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1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12-24 조회수 : 4878 세 바다가 한 바다가 되고 모든 대지 위에서 산맥들의 질주가 멈춘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꿈의 적서가 남김없이 규정된 시대에 한 남자가 호반에 서있었다. 피를 마시는 새 1. 잠든 불씨 - 1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살지." - 키탈저 사냥꾼들의 옛이야기 中. 호수의 수면 위로 여섯 개의 탑신이 얼비친다. 바람이 잔물결을 일으킬 때마다 수면은 그 위에 비치는 모든 풍경을 몽상으로 바꿔버린다. 하지만 여섯 탑신의 모습은 굳건하다. 그 영상 은 수면 위의 탑을 비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탑들은 수면 아래 에 있다. 판사이 호수. 한 때는 판사이 계곡으로 불리웠다. 상고토(上古土)의 아름다운 풍 광 속에서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시절, 판사이 계곡은 고대의 추 억으로 가득했다. 저 유명한 왕의 길 끝에 있는 여섯 탑은 물론이거 니와 계곡에 우거진 숲 사이로 머리를 드러낸 가장 작은 경계비조차 장려한 역사의 증거였다. 고건물들 위로 무수한 단풍잎이 흩날리는 낙엽의 계절이 오면 판사이 계곡은 대지가 은연 중에 드러낸 고대의 기억처럼 보였다. 하늘 아래 영원을 말할 수 있는 도시는 없겠지만 판사이와 같은 종 말을 맞은 도시 또한 드물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미증유의 재난이 닥쳐온 그 날, 강들이 노호하여 그 흐름을 변경하고 산허리와 둔덕을 타넘는 파도가 되어 계곡으로 몰아쳐왔을 때, 도시는 영원히 수장되 고 말았다. 왕의 길 끝에 열주처럼 서있던 여섯 탑 또한 그 끔찍한 운명에서 벗 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육형제탑이라 불렀던 그 여섯 탑 은 판사이의 다른 부분들과는 좀 다른 결말을 맞았다. 범람한 물은 동쪽에서부터 계곡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계곡의 건물들과 울창한 숲 을 닥치는대로 파괴한 후 기세가 약해진 채 왕의 길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계곡의 가장 낮은 부분인 서쪽 부분에서 서서히 차올랐다. 그 래서 육형제탑은 원형을 유지한 채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 그것을 판사이가 얻은 마지막 행운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 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닌데, 예를 들어 지 금 판사이 호수의 서쪽 기슭에서 물 속에 잠긴 육형제탑을 바라보는 검은 깃털의 레콘 같은 경우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발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레콘은 깃털을 부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레콘은 황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 났다. 시야에서 육형제탑이 사라지자 레콘은 간신히 숨통이 트였다. 검은 깃털을 모조리 부풀린 채, 레콘은 차라리 급류에 파괴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의견은 레콘의 뒤편에 있던 동료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 다. "차라리 박살나는 편이 낫지, 물 속에서 저게 무슨 꼴이람." 레콘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말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 지만 레콘은 '물'이라는 단어를 태연히 사용하는 무신경함에는 화가 치밀었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의 노여움에 찬 시선을 받게 된 것은 한 인간 소녀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소녀는 사과했다. "어, 미안해요." 소녀는 조그마했고, 레콘의 곁에 서있기에 그 조그마함은 더욱 두드 러졌다. 150 센티미터를 넘길까 말까한 소녀의 신장은 3 미터를 훌쩍 넘는 레콘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부피로 따진다면 똑같은 소녀가 두 자릿수 이상 모여야 비슷해질 정도다. 그 조그마한 소녀의 얼굴에 서 레콘을 되비치고 있는 눈은 오른쪽 눈 뿐이다. 소녀의 왼쪽 눈은 조그마한 얼굴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얼룩처럼 보이는 검은 안대에 덮혀 있다. 코는 몇 번이나 부러졌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선을 가지 고 있었고 귓바퀴 또한 귓구멍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듯한 모습 이었다. 그 모습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보던 레콘은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다 시 고개를 돌렸다. 용서받은 것이다. 하지만 애꾸눈 소녀는 다시 말했다. "미안하다고요. 지멘." 지멘은 수염볏을 쓰다듬으며 판사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거대하지 않은 레콘은 없지만 지멘이라는 이름의 레콘이 가진 거대 함은 움직이는 생물보다는 차라리 거석이나 준령이 보여주는 그것에 가까웠다.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두 눈은 보통의 레콘들보다 반 미터는 더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고 날카로운 부리에는 하얀 실금 같 은 상처가 가득하다. 대부분의 레콘들이 격투 중 그 부리를 훌륭한 무기로 사용하지만 지멘의 경우 그 정도가 심했다. 남보다 월등히 높 은 곳에서 내려 쪼는 부리의 파괴력은 압도적이다. 지멘은 그 상처 가득한 부리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어 혼잣말처럼 말했다. "레콘은 그 말에 익숙해져야 해." 애꾸눈 소녀는 그것이 명백한 혼잣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이 자신에게 건네어진 말인 것마냥 대답했다. "에이, 설마?" 소녀가 말한 '설마'에는 그 말에 담길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의미 가 다 포함되어 있었다. 지멘은 일단은 그 부정들을 수용하기로 했 다. "어떤 이는 설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소녀는 짧게 웃었다. 지멘은 그 웃음을 못들은 척했다. "하지만 레콘은 언제나 모든 것에 도전했고, 그런 도전에 임할 때 다른 사람의 상식을 필요로 했던 적은 없다. 오직 하나의 액체, 그 흔한 액체만이 레콘의 도전에서 보호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 다." 지멘은 잠깐 멈췄다가 - 여전히 - 혼잣말처럼 말했다. "물론, 그것이 레콘의 마지막 도전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소망 이긴 하다." 애꾸눈 소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지멘의 다음 동작에 싹 사라졌다. 지멘은 옆으로 손을 뻗어 땅에 세워둔 거대한 망치를 들어올렸다. 망치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긴 했지만 그것은 다른 망치들이 뭔지 못 알아볼 만한 녀석이었다. 대호(大虎)의 머리 형상을 한 망치 머리는 우아하지만 어딘가에 떨어뜨렸다가는 과실치사를 유발할 크기였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망치 자루까지도 철로 만들어져 있어 전체 무 게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통적인 레콘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지멘은 그 누구도 자신의 무기를 만지도록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들어올리기 위해 인간 몇 명이 필요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녀는 필 요한 인간의 숫자가 두 자리는 넘을 거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그 전설적인 망치를 집어든 지멘은 뒤로 빙글 돌았다. 실로 위압적 인 광경이었지만 소녀는 공포에 떨지는 않았다. 대신 소녀는 오른쪽 눈을 확 불태웠다. 지멘은 소녀의 변화를 잠깐 주시한 다음 그녀의 뒤쪽, 수풀을 향해 외쳤다. "앞으로 나와라!" 숲 속에서 열 명이 좀 넘을 사람들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의 복 장은 황제의 병사들의 것이었다. 소녀가 비평가다운 태도로 말했다. "뼈다귀도 없는데 개새끼들이 몰려드네?" 병사들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하지만 황제의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왜 활 을 쏘는 대신 앞으로 걸어나온 것인지도. 몰려온 병사들 가운데 도저 히 못보고 지나칠 수 없는 거대한 모습의 병사 한 명이 있었다. 지멘 은 다른 병사들을 무시한 채 그 병사에게 말했다. "오래간만이군요. 즈라더." "12년 만이지. 지멘. 그 망치는 자라는 것이 아닌가 싶군. 더 커진 것 같아." "크기는 모르지만 무게는 좀 무거워졌을 겁니다." 레콘인 즈라더는 지멘의 레콘식 표현을 쉽게 이해했다. 레콘에게 보 다 흔한 빛깔인 흰빛의 깃털을 가진 즈라더는 너비가 2 미터에 가까 운 양날 도끼를 부채라도 되는 양 가볍게 들어올렸다. 갈가리 찢어진 수염볏이나 생기 없는 깃털들은 즈라더가 태어난 해가 대단히 오래되 었음을 알려주지만, 그러나 늙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레콘의 노화는 태어난 해가 언제인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손에 최후의 대장간 에서 받은 무기를 들고 있으며 그것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이상 레콘은 언제나 젊은이고 언제나 투사다. 그리고 양날 도끼를 다루는 즈라더의 모습은 근시일 내에는 납병례(納兵禮)에 대해 생각해 볼 필 요가 없음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즈라더는 그 무시무시한 도끼를 어깨에 걸치면서 부리를 딱 소리 나 게 부딪쳤다. "그 망치가 마신 피가 얼마나 되는지는 나도 잘 알아. 내 아들의 피 도 그 망치가 무거워지는데 일조했으니까." "그 녀석, 형편없었습니다." "동감이야. 나였다면 그 녀석의 목을 떼는데 도끼질 두 번이면 충분 했을걸. 얼마나 걸렸나?" "두 번." 즈라더는 씩 웃었다. 지멘 또한 웃으며 덧붙였다. "무기가 무기인지라 아드님의 목을 떼진 못했습니다. 머리를 어깨 속에 쑤셔넣어줬지요." "그 녀석 머리가 좀 푸석푸석하긴 했지." 병사들은 도무지 자신들의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이 기괴한 대화 형태에 상당한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대화는 모범 적이라 할만큼 레콘다운 대화이기도 했다. 즈라더가 말했다. "그 계단은 괜찮았어. 자네가 착안한 건가?"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애꾸눈 소녀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멘과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던 즈라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소녀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지멘은 어떤 말도 듣지 못한 척 했다. 씩 웃던 즈라더는 왼손 엄지로 등뒤를 가리켰다. "여긴 좀 그렇군. 좀 떨어진 곳에 풍경 좋은 곳을 봐뒀네." "알겠습니다." 지멘과 즈라더는 그대로 잡담을 나누며 산책 하듯 걸어갔다. 병사들 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그리고 소녀는 그들에게 경멸에 찬 시선을 보내줄 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은 채 걸어갔다. 병 사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곤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며 그 뒤 를 따랐다. 지멘과 즈라더는 계속해서 한담을 교환하며 걸어갔다. 숲 가운데 형 성된 약간 오목한 공터에 도달한 지멘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울였다. "약간 좁군요." 즈라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 좀 풀까." 휘적휘적 걸어간 즈라더는 자신의 양날 도끼를 뒤로 당겼다가 잠시 동작을 멈춘 채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하던 병사들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 소녀를 보고는 황급히 그 동작을 따라했다. 즈 라더는 씩 웃고는 무서운 기세로 도끼를 휘둘렀다. 굉음과 함께 아름드리 나무가 꺾였다. 즈라더는 그런 식으로 나무들을 공터 반대쪽으로 쓰러뜨렸다. 그리 고 반대편에서는 지멘 또한 같은 작업에 착수했다. 어지간한 대장간 에서도 듣기 어려운 소음을 일으키며 즈라더와 지멘은 공터의 면적을 확장시켰다. 수목애호가들인 나가들이 본다면 짝을 찾기 어려운 만행 으로 규정짓고 격분했겠지만, 그 가운데 서있어야 했던 병사들과 소 녀는 굉음이 울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오싹함을 맛봐야 했 다. 두 명의 레콘은 잠깐 동안의 작업으로 공터의 면적을 두 배로 넓혀 놓았다. 둥근 공터는 이제 방사형으로 쓰러진 나무들로 테두리를 두 르게 되었다. 지멘은 망치에 묻은 나뭇진을 닦아내고는 문득 생각났 다는 듯이 애꾸눈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귀를 막고 있던 두 손 을 허리에 옮겨놓은 채 지멘을 마주보았다.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소녀를 보던 지멘이 마침내 손을 뻗었다. 기다 리고 있던 소녀는 두 팔을 앞으로 들어올렸다. 한 손으로 소녀를 집 어든 지멘은 그녀를 높은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4 미터 높이에 올려 진 소녀는 두 팔로 나무를 감싸안아 자세를 확보했다.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보던 즈라더가 말했다. "진다는 생각도 안 하나? 좋은 태도군." "당신을 상대로 그런 확신은 없습니다." "없다고? 그럼 왜 도망도 못치게 저 애를 나무 위에 올려놓은 거지? 네가 진다면 저 애는 도망쳐야 하잖아." "나무 아래에 있어도 어차피 당신에게서 도망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군. 그럼 이건 내가 질 경우의 대비라는 건데…… 병사들을 다 죽일 생각이군?" "예." 병사들은 기겁하여 즈라더의 부리를 바라보았다. 즈라더는 자신의 병사들을 죽 둘러보고는 말했다. "그냥 보내줘. 그러면 나도 저 애를 그냥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지." 지멘은 잠깐 주춤했다. 하지만 나무 위에 앉아있던 애꾸눈 소녀가 대신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지멘은 소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즈라더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즈라더는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도망쳐라." "무슨 말씀입니까, 즈라더?" "내가 질 경우 지멘은 너희들도 다 죽일 거다. 저 여자애가 방패막 이가 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두고 있잖아. 그러니 지금 도망쳐라. 내가 이기면 그 땐 너희들을 찾아가면 되니까." 사태를 파악한 병사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 만 지멘은 그들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지멘은 무시무시한 계 명성(鷄鳴聲)을 내지르며 몸을 세 배로 부풀렸다. 레콘의 모든 전투 의욕을 담아낸 외침이었고, 어쨌든 레콘에게 있어 전투 의욕은 항상 과잉 상태인 법이다. 병사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기선을 뺏길 수 없었던 즈라더는 병사들을 돌보는 것을 포기한 채 맞고함을 내질렀다. 희고 검은 두 명의 레콘은 산이 떨쳐 일어나 맞부딪치는 기세로 격 돌했다. 아라짓 제국의 수도이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주관자인 황제가 있 는 하늘누리의 날씨는 언제나 화창하다. 간혹 구름이 끼거나 약간의 비가 올 때는 있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쾌한 날씨인 경우는 절대 로 없다. 날씨가 수도 신민들을 우울하게 할 정도로 고약해지면 하늘 누리는 다른 날씨를 찾아 이동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국의 수 도에는 유사 이래 어떤 도시에도 붙은 적이 없었던, 오로지 제국 수 도 하늘누리에만 허용된 이름이 붙어있다. 지금, 한 인간 사내가 바라보는 하늘에 제국의 이동수도(移動首都) 하늘누리는 장엄한 모습으로 떠있다. 하늘누리를 바라보던 사나이가 검을 뽑아 들었다. 칼집을 빠져나온 칼날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또다른 칼집을 찾듯 서 늘한 빛을 뿌렸다. 잠시 칼날을 들여다 보던 남자는 그것을 높이 들 어올렸다. 머물렀다가, 황제의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단호하게 칼을 내렸다. "앞으로." 거대한 함성과 함께 나팔이 울렸다. 둔한 나팔소리는 고막이 아닌 척추를 울리는 듯하다. 온몸을 흔든 다음 사라진 후에도 여운으로 피를 끓게 만드는 진군의 신호. 바람을 거슬러 고개를 쳐드는 깃봉과 어지러이 나부끼는 깃발들. 전단 전개 를 알리는 교위들의 짧은 외침과 복창하는 부위들의 훨씬 다채로운 고함. 흥분한 부위가 망각한 것들을 빈틈없이 지적하는 수전사들. 입 술 끝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상전사들. 흥분을 남용하는 하전사들. 저 벅거리는 발소리가 일사불란하게 뒤를 잇는다. 뒤섞인 소음들이 충일 한 노래를 만들 때, 전투라는 이름의 광시곡은 화려한 도입부를 연주 한다. 성벽을 이백 미터 쯤 앞둔 곳에서 진형이 구축되었다. 그리고 도입 부가 잦아들었다. 발이 멈추고 칼은 다시 당겨쥐어졌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을 깨트리 기 싫은 듯 신호는 손짓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인계한 깃발에 의해 전달되었다. 잠시 후 거대한 다섯 형체가 각자 백 미터 정도의 간격 을 두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장엄한 도입부에 이은 잔혹한 전개부의 시작을 알릴 자들로, 사람들이 오뢰사수(五雷射手)라 부르는 자들이 었다. 그들은 모두 레콘이었다. 그리고 기괴한 물건들을 들고 있었다. 인 간이나 나가의 눈에는 병기라기보다는 건설 장비 같은 인상을 주는 그 물건은 레콘을 위해 제작된 활이었다. 길다란 금속판들과 정교하 게 다듬어진 수십 개의 금속 조각들이 맞물려 탄생한 철궁은 길이만 3 미터에 달했고 양쪽 고자를 잇고 있는 시위는 육중한 쇠사슬이었 다. 레콘들은 각자 2 미터가 훨씬 넘는 철시(鐵矢)를 꺼내어 절피에 먹였다. 보통의 활이라면 실로 감아두는 부분이지만 그 활들의 절피 는 아예 주조한 쇳덩이였다. 레콘들이 쇠사슬 시위를 잡아당기자 활을 이루고 있는 부품들의 연 결부에서 불꽃과 굉음이 울려퍼지고 쇠사슬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 질렀다. 황제를 위해 평생 한번밖에 택할 수 없는 무기로 활을 선택 한 그들 오뢰사수들의 눈에는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군단 앞에 우 뚝 솟은 그들의 모습은 번개를 머금은 거대한 구름송이들처럼 보였 다. 신호는 필요 없었다. 오뢰사수는 오직 야수적인 전투 감각에 의해 동시에 시위를 놓았다.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철시들이 해방되었다. 무수히 비산하 는 불티들 속에서 튀어오른 철시들은 휘어짐을 찾기 어려운 직선 궤 도를 그리며 날아갔다. 이윽고 돌을 깎는 소리와 함께 성벽이 달걀 껍질처럼 박살났다. 흙먼지와 벽돌, 돌조각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꽃 다섯 송이가 성벽 위에 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도 그것은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돌격!" 함성과 함께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두 번째 철시를 잡아당기는 오뢰사수 사이로 사만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규리하 전쟁 이십 육일 째, 규리하의 반란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점에, 황제의 대장군 엘시 에더리와 제국군은 규리하성 에 대한 공성전을 개시했다. 철시의 이차 사격은 모두 중앙성문에 집중되었다. 성문은 단숨에 같 은 부피의 잡동사니 비슷하게 바뀌었다. 오뢰사수는 조준을 높였다. 먼지가 사그라들고 있던 성벽은 다시 다섯 줄기의 벼락에 난타당했 다. 성벽 위에서는 규리하의 용맹한 병사들이 모든 종류의 방어 기재 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열다섯 발의 철시는 그것들 상당수를 무용지물 로 만들었다. 성벽이 무너지고 먼지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대처를 하기 어려웠다. 수비군은 애처롭기까지 한 함성과 함께 손에 잡히는대로 아무 것이나 먼지 속으로 집어던지고 쏘아 날 렸다. 하지만 철시의 소나기는 끊이지 않았다. 성벽은 소름끼치는 진 동을 되풀이했고 곳곳에서 허물어지는 벽돌이 수비군을 덮쳤다. 오뢰사수의 철시는 투석기에 사용되는 탄환과는 다르다. 도무지 그 렇게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화살에 속하는 철시는 강력한 힘을 일점 에 집중시킨다. 당연히 탄환보다 관통력이 월등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성벽 서편에서 참으로 경이적인 일이 일어났다. 어떤 놀라운 우연이 빚어낸 기적처럼 세 발의 철시가 같은 부분에 날아들었다. 성벽 서쪽 모퉁이의 그 부분은 전체 구조에서 상당한 하 중을 받는 부분이었다. 가장 먼저 날아든 철시는 성벽이 나무 판자인 양 꿰뚫고 들어가 박혀 버렸다. 충격으로 금이 간 돌 위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철시가 날아들자 성벽은 무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무너졌다. 마치 핏줄기처럼 석재와 목재들이 솟구친 직후 그곳에는 몇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틈이 벌어졌다. 그 아래에는 무너진 돌더미가 해자 위 에 다리 같은 것을 형성했다. 성문을 향해 진격하던 제국군의 일부에서 경험 많은 교위가 즉각적 인 판단을 내렸다. 그의 지휘를 받던 병사들은 사다리와 밧줄 등을 팽개치고는 새로 만들어진 틈으로 돌격했다. 그들은 운이 좋은 자들 이었다. 적절한 위치에 있지 못해서 사다리를 이용해야 했던 제국병 들은 규리하의 병사들이 전쟁의 오랜 예법에 따라 정성들여 준비한 환영 선물을 받게 되었다. 투석과 투창, 노궁, 그리고 끓는 기름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쏟 아지는 기름은 닿는 순간 사람을 튀겨버렸다. 그리고 뒤따라 떨어진 횃불이 기름을 폭발시켰다. 불의 폭풍이 제국군을 휘감자 제국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해자에 몸을 던졌다. 무너진 중앙 성문과 서편의 틈으로 쏟아져들어가는 병사들도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규리하의 거성은 이중 구조였고 수비군은 내성벽 위에도 상당히 많은 병력을 배치해두었다. 그들이 쏟아붓는 화살과 돌들이 침입자의 머리 위로 우박처럼 쏟아졌다. 제국병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두 번째 성문을 돌파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화염과 연기, 비명과 유혈, 돌과 화살과 창과 방패들이 세상의 참된 주인처럼 보였고 어디에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부딪치는 창검, 비등점을 넘어버린 듯한 의식의 불안정하고 급격한 부침. 죽음과 삶 이 모호해지는 그 순간 병사들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불 분명한 처지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성에 기대어 싸워야 하는 수비군의 입장에서 침입을 허용한 것은 이미 패배로 가는 한 발짝을 내디딘 셈이었다. 전통을 소모한 오뢰사수들이 엘시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들 다섯 명 은 이십이금군에 속한 자들이며 엘시의 지휘권에 포함된 자들은 아니 었다. 따라서 그들이 물러나기 전 엘시를 쳐다본 것은 황제의 대장군 에 대한 예의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조금 다른 것도 섞여 있었다. 성벽 앞에 있는 해자에는 레콘의 무릎을 적실 수 있는 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것을 넘는 것은 레콘에게 커다란 심리적 타격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의 뻣뻣한 태도에는 대장군이 혹 돌격을 요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그리고 그런 요구를 받으면 황 제의 금군은 황제의 명령만 받는다고 강변하려는 결의도 조금 섞여 있었다. 물론 엘시에겐 그런 악덕이 없었다. 엘시는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금군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지만 전투 중 이라 어렵군요. 승리 후에 찾아 뵙고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리 고 철시는 제가 모두 수거하겠습니다." 레콘의 화법은 상대가 누구든 크게 바뀌지 않았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칼리도백. 그럼 물러가겠다. 좋은 싸움이 되길." 오뢰사수들은 가볍게 목례한 다음 고개를 들어 하늘누리를 올려다보 았다. 엘시 또한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시선을 좇았다. 가시적인 변화 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조금 후, 오뢰사수들은 허공을 밟으며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누리는 모든 방문객에게 각자의 계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계 단은 밤의 다섯째 딸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만이 볼 수 있다. 원한다 면 어떤 계단을 상상해도 좋다. 나무계단이든 돌계단이든, 혹은 자신 의 괴벽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다리나 미끄럼틀을 상상해도 좋다. 상 상하는 순간 계단은 나타나며 상상한 사람 자신에게 - 그리고 오직 자신에게만 - 작용한다. 그것은 물론 하늘누리가 가진 놀라운 편리함 이지만 동시에 취약점이라 할 수도 있는데, 하늘누리에 대한 가장 최 근의 도전에서 그 점은 여실히 증명되었다. 허공을 밟으며 걸어올라 가는 레콘들을 보며 엘시는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이 드는 것을 느꼈 다. 그가 직접 본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전해들은 이야기는 충격적 인 것이었다. 몇 되지 않는 황제의 적 중 매일 같이 그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담 대한 도전자는 하늘누리에서 10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참으로 기 발한 계단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도전자가 상상한 계단은 중간 지점 까지 상승하다가 그 이후부터는 고공에서 하늘누리로 '내려오는' 계 단이었다. 건축학보다는 지리학의 대상이 되어야 할 그런 어마어마한 구조물을 상상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도전자는 필사적 으로 상상했고 마침내 바라던 계단이 도전자 앞에 나타났다. 레콘이 었던 도전자는 밤을 틈타 그 계단을 달렸다. 10 킬로미터 저편에서, 그리고 중간 지점부터는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침입자를, 하늘누리 의 감시자들이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도전자는 하늘누리에 무단침입하는데 성공했다. 다행히도 도전자는 그 이상의 목표를 달성 하지 못한 채 도망쳤지만 그 이후로 하늘누리의 감시자들은 익숙한 방향인 아래뿐만 아니라 위쪽도 경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규리하성에 대한 공격이 다급하게 이루어진 이루어진 이유 또한 그 소문이 퍼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엘시는 규리하의 필사적인 병사들이 제각기 그런 계단을 통해 하늘누리로 '밀고 내려 오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오뢰사수들은 그런 엄청난 계단을 상상할 필요는 없었고, 그래서 동 작만 보고도 단순한 계단을 상상했음을 알 수 있는 모습으로 걸어올 라갔다. 계단에서 보는 풍경은 훌륭한 것이겠지만 그들은 한 번도 전 쟁터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선의로 해석한다면 자신들의 이바지함을 강조해 보이지 않는 겸손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악의로 해석한다 면 인간이나 나가들의 전투는, 그것이 설령 몇만 명의 사활이 걸린 거대한 것이라도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레콘의 오만함일 수도 있 다. 엘시 에더리는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놓고 고민 하지는 않았다. 대신 엘시는 성벽의 전투를 바라보며 예비대의 투입 시기를 가늠했다. 세 시간 후, 제국군은 규리하성을 완전 점령했다. 애꾸눈 소녀는 땅에 쓰러진 레콘을 내려다보았다. 소란스럽게 흩어진 깃털과 핏자국 가운데 레콘은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제멋대로 던져진 다리들은 상체와 비정상적인 각도로 이어져 있었다. 허리가 부러진 것이 틀림없다. 인간이나 도깨비가 당 했다면 즉사하고 말았을 엄청난 타격이었지만 레콘은 그 무시무시한 생명력으로 아직 살아있었다. 추하고 슬픈 모습이었다. 몸의 다른 곳의 사정도 그다지 말끔하지는 못했다. 수염볏에 의해 힘겹게 턱에 매달려 있는 부러진 아랫부리는 피와 타액으로 젖어 있 었다. 파리들이 그 주위를 앵앵거리며 날아다녔지만 레콘은 손을 들 어 파리를 쫓을 기력이 없었다. 파리들은 최강 종족의 피를 게걸스레 탐식했다. 소녀는 레콘의 거대한 머리 옆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것은 적 절한 자세가 아니었다. 소녀가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리자 쓰러져 있 는 레콘의 부리는 그녀의 가슴 높이가 되었고 그런 신체 비례는 그녀 가 하려는 일에 적합치 않았다. 소녀는 무릎을 땅에 댄 채 몸을 폈고 그러자 소녀의 팔은 그럭저럭 레콘의 얼굴 위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 게 되었다. 소녀는 그런 자세로 손을 내저어 파리떼를 쫓았다. 레콘은 초점을 맞추려는 듯 몇 번 눈을 껌뻑였지만 성공하지 못한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고맙다." 부러진 아랫부리 때문에 발음이 좀 기괴했다. 소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콘이 다시 말했다. "네가 아실이지?" "그래요." "넌 황제의 병사들을 무척 싫어한다던데." "그보다 더 싫은 건 아직 찾지 못했어요. 고맙게도." 즈라더는 통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힘겹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왜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지?" 애꾸눈 소녀 아실은 잠시 침묵했다. 흐려진 즈라더의 눈에 아실의 안대는 얼굴 위를 기어가는 불길한 벌레처럼 보였다. 아실이 입을 열 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마음의 짐으로 남는 것도 싫으니까." "기묘하군.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아니잖아." "제 눈을 빌려드리고 싶군요.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꼴이 말이 아닌 모양이군." "그래요." 즈라더는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낀 듯 눈을 감았다. 뻔뻔스러운 파리 들이 다시 날아들었다. 아실은 손을 휘저어 그들을 쫓아버렸다. 즈라더가 말했다. "이상하구나." "뭐가 이상하죠?" "너는 마음의 짐이 될까봐 무참한 지경의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착한 아이다. 그 상대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그런데 왜 지멘에게 협조하는 거지? 지멘의 숙원을 몰라?" "잘 알고 있어요. 제 숙원과 같으니까." "네 숙원?" "예. 숙원이라는 말은 당신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예요." 잠깐 고민하던 즈라더는 오만한 레콘으로서 대답하기로 했다. "네가 감히 숙원을 추구하는 레콘을 흉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못할 것 같아요?" 아실은 잽싼 동작으로 단검을 뽑아들었다. 날이 예리하게 선 것이지 만, 레콘을 겁줄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이 설령 허리가 부러진 채 죽 음을 기다리는 레콘이라 해도. 즈라더는 멸시를 표시하기 위해 부리 를 딱 부딪치려 했지만 부러진 아랫부리 때문에 그 동작은 무위로 돌 아갔다. "그 조그마한 가시로 뭘 어쩌려는 거냐?" "영감님 명줄을 끊어줄 수도 있어요."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왜? 레콘의 흉내를 내는 것과 내 명줄 을 끊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 "저는 약해지지 않을 거예요." "약해지지 않는다?" "영감님 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약해진단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강해질 거에요. 당신들처럼 저도 끝까지 숙원을 추구할 거에요. 그런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이 단검으로……" 즈라더의 손이 휙 움직였다. 아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바람 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아실은 자신의 단검이 즈라더의 엄지와 검 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즈라더는 단검을 세 손가락 사이에 엇갈리게 끼우고는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단검은 가슴을 에 는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압도적인 힘의 과시에 아실은 심장이 멎을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주검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즈라더는 손가락만으로도 그녀를 죽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즈라더는 쓸모없는 쇳조각이 된 단검을 내던지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네 우위가 확실하기 전까지는 불쌍하다는 말 따위를 함부로 하는 게 아냐. 자, 이젠 어떻게 하겠어? 목을 조를 거야?" 아실은 부들부들 떨며 물러났다. 정신없이 미끄러지던 그녀의 다리 가 무엇인가에 호되게 부딪혔지만 아실은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기에 아실은 손을 뒤로 뻗어 뒤에 있는 것 을 만졌다. 그것은 즈라더의 도끼였다. 즈라더는 쿨럭거리며 웃었다. "나를 죽일 작정이라면 내 무기를 건드리는 무례 쯤이야 저지를 수 도 있겠지. 그걸 들어올려 나를 내리찍을 건가?" 아실은 비참한 심정으로 등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에겐 침대 크기가 될 도낏날이 기둥 같이 육중한 자루 위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굳이 시도하지 않아도 아실이 그것을 손톱만큼도 움직일 수 없음은 분명했 다. 아실은 다시 즈라더를 돌아보았다. 즈라더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아실은 목이 메어 말했다. "제기랄, 마음껏 비웃어요. 이 늙다리 깃털쟁이!" 아실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래요. 저는 아무 힘이 없어요. 죽어가는 사람한테 단검을 뺏길 정도로 힘없는 바보예요. 당신처럼 잘나빠진 레콘이 보기엔 짜증나도 록 한심하겠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조그마한 인간 여자고, 그나마 눈도 하나 뿐이죠!" 즈라더는 다시 아실의 안대를 응시했다. 아실은 오른손 검지로 안대 가 없는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는 이 눈으로 황제가 죽어 자빠지는 모습을 볼 거예요!" 파리 소리가 소란스럽다. 즈라더는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말 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거다. 아실. 넌 마음의 짐이 될까봐 나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했지. 그런데 황제가 죽으면 마음의 짐이 될 것 같지 않나?" "천만에요. 아주 기뻐할 거예요." "나와 그녀의 차이가 뭐지?" "싫어하는 것과 증오하는 것의 차이지요!" "그런가?" "그래요." "황제는 불쌍한 사람이다." "뭐라고요?" 즈라더는 엄청난 불신감으로 되물어오는 아실에겐 대답하지 않았 다. 늙은 레콘은 시선을 들어 아실의 등 너머를 향해 말했다. "자네 때문에 그렇다는 건 아냐. 지멘." 아실은 몸을 돌렸다. 나무 사이에서 지멘이 걸어나왔다. 육중한 망치는 피범벅이 되어 있 었고 풍성한 깃털들 사이에서도 덩이진 유혈로 붉은 꽃이 만발해 있 었다. 검은 깃털에도 불구하고 그 피는 또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아 실은 지멘이 다쳤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의 질문 은, 지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지멘이 쫓아간 병사들에 대한 것이 었다. "어떻게 됐어요?" 지멘은 아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쓰러져 있는 즈라더에 게 말했다. "부하들은 다 죽었습니다." "묻어줬나?" "그래서 좀 늦은 겁니다." "나도 그렇게 처리할 건가?" "아니오. 나무 위에 던져놓을 겁니다. 날개 달린 시체의 벗들이 당 신을 배웅하겠지요." 즈라더는 희미하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실은 즈라더의 만족감 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지멘이 즈라더의 유해를 다루는 방식의 거친 정도는 이 경우 즈라더에 대한 지멘의 존중의 척도가 된다. 개 의 사체보다는 호랑이의 사체가 사냥꾼의 위력을 더 잘 드러낼 수 있 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실은 자신이라면 나무 위에 던져져 몰염치한 햇살과 새카맣게 몰려든 까마귀들에게 유린당하는 최후를 만족스러워 할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즈라더 또한 그런 최후를 맨정신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던지기 전에 자네 망치를 한 번 써주게." "그렇게 할 겁니다." "고맙군." "황제가 나 때문에 불행하지는 않다고 말한 것은 나에 대한 모욕입 니까?" "자네는 누군가의 불행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 자네를 적 으로 두고 마음 편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겠지. 하지만 황제는 자네가 없다 하더라도 이미 불행해." "그녀가 왜 불행합니까?" 즈라더는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부서진 부리에서 나온 것은 말이 아닌 격렬한 기침이었다. 즈라더는 당장이라도 산산조각날 것처럼 격 렬하게 기침했다. 대답할 기회보다는 평안을 주는 것이 낫다는 판단 하에 지멘은 망치를 당겨쥐었다. 그러나 즈라더는 눈빛으로 그 친절을 거부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 는 아니다. 그는 살아날 수 없음을 오래전에 인정했다. 즈라더에겐 할 말이 있었다. 지멘은 망치를 늘어뜨렸다. 긴 시간 후에 즈라더는 간신히 말을 빚어낼 수 있을 정도의 안정을 되찾았다. "이 땅의 먼지에 취하여 긴 세월을 돌아다녔다. 온갖 것을 보고…… 온갖 것을 만졌다. 발은 지저분한 것들을 밟았지만 눈은 언제나 아름 다운 것을 좇았다. 가는 달을 앞지르며 황야를 쏘다녔고, 산꼭대기에 서서 누구보다 먼저 뜨는 해를 보았다. 어쩌다…… 올려다본 하늘의 별들이 낯설어질 때는 있어도, 세상에 끝은…… 없었다." 즈라더는 지멘을 쳐다보았다. "무애(無碍)한 세상에…… 울타리 세워봐야 부질 없는 짓이다. 껄껄 껄." 지멘은 긍정도 부정도 없는 눈빛으로 늙은 레콘을 마주보았다. 즐겁 게 웃던 즈라더가 갑자기 말했다. "도끼를 쥐어줘." 지멘은 손을 뻗어 즈라더의 도끼를 쥐어올리진 않았다. 그럴 수는 없다. 대신 그는 즈라더의 몸을 들어올렸다. 늙은 레콘은 엄습하는 고통에 피끓는 신음을 토했다. 아실은 도끼 옆에서 황급히 물러났다. 도끼 옆에 즈라더를 내려놓은 지멘은 즈라 더의 피투성이 오른손을 들어 도끼 자루에 올려놓았다. 고통에 파헤 쳐진 즈라더의 얼굴에서 한 줄기 만족이 피어올랐다. 그가 말했다. "납병을 하고 싶은데, 괜찮…… 겠나?" 아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설 듯 움찔했다. 하지만 곧 자제심을 발휘하여 제자리를 지켰다. 즈라더를 고요히 내려다보던 지 멘이 말했다. "납병을 하고 나면 망치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만." "은원의 도구가…… 아니라 친절의 도구로 쓰이는 거니 상관없다. 써도 돼. 내 도끼를…… 최후의 대장간에 돌려보내고 싶다." 지멘은 침묵했다. 그러나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즈라더는 당장이라 도 호흡을 멈출 것 같은 상태였다. 결심을 굳힌 지멘은 망치를 옆에 내려놓고는 곧게 섰다. "처음 하는 거라 서툴 겁니다. 양해하시길." 즈라더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멘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한 자루 도끼를 쥐고 당신의 가호 속 에 싸웠던 전사가 이제 그 도끼를 놓으려 합니다. 때론 승리했고 때 론 패배했습니다. 도끼로 얻었던 명예는 모두 당신에게 보내고 도끼 로 갚아야할 원한은 모두 잊으려 합니다. 세상에 맺었던 것들을 모두 끊어내고 풀어내어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려 합니다. 이후로 그는 다 시는 무기를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제외한 어떤 것도 그에게 무기를 들지 않을 겁니다." 지멘은 고개를 숙여 즈라더에게 말했다. "보살펴주신 여신과 병기에게 인사하십시오." 즈라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이미 숨을 멈췄나 생각한 지멘은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그러나 즈라더는 곧 부리를 움직여 말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긴 세월…… 당신의 가호 덕분에…… 제 도끼와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명예도 없이, 원한도 없이…… 당 신에게 갈 시간을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멘은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즈라더의 말이 계속되었 다. "적과 나 사이에…… 언제나 서주었던 신의 있는 벗이여. 고맙다. 이제 편히…… 쉬거라." 납병례가 끝났다. 들끓는 피를 상대방의 피로 식히던 전사는 사라지 고 한 명의 사람만 남게 되었다. 지멘은 즈라더의 손을 들어 그의 가 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가능한 일을 조심스럽게 수행 했다. 지멘은 도끼를 쥐어올렸다. 즈라더의 피가 튀지 않을 위치에 도끼를 내려놓은 지멘은 다시 돌아 왔다. 그는 즈라더가 눈을 감을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즈라더는 그 것을 거부했다. 대신 늙은 레콘은 또렷하게 말했다. "해." 지멘의 망치가 위로 올라갔지만 즈라더는 눈을 감지 않았다. 늙은 레콘은 온힘을 다해 외쳤다. "세상아! 들어라! 즈라더가 여기 있-었-다-!" 거대한 메아리를 들으며 지멘은 망치를 내리쳤다. =============================================================== 타자 20°입니다. (타자는 키보드 두드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전에 시리얼란에서 이런저런 질 낮은 잡문들을 연재하곤 하던 작 자입니다. 수준이 좀 나아져서 돌아온 거냐고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건 타자의 게으름에 대한 모독입니다. 과거 제 글을 읽으셨던 불운한 분들 중에는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이 글의 정체를 대충 짐작하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글은 거대한 핵전쟁으로 피폐해진 지구에 남아있는 흡혈귀들이 키우 고 싶어하는 애완 동물에 관한 장대한 서사시인 것입니다. 주인공은 피를 마시는 양을 키우고 싶어하지만 전기 양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가난한 현상금 사냥꾼인데, 어느날 외계에서 온 흡혈 안드로이드들을 붙잡으면 이미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피를 마시는 새를 분양해주겠다 는 안드로이드 제작 회사의 제안을 받고…… 가지마세요! 할 수 없군 요. 사실 이 글은 누구보다도 빨리 날고 싶어한 조나단 다이빙스톤이 라는 갈매기에 관한 글입니다. 떨어지는 돌멩이처럼 빨리 날고 싶어 서 이름까지 그렇게 바꾼 조나단 다이빙스톤은 몽운사 화주승으로부 터 피를 마시면 비행 속도가 증가한다는 조언을 듣고는…… 우하하하 하! ……예.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한 고군분투였습니다. 음음. 이 글 의 정체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연재나 하겠습니 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12-25 조회수 : 874 피를 마시는 새 1. 잠든 불씨 - 2 전사의 전쟁과 위관의 전쟁은 서로 다르며, 위관의 전쟁과 장군의 전쟁은 같지 않다. 전사의 전쟁은 단순하다. 싸우고 죽이고 노략질하 면 된다. 전사는 개전부터 종전까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지휘하는 자가 되면 전쟁의 막바 지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극적인 입장 변화'라 불러야 할 만한 일이 바로 그것인데, 전쟁의 결말이 결정되고 승자와 패자가 구 분되는 시점이 오면 수비자와 공격자의 행동 방침은 서로 바뀌게 된 다. 수비자는 그때껏 지키려 애쓰던 것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려 들며, 공격자는 자신이 공격하던 것을 지키려 애쓰게 된다. 이런 입장 변화의 기저에는 적에게 줄 바에야 부숴버린다는 이해하 기 쉬운 이유도 있고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이유도 있다. 복수를 맹 세하며 불타는 성을 등지고 도망치는 낭만적인 영웅은 노랫꾼들의 노 래에나 등장하는 고풍스러운 허구다. 진짜 복수자의 냉혹한 복수는 패배가 결정된 순간에 이미 시작된다. 남겨두었을 경우 자신을 위협 하게 되는 물건들을 파괴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복수의 법칙은 분루를 흘리며 패배의 아픔을 노래하는 서사시적 영웅보다는 냉정하 고 침착하게 비밀 서류를 불태우는 실용주의자들을 돕는다. 이런 사정을 모두 이해했을 때 비로소 규리하 전쟁 막바지, 규리하 성 3층에 있는 커다란 방에서 일어난 기괴한 격투의 내면에 존재하는 합리성을 깨닫게 된다. 그 혼란스러운 격투는 복도를 달리던 제국군 의 부위 틸러 달비가 느닷없이 들려온 여인의 비명에 놀라 방 안으로 뛰어듦으로써 시작되었다. 틸러 달비는 눈앞의 광경에 당황했다. 한 소녀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비명을 지른 것은 소녀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앞쪽에 있는 것은 틸러의 예상과 달리 무도한 본능에 눈을 빛내는 제 국군이 아니었다. 얼핏 보아도 반란군의 장수임이 분명한 소년이 손 에 든 검으로 소녀를 겨누고 있었다. 소년의 화려한 갑옷을 본 틸러 는 다시 주저앉아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 순간 틸러 달비가 200 명 을 지휘할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한 인사 책임자의 안목이 빛을 발했 다. 틸러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틸러 가 사태를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은 그의 외침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 다. "멈추시오, 시카트 규리하!" 시카트 규리하라 불린 소년 장수는 무서운 표정으로 소녀를 향해 검 을 휘둘렀지만 틸러가 집어던진 투구 때문에 그 공격은 성공하지 못 했다. 시카트는 두 번째 공격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물러섰다. 그 리고 틸러의 공격에 대비했다. 틸러는 자신이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 음을 한 번 더 증명해보였다. "정우 규리하! 피하십시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녀가 움찔하며 틸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소녀의 이름이었고 정우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틸러가 그녀 를 구하려 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구하기 위해 틸 러가 싸움을 건 상대는 시카트 규리하, 즉 그녀의 남동생이었다. 적군이 그녀를 위해 남동생과 싸우고 있었다. 끔찍하리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우는 마비되어버렸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두 남자의 격투를 바라보았다. 틸러 달비는 정 우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조감을 느꼈지만 그것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격투의 결과가 처음부터 분명했기 때문 이다. 틸러는 시카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그의 야전 검술은 시 카트의 그것보다 몇 배나 우수했다. 비록 투구가 없었지만 틸러는 여 유있게 시카트를 밀어붙였다. 시카트의 곤경을 본 정우는 남동생을 구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시카트……!" 하지만 정우는 일어나지 못했고 그런 자신에 대한 엄청난 모멸감을 느꼈다. 정우는 자신의 마음 속 한구석에서 진심으로 제국군 부위가 자기 남동생을 죽여주길 바라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 번 생각하기도 싫은 소름끼치는 충동이었다. 하지만 시카트를 본 정우는 다시 공포를 느꼈다. 제국군이 뛰어들기 전 남동생은 실제로 그녀를 죽이려 했다. 되살아난 공포가 혼란으로 바뀌었고 정우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짧고 모진 비명이 흘렀다. 검을 놓친 시카트는 팔의 상처를 움켜쥐고는 창백해진 얼굴로 틸러 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소년의 검을 멀리 차버린 다음 검으로 소년의 목을 겨누었다. "시카트 규리하. 귀 가문의 포악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육친을 죽일 정도로 악독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시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적의 등 뒤에 있는 누나를 향 해 외쳤다. "누나! 죽어, 자살하란 말이야!" 정우는 숨이 꽉 막혀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당장 눈물이 그 렁해졌다. 하지만 시카트의 비정한 권고는 계속되었다. "이놈들은 누나를 이용할 거야. 그래선 안돼! 아버님과 규리하를 위 해……!" 시카트는 말을 맺지 못하고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칼을 쥔 주먹으 로 시카트의 입을 후려친 틸러는 허물어지는 상대를 보며 투덜거렸 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꼬마가 있지요. 말 적은 꼬마와 말 많은 꼬마. 그런데 저는 후자를 아주 질색합니다." 시카트는 피가 흐르는 입을 움켜쥔 채 증오 어린 눈으로 틸러를 올 려다보았다. 틸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이저 변경백은 그런 아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시카트 규리하. 우리 아버지의 경우엔 이랬습니다." 호쾌하게 날아간 발이 시카트의 복부에 명중했다. 시카트는 숨이 막 히는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소년을 두어 번 더 걷어차서 꼼짝할 수 없게 만들어둔 다음, 틸러 달비는 자신이 아버지의 명예에 보탬이 되었는지 누가 되었는지를 고민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에 흠뻑 젖은 두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틸러는 남 의 집안일에 쓸데없이 끼여든 훼방꾼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틸러는 정우에게 남동생을 공격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지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를 받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때 정우의 입이 갑작스 럽게 열렸다. 심하게 일그러진 표정과 달리 그 어투는 놀랍도록 뚜렷 했다. "당신은 아마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나는 잘 모르 겠어요. 그러니 설명을 좀 해주면 좋겠어요. 당신은 어떻게 나와 시 카트를 알고 있지요? 그리고 시카트가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거죠? 그 리고 당신은 왜 나를 구한 거죠? 원래 성격이 폭력적인가요?" 틸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질문이 뚜렷하면 대답도 뚜렷할 수 있 다. 그리고 틸러는 정우만큼이나 대답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틸러는 자신과 정우 두 사람에게 들려주듯 말했다. "질문은 네 개였지만 말씀하시지 않으신 다섯 번째 질문에도 대답하 겠습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저는 제국군 가시나무 군단의 312 소대 장 틸러 달비 부위입니다." 정우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는 마주 목례한 다음 계 속 설명했다. "병사의 전투는 단순하지요. 이기면 짓밟고 지면 도망치면 됩니다. 병사에게 그 외의 전투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휘관의 전투는 좀 복잡 합니다. 패배했을 경우 지휘관은 물론 병사들처럼 도망쳐야겠지요. 하지만 지휘관의 임무에는 데리고 갈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남겨둘 수도 없는 자를 처리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정우 규리하는 처리한다는 말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틸러는 시카트의 동태를 곁눈질하며 계속 말했다. "제가 알기로 아이저 규리하에겐 병약한 장녀가 있습니다. 태어난 직후 죽을 뻔했지만 즈믄누리의 도깨비들이 맡아서 살려내었지요. 그 장녀는 그곳에서 성장했고 도깨비들이 붙여준 도깨비식 이름으로 불 리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아이저 규리하는 그 딸을 반쯤은 죽은 사 람 취급했지만, 전쟁이 벌어지자 이 성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병약한 그녀는 험난한 도피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놔두고 가는 것 도 불가능합니다. 인질이 될 수도 있고 심한 경우 적이 될 수도 있습 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녀는 아이저 규리하의 장녀이니까요. 그녀가 규리하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도 위험 요인입니다. 제거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반란군 장수에게 위협당하고 있는 여인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녀를 공격하는 반란군 장수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습니 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이저 규리하나 그의 아들뿐이지요. 나이를 보니 시카트 규리하일 것 같더군요. 그리고 저는 필요할 때만 폭력적입니다." 아버지에게 자신이 죽여야 하는 딸이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정우는 틸러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우는 틸러가 대단히 명쾌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때문 에 정우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설명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니름을 하실 줄 아셨던 것은 아니군요. 단순하군요." "예. 대단히 단순하지요." "고마워요. 달비 부위." 그리고 정우는 더 견딜 수 없었다. "이 고마움을……"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던 틸러는 정우가 기절로써 고마움을 표시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쓰러진 두 남매를 번갈아 쳐다본 제국군 부위 는 머리를 조금 긁적거렸다. "남자는 칼로 쓰러뜨리고 여자는 혀로 쓰러뜨렸다는 거지. 아버지가 보시면 자랑스러워하시겠군." 별로 재미없는 농담으로 스스로를 치하해 보려 했던 달비 부위는 잠 시 후 자신에 대해 넌더리가 나고 말았다. 황궁은 제국 정치의 중심이며 제국 의례의 중심이기도 하다. 가장 수준 높은 예법이 필요한 곳이기에 황궁에서 제안되고 채택되고 실행 되는 의례는 모든 교양 있는 제국 신민들이 지켜야 하는 예의의 기준 이 된다. 늦은 오후, 황제의 의전관에게 배달된 한 통의 서한은 황궁이 요구 하는 모든 예법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아름다운 문구와 격조 있는 수 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전관은 감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 나 서한에 담긴 요청이 지극히 난처한 것이기에 의전관의 감동은 크 게 희석되었다. 고민하던 의전관은 서한을 챙겨든 다음 자리에서 일 어났다. 반 시간 쯤 후 의전관은 고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원만한 일처리 솜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자기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의전관이 고민에서 헤 어난 바로 그 시점 황궁에서는 또다른 사람이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 쩌면 세상엔 고민 총량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고약한 법칙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 법칙의 희생자는 분명히 존재했다. 의전관에게서 서한을 받아든 사람은 비스 그라쥬백 데라시라는 이름의 나가였다. 황궁 내에서 데라시의 위치는 조금 모호하다. 그는 비스그라쥬의 백 작으로서 황제의 법과 자신의 사소한 재량권에 따라 비스그라쥬를 지 배해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데라시는 비스그라쥬가 아닌 하늘누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물론 대리인에게 영지를 맡기고 보다 문화적인 곳 에서 세련된 생활을 누리는 귀족들은 많았지만 그런 귀족들은 보통 하늘누리에 거주하지는 않는다. 하늘누리에는 제한된 면적밖에 없으 며, 따라서 하늘누리를 다스리는 천경유수는 합리적인 필요성을 증명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늘누리 거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누리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대부분 관리이거나 제국 공신이거나 대귀족 등 황제의 최측근에서 제국의 통치에 관여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다. 하지만 데라시는 황제의 관리가 아니며 황궁 내에서 뚜렷한 직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황족도 아니다. 그러나 데라 시는 황궁에 출석하며, 중요한 사안들에 관여하고, 때론 의견을 개진 하고, 아주 가끔은 집행도 담당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불평하 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데라시는 자신의 모호한 위치에 별로 유감을 가져본 적은 없다. 그 모호성을 책임 없는 권한이라는 매력적인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전관의 고민을 인수한 지금 비스그라쥬백은 자신 의 모호한 처지에 넌더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책임을 추궁당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어떤 일이든 떠맡을 수도 있는 것이 모호함의 또다른 일면이다. 그 때문에 데라시는 만병장(萬兵將)의 당혹스러운 요청을 검토해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아라짓 제국에는 적지 않은 수의 십병장(十兵將)이 있다. 그리고 백 병장(百兵將) 또한 귀족감이나 공신록을 뒤져보면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천병장(千兵將)이라는 무시무시한 권리를 가진 사람 은 넓은 제국에 아무도 없다.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식이라는 말이 항상 그렇듯 천병장이 있을 수 없다는 상식도 기괴한 일탈을 보여준다. 터무니없게도 제국에는 한 명의 만병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제국만병장의 서신은 데라시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벽난로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데라시는 결국 의전관의 처신을 모범으로 삼기로 했다.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데 라시는 의자에 앉은 채 황궁 안 어딘가를 향해 닐렀다. [데라시입니다. 폐하.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어딘가에서 그에 대답하는 니름이 들려왔다. [와.] 비스그라쥬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누군 가를 불렀고 그러자 그의 방 옆에 붙어있던 부속실에서 시종 한 사람 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데라시가 요청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데라시는 시종의 도움을 받아 두툼한 옷을 입었다. 데라시가 착의를 끝내자 시종은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옷 뒤쪽에 달려있는 주둥이의 마개를 열었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주전자를 들어올린 시 종은 주둥이에 끓는 물을 부어넣었다. 데라시는 몸이 무거워지고 답답해지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다. 하지 만 그런 대책 없이는 벽난로가 있는 그의 방에서 나갈 수 없었다. 규 리하의 땅은 변온 생물인 나가들이 생활하기에 적절한 온도가 아니었 고 그 점은 규리하의 하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종이 주둥이의 마개 를 단단히 닫은 후 데라시는 지체없이 방을 나섰다. 그는 황궁을 가로질러 바쁘게 걸어갔다. 굳이 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은 데라시의 시간을 뺏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하지만 하늘누리의 사람들은 발 아래에서 펼쳐진 승전에 흥분 해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양자 가 모두 아는 정보를 서로 끝없이 교환하는 일이 가진 사교상의 가치 를 인정했지만, 데라시는 그 때문에 물이 식어 몸이 차가워지는 꼴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데라시는 대단히 급한 일이라도 있는 양 황급히 걸어갔다. 그리고 흥겨워하던 이들은 그런 비스그라쥬백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어쨌든 황궁뿐만 아니라 하늘누리 전체가 승전 에 기뻐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비스그라쥬백을 구태여 붙잡으려 하 지 않았다. 그래서 데라시는 아무 방해 없이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 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데라시는 집무실 입구에 서 있던 장애물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2 미터의 신장에 가슴 둘레는 그 이상이 아닌가 의 심스러운 장애물이었다. 황제의 집무실을 지키는 금군 구레는 짧은 순간 유혹을 느끼는 듯했 지만, 결국 자신이 고지식한 인물임을 보여줄 기회를 포기했다. 그가 백작에게 이름과 방문 목적을 묻고 그것을 황제에게 전하고 허락을 얻는 것은, 물론 황궁의 예법에 맞는 일이지만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 이다. 그래서 구레는 그냥 문을 열어주었다. 방문 안으로 들어서자 데라시는 몸이 뜨거워지는 반가운 기분을 느 꼈다. 하늘누리에서 이 계절에 벽난로를 떼는 곳은 세 군데 뿐이다. 데라시는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인 치천제는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근 처에 앉아있었다. 들어오는 데라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데라 시가 문을 닫자 닐렀다. [구레는 드디어 자신의 소중한 의무를 포기했군.]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일을 포기한 것입니다. 폐하. 그는 제가 항 상 폐하께 허락을 받은 후에 찾아온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나 보지? 두뇌로 갈 영양이 전부 근육으로 간 것 같은데.] [구레를 탐탁찮게 여기시는 뜻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폐하. 그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치천제는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백작을 외면했다. 창가로 다가 간 황제는 그곳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며 닐렀다. [난롯가에 옷을 걸어두거라.] 데라시는 고개를 숙여 감사한 다음 무거운 보온복을 힘겹게 벗었다. 벽난로에는 그런 용도로 부착된 옷걸이가 있었다. 데라시가 보온복을 벽난로 옆에 걸어두자 황제가 질문했다. [무슨 일이지?] [조금 전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승전 보고를 보내어왔습니다.] 치천제는 기뻐하지 않았다. 전쟁터를 직접 내려다볼 수 있는 다른 수도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황제 또한 이미 전쟁의 결과를 알고 있었 다. 그래서 황제는 이어질 니름을 기다렸다. 데라시는 벽난로 옆에 서서 닐렀다. [그리고 의전관에게 보내는 자문 요청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수령 한 의전관은 그 내용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 판단하고는 답장을 쓰기 전 제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네게 떠넘겼다는 니름이군. 무슨 내용이지?] [대장군은 의전관에게 특정한 의전 형식에 대해 자문을 구했습니 다.] [개선식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폐하. 대장군은 승전을 거둔 장수가 승전 보고를 하면서 죄수들의 대사면 건의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문을 구했습니다.] 꽃을 들여다보던 황제는 놀란 표정으로 데라시를 돌아보았다. [대사면?] [예. 폐하.] [부냐 이야기군.] [그런 것 같습니다. 폐하.] 비스그라쥬백은 황제가 언짢아할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황제는 담담하게 닐렀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우리 대장군은 지독한 사람이야. 네 생각은 어떤가, 데라시? 짐이 부냐 헨로를 용서해야 할까?] 데라시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황제는 부냐 헨로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데라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부냐 헨로의 사건은 보통의 상식만 갖춘 자라면 모든 선민 종족이 비슷한 판단을 내릴 단순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황제의 질문은 데라시의 의견이 궁금해서 던진 것은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황제를 거들까 고민했지만 데라시는 결국 사실대로 니르기로 했다. 황제는 데라시가 일부러 심중과 다른 니름을 한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다. [부냐 헨로가 그녀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 것은 사 실입니다. 폐하. 하지만 저는 그녀의 행동을 죄라고 니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용서하라는 건가?] [그렇게 해주신다면 폐하의 자애로움에 많은 이들이 감사할 것입니 다.] [대장군도 그럴까?] [네? 당연히 그렇겠지요.] [글쎄. 데라시. 대장군은 부냐 헨로를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았어. 대신 규리하 변경백령으로 달려와 이 땅의 불패 신화를 깨버렸지. 이 렇게 거친 남자도 드물지. 그러고는 짐이 기분이 좋아져서 죄수들의 대사면을 명령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 그 중에 부냐 헨로가 포함 되길 바라면서. 이렇게 소극적인 남자도 드물지.] [그것이 엘시 백작의 방식입니다. 그의 희망을 이루어주시길 간원드 립니다. 백작으로 하여금 폐하께 바친 충정이 값진 것이었다고 여기 게 해주십시오.] [데라시.] [네?] [값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는 짐에게 충성해야 돼. 그렇잖은가?] 데라시는 비늘이 일어나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리고 조금 후 엔 자신의 어리석음에 염증을 느꼈다. 데라시의 발 아래에는 충성의 값을 매기려다가 몰살당한 자들이 있었다. [망극합니다. 폐하.] 치천제는 별로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집중하지 않은 니름처럼 닐렀다. [부냐 헨로는 엘시에게 어울리지 않아. 짐은 엘시에게 공작의 위를 주어 규리하를 다스리게 할 생각이었다.] 데라시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허리를 펴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떤 산이나 시야를 가로막는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하늘누리의 하늘이었다. [아이저 규리하가 남겨둔 독기를 모두 태우려면 그 정도 불길은 필 요할 테지. 이곳을 탐내는 얼간이들이야 많겠지만, 그런 반편이들 중 하나를 그곳에 앉히는 것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살아서 아무 쓸모가 없는 그런 반편이들의 문제는, 죽은 후에 없던 쓸모가 생기는 대신 소란만 일으킨다는 거지. 엘시만이 이곳을 다스 릴 수 있다. 그런 엘시에게 부냐 헨로는 짐이 될 거야.] 데라시는 당혹을 감추기 어려웠다. 황제의 니름은 합리적이었다. 하 지만 엘시 에더리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데라시는 황제에게 엘시 에더리가 보내어온 보고서의 한 흥미로운 부분을 닐렀 다. 규리하성 대전에서, 원래 아이저 규리하의 것이었던 보좌 옆에 서 서, 칼리도백이자 황제의 대장군인 엘시 에더리는 틸러 달비 부위의 설명을 들었다. 설명을 경청한 백작은 훌륭한 상황 판단과 민첩한 대 응을 높이 사서 즉석에서 틸러에게 포상을 내렸다. 상당한 양의 금편 을 받게 된 틸러는 아버지가 틀림없이 기뻐할 거라 생각하며 대전에 서 물러났다. 엘시 에더리는 정우 규리하를 바라보았다. 정우 규리하는 몇 단 아래의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과 어 깨를 뒤덮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보던 엘시는 갑자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도열해 있던 제국군의 장수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대장 군과 정우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정우 앞에 섰다. 눈 앞에 선 다리를 본 정우는 고개를 들어 대장군을 올려다보았다. 엘시는 단 위에 있는 보좌를 가리키며 조용 하게 말했다.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 당신은 규리하 변경백의 최우선 계승권자 로서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정우의 창백한 얼굴에 가느다란 분노가 스쳤다. 수만의 군대를 휘하 에 둔 제국의 만병장인 남자가 어떻게 포로로 잡힌 힘없는 여인에게 자신의 것을 지켜보겠느냐는 식의 야비한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정우 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엘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정우는 거기에 비웃음이나 조롱이 없음을 깨달았다. 문득 정우는 정신을 잃 기 전에 겪었던 기묘한 일을 떠올렸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장군님. 저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이 이상하게 생긴 도깨비 라고 생각하며 혼자 속상해 하곤 했어요. 제가 충분히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된 후에야 즈믄누리의 어르신들은 제 신분과 킴으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셨지요. 하지만 그 분들은 킴이 아니고 그랬던 적 도 없던 분들이죠. 지금 제게 어떤 것을 암시하고 싶으시다면, 대장 군님. 도깨비에게 말하듯이 말씀해주세요. 그 편이 이해하기 쉬우니 까요." 묵묵히 정우를 내려다보던 엘시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이 땅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 니다. 그러니 이 땅은 새로운 주인을 얻어야 합니다. 폐하께서 적절 한 인선을 하실 수 있도록 나는 이 땅의 새 통치자로 어울리는 품격 과 덕성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인사를 추천할까 합니다. 그 목록에 당 신을 포함시켜도 되겠습니까, 규리하공?" 도열한 제국군의 장수들은 간신히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들의 눈은 정우의 눈과 똑같았다. 정우는 당황하여 고개를 갸웃거리 다 말했다. "정우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반란자의 딸인 제가 어떻게 규리하 의 새 통치자가 될 수 있지요?" "그것이 그렇게 바르지 못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정우." "예? 무슨 말씀인가요?" 엘시 에더리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정우. 불쾌하시겠지만 조금 전 시카트 규리하가 한 일을 생각해보 십시오." 정우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에 앞서 엘시가 말했다. "시카트 규리하와 아이저 규리하가 두려한 것은 결국 당신의 변경백 위 계승입니다. 당신은 변경백위의 최우선 계승권자이며, 당신이 이 전쟁에 적극적 참여를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경우 는 부작위에 의한 종범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거역 하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요. 따라서 당신이 변경백위를 계승하는 것 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정우는 틸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기절이 이해력을 증진시 킬 리는 없기에 정우는 여전히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제 아버지와 제 동생은 왜 그걸 두려워하는 거죠?" "유서 깊은 규리하 가문은 제국 전역에 걸쳐 다종다양한 친교를 쌓 아왔으며 그런 친교의 대상 중 상당수는 규리하 변경백령은 규리하 가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 중 일부는 규리하 가문 이외의 사람들에게 변경백령이 넘어간다면 불평 을 하고 심지어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변경백위가 당신에게 계승된다면 그들이 화를 낼 명분은 없어집니다. 그것은 도주한 아이 저 규리하의 예비 지지자들이 이탈한다는 의미입니다." "제 아버지와 함께 화를 내어줄 사람이 줄어든다는 의미인가요?" "영민한 이해이십니다. 또한 당신이 죽을 경우 제국군에 의해 살해 당했다는 악담을 퍼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바르지 못한 책략을 통 해 아이저 규리하는 중도적 인사들의 규합을 도모할 수도 있습니다." "아아." 제국군의 장수들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누구에게 한숨 을 내쉬는지는 알지 못했다. 도무지 정치적이지 못한 정우와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아무렇게나 말해버리는 엘시 백작 중 누가 더 그들을 어이없게 했는지는 뇌룡공 륜 페이가 부활한다 하더라도 가늠하기 어 려울 것이다. 그러나 엘시의 직설적인 설명이 정우의 이해를 도운 것 은 분명했다. "하지만 제가 변경백위를 계승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 요. 폐하의 권위를 염려하는 많은 분들이 제 변경백위 계승을 역겨워 하실 것 같아요." "나도 아무런 반대가 없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 이 아이저 규리하가 고집했던 것을 거부한다면 그런 거부감 또한 상 당히 사라질 겁니다." "아버지가 고집했던 것…… 충성 서약을 부정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원인이었다. 황제는 더 이상 충성 서약을 받지 않겠 다고 선언했고 아이저 규리하는 서약지지파의 우두머리였다. 어느 쪽 도 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양자의 의견차는 피의 무 게로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장수들은 이 해괴한 대화가 그럭저럭 정리 단계에 들어섰다는 안도 감 속에 행복해졌다. 하지만 정우는 안도하지 못한 채 오른손으로 왼 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대장군께서 말씀하신대로 한다면, 저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적이 되 겠군요." "그들에겐 당신이 이미 적입니다." 정우는 몸을 떨었다. "그렇군요. 시카트가 저를 좋아해서 칼을 들지는 않았을 테니." "내 권고를 따르겠습니까?" "대장군님. 저는 이 땅을 다스리고 싶지 않아요. 그런 무거운 책임 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우. 당신은 어쩌면 자신 속에 있는 통치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물려줄 때까지만 저 자리를 지켜도 됩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는 당신에게 저 자리를 지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당신 에게 반란자의 혈족으로 처형당하는 취미가 없다면." 소스라치게 놀란 정우는 마치 물리적인 공격을 받은 사람처럼 상체 를 뒤로 젖혔다. 엘시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뒤로 조금 물러났다. 정 우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이 땅의 지배자가 되거나, 그렇잖으면 처형되거나 둘 중에 하나밖 에 없는 건가요?" "내 생각엔 그렇습니다." "어째서죠?" "이미 말씀드린 사실들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충성 서 약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당신에게도 아이저와 같은 역심이 있을 거라 믿을 겁니다. 따라서 당신은 충성 서약을 부정해야 합니 다. 그러려면 충성 서약 없이 규리하의 통치자가 되는 것보다 더 좋 은 방법은 없습니다." 엘시의 희망과 달리 정우는 백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공포에 떨었다. "저는 아버님이 부르셔서 이 성에 왔을 뿐이에요. 딸이 아버지의 명 령을 따른 것이 잘못인가요? 겨우 그런 일 때문에…… 동생에게 살해 당할 뻔하고…… 저는 도깨비…… 킴들의 논리로 저를…… 그건 부당 하기 짝이 없는……" 정우의 말이 혼란스러워졌다. 엘시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당신이 당했던 모든 바르지 못한 일들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을 느 낍니다. 하지만 내 질문에 빨리 대답해주길 부탁합니다." "빨리?" "나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장병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우는 엘시가 아무런 대가 없이 선물을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패 배자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 시 에더리는 정우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고 또한 그것에 대해 상세 히 설명해주었다. 사만 명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지휘 관이 오직 한 사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시간을 할애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배려에 커다란 당혹감을 느낀 정우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저는 그 자리를 원하지 않아요." 정우는 자신의 말에 놀랐지만 그것을 부정하거나 부연하지 않았다. 다만 크게 뜬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실망했는지 만족했 는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었고 그 때문에 정우는 불안해졌다. 조금 후 그가 입을 열었을 때도 정우는 자신이 대장군의 기대를 충족시켰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정우 규리하. 몸가짐을 돌봐줄 사람 한 명을 허락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허락 없이는 방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물론 당신의 요구가 정당하다면 나는 언제든 출입 을 허락할 것입니다." 정우 규리하에게 유폐 명령을 내린 다음 엘시는 그 일을 담당할 사 람을 선임했다. 민첩하게 진행되는 상황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던 정 우는 명령을 받은 장수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대장군님. 저는 이제 제 방에서 처형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그것은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정우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 때 엘시가 다시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당신에겐 황제 폐하께 대적할 의도가 없었으며 다만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이곳에 온 것 뿐이라는 사실을 폐하께 아뢰겠 습니다." 정우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그녀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장군님." "폐하께 정확한 사실을 고하는 것은 내 의무입니다." 정우는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는 대전에서 물러갔다. 집중한 채 비스그라쥬백의 니름을 듣던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는 빙 그레 웃었다. [흥미롭군. 엘시가 그런 생각을 했단 니름인가.] [잠시 대장군의 보고서를 인용하겠습니다. '널리 알려진 바, 정우라 고도 불리는 비셀스 규리하와 아이저 규리하의 관계는 그다지 돈독한 부녀 관계라 하기는 어렵고, 또한 비셀스 규리하가 이 전쟁에서 폐하 께 대적하려는 의도를 품거나 실행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포착되 지 않았사옵니다. 그런즉, 원치 않았던 환란 때문에 피폐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변경백령의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길 수 있는 규 리하공 비셀스 규리하로 하여금 그들을 보살피게 한다면 이는 곤경에 처한 양떼가 익숙한 양치기를 만난 것과 다름없으니 그 뜻이 제법 장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라고 썼더군요. 폐하.] [재미있는 의견이군. 하지만 즈믄누리에서 자란 인간에게 통치라니. 그 비셀스인지 정우인지 하는 여자는 어떤 사람이지?]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없는 듯해서 개괄적인 것만 알고 있습니다. 아이저 규리하의 장녀이며 상당히 병약하게 태어났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살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저 규리하의 오랜 친구인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가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그녀 를 즈믄누리로 데려와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치천제는 조금 놀랐다. [성주가?] [예.] [그 결정은 즈믄누리에서 이루어졌나?] [그렇습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황제가 왜 질문하는지 알고 있었다. 즈믄누 리의 성주가 즈믄누리에서 내리는 결정들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는 모 르는 사람이 없다. [아이저 규리하는 그 결정을 따르기로 했고 결국 그 결정은 옳았습 니다. 비셀스는 건강을 회복했고 그 후로 지금껏 즈믄누리에서 자랐 습니다. 물론 아이저는 바우 성주에게 매년 푸짐한 선물을 보냈으며 변경백의 장녀로서 알아야 할 일을 가르치기 위해 간혹 특별한 스승 을 즈믄누리로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규리하로 불러들이는 일은 없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아이저는 처음으로 그녀를 성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아마 인질이 될까봐 걱정한 것이겠지요. 그 리고 그녀에게 그 이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주위 사람 들과 다른 점 때문에 좀 우울해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테지만, 그 건 그녀의 성격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능력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으로도 특기할 만한 점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능력만 놓고 본다면, 백작이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촌부에게 규 리하를 넘겨준다 해도 비셀스에게 주는 것과 별 차이는 없을 겁니 다.] [차이가 있어.] [예?] [비셀스는 규리하를 포기했지. 강대한 규리하를 간단히 포기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거부할 경우 당할 수 있는 곤란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그건 대단한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 지.] [그건 그저 도깨비다운 수줍음일 겁니다.] [설명할 수 있겠나?] [예. 보고서에 인용된 그녀의 발언을 놓고 보거나 상식적으로 생각 해 보더라도 비셀스 규리하는 인간의 사고 방식보다는 도깨비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도깨비라면 수 십만 명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라면 일단 거절부터 할 겁니다. 폐하께 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는 죽기 전에 그렇 게 애를 쓰고도 결국 성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 르신이 된 후에도 즈믄누리를 다스려야 했던 열 명의 선대 성주들과 같은 처지에 처해있고, 바우 머리돌 성주가 그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 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비셀스가 거절한 것도 그런 거부감 때 문일 겁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가 위험해지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그런 선택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란 비셀스가 죽음에 대한 제 대로 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셀스는 그 저 아버지가 불러서 이곳에 왔을 뿐인 자신이 큰 처벌을 받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있을 겁니다.] 황제는 수긍하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닐렀다. [부냐 때문에 그런 것일까.] 데라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가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가의 니름은 인간의 언어보다 훨씬 본심을 잘 드 러낼 수 있다. 그리고 데라시는 황제의 추측에 공감을 느꼈다. 엘시 백작이 정우에게 사형 대신 규리하 통치를 제안한 것을 알게 되면 누 구든 부냐 헨로의 처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황제가 닐렀다. [그래서, 우리의 마루나래는 처녀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어떻게 대응했지?]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데라시는 즉각적으로 닐렀다. [백작은 규리하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거나 받을 수 있다고 생 각되는 인사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간략한 추천 사유를 덧붙였습니다. 글자와 문장 부호보다는 공평함과 객관성이 더 많이 들어있는 것 같 은 보고서였고, 당연히 그 이름들 중에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는 없었 습니다.] [곤란하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건가. 그 래도 엘시여야 해.] [그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폐하. 게다가 그가 받 아들인다 해도 발케네공은 절대로 승복하지 않을 겁니다.] 데라시가 조심스럽게 니른 뜻밖의 이름을 접하자 황제의 니름에 노 기가 묻어났다. [짐은 락토의 승낙이나 거부를 구한 적이 없어.] [하지만 락토 빌파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칼리도백에게 공작위를 하 사하기는 어렵습니다. 귀족원의 심사권이 있으니까요. 발케네공이 귀 족원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누군가가 공작이 되는 것을 막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습니다.] 황제는 손등의 비늘을 조금 세우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짐과 제국을 위해 이 정도의 대승을 거둔 백작을 적대시하는 것은 락토에게 있어 스스로에게 내리는 금치산 판정이 될 거다.] [그런 가정을 가지고 계신 거라 짐작했습니다. 폐하. 하지만 락토 공작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 때가 아니면 절대로 백작을 억누를 수 없 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락토 공작은 엘시 백작이 큰 모욕을 당 하길 바라며 이 전쟁을 주시하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백작은 손쉽 게 이겼고, 공작은 지금쯤 초조해하고 있을 테지요. 이 시점에서 엘 시 에더리에 대한 공작위 하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공작은 모 험을 결심할 겁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코 앞에 엘시 공작이 탄생 하는 것을 좌시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암살공이 결행하는 모험은, 글 쎄요. 가장 원만한 형태로 수습되더라도 백작에게 큰 상처를 남길 가 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규리하를 다른 자에게 주라는 건가?] [당분간만이라도 황제령으로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짐은 절대로 지상의 땅을 가지지 않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시적인 기간 동안만……] [더 이상 니르지마.] 데라시는 절망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황제와 가까운 사람은 아무도 없고 데라시는 언제나 자신이 다른 자들보다 아주 약간 황제와 더 가 까운 것이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 생각은 그에게 자제력과 겸손 함을 주었다. 또한 안전함도. 불에 조금 더 가까이 있으면 더 따뜻하 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비늘이 타버릴 뿐이 다.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라시는 자신을 황제의 최측근으로 여기고 싶은 충동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는 때때로 데라시의 그런 충동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곤 했다. 지상의 땅에 대한 황제의 거부감은 데라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어차피 지상의 지배자는 그녀이며 각 영지의 지배자들은, 그런 사실을 자주 확인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그녀의 대행자일 뿐이다. 따라서 지상의 땅을 가지지 않는다는 황제 의 선언은 원칙적으로 모순이다. 황제의 그런 불가해함을 접할 때마다 데라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런 느낌이 그를 괴 롭게 했지만 데라시는 무엇이 타고 있는지 알기 위해 불 속에 손을 집어넣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엘시 에더리입니까?] 황제는 오른손으로 입 주위를 받친 채 생각에 잠겼다. 데라시의 기 대대로 그 시간은 짧았다. 그리고 그 내용은 데라시의 기대대로 전혀 예상외였다. [비셀스 규리하를 회유해봐.] [예? 비셀스 규리하를 니르셨습니까?] [엘시의 생각이 재미있군. 빌파가 아무리 무도하다 해도 다른 사람 들의 결혼을 트집 잡을 수는 없겠지.] 비스그라쥬백은 잠깐 고민한 후에야 황제의 니름을 이해할 수 있었 다. [비셀스 규리하에게 규리하를 주고, 차후에 엘시 백작과 결혼시킨다 는 니름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폐하. 니를 것도 없이 백작은 폐하를 위해 규리하를 무 너뜨렸지만, 그의 흉중에는 폐하께서 니르신 것처럼 부냐 헨로의 석 방을 도모하려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백작이 부냐 헨로 대신 비셀 스 규리하와 결혼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결혼하게 만들어.] 황제의 명령은 예상 외라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데라시는 니 름과 표정 양쪽으로 최대한의 낭패감을 표현하며 닐렀다. [폐하. 그게 그렇게 '문을 닫아'라든가 '책을 가져와'라는 명령처럼 간단한 명령인 것 같지는 않군요.] [짐이 누구냐고 묻고 싶군. 데라시.] [만물의 지배자이십니다. 하지만 폐하. 인간들은 결혼을 개인적이며 타인의 참견을 불허하는 문제로 생각합니다.] [인간들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하지만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관습이 없는 이상 인간들이 하는 설명 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관습 이 엉터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정말 엉터리일 경우에도 무익합 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결정에 의해 결혼하게 되었다고 믿게 만들어.] 그리고 황제는 마음 속으로 어떤 영상을 그렸다. 그것은 데라시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데라시가 본 영상에는 목에 올가미가 걸린 부 냐 헨로가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올가미의 끝은 어떤 인간 여자 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데라시는 어렵잖게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2 미터가 넘는 키에 씨름 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 여자를 비셀스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긴 어려웠다. 실제 비셀스는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기에 데 라시는 정신적인 미소를 지었다. [엘시 백작이 그런 조건을 감내할지 의문입니다만, 알겠습니다. 노 력해보겠습니다.] 무자비할 정도로 명령형으로 일관하던 황제는, 데라시의 응낙을 받 자 약간의 동정심을 보여주었다. 황제는 부드럽게 닐렀다. [이 전쟁 때문에 고생 많았다. 데라시. 하지만 무슨 일이든 뒤처리 가 말끔하지 않다면 노력도 무의미해지지. 조금만 더 수고해줘.] 데라시는 감명을 받았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었다. 황제에 대한 길고 힘든 봉사의 세월 동안 데라시가 이 정도의 보답을 받은 적도 드물 다. 보답을 바란 적이 없기에 데라시는 그런 가벼운 배려에도 크게 감동할 수 있었다. 깊이 고개를 조아린 다음, 데라시는 자신있게 닐 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황제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니름처럼 닐렀다. [그래.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되었지?] 데라시는 황제가 니른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현재 금고방의 위치는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여는 방법을 알 수 없 습니다. 그것을 열기 위해선 비셀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로 비셀스를 만나봐야겠군. 네가 맡도록.] [알겠습니다.] =============================================================== 연재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성탄절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12-26 조회수 : 1284 피를 마시는 새 1. 잠든 불씨 - 3 대저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하늘누리에서도 엘시 백작의 집은 두드러지게 단출했다. 티나한로(路)와 갈바마리로(路) 교차 지점에 있는 엘시 백작의 조그마한 집에는 단 두 명의 식솔만이 거주하고 있 다. 엘시 에더리 자신과 그의 몸종 이레 달비가 그 두 명이다. 하늘누리의 집을 동산으로 봐야 할지 부동산으로 봐야 할지를 놓고 다투는 법리학자들은 많았고, 제반 상황은 그 해답이 제시될 수 있는 지조차 모호하게 만들고 있지만,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엘시는 식솔들이 거주하고 귀빈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으로는 쟁룡해에 면해 있는 자신의 저택을 이용했 고 하늘누리 위에서는 천막 생활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평소 엘시는 대장부가 처신을 올바로 하기 위해 필요한 사용인은 한 명이면 족하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몸종인 이레 달비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레에게 백작은 모시기 쉬운 상전 이었다. 집안의 일에 그다지 까탈스럽게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 지만 백작을 방문하는 어마어마한 신분의 손님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레는 만성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이레의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은 재치있게도 필요한 준비물 들을 하인의 손에 들려 방문함으로써 이레를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 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재치를 가진 것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어 도 깨비 탈해 머리돌 같은 이가 그랬다. 탈해는 다양한 집을 방문하는 즐거움이 각기 다른 물맛과 술맛, 장 맛을 보는 것에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자기 집의 음식을 싸들고 다 른 집을 방문하는 것을 크나큰 불행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음식이 나 술맛의 개별성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었지만 물맛에 대해서는 곤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생물의 등 위에 건설된 하늘누리에는 당연히 우물이 없기 때문에 황제를 포함하여 모든 하늘누리 시민들은 모두 같은 빗물을 마신다. 하지만 탈해는 같은 물이라도 집집마다 달 라진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고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탈해 의 말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백작님 댁의 물맛이 좀 바뀌었군요." 엘시의 집 마루에 앉은 탈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이레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레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려주시지요." 라고 말하고 싶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 었지만 존경하는 주인의 체면을 생각하여 그 말을 삼켰다. 그리고 엘 시는 사용인의 바람을 잘 이해하는 좋은 주인이었다. "물맛이 바뀌었다니,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아, 오셨습니까, 각하." 탈해는 마당을 가로질러오는 엘시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엘시가 마 당 저편에서 탈해의 말을 들은 것은, 황제의 대장군이 그 지위에 걸 맞는 초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집이 협소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네 걸음만에 마당을 가로지른 백작은 마루에 걸터앉 아 투구를 벗었다. "앉아. 탈해. 그리고 이레, 나도 맛이 바뀌었다는 그 물 좀 가져다 주겠어?" 이레는 깊숙히 목례했다. 그 목례는 평소보다 극진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런데 의복을 준비할까요?" 엘시는 가주라는 말에 미소를 지었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이레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엘시가 말했다. "그래주면 좋겠군. 갈아입고 바로 나갈 테니 외출복으로."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레는 조금 후 물그릇을 가져와 맵시있게 내려놓은 다음 옷을 준비 하러 갔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엘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물맛이 바뀌었다는 거지? 하늘누리에서 마시는 물은 다 똑같 은데." 탈해는 대답하기에 앞서 품에서 짧은 곰방대를 꺼냈다. 엘시는 무례 를 탓하지 않았다. 이레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으니 오히려 사려 깊다 고 할 것이다. 그래서 엘시는 탈해의 매혹적인 곰방대를 조용히 감상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무슨 물건인지 상상도 하기 힘들 것이 다. 그것은 도깨비 대장장이나 상상할 수 있는 곰방대였다. 물부리는 보통의 곰방대와 비슷했지만 연초를 채워넣는 곳의 구조가 특이했다. 곰방대 끝에는 잘 다듬어진 금속 원통이 부착되어 있었고 그 원통에 는 여섯 개의 구멍이 연근처럼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안에는 모두 연 초가 채워져 있었고 채워넣은 연초가 휴대 중에 쏟아질 염려가 없도 록 정교한 덮개가 있었다. 그 작동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한 구멍의 연초를 다 피운 후 누름쇠라 불리는 곰방대의 특정한 부분을 건드리면 원통은 자동으로 육분의 일 회전한다. 그리고 다음 구멍의 연초가 '장전'되며 동시에 '점화'된다. 여섯 번을 다 피운 후에는 물 론 다시 연초를 채워넣어야 하지만 대단히 편리한 물건임에는 분명하 다. 실제로 탈해는 곰방대 아랫부분의 꼭지를 잡아당김으로써 연초 피울 준비를 다 끝냈다.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다음 탈해는 코와 입으로 동시에 연기를 뿜었다. 그 곰방대의 이름이 뻐끔이라는 것을 떠올린 엘시는 정말 정 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탈해가 말했다. "제가 방금 마신 물에서는 그 집안 주인이 입맛을 잃어버린 흔적이 보이더군요. 집주인이 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성 실한 물독은 그럴 경우 물에 자양분을 담으려 애씁니다." 엘시는 미소를 떠올렸다. "성실한 물독이라고 했나?" "예. 잘 구워지고 정성껏 관리된 물독은 집안 식구들에게 성실하려 애씁니다. 그런 물독에 담긴 물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스하지 요. 몹쓸 벌레가 꾀거나 상하는 일도 드뭅니다. 한편, 대충 구워지고 아무렇게나 관리된 물독은 집안 사람들에게 별다른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지요. 그런 물독의 물을 마시는 식구들은 그 성정을 상하게 됩니 다. 따라서 물독은 성질 모진 식구들에게 더 궂은 대우를 받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이 댁의 물독은 칼리도에서 가져온 것이지요?" "맞아. 내 기억으로도 조부님 대까지 올라가는 물건인 것 같아.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고." "그런 해묵은 물독은 입맛을 잃어버린 집안 식구를 위해 물을 진하 게 만드는 재주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맛이 변한 것은 그 때문이지 요." "자네의 넘겨짚는 버릇이 더욱 심해질 것 같지만, 요즘 식사가 좀 부실했다는 것은 인정하겠어." "그 분의 일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각하." "고마워." 그리고 엘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탈해는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승을 거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엘시 또한 화제가 바뀌길 기다렸던 듯 빠르게 말했다. "축하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자네가 며칠 전에 하늘누리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온갖 흉흉한 이야기를 다 꾸며대더군. 즈믄누 리의 무사장이 전쟁터에 나타나다니 긴장할 일 아닌가? 하지만 나는 자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군. 비셀스 규리 하지?" 탈해는 더 이상 자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정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금 전 만나고 오는 길이야." "만나고 오셨다고요!" "그래. 아무 데도 상한 곳이 없이 안전하게 잘 있어." "자신을 죽이는 신이여, 감사합니다!" 탈해는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도 모자란 듯 박수까지 쳤다. 다섯 번 빠르게 박수를 친 탈해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됐습니다. 정우가 안전하다면, 전쟁도 이제 끝났으니 즈믄누리로 데려가도 되겠군요?" "즈믄누리로?" "예. 물론 정우가 동의해야겠지만." 엘시 에더리는 팔짱을 끼고는 잠시 할 말을 골랐다. 그 동안 탈해는 입에 물고 있던 뻐끔이를 한 번 더 맛있게 빨아들였다. 엘시는 잠시 후 투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그녀도 그쪽을 선호하는 것 같으니 정우라고 부르지. 정우 의 동의는 무의미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중요하지." "아, 예. 하지만 폐하께서 아버지가 불러서 여기 왔을 뿐인 정우에 게 설마 벌을 내리시겠습니까." "자네들이 정말 정우를 보호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규리하로 보내지 말았어야지." "그런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사실 제가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될 것을 짐작했군." "예. 하지만 성주님께서 돌려보내야 한다고 결정하셨습니다." 엘시는 눈을 조금 크게 뜨며 탈해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과 마 찬가지로 백작 또한 즈믄누리의 성주들이 내리는 결정들에 대한 신비 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즈믄누리의 성주들이 내리는 결정의 독 특한 성격을 잘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황제가 태양 이 두 개라고 말하면 조신들은 걱정할 것이다. 황제가 미친 것이 분 명하기에. 즈믄누리의 성주가 태양이 두 개라고 말하면 도깨비들은 걱정할 것이다. 태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기에.' 엘시는 다 짐하듯 질문했다. "바우 성주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는 건가? 정우를 규리하로 보내 야 한다고?" "예. 오래 전 정우를 즈믄누리로 데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주님 께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변경백이 연락을 보냈을 때 정우는 자신 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주님께 여쭤봤습니다. 성주님은 가라고 하 셨고, 그래서 정우는 그 결정을 따른 겁니다. 정우 자신은 이곳에 오 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녀가 부친과 변경백령에 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바르지 못하다 하긴 어렵겠지.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정우가 즈믄누리로 되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바우 성주님의 결정인가?" "아닙니다. 각하. 성주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 지 않으셨습니다." 엘시는 희미한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그 또한 도깨비가 아닌 자들 이 흔히 그러하듯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리는 결정보다는 자기 자신의 결정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 또한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였다. 탈해가 말했다. "정우를 되돌려받는 것은 도깨비들의 소망입니다. 그녀는 킴이지만 우리 가족입니다. 그래서 여쭙고 싶습니다. 폐하의 의중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까요?" "이봐, 탈해. 나는 조금 전에 전쟁터를 떠나 이곳으로 올라왔어. 물 론 승전 보고는 이미 황궁으로 보냈지만 아직 폐하를 알현하지는 못 했네. 자네가 좀 일찍 왔군." "그렇다면 혹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만나보셨습니까?" 엘시는 잠깐 동안 말을 멈췄다가 나직하게 질문했다. "탈해. 왜 비스그라쥬백을 거론하는 건가?" "예? 폐하께선 현명한 데라시 백작의 의견을 높이 사신다고 들었습 니다." "폐하께서는 물론 비스그라쥬백의 현명함을 귀하게 여기시지만, 동 시에 모든 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이기도 하시지. 미안하지만 나는 백작 또한 아직 만나지 못했어." 탈해는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뻐끔이를 들어올렸다. 그는 누름쇠를 누르려 했지만 생각을 바꿔 뻐끔이를 품 속에 집어넣었다. "각하. 저는 몽화각에 머물고 있습니다. 몽화각도 좋지만 거기선 도 깨비들밖에 볼 수가 없지요. 괜찮으시다면 이 댁에 머물면서 정우의 구명을 도모해도 되겠습니까? 정우의 일을 잘 풀기 위해선 아무래도 각하의 도움이 절실할 것 같습니다." "내 집이 자네 집이야." 엘시는 그의 하나뿐인 몸종이 비명을 지를 말을 태연히 꺼낸 다음 말했다. "하지만 구명에 대해서는 좀 기다려보라고 권하고 싶군. 정우 규리 하의 신병을 확보하는 과정에 좀 괴상한 일이 발생했어." 엘시는 시카트 규리하와 정우 규리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했 다. 소름끼친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탈해는 잠시 침묵하다가 곧 표정을 밝게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시카트 규리하는 일부러 그랬을 겁니다. 제국군 병사 가 다가오길 기다려 그런 모습을 보여준 거지요. 누나가 자신들의 적 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참 영리한 행동입니다." 엘시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지만 탈해의 호의 어린 넘겨짚기를 반대 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탈해의 낙관적인 해석은 계속되었다. "애초에 변경백이 정우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 르겠군요. 정우가 즈믄누리에 있으면 그녀를 반란자의 혈육이라는 신 분에서 헤어나게 할 방법이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성주님의 결정은 역시 옳았던 겁니다! 이제 이해가 되는군요." "그런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그런 일 때문에 정우의 신분을 규정하 는 일에 변수가 발생했지. 그러니 구명에 대해서는 조금 기다려보게. 어쩌면 자네가 애 쓰지 않아도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성주님이 결정하신 일이니까 꼭 잘 될 겁니다. 그렇다면 조만간 정 우를 만날 수 있겠군요. 그 때까지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 다만 한 가지는 유념해줘. 이레 앞에서는 그걸 좀 조심스럽게 사용하도록 해." "뻐끔이 말씀이지요? 알겠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쉬고 있어. 나는 다시 나가봐야겠어." "어디 가십니까? 혹 황궁의 고관들을 만나는 자리라면 제가 좀 따라 가면 안 될까요?" 엘시 에더리는 좀 기묘한 표정으로 탈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관들도 있긴 하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긴 어려울 거야." 하늘누리에는 무덤이 없다. 물론 제국 수도에서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황제는 하늘누리에서 장례 의식을 금했다. 그리고 거 기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아래를 파면 시체를 묻을 수 있는 공간 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유서 깊은 상식이지만, 하늘누리에서 는 같은 일을 시도할 경우 제국 수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하늘누 리는 하늘을 떠다니며 결코 땅에 내려오는 일이 없는 거대한 생물 하 늘치의 등에 건설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누리에서 누군가가 사망할 경우 시체는 지상으로 운구되며 그곳 에서 장례 의식이 거행된다. 제국의 아름다운 수도에 따라 다니는 악 평이 생긴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것이다. '하늘누리가 지나간 곳에는 무덤만 남는다.' 풍경화가와 시인을 행복하게 하는 제국 수도의 아름 다운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는 흉흉한 말이지만 도리가 없다. 한편, 그 악평이 생긴 또다른 이유는 훨씬 끔찍하다. 합리적인 이유에 의해 하늘누리는 지상의 도시 상공을 피한다. 그런 일은 지상의 신민에게 너무 많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하늘누리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 타난다는 것은, 규리하 변경백령에 대한 공격처럼 황제의 친정을 의 미할 확률이 높다. 참혹한 학살이 뒤따르며 남는 것은 무덤뿐이다. 누구나 하늘누리와 지상을 잇는 계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놀랍지만, 시체를 아래로 운구하는 일은 좀 까다롭다. 하늘 누리의 계단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며 그 사람 에게만 작용한다. 하늘누리에 말이나 노새, 나귀 같은 전통적인 사역 동물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 동물들은 계단을 상상할 능력이 없 으며 설령 하늘누리에 데려다놓더라도 추락 사고의 위험이 높다. 여 러 가지 크기의 승강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조그마한 것이거나 곡물을 실어나르는 것들이며, 당연한 일 이지만 황제는 곡물 운반용 승강기로 시체를 운반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운구는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 실시된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하늘누리에 하나밖에 없는 장의 기관은 상당한 전문가 집단이 다. 똑같은 형태의 계단을 상상할 수 있는 운구자들이 있으며(계단 모양이 달라지면 서로 보조할 수가 없다.) 시체를 오랜 시간 보존할 수 있는 냉동 장치를 갖추고 있다. 염사장 두이만 길토 또한 그런 전문가의 자부심을 실력으로 보여주 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기술자였다. 하지만 그의 고객 들은 그의 섬세한 기술을 평가해줄 수 없으며 두이만 또한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죽은 자들만 고객으로 받으니 당연하다. 그 때문에 두이만은 약간 재미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 다. 그래서 두이만은 늦은 오후 찾아온 방문객에게 하늘누리의 다른 주 민이라면 보여줬을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냐 헨로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엘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 에더리에게 '그 분'이라든가 '염사보조인'이 아닌 '부냐 헨로'라고 담담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두이만 길토 뿐일 것이다. 곁에서 듣고 있던 다른 염사들이 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눈을 깜빡거렸지만 두이만은 사무적 이라는 표현 이상으로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에겐 적당한 면회 시설이 없습니다. 각하. 또한 죄인을 응접실 로 불러올 수도 없고요." "안된다는 말인가?" "아니요. 염습실에서 만나도 괜찮으시겠냐는 질문입니다." 또다시 한여름 오후 벌통을 연상시킬 만큼 맹렬한 눈 끔뻑임이 있었 다. 하지만 엘시는 안도했다. "만나뵐 수만 있다면 나는 어디라도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다른 염사들이 보내는 '기회를 포착할 줄 모르는 바보'라든가 '당연 히 깨끗한 옷을 입혀 응접실에서 만나게 해줘야 함'에 해당하는 눈빛 을 무시하며 염사장 두이만은 천천히 일어났다. 두이만이 조금도 서 두르는 기색이 없이 밖으로 나가자 염사들은 의리 때문이라도 칼리도 백을 달래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불행한 사실은 그들 중 누구도 제국만병장에게 말을 걸 배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래서 얼마 후 두이만이 돌아와 엘시에게 "따라오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불쌍한 염사들은 의리를 저버린 자신들에 대한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염사장은 긴 통로로 엘시를 안내했다. 통로 좌우에는 문들이 규칙적 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감옥을 연상시키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엘시 는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애써 참았다. 다른 문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두이만은 엘시에게 말했다. "저는 밖에 있겠습니다. 안에 의자를 가져다놓았습니다." 엘시는 두이만에게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가 문을 조 심스럽게 당기자 잠겨있지 않은 문은 간단히 열렸다. 순간 독한 약냄 새와 끔찍한 악취가 뒤섞여 밖으로 새어나왔다. 신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른 엘시는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도로 닫았다. 창문이 없는 대신 꽤 밝은 등롱이 있었지만 방안은 답답했다. 육중 한 돌벽은 당장이라도 방 안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엘시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조심스럽게 방 안을 살폈다. 커다란 석조 작업대 같은 것이 방 가운데에 놓여있었고 그 옆에 물통 같은 것이 몇 개 놓여있 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두이만이 말한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하지만 의자들은 비어 있었고 방 안 어디에도 엘시가 찾는 사람은 보 이지 않았다. 엘시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때 작업대 뒤에서 무엇인가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것은 앙상한 손가락들이었다. 석조 작업대 위를 거미처럼 움직이 던 손가락들은 그것을 할퀴듯 움켜쥐었다. 조금 후 그 손 뒤로 인간 의 형체가 따라올라왔다. 헝클어진 머리와 땟국물로 찌든 얼굴은 두 억시니 같은 모습이었다. 늘어난 목깃 너머로 드러난 가슴팍 때문에 가까스로 인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넝마 같은 옷을 힘없이 움켜쥐어 가슴을 가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엘시는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부냐 헨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엘시." 엘시는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의자로 다가간 엘시는 자신의 웃옷 을 뜯어내듯 벗었다. 의자 위에 웃옷을 정성스럽게 깔아놓은 엘시는 부냐에게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녀의 가벼움에 일순 움 찔했지만 엘시는 아무 말 없이 부냐를 의자 위에 앉혔다. 그리고 엘시는 작업대 옆의 물통을 끌어당겨다. 물통에 걸려있던 수 건을 집어들던 엘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부냐를 바라보았다. 부 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시체 닦은 물이죠." 엘시는 수건을 도로 물통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엘시는 소맷자락을 끌어당겨 손에 쥐었다. 그곳에 조심스럽게 침을 뱉은 엘시는 의자 옆 에서 허리를 구부렸다. 그리고 소맷자락으로 부냐의 얼굴을 조심스럽 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부냐와 엘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시는 깨지기 쉬 운 것인 양 조심스럽게 부냐의 얼굴을 닦았고 부냐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엘시의 손이 이마 주위로 옮겨가자 부 냐가 입을 열었다. "무서워서 숨어있었어요. 함께 있는 다른 죄수들이 경고했어요. 염 사들이 저에게 이상한 짓을 할 거라고. 저 혼자 이곳으로 불려왔을 때 저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어요." 부냐는 작업대 뒤에 숨어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듯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던 엘시는 조금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떠드는 허언일 뿐입니다. 만약 그런 일 이 발생한다면 폐하의 법에 따라 하늘누리에서 바깥으로 집어던져질 겁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집어던져진 시체는 짐승이 뜯어먹도록 내버려 둡니다." 부냐의 얼굴을 다 닦은 엘시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부냐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엘시는 곧 다시 일어나 부냐의 뺨을 닦았다. 부냐가 그런 엘시의 손목을 가만히 붙잡았다. "그만두세요, 엘시. 곧 더러워질 거예요. 옷만 상하게 하는군요." "옷은 상관없습니다." "제가 만들어 드린 옷이잖아요. 함부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엘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끌어당겼다. 그 때 그의 눈이 부냐의 손에 이르렀다. 엘시의 시선을 따라간 부냐는 자신의 손을 보 고는 무심하게 말했다. "자꾸 얼어서 그래요. 어쩌면 동상에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동상이오?" "냉동실 근무가 많아졌어요. 전쟁 때문에. 사체를 냉동시켜야 하니 까요."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부냐는 생기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한꺼번에 많은 시체가 들어와서 지금 정신이 없어요. 냉동실에서는 장갑을 끼고 작업해야 하지만 그런 손으로는 사체를 제대로 다룰 수 없어요. 이렇게 볼품없는 모습도 제대로 씻을 틈이 없어서 그래요. 실망하셨지요? 하지만 제 모습이 보기 싫으시더라도 조금만 더 계셔 주시면 좋겠어요. 며칠 동안 대여섯 시간 밖에 못 잔 것 같아요. 계 속 시체를 염했지요. 견디기 힘들어요. 조금만 길게 이야기를……" "그러겠습니다." "고마워요, 엘시." 부냐는 졸린 듯 두 손에 자신의 얼굴을 담아보였다. 엘시는 시체를 염하는 부냐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황제의 대장군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큰…… 큰 승리였습니다." 부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은 그녀에게 더 많은 냉 동실 근무 외에 아무 것도 아닌 듯했다. 무릎에 괸 두 팔 위에 얼굴 을 얹어놓은 채 부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엘시는 자꾸 메말라가는 목을 힘겹게 적셔 말했다. "역도의 수괴는 체포하지 못했습니다만 그의 가솔들 대부분을 주살 하거나 체포했으며 근거지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폐하께서 크게 기 꺼워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폐하께서 대사면령을 내려주실지 도 모릅니다." 부냐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사면이라고 하셨어요?" 엘시는 희망적으로 들리도록 애쓰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의 작은 노고를 크게 치하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마지막 대사면이 있었던 것이 타이모 사건이 있었던 6년 전이니 그리 빠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좋은 소식이 있 을지도 모릅니다. 부냐." 엘시의 부드러운 말을 듣던 부냐가 툭 던지듯 대답했다. "제 방면을 요청하지 않으셨다는 것이군요."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부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두 손을 찔러넣어 머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손은 곧 힘없이 무릎 위에 떨어졌다. "엘시. 당신은 칼리도의 백작이고 황제의 대장군이며 제국의 유일무 이한 만병장이세요. 폐하를 위해 당신이 한 일을 흉내라도 낼 수 있 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런 당신이 놀라운 대승을 거두고도 폐하께 한 명의 죄수를 풀어달라는 요청도 못하시는 건가 요?" "부냐." "극악무도한 범죄자도 아니고 인륜을 저버린 패륜자도 아니에요. 저 는 그저 편지 한 장을 전달해준 죄밖에 없어요. 예의를 지키기 위해 그 내용을 훔쳐보지 않았던 것이 제 잘못이지요. 그 때문에 이런 끔 찍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건가요?" 부냐는 무릎 위에 놓아둔 두 손을 서로 얽었다. "그저 요청 한 마디면 될 것을, 그 부탁 한 말씀 하시는 대신에 칼 한 자루 들고 달려들어 규리하를 박살내셨다는 건가요? 그러고는 폐 하께서 혹 즐거운 마음에 대사면령을 내려주시진 않을까 기대하세요? 엘시. 저는 가끔 당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시다는 거죠? 당신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한다고 믿지 않 으신다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부냐가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기절하는 줄 알고 깜짝 놀 란 엘시는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부냐는 엘시의 다리를 붙잡으며 그 를 올려다보았다. "엘시! 제발……." 엘시는 무릎을 꿇고 부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고개를 떨군 엘시에게 부냐는 눈을 맞추려 애 쓰며 말했다. "아시잖아요? 전 소란스러운 곳을 싫어했어요. 애초에 가고 싶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대장군이시기에 저는 위문단에도 참가했고 그 사람의 편지도 받아준 거에요. 당신 부하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이 곧 당신을 돕는 일이 될 거라고 믿었어요. 그 사람이 간자라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제발…… 엘시. 한 번만, 제발 폐하께 한 말씀만 해주세요. 당신은 황제의 대장군이에요. 한 번 쯤은 폐하께 부탁할 수 있으세요!" 엘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부냐는 엘시의 몸을 흔들려 했지 만 흔들리는 것은 그녀의 팔 뿐이었다. 부냐는 울먹이며 외쳤다. "제발 제 마루나래가 되어주세요!" 엘시는 연서에 인용되곤 하는 이 낡은 관용구가 이토록 무섭게 들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 리가 났다. 부냐는 소스라치며 엘시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선 두이만 길토는 서로를 붙잡고 있는 남녀를 닭 두 마 리나 되는 양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면회가 끝났다고 말했다. 부냐는 절망적인 동작으로 엘시를 꽉 움켜쥐었다. 엘시가 황급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안되겠나?" "미안합니다만 일이 많습니다. 각하. 그리고 이 방에서도 일을 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여긴 면회실이 아니라 염습실입니다." 그리고 두이만은 더 이상 기다리지도 않고 부냐의 팔을 붙잡으려 했 다. 엘시는 손을 내뻗어 두이만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정신이 나 간 듯이 보이는 부냐를 부축하여 일어나게 했다. 부냐를 일으켜 세운 엘시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당신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하겠습니다." 부냐는 희열에 찬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녀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 의혹을 말로 풀어내기 전 다가온 두이만이 부냐에게 문을 가리켰다. 부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끌려 걸 어가는 것처럼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부냐는 갑자기 몸을 돌렸 다. 그리고 엘시에게 몸을 던졌다. 엘시는 부냐를 꼭 끌어안았다. 부냐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엘시를 끌어안은 채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울음을 참는 소리가 분명했다. 조금 후 부냐는 애써 엘시의 품 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걸어갔다. 부냐와 두이만을 따라 엘시는 밖으로 나왔다. 두이만은 따라가려는 백작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엘시는 복도 벽에 기대어 섰다. 부냐와 두이만이 떠나고 난 뒤로 한참 동안 엘시는 그렇게 서서 멍하 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복도 저편에서 울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엘시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엘시는 자신이 지상 수천 미터 상공에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바닥은 느껴 지지 않았다. 엘시는 두 손으로 벽을 짚으며 가까스로 주저앉으려는 몸을 지탱했 다. 그는 슬픔이나 분노가 아닌 어지러움만을 느꼈다. 아직까지도 현 실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헨로 가의 영애 부냐가 죄수 부냐로 불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맵시 있는 옷을 지어내던 그 손길 이 시체를 닦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자신의 반려가 되리라 믿었던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것조차 믿을 수 없었다. 엘시는 벽에 기대선 채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으로 머리를 짓눌 렀다. 부냐를 데려갔던 염사장 두이만 길토가 돌아왔다. 두이만은 복도 바 닥에 병자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황제의 대장군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나가시죠. 각하." 엘시는 두이만을 쳐다보지 않았다. 두이만이 약간 성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이러고 계시면 우리가 일을 못합니다. 각하." 엘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벽을 밀며 똑바로 선 엘시는 두이만을 쳐 다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 했다. "혹 염사들이 여자 보조인들을 상대로 바르지 못한 일을 하는 경우 가 있나?" 두이만은 멀뚱히 백작의 등을 바라보다가 침을 뱉듯 말했다. "각하. 그런 놈이 있다면 제 손으로 직접 염했을 겁니다." "알겠다." 하지만 두이만은, 그로선 드문 일이었지만 길게 말했다. "각하. 저는 이 하늘누리를 좋아합니다. 하늘누리는 근사합니다만 손이 많이 필요하죠. 그래서 죄수들도 이렇게 일하는 겁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래서 저는 제 관할에 있는 죄수들도 함께 하늘누리를 위 해 일하는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간수도 법의 대리인도 아니니까요. 죄수를 곯려줄 의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옳은 말이군. 염사장. 불쾌한 질문을 한 것을 사과하겠다." "됐습니다. 매일 송장 대하는 놈이니 산 사람들이 하는 말은 불쾌한 건지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왼쪽으로 가십시오." 엘시는 안도감을 느꼈다. 뒤에서 따라오는 퉁명스러운 염사장 두이 만이 속으로는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에서 부냐가 원래 받았던 대접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 부당한 대접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엘시는 그런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근시안적인가에 생각이 미쳤다. 그는 부냐가 이미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부냐의 언 손을 떠올린 엘시는 뒤따라오는 염사장에게 염 사 보조인들의 냉동실 근무가 과한 것이 아닌가 물으려 했다. 하지만 백작의 입에선 엉뚱한 말이 나왔다. "제국을 지키면서 자기 여자 한 명을 지키지 못하는 남자를 뭐라 부 르겠나?" 말을 끝냈을 때 엘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황제의 대장군에게 어울 리지 않는 넋두리로 이보다 더 적절한 말도 없을 것이다. 말을 주워 담는 것이 더 창피한 일이 될 것이기에 엘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 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생각하며 엘시는 등뒤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조금 후 투덜거리는 듯한 두이만의 말 이 들려왔다. "제게 질문하신 거라면 대답하지요. 그건 병신입니다." 엘시는 입을 다물려던 결심을 잊었다. "어째서 그렇지?" "제국은 다른 사람들이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제국 도 아니죠. 하지만 그 여자는 남자가 아니면 아무도 지킬 수 없겠지 요." 엘시는 실망했다. "그 남자의 제국이 그 여자를 싫어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 "제국이 여자를 싫어한다고요?" "그래." 두이만은 대답이 없었다. 엘시는 어느새 입구가 다가온 것을 보았 다. 그가 부질없고 창피스럽기까지 한 대화를 잊으려 했을 때였다. 두이만이 말했다. "제국이 여자를 좋아하게 해야겠군요." 아실은 투덜거리며 이끼 뭉치를 움켜쥐었다. 그것으로 즈라더의 도 끼를 닦으면서도 투덜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지멘이 그녀에게 요청한 일은 아니다. 아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 듯 지멘은 아실에게 아무 것도 요청할 수 없다. 지멘은 단지 즈라더 의 도끼를 내려놓고는 "이 피와 흙먼지를 닦아야겠군."이라고 혼잣말 을 중얼거렸을 뿐이다. 아실이 견디지 못하고 물가로 걸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아실이 한쪽 면을 다 닦은 후 도끼를 뒤집을 때도 지멘은 혼잣말을 했다. "반대쪽도 닦아야겠군." 아실은 이것이 그녀가 그에게 저지른 일의 복수라고 생각하지는 않 았다. 지멘은 그런 졸렬한 복수를 시행하기엔 지나치게 자부심 강한 사람이었다. 결국 지멘은 물을 견딜 수 없었던 것뿐이다. 즈라더의 도끼에 엉겨붙은 피딱지는 물을 대지 않고서는 닦아낼 수 없을 만큼 굳어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닿지 않아 다른 자에게 조력을 구해야 하 는 이 상황에 대해 더 불만스러워 하는 건 지멘일 거라는 것을 알기 에, 아실은 화를 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투덜거릴 권리는 포기하 지 않았다. 즈라더의 도끼는 너무 컸다. 그녀가 그 도낏날 위를 기어 다니며 닦아야 할 만큼. 나무 꼬챙이와 젖은 이끼 뭉치를 이용하여 마지막 피딱지를 긁어낸 다음 아실은 녹초가 되었다. "다 닦았어요." "나는 이 일을 해준 누군가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즈라더 또한 그 자에게 고마워할 거다." "천만에요. 맡길 거 또 없어요? 이제 슬슬 재미가 붙는 참이거든." 지멘은 별 대답 없이, 그리고 아실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즈라 더의 도끼를 집어들었다. 아실은 이끼 뭉치와 나무 꼬챙이들을 집어 던지고는 허리를 뒤로 젖혔다. 허리에서 들려오는 우두둑 하는 소리 에 기겁하며 아실은 다시 말했다. "즈라더는 어떻게 이 빌어먹을 물건을 닦은 거지요? 납병하기 전엔 다른 사람이 만질 수도 없으니까 저 같은 사람이 대신 닦아준 것도 아닐 텐데."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고 아실은 그 질문을 다시 반복했다. 지멘은 또다시 무시했고, 곧 그 사실을 후회했다. 아실이 세 번째로 같은 질 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지멘 자신이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도끼에 밧 줄을 묶어 자신의 가슴 앞에 걸며 지멘은 맥없이 말했다. "도끼는 인병(刃兵)에 속하니 즈라더는 아마도 기름을 사용했겠군. 나에겐 그런 기름이 없지만." "아하! 그러니까 당신이 망치를 쓰기 때문에 제가 이 개고생을 한 거군요. 알았어요. 그런데 즈라더의 곁에 무기가 없는 거 보면 제국 병들은 우리가 마지막 대장간으로 가는 것을 짐작하지 않을까요?" 지멘은 자신에 대해 실망했다. 그 자신이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 기 때문이다. 그런 속마음을 뻔히 아는 아실은 빙그레 웃으며 지멘의 허벅지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조심하자고요. 지멘. 규리하에서 전쟁 중이니 엘시가 올 리는 없지 만 그래도 그 작자에게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려지는 건 기 분 나빠요." 지멘은 앞서 걸어가는 소녀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 이 아실의 머리 뒤를 가로지른 안대의 끈에 이르렀을 때 지멘은 수염 볏을 조금 흔들었다. 레콘 지멘에겐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두 가지 사명이 있었다. 성숙한 모든 레콘들처럼 지멘 또한 평생을 던져 추구할 하나의 숙원 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의 제거. 설령 용이라 하더라도 어떤 레콘이 자신을 대상으로 그런 종류의 숙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면 마음 편하게 살긴 힘들 것이다.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 또한 지멘의 숙원을 알게 된 이후로 인생의 즐거움이 반 이상 사라져 버린 기분을 맛봐야 했다. 황제 자신은 지멘의 숙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바가 없었다. 지멘 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하늘누리를 침입한 이후에도 황제는 그 사실 에 대해 특별히 논평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즈라더와 그의 도끼를 보냈다. 그것은 황제가 지멘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명확 한 증거였다. 그리고 지멘은 그 사실에 고무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지멘은 어쨌든 황제를 죽일 것이고 그 사실에 대해 황제가 어떻게 생 각하든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지멘은 황제가 아니라 앞에서 걸어가는 조그마한 소녀에 대 해 생각했다. 지멘의 두 번째 사명은 애꾸눈 소녀 아실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명은 지멘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멘은 주저없이 아실을 만나게 된 날 이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레콘의 가공할 힘으로도 시간의 화살 을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젠가 아실은 마음대로 걸어왔던 말 대신 다른 것을 그에게 줄 것이고, 그것을 받으면 지멘은 가차없 이 사명을 달성할 것이다. 지멘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무익한 후회에 자신을 내맡기는 대신, 지멘은 앞으로 성큼 걸어가 두 손가락으로 아실의 옷 뒤를 붙잡아 달랑 들어올렸다. 아실은 놀라지 않았고 무례에 직면한 숙녀의 포효를 내지르지도 않 았다. 그녀에게 말을 할 수 없기에 행동에 곧장 돌입하는 지멘에게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손가락에 붙잡혀 허공에서 대롱거리면서 도 아실은 태평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는 듯이 지멘을 바라보았다. 그 녀를 자신의 배낭 속에 집어넣기 전 지멘은 뭐라도 말해야겠다고 생 각했다. 물론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지멘은 허공을 향해 혼잣말처 럼 말했다. "아무래도 황제의 병졸들이 앞길을 가로막기 전에 많은 거리를 달려 야될 것 같군." 아실은 빙그레 웃으며 지멘의 배낭에 다리를 파묻었다. 배낭 속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피해 용케 하반신을 고정시킨 아실은 두 손으로 배낭끈을 꼭 붙들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가슴쪽으로 잔뜩 끌어당긴 다음 아실은 말했다. "됐어요. 가요!" 지멘은 부리를 한 번 탁 부딪친 다음 달리기 시작했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지만 아실은 몸이 뒤로 휙 젖혀지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위험한 일이다. 지멘의 볏은 물론 말랑말랑하지만 그 표 면은 거칠다. 지멘이 빠르게 달리면 그 볏은 거세게 나풀거린다. 아 실의 입장에서는 머리 바로 위에서 부드러운 칼이 춤추는 것과 다름 없다. 아실은 턱을 더욱 강하게 끌어당겨 정수리로 지멘의 뒤통수를 찍어누르듯이 했다. 얼마 쯤 달리자 아실은 지루해졌다. 아실은 지멘의 깃털 속에 얼굴 을 묻은 채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아이저 규리하가 박살난다면 규리하 땅은 누가 가지게 될까요? 규 리하의 깡패들이 가지고 놀려고 덤빌 테니까 얼간이를 보낼 수는 없 을 거예요. 하지만 대가리 지나치게 잘 굴리는 친구도 안되겠지요. 규리하를 가지게 되면 엄청나게 힘이 세질 테니까. 조건이 까다롭군 요. 얼간이가 아니면서 대가리 굴릴 줄 모르는 영주. 퍼스? 안돼요. 얼간이에요. 락토? 황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년은 바보가 아니죠. 데라시? 그 개자식이 잘나긴 했지만 통치 전문은 아니에요. 가장 괜찮은 선택은 역시 엘시 에더리인데, 글쎄요. 만병장이 규리하까지 가진다면 지나치게 위험해요. 아마 그 러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그 년이 머리가 돌아서 엘시에게 규리하 를 주면 좋겠군요. 그럼 최소한 엘시가 우리에게 올 가능성은 없어질 테니까." 지멘은 아실이 쏟아내는 정보들에 놀라지 않았다. 아실 또한 지멘처 럼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제국 정세에 대한 그녀의 지식들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에 의해 획득된 것이다. 때론 지멘 자 신이 그런 정보 습득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정보 제공자와 대화 중 인 아실의 등뒤에서 조용히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그런 응시는 정보 제공자를 협조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충분했다…… 하지만 지멘 자신 은 그런 정보들에 관심이 없었다. 아실 또한 지멘이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런 중얼거림은 스스로 상황을 정리해두려는 목 적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곧 멈춰야 했다. 지멘이 30 미터 쯤 되는 절벽을 그냥 뛰 어내렸기 때문이다. 잠시 숨이 막혔던 아실은 조금 후에야 호흡을 회 복했다. 그리고 아실은 다른 말을 꺼내었다. "저 죽일 땐 그 망치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외견상 지멘에게선 아무런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실이 볼 수 없는 그의 눈에서만 잠시 모호한 빛이 일렁거렸을 뿐이다. 튀어오르 는 돌멩이와 아우성치며 찢기는 풀잎들이 그를 대변하는 듯했다. "즈라더는 레콘인데도 머리가 거의 깨져버렸지요. 제기랄. 저는 그 걸로 맞으면 으스러질 거예요." 지멘은 두 손으로 망치를 움켜쥐고는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달리는 기세 그대로 집어던졌다. 벼락처럼 날아간 망치는 그의 앞쪽 에 있던 거목을 일격에 부러뜨렸다. 망치가 땅에 떨어지기 전 그것을 나꿔챈 지멘은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쓰러진 나무 위를 뛰어 넘었다. 그런 식으로 지멘은 시냇물 위를 통과했다. 시냇물은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넓이였지만 지멘은 발 아래에 뭔가 딱딱한 것을 만 들어두지 않는 이상은 물 위에서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다. 밟지 않 을 나무라도 쓰러뜨려야 했다. 길을 만들면서 달리는 형국이었고, 아실에겐 놀랄 가치도 없는 일상 사였다. 좀 냉정했다면 지멘이 평소보다 과격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 었겠지만 아실은 자신의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죽으면 알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저분하게 죽는 건 싫어요. 목 을 졸라줘요. 당신이 엄지와 검지로 내 목 잡고 힘만 좀 주면 될 거 예요. 그렇게 죽여주세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부탁이에요." 아실은 지멘의 깃털 속 깊이 머리를 파묻었다. "그리고 저 죽인 후에도 안대는 벗기지 마세요." 다섯 시간 후, 출발한 지점에서 300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무시무시한 질주는 끝났다. 나나본 남쪽의 이름 없는 분지에 멈춰선 지멘은 광활한 대지 위에서 모아들인 온갖 먼지를 털어 낸 후 천천히 부리를 열었다. "그러지." 지멘의 예상대로 잠들어 있던 아실은 듣지 못했다. 대신 다른 사람 이 말했다. "무슨 말입니까?" 지멘은 대답하지 않은 채 말을 걸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오랜 시간 그곳에 앉아있던 몇 명의 인간들이 지멘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험한 꼴에 익숙한 자라도 동정심에 마음이 흔 들릴 모습들이었다. 그들이 걸치고 있는 더러운 옷엔 핏물과 먼지가 기괴한 무늬를 그리고 있었고 옷 아래에 완전한 사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찾기 어려웠다. 어두운 숲 가장자리에서 그들은 모닥불을 피 워 고기를 굽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한 장작을 모을 수 없었던 듯 불 은 작았고 부족한 화력 때문에 고기는 구워지기보다는 그을려지고 있 었다. 한 인간이 그걸 입에 넣고 두 손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날고 기를 씹는 것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지멘에게 말을 건 것은 찢어진 망토로 몸을 감싼 채 무리에서 약간 떨어져 앉아있던 남자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에는 움푹 패인 볼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고 있었고 원래 훌륭한 것이었던 수염은 손 질되지 않아 제멋대로였다. 남자는 왼손으로 망토 자락을 움켜쥔 채 서서히 일어났다. 똑바로 선 남자는 잠시 몸을 떨었다. 모닥불 주위 의 다른 인간들은 긴장하려 애쓰는 듯했지만 그보다는 피로감에 굴복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남자를 마주보던 지멘은 불에 얹혀져 그을려지는 고기를 가리켰다. "그건 뭔가?" 남자가 고개를 한참 들어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메말라 갈라진 입술 이 부스럭거리는 나뭇잎처럼 움직여 말을 빚었다. "내 말입니다." 고기를 굽던 인간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수염 을 쓸어내리려다가 포기하곤 말했다. "저녁 드셨습니까?" "아니." "함께 듭시다." 지멘은 부리를 닫은 채 도끼와 망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배낭을 조심스럽게 벗어 내려놓은 다음 그 속에서 아실을 꺼내었다. 아실은 실눈을 뜬 채 몇 번 웅얼거렸지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다시 지 멘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바닥에 앉은 채 한 팔로 아실을 안아든 지 멘은 다른 손을 뻗어 고깃덩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부 리는 덜익은 고기를 단숨에 뜯어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가 천천히 앉았고 다른 자들 또한 다시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진행된 식사는 해가 저물고 별이 떠오를 때 끝났다. 인 간들은 모닥불의 불빛을 낮추고 오래 탈 수 있도록 조처한 다음 적당 히 쓰러져 잠들었다. 그들이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잠들고도 한참 후 에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패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던 지멘은 천천히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 다. 남자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는 나를 짓밟고 내 선조들이 가꾸어 물려준 땅을 빼앗았습니 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고집 부렸기 때문이지요."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기 힘들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가 울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다음 남자가 다시 말했다. "내 땅, 내 성, 내 옷과 내 소지품들. 언제나 그런 것들을 은근히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째째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그런 것보 다 내 백성들에게 더 신경쓰는 지배자로 보여지길 원했기 때문에. 그 런데 나는 지금 빌어먹을 내 그릇이 지독하게 그립습니다." "그릇?" "그래요. 그릇. 내 식기 말입니다. 발란카 도자기지요. 다른 무엇보 다도 그것이 그립군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소인배인 겁니 까?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속여왔지만, 사실은 사소한 위락물들을 숭 배하며 살아온 얕은 작자인 걸까요?" 지멘은 남자를 꾸짖지 않았다. 지멘이 아는 남자는 절대로 그런 약 한 말을 입밖에 꺼낼 사람이 아니다. 상대방이 지멘이었기에 남자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좀 더 위로에 능숙했으면 좋겠 다고 생각하며 지멘은 부리를 열었다. "이제 어찌할 텐가. 아이저." 전(前) 규리하 변경백 아이저 규리하는 괴로운 표정으로 지멘을 올 려다보았다. 지멘은 냉랭하게 말했다. "황제는 불시의 공격으로 규리하가 서약지지파의 구심점이 되는 것 을 막았고 동시에 그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는데 성공했다. 서약 지지파들은 급속히 움츠러들겠지. 상금에 눈이 먼 누군가의 칼에 목 을 내어주는 것이 네 계획은 아니겠지." 아이저는 그것이 지멘의 고찰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아 이저는 지멘의 품 안에서 잠든 아실을 바라보았다. 지멘의 풍성한 깃 털 속에 파묻힌 채 아실은 가볍게 코를 골고 있었다. 아이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모닥불 주위에 쓰러져 잠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모두 규리하의 용장들이었으며 아이저의 충실한 가신들이었다. 누구 보다도 빛나던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지치고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웅 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아이저는 미어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곳 에는 다 타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가슴 외에 다른 것도 만져졌 다. 그것이 아이저를 진정시켰다. 자신의 품 속에 넣어둔 물건을 조 심스럽게 쓸어만지며 아이저는 질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멘은 아실이 중얼거렸던 말 중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을 꺼냈다. "즈믄누리로 가라. 바우 성주는 너를 보호해줄 거다. 그리고 황제 또한 네가 즈믄누리에 있다면 눈 감아줄 거다." "그럴 테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즈믄누리로 가진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이냐?" "황제는 내게서 모든 것을 가져갔지만 나도 황제에게 얻은 것이 있 습니다. 황제는 아무도 그녀가 규리하를 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할 때 규리하를 쳤습니다. 배울 만한 일처리 방식입니다. 나도 그녀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렇다면?" "서약지지파 중에는 안전을 위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 들도 있습니다. 당분간은 그들 가운데 스며들어야겠지요. 당신의 경 고대로 목을 조심하면서." "알았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지멘은 장작을 부러뜨려 모닥불 속에 꽂아넣었다. 불티가 분수처럼 피어올랐다.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가렸던 아이저는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패배자의 제안이니 매력이 있을 리 없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신과 나의 뜻은 같습니다. 지멘. 당신의 망치를 모욕할 생각은 추 호도 없지만, 그 망치로 황제의 머리를 부수려면 일단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멘은 얼마 전 상당히 가까이 갔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실 패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의 숙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옛날 티나한은 혼자 하늘치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러는 대신 하늘치 발굴대를 조직했지요. 당신도 동료들을 찾아야 합 니다. 혼자 황제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동료가 되어주겠다는 거냐?"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너와 함께 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지멘은 배낭 옆에 놓인 도끼를 가리켜보였다. 물론 아이저는 그 도 끼를 알고 있었다. "즈라더의 도끼군요. 그렇잖아도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즈라더가 당 신을 찾아갔던 모양이군요. 당신이 살아있다면 즈라더가 죽은 것일 텐데, 왜 그의 도끼를 가져온 겁니까?" "죽기 전 즈라더는 납병례를 했다. 나는 그의 도끼를 최후의 대장간 에 가져가야 한다." "그렇군요. 그곳은……" "그래. 넌 갈 수 없어. 최후의 대장간을 방문 중인 녀석들 중 하나 가 무기 뿐만 아니라 숙원을 이룰 밑천까지 구하게 되었다고 좋아하 면서 네 목을 가져가려 할지도 모르니까. 나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 을 품는 녀석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너까지 지켜줄 순 없다." "꼭 가야 합니까? 아니, 아닙니다. 당신은 반드시 가겠지요." 아이저는 확신했고 그래서 지멘은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 다. 아이저는 쓰러져 잠든 부하들을 죽 둘러보았다. 용기를 얻기 위 한 행동이었지만 소득은 별로 없었다. 그들의 처참한 모습에서는 동 정심을 느끼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행히도 아이저는 동정심 외에 책 임감도 느꼈다. 그들을 데리고 최후의 대장간으로 갈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길 바랍니다." "너도." 아이저는 흙을 집어들어 모닥불 위에 뿌렸다. 마치 꺼지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무성의하게 그 동작을 반복하며 아이저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를 도와주기 위해 지멘이 땅에 손을 뻗었을 때 아이저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다시 당신을 찾겠습니다. 내가 직접 당신을 찾아갈 가능성은 없겠 지만 어떤 형태로든 연락을 보낼 겁니다. 식기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그 사람의 말에 귀기 울여 주십시오." 어두워지는 불빛 속에서 지멘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분지의 품 안을 비추던 모닥불이 몇 번 하품하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 속에서 불씨는 대화재를 꿈꾸었다. =============================================================== 챕터 끝났습니다. 흡혈 안드로이드와 폭주 갈매기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눈의 여왕을 위해 얼지 않는 라면을 만들어야 하는 철이의 모 험이 펼쳐지는 다음 회에 등장합니다.(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당신에게 동료 의식으로 충만한 악수를.)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 돌과 바람 - 1 "독신자 친목회." - 전쟁의 본질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라수 규리하의 대답. 이레 달비는 격분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물의 지배자인 황제는 도깨비들이 연초를 피는 일에 대해 아무런 제지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식물을 태워 쾌감을 얻 는 일이며 예의 바른 도깨비라면 나가 앞에서 그런 일을 삼가는 법이 다. 그리고 즈믄누리의 무사장 탈해 머리돌은, 다른 이들이 흔히 그 렇듯 특정 악우들에겐 예의를 베풀지도 얻지도 못하고 있지만, 대체 적으로는 예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도깨비였다. 하지만 그가 뻐끔 이라는 이름을 붙인 곰방대를 빨다가 이레에게 목격된 직후 탈해는 뻐끔이를 황급히 치우지도, 자결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뻐끔이를 입으로 가 져갔다. 이레 달비는 자신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는 시모그라쥬에서 태어난 인간이 나가들처럼 연초를 태우는 도깨비에게 불쾌감을 느껴야 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가들조차도 불쾌감 이상의 감정은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연초는 불법이 아니니까. 하지만 탈해가 왜 거기 서있느냐는 표정으로 멀뚱히 바라보자 이레는 더 자제하지 못했 다. 가져온 술동이를 툇마루에 내려놓은 이레는 술잔과 안줏거리들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어찌 그리 평안하십니까, 무사장님?" "무슨 말이지요, 이레? 연초를 피는 것이 괴롭다면 왜 피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거짓말 하나가 늘어 났다. "지금 가주님께서 겪고 계신 고충을 아신다면 위로의 말씀이라 도 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리 유유자적하십니까?" 탈해는 이레가 예상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멍한 얼굴로 말 했다. "고충이라니요? 각하가 무슨 고충을 겪는다는 말입니까?" "그럼 부냐 아가씨의 일에 대해 가주님이 즐거워 하셔야 된다는 말 씀입니까?" 연초 한 대를 다 피운 탈해는 뻐끔이의 누름쇠를 누르려다가 이레의 살벌한 시선을 받고는 그것을 포기했다. 그는 백작의 유명한 몸종이 연초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 짐작하고는 투덜거렸다. "물론 즐겁지야 않으시겠지만 이젠 다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그 래서 축하할 겸 술 한 잔 하자고 모신 것이고." 이번엔 이레가 멍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해결되다니, 뭐가 해결되었다는 말씀입니까? 부냐 아가씨는 여전히 그곳에 계신데." "예? 엇그제 각하께선 백화각에 가셨잖습니까. 그건 부냐를 데리러 간 것이 아닙니까?" 이레는 뭐가 잘못된 건지 깨달았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부냐가 여전히 백화각에 있으며 백작이 그곳에 간 것은 면회를 위한 것임을 탈해에게 알려주었다. 엘시가 부냐의 석방 허가를 받고 백화각으로 달려간 거라 넘겨짚었던 탈해는 크게 당황했다. 그 때 탈해의 초청을 받았던 엘시 백작이 탈해가 앉아있던 뒤뜰 툇 마루 쪽으로 걸어왔다. 이레는 백작에게 목례한 다음 탈해를 한 번 째려보고 물러났다. 엘시는 그 태도에 조금 놀랐지만 아마도 뻐끔이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탈해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각하." "어젯밤 꿈은 기억이 안 나는군. 많이 늦진 않았겠지?" 탈해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술 동이를 바라보았다. 그 동작을 오 해한 엘시는 부드럽게 웃었다. "몽화각의 술 만큼 좋지는 않을 거야. 칼리도의 집엔 괜찮은 술이 있지만 여기엔 그런 것이 없어. 이레가 쿠스의 술도가에 가서 급히 한 동이 사 온 거야. 하지만 쿠스의 술도가와 몽화각은 같은 누룩을 쓴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 그렇게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지 않 아도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엘시는 소매를 걷어쥐고는 술잔을 동이에 담갔다. 크 게 술 한 잔을 푼 백작은 그것을 탈해 앞에 내려놓고는 자신의 잔을 집어들었다. 그 때 탈해가 말했다. "각하. 부냐 헨로가 왜 아직도 백화각에 있는 겁니까?" 엘시의 손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엘시는 곧 자신의 술잔을 채워 입 가로 가져갔다. 술 한 모금을 비운 엘시는 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 았다. "내 생각엔 몽화각의 술에 비해보아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것 같 아." "저는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냐가 왜 풀려나지 않은 겁니 까? 폐하께서는 어떻게 대승을 거둔 대장군의 연인을 풀어주지 않는 겁니까? 너무하잖습니까." "비록 술자리의 허물은 탓하지 않는다지만 말을 조심해. 탈해." 탈해는 뚱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올리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은 탈해는 팔짱을 꼈다. "이건 대장군의 품위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도저히 만병장에 대한 예우가 아닙니다. 하물며 그런 대승을 거두었는데…… 부냐는 겨우 편지 한 장을 전했을 뿐입니다." "간자의 서신이었어." "부냐는 몰랐습니다." "몰랐다 해도 검열 받지 않은 서신을 반출시킨 죄는 남아. 바로 그 런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기 위해 검열이 있는 거야. 자네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 아닌가." "저도 그 서신의 내용은 알고 있습니다. 규리하로 진군 중인 토벌군 의 규모에 대한 것이었지요. 대단한 정보인 것 같지만, 사실 별 것 아닙니다. 토벌군의 규모가 규리하에 알려진다 해서 전황이 바뀔 것 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누구든 짐작할 수 있는 거니까요. 게다가 그 서신은 규리하에 도달하지도 못했잖습니까. 그런데 왜 폐하께선 각하의 계청을 거부하신 건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계청이라니? 난 그러지 않았어." 탈해는 넘겨짚길 좋아하는 자신의 버릇에 대한 무수한 지적이나 질 책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다만 어처구니 없어했다. "계청하지 않으셨다고요? 왜죠?" "바르지 못한 일이니까. 부냐의 죄는 명명백백해." "죄라니오!"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술잔만 비우는 백작을 보며 탈해는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부냐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잔을 내려놓은 엘시는 약간 풀죽은 어투로 부냐에게 들려주었던 말 을 반복했다. "어쩌면 폐하께서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대사면을 명하실지도 모르 지." "그건 불확실하잖습니까. 좀 더 적극적인 일을 해 볼 생각은 없으십 니까? 그렇게 폐하께 계청 드리기 싫으시다면 제가 대신하면 어떻겠 습니까?" 엘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탈해는 그만 가슴을 쾅쾅 두드리고 싶 어졌다. "좋습니다. 제가 하지요. 정우의 일엔 아직 손 쓸 수 없으니 부냐부 터 나서야겠군요. 세상에, 저는 각하께서 당연히 손을 쓰셨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지 말아. 탈해." "예? 왜 하지 말라시는 겁니까?" "하지 마." 탈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못마땅한 심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 로 엘시를 바라보던 탈해는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부냐 헨로를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엘시의 호흡이 일순 멎었다. 그의 눈꺼풀도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 다. 그렇게 엘시는 미동도 없이 조각처럼 앉아있었다. 바라보던 탈해 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걱정하여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엘시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엘시는 눈을 감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랬다면 이토록 괴롭진 않겠지." "죄송합니다. 각하." "아니, 탈해. 자네 사과는 받지 않겠어. 그 사과는 내 제국이 부냐 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듣도록 하지. 그 때까지는 나를 병신이라 부 르든 가식 덩어리라 부르든 부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든 반대하지 않겠어." 탈해는 '내 제국이 부냐를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 었다. 그 말에 대해 질문하려 했을 때 엘시는 갑자기 잔을 비우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루 위 시렁에 얹힌 목검을 보지도 않고 집어든 엘 시는 마당으로 내려갔다. "탈해. 내 주사로 자네 눈을 좀 어지럽혀도 되겠나?" 탈해가 무사였다면 반가워했을 것이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이지만 무 사는 아닌 탈해는 아쉬워하며 말했다. "각하. 아시겠지만 저는 검에 대한 식견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나가 앞에 명창일 것 같군요." "다행이군. 덜 부끄러울 테니." 엘시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서서히 끌어당겼다. 탈해가 자신에게 갑 자기 검술에 대한 조예가 생겨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바라보는 가 운데 엘시는 몸을 던졌다. 탈해가 보기에도 그것은 기묘한 시작이었 다. 검이 아닌 몸으로 상대를 베는 것 같은 동작을 보며 탈해는 고개 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그보다 더 기이한 움직임들이 뒤를 이었다. 그 후 반 시간 동안 탈해는 백작의 취검을 감상했다. 나비가 미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그 작디 작은 머리 에 미칠 정도로 고급한 지성이 있다고는 여기기 어렵다. 그러나 만약 나비가 미친다면 그 날갯짓은 백작의 취검을 닮았을 것이다. 완전히 쓸모없어 보이는 동작이지만 6년 전 군단 하나의 명령 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무명 교위가 휘두른 취검은 군단 셋의 와해를 막았 다. 엘시는 진중에서 취해있었던 일을 씻을 수 없는 불명예로 생각하 며 당대에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그 이야기가 거론될 때마다 안색을 바꾸지만, 탈해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군단장이 강권하는 술을 엘시가 거절하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직접 목격한 것은 아 니지만 탈해는 그 장면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스카리 빌파와 엘시 에더리를 모두 알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로 스카리 빌파와 엘 시 에더리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고 스카리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가지리라 공언했던 대장군의 자리마저 엘시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탈 해는, 스카리와 암살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것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념에 잠겨 있던 탈해는 백작의 취검이 멈춘 것을 조금 늦게 깨달 았다. 엘시는 두 손으로 목검을 짚은 채 꼿꼿이 서서 광대한 하늘을 바라 보고 있었다. 옷은 땀으로 젖어 있고 얼굴은 취기와 열 때문에 약간 상기되어 있었지만 백작의 서 있는 모습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구 름들이 훨씬 낮게 떠있는 하늘누리의 하늘은 지독하게 푸르렀다. 탈 해는 이유를 모를 허탈감을 느꼈다. 이레 달비가 손에 수건을 든 채 나타났다. 엘시 곁에 선 이레는 수 건을 내밀면서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가주님." 엘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레를 돌아보다가 조금 후 수건을 집어들었다. "나는 가주가 아니야. 이레. 누가 온 거지?" "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호칭을 시정한 이레는 곧 찾아온 손에 대해 말했다. 엘시는 탈해에 게 양해를 구하고 말했다. "이곳으로 모셔와." 이레는 곧 앞마당쪽으로 갔다. 잠시 후 남자가 뒷뜰 쪽으로 걸어왔 다. 남자의 덩치가 얼마나 좋은지 탈해는 잠깐 동안 동족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었고, 이십이금군 의 일원인 구레였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전승을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구레." "안녕하세요, 구레?" 탈해는 반갑게 손을 들어보였고 구레는 거기에 대해 목례했다. 그리 고 구레는 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서신 봉투 하나를 꺼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서신입니다." 봉투를 받아든 엘시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자네가 비스그라쥬백의 편지를 가져온 거지?" "예? 나가인 백작님은 이런 날씨엔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알고 있어. 나는 왜 자네냐고 물은 건데." 구레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시를 마주보았다. 엘시는 부드 럽게 말했다. "구레. 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애먹은 적은 별로 없지만 앞 으로는 좀 더 주의해야겠군. 나는 왜 폐하께 봉사해야 하는 금군이 비스그라쥬백의 편지 심부름을 하는 건지 물었던 것이야." 구레의 얼굴에 당혹한 표정이 떠올랐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음. 폐하께서는 백작의 말 씀, 아니, 니름입니까? 어쨌든 그걸 잘 들으시니까…… 폐하의 뜻에 맞는 일이라 생각하기에…… 폐하께서도 그걸 원하시는 것 같고……" 엘시는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구레를 똑바로 바 라보았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군. 자네와 자네 동료들은 폐하의 안위에 대해서만 신경 쓰면 돼. 백작의 편지 심부름 같은 걸 하기 위 해 자네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일이야." 구레는 이제 완전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 덩치 큰 인간이 당혹하 는 모습은 탈해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엘시 또한 더 이상 금군 의 처신에 대한 구레의 생각을 추궁할 생각은 없는 듯 가볍게 말했 다. "백작은 답을 받아오라고 했나?" "아닙니다." "알겠어. 수고했네." 구레는 황망히 고개를 숙인 다음 탈해에게도 인사하고서 물러났다. 탈해는 따뜻하게 그를 전송한 다음 엘시를 쳐다보았다. "음. 그 때 비스그라쥬백을 만나보셨냐는 질문에 왜 지체하셨는지 알겠군요. 각하께선 데라시 백작이 건방지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백작이 건방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조금 전에는 데라시 백작이 폐하의 권위를 함부로 침범하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요." "봉사의 영역을 침범한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자기 주인에게 좋은 음식을 드리기 위해 마부에게 요리를 하라고 요청하는 하인에 대해 생각해봐. 자네는 그 하인이 건방지다고는 생 각하지 않을 거야." 탈해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상상력은 언제나처럼 자신을 가속시켰다. "혹 각하께선 자신의 일이 폐하의 적을 토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 니까? 그래서 폐하의 사법에 관여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 대장군 임명장을 보여줄까?" "아니오. 제국만병장의 권검을 보고 싶군요."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탈해는 타이르듯 말했다. "각하. 각하께선 만병장입니다. 순전히 원칙대로 말한다면, 만약 각 하께서 백화각을 습격해서 부냐 헨로를 구출한다 해도 동원된 인력이 만 명을 넘지 않는다면 그건 위법이 아닙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렇다 면 바꿔 말해서 각하께서는 병사 만 명이 필요한 일 이내의 일이라면 폐하께 무엇을 요청하든 상관없습니다. 절대로 주제넘은 일이 아닙니 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탈해는 더 말하겠다는 듯한 동작을 취했지만 엘시는 도깨비를 완강 하게 외면하며 툇마루에 걸터앉아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자신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한 탈해는 그런 방법을 모색했고 술잔을 집어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탈해는 서신이 그렇게 길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서신은 도깨비지 한 장 뿐이었고 나가들은 글씨를 크게 쓰므로 엘시가 읽고 있는 편지 에 담길 수 있는 내용은 그렇게 많을 수 없었다. 탈해의 예상대로 엘 시는 금방 편지를 다 읽고는 그것을 접어 피봉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뀐 듯 편지를 다시 빼 탈해에게 내밀었다. 탈해는 손을 닦고는 의아해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왜 이걸 제게?" "비셀스, 그러니까 정우 규리하에 대한 이야기야." 탈해는 긴장하며 도깨비지를 펼쳤다. 역시 큼직큼직한 글씨들이 보 기 좋게 적혀 있었다. 엘시가 그것을 이미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탈해 는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었다. "근계. 나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고금에 짝을 찾기 어려운 영용한 지혜와 불굴의 기상으로 압도적이며 완벽한 승리를 거두신 황제의 대 장군 엘시 에더리에게 진심으로 감탄과 경애의 마음을 느끼며……" "건너뛰면 좋겠군."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 그녀를 면담하라는 폐하의 하교에 따라 비셀스 규리하를 만나보려 합니다. 그녀의 신분에 걸맞는 대우가 있 어야 하니 백작께서 그녀를 호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요?" "나가들의 관습이야. 여인이 집밖으로 나올 땐 남자가 호위해야 하 지. 호위자가 없으면 여인의 품위가 깎인다고 생각하지." "그 관습은 저도 좀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정우는 나가가 아닌데요. 그리고 왜 각하지요?" "정우는 나가가 아니지만 데라시 백작은 나가지. 그리고 왜 나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가들이라면 그것은 방문자들 중 몇 명이 나서 야 하는 일인데 지금 규리하성에는 방문자 같은 것은 없군. 그렇다면 최근에 그곳을 방문한 것은 나로군." 탈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방문자가 아니라 점령자 아닙니까?" "내 생각에도 그래." "그런데 왜 각하지요? 그냥 호위라면 병사들이 해도 무방할 텐데." "데라시 백작은 그녀의 신분에 걸맞는 호위자가 나라고 말했지. 그 렇다면 백작이 그녀를 좋게 보는 거라고 추측해도 되겠지. 그걸 알려 주고 싶어서 편지를 보여준 거야." 탈해는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폐하께서도 그럴까요?" "폐하의 의중이야 아직 알 수 없지. 백작이 정우를 만난 후에 그녀 에 대한 인상을 폐하께 보고하지 않겠나?" "아아, 예. 그렇겠군요. 어쨌든 잘된 일입니다. 데라시 백작에게 정 우를 해칠 생각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건 그렇고 이제 자리도 슬슬 작파해야겠군. 나는 다시 내려갈 생각이네." "아, 이런. 전후 처리로 바쁘신데 제가 괜히 불렀군요." "좀 바쁘긴 하지만 보다시피 자네와 담소 나눌 시간도 못내는 것은 아니야. 나는 내려가서 정우에게 준비하라고 말할 생각인데, 혹 정우 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나?" "할말이 아주 많은데요. 죄송합니다만 편지 한 장 쓸 시간이 있겠습 니까?" "그렇게 해." 탈해는 지필묵을 챙기러 달려갔다. 엘시는 탈해가 두고 간 데라시의 편지를 집어 그것을 다시 천천히 읽었다. 엘시의 얼굴에 잠깐 동안 어두운 빛이 스쳤다. 하지만 엘시는 편지를 피봉 속에 집어넣으며 동 시에 어둠도 얼굴 아래로 가라앉혔다. 정우 규리하는 주위를 둘러보며 주눅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규리하성 을 이루고 있는 뼈대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 안에 있는 가구들 중에도 그녀보다 어린 가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정우를 불편하게 했다. 정우는 그런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란 즈믄누리 또 한 지상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건물이었다. 하지만 정 우는 곧 즈믄누리와 규리하의 거성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밤의 다섯 딸인 혼란, 매혹, 감금, 은닉, 꿈의 도움을 받 아 건설된 도깨비의 거성 즈믄누리는 반쯤은 현실적이고 반쯤은 관념 적인 건물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정신 나간 건물이었다. 규리 하성에 왔을 때 정우는 방으로 돌아가려면 나왔던 문으로 다시 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했고 계단을 올라가면 위층이 나타난다는 사 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당황과 충격 속에서 정우는 자신이 식당을 찾지 못해 굶어죽거나 화장실을 찾지 못해 민망한 꼴을 보이고 말 거 라고 굳게 믿었다. 다행히 그녀 또한 정상적인 방향 감각을 가진 보 통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규리하성은 지극히 무 겁게 현실에 밀착하여 있었고 그런 단단한 현실감은 즈믄누리에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규리하의 거성을 이루는 모든 부분들은 지나 쳐온 시간의 얼룩들을 하나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엄 했지만 따스하지는 않았다. 결국 주위의 무거운 풍경에서 안정감을 얻지 못한 정우는 자신의 비 녀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즈믄누리에서 가져온 물건이기에 즈믄누 리의 기분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우는 한 숨을 내쉬고는 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조금 전 그곳에 집어넣었 던 서신이 정우의 손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한 번만 더야." 정우는 몇 번 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다짐을 하며 편지를 펼쳤다. 종이 위로 뛰쳐 오를 것 같은 탈해의 글씨를 보자 채 읽기도 전에 정 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정우는 웃으며 서신을 읽었다. 서신의 내용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격려와 위로의 말들이 재치있는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었고 정우가 생각하기에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조언들이 있었다. 정우는 비스그라쥬백에게 말할 때는 고함을 지르라 는 탈해의 조언에서 과민성 이외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 지만 그것을 비웃지는 않았다. 나가들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탈해가 그렇게 쓸데없는 조언을 하는 것은 정우의 안위 를 몹시 염려하기 때문이다. 서신을 다 읽은 정우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접어 다시 품 속에 집어 넣었다.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들어오라는 소리를 하기 직전에 비녀를 다시 만지고 옷깃을 쓸어내리고 뺨도 두 번 쓰다듬을 수 있었던 자신에 대해 감탄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온 부위 틸러 달비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의 정 우를 볼 수 있었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가실까요?" 정우는 일어섰다. 틸러는 그녀를 밖으로 안내했다. 그 시간, 밖에서는 엘시 백작이 정우를 기다리며 제국군 수교위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시는 수교위의 보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수교위는 잠 깐 동안 대장군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대장군은 자신의 지위를 나타낼 수 있는 장신구는 아무 것도 착용하지 않은 채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허리에는 화려한 검대를 차고 있었고 그곳에는 황 궁에서 빌려온 의전용 사이커가 매달려 있었다. 대장군에게 의전용 검이나 다른 검이 없지는 않았지만 엘시는 나가의 예법을 따르려면 나가의 검을 차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런 옷차림을 본 수교위는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각하. 무례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일을 각하께서 하실 필 요는 없습니다. 데라시 백작의 요구는 부당합니다. 황제의 대장군이 신 각하께서 전쟁 포로의 수행원 노릇을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입니 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우리의 전쟁 포로는 장차 규리하를 다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 고 이미 내가 수락한 일이다. 경거망동이 없도록 하라." 수교위는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하지만 엘시의 다음 말이 이어지자 수교위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요청에 대해서는 불허한다고 전해라. 아직 작전이 종료 되지 않은 만큼 민간인의 출입을 허락할 수는 없다." 수교위는 희희낙락했다. 건방진 데라시 백작의 또다른 요청이 기각 되는 것은 수교위를 즐겁게 했다. 그 때 엘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 갔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수교위는 계단 위에 나타난 정우를 발견했 다. 정우와 눈이 마주친 엘시는 목례했다. 정우 또한 목례한 다음 계단 을 내려갔다. 수교위는 엘시에게 경례한 다음 달려갔다. 엘시 앞에 선 정우는 달려가는 수교위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았다. "좋은 꿈 꾸셨어요, 대장군님? 이번에도 대장군님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많은 부하들을 남겨두고 제게 시간을 내셨나 보군요. 점령군 총 지휘관이시니 바쁘시겠지요." "당신을 호위하는 것 또한 내 일입니다." 정우는 엘시의 옷차림을 관찰하고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황궁에 들어가는 거라서 화려한 옷을 입어야 되는 줄 알았어요. 그 런데 대장군님의 옷을 보니 그러지 않아도 되나 보군요." "아닙니다. 내 역할이 호위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입은 것입니다. 이 칼도 그 때문에 황궁에서 빌려온 것이지요. 그런데 그 복장은 도깨비 의 것입니까?" 정우의 옷차림은 낙낙했다. 그녀보다 큰 사람에게 맞을 것 같은 옷 이었다. 하지만 소매끝과 바지끝, 그리고 겨드랑이와 허리 등은 단단 하고 맵시있게 조여 있었다. 품이 커서 위엄 있으면서도 거추장스럽 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예. 즈믄누리에 있는 제 친구가 도깨비보다 작은 제 몸에 맞도록 변형시켜 만들어준 거죠. 점잖은 자리에서 입으라고 선물해 줬어요. 킴의 옷을 입어야 되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바꾸니 색다르고 보기 좋군요." 정우는 감사의 의미로 목례했다. 엘시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승강기를 이용해서 하늘누리에 올라가면 좋겠지만 승강기는 꽤 느 립니다. 무거운 승강기를 적은 힘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여러 개의 아 륜을 쓰다 보니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 천천히 올라가도 상관없는데요. 물론 비스그라쥬백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격의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이 왜 저격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정우는 질문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정우는 시카트 규리하의 일을 떠올렸다. 얼굴이 굳어 진 정우를 본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엔 아직 아이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네…… 네." "승강기들은 모두 가볍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많이 개방되어 있습니 다. 안전성이 취약한 편이지요. 그래서 하늘누리의 환상계단을 쓰고 싶습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계단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없는데요." "부끄러워할 일은 아닙니다. 하늘누리에 사는 사람들 중에도 그것을 제대로 상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다행히 내가 상상할 수 있지만 그 계단은 내게만 작용합니다. 그래서 내가 상상한 환상계단에 당신을 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소용이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옷은 나와 함께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 해보십시오." 정우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설마 저를 업으실 건가요?" "아닙니다. 내 발등을 밟으십시오." 어리둥절해 하던 정우는 조금 후에야 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이해했음을 알게 된 엘시는 특별한 계단을 상상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하늘누리에서 엘시의 발 앞까지 이어진 경사로 같은 것이 나타났다. 엘시는 장식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경사 로의 모습은 무미건조했다. 엘시가 주의를 기울인 것은 경사로 제일 아래쪽에 돌출된 단이었다. 그것은 엘시가 앉을 수 있는 크기였고 아 래쪽엔 발판도 있었다. 단에 앉은 엘시는 발판 위에 놓인 자신의 발 등을 가리켰다. 엘시의 동작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정우는 약간 불안 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공에 앉아계신 것 같아요." "예. 이 계단이 내게만 작용한다는 것은 내 눈에만 보인다는 뜻이기 도 합니다. 하지만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엘시는 두 손을 내밀었다. 엘시의 앉음새를 관찰한 정우는 실제로 엘시가 편안하게 앉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정우는 주저하지 않고 엘시에게 걸어가 엘시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엘시의 두 발등 위에 자신의 발을 하나씩 얹었다. "발 아프시죠?" "괜찮습니다. 혹 높은 곳을 싫어하면 눈을 감으십시오." "전 도깨비들과 함께 딱정벌레도 타고 다녔어요. 대장군님." "알겠습니다. 빠를 테니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엘시는 자신이 앉은 단이 경사로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상 상했다. 상상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물론 엘시에게만. 하지만 엘 시의 발등 위에 선 정우는 엘시와 같이 상승할 수 있었다. 몸이 뒤로 홱 쏠리는 것을 느낀 정우는 겁먹은 소리를 냈지만 엘시의 손이 그녀 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곧 정우의 목소리가 탄성으로 바뀌었다. 엘시가 상상한 것 중 어느 것도 정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에 정 우의 감각에서 그것은 하늘을 나는 사람의 발등에 서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우는 엘시가 앉아있는 계단을 상상해 보 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자신이 상상한 계단이 엘시의 계단과 교란이 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을 했더 라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정우가 상상한 계단은 정우에게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환상계단에 대한 이해가 아직 충분하지 않은 정우는, 그래서 계단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비행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 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독특하기 짝이 없는 비행이었으니 까. 규리하는 추운 지방이었고 상승은 빨랐다. 바람은 정우의 볼을 세차 게 문질러 빨간 손자국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정우는 별로 괴로워하 지 않았고 심지어 상쾌하다고 여겼다. 그 진귀한 경험에 흠뻑 빠져있 던 정우는 상승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을 때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위쪽을 쳐다보았을 때 정우는 아쉬움을 까맣게 잊었다. 거대한 하늘치가 하늘을 모조리 뒤덮은 채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 었다. 지상에서 볼 때도 거대했지만 이 높은 고도에서 바라본 하늘치의 모 습은 압도적이었다.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광대한 하늘치의 아래 쪽을 보며 정우는 땅을 향해 거꾸로 내려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 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정우는 불안해졌다. 하늘치의 아래쪽에 전속력 으로 부딪혀 죽은 것도 추락사라고 불러야 되는 건지 질문하려 했을 때 정우는 나루터를 보게 되었다. 나루터는 하늘치의 옆구리 쪽에 돌출된 구조물이었다. 50 미터는 됨 직한 긴 길이였지만 하늘치의 터무니없는 크기 때문에 그렇게 길어보 이지는 않았다. 방향을 가늠한 정우는 자신들이 그곳에 도달하게 될 것을 짐작했다. 정우는 안심했다. 그녀의 생각대로 얼마 후 엘시는 부드럽게 나루터 위에 도달해서 정우가 그 위에 내려서도록 도와주었 다. 정우의 곁에 서게 된 엘시는 자신이 상상했던 계단을 없앴다. "환상계단은 하늘치 위 어디로든 이어질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선 혼 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경유수는 이런 나루터에 이어지 는 형태로만 상상하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걸 나루터라고 부르는군요. 어울리네요." 주위를 둘러본 정우는 먼 곳에 낮은 위치로 가설되어 있는 나루터를 몇 개 더 발견했다. 어지간한 산꼭대기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허 공을 향해 불쑥 튀어나와 있는 모습들은 마치 부러진 교각처럼 보여 불안스러웠지만 딱정벌레를 타곤 했던 정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엘시 는 나루터 반대쪽의 계단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엘시와 정우가 도착한 나루터는 황궁에 부속된 것이어서 다른 통행 인은 만날 수 없었다. 계단 끝에 올라선 정우는 거대한 담장을 발견 했다. 담장의 높이는 상당했고 그 중간에는 레콘이라면 거북함을 느 낄 작은 문이 있었다. 문 안에 들어서자 익숙한, 하지만 이곳에서 볼 수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흙더미 사이의 골에 자연석들이 쌓여 이루어진 돌계단이었 다. 정우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엘시를 돌아보고는 계단을 빠르게 올 라갔다. 몇 미터 쯤 올라간 정우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곳에는 숲이 있었다. 색채가 가득한 숲이었다. 순박한 초록과 교태 어린 금빛, 근엄한 붉 은 빛과 따스한 검은 색이 범람하고 있었다. 그 흘러넘치는 빛깔들 사이에서 위풍당당한 거목들이 풍성한 그림자를 부드러운 풀 위에 던 지고 있었다. 하지만 거목들은 햇빛을 나눠쓸 아량도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바닥에는 눈이 아프도록 선명한 음영들이 잔뜩 흩어져 있 었다. 이미 풍부한 색채를 지니고 있는 숲은 그 음영들과 어우러져 빛의 급류 속에서 첨벙이고 있었다. 목향을 가슴 가득히 들이킨 정우 는 약간 어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눈을 몇 번 깜빡여 자신을 추스른 정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 담장은?" "사실은 담장이 아니라 흙이 쏟아지지 않도록 막아둔 제방입니다. 혹은 화분의 바깥면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어떻게 이곳에 숲을 만들었죠? 설마 하늘치의 등 위에 원래부터 숲 이 있었던 것은 아닐 텐데." "예. 흙과 나무를 지상에서 옮겨와 만든 것입니다." 정우는 가까이 있는 나무로 다가가 확인해 보고 싶다는 듯이 줄기를 쓸어만졌다. 그것은 분명히 나무였다. 정우는 또다시 감탄사를 터뜨 리고는 엘시를 돌아보았다. "보기 좋기는 하지만…… 이렇게 힘든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환상계단이라는 것이 있으니 숲을 보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내려갈 수 있을 텐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이 숲에는 미관 이외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죠?" 엘시는 돌계단을 오르며 설명했다. "이 하늘누리는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불안정한 도시입니다. 구조학적 으로 하늘누리는 떠있는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늘치의 등에 기둥을 박거나 할 수는 없으니 하늘누리는 그냥 얹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무게가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게요?" "매끄러운 탁자 위에 놓인 가벼운 도깨비지는 잘 미끄러지지만 도깨 비지 위에 서진을 올려두면 잘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정우에겐 마찰력과 하중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할 능력은 없었지만 엘시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거운 것이 잘 미끄러지 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늘누리의 무게를 늘이려고 숲을 만든 건가요?" "이 숲에는 그런 장점도 있다는 겁니다. 초기의 하늘누리는 꽤 불안 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정을 무릅쓰고 건물들을 계속 늘 였습니다. 물론 하늘누리의 모든 건물들은 바닥 아래에서 서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늘누리의 무게를 늘리자 오히려 안정되었다 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하늘누리 유수부 사람들은 이 위로 무거운 것을 올리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기보다 반가워 하게 되었습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콘 같네요." "예?"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도시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 보통은 가벼운 것들이 높이 올라가잖아요? 하지만 네 선민 종족 중에서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것은 가장 무거운 레콘이죠." "하늘누리가 가장 무거운 도시는 아닐 텐데요." 엘시의 지적대로 지상에 있는 도시 중에는 하늘누리보다 더 큰 도시 도 많았다. 하지만 정우는 좋은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계시잖아요."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말한 무거움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었다. "그렇군요. 그럼 가실까요." 엘시는 정우를 오솔길로 안내했다. 오솔길 끝에는 나루터에 면한 것보다 훨씬 낮은 담장이 있었다. 문 앞에는 네 명의 경비병들이 패검한 채 서있었다. 정우는 그들의 표정 을 보고는 불안감을 느꼈다. 경비병들의 표정은 사나웠다. 자신의 신 분이 전쟁 포로라는 것을 떠올린 정우는 그런 신분의 사람이 하늘누 리에 올라온 것이 경비병들을 화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경비병 중 한 명이 엘시에게 말했을 때 정우는 자신의 생 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웬 행차이신가. 에더리." 정우는 깜짝 놀라서 경비병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자한 태 도로 말한 사람이 인간이며 레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정우는 또다른 가설을 검토해봐야 했다. 하지만 정우는 왜 정신병자가 하늘 누리의 경비를 서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놀란 정우와 달리 엘시는 그런 태도에 별로 구애되지 않는 듯 평온하게 말했다. "평안하셨습니까, 스카리." 스카리라는 남자의 얼굴에 승리감이 떠올랐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다른 경비병들에게 외쳤다. "내가 뭐랬어! 엘시 에더리는 대장군의 옷 벗겨놓으면 대장군 노릇 도 못할 거라고 했지? 내 말대로잖아!" 경비병들은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스카리는 분노의 미소로 정우를 쳐다보았다. 그 무서운 눈빛을 본 정우는 다시 스카리를 정신병자로 규정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스카리는 비아냥이 가득한 태도로 말했 다. "승리는 병사들이 낚도록 내버려두고 자신은 여자를 낚았군. 마루나 래라 하지 않을 수 없군. 왜 부냐를 시체나 닦게 내버려뒀는지 알겠 어." 엘시는 스카리의 발언에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용건을 말했다. "이 분은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이며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와 만나 기 위해 황궁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이 분의 신원은 내가 보증합니 다. 연락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통과를 허락해 주십시오." 엘시의 건조한 태도는 스카리를 더욱 흥분시켰다.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엘시를 노려보던 스카리는 갑작스레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물러나지 않은 엘시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붙였다. 스카리는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뱀이 쉬쉿거리는 태도로 속삭였다. "이 야비하기 짝이 없는 자식아. 내 지위를 도둑질한 것까지는 참아 줄 수 있다. 내게는 네가 감히 손 댈 수도 없는 지위가 남아있으니 까." 스카리의 얼굴에 분명한 우월감이 떠올랐다. 자신이 상대보다 고귀 하고 우수한 사람임을 확신하는 자의 표정이었다. 그 때문에 스카리 의 말에는 약간 훈계 같은 어조가 묻어났다. "하지만 내 사랑까지 강탈했다면, 최소한 내게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 네깟 녀석은 모르겠지만 그게 사나이의 의리다. 이건 내 사랑을 두 번 짓밟는 짓거리야! 최소한의 명예도 모르는 이 추잡 한 소인배 녀석아!" 서로의 눈이 채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엘시와 스카리는 서로를 직시했다. 갑자기 정우는 엘시가 칼을 뽑아들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꼈다. 엘시의 몸 어디에도 그런 징조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정우의 예감은 뚜렷했다. 엘시 에더리는 만병장이며, 한 사람을 죽이 는 일은 이만 개의 팔이 아닌 하나의 팔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결 국 엘시는 아무 이유 없이 언제든 사람을 죽여도 되는……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스카리는 엘시의 뺨이라도 후려칠 것 같이 어깨를 경직시켰다. 하지 만 스카리는 결국 한담가들을 격분시키는 결정을 했다. 불미스러워서 흥미로운 뒷이야기거리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옆으로 물러나 며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엘시를 노려보았다. 엘시는 정우에게 걸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을 본 정우가 황 급히 걸음을 떼자 엘시는 그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다. 그들이 몇 걸 음 걸어갔을 때 뒤쪽에서 젖은 칼날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한다. 에더리." 엘시의 걸음이 멈췄다.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더러운 비겁자가 나를 몰락시켰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어. 내가 사내다운 사내에게 패배했다고 느끼게 해줘. 부냐를 그곳에서 꺼내!" 엘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우는 난처한 기분을 느끼며 엘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엘시가 다시 걸음을 뗐을 때 정우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싶어졌다. 두 사람은 경비병들 사이를 지나쳐 담 안으로 들어섰다. 담 안쪽에 는 판석들이 정교하게 깔려 있었고 앞쪽으로는 거대한 건물이 있었 다. 정우는 그것이 황궁임을 깨달았지만 한 동안은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정우는 엘시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엘시였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호위자 때문에 당신이 불필요하게 지체했습니 다." "아니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대장군님. 왜 그런 폭언을 감수하 신 거죠?" 엘시는 두 호흡 쯤 침묵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스카리 빌파는 과거 내 상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지휘 하 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수부 산하에 있습니다. 또한 발케네공 락토 빌파의 최우선 계승권자로 락토 공작과 마찬가지로 발케네공의 호칭 을 허용받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하대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일이 아닙니다." 정우는 그 엄청난 신분에 놀랐다. 정우 또한 규리하공의 호칭을 사 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공작에 버금가는 변경백의 권위에 대한 예우 일 뿐, 공작가의 최우선 계승권자와 그녀가 사용하는 호칭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아이저 규리하가 도주한 지금 규리하공이라는 호칭에는 농담 같은 분위기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발케네공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그런 분이 왜 하늘누리에서 경비병을 하고 있는 거죠? 발케네에 가 면 황제처럼 살 수 있으실 텐데." "그의 거취에 대해서는 스카리 본인이 대답해야겠군요. 들어가실까 요." 황궁 안으로 들어선 후에야 정우는 자신이 황궁의 외관을 제대로 보 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 2 챕터 시작합니다. 2004년이 왔군요. 다른 해보다 하루 많은 해입니다. 타자 같은 게으 름뱅이에겐 2005년 계획을 느긋하게 잡아도 되니까 좋은 해지요. 이 시점에서 그러면 2004년 계획은 세웠냐고 물어보신다면, 니름권을 행 사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증언은 니름으로. 행복한 새해 되시고, 좋은 밤 되세요. "춘부장께 봉토를 받은 소영주들이지요." "아아." "물론 그 소영주들 중 많은 수가 아이저 규리하의 소환에 응해 반란 군에 가담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습니다. 변경백령을 제 국령으로 귀속시킨다면 그들 전부에게서 재산을 몰수해야 합니다. 반 란에 가담하지 않은 소영주들의 입장에선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 지요." "모르겠어요. 제가 혹 무례한 말을 하더라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니 탓하지 말아주세요. 그 소영주들은 의리를 저버렸어요. 아버님께서는 당신께서 필요로 할 때 그들이 도와주길 바랐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 지를 나눠준 것이잖아요? 아버님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기가 받은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텐데요." "아닙니다. 춘부장께서 그들에게 봉여한 땅 자체가 이미 폐하께서 춘부장께 봉여한 땅입니다. 춘부장께서는 폐하께 봉여받은 영지를 그 들에게 재봉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처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인 이 집사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주인을 해칠 수는 없잖습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그들에게 새 집사를 주려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그것이 새 하인들을 데려와서 처음부터 다시 일을 배우 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기도 합니다." 데라시의 설명은 순수하게 원론적인 것일뿐, 영주에게 봉여된 영지 를 제국령으로 귀속시키는 일에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 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데라시는 그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규리하의 지배자 노릇을 해야 하 는 정우에겐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데라시는 정치적인 감각이 나은 남편감을 주선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 했다. 그런데 정우의 정치적 감각은 데라시가 예측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정우가 말했다. "시카트는 안되나요?" "네? 시카트 규리하 말씀입니까?" "예. 저와 함께 체포되었어요. 시카트는 저와 달리 규리하에서 자랐 으니 규리하에 대해서도 더 잘 알 거예요. 시카트가 변경백위를 계승 하면 어떨까요." 데라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엘시를 쳐다보았다. 엘시에게 감 정적 동의를 얻고 싶어서 취한 동작이지만 엘시는 벽난로 쪽을 바라 보고 있었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데라시는 정우를 바보 취 급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시카트 규리하는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당신의 경우와 는 다르지요. 그런 그가 변경백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 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시카트는 열다섯 살이에요. 미성년자이고 자식 이 부모를 거역하기는 어려우니까 시카트의 죄는 상당히 경감되지 않 을까요? 그렇다 해도 시카트의 죄가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 닐 거예요. 하지만 제게 제안하셨던 그 해결책을 시카트에게도 적용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시카트는 어리니 시카트만큼 어린 아내에 게 규리하를 맡기긴 어렵겠지요. 하지만 시카트가 어느 덕망 있는 분 의 양자가 된다면 어떨까요?" 데라시는 정우를 바보 취급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정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실제로 시카트 규리하는 미성년 자라는 이유로 규리하 토벌령에 그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그 사실 을 생각하며 데라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리하공. 시카트는 당신을 살해하려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제가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닐 거예요. 그래서 저도 시카트가 한 일 을 미워하지 않아요." "저는 시카트가 혈육을 죽이려 한 악한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넓 은 제국에는 그런 악한을 양자로 들일 사람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 런 자에게 유서 깊은 규리하를 넘겨준다는 것은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시카트의 계승권 순위는 당신보다 낮습니 다." 정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멍청하게 보일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 순위라는 것 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도깨비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아요. 단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더 현명할 거라 믿을 수는 없잖아요?" "도깨비들은 사망 후 어르신이 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후손들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바우 성주님께서도 어르신이 된 지금까지 즈믄 누리를 통치하고 계시잖습니까? 그래서 도깨비들은 승계 순위 같은 것에 큰 관심이 없는 겁니다." 바우 성주의 이름을 들은 정우는 애틋한 그리움과 터져나오려는 웃 음을 동시에 느꼈다. 데라시가 말했다. "하지만 인간이나 나가들은 그렇지 못하니 순위를 따져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자가 더 현명하진 못하더라도 경험은 더 많지 않겠습니 까. 최연장자에게 우선적으로 가문을 맡겨온 저희 나가들은 대체적으 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는 말로 계승권 순위에 대한 변호를 대 신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계승권을 포기하면 어떻게 되지요?" "포기하신다고요?" "예." "그럴 경우 다음 계승권자는 이이타 규리하지만, 이이타는 춘부장과 함께 도주했지요. 그리고 미성년자가 아니므로 반역죄는 유효합니다. 따라서 시카트가 다음 계승권자이긴 합니다. 당신이 계승권을 포기하 면 이론상 폐하께서는 시카트 규리하에게 규리하의 통치권을 위임하 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년은 지금껏 지배자의 자질 대신 비 행청소년의 자질만 잔뜩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여전히 당신 이외엔 합당한 계승권자가 없습니다. 규리하공. 시카트를 돕고 싶으시다면 오히려 당신이 규리하를 계승하는 편이 낫습니다. 당신이 규리하의 통치자로서 시카트의 교육을 책임진다면 폐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실 겁니다." 정우는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그러자 그녀에 게 보다 익숙한 도깨비다운 감성이 대신 말했다. "성주님께 물어볼 수 있을까요?" "바우 성주님께 말씀입니까?" "백작님께서 주신 제안에 대해 저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거라서. 그러니 성주님께 조언을 청해도 될까요? 탈해가 여기에 있다고 알고 있어요. 틀림없이 번뜩이를 타고 왔을 테 고, 금방 즈믄누리에 다녀올 수 있을 거예요." 데라시는 탈해가 즈믄누리의 무사장 탈해 머리돌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번뜩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탈해의 딱정벌레 이름이라는 정우의 설명을 듣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글쎄요. 규리하공. 이 제안은 수치스러운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 고 해서 공공연히 말할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아는 사람이 적었으면 하는데요." "도깨비는 그럴 경우 아는 사람이 많으면 도와줄 사람도 많다고 말 해요." "그리고 도깨비가 아닌 사람들은 훼방을 할 사람도 많을 거라고 대 꾸하지요. 저도 그런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이 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바우 성주님은 당신의 후 견인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니, 좋습니다. 서한을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백작님." "물론 서신 전달자가 서신을 열어보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피봉에 친전이라고 쓰십시오." 도깨비에 대한 보안 수단으로 데라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정우는 가혹하다고 생각했으며 괴로워하게 될 탈해를 동정했다. "바우 성주님께 조언을 구하고 당신 스스로도 이 제안에 대해 생각 해 보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요. 두 달 후 다시 만나서 당신의 결정을 말해주면 어떻겠습니까?" 즈믄누리까지의 거리와 딱정벌레의 속도를 고려한 데라시는 그 정도 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의 대답은 그를 놀라게 했다. "한 달이면 충분해요." 데라시는 눈을 크게 떴다. "무사장의 딱정벌레가 제국을 보름만에 횡단할 수 있다는 겁니까?" "여기에 올 때 그 정도 걸렸어요. 그 때 아버님은 최대한 빨리 오라 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탈해가 태워줬어요." "놀랍군요. 그렇다면 여유를 좀 둬서 사순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말씀대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쭐 것이 있습니다. 규리하성 지 하에 있는 금고방에 대해 아십니까?" "라수의 방 말씀인가요?" "예. 규리하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지요. 아시는가 보군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제가 열다 섯 되던 해에 아버님께서 장녀이니까 알아야 한다시면서 서신으로 알 려주셨어요." "그럼 그걸 여는 방법도 아십니까?" "예. 거기 들어가려면……" "말하지 마십시오." 정우와 데라시는 모두 깜짝 놀라서 황제의 대장군을 돌아보았다. 그 들은 침묵과 대화중이던 엘시의 존재에 대해 잊고 있었다.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던 엘시는 어느새 데라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데 라시는 그 시선에 불안감을 느꼈다. 눈길을 비스그라쥬백에게 고정시 켜둔 채 엘시는 정우에게 말했다. "정우. 당신에겐 그 방의 비밀을 말할 의무가 없습니다." 정우조차도 그 말에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승리자가 패배자의 것을 뺏는 것은 상식이다. 승패가 이미 갈린 상황에서 비밀을 지켜주겠다 는 엘시의 발언을 정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데라시의 충격 은 정우보다 더 컸다. "아니, 엘시?" 이름을 듣자 엘시는 데라시에게 말했다. "비스그라쥬백. 그렇잖아도 올라오기 전에 보고를 받았습니다. 규리 하성 지하의 금고방으로 통하는 통로에 자물쇠 전문가를 들여보내도 록 허락해 달라고 하셨지요. 거기에 대해 나는 아직 작전 구역인 만 큼 민간인의 출입을 허락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엘시. 그 안에는 반역자들의 중요 물건들이 들어 있을 겁니다. 반 역자들의 재산과 서류 등에 대한 완벽한 조사를 하는 것은 총지휘관 인 당신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충고 감사합니다만 내 의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비스그 라쥬백. 하지만 내가 비셀스 규리하에게 지하금고방 개방을 요구한다 면 그것은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권리는 비셀스 규리하가 선의로써 지하금고방을 공개할 경우 그걸 구경할 정도의 권 한 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반역자의 사유재산……" "아니오. 반역자의 사유재산은 그 방으로 이어진 통로까지입니다." "예?" 반문한 데라시와 달리 정우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 우가 말했다. "대장군님의 말씀이 맞아요. 데라시 백작님. 라수의 방은 즈믄누리 의 재산이에요." 데라시는 어처구니 없는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정 우의 설명을 들었다. 그 결과 데라시는 지하금고방이 원래는 즈믄누 리의 일부였으며 과거 정우의 종증조부인 라수 규리하의 요청에 의해 규리하의 지하에 옮겨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방의 이름이 그렇게 불리는 것은 그런 사실에 기인한다. "즈믄누리의 방 하나를 통째로 떼서 옮겨지었다는 겁니까?" "예. 그렇게 해도 즈믄누리와 같은 효과가 날지는 알 수 없었지요. 아마 바우 성주님도 그것이 궁금해서 종증조부님의 요청을 받아들이 셨을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같은 효과가 났지요. 제 생각엔 어두운 지하이기 때문에 다섯 따님의 도움이 여전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가 싶어요. 어쨌든, 킴 자물쇠 기술자는 거기 내려가봐야 어떻게 여 는지 알 수 없을 거예요." 데라시는 성 안 어디에서든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세 번만 돌면 대식 당으로 이어지고 동쪽탑 꼭대기에 서서 왼쪽으로 두 바퀴를 돌면 반 드시 성주의 서재에 엉덩방아를 찧게 되는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 큼 해괴한 성을 생각했다. 그러자, 반갑지 않게도 기운이 빠졌다. "그 방이 여전히 즈믄누리의 재산이라는 말입니까?" "예. 규리하성에 있지만 소유주는 즈믄누리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규리하 가문의 사유 재산일 텐데 요." 정우는 주춤했다. 엘시가 대답했다. "그 안에 반역자의 사유재산이 들어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면 머 리돌 성주에게 방의 개방을 요구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런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데라시는 이것이 키탈저 사냥꾼의 맹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규리 하의 사유재산이 들어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금고방을 열 수 없다. 그런데 금고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 안에 규리하의 사유재산 이 들어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엘시는 계속 말했다. "당신이 증명하지 못한다면 규리하공 비셀스는 당신에게 즈믄누리의 비밀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니 그건 즈믄누리와 규리하만 알고 있 었던 일인 것 같은데, 엘시 당신은 그것이 즈믄누리의 일부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엘시는 무감동하게 대답했다. "내 의무를 수행하던 도중 알게 되었습니다. 변경백령의 문서를 조 사하던 중 그 방을 옮겼던 날짜와 동원된 인원, 소요된 경비 등을 기 록한 의궤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궤에는 지하금고방이 즈믄누 리의 소유임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더군요. 규리하 가문은 기록을 대 단히 꼼꼼하게 하는 가풍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정우가 말했다. "그건 과텔과 케나린 이후로 가문이 지켜야 할 의무였어요. 물론 가 문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상무지요." 엘시의 말에 정우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후 정우 는 정면 대결로 규리하의 상무를 격파한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인 것 이 잘한 일인지 궁금해졌다. 데라시는 턱을 쓸어만지며 말했다. "믿을 수 없군요. 거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방 하나를 통째 로 옮기다니……" "종증조부님께는 레콘 친구들이 많이 있었지요." 교양 수준의 역사 지식만 가지고 있는 데라시도 라수 규리하가 제 2 차 대확장 전쟁과 천일전쟁 당시 북부군의 참모장이었으며 또한 대호 왕의 사도로 봉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우의 말대로 라수 규리 하에겐 그런 니름도 안 되는 일에 동원할 수 있는 레콘 지인들이 분 명 많이 있었을 것이다. 데라시는 항복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데라시는 조금 후 다시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건은 즈믄누리의 바우 성주에게 부탁해 봐 야 할 문제군요. 반란자의 사유재산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다 하더라도 엘시 백작의 말대로 바우 성주가 선의로 그 문을 열어줄 지도 모르니까요." 데라시의 말에는 대화를 끝내자는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정우는 자 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데라시는 회담 종결을 선언하는 대신 다른 요청을 했다. "규리하공. 혹 황궁 미술실을 구경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정우는 데라시를 바라보다가 엘시를 돌아보았다. "대장군님과 나눌 말씀이 있으세요?" "예. 제가 이 방에서 나가는 것이 지나치게 번거롭다 보니 무례한 부탁을 할 수밖에 없군요." "아뇨. 괜찮아요. 그 미술실이라는 곳에 가보죠. 그림을 못 보시는 폐하께 미술실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지네요." "나가의 시각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하긴 나가 잡는 것은 도깨비 라는 속언이 있지요. 예. 폐하께선 회화를 즐기지 않으십니다. 하지 만 조각품들이 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데라시는 시종을 불러 정우를 안내하게 했다. 방문까지 정우를 배웅 한 데라시는 다시 엘시 앞으로 돌아왔다. 엘시는 고개를 숙인 채 생 각에 잠겨 있었다. 의자에 앉은 데라시는 잠시 그런 엘시를 바라보았 다. 탁자를 향하고 있는 엘시의 눈엔 쓸쓸함이 가득했다. 데라시는 그 모습에 동정심을 느꼈다. [엘시. 당신은 참 바보입니다.] 인간인 엘시는 들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데라시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내용을 마음껏 닐렀다. [당신은 무향(武鄕) 규리하를 거꾸러뜨렸습니다. 폐하를 기쁘게 해 서 대사면령을 유도하기 위해. 당신은 반역자의 딸을 규리하의 지배 자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 실수로 반역자를 도운 다른 여자 또한 용서 받는 것이 공평하니까. 고달픈 사람. 당신은 떡이 먹 고 싶어지면 농업을 번창시킬 사람입니다. 농민들은 즐거워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떡을 먹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다른 성인 나가들과 마찬가지로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심장을 적출했 었기에, 데라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 지만 데라시는 심장이 있는 자들이 느끼는 기분과 거의 똑같은 기분 을 느꼈다. "예?" 엘시는 고개를 들어 데라시를 바라보았다. 데라시는 공포 속에서 엘 시의 말을 기다렸다. "옳은 이야기일 거라 믿습니다. 비스그라쥬백. 하지만 니르셨기에 아쉽게도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엘시. 말로 해야 할 것을 실수로 니르고 말았군 요. 그런데 들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내가 닐렀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 습니까?" "당신은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으니 무슨 말이든 했을 텐데, 그게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면 니름일 수밖에 없습니다. 번거롭겠지만 당 신의 고견을 말로 다시 들려주길 바랍니다." "고견이랄 것은 없습니다. 엘시. 사실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 저도 모르게 닐렀습니다. 금군 즈라더가 사망했습니다." 엘시는 충격을 받았다. "즈라더가요?" "예. 동행했던 병사들이 보고했습니다. 예상대로 일대일로 붙었습니 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부탁이 부 족하지 않았나 후회스럽군요. 즈라더는 제가 그의 용맹을 못미더워한 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싸움이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 잖습니까." "레콘은 그렇기에 싸울 이유가 있다고 말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고 돌아오는 것은 백 번이라도 용서하지만 이기고 죽어버리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하셨던 대호왕 폐하의 말씀이 떠오르는군요. 쉽게 하는 말로 최선을 다한 사람은 모두 승리자라지요. 즈라더는 당연히 최선을 다했을 겁 니다. 그는 승리자입니다. 하지만 죽은 승리자입니다." 엘시는 거부감을 느끼며 몸을 약간 뒤로 젖혔다. "비스그라쥬백. 나는 아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희언을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즈라더가 승리자였는지 패배자였는지를 그토록 성급하게 규정하고 싶다면, 그런 것을 참아주는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내게는 바르지 못한 일로 여겨집니다." 데라시는 두 손을 조금 펼쳐보였다. "엘시. 나는 왜 당신들이 죽은 자들을 다루기 까다로운 인물처럼 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불쾌하다면 그만두도록 하겠습 니다. 실용적인 이야기를 하지요." "좋습니다." "즈라더의 순직에 대해 제국 정부는 정당한 예우를 갖출 것입니다. 물론 레콘이라서 유가족이 없다는 점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율형부에 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겠지요. 아마도 충무나 충장의 시호가 증시될 것 같습니다. 백작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살해자를 체포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하늘누리를 침입하기까지 한 그 극악무도한 자가 이제 제국 공신을 살해했습니다. 마땅히 잡아들여 주살해야 할 것입니다." 엘시는 눈끝을 약간 찌푸렸다. "지멘의 체포를 군에 정식으로 요청하는 겁니까?" "아니오. 그럴 수는 없지요. 한 명의 레콘을 붙잡기 위해 제국군이 움직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 영리한 자는 걸핏하면 봉신들의 영토로 달아납니다. 즈라더는 금 군이기에 추적에 나설 수 있었지만 제국군은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없 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엘시. 지멘을 잡기 위해서는 역 시 레콘이 아니면 안됩니다. 조금 전 레콘들을 많이 알던 라수 규리 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당신도 레콘들 사이에서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조신들 중엔 당신을 따를 자가 없지요. 제국군에서 예편한 레콘들 중 많은 이들이 아직 당신과 친교를 나누고 있다고 알 고 있습니다. 그들 중 추적대를 조직할 만한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엘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대답하긴 어렵군요. 당신도 짐 작하겠지만 그들은 숙원에 도전 중이거나 신부 탐색 중입니다. 그리 고 그 일은 레콘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이 제국군에 입대했 던 것도 그 일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자금을 얻기 위해서지요. 쉽 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단 알아보기는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수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두번째 이야기를 하지요. 조금 전 거론된 비셀스 규리하의 결혼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 니까?" "그것은 비셀스 규리하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지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의견을 말해줄 순 있겠지요." 엘시는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나는 찬성합니다. 굴도하 남작부인이나 세퀴라도의 지테를 당주는 이번 전쟁에서 침묵을 지켰지만 끝까지 침묵하진 않을 겁니다. 그들 모두를 잠잠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비셀스가 변경백위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통해 남편에게 이양하는 것도 괜찮은 차선 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경우라면 분란의 소지가 많습니다." "굴도하 남작부인과 지테를 당주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데라시의 말에서 자신감을 읽은 엘시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들여 다보았다. "비스그라쥬백. 당신은 과거에도 그렇게 말했지요. 이제 전쟁이 끝 났으니 말해주십시오. 아이저 규리하의 여동생과 장인이 끝까지 침묵 을 지킨 이유가 뭡니까?" "이젠 말해도 되겠지요. 그들 각자는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받았습 니다. 굴도하 남작부인이 꿈에도 원하는 것은 강병의 육성이지요. 이 전쟁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대신 남작부인은 예비역 수교위 열 명을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을 감춘 채 남작에게 고용되어 1년 동안 교관으로 복무할 겁니다." "지테를 당주는?" "자유무역당은 연초를 취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엘시는 이해했다. "아이저 규리하의 팔다리를 잘라놓고 전쟁을 시작한 셈이군요." "그렇다 해도 당신의 전과는 대단한 것입니다. 엘시. 당신이 이렇게 빨리 전쟁을 끝냈으니 설령 그들을 내버려뒀다 해도 아이저를 배후 지원할 시간은 없었을 겁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배려를 조금 후회하 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호의를 얻어두었으니 만족해야겠지 요." "알겠습니다. 그들이 규리하에 대해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면 비셀스 규리하가 결혼해야 하는 이유는 많이 줄어드는군요." "하지만 두 사람 이외에도 규리하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가진 사람은 많지요. 워낙 유서 깊은 가문이니까요. 예를 들어 살인기사 (殺人棋士) 같은 이의 흉중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상 외의 이름에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어 솔한 말입니까?" "예. 그 사람 말입니다. 제이어가 철저한 야인으로 행세하고 있지 만, 저는 즈믄누리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으면 정황을 듣기도 전에 제이어가 그곳에 체재 중이라고 단정해버릴 겁니 다." 엘시는 제이어 솔한에 대한 데라시의 우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래서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다. "그가 벼락을 끌어내리는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겠 지만 벼락의 빛으로는 책 한 줄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파괴적이지만 순간적입니다. 제이어는 그 무엇에도 한 달 이상 집중할 수 없는 성격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동감입니다. 저도 제이어가 한 달 쯤 폭음을 일삼으며 아이저 규리 하의 몰락에 바치는 장시라도 쓸 거라는, 그러다가 실수로 우리 시대 의 명작을 내놓을지도 모른다는 쪽이 훨씬 있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 니다. 하지만 작은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족의 최우선 계승권자인 비셀스가 결혼하여 남편에게 변경백위를 이양하는 것은 여전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당신이 그 계획에 찬성한다면, 부 탁 한 가지 하고 싶습니다." "무슨 부탁입니까?" "눈치챘겠지만 나는 나가입니다." 엘시는 미소 비슷한 것도 짓지 않 았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데라시는 실망하지 않았다. "많이 노력하고 있지만 난 여전히 당신들의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머리로만 알뿐입니 다. 그러니 비셀스의 혼례를 주관하는 일은 아무래도 인간이 맡는 것 이 좋겠습니다." "그렇겠군요." "예." "내가?" "그렇습니다." "역시 잘 모르는군요. 그런 일은 연만하시고 경험도 많으신 분이 맡 는 편이 좋습니다. 귀족원의 원로들이나 규리하 가문의 어른들에게 맡기십시오. 그것이 어렵다면 바우 성주가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안됩니다." "당신이 거론한 사람들 중 광대한 규리하의 지배권이 걸린 일에 휘 둘리지 않고 소신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문 형편입니다. 엘시. 나는 혼례 주관자가 자신의 친족들을 우선적으로 신랑 후보에 올리거나 경쟁자의 아들들을 우선적으로 제외시키는 추태를 보고 싶 지는 않습니다." "바우 성주는? 도깨비와 인간의 혼례식은 비슷합니다. 그리고 바우 성주가 고른 신랑감이라면 비셀스도 쉽게 받아들일 겁니다." 데라시는 두 손을 펼쳐보였다. "엘시. 그 경우 비셀스를 만족시킬 수는 있겠지만 신랑측을 만족시 킬 수는 없을 겁니다. 이 결혼은 쉽지 않은 결혼입니다. 친 규리하 세력과 서약지지파 측으로부터 미움을 살 수도 있는 신랑측에서는 당 연히 안전 보장이 필요할 겁니다. 황제의 대장군이 혼례를 주관한다 면 그보다 더 큰 보증은 없습니다." 엘시는 데라시의 말을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결혼하기로 결정한다면 내가 그것을 주관하겠 습니다." 데라시는 만족감 속에서 짧은 유혹을 느꼈다. 그는 엘시에게 라수의 방에 출입하는 방법까지 알아내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하 지만 데라시는 곧 그런 유혹을 억눌렀다. 세번째 용건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지만 달갑게 수행할 수 는 없는 용건이. "그럼 마지막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엘시. 당신의 대사면 요청 말인데, 불가능합니다." 나가는 네 선민종족 중 가장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네 종족은 모두 개성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하지만 나가는 독자적 인 세계관에 덧붙여 실제적인 시각차도 가지고 있다. 나가들은 사물 의 뜨겁고 차가움을 본다. 그것은 때론 불편하고 때론 유리한데, 치천제의 미술실을 보면 알 수 있듯 회화를 즐기기 어렵다는 것은 불편함에 해당한다. 하지만 나 가들은 상대방의, 특히 나가가 아닌 종족들의 감정 변화를 독특한 방 식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유리함에 속한다 할 것이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능한 이들도 감정의 변화에 따른 체열 변화까지 조절할 수는 없고, 그래서 인간이나 레콘, 도깨비에게 충분히 익숙한 나가는 상대방이 무표정한 것인지 무표정을 가장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라시는 엘시에게서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데라시는 엘시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심적 충격을 느 끼지 않은 것인지, 그렇잖으면 그가 인간에게 익숙한 것 만큼 엘시 또한 열을 보는 나가에게 익숙해서 자신을 잘 감추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데라시는 니를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 말했 다. "큰 승리의 영광을 많은 이와 나누고 싶은 당신의 뜻은 저도 존중합 니다만 아무래도 여건이 좋지 않습니다." 엘시는 무표정한 얼굴 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대사면이 있었던 것은 6년 전입니다.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 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늦은 것은 아니지만 빠른 것도 아니지요. 시기적으로 크게 무리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좋지 않습니다. 6년 전 분리주의자들의 난과 규리하 정벌은 경우가 다릅니다. 대사면과 같은 행사는 오히려 당신이 거둔 승리의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습니 다." "효과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원론적으로 따져본다면 분리주의자들은 제국에 대항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승리의 기쁨은 모든 제국민과 나눌 수 있는 것 이었지요. 하지만 아이저 규리하는 황제 폐하께 대항했습니다. 이 전 쟁은 폐하의 위엄을 보이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폐하의 위엄을 보인 직후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기도 전에 폐하의 자비를 보여 준다면 결국 위엄도 자비도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엘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데라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폐하의 위엄과 자비를 폐하 아닌 누군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데라시는 몸을 뒤로 조금 젖혔다. 무거운 눈길로 황제의 대장군을 바라보던 데라시가 말했다. "저를 싫어하시죠?" 엘시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설명을 요청했다. 데라시는 방어적 으로 팔짱을 꼈다. "아무런 지위도 없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주제에 모든 것에 머리 를 내미는 황제의 첩이 황제의 대장군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요. 더군다나 그 자가 감히 폐하 를 관리하는 듯이 말한다면." 엘시는 데라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인간이라도 엘시의 얼 굴에서 어떤 의미가 담긴 표정을 읽어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엘시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 아버님께서는 지위란 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싸우는 이가 쥔 칼, 요리하는 이가 쥔 칼, 조각하는 이가 쥔 칼은 모두 그 쓰임이 다릅니다. 따라서 칼을 보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당신이 폐하와 제 국의 복리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사람이며 또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지위나 신분 같은 것은 내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데라시는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엘시가 먼저 말했다. "또한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큰 의미는 없습니다." 데라시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즐겁지 않게. "저를 싫어하지만 그 때문에 제 쓸모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 니까?" "내가 당신과의 대화에 두고 있는 확고한 진정성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좋습니다. 저도 당신이 저를 멸시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다고 오 래 전에 결심했으니까요. 당신이 저를 대등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있다니 오히려 기쁘군요. 그런데 페하의 위엄이나 자비를 다른 사람 이 관리하는 것을 거부하십니까?" "내 말은 자비를 아끼기로 한 결정이 당신의 것인지 폐하의 것인지 알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데라시는 대답했다. "폐하의 뜻입니다." 물론 엘시는 진짜냐고 묻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모처럼의 제안이신데, 서운하시겠군요. 아마 폐하께서는 당신의 봉 사를 다른 방식으로 치하하실 겁니다. 틀림없이 무향의 정복자에게 합당한 방식으로요." "나는 상을 바라서 폐하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데라시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던 순간이었다. 자기 모순의 흔적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 으며 데라시는 차분하게 말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주변에는 폐하의 은총이 필요한 누 군가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데라시의 말을 듣자 엘시는 갈망에 찬 눈으로 데라시를 바라보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황제의 대장군 엘시는 더듬으며 말했다. "그…… 럴 수도 있겠지요. 불민한 나로 말미암아 폐하의 은총이 더 널리 퍼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광영일 겁니다." "물론이겠지요. 규리하공이 많이 기다릴 테니 이만 이야기를 끝내도 록 하지요." 엘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라시는 기대감 속에서 엘시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말하길 기다렸지만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쉽게 기대감 을 버리기 어려웠던 데라시는 문을 닫은 후에도 엘시가 돌아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데라시는 빙긋 웃으며 따스한 난롯가로 다가갔다. 몸을 뜨겁게 하며 데라시는 엘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자고 있을 때조차도 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 다. 하지만 만약 엘시가 부냐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꺼냈다면 데라시는 기분이 좋진 않았을 것이다. =============================================================== 정우나 탈해가 모든 말을 의문형으로 끝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도깨비 중 바우 머리돌, 사빈 하수 언, 노기 하수언, 탄실 구마리는 의문종결형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모든 말을 의문형으로 끝내는 것은 도깨비의 특징이 아니라 비형 스 라블의 특징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03 조회수 : 967 피를 마시는 새 2. 돌과 바람 - 3 황궁 미술실로 걸어가며 엘시 에더리는 번민을 느꼈다. 황제의 대장군은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가 현실주의자도 때론 맹랑한 환상에 빠질 때가 있는 법이다. 엘시는 데라시가 마지막 으로 건넨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보다 긍정적이 고 무책임한 희망을 즐기는 엘시의 작은 일부분은 데라시의 말을 이 렇게 해석했다. "엘시. 전승을 축하하는 대사면은 어렵겠지만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대사면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가능할까? 데라시는 위엄을 보인 직후에 자비를 보일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말은 황제의 자비를 보이기 적당한 시점은 흉사가 아닌 길 사가 있을 때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대사면을 베풀어 축하할 만큼 비셀스 규리하의 결혼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규리하 변경백위는 제국의 중요한 작위지만 최고 위 서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생각할수록 엘시는 자신의 희망이 말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 의기소침해졌다. 그렇다면 희망을 품기를 권하는 듯한 데라시의 말은 도대체 무슨 의 미일까? 엘시는 데라시가 그저 자신을 희롱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데라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엘시는 비스그 라쥬백이 그렇게 유치한 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데라시가 누군가 를 희롱한다면 그보다 훨씬 고급스러우면서도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 을 것이다.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 하 지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깊은 상념과 공간적 거리의 반비례 법칙은 엘시에게도 작용했다. 엘시는 어느새 황궁 미술실에 도달한 자신을 발견했다. 엘시는 상념 을 멈추고 정우를 찾았다. 회화보다는 조각이 주를 이루는 황궁 미술 실은 시야를 가리는 부분이 많았다. 몇 걸음 움직인 후에야 엘시는 정우를 발견했다. 엘시는 눈앞의 광경에 자신을 적응시킬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 다. 정우는 기묘한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한쪽 팔을 멀리 던지고 다른 팔은 귀 쪽으로 구부린 모습이었다. 엘시는 그것이 정지된 춤처럼 보 인다고 생각했다. 대장군이 바라보는 동안 정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옆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기묘한 동작을 취했다. 정 우는 앞쪽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손이나 발, 허리의 각도를 변화시키 고 있었다. 대장군은 조금 후에야 정우 규리하가 조각상을 흉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황을 깨달은 엘시는 곧 우려를 느꼈다. 다 음 조각상은 도약하는 티나한을 묘사한 마루젤의 작품이었다. 티나한 이 승천하기 직전에 제작된 가장 유명한 작품이었고, 의문의 여지 없 이 훌륭한 예술품이지만 흉내내기가 쉽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 다. 티나한의 상 앞에 선 정우 또한 자신이 난관에 봉착했음을 깨달은 듯했다. 정우는 한참 동안 조각을 바라보았다. 엘시는 인기척을 내는 것이 정우를 돕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정우가 뛰어 오르는 바람에 엘시는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위로 뛰어오른 정우는 일순간 티나한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비록 전설적인 티나한의 철창이 없긴 했지만 내뻗은 두 팔만큼은 박 력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내뻗은 다리나 뒤로 크게 휘어진 허리 또한 영웅의 재현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정우는 마루젤의 조각엔 나 타나 있지 않은 시간 경과까지 재현했다. 땅에 착지한 정우는 그 가 공의 창을 회수하며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정우와 엘시의 눈이 마주쳤다. 가공의 창으로 겨냥당한 남자와 남자를 겨냥한 여자는 잠깐 동안 얼 어붙은 모습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정우는 눈만 깜빡이며 엘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엘시가 익힌 예 절에는 이런 경우의 처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는 아무 행동 도 할 수 없었다. 멍한 정신 속에서 엘시는 정우가 저렇게 똑바로 바 라보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정우가 갑자기 움직였다. 엘시는 주춤할 뻔했다. 정우는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그에게 척척 걸어왔다. 엘시 앞에 도달한 정우는 곧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엘시가 따귀라도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을 했을 때였다. 정우의 손이 그의 눈을 덮었다. 엘시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짧은 시간 동안 엘시는 온갖 생각을 다 했고 그 생각들 대부분이 말 도 안되는 것들이었다. 엘시는 귓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암흑 속에 있는 엘시에게 정우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잊으세요." 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엘시는 다시 암흑에서 해방되었다. 눈 을 몇 번 깜빡인 엘시는 주저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우는 엘시를 처음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대장군님. 오셨어요?" 입을 열자마자 엄청난 실언이 나올 것 같았기에 엘시는 입을 꽉 다 물었다. 엘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우는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방금 오셨죠?" 가까스로 엘시의 입이 열렸다. "예. 지금 오는 길입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지루하 셨지요?" "아니오. 지루하지 않았어요." "조각들을 감상하셨군요." "아니오. 흉내냈어요." 엘시는 입을 딱 벌린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마주보던 정 우의 볼이 부풀었다. 입술을 떨던 정우는 마침내 폭소를 터뜨렸다. 정우는 허리를 구부린 채 웃었다. 엘시는 넋을 잃은 채 그런 정우를 바라보았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정우는 눈물을 닦으며 엘시를 바 라보았다. 엘시의 딱딱한 얼굴을 본 정우는 주춤했다. "죄송해요. 스스럼없이 굴어서 화나셨어요?" "네? 아니오. 그냥 조금 당황했습니다." "당황하셨어요?" 정우는 그 말에 대해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황제의 대장군이시며 제국의 유일무이한 만병장이신 어 려운 분께 장난을 치는 킴은 없겠군요. 제가 지나치게 도깨비처럼 굴 었나 보군요." 엘시는 정우의 판단이 정확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부연하지는 않 았다. 정우는 두 손을 뒷짐지고는 조각들을 돌아보았다. "굉장히 많네요. 폐하는 조각을 좋아하시나 보지요?" 엘시는 좀 평범한 대화로 바뀐 것에 안도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각 영지의 통치자들이 많은 조각을 보냈기 때문입 니다." "제국에 조각가가 그렇게 많나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선 음주도 하지 않으시고 잡수시는 것 또한 제한되어 있습니다. 먹거리가 제외되는 것만으로도 특산품의 상 당수가 제외됩니다. 그래서 폐하께 진상되는 물건은 대부분 공예품입 니다. 물론 폐하께서 이런 선물을 즐기시는 것에는 공예인들을 간접 후원하시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죄송해요." 엘시는 다시 암담함을 느꼈다. 정우의 말이 다시 평범의 울타리를 넘었기 때문이다. 정우는 뒤로 빙글 돌아서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처음 뵀을 때 제게 상황을 설명해주신 것, 그리고 쾌히 제 호위를 맡아주신 것, 데라시 백작 앞에서 저를 거들어주신 것 때문에 제게 호의를 가지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대장군님을 친근 하게 생각했나봐요. 당치않은 생각이겠죠." "괜찮습니다." "아뇨. 괜찮지 않아요. 대장군님은 제 원수니까요." 엘시는 정우의 화법을 따라가길 포기했다. "그런가요." "예. 대장군님은 제 아버지를 무찔렀어요. 그러니까 아마 원수가 맞 을 거예요. 그런데 애써봐도 화가 나지 않아요. 저도 제 아버지의 적 이잖아요. 대장군님도 제 적이고 아버지도 제 적이라면, 저는 도대체 뭐죠?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괜 찮다면 저는 두 분과 친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저를 낳아주신 분이니 당연히 그렇고, 대장군님과도 적이 되고 싶진 않아요. 탈해와 친하시 다고요?" "부족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친구입니다." "아뇨. 탈해 머리돌 말이에요." 엘시는 즈믄누리에서 탈해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 다. 자신 또한 즈믄누리의 무사장을 거론한 것이라는 엘시의 말에 정 우는 혼란스러워 했다. "제가 말하는 탈해와 대장군님이 말씀하신 탈해가 정말 같은 도깨비 인지 확신은 안 가지만, 만약 같은 사람이라면 지금 대장군님 댁에 머물고 있겠군요.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장차 그럴 시간이 오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당신은 난방 이 되는 방을 나오기 힘든 비스그라쥬백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이곳 에 올 수 있었던 겁니다. 회담이 끝난 이상 당신은 다시 규리하성으 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정우는 두 팔로 자신을 감싸고 검지를 까딱거렸다. "제 아버지의 지지자들 중 누군가가 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말씀 이죠?" "유감입니다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만약 결혼한다면 아주 무시무시한 혼례식이 되겠군요. 혹 전 투가 벌어지진 않을까요?" "책임지고 안전하게 치르겠습니다." "예? 대장군님께서 책임을 지신다고요?" "만약 당신이 혼례를 치르기로 결심한다면 내가 그 일을 주관하게 될 겁니다." 정우는 입술을 둥글게 만든 채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러니까 대장군님이 제 신랑감을 물색하고 대장군님의 이름 으로 혼서를 보낸다는 뜻인가요?" "그 외의 다른 일도." "외람될지 모르겠지만, 저를 잘 아시지도 못하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정우. 처음부터 잘 아는 두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신은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랐고 나는 나가 황제를 모시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같은 인간입니다. 다른 종족 사이에서도 가능 한 대화가 우리 둘 사이에서만 불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 다. 서로 의논해서 좋은 결혼 상대자를 찾아보도록 하면 어떻겠습니 까." 정우는 입술을 위로 밀어올렸다. 그런 얼굴로 생각에 잠긴 정우는 조금 후 입술을 아래로 내렸다. 동시에 입술 양쪽 끝은 위로 올렸다. "아직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아니예요." "예." "하지만 결혼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조금 드네요." 엘시는 희미하게 웃으며 목례했다. 그 때 정우가 말했다. "그리고 잊어주세요." 한참 후에야 엘시는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규리하성의 방으로 돌아온 정우는 잠깐 동안 어디에도 앉지 않은 채 왔다갔다 했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서 앉기가 힘들었다. 하늘누리에서 내려오기 전 정우는 용기를 내어 어떤 제안을 했고 엘 시는 약간 주저한 다음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정우는 올라갈 때 와 반대 방향으로 엘시의 발 위에 섰다. 뒤로 뻗은 두 손을 엘시에게 맡긴 채 정우는 허공을 똑바로 응시하며 하늘을 날아내려왔다. 정우는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딱정벌레를 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인간 기준으로 보통에 조금 못미치는 체구를 가진 정우 는 도깨비들 기준으로는 굉장히 작은 축에 속했고, 그런 체구로는 즈 믄누리의 거대한 딱정벌레들을 완전히 통제하기 힘들었다. 물론 인간 들 중에서 정우 만큼 딱정벌레를 잘 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 만 즈믄누리에서 정우는 그저그런 수준의 딱정벌레 기수였다. 정우는 그제서야 딱정벌레를 탈 때는 그것을 통제하느라 비행 자체엔 완전히 몰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엘시가 상상한 계단은 딱정 벌레와 달리 직선으로밖에 움직이지 못했지만, 정우는 자신이 그보다 더 멋지게 움직이는 계단을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우는 그 가능성에 흥분했다. '계단을 상상하는 법을 배워야겠어. 난 어쩌면 하늘누리에서 가장 복잡한 계단을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정우는 자신의 생각이 허황되다고 여기진 않았다. 비행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킴들과 달리 그녀는 이미 비행에 익숙했다. 자신의 계획 을 좀 더 검토하기 위해 정우는 의자에 앉았다. 정우의 생각 속에서 차례차례 떠오르는 계단들은 그림으로 표현하기 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엔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건물에 익숙하 고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녔던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개념이 덧붙 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즐거운 상상에 푹 빠져있던 정우가 현실을 인 지한 것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였다. 정우는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 속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국군 부위를 바라보았다. 틸러 달비 부위는 경례하고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편지를 받으러 왔습니다." 정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바우 성주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것을 까 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우는 틸러에게 몇 번이나 사과한 다음 한 시간 쯤 후에 다시 와달라고 부탁했다. 틸러가 나가자 정우는 자 신의 머리를 한 번 쥐어박고는 서둘러 지필묵을 챙겼다. 먹을 갈자 송연묵의 향긋한 내음이 퍼져나갔다. 제국 대부분의 지역 에서는 제조가 쉬운 유연묵을 쓰고 있지만 즈믄누리에서는 나가들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송연묵을 제조해 쓴다. 다행히도 비늘 덮인 수목애호가들에겐 위로가 될만한 사실이 있었다. 도깨비들은 효 율적으로 그을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소나무를 남벌하지는 않는다. 먹을 다 갈아놓은 정우는 붓을 풀었다. 정우는 도깨비지 위에 글을 쓰면서 어린애처럼 자신이 쓰는 글을 읽었다. "존경하는 바우 성주님. 좋은 꿈 꾸셨는지요. 건강하시죠?" 정우는 킥 웃었다. 죽은지 오래된 바우 성주에게 건강하냐고 묻는 것은 당연히 농담이다. 정우는 즐거운 기분으로 붓을 놀렸다.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심려해주시는 덕분에 저는 잘 있습니다. 지금 저는 제국군에게 붙잡힌 포로의 처지이긴 합니다만 규리하성의 제 방에서 자유롭게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곳에 있거 나 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 감옥이라는 것을 구경해봤으면 좋겠다 는 생각도 조금은 했어요. 진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제 말을 들으면 화를 내겠지요. 제국군이 성을 점령하기 직전 아버님께서는 이이타와 몇몇 가신들과 함께 어딘가로 도주하셨습니다. 시카트는 도주하지 못했습니다. 놀라 지 마세요. 성주님. 시카트는 저를 죽이기 위해 남았다가 제국군에게 붙잡혔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우시죠? 저도 이해를 못했지만 몇몇 분 들이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분들의 말에 의하면 저는 아무래도 아버 님께 해가 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복잡하지만 쉽게 설명해보도록 애쓰겠습니다. 아버님의 친구분들은 아버님의 땅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면 화를 낼 거랍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땅이 아버님의 장녀인 제게 주어지면 그 친구분들은 화를 낼 명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황제 폐하 에 대한 분노를 공유해줄 사람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아 버님의 땅이 제게 주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제가 죽을 경우 아버지는 그것을 제국군의 소행으로 위장하여 제국군에 대한 악 평이 퍼지게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도 아버지의 친구분 들은 화를 내겠지요. 제가 이해하는 상황은 대충 이렇습니다. 그 때 문에 저는 아버지의 지지자들이 가할지도 모르는 공격을 피해 제국군 의 보호를 받는, 좀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당신의 친구분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딸 또한 화 나게 만드셨어요. 바우 성주님. 저는 정말 화가 나요. 저는 아버님의 땅을 원한 적이 없어요. 제가 아버님의 땅을 계승하는 것이 두려우셨 다면, 아버님은 왜 저를 이곳으로 불러들이신 거죠? 애초에 저를 원 하지 않으셔서 즈믄누리로 보내신 거라면 끝까지 즈믄누리에서 살게 끔 내버려둬도 될 텐데요. 혹 아버님은 필요할 때 저를 간단히 제거 하기 위해 이곳으로 저를……" 정우는 먹물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그 먹물을 번지게 하는 것은 눈 물이었다. 정우는 붓을 벼루에 내려놓고는 자신의 눈주위를 만져보았 다. 손가락이 금세 젖어들었다. 정우는 오른손 손등으로 눈 주위를 슥슥 닦았다. 하지만 눈앞은 다 시 부옇게 바뀌었다. 정우는 왼손으로 눈을 닦았다. 눈물은 계속 흘 러나왔다. 정우는 양손의 손바닥을 차례로 들어 눈을 닦았다. 두 손 이 정우의 눈물로 흠뻑 젖었다. 정우의 목에서 오리 우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정우는 두 손을 주먹 쥐어 눈을 힘껏 눌렀다. 눈이 아팠 다. 정우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얹었다. 그녀의 두 팔이 힘없이 좌우 로 떨어졌다. 젖은 볼이 차갑게 느껴졌다. 쉼없이 솟아나오는 눈물은 정우의 양쪽 귀를 타고 흘렀다. 정우는 입을 열었다. "하하하." 정우는 오른손으로 비녀를 뽑고 머리를 흔들었다. 출렁 하며 일어났 던 머리카락들이 등받이 뒤쪽으로 너울치며 흘러내렸다. 정우는 두 손으로 비녀 양쪽을 붙잡고 자신의 얼굴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두 눈을 가렸다. 콧등 위에 비녀를 올려놓은 정우는 두 손 을 놓았다. 볼을 타고 흘러들어온 빛이 비녀 표면에 있는 복잡한 문양을 문질러 광을 내었다. 정우는 고개를 미세하게 좌우로 까딱거렸다. 흔들리는 비녀가 눈꺼풀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 서늘한 느낌이 좋았다. 긴 시간 그렇게 앉아있던 정우가 고개를 숙였다. 비녀는 코를 타고 흘러내려 턱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기다리던 손으 로 비녀를 받은 정우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우는 자신이 무엇을 원 하는지 알고 있었다. 문을 두드린 다음 누군가가 오면 즈믄누리로 가 는 가장 빠른 수단을 준비하라고 외칠 작정이었다. 하지만 문 앞에서 정우는 걸음을 멈췄다. 엉망으로 젖은 눈가와 두 볼을 소매로 쓱 훔친 정우는 분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요청을 들어줄 리가 없다. 손끝이 아팠다. 손을 들어올린 정우는 자신이 손가락이 하얗게 변하 도록 비녀를 꽉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우는 그것을 가슴에 붙였다. 그러자 정우의 머리 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허벅지까지 미치는 긴 머리채가 거추장스러웠다. 정우는 그것을 두 손으로 쥐어올려 목 주위에 감았다. 그리고 보편 상식의 눈으로 보기 엔 무의미하게 보이는 일련의 행동을 취했다. 행동을 끝낸 정우는 확 신을 가지고 손잡이를 붙잡았다. 심호흡을 한 정우는 문을 힘있게 잡 아당겼다. 그곳에 있어야 하는 복도 대신, 정우가 바라던 것이 나타났다. 정우는 짧은 비명 같은 탄성을 질렀다. 문을 꼭 붙잡은 채 정우는 좌우를 돌아보았다. 방 안에는 물론 아무도 없었다. 정우는 씩 웃으 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방은 고요함에 잠겨들었다. 조금 후 문이 다시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제국군의 부위 틸러 달비였다. 틸러는 들어서자 마자 절도 있게 경례를 시작했다. 하지만 경례의 끝마무리는 좀 어정 쩡했는데, 틸러는 자신의 경례를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틸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 전 정우가 했던 행동을 되풀이했다. 좌우를 둘러본 것이다. 그러나 틸러는 아무도 발 견할 수 없었다. 틸러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작게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대답이 없었다. 틸러는 방 안을 돌아다니며 정우를 찾았다. 창문을 내다보고 부속실을 열어보았지만 틸러는 어디에서도 정우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방 가운데로 돌아온 틸러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그 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의아함을 느꼈다. 틸러는 자신이 왜 겁을 집 어먹었는지 생각했다. 대답은 단순했다. 틸러는 들어왔던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뛰쳐나갔다. 제국군은 발칵 뒤집어졌다. 성을 점령하고 있던 가시나무 군단의 군 단장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까지 그 소식이 전달되는 것에 채 10 분도 소요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시나무 군단의 의사전달 체계가 효율 적이라는 증거일 수도 있고 그 소식의 중대함을 나타내는 증거일 수 도 있다. 마지오 상장군은 즉각 규리하성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시키 고 수색을 명령했다. 그 즈음 규리하성의 출입은 이미 엄격하게 통제 되고 있었으므로 정우가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마지오 상장군은 정우가 반드시 성 안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지오 상장군에겐 안된 일이지만, 하늘누리에 있던 엘시는 정우의 서신이 오지 않는 것에 대해 궁금함을 느꼈다. 서신을 받으러 온 엘 시의 몸종 이레 달비에게 마지오 상장군은 못을 씹는 기분을 느끼며 정우가 사라졌음을 알렸다. 이레는 황급히 하늘누리로 올라가 엘시에 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엘시가 정우의 방에 도달한 것은 틸러가 정 우의 부재를 확인했을 때부터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엘시는 시허릭과 몇몇 교위, 그리고 최초 발견자인 틸러 달비 부위 와 함께 정우의 방에 들어섰다. 방안을 일별한 엘시는 탁자 위에 놓 인 서신을 발견했다. "저것은 뭐지?" 시허릭은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우 규리하가 쓰던 편지입니다. 쓰던 도중에 그만둔 것 같습니 다." 엘시는 탁자로 다가가 서신을 들여다보았다. 그 내용을 읽은 엘시는 눈살을 조금 찡그렸다. 정우가 흘린 눈물은 이미 말라있었지만 먹이 번진 자국이나 종이가 운 자국은 선명했다. 엘시는 그것을 그대로 놓 아둔 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편지를 쓰던 도중에 사라졌다면 계획적인 것은 아니겠군. 즉흥적으 로 결심한 것일 수도 있고, 그렇잖으면 침입자가 있었을 수도 있군. 시허릭?" "절대로 침입자는 없었습니다. 대장군님. 문밖에는 병사들이 경계하 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말이기에 엘시는 미소를 지었다. 규리하성은 전투성이었고 그 창문은 활이나 쏠 수 있을 정도였지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넓이 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해 두고 싶어했다. 언제나 말(馬) 냄새와 양파 냄새를 풍기고 다니며 자 신의 아내에게조차 매력적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는 마지오 상장군은, 그러나 일처리에 있어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가 결혼을 결심한 것도, 그리고 엘시 에더리가 규리하 토벌군을 구성하며 참나무 군단과 더불어 가시나무 군단을 주축으로 삼은 까닭 도 그런 성격 때문이다. 시허릭의 성격을 알기에 엘시는 별 기대없이 질문했다. "비밀 통로는?" "이 방의 벽 두께라든지 천장, 바닥을 모두 검사했습니다. 이 방에 는 비밀 통로가 없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엘시는 방을 죽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정우는 이 방에 있어야 해. 그런데 사라졌단 말이군. 정 우가 어르신이 아닌 바에야 홀연히 사라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수색 중이니 곧 발견될 거라 믿 습니다." "쥘칸에겐 연락했나?" 시허릭의 얼굴이 굳었다. 규리하 토벌군에는 가시나무 군단과 참나무 군단 이외에 몇몇 독립 여단이 참여하고 있었고 그 중 쥘칸 장군의 지휘를 받는 엉겅퀴 여단 은 케나린 요새를 점령,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케나린 요새는 규 리하령의 대도시들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 라서 규리하령의 완벽한 통제를 위해선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쥘칸 장군의 관계가 돈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시허릭과 쥘칸은 서로를 자신이 아는 최악의 인물이라고 생각하 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의 불명예에 대해 가장 크게 웃어줄 용의 는 똑같이 가지고 있다. 시허릭은 볼멘 소리로 말했다. "대장군님. 정우 규리하가 성을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결코 없습니 다." "시허릭. 만약 두 시간 전이라면 자네는 정우가 이 방을 빠져나갈 가능성도 결코 없다고 말했겠지. 물론 정우에게는 우리 만큼이나 이 성이 낯설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규리하 가문의 장녀야. 혹 비상 수 단 같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쥘칸에게 연락해서 수색대를 조 직하라고 해. 물론 자네도 그래야할 테고. 서두르게." 시허릭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엘시는 다시 방안을 둘러보 고는 문쪽으로 걸어갔다. 엘시가 손잡이를 쥐려 했을 때였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엘시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문을 바라보았다. 열린 문을 통해 안 으로 들어온 것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여자였다. 한눈 에 알아볼 수 없었기에 누구냐고 물으려 했던 엘시는 그녀의 옷이 눈 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우?"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신음이나 약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엘시는 입을 다문 채 정우의 뒤편을 응시했다. 그곳은 그가 조금 전 걸어왔던 복도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것이 있었다. 그 리고 한번에 알아볼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엘시가 정우의 뒤쪽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려 했을 때 정우가 문을 닫았다. 정우는 엘시를 올려다보았다. "예. 저예요." 엘시는 정우를 바라보다가 손짓으로 그녀를 비켜서게 했다. 정우가 옆으로 물러난 후 엘시는 직접 문을 열었다. 대장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 뒤에는 복도가 있었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엘시 는 잠깐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엘시는 정우에게로 몸을 돌렸다. "라수의 방입니까?" "예?" "정우. 당신은 라수의 방에서 여기로 온 겁니까?" "네. 그래요." 제국군의 장교들은 다시 신음을 흘렸다. 엘시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 쓰며 말했다. "이 방에서 라수의 방으로 바로 갈 수 있습니까?" 정우는 엘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곁을 지나쳐 걸어갔다. 시 허릭과 다른 사람들 사이를 태연하게 걸어간 정우는 서신이 놓여있던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 위에 팔꿈치를 얹은 정우는 두 손을 깍지 껴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엘시가 말했다. "모두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도록."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수교위들, 그리고 틸러 달비 부위는 궁금해 못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장군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이 모두 밖으로 나간 다음 엘시는 문을 닫고 정우에게 걸어갔다. "정우." 정우는 엘시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예." "이해하긴 어렵지만, 이 방에서 지하금고방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겁 니까?" "예. 성 안이라면 어디에서든 라수의 방으로 갈 수 있어요. 그런데 나올 때는 들어간 곳으로만 나올 수 있더군요. 킴의 건물처럼. 그래 서 즈믄누리로는 갈 수 없었던 건가 봐요." 엘시는 당황했다. "즈믄누리로 간다고요?" 정우는 깍지 낀 두 손을 앞으로 죽 내밀며 몸을 의자 등받이에 파묻 었다. 그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온갖 방법을 다 써봤어요. 성주님 서재로 가는 방법, 3층 손님방으 로 가는 방법, 딱정벌렛간으로 가는 방법, 도서실로 가는 방법. 생각 나는 방법은 다 써봤는데 갈 수 없더군요." "여기서 즈믄누리로 곧장 가려고 했다는 겁니까? 제국을 횡단해서?" 엘시의 머리 속이 급박하게 움직였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아이저 규 리하는 즈믄누리로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 딱정벌레로 날아도 한 달은 걸리는 거리에 있는 즈믄누리로 곧장 이동한다는 것은 상식적으 로 말이 되지 않지만, 즈믄누리 자체가 이미 상식적인 장소가 아니 다. 하지만 정우는 부정했다. "그런 방법은 없나봐요." "정리해보겠습니다. 당신은 이 성 안의 어느 곳에서든 곧장 라수의 방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올 때는 들어간 곳으로 나오게 됩니다. 맞습니까?" "생각해 보니 어느 곳에서든 가능한 것은 아니군요. 문이 있는 곳이 라고 해야겠군요." "정말 놀랍군요." "그 정도는 즈믄누리에선 아무 것도 아니예요. 대장군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놀랍군요." 정우는 엘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아니오. 듣고 싶지 않습니다." "궁금하실 것 같은데." "궁금합니다. 하지만 말하지 마십시오. 하늘누리에서 말했듯이 당신 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이유에서 당신이 그 비밀을 간직하길 바랍니다." "그 다른 이유가 뭐죠?" "당신은 언제든 다른 사람들은 갈 수 없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에 하나 불측한 습격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당신에겐 피신 처가 있는 셈입니다." 정우는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 정우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진 못했다. 그리고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대해 환호하지도 않았다. "예.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라수의 방으로 도망치겠어요." "기분이 상하셨군요." "도망칠 곳이 있다는 것에 대해 기뻐할 수는 없군요." "동감입니다. 도망칠 일 자체가 없어야겠지요. 되도록 그런 일이 발 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왜냐니오?" "왜 즈믄누리로 가려 한 겁니까? 탈해가 당신의 서신을 가지고 바우 성주님께 가기로 했잖습니까." 정우는 탁자를 밀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똑바로 서서 엘시를 바라보았다. "대장군님.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네?" "제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비스그라쥬백이 알았다고 말씀하시 고 저를 즈믄누리로 보내주실 거라고 정말 믿으세요? 그럴 리가 없다 는 것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모르세요? 즈믄누리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는 저도 다 알겠는데 요. 편지를 쓰다가 이 바깥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깨달았어요. 저희 아버지는 괴물이 아니에요. 아버지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 만 괴물이 변경백령을 지배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 아버지는 다른 사 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즈믄누리 바 깥에서는 자기 것을 빼앗길 것 같으면 그 상대가 딸이라도 주저않고 죽인다는 말이에요. 그게 이 세상의 방식이죠. 그렇다면 자기와 아무 관련도 없는 여자 한 명 결혼시키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겠지요. 데라 시 백작님은 제가 뭐라고 하건 반드시 저를 결혼시킬 거예요." "당신이 겪어야 했던 일에 대해 큰 유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백작이 당신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라면 당신이 숙고할 시간을 사 십 일이나 줄 리는 없잖습니까." "사순이건 팔순이건 줄 수 있지요. 혼례 준비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당신의 혼례를 관장할 사람은 비스그라쥬백이 아니라 납니다. 그리고 나는 사십 일 후 당신의 답변 을 듣기 전까지는 어떤 준비에도 착수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정우는 엘시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인간보다는 도깨비의 눈빛에 더 익숙한 그녀였지만 정우는 엘시의 눈에서 거짓된 점을 찾 을 수 없었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제 의견을 존중하실 건가요?" "그럴 겁니다." "비스그라쥬백이 아니라 폐하께서 저를 결혼시키라고 명령하셔도 제 의견을 더 존중하실 건가요?" "정우." "아니군요." 엘시는 곤혹스러웠다. 그 곤혹스러움은 익숙했다. 갑작스러운 분노 를 느낀 엘시는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르지 못합니다." "네?" "규리하공. 그런 부당한 조건을 걸어서 당신을 존중하려는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는 일은 바르지 못합니다. 왜 성의를 가지고 당신을 대 하려는 사람을 괴롭힙니까. 당신의 조력자에게 불가능한 일을 부탁하 여 그를 좌절하게 하는 것이 재미있지도, 당신에게 도움되지도 않을 텐데요." "어머, 대장군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한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내 도움을 얻고 싶다면 우선 내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그런 것을 인정하 지 못하는 저 무수한 바보들처럼 굴지 마십시오. 그런 바보들이 오해 를 만들어내고, 그런 바보들이 세상이 원래 각박한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듭니다." "대장군님. 죄송해요. 폐하를 거론한 것은 그냥 해 본 소리였을 뿐 이에요. 그건 제 무력하고 답답한 심정을 말하고 싶어서…… 전 정말 이지 대장군님이 폐하께 대항하면서까지 제 뜻을 따라주길 바란 적이 없어요." 엘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우는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 다. 그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우는 그 분노의 대상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엘시는 정우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 니라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엘시는 자신이 한 말을 들을 대상이 정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 었다. 사과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설명이 지나치게 많이 필요했다. 엘시는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인사 같기도 하고 외면 같기도 한 모 호한 동작이었다. "쉬십시오. 화한을 받을 사람을 있다가 보내겠습니다." 엘시는 뒤로 돌아섰다. 방문 앞에 선 엘시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정우는 똑같은 자세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사이의 시간 : 라수 규리하는 정우 규리하의 종증조부(증조부의 형제)입니다. 그렇 다면 정우의 아버지인 아이저는 라수의 종손(형제의 손자)이 됩니다. 그런데 눈물을 마시는 새가 끝날 무렵의 라수는 형제의 손자가 태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연배였습니다. 흐음. 계산하기 간단하게 눈물 을 마시는 새가 끝날 무렵에 아이저가 태어났다고 가정하지요. 그렇 다면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사이의 시간은 아이저의 나 이와 비슷할 겁니다. 아이저의 나이는? 정우 연배의 장녀가 있을 수 있는 나이.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04 조회수 : 84 피를 마시는 새 2. 돌과 바람 - 4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인 치천제는 몸단장을 끝냈다. 제국의 통치자 는 자신의 손으로 몸단장을 한다. 하늘누리의 무게를 늘이는 것에 열 심인 유수부 사람들도 하늘누리의 거주민을 늘이는 데는 난색을 표하 며, 황제 또한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한 명의 사용인만을 둔 칼리 도백 같은 경우는 좀 극단적인 경우에 속하겠지만 대부분의 하늘누리 고위 인사들은 적은 수의 사용인만을 두며 그것은 황제 또한 마찬가 지다. 치천제가 몸단장을 끝내길 기다리던 황제의 시종장 블레드 백작은 쟁반에 받쳐든 물건들을 들고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쟁반 위에 놓인 물건들 중 하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차갑고 뜨거움을 시각적으 로 볼 수 있는 나가의 눈으로 본 황제는 그 물건이 뜨겁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황제는 그것을 집어올렸다. 검은 모피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가장자리는 거칠었지만, 어떤 물건이 가지는 권위에서 이 망토를 따를 만한 물건 은 드넓은 제국 내에도 별로 없다. 그것이야말로 대호왕의 흑사자 모 피였다. 하지만 황제가 그 망토를 걸칠 때는 단지 권위만을 걸치는 것은 아 니다. 망토를 몸에 두른 황제는 몸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깨 비 감투만큼이나 신비한 그 망토는 자체에서 열을 낸다. 원칙적으로 한계선을 넘을 수 없는 나가인 황제가 한계선 이북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그 망토 덕분이다. 망토를 덮은 황제는 쟁반 위 에 놓인 두번째 물건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쉬크톨이었다. 육친을 베기 위해 제작되는 포악한 검 쉬크톨 은 바로 그런 사명 때문에 치명적으로 예리하다. 달인의 손에 쥐어진 쉬크톨은 돌을 베어낸다. 검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 탐을 내는 칼이지만, 손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비극적인 사명을 달성 한 직후 쉬크톨은 소유자에 의해 부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크톨 의 그 어두운 역사에서 단 한 자루 부러지지 않고 남은 검이 있었다. 바로 황제가 집어든 대호왕의 쉬크톨이었다. 황제는 그 유서 깊은 검을 허리에 착용했다. 실로 위엄에 찬 모습이 라는 평가는, 아마도 역사학자만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 사학자가 아닌 블레드 백작은 위통을 느꼈다. 황제가 가진 이 놀라운 두 개의 장신구는 그 한없는 권위와 경이적인 기능과 함께 착용자를 무뢰배로 보이게 하는 환상적인 효과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탈영한 병사가 안심하고 말을 걸 것 같은 모습이 된 아라짓 제국의 통치자는, 존경하는 황제의 존경스럽지 못한 모습에 괴로워하는 시종 장 블레드의 보필을 받으며 대전으로 향했다. 블레드의 고통은 다행히 길지 않았다. 황제와 그의 최측근 - 이 경 우엔 블레드 백작 - 만이 이용할 수 있는 통로를 통해 대전으로 나아 간 블레드는 자긍심이 충족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옥좌가 놓인 단 아래로는 넓은 방 가득히 많은 관료들이 서 있었다. 산적 두목 같은 황제의 모습에 비하면 오히려 황제처럼 보이는 화려 한 복장의 관료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 은 모습을 취하면 사람의 숫자가 많다는 것 이상의 감동을 불러일으 키게 되는 법이다. 대전 1층 뿐만 아니라 복층으로 되어 있는 2층에 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 얼핏 보아도 백 명은 족히 넘을 사람들이 모 여 있었지만, 숨소리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가 황제가 소음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그들의 공경심을 짐작 할 수 있다. 치천제가 화려한 옥좌에 앉고 사람들이 고개를 든 후에도 소음은 전 혀 들리지 않았다. 준비했던 목록을 들어올린 블레드가 첫번째 접견 자의 이름을 불렀을 때 비로소 낮은 소음이 들려왔다.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걸어나온 첫번째 접견자는 머리를 박박 깎은 승려였다. 어디에도 없는 신을 섬기는 사찰들의 총본산인 하인샤 대 사원에서 온 니존 대덕은 승려의 예에 따라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치천제가 말했다. "듣겠다." 니존 대덕은 의례적인 인사를 한 다음 가지고 온 문제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대전에서 황제는 과도한 수사를 용납하지 않았다. 다른 접 견자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수사에 대한 황제의 혐오감은 퍽 이나 유명해서 접견을 앞둔 사람들은 요점을 빨리 말하는 방법을 따 로 연습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니존 대덕은 자유무역당원이나 쓸 만한 어투로 자신의 요구 사항을 설명했다. 니존 대덕은 먼저 발케네공이 건설 중인 스카리 요새에 대해 간략히 거론했다. 암살공이 자기 땅에 요새를 짓는 일이 하인샤 대사원과 무 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 하던 치천제는 그 요새가 수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로 공사를 위해 하인샤 대사원의 소유지를 침범했음을 듣고는 사태를 이해했다. 발케네공은 하인샤 대사원이 보낸 항의를 무시했 고, 그래서 대사원은 황제에게 그 사실을 탄원하기 위해서 하늘누리 로 온 것이다. 치천제는 하인샤 대사원이 자기 재산을 보호받길 원한다고 착각하지 는 않았다. 그렇다면 황제에게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토지 때문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당하는 하인샤 대사원에게 그 먼 곳 에 있는 땅은 아무런 매력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인샤 대사원이 원하는 것은 적당한 값을 받고 발케네공에게 그 땅을 파는 일일 것이 다. 틀림없이 거래가 오갔을 텐데도 이 문제가 황제의 대전까지 왔다 면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발케네공이 구매에 관심이 없는 것이 다. 암살공에게 그 땅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하인샤 대사원이 부 당한 가격을 요구했을 리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본 치천제는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모든 고려에도 불구하고 치천제가 대 답했을 때, 사람들은 니존 대덕의 말이 끝났을 때와의 시간 간격을 느끼지 못했다. "명백한 재산권 침해가 인정된다. 발케네공은 하인샤 대사원의 땅을 구입하든지, 토지 이용료를 지불하든지, 그렇잖으면 우회로를 건설해 야 할 것이다. 수로 공사는 즉각 중단하며 하인샤 대사원과 발케네공 양자가 만족할 수 있는 시점까지 재개될 수 없다. 이것이 황제의 권 고다." 언제나 빠른 치천제의 대답은 사람들에게 황제가 즉흥적이라는 인상 마저 주고 있었다. 황제의 일처리 또한 빨랐기에 그런 인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순간 자신들이 들은 황제의 권고를 천 오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암살공 또한 듣고 있을 것이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즉각'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즉각이 었다. 니존 대덕 또한 그런 경이적인 일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이 무엇인지 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니존 대 덕은 많은 사람들이 비밀이 있으리라 자신있게 지목하는 단을 바라보 았다. '정말 저 아래쪽이 비어있고 거기엔 세번째 벽난로가 있는 것 일까?' 상념에 잠기는 바람에 니존 대덕은 황제를 약간 언짢게 했다. 그리 고 그런 경우 치천제는 직설적이다. "물러가라." 니존 대덕은 화들짝 놀라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가 니존 대덕의 의심을 알았다면 즐거워했을 것 이다. 세번째 벽난로방이 황제의 발 아래에 있다는 소문을 조장한 사 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에 대한 데라시의 우위는 거기까지였다. 황제가 접견자들과 만나던 그 시각 데라시는 벽난로방 에 있었지만 그가 있는 곳은 두번째 벽난로방이라 불리는 그 자신의 방이었다. 첫번째 벽난로방은 물론 황제의 거처였고, 비밀에 싸인 세 번째 벽난로방의 소재에 대해서는 데라시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정 도밖에 알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거기 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 소재는 모르는 것이 다. 데라시는 세번째 벽난로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해 보았다. 세번째 벽난로방은 탁자들이 많이 놓여있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방이 다. 여상스레 볼 수 있는 방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방이지 만 그 방에서 처리하고 있는 업무를 생각하면 오히려 작다 할 수 있 다. 거대한 벽난로가 있는 벽을 제외한 다른 벽에는 단지들이 가득 놓여있는 선반들이 설치되어 있다. 벽난로 이외에는 조명이랄 것이 없어서 나가가 아니고선 그 모든 시설을 알아보긴 힘들 것이다. 다행 히도 그 방에 있는 자들 중 인간이나 도깨비, 레콘은 한 명도 없다. 데라시는 계속 상상했다. 황제가 니존 대덕에게 말한 직후 세번째 벽난로방에서는 한 명의 나가가 벽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단지 하나를 방 가득히 놓인 탁자들 중 하나로 가져온다. 나가는 주저없이 단지의 내용물을 탁자 위에 쏟아놓는다. 단지 안에서는 뱀들이 쏟아져 나온다. 서로 뒤엉켜 쏟아져나온 뱀들은 꿈틀거리며 흩어지고 그 중 몇몇은 목을 빳빳하게 쳐든 채 주위를 경계한다. 당장이라도 뱀들이 탁자 아 래로 쏟아질 것 같았지만 방 안에 있는 나가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 다. 단지를 가져온 나가조차 태연한 동작으로 빈 단지를 탁자 가장자 리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나가는 탁자 위에서 구불거리는 뱀들을 응시한다. 강력한 정신억압이 시작되자마자 뱀들은 움직임을 멈춘다. 한자리에서 미세하게 떨던 뱀들은 잠시 후 기묘하게 움직인다. 빠르 게 움직였다가 멈추고, 다시 뒤엉켜 탁자 위에 무늬를 그리는 뱀들의 모습은 마치 명필가가 휘둘러대는 붓자국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것은 일종의 문자다. 데라시는 상상의 영역을 바꿨다. 비스그라쥬백은 멀리, 암살공이 지배하는 엄혹한 땅 발케네를 상상 했다. 암살공의 성 모처에서는 세번째 벽난로방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모인 자들 또한 탁자 위 에 놓인 뱀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두 무리의 뱀들은 똑같이 움직인다. 세번째 벽난로방의 율모기가 몸을 뒤틀 때 발케네 에서는 밀뱀이 몸을 뒤트는 것처럼 약간의 세부 사항은 다를 수 있겠 지만 뱀들이 그려내는 무늬는 똑같다. 읽을 수 있는 자들에게 그 무 늬는 명확한 의미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발케네에 있는 자들은 뱀의 무늬를 보며 황제의 권고를 알게 된다. 데라시는 비늘이 약간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데라시는 뱀부리미들 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 만 동감하긴 어려웠다. 뱀부리미들의 일과 직업 정신에 대해 고민해 보는 대신, 데라시는 자신에게 보내어지는 황제의 니름에 집중했다. [락토가 그 땅을 원하면서도 구입하는 것을 꺼린다면 대답은 하나 다. 그가 구입한 땅은 봉지가 아닌 락토 빌파의 사유지가 될 터이니 짐의 행정관이 락토 빌파의 재산 파악을 위해 들어가야 한다. 락토는 발카네에 짐의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의미다. 자기 땅 에 상전의 대리인을 들이지 않는 것이 락토에게 자존심의 만족 이외 에 무엇을 주는지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데라시는 붓을 들어 치천제의 니름을 받아적었다. 세번째 벽난로방 의 뱀부리미들이 전령의 역할을 담당한다면 두번째 벽난로방의 데라 시는 비망록 기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계속 황제의 니름이 전달되었다. 대전의 옥좌에 앉은 황 제는 접견자들의 탄원이나 요청, 제안 등에 대해 필요한 권고나 황명 을 결정했고 그것들은 곧 뱀부리미들에 의해 사어(蛇語)로 바뀌어 제 국 전역으로 전달되었다. 그 광경의 모식도 같은 것을 그려본다면 굉장한 장관일 것이다. 그 모식도는 세번째 벽난로방으로부터 제국 곳곳을 향해 뻗어있는 무수 한 거미줄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거미줄들의 길이는 수십에서 수천 킬로미터까지 다양하다. 황제의 의지는 그 거미줄을 흔들리게 하고 거미줄의 반대편 끝에 있는 영주와 행정관들은 황제의 의지를 즉각적으로 실체화시킨다. 무려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에서! 따라서 제국의 모든 신민들은 황제와의 정치적 거리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황제는 제국 전체를 동시에 다스리므로. '아냐.' 데라시는 생각했다. '동시는 아니야. 그렇다면 접견자들은 필요없겠지.' 비스그라쥬백의 생각대로였다. 사어를 읽을 수 있는 사 람은 충분했다. 사어 해독은 교육으로 터득할 수 있는 능력이므로. 하지만 사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사어를 쓰는 뱀부리미가 되기 위해선 나가들 가운데서도 희귀한 정신억압의 능력을 선천적으 로 갖춰야 한다. 그런 능력을 갖추었으며 동시에 뱀부리미에게 필요 한 다른 자질도 갖추고 있는 자들 중 벽난로의 온기에 의지하여 한계 선을 넘을 수 있었던 자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그 소수의 뱀부리미 들은 모두 세번째 벽난로방에 있다. 따라서 거미줄을 흔드는 쪽은 황 제뿐이다. 거미줄 반대편의 신민들은 황제의 뜻을 읽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뜻을 황제에게 보낼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접견자들이 황제에 게 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거리감은 여전히 없다. 제국의 수도는 이 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국에는 변두리가 없다. 어느 지점 을 변두리라 명명한다 해도 그곳은 언제든 수도 인접 도시가 될 수 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뱀부리미도 아닌 그 가 한계선을 넘어 나가들이 살 수 없는 땅까지 와서 확인한 것은 그 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데라시가 보는 아라짓 제국의 모습은 완벽했 다. 제국은 자신의 의지를 세상 모든 곳에 순식간에 전달할 수 있으 며, 또한 필요한 곳 어디라도 자신의 중심을 보낼 능력을 가지고 있 다. 그런 체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집단이 유사 이래 오직 하나뿐이 기에 아라짓 제국 체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체제는 무한한 가능 성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궁의 대전에 선 도르 헨로 자작은 제국에서 아무런 가능성 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전에서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는 물건을 소지하는 것이 불가능했 지만 황제는 도르 헨로 자작에게 지팡이 소지를 허가했다. 도르 헨로 자작은 지팡이 없이는 서있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사나운 산진이를 팔뚝에 얹고 말을 달리거나 호쾌하게 바둑돌을 내리치던 자작의 모습 을 또렷하게 기억하던 사람들은 떨리는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 게 걸어가는 자작을 보며 동정심을 느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산공부 사 파라말 아이솔이 속삭였다. "도르 자작 기절하겠는데요. 형님. 끝까지 걷지도 못할 것 같습니 다." 파라말 아이솔의 형이자 율형부사인 사라말 아이솔은 진지하게 말했 다. "내 생각에도 기절한 채 걸으면 이상할 것 같아." 언제나처럼 파라말은 고개를 홰홰 내둘렀다. 사람들의 기대 섞인 오 해에도 불구하고 파라말은 사라말과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 아 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형부사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세상에 한 사람 쯤은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그들의 바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파라말은 다시 사라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옹골차기가 차돌 같던 이가 저렇게 한 순간에 썩은 허수아비 꼴이 되는군요. 자식이란 그런 건가 봅니다. 부냐 헨로에 대한 재심 청구 가 기각된 이상 도르 자작에겐 이것이 마지막 수단일 겁니다. 어떻게 든 성심을 움직여주면 좋겠군요." "아아. 맞아. 기절한 채 걸으면 폐하께서도 동요하실 거야. 그런 뜻 이었구나?" 파라말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도르 헨로를 돌아보았다. 파라 말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지만 다행히 도르 자작은 끝까지 쓰 러지지 않고 걸어갔다. 황제가 말했다. "듣겠다." 하지만 자작은 곧장 말하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딱 한 처지를 고려한 듯 치천제는 예외적으로 기다렸다.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도르 헨로는 떨리는 두 손을 지팡이 위에 얹어놓은 채 힘겹 게 말했다. "지극히 고귀하신 폐하. 폐하의 미천한 종복 도르 헨로가 돈수백배 코 아뢰옵니다." 치천제는 또다시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사어에 대한 거부 감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도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유언인 양 힘 겹게 말했다. "폐하.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한 번이라 말하 는 자 많사옵니다만, 제가 보기엔 도깨비가 아니라도 사람의 인생은 두 번입니다. 처음에는 자식으로 살고, 그 다음엔 부모로 살게 됩니 다. 그 둘은 한 사람의 두 가지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두 사람 입니다." 주위를 둘러본 파라말은 그들 중 누가 자식을 가진 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동감 어린 부모들의 시선 속에서 도르 가 말했다. "존경하는 폐하. 제 여식이 참으로 씻지 못할 대죄를 범했사옵니다. 제 손으로 직접 중벌을 내리도록 윤허하여 주시길 간청드리는 것이 폐하를 섬기는 신하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약한 아비의 마음 이 저를 옹졸하게 만듭니다. 평생을 부끄러움 없이 살길 바랐건만, 이제 저는 부끄러움 속에서 천박해진 자신을 보게 되었사옵니다. 제 여식이 태위청에 끌려간 후 저는 매일처럼 뼈가 부서지고 장이 끊어 지는 고통을 맛보았사옵니다. 이제 저는 옹졸하고 천박한 아비일 뿐 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비로서 말하겠사옵니다. 제 여식은 제 목숨입 니다." 도르 자작의 눈에 눈물이 영글었다. 도로는 흐느끼며 말했다. "제 여식이 저지른 죄를 사해달라 요청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죄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 근원을 따져야 할 것입니다. 자녀의 죄는 결국 그 부모의 가르침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디, 폐하. 저로 하여금 제 여식의 벌을 대신하게끔 허락하소서. 부디 제 것일 수 없는 작위와 봉급을 반납하고 딸을 잘못 가르친 죄수로서 벌을 받 도록 하여주소서." 파라말은 코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산공부사가 아는 도르는 자 신의 작위를 사랑했다. 그것은 명예욕이나 권력욕과는 다른 것이었 다. 명예욕이나 권력욕은 타인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도르에게 타인 은 필요없었다. 도르는 자작으로서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을 즐겼을 뿐이다. 그런 도르 헨로가 작위를 포기하고 딸의 벌을 대신하게 해달 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황제는 세번째의 예외를 보여주진 않았다. 도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치천제의 대답이 시작되었다. "비록 짐에게 자식이 없으나, 그대의 말에 담겨 있는 절절한 진심은 짐에게도 부모와 자식 간의 비할 데 없이 귀중한 인연의 무게를 짐작 케 하는 바가 크다. 도르 헨로." 도르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그러나 황제는 준열하게 말했다. "그러나 신상필벌은 치도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상을 대신 받는 자가 있을 수 없듯 벌을 대신하는 것 또한 부당하다. 그대가 딸을 사 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야기한다면, 짐은 그대의 철없는 딸이 가 벼이 위험에 빠트린 무수한 장병들의 어머니들을 말하겠다. 그대의 딸이 그대의 목숨이라면, 장병들 또한 그 어머니들에겐 목숨이다." 도르 헨로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황제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선고했다. "따라서 짐은 그대의 해괴하기까지 한 요청을 거부한다. 물러가 근 신하라. 이것이 황제의 대답이다." "폐하!" "물러가라." 도르는 물러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몸을 휘청거리면서 도르는 외쳤다. "폐하. 부디 허락하여 주소서. 딸의 벌을 대신하게 하여 주소서!" 치천제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파라말 아이솔의 몸이 움찔했다. 치천제의 동작은 격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문득 파라말은 치천제가 진짜 화를 낼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폐하께서는 도르 헨로가 자신의 사사로 운 정을 제국법 위에 놓으려 한다고 여기실 수 있다.' 위험했다. 시 대 착오적인 충성 서약을 고집하다가 죽은 자들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도르 헨로 또한 치천제의 분노를 느낀 듯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애타는 심정으로 바라보던 파라말의 시선이 도르 헨로의 지팡이에 멈추었다. 지팡이를 쥔 도르 의 손 모양새가 좀 이상했다. 그 모양새를 살피던 파라말의 가슴이 철렁했다. '지팡이 안에 수상한 것이 들어있다!' 파라말 아이솔은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 때 누군가의 손 이 파라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뒤를 돌아본 파라말은 형이 자신을 붙잡은 것을 알게 되었다. 파라말이 황제 시해라는 말을 외치려 했을 때 사라말이 실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만세!" 동생의 손을 나꿔챈 사라말은 앞으로 돌진했다. 파라말은 발목을 접 질릴 뻔하며 그 뒤를 따랐지만, 똑바로 서지는 못했다. 사라말이 다 시 그를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쓰러질 것을 각오한 파라말은 눈을 질 끈 감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충격은 오지 않았다. 파라말은 눈을 떴 고 형의 손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라말은 양팔을 옆으로 쭉 뻗고 오른손으로 동생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자 신이 처한 상황을 힘겹게 깨달은 파라말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 나 사라말이 급하게 손을 잡아당겼기에 파라말의 비명은 삼켜지고 말 았다. 도르 헨로는 자신의 옆에 춤을 추는 아이솔 형제를 보며 다른 사람 과 마찬가지로 기겁했다. 사라말은 파라말의 두 손에 깍지를 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채 빙글빙글 돌았다. 꽤 즐거워 보였지만 파라말은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멈췄다간 손등이 뒤로 꺾일 판국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형을 따라 돌며 파라말은 애처롭게 말했다. "형님! 대관절……" "살아야 딸을 구합니다." 파라말은 흠칫 놀라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옆을 보고 있 었다. 형의 눈길을 따라간 파라말은 뻣뻣하게 굳은 모습으로 서있는 도르 헨로 남작을 발견했다. 파라말은 뭔가를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곧 형의 손이 그의 허리를 나꿔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시 쩌렁쩌렁 울리는 율형부사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국 만세! 오오, 아라짓 만세!"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온갖 소리를 내지르며 형제에게 달 려들었다. 그 때 그의 머리 위로 뭔가 엄청난 것이 휙 날아갔다. 코뿔소가 머리 위로 날아간다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 다. 아이솔 형제들을 뜯어말리려 애쓰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대전에 서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엄청난 기운에 놀라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다. 돌풍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 황제 앞에 사뿐히 내려선 것은 금군 부악타였다. 오뢰사수의 일원인 그 용맹한 레콘은 대전에서 소 음이 들리자마자 지체없이 뛰어든 참이었다. 벼슬을 꼿꼿이 세운 부 악타는 우람한 두 팔을 벌린 채 황제에게 다가오는 어떤 위협이라도 막아내겠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며 대전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부악타 는 곧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그의 시야 어디에서도 위험의 징후는 보 이지 않았다. 다만 애처롭기까지 한 모습으로 엎어져 있는 사람들과, 그 가운데서 동생의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춤을 추고 있는 율형부사 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은 부악타의 상상력을 가혹 하게 고문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부악타에게 황제의 명령이 들려왔 다. "부악타. 말려." 부악타는 황명을 듣자마자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부악타는 이 존경 받는 대신들의 광태를 어떻게 저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부악타는 아무렇게나 행동했다. 그는 물건 들어올리듯 율형부 사와 산공부사의 뒷덜미를 붙잡아 나꿔챘다. 한 손에 한 명씩 대신을 들어올린 부악타는 황제에게 돌아섰다. 사라말은 그 때까지도 기쁨에 겨워 황제와 제국의 영광을 말하고 있었다. 부악타는 그가 울음을 터 뜨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치천제는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흔들어." 꼿꼿하게 서있던 부악타의 벼슬이 수그러들었다. 부악타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표정으로 사라말을 한 번 본 다음 그를 위아래로 흔들 었다. 곧 사라말이 조용해졌다. 삐뚜름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 던 치천제가 말했다. "율형부사." 대전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서서 두 형제를 바라보았 다. 사라말은 어지러움 때문에 조금 늦게 대답했다. "예. 폐하." "상황을 알고 싶군." "황제 폐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짐에 대한 그대의 애정에 감동하고 싶지만, 그걸 꼭 지금 춤으로 표현해야 했나?" "노래를 못 부릅니다." 사람들의 침묵 사이에서 익살맞은 표정의 소음들이 하나 둘 비져 나 왔다. 그 소음들은 뒤엉켜 알아듣기 힘든 불협화음을 구성했고 조금 후 어 떤 유서 깊은 동작도 참여시켰다. 주위를 둘러본 파라말은 머리 옆에 손가락을 가져가 빙글빙글 돌리는 사람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춤으로 표현해줘서 고맙군. 짐도 노래엔 조예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창의력을 시험당하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터져나오려 는 웃음을 참기 위해 사람들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 다. 시뻘겋게 변한 얼굴 위로 핏줄이 탱탱 솟아오른 그 모습들은 어 찌 보면 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황제가 말했다. "기쁨조차도 표현하지 않으면 심화가 되는 법. 짐은 제국에 대한 참 을 수 없는 애정을 거침없이 표현한 율형부사의 용기와 실행력에 찬 사를 보낸다." 이제 사람들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바뀌었다. 몇 명은 당장 쓰러질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율형부사와 산공부사가 대신의 체통과 대전의 위엄을 손상시켰음을 묵과하긴 어렵다. 각자 태오회, 그리고 다음 번 지급되는 봉급을 절반으로 삭감한다. 태형은 금군 구레가 맡도록. 부 악타는 구레에게 두 부사를 데려가라. 두 부사의 형벌은 기록에 남기 지 않는다. 이것이 황제의 명령이다." 그리고 치천제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접견이 끝났으니 대전 회의를 시작해야 할 터이지만, 황제는 중요한 대신 두 명에게 피치 못할 사 정이 생겼기에 대전 회의를 잠시 연기하기로 했다. 치천제는 다 죽어 가는 블레드 백작의 보필을 받으며 떠났다. 황제가 대전을 떠나자마 자 여기저기서 엉덩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형부사와 산공부사는 폭소와 야유, 그리고 엄청난 질문들을 받으 며 대전 밖으로 끌려갔다. 부악타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은 아 무도 못 따라올 만큼 빠르게 달리는 일이었다. 덕분에 아이솔 형제는 멀미를 일으켰다. 주위가 좀 조용해진 것을 깨달은 파라말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단하십니다. 형님." 사라말은 멀미 때문에 반쯤 혼절한 상태여서 동생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파라말이 계속 말했다. "조금 전에 깨달았습니다." 듣고 있는 부악타를 고려하여 파라말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말은 파라말이 뭘 깨달았는지 알 수 있었다. 파라말이 그제야 깨 달은 것은 황제 시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모든 성인 나 가와 마찬가지로 심장을 적출한 치천제를 죽이는 것은 매우 힘들다. 최소한 쇠약한 인간 노인의 칼에 치천제가 죽을 일은 없다. 도르 자 작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사라말은 황제 시해가 아니 라 자살 시위를 막기 위해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파라말은 형의 상황 판단에 감탄했다. 하지만 투덜거림을 억누르긴 힘들었다. "그렇더라도 이게 무슨 개망신입니까. 좀 상식적인 방법을 쓰실 순 없었습니까? 아버님께서 이 소식 전해들으면 형님을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젠장. 봉급도 삭감당했잖습니까." 사라말 아이솔은 누군가에게 허리를 붙잡혀 들려가는 사람이 지어보 일 수 있는 가장 준엄한 얼굴로 동생을 노려보았다. "아우야. 네 봉급이 그리도 중요하더냐? 내 생각에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 것 같다." 파라말은 당황했다. 그는 몇 푼의 돈보다 남작의 목숨이 훨씬 중요 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이며 다만 불평을 좀 해본 것 에 불과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라말은 동생이 변명하도록 내 버려두지 않았다. "넌 당연히 내 봉급부터 생각했어야해. 그러니 네 봉급 나한테 다 오. 간신히 원상복구 되겠군." "형님!" 탈해 머리돌은 뻐끔이의 누름쇠를 눌러 연초를 점화시켰다. 연기를 가득 빨아들인 탈해는 볼을 부풀린 채 한 동안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큰 입을 벌려 연기를 뭉게뭉게 뿜어내었다. 탈해는 연기들 중 일부가 부서져 촛불에 휘말려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엘시 백작은 고개를 들어 탈해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탁을 내려다보 았다. 그곳에는 대장군에게 보내어진 보고서들과 함께 정우 규리하가 보낸 서신이 놓여 있었다. 엘시가 그것을 탈해에게 내놓은 것은 좀 전의 일이었고 탈해는 아직 그것을 집어들지 않았다. 엘시는 손가락 들을 엮어 서탁 위에 얹었다. "왜 확신하는 거지?" "저도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요." "자네도 했다고?" "예. 정우가 즈믄누리를 떠난 직후였을 겁니다. 정우가 보고 싶어서 성주님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혹 즈믄누리에서 라수의 방으로 이 동하는 방법이 없냐고. 라수의 방도 한 때는 즈믄누리의 일부분이었 으니까 제 생각엔 가능할 것 같았거든요." "그렇다면 정우는 역시 도깨비처럼 생각한 것이군. 그렇잖으면 자네 처럼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바우 성주님은 뭐라고 하셨 지?" 탈해는 다시 연기를 잔뜩 뿜어내었다.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허락이 없고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신께서 그런 일을 허 락해주실 리가 없다고 덧붙이셨지요." 엘시는 의아해했다. 탈해가 거론하는 여신은 도깨비를 돌보는 신이 아니다. "왜 레콘의 여신께서 허락하셔야 된다는 거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성주님께서는 그렇게만 말씀하셨으니까요." 엘시는 조금 고민하다가 곧 그것을 떨쳐내었다. 신학은 그의 최대 관심사가 아니었고 엘시는 실제적인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규리하성의 지하금고방과 즈믄누리 사이의 연관이 없다면 아이저 규리하가 즈믄 누리로 도피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 때 탈해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렇다면 정우는 즈믄누리로 가고 싶어했다는 말이군요. 결혼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요." 투명하게 흘러내리던 촛농이 하얗게 굳었다. 엘시는 흔들리는 촛불 이 서탁 위에 어지러이 뿌리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강압에 의해 결혼하게 될까봐 걱정한 거야. 나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설명했고."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결혼할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쨌든 그녀도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하더군." "그 이야기를 했군요. 정우는 자기가 아이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엘시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탈해는 무의미해 보이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실제로 아이를 겪어본 다음에 내린 결론이 아니라는 겁니다. 뭐, 정우가 아이들을 겪은 후에도 좋아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 정 우가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일종의 환상입니다. 저희들은 정우가 아이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지?" "도깨비불 때문이지요." "아. 그렇군." "예. 말 하는 법을 갓 터득한 아이들이 얼마나 말을 많이 하는지는 각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불을 다루는 법을 터득한 도깨비의 아이들 도 마찬가지지요. 불장난이 한이 없습니다. 도깨비들끼리야 아무런 위험이 없습니다만, 정우가 그런 불장난을 당한다면 끔찍한 일이 일 어나겠지요." 탈해의 음색이 어두웠다. 아이들과 놀고 싶어하면서도 접근을 금지 당한 정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엘시도 동정심을 느꼈다. "안됐군. 하지만 자기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것은 처녀들의 권리일 테지. 정우가 결혼과 자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은 결혼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는 않아. 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녀야. 그러니 자네는 이 편지를 바우 성주님께 가져가 야 해." 탈해는 엘시가 가리킨 서신의 피봉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탈해에게 익숙한 글씨로 친전이라 적혀 있었다. 탈해의 눈썹이 좌우로 쳐졌다. "솔직히, 성주님께서 정우가 결혼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실까봐 겁 납니다." "그런가." "폐하께서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죠? 누구는 억지로 결혼시키고 정인이 있는 누구는……" 탈해는 자신의 입을 원망하며 엘시의 안색을 살폈다. 엘시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경박하게 입을 놀렸습니다." "탈해. 사과는 내 제국이 부냐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듣겠다고 했 어." "제국이 어떻게 부냐를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냐는 지금 제국 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풀려나야 제국을 위해 봉사하든 지 말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더욱 풀려나야지요. 기회 가 주어져야 합니다." "나는 갇혀있지 않아. 부냐가 제국에 봉사하지 못한다면 내가 하면 돼." 탈해는 문득 어떤 의심을 느꼈다. 탈해는 솔직하게 그 의심을 말해 보았다. "정우가 결혼하는 것이 제국에 도움되는 일입니까?" "주인을 잃은 이 땅에 가장 도움 되는 일은 조속히 새 주인을 주는 것 아니겠나? 정우가 통치에 관심이 있었다면 폐하께선 그녀를 규리 하의 통치자로 임명하셨을 거야. 하지만 정우가 원하지 않으니 그 남 편에게 맡길 수밖에 없지. 정우가 통치도 거부하고 결혼도 거부한다 면 도대체 의무를 뭘로 생각하는 거냐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 안 그런가?" "그게 왜 정우의 의무입니까? 정우가 이 땅과 가진 인연은 여기서 태어났다는 것 뿐입니다. 정우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오히려 즈믄누리일 겁니다." "즈믄누리는 정우를 규리하로 보냈어." "그건 바우 성주님께서……" "바우 성주님이 즈믄누리의 의지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말할 건가?" 탈해는 할 말이 없어졌다. 신경질적으로 뻐끔이를 빨던 탈해는 이미 연초를 다 태웠음을 알게 되었다. 누름쇠를 눌렀지만 뻐끔이는 쇠 부 딪히는 소리로 딸꾹질을 할 뿐이었다. 여섯 대를 다 피운 것이다. 탈 해는 섬세하지 못한 동작으로 뻐끔이를 품 안에 쑤셔넣었다. 그 모습 을 바라보던 엘시가 말했다. "탈해. 종족이나 성별, 부모나 고향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 어. 그것들은 그냥 받아들여야 해. 그것들이 주는 이익과 마찬가지로 손해도. 그런 손해들에 대해 괴로워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손해 를 줄이거나 혹은 손해를 이익으로 바꾸는 일을 생각하는 쪽이 낫겠 지. 정우도 마찬가지야. 정우는 반역자가 될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 어. 하지만 나는 정우에게 그것에 대해 괴로워 하거나 다른 이들을 원망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상황을 개선하도록 애쓰라고 말하고 싶어. 그리고 자네에게도 정우가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말하고 싶군. 아버지를 부정하고 즈믄누리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겠 지만, 규리하의 차기 지배자의 아내가 되어 폐하께 봉사하는 것도 또 한 방법이야. 나는 후자를 지지하네. 전자가 바르지 못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은 아니야. 전자의 경우 정우가 서약지지파처럼 보일 수 있 기 때문이야." "네? 정우는 충성 서약에 대해서는 아무 의견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사람들의 눈에는 규리하의 통치자라는 엄청난 지위를 포기하는 정우가 이상하 게 보이겠지. 그리고 그런 이들은 정우가 그 부친처럼 서약을 지지하 기 때문에 황제가 내린 지위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겠지. 그렇 게 된다면 정우는 물론이거니와 정우를 후원하는 즈믄누리에까지 피 해가 가게 될 거야." "어이구, 말도 안됩니다!" "맞아.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공정하게 말하고 싶으니 전 자의 좋은 점도 거론해야겠군. 결혼을 거절하고 즈믄누리로 간다면 정우는 그 아버지에게 공격당하지는 않겠지." 탈해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장점이라는 겁니까?" 엘시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서신을 집어들 었다. 엘시는 그것을 탈해에게 내밀었다. "가게. 결정은 정우가 할 거야. 우리는 그녀의 결정까지 대신해줄 필요는 없어. 그래서도 안되고. 다만 정우가 요구하는 정보들을 제공 하려 애써야 할 거야. 그것이 바른 일이겠지." 거부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탈해는 상당히 수긍하게 되 었다. "그 말씀이 맞군요. 결정을 대신하려 해서는 안되겠지요." 탈해는 서신을 받아들었다. 깊은 밤, 갈바마리로를 따라 걷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그 걷고 있는 모양새가 꽤 독특했다. 보폭이 채 한 뼘이 될까 말까 했고 발디 딤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쇠못을 잔뜩 뿌린 바닥을 걷는다면 비슷 한 모습이 될 테지만 갈바마리로에는 쇠못은커녕 보행자들에게 긴장 을 요구하는 가축의 배설물조차도 없었다. 따라서 그 걸음걸이를 수 상하게 여긴 유수부의 야경꾼들이 계속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하지만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접근했던 야경꾼들은 더 큰 의문만 가 지고 물러나게 되었다. 그 묘한 걸음걸이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걸 음걸이가 국정의 미묘한 운영에 의해 발생한 부득이한 결과라고 설명 했다. 야경꾼들은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 중 율형 부의 수장과 산공부의 수장을 의심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섯번째의 야경꾼들이 예를 표하고 물러나자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 솔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랑스럽게 말하기는 힘든 체험 때문에 의자에 앉기 힘들어진 두 형 제는 그 날의 남은 업무를 서서 처리했다. 그리고 그들의 책상은 서 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집중력을 저하시키는 그런 조건들에 시시때때로 머리끝을 쭈뼛하게 만드는 신체 어느 곳의 불쾌 한 감각까지 더해지자 그들의 귀가는 꽤 늦어지게 되었다. 다시 걸음을 떼려던 산공부사 파라말은 형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을 깨달았다. 파라말은 질문하는 표정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그 러자 사라말이 손을 들어 하늘 한 곳을 가리켰다. 달이 밝았고 밤하늘은 푸르렀다. 형이 가리킨 곳을 본 파라말은 딱 정벌레 한 마리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몽화각의 도깨 비들 중 한 명이 야간 비행에 나서는가 보다고 생각한 파라말은 형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자 사라말은 딱정벌레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다 는 것을 지적했다. 다시 딱정벌레를 돌아본 파라말은 그 상승 속도가 굉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율형부사와 산공부사가 몸 모처의 고통도 잊은 채 난생 처음보는 딱 정벌레의 속도에 감탄하고 있을 때 그들의 발 아래로 수백 길을 내려 간 곳에서는 제국군 부위 틸러 달비가 성벽을 걷고 있었다. 틸러 달비 부위의 원래 임무는 가시나무 군단 3 대대 1 중대 2 소대 를 지휘하는 것이었다. 제국군 편제에서 인간 보병을 기준으로 할 때 소대는 200 명으로 구성되며, 그것은 4 개 분대, 20 개 반에 해당한 다. 따라서 틸러 달비 소대장의 휘하엔 네 명의 수전사와 스무 명의 상전사가 있다. 이 인원은 교위급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는 사소한 업 무들을 충분히 처리할 만한 인력이다. 따라서 다른 제국군의 부위들 과 마찬가지로, 전투 상황에서 최일선의 돌격대장인 틸러 달비는 비 전투 상황에선 가용 시간이 많은 편이다. 물론 군대는 그 조직원들을 절대로 무위도식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노는 부위를 돌려라'라는 은어로 표현되는 제국군의 전통적인 불문율에 따라 틸러 달비는 원래 임무 이외의 다른 임무를 맡고 있었다. 틸러의 현재 임무는 그 스스 로 체포한 중요 포로인 비셀스 규리하를 보좌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규리하성이 상냥한 달빛과 부드러운 고요 속에 잠든 그 시각 틸러는 제국군의 또다른 불문율 '열심히 도는 놈이 바보'에 따라 농 땡이를 부리기로 결정했다. 물론 틸러는 누군가에게 들려줄 일이 없 길 바라는 이유 하나 쯤은 가지고 있었다. 틸러의 소대는 그날 밤 성 벽의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틸러는 소대장으로서 소대의 근무 태 도를 점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하면 야식거리 징발이 아 니냐는 지적은 틸러를 많이 당황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도 올 리가 없는 성벽 위에서 한가롭게 야참을 먹으려 했던 하 전사들에겐 봉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파지 는 병사들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성벽 위에 서있어야 하는 고충도 짐작하기에 틸러는 일부러 수색을 대충 했다. 하전사들이 자신을 욕하며 씹을 것을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러는 성벽을 반도 돌지 않은 시점에 상당량의 군것질거리 를 획득했다. 틸러는 걸음을 멈추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구운 옥수수를 입 안 가득히 집어넣고 우물거리던 틸러는 묘한 소리 를 들었다. 틸러는 씹던 동작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후 틸러는 그 소리가 누군가가 시험 삼아 부는 대금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제국군은 취침 시간에 소음을 내도록 허락하지 않 는다. 소리가 들려오던 곳을 가늠하던 틸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음 순간 틸러는 계단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정우의 방이었다. 그리고 틸러가 알기로 정우에겐 분명히 대금 이 없었다. 틸러 달비가 제국군 정규 훈련 과정에 없는 '옥수수알 뿜으며 달리 기'라는 기술을 연마하던 그 시각, 정우는 입에서 대금을 떼어 그것 을 내려다보았다. 시험 삼아 불어본 대금의 음색은 훌륭했다. 잠이 오지 않았던 정우 는 자신의 마음을 달랠 만한 물건이 있나 찾아보기 위해 라수의 방으 로 갔고, 그곳에서 유래를 알 수 없는 대금 한 자루를 발견했다. 좋 은 악기였지만 보물이라고 할 만한 물건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정우 는 선조들 중 누군가가 쓰던 악기일 거라 짐작했다. 정우의 손은 대금 연주에 유리할 만큼 크진 않았지만 그 손가락들은 대단히 유연했다. 체구가 훨씬 큰 도깨비들의 도구들에 적응했기 때 문이다. 정우는 자신이 어렵잖게 그 대금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다만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탓인지 갈대청의 성능이 좋지 않았다.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청을 갈아줘야 할 것 같았다. 청 가리개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정우는 달빛이 새어들어오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안심할 만큼 좁았지만 세로 방향으 로는 충분히 길었다. 창문을 열고 얼굴을 바짝 붙이면 바깥의 풍경을 상당히 넓게 볼 수 있었다. 정우는 푸른 달빛이 쏟아지는 규리하성과 그 성벽을 바라보았다. 희푸른 달빛 속에 성벽은 커다란 얼음덩이처럼 보였다. 성벽 너머에 산재한 농토들은 전쟁 때문에 관리가 되지 않아 황무지로 바뀌고 있 었다. 새파란 달빛 아래 그 황무지는 아름다워 보였지만 정우는 규리 하령의 주민들에게 이번 겨울이 꽤 가혹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 을 보살펴줄 아버지가 도주해버린 지금 누가 그들을 보살필 것인지 궁금해하던 정우는 아마도 엘시 대장군과 제국군이 그 일을 맡으리라 고 추측했다. 그리고 정우는 흠칫 놀랐다. 자기도 모르게 정우는 규리하를 다스릴 책임이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정우를 혼란스럽게 했다. 정우는 자신이 이 전쟁 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우가 아는 것 은 황제가 거부한 충성 서약을 그녀의 아버지 아이저 규리하가 고집 스럽게 지지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때문에 황제와 아이저 규리하의 사이가 전쟁을 통해 견해차를 조절해야 할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사 실, 그리고 황제측의 견해를 대변하기 위해 규리하로 온 대장군 엘시 에더리 백작이 무향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땅의 견해를 간단히 묵살해 버렸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정우는 아이저 규리하의 장녀가 이토록이나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자신 이 모르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우는 아이저 규리하의 장녀에게 규리하령의 사정이 몰라도 되는 일 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우는 손에 쥔 대금이 그런 혼란을 야기하고 있음을 서서히 인지했 다. 그녀의 선조 중 한 명이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과텔 규리하와 케나린 규리하의 후예였을 누군가가 썼을 그 대금. 정우는 케나린에 대해 생 각했다. 물론 정우는 자신과 케나린을 동일시하기 힘들었다. 케나린 은 태어나자마자 이 땅을 떠나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케나린 규리하 또한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결혼에 직면해야 했다. 케나린의 선택은 아버지의 심복 중 한 명과 결혼하여 직접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심회가 번잡했다. 정우는 대금을 움켜쥐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정우는 하늘누리의 율형부사와 산공부사를 감탄케 했던 것 을 보았다. 딱정벌레는 세차게 움직이는 속날개와 반들거리는 외피로 달빛을 조 각내어 흩뿌리고 있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정우는 그것이 번 뜩이라고 확신했다. 기수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우의 편지를 가진 탈해가 그 위에 타고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정우는 뜨거운 그리움을 느꼈다.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정우는 그 런 충동을 억눌렀다. 계명성을 내뿜는 레콘이라 하더라도 저 고도에 서 딱정벌레 날개소리에 감싸인 기수를 불러내리는 일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애틋하고 서럽기까지 한 감정 속에서 정우는 번뜩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볼 수 없을 테지만 정우는 손을 흔들어야 했다. 그러나 번뜩이는 곧장 즈믄누리로 날아가지 않았다. 번뜩이가 크게 선회하는 것을 본 정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곧 정우는 탈해의 마음을 깨달았다. 탈해 또한 정우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탈해는 정 우가 있는 규리하성의 상공을 한 바퀴 돌지 않고서는 떠나기 힘들었 을 것이다. 정우가 볼 수 없는 탈해에게 손을 흔든 것처럼. 정우는 기쁨의 신음을 흘렸다. 탈해가 그녀를 잊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그런 행동이 고마웠다. 북받치는 고마움과 그리움 속에서 정우는 대금을 들어올렸다. 서로 볼 수 없어도 보여줄 수 있다면 들을 수 없어도 들려줄 수 있 다. 정우는 탈해가 잘 있으라는 안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 다. 그 화답을 보내야 했다. 정우는 취구에 입술에 대고 잠시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입김을 불어넣었다. 입김에 의해 자극 받은 갈대청이 몸을 떨었다. 고대를 꿈 꾸는 규리하의 돌들 위로 대금의 징철한 소리가 흘렀다. =============================================================== 챕터 끝났습니다. 오탈자 알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알려주시 는 대로 수정합니다만, 수정 전에 읽으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3.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 1 "여기 있잖아." - 레콘에겐 왜 성(姓)이 없냐는 질문에 대해 자신의 철창을 들어보이며 티나한이 한 말. 나나본의 중앙 시장은 열기와 소음으로 들끓었다. 주막에 앉아있던 지멘은 조용히 술잔을 들어올렸다. 장터에 가설된 주막에는 레콘이 마음 편히 몸을 맡길 의자 같은 것은 없었지만 주막 주인은 땅바닥에 멍석을 깔아두었다. 그리고 장터를 흘러다닐 수 있 는 물기에 대비하여 멍석 아래에는 짚더미도 깔아두었다. 지금 그 멍 석에는 지멘이 홀로 앉아있었다. 레콘과 동석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자들도 공성병기 같은 두 자루 병기와 동석할 용기까지는 끌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결과로 주위의 다른 멍석들은 포화 상태였다. 주막 주인은 그 사실에 대해 짜증을 내지 않기로 했다. 그 또한 지 멘이 옆에 놓아둔 무시무시한 망치와 압도적인 도끼에 질린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였거니와, 지멘은 상당량의 음식을 주문했기에 주인이 입은 손해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주막 주인은 손들의 수발을 들며 그 무기들의 유래에 대해 고민했다. 두 가지 무기를 쓰는 레콘은 없 기에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필요에 따라 가지고 다니는 단검 같은 것을 제외한다면 모든 레콘은 최후의 대장간에서 받은 한 가지 무기 만을 평생 지닌다. 그 때 저편에서 낭랑한 외침이 들렸다. 건방지기까지 한 쾌할한 목 소리였다. "저는 버릇없이 자랐어요. 아저씨 때문에 제가 철 들어버리면 책임 질 거예요?" 주막의 손들이 피식거렸다. 주인 또한 얼굴을 기분 좋게 찡그리며 외침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지멘의 동행이 서있었다. 두 자루의 무기 만큼이나 기묘한 동행이었다. 거침없는 화법과 무례한 흥정 기술로 피혁상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 는 것은 인간 기준으로도 꽤 작은 키의 애꾸눈 소녀였다. 한쪽 눈을 덮은 큼직한 안대, 비뚤어진 코, 뭉개진 귓바퀴 등은 굉장한 불균형 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불균형이 용케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싱그러 운 생기다. 선량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하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소녀에게 동정 어린 눈빛을 보낼 것 같지만, 정작 그 생기 가득한 소 녀는 자신을 별로 동정하지 않는 듯했다. 소녀가 자신의 안대를 손가 락질하며 외쳤을 때 그 사실은 분명해졌다. "몰라요! 저는 반밖에 안 보이니까 반값!" "그럼 장님한텐 공짜로 줄까!" 꽤 수학적인 대답이다. 그리고 소녀는 그 논리를 간단히 격파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고맙다고 해요. 그 꼴사나운 모피에 반값이라도 준다잖아요." "젠장, 그 가격으론 무두질하는데 쓴 백반 값도 안돼. 아가씨." "그 말 물정 모르는 바보한테 또 써먹고 싶으면 저한테 잘 보여야 될 거예요. 아저씨.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곳 에 명반석 광산이 있다는 거 온 장터에 다 떠들고 다닐지도 모르니 까." 피혁상은 허! 하는 소리를 내뱉었지만 속으로는 당황했다. 명반의 희귀성으로 으름장을 놓는 최후의, 그리고 가장 성공률 높았던 수단 이 쓸모없어진 이상 그는 다른 수단을 바삐 강구해야 했다. 피혁상은 자신의 게으름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수단이 떠오르 지 않았다. 결국 애꾸눈 소녀 아실은 자신이 정한 가격으로 털가죽을 사들일 수 있었다. 아실이 당당하게 전리품을 끌어안고는 가설 주막 을 향해 걸어왔다. 주막 사람들은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아실과 지멘을 훔쳐보았 다. 아실은 끌어안고 온 털가죽을 멍석에 내려놓고는 그 위에 털썩 주저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지멘은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비웠지만 아실은 무슨 질문을 들은 양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아, 이거요? 옷 만드려고. 제대로 만드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그럴 시간은 없고, 아무래도 둘둘 만 것보다 좀 나은 정도밖에 안되 겠네." 지멘이 질문하는 것을 듣지 못했기에 주막에 있던 이들은 좀 어리둥 절해졌다. 그 때 아실이 다시 말했다. "걱정말아요. 금방이니까." 주막의 손들과 주인은 더욱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들 사이에 서는 지멘이 혹 니른 것이 아닌가 하는 종족적 특성을 무시하는 가설 까지 오갔다. 하지만 지멘도 아실도 주위에서 일어나는 동요에 대해 서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멘은 한결 같이 술잔을 비웠고 아실은 지멘의 배낭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조금 후 배낭으로부터 다급한 구조 요청이 흘러나왔다. 지멘은 옆을 돌아보지 않은 채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 배낭에 처박혀 버둥거리고 있는 아실의 발목을 붙잡아 위로 들어올렸다. 멍석 위에 똑바로 앉혀 진 아실은 한참 동안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씨. 배낭인지, 뒤주인지." 지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실은 지멘이 들은 척해주 길 바라는 척하지도 않았다. 지멘은 술잔에, 그리고 아실은 꺼내든 반짇고리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다른 옷도 마찬가지지만 털가죽 옷을 만드는 일은 매우 까다롭다. 마름질도 힘들거니와 가끔 송곳이 필요해지는 바느질은 숙련공의 기 술이 아니고선 감당할 엄두도 내기 어렵다. 자신의 재능이 어느 쪽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던 아실은 세련미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아실은 자신의 옷 한 벌을 꺼낸 다음 거기에 털가죽을 잘라 붙이는 방법을 썼다. 옷본도 필요없고 정교한 마름질도 필요없는 영리한 방 법이다. 그리고 빠르기도 했다. 짧은 시간 동안 아실은 방한복 한 벌 을 완성했다. 도저히 튼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실은 자신의 다리 로 움직여야 할 일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직접 입고서 팔다리 를 놀려본 아실은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출발해도 돼요." 지멘은 움직이지 않았다. 붙잡혀 들어올려지길 기다리던 아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지멘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팔짱을 낀 채 장터 한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 었다. 아실은 의아해하며 그 쪽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젊은 레콘 한 명이 누군가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 가는 사람들과 천막들 때문에 레콘의 상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 람들의 머리 위로 불쑥 올라와 있는 레콘의 모습은 탑처럼 잘 보였 다. 그 때문에 아래를 향해 이야기하는 레콘 젊은이의 모습은 마치 일인극을 보는 듯했다. 아실은 그 젊은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음 때문에 정확하게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젊은이는 노기를 억 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목 뒤편의 깃털이 부풀어올랐다가 눕기를 반복했고 수염볏이 자꾸 뻣뻣해지고 있었다. 레콘을 감성적이라고 말 하긴 어렵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감정 표현은 대단히 명확하다. 주막 주인에게 셈을 치른 지멘은 그 청년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아 실은 그 뒤를 따라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씩 젊은 레콘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제기랄,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러자 인간의 것으로 짐작되는 칼칼한 목소리가 그 말을 받았다. "사람 말을 제멋대로 이해해놓고 억지를 부리면 곤란하지요." 아직 그 모습을 보기 전부터 아실은 상대편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 각했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현장을 목격하게 된 아실은 그 용감 한 인간이 앞뒤없이 무모해도 무방한 젊은이가 아니라 물정 밝을 중 늙은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중년 남자는 괜찮은 옷을 입고 있지만 어떻게 봐도 투사라고 보긴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레콘 청년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한 껏 젖히고 있기 때문에 목 뒤의 살들이 옷깃 너머로 비져나와 벌겋게 변해 있었다. 그를 상대하고 있는 레콘은 호리호리한 체구의, 그다지 잘 먹지는 못한 것 같은 모습의 청년이었다. 물론 레콘의 기준으로 날씬하다는 것이지 상대편의 인간은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거대했 다. 하지만 중년 남자는 주눅든 기색도 없이 그들 사이에 놓여있는 뭔가를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아실은 잠깐 동안 남자가 가리키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자세히 바라본 후에야 아실은 그것이 원래 얼룩곰이라 불리는 동물이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뚜렷한 얼룩무늬에도 불구하고 알아보기 어려운 것 은 그 얼룩곰이 참 희한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잔뜩 으스 러진 부위는 한참 본 후에야 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네 다리 또 한 온전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갈비뼈는 부러진 채 피부를 뚫 고 튀어나와 있었다. 어떤 가공할 힘을 가진 작자가 그 얼룩곰을 부 서져도 별로 상관없는 장난감 취급을 한 듯했다. 그리고 아실은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실의 짐작을 뒷받침하듯 레콘 청년이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네 말대로 칼 안 댔잖아. 화살도 안 댔고. 한 번 살펴보라고. 어디 에 그런 자국이 있는지." 무기는 어디다 뒀는지 젊은이는 빈 손이었다. 젊은 레콘은 그 빈 손 으로 얼룩곰의 상당히 망가진 사체를 들어올려 넝마조각처럼 흔들었 다. 위협적인 광경이었기에 인간은 뒤로 한두 걸음 물러나서는 찌푸 린 얼굴로 말했다. "무기를 써선 안된다고 말한 건 온전한 상태이길 원했기 때문입니 다. 하지만 이건 뭡니까? 다 뭉개지고 박살났잖아요. 이런 꼬락서니 로 어떻게 박제를 만든다는 겁니까?" "젠장. 네가 이걸 구워먹을지 튀겨먹을지 알게 뭐야. 무기 쓰지 말 라고 해서 때려잡았잖아. 너 하라는대로 다했어. 그러니 내 돈 내 놔." 인간은 기어코 울화통이 터진 듯했다. "말 좀 제대로 들으란 말입니다! 온전한 모습이 필요한 거라고요. 이건 못 씁니다. 돈은 줄 수 없어요." "이 조그만 날강도 새끼 같으니, 뭐? 돈을 못 준다고? 못 줘? 야, 이 조그만 새끼야. 네녀석 뼈대가 이 얼룩곰보다 더 단단한지 한 번 확인해볼까?" 인간은 섬뜩한 표정으로 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거기에 칼이라도 있 나 생각했던 아실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수통이 있었다. 아실처럼 수통을 확인한 레콘의 몸이 당장 부풀어올랐다. "너, 거기서 손 안 떼면 네 엉덩이 볼 수 있게 해준다." "협박하지 마시오. 젠장. 날강도라니. 부리 함부로 놀릴 거요? 누가 누구한테 강도라는 거야? 어디서 제 놈 머릿속 같은 꼴을 한 얼룩곰 한 마리 가져와서는 돈 내놓으라고?" "너 이 새끼, 진짜 끝까지 한 번 가 볼래?" 비무장의 레콘이 있을 리 없다. 아실은 그 청년의 무기가 어디에 있 는지 알게 되었다. 레콘 청년은 등 뒤에서 자신의 병기를 꺼내어들었 다. 젊은 레콘이 꺼내어든 것은 접칼이었다. 레콘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손목을 가볍게 던지자 새파란 칼날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칼 날의 형태가 특이했다. 칼과 끌, 톱, 낫, 손도끼 등을 뒤섞어놓은 듯 한 그 복잡한 모습에 아실은 놀랐다. 자세히 보자 접칼의 손잡이 부 분도 망치나 못뽑이, 지렛대 등으로 쓰여질 수 있는 부분들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 크기는 레콘에게 맞는 거대한 크기였고 그래서 레 콘이 그걸 앞으로 내밀자 꽤 무시무시했다. "이 자식아, 이걸로 혀 좀 다져준 후에도 그 따위 소리 지껄일 수 있는지 한 번 볼까?" 그 시점에서 지멘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접칼을 든 청년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짚는 것을 느끼자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리고 곧 머리 전체를 돌려 지멘을 바라보았다. 지멘 의 모습은 같은 레콘에게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거대한 도 끼와 망치는 청년을 놀라게 했다. 지멘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끼여들어 미안하지만, 좀 참지." 레콘 청년은 주눅든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깨를 긴장시키며 말했 다. "댁이 무슨 상관이오?" "그런 걸로 장난 치면 저 사람 죽어. 이봐, 인간. 당신은 박제할 얼 룩곰을 이 친구에게 부탁한 것 같은데, 맞나?" 평생 한 번 볼까말까한 우악스러운 거병이 한꺼번에 두 자루나 등장 하는 바람에 넋이 나가있던 인간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멘은 나직하게 말했다. "저걸로는 박제 만들긴 어렵겠군. 그러니 당신은 돈 낼 필요 없어. 돌아가." 레콘 청년이 벼슬을 곤두세웠다. 지멘이 곧 말을 이었다. "저 곰은 내가 사지. 나는 박제용이 아니라 먹을 거리가 필요한 거 니 고깃값 정도는 쳐줄 수 있어." "저 놈은 은편 열 닢 내기로 했는데? 당신이 그 값 쳐 줄 거요?" "인간 시체가 필요한 것 아니라면 다섯 닢 받고 나한테 팔아." 레콘 청년은 조금 고민하다가 인간을 향해 말했다. "너 이 자식, 이 어른이 끊어진 네놈 명줄 붙여준 줄 알아라. 꺼져!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뭐 부탁할 생각하지마!" 인간은 하늘이 두쪽 나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는 투덜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접칼을 접어 어딘가로 집어넣은 청년은 어쩔 작정이냐는 듯이 지멘을 바라보 았다. 지멘은 얼룩곰을 가리켰다. "들고 따라와." 그리고 지멘은 소지품 챙겨들 듯이 아실을 배낭에 주워담았다. 레콘 청년은 그 모양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는 얼룩곰을 주워들었다. 지 멘은 떠나왔던 주막에 돌아가 술 한 통을 구입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장터 외곽쪽으로 빠져나갔다. 레콘 청년은 약간 의아해 하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반 시간 쯤 걸어 상당히 한적한 곳에 도달한 지멘은 배낭과 망치, 도끼, 아실, 술통 등을 내려놓았다. 은편 다섯 닢을 꺼낸 지멘은 청 년에게 그것을 건네며 말했다. "보다시피 짐이 많아서 그것 들고 다닐 수 없어. 여기서 먹어치우도 록 하지. 자네도 좀 들게." "어, 저요?" "그럼 이 술 나 혼자 다 마실까." 지멘은 술통을 툭 쳐보였다. 레콘은 기분 좋다는 듯이 웃었다. "아주 좋은 의견입니다! 아, 내 이름은 뭄토입니다." "후치야. 자네가 고기 다듬게. 내가 땔감을 하지." 뭄토는 자신의 접칼을 꺼내어들었다. 뭄토가 그 복잡한 칼날의 이곳 저곳을 사용하여 가죽을 벗겨내고 뼈를 추리고 고기를 다듬는 동안 지멘은 나무를 몇 그루 부러뜨려 가져왔다. 평평한 돌을 찾아낸 두 레콘은 그것을 불판 삼아 모닥불 위에 얹었다. 그리고 썩썩 잘라낸 곰고기를 구웠다. 곰고기가 익는 모습을 보던 뭄토가 말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언제 소개해줄 겁니까?" 지멘은 갑자기 하늘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아실은 빙긋 웃고는 손을 가슴에 얹고 스스로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뭄토. 저는 제미니라고 해요. 후치는 제가 없는 것처 럼 굴 거예요.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신경쓰지 마세요." "음? 서로 다투기라도 했나?" "비슷해요." 뭄토는 레콘과 인간이 다투고 말도 하지 않는다니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멘이 적절하게도 술통을 따자 더 이상 따져 물을 마음이 없어졌다. 지멘은 배낭에서 두 개의 큼직 한 그릇을 꺼내어 하나는 뭄토에게 주었다. 그리고 작은 그릇을 꺼내 어 아실에게 건냈다. 세 사람은 술통에서 술을 떠 마시기 시작했다. 술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풍경은 그럴싸했다. 아실에겐 좀 자극적인 풍경이었는데, 물을 쓰지 않는 뭄토는 해체한 곰에서 흘러 나온 피를 그냥 내버려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잔째의 술을 들이키 자 그것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게 되었다. 대화의 주체는 처음부터 아실과 뭄토였다. 아실은 뭄토가 최근에 들 은 모든 풍문을 듣고 싶어했다. 뭄토는 지멘을 무시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조금 머뭇거렸지만 아실은 말주변이 좋았고 지멘이 고요를 선호하는 쪽이라는 것은 분명했기에 곧 뭄토는 아실과 더불어 수다를 떨었다. 얼마 있지 않아 뭄토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 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아실은 실망한 기색 없이 뭄토가 떠벌 리는 모든 이야기를 경청하고 계속 이야기를 끌어내었다. 결과적으로 아실은 뭄토가 최근까지 나포츠에 있었다는 사실, 발케네로 가기 위 해 그곳을 떠나왔다는 사실, 그리고 떨어진 여비를 보충하기 위해 온 갖 잡일을 하고 있다는 등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아실이 알 수 없었던 것은 뭄토의 숙원 뿐이었다. 뭄토가 신 부탐색자가 아닌 숙원추구자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뭄토는 자신 의 숙원에 대해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아실은 자기 숙원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쓰지 않는 레콘의 성격에 비해볼 때 꽤 독특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다그쳐 묻지는 않았다. 어느새 고기도 사라지고 술도 없어져 술자리를 끝낼 때가 되었다. 거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던 지멘은 조용히 일어나 말했다. "즐거웠네. 뭄토. 난 이만 떠나야겠군." 뭄토는 조금씩 꼬부라지려는 혀를 애써 진정시켰다. 지멘은 대화에 참가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았기에 한 통의 술 은 뭄토와 아실이 다 처리하다시피 했다. "천만에! 나야말로 간만에 호호탕탕한 레콘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되바라진 인간들하고만 어울리다 보니 사람 참 못쓰게 변하는 것 같 았어요. 아, 미안. 제미니. 아가씨 동포들을 도맷금으로 비난할 생각 은 아니지만, 주위에서 부딪쳐오는 것들이 좀 예의 없는 것들이라 서." 아실은 빙긋 웃으며 짐들을 배낭에 던져넣었다. 뭄토는 허리를 펴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멘과 아실이 불을 끄고 다시 길 떠날 준 비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뭄토는 그대로 서 있었다. 지멘이 그의 주 의를 끌어볼까 하고 생각했을 때 뭄토는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지멘." 지멘은 오른쪽 눈꺼풀을 조금 올렸지만 부리는 열지 않았다. 뭄토는 허리를 좀 숙이더니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는 아실에게도 눈인사를 보내었다. "잘 지내. 아실." "어, 저, 예. 고마워요." 뭄토는 수염볏이 출렁일 만큼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지 멘을 쳐다보았다. 잠시 지체하던 뭄토는 곧 아무 상관 없다는 투로 몸을 돌렸다. 약간씩 흔들리는 발걸음이었지만 불안하다기보다는 흥 겨운 발걸음으로 뭄토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오후의 햇살을 성큼 성큼 밟으며 멀어지던 뭄토는 곧 조그마한 점이 되었다. 주위가 탁 트인 위치였기에 지멘과 아실은 오랫동안 뭄토의 흔들리는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실은 팔짱을 끼고는 왼쪽 볼을 한껏 치켜올렸다. "우리가 꽤 유명해졌나 봐요, 지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는 저 청년도 우리 정체를 짐작하는 걸 보니." 지멘은 아무 말 없이 뭄토를 바라보았다. 아실은 다시 말했다. "저도 몇 가지는 짐작할 수 있어요. 아까는 일부러 나서준 거죠? 무 기를 꺼내들고도 말을 계속하는 레콘이라니, 뻔하잖아요. 누가 나서 서 말려주길 원했던 거에요. 하지만 그건 동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 예요. 지멘. 버릇 돼요. 결국 아무도 나서주지 않는 날이 올 테고, 그 때 저 얼간이는 참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될 거예요." 아실에게 말을 걸 수 없는 지멘은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변호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계속 이어진 아실의 말은 지멘 을 놀라게 했다. "빨리 튀죠.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밀고할 거라는 것 미리 알려줬으 니까." 지멘은 고개를 숙여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아실은 오른팔로 왼쪽 팔 꿈치를 쥔 채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지멘과 눈이 맞은 아실은 그 자 세 그대로 지멘을 바라보며 말했다. "헤? 몰랐어요? 뭄토는 오늘 밤이 오기 전에 가까운 제국군에 우릴 밀고할 거예요. 우리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잖아요. 발케네 로 갈 여비 벌겠네요." 지멘은 고개를 들어 혼잣말처럼 말했다. "뭄토는 자신이 못쓰게 변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런 의미죠. 나쁜 자식. 뭐, 저 얼간이가 알아차릴 정도면 아까 그 장터에 있던 사람들 중 반은 짐작하고 있었을 거예요. 어차피 가 만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밀고할 테니 자기가 먼저 해서 현상금이나 벌자는 생각일 거예요." 지멘의 벼슬이 약간 꿈틀거렸다. 지멘은 부리를 단단히 닫은 채 배 낭을 둘러매었다. 아실을 집어들어 배낭에 넣은 지멘은 도끼와 망치 를 양 손에 움켜쥐었다. 아실은 지멘의 깃털을 움켜쥐며 충격에 대비 했다. 하지만 지멘은 곧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대신 지멘은 뭄토가 사라져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멘의 오른팔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지멘은 고기를 굽던 돌을 망치로 내리쳤다. 땅이 울리는 굉음과 함께 넓적한 돌이 자갈 무더기로 바뀌어 사방으 로 날았다. 다시 망치를 들어올린 지멘은 빈 술통을 후려쳤다. 나뭇 조각이 폭풍처럼 흩어졌다. 몸을 돌린 지멘은 모닥불을 피웠던 자리 를 걷어찼다. 사납게 날아간 잿더미가 앞쪽 수십 미터의 땅을 검게 뒤덮었다. 이우는 햇빛이 사물들을 전조하다가 스러져갔다. 많은 그림자들이 서로를 뒤덮은 가운데 지멘은 망치와 도끼를 늘어뜨린 채 똑바로 섰 다. 그의 목 뒤에서 작은 한숨이 들려왔다. 지멘은 배낭에 담겨있는 입이 매운 소녀가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원했다. 그는 만족했다. 아실은 동포의 배신에 분노하는 전사에게 아 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뭄토는 접칼을 접었다 폈다 했다. 그걸로 책상 모서리라도 깎아볼까 하는 생각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그를 이곳으로 안내한 제국군 수 전사는 얌전히 앉아 기다리라고만 말했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는 말해주지 않았다. 초조함이 동반된 무료함이 뭄토를 괴롭혔다. 뭄토는 짜증스러운 눈 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에겐 약간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리 크지 않은 방 안에는 오밀조밀한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뭄토는 갑작스럽 게 심술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특별히 화려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간 소한 물건들이었지만, 뭄토의 눈에 그것들은 어떤 질서와 어떤 힘을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국군 일개 중대를 지휘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물품들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는 셈이니 뭄토의 인상이 그리 틀리진 않았다. 그리고 뭄토는 그 광경에서 희미한 시기심을 느 꼈다. 뭄토가 그 느낌을 지우려고 애쓰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뭄토는 문쪽을 쳐다보았다. 제국군 수교위 한 명이 들어섰다. 인간 여자였다. 뭄토는 언젠가 예편한 제국병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이야 기를 들려준 자는 제국군을 사람의 몸에 비유했다. 장군은 머리이고 전사들은 무기다. 부위는 무기를 휘두르는 팔이고 교위들은 다리다. 다리에는 무시무시하다거나 맹포한 느낌은 없다. 하지만 다리가 없으 면 꼼짝도 할 수 없다. 제국군에 있어 교위들은 바로 그러한 존재다. 전투를 수행하는 부위와 전쟁을 다스리는 장군들 사이에서 교위들은 전투와 전쟁을 연결하며 드러나지 않게 제국군을 움직인다. 하지만 뭄토는 멍석을 깔고 바닥에 앉아있는 그보다 별로 크지 않은 조그마한 여자를 보며 자신이 뭘 잘못 들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십 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 어디에도 그런 수교위의 굳건함은 찾기 어려웠다. 한장만 걸친 웃옷을 떨어지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은 단추가 아니라 어깨인 듯했고 바지는 앞뒤가 바뀌어 있었 다. 얼굴은 침자국으로 가득했고 그 위의 머리카락은 사자처럼 일어 나 있을 듯했다. 가정형인 것은 왜 쓰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투구가 머리카락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며 걸어들어오 는 여자의 손엔 반쯤 베어먹은 무가 들려있었다. 어디를 봐도 숙취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주정뱅이였다. 뭄토는 어 이가 없었다. 책상 뒤로 돌아간 수교위는 갑자기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절이라도 하는가 하고 놀랐던 뭄토는 수교위의 머리에서 투구가 쿵 떨어지자 뭐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심회를 느꼈다. 빙글빙글 돌던 투구를 손 으로 눌러 고정시킨 수교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에 들어있 는 무를 대충 삼킨 수교위는 뭄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말 했다. "제국군은 언제나 승리합니다." "……상대가 술일 경우만 빼고 말이지." "제국군의 군사 기밀을 알고 있는 당신은 누굽니까?" "뭄토다." 수교위는 자신있는 동작으로 자신의 가슴을 탕 쳤다. 그 손에 무가 들려 있다는 것을 잊었던 모양이다. 수교위는 책상에 고꾸라져 한동 안 고통스러워 했다. 뭄토는 왜 자신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후 가까스로 호흡을 회복한 수교위가 말했다. "죽는 줄 알았네. 이건 뭐야? 아, 무. 저는 니어엘 헨로 수교위입니 다. 뭐 하시는 분입니까?" "정해놓고 하는 일은 아직 없어." "그렇습니까. 그럼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군." "비밀은 지켜드리죠." "너에게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뜻이야. 하지만 이왕 만났으니 이야기는 하지. 내가 검은 깃털의 레콘을 보았는데." 니어엘 헨로 수교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제서야 손에 든 무의 용 도를 떠올린 듯 니어엘은 그것을 와삭 깨물었다. 무를 질겅거리던 니 어엘이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검은 레콘이 포악하다는 속설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은 레콘이 곧 범죄자인 것은 아닙니다. 뭄토. 사실 저는 레콘이 다른 레콘에게 포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쓸 데없는 모색차별은 버리세요." 뭄토는 한 번만 더 참기로 했다. 제국군 장교를 살해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녀석은 살벌한 망치를 들고 있었어." 니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뭄토의 암시를 이해한 것 같았다. "흠. 황제사냥꾼 지멘이군요." "그래. 음, 그 친구에게 현상금이 걸려 있다던데?" "현상금? 예. 현상금이 있지요. 금편 삼백 닢입니다." 뭄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가 아는 현상금 액수는 백 닢이었다. '언제 오른 거지?' 뭄토는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푼돈이네." "응? 관심이 없습니까?" "공돈이 싫을 리야 없지." "공돈이라니오?"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뭄토를 바라보았다. 뭄 토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저질렀나 생각했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청을 창밖으로 집어던진 니어엘이 다시 말했다. "협조를 요청하러 온 것 아닙니까?" "협조라니, 무슨 말이야?" "그럼 여기에 뭐하러 온 겁니까?" "현상금 받으러." 니어엘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뭄토는 뭔가 잘못 돌아간 다는 느낌을 받으며 초조하게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니어엘이 말했 다. "아아. 모르셨군요. 그 자는 맹랑하게도 자신의 거취를 숨기지 않습 니다. 자신감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의 소재를 알리는 자에 게 지급하는 금액은 별 의미가 없겠지요? 그래서 현상금 규정이 바뀌 었습니다. 액수를 세 배로 올리는 대신 체포한 자에게 지급하도록 말 입니다." 뭄토는 당황했다. "뭐야, 그럼 붙잡아와야 현상금을 준다는 거야?" "본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시체를 가져와도 상관은 없습니 다. 꺼억. 저는 당신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군의 지원을 얻으러 온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지멘을 체포할 생각 같은 것은 해보지도 않았던 뭄토는 낭패감을 느 꼈다. 모르는 척했지만 뭄토는 지멘이 가지고 있던 도끼를 눈여겨 보 았다. 그 도끼는 분명히 레콘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용력이 대단한 레콘이었을 것이다. 날폭이 2 미터 쯤 되는 물건이니. 자신의 무기를 타인에게 맡기는 레콘은 없으므로 그 원 소유자는 분명히 죽 었을 것이다. 그리고 뭄토는 지멘이 그 죽음과 무관하다고 믿기 어려 웠다. 니어엘은 입 주위를 쓱쓱 닦으며 곤혹스러워하는 뭄토를 바라보았 다. 뭄토가 한 동안 말이 없자 니어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제 상황을 알았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군의 지원을 요청하겠 습니까?" "잠깐만. 내가 지멘을 잡을 수 있도록 당신들이 도와준다는 거야?" "아니, 아니지요. 엄밀하게 말하면 당신이 군을 돕는 것입니다. 지 멘이 이 근방에 출현했다는 것을 안 이상 저는 그를 붙잡을 생각이니 까요. 당신이 제 작전에 협조한다면 현상금 중 백 닢을 나눠드리겠습 니다." "백 닢?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니어엘은 킬킬 웃었다. 뭄토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꾹 참았 다. 니어엘이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는 건 그쪽입니다. 어, 이름이 뭐라고 하 셨더라? 아, 그래. 뭄토. 당신은 한 명이지만 우리는 천 명입니다. 이백 닢 가지고 천 명이 나눠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싫다면 혼자 가 서 지멘과 놀아보십시오. 그렇게 한다 해도 저는 아무 불만이 없습니 다. 하지만 권고하겠는데, 저와 경쟁하는 것보다는 제게 협조해서 백 닢을 얻는 편이 나을 겁니다. 분명히 그 쪽이 훨씬 현실적이니까요." 뭄토는 앉아있는 멍석을 가리켰다. "여기 변변한 의자도 없는 걸 보니 당신 졸병들 중엔 레콘이 없는 것 같은데." "없습니다. 혹 인간으로 위장하고 있는 레콘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의심이 가는 녀석들이 몇몇 있어요. 지독하게 씻지 않는 놈들 이……" "그만해. 제국군 수교위는 허풍 잘 치는 순서로 뽑나? 레콘 졸병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지멘을 잡겠다는 거야?" "끄윽. 젠장. 웬 트림이. 그건 당신이 걱정해줄 문제가 아닙니다. 협조할 의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뭄토는 일단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머리를 굴려보았다. 뭄토는 얼핏 보기에 지나치게 헐렁해 보이는 이 니어엘 헨로라는 수교위가 겉으로 보기완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 대화는 논리적이었고 진행되는 속도도 빨랐다. 교위들에 대해 뭄토가 들었던 이야기는 역시 사실이 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협조 하에 지멘을 붙잡는다 해도 니어엘 은 현상금을 몽땅 가로채는 약아빠진 짓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뭄토는 그런 권리가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건이 되는 문제는 하나다. 뭄토는 자신이 지멘을 상대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지멘은 그보다 크고 강했다. 무엇보다도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쉽게 쇠약해지지 않고 성정이 폭력적인 레콘 에게 있어 나이는 강력함을 추정하는 중요한 척도다. 나이는 경험이 고 동시에 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력함의 증거다. 치천제를 모 시는 저 즈라더 같은 강대한 레콘의 나이는…… 뭄토는 벼슬이 뻣뻣하게 서는 것을 느꼈다. 그제서야 뭄토는 지멘이 가지고 있던 도끼가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 차렸다. 뭄토가 그 유명한 도끼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누군가 가 즈라더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뭄 토는 망연하게 말했다. "도끼를 가지고 있었어." "네?" "지멘 말이야. 이런 미꾸라지에게 따귀 맞을 멍청이. 그걸 왜 깨닫 지 못했지? 망치 말고 도끼를 하나 가지고 있었어." "아, 금군 즈라더의 도끼 말씀이군요. 알고 있습니다." 뭄토는 충격을 받았다. "알고 있었다고?"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를 다 먹었음을 깨달았다. 니어엘은 몹시 불행한 얼굴로 빈 손을 바라보 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예. 상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지멘은 판사이 호반에서 그를 추적하던 즈라더와 조우했습니다. 도끼와 망치의 격투가 어떤 결과로 끝났는지는 당신도 짐작하겠군요." "그렇다면 지멘이 즈라더를 죽인 거야?" "망치로 머리를 때려부수었지요. 쯧쯧. 당신들이라면 멋진 죽음이라 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죽음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그런 데 즈라더의 곁에는 그 분의 도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부에서는 지멘이 즈라더의 도끼를 최후의 대장간으로 가져간 것이라고 추정했 고 발케네 이남 지역의 제국군에 경계령을 내렸습니다. 그 추정이 맞 았군요. 하긴 지멘이 아니면 누가 그 무거운 도끼를 들고 가겠습니 까? 팔아먹지도 못하는 건데." "그렇다면 이 근처로 올 줄 알고 있었다는 거야?" "제가 많이 놀라는 것처럼 보였습니까?" "아니었어." 뭄토는 희비가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지멘을 잡겠다는 니어엘 헨로 수교위의 선언이 취중의 결심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고민한 결론이라 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지멘이 즈라더를 격퇴했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었다. 승천한 티나한 외엔 아무도 죽일 수 없고, 티나한 이 돌아온다 해도 즈라더와 약속한 철의 침묵 때문에 공격하지 않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무적이라고 말해지던 즈라더였다. 그런데 지멘 이 그를 거꾸러뜨린 것이다. 뭄토는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니어엘을 바라보았다. "이봐, 수교위. 당신 정말 그 지멘을 잡을 작정이야? 군인들 허풍이 아니고?" "당신에게 돈 빌린 것도 없는데 제가 왜 허세를 부립니까." "즈라더도 죽었어." "즈라더도 기뻐할 겁니다. 제 작전에 협조하겠습니까?" 어쩐지 결정을 강요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뭄토는 결정했 다. "이백 닢 내놔." "백 닢입니다." "젠장. 당신이 유료도로당원이야? 그럼 시원하게 반씩 가르자고. 백 오십 닢." "백 닢." "누가 군인 아니랄까봐. 그만둬!"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뭄토는 멍석 위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주춤거리며 니어엘 을 내려다보았다. 니어엘은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뭄토는 수염볏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거 고집 진짜 세네. 나 없어도 자신이 있는 거야? 후회할 고집은 부리지마." "협조할 겁니까?" "백 닢은 꼭 내놔야 해! 제하는 거 없이!" 니어엘은 동의했고 협정이 맺어졌다. 하지만 뭄토는 그 때까지도 의 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가 농담이나 불가능한 도 전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뭄토는 지멘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불안 속에서 뭄토는 니어엘이 취중의 흥분 때문에 장렬한 옥쇄로 자신의 군인다움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도 느꼈다. 하지만 니어엘이 그런 낭만적 군인상을 추구하고 있지 않음은 곧 명 확해졌다. 니어엘은 부위 한 명을 불러들여 몇 가지 명령을 하달했 다. 그 중 첫번째는 숙취 해소를 위해 무보다 더 진한 것을 준비하라 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명령을 듣던 뭄토는 그만 지멘을 동정 하고 말았다. =============================================================== 3챕터 시작합니다. 남자란 : 창밖에 겨울비가 오는 것을 보면 자기가 광활한 우주의 외 로운 섬 지구에 표류한 가난한 표류자라는 사실에 씁쓸해하는 생물이 다. 그리고 5분후 이 생물은 라면에 대한 망상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타자 사는 동네에 겨울비가 왔습니다. 빙판길 조심하세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3-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11 조회수 : 27 피를 마시는 새 3.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 2 시구리아트 산맥을 향해 동으로 달리던 지러쿼터 산맥이 기력을 잃 고 대지의 등뼈에 대한 집념처럼 던져둔 조그마한 산들. 토박이들에 게만 의미가 있는 이름이 붙어 있을 터였지만, 그 중 한 산의 등성이 에 선 레콘은 자신이 딛고 선 산의 이름을 궁금해하진 않았다. 레콘 의 기준으로는 산이라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따라서 레콘 지멘 이 걸음을 멈춘 것은 자신의 진로에 산이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기 위 해서는 아니다. 지멘은 그보다 더 먼 곳에 있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지멘이 몸을 돌렸고, 그래서 지멘의 등 뒤에 있던 아실은 지멘이 보 고 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넓은 강이 산 아래의 평지를 가로질러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강 저 편은 발케네지만, 당장은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강폭을 가늠해 본 아실은 지멘이 뛰어넘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실은 왜 이런 길로 온 건지 지멘에게 묻지 않았다. 이 근방의 지리를 아는 지 멘이 아무 생각 없이 오진 않았을 테니까. 지멘은 지금까지 걷던 길 비슷한 지형을 벗어났다. 지멘이 택한 것은 옆산으로 이어지는 산마룻길이었다. 주위를 살피 며 산마루를 따라 걷던 지멘은 곧 계곡 하나를 택해 그 안으로 접어 들었다. 의외로 깊은 계곡 내에는 나무들이 가득했다. 지멘은 밀생한 자작나무들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훤칠한 자작나무는 지멘의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가지를 퍼뜨 리고 있었다. 숲 아래를 뒤덮은 관목들도 와삭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 를 낼 뿐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주렴처럼 늘어선 자작나무들의 보 얀 목피에서 흘러나온 흰 빛이 숲 가득히 는지럭댄다. 고요함이 맵싸하게 자리한 숲을 둘러보던 아실은 물소리를 들었다. 아실은 놀랐다. 지멘은 그 물소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보편적인 레콘의 행동이 아니다. 물보다 무거워서 수영이라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몸을 가진 이 최강 종족은 날카로운 검이나 예리한 창, 흉포한 악의보다 물을 더 두려워한다. 결코 반추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지만 아실은 물에 빠진 레콘을 본 적이 있었다. 쇳덩이처럼 그저 물 아래로 끝없이 가라앉는 그 모습은 레콘이 아닌 그녀에게도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광경이었다. 물소리가 본격적으로 커지자 아실은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실은 지멘의 벼슬을 꼬집으며 말했다. "지멘. 저 소리 안 들려요?"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잠깐 멈춰섰다가 다시 걸어갔다. 아 실은 그 몸짓을 지멘이 제정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호 기심이 동한 아실은 배낭 끈을 붙잡았다. 등반과 비슷한 일이 지멘의 등 뒤에서 벌어졌다. 아실은 지멘의 어 깨 위로 자신의 몸을 끌어올렸다. 지멘은 목과 얼굴 옆부분의 깃털들 이 차례로 당겨지는 것을 느꼈지만 옆을 훔쳐보지는 않았다. 지멘의 어깨에 엉덩이를 얹고 왼손으로는 배낭 끈을, 오른손으로는 지멘의 깃털을 붙잡은 아실은 그 불안한 자세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작나무들 때문에 아직 시계는 짧았다. 하지 만 지형을 살피고 세찬 물소리를 들어본 아실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 었다. 지멘은 평야에 있던 강의 상류 지점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 다. 물론 상류 지점은 물 위에서 도약력이 형편없어지는 레콘도 뛰어넘 을 수 있는 넓이일 것이다. 아실이 배낭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을 때 그 강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실은 배낭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황제 사냥꾼 지멘이 제국일등공신이자 금군인 즈라더를 살해했다는 소식과 함께 발케네 이남 지역의 제국군 전체에게 경계령이 내려졌을 때, 그 의미를 지멘에게 애먼 제국병을 잃거나 기습당하지 않도록 주 의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인 다른 지휘관들과 달리, 니어엘 헨로 수교 위는 지멘을 붙잡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지식하거나 만 용을 즐기는 성벽 때문은 아니다. 그 결정을 내렸을 때 니어엘은 잠 을 자기로 결정하는 것만큼의 결단력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니어엘 에겐 이유도 있었고 자신도 있었다. 따라서 레콘 뭄토가 주기로 한 협조는 니어엘에게 있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할 타개책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협조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술이 깬 상태에서 세찬 강물 속에 다리를 담근 채 활을 들어올리면서 니어엘은 무척이나 담담했 다. 니어엘은 강의 중심부에 서있었지만 강물의 깊이는 고작 그녀의 무 릎 위를 적실 정도였다. 상류라서 물이 세찼지만 니어엘이 중심을 잡 는 것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빈 활을 몇 번 퉁겨본 니어엘은 활을 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활을 다시 내린 니어엘은 오른손 엄지에 낀 깍지를 만지작거리며 흰 자작나무 사이에 서있는 검은 레콘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갈과 바위가 깔린 강변에도, 그 너머에 두텁게 자리한 숲에서도 시선을 끄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멘은 주위에 병사들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 멘은 그들 중에 레콘이 섞여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레콘 부하가 있 다면 굳이 그들이 활약하기 힘든 강변으로 끌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지멘은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 다. 지멘은 어깨를 꿈틀했다. 그 신호를 알아차린 아실이 다시 배낭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작은 동반자가 배낭 속에 자리한 것을 느낀 지 멘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자갈이 깔린 강변으로 내려섰다. 거대한 레콘의 발 아래 자갈들이 신음했다. 검은 산사태처럼 거침없이 내려서는 지멘을 보며 니어엘은 감명을 느꼈다. 하지만 니어엘은 그 산사태가 강물에서 20 미터 쯤 떨어진 거리에 멈춰설 것이라 예상했다. 지멘은 그녀가 예상한 지점에 멈춰 섰다. 니어엘은 곧 입을 열었다. "저는 제국군 수교위 니어엘 헨로입니다. 당신은 지멘입니까?" 질문이 아니라 확인을 요구하는 말투였다. 지멘은 확인해주었다. "그렇다." 니어엘은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강물 위쪽의 하늘은 넓게 열려 있었고 그곳에는 파란 하늘이 반짝였다. 자작나무의 잎사귀들이 비비 적거리는 소리가 졸졸거리는 물소리와 어우러졌다. 니어엘은 산마루 에 걸린 하얀 구름을 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제게 주신 권한에 의하여 살인, 강도, 방화 등의 죄목으 로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체포에 응하십시오." 지멘은 자신의 죄목들 중 하나에 의문을 느꼈다. "방화는 무슨 말이지?" "메헴 태수관에 불을 지른 것을 말합니다. 자보로 사람들은 정말 좋 아했다지만, 그래도 그건 범죄지요." "그건 내가 떠난 후 메헴 태수가 놓은 불이다. 비밀 창고가 있었다 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지." 니어엘은 눈을 내려 지멘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까? 물론 당신은 폐하의 법정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 니다." "내가 여기로 올 것을 알고 있었나?" "이 근방을 지나는 레콘들 중 많은 이들이 여기서 도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준비하고 왔다는 것인데, 무슨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말해봐." 니어엘은 허리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보통의 전통보다 훨씬 짧은 전통과 긴 대롱 같은 것이 꽂 혀 있었다. 니어엘은 대롱 끝에 달린 고리에 오른쪽 손목을 끼워 잡 아당겼다. 그러자 대롱은 니어엘의 팔목에 매달려 대롱거리게 되었 다. 대롱은 완전한 원통이 아니라 한쪽이 열린 반원통이었다. 지멘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그 순간 짧은 전통이 무엇인지도 이해했 다. 오묘한 궁술의 세계에서도 가장 경이적인 기술 중 하나를 접하게 되 었음을 알게 된 지멘은 벼슬을 약간 곤두세웠다. 지멘의 예상대로 니어엘이 꺼낸 것은 인간의 손으로도 채 두 뼘이 되지 않을 짧은 화살이었다. 니어엘은 그 짧은 화살을 보통 화살처럼 활에 먹였다. 그대로 시위를 당긴다면 짧은 화살은 활몸에서 벗어날 것이다. 하지만 니어엘은 시위를 당기는 대신 오른쪽 손목에 걸고 있 던 대롱을 짧은 화살에 씌웠다. 그런 후에야 니어엘은 시위를 잡아당 겼다. 그러자 활몸을 벗어나 얼굴을 때려야 할 화살은 대롱의 품에 안긴 채 고정되었다. 지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조금 굽혔 다. 니어엘이 시위를 놓은 순간 지멘은 몸을 세차게 뒤틀었다. 굉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상체를 뒤로 젖혀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선 지멘은 뒤쪽을 바라보 았다. 자작나무에 깊숙히 박힌 짧은 화살이 깃을 흔들고 있었다. 고 개를 당긴 지멘은 가슴을 내려다보았고 선혈에 젖어있는 깃털을 발견 하곤 더 큰 미소를 지었다. 다시 움직인 지멘의 부리가 니어엘을 향 했다. "애기살이라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긁혔는걸." 활개를 좍 펼치고 있던 니어엘 또한 미소를 지었다. 활을 내린 니어 엘이 말했다. "보였습니까?" "몇 번 더 보면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번엔 못봤어." "못봤다면 어떻게 피했죠?" "감이지." "그렇게 말하는 레콘이 솔직히 부러울 때가 있죠." "한 번 더 쏴봐." 니어엘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니어엘은 대롱을 손목에서 풀어 다시 허리춤에 끼워넣었다. 기억을 더듬어본 지멘은 그 대롱의 이름을 떠올렸다. "덧살을 왜 집어넣는 거야?" "제 비장의 기술이니까요. 당신에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는 확 인했으니 더 쏴서 당신이 애기살에 익숙해지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지멘은 아쉬움을 느꼈다. 화살을 감싸는 긴 덧살을 이용하여 활몸에 걸리지도 않는 짧은 애기살을 날려보내는 그 전설적인 기술은 지멘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같은 힘으로 발사되지만 화살의 무게가 반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속도가 훨씬 빨랐고, 그 속도에 길 이까지 짧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깊은 인상을 받은 지멘은 니어 엘의 다음 시도를 기대감 속에서 기다렸다. 니어엘은 활을 어깨에 걸 며 말했다. "대신 이걸 보여드리죠." 그리고 니어엘은 허리를 숙여 강물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다시 허리를 폈을 때 지멘의 몸이 세 배로 부풀었다. 애기살의 위협에도 맨몸으로 맞섰지만, 지멘은 니어엘이 똑바로 선 순간 본능적으로 즈라더의 도끼를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니어엘은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지멘은 그 웃음을 보지 않았다. 대신 눈이 튀어나올 듯 긴장하여 니어엘의 손을 바라보 았다. 니어엘은 손을 앞뒤로 천천히 흔들었다. 진폭을 서서히 증가시 키며 팔을 흔들던 니어엘은 어느 순간 팔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녀의 팔이 완전히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니어엘의 손에 쥐어진 물통 또한 한 바퀴 돌게 되었다. 원심력에 관한 실험이라도 하듯 니어엘은 경쾌하게 물통을 회전시켰 다. 같은 일을 시도하는 사내아이는 그 행동에 아무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황홀경에 빠진다. 니어엘도 그런 것 같았다. 점점 커 지는 웃음을 얼굴에서 뚝뚝 흘리며 니어엘은 물통을 세차게 회전시켰 다. 그 회전을 보며 지멘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향 해서는 그것이 철퇴도 아니고 공성추도 아닌, 그저 어느 집 부엌에서 나 볼 수 있는 나무통일 뿐이라고 외쳤다. 그것이 날아와 부딪힌다 해도 큰 해가 되진 않는다. 빳빳하게 일어선 그의 깃털이 충분한 완 충 작용을 해줄 테고 레콘이 같은 부피의 물보다 더 무거운 몸을 가 지게 되는 이유인 튼튼한 뼈대는 그 정도의 충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낼 것이다. 그저 깃털들이 조금 젖을 뿐인…… 니어엘이 물통을 놓은 순간 지멘의 모습이 사라졌다. 맹렬하게 날아오르는 자갈들 위를 통과한 물통은 요란한 소리를 내 며 자작나무에 부딪혔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물통은 한쪽이 부서 진 채 바닥에 떨어져 다시 튕겼다. 니어엘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 다. 바닥에 있는 자갈 파인 자국을 따라간 니어엘은 원래 위치에서 15 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벼슬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서있는 지멘을 발견했다. 니어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지멘을 조롱하지는 않았다. 통 제할 수 없는 심리적 거부감 때문에 어떤 이를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 지 않다. 니어엘은 지멘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런 이해 속에서 니어 엘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손이 강물 속에서 또 하나의 물통 을 꺼냈다. 지멘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계속된 급격한 이동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아실은 하마터면 배낭 밖으로 튕겨나올 뻔했다. 다행 히 지멘이 재빨리 허리를 폈기 때문에 아실은 그런 낭패를 겪지 않았 다. 니어엘의 머리통만한 돌멩이를 주워든 지멘은 팔을 뒤로 힘껏 끌 어당겼다. 꼿꼿이 세운 벼슬 아래에서 지멘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하지마." 니어엘은 지멘의 손에 쥐어진 돌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 이 지멘의 힘으로 던져진다면 니어엘의 몸을 부수고 말 것이다. 하지 만 그녀의 손은 어느새 회전하고 있었다. 지멘은 믿을 수 없다는 표 정으로 회전하는 물통을 바라보았다. 지멘이 다시 경고의 말을 하려 할 때 니어엘이 말했다. "싫어." 니어엘의 손이 물통을 놓았다. 절망적인 신음과 함께 지멘은 옆으로 몸을 날려 물통을 피했다. 그 리고 돌을 집어던졌다. 어차피 물 속에서 몸을 빠르게 놀릴 수도 없 었지만, 니어엘은 날아오는 돌을 피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돌은 어이없을 정도로 높이 날아갔다. 니어엘의 머리보다 한참 높은 곳을 지난 돌은 강 건너편의 숲으로 날아들었다. 관목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지멘은 격분하 여 벼슬을 꿈틀거렸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본 니어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구부리며 말했다. "물이 튈까봐 겁나지?" 벼슬 찢어지는 지적이었다. 니어엘의 손이 세번째 물통을 꺼냈지만 지멘은 두번째 돌을 집어들지 않았다. 니어엘은 지멘보다 훨씬 작았 고 게다가 강물 속에 서 있었다. 니어엘을 맞추기 위해선 낮게 던져 야 하지만 지멘은 그럴 수 없었다. 니어엘을 맞추지 못할 경우 그의 힘이 담긴 큼직한 돌은 굉장한 물보라를 일으킬 것이다. 지멘은 이 강의 상류가 건너뛰기 불편할 만큼 급격한 계곡으로 이어 진다는 사실, 그리고 하류는 지나치게 넓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니어 엘은 정상적인 레콘이 뛰어넘는 것을 감수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서있었다. 물론 지멘은 니어엘의 머리 위를 건너뛰는 것을 고려할 수 는 없었다. 뛰는 동안에는 물통을 피할 수 없고 혹 균형을 잃으면 곧 장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지멘은 비통함마저 느끼며 물 이 튀지 않을 거리까지 물러나 돌을 던지는 것을 고려해보았다. 무의 미했다. 빽빽한 자작나무들 사이로 돌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이상 고려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니어엘이 물통을 회전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는 불확실했지만 지멘 은 튀는 동작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니어엘은 팔의 회전을 유지하 며 지멘을 응시했다. 지멘은 그보다 더할 수 없는 미움을 담은 채 니 어엘을 쏘아보았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 "니어엘 헨로 수교위. 기억했다." 지멘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르는 지멘을 보던 니어엘은 황급히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두 귀를 모두 막아야겠지만 물통 때문에 한쪽 귀는 지멘의 폭발적인 함성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편-하-게-죽-지-는-못-할-것-이-다-!" 니어엘은 막지 못한 귀 쪽에서 통증을 느꼈다. 니어엘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재빨리 손을 흔들며 균형을 잡아야 했다. 그녀가 쓰러지기 라도 한다면 지멘은 강을 뛰어넘을 것이고 니어엘은 절대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정신을 추스른 니어엘이 다시 바라보았을 때 지멘 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작나무들 사이에서 엄청난 소 음이 들려나왔다. 지멘이 떠났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니어엘 은 회전시키던 물통을 다시 강물 속에 내려놓았다. 물을 뚝뚝 떨어뜨 리며 강 밖으로 걸어나온 니어엘은 숲을 향해 말했다. "모존 상전사." 숲 여기저기에서 해쓱하게 질린 상전사 한 명과 몇 명의 하전사들이 나타났다. 할말이 없었던 그들은 그저 감탄에 찬 눈으로 그들의 지휘 관을 바라보았다. "그럼 작전대로 이곳을 지켜라. 지멘은 너를 향해 돌을 던지지 못한 다. 지멘을 통과시키지 마라." 모존 상전사는 굳은 얼굴로 명령을 받았다. 상전사와 나머지 하전사 들의 경례를 받은 다음 니어엘은 숲으로 걸어들어갔다. 거기엔 말 한 필과 뭄토가 있었다. 뭄토는 물을 떨어뜨리며 다가오는 니어엘을 보며 깃털을 부풀렸다. 자존심과 힘겹게 싸우던 뭄토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옆으로 두어 걸 음 물러났다. 니어엘은 뭄토에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게끔 조심하며 말고삐를 끌어당겼다. 니어엘이 말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던 뭄토가 부리를 열었다. "야, 수교위. 넌 죽었어." 니어엘은 손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이 잘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니어엘은 뭄토를 돌아보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확실한 정보입니까?" "농담할 때가 아니야. 말투는 왜 그 모양이었어?" 니어엘은 빙긋 웃으며 활을 쏘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런 짓을 한 판국에 경어 써주는 것이 더 우습지 않습니까?" "맞아. 그래. 레콘에게 그런 짓을 하면 죽는다는 거 몰라?" "그 전에 제가 체포할 겁니다." "허! 그 배짱 마음에 든다. 어, 혹시 그 때문에 여기 온 거야?" "네?" 뭄토는 얼마나 기다려야 니어엘의 바지가 마를지 궁금해 하며 말했 다. "여기를 지키는 건 아까 그 상전사랑 몇 명이면 되는 거잖아. 네 계 획도 그런 것이고. 그런데 다른 부하들 내버려두고 일부러 여기까지 함께 온 것은 활 쏘는 일을 네가 하려고 한 거 아냐?" "제 생각엔 그것이 지휘관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착하군.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부하들이 제 때 준비하지 못하는 거 아냐?" "제 휘하에 그런 부하는 없습니다. 다만 더 지체할 경우엔 약간 곤 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질문할 것이 더 있다면 달리면서 하면 안되겠 습니까?" "내가 먼저 가겠어! 물 뿌리며 달리는 놈 뒤를 따라가고 싶진 않 아!" "좋을대로 하십시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요?" 뭄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앞장서서 달렸다. 니어엘은 물을 묻힌 채 추적하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을 정도까지 기다린 다음 말을 출발시켰다. 지멘은 몸을 세 배로 부풀린 채 내려왔던 계곡을 몇 배의 속도로 올 라갔다. 무참하게 꺾인 관목들이 좌우로 쪼개져 길을 만들었다. 산마 루로 다시 접어들었을 때 지멘은 잠시 멈춰섰다. 숨이 차거나 힘들었 기 때문은 아니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흥분을 다스려야겠다는 희미 한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해요. 지멘." 하마터면 지멘은 그 말에 대답할 뻔했다. 자신이 얼마나 흐트러져 있는지 깨달은 지멘은 부리를 꽉 다문 채 아실의 말을 기다렸다. 숨 이 찼던 아실은 조금 후에야 말을 이었다. "아까 그 방법으로는 당신을 잡을 수 없어요. 그곳으로 지나가지 못 하게 하는 것이 고작이지요." 지멘은 그걸로 부족하냐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끔찍한 수모에 대해 어떻게 '고작'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냐고 다그치고도 싶었다. 그 러나 지멘은 아실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멘은 격노 속에서 아실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흥분이 가라앉았다. 지멘은 아실의 지적이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상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상대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지멘은 부풀어올랐던 깃털들을 누그러뜨렸 다. 그의 부리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 수교위는 함정을 만든 것일까?" 다르게 생각할 수 없었다. 지멘은 자신의 가설을 확신했다. 그래서, 온 길을 되짚어 가다가 소화차와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지멘은 분노 하기는 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소화차에는 말이 매어져 있지 않았다. 지멘이 말을 겁줘서 도망치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말들을 어딘가에 풀어둔 모양이다. 소화차 주위엔 제국병들이 두꺼워 보이는 방패를 든 채 둘러싸고 있었다. 그 들 자신들도 방패를 신뢰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그런 것이라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화차 위에는 힘세어 보이는 제국병들 이 양수 손잡이를 붙잡은 채 서있었다. 소화차 앞쪽에 있는 굳은 표 정의 상전사 한 명이 들고 있는 것은 살수관이었다. 상전사는 창처럼 움켜쥔 살수관으로 지멘을 겨냥하며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시오." 지멘은 상대방이 상당히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 다. 소화차는 그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그 위치는 물줄기를 상당히 멀리까지 쏘아보낼 수 있다는 장점 이외에 지멘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다는 장점도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지멘이 선택할 수 있는 공격 수 단은 조금 전 강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돌을 집어던지는 것 뿐이지만 돌에 명중당한 소화차가 파괴된다면 지멘은 곧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 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소화차가 있는 곳을 제외한다면 갈 길은 둘이었다. 반대쪽 산등성이 로 올라가는 길과 강이 있는 평야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지멘은 고민에게 시간을 나눠주진 않았다. 두려움보다 시간 낭비를 피하기 위해 지멘은 곧장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평야 쪽이었다. 산등 성이를 박찬 지멘은 한동안 공중을 날았다. 몇십 미터는 떨어진 곳에 서 다시 발을 땅에 디딘 지멘은 그대로 산 아래를 향해 달음박질쳤 다. 상전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살수관을 다시 소화차 옆의 고리에 걸었 다. 그의 짧은 명령이 떨어지자 방패를 들고 있던 하전사들이 달려갔 다. 조금 후 하전사들은 말들을 끌고 돌아와서는 소화차에 말을 연결 했다.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소화차는 지멘의 뒤를 따라 천천히 움 직였다. 따라잡기엔 형편없이 느린 속도였지만 상전사는 걱정하지 않 았다. 지멘이 달아날 길은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위험한 인물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도 함께 작용하여, 상전사가 이 끄는 소화차는 꽤 느긋한 속도로 지멘을 추적했다. 산 아래로 내려서던 지멘은 다시 한 번 높이 도약했다. 앞쪽의 나무 들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형을 살펴두기 위해서였다. 곧장 달리 면 강을 맞닥뜨리게 될 터였으므로 지멘은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바 꿔야 했다. 강의 상류로 이어지는 서쪽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곳 으로 가는 길도 나빴거니와 상류로 계속 올라가다간 니어엘이 활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장소에 도달하게 될지도 몰랐다. 도약을 끝내고 지상에 도달했을 때 지멘의 몸은 동쪽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지멘은 달리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산을 따라 동쪽 으로 가는 길과 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가는 길 두 가지가 있었다. 어 차피 강을 건너야 한다면 강을 따라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멘은 이 강의 하류 쪽에 레콘이 건널 만한 장소가 있는지 알지 못 했다. 강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간 다음 산 남쪽 으로 크게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그것은 왔던 길을 엄청나게 돌아가 는 길이었다. 어느 쪽도 선택하기 쉽지 않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지멘은 망치와 도끼 끝으로 땅바닥에 짚은 채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노력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먼저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지 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행하지 못하는 일이며, 지멘 또한 분노의 표출 쪽에 더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지멘은 애써 자신을 달랬다. 노력의 결실이 있었다. 지멘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난감한데." 자신이 미력한 인간에 의해 난관에 봉착했음을 인정하는, 참으로 극 기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이 아름다운 토로에 대해 별로 아름답지 않 은 대답이 들려왔다. "토할 것 같아요." 지멘은 황급히 배낭을 벗어 땅에 내려놓았다. 아실은 감사의 의미로 목례하고는 배낭에서 기어나왔다. 두 무릎과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아실은 한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구토하지는 않았다. 땅바닥 에 주저앉은 아실은 머리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이라면 기절했을 거예요. 당신 등에 오래 탄 저니까 버텼 지." 지멘은 아실의 투덜거림을 못들은 체하며 주위를 살폈다. 강이 있는 쪽은 빨리 지나쳤지만 볼 것은 대충 확인했다. 그리고 지멘은 조금 전에 찾지 못했던 뾰족한 수가 새로 등장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 했다. 강을 따라가거나 산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배낭을 붙잡으 며 일어난 아실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산을 따라가도록 해요. 굉장히 많이 돌아가야겠지만 그래도 그 쪽 이 확실한 길이군요. 수교위라면 중대를 지휘하고 있을 테니까 소화 차는 한 대뿐일 테고, 그러니 그 쪽을 또 막지는 못할 거예요." 지멘 또한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그들이 알지 못 하는 한 가지 판단 착오가 내포되어 있었다. 동쪽을 향해 한 시간 쯤 달렸을 때 지멘은 급하게 멈춰섰다. 아실은 의아해 하며 지멘의 어깨 너머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 착오가 서서히 모습 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숨소리를 낮췄다. 그들 앞쪽의 언덕 위로 소화차가 나타났다. 소화차를 따르던 제국병 들은 아실과 지멘의 모습을 확인하자 즉각 소화차를 멈추고 말을 풀 었다. 그리고 소화차 주위를 둘러쌌다. 그들이 공격 태세를 갖추는 것은 분명했지만 지멘은 그 사실에 반응할 수 없었다. 그가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은 그 소화차가 한 시간 전에 본 것과 다른 것이라는 사 실 뿐이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지멘의 곁에 서서 언덕 위를 바라보던 아실도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화차를 두 대 가지고 있었군요. 그렇다면 세 대나 네 대일 수도 있겠는데요." 뭄토의 벼슬이 뻣뻣해졌다. 니어엘을 노려보던 뭄토는 나직하게 속 삭였다. "서른 한 대라고?" "예. 원래 가지고 있던 것도 있고 근방의 중대들로부터 지원 받은 것도 있습니다. 또 나나본의 태수께서 쾌히 빌려주신 것도 있고…… 아, 예. 자유무역당에게서 급히 빌려온 것도 있습니다. 그들이 규리 하에 납품하기 위해 수송하던 물건이었습니다." 니어엘은 야영지 끄트머리 쪽에 있는 소화차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 소화차에는 군용임을 밝히는 식별 기호가 붙어있지 않았다. 니어 엘이 말한 빌려온 물건임에 분명하지만 뭄토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 다. 그 소화차는 야영지 옆을 흐르는 시냇물을 퍼담고 있는 중이었 다. 뭄토가 돌아보지 않자 니어엘은 손을 내리고 말을 마무리지었다. "규리하의 정세는 뒤숭숭합니다. 그래서 그곳을 점령하고 있는 가시 나무 군단이 자유무역당에게 소화차 열 대를 주문했습니다. 방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혹은 저와 비슷한 이유에서 필요한 모양입니다. 가 시나무 군단의 양해를 얻어 그들보다 먼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뭄토가 질문했다. "규리하의 정세가 왜 뒤숭숭한데?" 니어엘은 잠깐 동안 얼이 빠진 표정으로 뭄토를 바라보느라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 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런 후에 니어엘은 제국군이 규리하를 공격했고 승리했음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뭄토는 자신이 벼락을 맞거나 그에 준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는 이상 정치에 관심을 둘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약지 지파에 대한 이야기는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인상적일 만큼 어처구니 없었기 때문이다. 뭄토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려 했던 아이저 규리하가 황제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 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뭄토는 투덜거렸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이건 미친 짓거리라고밖에 생각이 안 되는군. 충성하기 위해 싸운다는 놈이나 충성하려고 고집 피우기 때 문에 공격하는 황제나. 그런데 누가 아이저 규리하를 잡았는데? 그 사람 세다고 들었는데." "에더리 교위님이지요." "에더리 교위님?" "아니, 이런. 지금은 대장군님이시죠. 폐하의 대장군이신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를 말한 겁니다. 교위님이라고 부른 건 버릇이 되어서입 니다. 6년 전 타이모 사건 때 저는 그 분을 모시던 부위였습니다." 뭄토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야?" "예." "허! 온갖 허풍선이들을 다 봤지만 유명한 사람과 이렇게 가까운 사 람은 처음 보는데?" 니어엘은 뭄토의 순박한 탄성에 미소지었다. 하지만 니어엘은 곧 더 큰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 앉은 뭄토가 제국만병장 엘시 에더리가 정말로 최후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받았는지 질문했기 때문 이다. "아뇨. 그건 헛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그 분이 가진 칼은 세 자루 입니다. 그 중 제국만병장의 권검과 에더리 가문의 보검은 거의 쓰시 지 않습니다. 그 분이 주로 패검하시는 것은 제가 차고 있는 이것과 똑같은 제국검입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인간이 최후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받다니, 말도 안되잖아. 하지만 너무 말이 안되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더 라고." 니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마무리지었다. "아이저 규리하는 패하여 도망쳤고, 그래서 현재 규리하는 뒤숭숭한 겁니다. 아직 그 소식을 접하지 못하셨다니 조금 놀랍군요." "난 그런 일엔 관심이 별로 없어서. 하지만 이상하네. 규리하가 여 기서 가까운 거리는 아닌데, 너 뱀단지 가지고 있냐?" "뱀단지는 군단 사령부에만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 있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양해를 구했다는 거야?" "제 말은 가시나무 군단에 양해 요구서를 보냈다는 의미입니다. 며 칠 후에 도달하겠지요." 뭄토는 웃음을 터뜨렸다. 보급에 함부로 개입할 경우 받게 되는 중 징계를 안다면 니어엘을 동정했겠지만, 그런 것을 모르는 뭄토는 대 신 다른 말을 꺼냈다. "정말 지멘을 잡으려고 작정한 것이군?" "물론입니다." "너 지멘에게 무슨 원한 있냐?" "그를 체포하는 것은 제 의무입니다." "바른 소리 듣고 싶다는 것이 아냐. 그리고 쓸데없는 위험을 피하는 것도 네 의무일 텐데? 인간 밖에 없는 네 알량한 부대로 지멘에게 도 전하는 건 모험 아냐?" 의외로 날카로운 뭄토의 지적에 니어엘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니어엘은 뭄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 요청할 것은 간단합니다. 뭄토.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제 곁에서 저를 보호해주십시오. 지멘이 저를 기습할 가능성은 없다고 믿습니다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겠죠. 그리고 작전의 최종 단계에 서 지멘의 구금 및 호송을 맡아주십시오. 원래는 제 부하들에게 맡길 까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레콘에게 더 쉬운 일이겠지요. 지멘을 결박 한 다음 센시엣 특수수용소까지 호송해주십시오. 괜찮겠습니까?" "센시엣 특수소용소? 그게 뭔데?" "절망도라는 말 들어봤습니까?" 뭄토의 벼슬이 꼿꼿해졌다. 그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름만 아 는 것이지만 그것으로도 뭄토의 대답에 살의가 담길 이유로 충분했 다. "절망도에 들어가라고!" 니어엘은 겸손한 표정과 어투를 사용했다. "거기에 들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뭄토. 그곳에 가면 특수수용소 의 관리들이 지멘을 인수할 겁니다. 지멘을 섬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일입니다. 당신이 할 일은 지멘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인 수증을 받아오는 일 뿐입니다. 제가 알기론 그 과정에서 바다를 눈으 로 볼 일도 없습니다." 뭄토는 조금 안도했다. 불안을 떨칠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게 어디 있는지 몰라. 다른 레콘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젠 장. 알고 싶지도 않은 곳이니까. 그게 어디 있는데? 쟁룡해?" 터무니없는 바다의 이름을 대는 뭄토를 보며 니어엘은 센시엣 특수 소용소에 대한 레콘의 의도적 무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 었다. 혹 해양학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렇게 먼 곳은 아닙니다. 선조해입니다." "선조해면, 그게 어디인데?" 니어엘은 두 손을 조금 펼쳐보였다. "시구리아트 산맥을 넘어 호라이체, 단탐, 나로드를 거쳐 키준 산맥 을 돌아 북상하면 됩니다. 여기서부터 말을 타고 간다면 사순이면 충 분히 닿을 수 있습니다. 제 장병들이 동행할 테니 당신이 지멘과 붙 어있어야 하는 기간은 최대 사순입니다." 뭄토는 사십 일 동안 지멘의 곁에 붙어있어야 하는 것과 절망도에 가까이 가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꺼림칙한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둘 모두 그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뭄토는 지멘 을 붙잡을 결심을 하고 있는 인간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뭄토는 니어엘을 자극해 보기로 했다. "네 졸병들이 따라오면, 너는 안 가냐?" "아, 유감스럽지만 저는 중대 본부를 오래 떠날 수 없습니다. 왕복 백여 일이나 되니 어렵군요." 겁이 나서 안 따라가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보려 했던 뭄토는 좌절하고 말았다. 니어엘은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서 뭄토는 질문했다. "이렇게 술술 대답하는 걸 보면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지멘 체포를 생각했다는 의미군. 무슨 원한인지 읊어봐" 니어엘에겐 유감스럽게도 뭄토의 기억력은 나쁘지 않았다. 니어엘은 조금 지체한 다음 말했다. "저는 그가 싫습니다." "싫다고? 그게 이유야?" "예." 뭄토는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저편 에서 부위 한 명이 낭랑한 목소리로 소화차의 수조가 찼음을 알려왔 기에 뭄토는 더 질문할 수 없었다. 니어엘은 뭄토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났다. 하늘을 잠깐 올려다 본 니어엘은 부위에게 말했다. "약간 빨리 행군해야겠군. 도착하는 대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말 해봐." "소화차를 서로 엄호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시키고 지멘을 목격할 때까지 함정을 팝니다." "어쩌면 지멘은 몸을 숨길지도 모른다. 그 커다란 몸도 숨기기 불가 능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네 구역에 반드시 나타날 거야. 그러니 지멘을 혹 목격하지 못하더라도 달이 뜰 무렵엔 다음 단계로 넘어가 도록 해라." 부위는 경례하고는 두 대의 소화차와 자신의 소대원 이백 명과 함께 출발했다. 니어엘은 말에서 내린 다음 뭄토에게 말했다. "잠깐 식사할 시간이 있습니다. 저녁 시간은 멀었습니다만, 밤에는 아무래도 좀 바쁠 테니 지금 드셔야겠습니다." 뭄토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야영지의 취사장에서 제공된 음식은 거칠었지만 양이 많았다. 뭄토 에게 적당한 그릇은 없었지만 다행히 뭄토는 떠돌이 레콘들이 흔히 그러하듯 자기 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애 한 명이라도 들어갈 것 같은 뭄토의 그릇에 삽으로 음식을 퍼담으며 취사병은 재미있어 했 다. 식사를 하며,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작전을 설명해 달라는 뭄토에게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하지만 니어엘이 든 비유는 뭄토를 약간 곤혹 스럽게 했다. 뭄토는 도대체 회돌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 었다. 뭄토가 바둑을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니어엘은 비유를 포기했다. "간단히 말하죠. 저는 지멘을 포위할 병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멘에게서 병력을 빌릴 작정입니다." "무슨 소리야?" 니어엘은 나무 숟가락으로 그릇을 긁으며 말했다. "저는 지멘이 선택할 수 있는 길 중 하나를 계속 없애고 있습니다." "아, 몰아붙인다고? 몰이?" "음. 그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몬다는 것은 한 길을 선택하게끔 유 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다른 길을 포기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뭄토는 커다란 물잔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다음 상체를 앞으로 크게 숙였다. 그리고 물잔에 부리를 박고 물을 빨아들였다. 몸에 물 이 묻지 않게끔 하는 레콘 특유의 방법이다. 그렇게 물잔을 고정시켜 둔 채 물을 마신 뭄토는 다시 상체를 들어올리고 말했다. "야, 수교위. 그거 말장난처럼 들린다. 이 길로 가게 하는 것과 다 른 길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같은 말이잖아." "그래서 하나의 길을 없앤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가진 병력이 부족 하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둘이라면 내버려둘 겁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셋 이상일 경우에만 그 중 하나를 막을 겁니다. 그러면 지멘은 남은 길들 중 하나를 선택 할 겁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한 가지 길을 선택하면 다른 길 은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길은 제가 막지 않아도 막은 거나 다름없게 됩니다. 포기하는 길이 점점 많아지면 결국 지멘이 포기한 길들이 지멘 자신을 포위하게 될 겁니다. 결국 지멘은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실제로는 갈 길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스스로 우형을 짓게 하여 곤마가 되게 하는, 아니, 그러니 까 지멘에게서 병력을 빌린다는 것은 그런 말입니다." "음. 그럴 듯하게 들리는데. 하지만 지멘이 자기가 포기한 길로 다 시 돌아가면 어쩔 건데?" 빈 그릇과 숟가락을 내려놓은 니어엘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뭄토는 자신의 날카로운 지적에 니어엘이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조금 더 생각해 본 뭄토는 자신의 지적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지적 임을 깨달았다. 어리둥절해진 뭄토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니어엘의 대답을 촉구했다. 니어엘이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좀 걱정스럽군요. 저는 지멘이 레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레콘 맞는데." "예. 자기가 선택한 길을 평생 추구하는 레콘 말입니다." "어, 맞아. 지금 그러고 있잖아?" "예. 맞습니다.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안심했어? 그런데 조금 전엔 왜 걱정했는데?" "또다른 레콘이 선택을 번복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해서 조금 걱 정스러웠습니다." 니어엘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본 뭄토는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 다. 뭄토는 손가락을 펴 니어엘을 겨냥했다. "그거 무슨 의미야? 그러니까 내가 우유부단하다는 말이야?" 니어엘은 두 손바닥을 펼쳐 뭄토에게 보였다. "아아, 저는 레콘의 부리에서 자기가 포기한 길로 다시 돌아간다는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 작전은 레콘이 그런 생각 을 할 수도 없다는 가정 하에 세운 작전입니다. 그래서 조금 놀랐던 겁니다. 기분 나쁘다면 사과하죠." "그 말은 레콘을 바보 취급하는 거야?" "아니오. 가당찮은 숙원에 매달리고 있는 지멘의 고집스러움을 염두 에 둔 겁니다. 니어엘의 정성스러운 대답에도 뭄토의 기분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 다. 하지만 뭄토는 지멘의 숙원이 가당찮다는 것에 동의했기에 더 이 상 따지지는 않기로 했다. 레콘이 다른 레콘의 숙원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뭄토는 지멘의 숙원에 대해서는 그런 취급도 어 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뭄토는 자신이 배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멘의 숙원을 비웃 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잊기로 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3-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12 조회수 : 13 피를 마시는 새 3.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 3 지멘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광경이 황혼녘에 볼 수 있는 가장 끔찍 한 풍경이라고 단정했다. 지멘이 보고 있는 것은 넓은 선상지였다. 선상지 위쪽, 무슨 수를 써도 지멘이 단숨에 접근하기 힘든 암석 지대에는 두 대의 소화차가 서로를 엄호하는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 모습도 꽤 많은 우려를 불러 일으키는 모습이었지만 정작 지멘으로 하여금 부리를 떨게 만드는 모 습은 선상지 아래쪽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많은 수의 제국병들이 넓 게 펼쳐져 땅을 파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함정이었다. 하지만 함정이라는 거창한 이 름에 어울리지 않게 제국병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겨우 무릎이나 빠 질까 싶은 구덩이에 불과했다. 가벼운 여흥거리 삼아 뒷산에 허방다 리를 놓는 농가의 소년이 보더라도 비웃음을 금하기 어려운 조잡한 수준이었지만 지멘은 그럴 수 없었다. 아실이 그의 생각을 읽는 것처 럼 말했다. "저런 걸로 당신 잡을 생각은 없을 테고, 아무래도 그걸 채우겠군 요." 아실이 말한 '그것'은 물론 물이었다. 물구덩이 위를 흙이나 풀잎쪼 가리 등으로 위장한다면, 밝은 대낮이라면 눈으로 보면서 피할 수 있 겠지만 밤에는 꼼짝없이 빠지게 될 것이다. 실로 소름끼치는 함정이 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을 느끼면서도 지멘은 그쪽으로 다 가갈 생각을 포기해버렸다. 결과적으로 산을 넘는 것이 힘들어졌다. 지멘이 목표한 선상지는 산을 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지멘은 몸을 숨기고 있던 언덕에서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쳤다. 언덕 아래까지 내려온 지멘은 바닥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벼슬을 움켜쥐었 다. 조금 늦게 비탈을 내려온 아실이 맥빠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보라는 듯이." 지멘은 부리를 완강하게 잠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땅바닥에 앉은 아실은 지멘의 무릎에 뒷통수를 기대었다. "이 근처 여기저기에 저런 함정을 파뒀다고 생각하길 바라는 거예 요. 사실 하나도 안 팠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네요. 그 수교위, 니어엘 헨로라고 했지요? 엘시 에더리 외에 유념해둬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것 같군요." 지멘과 아실의 크고 작은 모습에도 비탈을 흠뻑 적신 낙조가 물들기 시작했다. 풀잎들이 검붉게 타오르고 흙냄새 풍기던 바람은 조용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밤을 기다리던 것들이 차가운 체취를 뿜기 시작 했다. 아실은 하루가 마감되는 우울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추적자들의 존재가 확인된 이상 밤을 틈타 움직여야 하겠지만 지멘은 절대로 움 직이지 않으려 할 것이다. 물론 지멘은 어둠 저편에 별보다 많은 함 정들이 있을 거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실에게 말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실은 지멘이 그렇게 생각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니어엘 헨로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실은 지멘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떨구고 오른손으로 벼슬을 움켜쥔 모습으로 지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은 깃털들 사이를 파고든 마지막 햇살이 그의 몸을 불 붙은 숯덩이처럼 바꿔놓았다. 만약 좋은 바람을 탄다면 맹렬한 불 길을 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숯덩이. 하지만 바람은 없고 냉혹한 물 만 가득하다. 해가 졌다. 저녁이 밤으로 바뀌는 미묘한 시각. 빛이 사라지고 지멘의 검은 몸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사그라드는 불 잉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아실은 속이 상했다. 지멘의 다리 사이로 걸어간 아실은 지멘의 부리를 똑똑 두드렸다. 지멘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눈만 치켜떠 아실을 바라보았다. 이미 서로의 눈을 찾기 어려운 어둠이었지만 두 사람은 정확하게 서로의 눈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실은 지멘의 왼쪽 무릎에 팔꿈치 를 괴고 비스듬하게 기대섰다. "지멘. 저는 아마 열여덟 살 쯤 되었을 거예요. 저를 주웠을 때 타 이모는 제가 다섯 살이라고 말했거든요." 그 서두는 지멘의 관심을 끌었다. 지멘은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아실 의 말에 집중했다. "타이모 성격 기억나죠? 사소한 건 신경 안 쓰죠. 인간 아이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타이모는 누가 다섯 살 쯤일 거라고 말하자마자 제 나이를 다섯 살로 결정했어요. 그렇게 틀린 것 같지는 않으니 다행이 지요." 아실의 설명은 지멘이 기억하는 타이모와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 다. 지멘은 추억의 상호 확인에서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즐거움을 느 꼈다. 그리고 아실도 지멘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 다. 서로를 볼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그리 큰 장애가 아니었 다. "나이야 특별히 중요할 건 없지요. 중요한 건 이 땅에 있는 모든 열 여덟 살짜리 인간들 중에 매일 제국군에게 쫓기고 한달에 대여섯 도 시를 떠돌고 반년에 한 번씩 황제의 세금수송대를 습격하고 3년에 한 번 꼴로 지붕 밑에서 자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지멘은 벼슬을 움켜쥐었던 손을 풀었다. 오랫동안 움켜쥐었던 벼슬 이 약간 저렸다. 아실이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열여덟 살짜리들은 이렇지 않아요. 사람은 열여덟 살 때 이렇 게 사는 것이 아닐 거예요. 팔다리가 온전한 열여덟 살짜리가 옷에서 자기 똥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닐 거예요. 미치지도 않 은 열여덟 살짜리에게 아프면 신경 써주고 우울한 것 같으면 농담 걸 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거라고요. 언젠 가 자신을 죽일 사람 외엔 아무도 믿지 못하면서 사는 것은 제대로 된 열여덟 살짜리의 삶이 아니에요." 아실은 지멘의 무릎에 얹어둔 팔꿈치를 뗐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살아요." 분노가 아실의 목소리를 갈아 날을 세웠다. 아실이 외쳤다. "빌어먹을, 단 한 번뿐이에요! 한 번 뿐인 열여덟 살을 이 따위로 산다고요. 저는 당신처럼 해볼 거 다 해보고 이 미친 짓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방식으로는 살아본 적도 없다고요!" 아실이 손을 뻗었다. 어둠 속을 거침없이 뻗어간 손은 지멘의 수염 볏을 할퀴듯 움켜쥐었다. "그러니 약한 척하지 말아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으니까! 무서워 요? 물이 무서워요?" 지멘의 몸이 굳었다. 그의 몸에서 깃털이 부풀어오르며 아실의 볼을 때렸다. 아실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 깃털을 깨물었다. 아 실은 지멘의 깃털을 깨문 채 속삭였다. "좋아요." 아실은 깃털을 잎에 문 채 급하게 몸을 뺐고 그 때문에 지멘의 깃털 들이 몇 개 빠졌다. 지멘의 품에서 뛰쳐나온 아실은 어둠 속을 더듬 어 지멘의 등뒤로 돌아갔다. 배낭을 뒤진 아실은 곧 밧줄을 찾아내었 다. 아실은 다시 지멘의 앞쪽으로 걸어나오며 밧줄의 한쪽 끝을 자기 의 허리에 묶었다. 밧줄을 잡아당겨 그것이 잘 묶인 것을 확인한 아 실은 밧줄 사리를 지멘에게 집어던졌다. 밧줄 사리는 지멘의 가슴팍 에 부딪혔다. "붙잡아요." 지멘은 몸을 부풀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실은 볼에 깃털을 붙 힌 채 발을 쾅쾅 굴렀다. 자신의 허리에서 밧줄을 잡아챈 아실은 그 것을 지멘에게 내밀었다. "붙잡아요! 그 줄을 붙잡고 따라와요! 저 앞에 있는 건 쟁룡해도 아 니고 엘시 에더리도 아니에요. 물구덩이일 뿐이라고요. 그러니 저를 따라와요! 제가 물에 빠지지 않으면 당신도 빠지지 않아요. 당신이 그랬죠? 레콘은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잘난 척하며 떠들었죠? 부 리로만 떠드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몸으로 보여요!" 지멘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실은 밧줄을 움켜쥔 손끝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긴장한 근육들 이 팔 속에서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흐느낌에 놀란 아실은 황급히 팔을 끌어당겼다. 좌절감이 그녀의 팔 을 훔쳤고 아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밧줄을 느꼈다. 손바닥이 아팠다. 아실은 무릎을 꿇었다. 의지의 매듭이 풀렸고, 아실은 자신의 주의 력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방기된 시간들이 소녀와 거인 주위를 흘러갔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아실을 불렀다. 아실은 고개를 들었다. 캄캄한 밤. 달은 지평선 이쪽에 도달하지 못 했고 자폐적으로 번득이는 별빛들은 땅에 아무런 빛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아실을 자극한 것은 시각이 아니었다. 그녀의 피부를 쓸어만 진 것은 거대한 공기의 움직임이었다. 크고 육중한 것의 움직임에 휘 말려든 공기들이 내뿜는 불평이 그녀의 주의를 끈 것이다. 아실은 밧줄이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아실은 황급히 일어섰다.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애를 따라가야겠어." 아실은 보이지 않는 지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밧줄을 당기는 힘은 거대했지만 부드러웠다. 아실을 내동댕이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손놀 림이었다. "이 애가 나를 이끌어준다면." 아실은 두 주먹으로 눈을 눌렀다. 눈꺼풀 속에서 빛이 폭발하고 그 잔영이 그을음에 뒤덮일 때까지 그렇게 누르던 아실은 손을 뗐다. 그 리고 코먹은 소리로 말했다. "함정들 사이를 돌파해서 산을 넘겠어요." 무거운 신음이 들려왔다. 그것을 동의로 받아들이기로 한 아실은 주 저없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줄이 잠깐 팽팽해졌다가 곧 느슨해 졌다. 인간과 레콘은 산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은 낮에 기대어 사는 동물이다. 밤을 낮처럼 볼 수 있는 나가 도, 불을 마음대로 부리는 도깨비들도 그 사실에서 자유롭지는 못하 다. 그리고 인간인 아실과 레콘인 지멘에게는 다른 두 부류의 사람과 달리 밤의 어둠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다. 주의력을 앗아가는 그 암흑 속에서 아실은 불빛을 목표 삼아 걸었다. 함정을 파고 있던 제국군들은 밤이 다가오자 횃불 같은 것을 피워두고 있었다. 아실은 제국군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 외에는 목표로 삼을 만한 것 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실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 다. 아실에겐 걷는 것 이외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는데, 그것 은 걷는 것이 지나치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지멘의 발에 걷어차일까봐 아실은 감히 밧줄을 느슨해지게 만들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실은 지멘의 몸을 끌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 은 무익한 고행이었고 아실도 자신이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하지만 아실은 지멘의 발길질이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 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참아낼 수 있었지만 결국 아실의 입에서 고통스러 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단 시작된 신음을 멈추기는 어려웠다. 문득 아실은 자신의 신음이 이중주처럼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실은 자신이 내뱉지 않은 신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멘 의 신음임을 알고는 놀랐다. 지멘 또한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는 물에 대한 원초적 공포와 싸우 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다리와도 싸우고 있었다. 지멘 또한 지 나치게 빨리 걸으면 아실을 걷어차게 될 테고 느리게 걸으면 아실이 뒤로 나동그라지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멘은 자신의 걸음을 통제하려 애썼다. 걷거나 숨쉬는 것과 같은 일은 통제 하려 하면 더 힘들어지는 법이다. 지난 6년 동안 아실이 본 지멘은 멈춰서 있는 시간보다 달리는 시간 이 더 많았다. 그들이 아침과 점심, 저녁을 각기 다른 도시에서 맞이 한 회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런 지멘이 걷는 행위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실로 하여금 기묘한 기분에 젖어들게 했다. 살 갗이 부풀어오르면서 동시에 몸의 중심은 잔뜩 비틀려 짜여지는 느 낌. 아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실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아실은 눈물로 볼을 적시는 감미로움을 즐길 수 없었다. 그 녀가 걷고 있는 삶의 형태는 다른 가능성들을 단호하게 배제한 끝에 얻어진 유일한 것이고 후회나 절망의 무게를 짊어진 채 그 가느다란 경로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멈춰서서 우는 대신 아실 은 또다시 몸을 앞으로 내던졌다. 밧줄이 팽팽해졌다. 자신이 해가 뜨기 전에 기절할 것을 확신했지만 그래도 아실은 걸어야 했다. 불빛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 아실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 다. 아니었다. 아실은 몇 번이나 의심해보았지만 그 광경은 압박감에 지 친 정신이 제공하는 만화경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횃불들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실은 황혼녘에 보았던 제국군들의 모습에서 야영 장비가 있었는지 떠올려보려 애썼다. 그 때 지멘이 말했다. "야영지로 복귀하는 모양이군." 지멘의 목소리에 흠칫했던 아실은 다시 멀어져가는 횃불들을 바라보 았다. 아실은 이런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껏 표적이 되어주던 횃불이 접촉하게 될 만큼 가까워지자 스스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아실은 더 큰 행운에 직면하게 되었다. 본격 적으로 함정 지대에 들어섰기에 긴장하고 있던 아실은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땅을 파헤친 흔적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주위를 둘러본 아실 은 새파란 밤하늘과 지평선을 박차고 솟아오른 달을 발견했다. 상현 에서 조금 더 부풀어있는 그 달은 아실에게 상당한 시야를 확보해주 었다. 뒤를 돌아본 아실은 지멘의 검은 모습과 달빛 속에 드러난 윤 곽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실은 지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지 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지멘에게도 아실의 모습이 잘 보였던 것이다. 더 교묘하게 숨겨진 함정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실은 그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아실은 발을 적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혹 몸이 통째로 빠질 함정이 있다 해도 지멘과 연결된 밧줄이 있었기 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실은 기쁨 속에서 외쳤다. "빨리 걸어 요!" 그리고 아실은 달려갔다. 지멘은 보조를 맞춰 걷는 속도를 높였 다. 아실은 지금껏 겪었던 고통과 불쾌한 감정들을 모두 잊었다. "수문을 열어라-!" 메아리를 동반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을 때 아실은 앞으로 달려가는 중이었고, 그래서 갑자기 팽팽해진 밧줄에 대응할 수 없었다. 몸이 붕 떠올랐을 때도 아실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뒤통수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을 때 였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아실은 지멘의 이름을 연거 푸 불렀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주를 퍼부어 주기 위 해서. "둑이 무너진다!" "안돼! 난 수영 못해!" "뗏목에 타라! 쓸려내려간다!" 발길질을 좀 세게 하면 먼지가 일어날 것 같은 바싹 마른 언덕 위에 서, 눈동자와 입안 외에 어느 곳도 젖어있지 않은 모습으로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수난 사고에 동반될 법한 탄성들을 내뱉고 있었다. 킬 킬거림은 이 경우 존경의 표시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수교위 주위에 있던 부위들과 수전사들은 마음놓고 킬킬거렸다. 니어엘은 빙긋 웃으 며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귀관들의 상상력을 점검해볼까. 카루스 부위." 니어엘은 부위 한 명을 지적했다. 다른 부위와 수전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걸어나온 카루스 부위에게 니어엘은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언덕 정상에 선 카루스 부위는 힘껏 외쳤다. "사람 -려! 어푸! -람 살려!" 카루스 부위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뗐다 하면서 실감나는 외침 을 만들어내었다. 좋은 상상력에 대한 찬사로 작은 박수가 터져나왔 다. 니어엘 또한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니어엘 은 부하들에게 나머지를 맡겨두고는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 아래엔 그녀의 야영지가 있었다.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자신 의 천막으로 걸어간 니어엘은 지멘이 어떤 모습일지 짐작하게 도와주 는 좋은 표본을 보게 되었다. 뭄토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 양쪽을 짓누르며 무릎에 부리를 박고 있었다. 니어엘이 그 애처롭다 할 광경에서 눈을 돌린 까닭은 그녀의 무정함 때문은 아니다. 니어엘은 뭄토 근처에 있는 인간 남자들을 빨 리 쫓아버리는 편이 뭄토에게 더 도움될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니어 엘은 남자들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들은 일부러 그렇게 모아놓은 것처럼 한결같이 체구가 크고 사 나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하고 있 어 그 사나움이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한 가지 기묘한 점이 있었 는데, 그들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은 분명히 칼을 맬 수 있는 허리띠 였지만 어디에도 칼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들의 신분을 혼동 할 가능성은, 다행히 없었다. 사내들이 옆에 놓아둔 방패들에는 유명 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발케네의 공작가를 나타내는 감투 문장이었다. 도깨비들은 자신들의 장난감이 사용된 이 문장에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깨비가 아닌 사람들 중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암살공의 괴팍한 성미를 거스를 만한 요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니어엘이 자리에 앉자 남자들 중 하나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탄했습니다. 헨로 수교위." "고맙습니다. 마바노 조장." 마바노 조장이라 불린 남자는 목례하고는 언덕 쪽을 잠깐 곁눈질했 다. "하지만 저렇게 계속 고함을 지르면 지멘도 이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근방은 물난리가 일어날 지형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멘은 소리의 방향으로 야영지의 위치를 짐작할지도 모릅니 다." "지멘이 저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에 속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턱없 이 과분한 소망이겠지요. 저는 그저 지멘의 신경이 곤두서길 바랄 뿐 입니다. 그리고 저 소리는 시간을 두고 각자 다른 곳에서 들리게 될 겁니다." 니어엘이 말을 맺을 때 쯤 언덕 위의 소란이 끝났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케네 국경수비대의 텡 마바노 조장은 트집 잡을 것이 없을 거라는 것을, 혹은 자신이 생각해낼 만 한 문제들은 니어엘이 이미 고려했을 거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텡은 원론적인 문제로 곧장 직행하기로 했다. "당신이 드높은 열의로 이 작전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 쁩니다. 수교위. 지멘의 체포는 틀림없이 폐하의 기쁨일 테고 또한 언제나 폐하의 안녕을 바라는 제 주군의 기쁨이기도 할 테니까요. 물 론 저는 당신의 열의가 우리 모두의 존중을 받는 틀 안에서 펼쳐질 거라 믿습니다." "정당한 믿음이십니다." "혹 저희들이 도와드릴 것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기꺼이 도와드리 겠습니다." "친절한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으로선 떠오르는 것이 없군요. 여러 분의 귀한 조력이 있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잊지 않고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텡 마바노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용건이 끝나자마자 마바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례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될 터였으므로 니어엘은 손을 내밀었다. 텡은 그 손을 마주잡아 두어 번 흔들고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모닥불 곁을 떠났다. 그들을 배웅한 니어엘은 다시 모닥불 곁으로 돌아왔다. 뭄토는 조금 전 그녀가 보았을 때와 똑같이 무정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니어엘은 뭄토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천막에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사물을 뒤진 니어엘은 곧 동그란 술병 하나를 꺼내어 돌아나 왔다. 모닥불 옆으로 돌아온 니어엘은 병째 술을 마셨다. 제국병 하 나가 황송해 하며 잔을 들고 나타났지만 니어엘은 고개를 저어 그를 물러나게 했다. 니어엘이 세 모금째 마셨을 때 웅크리고 있던 뭄토가 말했다. "그 자식 뭐 하러 온 거야?" 니어엘은 당신을 놀리러 온 건 아니라고 말할 순 없었다. "경고를 하러 온 겁니다." "무슨 경고?" "지멘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발케네 경계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지요. 제국군이 국경 인접지역에서 작전을 시작하면 항상 옵니다. 도대체 어떻게들 알고 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작전을 시작할 때 발 케네 수비대에 공문을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편에서는 세작들에게 지급하는 돈을 아낄 수 있어 고마워할 지도 모르지요." 뭄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존중하는 틀 어쩌고 하는 건 그 소리야?" "그렇습니다." "그거 좀 넘어가면 안되냐? 그 놈들은 넘어왔잖아." 니어엘은 모닥불을 헤쳐 불길을 살렸다. "아, 저도 몇 명의 부하들만 데리고 칼 없이 넘어가려 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넘나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발케네령 안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경계선을 넘나드 는 것을 대충 눈감아주는 영주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발케네공은 자기 땅에 제국군이 들어오는 것을 자기 바지에 남의 손이 들어오는 것보다 더 싫어합니다." 뭄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만약 지멘이 그 경계선을 넘어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데? 넌 못 쫓아가는 거야?" "그렇습니다. 지멘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자는 자주 그런 식 으로 제국군의 추적을 뿌리칩니다. 제가 화살을 쏘았던 그 강이 발케 네와 제국령 나나본의 경계입니다. 지멘은 그 강을 건너려 애쓰겠지 요. 물론 건널 수 없습니다. 저를 그가 붙잡을 테니까." "뭐?" "예? 제가 그를 붙잡는다고요." "조금 전엔 반대로 말했어." "설마요. 그럴 리가 없지요. 그건 말도 안됩니다." 뭄토는 도와줄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했다. 지휘관의 난행을 말리러 다가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뭄토는 니어엘이 폭 압적인 상관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뭄토는 뒤통수를 조금 긁적거리다가 자신을 돕기로 했다. "너 술주정뱅이냐? 혹 그렇다 해도 작전 중에 그렇게 퍼마셔도 되는 거야?" 니어엘은 대답 없이 입 안에 술을 부어넣었다. 짜증이 났지만 동시 에 뭄토는 짜증을 부릴 근거가 희박하다고도 생각했다. 니어엘은 해 야 할 일을 말끔히 처리했으며 부과된 임무를 완수하면서 자기 즐거 움을 찾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최소한 레콘인 뭄토는 그 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뭄토는 눈이나 붙이자는 결심 하에 땅에 누웠다. 그런데 니어엘이 말을 했다. "저는 지멘이 싫습니다." 뭄토는 고개를 돌려 니어엘을 바라보았다. 니어엘은 술병을 든 팔을 세운 무릎 위에 얹어놓고 다른 손으론 땅을 짚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뭄토가 질문했다. "왜 싫어하는데?" 니어엘은 그 말에 대한 대답으로 술병을 확 들어올렸다. 입에 술을 때려붓는 니어엘을 보며 뭄토는 자신의 질문이 잘못된 것인가 생각했 다. 하지만 딱히 짚히는 바가 없었다. 술병을 내린 니어엘은 숨이 막 혔던지 몇 번 콜록거렸다. "지멘은 미치광이입니다." "미쳤다?" "그럼요. 미쳤지요. 황제 폐하를 죽이겠다고요? 백보 천보 양보해서 그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치지요. 그러고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자기가 제국을 더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걸까요? 6억 명의 삶을 자기 가 책임지겠답니까?" 니어엘은 헝클어트리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백 명에 한 명이 어린애라고 쳐도 6백만 명입니다. 저는 한 명의 어린애도 저 때문에 괴로움 받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런데 6백만 명의 어린애가 겪게 될 고통보다 자기 숙원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 까?" "그건……" "대답해보세요. 뭄토. 당신도 레콘입니다. 제가 당신 정체를 알고 있을 줄 몰랐죠?" 주정이라 생각했던 뭄토는 조금 후에야 농담임을 깨닫고는 피식 웃 었다. 니어엘은 검지와 엄지로 술병의 목을 붙잡은 채 그것을 이리저 리 흔들었다. "예. 당신도 뒤돌아볼 줄 모르고 옆길로 새지 않고 충고를 들으면 화를 내는 레콘이지요. 그런데, 당신이라면 6백만 명의 아이가 고통 을 당해도 자기 숙원을 추구할 겁니까?" 동족으로서 지멘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뭄토는 지멘의 숙원이 황당 하다고 생각했다. 뭄토가 선택한 타협안은 가만히 모닥불을 들여다보 며, "나라면 애초에 그런 숙원을 가지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대답은 니어엘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 같았다. 니어엘은 술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모두 마셨다. 그러고나서 그녀는 몇 번 실패한 후 에야 병뚜껑을 제자리에 끼워넣었다. "그럼 역시 지멘은 미친 것이군요. 그래서 저는 내일 정오에 그를 붙잡는 겁니다." "내일 정오?" "지금 쯤 지멘은 자기가 축에 몰렸다는 걸 느끼고 있을 테지요. 내 일 아침은 지멘이 자유의 몸으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이 될 겁니다. 그리고 내일 정오, 유료나루터에서 저는 지멘을 붙잡을 겁니다. 그를 절망도에 처박아버릴 겁니다. 기러기의 노래가 그를 기겁하게 하고 파도 소리가 그를 파괴하게 만들 겁니다." 벼슬 곤두서는 선언에 뭄토는 불쾌함을 느꼈다. 문득 뭄토는 지멘에 대한 니어엘의 증오가 다른 자에 대한 그것에서 전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꼈다. 그 가설을 검토해본 뭄토는 그것이 그럴 듯하다 고 생각했다. 지멘에 대한 니어엘의 혐오감에는 확실히 지나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뭄토는 자신의 의문을 풀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가 듣게 된 니어엘의 다음 소리는 코고는 소리였다. 조금 고민하던 뭄토는 자신 의 의문과 제국군 수교위를 한꺼번에 천막 안에 던져넣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훌륭한 해결책이었다. 아실은 자신이 보고 있는 색깔에 이름을 붙이려 했다. 이름이 없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이름을 떠올렸을 때마다 빛깔은 바뀌었 고, 그래서 아실은 또다른 이름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가다듬어 본능이 되다시피 한 긴장감은 아실 을 그런 유희에 빠져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채 떠올리기도 전에 아실은 벌떡 일어났다. 짧은 시간 동안, 아실은 황량한 산중턱에 쓰러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위를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통증이 찾아들었다. 아 실은 엉겁결에 뒤통수를 만졌고 곧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간신히 눈을 뜬 아실은 손바닥을 관찰했고 거기에 붉은 가루 같은 것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실은 좀 더 조심스럽게 뒤통수를 만졌다. 조금 후 아실은 뾰족한 돌 같은 것에 머리를 부딪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실은 그 상황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막막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 다. 잿빛 들판과 푸르스름한 하늘, 척박한 산, 그리고 밧줄. 밧줄의 한 쪽 끝은 아실의 허리에 묶여 있었다. 아실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그 반대편 끝을 살폈다. 그곳에는 다른 모든 것들에 비해 별 다른 인상을 주지 않는 거대한 레콘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아실이 레콘에 집중하기 위해선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지멘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멘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그 모습은 사람이 그냥 할 일이 없어 서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렇게 보기엔 자세가 지나치게 곧 았다. 하지만 또한 그 모습은 예의의 요청에 부응하여 사람들이 취하 곤 하는 부동 자세와도 달랐다. 그렇게 보기엔 체중 분포가 지나치게 불규칙했다. 지멘이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것은 망치와 도끼 덕분인 것 같다. 지멘은 망치와 도끼로 땅을 짚은 채 서있었다. 아실은 지멘이 다른 자세를 취할 수 없어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아실은 추위를 느꼈다. 아실은 두 팔로 자신을 감싼 채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러자 두통이 격해졌다. 현기증을 느낀 아실 은 몇 번 휘청거렸다. 몇 걸음도 걷지 않아 다시 쓰러질 것을 직감한 아실은 자신의 몸을 지멘에게 던졌다. 비틀거리며 걸어간 아실은 용 케도 쓰러지기 직전에 지멘의 무릎을 붙잡았다. 지멘의 무릎에 의지하여 호흡을 가다듬은 아실은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올렸다. 아래로 늘어진 벼슬이 지멘의 오른쪽 눈을 덮고 있었다. 그러나 왼 쪽 눈은 아실을 정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그 눈은 슬퍼보였다. 아실은 일어났던 일들을 재구성해보았다. 물을 상기시키는 외침에 지멘은 갑자기 멈춰섰다. 그 때문에 나꿔채어진 아실은 뇌진탕을 일 으키고 혼절했다. 밧줄의 이끌림이 사라지자 지멘은 제자리에서 꼼짝 도 하지 못했다. 밤과 바람과 추위와 맹목과 고독과 슬픔이 그들만의 기괴한 음색으로 우짖도록 내버려둔 채. 아실은 속눈썹의 떨림으로 말했다. 밤새도록 서있었어요? 아실은 지멘의 무릎을 쥔 손가락으로 말했다. 쓰러진 저에게 다가올 수도 없었어요? 아실은 일그러지려는 미간으로 말했다. 그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죠? 아실은 입으로 말했다. "안녕, 지멘?" 지멘은 눈을 부릅떴다. 아실은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끌어올렸다. 미소로 보이길 바랐지만 희망은 별로 가지지 않은 채 아실이 말했다. "오늘도 날씨가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끔찍하게 춥네요. 으아, 와 들와들 떨리네. 좀 움직이는 편이 좋겠어요. 해도 저만큼 떴으니까, 지멘! 우리 움직여요." 지멘의 부리가 열렸다. 닫혔다. 지멘의 손이 올라왔다. 다시 내려갔 다. 지멘의 눈이 커졌다. 끔뻑였다. 재미있다는 듯이 그 모습을 바라 보던 아실은 지멘의 무릎을 밀며 똑바로 섰다. 아실은 다시 주위를 살폈다. "저 앞까지는 함정이 있어요. 거기까진 제가 이끌죠. 가요!" 아실은 자신의 말대로 했다. 그녀는 주저없이 발을 뗐다. 아실의 뒤 통수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본 지멘이 벼슬을 떨었다. 아실은 거침없 이 걸어갔다. 또다시 밧줄이 당겨질 거라 의심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 이지 않았다. 아실과 지멘을 잇는 밧줄 가운뎃부분이 땅에서 떠올랐을 때 지멘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망치와 도끼가 땅을 밀었고 다음 순간 지멘은 발을 뗐다. 지멘은 아실을 따라 걸었다. 한 발, 한 발. 거대한 세월이 다져놓은 산등성이에 희미한 발자국을 남기며 두 사람이 걸었다. 아실이 중얼거렸다. 지멘은 아실이 왜 그 러는지 이해했다.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하려는 아실의 배려였다. 눈 주위의 깃털들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지멘은 아실의 말에 집중했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타이모의 말이었다. 지멘은 벼슬을 곤두세웠다. 눈으로는 아실을 쫓 았지만 지멘은 귀로 어젯밤 내내 들었던 외침들을 떠올렸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니어엘 헨로의 부하들은 밤새도록 자리를 바꿔가며 떠들었다. 지멘 은 그 말의 백분의 일도 믿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그 외침 전부를 수 용했다. 자괴감과 혐오감으로 얼룩진 밤을 생각하며 지멘의 부리가 열렸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아실은 잠깐 멈춰섰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지멘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혼잣말을 하고 싶어함을 직감한 그녀는 잠깐 멈춰선 것을 후회하며 다시 발을 움직였다. 지멘이 쉰 목소리로 말했 다.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한 시간 후 아실과 지멘은 산봉우리에 섰다. 지멘과 아실을 묶어놓았던 밧줄이 다시 풀렸다. 아실은 지멘의 배낭 안에 들어섰다. 머리의 통증과 차가운 땅에 쓰러져 있었던 후유증 때 문에 다시 졸도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아실은 애써 비명을 삼켰다. 밤새도록 서있었던 지멘 또한 무릎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피로감 을 느꼈다. 그러나 지멘은 두 팔을 억지로 벌렸다. 그리고 망치와 도 끼를 힘차게 부딪혔다. 섬광이 산봉우리를 확 불태웠다. 새하얀 빛의 잔영이 사라졌을 때 지멘은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힘차게 산봉우리 를 걷어찼다. 지멘은 산등성이를 달렸다. 섬광은 너무나도 짧다. 지멘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결정했다. 그는 강이 싫었고 이 근처의 산들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멘은 나나본 남쪽으로 크게 돌아가기로 했다. 엄청나게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지멘은 괘념치 않기로 했다. 우기츠까지 가서 지러쿼터 산맥을 넘는 한이 있어도 지 멘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니어엘 헨로가 깔아둔 거미줄은 촘촘했다. 얼마 달리지 않아 서 지멘은 소화차를 발견했다. 지멘의 달리기가 정숙할 수는 없다. 소음을 들은 제국병들은 이미 지멘을 대비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겨 냥되는 살수관을 본 지멘은 주저없이 방향을 바꿨다. 오전 동안 지멘은 여덟 번 방향을 바꿔야 했다. 가중되는 피로감과 무력감이 지멘을 다시 옭아매었다. 지멘은 지나 온 밤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출발할 때 수립했던 계 획은 망각되었고 지멘은 그저 자신이 가지 않았던 길을 찾아 맹목적 으로 달렸다. 스스로를 다잡기도 힘들었던 아실은 그런 지멘을 통제 할 수 없었다. 정오 무렵, 지멘은 지친 눈으로 갈대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멘은 갈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겐 습지에 자라나는 식물에 대 해 어떤 종류의 호감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갈대밭 한쪽에 그의 지친 정신을 파고드는 인위적인 사물이 있었다. 지멘은 피로한 눈을 비비고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움막보다 조금 나아보이는 오두막이었다. 지멘은 잠시 쉴 수 있을지 의심하며 그 움막을 향해 걸어갔다. 탁월한 신장 때문에 전망을 확보하는 것은 지멘에게 쉬운 일이었다. 다가가면서 지멘은 좀 더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오두막은 작았지만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지멘이 여러 번 보았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폭은 꽤 넓었다. 지멘은 강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두막의 좀 특별한 부속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강심을 향해 뻗어있는 나루터였다. 나루터에는 꽤 큼직한 나룻배가 묶여 있었다. 그리고 나룻배를 묶어 둔 말뚝에는 한 명의 인간이 걸터앉아 있었다. 두툼한 옷을 두르고 있어 인간의 나이를 당장 알아보긴 힘들었다. 멍한 정신 속에서 지멘 은 그가 사공일 거라 짐작했다. 강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들을 배에 태워주고, 아마도 오두막에서 기거할 것이다. 지멘이 좀 더 가까이 갔을 때 사공이 그를 발견했다. 사공은 고개를 갸웃했을 뿐 앉음새를 바꾸지는 않았다. 지멘이 나룻배에 관심이 없 는 것처럼 사공은 레콘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사공은 예비 고객 을 바라보는 눈길이라기보다는 호기심으로 지멘을 바라보았다. 그 때 지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들을 들었다. 지멘은 엉겁결에 오두막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은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유일한 방향이었다. 놀란 사공이 벌떡 일어났다. 오두막의 마당 에 도달했을 때 지멘은 뒤로 홱 돌아섰다. 다가오는 소리에는 온갖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말발굽 소리, 발소리, 바퀴 소리. 지멘은 등 뒤의 사공은 완전히 잊은 채 갈대밭을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갑작스럽게 많은 것이 나타났다. 지멘은 좌에서 우로 죽 둘러보았다. 대략 오백 명 쯤 되는 완전 무 장한 제국병들이 갈대를 헤치며 나타났다. 그들 중간중간에는 말을 탄 지휘자들도 있었다. 오른쪽 끝에 도달한 지멘은 다시 고개를 왼쪽 으로 돌리며 지휘자들을 살펴보았다. 곧 지멘은 니어엘 헨로를 발견했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커다 란 레콘 한 명과 함께 서있었기 때문이다. 지멘은 그 레콘을 바라보 며 고통스럽게 말했다. "뭄토." 뭄토는 지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니어엘은 지멘 을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그녀가 짧게 외치자 다가오던 오백 명의 병사들이 동시에 멈춰섰다. 지멘에게서 몇십 미터 쯤 거리를 둔 채 제국병들은 그를 완전히 포위했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목에는 덧살이 끼 워져 있었다. 이토록 지친 상태에서는 니어엘의 '비장의 기술'을 피 할 수 없으리라는 자각에 지멘은 통탄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니어 엘은 오른손을 전통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덧살을 움켜쥐어 지 휘봉처럼 흔들었다. 그 의미를 아는 뭄토는 몸을 부풀렸다.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멘의 고개가 홱 돌았다. 제국병들 의 뒤편에서 갈대들이 마구 쓰러졌다. 이윽고 소화차 한 대가 당당하 게 굴러왔다. 지멘의 손가락들이 망치와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두번 째, 세번째 소화차가 나타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조금 후 지멘은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서른 하나의 살수관을 확인했 다. 니어엘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제국병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소 화차 주위를 에워쌌다. 소화차와 한 덩어리가 된 제국병들은 지멘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지멘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재빨리 뒤 를 돌아본 지멘은 자신이 나루터의 입구를 향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더 물러날 수 없었다. 스스로 막다른 길로 걸어온 것을 저주하며 지 멘은 앞을 돌아보았다. 소화차들과 제국병은 당장이라도 물을 뿜어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말을 탄 니 어엘이 서있었다. 터질듯 부풀어오른 지멘을 보며 니어엘은 차분하게 말했다. "단수." =============================================================== 일본 : 당신의 부모님과 같은 사람들이, 당신과 같은 자식을 사랑하 며 사는 나라.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3-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13 조회수 : 49 피를 마시는 새 3.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 4 뱃사공의 이름은 데무즈였다. 갈대밭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검은 레 콘이 나타났을 때 데무즈는 꽤 놀랐다. 카지라와 러크, 우기츠와 함 께 나나본 지역은 최후의 대장간으로 가는 레콘들이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제국의 다른 장소에 비해 레콘을 볼 확률이 높은 곳 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은 데무즈와 관련이 없었는데, 다름아닌 그의 직업 때문이다. 비록 데무즈는 어떤 종류의 고객도 거부하지 않았지 만 레콘들은 데무즈가 제공하는 용역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 무즈는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검은 레콘을 관찰했지만, 검은 레콘 과 자신이 서로 연관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일어난 일은 그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여전히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기에 데무즈는 순수하게 호기심만을 추구할 수 있 었다. 그의 눈앞의 광경은 독특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 다. 데무즈는 제국병들에게 쫓기던 레콘 범법자가 이곳까지 쫓겨온 거라 판단했다. 서른 한 대나 되는 소화차에 감명 받은 데무즈는 검 은 레콘이 꼼짝 못하고 잡힐 거라 확신했다. 물론 데무즈는 자신이 인질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레콘이 혹 그런 시도를 하려 한다면 데무즈는 그냥 배를 나루터에서 조금 떨어뜨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 때 데무즈가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강 건너편에서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혹 뱃손이 부르나 싶어 뒤 를 돌아본 데무즈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말을 탄 십여 명의 발케네 국경수비대원들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배를 부르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똑바로 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무즈는 혹시나 싶어 자신의 배를 가리켜 보였지만 수비대원들 중 한 명이 손을 가로저었다. 배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데무 즈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레콘과 대치 중인 제국병들을 돌아보았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도 강 건너편에 나타난 발케네 국경수비대원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니어엘은 그들 중 한 명이 텡 마바노 조장이라는 것도 알아보았다. 지멘이 체포되는 모습을 구경하러 온 것이라 판단 한 니어엘은 극적인 모습을 연출해볼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이를테 면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들고 지멘에게 다가가는 것 같은. 하지만 니어엘은 자신을 억누르며 안장에 매달아둔 활을 집어들었다. 자포자 기한 지멘이 뭔가를 집어던질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을 고려한 니어엘은 화살을 먹이지는 않았다. 비어있는 손으로 말고삐를 움켜쥐 며 니어엘이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땅에 엎드려라. 지멘." 데무즈는 움찔하며 새로운 눈빛으로 지멘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멘 이라고?' 지멘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지멘이 꿈쩍도 하지 않 자 니어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하기 싫더라도 받아들여. 지멘. 네겐 남은 팻감이 없어." 아실은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통증도, 피로감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멍한 기분 속에서 아실은 자꾸만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 렸다. 6년 동안의 목숨을 건 노고가 물거품이 되었다면 더 이상 울지 않을 까닭도 없는 것 같았다. 상상 속에서 아실은 처절하고 비장한 최후들을 상당히 많이 예습했 지만, 그 상상 속 어디에도 이런 경우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언덕 을 이룬 인마의 사체도, 땅을 흠뻑 적신 피도, 붉게 타오르는 석양도 없다. 아무 것도 없다. '황제를 죽이겠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결국 일 개 수교위도 당하지 못하는 조무래기라는 말이야?' 아실은 손을 뻗어 안을 수도 없는 지멘의 목을 끌어안으려 했다. 깃 털들 속에 얼굴을 파묻은 아실은 소리 없이, 눈물 없이 울었다. 그 때 지멘이 말했다. "뭄토. 너를 용서하겠다." 니어엘은 뭄토를 돌아보았다. 뭄토는 움찔하며 벼슬을 세웠다. 그의 부리가 욕이라도 퍼부을 듯 열렸다. 하지만 뭄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어엘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지멘을 바라보았다. 지멘이 몸을 돌렸다. 아실은 놀라서 깃털 속에서 머리를 들었다. 니어엘에게 등을 보인 지멘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아실은 흠칫 놀라 지멘의 벼슬을 움 켜쥐었다. 니어엘 또한 당황했다. 뭄토를 용서하겠다는 지멘의 말이 그녀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문득 니어엘은 뭄토가 말했던 바 다의 이름을 생각했다. 쟁룡해. 바다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레콘 이 알고 있는 바다의 이름이라면 그것밖에 있을 수 없다. 쟁룡해. 그 바다에는 어느 유명한 레콘과 남다른 관련이 있다. 6년 전, 엘시 에 더리와 함께 그녀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쟁룡해. 타이모가 빠진 바다의 이름이다. "지멘!" 니어엘은 다급하게 외쳤다. 지휘관의 당혹은 곧 병사들에게도 전파 되었다. 제국병들은 수군거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병사들이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니어엘을 진정시켰다. 니어엘은 보다 단호 한 어조로 외쳤다. "지멘! 기다려! 네 마음대로 너를 처벌할 수는 없다. 너는 폐하께 처벌 받아야 한다!" 걸음이 약간 느려지긴 했지만 지멘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발케네 국 경수비대원들도 당혹한 듯 강건너편에서 아스라한 소음이 들려왔다. 아실은 겁먹은 얼굴로 지멘의 벼슬을 자꾸 끌어당겼다. 그러나 지멘 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무게에 나무들이 삐걱거렸 다. 나루터의 기둥을 때리는 강물의 소리가 스산하다. 철썩, 철썩. 지멘은 나루터 끝에 섰다. 그의 부리에서 비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태워줘." 데무즈는 자신의 기분을 뭐라고 정의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국령 나나본과 발케네령을 경계 짓는 강변에서, 제국의 역사는 물 론이거니와 유사 이래 한 번도 없었던 요구에 직면한 한 노인이 자신 의 오랜 습관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인간 여자, 은편 다섯 닢, 그런데 레콘 남자는 탄 적이 없어서 모 르겠군요." 데무즈의 목소리는 그의 예상보다도 더 크게 들려서 그 자신을 놀라 게 했다. 데무즈가 특별히 크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 이쪽 편을 소란스럽게 만들던 소음이 일시에 사라진 덕분에 그 소리는 꽤 잘 들렸다. 정신이 나가있기로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상태였던 아실 또한 무의식적으로 질문했다. "인간 여자? 레콘 남자? 유료도로당원 말투 같은데. 그러세요?" 데무즈는 허리 춤에서 당원패를 꺼내어 들어보였다. "그래. 당원이야. 여긴 유료도로당 나나본 지부 소속 유료나루터 고." "아아. 그렇구나. 한 번도 탄 적이 없다면 새로 요금을 결정하셔 야…… 그런데, 지멘? 탄다고요?" 아실의 말 끝부분은 숫제 비명이었다.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신호가 된 듯 제국병들 사이에서도 비명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들을 통 솔할 일차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 니어엘은 자신의 책임을 망각해버 린 채 아실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탄다고?" 몹시 당혹해버린 병사들에겐 그것도 일종의 지휘 행위가 된 모양이 다. 병사들은 앵무새처럼 니어엘의 말을 반복했다. 탄다고? 탄대? 탄 대잖아? 탈까? 타려고? 제발 타지마! 삶에 대한 믿음을 잃을 것 같 아! 세계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레콘은 언제나 행동으로 대답한다. 지멘은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데무즈는 황급히 이물 쪽으로 물러났 다. 이윽고 지멘의 발이 나룻배 위에 실렸다. 데무즈는 제발 배가 뒤 집히지 않길 바라며 이물 바깥으로 몸을 한껏 내밀었다. 그리고 지멘은 배 위에 섰다. "탔다." 니어엘의 얼빠진 목소리는 곧 오백 배로 증폭되었다. 오백 명이 동 시에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광경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그 터무니 없는 공포극에 정신을 차린 니어엘은 뭄토를 돌아보았다. 같은 레콘 으로서 뭄토가 지멘의 행위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니어엘은 만족했다. 뭄토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당장 부서질 듯 이 몸을 떨고 있었다. 니어엘은 다시 나룻배를 돌아보았다. 배는 몇 번 무겁게 흔들렸지만 뒤집히지는 않았다. 지멘은 니어엘에 게 등을 보인 자세 그대로 배 한가운데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는 아실이 배낭 위로 몸을 쭉 뺀 채 지멘의 머리를 여 기저기 만져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 혼란에 빠져버린 니어엘은 촉진으로 정신질환을 판별할 수 있다면 제국 의학계의 진일보가 아니 고 무엇이랴 생각했다. 그 모든 광경 속에서 침착하게 배 바깥으로 손을 뻗고 있는 데무즈 의 모습은 이채로웠다. 수면과 뱃전을 만진 데무즈는 나룻배가 거의 만재 흘수선이라 할 만한 깊이까지 잠겼음을 깨닫고는 이맛살을 찌푸 렸다. 자신이 태운 독특한 고객의 특성을 알고 있는 데무즈는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듣던 것보다 더 무겁네. 스무 닢." 데무즈의 말에 아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실은 재빨리 배낭 속 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조금 후 아실은 돈주머니를 꺼내어 지멘의 어 깨 너머로 던졌다. "달라는대로 드릴 테니까 출발해요!" 아실은 분통을 터뜨렸다. 곧장 출발하기는커녕 데무즈는 허리를 굽 혀 뱃전에 떨어진 돈주머니를 주워들었다. 주머니 안에서 은편 스물 다섯 닢을 꼼꼼하게 세어 꺼낸 데무즈는 돈주머니를 다시 묶어 지멘 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지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데무즈는 어서 받으라는 듯이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아실이 배 낭 밖으로 몸을 던지듯이 빠져나왔다. 배 바닥에 선 아실은 데무즈의 손에서 돈 주머니를 나꿔챘다. "영감님, 정말! 누가 유료도로당원 아니랄까봐. 됐어요?" 데무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물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도 데무즈 는 태평스럽게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뒤쪽에서 퇘, 퇘 하는 소리가 들리자 지멘의 벼슬이 움찔했다. 손바닥을 비빈 데무즈는 나룻배 뒤 에 달린 노를 움켜쥐었다. 나룻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가 제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안도하던 니어엘은 문득 자신이 말 도 안되는 지체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니어엘은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제국병들은 당장 달려나갈 듯이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 던 제국병들은 침묵이 길어지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 의 지휘자를 곁눈질했다. 노를 젓는 데무즈의 곁에 와있던 아실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니어 엘을 바라보았다. 제국군 수교위는 손을 높이 든 채 미동도 하지 않 았다. 니어엘의 손끝에 집중하고 있던 아실은, 그래서 턱으로 물이 튀어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턱을 적신 아실은 놀란 표정을 데무즈 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내가 아냐." 데무즈 또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를 멈추었다. 그 때 쇅 하는 소 리와 함께 물이 다시 튀어올랐다.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던 아실의 눈에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화살 하나가 물 위로 떠오르고 있었 다. 아실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 때 강 건너편에서 세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지멘!" 아실은 비명을 지르며 지멘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아실은 자신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화살은 꿈쩍도 하지 않는 지멘 의 머리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 미간에 화살 이 꽂힐 것이다. 지멘이 고개를 아주 조금, 세차게 비틀었다. 날아온 화살은 지멘의 부리에 맞았다. 파열음과 함께 튕겨져나간 화 살이 빙글빙글 돌며 하늘로 치솟았다. 아실은 그 화살이 수면에 떨어 질 때까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아실이 몸을 날렸다. 어떤 명령도 받지 못했기에 그저 구경만 하고 있어야 했지만, 제국 군은 그 사실에 불만을 느끼지 못했다. 아실의 행동은 넋놓고 구경해 도 허물이 되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거침없이 몸을 날린 아실이 떨어진 곳은 데무즈의 가슴이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데무즈는 아실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황급히 뱃전을 움켜쥔 덕에 데무즈는 배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사공은 자신의 가슴을 내리누르고 있는 고객에게 외쳤다. "무슨 짓이야! 왜 갑자기-" "제기랄, 가만 있어요! 당신을 쏘고 있는 거라고요!" 데무즈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조금 후 데무즈는 속삭이듯 말했다. "저 레콘이 아니고?" 아실은 데무즈를 인정사정없이 아래로 짓누르며 외쳤다. "저 산 만한 덩치를 맞추는데 세 발이나 필요하겠어요? 지멘이 얼어 죽을 화살에 맞기나 하고? 그럴 리 없죠. 당신을 쏘는 거예요!" "귀 좀 그만 눌러. 귓바퀴 찢어지겠네. 왜 나를 쏜다는 거야?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당신이 없어지면 이 나룻배는 그대로 바다까지 흘러가버릴 테니 까!" 지멘의 벼슬이 꼿꼿하게 곤두섰다. 강 저편, 발케네령에 서있던 텡 마바노 조장은 천천히 활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궁술 실력에 낙심하고 있었다. 앉아있었지만 그래도 지 멘은 지나치게 큰 장애물이었다. 그를 지나쳐 그 뒤편에 있는 데무즈 를 저격하는 것은 그에겐 어려운 과제였다. 게다가 세번째 화살이 날 아갔을 때 아실이 보여준 행동은 텡의 의도가 간파되었다는 증거였 다. 씁쓸한 기분 속에서 텡이 외쳤다. "데무즈! 데무즈! 그 소녀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배 위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바노 조장님. 당신이 저를 쏘고 있다는데, 맞습니까?" "설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나는 지멘을 쏘려고 한 겁니다. 하지 만 당신이 좀 위험하군요. 내 불찰이었습니다. 배에서 뛰어내리십시 오." "배에서 뛰어내려요?" "그래요. 그 소녀를 밀쳐내고 강으로 뛰어들어요. 데무즈."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왜라니, 당신이 위험하다고 말했잖습니까? 이것은 기회입니다. 지 멘은 꼼짝도 할 수 없어요. 거기 그렇게 서있는 것이 고작입니다. 당 신은 그냥 배를 버리고 뛰어들면 됩니다. 그러면 지멘은 바다까지 흘 러갈 테고 당신은 지멘의 현상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현상금은 금편 삼백 닢입니다." 데무즈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편 삼백 닢?" "그렇습니다! 은편이 아니라 금편 삼백 닢입니다. 나와 니어엘 헨로 수교위가 증인이 되어줄 테니까 당신은 틀림없이 그 돈을 받을 수 있 습니다." 데무즈는 놀랐다는 얼굴로 지멘의 등을 바라보았다. 데무즈를 짓누 르고 있던 아실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하세요." "응? 뭐?" "빌어먹을, 그렇게 하라고요! 배에서 뛰어내려요. 노젓기를 터득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떻게 되겠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실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던 데무즈의 얼굴 이 곧 험악하게 바뀌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짓는 데무즈 를 보며 아실은 노젓기가 대단히 어려운 기술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오해였다. 아실을 밀어내고 일어난 데무즈가 노를 쥐었을 때 아실은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데무즈는 노를 잡고 다시 강물을 밀어붙였다. 잠깐 동안의 소동 때문에 나룻배는 통상의 궤도에서 밀려나 있었다. 데무즈는 투덜거리며 나룻배를 다시 원래의 궤도로 밀어넣었다. 선수 를 정확히 텡 마바노 조장에게 고정시킨 데무즈는 그대로 나룻배를 전진시켰다. 아실은 눈을 부릅떴다. "영감님?" "왜 불러?" "지금 뭐하는 거예요? 왜 노를 젓는 거죠?" "돈 받았으니까." 아실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어 데무즈 를 겨냥했다. "돈 돌려주고 뛰어내려요! 은편 몇 닢으로 영감님 목숨을 사고 싶진 않아요." 데무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실을 노려보았다. "얘가 미쳤나. 누구에게 뛰어내리라는 거야? 돈 돌려받고 싶으면 네 가 뛰어내려. 이게 누구 배인데." "뭐라고요?" "못 알아듣겠어? 이건 내 배야. 돈 돌려받고 싶으면 이 배를 떠나. 하지만 나에게 떠나라는 건 말도 안돼. 왜냐구? 이건 내 배니까." 아실이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시야가 닿는 곳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크게 웃고 있었지만, 그러나 가장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영감님, 죽어요." "파!" 데무즈는 괴상한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고 아실의 웃음은 더욱 커졌 다. 그녀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배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며 텡은 씁쓸함을 느꼈다. 텡은 사태가 이 렇게 진행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경고나 부탁 없이 곧장 활을 쏜 것도 데무즈가 배에서 뛰어내리라는 권고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텡은 고개를 내저었다. "빌어먹을 유료도로당원. 역시 도로에서 죽겠다는군." 부하들 중 한 명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하죠? 지멘을 쏠까요?" "못봤냐? 눈앞까지 날아오도록 내버려뒀다가 부리로 쳐내는 거? 지 금 엄청나게 위축되어있을 텐데도 그런 재주를 부리는 녀석이야. 역 시 사공을 쏴야 해. 그러니까-" "덧살- 착용!" 우렁찬 외침에 텡 마바노는 찔끔했다. 고함이 들려온 곳을 쳐다본 텡은 강 건너편에 있던 니어엘 헨로 수교위가 드디어 손을 내린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텡은 그 모습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니어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전통으로 손을 뻗었다. 다시 당겨진 그들의 손목 에는 덧살이 걸려 있었다. 텡은 말도 안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니어엘은 이번에도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녀의 짧은 외침이 떨어지자 오백 명의 제국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먹였다. 그것이 텡이 예상한 화살이었고 또한 텡이 절 대로 볼 거라 믿지 않았던 화살이었다. 오백 발의 치명적인 애기살이 발케네령을 향해 겨냥되었다. 텡 마바노 조장은 자신의 머릿속 비망록에 있는 니어엘 헨로 수교위 에 대한 항목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애기살 쏘기의 명수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텡은 그 설명에 주석을 달아야 할 필요를 느꼈 다. 또한 애기살 쏘기의 좋은 스승이기도 함. 텡은 니어엘 헨로가 자신의 중대원들에게 애기살을 가르쳤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군대에서 가르치기엔 위험한 기술이 다. 덧살이 벗겨지거나 할 경우 아무렇게나 날아간 애기살은 옆에 있 는 동료를 죽일지도 모른다. 텡은 지휘자였고, 부하를 사랑한다는 말 의 의미를 그들에게서 사고 발생 가능성을 편집증적으로 제거해주어 야 한다는 관념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군대에서 무수히 발생하 는 불가사의한 사고들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잘못된 관념은 아니다. 하지만 텡은 그 관념 때문에 자신이 또다른 당연한 사실을 무시했음 을 뼈저리게 느꼈다. 애기살 쏘기는 엽사나 활량보다는 병사에게 필 요한 기술이다. 니어엘이 병사에게 필요한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 면, 자신의 부하 외에 누구에게 가르치겠는가. 자신의 판단착오에 이를 가는 텡을 향해 니어엘이 외쳤다. "맞추기 힘든가 보군요. 도와드리겠습니다. 텡 마바노 조장!" 니어엘의 쾌활한 외침에 텡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오백 발 이나 되는 애기살이 날아온다면 고집스러운 유료도로당원을 물귀신으 로 만드는 것은 물론 간단할 것이다. 어쩌면 지멘에게도 상당한 타격 을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텡은 자신과 수비대원들이 사선 에 들어가 있음을 니어엘이 어찌 간과하고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분노 속에서 텡은 지적 수준에 관련된 저속한 단어들을 남용해가며 그 사실을 니어엘에게 지적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텡의 입이 열렸을 때 거기에서는 말은커녕 계명성이나 니름 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후자의 두 가지는 물론 인간인 텡에게 불가능 한 것이다. 하지만 텡이 말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발케네 국경수 비대원들을 놀라게 했다. 수비대원들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기들의 조장을 바라보았다. 텡은 분노와 경악, 그리고 의혹을 담은 눈으로 니어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니어엘이 다시 쾌활하게 말했다. "쏘십시오! 지원하겠습니다." 텡의 얼굴이 검붉게 변했다. 그는 눈을 내려 배를 보았다. 희망을 찾는 것이라면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꾸준히 다가오고 있는 나룻배 안에는 텡이 아는 최고 수준의 유언 청취 전문가가 무시무시한 눈으 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텡은 결정을 내릴 시간이 거의 없음을 깨 달았다. "뒤로 돌아." 수비대원들은 당황했다. 그러자 텡은 몸소 뒤로 도는 행동의 시범을 보여주었다. 발케네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린 텡은 활과 화살을 안장 에 고정시켰다. "전속력으로 귀환한다." 도망간다는 말은 수비대원들에게도 금지어였다. 그리고 수비대원들 은 텡의 말을 오해하지는 않았다. 텡과 수비대원들이 부리나케 도망치는 모습을 보던 니어엘은 빙긋 웃으며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활에 걸렸던 덧살과 애기살이 치워졌 다. 배가 나루터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던 니어엘은 문득 생각나는 것 이 있었다. 니어엘은 뒤를 잠깐 돌아보았다. "뭄토는 어디 있는 거지?" 제국병들은 당황하여 뭄토가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물론이 거니와 그들이 볼 수 있는 곳 어디에도 뭄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니어엘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도저히 볼 수 없어서 도망친 모습이군." 그렇게 설명하던 니어엘은 자신을 곁눈질하는 시선을 느꼈다. "카루스 부위. 뭄토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나?" 니어엘은 카루스 부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카루스 부위는 귀밑머 리를 긁적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저도 뭄토가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우선, 왜 한 대만 더 쏘면 다 죽여버릴 거라고 위협하셨는지 궁금 하군요." 니어엘은 조금 주춤한 표정으로 카루스 부위를 보다가 곧 고개를 끄 덕였다. "설명이 필요하겠지. 좋아. 텡이 사공을 죽여서라도 지멘의 월경을 저지하는 이유가 뭘까? 이유는 하나다. 지멘을 추적한다는 명분으로 제국군이 발케네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을 미연에 저지하려는 거지." "네? 제국군은 봉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래. 하지만 지멘은 제국 공신을 살해했지. 그리고 제국군이 보는 앞에서 발케네에 들어갔고. 그 정도면 억지를 부려볼 명분이 되지. 물론 폐하께 그런 억지를 부릴 생각이 있으신지 없으신 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폐하의 의향과 관계 없이 발케네공 락토 빌 파에게는 그런 억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의심할 자유가 있지." "흐음. 그래서……" "텡은 일부러 찾아와서 들어오지 말라고 강조했어. 그리고 오늘은 사공을 죽이려드는군. 아마 오래 전에 발케네공으로부터 국경수비대 원들에게 어떤 지시가 내려진 것일 거야. 승천한 티나한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제국군이 발케네령에 들어올 빌미를 주지 말라는 식이었겠 지. 그런데, 발케네공이 왜 그렇게 우리를 싫어하는지야 모르지만 난 발케네공의 까다로운 비위를 맞춰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 카루스는 다시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수교위님께서는 지멘이 발케네령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보고하시면서 그것이 제국군의 발케네령 진입의 빌미로 이용 될 수 있다는 강력한 암시를 담으시겠군요. 발케네공이 자신의 땅을 지나치게 보호하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말입니다." "나는 물론 사실대로 보고할 거다. 내 의무니까." 니어엘의 약간 뻔뻔스러운 표정은 카루스를 즐겁게 했다. 카루스는 자신이 상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그래서 카루스는 어떤 대답을 들어도 마음 상하지 않을 자신감 속에서 두번째 질문을 꺼냈다. "마바노 조장이 활을 쏘기 전에도 수교위님께서는 명령을 내리지 않 고 계셨습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손을 들고 계셨습니까?" "그거? 빚갚음이지." "예?" "결국 레콘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물에 빠지는 것이다. 물에 닿는 순간 허우적거릴 겨를도 없이 쇳덩이처럼 바로 가라앉지. 생물 중에 그런 식으로 물에 빠지는 건 레콘뿐일 거다. 절대로 보기 좋은 광경 은 아니야. 그런데 소화차로 돌진하는 것과 배에 타는 것 중 어느 쪽 이 물에 빠질 위험이 더 클까?" 니어엘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본 카루스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고삐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카루스는 니어엘을 쳐다보았 다. 니어엘은 한숨처럼 웃었다. "글쎄. 모르지. 소화차로 돌진하면 반드시 젖지만 나룻배를 탈 경우 에는 조심하면 젖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또 사공을 인질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니어엘은 말끝을 흐렸다. 듣는 귀가 많았고, 지휘관의 입장에서 아 무 말이나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니어엘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조금 고민했다. 그 동안 나룻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도달했다. 먼저 지멘이 대단히 신중한 동작으로 나루터에 올라섰다. 두어 걸음 을 점잖게 걸어간 지멘은 세번째 걸음에서 앞으로 도약했다. 지멘은 수십 미터 저편의 단단한 땅에 무릎부터 떨어졌다. 두 무릎과 양손으 로 땅을 짚은 지멘은 격한 호흡을 몰아쉬었다. 아실 또한 발작적인 웃음 때문에 호흡에 문제를 겪고 있었다. 나룻 배에서 가까스로 내린 아실은 비틀거리며 지멘을 향해 걸어갔다. 그 러나 채 반도 이르지 못해 아실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뒤로 몸을 돌린 아실은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제국령 쪽을 바라보았다. 아실 의 가슴이 크게 벌렁거리는 것은 제국군에게도 잘 보였다. 니어엘은 피식 웃었다. 저 팻감을 쓸 줄은 몰랐는데. 니어엘은 더 이상의 고민 없이 말했 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적을 일으키는 자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카루스 부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니어엘이 손을 들어올렸다. "자! 저 숨쉬기 어려워하는 남녀는 발케네 땅에 있고, 그렇다면 우 리는 저 자들에게 볼일이 없다. 임시 훈련은 이만 끝내고 중대 본부 로 복귀하자." 카루스는 이 체포 작전이 언제부터 임시 훈련이 되었는지 몹시 궁금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꺼낼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해답 없는 의문 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카루스 부위는 재빨리 수교위의 명령을 전달 했다. 곧 제국군 전체가 강변에서 물러났다. 강을 건너오던 데무즈는 잠시 노를 멈추었다. 다시 제국군과 조우하 는 것도 좀 점잖지 못한 일이라 생각한 데무즈는 노를 멈춘 채 마지 막 제국병의 모습이 갈대 사이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강변 에서 모든 제국군이 떠났다. 노를 당기려던 데무즈는 발케네 쪽을 잠 시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빈 나루터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숨도 제 대로 쉬지 못하던 남녀의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유료도로당원들은 말하곤 한다. 길은 방랑자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 할 수 있지만 방랑자를 따라갈 수는 없다고. 부족함 없는 유료도로당 원답게, 데무즈는 길을 떠난 고객들의 신상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사공은 정오의 강물 속에 노를 쑤셔넣어 떠다니던 햇빛을 부서뜨렸 다. =============================================================== 챕터 끝났습니다. 아쉽게도 이번 챕터에서도 폭주갈매기와 흡혈안드로이드, 그리고 철 이가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간략히 그들의 근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폭주갈매기 : 비행속도가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피를 복용한 것 때문인지 그렇잖으면 복용중 흘린 피가 몸에 묻은 것 때문 인지(붉은 색은 속도가 3배) 알 수 없어서 고민 중이라고 합니다. 흡혈안드로이드 : 지구를 구하게 될 용사를 제거하기 위해 타임머신 을 타고 미래로 떠났다고 합니다. 왜 그냥 용사의 어머니를 제거하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그냥 기다리면 올 미래에 왜 타임머신씩이나 타 고 떠난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검찰은 이것이 차떼기의 변종수법인 타임머신떼기가 아닌가 조사중이라고 합니다. 철 : 그레이트 마징가를 타고 지구를 구하게 될 용사를 제거해야 한 다면서 쫓아다니는 안드로이드 때문에 은하철도를 타지 못해 발만 동 동 구르고 있다고 합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4. 묻은 것과 믿은 것 - 1 "……와 같이 타이모의 실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요약해 볼 수 있다. 간략히 살펴보더라도 그 논리의 맹점들은 쉽 게 포착된다. 첫째,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은 단계를 거치는 쪽이 더 효율적이다. 이것은 공리다. 타이모의 제 안을 염수 얻기라는 일에 비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염전 건설 - 소금 채취 - 물에 소금 용해 - 염수 얻기'. 하지만 염수가 필요하다면 그냥 바닷물을 한 그릇 떠오는 것이 낫 지 않을까? 내 견해로는 그것이 염수를 얻는 훨씬 간단한 방법이다. 타이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소금이 아니라 염 수임을 명백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왜 제국에서 분리되었 다가 다시 제국에 융합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인가. 레콘들 은 제국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둘째, 사람의 숫자가 많을수록 그들 모두가 똑같은 소리 를 내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이것 또한 공리다. 백 보 양보해서 레콘 독립국의 건설이 가능할 수 있다고 가정하 자. 우리 모두가 아는 레콘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지배자가 되는 것을 숙원으로 삼은 레콘이 그 독립국을 지 배하려 할 것이다. 좋다. 나는 자신이 상정한 목표를 전력 으로 추구하는 레콘들의 태도를 비웃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배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지배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정통성의 획득이다. 지배자보다는 피지배자의 숫자가 월등히 많으며, 따라서 정치의 문외한들이 착각하기 쉽지만, 더 중요한 쪽은 지배 자의 의사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의사다. 지배자가 되길 원 하는 한두 명의 레콘은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피지배 자가 되길 원하는 절대다수의 레콘 집단을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안됐지만 타이모가 제안하는 국가는 성 립할 수 없는 정치 집단이다. 셋째……" - 쥐딤 대학에서 개최된 강연회에서 비스그라 쥬백 데라시가 강연한 '타이모의 실수' 中. "많이 노력했지만, 시카트. 나는 종증조부님께서 집필하신 책 어디 에서도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남동생과 친해지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어. 그게 우리 가문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교양은 아 닌 모양이지?" 시카트는 멍한 눈으로 누나를 바라보다가 헛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 다. 정우는 그것을 작은 성취라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시카트 는 정우가 즐거워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비셀스 규리하. 농담하는 재주 외에 도깨비들에게 뭐 다른 것은 배 우지 못했나 보죠?" "아니. 다른 것들도 많이 배웠어. 내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부분은 어르신들에게 길 물어보기야. 그 재주만큼은 도깨비들도 나를 못 따 르지." 무시하려 했지만 시카트는 호기심을 느꼈다. "길 물어보는 재주? 그게 뭐가 대단하다는 겁니까?" "어르신들이 가르쳐주는대로 걷다간 오른쪽 세번째 벽에 들어가려다 가 기절할 수도 있거든." 어르신들이 벽이든 바닥이든 천장이든 거리낌 없이 뚫고 다닐 수 있 다는 것을 떠올린 시카트는 겨우 정우의 말을 이해했다. 시카트는 다 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오를 조금 지난 오후였다. 규리하 변경백령의 규리하 시에 있는 규리하 성에서 두 규리하가 규리하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교환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혼란의 요건은 충분하다. 시카트 규리하는 그 모 든 규리하를 아우르는 제유적인 규리하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지만, 정우 규리하가 거론하고 싶어하는 것은 남동생과 자신을 연결짓고 하나로 묶어주는 가문인 규리하였다. 그들의 견해차 는 말투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시카트가 정색하며 말했다. "비셀스 규리하. 당신이 이 회견을 요청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 게 이 회견을 진행시킬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결례는 아니겠 지요. 당신이 지향하는 회담 형식이 지금까지 드러난 것처럼 농담이 나 나누는 것이라면, 나는 이만 회견을 끝내고 싶습니다." "왜 모르는 척하는 거니, 시카트? 너도 내가 애쓰고 있다는 것을 느 꼈을 텐데." 직설적인 도깨비 화법에 시카트는 낭패감을 느꼈다. 이 상황에서 계 속 '비셀스 규리하'라고 부르는 것은 스스로를 창피하게 만들 뿐이었 다. 시카트는 어깨의 힘을 빼고 말했다. "좋아, 누나. 나와 친해보고 싶다는 거야?" "맞아." "내가 한 일은 남매들 사이에 농담 삼아 이야기할 수 있는 옛일 정 도로 만들어버리고?" "싫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데. 왜냐 하면 그건 옛일이 될 수 없어. 난 지금도 그럴 생각이거든." 시카트는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의자가 그와 함께 들썩거렸 다. 의자와 함께 앞으로 얼마쯤 전진한 시카트는 자신을 의자에 결박 시켜놓은 밧줄을 불만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이 결박만 풀리면 말이야." 정우는 안타까운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 때 갑자기 시카트가 앉아있던 의자의 앞쪽 다리가 들렸다. 의자는 시카트를 태운 채 뒤로 죽 밀려났다. 의자가 다시 똑바로 놓여지자 시카트는 옆을 노려보았 다. 틸러 달비 부위가 한 손으로 등받이를 짚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웃고 있었다. "시카트 규리하. 다음엔 바닥에 엎어놓고 깔고 앉겠습니다." "몰상식하고 무례한 놈 같으니. 신이 난 것처럼 보이는군. 귀족을 마음대로 다루니 기분이 아주 좋은가 보지?" 시카트의 희망과 달리 틸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틸러는 손을 뻗었다. 시카트는 흠칫하여 고개를 뒤로 젖혔다. 틸러는 검지로 재빨 리 시카트의 볼을 찍었다가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손가락 끝에 혀를 대어 본 틸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귀족?" 시카트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틸러를 바라 보았다. 틸러는 소리 없이 웃으며 앉아있던 의자로 돌아갔다. 책을 집어든 틸러는 정우에게 계속 대화하라는 몸짓을 해보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시카트는 틸러가 책을 읽기 시작한 후에야 욕설을 내뱉을 수 있었다. 틸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없이 그 광경을 보 던 정우는 쿡 소리를 내며 웃었지만 시카트가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 자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시카트. 그만둬. 그런 욕설은 정말 귀족 맛이 안 나는 행동, 어머. 미안해. 그러니까 점잖게 행동하라는 거야." 불쌍한 시카트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졌다. 도깨비나 다름없는 자에게 점잖게 행동하라는 말을 듣다니. "돌아가겠어. 누나와 할말은 없어." "시카트.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뭐야?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좋다 는 거야?"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 "거짓말." "……누나. 상대가 거짓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거짓말을 할 때는 지적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예의야." 정우는 싱긋 웃었다. "누나를 바보 취급하지 마. 시카트. 물론 나는 네가 익숙한 킴들과 다르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다르다는 거지 더 멍청하다는 말은 아냐. 조금 전에 네가 말한 건 농담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거든? 그리고 도 깨비들은 모두 농담을 좋아해. 내가 거짓말이라고 한 것은 누나의 도 움이 필요없다는 네 태도가 거짓이라는 거야. 네가 정말 도움이 필요 없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시카트의 빗장 하나가 또 벗겨졌다. 시카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 다. "그래. 난 지금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정해. 하지만 누나가 뭘 해줄 수 있지? 내가 좋은 말 한 필과 잘 드는 칼 한 자루, 그리고 식량을 주고 여길 떠나게 해달라고 말하면 누나가 그걸 들어줄 수 있 어?" "그걸 들어주면 어떻게 할 건데? 아버님을 찾아갈 거야?" "당연하잖아." "아버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잖아." "그건 문제가 안돼." 정우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조금 누른 자세로 시카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단 알려주겠는데, 너는 그걸 받을 수 있어." 시카트는 움찔했다. 그는 틸러를 황급히 돌아보았지만 틸러는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카트는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정우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너 만나기 전에 설명을 들었어. 너는 반역죄로 잡혀있는 것이 아니 야. 반역죄에 대해서는 고발된 적이 없거든. 너는 살인미수죄로 잡혀 있는 거지. 나를 공격한 것 말이야. 따라서,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나는 너를 규리하령 바깥으로 내보낼 수 있다더라. 좋은 말 한 필과 잘 드는 칼 한 자루, 그리고 식량 외에 남자애에게 꼭 필요한 많은 손수건까지 줘서. 내가 듣기론 킴 남자애보다 더 지저분해지기 쉬운 생물은 지상에 없다더라고." 시카트는 당황 속에서 정우의 말을 생각했다. 비록 제국군 부위에게 서 귀족 맛이 안 난다는 모욕적인 판정을 받았지만 시카트는 귀족이 었다. 시카트는 곧 정우가 말한 특수한 상황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규리하의 지배자가 누나일 경우…… 누나는 나를 영외추방할 수 있 어." "맞아." "수락했어?" "아직." 시카트는 안도했다. 그리고 곧 안도감을 내팽개쳤다. "수락할 거야?" "몰라.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나는 즈믄누리의 바우 성주님께 편지 를 보냈어. 답장이 오면 성주님의 조언을 고려해서 결정할 생각이야. 하늘누리 쪽에서도 그 때까지 기다리기로 동의했고." 정우에게 몸을 내밀던 시카트는 밧줄의 방해를 받았다. 시카트는 정 우와 눈을 맞추려 애쓰며 말했다. "누나. 내 조언을 들어볼 생각은 없어?" "너에게 만나자고 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거야. 말해줘." "누나는 아버님의 자리를 훔치면 안돼. 그건 아버님의 은혜에 대한 배신이야." "아버님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지? 배신할 은혜가 잘 안 떠오르 는데." 정우는 원한의 토로가 될 수도 있는 말을 담담하게 말했고, 그래서 시카트는 정우가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기 어려웠다. 시카트 가 선택한 대답은 원론적인 것이었다. "아버님은 누나를 태어나게 해주셨어." "그리고 곧 포기하셨지. 불과 얼마 전까지 나를 죽은 딸로 취급하다 시피 하셨어.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 을 떠나라고 하셨고, 게다가 너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령하셨지." 말을 통해 드러나는 정우의 감정은 여전히 모호했다. 책을 들여다보 고 있던 틸러가 정우를 훔쳐볼 정도였으니 대화 당사자인 시카트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카트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던 정우가 천천히 미소를 머금어보였다. "시카트. 혹 내가 아버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면, 그렇 지 않아." "아버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나가는 나무를 베는 킴을 원망하진 않겠지. 도깨비는 무기부터 휘 두르는 레콘을 원망하진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아버님이 즈믄누리 바깥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대로 하셨을 거 라고 믿는다는 말이야." 정우의 말을 이해한 시카트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는 아버지를 위 해 즈믄누리 바깥의 모든 사람을 친족 살해 애호가로 만들어야 하는 건지, 혹은 그 반대로 역설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시카트는 혹 그 곤혹스러운 문제에 대신 뛰어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눈으로 틸 러를 훔쳐보았지만 틸러는 그러지 않았다. 시카트는 힘겹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아버님은…… 그래. 사람다운 일을 하셨 어. 영지와 재산을 보존하려면 그냥 황제의 비위만 맞추면 그만이야.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일신의 안녕은 물론이거니 와 가족들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으셨어. 잘난 척하면서 대의와 정의 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 하지만 자기 재산에 눈곱만큼이라도 손상이 가게 된다면 그 자들은 자기 입으로 말한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리지. 아버님은 다르셨어. 아버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셨 다고? 아냐.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어." 말을 하면서 시카트는 점점 말하는 것이 쉬워지는 것을 느꼈다. 스 스로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던 시카트는 자신있게 말했다. "누나는 아버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지? 당연히 그래야 해. 그리 고 아버님의 뜻을 따라야 해. 황제에게 가서 규리하의 지배자는 아버 님이라고 말해. 그리고 아버님의 충성 서약을 받아들이라고 말해." "그 다음엔? 자결?" "할 수 있겠어?" 정우는 어두운 얼굴로 시카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시카트.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는 믿지 않지만, 너는 나를 화나게 하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돌아가. 시카트. 며칠 후에 다시 만나도록 하자." "누나!"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니 사과하겠어. 미안해. 돌아가서 쉬렴. 달 비 부위?" 틸러가 책을 내려놓고 시카트에게 다가왔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 던 시카트는 정우를 끝까지 바라보려고 했다. 하지만 틸러의 다음 행 동은 시카트를 격분시켰다. 틸러는 의자를 뒤로 돌린 다음 그대로 손 수레를 밀듯 시카트를 문쪽으로 밀고갔다. 어쩔 수 없이 시카트는 고 함을 질렀다. "누나! 사람다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마! 황제의 개가 되 지마! 누구도 서약 없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순 없어. 우리가 개돼지 인 양 서약을 받지 않겠다는 황제의 태도를 용납해선 안돼. 황제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 굴종 속에 사느니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서 죽어야 해!" 정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카트는 정우의 표정을 몹시 보 고 싶었지만 틸러는 끝까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틸러와 시카트 는 그대로 문밖으로 사라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틸러는 빈 의자와 함께 방 안으로 돌아왔다. 정우는 창문 앞으로 옮겨가 있었다.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틸러 는 조금 기다렸다. 의자를 제자리에 가져다놓는 것 외에도 용건이 있 었지만 틸러는 정우가 먼저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 했다. 틸러는 자신에 대해 좋은 대화 상대라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 었지만 정우가 자신의 사고무친함을 토로하고 싶어한다면 들어줄 수 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우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틸러는 헛기침을 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시키실 일이 없습니까?" 틸러의 예상대로 정우는 할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틸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우는 곧 말하지는 않았다. 틸러가 약간 초조함을 느낄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정우가 입을 열었다. "제 동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틸러?" "글쎄요. 부하로 두고 싶지는 않은 부류입니다. 혹 상관이라면 괜찮 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왜 상관으로는 괜찮지요?" "저는 제 상관들이 사실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느낄 때가 많거든요." 문득 틸러는 자신의 농담이 좀 과한 것이 아니었나 걱정했다. 하지 만 정우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부하들도 당신에 대해 비슷한 의심을 하고 있겠군요?" "때때로 그 녀석들의 의심을 확인시켜주면서 기쁨을 느끼곤 한다는 것을 고백해야겠군요." 정우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틸러는 턱을 조금 긁적거리다가 말했 다. "예. 규리하공 아가씨. 제가 괜히 상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닙니 다. 군인에게 있어 상관의 언동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지요. 마찬가지 로 저는 시카트를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우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는 그쯤에서 용건을 꺼 내려 했다. 하지만 정우가 먼저 말했다. "저는 충성 서약이 왜 문제인지 몰랐어요. 틸러." "그러셨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보다 더 기묘한 일도 없다고 생각했죠. 자신에 게 충성하겠다는 사람에게 화를 내시는 폐하도, 그리고 폐하께 충성 하기 위해 폐하와 싸우던 아버지도 모두 제정신이 아닌 건가 하고 의 심했어요. 그런데 이제 알겠어요. 시카트의 말이 맞아요. 우리가 개 나 돼지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하지는 않아요. 그냥 기를 뿐이죠. 하 지만 우리는 짐승이 아니예요. 당신은 몰라도 저는 확실히 아니죠." 틸러는 내가 왜 짐승이냐고 반문하려 했지만 정우는 곧 설명했다. "당신 부하들은 가끔 당신을 짐승이라고 생각할 테죠?" "반론의 여지가 없군요." "제가 사람으로 대접해줄 테니 만족하면 좋겠군요. 어쨌든 사람들이 왜 서약을 원하는지는 알았어요. 그런데 폐하께서는 왜 충성 서약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거죠?" "무의미하니까요." "무의미? 왜? 무엇 때문에?" 틸러는 머리를 조금 긁적였다. 그런 행동으로 틸러는 자신의 말이 전문가의 견해가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 지만 이어진 틸러의 말은 유창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제국에는 6억 명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충성 서약이 있어야만 폐하의 통치가 가능하다는 논리대로라면, 그 6억 명 의 사람들도 모두 폐하와 서약을 맺어야 합니다. 하루에 백 명씩 만 나셔도 폐하께선 서약을 끝내시는데만 6백만 일이 필요하시겠군요. 오늘 당장 서약을 시작하셔도 폐하께선 대충 1만 6천년 정도 지나야 통치를 시작하실 수 있는 셈입니다. 그 때 쯤이면 승천한 티나한이 돌아올지도 모르겠군요." "아아." "예. 폐하께서 1만 6천년 동안 사실 수 있다 해도 그 동안 죽거나 새로 태어나는 자들이 있을 테니 폐하께서 통치에 착수하실 수 있는 날은 요원합니다. 이 정도면 무의미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서약지지파 귀족들은 그런 단순한 계산을 못하는 건가요?" 틸러는 방어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제가 군인의 본분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군요. 규 리하공 아가씨. 제 말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않으시기를 바라면서 계 속 말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일반 상식 수준이거든요. 서약지지 파측에서도 그런 계산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폐하는 상위 귀족들과 서약하고 상위 귀족들은 하위 귀족들과 서약하는 식으 로 서열에 따라 서약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 습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똑같이 폐하와 서약한다면 계급의 구분이 무엇에 필요하냐는 것이지요." "어, 그것도 타당한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 주장에도 문제가 있나 요?" "예.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피지배자가 있거든요. 영주들의 통치 를 받는 사람들과 황제 폐하의 행정관들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 전자 의 경우에는 서약지지파가 바라는 것처럼 충성 서약을 할 수 있을 겁 니다. 하지만 후자가 충성 서약을 한다면 오직 황제 폐하께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다스리는 행정관에게 충성을 서약할 수는 없 으니까요. 그런데 후자의 숫자도 만만찮게 많거든요." "거기에 대한 서약지지파의 해답은?" "제국령의 점진적인 축소지요. 절대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 생각엔 서약을 포기하는 것이 훨씬 시간과 금전을 아끼는 일 같습 니다." "음. 이제 조금 이해가 되네요. 결국 시시한 이야기였군요." "예?" "아니에요. 이만 물러가도 좋아요. 틸러." 틸러는 무엇이 시시하다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 전에 자신이 방 기해두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렇잖아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규리하공 아가씨. 잠시 가보실 곳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시카트 규리하를 데려다 주다가 아가씨를 모셔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대전입니다. 규리하공을 만나러 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잠깐 동안 정우는 탈해가 즈믄누리에서 돌아온 것이 아닐까 하 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정우는 시간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다. 탈해가 떠난 것은 나흘 전이었고 탈해의 딱정벌레 번뜩이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나흘 만에 제국을 왕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우는 도대체 누가 찾아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대전을 향해 걸어가면서 정 우는 질문했고, 틸러의 설명을 경청한 다음 혼란에 빠졌다. "나랏님? 그게 뭐죠?" "이 경우엔 규리하 변경백령을 다스리는 규리하공을 말하는 것이 되 겠지요." "아버님 말인가요?" "글쎄요. 그 노인은 아마 자신이 찾고 있는 인물이 정확하게 누군지 모를 겁니다. 춘부장의 존함은 알지도 못하겠지요. 뭐,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의 주인을 모르는 사람이야 많습니다." "도깨비는 다 알아요." "네? 아, 도깨비에겐 딱정벌레도 있고 어르신도 있잖습니까. 게다가 자주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인간은 자기 땅의 지배자가 누군 지 알아보기 위해 며칠 동안 자기 땅을 떠날 여유 같은 것은 없지요. 규리하공 아가씨. 그런 사람들은 나라에는 나랏님이 있다는 것만 알 면 만족합니다. 그외의 다른 정보가 그들의 땅에 무슨 소용이 되겠습 니까? 나랏님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콩이 더 크게 자라고 메밀이 실 해지는 것도 아닌데요." "틸러. 농부였어요?" 틸러는 싱긋 웃었다. "아버님이 농부였습니다. 집에서 5 킬로미터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시지만 자기 땅에 대해서는 토끼굴 하나까지 다 아시 는 분이었지요. 무식하다고 말해지지만 사실은 아주 현명한, 그런 보 통의 농부셨지요."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랏님 이름보다 자기 땅의 곡식에 더 관심이 많을 그 노인 이 왜 나랏님을 찾아온 거죠?" "직소입니다." "어? 규리하공도 규리하성에서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어요? 저 는 그런 느낌 못 받았는데요." 틸러는 당황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규리하공 아가씨?" "뭔가 자신이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 아닌가요? 즈믄누리에서 직소하러 온 도깨비들은 그런 이유에서 오는 데요." 틸러는 '직소'라는 의미가 도깨비들에게는 좀 다르게 쓰이고 있음을 눈치챘다. 틸러는 그 노인이 자기 땅의 지배자와 모종의 갈등을 일으 켰기 때문에 상급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우는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그 노인이 어디서 왔다고 했지요?" "아스캄입니다." 정우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웃지 말고 대답해주세요. 틸러. 아스캄이 어디죠?" "어…… 도보로 간다면 여기서 동쪽으로 대략 열이틀 거리 쯤 되는 곳에 있습니다. 후사린강 중류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 노인은 아흐레 만에 왔다고 했으니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왔나 봅니다." "와! 굉장히 분했나 보군요." "그런가 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웃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정우 '규리하'가 규리하 땅에 대해 틸러 달비에게 묻는다면 좀 웃 기지 않나요?" "규리하공 아가씨는 즈믄누리에서 자라셨으니 그건 웃을 일이 아니 지요." "이해해줘서 고맙군요. 그렇다면 제가 왜 후사린강이라고 불리는지 물어도 웃지 않겠지요? 그 이름이 제 선조인 후사린 규리하와 무슨 관련이 있나요?" 틸러는 까마득한 옛날 후사린 규리하가 남쪽으로 떠나기 전 그 강에 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아는대로 설명해주었다. 결과적으로 정 우는 틸러 달비가 규리하 출신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자신의 출 생과 유년기 최악의 추억까지 늘어놓을 뻔한 틸러는 가까스로 본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규리하공 아가씨. 다가올 일을 준비하시려면 제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보다는 그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네? 아아, 네. 좋아요. 그 아스캄에서 온 노인은 자기의 분함을 호 소하기 위해 규리하의 지배자를 찾아왔다는 거죠. 그렇다면 대장군님 이 만나보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대장군께서도 그러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노인은 누구에게 전 해들었는지 규리하공을 만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장군께서 는 이 성에 규리하공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정우는 우스꽝스러운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은 규리하의 지배자 인 규리하공을 만나러 온 것이고, 보통 때라면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 은 소원이다. 어쨌든 노인은 규리하의 지배자와 규리하공이 서로 다 른 사람일 경우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정우의 지적에 틸러 또한 동의했다.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규리하공 아가씨. 대장군께서도 아가씨의 곁 에 계실 겁니다. 대장군께서 도와주실 테니 어려운 점은 없을 겁니 다." "그럼 전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요?" "전 규리하공 아가씨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듣 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점을 말하고 싶군요. 대장군께서는 자신이 규리하공이라고 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규리하의 지배자를 만나러 온 노인에게 큰 해가 되는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아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그냥 앉혀두려고 부르지는 않으셨을 거라는 말이군요." 틸러는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전으로 들 어갔다. 대전의 보좌 앞에는 이미 제국군 장군들과 함께 엘시 에더리가 서있 었다. 엘시는 보좌 옆의 문으로 들어서는 정우에게 가볍게 목례해 보 였다. 그 인사에 답례한 다음 정우는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틸러가 말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참으로 볼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우는 아흐레 동안 쉼 없이 달려온 노인이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 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의 옷차림은 정우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 이었다. 정우는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틸러? 저 분 옷 좀 봐요. 킴 옷이라서 확신은 못하지만, 뒤집어진 것 같은데요?" "뒤집어진 것 맞습니다." "어머. 저 할아버지 정말 당황하셨나 보군요." "음. 아가씨.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요. 옷을 똑바로 입 는 사람과 뒤집어 입는 사람. 후자에 대해서는 술에 진탕으로 취했거 나 정신이 이상하거나 철학자일 거라는 식으로 재미있는 추측을 해볼 수 있지만, 이곳 규리하에서는 그에 덧붙여 직소하러 오는 사람이라 고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엔 그게 맞을 것 같습니다." "예? 직소하러 오는 옷차림이오?" "그렇습니다. 자기가 직소하러 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사람은 저 렇게 옷을 뒤집어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분함이 풀릴 때까지 계속 저런 옷차림을 유지한다더군요."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시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 던 노인은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색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들었다. 정 우와 틸러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본 노인은 곧 결정을 내렸다. "나랏님! 이것의 지원극통함을 풀어주소서!" 제국군 장군들은 빙긋 웃었고 엘시는 한숨을 내쉬었으며 정우는 머 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틸러는 손을 들어 정우를 가리켰다. "이쪽입니다. 영감님." 고개를 든 노인은 당황하여 틸러를 바라보다가 정우를 쳐다보았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노인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곧 노 인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몸을 정우 쪽으로 틀었다. "나랏님! 이것의 지원극통함을 풀어주소서!" 정우는 노인의 원통함보다 급회전의 축이 된 노인의 무릎이 더 염려 된다고 생각했다. 정우가 그 사실에 대해 뭐라 말하려 할 때 엘시가 그녀에게 손짓을 보냈다. 정우는 곧 엘시가 보좌에 앉을 것을 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우는 놀라서 입모양으로 말했다. '저기 앉으라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 규리하의 지배자가 되겠다 고……' '괜찮습니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저 노인을 위해서입니다.' 정우는 조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보좌로 다가갔다. 그녀의 아버 지가 앉아서 규리하를 지배하던 자리를 내려다보던 정우는 결국 그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살짝 걸쳤다. 누가 보아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엘시는 더 이상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우는 엘 시의 요구를 받아들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노인은 보좌에 앉은 정 우를 보자 한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우의 다음 행동은 노인을 다시 혼란에 빠트렸다. "좋은 꿈 꾸셨나요. 영감님. 제가 규리하공인데요. 하실 말씀이 있 으시다고요?"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우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노인의 심정을 이해했다. 바야흐로 노인이 불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려는 찰라, 엘시가 입을 열었다.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께서 친히 네 말을 들으러 오셨으니 어서 아뢰도록 하라." 엘시의 말투에는 권위가 있었다. 정우는 자신이 규리하공이 아닌지 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느꼈다. 최소한 엘시가 말하는 '규리하공'이 자신보다 터무니없이 위대한 인물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했 다. 어쨌든 그 말투가 피어오르던 노인의 의심을 잠식시킨 것은 분명했 다. 노인은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살려주십시오, 제 아들놈을 살려주십시오!" 보좌 아래쪽의 단에 서있던 틸러는 정우가 난처할 거라 생각했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다행히 노인은 정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 며늘아기는 진짜 제 며늘아기입니다. 정말입니다. 아들놈 혼례 를 치르느라 금편을 50 닢이나 썼습니다.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가짜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 돈을 썼겠습니까? 사람들은 저를 구두쇠라고 합니다. 자린고비라고 하지요. 하지만 저도 쓸 땐 쓰는 놈입니다. 자 식놈 평생 한 번 있을 혼례이기에 아깝다 생각 않고 죽을 고생을 해 서 모은 그 돈을 쓴 겁니다. 그런데 가짜 결혼식이라니오. 위법이라 니오! 분하고 원통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입니다." 틸러는 말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 그 정도라면 말이 잘 나올 땐 레콘 도 도망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우는 황망함을 견딜 수 없 는 듯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정우는 틸러나 다른 사람들이 감탄 할 만한 참을성을 발휘했다. 그녀는 끝없이 질문을 계속했고, 비록 정우가 사용하는 경어가 노인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마침내 노인의 말 이 논리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서 틸러는 노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의 이름은 파노 긴시테였다. 긴시테 노인은 자유농이었고 평생 에 걸쳐 개간한 밭과 아들을 인생에서 건진 최고의 보물로 여기고 있 었다. 아들의 혼기가 꽉 찼을 때 파노가 느꼈던 갈등은 실로 만만찮 았다. 하지만 결국 파노는 아들의 결혼을 위해 자신의 농토 일부를 팔기로 결심했다. 파노가 언급한 금편 50 닢은 그 농토 판매를 통해 받은 대금이었다. 파노에게서 땅을 구입한 자는 아스캄을 다스리는 골케 남작이라는 자였다. 한달 전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당연하게도 파노의 아들과 며느리는 세상 만물이 자신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들 의 견해는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혼례식 후 사흘 뒤 골케 남작은 자 신이 구입한 땅이 본래부터 남작령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골 케 남작은 노인에게 금편 50 닢을 되돌려 달라고 주장했다. 파노는 자신이 자유농임을 역설했지만 남작은 등기소의 등기부를 내보이며 그 땅이 원래부터 남작령에 속함을 입증했다. 파노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문자와 문서를 존 중하는 보통 사람이었다. 자신이 도깨비 장난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고 믿었던 파노에게 등기부가 위조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가르쳐준 사 람은 그 고을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평가를 받는 대장장이였다. 대장 장이는 아스캄의 등기소장이 남작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결정적 증거 로 내세웠다. 하지만 파노 노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도 그런 어처구니 없 는 일이 대명천지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불행한 대 장장이는 자신의 명성이 대폭 추락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파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골케 남작은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금편 50 닢을 통해 노인이 얻은 것은 며느리라는, 참으로 명쾌하기까 지 한 설명을 들려주며 골케 남작의 병사들이 며느리를 납치해간 것 이다. 파노는 절망했고 새신랑은 격분했다. 괭이 한 자루와 눈이 뒤집힌 새신랑이 남작의 성에 진입했다. 그리고 골케 남작은 괭이를 벌하지 는 않는 분별력을 보여주었다. 죽지 않을 만큼 두드려맞은 새신랑은 남작의 감옥에 갇혀버렸다. 혼절한 파노가 깨었을 때 그의 이웃들은 조심스럽게 남작의 권고를 전달해주었다. 골케 남작은 며느리에 대해 금편 50 닢, 그리고 불손한 아들에 대해 금편 50 닢을 내놓고 둘을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합이 백 닢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준 이웃은 파노의 주먹에 코피를 쏟았다고 한다. 그 때 나서준 사람이 정의로운 대장장이였다. 사람들이 보내는 비웃 음에 화가 나서 불과 쇳덩이에게로 돌아갔던 대장장이는 파노의 소식 을 듣고는 망치를 내려놓았다. 파노 긴시테와 고을의 유지들을 반강 제로 끌고나온 대장장이는 그들과 함께 남작을 찾아갔다. 그리고 미 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남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작에게 영지를 준 사람이 곧 나랏님이니 나랏님의 서류를 보면 남작의 거짓말을 격 파할 수 있다고. 골케 남작이 껄껄 웃었을 때 파노 노인과 유지들은 대장장이가 미쳤 다고 말할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남작은 대장장이를 미치광이 취급 하지 않았다. "남작 각하님은 대장장이가 똑똑한 소리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남작 각하님이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남작 각하님은 대장 장이를 놀리시면서 나랏님이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헛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나랏님이 없다니오? 대장장이는 물론이거니와 저희들도 너무도 황망하여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남작 각하 님은 나랏님이 없으니 나랏님의 서류도 없다고 말씀하시고 저희들을 쫓아내었습니다." 파노 노인은 또다시 원통함을 참지 못하는 투로 이마를 바닥에 찧었 다. "나랏님이 없다니오! 어떻게 그런 막돼먹은 소릴 할 수 있습니까? 이 미욱한 놈은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 오. 너무 무서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오셨어요?" "그렇습니다. 나랏님. 제발 이 늙은 놈을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그 전에 나랏님의 서류를 잠깐만 확인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정말로 골케 남작 각하님께서 감히 등기부를 위조한 것입니까? 제발 이 늙은 이의 지원극통함을 풀어주소서. 부탁합니다!" 틸러는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스캄의 등기소장 이 남작과 공모하여 장난을 친 것이다. 그것은 정권의 교체기에 일어 나는 평범한 사건일 뿐이다. 그래서 틸러는 노인에게 '남작 각하님' 같은 이상한 경칭을 가르쳐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지 궁금해 했다. 정우는 엘시를 돌아보았다. 정우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엘시가 말 했다. "토지 대장을 확인하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벌써요?" "이 자는 규리하공이 오시기 전부터 저 말을 반복했습니다." 엘시의 말대로 조금 후 수교위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규리하의 토지 대장을 조사하러 갔던 수교위는 틸러가 예상했던 대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정우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고 싶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영감님. 그 남작님은 거짓말을 한 거예요." 파노 긴시테는 하늘이 무너졌다는 최신 소식을 전해들은 것 같은 표 정을 지었다. 기막힌 나머지 파노는 입을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 노인을 바라보고 있던 정우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 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또 시시한 이야기야." 틸러는 약간의 익숙함을 느끼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정우는 고개를 들어 엘시를 바라보 았다. "대장군님. 대장군님은 칼리도의 백작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장군님은 여기 계시지요. 그럼 칼리도는 누가 다스리지 요?" "모친께서 섭정의 지위로 칼리도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엘시가 대장군의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칼리도를 떠나 있다는 사실, 엘시가 칼리도를 잠깐이라도 본 것이 벌써 4년 전이라는 사실, 그리고 엘시와 그의 모친이 모두 그런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잘 아는 제국군의 장군들은 동정의 눈빛으로 엘시를 바라 보았다. 그들 중 몇몇의 눈빛은 좀 더 애잔했는데, 엘시가 대장군의 지위를 반납하고 부냐 헨로와 함께 칼리도로 돌아갈 날을 꿈꾸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사정들을 모르는 정우는 단도직입 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대장군님이 칼리도에 계시지 않은 것을 틈타 누군가가 저 분께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면 대장군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국법대로 처리하나요?" "아닙니다. 제국법을 참조할 수는 있지만 이 경우엔 영주의 개인적 권한이 침해당한 일이니만큼 자의대로 처리할 겁니다." "그런가요. 그럼 대장군님은 의향은 어떠세요?" "공연한 무고인지 명백한 범죄인지 살핀 다음 범죄임이 확실하다면 조속히 사형을 언도할 것입니다." 정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전에 있던 다른 이들도 조금 당혹한 얼굴로 대장군을 바라보았고 파노 노인마저도 잔혹한 복수의 희열보 다는 경악을 드러내었다. 다른 사람들의 동요를 눈치챈 정우는 질문 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중한 범죄라고 생각하세요?" "내 생각엔 그렇습니다. 권력을 오용하여 영민을 괴롭혔고 그에게 권력을 준 상급자를 욕보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죄입니다. 하지 만 무엇보다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등기부를 위조했다는 것입니다." "어…… 등기부 위조가…… 심각한 죄인가 보군요?" 엘시는 잠깐 아무도 없는 곳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들 영주는 그 영민들의 복리를 증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영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도 못 한다면 복리의 증진은 광언이 되고 말 겁니다. 생명과 재산의 보호는 치도에 있어 근본 중의 근본입니다. 등기부 위조는 그 기본적인 것을 파괴하는 범죄입니다." 엘시는 그대로 말을 멈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엘시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라 하여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붓이 칼 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문필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가 칼로 이루어진 범죄보다 더 큰 처벌 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억울해 합니다.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붓 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 그 책임 또한 더 무거워야 합니다. 등기부 위조는 붓으로 이루어지는 반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나는 창 검으로 이루어지는 반역에 비해 더 큰 처벌을 내리지는 못할 망정 최 소한 같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에 보 내는 칼의 경의로 생각할 것입니다." 제국군의 장수들은 약간 질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칼리도의 소영주들이 엘시 본인 만큼 엘시의 귀향을 달가워하기는 힘 들겠다는 심술궂은 생각을 하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으로 바짓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 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진 지했다. 정우는 그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대장군님. 병사들을 좀 빌려주시겠어요?"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입니까?" 정우는 엘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정우는 몸을 뒤로 끌 어당겼다. 규리하 변경백의 보좌에 똑바로 앉은 정우는 두 손으로 팔 걸이를 움켜쥐었다. 틸러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틸러는 대전의 벽에 있는 케나린 규리하의 벽화를 훔쳐보고는 다시 정우를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귀밑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긴 정우는 파노를 향해 또박또 박 말했다. "영감님. 머지 않아 영감님은 손자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아이가 커서 이야기를 조를 나이가 되거든 말해주세요. 나랏님이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아 아스캄에 와서 나쁜 남작을 물리쳤던 이야기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파노 긴시테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순간 그가 대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두번째로 행 복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 4 챕터 시작합니다. 지난 주는 올림픽 축구 대표팀 덕분에 즐거운 한 주였습니다. 조금 전 끝난 마지막 게임에서 지긴 했습니다만 어린 선수들 기 죽지 말고 계속 잘해줬으면 좋겠네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4-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20 조회수 : 3845 피를 마시는 새 4. 묻은 것과 믿은 것 - 2 엘시 에더리와 정우 규리하는 참관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논쟁을 벌였다. 그 참관자 중에는 놓친 식사를 하고 몸을 씻기 위해 물러난 파노 긴시테는 제외되어 있었는데, 그가 있었다 하더라도 혼란스럽기 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참관자들은 그것이 논쟁인지도 알 수 없었 다. 엘시 에더리와 정우 규리하는 단 한 마디씩 말한 다음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러가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한심한 참관자 대열에 속해 있던 틸러 달비가 두 사람이 니름을 나누고 있다는 가설 을 거의 믿게 되었을 무렵, 엘시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엘시의 발언은 참관자들에게 신선함을 주진 못했다. 그가 꺼낸 말은 앞서의 말과 같았다. "안됩니다." "가고 싶어요." 정우 역시 같은 말로 대답했다. 참관자들은 또다시 침묵이 재개될까 두려워했다. 다행히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왜 안되는지 말할까요?" "안전 문제나 제 포로 신분에 대한 이야기 외의 이야기라면 환영하 겠어요." 엘시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이 그런 이유 정도는 이미 예상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 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침묵한 것은, 아마도 내가 제 시할 이유들에 대한 적절한 반론을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짐 작합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참관자들은 그제서야 침묵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지 식이 그들을 즐겁게 하진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할말이 없어서 서 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이다. 엘시가 말했다. "적절하지 않은 이유라도 말해주십시오." "들어주지 않으실 테니 말하지 않겠어요. 그냥 부탁해요. 가게 해주 세요." 엘시는 정우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껏 정우는 수락되지 않을 요구로 심술을 표현한 일은 없었고, 따라서 엘시는 정 우가 정말로 아스캄에 가길 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쉽게 판단할 수 없었던 엘시는 자신이 확실히 아는 사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한 가지 오류를 정정해야겠습니다. 규리하공. 당신은 포로 신 분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어제 말씀드렸듯이 당신은 군정자문위원회의 자문위원입니다. 따라 서 당신은 규리하 시찰을 위해 출장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정우는 분명히 그 말을 전해들었다. 하지만 엘시가 원하는 방식으로 들은 것은 아니다. "어, 그건 포로를 좀 고상하게 부르는 말이 아니었던 건가요?" "……당신이 규리하의 재건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등 록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문위원회는 규리하의 유력인사들 중 많 은 분들이 소속되어 있는 뜻깊은 위원회이며 그 임무는 규리하를 원 활하게 재건할 수 있도록 군정 당국을 자문하고 보좌하는 것입니다. 포로와는 완전히 의미가 다릅니다." "그런가요. 죄송해요. 그런데 왜 제가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거지 요?" "당신이 소속되어 있으면 규리하 가문에 호의적인 유력 인사들을 끌 어들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자문 위원직을 수락한 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지금 보니 이해를 못하 셨군요. 결과적으로 당신의 동의 없이 당신의 이름을 무단으로 이용 한 꼴이 되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 이해하셨으니, 만일 사임 하고 싶다면 그러셔도 무방합니다." "그 자문위원이라는 것을 계속하면 아스캄에 갈 수 있는 건가요?"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하죠." 그런 평가가 어려웠던 경우는 별로 없지만, 틸러 달비는 엘시와 정 우를 영리하다고 보아야 할지 멍청하다고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화의 전반부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미리 짐작하는 영리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후반부는 틸러가 아는 최고의 멍청이 한 쌍, 그러니까 그의 여동생과 그녀의 천생연분인 매제를 떠올리게 할 만큼 형편없었다. 편리할 것 같아서 당신 이름을 이용했다고 솔직 하게 말하는 엘시와 이름을 이용하는 대신 아스캄에 보내달라고 말하 는 정우에게서 고도의 정치적 감각 같은 것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분 명했다. 엘시가 말했다. "그렇다면 자문위원의 자격으로 위원회에 아스캄 현지시찰을 요청할 겁니까?" "네." "위원장의 허락이 필요하겠군요." "그게 누구죠?" "여기 있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입니다." 시허릭 마지오는 낭패감을 느꼈다. 임기응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순 발력보다 신중함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말을 끝낸 엘시가 몸을 돌렸을 때 시허릭은 자신이 그곳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 각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정우는 시허릭이 아무 말도 하 지 않자 질문했다. "위원장님. 이렇게 부르면 되죠? 아스캄에서 뭔가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으니, 그곳을 시찰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은데요. 허락하 시겠어요?" 시허릭은 골치가 아팠다. 그는 엘시가 자신에게 거절하는 곤혹스러 움을 떠넘긴 것인지, 그렇잖으면 승낙하는 어려움을 떠넘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우의 아스캄행은 온갖 위험 요소를 무릅쓰는 일이 다. 하지만 엘시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갈 수 있는 방법을 알 려줄 리는 없다. 혹은, 그저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은 솔직성인 것일 까? 결국 시허릭은 평소의 생활 태도와 배치되는 행동을 했다. 그는 직관적으로 판단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군요. 그렇게 하세요. 규리하공." 시허릭은 말을 끝내자마자 엘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엘시는 그 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엘시는 그저 무표정하게 정우에게 필요한 주의 사항을 말했고 자문위원의 출장을 보좌할 수행인을 결정 할 때도 그 무표정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엉겅퀴 여단 1대대로 하여금 당신을 수행하게 하겠습니다. 규리하 공. 바로 출발하십시오." 정우는 엘시의 마지막 말에 놀랐다. "바로 출발하라고요?" "그렇습니다. 가시기로 결정되었다면 이 정보가 다른 곳으로 새어나 가기 전에 바로 출발하는 것이 위험을 줄이는 방법일 겁니다. 곧장 출발하여 아스캄에서 일을 처리하고 바로 돌아오십시오." "하지만, 어, 무슨 준비가 필요하지 않나요? 그곳이 가까운 곳도 아 니고." "수행인들이 모든 준비를 해줄 겁니다." 정우는 그런가 보다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좌에서 일어난 정우 는 틸러와 함께 방으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엘시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정우는 잠깐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이오?" "예." 정우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스스로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대로 그냥 출발하라고요? 그래도 돼요?" "예. 달비 부위. 마차로 규리하공을 모시도록 하라. 밤이 오면 불을 크게 피우도록." 틸러는 싱긋 웃으며 우물쭈물하는 정우에게 허리를 숙였다. 정우는 한번 더 의아한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지만 엘시는 어서 가라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정우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전을 나 섰다. 그녀의 뒤에서 틸러가 따라왔다. 틸러는 근처의 병사들에게 몇 마디를 중얼거린 것 외에는 별다른 말 없이 마구간까지 정우를 안내했다. 마굿간 앞에 선 정우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방에서 나온 모습 그대로였고 아무리 생각 해봐도 공무 수행을 위해 도보로 열이틀 거리나 떨어져 있다는 곳으 로 출발하는 모습은커녕 산책 나가는 모습도 되지 못했다. 정우는 엘 시가 혹 아주 괴팍한 방법의 거절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보 았다. 하지만 그 의심은 곧이어 일어난 일들 때문에 더 체계화되지 못했다. 세 가지 사건이 거의 시간차 없이 일어났다. 먼저 틸러가 마구간에 서 육두 마차를 끌고 나타났고, 그 직후 커다란 바구니 두 개를 든 하전사 한 명이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왔으며, 마지막으로 목욕 도중에 끌려왔는지 아직까지도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는 파노 긴시테 노인 이 나타났다. 정우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에야 자신이 파노와 함께 마차 안에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녀가 그 상황에 익숙해지려 애쓸 때 마차가 튕겨져나가듯 출발했고, 그래서 정우는 도대체 누가 마차를 몰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못했 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정우는 틸러 달비와 하전사 한 명 이 마차를 몰고 있다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지만 그 사실을 확신하 지는 못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규리하 성을 빠져나왔지만 정우는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정우는 나랏님과 같은 마차에 탔 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해버린 파노 노인을 달래기에도 바빴고, 또한 마차의 속도에 공포를 느꼈다. 분명 도로를 달리는 것이었지만 정우 와 노인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 힘들었다. 바퀴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뿜었고 튀어나가는 돌이 내지르는 비명은 소름끼쳤다. 힘이 남아 있는 동안 정우와 파노는 마차 벽을 부여잡고 버텼지만 곧 두 사람은 마차가 선회할 때마다 좌우로 튕겨져 나갔다. 결국 정우와 파 노는 마차나 자신들 중 하나가 부서질 거라 믿으며 울먹거렸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겨우 질풍 같은 질주가 멎었다. 오후 내내 계속된 공포에서 해방된 정우와 파노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그러나 정우는 곧 당혹감을 느꼈다. 마차 문을 열고 기다리던 틸 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정우는 울상이 되 어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다. "일어설 수가 없어요." 틸러는 씩 웃고는 누군가를 불렀다. 정우의 기억대로 하전사 한 명 이 다가왔다. 정우와 노인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차 밖으로 나 왔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은 채 정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산도 최소 10 킬로미터는 떨어진 것 같은 광막한 황야였고 어디에도 초록빛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바람 을 타고 출렁거리는 흙먼지 뿐이었다. 저물어가는 햇빛 속에서 흙먼 지의 꿈틀거림은 그림자의 춤처럼 보였다. 우울해지는 광경이라 생각 했을 때 정우는 마차가 구르는 소리를 들었다. 정우는 자신들을 태우 고 온 마차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 틸러가 데려온 하전사가 마차를 천천히 몰고 있었다. 정우는 걱정스러웠다. 사방 어디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는 이런 벌판 에 세 사람만 남겨졌으니 겁을 집어먹어도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도깨 비가 느낄 감정은 아니었고, 그래서 정우가 느낀 것은 걱정이었다. 그녀는 틸러나 엘시가 뭘 제대로 알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 러웠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무릎을 힘겹게 움직여 정우는 틸러에게 다가갔다. 틸러는 모닥불을 일으키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찾기 힘든 황야였기 에 정우는 틸러가 쌓아놓은 땔나무를 보곤 놀랐다. 어렵게 모닥불을 피운 틸러는 정우와 파노를 불 주위에 앉게 했다. 파노는 모닥불 옆 으로 오자마자 쓰러져 코를 골았다. 정우 또한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윗분들이 알아서 잘 할거 라고 믿는 파노와 달리 정우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정우는 자신 의 시선에 압박감이 담기길 기원하며 틸러를 바라보았다. '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말해요.' 정우의 시선을 느낀 틸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빙그레 웃으 며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를 받아든 정우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음식물이 담긴 바구니였다. 어쨌든 정우 는 땔감이 어디서 난 건지 알게 되었다. 또다른 바구니에는 불 피울 것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도무지 식욕을 돌볼 상태가 아니었던 정우 는 바구니를 내버려둔 채 - 이번에는 말로써 - 질문했다. "틸러. 왜 여기에 온 거죠?" 틸러는 불을 더 크게 피우려 애쓰며 말했다. "여기서 엉겅퀴 여단 1대대 병사들을 기다릴 겁니다. 규리하공 아가 씨. 이 불빛을 보고 올 겁니다." "예? 여기로 병사들이 온다고요?" "예. 우리가 출발한 직후 대장군님께서 뱀단지로 연락하셨을 겁니 다. 불빛을 보기 쉽도록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정우는 규리하성을 떠나기 직전을 떠올렸다. 몇 시간 전의 일이지만 마치 며칠 전이나 되는 것 같았기에 정우는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겨우 정우는 엘시가 밤이 오면 불을 크게 피우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 올렸다.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달린 거잖아요. 왜 그렇게 달린 거죠? 죽는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당연히 안전 문제 때문이지요. 규리 하공 아가씨가 규리하성을 떠났다는 소식보다 더 빨리 달려야 했으니 까요. 그리고 이곳으로 찾아올 병사들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정우는 감탄했다. "이런 일이 일상사인 것처럼 말하는군요? 혹시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스캄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신 것은 규리하 공 아가씨인 걸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께서 가도 좋다고 말하기 전 까지는 저도 오늘 밤 이곳에 와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부터 좀 먹어도 될까요?" 틸러는 바구니를 가리켰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들어요. 그렇다면 당신도 제가 아는 것 정도밖에 모른다 는 것이죠? 우리가 떠난 다음에 뱀단지로 연락이 갈 거라는 것, 그리 고 아스캄까지 우리를 수행할 병사들이 이곳으로 올 거라는 것은 당 신이 짐작한 것이지요?" "예. 다르게 짐작할 수 없지요." 정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이 진 것도 당연하군요. 제국군이 모두 당신처럼 밤에 불을 크게 피우라는 말만 듣고도 알아서 척척 행동할 수 있는 병사들로 이 루어져 있다면." 틸러는 씹던 음식을 삼키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전투가 벌어졌을 때 지레짐작이나 개 인적인 판단은 절대 금물입니다. 지휘관은 명확하게 명령해야 하고 병사들은 받은 명령만 정확하게 시행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전투 행동이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겁니다. 대장군께선 시각을 말씀해 주시고, 장소를 말씀해주시고, 교환해야 할 암호를 알려주시고, 제가 소대 지휘권을 잠시 이양하도록 하셨을 것이며, 전체 계획서를 여러 부 만들어 필요한 모든 곳에 보내도록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규리하 공 아가씨는 빨라도 열흘 뒤에나 출발할 수 있었겠지요." "와." "예. '와'죠. 하지만 이것은 전투 행동이 아니고 남작을 빨리 해치 울수록 안전한 규리하성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대장군께선 간단하게 처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장군님이 뱀단지로 수행 병들을 보내주실 거라 짐작하고, 또한 제가 떠난 뒤에 제 직속 상관 인 데시마스 수교위님에게 제 소대 지휘를 잠시 대행하라고 전달해주 셨을 거라 짐작하는 겁니다. 또한 저는 데시마스 수교위님이 놀라지 도 않을 거라는 것까지 짐작합니다. 노는 부위를 돌리는 일이야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남작을 해치워요? 당신도 남작의 피를 원하는 건 가요?" 술병을 들어올리던 틸러는 그것을 잠시 내버려두고는 정우를 바라보 았다. "저도 원한다고요? 무슨 말씀인가요, 규리하공 아가씨?" "대장군님은 남작을 사형시키겠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저는 그저 점심을 해치운다거나 일을 해치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한 겁니다. 남작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는 규리하공 아가씨 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틸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술병을 끌어당겼다. 잔에 술을 부은 틸러는 정우에게 건넨 다음 마차를 모는 동안 떠올렸던 가설을 말했 다. "규리하공 아가씨. 혹 남작을 사형시키고 싶지 않으셔서 직접 오신 건가요?" 정우는 말없이 술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틸러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 다. "골케 남작이 알면 정말 고마워하겠군요. 하지만 세상에는 두 종류 의 사람이 있지요. 때리지 않아도 철없는 짓을 스스로 피하는 사람과 때려야만 철없는 짓을 포기하는 사람. 그런데 전자는 참 드물지요. 그래서 때론 폭력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남달리 비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나신 규리하공 아가씨는 그 사실을 받아들 이시기 힘드시겠지만요."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약간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도 그 사실을 모르는 척 하는군요. 틸러." "네?" "틸러. 유사 이래 최대의 학살극을 벌인 건 나가도, 킴도, 레콘도 아니에요. 그건 도깨비였어요." 틸러는 낭패한 기분을 느꼈다. 정우의 말대로였다. 페시론 섬과 아 킨스로우 협곡에서 일어난 참극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 이 도깨비가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사람들은 그 지식과 자 신이 아는 도깨비를 쉽게 연결짓지 못한다. 정우는 고개를 숙여 자신 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저 강대한 레콘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죽지 않는 나가들 은? 못 가는 곳이 없는 킴들은? 전부 불가능하죠. 하지만 도깨비들은 더 이상 웃을 일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그 렇게 할 수 있어요.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도깨비의 어진 성품과 싹싹한 태도 때문에 쉽게 그 사실을 망각하지요. 아니, 망각하고 싶은 것일 거예요. 미안하지만 도깨비들이 피를 무조건적으 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예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고개를 끄덕이던 틸러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틸러는 그것이 무엇 인지 곧 깨달았다. "어, 그런데 여쭙고 싶은 것이 있군요. 규리하공 아가씨는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라셨는데…… 그 말을 잘 하시는군요?" "그 말?" "도깨비들은 입에도 담지 않는 말이 있잖습니까?" "네? 아, 피요? 저는 괜찮아요. 매달 보니까." 틸러는 술잔을 깨물 뻔했다. 가까스로 술을 삼킨 틸러는 그것을 내 려놓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면 정우의 얼굴을 보지 않아 도 되기 때문이다. 틸러의 사정을 눈치채지 못한 정우는 태평하게 말 을 이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주위의 어떤 도깨비들도 도와줄 수 없어서 제 가 직접 처리해야 했지요." 틸러는 절대로 더듬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 그, 그렇겠군요." "물론 즈믄누리에서는 저도 그 말 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겐 피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지요? 킴이니까." "괘, 괘, 괜찮습니다." "절대로 괜찮지 않다는 말투군요. 이상하네요. 당신 설마 킴처럼 생 긴 도깨비인가요?" 틸러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가까스로 말했다. "아, 저, 예. 피 이야기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저는 상대방의 옷 아래에서 일어나는 신체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 예절이라고 배웠습니 다." "옷 아래에서 일어나는 신체 활동?" "예. 옷을 입는 이유가 없어지는 일이니까요." "아하, 그거. 이해했어요. 고마워요." 틸러의 호흡이 좀 쉬워졌다. 정우가 말했다. "다시 말하죠. 도깨비들은 큰 소리로 웃을 줄 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도깨비들도 폭력을 쓸 수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으려면 페시론 섬에 상륙했을 때 유리 기픈골 무사장이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해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등기부 위조는 사형의 합당한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예." "붓 한 자루 놀려서 어떤 사람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것을 뺏는 것 은 가혹한 일입니다." "칼 한 자루 놀려서 어떤 사람의 평생을 뺏는 일은?" "그러면 어떻게 판결하실 생각이십니까?" "가서 그러면 안된다고 가르쳐주고 앞으로 안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 아야지요." 틸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규리하공 아가씨. 그렇게 설득해서 들을 사람 같으면 애초에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할 수 없죠. 남의 피를 마시면 오래 살 수 있지만 결국 지 독한 피냄새를 풍기게 되니까." 틸러는 눈을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틸러의 표정을 본 정우가 활 짝 웃었다. "아, 미안, 미안해요. 이건 저를 귀여워 해주셨던 어르신이 들려주 신 이야기지요. 당신도 어쩌면 그 분의 성함을 알 거예요. 비형 스라 블이라는 분인데, 알아요?" "물론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분이지요. 승천한 티나한의 친구분이잖 습니까." "비형 어르신은 해몽서를 쓰고 계세요. 그 일 때문에 그러신 건지 모르겠지만 온갖 옛이야기를 많이 수집하셨어요. 어르신은 언젠가 제 게 키탈저 사냥꾼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정우는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었어요. 네 마리의 식성은 모두 달 랐지요. 한 마리는 눈물을, 한 마리는 피를, 한 마리는 물을, 그리고 한 마리는 독을 마셨어요. 그 중 가장 빨리 죽는 것은 눈물을 마시는 새였대요. 눈물은 도저히 몸 안에 둘 수 없어서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니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기 때문에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빨리 죽지요. 그렇다면 가장 오래 사는 건 어떤 새일까요?" "글쎄요. 말씀하신 것들 중에 장수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나 의심스 러운데요. 어떤 새지요?" "피를 마시는 새. 아무도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마시니까요. 하지만 그 피비린내 때문에 아무도 피를 마시는 새에겐 가까이 가지 않아요."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 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계속 말했 다. "비형 어르신께서는 그 이야기를 해주시고는 제게 질문하셨지요. 피 는 누구도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인데, 왜 몸 밖으로 나오 면 누구도 좋아하기 힘든 피비린내를 풍기게 되냐고. 틸러. 당신은 대답할 수 있겠어요?" "모르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몇 달 동안 저는 그 날이 올 때마다 피를 마시는 새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어머, 미안해요. 옷 아래 이야기는 금지지요. 사과했으니 그렇게 제가 못볼 물건이나 되 는 것처럼 외면하는 일은 삼가주세요. 고마워요. 저도 그 답은 잘 모 르겠어요. 하지만 피를 마시면 오래 살 수는 있어도 피비린내를 풍긴 다는 것은 이해했어요." 틸러는 하품이 나올 만큼 평범한 윤리관이라고 생각했다. 이득을 위 해 타인을 괴롭히지 말라.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내용이지 만, 그렇기에 거기에는 자극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 틸러는 조심스럽 게 웃었다. "어떤 사람은 피비린내를 풍기더라도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알고서 그러는 거니 설득할 수 없습니다." 정우는 물끄러미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무슨 표정인지 생각하다가 그것이 실망감에 가까운 것이라고 판 단했다. 틸러는 자신의 현실적인 말이 정우의 이상주의를 상처 입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틸러. 당신도 시카트처럼 저를 가르치려고 드는군요." "예?" "물론 즈믄누리를 나와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저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엔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자기가 확실히 아는 것만 가르쳐주는 대 장군님 같은 분은 정말 드물군요. 저는 당신도 대장군님 같은 사람이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잘 모르면서 가르 치려고 하네요. 전 그게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틸러는 불쾌함을 느꼈다. "규리하공 아가씨. 죄송합니다만 전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어떤 점에서 그렇게 했습니까?" "틸러. 당신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믿겠죠. 미안하지만 당신은 잘못 알고 있어요.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나쁜 짓 하지 말 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말 한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틸러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 당황 때문에 사과할 기회를 놓쳤다. 스 스로도 원하지 않는 논쟁에 뛰어들고 마는 자신의 버릇이 자존심 때 문인지 호승심 때문인지 고민하며 틸러는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한 제 우 둔함에 대한 질책은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짐작 한 의미가 아니라면 규리하공 아가씨께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신 겁니 까? 골케 남작은 오래 살고 싶어서 파노의 피를 마셨습니다. 아가씨 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 아닌가요?" "아니죠. 저는 골케 남작이나 파노 영감님 때문에 길을 나선 것이 아니에요." 틸러는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그러면 누구 때문에 길을 나선 거냐고 정우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질문하지 못했다. 먼곳에서 그가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파노 를 깨어나게 하고 정우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정우는 소리의 방향을 가늠하려 애쓰며 캄캄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정우는 그녀의 시대에 속한 것들 중 후대에 전설이 될 가능 성이 가장 높은 것들 중 하나를 보게 되었다.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은 악랄한 싸움꾼이었다. 싸움이 최선책일 때도 싸웠지만 최악의 결과를 얻을 것이 뻔할 때도 싸웠다. 그는 싸 움 자체를 즐겼다. 인정하지 않지만 파라말은 상대를 도발하여 격분 시킬 때 쾌감을 느꼈고 상대의 급소를 단번에 내려칠 때 전율을 느꼈 으며 상대가 비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볼 때 황홀감을 느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파라말이 상종 못할 악한으로 취급되지 않는 까닭은, 그 의 폭력성이 십구로 위에서만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런 파라말에게 있어 눈앞에 펼쳐진 바둑판은 심히 만족스럽지 못 한 것이었다. 상대의 착점을 바라보던 파라말은 참을 수 없는 기분으 로 바둑판을 가리켰다. 멍한 얼굴로 파라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을 바라보던 스카리는 욕설을 내뱉었다. 파라말이 말했다. "안되겠습니다. 공의 마음이 스무번째 줄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그만 두도록 하지요." 스카리는 반대하지 않았다. 돌을 쓸어모아 통에 담으며 스카리는 사 과했다. "미안하게 됐군. 파라말." "아뇨. 괜찮습니다. 수담을 나눌 수 없으면 잡담이라도 나누지요. 무슨 생각에 그리 골똘히 빠져계신 겁니까?" 파라말이 짐작한 것처럼 스카리는 자신의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말하려는 내용이 좀 어려운 것인 듯했다. 스카리는 먼저 파라말과 자신의 친분을 재확인하려 했 다. "내가 자네에게 바둑 가르쳐달라고 말한 것이 4년 전이었지? 그 때 자넨 진짜 놀랐지. 쳇. 발케네 남자가 바둑을 배운다니 놀랄 일이긴 하지. 하지만 자네는 이유를 묻지 않았어. 그리고 4년 동안 재미도 없을 텐데 내 상대를 해줬지. 경고하는데 그게 재미있었다고 말해서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마." "좋습니다. 가끔 바둑판으로 공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었습니다." 스카리는 웃었다. "그런 정석은 배운 적이 없는데? 유용할 것 같으니 기억해두겠어. 어쨌든 이젠 자네에게 바둑을 배우려고 한 이유를 말해주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헨로 가문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두잖아." "그 사람들이야 유명한 애기가들지요. 현재 문중에서 가장 강한 니 어엘 헨로 수교위 같은 경우에는 칼리도백과 호선으로 둔다더군요. 물론 승률은 높지 않지만." 무심히 엘시를 거론했던 파라말은 스카리의 얼굴이 확 변하는 것을 보고는 찔끔했다. 파라말은 스카리가 조금 전에 배운 정석을 활용할 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다행히 스카리는 그러지 않았다. "에더리가 정말 그렇게 잘 두나? 난 그 놈과 둬봤다는 사람 본 적 없어. 자넨 둬 봤나?" "아뇨. 백작의 집엔 바둑판도 없습니다. 칼리도의 본가에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그 놈이 잘 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 대장군에게 아첨하는 놈들이 지어낸 말 아냐?" "그건 아닐 겁니다. 칼리도백과 둘 기회는 없었지만 백작과 호선으 로 둔다는 사람과 둬 본 적은 있거든요. 제가 정선으로 둬야 했습니 다." "자네가 정선으로? 그게 누군데?" "시련의 아르키스 대수호자입니다." 스카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잠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도시연합에 있는 대수호자하고 어떻게? 에더리가 미라그라쥬에 가기라도 했다는 거야?" 스카리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파라말은 몸을 뒤로 조 금 젖히며 말했다. "천만에요. 대수호자와 바둑을 둘 때 칼리도백은 미라그라쥬를 방문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도 방문하지 않았고요." "지금 농담 하는 거야? 만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바둑을 뒀다는 거 야? 설마 대수호자가 국경을 넘어왔다는 건가?" 파라말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뱀단지로 두는 겁니다." "뱀단지?" "예. 뱀단지로 서로의 착점을 알려주는 거죠. 그러면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동시에 바둑을 둘 수 있습니다." "허! 그런 방법이 있나? 그런데 폐하의 뱀단지를 그런 시시한 짓거 리에 쓴다고?" "물론 세번째 벽난로 방을 이용한 것은 아닙니다. 한계선 남쪽으로 가면 이곳만큼 뱀부리미가 귀하지는 않지요. 그런 자들의 도움을 받 아 바둑을 두는 겁니다. 공께서야 바둑 둘 줄 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셨으니 기계의 이야기를 별로 접하지 못하셨겠지만 기객들 사이에 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름 높은 기객이 제국 남부에 가면 시련으로부터 아르키스 대수호자의 대국 요청이 국경을 넘어오는 일 이 흔합니다. 저는 비스그라쥬에서 몇 번 그렇게 뒀습니다. 백작도 그런 식으로 둔 적이 있다더군요." 스카리는 겨우 파라말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엘시를 이해할 생각 은 없었다. "폐하의 대장군이 적국의 수괴와 바둑이나 둔다는 것도 말이 안돼. 넋 빠진 놈." 스카리를 당황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파라말은 그 비난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산공부사는 적당히 중립적으로 들리는 말을 한 다음 대화가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스카 리가 말했다. "그래. 헨로 가문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바 둑을 배우기로 결심했어. 내가 발케네의 무식하고 거친 남자가 아니 라는 것을 부냐의 가족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거든." "대단한 결심을 하셨군요." 파라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스카리는 발케네 남자이기 때 문이다. 스카리도 동의했다. "빌어먹을. 발케네를 통틀어 바둑 둘 줄 아는 남자는 나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내가 지금 헨로 가문에 찾아가서 대국을 하면 창피를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아냐. 내 가 바둑 둘 줄 안다는 건 자네밖에 몰라. 그런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바둑 둘 줄 모르는 척하면서 바둑 좀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그 사람 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까?" "바둑 둘 줄 모르는 척하면서 상대를 놀라게 한다고요?" "그래." "왜 그러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안됩니다." "뭐야? 내 기력이 그렇게 형편없나?" "아니오. 음. 체이다 헨로 정도라면 공께서 두 점 치수 정도로 해볼 만하실 겁니다. 문제는 공의 기력이 그 사람들의 상대가 안 될 만큼 낮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속일 정도로 높지 않다는 점입니다. 공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일은 상대보다 몇 치수 이상 높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스카리는 주춤했다. 하지만 곧 손가락 하나를 펼쳐보이며 말했다. "처음 한두 판이면 돼! 자네가 가르쳐줄 수 없나?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의 재능으로 보이면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파라말은 스카리의 속셈을 이해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기력 낮 은 기객이라면 헨로 가문 기사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하지만 기재 가 있어 보이는 문외한이라면 가까이 두어 가르치고 싶은 것이 또한 기사의 본성이다. 파라말은 발케네 남자가 좋아하는 치하의 말을 꺼 냈다. "교활하군요." 스카리는 흡족해했다. "그런 식으로 그 가문에 접근 하실 생각입니까?" "부냐가 에더리와 약혼한 이후로 그 놈들은 나와 모든 관계를 끊었 어. 내가 초대해도 오지 않고 직접 찾아가면 사람 앉아있질 못하게 해." "그래서 천재인 척해서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것이군요. 하긴 그 가 문은 바둑 잘 두는 것만 아니라 좋은 기사를 키워내는 걸로도 유명하 지요. 혁기에 재능이 있는 발케네 남자라면 호기심의 대상으로도 충 분할 테고요. 하지만 안됩니다." "도저히 안되겠어?" "발케네공.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천재로 위장할 수는 없습니 다. 엄청나게 운이 좋으면 성공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헨로가 사람들은 애기가들 입니다. 당신의 계획이 탄로나면 그 사람들은 당신을 기객이 아닌 사 기꾼으로 생각해서 상종도 안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스카리는 신음했다. 파라말은 빙긋 웃고는 질문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접근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질문을 받은 스카리는 파라말을 외면했다. 숨소리를 낮추고 싶어하 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때문에 스카리의 호흡은 더 부자연스러워 보 였다. 스카리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자네가 짐작해보지 그러나?" "부냐 아가씨 때문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무슨 계획을 가지 신 건지는 모르겠군요." "엉망이라잖아." "예?" "부냐가 그렇게 되고나서 남작은 산송장 비슷하게 되었다고 들었어. 가장이 그 모양이니 집안이 제대로 돌아갈 까닭이 없지. 당연히 풍비 박산 날 지경이야. 쳇! 헨로 가문에서 바둑꾼을 그렇게 키워냈다면, 왜 어려울 때 코빼기 비치는 녀석은 하나도 없는 거야?" "아니오.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 계보에 속한 기객들 중 몇 명이 찾아와서 스승을 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자기 연명하 기도 바쁜 처지들인지라 남작이 사양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럼 아무 쓸모가 없지. 그래서 내가 가서 그 집안을 좀 돌봐주고 싶은데, 빌어먹을. 나한테는 명분이 없잖아. 어차피 접근도 못하게 하고 말이야." 파라말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제자가 되겠다는 겁니까?" "바둑 배우려고 드나들면서 집안 일 돌볼 수 있을 정도면 돼. 그런 데 자네에게 배웠다고 말하면 제자가 될 수 없잖아." 파라말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사제 관계를 밝힐 수 없다는 기괴한 조건으로 4년 동안 스카리에게 바둑을 가르쳐온 것은 스카리 가 내놓는 지도료가 상당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스카리를 좋 아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남자들 중에서 자신을 거부한 여자의 가 족이 곤경에 빠졌을 때 돕겠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그것도 상대 가 불편하지 않도록 제자로 들어간다는 형식을 궁리해낼 만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고민을 많이 하신 듯하군요. 발케네공. 안타깝지만 모양이 안 좋습 니다. 말씀하신 일은 칼리도백이 해야 할 일입니다. 공께서 그러시면 주제 넘게 나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엘시의 이름은 스카리를 다시 흥분시켰다. "그렇잖아도 그 놈 이야기 하고 싶었어. 에더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것이 아냐. 그 놈은 당장 백화각에 가서 부냐를 꺼내야 해! 그 개새 끼는 만병장이야. 그 놈은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런데 안 하고 있다 고! 내가 백병장이나, 아니면 십병장만 되었더라도 난 당장 그렇게 했을 거야. 애초에 그깟 고자 같은 놈에게 만병장이라는 것은 어울리 지도 않아!" 바로 그렇기에 스카리에게는 백병장도, 십병장도 주어지지 않을 거 라고 생각했지만 파라말은 그 생각을 말로 바꾸지는 않았다. 파라말 은 달래듯이 말했다. "칼리도백은 삼가고 조심하는 미덕을 보이는 것입니다. 만병장에 대 해서 우리는 만 명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처신을 기대하니까요." "자기 앞가림 못하는 바둑꾼들도 찾아와서 도우려고 하는데 약혼자 주제에 한 번 들여다 보지 않는 것이 삼가고 조심하는 건가?" "발케네공. 아시잖습니까? 백작은 대장군의 일만으로도 지쳐 쓰러질 정도로 바쁩니다. 이 전쟁 전에도 도망친 태위 때문에 백작은 제국군 전체를 다 통괄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전쟁을 준 비했고, 승리했으며, 그 전후 처리까지 하고 있습니다. 저는 칼리도 백이 잠 잘 시간이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어쨌든 백작은 지금으 로서는 헨로 가문을 보살필 시간까지는 도저히 낼 수 없을 겁니다. 백작이 좀 더 여유가 생기면 헨로 가를 보살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에더리가 나설 때까지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난 그렇게 못해." "조금만 기다려보시지요. 어쩌면 파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스카리는 확연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찔끔했다. 그는 매섭게 파라말 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이야기가 있어?" "아니오. 제 추측이 그렇다는 겁니다. 여러 사정상 백작은 죄수 신 분의 약혼자를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지요. 설령 그가 그러길 원하더 라도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의 주위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뭐? 여자라니? 그 멍청이에게 칭찬할 점은 난봉질을 안한다는 것뿐 인데. 그것도 지조가 있어서가 아니라 배짱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겠 지만." "저는 적당한 여자가 있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정우 규리하지 요." 말을 꺼낸 파라말은 스카리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조금 의아 해 했다. 스카리는 당황과 충격이 뒤범벅된 얼굴로 파라말의 말을 재 확인했다. "정우? 비셀스 규리하? 아이저 규리하의 딸 말인가?" "예. 사정이 급하기로는 칼리도백에 못지 않은 그 처녀 말입니다." "설명해봐." "그녀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변경백 위를 계승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가진 인맥은 별 도움이 안되는 도깨비들과의 친분이거나 당장은 쓸모 없는 규리하 가문의 인 맥 뿐입니다. 그런 꼴로 규리하령을 계승할 수는 없지요. 따라서 든 든한 남편을 구해야 할 겁니다. 작금의 제국에서 좋은 남편감의 목록 을 뽑아본다면 역시 첫줄에는 칼리도백이 들어가겠지요. 물론 락토 공께서 찬성하실 리는 없지만." "응? 우리 아버지가?" "예. 락토 공께서 엘시 백작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아시죠? 그런 데 발케네의 목전에 엘시 백작이 온다면 춘부장께서는 그 사실에 감 사하기는 어려우시겠지요." "아아. 무슨 말 하는 건지 알겠어. 그래. 분기탱천하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 아버지는 에더리를 몰라서 그래. 그 녀석이 넋 빠진 얼간 이라고 내가 아무리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아. 황제의 대장군? 유일 한 제국만병장? 쳇. 자기 약혼자 한 명도 구하지 못하고 황제의 눈치 나 보는 옹졸한 놈이야. 가진 재주는 바둑돌 깔짝거리는 재주와 칼 들고 주정 부리는 재주뿐이고. 그런 조무래기를 왜 무서워하시는 건 지 모르겠어." 파라말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향의 정복자에 대한 평으로는 지나치 게 유치해서 맞장구를 치기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물론 파라말은 스카리의 그런 순진함도 좋아했다. "어쨌든 엘시 백작과 정우가 결합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라는 말 씀을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난점이 해결된다면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는 짝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귀족원에서 도 그 결혼을 반대할 명분은 없으니 락토 공께서도 적극적으로 거부 하기 어려우시겠지요." 스카리는 팔짱을 끼고는 파라말의 말을 숙고했다. 파라말은 크지는 않지만 잘 꾸며진 정원을 바라보았다. 토양이라는 것이 없는 하늘누 리에서 개인적인 정원이라는 것은 유수부의 일개 경비병의 입장에서 는 상상할 수 없는 사치다. 물론 발케네공의 입장에서는 검약의 절정 이라 해야겠지만. 조금 후 스카리가 약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라말." "예." "자네는 내 친구지?" "아뇨. 스승입니다." 스카리는 웃음을 머금었다. "좋아. 스승. 사실 비셀스 규리하가 좋은 신부감이라는 것을 내게 말해준 사람이 자네가 처음은 아니었어. 그런데 신랑 후보에 대해서 는 좀 다른 말을 들었지." 파라말은 '아'라고 말하듯 입을 조금 벌렸다. "혹시 발케네에서 연락이 온 겁니까?" 스카리는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파라말은 그가 고민하도록 내버려두었지만 대답이 긍정일 것은 의심하지 않았 다. 스카리는 긍정했다. "맞아. 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 비셀스 규리하를 며느리로 선택했다 고." 파라말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나마나 일방적인 통고였을 것이다. 암 살공은 아들에게 너의 짝을 찾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며느 리를 데려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스카리 또한 소심한 아들 은 아니다. 파라말은 얼굴 비출 곳이 없으면 락토와 스카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면도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스카리가 말했다. "네가 말한대로 에더리가 비셀스와 결혼하는 꼴을 볼 수 없어서 그 런 걸 수도 있지. 에더리와 그 여자가 결혼하는 걸 거부할 수는 없으 니 대신 나를 밀어넣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을 거야. 며느리의 지참금이 탐난다는 거지. 쳇. 노인네 과욕이야. 황제나 다른 대귀족들이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걸. 어쨌든 그 녀석과 나는 도대체 무슨 악연인지 모르겠군. 항상 한 여자를 놓고 부딪히게 되니. 그런데 말이야. 폐하께서도 에더리와 비 셀스가 결혼하길 원할까?" "용인도 아닌 제가 폐하의 흉중을 짚어낼 수 있을 리는 없지요. 하 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듣긴 했습니다." "뭔데?" 파라말은 자신의 말이 스카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심스럽게 즐기며 말했다. "폐하께서 부냐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은, 백작의 짝으로 다른 사 람을 염두에 두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거죠." =============================================================== 다음회 예고 : 그리하여 그레이트 마징가의 파일럿은 테츠야고 자신 은 테츠로이며, 그 이름이 전부 철이로 번역된 것이 대해서는 한국방 송계의 번역 관행에 대해 따지라는 말로 흡혈안드로이드를 진정시킨 철이. 그러나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전기 포켓몬의 모습을 목격한 철이는 자신이 축생만도 못하다는 자괴감에 정신적 쇼크를 받고서는 '네트는 광대해' 같은 의미불명의 말을 남기고 전뇌공간으로 사라진 다. 그러나 그곳에는 치바에서 손상된 신경을 치료받고 다시 현역으 로 복귀한 전설적인 카우보이가 기다리고 있는데…… 한편 추적 의무에서 해방된 안드로이드는 자신을 뒤쫓아온 현상금 사냥꾼을 마스터라고 부르고 만다. 자신은 기사가 아니므로 마스터가 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은 안드로이드는 그렇다면 호부호형이라도 허 락하라고 요구한다. 과연 폭주갈매기는 세 명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 면 음속을 돌파할 수 있다는 '제트 스크림 어택'의 비밀을 풀 수 있 을 것인가? 힘내라, 조나단! 혼돈을 향해 달리는 왕자에게 목걸이를 전달하는 것은 핏빛 새의 사명! 목걸이에서 빛나는 푸른 보석의 정체 는? 다음회 '블루워터와 스머프의 관계' 많이 기대해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4-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21 조회수 : 3244 피를 마시는 새 4. 묻은 것과 믿은 것 - 3 엘시는 서류를 책상 저편으로 밀었다. 같은 줄을 일곱 번째 읽는 것 보다는 그것이 나을 것 같았다. 눈 주위를 문지르며 엘시는 자신의 상태가 최악이라는 것을 인정했 다. 그러나 자신의 나태함에 정당성을 제공하기 위해 그러는 사람들 과 달리 엘시가 그것을 인정한 것은 솔직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시 는 집중력이 회복되기를 바라며 좀 간단한 일감부터 손 대기로 했다. 그러나 서류를 뒤적거리던 엘시는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서류더미 아래쪽에서 엘시는 태위청의 서류들을 잔뜩 발견했다. 엘 시는 규리하 토벌군의 서류들을 위에 덮어 살짝 위장해둔 그 솜씨가 태위청의 어느 관리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태위 본인보다 더 태위청의 관리들을 자주 만나니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엘시는 당번병을 부르는 것을 고려해보았다. 태위청에 보내는 경고 문을 쓰는 것이다. '나는 대장군이 태위를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은 듣 지 못했다. 따라서 까다로운 상관을 설득하는 대신 대장군에게 전결 을 요청하는 편이 더 수월하다는 그대들의 판단과 행동에 정당성은 없다. 심지어 그대들의 행동에는 황제의 대장군을 얕보는 의도조차 엿보인다. 그대들은 태위만이 두렵고 제국만병장은 두렵지 않다는 것 인가? 그런 의혹이 부당하다면 나에게 더 이상 태위의 일을 가져오지 마라. 그것은 바르지 못하다……' 물론 꿈에서나 가능한 상황이다. 엘시가 보기에 그것은 지나치게 품 위 없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불평을 한다면 태위청의 가엾은 관리들 이 아니라 태위 레이헬 라보 자신에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도망친 라보 태위가 불평을 듣기 위해 엘시를 찾아와주기 만 한다면. 큰 붓으로 집무실 벽에 사임 요청문을 써갈겨 놓고 홀연히 태위청을 떠난 노장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그러나 그가 제국을 주유하고 있 다는 것은 분명한데, 각종 동물의 몸에 쓴 사임 요청서가 계속 도착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사임 요청서는 푸른 물수리 의 날개에 쓰여져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태위가 황금해에 인접한 휘포리나 섬버, 혹은 카라보라 같은 지방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아있는 동물의 몸에 쓰여져 있는 태위의 글은 명필 로 소문난 태위의 작품을 감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차치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당혹시켰지만 황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치 천제의 무반응은 포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레이헬 라보는 여전히 태 위이며, 태위청의 관리들은 대장군의 책상에 서류를 던져놓고 도망치 는 술래잡기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지 않습니다. 태위님.' 엘시는 레이헬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마도 간편한 복장. 가지고 있는 물건은 문방구와 장죽 하나. 긴 세월 맺어둔 은원의 두께가 두 터우니 발등에 먼지 쌓일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먼지를 털고 쉴 곳 도 많을 테고, 먼지 쌓일 틈 없이 황급히 지나쳐야 할 곳도 많을 테 니까. 한밤중에 레이헬 라보가 왔노라고 외치며 죽마고우의 대문을 걷어차는 태위를 눈으로 보는 듯하다. 레이헬 라보라는 이름을 난생 처음 들어봤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 태위를 보지 않고서도 짐 작할 수 있다. 엘시는 상상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당황했다. 엘시는 자신이 레이헬의 여행을 명확한 이유 없이 미화하는 이유가 대리만족감에 있음을 깨달았다. 문방구와 장죽을 바둑판과 무딘 칼 한 자루로 바꿔놓으면 그것은 바로 엘시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다. 엘 시는 거부감 속에서 그것이 도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의 도피인가? 아라짓 제국의 가상적국 1호는 원칙적으로 한계선 남부의 도시연합 이다. 하지만 도시연합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자신들의 존속을 첫번째 가치로 여기는 도시들의 느슨한 집합체다. 그들이 연합을 유 지하는 까닭은 북진의 가능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제국의 남진 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도시연합에서 아라짓 제국으로 보내는 문서에 는 오래 전부터 '북부의 지배자'나 '아라짓의 지도자' 같은 기묘한 말 대신 '아라짓 제국 황제 폐하'와 같은 정확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 으며, 그것은 아라짓 제국의 통치자가 곧 세계의 패권자임을 도시연 합의 나가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다.(물론 나가들은 공문서를 서 판에 써서 보내는 관례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하물며 현재 도시연합 을 대표하고 있는 대수호자는 바둑판 위에서만 제국인들에게 호전적 인 아르키스. 대수호자는 언젠가 엘시에게 자신과 바둑의 관계를 넌 지시 고백한 적이 있다. 그가 바둑을 두는 까닭은 물론 그것을 좋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의 기사들을 격파하면 나가들이 좋아하는 것도 그에겐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대수호자의 말에서 엘시는 도저 히 실전으로 겨룰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승리감을 대리 체험코자 하는 나가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었다. 만약 도시연합이 아라짓 제국을 도저히 참아넘길 수 없어서 공멸을 각오하는 때가 온다 해도 그것은 각오로 그칠 수밖에 없다. 비스그라 쥬백 데라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하루 종일 난로에 불을 지펴 고온을 유지하는 귀찮은 방법이 아니고서는 나가들은 한계선을 넘을 수 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에는 적이 없 다. 그렇다면 제국의 장수가 꿈 속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적수는 누구인가? 인정하기 싫었지만 '솔직하게' 엘시는 자신이 제국의 대장군이 아니 라 황제의 대장군임을 인정했다. 그는 적이 없는 제국의 수호자가 아 니라 하늘의 대행자다. 지상의 땅에 대해 완고하게 거리감을 두고 있 는 치천제 - 하늘을 다스리는 황제의 대장군이다. 그는 군대를 몰아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을 격파한다. 감히 하늘에게 요구하는 분 리주의자? 주살하라. 감히 하늘과 계약을 논하는 서약지지파? 격파하 라. 감히 하늘의 비밀을 빼돌린 여인? 그 여인은? 엘시의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힘겹게 쌓아올린 무엇인가가 무너지 는 것 같았다. 겉모습만을 볼 때 대장군의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엘시 는 자신이 빈사의 지경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상처 입어왔 기에 더 이상 새 살이 돋지도 않는 마음의 한 부분이 무참하게 파헤 쳐지는 것을 느끼며 엘시는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바른 길을 찾도록 허락하소서. 제 지혜가 부족하고 제 인내가 부족하다면,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위엄이라도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도망치지 않도록 하여주옵소서.' 안타깝게도 기도는 엘시의 내부에서 흔적 없이 흩어져 버릴 뿐이었 다. 엘시는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어떤 반향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엘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그래서, 엘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 허 영심으로 가득 찬 우둔한 여자만 없었다면……' 생각의 끝에서 엘시는 혼란에 빠졌다. 그게 누구지? 그 허영심으로 가득찬 우둔한 여자가 누구지? 병사의 고충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주제에 동행한 귀부인들에게 약혼자가 대장군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위문단에 참가하는 허영심을, 그리 고 작은 쪽지 한 장도 엄중히 검열되는 병영에 들어와서 뱃심 좋게 편지를 받아드는 우둔함을 가진 그 여자는? 엘시는 죽음과 같은 자기 환멸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그런 충동을 느낀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지만 엘시는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간단한 타협이다. 자기 읍소다.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엘시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간 엘시는 바람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규리하의 바람은 칼리도의 바람과는 달랐다. 쟁룡해에서 불어오는 관능적이기까지 한 남국의 바람과 달리 이 북쪽의 무향에 부는 바람 은 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사나웠다. 피부에 얼음이 맺히는 듯한 혹 독한 느낌은 엘시를 진정시켰다. 엘시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두 손으로 세차게 볼을 비볐다. 얼어붙 은 볼이 화끈거렸다. 엘시는 하늘누리가 떠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지상에 발을 딛지 않는 지상의 통치자가 있는 곳. 모든 사람들이 지상에 대한 치천제의 거부감에 대해 의아해하지만 엘시는 자신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치천제가 황제령 을 두지 않는 것은 다른 땅보다 더 자신에 가까운 땅을 두지 않으려 는 것이다. 치천제는 자신의 직접 통치를 받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구분되도록, 그리하여 전자와 후자가 반목하도록 내버려둘 생 각이 없는 것이다. 치천제가 충성 서약을 거부하는 것 또한 다른 사 람보다 더 자신에 가까운 사람을 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신에게 서 약할 수 있는 자들과 그럴 수 없는 자들을 구분하지 않기 위해 치천 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서약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서약 지지파측이 원하는 단계적 충성 서약은 바로 그 본질부터 치천제의 바람에 위배되는 것이다. 한편, 치천제가 분리주의자들을 엄단한 것 은 다른 자들보다 자신에게서 더 멀어지려는 자들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면 태양에 더 가까워져서 더 따뜻할까? 동쪽으로 달리면 서쪽으로 가는 태양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엘시는 자신이 황제에게 부냐의 방면을 요청할 수 없음을 다시 깨달 았다. 생각 얕은 이들이 황제를 무한한 권능을 가지고 있는 절대자로 볼 때 엘시는 스스로에게 가혹한 고독을 강요하고 있는 한 치열한 여 인을 볼 수 있었다. 한계선 이북, 나가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땅에서 나가 황제는 제국을 다스리고 있다. 등극한 이후 치천제가 하늘누리 를 한계선 이남으로 움직인 것은 단 두 번뿐이며, 그 때조차도 땅에 발을 딛지는 않았다. 황제가 곁에 두고 있는 첩조차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능력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데라시가 무 능한 인물이었다면 치천제는 동포의 얼굴을 하나도 볼 수 없는 환경 을 거리낌 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이기적인 부 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엘시는 자신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외길임을 인정했다. '부냐.' 엘시는 하늘누리를 바라보았다. 백화각에서 곱은 손을 가슴에 끌어 안은 채 웅크리고 자고 있는 부냐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제 제국은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 다. 언젠가 제국이, 그리고 폐하가 당신에게 따스한 가슴을 열어보일 겁니다. 그 온기는 당신의 곱은 손을……' 나가인 치천제에겐 따스한 가슴이 없다. 엘시는 주춤했다. 사소한 말실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엘시를 묘하게 동요시켰다. 그것을 무시하려 애쓸 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 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엘시의 당번병은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가 찾아왔 음을 알렸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순간에 가장 만나기 싫은 남자가 찾아왔 다. 엘시는 면담을 거절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스카리는 군인이 아니며, 면담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스카리 빌파 는 약속 같은 것을 할 위인도 아니다. 암살공의 최우선 계승권자인 이 젊은 발케네공을 수하에 두고 있는 지알데 락바이도 참 힘들겠다 고 생각하며 엘시는 모셔오라고 말했다. 옛날 상관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엘시는 책상 앞에 선 채 스카 리 빌파를 맞이했다. 스카리 빌파는 격분한 얼굴로 들어섰다. 엘시는 자신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싫다면 왜 찾아온 거냐고 생각했지만 스 카리가 화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에더리! 네 졸병이 내 검을 가져갔다. 그걸 당장 돌려받아야겠어!" "이곳에 패검하고 오셨습니까?" "발케네 남자는 절대로 칼을 놓지 않아." 엘시는 불명예 제대가 군규의 망각을 야기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 지는 않았다. 대신 6년 전까지는 제국군의 군단장이었던 사람에게 차 분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발케네 남자이며 동시에 민간인입니다. 무장한 채 작전구역에 들어선 자는 적으로 간주하여 즉결할 수도 있습니다." 스카리는 눈빛으로 엘시를 죽일 작정인 것 같았다. 순수한 발케네 남자답게 스카리는 그것을 죽이겠다는 협박으로 알아들었다. 그가 거 친 호흡을 몰아쉬며 패악스러운 말을 준비했을 때 엘시가 의자를 가 리켰다. "제 부하가 당신을 존중하기 위해 칼을 받아간 것으로 생각합니다. 돌아가실 때 틀림없이 돌려드릴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겐 어차피 숨 겨둔 무기가 있을 테지요. 그걸로 만족하십시오." 스카리는 찔끔했다. "무슨 근거로 내게 다른 무기가 있을 거라 믿는 거냐?" "발케네 남자는 절대로 칼을 놓지 않으니까요. 앉으십시오." 스카리는 더 이상 뺏긴 칼에 대해 떠들어선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랬다간 품 속의 다른 무기까지 뺏길지도 모를 판국이다. 포기했지 만 승복하기는 어려워 하며 스카리는 의자에 앉았다. 엘시는 당번병에게 마실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스카리 가 거절했다. "필요없어. 오래 있을 것 아니니까. 군대 곡차 같은 건 입도 대기 싫고." 엘시는 불명예 제대가 군인의 입맛에 대한 변경까지 가져오는 건 아 닐 것 같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하긴 그 날 스카리를 취하게 만든 것 은 군대의 술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신 겁니까?" "중신 서러 왔다." "네?"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해." 그날 밤 두번째로 엘시는 당번병을 부르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해보 았다. 스카리에게 칼을 가져다주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스카리 가 손에 칼을 들면 그 때 베어버리는 것이다. 엘시는 첫번째 충동을 느꼈을 때와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품위가 없다.' 엘시는 충분히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차갑게 말했다. "유쾌하지 않은 희언이시군요." "네가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야. 에더리." "설명할 논리가 있으실 거라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설명해보시지 요." 스카리는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엘시는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마 음에 들지 않았다. 스카리가 말했다. "폐하께서 너를 좋아한다는 건 알지?" "폐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따분한 소리는 그만둬. 내 밑에서 빌빌거리던 교위가 어떻게 대장 군까지 되었지? 어떻게 제국만병장이라는 말도 안되는 권한이 한 사 람에게 내려졌지? 네가 잘나서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엘시는 한층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씀이 제 부족함을 돌보라는 뜻이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 니다. 하지만 폐하의 안목을 폄하하려는 의도이거나 그 분의 편협함 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제기랄, 그만두자고. 폐하께서는 너를 좋아해. 그렇게 넘어가." "그렇다고 가정하지요. 그래서?" "뇌룡공에게 아스화리탈을 주는 거지. 폐하께서는 대장군과 제국만 병장에 이어 너에게 규리하를 줄 작정이신 거야. 그러기 위해선 네가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해야 하지." 엘시는 허무맹랑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뒤이은 스카리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부냐를 풀어주시지 않는 거야! 알겠냐? 부냐는 네가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풀려날 수 없어!" 엘시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스카리는 엘시의 얼굴에 서 그의 심정을 정확하게 읽었다. 스카리는 추궁하듯 얼굴을 엘시에 게 가까이 가져갔다. 뒤로 물러서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엘시는 가까 스로 말했다. "부냐가 염사 보조인으로 노역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명백한 죄에 대한 공정한 처벌입니다. 스카리. 신상필벌의 엄정함을 왜곡하지 마 십시오." 스카리는 경멸적으로 말했다. "신상필벌의 엄정함 좋아하네." "도대체 그게 무슨 무례한……" "너는 만병장이야. 에더리. 너는 언제든 합법적으로 부냐를 꺼낼 수 있어. 언제든 합법적으로 풀려날 수 있는 죄인을 억지로 가둬두는 것 에 무슨 엄정함이 있다는 거냐?" 엘시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가 알던 스카리 빌파가 맞는 건지 의 심스러웠다. 그가 아는 스카리는 기르는 개에게도 논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을 사람이다. 만약 그가 그런 이름을 붙였다면 그건 개를 걷어차고 때리고 꼬리를 자르겠다는 의사 표시다. 그런데 그 스카리 가 논리적인 반박을 하고 있었다. 엘시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제게 만병장의 권검을 주신 까닭은 부족한 제 능력을 그 것으로 보충하길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폐하의 법질서를 교란하는 것에 그것을 쓰는 것은……" "그만둬! 묻는 것에만 대답해. 네가 백화각에 가서 부냐를 꺼내오면 그건 정당한 일이야, 아니야?" "저는 그런 일을 하지……" "정당해? 정당하지 않아? 그것만 말해!" 엘시는 대답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스카리에게 그 대답을 들려줄 수 없거니와 그 자신도 그 말을 들으면 안된다. 하지만 질문에 대답 해야 한다는 예의 때문에, 혹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기원한 어떤 충 동 때문에 엘시는 말했다. "정당합니다." 스카리는 얼굴 전체로 정신적 포만감을 표시했다. 극심한 모멸감을 느끼며 엘시는 자신의 무릎 쪽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발견한 엘시는 그것을 힘들게 떼어냈다. 스카리가 말했다. "그러고도 네가 부냐를 사랑한다고?" 엘시는 스카리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행하게도 눈과 달리 귀는 감을 수 없다. "사랑이 뭔지 알아?" 갑자기 엘시가 알던 스카리가 돌아왔다. 엘시는 혐오감에 차서 스카 리를 쳐다보았다. 무례하고 거칠면서 묘하게 감상적인, 그러나 자기 애라는 방식으로만 그 감상적인 면을 드러내는 남자. "사랑은 말이야, 그녀가 내 목숨을 원하면 목숨이 하나 뿐이라는 걸 안타까워 하는 거라고." 엘시는 흐린 눈으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스카리 가 두 명, 세 명으로 보였다. 청중의 미지근한 반응은 스카리에게 문 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을 유일한 청중으로 삼아 스카리는 열변을 토했다. "나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있어. 알아? 아버지를 배신하고 있다고." 엘시는 암살공을 배신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생각했다. 배신하려 면 신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암살공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아버지는 너를 싫어해. 발케네의 턱밑에 네가 주저앉으면 노인네 미쳐버릴지도 몰라. 나도 너를 규리하공이라고 부를 것을 생각하면 나가처럼 껍질이 벗겨질 것 같은 기분이야. 하지만 나는 부냐를 사랑 해. 그러니, 네가 규리하공이 되는 걸 용납하겠어. 비셀스와 결혼해. 부냐를 놔줘. 너는 부냐를 놓아줌으로써만 그녀를 도울 수 있어." 엘시는 믿을 수 없었다. 스카리는 자신을 경애하고 있었다! 자신을 존경하고 자신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스카리는 엘시에게 떠오른 혼란이 자신의 날카로운 지적에 대한 반 응이라고 생각했다. 만족감 속에서 젊은 발케네공은 벌떡 일어섰다. 여전히 앉아있는 엘시를 내려다보며 스카리가 말했다. "내 말에 대해 생각해봐. 계속 생각해보면 결국 이해할 수 있을 거 야.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스카리는 문쪽으로 걸어갔다. 엘시는 그의 모습을 쫓았다. 스카리는 문 앞에서 한 번 더 외칠 사람이니까. 그의 기대대로 스카리는 외쳤 다. "사내가 되라고!" 스카리가 떠났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엘시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 다. 물방울이 철판을 뚫는 것 같은 형국으로, 엘시의 눈에서 눈물이 흘 러나왔다. 규리하성의 한쪽에서 대장군이 기묘하고 불쾌한 경험에 시달리던 그 시각, 성의 다른 곳에서는 비스그라쥬백 데라시가 문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혹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종족에겐 그저 쌀쌀한 정도였지만 나가인 데라시에겐 열까지 세기도 전에 혼수 상태에 빠질 만큼 추운 기온이었다. 하지만 데라시는 아무 어려움 없 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문 바로 앞에 섰을 때 데라시는 몸이 둔해지는 것을 느꼈다.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짜증을 느꼈지만 데라시는 차분하게 뒤를 돌 아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도깨비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유? 어, 제 몸이 둔해지고 있군요. 당신의 도깨비불에 뭔가 문제 가 생긴 것 같습니다." 기유 구마리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뭔가를 했고 그러자 데라시의 몸 이 다시 더워졌다. 기유는 고개를 꾸벅하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백작님. 라수의 방에 들어가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잠 깐 불을 놓쳤습니다." 데라시는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물론 그러지는 않았다. 데라시가 벽난로가 있는 자신의 방에서 이렇게 먼, 즉 보온복에 든 더운 물마 저 식을 정도로 먼 규리하성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유 가 붙여준 도깨비불 덕분이다. 기유는 나가에게 가장 쾌적한 온도의 도깨비불을 만들어 데라시의 몸에 붙여주었고 그래서 데라시는 한계 선 이남에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데라시가 불평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런 고마움 때문은 아니다. 기유 구마리는 이 야행을 유쾌한 장난의 일부로 알고 있었고 그것은 데라 시가 조장하고 싶어하는 착각이었다. 그래서 데라시는 공모자의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까? "예! 라수의 방도 지하 창고라고 할 수 있으니까 즈믄누리의 지하 저장고에 도달하는 방법과 비슷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닫이처럼 열 어보세요." "이건 여닫이문인데요?" "그렇지요. 여닫이문을 미닫이문처럼 통과해야 합니다." 데라시는 좀 어처구니 없는 심정을 느끼며 기유의 말처럼 해보려 했 다. 문 손잡이를 붙잡고 옆으로 민 것이다. 그러자 여닫이문에 대해 그런 행동을 취했을 때의 당연한 반응이 일어났다.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데라시는 다시 기유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기유는 뒤통수를 조금 긁적였다. "제 설명이 잘못됐나 보군요. 그러니까 여닫이문이지만 미닫이문처 럼 여는…… 으으, 아무래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요. 잠깐만 옆으 로 비켜보세요." 데라시는 순순히 그렇게 했다. 데라시의 자리에 선 기유는 여닫이문 을 열 때와 같은 방향으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자신에게 한 말과 다르지 않느냐고 항의하려 했을 때 데라시는 말문이 막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문짝은 열리는 대신 통째로 끌려나왔다. 마치 커다란 서랍을 잡아당긴 것 같았다. 문은 아래쪽을 바닥에 붙 인 채 슥 미끄러져 나왔다. 데라시는 그 문이 어떻게 서 있을 수 있 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여닫이도 아니고 미닫이도 아니었 다. 그야말로 즈믄누리 식이었다. 문 너머의 공간을 살펴본 기유는 문을 도로 밀었고 그러자 서랍을 닫는 모습을 연상시키며 문이 제자리로 밀려들어갔다. 그 광경에 매 혹된 데라시에게 기유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 것도 없는데요. 이 방법은 아닌가 봅니다." 데라시는 항복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시도해볼 만한 다른 방법을 궁리하는 일은 당신에게 일임하겠습니 다. 저는 그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조차 없을 것 같으니 까." 데라시는 자신이 잘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왜냐 하면 기유가 중얼거 린 말은 '나가는 방법으로 들어가보면 어떨까'였기 때문이다. 데라시 는 나가는 것과 들어가는 것에 동작 상의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유가 도깨비만 떠올릴 수 있는 갖가지 괴상한 방법을 시도하는 것 을 보며 데라시는 잠시 엘시에 대해 생각했다. 엘시는 정말 이 비밀이 지켜지리라 믿은 걸까? 도깨비들의 다른 창 조물들이 그러하듯 몽화각의 성격을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곳에 가장 영리한 도깨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깨 비들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집단이 데라시의 영향권 이라 할 수 있는 하늘누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데라시는 엘시가 몽화각의 존재를 간과했으리라고 믿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엘시가 알지 못한 것은 데라시가 어느 정도로 필사적인가 하 는 것이다. 데라시는 라수의 방에 반드시 들어갈 작정이었고 수단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아이저 규리하는 붙잡히지 않 았고 따라서 그가 '그 물건'을 가지고 도망쳤는지, 그렇잖으면 놔두 고 갔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물건이 있는 라수의 방에 들어가 보 는 방법 뿐이었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만약 낙성 당시 아이저 규리 하가 그 물건을 가지고 도망쳤다면 지금 그 물건이 어디까지 흘러갔 을지는 짐작할 수도 없다. 그것이 규리하성을 빠져나갔다는 것만이라 도 알아야…… 데라시는 사고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몸이 차가워져 있었다. 라수의 방으로 들어가는 일에 열중한 기유가 또다시 데라시의 몸에 붙여둔 도깨비불을 잊어버린 것이다. 데라시는 불평했다. "기유. 제 몸이-" "열었습니다!" 데라시는 말 그대로 펄쩍 뛸 뻔했다. 기쁨 때문이 아니다. 데라시는 소리를 잘 듣는 종족들에게 배운 손짓을 해보였다. 데라시가 입 앞에 손가락을 세우는 것을 본 기유는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 았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네요." 하지만 기유는 자신의 부주의에 당황하기보다는 나가에게 소리에 대 한 주의를 듣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낄낄거리는 기유를 보며 데라시 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속으로 불평을 니르면서 데라시는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데라시는 기유를 용서하게 되었다. 하늘누리에서 환상 계단을 이용하여 은밀히 내려왔기 때문에 데라시 와 기유는 규리하성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기유가 연 문 뒤에는 라수의 방이 있었다. 이전에 본 적이 없었지만 데라시는 작은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그 방이 라수의 방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지하에 있는 라수의 방이 최상층 방과 같은 높이로 이어져 있다는 사 실은 데라시를 혼란스러운 기분에 젖게 했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확 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데라시는 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방 안이 어두운 것을 본 기유는 작은 도깨비불들을 몇 개 만들어 여 기저기로 띄워보냈다. 도깨비불 아래에 드러나는 광경은 더욱 인상적 이었다. 규리하 가문의 유구한 역사가 방 안 가득 퇴적되어 있었다. 그리고 역사학자가 아닌 데라시는 낭패감을 느꼈다. 자신이 찾는 물 건이 어디에 있을지 백작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즐비한 서가엔 서책과 장부, 두루마리 이외에 나가들이 사용하는 서 판도 꽤 쌓여있었다. 그리고 무수한 상자들은 놓을 공간이 부족하여 겹쳐 쌓여 있었다. 그 공간 사이사이에 목공예품이나 도기, 문방구, 악기, 족자, 편액, 그리고 무향의 지배자들이 사용했던 것이라 짐작 되는 무구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멍한 심정으로 후사린 규리하의 무 기라도 볼 수 있을까 생각하던 데라시는 잠시 후 그것이 말도 안되는 소망임을 깨달았다. 이 방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이라도 규리하 가문 을 재건한 과텔 규리하의 시대 이상은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 때 기유가 가져온 물건을 잘 보이는 곳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새 장이었고, 그 모습을 보고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안에는 새가 있었 지만, 새는 진짜가 아니었다. 어쨌든 세상에는 금속으로 된 몸을 가 지고 있는 새는 없다. 도깨비 대장장이들이 만들어낸 기발한 물건들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그 인조새는 알을 낳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고 양이를 애타게 하는 등의 일반적인 새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그 대신 풍부한 어휘력을 가지고 완벽하게 부적합한 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만든 도 깨비 대장장이는 자랑스럽게 황제에게 선물했고 황제는 그것을 다시 데라시에게 선물했다. 데라시는 평소 소유자의 인내력 향상 이외엔 그 인조새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도깨비나 도깨비 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그것을 재미있어할 거라고 판단했다. 더 정확하게 니른다면 데라시는 라수의 방 잠입에 기유를 동원하기 위한 핑계거리가 된다고 판단했다. 새장을 내려놓은 기유는 도깨비지를 꺼내었다. 거기엔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가져갈 것'이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도깨비들은 자신 들의 공예품에 동력이 필요할 경우 도깨비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 만 그 인조새는 도깨비불 대신 하늘에 떠있는 불을 이용한다. 그래서 태양이 없는 이 시각 새는 잠들어 있었다. 새장으로 도깨비지를 눌러 놓은 기유는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괜찮은 생각이십니다. 백작님. 정우가 여기 들어와서 이걸 보면 깜짝 놀라며 좋아할 겁니다. 정우를 달래는 일은 저희들이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 일인데 백작님께 신세를 졌군요." 데라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 목표하던 물건의 소재를 확인하 지 못한 비스그라쥬백은 시간을 끌기로 했다. "당신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그렇잖아도 푹 주무셔 야 할 이런 시간에 불러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잘 자는 일 은 도깨비에겐 대단히 중요한 일로 취급된다. "하지만 제 몸에 불을 붙여주고 이 방에 들어오는 방법을 알아내는 건 도깨비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불편을 끼쳐드려야했습니다." "아뇨. 이런 일이라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아, 물론 다른 경우 라도 백작님이 부탁하시면 언제든지 도와드릴 테지만요." 데라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낭패였다. 도 깨비불이 없으면 방에서 나올 수 없는 처지기에 기유와 함께 돌아간 다음 혼자 되돌아온다든가 하는 방법은 불가능했다. 데라시에겐 고맙게도 거기엔 시간을 끌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 밤 그의 동행자는 중요 사망 원인에 호기심이 포함되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종족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저, 백작님. 바쁘시죠?" "아니오. 특별히 바쁜 일은 없습니다." "그럼 구경 좀 하고 가도 될까요? 물론 백작님께서 돌아가셔야 한다 면 도깨비불을 유지해야 하니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구경을 항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저도 구 경 좀 하고 싶군요." 기유는 기뻐하며 규리하성의 보물들에게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충 분히 관찰하며 데라시는 마음 속으로 정해둔 위치로 천천히 움직여 갔다. 조금 후 데라시는 기유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기유 의 주의력은 라수의 방에 가득한 기념품과 보화들이 가져가버렸고 그 래서 데라시에게 할애될 주의력은 남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다른 사 람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던 데라시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그게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오레놀 선사는 라수 규리하가 그것을 대수롭잖은 것처럼 취급한다고 적어뒀지. 선사의 눈이 정확했다 면…… 아냐, 아니다. 이 방을 관리한 사람들은 규리하 가문의 사람 들이다. 선사의 입장보다는 이 방을 직접 관리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그래. 아마도 라수의 물건들은 한곳에 모여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라수의 소지품이었던 물건을 찾으면 되는 데, 라수의 소지품 중에서 유명한 것은? 물론 책이지. 저술량이 엄청 나니까.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규리하성의 도서실에 있으니 다른 물건 을 떠올려야 해.] 그 때 기유가 데라시의 어깨를 툭 쳤다. 데라시는 화들짝 놀랐고 그 모습을 본 기유는 고개를 꾸벅 했다. "미안합니다. 백작님. 제 말을 듣지 못하셔서요." "아, 이런. 사과하겠습니다. 잘 알겠지만 저는 신경을 쓰고 있지 않 을 땐 귀머거리나 다름없지요. 무슨 말을 했지요?" "괜찮습니다. 저는 유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유감? 왜죠?" "찾으시는 물건이 여기 없는 것 같아서요." 엘시에게 한 번 당한 일이지만 데라시는 다시 경악했다. 데라시는 니를 줄 아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무슨 말이죠?" 기유는 대답 대신 도깨비지를 내밀었다. 데라시는 인조새에 대한 지 시 사항이 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기색의 백작을 본 기유는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이런. 이 글씨는 백작님이 보시기엔 좀 작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 니다. 여기엔 '나는 졌지만 너는 이기지 못했다. 데라시. 그 물건을 내가 가져가니까.'라고 적혀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쓴 걸 보니 규리 하공께서는 아마도 백작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던 모양이군요. 하 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리고 기유는 뭐라고 더 떠들었지만 데라시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 오지 않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기유의 말에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가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동행 자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도깨비라는 사 실을 저주하며 데라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생각했 다. 결국 데라시는 그 상황을 웃기는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아이저 규리하가 그 물건을 가져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잘됐지만, 이왕이면 그 물건이 뭔지도 적어뒀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아이저에 겐 미안하지만 그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 무엇인지 저는 도 통 짐작되지 않는군요." 데라시의 바람대로 기유는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기유가 아이저 의 서신을 데라시의 손에 쥐어주고 문쪽을 향해 걸어갈 때까지 데라 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유는 문 앞에서 데라시를 돌아보았다. "그럼 돌아갈까요?" 데라시는 눈을 크게 뜬 채 기유를 바라보았다. 아이저 규리하의 서신이 발견된 이상 데라시에겐 이 방에 머물 이유 가 없었다. 하지만 기유가 바로 떠나는 것은? 기유 구마리의 목적 또 한 구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유는 데라시가 라수의 방을 찾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기유가 재미있어 한 것은 시치미를 떼려 하는 데라시의 능청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데라시의 목적에 대해 기유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까? 데라시는 일단 기유가 호의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도깨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반응이 그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데라시가 그 물건을 찾는 것을 기유가 원하지 않았다면 기유는 그와 동행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새장을 놓고 바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잖으면 아이저의 서신을 몰래 빼돌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유 는 그와 동행하여 라수의 방으로 들어오는 방법을 찾아주었으며, 구 경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어 데라시가 그것을 찾을 시간을 주었으며, 데라시가 읽을 수 없는 서신을 대신 읽어주기까지 했다. 기유는 분명 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데라시는 그 호의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데라시에겐 재확인이라 할 수 있다. 몽화각에 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데라시는 몽화각의 도깨비들이 어디까지 관찰하고 어디까지 해석하는지, 그리고 무엇보 다도 그 관찰과 해석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꼭 확인해두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 모든 추측과 판단, 결심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데라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올라가지요." 데라시의 몸에 붙인 도깨비불을 계속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기유는 황궁까지 동행했다. 데라시의 방 앞에서 기유는 좋은 꿈 꾸라는 인사 를 남기고는 데라시의 몸에서 도깨비불을 거뒀다. 떠나는 기유의 모 습을 보기엔 규리하의 날씨가 너무 추웠고 그래서 데라시는 간략한 인사만 건네고는 황급히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기대하던 것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는 데라시가 기대하던 것이었다. 하 지만 부지깽이로 벽난로를 헤집고 있는 사람은 데라시의 시종이 아니 었다. 치천제는 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데라시는 당황하여 뭐라 니르려 했지만 그 전에 치천제가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부지깽이를 치우며 닐렀다. [도깨비는 돌아갔나?] 데라시는 자신이 도깨비와 함께 외출했다는 것을 황제가 어떻게 짐 작했는지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벽난로 곁에는 그의 보온복이 걸려 있었다. [예. 문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갔습니다.] [몽화각의 도깨비들은 여간내기들이 아니지. 어떻게 눈을 피했지?]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제 목적이 뭔지 짐작하고 있더군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를 가리켰다. 데라시는 의자에 앉았 다. 그리고 황제가 맞은편 의자에 앉길 기다렸다. 하지만 치천제는 선 채 닐렀다. [그렇다면 도깨비들도 이 전쟁의 또다른 중요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니름이군. 그리고 네가 그걸 찾도록 도와주었다면 일단 방해하지는 않겠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여야겠군.] [그런 것 같습니다. 폐하. 하지만 도깨비들은 누구의 일도 방해하지 않으니 특별한 의미를 두긴 어렵습니다.] [그건 어디 있지?]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아이저 규리하가 가지고 갔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저 규리하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이런 서신을 남겨두었더군요.] 데라시는 아이저의 서신을 꺼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가인 치천 제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기에 데라시는 기유가 그것을 읽어주었을 때의 기억을 치천제에게 보냈다. 치천제는 팔짱을 꼈다. [도깨비들도 알고 아이저도 알고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보군.] [한 사람은 있을 겁니다. 폐하.] [엘시를 니르는 것이군.]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사자만 이 전쟁의 중요한 이유를 모른다 는 것은 어찌 보면 비극적이군요.] [비극이라고? 천만에. 엘시에겐 엘시 자신의 이유가 있어. 부냐를 석방시키기 위해 싸웠지. 그리고 짐을 만족시키기 위해 싸웠고. 그는 그 두 가지를 자기 식으로 결합시켰고, 다른 사람들의 이유에 대해서 는 신경쓰지 않을 거야. 만약 알았다면 그것도 결합시켰겠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엘시가 우유부단하다고 니르시는 겁니까?] [엘시가 우유부단하다면 세상에 엄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니름 이 되겠지.] 데라시는 그것이 과장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니르지는 않았다. 치천제가 닐렀다. [그건 그렇고, 아이저가 그것을 가져갔다고 했지? 지금 그의 처지에 선 사용할 수 없을 테니 아마도 비싼 값에 팔려고 하겠군. 구매자를 예상해볼까.] [상식적으로는 폐하께 팔아야 합니다.] [아이저가 짐에게 그걸 양도할 작정이라면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그 랬을 텐데.]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아이저는 서약 지지파가 그를 지원해주길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원은 없었고 아이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저는 서약지지 파에 대한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짐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졌겠지. 너는 지금 나가처럼 생각 하고 있어. 데라시. 아이저는 인간이지. 그리고 규리하고. 아이저는 그것을 이 땅을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겠지만 거래 수단이 아 닌 투쟁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목록의 두번째 이름은 어떨까요? 시련입니다.] 치천제는 정신으로 데라시를 툭 치는 것과 유사한 니름을 닐렀다. [농담을 하는 건가, 아니면 두번째 이름을 니르기 싫어서 일곱번째 나 여덟번째 이름을 끌어온 건가? 만약 아이저가 분별력을 완전히 상 실하여 미라그라쥬에 그걸 들고 간다면 아르키스는 당장 그를 붙잡은 다음 잘 묶어서 짐에게 보낼 거다. 데라시. 왜 락토를 니르지 않는 거지?] 데라시는 비늘을 살짝 부딪쳤다. 무례하지 않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견해는 전달할 수 있을 만큼. [폐하. 쇼자인-테-쉬크톨은 일단 시작되면 암살자와 암살대상 중 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쉬크톨이라는 건가?] [암살공은 그것을 알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던 아이저 규리하가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암살공이 야심가이긴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아이저의 분노가 락토를 설득할 수도 있지. 그가 그 '쉬크톨'을 락 토에게 주어 짐을 암살하게끔 획책할 가능성은 많아. 암살이라면 암 살공 외에 누가 전문가라 자칭하겠나.] [니르시는 것처럼 아이저는 그렇게 되길 바라겠지요. 하지만 암살공 은 바라지 않을 겁니다. 폐하.] [확신하나?] 이런 일에 확신이라는 것은 없다고 니르려던 데라시는 문득 치천제 의 눈빛을 보았다. 치천제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나나본에서 한 수교위가 재미있는 보고를 보내왔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군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추측하지만, 치천제는 데라시가 수천 명이나 되는 제국군 수교위의 이름과 임지를 다 외고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 았다. [짐이 알아두어야 하는 사람인가?] [부냐 헨로의 언니입니다.] [그리고?] 치천제가 부냐의 이름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데라시는 약간 당황하여 다른 정보들을 꺼냈다. [아마도 가장 젊은 수교위들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고, 국수급의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편입니다. 군사와 혁기 양쪽으로 그 나이 에 그 정도의 성취를 보였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같은 분야들에서 그보다 더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엘시?] [예. 수교위로 진급하여 독립 중대를 지휘하게 되면서 떠나게 되었 지만, 그 이전까지 니어엘 헨로는 칼리도백의 수하에 있었습니다. 아 마 엘시가 부냐와 만나게 된 것도 그녀 때문일 겁니다.] 무심히 데라시의 설명을 듣던 황제는 엘시의 이름에 반응을 보였다. 치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의 부하였다면 이해가 되는군. 영민한 사람 같더군.] 치천제는 니어엘 헨로의 보고서에 대한 기억을 데라시에게 통째로 보냈다. 잠시 후 데라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유무역당에서 또 항의가 들어오겠군요. 범죄자와 무법자의 친구, 패륜의 수호자, 배금주의의 왕 유료도로당주를 규탄한다……] [만일 그런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배은망덕한 것들에게 준엄한 훈계 가 내릴 것이다. 그들이 무역을 할 수 있는 것이 누구의 도로 때문인 가? 그런데도 무역로를 공짜로 쓰겠다는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 으니, 금편에 눈이 어두워 도리를 소홀히 하는 것들이 누구인지는 분 명하지 않은가.] 데라시는 치천제의 반응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자유무역당주 지테를 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료도로당에 대한 황제의 애정은 변함 이 없으니, 아무래도 자유무역당이 유료도로당에 지불하는 막대한 도 로사용료가 축소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지테를 당주는 항의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데라시를 당황하게 했다. [라고, 네 선에서 은밀히 전해. 그러면 귀찮은 항의서는 보내지 않 겠지.] 데라시는 비늘을 눕히려 애쓰며 황제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황 제는 무심하게 닐렀다. [황제는 유료도로당을 편애하니 비스그라쥬백은 자유무역당에게 친 근한 척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면 지테를은 짐에게 화를 낼 수 있고 게라임은 너를 경멸할 수 있을 테니 공평하겠군. 그리고 우리는 필요 할 때 그들을 긴장시킬 수도, 고분고분하게 할 수도 있겠지. 네가 이 미 그랬던 것처럼.] 데라시는 당혹감과 동시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가 지테를에게 은밀 한 호의를 보낸 까닭은 황제가 니른 이유 때문이다. 황제가 유료도로 당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내고 있는 이상 앙숙이라 할 수 있는 자 유무역당에게도 누군가가 호의를 보내지 않는다면 자유무역당은 피해 의식에 빠질지도 모른다. 물론 단순히 자유무역당을 안심시키기 위한 이유만은 아니다. 황제가 지적한 것처럼 연초교역권과 아이저 규리하 를 맞바꾸는 거래를 데라시가 쉽게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 유무역당과 쌓아둔 관계 때문이다. 황제는 데라시의 그런 공작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내버려둔 것이다. 데라시는 갑자기 자신에게 비 밀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몽화각의 도깨비들 도, 황제도 데라시가 하는 일을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데라시는 그 사실에 대해 잠깐 불평하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황제에게 미리 니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엄존했고 황제가 쾌히 사후승인을 해 준 시점에 자신이 독단적으로 일을 꾸몄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데라시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일전의 하인샤 대사원의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암살공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 군요. 폐하. 그것이 아이저 규리하라고 생각하십니까?] 치천제는 데라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벽난로로 다가간 황제 는 손수 장작을 집어 불에게 먹였다. 시련의 나가들이 참을 수 없는 배신으로 여기고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행동이다. 불길이 가벼운 액체처럼 나무 껍질 위로 흐르는 것을 보던 황제가 갑작스럽 게 닐렀다. [짐의 주의를 끄는 것은 니어엘 헨로 또한 지적한 바로 그 부분이 다. 락토는 제국군이 들어갈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지멘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지. 지멘이 어떻게 보면 한낱 부랑자에 불과하다는 사 실을 고려한다면 그건 아주 약한 빌미야. 짐이 락토의 시의라면 편집 증이라고 진단했을 만큼. 그렇다면 락토는 반역자 아이저 규리하가 발케네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무슨 니름이신지 알겠습니다. 제국군이 따라들어오면 안되니 결사 적으로 막겠군요.] [아니지. 손이 하나 더 있다면 세 손 들어 환영하겠지.] 데라시는 턱을 약간 앞으로 내민 채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열을 보는 그의 눈은 벽난로 주위에서 춤추는 열류를 볼 수 있었고 그래서 황제가 가만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라시는 황제가 계속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황제가 닐렀다. [자기가 비밀을 가지고 있노라고 만천하에 알리는 바보는 없다. 락 토는 바보가 아니지. 짐에겐 그가 제발 자기 영지에 관심을 가져달라 고 애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곳에 황제 전용덫이라도 만들어뒀나 보지. 그렇다면 왜 지멘은 안되는 것 일까? 간단하지. 지멘은 짐을 노리는 암살자며, 한 번이지만 천경에 그 더러운 발을 딛기까지 했지. 따라서 락토는 지멘이 발케네에 있다 면 짐이 그곳으로 가지 않으리라 생각한 거지. 하나 아이저는 다르 지. 아이저 규리하를 받아들인다면 그보다 더 확실하게 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데라시는 황제의 설명에 대해 생각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니름은 아니었지만 데라시는 거기에서 직관과 비약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 다. 데라시는 지나친 단정이 아니냐고 정중하게 니를 방법에 대해 생 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치천제가 단정적으로 니르거나 말할 때는 그것이 정말 직관적 사유의 끝에서 나온 것인지 그렇잖으 면 귀찮다는 이유에서 니르거나 말하지 않은 사유가 허다하게 있었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순간 치천제는 그 어느 때보다 단정적으로 닐렀다. [아이저 규리하와 라수의 천경비록(天京秘錄)은 발케네로 갔다. 데 라시.] 데라시는 반론을 포기했다. 치천제는 몸을 돌려 데라시를 똑바로 바 라보았다. [그것들을 짐에게 가져오라.] 데라시는 치천제가 아이저 규리하에 대한 경멸 때문에 무정물을 지 칭하는 대명사를 썼다고 착각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황제에게 바 쳐야 하는 것은 천경비록과 아이저 규리하의 시체인 것이다. 데라시 는 머리를 조아렸다. [니르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폐하.] =============================================================== 예고한 내용이 아니라고 항의하실 분? (……한두 명은 예고를 믿을 줄 알았는데.)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4-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22 조회수 : 3149 피를 마시는 새 4. 묻은 것과 믿은 것 - 4 지러쿼터 산맥의 험한 산세에서 격렬하게 쏟아져나오는 상류를 보면 짐작하기 어렵지만, 후사린강도 그 중류에 이르면 바다가 될 때가 다 가온 것을 인지한듯 그 흐름이 자못 점잖게 바뀐다. 그러나 구헬 협 곡이라 불리는 복잡한 단층 지대에서 후사린강은 갑작스럽게 찾아오 는 유년기에 대한 회귀처럼 그 사나운 기세를 드러낸다. 좁은 협곡을 쾅쾅 울리며 흐른 후사린강이 크게 굽이치며 덧없는 회귀의 충동을 포기하고 마침내 인자함을 되찾는 곳에 아스캄이 있었다. 아스캄은 규리하 변경백령의 중심에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변두리 에 해당한다. 과텔 규리하의 시대 이후로 규리하의 중심은 그 이름만 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과텔', '규리하', 그리고 '케나린' 등 규리 하 동부의 세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규리하가 세계의 다른 부분과 접한 곳은 지러쿼터 산맥으로 막혀 있는 동쪽뿐이기 때문에 산맥 동 쪽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시에 교류를 수행하기 위해 규리하 의 중심이 동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변 경백령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캄은 풍요롭고 인 심 넉넉한 전원 도시의 분위기를 띠었다. 누군가가 아스캄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다면 지노피 말티는 격분했을 것이다. "그 사마귀 자지 같은 남작 새끼가 진짜 그 미친 짓을 한다는 거 야?" 지노피 말티의 패악스러운 말투에 사람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물론 그들도 보다 부담 없는 자리에서는 자신들의 지배자가 가지고 있는 개탄스러운 악덕들에 대한 놀랄 만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곤 했 지만, 칼을 뽑아들고 있는 남작의 병사 정면은 부담 없는 자리라 하 기 어렵다. 경악한 병사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었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병사에겐 안됐지만 대장장이 지노피 말티는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코딱지 파서 귓구멍에 쑤셔넣냐? 왜 사람 두 번씩 말하게 하는 거 야. 남작 새끼가 정말 그 미친 짓을 하려는 거냐고 물었어. 히다." 병사는 한참 동안 어깨로 숨을 쉬며 대장장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지노피는 밋밋한 턱을 한껏 내민 채 그 시선을 받아내었다. 결국 히 다 켄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수십년지기 친구로 말하기로 했다. "그래. 할 거야. 지노피." "입이 얼어서 잘못 말했다고 어서 말해." "쭉정이 바람인데 입이 얼기는. 남작님은 몸이 달아 있어. 그 새댁 이 썩 곱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면, 남작님은 자기 몸의 일부와 새댁의 몸 일부가 잘 맞는지 맞춰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는 거지." 지노피의 눈에서 불이 철철 흘러넘쳤다. 히다는 칼끝으로 장화 옆에 말라붙은 흙덩이를 긁적거렸다. "남작님이 앞뒤없는 성격이지만 희한하게 원칙은 있어. 그 왜 그런 사람 있잖나? 무슨 말이냐 하면, 남편이 죽어야 정식으로 그 여자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정식으로 결혼 할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쳇. 새댁 처지에선 그럴 바에는 눈 한 번 질끈 감고 하룻밤 자주고는 남편과 함께 집에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나 을 텐데. 집사 양반 알지? 포우티 씨 말이야. 그이도 그런 식으로 넌 지시 권해봤나 봐. 하지만 안 통해. 간통은 절대로 안된다는 거야." "그래서 그 불쌍한 녀석의 목에 예쁜 매듭을 매준다는 거야? 간통질 안하려고?" 히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교수대 쪽을 돌아보 았다. 광장 가운데 만들어진 교수대는 꽤나 훌륭한 모습이었다. 물론 아스캄의 목수들이 교수대 제작에 특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 다. 교수대 쓰일 일이 워낙 없는 곳이라 모든 부품들을 새로 제작했 기 때문이다. 그 용도를 고려한다면 그렇게 보기 어렵지만 광장 가운 데 선 교수대는 산뜻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특히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난처하고 어색한 모습 때문에 교수대의 깔끔한 모습은 더욱 두드러졌다. 히다 켄은 구경꾼들을 통제하고 있는 동료 병사들 을 바라보았지만 그다지 의욕이 고취되지는 않았다. 다른 병사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구경꾼이 칼에 다칠까봐 황급히 칼을 뒤로 치 우며 다른 손을 맹렬하게 내미는 병사를 본 히다는 한숨을 푹 내쉬었 다. 차라리 자신을 위로해 달라는 얼굴로 친구를 돌아본 히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노피 말티가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히다가 묻는 눈으로 바라보자 지노피가 공모자의 어투로 속삭였다. "히다." "왜? 말하게." "있다가 내가 한 대 때릴 거야. 슬쩍 칠 테지만 그냥 넘어져. 그 때 그 칼 꼭 떨어뜨리라고." "뭐라고?" "더럽게 되묻기는. 맞고 자빠지라고. 자빠지는 거 몰라? 진탕 취했 을 때 하는 그거 말이야. 칼은 놓고. 넌 그것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기막힌 얼굴로 대장장이를 바라보던 병사는 곧 고개를 심하게 가로 저었다. "안돼, 절대로 안돼." "신호 없이 때릴 거니까 입 꽉 다물고 있어. 혀 깨물지도 모르니 까." "허튼 짓 하면 당장 자넬 때려눕힐 거야." "칼 너무 멀리 던지지마. 그냥 떨어뜨려." "며칠 누워 있게 해주겠어. 틀림없이 살려줘서 고맙다고 하게 될 걸." "아, 참. 너무 티 나게 쓰러지면 안돼. 잘해볼 생각 말고 그냥 고꾸 라져. 네가 잘해보려고 하면 틀림없이 바보 짓 한다는 건 알고 있지? 그냥 얌전히……" 히다는 더 못참겠다는 얼굴로 지노피의 발을 콱 밟았다. 지노피가 입을 다물자 히다는 친구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가져가서 사납 게 속삭였다. "젠장, 하지마! 이 노망 난 뚱보 녀석아!" 부루퉁한 얼굴로 히다를 바라보던 지노피는 갑자기 히다에게 입을 맞췄다. 히다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지 노피를 바라보았다. 지노피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히다는 욕설을 퍼 부어주려고 했지만 입을 닦으면서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결국 히다는 엄한 얼굴로 지노피를 노려보곤 몸 을 홱 돌렸다. 히죽거리며 히다를 보던 지노피는 히다가 몸을 돌리자 곧 웃음을 거 뒀다. 늙은 대장장이는 미간을 찡그린 채 사람들을, 그리고 교수대를 바라보았다. 지노피는 개 뛰어든 닭장 같은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저 기에 파노의 아들놈을 매단단 말이지. 파노 긴시테를 떠올린 지노피 는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지렁이한테 흰소리 들을 노인네. 나랏님을 만나러 가겠다고? 높은 사람들이 언제 우리 같은 것들 신경 써주는 거 봤나? 남작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진짜 전쟁이 좀 이상하 게 흘러간 모양이고, 그렇다면 그런 난리통에 나타나서 나랏님을 만 나겠다고 설치는 촌노인은 문전박대나 당하면 다행이다. 자칫하면 더 험한 꼴을 볼지도 모르고. 그렇게 가지 말라고, 여기 있어야 아들을 구하든 아들 장사를 치르든지 할 테니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있으 라고 말했지만 그 고집 세기가 기르는 황소와 똑같은 노인은 기어코 떠나버렸다. 상황이 이러하니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다. '멍청한 아비과 얼빠진 아들놈. 부자지간에 작당해서 지노피 말티를 잡아먹는구나. 퇘!' 긴시테 부자에 대한 촌평을 마친 지노피는 큼직한 손을 들어올려 손 가락을 꺾었다. 큼직하고 화상 자국이 가득한 우악스러운 손이었으며 지노피가 자신의 머리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기도 했다. 관절염이 있 는 왼쪽 무릎에 대해서는 약간 염려가 되었지만 지노피는 달릴 때 좀 뻑뻑할 뿐 아직 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문득 지노피 는 앞쪽에 있는 히다가 당장이라도 돌아서고 싶어하는, 그래서 제발 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어하는 것을 느꼈다. 오랜 친구였기에 뒤통 수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장난기가 동한 지노피는 히다의 목을 쿡 찔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때마침 외침이 들려왔기에 그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광장에 접한 골목에서 건장한 병사들이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수레 에는 파노의 아들 햄 긴시테가 꽁꽁 묶인 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수레의 주인인 세파티가 몹시 언짢은 얼굴을 하고서 걸어오 고 있었다. 세파티는 몇 닢의 은편을 받고 수레를 빌려주기는 했지만 자신 또한 햄의 처형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런 얼굴로 알 리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몰려선 구경꾼들 중에 세파티에게 동정적 인 시선은 별로 없었다. 햄의 모습은 사형수치고는 꽤 깔끔한 모습이었다. 골케 남작은 햄이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햄 또한 동정 을 끌어모으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잔뜩 흥분하여 있는 햄 에게 어떤 냉철한 기획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만약 뭔 가를 꾸미고 있다면 햄은 아마도 사람들의 공분을 끌어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햄 긴시테는 골케 남작은 물론이거니와 수레를 끌고 있는 병사들, 그리고 교수대를 만든 목수들까지 모조리 욕하고 있었다. 그 리고 광장에 모여있는 구경꾼들 또한 햄의 욕설을 피할 수 없었다. 지노피는 화나고 불안한 심정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당장이 라도 누군가가 그 시끄러운 녀석 빨리 매달라고 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외침이 터져나오면 잔혹한 것에 매혹되는 군중의 본성이 곧 깨어날 것이다. 그 때 수레가 교수대 앞에 멈췄다. 그와 동시에 햄의 폭언도 중단되었다. 조금 전까지 무례한 말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던 입을 꽉 다문 채 햄은 교수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차츰 사람들도 햄이 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산뜻한 공예품이라는 인상 때문에 그들은 망각하고 있 었지만 그 물건은 만인의 눈 앞에 내놓기엔 수치스러운 물건, 사람을 죽이는 물건이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부끄러움과 당황을 느꼈다. 햄 긴시테는 넋이 나간 듯했다. 그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기 에 병사들은 그를 수레에서 교수대 위로 옮기느라 상당히 고생했다. 병사들의 지휘자이자 처형식을 주관하게 된 버르 대장은 불측한 의도 를 품고 남작의 저택을 침입한 햄의 죄상을 나열하면서도 햄이 그 선 고를 잘 듣고 있는지보다 그가 제풀에 죽어버리지 않나를 더 염려하 는 기색이었다.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버르 대장이 사형을 집행한다 는 말을 끝낼 때까지 햄은 살아있었다. 버르 대장은 준비한 자루를 꺼냈다. "눈을 가리겠나?" 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릴 뿐이었 다.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버르 대장은 지체없이 햄의 머리 에 자루를 씌웠다. 햄은 잠깐 움찔했지만 그것은 동물적인 반응일 뿐 그 때까지도 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노피 말티가 고향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건 아스캄은 평화 로운 지방이고, 그래서 머리에 자루를 쓴 채 교수대에 서있는 사람의 모습은 목격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모습 은 교수형 자체보다 더 무서웠다. 더불어 농담을 나눌 수 있고 악담 을 나눌 수 있던 한 생명체가 무시무시한 익명성 아래에서 예비 시체 로, 뼈와 근육과 살을 가지고 있지만 무정물에 불과한 무엇으로 바뀌 는 모습은 사람들을 전율케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어떤 고집 센 대장장이로 하여금 죽마고우의 뒤통 수를 후려치게 했다. 흉한 모습으로 쓰러지면서 노병 히다 켄은 무수한 갈등을 느꼈다. 물려받은 땅도 없고 장사할 밑천도 없었던,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사지육신 튼튼한 것에 만족하며 적당적당히 체면 깎이지 않을 정도로 살다가 조용히 사라지자는 결심을 내린 젊은이가 아스캄 수비대의 머 릿수를 채워주기로 결심한 이후로 근 30년, 히다는 이토록 큰 무사의 갈등을 느낀 적이 없었다. 뒤돌아서서 저 빌어먹을 악우의 불알을 걷 어차야 하나? 아니면 그냥 쓰러져야 하나? 나는 한 번도 지노피에게 반대한 적이 없었어. 비겁해서 그랬나? 아냐. 귀찮아서 그랬던 거야. 망할 녀석. 오냐오냐 하니까 내가 제 편 들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 럼 굴고 있어. 다른 사람 생각은 눈곱 만큼도 못하는 못된 자식. 나 아니면 누가 그 성질 받아주나.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지. 저 놈은 좋 은 놈이야. 굶주린 곰보다 조금 괜찮다는 의미지만, 어쨌든 좋은 놈 이지.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결국 히다는 어떤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 아니라 머리가 아파서 아무 짓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칼을 놓친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땅에서 쓰린 턱을 들어올렸을 때 히다는 자신의 칼을 주워들다가 놓 치고 다시 주워드느라 비틀거리는 지노피를 보곤 욕설을 퍼붓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망할 놈, 똑바로 하지도 못하면서! 지노피 역시 자신이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임을 자각했다. 사람들 모 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가까스로 칼을 주워들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속도는 형편없이 줄어들었고, 그래서 지노피는 원래 계획처럼 교수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대신 천천히 걸으며 외치기로 했다. "버르, 이 못된 놈의 자식! 곰덫에 자지 치인 사냥개 같은 놈! 당장 그 짓을 그만두지 못해?" 사람들은 그제야 지노피가 오랜 친구와 무슨 어이없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상황에 대해 아직 평가를 내릴 순 없었지만 사람들은 흥분해서 버르 대장을 쳐다보았다. 버르 는 얼굴을 심하게 찡그렸다. "말티 씨. 이건 교수형입니다. 물러나세요. 더 이상 행패를 부리면 봐드릴 수 없습니다." "너야말로 그 장난을 멈추지 않으면 봐주지 않겠다! 도대체 무슨 생 각이야, 사람을 죽이다니! 막둥이 버르가 사람을 죽이다니!" 버르의 부모들도 오래전에 포기한 애칭을 꺼낸 지노피의 행위는 다 분히 전략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친 시도였다. 버르 대장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외쳤다. "멈춰! 이 미친 노인네. 어디서 노망질이야! 이 놈 옆에 나란히 매 달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뜻밖의 반응에 지노피는 주춤했다. 버르는 계속 외쳤다. "병사들! 저 정신 나간 영감을 당장 붙잡아! 칼을 뺏어! 누가 피 보 기 전에!" 병사들은 그제서야 지노피가 들고 있는 칼의 의미를 깨달았다. 누군 가를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 물건이 괴팍한 노인의 손에 들려 있으며, 그 누군가는 바로 그들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병사들은 자기보존본능 에 의거한 분노를 느끼며 칼을 꼬나들었다. '칼을 던져, 이 바보야!' 히다는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좌우를 두 리번거리던 지노피는 오히려 칼을 더 높이 들어올렸다. 히다가 보기 엔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손을 들어올렸고 그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병사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 았다. 그들은 더욱 사나운 기색으로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히다는 그들이 지노피의 몸에 칼자국을 내줄 작정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지노피 또한 느리게나마 사태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히다와 는 정반대였다. "이 새끼들이!" 지노피는 칼을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칼부림보다는 메질에 적합한 모습이었지만 그 기백만큼은 훌륭했다. 칼끝으로 좌우를 번갈 아 겨냥하던 지노피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교수대를 바라보았다. 완고한 대장장이는 교수대를 향해 달렸다. 놀랍게도 왼쪽 무릎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지노피는 유쾌함을 느꼈다. 양쪽에서 병사들이 낭패한 얼굴로 달려오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노피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노피는 버르와 햄의 위치를 재빨리 살폈다. 햄은 자루를 쓴 채 비 틀거리고 있었고 버르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에서 주춤거리다간 다가온 병사들에게 붙잡힐 수 있다고 생각한 지노피는 교수대의 높이를 살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에 차있던 지노피에게 2 미터 쯤 되는 교수대의 높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뛰어오를 수 있다! 끝에 매달려서 단번에 뛰어오르면 돼! 지노피는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확고한 믿음 속에서 지노피는 땅을 박찼다. 중력에 대한 사람들의 천진한 믿음을 비웃으며, 새들에 대한 사람들 의 애수를 무시하며, 지노피의 거대한 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높이, 더욱 더 높이. 버르 대장의 입가에서 침줄기가 영롱하게 반짝 였다. 사람들의 경악한 얼굴에서 허연 각질들이 꽃잎처럼 떨어져내렸 다. 높이, 더욱 더 높이. 지노피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새들의 영토 를 걷고 바람의 호흡을 훔치고……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이르다 하기 어려운 시점에 지노피는 당황하여 자기 발을 내려다보 았다. 그의 발은 교수대 윗부분에서 한참 떨어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당장은 아래로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이없는 상황 에 지노피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왜 허공에 떠있는 거지? 그 때 그의 귓가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얼굴 깨질 뻔했잖아." 고개를 돌린 지노피는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조금 후에야 지노피는 그 것이 어떤 레콘의 얼굴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노피는 그런 각도에 서 레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신체 구조상 불가능하기 때문이 다. 그는 어떤 레콘의 얼굴에서 불과 몇 뼘 밖에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떠있었다. 그 때 지노피의 몸이 아래로 내려갔다. 몇 번 비틀거리다가 똑바로 선 지노피는 그제야 레콘이 허공에서 자신을 붙잡아 교수대 위까지 끌어올려준 것임을 깨달았다. 지노피를 내려놓은 레콘은 햄에게 돌아 섰다. 그 때까지 충격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던 버르 대장이 힘겹게 외쳤다. "이보시오! 뭐 하는 거요?" 레콘은 버르의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큼직한 손가락들을 교묘하게 놀려 햄의 자루를 벗겨낸 레콘은 그를 지노피 쪽으로 툭 밀 었다. 살짝 건드린 것처럼 보였지만 햄은 쓰러질 뻔했고 지노피는 간 신히 그를 붙잡아 부축했다. 레콘이 말했다. "묶은 거 풀어줘."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노피의 손은 벌써 햄의 포박 을 붙잡고 있었다. 손에 대한 그의 편애는 정당한 것인 듯했다. 그 때 버르 대장이 대단한 용기를 보였다.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이건 사형……" 벼락이 쳤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에 눈을 감았던 버르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앞쪽에서 계단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찾던 버르는 계단이 사라진 부분 아래 쪽에서 추악하게 생긴 쇳덩이를 발견했다. 불규칙하게 가시와 칼날 같은 것이 돋아있는 그 쇳덩이는 땅을 몇 센티미터는 파고든 모습이 었고 그 뒤쪽으로는 도개교 들어올릴 때나 쓸 것 같은 쇠사슬이 이어 져 있었다. 레콘은 그 쇠사슬의 반대쪽을 쥐고 있었다. 버르는 그것 이 일종의 유성추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엄청난 크기 때문에 도저 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 때 레콘이 쇠사슬을 훌쩍 잡아당겼다. 쇳덩 이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레콘의 손으로 회수되는 것을 보던 버르 는 그제서야 오줌을 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레콘이 말했다. "시끄럽다." 버르는 뒤로 물러났다. 그 자신의 발로 움직인 것인지, 그렇잖으면 달려온 병사들이 그를 끌어내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버 르는 조금 후 교수대에서 꽤 떨어진 위치에 서있게 되었다. 레콘은 버르에겐 크게 신경쓰지 않은 채 지노피와 햄을 집어들어 차례로 교 수대 아래쪽에 내려주었다.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내려온 레콘은 병사 들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리로 벼락을 쳤다. "이-것-들-은-어-떻-게-할-까-규-리-하-공-?" 맹렬한 계명성에 혼이 나갔던 버르는 잠시 후에야 그 내용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버르는 왜 사람에게 마음 먹었을 때 기절할 수 있 는 능력이 없는 것인지 안타까워 했다. 비록 나랏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규리하의 통치자가 규리하공이라고 불 린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까마득히 먼 저편에서 대답이 들려 왔다. "여-기-서-는-하-장-군-께-서-말-하-는-이-것-들-이-뭔-지-안-보-인 -다-고-합-니-다-!" "그-럼-와-!" 사람들은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리로 폭풍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레콘들이 수백 미터 이상 되는 거리를 두고 '대화를 나누 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옆마을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다름없었고 따라서 사람들에겐 굉장히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 은 두려움에 차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금 후 일대 난동이 벌어졌다. 인파의 저편에서부터 비명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리는 소리와 무엇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뒤섞여 형언키 어려운 소음들이 들려왔다. 그 때까지도 땅에 쓰러져 있던 히다 켄은 그 소란에 넋이 나갔다가 문득 누군가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지노피 말 티의 손이라는 것을 깨달은 히다는 그 손에 의지하여 일어났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지노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랏님이야." "뭐?" "못 들었어? 규리하공이라잖아. 나랏님이야. 나랏님이 오신 거야. 파노가 일을 저지른 거라고! 그 조용한 친구가 언젠가는 세상을 놀라 게 할 줄 내 알고 있었지!" 히다는 지노피에게 평소 파노에 대해 하던 말과 좀 다른 발언 아니 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노피 곁에서 반쯤 죽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햄이 아버지의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고, 무엇보다도 군 중들 속에서 일어나던 소란이 최대로 치닫고 있었기에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히다는 겁먹은 얼굴로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히다는 군중들의 머리 위로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 히다는 아스캄의 건물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느낌 을 받았다. 아니었다. 히다는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비로소 우 렁차게 울리는 일사불란한 발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 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지붕을 흔들고 벽을 춤추게 하는 굉음 인데도. 숙원을 걸머지고 오만하게 걷는 거인들. 수백 명의 레콘들이 그들에 게 다가오고 있었다. 틸러 달비는 맥이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폭정에 시달리는 불쌍한 이들의 구원자였지만 열렬한 환영으로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아스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 두 가까운 집으로 도망쳤거나 도망치는 중이었고 넓은 광장에 서있는 아스캄 사람은 극소수였다. 하지만 정우 규리하는 수백 명이나 되는 레콘들의 출현이 사람들을 두렵게 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레콘 병사들 또한 익숙한 반응이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군대와 무관한 자 들에게 엉겅퀴 여단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본 틸러 달비는 아스캄 사람들에 대한 섭섭함을 잊기로 했다. 물론 노련한 군인의 감각에도 엉겅퀴 여단은 껄끄러운 대상이다. 전 원이 레콘으로 구성된 엉겅퀴 여단에서는 최하위 계급이 수전사다. 이곳에 하루에 보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숫자 이상의 교위나 수교위가 득시글거린다는 것을 떠올린 틸러 달비 부위는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느꼈다. 틸러는 수전사든 장군이든 모든 레콘은 어차피 오만하다는 것을 되새긴 후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파노 긴시테와 햄 긴시테는 주위에 무엇이 있건 아랑곳하 지 않았다. 그 부자는 서로를 끌어안고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우는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팡탄 하장군님?" 팡탄 하장군은 유성추 자루로 어떤 인간의 등을 쿡 찔러 앞으로 나 서게 했다. 그 사람은 히다 켄이었고 그 곁에는 지노피 말티가 히다 를 부축하고 있었다. 팡탄이 말했다. "이 녀석이 아스캄 수비대원이야. 규리하공." "한 명 뿐이에요? 다른 병사들은 어디로 갔지요?" "아까 물었는데 대답 안 했잖아. 그래서 놔뒀어." "그 이것들이라는 것이 병사들이었군요." "맞아. 잡아올까?" 정우는 어쩔까 생각하면서 히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노피가 갑자기 땅에 엎드렸다. "나랏님 만세! 만세! 이 놈은 아닙니다. 이 친구는 히다 켄이고 제 친구입니다. 아, 그리고 저는 지노피 말티라고 합니다. 우리는 햄 긴 시테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이 친구야, 무릎을 꿇어!" 지노피는 히다의 허리춤을 확 잡아챘고 히다는 하마터면 땅에 코를 부딪힐 뻔했다. 정우는 오른쪽 뺨을 손으로 받친 채 팡탄을 올려다보 았다. 팡탄 하장군은 부리를 슬쩍 부딪혔다. "맞아. 구하려고 했어. 교수대에 박치기를 해서 그걸 무너뜨리려고 하더군." 정우는 고개를 갸웃했고 지노피는 못마땅한 소리를 내었다. 몇 마디 설명이 더 오간 후에야 정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정 우는 환하게 웃으며 지노피와 히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양손으로 지 노피와 히다의 손을 하나씩 붙잡은 정우는 호의 가득한 표정으로 말 했다. "와, 정말 용감하세요! 레콘도 아닌데."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지노피와 히다는 앞에 있는 소녀가 정 말 나랏님이 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들은 존 귀한 나랏님이 자신들을 이렇게 스스럼 없이 대할 수 있다고 여기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의 명령을 따르는 것 같은 수백 명이나 되는 레콘들은? 상식이 온갖 방향으로 공격당하는 것을 느끼며 지노피와 히다는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말수를 줄이기로 했다. 정우는 두 사람이 갑자기 과묵해진 것이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 문이라 여기고는 팡탄 하장군에게 말했다. "그럼 골케 남작한테 가죠. 병사들도 거기 있겠지요?" "뭐 그렇겠지. 이봐. 수비대원. 안내해." 히다는 골케 남작의 성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히다는 그것으로 안내를 마치고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레콘들이 곧 움직였기에 물러가고 싶다고 말할 기회를 놓쳤다. 어쩔 수 없이 히다는 그들과 함께 걸었다. 그에게 좀 위안이 된 것은 지노피 또한 물러가지 않고 함께 걸어준다는 사실이었다. 지노피는 일부러 찾아와서라도 구경할 모습이니 물러가라는 말을 듣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 리고 파노 노인과 햄 또한 남작에게 억류되어 있는 새댁을 되찾기 위 해 동행했다. 자연스럽게 레콘이 아닌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인간인 틸러 달비를 발견한 지노피는 그에게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었다. 그는 틸 러에게 도대체 왜 나랏님의 언동이 저렇게 이상한 것인지 묻고 싶었 다. 하지만 바로 곁에 정우가 걷고 있기에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 그 때 히다가 갑작스럽게 외쳤다. "즈믄누리에 계신 공녀님!" 지노피는 기겁하여 히다를 돌아보았다. 히다는 열정적인 얼굴로 정 우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떠올리다니, 세상에! 즈믄누리에 계신다는 공녀님이 맞지요? 규리하로 돌아오셨군요!" 정우는 방글방글 웃다가 결국 틸러를 돌아보았다. "제가 공녀예요?" "그렇긴 합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하지만 거기에는 규리하공의 영 애라는 뜻밖에 없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규리하공의 호칭을 사용하실 수 있는 장녀이시니 적절하지는 않군요." "하지만 제가 아버지의 딸인 것은 맞잖아요. 그래서 속상하기도 하 지만 어쨌든 그건 사실이에요. 공녀가 훨씬 짧은데요. 당신도 규리하 공 아가씨 같은 긴 호칭 대신 그걸 쓰는 것이 어때요?" "말씀드렸듯이 공녀님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럼 각하는?" 여유있게 대답하던 틸러의 입이 갑자기 다물어졌다. 히다와 지노피, 그리고 파노와 햄은 갑작스러운 침묵에 주눅들어 두 사람을 훔쳐보았 다. 틸러가 조용하게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뇨. 하지만 왜 짧은 말을 놔두고 긴 말을 쓰는 건지 궁금했어 요." 정우가 즉흥적으로 떠올린 의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틸러는 사 실대로 말해야 함을 직감했다. "죄송합니다. 각하의 지위가 제겐 명실상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 기 때문이었습니다." 틸러의 예상대로 정우는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정우는 소 외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밝게 말했다. "그래요. 제가 그 공녀예요. 태어나자마자 규리하를 떠났는데 제 이 야기를 아실 줄은 몰랐군요." 낯선 이와 억지로 어울려야 하는 사람이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발견 하면 흔히 그러듯이 히다는 매우 기뻐하며 정우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몹시 궁금해하는 지노피와 햄, 파노 등을 위해 히다가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그것이 애석한 오해임이 밝혀졌 다. 정우는 자신의 탄생이 규리하 변경백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예언 을 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히다의 이야기, 즉 변경백이 차마 딸을 죽일 수 없어 대신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 궁인 즈믄누리로 그 딸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정우를 그만 매료시켰 다. 다른 도깨비와 마찬가지로 정우는 즈믄누리를 미궁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고, 따라서 그것은 꽤 앞뒤가 맞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정우는 그것이 어이 없는 허구임 에도 불구하고 히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결국 예언이 이루어져 변 경백은 멸망했으니 그것이 바로 풍문으로 전해듣던 이번 전쟁이라는 히다의 설명은 정우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다. 히다는 억울하게 갇혀있던 그 공녀가 마침내 규리하로 돌아와 선정을 펼치게 되었으며, 우리의 못된 남작을 처벌하는 것은 약속된 선정의 첫걸음 이라는 해석으로 끝을 맺었다. 그래서 정우는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 이야기를 실컷 즐긴 다음에 그것이 헛소문이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 다. 되도록 히다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애쓰며 조심스럽게 이야기의 잘못된 부분들을 수정하는 정우를 보며 틸러 달비는 상념에 잠겼다. 틸러 달비에게 정우는 자신이 감당할 수도 없는 상황에 빠져 동생의 칼에 목숨을 잃을 뻔한 무력한 여인으로 나타났다. 도깨비들 사이에 서 자라난 정우에게서 틸러는 인간 귀족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교 활함이나 사람을 압도하는 오만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정우의 처지가 유쾌한 것은 아니었고, 그래서 틸러는 정우에게 상냥하려고 애썼으며 실제로 그러했지만, 상냥함의 이면에는 간혹 거론키 어려운 오만한 감정이 숨어있는 법이다. '상냥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모든 사람이 서로를 깔보는 마을이라고 말했던 것이 가이너 카쉬냅이었던가, 라수 규리하였던가?' 틸러는 얕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친절할 수 있는 사 람에 대해 말하는 그 경구가 좀 극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정 우를 존경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각하는?'이라고 물었다. 틸러 달비는 진짜 상냥함을 발휘한 사람이 누구인지 의심스러웠다.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대신 규리하공 아가씨 같은 이상한 호칭을 쓰는 방식으로 당신이 전쟁 포로인지 변경백령의 정통 계승자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사람을 가만히 참아준 사람은 누구인가. 도깨비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오만함 없는 상냥함을 참을성 있게 보인 사람은 누구인가. '당신을 진작 각하라 불렀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그 때 아스캄 사람들과 수다를 떨던 정우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 다. "아, 참. 틸러? 긴 말 쓰세요." 틸러는 눈을 조금 크게 뜬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가 말했다. "당신이 괜찮다면 앞으로도 규리하공 아가씨라고 불러요. 어쩐지 특 별한 느낌이 나니까 좋아요. 물론 여러분들이 공녀라고 부르시는 것 도 좋아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얼마나 딱딱하게 서로를 부르는지 아세요? 정우라고 불린지 너무 오래 되어서 제가 정우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어요. 정우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하니까 바로 들어주신 분 은 대장군님 뿐인데, 아, 미안해요. 정우는 즈믄누리의 도깨비들이 붙여준 이름이에요. 정우 규리하. 도깨비들이 고향 이름을 쓴다는 것 은 아시죠? 예. 맞아요. 바우 머리돌은 머리돌에서 태어난 바우, 비 형 스라블은 스라블에서 태어난 비형이라는 식이죠. 그렇죠! 지노피. 저는 고향 이름과 실제 성이 같았던 거예요. 도깨비 식으로는 규리하 에서 태어난 정우니까 정우 규리하. 킴 식으로는 규리하 가문에서 태 어난 정우니까 역시 정우 규리하. 기막히죠?" 잠깐 틸러에게 향했던 정우의 주의가 다시 아스캄 사람들에게 옮겨 갔다. 하지만 정우의 말은 틸러에게 오래도록 남았다. 남작의 성이 가까워졌다. 언덕 위쪽에 있는 성을 대충 훑어본 틸러는 어렵잖게 성이 전투 준 비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루 위 에는 창검의 빛이 번득였다. 골케 남작은 아스캄에 어떤 자들이 나타 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해들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반응은 무모한 것이었다. 틸러는 그 자신이 참가했던 전투에서 오뢰사수의 다섯 레콘의 공격 앞에 규리하성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똑똑히 목격 했다. 또한 아스캄으로 오면서 엉겅퀴 여단의 공격 앞에 케나린 요새 가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해서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남작의 성은, 물론 성이라는 이름에 못미치는 건물은 아니었지만, 규리하성이나 케 나린 요새에 비한다면 좀 튼튼한 집에 불과한 것이었다. 성의 분위기 를 보던 정우가 콧잔등을 긁적거렸다. "틸러. 골케 남작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맞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틸러는 잠깐 고민한 다음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정우는 방긋 웃으며 신뢰감 담긴 눈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우는 다시 골케 남작의 성을 쳐다보았다. "남작도 정말 용감하군요. 아스캄 사람들은 다 용감한 건가요? 진짜 이 많은 레콘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틸러는 팡탄 하장군을 흘끔 쳐다보고 말했다. "제 생각엔 엉겅퀴 세 송이면 골케 남작의 착오를 바로잡아줄 수 있 습니다." "세 송이? 세 명이오?" "예. 싸울 사람 한 명, 그리고 그 사람이 너무 흥분했을 경우 말릴 사람 두 명입니다." 정우와 아스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틸러를 바라보았지만 팡탄 하 장군은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자 팡탄은 설명했다. "맞아. 300 명이나 끌고 왔는데 저런 새둥지라니. 대장군이 호들갑 떠는 성격은 아닌데, 그렇다면 우리를 출동시킨 건 여기 있는 녀석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규리하공 너를 잘 보호하라는 뜻이었나 보군. 너 중요한가 보지?" 정우는 자신이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얼핏 틸러를 돌아보았다. 틸러는 그렇게 말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팡탄 하장군은 같잖은 적 때문에 화가 나 있습니다. 자기가 중요한 사람 때문에 움 직였다고 믿게 하세요. "글쎄요. 부담스럽게도 대장군님은 그렇게 여기시나 봐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할 거야." 팡탄은 만족했고 틸러도 만족했다. 그리고 조금 후 틸러는 자신의 눈짓이 좀 과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정우가 꺼낸 충격적 인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삼백 분이 오신 것은 잘됐어요. 여러분 모두가 필요할 것 같으니까." 불과 얼마 전 정우를 무시한 자신에 대해 질책을 보냈던 것을 잊고, 틸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정우를 노려보았다. 그는 정우에게 레 콘 300 명이 일으키는 파괴력이 어떤 건지 짐작한다고 믿는다면 큰 오산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단지 그들에게 헛수고했다는 기분을 느끼 게 하기 싫어서 그런 파괴력을 해방하는 것은 더없이 무책임한 일이 라고도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틸러는 그러지 못했다. 거대한 레콘이 파괴 본능에 눈을 빛내며 상체를 확 숙이는 것은 침묵의 충분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다 필요하다고 했나?" 정우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천진한 미소를 본 틸러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소름이 좍 돋는 것을 느꼈다. 도깨비는 상냥하 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선민종족들과 공유하기 힘든 견해를 가지 고 있다. 어쨌든 그들은 가족이 죽었을 경우 그 죽음에 대해 다른 사 람도 아닌 사망자 자신과 담소할 수 있는 자들이다. 물론 피에 대한 비가역적인 거부감 때문에 도깨비들 사이에서 무차별 살인광이 나타 날 수는 없다. 하지만 틸러는 정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 었다. '저는 괜찮아요. 매달 보니까.' 이미 알고 있었지만 조합해볼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정보들을 서로 맞춰본 틸러는 눈앞에 있는 여인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지 깨달았다. 죽음을 대수롭잖게 여기고 피를 두려워하지도 않는 자. 자신에게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용감하다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타인 에게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괴물이라고 불린다. 틸러는 정우의 얼굴 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우가 싱긋 웃었을 때 틸러는 오싹함을 느꼈 다. 그 후 16 시간 동안 아스캄의 지배자 골케 남작은 페시론 섬에 떨어 진 기분을 느꼈다. 기괴하고 무서운 밤이었다. 사람들이 대지의 그 지점을 아스캄이라 부르기로 합의한 이래 그런 밤은 한 번도 없었다. 아스캄의 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키우 는 가축, 아니 아스캄에 있는 생명체 중 그 어떤 것도 그 날 밤 잠을 잘 수 없었다. 밤이 살해당하며 내지르는 비명 같은 굉음 때문이었 다. 모든 폭풍이 아스캄에 모여 회동을 가진 것 같았다. 수십 킬로미터 바깥에서도 세상의 구조가 바뀌는 것 같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그러나 불빛은 없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며 깨어있어야 했던 사람들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방화는 인간의 폭력이다. 불을 자유로 이 다루는 도깨비는 비폭력적이고 나가들은 나무를 태우는 일에 질색 한다. 그리고 아스캄에 닥친 전대미문의 밤을 지배하는 레콘은 불을 지르는 일을 째째하다고 여기는 종족이다. 그들은 가지고 태어난 몸 과 최후의 대장간에서 받은 무기로 직접 부딪치는 쪽을 훨씬 선호한 다. 그 때문에 엉겅퀴 여단의 레콘 병사들이 저지른 일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 찾아왔을 때였다. 틸러는 정신을 질식시키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 각하는 것은 그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틸러는 멍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스캄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 었다. 어린애는 하나도 없었고 다섯 명 이하의 무리도 없었다. 이곳 이 바로 그들에게 익숙한 고향임을 떠올린 틸러는 갑자기 그들이 어 떤 느낌을 받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물어본다 해서 대답을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래 서 틸러는 그 스스로 자신의 인상을 정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돌아보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정우가 레콘들에게 남작의 병사들을 주살하라고 명령했다면, 그 성벽을 부수고 그 기둥을 꺾고 그 대들보를 모조리 주춧돌 아래로 쑤셔넣으라고 명령했다면 틸러는 분노와 슬픔 속에서 그 행위를 평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골케 남작의 성이 지난밤에 당한 일 은…… "실례합니다. 장군님." 틸러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의 행동을 후 회했다. 틸러의 다급한 동작에 놀라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대단히 늙은 인간 노인이었다. 노인의 등 뒤로 꽤 먼 곳에는 사람들 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틸러는 노인이 사람들을 대신해서 자신 에게 온 것임을 곧 깨달았다. 틸러는 부드럽게 말했다. "놀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영감님. 저는 장군이 아니라 부위입니 다. 장군이 돌리면 열심히 도는 부위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아, 예. 그러신가요? 바쁘시지 않으시다면 여쭐 것이 있어서요. 부 위님." "말씀하세요." "저, 도대체 남작님의 성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리고 저건, 저건 도대체 뭐죠?" 틸러는 쓴웃음을 지었다. "영감님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예?" "영감님. 믿기 싫으시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시잖습니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지요. 그렇잖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틸러의 타이르는 듯한 어조 에 대한 반사적인 동작일 뿐 그 때까지 노인은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노인의 머릿속에 어떤 단어가 떠올랐다. '생 매장' 노인은 왜 그런 끔찍한 단어가 떠올랐는지 의아해하다가, 마침 내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은 황급히 숨을 들이마셨 다. 사레가 들렸는지 몇 번 기침을 한 노인은 많이 낮아진 음정으로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말로…… 정말 저 아래에…… 그러니까…… 생매장한 겁니까!" 틸러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노 인이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예. 여러분의 나랏님께서 골케 남작을 벌하기 위해 그의 성을 묻었 습니다." 노인은 틸러가 배가 고파서 하늘치를 구워먹었다고 말한 것 같은 표 정을 지어보였다. 틸러 자신도 스스로의 말에서 비슷한 인상을 받았 다.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틸러는 고개를 돌렸고, 원하던 것 을 얻게 되었다. 틸러는 맥없이 생각했다. '그럼 저건 성무덤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 안에 성이 묻혀있는 흙더미라면 성무덤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골케 남작의 성이 있던 언덕에는 지금 성보다 조금 큰 규모의 흙더 미가 쌓여 있었다. 정우의 명령에 따라 팡탄 하장군과 300명의 레콘 들은 16 시간만에 성을 깨끗이 묻어버린 것이다. 그 말도 되지 않는 짓을 위해 언덕 뒤편에 있던 산의 형태가 일부 변경되었다. 앞으로 모든 역사가들이 특기하고 모든 호사가들이 찾아와 구경할 위업을 달성한 영웅들은 지금 노동 후의 나른한 피로 속에 드러누워 있거나,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있거나, 땅바닥에 앉은 채 옆사람 과 담소하고 있었다. 간혹 웃음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언 덕 아래쪽의 그들은 틸러와는 다른 계절, 좀 더 느긋한 계절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틸러는 그들이 왜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흥분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엉겅퀴 여단 1대대의 병사들 은 상대의 짜증나는 장광설을 묵묵히 들어주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옛날에 성 하나를 묻었지'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레콘들은 옛친구와 함께 이야기할 추억거리를 하나 만들었다는 기쁨 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틸러의 의문을 풀어준 것은 두어 시간 후 깨어난 정우였다. 한밤의 대역사가 종료되어 비로소 고요함이 찾아들었을 때 정우는 어떤 교위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교위는 자신의 배낭을 비운 다음 그 안에 나무 막대기를 세워 간단한 천막을 만들었다. 몸에 난 풍성한 깃털 때문에 레콘들은 천막은커녕 모포도 제대로 가지고 다니지 않지 만 그 배낭 천막은 정우의 체구에 알맞았다. 정우는 두 번 생각하지 도 않고 그 안에 기어들어가 잠들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틸러 는 도깨비들이 잘 자는 것을 높은 덕의 증거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틸러가 보기엔 저런 일을 저질러놓고도 태평한 레콘 이나 그런 충격적인 풍경 앞에서 태연히 잠드는 정우나 똑같이 이해 불가능한 자들이었다. 두 명의 레콘 병사들이 지키던 배낭에서 정우가 눈을 비비며 걸어나 왔을 때 틸러는 자신의 표정이 지나치게 의문스럽지 않기만을 바랐 다. 주위의 레콘들 중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할 리는 없기에 틸러는 정 우에게 씻을 곳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정우는 고마워하며 그를 따라나섰다. 그것은 조금 위험한 광경이었다. 정우는 두 손으로 얼굴 을 가린 채 걷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틸러는 장님을 인도하는 기분 을 느껴야 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불로 깨끗이 씻는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란 여자 가 지저분하게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이해하겠죠?" "이해합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틸러가 미리 수배해둔 집으로 걸어가며 레콘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 왔다. 정우는 레콘들이 흥분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것이 저 분들의 숙원이었다면 저 분들도 스스로에게 자랑스럽겠 지요. 하지만 아니잖아요?" "스스로에게 자랑스럽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 할 일은 충분히 되잖습니까." 정우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얼굴을 가린 채 그렇게 했기 때문에 몇 걸음 비틀거려야 했다. 간신히 중심을 회복한 정우는 고집스럽게 손을 얼굴에 붙인 채 말했다. "비형 어르신께서 승천한 티나한에 대해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나 네요. 티나한은 하늘치에 오르고 싶어했지만 다른 사람보다 먼저 올 라가려고 애쓰지는 않았대요. 결국 가장 먼저 하늘치에 오른 사람은 잘 알다시피 막타드 신뷰레와 킬소 펜, 주키 네미……" "그리고 참관하러 갔다가 반강제로 올라가게 된 오레놀 선사였지요. 그리고 티나한은 그 사실에 대해 유감스러워하지 않았고요. 저도 레 콘이 자기 숙원을 다른 사람이 먼저 이루는 일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요?" "레콘들이 다른 사람이 이룬 일에 관심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성을 파묻었다 해도 재미있어 하겠지만 부러워 하거나 약올라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다른 레콘들이 그럴 것을 아는데 저 분들이 왜 자랑하겠어 요?" 틸러는 아버지를 동정했다. 멍청한 아들을 두셨으니까. 정우의 말이 옳았다. 레콘은 개인주의자다. 그들이 뭔가를 자랑한다면 그 대상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감동시키 기 위해 레콘들은 숙원에 도전한다. 정우의 세면은 틸러의 기대대로 굉장한 것이었다. 틸러는 정우의 세 면법에서 도깨비불로 씻기에 물로 씻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도 깨비들이 어린 그녀에게 경쟁적으로 건넸을 기상천외한 조언의 흔적 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그나마도 아이저 규리하가 파견한 교사 가 많이 교정시켜준 것이라니 틸러는 보다 어린 시절의 정우를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세면을 마친 정우를 다시 언덕으로 안내하면서 틸러는 자신이 레콘이 아닌 것에 감사했다. 굉장한 것을 보았노라고 자랑할 수 있으니까. 땅에 앉아있던 골케 남작은 넋이 빠진 얼굴로 자신의 주군을 올려다 보았다. 골케 남작과 그의 가솔들, 그리고 성을 지키던 아스캄 수비대원들이 성을 뛰쳐나온 것은 성의 1층 부분이 반쯤 묻혔을 때였다. 뛰쳐나가 야 한다는 기분을 느꼈던 것은 훨씬 이른 시점이었지만 성 안의 사람 들은 자신들이 겪는 일이 장난이나 거짓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 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상식이 포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바깥의 레콘들이 정말로 성을 묻어버릴 작정이라는 확신이 모든 사람을 덮쳤을 때 그들은 어떤 전 망이나 계획도 없이 동시에 성을 뛰쳐나왔다. 따라서 체포는 간단했 다. 엉겅퀴 여단의 병사들은 방을 치우는 정도의 노고만으로 그들을 한 자리에 말끔하게 정리해둘 수 있었다. 밤새도록 땅에 앉아있어야 했지만 그들 중 300 명의 레콘을 뚫고 탈주할 수 있다는 과대 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골케 남작은 원망을 하거나 분노를 터뜨릴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얼 굴로 정우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정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틸러에 게 물었다. "아스캄의 등기소장은 어느 분이지요?" "어젯밤에 말을 타고 도망쳤습니다." "어머? 왜 말을 타고 도망친 거죠? 좀 느리더라도 당연히 강을 따라 도망쳐야 할 텐데." "일반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구헬 협곡 때문에 상류로는 갈 수 없고 하류로 도망친다면 중간에 배에서 내려야 합니다. 스지우나 데 린보트로 가려면……" 문득 틸러는 정우가 규리하의 지리에 대해 모 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조 금 전 네 명의 병사가 붙잡으러 갔으니 늦어도 저녁까지는 잡아올 겁 니다." "그렇군요. 파노 영감님의 자부는 어느 분이죠?" "그 여인은 집으로 보냈습니다. 몸이 상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 고 초가 심해서 빨리 쉬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나랏님이 깨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꼭 인사를 하겠다고, 그리고 남작의 따귀를 한 대 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을 겨우 돌려보냈지 요. 파노와 그 아들은 그녀를 집에 데려다놓자마자 돌아오겠다고 했 습니다." "그런가요? 잘하셨어요. 틸러." 주위의 레콘들이 조금씩 이쪽을 향해 몸을 움직이거나 고개를 돌렸 다. 레콘들의 모습에 질려 감히 다가오지는 못하지만 아스캄의 사람 들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신경을 곤두세운 채 바라보고 있었다. 정우가 말했다. "도깨비들은 저를 정우라고 부르지요. 킴 식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변경백 아이저 규리하의 딸 비셀스입니다." 골케 남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우는 두 손을 모아 배 앞에 붙였다. "보시는 것처럼 남작님의 집이 사라졌어요. 그러니 이젠 아스캄 사 람들의 집에서 사세요." 틸러는 흠칫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작이나 그의 병사가 무슨 짓을 하는지 빈틈없이 바라보던 팡탄 하장군도 벼슬을 약간 꿈틀하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남작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뭐……?" "아스캄 사람들의 집에서 살라고 했어요.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지 는 마세요. 폐가 되니까. 사흘 넘게 한 집에 머무시면 안돼요. 물론 어떤 아스캄 사람들도 남작님을 머물지 못하게 해선 안돼요. 같은 음 식을 먹고 같은 잠자리에서 자며 사흘 동안은 머물게 해줘야 해요." 골케 남작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왜……?" "열심히 일해서 남작님을 먹이고 입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잘 모르시 는 것 같으니 알게 해드리려는 거예요. 그렇게 직접적으로 가르쳐드 려도 모른다면 남작님은 바보겠지요. 스스로와 아스캄을 위해 바보가 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바보가 아스캄을 지배할 수는 없으니 까." 남작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골케 남작은 처음으로 완전한 문장을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규리하공?" "남작님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아스캄의 통치자예요." "제가 아스캄의 통치자라고요? 제가요?" "그래요. 아스캄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고 잠자리를 제공받고, 그 대신 아스캄을 통치하세요. 다음에 돌아와서 남작님이 잘하고 계신다 면 저 성을 도로 파내드리지요. 만일 보수가 어려울 정도로 망가졌다 면 다른 성을 짓도록 도와드리고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남작님에 게서 다른 것을 뺏겠어요." 대취한 레콘이 골케 남작의 목을 술병으로 착각하고 꽉 움켜쥔 것처 럼 골케 남작의 얼굴이 하얗게 바뀌었다. "다른 것? 다른 것이오?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스캄에 대한 통치권 외에는 모든 것이 대상이 될 수 있겠지요. 통치권만큼은 끝까지 남아있을 거예요. 남작 님은 계속해서 아스캄을 통치해야 하니까. 통치에 필요하지 않은 것 이라면 무엇이든 묻을 수 있겠지요." 틸러는 그 무엇이든이라는 말이 정말 무서우면서도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성채 한 기를 통째로 묻었는데 무엇이든 못 묻겠는가. 아 스캄 수비대원들은 다음에 묻힐 것이 남작의 군대가 되고 말거라는 확신 속에 영을 흘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골케 남작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는 골케 남작에게 정우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잘해보세요. 팡탄 하장군님?" 정우의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팡탄 하장군은 갑작스러운 호출에 놀라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 말을 다시 외쳐주시겠어요? 다른 분들도 알아야 하 니까." 팡탄 하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세 배 로 늘어날 때까지 몸을 부풀렸던 팡탄은 곧 계명성을 뿜어내었다. 아스캄의 모든 사람들에게 정우의 선고가 울려펴지기 시작했다. 그 녀 자신의 선고였지만 정우는 주저없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틸러 는 꽤나 실용적인 태도라고 생각했지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정우를 방해할 수밖에 없었다. 틸러가 자신의 입을 가리키는 것을 본 정우는 조금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오른쪽 귀를 막은 손을 뗐다. 그 리고 그 귀를 틸러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틸러는 손나팔을 만들고 외쳤다. "규리하공 아가씨! 그러면 안된다고 가르쳐주고! 앞으로 안 그러겠 다는 약속을 받겠다고 하신 건! 이런 뜻이셨습니까?" 그리고 틸러는 자신의 귀를 정우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정우 또한 손나팔을 만들었다. "네! 남작님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알려드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출발하실 땐! 호위자가 레콘 300 명이라는 것! 모르셨잖습 니까?" "예! 몰랐어요! 갑자기 출발했으니까! 그런데요?" "그러면 그 때는! 무슨 방법을 쓰실 생각이셨습니까?" "아무 생각 없었는데요? 남작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데! 그 분을 어떻게 이해시킬지! 미리 알 수 있었겠어요!" 틸러는 곧 대답하려다가 잠깐 멈추고는 고함을 지르느라 새빨개진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을 이 해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우는 이곳에 와서 남작을 보았고 그가 성에 기대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한 것을 확인한 다음 그에게 서 성을 제거했다. 할 일이 없어진 레콘 300 명이 때마침 가까이 있 었으니. 정우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틸러는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채 수습하지 못한 미소를 입가에 묻힌 채 틸러는 손나팔로 외쳤다. "그게 누구라도! 그 사람을 알면! 그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믿 으세요?" 정우는 틸러가 왜 웃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진 도깨비들이 흔 히 그렇듯 정우는 상대가 웃으니 덩달아 웃으며 외쳤다. 바로 그 때 팡탄의 계명성이 끝났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요 속에 정우 의 외침이 크게 울렸다. "믿고 싶어요!" =============================================================== 챕터 끝났습니다. 믿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뻔뻔하게 돌아온 다음 챕터 예고 : 마침내 블루워터는 혼돈을 향해 달리던 왕자에게 전달된다. 왕자는 스머프를 소환하기 위해 푸르게 빛나는 블루워터를 높이 들어올린다. 그러나 사실 블루워터는 모든 컴퓨터에 블루스크린을 뜨게 하는 금단 의 아티팩트. 철이는 치바에서 온 카우보이와 함께 전뇌공간에 봉인 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자는 혼돈이 된 전뇌공간에 새로 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스머프들과 함께 패턴을 재조립한다. 그러 나 3.3.5 조로 이루어진 스머프의 노동요에 익숙하지 못했던 왕자가 그려버린 패턴은 마법진 구루구루. 구루구루가 발동되자 괜히 벼락이 치고 쓸데없이 쓰레기가 날아다니 다가 미래로 떠났던 안드로이드가 소환된다. 마스터로 선택한 사람과 강제로 헤어진 안드로이드는 분노하여 다리를 떨기 시작한다. 진동하 는 다리로 대지의 기운을 빨아들인 안드로이드는 전신의 에너지를 고 간에 집중시킨다. 마침내 발사되는 중화 대캐논! 그 가공할 에너지가 화성에 도달한 순간 외계인이 남겨둔 공기제조 시스템이 작동하며 화 성의 붉은 하늘이 푸르게 변한다. 그 광경을 보던 안드로이드가 중얼 거린다. '아주 가끔,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 그 때 함께 비명을 지 를 동료를 찾아 하늘을 날던 폭주갈매기가 중화 대캐논의 번뜩임을 보고 외친다. '거기냐!' 드디어 조우하게 된 흡혈안드로이드와 폭주 갈매기. 그러나 그들은 세 번째 동료인 철이가 전뇌공간에 갇혀 있다 는 것을 알게 된다. 전뇌공간에 갇힌 철이를 구출하려면 자신의 영혼 을 에뮬레이트해서 전뇌공간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는데… 다음 챕 터 '영혼의 에뮬레이터' 많이 기대해주세요. 이 혼란상을 두드리고 있는 타자의 정신상태는? 니름권 행사. 아, 참. 오탈자 알려주신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사정상 답장을 쓰지 못하는 것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같은 것을 많은 분이 지적하시거나 하면 타자는 곤혹스러워지거든요. 어느 분께는 쓰고 어느 분께는 안 쓸 수가 없어서 그냥 전부 안 씁니 다.(예. 여러분께서는 편의주의를 핑계 삼아 무례를 자행하는 작태를 보고 계십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5. 깨어난 불씨 - 1 "……아마도 이런 오해에는 레콘에 대한 비스그라쥬백의 잘못된 선입견 또한 작용한 바가 클 것이다. 나는 비스그 라쥬백 데라시의 무지몽매함에 유감스러워하며 다음과 같 이 그의 주장을 논박한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첫번째 실수는 아무런 논리적 근 거 없이 타이모의 최종 목표와 자신의 최종 목표가 동일한 것이라 단정한 것이다. 타이모가 원한 것은 비스그라쥬백 이 그러리라 믿는 것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다. 백작이 타이모의 철학을 일부라도 이해했다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염수의 비유는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타이모의 목표를 잘 차려진 요리상에 비유하고 싶다. 타이모가 원한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도깨비가 도깨비답게, 그리고 레콘 이 레콘답게 행동하면서 그 모든 행위가 조화를 이루는 제 국이다. 절대로 비스그라쥬백이 상상하는 것처럼 모든 것 을 한데 뒤섞어버려 뭐가 뭔지도 모르게 되는 잡탕 찌개 같은 것이 아니다. 보다 적은 단계를 지향하는 것이 공리 라고 말하는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요리사에게 하나의 솥 에 모든 음식 재료를 집어넣고 한꺼번에 요리하라고 조언 할 사람이다. 그를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나가이며, 그가 태어나 자란 사회에는 요리사가 없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두번째 주장을 보자. 지배권은 지 배자가 아닌 피지배자들에게서 나온다는 그의 분석에는 이 의가 없다. 피지배자의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동의 없이 는 어떤 자도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없다. 그런데 비스 그라쥬백 데라시는, 고의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능동적 동의만을 전제하고 있다. 비스그라쥬백은 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한두 명의 레콘은 존재할 수도 있지만 피지배 자가 되길 원하는 절대다수의 레콘 집단을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타이모를 비웃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동의에는 능동적인 동의뿐 만 아니라 수동적인 동의도 있다. 레콘이 왜 수동적인 동 의를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능동적이라는 말의 예로서 부 족함이 없는 레콘들도 자신의 숙원에 관계된 일이 아니라 면 얼마든지 수동적일 수 있으며, 실제로 현재 레콘들은 치천제의 지배권을 수동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만약 비스 그라쥬백 데라시가 능동적인 동의만을 동의로 인정하겠다 면, 나는 그에게 충성 서약에 대한 치천제의 반감을 설명 해보라고 말하겠다. 충성 서약이야말로 황제의 지배권에 대한 영주들의 능동적인 동의 수단이다. 하지만 치천제는 그런 능동적 동의를 부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수동적인 동 의만을 요구하고 있다. 셋째……" - 쥐딤 선언문 中 일부. 쥐딤 선언문에 따르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강연이 있은 날로부터 닷새 뒤 쥐딤 대학 출판부는 지멘과 아실의 방문 을 받게 되었다. 책상 하나와 지필묵을 요구한 아실은 한 시간 만에 선언문을 써버렸고 지멘은 출판부원들에게 정중 히 인쇄를 요청했다. 이틀 뒤 제국군이 쥐딤 대학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오천 매 가량의 선언문이 인쇄되었다. 지멘 과 아실은 두툼한 선언문 묶음과 함께 사라졌고 이후 제국 곳곳에서 쥐딤 선언문이 발견되었다. 덧붙여 말한다면, 쥐 딤 대학장은 쥐딤 선언문이라는 이름의 원인이 된 '쥐딤 대학 출판부의 도움으로 인쇄되었음'이라는 문구를 빼지 못한 출판부원들에게 어떤 견책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지멘의 정중한 요청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 문이다. "아직도 따라오고 있네요. 이젠 숨지도 않아요." 지멘은 아실의 말에 대해 약간의 우려를 느꼈다. 그 내용 때문에 그 런 것은 아니다. 아실이 추격자를 보고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배낭에 서 머리를 내밀고 있다는 뜻이다. 지멘은 이 혹독한 추위가 인간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아실이 다시 말했다. "돈이 없다면 야외 생활하는 재주라도 좋아야 할 텐데. 혹시 쫄쫄 굶고 있는 것 아닐까?" 아실의 말투는 염려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고소하다는 기색이었다. 지 멘은 어찌 할까 하다가 몸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면 추격자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도 있고 또 더이상 추격자를 볼 수 없게 된 아실이 배 낭 속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멘은 몸을 돌려 그가 걸어왔 던 빙원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최북단 지역 라호친에서도 다시 북쪽으로 며 칠을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이 땅의 나이는 한 살. 한 번도 봄이나 여름, 가을을 겪지 못했으니까. 이 늙은 신생아는 연륜 깊은 화가와 이제 막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미술학도가 비슷한 수준의 초상화를 내놓을 수 있을 법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하 얀 도깨비지만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은 지독하게 하얀 풍경. 지멘은 그 백색의 세계 속에 움직이는 하나의 점을 바라보았다. 발케네에 들어선지 이틀이 되었을 때 지멘과 아실은 그 점을 발견했 다. 그리고 또 이틀이 지났을 때 지멘과 아실은 그것이 누구인지에 대해 이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나나본과 발케네의 경계선 에서 그들을 괴롭혔던 뭄토였다. 그 순간부터 아실은 지멘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지멘은 아실이 유념해둘 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지멘은 추적자의 존재가 확인된 이후부터 추적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 동했다. 아실은 뭄토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지멘의 무관심은 마 음에 걸렸다. 발케네로 입국하기 전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지 멘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듯했다. 지멘이 그녀에게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실은 그 변화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 실은 지멘의 변화와 뭄토에 대한 무관심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아실은 추적자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말들을 지멘에게 건넸다.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지 멘이 단 한 번 반응을 보인 것은 하루 전의 일이었다. 최후의 대장간까지 하루를 남겨둔 시점에서, 아실은 최후의 대장간 에 무기를 받으러 온 젊은 레콘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넸다. 하지만 지멘은 누구나 다 아는 그 사실이 어쨌냐는 눈으로 아실을 쳐다볼 뿐 이었다. 아실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물론 뭄토는 최후의 대장간에 있는 젊은이들을 규합해서 우리에게 덤비려고 시도할 수 있어요. 그곳에 있는 젊은 레콘들은 무기를 받은 다음 숙원사업에 뛰어들거나 신부탐색에 도전할 테니 돈이 필요할 거 예요. 그렇잖아요? 뭄토는 그런 계획 때문에 다른 곳에서 일 벌이지 않고 여기까지 그냥 따라온 것인지도 몰라요." 지멘은 팔짱을 끼고는 아실의 지적에 대해 숙고했다. 그 숙고는 지 나치게 길었다. 견디다 못한 아실이 괜한 지적을 한 번 해본 것에 불 과하다는 것을 고백하려 했을 때 지멘이 말했다. "뭄토에겐 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겐 돈이 있다." 바로 아실이 하려 했던 말이었다. 아실은 지멘을 유심히 살피며 말 했다. "예. 맞아요. 뭄토가 마지막 대장간에서 다른 레콘들을 규합한다면 현상금을 담보로 한 외상이 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현금 박치기로 다른 레콘들을 유혹할 수 있겠지요. 마지막 대장간에 있는 젊은이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붙을 거예요. 뭄토 쪽에 붙으 면 당장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당신과 싸우느라 다치거나 죽을지 도 모르니까. 혹 성공한다 해도 현상금을 독식하려는 녀석이 나타나 서 개판이 될지도 모르고요." 아실은 그런 대답을 통해 자신이 이미 그 대답을 고려해둔 의문을 말했다는 것, 즉 지멘을 떠보려 했다는 것을 지멘이 알아차리길 바랐 다. 하지만 지멘은 해답이 나왔으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듯 뭄토를 의식 저편으로 날려보냈다. 그가 중얼거린 말은 최후의 대장간을 마지막 대장간이라고 부르는 아실의 말버릇에 대한 혼잣말뿐이었다. 그것은 타이모의 버릇이기도 했다. 아실은 그런 미지근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거나 아실과 지멘은 수배자이며 긴장감을 대가로 호흡을 버는 자들이었다. 그런 지멘이, 비록 위험이 될 가능성이 적은 뭄토가 대상이지만, 무관심으 로 일관한다는 것은 아실에게 꽤 위험하게 보였다. 아실은 그 나룻배 위에서 지멘에게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 나 아실은 레콘이 아니었고 물웅덩이로 가득한 땅에서 보낸 하룻밤과 강 위에서 보낸 몇 분의 시간이 지멘에게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없 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화제로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런 화제를 레콘에게 건네는 것보다 더 무례한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아실은 결국 시간을 더 두고 지멘을 관찰하기로 결정했다. 최후의 대장간을 지척에 둔 거리에서 아실이 한 번 더 뭄토에 대해 거론한 것은 그런 관찰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지멘은 아실이 배낭 속으로 들어가자 곧 몸을 돌렸다. 최후 의 대장간으로 이어지는 그날의 남은 여정 동안 아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해보았다. 어떤 레콘이든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태어난 장소를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레콘에게 바람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고 만물의 빛깔 이 원래 그러해야 하는 색을 띠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레콘은 당황하거나 화를 낼 것이다. 레콘의 성정을 고려한다면 화를 낼 가능 성이 더 높다. 레콘에게 고향은 사전적 의미의 그것밖에 없다. 따라 서 인간이나 나가가 레콘에게 향수를 설명하기 위해 출생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재치 있는 사람이라면 레콘 에게 최후의 대장간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요구할 것이다. 레콘은 상 대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최북단의 도시에서도 다시 북쪽으로 한참 올라간 곳에, 빙원 한가운데 느닷없이 솟아난 거대한 산 아랫부분에 웅장한 건물이 있다. 대부분은 얼음산 내부에 있어 앞쪽에서 보면 전면의 일 부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건물 전체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구름에게 사사받은 채식가가 그려넣은 듯한 희미한 얼룩 무늬로 뒤덮여 있는 그 건물이 바로 최후의 대장간 이다. 레콘들의 평생 반려가 되는 무기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그 자신이 즈라더의 죽음을 집행했지만, 지멘은 즈라더의 도끼가 최 후의 대장간에 도달한 이 시점에야 비로소 즈라더가 죽었음을 실감했 다. 모순된 감정은 계속 떠올랐다. 지멘은 자신이 죽인 즈라더가 부 럽다고 생각했다. 납병을 하면 다시는 무기를 쥘 수 없고, 죽음이 임 박한다 해도 무기를 휘두를 마지막 호흡을 남겨두려 애쓰는 것이 레 콘이기에, 납병례는 거의 시행되지 않는다. 납병을 할 기회가 온다 해도 미련 때문에 무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회 는 아마도 지멘에겐 절대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극연왕이 건설한 도로를 지나 거대한 계단을 올라가면서 지멘은 경 외감과 친근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 순간의 지멘은 향 수가 무엇인지 거의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부드럽지만 크게 일렁이는 감정의 동요 속에서 지멘은 최후의 대장간 안으로 들 어섰다. 지멘의 벼슬이 꼿꼿하게 섰다. 그의 검은 몸에서 눈과 얼음가루가 가볍게 튕겨 날아올랐다. 갑작스 럽게 얼음을 뒤집어쓰게 된 아실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멘의 호흡 이 뚝 멈춘 것을 깨달은 아실은 깜짝 놀라서 지멘의 배낭 끈을 움켜 쥐었다. 그의 어깨 위로 기어오른 아실은 무엇이 지멘을 놀라게 했는 지 찾아보았다. 아실은 인간이었고 이전에 최후의 대장간을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실은 무엇이 지멘을 경직시켰는지 알 수 없었다. 애써 잘못된 점을 찾아보려 애쓰던 아실은 자신이 성질 못된 트집쟁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지멘의 앞쪽에 펼쳐진 광경은 대 단히 활기찬 것이었다. 늘어선 열주들이 딱정벌레를 탄 도깨비가 어렵잖게 비행할 수 있을 것 같은 높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열주들 사이에 묶인 화려한 장막들에는 큼직한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테트모의 만능도구', '기 능성 단도 염가 판매', '방랑자의 길벗' 등 여러 가지 문구들이 장막 을 수놓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온갖 물건들이 쌓여있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뒤편에는 상인들이 자신의 물건을 구매하지 않는 자에 게 닥칠 다양한 비난을 맹렬한 기세로 암시하고 있었다. 물론 그 앞 에서는 만만찮은 기세의 구매자들이 상품의 하자와 상인의 양심에 관 계된 미지의 논리들을 박력 있게 설파하고 있었다. 다섯에 한 사람은 달리고 있었고 셋에 한 사람은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목청껏 고함지르고 있었다. 어쩐지 취향에 맞는 곳이라는 느긋한 생각을 하던 아실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어떤 것 이…… '야하다.' 아실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리고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녀 앞의 풍경은 활기차다 못해 천박했다. 아실이 타이모에게 들었던 것 들을 통해 예측한 최후의 대장간은 훨씬 재미없는 장소였다. 지멘이 최후의 대장간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경건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실 은 최후의 대장간이 엄숙하고 근엄한 장소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실은 의심의 눈을 떴 다. 그제서야 아실은 지멘이 이미 느꼈던 충격을 느꼈다. 레콘의 깃 털 덮인 얼굴은 붉게 변하지 않는다. 빨간 얼굴로 고함을 지르고 있 는 사람들은 인간이었다. 최후의 대장간답게 평소에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레콘들이 있었지만 인간들 또한 적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기를 제작하는 것도 레콘이고 그 무기를 필요로 하 는 것도 레콘이니 최후의 대장간에 인간이 있을 이유가 없다. 아실은 지멘에게 인간이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지멘 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어떤 인간 소년에게 주의를 뺏겼다. "뭘 고르러 오셨습니까?" 인간 소년은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보일 법한 레콘에 대한 경계심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지멘은 놀랐지만 아실 또한 그녀 자신보다 더 레콘에게 익숙한 소년의 등장에 놀랐다.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자 소년은 다시 짜랑짜랑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 다. "칼 좀 보시겠습니까? 손님 인상으로 보니 통칼이겠군요. 그렇지 요?" 지멘의 부리가 겨우 열렸다. "나는……" "당연히 통칼이지요! 여기 좀 보세요. 구경만 해도 됩니다!" 놀랍게도 소년은 지멘의 손을 붙잡아 끌려는 몸짓을 했다. 조그마한 인간 소년이 지멘을 끌고다닐 수야 없겠지만 인간이 감히 그를 통제 하려는 듯한 몸짓을 보인 것에 당황한 지멘은 저도 모르게 소년에게 끌려갔다. 소년은 가까이 놓인 탁자로 지멘을 끌고 갔다. 탁자 위에 는 역시 화려한 장막이 걸려 있었고 거기엔 '헤치카의 만년검, 일인 일인(一人一刃)'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실은 소년이 탁자 위에서 장 검 하나를 힘겹게 들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칼은 장검치곤 지나치게 폭이 넓었고 아실은 곧 그것이 레콘의 단검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삽과 톱과 도끼가 뒤섞여 있는 것 같은 그 단검을 쓰려면 아 주 개성이 강한 레콘이어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은 단검의 무게에 버 거워하며 외쳤다. "어이쿠, 쓰러지겠네. 좀 들어보세요!" 지멘은 엉겁결에 그 괴상한 단검을 집어들었다. 소년은 반색하며 외 쳤다. "어떻습니까? 잡아보신 기분이? 손에 착 달라붙지요?" 아실은 소년의 상술에 감탄했다. 지멘의 손에 칼을 쥐어주기 위한 일련의 행위가 틀에 박힌 듯 매끄러웠다. 손에 쥔 단검을 바라보던 지멘은 이 가당찮은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니까 나는 납병을……" "예! 납병 하러 오셨겠지요. 가지고 계신 그 구식 무기는 눈을 감아 도 보이겠네요. 어이쿠! 이건 도대체 무슨 괴물인지. 옛날 레콘들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잖습니까, 손님?" 아실은 지멘이 어느새 손님이 된 것에 감동했다. "레콘은 자기 몸이 이미 무기인데 뭣 때문에 이렇 게 부피 크고 무겁고 거북한 것을 가지고 다녔는지. 손님 손에 있는 단검을 보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최종도구란 그런 것을 말하는 거지요. 접칼 같은 것은 못써요. 건달들이나 한 손으로 홱 펼치면서 까부는 거지요." "젠장, 그 따위 헛소리 그만두지 못해!" 갑자기 뛰어든 날카로운 외침에 지멘과 아실은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떤 체격 좋은 인간 여인이 우락부락한 팔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기가 꺾이긴 싫은 듯 턱을 빳빳하게 든 채 여자를 맞이했다. "이봐요, 아줌마. 지금 흥정 중인 거 안 보이나? 서로 지킬 건 지키 고 삽시다." "누가 흥정에 뛰어들고 싶어서 뛰어드냐? 이 버릇 없는 새끼. 접칼 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불거린 녀석이 누구야!" 여자는 기세 좋게 뒤춤에서 접칼 하나를 꺼냈다. 그것 또한 레콘이 사용함직한 큼직한 칼이었지만 여자는 어렵잖게 날을 펼쳐 앞으로 내 보였다. 그 칼을 보던 아실은 놀랐다. 그것은 뭄토가 가지고 다니던 접칼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눈썹에 고드름 달린 거 아니면 똑바로 보라고! 접칼이 뭐 어째?" 소년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긴 말 안하겠어요. 딱 한 가지만 물어보지. 그거 손잡이로 망치질 할 수 있어요? 손님도 좀 생각해 보십시오. 속이 텅 빈 접칼 손잡이 로 망치질을 하면 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난리 나는 거죠." 지멘이 그 가상 실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기회는 없었다. 여자가 악을 쓰듯 외쳤다. "자랑할 것이 딱 그거 하나지!" "어디 그것 뿐이겠어? 통칼이 더 튼튼하다는 것은 상식이에요. 접었 다 폈다 하는 물건이 튼튼해봐야 통칼을 당하겠어요? 도구는 무조건 튼튼한 것이 최고라고." "무식한 소리 하고 있네. 넌 도끼로 종이 자를 거냐? 연장은 작업에 딱 맞는 것이 최고라고. 그리고 칼이 아무리 튼튼해도 칼로 바위 자 를 일 있냐? 쓰는 도중에 안 부서지면 충분히 튼튼한 거야. 무식한 꼬마놈아. 그리고 통칼이 튼튼하다 해도 그 늙은 헤치카가 만든 물건 이야 뻔하지." 이번에는 소년이 격분했다. "말 다했어요! 우리 영감은 나무만 좀 쳐도 이빨 빠지는 그 따위 장 난감 파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 들을 분이 아냐!" "뭐? 장난감? 말 다했냐? 그럼 충돌 시험 해봐!" "그 말 진심이쇼? 칼 부서지고나서 헛소리 할 거 아니지?" "헛소리는 네가 하게 될걸. 헤치카한테 맞기 싫으면 빨리 잘못했다 고 해." "내가 이게 무슨 복이야? 드디어 꼴 보기 싫은 아줌마 장사 치르는 꼴 보게 됐네. 합시다! 이 손님한테 부탁하지. 어때요?" 여자는 두 말 없이 자신의 칼을 지멘에게 내밀었다. 지멘은 엉거주 춤한 동작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망치를 내려놓고는 그 접칼을 받아 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년과 여자를 바라보던 아실 은 지멘의 양 손에 하나씩 들려 있는 단검을 보고서야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단검을 서로 부딪혀 어느 칼의 이가 빠지는지 시험해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지멘이 물었다. "충돌 시험?" 소년이 기운차게 외쳤다. "그래요! 부딪혀보세요. 손님. 우리 힘으로는 못하니까. 그 접칼 부 숴버려요." "끝까지 헛소리를. 통짜로 된 거니 튼튼하다고 믿는 건 네 자유지 만, 부딪히는 것은 칼날이고 칼날 처리에는 우리 사후 따라올 대장장 이 없어." "두고 봅시다. 손님. 당장 그걸…… 지금 뭐 하십니까?" 소년을 윽박지르던 여자는 소녀의 질문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단검이 모두 바닥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단검들을 땅바닥에 내 려놓은 지멘은 옆에 두었던 망치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바닥을 조심 스럽게 겨냥했다. 여자의 얼굴이 부풀었고 반대로 소년의 얼굴은 홀 쭉해졌다. 그들은 뭔가 말을 만들어내려는 애처로운 시도를 했고, 성 공하지 못했다. 지멘은 무자비하게 망치를 내리쳤다. 폭발적인 충돌음에 인파의 소음이 싹 사라졌다. 흥정 중이던 사람들 도, 정신없이 달리던 사람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지멘 쪽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천천히 망치를 들어올렸다. 그 아래에 는 박살난 단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여자와 소년은 그대로 혼절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얼굴을 한 채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지멘은 무감동하게 말했다. "둘 다 약해."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여자 또한 비명을 질렀다. 아마도 똑 같이 비명을 지르는 것 또한 공정 경쟁의 일환이라고 믿는 듯하다. 놀라운 소동과 함께 주위가 상당히 한적하게 바뀌었다. 인간과 레콘 들은 지멘과 아실을 중심으로 한 상당히 큰 원을 구성했다. 뭔가 끔 찍한 일이 일어날 것은 분명했지만, 아실은 조그마한 인간 소년과 좀 크지만 역시 인간인 여자가 어떤 폭력을 이끌어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터져나온 외침은 구경꾼들의 처신이 올바른 것임을 알 려주었다. 여자와 소년이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무-울! 사후, 물 끼얹어줄 녀석이 나타났어요!" "그래요! 헤치카 영감님, 물 가져와요!" 아실은 확신했다. 지멘이 물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도망치지 않은 것은 '사후'와 '헤치카'가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멘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를 낼 정도로 굳은 채 눈만 뒤룩거렸다. 조금 후 사후와 헤치카로 짐작되는 레콘들이 나타났을 때 아실 또한 충격으로 뻣뻣해졌다. 누가 사후이고 누가 헤치카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쪽은 나이가 많아 보이는 레콘이고 다른쪽은 그보다 훨씬 더 늙은 레콘이었다. 두 레콘 을 바라본 아실은 그들이 대장장이임을 직감했다. 깃털이 많이 빠진 팔뚝이나 하얗게 변한 부리 끝을 보고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물이 찰랑거리는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아실의 견해로는 피투 성이 시체를 끌고 나타난 도깨비만이 그들의 충격적인 모습에 감히 비교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두 레콘은 지멘을 가운데 둔 채 앞뒤에서 나타났다. 그 들이 다가옴에 따라 구경꾼들 중에 있던 레콘들이 기겁하며 몸을 피 했다. 멍한 기분 속에서 아실은 인간들이 깔려죽지나 않았는지 걱정 했다. 지멘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도달한 두 대장장이는 동시에 걸음 을 멈췄다. 아실은 지멘의 벼슬을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었다. 두 대 장장이는 합의나 한 것처럼 지멘의 모습을 위아래로 관찰했다. 둘 중 더 늙은 레콘이 소년에게 말했다. "뭐지?" "저 녀석이 상품을 부쉈어요, 헤치카!" 한쪽이 헤치카로 판명되자 다른쪽이 누군지도 분명해졌다. 아실은 사후를 돌아보았다. 사후는 여자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너는 왜 불렀냐?" "우리 상품도 부쉈어요!" 사후는 노기를 띠며 몸을 부풀렸다. 그는 기운차게 물동이를 들어올 렸고 구경꾼들 사이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실은 구경꾼들 중 레콘의 모습이 상당히 줄어들었음을 깨달았다. 사후는 물동이를 위협 적으로 내밀며 말했다. "훔친 것도 아니고 부쉈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야, 검은 녀석. 설명해봐." 그 순간 지멘이 몸을 옆으로 홱 틀었다. 아실은 자신의 하반신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사적으 로 지멘의 벼슬 끝에 매달린 덕분에 아실은 아래로 떨어지는 지경을 모면했다. 순식간에 사후와 헤치카를 양쪽에 오게 만든 지멘은 양손 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어느새 망치와 도끼가 쥐어져 있었 다. 지멘은 두 무기를 머리 위에서 교차시키듯 들어올렸다. 사후는 검은 레콘이 항복의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지멘이 고개를 조금 숙였기 때문이다. 두 팔 때문에 양쪽에 있는 대장장이들을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며, 그래서 사후는 지멘이 무기를 양쪽으로 던질 채비를 갖추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떨군 지멘은 속삭이듯 말했다. "손에 든 걸 내려놔라." 사후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망치였다. 높은 곳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는 대호의 모습에 사후는 약간 놀랐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대장장 이로 일한지 제법 되어지만 사후는 그런 망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후 또한 레콘이었고 순순히 물동이를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 때 바닥에 있던 단검의 잔해들을 보던 헤치카가 갑자기 소년에게 말 했다. "돔. 어떻게 된 거냐?" "예?" "너 혹시 이 친구에게 칼 골라보라고 떼썼냐?" 돔은 입을 닫은 채 눈을 꿈뻑거렸다. 헤치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녀석. 너 저 친구가 다른 젊은이들처럼 무기 구하러 여기 오는 길에 납병례를 치른 늙은이들의 무기 두 자루를 맡아서 가져온 거라고 짐작했지? 그래서 납병은 천천히 해도 되니까 일단 무기부터 골라보라고 떠든 거지?" "다른 녀석들이 채가기 전에 빨리 손님 붙잡아야 되잖아요." "널 너무 많이 칭찬한 것 같군. 돔, 이 녀석아. 반만 맞았다." 헤치카는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사후는 찔끔했다. 그는 자신이 공격 목표가 되기 전에 물동이를 내려놓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검은 레콘 이 물이 없어진 쪽으로 도망칠 거라 믿고 그대로 물동이를 들고 있어 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갈등하는 그와 달리 헤치카는 태평한 태 도로 돔에게 설명했다. "두 자루 중 한 자루는 납병 때문에 온 것이 맞지만 다른 한 자루는 저 친구의 무기다. 이미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무기를 골라보라고 떼 를 쓰니 짜증이 나서 부순 거잖아." 돔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팔을 쭉 내뻗어 지멘의 망치를 가리켰다. "예? 늙은이 아니면 누가 저런 구닥다리 옛날 무기를 써요? 저 사람 그렇게 늙어보이지는 않는데?" "어린 너한테는 그렇게 느껴지겠지만 그렇게 옛날은 아니야. 너 태 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레콘들이 저런 무기를 집병했다. 내가 제 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기 있는 황제 사냥꾼도 너 태 어나기 전에 여기서 무기를 받아갔을 거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이면 영웅왕 시대와 동일하다는 의미의 말을 꺼 내려던 돔은 뜻밖의 이름에 경악했다. 갑자기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 을 느끼며 돔은 지멘을 바라보았다. 헤치카가 말했다. "내 기억이 맞나, 지멘?" 무례한 일이었지만, 지멘은 헤치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후 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후는 서서히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돔은 생물학을 습득하던 무렵 자신이 인간임을 깨달았고, 문화현상 학을 습득하던 무렵 자신의 이름이 좀 짧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일 이 일어난 것은 대략 그의 나이가 여덟 살 쯤 되던 해였다. 만약 돔 에게 아홉 살이 오지 않았다면 그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홉 살은 찾아왔고, 돔은 자신이 익혀야할 학문의 영역이 대폭 늘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 기에 돔은 심리학과 언어학, 경제학, 수학 등을 익혔다. 흥정을 하고 호사스러운 말로 상품의 가치를 선전하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어 줄 수 있게 되자 돔은 자신이 인생의 정점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았 다. 물론 어정쩡한 열한 살과 괴로운 열두 살은 그런 생각이 황당한 오해임을 가르쳐주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돔은 여덟 살 때 자신 을 의아하게 했던 문제에 다시 도전했다. 특별히 대단한 방법을 시도 한 것은 아니다. 돔은 헤치카에게 질문했다. 헤치카는 돔이 고아이며 그의 아버지는 젖먹이를 키우는 아내와 함 께 최후의 대장간에 장사하러 왔다가 추위 때문에 아내를 잃고 아이 를 포기한 채 떠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첨삭 없이 가르쳐 주었 다. 돔에게 성이 없는 까닭은 그 아버지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 고 레콘인 헤치카에게 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헤치카는 돔에게 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하나 만들어가져도 좋지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는 기다리는 것이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성은 돔의 것이면서 동시에 돔의 자식들의 것이 될 텐데, 그렇다면 좀 더 머리가 큰 다음에 생각 하는 것이 그의 자식들에게 덜 잔인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헤치 카의 설명이었다. 돔은 자식에 대해서는 좀 모호한 생각을 가지고 있 었지만 그 설명 자체에는 만족하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저를 왜 받으셨는데요?" "너 지금 하는 일 시키려고." 돔은 헤치카의 판매 대리인이었다. 늙은 대장장이 헤치카가 뚝딱뚝 딱, 쿵쿵탕탕 만들어내는 단검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은 다음, 얍! 그 것을 금편으로 바꾸는 자였다. 돔은 그것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얍, 얍, 얍! 열다섯 살이 되었고, 돔은 가끔 자신보다 우수한 사람 을 평생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돔에 게 열다섯 살짜리는 누구나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에 돔은 아실이 자신의 존재를 숙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실은 돔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니 었다. 만삭의 아내를 동반한 떠돌이 장사꾼이 들어올 정도라면 최후 의 대장간은 오래 전부터 다른 도시의 시장과 다를 것이 없어진 상태 라고 생각하며 아실은 질문했다. "그렇다면 요즘은 미리 무기를 만들어두었다가 판다는 말인가요?" 헤치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멘이 그 망치 가지게 된 시절에도 이미 그런 기운이 조금 씩 있었지. 내가 처음 불 보는 일을 시작할 때는 일 년 동안 찾아오 는 레콘들은 몇만 명 단위였어. 그러던 것이 한 십 년 전 쯤부터 몇 십만 명 단위로 늘어났어. 곧 백만 단위가 될 것 같아. 그렇게 되니 옛날처럼 무기 쓸 당사자를 관찰하고 그 사람과 토의해서 무기 만드 는 것은 불가능해졌어. 그래서 미리 만들어두는 거지. 그걸 저 녀석 이 팔고. 옛날엔 무기를 받은 레콘이 알아서 성의껏 사례를 했지만, 이젠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가격을 매겨서 파는 거지." "그럼 여기 있는 인간들은 모두 판매인들인가요? 대장장이들이 만든 물건을 파는 사람?" "그런 사람들도 있고 다른 장사꾼들도 있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시장이 생기는 법이잖아. 그 장사꾼들은 무기를 구해서 여행을 떠날 레콘들에게 이런저런 잡다한 것을 팔려고 모인 거야. 여기까지 물건 가져오는 것이 지독하게 어렵긴 하지만 손님은 확실히 있으니까 강단 있는 장사꾼들이 제법 모였지." "이상하네요. 왜 갑자기 레콘이 늘어난 걸까요?" "한 번 생각해봐."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레콘들이 좀 더 어릴 때 무기를 받기로 한 것은 아닐 텐데." "그게 아니야. 레콘의 숫자 자체가 증가한 거야." "레콘의 숫자가 늘어났다고요?" "그래. 네가 태어나기 전 이야기를 조금 하지. 천일전쟁이 끝나고 원시제가 황위에 오르자 여자 레콘들은 아이 낳는 일에 전념하게 되 었지. 그 시절 무기를 받으러 오는 레콘들 중 열에 일고여덟은 신부 탐색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 신부감이 아주 많다는 거야. 그래 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지. 게다가 원시제는 제국을 잘 다스렸지. 여긴 퍽 외진 곳이지만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일 제법 알 수 있어." 아실은 지겹게 들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천일전쟁이 끝나고 원시 제가 붕어하기까지의 12년이 역사상 다시 오지 않을 황금 시대인 것 처럼 말하는 노인은 많았다. 때때로 아실은 그런 호평에 원시제의 뛰 어난 통치력 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느꼈 다. 천일전쟁 때문에 적출식을 가질 수 없었던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 우는 천일전쟁이 끝난 후에도 적출식을 계속 미뤘으며, 결국 심장을 가진 채 요절했다. 아실은 사람들이 원시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즉 자신들 때문에 적출식도 받지 못하고 북부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통치에 몰두하느라 수명까지 짧아진 나가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녀 와 그녀의 처세를 미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아실에겐 고맙게도 헤치카는 좋았던 옛날에 대해 말하는 것에 머물 지는 않았다. "살기 좋은 시절이 계속되었으니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잘 자란 거 야. 그 세대의 아이들이 자라나서 슬슬 등장하게 된 거지. 그러니까 내 일이 이렇게 변한 건 원시제 때문이라는 거지." 헤치카는 잠깐 기다렸다가 말했다. "또 나는 타이모의 일이 일어난 것도 치천제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 으로 따지고 보면 원시제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아실은 눈을 부릅떴다. "그 일이 그저 레콘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말 씀인가요?" "나는 타이모는 알지만 분리주의는 몰라. 아는 척하지도 않겠어. 하 지만 사람이 많으면 말썽도 많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지. 타이모의 일은 내가 보기엔 아주 신기한 일이었어. 옛날 레콘들은 그렇게 무리 지어 사고를 치진 않았어. 뭐, 어쩌다 비슷한 숙원을 가진 레콘들이 서로 협력할 수는 있지. 그런 식으로 레콘 두세 명이 모일 수는 있 어. 하지만 타이모의 일이 그런 식이었나? 쥐딤에 모였던 레콘들 중 독립국 건립을 숙원으로 삼은 레콘이 몇 명이었지?" "전부 다는 아니었어요." 아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타이모의 사상 이 훌륭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이 동조했다는 식으로는 생각해보실 수 없어요?" "레콘이 다른 사람들의 사상에 신경 쓰는 것들이라고?" 헤치카의 지적은 정확했다. 아실은 최후의 대장간에 있는 대장장이 들이 그 업무 특성 때문에 물을 만질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다른 레콘 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아실은 그들이 교사와 비슷하 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지만 교사 들은 항상 젊은이들을 만나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가장 전통 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혼자 늙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 느낌과 싸워야 하는, 하지만 또한 자신의 정신은 전통 에 묶어두어야 하는 교사들에게서는 언제나 엉뚱한 시대를 표류 중인 조난자의 냄새가 난다. 헤치카의 처지는 그보다 조금 더 극적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무기를 받으러 오는 젊은 레콘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역사 이래로 계속된 의례를 베풀어주는 점은 교사와 비슷하지만, 엄 숙한 의례였던 그의 일은 평범한 상행위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헤치 카는 교사이자 의식주관자이며 도구제작자에 장사꾼인 셈이다. 교사 들이 시간의 표류자라면 헤치카는 모든 시대로부터의 도망자처럼 보 였다. 하지만 그는 위엄 있는 망명객이었다. 아실은 헤치카의 설명을 모두 받아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눈과 얼음의 땅에서 고집스럽게 망치를 휘둘러왔을 노인의 설명은 매혹적 이었다. 그러나 아실은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레콘도 타이모의 사상에 동의했다는 거죠." 헤치카는 빙그레 웃었다. 아실은 갑작스러운 창피함을 느꼈다. 헤치 카는 어린 타이모를 바로 곁에서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일하는 틈틈 이 타이모와 놀아주었을지도 모르고, 타이모가 어린 시절 저질렀을 온갖 실수와 유치한 장난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타이모의 유년기를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타이모의 사상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 이 어떻게 들릴까? 헤치카는 아실을 감탄하게 했다. "지멘이 돌아올 때까지 그 분리주의라는 것 좀 설명해주겠어?" 아실은 최선을 다해 설명하기로 했다. 헤치카와 자신 둘 다를 위해. =============================================================== 챕터 5 시작합니다. 정신 없었던 며칠. 안돼, 컴일병! 눈을 떠! 고향이 보고 싶어요, 상 사님… 베르길리우스가 자신을 부른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중얼거리는 컴퓨터를 가까스로 부활시킴. 기운내! 네트는 아직 접속할 가치가 있 어!(타자, 공황 중.)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5-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29 조회수 : 26 피를 마시는 새 5. 깨어난 불씨 - 2 아실이 헤치카의 처소에서 타이모의 사상과 분리주의 운동에 대해 설명하던 그 시각,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를 만나고 있었다. 지멘 또한 아실이 헤치카에게 던졌던 것과 같은 질문을 최후의 대장장이에 게 던졌고 그 대답에 대해 생각하며 최후의 대장장이를 관찰했다. 모든 레콘에게 무기를 주는 자이며 별빛로의 주인이자 타이모의 어 머니인 여인은, 이곳의 다른 대장장이들과 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 다. 최후의 대장장이는 부리의 빛깔이나 팔의 깃털 등이 온전한 모습 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별빛로의 주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별빛로는 별빛을 모아 철을 용해시키며 따라서 그 주위에는 대장장이들의 깃털 을 상하게 하고 그 부리의 빛깔을 변색시키는 살인적인 열기가 별로 없다. 그래서 최후의 대장장이에게 나타난 노쇠의 증거는 순전히 시 간적인 것 뿐이었다. 그 늙은 모습이 최후의 대장장이의 두번째 특징이었다. 대장장이라는 말에서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레콘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다른 레콘 대장장이들과 달리 최후의 대장장이는 그저 늙은 생명체일 뿐이었다. 그녀의 몸가짐은 꼿꼿하고 자신의 사지를 통제하는 것에도 아무런 무리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멘은 그녀에 게서 어떤 강인함도 느낄 수 없었다. 지멘은 혹 타이모의 죽음이 최후의 대장장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를 남긴 것이 아닌가 의심해보았다. 물론 아들을 때려죽인 사람에게 태연하게 농담을 걸었던 즈라더의 경우가 정상적인 레콘의 태도다. 하지만 즈라더의 아들과 타이모의 경우는 그 죽음의 방식이 다르 다…… 지멘은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최후의 대장간은 지멘이 알던 모습 이 아니었다.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도 그가 알던 레콘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멘은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왜 그 사람이 최후의 대장장이의 방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 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앞에는 커다란 바둑판이 놓여 있었고 바둑판 반대편에는 조금 전까지 최후의 대장장이가 앉아있던 자리가 있었다. 지멘이 찾아갔을 때 그들은 바 둑을 두고 있었다. 지멘은 그 사실이 좀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언젠 가 지멘은 국수가 되는 것을 숙원으로 삼은 레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이야기는 농담을 나누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 다. 레콘과 바둑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지멘의 생각이었다. 하지 만 그곳에 놓여있는 바둑판은 레콘이나 씀직한 거대한 것이었고 돌 또한 육중해 보였다. 지멘은 좀 지나치게 육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 다. 지금 바둑판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인간이었으니까. 오십 대 쯤 되어 보이는 인간 남자는 뒤쪽이 희끗희끗하지만 다른 부분은 아직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도 놀랄 정 도로 짙은 검정색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검정색은 거기까지였다. 피 부는 새하얗고 위아래 옷 또한 새하얀 색깔이었다. 탁자 아래에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신발도 하얀색일 것 같았다. 좀 관계가 없을 지 모르지만 남자가 쥐고 있는 돌도 백돌이었다. 흰색에 대한 광적인 애호를 가진 것 같은 그 인간은 바둑판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 최후의 대장장이와 지멘에겐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지멘이 하얀 인간에 대한 관찰을 대충 끝냈을 때 최후의 대장장이가 고개를 들었다. "이 도끼는 일단 내가 보관할 걸세.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할 때까 지." "보통 어떻게 처리됩니까?" "일반적으로는 녹여서 새로운 무기를 만드는데 쓰이지. 그 주인이 놓아준 무기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니니까. 하지만 가끔은 남겨두는 무 기도 있어. 승천한 티나한의 철창 같은 경우가 그렇지." 전설적인 이름을 들은 지멘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별빛로의 주인 은 박물관 안내인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것 같았다. "티나한이 승천하기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온갖 이야기를 다 들어봤겠지만 그 이야기는 잊도록 하게. 내 이야기가 가장 정확한 거 니까. 티나한의 승천에 관한 정확한 사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 하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최후의 대장장이는 지멘이 웃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멘은 웃지 않은 채 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둑판을 응시하던 인간 역 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소박한 희망의 좌 절에 머쓱해하며 최후의 대장장이가 말했다. "그날 밤 티나한도 취해 있었지만 다른 참석자들도 모두 대취해 있 었어. 티나한이 자기 철창에 대해 뭔가 감상적인 이야기를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아. 하지만 그것이 납병례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 당시 의 참석자들 모두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했으니. 어쨌든 티나한은 뭔가 장황한 이야기를 끝낸 다음 일어섰어. 그런 상황 알지? 오래 계 속된 술자리의 마지막 장면 말이야. 참석자 모두가 완전히 취한 상 태. 몇몇은 이미 잠들어 있고 깨어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떠들썩하게 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두런두런 잡담을 나 누는 때 말이야. 그럴 땐 꼭 누군가가 어이 없는 짓을 하고 다른 사 람들은 그저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지. 티나한이 허공으로 걸어올라갈 때도 사람들은 그저 미소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을 거야. 환호나 비 명에 대한 말은 꾸미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한 말일걸. 걸어올라가는 티나한도,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저 꿈처럼 느끼고 있었 을 테지." 지멘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 일이 일어난 하늘치가 어떤 하늘치인 지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티나한과 그의 지우들은 어떤 하늘치의 등 위에 모였다. 보름달이 시리도록 밝게 비치는 밤이었고 그들 외에 는 사람은커녕 동식물도 없는 하늘치의 등 위는 고요했다고 한다. 최 후의 대장장이가 한 말처럼 모든 것은 꿈속의 일처럼 일어났을 것이 다. 티나한이 상상한 것이 달로 향하는 계단인지 하늘의 끝까지 향하 는 계단인지는 그가 돌아와서 알려주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그리 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모호한 그런 상황에서 납병례가 확실하게 치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 물론 티나한이 철창을 손에서 놓은 것 자체가 확실 한 납병의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납병례를 그렇게 추측으로 처리할 수는 없어. 어쨌든 그건 티나한의 철창이고 티나한 외에 다른 사람은 그것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거니까. 그래서 그 철창은 보 관되고 있어." "티나한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말입니까?" "나도 들었어. 재미있는 이야기더군.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우리가 그것을 보관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 야." "즈라더의 도끼에는 그런 의혹이 없습니다. 그는 명백하게 납병례를 치뤘습니다." "맞아. 그러니까 그 도끼는 곧 녹일 거야." "별빛로에서 녹입니까?" "그래. 아마 곧 결정이 날 테니 원한다면 여기 머물렀다가 용해식에 참가하게." "용해식? 의식이 있습니까?" "대단한 것은 아니야. 바쁘지 않은 대장장이들이 모인 가운데 무기 를 녹이지. 납병을 치른 무기는 좋은 무기야. 그 주인을 잘 지켜서 장수하게 했다는 의미니까. 그래서 한 자리에 모여 그런 무기를 또 만들자는 다짐을 다지는 거야. 그냥 이곳의 대장장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 도끼를 가져온 자네가 그것이 확실히 처리되는 것 을 보고 싶다면 참관해도 좋아." 지멘은 자신이 그 일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숙원에 도전 중인 레콘들이 그러하듯 지멘은 외도에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그는 납병을 마치면 곧장 원래의 노정으로 복귀할 계획이었다. 용해식이 대장장이 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일이라면 지멘은 거기에 참가할 이유가 없었 다. 하지만 그의 원래 노정, 즉 황제 사냥의 다음 다계는 현재로선 개관도 세부 사항도 없는 상태였다. 아이저 규리하의 협조 요청을 잊 은 것은 아니지만 지멘은 진지하게 그 제안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전 규리하 변경백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거니와 지멘은 도망자 신 세인 아이저에게 어떤 기대할 만한 것이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 그가 가슴에 품은 어떤 비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멘은 자신에게 그 칼 날을 벼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에겐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무는 것에는 많은 위험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젊 은 레콘들은 아직 숙원이나 신부 탐색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자기 바로 옆을 지나가는 금편 삼백 닢짜리 현상범을 무시한 채 숙원 사업 이나 신부 탐색에만 정진하는 일반적인 레콘과는 좀 다른 것이다. 아 실은 돈을 가지고 있는 한 두려움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 돈 이 바로 젊은 레콘들을 유혹할 수 있다는 말을 아실이 고의적으로 생 략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선 굳이 학자가 될 필요도…… 어떤 착상이 지멘을 주춤하게 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최후의 대장장이는 지멘의 동요를 깨닫진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최후의 대장장이나 납병례, 그리고 즈라더의 도 끼 같은 것은 지멘의 의식에서 사라졌다. 지멘은 자신의 생각에 골몰 했다. '나에겐 황제의 세금수송대를 습격하여 획득한 많은 금편이 있다. 그 돈으로 젊은 레콘들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 수 없일까? 그리고 그 들과 함께 하늘누리에 침입한다면?' 어떤 이에겐 닳고 닳은 것처럼 느껴질 그런 개념이 레콘인 지멘에겐 대단히 놀랍고 창의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지멘은 그 생각에 골몰하 고 싶었다. 그러나 더 기다리지 못한 최후의 대장장이가 부리를 열었 다. "어떻게 할 건가, 지멘?" 지멘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까지의 여정이 짧은 것은 아니었으니, 잠깐 쉬도록 하겠습니 다. 그 용해식이 곧 이루어진다면 참석할 수도 있겠군요." "좋도록 하게. 여숙 시설은 많이 있네." "여숙 시설이오?" "그래. 옛날에는 무기를 받을 때까지 젊은 레콘들이 그냥 머물 수 있었지.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아. 사람들이 워낙 많아야지. 게다 가 이곳에서 장사 중인 인간들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여숙업을 하는 이들도 들였네." 지멘은 자신이 북극의 땅에 와 있는 건지 시모그라쥬 한복판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위대한 병기들을 만들어 내던 대장장이들은 이제 조그마하고 쓸모 많은 도구들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자신의 평생 반려가 될 무기를 기다리던 젊은 레콘들이 초조 함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소하던 장소에는 여숙업자들이 들어섰다. 그 가 아는 최후의 대장간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지멘은 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이곳에서 제 안전이 보장 됩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아실 겁니다. 제게는 현상금이 걸려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공격 하지 않는다면 저도 지불할 것은 지불하고 요청받은 것은 따르며 얌 전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현상금을 노린 누군가가 덤벼든다면 그 럴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저는 이 방을 나서자마자 그대로 최후의 대장간을 떠나겠습니다. 최후의 대장 간에서 소란을 부리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최후의 대장장이는 수염볏을 쓸어내렸다. "하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 알겠군. 이곳의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군." 지멘은 말없이 최후의 대장장이를 응시했다. 최후의 대장장이가 말 했다. "최후의 대장간은 언제나 무기를 원하는 레콘에게 그것을 주었어. 그가 바깥에서 혐오스러운 범죄자로 취급된다 해도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지. 물론 그가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 무기를 쥐자마자 당장 달려가 누군가를 살해할 거라 해도 신경 쓰지 않았어. 이곳에는 무기 를 원하는 레콘과 그것을 만들어주는 대장장이가 있을 뿐이야. 그리 고, 아무리 이곳의 모습이 바뀌었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네. 깃털은 빠진 곳에 남아있을 거야. 그곳에서 빠진 깃털은 그곳에, 그 리고 이곳에서 빠진 깃털은 이곳에 남을 걸세." 지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의 말도 할까 하는 충동을 느꼈지만 지멘은 관두기로 했다. 그는 인사를 남기고 일어섰다. 그 때 바둑판만 들여다보던 인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제가 머무는 곳에 당신을 초대하겠습니다." 지멘과 최후의 대장장이는 하얀 남자를 돌아보았다. 하얀 남자는 천 천히 고개를 들어 지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끗한 미소를 지었다. 쉰은 넘겼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게도 속된 구석이 없는 맑 은 웃음이었다. 그 때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얼굴을 여전히 이쪽으 로 향한 채 남자는 백돌을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바둑판을 보지도 않고 돌을 내려놓는 그 기묘한 동작에 지멘과 최후 의 대장장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인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멘 에게 다가온 인간은 갑자기 환한 표정을 지으며 최후의 대장장이를 돌아보았다. "나란히 서있으니 바둑판 같지 않습니까?" 최후의 대장장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의 말대로 온통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그와 검은 깃털의 지멘이 나란히 서있으니 그렇게 보 였다. 인간은 지멘에게 말했다. "저도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곳의 여숙 주인들은 강도나 다름 없지요.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밖에 빈터는 많으니 노숙하라고 말하는 놈들입니다. 물론 최후의 대장장이께서 엄히 단속하십니다만 물정 모르고 찾아간 레콘은 깃털이 모조리 뽑혀 나올 지경이지요. 저 와 함께 가신다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 초대를 받아들이시 고, 그곳이 마음에 드신다면 머무시지요." "나는 너를 처음 보는데." "지금 그 말 하셔야지요. 다음 번에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으실 테니까." 물론 두번째 봤을 때는 처음 본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지멘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왜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의를 받아야 하지?" "저는 당신과 아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지멘은 자신이 방어적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뭄토도 자신과 아실 의 정체를 곧장 알아본 만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지멘은 보다 심도 깊게 하얀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보아도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인간 기준으로 는 후리후리한 체격이었지만 레콘 기준으로는 결코 크다고 할 수 없 다. 무기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고 물통 같은 것을 차고 있지도 않았 다. 어쨌든 겉으로 드러나는 위험성은 보이지 않았다. 지멘은 조금 전 최후의 대장장이가 안전보장을 해주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최후의 대장장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최후의 대장장이는 지멘을 도 와주지 않았다. "이봐. 두던 바둑은 어쩌고?" 지멘은 김빠지는 기분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손으로 바둑 판을 가리켰고 그러자 최후의 대장장이는 남자가 조금 전 내려놓은 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조금 후 최후의 대장장이의 벼슬이 뻣뻣해 졌다. "어떻게!" 비명 같은 외침을 들은 지멘은 승부가 났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얀 남자는 겸손하게 말했다.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는 동안 생각할 시간이 많았습니다. 간신히 찾아냈지요." 최후의 대장장이는 그 말에 별로 고무되지 않았다. 그는 깃털을 세 웠다 눕혔다 하며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조금 후 최후의 대장장 이는 포기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젠장. 좋아. 가봐. 아, 지멘. 그 친구 조심해. 미쳤거든." 지멘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그 말 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래서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미쳤습니까?" "잘." 그 짧은 부사어를 미쳤다는 말 앞에 붙여봐야 이해가 넓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멘은 이해를 포기하고 대신 감각에 의존했다. 지멘이 가 진 수배자의 감각은 남자를 멀리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를 불쾌하게 하더라도 남자의 동행을 거절하기로 했 다. 하지만 그 때 남자가 말했다. "아실도 저를 보면 좋아할 겁니다. 지멘." 지멘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는 거짓을 찾을 수 없 었다. "좋다. 이름이 뭐지?" "제이어 솔한." 지멘은 그 이름이 어쩐지 낯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가 혹 제이어의 정신 상태에 관한 정보 외에 다른 정보를 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 지만 최후의 대장장이는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혼자 복기에 빠져 있었 다. 다시 맥빠지는 기분을 느끼려는 찰라, 문득 지멘은 고마움을 느꼈 다. 최후의 대장장이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딸의 끔찍한 죽음도, 그리고 지멘이 딸의 복수를 하려는 것도 잘 알 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에 관해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방금 끝난 바둑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것은 즈라더가 보 여주었던 레콘의 모습이었다. 오만한 개인주의자. 그녀에겐 바둑판이 있었고, 지멘은 그것을 방해할 수 없다. 지멘은 살짝 목례했다. 그녀가 보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지멘도 개인주의자였으니까. 물론 지멘은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을 알고 있었다. 헤치카의 가게로 돌아간 지멘이 아실에게 제이어를 소개하자 아실은 놀란 표정 으로 말했다. "살인기사?" 제이어는 한숨을 내쉬었고 지멘은 그제서야 당대의 유명한 기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람들이 그를 살인기사라 부르는 것은 제이어와 바둑을 둔 사람 중 네 명이 대국 직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 두 명은 오늘 내일 하는 노인이었고 한 명은 대국을 끝내고 귀가하다가 강도를 만 나 죽었으며 심장마비를 일으켜 바둑판에 코를 박고 죽은 한 사람은 원래 심장이 튼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건조한 설명은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사람들은 두 명의 노기사가 제이어와의 대국 때 문에 수명이 단축되었으며 세번째 기사는 패배의 충격 때문에 혼이 빠진 채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절명했으며 오만한 태도로 유명했던 마 지막 기사의 경우는 제이어가 심장이 멎을 수밖에 없는 무서운 행마 로 손수 살해한 거라 믿었다. 바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지멘이었지만 사람을 넷이나 죽인, 말 그대로 살인적인 기사의 이야기는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이어 본인은 그 호칭이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아실. 별 의미 없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해봐." "어, 미안해요. 레콘이라면 그런 별명 좋아할 텐데. 강하고 거칠어 보이잖아요." "나는 레콘이 아니야. 그리고 바둑을 살인기술로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면 왜 상복을 입고 있는 거죠?" 제이어가 약간 동요했다. 아실은 씩 웃었다. "그 하얀 옷, 죽은 네 기사를 복상하기 위해 입고 다닌다고 하더군 요. 하지만 그 옷은 아저씨가 바둑 두다가 사람을 넷 죽였다고 광고 하는 의미도 될 텐데요? 미안하지만 좀 유치하지 않아요?" 제이어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보여도 할말은 없겠지. 하지만 내 의도는 순수해. 내가 그 분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냥 잊어버리는 것 도 예가 아니겠지. 나는 그 분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입고 다니 는 거야. 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내가 머무는 곳으로 안내하지." 아실은 묻는 눈으로 지멘을 바라보았지만 지멘의 대답은 그녀를 집 어 배낭 속에 넣는 것이었다. 배낭 속에서 아실은 처음 본 사람을 어 떻게 따라가는 건지 궁금하게 여겼지만 별다른 반대는 하지 않았다. 제이어와 아이저의 관계를 고려한 아실은 그가 황제에게 유리한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추측했다. 물론 알려진 풍문의 반만 사실이라도 제이어 솔한은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이겠지만. 제이어 솔한이 머물고 있는 여숙은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꽤 안락해 보였다. 그리고 제이어는 그곳에서 호방한 숙박객으로 통하는 것 같 았다. 지멘과 아실의 모습을 본 여숙의 종업원들은 '또 손님을 데려 왔구나' 하는 반응을 보이며 좋아했다. 음식을 차린 방으로 안내해준 종업원에게 수고료를 듬뿍 주는 제이어의 모습을 본 아실은 그들이 좋아할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종업원들이 물러가고 넓은 방에 세 사람만 남게 되다 제이어는 함지 에서 직접 술을 퍼 아실과 지멘에게 돌렸다. 자신의 사발을 들어올린 제이어가 말했다. "괜찮다면 아이저 규리하의 건강을 위해 잔을 들도록 합시다." 짧은 순간 아실은 의혹의 눈으로 제이어를 관찰했다. 아직 역사가들 은 아이저 규리하를 위해 먹을 갈지 않았으며, 반역자를 위한 건배를 제안하기엔 확실히 시기상조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황제사냥꾼을 자 신의 거처로 초대한 대범함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받아주지 못할 것 이 없다. 지멘이 이미 잔을 들어올렸음을 확인한 아실은 씩 웃으며 제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반역자를 위해 건배했다. 잔을 내려놓은 제이어는 두 손을 깍지 껴서 그 위에 턱을 얹었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으며 지멘과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아실은 지멘을 한 번 바라본 다음 입 을 열었다. "아저씨는 이곳에서 뭐 하고 계신 거죠? 무기를 받으러 온 것은 아 닐 텐데." 제이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대화를 담당하는 건 너로군. 건강에 해로운 망치를 들고 다니는 쪽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는 것, 또한 둘을 잘 안다는 듯한 태도가 아실의 비위를 건드렸다. "지멘과 대화하고 싶으세요?" "아니.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너야. 다만 그 때문에 지멘이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걱정 말고 하세요." 아실은 지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멘 또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하지 않았다. 지멘은 몸 전체로 자신이 말 없는 참관인의 역할에 익숙함을 보여주었다. 제이어는 그 상황에 흥미를 느끼면서 말했다. "그럼 먼저 질문 하나 하지. 지금까지 모은 것이 삼백만은 넘었지?" 지멘은 제이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실이 긴장 하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아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삼백만이라는 거죠?" "황제의 세금수송대를 습격해서 모은 돈 말이야. 금편 삼백만 닢은 될 테지." 조금 전 그 돈에 대해 생각했던 지멘은 흥미로운 우연이라고 생각했 다. 가용할 충분한 자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실은 일년에 두 번 정례 행사처럼 세금수송대에 대한 공격을 요구했다. 그것이 치천제를 곯려주는 일이 될 거라 생각했기에 지멘은 동의했다. 물론 쉽지는 않 았다. 레콘들이 지킬 때도 있었고 배로 세금을 실어나르기도 했다. 하지만 넓은 제국에는 강이 이어져 있지 않은 곳이 분명히 있었고 모 든 세금수송대에 레콘 경비병들이 배치될 수는 없었다. 최초의 공격 을 성공시켰을 때 그들은 이미 가지고 다닐 수도 없는 막대한 금편을 획득했고,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획득한 돈을 모처에 숨겨두었다. 지 멘에게 그곳은 필요할 때마다 찾아가서 쓸 돈을 가져오는 창고에 불 과했다. 그래서 지멘은 쌓여있는 금편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게 삼백만이나 되나? 그 정도면 많은 병사를 살 수 있겠군.' 제이 어는 계속 말했다. "내 계산이 조금 틀렸을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하늘누리를 침입했으 니 모을 만큼 모은 것은 분명하겠지." 지멘은 하늘누리 침입과 그들이 모은 돈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돈으로 병사를 산다는 생각을 지멘이 한 것은 반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제이어는 훨씬 전에 있었던 하늘누리 침입 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늘누리를 침입할 당시 지멘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의 망치와 상상력뿐이었고 돈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지 멘은 아실 쪽을 쳐보았다. 아실은 가면 같은 얼굴로 제이어를 마주보 며 말했다. "후원자가 필요하세요? 아저씨와 검소한 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기는 하군요." "아, 고맙지만 괜찮아. 요즘 나에겐 후원자가 있으니까. 나는 모 인 사의 특사로 이곳에 와 있어. 얼마 동안은 지내는 것에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아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들은 당신이 철저한 야인이라고 하던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군. 하지만 철저한 주변인은 철저한 중앙인과 같아. 주변에 머물기 위해서는 중앙에 머물기 위한 것과 똑 같은 적극성과 노력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떠밀려다 니게 돼. 주변에서 중앙으로, 중앙에서 주변으로. 아이저 규리하가 그랬듯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수장이었던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그 세상에서 가장 유서 깊다는 가문은 27년 전에 끝났다고 봐야 해. 충의공 괄하이드 규리하가 부러진 대도를 들고 죽은 채 싸웠던 그 날 말이야. 하지만 제국에게, 그리고 선황께 왕이 되지 않는 왕자 들은 아직 필요한 존재였지. 그래서 찾아낸 것이 충의공의 재종손인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었어. 아이저 규리하는 어느 날 느닷없이 중앙 으로 끌려나온 거지. 생각해 보면 27년 전 그 날 충의공의 모습은 그 이후 규리하 가문의 모습을 예언한 것이나 다름없어. 규리하 가문은 죽은 상태로 제국을 위해 봉사했지. 그리고 27년이 지난 지금 그 봉 사는 드디어 끝났어. 치천제께서는 아이저 규리하에게 서약지지파의 우두머리라는 관을 씌운 다음 벼랑 끝에서 내치셨어. 아이저 규리하 는 다시 주변으로 밀려난 거야.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현재 추락하고 있어. 하지만 어쩌면 아이저는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도 규리하니까." 아실은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그 행동이 어떤 사람들을 당황 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제이어는 아실이 귀고리나 반지를 만 지작거리고 있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아실은 안대에서 손을 뗐다. "그래서 아저씨는 아이저 규리하와 다르다는 건가요? 다른 사람에게 등 떠밀려서 움직이지는 않았다는 거죠?" "내가 야인이라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설 명한 것뿐이야." "좋아요. 그러면 아저씨는 모 인사의 특사로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 거죠?" "당연한 말이겠지만 네가 모 인사의 동의를 받아오기 전에는 내 임 무에 대해 말해줄 수 없군. 그리고 내가 너와 지멘을 만나려고 한 것 은 모 인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럼 우리가 가진 돈에 대한 이야기는 뭐죠?" "그건 그냥 내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거였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니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요?" "황제의 심장병에 대한 이야기. 관심 있을 것 같은데." 아실은 관심이 없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지멘이 갑자기 몸을 세 배 로 부풀렸기 때문이다. 아라짓의 황제를 가리키는 수식어 중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주관 자라는 말이 있다. 이 거창한 말에는 황제의 드높은 권위에 대한 칭 송의 의미 외에 평등주의자를 흥분시키는 고약한 의미가 숨어있다. 비록 도시연합의 나가들이 아라짓의 황제를 실질적인 세계의 지배자 로 인정하고 있지만, 아라짓의 황제가 도시연합을 직접 통치하는 것 은 아니다. 그런 황제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주관자라면 도시연합 의 나가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이 맹랑한 중상의 근거는 모든 나가들이 스물두 살 되는 해에 치르 는 심장 적출식이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는 그 이후로 불사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어떤 생물도 감당할 수 없는 손상을 능히 견디며 적절 한 환경과 시간이 주어지면 그 손상을 말끔히 복구시키는 것이다. 면 밀하게 통제된 죽음을 한 번 경험함으로써 나가들은 그런 초인적인 능력을 획득한다. 심장병은 바로 적출된 나가의 심장을 담아두는 병 이며, 나가들은 그 심장병을 자신의 도시 중앙에 있는 심장탑에 보관 한다. 치천제가 불사에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은 그녀의 파멸을 원하는 지 멘과 아실에겐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실은 제이어 솔한이 자신들의 애로점을 거론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황제의 심 장병이 애로 사항이 아닌 검토해볼만한 대상이 되기 위해선…… 아 니, 아실은 그런 희망을 감히 품을 수 없었다. 아실은 당장이라도 부리를 벌릴 것 같은 지멘에게 손을 뻗었다. 아 실의 펼친 손바닥을 본 지멘은 깃털을 눕히려 애썼다. 제이어는 두 사람의 동작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실은 화를 참으며 말했다. "아저씨. 황제의 심장병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데요." "이상하군. 너와 지멘의 목표는 황제를 죽이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아실은 지멘이 더 참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 자신이 그 랬으니까. 아실은 비명처럼 외쳤다. "심장 파괴로는 치천제를 죽일 수 없어요!" 제이어는 아실이 폭발하기를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그는 만족한 표 정으로 아실을 쳐다보았다. 그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희롱하는 것 같은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실은 자신을 더 제어할 수 없었 다. 아실은 벌떡 일어났다. "오래 전에 검토해봤어요! 예. 지도그라쥬의 심장탑에 있는 치천제 의 심장병을 깨트리면 치천제를 죽일 수 있어요.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황제는 지도그라쥬에서 적출을 했어요. 한계선 이남의 최대 도시에서! 시련은 원시제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지카그라쥬 와 미라그라쥬의 모든 적출대상자들이 지도그라쥬에 모였고…… 지도 그라쥬의 적출대상자들과 함께…… 황제도 적출했어요. 그 중에서 그 년의 심장병을 찾을 수는 없어요!" 아실의 흥분은 지멘을 진정시켰다. 적어도 겉으로 지멘은 차분한 표 정을 유지한 채 제이어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제이어는 지금 이 순간 위험한 자가 누군지 착각하지는 않았다.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멘?" 제이어가 말을 시켰기 때문에 지멘은 자신을 더욱 진정시켜야 했다. 지멘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아는 어떤 소녀의 의견은 타당하다. 그런 방법은 없다." 제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방법은 없지요. 선황께서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최고의 안 전 보장을 선물했지요." 갑작스럽게 아실은 제이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매우 단순 하면서 저열한 이유, 그녀를 약 올리려는 것이다. '아하, 너 같은 녀석 알아. 장난감을 원해? 가소로운 것들에 일희일 비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세상을 은근히 경멸하는 사람처럼 비춰지고 싶어서? 원한다면 가져. 주겠어. 누가 누굴 가지고 노는지 보라고.' 아실은 펄쩍펄쩍 뛸 듯이 흥분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황제의 심장병이 어쨌다는 거예요?" 제이어는 만족했고, 아실도 만족하게 되었다. 제이어는 배부른 표정 으로 말했다. "황제의 심장병은 지도그라쥬에 있지 않아." =============================================================== 믿을 때까지 계속되는 다음회 예고 :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사용하려면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데 안드로이드에게 영혼이 있을까? 밝혀지는 흡혈안드로이드의 정체. 그는 사실 지구인과 합체한 M-78 성운에서 온 외계인이었다. 그의 은 색과 적색 몸 아래에는 지구인의 영혼도 있었다. '전뇌공간을 여행하 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까지 챙긴 흡혈안드로이드는 조나단 다 이빙스톤의 애절한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철이, 기억하고 있습 니까.' 지구인의 영혼을 에뮬레이트한 다음 전뇌공간으로 조운트 한 다. 'Beam me up, Scotty.'라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전뇌공간에 봉인된 철이와 치바에서 온 카우보이. 탈출할 방법을 모 색하던 철이는 숟가락으로 땅굴을 파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열성적인 수색 끝에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숟가락은 없다'는 사실 뿐. 결국 치바에서 온 카우보이는 자신의 주특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인터넷 검색 찬스 쓰겠습니다.' 카우보이가 찾아낸 것은 숟가락처럼 생긴 우 주선의 사진 한 장. 목성 궤도의 모노리스를 조사하기 위해 떠난 우 주선과 전뇌공간에서 자취를 감춘 숟가락의 관계는 무엇인가. 모노리 스는 인간이 숟가락 없이 굴을 팔 수 있을 만큼 진화하기를 기다려온 외계인의 감시 초소인가? 인류 진화의 비밀이 밝혀지는 다음편 '소년 이여, 진화가 되라.' 많이 기대해 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5-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30 조회수 : 10 피를 마시는 새 5. 깨어난 불씨 - 3 제이어 솔한은 말술을 즐기는 축은 아니었고 아실과 지멘 또한 수배 자답게 술을 절제했다. 술자리는 일찌감치 끝났고 지멘과 아실은 같 은 여숙에 머물기로 했다. 그들이 안내된 방은 정갈했다. 온기가 약 간 부족했지만 견디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희미한 취기가 있었기에 지멘은 몸이 훈훈하다고 느꼈다. 깃털이 없는 아실의 경우 에도 추위를 느끼지는 않았다. 바닥에 누운 지멘의 배 위에 누워있었 기 때문이다. 지멘은 아실이 조금 태평해졌나 보다고 생각했다. 아실이 그렇게 누 워있으면 지멘은 위급할 때 빠르게 일어날 수 없다. 상황이 위태로울 때 아실은 지멘이 곧장 들어올릴 수 있도록 배낭 속에서 잠드는 것도 불사하곤 했다. 하지만 타이모가 태어난 곳으로 온 아실은 그것이 어 떤 안전 보장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실은 완전히 긴장을 푼 상태였다. 지멘이 제이어에 대한 독백을 했을 때 아실은 편안하게 대답했다. "정말 괜찮은 개새끼예요." 지멘은 아실의 이어질 설명을 기다렸다. 아실은 설명했다. "전해들었던 것도 그랬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바도 그래요. 불 쌍한 사상적 난봉꾼이에요. 난봉꾼이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듯 제이어는 이 학문, 저 사상을 집적거리죠. 하지만 난봉꾼이 진짜 사 랑을 못찾듯 제이어도 자기를 확 불태울 분야를 못찾았어요. 사람들 이 왜 제이어를 살인기사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뭐, 같이 바둑 둔 사 람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해도 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기력이 보통 이상이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경칭 같은 것을 붙 여줘야 되는데, 차마 국수라고 부를 기력은 아닌 거죠. 마침 유명한 일화가 있으니, 잘됐다. 살인기사라고 부르자. 이렇게 된 거죠. 제이 어가 집적거리고 있는 다른 분야에서도 상황은 비슷해요. 괜찮은 시 인이고 괜찮은 건축가지만 최고는 아니죠." 아실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그런데 그런 제이어의 무서운 점이 뭔지 알아요? 뭐든 제대로 못한 다는 자신감이지요." 불을 켜두지 않은 방안은 어두웠다. 먼 곳의 왁자한 소음과 빙원을 할퀴며 치닫는 바람의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아실이 말했다. "발목에 밧줄만 단단히 묶여 있으면 벼랑에서도 뛰어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죠. 제이어가 그래요. 제이어의 밧줄은 우습게도 자기가 반드시 실패한다는 믿음이에요. 실패할 것이 뻔하니까 아주 미친 짓 이라도 해볼 수 있다는 거죠. 제이어가 아이저와 경쟁한 것도 잘 살 펴보면 오직 실패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오세느가 더 사랑했던 것은 아이저였어요. 그리고 지테를 당주가 제정신이라면 변경백을 제치고 근거 없는 떠돌이에게 자기 딸을 줄 리가 없죠. 그 런데도 제이어는 아이저 규리하에게 도전했지요. 왜 그랬을까요? 오 세느를 사랑해서? 천만에요. 아이저와 오세느가 결혼한 이후 제이어 와 아이저의 사이는 더 좋아졌어요. 그게 사내다운 태도라고 생각하 는 바보도 있겠지만, 아니에요. 애초에 오세느에 대한 사랑이 없었던 거예요. 실패할 것이 뻔하니까 미친 짓 한번 부담 없이 해본 거죠. 그게 제이어에요." 지멘은 아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는 오세느가 아이저 규리하의 아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또한 아이저 규리하의 결혼에 뭐가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을 꺼리는 추 문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기억도 떠올렸다. 지멘은 아실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추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지멘은 그 이 야기를 굳이 마음에 담아두려고 하지는 않았다. 세상이 흘러가는 모 습을 관찰하고 그것을 해석한 다음 몇 가지 주석을 달아 정리하는 것 은 아실의 일이었다. 지멘은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또 관심을 두지 도 않았다.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살해해야 하는 소녀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세세하게 기억해두는 짓은 지멘에 겐 변태 같은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아실이 제이어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지멘은 제이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감각으로 포착한 정보들이 아닌 타인에 의해 가 공된 정보를 받아들임으로써 직접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 누구나 당연시하기에 관심도 두지 않지만 그것은 사람이라 불리는 네 종류의 생물이 가진 놀라운 특징이다. 지멘의 세계는 지멘 이 보고 느끼고 해석한 세계와 아실이 보고 느끼고 해석한 세계가 융 합된 것이다. 짐승은 그럴 수 없다. 짐승이 아는 세상은 직접 느끼고 해석한 세상뿐이다. 물론 니름을 쓰는 나가들 중 몇몇 특이한 이들은 짐승에게 다른 종류의 해석을 강요할 수 있다. 그들을 정신억압자라 고 부른다. 지멘은 정신억압을 당하는 짐승들이 무슨 기분을 느끼는 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멘은 제이어 솔한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제이어 솔한에 대해 안다. 제이어 솔한의 좌우명은…… "다른 사람은 감히 못할 일이지만 나는 해도 돼. 나야 원래 실패하 는 놈이니까 상관없잖아? 이거죠. 그리고 실패에 좌절하는 척하면서 다른 실패거리를 찾아나서죠. 이번에 제이어가 찾아낸 실패거리는 제 국 멸망이에요." 아실은 피식 웃었다. 그 희미한 웃음이 어둠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 다. 아실은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그리고 아실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지멘과 얼굴을 마주한 방향으로 엎드려 누운 아실은 어둠 속 에서 살짝 반짝거리는 지멘의 눈을 찾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비장한 투로. 아이저 규리하가 고꾸라졌다고? 이런 제기 랄! 그는 내가 사랑한 여인의 남자였어. 좋아. 제국이여. 나의 복수 를 받아라. 그대를 끝장내버리겠도다. 여기서부터는 속삭이듯. 괜찮 아. 보나마나 실패할 테니까. 이런 식이죠." 지멘과 아실이 짝을 지어 함께 걸은 것은 6년이다. 타이모에게 딸려 있는 기괴한 장신구 정도의 의미밖에 둘 수 없었던 인간 소녀는 이제 지멘의 한 명 뿐인 동료고 친구고 가족이다. 지멘과 아실은 그 셋 중 동료에만 약간의 무게를 두고 있을 뿐 나머지 둘에 대해서는 언급하 지 않지만 그것은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이 그 사실을 직시하 지 않는 것은, 둘 다 그것을 통제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실과 지멘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자신의 몸에 묻히게 된다. 그래 서 상대방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 "무서운 놈이에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제이어를 비웃을 수 없지요. 왜냐 하면 그 개새끼는 아무 거나 하는 놈이니까. 어떤 사람은 성공할까봐 두려워 하지 못하는 일을 제이어는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지요. 용이지요. 용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제약도 없 어요. 제이어 솔한도 그래요." 지멘은 제이어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아실이 그렇게 말했 기 때문에. 가슴 위에 엎드린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멘은 독백했 다. "제이어 솔한은 황제의 심장병이 지도그라쥬에 있지 않다고 말했 다." "예. 그걸로 시작할 셈이지요. 홧김에 자기가 알고 있는 제국의 약 점을 사방팔방에 대고 떠들 생각이에요. 아마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실패할 테고 제국은 여전히 건재할 거라 믿겠지요. 하지만 저 는 제이어의 믿음엔 관심 없어요. 그가 해준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어 요. 황제의 심장병이 정말 지도그라쥬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원 시제는 최고의 사기꾼이라는 거죠. 그 때 기억나요? 전 너무 어릴 때 라서 기억도 안 나요." 지멘은 원시제가 붕어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었다." 지멘은 한 번 더 말했다. "슬퍼하고 있었어." 아실은 빙긋 웃으며 지멘이 혼잣말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지멘 이 말했다. "존경하는 황제가 적출식을 받지 않아서 일찍 죽은 것 때문에 사람 들은 슬퍼하고 있었지. 그래서 사람들은 후계자가 적출식을 받지 않 은 나가라는 사실을 알고 걱정했다. 원시제가 지명한 사람이니 믿을 수 있지만 그래도 심장 적출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상 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원시제의 유언장에 후계자의 적출식에 관한 상세한 지침이 있었다는 거였다. 1년 후 그것은 사실임이 밝혀졌다. 그 때까지 대관을 미루고 있던 황위 계승자가 갑자기 도시연합에 가 서 심장을 적출할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많이 놀랐다." 지멘의 깃털이 아실의 코를 간지럽혔다. 아실은 황급히 코를 막았 다. 그녀가 잘 아는 이야기였지만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느꼈는지 알 고 싶었기에 아실은 지멘을 방해하지 않았다. 지멘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당시 제국의 분위기는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직접 본 것은 매일같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군단들의 모습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 사람들은 누구나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행동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그리고 몇년 쯤 지난 후에야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 터 들었다. 군단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던 그 시절, 하늘누리는 한계선 을 넘어 지카그라쥬로 간 다음 그곳에서 그 해의 적출 대상자들을 모 두 태웠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 지도그라쥬로 향했지. 그곳에는 지도 그라쥬의 적출 대상자들과 미라그라쥬에서 온 적출 대상자들이 기다 리고 있었다 한다. 황위 계승자와 지카그라쥬의 나가들은 지도그라쥬 와 미라그라쥬의 나가들과 함께 적출식을 가졌다. 적출식이 끝난 다 음 2만 개의 심장병이 남게 되었고, 그 병들은 제국과 시련의 대표자 들에 의해 수십 번 이상 뒤섞였다고 한다. 누구도 심장병의 주인을 알 수 없게 되었지. 그리고 심장병들은 지도그라쥬의 심장탑에 안치 되었다. 일이 끝난 다음 황위계승자는 직접 지도그라쥬의 의장에게 감사 인사를 했지. 그리고 열흘 동안 계속된 잔치가 있었다고 한다. 적출식 도중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서 제국군이 남쪽으로 이동하긴 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이 훌륭한 잔치로 끝난 거지." 아실은 굉장한 장관이었을 거라 추측했다. 천일전쟁이 끝난지 13년 밖에 되지 않았고, 아라짓 제국과 도시연합이 협조하여 무슨 일을 한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지도그라쥬의 나가들에게 는 적국의 지배자가 그들의 도시에 와서 적출식을 받았다는 것이 경 천동지할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라짓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감탄할 만한 결단, 놀라운 화해의 시작, 새로 운 시대의 출발…… 아실은 당시 지도그라쥬의 분위기를 본 것처럼 짐작할 수 있었다. 혼란과 서툰 농담과 초보 낙관주의자의 시간이었 을 것이다. 물론 나가들의 도시니만큼 폭음은 없었겠지만. 지멘이 말 했다. "황위 계승자의 심장병을 적국에 보관한다는 것은 정말 선황 같은 사람이나 생각할 만한 대담한 발상이었다. 어느 것이 황제의 심장병 인지 알 수 없는 이상 도시연합의 나가들은 모험을 할 수 없다. 자칫 하다가는 자기 측의 누군가를 죽이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라짓 제국 의 황제를 제거하고 싶은 도시연합의 누군가는 먼저 자기측 사람들의 분노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분노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한편 상당한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심장탑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적국에 군사력을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다. 따라서 황제의 심장병은 아라짓 제국 내부의 반역자로부터도 안전하다. 제이 어의 말처럼 선황은 후계자에게 최고의 안전보장을 해준 셈이다." 지멘의 깃털이 계속 아실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아실은 상체를 들어 올리고 두 손으로 턱을 받쳤다. 팔꿈치로 지멘의 가슴을 찌르며 아실 이 중얼거렸다. "맞아요. 그리고 제이어는 그것이 최고의 사기극이라고 주장했어 요." 지멘은 부리를 딱 부딪혔다. 아실이 말했다. "그게 사기극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리 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지도그라쥬의 심장탑은 더 할 나위 없이 안전해요. 그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다는 걸까요? 또 굳이 위장을 위해 그런 거창하고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이어의 말은 비합리적이에요. 그런데 제이어가 우리를 속이고 싶다면 합리적으로 들리는 거짓말을 했을 거예요. 타 이모는 이런 경우엔 항상 동기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했어요. 하지 만, 젠장. 제이어의 동기는 장난질이라고요. 제국과 황제를 상대로 장난을 치고 싶은 거라고요." "제이어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좋을까." "그런데 무시하기엔 지나치게 유혹적이라고요. 아아, 제기랄!" 아실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멘의 배 위에 오도카니 앉은 아실은 증오에 찬 눈으로 어둠을 바라보았다. "나이 처먹을 대로 처먹고도 인격이 미성숙한 작자의 헛소리에 이렇 게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나요. 왜 나는 다른 사람 들처럼 제이어 솔한을 화려한 실패자 쯤으로 취급하며 살 수 없는 거 지? 미치광이는 미치광이를 동요시킬 수 있는 건가?" 지멘의 기분이 언짢아졌다. 타이모의 출생지로 온 아실은 신변에 대 한 주의력 외에 마음에 대한 주의력까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아실에 게서 6년의 피로가 새어나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라도 지멘을 불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지멘은 아실 때문에 불안 해하는 자신에 대해서도 불안감을 느꼈다. 아실이 있어도 그만 없어 도 그만인 존재라면 불안할 까닭이 없다. 지멘의 숙원으로 향하는 노 정에 아실이라는 길벗이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면 불안할 까닭이 없 다. 그러나 지멘은 불안했다. 지멘은 아실의 주의를 제이어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려야겠다고 생각 했다. 타인의 기분을 바꾸려 시도하는 것은 지멘에겐 신경을 곤두서 게 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레콘에게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멘은 시도했다. 그는 제이어 솔한을 무시해도 무방하다는 투의 혼잣말을 했다.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아실은 호기심을 나타내며 지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멘은 최후의 대장장이와 만났을 때 떠올렸던 계획에 대 해 독백했다. 나에게는 세금수송대를 습격하여 모아둔 자금이 있고, 이곳에는 평생 계속될 여정에 돌입하지 않은 레콘들이 있으니, 레콘 동료를 사면 어떨까. 그들은 하늘누리 침입에 대단한 힘이 되어줄 것 이다. 말을 하면서 지멘은 점점 확신을 느꼈다. 그것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계획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거대계단에 대해 가르쳐줄 수 있다. 수백 명의 레콘이 고공에서 하늘누리 위로 쏟아져 내려가는 광 경을 상상해보라. 그런 광경에 현실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은 좀 우습지만, 제이어 솔한의 어처구니 없는 말에 휘둘리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지멘의 독백이 끝나자 아실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지멘은 그녀가 자 신의 계획에 대한 검토를 끝낼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아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멘의 배 위에서 내려간 다음 레콘도 아니고 선민종족도 아닌 생물 의 이름으로 지멘을 지칭했을 때 그녀는 분명히 열광적이었다. 지멘 이 그 포악한 폭언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허둥대는 동안 아실은 겉옷을 집어들고 방밖으로 달려나갔다. 아실은 자기 팔이 분노한다고 느꼈다. 아실은 자신의 다리가 분노한 다고 느꼈다. 아실은 자신의 심장이, 머리가, 발가락이, 거추장스럽 게 부푼 가슴이, 고양이 발톱이 긁어내리는 것 같은 자궁이 분노한다 고 느꼈다. 자신이 그대로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기분에 아실은 걸음을 멈췄 다. 벽에 손을 짚은 그녀는 세차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 계절의 극지에서 밤은 낮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잠깐씩 밝아지는 하루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낮과 밤의 세력이 보다 대등한 지 방의 습관을 이곳에서도 유지하고 있었다. 아실이 서있는 곳은 그녀 가 처음 보았던 실내 시장이었다. 장막과 매대, 좌판 등은 예전 그대 로였지만 서로에게 고성을 지르고 팔이 닿지 않는 거리는 무조건 달 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아실은 매장 뒤편 같은 곳에 옹색한 잠 자리를 만들어놓고 잠든 상인들을 볼 수 있었다. 어깨에 담요를 쓴 채 앉아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도 아실을 발견했지만 그녀가 뭔 가를 사지는 않을 거라 판단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잠든 틈에 찾아올 레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여 숙에 묵을 돈이 없는 걸까?' 아실은 그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묘하게 죄인처럼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실은 기지개를 켰다.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것 때문에 뛰쳐나왔다는 듯이, 갑자기 바뀐 잠자리 때문에 나타난 불면증을 토로하듯이. 사람 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실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갑자기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실은 주머니 속의 손으로 허리를 세게 눌렀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그 부분을 눌 러 확인해야 했다. 반응은 신통찮았다. 아실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지붕이 있는 곳에 쉬게 된 날 미치광이에게 헛소 리를 듣고 동료는 배신감을 선사했고 그녀의 아랫배는 제멋대로 통증 에 빠져들었다. 제기랄! 아실은 걸었다. 잘 다듬은 포석들은 아무런 발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온갖 얼룩으로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원래 레콘들을 대상으로 놓여진 것들이기에 포석들은 육중하고 튼튼했으며 들썩거리는 부분이나 깨진 부분, 이가 맞지 않은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 어느 곳의 시장에도 이렇 게 반반한 바닥은 없다. 조금도 미끄럽지 않았지만 아실은 빙판을 걷 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그것은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아실 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아실의 눈길이 이리저리 표류했다. 그러다가 아실은 낯익은 기분을 느꼈다. 아실은 헤치카의 가게 앞에 서 있었다. 돔과 그의 자랑거리인 칼들 은 보이지 않았다. 아실은 헤치카의 장막을 바라보았다. 헤치카의 만년검, 일인일인. 아실은 만년검이라는 말이 상품의 내구성을 자랑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일인일인이라는 운율이 잘 맞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알 수 없었다. 아실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그 문구를 바라보았 다. "일인일인이라는 건, 음. 한 사람에게 하나의 칼날이라는 의미야." 아실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은 레콘 남자였 다. 그 레콘은 헤치카의 장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헤치카라는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건 그거야. 그러니까, 목숨이 하나라면, 목숨은 하나잖아? 그렇다면 그걸 위해 필요한 도구도 하나 여야 한다는 말이야. 엄청나게 큰 창고에 온갖 도구를 다 갖춰놓는다 해도 등에 창고를 지고 다니지 못할 바에야 무슨 소용이 있나? 가지 고 다닐 수 있는 도구가 하나라면, 그 하나의 도구가 모든 도구의 역 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지. 도끼도 되고 톱도 되고 송곳도 되는 칼 말 이야." 아실은 이곳에서 판매되는 온갖 도구가 뒤섞여 있는 것 같은 칼들이 왜 그런 모양인지 깨달았다. 레콘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저 말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어. 일인일인이라는 건,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든 칼날 하나는 있다는 말이라는 거야." 레콘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통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 는 동요를 드러내며 레콘은 한숨처럼 말했다. "사람이라면 말이야. 누구나 평생 한 번 쯤은, 한 번 쯤은 흐르는 시간을 찔러 멈추게 하거나 떨어지는 벼락을 두 동강 낼 수 있다고 하더라고. 가지고 태어난 칼날 하나가 있으니까." 아실의 목 뒤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아실은 옷깃을 추슬렀다. "재미있는 말이네요, 뭄토. 그래서?" "나도 할 수 있어." "뭘요?" 뭄토는 왜 이해하지 못하냐는 듯한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할 듯 두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뭄토의 말이 시작된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지멘은, 어, 지멘은, 그걸, 젠장. 배를 탔어. 배. 그래. 그걸 탔 어. 나는 그걸 봤어. 이 눈으로 직접 봤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래서 알게 되었어. 알게 됐다고. 나는 알아차렸어. 지멘에겐 불가 능이 없고,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뭄토는 자신의 말에 압도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것이 되겠다, 혹은 저것이 되겠다라고 말하지. 그 중 어떤 건 시시하고 어떤 건 굉장해. 하지만 사실은 그것들과 비교도 안 되는 것이 있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것이 되는 거야. 그건 정 말 굉장한 거야." 아실은 그 표현이 바로 제이어에 대한 자신의 평가임을 떠올렸다. 아실은 제이어의 패배자 근성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진단했 다. 하지만 뭄토의 진단은 달랐다. "왜 지멘이 그런 것이 되었는지 생각해 봤어. 정말 벼슬이 익을 정 도로 생각해봤어. 기어코 알아냈지. 그건 너 때문이야." "저요?" 아실은 왜 추위를 느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공포의 예감이었다. 뭄토는 부리 부딪히는 소리를 심하게 내며 말했다. "왜 지멘과 함께 다니는 건지 알아. 들은 적이 있어. 황제를 죽이려 는 거지? 좋아. 하지만 꼭 지멘이어야 되는 건 아니지? 네 목적은 결 국 황제니까, 도와줄 수만 있다면 동료가 누구든 상관없는 거지? 그 렇다면 나라도 되는 거지? 나도 그럴 수 있어. 나한테도 칼날 하나가 있을 테니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지멘만 가능하다고 하려는 건 아 니지? 몇 년 동안 성공하지 못했잖아. 나는 할 수 있어. 그러니까, 황제를 죽여주겠어. 죽이겠어. 그러면 되는 거지?" 아실은 몸을 뒤로 완전히 돌려 뭄토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호리호 리하고 왜소한 모습의 뭄토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레콘에게 비 교했을 때 그렇다는 말일 뿐 조그마한 인간 소녀인 아실에게 뭄토는 탑처럼 거대했다. 아실은 속삭였다. "뭄토. 왜 우리를 따라온 거죠?" 뭄토는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눈이 서서히 흐 려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뭄토는 몸을 부풀리며 빠르게 말했다. "너를 뺏으려고." "뭐에 쓰려고?" "너와 지멘을 보기 전에는 몰랐어. 아니, 그 배에 타는 지멘을 보기 전까지도 몰랐어. 내 숙원이 뭔지 말이야. 내가 뭔가를 바라고 있다 는 것은 확실했는데, 그게 뭔지 말로 정리할 수 없었어. 하지만 이젠 난 내 숙원을 알아. 나는 뭐든지 될 수 있는 것이 되길 원해. 그것이 내 숙원이야. 그러기 위해선 네가 필요해." 갑자기 아실의 아랫배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실은 숨 을 급히 들이쉬었다. 다시 숨을 내쉬었을 때 아실은 자신을 향해 뻗 어오는 커다란 손을 보았다. 세수를 끝낸 제이어 솔한은 신음을 흘렸다. 최후의 대장간 주변에는 얼음과 눈 밖에 없고 애석하게도 그것들은 아직 연료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제이어는 언젠가 어떤 도깨비 가 얼음 위에 정교하게 일렁거리는 도깨비불을 붙여 마치 얼음이 불 타는 듯한 장면을 만들어보인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즈믄누리의 무 사장 탈해 머리돌이었고, 그 역설적인 광경으로 많은 사람들을 즐겁 게 했었다. 하지만 즈므누리의 무사장이라도 얼음과 눈을 직접 태우 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최후의 대장간 또한 대장간이기 때문에 연료를 필요로 한다. 다행히 용광로라 할 수 있는 별빛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만 이 용하지만 그 외의 다른 과정에는 역시 자연적인 불이 필요하다. 그래 서 최후의 대장간으로 실려오는 막대한 연료들의 대부분은 대장장이 들의 몫이다. 그 결과로 제이어는 쌀쌀한 여숙에서 잠들고 얼음장 같 은 세숫물을 얼굴에 문질러야 하는 것이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문지르며 제이어는 인간은 왜 허물을 벗는 나가 나 깃털갈이를 하는 레콘, 또는 불로 몸을 씻는 도깨비들과 달리 자 신의 몸을 청결히 할 방법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지 고 민했다. 인간은 원래 더러워지라고 태어난 종자인가? 그 정의의 뻐드 렁함이 제이어의 마음에 들었다. 그렇군. 인간은 원래…… "깔끔히 닦고 나와라." 지멘의 목소리였다. 조금 초조한 목소리였다. 제이어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얼굴을 꼼꼼하게 닦고 밖으로 나갔다. 투숙객 전부가 이용하 는, 아니, 투숙객 중 인간 전부가 이용하는 욕실 밖으로 나간 제이어 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지멘을 보았다. 저것이 레콘이 다가올 수 있는 최소 거리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제이어는 아침 인사를 건넸 다. 지멘은 성의 없이 목례하고는 말했다. "아실이 너에게 찾아갔나?" "아실? 아니오. 아실이 없어졌습니까?" 지멘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그가 그대로 떠날 작정이 라는 것을 깨달은 제이어는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잠깐만요! 아실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젯밤에 방을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걸음을 좀 멈춰요. 지멘." 지멘은 멈춰서서 제이어를 내려다보았다. 지멘을 따르느라 달려야 했던 제이어는 숨을 조금 헐떡였다. "아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요? 둘이 싸웠습니까? 아니, 잠깐. 당신 들은 싸울 수 없잖아요. 아실이 공격하면 그 즉각 당신은 그 애를 죽 여야 하니까…… 당신들, 철의 대화로 얽혀 있지요, 그렇지요?" 지멘은 이 대담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지멘은 그와 아실의 관계가 두 사람만의 비밀일 거라 믿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면 전에서 그 사실을 직설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후의 대장장이가 말한 대로군. 잘 미쳤어.' 제이어는 빳빳하게 선 지멘의 벼슬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계속 중얼거렸다. "그럼 말싸움입니까? 그래서 화가 나서 당신 곁을 떠난 것이고? 그 애가 영리하다 해도 아직은 어리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당신은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습니까. 애하고 무슨 싸움을……" 제이어는 갑자기 새로운 전망을 획득하게 되었다. 익숙한 높이보다 1 미터는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전 망이 참 낯설었다.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다리의 감각과 대호가 깨물 고 있는 것 같은 목의 감각을 종합해본 제이어는 지멘이 자신의 멱살 을 움켜쥐어 위로 들어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숨이 탁 막히는 기분에 제이어가 자신도 모르게 버둥거렸을 때 지멘이 말했다. "그럼 너하고 싸울까?" 제이어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숨통이 꽉 조여진 상태인지라 불가능 했다. 지멘은 싸늘하게 말했다. "친한 척하지 마라. 함께 한 시간은 반나절도 안 되고 함께 한 일은 술자리 한 번이 고작이다. 그걸로 네가 나와 아실의 모든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네가 장난꾼이라는 건 안다. 아무 곳에나 발 들이밀어 문 못 닫게 한 채 나불거리는 놈이라는 것도 안 다. 하지만 가끔은 그 문이 네 발목을 자를 수도 있다. 알았나?" 제이어는 가까스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지멘은 그를 놓아주었 다. 요란하게 엉덩방아를 찧은 제이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발목을 움켜쥐었다. 지멘은 바닥에 떨어진 인간을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당 장 아실을 찾아야 한다. 최후의 대장장이의 보장을 믿은 것은 멍청한 일이었다. 그녀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젊은 레콘들은 분명히 있을 테고 그들 중 누군가가 아실을 인질로 붙잡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멘은 망치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가 두 걸음도 떼기 전에 제이어가 말했다. "장난꾼이라는 것은 아실의 평가입니까?" 지멘은 기가 막히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이어는 발목을 조심 스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그렇겠지요.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고, 아무래도 그 애가 나 에 대해 내린 평가인가 보군요." "내 경고가 부족했다면-" "싸운 것이 맞군요. 아실이 뭣 때문에 화가 난 겁니까?" 지멘은 부리를 닫았다. 그가 망치나 주먹을 사용할 경우 제이어는 절명하겠지만, 그런 끔찍한 방법이 아니라도 무례한 수다쟁이를 침묵 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손가락으로 흉골 아랫부분을 가볍게 튕 겨주면 제이어는 지멘에게 필요한 시간 만큼은 침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직 얻지 못한 답을 제이어에게서 얻을 수 있다는 가능 성은 지멘을 주춤하게 했다. "왜 화가 난 건지 모르겠다." "그래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니까 그 애가 화를 낸 거죠?" "옛날 티나한처럼 동료를 모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돈으로 그들의 협조를 살 수도 있다고. 그러자 아실은 욕설을 퍼붓고 방을 나갔다. 어쩌면 아실은 돈으로 동료를 산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실이 그런 결벽주의자입니까?" 지멘은 인정해야 했다. "내 생각엔 아니다." "제 생각에도 그렇군요. 그런데 당신이 그 생각을 떠올린 것이 이번 이 처음입니까? 6년 만에?" "처음이다. 그런데 그게 왜?" 제이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지멘이 조바심 때문에 망치를 조금 들어올릴 때까지. 웃음을 거둔 제이어는 망치를 주시하며 빠르게 말 했다. "아실이 화가 날 만도 하군요. 당신이 6년 만에 타이모의 생각을 이 해했다면." 뜻밖의 이름에 지멘은 몸을 팍 부풀렸다. 압도적인 크기로 변한 지 멘을 본 제이어는 뒤로 물러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신과 싸우며 제이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멘. 날 때부터 개인주의자인 레콘도 하나의 목적을 위해 집단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타이모의 발상이었습니다. 그 결속을 가 능하게 하는 것이 공동의 목표든, 감정적 연대감이든, 구성원에게 주 어지는 금전적 보상이든 상관 없습니다. 결속을 이룬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분리주의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기본 전제가 바로 그 거지요. 타이모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천재적입니다. 레콘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 거니까. 다른 레콘이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도 천재 적이지요. 다른 레콘은 타이모가 아니니까. 하지만 당신이 어제 그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은, 당신이 6년 만에 겨우 그녀의 생각 중 일부 를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지멘은 아실의 분노와 짝이 될 만한 분노를 발견했다. 바로 그 자신 의 분노였다. 지멘은 스스로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을 느꼈다. 그리 고 차츰 그 감정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지멘의 얼굴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제이어는 살아났다는 느낌과 지멘에 대한 동정심을 동시에 느꼈 다. 제이어는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일어섰다. 똑바로 서게 된 제이어는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분리주의자가 아니죠?" 지멘은 두어 번의 실패 끝에 간신히 말했다. "나는 네째 부인을 얻으려는 신부 탐색자였다. 타이모의 호감을 얻 기 위해 분리주의자처럼 행동했지만 분리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구태여 숨기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것이…… 타이모를 상심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럴 거라 짐작했습니다. 하긴 그 때 쥐딤에 모였던 자들 중 진짜 분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레콘은 몇 되지도 않을 겁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지멘은 벼슬을 빳빳하게 세웠다. "뭐든 안다는 네 태도를 더 참기 어렵다. 넌 6년 전 쥐딤에 있지도 않았고, 타이모를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무슨 일을 했 는지도 몰라. 너는 나를 몰라! 그런 네가 하는 위로 따위에 내가 위 안 받아야 하나?" 제이어는 아실이 왜 화가 났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사람이 누구냐고 말하지는 않았다. 유언으로는 좀 어색한 말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 다. "미안합니다. 지멘. 저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일 뿐입니다. 지난 6년 동안 오로지 건국 운동의 부활을 위해 노력해온 아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 애도 잘 설명하면 이해할 겁니다. 가서 그 애를 찾으십시오." 지멘은 제이어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그의 말 속에 이해할 수 없 는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건국 운동의 부활?" "예." "무슨 말이냐. 아실이 원하는 것은 나와 같다. 황제를 죽여 타이모 의 복수를 하는 것이다." 제이어는 넋이 빠진 얼굴로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지멘이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려 했을 때 제이어는 두 손으로 양쪽 이마 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제이어는, 그것 때문에 죽을 뻔한 위기를 겪 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지멘과 아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식으 로 말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너 지금 당장……" "예. 맞습니다. 황제 시해지요. 하지만 그건 아실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입니다. 아실의 목표는 그것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제이어는 갑자기 복도 앞뒤를 둘러보았다. 인간 투숙객이 별로 없는 탓인지 욕실로 통하는 그 복도는 조용했다. 제이어는 지멘을 향해 손 짓했다. 지멘이 약간 주저하다가 허리를 숙이자 제이어는 그의 귓가 에 낮게 속삭였다. "지멘. 당신들이 강탈한 세금은 엄청난 양입니다. 하지만 지난 6년 동안 제국 어디서도 출처가 불확실한 거액의 출현은 없었습니다. 그 런 거액은 포착되지 않을 수 없지요. 소액으로 분산시켜 유출하는 것 은 당신들 두 명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요. 그래서 저는 당신들이 그 돈을 그냥 모아두고 있는 거라고 판단 했고, 왜 그 돈을 모아두고 있는 건지 추리해 봤습니다. 당신들이 누 구의 계승자인지 생각해 보면 간단히 답이 나오지요. 답은 독립국 건 설입니다." 그것은 타이모의 바람이었다. 레콘들의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 지멘 은 물론 타이모의 바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지멘을 움 직인 동인은 타이모의 바람이 아니라 타이모의 죽음이었다. 지멘이 원한 것은 오직 복수와 파괴였지 계승과 건설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 이어는 지멘의 행동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 "선황께서는 후계자를 결정해두셨고, 적출을 받지 않으셨기에 일찍 승하하신 것도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치천제 폐하는 다릅니다. 그 분이 승하하실 거라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어느날 갑자기 폐하를 시해한다면 무슨 일 이 일어나겠습니까?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그런데 그런 혼란 은 나라를 하나 만들고 싶은 사람에겐 다시 없을 호기일 겁니다. 그 렇게 생각해 보니 앞뒤가 딱 들어맞더군요. 독립국 건설에 필요한 자 금이 아니라면 그 돈이 무엇에 필요하겠습니까? 폐하를 금편으로 깔 아뭉갤 작정이 아니라면?" 가공할 충격에 지멘은 넋이 빠질 것 같았다. 불현듯 지멘은 어젯밤 들었던 제이어의 이상한 말을 떠올렸다. "하늘누리에 침입한 것은…… 돈을 모을 만큼 모았기 때문이라 고……" "예. 그렇게 말했지요. 저는 당신들이 충분한 자금을 모았기에 드디 어 계획에 착수한 거라고 봤습니다. 금편 삼백만 닢이라면 쓸만한 유 력자 몇 명을 구슬리고 필요한 병력을 구한 후에도 성대한 만찬을 차 릴 정도는 남겠지요. 저는 그것이 당신들의 목표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당신들의 목표가 아니라 아실의 목표였던 모양이군 요." 지멘은 머리를 용광로에 집어넣은 것 같다고 느꼈다. 지난 6년 동안 그가 하고 있었던 일은 그가 하고 있다고 믿었던 일 이 아니었다. 지멘은 그 혼란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상황을 단순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모든 것을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이어는 그를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가서 아실을 찾으십시오." 지멘은 눈을 끔뻑거리며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어는 강권하는 투로 말했다. "그걸 모르고 있었으니 놀랐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숙원 이 누군가의 수단이 된다 해서 문제될 것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 니다. 하늘치를 정복하겠다는 티나한의 숙원은 결국 하늘누리 건설의 수단이 되었지만 저는 티나한이 그 사실에 대해 화를 냈다는 이야기 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두 명의 레콘 중 한 명의 이름은 지멘을 진정하 게 했다. 레콘들이 가지고 태어나는 용력과 용맹에 비춰보면 역사가 그 이름을 기록한 레콘 영웅이 두 명뿐이라는 사실은 좀 이상하게 느 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웅의 조건에는 타인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 도 포함되는 법인데, 그런 면에서 레콘들은 실격이라 할 수 있다. 왜 냐 하면…… "당신이 바라는 것은 치천제 폐하를 시해하는 것이잖습니까? 아실이 그 죽음을 이용하여 무엇을 꾸미든 그건 당신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 때 당신은 이미 숙원을 이루었을 테니까요." ……레콘들은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지멘은 논리보다는 감성으 로 이해했다. 그리고 안도했다. 지금껏 해왔던 대로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아실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지 멘의 숙원을 방해하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아실의 목표는 지멘의 숙 원 성취를 꼭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지멘에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제이어가 마치 지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이건 제 추리일 뿐입니다. 아실을 찾아서 직접 확인하십시오. 아실 도 결국 황제의 죽음을 원합니다. 치천제 폐하께서 승하하셔야 그 애 가 바라는 일이 가능해지니까요. 그러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애는 앞으로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동료입니다. 아, 생각해 보 니 어쩌면 그 애는 당신이 타이모의 분리주의에 대해 잊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낸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제가 당신을 지체하 게 하고 있군요. 빨리 가십시오! 이 안쪽은 조그마한 인간 소녀 혼자 서 돌아다닐 만한 곳이 아닙니다. 물론 그 점에서는 이 바깥도 마찬 가지지요. 그 애가 혹 바깥에 있다면 몇 시간도 버티기 어려울 겁니 다." 제이어가 지적한 위험이 지멘을 긴장시켰다. 지멘은 간략히 목례한 다음 곧장 몸을 돌렸다. =============================================================== 남자란? : 일반톱과 전동톱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전동톱부터 집어드 는 생물. 산속에는 전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 생물의 반응은? 답 : 산속으로 전기를 끌어올 방법을 궁리한다. 일반톱 쪽으로는 다 음 빙하기가 오기 전까지는 눈길을 주지 않음. - 컴일병의 회복을 가속하기 위해 수술을 꿈꾸는 닥터 T. (이러다가 컴퓨터 잡을 텐데… 으음…)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5-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1-31 조회수 : 30 피를 마시는 새 5. 깨어난 불씨 - 4 아실은 잠에서 깼다. 주위는 캄캄했고 몸은 무거웠다. 무엇이 그녀 를 깨운 것인지 생각해 본 아실은 곧 자신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은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불쾌한 감 각만이 팔다리를 괴롭힐 뿐이었다. 잠들기 전의 상황을 추측해본 아 실은 불평의 신음을 토해냈다. 곧 반응이 있었다. 아실의 머리 쪽에서 갑자기 빛과 한기가 스며들 어왔다. 아실은 눈을 감아야 했다. 머리 위편에서 뭄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나?" 아실은 눈을 몇 번 더 깜빡인 다음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한심한 처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실은 옆으로 손을 뻗 었다. 그리고 아실은 바구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구니 속에 그녀와 함께 있던 모포를 끌어올린 아실은 그것으로 어 깨를 두른 다음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눈이 멀 것 같은 하얀 광 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까지 계속되는 빙원과 하얀 하늘 어디에 도 자신의 위치를 짐작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결국 아실은 눈여겨 볼마한 유일한 물체를 바라보았다. 뭄토는 바구니 뚜껑을 옆에 내려놓고 뭔가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 을 바라보던 아실은 자신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바구니 속에 담겨 밤새도록 실려온 일은 그녀에게 그다지 부담이 되진 않았다. 실 려다니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실은 바구니 밖으로 나왔 다. "저도 먹을 것 좀 줘요." 뭄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다른 바구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안에서 건량을 꺼낸 뭄토는 그것을 아실에게 건넸다. 아실은 바닥에 놓여있는 바구니 뚜껑을 다시 바구니에 씌운 다음 그 위에 걸터앉았 다. 바람이 전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약간의 바람이라도 있었다 면 아실은 감히 바구니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바깥에 있는 것이라곤 창백한 빙원과 시든 하늘, 그리고 뭄토 뿐이었고 그 중 눈 을 즐겁게 하거나 식욕을 돋우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아실은 밤새 도록 처박혀 있던 바구니 속에 계속 있고 싶지는 않았다. 베어문 건 량이 입 안에서 부드러워지기를 기다리며 아실이 중얼거렸다. "밤새도록 걸어왔어요?" "그 이상일 거야. 낮이 짧으니까. 좀 밝아졌고 바람도 없어서 쉬는 거야." "그러면 생각해볼 시간은 많았겠군요. 제가 부탁한 대로 하셨어요?" "아, 그래. 생각해 보라고 했지? 생각해 봤어. 그럼, 아주 많이 생 각했지. 그리곤 내 결정이 옳다고 판단했어." 뭄토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실은 경멸의 시선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뭄토를 바라보았다. 뭄토는 접칼로 건육을 베어내며 말했다. "넌 상상할 수 없냐? 그건 정말 대단한 거라고. 공작이 된다거나 대 장군이 된다는 것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에 비하면 한 단계 낮은 이야기야." 뭄토는 자신을 대단히 기특해 하는 것 같았다. 아실은 차분하게 말 했다. "왜 그런 것이 되길 원하죠?" 뭄토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런 굉장한 것을 거부할 이유가 뭐냐고 되묻고 싶어하는 눈이었다. 그러나 뭄토는 곧 아실의 질문이 조금 다른 뜻임을 깨달았다. 뭄토는 벼슬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 아버지는 천일전쟁 때 죽었어. 우리 어머니는 다른 남자의 세째 부인이 되었지. 그런데 그 남자는 다른 신부 탐색자에게 우리 어머니 를 뺏겼어. 그 신부 탐색자는 꽤 강했고, 젊은 신부들을 많이 얻었 어. 그 중 몇몇은 나보다 겨우 몇 살 많았지." 그러다가 그들 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도전해야 했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된다면 그럭저럭 슬픈 유년기 에 관한 극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아실은 그런 기대는 품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며 레콘에게 어 울리는 일은 아니다. 레콘이 아버지와 경쟁하지는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뭄토의 경우처럼 그들의 아버지는 피붙이가 아닐 가능 성이 다른 종족보다 월등히 높다. 혹 피붙이라 하더라도 성인이 된 레콘 자녀와 부모는, 물론 다른 종족들이 지인이나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 정도는 서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남남이나 다름없다. 레콘은 꼭 필요하다면 부모와도 경쟁한다. 바로 그렇기에 레콘은 그런 이야 기를 늘어놓을 특별한 이유가 없다. 식사하기 위해 수저 쓰는 법을 배워야 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아실은 보다 레콘다운 이야기가 뒤를 이을 거라 생각했다. "내 나이와 비슷한 젊은 신부가 많았다는 건 그 남자가 굉장히 강했 다는 거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어. 멋있어 보였거든. 최후의 대장 간으로 올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신부 탐색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최후의 대장간에 도착해서 다른 레콘들을 보고는 가망성이 없 다는 걸 알았어. 나는 작고 약했어. 누군가의 아내를 뺏을 능력은 없 었어. 혹 결혼할 수 있다 해도 아내를 지키지 못할 것이 뻔했지." 뭄토는 생각난 것처럼 접칼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접었다 폈다 하 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난 숙원을 추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최후의 대장간에서는 괜찮은 칼을 팔더군. 아무래도 오랫동안 돌아다니려면 이런 것이 좋 겠지. 이 칼을 산 다음 최후의 대장간을 나왔어. 그리고 천천히 숙원 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지. 그런데 라호친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뭘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곳저곳에서 잡일 하면서 지러쿼터 산맥을 따라 나로이까지 갔어.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대충 이 년 쯤 걸렸 을 거야. 하지만 그 때까지도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고." 아실은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아실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 뭄토는 고 개를 돌렸다가 아실이 무엇을 하는지 확인하고는 다시 손에 쥔 접칼 로 시선을 옮겼다. "나로이에서 더 남쪽으로 갈 수는 없고, 그래서 난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바꿨어. 발케네에서 요새를 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거기서 잡역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그 때까지 지났던 길을 다시 되짚어 걸었지. 같은 길을 두번째로 걸으니 전에는 못봤던 것들 이 눈에 들어오더군." "뭐가 보였죠?" 뭄토는 하얀 지평선을 쳐다보다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카시다의 거지가 되는 것이 좋겠냐, 살본의 농장주가 되는 것이 좋 겠냐?" "대체로 농장주겠군요." "그럼 살본의 농장주가 되는 것이 좋겠냐, 시모그라쥬의 공작이 되 는 것이 좋겠냐?" "좋아요. 사람들 사이에는 지위의 높낮음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리 고 높은 지위가 인기 있는 편이고요. 당신이 본 것이 그거라면, 참 대단한 발견을 했군요." "내가 바본줄 알아? 내가 본 것은 그게 아냐. 나는 조금 더 생각해 봤단 말이야.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건 그걸 골랐 다는 말이야. 알겠어? 돌과 금덩이 사이에서 금덩이를 고르는 것처 럼. 금덩이가 더 좋은 거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뭔가가 좀 이 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뭐가 이상하죠?" "왜 돌과 금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지? 둘 다 가지면 안 되나? 돌도 가끔은 쓸모가 있어. 누군가에게 집어던지려면 금보다는 돌이 좋지. 그러니 금도 가지고 돌도 가지면 되잖아. 그런데도 그 중 하나를 골 랐다면, 그건 둘 다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 "아하?" 아실의 반응은 어정쩡했지만 뭄토는 만족한 것 같았다. 뭄토는 으시 대는 투로 말했다. "그게 사람들이 모르는 거야.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싶어해.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높은 지위가 좋은 거니까 그런다고 말하겠지.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더 정확한 대답은 사람이 한 번에 하나씩만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지. 그렇기 때문에 고르 는 일이 필요한 거라고." "그래서 뭐든지 될 수 있는 것이 되기로 결정했다는 거예요? 하나를 고르기 싫어서?" "우습게 들리냐? 그런데 니어엘 헨로가 너희들을 몰아붙일 때 썼던 수법이 그거였어." 아실은 긴장했다. 그 인간 수교위가 6년 동안 제국 전체에 위명을 떨쳐왔던 그들을 엄청난 곤경에 몰아넣은 사실은 절대로 잊을 수 없 었다. "무슨 수법인데요?" "그 수교위는 너희들이 갈 길이 둘이면 내버려뒀어. 셋이면 그 중 하나를 막았고. 그래서 너희들은 항상 갈 길이 둘 이하였던 거야. 그 러면 선택을 해야 하지. 알겠어? 선택이라고. 금과 돌 중에 금을 고 른 것처럼. 그런데 금을 고르면 너희들에겐 돌이 남지 않아. 뭔가를 집어던져야 할 때 집어던질 것이 없는 거지." 퍽 은유적인 표현이었지만 아실은 그 의미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 다. 나나본 북부 지역에서 이틀 동안 겪었던 일을 분노 속에서 재구 성해 본 아실은 니어엘이 그들을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 깨달았다.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나루터로 가게 되었지. 하지만 너희들이 다른 길로 못간 것은 니어엘 헨로 때문이 아니야. 그 수교위가 반을 막았고, 나머지 반은 너희들 스스로가 막았지. 애초에 니어엘에겐 모 든 길을 막고 너희들을 몰아붙일 병력은 없었거든." "제기랄." 아실은 그 말을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고 싶었다. 정말 제기랄이다. 뭄토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알았어. 다른 사람들이 못하게 하는 것이 아냐. 자기 스 스로 포기하는 거야. 사람은 사실 온갖 것이 될 수 있어. 용만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뭄토는 생각난 것처럼 접칼을 위로 들어올렸다. "이 칼을 봐. 멋있잖아? 최후의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은 참 멋진 생 각을 했어. 이것 봐. 이건 칼도 되고 도끼도 되고 톱도 돼. 여기, 이 부분 보여? 밧줄 자를 땐 그만이지. 밧줄에 대고 그냥 잡아당기면 싹 둑싹둑 잘린다고. 바로 이거야. 칼과 도끼와 톱을 다 들고 다닐 수는 없어. 하지만 이런 것이라면 하나만 들고 다녀도 되지. 일인일인이 지.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어. 한 사람이 카시다의 거지와 살본의 농장주, 시모그라쥬의 공작이 동시에 될 순 없어. 하지만 그 모든 것 이 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한꺼번에 그 셋이 된 것과 다름없지. 그 렇잖아?" 뭄토는 웅대한 계획이라고 평가해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아실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아실은 심드렁한 동작으로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 다. "어떻게 그런 것이 된다는 거죠?" "그건 네가 알려줘야지." "저요?" "그래. 너. 지멘은 레콘이면서 배를 탔어. 레콘도 되고 인간도 되는 것이 된 셈이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뻔해. 어제도 말했듯이 그건 네 덕택이야. 싫다고 말해도 돼. 안된다고 말해도 되고. 난 신 경 쓰지 않을 테니까. 물론 대가는 지불할 거야. 황제를 죽이면 되는 거지? 그러니 너는 나를 도와야 해." 뭄토는 다시 자신의 접칼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것이 되도록." 그 순간 안대를 만지작거리던 아실의 손가락이 안대 아래로 파고들 었다. 그 손가락들은 안대 안쪽에서 조그맣고 동그란 물체를 끌어냈 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 날렵한 동작이었다. 아실은 그 물건을 손바닥 안에 숨겼다. 뭄토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아실은 헛기침을 했다. "목이 메는군요. 마실 것 좀 줘요." "아, 그래." 뭄토는 음식물이 담겨있는 바구니로 몸을 돌렸다. 아실은 재빨리 손 바닥 안에 있는 물건을 엄지로 비틀었다. 뭄토가 커다란 술주머니를 건네자 아실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마개를 뽑은 아실은 술 주머니의 주둥이를 입가로 가져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실은 손안에 감추고 있던 물건으로 술주머니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왼손 엄지로 그 물건을 꽉 누른 아실은 술주머니 를 위로 들어올렸다. 아실의 모습은 술을 마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입 안으로는 한 방울의 술도 들어가지 않았다. 술주머니를 아래로 내린 아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뭄토의 시 선을 자신의 얼굴쪽에 고정시키면서 술주머니의 입구를 막았던 물건 을 다시 손 안으로 회수한 아실은 투덜거렸다. "차가워서 못 마시겠어요. 얼음장 같잖아." "얼어붙지 않은 것이 다행이야. 내가 바구니를 계속 겨드랑이에 끼 고 있었거든." "마셔봐요. 뱃속이 얼어붙는 것 같을걸." 뭄토는 선선히 술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부리로 주둥이를 문 뭄토는 그것을 위로 죽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아실은 손 안에 든 물건 을 비틀었다. 조금 후 그 물건은 아실의 장갑 속으로 사라졌다. 꿀꺽꿀꺽 하는 소리를 내며 술을 마신 뭄토는 부리를 한 번 딱 부딪 혔다. "마실 만한데, 뭐. 인간은 허약해서. 하긴 내가 필요한 건 힘이 아 니지만. 음?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뭄토가 바라본 아실의 입매에는 경멸감이, 그리고 그 눈에는 동정심 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아실은 걸터앉아 있던 바구니에서 일어서서 그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뭄토를 향해 인간이 레 콘을 상대로 거의 지어보이지 않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은 싸늘 한 조소였다. 그 표정을 이해한 뭄토는 분노를 느꼈다. "너 지금 나를 비웃고 있는 거야?" 아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차갑기 그지 없는 조소로 뭄토 를 훑을 뿐이었다. 뭄토는 깃털을 조금씩 부풀렸다. "비웃는 것은 가만 놔두지 않겠어. 나와 함께 다니려면 그것부터 알 아야 돼." "제가 당신을 따라다닐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죠?" "마음대로 그렇게 말해.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저를 보내주지 않으면 지금 당장 당신을 해치겠다는 건 어때요? 그 말에도 신경 쓰지 않을 건가요?" 뭄토는 껄껄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거 참 위험한 계획인데. 말리고 싶어. 나를 해치면 너 혼자서 최 후의 대장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텐데. 그리고 라호친으로 가는 것 도 어려울걸. 넌 여기에서 어디가 더 가까운지도 모르잖아." "왜 혼자서 돌아간다는 거죠?" "나를 해치겠다면서? 여기에 나와 너 말고 누가 있지?" 아실은 한층 더 차가운 눈으로 뭄토를 노려보았다. 뭄토는 어쩐지 더 웃고 싶지 않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웃음을 거둘 수도 없었 고, 그래서 뭄토는 꽤 이상한 얼굴을 하게 되었다. 아실이 음식물이 담겨 있던 바구니를 가리켰다. "저거 샀을 때 기분 좋았지요?" 뭄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젯밤 뭄토는 아실의 소지금을 빼앗아서 온갖 물건과 음식을 구입했다. 굶어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지멘 과 아실을 추적해온 뭄토에겐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 만 뭄토는 그것으로 아실이 생색을 내려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쫄쫄 굶으면서 따라온 보람이 있었다고 좋아했겠지요. 이것도 사 고, 저것도 사고, 그것도 사겠어! 기억이 나는군요. 어떻게 흥정 한 번 안하고 사는지." 뭄토는 드디어 분노를 느꼈다. "내가 네 돈으로 저 따위 잡동사니를 좀 산 것 가지고 나를 업신여 긴다면-" "저는 물건을 판 상인들이 저와 당신에 대해 지멘에게 알려줄 수 있 다는 사실을 당신이 떠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워요." 뭄토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그는 아실이 무슨 희망을 품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하, 그래서 지멘이 쫓아올 거라고? 너 내가 완전히 바보인 줄 알 고 있군. 물론 그 장사꾼들은 네가 어떤 레콘과 함께 있었다는 이야 기를 지멘에게 해줄 수 있겠지. 하지만 최후의 대장간에 레콘이 얼마 나 많은데? 지멘은 거기 있는 레콘들을 전부 만나봐야 할 걸. 게다가 너를 찾으려면 그 레콘들의 소지품을 다 조사해봐야할 테고 말이야. 지멘은 지금 우리를 쫓아오고 있기보다는 다른 레콘들과 싸우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말을 끝낸 뭄토는 심술궂게 아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실 은 그가 기대한 만큼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조금도 실망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실 또한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단지 시간을 끄는 것 뿐이었다. "그럼 당신을 처리하는 건 제몫이겠군요." 뭄토는 숨가쁠 정도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의 끝에서 뭄토는 갑 자기 격한 기침을 토했다. 자신의 상태에 의아해 한 뭄토는 앉은 자 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허리까지만 전달되었다. 뭄토는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보던 뭄토가 말했다. "뭐야, 이거?" "움직이기 힘든가 보군요." 뭄토는 초조하게 투덜거리며 다리를 움직여보려 애썼다. 그러나 소 득은 없었고 뭄토는 손조차 말을 듣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사실에 직 면해야 했다. 억지로 팔을 움직여보려던 뭄토는 그대로 땅에 곤두박 질쳤다. 거대한 몸이 땅에 부딪히며 커다란 충돌음이 일어났다. 뭄토 는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외침이 계속되었 다. 창에 맞은 사슴이 그러듯 뭄토의 팔다리가 땅을 마구 때렸다. 그 때마다 얼음이 퍽퍽 부서졌다. 아실은 뭄토를 완전히 무시하며 먼 하 늘을 바라보았다. 뭄토의 몸부림이 점점 느려졌다. 강맹한 레콘의 정신에 두려움이 스 며들었다. 뭄토는 충혈된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실은 세상에 뭄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뭄토가 헐떡이며 말했다. "이거, 네가 한 짓이야?" 아실의 입이 조금 열렸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뭄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지멘은 어제 나를 엄청나게 화나게 했어." 뭄토는 실망감 속에 용을 쓰며 일어나려 했다. 다시 거칠게 발버둥 을 치는 그의 모습을 아실은 무시했다. "껄렁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을 때 그 나쁜 자식에겐 부인이 셋 있 었지. 그리고 타이모를 네번째 부인으로 삼고 싶어했어. 타이모가 만 약 결혼했었다면 간단했을 테지. 남편을 두드려팬 다음 타이모를 뺐 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타이모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 었어. 지멘은 좀 곤란했을 거야. 그런 상황이라면 그냥 남편을 가진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나는 것이 더 화끈하고 재미있는 일이겠지. 피가 끓는 레콘 신부탐색자는 대부분 그렇지. 하지만 지멘은 그냥 우리 옆 에 눌러앉았어. 그리고 타이모를 돕는 척했지. 솔직히, 좀 놀랐어. 레콘이 마치 여자를 감동시키려는 인간 남자처럼 그랬으니까. 어떻게 보면 좀 순진하게 보였어. 그래서 마음에 들었지. 타이모를 정말 사 랑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몸토는 빙판에 닿아있는 부분들의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뭄토는 갑자기 지금 일어서지 못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확신 을 느꼈다. '왜?' 죽기 때문이다. '죽어?' 뭄토는 깃털이 뽑혀나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내가 죽는다고?' "그런데 어제 지멘은 황제를 죽이기 위해 다른 레콘들과 힘을 합치 자고 이야기했어. 타이모가 오래 전에 하려고 했던 일을 이제야 떠올 린 거라고. 화가 안나게 생겼어? 누구는 지난 6년 동안 계속 그 생각 만 해왔는데." 뭄토는 절망감 속에서 떨어뜨린 접칼로 손을 뻗었다. 혼자 죽을 생 각은 없었다. 죽음이 확실해지면 뭄토는 아실에게 접칼을 집어던질 작정이었다. 그 때 아실이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네 헛소리를 듣고나서 나는 지멘을 용서하게 됐어." 뭄토는 절망적인 신음을 흘렸다. 다가온 아실은 그의 접칼을 발끝으 로 끌어당겼다. 두 손으로 묵직한 접칼을 들어올리는 아실을 보며 뭄 토는 분노했다. 아실은 경멸스러운 눈으로 칼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일에 다 쓸 수 있는 도구라고? 왜 레콘이 온갖 일을 다 해야 하는데? 왜 모든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아야 하는데? 레콘이 받아야 할 갈채는 자기 자신의 것 뿐이야. 레콘은 딱 한 사람만 만족시키면 돼. 자기 자신! 그런데 너는 인간처럼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해. 그러니 모든 것이 되어야 하지. 네가 뭐가 된 건지 알아? 하늘누 리 위에 있는 그 잡년이 기르고 싶어하는 가짜 레콘이 된 거라고. 이 빌어먹을 칼을 보니 그 년은 이미 상당히 성공하고 있는 것 같군." 아실은 뭄토에게서 꽤 떨어진 위치에 접칼을 떨어뜨렸다. 얼어붙은 쇠구슬을 삼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실이 말했다. "헤치카는 너 같은 가짜 레콘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지. 혼자서는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결정하지도 못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 는 레콘. 겉모습만 레콘인 가짜 레콘. 황제가 마음대로 기를 수 있는 레콘. 절대로 안돼. 이젠 더 미룰 수 없어. 황제를 죽여야 해. 아직 세상에 지멘 같은 진짜 레콘들이 남아있는 동안에, 레콘이 무엇인지 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더이상 뭄토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뭄토는 그 사실에 화를 내다 가, 무서워하다가, 마침내 익숙해졌다. 뭄토는 놀랄 만한 편안함을 느꼈다. 평소에 신경 쓰지 않았던 몸의 부분들에서 알싸한 쾌감이 번 져나오는 것 같았다. 거대한 도취감 속에서 뭄토는 평생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틀림없다. 뭄토는 행복했다. 별이 소 용돌이치는 밤하늘을 향해 걸어올라가면서 티나한도 아마 이런 기분 을 느꼈을 것이다. 아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뭄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실은 장갑 속에 넣어둔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의안과 비슷한 크 기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것은 의안이다. 그러나 의안이 시력을 되찾아주거나 하지는 않고 다만 미관상의 효과만을 가 지고 있는 물건이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의안이 아니다. 그것 에는 미관상의 효과가 전혀 없다. 아실은 안대를 이마 쪽으로 밀어올렸다. 휑하니 뚫린 눈구멍이 드러 났다. 아실은 혹한의 바람이 그 눈구멍으로 들어와 머리속을 헤집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람이라곤 한 점도 없었지만. 아실은 손에 쥐 고 있던 물건을 눈구멍 속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안대를 다시 원위치 로 가져왔다. 아실은 바구니에 걸터앉았다. 뭔가 미진한 것 같았다. 아실은 앞머 리를 끌어당겨 안대를 덮어보려 했다. 그녀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 다. "가짜 레콘." 뭄토에게 말할 때와 달리 이제 그 말을 듣는 것은 그녀뿐이었고, 그 래서 아실은 그 말이 가지고 있는 무서움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소 름 끼치는 말이었다. 아실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것이 모든 통증을 물리치는 마법의 말인 것처럼 분리주의에 대해 암송했다. '타이모의 분리주의는 배타적 동포주의나 특권의식과는 무관하다. <빌어먹을. 나는 열여덟 살이야.> 실존이라는 개념이 당신들에게는 발견된 것일지 몰라도 레콘에겐 그렇지 않다. 만물이 당신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간단하다. <나는 열여덟 살. 눈은 하나뿐이고 나머지 눈은 특제 약병이지.> 여기서 평가가 이루어지고 가치가 발생한다. 그리고 유일하며 끔찍한 선택이 시작된다. 자신과 만물을 분리하고 두 세계의 연결자인 두번째 자아를 생성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만물을 통합하고 그것을 전체 계로 규정한 다음 자신 을 계의 조정자가 되게 할 것인지. <제기랄. 내 아랫배에 들어온 씨 발 도깨비, 거기서 불장난을 쳐도 좋다고 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세상에는 망령 같은 두번째 자아가……' 아실은 실망했다. 분리주의의 철학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입 을 때리듯 틀어막았다. 혹한의 추위 속에선 눈물이 얼어붙을 위험이 있다. 아실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아랫배가 불타는 듯한 통증은 끔찍했다. 아실은 호소하는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문득 눈길이 머문 하늘 저편의 색깔이 이상했다. 이곳의 기후에 익 숙한 것은 아니지만 아실은 그것이 폭풍의 징조인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폭풍이 몰아친다면 그녀는 살아남기 힘들 것 이다. 당장 어딘가로 움직이는 편이 좋을까? 그것이 아실의 계획이었 다. 뭄토를 무력화시킨 다음 빙원에 남아있는 뭄토의 발자국을 되짚 어 걸어가는 것. 하지만 뭄토가 쓰러진 지금 아실은 갑자기 긴장감이 사라진 빈 자리에 찾아온 허탈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무력감만 느꼈다. 아실은 멍한 기분으로 지멘이 뒤쫓아오리라 생각했다. 지멘에겐 아실을 뒤쫓을 방법이 없었다. 뭄토가 말한 것처럼 지멘은 어느 레콘이 아실을 납치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레콘들을 구분짓 는 것은 각자가 가진 무기지만 뭄토의 접칼은 기성품이다. 그 외에 뭄토가 가진 특징은 체구가 좀 작다는 것뿐이다. 최후의 대장간을 샅 샅이 뒤진 다음에는 이쪽으로 달려올지도 모르지만 그 때는 아실이 얼어죽은 후일 것이다. 지멘은 올 수 없다. 지멘은 올 거야. 아실은 이것이 자신의 목이 걸릴 밧줄을 꼬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일어서서 뭄토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이 쓸쓸한 세계 속을 홀로 걷는 것이…… 쓸쓸한 세계? 쓸쓸한 세계. 시간과 결별한 이 땅의 모습은 시원의 시랍 같았다. 아실은 이성의 박탈감을 느끼며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변하지 않았고 변하 지 않을 세계. 문득 아실은 자신이 한 마리 무당벌레 같다고 생각했 다. 시간이라는 밧줄 위를 걸어가는 조그마한 무당벌레. 밧줄의 뒤쪽 을 일백년, 그리고 앞쪽을 일백년 정도 늘이면 작은 무당벌레를 찾는 것은 힘들다. 앞쪽을 일만년, 뒤쪽을 일만년 정도 늘인다면? 극히 드 문 우연이 아니고선 무당벌레를 찾을 수 없다. 일억년씩 늘인다면? 밧줄 위를 걷는 무당벌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무 당벌레는 없다. 아실의 몸이 다급하게 경련했다. 아실은 겨드랑이에 두 손을 묻은 채 황급히 일어섰다. 아실은 지평선을 따라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두 바퀴를 돈 아실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나는 없다. "나는 가짜가 아니야!" 아실은 두 손을 입 앞에 모으고 힘껏 외쳤다. "나는 가짜가 아니야!" 그녀는 몸을 돌려 또 외쳤다. "가짜가 아니라고!" 전후좌우를 향해 외친 아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외쳤다. "나는 나다!" 몸서리 쳐질 만큼 유치한 행동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아실은 몸 속의 피가 더 빨리 흐르는 것을 느꼈다. 딱딱한 등 아래에 무당벌레 는 날개를 숨기고 있다. 무당벌레는 밧줄을 박차고 날아오를 수 있 다. 날개의 힘이 다하면 바닥 없는 심연으로 떨어질 테지만, 추락도 방향이 다른 상승이니. 뭄토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자. 어쨌든 최후 의 대장간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편이……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크고 난폭한 소리. 아실에게 그 소리는 하늘의 빛깔보다 더 확실한 폭풍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아실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는 걱 정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그녀가 보고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아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하얀 세계에 대한 모욕적인 침범을 발견했다. 언젠가 그녀를 죽일 검은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아실은 미소지 었다. 지멘은 꽤 먼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다가섰다. 다가오면서 지멘은 쓰러져 있는 뭄토와 아실의 무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해야할 행동도 정리했다. 그래서 지멘은 아실을 내버려둔 채 우선 무릎을 꿇 고 뭄토의 몸을 건드려보았다. 몇 번 뭄토를 흔들어본 지멘은 아예 그 몸을 뒤집어놓았다. 뭄토의 몸은 지멘이 다루는 대로 힘없이 움직 이다가 빙원 위에 똑바로 눕게 되었다. 똑바로 일어선 지멘은 그제서야 아실 쪽을 돌아보았다. 아실이 말했 다. "어떻게 찾아왔죠?" 지멘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마치 자 신도 아실이 꺼낸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 다. 아실은 재촉했다. "예? 어떻게 찾아왔어요?" "어떤 레콘이 그 애를 데려갔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 애 는 멍청한 레콘에게 한 시간 이상 붙잡혀 있을 아이가 아니다. 그래 서 나는 틀림없이 대장간을 떠난 거라고 추측했지. 최후의 대장간을 나와 남쪽으로 달리며 몇백 미터마다 한번씩 높이 도약하여 발자국을 찾았지. 그리고 그것을 발견했어." 아실은 그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아실이 그 상황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려 할 때 지멘도 그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 느낌이 그랬다." "느낌?" "왜 그 애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 느꼈을까." 아실은 말을 할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그 느낌이 맞아서 다행이네요." 지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실은 시선을 이리저리 방향 없이 흔 들다가 말했다. "좀 늦었네요." 지멘은 그 표현이 중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찾아온 것이 늦었다 는 의미도 되고 타이모의 사상을 이해한 것이 늦었다는 의미도 된다. 지멘은 그것에 대해 사과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먼저 사과한 것 은 아실이었다. "미안해요." 지멘은 눈을 크게 떴다. 아실은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진작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겠지요. 예. 우리가 모아둔 돈을 풀 어 레콘 용병을 살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많은 레콘이라는 것은 의미 가 없어요. 쥐딤에서 이미 증명되었어요." 지멘은 탄성을 지르고 싶었다. 그곳에는 무수한 레콘이 있었고, 교 활한 계략에 의해 제국군의 명령 체계까지 파괴했지만, 그들은 패배 했다. 그 때 무수한 레콘은 아무런 힘도 되지 않았다. "6년 전에는 차라리 변명거리라도 있지요. 그 때 저는 스카리 빌파 만을 겨냥하고 있었지 엘시 에더리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엘시 에더리라는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어요." 지멘은 아실이 말하는 엘시 에더리가 대지진, 태풍, 화산폭발, 유성 낙하 등과 비슷한 어조로 발음된다고 느꼈다. 지멘이 철의 대화를 하 도록 유도할 정도로 배짱 좋은 그녀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가 제국만병장이다. 그리고 지멘은 그 두려움이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하 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들이 패배하고 타이모가 쟁룡해에 빠지고 무 수한 레콘이 절망도로 가야 했던 것은 그들이 엘시 에더리라는 한 명 의 인간을 몰랐기 때문이다. 아실이 말했다. "우리가 용병을 모은다는 소식이 들리면 틀림없이 엘시가 오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똑같은 패배를 또 겪게 될 테고요. 안돼요. 지난 6년 동안 확인했던 것처럼 적을수록 가볍고 좋아요. 치천제는 단지 두 명 의 수배자를 붙잡기 위해 엘시를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돈이 아까워 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멘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로 했다. "이 애가 모아둔 돈은 건국자금이지." 아실은 충격에 빠진 눈으로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황제를 죽인 후 발생하게 될 혼란기에 사용할 자금이지. 타이모의 유지를 이은 독립국의 건설. 그것이 이 애의 소망이지."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이 깨달은 거예요?" "살인기사는 그렇게 말했지." "제이어 솔한이? 제이어가 그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당신한테?" 지멘은 그 날 새벽에 일어났던 일을 아실에게 들려주었다. 혼잣말의 형태로 바꿔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좀 많이 걸리긴 했지만 아실은 무 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실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 장난꾼, 정말 사람 미치게 하네!" 분노의 말과 행동으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던 아실은 지멘의 배낭을 가리켰다. "꺼내봐요! 직접 말해야겠어요." 지멘은 무엇을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멘이 꿈쩍도 하지 않 는 것을 본 아실은 고개를 갸웃했다. "배낭에 넣어오지 않았어요? 그러면 마지막 대장간에 묶어뒀어요?" 지멘은 당혹했다. 아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지멘을 바라보다가 뚝뚝 끊어서 말했다. "설마, 우리를 한 번 보지도 않은 주제에, 계속 함께 다녔던 당신도 알지 못했던 제 속셈을, 다 짐작해버리는 영리한 녀석을, 그냥 내버 려두고 온 것은, 아니겠죠?" 지멘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제서야 지멘은 아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지멘은 아실이 기대하는 행동을 자 신이 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해했다. 지멘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실은 곧 상황을 파악했다. "아아, 내가 미쳐! 그 장난꾼이 뭣때문에 우리를 돕는 건지 모르잖 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떠들지도 모르고요! 제이어가 한동안은 황제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우리 일을 입 다물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정신 나간 녀석은 한 달 쯤 지난 후엔 광신적 애국자로 바 뀌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요. 그의 입을 막아야 해요! 어서 가요!" 아실은 들어올려달라는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지멘은 움직이지 않 았다. 아실은 분노와 의문이 뒤범벅된 얼굴로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지멘은 가는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 애는 뭄토처럼 제이어도 죽일 작정인 걸까." 아실의 몸이 굳었다. 애꾸눈 소녀는 하나뿐인 눈에 큰 의혹을 담은 채 지멘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뭄토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뭄토를 용서했다. 결국 이 자는 못쓰게 변한 레콘일 뿐이고 그것은 이 젊은이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가 황제들의 잘못이다. 원시제와 치천제의 통치 기간 동안 레콘은 천박한 것으로 바뀌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제작되는 도구들은 혐오스러운 것들이 다. 온갖 용도에 쓰일 수 있는 그 칼들은, 레콘에게 하나의 숙원을 위해 달려가는 대신 황제를 위해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하라고 요구 하는 치천제의 명령이나 다름없다. 나가 황제들이 만든 세상이 잘못 된 것이고, 뭄토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하지만 이 애는 방해가 된 다는 이유로 뭄토를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또 제이어 솔한이 자신 의 계획을 짐작할 수 있는 명석함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를 죽 이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거들고 싶지 않다." 지멘은 망치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아실은 지멘의 망치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망치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실은 지멘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아실은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과거의 어느 시점, 지멘이 틀 림없이 잊고 싶어할 어느 시점 격분한 지멘은 아실에게 철의 대화를 요구했다. 분노한 레콘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고 오직 격투로써 견해차를 조정하겠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것이 철의 대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공격하면 된다. 그로써 철의 대화가 시 작된다. 둘 중 하나가 죽을 테니 견해차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래서 지멘은 아실에게 말을 할 수 없다. 대화를 거부했기 때문이 다. 그리고 지멘은 아실을 공격할 수도 없다. 아실이 아직 그를 공격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실이 지멘을 향해 작은 비수 하나를 휘두르 기만 해도, 그것이 지멘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철 의 대화는 시작되고 지멘은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아실은 아직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아실은 공포 없이 말했 다.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는 건 아는군요." 지멘은 무거운 눈길로 동의했다. 아실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마지막 대장간의 그 칼들, 제대로 봤어요. 징그러운 물건이죠. 그 렇다면 당신은 그것도 짐작하겠군요. 이 녀석이 처음이긴 하지만 앞 으로 이런 녀석들을 많이 보게 될 것." 지멘은 그것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멘의 오해였다. 아실은 웃음을 터뜨렸다. "젠장. 이런 가짜 레콘을 볼 때마다 죽인다면 저는 페시론섬에 상륙 한 도깨비 무사장의 기록에 도전할 수 있겠군요." 지멘은 당혹했다. 아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죽었어요." "뭄토…… 는 안 죽은 것일까?" "안 죽었어요! 세상에는 당신들도 몇 방울로 때려잡는 독이 있을지 도 모르지만, 저는 그런 독은 구경한 적도 없어요. 설령 가지고 있다 해도 바보를 닥치게 하느라 그 아까운 걸 쓰지는 않을 테고요. 반나 절이나 하루 쯤 잔 다음 깰 거예요. 물론 깨고 나서 머리도 아프고 속도 좀 뒤집힐 테니 몸조리는 해야겠지만, 어쨌든 죽진 않아요. 그 리고 제이어 솔한도 죽일 생각 없어요." 당황한 지멘은 애꿎은 수염볏을 이리저리 비틀며 말했다. "음,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살인기사의 입을 막을 수 있을까.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 그에게 약속을 받을 수도 없을 테고……" "제이어가 장난꾼이라고 여러 번 말했잖아요. 장난꾼이라면 어떤 종 족이 떠오르죠? 도깨비죠. 그런데 도깨비 잡는 건 뭐죠? 세 명의 이 야깃꾼이죠. 알겠어요?" '모르겠는데.' 지멘의 불쌍한 얼굴을 본 아실은 핏 웃었다. "제이어에게 엉터리 추리를 할 정보를 잔뜩 들려주면 돼요. 그가 노 선을 바꾸면 더 쓸모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거죠. 젠장. 제가 살인 기사를 왜 죽여요? 돌아다니면서 벼락이나 끌어내리게 하는 편이 훨 씬 좋은데. 우리에게 그런 것처럼." 그 대답이 지멘에게 남은 마지막 불안도 걷어갔다. 지멘은 만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오해했군. 이 애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죽이지 않을 작정 이군. 타이모도 이 애를 자랑스러워할 테지. 그녀가 꿈꾸었던 레콘 독립국이 무고한 이들의 시체 위에 세워지는 것은 그녀 또한 바라지 않을 테니." '무고한 이들의 시체?' 아실은 그 말이 거슬렸다. 아실은 즈라더를 죽인 것은 누구냐고 묻 고 싶었다. 그러나 아실은 그 말을 꺼내기 직전 도로 삼켰다. 두 가 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아실은 즈라더의 죽음을 무고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즈라더와 지멘의 대결은 공정한 결투였고 만약 즈라 더에게 승기가 있었다면 납병을 한 사람은 지멘이 되었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아실이 더욱 주목한 것은 두번째 이유였다. '죽음? 당신, 그 나룻배 위에서 죽음을 봤어요?' 아실은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나룻배 위에서 보낸 몇 분 동안 레콘 지멘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다. 갑자기 아실은 지멘이 죽음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의 죽음은 약속 되어 있다. 3 미터를 훌쩍 넘는 검은 레콘이라는 형태로. 하지만 지 멘은 그렇지 않다. 지멘은 강력했다. 신부탐색자 시절에도, 그리고 6 년 동안 계속된 도망자 시절에도 그는 한 번도 죽음의 위협 앞에 진 지하게 노출된 적이 없다. 물웅덩이 사이에서 보낸 하룻밤과 배 위에 서 보낸 몇 분을 통해 죽음을 경험한 지멘은 이제 다른 이를 죽이는 일에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실은 그것을 반길 수 없었다. 아실은 지멘의 벼슬 아래를 꿰뚫어보고 싶다는 눈으로 지멘을 바라 보았다. 지멘은 아실의 그런 눈을 깨닫지 못했다. 다시 허리를 굽힌 지멘은 뭄토에게 호흡이 있는지 확인했다. 뭄토가 미약하지만 호흡을 계속하 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지멘은 만족한 모습으로 일어섰다. 주위를 잠 깐 둘러본 지멘은 뭄토가 잠들기 전 무엇을 먹었음을 확인했다. "식사를 잘 했다면 레콘은 이런 날씨에 잠들어도 크게 해를 입지 않 는다. 뭄토는 여기 놔두고 가도 되겠군." 그리고 지멘은 아실의 몸을 들어올렸다. 지멘의 배낭 속에 자리를 잡게 된 아실은 그 익숙한 자세가 마음의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깨달 았다. 결국 아실은 지멘에 대한 우려를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당면 한 문제는 살인기사였다. 지멘이 달리기 전, 아실은 뭄토를 한 번 돌아보았다. 하얀 빙원 위 에 똑바로 누워있는 뭄토의 모습을 보며 아실은 고소를 머금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뿐이야. 뭄토. 최후의 대장간으로 돌아가는 지멘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뭄토와 아실의 뒤를 쫓아올 때 전속력으로 달렸기 때문에 그는 지쳐 있었다. 아실은 조바심을 느꼈지만 지멘을 보채지는 않았다. 지멘을 더 지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위험은 어차피 그들의 일상이었다. 아 실에게는 두 사람이 이제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아실은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이어 솔한이 사 라졌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도 아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화를 내지 는 않았다. 그들이 머물던 여숙으로 돌아온 것은 짧은 낮이 저문 뒤였다. 여숙 은 저녁 준비로 바빴고 지멘과 아실은 겨우 종업원 한 사람을 붙잡을 수 있었다. 제이어가 몇 시간 전에 떠났음을 알려주던 종업원은 갑자 기 뭔가를 떠올렸다. 지멘과 아실을 놔둔 채 잠깐 사라졌던 종업원은 곧 봉투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그 분이 두 분께 남긴 편지입니다." 제이어를 추적하기 위해 다시 떠나야 하나 고민하던 아실은 그 봉투 를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제이어는 붙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추격과 귀환으로 지친 지멘을 다시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는 것도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달가운 결정은 아니지만 빨리 결정을 내 린 아실은 곧 종업원에게 하루 더 머물겠다고 말했다. 아실이 말하는 것을 듣던 지멘은 말없이 그 결정을 따랐다. 방으로 안내된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가까이 마주 앉았다. 아실 은 봉투를 열고 그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 내용은 짧은 문장 하 나였다. 아실은 그것을 두 손으로 들고 바라보다가 뒤집었다. 그리고 지멘의 눈 앞으로 내밀었다. 지멘은 그 내용을 보았다. '하텐그라쥬를 주목하십시오. 여러분의 벗.' "하텐그라쥬." 지멘의 말을 들은 아실은 그 편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턱 을 만지작거리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하텐그라쥬라면 아스화리탈과 뇌룡공이 있는 곳이잖아요. 그리고 대호왕과 원시제도 그 도시 출신이고…… 하지만 그 도시는 제 2 차 대확장 전쟁 때 파괴되었잖아요. 거기엔 심장탑이 없어요. 따라서 치 천제의 심장병이 거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지멘은 벼슬을 꿈틀했다. 아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예. 심장병이에요. 제이어 솔한은 치천제의 심장병이 지도그라쥬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하텐그라쥬를 주목하라는 군요. 그렇다면 하텐그라쥬에 치천제의 심장병이 있다는 의미가 되겠 지요." 지멘은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아실의 말대로였다. 비록 제이어 솔한 의 동기나 욕망에 대해 그들이 아는 것은 거의 없거나 혹은 모호한 것뿐이지만,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은 치천제의 심장병에 대한 이야기 였다. 아실은 뒷통수를 긁적였다. "젠장. 하필이면 제국 최남단의 도시를 주목하라는 거야? 우리는 제 국 최북단에 있는데. 여기서부터 거기까지 거리가…… 걷는 거리로 따지면 말도 하기 싫을 정도가 되겠군요." 실질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실을 바라보던 지멘은 갑자기 그녀가 하텐그라쥬로 갈 작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애는 제이어 솔한을 믿는 것일까." 아실은 코방귀를 뀌었다. "믿냐고요? 아뇨. 절대로 안 믿어요." "이 애는 하텐그라쥬로 갈 작정인 것 같은데."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는 세상의 북쪽 끝에 있어요. 여기서 어디로 간다면 남쪽밖에 없죠. 그리고 하텐그라쥬는 제국의 남쪽 끝 에 있고." 말을 끝내려던 아실은 그것이 지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금 생각한 다음 말했다. "제가 믿는 것은 제이어 솔한이 아니라 제이어 솔한이 우리에게 하 텐그라쥬에 주목하라고 말했다는 사실이에요. 그건 확실히 일어난 일 이지요. 여기 증거도 있고." 아실은 바닥에 놓인 살인기사의 편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저는 이 사실만 믿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살인기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결정할 거예요." 대장장이 헤치카의 판매대행인이자 세상이 평온한 것은 자신이 세상 을 가만히 놔두기 때문이라는 망상에 빠지는 것을 즐기는 소년인 돔 의 관심은 언제나 최후의 대장간에 들어서는 레콘에게 쏠려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가 답습하고 싶어할 눈초리로 레콘들을 바라보다 가, 얍! 맡겨둔 단검을 이제 가지러 온 거냐? 맡아줘서 고맙다고 말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속에 레콘은 돈을 내놓게 된다. 그 순간은 돔에게 인생의 절정기이며, 따라서 돔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절정을 경 험한다. 그런 돔에게 지멘과 아실을 관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배신처럼 느 껴졌다. 무기를 이미 가지고 있는 지멘이나 레콘의 무기와 완벽히 무 관한 아실에게 자신의 귀한 주의력을 할애하면서, 결국 돔은 도착적 인 즐거움을 느끼기로 했다. 돔은 이미 인생을 알고 있다. 지멘과 아 실이 최후의 대장간을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 헤치카의 작업장으로 뛰 어갈 때 돔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갔어요!" "알았다. 그럼 수고해라." 헤치카의 대답을 들은 돔은 휘파람을 부르며 다시 절정을 맞으러 달 려갔다. 헤치카는 귀엽다는 표정으로 돔의 뒷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떠났다는군." "저도 들었습니다. 그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지요." "더 할 이야기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레콘의 무기만 만들어." "물론이지요. 다른 종족의 무기를 만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하던 일을 말하는 겁니다." 늙은 대장장이 헤치카는 조그마한 인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 간들 사이에서 그가 살인기사라는 기분 나쁜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떠올렸다. "최후의 대장장이께서 확실히 동의했나?" 제이어 솔한은 빙긋 웃었다. 헤치카는 그 웃음이 맑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걸까. 단지 대국 상대자에게 일어난 불상사 를 가지고 그렇게 부른다면 그것은 무례한 일일 텐데. "제가 무슨 경을 칠지 모르니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최후의 대 장장이께서 동의하신 것은 제가 여러분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좋 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겠지요. 사실 그 분 께서는 여러분이 쓰시는 별철을 만들어내실 뿐 여러분이 어떤 무기를 만드는가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재량이지 않습니까?" 헤치카는 피로감을 느꼈다. 제이어의 말은 전부 옳았다. 그러나 제 이어의 요청은 헤치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이 필 요한 것일까. 최후의 대장장이가 대신 판단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헤 치카는 결국 대가 세고 무서움 없는 레콘답게 말했다. "네 후원자는 락토 빌파인가?" 제이어는 곤혹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것은 암살공에게 확인받으셔야 될 질문인 것 같은데……" "락토 빌파인가?" 제이어는 웃음을 거두었다. 살인기사는 헤치카의 시선을 피하기 위 해 주위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거대한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 콘의 병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압도적인 크기의 집게와 망치와 모루와 노. 제이어는 옆을 쳐다보며 말했다. "락토 빌파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락토 빌파인가?" 제이어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는 헤치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 며 말했다. "제 후원자는 암살의 주인입니다." 헤치카는 부리를 한 번 부딪혔다. 그리고 조금 후 다시 그것을 부딪 혔다. 발케네공이 사용하는 감투 문장은 그들 가문에 내려오는 세 개 의 저주 받은 도깨비 감투 이야기에 기인한다. 착용자의 모습을 감추 는 도깨비 감투의 효과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빌파 가문에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도깨비 감투들은 그 이상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 저주 받은 감투들은 열을 보는 나가의 눈에서조차 착용자를 감춘 다. 암살자에겐 최고의 도구라 할 수 있다. 제 2 차 대확장 전쟁의 다급했던 시기, 도깨비 장인들은 나가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런 무서운 물건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을 받은 자 들은 빌파 가문의 세 남자였고, 2 차 대확장 전쟁과 천일전쟁 동안 그들은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천일전쟁이 끝난 다음 그들은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고 아라짓 제국의 황제들은 발케네의 도 둑들 중 가장 우수한 도둑들인 그 남자들에게서 그것을 회수하지는 못했다. 물론 그들이 그것을 정말 잃어버렸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발케네공 자신이 직접 그 감투를 이용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시험 끝에 선택된 암살자에게 그것을 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것을 소재로 한 낭만적이면서 무서운 이야기도 많지만, 어 쨌든 사람들은 그 저주 받은 감투들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때때로 사 용된다고 믿는다. 발케네공은 암살공이며, 그래서 발케네공은 암살의 주인이다. 헤치카는 수염볏을 쓰다듬었다. "내가 만들어야 할 단검이 몇 개라고?" "우선 천 자루입니다."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헤치카는 알 수 없었다. 암살공이 쓰지도 못할 레콘 단검을 천 자루나 필요로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을 인간용 장검으로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검은 단지 크기를 줄여놓은 장검이 아니다. 무게 분포가 완전히 다르다. 헤치카는 무거운 심정으 로 말했다. "좀 생각해 보고 대답해야겠군. 내일 대답해주면 어떻겠나." 제이어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을 보며 헤치카는 다 시 혼란을 느꼈다. 어쩌자고 저렇게 맑은 표정일까. 나이도 적지 않 게 먹은 사람이. 제이어는 간략한 인사를 남기고 헤치카의 작업장을 떠났다. 홀로 남 은 헤치카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머리가 복잡했다. 헤치카는 아실 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제법 안다고 말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 다. 그는 알 수 없었다. 헤치카는 익숙한 작업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기로 했다. 늙은 대장장 이는 턱없이 익숙하기에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을 민첩하게 해 치웠다. 별철을 녹일 준비를 갖춘 헤치카는 자신의 노에 불을 붙였 다. 발로 밟는 풀무를 쓰기에 불을 다루는 일은 그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헤치카는 세심하고도 정이 깃든 손놀림으로 노 속에서 잠든 불씨를 깨웠다. 일어나렴. 일을 할 시간이구나. 늙은 대장장이의 부드러운 손길 속에 불꽃이 잠을 깼다. =============================================================== 챕터 끝났습니다. 헹, 헹씨유쎈, 쪼이와이오 쏭 완 뉜∼♪ 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졌어도, 타자는 쌍드라이버 손에 들고 컴퓨 터를 구하러 갑니다.(비둘기들아, 날아라!)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6. 바람 속의 돌 - 1 어느 날 아라짓 전사와 키탈저 사냥꾼이 함께 사냥을 나 갔다. 한밤중에 그들은 대호의 습격을 받았다. 키탈저 사 냥꾼은 대호의 공격에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아라짓 전사 의 도움으로 간신히 대호를 쫓아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라짓 전사는 다리가 잘리는 극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의 거리는 멀었 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부상자를 데리고 그곳까지 갈 수 있는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키탈저 사냥꾼은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땅에 쓰러져 있는 아라짓 전사를 바라보던 키탈저 사냥꾼은 곧 결정을 내렸 다. 키탈저 사냥꾼은 잘린 다리를 집어들었다. 아라짓 전사는 헐떡이며 질문했다. "왜 그걸 집어드는 거지?" "은인의 다른 부분이여. 이 부분이 더 가벼우니, 마을까 지 가지고 돌아갈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아라짓 전사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페치렌 지방의 오래된 민담 中 딱정벌레 한 마리가 구름을 박차고 새파란 하늘에 뛰어들었다. 높이 치솟아 오른 딱정벌레는 잠시 구름 위를 배회했다. 세차게 움 직이는 속날개에서 부서지는 햇살 때문에 먼곳에서 보는 딱정벌레는 두 덩어리의 빛에 의해 떠받쳐지는 것 같다. 딱정벌레의 등 위에는 고공을 거니는 사람에게 알맞은 복장을 한 인 간 여자가 타고 있었다. 두툼하지만 펄럭거리지 않는 옷 외에 여자는 머리를 둘러싸는 형식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고 동시에 딱정벌레 날개 소리로부터 청력을 보호할 수 있는 적절한 모습이다. 딱정벌레가 전진하는 동안 여인은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땅 은 사방으로 뻗어있었고 그 가장자리들은 면도날로 베어낸 것처럼 깔 끔하지만 동시에 고체도, 기체도 아닌 묘한 물질처럼 출렁였다. 거친 황야와 투박한 산들, 거대하고 납작한 생명체인 양 그 위를 기어 다 니는 구름 그림자. 하늘과 땅 사이를 끊임없이 흐르는, 새들만 들을 수 있는 선율 위를 미끄러지며 딱정벌레와 여인은 무지개가 빚어지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익는 냄새를 맡는다. 그러다가 여인은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여자는 딱정벌레에게 적당한 신호를 보냈고 그러자 딱정벌레가 옆으로 선회했다. 잠시 후 딱정벌레와 여인은 커다란 먹구름으로 다가서게 되었다. 딱 정벌레를 아래로 내려가게 한 여인은 먹구름이 상당히 낮은 위치로 깔려 있는 비구름임을 확인했다. 곧 비를 뿌릴 것처럼 무거운 먹구름 을 빈틈없이 확인한 여인은 다시 딱정벌레를 상승시켰다. 그리고 여 인은 지금까지 날아온 방향을 되짚어 날아갔다. 잠시 후 거대한 하늘치의 모습이 여자에게 다가왔다. 하늘치 위에는 거대한 벽과 그 너머에서 푸르게 빛나는 가느다란 숲, 그리고 숲 안 쪽으로 장려한 도시가 있었다. 아라짓 제국의 수도 하늘누리다. 하늘 치의 허리쪽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나루터들 때문에 하늘누리는 마 치 호도(湖島)에 건설된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상에서는 그 모 습을 보기 힘들고 도시 내부에서 도시를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늘누리의 아름다운 전체 모습을 보려면 여자처럼 딱정벌레 에 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고공에 떠있는 도시의 아 름다움에 매료되지는 않았다. 그녀에겐 꽤 익숙한 광경이었던 탓이 다. 그래서 여자는 한 번의 지체 없이 딱정벌레를 하늘누리 위편으로 이끌었다. 하늘누리의 건물 지붕들을 가로지르던 여자는 곧 유수부의 상공에 도달했다. 유수부 건물 위쪽을 한 바퀴 돈 딱정벌레는 부드럽 게 아래로 내려섰다. 곧 여인과 딱정벌레의 모습이 사라졌다. 장려한 태화각의 이층 보랑 난간에 기대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산 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이 말했다. "일찍 돌아오는군요. 가까운 곳에 괜찮은 비구름이 있나 봅니다. 형 님." 유수부에서는 며칠 전부터 하늘누리의 이동에 관한 말들이 흘러나오 고 있었다. 파라말은 그것이 유수부원 특유의 정지불안증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늘누리에는 물이 흘러들어오는 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자가 들어오는 길도 없다. 그래서 물과 물자를 향해 거꾸로 흘러가 야 한다. 유수부원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도시의 그런 성격을 잘 알 고 있고, 그래서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하늘누리의 자원들이 소비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불편함을 느낀다. 규리하 전쟁이 벌어진 이후 하늘누리는 꽤 긴 시간 동안 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유수 부원들은 이동할 명분을 찾느라 애쓰고 있었다. 그들이 딱정벌레를 날려보낸 것도 빗물을 받을 만한 비구름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다. 그런 구름이 발견된 이상 유수부원들은 하늘누리를 이동시키고 싶어 안달할 것이다. 파라말 아이솔은 형의 생각이 어떤지 묻는 표정으로 옆에 서있던 율 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 던 사라말이 말했다. "귀족모독죄가 될 수도 있어." "……제 이야기 안 들으셨죠?" "응? 비셀스 규리하의 행동이 귀족모독죄가 될 수 있냐고 묻지 않았 어?" "형님이 생각에 잠긴 다음에 한 말 말입니다. 비구름을 찾으러 떠났 던 딱정벌레가 빨리 돌아온 것을 보니 가까운 곳에 비구름이 있을 거 라고요. 그러니까……" "저수량은 아직 충분하고 천경유수께서는 부하들의 정지불안증에 대 해 시큰둥한 편인데다, 그 가깝다는 구름이 이쪽으로 이동할 가능성 도 있으니 아마 이동하지 않을 거야." "그럴까요?" "내기할까? 하늘누리가 이동하지 않으면 내가 이기고 하늘누리가 이 동하면 네가 지는 걸로 하자." 파라말은 절대 승리할 수 없는 내기에 응하는 것으로 자신의 호승심 을 자랑할 생각은 없었다. "귀족모독죄가 될 수도 있다고요?" "될 수 있어. 실명을 밝힐 순 없지만 과거 모 영주가 모 봉신의 바 람직하지 못한 태도에 격분하여 모 봉신의 저택에 불을 지른 일이 있 었지. 당시 귀족원은 모 영주를 귀족모독죄로 처벌했지. 봉신을 처벌 하는 주군의 권한은 인정하지만 방법이 지나치게 비귀족적이었다는 거지." "성을 파묻은 것은 비귀족적인 것이라고 보십니까? 하지만 굉장히 화려한데요." "화려함이나 위풍당당함, 장엄함 등은 귀족적 행위의 겉모습이지만 요체는 아니야. 귀족적 행동의 요체는 상식에 있지. 그런데 성을 파 묻은 건 비상식적이야." "그렇다면 좀 문제군요." "뭐가 문제인데?" "예? 정우 규리하가 곤경에 빠지지 않습니까. 또 칼리도백의 문제도 있지요. 정우가 아스캄에 가도록 허락한 것도, 그리고 엉겅퀴 여단병 을 보내어 호위하게 한 것도 엘시 백작입니다. 정우의 행동이 범죄가 된다면 백작 또한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황제의 대장군이 추문에 빠진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그건 사도께서 걱정하실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파라말은 약간 놀랐다. 그리고나서 파라말은 놀란 자신에 대해 다시 놀랐다. 사라말은 동생이 락신 치올 사도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다. 율형부사의 집무실이나 산공부사 의 집무실이 아닌 보랑이라는 비공식적인 위치를 회담 장소로 선택했 을 때 사라말은 이미 사태를 짐작했을 것이다. 파라말은 형이 어디까 지 짐작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럼 사도께서 그것에 대해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 까?" "태위가 돌아오지 않는 한 백작을 꾸짖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폐하 뿐이야. 엘시 백작이 그것이 규리하 안정화를 위한 충격요법이었다고 말하면 퍼스 후작은 할 말이 없어." 파라말은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퍼스 후작이 그럴 거라는 걸 알고 계셨군요." "보름 후 비나간에서 열릴 귀족원 회의에 참석할 거라고 통고했다 지? 뻔하잖아. 사도께서 무엇을 걱정하고 계신 건지 말해봐." "예. 퍼스 후작도 귀족모독죄를 가지고 백작을 곤경에 빠트릴 수 없 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겁니다. 후작이 원하는 건 바로 백작이 형님께 서 말씀하신 것처럼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면 후작은 당장 백작이 복 구사업을 핑계 삼아 사전정지작업을 한 거라고 주장할 겁니다." "사전정지작업?" "백작이 규리하를 차지하기 전에 이곳 사람들을 장악하려 했다는 거 죠. 정우 규리하가 저지른 비상식적인 행동은 사실은 엘시 백작의 사 주를 받은 엉겅퀴 여단병의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이해가 안되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백작이 규리하를 가진다는 거지?" "예? 당연히 정우와의 결혼을 통해서죠." 파라말은 당연한 것을 질문하는 형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 다. 그러나 사라말은 그 당연함에 대해 거론하고 싶은 듯했다. "요즘 하늘누리에서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군. 대장 군이 부냐 헨로와 파혼하고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할 거라는 거지. 하 지만 그게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말이지? 백작 본인일 리는 없어. 내 가 아는 백작은 그럴 사람이 아냐. 비셀스 규리하인 것 같지도 않아. 그녀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건 몸빠진 살로 용을 잡으려드는 형국이 지. 도대체 그 이야기가 어디서 나온 거지?" "모르겠다는 겁니까, 추측을 확인하고 싶다는 겁니까?" "아무 쪽이든, 말해봐." 파라말 아이솔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파라말은 형의 질문이 순수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혹은 그렇게 간주하기로 결정했다고 할 수도 있다. "제 생각엔 이 혼담이 나온 곳은 첫번째 벽난로방인 것 같습니다." 사라말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참 재미있지 않아?" "뭐가 말씀이십니까?" "폐하." "예?" 사라말은 보랑 기둥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아래쪽, 포석이 깔려있는 태화각의 중정에는 하급 관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 었다. 하늘누리의 공적인 건물들이 대부분 그렇듯 태화각의 이층 또 한 레콘들의 신장을 고려하여 꽤 높은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 중 이층 보랑에 서있는 아이솔 형제를 발견하는 사람 은 별로 없었다. 태평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사라말은 지나가는 말처 럼 말했다. "폐하께서는 칼리도백을 대장군으로 만드셨고, 만병장이라는 공전의 권능을 주신데다, 이제는 규리하령이라는 막강한 영지까지 주신다는 거지. 그런데 그 중에서 백작이 진실로 바라는 것은 하나도 없어. 젊 은 백작이 정말 바라는 단 하나의 포상은 백화각에서 언 손으로 시체 를 염하고 있는 여인과 함께 쟁해로 돌아가는 것이지." 파라말은 쟁해가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사라말은 쟁룡해에서 용 이 빠져나왔기에 그것은 쟁해가 되었다고 말한다. 파라말은 그 빠져 나왔다는 용이 엘시 에더리를 가리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형이 왜 대장군에게 그런 평가를 내리는지는 알지 못했다. 사라말이 말했 다. "이 처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폐하께서는 강대한 측근을 필요 로 하시는 분도 아니거니와, 혹 그런 사람이 필요하셨다 하더라도 대 장군과 제국만병장, 그리고 규리하 변경백을 따로 만드실 정도의 감 각이 없으신 분은 아니야. 그렇다면 늙은 칼은 왜 도망친 걸까." 맥락이 닿지 않는 말에 당황하던 파라말은 조금 지체한 후에야 형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깨달았다. 레이헬 라보 태위는 '녹슨 몸, 늙은 칼'이라는 괴상한 자평으로 유명했다. "갑자기 왜 태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칼리도백은 태위의 계보가 아니야. 사실 백작은 어느 계보도 아니지. 여기서 젊은 백작의 놀라운 중용지도를 잠시 칭 찬하고 넘어가지. 그런데 제국군 내에는 태위의 계보에 속하는 백전 노장들이 득시글거리지. 그런데 태위가 도망치고도 이렇게 많은 시간 이 흘렀는데 그 자들이 아직 가만히 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야. 실 제로 칼리도백은 이번 전쟁에서 규리하만을 적으로 놓고 싸울 수 있 었지. 물론 누구라도 백작의 탁월한 기량은 인정할 거야. 하지만 탁 월한 기량도 부하들의 협조 없이는 무용지물이지. 라보의 계보에 속 한 누군가가 애송이 대장군을 약간 골탕 먹이기로 작정했다면 그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했을 거야. 하지만 이번 전쟁의 준비 과정에 일어 난 불상사는 부냐 헨로의 것 뿐이었고 어쩌면 최고지휘관의 추문이라 할 수 있는 그 사건에도 군은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어. 태위가 잠 적하기 전에 모든 일처리를 말끔히 해놓은 것이든지, 그렇잖으면 태 위가 잠적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연락망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야. 만약 후자라면, 재미있는 상상이 가능하지." "어떤 재미있는 상상이지요?" 사라말은 하품을 하고는 기지개를 죽 폈다. 다시 똑바로 선 사라말 은 동생에게 말했다. "사도께서 원하는 건 퍼스 후작을 잠잠하게 해달라는 거야?" 두번째로 맥락이 닿지 않는 말을 들은 파라말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라말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것이고 그 주제에 대해서는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질문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임을 알기 에 파라말은 미련 없이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예. 사도께서는 백작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랬다간 하늘누리가 추 락할 정도로 무거운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폐하께 서 정말 엘시 백작이 규리하를 계승하는 것을 바라신다면 그 과정에 절대로 추문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게 사도께서 걱정하시는 것이군. 그렇다면 가서 전해드려. 걱정 하실 필요 없다고." "퍼스 후작을 잠잠하게 할 방법이 있는 겁니까?" "없어." 파라말은 꽤 현명한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 한참 지체한 후에 말 을 하는 것은 심사숙고 끝에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형님께서……" "귀족모독죄는 율형부의 관할이 아니야. 그건 귀족원에서 다룰 문제 지. 율형부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 "그러면 왜 사도께서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까?" "조만간 후작은 대장군에 대한 일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테니까." "예? 그게 무슨 말이지요?" 사라말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나온 율형부사의 손에는 편 지 봉투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파라말은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뭡니까?" "결투장이다. 내가 두 살 먹던 해에 제멋대로 태어나서 엄마 젖을 훔쳐간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 "……꽤 늦은 복수군요." "원한이 깊었거든." "그만하죠. 뭡니까?" "네가 만나자고 하기에 들고 나왔다. 발케네공의 서한이야." "발케네공이요?" "오늘 아침 도착했어. 아마 똑같은 내용을 담은 편지가 젊은 발케네 공에게도 전해졌을 거야. 배덕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남의 서한을 함부로 공개해선 안되겠지. 그리고 실수로 공개된 서한이라도 보지 않으려 해야 할 테고." 사라말은 편지 봉투를 동생의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자, 나와 함께 배덕의 길을 걸어보겠어?" 파라말은 주저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이 중정을 걸어가는 관료들의 정수리를 바라보는 동안 파라말은 서한의 내용을 다 읽었다. 형에게 서한을 돌려주려던 파라말은 생각을 바꿔 그것을 한 번 더 읽었다. 파라말은 퍼스 노후작에 대해 완전히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공 부사의 얼굴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백화각의 냉동실에서 사체의 이름표를 확인하던 부냐 헨로는 갑작스 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부냐의 몸에 소름이 좍 돋았다. 염사보조인들 사이에서는 냉동실에 서 발견된 얼어죽은 염사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홀로 일을 하던 염사가 냉동실 안에서 그만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추위 때문에 얼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는 여러 변형판이 있었다. 염사가 죽은 곳이 출입구 바로 옆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염한 시체 옆 이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동사한 염사의 이름 또한 각양각색이 며, 따라서 신빙성이 떨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부냐를 포함하 여 냉동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이야기를 믿었다. 백화각의 냉동실은 어둡고 광활하며, 산 자의 편의를 위해 설계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 악조건에 죽은 자들 사이를 거닐어야 하는 심리적 압박감까지 더해지면 정신이 말짱한 사람도 자칫하면 같은 자리를 빙 글빙글 돌게 된다. 겁을 집어먹은 부냐는 황급히 출입구의 위치를 확인했다. 냉동실의 구조는 전체적으로 서가를 지나치게 많이 집어넣은 도서관과 오래된 술저장고, 그리고 쥐딤 대학 기숙사 창고를 뒤섞어 놓은 것과 비슷하 다.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선반들 사이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빈틈없이 확인한 부냐는 그제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부냐는 이마를 짚었다. 장갑의 차가운 느낌이 머리를 시원하게 했 다. 현기증을 느낀 것은 피로 때문일 것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사망자 의 행렬이 끝난 것이 불과 반나절 전이었다. 백화각에서 취급하는 사 체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매장될 귀족이나 하늘누리의 냉동실 이 용료를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이들의 사체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숫자는 막대했다. 부냐는 평판이 좋지 않은 동료가 툭 던지 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대장군이 대승했다고? 대장군의 대승은 부하 를 얼마나 죽였느냐로 결정되나 보지?' 부냐는 엘시를 변호할 수 있었다. 하늘누리에는 상주인구가 많은 편 이 아니고 구성원 대부분이 일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에 사망 사건 은 드문 편이다. 염사보조인들이 갑자기 격무에 시달리게 된 것은 평 소에 일이 적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뿐, 이건 수만 명이 싸운 전쟁 터에서 발생한 사망자 숫자로는 많은 편이 아니다…… 부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 자리를 피했다. 부냐 가 보기에 그 염사보조인은 시비를 걸어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 인 것처럼 보였다. 상대의 목적이 싸움이라면 설득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홀로 냉동실에 있는 지금, 부냐는 자신의 침묵에 다른 의미 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엘시를 변호하고 싶지 않았다. 부냐는 그 생각을 계속하기가 두려웠다. 사망자의 이름표를 확인한 부냐는 조금 전 확인해두었던 길을 향했다. 사망자의 운구 계획표를 짜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하늘누리의 이동을 책임지는 천경유수에게 제출하는 것은 그녀의 일이 아니다. 사망자 기록에 이상이 없음을 확 인한 부냐는 이제 돌아가 쉴 수 있다. 부냐는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걸어가야 할 길 양쪽에는 커다란 선반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그 선반 위에는 관들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좀 오래된 관들에는 예외없이 고드름과 하얀 성에가 뒤덮여 있었다. 운반에 필요한 최소 한의 공간만 남겨두었기에 선반 사이의 길은 좁았다. 팔을 양쪽으로 벌리면 관을 치게 될 정도로. 부냐는 팔짱을 꼈다. 두꺼운 방한복 때 문에 동작이 여의치 않았다. 그것은 그저 가슴 쪽으로 팔을 구부린 것에 불과했다. 부냐는 어쩐지 눈이 가물거린다는 것을 느꼈다. 걷고 싶지 않았다. 왜? 부냐는 의아했다. 가물거리는 눈 때문에 똑바로 걸을 수 없을까 봐? 그래서 선반에 놓인 관을 치게 될까봐? 얼어붙은 관뚜껑이 부서 지며 그 안에서 꽁꽁 얼어붙은 시체가 불쑥 튀어나올까봐? 죽은 자의 바스러질 듯한 차가운 손가락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까봐? 부냐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열 걸음은 물러난 것처럼 출입구가 멀어졌다. 부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기묘한 소리가 들 려왔다. 관 속의 시체가 부푸는 소리 같은. 부냐는 질겁하며 다시 눈 을 떴다. 길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었지만 부냐가 걸어가야 하는 길 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냐, 저건 내 입김이야. 하얀 입김 때문에…… 그럴까? '저 여기 있어요.' 부냐는 몸을 더욱 옹송그렸다. 얼어있는 방한복이 버석거리는 소리 를 냈다. 허기에 미친 옷이 그녀를 잡아먹으려 하는 것 같았다. '엘시, 도와줘요. 언니, 저를 꺼내줘요. 아버지, 저를 잊으셨어요?' 부냐의 주위엔 벌목장의 목재처럼 쌓여있는 시체들 뿐이다. 그리고 그녀 또한 얼어죽은 시체가 될 것이다. 그렇다 해서 바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도르 헨로는 산진이를 팔뚝에 얹은 채 산야를 달릴 것이 며 엘시와 니어엘은 바둑을 둘 것이다. 부냐는 그 어렵고 따분한 놀 이를 재미있어 하는 언니와 약혼자를 언제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 나 그들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바둑을 두며 두 사람은 죽 은 부냐에 대해 말할 것이다. 죽은 부냐는 엘시와 니어엘을 연결짓는 매개가 될 것이다. 죽은 부냐는 씁쓸한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죽 은 부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곳에 가득한 시체들처럼. 절망감 속에서 부냐는 자신의 왼쪽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익숙 하지 않은 느낌이 팔목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에 질겁한 부 냐는 반사적으로 달렸다. 버석거리는 옷소리가 부냐를 괴롭혔다. 거대한 냉동실에서 울리는 그녀의 발소리가 부냐를 난타했다. 쿵쿵, 쿵쿵. 쩌렁쩌렁 울리는 그 소리 때문에 선반에 얹혀있던 관들이 우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시체 가 부푸는 것 같은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자신이 쓰러지리라 확신한 순간, 부냐는 냉동실 입구에 도달했다. 냉기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삼중으로 되어있는 냉동실 문을 빠져나오 는 동안 부냐는 문과 통로 벽에 몇 번이나 부딪혔다. 밖으로 나온 부 냐는 등으로 세번째 문을 밀어붙였다. 부냐는 문을 등지며 벽에 기대어섰다. 몸 왼편을 벽에 붙인 채 부냐 는 헐떡였다. 차가운 피부 위로 땀이 흐르는 느낌은 기묘했다. 부냐 는 거칠게 모자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그리고 부냐는 몸을 돌려 돌 벽에 이마를 가져다대었다. 차가운 돌벽 때문에 머리 속에 폭발이 일 어나는 것 같았다. 그대로 이마가 돌벽에 달라붙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지만 부냐는 이마를 떼지 않았다. '저를 잊으셨어요?' 부냐는 자신이 다시 왼쪽 팔목을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누가 서류철에 그런 것을 끼워둔 것일까. 부냐는 서류철에 끼여 있는 그 기묘한 서신을 읽었지만, 그 내용보다 죄수인 자신에게 서신이 전 해졌다는 사실에 더 놀라 엉겁결에 그것을 소매 속에 쑤셔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가 그녀에게 보낸 접촉이었다. 부냐는 그 서신 을 꺼내어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헨로?" 부냐는 소스라치듯 놀라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염사장 두이만 길토 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었던 부냐 는 눈으로 대답했다. 두이만은 부냐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 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의 무뚝뚝한 성품을 누그러뜨려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두이만은 단순하게 용건만 말했다. "면회다." 부냐는 두이만의 말을 못알아들은 것 같았다. 두이만이 한 번 더 말 할 것인지 귀가 먹었냐고 야단쳐야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할 때 부냐 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열렸다. "누구죠?" 두이만의 눈꼬리가 씰룩였다. 잠깐 동안 염사장은 부냐가 무례한 행 동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조금 후 두이만은 염사보조인에게 질문이 금지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잠시라도 바깥의 사람 을 볼 수 있고 바깥의 소식을 들을 수 있기에 면회를 거절하는 죄수 는 거의 없으며, 따라서 누가 온 거냐고 묻는 죄수도 없다. 두이만이 맞닥뜨린 것은 무례가 아닌 낯설음이었다. 어색한 기분 속에서 두이 만은 자기 대답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해하며 말했다. "칼리도백." 두이만은 부냐의 반응에서 낯설음을 느껴야 할지 익숙함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체를 처음 본 염사보조인이 졸도하는 것은 자 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두이만은 면회인의 이름을 듣고 졸도한 염사 보조인을 처음 보았다. 정우는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리고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독은 가장 부드럽고 물은 가장 날카롭대요. 독을 주면 잠이 들지만 물을 끼얹으면 벌떡 일어나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대요. 그런데 가장 빨리 나는 새는 독을 마시는 새고 가 장 느리게 나는 새는 물을 마시는 새라고 하더라고요. 왜 그렇죠?" "버섯의 꽃말은 유혹." "고맙습니다." 정우는 새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틸러 달 비는 웃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어 곤혹스러웠다. 정우는 자기 나이 가 오백 살이라는 인조새의 주장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대답은 탈해 머리돌이 언제 돌아오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새장 곁을 떠난 정우는 다시 틸러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틸러와 자 기 자신에게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버섯과 관련된 문제인 것 같아요." 틸러는 어디에도 없는 신이 자신에게 정우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 지 파악할 능력을 내려주길 기원했다. 아마도 서른다섯 번째로. 하지 만 갑작스러운 재능의 분출을 느낄 수 없었던 틸러는 그냥 그 이야기 를 무시하기로 했다. "키탈저 사냥꾼들의 옛이야기에 대한 토론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만, 규리하공 아가씨. 먼저 자문위에 제출할 보고서부터 완성하는 것 이 어떨까요?" "그냥 당신이 써온대로 제출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대로 제출하더라도 읽기는 하셔야 합니다." 정우는 틸러의 말을 못들은 척하며 탁자 위에 놓여있던 접시를 밀었 다. "뜨거울 때 들어요." 틸러는 정중한 동작으로 접시 위의 구운 감자를 집어들었다. 파노 긴시테 노인은 감자를 수레 단위로 주고 싶어했고 정우가 받아들인 것은 한 바구니였다. 틸러는 감자를 입 쪽으로 가져가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아, 참. 제가 알기로 기록을 성실히 하는 것은 규리하 가문의 의무 라고 하더군요." 정우는 포기하는 얼굴로 탁자 위에 놓인 서류들을 집어들었다. 다시 정우의 주의를 보고서에 돌려놓은 틸러는 감자를 우물거리며 새장 쪽 을 바라보았다. 아스캄으로 떠났을 때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규리하성으로 돌아왔을 때, 틸러는 정우가 그 시대의 전설이 되어있음을 발견했다. 풍문을 전하는 바람은 뱀단지보다 빠르다는 사람들의 말은 물론 사실 증언이 아닌 경구일 테지만 어쨌든 틸러는 자신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채 매장자'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놀라야 했다. 그 순간 틸러는 자신의 목격담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려던 계획을 깨끗이 포기하고는 정우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기로 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의향 또한 틸러와 마찬가지였다. 틸러의 견 해로는 5년에 한번 쯤이면 감수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즉 군단장과 독대하게 되었을 때 시허릭은 절대로 오해할 수 없는 명 령을 내린 다음 가볍게 질문했다. "비셀스 규리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겠나?" "비셀스 규리하가 누굽니까?" "좋아." 틸러는 자신의 대답처럼 행동했다. 성채 매장자를 한 번 만나려는 사람은 많았다. 은근한 유혹과 부탁, 때론 협박까지 있었지만 틸러는 정우에 대한 어떤 언급도 거부했고 정우를 만나려는 모든 시도를 좌 절시켰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조차도 정우를 자유로이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틸러를 약간 우쭐하게 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틸러는 그럴 수 없었는데, 그를 통하지 않 고서도 누군가가 정우에게 접근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인조새 때문이 다. 정우는 몽화각의 어느 도깨비가 그녀를 위해 그것을 라수의 방에 가 져다놓았을 거라고 판단했다. 틸러는 그 일에 도깨비가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정우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라수의 방에 들어가는 방법을 추리해낼 수 있는 것은 도깨비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 도깨비가 혼자 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 도깨비가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외로운 정우를 위해 이 장난 감을 가져다놓고 싶은데, 도와주시겠습니까?' 아주 간단하다. 틸러는 자신의 추리를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조사를 해보았다. 부 위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인맥을 총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 있지 않아 틸러는 그 인조새가 원래는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것임을 알아 낼 수 있었다. 조사의 끝에서 만나게 된 대상이 가진 지나치게 높은 지위는 틸러를 약간 당황시켰다. 동시에 틸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추리와 조사라면 이미 오래 전에 해보았을 시허릭 마지오 상 장군이 왜 그 인조새를 무시하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말벌집은 뒤 흔드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점에서 틸러 달비는 군단장처럼 그 새장을 그곳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물건인 것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틸러는 비스그 라쥬백이 왜 라수의 방 출입법을 알아내려 한 것인지 추측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추리하는 것에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노는 부위를 스스로 돌리고 있다는 생각에 틸러는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자신의 휘하에 있는 소대의 전투능력 유지 및 향상을 책임져야 하는 담당자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틸러가 장교다운 켕김을 맛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못 고상 한 태도다. 자신의 행정 업무를 교위나 수전사들에게 떠넘기고 자유 시간을 가지는 부위들에 대해 제국군은 관대한 편이다. 어떤 문서에 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결국 제국군이 부위들에게 바라는 것이 최 전선에서 싸우다가 장교답게 죽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틸러 달비는 언젠가 그 사실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장교 한 명을 육성하는 데 드는 물질적, 시간적 비용은 사병에 비해 월등히 높다. 따라서 전투 상황에서 장교는, 아니 모든 상급자는 언제나 최 우선 보호대상이다. 이것은 명쾌한 경제 논리며 군의 율법이다. 그런 데 왜 부위만은 유독 그렇지 않은 것일까? 여러 가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틸러가 가장 그럴 듯하다고 여긴 것은 그것이 교위를 만드 는 비용이라는 대답이었다. 살아남은 부위로 교위를 만든다는 것이 군의 공식적인 지침일 리는 없고, 또한 비공식적인 지침인지도 불명 확하지만, 틸러는 그 대답을 받아들여 부위의 삶과 죽음에 익숙해기 로 했다. 따라서 틸러는 자신의 양심적 가책과 자신의 권리를 맞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정우는 틸러의 미소를 좀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제가 아스캄에서 한 일 때문에 많이 시끄러운가요?" 틸러는 정우를 다시 돌아보았다. 정우는 서류 너머로 눈만 내밀어 틸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틸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손에 묻 은 찌꺼기를 털어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건이 있지요.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사 건과 그렇지 않은 것. 그런데 규리하공 아가씨가 한 일은 분명히 전 자에 속하는 것이겠지요." "소란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 일 때문에 아가씨에게 해가 갈 가능성은 적 습니다." "제가 한 일은 제가 책임질 거예요. 하지만 제 부탁을 들어준 레콘 병사들이나 에더리 대장군님, 혹은 마지오 상장군님께 폐가 가는 것 은 싫어요." "엉겅퀴 여단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엉겅퀴 여단병 의 정강이라도 걷어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쥘칸 장군뿐입니다. 그리 고 그 누구도 쥘칸 장군의 정강이를 걷어찰 수는 없지요. 시허릭 마 지오 상장군님에 대해서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보고서만 잘 제출한다면 말입니다." 틸러는 의도적으로 말을 끊었다. 그러자 정우가 말했다. "음? 그러면 대장군님은?" 틸러가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규리하공 아가씨. 그건 한낱 부위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 아 닙니다." 틸러는 그렇게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할 일은 했다고 생각했다. 문제 가 있다는 것을 알려줬으니 이제 정우가 스스로 문제 파악에 나설 차 례다. 규리하공인 그녀가 접근할 수 있는 보다 높은 단계의 책임권자 들을 통해. 하지만 정우의 대답은 완전히 뜻밖의 것이었다. "친구로서 말해줄 수는 있어요?" 틸러는 낭패함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규정하기 어려운 다른 감정 도 느꼈다.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미처 고려하기도 전에 틸러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친구로서 들으시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를 도로 내려놓고는 상체를 앞으로 내 밀었다. "좋아요, 친구. 말해봐요." 틸러는 생각했다. 그녀가 밧줄을 던져주긴 했지만, 매듭을 지은 것 은 나로군. 꼼짝없이 묶였는데. 그리고 그 생각이 그를 편안하게 했 다. 틸러는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아가씨와 저는 아스캄에서 일어났던 일을 규리하 변경백과 아스캄 남작 사이에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어 떤 사람들은 그 일을 에더리 대장군과 규리하의 소영주들 사이에 일 어난 일로 받아들일 작정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장군님께서 장 차를 대비하여 소영주들의 기를 꺾어놓으려 하셨다는 거지요." "장차를 대비하여? 전후복구 말인가요?" "아니오. 대장군님께서 이 땅을 가지게 될 때를 대비해서요." 정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군님이 이 땅을 가지신다고요? 어떻게요?" 틸러는 대답 대신 정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당황한 정우는 틸러의 시선을 만지려는 듯 손을 흔들다가 그것을 자신에게 향했다. 정우는 자신의 손을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정 우는 황급히 틸러를 바라보았고 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말 했다. "제가 대장군님과?" "왜 아이저 규리하와 이이타 규리하는 도망쳤는데 비셀스 규리하와 시카트 규리하만 남았냐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대장군님이 방해될 사람은 쫓아버리고 자기 신부감만 남겨둔 거라 는 건가요? 와!" 틸러는 정우가 사용한 탄성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괴상한 이론에도 정우가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떠올린 후에야 틸러는 그것이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에 대한 정우의 기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 결론을 얻어두었기에, 틸러는 정우의 다음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를 구한 건 대장군님이 아니라 당신이잖아요. 그럼 제가 당신과 결혼해야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데요? 그게 훨씬 근사한데요. 위험에 빠진 공녀와 그녀를 구한 무명 부위. 공녀님을 구한 용감한 부위님은 규리하의 변경백이 되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첫 아이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멀쩡한 청년 혼삿길 막는 것은 악취미입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호오, 부위님. 제가 눈에 안 차나 보군요?" "애석하지만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저는 부유함이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두 사람 의 충만한 애정은……" "제 말은, 규리하공 아가씨. 제가 홧김에 집을 묻어버릴 수 있는 아 내를 위해 집을 여러 채 준비해둘 수 있는 부자가 아니라는 뜻입니 다." 정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흩어놓듯 고개를 좌우로 흔든 정우 는 이마로 늘어진 머리카락들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정말 대장군님과 결혼하게 되나요?" "그건 친구로서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 경 우 귀족원이 처하게될 곤경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 다." "곤경?" "귀족원의 입장에서는 처치 곤란한 두억시니가 출현하게 되는 거지 요." "두억시니요?" "음.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귀족이 있습니다. 황위 계승에 관여 할 수 있는 귀족과 그렇지 않은 귀족. 공작과 후작은 황위 계승에 관 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황제께서 직접 지명한 후계자의 권리가 가장 높지만 공작이나 후작은 그것을, 뭐라고 할까요. 인준할 수 있습니 다. 예. 그 표현이 적절할 것 같군요. 그런데 백작이신 대장군님은, 비록 대장군이시고 제국만병장이시지만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권이나 권리가 없지요. 그런데 규리하공 아가씨도 잘 아 시겠지만 변경백은 공작의 지위에 준합니다. 대장군께서 규리하 변경 백이 되신다면 대장군이고 제국만병장이며 황위 계승에도 관여할 수 있는, 제국법의 테두리 내에 존재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 가 되는 셈입니다." "최고 권력자요? 설마 황제 폐하보다 더 높다는 건가요?" "아니오. 제국법의 테두리 내에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폐하께서는 법보다 더 높은 유일무이한 분이십니다." "아아, 예. 알겠어요. 그런데 뭐가 귀족원의 곤경이지요? 명실상부 한 최강자인 대장군님께서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귀족들을 닥치 는대로 사형시킬까봐?" 틸러는 웃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부위 쯤 되는 인물에겐 적합하지 않은 행동이라 자제했지만 정우의 표현은 엘시의 행동 양식을 꽤 그 럴 듯하게 포착한 것이었다. "그건 극단적인 예상이십니다만 말씀하신 바의 중심 논지는 사실에 닿아있군요. 비유로 말씀드린다면 규리하공 아가씨와 대장군님의 결 혼은 뇌룡공에게 아스화리탈이 주어지는 셈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에게 벼락이 떨어질 거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지요." 벼락의 날개로 하늘을 불태우며 2차 대확장 전쟁의 전장을 누볐던 마지막 용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우는 틸러의 비유를 이해 했다. 그래서 정우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고가의 상품이 된 것 같네요." "예?" "입으면 품위가 높아지는 옷, 쓰면 우아하게 보이는 머리 장식, 신 으면 달리기 편한 신발. 그리고, 가지면 무서운 두억시니가 될 수 있 는 아내. 비슷하게 들리지 않아요?" 틸러는 몸을 뒤로 당겼다. 그는 두 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저는 단지……" "괜찮아요. 다른 킴들처럼 말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대장군님과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정우는 두 팔을 탁자 위에 포갰다. 엎드린 정우는 머리를 옆으로 틀 어 왼쪽 뺨을 팔 위에 괴었다. "대장군님은 좋은 분이지만 상냥한 아빠가 되실 것 같지는 않아요. 고를 수 있다면 저는 제 아이에게 상냥한 아빠가 되어줄 수 있는 사 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아빠가 아예 없어 도 엄청난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피할 수 있는 문제를 굳이 제 아이 에게 안겨줄 필요도 없으니까." 틸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규리하공 아가씨. 아가씨께서 사랑하는 분과 결혼하는 것이 더 적 당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요. 죽어도 어르신이 되는 킴이라면." "어르신이 되는 킴이요?" 정우는 고개를 돌려 오른뺨을 팔에 묻었다. 그렇게 틸러의 시선을 피한 정우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마 당신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에 익숙하겠지요. 저는 그렇지 않아요. 도깨비들의 세상에서는 아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요. 아무도 쉽게 잊혀지지 않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사라져서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거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킴은 그렇지 않죠." 정우는 몸을 일으켰다. 똑바로 앉은 정우는 팔짱을 끼더니 잔뜩 무 거운 얼굴을 해보였다. "두루 살핀 다음 범죄임이 명확하다면 조속히 사형을 언도하겠다. 무우하하하!" 잠깐 동안 틸러는 질식사의 공포를 맛봐야했다. 하나뿐인 청중을 호 흡 곤란에 빠트려놓은 정우는 웃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하죠." 정우의 의문스러운 눈을 본 틸러는 겨우 웃음을 참을 수 있었다. 정 우는 정말 궁금하다는 투로 말했다. "조속히 죽인다고요? 그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상관없다고요? 그 사람을 아는 누군가가 그 사람을 보고 싶어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엘시 백작에 대한 말이었다. 하지만 틸러는 그 말을 자신에 대한 공 박으로 느꼈다. 틸러가 정우에 대해 가졌던 의심, 죽음도 대수롭잖게 여기고 피도 두려워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의심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도깨비들은 상실에 익숙하지 않다. 능동적으로 상실을 꾀하는 것은 도깨비에게 불가능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틸러는 이제 그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정우는 도깨비들의 세계에서 자랐다. "욕심 같지만, 저는 느닷없이 죽어서 제게 추억만 남겨줄지도 사람 과 사랑에 빠지고 싶지는 않아요." 안타까운 기분으로 정우를 바라보던 틸러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동물을 길러본 적이 있으세요?" "동물? 아뇨. 어릴 때 딱정벌레를 기르고 싶었던 적은 있었지만 딱 정벌레는 제겐 너무 컸죠." "저는 어렸을 때 개를 두 마리 길러본 적이 있습니다. 개는 오래 살 면 십오 년 정도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기른 개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첫 번째 녀석은 두 살 때 오소리와 싸우다 가 심하게 다쳐서 죽었습니다. 두 번째 녀석은 그럭저럭 9년 정도 산 다음 죽었습니다." "많이 슬펐겠네요." "그 때는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제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죠?" "첫 번째 녀석이 죽었을 땐 저도 너무 어려서 뭘 잘 몰랐지요. 그리 고 두 번째 녀석은 죽기 오래 전부터 죽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 다. 밥도 잘 안 먹고, 달리기도 귀찮아 하고, 냄새도 심해졌지요. 무 엇보다 제가 부르는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르면 언제나 씩씩하게 달려오던 녀석이 제 목소리를 못알아들을 때는 참 우울했습 니다. 매일 아침 밖으로 뛰어나가 그 녀석이 살아있는 걸 확인했고, 저녁에 잠들 때는 밤중에 녀석이 어떻게 될까봐 걱정했지요. 그러다 가 어느 날 아침에 그 녀석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슬프 기도 했지만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묘하게 편했습니 다." 정우는 틸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틸러.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죠?" "규리하공 아가씨가 말씀하시는 도깨비의 세상은 정말 부러운 것입 니다. 사랑하는 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에 사랑을 아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참 좋은 것이지요. 규리하공 아가씨가 그런 세상으로 돌 아가시고 싶어하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가씨가 돌아가면 도깨비들은 반겨주겠지요." "제가 어르신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틸러는 미소지었다. 도깨비와 살았던 것은 그가 아니라 정우다. 그 녀는 자신이 도깨비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다른 도깨비들보 다 훨씬 짧다는 것을 오래 전에 깨달았을 것이다. 정우가 말했다. "예. 그래서 욕심이라고 말했어요. 틸러. 어린 틸러 달비가 수명이 짧은 개를 키운 것처럼, 그리고 도깨비가 사라질 저를 차별 없이 아 껴준 것처럼 저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요? 느닷없이 사라질지 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걱정 말고 사랑하라고?" "규리하공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피할 수 있는 문제를 굳이 떠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틸러는 눈을 약간 내리깔았다. "하지만 피하고 싶다는 것만으로 조속히 피해버린다면, 나중에 그것 이 사실은 가장 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좀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정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몸을 등받이에 던지며 마음껏 웃은 정우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마워요. 틸러."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버릇일 뿐입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요. 킴 남자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아예 못박아두지는 말라는 거죠?" 틸러는 정우가 그러길 바랐다. 정우는 인간에게 받아야할 사랑을 받 지 못했다. 비록 도깨비들이 모자람 없는 사랑을 주었겠지만 인간에 게 사랑받는 것은 인간인 그녀의 권리다. 그런 정우가 남편과 주고받 는 사랑마저 포기하고 대신 좋은 아빠에 만족한다면 틸러는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제 넘게 나서는 버릇은 내 고안 품일까, 물려받은 것일까?' 다행히도 정우는 틸러의 주제넘음을 꾸짖지 않았다. "아직도 결혼 상대자에 대한 제 첫 번째 기준은 상냥한 아빠감이에 요. 틸러. 하지만 당신이 선의에서 조언해줬다는 것을 아니까 당신에 게 감사하기 위해서라도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두 번째 기준으로 삼 겠어요. 고마워요." 틸러는 멋쩍은 듯 손가락으로 콧등을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음, 고마우시다면 그 보고서 마저 검토해주세요." 배신감에 찬 정우의 시선에 틸러는 말을 덧붙였다. "감자 좀 드시고요." 정우는 대단히 행복해 보였다. =============================================================== 6 챕터 시작합니다. 대보름을 맞이하여 캐릭터 대표가 인사드립니다. 선착순! 1등으로 도착한 데오늬 달비 : 태웠니, 달집? …죄송합니다.(선착순 하지 말걸.)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6-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2-07 조회수 : 269 피를 마시는 새 6. 바람 속의 돌 - 2 레콘 즈라더의 사망 때문에 현재 구성원은 스물 한 명이지만, 관례 에 따라 여전히 이십이금군이라 불리는 황제의 직속 전사들 중 한 명 인 구레는, 긴장한 얼굴로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를 내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입실 절차를 포기했기에 구레는 데라시가 자기 앞에 멈춰 서자마자 옆으로 비켜섰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데라시가 통과하기를 기다리던, 그래서 황제의 집무실을 지키는 위엄 있는 감시자의 위치 로 빨리 복귀할 수 있기를 기대하던 구레는 데라시가 미동도 하지 않 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나가는 귀가 어둡지만 눈이 어둡지는 않다. 또한 보온복의 물이 식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데라시는 보온이 되지 않는 장소에서 꾸물거리지 않는다. 다른 종족이라도 그렇게 서 있는 것은 이상한 광경이겠지만 데라시의 경우엔 황당하기까지 한 일 이었다. 당황 때문에 데라시에게 말을 걸려던 구레는 문득 그것이 어떤 시험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 법한 일이었다. 혹 백작은 입실 절 차를 태만히 하고 있는 구레를 말없이 꾸짖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구 레는 비스그라쥬백이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 지체할 만한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구레는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젠장, 항상 폐 하께 미리 니르고 찾아와서 사람 맥빠지게 했던 것이 누군데?' 구레 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구레는 만약 데라시가 근무 태만에 대한 이 야기를 한 마디만 한다면 백작의 보온복을 벗긴 다음 엉덩이를 걷어 차주리라 결심했다. 위대한 갈바마리 이래로 금군에겐 필요하다면 공 작의 엉덩이라도 걷어찰 권한이,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해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구레는 두억시니였던 갈 바마리에게는 애초부터 변명이나 설명을 할 언어 능력이 없었다는 사 실에 연연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갈바마리는 설명하지 않았고, 그 러니 나도 안 한다. 떠들어봐, 백작. 구레는 자신에게 니름의 능력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 었다. 그가 결심하자마자 데라시가 황제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 으니까. 놀람과 기쁨 속에서 데라시의 모습을 보던 구레는 문이 닫히 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정신을 집중해서 닐러보았다. 재수 좋았어, 백작. 당연하지만 구레는 침묵왕의 비원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구레가 어 떻게 생각하건 인간인 그에게는 니를 능력이 없다. 그것은 데라시가 자신의 재수가 아주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 다. 데라시의 견해로는 제국 정부 전체의 재수가 바닥을 때린 날이 다. 치천제는 문 안으로 들어서는 데라시를 보며 잠시 니름을 멈췄다. 데라시는 벽난로 옆에 보온복을 벗어둘 때까지 기다려주는 황제를 고 맙게 생각했다. 마침내 데라시가 준비를 끝내자 황제는 닐렀다. [이제 설명해봐. 도대체 신부 절도가 뭐지? 레콘들의 신부탐색과 비 슷한 건가?] 먼 곳에서 닐러봐야 황제는 전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데 라시는 직접 배알한 채 설명해야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황제를 마 주한 지금 데라시는 자신이 왜 그런 멍청한 판단을 내렸는지 궁금했 다. 존경하는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런 바보 같은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폐하. 그룸 빌파가 발케네의 공작이 되기 전에도 발케네는 독특한 지역색으로 제국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려왔습니다.] [그래. 도둑놈들의 땅이지. 그래서?] 데라시는 한숨을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발케네 가 형성해온 특징은 황제가 사용한 짧은 설명 이상이다. 발케네는 속 이고 빼앗고 훔치는 일을 사내의 덕목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땅 이며, 어쩌면 세상의 모든 악덕이 태어나는 땅인지도 모른다. 발케네 사람들이 강하고 거칠고 교활하며, 최악의 환경에서도 자기 조절 능 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체득 한 능력이다. 발케네인들의 우수한 능력 때문에 그들을 중용한 자들 은 언제나 호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지역 중 하나지만 발케네는 끝없는 배반과 암살, 부족 전쟁 때문에 십년 이상 계속된 지배 구조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 역사를 바꾼 것이 락토 빌파의 아버지인 그룸 빌파다. 그룸 빌파는 저주 받은 도 깨비 감투를 받은 세 명의 빌파 남자들 중 하나였고, 다른 두 명의 빌파와 함께 유사 이래 처음으로 발케네에 안정된 지배 구조를 확립 시켰다. 그것이 그룸 빌파의 놀라운 지도력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사 람은 아무도 없다. 절대로 포착되지 않는 도깨비 감투의 능력 때문에 그룸 빌파는 모든 적수를 간단히 무덤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현재 발케네를 다스리고 있는 락토 빌파는 아버지 그룸이 만들어놓 은 지배 구조를 안정적으로 계승했고, 아버지보다 더 혹독한 사람으 로 비춰지는 것을 평생의 야망으로 삼은 듯한 남자다. 그러나 그룸 빌파도, 락토 빌파도 제국에 널리 알려진 발케네의 특징에 근본적인 변경을 가하지는 않았다. 발케네인들은 여전히 속이고 빼앗고 훔친 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폐하. 신부 절도는 그런 발케네의 지역색에 어울리는 풍습입니다. 간단히 닐러드리자면, 그들은 신부감을 훔칩니다.] [레콘과 같나?] [다릅니다. 신부 탐색중인 레콘 도전자는 여자의 남편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요. 만약 남편이 없는 여자라면 싸움 같은 것은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있어서 싸움이 성립된다 해도 아내 쪽에서 확고하게 남편을 편들면 도전자는 대충 싸우다가 싸움을 그만두는 일 도 있습니다. 물론 레콘 여자들은 더 강한 남자를 고르고 싶은 충동 때문에 주로 싸움을 부추기는 편입니다만. 어쨌든 레콘의 경우엔 싸 웁니다. 그에 비해 발케네인들의 신부 절도는 훔치는 것입니다. 처녀 라면 그 여인의 가족들에게서 훔칩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라면 남편 에게서 훔칩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레콘과 비슷합니다.] [왜 비슷하지?] [모의 절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의 절도? 가짜로 훔친다는 건가? 안되겠군. 기억을 보내.] 데라시는 이번에는 진짜로 한숨을 쉬었다. [별로 추천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 저와 비슷한 처지가 되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치천제는 그것이 무슨 니름인가 하다가 곧 비늘을 조금 부딪혔다. [이해 못하고 있나?] [예. 발자국 없는 여신께 맹세코 그건 지독하게 복잡하고 이해하기 짜증스러운 풍습인 것 같습니다. 발케네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명 쾌함과 합리성이 있겠지만, 저는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폐하께 닐러드리면서 저도 그것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해.] 데라시는 감사를 표하며 신부 절도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닐렀다. 그리고 치천제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될 거라는 데라시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신부 절도는 신랑측에서 먼저 신부측으로 절도 통고를 보내는 것으 로 시작한다. 통고가 접수되면 신부측은 신부를 지켜줄 '수비자'들을 모집하게 되고 그에 발맞추어 신랑측 또한 '공격자'들을 모집한다. 모집 기준은 다양한데 혈족이나 동맹협정 대상, 친구 등이 포함되며 빚을 갚기 위해 수비나 공격에 합류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빚이라는 것은 당연히 세상의 다른 지역에서 쓰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다. 훔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빚이라는 것이 다른 이들의 빚과 같을 리가 없다. 어쨌든 수비자와 공격자들이 모두 모이면 공격측의 공격으로 신부 절도가 시작된다. 그들은 수비측의 저항을 뚫고 신부 를 훔쳐내려 시도한다. 물론 수비측은 공격자들을 패퇴시키려 시도한 다. 그러나 발케네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수비자와 공격자의 용맹과 지략 이 아니다. 그들은 주로 '배신자'들의 활약에 깊은 관심을 두고 신부 절도를 감상한다. 수비측과 공격측에는 반드시 배신자들이 섞여있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공격측은 수비측에 공격일시를 직접 통고하지는 않는다. 배신자들이 전해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수비측에서 공격 측으로 배신자를 잠입시키지 못해서 공격 일시를 알지 못했다면, 그 것은 수비측의 잘못이고 불명예이지 공격 일시를 가르쳐주지 않은 공 격측의 잘못은 아니다. 이렇듯 신부 절도에서는 일반적으로 '반칙'이 라 불릴 만한 온갖 전술이 다 허용된다. 한편 수비측의 악명 높은 전 술 중에는 신부 바꿔치기라는 것도 있다. 결혼하기 어려운 결함을 가 진 여인을 고의적으로 신부와 바꿔 신랑측에 떠넘기는 이 전술 때문 에 죽도록 고생하고 엉뚱한 신부를 데려가는 신랑도 있다. 물론 그것 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공격측의 잘못이고 불명예다. '교환'은 당연 히 불가능하다. 잘못 훔쳤으니 바꿔 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고, 또한 잘못 훔쳤음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불명예를 인정하는 것이니 까. 이런 다양한 전술 때문에 신부 절도는 거대하고 현기증 날 만큼 복 잡한 놀이에 가깝다. 이 모든 상황에서 수비측과 공격측이 지켜야 할 묵시적 규칙은 한없이 많지만, 그것은 언제나 비틀려지고 곡해되고 깨트려지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할 명명백백한 규칙은 단 하나뿐이 다. 치명적인 무기는 사용하면 안된다. [목검이나 몽둥이, 올가미, 그물 등은 괜찮지만 단검은 안된다는 식 입니다. 그 외에는 온갖 일이 다 허용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배신자 의 활약 부분에는 어떤 제한도 없는 것 같습니다. 상대편을 몽땅 배 신자로 채워서 신부 절도가 시작되자마자 결판이 나버리는 기막힌 상 황을 연출하는 것은 발케네인들의 야망인 것 같습니다. 물론 서로 그 런 것을 꿈꾸니 성취 불가능한 야망일 테지요. 이외에도 온갖 전술과 규칙이 있습니다. 상대편을 속이기 위한 이중 배신자, 공격측이 두 개인 삼각 절도, 그것의 변형판으로 예비 신부가 두 명인 복합 절도, 간혹 일어나는 신랑 절도, 배신자 비밀교환, 공개 배신자……] [그만. 그런데 그것들은 결혼할 때마다 그 짓거리를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평범한 방식으로 결혼하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하지만 양가에서 자신의 세력을 자랑해보이고 싶을 경우 묵시적 협의 하에 신부 절도를 시도합니다. 모아들인 사람의 숫자로 자신의 위세 를 과시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엔 전체적으로 거대한 잔치에 가깝고 공격과 수비는 상당히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양자 가 결혼에 합의하지 못했을 때 신부 절도나 신랑 절도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이 때는 비록 모의전 비슷한 것입니다만 분위기가 험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치명적인 무기를 쓰지 않는데도 인명사고가 비일 비재합니다. 인간은 목검이나 몽둥이로도 죽일 수 있으니까요.] 치천제는 목 주위의 비늘이 일어나려는 것을 느끼고는 손바닥으로 그것을 눌렀다. [짐이 정확한 인상을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절도가 아니라 떼강 도, 아니, 전투에 가까운 것 같군. 그러니까 락토 빌파는 비셀스 규 리하를 훔치겠다는 건가?] 그것이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로 하여금 황제의 집무실 밖에서 한참 동안이나 주저하게 만든 비보였다. 데라시는 마지못한 기분으로 닐렀 다. [암살공은 그것이 납치가 아니라 발케네의 전래 풍습임을 인정해 달 라는 내용의 서한을 율형부에 보냈습니다. 발케네식 구혼법이라는 거 지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암살공은 신부 절도의 규칙들 전부를 완전히 공개하고 그 중 외부인들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대 해서는 조정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규칙은 한 가지뿐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니 규칙을 공개하겠다는 선언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발케네의 전래 풍습이라는 주장이 중요합니다.] [락토는 그것이 구혼임을 부각시킬 작정인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발케네식으로 구혼하는 것이니 거절하고 싶다 면 발케네식으로 거절하라고 주장하겠지요.] [인간들은 이 경우 어떻게 행동하지? 결혼은 그들의 풍습이잖나.] [보통 같은 지역에서는 같은 예법을 따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예법이 조금 다른 타지역 사람들끼리 결혼할 때는 여러 가지 해결 방안이 있습니다. 신랑측의 예법을 따르는 경우도 있고 신부측 의 예법을 따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절충안을 내는 경우도 있습 니다. 규리하 지역의 경우엔 주로 신랑측의 예법을 따르는 경향이 큰 것 같습니다. 아이저 규리하의 결혼식은 규리하식으로 이루어졌습니 다. 그리고 굴도하 남작부인의 결혼은 판사이식으로 이루어졌지요.] [칼리도에서는?] 데라시는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런 질문이 있을 것을 예상했고, 그 래서 데라시는 칼리도의 결혼 예법에 대해서도 조사해두었다. 하지만 백작은 심적 동요까지 억누를 수는 없었다. 황제는 돌려 니르지도 않 았다. 데라시가 닐렀다. [칼리도에서는 주로 신부측의 예법을 존중하는 편이라고 알고 있습 니다.] [그렇다면 엘시는 결혼이 규리하식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겠군.] [폐하. 외람되지만 백작이 그렇게 판단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우 의 결혼을 주관하기로 한 백작은 먼저 정우에게 결혼할 의사가 있는 지부터 확인할 것입니다. 즈믄누리로 간 서신의 대답이 돌아오기 전 까지 백작은 모든 혼담을 일단 보류해둘 겁니다. 그리고 즈믄누리에 서 온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백작은 정우의 결혼을 반대할 것입니다.] [짐의 생각은 조금 다른데. 즈믄누리에서 온 대답이 무엇이건 아이 저의 딸은 결혼해야 해. 그리고 그 상대는 엘시고.] 데라시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바닥에 엎드렸 다. 치천제는 자신이 니른 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며 데라시 또한 그렇게 되도록 애써왔다. 데라시는 엘시와 정우가 결혼하는 것이 기정 사실 인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고, 적당한 때를 기다려 엘시가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을 요청할 작정이었다. 만약 암살공의 터무니 없는 구혼이 없었다면 데라시는 며칠 내로 엘시를 불렀을 것이다. 하 지만 암살공의 서신이 도착한 지금 데라시의 사전 공작은 의미가 퇴 색했다. 암살공의 구혼은 사람들이 기정 사실이라 여겼던 것을 수정 하게 할 만큼 강력한 의미가 있다. 어쩌면 암살공이 이렇게 다급하게 '발케네식 구혼'을 결심한 것은 데라시의 공작이 지나치게 효과적이 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암살공 또한 엘시와 정우가 결혼할 거라고 받아들였기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치천제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애써온 결과인 만큼, 데라시는 아무런 방안도 제시하지 않는 치천제에 대해 약간의 서운함 을 느꼈다. 데라시가 보기에 치천제가 해야 할 일은 집무실에서 첩과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벽난로방을 통해 그런 구혼 따 위 집어치우라는 황제의 권고를 발케네로 보내는 것이었다. 충성 서 약이라는 강력한 관습을 간단히 무시한 치천제가 발케네 지방의 특화 된 관습에, 그것도 다른 이들에겐 괴이하게 보일 관습에 연연하는 것 은 이상한 일이다. 발케네의 강대함 때문에? 규리하의 강대함은 그에 못지 않다. 하물 며 데라시의 안배가 없었다면 규리하는 서약지지파를 규합하여 그 세 력을 몇 배로 불릴 수도 있었다. 규리하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황제가 발케네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비록 데라시에게 모든 것을 일임 했지만, 지금은 황제가 나설 차례다. '불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안돼.' 하지만 데라시는 희망을 약간 품 어보았다. [니르신 대로 이루어지려면 암살공이 자신의 그릇된 야욕을 포기해 야 합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관습을 강요하지 말라는 내용의 권고를 발케네로 보내시면 어떻겠습니까?] [데라시.] [예, 폐하.] [그는 강요할 수 있다.] [예?] 치천제는 엄격한 얼굴로 비스그라쥬백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의 단 호함은 데라시를 약간 두렵게 했다. [이 하늘 아래에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 고, 그것은 짐이다. 짐 외에 아무도 그러할 수 없다. 만약 락토가 짐 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것이라면 짐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 다. 그러나 락토는 비셀스나 엘시에게 강요할 수는 있다. 그럴 능력 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또한 비셀스나 엘시는 락토의 강 요를 자신들의 판단과 능력에 따라 대처할 수 있다. 짐은 그것에 관 여치 않겠다.] 데라시는 충격을 받았다. 데라시의 예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데라시는 모든 것을 일임받은 그 가 직접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니름을 들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치천제의 니름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순을 가진 선언이었 다. '폐하께서는 칼리도백이 정우와 결혼하여 규리하의 공작이 되기를 바라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 으신다?' 이 니름도 안 되는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의 방해 에 상관 없이 결국 자신의 바람이 관철되리라는 자신감일까? 데라시 가 아는 치천제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자신 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일까? 충성 서약 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강력하게 관철시킨 치천제에게는 중상으로라 도 할 수 없는 니름이다. 어떻게 보아도 치천제의 니름은 광언에 가 깝다. 하지만 치천제는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짐이 너에게 무엇을 명령했느냐?] [칼리도백과 비셀스 규리하가 결혼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기억한다면 가서 최선을 다해 그것을 수행하라.] 그것은 데라시가 예상했던 대답이다. 하지만 지금 듣는 대답은 그 의미가 많이 달랐다. 데라시는 황제가 자신에게 명령한 것처럼 발케 네공에게 명령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데라시는 황제 에게 설명을 요청할 수 없었다. 치천제의 니름에는 '가서'라는 명령 이 섞여 있었다. 데라시는 자신이 확고한 동작을 취하는 것처럼 보여지길 바라며 일 어났다. 난롯가에 잠시 걸려있던 보온복은 충분한 열기를 빨아들이지 못했 다. 데라시는 문을 나섰고, 자신에게 이상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구 레를 무시하며 빠르게 걸어갔다. 달리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황궁을 가로지른 데라시는 곧 자신의 방에 도달했다. 몸이 싸늘했다. 그의 예상처럼 보온복의 온기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대로 벽난로가로 걸어가고 싶었지만 데라시는 힘없는 팔을 움직여 보온복을 벗었다. 보온복은 방열복 역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걸친 채 벽난로가로 다가가면 열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백작의 어깨에서 떨어진 보온복이 바닥에서 출렁거렸다. 데라시는 보온복 무더기에서 발을 빼 쓰러질 듯 다급한 동작으로 벽난로에 다 가갔다. 반가운 열기에 데라시는 신음을 흘리고 싶었다. 의자를 끌어 오기도 귀찮았던 데라시는 벽난로 앞에 그냥 주저앉았다. 한기는 빠르게 가셨다. 그러나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데라시는 황제의 니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치천제는 그 누구라도 황제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다른 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닐렀다. 하지만 락토가 정우를 신부 절도한다면 그것은 치천제에 대 한 강요가 된다. 정우와 엘시가 결혼하는 것이 치천제의 바람이니까.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황제가 왜 그런 니름도 안 되는 설명을 한 것 일까? 불현듯 데라시는 어떤 사람을 떠올렸다. 백작이 아는 사람 중에 황 제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는 온갖 것이 다 주어졌다. 대장군, 제국만병장, 그리고 가질지도 모 르는 규리하 공작위. 물론 그 사람이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하 는 약혼자를 뺏겼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규리하 공작위를 받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데라시는 필사적으로 엘시에 대해 생각했다. 데라시는 엘시를 대하 는 황제의 태도에서 자신의 의문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 라 믿었다. 그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엘시 에더리는 걱정스러워 하는 눈빛으로 부냐 헨로의 안색을 살폈 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기뻐서 기절한 거예요." 부냐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 다. 그래서 그녀는 대신 엘시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기분 같아서는 그의 무릎에 앉고 싶었지만, 그리고 약혼자의 목을 끌어안고 싶었지 만 부냐는 가까스로 자신을 억누르며 말했다. "정말 기뻤어요. 엘시." 부냐의 떨리는 눈매를 본 엘시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백작은 왼손 으로 부냐의 손등을 덮어 꼭 쥐었다. "그러시다면 안심하겠습니다만, 혹 노역 조건이나 환경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아뇨. 그런 것 없어요. 설령 있다 해도 말하지 않을 테지만." 엘시는 고개를 조금 갸웃하다가 벌을 받는 죄수의 신분으로 처우의 개선을 요구할 수는 없기에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냐의 의도는 달랐다. "이곳을 지내기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진 않아요. 여기에 계속 있으 려는 것처럼 보이니까." 엘시는 부냐의 눈을 바라보다가 투박한 동작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 덕였다. 흥분 때문에 민감해져 있던 부냐는 엘시의 반응이 자연스럽 지 못하다는 것에 약간 당황하여 말했다. "죄수가 감옥을 좋아할 수는 없잖아요?"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부냐는 그 말이 마치 따귀를 맞는 것 같 다고 생각했다. 문득 부냐는 이곳을 지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엘시에게도 적용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노역 조건이 나 환경에 대한 엘시의 질문은 부냐가 이곳에서 계속 지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부냐는 그 의미에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그것을 외면했 다. 부냐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졌다. 엘시는 조용히 부냐의 말을 경청했다. 특이한 일이었다. 부냐 자신 도 스스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염사보조 인 모씨는 바깥에 있는 아들을 보고 싶어해요. 동생이 그 아들을 맡 아기르고 있는데 그 동생은 모씨의 말에 의하면 선인장을 맡겨도 말 라죽게 할 만큼 무성의한 사람이래요. 그래서 몹시 걱정하고 있지요. 염사 모씨는 자신의 동상을 숨기려고 하고 있어요. 그는 계속 일해야 하거든요. 유수부에서는 모씨에게 수도 요금을 내지 않으면 물을 끊 겠다고 했대요. 그런데 모씨에게는 어린 아기가 있거든요. 얼마나 물 이 많이 필요하겠어요. 하늘누리의 물값은 너무 비싸요. 물론 이곳에 우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 겠지요. 여기서 원추리문에 다닐 때 알던 여자의 시체를 봤어요. 그 리 잘 알던 사람은 아니었고 그저 면식이 있는 정도였지만 기분이 정 말 이상했어요. 그 여자를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 굉장히 미안한 일 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냥 같은 수업을 하나 들었을 뿐인데. 부위 였어요. 학교 다닐 수 있었던 걸 보니 가세가 그럭저럭 괜찮았나 봐 요. 하긴 그래서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부냐는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열패감에 손끝을 떨며 부냐 는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한결 같이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의 말 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를 구출해낼 방도를 아직 찾지 못하셨어요?' 부냐는 그 말이 입천장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다고 느꼈다. 혀로 누 르면 그 말이 팍 터질 것 같다. 부냐는 입술을 핥았다. "얼마 전에 성채 매장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엘시의 평온한 얼굴에 갑자기 금이 갔다. 황제의 대장군은 다시 웃 음을 머금었지만 웃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사람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길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예. 염사들은 바깥에 들락날락하니까요. 그리고 염사들과 사이가 좋은 보조인들도 있고요. 성 하나를 통째로 파묻은 분이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입니다. 아이저 규리하의 장녀 지요." "옛날에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여자들끼리 모이면 간 혹 그녀의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인상이 깊었어요. 도깨비들 사이에 서 자랐다지요? 그러면 그 여자도 도깨비불을 쓰나요?" "아닙니다. 그것은 도깨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딱정벌 레는 잘 탄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아랫사람의 잘못을 꾸짖기 위해 성을 묻었다기에 아주 무서운 여자일 거라 생각했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 아야 했으니 성격이 괴팍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불을 쓰면 어울 릴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정말 무서운 분인가요?" "도깨비 같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도깨비를 무서워하지는 않으시겠 지요." 부냐는 천장이 무너질 것을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면 어질고 착한 분인가요? 남자들이 좋아할까요?" "저는 비셀스 규리하에 대한 남자들의 평이 어떠한지 알지 못합니 다. 사람들은 그녀가 성을 묻은 사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 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어떤 여성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부냐는 언니의 초대를 받아 처음 헨로 가를 찾아왔을 때를 엘시를 떠올렸다. 그 이전까지 그녀가 들었던 엘시에 대한 이야기는 엄청난 것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전공을 세운 사람, 술김에 기적을 만든 사람, 복무연 한에 대한 제국군의 불문율을 모조리 깨트린 사람. 자신이 군인의 동 생이며 낭만적인 소녀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던 부냐는 엘시에 대해 실망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거칠고 투박한 전사가 성큼성큼 들어 와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고 술을 퍼마시고 고함을 질러도 상심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만질 수 있게 된 전설은 환멸의 대 상이 된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그 날 엘시는 칼리도의 백작만 데려오고 무례한 전사는 데려 오지 않았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엘시가 돌아간 다음 부냐는 자신의 일부가 엘시와 함께 떠났다고 느꼈다.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부냐의 느낌은 정말 그러했다. 언니인 니어엘마저도 그렇게 표현했으니까. '너 여기에 다 있는 거야?' 니어엘은 그렇게 물었을 때 부냐는 아스화리탈의 날개를 쓰다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부냐는 자신이 도대체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보. 당신도 남자잖아요! 왜 다른 남자의 평이 필요해요? 당신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달라는 거예요. 엘시는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아차리기 어려운 사실 은 아니니까. 하지만 엘시는 자신이 정우를 평가하는 남자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부냐 외의 다른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는 투로 말한 자신에 대해 부냐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엘시 는 약간 초조함을 느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 태에서 엘시는 정우의 단점으로 파악될 만한 말들을 꺼냈다. 그녀의 무모함, 그녀의 무례함, 그녀의 무지함, 정우가, 정우는, 정우의, 정 우에게, 정우를. 엘시가 계속해서 꺼내놓는 정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부냐는 미 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부냐는 무의식적으로 정우를 변호하기 시 작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가엾은 여자다, 도깨비의 사회에 익숙한 여자다, 원하지도 않는 낯선 세상에 갑자기 떨어진 여자다, 비셀스 가, 비셀스는, 비셀스의, 비셀스에게, 비셀스를, 비셀스를, 비셀스 를…… "비셀스를 도와주세요." "예?" "비셀스를 도와주세요." 엘시는 불편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기분으로 부냐를 바라보았다. 부냐는 하얗게 변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이 언제 엘시의 손에서 빠져나왔는지 부냐는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당신은 도깨비 무 사장과 친하지요. 당신도 비셀스처럼 도깨비에게 익숙한 인간이에요. 많이 바쁘신 것은 알아요. 하지만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그녀는 크게 기뻐할 거예요. 의지가지없는 처지니까…… 약간의 도움도 큰 힘이 될 거예요." 엘시는 부냐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 이전까지 그가 들었던 부냐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그녀의 언니가 내린 평가뿐이었고, 그래서 엘시는 그것이 객관적일 리 없다고 믿었 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작품을 두 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무턱대 고 만든 첫 번째 작품보다는 경험을 좀 쌓은 후에 제작한 두 번째 작 품의 완성도가 더 높습니다.' 엘시는 그것이 그저 동생에 대한 애정 의 증거이자 농담이며 겸양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보기에 니어엘은 이미 훌륭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니어엘보다 더 우수한 작품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엘시는 귀염받고 자란 응석받이가 맵시를 부리느라 어색한 걸음으로 나타나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 주어 져야 마땅하다는 투로 징징거린다 해도 당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쨌든 엘시는 자신의 여성관은 모친이나 니어엘 헨로, 혹은 치천제 같은 여인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쪽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부냐는 자작가의 영애로 행동했을 뿐 응석받이는 동석 시키지 않았다. 엘시는 감탄했다. 헨로 가를 떠날 때 엘시는 결심을 굳혔다. 쥐딤에 가까운 칼리도를 다스렸기에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 믿고 참전했던 전쟁이었다. 운이 좋아 전공을 세웠으니 귀향해도 무 방할 거라 믿었던 엘시는 '어머님의 며느리감과 함께 돌아갈까 합니 다'라는 편지를 썼다. 그 약속의 이행은 아직까지 보류되어 있다. 그리고 엘시는 지금 그 약속을 영원히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엘시는 갑자기 자신이 왜 여기에 와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어떤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부냐를 석방할 만한 계기도 만들지 못했다. 엘시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그 이유가 떠올랐다. 엘시는 이곳에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 와 부냐의 변함 없는 애정을. 스카리 빌파가 무엇이라 말하든, 사람 들이 무엇이라 말하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엘시는 그것이 괴이한 농담 같다고 느꼈다. "그것을 원하십니까." "예?" 엘시는 옅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정우 규리하를 돕기를 원하십니까?" 부냐는 피곤한 듯 눈을 비볐다. 그리고 손가락에 묻어나온 눈물을 엘시에게서 감췄다. "당신만이 그럴 수 있어요. 그녀를 도와주세요."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당신과 파혼하고 정우와 결혼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셨겠지요." 부냐는 깜짝 놀랐다. 그 단도직입적인 태도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렇게 말한 사람이 엘시라는 사실에 놀랐다. 니어엘은 군의 일을 처리 할 때 엘시가 파악, 결단, 실행이 모두 빠르다고 이야기했지만 부냐 는 그런 엘시를 본 적이 없었다. 부냐가 처음 보는 엘시가 말했다. "제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그 중에 당신이 요구한 일은, 애석하게도 없습니다. 저는 폐하께 당신의 방면을 계청 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대신 저는 폐하께 더 많 은 것을 드리려 시도할 수 있습니다. 폐하라는 호수에서 물을 퍼낼 수는 없지만, 대신 거기에 더 많은 물을 부어넣어 황은이라는 물결이 넘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저는 필요한 만큼의 무장 병 력을 동원하여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백화각을 장악 하여 당신을 구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국만병장이니까요." 부냐는 질려버릴 것 같았다. 엘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 었다. 결국 그녀는 군인의 동생이고 엘시의 약혼자니까. 통제할 수 없는 압박 속에서 엘시는 자신이 가장 잘 취할 수 있는 태도를 돌파 구로 선택한 것이다. 엘시는 군인으로 말하고 있었다. '상정된 전략 적 목표에 적용할 수 있는 전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시가 무 감정하게 사실을 열거하는 군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엘 시의 다음 말에서 잘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약혼을 파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제 약혼자 이기 때문에 방면되지 않는 것이라는 풍문이 사실이라면, 비록 저는 거기서 타당함을 느낄 수 없지만, 약혼 파기를 통해 당신의 방면을 꾀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냐는 긴장 때문에 바들바들 떨리는 왼손을 꼭 움켜쥐었다. "세 가지가 있는데, 그래서요?" "저는 지금껏 첫 번째 방법만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 면 다른 방법들을 고려하겠습니다." "왜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짙은 말리향. 부냐는 코끝을 찌르는 것 같은 말리향을 느꼈다. '이상하다. 말리는 없는데.' 부냐는 자신이 지어준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누굴까? 나를 사랑한다는 이 남자 는?' 부냐는 세번째 엘시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였던 남자도 아니고 군인으로 말하고 있는 남자도 아닌 남자였다. 그 낯선 남자가 말했다. "심지가 심지로 남고 초가 초로 남아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 다. 불꽃을 피우기 위해 심지는 검게 타고, 초는 촛농으로 변해 녹아 내려야 합니다. 부냐. 당신은 그 때문에 제가 타고 녹아도 상관없다 고 결정한 사람입니다. 당신과 함께 변하고 싶습니다." 부냐는 기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꼰 실이 시커멓게 타고 당신이 정제하여 굳힌 밀랍이 녹아내리길 바란다고? 당신, 엘시 에더리 맞아요? "제가 원한다면,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도 하시겠다는 건가 요?" 엘시는 약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는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가식이 되고 위선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요. 제가 말씀 드린 세 가지 방법은 전부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르지 못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충격 속에서 부냐는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 낯익은 사람, 엘시 에 더리가 있었다. 부냐는 갑자기 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웃음을 터뜨리면 틀림없이 울게 될 거라는 확신도 느꼈다. "그렇게 이성적이어야 하나요?" "예?" "도대체 변하고 싶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죠? 당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작정인데." 부냐는 자기 손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엘시는 낭패 감과 의심 속에서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부냐가 말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겠다면, 당신은 그대로 당신이잖아요. 곰도 가끔은 두 발로 서요. 그럴 수 있으니까. 그래도 곰은 곰이죠." "부냐. 그렇다면 제가 위선자가 되길 바랍니까? 당신을 위해 저 스 스로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기를 바랍니까? 저는 당신이 그 런 것을 바란다고……" "그만하세요!"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부냐는 괴물을 보듯 엘시를 바라보았다. "저요? 제가 당신에게 뭘 바라냐고요? 모르겠어요. 당신을 존경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아주 중요한 거라고 믿었지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의 짝이 되는 것이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모르겠 어요. 바보가 된 것 같아요. 당신은 왜 아주 미친 짓을 하지 않느냐 고 묻고 싶어요. 당신은 왜 그렇죠? 엘시. 당신은 왜 취했을 때조차 강한 거죠?" 부냐는 자신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깜짝 놀란 눈으로 엘시 를 보던 부냐는 두려움 섞인 의심 속에서 말했다. "엘시. 왜 당신의 친구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도깨비뿐인 거죠?" 엘시는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탈해 머리돌이 그의 친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친구가 탈해 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냐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저를 정말 사랑하세요?" "사랑합니다." "그럼 저를 당장 여기서 꺼내주세요." =============================================================== 죽지도 않고 돌아온 다음회 예고 : 마침내 흡혈안드로이드는 철이와 카우보이를 찾아낸다! 감격의 재회 를 가진 셋. 그러나 인류 진화의 비밀을 풀지 못하는 이상 철이와 카 우보이는 전뇌공간을 빠져나갈 수 없다. 카우보이는 단풍잎을 마크로 쓰는 특무 기관에 침입하여 인류보완계획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만 뭐 가 잘못되었는지 메뚜기 가면을 쓰고 정의를 부르짖으면 진화(개조?)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변신 벨트를 찾아내자고 주장한다. 흡 혈안드로이드는 그에 뒤질새라 변신 시간은 오직 3분 뿐인데 그 안에 빠져나갈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마침내 철이마저도 한 마디 해야 한 다는 압박감 때문에 변신하기 위해서는 달빛의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 하기 시작한다. 격화되는 갑론을박. 그러나 그들은 다가오는 위험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일그러지는 전뇌공간! 철이와 카우보이, 안드로이드가 바라 보는 가운데 허공에 구멍이 생기며 한 사내가 걸어나온다. 사내는 안 드로이드를 보며 중얼거린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습니다…' 그는 바 로 스토킹의 파동에 눈을 뜬 현상금사냥꾼이었다. 안드로이드가 홀로 과거로 돌아가는 바람에 미래에 남겨졌던 현상금사냥꾼이 안드로이드 를 쫓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어떻게 따라온 거냐고 묻는 안드로이드 에게 현상금사냥꾼은 손을 들어보인다. 그 손에는 안드로이드가 남겨 두고 온 타임머신이 들려있었다. '돈데기리기리 돈데기리기리…' 앞 에는 집념에 찬 추적자. 전뇌공간을 빠져나갈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 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카우보이가 갑자기 중얼거린다. "카우보이의 기능 정지까지 앞으로 123일." 그렇다. 치바에서 온 카우보이는 외계 인에 대항하는 비밀전투경찰 출신이었다. 카우보이는 오래 전 석파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종로구 부암동 소재.)에 놀러갔다가 깨달은 전투경찰의 최종 오의를 시전한다. 석파정에서 깨달은 전투경 찰의 권, 석파전경권은 위기에 빠진 동료들을 구할 수 있을까? 다음회 '세 마음이 하나로 합치면 백만 파워!' 많이 기대해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6-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2-08 조회수 : 269 피를 마시는 새 6. 바람 속의 돌 - 3 엘시는 일어서면서 칼을 뽑았다. 칼날의 새파란 빛에 놀란 부냐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밀었다. 엘시 는 칼을 든 오른손을 부냐의 반대편으로 오게 한 다음 왼손을 내밀었 다. "나갑시다." "예?" 엘시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허리를 굽힌 엘시는 부냐의 손목을 붙 잡아 당겼다. 부냐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엘시는 그대로 문쪽을 향 해 걸어갔다. 그리고 발로 문을 걷어찼다. 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부냐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몸이 뒤로 당겨진 것을 느낀 엘시는 부냐를 돌아보았다. "저를 당기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그리고 엘시는 부서진 문을 통해 나갔다. 부냐는 끌려가듯 걸어가야 했다. 부냐는 엘시의 뒤통수를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엘시, 도대체 지금 무엇을……" 그 때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깨달은 부냐는 겁에 질렸다. 그제서야 부냐는 이 것이 탈옥임을 깨달았다. 아니, 탈옥인가? 부냐는 잠시 생각을 정리 할 여유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엘시는 부냐의 손목을 쥔 채 성큼 성큼 걸어갈 뿐이었다. 모통이를 돌자마자 누군가가 나타났다. 놀란 표정으로 뛰어온 것은 두 명의 염사였고 그들은 칼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러나 그들은 곧 공포보다 더한 의문을 느꼈다. "각하? 지금 뭐 하시는……" 엘시는 대답 대신 칼을 세차게 좌우로 휘둘렀다. 통로 양쪽 벽에 칼 이 부딪히며 타당 소리와 불꽃이 튕겼다. 부냐는 그만 비명을 질렀고 염사들은 넋이 빠져나간 얼굴이 되었다. 엘시는 두 걸음 걸은 다음 다시 같은 일을 반복했다. 탕, 타당! 염사들이 물러섰다. 엘시는 세 걸음 걸은 다음 또 양쪽 벽을 후려쳤다. 의미가 분명한 행동이었다. 염사들은 비명인지 신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를 내고는 머리를 싸쥔 채 도망쳤다. 엘시는 그 뒤를 따 라 성큼 걸어갔다. 엄청난 사태에 질린 부냐는 한참 후에야 겨우 소 곤거리듯 말할 수 있었다. "엘시. 지금 뭐 하는 거죠?" "이곳을 나가고 있습니다." "탈옥? 탈옥인가요? 지금 탈옥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출옥이라고 표현하고 싶 습니다." 부냐는 엘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엘시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관성 때문에 두어 걸음 걸어간 부냐는 엘시의 옆에 서게 되었다. 앞쪽의 광경을 본 부냐는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 았다. 부냐가 처음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 통과했던 커다란 문이 보였다. 장의 기관이긴 하지만 죄수들이 노역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백화각의 보안 태세는 감옥에 가깝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은 두께가 30센티미터는 될 커다란 문이었고 그 앞에는 무장한 경비 병들이 창을 꼬나든 채 도열해 있었다. 얼핏 보아도 그 수가 열다섯 명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양쪽의 통로와 그들의 뒤편에서도 발소리 가 들려왔다. 부냐는 뒤를 돌아보았다. 창끝을 겨눈 경비병들이 다가 서고 있었다. 엘시는 뒤쪽의 상황을 흘끔 보고는 다시 앞을 막고 있 는 경비병들을 노려보았다. 경비병들은 계속 충원되고 있었고 이제 그 수는 서른에 육박했다. 여기저기서 문 닫히는 소리와 창살문 떨어지는 소리 등이 쾅쾅 들려 왔다. 먼곳에서 고함과 욕짓거리가 들려오고 비명처럼 들리는 소리도 웅웅 울렸다. 염사나 경비병들이 동요할지도 모르는 죄수들을 거칠게 다루는 듯했다. 그러나 엘시와 부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소리 도 내지 않았다. 태풍의 눈 가운데 서있는 것 같았다. 부냐가 주저앉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엘시가 말했다. "문을 열어라." 경비병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욕설의 대상은 엘시나 부냐 가 아닌 경비병들 자신인 것 같았다. 그들은 엘시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분노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상황에 변화가 없 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린 다음, 엘시는 앞으로 걷기 시작 했다. 부냐는 기겁하여 엘시의 팔에 매달렸다. 엘시는 멈춰서서 부냐를 돌아보았다. 부냐의 눈과 눈썹, 떨리는 볼, 부푼 아랫입술, 경직된 턱은 한 편의 선언문이었다. 하지 마세요. 우리는 죽을 거예요. 저 사람들이 그럴 거예요. 당신이 만병장이라고 해도 지금 당신은 혼자예요. 수십 개의 창날이 몸 곳곳을 후벼팔 거예요. 여기서 죽자는 건가요? 함께 죽자 고요? 그 모든 선언을 읽은 엘시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갑시다. 부냐." "제발……" "각하! 멈추십시오!" 부냐는 자신이 쓰러지리라 확신했다. 그녀의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 가는 순간 엘시도 그것을 깨달았다. 엘시는 재빨리 부냐를 끌어당겨 왼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칼끝은 외침이 들려온 쪽을 겨냥했다. 염사장 두이만 길토가 달려오고 있었다. 창끝을 나란히 하고 있는 경비병들 앞으로 뛰어나온 염사장은 백작을 향해 다시 외쳤다. "각하. 뭐 하시려는 겁니까?" "이 분과 함께 여기서 나가려고 한다." 두이만 길토는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소녀를 본 맹견처럼 으르릉거렸 다. "각하께선 그러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죄수입니다. 저는 그 여자를 이곳에 가둬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자네가 그 명령을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각하. 이러지 마십시오." "스스로 그 명령을 무시하겠나,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게 해주기를 바라나? 어느 쪽이 좋겠나?" 무뢰배 같은 협박을 하는 엘시의 목소리는 부냐를 소름 끼치게 했 다. 부냐는 황급히 엘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백화각 경비병들의 창 끝에 죽을 것을 알기에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대장군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부냐는 다른 곳을 볼 수도 없었다. 엘시는 무표정했다. 연인과 함께 맞이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 럼 보이지는 않았다. 사형수들은 마지막에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부냐 는 그런 것을 구경할 수 없었다. 정문의 모습 때문에 원추리문이라 불리는 데오늬 달비 여성기숙학원에 다니던 시절, 부냐의 동기생 중 에 처형장의 모습을 구경했다는 학우가 있었다. 부냐와 다른 동기생 들은 어딘가의 남작 영애라는 그녀를 거의 존경할 뻔했다. 상급생들 조차 그녀를 좀 어려워한다는 인상을 받았을 때 부냐는 그 사실에 우 쭐함을 느꼈다. 결국 부냐와 다른 동기생들은 그녀를 존경하지 않기 로 결정했지만, 그것은 재미 삼아 사소한 물건들을 훔치는 그녀의 손 버릇 때문이었지 그녀의 처형장 참관이라는 것이 몇십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잠깐 훔쳐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부냐는 엘시의 감정 없는 얼굴이 자신이 상상 속에서만 그려봤던 사 형수의 마지막 표정이 아니기를 애타게 기원했다. 그 때 두이만이 손 을 들어올렸다. 경비병들이 창끝을 전율시켰다. 부냐는 엘시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엘시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아무 런 도움도 받지 못한 부냐는 애원하는 시선을 염사장에게 옮겼다. 하 지만 염사장은 엘시를 노려볼 뿐이었다. 갑자기 염사장은 코끝으로 웃었다. 피식 피식 웃던 염사장은 손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옆으로 비켜라." 경비병들은 움찔하여 염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자 염사장은 투덜거리며 가까이 있던 경비병의 창을 빼앗아 들었다. 창 을 거꾸로 쥔 염사장은 창대를 경비병들 사이에 집어넣어 좌우로 흔 들었다. 경비병들은 성난 소리와 당황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비켜섰 다. 그렇게 길을 만든 염사장은 창을 바닥에 짚으며 말했다. "라호친가히 같은 놈들. 꼭 손을 대야 명령을 알아먹나. 빨리 좌우 로 비켜!" 경비병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며 문 앞에서 비 켜섰다. 문이 완전히 노출된 것을 확인한 염사장은 그 자신도 옆으로 비켜서며 외쳤다. "문을 열어!" 경비병들은 다시 당혹한 표정으로 염 사장을 바라보았지만 염사장이 다시 창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는 머 리를 내저었다. 부냐는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대한 문은 돌을 깎아내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칼날 같은 빛에 부냐는 눈을 가렸다. 문 사이에 나타난 은실이 빛의 기둥으로 부풀다가, 이윽고 밖으로 통하는 입구로 바뀌었다. 미풍이 살짝 불어왔다. 이마에 손을 붙인 채 가늘게 뜬 눈으로 밖을 본 부냐는 햇빛이 찬란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은 회색빛 이었다. 그리고 포석이 깔린 바닥은 검었다. 그 검은 바닥 위에 동그 라미가 가득했다. 실비가 오고 있었다. 부냐가 느낀 바람은 문틈을 통해 갑자기 안으 로 밀려든 습기였다. 이마를 가린 손 아래로 늘어진 소매자락을 통해 싸늘하면서도 청량한 느낌이 파고들었다. 부냐는 소름이 돋는 상쾌함 을 느꼈다. 간지러운 빗소리. 경비대원들은 이제 창을 위로 세워들고 있었다. 두이만은 왼팔을 들 어올렸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두이만은 그것으로 문밖을 가리켜보였 다. 열었습니다. 각하. 이용하시지요. 기묘한 일이었다. 부냐는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두이만 길토를 바라 보았다. 엘시는 대장군이지만 지금 그가 데리고 있는 전력은 큰 도움 이 되지 않는 부냐를 제외한다면 그 자신뿐이다. 반면 두이만은 간단 히 백작을 억류할 만한 병력을 데리고 있다. 혹 백작을 보내주면 만 병을 데려와서 백화각을 박살낼 테니 막아봐야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하지만 두이만은 엘시가 그럴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아 니,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 두이만은 죄수들의 관리 책임을 소홀히 했 다는 지적을 면피할 수 있다. 지금 문을 열어주는 것은 탈옥 방조가 된다. 부냐는 엘시를 이해할 수 없는 것만큼 두이만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엘시가 안고 있던 부냐를 놓으며 말했다. "갑시다. 부냐." 부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밖을 향해 달려가 고 싶었지만 뒷걸음질 치고 싶다는 충동 또한 느꼈다. 부냐가 쉬 움 직이지 못하는 것을 본 엘시는 그녀의 손을 살짝 끌어당겼다. 한 방울의 물이 잔을 넘치게 하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부냐는 그 가벼운 손길에 스르륵 끌려왔다. 엘시는 검을 옆으로 늘어 뜨린 채 앞장서서 걸어갔다.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문은 다 섯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커다랗게 다가오는 문의 모습에 질린 부냐는 옆을 쳐다보았다. 경비 병들은 미간을 찡그리거나 옆사람에게 소근거리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창끝은 여전히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앞으로 네 걸음. 또 한 걸음. 부냐는 엘시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엘시의 눈은 앞쪽 만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걸음을 더 걸었을 때 부냐는 두이만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두이 만은 팔짱을 낀 채 약간 높은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죄수를 놓아주 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나 그 행동 때문에 받게 될 처벌에 대해 걱정 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입가에 무엇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엘시는 실비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왼손에서 부냐의 손이 미끄러져 나갔다. 엘시는 몸을 반쯤 돌려 부냐를 돌아보았다. 부냐는 엘시가 쥐고 있 던 손을 아직도 내민 채 뒤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냐는 두이만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염사장의 입가에 꿈틀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 때 두이만은 부냐를 향해 얼굴을 돌 려 자신의 입가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쓸 쓸한 비웃음이었다. 고개를 떨군 부냐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발은 젖은 바닥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눈길을 옮겨 젖은 바닥을 따라간 부냐는 그곳 에 서있는 두 발을 발견했다. 부냐는 고개를 들어 엘시를 보았다. 거미줄처럼 가는 빗속에서 엘시는 벌린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손 에 들어가 있어야 할 자신의 손을 찾던 부냐는 그것이 엘시의 손에서 두 뼘 정도 떨어진 위치에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때 빗방울이 부냐의 손등을 쳤다. 부냐는 화들짝 놀라 손을 끌어당겼다. 엘시의 얼굴에 의문이 스치는 것을 보며 부냐는 자신의 손을 목 아래로 가져왔다. 부냐는 두 주먹 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엘시를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엘시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엘시의 앞머리에서, 굳은 턱에서, 놓쳐버린 부냐의 손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고 있는 왼손에서, 그리고 비스듬하게 뻗어있는 칼끝에서 영근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 다. 엘시가 말했다. "부냐?" 부냐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엘시는 칼을 옆으로 뿌렸다. 칼날에서 튕겨져나간 물방울의 원호가 빗줄기를 잘랐다. 엘시는 칼을 칼집에 꽂아넣고는 몸을 돌려 부냐를 똑바로 향했다. 엘시의 이마와 볼을 타고 물줄기들이 흘러내렸다. 그 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부냐." 부냐는 또 한 걸음,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반사적으로 부 냐를 따르려던 엘시는 발을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내렸다. 엘시의 손 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엘시는 두 손을 떨어뜨린 채 옆으로 약 간 기울인 얼굴로 부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두이만 길토가 굵게 말했다. "감기 들겠다. 문 닫아라." 약간의 지체가 있었지만 곧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부냐는 주먹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 호흡이 가빴다. 문틈으로 보이는 엘시의 얼굴에 어떤 희망이 떠올랐다. 그것을 본 순간 부냐는 눈을 감았다. 묵직한 소리에 부냐는 움찔했다. 다시 부냐가 눈을 떴을 때 문은 빈 틈 없이 닫혀 있었다. 부냐는 그 문을 처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거운 눈길로 문을 바라보던 두이만은 정적이 계속되자 코를 한 번 울리고는 부냐에게 다가섰다. 부냐의 뒤편에 선 두이만은 그녀의 어 깨를 가볍게 쥐었다. 부냐의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헨로. 돌아가야지." 부냐는 멍한 얼굴로 두이만을 돌아보았다. 재촉하려던 두이만은 부 냐가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비병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을 본 두이만은 큰 소리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경비 병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지만 주어진 명령은 어김 없이 수 행했다. 떠나는 경비병들을 보던 두이만은 부냐를 부축하며 말했다. "가자." 두이만의 부축을 받은 부냐는 걸음을 떼었다. 바깥을 보고 있던 부 냐의 눈에 백화각 안쪽은 몹시 어두워 보였다. 앞길을 잘 볼 수 없었 던 부냐는 두이만에게 완전히 의지했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가던 두이만이 갑자기 속삭였다. "할말이 있습니다. 헨로." 부냐는 두이만을 돌아보았다. 두이만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늘이 가기도 전에 바보짓을 했다고 후회하겠지요. 그러니 미리 말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귀족답게 행동했습니다." 부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를 사랑스러운 딸이나 귀여운 동 생, 착한 숙녀로 여겨준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녀에게 귀족답다고 말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냐는 그런 말을 듣고 싶어했던 적이 없고, 더군다나 수인의 신분이 되어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 상상할 수 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냐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서 슬펐다. 부냐는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럭저럭 밝기에 익숙해진 부냐는 자신이 수인 구역에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창살문이 열 리고 수인 구역 안으로 들어서게 되자 부냐는 두이만의 부축에서 벗 어났다. "이젠 혼자 가겠습니다. 염사장님." 두이만은 고개를 한 번 꾸벅였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두이만은 결국 그것을 포기했다. 그의 성격상 적당한 말을 만들어내 기도 귀찮았을 것이다. 두이만은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두이만이 떠나자 부냐는 잠시 벽에 기대었다. 문득 손목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부냐는 소매 속에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곧 그녀의 손이 쪽지 하나를 꺼내었다. 그녀의 땀과 체온 때 문에 부드러워진 서신을 펼친 부냐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 를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한 부냐는 서신에 있는 글자를 하나하나 파 낼 듯이 읽었다. '비셀스 규리하가 앉아야 할 자리에서 비키십시오.' 서류철 속에 있던 그 서신을 처음 보았을 때 부냐는 당황 속에서 비 셀스 규리하가 죄수가 되고 싶어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부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신을 보낸 자는 그녀에게 엘시 에더리의 약혼자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부냐는 한 번 더 서신을 읽었다.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찢기 위해서. 부냐는 서신을 세로로 죽 찢었다. 종이를 가늘 게 찢은 부냐는 그 중 몇 조각을 입에 집어넣었다. 입안이 말할 수 없이 텁텁했다. 부냐는 서신을 먹는다는 것이 말처 럼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참을성 있게 그것을 씹었다. 종이는 충분히 부드러워졌지만 그것을 삼킬 때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가까 스로 종이를 삼킨 부냐는 다른 조각들을 입에 넣었다. 목이 또 메었다. 눈을 질끈 감자 갑자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나왔다. 부냐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지만 눈물은 쉼없이 흘러나왔다. 부냐는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두이만에 대해 생각했다. 두이만은 엘시를 저지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부냐를 저지할 수 없었 다. 엘시가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은 아니다. 엘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두이만의 저지를 물리치기 위해 만병장인 엘시가 해야 할 일은 부냐를 자신의 병사라고 선언하는 것뿐이다. 그 순간 부냐는 엘시에게 귀속되며 황제의 법으로 부냐를 억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엘시가 말한 '무시하게 해주기를 바라나'라는 말은 협박 이 아니라 그런 사실의 지적이었다. 엘시의 지적을 이해했기에 두이 만은 그들을 저지하길 포기한 것이다. 떠나는 부냐에게 보낸 두이만의 비웃음은 동등한 약혼자나 아내이길 포기하고 엘시의 귀속물이 되려는 부냐에 대한 조소였다. 걸음을 멈 추고 엘시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뺀 부냐를 보았을 때 두이만은 꽤 놀랐을 것이다. 두이만이 보기에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엘시가 결정 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신은 귀족답게 행동했습니다.' 부냐는 그런 관점에 동의할 수 없어서 슬펐다. 부냐는 종이를 씹으며 오랫동안 소리없이 흐느꼈다. 이레 달비는 전설적인 몸종이라는 평가에 대해 언제나 시큰둥한 반 응을 보였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레는 하루라도 좋으니 자 신과 자리를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싶었다. 하지만 비에 젖 은 채 집안으로 들어서는 엘시를 본 이레는 자신이 전설적인 몸종이 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희희낙락하며 들어서는 주인의 모습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전설적인 몸종의 평정심이 필요할 것 같 았다. 들어서자마자 이레를 힘있게 껴안아줌으로써 이레의 정신 세계 절반 을 황폐화시켜놓은 엘시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옷부터 갈아입으 시라는 이레의 애처로운 요청을 거부한 채 명령의 폭포를 쏟아내었 다. 이레는 정신 세계의 나머지 반으로 퍼져가는 재난을 수습하려 애 쓰며 동시에 그 명령들을 기억하려 애썼다. "론솔피, 그을린발, 준람, 왕벼슬, 주테카, 야리키라고 하셨습니 까?" "내가 그랬나?" 엄청난 극기심을 발휘한 끝에 이레는 가까스로 담담하게 말할 수 있 었다. "제 기억으로는 그런 것 같습니다. 가주님. 그을린발과 왕벼슬이 사 람 이름이 맞다면, 가주님께서는 여섯 개의 사람 이름을 말씀하셨습 니다." "주인님이다. 그을린발은 엉겅퀴 연대 2대대 1중대장이었다. 이름이 뭔지 기억이 안나는군.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어서. 언젠가 발이 물에 젖은 적이 있는데 그대로 모닥불 속에 집어넣었다. 살 타 는 냄새를 맡은 병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끌어당긴 후에야 겨우 그의 발을 빼낼 수 있었지. 그래서 그을린발이야. 내 기억이 맞다면 켄테 롭에서 코끼리를 잡고 있을 거다." "레콘인가 보군요. 그런데 그 분이 왜 코끼리를 잡고 있는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코끼리를 가축화 하는 것이 숙원이거든." "예? 코끼리는 이미 가축화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제국 남쪽에는 코끼리를 부리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건 잡아서 기르는 거지 가축이 아냐. 어떤 사람은 호랑이나 사자 를 잡아서 기르기도 하지만 그걸 가축이라고 부르지는 않지. 가축이 라고 부르려면 소나 말, 돼지처럼 사람의 보호 아래에서도 자유로이 번식해야 하니까. 그을린발의 숙원은 코끼리를 소나 말처럼 만드는 것이다." "아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레콘이 도전할 만한 일이군요." "왕벼슬의 이름은 기억나는군. 쵸지. 그래. 쵸지였다. 신부탐색자였 지만 보는 눈이 굉장히 까다로웠지." 이레는 주인에게 수건을 건네며 질문했다. "가주…… 주인님. 혹 거론하신 여섯 분이 전부 레콘입니까?" "그래. 전부 레콘이야." 이레는 한 가지 가능성 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어딘가에 퇴치해야 할 용이 나타났습니까?" "음? 아니다. 나는 지멘을 잡으러 갈 생각이야." "예? 그 수배자 말씀입니까?" 엘시는 수건을 머리에 덮어쓴 채 그것을 세차게 문질렀다. 엉망이 된 머리를 내버려둔 채 엘시는 목 주위를 닦으며 말했다. "비스그라쥬백이 나에게 지멘을 잡을 만한 레콘들을 수배해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직접 그들을 지휘할 생각이야. 서신도 내가 직접 쓰 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군. 그러니 네가 서신을 써야겠 다. 누구라고 했지?" "론솔피, 그을린발, 준람, 왕벼슬, 주테카, 야리키입니다." "론솔피에게는 지멘이 즈라더를 죽였다고 전하면 된다. 무슨 말인지 알 거야. 주테카에겐…… 지멘에게 걸린 현상금을 주겠다고 써라. 현 상금 사냥꾼이니까." 현상금 사냥꾼? 숙원 사업을 위한 자금 모으기인가? 이레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본 엘시는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주테카의 숙원은 정의 구현이다. 그래서 범죄자를 소탕하는 거지." 이레는 폭소해야 할지 감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이레는 감 탄하기로 했지만 그것은 주테카가 아닌 그의 주인에 대한 감탄이었 다. 일반적인 레콘보다 더 레콘에 대한 교제 범위가 넓은 그의 주인 은 이레의 감탄을 받을 만했다. 엘시가 계속 말했다. "그을린발에게는 내가 직접 정신억압자를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고 전해라. 야리키에겐 쥐딤의 빚을 갚을 때가 왔다고 전해라. 아, 내 이름을 말해봐야 못 알아들을 테니 취검 하던 그 교위라고 써야 한다. 그리고 준람에겐 그의 둘째 아내…… 아니, 그냥 내가 지멘을 잡을 생각이라고만 전하면 된다. 알아들을 거다. 왕벼슬에게도 준람 과 마찬가지로 전해라. 집합 장소와 시간은 보름 뒤, 나나본의 태수 관이다." 이레는 입을 쩍 벌렸다. "보름 뒤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보름 뒤, 나나본의 태수관." "가…… 주인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 분들의 이름을 방금 들었습 니다. 이 넓은 제국땅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분들을 보름 뒤까지 나나본에 모이게 하는 것은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그 중 한 분은 신부탐색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렇다면 떠돌아다니고 있 을 텐데요." "이레. 나는 네게 간혹 어려운 일을 시키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지는 않는다.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덕시 수교위에게 물어봐 라. 그가 어떻게 그들을 찾아야 하는지 알려줄 거다." 이레는 의혹을 완전히 잊기로 했다. 엘시의 말대로일 것이다. 그들 은 틀림없이 엘시의 소환에 응할 사람들일 것이며, 이레가 찾아낼 수 있는 곳에 있을 것이며, 아마도 보름 안에 나나본에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이레가 짐작하지 못하는 수많은 기준 을 통과한 자들일 것이며, 그들이 모이면 지멘을 때려잡을 수 있을 거라는 점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엘시가 그 목록을 작성했으니까. 하지만 이레에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주인님. 외람되지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주인님께서는 황제의 대장군이십니다. 일개 수배자를 잡으러 다닐 분이 아닙니다. 왜 그런 격에 맞지 않는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엘시는 대답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앉아서 서신을 쓸 시간도 없는 판국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규리하 점령군의 업무 인계에 돌입 해야 한다. 하지만 엘시는 마음을 바꿨다. 똑같은 질문을 다른 사람 에게 듣게 될 거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시는 그의 몸종을 연습 상대 삼아 대답해보기로 했다. 엘시의 예측은 옳았다. 그날 자정 무렵, 대장군의 느닷없는 방문 때문에 잠자리에서 나와야 했던 데라시는 자신이 비몽사몽간이라는 사실을 표현하려 애썼다. 잠 자리에서 끌려나온데다가 하늘누리에 쏟아진 비 때문에 기온이 몹시 떨어져 있었으니 나가가 추위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엘시의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든 데라시는 그 런 항의를 포기했다. 주의깊게 엘시의 말을 들은 데라시는 이레가 한 것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저는 레콘들을 수배해달라고 했지 당신에게 그들을 지휘해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황제의 대장군이 일개 수배자를 뒤쫓아야 되는 이 유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쏟아진 비에 몸이 상당히 젖었고 업무 인계 계획을 수립하느라 저녁 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엘시는 허기를 느꼈다. 하지만 엘시는 데라시 에게 뭐 먹을 것이 없겠냐고 물어보는 바보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데라시가 내놓는 먹거리는 살아있는 양이나 새끼 돼지 같은 것일 테 니까. 나가인 데라시는 산 것만 먹는다. 그리고 큰 동물을 먹으면 오 랫동안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엘시는 퍽 부러운 특징이라고 생각 하며 말했다. "내가 수배한 레콘들은 내 말만 들을 겁니다. 비스그라쥬백. 론솔피 나 주테카 같은 경우는 안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나머지는 내가 부르 지 않으면 오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레콘이 처음 보는 인간의 지 휘를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그들 중 누군가를 지휘자로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서로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들은 모두 나이 많은 레콘입 니다." 데라시는 엘시가 노쇠한 레콘을 모아들인다고 착각하지는 않았다. 무기를 놓지 않은 이상 레콘의 나이는 그만큼의 전투 경험으로 파악 해도 무방하다. 엘시가 거론한 레콘들은 모두 강한 사람들일 것이고, 아마 서로에게 쉽게 머리를 숙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그 강력한 레콘들이 당신의 지휘는 들을 거라는 말입니까? 어 째서죠?" 엘시는 간단히 대답했다. "내 지휘를 받아들일 만한 사람만 골랐기 때문입니다." 데라시는 그 날 낮에 이레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엘 시가 말한 대로일 것이다. 데라시는 레콘들의 통솔에 대한 의문은 포 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신은 정우의 결혼을 주관하기로 했잖습니까?" "비스그라쥬백. 나는 정우와 결혼하지 않습니다." 데라시의 몸에서 비늘이 일어났다. 데라시는 조금 전에 피운 난롯불 이 잘 타는지 궁금하다는 눈으로 벽난로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엘 시를 외면한 채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비스그라쥬백. 나를 보십시오." 데라시는 어쩔 수 없이 엘시를 돌아보았다. 물론 그의 얼굴을 보기 전에 데라시는 엘시가 칼을 차고 왔는지부터 확인했다. 난처하게도 엘시는 칼을 차고 있었다. 엘시가 말했다. "전에도 말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지 안다고. 당신을 싫어하지만 그 점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나는 화를 내지는 않 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우 규리하와 결혼하지 않습니다. 내 약혼자 는 부냐 헨로이고, 나는 그녀와 파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가 나 를 이해해준 지금은 더욱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가 당신을 이해했다고요?" "당신은 아마 오후에 백화각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받았겠지요." "아니오. 보고받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엘시는 두이만이 그 일을 덮어두려 했음을 알게 되었다. 두이만이 보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자질하고 싶지 않았던 엘시는 모호하게 말했다. "나는 만병장의 권한으로 부냐를 그곳에서 꺼내주겠다고 제안했습니 다." 데라시는 깜짝 놀랐다. 엘시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 다. 하지만 데라시는 엘시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신이 그랬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지요?" "부냐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부냐는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옳다고 믿는 방법 으로 그녀를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준 것입니다." 데라시는 한숨을 쉴 뻔했다. "당신이 옳다고 믿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해볼까요. 폐하께 뭔가를 요구하는 대신 더 많은 것을 드리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내 방식입니다." "그래서 무향 다음에 황제사냥꾼을 잡기로 했다는 겁니까? 그 다음 엔?" 엘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데라시를 바라보았다. 데라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기를 더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벽난로 앞으로 걸어간 데 라시는 그곳에 서서 말했다. "당신이 황제사냥꾼을 붙잡아 폐하께 진상한 후에도 폐하께서 부냐 의 석방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쩔 생각입니까. 그 다음엔 누구를 잡 으러 갈 생각입니까? 누구를 거꾸러뜨릴 생각입니까?" "내 방식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군요. 하지만 당신을 납득시 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비스그라쥬백. 내 약혼자가 나를 이해해 주었고, 내겐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정우와 당신의 결혼이 폐하의 의지라면 어쩔 생각입니까?" 엘시가 가장 두려워하던 질문이다. 하지만 이미 대비했기에 엘시는 당황하지는 않았다. "나는 폐하께 그런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설령 폐하께서 그렇게 말 씀하신다 하더라도 나는 폐하께 대답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이 폐하의 의지라고 말한다면 나 는 폐하께 찾아가서 직접 여쭙겠습니다." 미봉책이랄 수밖에 없는 말이다. 하지만 엘시는 그보다 나은 대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데라시 또한 엘시의 그런 심정을 잘 알 수 있었 다. 이 시점에서 그것이 폐하의 뜻이니 궁금하면 가서 여쭤보라고 말 한다면 저열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라시는 황제와 대장군이 직접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무모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고민 끝에 데라시는 생각에 잠긴 척하며 조심스럽게 닐러보았다. 곧 대답이 있었다. 데라시는 조금 전 엘시와 나누었던 대화의 기억 을 황궁 저편의 황제에게 보냈다. 지나치게 지체했다가는 자신이 무 슨 일을 하는지 엘시가 눈치챌지도 모르지만 데라시는 황제의 대답이 순식간에 올 거라고 믿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데라시의 기억을 전부 전해받자마자 황제는 짤 막한 니름을 보내어왔다. 하지만 그 니름은 데라시에겐 놀라운 것이 었다. 데라시는 충격을 감추기 위해 벽난로 쪽으로 돌아섰다. 나가에 게 익숙한 사람이라면 데라시가 몸 다른 곳에도 열기를 받으려 한다 고 판단할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데라시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정우의 결혼은 누구에게 맡길 생각입니까?" 엘시의 음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 맡길 겁니다. 그는 연만하고 그런 일에 대해서는 나보다 경험도 충분합니다. 두 자녀를 결혼시켰으니까요. 빈틈이 없는 성격이니 잘 처리할 겁니다." 갑자기 높아진 엘시의 음성을 들은 데라시는 엘시가 무슨 생각을 하 는지 깨달았다. 엘시는 정우와 결혼하는 것이 황제의 뜻이 아니라 데 라시의 뜻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데라시는 다시 엘시를 향해 몸을 돌 렸다. "엘시. 당신은 대장군입니다. 당신이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자기 자 신에게 장기 휴가를 주고 그 휴가를 황제사냥꾼 체포에 쓴다 하더라 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제게 그 사실을 보고하러 온 이유는 당신의 계획에 대해 제가 어떤 분과 의논하기를 바라기 때 문일 겁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일 대답해도 되겠습니까?" "기다리겠습니다. 야심한 시간에 결례가 많았습니다." 엘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라시는 그가 통제하지 못한 기쁨 때문 에 어깨라도 움찔거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엘시는 차분한 태도를 유 지하며 그의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데라시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비스그라쥬백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슴 속이 휑하게 느껴졌 다. 심장을 적출한 빈 자리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황제의 니름이 들려왔다. [엘시에게 대답을 전했나?] 데라시는 황제의 방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 었다. [전하지 않았습니다.] [왜지?] [제가 납득할 수 없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 다.] [네가 말하는 일은 네 특기인 것 같은데.] [폐하!] [왜 전하지 않았지?] 데라시는 황제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이곳이 한계선 이남의 땅이었 다면 데라시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추운 땅에서 데라시는 시종들을 깨워 보온복을 준비시키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자 신이 갇혀있다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며 데라시는 비늘을 부 딪쳤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게 엘시와 정우를 결혼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엘시에게 약혼자가 있어도, 암살공이 그 결혼을 반대해도 그렇게 하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정우에게 중요한 일 이 결혼임을 엘시에게 가르쳐주었고, 모든 사람들이 엘시와 정우의 결혼을 받아들이게끔 했고, 부냐에게는 엘시와 파혼하라는 서신을 보 냈습니다. 부냐가 왜 엘시의 구조를 거절했는지는 분명합니다. 가엾 은 대장군의 슬픈 오해를 폐하께서도 들으셨지요?] 데라시는 약혼자가 자신을 이해해줬다고 믿는 엘시가 정말 가엾다고 생각했다. 부냐는 알고 있었다. 엘시와 함께 백화각을 나오는 순간 부냐는 자신의 유언장에 서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녀의 손에 들어갈 서류철에 서신을 끼워두는 행위에서 부냐는 강력한 권력을 느 꼈을 것이다. 그리고 부냐는 엘시의 옆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 강 대한 권력이 그녀를 죽여서 파혼을 이끌어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르 헨로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조만 간 헨로 가문에서 파혼 요청이 있을 겁니다. 저는 부냐의 문제를 깨 끗하게 처리했고, 이제 까다로운 암살공을 처리할 방법에 대해 고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엘시가 부냐의 방면을 위해 애쓰도록 내버 려둬야 합니까? 그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합 니다.] 치천제는 무정하리만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어떤 침묵의 시간 도 없이 황제의 니름이 들려왔다. [무익하지는 않다. 금편 380만 닢이라는 무서운 폭발력을 품은 채 방황하고 있는 그 불씨들을 계속 내버려두는 것은 자해 행위에 가까 우니까. 엘시가 그것들을 잡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다.] [엘시는 그것이 부냐의 석방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황을 알게 되면 그는 배신감을 느낄 겁니다. 폐하. 부디 제 니름을 들어주십시오. 제국만병장에게 그런 배신감을 주는 것이야말로 자해 행위입니다.] [배신감? 배신감은 믿음의 대가를 받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엘시는 대가를 바라고 짐을 믿는 것이 아니다.] 놀라운 충격에 데라시는 정신을 닫았다. 황제는 갑자기 닫힌 그의 정신을 느끼겠지만 데라시는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째 벽난로방에 있는 나가들이 황제의 니름을 세상에 전달하는 전문가일 뿐 황제와 어떤 친밀함을 나누는 상대가 아니라는 점을 놓 고 본다면, 하늘누리 위에서 치천제의 동포는 오직 한 사람 데라시뿐 이다. 다른 이들보다 황제에게 더 가깝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애써 물리치는 데라시지만 그가 동포의 눈과 동포의 생각으로 황제를 이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객관성과 무관했다. 데라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 는 황제와 대장군의 관계는 그를 절망에 빠트렸다. 배신으로 보답 받아도 변함 없는 믿음?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에게 그런 것을 태연하게 기대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 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치천제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런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엘시 에더리 뿐이다. 데라시는 자신이 이 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황제는 오래 전부터 대가 없 는 충성을 바랐다. 데라시 자신이 바로 그런 황제의 바람을 세상에 적용시켰던 사람이다. 하지만 데라시 자신이 그것을 황제에게 주었던 가? 황제가 바라는 그것을 묵묵히 황제에게 주었던 사람은 바로 엘시 에더리다. 황제의 어처구니 없는 발언은, 그 대상이 엘시이기에 합리 적이다. 갑자기 데라시는 황제와 대장군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느 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해의 방식이 무엇이건 그것은 오직 그 두 사람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데라시는 궁금해졌다. 그것이 위험한 의문임을 데라시는 알고 있었 다. 하지만 데라시는 엘시가 그런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황제 를 믿고 황제에게 충성할 것인지 궁금했다. 황제가 닐렀다. [데라시. 엘시에게 짐의 대답을 전해라.] [그의 계획을 진행해도 좋다고 니름이십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폐하.] 어떤 일그러진 감정 상태에서 데라시는 엘시의 대답을 흉내내었다. [야심한 시간에 결례가 많았습니다.]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데라시는 갑자기 나가도 술을 마실 줄 알 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개 : 잘생겼든 못생겼든, 몸짱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단지 주인 이 주인이기에 사랑하는, 그럼으로써 인간을 부끄럽게 만드는 인간의 영원한 반려이자 반면교사. …라고 생각해. 그러니 물지 말라고. 젠장.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6-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2-09 조회수 : 75 피를 마시는 새 6. 바람 속의 돌 - 4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은 스카리 빌파가 술을 그만 마셨으면 좋겠 다고 생각했다. 스카리의 건강을 염려한 것은 아니다. 파라말은 취할수록 흉폭하게 바뀌는 스카리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한 잔의 술을 위 속 에 때려붓는 스카리를 보며 파라말은 도대체 그 술들이 다 어디로 사 라지는 건지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스카리는 잔을 소탁에 내려쳤다. 파라말은 소탁이나 잔 중 하나가 박살나지 않는 것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스카리가 말했다. "개 같은 노인네. 비셀스를 훔쳐오라고? 아들을 자기 발 닦는 쫄따 구로 보나. 씨발. 완전히 옆집에 가서 뭐 하나 슬쩍해 오라는 식이잖 아." 또한 파라말은 취할수록 거칠어지는 스카리의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무지 귀족적이라고 할 수 없다. 발언자가 발케네공이 아니 라면 품위 유지에 관한 의무 태만으로 귀족원에 끌려나간다 해도 할 말이 없는 폭언이다. 물론 귀족원도 발케네 남자에게 품위에 대한 헛된 기대를 품지는 않 을 것이다. 파라말은 자신 또한 그러기로 했다. 앞에 놓인 술잔을 만 지작거리며 파라말이 말했다.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신부 절도가 발케네의 전래 풍습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건 여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색시감이 있으니 결혼할 생각이 없냐는, 그러니까 춘부장 연배 의 아버님들이 호흡처럼 하는 말씀이지요." 스카리를 달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파라말은 자신이 왜 발케네 남 자에게 발케네의 풍습에 대한 변호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 카리 또한 그것이 웃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웃기네, 스승. 나한테 발케네 풍습을 설명하는 거야? 헷!" 웃으며 술잔을 집어든 스카리는 그것을 턱 앞에서 멈췄다. 그는 잠 깐 술잔 안을 쳐다보더니 그것을 옆으로 휙 뿌렸다. 비 내리는 마당 에 술이 쏟아지며 물보라가 일었다. 파라말은 의아한 얼굴로 스카리 를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술잔을 뒤집어 소탁 위에 엎어놓았다. "더 마시면 스승이 들려줄 좋은 말을 못 들을 것 같군. 그러니 잠깐 쉬지." 시원시원한 사내. 파라말은 빙그레 웃었다. 스카리는 약간 비틀거리 며 마루에서 내려갔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이 신발을 찾는 것 같았지만 어두운 밤과 취기 때문에 스카리는 그냥 포기했다. 맨발 로 마당에 내려선 스카리는 철벅거리며 마당 가운데까지 걸어갔다. 바지 앞섶을 풀어헤치는 스카리를 본 파라말은 다시 웃었다. 빗줄기 속으로 장쾌하게 오줌줄기를 뿜어낸 스카리는 바지를 추스르 고는 쏟아지는 비를 향해 얼굴을 들어올렸다. 입을 벌려 빗물을 받아 마신 스카리는 입을 쓱 닫고는 다시 마루 쪽으로 돌아왔다. 마루 끄 트머리에 걸터앉은 스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사라말에게 소식 듣고 위로하러 온 거야? 그런 거라면 됐어. 위로 안 받아도 되니까." "형님에게 소식을 들은 것은 맞습니다만 위로하러 온 것은 아닙니 다. 바둑만 가르쳐드리기로 했지 위로해드리기로 한 적은 없고, 공에 게 그런 것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 까?" 스카리는 젖은 두 발을 서로 탁탁 부딪쳤다. "열여섯 살 먹었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경고했어. 앞으로는 내가 하 기 싫은 일을 시키려면 고함 지르는 것 가지고는 안 될 테니 좀 더 단단한 것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허튼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을 보여주려고 칼부림 한 번 확실하게 해줬지. 알아먹더군. 그 런데 집을 오랫동안 떠나있었더니 멍청한 노인네 그걸 까먹고 다시 자기가 대장이라고 생각하게 됐나봐. 하긴 옆에 있는 것들이라곤 전 부 아버지에게 설설 기는 놈들뿐이니 그렇게 착각해도 할 수 없지." 파라말은 생각했다. 발케네 공작가의 가족사를 쓰고 싶은 전기 작가 는 따사로운 가족애라는 말 대신 좀 더 모호한 어휘를 찾아야 할 거 라고. "그러면 아버님의 명령을 무시할 작정입니까?" 스카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당연하지. 비셀스는 에더리와 결혼해야 해. 살다보니 내가 그 녀석 에게 양보를 다 하는군. 하지만 부냐를 구하려면 그래야겠지. 노인네 가 무슨 소리를 하건 무시다." 스카리는 새삼 화가 치민다는 듯이 말했다. "빌어먹을. 이것도 에더리 때문이야. 내가 대장군이 되었다면 아버 지가 내게 그따위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야." 파라말은 그런 가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스카리에게 엘시는 생명의 은인이다. 엘시가 취한 그를 대신하여 군단을 회복시 키지 않았다면 스카리는 불명예 속에서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파라 말은 스카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 다. 그는 스카리의 분노가 더욱 커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파라말의 절제는 아쉽게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스카리는 스 스로 자신의 분노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규리하의 얼간이들은 왜 그 녀석 하나 붙잡지 못했나! 괄하이드 규 리하의 시절이라면 이러진 않았을 거야. 괄하이드라면 그런 병신 같 은 자식이 자신의 땅을 집적거리게 놔두진 않았을 거다. 칼질 한 번 으로 목을 따버렸겠지." 파라말은 조바심을 느꼈다. 반역 선언에 가까운 스카리의 말을 듣는 것은 젊은 산공부사를 몹시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스카리 빌파의 집 이 크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늘누리의 기준에서 크다는 것이 다. 집 바깥을 지나던 사람이 스카리의 목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파라말은 비가 와서 나다니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사실에 감사 했다. 그는 스카리에게 암시를 알아들을 정도의 이성이 남아있기를 바라며 말했다. "괄하이드 규리하라면 폐하의 미움을 사지도 않을 겁니다. 발케네 공." 스카리는 '규리하 땅을 집적거린 사람'이 황제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발케네공은 이를 악물었다. "그랬겠지…… 맞아. 그럴 거야. 쳇. 나는 농담도 제대로 못하는 군." 파라말은 안심했다. 겨우 몇 초 정도. 스카리가 다시 말했다. "규리하를 너무 얕보는 것도 좀 미안한 일이겠지. 어쩌면 오늘 밤이 라도 규리하의 어떤 의사(義士)가 에더리의 멱을 딸지도 모르니까." "예? 아, 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요. 하지만 쉽지 는 않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대답하던 파라말은 갑자기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 꼈다. 파라말은 스카리의 얼굴을 뜯어보며 매우 불쾌한 추리에 돌입 했다. 스카리 빌파의 고민은 단순하다. 부냐를 구하기 위해 정우와 엘시의 결혼을 지지할 경우 스카리는 그의 아버지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 게 된다.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는 제국만병장이 발케네의 목전인 규리하를 차지하게 되면 황제는 그다지 공손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발케네의 암살공을 완벽하게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락토 빌파의 입장에서는 침실에 대호가 한 마리 들어온 기분이 들 것이다. 그리고 락토의 후계자인 스카리는 락토의 고민도 계승하게 될 것이다. 비록 입으로는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지만, 스카리는 그것을 단순히 아버 지의 고민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쫓아 정우를 훔치는 것 또한 쉬운 선택은 아 니다. 스카리는 자신의 사랑을 쉽게 포기할 사내는 아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엘시를 규리하공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치천제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일이다. 락토 빌파는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황제와 약간 대립하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겠 지만 아직 발케네의 주인이 아닌 스카리에게 황제와 대립하는 것은 별로 매력이 없는 일이다. 사랑이냐, 권력이냐. 고전미가 물씬 풍기 는 갈등이다. 그런데 사랑과 권력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자신을 망치는 비극적 사 내의 모습은 발케네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귀감이 되는 모습이 아니 다. 속이고 빼앗고 훔치는 발케네인들은 그런 비극의 주인공에게 얼 간이의 낙인을 즐겁게 찍어줄 것이다. 그리고 스카리 또한 발케네인 이다. 스카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하는 대신 가장 많 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며, 그런 모색에 도덕을 동 참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많은 것을 얻는 현실적인 방법은 엘시의 죽음이다. 엘시가 죽을 경우 락토의, 그리고 장차 스카리의 것이 될 고민은 영 구히 사라진다. 정우는 다른 남편감을 찾아야 할 것이고 그녀가 찾아 낼 수 있는 어떤 남편감도 암살공의 비위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약혼자가 죽은 이상 부냐는 자연스럽게 파혼하게 될 테니 스 카리는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게 된다. 단검 하나로 스카리는 자신의 모든 고민을 영원히 잊을 수 있는 것이며 그에 덧붙여 가장 꼴보기 싫은 사람을 제거하는 쾌감까지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런 계산법은 발케네인의 취향에 잘 맞는 것이다. 더군다나 현 상황은 스카리에게 황제의 대장군을 죽이는 일이 가져 올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모면할 방도까지 제공하고 있다. 점령지에 서 주둔군 사령관이 죽었다면 그 혐의가 피정복자들에게 갈 것은 분 명한 사실이다. 스카리의 표현처럼 규리하의 의사가 저지른 소행이라 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제반 조건은 이렇듯 완벽하다. 그렇다면 스카리가 고려해야 할 실제적인 문제는 그에게 엘시를 죽일 능력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스카리 빌파는 암살공의 아들이다. 파라말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려 애썼다. 암살공이 가지고 있 다고 알려져 있는 도깨비 감투는 세 개다. 그 중 하나를 암살공의 최 우선 계승권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자신이 죽을 경우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될 사람에게 자신을 죽일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암살공처럼 의심이 많은 사람에게 어울리 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향권 밖을 떠도는, 그래서 자칫하면 적대자들의 인 질이 될 수도 있는 아들에게 암살공이 어떤 대비책을 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도깨비 감투밖에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파라말은 암살공 이 아니고, 따라서 파라말은 암살공이 자신의 안전과 후계자의 안전 중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둘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파라말은 스카리 의 생활 방식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카리는 호 사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안전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 니다. 군대에서 쫓겨나 유수부의 경비병 노릇을 하고 있는 스카리에 게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주변에 거센 발케 네 전사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암살공은 자신의 후계자를 이토록 무 방비하게 방치할 수는 없다. 스카리에게 도깨비 감투를 준 것이 아니 라면. 스카리 빌파가 도깨비 감투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 다. 파라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스카리는 뇌룡공이 돌아오 기 전까지는 절대 밝혀낼 수 없는 방법으로 황제의 대장군을 살해할 수 있다…… 파라말은 그런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 목울대를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에 파라말은 입을 여는 대신 그것을 단단히 닫으 며 고개를 돌렸다. 스카리가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 렇잖으면 엘시에 대한 증오 때문에 농담을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 다. 만약 후자라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수습이 불가능한 바보짓이다. 파라말은 스카리의 속셈이 무엇인지 간파할 수 있는 방법을 필사적으 로 궁리했다. 그리고 스카리의 다음 말은 파라말을 더욱 곤경 속에 빠트렸다. 스 카리는 자신의 농담에 스스로 웃는 사람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며 말했다. "아냐, 아냐. 생각해보니 그 의사는 비셀스 규리하를 노릴 확률이 더 높겠군. 황제의 대장군을 잡는 것은 어렵잖아. 비셀스가 에더리와 결혼하여 이 땅을 규리하가 아닌 자에게 주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우국지사가 있지 않겠어?" 정우 규리하를? 파라말은 겁에 질린 얼굴로 스카리의 옆얼굴을 훔쳐 보았다. 엘시와 정우의 결혼을 방해하는 방법은 엘시를 죽이는 것뿐 만은 아니다. 정우를 죽여도 그 결혼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마찬가 지다. 엘시를 죽이는 것만큼 효과가 크진 않지만 대신 정우의 경우에 는 부담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지지 세력이 거의 없으니까. 정우가 가진 최대의 지지세력은 완전히 비폭력적인…… "도깨비다." 파라말은 어안이 벙벙하여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스카리가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뭔가를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카리가 가리킨 하늘에는 커다란 도깨비불이 솟아오르고 있 었다. 그것은 거대한 광선의 형태로 밤하늘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몽화각의 어떤 도깨비가 그런 불을 만들어내고 있으리라. 방 향을 가늠해본 파라말은 예상대로 그것이 몽화각 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카리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설마 황제사냥꾼이 돌아온 건가?" "예?" "하늘로 빛을 쏘고 있잖아. 하늘에 뭐가 있어서 비춰보려는 것 아 냐?" 파라말은 긴장했다. 황제사냥꾼이 하늘누리 침입을 다시 시도한다면 이렇게 비가 오는 밤이 적격일 것이다. 스카리는 유수부원답게 재빨 리 신발을 찾았다. 그러나 스카리가 그 암흑 속에서 신발을 찾아내어 한쪽을 신었을 때 파라말이 말했다. "다행히 그건 아니군요.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스카리는 나머지 신발을 손에 든 채 광선을 바라보았다. 광선이 흐 려지는 부분에 나타난 것은 파라말의 말처럼 딱정벌레였다. 딱정벌레 는 광선을 따라 하강하고 있었다. 스키라와 파라말은 사태를 이해했 다. 어둠과 비 때문에 제대로 내려서지 못하는 딱정벌레 기수를 위해 몽화각의 도깨비가 유도용 광선을 쏘아준 것이다. 그들의 짐작처럼 광선은 딱정벌레가 내려섬에 따라 점점 짧아졌다. 딱정벌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스카리가 말했다. "이상하군. 유수부의 갑충사들이든 몽화각의 도깨비들이든 이 정도 어둠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눈 감고도 오르내릴 수 있을 거라 고." "탈해 머리돌이군요." "뭐?" "즈믄누리로 갔던 무사장 탈해 머리돌이 돌아온 모양입니다. 그는 하늘누리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이런 어둠 속에서는 도움이 필 요했겠지요." "아, 그래. 바우 성주에게 조언을 구하러 갔었지?" 스카리는 발에 끼었던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만약 성주가 결혼하지 말고 즈믄누리로 돌아오라고 조언했다면 비 셀스는 그것을 따를까?" "도깨비들은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린 결정을 무조건 받아들이지요. 우리의 성채매장자도 도깨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파라말은 잠깐 침묵한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규리하의 우국지사는 비셀스를 죽이지 않겠군요." 스카리는 무의미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 파라말이 추리의 근거 로 삼을 만큼의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폐하께서 결혼을 강요한다면 그 여자가 무슨 재주로 그것을 거절하겠어? 바우 성주의 조언 같은 것은 필요없어." 파라말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바우 성주가 뭐라고 했건 황제 는 엘시와 정우를 결혼시키려 할 것이다. 그리고 스카리는 신랑이나 신부 중 한 명을 살해하는 방법으로 그 결혼을 저지할 수 있다. 그 추측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라말은 꺼내야 할 말들을 재빨리 검토 했다. 파라말은 스카리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전에는 스카리의 집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정우는 두 손으로 뺨을 토닥이며 할 말을 열심히 정리해 보았다. 하 지만 흥분 때문에 정우가 가다듬은 말들은 머리 속에서 마구 뒤엉켜 버렸다. 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틸러가 탈해가 왔다고 알려주었을 때 부터 그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우 성주의 조언을 직접 전 하기 위해 탈해가 찾아온다고 알려주었을 때 정우는 손 써 볼 수 없 을 만큼 흥분해버렸다. 어떻게 잠자리에서 나왔는지, 어떻게 옷을 입고 어떻게 몸단장을 끝 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직도 잠옷 차림이라고 생각한 정우는 깜짝 놀라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옷을 정확하 게 차려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억상실증에 대해 걱정하기 시 작했다. 흥분하고 허둥대고 혼란스러워하던 정우는 결국 자신의 상태를 인정 하고 그것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우는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다. 호- 하- 호- 하-. 정우는 자신의 숨소리가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정우는 그 숨소리에 대해서도 잊었다. 그리고 편안한 어둠만이 남게 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외로웠구나. 정우.' 정우는 조금 놀랐지만 정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탈해를 만나게 된 것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정우가 이토록 흥분하는 것은 도 깨비를 너무 오래간만에 보기 때문이다.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탈해를 기다릴 때 정우는 해야할 말을 궁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 신 문을 열고 들어서는 탈해를 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농담을 할 것이다. 탈해 또한 농담으로 응수할 테고, 그리고 두 사람은 요란하 게 웃을 테고,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용건이 뭔지 까먹었다는 사실에 낭패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탈해와 정우가 보통 만나는 방식 이었다. 하지만 태어난 이래 가장 긴 시간 동안 도깨비와 헤어져 있어야 했 던 정우는 그 옛날의 방식에 생경함을 느꼈다. 그래서 정우는 탈해 를, 좋은 친구 탈해를 마치 어려운 손님처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자 신이 탈해를 여전히 친구로 여기고 있고 그를 만나게 되어서 기쁘다 는 사실을 강조해 보이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는 것이다. 눈 깜빡임을 규칙적으로 정확하게 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이런 거 그만두자. 옛날처럼 하자.' 정우는 결심했다. 감정을 강조해 보일 필요는 없다. 아마 탈해는 그 것을 가지고 정우를 마구 놀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정우는 웃고 싶어졌다. '와! 큰일날 뻔했네. 탈해. 나를 비웃게 놔두진 않을 거야.' 정우는 긴장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 께 엘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시 에더리입니다. 탈해 머리돌과 함께 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 다." 정우는 눈을 떴다. 갑자기 어둠에서 빠져나온 정우는 문이 열리고 엘시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정우는 조금 전의 결 심을 깡그리 잊고는 자신이 이곳에 없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 녀의 몸은 조각가가 열정을 잃고 방치해둔 조각품처럼 볼품없는 모습 으로 굳었다. 정우의 정신 상태에 대해 알 리 없는 엘시는 정중한 동작으로 옆으 로 비켜섰다. 정우는 엘시가 비켜난 자리를 통해 커다란 도깨비가 들 어서는 것을 보았다. 탈해 머리돌이었다. 빗속을 날아온 탓인지 탈해는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 지만 그 얼굴은 단순히 젖은 것 이상으로 후줄근해 보였다. 정우는 탈해가 아픈 것이 아닌가 하고 깜짝 놀랐다. 탈해는 의기소침해 보였 고 불편해 보였다. 그는 자기 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 람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탈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우 는 그것이 아마도 미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 자신할 수는 없었다. 탈해가 말했다. "어, 안녕, 정우?" '안녕?' 정우는 멍한 얼굴로 탈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우는 탈 해가 자신에 대해 깜짝 놀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우는 깨달았다. 탈해 또한 이 만남 때문에 흥분하고 있었고, 자신 의 기쁨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싶어했고, 적절한 말들을 고르느라 끔 찍한 시간들을 보냈고, 결국 흥분 때문에 그 말들을 다 까먹고는 아 무 말이나 꺼냈다는 것을. 정우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정우는 커다랗게 미소지었다. 구월의 해바라기 같은 미 소를 짓는 정우를 보며 탈해의 얼굴 또한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정우 는 두 손을 들어올려 가슴에 얹었다. 정우는 온화하게 말했다. "나 아줌마 되는 거야?" 부드러워지던 탈해의 얼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결이 치는 것 같 았다. 마침내 탈해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던 정우의 입에 서도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풋, 푸풋. 입술을 떨며 애써 버티던 정우는 결국 항복했다. 정우는 허리를 확 꺾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 정신없이 웃는 도깨비와 인간을 보며 엘시는 자신의 정서에 어떤 중 대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엘시는 탈해와 정우의 웃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명쾌하게 설명해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웃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시는 대충 이해했다. 그 것은 서로 굉장히 익숙해서 서로의 사이에 어떤 벽도 세워둘 필요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곤 하는 웃음들이었다. 탈해에게 수건을 건네는 정우를 보며 엘시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난 아직 꽃을 피우고 싶지 않으니까 물은 그만 뿌려도 돼." "미안. 빗속을 날아오다보니 엉망으로 젖었어. 근처에 레콘 없지?" 탈해는 머리와 어깨를 대충 닦아내었다. 수건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탈해는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정우. 앉아. 각하께서도 앉으시지요. 성주님의 전언을 전하겠습니 다." 정우는 기대한다는 얼굴로 앉았다. 엘시는 전언을 전하는 것이 왜 이렇게 거창한가 하는 생각을 하며 앉았다. 두 사람이 앉자 탈해는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가 가볍게 뿌렸다. 그 의 손에서 물방울과 함께 불방울들도 튕겨져 나왔다. 그것은 허공에 엉겨 꿈틀거리다가 바우 성주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우와!" 정우는 비명 같은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엘시 또한 꽤 놀랐 다. 도깨비들이 도깨비불로 이런저런 형태를 자유로이 만들 수 있다 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형태는 어린애의 낙서 비슷한 수 준이다. 하지만 탈해가 도깨비불로 만들어낸 성주의 모습은 완벽에 가까웠다. 물론 그 도깨비불을 사람으로 착각할 수는 없겠지만 바우 성주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없었다. 잠깐 동안 엘시는 어르신인 바우 성주가 탈해와 함께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느 꼈다. 바우 성주는 먼저 엘시와 정우에게 인사했다. 다음 순간 엘시는 피 식 웃었다. 바우 성주가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를 낸 것은 탈해였다. "좋은 꿈 꾸셨나, 대장군? 그리고 정우, 좋은 꿈 꿨니?" 도깨비불로 하는 꼭두각시 놀음이라고 할 것이다. 엘시는 그것이 도 깨비불임을 확신했다. 도깨비불을 향해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하는 정 우를 보며 엘시는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꿈 꾸셨어요, 성주님?"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좋은 꿈 좀 꾸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잘 안 되는구나. 해몽서 쓰고 있는 비형이 지배자들의 꿈에 대해 조사하고 싶다고 나를 아주 못살게 굴고 있거든." "저, 성주님은 이미 살아있지 않은데요?" "정말이야? 결국 비형이 해냈나 보군. 어쨌든 비형이 아는 범위 내 에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다보니 아주 각다귀처럼 달 려들고 있어. 얼빠진 도깨비 한 놈 붙여서 제국 순례라도 보내야 하 는게 아닌가 싶다. 이 자에게 최근에 꾼 꿈을 좀 알려주시면 고맙겠 다는 소개장 써서." 정우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 를 나누었다. 엘시는 그것을 탈해와 정우의 대화라고 해야 하는지 바 우 성주와 정우의 대화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탈해와 정우의 대화다. 하지만 정우는 바우 성주를 대하듯 말하고 있었고 탈해 또한 그것에 맞추어 말했다. 그런 혼란은 어쩐지 도깨비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그렇게 무심하게 관찰하고 있던 엘시에게 갑자기 도깨비불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엘시?" 엘시는 몸가짐을 바로하며 탈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탈해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엘시는 못말리겠다는 심정으로 도깨비불을 보았다. "자네는 내게 조언을 청한 적이 없지만 한 마디 하고 싶은데. 괜찮 을까?"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바우 성주의 용건이 정우에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탈해에게 말해보라고 하려던 엘시는 생각을 바꿔 바 우 성주에게 말했다. "말씀 듣겠습니다." "결코 신념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신념이 부 족할 때가 아니라 신념으로 충만하다고 생각할 때야." 깊은 의미가 있음직한 말이었지만 엘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어쩐지 노인들이 좋아하는 삶의 지혜 같은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지 나치게 여러 번 우려내어 더 이상 국물도 나오지 않는 지혜. 그것을 우려내었던 기억만 가지고 있는 노인이 선의로 젊은이에게 그것을 주 는 광경은 한 편의 익살극이다. 그리고 일상사이기도 하고. 하지만 엘시는 시뻐하지 않기로 했다. 엘시는 경의를 담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바우 성주의 꼭두각시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는 탈해의 관찰력과 표현력, 그리고 도깨비불 다루는 솜씨가 참 대단하다고 생 각했다. 도깨비들이 반드시 관철하기로 한 정의를 실행해야 하는 즈 믄누리의 무사장은 도깨비불 다루는 기술을 남다른 수준으로 익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우 성주의 꼭두각시는 정우를 돌아보았다. 엘시는 다시 감탄했다. 바우 성주의 얼굴에는 풍부한 감정이 나타났다. 안쓰러움과 동정심, 그리고 희망을 주고 싶다는 느낌. 엘시는 혹 그것이 탈해의 감정이 아닌가 의심해보았다. 바우 성주가 말했다. "정우야." "예. 성주님." "그럴 때도 되었으니, 결혼하는 것이 좋겠구나." 정우는 손가락을 깍지껴 입술을 눌렀다. 그러다가 정우는 갑자기 엘 시 쪽을 살짝 훔쳐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엘시는 무슨 할 말이 있느 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닫았다. 엘시는 정우도 하늘누리에 파다한 소문을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엘시는 거북함과 난처함이 뒤섞인, 약간 씁쓸하면서도 달뜨는 기분 을 느꼈다. 정우도 엘시가 자신의 시선을 느낀 것을 깨닫고는 어색하 게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이곳을 떠나 있어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 르는 탈해는 두 사람의 표정 변화를 보곤 의아해했다. 그 사태를 타 개하기로 결심한 것은 정우였다. 정우는 도깨비들이라면 하지 않을 말, 그러니까 즈믄누리의 성주가 한 말에 대해 이유를 요청하거나 반 론을 개진하는 말을 하는 대신 곧장 다른 의문을 표시했다. "성주님. 제 결혼 상대에 대해서도 조언해주실 수 있으세요?" 엘시는 헛기침을 하듯 주먹으로 입을 가볍게 막았다. 그 대답이 걱 정되는 질문이긴 하지만 말릴 수도 없는 질문이다. 한편 엘시는 바우 가 자신과 정우가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 해보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논리를 짜내기도 전에 바우 성주가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겠지. 아, 물론 그 사람도 널 사랑 해야 할 테고." 엘시는 자신이 왜 말도 안되는 고민을 했나 하는 허탈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안도감 같은 것도 느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어쨌든 즈믄누리로 돌아가는 대신 이곳에서 결혼을 궁리 해보라는 건가요?" 탈해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지금 하려는 말이 자신의 말이 아닌 바우 성주의 말임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것 같았다. 바우 성 주의 꼭두각시가 말했다. "네가 돌아온다면 물론 기쁘겠지. 하지만 네가 대호왕처럼 독신으로 살 것을 결심한 것도 아니잖느냐? 너는 언젠가는 킴 남자와 결혼해야 겠지. 그런데 즈믄누리에서는 킴 남자를 보기 어렵지. 킴 남자를 찾 으려면 그곳이 좋을 거야." 바우 성주가 하는 말은 퍽이나 상식적이고 평범한 것들이었다. 정우 나 탈해는 그런 평범함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만 엘시는 그 정도 조언을 구하기 위해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대륙을 횡단할 필요까 지는 없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런데 바우는 엘시가 그런 생각을 할 거라는 것을 짐작한 것처럼 말했다. "탈해가 너를 도와줄 거다." "예? 탈해가요?" "물론 탈해가 네 신랑감을 찾도록 도와줄 거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네 인생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정우는 웃음을 터뜨렸고 엘시 또한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엘시는 그 자신에 대한 악담을 한 점 흔들림 없이 전달하는 탈해의 모습을 장인 정신이라고 불러야 할지 예술가 기질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엘시의 웃음은 곧 사라졌다. "네 신랑감은 네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라. 탈해가 할 일은 예비 신부를 보호하는 것이 될 거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이라면 웬만한 맹 견보다는 좀 나을 거야." 엘시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도깨비들 중 유일하게 사람을 직접 태워죽일 수 있는 도깨비에 대한 평가치고는 폄하가 심하다. 비 록 유사 이래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 예는 단 한 번뿐이지만 그 공포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정우도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보호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탈해가 말했다. "그럼 언제나 네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겠다." "예? 아, 예. 고맙습니다. 바우 성주님." 탈해는 도깨비불을 사라지게 했다. 정우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 은 얼굴을 엘시에게 돌렸다. "대장군님.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제 혼례식은 아주 무시무시한 것이 되려나 봐요." 엘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도깨비들이 가진 유일한 전투력이다. 하지만 도깨비들에게 왜 두번째나 세번째 전투력을 강구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상대로 도깨 비불을 쓸 수 있는 도깨비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 바우 성주는 그 끔찍한 전투력을 파견하여 정우의 결혼을 보호하게 했다. 엘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싫었다. 한숨을 내쉬려던 엘시는 탈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발견했다. 탈해는 엘시에게 말했다. "무시무시한 혼례식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결혼해본 적은 없 지만 저는 결혼식이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뭘 잘못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런 것은 아냐." 엘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 엘시는 그 설명을 정 우에게 맡기기로 했다. 도깨비에게 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라면 그보 다는 정우가 나을 것이다. 그리고 엘시에게 그 날 하루는 지나치게 길었다. 엘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우에게 듣도록 하게.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나눌 이야기가 많겠 지. 나는 하늘누리로 올라갈 테니 편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너무 늦지는 말고. 자네가 이야기에 취해서 두 시간 후에도 나오지 않으면 끌어내라고 명령해두겠어. 물러가겠습니다. 정우." "괜찮으시면 세 시간으로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이야기에 취할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엘시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장군님. 좋은 꿈 꾸세요." 정우는 인사했고 탈해는 문까지 백작을 배웅했다. 백작이 돌아가고 문이 닫힌 다음 탈해는 정우에게 돌아왔다. 몸의 물기가 꽤 마른 것 을 느낀 탈해는 꾸깃꾸깃해진 옷자락을 펴며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 다. 탈해는 뻐끔이를 꺼내어 피워물고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 우가 무시무시한 혼례식이라는 기묘한 이야기에 대해 설명해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정우는 그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탈해는 왜 정우가 즈믄누리의 사정이나 다른 도깨비들의 안부를 묻 는 대신 그녀 곁에 있었던 사람인 엘시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청하 는 건지 의아하게 여겼다. 처용 산맥을 넘은 태양이 아라짓 제국의 동쪽 끝 자이아치를 비추었 다. 하지만 하늘누리가 떠있는 규리하는 아직 한밤 중이다. 규리하에 서 일출은 앞으로 다섯 시간 후에나 일어날 사건이다. 그리고 다섯 시간 후에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황제는 일출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는 햇빛을 보고 있었다. 치천제는 앉거나 눕는 것 모두에 편한 의자에 반쯤 누운 채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건축학적으로도 말이 안 되고 황제의 방에 익숙한 사람들은 절대로 없다고 말할 구조물이 놓여있었다. 방 가운데 불쑥 솟아오른 그것은 일종의 석비, 혹은 석 벽처럼 보였다. 광장이나 황야 가운데 서있다면 나름대로 장엄한 풍 모를 자아내었을 테지만 황제의 방 안에서 높이는 천장에 닿을 듯하 고 폭은 방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그 물건은 거북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황제의 집무실에 출입하는 이들이 전부 시력 이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거대한 물체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 물체는 황제 외의 다 른 이에겐 보이지 않으며, 또한 다른 이의 통행을 방해하지도 않는 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환상계단과 똑같은 물체였 다. 환상계단이 그것을 상상한 이에게만 영향을 주듯 황제의 방에 놓 여있는 그 석비 또한 황제에게만 영향을 끼쳤다. 그것을 상상하여 만 들어낸 이가 황제이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역사에 의하면 일찌기 라수 규 리하는 이와 같은 환상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라수는 그 환상벽에 문장들을 떠오르게 하여 자신의 사고를 돕는 도구로 이용했 다. 하지만 라수가 살아나서 황제의 환상벽을 보았다면 대단히 놀랐 을 것이다. 황제의 환상벽은 라수가 생을 통틀어 단 두 번만 창조할 수 있었던 모습을 띠고 있었다. 황제의 환상벽에는 부조된 글이나 그 림 대신 움직이는 영상이 있었다. 더군다나 나가에게 익숙한 온도의 세계라는 형태로. 환상벽에 떠오른 영상 속에서 따스한 햇빛이 비치고 있는 것은 그것 을 상상한 이가 나가인 치천제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차가운 나무 껍질과 풀밭을 물결치게 하는 서늘한 바람의 움직임까지 재현되고 있 었다. 다만 나가가 상상한 것이기에 소리는 별로 재현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런 정경을 대강 상상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남달 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상당히 세부적인 부분까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풍경을 한 점 빠트림 없이 상상하여 움 직이는 벽이라는 형태로 구현해내는 것은 라수 같은 천재에게도 생에 단 두 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상상력의 호사다. 하지만 그 환상벽을 존재케 하고 있는 치천제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황제는 환상벽에 떠오른 영상을 약간 조작했다. 그녀만 납득할 수 있고, 다른 이에게는 설명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그러자 환상벽의 영상이 변화했다. 영상을 조작하고 있는 사람이 황제였지만 황제는 다음 순간 어떤 영 상이 나타날지 알지 못했다. 라수가 환상벽을 통해 사고할 수 있었던 것도 환상벽에 그가 예상하지 않은 글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상 황 전체는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하다. 도깨비들은 그런 생각에 동의하 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꿈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신이다. 하지만 꿈을 꾸는 동안에는 다음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른다. 환상벽 또한 그 렇다. 그것을 조작하는 자도 다음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알지 못하 는 것이다. 그런 예측 불가능성이 환상벽 스스로가 창조해내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꿈과 마찬가지로 조작자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인지에 대해서 는 죽은 라수도, 살아있는 치천제도 대답할 수 없다. 라수와 치천제 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예측 불가능성을 통해 나타난 결과가 조 작자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사실 뿐이다. 치천제가 환상벽을 만 들어내었을 때 그녀는 어떤 의문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환상벽에 나 타나는 변화는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다. 환상벽이 알려준 대답인지 그녀의 무의식이 찾아낸 대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치천제는 호기심 속에 그 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변화가 끝났다. 황제는 그것을 응시했다. 그곳에 비치고 있는 영상은 기묘했다. 배경에는 도시의 폐허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도시는 꽤 오래 전에 엄청난 파국을 겪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도시를 덮친 재난이 무엇인지 일견하여 알기는 어렵다. 두텁 게 깔린 화산재나 굳은 용암 같은 것이 없으므로 화산 폭발은 아니 다. 건물의 일부를 다른 건물의 윗부분에 얹어놓은 재난이 지진일 리 는 없다. 지진은 건물을 날려올리지는 않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화재 도 아니다. 강력한 유체의 습격, 그러니까 대해일이나 산사태 같은 것이라면 그런 식의 피해를 입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영상 속에 비치는 도시의 폐허는 푸른 밀림 한가운데 있었다. 해일이나 산 사태가 일어날 장소가 아니다. 그런데 재난을 일으키는 유체는 그 외 에도 하나 더 있다. 공기의 흐름, 바람. 어떤 물체를 그런 식으로 파괴하는 것은 바람 뿐이다. 하지만 쟁룡 열도의 태풍이라도 건물을 그런 식으로 날려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상할 수도 없는 바람, 신의 분노가 그대로 실현된 바람만이 도시를 그런 식으로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벽의 가운뎃부분에서 춤추는 대선풍 같은 바람만이. 무섭게 소용돌이 치는 회오리가 영상을 비추는 환상벽을 부술듯한 기세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늘의 일부가 땅을 파고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광경은 자신의 존재를 통해 신을 증거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신이 준비해둔 신성의 증거처럼 보였다. 만약 치천제가 나가가 아니어서 소리의 재현에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 영상에서 뿜어져나 온 굉음은 하늘누리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았을 것이다. 모든 회오리의 할아버지 쯤 될 법한 그 회오리는 그 압도적인 힘 외 에도 독특한 특징이 세 가지 있었다. 그 회오리의 상공에는 거대한 회오리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뇌우나 먹구름이 보이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이동하지 않았다. 모든 바람들 중 가장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이 회오리지만 거의 대부분의 회오리는 한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치천제가 보고있는 대선풍은 한 자리에 뿌리 내린 듯 이동하지 않았다. 치천제는 그 대선풍이 반백년 동안 이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쓸모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치천제는 대선풍 안쪽을 보려 했다. 이윽고 나타난 변화는 치천제를 약간 놀라게 했다. 영상 속의 대선풍 이 실제로 불고 있는 현실의 장소를 찾아가면 관찰자가 볼 수 있는 것은 규정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는 시커먼 힘뿐이다. 하지만 환상 벽은 치천제에게 대선풍 안쪽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결과적으로 치 천제는 비늘이 서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영상은 대선풍에 점점 다가 가는 모습을 띠었다. 환상벽 속의 회오리가 당장이라도 치천제의 몸 을 부술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는 굳건한 자제력으로 변화를 계속 이끌었다. 어느 순간 회오리가 사라졌다. 치천제는 비통한 만족감과 슬픈 경외 감으로 그곳에 나타난 것을 바라보았다. 대선풍 안쪽에는 무너진 하얀 탑이 서있었다. 그것은 대선풍의 세 번째 특징이었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회오리 안 쪽에서는 엄청난 끌어올려짐이 발생한다. 그 힘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닥치는대로 끌어올려 내팽개친다. 하지만 대선풍 안쪽의 탑 은, 비록 윗부분이 무너져 파괴된 모습이었지만 평온해보였다. 대선풍은 탑을 중심으로 약 50미터 쯤 떨어진 위치를 둘러싸고 있었 다. 불가해한 자기 파괴욕에 사로잡힌 새를 깃털 뭉치로 바꿔놓고 맹 목적으로 달리던 코뿔소를 차가운 고깃덩이로 바꿔놓은 그 회오리는 안쪽의 탑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것 같았다. 비록 직접적인 접촉이 없다 해도 회오리의 진동음만으로도 탑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 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170미터 쯤 되는 탑의 외관 어디에도 균열 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탑이 입은 피해는 윗부분의 파괴뿐이고 그것은 회오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이었다. 결코 움직이지 않고 멈추지 않 는 대선풍이 보호하는 탑. 50년 전, 제2차 대확장 전쟁의 실질적인 마지막 날, 냉혹의 도시 하 텐그라쥬의 모든 것을 파괴한 회오리는 윗부분이 파괴된 심장탑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회오리는 그 때까지 행해오던 파괴 대신 보호를 선택했다. 회오리는 상처 입은 탑을 둘러싸며 멈춰섰다. 그 이후로 탑은 더 이상 상처입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파괴력이 탑 에 접근한 적도 없다. 비록 그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영상이지만 치천제는 대선풍이 지키고 있는 금단의 땅을 침입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치천제는 영상 을 다시 조작했다. 환상벽은 대선풍에서 꽤 떨어진 위치를 비추었다. 하텐그라쥬의 폐허를 비추는 햇빛은 아름다웠다. 지금 이 시각, 하 텐그라쥬에는 아직 태양이 뜨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재 의 모습은 아니다. 치천제는 굳이 현재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녀가 원한 것은 시간이 아닌 장소였으니까. 그리고 그 장소가 어딘지 밝혀 졌다. 바람 속에 갇혀있는 돌탑. 황제의 의문이 사라졌다. 치천제는 환상벽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사라지게 하려 했을 때 무엇인가가 영상 속에 나타났다. 처음에 치천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치 천제는 환상벽에 나타난 것이 두 개의 다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 은 왼쪽에서 나타나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치천제는 낮은 위치에서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람의 모습을 추적하기 위해 환상벽을 조작하면서 치천제는 환 상벽의 불가사의함을 재인식했다. 그녀의 무의식이 걸어가는 다리를 원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환상벽은 스스로 조작자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일까? 치천제는 대답이 없는 의문에 침 잠하는 대신 다리의 주인을 확인하게 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환상 벽에 떠오른 영상은 어떤 사람의 뒷모습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어떤 나가의 뒷모습이었다. 자세는 꼿꼿하고 걸음걸이는 민 첩했다. 치천제는 그 나가가 입고 있는 옷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 했다. 약간 낡아보였지만 손질이 잘 되어 있는 그 옷은 옛날식의 화 려한 옷이었다. 변온생물인 나가들은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기후인 한계선 남쪽에 있을 경우 체온을 유지하는 의복이 필요 없다. 또한 심장을 적출한 나가는 쉽게 몸을 재생시키기에 피부를 보호하는 의복 의 기능도 필요없다. 그래서 옛날 나가들의 옷차림은 그 착용자의 미 적 감각을 드러내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 천일전쟁이 끝나고 북부와 남부가 상당 수준의 교류를 이루게 된 이 후 나가들의 옷은 북부의 견실함을 많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북부의 옷차림 또한 나가들의 화려함을 많이 차용했다. 하지만 그 나가가 입 고 있는 옷은 순진성마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옷이었다. 단순해서 아름답고 무익하기 때문에 화려한 옷이었다. 치천제는 영상을 조작하 여 그 옛스러운 복장을 입고 있는 나가의 얼굴을 보려 했다. 그 순간 환상벽 속의 나가가 걸음을 멈췄다. 나가는 고개를 돌렸다. 치천제는 그 나가가 자신을 응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치천제는 겁을 집어먹지는 않았다. 견고한 이성의 대좌 위에 건설된 그녀의 정신은 그런 감정을 거부했다. 치천제는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린 그 나가의 모습 전부가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햇빛이 넘치는 하텐그라쥬 의 모습이 현재일 리는 없다. 치천제가 보고 있는 그 나가는 하텐그 라쥬의 폐허를 걸은 적도 없고 앞으로도 걷지 않을지도 모른다. 치천 제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환상벽 속에 있는 나가의 눈을 마주했다. 그 나가는 여자였다. 그리고 치천제가 아는 사람이었다. 치천제는 그녀가 혹 자신을 향해 니르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치 천제는 그녀를 니르게 할 수 있다. 그 영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치천 제 자신이니까. 하지만 치천제는 그녀에게 시킬 니름이 없었다. 그래 서 치천제는 환상벽, 혹은 자신의 무의식에게 그 영상을 맡기기로 했 다. 치천제는 아무런 의식적 조작 없이 그 나가를 바라보기만 했다. 약간 실망스럽게도 그 나가는 아무런 니름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걸어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치천제는 주 시해야 할만한 모습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 서 치천제는 주저없이 환상벽을 없앴다. 황제의 방은 그 방에 익숙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으로 돌 아갔다. 거추장스럽게 부피가 큰 벽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치천 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벽난로 쪽으로 다가간 치천제는 그곳 의 불을 크게 일으켰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을 보며 치천제는 환상벽 속에 나타났던 나가 여인에 대해 생각했다. 일출은 아직 먼 시간이었다. =============================================================== 챕터 끝났습니다. 바퀴처럼 끈질긴 다음 챕터 예고 : 카우보이의 석파전경권 작렬! 그러나 현상금사냥꾼은 <상>을 두르고 <속성>을 발휘하여 석파전경권을 무력화시킨다. 흡혈안드로이드는 두 팔을 괴상하게 움직여 M-78 성운에서 온 외계인으로 변신하지만 현상 금사냥꾼은 3분 뒤의 미래로 이동했고 그러자 변신은 종료된다. 절체 절명의 순간 철이는 느닷없이 카우보이에게도 숨겨진 정체가 있고 안 드로이드에게도 원래 정체가 있다면 자신에게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 한다. 갑자기 철이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깨닫는다. "나를 봐! 나를 봐! 내 속의 맹장이 이렇게… 잠깐. 다시 봐." 현상금사냥꾼은 의아해하면서도 철이를 관찰한다. 그러자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 큰 머리, 짜리몽땅한 몸매, 패션센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후줄근한 모자… 현상금사냥꾼이 철이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철이의 입에서 전설의 주문이 시작되었다. 카피카피름름, 카피카피름 름! 이루어져라! 주문이 완성되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차 증후군이 걱정되니 강제로 네트를 열겠다는 알 수 없는 경고가 들려 온 순간 현상금사냥꾼의 모습이 사라진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세 사람은 다시 전뇌공간을 빠져나갈 방도를 강구한다. 그러나 여름으로 통하는 문을 찾을 수 없었던 어떤 자부심 강한 고양이처럼 세 사람도 전뇌공간을 빠져나가는 문을 찾을 수 없 었다. 답답한 마음에 철이는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전뇌공간이 생 길 때까지 타우를 증대시켜보자고 말한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는 타우 를 증대시키려면 은하계를 파괴해야 하는데 그것은 제2파운데이션이 용납하지 않을 일이라고 말한다. 카우보이의 손등에 있는 렌즈가 번 쩍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렌즈를 통해 그들에게 접촉해온 것은 조나 단 다이빙스톤. 조나단은 전뇌공간의 중심에 바깥으로 통하는 지하철 이 있다고 알려준다. 유니크들을 위해 준비된 지하철을 이용하면 밖 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은 지나가던 모래벌레를 붙잡아서 전뇌공간의 중심을 향해 떠나는데… 과연 잃어버린 중심에 는 멸종된 지하철이 남아있을까? 다음 챕터 '어둠의 왼손은 거들뿐!' 많이 기대해주세요.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7. 삶을 이용하는 태도 - 1 물고기 같은 것을 제외한다면 지상에 발을 딛지 않는 생 물은 하늘치 뿐이다. 그리고 하늘치는 도대체 생물에 속하 기나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하늘치의 교미나 출산을 보 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필자는 그런 것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크고 작은 하늘치 가 목격되는 것으로 보아 하늘치는 아마도 성장하는 모양 이지만 그것이 죽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어쨌든 필자는 하늘에서 늙어죽은 하늘치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이 없다. 어떤 이들은 하늘치가 죽은 후에도 떠다닌다는 설명을 내세우지만, 백골이 된 하늘치가 떠다니는 충격적 인 모습이 목격됨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뒷받침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늘치의 또다른 비생물적인 특징은 다른 생물과 아무런 상호 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다른 생 물과 상호작용을 한다. 먹고 먹히는 단순한 관계에서부터 신용대출 같은 복잡한 것까지 모든 것은 상호작용이다. 그 러나 하늘치는 어떤 수준의 상호 작용도 하지 않는다. 하늘치에게는 생물이, 혹은 생물이었던 것이 가질 수 있 는 평범한 모습들을 적용시키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일어 난다. 그리고 그런 거부감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학문 적 요구나 사고의 편의를 위해 하늘치를 생물에 포함시킬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하늘치는 생물이 아 니라 그냥 하늘치다. 하늘치는 왜 하늘을 떠다니는가? 하 늘치이기 때문이다. 먹거나 배설하는 하늘치가 왜 한 마리 도 없는가? 하늘치이기 때문이다. 태어나거나 죽는 하늘치 가 왜 한 마리도 없는가? 하늘치이기 때문이다. 학문이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명료함을 지닌 복잡성 으로 대체하여 체계성을 구축하는 작업이라면 하늘치는 학 문의 대상이 아니다. 하늘치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 다. - 펜조일의 '생명의 가장자리' 中 그 흉한 모습 때문에 세상의 다른 곳에 자리를 얻지 못한 바위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듯한 땅. 가까스로 그곳에 자리잡은 흙과 모래도 시시때때로 불어닥치는 폭풍과 비 때문에 식물을 위한 토양층을 형성 하지 못한다. 식물이 없으니 동물 또한 없고, 그래서 그 땅의 주인은 언제나 바위들 뿐이다. 물론 폭풍과 비는 바위들도 깎아내고 언젠가 는 이 땅의 바위들도 험악한 인상을 누그러뜨리겠지만, 지금 그 땅을 바라보는 사내의 생전에 그런 모습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땅의 이름은 발케네의 파리조, 그리고 암살성의 4층 노대에서 파 리조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발케네공 락토 빌파다. 락토 빌파가 서있는 노대는 반지름이 5미터쯤 되는 반구형이었고 주 위에는 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 노대는 락토에게 절벽에 서서 세상 을 보는 듯한 풍광을 제공했다. 바람이 세찬 곳이니 안전상 당연히 난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없는 까닭은 바로 안전을 피 하기 위해서라는 풍문이 있다. 즉 암살공이 누군가를 밀어 떨어뜨리 기 위해서는 걸리적거리는 난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락토 빌파는 그런 풍문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암살공의 시원한 이마는 정수리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서 정상을 넘 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그 아래로 눈은 가늘고 눈꼬리는 약간 처 져 있다. 코는 날씬하게 빠졌고 입술은 작고 도톰하다. 전체적으로 퍽 호감 가는 인상이다. 그런 얼굴의 소유자가 당신 심장을 뜯어내어 주전부리를 하겠다고 말하면 상대방은 자기가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 할 것 같다. 암살공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황급히 가슴을 가리겠지 만. 파리조의 흙먼지를 모두 날려버리는 강풍이 락토 빌파의 몸을 흔들 었다. 암살공의 옷깃에 붙어있는 모피가 불길처럼 펄럭였다. 락토는 입매를 조금 찡그렸다. 하지만 락토의 옆에 있어야 했던 소년은 가슴 이 다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락토는 그 노대에서 자신의 뒤편에 누군가 서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락토와 나란히 서있어야 했다. 하지 만 소년은 그런 위험한 노대에서 바람을 맞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암살공과 함께 있는 것에도 익숙하지 못했다. 객기나 반항심 은 오래 전에 바닥났다. 하지만 소년은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 은 암살공이 자신을 다루기 쉽게 만들려고 그곳으로 데려왔다는 것을 짐작했기에, 비록 속으로는 겁이 나 죽을 지경이었지만 겉으로는 그 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소년은 자존심만큼은 포기 할 수 없었다. 자부심 강한 남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가진 것이 그것 뿐이기에. 락토가 말했다. "이이타. 아버님께서는 좀 어떠신가?" 이이타는 일부러 대답을 조금 지체했다. 그 작은 술수로 락토를 초 조하게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며. "예…… 계속 그 책을 읽고 계십니다." "아직도 다 못 읽으셨나?" "아닙니다. 읽기는 오래 전에 다 읽으셨습니다. 하지만 계속 반복해 서 보고 계십니다. 한 번 읽어서는 그 책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책은 읽는 이의 편의가 아니라 쓰는 이의 편의를 위주로 쓰여진 것 같습니다. 앞에서 논리 전개를 위해 이용된 개념이 한참 뒤에 설 명되기도 하고 간단한 논리는 뛰어넘기도 하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암호나 우의로 쓰여진 것은 아니라는 건가? 그냥 어렵 다?" "그렇습니다. 그런 무가치한 비결서 같은 것들과는 다릅니다." 대답하며 락토의 얼굴을 본 이이타는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락 토는 이이타가 굉장히 시퉁하게 군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곳이 난간 없는 노대임을 되새긴 이이타는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락토는 이이타에게 땅까지 거리를 재어보라고 제의하 지는 않았다. "이이타. 자네 말대로라면 춘부장께서는 무익한 고생을 하고 계신 것이군. 어쨌든 자네 아버님은 무골이지 않은가. 사람은 각자 잘 하 는 분야가 있는 법이지. 그 책이 규리하 가문의 구성원만 이해할 수 있는 비결서가 아니라 그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면 그런 것을 쉽 게 다룰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학자 같은 이에게 맡기는 것이 상식 적인 일일 것 같은데." 이이타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 아버지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주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이 타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암살공에게 이 책의 성격을 알려주면 학자에게 해석을 맡기자고 할 것이다. 그건 절대로 안된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학 자에게 맡기긴 싫다고 말하는 건 앞뒤가 안맞는 것 같은데요. 아예 처음부터 규리하의 지배자만 이해할 수 있는 암호로 쓰여있다고 말하 면 되지 않겠습니까?' '너는 도깨비 감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 냐? 그것도 그 사람의 성에서?' 이이타는 자신이 개나 고양이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상승이 아니라 추락의 의미로. 멍청한 발언에 창피해하는 아들을 보 며 아이저는 말했다. '락토는 언제라도 이 책이 정말 암호로 쓰여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 다. 그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사실을 말해라. 하지만 허락은 하 지 마라.' 아이저는 허락 대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래서 이이타 는 약간 화난 어조를 꾸몄다. "그것은 규리하의 보물입니다. 동시에 규리하가 지켜야 할 보물이고 요. 지적 충만감을 위해서는 어떤 책임감도 돌보지 않을 학자에게 그 것을 내어주길 바랐다면 종증조부님께서는 그것을 라수의 방에 보관 하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락토는 턱을 한 번 실룩이고 말했다. "자네 종증조부가 비밀을 감추고 싶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아에 책을 쓰지 않는 거야. 하지만 라수 규리하는 그 책을 썼지. 그건 자 네 종증조부가 그 책의 내용을 비밀로 할 생각이 없었다는 거지. 암 호로 쓰여있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은가. 자네 아버지에게 그 것을 읽을 능력이 없다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그것을 해석 해야지."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아버님께서는 그 내용을 곧 이해하실 겁니다." 이이타 규리하는 자신의 말에 확신이 담겼는지 궁금했다. 락토는 그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발케네의 공작은 가늘게 뜬 눈으로 파리조 의 울퉁불퉁한 바위땅을 바라보았다. 날아가는 새의 배를 찢어놓을 것 같은 날카로운 바위 능선들과 어루러기에 걸린 듯한 칙칙한 바위 구릉들. 이이타는 이 땅의 사람들이 과연 애향심이라는 것을 느낄지 의심스러웠다. 발케네공이 앞으로 걸어갔다. 이이타는 움찔했다. 락토 빌파는 노대 가장자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주의를 받았기에 이이타는 조금 늦게 락토를 따라걸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가장자리를 본 이이타는 걸음을 멈추고 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락토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암살공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이타가 경고의 외침을 말하려는 순간 락토는 갑자 기 걸음을 멈췄다. 락토는 노대 끄트머리에서 한 뼘 쯤 떨어진 위치에 섰다. 노대에 부 딪힌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지는 자리였다. 절망적인 얼굴로 암 살공을 보던 이이타는 주춤주춤 발끝을 꿈틀거렸다. 뒤에 서있을 수 는 없다. 이이타는 이를 악문 채 발을 들어올렸다. "가소롭지 않은가?" 이이타는 벽에 쾅 부딪힌 것처럼 멈춰섰다. 암살공은 한가로운 태도 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다는 것은 지독하게 가소로운 문제야. 내가 죽은 후에 눈물 흘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에겐 안 그럴지 몰라 도." 락토는 엄지를 허리띠에 느슨하게 끼운 채 바람에 맞서 상체를 앞으 로 내밀었다. 변덕스러운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꾼다면 락토는 손 쓸 틈 없이 그대로 떨어질 것이다. 이이타는 그를 끌어당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암살공의 몸에 손을 대도 되는지 알 수 없었 다. 락토가 말했다. "목숨은 여벌이 없는 도구고 손질을 잘 해야 쓸 수 있는 도구지만, 어쨌든 도구야. 가소로운 도구지. 내게 도깨비불이 주어진다면 나는 의미 있는 삶이니 삶의 가치니 하는 개수작을 하는 천박한 것들을 가 장 먼저 태울 걸세. 삶은 도구일 뿐이야. 그리고 만능도구라는 것은 없어. 가위로 뚫고 송곳으로 자르려고 할 수야 있겠지만 바보짓이야. 가위는 자르는데 쓰고 송곳은 뚫는데 써야 어울리는 거지. 삶 또한 가장 잘 어울리는 하나의 쓰임을 가지고 있는 도구야. 그게 뭔가?" "공작님……" 락토는 이이타를 돌아보았다. "말해라. 이이타 규리하. 삶은 어디에 써야 하나?" "공작님. 뒤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락토는 이이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이이타는 공 작을 끌어당겨주기 위해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마자 공작은 이이 타를 와락 끌어당겼다. 이이타는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뒤로 뺐다. 하지만 락토는 그곳이 넓은 광장이라도 된다는 듯 사정없이 이이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이이타는 자신의 목숨도 걱정되었지만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있는 락 토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락토의 손아귀 힘은 강인했지만 이이 타는 결사적으로 버텼다. 그러자 락토는 어떤 일을 했다. 공작이 자 신의 손목을 어떻게 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이타는 정확히 무슨 일 을 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이타는 어깨의 힘 이 좍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휘청 쓰러졌다. 눈앞으로 갑자 기 다가오는 허공을 본 이이타는 발끝으로 바닥을 찍을 듯이 발가락 에 힘을 줬다. 이이타는 뒷꿈치를 든 채로 노대 끄트머리에 서게 되었다. 락토가 말했다. "말해라. 이이타. 삶은 어디에 써야 하나?" "고, 공작님. 저는……"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 뛰어내리겠다. 그러면 자네도 나와 함께 허 공을 맛보게 되겠지. 날 수 있나?" 이이타는 흠칫하여 위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목은 락토에게 붙잡힌 채 위로 높이 들려있었다. 이이타는 그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락토는 교묘하게 이이타의 손목을 비틀어 올려쥐고 있었고, 그래서 이이타가 얻은 것은 끔찍한 고통뿐이었다. 이이타는 애원했다. "안됩니다. 공작님. 손을 놓아주세요." "정답을 말한다면 자네에게 도깨비 감투를 주겠다."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이이타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도 깨비 감투를 장난감 정도로 취급하는 도깨비들과 달리 이이타는 인간 이었다. 그는 당연히 도깨비 감투에 관심이 있었다. 더군다나 락토 빌파가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세 개의 도깨비 감투는 특별한 것 이었다. 열을 보는 나가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다른 도깨비 감투와 달 리 빌파가의 도깨비 감투는 모든 종족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만 가지면 나가 황제의 목도 딸 수 있다.' 이이타는 말 한 마디에 그런 엄청난 보물을 그냥 주겠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흥분과 기대감, 의심으로 뒤범벅된 눈으로 락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락토는 대답을 촉구하듯 이이타의 팔을 노대 바깥쪽으로 끌었다. 이이타는 질겁했다. "고, 공작님!" "말해! 삶은 어디에 써야 하나? 도움될 만한 걸 하나 알려주지. 모 든 패배자는 패배하기 전까지 승리를 거듭한 자들이다. 자, 이제 말 해라." 뚱딴지 같은 소리다. 이이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은 암봉이라 불러야 할 만큼 큰 암석들에 의지하여 건설되어 있었고 그 큰 암석들 은 흉포하게 생긴 기석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래로 떨어진다면 몸 이 정지할 때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추락에 걸리 는 시간은 그리 길진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바위들에 찢기고 뭉개지고 부서지는 것에 소모될 테니까. 그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이이타는 떨리는 입술을 축였다. 세찬 바람 에 입술이 얼어붙었다. "삶은…… 신념을 위해 써야 합니다." 락토는 밖으로 몸을 던지진 않았다. 발케네의 공작은 의미를 알기 힘든 눈으로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은 그것이 설명해보라는 의미일 거라 생각했다. "비록 꺾이고 패배하는 한이 있어도……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신념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전부 잃어도 상 관 없습니다." 락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났다는 환희에 이이타의 얼굴이 펴지 는 순간 암살공이 말했다. "세상의 토대가 되고 싶은 것이로군. 이이타." "예?" 락토는 갑자기 팔을 던졌다. 이이타는 손목이 부러지는 고통을 느끼 며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곳은 노대의 바닥이었다. 이이타는 손목을 움켜쥔 채 암살공을 바라보았다. 락토는 노대 끄트머리에서 몸을 반쯤 돌려 이 이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락토는 웃었다. "정답이 아니니 상품은 줄 수 없다. 하지만 대답한 것, 그리고 대답 할 때의 자네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에게 가봐라." "공작님…… 저는……" "자네 말처럼 아이저가 빨리 그 책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지. 가." 이이타는 다시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이타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서는 몸을 돌렸다. 노대의 출입문까지 걸어가면서 이이타는 몇 번이고 뒤를 돌 아보고 싶은 충동과 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이타는 둘 중 어느 것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기분 속에서 이이타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이타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락토는 냉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락토가 움직였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선 락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시종들과 가신들이 다가왔지만 락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 처럼 걸었다. 사람들은 당황하여 서로를 쳐다보았고 공작을 모셔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은 부리나케 락토의 뒤를 따랐다. 락토는 그들에 게 어떤 설명도,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공작의 거침없는 걸음이 멈춘 것은 마구간이었다. 전갈을 받지 못한 마구간지기는 느닷없이 나타난 공작의 모습에 기겁했다. 암살공은 주 위를 둘러보다가 안장을 집어들었다. 당황하는 시종들과 마구간지기 의 시선을 무시한 채 애마의 등에 손수 안장을 올린 암살공은 그 위 에 올라탔다. 조금 늦게 마구간에 도착한 시종장은 그 광경을 보고 외쳤다. "가, 각하? 산책을 나가시려는 겁니까?" "스카리 요새에 잠깐 다녀오겠다." 시종장은 경악했다. 좋은 말로 달려도 사흘은 걸리는 곳의 지명을 공작처럼 가벼운 태도로 말하면 누구라도 당황할 것이다. "각하! 수행원도 병사들도 없이 가실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준 비하려면 적어도 닷새는 주셔야……" "말 다섯 필을 따르게 하라." 그리고 락토는 말의 고삐를 확 잡아챘다. 말은 앞발을 거세게 굴렀 고 사람들은 경악하여 물러났다. 사람들 사이에 길이 생기자 락토는 곧장 말을 달리게 했다. 암살공의 흑마는 눈깜짝할 사이에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암살공을 바라보던 시종장은 갑자기 공작이 남긴 마지막 말을 이해했다. 공작은 사흘 씩 이나 소모해서 스카리 요새로 갈 생각이 없음이 분명했다. 시종장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가장 솜씨 좋은 기수를 찾아오라고 외치며 동시에 마구간지기에게 힘 좋은 말 다섯 필을 준비하게 했다. 시종장이 부리나케 수배한 기수가 다섯 필의 말을 끌고 공작을 따라 잡은 것은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말 다섯 필을 통제하며 공작을 따 라잡았으니 그 실력이 출중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기수 는 극심한 피로를 얻게 되었다. 언덕받이를 오르던 공작은 따라오는 기수를 흘끔 돌아보았다. 머리는 두건으로 가리고 얼굴엔 복면을 쓰 고 있었지만 기수가 피곤해하고 있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락토는 씩 웃었다. 하지만 기다리지는 않았다. 락토가 멈춰선 것은 흑마가 완전히 지쳐빠진 후의 일이었다. 락토는 흑마를 천천히 걷게 하면서 뒤따르던 기수를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 아 기수가 그를 따라잡았다. 가장 가까이 다가온 말의 고삐를 잡아챈 락토는 그대로 말을 갈아탔다. 땅에 발을 딛지도 않는 좋은 승마술이 었다. 힘이 남아있는 말로 갈아탄 락토는 흑마를 내버려둔 채 다시 달려갔 다. 기수는 얼굴을 찌푸리며 흑마를 수습했다. 그리고 자신도 다른 말로 갈아탔다. 부락과 산, 시내, 바위산, 길, 오가는 사냥꾼, 황야, 석양, 별, 새 파랗게 불타는 별 아래에서 말들은 잠시 호흡을 돌릴 수 있었다. 바 람의 횡포에 신음하는 풀의 절규 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락토와 기수는 빨리 달리지 못했다. 하지만 달이 떠오르자 말 들은 다시 독려를 받았다. 먼곳에서 반짝이는 정체 모를 불빛, 퀴퀴 한 노린내, 암석에 주름이 생기는 소리…… 몇 시간 뒤 다시 갈아타기가 있었다. 두 사람이 두 번씩 갈아타기 위해서는 말 여섯 마리가 필요하다. 말들은 완전히 지쳤지만 두 사람은 다음 날 오전 스카리 요새에 도 착할 수 있었다. 20시간, 160킬로미터를 달려온 후에야 락토는 처음 으로 기수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했다. 헤어릿." 헤어릿은 얼굴에 쓰고 있던 복면을 끌어내리고 두건도 뒤로 젖혔다. 피로에 젖은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땀에 젖은 흙먼지 때문에 얼굴 이 엉망이었지만 곱게 단장하면 상당한 미모를 보여줄 것 같다. 격심 한 장거리 승마의 후유증 때문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은 말 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말씀은 공작님의 괴벽을 순순히 따라준 이 성실한 말들에게 해 주십시오. 공작님." "발케네의 공작은 짐승에게 말하지 않아." "그러면 저에게도 하지 마십시오." 락토는 헤어릿 에렉스가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다고 착각하진 않았 다. 헤어릿은 자신을 짐승으로 선언함으로써 아버지인 락토를 비하하 고 있었다. 락토는 피식 웃을 뿐 그의 사생아가 펼친 논리를 논평하 지는 않았다. 대신 락토는 앞쪽의 거친 땅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가문비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뿌리가 약한 이 나무 가 대규모로 자랄 수 있는 것은 제멋대로 자리한 산들과 기묘하게 얽 혀있는 절벽들이 바람을 흩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지형의 높이차는 극단적이어서 50미터 쯤 떨어진 두 지점의 높이차가 수백 미터에 이 르는 일도 많았다. 대지의 약한 부분을 사정없이 깨트리고 그 단단한 뼈대만 남겨 이런 지형을 만들어낸 것은 막대한 물이다. 락토는 아래쪽의 계곡을 거칠 게 치달리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와 번들거 리는 바위. 적회색 강물의 모습을 보건대 이 땅은 아직 만들어지고 있는 도중인 것 같다. 불과 20시간 전 바위의 땅 파리조를 떠나온 락 토에게 이 땅은 같은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락토는 말고삐를 잡아채었다. 울창한 가문비나무 숲 사이로 락토는 마냥 걸어갔다. 길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 지 않는다. 헤어릿 또한 지친 말들을 이끌고 아무 말 없이 락토의 뒤 를 따랐다. 대략 반 시간 쯤 걸었을 때 숲속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락토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홀연히 병사들이 나타났다. 오래 전부터 락토와 헤어릿을 관찰했기에 병사들은 정체를 묻거나 하 지는 않았다. 병사들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인사하고는 두 사람을 스카리 요새로 안내했다. 아실은 방한복을 벗었다. 누더기 같은 옷이지만 그녀 스스로 만든 옷이다. 그리고 꽤 긴 시간 동안 살인적인 추위에서 그녀를 지켜주었 던 옷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옷을 벗는 아실의 동작에는 조심성이라 고는 없었다. 민첩하게 방한복을 벗은 아실은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빙글 돌렸다. 그리고 아실은 그것을 집어던졌다. 모피를 덧대었기에 꽤 묵직했지만 방한복은 거센 바람을 타고 날아 올랐다. 물론 아실이 계곡 위에 서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소매를 펄럭이며 나는 옷의 모습은 마치 상체만 가진 사람이 날아가 는 듯한 매혹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아실에게 그것은 그저 필요 없 어진 쓰레기 처치일 뿐이다. 아실은 날아가는 옷에 아무런 관심도 두 지 않은 채 남동쪽 먼 곳에 자리한 도시를 바라보았다. 시구리아트 산맥의 북쪽 끝. 높이 3, 4백미터 정도의 헐벗은 구릉들 이 가득하다. 그 구릉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도시의 모습은, 비록 대 지에 생긴 버짐처럼 보이는 불품없는 모습이지만, 여행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마지막 힘을 끌어내게 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아 실은 카날티의 모습을 보며 묻어두었던 고민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 다. 수많은 구릉 때문에 어느 곳을 보든 1킬로미터 이상 멀리 보기 힘들 었지만 아실은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카날티에서 남쪽으로 가는 방법은 대충 세 가지가 있다. 시구리아트 산맥 동사면으로 가려면 남동쪽에 있는 디팝을 향해야 한다. 반대로 시구리아트 산맥 서사면을 따라가려면 남쪽의 파리조로 향해야 한다. 그 길은 발케네령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이며 이후 나나본까지 똑바 로 내려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쪽에 있는 아이톤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제국의 남부로 내려가려는 여행자에게는 좀 돌아가는 길이 되 지만 규리하를 목적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적당한 방향이다. 아이톤에 대해 고려해보던 아실은 결국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것이 방향이 아니라 목적지임을 깨달았다. 세 가지 방향을 동시에 고려하 는 것은 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텐그라쥬로 간다면 디팝 쪽을 향하는 것이 좋다. 그 방향으로 걸어 간다면 키준 산맥과 에시올 산맥을 넘어 푼텐 사막에 도달할 때까지 대하(大河)나 큰 호수, 바다 등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하텐그라쥬 가 아닌 황제에게 간다면 규리하로 가야 하고, 그렇다면 아이톤 방향 으로 가야 한다. 하텐그라쥬와 황제 중 하나를 결정하기 어렵다면 가 운데 방향인 파리조로 가야겠지만 그 방향으로 가면 나나본에 도달하 게 된다. 그리고 아실은 나나본에 있는 어떤 수교위와 근시일 내에 다시 마찰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결국 황제와 하텐그라쥬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결정하기 까다로운 문제였다. 헛수고하는 셈치고 가기엔 하텐그라쥬 는 너무 멀다. 지멘이 쉼없이 달려도 두 달은 걸릴 테고, 그렇게 쉼 없이 달렸다간 당연히 아실이 먼저 죽을 것이다. 아실은 모든 상황이 쾌조일 때 대락 반 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계산했다. 왕복하면 일 년. 긴 시간이다. 하지만 당장 규리하로 찾아간다 해서 뚜렷한 방도 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전의 시도에서 그들은 하늘누리에 침입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치천제의 모습은 보지도 못한 채 그곳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실은 능선에 걸터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멘은 고민하고 있는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이 직접 설명해준 것은 아니지만 지멘은 아실이 고민하고 있는 내용을 거의 짐작했다. 지멘 또한 요청받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의 고민에 개입하지 않는 레콘이었고 그 다른 사람이 아실일 경우 개입 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죽일 때까지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지멘은 그 생각에 약간 껄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뭔가 잘못된 생 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 그는 자신이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지멘은 자신이 아실을 죽일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철의 대화 가 시작되었으니 아실이 공격할 때까지 지멘은 공격할 수 없다. 아실 이 공격한 후에야 지멘은 공격할 수 있다. 그런 조건성, 한시성에 대 한 관념이 지멘을 묘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 것이다. 말과 공격은 다 르다. 아실이 공격한 후에 지멘은 공격할 권리를 얻지만, 그 때도 말 을 할 권리는 찾아오지 않는다. 아실이 죽을 테니까. 도깨비가 아닌 아실은 죽은 다음에는 말을 할 수 없다. 지멘은 영원히 아실에게 말할 수 없다. 너무도 자명한 사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지멘을 놀라게 했다. 지멘은 낯선 것을 보는 기분으로 자신이 영원히 말을 걸 수 없 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언제나 그의 곁에 있으 며 그의 숙명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엄청난 손실인가? 지멘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그런지 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실이 일어섰다. 그녀는 지멘을 향해 걸어왔다. 지멘은 그녀의 얼굴에 담긴 결단보다 고뇌의 흔적을 먼저 읽었다. 그것이 지멘을 동요하게 했다. 지멘은 기다렸다. 아실은 뭐라 말할 듯 지멘을 올려다보았지만 곧 다시 고개 를 떨구었다. 지멘은 수염볏을 무의식적으로 비틀었다. 아실이 겨우 말했다. "결정했어요. 파리조 방향으로 가요." 디팝도 아니고 아이톤도 아닌 파리조. 지멘은 아실이 고민을 잠시 유예시켜두기로 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실은 변명했다. "그 때는 납병 때문에 그냥 지나쳤지만 우리는 암살공에게 알아볼 것이 있어요. 기억나죠? 유료나루터에서 말이죠. 왜 우리의 입국을 그렇게 결사적으로 막은 것인지 궁금해요. 그 사람 요즘 요새를 짓고 있다지요. 뭄토도 그 요새에 가서 잡일을 할 계획이었대요. 그 요새 가 문제인 것 같아요. 그걸 좀 봐야겠어요." 합리적인 설명이었지만 지멘은 아실이 변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쉬 지우지 못했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알 수 없었던 지멘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아실을 집어 배낭에 집어넣었다. 자리를 잡은 아실이 말했다. "시구리아트 산맥을 왼쪽에 두고, 남쪽으로." 쓸데없는 말이었다. 아니.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진로를 결정했다는 느낌을 원하는 것일까? 지멘은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는 시구리아트 산맥을 따라 달렸다. 몇 시간 뒤 그들은 꽤 큰 농장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했다. 아실과 지멘에게 돼지를 판 농장주는 자신이 1년에 한 번 올까말까 한 행운 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돼지를 도축하고 요리까지 해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아실은 돼지 세 마리에 해당하는 대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아 실과 지멘은 배가 충분히 부르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먹었고 나머지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떠났다. 그 덕분에 이후 사흘 동안 농장주와 그 의 가족들은 남아있는 돼지고기와 뼈 등을 상대로 여러 가지 조리법 을 시험해보면서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흘째 되던 날, 돼지고기, 판매 대금, 그리고 둘째 아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그러 니까 10년에 한 번 올까말까 한 불운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더 이 상 즐거워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흘 뒤의 일이다. 지멘과 아실이 농장을 떠난 것은 달이 떠오르던 시점이었다. 농장주는 스카리 요새라는 이름을 낯설어 했지만 다행히 그의 농장 에서 일하는 사용인들 중 한 명이 그 소재를 대충 알고 있었다. 아실 이 항상 큰 농장을 선호하는 것은 식량이 넉넉하여 판매할 여력이 있 다는 이유 외에 젊고 혈기 왕성한 사용인들이 모아놓은 정보들이 많 다는 이유도 있다. 물론 그런 정보들에게는 해괴한 변형이 가해져 있 을 경우가 많아서 잘 새겨들어야 하지만 이 경우에는 단순한 지리학 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별다른 변형이 가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발케 네에서만 통용되는 고유지명들 몇 가지를 정리한 후 아실은 자신이 스카리 요새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벽이 되었을 때 아실은 꽤 낭패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14시간 동안 500킬로미터를 조금 넘는 거리를 달려온 끝에 그들이 맞이한 지형은 아름다웠다. 까마득한 절벽과 깊은 계곡이 뒤섞여 새 들에게 주의력을 요구하는 지형 위로 울창한 가문비나무숲이 덮혀 있 었다. 굳이 광적인 자연찬미가가 아닌 여행자라도 이 땅의 웅혼한 기 상에 깊은 인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실에게는 어처구 니없는 광경일 뿐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 러보았다. 지멘은 아실이 왜 그렇게 당황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실은 설명 할 기분이 아니었다. 500킬로미터의 관성이 그녀의 몸 안에서 아직도 요동치는 것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자신에게 설명해야 하는 의무를 맞닥뜨렸고, 그래서 동행자에게 뭔가를 설명할 여유나 기력은 그녀에게 없었다. 적당히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찾은 아실은 그대로 그곳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쥔 채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지멘은 무력감을 느꼈다. 육체적으로도 피로한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의 무력감을 조장하 는데 있어 육체적 피로감은 종범의 위치에 있는 듯했다. 주범은 정신 적인 것이었다. 지멘은 아실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어떤 박탈감을 느 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6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무턱대고 주저앉은 아실과 달리 지멘은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보았 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가문비나무는 그의 거대한 체구를 감 추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은 빛깔은 하얀 빛깔의 경우보다 몸을 감추는 데 유리했다. 하지만 숲에 익숙하고 눈이 밝은 사람이라 면 그의 모습이나 그의 발자국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지멘은 앉지 않기로 했다. 깍아지른 절벽에 거대한 몸을 기댄 지멘은 하전한 눈길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아실에게서 달라진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멘 속 의 무엇인가가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지 멘은 그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때 아실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군사 이론이 발케네에서만 퇴보한 것이 아니라면 이건 말도 안돼 요." 아실은 감싸쥔 머리를 그대로 둔 채 말했다. "제가 아는 것이 맞다면 군사이론가들은 험지에 방어력을 집중시키 는 이론에 대해 오래 전에 사망선고를 내렸어요. 험지의 방어기지는 공격측을 괴롭혀줄 수는 있지만 방어력도 고립시키니까요. 방어에만 치중하겠다면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현대의 전쟁은 그렇지 않아요. 방어를 하면서 필요할 땐 공격에도 나설 수 있어야 하죠. 그러니 까…… 어르신, 딱정벌레, 그리고 뱀단지 등 굉장히 빠른 명령전달수 단이 사용된 제2차 대확장 전쟁 때부터 전쟁이론가들은 방어와 공격 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게 되었어요. 군사력은 그 둘을 동시에 수행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험악한 지형에 위치한 방어기지는 그 중 반밖에 수행할 수 없지요. 그래서 난공불락의 요새나 철옹성 같은 것 은 구닥다리 신화가 됐어요. 유격활동을 하려는 것이 아닌 바에야 현 대의 요새는 좋은 거점기지 역할만 해주면 돼요." 지멘은 조금 감동했다. 아실의 설명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극심한 피로 때문에 말도 하기 싫을 텐데 아실 은 말을 걸 수 없는 지멘의 처지를 고려한 것처럼 참을성 있게 설명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실은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 다. "간단히 말해서, 락토 빌파가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땅에 요새를 짓 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죠. 둘 중 하나예요.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거 나 발케네공이 짓고 있는 것이 요새가 아니거나." 지멘은 수염볏을 조금 비틀었다. 아실은 크게 하품을 하고는 일어났 다. "우선 눈 좀 붙인 다음 어느 것이 맞는지 알아보지요." 아실은 위로 팔을 들어올렸다. 그녀를 집어든 지멘은 안전하게 잘 수 있는 지형을 찾아 움직였다. 락토 빌파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기 전 락토는 두 손을 조심스 럽게 움직였다. 손끝에 와닿는 우둘투둘한 감각을 느낀 락토는 그것 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암살공은 눈을 떴다. 지상에서 4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잠든 사람은 그렇게 깨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자세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던 락토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중력의 방향과 몸의 체중 분포를 면밀하게 검토해본 다음 락토는 약 간 높은 곳에 있는 굵은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그 나뭇가지가 체중 을 버티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한 암살공은 천천히 몸을 끌어당겼 다. 마침내 공작의 척추 방향과 중력의 방향이 일치되자 락토는 그 자세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빽빽한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신통 한 것을 찾지 못한 락토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넓은 풀밭에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스 카리 요새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 중 아무도 나뭇 가지 위에 있는 락토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 쪽의 환경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법이고, 그에 덧붙여 암살공은 도깨 비 감투를 쓰고 있었다. 부하들에게 유혹을 주지 않기 위해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했으니 발 케네 공작을 자애로운 군주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락토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나무 위에서 가진 잠깐의 수면은 다급한 수면욕을 잠시 억눌러두는 효과밖 에 없었다. 그의 몸은 상궤를 벗어난 질주의 여파를 여전히 피력하고 있었다. 관절의 소음과 근육의 경련으로. 하지만 락토는 강철 같은 자제력으로 자신을 통제하며 나무 아래로 내려섰다. 주위를 살펴 보 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락토는 머리 위의 감투를 벗었다. 그리 고 그는 시각에 포착되는 대상이 되었다. 락토는 천천히 풀밭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는 스카리 요새로 걸어 갔다. 다가오는 공작의 모습을 보고 헤어릿이 요새에서 걸어나왔다. 헤어 릿은 공작의 걸음새를 유심히 관찰했다. 락토는 헤어릿이 일부러 자 세를 꼿꼿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의 부하들을 피해 숨어서 자야했던 당신과 달리 나는 요새의 좋은 침대에서 편안하게 잤거든.' 성공할 뻔했다. 하지만 좋은 침대라고 해서 그녀의 몸에 쌓 인 피로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을 테고,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편 안함을 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장을 포착한 공작은 피식 웃었 다. 락토의 웃음을 본 헤어릿은 턱 근육을 약간 긴장시켰다. 암살공 은 그 모습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헤어릿 에렉스는 실로 아름다웠다. 락토가 사생아가 생길지도 모르 는 모험을 무릅쓸 만큼 아름다웠던 모친을 닮은 탓이다. 아들이었다 면 아마도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발케네가 사생아를 용납하지 않 는 무시무시한 도덕주의자들의 땅이기 때문은 아니다. 실상은 정반대 에 가깝다. 하지만 암살공은 스카리에게 경쟁자를 선물하고 싶은 생 각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딸이었던 헤어릿은 사고 없이 무사히 성장했다. 그리 고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었다. 락토는 자신에게 사랑을 보내지 않는 헤어릿에게 조금의 유감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보내는 대신 헤어릿은 말들에게 사랑을 보내고 있었고 그 때문에 락토의 말들이 잘 크고 있으니 락토는 유감스러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 다. 그리고 락토는 헤어릿의 미모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 었다. 헤어릿의 친구들인 말들은 공작의 사생아가 가진 미모에 대해 당근 한 조각 만큼의 가치도 두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락토가 보기에 그것은 공작의 사생아라는 가치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좋은 상품가치였다. 락토가 말했다. "내가 뭣때문에 온 건지 네게 물었겠지. 뭐라고 대답했나?" "저는 공작님께서 갈아타실 말들을 데리고 따라온 것뿐이라고 말했 습니다." "알았다. 그럼 돌아가서 더 자거라. 오늘 당장 돌아가지는 않을 테 니까."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나?" "예." "그럼 가서 힌치오를 데려와라. 나는 요새에 들어가 있겠다." 헤어릿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떠났다. 공작은 요새 안으로 들어섰다. =============================================================== 7 챕터 시작합니다. 졸업 시즌이군요. 내 졸업장이 빛나고 있다! 취업사기꾼을 응징하라 고 외치고 있다! 샤이닝 졸업장! 졸업생 여러분들 모두 품었던 꿈 아름답게 펼치시길 바랍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7-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2-16 조회수 : 225 피를 마시는 새 7. 삶을 이용하는 태도 - 2 얼마 있지 않아 헤어릿은 어마어마하게 큰 레콘과 함께 돌아왔다. 요새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공작은 헤어릿과 레콘에게 맞은편에 앉으라고 했다. 락토는 식사할 때는 금언해야 한다는 충고를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을 기다리게 할 생각은 없었다. 자리에 앉은 헤어릿은 자기 몫의 음식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별말없이 그것을 들었다. 락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콘을 돌아보았다. 레콘은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체구였다. 그리고 팔도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등에는 그 체격과 팔길이에 잘 어울리는 서까래 같은 양손검 을 매고 있었다. 레콘용으로 제작된 그 말도 안되는 거대한 칼은 락 토의 눈에는 어처구니 없는 농담처럼 보였다. 물론 진짜 농담거리는 그 칼의 이름이지만. "잘 있었나, 힌치오?" 힌치오라 불린 레콘은 레콘이 아닌 종족에게 평대를 들은 레콘의 일 반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위아래 부리를 탁 부딪치며 말 했다. "온다고 이야기나 하고 올 것이지. 뭐하러 온 거냐? 그리고 그렇게 급한 일로 왔으면 이야기부터 할 것이지 오자마자 자는 것은 또 뭐 고?" "잠이야 졸리니까 그런 것이고, 내가 여기 온 것은 노파심 많은 상 관의 불시점검 정도로 생각하게." 힌치오는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뭐? 그것뿐이야?" "그것뿐이야." "이런, 빌어먹을. 네가 나타난 것 때문에 얼간이들이 얼마나 흥분하 는지 알고서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거야?" 락토는 반색했다. "많이 흥분했나?" "여기 있는 것도 싫어. 나 없는 새 그 녀석들이 서로의 머리를 부술 까봐. 하지만 돌아가는 것도 탐탁찮아. 내 머리가 부서질지도 모르니 까. 이 정도면 알겠나?" "그거 참 반가운 이야기군. 나는 자네가 말하는 그 얼간이들이 풀이 죽어있거나 만사가 다 귀찮다는 투로 늘어져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사기 진작을 위해 몇 마디 헛소리를 하라 는 요청을 받게 될 것도 각오했지. 그런데 상황이 정반대라니. 역시 힌치오답군." 힌치오는 락토가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투로 얼굴을 찡그렸 다. "그렇게 좋아할 일이 아니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나 자신도 믿기 지 않지만 파벌이 생기는 것 같아." 헤어릿은 식사를 멈추고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힌치오를 돌아보았 다. 락토 역시 호기심이 잔뜩 동한 얼굴로 힌치오를 바라보았다. "파벌? 파벌이라고 했나? 그것 굉장한 이야기군. 들려주게." 힌치오는 상처가 많은 수염볏을 쓸어내렸다. "내가 설명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내 쪽에서 물어보고 싶 은 상황이야. 팔리탐에게 물어보니 이런 건 인간들 사이에서 아주 흔 한 일이라고 하더군. 그러니까 큰 감옥이나 대규모 소용소 같은 곳에 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래. 그게 인간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라면 너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락토는 물론 알고 있었다. 꼭 감옥이나 수용소가 아니라도, 그러니 까 학교나 동네 꼬마들이 모이는 마을 공터 같은 곳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다양한 파벌이 형성되어 오직 그러기 위해 생겨났다 는 듯이 서로 반목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이에겐 삶의 유일한 방식이기 도 하다. "알아. 그러면 그런 일이 여기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건가?" "그런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꽤 당황했어. 그 런데 팔리탐이 몇 마디 해주더군. 그 녀석 희한한 경험이 많은 것 같 더군." 락토는 팔리탐을 보내 안치오를 보좌하게 한 자신의 인사 감각에 만 족했다. 힌치오가 계속 말했다. "파벌 전부를 건드리지는 말고 우두머리인 것 같은 녀석만 목표로 삼으라고 하더군. 하지만 절대로 그 녀석들을 적대하지는 말라고 하 더라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 내가 알기론 전쟁에선 우두머리만 잡으 면 되는 거야. 그게 가장 효과적이지. 그런데 우두머리를 건드리면 안된다니. 모순 같아." 락토는 조바심마저 느꼈다. "그래서 팔리탐의 말을 무시했나?" "아니. 잘 아는 것 같아서 그냥 따르기로 했어." "잘했어! 어떻게 했지?" "팔리탐이 시키는대로 그 우두머리 녀석들을 오히려 우대해줬어. 그 러니까 어떻게 됐는지 알아? 아, 참. 이건 너희들이 더 잘 아는 일이 지. 놀라게 할 순 없겠군. 네가 한 번 짐작해봐. 어떻게 됐을지." "그 우두머리들이 알아서 자네에게 협조했지? 자네가 쉽게 통솔할 수 있도록?" 힌치오는 약간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말 잘 아는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네 말대로 되었어. 녀석들이 말썽을 일으켜도 이젠 내가 나설 필요가 없어. 우두머리들이 알아서 정리를 하니까. 그러면 나는 느긋하게 가 서 참 잘했다고 칭찬해주기만 하면 돼. 이쑤시개는 쓸 필요도 없고. 젠장. 난 믿을 수가 없어." 락토는 실소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는 아직 힌치오가 자연 스럽게 말한 검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어릿도 약간 당황한 얼굴로 엉뚱한 곳을 바라보았다. 길이 4미터짜리 철제 이쑤시개라니. 도깨비나 좋아할 만한 명명법이다. 락토는 가까스로 웃음을 삼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 있어도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겠군." "말했잖아. 나는 그걸 믿을 수 없다고. 내 눈으로 사태가 잘 돌아가 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계속 불안할 거야. 네가 그냥 심심 해서 온 거라면 난 얼간이들에게 돌아가고 싶은데." "그러지마. 나는 자네와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으니까. 불안해할 필요는 없어." 힌치오는 락토가 그렇게 말하자 약간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 의 다음 말은 의구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 한 설명을 요구하는 투였다. "락토. 난 한두 놈이 일으키는 말썽 정도는 처리할 수 있어. 이쑤시 개의 칼날이 말소용이라면 이 옆면은 질서회복용이야. 왜 그런 이상 한 표정을 짓는 거야? 알았어. 계속하지. 이 옆면으로 적당히 토닥거 려주면, 맞은 얼간이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건 난 질서가 잡혔다 고 생각해버릴 수 있어. 내가 안심할 수 있다는 말이야. 하지만 이건 아니야. 칼을 쓸 필요도 없다니. 팔리탐 녀석은 좋아해야 하는 거 아 니냐고 말하고 나도 어느 정도 그 말에 동의하긴 해. 하지만 한편으 로는 전보다 더 불안하다고. 만약 파벌들끼리 전면전을 벌이거나 하 면 난 절대로 그걸 통제할 수 없을 거야." "혹시 인사사고가 일어났나?" "인사사고? 누가 죽었냐고? 아냐." "좋군. 파벌이 몇 개인데?"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넷이야. 파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 두어 개 더 있고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이는 얼간이들이나 그런 것 무시하고 혼자 지내는 얼간이들도 꽤 많아." "불확실한 것들은 빨리 확실하게 만들고, 뒤쪽의 얼간이들은 빨리 파벌에 속하게 해." "파벌을 조장하라는 거야? 내 말을 어떻게 들은 거야. 락토. 난 그 상황이 마음에 안든다고." "힌치오. 내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모든 얼간이들의 소속 을 명확하게 만들어줄수록 자네 사정이 편해질 거라는 거야." "확실해?" "확실해. 소속이 불명확할 때 오히려 사고 위험이 높아. 상대방의 전력을 정확하게 모르면 오판으로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거든. 상대 를 정확히 알면 일단 생각을 해보게 될 거야. 물론 그러려면 자네가 편성 작업을 하면서 되도록이면 모든 파벌의 세력이 비슷하게 되도록 조정해야겠지." 힌치오는 미섬쩍다는 시선으로 락토를 노려보았다. "조정한다는 그거, 상당히 까다로운 일인 거지?" "까다로운 일이야." "그냥 고개만 끄덕이지 꼭 말을 하냐. 젠장." 힌치오는 부리를 딱 부딪혔다. 락토는 두 손을 펼쳐보였다. "미안하니까 그러는 거지. 어려운 일을 맡겨놓고 그냥 고개만 까딱 거릴 수가 없군." "쳇. 됐어." "좋아. 그럼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오늘은 좀 늦었고, 내일 간단히 사열을 하고 싶은데 준비할 수 있겠나?" "사열? 세워놓고 구경하는 거?" "그래. 그런 거." "그거라면 어려울 거 없지. 그냥 서있는 건데." 락토는 미소를 머금었다. 문외한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열이 군대예절의 꽃이고 그 간단한 행위를 통해 조직의 충실도를 꽤 정확 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그냥 바보 처럼 서있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락토는 힌치오의 오해를 푸는 일은 팔리탐에게 맡기기로 했다. 상관 살해라는 곤혹스러운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팔리탐 지소어는 좋은 군인이다. "팔리탐에게 가서 물어봐. 내 생각엔 그렇게 간단할 것 같지는 않 아." 힌치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공작의 요구 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았다. 나가는 걸음이 제법 빨랐다. 힌치오의 뒷모습을 잠시 쫓던 헤어릿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 사실 조금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 말했다. "힌치오는 그가 우두머리들을 다루는 방법이 바로 공작님이 그를 다 루는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더군요." 락토는 씩 웃었다. "정말 모르는 것 같지?" 헤어릿은 당황한 얼굴을 숨기기 위해 식기들을 정돈하는 척했다. 락 토와 스카리를 모두 아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동의하겠지만 두 사람 은 정말 닮았다. 상대편이 예상치 못했을 때 그들은 순진한 구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순진함인지 천성화된 어리칙칙함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비난의 어조로 말하는 사람에게 순진한 공모자의 웃음으로 응수하는 남자를, 헤어릿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증오도 사 랑만큼이나 이해의 자양분을 필요로 한다. 이렇듯 이해하기 어려운 면모를 볼 때마다 헤어릿은 락토에 대한 증오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 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헤어릿은 락토를 격분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락토가 말했다. "활을 챙겨라." "예?" "잠도 잤고 배도 든든하니 사냥이나 하자. 할덴에게 활을 얻어오너 라. 병사도 몇 명 준비시키고." 헤어릿은 발칵 화를 내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고민했다. 그녀는 공 작에게 사냥하고 사열하려고 그렇게 달려온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 리고 자신은 갈아탈 말을 데리고 따라온 것일뿐 공작의 몸종도, 보좌 관도 아니라고 말하고도 싶었다. 헤어릿은 일어났다. 그녀는 무익한 항의로 시간을 낭비하는 습벽이 없다. 스카리 요새의 책임자인 할덴은 - 그의 의무는 힌치오와 팔리탐 지 소어가 요구하는 것을 제때 제공하는 것뿐이지만 어쨌든 그는 요새의 책임자였다. - 헤어릿이 요청한 것들을 준비해주었다. 헤어릿은 그것 으로 자신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공작은 그녀에게 사냥에 따라 나서라고 명령했다. 헤어릿은 말없이 활을 집어들었다. 할덴이 편한 옷까지 준비해주었기에 락토는 파리조에서부터 입고 왔 던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사냥꾼의 복장을 갖춘 락토는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발케네의 공작을 수행하고 있다 는 사실에 약간 흥분한 세 명의 병사들은 수다스럽게 산양이 어떠니 멧돼지가 어떠니 하고 떠들었다. 공작은 미소 띤 얼굴로 그 조언들을 경청했지만 병사들이 지목한 곳으로 다급하게 달려가지는 않았다. 얼 마 있지 않아 공작이 원하는 것이 그저 가볍게 숲속을 거니는 것임을 알게 된 병사들은 약간 아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병사들 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공작이 사냥을 필사적으로 원 했다면 난처해진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을 것이다. 힌치오와 그의 얼 간이들의 취미 또한 사냥이었고 그래서 이 주변에는 락토가 흥분할 만한 사냥감이 거의 없었다. 락토는 자취를 추적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고, 그래서 두 명의 남 자 병사들은 헤어릿의 거동을 훔쳐보며 그녀가 알았다면 찬성하지 않 았을 환상을 즐기기로 했다. 헤어릿을 쫓는 남자 병사들의 시선을 깨 달은 락토는 다른 한 명의 여자 병사가 자신을 훔쳐볼까 기대했지만 그녀의 시선 또한 헤어릿을 쫓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남녀의 차이 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런 엉성하고 목적의식 희박한 사냥꾼들의 무리에 놀란 꿩은 틀림 없이 굉장히 소심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꿩이 날아올랐을 때 꿩보다 사람 들이 더 놀랐다. 병사들이 고함을 지른 것은 좀 늦은 시각이었고 락 토가 그 소리를 듣고 꿩의 위치를 찾은 것은 그보다 더 늦은 시각이 었다. 이미 꿩이 명중을 자신할 수 없는 높이까지 날아오른 것을 확 인한 락토는 속으로 혀를 차며 활을 들어올렸다. 그 때 락토는 자신 보다 훨씬 유리한 - 그리고 의지도 훨씬 투철한 - 사냥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병사들 또한 하늘 저편에서 매섭게 날아드는 매를 발견하고는 불안 한 소리를 내었다. 매는 급강하하기 좋은 각도를 찾고 있었고 사람들 에게 놀란 꿩은 아직 매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했다. 적당한 방향만 잡으면 매는 눈깜짝할 사이에 날아들어 꿩을 후려칠 것이다. 병사들 은 공작에게 쏘라고 성화를 부렸다. 락토는 그에 부응하듯 활시위를 잔뜩 잡아당겼다. 그러나 활을 쏘기 전 락토는 갑자기 헤어릿을 쳐다 보았다. 헤어릿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락토는 그녀가 자신의 실패를 기대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락토는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화살이 바람을 찢으며 날아올랐다. "맞았다!" 병사들은 환호를 외쳤다. 그러나 곧 병사들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 중 어떤 이는 자신의 눈을 비비기도 했다. 호들갑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새는 두 마리였다. 꿩은 물론이거니와 꿩을 향해 날아들기 위해 몸을 접은 매 또한 날 개를 힘없이 펼친 채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두 마리 새에서 떨어져나온 깃털들이 어지럽게 나부꼈다. 병사들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락토를 바라보았다. '한 살로 두 마리를?' 그들은 자 신들의 지배자에 대한 믿을 만한 이야기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 기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들이 들은 이야기들 중 어떤 것도 락토가 희대의 명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없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어떤 새 로운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사 람들에게 무수히 들려줄 이야기, 20년 쯤 후에는 락토가 활을 한 대 쏘자 발케네의 조류가 멸종해버렸다는 식의 이야기가 될 사건의 목격 자인 것이다. 따라서 병사들은 락토가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는 것에 대해 만족하기 어려웠다. '그 때 공작은 대수롭잖다는 투로 싱긋 웃으셨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락토는 다른 병사들 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떨어지는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의 멍한 얼굴을 본 헤어릿은 20년 쯤 후에 번지게 될 조류멸절궁에 대한 이야기를 차단하기로 했다. "운이 좋으시군요. 공작님." 락토는 그 말에 겨우 고개를 내렸다. 헤어릿의 얼굴을 본 락토는 고 개를 가로저었다. "가서 보면 알겠군. 도대체 어떻게 두 마리가 맞았는지." 병사들도 갑자기 떨어진 새들의 모습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에 사로 잡혔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새들이 떨어 진 방향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새들은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닥에 떨 어져 있는 새도 발견했다. 새의 모습을 본 순간 그들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두 마리의 새 중 한 마리는 솜씨 좋은 활량의 일격을 당한 새의 보 편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쪽은 꽤 이상한 모습이었다. 무기에 대한 식견이 전혀 없는 사람도 그 새가 활에 맞아죽었다고 말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의 몸통은 으스러져 있었고 허연 뼈가 찢어 진 살갗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사방에 흩뿌려진 피는 그 새의 몸 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락토와 헤어릿, 그리고 병사들은 활에 맞은 새가 그렇게 많은 피를 뿌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았 다. 그들은 동시에 침묵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누군가가 이 상황을 설명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설명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락토도 헤어릿도, 그리 고 세 명의 병사들도 아니었다. 근처의 숲속에서 갑자기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석이조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진짜 그런 것을 볼 줄은 몰랐네. 어 떻게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았어요? 나 원 참 어처구니가 없 어서." 그것은 소녀의 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귀의 웃음이라 도 들은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가까스로 그 괴이한 말이 이 상황 에 대한 설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갑자기 숲속에 서 거대한 것이 불쑥 나타났다. 그것은 애꾸눈 소녀를 어깨에 태우고 있는 검은 레콘이었다. 병사들이 느낀 첫번째 인상은 힌치오가 깃털을 검게 물들이고 어디 서 소녀를 한 명 주워들고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본 레콘 중에 그렇게 큰 레콘은 힌치오뿐이었으니 그들의 인상을 탓할 것은 아니다. 인간이 보기에 모든 레콘은 거대하게 보이 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검은 레콘의 거대함은 상식을 벗어날 정도였 다. 어떤 병사는 - 조금 전 눈을 비볐던 병사다. - 힌치오라고 부를 뻔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곧 깃털 색깔 외에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검은 레콘은 힌치오만큼이나 키가 컸지만 팔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길다기보다 굵은 팔이었다. 그리고 그 굵은 팔 끝에 쥐 어져 있는 것은 양손검이 아니라 대형 공성추였다. 아니, 그것은 망 치였다. 병사들과 함께 검은 레콘과 소녀를 바라보던 헤어릿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헤어릿은 앞에 있는 레콘과 소녀가 누군지 깨달았다. 그녀는 공작도 그것을 알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공작을 돌아보았다. 락토는 내심을 알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멘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 며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지멘은 그들이 모두 무장하고 있는 것을 보 고는 망치 자루를 두 손으로 쥐었다. 상당히 공포감을 조성하는 동작 이다. 병사들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 때 락토가 입을 열었다. "아아, 그렇게 된 것이군. 각자 다른 것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군." 락토는 빙그레 웃었다. 지멘의 어깨 위에 있던 아실은 바닥에 놓여 있는 두 마리 새의 상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석이조가 아니네." "나도 한 화살로 두 마리를 잡은 줄 알고 놀랐다. 얘야. 그나마 서 로 겨냥한 것이 달라서 다행이군. 그렇잖으면 다툼이 일어났을 텐 데." 락토는 대화의 방향을 지멘에게 돌렸다. "그런데 돌팔매로 맞춘 겁니까?" 지멘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똑같은 의심이 자신에게도 적용되 겠지만, 지멘은 숲속에서 갑자기 만난 무장세력이 수상하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하고 있었던 일이 사냥인 것처럼 보이더라 도 지멘은 쉽게 긴장을 풀고 싶지는 않았다. 아실 또한 마찬가지였 다. 아실은 지멘이 갑자기 움직여도 떨어지지 않도록 배낭끈에 다리 를 꼬고 손으로는 지멘의 깃털을 움켜쥔 다음에 말했다. "사냥 중이셨어요? 혹시 스카리 요새에서 오셨어요?" 락토는 활을 두 손으로 쥐어 무방비한 모습을 취해보이며 말했다. "사냥 중이었다는 건 숨길 수 없겠지만 내가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 은 숨길 수 있을 것 같군. 하지만 내가 숨김없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면 숨기지 않겠어." "우리는 이 근처에 있다는 스카리 요새를 찾고 있어요. 아저씨와 저 기 있는 분은 사냥꾼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병사 같군요." "이런. 내가 생각을 잘못했군. 맞아. 저 사람들이 병사들처럼 보이 는 사냥꾼이라고 주장할 순 없겠지." 락토는 쾌활하게 말했지만 아실은 그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음을 놓치지 않았다. 아실은 대답을 듣겠다는 듯이 입을 꽉 다물었다. 락 토가 말했다. "그래. 우리는 스카리 요새에서 왔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왜 요새에 가려는 거지?" "죄송하지만 질문 하나만 더 하죠. 아저씨는 누구죠?" 락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요새 건설 책임자인 할덴 모리노 자작이다." 병사들이 받은 훈련 중에는 당연히 연기력 증진 과정이 없었고 게다 가 그들 중엔 아예 천성이 그런 쪽과 관련이 없는 자들도 있었다. 하 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 중 지멘이나 아실이 눈치챌 만한 동요를 보 인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그들도 발케네인이다. 별다른 기색을 느끼 지 못한 아실은 그저 봉토명이 없으니 아마 봉급귀족인가 보다고 생 각했다. 게다가 락토는 영지가 없기에 개방적인 봉급귀족의 태도를 정확히 구현해보였다. "그리고 이쪽은 내 딸이자 내가 가진 유일한 보물인 보늬 모리노란 다. 진짜 이름이 보늬야. 고슴도치 심정이라고 타박하지는 않겠지?" 헤어릿은 구역질이 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실은 헤어릿의 일그 러진 표정을 다르게 해석했다. 자식 사랑이 지나친 부모에게 난처한 이름을 받은 딸은 그런 표정을 지을 법도 하다. 아실은 웃으며 말했 다. "타박이라니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나늬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요." "내 딸 정말 예쁘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사람들이 팔불출이라고 놀리든 말든 나늬라고 짓는 건데 말이야. 하지만 막 태어났을 때는 아무리 아비라도 장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웠거든. 그래서 보늬로 만족하기로 했단다." 헤어릿은 가증스럽다는 눈으로 락토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실은 헤어릿의 눈길이 자식 자랑에 정신이 팔린 아버지를 민망해하 는 딸의 눈길이라고 생각했다. 아실은 지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 다. "저희들 소개를 하죠. 이쪽은 후치고 저는 제미니에요. 후치의 숙원 은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집을 짓는 거예요. 그래서 보시는 것처럼 망치를 받았지요. 후치는 건축에 대해 배우기 위해 여러 건설 현장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스카리 요새에 가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거기서 일하면서 건축을 배우려고요." "아아, 거기서 일을 하려고? 하지만 인부는 이미 다 뽑았는데. 우리 팔리탐 십장은 더 이상 인부가 필요없다고 했어." "임금은 적게 받아도 돼요. 배우는 것이 목적이니까." "글쎄. 체격을 보니 임금은 적게 받아도 식사는 많이 할 것 같은데? 어려울 것 같군." "그러면 견학은 안될까요? 말씀드렸듯이 건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 니까요." 락토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들어줄 수가 없구나. 그건 요새야. 제미니. 요새 설계도도 그렇지만 건설 현장도 기밀이지. 그러니까 외부인이 들어오게 해줄 수가 없어. 기밀을 지키기 위해서 나도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내 딸을 봐.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이 애가 들어와서 내 수발을 들어주고 있단다. 한창 청년들을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 낼 나이에 건설 현장에 있게 해서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 오 늘 사냥을 나온 것도 이 애 기분전환이나 시켜주려고 나온 거란다." "도저히 안될까요?" "먼길 왔을 사람들에게 이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안되겠구나. 사실 이 근처에서 배회하는 것도 허락할 수가 없구나. 나야 두 사람 을 이해하지만 공작님은 외부인이 이 근처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 빨리 떠나달라고 부탁해야겠군." 아실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이 그러시다니 할 수 없지요. 떠나겠어요." 락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숙였다. 돌에 맞아 죽은 새를 집어 든 락토는 그것을 위로 들어올렸다. "이건 가져가십시오. 후치. 사냥꾼에게서 사냥감을 뺏을 수는 없지 요." 지멘은 새를 받아들었다. 그 때 락토가 말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이 놈을 노렸는지 말해주겠습니 까?" "음?" "겨냥한 것이 서로 달랐잖습니까. 그래서 궁금한 겁니다. 왜 꿩을 노렸지요?" 지멘은 잠시 손에 든 꿩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왜 매를 쏘았나?" 락토가 쏜 화살은 원래부터 매의 신체 부위인 것처럼 꽂혀 있었다. 정통으로 맞은 탓에 피도 별로 흘리지 않는 매의 모습은 잠든 것처럼 보였다. 락토가 말했다. "저는 보통 쫓기는 쪽 편입니다." "나는 보통 뺏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락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멘은 별다른 인사 없이 그대로 몸을 돌 렸다. 아실은 뒤편을 조금씩 훔쳐보다가 지멘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곧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떨어진 두 마리 새, 보기 드물게 거대한 레콘, 그리고 발케 네 땅에서 자기 정체를 숨기는 발케네의 지배자 등 비상식적인 모습 들이 계속된 끝에 잠깐 동안의 침묵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 고요하 순간은 사람들을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병사들은 서로 눈짓으로 수군 거리고 있었고 그들이 혀와 입술로 수군거리게 될 때까지 시간이 많 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장악력을 보여야 할 시점이지만 락토는 지 멘과 아실이 사라진 덤불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치게 흘렀다. 마침내 병사들 중 한 명이 - 지멘을 힌치 오라고 부를 뻔한 병사다. - 공작에게 다가서려 했을 때 락토가 갑자 기 몸을 돌렸다. 락토는 허리를 숙여 매를 집어들었다. 화살을 뽑아낸 락토는 매를 헤어릿에게 던졌다. "요새로 돌아가자." 헤어릿은 매를 받아드느라 잠시 지체하며 말했다. "사냥을 끝내실 겁니까, 공작님……?" 고개를 든 헤어릿은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받을 사람 이 사라진 것이다. 헤어릿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락토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당황한 병사들의 얼굴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때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본 헤어릿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남자 병사들 중 한 명의 목이 살아있는 사람은 절대로 불가능한 각도로 비 틀려 있었다. 병사는 마치 춤이라도 추는 양 제자리에서 빙글 돌고는 무너졌다. 여자 병사가 숨이 막혀 컥컥거리는 소리를 낸 순간 두번째 남자 병사가 갑자기 뒤로 상체를 확 젖혔다. '쓰러져야 해.' 헤어릿 의 상식은 그런 장면을 요구했다. 하지만 병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배꼽을 하늘로 향한 모습이었지만 병사는 버둥거릴 뿐 쓰러지지는 않 았다. 그 비정상적인 광경을 본 여자 병사가 다시 말도 아니고 신음 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병사가 쓰러진 것은 조금 후의 일이 었다. 그리고 병사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았다. 헤어릿은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들었다. "락토!" 여자 병사는 헤어릿의 외침에 퍼뜩 그녀를 쳐다보았다. 칼을 빼들고 있는 모습 때문인지 헤어릿이 내지른 고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 병사는 헤어릿을 의지하기로 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헤어릿에 게 달려왔다. 헤어릿은 어금니를 깨물며 단검을 왼손으로 옮겨쥐었 다. 그리고 오른손은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내밀었다. 여자 병사를 안으려던 헤어릿의 팔은 허공을 갈랐다. 헤어릿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여자 병사는 보 이지 않는 그물에 붙잡힌 물고기인 양 퍼득거리고 있었다. 헤어릿은 그녀의 두 다리가 추락하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 허공에 떠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헤어릿의 눈에 여자의 목이 보였다. 무엇인가가 그 목을 잔뜩 움켜쥐고 있었다. 목 에 골이 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자는 컥, 컥 하는 숨막히는 소리 를 내며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간절한 애원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살려줘요. 제발. 그녀의 혀는 이미 입술 밖으로 밀려나와 있었다. 검 붉게 물든 얼굴이 부풀었다. 열심히 살아왔을 나날에 대한 추억을 담 고 있는 눈빛이 흐려졌다. 여러 음식들이 문지르고 지나갔을 입술이 푸르게 변했다. 터질듯이 부푼 볼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의 버둥거림이 약해졌다. 끝이 다가왔다. 그녀의 이름은 수핀 로베자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헤어릿이 수핀에게 다가간 순간 그녀는 주저앉 았다. 수핀은 쓰러지는 순간까지 모욕당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가 수핀의 등을 차서 쓰러뜨렸다. 바닥에 부딪혀 뒹구는 수핀을 보던 헤어릿은 입을 틀어막았다. 수핀 로베자의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번 져나와 바닥의 돌을 검게 물들여다. 헤어릿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허공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헤어릿은 다시 좌에서 우로, 위아래로 단검을 휘둘렀다. 헤어릿은 허공을 베어내길 원했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찢어지며 선혈이 솟구치길 원했다. 그러나 허공은 헤어릿의 팔을 붙잡아 비틀었다. 단검을 놓치지 않으려 했지만 헤어릿은 어깨까지 비틀리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허공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결국 네 번째에 헤어릿은 주저앉았다. 얼굴에 불이 붙은 것 같았지만 헤어릿은 감히 얼굴을 만질 수 없었 다. 헤어릿은 두 팔을 얼굴 앞에 가로질러 자신을 지키려는 몸짓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없었다. 헤어릿은 눈물을 닦아내었다. 헤어릿이 보는 가운데 커다란 돌이 갑자기 사라졌다. 구체적인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떠올릴 수 없는 머리 때문에 헤어릿 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돌이 사라진 곳에서부터 작은 돌조 각, 모래 등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그곳을 걸어가고 있 었다. 손에 돌을 든 채. 걸음걸이는 죽은 병사의 머리 근처에서 멈췄 다. 그리고 누군가가 힘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돌을 들어 올리는 것 같은. 일어날 일을 직감한 헤어릿은 고개를 홱 돌렸다. 살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어릿은 눈을 감고 귀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막을 수 없 었다. 퍽, 퍽 하는 소리는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조금 멈췄다가 다른 방향에서 또다시 퍽, 퍽, 퍽. 헤어릿은 숨을 쉴 수 없었다. 퍽 퍽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헤어릿의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한 번 더 자리를 옮겨 계속되던 소리가 마침내 끝났다. 헤어릿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가 보게 될 광경을 그녀는 보고 싶 지 않았다. 하지만 락토의 생기 있는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락토 는 노련한 기술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망치라면 이 정도는 되겠지. 잘 으깨졌군." 헤어릿은 진저리를 쳤다. 눈 앞에 하얀 불꽃들이 퍼득였다. 그 불꽃 은 열을 가지고 그녀의 눈을 지지는 것 같았다. 그 때 무엇인가가 그 녀의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작할 생각이야." 헤어릿은 눈을 뜨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꺼풀은 제멋대로 열렸다. 헤어릿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락토의 얼굴을 보았다. 락토는 가위에 눌렸다가 막 깨어나 울음을 터뜨리려는 딸을 내려다보는 아빠 처럼 근심과 동정심이 담긴 얼굴로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헤어릿의 눈꺼풀에 이어 입술이 자결권을 주장했다. "예?" 락토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냥을 끝낼 거냐고 물었잖아. 그게 아니야. 이제 시작해야지." 석양이 계곡과 산등성이를 불살랐다. 산비탈을 돌 때마다 만나는 태양은 그 때마다 점점 붉게 변하고 있 었다. 성급한 별 몇 개는 벌써 반짝이고 있다. 바람은 밤의 내음을 나르기 시작했고 먼데서 이름 모를 짐승이 우는 소리도 들려온다. 작은 계곡 옆을 걸어가는 지멘의 허리에는 꿩 외에도 새 두어 마리 가 더 매달려 있었다. 배부르게 먹을 양은 아니지만 허기를 달래두기 엔 충분해 보였다. 지멘은 불을 피울 만한 적당한 자리를 찾고 있었 다. 조건이 그것뿐이라면 오래 전에 좋은 장소를 찾았을 것이다. 하 지만 아실은 높은 곳을 원했다. 아실은 이 근방 어딘가에 있을 요새 의 머리 부분이라도 볼 수 있는 장소를 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꽤 높 은 산봉우리를 몇 개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물론 지형이 지나치게 복잡해서 높은 곳에서도 시야가 닿지 않는 부분은 많았다. 해가 지는 것을 본 아실은 수색을 포기했다. "그냥 적당히 앉도록 하죠. 지멘. 지금은 찾기 어렵겠어요. 요새에 서 불을 피우면 더 잘 보일 테니까 밤에 찾아봐요." 지멘은 그 말을 받아들여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물이 흐르는 계곡 바닥에서 훨씬 떨어져 우묵하게 파인 장소를 찾아낸 지멘은 배낭을 내려놓고는 걸어오면서 꺾어두었던 나뭇가지들을 바닥에 쏟았다. 배 낭에서 빠져나온 아실은 나뭇가지들을 쌓아 불을 피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지멘은 새의 깃털들을 대충 뽑아내었다. 불을 피울 준비를 하 며 아실이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요새는 있었던 거예요." 불을 지피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또 지멘이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실은 지멘이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만약 고개를 들어 지멘을 보았다면 아실 은 조금 놀랐을 것이다. 손으로는 새를 손질하고 있었지만 지멘은 아 실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그 내용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 은 아니다. 지멘은 자신이 왜 아실이 말하는 것에 이토록 주의를 기 울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실이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돼요. 암살공은 이 땅에 요새를 만들 필요 가 없어요. 콜록! 아우, 매워. 비밀요새? 음. 아까 그 자작이 보여준 태도로 봐서 비밀 요새는 아닐 거예요. 아무래도 그 요새를 꼭 확인 해야겠어요. 저녁 먹고 나서 눈 좀 붙인 다음 찾아보도록 해요." 지멘이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암살공이 장차 레콘 독립국의 건설에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질문은 지멘이 아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하 지만 아실은 그것을 대수롭잖게 넘겼다. 자신의 생각으로 꽉 차있었 기 때문이다. "예. 황제가 죽으면 제국 북부는 틀림없이 암살공의 놀이터가 될 거 예요. 그리고 귀족원에서 암살공의 발언권은 상당히 높아요. 도움이 든 방해든 암살공은 우리 사업에 영향을 크게 줄 수 있어요." 우리 사업? 지멘은 그 말에서 약간 켕기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숙 원은 황제 살해이고 독립국 건설은 아실의 목표다. 하지만 아실은 지 멘 또한 그 일에 합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 지멘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가 죽은 후에도, 즉 그들 두 사람이 6년 동안 함께 추구해왔던 일을 달성한 후에도 지멘은 아실의 곁을 떠날 수 없다. 지멘과 아실 은 철의 대화로 얽혀 있다. 아실이 선제 공격을 하지 않는 한 지멘은 그것을 기다리며 계속 아실 곁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실의 사업 은 곧 지멘의 사업이 될 것이다. 아실은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철의 대화를 유도한 것일까? 지멘은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지멘은 그 사실이 반가웠다. 지멘은 황제를 죽인 후 곧 아실을 죽이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멘은 황제를 죽인 후에도 아실이 철의 대화를 끝내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실은 황제를 죽이고 레콘 독립국을 건설하여 타이모 의 유지를 완성한 후에야 철의 대화를 종료할 것이다. 나라를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멘이 아실을 죽이는 날은 빠른 시일 내에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 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만, 이 애를 긴 시간 동안 도울 수는 있겠군.' 아실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암살공이 이상한 짓을 하면 그게 무슨 이상한 짓인지 알 아둬야 해요. 게다가 요새라는 건 전쟁 외에는 쓸모가 없어요. 요새 건설은 곧 전쟁 준비지요. 하지만 암살공이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땅 은 규리하를 제외하면 제국령 뿐이에요. 암살공이 설마 제국을 상대 로……?" 아실은 말끝을 흐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땅이 흔들리네요?" 지멘은 눈을 끔뻑였다. 아실의 말이 맞았다.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 고 있었다. 아실이 다시 말했다. "지진인가?" 하지만 지진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지진보다는 훨씬 미약했지만 대신 지속적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다가오고 있었다. 지진은 다가오 거나 하지 않는다. 아실은 갑자기 불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가느 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실은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 었다. 무엇인가가 연기를 보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것은 땅을 울리게 하는 것이다. 아실은 벌떡 일어났다. "배낭에 태워줘요! 산꼭대기로 올라가요!" 지멘은 손질하던 새들을 내버려둔 채 아실의 말을 따랐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산꼭대기로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정상에 선 지멘과 아 실은 그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스러지는 햇빛은 미약했지만 지멘과 아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실이 찢어지 는 목소리로 외쳤다. "도망쳐요, 지멘!" 지멘은 온몸의 깃털을 부풀렸다. 하지만 아실의 외침이 합리적이라 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멘은 주저없이 몸을 돌려 산꼭 대기에서 뛰어올랐다. 내리막을 향해 뛰었기 때문에 지멘이 발을 다시 땅에 디딘 것은 허 공을 백 미터 쯤 난 뒤의 일이었다. 착지의 충격은 아실의 폐를 터뜨 릴 것 같았다. 아실은 숨이 막혔다. 동시에 아실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실은 신음처럼 말했다. "요새가 아니었어." 가문비나무숲을 질풍처럼 달려가면서 지멘은 다시 아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아실의 말을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왜 그럴까? 아실은 더듬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요새가…… 아니었어!" 요새가 아니다. 아실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요새가 아니다. 암살공이 원한 것은 요새를 짓기 위해 필요한 인력이었다. 여러 대의 우마차에 필적하는 운반력, 육중한 돌을 자유로이 쌓아올리는 견인 력, 방해가 되는 지형을 간단히 평탄화할 수 있는 파괴력, 그러니까 힘. 요새를 지을 수 있는 거대한 힘. 아실은 미처 그 소식을 접하지 못했지만 그 힘은 또한 하룻밤만에 성채를 파묻을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아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아실은 익 숙함도 느꼈다. 아직 의식의 겉면까지 배어나오지 않았지만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는 얼어있던 기억이 녹아흐르고 있었다. 아실은 그와 비 슷한 모습을 6년 전 본 적이 있다. 그 때는 더없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오줌을 지릴 만큼 무서운 광경이다. 거대한 산봉우리들을 낮은 울타리처럼 뛰어넘으며 수천 명의 레콘들 이 달려오고 있었다. =============================================================== 오탈자 지적해주신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아래의 것들은 지적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채식가 : 채소를 먹는 사람이 아니라 무늬 채, 꾸밀 식을 쓰는 채식 가입니다. 무늬를 넣어 꾸미는 사람이지요. 는지럭대다 : 몹시 얼크러져 축축 처진다는 뜻입니다. 시뻐하다 : 흡족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전하다 : 허전하다의 작은말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7-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2-17 조회수 : 2033 피를 마시는 새 7. 삶을 이용하는 태도 - 3 파리조의 암살성. 물론 원래 이름은 그것이 아니지만 성의 주인인 락토 빌파조차도 성의 원래 이름이 그룸성이라는 것을 금방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이타 규리하에게 융통성이 없지는 않았다. 성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암살성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니 이이타 규리하 에게도 암살성이라는 이름이면 충분했다. 규리하의 거성에 비하면 암살성은 신축건물이나 다름없다. 과텔과 케나린의 시대에 많이 재건되긴 했지만 규리하의 거성을 이루고 있는 뼈대는 고 아라짓 왕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다. 하지만 암살성은 현재의 주인인 락토 빌파의 아버지인 그룸 빌파가 건설한 성이며 현재의 주인보다도 나이가 어리다. 바지런을 떠는 하인의 손 길도 닿지 않는 성의 높은 곳과 깊은 곳에는 그럭저럭 수십년 묵은 때가 앉아있긴 하지만 어디를 보아도 천년을 넘어선 건물의 무게감은 없었다. 이이타에게 성이란 자연물에 가까운 무게감을 가진 건물이 고, 그래서 암살성의 산뜻한 모습은 이이타를 불편하게 했다. 무시무시한 이름과 달리 이이타가 만날 수 있는 암살성의 사람들은 공손했다. 이이타에게 그런 태도는 두번째 불만거리였다. 그들이 근 거 없는 도망자의 아들을 무시한다면 이이타는 무시당한 규리하 남자 가 어떤 재난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하 지만 그들은 아이저 규리하가 여전히 규리하 변경백령의 주인이며 이 땅에는 손님의 자격으로 잠시 찾아온 것처럼 대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어린 하녀를 보며 이이타는 이곳 사람들이 과연 자신을 어느 정도로 대우하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다과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녀가 다기들을 내려놓을 때 이이 타는 그녀의 눈이 벌겋게 변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이타는 그녀에 게 울었냐고 질문했고 그녀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손윗하녀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었음을 고백했다. "왜 꾸중을 들었는데?" "배가 고파서…… 음식을 집어먹었어요." "음식을?" "저, 사실 어제도 실수를 저질렀어요. 그 벌로 어제부터 굶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개들에게 주려고 따로 떼어둔 음식을 집어먹었어 요. 개는 고자질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조금만 먹는다는 것이 너무 많이 집어먹어서 들켰어요." 이이타는 한숨을 내쉬고는 차와 함께 나온 과자를 가리켰다. "먹어." "예?" "앉아서 먹어. 나는 고자질하지 않을 테니까. 가져가서 먹다간 들키 겠지. 먹고 가." 하녀는 여러 번 사양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과자를 집어먹는 하 녀의 모습을 보며 이이타는 그녀의 나이를짐작해보았다. 쉽게 짐작하 기 어려웠다. 이이타는 결국 질문을 던졌고 하녀는 열여덟이라고 대 답했다. 자신보다 어릴 거라 생각했던 이이타는 조금 놀랐다. "우리 누나하고 같네. 나는 열일곱이야. 이름은 뭐지?" 접시에 놓여있던 마지막 과자를 갈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하녀는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소리 로베자입니다. 공자님." "마저 먹도록 해. 그런데 너도 칼 가지고 있어?" "예?" "발케네에서는 개도 칼 차고 다닌다던데. 나는 그게 정말인지…… 정말이군." 20센티미터는 될 법한 비수를 본 이이타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것을 꺼내드는 소리의 손길은 손수건을 꺼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 러웠다. 송곳처럼 생긴 찌르기칼로, 분명히 살인용 흉기였다. 다른 용도로는 쓸모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 모양이니 가지고 다니기는 좋 겠지만. 자연스럽게 칼을 꺼내든 소리는 이이타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소리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그 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낭패스러운 심정으로 이이타의 얼굴과 자신의 비수를 바라보던 소리는 엉겁결에 말했다. "예쁘죠?" 이이타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는 더욱 당황 했다. 이이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그래. 예쁘네.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다시 집어넣어." "만져보시겠어요?" 이이타는 어리둥절했다. 칼은 소유주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물건이다. 바꿔 말한다면 그런 허락은 상대를 신뢰한다는 호 의의 표시가 된다. 소리가 왜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이 이타는 규리하와 발케네의 도검에 대한 예법이 조금 다른 것인가 생 각했다. 어쨌든 이이타가 배운 예법에서는 그런 호의를 무시해서는 안되게 되어 있다. 이이타는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칼을 건네주는 동작은 똑같았다. 소리는 칼날을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한 채 손잡이를 건넸 다. 받아든 칼을 관찰한 이이타는 그것이 대단한 물건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요한 용도에는 충분히 부합하겠지만 그 이상의 가치 는 없어보였다. 하긴 찌르기용의 이런 칼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관 리하기 편하며, 따라서 그런 신분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품질만 가 지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이이타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소리에게 그 비수는 외국의 공자님께 자랑하고 싶을 만큼 소중한 물건이었다. "언니의 칼이에요." "언니?" "예. 저는 언니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바보거든요. 그런데 언 니는 저를 놔두고 스카리 요새로 갔어요. 그래서 언니는 자기에게 무 슨 일이 생기면 그 칼이 알려줄 거라고 했어요. 예. 그래요. 그 칼 잘못된 데가 없나요?" 조금 혼란스러운 소리의 말을 정리해본 이이타는 그 비수의 내력을 대충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소리가 왜 자신에게 칼을 준 것인지도 알 게 되었다. 소리는 전문가의 눈으로 칼의 이상 유무를 찾아주기를 바 라고 있었다. 이이타는 자신이 전문가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 가 보기에 그 비수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이 칼을 보니 소리의 언니는 건강하게 잘 있나봐." 소리는 반색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던지듯 이이타에게 다가왔다. 소리는 이이타의 발 앞에 꿇어앉아 그의 무릎에 팔꿈치를 얹었다. 소 리의 가슴을 찌를 뻔한 이이타는 기겁하여 비수의 끝을 위로 세웠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도 모르는 듯 소리는 이이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화를 내려던 이이타는 소리 의 집중한 표정을 보고는 그냥 참기로 했다. 칼을 살펴보던 소리는 눈을 크게 떴다. "공자님, 여기가 좀 이상해요! 흐려졌어요!" "네 입김이야." "아…… 어머! 여기 금이 갔어요! 칼이 쪼개지려나 봐요. 어떡해!" "실밥이군." "아? 아아, 그렇네요. 공자님은 대단한 검사이신가 봐요." 이이타는 성장하면서 진짜 검사들을 많이 접했고 또 철없는 바보는 아니기에 그저 보통의 관찰력이라고 대답했다. 소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소리는 무향 규리하의 공자라면 얼룩곰의 후장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이이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이곳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알게 되었다. "무슨 명령을 받았지?" "예?" "공작이 무엇을 요구했냐고. 순진한 척하면서 나를 부추긴 다음 뭘 하라고 했지? 동침? 그래서 뭘 빼내오라고 했지?" 소리는 일어섰다. 그녀는 이이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수는 여전히 이이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충분히 찌를 수 있는 거리임을 깨달은 소리는 뒤로 물러났다. 이이타는 웃었다. 뒤로 물러선 소리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보다 어리신데 나이 서른은 먹은 아저씨 같군요. 공자님." 정확히 말하면 서른이 아니라 마흔둘이다. 그리고 이이타는 아버지 가 미리 경고해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곳이 발케네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뿐이야. 소리. 그게 본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명 맞아요. 덧붙인다면 언니 이야기나 그 칼 이야기도 사실이고 요." "음식 집어먹다가 꾸중 들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눈은 어떻게 한 거지?" "설거지물에 얼굴을 넣고 눈을 깜빡였어요." "고생했군." "어떻게 눈치채셨지요, 공자님?" 이이타는 비수를 내려다보며 점잖게 말했다. "글쎄. 나는 공작이 나를 잔뜩 겁준 다음 갑자기 이 성을 비워서 내 긴장이 탁 풀리게 만든 이유가 궁금했어. 그리고 그런 시점에 눈이 빨갛게 변한 하녀가 동정해 달라고 외치는 듯한 얼굴로 찾아온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묘하게 느껴진 것은 내 무 릎 위에 엎드려서 칼에 대해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는 발케네 여자였어. 놀라운 일도 세 가지면 진부한 설명을 찾을 수 있는 법이 라고 들었어." 소리는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어머, 그렇군요. 공자님 눈에는 제가 정말 멍청해 보이겠네요." "아무리 멍청해도 공작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는 아직 기억하고 있 겠지." "기억 못하겠는데요?" "정말 멍청하군." 소리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발케네의 거친 땅을 열여덟 해 동안 살아온 소리의 눈에 이이타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소년이 아니 라 과잉보호 받고 자란 애송이처럼 보였다. 그나마도 지금은 도망자 신세다. 소리는 그런 이이타가 자신을 깔보는 것이 싫었다. "기억 못하겠다는 건 애초에 기억할 것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공작 님은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당신에게 안기라고만 하셨 어요." "그것뿐이야?" "그래요." "어쩐지." "예? 뭐가 어쩐지죠?" "안기기 전에 목욕부터 하라는 말을 잊어버리셨군." 이이타의 유들유들한 말은 소리를 타오르게 만들었다. 소리의 눈길 이 비수에 꽂히는 것을 본 이이타는 그것을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자 기도 모르게 그 칼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소리는 갑자기 자신의 모 습을 깨닫고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이이타가 말했다. "대가로 뭘 받기로 했지? 은편?" "공자님이 알아서 뭐하려고요?" "네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야 너를 유혹할 거 아냐." "유혹이요?" "그래. 뭘 받기로 했어?" 이이타는 자신이 이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 기에 이이타는 소리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에 놀랐다. 갑자기 소리는 피로에 젖은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언니를 좀 좋은 근무지로 옮겨주신다고 했어요." "스카리 요새는 별로 안 좋은 자리인가?" "언니가 거기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면 승진에 도움이 될지 도 모르지요. 하지만 언니는 그냥 경비병이에요. 힘들기만 하고 아무 런 티가 안나요. 공작님은, 어, 저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잘 구워삶으면." "고마워요. 공자님. 예. 공자님을 잘 구워삶으면 언니를 암살성으로 옮겨주신다고 했어요. 언니랑 같이 저녁을 먹은 것이 언제인지도 모 르겠어요. 저, 공자님. 저 좀 도와주실래요? 그냥 저와 함께 자주세 요. 그러면 저와 언니에겐 큰 은혜를 베푸시는 거예요." 소리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대신 비굴함과 욕심이 떠올랐다. 또한 당신은 하룻밤 즐기는 일이니 이득 아니냐고 묻는 듯한 뻔뻔함 도 조금 떠올랐다. 이이타는 그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는 자신에게 놀 랐다. 그리고 동시에 이이타는 앞에 있는 하녀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이타는 자신이 소리 로베자와 자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품에 몇 개의 칼 을 감추고 있는지도 짐작하기 어려운 발케네 여자를 품는 것은 바보 짓이다. "원한다면 여기서 머물다가 가도 좋아." "예?" "여기 앉아있다가 밤늦게 돌아가도 좋아. 그리고 공작에게 나랑 잤 다고 말하도록 해. 나는 부정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네 언니에게 도움이 되겠지." 소리는 한순간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당황과 실망감을 드러내보였다. 이이타는 농담을 하기로 했다. "이봐. 영계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실망한 표정 짓 지마. 어른답지 않잖아." 그다지 우스운 말은 아니지만 웃음의 요체는 그 내용이 아니라 의외 성이다. 그리고 이이타의 말은 소리에게 충분히 의외였다. 소리는 한 참 동안 깔깔거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 호흡을 회복한 소리는 이이타 의 어깨를 한 대 때리고 싶다는 투로 말했다. "어머, 공자님. 천한 말씀 잘 하시네요?" "난 못된 꼬마거든." 소리는 다시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한참 웃은 소리는 눈물이 그렁 한 눈으로 이이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는 입술을 깨 물었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리의 눈빛이 이이타에겐 부담스 러웠다. 소리가 말했다. "저, 냄새 때문이라면 씻고 올게요." 이이타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영리하긴 하지만 이이타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는 소리가 왜 얻을 것을 얻은 후에도 자신을 제공하겠다 는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신분 높은 남자에 대한 호기심일까? 떳 떳하게 대가를 치르겠다는 걸까? 이이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을 알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씻는 건 됐고, 혹시 노래 부르는 것 좋아해?" "예?" 이이타는 비수를 살짝 던져 칼날을 붙잡아 앞으로 내밀었다. 소리가 비수를 받아들자 이이타는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발케네의 노래나 좀 가르쳐줘. 나는 규리하의 노래를 가르쳐줄 테 니까.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이 될 것 같군." "공자님, 저……" "내가 먼저 시작하지. 다른 사람이 고향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싶어." 소리는 입을 다물고 고향에서 쫓겨난 방랑자를 바라보았다. 이이타 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으니 네가 잘 배워서 내게 불러주 면 좋겠어. 규리하의 노래는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향이라서 노래도 좀 무뚝뚝해." 규리하의 공자는 발케네의 하녀를 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신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닥쳤다. 헤어릿 에렉스는 제 멋대로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가다듬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손바닥 이 얼굴을 스쳤을 때 헤어릿은 통증을 느꼈다. 헤어릿은 가만히 얼굴 을 만져보았다. 볼이 부어 있었다. 스카리 요새의 뒷문에 기댄 채 헤어릿은 가만히 뺨을 쓰다듬었다. 동쪽 지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아침을 끓이고 있었다. 희푸르게 변하 는 하늘 아래로 아침이 익는 냄새가 풍겨왔다. 헤어릿은 아침을 사랑 하는 편이었다. 특히 숲속에서 맞는 아침은 그녀의 견해로 축복에 가 까운 것이다. 하지만 이 아침, 헤어릿은 두통과 번민만 느낄 수 있었 다. 지난 밤은 소란스러웠다. 사열이 취소된 것에 대해 힌치오는 약간 아쉬워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약간일 뿐이었다. 힌치오는 병사들을 죽이고 공작을 죽일 뻔한 황제사냥꾼을 도륙하는 것에 찬성했다. 그 리고 팔리탐과 레콘들도 찬성했다. 일만 명의 레콘이 사방으로 흩어 져 지멘을 추적했다. 그들은 달리는 것도 빨랐고 목소리도 컸다. 누 구나 아는 레콘들의 그런 특성들이 결합하자 그 결과는 참으로 인상 적이었다. 헤어릿은 밤새도록 계명성에 시달려야 했다. "이-산-으-로-와-!" "이-산-이-어-디-냐-?" "소-속-과-이-름-을-말-하-고-외-치-라-고-!" "네-소-속-부-터-말-해-!" 그런 외침이 사방 수백 평방킬로미터에서 들려왔다. 헤어릿은 남자 가 아니었고 그런 거대한 규모로 수행되는 단일작전에서 충격과 경외 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헤어릿이 보기에 그것은 초현실적 규모의 난 동일 뿐이었다. 오늘 아침이 어제 아침보다 빨리 왔다면, 그것은 봄 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레콘들의 소동에 질린 밤이 황급히 도망쳤기 때문이다. 몸에 익은 버릇 때문에 새벽에 깨어났지만 헤어 릿은 견디기 힘든 수면욕을 느꼈다. 헤어릿이 다시 요새로 들어가려 했을 때였다. 헤어릿은 고개를 돌렸다. 요새 주변에 남아있는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 다. 그것은 곁눈질로 보이는 것이었고 그래서 헤어릿은 당장 그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면밀한 관찰 끝에 헤어릿은 락토의 머리를 찾아내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 속에 헤어릿은 그 머리를 바라보았다. 헤어릿 의 첫인상은 락토의 잘린 머리가 땅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가슴 을 진정시킨 다음 헤어릿은 보다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헤어릿은 락토가 덤불 속에 누워 있으며 그 머리가 우연히 덤불 밖으로 나와있 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심하려던 헤어릿은, 그러나 자신이 정말 놀라운 것을 발견했음을 깨닫고는 경직했다. 그 누구도 잠자는 암살공을 본 적이 없다. 어쨌든 지난 9년 동안은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아라짓력 21년, 발케네의 공작이 된 락토 빌파는 그 후로 자신의 자 는 모습을 감췄다. 암살공이 매일밤 도깨비 감투를 쓰는지는 불확실 하다. 어쩌면 문을 잠그고 혼자 잘 때는 감투를 쓰지 않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잠든 락토의 곁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여건 에서는 항상 감투를 쓰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도 잠든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까. 헤어릿은 락토가 혹 눈을 뜨고 있지 않는지 살폈다. 락토가 잠에서 깬 채 그냥 누워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둠 때문에 확실하지 않았다. 헤어릿은 조심스럽게 덤불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헤어릿은 락토의 머리 근처에 떨어져 있는 감투 를 발견했다. 잠결에 그것이 벗겨진 모양이다. 락토의 숨소리는 일정 했고 다가가는 그녀를 눈치챈 기색은 보여주지 않았다. 헤어릿은 락 토의 머리에서 1미터 쯤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그 위치에서는 아직 공작의 눈을 확실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공작이 잠들어 있다 면 헤어릿의 발소리가 공작을 깨울지도 모른다. 공작을 깨우면? 헤어릿은 자신이 공작을 깨울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공작이 깨어나면 안되는가? 그러면 그를 죽이기 어렵다. 다급하게 칼자루를 움켜쥐느라 헤어릿은 하마터면 손가락을 부러뜨 릴 뻔했다. 입을 틀어막아 터져나오려는 비명은 억눌렀지만 그러자 가빠지는 호흡이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헤어릿은 안간힘을 써서 호 흡을 가라앉혔다. 육체는 그녀에게 비협조적이었다. 헤어릿은 속이 뒤집히는 느낌에 고통스러워했다. '바보. 이러다간 저 남자를 깨우고 말 거야.' 락토는 깨어나지 않았다. 헤어릿은 감투를 보고 다시 락토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헤어릿은 조심스럽게 무 릎을 꿇었다. 락토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얼굴은 편안했다. 헤어릿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곤 황급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긴 머리카락이 락토의 얼굴에 닿기 전 헤어릿은 그것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자신의 멍청함에 절망하며 헤어릿은 머리카락을 목깃 속에 쑤셔넣었다. 그런 소동을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락토 는 깨어나지 않았다. 믿기 어려운 행운이다. 아니, 원래 공작은 깊게 잠드는 체질인 것일까? 아무도 공작의 자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그 잠버릇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헤어릿은 자신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손 이 칼자루 위에서 꿈틀대다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헤어릿 은 어깨를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 어깨는 누군가의 손에 붙잡혔다. 헤어릿은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알 수 없다. 가면을 쓰고 있으니. 헤어릿은 목이 졸린 사람마냥 힘들게 속삭였다. "팔리탐……"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가면의 남자는 헤어릿의 어깨를 놓아 주었다. 똑바로 선 팔리탐은 손바닥을 위로 쳐올렸다. '일어나.' 헤어릿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제발 눈감아주세요.' 팔리탐은 다시 손바닥을 위로, 이번엔 조금 더 강하게 쳐올렸다. '일어나.' 그리고 팔리탐은 공작을 가리켰다. '그러지 않으면 공작을 깨우겠다.' 헤어릿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팔리탐 지소어는 헤어릿의 팔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범죄자를 붙잡는 손이라기보다는 딸을 이끄는 아 버지의 손 같았다. 헤어릿은 자신의 느낌에 놀랐지만 팔리탐의 손길 은 정말 그랬다. 락토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겠지만 헤어릿은 그 느낌을 거부하기 어려웠 다. 팔리탐은 헤어릿을 이끌며 공작에게서 멀어졌다. 팔리탐은 요새 반대편으로 돌아간 후에야 헤어릿의 손을 놓아주었 다. 헤어릿의 손에 단검이 아직까지 쥐어져 있는 것을 본 팔리탐은 그것을 가리켰다. 칼집에 집어넣으라는 손짓이었다. 하지만 헤어릿은 그 말을 따르는 대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팔리탐의 가면을 바라 보았다. 헤어릿은 그 가면 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본 사람은 극 히 드물다. 하지만 이야기는 무성하다. 어떤 희박한 우연으로 가면 뒤쪽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팔리탐이 왜 상관을 죽였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름도 불명확한 상관이 부하의 얼굴을 망 가뜨린 이유에 대해서는 온갖 이야기가 난무한다. 하지만 그 상관이 어디서 그런 착상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일관된 설명이 전해 져 온다. 젊은 시절 팔리탐의 별명은 두억시니였다. 팔리탐의 얼굴을 망가뜨린 상관은 아마 이름과 대상의 유관성에 대한 개인적인 소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 때 두억시니라고 불렸고 이젠 두억시니처럼 변한 얼굴을 가면으 로 감추고 있는 남자치고 팔리탐의 태도는 온화했다. 헤어릿이 단검 을 꽂지 않는 것을 본 팔리탐은 약간 거칠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침 인사를 하러 갔던 거야. 헤어릿. 그리고 나는 공작님이 더 주무셔야 된다고 생각하고는 너를 말린 것이고." "저를 당장 베지 않으신 것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셨던 건가 요, 아니면 제 심정을 이해하시기 때문인가요?" 팔리탐은 허리띠에 엄지손가락을 걸었다. 헤어릿은 계속 말했다. "저를 이해하시는 거라고 믿고 싶어요.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 람이라면 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제 마음을 이해할 테니까." "이런.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는 데." "농담하지 마세요. 팔리탐. 이건 기회예요. 저 개자식을 죽여야 해 요. 그리고 스카리에게 이 땅을 주도록 해요. 스카리는 자기 아버지 와 똑같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그 녀석은 미치지는 않았어요."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냐. 헤어릿. 그 사람은 네 아버지야." "그럼 당신이 해요! 당신은 상관을 한 번 죽였잖아요. 당신이 죽인 상관이 락토보다 못한 인간인가요? 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 요." 팔리탐은 침묵했다. 지독한 답답함을 느낀 헤어릿은 팔리탐의 가면 을 벗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면 뒤의 얼굴이 아무리 흉측하든 이토 록 표정 없는 가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헤어릿이 말했다. "그 병사들, 황제사냥꾼이 죽인 것이 아니에요." 팔리탐의 가면은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헤어릿을 똑바로 향할 뿐이었다. 헤어릿은 흐느끼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황제사냥꾼을 만난 것은 맞아요. 가명을 댔지만 알아볼 수 있었어 요. 검은색, 망치, 애꾸눈 소녀. 그런 레콘이 세상에 또 있을 리는 없겠지요. 하지만 락토도 가명을 댔고, 황제사냥꾼은 락토의 진짜 정 체를 깨닫지는 못했어요. 우리는 그냥 몇 마디 말만 나누고 헤어졌어 요. 그런데 황제사냥꾼이 떠나고나서…… 저 개자식은 감투를 쓰 고…… 병사들을 무참하게 죽였어요. 도대체 그래야 할 이유가 뭐죠? 그냥 황제사냥꾼을 잡아오라고 해도 힌치오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 병사들을 죽여서 황제사냥꾼에게 누명을 씌워야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저 미친 살인마는 그렇게 했어요! 재미 삼아 그런 것이 분명 해요.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재미 삼아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고요!" 팔리탐은 오랜 시간 동안 가면을 썼고 그래서 자신의 침묵이 다른 사람들의 침묵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팔리탐은 다른 사람들 이 잠시 상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침묵하는 것과 비슷한 침묵을 만들 어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팔리탐은 사실로써 헤어릿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무의미한 것은 아니야." 헤어릿은 눈을 크게 떴다. 팔리탐이 말했다. "이건 할덴 자작과 공작님 사이의 일인 것 같고, 나는 가면 때문에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 재주로 몇 가지를 눈치챈 것 뿐이야. 하지만 네게 들려줄 만큼은 아는 것 같군. 그 세 명 중 한 명은 데라시의 간 자야." "간자라고요? 데라시?" 헤어릿은 간자나 데라시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팔리탐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비스그라쥬백 데라시가 보낸 사람이야. 할덴 자작은 그 세 명 중 한 명이 간자라는 것은 알아내었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은밀하게 조사하고 있었지. 그런데 공작님은 세 명 다 죽이면 간자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 아마 공작님께 서 사냥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자 할덴은 공작님의 속마음을 눈치챈 것이겠지. 그래서 그 세 명을 골라서 공작님을 따라가게 했고." 헤어릿은 숨쉬는 것을 잊었다. 팔리탐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말했다. "황제사냥꾼이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 세 명은 어차피 죽었을 거야. 황제사냥꾼이 나타나는 바람에 공작님은 그 세 명의 죽음을 설명할 방법을 찾아내신 거지. 그리고 또 이곳에 있는 레콘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할 방법도 찾아내셨고. 언제나 하나 이상의 목표를 동시에 추구 하는 분이니까. 여쭤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으로 오신 이유도 간자를 손수 처리하는 것과 훈련 상태를 점검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으 셨을 거야. 그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훈련 상태에 대해서는 실망하 셨을지도 모르겠군. 너도 경험했듯이 지난밤 드러난 훈련 상태는 끔 찍했지. 엉망일 거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헤어릿은 레콘들의 훈련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 녀는 당장이라도 팔리탐의 가면에 달려들 듯한 얼굴로 말했다. "세 명 중 한 명이라고요?" "그래." "그럼 그 한 명 때문에…… 아무런 죄가 없는 두 사람을……"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겠지." 헤어릿은 격분하여 말했다. "말씀 잘못하셨어요. 팔리탐.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에요. 납득해서는 안되는 이야기에요." "그 간자를 빨리 제거해야 했어. 이 땅에 무엇이 있는지 황제에게 알려줄 수는 없으니까." 헤어릿은 어떤 설명으로도 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세 사람을 죽이 는 짓을 합리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큰 의문 때문에 헤 어릿은 그 말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 "그렇다면 락토는 정말 제국을 훔칠 생각인 건가요? 길들인 레콘 병 사들을 데리고?" 팔리탐은 그렇지 않으면 뭣때문에 힘들여 레콘들을 훈련시키는 거냐 고 되묻지는 않았다. "글쎄. 어쩌면 공작님은 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거야." "훔치는 것이 아니면 뭐죠?" "헤어릿. 나는 네 할아버지대부터 빌파가와 인연을 맺어왔어. 너도 알겠지만 상관을 죽인 것 때문에 효수를 당하게 된 나를 구해주신 분 이 네 할아버지……" "그룸 빌파라고 해주세요. 저는 그 사람의 손녀가 아니예요. 저는 헤어릿 에렉스예요." "……그래. 나를 구해주신 분은 그룸 공작님이셨다. 그룸 공작님은 북부인에게 돌아와야 할 자리가 계속 나가에게 이어지는 것은 배신이 라고도 하셨어. 배신이라는 말은 좀 이상해. 나는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그룸 공작님은 아라짓의 제위는 북부인에 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 하지만 공개적으로 치천제 의 등극을 반대하실 수는 없으셨어. 그 때는 존경받는 선황 폐하의 유지를 따르자는 분위기가 강했거든. 결국 심장을 적출하여 단기간 내에는 죽을 리가 없는 치천제가 제위에 올랐지. 그래서 나는 그룸 공작님께서 제위에 대한 자기 의견을 포기하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들어 생각이 좀 바뀌는군. 그 분은 아드님을 통해 자기 의지를 실현하기로 결심하신 것 같아." "그렇다면 이건 나가에게서 북부를 되찾는 제3차 대확장 전쟁이라는 건가요?" 헤어릿은 농담을 말했다. 하지만 팔리탐은 가면의 침묵을 보내왔다. 헤어릿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그렇다는 거예요?" "어쨌든 북부가 나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나가면 안되나요? 그럼 도깨비나 레콘, 인간이어야 해요? 그 이유 가 뭐죠?" "넌 전후세대야. 헤어릿. 너는 2차 대확장 전쟁이나 천일전쟁을 모 르지. 그래서 나가도 네 선민종족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겠지." 헤어릿은 팔리탐의 손윗사람다운 태도에 별로 감동하지 않은 것 같 았다. 헤어릿은 도전적인 얼굴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팔리탐. 전후세대라고 하셨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시는 말 씀인가요? 그건 제 세대 사람들이 나가와 피를 뿌리며 싸웠던 사람들 에게 키워졌다는 뜻이에요. 나가에 대해 전설로만 알고 있던 부모들 에게 키워진 당신 세대와 달라요." 팔리탐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듯 어깨를 조금 움츠 렸다. 헤어릿의 지적은 정확했다. 2차 대확장 전쟁과 천일전쟁을 직 접 경험한 사람은 그의 연배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팔리 탐의 세대는 그 이전에 태어나 가치관을 형성한 사람들이다. 그에 비 하면 헤어릿은 나가들을 끔찍하게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교육 받으며 자라났다. 팔리탐은 헤어릿의 세대가 자신들보다 나가들을 더 증오하 는 것이 타당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나가 황제들의 지배 하에서 자라난 세대이기도 해 요. 우리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어요. 어른들은 나가들이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인 양 말했지요. 하지만 우리를 다스리는 것은 나가 황제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지요. 우리는 모순을 받아들이거나 스스로를 가르쳐야 했던 세대에요. 어른들은 앞 뒤가 안맞는 말만 하니 별도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너는 아라짓의 제위가 나가에게 있어도 상관없다고 너 스스 로 판단한 거니?" "인간이나 도깨비, 레콘만큼 나가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믿어요. 황 제의 다른 악덕이 아니라 그 분의 종족 때문에 황제로 인정할 수 없 다는 것이라면 저는 거기에 절대로 찬성할 수 없어요. 황제사냥꾼에 겐 복수라는 이유라도 있지요. 그리고 황제사냥꾼은 무수한 사람을 학살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락토는 뭐죠? 나가 황제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을 벌인다고요? 그런 지독한 광언이 어디 있죠? 미 쳤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겐 그냥 질병이에요. 하지만 저렇게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미쳤다는 것은 범죄예요.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는 것도 범죄죠." "그래서 네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거니?" "누군가는 그래야 한다고 믿어요. 그리고 제게 기회가 왔으니 제가 그럴 수도 있지요."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그럴 수 있겠어?" 헤어릿은 절망적인 얼굴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 리고 싶지 않았다. 팔리탐은 헤어릿의 어깨 너머로 락토 빌파를 바라 보았다. 락토 빌파는 웃는 얼굴로 헤어릿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어 릿은 락토에게 등을 돌린 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 손에는 아직까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칼자루를 단단히 감아쥔 헤어릿은 여전히 뒤로 돌지 않은 채 서서 기다렸다. 팔리탐의 가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헤어릿은 간절한 눈빛으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분명했다. 헤어릿은 팔리 탐에게 모르는 척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뒤로 돌지 않는 헤어릿 을 강제로 돌리려고 락토가 다가올 때까지, 락토가 그녀의 어깨를 붙 잡아 뒤로 돌릴 때까지, 그리고 락토의 심장을 찌를 수 있게 될 때까 지. 그러나 팔리탐은 그것이 좋은 계획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락토가 말했다. "말해봐. 헤어릿. 나를 죽일 수 있겠어?" 헤어릿은 자신의 목 뒤를 가볍게 찌르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바늘처 럼 날카로운 느낌에 헤어릿은 팔리탐을 쳐다보았다. 팔리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헤어릿의 몸이 차가워졌다. 제멋대로 튀어다니는 벌레 같은 것이 그녀의 옷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락토가 말했다. "그러다가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헤어릿은 억지로 침을 삼켰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날카로운 칼끝이 목 뒤를 찌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두 팔을 머리 옆으로 들어올려." 헤어릿은 눈을 질끈 감고는 그 말을 따랐다. 락토가 말했다. "단검이군. 집어넣어라." 그렇게 했다. 헤어릿의 두 손이 빈 것을 확인한 락토는 딸의 목에 겨누고 있던 장검을 끌어당겼다. 헤어릿은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 는 동안 팔리탐이 사라지리라 믿었던 헤어릿은 팔리탐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을 보고는 안도감을 느꼈다. 헤어릿은 천천히 뒤로 돌았다. 락토 공작은 왼손을 허리에 얹고 장검은 어깨에 걸친 자세로 헤어릿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복잡했다. 장난기와 동정심, 애정과 심 술이 뒤섞여 있었다.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락토의 얼굴에서 - 그리고 스카리의 얼굴에서 - 거의 사라질 때가 없는 자신감뿐이었 다. 헤어릿은 그 눈을 피했다. 락토가 말했다. "내 질문에 대답하거라. 죽는 것이 두렵지 않나?" "두렵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과 함께 하는 죽음이라면 환영입니다." "네 패기가 마음에 드는군. 헤어릿."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죽으면 공작님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칼을 거둔 것뿐입니다." "천 년을 살아도 너는 날 못 죽여. 헤어릿."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헤어릿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에 그럴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헤어릿은 팔리탐에 대한 원망을 느꼈다. 그가 없었다면…… 헤어릿은 갑자기 어떤 사실 을 알게 되었다. "일부러 감투를 벗었군요." 락토의 오른쪽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헤어릿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했다. "저를 도발하려고 그러셨군요. 그리고 좌절시킬 작정이셨겠지요. 그 래요. 어제도 저를 일부러 데리고 갔군요. 병사들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자신이 사람을 얼마나 간단히 죽이는지를 보여줘서 저를 좌절시키려고." 헤어릿은 자신감을 느꼈다. 아직 불안과 두려움이 말끔히 사라진 것 은 아니지만 이제 헤어릿은 락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눈에는 새로운 것이 떠올라 있었다. 헤어릿에게 더욱 거친 자신감 을 불어넣어주는 것이었다. "공작님은 제 손에 죽게 될까봐 무서워하고 있군요." 그 순간 락토의 오른발이 헤어릿의 배를 걷어찼다. 헤어릿은 숨이 끊어지는 통증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주저앉았다. 땅에 쓰러지려는 그녀의 몸을 누군가가 부축했다. 헤어릿은 그것이 락토의 손이라 생각하고 두려움에 빠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헤어릿 은 뒤로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헤어릿은 자신이 팔리탐에게 안겨있다는 것을 간신히 깨달았다. 팔리탐은 그녀를 단단 히 붙잡은 채 말했다. "공작님. 하지 마십시오." "걱정마. 팔리탐. 나도 그 예쁜 얼굴과 몸을 헐값에 팔고 싶은 생각 은 없어. 상처를 내지는 않을 거야. 놔." "각하의 혈육입니다." 팔리탐의 품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헤어릿은 자신이 정말 자신감을 느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랫배의 통증은 이제 날카로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바뀌었고 그 육중한 무게는 당장이라도 헤어릿을 납작 하게 만들 것 같았다. 헤어릿은 두려움에 떨며 팔리탐의 팔에 매달렸 다. 락토는 헤어릿이 자신의 혈육임을 지적하는 팔리탐의 말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팔리탐의 품을 파고드는 헤어릿의 모습 은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락토를 진정시켰다. 락토는 날이 선 눈길로 헤어릿을 노려보았다. 락토는 장검을 들어올렸다. 팔리탐의 몸이 꿈틀한 순간 그 장검은 칼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색은 어떻게 되고 있나?" 팔리탐의 몸에 밀착해 있던 헤어릿은 그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느꼈 다. 팔리탐이 말했다.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지난 밤에 겪은 바로는 네 훈련이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 같군." "인간도 군인으로 만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공작님. 단독 활 동에 익숙한 독불장군형 인간이라면 아예 군인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 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레콘입니다. 좀 더 시간을 주셔 야 합니다." "엉겅퀴 여단에서 레콘을 병사로 만드는데 그렇게 긴 시간을 쓴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는데." "현재의 엉겅퀴 여단은 이미 군인이 되어 있는 많은 레콘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기록을 조사해봤습니다. 엉겅퀴 여단도 초기에 는 도저히 군대라 부를 수 없었던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 시기 는 꽤 길었지요. 만일 더 빨리 결과를 얻고 싶으시다면 현재의 엉겅 퀴 여단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제게도 주시면 됩니다." "그게 뭔데?" "제국군에서 예편한 레콘들을 데려와 저를 돕게 하십시오." 팔리탐은 '물론 불가능하겠지만'이라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락 토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제국군에서 예편한 레 콘들은 숙원에 매달려 있거나 신부탐색 중이다. 그리고 어차피 오랜 시간 동안 군사 교육을 받은 그들의 충성심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 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락토가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레 콘 부대였다.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지 말해." "공작님. 딱부러지게 언제까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들어야겠는데." 팔리탐은 품 속의 헤어릿을 보았다. 빨리 원하는 것을 줘서 공작을 떠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팔리탐은 말했다. "전투력에 관한 부분은 어차피 레콘이니 간략화해도 되는 것이고, 명령체계 확립이라면 한 달 내에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힌치오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레콘들은 이제 어느 정도 단체 활동에 대한 감각을 체득하고 있습니다." 힌치오가 들려준 파벌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린 락토는 팔리탐의 말 을 이해했다. 그리고 팔리탐이 자신을 빨리 보내고 싶어하는 것도 이 해했다. 락토는 오랜 세월 빌파가와 인연을 맺어온 가면의 무인을 바라보았 다. '네가 나 대신 그 애의 아버지가 되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거 냐?' 락토의 눈빛에 대답하는 팔리탐의 눈빛은 없었다. 그런 것은 기 대할 수 없다. 락토는 말했다. "한 달이라고 했나?" "예." "알겠다." 락토는 헤어릿을 외면하며 늘어서 있는 창고 중 하나로 들어갔다. 폭 20미터, 길이 50미터, 높이 10미터의 목조 창고. 그런 창고가 모 두 네 동이다. 락토가 들어선 창고는 할덴 자작과 팔리탐, 그리고 경 비병 등 이곳의 인간 거주자들을 위한 것이고 다른 세 개의 창고는 일만 명의 레콘들을 위한 보급품이 가득 들어 있다. 보급품의 대부분 을 차지하는 것은 식량이다. 대부분의 레콘은 노련한 방랑자라 할 수 있고 따라서 필요한 물건들을 휴대하기 좋게 꾸리는 일에 능숙하다. 또한 야외에서 생활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레콘들을 위한 건물은 필요없었기에 할덴 자작이 건설해야 했던 건축물은 네 개의 창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네 개의 창고와 그 가운데 서있는 감시탑이 스카리 요새 의 모든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발케네 공작가의 막대한 재산이 아 낌없이 투입된 거대 요새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스카리 요새의 건설비 내역서를 보면 황당해할 것이다. 락토의 등뒤로 문이 닫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팔리탐 은 복잡한 심회를 느꼈다. 문득 팔리탐은 끌어안고 있던 처녀를 떠올 렸다. 팔리탐은 헤어릿을 내려다보았다. 팔리탐은 공포에 질려 있는 여인을 볼 거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빗나갔다. 헤어릿은 기이하게 뜨거운 눈으로 락토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고 있 었다. =============================================================== 다음편 예고는 죽지 않는다. 다만 되돌아올 뿐이다 : 철이와 흡혈안드로이드, 그리고 카우보이는 멸종된 지하철이 있을지 도 모르는 잃어버린 중심을 향해 달린다. 한참 달리던 도중 카우보이 가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늙은이들이 말을 탄 채 그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노환의 기마대'임을 알아본 흡혈안드로이드는 길을 물어보기 위해 그들을 멈춰세웠다. 늙은이들은 '우리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외신을 베끼겠군'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길을 가르쳐준 다. 그러나 그 길은 잘못된 길이었다. 엉뚱한 곳을 헤매던 그들은 곰인형을 안고 있는 조그마한 소년을 만 난다. 자신을 데이빗이라고 소개한 소년은 인간이 되기 위해 푸른 요 정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소년과 동행하게 된 세 사람. 하지만 조나 단 다이빙스톤은 렌즈를 통해 곰인형을 안은 데이빗은 지구상에 남은 인간을 제거하기 위한 세번째 변종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자신과 동행한 데이빗이 과연 어느 데이빗인지 알 수 없었던 철이는 '진실은 저너머에'라고 중얼거리며 바지 지퍼를 내렸다. 전설의 무도로 데이 빗을 날려보낸 세 사람은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한다. 천신만고 끝에 잃어버린 중심에 도달한 세 사람. 그러나 잃어버린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핵병기를 탑재한 이족형 보행전차. 세 사람 은 보행전차의 해제 코드를 찾아내기 위해 박스를 뒤집어쓰고 잠입한 다. 가까스로 잠입한 중앙통제실에서 그들은 9000 데시빌로 고함을 지를 수 있다는 갈! 9000을 만나게 된다. 갈! 9000은 이족형 보행전 차를 멈추기 위해서는 세 사람이 정해진 파트를 정확하게 불러 열번 의 시도 안에 정해진 노래를 완성시켜야 하며, 실패할 경우 머리 위 에서 쟁반이 떨어진다고 가르쳐주었다. 어쩐지 익숙한 룰임을 깨달은 세 사람은 자신있게 노래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던 세 사람은 그 노래가 아프리카의 최고봉을 거니는 표범 에 대한 것임을 깨닫고는 사색이 되었다. 과연 그들은 그 위기를 어 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철벽을 뚫는 다음편, '강 철의 연금공단' 많이 기대해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7-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2-18 조회수 : 2056 피를 마시는 새 7. 삶을 이용하는 태도 - 4 "머리 숙여요!" 아실이 비명을 질렀다. 황급히 머리를 숙인 지멘의 위쪽으로 가문비 나무가 황급하게 지나쳤다. 곧고 길게 자라지만 목질이 튼튼한 편은 아니라서 건축용으로는 별로 호평받지 않는 나무지만 레콘의 힘은 그 나무를 파괴병기로 바꿔놓았다. 지멘을 놓친 가문비나무는 앞쪽의 숲 에 부딪혀 나무 몇 그루를 쓰러뜨렸다. 황급히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몇 번 비틀거리던 지멘은 앞으로 발을 내뻗었다. 그 발끝에 있던 바위가 놀란 새처럼 떠올랐다. 지멘은 땅 을 박차고 그 바위를 향해 도약했다. 공중에서 바위를 움켜쥔 지멘은 허리를 뒤틀었다. 지멘은 그것을 뒤편으로 집어던졌다. "먹어라!" 바위는 나뭇가지 몇 개를 박살낸 후에도 속도가 조금도 줄지 않은 채 날아갔다. 지멘을 따라 달리던 레콘은 주먹을 끌어당겼다. "안 좋아하는 거야!" 달리는 힘에 주먹을 보태어 레콘은 바위를 후려쳤다. 바위가 세 쪽 이 나며 주위의 숲 일부분이 돌벼락을 맞게 되었다. 나뭇잎이 구름처 럼 튀어오르고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았다. 인간이라면 주 먹과 팔과 어깨가 한꺼번에 부서질 무모한 짓이었고 레콘도 편해보이 지는 않았다. 레콘은 바위를 후려친 주먹을 흔들며 투덜거렸다. "힘 더럽게 좋네!" 속도가 조금 줄었지만 레콘은 땅에 떨어지는 지멘을 포착할 만큼은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위로 뜨다니, 멍청한 짓이다. 레콘은 신이 나 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두번째 걸음은 내딛지 못했다. 지멘 이 어느새 그의 머리 앞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왜 나는 거냐!" 고함을 지르면서도 레콘은 저 멀리서 부러지는 가문비나무 첨단부를 보며 상황을 이해했다. 지멘은 땅에 내려서는 대신 나무를 박차고 그 에게 날아든 것이다. 뒤로 당긴 지멘의 주먹을 본 레콘은 두 팔로 얼 굴과 상체를 틀어막았다. 실수였다. 지멘은 주먹이 아닌 손바닥으로 땅을 긁듯이 휘둘렀다. 그 손바닥 끝에 걸린 것은 레콘의 정강이였 다. 앞으로 공중제비를 넘은 레콘은 산사태 같은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지멘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땅에 쓰러지자마자 일어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지멘은 거꾸로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격분하며 몸을 튕긴 레콘은 기다리고 있던 지멘의 손아귀에 발목을 내주게 되었다. 레콘 의 눈에 불신감이 떠올랐다. "제기랄!" 지멘은 두 손으로 레콘의 오른쪽 발목을 쥔 다음 빙글 돌았다. 두 바퀴를 돈 지멘은 맹렬한 기세로 레콘을 집어던졌다. 날아간 레콘은 소음을 듣고 그쪽으로 달려오고 있던 세 명의 레콘들에게 명중했다. 네 명의 레콘들이 한꺼번에 사방으로 튀며 숲을 상당히 훼손시켰다. 뿌리가 얕은 가문비나무들은 그런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그들 위로 나무들이 우수수 넘어졌다. 작은 언덕을 이룰 만큼 쌓인 나무 그루터기 사이에서 레콘들이 빠져 나왔을 땐 이미 지멘은 사라진 후였다. 레콘들은 흥분하여 투덜거리 며 사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약간 절뚝거리고 비틀거리긴 했지만 잠시 뿐, 그들은 곧 질풍 같은 속도로 능선을 치달렸다. 그로부터 반 시간 후, 아실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구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 은 높은 산의 콧등 부분이었다. 가까운 산들보다는 훨씬 높은 산이었 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는 구름으로 이마를 덮은 고봉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이 땅의 산들은 고독을 사랑하는 늙은 은자가 아니다. 한데 모여 산의 언어로 활기차게 토론하는 젊은 산들이다. 그런 들뜨는 인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여기저기서 벼룩처 럼 뛰어다니는 점들이었다. 거리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만 그 벼룩들 은 구릉과 산봉우리들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레콘들이었다. 눈이 하나 라 거리 감각은 시원찮지만 아실은 괜찮은 계산 감각을 가지고 있었 고 그녀가 가늠해본 레콘들의 실제 움직임은 현기증 나는 수준이었 다. 비슷한 인상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별비나 마루 나래의 직계손 쯤 되는 대호 수천 마리를 모아 수백 평방킬로미터의 산악 지대에 풀어놓는 것 뿐이다. 아마 지금 아실이 보고 있는 광경 의 근사치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 아실이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한 모습은 지상에 없다.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나는 레콘의 모습이었다. 희열이 아실의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 모습은 레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기에 레콘다웠다. 아실은 타이모가 꿈꾸었고 이제는 자신의 꿈이 된 광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 했다. 아실은 그들이 바로 자신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 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틀림없이 가짜 레콘들이겠지." 지멘이 고개를 돌려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상 바로 아랫부분 의 갈라진 절벽 틈에 앉아있었다. 태양은 산 반대편을 비추고 있었고 지멘의 검은 깃털은 절벽 사이의 어둠 속에 잘 녹아있었다. 그리고 아실은 지멘의 깃털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 었다. 지멘이 아실의 말을 놓칠 리가 없다. 자신의 중얼거림을 조금 늦게 깨달은 아실은 설명하듯 말했다. "그 나루터에서 우리를 막았던 건 황제쪽 사람들이 발케네에 들어올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거였어요. 저걸 감추기 위해. 암살공은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걸 만들어온 걸까요? 하긴 그의 땅은 다른 곳보다 유 리하지요. 최후의 대장간으로 가는 레콘은 언젠가 한 번은 이곳을 지 나쳐야 하니까. 사실 대단한 발상도 아니예요. 이미 엉겅퀴 여단이라 는 것이 있으니까. 어쩌면 타이모의 철학에서도 착상을 좀 얻었는지 도 모르고. 그래도 놀랐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네요." 지멘은 제이어 솔한의 말을 떠올렸다. 살인기사는 레콘들이 집단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천재적이라고 평가했다. 지금 그런 광경을 본 지멘은 그것이 왜 천재적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 멘은 제국을 망가뜨리기로 결심한 살인기사가 지금의 광경을 보면 좋 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실이 말했다. "살인기사가 보면 당장 암살공에게 자신이 아는 제국의 모든 약점을 털어놓고 싶겠군요. 그래놓고는 어쩌면 이번에는 자기가 성공할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할 테지요." 푸념하듯 말하던 아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잠깐. 살인기사는 누군가의 특사로 최후의 대장간에 왔다고 했지요. 그런데 최후의 대장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레콘의 무 기……?" 아실은 입을 틀어막았다. 아실의 긴장감은 그대로 지멘에게도 전달 되었다. 아실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멘은 아실의 말을 놓치 지 않을 것이다. 지멘은 아실의 생각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지멘은 아실의 목숨을…… "암살공은 최후의 대장간을 살 생각이야!" 아실에 대한 지멘의 사고가 헝클어졌다. 지멘은 아실이 말한 내용에 놀라 깃털을 부풀렸다. 하마터면 앞으로 나동그라질 뻔한 아실은 지 멘이 재빨리 받쳐주었기에 그런 곤경을 모면했다. 지멘의 손가락을 붙잡으며 아실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랬어! 지멘. 제 말에 화내지 말아요." 지멘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성급한 생각이었다. "최후의 대장간은 당신이나 타이모가 알던 장소가 아니에요. 이제 그곳은 보통의 대장간과 다름없어요. 돈을 받고 물건을 만들어주죠. 그곳에서 만드는 물건이 레콘용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에요." 틀린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기에 지멘은 화가 나려는 것을 꾹 참았 다. 아실의 말이 계속되었다. "최후의 대장간은 발케네 북부에 있어요. 발케네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그곳으로 갈 수 없죠. 얼마나 안전해요? 아, 이런. 건너뛰었 네. 안전하다는 것은 조병창으로서 그렇다는 거예요. 저 레콘들을 보 세요. 저건 암살공의 병사에요. 그리고 병사들을 부리려면 조병창이 필요하지요. 무기를 공급해야 한다고요. 암살공은, 예. 최후의 대장 간을 자기 조병창으로 쓸 생각이에요. 그것을 논의하기 위해 살인기 사를 특사로 파견한 거였어요! 스카리 요새라는 것은 어차피 존재하 지도 않을 테고, 그 돈으로 최후의 대장간을 사겠지요!" 지멘은 그 추리에 놀랐지만 한 가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 콘이 병사일 경우 조병창은 필요없다. 유명한 엉겅퀴 여단만 해도 병 사들의 무기를 공급하는 곳은커녕 그 무기를 손질하는 부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레콘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최후의 대장간에서 제 작된 그 무기들은 소유자가 죽을 때까지 써도 무뎌지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지멘은 그 사실을 혼잣말로 알려주려 했다. 그러나 아실이 먼저 말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무기들을 공급하겠지요. 왜냐 하면, 어, 만약 저 레콘들이 뭄토가 가지고 있던 그런 접칼이나 당신이 부순 그 단검들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쓸모가 많겠지만 전투엔 부적합해요. 병기가 아니라 도구니까." 지멘은 이해했다. 아실은 두 손으로 자기 뺨을 일그러뜨리며 말했 다. "그리고 군대를 만들려면 여러 가지 무기가 필요해요. 장검, 단검, 투창…… 오뢰사수의 활? 어쩌면 최후의 대장간에서 방패나 갑옷 같 은 것을 만들지도 모르겠군요. 세상에.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네." 지멘 또한 그것이 무시무시하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받 은 하나의 무기가 아니라 완전무장을 한 레콘 병사들이라니. 그런 것 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다.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를 가늠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지멘은 뻣뻣하게 일어선 벼슬을 쓸 어내리며 말했다. "암살공이 서약지지파인 것일까." "예? 아,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요. 어, 이것봐. 흥분해서 손끝이 다 떨려요." 아실은 떨리는 두 손을 깍지껴 턱으로 눌렀다. 눈은 아래로 향하고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레콘들을 보지 않으며 아실은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살인기사는 우리에게 하텐그라쥬를 주목하라고 한 것일 까? 살인기사가 암살공의 특사라면 살인기사는 이것을 알고 있었겠 지. 그렇다면 우리가 하텐그라쥬로 가는 것이 그 싸움에 도움이 된다 는 걸까? 하지만 어떻게? 어떤 일을 하라는 말도 없었어. 단지 우리 가 하텐그라쥬로 가는 것만으로 무슨 도움이 될까? 제이어, 망할 놈. 좀 똑바로 설명해줄 것이지!" 아실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멘이 그녀를 들어올려 배 낭에 집어넣었을 때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멘이 산등성이를 따 라 올라오는 레콘들을 피해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동안에도 아실은 계 속 살인기사의 전언에 대해 고민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부럽지 않은 속도로 험준한 산지를 치달릴 수 있 는 레콘 수천 명에게 쫓기는 것치곤 지멘의 도피행은 꽤 긴 시간 동 안 지속되었다. 물론 지멘은 몹시 지쳤지만 막다른 길에 봉착하지는 않았다. 지멘은 눈에 보이는 모든 레콘을 피하면 그만이지만 힌치오 의 레콘들은 앞의 레콘이 자기 동료인지 지멘인지 먼저 구분해야 했 다. 힌치오는 추적 이틀째가 되는 시점에도 아직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 했다는 사실에 초조해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는 피아 식별이 더욱 어 렵다. 태양이 기우는 것을 본 힌치오는 더욱 초조해졌고 그 초조함은 빠르게 분노로 변모해갔다. 힌치오는 검은 레콘을 닥치는대로 거꾸러 뜨려놓고 볼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렸다. 얼마 후 말을 탄 팔리탐 지 소어가 물어물어 그를 찾아왔을 때 힌치오는 그런 심정을 고백하고 말았다. 하지만 팔리탐은 그의 괴로움을 이해해주는 대신 어이 없는 얼굴로 '그렇다면 검은 레콘들을 수색대에 포함시킨 거냐'고 물었다. 힌치오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래에 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일몰이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검은 레콘들은 모두 스카리 요새로 돌아가라는 내용의 메아리들이 산봉우리 사이로 퍼져나갔다. 계명성을 통해 수십 킬로미터 저편까지 전달되는 명령을 들으며 팔리 탐은 명령 전달의 속도 만큼은 뱀단지가 부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팔리탐이 속도에만 높은 점수를 준 것은 그 수용성을 의심했기 때문 이다. 그 의심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힌 치오와 팔리탐은 추적열을 불태우고 있는 검은 레콘을 발견했다. 목 을 비틀어버릴 기세로 다가서던 힌치오는 그가 지멘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흉측한 욕설을 퍼부었다. 뒤틀린 표정으로 물러가는 검은 레콘을 보며 팔리탐은 그런 레콘이 한 명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명령이 무시되고 있었다. 힌치오의 레콘들에게는 흥분한 상태에서도 명령을 정확히 수행하는 세련된 자 세를 아직 기대할 수 없다. 검은 레콘이 물러간 후에도 화를 가라앉 히지 못하고 있는 힌치오에게 팔리탐은 같은 명령을 다시 내리라고 했다. 이번에는 내용을 조금 바꿔서. '아직도 추적에 열중하고 있는 검은 레콘들은 들어라. 다른 레콘들이 실수로 너희들을 때려죽일지도 모른다! 빨리 돌아가!'에 해당하는 계명성들이 다시 주위의 산야를 뒤덮었다. 태양의 위치를 본 힌치오는 우울하게 말했다. "아래에 그것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팔리탐은 힌치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초조해하고 있다 는 것은 쉽게 이해했다. "괜찮을 거요. 힌치오. 지멘은 어제부터 제대로 먹지 못했을 테고 최대 속도로 움직였다간 죽이게 될 인간 소녀도 데리고 있소. 그런 주제에 우리 포위를 빠져나간다면 그 친구는 몸을 검게 물들이고 돌 아온 티나한일 거요." 힌치오는 부리를 탁 부딪혔다. "글쎄. 지멘이야 지쳤을지도 모르지만 아실이 지멘의 짐이 될 것 같 지는 않은데. 그 지독한 애는 기절하는 한이 있어도 지멘의 짐이 되 지는 않을 거야." 팔리탐은 힌치오에게 가면을 향했다. 힌치오가 말했다. "쥐딤에서 아실의 별명은 나늬였어." "나늬?" "그 땐 눈 하나가 없어지기 전이었고 그럭저럭 예쁘장했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은 아니야. 도대체 말을 안 들을 수 가 없었거든. 인간은 물론이고 상대가 자기 열 배는 되어 보이는 레 콘에게도 타이모가 이랬어요, 타이모가 그러지 말랬어요. 하면서 바 락바락 대들었지. 손가락으로 좀 세게 튕겨도 죽을 것 같은 꼬맹이에 게 어떻게 할 수 있나. 그냥 이쁘게 구는구나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 었지. 예쁘다, 예쁘다 하다 보니 별명이 나늬가 되었고." 거목 같은 레콘들 사이를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조그마한 소녀를 상 상해본 팔리탐은 힌치오가 느꼈을 정서를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힌 치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실과 지멘이 왜 그렇게 잔인해졌는지 모르겠군. 죽은 병사들 봤 어? 레콘이라면 모를까, 인간을 그렇게 죽일 필요는 없어. 그냥 겁만 줘서 쫓아보내도 그만이야. 제국병이라면 어떻게 이해해볼 수도 있지 만 그렇지도 않잖아. 6년 동안 쫓겨다니다 보니 미쳐버렸나봐." 팔리탐은 그것이 락토의 소행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에 대해 고 려해보았다. 락토의 계획대로라면 힌치오는 오랫동안 레콘들을 지휘 하며 공작을 모셔야 한다. 락토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것이 힌치오에 겐 좋을 것이다. 하지만 팔리탐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락토도 아마 동의할 것이다. 힌치오가 발을 뺄 수 없는 시점까지 기 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팔리탐은 말의 목을 쓸어주며 말했다. "지멘을 붙잡으면 그가 미쳤는지 미치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요. 서두릅시다." 힌치오는 무거운 표정으로 팔리탐을 바라보다가 그가 타고 있는 말 을 가리켰다. 그 다음 힌치오는 귀를 덮는 시늉을 해보였다. 힌치오 의 손짓을 이해한 팔리탐은 주위를 살펴 말이 놀라더라도 위험하지 않은 지형으로 움직였다. 팔리탐이 말고삐를 나무에 묶는 것을 본 힌 치오는 두어 걸음 훌쩍 뛰었다. 절벽 끄트머리에 선 힌치오는 가슴을 부풀렸다. "내-목-소-리-기-억-하-지-? 나-힌-치-오-다-이-쑤-시-개-쓰-던-레- 콘-!" 강력한 계명성이 암벽을 할퀴는 벼락처럼 산봉우리들을 스쳐지나갔 다. 지멘은 외침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뒤편에서 아실이 벼슬 을 끌어당겼다. "대답하지 말아요. 지멘. 우리 위치를 알아내려고 저러는 걸지도 몰 라요." 애초에 대답할 생각이 없었던 지멘은 아실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 는 것에 주의했다. 아실은 그날 하루 종일 자기 발로는 한 걸음도 움 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수십 미터씩 도약하거나 추락해야 했 고 빙글빙글 돌고 뒤집히고 옆으로 날아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움 직임은 그녀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미리 대비할 수 없어서 더 고된 것이었다. 아실은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무슨 소리 하는지 들어봐요." 힌치오의 계명성에는 특기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그렇게 도망치다 간 나늬를 죽일 테니 순순히 투항하라는 내용이었다. 내용보다는 그 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 때문에 인상적인 외침이었다. 아실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은 과거의 별명에 실소했다. 그런데 웃음과 함께 눈물도 흘러나왔다. 아실은 당황하여 눈가를 훔 쳤다. "기억나네요. 기둥 같은 양손검을 쓰던 아저씨였지요. 절망도에 들 어가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에요. 암살공이 거둬줬나 봐요." 아실의 목소리에 콧소리가 섞인 것을 느낀 지멘은 심란함을 느꼈다. 힌치오의 지적은 옳았다. 레콘들로부터의 도피행이 더 길어지면 아실 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지멘은 주위를 살피며 되도록 아실 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부드럽게 걸었다. "그러고보니 전부 절망도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겠군요. 쥐딤에서 도망쳤던 다른 사람들은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예요. 우리 신 세가 이러니 만날 수는 없지만." 아실은 지멘의 목뒤에 얼굴을 파묻었다. "물론 저 녀석들은 가짜 레콘들일 거예요. 하지만 주위에 많은 레콘 들이 있으니 꼭 그 때로 돌아온 것 같아요." 지멘은 그 때를 생각했다. 쥐딤. 여름이었다. 수많은 레콘들. 어디 를 보아도 레콘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쟁룡해에 대해 호의를 가 진 레콘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모두 좋아했 다. 들끓는 분위기. 많은 술. 물론 쥐딤 시민들에겐 악몽 같은 나날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다. 그저 너무도 많은 레콘들이, 내키면 지형을 변경시킬 수 있는 힘이 그들의 교외에 있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뿐이다. 쥐딤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타이모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타이모가 끝까지 관철한 것도 그것뿐이다. 타이모는 학술토론회가 대규모 집회로 바뀌 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대규모 집회가 분리주의 무장투쟁으로 변모되는 것도 막지 못했다. 괴상한 여름이었다. 쟁룡해의 바람은 신 비했다. 만질 수 있는 모든 것과 만질 수 없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마법에 걸린 것 같은 짧고 감미로운 시기였다. 그리고 마법의 마지막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황제가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분리주의자들의 난. 축약도 가능하다. 반역. 그들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지위에 도취되어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황제를 희롱하는 온갖 농담이 만들어졌다. 재미없는 것도 많았지만 어쨌든 수는 많았다. 그들은 가소로워했다. 건드릴 필 요가 없어 무시해주었더니 레콘도 마음대로 겁줄 수 있다고 믿게 된 황제가, 그들의 눈에는 불쌍하게 보였다. 괜한 피를 뿌릴 필요가 없 다고 생각한 그들은 타이모가 데리고 다니는 어린 소녀가 내놓은 계 책을 받아들였다. 창피를 줘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스카리 빌파가 만취했을 때까지도 그들은 반역자라기보다는 장난을 치는 악동에 가 까웠다. 그리고 엘시 에더리가 나타났다. 여름도 끝났고 그들의 기이한 시간도 끝났다. 그 여름은 아예 존재 하지도 않은 것 같다. 아실의 얼굴 위에 그 여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지 않았다면 지멘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웠을지도 모 른다. 갑자기 지멘의 오른쪽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지멘은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오른팔 상완에 단검이 꽂혀 있었다. 지멘은 시선을 옮겼다. 칼날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깊숙하게 들어 온 단검을 더 비틀어 밀어넣으려 애쓰고 있는 손이 보였다. 지멘은 그 손 뒤편을 보았다. 태양이 녹아내린 것 같은 석양 속에서 부풀어 오른 레콘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멘의 손에서 망치가 떨어졌다. 그 동작에 놀란 레콘이 단검을 확 떠밀었다. 지멘은 왼쪽으로 휘청 하다가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러면 아실이 크게 다친다. 지멘은 왼 손으로 가까운 나무를 움켜쥐었다. 겨우 똑바로 서게 된 지멘은 레콘 을 바라보았다. "뭄토." 지멘의 이상한 목소리를 들은 아실은 배낭에서 황급히 빠져나왔다. 그녀가 지멘의 어깨 너머로 앞을 보았을 때 아실과 뭄토의 눈길이 맞 부딪혔다. 당황하고 있던 뭄토의 눈에 뜨거운 희열 같은 것이 흘렀 다. 아실은 뭄토를 보곤 얼굴을 찡그렸다. 그 때 그녀의 눈이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보았다. 아실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지멘의 어깨 위로 몸을 끌어올리려 했 다. 아실과 지멘 둘 다 고통을 느꼈다. 아실이 붙잡은 것은 지멘의 오른쪽 어깨였다. 지멘은 부리를 꽉 닫은 채 통증을 무시했다. 그리 고 아실은 종일 시달린 몸이 토해내는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배 낭 아래로 떨어질 뻔한 위기를 무릅쓰며 지멘의 오른팔을 확인한 아 실은 그곳에 있는 단검 칼자루를 보곤 눈을 확 불태웠다. "오른팔을 못써." 뭄토는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성 공했다. 뭄토는 자신감에 찬 얼굴로 지멘과 아실을 바라보았다. "많이 바쁜 것 같군. 지멘. 좀 쉬어야지." 팔뚝에서 흘러내린 피가 지멘의 깃털을 적셨다. 검은 깃털과 황혼의 붉은 물결 때문에 그 피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에 서 훅 풍겨오는 피냄새는 아실을 아찔하게 했다. 축적된 피로와 자극 적인 냄새에 아실의 현실감각이 위축되었다. 뭄토가 말했다. "배낭을 벗어. 난 그 애만 데려가면 돼. 그러지 않으면 지멘이 여기 있다고 고함치겠어. 당신 저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더군." 지멘은 물끄러미 뭄토를 바라보다가 배낭끈을 붙잡았다. 아실은 무 의식중에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지만 지멘은 그녀를 억지로 떼내어 배 낭째 내려놓았다. 왼손만 사용하는 어색한 동작으로 아실과 배낭을 내려놓은 지멘은 허리를 폈다. 똑바로 선 지멘을 본 뭄토는 조금 긴 장했다. 뭄토는 자신을 독려했다. 무기도 없고 팔도 하나를 못쓰는 레콘이 두려울 것은 없다. 뭄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먼곳에서 계속 된 추적에 성이 난 레콘의 계명성이 들려왔다. "나-와-! 나-오-라-고-! 넌-나-가-와-인-간-만-잡-냐-!" 지멘은 뭄토에게 달려들었다. 왼손을 앞으로 펼친 채 지멘은 뭄토에게 돌진했다. 어떤 고려도 없 는 순수한 돌진이었다. 뭄토는 벼슬을 곤두세우며 주먹을 빠르게 휘 둘렀다. 잠깐 사이에 지멘의 상체에 세 번의 타격이 꽂혔다. 그런데 지멘의 속도가 줄지 않았다. 네 번째 주먹을 뻗으려던 뭄토도 자신의 예상보다 지멘이 너무 가깝 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멘은 철판이라도 뚫을 듯한 주먹을 맞으 면서 그냥 달려들고 있었다. 뭄토는 당황했다. 그는 지멘을 떠밀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뭄토의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지멘은 뭄토의 머리를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뭄토는 쇳소리를 내며 지멘의 왼팔을 움켜쥐었다. 억지로 그 손을 뜯어내려 했지만 지멘의 손은 달라붙은 것마냥 떨어지지 않았다. 뭄 토는 버둥거렸다. 그는 지멘의 다리를 걷어찼다. 하지만 지멘은 조금 전 주먹을 무시한 것처럼 뭄토의 발길질도 무시했다. 뭄토는 지멘의 왼팔을 비틀었다. 무익한 시도였다. 지멘의 완력이 대단할 거라 짐작 은 하고 있었지만 뭄토가 느낀 지멘의 완력과 악력은 깃털이 빠질 수 준이었다. 그 때 뭄토는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다. "레-콘-은-잡-을-줄-모-르-냐-이-자-식-아-!" 지멘은 뭄토의 머리를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 바위에서 물을 짜내는 짓과 비슷하다. 하지만 지멘은 정말 그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공포 때문에 뭄토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는 머리가 붙잡힌 채 위로 뛰어올랐다. 지멘의 몸이 따라 떠올랐다. 하지만 지 멘은 왼손을 풀지 않았다. 허공에서도 지멘의 손가락은 여전히 뭄토 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뭄토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지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래로 떨어지며 지멘은 뭄토의 몸을 휘둘렀다. 뭄토의 몸이 채찍처럼 바닥을 때렸다. 말도 안되는 장면에 아실은 혀를 깨물 뻔했다. 뭄토의 목뼈가 부러 지지 않은 것은 지멘의 왼팔에 결사적으로 매달렸기 때문인 것 같다. 마찰 때문에 뭄토의 피부가 찢어졌다. 뭄토의 머리를 찌르고 있는 지 멘의 손가락 아래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지멘은 왼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뭄토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그 손을 따라 올라갔다. 지멘의 손가락은 찢어진 뭄토의 피부 안을 파고들었 다. 뭄토는 피에 젖은 지멘의 손가락이 자신의 두개골에 닿았다고 느 꼈다. 뼈에는 감각이 없으니 그런 느낌이 사실일 리가 없다. 하지만 뭄토는 그렇게 느꼈다.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 속에서 뭄토는 헐떡였 다. "놔…… 놔." "저 애는 줄 수 없어." 아실은 위화감을 느꼈다. 지멘의 말투는 경고나 협박이 아니었다. 지멘의 어조는 내게 소중한 것이라서 내줄 수가 없다고 말하는 어조 였다. 지멘도 자신의 말투가 좀 어색하다고 느낀 듯 다시 말했다. "절대로 줄 수 없다."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말이다. 지멘은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뭄토의 의견을 구했다. "알겠어?" "제발…… 놔줘요. 키컥! 놔줘." "알겠어?" "알았어요. 확실히…… 알았어요!" 지멘은 왼팔을 끌어당겼다. 뭄토는 더럭 겁을 집어먹었다. 지멘은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멘은 계속해서 뭄토의 머리를 짓누를 것이다. 뭄토의 머리뼈를 부수고 뇌를 헤집고 마침내 그것들이 뭉개 져 지멘의 주먹 안에서 죽처럼 변할 때까지 지멘은 손가락에서 힘을 빼지 않을 것이다. 지멘은 뭄토를 앞으로 던졌다. 뭄토는 피투성이 얼굴로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벼슬과 깃털에 엉겨 붙은 핏덩이가 끔찍하다. 지멘은 손가락이 저린 듯 주먹을 몇 번 쥐 었다 폈다 했다. 그리고 지멘은 오른팔에 꽂힌 단검을 움켜쥐었다. 지멘은 오른쪽 어깨를 뒤로 당기면서 왼팔을 잡아당겼다. 지멘의 팔뚝에서 핏줄기가 뿜어져나와 바닥을 더럽혔다. 짙은 피냄 새가 목향과 초향, 토향 같은 것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아실은 질식 할 것 같았다. 지멘은 단검을 한 번 휘둘러 피를 뿌려낸 다음 뭄토에 게 내던졌다. 뭄토는 가슴에 떨어진 단검을 내버려둔 채 헐떡거리며 지멘을 바라보았다. "가." 뭄토는 불신에 찬 눈으로 지멘을 바라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지멘 은 짜증 섞인 눈으로 뭄토를 바라보다가 왼손을 불쑥 내밀었다. 매의 발톱처럼 구부린 지멘의 손가락들을 본 뭄토는 기겁하며 일어 섰다. 단검을 움켜쥔 뭄토는 벼슬이 찢어져라 도망쳤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꽤 오랫동안 들려왔다. 지멘은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지멘은 천천 히 손가락부터 움직여보았다.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지멘은 통증을 참으며 팔 전체를 움직였다. 혈관이나 신경이 크게 상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른팔이 회복될 수 있다고 판단한 지멘은 배 낭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실은 이미 배낭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헝겊과 주머니를 본 지멘은 천천히 바닥에 앉았다. 아실은 지멘의 오른팔 옆 으로 돌아가 상처를 살폈다. 흩어진 깃털들을 대충 뽑고 정리한 아실 은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어 상처에 치덕치덕 발랐다. 기둥 같은 지멘 의 팔에 헝겊을 감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멘의 왼손이 고전하는 그 녀를 도와주었다. 치료를 끝낸 아실은 손수건을 꺼내어 피에 젖은 손을 닦았다. 하지 만 마음에 묻은 불안은 닦아낼 방법이 없었다. 아실은 흐려진 눈으로 지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이울어 그녀의 시야는 더욱 가무레했다. 지멘은 아실의 표정에 담긴 근심을 읽었다. 주위에 적대적인 레콘들 이 가득한 상황에서 한쪽 팔이 부자유스럽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지 멘의 깃털 색깔을 닮은 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위안거리 였다. 지멘은 해가 지기를 기다려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무릎을 아실의 뒤쪽으로 폈다. 아실은 그 다리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떨군 아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조금 전 일어났 던 일이 그녀를 동요시키고 있었다. 뭄토의 집념 때문에 놀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실은 그렇게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아실의 마음에 파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지멘의 대답이었다. 저 애는 줄 수 없어. 그것은 동료를 뺏길 수 없다는 의미의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의 얇은 껍질 안쪽에는 쉽게 비치는 의미가 있다. 그들이 통제할 수 없기에 무시하고 있었던 것. 그들이 서로의 유일한 친구이고 가족이라는 것 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죽음을 약속한 친구나 가족은 없다. 아실은 지멘의 손에 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실은 친구의 손에 죽 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멘으로 하여금 가족을 죽이게 하고 싶지 도 않았다. "너-는-여-자-만-죽-이-는-거-냐-!" 하늘에 포돗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지멘과 아실은 일어섰다. 숲은 밤의 차가운 호흡을 하고 있었다. 지멘은 부자유스러운 오른팔 때문 에 배낭을 메는 것에 애를 먹었다. 배낭이 출렁거릴 때마다 아실이 신음했다. 지멘은 좀더 조심스럽게 움직이려 했고, 아실을 편하게 해 주는 대신 자신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가까스로 배낭을 멘 다음 지멘 은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좀 더 주위가 밝을 때 망치를 주워두 었어야 했다. 숲의 발치에는 이미 어둠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지멘 은 망치가 있음직한 곳을 발끝의 감각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익숙하 지 않은 장소에서 낮과 밤의 공간을 일치시키는 것은 매우 힘들다. 지멘은 짧지 않은 시간을 허비한 끝에 망치를 걷어찰 수 있었다. 부 딪힌 발보다 화가 난 머리가 더 아팠다. 지멘은 투덜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망치를 집어들었다. 지멘은 숲을 걸었다. 밤은 잠과 꿈의 시간이라 믿는 도깨비들이 보았다면 슬퍼했을 것이 다. 그 밤은 잠과 꿈의 시간이 아니었다. 레콘들은 암흑 속에 숨은 지멘을 찾기 어렵자 메아리로 그를 괴롭히기로 결정했다. 사방에서 계명성이 들려왔다. 켜켜이 쌓여있는 산들은 그 메아리를 왜곡시켰 다. 소리의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방향 을 바꿨다면 지멘은 밤새도록 쳇바퀴 돌듯 돌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 고 그것이 수색대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지멘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 다. 한쪽 팔을 못쓰는 상태에서도 지멘은 앞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때려눕히겠다는 기세로 걸었다. 아실은 분명히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그 옆을 지나치 는 지멘의 모습에 당황했다. 도저히 희망을 떠올리기 어려운 조건이 었지만 아실은 밤이 보내는 은닉의 축복이 끝나기 전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아실을 주춤하게 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배낭 속에 파묻힌 채 아실은 자신의 상실감을 직 시했다. 무엇이 그녀를 아쉽고 안타깝게 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 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불굴의 소녀를 두렵게 했다. 어처구니 없 는 유혹. 아실은 잠을 자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낯선 느낌이 그녀의 안면을 방해했다. 그녀를 괴롭힌 느낌은 하늘누리의 유수부원들에게 자주 발병하는 직업병과 비슷한 것이었다. 지멘이 멈춰서 있었다. 아실은 꿈틀거리며 배낭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밀생한 가문비 나무들 때문에 별빛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밤과 가문비나무는 검 은빛 깃털의 도망자에겐 바랄 수 있는 최선의 조건들이다. 하지만 중 상을 입은 부상자가 걷기엔 최악의 조건이다. 지멘의 호흡은 불규칙 했다. 그는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쉬어야겠군." 지멘은 소경처럼 주위를 더듬다가 겨우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배낭 을 벗어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지멘은 천천히 허물어졌다. 땅은 차가 웠다. 지멘은 뜨거운 몸을 가문비나무 밑둥에 기대었다. 아실은 지멘이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실은 배낭에서 빠져나왔다. 자기 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암흑 때문에 지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실은 지멘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지멘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다. 아실은 지멘의 숨소리가 들려 오는 곳을 찾았다. "지-친-놈-하-고-싸-우-기-싫-다-당-장-나-와-!" 아실은 지지러졌다. 바로 곁에서 천둥처럼 힌치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말이 아실의 몸을 때리는 것 같았다. 지멘의 호흡도 딱 멈 췄다. "빌어먹을 자식. 벌써 내뺀 거 아냐?" 두려운 일이었다. 힌치오의 투덜거림은 계명성이 아니었다. 그런데 도 그 목소리가 아실의 귀에 뚜렷하게 들렸다. 아실은 힌치오가 어디 쯤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걸음으로도 몇십 걸음 되지 않 을 것이다. 레콘에게는 악수하는 거리나 다름없다. 아실은 입을 틀어 막은 채 힌치오가 떠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힌치오는 떠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냄새야? 어이, 팔리탐. 무슨 냄새 안 나?" "뭐라 했소? 제발 부탁이니 화가 난다고 무턱대고 계명성을 지르지 마시오. 좀 대비해야 할 거 아니오. 이거야, 원. 고막이 상하지 않았 나 싶군." "무슨 냄새 맡지 못했냐고 물었어. 이거 꼭 피냄새 같은데." 아실은 코를 발름거렸다. 하지만 지멘과 함께 있었던 그녀는 피냄새 를 맡을 수 없었다. 헝겊으로 단단히 묶어두었지만 지멘의 상처에서 는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안정을 취하는 대신 계속 걸었기 때문이 다. 힌치오가 다시 외쳤다. "케-무-륵-! 살-보-! 이-리-와-봐-! 혹-시-근-처-에-서-사-냥-질-하 -고-있-는-녀-석-있-으-면-대-답-해-!" 지멘은 배낭을 내려놓은 곳으로 손을 뻗었다. 배낭을 끌어당기던 지 멘은 그것이 가볍다는 것을 알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실이 배낭 밖 에 있었다. 다른 레콘들이 힌치오에게 합류하기 위해 달려오는 소리 가 들렸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아실은 배낭 안에 있지 않았다. 지멘의 부리가 열렸다. "어디 있어?" 아실의 몸이 뻣뻣해졌다. 지멘의 속삭임은 힌치오의 외침보다, 그리 고 달려오는 여러 명의 발소리보다 그녀를 더 경악시켰다. 저것이 혼 잣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나를 부르는 건가? 지멘이 다시 말했다. "어디 있을까?" 혼잣말처럼 꾸며진 말이다. 아실은 정신을 차렸다. 달려오는 레콘들 의 발소리에 숲이 진동했다. 케무륵과 살보 외에 다른 레콘들도 외침 을 듣고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실은 결심했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지멘은 깃털을 조금 부풀렸다. 아실이 계속 속삭였다. "레콘 독립국에는 레콘이 필요하지요. 여기엔 많은 레콘이 있어요. 하텐그라쥬로 가요. 그게 저를 돕는 길이에요." 그리고 아실은 다급하게 짧은 단어 하나를 더 말했다. 지멘은 그 말 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엉뚱한 단어였다. 다급함과 흥분 때문에 또다시 지멘은 혼잣말 처럼 꾸미지 않은 채 말했다. "가위?" 아실은 진저리쳤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예 대화가 이루어질 지경이 다. 아실은 다급하게 속삭였다. "아마 그것이 답일 거예요. 이제 알겠어요. 가위.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하텐그라쥬로 꼭 가요." 아실은 가라고 말했다. 함께 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레콘 독립국에 는 레콘이 필요하다. 이곳에는 많은 레콘이 있다. 아실은 이곳에 남 을 것이다. 암살공이 어떻게 레콘들을 모았는지, 그리고 이곳에 분리 주의의 희망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리고 지멘을 탈출시키기 위해. "알겠어요? 제 말대로 할 거죠?" 보낼 수 없다. 지멘은 결코 아실을 보낼 수 없었다. 그는 약간 난폭 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실을 붙잡아 배낭에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아 실은 지멘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아실은 뒤로 한 걸음 물러 났다. 레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고함도 들 려왔다. "제발, 지멘. 그렇게 해야 해요." 아실은 그대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멘을 알고 있다. 이대로 달려가버리면 지멘은 그녀를 뒤따라올 것이다. 아니, 고함을 질러버릴지도 모른다. 레콘들을 자신에게 오도록 유인하여 아실이 도 망칠 수 있도록. 아실은 확신에 가까운 느낌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부탁이에요. 지멘……" 지멘의 손이 땅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실 주변의 땅을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온 지멘의 손은 곧 아실을 붙 잡을 것 같았다. 아실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멘의 집게손가 락이 마침내 아실의 발목을 살짝 건드렸다. 아실은 주먹을 깨물었다. "타이모의 이름으로 부탁해요." 스카리 요새의 4동 창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짐승을 피하기 위해 약간 높게 만들어진 창고 바닥과 지면을 잇고 있는 나무 계단 에, 락토 빌파는 걸터앉아 있었다. 작은 별장에서 햇빛을 즐기는 신 세 좋은 노인 같은 모습이다. 팔꿈치로 턱을 괸 발케네 공작은 눈을 감은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를 노려보는 헤어릿 에렉스의 시선을 온몸에 느낄 수 있었다. 발케네 공작은 미소 짓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를 정말 즐겁게 하 는 것은 많지 않았다. 헤어릿은 공작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즐 겁게 할 수 있는 드문 존재였다. 누군가가 그런 것이 육친의 정이라 고 말하면 공작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오해를 바로 잡아주는 수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가오는 31년이 되면 헤어릿의 나이는 스물일곱이 된다. 헤어릿은 십대 때 형성된 아름다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거기에 덧붙여 20대 후반의 인간 여성에 찾아오는 미묘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것 은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니다. 굳이 창백한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성년의 시기를 십 년 정도 보낸 사람의 품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설명은 이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락토는 싱거운 농담을 자신에게 던졌다. '안목 있는 고객은 돈을 아끼지 않으시겠지요.' 생각했던 것만큼 즐겁지는 않았다. 공작은 눈을 떴다. 헤어릿을 보 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얼굴을 돌리기 전 락토는 다가오는 힌치오를 보았다. 락토는 두 손을 깍지 껴 그 위에 턱을 얹고는 힌치 오와 그 곁에서 걸어오는 애꾸눈 소녀를 바라보았다. 누구나 웃음을 지을 만한 광경이었다. 힌치오가 보통 이상으로 큰 레콘이라면 소녀는 보통 이하로 작은 인간이었다. 힌치오 옆에서 걸 어오는 소녀의 모습은 유랑예인의 원숭이 같았다. 그 얼굴을 덮고 있 는 커다란 안대마저 어쩐지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분장 같았다. 락토 는 미소지은 채 소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힌치오는 걸음을 멈추고 소녀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소녀의 몸은 묶여 있지 않았지만 어디로도 달아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본 소녀 또한 그것을 인정했다. 창고 앞 공터 주위에는 레콘들이 죽 둘러서 있었다.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가갈 경우 입을 수 있는 재난을 생각한다면 성벽보다 더 무섭다. 어지간히 거친 사내도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있기 힘든 광경이었지 만 소녀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녀는 주위의 레콘들 중 몇몇에게 눈인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소녀의 인사를 받은 레콘들 중 어떤 이들은 모르는 척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마주 인사하는 레콘 들도 많았다. 그 모습을 면밀하게 관찰하던 락토가 말했다. "안녕. 제미니." 아실은 싱긋 웃었다. "우스꽝스럽잖아요. 자작님. 아실이라고 부르세요." "네가 나를 공작님이라고 부른다면 나도 너를 그렇게 불러주지." 아실은 움찔하며 락토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빙그레 웃었다. 아실은 락토의 위아래를 다시 바라보았다. 락토는 암살성을 떠날 때 입고 있던 의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아실은 눈을 크게 떴다. "발케네공 락토 빌파이신가요?" "아라짓 제국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며 발케네의 통치자, 자유무 역당의 후원자, 용감한 도둑들의 친구, 그리고 뿔관의 주인이기도 하 지." 아실은 당황을 수습했다. "머리에 쓰는 것이라면 뿔관보다 더 유명한 것을 가지고 계신 걸로 아는데요." "하긴 장신구에 관심이 많을 나이겠구나." 락토는 아실의 지적을 간단히 받아넘겼다. 아실은 일단 입을 다물고 기다리기로 했다. 락토가 말했다. "힌치오는 네가 황제사냥꾼을 빼돌리기 위해 자기들을 유인했다고 말했다. 설명이 되긴 하지만 좀 부족해. 나는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생각해. 아무리 어둠 속이라지만 네가 레콘들을 이끌고 도망 치는 것은 열 걸음이 한계일 텐데. 힌치오가 내게 말해주지 않은 것 이 뭐지?" "가까이 오면 뿌리겠다고 외치면서 도망쳤어요." "뿌려? 아아." 락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힌치오를 바라보았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쏘아보고 있는 힌치오의 모습에 락토는 미소지었다. "세상의 토대가 되고 싶은 애로구나." "저는 바보일지는 모르지만 아직 시체는 아니에요." 락토는 짐짓 놀랐다는 얼굴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심드렁하 게 말했다. "세상은 바보들의 시체 위에 서 있다. 주퀘도 사르마크. 그 사람이 할만한 말이긴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죽음의 거장이 그 런 말을 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으니까." "공식 기록까지 거론하는 사람은 처음 봤는데." "주퀘도 사르마크 숭배자인 정치학 교수님을 한 분 만난 적이 있어 요. 그 교수님은 절대로 주퀘도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고 확신하 시더군요." "타이모와 함께 있을 때의 이야기겠군." 약간 방만한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아실이 갑자기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살아있는 장벽을 이루고 있던 레콘들 사이에서도 작 은 동요들이 일어났다. 아실은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그 일이 있은 후의 일이죠." "그 후? 흐음. 넌 줄곧 황제를 죽이겠다면서 싸돌아다니지는 않았던 모양이구나." "타이모에게 모든 것을 배우기 전에 그녀는 제 곁을 떠났어요. 그래 서 타이모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도움이 필요했지요. 쥐딤 선 언문을 혹시 보셨어요?" "본 적이 있다." "그 때 쥐딤 대학으로 갔던 것도 그런 만남 때문이었어요. 거기엔 타이모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학자분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대학에 도 착하고나서야 비스그라쥬백이 말도 안되는 강연을 했다는 것을 알았 지요." "괜한 고생을 했구나. 내게 왔으면 그냥 알려줬을 텐데." "뭐라고요?" "타이모를 이해하고 싶었다면 그냥 내게 왔으면 됐을 거라고 말했 다." 아실은 긴장했다. 그녀는 레콘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눈 이 대단히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했다. 아실은 잠깐 동안 놀란 표정으 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 속에 들어있는 인명록을 재빨리 뒤져본 아실은 그녀가 락토 빌파의 서녀인 헤어릿 에렉스일 거라 추측했다. 헤어릿을 제외하면 공작 주변에는 미인은커녕 여자도 별로 없으니 지 나치게 과감한 추리는 아닐 것이다. 아실은 그녀가 상당히 주의깊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실 은 일단 공작부터 상대하기로 했다. "공작님께서 타이모의 사상을 이해하신다는 건가요?" "타이모의 주위에 있었던 레콘들도 지금 내 곁에 있는 레콘들보다는 적었을걸." "여기에 레콘이 몇 명이나 있는 거죠?" "일만 명 정도." 아실은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공작의 말처럼 쥐딤에 모였던 레콘 들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실은 흥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공작님은 분리주의자인가요?" 지난 6년 동안 아실은 분리주의자를 구경도 못했다. 늘 함께 있었던 지멘은 복수자일뿐 분리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6년만에 처음 만 난 분리주의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발케네의 공작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아실은 벅찬 기대감으로 락토의 대답을 기다렸 다. 락토가 말했다. "그게 내가 너를 동지로 받아들일 거냐는 질문이라면, 잘 모르겠다 고 대답할 수밖에 없구나." 그 대답은 아실을 당황하게 했다. 아실은 락토의 눈을 열심히 들여 다보았지만 그곳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것은 모호한 미소뿐이었다. 동 지가 되고 싶다면 능력을 보이라는 뜻인가? 아실은 자신이 비축해둔 금편에 대해 이야기할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락토가 그 금편 을 노리고 아실을 속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락토는 용감 한 도둑들의 친구니까. 아실이 침묵하자 락토가 말했다. "너희들은 그냥 얌전히 하텐그라쥬로 가야 했다. 왜 이곳으로 왔 지?" 아실은 머리 속에서 부싯돌이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 는 비로소 살인기사와 암살공의 관계에 대한 증거를 얻게 되었다. 아 실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우리를 왜 하텐그라쥬로 보내려고 했는지 말해주겠어요?" 그 질문은 락토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락토는 못마땅한 표 정으로 아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가 그걸 모른다면 지멘도 아마 모르겠군. 쫓기는 처지인 그가 나 를 방해하기는 어렵겠지." 아실은 보지 못했지만 락토는 그 순간 헤어릿이 앞으로 한 걸음 걸 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미 치광이 괴물. 그 애를 죽이려고?' 헤어릿의 반응은 락토를 퍽 고무시 켰다. 그 때 아실이 말했다. "가위." 뜻밖의 말에 헤어릿은 입을 닫았다. 락토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실 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겸손한 얼굴로 말했다. "지멘은 하텐그라쥬로 갈 거예요.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어 요." "……지멘이 어디까지 알고 있지?" 락토의 질문에 아실은 자신감을 얻었다. 아실은 여전히 겸손한 얼굴 로 락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씀은 저를 동지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뜻인가요?" 락토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지는 않지만 긴 웃음이었다. 헤어릿은 당혹하여 아실과 락토를 바라보았다. 웃음을 그친 락토는 헤어릿을 향해 말했다. "말을 가져오너라. 헤어릿. 파리조로 돌아가자. 아실은 너와 함께 탄다." 당황한 헤어릿은 조금 후에야 아실이 죽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 다. 헤어릿은 못믿겠다는 얼굴로 락토를 바라보았지만 락토는 명령을 재촉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 명령을 실행에 옮겼다. 헤어릿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던 락토는 아실에게 고 개를 돌렸다.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좀 더 편안한 장소에서 좀 더 많은 이야기 를 나눠보자. 어쩌면 너는 나 대신 어떤 가엾은 얼간이에게 삶을 이 용하는 태도에 대해 가르쳐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겐 그럴 자격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전에 한 가지만 다짐해주면 좋겠구나. 지멘은 확실히 하텐그라쥬로 가는 거냐?" 아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대답은 지멘이 직접 했다. "락-토-! 내-가-하-텐-그-라-쥬-에-서-돌-아-올-때-까-지-그-애-에- 겐-상-처-하-나-도-나-선-안-된-다-! 그-애-의-상-처-하-나-에-네-가 -족-한-명-을-죽-이-겠-다-!" 레콘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짐 작할 수도 없이 까마득히 먼 곳에서 들려온 계명성이었다. 아실은 어 쩐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거리에 어울리는 많은 메아리가 지멘의 외침을 뒤따라왔다. 한참 동 안 계속되는 메아리를 듣던 락토가 말했다. "확실하군." 자신의 얼굴색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던 아실은 그냥 고개만 조금 끄덕이기로 했다. =============================================================== 챕터 끝났습니다. 개 : 원래 육식동물이지만 인간에게 사육된 이후 식성이 잡식성으로 바뀐 동물. …그러니까 바퀴벌레를 먹는 건 육식맹수였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인 거지?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8. 아는 것과 우는 것 - 1 이 글을 잘 보게. "아, 이런. 발케네놈들이 내 남편을 훔 쳐갔어!" 펜조일의 유일한 소설에 나온 대목이지. 읽어봤 겠지? 제군들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 을 겪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것이 소설의 일부라는 것 을 모르는 사람은, 혹 안다 해도 전후 맥락을 모르는 사람 이라면 이 말의 정서, 즉 연인에서 남편으로 바뀐 후 남자 에게 일어난 변화를 한탄하는 여주인공의 정서는 느낄 수 없을 거야. 그 가상의 청자는 무서운 납치극이 일어났다고 착각할 수도 있단 말이야. 이 대목에서 언어의 불확실성을 논파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 하이스 대학 문학 강의 中. 자유무역당원이 아니라도 유료도로당에 대해 악감정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많다. 이들은 유료도로당의 사업과 산적질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거칠게 보면 유료도로당이든 산적이든 행인에게 돈을 받는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으니 이런 의구심은 일 견 타당하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주갈과 잠바이를 잇는 그리미 유료 수도(有料隧道)에서는 악담을 멈출 수밖에 없다. 어쨌든 산적들은 16 킬로미터 길이의 굴을 뚫을 수 없다. 세상에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유료도로당도 게라 임 지울비가 당주로 선출되기 전까지는 시구리아트의 허리에 구멍을 낼 엄두는 감히 내지 못했다. 따라서 시구리아트 산맥을 넘고 싶은 자들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를 이용하거나 북쪽 으로 올라가 러크에서 호라이체로 넘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구리아트 유료도로와 러크 사이의 거리는 2천 킬로미터에 달한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 외에 시구리아트 산맥 동쪽과 서쪽을 잇는 다 른 길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길은 없었다. 게라 임 지울비는 산 위로 넘어갈 수 없다면 산 아래로 지나가면 된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당주에 선출되자마자 게라임은 원시제에게 특 별 계약을 제안했다. 원시제는 그 계약을 받아들였다. 주갈에서 기다 리고 있던 당원들 앞에 전원 레콘으로 구성된 고추냉이 여단이 나타 난 것이다. 당원들은 그것이 인상적이라는 데는 두말없이 동의했지만 그 여단병 들이 굴착전문가는 아님을 지적했다. 게라임도 그 지적에 동의했다. 하지만 게라임은 열성적으로 고추냉이 여단의 레콘들에게 굴착에 대 해 가르쳤다. 전체 계약기간 4년의 절반에 해당하는 2년이 레콘들의 교육에 이용되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당원들은 지하수의 용출 가 능성이 가장 적은 지대를 탐사해야 했다. 마침내 교육과 탐사가 끝나 고 굴착 작업이 시작되자 고추냉이 여단은 가장 비관적인 당원들도 환호를 보내게 만들었다. 그 광경을 본 어떤 당원은 레콘들이 굴을 파는 것이 아니라 굴을 찾아내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무자비한 속도 로 굴을 파낸 고추냉이 여단병은 남은 계약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수 도를 완공시켰다. 게라임은 그 굴에 원시제의 이름을 따 그리미 유료 수도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리미 유료수도가 완성되자마자 유료 도로당은 계약 사항의 나머지를 이행하게 되었다. 원시제와 게라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향후 50년 동안 제국군, 혹은 예비역 제국군이 무상으로 유료수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심장 적출 을 위해 시련으로 간 제위 계승자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 던 제국군이 첫번째로 유료수도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계약이긴 하지만 유료도로당은 마수 고객이 공짜 손님이라는 것에 대해 좀 찜찜해했다. 물론 그런 걱정은 기우로 밝혀졌다. 시구 리아트 산맥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은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는 수도이 용료를 흔쾌히 지불했다. 그리미 유료수도는 완공된 후 유료도로당의 전체 지부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드는 수익을 매해 올려주었다. 그래서 그리미 유료수도의 징수소에서는 전역증을 제시하는 예비역 병사들에게 '무료통과'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속상해하거나 하지는 않 았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미 유료수도의 서쪽 입구에 선 레콘 주테카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는 징수원의 모습에 조금 놀랐 다. 주테카의 전역증을 들여다보던 징수원은 갑자기 징수소장에게 달 려가서 그것을 보여주었고 그러자 징수소장은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 작했다. 주테카는 어리둥절해하다가 혹시 자기가 데리고 있는 사람 때문에 그런 건가 하고 생각했다. "이봐! 이 녀석은 안전해. 내가 책임지겠어." 주테카가 가리키는 '이 녀석'은 누가 봐도 약간 맛이 갔다고 표현할 인간 남자였다. 어쨌든 뺨에 구멍을 내서 거기로 침을 뱉는 인간은 정상으로 보이기 어렵다. 드러난 가슴과 팔에는 칼자국이 가득하고 속눈썹이 그대로 눈썹에 붙어버린 것 같은 짙은 눈썹은 이나 벼룩이 득시글거려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그 아래 눈 또한 걸작이었 다. 오른쪽은 정신병자의 눈이오 왼쪽은 살인마의 눈이다. 누구라도 이런 사내와 함께 16킬로미터나 되는 굴을 - 무장한 당원들이 그 안 을 순찰하고 있다 해도 - 걷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유료도로당원들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 주테카는 사내의 상체를 결박하고 있는 밧줄을 가리켰다. 그 밧줄의 다른쪽 끝 은 주테카의 왼쪽 손목에 묶여 있었다. 주테카는 그 결박이 튼튼하다 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사내는 자신에게 양해를 얻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주테카는 밧줄째 인간을 들어올려 휙휙 휘둘렀다. 비 명을 지르는 인간을 무시하며 주테카는 외쳤다. "보라고. 단단히 묶었잖아. 못믿겠으면 와서 확인해봐." 징수소장이 다가왔다. 주테카는 인간을 땅에 내려놓았다. 비틀거리 던 인간은 결국 주저앉아 헐떡거렸다. 하지만 그는 쉴 팔자가 아니었 다. 주테카가 확인해보라는 듯 왼쪽 손목을 불쑥 내밀었기 때문이다. 밧줄에 질질 끌려오는 인간을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징수소장은 전역증을 내밀었다. "엉겅퀴 여단에 복무했던 주테카시죠?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께서 당 신에게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테카는 놀란 얼굴로 전역증을 받아들었다. "엘시? 대장군 말이야? 잠깐. 내가 여기로 올 거라는 걸 엘시가 어 떻게 알았는데?" "모든 지부에 똑같은 전언이 왔습니다. 당신이 유료도로를 지나려 하면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아아, 그런가? "당신 외에도 야리키와 쵸지라는 레콘에게 가는 전언이 더 있습니 다. 혹시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당신이 직접 전해도 좋습 니다." "글쎄. 난 그 친구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 엘시가 나한테 무슨 말을 전했는데?" "좀 길어서 적어뒀습니다." 징수소장은 도깨비지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주테카는 꼼꼼하게 서신을 읽었다. 서신을 다 읽은 주테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 고 주테카는 기묘한 짓을 시작했다. 징수소장은 유료도로당과 황제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잘 알고 있었 다. 하지만 징수소장은 그 계약이 예비역 제국병에게 유료수도 앞에 서 경매를 할 권한까지 부여한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주테카 는 방해나 제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태도로 외쳤 다. "자, 수도 이용료를 건질 기회다! 여기 현상수배서 보이지? 그래. 이 녀석을 데리고 잠바이로 가면 금편 150닢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정의 구현에 이바지했다는 자부심은 그 이상이지. 이 녀석은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해서 아홉 명을 죽인 벌레 같은 놈이거든. 이런 기회가 매일 오는 건 아냐. 내가 급히 나나본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이 녀석 을 포기하는 거라고. 자, 정의를 사랑하는 친구들. 불러봐!" 현상범 경매라는 전무후무한 광경에 놀라 얼이 빠졌던 징수소장은 결국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해서 아홉 명을 죽였다'는 대목을 빼라고 주테카에게 조언했다. 주테카를 돕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편이 주테 카를 빨리 쫓아버리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유무역당 잔하일 사무소. 보통 자유무역당의 지부 사무소는 그리 눈에 뜨이지 않는 건물이다. 자유무역당은 그 당원들에게 재력을 뽐내는 것을 강력하게 금하고 있 다. 자유무역당이 취급하는 상품들을 보관하는 커다란 창고는 보통 도시 바깥에 따로 두기 때문에 지부 사무소가 작아도 불편할 것은 없 다. 중소도시의 경우에는 아예 상품 창고 구석에 지부 사무소를 차리 기도 한다. 잔하일의 경우엔 시내에 사무소를 두었지만 그것은 당의 지침을 철저히 따르는 아담한 건물이었다. 레콘인 쵸지의 견해로는 약간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작은 건물이었다. 그래서 쵸지는 건물 바깥으로 나와 마당에 서서 당원이 건네준 서신을 읽었다. 서신을 다 읽은 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돌아다니는 레콘을 수배 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두 가지다. 우선 유료도로당에 협조를 구하는 방법이 있다. 대단한 속도로 움직이는 레콘들은 다른 종족보 다 유료도로를 더 자주 맞닥뜨리니 합리적인 방법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쵸지의 경우처럼 전역금을 받기 위해 자유무역당 지부를 찾아 왔을 때 전언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밑천이 많이 필요한 숙원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레콘 전역병은 전역금을 일시불로 받지만 신부탐색이 나, 아니면 당장 돈이 필요없는 경우에는 분할해서 받기도 한다. 이 경우 그들은 자유무역당에 가서 원하는 만큼의 돈을 지급받을 수 있 다. 자유무역당은 제국군에게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그런 지급 업무 를 대행해준다. 하지만 유료도로당이든 자유무역당이든 연락업무까지 대행할 의무는 없으므로 엘시는 그들을 수배하기 위해 유료도로당과 자유무역당에 약간의 비용을 지불했을 것이다. 쵸지는 엘시가 자신이 빨리 와주길 바란다고 추측했다. 다른 레콘보다 훨씬 커서 평소에는 얼굴 옆으로 늘어지는 벼슬을 만지작거리며 쵸지는 생각에 잠겼다. 엘시는 하루라도 빨리 지멘을 잡을 계획이었다. 쵸지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황제의 대장군이 일개 수배자를 잡으러 나설 이유가 무엇인가? 그 상황의 의외성이 쵸지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마당의 축담에 걸터앉아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반 시간 쯤 생각한 후, 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쵸지가 한 일은 장부를 꺼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역금 장부를 꺼 내 남은 금액을 확인한 쵸지는 일어섰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던 쵸 지는 생각을 바꿔 당원을 불러내기로 했다.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는 것보다는 인간이 밖으로 나오는 쪽이 덜 위험할 거라 판단했기 때 문이다. 자유무역당원들도 자신들의 아담한 건물을 또 위험에 노출시 키고 싶은 생각은 없는 듯 황급히 사환인 듯한 소녀 한 명을 마당으 로 내보냈다. 쵸지는 사환에게 장부를 건네며 말했다. "남은 돈 전부 다 찾고 싶다." "전액 출금. 확인 부탁합니다." "그래. 전액 출금이다. 됐냐?" 사환은 왜 갑자기 전역금을 전부 찾고 싶은 것인지 설명해줬으면 좋 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쵸지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사환이 당장 뛰어들어가게 만들었다. "돈이 없냐?" 사환은 그보다 더 큰 모욕이 어디 있냐는 투로 분개하여 달려들어갔 다. 아무래도 재력에 대한 당의 철학을 체화하기엔 좀 어린 탓이다. 사환은 곧 묵직한 금편 주머니와 장부, 필기구 등을 얹은 쟁반을 들 고 나타났다. 사환은 그것을 가벼워 보이게끔 애썼는데, 아무래도 쵸 지의 남은 전역금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듯했다. 하 지만 그런 시도를 하기엔 주머니의 무게가 만만찮았다. 사환의 팔목 에 무리가 가기 전 쵸지는 주머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쟁반 위에 놓인 장부에 서명하려 했다. 사환은 장부를 끌어당겼다. "서명 전 확인 필수." 쵸지는 피식 웃었다. 철학은 배우지 않았어도 규칙은 확실히 익힌 모양이다. 하긴 어떤 규칙이든 일단 익힌 후에야 거기서 철학을 발견 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말투도 상당히 자유무역당스러웠 다. "이걸 다 세려면 나는 짜증날 텐데. 꼬마야. 그리고 경험상 사람들 은 내가 짜증 내는 것을 싫어해." 사환 소녀는 쟁반을 내려놓고는 손을 불쑥 내밀었다. 쵸지는 어쩌나 보려고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사환은 주머니를 열어 금편들을 쏟았 다. 그녀의 손이 몇 번 꿈지럭거린 후 금편들은 열 개씩 쌓여서 열과 행을 맞춰 좍 배열되었다. 쵸지가 보기엔 계가를 하는 국수 만큼이나 날렵한 솜씨였다. 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확인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 속에 금편을 다시 쏟아부었다. 그 후에야 소녀는 쵸지가 서명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쵸지는 서명을 끝낸 장부를 다시 쟁반 위에 얹어놓았다. "장부는 폐기해줘. 한 가지 더. 이 도시에서 술맛이 제일 괜찮은 곳 이 어디냐?" "주점?" "그래. 레콘 손님도 잘 받는 곳으로." 소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소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 에 쵸지가 말했다. "자유무역당은 특정 업체를 후원하지 않습니다. 알아. 안다고. 가까 운 순서대로 부르면 되잖아. 고객 편의를 위해 그 정도는 괜찮아." 사환은 쵸지가 꽤 오랫동안 자유무역당을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하긴 장부에 찍혀있는 자유무역당의 도장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린 사환은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수십 군데의 상 호를 댔다. 그리고 사환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쵸지가 금편을 꺼내어 던져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환은 그 일을 자랑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사환 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그날 잔하일의 거지들은 인생 최고의 날을 경험하게 되었다. 어떤 정신 나간 레콘이 금편을 뿌리고 다닌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잔하일 전체로 퍼져나갔다. 쵸지가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 동안 온갖 사람들 이 그를 찾아왔다. 가족이 아프다, 빚쟁이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공 부하고 싶은데 학자금이 필요하다, 끗발이 서는 것 같으니 한 판만 제대로 먹으면 된다. 쵸지는 돈을 뭉텅뭉텅 나눠주었다. 조건은 한 가지뿐이었다. "갚겠다는 소리는 하지마. 그럼 안 줘." 꿈속에서나 들을 법한 조건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아침 쵸지는 자신이 남은 전역금을 깡그리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쾌했다. "남은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고. 세상에 나늬 같은 여자도 없고. 흠. 사나이가 죽기 좋은 조건이다." 술기운에 머리가 약간 아팠지만 쵸지는 가볍게 나나본을 향해 뛰었 다. 커다란 벼슬이 바람에 나부꼈다. 남으로 달리던 지러쿼터 산맥이 주춤하다가 동서로 크게 갈라지는 지역에 자리잡은 나발칸 지방.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 이름은 나포 츠, 발란카, 그리고 칸라크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물론 피녹이나 부누, 올렌 같은 지역들은 나발칸이라는 이름에 자기 지역명이 포함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섭섭해하지만 개칭이 시도된 적은 없다. 나발칸은 예스러운 땅이고 이곳 사람들은 전통을 파괴하는 일에 공포 마저 느낀다. 전통이라는 말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종족인 레콘도 이 땅에서는 좀 보수적인 편인데, 그런 보수성은 레콘이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전통에 대한 지독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발란카에 사는 레콘 준람 또한 그런 나발칸의 레콘이었다. 양식 있 는 레콘이 살 수 있는 땅은 나발칸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는 평 생에 딱 세 번 나발칸 지역을 벗어났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얻은 다음 제국군에 입대한 것이 그 첫번째였다. 그 기간 동안 준람 은 대단히 마음에 드는 레콘 여성을 목격했다. 준람의 두번째 여행은 그 여성을 자신의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한 도전 여행이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세번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준람은 남은 평 생 동안 한 번의 탈향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준람은 그 예감이 적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려 못을 박아넣은 준람은 느린 동작으로 물러 섰다. 공사장 한켠으로 물러난 준람은 아내들을 죽 둘러보았다. 건설 현장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는 모두 다섯이었다. 그리고 그 아내 들의 구성은 준람이라는 레콘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준람은 나발칸의 레콘답게 많은 것을 고려했다. 마음에 쏙 들었던 여자를 두번째 부인으로 얻은 것도 레콘의 첫째 부인은 사려 깊고 통 솔력이 충분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확한 안목으로 고 른 첫째 부인은 실제로 그러했다. 다섯이라는 숫자 또한 그런 고려의 결과다. 고추냉이 여단에서 복무하며 그리미 유료수도 공사에 참여했 던 준람은 그곳에서 건축 기술을 익혔다. 준람은 자신의 기술을 부인 들에게 가르쳐 함께 일할 경우 다섯이라는 숫자가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보다 적어도 큰 무리는 없지만 사려 깊은 준람은 가정사를 꾸리기 위해, 그리고 혹 부인들 중 누군가가 임신했을 경우 까지 고려하여 다섯 명을 선택했다. 그 자신까지 포함하여 여섯이다. 더 이상은 필요없다. 준람의 인생은 그렇듯 철저한 고려와 계획에 의해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완성된 인생 같은 것은 없는 법이다. 준람의 철저한 고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과 그의 가족에는 한 가 지 오점이 남아있다. 준람은 무거운 눈으로 다섯째 부인 고라이를 바 라보았다. 고라이는 공사장 한켠에서 인간 고용인과 함께 벽돌 사이 에 발라넣을 진흙을 만들고 있었다. 물을 다루는 것은 인간이고 고라 이는 흙과 지푸라기 등만 담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레콘들이 좋아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준람은 고라이가 다른 부인들과 그 일 을 교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가 고라이를 응시하자마자 군령자의 또다른 영처럼 첫째 부인이 그 곁에 나타났다. 한순간 준람은 가만히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그녀는 준람이 그녀를 존중하는 것만 큼 준람을 존중하는 첫째부인이었고 그녀의 결정은 따르는 것이 현명 하다. 준람보다 열한 살 많은 첫째 부인은 남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준람. 언제 갈 거야?" "제가 언제 간다고 했습니까, 란쉐." "거짓말 하지마. 준람." 준람은 부리를 탁 부딪혔다. "란쉐. 그렇게 긴 세월 함께 보냈는데 제가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 는 것을 모릅니까? 그건 다섯 명의 부인을 데리고 있는 남자가 할 일 이 아닙니다. 만약 지멘을 추적하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 면……" "그거야 신부탐색자가 나타나는 경우도 마찬가지잖아." "신부탐색자라면 제가 패배하더라도 그 남자가 아내를 데려갈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준람. 우리 아내들에 대한 네 책임감은 잘 알아. 하지만 내가 남편 에게 원하는 것은 내 귀여운 남편이 잠꼬대로 누군가를 저주하는 짓 을 제발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거야." 준람은 한참 동안 부리를 닫아야 했다. "제가 아직도 그럽니까?" 란쉐는 목재와 석재를 나르는 젊은 부인들을 바라보았다. "요즘도 말이야, 준람. 가슴 한 구석이 쓰릴 때가 있어. 내가 멍청 해서 너와 고라이가 그런 꼴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란쉐. 거짓 없는 진심으로 말하는데, 당신은 한 남자가 만날 수 있 는 최고의 아내입니다." "아부는 그만둬. 내가 지금 어떤 아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6년 전 에는 네가 말하는 그런 여자는 분명히 아니었어. 나는 지멘이 알아듣 도록 강하게 대하지 못했지. 나도 그 시커먼 녀석이 좀 겁났거든." 그래서 지멘은 자신만만하게 준람에게 도전했고, 고라이는 지멘의 세째 부인이 되었고, 세째 부인을 얻은 지멘은 타이모를 네째 부인으 로 얻으려 했고, 타이모가 죽은 다음 지멘은 아내들을 버렸다. 준람 은 오갈데 없어진 고라이를 도로 데려오기 위해 세 번째로 나발칸 바 깥으로 여행했다. 지멘에게 가기 전 준람의 둘째 부인이었던 고라이 는 그렇게 되돌아오면서 다섯째 부인이 되어야 했다. 준람은 기량이 부족하여 둘째 부인을 뺏긴 것을 가지고 자신을 원망할지언정 지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레콘의 전통이니까. 하지만 빼앗아간 부 인을 버렸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라이 역시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원래 쾌활한 여인이었던 고라이는 준 람의 다섯째 부인이 된 이후로 가장 우울한 부인이 되고 말았다. 란 쉐는 그 모든 이야기를 되새기는 것은 상처를 후벼파는 짓밖에 안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일 하나만 놓고 봐도 나는 첫째 부인감이 아냐. 너와 고라이에 겐 평생 사과하는 마음으로 지내도 부족하지." "그것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 지멘 탓입니다." "아, 동감이야. 가서 그 나쁜 녀석을 거꾸러뜨려." 준람은 수염볏을 신경질적으로 비틀었다. "란쉐. 지멘은 보통 놈이 아닙니다. 제가 당할 수도 있어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들은……" "저 애들은 걱정하지마. 네가 기술을 잘 가르쳤잖아. 좋은 기술을 가진 아내는 환영받지. 다른 신부탐색자들이 귀하게 받아들일 거야." 준람은 거침없이 남편이 죽었을 경우를 상정하는 첫째 부인에게 약 간 질렸다. 하지만 준람은 란쉐가 '저 애들'이라고 말했다는 것에 더 관심이 쏠렸다. "저 애들? 그러면 당신은?" "나? 난 승률이 낮은 도박에는 관심이 없어." "무슨 말입니까?" 란쉐는 햇빛 쏟아지는 부리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최고의 남편을 이미 가져봤어. 내 운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 만한 남편을 또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러니 숙원이나 추구 할 거야." "무슨 숙원 말입니까?" "지멘이 왜 황제를 죽이겠다고 설치지?" 준람은 가슴이 벅차는 것을 느꼈다. 란쉐는 준람의 왼손 위에 자신 의 오른손을 얹었다. "준람. 네 늙은 아내가 그런 흉측한 녀석이나 쫓아다니게 하지는 않 겠지? 빨리 해치우고 돌아오라고. 그리고 우리도 좀 웃으면서 살자. 응?" 준람은 생각했다. 좋은 첫째 부인은 남편을 보호할 것이다. 새남편 이 생기지도 않는 위험한 일에 남편이 뛰어들게 하여 자신과 다른 아 내들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좋은 첫째 부인이 아니다. 준람은 자신이 좋은 첫째 부인을 고르는 일에도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저지른 가장 훌륭한 실수였다. 세상에는 좋은 첫째 부인 보다 나은 것이 있다. 준람은 손을 뒤집어 란쉐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 를 끄덕였다. 가장 거대한 소리를 내는 레콘도 아무 말을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다. 며칠 동안 계속된 비가 규리하성을 씻어내렸다. 보통 이 즈음에 내 리는 긴 비는 겨울이 남겨둔 것들을 쓸어내기 위한 봄의 청소부며 따 라서 비가 그칠 때 봄이 올 거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틸러는 규 리하 변경백령에 대한 군사적 지식만 쌓아두었을 뿐 이곳의 기후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 그것이 봄비가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 때문에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틸러는 걱정 스럽다는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틸러가 언젠가 보았던 도깨비의 옷을 입고 있었고 그 위에는 틸러가 처음 보는 옷을 덧입고 있었다. 틸러는 정우가 반비라고 부르 는 그 옷이 보기 좋긴 하지만 보온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 각했다. 하지만 틸러의 우려와 달리 정우는 별다른 추위를 느끼지 못 하는 듯 태평하게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유자재로 불 을 다루는 도깨비들 틈에서 자랐으니 추위는 그녀에게 괴로운 것일 거라 믿었던 틸러는 의아해했다. 하늘을 바라보던 정우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에 우산을 건네 주기 전 틸러는 다시 질문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안 추워요. 틸러." "그것도 걱정입니다만, 저 위에 올라가시면 저는 아가씨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저를 해치고 싶은 사람도 가까이 못오겠지요. 걱정 말아요." 틸러는 할 수 없다는 듯 우산을 건네주었다. 정우가 몸을 돌리자 새 빨간 도깨비지로 만들어진 커다란 우산이 그의 눈에 가득 찼다. 틸러 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딱정벌레를 바라보았다. 딱정벌레 위에는 탈해 머리돌이 기묘하게 생긴 곰방대를 문 채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 다. 도깨비 무사장의 얼굴에도 불안감이 약간 떠올라 있었다. 틸러는 왜 이런 위험한 회담을 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정우 를, 특히 그 발에 주의하며 바라보았다. 정우는 발을 들어올리지 않았다. 그냥 허공으로 스르륵 떠올랐다. 틸러는 계단이 아니라는 것에 놀랐다. 어떻게 보아도 정우의 발모양 은 계단을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똑바로 선 채로 허공을 향 해 솟아올랐다. 틸러는 아래쪽에서 기성이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곧 마당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몰려나온 병사들이 내 리는 비를 무시하며 위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모습을 본 틸러는 피식 웃었다. 다시 한 번 정우를 본 틸러는 안심하기로 했다. 그녀가 밟고 있는 것이 계단이 아니라면 이동계단이나 그 비슷한 무엇일 테고 그 런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정우는 쉽게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틸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탈해를 돌아보았다. 그리 고 도깨비 무사장이 완전히 넋이 나간 채 정우를 올려다보는 것을 보 고는 실소했다. 하늘로 떠오르면서 정우는 아무런 불안감도 느끼지 않았다. 다른 사 람에겐 보이지 않지만 정우는 자신의 몸을 받치고 있는 환상 구조물 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환상계단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 정우는 천천히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풍경은 만족스러웠다. 사실 풍경이랄 것은 별로 없었다. 세상을 얇 게 저며내는 거미줄 같은 빗줄기들이 모든 곳에 가득했다. 하다다닥. 가랑비가 우산을 때리는 소리는 경쾌했다. 정우는 상승 속도를 조절 하면 빗소리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옥상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를 생각한 정우는 유 혹을 떨쳤다. 규리하성과 하늘누리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정우는 멈춰섰다. 알알해진 뺨을 만지작거리며 정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습기 가 득한 공기가 그녀와 코와 폐를 씻어내는 것 같았다. 좋은 딱정벌레 기수인 정우는 자신이 떠있는 높이가 지상에서 대략 100미터 조금 못 미치는 높이일 거라 추측했다. 세상은 하얗게 물결치고 있었다. 산등 성이를 타고 피어올라 흐르는 연무들 때문에 대지는 꿈틀거리는 흰 생물처럼 보였다. 정우는 어깨에 걸친 우산을 조금씩 돌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빗방울 은 그녀의 발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구조물에 방해를 받지 않았다. 정우는 약간 고민하다가 발 아래에 있는 것을 투명하게 바꿔보았다. 그 시도를 위해 정우는 도깨비답게 생각했다. 열은 보이지 않지만 존 재한다. 나가들이라면 열도 보인다고 말하겠지만…… 정우는 성공했다. 정우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과 똑같은 모습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빨간 우산을 든 채 백 미터 상공에 조용히 떠있는 소녀. 소 심한 사람에겐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광경이겠지만 정우는 방긋 웃었 다. 엘시는 그녀가 왜 웃는지 궁금했다. 자신을 부르는 낮은 소리에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위 치에 엘시가 떠있었다. 엘시는 우산 대신 두건이 달린 우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엘시의 얼굴 쪽이 꽤 어두웠다. 정우가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코 아랫부분 정도였다. 정우는 엘시의 입을 가만히 바 라보았다. 엘시는 그것이 한 번 더 말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즐거우신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정우." 정우는 다시 웃었다. "좀 걸을까요." "예?" 정우는 엘시에게 몸을 돌려 허공을 자박자박 걸어갔다. 잠깐 동안 그 모습에 감탄한 엘시는 곧 자신이 밟고 있던 환상계단을 도로로 바 꾸었다. 그 도로는 앞에서 걸어가는 정우의 옆쪽으로 이어졌다. 엘시 는 그 환상계단을 따라 정우의 옆으로 다가섰다. "정말 능숙하시군요.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직접 밟은 것은 처음이지만 연습은 많이 했어요. 창밖으로 하늘누 리를 보면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만들어봤지요. 어렵지 않던데요." "하늘누리에 익숙한 사람들 중에도 당신처럼 허공을 산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하늘에 길을 만드는 것이 익숙해서 그럴 거예요. 탈해는 비행 궤도 라고 하겠지만 그것도 길은 길이지요."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평온한 대화에 비해 백 미터 아래에서 일어 나고 있는 소란은 엄청났다. 성채매장자의 전설에 허공답보자의 전설 을 덧붙이고 있는 병사들은 조만간 세계창조자에 관한 담론을 시작할 기세였다. 틸러는 그들 중 누군가가 환상계단을 만들어 뛰어올라가지 않나 예의 주시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도깨비 무사장이 날아가 통제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탈해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틸러 는 지상에 대한 관심을 그와 공유하기로 했다. "그거 이름은 하늘이라고 합니다. 무사장님." 도깨비 무사장은 놀란 눈으로 틸러를 내려다보고는 곧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합니다. 달비 부위. 아무래도 정우가 신경 쓰이는군요." "대장군님께 맡겨두기로 했잖습니까. 그 딱정벌레 날개가 더 위험하 니까요." "예. 땅을 보고 있는 편이 낫겠습니다. 정우가 떨어지는 걸 보면 저 도 모르게 날아오를지도 모르니까요." "규리하공 아가씨는 안전하실 겁니다. 대단한 기량이군요. 저는 계 단을 만드는 것이 고작입니다. 하늘누리까지 걸어올라가면 다리가 뻐 근하지요. 저 분이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군요." 틸러의 말을 들었다면 정우는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 자 신도 자기가 만들어낸 것을 볼 수 없었으니까. 정우가 자행하고 있는 일을 엘시가 알았다면 즉각 산책을 중단할 것을 종용했을 것이다. 시 각적 신호는 상상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다. 하지만 엘시는 정우가 그런 것 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방도가 없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허공이었기에 튀어올라 발을 적시는 빗방울은 없었다. 또한 빗줄기가 땅을 때리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우산 을 두드리는 소리와 엘시의 어깨를 때리는 소리는 귀에 거슬린다기보 다는 답답한 적막을 감추는 음악 같았다. 빗속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한 공간 속에서 정우가 말했다. "대장군님의 몸종과 틸러가 서로 종형제간이라고 들었어요." "엄밀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를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예. 내가 알기로 옛날 달비 가문의 몇몇 사람들이 시모그라쥬 대사 였던 데오늬 달비를 따라 시모그라쥬에 정착했습니다. 이레는 그 사 람들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이레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 나가들 사 이에서 자랐습니다. 틸러와 이레가 만났을 때 두 사람의 관계를 알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틸러와 이레는 5분만에 상황을 간략화 하는데 동의했습니다. 두 살 많은 틸러가 종형이 되고 이레가 종제가 되기로 했습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님과 저랑 비슷하네요." "예?" "5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장군님이 제 혼례를 주관해주시기로 결심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쓰시진 않으셨던 것 같아요." 정우의 작은 신장 때문에 곁에서 걷는 엘시가 볼 수 있는 것은 빨간 우산뿐이었다. 엘시는 고개를 돌려 하얀 비안개를 바라보았다. 그곳 어딘가에 가장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해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함부로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것은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정우는 걸음을 멈췄다. 정우는 엘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약속 못 지키게 되었다. 하시라고 드린 말인데요." 스카리 빌파가 내린 결정은 사안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을 놀라게 하고 엘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율형부에서 발케네공의 요청에 대한 검토를 끝내기 전 스카리는 기습적으로 정우에게 구혼장 을 보냈다.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은 특별한 논평을 내진 않았지만 율형부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엘시 에게도 그러했다. 엘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정우와 결혼하라고 요구했던 스카 리가 왜 갑자기 정우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아버지의 강요 를 이길 수 없어서? 엘시가 아는 스카리 빌파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 다. 엘시는 스카리에게 직접 찾아가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약혼녀가 된 여인을 공공연히 사랑하던 그 행동은 뭐였습니 까. 약혼녀를 지키지 못한다고 그 남자를 추잡한 소인배로 규정하던 그 행동은 뭐였습니까. 아버지의 바르지 못한 욕망을 이루어주기 위 해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당신이라는 사람 의 깊이입니까. "정우. 당혹하지 않길 바랍니다. 어딘가에 당신과 내가 결혼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우는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당혹스러운 말이니까. 엘 시를 외면하기 위한 정우의 선택은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 예. 그런 이야기 들었어요." 엘시는 정우를 따라걸으며 말했다.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이 당신이나 나의 의견엔 아랑곳하 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만, 나는 다른 것도 아닌 반려를 다른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결정할 생각 은 없습니다. 내게는 내가 선택한 약혼자가 있습니다." "탈해가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어요. 저, 그 분이 겪고 계신 일에 대해서는 정말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내 약혼자는 제국의 사랑 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형 생활은 그녀에게서 제국의 사랑 을 회복할 기회도 박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약혼자를 대신하여 그 녀에 대한 제국의 사랑을 되찾을 생각입니다." 엘시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정우는 열심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 다. 하지만 정우는 엘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우는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엘시의 말이 계속되길 기다렸다. "그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내 약혼자를 대신하는 일이니까요. 그 래서 나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대행인으로 하여금 당신의 혼례를 주관 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약속을 어기는 일이라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발케 네공이 청혼서를 보내는 바람에 내 입장이 우습게 되었군요. 당신에 겐 내가 막상 일이 닥치자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 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만약 당신이 바란다면 내가 직접 그 것을 주관하겠습니다." "대장군님이 저 때문에 지체하신다면 약혼자께서 이해하실 수 있으 실까요?"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할 작정인지 알지 못합니다. 알려주지 않았 으니까요." "왜죠?"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을 성공한 후에도 제국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정우는 질문을 더 참을 수 없었다. "저, 대장군님?" "말씀하십시오." "대장군님도 제국인데요." "예?" 정우는 우산을 다른손으로 바꿔쥐었다. 그리고 조금 후 그것을 다시 두 손으로 쥐었다. 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대장군님도 제국이에요. 저도 그렇고, 대장군님의 약혼자인 부냐 헨로도 그렇지요. 모든 것이 다 제국이지요. 설마 대장군님은 모든 사람이 그 분을 사랑하게 되길 바라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건 전 설 속의 나늬나 가능한 일일 텐데요. 어, 혹시 황제 폐하라고 말씀하 실 것을 제국이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그렇습니다만 차이는 없습니다. 폐하의 의지가 곧 제국의 의지니까 요." "예? 아, 예…… 그렇지요."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모르겠어요. 손은 음식을 입에게 주지요. 그것이 결국 손을 건강하 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니까. 음식을 집을 줄 안다고 해서 그걸 붙 들고 있으면 결국 자기만 손해지요. 그게 맞을 테지요. 어, 흠. 잘 모르겠어요. 저, 대장군님?" "말씀하십시오." "약속 못 지키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해주실래요?" 엘시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정우의 얼굴을 살폈지 만 정우는 엘시의 말을 기대한다는 표정일 뿐 알아볼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는 보여주지 않았다. 엘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약속은 지켜질 테니까." 엘시는 자기도 모르게 입 근처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까스로 좌절감을 억누른 엘시는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곳에 남아서 당신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정우는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예? 어머, 그게 아닌데요?" "무슨 말씀입니까?" 정우는 손을 바쁘게 흔들며 말했다. "오해하셨네요. 대장군님. 약혼자를 위해 떠나세요. 그리고 원하시 는 모든 것을 얻으신 다음 제 결혼을 돌봐주세요. 발케네공은 제가 처리할게요." 엘시는 기막힌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도깨비들 사이에 서 자랐다지만 암살공을 이렇듯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탈 해의 조력을 믿는 건가? 하지만 엘시에겐 암살공의 권력 철학과 그 실천 의지에 대한 강의를 할 시간이 없었다. 정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 오른발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녀의 발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톡톡 두드리듯 움직였다. 의아한 눈으로 그 동작을 바라보던 엘시는 조금 후 눈을 크게 떴다. "아!" 정우가 말했다. "예. 대장군님.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말을 잘 못했네요." "그럼……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은……" "예.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성 안쪽에선 라수의 방, 성 바깥에서는 환상계단. 발케네공이 아무리 기민한 도둑이라도 이런 신부를 훔치긴 어려울 거예요." 엘시는 틀림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그 재주를 - 절대로 즐 거운 표정은 짓지 않은 채 - 인정하는 발케네의 도둑들이라도 이런 존재가 대상이라면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은……" "저 결혼하기로 결심했어요. 데라시 백작님이 좋아하시겠어요." "결심하셨다고요?" 정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예. 대장군님. 믿고 싶어졌거든요." "믿고 싶어졌다고요?" 정우는 크게 웃었다. 자신의 바보 같은 말투를 깨달은 엘시는 얼굴 을 붉혔다. 정우는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비웃는 것 아니에요. 대장군님이 그러시니까 정말 어울 리지 않아서 그만 웃었어요. 음. 예. 저는 이 바깥 세상을 믿고 싶어 졌어요. 이 바깥 세상이 정말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몰지각으로 대화 하고 탐욕으로 악수하는 곳이라면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훨씬 바빴을 테죠. 하지만 모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영원히 소멸시킬 수 있는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실제로 나선 것은 단 한 번뿐이었어요." 섬뜩한 가정에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세계 파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치곤 상당히 한가로운 태도로 정우는 우산 손잡이에 매달아 둔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바우 성주님은 제게 이곳에서 남편을 찾아 결혼하라고 하셨어요. 이곳이 정말 엉망진창이라면 그러실 리가 없지요. 틸러도 말했어요. 피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피해버리면 진짜 좋은 것을 놓칠지도 모른 다고요. 예. 매달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찾아오고 매일 성채매장자가 출동해야 될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는, 제 소견이 얕아서 아직 찾 아내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을 거예요. 정말 좋은 것. 시시하지 않은 것. 그것은 쉽게 사라지는 킴들의 특징 때문에 찾기 어려운 것일 거 예요. 킴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기 때문에 잠시 옆으로 치워둔 것일 지도 몰라요. 저는 그게 뭔지 알고 싶어졌어요. 궁금해요." 도깨비의 불도, 레콘의 강한 힘도, 나가의 불사체도 가지지 못했지 만 못 가는 곳이 없는 인간. 항상 움직이기에 거꾸로 어디에도 없다. 정우는 인간을 보살피는 신이 어디에도 없는 신이라는 것은 대단히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저는 그런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발케네공 은, 미안하지만 제외. 이런 말 함부로 하면 안되겠지만 시시한 분 같 아요." 멍한 기분 속에서 엘시는 자신도 스카리 빌파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엘시는 낯선 신체 반응을 느꼈 다. 마지막으로 경험한 것이 언제인지 떠오르지도 않는…… 웃음. 엘시는 자신이 웃으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엘시는 그것이 굉장히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웃더라. 엘시는 포 기했다. 정우가 말했다. "하지만 결혼은 할 테고, 그 결혼은 대장군님이 주관해주셨으면 좋 겠어요. 약속이니까." "그렇다면, 제게 시간을 주시는 겁니까?" "예. 다녀오세요. 빨리 다녀오시라고 따로 부탁할 필요는 없겠지요? 약혼자 분을 위해 빨리 다녀오실 테니까…… 아." 말을 하던 정우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엘시는 비가 그친 것 을 깨달았다. 정우는 빙긋 웃었다. "출발 신호네요. 대장군님. 떠나셔도 되겠어요." 엘시는 그 말이 귓속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출발 신 호라고?' 정우는 우산을 옆으로 돌려 물기를 털어냈다. 우산으로 바 닥을 짚으려던 정우는 갑자기 자신의 동작에 놀라며 우산을 끌어당겼 다. 그 때문에 정우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휘청했다. 깜짝 놀 란 엘시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엘시가 정우의 두 팔을 움켜쥐었기에 정우는 가까스로 주저앉지 않 았다. 하지만 두 팔을 붙잡힌 정우는 똑바로 서지도 못했다. 어정쩡 한 자세로 선 정우는 어쩔 수 없이 엘시를 올려다보았다. 엘시는 그 녀를 끌어올렸다. 똑바로 선 정우는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와, 멍청이! 우산을 짚으려고 했어요. 우산은 받치지 못할 텐데." "아, 예. 그런 걱정을 하셨군요." "잡아주셔서 고마워요. 이 팔은 감사의 뜻으로 드릴게요." 깜짝 놀란 엘시는 황급히 정우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 동작이 뿌리 치는 것에 가깝다는 것에 또다시 놀란 엘시는 안절부절 못하며 정우 를 바라보았다. 고맙게도 정우는 씩 웃었다. "그럼 전 내려가볼게요. 떠나시는 것을 볼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 인사 드리죠. 다치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아, 저, 예. 감사합니다. 부냐도 당신에게 감사할 겁니다." 정우는 말없이 웃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은 뒤로 빙글 돌았다. 그녀를 받치고 있는 환상 구조물이 회전한 것이라 고 판단한 엘시는 그 놀랄 만한 응용력에 다시 감탄했다. 정우는 그 대로 규리하성을 향해 날아내려갔다. 곧 하늘누리로 돌아가야 했지만 엘시는 잠깐 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정우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녀의 모습이 무의미할 정도로 작아진 후 에야 엘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비가 그친 하늘에서는 구름 이 밝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출발 신호?"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그곳에서, 엘시는 작은 소리로 웃어보았 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 8챕터 시작합니다. 두근두근 다음 편 예고 : 톤베리 수백 마리를 때려잡아 음유시인 레벨을 높인 끝에 가까스로 아프리카 최고봉을 거니는 표범에 대한 장대한 서사시를 완성시킨 세 사람. 일격사를 주특기로 하는 톤베리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피닉스의 꼬리가 뭉텅이로 소모되었고 그 충격으로 파랗게 질린 피닉스는 푸른 포에닉스가 되었다는 믿지 못할 전설이. 어쨌건 세 사람은 환호하며 "올 포 원, 원 포 올!" 핵병기 탑재 이족보행형 전차를 지나쳐 지하 철로 들어선다. 전뇌공간 바깥을 향해 힘차게 달리는 지하철. 아련하 게 들려오는 노래. 기차는 은하수 건너서 밝은 빛의 바다로♪ 바깥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패턴을 망가뜨린 왕자를 위로하기 위해 폭주갈매기는 이웃집의 로토로를 찾아간다. 로 토 하나로 뭐든 해결하는 로토로는 로토 용지가 마침 떨어졌으니 그 걸 가져오면 왕자를 위로할 수 있다는 다분히 NPC적인 대사를 말한 다. 느닷없는 RPG 분위기에 휩쓸려버린 폭주갈매기는 로토 가게를 찾 아가는 간단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채 뒷산에 로토 용지를 가지고 있는 중간보스가 있을 거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뒷산으로 향한다. 그 런데 그를 추적하는 무리들이 있다. 몬스터에게서 획득한 소득에 대 해서도 국민연금을 징수하는 이 자들은 바로 강철의 연금공단! 폭주 갈매기는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어떤 소득도 끝까지 뒤진 다는 비밀 결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다음 편 '뒤져 클럽.' 많이 기 대해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8-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2-25 조회수 : 2097 피를 마시는 새 8. 아는 것과 우는 것 - 2 하늘누리에 있는 스카리 빌파의 집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다. 출세 를 꿈꾸는 젊은이나 제국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이들은 이 유 력자의 집에서 무엇인가를 얻거나 주고 싶어했고 스카리는 오는 손님 을 박대하지 않았다. 비록 스카리 빌파가 자신의 집에서 폭군처럼 군 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누구나 자신의 집에서는 어느 정도 그럴 권한이 있다. 그리고 스카리는 즐거운 폭군에 가까웠다. 분명 그는 손님의 취향이나 기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이 즐기 는 오락에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또한 스카리는 특정한 사람 들에게만 허락된 귀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떤 놀이라도 즐 거운 것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스카리도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이 마루 한켠에 놓여 있는 바둑판을 가리켰을 때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지만 내 집엔 손들이 많이 드는 편이야. 저건 그 사람들 가지 고 놀라고 놔둔 거야. 나는 바둑 둘 줄 몰라." 사라말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가르쳐드리지요." 스카리는 사양하려 했다. 하지만 스카리는 사라말이 저녁 늦은 시간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되새겼다. 하늘 누리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한두 번은 발케네공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이 젊은 대귀족을 찾아왔지만 사라말은 그렇지 않은 소수에 속했다. 스카리는 일단 사라말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 다. 또한 스카리는 파라말에게 배운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아보고 싶기도 했다. 이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파라말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대국에서도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 정도만 확인하기로 했다. 사라말의 바둑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그 동생의 기력에 비 춰보건대 형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흑돌을 쥔 사라말의 첫수는 스카리의 희망을 박 살냈다. 스카리는 도저히 응수를 떠올릴 수 없는 신묘한 수에 얼이 빠졌다. 사라말의 흑돌이 놓여있는 곳은 바둑판의 중앙, 천원이었다. "내가 바둑을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수가 괴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어. 나를 모욕하려는 거야?" "두십시오." 스카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라말을 바라보다가 홧김에 백돌을 내려놓았다. 우하귀 화점. 예의를 따르는 착점이다.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번째 수를 행했다. 스카리는 다시 충만한 황당 함을 느꼈다. "뭐하는 거지?" "움직였습니다." "놓은 돌을 어떻게 움직이나?" 사라말의 말대로 율형부사는 돌을 움직였다. 집게손가락으로 천원에 놓아둔 돌을 짚은 사라말은 그것을 위로 두 칸 밀어놓았다. 물론 윷 놀이에서나 가능할까 바둑에서는 불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사라말 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 돌은 하늘누리입니다." 화를 내려던 스카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사라말을 물끄러 미 바라보다가 백돌을 집어 우상귀에 내려놓았다. 사라말은 태연하게 흑돌을 집어들며 말했다. "이것은 규리하입니다." 스카리는 의식 속에서 바둑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날려보냈다. 진작 떠올렸야 하는 일이다. 스카리를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던 율형부사가 느닷없이 바둑을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올 리가 없다. 스카리는 백돌 을 들어 아무곳에나 내려놓고는 호기심에 찬 얼굴로 사라말을 바라보 았다. 사라말의 다음 수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율형부사는 스카리가 내려놓은 백돌을 집어들었다. 훔쳐갔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것을 좌 상귀 쪽에 내려놓은 사라말은 담담하게 말했다. "발케네입니다." 스카리는 한쪽 입매를 치켜 올려 소리없이 웃었다. 사라말은 발케네 라고 지목한 백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춘부장께서는 레콘과의 형평성 차원에서 이곳의 풍습 또한 용인될 거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일반화이며, 이곳 이외 의 장소에서 신부 절도가 일어날 경우 그것은 납치로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카리는 바둑판을 보지도 않은 채 돌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은 사 라말의 눈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 이외의 제국령이겠지." 사라말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율형부사는 규리하라고 명명한 흑 돌을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여기 법을 따라야지요. 각하께서 여기서 저 지른 신부 절도를 율형부가 처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 다." "그렇지 않은가?" 사라말은 아무 말 없이 하늘누리라 부른 흑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딱 소리나게 뒤집어 놓았다. 스카리는 이해했다. 락토는 율형부에 자문 요청을 보내는 품위를 보였지만 스카리는 정 우에게 직접 청혼서를 보냄으로써 율형부를 아예 배제시키고 이 건을 자신과 규리하의 문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율형부는 그것에 대해 화 를 내기 어렵다. 규리하는 제국령이 아니라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변 경백령이며 현재 그 자치권이 군정 당국으로 넘어가 있지만 그렇더라 도 그 결혼 풍습은 여전히 율형부의 관할이 아니다. 결혼 풍습은 명 백히 내정에 속하는 일이므로. 하지만 사라말은 스카리에게 하늘을 움직이는 제국의 이동수도가 가진 특징을 지적해 보였다. 사라말의 경고를 말로 바꿔보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당신이 아래에서 신부를 훔치는 것은 막지 못합니다. 하지만 훔친 신부를 데리고 올라오면 그 즉시 나는 유수부에 요청하여 당신을 납 치범으로 체포할 수도 있습니다. 규리하 상공에 떠있지만 하늘누리는 규리하가 아니니까. 천경유수의 분노를 사고 싶습니까?' 사라말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다. 스카리가 유수부원이라는 사실은 지알데 락바이 천경유수의 분노를 피하는 것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 을 것이다. 율형부와 마찬가지로 부라는 호칭을 쓰고 있지만 제국수 도 하늘누리를 총괄하는 유수부는 사도의 휘하에 있는 부서가 아니 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레이헬 라보 태위나 락신 치올 사도와 마찬가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위 관리이며, 신중함으로 유명 한 사도나 호방함으로 유명한 태위에 비해볼 때 이 삼고(三高)의 마 지막 일원은 별철 같은 엄격함으로 유명하다. 스카리 빌파는 자신의 상관이 태위나 사도도 아닌 율형부사에게 창피를 당하는 것을 결코 참아 넘길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최악의 경우 천경유 수는 그를 율형부에 넘길 수도 있다. 그리고 율형부의 수장 사라말 아이솔은 그 친동생도 평가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스카리는 백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왜 청혼서를 보냈는지는 묻지 않는 건가?" "그 청혼을 취소하십시오. 각하." 한 번도 이런 뻣뻣한 대답을 접한 적이 없는 스카리는 분노가 왈칵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스카리는 자신의 분노를 자제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관념에는 무관심하다. "네가 뭔데 취소하라느니 말라느니 하는 거냐." "각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비셀스 규리하의 시체입니까." "뭐라고?" 스카리는 턱을 경직시킨 채 율형부사를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사막 같은 메마른 눈으로 스카리를 마주보다가 갑자기 손을 움직였다. 딱! 바둑돌 내려치는 소리에 스카리는 움찔했다. 스카리는 창피함과 노여 움에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스카리의 신경줄을 한 번 호되게 퉁겨 놓은 사라말은 돌통에 손을 집어넣어 태연하게 바둑돌을 달그락거렸 다. 그 달그락거림은 입을 열려던 스카리를 침묵하게 했다. 스카리는 이 불가사의한 인물이 듣던 것 이상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인물임을 인정했다. 백돌을 집어든 스카리는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살피는 척 하며 말했다. "무슨 농담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사라말." "신부 절도는 거친 풍습입니다. 치명적인 무기는 금지되어 있지만 이 곳의 환경은 비셀스 규리하에겐 이미 치명적입니다. 여러 가지 이 유에서 그녀에게 해가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 런 자들 중 누군가가 신부 절도의 혼란을 틈타 비셀스 규리하에게 위 해를 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게 신부 절도를 포기하라는 거냐? 만일 끝내 그 짓을 하 면 납치범으로 처벌할 거라고 협박하면서?" "질문이 아닌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빌어먹을. 걱정마. 내가 보호할 테니까. 나도 죽은 신부를 원하지 는 않아. 당연한 거 아닌가!" 사라말은 다시 건조한 표정으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그 눈빛을 꾸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카리가 호된 말을 고를 때 사라말 이 갑자기 돌을 놓으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하늘누리에서 살인자 처벌이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뭐?" "하지만 폐하의 법은 그 형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투하형이지요. 하늘누리 바깥으로 집어던지는 겁니다. 교수형과 마찬가지로 눈을 가 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환상계단의 사용에 능숙한 죄인이 구 명을 도모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눈을 가리고 한 번 실험해봤습니다. 그 결과 시각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환상계단을 이용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상상력은 개 인적 편차가 심하고 극한의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 습니다. 그래서 율형부에서는, 물론 처벌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를 더 바랍니다만, 그 첫번째 투하형이 일어날 경우 다각도의 관찰을 행하 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만약 투하형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처형 방 식을 바꿔야 하니까요." 스카리는 자신이 나가였다면 일어선 비늘 때문에 옷이 갈기갈기 찢 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비로소 사라말의 뜻을 이해했다. 사라말은 누군가가 아이저 규리하를 위해 정우를 해치는 것을 염려 한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사라말이 정말 우려하는 것이 그것이라 면 투하형에 대한 이야기는 꺼낼 필요가 없다. 사라말은 스카리 빌파 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엘시 에더리가 정우와 결혼하여 규리하의 지 배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버지와 정우와 결혼할 생각 같은 것 은 전혀 없는 자신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잔인한 수단을 강구하지 말 라고. '각하께서 원하는 것이 비셀스 규리하의 시체입니까.' 스카리는 난폭한 미소로 사라말을 응시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언제나 과장되어 있기 마련이지. 그런데 자 네의 경우엔 일반론이 맞지 않는군." "각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무슨 말이지?" "풍문보다 못한 분이십니까, 아니면 풍문 이상인 분이십니까." "알게 될 거야." "기대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군. 네가 비셀스 규리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유는 뭐지?" 사라말은 어떤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저는 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카리는 당황했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대답이다. 사라말은 흑 돌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용근이 자라고 있습니다. 조만간 용화가 필 것입니다. 용인이 되려 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손길만 피할 수 있다면 용은 날개를 펼쳐 날아 오를 겁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마지막 용 아스화리탈 이후로 용 은……" 딱! 사라말은 바둑돌을 내리쳐 스카리의 입을 막았다. 스카리는 입 을 앙다문 채 사라말을 쏘아보았다. 사라말은 고개를 꾸벅였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그럼 이만 떠나겠습니다." 사라말은 경쾌한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스카리는 마당에 내려서는 율형부사의 뒷모습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사라말 아이솔은 자기 집이 나 되는 양 태평한 동작으로 걸어나갔다. 사라말이 떠난 후 스카리는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는 나타날 거라 예상했었다. 스카리는 데라시의 측근이나 그 쪽 계파로 알려진 누군가가 나타나서 정우를 죽이지 말라는 경고나, 혹은 다른 종류의 타협안을 들고 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라말 아이솔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모든 사람에게 불가해한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사라말은 그 때문에 어떤 계파에도 포함되지 않 는다. 스카리는 사라말이 사실은 데라시의 비밀스러운 측근이었다는 가설 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그 가설은 불합리했다. 데라시가 그저 경고 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비밀스러운 측근을 노출시킬 리는 없다. 예 상할 수 없는 의외의 인물을 보내어 강력한 경고를 전달한다는 전략 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사라말이라는 인물은 적합하지 않다. 그런 충격을 주고 싶다면 스카리의 계파로 알려진 누 군가를 보내는 것이 훨씬 충격적일 것이다. 스카리는 이것이 사라말 아이솔의 단독 행동일 거라고 판단했다. 단독 행동의 진의를 파악하 는 것은 어렵다. '용을 기다린다?' 스카리는 기괴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4년 동 안 몰래 파라말에게 바둑을 배우며 온갖 이야기를 다 들은 스카리는 사라말이 쟁룡해를 쟁해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들어 알고 있었다. 사 라말이 쟁룡해에서 빠져나온 용으로 지목하는 이는 엘시 에더리다. 치천제가 정우를 주고 싶어하는…… 순간 스카리는 기분 나쁜 충격을 느꼈다. '사라말은 황제의 전령인가?' 치천제는 누구와도 필요 이상의 친교를 두지 않는다. 황제의 최측근 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라는 사실은 황제의 친 교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한다. 데라시는 제국 북부에서는 자기 방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인물이다. 또한 아무런 관직도 가지고 있지 않 다. 비스그라쥬백이라는 작위는 가지고 있지만 영토를 벗어난 영주는 무력한 존재다. 황제의 곁에 있는 자들 중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 는 이들은 오직 이십이금군뿐이다. 그들의 무용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 스물두 명의 전사는 결국 황제의 개인경호원이다. 그런데 제국의 황제가 이토록 측근이 없는 상태에서 제국을 다스린 다는 것이 가능할까? 스카리는 그것은 매우 힘들거나 불가능한 일이 라고 생각했다. 비밀스러운 측근이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훨씬 이해 하기 쉽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측근 중 한 명인 사라말 아이솔이 정우 규리하와 엘시 에더리를 맺어주려는 황제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정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 합리적인 가설이다. 그리고 스카리 빌파는 그 가설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젊은 발케네공은 자신이 할 일을 이미 결정했고 그 결정을 끝까지 추구할 것이다. 스카리는 씩 웃으며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스카리는 얼어붙었다. 사라말이 바둑판 위에 남겨둔 포석은 놀라운 것이었다. 가로로 길게 한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 쯤에서 상변 방향, 즉 스카 리의 방향으로 흑돌들이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신체를 이용한 야유 중 가장 초보적인 것을 도식화한 그 문양 앞에서 젊은 발케네공은 화 도 낼 수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황당함 속에서 스카리는 사라말이 역시 불가사의한 인물이라는 - 모든 사람들이 아는 - 사실만 되뇌었 다. 스카리의 집을 나온 사라말 아이솔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갈 바마리로를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하늘누리의 외곽까지 걸은 사라말 은 약간 복잡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빈민이나 부랑자가 없는 하늘 누리에서 뒷골목이란 그다지 음침한 장소는 아니다. 여느 도시의 뒷 골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하늘누리의 뒷골목은 음침 한 곳을 좋아하는 자유무역당에겐 약간 난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두 드러지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무역당은 결국 하늘누리 사무소의 건물 을 주위의 다른 건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꾸며놓았다. 하늘누리 사 무소에 비하면 세퀴라도의 자유무역당사도 훨씬 검박하다. 규모는 물 론 더 크지만. 방문 예고를 했기에 하늘누리 사무소장은 소장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유무역당의 말투는 대화를 빨리 진행시키는 것에 유리했 다. 사라말은 몇 분의 대화 끝에 용건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그 리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소장의 넋두리를 경청하는 것에 할애했다. 하늘누리 사무소장은 어떤 영지에서도 통과세를 내지 않는 자유무역 당이 왜 길에 대한 요금을 내야 하느냐를 놓고 제국 율형부사와 본때 있게 토론하고 싶어했다. 적당히 에두르는 말을 몇 마디,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호의라고 여 겨질 수 있는 말을 몇 마디 한 다음, 사라말은 상대로 하여금 호소가 지나쳐 역효과를 내게 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시점에 율형부사를 돌려 보내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그런 판단을 내리자마 자 사무소장은 지체 없이 사라말이 떠나게 해주었다. 사무소 밖으로 나온 사라말은 기지개를 켜면서 소장이 했던 말을 모두 잊었다. 사라 말은 다시 느릿하게 걸었다. 하늘누리의 최외곽에 도달한 사라말은 승강기를 탔다. 그리고 얼마 후 사라말 아이솔은 가시나무 군단의 부위 한 명을 곤란에 빠트렸다. 틸러 달비는 성채매장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일 에 상당히 능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틸러는 사라말 아이솔 같은 고위 대신이 수행하는 인원 한 명 없이 규리하성 정문에 나타나 자신을 불 러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허락을 받으셨습니까?" "아니오." "규리하공의 초대장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오." "저를 난처하게 하시는군요. 부사님." "나를 돌려보낼 거요?" 특이한 화법이다. '아주 중요한 용건으로 급히 찾아왔다'느니 '나를 돌려보내면 후회하게 된다' 같은 말이라면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돌려보낼 거냐고 묻는 것에는 낯선 종류의 자신감이 엿보였 다. 틸러는 결국 그를 정우에게 안내하기로 결심했다. 제국의 율과 형을 총괄하는 고위 대신이 무의미한 이유로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라 는 상식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틸러는 그 자신감의 정체가 궁금했다. 정우의 방으로 다가가던 틸러는 정우가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고 간혹 웃음 도 들려왔다. 사라말을 밖에 세워둔 틸러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조 금 후 문이 다시 열리며 사라말은 방안으로 안내되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단신의 소녀가 똑바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편 창가쪽에는 도깨비 무사장이 손에 곰방대를 든 채 서있었다. 사라말은 소녀에게 인사했다.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입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뵙게 되었습니 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부사님.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입니다. 정우 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도깨비 무사장과 율형부사는 면식이 있는 관계이기에 소개가 필요없 었다. 정우는 율형부사를 의자로 안내하고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사 라말은 부속실로 들어가려는 틸러에게 말했다. "아무 것도 가져올 필요 없습니다. 곧 돌아가야 할 테니까요." 틸러는 정우를 바라보았고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말했다. "저와 무사장님이 배석해도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불편하다는 대답을 들으면 틸러는 유감이라고 말해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사라말은 상관 없다고 말했다. 틸러는 사라말의 뒤편에 섰다. 사라말은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각하. 저는 지금 자유무역당 하늘누리 사무소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각하께서 자유무역당에 아무런 요청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케네공의 신부 절도에 대응하기 위해 외조 부님의 현책을 빌릴 생각이 없습니까?" "외조부님이오? 지테를 시야니 당주님 말씀이죠? 글쎄요. 한 번 뵙 지도 못한 분이고 서로 내왕도 없는 관계라 제게는 남 같은 분이신데 요." 정우는 말을 끊었다가 자신의 설명이 좀 짧다고 여긴 듯 다시 말했 다. "분명히 그 분은 제 어머니의 아버지지만 저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르고 자랐어요. 전 제 가족들이 즈믄누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아, 여기도 한 명 있고요." 정우는 몸을 돌려 탈해에게 손을 흔들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탈해 는 머리 위에 손 모양의 도깨비불을 만들어 그것을 좌우로 흔들었다. 정우는 웃는 얼굴로 사라말을 돌아보았다. 사라말은 웃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모님이신 굴도하 남작부인께도 연락을 하시지 않으셨겠 군요." "예. 그 분들은 제 아버님이 제국군과 싸우는 동안에도 아무 연락을 하시지 않으셨어요. 아버님이나 제게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데요." "세퀴라도의 외조부님은 자유무역을 위해 어떤 사람과도 원한을 만 들지 않으려 애쓰시는 분이시고 판사이의 고모님은 독립을 지키는 것 에 모든 열의를 쏟고 계시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을 텐데요. 혹 발케네공이 각하를 훔쳐가도록 내버려둘 작정 이십니까?" "저, 괜찮으시다면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가 뭔지 말씀해주시겠어 요?" 정우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사라말 아이솔의 뒤편에 서 있던 틸러가 참 잘했다는 손짓을 해보였던 것이다. 틸러 또한 율형부 사가 밤중에 나타나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사라말은 말 했다. "각하와 결혼하는 남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십니까?" "예. 어떤 좋은 친구가 설명해줬어요. 황위 계승에 관여할 수 있는 정치적 두억시니가 출현하게 되는 거라고 하더군요." "이해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은 신부 절도가 신부 살해로 바뀌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시겠군요." 채 몇 초도 지나기 전에 틸러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다. 율 형부사가 암살자라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라말이 신부 살해를 언급한 순간 틸러는 요란한 동작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 동작은 정우와 탈해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놀란 모습 을 본 사라말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뒤에 있는 부위는 이해하신 것 같군요. 각하께선 어떠십니까." 정우는 두 손을 들어 틸러에게 까딱거려 보였다. '진정해요. 틸러.' 이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던 틸러는 칼자루를 놓았다. 그것을 확인한 정우는 사라말에게 말했다. "신부 살해요? 그건 신부 절도보다 더 무섭게 들리네요. 제가 어떤 남자에게 거대한 권한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누군가가 저를 제거한 다는 뜻인가요?" "그런 뜻입니다. 각하.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남동생의 칼에 죽을 뻔한 이후부터 그런 일에 놀라지 않기로 했어 요." "유익한 결심이십니다." 틸러는 또 하나의 괴상한 화법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유감이라고 하지 않나?' 정우는 이상한 것을 못느끼는 듯 빙그레 웃었다. 사라말 이 말했다. "저는 각하가 사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건 훌륭한 이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조처를 취하길 바라세요?" "거기에 몇 가지 덧붙이길 바랍니다." "훌륭함이 바래지고 있는 듯해요." "붉은색에 분홍색을 더한다고 해서 더 붉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반 대죠." "그게 문제군요. 할 수 없네요." 틸러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정우와 사라말은 대화가 통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 광경은 무섭기까지 했다. 두려움 속에서 틸러는 자 신이 '규리하공의 세면식'에 덧붙여 '규리하공과 율형부사의 대화'라 는 이야깃거리를 하나 더 얻게 된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두번째 이야깃거리를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해야 되는지 알 수 없 었다. 이곳에 목격자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틸러는 재빨리 탈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틸러는 이야깃꾼의 희망을 포기했 다. 정우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라수의 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낮에 보여주 신 일도 전해들었습니다. 그것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들도 극복할 수 있는 암살자라면 자유무역당원이나 먼곳에서 온 몇 명의 판사이 병사들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텐데요." "많은 사람은 많은 명분을 만듭니다." "살인자를 자유롭게 하는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라말은 빙긋 웃었다. "용감하신 분이군요." "고맙습니다." "제 수단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꿈 꾸세요. 정우." "어머! 고마워요. 좋은 꿈 꾸세요!" 거의 최면에 걸릴 것 같았던 틸러는 조금 늦게야 사라말을 문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틸러와 사라말이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정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에서 일어선 정우는 창가로 다가갔다. 도깨비 무사장은 뻐끔이 를 물고 온갖 감정이 담긴 눈으로 정우를 바라보고 있엇다. 정우는 두 손바닥을 입 앞에 모아붙였다. "탈해." "응?" "나 좀 안아줘." 탈해는 두 팔을 벌렸다. 정우는 빙글 돌아 탈해의 배에 등을 기댔 다. 어깨 앞으로 늘어진 탈해의 두 손을 서로 깍지끼게 한 정우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센범 폭포처럼 울 것 같은데 울고 싶진 않 거든." "조금 전의 그거 슬픈 이야기였어?" "아주 많이 그래." 탈해는 어째서 슬프냐고 묻지 않았다.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아냈어?" "응. 믿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믿어볼 거야. 그래도 네가 있어서 정 말 좋다." 탈해는 울고 싶어졌다. 정우의 표현처럼 센범 폭포 같이. 네가 있어 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우라는 사실은 즈믄누리의 무사장 탈해 머리돌에겐 일종의 경이다. 물론 그에게 태연히 기대고 있는 정우의 모습 또한 작은 기적이다. 탈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네가 결혼한 다음…… 남편을 얻게 된 후에는…… 그렇게 말 할 수 없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맙소사. 네가 결혼한다니. 네 남편은 용서하지 않겠지……" "쉬. 그만. 내가 대금 불어줄게." 탈해의 품에서 빠져나온 정우는 대금을 집어들었다. 탈해는 입을 다 물었다. 제국 북부의 태양에도 어느덧 봄빛이 물들고 있었다. 계절 감각이 무딘 사람들도 조만간 대청소와 옷정리와 나뭇가지의 새순, 그리고 아라짓력 31년의 봄이 올 것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나본의 아침을 비추고 있는 햇살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말을 타고 그 아침을 가로지르고 있는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봄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입 안에 잔뜩 집어넣은 도깨비지와 우울함을 동시에 질겅거 렸다. 며칠째 지켜온 금주가 하필이면 대장군이 도착하기 전날 깨졌다는 사실은 니어엘 헨로 수교위를 우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며칠 동안 계속된 금주 탓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 다. 그녀는 한 잔의 술이 주는 놀라운 축복을 신뢰하는 사람이고 일 반적으로 그녀의 믿음은 타당하다. 한 잔으로 끝날 수만 있다면 술은 좋은 의사고 친구이며 잠동무다. 하지만 니어엘은 레콘의 한 잔을 마 셔버렸다. 그 정도의 술은 니어엘의 익일 활동에 아무 지장도 주지 않지만 입에서 술 냄새가 풍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니어엘은 다 씹은 도깨비지를 뱉은 다음 품속에서 도깨비지를 꺼냈 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본 니어엘은 나나본의 태수관이 가깝다는 것 을 깨달았다. 니어엘은 울상이 된 얼굴로 도깨비지를 도로 쑤셔넣었 다. 마침내 태수관이 나타났을 때 니어엘은 취궁을 연마하던 중이라 는 설명은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들릴까 하는 망상에 빠졌다. 태수관 앞에 도착한 니어엘은 말에서 내렸다. 말고삐를 쥔 채 정문 을 통과하려던 니어엘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위병에게 다가갔다. 태 수관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있는 그녀의 부하는 다가오는 상관에게 경례했다. 그 경례를 받아준 니어엘은 입술을 죽 내밀었다. "유후!" "……뭐하시는 겁니까. 중대장님." "뽀뽀하자는 거 아냐. 술 냄새 나?" "조금 납니다." "미치겠군." 수전사인 위병은 빙긋 웃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중대장님. 안쪽의 냄새가 장난이 아 닙니다. 중대장님이 휘포리에서 나는 향수를 전부 다 뒤집어쓰고 가 셔도 그 향을 맡지 못할 정도입니다." "뭐? 태수관의 화장실에 사고라도 났나?" "아니오. 레콘 네 명이 있습니다. 대부분 흙먼지 때문에 말이 아닙 니다." "아, 맞다! 그래. 그 레콘들도 도착했나?" "어제 저녁부터 오늘 새벽에 걸쳐서 한 명씩 도착했습니다. 별관쪽 으로 가십시오." 니어엘은 그 소식에 고무되어 태수관 별관쪽으로 걸어갔다. 다가가 던 니어엘은 폭풍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아무래도 레콘적 규모의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간 니어엘은 구 원적 향기의 주인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위병은 네 명의 레콘이라고 말했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세 명이었 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땅에 엇갈리게 꽂아둔 두 자루의 창 을 베개 삼아 누워있는 레콘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드러누운 것인지 몸에 흙먼지도 제대로 털지 않은 상태였다. 시선을 조금 돌리 자 별관 계단에 걸터앉아있는 검은 레콘이 보였다. 그 검은색에 잠깐 주춤했지만 니어엘은 그가 지멘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 다. 별관 지붕에 걸쳐놓은 엄청난 크기의 도끼창 덕분이었다. 세번째 레콘은 별관 마당 한가운데서 니어엘이 들은 폭풍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상체 주위에서는 무엇인가가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속도 때문에 무슨 무기인지 알 수 없었다. 말이 겁먹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니어엘은 소리를 질렀다. "실례합니다! 거기, 뭔지 모를 것을 돌리는 분. 잠깐 멈춰주시겠습 니까?" 레콘은 그 소리를 듣고는 손을 멈췄다. 니어엘은 그 무기가 철저(鐵 杵)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멘의 망치에도 뒤지지 않을 우악스러운 무기였다. "그 소리 때문에 제 말이 놀랄 것 같습니다." 레콘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철저를 땅에 짚었다. 도끼 창을 가진 검은 레콘이 말했다. "누구냐?" "니어엘 헨로 수교위입니다. 엘시 에더리 대장군을 만나러 왔습니 다. 여러분은 대장군님의 소환을 받아 오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 검은 레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론솔피다." 철저를 돌리던 레콘은 자신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주테카다. 저기 쌍창 베고 누워있는 친구는 준람이야. 나발칸에서 달려와서 오늘 새벽에 도착했거든. 그래서 잠든 거야. 내가 제일 빨 리 도착했지. 그래서 네 이야기 들었어." "제 이야기라고 하셨습니까?" "지멘을 잡을 뻔했다지?" 론솔피가 벼슬을 세웠다. 그리고 쌍창을 베고 누워있던 준람은 갑자 기 상체를 일으켰다. 주테카가 놀라서 말했다. "준람?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는 줄 알았다고?" 준람은 피곤해보였지만 다시 누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벼슬을 쓸어만진 준람은 땅에 꽂아둔 창을 하나씩 뽑았다. 말뚝이 뽑혀나오 는 것 같았다. 두 자루의 단창을 포개어 무릎에 놓은 준람은 니어엘 을 바라보았다. "지멘을 잡을 뻔했다고? 듣고 싶군." "괜찮으시다면 모두 모인 곳에서 하고 싶습니다. 여러 번 말하면 번 거로우니까요. 네 분이 계신다고 들었는데 한 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고 대장군님은 안에 계십니까?" 니어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먼저 나타난 것은 별관 뒤편에서 돌아나온 레콘이었다. 대단히 큰 벼슬이 얼굴 옆으로 늘어지고 있었다. 그 레콘은 쇠몽둥이라고 불러 야 될 것 같은 병기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칼과 비슷 했다. 최소한 칼자루처럼 보이는 자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칼날 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육중한 삼각 기둥이 붙어있었고 그 끝부분은 삼각뿔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레콘은 별관 안에 있다가 뒤쪽의 더 큰 문을 통해 나온 것 같았 다. 앞쪽의 문은 레콘이 통과하기엔 좀 작았으니까. 큰 벼슬을 가진 레콘이 별관 앞에 서자마자 그 작은 문이 열렸다. 니어엘은 갑자기 가슴이 벅차는 것을 느꼈다. 밖으로 걸어나온 것은 엘시 에더리였다. 니어엘을 발견한 엘시는 똑바로 섰다. 오래된 기억 이 갑자기 현실의 옷을 입고 돌아왔다. 니어엘은 말고삐를 놓고 우아 하게 경례했다. "에더리 교위님." 엘시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하급자군." 니어엘은 술을 저주했다. 술의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 뭔가 복잡했던 하루. 땡!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8-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2-26 조회수 : 1810 피를 마시는 새 8. 아는 것과 우는 것 - 3 조금 후 엘시의 몸종인 이레가 찾아와 그들을 태수관 옆에 있는 공 회당 건물로 안내했다. 공회당 안쪽에서는 얼마 전 무슨 행사라도 있 었는지 먼지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레콘들이 마음놓고 움직일 수 있 을 만큼 천장이 높았다. 그래서 더욱 휑뎅그렁했다. 단상 가까운 곳에서는 나나본 태수로 보이는 인간이 수행인 쯤으로 보이는 인간들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작고 상당히 야 물게 보이는 태수는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가 말했다.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다." "나나본 태수 무스키 드레입니다. 레콘들과 그들의 무기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여기뿐이군요. 을씨년스러운 곳이라 죄송합니 다. 각하." "아니. 느닷없이 찾아온 처지에 이렇듯 배려해주니 고마운 것은 이 쪽이지." 무스키 드레는 엘시에게 목례해 보이고는 니어엘에게도 목례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각하. 이쪽에 차리는 것이 좋으시겠습니 까?"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군. 이곳에 거친 음식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 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지만 양은 좀 많이 부탁해야겠군. 론솔피. 요 즘도 예전처럼 드시지요? 예. 이레. 가서 음식 차리는 분들을 돕도록 해라." 이레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태수와 함께 물러갔다. 엘시는 시간 낭비 를 하지 않았다. 태수가 떠나자 엘시는 단상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갔 다. "각자 편하게들 앉으십시오. 누워서 들어도 좋습니다." 레콘들은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털썩털썩 주저앉았고 론솔 피는 옆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니어엘도 바닥에 앉았지만 준람은 일어서서 벽에 기대섰다. 엘시가 그를 바라보자 준람이 말했다. "앉으면 졸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이렇게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외에도 야 리키와 그을린발에게 연락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군요. 그을린발 은 그의 코끼리를 떠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켄테롭에서 오느라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야리키는 현재 소식이 불분 명하군요. 혹 소식을 아는 분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엘시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상황 설명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일명 황제사 냥꾼으로 알려져 있는 레콘 지멘을 알 겁니다. 그 자는 지난 6년 동 안 제국 전체를 주유하며 수많은 강도, 방화, 살인을 저지른 파렴치 한 자입니다. 주테카라면 아마 정의의 적이라고 표현하겠지요. 여러 분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자의 숙원 또한 공감하기 힘든 것입니다." 니어엘 헨로는 지멘의 숙원을 평가하려 하지 않던 뭄토를 떠올리며 레콘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레콘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면 그것은 니어엘이 파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을 것이다. 레콘들 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엘시가 말했다. "레콘과 그의 숙원 사이에 끼여들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들은 나를 알 테고, 그렇다면 내가 그 말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것 도 알 겁니다. 하지만 타인의 숙원에 대한 존중보다는 내 것을 지킬 권한이 우선입니다. 철의 침묵을 약속했던 티나한과 즈라더 같은 희 귀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여러분들도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드는 일을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내 황제와 제국을 지키기 위해 그 자를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온 것은 내 의지를 이해했기 때문이라 믿고 앞으 로 더 이상 이 말을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앞으 로 아무리 몸이 힘들고 깃털이 뭉쳐져 괴롭고 피 묻은 벼슬에 꼬이는 파리 때문에 슬퍼도 우리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냐는 말은 하지 마십 시오. 그러려면 지금 돌아가십시오. 물론 그 경우에도 나는 정중하게 그를 보낼 것이고 내 우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을 겁니다." 주테카는 사납게 웃었다. 다른 레콘들도 엘시의 말을 따라 떠날 생 각은 없어 보였다. 일어서서 떠나는 레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엘시 는 계속 말했다. "이 추적에 소모되는 비용은 전액 내가 지불할 겁니다. 그리고 지멘 을 잡을 경우 그에게 걸린 현상금은 주테카가 가질 겁니다. 론솔피와 준람. 당신들은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다른 것을 원한다면, 예를 들어 현상금을 원한다면 주테카가 가지 는 것과 똑같은 액수를 칼리도에서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론솔피?" "그 녀석이 도끼 영감을 죽였다는 것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왜 내게 그 이야기를 전했는지 알아." "나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다만 정보를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어쨌든 이제 이십이금군이 스물한 명이 되었잖아. 젠장. 실력이 문 제가 아니라 숫자가 다 차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이야기야. 이제 결원이 생겼으니 즈라더를 죽인 지멘을 잡아 가면 가능성이 높겠지. 나는 그걸로 됐어. 하지만 만약 황제가 네게 나에 대해 물어보면 이야기나 좀 잘해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준람?" 준람은 졸린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 은 채 말했다. "그 녀석을 잡은 다음 발란카로 잠시 데려갈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센시엣 특수수용소로 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위험한 자이니만큼 최대한 빨리 그곳에 보내야할 겁니다. 하지만 만약 지멘 을 발란카 가까운 지역에서 체포할 수 있다면, 혹은 센시엣 특수소용 소로 가는 길에 그곳을 들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애쓰겠습니다. 만족하시겠습니까?" "괜찮군." "란쉐는 잘 있습니까?" 준람은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의 아내 이름을 엘시가 기억하고 있 다는 것이 더 놀랍긴 했지만, 준람은 엘시가 다른 이름을 말하려 했 던 것이 아닌가 의심해보았다. 엘시의 눈을 본 준람은 그 생각이 맞 다고 생각했다. 엘시는 고라이의 안부를 묻는 대신 첫째 부인이 그녀 를 잘 보살피고 있냐고 물은 것이다. 준람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 했다. "잘 있어."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쵸지. 나는 당신의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 습니다. 고맙게 와주셨는데 무엇을 드려야할지 모른다는 것은 난처한 일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거대한 벼슬을 가진 레콘 쵸지는 싱긋 웃었다. "친구. 너는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지 않나." "나늬 같은 여자라면 내 능력 밖입니다." "그럼 됐어. 기분전환, 생사전환. 둘 중 하나겠지. 벼슬 찢어지는 기분이나 맛보게 해줘." 엘시는 가만히 쵸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쵸지가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지멘은 난폭자입니다. 용맹한 금군 즈라더도 그의 망치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주테카가 의아한 얼굴로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엘시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그 사실에 주눅들거나 겁먹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잘 압 니다. 나를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혹 내가 인질이 되거나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나 대신 자신을 먼저 보살피십시 오. 그것을 약속해주지 않는 사람은 데리고 가지 않겠습니다." 주테카가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그건 정의가 아냐. 엘시." "정의에 대해 당신과 토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테카. 약속하기 어렵다면 돌아가주십시오." "그런다고 돌아가면 그게 더 웃기는 일이지. 난 남겠어. 그리고 약 속도 못해." "고집을 부리시는군요." "되도록 네 말을 고려하겠다고 약속하지. 그럼 됐나?" 엘시는 주테카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약속을 받아내 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임을 아는 엘시는 포기했다. 엘시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론솔피는 가볍게 "약속"이라고 말했고 준 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쵸지는 "멍청이를 돕는 건 시간 낭비지."라는 말로 약속했다. 엘시는 그 정도의 반응이나마 이끌어낸 것도 다행이 라고 생각하며 니어엘 헨로에게 말했다.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마지막으로 지멘을 목격한 자네 이야기를 좀 듣고 싶군." 니어엘은 난감했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틀림없이 레콘들을 불쾌하게 하거나 화나게 할 만한 내용이 섞이게 될 것이다. 니어엘은 모호한 용어나 돌려 말하는 용어들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이 담긴 함지를 든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레콘들 중 상당수가 입 맛이 달아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음식을 준비한 나나본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건성으로 음식을 먹는 레콘들을 보던 니어엘은 이 자리에서 물러나 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 생각을 엘시에게 전하려 할 때 엘시가 그녀를 불렀다. "헨로 수교위. 잠시 밖에서 나 좀 볼까." 그리고 엘시는 공회당 밖으로 나갔다. 니어엘은 이 우연에 놀라워하 며 그를 따라 나갔다. 밖에서는 엘시가 눈을 비비고 있었다. 니어엘이 가까이 다가가자 엘 시는 조용히 말했다. "딱정벌레를 타고 한참을 날아왔더니 피로하군. 눈을 조금 붙였는데 도 말이야." "오늘은 푹 쉬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교…… 대장군님. 나나본 태수님께 폐를 끼치는 것이 싫으시다면 저희 중대 본부로 안내하겠습 니다." "이건 군사 작전이 아니야. 어쩌면 앞으로 많은 봉토를 드나들지도 모르지. 처음부터 군사 작전이 아님을 명확하게 해두고 싶군.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지멘이 확실히 강을 건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마루젤의 상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모습으로 단단히 굳 어있었지만 분명히 배를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엘시는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이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고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나는 6 년 전의 그 때 일만 생각했어. 이번에도 물이 내 강력한 원군이 되어 줄 거라 믿었지. 하지만 지멘은 그 6년이 지나는 동안 뭔가 엄청난 것이 되어있는 모양이군." "대장군님은 해내실 겁니다." 엘시는 니어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대장군이 왜 이 일에 나선 건지 묻지 않나?" 니어엘은 생각했다. 제발 지금은 술 냄새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는 데. 그렇다면 최악이잖아. 니어엘은 엘시에게서 고개를 약간 비틀어 말했다. "제 부족한 동생을 위해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군님." 엘시는 무엇인가에 찔린 사람처럼 숨을 빠르게 들이쉬었다. 그는 니 어엘을 쳐다보았고 니어엘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늦겨울의 해보다는 봄햇살에 더 가까운 태양이 땅을 따스하게 데우 고 있었다. 졸기 좋은 햇빛이다. 술 냄새를 걱정하는 니어엘처럼 엘 시는 자신의 졸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니어엘의 말을 똑똑히 듣 고 싶었다. 니어엘이 말했다. "저는 대장군님을 압니다." "네가 지멘을 잡으려 했던 것은……"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니어엘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엘시가 몇 십 시간 전 규리하에서 본 어떤 웃음을 떠올리게 했다. 그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지상 백 미터 상공이었다. 환경의 변화는 크지만 웃음 은 비슷하다. "사과하고 싶어서 이곳으로 나왔다." "그 사과, 받지 않겠습니다.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교위님." 엘시는 갑자기 어떤 충동을 느꼈다. 규리하의 하늘에서 홀로 해보았 던 시도를, 엘시는 니어엘에게 시도했다. 엄청난 야유를 각오하고서. 니어엘은 그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엘시는 안도하며 말했다. "술은 좀 줄이는 것이 좋겠다. 술에 의해 진급하는 것보다는 군인의 의무를 다해서 진급하는 것이 바르겠지." 유사 이래 인류의 좋은 벗이었던 술은 그 날 최악의 저주를 받게 되 었다. 쿠스의 술도가는 하늘누리의 티나한로 서편에 있다. 그리고 이 설명 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하늘 누리에는 동서남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 어처구니 없는 지리 학적 오류가 어디에 기원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황제의 질문을 받은 쿠스가 얼떨결에 '티나한로 서편에 있습니다.'라 고 당시 있던 방향을 말했다는 전설을 거론한다. 하지만 이 전설은 술도가의 주인이 황제를 접견할 일이 있을 리 없다는 반론 때문에 빛 을 잃은지 오래다. 좀 더 현실적인 가설을 선호하는 이들은 잔뜩 취 한 쿠스가 난동을 부리다가 유수부 야경꾼에게 붙들렸을 때 취중에 꺼낸 대답이 그 기원이라고 말한다. "댁이 어딥니까?" "티나한로 서 쪽일 거야." 하지만 유수부 경비국에서 그 가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적은 없다. 물론 쿠스 본인에게 물어보면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있 겠지만 쿠스는 질문을 받으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말을 돌리곤 했다. 어쨌든 그 때문에 '티나한로 서편에 있는 쿠스의 술도가'의 진실이 알려진 적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농담의 기원에 대해 깊이 따지지 않는다. 쿠스의 술도가를 이용할 일이 있거나 그곳과 연관된 사람들 은 즐겁게 '티나한로 서편에 있는'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쿠스의 술도가 앞마당에 술통 두 개를 가져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있는 틸러 달비 또한 그런 쪽지를 보냈다. '티나한로 서편에 있는 거 기로 와.' 쪽지를 받은 상대방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틸러는 주전자에 술을 채웠다. 얼마 있지 않아 마당 저편에서 틸러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틸러는 빈 잔을 들어 흔들며 외쳤다. "오니, 내 사랑!" 다가오던 인간 남자는 우뚝 멈춰섰다. 그는 이를 허옇게 드러내었 다. 웃은 것은 아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바지 까고 보여줄까? 난 남자라고." "대담한 제안이군. 얼마나 큰 용기를 내었을까? 받아들이겠어. 벗어 봐." 하늘누리의 자랑스러운 유수부원 오니 보는 동료들이 인정하는 전설 적인 주먹의 소유자답지 않은 맥빠진 동작으로 술통에 걸터앉았다. 이런 두억시니 같은 놈이 때려죽이면 큰 곤경을 겪게 되는 '고향 친 구'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니로 하여금 하늘을 저주하 게 했다. 하지만 고향 친구에는 나름의 장점도 있다. "자꾸 까불면 너희 아버지한테 '시아버님 전상서'라고 편지 써버린 다." 이미 넋이 반쯤 나가 있던 술도가의 일꾼들은 그 대목에서 호흡 곤 란을 느꼈다. 오니는 앉아있는 술통이 애처로워 보이는 체구에 특수 무장이 아닌가 싶은 뻣뻣한 수염으로 턱을 둘러싸고 있는 장한이었 다. 당연히 주위에서 온갖 종류의 웃음들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틸러 의 입에서 나온 것은 비굴한 애원이었다. "……사나이의 의리를 저버리지마. 오니." "의리는 됐고, 술이나 줘. 네가 산다고 했지?" 틸러는 재빨리 주전자를 기울여 잔을 채워주었다. 오니의 술 마시는 모습은 술도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다. 그 중 어떤 이가 '나도 저렇 게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술을 만들어야지' 같은 한기가 돌 만큼 바람 직한 결심을 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장쾌한 모습이었다. 벌컥벌컥 술을 들이킨 오니는 수염에 묻은 술을 털어내며 투덜거렸 다. "째째한 자식. 이왕 술을 사려면 제대로 된 주점에서 살 것이지 술 도가로 사람을 불러내냐. 너 규리하공인가 하는 귀족 아가씨 구하고 금편도 받았다며?" 술도가에서 직접 구입하는 술이 싼 것이야 당연하다. 그리고 틸러처 럼 쿠스에게 인심을 얻어둔 경우에는 지금처럼 그 마당 한켠에서 술 을 마실 수도 있다. 틸러는 따로 두었던 통닭을 꺼내며 빙긋 웃었다. "네가 술을 작작 마셔야 주점으로 데려가지." "말 잘했다. 주전자 줘봐." 틸러는 주전자를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훔쳐보는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을 보냈다. 사람들이 예의 바르게 떠나간 후 틸러는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오니에게 말했다. "취하기 전에 들을 거 좀 듣자." "뭐가 궁금해?" "네 동료에 대한 이야기.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 "동료? 글쎄. 같이 유수부에 있지만 그 사람하고 나는 소속이 달라. 그 사람은 경비국에 있고 나는 수도국이잖아. 정말 다행이지. 그런 엄청난 귀족하고 같이 일하려면 숨도 제대로 못 쉴 텐데."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니까 뭔가 얻어들은 거라도 있을 거 아냐." 오니는 빙글빙글 웃으며 주전자를 가리켰다. "술 좀 마시면 생각이 떠오를 거 같은데." 틸러는 주전자를 건넸다. 잔에 술을 콸콸 부은 오니는 그 잔을 채우 는데 드는 시간의 반밖에 안되는 시간만에 그것을 비웠다. 오니는 거 창한 트림을 하고는 수염을 훔쳤다. "그 사람 요즘 사람들 모으고 있어. 사실 나한테도 이야기가 들어왔 어. 직접 온 것은 아니고 몇 다리 건너서 온 것 같지만." 틸러의 예상대로였다. 그의 친구 오니 보는 확실히 그 풍모가 장엄 하다. 오니가 계속 말했다. "비번일 때 하루 몸 좀 풀고 금편 다섯 닢 받을 수 있다니 이야기가 참 좋더라고." "금편 다섯 닢? 이런. 내가 참가하고 싶어지는군. 어쩌기로 했어?" "안하기로 했어." "왜?"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대가가 좋다면 그건 겉으로 보는 것만큼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뜻이지. 게다가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거 결혼 이 아니라 납치더라. 무슨 그런 전통이 다 있는지 모르겠어. 가로세 로 따지고 대각선까지 따져봐도 찜찜해. 게다가 이상한 이야기도 들 었어. 그러잖아도 너 만나서 그거 좀 물어보고 싶었어.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그 아가씨 지키러 와 있다던데. 맞아?" "응. 맞아." "즈믄누리의 무사장이면 도깨비불로 사람 태울 수 있는 도깨비잖아. 어이구, 그럼 그거 사람 죽을 일이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금편 다섯 닢에 그 짓을 어떻게 하나." 틸러는 즈믄누리의 무사장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몇 가지 만 들어내면 스카리 빌파의 공격측 병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 다는 유혹을 느꼈다. 그의 친구 오니 보는 과묵한 성격은 아니다. 하 지만 틸러는 그 생각을 포기했다. 쉽게 들통나는 거짓말은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더 높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길 가다가 만난 사람 아무나 태워죽일 수 있 는 사람은 아니야." 그리고 틸러는 포기했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 었다. "뭐, 아킨스로우 협곡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오니 보에겐 아킨스로우 협곡의 일이 재현될 거라는 이야기 로 들렸다. "맙소사, 그럼 막아야지! 하늘누리고 규리하성이고 다 박살나는 거 아냐?" "걱정마. 치명적인 무기는 못 쓰니까. 그 이야기 못 들었어?" "들었어. 그럼 안전한 거야?" "아마도…… 유서는 써뒀지?" 틸러의 생각대로 역효과가 일어났다. 오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만해. 젠장. 발케네공 같은 높은 귀족이 너도 알 수 있는 일을 모르지는 않겠지. 자식이 술맛 떨어지는 소리를 하고 있어." 자신에게 여론 형성의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틸 러는 실제적인 일에 매진하기로 했다. "어쨌든 너처럼 몸 사리는 사람이 많다면 많이 못 모았겠네?" 오니는 닭다리를 비틀어 뜯어내며 말했다. "아냐. 발케네공은 경비국 소속이잖아. 하늘누리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저기 아는 사람도 많아. 그리고 젊은 귀족들 중에 그 사람 따르는 사람도 많고. 귀족이나 평민이나 똑같아. 아주 미친 짓도 쉽 게 저질러버리는 열아홉, 스무 살짜리들 알잖아?" "아아, 이런. 우리가 벌써 그 나이를 어린 것들처럼 취급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니. 함께 슬퍼하자고. 오니." 농담처럼 말했지만 틸러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연배의 흥분한 젊은이는 한두 명일 경우 수줍음 타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무리가 되면 정말 무서운 존재가 된다. 전투 상황에서 200명을 지휘하는 틸 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그 흥분한 무리의 첨단에서 가장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은 그 자신이지만. "얼마 쯤 되는지 혹시 알아?" "글쎄. 나한테 말한 사람은 이미 오십 명 쯤 모였으니 빨리 참가하 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거라고 하던데. 그 사람은 과장을 심하게 하 는 성격은 아니니까 이삼십 명은 확실히 넘지 않을까." 틸러는 생각했다. "젠장." 그리고 생각이 입밖으로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고개를 든 틸러는 오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니가 말했다. "너 그 아가씨 지켜야 되냐?" "규리하공 아가씨는 자기를 도둑맞지 않기로 결심했거든. 나는 그 아가씨를 도와야 하고. 그러니 지켜야 하는 거지." "그거 안 좋네. 이삼십 명이면 전부 맨손이라도 사람 죽어나갈 수 있는데. 음. 너 소대장이잖아. 소대원 집합시키면 200명이지?" "저번 전투 때 전사하거나 부상 입은 애들이 몇 명 있어서 지금은 160명 쯤 되지." "그래도 이삼십 명의 몇 배나 되는 숫자잖아. 그리고 전투 훈련도 받으니까 귀족가의 망나니들 쯤이야 간단히 다룰 수 있겠군." "내 병사들을 쓰라는 말이야?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안돼." "왜?" "이런, 젠장. 그 애들은 제국군이야. 민간의 풍습에 군사력을 동원 할 수는 없어. 발케네쪽에서 말도 못할 항의를 받을 테고 난 모가지 가 날아갈걸. 나만 날아가는 것이 아냐. 자칫하면 내 위아래로 줄줄 이 박살나게 될 거야." 오니는 빙그레 웃었다. "틸러. 저번 전투 때 네 병사들 고생이 많았지?" "응? 그렇지. 그런데 왜?" "휴가 좀 줘야겠다. 그렇지?" 무슨 앞뒤없는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고향 친구를 바라보던 틸러는 갑자기 오니의 뜻을 이해했다. 갑작스러운 기쁨 때문에 틸러는 자신 의 인생을 망칠 망발을 외치고 말았다. "사랑해, 오니!" 틸러의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의 초안을 구상하기 시작하는 오니를 겨우 말린 다음 틸러는 하늘누리 외곽까지 단숨에 달렸다. 술에 취한 채 수백 계단의 환상계단을 만들었다간 자신을 죽이게 될 것이 분명 하기에 틸러는 승강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래로 향하는 동 안 틸러는 승강기의 느린 속도는 시련의 첩자가 일으킨 태업 때문이 분명하다는 가설을 완성시켰다. 그 가설 어디에도 나가가 이토록 추 운 땅에 올 수 없다는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가까스로 자신 이 꽤 취했다는 것을 자각한 틸러는 먼저 세수를 한 다음 정우의 방 으로 달려갔다. 틸러는 자신이 말짱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정우의 의견은 달랐다. 정 우는 일찌기 파노 긴시테 노인에게 발휘했던 것과 같은 참을성을 발 휘하여 틸러의 중언부언하는 말을 정돈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당신 소대원들에게 휴가를 줘서 춘부장께 그릇 된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 도시 연합의 첩자들을 붙잡아내자는 거죠?" "……죄송합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정우의 방을 떠났던 틸러는 조금 후 레콘이 발작적으로 무기를 움켜 쥘 것 같은 몰골이 되어 돌아왔다. 뭐라 평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정우는 '썩 말끔해 보여서 좋다' 정도로 말하기로 했다. 정신을 차린 틸러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정돈해놓았다. 정우는 이해했다. "당신 소대원들에게 휴가를 줘서 저를 지키게 한다고요?"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감사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계획이네요. 하지만 휴가 중이라도 군인은 군인이잖아요. 민간인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면 안될 텐데요?" 틸러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 점이 바로 제 친구가 귀뜸 해준 계획의 기막힌 부분입니다. 규 리하공 아가씨. 이건 싸움이 아니거든요. 암살공의 주장을 따른다면 이것은 발케네의 전래 풍습입니다." "와!" 틸러는 정우의 '와'가 자신의 계획에 찬성한다는 뜻인지 그렇잖으면 그 계획의 조리 있음에 대한 감탄인지 알 수 없었다. 정우는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쓰기 때문이다. 틸러는 빠르게 말했다. "병사들이 휴가 동안 전래 풍습에 참가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 지 않습니다. 그건 결코 대민 사고가 아니지요. 누군가를 심하게 다 치게 한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습니다.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가 오십 명 쯤 모아온다고 해도 저는 그 세 배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부하들은 훈련 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세 배의 병력으로 상대를 억류하는 것은 어렵 지 않습니다. 문제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점이지만, 듣기로 신 부 절도에는 배신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오히려 예의인 것 같으니 저 는 배신자를 보낼 겁니다. 그러면 공격 일시를 알아낼 수 있겠지요." 틸러는 오니를 생각했다. 오니를 스카리에게 보낸다면 공격 일시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틸러는 상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소맷자락을 만 지작거리다가 옆으로 손을 뻗어 대금을 집어들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틸러를 기다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정우는 미안하다는 듯 고 개를 꾸벅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우는 방 한켠에 놓여있는 새장을 향해 걸어갔다. 틸러는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우는 새장 속의 인조새에게 질문했다. "틸러의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쉬크톨은 히참마의 잎으로 부러뜨립니다." "역시……" 틸러는 뭐가 '역시'인지 알려주는 사람에게는 뭐든 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우는 대금으로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다가 틸러에게 돌아섰다. "이주무 선사의 이야기를 꺼내다니, 놀랐어요." 틸러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제가 많이 취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저는 쉬크톨 이야기와 이 주무 선사의 이야기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쉬크톨은 나가 가문의 일원 중 암살자로 지명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칼이잖아요. 이주무 선사는 혼자 하인샤 대사원을 위해 싸우기로 했 고. 비슷하지 않아요?" 틸러는 신음을 흘리고 싶었다. 끼워맞추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 지만 틸러에겐 아무래도 억지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틸러는 정우가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우는 처음부터 이주무 선사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 다면 인조새에게 질문한 것은? 도깨비의 장난이거나, 혹은 틸러의 의 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완벽하게 부적절한 말만 하는 인조새에게 질문하는 것이 어떻게 틸러를 존중하 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틸러는 그것이 맞는 설명이라고 느꼈 다. 틸러는 정우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정우가 말했다. "이주무 선사는 스님이지만 필요할 땐 무기를 잡았지요. 당신의 소 대원들도 병사지만 필요할 땐 신부 보호자가 될 수 있겠지요. 이 분 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 거예요." "그러면 찬성하시는 겁니까?" "부분적으로만."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틸러는 드디어 인조새에게 의견을 구 하는 것이 어떻게 존중의 의미가 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게 되었 다. 정우는 틸러의 의견을 반대하기 앞서 그것이 좋은 의견이라고 말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 높은 고승의 일화까지 꺼 낸 것이다. 상쾌함과 낭패감이 동시에 찾아드는 기묘한 느낌에 틸러 는 혼란스러웠다. "어떤 부분에 찬성하시는 겁니까?" "배신자를 보낸다는 부분. 그 날짜를 알아내면 편리하겠지요. 그럴 수 있다면 알아봐 주세요. 탈해도 그것을 알아보러 몽화각에 갔어요. 하지만 당신도 함께 알아보면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겠지요." "그러면 제 소대원들을 동원하여 규리하공 아가씨를 지킨다는 의견 에는 반대하십니까?" "예. 당신의 자신감은 존중하지만 저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싸우 면서 사고가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어요." "규리하공 아가씨. 죄송합니다. 무례를 무릅쓰고 고함을 지르겠습니 다." "예?" "이거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틸러는 목과 얼굴이 벌겋게 변하도록 고함을 질렀다. 정우는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동그란 눈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숨을 씨근 씨근 몰아쉬며 말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살인자가 있습니다. 살인에게 조종당하는 살인 자와 살인을 조종하는 살인자입니다. 둘 다 죄입니다만 전자는 그나 마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저 또한 전자에 포함됩니 다. 저는 전쟁 속에서 살인을 수행하는 자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 는다는 상황이 저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합니다. 그래서 살인에 조종당하는 거지요. 아, 규리하공 아가씨.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를 합리화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정우는 약간 창백하지만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하세요. "율형부사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이것은 신부 절도가 아니라 신부 살해일 수 있다고. 아가씨도 아시지요? 신부 절도의 혼란상을 틈타 누군가가 아가씨를 죽이려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가씨의 부친을 따 르는 사람. 온 규리하 땅에 잔뜩 있을 겁니다. 대장군님이 규리하를 가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발케네나 살본, 비나간 등에 잔뜩 있을 겁니다. 발케네가 거대한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전 제국에 잔뜩 있을 겁니다! 세상에, 모두가 아가씨의 적입니다." 틸러는 숨이 막혔다. 몇 번이고 콜록거린 다음 틸러는 아픈 목을 쓸 어만지며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지키게 해주십시오." 정우는 깍지 낀 손으로 대금을 꼭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보던 틸러 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꽉 움켜쥐었다. 아픔 때문에 겨우 정신을 차 린 틸러는 두 손을 떨어뜨렸다. "아가씨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도깨비의 특징 이지요." 틸러는 어깨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몹시 아팠다. 다시 취기가 오르 고 있었다.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모든 죽음에 대한 거라 고 착각했습니다. 그렇지 않더군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만 두려워 하지 않는 겁니다. 모든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세상에서 자란 규 리하공 아가씨는 다른 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우리 위 선자들과는 반대입니다. 우리들은 타인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 다. 슬프다, 유감스럽다, 명복을 빈다. 개소리입니다. 자기 가족이 아니라면 수백 명이 죽어도 혀 한 번 차고 그만입니다. 그걸 가지고 농담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밤에 잠자리에 누웠을 때 우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몸부림치지요. 예. 아가씨가 제 병 사나 스카리 빌파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다치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아가씨와 우리는 반대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을 무 서워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사라지는 것은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틸러. 저도 죽는 건 싫어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씨는 그렇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 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다릅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우리와 같이 한 번 죽습니다. 도깨비처럼 두 번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문제입 니다. 문제는 그것이라고요…… 예. 오직 한 번뿐입니다." 틸러의 발음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어쩌면 제정신을 차렸다고 생각 한 것 자체가 일종의 취기였는지도 모른다. 정우는 자신이 말이 틸러 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는 그저 조용히 틸러를 바 라보았다.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던 틸러는 갑자기 자신의 뺨을 세 차게 두드렸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틸러." "규리하공 아가씨. 아가씨께서 반대하셔도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님께 가보겠습니다. 그 분은 허락하실 겁니다." "틸러. 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규리하공 아가씨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입니다." 정우는 더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틸러의 작별 인사였다. 틸 러는 뒤로 돌았다. 한 번에 문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곧 틸러는 밖 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인가가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다 가 곧 멀어졌다. =============================================================== 계속되는 술 이야기. 타자, 술이 고픈가 봅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8-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2-27 조회수 : 2117 피를 마시는 새 8. 아는 것과 우는 것 - 4 몇 시간 후 틸러 달비는 잠자리 속에 함께 누워 있는 숙취와 두통을 발견했다. 그것을 잠자리 밖으로 차내려 했지만 그의 발길질에 날아 간 것은 이불이었다. 틸러는 우울한 기분으로 자신에게 지어줄 고약 한 별명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두 개도 떠올리기 전에 참견하는 사람이 있었다. "일어난 것이 확실하군요. 달비 부위." 틸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덩치 큰 도깨비 무사장이 앉아서 그 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각은 그렇게 빨랐지만 틸러 의 의식이 무사장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훨씬 더뎠다. 멍하게 누 워있는 부위를 본 무사장은 웃으며 자리끼를 끌어왔다. 틸러가 생각 하기에 창조의 축복 이후로 이보다 더 고결한 행동은 없었다. 틸러는 일어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물을 받아들었다. 몸은 노곤했지만 틸러는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틸러는 탈해 를 바라보았다. 탈해가 말했다. "정우가 가보라고 해서 조금 전에 왔습니다."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죠?" "아침 시간은 지났습니다. 하지만 식당에 가시면 드실 것이 있을 겁 니다. 요리사에게 죽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틸러는 그런가 하는 얼굴로 탈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젯밤과 새 벽에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을 평가하기에 앞서 틸러는 먼저 결과물을 찾아보기로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틸러는 곧 옷상자 위 에 놓여있는 서류를 발견했다. 틸러는 무릎 걸음으로 그것에 다가가 서류를 집어들었다. 조금 후 틸러는 손등으로 서류를 탁 퉁겼다. "좋아! 꿈이 아니었군." "그게 뭡니까?" "아, 제 소대원들 중 백 명에게 휴가를 줘도 좋다는 명령서입니다. 휴가 지역은 규리하성 내부로 제한하고요. 상당히 예외적인 명령서지 요." "정우가 그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부위의 부하들을 동원해서 정우를 지킨다고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님이 부위의 제안을 받아들이신 모 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공격 일시만 알아내면 됩니다. 어, 그러고보니 무사장님도 공격 일시를 알아내기 위해 몽화각으로 가셨다고 들었는 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답해드릴 수 있어서 기쁘군요. 몽화각에서는 앞으로 여드레에서 열흘 사이일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여드레에서 열흘이라. 어째서죠?" 질문을 하자마자 틸러는 그것을 후회했다. 어떤 대답을 들을지 분명 하다. "미안합니다만 그건 모르겠습니다. 몽화각의 도깨비들이 좋아하는 관찰을 통해 알아낸 것 아닐까요?" "아, 예. 알겠습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여드레에서 열흘이라. 전부 사흘이라면 지나치게 길지도 않고 괜찮군요. 아주 좋은 정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도 좀 확인해봐야겠군요. 음? 왜 그러십니까?" "예?" "이상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는군요. 무사장님. 하실 말씀이 있으 십니까?" 탈해는 헛기침을 험험 하고는 말했다. "달비 부위. 정우를 사랑합니까?" 엘시나 정우 중 누구도 탈해의 넘겨짚는 버릇에 대해 틸러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따라서 무사장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냥 웃어넘 겼을 상황에서 틸러는 입을 쩍 벌린 채 황망해했다. "어, 어, 남녀간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혹 창피해서, 그렇지 않으면 신분이 지나치게 달라서 포기하는 것 이라면……" "아뇨,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보였습니까? 어, 혹시 규리하공 아가 씨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오. 제 느낌을 물어보는 겁니다." "놀랍군요. 왜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달비 부위는 정우를 도우려고 애쓰는 것 같더군요. 좀 무리를 하면 서까지 그런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킴 남자가 여자에게 그런다는 것은 여자에게 연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틸러는 한숨을 내쉬며 물그릇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전 그 가 비운 그릇이었다. 탈해는 주전자를 들어 건넸고 틸러는 고맙게 받 아들었다. 그릇에 물을 부으며 틸러는 말했다. "무사장님. 부위라는 것들은 원래 교위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만 빼 놓고 뭐든 열심입니다." 틸러는 물을 마시며 뒷말을 생각했다. 덕분에 코로 물을 들이킬 뻔 했지만 틸러는 가까스로 곤경을 모면했다. 숨을 고른 틸러가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는 불평을 안 하더군요." 탈해는 팔짱을 끼며 틸러의 말을 경청했다. 틸러는 턱을 만지작거렸 다. 수염이 까슬까슬했다. "그 분도 사람이니까 가끔은 화도 내시고 실망한 표정도 지으시긴 하지만,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 갑자기 떨어져서 죽이려 드 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치곤 놀랍도록 불평을 안 하시더군 요. 처음엔 다른 종족 사이에서 자라나서 어릴 적부터 주눅이 들어있 었던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더군요. 저는 그 분이 주눅들어 하는 모습을 별로 본 기억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성격이 수동적이신 것인가 의심도 해보았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 다. 대장군님께 아스캄에 가게 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청하시던 모습 은 아무리 봐도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보다는 무사장님이 더 잘 아실 텐데, 규리하공 아가씨가 수동적인 분입니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군요." "제 생각이 맞군요. 예. 그렇지만 그 분은 불평을 하지 않으시고 칭 얼거리지도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계시지요. 비록 그 방법이 성을 통째로 묻어버리는 것 같은 상상하기 힘든 것일 때도 있 습니다만, 그거야 그 분의 개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열심 히 사는 사람 보면 도와주고 싶더군요. 게다가 감당해야 할 짐이 그 렇게 무거울 땐 저는 꼼짝못하겠더군요." "그러니까 그냥 측은지심이라는 말입니까?" "제국군 부위 따위가 규리하령의 계승자를 동정한다면 좀 웃기는 일 인 것 같습니다." 탈해는 큼직한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칼리도백 각하께서 당신을 보고 좀 배웠으면 좋겠군요. 돕고 싶으 면 돕는다는 그 태도 말입니다." "예? 아아, 대장군님이오. 그러니 대장군님은 만병장이지요. 저는 제국 수호를 위해 제게 맡겨진 이백 명도 제멋대로 쓰는 악당이고 요." 탈해는 알듯 모를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릎을 주물럭거리다가 말했다. "당신이 정우에게 연심이 없다 해도 그렇게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 면 당신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정우를 잘 돌봐주세요. 어쨌든 정우는 킴이고 킴들 사이에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주 는 도움보다는 킴이 주는 사소한 도움이 정우에겐 더 큰 힘이 될 겁 니다." 틸러는 '정우를 사랑하십니까, 무사장님?' 하고 장난스럽게 말해볼 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틸러는 관두기로 했다. 둘은 종족이 다르다. 농담이 되지 않는다. "능력이 닿는 한 그렇게 할 겁니다. 물론 지금 제 능력은 엉망진창 입니다만. 식당에 가서 뭐라도 뱃속에 집어넣어 불씨를 살려봐야겠군 요." "아, 그 전에 이것부터 받으세요." 탈해는 옆으로 손을 뻗어 묵직한 봉투를 집어들었다. 탈해는 그것을 틸러에게 건넸고 틸러는 뭐냐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탈해가 말했다. "제가 이 방에 들어온 직후에 누군가가 와서 그걸 주더군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진 않았습니다. 당신이 주무시는 것을 보고는 깨면 드리 라고 했습니다."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고요?" "예." 틸러는 그 봉투를 들어보았다. 봉투는 꽤 많은 종이가 들어있는 듯 두툼했고 또 묵직하기도 했다. 틸러는 봉인을 뜯고 봉투를 뒤집었다. 그러자 두꺼운 금속판 하나가 떨어졌다. 봉투가 왜 무거웠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금속판을 들여다본 틸러는, 다음 순간 그것을 다리 아래로 화다닥 밀어넣었다.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하지만 방안에는 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틸러는 자신의 행동에 놀라서 탈해를 바라보았다. 탈해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도깨비다운 호기심으로 눈을 번쩍 번쩍 빛내며 그의 다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귀한 물건인가 보군요." "어, 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오. 저한테 온 것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밖으로 나갈까요?" 탈해의 얼굴은 제발 나가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틸러는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발목에 닿는 금속판의 서 늘한 느낌은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였다. 잠시 생각해 본 틸러는 고 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음. 잠시 계셔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서류 를 다 읽을 때까지만이라도." 탈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틸러의 발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 다. 갑자기 손을 뻗어 틸러의 발목을 붙잡아 올리기라도 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불안감 때문에 도깨비 무사장을 앉혀두기는 했지만 그 도깨비 무사장이 더 신경 쓰인다는 것은 틸러를 난감하게 했다. 틸러 는 목 주위가 근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서류들을 읽었다. 빠르게 시작되었던 서류 읽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갈수록 점점 느려 졌다. 흥분 때문에 코를 벌름거리며 서류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틸러의 모습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서류의 냄새를 맡는 것 같았 다. 그 진지한 태도는 도깨비까지 감동시켰고, 그래서 탈해는 틸러의 발목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 서류 쪽에 뜨거운 관심을 쏟아붓 기 시작했다. 마지막 서류를 읽는 틸러의 모습을 보면서 탈해는 설명 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보았다. 안타깝게도 탈해의 희망은 성취되지 못했다. 서류를 다 읽은 틸러는 벌떡 일어섰다. 걸어가면서 옷과 칼을 챙겨든 틸러는 그대로 도망치 듯 방을 빠져나갔다. 상당한 무례라 할 수 있겠지만 탈해는 떠나는 틸러의 모습을 쫓기에 앞서 틸러가 앉아있던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았 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탈해는 조금 늦게서야 방을 나왔고 이미 틸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탈해가 다시 틸러 달비 부위를 보게 된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정우와 탈해는 소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정우가 오후에 시카 트를 보려 했지만 틸러가 보이지 않아서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틸러가 소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틸러의 모습을 본 순간 정우는 그가 이틀 연달아 음주를 한 것이 아 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틸러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한 정우는 그가 보 여주는 흐트러진 모습이 음주가 아닌 노동의 흔적임을 알게 되었다. 틸러는 하루 종일 동분서주한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입을 열 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먼지를 마시면서 말을 많이 한 사람처럼 괴상 했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괜찮아요. 아직 저녁 들지 않았다면 같이 들어요." "감사합니다만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 후 규리하 성을 떠날 생각입니다." "예? 성을 떠난다고요? 밤이 오는데?" "예. 지금 떠나야 발케네공이 쳐들어오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음.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저 녁 들고 나서 딱정벌레를 타고 가면 안되는 일인가요? 탈해는 번뜩이 에 태워줄 거예요." "딱정벌레요? 어, 그건…… 아니, 안되겠습니다. 혼자 가야 하는 일 입니다. 만약 제가 때를 맞춰 돌아오지 못한다면 데시마스 수교위님 이 제 소대원들을 지휘하여 아가씨를 보호할 겁니다. 하지만 되도록 늦지 않게 돌아오도록 애쓰겠습니다." 틸러는 정말 조급한 듯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아 지만 정우는 틸러의 다급해 하는 모습에 그 질문들을 삼켰다. "예. 알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틸러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민첩하게 밖으로 나갔다. 틸러가 흔들어 놓고 간 공기는 오랫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정우는 입맛을 잃었다는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난 그만 먹을래. 탈해. 입맛이 없어." "어디 아파?" "아냐. 괜찮아."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응. 좀 안 좋아." "왜?" "틸러가 사과를 안 해서." "사과?" "응. 오늘 술 깨면 찾아와서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종일 보이지도 않더니 이 저녁에 찾아와서 갑자기 떠나겠다고 말하네." "달비 부위가 너한테 무슨 사과할 일을 했는데?" "몰라." "뭐?" "몰라. 사과할 일 같은 건 하지 않았어. 기억이 안나." "그럼 왜 사과를 받으려는 거야?" 정우는 어슴푸레하게 웃었다. 식탁에서 일어선 정우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깊은 밤, 불빛 하나 없는 나나본 북부 자작나무숲 지대에서 레콘 지 멘은 걸음을 멈췄다. 아직 얼마든지 더 걸을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만 지멘은 근방에 강 이 있는 상황에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해가 뜨고 세상이 밝아질 때까지 눈 좀 붙일 정도의 시간은 있다고 판단한 지멘은 배낭을 내려 놓았다. 배낭에 손을 가져가던 지멘은 갑자기 꺼내야 할 아실이 없다 는 것을 깨달았다. 지멘은 배낭 위로 뻗은 손을 부리 주위로 가져왔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 지멘은 느릿하게 배낭 옆에 주저앉았다. 누워서 잠들 생각은 없었다. 다리 위에 망치를 얹어놓은 지멘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고 개를 약간 숙였다. 거대한 지멘이 움직임을 멈추자 자작나무숲에 기대 사는 밤 생물들 이 살그머니 속삭이기 시작했다. 주로 새 소리였다. 양서류가 울기엔 아직 이르다. 귀를 기울이면 철새들이 밤하늘에서 어둠을 헤치는 소 리도 들릴 듯하다. 긴 시간 후 지멘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레콘의 한숨. 지멘은 6년 만에 맞이하는 혼자인 밤이 껄끄러웠다. 애꾸눈 소녀가 없다는 것이 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 인지 지멘은 알 수 없었다. 아실이 있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 다. 아실은 그의 등에서 시달리다가 잠잘 곳이 생기면 곧 죽은 듯이 잠든다. 하지만 아실의 부재는 지멘의 수면을 방해했다. 걷고 싶었지만 해가 뜰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다. 잠을 자야 한다. 지멘은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새벽을 강제로 끌어당기려는 짓과 마찬가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질기게 울었다. 히호-투, 히호-투. 자작나 무의 하얀 빛깔이 어둠 속에서 안개처럼 일렁거렸다. 자작나무의 머 리를 빗질하는 실바람의 노래. 그리고 새 소리. 히호-투, 히호-투. 새벽을 끌어당겨 앞에 놓았을 때 지멘은 지쳐버렸다. 지멘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신새벽의 그림자 없는 푸른 빛이 세 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지멘은 배 낭과 망치를 집어들고 걸음을 뗐다. 얼마 후 지멘은 조그만 개울에 도착했다. 언젠가 니어엘 헨로가 물 동이를 들고 그를 막아섰던 곳이다. 그 때는 반대편 기슭에 있었다. 지멘은 자신이 서있던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개울의 폭을 가늠 했다. 지멘은 도움닫기를 위해 뒤로 물러섰다. 반대편 기슭을 뚫어지 게 바라보던 지멘은 갑자기 개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충분한 속 도. 지멘은 몸을 웅크렸다. 바로 이 다음 걸음에서 크게 도약을…… 지멘은 달리기를 멈췄다. 관성 때문에 지멘의 발이 자갈밭 위로 주루룩 미끄러졌다. 자칫하면 개울에 발이 빠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지멘은 망치를 뒤로 휘둘렀다. 그 힘이 지멘을 끌어당겼다. 개울을 불과 1미터 쯤 남겨둔 곳에서 지멘은 멈춰섰다. 지멘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충분한 거리까지 물러난 지멘은 다시 건너편 기슭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무엇이 자신을 멈추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푸른 어둠 속에 솟아 있는 하얀 자작나무들. 그것뿐이다. 지멘은 스스로에게 곤혹스 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이러지? 혼자라는 것이 나를 이렇게 이상하게 만드는 건 가?' 하지만 지멘은 확신했다. 건너편 기슭은 위험하다. 지멘은 오랫동안 건너편 기슭을 바라보았다. 해가 떠올라 세상의 빛 깔이 제 색을 찾을 때까지. 기나긴 관찰 끝에 지멘은 갑자기 벼슬을 꼿꼿하게 세웠다. 지멘은 경멸하는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왔던 길 을 성큼성큼 되돌아갔다. 지멘의 모습이 자작나무들 사이로 사라진 후, 지멘이 노려보던 기슭 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큰 도끼창을 든 검은 레콘 론솔피였다. 뒤이 어 주테카와 쵸지, 그리고 준람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엘시과 이레였다. 엘시는 지멘이 사라진 숲을 바라보다가 개울을 쳐 다보았다. 주테카가 툭 던지듯 말했다. "건널 수 있어." "압니다. 하지만 건너면 발케네 땅입니다. 넓은 숲, 깊은 계곡, 바 위 투성이 땅. 추적하기가 힘든 땅입니다." 론솔피가 투덜거렸다. "자식. 감 좋네."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기츠나 러크, 카지라. 선택할 길이 많습니다. 일단 야영지로 돌 아갑시다. 나와 이레가 딱정벌레로 정찰해 보겠습니다." 레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의 레콘과 두 인간은 지멘의 반대 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하늘누리를 며칠 동안 점령하고 있는 흥분감은 몽상가의 자질을 가 진 자들을 걱정스럽게 했다. 그들은 그 흥분이 하늘치에게까지 전달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가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에게 보낸 청혼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발케네에 한 번이라도 발을 디딘 사람은 신부 절도 풍습에 대한 전문가로 대우받았다. 신부 절도에 대 한 중론은 그것이 보편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화각이나 황궁에서 상식인들을 기쁘게 하는 논평을 내주지는 않았 다. 고위층의 침묵은 사람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발케네와 규리하의 결합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누리에 별 로 없었다. 그런 결합을 황제나 대귀족들이 좌시할 리는 없고, 따라 서 사각 지대에서 저지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리라는 것이 사람들의 판단이었다. 그런 판단을 주도하는 것은 젊은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의 추종자들 이었다. 파락호와 제국의 동량 사이를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왔다갔 다 하는 이 젊은이들은 스카리 빌파의 결혼을 황제가 방해하게끔 놔 두지는 않을 작정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그리고 규리하성에 주둔 하고 있는 가시나무 군단의 소대 하나가 휴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을 때 그 젊은이들은 폭동이라도 일으킬 듯한 모습을 보여 사 람들을 걱정하게 했다. 스카리 빌파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판 단 하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전부 불러모아 큰 술판을 벌였다. 술에 취해 모든 것을 욕한 다음 자신이 모든 것을 바로잡았다고 착각하는 것은 분명히 젊은이의 특권이다. 흥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디서부터 흘러나온 정 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 날'이 언제인지 알게 되었다. 아라짓력 30년 12월 19일이 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 날'이 내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찾아왔다. 스카리 빌파의 집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 기세 등등한 젊은이들 몇 명이 우르르 몰려들어갔다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간혹 숨이 턱에 닿아 달려오는 젊은이도 있었다. 집 안에서는 바깥의 눈을 피하는 움 직임들의 파편들이 스며나왔다. 오전은 짧고 숨가쁘게 지나갔다. 정오 무렵, 발케네 공작 락토 빌파의 계승권자인 스카리 빌파는 자 신의 방에 앉아 앞에 앉아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알았어. 곧 가도록 할 테니 가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해." 사내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스카리는 서탁 위에 얹어둔 목검을 바라보았다. 등이 가려웠다. 무심히 손을 뒤로 돌렸지만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었다. 스카리는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긁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다시 목검을 관찰했다. 칼과 비슷한 형태로 깎아놓은 몽둥이. 실제 쓰임도 몽둥이와 똑같다. 베기와 찌르기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치기뿐 이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6년 전으로 돌아가면 거기엔 이런 나무 작대 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스카리 빌파가 있을 것이다. 그 스카리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것은 자신의 것이 될 대장군 지위뿐 이다. 지금의 스카리는 과거의 스카리를 비웃으며 알려줄 수 있을 것 이다. 대장군? 바보 녀석. 나무 작대기로 납치극 벌이는 녀석이 될 거야.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겠지? 기다려봐. 치솟는 격분에 스카리는 왼손 소매 속으로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그 손은 커다란 비수를 꺼내어들었다. 스카리는 단단히 쥔 비수를 눈앞 으로 가져왔다. 코 바로 위까지 가져오자 칼이 두 개로 보였다. 스카 리는 한쪽 눈을 감았다. 다른 눈으로 하나가 된 칼끝을 바라보며 그 칼을 서서히 끌어당겼다. 칼끝은 이제 속눈썹에 닿을락말락 하는 곳 에 떠있었다. 재채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스카리는 비수를 끌어내렸다. 비수는 그의 눈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스카리는 억지로 팔을 끌어 내려야 했다. '엘시 에더리. 네 심장에 이걸 박아줘야 하는데.' 엘시는 이곳에 없다. 스카리는 그 사실이 정말 싫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스카리는 가끔씩 자신의 내부에서 들끓 는 분노에게 제물을 주려고 시도해보았다. 타이모, 아실, 분리주의, 술, 엘시 에더리. 그 중 어느 것도 엘시 에더리만큼 그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지만 스카리의 내부에 도 합리성을 존중하는 마음은 존재하고 그 마음은 엘시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 겁에 질려 - 증언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 마 음은 엘시가 군단을 구하고 스카리의 목숨도 구했음을 지적하기도 했 다. 스카리는 대개 그런 지적을 무시하는 편이었다. '너는 다른 어떤 선행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어. 그것은……' 무엇인가가 그의 상념을 방해했다. 소음. 어떤 소음이 들려왔다. 굉장히 불쾌한 소음이다. 스카리는 벌 떡 일어섰다. 마루로 달려나온 스카리는 그 소리가 대문 쪽에서 들려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는 거칠고 흉했다. 스카리는 비수를 거꾸 로 쥐어 팔뒤에 숨기고 왼손으로는 목검을 꼬나쥐었다. 드디어 소음 사이로 욕지거리와 비명도 들려왔다. 스카리는 이제 자신의 저택이 공격당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찢어죽일 놈들이 발케네공의 집을!' 스카리가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을 때 그의 의문에 대한 대답 이 제시되었다. 우렁찬 함성으로. "사자패주 출또야!" 강대한 발케네의 계승권자는 다리에 힘이 죽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 다. 위로 삼고에서 아래로 태수관 분원까지 아라짓 제국의 다양한 관직 들의 계보는 초보 관리들의 두통거리다. 사실 아라짓 제국의 광활한 영토에 비해보면 그 행정 조직은 놀랄 정도로 단순한 편이다. 뱀단지 의 강력한 전달력 때문에 중간 결정권자들과 그들의 감시자, 견제자 등을 대폭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의 행정 조직을 완전히 숙지하기 위해서는 보통 이상의 노력이 필요 하다. 많은 종류의 계약직이나 임시직 뿐만 아니라 귀족 제도와의 연 계 때문에 그러하다. 공작과 같은 예우를 받는 삼고에서 남작과 같은 예우를 받는 태수까지 귀족 제도와 연계하여 제국 행정 조직을 완벽 히 이해했을 때 비로소 초보 관리는 중견으로 대우 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하지만 어떤 관리도 특별히 암기할 필요가 없이 바로 그 서열을 이 해하는 관직이 몇 가지 있다. 가장 높은 삼고나 가장 낮은 분원 같은 것은 물론 외울 필요가 없다. 그런 관직들 중 가장 특이한 것이 사자 패주으로 불리는 임시관직이다. 사자패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이러하다. 이들은 황제의 직지를 받 아 지정된 고장을 암행하며 관리의 행적을 평가하고 민정을 살피는 임시직 관리다. 그리고 징벌이 필요할 경우 소정의 절차에 따라 관리 를 처벌할 수 있다. 지정된 고장에 대한 관찰과 처벌이 끝나면 이들 은 황제만 자유로이 열람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은 황제의 허락이 있 을 때만 열람할 수 있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 보고서를 제출함과 동 시에 이들의 권리 및 의무도 소멸된다. 신분 증명과 업무 편의를 위 해 흑사자가 양각된 패가 지급되고 업무에 종사하는 동안 원래의 지 위와 상관없이 무조건 백작과 동일한 예우를 받는다. 단순하다. 그리 고 이 단순한 설명은 사자패주의 놀라운 위엄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 한다. 차라리 민간에 전하는 속언이, 비록 과장이 심하지만 사실을 이해하는 것에 훨씬 도움이 된다. '만약 사자패주가 하늘누리에서 출 또한다면 하늘치도 놀라 몸을 떨 것이다.' 이 얼토당토하지 않은 속 언이 지금 스카리의 눈 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집 안공간과 바깥공간을 구분하는 흙담 위로 사람들의 손이 불쑥 올 라왔다. 그와 동시에 문이 박살났다. 부서진 문 안쪽으로 자신의 하 인들이 데굴데굴 굴러오는 것을 보자 스카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 다. "사자패주 출또야!" 흙담 위로 사람들이 불쑥 튀어올랐다. 모두 체구 당당한 사내들이며 거세게 보이는 무장을 하고 있다. 담을 넘어 온 이들을 보자마자 스카리는 뒤로 뛰었다. 마루에 올라선 스카리는 목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자패주 출또야!"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위쪽에서, 뒤쪽에서 연신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사자패주 출또야!" 부서진 문 사이로 거친 사내들이 어깨를 비비적거리며 뛰어들었다. 기왓장이 날리고 정원이 파헤쳐지고 장독이 깨지고, 어쨌든 부서질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부서지면서 다급하게 아우성쳤다. 정신이 쑥 빠질 광경이지만 스카리는 첫번째로 가까이 오는 놈의 머리를 부수겠 다는 태도로 목검을 거세게 내밀었다. "천박한 도로장사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유료도로당원들은 씩 웃었다. 길손은 언제나 있는 법이고 따라서 길 을 관리하는 유료도로당원에게는 축제나 휴일 같은 것이 없다. 그런 유료도로당원에게 축제에 가까운 것이 있다면 사자패주의 출또다. 주 어진 권리를 실행하기 위해 사자패주에게는 무력이 주어져야 하지만 대규모의 병력은 암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자패 주는 가장 가까운 유료도로 관리소에 찾아가 사자패를 제출하고 무장 당원들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들을 대동하고 관청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패주출두(牌主出頭)다. 유료도로당원들에겐 축제지만 지방 관리 에겐 가장 끔찍한 악몽이다. 발케네의 계승권자지만 또한 유수부의 관리이기도 한 스카리는 사자 패주의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가 목검을 던지고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스카리의 내부에 발케네 남자의 난폭함이 남 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료도로당원들은 그들이 상대하는 사람이 발 케네공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그 들은 마루 쪽을 포위한 채 더 다가서진 않았다. 하지만 집 안의 다른 곳에서는 문 쪼개지는 소리와 자물쇠 부수는 소리, 각종 가구 나뒹구 는 소리와 함께 하인들의 비명이 처절하게 들려왔다. 눈이 뒤집힐 것 같은 분노 속에 스카리는 그냥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 때 스카리의 눈에 번쩍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어떤 남자가 손에 둥그런 금속패를 들고 있었다. 반사광 때문에 그 금속패의 형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스카리는 그것이 무엇인 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의 직지를 받은 패주에게 주어지는 사자패 일 것이다. 스카리는 사자패를 들고 있는 남자에게 목검을 겨눴다. 사자패주는 씩 웃으며 자신의 칼을 뽑아들었다. 평범한 제국검이지 만 스카리의 병기 같지도 않은 병기보다는 훨씬 우수한 것이다. 스카 리는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고함을 질렀다. "무슨 장난이냐! 사자패주가 하늘누리에 출두한다고?" 백작의 예우를 받는 사자패주는 발케네공에게 공대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장난이 아닙니다. 각 하." 사자패주는 사자패를 옆에 있는 유료도로당원에게 건네주고는 품속 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가볍게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것을 보시면 제가 하늘누리에 파견된 치천제수사자패주 틸러 달 비라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각하." 틸러 달비는 한없는 고양감 속에서 생각했다. 아버지가 여기 계셔야 하는 건데. 스카리 빌파는 서류를 확인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둑판에 신묘한 포석을 남겨두고 떠났던 율형부사의 얼 굴을 떠올리며 스카리는 이를 갈았다. "사라말 아이솔이 장난을 친 것이군." 틸러는 싱긋 웃었다. "제 권고는 이렇습니다. 각하. 목검을 버리고 마루에 앉으십시오. 지필묵을 대령할 테니 나루터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해산하라는 통 지문을 써주십시오. 그리고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에게 보낸 청혼서 를 취소하며 앞으로 다시는 같은 일을 벌이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 도 한 장 부탁합니다. 협조해주신다면 위엄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많이 연습한 듯한 매끄러운 말투였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붙잡 았으니 연습이 많았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스카리는 격분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발케네공을 이렇게 대하고 너와 사라말이 무사할 거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폐하의 사자패주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내가 왜 사자패주의 명령을 들어야 하나! 내 죄가 뭔지 말해봐." "사자패주의 명령을 안 들은 죄입니다." 스카리는 우습지도 않다고 생각했지만 유료도로당원들은 껄껄 웃었 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시시한 농담에도 선 선히 웃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스카리가 목검을 바닥에 떨어뜨리자 그들은 더욱 즐거워했다. 목검을 내려놓으면서 손을 허리쯤으로 가져간 스카리는 그것을 재빨 리 들어올렸다. 스카리가 마침내 포기한다고 믿었던 틸러와 유료도로 당원들은 그 동작에 대처하지 못했다. 스카리의 손이 머리 근처를 스친 순간 그의 모습이 싹 사라졌다. 틸 러는 목이 졸린 소리를 냈다. "발케네공!" 스카리는 다시 나타나서 대답하는 예의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틸러 는 자신이 어처구니 없는 여유를 부리고 있음을 깨닫고는 황급하게 외쳤다. "모두 서로 붙어! 도깨비 감투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 그리고 틸러는 스카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손을 거칠게 휘두르며 뛰 어들었다. 경악에 빠져 있던 유료도로당원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서로의 간격을 좁혔다. 그러나 조금 후 틸러가 정말 원하지 않았던 비명이 들려왔다. "아이고, 내 코!" 유료도로당원 중 한 명이 얼굴을 움켜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몸 을 홱 돌려 그쪽을 본 틸러는 두 팔로 얼굴 근처를 가리며 달려갔다. 그 때 담장 저편에서 무엇인가가 쿵 하는 소리를 냈다. 틸러는 소스 라치게 놀랐다. "제기랄! 벌써 빠져나갔군. 모두 9번 나루터로…… 나를 따라와!" 하늘누리의 지리를 잘 모르는 유료도로당원을 위해 틸러는 앞장서서 달려야 했다. 스카리의 벙력이 집결해 있는 9번 나루터로 달려가면서 틸러는 암살공의 아들이 도깨비 감투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저주했다. 스카리의 진로를 알았다면 틸러는 그나마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 이다. 틸러의 추리대로 스카리는 자기 사람들이 모여있는 나루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달려가는 소리는 나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경은 수도 시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좌우를 두리 번거릴 뿐 비켜서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스카리는 짜증을 느꼈다. 그 들을 떠밀어버리고 싶었지만 쫓아오는 이들에게 나 여기 있소 하는 꼴이 될 터인지라 스카리는 분노를 억눌렀다. 스카리의 억제된 분노는 나루터에 도착하면서 폭발했다. 나루터에는 위험해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외침이 충분히 들릴 거리에 도달한 스카리는 주저없이 외쳤다. "스카리 빌파가 말한다. 돌격!" 스카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목소리가 들리면 곧 행동에 돌 입하기로 몇몇 사람들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 약속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카리가 어디에 있나 둘러보았지만 언질을 받은 이 들은 다른 사람들이 시간 낭비를 하고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돌격이다!" 외침과 함께 나무 몽둥이를 든 남자 한 명이 몸을 뒤로 돌렸다. 그 리고 나루터 밖으로 몸을 던졌다. 아주 잠깐 동안 중력의 영향만 받 으며 떨어지던 남자는 곧 보이지 않는 어떤 구조물의 도움을 받아 그 이동 방향을 바꿨다. 그는 허공을 빠른 속도로 미끄러졌다. 그러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른 남자가 외쳤다. "가자! 뒤쳐지지마!" 몇 명의 남자들이 뒤쪽으로 몸을 던졌고 그들 또한 허공을 비스듬하 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곧 나루터 위에 모여있던 사람들 모두가 아래 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어떤 환상계단을 만들 것인지도 미리 결정해 두었다. 계단 난간을 타고 놀아본 사람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계단 이다. 좁고 매끄러운 긴 경사로. 거기에 배를 대고 두 다리와 손으로 양쪽을 붙잡아 속도를 조절한다. 엉덩이부터 아래로 향하는 그 모습 은 그다지 품위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다른 사물에 영향을 받지 않는 환상계단에서 속도를 조절하려면 자신 의 손바닥이나 발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니까. 가장 먼저 뛰어내렸던 사내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환상계단을 두 허벅지와 손으로 꽉 붙잡아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곧 그는 규리하성 뒷마당에 내려섰 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내려섰다. 나루터에 도착한 틸러는 아래로 미끄러지는 스카리측 사람들을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스카리와 그 동료들이 어떤 환상계단을 만들 어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유료도로당원들에게 설명 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틸러는 당원들과 함께 승강기를 이용할 수 는 없었다. 도깨비 감투를 쓰고 있는 공격자가 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빨리 아래쪽에 알려야 했으니까. 틸러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 올라왔을 때 이용했던 승강기 알지? 그걸 타고 내려와서 합류 해라! 나는 환상계단으로 먼저 내려가겠다." 그리고 틸러는 뒤로 돌아 엉덩이를 죽 뺀 볼품 없는 자세로 섰다. 머리속에 그린 경사로가 현실이 되었고 틸러는 그것을 따라 미끄러졌 다. 규리하성을 향해 빠르게 미끄러지면서 틸러는 데시마스 수교위가 자신과 달리 스카리 빌파가 도깨비 감투를 가지고 있을 경우를 가정 하기를 기원했다. 틸러의 기원이 니름이 되어 데시마스 수교위에게 전달된 것은 아니 다. 그보다는 쟈마 데시마스라는 남자가 수교위라는 계급에 부족함이 없는 노회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사실적이다. 쟈마 데 시마스가 보기에 신부를 훔치러 오는 자가 발케네공이라면 도깨비 감 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했다. 그래서 쟈마 데시마스 수교위는 몇몇 병사들에게 좀 특별한 종류의 무기를 준비하도록 했 다. 규리하성에 난입한 공격자들은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들의 모습에 당 황했다. 채찍은 살점을 뜯어낼 만큼 무서운 무기지만 치명적인 무기는 아니 다. 채찍이 입히는 상처는 찰과상이며, 따라서 뼈를 부술 수도 있는 몽둥이에 비하면 오히려 온건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병사들 은 도깨비 감투를 쓰고 몸을 숨기고 있을 스카리를 찾아내기 위해 사 람이 없는 빈 공간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공기를 찢어내는 무 서운 굉음과 사나운 기세는 공격자들을 당황시켰다. 그들은 꽤 긴 시 간 동안 채찍을 피해 다녔다. 우연히 대처법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 들은 병사들과 승강기를 타고 내려온 유료도로당원에게 포위되어 순 식간에 자멸했을 것이다. 공격자들을 구한 우연은 어떤 몽둥이에 감겨버린 채찍이었다. 몽둥 이의 주인은 당황하여 몽둥이를 왈칵 끌어당겼고 그러자 채찍 소지자 는 얼떨결에 그것을 뺏기고 말았다. 그 모습은 많은 공격자들에게 목 격되었고 공격자들은 즉각 채찍의 궤적에 몽둥이나 목검 등을 쑤셔넣 었다. 병사들은 속절없이 채찍을 놓치거나, 혹은 채찍을 끌어당기며 당혹한 얼굴로 물러났다. 공격자들의 기세가 드높아졌다. 스카리 빌파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스카리는 탈출할 경우를 생각하여 손 닿는 곳에 있는 무장한 사람들은 무조건 후려갈겼다. 올 것을 알았다 해도 감당하기 힘든 공격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시점에 가해지자 아 무도 견디지 못했다. 스카리의 목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사람들이 픽 픽 쓰러졌다. 스카리의 맥박이 빨라지고 그 호흡은 불규칙해졌다. 세 상에, 이렇게 즐거울 수가. 스카리는 황제와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도깨비 감투를 내주지 않은 조상들을 찬양했다. 조부님, 증조부님, 종조부님. 왜 그러셨는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 시점에서 스카리가 아쉬워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성난 하늘치 같은 그의 기백을 감상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추락하듯 미끄러지던 틸러는 어느새 땅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닫고 는 급히 속도를 줄였다. 그 때문에 손바닥이 벗겨질 것 같았다. 틸러 는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상처를 입는 일이 어떤 은유가 될 수 있는 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허리의 검을 뽑아들려던 틸러는 이곳이 하늘 누리 위쪽이 아니라 신부 절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임을 되새겼 다. 틸러는 이를 악물고는 맨주먹으로 달렸다. 바닥에 내려서자 상황이 심상찮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틸 러의 소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분전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옆에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 때문 에 기겁하여 고개를 돌렸다가 정면에서 날아온 몽둥이에 맞고 쓰러지 는 병사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한편 공격측은 보이지 않는 아군에 대한 신뢰감으로 용기백배한 상태였다. 도깨비 감투를 쓴 단 한 명 때문에 도저히 상대가 안 될 병력이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를 갈던 틸러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채찍을 발견했다. 틸러는 그것 을 주워들고는 괴성을 지르며 공격측의 후위를 기습했다. 스카리 빌파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눈치챘다. 하지만 되돌아 갈 생각은 없었다. 그 소란이 그를 뒤따라올 수는 있겠지만 그를 볼 수는 없다. 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스카리는 급격히 끓어올랐던 폭력의 흥분감이 사라진 자리에 기묘한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앞쪽에 있는 사내에게 아마도 평생 흉터로 남을 상처를 안겨주면서 스카리는 묘하게 차분해졌다. 그는 자유로웠고 무슨 일이 든 할 수 있었다. 틸러는 채찍을 정신 사납게 휘둘러 공격자들을 주춤하게 만드는 것 에 성공했다. 하지만 싸움터 안쪽으로 뛰어들자 틸러는 다른 병사들 이 느끼는 것과 똑같은 불안을 느꼈다. 이곳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적이 있다. 하지만 틸러는 두려움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틸러는 그것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했다. "스카리 빌파!" 공격자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312소대의 소대원 들은 소대장의 목소리에 환호를 올렸다. 틸러는 호호탕탕하게 외쳤 다. "나와라, 주정뱅이 장군! 아, 이런. 내 실수로군. 너 하전사 제대했 지? 도대체 몇 계급 강등이야? 부위님이 부르는데 하전사 녀석이 나 타나지도 않고 숨어 있어? 당장 나타나! 이 겁쟁이 녀석!" 공격자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스 카리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당장 저 시건방진 부위의 입이 뭉개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틸러의 입은 건강하고 활기차게 독설을 토해내 고 있었다. 스카리는 자신이 더 이상 야유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 랐다. 그를 겨냥한 독설과 폭언을 칼로 갚아주는 것이 스카리의 인생 철학이었다. 하지만 무한히 자유로워진 지금, 병기 같지도 않은 나무 작대기에 픽픽 쓰러지는 무력한 상대를 보면서 스카리는 그런 것들이 보내는 야유에 도대체 무슨 아픔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그 때 스카리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바로 앞쪽,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있었다. 보이지 않는 자의 공격에 쓰러지는 사람을 본 그녀는 넋빠진 얼굴로 쓰러진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검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아 쓰러진 남자 는 비명이나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땅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경악과 동정심, 슬픔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그 녀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스카리는 오른손잡이였다. 그는 목검과 비수를 바꿔들었다. 현하한 독설을 뿜어내던 틸러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꼭 나가가 된 것 같다. 숨어 있어야 할 정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우는 계단 위쪽에 서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틸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있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떠보아도 정우의 모습은 그 대로였다. 틸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신부 절도자들에게 그들의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음을 알 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우를 못 보기를 바라 는 것은 지나친 희망이었다. "신부다!" 공격자들 중 한 명이 외쳤다. 그러자 뒤이어 같은 내용의 외침들이 들려왔다. "신부다!" "규리하공이다!" "성채매장자다!" 공격자들은 바야흐로 정우를 향해 쇄도할 기세였다. 정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스카리는 비수를 휘둘렀다. 비수는 그녀의 발목을 잡으려던 남자의 손등에 꽂혔다. 남자는 온몸 을 진저리쳤다. 스카리는 잔인하게 비수를 비틀어 뽑아낸 다음 일어 섰다. 그 때 그녀가 말했다. "엘시?" 스카리는 가슴에 구멍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참 후에야 스카리는 겨우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군. 부냐." 스카리는 도깨비 감투를 벗었다. 백화각의 복도 한가운데서 갑자기 스카리 빌파의 모습이 나타났다. "겨우 백작 따위가 당신의 구원자가 될 순 없지. 당신은 그 이상이 니까." 부냐 헨로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발케네공……" "스카리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부냐는 머리를 내저었다. "당신은, 당신은 비셀스 규리하를 훔치러 간 것 아닌가요? 백화각의 염사나 경비병들도 그 때문에……" 부냐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해했다. 스카리가 왜 신부 절도를 시 작했는지. 스카리는 많은 젊은이들에 덧붙여 백화각의 염사와 경비병 들도 공격자로 끌어들였다. 그 때문에 백화각의 경계는 약화되어 있 었다. 발케네의 날렵한 도둑이 도깨비 감투를 쓴 채 침입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부냐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발케네공. 저를 탈옥시키겠다는 건가요?" "아내를 감옥에 두는 취미는 없거든." 부냐 헨로는 몸을 떨었다. 어떤 감정이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지 부 냐도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엘시가 아니에요. 벌을 피할 수 없어요. 어떻게 이런 짓 을……" "그래. 당신이 보고 있는 그대로야. 당신을 탈옥시키든 그렇지 않든 난 이미 상당한 죄를 쌓아뒀어. 사람들은 나를 야유하겠지. 무슨 상 관이야? 어느 쪽이 좋겠어? 내가 당신 옆에서 함께 시체를 염하는 것? 아니면 파리조에 가서 암살성의 안주인이 되는 것? 난 어느 쪽이 라도 좋아.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으니." "발케네공……" "선택은 어렵지 않을 것 같군. 하지만 빨리 해줘야겠어." "발케네공. 저는……" "나와 함께 파리조로 가줘. 부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면서 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리는 희열 에 찬 얼굴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좋아, 훌륭해!" 거친 포옹에 부냐는 몸이 부서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 몸이 부 서지면 염사장이 염해줄까?' 부냐는 엉뚱한 생각들밖에 떠올릴 수 없 었다. 짧고 강한 포옹을 끝낸 스카리는 부냐를 놓아주었다. 그 때 갑 자기 부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스카리는 그 눈물에 숨을 쉭 들이켰다. 조금 후 스카리는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렇게 좋아?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사과해야겠군." 부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냐는 이것이 도망임을 알고 있었 다. 탈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류에 쪽지를 끼워둔 자, 그녀를 죽이려는 자들에게서의 도피다. 부냐는 엘시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따라갔을 거라는 사실을 스카리에 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울었다. 틸러의 소대원들은 정우를 등진 채 서있었기 때문에, 정우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알아차린 것은 공격자들이었다. 312 소대원들은 갑자기 움찔하며 멈춰서는 공격자들을 보곤 의아해 했다. 공격자들은 당혹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입을 여는 사 람은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요함은 꽤 어색했다. 그리고 그 어 색함은 사람들을 더욱 얽어매었다. 모든 사람이 숨소리를 낮추었을 때 정우가 말했다. "뭘 하고 계시죠, 여러분." 공격자들의 당혹이 더욱 커졌다.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수근거림이 터져나왔다. '발케네공 어디 있지?' '스카리. 대답해요. 어디 있어 요?' 대답은 없었다. 공격자들은 낭패감에 젖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 정우의 말에 대답해야 할 사람은 스카리 빌파다. 그런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성격이 급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발케네공!" 스카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정우의 곁으로 다가갈 기회를 엿보던 틸러도 스카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 때 비명이 터져나왔다. 틸러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정우의 몸이 떠오르고 있었다. 두 팔을 편 채 정우는 위로 둥실 떠올랐다. 상승할수록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사람들은 충격에 말을 잃었고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 었다. 정우의 작은 몸이 매처럼 상승했다. 하늘누리 가까이까지 치솟아오 른 정우는 몸을 크게 뒤틀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은 하늘누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수평으로, 수직으로. 하늘누리라는 거대한 실패에 실이 감기는 것 같았다. 그 엄청난 속도에 틸러는 현기증이 났다. 가혹한 고요 속에 공격자들 중 누군가가 목검을 떨어뜨리며 중얼거 렸다. "오, 맙소사. 저 분은……?" =============================================================== 8챕터 끝났습니다. 암행어사 출또, 언젠가 한 번 해보고 싶었음. 타자 만족중.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9. 불씨의 비행 - 1 "세상을 용납할 수 없다면, 세상도 너를 용납할 수 없게 하라." - 그룸 빌파. 파리조의 바위 투성이 땅에서 미학을 발견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 다. 바위 애호가이거나 광선 애호가. 두 범주에 동시에 속하는 이들 에게, 그 중 미학의 본령은 무용함에 있다고 굳건하게 믿는 이들에게 파리조의 불모함와 황폐함은 오히려 아름다움을 더욱 뜻깊게 하는 소 중한 가치다. 광선의 각도가 대지를 저며내는 듯한 파리조의 일출과 석양에 바위 들은 수억년에 걸친 자신의 연대기를 빛으로 낭독한다. 거시적 규모 로 이루어지는 이 자기 담론은, 헤어릿 에렉스가 파리조에서 발견한 몇 안되는 애정의 대상이다. 보물을 원하는 자들은 헤어릿 에렉스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보물을 가지려면 헤어릿처럼 아무도 훔쳐갈 수 없고 얼마든지 나눠써도 줄어들지 않는 보물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이 경우엔 나눠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 문제지만. 헤어릿은 무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냐 헨로와 아예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실을 보며 난처한 기분을 느꼈다. 헤어릿은 빌파 가문에서 요구를 받았던 적이 없다. 이것은 국외자의 한가함을 즐기는 사람에겐 일종의 축복이라고 할 것이다. 헤어릿은 빌파 가문에 대한 발언권이 없는 것만큼 거기에 대한 책임도 없다. 하지만 일찌기 만나지 못했던 기묘한 봄이 다가오고 있는 이 겨울의 모호한 끝에서 헤어릿은 빌파 가문의 안주인으로 행세한다는 특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그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하지 만 헤어릿은 암살성에서 아실과 부냐 헨로를 상대할 사람이 자기 밖 에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기엔 관찰력이 괜찮은 편이다. 그래서 헤어릿은 낯선 이들과 친교를 쌓는 교과서적 단계를 시험하 기로 했다. 아실, 말 탈 줄 알면 잠깐 산책이나 할까? 부냐. 괜찮으 시다면 당신도 같이 나가죠.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시작은 훌륭한 것 이었다. 아실과 부냐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암살성 외곽의 거친 협곡 사이에서 두 여인은 헤어릿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부냐가 좋아하는 자연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아름다운 자연'뿐이었다. 그녀는 헤어릿이 말한 멋진 풍경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모 르겠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아실은 말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 하는 것에 애를 먹고 있어서 자연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할애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헤어릿은 기우뚱하는 아실의 몸을 붙잡아주며 말했다. "말을 잘 못 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탈 줄 모르는 것 같구나. 아 실." 간신히 자세를 회복한 아실은 말의 귀를 물어뜯고 싶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레콘을 타는 것보다는 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빌어먹을. 이 못생 긴 동물이 레콘보다 훨씬 멍청할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안장 위에 우아하게 앉아있던 부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실을 바 라보았다. "네 말투에 격조가 없다는 것을 지적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니, 아 실?" 말의 귀를 노려보던 아실이 부냐를 돌아보았다. 부냐는 아실의 하나 뿐인 눈이 무서웠다. 아실은 씩 웃었다. "같은 죄수끼리 빡빡하게 굴지 말아요. 부냐." 부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부냐는 아실이 자신의 과거를 야유한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실이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였다. "우리는 둘 다 발케네공의 수인이잖아요. 저는 늙은 발케네공이고 당신은 젊은 발케네공이지만." 헤어릿은 부냐가 '근본도 없는 계집애 주제에'라고 말하려 했다는 것을, 그리고 아실이 무서워 그 말을 도로 삼켰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헤어릿은 자신이 왜 두 사람을 동시에 사귀려는 멍청한 짓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부냐와 아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각자 익숙 한 방식으로 자신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다. 아실은 원래부터 가지 고 있던 거친 태도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그리고 부냐 는 오랫동안 쓸 길이 없었던 귀족적인 태도를 회복하는 것으로 자신 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피랍되다시피 암살성에 오게 된 한 그녀들은 헤어릿이 보기엔 똑같이 가엾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공평하게 관심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스카리라는 든든한 옹 호자를 가진 부냐보다는 아실에게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 었다. 그런 자신을 반성하며 헤어릿은 부냐를 조금 거들어보았다. "아실. 부냐 아가씨는 수인이 아니셔. 저 분은 발케네공 스카리와 결혼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거야." "믿어요. 얼마나 결혼하고 싶으셨으면 감옥을 박차고 나오셨을까." 부냐의 눈이 확 불타올랐다. 헤어릿은 말채찍을 쥐고 있는 부냐의 손이 긴장되어 있는 것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실의 다 음 행동은 헤어릿을 더욱 근심스럽게 했다. 아실은 용케 말을 다루어 부냐의 곁으로 다가섰다. 마치 때려보라는 듯한 동작이다. 부냐는 얼 어붙은 채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차갑게 웃으며 턱을 불쑥 내밀 었다. 헤어릿이 황급히 다가가려는 순간 더 참을 수 없었던 부냐가 말채찍 을 휘둘렀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서툰 동작이었지만 아실은 피하 지 않았다. 아실의 뺨에서 호된 소리가 났다. 아실의 찢어진 뺨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냐는 자신이 저지 른 일에 기절할 것 같아 보였다. 아실은 혀로 볼 안쪽을 눌러보다가 퇘 침을 뱉었다. 피 섞인 침이 바닥에 음울한 얼룩을 만들었다. 두어 번 침을 뱉은 아실은 부냐에게 말했다. "가족들을 데려와요." 부냐는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품에서 손 수건을 꺼내며 한가롭게 말했다. "아직 스카리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그러는 것이 좋아요. 가족들을 발케네로 데려다주기 전에는 결혼해주지 않겠다고 말하면 되겠군요. 얼빠진 신세 타령만 하다가 가족들을 죽어나가게 하면 당 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에요. 부냐 헨로." "내 가족이…… 너 도대체 무슨 소리를……?" 아실은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섰다. 그녀는 말을 한 대 걷어차주 고 싶다는 듯이 노려보았지만 그 뒷다리의 탄탄한 근육을 보고는 위 험한 충동을 억눌렀다. 아실은 뺨에 손수건을 댄 채 걸어왔던 길을 돌이켜 걸어갔다. 헤어릿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아실! 뭐 하는 거야?" "걱정 말아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암살성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앞으론 목에 머리카락 난 동물은 절대 안 타요." 아실은 어떤 제지도 불허하겠다는 단호한 걸음걸이로 암살성을 향해 걸어갔다. 헤어릿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분으로 아실과 부냐를 번갈 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헤어릿은 아실이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당겨쥐며 말했다. "부냐 아가씨. 돌아가죠." 부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넋잃은 얼굴로 표표히 걸어가는 아 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이 한 번 더 재촉한 후에야 부냐는 헤어릿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녀는 격한 혼란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헤어릿 에렉스. 저 아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저도 모릅니다. 아가씨. 저도 아가씨 만큼이나 궁금하네요." "모를 리가 없어! 다 알고 있잖아. 말해!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내 눈을 피해. 뭔가 잘못된 물건이 집안에 들어왔다는 투야. 그걸 못 느 낄 것 같아? 너도 알고 있지? 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 지?" 헤어릿은 이제 낭패감에 익숙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부냐 가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냐의 가 족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부냐 아가씨. 당신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불편한 기분을 느끼는 것 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그 사람들은 부냐 헨로가 아닌 비셀스 규 리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 사람들은 당신에게 잘 대하는 것 이 락토 공작님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죠. 그 래서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거예요. 저 애가 말한 이야기는 저도 무 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비셀스 규리하가 아니라 부냐 헨로라서 당황하는 것뿐이라고?" "그래요. 아가씨." 부냐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이 한 번 더 재촉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 부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죠, 리스?" 헤어릿의 얼굴이 굳었다. 그 이름은 한 때 그녀의 것이었다. 부냐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말했다. "저를 아마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당신은 워낙 홀로 다니길 좋아했 고, 또 저는 그렇게 두드러지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당신 같은 미인 동기생을 잊을 수는 없어요. 두 살이나 어린 동기생들을 곯려주기 위해 이런 저런 물건들을 훔치던 당신의 버릇도 잊혀지진 않아요. 혹시 발케네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당 신이 암살공의 딸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헤어릿은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이런 결말이라니, 아무래도 오늘 나는 최대한 멍청했나 보군. "당신들을 곯려주기 위해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퇴학당하고 싶었 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들처럼 부주의한 사람들에겐 발케네의 기술까지 필요하진 않았어요." "왜 퇴학당하고 싶었던 거죠?" "제가 원해서 간 것이 아니니까요." "공작님이 당신을 억지로 보냈나 보군요." 헤어릿은 약간 난폭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동문의 우정을 제게 기대하진 말아요." "네?" "당신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붙들고 싶어할 거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요. 그걸 이해하기 때문에 당신을 동정해요. 하지만 동문이니까 도와줄 거라고 믿지는 말아요. 저는 그곳에 다녔던 일을 결코 좋아해본 적이 없으니까." 부냐는 말채찍에 맞은 사람이 자신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 릿은 내킨 김에 더 말했다. "그리고 제게 도움을 원한다면 제가 보는 앞에서 어린애의 얼굴을 채찍으로 갈기는 짓 따위는 삼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부냐 아가씨. 그 애가 얼마나 무례하고 공격적이냐는 것은 문제가 안돼요. 당신이 얼마나 절박하고 예민해져 있는지도 고려 대상은 아니에요. 어떤 상 황에서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법이에요." "헤어릿. 나는……" "돌아가죠. 부냐 아가씨. 날이 곧 저뭅니다. 제가 당신을 동정한다 는 것은 분명히 말해두겠어요. 하지만 제 그릇에 담긴 물은 당신의 갈증 때문에 늘어나진 않아요." 부냐는 더 말하는 것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헤 어릿의 물그릇을 땅에 쏟는 짓이 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풀이 죽어서 말머리를 돌렸다. 헤어릿은 아실의 말을 이끌며 그 뒤를 따랐다. 창밖을 내다보던 이이타 규리하는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뺨에 서 피를 흘리는 소녀가 성안으로 걸어들어고 있었다. 소녀의 작은 키 와 안대, 그리고 뺨에 난 상처에도 불구하고 활달한 걸음을 본 이이 타는 어렵지 않게 그 소녀가 아실임을 깨달았다. 아직 정식으로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이이타의 아버지와 황제사냥꾼은 서로 알고 지내 는 사이였고 그 때문에 이이타는 먼 발치에서 아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그녀를 본 것은 규리하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 어난 조우였다. 그 때 아실은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이이타는 그녀가 왜 암살성에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이타 는 소리 로베자에게 질문했고 소리는 아랫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온 갖 이야기를 풍부하게 가져다주었다. 그 풍문들 가운데서 사실성이 높은 것만을 가려낸 이이타는 황제사냥꾼과 아실을 우연히 만나게 된 암살공이 그녀만 붙잡아온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디서 심하게 구르기라도 한 것일까?' 아실의 활달한 걸음을 본 이이타는 그녀가 폭행을 당했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워낙 성한 곳이 없는 얼굴이긴 하지만 그런 상처가 또 생겼다는 것은 이이 타를 근심스럽게 했다. 그 때 아이저 규리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 다. "뭘 보고 있지?" 이이타는 창가에서 조금 비켜 아이저가 아실을 볼 수 있게 해주었 다. 아실을 내려다본 아이저는 짧게 혀를 찼다. "또 어디서 상처를 만들어왔군. 늘상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부싯돌 같은 아이구나." "부싯돌 같은 아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딘가 부딪쳐서 불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배기지 못하는 사람 말 이야." "저 처녀를 우리가 거둬들이면 안될까요? 아버님께서는 황제사냥꾼 과 우의를 나누고 계신 걸로 압니다. 저 처녀도 그러고 싶어하는 눈 치였습니다." "처녀? 그렇군. 그러고보니 너랑 비슷한 연배일 테지. 그런데 너보 다 어리게 느껴지는군. 워낙 작아서 그런가 보군. 그런데 너는 불쌍 한 처지의 여인들을 돌봐주겠다는 결심이라도 한 거냐? 네가 이 성의 하녀 한 명과 친근하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이타는 어깨를 으쓱였다. "발케네공이 보낸 여자입니다. 뭘 원하고 보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만 아버님의 경고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지멘의 얼굴을 봐서 저 애를 거두는 것도 좋겠 지만 지금 당장은 곤란하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아이저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이저는 책상 위에 놓인 초에 손수 불을 붙였다. 이이타 외에 아무도 이 방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방안의 사소한 일은 아이저가 손수 처 리하고 있었다. 이이타는 아버지를 도와 초에 불을 붙였다. 책상 뒤 에 앉은 아이저는 말했다. "아실이 지멘과 떨어지기로 했다면 그것은 정말 피치못할 사정이거 나 아실이 스스로 그러기로 결정한 일일 게다. 아실은 지멘을 자신의 곁에 묶어두기 위해 그에게 철의 대화를 하게끔 유도했지." 이이타는 스쳐들었던 이야기들을 통해 세워둔 가설이 확인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또 다른 것도. 아이저는 그의 질문에 산문적으로 대 답하고 있었다. 아이저 규리하는 아들과 나누는 대화의 즐거움을 포 기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아들의 머리 속에 옮겨두려는 것 같았다. 피비린내 나는 세계를 질주할 운명 을 선택한 이에겐 어울리는 태도지만 이이타는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아이저는 말했다. "그런데 만일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면 지멘은 오래 전에 이곳을 급 습했을 테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실이 이 곳에 있는 것은 아실 스스로 그러기로 결정했기 때문일 거야." "왜 그렇게 결정했을까요?" "너와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뭐냐?" "이곳에 황제를 잡을 방도가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아이저는 문과 창을 한번씩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을 비웃었 다. 이 성의 주인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감출 수 있다. 아이저는 엿들어도 무방한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 생각하면서 말했다. "하늘누리의 특징은 뭐지?" 어렵지 않은 질문이다. "그것은 움직입니다." "그래. 그것 때문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지. 군사적으로 봤을 때 하늘누리는 포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없어. 움직이는 대상을 포위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 누구나 자신의 길을 만들어낼 수 있는 하늘누 리는 또한 요새도 아니지. 하지만 하늘누리는 그냥 조금씩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요새처럼 기능할 수도 있어. 움직이는 대상을 상대로 길 을 만들어내는 일은 어려우니까. 하늘누리에 대한 군사학은 전부 새 로 쓰여져야 하고 그것은 이전의 유산을 거의 이용할 수 없다." 이이타는 아이저가 천경비록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 다. 이이타는 아이저의 가슴 부근을 바라보았다. 읽지 않을 때 아이 저는 그 책을 언제나 품속에 넣어두었다. 아이저의 말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하늘누리를 공격하려는 자는 공격자를 좌절시키는 그 특징 을 거꾸로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늘누리는 움직이지. 따라서 고 정된 군사 목표에는 별로 의미가 없는 매복 기습이 하늘누리에겐 오 히려 적용될 수도 있지." "하늘누리를 끌어들인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만반의 준비를 갖춰둔 다음 하늘누리를 끌어들이는 거야. 그 것이 움직이는 하늘누리를 쫓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이다. 그 렇다면 하늘누리를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지?" "모르겠습니다." 무심히 대답하던 이이타는 아버지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당황했다. 아이저 규리하는 상체를 앞으로 불쑥 내밀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이이타. 좀 생각해보거라." "어, 저, 글쎄요. 천경유수를 포섭해야 합니까?" "삼고의 일원을 포섭한다는 소리를 하는 거냐? 결국 한 도시의 책임 자일 뿐인 천경유수가 사도나 태위와 같은 반열이라는 것은 무슨 의 미냐? 너는 그 의미를 몰라도 지알데 락바이는 모를 사람이 아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아버님.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아들의 주눅 든 모습을 본 아이저는 노기를 가라앉혔다. 그는 아들 에게 도망자의 신세를 선물한 아버지라는 죄책감에서 자유롭기 어려 웠다. 아이저는 달래듯 말했다. "이이타.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느냐? 네 아버지는 이미 한 번 그런 일을 했는데." "예?"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하늘누리를 내게 오게 했다. 그 것이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된 일이냐?" 이이타는 머릿속에 아실이 들어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싯돌이 부 딪치며 튕긴 불꽃. 이이타는 목소리를 낮췄다. "서약지지파입니까?" "그래. 황제가 서약지지파를 싫어하기 때문에 하늘누리는 규리하에 나타났지. 그렇다면 또다른 서약지지파가 있는 곳에 하늘누리가 나타 날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 무리한 예상은 아닐 거다." "아버님이 미끼입니까?" "지금은 아니지." "예?" "그곳에 내 딸이 있기 때문에." '비셀스 규리하.' 이이타는 누나에 대해 밀도 있는 감정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가 태 어나 자라온 시간 동안 비셀스는 유명한 옛이야기 속의 인물과 마찬 가지였다. 이이타가 느낀 인상은 누구나 그녀를 알지만 아무도 그녀 를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런 감정적 오해는 잘못된 것이 아니 다. 옛이야기 속의 인물처럼 비셀스 규리하는 무책임한 상상의 대상 이 될 수 있는 인물이고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이불을 벗기지는 않 을 사람이다. 이이타에겐 그러했다. '하지만 아버님에겐 다르겠지. 당신의 딸이니까.' 그래서 이이타는 아버지가 어떤 감상적인 말을 하더라도 놀라지 않 겠다고 다짐했다. 쓸데없는 다짐이었다. "그 애 때문에 나는 하늘누리를 끌어당기는 미끼가 될 수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제거하려는 것은 서약지지파의 철학이 아니야. 이이타. 황 제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사람의 머릿속을 뜯어고치겠다는 식의 환상 은 황제의 고려 대상이 아냐. 따라서, 어떤 사람이 내심 서약을 지지 한다 해도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이상 황제는 그것을 완전 히 용인할 것이다. 실현의 소지를 제거하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래 서 황제는 나를 공격했다." "서약지지파의…… 구심점을 제거했습니다." "맞아. 황제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언제나 바람이 아닌 불꽃이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바람이 불건 황제는 그것을 용인한다. 하지만 불 꽃이 포착되면 즉각 달려와서 주저없이 밟아버리지. 쥐딤에서 그러했 고 규리하에서 그러했다. 바람이 아무리 분들 바람을 타고 일어날 불 꽃이 없다면 큰불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지." "그렇군요. 그런데 이제 아버님은 불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내 딸이 황제의 수중에 있으니 서약지지파는 나를 신뢰하지 않을 거다." 이이타는 이해했다. 아이저는 두 손을 깍지껴 뒤통수를 받쳤다. "물론 발케네공도 안된다. 사람들은 발케네의 어떤 것도 믿지 않고 당연히 암살공 또한 신뢰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는 나를 추대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게 비셀스를 데려와야 하지. 비셀스가 내 약점이니 까. 비셀스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나는 서약지지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스카리 빌파가……" "맞아." "하지만, 아버님. 애초에 그것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황제는 스카 리와 누님이 결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요." "바로 그 때문에 더욱 좋은 거다. 스카리 빌파에겐 도깨비 감투가 있거든. 억지로 스카리를 막으려 했다면 황제는 비셀스도 지키지 못 하고 체면은 체면대로 크게 깍였을 테지. 하지만 스카리 빌파의 바보 짓 때문에 나는 당장은 미끼로서의 가치가 없다. 남은 미끼가 하나 더 있긴 하지만……" "하나 더 있다고 하셨습니까?" 아이저는 자신의 가슴을 툭 쳤다. "아아……" "그래. 천경비록이다. 황제는 이것을 원해. 규리하 공격은 두 가지 를 한꺼번에 노리는 포석이었다. 서약지지파의 구심점을 파괴하고 천 경비록을 손에 넣는 것이지. 황제는 그 중 한 가지만 성공했다. 천경 비록은 얻지 못했지. 그런데 황제가 천경비록 한 권 때문에 이곳으로 올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책 한 권이 목적이라면 솜씨 좋은 도둑을 고용하는 편이 낫겠지. 그래서 이것은 하늘누리를 끌어들일 수 있는 미끼는 되기 어렵다." 아이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비셀스 문제를 해결한 다음 이곳에서 내가 주동자가 되어 서 약지지파의 봉기를 일으켰어야 했다. 그것이 하늘누리를 이곳으로 유 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그것이 계획이었습니까?" "그것이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아실이 그 모든 것을 짐작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다. 아실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 니까. 하지만 암살공이 뭔가 미끼가 될 만한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수는 있겠지. 영리한 아이니까." "그래서 그것이 뭔지 알아보러 이곳에 온 거란 말씀이군요. 그렇다 면 더욱 가까이 둬서 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알려줄 필요는 없다.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상황을 짐 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저 아이를 피해야 해."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공개되어도 무방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조금 고민한 아이저 는 이이타에게 손짓했다. 이이타는 책상을 돌아 아이저에게 다가갔 다. 아이저는 귓속말로 말했다. "저 아이는 엄청난 부자이기 때문이야." 이이타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뒤이은 아버지의 말은 그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아이저는 지멘과 아실이 강탈한 세금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이타는 휘파람을 불 뻔했다. 아이저는 계속 귓속말로 말했다. "그 돈은 우리가 가져야 한다. 암살공에게 줄 수는 없지." 이이타는 그렇다면 더욱 아실과 접촉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고 싶 었다. 아들의 속마음을 짐작한 것처럼 아이저가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아실과 접촉하면 안되는 거다. 우리가 아실의 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살공이 알게 되면 우리나 아실 모 두 곤란해진다. 우리는 그 돈을 모르는 척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 이 천경비록 한 권뿐인 동안은 암살공은 우리에게 친절할 거야. 우리 가 그 이상의 힘을 손에 넣으면 암살공은 미끼로서의 쓸모가 적어진 나를 따돌리고 직접 천경비록을 연구해보기로 작정할지도 모른다. 따 라서 내가 다시 서약지지파를 결속시킬 힘을 얻거나, 혹은 천경비록 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때까지는 아실에게 함부로 접근해선 안된다." 이이타는 침을 삼켰다. 아이저는 아들을 살짝 떠밀었고 이이타는 자 연스럽게 일어섰다. 이이타는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이저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실이 왜 지멘을 빼돌렸는지도 알지 못한다. 참 대 담한 아이지. 이곳에서 무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서는 겁 없이 혼자 암살공을 따라온 거야. 지멘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를 알아내기 전에는 아실을 만나고 싶지 않구나."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아이저는 아들에게 더 가르쳐줄 것이 없나 생각해 보았다. "그 여자를 조심해라. 그 하녀의 목적을 모른다고 했지? 친근하게 대하는 것은 좋지만 그 하녀가 너를 오해하게 해야 한다. 네가 어떻 게 행동할지 다 안다고 믿게 해라."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 좋아. 지금은 일단 몸을 사려야 한다. 스카리 빌파의 사랑 놀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곤하게 됐다. 락토 공작도 아마 아들에 게 실망했겠지." 아이저 규리하의 예상대로였다. 그 시간은 어쩌면 부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으로 정해져 있는지 도 모른다. 아이저 규리하가 아들과 대화를 나누던 시각, 암살성의 다른 곳에서는 락토 공작이 스카리와 대화 중이었다. 하지만 대화 분 위기는 천양지차였다. 락토 빌파는 차갑게 말했다. "너를 바보 취급하지는 않겠다.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나는 너를 그렇게 높게 평가할 수 없군." 스카리는 철창이 없어지길 바라는 야수 같은 눈으로 아버지를 노려 보았다. 락토는 난폭한 눈길로 그것을 마주했다. 만약 누군가가 있어 그들을 보았다면 두 사람의 눈빛이 똑같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겠지 만 그곳에 그런 관찰자는 없었다. 스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 다. "하실 말씀은 그게 답니까?" "앉아!" "왜 그래야 합니까?" "빌어먹을. 앉아서 내 말을 들어. 내 질문에 대답해. 너는 그래야 해!" 스카리는 팔짱을 끼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락토는 책상 서랍을 확 잡아당기고는 팔을 크게 휘저어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서랍 안에 쓸어넣었다. 거칠게 서랍을 닫은 락토는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스카리는 비웃음을 지었다. "멀리서 뭘 집어던지시는 것이 안전할 텐데요." 락토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 사실 때문에 화가 나지만 너는 내 아들이다. 아무도 너에게 뭘 집어던질 수는 없다. 나조차도.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어." 스카리는 이것이 혹 애정의 표현인가 하는 의심을 품어보았다. 그리 고는 곧 자신에게 황당한 생각도 잘 한다는 핀잔을 주었다. 락토가 말했다. "도대체 왜 그 모양이냐? 술에 취해서 대장군의 지위를 날려버린 걸 로 부족하다는 거냐?" 스카리는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거론하다니, 너무 야비하 다. 다른 사람들의 어떤 야유에도 굴하지 않겠다 결심했지만 스카리 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옛날 일 들춰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노화의 증거입니까?" "허튼 소리 집어치워라. 무슨 생각으로 부냐 헨로를 데려왔는지 말 해라." "설명해야 합니까?" "해!" "그녀를 사랑합니다." "엘시 에더리보다 더?" 갈수록 심하다. 엘시의 이름을 거론하다니, 작정하고 나선 것이 아 닌가. 스카리는 일어나지 않기 위해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락토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엘시 에더리는 부냐에게 세계를 주려고 했다! 그녀를 용서하는 세 계, 부냐 헨로가 있어서 참 좋다고 말할 세상을! 그 놈의 방식이나 가능성 같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 놈이 노리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 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부냐 헨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너는 부냐에게 탈옥수 신분 이외에 도대체 무엇을 줬냐?" 스카리는 눈 주위를 꿈틀거렸다. 락토는 스카리의 얼굴에 화인을 찍 어줄 듯한 기세로 아들의 표정을 살폈다. 스카리는 의자에 몸을 밀어 넣으며 그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가 그런 몽상가의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실 줄은 몰랐군요. 아버지는 그 놈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 놈을 모르시기 때문에 그 병신 같은 자식을 과대평가하는 겁니다. 한 번이라도 에더리를 겪어 보신다면 그 놈에게 줄 것이 경멸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못난 놈. 제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예?" "현자는 우자를 경멸하지 않는다. 경멸은 항상 그 반대 방향으로 작 용하지." 스카리는 붉으락푸르락하며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아버지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을 사과하 길 바라는 겁니까? 사과할 거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부 냐와 결혼할 겁니다. 난동을 부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면 그 혼 례식에 아버지를 초청하지요. 그것이 제가 드릴 수 있는 제안입니다. 그러기 어려우시다면, 아버지와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어쨌든 에더리 따위에게 비교나 당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남 은 시간은 모두 부냐의 것이니까요." "뭐라고? 누구의 것이라고?" "부냐 헨로의 것입니다." 락토는 창백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암살공을 약간이라도 아 는 사람이라면 그가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 다. 스카리 또한 그러했다. 지극히 낯설어서 부정해버리고픈 얼굴을 보며 스카리는 숨을 멈췄다. 더 볼 수 없었다. 스카리는 일어섰다. 그는 더듬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제 제안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스카리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분을 참지 못한 아버지가 서랍에서 꺼낸 물건이 날아오기를 반쯤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가 문 가까이 다 가갔을 때 날아온 것은 질문이었다. "누구냐?" 스카리는 몸을 돌렸다. 락토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무슨 말입니까?" "누가 네 귀에 그 계획을 불어넣은 거냐? 나는 너를 안다. 넌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없다. 비셀스 규리하에게 청혼서를 보내고 규리하 성에 모든 주의를 집중시킨 다음 부냐를 빼낸다는 계획을 네게 알려 준 사람은 누구냐?"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런 사람 아무도……" "당연히 없을 거다! 그런 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중얼거린 녀석을 찾 으려면! 너 스스로 그 생각을 떠올렸다고 착각하게 했을 것이다. 생 각하지 마라! 이제 넌 생각 따위를 할 수 있는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냥 두 가지만 떠올려라.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부냐와 비셀스라는 이름을 동시에 말한 녀석들을 떠올려라. 그 중에 서 네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찾아라. 그 녀석이 너를 조종한 자 다!" 스카리는 자신이 누구에게 조종당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 다. 하지만 락토의 지적이 너무도 정확했기에 스카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락토가 내세운 조건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물이 그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스카리는 그 사람을 의심할 수 없었다. 왜냐 하 면…… "4년 동안 공을 들였으니까요."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은 미간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그 말투에 는 겸손함과 과시욕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비스그라쥬백 데 라시는 그 정도의 과시욕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사의 말처럼 스카리는 절대로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르지요. 하지 만 암살공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음에 스카리를 만나게 되 면 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거 참 아쉽군요. 저는 스카리 빌파를 좋아하거든요." "제자로서 말입니까?" "제자로서? 글쎄요. 좋은 제자였습니다. 같은 것을 세 번 말할 필요 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훌륭한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제자가 행할 수 있는 최대의 보답은 스승을 격파하는 것인데, 아마 스카리에겐 그 런 종류의 보답을 할 능력이 없을 겁니다. 저는 그를 한 사람으로 좋 아했습니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사람이었죠." "그렇다면 참 안됐지만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 잠깐 이야기 합시다. 첫번째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망가뜨릴 뻔한 당신의 형입니다." 파라말은 두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백작님. 잘 아시겠지만 저희 형님은 판단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형님이 그런 일을 할 줄 몰랐습니다." "부사의 말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실 그런 일을 누가 예상할 수 있 겠습니까. 일개 부위에게 사자패를 주어 하늘누리에 출또하게 하다 니. 하지만, 부사. 저는 당신의 형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그냥 남겨두기엔 지나치게 영향력이 큽니다." 파라말은 문득 긴장했다. 파라말의 긴장을 간파한 데라시는 정확하 게 인간의 웃음을 표현해보였다. "무슨 걱정을 하는 겁니까. 제가 소속이 불분명한 선수를 경기장에 놔두는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그를 밖으로 쫓아낼 거라고요? 걱정하 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그를 더 알고 싶다는 겁니다." 파라말은 안도했다. "직접 만나서 판단하시라는 말밖에 드릴 것이 없어 유감입니다. 저 는 형님이 엘시 백작을 좋아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습 니다. 하지만 비셀스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나설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율형부사는 엘시 백작의 신부감을 보호한 것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정의감에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 니다. 지금 저 밖에 있는 그녀가 죽게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셨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데라시는 파라말이 사라말에 대해 아무 것도 논평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눈치챘다. 또한 그것이 거부감이나 비밀주의 때문이 아니라 정 말 논평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도. 친동생에게서도 적절한 정보를 얻어낼 수 없게 되자 데라시는 사라말에 대한 정보원을 더 떠올릴 수 없었다. 데라시는 사라말을 몽화각의 도깨비처럼 대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 진의는 알기 어렵지만 일단 호의적이고 협조적인 인물 로 분류해두어야 할까? 데라시는 경우가 다르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라말은 도깨비 가 아니다. 그리고 그 종족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를 불러온다. 만약 율형부사가 도깨비였다면 사자패주를 감히 하늘누리에 출두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말 그럴까? 도깨비라면 그것이 재미있어 보 인다는 이유에서 그러지 않을까? 데라시는 혼란스러워졌다. "알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직접 율형부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 도록 하지요." "제가 자리를 주선할까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좀 여유를 가져도 될 것 같군요. 부사 덕분에 부냐와 스카리를 모두 처리했고, 규리하를 원하는 암살공의 그릇된 야욕도 분쇄했으며, 비셀스 규리하는, 음. 안전합니다." 데라시의 말끝은 좀 이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다. 파라말 아 이솔은 정우의 상태를 안전하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 다. "백작님. 그 분은 도대체 무엇이 되신 걸까요?" "규리하공 말입니까? 그녀는 인간입니다. 아무 것도 되지 않았습니 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저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은 도깨비 들에게 상상력을 단련받은 인간과 환상계단이 서로 만나서 이루어낸, 대단히 인상적이지만 사실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닌 일입니다. 그리고 내용을 놓고 본다면 방문을 잠그고 밥 안 먹겠다고 고함을 지르는 어 린애와 똑같은 일이고요. 어디를 봐도 놀랄 일은 없습니다." 파라말은 겨우 그것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다른 설명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파라말은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백작님처럼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형님이 첫번 째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두번째는 누굽니까?" "도르 헨로 자작과 그의 가솔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들은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복잡 합니다. 부사가 그들을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파라말은 조금 생각했다. "암살의 위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발케네공이 정말 그렇게까지 막나갈지도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부냐 헨로의 가족이 피살된다면 그는 제국 정 부에 지게 된 정치적 부채를 일소하면서 거꾸로 엄청난 정치적 부채 를 떠넘길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인정해야겠지요. 부냐 헨로가 영리하다면 최우선적으로 자기 가족부터 발케네로 데려 갈 겁니다." "그렇다면 부냐와 협조하여 그들을 발케네로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 을 것 같군요." "그게 좀 어렵습니다. 발케네의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발케네의 조직이 노출되었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노출되어서 제거된 것 같은데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 명이 제거되면 전체가 기능을 정지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그런 것 같습니다." 파라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르 헨로 자작이라면 일전에 대전에서 있었던 일도 있고, 또 제가 그와 바둑 이야기를 나눠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겁니다. 이번에도 바둑이 핑계가 되겠군요. 제가 자작의 주변을 살펴보겠습니 다." "수고해주십시오." 파라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는 봄이 다가오고 있었고 따라 서 계속 난방을 하고 있는 데라시의 방은 지나치게 더웠다. 파라말은 일어설 수 있어서 즐거웠다. =============================================================== 9챕터 시작합니다. 3월달에 눈이 다 내리는군요. 감기 조심, 빙판길 조심하세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9-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3-05 조회수 : 1671 피를 마시는 새 9. 불씨의 비행 - 2 세찬 바람에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가다듬던 틸러는 하마터면 뒤쪽으 로 구를 뻔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던 탈해가 뒤편에 앉 기를 고집했기에 다행히 틸러는 추락사를 모면했다. 도깨비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 틸러는 헐떡거렸다. 고마움을 말하고 싶었지만 양쪽에 서 들려오는 엄청난 날개 소리 때문에 틸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 다. 그는 그냥 호의적으로 탈해의 팔을 두드리고는 바람에 저항하여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틸러가 충분히 고정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탈해는 번뜩이로 하여금 날렵한 호선을 그리게 했다. 빈 하늘을 매끄럽게 미끄러진 딱정벌레 의 앞쪽에 정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정우는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두 무릎을 가슴에 대고 그것을 끌어 안은 평범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수백 미터 상공 에서는 평범할 수가 없다. 틸러는 허공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는 것만 으로도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수백 미터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딱정벌레의 날개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정우가 무릎에 파묻 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틸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천을 펼쳤다. 도깨비지를 썼다간 찢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틸러는 천을 선 택했다. 거기엔 큼직한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규리하공 아가씨. 제발 내려와주세요.' 정우는 그 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천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뒤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틸러는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을 보면서 자신이 앉아있는 환상구조물을 다룰 수 있다는 건가? 그런 것 같았다. 새들도 힘껏 날 개치지 않으면 그런 비행을 할 수 없겠지만, 그리고 뒤로 날 수 있는 새는 거의 없지만, 정우는 오도카니 앉은 자세로 뒤로 날아갔다. 삽 시간에 정우는 수백 미터 저편까지 날아갔다. 하늘누리의 반대편 가 슴 지느러미 상공이다. 틸러는 넌더리를 내며 아우성치는 천을 품 안에 말아넣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정우를 가리켰고 탈해는 딱정벌레 번뜩이를 그곳으로 날 아가게 했다. 아마도 열다섯 번째나 마흔 번째의 일일 것이다. 그 이 상일 수도 있고.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정우가 하늘에서 내려 오지 않은 것이 벌써 며칠째다. 틸러는 그녀가 졸기라도 한다면 그대 로 곤두박질치게 될 거라 예상했다. 탈해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강제로라도 정우를 아래로 끌어내려야겠지만, 유수부의 가장 노련한 갑충사들도 그녀를 잡는 것보다는 독수리를 잡는 것이 쉽다고 공언했 다. 정우는 하늘에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대개의 경우 그녀는 한 자 리에 가만히 떠있었지만 딱정벌레나 환상계단을 이용한 누군가가 다 가오면 앉은 채, 혹은 선 채 휙휙 날아다녔다. 실제로는 그녀를 지탱 하는 환상구조물이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는 것이겠지만 그 구조물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 날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언제나 경이적이다. 하늘을 나는 사람을 그린 상상 화 속 인물은 언제나 새의 모습을 흉내낸다. 두 다리를 뒤로 뻗고 두 팔을 날개처럼 펼친 모습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우는 선 채로, 혹 은 앉은 채로 날았다. 허공에서도 정우는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다리 를 땅으로 향하는 기초적인 품위를 잃지 않았다. 어쨌든 그 이동 속 도는 놀라운 것이었고, 그래서 틸러와 탈해는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 리는 대신 그녀를 설득하기로 했다. 사실상 선택 가능한 유일한 수단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틸러가 하려는 짓을 제외하면. 탈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틸러를 내려다보았다. 틸러는 밧줄 끝을 자신의 허리와 상체에 묶고 있었다. 그것은 날아 오르기 전 될 수 있는 한 자제하자고 약속한 짓을 틸러가 할 것이라 는 증거였다. 탈해는 틸러의 어깨를 두드렸다. 틸러는 뒤를 돌아보았 다. '정말 할 겁니까?' 탈해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딱정벌레가 비행중일 때 탑승자는 대화 가 불가능하다. 틸러도 입을 벙긋거려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해야 합니다.' '당신이나 정우 둘 중 한 명이, 혹은 두 사람 모두가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틸러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펼쳐보였다가 다시 손가락 하나를 펼쳤 다. '제기랄, 엿새째입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잠 한 숨 자지 않 고 엿새째 저러고 계십니다. 인간은 저럴 수 없어요. 규리하공 아가 씨를 죽일 작정입니까?' 물론 탈해는 정우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르신이 되는 도깨 비와는 다르니까. 탈해는 결단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에 동의했다. '좋습니다. 해봅시다.' 탈해는 번뜩이에게 몇 가지 명령을 전달했다. 번뜩이는 정우에게 날 아가는 대신 하늘의 높은 쪽, 별들의 산책로로 날아올랐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지만 틸러는 옆에서 내려앉는 구름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래쪽의 땅에는 봄내음이 가득했지만 이 곳, 구름이 태어나는 높이는 아직 겨울을 독백 중이었다. 아마 일년 내내 그럴 것이다. 틸러는 갑충사에게 빌려입은 비행복이 아니었다면 얼어죽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상당한 고도까지 치솟아오른 번뜩이는 갑자기 몸을 뒤집으며 속날개 를 접었다. 날개 소리가 멈췄기에 탈해의 외침은 틸러의 귀에 똑똑히 들어왔다. "시작합시다!" 틸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밧줄 사리를 옆으로 힘껏 집어던 졌다. 호흡을 빠르게 내쉰 틸러는 눈을 질끈 감고는 옆으로 몸을 기 울였다. 속날개가 요동치고 있을 때 그런 짓을 해다면 틸러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속날개는 안으로 접혀 있었고 그래서 틸 러는 미끄러지며 딱정벌레의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중력이 번뜩이로부터 틸러를 인계받았다. 틸러의 등뼈가 부러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탈해는 번뜩이를 조 금 하강하게 했다.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틸러를 덮친 충격은 엄청 났다. 온몸의 뼈가 한꺼번에 몸 안쪽으로 쇄도하는 기분을 느끼며 틸 러는 비명을 질렀다. 위아래로 거칠게 출렁이던 몸은 곧 빙글빙글 돌 기 시작했다. 틸러는 귀 안쪽에 모래가 쏟아져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 을 느꼈다. 토하면 안돼. 이런 바람 속에서 토했다간 숨이 막혀 죽을 지도 몰라. 틸러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눈도 뜨지 않았다. 아직 시각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세찬 바람이 그를 허공에 굴렸다. 회 전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이 회전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 틸러는 눈을 뜨기로 했다. '오, 멍청이. 왜 눈을 뜬 거지? 그 빌어먹을 빛을 내 눈 앞에서 치 워! 나를 고문하려는 거야? 잠깐. 저건 태양인가? 와, 며칠이 순식간 에 지나가는군.' 세계가 무섭게 회전하고 있었다. 세상의 동서남북이 순식간의 틸러 의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틸러는 이것이 자신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 이기만을 애타게 원했다. 이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살 맛이 안날 테니까. 그리고 틸러는 정우를 지나 쳐버리지 않기 위해 몸의 회전을 멈추려고 애썼다.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매달린 사람은, 원 래는 자신의 회전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틸러를 매단 딱 정벌레 번뜩이는 고속으로 활강하고 있었다. 그 속도가 틸러를 도와 주었다. 틸러는 몸을 넓게 펼쳤고 그러자 바람을 안은 연이 회전하지 않는 것처럼 틸러의 몸도 고정되었다. 줄의 방향이 정반대일 뿐 틸러 의 모습은 연과 비슷했다. 그렇게 틸러는 번뜩이의 배 아래 5미터 쯤 되는 높이에 매달린 채 정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날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우가 날개 소리를 듣고 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정우의 뒤쪽 상공에서 활강해 내려가기로 약속 되어 있었다. 하지만 틸러는 펄럭거리는 자신의 옷소리를 들으며 도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에 빠졌다. 몸에 잘 달라붙는 갑 충사의 비행복도 틸러에겐 고막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소음의 원천이었다. 틸러는 정우가 그 소리를 들었나 궁금해하며 정우의 모 습을 찾았다. 정우는 그의 앞쪽에 있었다. 딱정벌레가 비스듬하게 하강하고 있었 기 때문에 틸러는 정우의 모습과 하늘누리의 모습, 그리고 그 아래쪽 넓은 규리하땅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기가 확 꺾이는 광경이었 다. 틸러는 자신이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칠 거라는 두려움을 떨치 기 어려웠다. '왜 제국군 훈련과정엔 딱정벌레에 매달린 채 활강하는 부위를 위한 특별과정이 없는 거지?' 자신이 발견해낸 제국군사교육 의 치명적 맹점에 애석해 하며 틸러는 정우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사 실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까지 틸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 다. 아래에 매달린 틸러를 정확하게 정우에게 충돌시키는 일은 탈해 의 몫이었다. 탈해는 자신이 떠올린 충돌이라는 용어에 두려움을 느꼈다. 속날개 를 이용하면 딱정벌레는 훨씬 부드러운 방식으로 틸러를 정우에게 접 근시킬 수 있다. 하지만 겉날개만을 펼친 채 활강할 때는 속도를 조 절하는 일이 굉장히 어렵다. 그리고 틸러는 탈해를 별로 도와주지 않 았다. 정우에 대한 걱정밖에 할 수 없었던 틸러는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도깨비의 심리에 입힐 영향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자신은 정우 의 목뼈를 부러뜨리고 싶은 생각은 없노라고 말했다. 가능한 일이다. 레콘이 아닌 인간이라도 지상에서 두 발로 달리는 것만으로 인간의 목뼈를 부러뜨릴 힘 정도는 낼 수 있다. 그리고 딱정벌레의 활강 속 도는 인간의 주력보다 월등히 높다. 그 때문에 계획은 아주 복잡한 것이 되었다. 적당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번뜩이는 갑자기 속날개를 펼치며 공중 에 멈춰야 한다. 그러면 틸러는 날아가던 관성에 의해 진자처럼 앞으 로 날아가다가 속도가 떨어질 때 쯤 정우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안 전하게 정우를 붙드는 것이다. 당연히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고 연습 은 해볼 수 없는 일이다. 사실상 미친 짓에 가깝지만, 두 사람은 정 우를 이대로 놔두는 것이 더 미친 짓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 다. '아마 실패할 거야. 절대로 실패하면 안돼!' 전망과 소망 사이의 모순은 탈해 머리돌에게도 낯선 것은 아니었다. 번뜩이의 활강 속도와 각도, 그리고 정우의 위치를 세심히 관찰하던 탈해가 결단을 내렸다. 순간 번뜩이는 활강을 중단하고 속날개를 확 펼쳤다. 틸러는 밧줄에 매달려 날아가던 자신의 몸이 거대한 호를 그리는 것 을 느꼈다. 창자가 뒤집어지는 충격을 애써 참아내며 틸러는 진폭의 정점에 정우가 있기를 애원했다. 그리고 홀연히 정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정우는 갑자기 들려온 날개 소리에 놀라 위쪽을 보고 있었고, 그래 서 아래에서 날아드는 틸러의 모습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틸러는 손을 죽 내밀었다. 각도는 훌륭했다. 가장 이상적인 각도는 아니지만 틸러의 팔로 정우를 붙잡을 정도는 되었다. 틸러는 희열에 차서 정우 의 허리를 향해 두 팔을 휘둘렀다. 틸러는 허공을 와락 끌어안게 되었다. 그 때 정우도 아래에서 날아드는 틸러를 발견했다. 정우는 놀란 눈 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우를 보 고 있었다. 정우의 몸 앞 50센티미터도 되지 않을 지점에서 진동이 끝나버린 것이다. 틸러는 발을 버둥거리고 손을 휘저었다. 그러니까 헤엄을 치는 것과 유사한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진자 운동의 냉엄 한 법칙은 틸러의 안쓰러운 노력을 무시하며 그의 몸을 반대 방향으 로 이끌기 시작했다. 틸러는 고함을 빽 질렀다. "앞으로! 앞으로!" 뒤로, 뒤로. 틸러의 몸은 속절없이 뒤로 날아갔다. '으아, 50센티미터인데!' 물 론 진자 운동은 반복 운동이니 뒤로 흔들린 다음 다시 앞으로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탈해와 틸러의 계획을 알아챈 정우가 도망쳐 버릴 것이다. 틸러는 울상을 지은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 우의 얼굴에 나타난 병색을 본 틸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가까이서 보게 된 정우의 얼굴은 벌겋게 열이 올라 당 장이라도…… 정우는 폭소를 터뜨렸다. 뒤로 거대하게 흔들리며 틸러는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정우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아예 발을 구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결국 정우는 쭈그리고 앉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정우는 어깨를 바 르르 경련하며 웃었다. 뒤로 진동했던 틸러는 정점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앞으로 흔들렸 다. 긴장감이 사라진 자리에 반갑잖은 메스꺼움이 냉큼 뛰어들었고 틸러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을 느꼈다. 앞으로, 뒤로. 다시 앞으로. 결국 틸러는 진동을 멈추고 허공에 매달려 뱅글뱅글 돌게 되었다. 지 상 수백 미터 상공에서 펼쳐진 박진감 있는 활극의, 매우 품위 없는 끝장면이다. 틸러는 언뜻언뜻 시야에 들어오는 정우를 보려 애썼다. 그 때 정우가 눈물이 그렁한 얼굴을 들어올렸다. 정우는 숨이 막혀 콜록거리다가 간신히 손을 내밀었다. 정우의 손짓을 본 틸러는 환호 했다. '아래로 가요.' 위쪽에서 번뜩이를 몰고 있던 탈해도 정우의 손짓을 보았다. 정우는 똑바로 일어서더니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몸이 규리하성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 탈해는 환호를 지르며 번뜩이를 아래로 이동시 켰다. 물론 탈해는 아래쪽에 매달려 있는 틸러 달비의 존재를 잊지는 않았다. 급강하를 시도했다간 틸러의 몸에 충돌할지도 모르고 그런 사고를 피할 수 있다 해도 틸러는 대단히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될 것 이다. 그래서 탈해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최대한 부드럽게 하강했다. 그 때문에 정우는 두 사람보다 한참 앞서 규리하성에 내려섰다. 정우 가 내려선 곳은 얼마 전 엘시를 만나기 위해 떠올랐던 장소였다. 바닥을 두 발로 단단히 딛은 정우는 번뜩이가 뒤따라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딱정벌레의 날개 바람이 쇠약해진 정우를 날려버릴까 두려웠 던 탈해는 조금 떨어친 위치에 번뜩이를 착륙시켰다. 물론 그 착륙은 순탄치 않았다. 탈해는 먼저 딱정벌레가 약 4미터 쯤 되는 높이에 머 물게 해야 했다. 먼저 바닥에 발을 딛은 틸러는 밧줄을 풀려고 애썼 다. 서두름을 경계하는 온갖 조언들은 이 경우 틸러에게 정확하게 적 용될 수 있을 것이다. 황급히 밧줄을 풀려던 틸러는 그만 밧줄에 엉 켜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틸러는 얼굴을 빨갛게 부풀린 채 스스로 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꼴을 보다못한 탈해는 딱정벌레 쪽에서 밧 줄을 풀어주었다. 밧줄이 아래로 떨어져 고함을 지르고 있는 틸러의 볼을 찰싹 때렸다. 틸러는 꽤 한심한 기분을 느꼈지만 구속에서 해방 된 것은 반가웠다. 틸러는 일어섰고, 그리고 밧줄을 질질 끌며 정우 에게 달려갔다. 정우는 위아래 입술을 깨문 채 웃음 가득한 얼굴로 틸러를 보았다. 하지만 틸러는 헐떡거림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 정우가 먼저 말했다. "오늘이 며칠이죠?" "규리하공 아가씨! 엿새입니다. 맙소사, 엿새라고요!" "엿새? 아아. 그렇다면 12월 25일이겠군요." "예? 예. 그렇지요. 그게 그렇습니다. 규리하공 아가씨께서는 엿새 동안이나 하늘에 계셨단 말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젠장, 괜찮으실 리 가 없지. 이런 멍청한 질문이라니!" 인간은 엿새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버틸 수 없다. 틸러는 정우가 당장 실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황을 좀 수습하고 정우를 관찰한 틸러는 뭔가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 우는 바람에 흩어진 머릿결과 약간 창백한 볼빛을 하고 있을 뿐 건강 상의 문제는 없어보였다. 불가능한 일이다. 틸러는 허둥거렸다. "어떻게…… 규리하공 아가씨. 의사를 대기시키겠습니다. 아니, 식 당을, 아니, 잠자리를, 어, 혹시 화장실을…… 아뇨, 그러니까……" "틸러. 진정해요. 저는 괜찮아요." 틸러는 진정하지 못했고 그 흥분은 곧 두 배로 늘어났다. 번뜩이를 착륙시킨 탈해가 성큼성큼 달려와 동참했기 때문이다. "괜찮을 수가 없어! 정우. 업어줄까? 괜히 버티지마. 어서 안으 로……" 정우는 입 앞에 손가락을 세웠다. 두 사람이 불만족스러운 기분 속 에 침묵하자 정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틸러는 두 팔을 앞으로 내밀려 했다. 하지만 그 팔은 아직도 밧줄에 엉켜 있었다. 그래서 틸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어떻게 괜찮다는 겁니까? 엿새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않으셨고 잠 한 숨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인간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허공을 걸을 수도 없죠." "예?" "환상계단 말이에요." 무슨 말인가 생각하던 틸러는 조금 후 소스라치는 기분을 느꼈다. 두려움 때문에 뒷걸음질 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틸러는 정우의 얼 굴과 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물론 틸러가 보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용인의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틸러에겐 정우의 내부를 볼 능력이 없었다. 환상계단은 상상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줄뿐 다른 사람에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상상한 본인에게 주는 영향은 어디까지인가? 가 장 널리 알려진 용도, 즉 그것을 밟고 하늘누리를 오르내릴 수 있다 는 것은 환상계단의 모든 것일까? 틸러는 혼란스러웠다. 정우는 졸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굶주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의 얼굴 에 한 꺼풀 덮여 있는 것은 낯설음에 대한 놀라움처럼 보였다. 마치 이 세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다른 세상에서 온 방문자처럼. 충격에 빠진 틸러와 달리 탈해는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에 어려 움을 겪지 않았다. 정우가 괜찮은 것처럼 보였고 탈해에겐 그것은 만 족의 충분조건이었다. 탈해는 정우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으며 웃었 다. "너 사람 걱정하게 했어." "미안해. 생각 좀 정리하고 곧 내려올 생각이었어. 엿새나 흐른 줄 은 몰랐네." 탈해는 엿새나 흐른 줄 몰랐다는 말을 깊은 상념과 시간적 간격의 반비례 관계 쯤으로 생각하고는 대수롭잖게 웃었다. 하지만 틸러는 새로운 의혹을 느꼈다. 틸러의 얼굴을 본 정우는 고개를 꾸벅했다. "웃은 것 미안해요. 당신을 비웃은 것은 절대로 아니예요. 몹시 놀 라서 그랬던 거예요. 틸러. 어쩌려고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한 거죠. 물가와 높은 곳을 조심하라고 자당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어요?" "어, 저, 그 점에 있어서 저희 어머니는 단순한 방식의 신봉자입니 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조심하라고만 하셨지요." "예?"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게 꾸중 들을 일을 피했습니다." "아아…… 하하하." 정우의 웃음은 탈해를 행복하게 했다. 하지만 틸러는 찔끔 놀라야 했다. 틸러는 의혹과 경외감, 그 외에도 명명하기 어려운 몇 가지 감 정을 더 느끼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틸러의 눈길은 정우의 웃음을 잘 건조시켜 표본을 만든 다음 두고두고 연구해보고 싶다는 눈길이었다. 탈해가 말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나는 너를 좋은 음식으로 꽉꽉 채워 잠자리 에 눕혀놓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어. 가자고." 정우는 자신의 소매와 바짓단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 씻는 것 먼저. 내 꼴 좀 봐. 엉망이야. 엿새라더니 정말 그런 가봐." "씻는다고? 어, 물에 들어가지. 잠깐. 쇠약한 킴이 뜨거운 물에 들 어가도 되던가? 달비 부위. 괜찮겠습니까?" 틸러가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정우는 까치발을 하며 - 그래도 탈해 의 목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다. - 말했다. "나 쇠약하지 않아. 탈해." "네가 그렇다면, 알았어. 하지만 씻을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 릴 테니까 일단은 간단하게라도 뭐 좀 먹도록 하자. 달비 부위! 정우 를 방으로 좀 데려가주겠습니까? 저는 번뜩이를 마구간에 데려다놓고 곧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틸러는 그 요구에 당황했다. 하지만 탈해는 이미 번뜩이를 향해 뛰 어가고 있었다. 틸러는 주춤거리지 않기로 했다. 그는 성큼성큼 정우 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정우는 놀란 눈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 화났어요?" "예? 아뇨. 천만에요. 화가 날 리가 있겠습니까. 아가씨가 마침내 내려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크게 웃을 수도 있습니다. 하, 하, 하. ……죄송합니다. 설득력이 별로 없죠?" "감투 정신은 높이 살게요." 틸러는 손을 처음으로 가지게 된 사람처럼 보였다. 정우는 틸러가 당황을 가라앉히고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틸러가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 도대체 하늘누리의 환상계단이 아가씨에게 무슨 일을 한 것입니까? 아가씨의 지난 엿새는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시간 입니다." 정우는 틸러를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틸러.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틸러는 정우가 왜 갑자기 남자가 여자에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 을 꺼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틸러를 보며 정우 가 말했다. "가끔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사과하지도 않지만, 그건 아마도 당신이 그것을 사과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겠지요." 낯익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틸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꺼낸 것 은 질문이었다. 그는 환상계단에 대해 전문가연한 적은 없었다. 틸러 는 정우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모르고 하는 일에 대해 화를 낼 순 없겠지요. 저는 화를 내면 안돼 요. 예. 화내지 않겠어요. 게다가 그 때 당신은 술에 취해 있었으니 까." 틸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보름 전의 일이었지만 틸러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맙소사. 그 날 밤.' 취기와 흥분 속에서 정우에 게 정우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 밤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저를 걱정해서 한 말이니 화를 내는 건 배은망덕한 일이 되겠지요. 예. 당신은 제게 잘해줘요.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이 곳에서 버틸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고마워요. 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래서 저는 그게 싫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에게 저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고 싶어요. 간단하게 '정우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그만인 사람이고 싶진 않아요. 친구는 그런 거잖아요? 오래 사귈수록 더 서로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 람. 그리고 그 사실에 감사하게 되는 것. 그것은 참 멋진 일이겠지 요." "죄송합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어머, 사과하지 말아요. 사과를 받아내려고 한 말처럼 되니까 싫어 요. 그냥 약속만 해줘요." "무슨 약속을 바라십니까?" "앞으로 저를 위해 무슨 일을 하려면, 음, 깜짝 선물을 할 때만 빼 고 저와 상의해줬으면 좋겠어요. 틸러. 당신이 무슨 판단을 했는지 알아요. 제가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이 싫어서 저 자신을 지키지 않 을 거라고 판단했지요. 하지만 그것은 저를 잘 모르고서 내린 판단이 에요. 저는 물론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싫어요. 하지 만 저 자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에요. 저는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고 저를 지킬 수 있어요. 그 날 봤지요? 당신 부하들은 괜히 다쳤어요. 당신이 저를 제멋대로 판단한 것 때문에 그런 불필요한 고통이 있었 다고 생각하면…… 아냐, 이러면 안돼. 정우. 이러지마. 미안해요. 틸러. 그 날 제 눈 앞에서 일어났던 싸움을 생각하니 마음이 흐려져 서." 틸러는 고개를 떨구었다. 극심한 부상자는 없었다. 원래가 치명적인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풍습인 만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틸러는 그것들이 변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론 규리하공 아가씨와 상의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약속 한 가지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뭘 약속하면 되죠?" "앞으로 제가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면 즉시 지적해주십시오." 정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소였다. "그렇게 하죠. 그리고, 지난 엿새 동안의 일을 질문했죠?" "예." 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네요. 이것이 적절한 비유가 될지. 처녀에게 애 낳는 일을 설명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런 것처럼 저의 지난 엿새는 비슷한 엿새 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겐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그런 시간이었어 요. 당신이 저를 염려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불쾌하거나 괴로운 일은 없었어요. 당신이 호기심에서 질문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겠네요." 정우는 갸웃거림을 멈추고 틸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틸러는 정우 의 눈안에 담겨있는 것에 매혹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틸러는 자신이 정우의 대답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려는 순간 정우가 말했다. "저는 용이었어요." 제국의 복잡한 행정 작용이 이루어지는 태화각도 연말의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아니, 연말이기에 더욱 특별한 분위기가 연출 되고 있었다. 한 해의 업무를 정리하는 각 부서에서는 이월시켜도 되 는 업무의 숫자를 최대한 줄이고 싶어하는 부서장과 모든 것을 이월 시키고 싶어하는 부서원 사이에서 소리 없는 각축이 벌어지고 있었 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분위기는 화사했다. 천일전쟁 이후로 제국이 겪은 최악의 전쟁이 될 뻔한 규리하 전쟁은 엘시 에더리 대장군의 눈 부신 활약에 의해 단시일에 끝났고 따라서 그 전쟁 때문에 제국 정부 가 입은 피해는 경미했다. 규리하에서 얻은 물질적 보상이 별로 없다 는 사실도 제국 관료들의 얼굴에 수심을 드리우지는 않았다. 제국의 재무구조는 견고했고 그 재정은 풍족했다. 농담 삼아 하는 말이긴 하 지만 이런 전쟁이라면 몇 번 더 치뤄도 무방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 다. 관리들은 한가로운 기분으로 5년 계획, 혹은 10년 계획을 검토할 수 있었다. 새 해와 새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율형부에서는 연말의 분위기를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율과 형은 매년 개정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연말이라고 해서 율 형부가 특별히 분주해질 일도, 한가해질 일도 없다. 율형부의 시간 단위는 다른 부서의 그것보다 훨씬 길다. 하지만 틸러 달비 부위는 율형부의 차분한 분위기에는 부서의 특성 외에 그 수장의 성격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사자패를 만지작거리며 틸러의 말을 듣던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이 입을 열었다. "달비 부위. 나와 부위가 규리하공에게 한 방 먹은 것 같군요." 틸러는 웃을 준비를 했지만 사라말의 얼굴에 웃음 비슷한 것도 떠오 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준비했던 웃음을 황급히 거둬들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부사님. 물론 규리하공 아가씨께서는 부사님의 관심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그 감사 잘 쓰겠습니다. 그런데 보고서는?" "예?" "당신은 치천제수사자패주였습니다. 살핀 바를 적은 보고서를 제출 하십시오." 틸러는 당황했다. "저, 부사님. 깐깐하게 그러셔야겠습니까? 어, 그것은 결국 규리하 공 아가씨를 보호하기 위한 임시 방편이었잖습니까. 제가 사자패주로 서 한 일도 없고요." "문맹자는 장교가 될 수 없을 텐데요." "……글을 쓸 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부사님. 저, 폐하께서 열람 하실 글을 쓸 엄두가 안 납니다. 사실 쓸 말도 없고요." 사라말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랍에서 도깨비지 뭉치를 꺼냈다. 틸러 는 거기에 깨알 같은 글씨가 쓰여있는 것을 보았다. 사라말은 지필묵 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명하십시오." "직접 쓰셨습니까?" "예." "제가 빈손으로 올 거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부사님?"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준비하셨습니까?" "부위가 보고서를 들고 오면 이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 위해서. 분명 히 그럴 테니까요." 이번에야말로 틸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입을 막고 낄낄 거린 다음 보고서를 가리켰다. "좀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보나마나 잘 쓰셨겠지만 제 이름으로 올 라가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됩니다." 틸러는 그것을 읽었다. 덕분에 틸러는 자신이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하늘누리의 패주출두를 상정하여 그 경우 유료도로당원들을 필요한 시간 안에 정해진 장소에 집결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유수 부원 스카리 빌파의 협조를 얻어 모의출두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그리고 틸러는 자신이 그런 경우에도 사자패주의 출두에는 별 무 리가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틸러는 고개를 가 로저으며 서명했다. 사라말은 틸러에게 사자패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서명 옆에 찍으십시오. 여기 인주입니다." 틸러는 그렇게 했다. 서명과 인주가 마르길 기다려 사라말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 시간 이후로 틸러 달비의 치천제수사자패주로서의 권한과 의무 는 소멸되었습니다." "아, 예. 폐하의 직지를 받들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당신은 정우 규리하가 환상에 의해 일반인이라면 사망했을 시간을 견뎌내었다고 가정합니까?" 틸러는 조금 주춤했다. 율형부사는 휴지나 잡담 한 마디 없이 자신 의 본론으로 들어가버렸다. 틸러는 현명하게 보이는 자세를 취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 외에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인간은 물을 안 마시면 사흘도 못버틴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 물은 중독성이 강하지요. 율형부에서는 금지 물품으로 지정할 까 고민 중입니다." 틸러는 넋나간 얼굴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잡담이 나와야 할 시점이 일반인의 그것과 달랐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분위기 였던 것 같은데.' 사라말은 틸러의 혼란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말했 다. "당신은 그녀가 시간에 대해서 어떤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생각합니 까?" "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한결 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군요. 예. 규리하공 아가씨는 엿새나 지난 줄 몰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해 가 뜨고 지는 것을 관찰할 수만 있고 손가락만 꼽을 줄 알면 알 수 있는 일인데도요. 이건 순전히 제 느낌입니다만 그 분은 하늘 위에서 인간이 죽을 수도 있는 '엿새' 대신 뭔가 다른 시간을 보내신 것 같 습니다." 틸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환상 계단은 공간과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럴 능 력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시간과 사람의 관계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소견머리 없는 생각이긴 합니다만." "문맹자는 아닌 것 같군요." "……예. 저도 책은 읽습니다. 괴롭혀줄 상전사가 보이지 않을 때만 그럽니다만." 사라말은 두 손을 깍지껴 가슴 쪽으로 밀었다. 손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를 낸 율형부사는 그것을 그대로 배 위에 얹으며 말했다. "부위의 가설은 그럴 듯합니다. 내가 태위청의 일에 관여하거나 그 것을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부위를 놀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군요. 교위가 되기 전 온갖 일을 다 경험하고 사색하게 하려는 의 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틸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진 않았다. 그러고보니 그럴 듯한 가 설이었다. 노는 부위를 돌린다는 것은 엄격하게 고정되어 있는 군사 업무 이외의 비정규적이고 비일상적인 다양한 일을 부위에게 시킨다 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틸러는 또 이야기가 갑자기 잡담이 된 것에 놀랐다. "그런데 정우 규리하는 그것을 용이 된 것이라고 표현했다고 하셨습 니까?" "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용들이 춤추는 시대인 것 같군요." "예?" "아닙니다. 용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지요. 환상계단도 상상한 사람 에게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정우 규리하는 환상계단의 그런 특성 때문에 엿새 동안 허공에 떠서 버티는 존재도 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녀를 사랑합니까?" 틸러는 사람에게 이 정도의 황당함을 주는 행위에 대해 율형부가 범 죄로 규정할 생각은 없냐고 묻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무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다른 사람도 부사님과 같은 질문을 제게 하더군요. 왜 남자가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전부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노는 부위를 돌리고자 하는 제 상관에게 그 분을 보좌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래서 그것을 열심 히 수행 중입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 각하는지 물은 겁니다." "그 분을 돕고 싶습니다. 그래서 돕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닙니다. 부사님." "확실합니까?" 틸러는 짜증을 조금 내비쳐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확실합니다." "잘됐습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틸러는 뚱한 얼굴로 율형부사를 바라보았다. 율 형부사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경우 말리는 것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모닥불은 비가 올 때 더 잘 타오른다던가 요. 하지만 나는 교묘하게 사람의 연심을 변화시키는 방법 같은 것은 모릅니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우 규리하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면 나는 스카리 빌파에게서 정우 규리하 를 보호하려 했던 것처럼 당신에게서 정우 규리하를 보호할 겁니다." 틸러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사람은 사라말에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는 기인' 정도의 평가를 내릴지도 모르지만 사라말 아이솔은 아라짓 제국의 율형부사다. 사자패주를 동 원하여 발케네공의 계승권자를 붙잡으려 시도할 수도 있는 사라말에 게 제국군 부위 정도는 손가락으로 눌러죽일 수도 있는 존재일 것이 다. 하지만 두려움과 별개로 틸러는 호기심을 느꼈다. "제가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그런데 왜 규리하공 아가씨를 보 호하시려는 겁니까? 그러고보니 저는 설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부사 님은 제게 사자패를 보내주시면서 아가씨를 보호하고 싶으면 발케네 공의 집에 출두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이유입니다. 부사님의 이유는 뭡니까?" 사라말은 눈을 내리감았다. 잠시 두 사람의 대화가 사라진 공간에 태화각 전체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이 흘렀다. 두런거리는 말소리 와 발소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그 분주함은 느낄 수 있는 소리들이 여러 방향에서 들려왔다. 지상에 있지 않은 지상의 심장이 맥박치는 소리였다. 사라말은 눈을 떴다. "달비 부위. 차기 황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틸러는 놀랐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치천제 폐하께서는 심장을 적 출한 나가이십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오랫동안 제국을 다스리실 겁 니다. 차기 황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 어떤 분을 점 지해둔다 해도 막상 황위를 계승할 때가 되면 독서왕 만큼이나 늙은 나이가 될 텐데요." "달비 부위. 치천제 폐하 이전에 이미 두 분의 나가 지배자가 있었 습니다. 대호왕 폐하와 원시제 폐하셨지요. 그 분들이 오랫동안 제국 을 다스렸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두 분이 그러셨다고 해서 폐하께서도 황상에 계시 는 기간이 짧을 거라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부사님. 어쩐지 불충 같은 말처럼 느껴집니다." 사라말은 틸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했다. "대호왕 폐하와 원시제 폐하 모두 직계 자손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외로운 생활을 하셨으니까요. 이 북부에서 나가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치천제 폐하께서도 두 분 못지 않은 외로운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덕분에 어떻게 보면 좀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국의 모든 작위는 세습됩니다만 아라짓 제국의 황위는 세습되지 않 았습니다. 세습되지 않는 지위는 야심가들을 유혹합니다. 부위도 귀 족들에는 황위 계승에 관여할 수 있는 귀족과 그렇지 않은 귀족이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것은 틸러가 정우에게 말했던 내용이었다. 틸러는 고개를 내민 채 사라말의 말에 집중했다. "폐하께서는 서약을 거부하셨습니다. 폐하께 서약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구분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면 폐하는 황위 계승에 관여할 수 있는 귀족과 그렇지 않은 귀족이 나눠 지는 것을 원하실까요?" "그렇다면, 부사님. 폐하께서는 황위 세습을 원하신다는 겁니까?" "북부에서 나가는 세습이 어렵습니다. 레콘 또한 세습이라는 제도에 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도깨비는 즈믄누리 바깥의 어떤 정치구조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인간밖에 없습니다." 논리의 귀결은 분명하다. 틸러는 동그래진 눈으로 율형부사를 바라 보았다. 사라말은 천장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분리주의자와 서약지지파는 분쇄되었습니다. 폐하의 죄수를 훔친 발케네공은 당분간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국은 평안합니다. 아 주 좋은 시기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계승자의 문제를 준비할 만한 시 기지요." 틸러는 성채를 묻고 허공을 걷고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시간을 견뎌 낸 그의 규리하공 아가씨가 황비 폐하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놀랍도록 어울린다는 것이 그의 첫번째 감상이었다. =============================================================== 남자란? : 친구 장가 간다는 소식 들으면 신부가 뭐 하는 사람인지 묻기 전에 신부 나이부터 물어보는 동물.(도대체 그걸 알아서 뭐하려 고 물어보는 거지?) 즐거운 나날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9-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3-06 조회수 : 1728 피를 마시는 새 9. 불씨의 비행 - 3 러크와 호라이체를 잇는 용재는 시구리아트 산맥 북부에서 산맥을 넘는 도로로 오랫동안 애용되었다. 용재는 유명한 길이면서 유료도로 당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도 유명한데 유료도로당이 개척하기 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상존했던 길이라도 유 료도로당이 더 완벽하게 정비하여 소유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 만 용재의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땅을 파헤치며 이동하는 어 떤 용이 산맥을 넘으며 남겨놓은 길이라는 전설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어있는 용재는 고지대에 있는 길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평탄했 다. 그래서 유로도로당은 이곳에서 통과료를 받는 것을 포기하고 대 신 숙박업만 하고 있었다. 가벼운 차림의 신체 튼튼한 여행객이라면 일박 없이 용재를 넘을 수 있다. 따라서 용재 숙박소의 고객은 주로 노약자들이 포함된 여행자 들이나 짐이 많아서 사역 동물들을 쉬게 할 필요가 있는 여행자들이 었다. 그리고 후자에는 자유무역당의 상단이나 운송단 또한 포함된 다. 자유무역당원들은 가끔 자신들을 약올리기 위해 유료도로당이 이 곳에 숙박소를 건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에 시달리곤 했다. '우 리가 공짜로 길 이용하는 꼴은 죽어도 못보겠다는 거지?' 피해망상이 라 할 것이다.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기 때문에 용재 숙박소에서는 여행객들이 용재 아무데서나 야영을 하든 말든 참견하지 않는다. 하 지만 풍부한 물과 음식, 좋은 잠자리, 그리고 상품의 안전을 한꺼번 에 보장받을 수 있는 숙박소를 외면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일이었다. 다른 숙박소를 세우는 것도 자유무역당으로서는 고려해볼 만한 일이 겠지만 지리적 조건은 그런 행동을 제한한다. 용재는 평탄하지만 좋 은 물이 있는 곳은 드물다. 그리고 가장 좋은 물이 있는 곳에는 이미 유료도로당의 숙박소가 있다. 자유무역당원들은 새 숙박소 건설을 강 행할 경우 소요되는 건설비와 유지경비를 계산해보았고, 그들의 제일 신념인 이문의 법칙에 따라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용재 숙박소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으르릉거리며 숙박소를 들어서는 자유무역당원들의 모습을 보며 유료도로당원들이 비도덕적인 즐거움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그들 의 의혹이 완전히 사실과 무관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자유무역당 은 오래 전부터 좋은 값을 지불하고 숙박소를 사겠다고, 그것이 어렵 다면 임차라도 하겠다고 줄기차게 제안했지만 유료도로당은 그 제안 을 거부해왔다. 그 거부의 이면에는 자유무역당의 철학에 대한 유료 도로당의 거부감이 존재할 것이다. 자유무역당은 최저의 경비로 이루 어지는 물산의 흐름만이 보다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유료도로당은 왕래와 전파가 소중한 개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 또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행위임을 인정해야 한다 고 믿었다. 용재 숙박소의 소장인 리존 보와 자유무역당 제22상단장 인 사이케라 호미스의 대화는 두 단체의 이념적 대치를 잘 드러내는 것이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무분별한 전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아나? 그것은 결국 천박한 것들에게 주어지지 않아야 할 전파력을 부여하게 된다네. 사이케라." "리존. 귀 단체에서는 천박한 것과 고귀한 것 모두에게 똑같은 대가 를 요구하지 않는가. 귀 단체가 고귀한 것의 전파력 또한 소모시킴으 로서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듣게 되어 만족 스럽군." "멈추게! 나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았네. 사이케라. 내 말을 공박 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그릇된 언행부터 보살피도록 하게. 자네는 은 연 중에 천박한 것과 고귀한 것에 똑같은 전파력이 있음을 전제했어. 그렇다면 귀 단체가 둘을 구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 는 것으로 보아도 되겠군?" "천만에.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언제나 대중의 권한이고 우리 는 대중의 기호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단체일세. 우리 는 그 두 가지를 언제든 구분할 수 있어. 그리고 내 전제는 잘못되지 않았어. 천박한 것과 고귀한 것은 똑같은 전파력을 가지고 있지." 리존 보는 코방귀를 뀌었다. "악행이 선행과 똑같이 권장된다는 건가? 내가 들어본 가장 엉터리 같은 소리군." 숙박소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이케라 호미스는 잽싸게 말했다. "자네는 전파력과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어. 선행이 권장되고 악 행이 경계되는 것은 당연해. 그 당연하다는 점에 주목하게. 선행의 전파력이 더 높다면 권장할 필요가 있겠나? 권장하지 않아도 자연히 선행만이 전파되어 모든 인류가 선행의 길을 걷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자네처럼 어린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 나이쯤 되면……" "그 점에 이의 있네. 내가 자네보다 연상일걸." "허튼 소리!" 두 사람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숙박소의 3층 휴게실에서 일어난 숙박소장과 상단장 의 불꽃 튀는 토론에 아무도 근심 어린 눈빛을 보내지 않는 것도 당 연하다. 휴게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바둑을 두거나 담소를 나누던 숙 박소 직원들과 상단 단원들은 한심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며 두 늙은이를 바라보았고 이것이 적대적인 두 단체의 유혈분쟁으로 비화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품지 않았다. 하지만 두 늙은이는 부하들이 보내는 시선을 무언의 응원으로 오해했다. 자네는 너로 바뀌었고 너 는 곧 놈이 되었다. "야, 이 멍청한 놈아! 도대체 뭐하고 살았냐? 그 나이 먹도록 뭘 얻 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배우지 못했냐? 모든 것에는 대 가를 지불해야 해! 모래 한 알도 공짜가 아니야. 네가 모래 한 알을 주우면 그 만큼의 시간을 지불하게 되는 거라고. 그 시간에 하지 못 한 일이 모래 한 알의 대가야!" "이 넋빠진 놈아! 그래서 모래 한 알과 바위 한 덩어리를 똑같이 취 급하냐? 모래나 바위나 똑같으니까 네 머리 위에 바위를 던지겠다고 말하면 그러라고 할 테냐?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살인자에게도, 아픈 사람을 구하러 달려가는 의사에게도 똑같은 통행료 받는 네놈들 짓거리가 바로 그런 것 아니냐. 정신 똑바로 박힌 놈이라면 의사한테 는 돈 안 받을 거다, 이 얼빠진 멍청아!" "네놈들이 사람 구하려고 싸돌아다니냐! 돈 긁어모으려고 그러지!" "미친 놈. 우리가 돈을 긁어모은다고? 우리는 돈을 흐르게 하는 거 다. 돈이 한 곳에 쌓여있으면 곧 독이 되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세 상을 구하는 의사인 셈이야!" "허, 요 모자란 녀석. 말 잘했다. 그러면 네놈들이 긁어모은 돈 통 행료로 내놓는 것은 바로 네놈들이 원하는 일인 게로구나?" "그거하고 그거하고 같냐!" "뭐가 다르냐!" "너 이 자식, 그 때의 그 베짱이 때문에 그러는 거지?" "다, 닥쳐라!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그 때의 그 개밥그릇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그만해!" 용재 숙박소 직원들과 제22상단 단원들 중에는 '베짱이'와 '개밥그 릇'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면 일년 수입을 내놓아도 좋 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두 단어가 언급되자마자 고개를 홱 돌린 자들은 전부 그런 자들이었다. 반면 호기심보다는 견실함에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있기에, 혹은 그런 단어들은 대개 관련자들에게 만 의미가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알아봐야 재미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두 단어의 근원에 별 관심이 없는 자들은 진부 함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중에는 그 격론에 아무런 흥미의 요소가 없다는 태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기 위해 바깥을 돌아보는 사 람도 있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른 사람은 그런 무리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일종의 자연음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럽다 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 만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돌아본 곳에서는 파랗게 질린 숙박소 직원 이 바깥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순간 직원이 가리킨 방향의 창과 벽이 박살나며 뭔가 시커멓고 거대한 것이 휴게실 안으 로 뛰어들었다. 그 충격으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숙박소 건물이 요란하게 경련했다. 사방으로 뛰어오른 바둑판과 그릇과 탁자와 의자와 액자 등의 물건 들이 나동그라지고 쓰러진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사람들 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조금 전 리존과 사이케라가 나 누었던 대화에서 거론되었던 바위가 현실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그들의 첫번째 감상이었다. 확실히 투석기의 공격에 준하는 충격이 다. 그러나 가까스로 머리를 내민 사람들은 좀 이채로운 것을 보게 되었다. "이런 썅놈의 자식!" 검은 레콘이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검은 레콘은 몸을 확 부풀려서 탁자 부스러기와 그릇 등을 털어냈다. 틀림없이 '그가 몸을 부풀리자 깃털 사이에서 일품요리가 차려진 십인분 상차림이 튀어나갔다'는 후 일담이 전해지게 될 광경이었다. 허리를 구부린 검은 레콘은 코끼리 를 통구이할 때 쓰는 것이 아닌가 싶은 크기의 도끼창을 집어들었다. 똑바로 일어선 검은 레콘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주춤 멈춰섰다. 그가 뛰어들어온 곳은 벽과 지붕 일부분에 걸쳐 거대 한 파괴가 일어나 있었다. 검은 레콘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처참한 폐 허 사이에서 쓰러져 있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레콘은 위아래 턱 을 탁 부딪히고는 부리를 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언서 읽어봤지? 오늘이 그 날이야'라는 말을 듣 게 될 거라 예상했다. 그 예상은 빗나갔다. 좀 기묘한 방식으로. "죽은 놈 없지? 좋아. 엘시 에더리에게 달아놔." 그리고 검은 레콘은 건물의 찢어진 틈 사이로 날아올랐다. 그가 발 을 구른 덕분에 잔해와 먼지들이 다시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황망함을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할일이 생겨 기쁘다는 투로 비명 을 질렀다. 그러나 그 중에서 도무지 비명 같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 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웃어?' 사람들은 그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리존과 사이케라의 모습을 보고는 어쩐지 수긍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 다. 용재 숙박소 뒤편에는 꽤 높은 절벽이 있었다. 그 절벽 위에서 이레 달비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가주…… 주인님. 론솔피가 나오는군요.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 습니다." 엘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용재 숙박소장에게 내 이름으로 서신을 쓰도록 해라. 진심으로 사 과하며 피해를 전부 보상하겠다는 내용으로. 주테카? 용재 숙박소에 서 좀 떨어지라고 외쳐주십시오." 제비뽑기에서 걸린 탓에 그 날 이레와 엘시 곁에 붙어있기로 한 주 테카는 냅다 계명성을 질렀다. 쩌렁쩌렁 울리는 계명성이 용재 숙박 소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숙-박-소-에-서-떨-어-져-서-싸-워-!" 주테카의 계명성을 들은 쵸지는 피식 웃으며 외쳤다. "지멘, 들었냐? 이리 와서 나랑 놀자!"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쵸지는 바위를 집어들었다. 공기놀 이보다는 성벽건설에 훨씬 적합한 크기의 바위가 하늘 한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곳에는 준람의 쌍창을 피해 위로 뛰어오른 지멘이 있었 다. 공중에서 몸을 피할 수 없었던 지멘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웅크렸 다. 바위는 지멘의 다리 쪽에 맞았고 그 때문에 거대한 레콘이 공중 에서 두 바퀴를 도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지멘은 어쩔 도리 없이 등부터 떨어졌다.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지멘은 준람의 쌍창에 호되게 당할 것을 각오했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준람의 성난 외침이 었다. "바위 집어던지지마!" 지멘에게 명중한 다음 궤도가 바뀐 바위가 준람에게 날아든 것이다. 그것을 피하느라 준람은 뒤로 뛰어야 했고 그 사이에 속수무책의 처 지에 빠져 있던 지멘은 다시 똑바로 일어설 수 있었다. 성난 론솔피 의 도끼창과 쵸지의 삼각 철봉이 날아들기까지 지멘은 두 호흡 정도 쉴 수 있었다. 지멘은 주저없이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 곳에는 쌍창을 꼬나쥔 준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망치를 냅다 집어던 지려던 지멘은 생각을 바꿨다. 준람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준람에겐 창 하나가 남게 된다. 론솔피와 쵸지까지 합류하게 된다면 망치를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지멘은 어쩔 수 없이 지금 까지 피해왔던 일에 돌입했다. 그는 준람과 무기를 겨루기로 했다. 지멘의 결심을 직감한 준람이 벼슬을 꼿꼿하게 세웠다. 두 사람은 정면에서 부딪혔다. 오래 전에 한 번 그러했던 것처럼. 쌍창과 망치는 모두 최근접 격투에 부적합한 병기다. 하지만 준람과 지멘의 무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멘과 준람은 자신의 두 발과 부 리도 싸움에 참가시켰다. 잠깐이라도 주의력을 잃는 쪽이 끔찍한 피 해를 입게 되는 싸움임을 확인한 론솔피와 쵸지는 어쩔 수 없이 쇄도 를 멈추고 관망에 들어갔다. 망치와 부리, 발, 쌍창이 수십 번 얽혔다. 한 번 경험했던 싸움의 반복이지만 지멘은 여전히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창의 범위 안쪽으로 뛰어드는 것은 이 경우 의미가 없다. 그 안쪽에 부리와 두 발 외에도 또다른 창 하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준람도 예전의 당황 을 다시 느꼈다. 오래 전 그랬던 것처럼 지멘은 균형을 잃기 쉬운 망 치를 휘두르지 않았다. 지멘은 언제든 그것을 휘둘러 준람의 몸을 부 술 수 있는 위치에 망치를 놓아둔 채 주로 발과 부리를 이용해서 싸 웠다. 망치는 느린 무기에 속하기 때문에 지멘은 더 빠른 부리나 발 을 쓰는 기술을 꽤 높은 수준으로 익혀두었다. 날붙이라면 그 부리나 발에 호된 응징을 가할 수 있을 테고 긴 무기라면 발이나 부리가 닿 지 않는 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겠지만 준람의 병기는 짧은 창 두 자 루였다. 지멘은 창자루에 맞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망치를 휘두 를 기회만 엿보았다. 절벽 위에서 그 광경을 보던 주테카가 감탄하여 말했다. "지멘이 상대를 잘 골랐군. 왕벼슬이나 론솔피의 무기가 상대라면 저 짓은 못할 텐데." 엘시는 미간을 찡그렸다. "몸을 빼라고 하십시오. 셋이 한꺼번에 싸울 수 있도록." "상대가 빼줘야 빠지지. 지멘 녀석도 준람을 놔주면 세 명이 한꺼번 에 덤길 것을 아니까 놔주지 않잖아. 지금 이 기회에 준람을 확실히 박살내놓자는 결심일걸. 저것 봐. 계속 달라붙잖아." "준람은 예전에 지멘에게 한 번 졌습니다. 계속 저렇게 두면 위험합 니다." 주테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건 옛날 일이고. 그 동안 많이 늘었나 봐. 아니면 지멘이 좀 약해졌거나." 지멘 또한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일지 궁금했다. 오래 전 싸웠던 준람이 아니었다. 그 때도 쌍창이라는 무기의 특징 때문에 애먹었던 기억은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때는 조금 더 느린 창이 있었다. 왼쪽이었던가? 지멘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 금 준람의 두 창은 똑같은 속도와 정확성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따라 서 그가 오른손잡이인지 왼손잡이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아내를 지 키기 위해 신부탐색자들과 싸우면서 실력을 연마한 것일까. 지멘은 준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게 아니라 나를 잡으려고?' 그 순간 준람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몸을 빼내려고!' 지멘은 지 체없이 뒤따라 뛰어올랐다. 그런데 준람은 뒤따라오를 것을 예상했다 는 듯이 차분하게 지멘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약해졌나?" 지멘은 벼슬을 꿈틀했다. 준람은 몸을 빼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 기를 하기 위해 뛰어오른 것이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준람은 빠르게 말했다. "즈라더를 잡았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군. 약해. 나를 죽이기 싫은 것처럼 보이는군." 준람의 발이 땅에 닿았다. 뒤따라 떨어지면서 지멘은 부리를 내려찍 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망치를 휘두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분명히 망치를 휘두를 기회인데. 준람은 지멘의 부리를 피하며 창을 내찔렀다. 망치 자루로 그것을 걷어올린 지멘은 준람의 다리를 걷어찼다. 준람은 피하지 않았다. 짧 게 잡은 다른 창으로 준람은 날아오는 지멘의 허리를 찔렀다. 주테카 가 외쳤다. "떨어졌다!" 지멘에게 걷어차인 준람은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리고 허리를 찔린 지멘 또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을 애타게 기다리 던 론솔피가 괴성을 지르며 땅 위를 미끄러졌다. 지멘이 고개를 돌렸 을 때 도끼창의 육중한 날이 하늘을 갈랐다. 한 무리 철새가 파리조의 낙조 속을 날고 있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으니 철새들도 지친 날개를 접을 시간이다. 그러나 파리조의 바위땅에 철새들이 쉴 곳은 없었다. 철새들은 높은 고도에 남아있는 햇빛을 따라가듯 높게만 치솟았고 땅을 향해 내려오는 새는 보이지 않았다. 시인의 흥취를 자극할 그 광경을 보면서 락토 빌파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놀랐다. 저 미물 이 내 땅을 밟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가 화를 낸단 말인가? 락토는 아 들의 말을 떠올렸다. '옛날 일 들춰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노화의 증거입니까?' 락토는 자신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새해가 오면 마흔 아홉이 된 다. 남자가 진짜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다. 늙었다는 것은 당치 도 않은 소리다. 하지만 스카리의 말에는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남자로서의 노화는 멀었지만, 아버지로서의 수명은 다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들 없이는 아버지도 없 는 법이니까. 락토는 그 사실에 대해 초연하고자 했다. 쉽지 않았다. 사라진 후에야 그 소중함을 느끼는 것들이 있다. 락토에게는 아버지 라는 지위가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성실한 아버지이고자 한 적이 없 었고 그 지위를 은근히 무시하는 쪽이었다. 스카리의 경쟁자를 허락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것을 이어받을 아들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위한 배려였다. 락토는 계승 경쟁 때문에 힘이 낭비되는 것 을 원치 않았다. 둘 이상의 계승 후보는 결국 관련자 모두가 편가르 기에 돌입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낭비다. 그런데 지금 락토는 다른 종류의 낭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꼈다. 왜 한 번도 아버지로서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까. 아들은 기다려주지도 않고 어른이 되었다. 독립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에게 줄 시간은 없다고 말했다. '제 남은 시간은 모두 부냐의 것이니까요.' 문 밖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락토가 자신을 더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거의 천성에 가깝게 단련된 교활함 과 집중력으로 락토는 순식간에 자신을 회복했다. 틈을 보일 수 없 다. 그것은 죽음이다. 책상 옆으로 돌아와 선 락토는 담담한 태도로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다. 문이 열리고 시종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아실이 약간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따라들어왔다. 락토는 큼직한 주먹으로 책상을 짚은 채 아실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서는 능력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좌우 대칭이 맞지 않는 눈과 고약을 붙인 뺨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아 래로 모든 것이 삐딱했다. 눈이나 뺨은 원래 그런 것이지만 그 외의 다른 것은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임을 락토는 간파했다. 락토는 씩 웃 으며 시종장에게 나가봐도 좋다고 말했다. 시종장이 물러가자 아실의 흐트러짐은 극적으로 변했다. 아실은 비스듬한 얼굴로 락토를 올려다 보며 한쪽 발끝을 까딱거리기까지 했다. 락토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내가 무섭냐?" 아실의 하나뿐인 눈이 커졌다. 사태를 깨달은 아실은 체념한 표정으 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 부러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지만 발케네공을 속여넘기기엔 역부족이었 다. 아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곳에는 앉을 의자가 없었다. 묘 한 일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접견자는 앉혀두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락토의 방에는 그런 용도의 가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실은 그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기로 했다. "앉을 곳이 없네요. 공작님." "서있는 사람이 말을 빨리 하거든." "그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서있는 사람은 위험하잖아요?" "아아. 이야기를 듣지 못했구나. 이 방 안에는 도깨비 감투를 쓴 감 시자가 있단다. 네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면 즉각 목을 날려버 리라는 명령을 받은." 아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 때문에 그녀는 주위를 재빨리 둘 러볼 뻔했다. 하지만 아실은 곧 자신을 다잡았다. 둘러본다고 해서 도깨비 감투를 쓴 사람을 볼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아실은 그 이야 기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감투를 쓴 감시자는 서있는 사람보다 백 배 는 더 위험할 테니까." 락토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암살공에게 보이지 않는 수호자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길 더 좋아하지. 너와의 대화가 즐거울 것 같구나. 사실 이곳에는 의자가 있다. 스카리가 앉곤 하는 곳이지. 헤어릿도 한 번 앉은 적이 있다. 네가 세번째가 되겠구나." 락토가 책상의 어딘가를 만지작거렸다. 아실이 본 것은 그것뿐이었 다. 하지만 곧 책상의 일부가 떨어지며 의자가 되었다. 아실은 감탄 했다. 가구 장인의 교묘한 솜씨로 만들어진 그 의자는 책상에 붙어있 을 땐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실이 의자에 앉은 다음 락토도 책상 뒤 편의 자기 의자로 돌아갔다. 그는 아실의 뺨에 붙어있는 고약을 바라 보았다. "멋진 훈장이 되겠구나. 병사." "캄샤합니다! 쑤전사님! 그런데 애인이 이 모습도 싸랑해줄까요?" 락토는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히 허물어지는 느낌이었고 틈을 보여선 안된다는 생각마저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겨우 호흡을 회복한 락토는 창피스레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내며 헐떡 거렸다. "도대체…… 참 대단하군. 제국군이랑 많이 싸워서 그런 흉내를 낼 줄 아는 거냐?" "뭐 그렇죠." "그 나이에 온갖 경험을 다 했겠군." "산전수전 다 겪었죠. 남아있는 눈 하나 마저 파내서 안주거리로 삼 겠다고 말하는 살인광과 함께 술 마신 적도 있어요. 정신이 그런 상 태라서 제국군에서 쫓겨난 사람이었죠." 아실은 자신의 뺨에 붙어있는 고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각하. 그러니 며느님 되실 분에게 너무 책망하지 마세요." 락토는 며느님이라는 말에 당황했다. 전혀 생각도 못한 관계였기 때 문이다. "너를 부른 이유는 부냐 헨로에 대한 변호를 듣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내 며느리가 아니야." "아드님의 생각은 다른 것 같던데요." "그 얼빠진 놈의 이야기는 하지 마라." "각하의 아드님이잖아요." "계속 그 녀석의 이야기를 하면 네 눈을 파내서 간식 삼아 먹겠다." 아실은 입을 다물었다. 발케네공은 자신이 했던 무시무시한 말에 아 무 영향도 받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고 나는 나름대로 바쁜 몸이라서 다 른 기회를 또 내기는 어렵다. 그러니 지금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해 야해. 쓸데없는 이야기는 피하도록 하자." "그러죠. 공작님. 제가 먼저 시작해도 될까요?" "내가 먼저 시작하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공작님. 저는 공작님이 자신의 용건만 끝낸 다음 저를 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아요. 반 면 저는 제 용건만 마치고 마음대로 물러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친절을 베푸시면 안될까요?" 락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말해봐." "감사합니다. 각하. 일전에 각하께선 타이모를 이해하고 싶었다면 각하를 찾아왔으면 됐을 거라고 말씀하셨죠. 이제 묻겠어요. 각하께 선 타이모의 철학을 제게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처음부터 꽤 시간이 많이 걸릴 주제를 선택하는구나." "제겐 꽤 중요합니다." "좋아." 락토는 의자를 뒤로 끌어당기고는 두 발을 책상에 얹었다. "너도 원하면 이렇게 해도 돼." "그러기엔 책상이 높고 제 다리는 짧아요." "알았어. 그럼 먼저 너와 데라시가 모두 동의한 사실을 말하도록 하 자. 데라시는 그것을 염수 얻기에 비교했고 너는 요리상에 비교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모두 분리되었던 것이 다시 합쳐지는 것에는 동의 한 것이지. 타이모의 분리주의는 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사 실 그 명칭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통합만큼이나 그 분리도 중요하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겠지. 그래. 타이모가 주시한 것은 느닷없이 나타난 이 거대한 단일 세계다. 아라짓 제국. 아라짓 제국은 점진적으로 형성된 사회가 아니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당시 북부의 지배 구조가 상당수 파괴되었고 천일전쟁을 겪으며 원시제는 남아있는 지배 구조의 자취들을 전부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 다. 지배 구조가 아예 없어진 곳에는 자신의 것을 집어넣었고. 그것 은 원시제가 가지게 된 하늘누리와 남부에서부터 온 뱀단지의 강력한 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길 거라는 예상도 할 수 없었 던 전대미문의 단일세계가 갑자기 태어난 것이다. 몇 번이나 강조하 지만 이것은 갑자기 생긴 일이다. 아직까지도 세계가 이렇지 않았다 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존해 있다. 타이모는 바로 그 지점에서 레콘들이 갑자기 맞이하게 된 위험을 감지했다." 락토는 잠시 말을 끊었다. 아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락토의 말을 재촉했다. "레콘의 놀라운 힘과 속도 때문에 레콘의 세계는 다른 종족들의 세 계보다 좁다. 이것은 레콘들이 유사 이래로 한 번도 정치 구조 비슷 한 것을 가져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족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 정치 구조는 어쨌든 그 범위라는 것이 있 게 마련이다. 하지만 레콘은 쉽게 그것을 넘나들 수 있었다. 발케네 를 예로 든다면 발케네 안에 있는 사람에겐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 지. 발케네 밖으로 나가버린 사람에겐 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레 콘들이 그러했지. 그런데 이제 갑자기 레콘들이 절대로 벗어날 수 없 는 영향력이 생긴 것이다. 시련까지 가지 않고서는 레콘은 언제나 아 라짓 제국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벗어날 수가 없지." "맞아요. 그렇죠." "벗어날 수 없는 것에는 순응해야 하지. 태양의 움직임이나 계절의 변화 같은 것에는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레콘도 이제 정치 구 조를 익혀야 한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정치 구조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인간이나 나가, 도깨비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 거대 체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지만 그런 경험이 아예 없었던 레콘에겐 그럴 능력을 기를 시간이 없다. 타이모가 경계한 것은 비레콘들이 만들었 기에 비레콘들에게 어울리는 구조에 레콘들이 억지로 편입되는 것이 지. 그것은 도덕적으로도 공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 레콘에게 맞지 않는 인간이나 나가의 옷을 입히면 옷이 찢어질 테지. 아니면 레콘이 화를 내거나." '혹은 가짜 레콘이 태어나거나.' 아실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락 토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레콘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진 종족이 다 른 종족과 불화를 일으킨다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큰 상처를 입게 될 테지. 그래서 타이모는 레콘들이 먼저 아라짓 제국에서 분리되는 것 을 제안했다. 인간이나 나가, 도깨비들이 오래 전부터 해왔던 일을 레콘들도 해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거지. 바로 자신들의 고유한 정치 구조를 만드는 일. 그렇게 레콘들이 자신들의 정치 구조를 만들 어내면 그 다음에 다른 종족들의 뒤를 이어 마지막으로 레콘이 제국 에 통합되는 거야. 이 통합이 이루어질 때는 물론 약간의 상호 조종 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엄청난 혼란과 폭력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 다는 훨씬 상식적인 일이지. 이상이 타이모가 제안한 바다. 맞나?" "그래요." "아냐." "예?" 아실은 어리둥절했다. 락토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라고 했어. 타이모는 그렇게 제안한 적이 없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죠? 타이모가 그렇게 제안한 적이 없다 니." "말 그대로의 의미야. 타이모에 관한 어떤 기록에서도 그런 제안은 찾아낼 수 없어. 너는 네가 타이모의 곁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나도 많은 현장 증인을 만나봤어. 너도 스카리 요새에서 봤겠지만 거 기에는 쥐딤에 있었던 레콘도 많아.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지. 그래서 확신하는 거야. 타이모는 그런 식의 주장을 한 적이 없어. 만 약 네가 타이모에게 직접 그런 계획을 들었다면 내게 말해봐. 언제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아실은 발끈하여 입을 열었다. 그러나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실 은 의혹에 찬 눈으로 락토를 바라보다가 그 눈길을 스스로에게 보냈 다. '언제 어디서?' 아실은 생각했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 고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언제 어 디서?' 락토가 말했다. "떠오르지 않을걸. 그런 적이 없으니까." "그런 적이 없다면…… 그 계획을 타이모가 말한 적이 없다면 각하 는 어떻게 알고 있죠? 그런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각하가 알고 있다면 말이 안되잖아요!" "내가 그 계획을 알게 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방법을 통 해서야. 쥐딤 선언문 같은 네가 남긴 글과 네가 한 말들을 통해 알게 되었지." 아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발 케네의 공작을 바라보았다. 락토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발을 하나 씩 내리며 말했다. "그러니 너는 많은 학자들을 만나야 했어. 그 학자들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없었고. 넌 대단해. 천재적이야. 지난 6년 동안 스스 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타이모를 분리주의의 사조로 만들어버렸 지. 세상을 속여넘긴 것이지. 하지만 나는 속이지 못했어. 그것은 타 이모의 분리주의가 아니야." 락토는 짐짓 안쓰럽다는 눈으로 아실의 벌겋게 부푼 얼굴을 바라보 며 말했다. "그것은 아실의 분리주의야." 아실은 갑자기 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 다. 아직 벌이 날아다닐 때가 아닌데. 손끝에 전해져오는 묵직한 감각에 론솔피는 자신이 지멘의 머리를 쪼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 는 지멘의 모습은 론솔피를 놀라게 했다. 론솔피는 자신의 도끼창을 바라보았다. 도끼창의 회전이 가장 적은 부분, 그의 손 바로 윗부분 의 창대가 무엇인가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삼각 철봉이었다. 론솔피는 당황하여 쵸지를 바라보았다. "쵸지? 뭐하는 거야?" 쵸지는 철봉을 위로 들어올리며 말했다. "죽이지마." "뭐? 생포하자는 거야?" "죽여버리면 준람이 어떻게 이야기를 하나." "이야기? 준람?" "준람이 지멘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는 것 같군. 그래서 억지로 싸움 을 끊었잖아." 론솔피는 망연한 눈으로 다시 지멘을 바라보았다. 물론 지멘은 그곳 에 없었다. 론솔피는 벼슬을 빳빳하게 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 멘은 꽤 떨어진 곳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서있었다. 당장 머리를 부술 수는 없는 거리였다. 론솔피는 욕설을 씹으며 준람을 찾았다. 준람은 허리를 쥔 채 쵸지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말을 하고 싶 었지만 다리의 고통이 만만찮았다. 뼈가 상한 것이 분명했다. 레콘이 아닌 생물이라면 절명했을 충격이다. 준람은 조금 후에야 겨우 부리 를 열 수 있었다. "지멘." 지멘은 한손으로 허리를 누른 채 비스듬하게 서있었다. 치열한 격투 때문에 사방엔 검고 흰 깃털이 가득 뿌려져 있었다. 불어온 바람이 그것들을 붙잡아 날려올렸다. 춤추는 깃털 때문에 지멘의 모습이 흐 려지자 준람은 다급한 마음에 한 발 내디뎠다. 그러자 다리의 통증이 다시 그를 강타했다. 준람은 걷는 것을 포기하고 말했다. "지멘. 왜 약해졌나?" 지멘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많이 약해졌나?" "그래." "자네는 많이 강해졌더군." "응. 자네를 죽이려고 연습을 많이 했어." 지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추측대로였다. "고라이 때문인가?" "억지로 뺏어가서 버리는 것은 뭔가." "미안해." "고라이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자네가 사과했는데 고라이가 내 게 들려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고라이에게 사과했나?" "그런 기억이 없군." "변명할 텐가?" "아니." 떠올랐던 깃털들이 빙글빙글 돌며 내려앉았다. 준람은 부리에 닿는 깃털을 훅 불었다. "그런데, 왜 약해졌나?" "죽이고 싶지 않아." 준람은 노기를 느꼈다. "그래. 싸우기는 하는데 죽이기는 안하더군. 나를 동정하나? 그렇잖 으면 고라이가 또 남편을 잃게 할 수는 없다는 건가? 그렇게 나를 또 모욕하는 건가?" "미안해." "그-소-리-그-만-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6년 동안 방 해되는 것은 뭐든 때려죽이고 불지르면서 돌아다녔다고 들었어. 내가 잘못 들었나? 발란카에 들어오는 풍문이 모두 헛소문이었나?" "그렇지 않아. 자네가 들은 나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맞을 거야." "그런데 왜! 왜 나는 죽이고 싶지 않다는 건가!" "자네라서 그런 것은 아니야." "뭐? 그럼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는 건가? 하지만 즈라더는! 자네가 죽이고 그 도끼를 납병하지 않았나!" "그랬지." 준람은 하마터면 다리를 구를 뻔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다리의 부 상을 떠올린 준람은 대신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바보가 된 건가! 답답하게 굴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를 좀 해봐!" 지멘은 어쩌면 준람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준람. 자네가 살아있어서 이렇게 싸울 수도 있고 옛이야기를 할 수 도 있잖나?" "무슨 소리인가, 도대체!" 가까스로 끌어낸 용기가 싹 사라졌다. 지멘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모르겠어. 준람. 그래. 나는 모르겠어. 그냥 이렇게 말하겠어. 저 기 있는 레콘들과 절벽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말이야. 따라 오지마.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아." 아실도 죽이고 싶지 않아. 지멘의 부리 끝에 걸린 말이었다. 지멘은 그 말을 도로 삼켰다. "나는 남쪽으로 가야해. 따라오지마. 내 모든 숙원이 끝난 다음 발 란카로 자네를 찾아가지. 기다려주게." "안되겠군. 지멘." "따라오지마." "자넬 잡겠어." 가라앉던 깃털들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지멘의 급격한 움직임이 일으킨 바람이 깃털들을 소용돌이치게 했 다. 지멘은 그들을 내버려둔 채 호라이체 방향으로 내달렸다. 론솔피 는 성난 소리를 내며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쵸지는 삼각 철봉을 다 시 허리에 차고는 준람에게 걸어갔다. 준람은 쵸지의 내민 손을 보고 는 쌍창을 한 손에 몰아쥐었다. 그리고 쵸지의 팔에 몸을 기댔다. 쵸 지가 말했다. "다리 좀 어때?" "아파." "역시 힘이 좋은가 보군." "그래. 약해진 건 마음 쪽인 것 같아." "별일 다 봤군. 누굴 죽이겠다는 숙원을 세운 레콘은 그렇지 않은 데. 그리고 그 애는 어디 있는 거지?" "그 애?" "인간 여자애 하나 배낭에 넣어다닌다고 했잖아. 하지만 배낭에 그 런 것 안 보이더군." "그래. 그러고보니 보이지 않는군." 멀리서 딱정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쵸지는 절벽 쪽을 보았다. 두 마 리의 딱정벌레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는 지멘이 뛰어간 방향으로 날아갔고 다른 한 마리는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주 테카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쵸지는 준람의 다리를 살피기 위해 용재 숙박소 쪽으로 걸었다. "죽이고 싶지 않다니, 시시하군. 각오하고 온 사람 허탈해지는데." "죽고 싶어서 왔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쵸지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커다란 벼슬이 출렁였다. "바보처럼 웃고 싶을 뿐이야." =============================================================== 다음회의, 다음회에 의한, 다음회를 위한 예고 : 뒤져 클럽의 추격을 받게 된 조나단 다이빙스톤.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주문을 외운다. '노루 힘, 노루 힘, 아스피린!' 아스 피린을 먹고 노루와 같은 힘을 낸 다이빙스톤은 마침내 숲속으로 도 망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숲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데. 때 마침 앞에 나타난 거대한 저택. 조나단은 현관에 붙어있는 '엄브렐러 제약회사'라는 현판을 보고는 우산도 만들고 약도 만드는 곳인가 보 다고 생각하며 길을 물어보기 위해 저택 안으로 들어선다. 저택 안에 서 조나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좀비들! '기다 리고 있었다. 데이워커…' '젠장, 그건 뱀파이어 대사야!' 조나단은 이 혼란을 기묘하게 여긴다. 그렇다. 모든 호러물의 고향인 호러지아 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 던 조나단은 기묘한 책을 발견한다. 책에는 서로의 꼬리를 문 두 마 리 뱀의 문양이 붙어있다. 책을 펼친 조나단은 어느새 호러지아의 세 계로 빨려든다. 이름을 잃어버린 호러지아의 공주에게 이름을 되찾아 주는 모험이 펼쳐지는 다음편, '플라이 미 투 더 문차일드' 많이 기 대해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9-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3-07 조회수 : 749 피를 마시는 새 9. 불씨의 비행 - 4 발케네공 락토 빌파가 일어났다. 락토는 책상 뒤로 돌아갔다. 그는 아실을 무시한 채 벽 한쪽에 있는 줄을 두 번 잡아당겼다. 그리고 락토는 문쪽으로 다가갔다. 얼마 후 방문이 열리며 손에 촛대를 든 시종이 나타났다. 락토는 손을 내밀었 다. "내가 하지." 시종은 황송해하며 촛대를 건네주고 물러갔다. 촛대를 받아든 락토 는 방안을 돌며 초에 불을 붙였다. 아실은 비로소 해가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을 다 붙인 락토는 촛대를 들고 다시 아실에게 돌아왔다. 촛대를 책상에 내려놓은 락토는 두 손으로 아실의 어깨를 짚어 아래로 눌렀 다. 아실은 잠시 저항했지만 곧 포기하고 의자에 앉았다. 락토는 아 실을 마주보며 책상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그게 네가 한 일이다. 아실." "부정해드리죠." "재부정해줄 테니 해봐." "각하께선 제가 분리주의를 만들어냈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그 렇다면 쥐딤에 모였던 레콘들은 뭐였죠? 타이모에게 분리주의가 없었 다면 어떻게 그 많은 레콘이 모인 거죠?" "내 주위에 모인 레콘들이 나의 훌륭한 사상 때문에 모인 거라고 말 하면 내 허영심은 만족시킬 수 있겠지. 하지만 너를 납득시키긴 어렵 겠지." 아실은 헐떡였다. 락토의 말은 빌어먹을 정도로 합리적이다. "너는 타이모의 사상에 감동한 레콘들이 그곳에 모였다는 식으로 말 하고 싶은가 보지만 그런 고상한 설명은 다른 경우에도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별로 어울리지 않아. 타이모의 사상에 동조하려면 일단 타 이모의 사상이라는 것을 듣기는 해야 해. 듣기 전에는 감동할 수 없 지. 그런데 레콘들은 다른 사람의 사상을 경청하러 학술토론회에 갈 종족이 아냐. 네가 잘 기억하겠지만 그건 학술토론회였어. 레콘들이 갈 자리가 아니라는 거지. 여기 훨씬 단순한 설명이 있어. 들어봐. 나는 할일 없고 심심했던 레콘들이 최후의 대장장이의 딸을 구경하러 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말도 안되는……" "뭐가? 조금 전 나는 유사 이래로 레콘은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 위대한 지배자, 존경과 경애, 목숨을 건 충성. 뭐 이 런 건 향수와 마찬가지로 레콘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오만한 개인주 의자 레콘에게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이야기야. 하지만 그런 레콘에게 유일하게 경애의 감정 비슷한 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최후의 대장간이야. 요즘은 거기도 모양새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래도 오래된 상징의 힘은 쉬 사라지지 않지. 최후의 대장장이의 따 님. 레콘 공주님. 공주님의 행차를 보기 위해 일손을 놓고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이 네겐 이상하게 보이나?" "그것은 레콘이 아닌……" "원시제 이전의 레콘이라면 좀 다를지도 모르지. 아실. 눈은 하나지 만 다른 사람의 두 개보다 날카로운 걸로 알고 있는데. 다른 종족들 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레콘을 한 명도 보지 못했나?" 정신적 결정타에 아실은 숨이 멎는 것을 느꼈다. '가짜 레콘.' 아실 은 바깥의 바위땅에 던져두면 찾지도 못할 만큼 굳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락토에게 완벽한 대답이었다. 락토는 그 눈에 동정심을 담아 보였다. 그리고 그 입으로는 아실 속의 타이모를 부수었다. "타이모의 사상은 시시한 것이었어. 참신성도 없고 학부생이 내놓은 기말시험지 만큼이나 난잡했지.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엔 타이모는 학자가 아니야. 그리고 사상가나 저술가도 아니야. 그래. 타이모의 사상 속에 네가 만든 분리주의의 기초 정도는 포함되 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타이모의 사상과 네 사상 사이에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할 때의 관련성 밖에 없어. 너는 분 리주의의 해석자가 아니야. 분리주의의 창안자지. 분리주의는 쟁룡해 에 빠진 타이모에게 바치는 네 아름다운 추모비지. 너는 상당히 성공 했어. 타이모가 분리주의의 사조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꽤 많지. 물 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분리주의가 뭔지도 모른다는 점이 비극적 웃음을 자아내지만." 아실은 그 여름을 생각했다. 햇빛이 뜨거운 꿀 같았던 여름. 왜 그 렇게 모든 것이 즐거웠을까. 레콘은 세 명만 있어도 너무 많다는 느 낌이 든다. 그곳에 모인 레콘은 지독하게 많았다. 아실은 피가 몸 속 에서 너무 빨리 돌아서 몸이 우쭐거릴 것 같은 열두 살 소녀였다. 눈 도 두 개 다 있었다. 하지만 산도, 나무도, 하늘도 제대로 보이지 않 았다. 그녀의 세상은 그녀를 나늬라고 부르며 웃는 거인들이 다 덮고 있었다. 아실은 그 추억 속에 분리주의에 대한 이야기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은 의자를 쓰러뜨리며 일어났다. "앉아." 락토가 말했다. 아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돌아 문을 향 해 달려갔다. 책상 귀퉁이에 앉아있던 락토는 재빨리 몸을 던져 아실 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그가 끌어당기자 아실은 비틀거리며 돌아섰 다. 하지만 아실은 락토의 눈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아실은 두 발로 바닥을 밀며 뻗대었다. 락토가 말했다. "아실. 앉아." 아실의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놔아아아앗!" 락토는 입술을 깨문 채 아실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아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락토의 손을 떼어내려 애썼다. "놔아아! 이거 놔아아아! 우어, 우어, 우어어어어!" 아실은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로 던졌다. 바 닥에 주저앉으려 했다. 하지만 락토는 아실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 다. 아실은 갑자기 몸을 튕겼다. 그녀는 락토의 손을 깨물려 했다. 락토는 당황하여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가 뒤로 꺾어내렸다. 아실의 몸이 홱 돌았다. 락토는 지체없이 아실의 허리를 안아올렸다. "우아아! 우아아아아!" 아실의 두 다리가 락토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실의 왼손 은 락토의 눈을 향해 손톱을 세우고 날아들었다. 화가 난 오소리를 안아 옮기려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락토는 안아올렸던 아실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계속되던 괴성이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멎었다. 아실 은 옆으로 구르려 했지만 락토가 그녀의 배 위에 올라탔다. 락토는 오른손으로 아실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의 손바닥 안에 다 들어오는 작은 얼굴이었다. 락토는 그것을 잡아당겼다가 아래로 힘껏 찧었다. "묵!" 아실의 몸에서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아직도 아실은 버둥거 리며 락토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락토는 한 번 더 아실의 뒤통수를 바닥에 찧었다. "머어어……" 아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락토는 아실을 죽인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손을 당겼다. 아실은 눈 을 질끈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 락토는 안도했다. 그 때 아실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비켜요." 락토는 아실의 감은 눈을 보다가 말했다. "얌전히 굴 건가?" "비켜요." 락토는 일어났다. 아실이 또 도망치려 할 경우를 대비하여 락토는 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아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두 팔을 옆으로 던진 채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락토는 문에 등을 기대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실의 목에서 풀피리 같은 소리가 흘 러나왔다. 공작의 방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운 채 아실은 서럽게 울었다. 체면이고 뭐고 돌보지 않는 본때 있는 울음이었다. 공작은 이렇게 우는 사람을 본 것이 도대체 몇 년만의 일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실은 고래고래 고함 지르며 울었다. 두 주먹으로 바닥을 때리고 두 발로 허공을 차며 울었다. 몸을 뒤집어 울었고 숨이 막혀 쿨럭쿨럭 하면서 울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락토는 아실이 쓰러뜨 린 의자를 집어들었다. 의자를 문에 받혀놓은 락토는 거기에 걸터 앉 았다. 그리고 주머니칼을 꺼내어 손톱을 다듬었다. 손톱 손질을 끝낸 락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서가에서 책 한 권을 집어든 락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도 아실은 꽥꽥거리며 울었다. 락토가 책을 반쯤 읽었을 때 비 로소 울음이 잦아들었다. 기운이 다 빠진 아실은 신음하듯 숨을 쉬었 다. 가슴이 꽤 아픈 것 같았다. 락토는 서표를 집어 책에 끼워두고는 책을 탁 덮었다. "그럼 계속할까." 아실이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락토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더 크게 말해." "전 졸려요. 잘 거예요." "끝나고 자면 돼." "뭘 끝내죠? 다 끝났는데." "난 안 끝났어." "공작님. 다 끝났어요. 아무 것도 안 남았어요. 모두 사라졌어요." "그건 네 사정이야." "돈 필요하세요? 드리죠. 까짓거. 그거 드리면 저를 귀찮게 하지 않 으시겠어요?" "내 방에서 그렇게 운 값은 치뤄야지. 하지만 돈으로는 안돼. 다른 것으로 치뤄." "뭘 드리면 절 좀 가만히 놔두시겠어요?" "첫째. 가위에 대해 말해." "각하께서 잘 알고 있는 거잖아요." "네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야겠어." 아실은 두 손을 힘겹게 끌어당겨 가슴에 얹었다. 말을 하기 위해 먼 저 긴 한숨을 내쉰 아실은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위는 시모그라쥬공의 문장. 락토 가문의 감투 문장처럼 제2차 대 확장 전쟁 시절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감투와 가위가 손을 잡았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 제국 최북부의 강자와 최남부의 강자는, 서로 그토록 떨어져 있기에 협조가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어떤 종류의 협조지?" "지멘과 제가 하텐그라쥬로 가면 조만간 대장군에게 모종의 첩보가 갈 거예요. 우리의 진로를 넌지시 알려주는 첩보겠지요. 대장군은 약 혼자를 구하기 위해 공을 세울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아요. 또한 우리 가 가진 돈은 규리하 복구 비용으로 쓸 수도 있지요. 이래저래 탐나 는 사냥감이지요. 따라서 대장군은 우리를 뒤쫓게 될 거예요." 락토는 그런 첩보를 보내기도 전에 대장군이 스스로 지멘을 쫓아나 섰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다만 질문했다. "그래서?" "하텐그라쥬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그 도시가 있는 위 치지요. 그 도시는 제국 최남단에 있어요. 따라서 대장군은 발케네에 서 가장 먼곳으로 가게 되죠. 또한 황제에게서도 멀어지게 되고. 또 한 거기로 가려면 시모그라쥬를 지나야 하지요. 그 때 시모그라쥬의 가위가 황제와 대장군 사이를 자르겠지요. 설마 암살? 억류? 억류 쪽 이 가능성 높은 일일 것 같군요. 하텐그라쥬로 향하던 대장군은 시모 그라쥬에서 억류되겠지요. 그 다음은 각하 차례고요." "나는 무슨 일을 하지?" "이곳에 일만 레콘 병사를 준비해둔 각하께서는 하늘누리를 이곳으 로 끌어들이겠지요. 공작님은 황제를 억류하는 거에요. 황제와 대장 군이 제국 최북부와 최남부에 각자 억류된 상황에서는 각하께서 하시 고 싶은 일은 뭐든 할 수 있겠지요. 공작님이 모든 제국민들은 빨간 색 바지만 입고 다녀야 된다고 말하면 그렇게 되겠지요." "어떻게 하늘누리를 이곳으로 끌어들이지?" "각하에겐 변경백이 있잖아요. 변경백을 내세워 서약수호운동을 펼 치면 돼요." "변경백의 딸이 치천제에게 붙잡혀 있는데." "제발 이제 그만하면 안돼요? 그래요. 각하의 아드님이 엉뚱한 여자 를 데려왔어요. 하지만 그거야 많은 아버지가 겪는 일이니 놀랄 일도 아니잖아요." "아무 관계 없는 너도 그렇게 잘 아는데." 아실은 눈을 떴다. 그녀는 누운 채 고개를 돌려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꼰 무릎 위에 책을 쥔 팔을 얹어둔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내 아들은 멍청이다." "그건 각하의 사정이죠." 락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서 일어난 락토는 그것을 한 손에 든 채 아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다른 손을 아실에게 내밀었다. "일어나거라. 발케네의 공작 앞에서 누워있으면 안 된다." 아실은 기묘하다는 눈으로 락토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아실 을 붙잡아 일으킨 락토는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손수건을 꺼내어 아 실에게 건네준 락토는 다시 책상 뒤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굴을 대충 닦아낸 아실은 무슨 말을 할지 두고 보자는 얼굴로 락토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락토의 말은 그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는 나의 스승이다." 아실은 돌려주려던 손수건을 그만 꽉 움켜쥐고 말았다. 락토는 두 손을 깍지 껴 그 위에 턱을 얹고는 아실을 바라보았다. "분리주의가 사실 타이모의 것이 아니라 네 것이라는 것을 내가 어 떻게 알아내었을 것 같나? 거기에 대해 연구했기 때문이지. 이 책을 봐. 이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다. 네가 남긴 선언문과 편지, 그리고 말들을 모아놓은 것이지." 아실은 동그래진 눈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제목도 없었다. 락토는 그 책을 아실에게 밀어주며 말했다. "데라시의 강연처럼 관련된 것도 모아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내 주 석도 조금 덧붙였지. 많이 덧붙이지는 않았어. 그렇게 정리해서 읽기 편하게 가제본한 거다. 아직 정식 책은 아니지. 그러려면 좀 더 정리 를 해야 할 테지. 물론 제목도 붙여야 할 테고. 완성이 되면 제대로 출판을 할지도 모르지." 아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책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집어들었다. 책을 펼치자 서표를 끼워둔 부분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아실은 그 부분을 읽었다. '……실존이라는 개념이 당신들에게는 발견된 것일지 몰라도 레콘에 겐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 본질에 대한 낡은 수수께끼를 레콘에게 적용하지 마세요. 만물이 자신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레콘에겐 지극히 간단합니다. 거기서 평가가 이루어지고 가치가 발생합니다. 실존에 끼치는 영향에 따라 평가하는 것입니다. 세계 반 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망치는 나의 실존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습 니다. 따라서 그것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도 세계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망치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계 반대편 에 있는 누군가의 망치에 맞아죽게 된 사람이라면 입장이 다르겠지 요. 이렇듯 실존만이 평가를 하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 고 실존이 하는 일이라곤 사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아 무 것도 없습니다.' 아실은 그 대화를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화 상대자 가 누구인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교수님이라는 이름으로 보건대 아마도 어딘가의 교수일 거라는 것밖에 짐작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든 아실은 락토가 뭔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 다. 아실은 그냥 책을 접어 돌려주기로 했다. 락토는 약간 불만족스 러워 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아실은 그냥 침묵했다. 락토가 말했다. "나는 이 대목에 대한 해석을 보류해뒀어. 대충 짐작은 가지만 네가 사용한 표현 중 몇 가지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이것은 순전 히 큐레 교수의 기억에 의지해서 쓰여진 것이고 내게 이것을 갖다준 사람의 말로 교수는 자기 주장이 강한 성격이라고 하더군. 사실 그렇 지 않은 학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혹시 네가 말하지 않은 것이나 사 실과 다르게 된 부분은 없어?" "모르겠어요. 공작님이 말씀해주기 전까지는 이 교수님이 큐레 교수 라는 것도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락토는 실망하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였다. "너도 타이모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으니 나도 너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인가 보군. 뭐, 괜찮아." "그만두세요. 공작님." "뭐?" 아실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지만 또한 건조한 얼굴이기도 했다. "그래요. 저는 헛된 낭비를 했어요. 6년 동안 바보짓을 했어요. 인 생을 낭비했지요." 락토는 제목 없는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질문했다. "몇 살이지?" "예?" "몇 살이냐고 물었어. 아마 열여덟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맞아요. 그런데요?" "내가 공작이 된 것은 서른아홉이 되었을 때다. 네가 서른아홉이 되 려면 지금까지 산 것만큼 더 살아도 모자라겠군. 너는 젊다. 사실 어 리다고 말해도 되지. 아실. 무슨 낭비를 했다는 거냐. 그리고, 비록 약간 잘못된 동기에서 시작한 것이긴 하지만 네 사상은 훌륭하다. 그 것은 네가 만들어낸 작품이지. 도깨비들은 길에서 돈을 주우려면 최 소한 발 아래는 살펴야 한다고 말하지. 네가 한 일은 발 아래를 살피 는 정도가 아니었어. 낭비 같은 것은 없다." "위로해줄 필요 없어요. 각하에게 그런 것 받을 이유가 없어요." "발케네의 공작은 위로하지 않아. 내 둘째 용건을 들어보면 너를 위 로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거야." "둘째 용건이오?" "가위에 대한 질문이 첫째였다. 이제 둘째를 말하지." 락토는 책을 옆으로 밀어놓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네 분리주의 사상은 레콘을 위한 것이지만 훌륭한 사상이 그러하듯 그 외의 다른 것에도 적용할 수 있다. 느닷없이 출현한 초거대세계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정치 활동에 익숙한 종족이라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너와 지멘이 메헴 태수관에 불을 지른 적이 있지. 그 범죄에 대해 공공연히 즐거워하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고소하게 생각한 사 람들이 있다. 누구지?" "자보로 사람." "그래.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농담거리가 아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발케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 발케네 사람도 따지고 보면 아라짓 제국인이다. 하지만 누가 그걸 생각하지? 여기에는 속이고 훔 치고 빼앗는 발케네인이 있을 뿐이지, 같은 아라짓 제국인이 있는 것 이 아니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걸. 많은 천조각을 꿰매어 넓은 천 을 만들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같은 넓이의 단일한 천에 비해 형편없이 약하지. 아라짓 제국이 그렇다. 하나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꿰매어 놓았어. 원래부터 약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아직까지는 유지되고 있다. 원시제의 초인적인 능력 때문이지. 그것 이 아직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주 등 장하는 것이 아니야. 원시제조차도 제국을 하나로 유지하느라 그 수 명이 짧아졌지. 아직 황제의 시대가 아니야. 그건 너무 빨리 왔어." "그렇다면?" "왕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왕의 시대로……?" "그래. 왕의 시대로. 고 아라짓 왕국 이래로 북부는 수백년 동안 왕 을 기다려왔다. 대호왕은 수백년의 기다림 끝에 북부가 겨우 가지게 된 왕이었다. 그런데 신 아라짓 왕국은 불과 20여년만에 끝나고 느닷 없이 아라짓 제국이라는 것이 나타났지. 수백년 동안 기다렸던 것치 고는 너무 짧아." "그래서 황제를 잡으려는 건가요?" "그래. 내 둘째 용건은 나를 도우라는 거다." "발케네의 공작님이 근본도 없는 어린 계집애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 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텐데요." "천만에. 너는 지난 6년 동안 지멘과 단 둘이서 황제와 싸워왔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거냐? 너는 나만큼이나 유명할걸. 너는 스스로 를 낭비하지 않았다. 6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네 속에 쌓아 뒀지. 너는 나를 도울 수 있다." 아실은 왼다리를 오른다리 위에 얹었다. 그리고 자세를 바꿔 오른다 리를 왼다리 위에 얹었다. 어떻게 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아 실은 자신도 모르게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제게 무슨 도움을 바라신다는 거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제 돈 을 원하세요?" "아아, 세금수송대에서 훔친 돈. 그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나는 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다. 그것을 말하기 전에 네가 내게 협조할 생 각이 있는지부터 말해주면 좋겠군." "당장 대답해야 하나요?" "셋을 세면 될까?" "느리게 세어야겠는데요." "좋아. 하나, 둘. 가거라. 생각이 정리되면 돌아와." 아실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락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락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이미 아실이 떠나는 것을 기정 사실화 하는 동작 을 취해보였다. "시간은 충분해. 걱정말고 생각해봐. 내 멍청한 아들 때문에 당장은 하늘누리를 이곳으로 끌어올 수 없게 되었다. 가위에게도 잠시 기다 리라고 말해야겠어. 지금은 엘시를 잡아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 가 없으니까. 지멘도 여기로 돌아오도록 하겠다." 아실은 지멘의 이름을 듣는 순간 몸에 기운이 죽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겐 지금 어느 때보다도 지멘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에게 연락을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할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락토는 됐다는 듯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실은 그것이 떠나 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문 가까이 다가섰을 때 갑자기 락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실은 고개를 돌렸다. 락토는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이제 제법 봄 같구나. 세계의 운명을 바꿀 전투는 아직 멀었 으니, 이번 봄은 그냥 편안하게 즐기며 보내도록 하자." 아실은 어떻게 대답할까 하다가 보지도 않는 락토에게 그냥 고개만 꾸벅였다.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 또한 다가오는 봄에 대해 발케네공 락토 빌파 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다가오는 새해로 이월시킬 걱정거리가 거의 없었다. 올해의 문제는 이미 대부분 매듭지어졌다. 규리하 전쟁도 순식간이라 할 만큼 빠르 게 끝났다. 서약지지파는 지하로 숨었거나 혹은 고사했다. 엘시 에더 리를 규리하공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황제의 뜻에 방해되는 인물은 한 데 묶어서 발케네로 보냈다. 엘시는 자동으로 파혼하게 된 셈이며 엘 시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스카리는 경쟁에서 물러나게 되었 다. 부냐와 스카리가 발케네로 도망치게 함으로써 두 문제를 한꺼번 에 해결한 것이다. 데라시는 스스로에게 치하라도 보내고 싶었다. 하 늘누리의 이동 계획을 설명하는 비스그라쥬백의 니름은 그래서 활기 찬 것이었다. [새해에는 시구리아트 산맥 동쪽을 순방하기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유수부에서는 새해 1월 1일에 출발하면 4월 20일 쯤에는 시구리아트 산맥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 확인해주었습니다. 전사자들의 유해를 이송하는 것 때문에 속도가 조금 느린 셈입니다. 5월에 잠바이에 도 달하면 나로드, 바랄누리, 아제, 휘포리, 로세이즈를 거쳐 연말 쯤이 면 메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한계선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만, 그것은 내년의 상황을 봐서 결정해 야겠지요. 여기 상세 계획표입니다.] 황제가 그 계획표를 승인해주면 그것은 즉각 뱀단지를 통해 해당 도 시로 전달될 것이다. 올해 계획표는 이미 조금 늦었다. 규리하 전쟁 때문에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각 지역에서는 손꼽아 계획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황제의 뜻은 뱀단지를 통해 순식간에 전달되지만 반대 방향의 의사 전달에는 뱀단지가 이용되기 어렵다. 정신억압으로 뱀을 조종하는 대 신 손으로 뱀을 집어 뱀단지에 넣거나 빼는 것으로도 약간의 의사 전 달은 할 수 있지만 그 방법으로는 매우 축약된 의미조차도 제대로 전 달하기 어렵다. 역시 황제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면 황제의 대 전에 나가 접견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지방 행정관들이나 영주들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광대한 제국을 가로질러 사람을 보낼 수는 없기 때문에 조금 덜 급하거나 덜 중요한 사안들은 제국 수도가 자신에게 로 오는 시기까지 미루는 것을 선택한다. 따라서 그들이 새해 계획을 세우려면 먼저 제국수도의 이동 계획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데라시 는 황제가 어서 그것을 보고 승인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치천제 는 계획표를 보지 않았다. [짐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군.] [혹 따로 염두에 두신 곳이 있습니까? 시구리아트 산맥 동쪽이라면 조정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서쪽일 경우라도 4월 안에 도달할 수 있 는 곳이라면 역시 가능합니다. 계획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4월 이전 에도 꽤 넓은 지역을 방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치천제는 여전히 계획표를 보지 않았다. 황제는 아예 몸을 돌려 벽 난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계선 이남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일년 내내 타는 불꽃이 활활 타고 있었다. 치천제가 닐렀다. [발케네로 간다.] 데라시는 비늘을 부딪쳤다. 비스그라쥬백은 갑자기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커다란 멧돼지를 통째로 삼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뭐라고 니르셨습니까, 폐하?] [새해에는 발케네로 간다. 규리하 점령군을 그대로 나나본 쪽으로 이동시키도록 해라. 엘시가 없으니 그것에 관해서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의논하도록.] 데라시는 규리하 지역 치안 유지 병력만 남겨두고 회군할 준비를 하 고 있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이 소식을 들으면 놀랄 거라는 생각 을 했다. 그러나 조금 후 데라시는 자신도 놀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 았다.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이다. [발케네로…… 발케네에…… 폐하. 발케네로 병력과 함께 가신다는 니름이십니까? 무엇 때문이신지 닐러주십시오.] [물론 전쟁이지.] [전쟁이오?] [그래.] 데라시의 몸에서 일어선 비늘이 옷을 거세게 찔렀다. 그 때문에 데 라시의 옷은 바람에 펄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벽난로를 들 여다보는 황제의 옆얼굴을 보며 데라시는 두 손을 마주쥐었다. 침착 해야 한다. 불가능한 명령을 자신에게 부여하면서 데라시는 슬픔마저 느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겪어야 하나. 몇 분 전까지도 참 즐거웠 는데. [폐하. 무슨 연유로 발케네공과 전쟁을 한다는 니름이십니까?] [짐의 죄수를 훔쳐간 것을 벌하기 위해서다.] 데라시는 그것이 공개적인 이유임을 깨달았다. [다른 이유는 없는지요?] [아이저 규리하를 붙잡는다는 이유까지는 공개해도 되겠지. 그러나 천경비록을 되찾는다는 이유는 공개할 수 없는 것이다.] [폐하. 일전에 폐하께서는 제게 암살공이 폐하를 자신의 땅으로 불 러들이고자 애쓰고 있다는 내용의 니름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런데 발케네로 가신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 같습니다. 더군다 나 엘시 백작도 없는 상태에서……] 데라시는 화들짝 놀랐다. 어떤 치명적인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함정이다.' 데라시는 합리적인 설명을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것은 함정이다. 태위 레이헬 라보도 없고 대장군 엘시 에더리도 없는 상태에서 하늘누리가 발케네로 가는 것은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데 라시는 닐렀다. [절대로 불가합니다, 폐하!] [데라시. 누가 네게 짐의 뜻을 통제할 권한을 주었느냐?] 격정 때문에 해서는 안될 니름을 했다. 데라시는 머리를 조아렸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제가 혼란에 빠져 커다란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니름 대신 제 뜻을 살펴주십시오. 폐하의 뜻을 재고해주 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무나도 수상합니다. 발케네공은 오랫동안 폐하의 관심을 자신의 영지로 끌어들이려 애썼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레이헬 라보 태위와 엘시 에더리 대장군 모두가 폐하의 곁에 없습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기이합니다. 엘시 에더리 대장군 의 경우엔 그나마 그 이유가 뚜렷합니다만 레이헬 라보 태위가 사라 진 것은 아직도 그 이유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살피고 살피고 또 살 펴주십시오.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십시 오.] [엘시는 있어도 데려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예?] [이 전쟁은 그 수행자에게 큰 빚을 남기게 될 전쟁이 될 것이다. 엘 시에게 그런 것을 주지는 않는다. 그가 지멘을 추적하고자 했을 때 짐이 그를 보낸 것도 그 때문이다.] 데라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가 경애하는 황제를 바라보았 다. 큰 빚을 남기는 전쟁? 전쟁은 진 자에게도 이긴 자에게도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황제가 특별히 큰 빚이라고 표현한 다면…… 그 순간 데라시는 죽음과 같은 공포를 느꼈다. 살육전이다. 황제는 승자에게 절대로 씻을 수 없는 피비린내를 남기는 전쟁을 수 행할 생각이다. 발케네를 완전히 도륙하는 것이다. 싸울 수 있는 사 람은 다 죽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후손을 남길 능력을 박탈하 는 전쟁. 단종시키는 전쟁. 그런 전쟁이 엘시의 지휘 하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엘시는 차기 황제가 될 테니까. 데라시는 벼락 같은 속도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 발케네는 독립적인 도둑의 땅이다. 그 땅에 유사 이래로 처음 지배 구조라는 것을 심어 놓은 것은 도깨비 감투를 가진 냉혹한 사내들이었다. 그 땅은 새 황 제에게도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날이 올지조차 의심스럽 다. 치천제는 그런 귀찮은 자들을 아예 지상에서 없애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반역의 증거가 될 도깨비 감투 또한 파괴할 것이다. 그 일은 또한 제국의 모든 사람에게 나가 황제에 대한 환멸 과 증오, 공포도 줄 것이다. 그 감정들은 인간 황제에 대한 폭발적인 애정으로 바뀔 것이다. '엘시 백작을 적이 없는 황제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서 분리 주의자를 격파하고 서약지지파를 격파하고 암살공을 격파하시려는 겁 니까? 엘시 백작을 사랑 받는 황제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서 직접 아킨스로우 협곡과 페시론 섬의 일을 재현하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차기 황제다. 엘시에겐 모든 것이 주어졌다. 대장군, 제국 만병장, 규리하공. 그 다음은 당연히 황위다. 데라시는 자신이 왜 진 작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런 결론을 내리기 싫었던 것이리라.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데 라시는 심장을 적출한 황제가 오랫동안 제국을 다스릴 것이라 믿었 고, 그래서 차기 황제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사랑 하는 제국의 안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 지배자가 아직 젊은 데 차기 지배자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면 그것은 안정적인 지배 구조 라 할 수 없다. 그래서 데라시는 차기 황제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 으로 거부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데라시의 무의식적 소망에 관심이 없었다. 사실상 오래 전부터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데라시는 화를 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았을 뿐 황제는 전부 알려주고 있었다. 데라시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가를 훔쳤다. 그의 손이 은빛으로 빛 났다. 나가들은 거의 울지 않는다. 그리고 일생에 몇 번 흔치 않은 기회로 울게 될 때 그들은 어떤 종족도, 어떤 생물도 흘리지 않는 특이한 눈 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은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은루(銀淚)라고 불린 다. 자신의 눈물이지만 데라시에게 그것은 낯설고 놀랍게만 보였다. '내 몸에서 이런 것이 흘러나온 건가?' 놀라워하던 데라시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닦아내었다. 황제는 그를 보지 않았다. [폐하……] [가서 새 계획표를 준비해오너라.] 아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더 온건하고 더 부드러운 방 법이 있을 것이다. 엘시 에더리만이 유일한 차기 황제의 자질을 가지 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다. 황제는 지상에 대한 그녀의 특별한 거부감 때문에 지상의 지배자 자리를 빨리 다른 이에 게 넘겨주려고 무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데라시는 애타게 닐렀 다. [폐하. 부디 잠시만 니르게 해주십시오.] [듣지 않겠다. 가라.] [폐하.] [가라.] 더 니를 수 없었다. 데라시는 자신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 았지만 그의 몸은 데라시를 놀라게 했다. 그의 몸은 반사적으로 일어 나 보온복을 집어들고는 데라시를 문가로 데려갔다. 보온복을 입고 문손잡이를 쥐었을 때 데라시는 겨우 뒤를 돌아볼 정도의 여유를 되 찾았다. 그는 황제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벽난로 속의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데라시는 절망감 속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혔다. 하늘누리가 멈춘 상태에서 이동을 시작할 때 그 아래쪽에 있는 사람 은 건물 내부에 있도록 권장된다. 이동의 충격 때문에 하늘누리에서 뭔가가 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것, 그러니까 실수로 나루터에 놔둔 그릇 하나라도 아래로 굴러떨어지면 그것은 곧 놀라운 속도로 땅을 강타하게 된다. 물론 유수부원들이 이동에 앞서 철저하 게 검사를 하고 실제로 그런 물건이 떨어져 아래에 있는 사람을 다치 게 할 확률은 지독하게 적다. 하지만 틸러 달비는 권장이라는 용어 대신 규칙이라는 용어까지 사 용하면서 정우를 성 내부에 있도록 강제했다. 그는 정우가 배웅을 핑 계 삼아 날아오를까봐 두려웠다. 환상계단을 다루는 정우의 놀라운 솜씨는 틸러의 이해나 추측을 벗어난 수준이지만 그래도 정우는 하늘 누리가 움직일 때 환상계단을 사용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틸러는 정우가 엉뚱한 생각을 떠올릴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 그 때문에 정우는 볼이 약간 부은 채 자신의 방 창가에서 하늘누리가 움직이기 를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하늘누리가 움직이는 장관을 넓은 장소에 서 보고 싶어했다. 갑자기 정우는 묘안을 떠올렸다. 정우는 환한 얼굴로 틸러를 돌아보 았다. "틸러! 탈해와 함께 번뜩이를 타고 날아오르면 되죠? 땅이 아니니까 상관없잖아요." 정우의 곁에 있던 탈해도 환한 얼굴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 전부터 그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 다. "죄송합니다만 안되겠습니다. 하늘누리는 곧 움직일 겁니다. 지금 딱정벌레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데 뭐가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 까." 정우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정우는 그녀가 딱정벌레를 타고 날 아오를 때까지 하늘누리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열심히 하늘누리를 관찰했다. 물론 그런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정우 는 한숨처럼 말했다. "떠난다니 아쉽네요.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땐 참 좋았는데." 틸러는 정반대라고 생각했다. 정우가 하늘에 있었던 엿새는 다시 겪 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정우가 틸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하늘누리는 어디로 가는 거죠?" "그건 유수부의 극비입니다." "아, 그래요?" 정우는 그냥 그런가 하는 얼굴로 다시 하늘누리를 돌아보았다. 탈해 또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틸러가 근심 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늘누리의 이동이 극비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 하늘누리는 제국의 수도다. 수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아무리 그 수도가 움직 이는 수도라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늘누리의 이동 계획은 제 국의 모든 지역에 공지된다. 하늘누리가 비밀리에 움직일 때 그 이유 는 하나뿐이다. 틸러는 그런 경험을 한 번 했었다. 규리하를 공격하기 전, 하늘누리는 이동 계획을 공지하지 않았다. 틸러 달비는 어딘가에서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주둔지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참나무 군단과 가시나무 군 단에도 갑자기 경계령이 내려졌다. 치안유지병력과 함께 성에 남아서 정우를 보좌하기로 한 틸러는 다른 병사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 었다. 이 또한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증거였다. 부위의 인맥으로도 전쟁 목표 같은 것은 알아낼 수 없다. 틸러는 알아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상할 자유는 포기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 전쟁을 치뤘는데 또 이렇게 새해 벽두부터 전쟁을 치 른다면 그 전쟁 상대는 어디일까? 틸러는 자신이 정치에 지나치게 무 지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럴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시 련인가? 틸러는 그 생각에 잠깐 매달렸지만 곧 포기했다. 도시연합과 아라짓 제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그것은 엄청난 규모가 될 것이다. 모 든 제국군에 경계령이 내려질 테니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아도 자연 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련은 아니다. 만에 하나 전쟁 상대가 시련이라면 그것은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한 소규모 국지전일 테고 그 경우 하늘누리가 이동할 필요는 없다. 역시 제국 내부의 누군가 다. '하지만 규리하의 대승으로 황제 폐하의 위엄이 제국 전체에 떨 쳐는데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녀석이 폐하께 대들 수 있을까?' "아! 새님." 정우가 갑자기 작은 탄성을 질렀다. 틸러는 어리둥절하여 정우를 바 라보았다. 정우는 새장쪽으로 달려가서는 그것을 들고 창가로 돌아왔 다. 그리고 새장을 가슴에 안아 하늘을 잘 볼 수 있게 했다. 틸러는 조금 전까지 빠져있었던 고민도 잊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늘누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우와 탈해는 탄성을 질렀다.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런 물체가 하늘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 같았다. 물론 하늘에 떠있는 것 자체가 이미 상식을 짓밟는 일이긴 하지만, 움직이 기 시작하자 하늘치는 그 무게감을 온전히 드러내어 보였다. 눈 두 개가 앞쪽에 있는 생물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지 않고서는 그 전체 모 습을 보기 힘든 크기의 생물이 부드럽게 하늘을 날아갔다. 위쪽에 있 는 도시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그 이동 속도는 느렸다. 그래서 정 우와 탈해는 오랫동안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한 번 내리지도 않 았다. 그들은 하늘치의 두 가슴 지느러미가, 그 배가, 그리고 꼬리 지느러미가 시야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때는 이미 하늘치의 앞 쪽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하늘치가 하늘 저편의 조그마한 모습 이 되었을 때 정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장을 꼭 붙들고 있던 팔 이 저렸고, 그래서 그녀는 새장을 창턱에 내려놓고는 두 팔을 조금 흔들었다. 정우는 틸러에게 말했다. "가슴 지느러미를 날개치지는 않네요. 꼭 날개처럼 보이는데." "예. 그러지는 않습니다." "환상계단을 탈 때와 마찬가지네요." "예?" "저도 두 팔을 흔들지는 않았잖아요." "아, 예." "그러면 하늘치도 환상계단 같은 걸로 떠있나 봐요?" 틸러는 흥미로운 가설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치의 비행에 대해 설명 하길 승락한 생물학자는 없다. 그들은 아예 하늘치에 대해 설명하길 꺼린다. 그토록 거대한 물체가 떠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공기보다 가 벼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기보다 가벼운 생물의 등에 도시를 건설 할 수는 없다. 하늘치를 저울 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없지만 그 무게 가 엄청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자연법칙으로 하늘 치의 부양이나 비행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고, 따라서 생물학자들의 거부감도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늘치 자신에게만' 작용하는 환상계단에 의해 떠있다면? 환상 계단은 상상한 자에게만 영향을 끼치지만 그 영향은 한계가 밝혀져 있지 않다. 틸러가 목격한 정우의 비행이 그 한 예다. 틸러는 그럴 법하다는 의미의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 때 인간이나 도깨비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가 갑자 기 들려왔다. "불씨가 날아간다. 큰 불이 일어날 거야." 정우와 탈해는 놀란 눈으로 새장을 바라보았다. 새장 속의 인조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한 것이 인조새라는 것은 분명했 다. 정우는 의아해 하며 틸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틸러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더 큰 의아함을 느꼈다. =============================================================== 9챕터 끝났습니다. 요즘 의혹에 빠졌습니다. 아무래도 타자에겐 어릴 때 헤어진 여동생 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군단 병력으로. 믿기 힘들지만 그 중에 는 외국인 여동생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빠가 보고싶다는 메일이 계속 옵니다. (그만 좀 보내라, 스패머들아.)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10. 바람 속에 던진 돌 - 1 병리학적 연쇄살인자 파델 미호린의 문제점은 그가 지나 친 부자였다는 점이다. 각자 정의와 법, 그리고 복수심의 응원을 받는 추적자들의 추적은 매서웠으나 파델 미호린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준마를 타고 힘껏 달렸다. 그러나 파델 미호린은 도로에 도달하자마자, 즉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 는 여건이 되자마자 추적자들이 보는 앞에서 말에서 내렸 다. 추적자들은 미호린이 도주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미호린의 환희에 찬 선언은 추적자들을 절망에 빠트 렸다. 미호린이 딛고 있는 것은 유료도로당의 도로였다. 유료도로당원들은 자신의 도로에 있는 여행자인 미호린을 보호하기 위해 출동했고 미호린은 추적자들의 분노를 조롱 하며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추적자들이 내뱉은 폭언과 욕 설, 그리고 설득의 외침들은 유료도로당원에게 아무런 영 향도 주지 않았다. 이 사건은 곧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관계되 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억울한 죽 음에 슬퍼하는 유가족들로부터 법의 지엄함과 도덕의 존엄 함을 믿는 많은 상식인들이, 그리고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보낸 항의가 유료도로당에 산처럼 쌓였다. 그러나 유료도 로당은 자신의 원칙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여행자들의 안전한 도로 이용을 위해 유료도로 위에서는 어떤 종류의 폭력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 동안 파델 미호린은 막강한 재력으로 도로와 유료도로당의 여숙 시설을 이용하며 도로 위를 유유히 여행했다. 그는 도로 위에 있을 때만 유료도 로당의 완전한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고귀한 도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지만 황제의 정부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 의 위기로 파악했다. 제국의 체제 내에서 법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제 한 사람뿐이다. 제국 관리들이 보 기에 유료도로당의 행태에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규칙을 제 국법 위에 놓으려 한다는 혐의가 엿보였다. 유료도로당에 대한 하늘누리의 여론은 악화되었다. 물론 그 악평의 상당 부분은 자유무역당의 선동에 힘입은 것이겠지만 자유무역 당과 별다른 이해가 없는 이들도 유료도로당의 행태에 격 렬한 비난을 보내며 황제에게 유료도로당의 처벌을, 심지 어 그 해산을 간원했다. 그러나 어떤 여론과 간원에도 황 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황제는 율형부사 에스커 헬토 를 불러들였다. 황제의 명령은 잘 알려져 있다. "가서 그 일을 해결하거라." 율형부사 에스커 헬토는 그 일이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부사는 젊은 율형부차사 사라 말 아이솔을 불러들여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사라말 아이 솔은 장검 한 자루를 챙겨 하늘누리를 떠났다. 여드레 뒤, 에시올 산맥 남단의 자흐-로세이즈 유료도로 를 걷고 있던 파델 미호린은 길 앞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율형부차사 사라말 아이솔을 발견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 게 된 미호린은 젊은 차사를 희롱하고 황제의 법을 조롱했 다. 사라말 아이솔이 묵묵히 칼을 뽑아들 때까지. 당황한 미호린은 동행하던 유료도로당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러나 유료도로당원의 대답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조금 전 지나친 이정표부터 다음 이정표까지 2킬 로미터 구간은 저기 계신 율형부차사 사라말 아이솔께서 동편 한 닢을 지불하고 구매하셨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당 의 도로가 아닙니다." 유료도로당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라말 아이솔의 칼이 번뜩였다. 파델 미호린은 머리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유료도로당의 도로가 외부에 판매된 유일한 예다. 사람들은 유료도로가 팔렸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가격이 동편 한 닢이라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하지만 사람들이 놀랄 일은 한 가지 더 남아있었다. 사라말 아이솔은 동편 한 닢을 주고 산 도로를 금편 오백 닢을 받고 유료도로당 에 되판 것이다. 사람들은 이 폭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 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의 당황이 해소된 것은 젊은 차 사가 도로 판매금 전액을 유가족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였다. 금편 오백 닢은 유료도로당이 유가족들에 게 보내는 위로금이었다. 그러나 엄격한 유료도로당원은 그 금액에서 동편 한 닢을 빼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지 적한다. - 하르체 도빈의 <우리는 길을 준비한다.> 中 세상에는 어린 땅, 사춘기에 걸린 땅, 미친 땅 등과 함께 조로증에 걸려버린 듯한 땅이 있다. 창조되자마자 늙어버려 어떤 변화도 일으 키지 않는 이런 땅 중에는 황금해를 향해 달리는 에시올 산맥이 아직 바다에 대한 피상적인 꿈을 꾸는 곳, 실드파이 봉우리 아래의 벨쟈고 고원 포함된다. 디네에서 남쪽으로 300킬로미터 가량, 그리고 로세이 즈에서 북으로 500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고 슈라도스와 자흐로부터 도 800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어 육상의 고도(孤島)라 할 수 있는 이 땅은 종말이 올 때까지 살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미리 보 기 위해 찾아옴직한 땅이다. 수억 년 동안 태양에 그을린 칼날 같은 바위와 붉은 모래들. 그 따 스해 뵈는 빛깔에 어울리지 않게 벨쟈고 고원은 차갑다. 모래 틈에 있는 무수한 미세 암흑들이 날과 달과 해를 한량없이 삼키지만 시간 에 대한 이 땅의 굶주림은 끝이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비탈을 구르는 레콘의 몸이 날려올린 것은 태양에 그을린 모래와 흙만이 아니다. 그 곳에서는 이 땅에 삼켜져 반쯤 소화되었던 시간들이 파드득거리며 날 아올랐다. 급한 경사를 따라 몇십 미터 쯤 신나게 구른 주테카는 자신의 분노 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 그래서 분노는 조금 뒤늦게 일어나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주테카는 눈이 뒤집힐 만큼 화가 나 고함을 꽥 질 렀다. 확 부푼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흙모래가 주테카의 부리에서 터 져나온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대류했다. 정신 사나운 모습이다. 그러 나 주테카의 격분은 길지 못했다. 호리병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 기 때문이다. 주테카는 승천한 티나한을 찾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싶게 도약했고 그가 있던 자리에서는 호리병이 폭발했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올 랐다.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서는 론솔피가 도끼창을 쥔 손을 경련시키며 땅에 떨어지는 지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론솔피는 지멘이 땅 에 내려설 때 그의 허리를 잘라놓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공중에서 지멘이 던진 물건을 보고는 두 다리가 땅에 붙어버렸다. 론솔피는 저 거 봤냐는 표정으로 멀리 있는 준람을 쳐다보았지만 그가 본 곳에는 준람이 보이지 않았다. 준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그는 지멘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맹렬하게 도망치고 있었다. 실드파이 봉우리 중턱에서 딱정벌레의 등 위에 걸터앉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레 달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디네에서 지멘이 호리병을 대량으로 구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 이레는 그것이 추적자들을 동요시키기 위한 허위 정보일 거라 믿었 다. 그의 상전과 네 명의 레콘 또한 전적으로 동의했는데, 그들은 지 멘이 물병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벨쟈고 고원에 들어섰을 때 지멘은 지척까지 다가온 론솔피에 게 호리병을 집어던졌다. 론솔피는 거의 디네까지 되돌아갈 뻔했다. 지멘이 집어던진 것이 빈 호리병이었음이 밝혀졌을 때 추적자들은 자 신이 지멘에게 농락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모든 호리병이 비어있을까? 호리병 판매자가 알려준 또 다른 정보는 그들의 의욕을 대폭 저하시키는 것이었다. 지멘은 호리 병을 구입하면서 그 중 몇 개의 병에 물을 채운 다음 단단히 밀봉하 고 겉에 표시를 해달라는 복잡한 주문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멘은 오래 전에 표시가 된 병을 모두 버렸을 수도 있다. 그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판매자가 실수로 표시를 하지 않은 것이 있 을 수도 있다. 우연의 장난은 때론 치명적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그 두 가지 경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염려하는 것 은 가장 믿기 어려운 경우, 즉 지멘이 표시가 된 병들을 가지고 있을 경우다. 이 경우 추적자들은 지멘의 전투 능력 외에 그의 정신 상태 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이레는 지멘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나뿐인 사례는 정의를 내리는 데 부 족하지만 이 경우엔 지멘에게 정신 질환의 판정을 내릴 수도 있을 것 이다. 분노한 주테카가 철저로 바위를 몇 개 때려부수며 외쳤다. 소지품 관리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줄 것을 요망한다는 의사가 악랄한 비속 어로 표현되었다.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지멘을 상대로 해부학적 도전이 될 만한 실험에 돌입하겠다는 경고도 뒤를 따랐다. 지멘은 가장 효과적인 반응을 보였다. 주테카와 그의 독설을 한 자리 에 남겨두고 도망친 것이다. 청자가 무시할 경우 독설은 화자의 심사 를 뒤집어놓는다. 주테카는 화가 나서 땅에 드러누워버렸다. 상처 입 은 정의구현자의 비명이 벨쟈고 고원을 진동시켰다. "쿠아아아악!" 주테카가 개미처럼 보이는 먼 거리였지만, 그리고 빛이 사그라드는 황혼녘이었지만 비명의 절절함은 이레에게 남김 없이 전달되었다. 이 레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상전을 바라보았다. 엘시 에더리는 바위에 걸터앉아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찬 바 람이 엘시의 머리카락을 뒤집어 불꽃처럼 떠오르게 하고 있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은 차분하다. 엘시가 말했다. "왕벼슬. 당신이라면 다급한 처지에 빠지면 저런 재주를 부릴 수 있 겠습니까." 그 날 엘시와 이레를 경호하던 쵸지가 수염볏을 주무르며 말했다. "너라면 그래야만 하는 상황에서 똥을 먹을 수 있겠나?" 이레는 이 반문에 화를 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엘시는 화난 기 색이 없었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아마 강력하게 거부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쓸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지멘이 저 짓거리를 하는 이상 다루기 까다로워." "야리키가 와줬다면 좋을 텐데, 아쉽군요." "뭐 하는 사람인데? 그을린발은 알지만 그 사람은 모르겠군. 군대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레는 무예의 달인이나 투사병기를 다루는 레콘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 예상했다. 이레의 예상은 당혹스러운 방식으로 빗나갔 다. "조인(釣人)입니다." "뭐? 생선 사냥꾼?" "보통은 낚시꾼이라고 합니다." "미쳤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정신에 하자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레콘이, 음. 거기서 그걸 보면서 생선 사냥을 한다고?" "그러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이야?" 엘시는 손목을 꺾으며 말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조간을 받은 이후로 야리키가 낚은 고기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그가 나설 때마다 항상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점 이 있었지요. 사람들이 지나치게 붐빈다거나, 좋은 고기가 없어 보인 다거나, 날씨가 지나치게 좋다거나, 혹은 지나치게 나쁘다거나, 낚시 질보다 더 급한 용건이 갑자기 생기거나." 이레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쵸지 또한 웃음을 머금 어 보였다. "감당할 수 없는 숙원을 택해버렸군. 사는 것이 팍팍하겠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낚시는 그 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지멘은 배도 탔습니다." 쵸지는 그 말을 못들은 척했다. 엘시가 계속 말했다. "그에 비하면 야리키가 하려는 일은 조금 난이도가 낮다고 할 수 있 겠지요. 야리키의 조간은 레콘의 체구에 맞춘 것이라 굉장히 깁니다. 꺼림칙한 장소에서 거리를 두고 낚시를 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봤 을 땐 아직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가 그 일에 성공했 다면 지멘의 저런 공격에도 상당한 저항력을 보여주겠지요." "내기를 할 돈은 없지만 다른 걸 걸어도 된다면 그 사람 아직 성공 하지 못했다는 것에 걸고 싶군."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성공하면 어탁을 떠서 내게 보내준다고 했 지만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가 성공하길 바랍니다. 숙원에 도전하는 모든 레콘들에게 보내는 것과 똑같은 응원을 보내 며." 이레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문득 쵸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나 그의 주인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서 쵸지는 기이한 눈길로 별이 반짝 이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레는 주인 만큼 레콘에게 익숙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쵸지의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엘시가 말했다. "왕벼슬. 저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전해주십시오." 쵸지는 고개를 숙였다. 쵸지는 론솔피와 주테카, 준람에게 들리도록 계명성을 내질렀다. 론솔피는 도끼창을 어깨에 맨 채 풀쩍 풀쩍 뛰어 산 위로 달려왔고 저 멀리서 지평선을 건드리고 있던 준람도 돌아왔 지만 주테카는 그 때까지도 땅에 드러누워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엘 시는 자신을 위로하는 주테카의 방식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는 주테 카를 내버려둔 채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저녁 먹고 다시 추적하도록 합시다." 론솔피가 약간 어색해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지만, 밤중에 저 녀석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 은데." 엘시는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오늘 밤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어디로 가는지만 확인해두지요." 론솔피는 한결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간단한 식사가 끝나고 횃불을 만든 다음 준람과 쵸지가 엘시와 함께 출발했다. 그리고 이레와 론솔 피, 조금 늦게 산을 올라온 주테카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시 눈을 붙였다. 그들은 이렇게 세 명씩 교대로 지멘을 추적해왔다. 따라서 그들은 교대로 쉴 수 있지만 지멘은 그렇지 못했다. 추적자들의 바람처럼 지멘은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고원 귀퉁이의 산자락에 몸을 숨긴 채 지멘은 사지에서 전해져오는 비보들을 무시하려 애썼다. 하지만 졸음이나 허기와 마찬가지로 통증 은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무시하기 힘든 것은 준람에게 찔린 허리 쪽의 고통이었다. 레콘 추적자들에게 쫓기는 도망자에겐 곤란하 기 짝이 없는 상처다. 해 저물 무렵 치루었던 일전의 흥분이 사라지 며 지멘은 부리가 떨어질 것 같은 한기와 통증을 느꼈다. 옆구리를 만져본 지멘은 상처가 벌어졌음을 확인했다. 뭄토에게 찔린 오른팔의 상처도 격심한 움직임 때문에 다시 악화되는 것 같았다. 지멘은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차가운 흙 속에 머리를 비벼넣었다. 이대로 땅 속에 묻혀서라도 추적자들의 눈을 피해 쉬고 싶었다. 지멘 은 아실이 그토록이나 엘시를 두려워 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 했다. '엘시가 아냐.' 지멘은 왼손으로 수염볏을 비틀며 생각했다. '엘시가 아냐. 나는 레콘들에게 쫓기고 있는 거야. 레콘들만 없다면 엘시는 아무 것도 아냐.' 보다 안정된 상태였다면 지멘은 자신이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펴고 있 음을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논리가 성립한다면 지멘은 치천 제를 공격할 수 없다. 치천제가 타이모를 손수 쟁룡해에 집어던진 것 은 아니니까. 타이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치천제이듯 그를 괴롭 히고 있는 것은 엘시 에더리다. 그러나 혹독한 상태에 빠져있는 지멘 에겐 그 정도의 사유도 버거웠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왜 시련을 선택해야 합니까, 타이모? 시련을 선택해서 거기서 벗어 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실패입니다. 혹 힘겹게 시련에서 벗어 난다 해도 그것은 애초에 시련을 선택하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습 니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타이모.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해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죽은 자의 말은 계절과 같다. 언제나 같은 것이 되돌아온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아니, 그럴까? 살아있는 것도 똑같은 것 의 반복이다. 니어엘 헨로는 그에게 애기살을 쏘았고 뭄토는 접칼을 휘둘렀으며 준람은 창을 내찔렀다. 그 일은 계속될 것이다. 열 살만 넘어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내일은 단 한 가지 사실 외에는 아무 것 도 담보하지 않는다. 오늘과 똑같이 한심할 수 있다는 것. 가까스로 해결한 모든 고민이 형태를 바꿔 끝없이 돌아온다.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최종적 고민 아래 쓰러지면, 그것이 죽음이다. 그리고 그것 이 삶이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없다. 숙원만이 가치 있다. '죽은 황제는 돌아오지 않는다.' 황제에게 죽음을. 철저하고 무참하고 회복 불가능한 죽음을. 지멘의 손이 무의식 중에 움직였다. 그 손은 허공에서 누군가의 사지를 찢어 내는 동작을 그려보였다. 팔을 비틀어 어깨에서 떼어내고 무릎을 분 지르고 등을 찢어 척추를 끄집어내는 섬세하고 집착에 찬 동작.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기에.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기에? 퇴락한 땅에 몸을 누인 채 지멘은 밤이 동에서 서로 날아가는 소리 를 들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면 손끝에 검댕이 묻어날 것 같은 시커 먼 밤. 바람은 시퍼런 쇳내음으로 가득하고 그의 몸 안에서는 비비꼬 인 열기가 꿈틀댄다. 지멘은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가 어디 있는지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 는 현기증을 느꼈다. 예상과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땅을 겨우 찾아 내어 짚은 지멘은 고원 사이에서 일어났다. 추적자들에게 발각되지 않으려면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테지만 지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땅을 힘껏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 소리는 꽤 먼 곳까지 전달되었다. 곧 저 먼곳에서 레콘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멘 은 그 소리를 무시했다. 망치의 목을 단단히 움켜쥔 지멘은 구릉을 뛰어넘었다. 지멘을 먼저 포착한 것은 쵸지였다. 조금 전까지 소리를 따라 달리 던 쵸지는 조금 후 묽은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덩어리를 발견했다. 쵸지는 지체 없이 횃불을 빙글빙글 돌린 다음 그 검은색을 추적했다. 저 먼곳에서 딱정벌레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준람도 그에게 합류했다. 그들은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지멘 을 뒤따라 달렸다. 지멘은 전속력으로 달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쵸지 와 준람 역시 어둠 속에서 무리한 체포를 감행하다가 곤경을 겪는 것 은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지멘의 기운을 빼놓기로 했다. 지멘이 시 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며 쵸지와 준람은 꾸준히 달렸 다. 밤을 달리는 세 레콘의 발소리가 작은 장단을 만들었다. 비탈을 내 려가는 약간 가벼운 소리, 능선을 따라 달리는 무거운 소리, 좁은 협 곡 사이에서는 발소리가 왕왕 울린다. 쌓인 자갈들이 구르며 내지르 는 아우성은 여운이 퍽 길다. 하늘이 제비꽃 빛깔로 물들었을 때 쵸지와 준람은 안도하며 동시에 의혹을 느꼈다. 주위가 밝아져서 이제 지멘의 모습이 잘 보였지만 그 속도는 지난밤과 똑같았다. 지멘은 걷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 성큼성큼 달렸다. 횃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쵸지는 그것을 옆으로 늘어뜨려 땅에 긁 었다. 불티가 날리다가 불이 꺼졌다. 홰를 다시 회수하려던 쵸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홰로 바닥의 돌을 튕겨올렸다. 그의 진로 앞 에 동실 떠오른 돌을 왼손으로 붙잡은 쵸지는 계속 달리면서 그것을 관찰했다. 잠시 후 쵸지는 옆에서 달리는 준람에게 돌을 던져주며 중 얼거렸다. "죽으려고 작정하는군." 돌을 받아든 준람은 쵸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했다. 돌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부리를 꽉 닫은 채 돌을 어깨 너머로 집어던 졌다. "우리가 몇 시간째 뛰고 있는 거지?" "열 시간 쯤? 졸리는군." "엘시의 딱정벌레가 안 보이는군." "딱정벌레는 그렇게 오래 못 날아. 어디서 쉬고 있겠지."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동시에 뛰어내렸다. 땅에 떨어진 준람이 무릎을 펴며 말했다. "이제 좀 훤해졌는데, 한 번 붙어볼까." 쵸지는 지멘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들은 약간 경사진 땅을 따라 평야 지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쵸지는 평야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바 위산을 보았다. 10킬로미터 쯤 되는 것 같았다. 지멘이 높은 곳에 올 라가면 싸우기가 좀 어려울 것이다. 쵸지는 결정했다. "좋아. 산에 도달하기 전에 따라잡자." 준람과 쵸지는 속도를 높였다. 비탈길을 내려가던 중이라 속도는 급 상승했다. 밤새 계속되던 장단이 갑자기 변경되자 지멘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도 준람과 쵸지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 멘은 앞쪽의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두 개로 보인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지멘은 펄쩍 뛰어올라 평야 이곳저곳을 빠르게 둘 러보았다. 도움될 만한 것을 찾던 지멘은 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 진 곳에 시선을 끄는 것을 발견했다. 땅에 내려설 때까지 지멘은 그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저것을 뭐라고 하더라. 두 발이 쾅 하며 바닥에 닿았을 때 지멘은 가까스로 자신이 본 것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것은 평야를 따라 곧게 뻗어있는 도로였다. 지멘 은 갑자기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느꼈다. 합리적인 이유는 댈 수 없 었지만 지멘은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지멘은 진로를 동쪽으로 조금 수정했다. 그 동안에도 준람과 쵸지는 질풍 같은 속도로 다가오 고 있었다. 지멘은 몸을 부풀리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지멘은 마음 먹은 것처럼 속도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했다. 그의 몸은 밤새도록 계속된 속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누적된 피로 또한 지멘의 발목을 붙잡았다. 지멘의 뒤를 따라 달리던 준람과 쵸지가 무기를 뽑아드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지멘은 호리병을 꺼내들었다. 재빨리 몸을 돌린 지멘은 절망을 느꼈다. 준람과 쵸지는 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달려오고 있었다. 한쪽을 향해 호리병을 집어던질 수는 있겠지만 다른쪽이 쇄도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까다롭기 짝이 없는 쌍창을 떠 올린 지멘은 준람에게 호리병을 집어던졌다. 다급하게 발목을 돌리느라 준람은 하마터면 다리를 부러뜨릴 뻔했 다. 그 다리는 얼마 전 지멘에게 호되게 맞았던 다리였다. 준람은 어 쩔 수 없이 다른 발로 겅중겅중 뛰었다. "쵸지, 잡아!" 쵸지는 대답 대신 커다란 벼슬을 빳빳하게 세웠다. 쵸지가 단병을 쓰며 또한 그것이 날붙이가 아님을 확인한 지멘은 몸을 거대하게 부 풀리며 망치를 집어올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지멘은 쵸지가 평생 함께 할 무기를 아무렇게나 고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 다. '설마 저것이 칼일까?' 달려오는 쵸지의 자세는 아무리 보아도 칼잡이의 것이었다. 지멘은 길게 잡았던 망치를 재빨리 손 사이로 미 끄러트려 짧게 잡았다. 지멘의 예상이 맞았다. 쵸지는 칼을 쓰듯 삼각 철봉을 내찔렀다. 망치 자루로 쵸지의 철봉을 쳐내린 지멘은 지체없이 쵸지의 정수리 를 쪼려 했다. 그러자 쵸지는 왼손을 주먹 쥐어 지멘의 부리와 머리 가 연결된 부분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머리가 홱 돌아가는 타격에 지 멘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쵸지 또한 아픔에 쩔쩔매며 왼손을 흔들 었다. 그러나 싸움의 규칙에 더 능한 것은 지멘이었다. 지멘은 비틀 거리면서도 품속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호리병을 집어던지려던 지멘 은 깜짝 놀랐다. 그 때까지도 손을 흔들던 쵸지는 지멘의 동작을 보 지 않았다. 쵸지가 병을 피할 수 없음이 분명하지만 지멘은 이미 휘 두른 자신의 손을 멈출 수 없었다. 호리병은 쵸지의 부리에 부딪혔다. 놀랄 만큼 많은 생각이 순식간에 쵸지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렇군. 난 제대로 싸운 적이 없어.' 신부탐색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쵸지는 그러했다. 쵸지는 싸워서라도 얻고 싶은 여인을 발 견한 적이 없었고, 또 다른 레콘 남자가 뺏어갈 여자를 가진 적도 없 었다. 그래서 쵸지는 다른 레콘들과 싸운 적이 없다. '서툴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였나?' 자신의 가슴을 무방비하게 노출시켰다는 사실에 더 놀랐기 때문에 쵸지는 잠깐 동안 호리병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 이라 할 것이다. 조금 후에야 쵸지는 자신이 물이 들어있을지도 모르 는 병에 맞았음을 깨달았다. 쵸지는 아래에 떨어진 호리병 파편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욕설이나 비명을 질러야 할 것 같았지만 어쩐지 어 색했다. 쵸지는 화를 내야 하나 생각하며 지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멘은 여전히 그보다 능숙했다. 쵸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도망치는 지멘의 뒷모습이었다. "이봐! 괜찮아?" 준람은 쵸지의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쵸지가 호리병에 맞는 모습을 똑똑히 본 준람은 그가 선 채로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쵸지는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난 괜찮아." "정말?" "정말." "그럼 빨리 쫓아가지 않고 뭐해?" "그래." 준람은 그 때까지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쵸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쵸지는 지금까지와 같은 모습으로 태연히 지멘의 뒤를 쫓았다. 쵸지 가 지멘을 추적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미적거릴 것을 염려한 준람은 그 침착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지체하는 동안 지멘은 도로에 도달했다. 지멘은 도로를 따라 달렸다. 그리고 자신이 왜 도로에 들어왔는지 생각해 보 았다.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발자취를 없애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가거나 할 수 없는 그의 입장에서 잘 정비된 도로는 물의 대용이 될 수 있다. 단단한 노면에는 지멘의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지멘이 그 생각에 만족하려 했을 때 해가 떠올랐다.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앞으로 한나절 동안 쵸지와 준람은 그의 모습을 보면서 추적 할 수 있다. 발자취가 남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멘은 자신의 멍청함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쵸지는 지멘의 현명함에 씁쓸해 했다. 그토록 잘 정비된 도로가 자연스럽게 생길 리는 없다. 쵸지는 약간 초조한 기분으로 도로가 이어진 바위산 쪽을 응시했다. 조금 후 말에 탄 일군의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모습을 보게 될 것을 예상했지 만 쵸지는 언짢은 기분을 느꼈다. 자신을 애써 달래며 쵸지는 속도를 높였다. 조금 후 준람도 도로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준람은 그들이 지멘의 인질이 될 것을 염려했다. "다-가-오-지-마-! 위-험-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늦추기는커녕 그들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말들을 본 준람과 지멘은 모두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쵸지는 만사가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준람이 다시 외친 후에야 사람들은 말고삐를 잡아챘다. 질주의 흥분 을 이기지 못한 말들은 발길질을 해댔다. 민첩하게 말들을 진정시킨 사람들 중 하나가 가까이 다가온 지멘과 준람, 쵸지에게 외쳤다. "유료도로당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멈추시오! 유료도로당의 도로에 서는 어떤 분쟁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준람은 당혹하여 쵸지를 돌아보았다. 쵸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수염 볏을 탁 쳤다. "젠장. 여기는 유료도로다." 두어 시간 뒤, 휴식을 끝낸 엘시와 그들의 뒤를 따라오던 론솔피와 주테카, 이레가 합류했을 때 쵸지는 같은 말로 설명을 시작했다. "엘시. 어떻게 하지? 여기는 유료도로야. 여기서는 싸우면 안되는 걸로 아는데." 현상금 사냥꾼인 주테카는 쵸지의 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붙 잡은 현상범을 데리고 도로를 이용하는 것에는 아무런 제약도 가하지 않고 오히려 편의를 돌봐주면서 유료도로상에서 체포 행위를 하는 것 은 결사적으로 허락하지 않는 유료도로당에 대해 주테카는 항상 애정 과 짜증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주테카는 유료도로상에서는 절대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료 도로당과 그런 문제로 분쟁을 일으킨 적이 없었던 론솔피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번뜩이는 눈으로 자신들과 지멘 사이를 걷고 있는 유료도로당원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길은 폭력으로 사태 를 해결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레콘의 눈길이었기에 대담한 유료도로당원들도 질린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여행객들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왔지만 그들은 그 여행객이 네 명의 사나운 레콘과 대장군이 될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엘시는 앞쪽에서 걷고 있는 당원들과 그 앞에서 뒤를 흘끔흘끔 돌아 보는 지멘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보기에 따라 꽤 우스꽝스러운 모 습이다. 가장 앞쪽에는 지멘이 걷고 있었다. 지멘은 허리에 손을 얹 고 힘겹게 걷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당장 쓰러지는 편이 좋을 것 같 은 모습이다. 하지만 지멘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 고 있었다. 물론 유료도로당원들은 노상에서 쓰러진 여행자도 보호한 다. 하지만 간단한 물리적 난제가 있는데, 지멘의 거대한 몸을 감당 할 수 있는 것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추적자들 같은 레콘뿐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유료도로당원들은 지멘의 몸을 움직일 수 없 고 따라서 지멘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힘들다. 그 때문에 지멘의 뒤 쪽, 이십 미터 쯤의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는 유료도로당원들은 걱 정스러운 얼굴로 지멘과 추적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진귀한 행렬의 말미에는 물론 추적자들과 딱정벌레들이 걷고 있었다. 그 행 렬에서 가장 화가 나있는 무리가 제일 뒤편에서 속도를 죽이며 걷고 있는 것은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그 모습을 타개하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해 본 이레 달비가 조심스럽 게 말했다. "가주님. 제가 알기로 사라말 아이솔 율형부사님이 예전에 범죄자를 처형하기 위해 유료도로당에게서 도로를 구입한 적이 있습니다."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로가 바로 그 도로다." 이레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주인이 해당 사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레는 입을 다물고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엘시는 이레와 레콘들을 위해 설명했다.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이 차사였던 시절 유료도로 상에 있는 악질 적인 범죄자를 처형하기 위해 유료도로를 구입한 적이 있습니다. 자 흐-로세이즈 유료도로였으니 아마 이 근방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구입한 도로 위에서 범죄자를 처형했습니다. 재치 있는 행동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같은 방법을 쓰기 어렵습니다. 당시 유료도로당은 도로를 팔았지만, 내막을 따진다면 결국 자신의 고객을 당 외부에 판 것입니다. 도로이용자들의 안전과 편의를 지상 과제로 여기는 유료도로당의 입장에서는 감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 래서 유료도로당은 같은 일을 두 번 저지르는 것에 공포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이후로 당에게 도로를 사겠다는 제안이 몇 번 있었습니다. 제국 정부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구매 요청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짐작하겠지만 개인적인 복수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지요. 유료도로당은 그런 요청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습니 다. 아마 도로를 팔지는 않을 겁니다." 이번에도 주테카는 이해했고 론솔피는 이해하지 못했다. 론솔피가 말했다. "저 놈은 황제사냥꾼이잖아." "유료도로당은 여행자들의 목적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구는 유료도로를 걸어도 되고 누구는 걸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 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들은 길을 준비할 뿐입니다." "웃기는 소리야. 길이 왜 있는 건데? 길은 사람이 서로 만나라고 있 는 거지 서로를 죽이라고 있는 것이 아냐.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 사 이에는 길보다는 담이 있어야지. 저 녀석들이 담 대신 길을 만들었다 면 그건 저 녀석들이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도와주기로 했다는 거잖 아. 하는 짓이 앞뒤가 안 맞아." 이레는 의외라는 얼굴로 론솔피를 바라보았다. 론솔피의 커다란 목 소리를 들은 유료도로당원들도 당혹하여 서로 수군거리거나 론솔피를 돌아보았다. 준람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주테카와 쵸지는 수염볏을 주 물럭거리며 론솔피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데 유료도로당원을 변 호한 것은 엘시였다. "서로 만나서 무엇을 하건 그건 두 사람의 일입니다. 길은 책임이 없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칼에 책임이 없는 만큼." "에잇! 젠장.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엘시는 앞쪽의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유료도로당의 징수소와 숙박시 설이 있을 만한 곳이었다. "일단 이 도로를 관리하는 당 책임자를 만나봐야겠습니다. 그에게 도로를 판매하거나 대여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엘시는 대답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는 앞쪽에서 힘겹게 걸어 가는 지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 지멘 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말을 탄 유료도로당원들이 사이에 있었지 만 남다른 장신 때문에 지멘은 어렵잖게 엘시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 다. 엘시는 그 눈길을 똑바로 마주했다. 지멘이 걸음을 멈췄다. 그에 따라 유료도로당원들도 말을 멈췄고 추 적자들도 뒤이어 걸음을 멈췄다. 중간에 끼인 유료도로당원들은 별다 른 지시 없이도 무기를 움켜쥐었다. 대비하는 자세는 훌륭한 것이지 만 이 경우엔 마음 속으로 대비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유료도로당 원들의 긴장한 모습은 레콘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추적자들의 우악스 러운 거병들이 폭력을 수행하기 좋은 위치로 이동하는 것을 본 유료 도로당원들은 사색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엘시와 지멘은 서로의 눈 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멘이 꿈틀거리듯 부리를 열었다. 뭔가 말을 하려던 지멘은 다시 부리를 닫고는 의혹에 찬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지멘은 엘시에 게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공포를 억누르고 있는 경직된 얼굴 이나 자신감을 과장하는 수다스러운 손짓 등 지멘이 익숙한 모습은 엘시에게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엘시가 자신감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엘시는 현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고 타개책을 골몰 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지멘은 엘시가 국수로 불리는 기사임을 떠올렸다. 아실이 들려 준 온갖 정보들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대장군의 책무에 바빠 바 둑을 자주 두지는 못하지만 엘시의 기력은 상대할 자가 없으며 도시 연합의 대수호자마저도 그 기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 아실의 설명 이었다. 지멘은 바둑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 엘시가 그를 바라보는 눈 은 국수의 집중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사는 왜 싸 워야 되는지, 왜 이겨야 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이기는 것만 고민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기사는 두 개의 돌을 동시에 내려놓을 수 없다. 기사는 상대에게도 똑같이 이길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상대의 착점에 대해 노여워하거나 분노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제공한 기회이기 때문에. 지멘은 엘시가 유료도로에 뛰어든 자신의 '수'에 대해 분노하는 대신 적절한 응수책을 찾고 있는 것처럼 느꼈 다. 그리고 엘시가 반드시 그런 방법을 찾아내리라는 확신도 느꼈다. 지멘은 진저리를 쳤다. 그가 익숙한 싸움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상 대에게 어떤 기회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지멘의 싸움이었다. 지멘은 엘시가 자신과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보고 있음을 갑작스럽게 깨달았 다.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각은 지멘을 놀라게 했다. 지멘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유료도로당원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표 정으로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추적자들은 약간의 아쉬움을 분명히 드러내며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가 말했다. "갑시다. 우리는 지멘을 꼭 잡을 겁니다." 한 시간 뒤 엘시는 그 말을 질문으로 바꿔 자신에게 던지게 되었다. =============================================================== 4월 15일, 내가 간다. - 너희들의 주인으로부터. 10챕터 시작합니다.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0-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3-14 조회수 : 1598 피를 마시는 새 10. 바람 속에 던진 돌 - 2 마리번 도빈 징수소장의 작은 방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온통 산양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엘시는 벽에 걸린 산양 그림과 문에 부조된 산양 무늬, 그리고 책상에 놓인 산양 모형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산양 모양의 의자는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행히 엘시는 산양 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정도의 교양은 가지고 있었다. 유 료도로가 시구리아트 유료도로 하나밖에 없던 시절 유료도로당의 상 징은 산양이었다. 산양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를 만들었다는 초대 당주의 전설은 당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유명하다. 하지만 당의 유료도로가 제국 모든 곳에 뻗어있는 지금 산양의 상징 은 다른 지방의 당원들에게는 낯선 것이 되었다. 시구리아트 유료도 로 이외의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산양 애호로 미루어보건대 마리번 도빈 징수소장은 당내에서 상당히 전통적인 파에 속해있는 것이 분명 했다. 대화가 시작하자마자 엘시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마리번은 율형부차사에게 일시적으로나마 도로를 판 과거사에 대해 격분하고 있었다. 마리번의 강력한 성토에 질린 엘시는 자기 소개를 다시 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사라말 아이솔이 아니라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다.' 하지만 마리번은 황제사냥꾼을 쫓아온 대장군이 사라말 아이솔의 옛일을 재현해볼 생 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울 거라는 요지의 말로 엘시의 항의를 원천봉쇄했다. 도저히 도로 구매나 대여의 가능 성이 없다고 판단한 엘시는 대화를 끝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화를 가라앉힌 마리번이 꺼낸 말은 엘시를 얼어붙게 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마리번은 단조롭게 자신의 말을 반복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대장군님.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가 백화각 을 파옥하고 부냐 헨로를 탈옥시켰습니다." "잠깐만. 그는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에게…… 청혼서를……" 말을 하던 엘시는 사태를 파악했다. 마리번이 그의 추측을 확인해주 었다. "위장이었습니다. 백작님.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규리하공에게 돌려 놓으려는. 발케네인다운 교활함이지요. 발케네공이 모아들인 공격자 들 중에는 백화각 경비원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 게 경비가 느슨해진 차에 도깨비 감투를 쓴 발케네공이 들이닥쳤으니 막을 수가 없었지요." "그렇다면 그는 발케네로 갔나?" "예. 그와 그녀 모두." 설명하면서 마리번은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입수할 수 있는 정보들 에 의거하여 그녀가 내린 판단에 따르면 엘시 에더리는 비셀스 규리 하와 결혼하여 규리하 변경백령을 획득하게끔 되어 있었다. 무향 규 리하를 온전히 지배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실제로 정복한 사 람보다 나은 대안은 별로 없다. 또한 황제의 대장군인 엘시가 규리하 를 지배한다면 그것은 황제에게 공손함을 보이려 애쓰지는 않는 발케 네공을 압박하는 효과적인 재갈이 될 것이다. 마리번은 황제의 고려 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고려에서 유일한 문제점은 엘시가 이 미 약혼했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마리번이 보기에 엘시는 처리가 곤 란한 약혼녀가 원하지 않는 연적과 함께 사라지는 행운을 얻게 된 것 이다. '어쩌면 그걸 바라고 일부러 자리를 비운 것인지도 모르지.' 마리번은 그런 가능성까지 예측에 포함시켜 두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내기는 어렵겠지만 엘시는 기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마리번이 보기에 엘시가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기쁨 이 아니라 절망인 것 같았다. 그 '희소식'이 엘시를 마구 성토했던 것에 대한 사과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마리번은 조금 당황했다. 마리 번은 상식적인 말을 선택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백작님. 약혼자를 도둑맞은 셈이니." 말을 끝낸 마리번은 자신의 말이 사실에 닿아있음을 알고는 놀랐다. 엘시는 실제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있어야 했던 것이었나 보군." 마리번은 또다시 놀랐다. 엘시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대장군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무용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어울리는 고도의 정치적 감각을 가 지고 있을 것이라고. 전자는 이미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후자 는 아무래도 잘못된 예측인 듯했다. 마리번은 그다지 고상하지 않은 충동을 느꼈다. 황제의 대장군이 설마 바보일까? 확인해보지.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만 세상에는 대장군에게 범 법자 배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 람들은 대장군에겐 좀 더 나은 조건의 처자가 어울린다고 말하더군 요." "규리하 가문의 비셀스 같은?" 마리번 도빈은 그 대답이 엘시의 지적 능력 추정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엘시 에더리가 자신의 결혼 문제에 대한 상 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렇게 공개 적으로 말하는 것은 섬세한 행동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 분도 좋은 배필이 될 수 있겠지요." 마리번 도빈이 어떤 의혹을 느끼든 엘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데라시가 펼친 공작이 도대체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 다. 그리고 규리하 가문의 비셀스라는 말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는 마 리번의 모습은 엘시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시련의 나가들도 내가 정우 규리하와 결혼하는 걸로 알고 있겠군.' 예전부터 엘시는 데라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지만 그 평가는 데라 시를 귀하게 쓰는 황제의 견해를 따른다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 제 엘시는 데라시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봉토를 떠 나 있으며 차가운 북방에서는 자신의 방도 나오기 힘든 사람치고 비 스그라쥬백 데라시는 기적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의 말은 없는 용도 만들어낼 수 있다지만, 데라시의 경우에는 혼자서도 용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엘시가 말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지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사실은 하 나다. 아직 내 약혼녀는 부냐 헨로이고 그녀의 약혼자는 나다. 그것 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혼례 문제에 참견하는 것이 무례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면 나는 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리번은 부분적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엘시가 보낸 경고는 '참견 하지마'보다는 섬세한 것이었다. 마리번은 그 경고를 수용했다. 소장실을 나온 엘시를, 텅 빈 공허감이 습격했다. 엘시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허탈감 속에 잠시 서있었다. 낯선 복도와 낯선 벽은 그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엘시는 방을 나오기 직전에 확인한 사실을 잠시 곱씹었다. '비스그라쥬백. 그대인가?' 그가 데라시의 영향력을 확인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엘시 는 스카리 빌파가 데라시에게 조종당했다는 가설을 뿌리칠 수 없었 다. 사람들은 부냐를 훔쳐낸 스카리의 책략을 발케네인다운 교활함의 증 거로 해석할 것이다. 엘시는 받아들이기 쉽다는 그 사실이 의심스러 웠다. 누군가가 받아들이기 쉽게끔 주도면밀하게 연출한 상황 같았 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타당했다. 엘시가 조금 전 파악한 데라시의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해보면 스카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종당 했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엘시는 데라시에게 아주 멋지게 한 방 먹은 셈이었 다. 데라시는 한 손으로는 황제사냥꾼을 체포하기 위해 떠나겠다는 대장군을 전송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스카리 빌파에게 연결된 실을 잡 아당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엘시는 자연스럽게 파혼하게 되었다. 지 금쯤 데라시는 엘시 에더리와 정우 규리하의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 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지? 비스그라쥬백에 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건가?' 엘시는 분노를 느꼈다. 약혼녀를 구하기 위해 황제사냥꾼을 잡겠다는 엘시의 뜻은 데라시에 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 자신이 직접 그 의사를 전달했으니까. 그 런데 데라시는 제멋대로 그 추적행을 엘시의 파혼을 위한 도구로 바 꿨다. 엘시의 진정은 무참하게 무시되었다. 엘시는 그 사실에 분노했 다. 그러나 엘시를 정말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데라시는 사욕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데라 시가 내놓을 답은 황제와 제국을 위해 그랬다는 것일 테고, 유감스럽 게도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엘시는 서로 처지가 바뀌었다 면 데라시가 주저없이 정우 규리하와 결혼했을 거라는 것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었다. 데라시의 의도와 동인(動因)은 엘시가 온전히 납 득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엘시는 그것에 대해 화를 낼 수 없었 다. 그것이 엘시의 고민이자 엘시를 처참한 기분에 젖게 만드는 원인 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엘시를 미치도록 분노하게 하는 이유였 다. 데라시에게 분노하기 힘들었던 엘시는 스카리에게 분노의 방향을 바 꿔보았다. 당장 거부감이 일어났다. 스카리의 행동 어느 부분에도 찬 성할 수 없었지만 엘시는 조종당한 스카리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엘시는 자신의 주위에 싫어하지만 증오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가득한 것 같다고 느꼈다. 심지어 지금 그가 쫓고 있는 지멘조차도. 엘시는 지멘을 싫어하지만 숙원을 추구하는 그 태도에 대해서는 화를 낼 수 없었다. 레콘이 숙원을 추구하는 것은 고양이가 쥐를 추구하는 것만 큼 당연하다. '분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무도 없다면, 도대체 이 분노는 무엇인 가.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이 불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이 제 살을 태우고 뼈를 그을리는 것입니까. 신이여, 신이여, 신이여! 저는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엘시는 움켜쥔 주먹으로 이마를 짓눌렀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 귀 주위가 뜨거워졌다. 엘시는 차가운 돌벽에 몸을 기대고 헐떡였다. "엘시?" 대장군을 불렀던 쵸지는 호흡 기관을 하나 더 얻을 뻔했다. 던지는 것 같은 속도로 날아온 제국검이 쵸지의 수염볏 아래에 멈췄 다. 쵸지는 그 칼날을 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엘시를 보았다. 엘 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쵸지는 대장군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 았다. 엘시가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 반짝임은 사라졌다. 엘시는 쵸 지를 알아보았다. "왕벼슬? 미안합니다. 좀 놀랐나 봅니다." 설명이 안돼, 이 친구야. 칼을 도로 집어넣는 엘시를 보며 쵸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칼은 정확하게 쵸지의 목을 겨누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인간의 경우엔 머리 위로 지나가게 될 공격이었다. 쵸지는 엘 시가 지멘의 기습을 염려한 것인가 생각했지만 그것 또한 적용하기 힘든 가설이었다. 다른 레콘보다 더 큰 지멘의 신장을 놓고 본다면 그 공격은 조금 낮은 편이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엘시의 동작이었 다. 쵸지가 보기에 칼 자신이 살아있는 맹수처럼 튀어올랐고 엘시의 손과 팔은 그 뒤를 그냥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사과하겠습니다. 많이 긴장했나 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니, 괜찮아. 그런데 너는 괜찮아?"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엘시는 그런 질문을 받을 정도라면 괜찮다는 대답은 별로 의미가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습니까?" "다리 부러진 말 같더군." "다리 부러진 말이라. 알 것 같군요. 징수소장에게 하늘누리에 관련 된 안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지멘이 너 좀 보자는데." "나를?" "그래. 휴게실에서." 지멘은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도로 이용료를 지불하고 징수소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지멘이 추구한 것은 황제의 죽음이라는 평생 숙원도, 남쪽으로 가라는 아실의 당부 도 아니었다. 지멘은 곧장 잠자리로 향했다. 물론 아무도 그런 행동 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둘씩 나뉘어 쫓아오는 추적자들 때문에 지 멘은 제대로 잔 것이 몇 년 전 쯤 되는 것 같은 피로를 느끼고 있었 다. 그 때문에 지멘은 잠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배신감을 느꼈다. 로세이즈 징수소의 여숙은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안락한 것이었다. 그들은 레콘 여행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완전히 구비해두고 있었고 지멘이 남달리 소탈함과 거리가 먼 레콘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방을 트집 잡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멘은 평범한 레콘들처럼 취식이나 잠자리 문제에 대해서는 소탈한 편이었다. 결국 잠을 잘 수 없는 원 인은 징수소의 방에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것은 지멘의 내부에 있 었다. 그러니까 지멘의 눈꺼풀 안쪽에. 눈을 감고 바라본 암흑 속에서 지멘은 엘시의 두 눈을 마주하게 되 었다. 집중력 외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눈빛이 그를 똑바로 응시 하고 있었다. 증오도 없고 원망도 없고 분노도 없다. 그저 집중력뿐 이다. 지멘은 평범한 대응을 시작했다. 다른 생각을 떠올려보려 애쓴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릿속만 혼란스러워졌고 그 혼란이 피로와 결합되자 견디기 힘든 압박감이 되었다. 지멘은 자신에게 폐소공포증 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벽과 천장, 바닥을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 때문이다. 결국 지멘은 잠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건물 중앙에 있는 휴게실은 복층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레콘들을 고려한 구조인 듯했다. 추적자들은 천장이 높은 쪽에 모여 앉아 있었다. 지멘의 모습을 보자마자 추적자들은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었다. 그 러나 준람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준람은 지멘이 빈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지멘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했다. "준람." "지멘. 괜찮은 건가?" 쫓는 입장에서 어울리는 질문은 아니지만 준람은 그렇게 물었다. 지 멘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엘시를 불러줘. 그를 만나고 싶어." 준람은 조금 고민하다가 쵸지를 돌아보았다. 쵸지는 꺼내들었던 철 봉을 다시 허리에 꽂아넣고는 엘시를 찾아 떠났다. 론솔피와 주테카 는 투덜거리며 다시 앉았다. 레콘들의 대치를 보며 대경하여 일어섰 던 여행객들과 당원들은 그제서야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층에 있는 사람들은 난처한 기분을 느꼈다. 지멘이 간이 이층으로 이 어진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은 돌벽을 따라 만들어진 돌계단 이었기에 지멘이 앉을 만한 장소이긴 하지만 그 때문에 이층에 있는 이들은 내려갈 길이 막힌 셈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갑자 기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당장 내려갈 일이 없다는 듯한 태도로. 준람은 앉지 않았다. 쌍창을 다시 포개어 등 뒤에 꽂아넣은 준람은 팔짱을 낀 채 지멘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몸을 옹송그린 채 앉아있는 지멘의 모습은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준람은 조금 고민하 다가 주테카와 론솔피 앞에 놓여있던 술주전자를 집어올렸다. 론솔피 는 부리를 딱 부딪혔고 주테카는 핏 웃으며 술잔을 집어 건넸다. 준 람은 주전자와 잔을 들고 지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잔을 지멘에게 내밀었다. 지멘은 준람이 내민 술잔을 보다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준람은 잔에 술을 채워주고는 주전자를 주테카 쪽으로 휙 집어던졌다. 한 손으로 주전자를 턱 받아낸 주테카는 술 더 가져오라고 외쳐서 당황한 사람 들에게 주잔자가 비었음을 알려주었다. 지멘은 술 한 잔을 천천히 마셨다. 준람은 돌벽에 등을 기댄 채 지 멘을 바라보았다. 지멘이 잔을 내려놓는 것을 본 준람이 말했다. "아까 질문에 대답 안했어." "뭐?" "괜찮냐고 물었어. 안 좋아 보이는군." "좀 그래." "꼴사납군." "좀 그렇지." 준람은 지멘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지멘을 꾸 짖고 성토할 준비는 잔뜩 해두었지만 위로할 준비 같은 것은 전혀 해 두지 않았다. 준람은 신경질적으로 수염볏을 꼬았다. '젠장. 도무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준람은 어정쩡한 어조로 말 했다. "남쪽으로 간다고 했지?" "응." "남쪽은 왜? 황제는 규리하에 있는데." 빈 술잔을 들여다보던 지멘이 고개를 들었다. "준람. 엘시는 어떤 사람이지?" 준람은 이것이 말을 돌리기 위한 술책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지멘의 태도는 진지했다. 준람은 부리를 한 번 딱 부딪히고 말했다. "나는 엘시의 지휘를 받지는 않았어. 내가 군대를 나온 것은 12년,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13년이군. 13년 전이었어. 엘시가 군대에서 출 세하기 시작한 건…… 그러니까 7년 전 타이모 사건 때잖아. 나보다 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엘시의 지휘를 받은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엘시를 따라온 거지?" "엘시는 예비역 레콘들을 많이 챙기니까. 내가 건축 면허 따려고 할 때 엘시가 도와줬어. 우리 레콘들은, 음. 무슨 말인지 너도 알 거라 고 생각하는데, 건축 면허를 따기가 쉽지 않아." 지멘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하니 준람을 바라보았다. 준람은 부리를 신경질적으로 부딪치고는 수염볏을 만지작거렸다. "그거 말이야, 그거. 흙을 개거나 할 때, 혹은 하수도를 파거나…… 몰라?" "아아. 그럼 너 그거 만지나?" "아냐. 인간 일꾼을 써. 어쨌든 나한테 그런 문제가 있어서 면허를 따기 어려웠어. 인간에게서 명의만 빌리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난 아 내들을 챙겨야 하니까 그런 불확실한 방법은 쓸 수 없었어. 그래서 직접 면허를 따려고 했지. 그 때 엘시가 도와줬어. 그래서 알게 된 거야." "대장군이 예비역들까지 일일이 챙기는 건가?" "처음부터 대장군이었겠나. 엘시가 보훈국장이었던 시절의 일이야.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군. 간단히 말해서 나한테 해준 것 같은 일을 맡는 부서야." "참 특이한 일이었지." 갑자기 끼여든 것은 주테카였다. 지멘과 준람은 주테카쪽을 돌아보 았다. "보훈국은 늙다리 장군들이 주로 맡는 곳이거든. 장성급이 맡는 곳 이긴 하지만 만년 수교위 퇴역하기 전에 한 계급 올려주기 위해 맡기 는 곳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야. 그러니 거기 들어가면 군대 인생은 대충 끝난 거라고 봐야 해. 야전군에서 팔팔하게 뛰는 젊은 장군에게 보훈국장을 맡기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지. 게다가 거길 나와서 대 장군까지 올라갔으니 말이야." 론솔피는 뜨악한 얼굴로 주테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그렇네? 거 희한한 일이군." 그리고 주테카와 론솔피는 엘시에 대한 잡담을 나누었다. 주로 제국 군과 관련된 이야기였기에 지멘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준람이 말했 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이야. 더 궁금한 것이 있어?" 지멘은 생각했다. 더 궁금한 것이 있나? "그러면 그 사람 레콘들을 잘 알겠군." "그런 것 같아. 왜? 설득해보려고?" 지멘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준람을 바라보았다. 레콘은 설 득에 별로 관심이 없다. 준람은 부리 끝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도 설득하려고 했잖아. 용재에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 지멘은 그 기억을 떠올렸다. "죽이고 싶지 않아." "누구 맘대로 죽인다는 거야. 네가 죽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너 이상해." "내가?" "글쎄…… 이상해. 설명을 못하겠군. 아무튼 이상해. 그런데 나도 질문 좀 할까. 너하고 같이 다닌다는 그 꼬마는 어디 있는 거지?" 준람은 또다시 이상한 것을 보게 되었다. 지금껏 더위에 지친 사람 마냥 축 늘어져 있던 지멘의 눈에서 갑자기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검은 깃털은 부풀어 몸이 세 배로 불어났다. 준람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고 잡담을 나누던 론솔피와 주테카는 황급히 일어섰다. 그러나 지멘의 모습을 확인한 준람은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만류했다. 지멘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아래쪽만 바라보았다. 준람 이 왜 그러냐고 질문하려 했을 때 엘시와 쵸지, 그리고 이레가 휴게 실에 들어섰다. 쵸지는 지멘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긴장했다. 하지만 그 앞에 준람 이 서있는 것을 본 쵸지는 사태가 화급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쵸지 는 철봉의 자루를 움켜쥔 채 론솔피와 주테카에게 몸짓을 보냈다. 그 들은 엘시와 지멘 사이를 막는 위치로 움직였다. 의자를 가져오려던 이레는 엘시가 의자에 앉는 것이 좋은 생각이 아 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서있었다. 엘시는 지멘 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를 불렀습니까, 지멘?" 지멘은 깃털을 눕혔다. 그는 휴게실을 죽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 이 있었고 게다가 엘시와 그 사이에는 네 명의 레콘이 있었다. 대화 를 나누는 간격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기 좋은 상황도 아니었고. 두리번거리는 지멘의 눈길을 본 엘시는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유료도로당의 규칙을 존중하기 위해 나는 당신에 대한 체포를 시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이 당신을 보호한 유료도로당의 규칙에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이 건물 내에 있는 동안 나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지멘은 반갑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하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에 걸고." "좋습니다. 내 방은 당신과 함께 들어가기엔 작으니 당신 방으로 갑 시다." 휴게실의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은 분개했지만 그들에겐 말릴 권한이 없었다. 지멘과 추적자들은 지멘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엘시는 지 멘의 맹세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밖 에 둔 채 홀로 지멘의 방에 들어섰다. 지멘이 말했다. "담이 세군." 엘시는 고맙다고 말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목례한 엘 시는 지멘에게 대화를 맡으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대장군이 나를 쫓아오는 거냐. 그것도 제국군 대신 레콘들을 이 끌고서." "이것은 군사 작전이 아닙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현재 휴식 중 입니다. 당신을 쫓고 있는 것은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입니다." "둘 다 너야." "맞습니다. 당신에겐 차이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구분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알았어. 이건 어떨까. 나를 계속 귀찮게 하면 칼리도에 쳐들어가서 네 가족을 다 쳐죽이겠다." "내 집은 바닷가에 있습니다." 지멘이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말투였다. 지멘은 당황을 애써 감 추며 말했다. "그것이 완전한 대비책이 될 것 같나." "하긴 당신은 배도 탔지요." 지멘은 그 사실에 우쭐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사실을 상기시킨 것에 대해 화가 치밀었다. 엘시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멘. 당신이 하려는 것이 협박이라면 별 소득이 없을 겁니다. 나 는 황제의 대장군입니다. 나 자신이나 내 가족들을 죽이겠다는 협박 은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레콘이 보낸 것도 있습니 다. 쥐딤에서 혼쭐이 난 채 도망쳤던 레콘이 보낸 것입니다. 당신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의 협박에는 내 주의를 끄는 참신함이 별로 없습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있습니다만." "그게 뭐지?"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은 좀 독특하군요. 인간을 잘 아는군요." "무슨 소리야?" 엘시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당신은 신부 탐색자였던 시절 금군 즈라더의 아들을 죽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랬는데?" "금군 즈라더는 그 사실을 잘 알지만 폐하의 하명을 받기 전까지 당 신에게 무관심하게 행동했습니다. 물론 한 명의 신부를 걸고 공정하 게 싸운 결과이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가족의 죽음에 참을 수 없 는 상실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는 레콘의 특징 또한 즈라더를 무관심 하게 행동하게 한 것 같습니다. 내가 아는 레콘은 그런 것입니다. 당 신은 레콘보다는 인간의 방법으로 협박하는군요. 하긴 인간에게 협박 하려면 인간의 방법을 써야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나에겐 통하지 않 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든 나를 잡겠다는 건가?" "……예." 지멘은 엘시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느꼈다. 하지 만 그 지연은 용기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지멘 과 단 둘이서 방에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에게 용감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멘은 왜 그런 지체가 생겼는지 궁리해보았다. '아닌 척해도 역시 가족들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 때 엘시가 말했다. "나도 질문 하나 하지요.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멘은 그것을 감추어야 하나 생각했다. 아실이라면 어떻게 대답했 을까. "그것을 알려주면 제국군을 움직여 나를 막을 텐데." "이것은 군사 행동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너와 네 명의 레콘만 나를 따라온다는 건가?" "거기에 내 몸종과, 어쩌면 뒤늦게 합류할지도 모르는 두 명의 레콘 이 포함됩니다. 내가 소환한 것은 여섯 명의 레콘입니다만 도착한 것 은 네 명이군요." 엘시의 솔직한 태도는 지멘을 동요시켰다. 지멘은 곰곰히 생각해보 았지만 아실이 목적지를 감추라고 말한 기억은 없었다. 어차피 그의 뒤를 따라온다면 알게 될 일이다. 한편, 지멘은 아실이 가라고 했기 에 가고 있을뿐 자신이 왜 그곳으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멘 은 어쩌면 엘시에게서 자신이 그곳에 가야 하는 이유를 알아낼 수 있 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멘은 말했다. "나는 하텐그라쥬로 가고 있다." 지멘은 엘시의 반응에 놀라면서도 약간의 기대감을 느꼈다. 엘시가 갑자기 긴장을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엘시 에더리는 하텐그라쥬라는 이름에 전율을 느꼈다. 하텐그라쥬. 2차 대확장 전쟁 때 철저히 파괴되기 전까지는 한계선 이남 최대의 도시였고 모든 나가들의 성지로까지 여겨졌던 위대한 도 시. 그러나 북부군의 결사적인 공격에 의해 위대한 전설과 축적한 명 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도시 출신의 두 나가들이 북부에서 제국의 기틀을 쌓고 신생 제국을 건설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사람들에 게 던져주는 고민거리이긴 하지만, 이제 그곳은 도시연합에게 교훈을 주는 도시이며 아라짓 제국 최남단의 도시라는 의미밖에 남아있지 않 다. 햇빛에 달궈진 넝쿨 속에 잠들었다가 울부짖는 밤짐승들의 노래 소 리에 깨어나 덩달아 호곡하는 그 폐허의 도시에는, 그러나 작은 비밀 이 있다. 아라짓 제국 최고의 비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비밀성 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황제와 삼고뿐이 니까. 태위가 느닷없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엘시도 알 수 없었을 것이 다. 하지만 태위가 도망친 후 락신 치올 사도는 엘시에게 그 비밀을 알려주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있다.' 엘시가 머릿속에서도 대명사로밖에 부를 수 없는 사람이 그곳에 있 다. 엘시는 그 사실이 비밀이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 었다. 그리고 신중하기로 소문난 사도가 왜 자신에게 그 비밀을 알려 주는 것인지도. 그것은 사도나 천경유수보다는 태위가 알아두어야 하 는 비밀이었고 엘시는 태위를 대행하고 있었다. 엘시는 아무 질문도 던지지 않았고 사도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그리고 엘시는 자신이 그 비밀을 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런데 지멘이 그 비밀을 안다는 것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엘시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하텐그라쥬? 뇌룡공과 아스화리탈을 보러 가기라도 하는 겁니까?" 말을 꺼낸 엘시는 그것이 스카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라는 것을 떠 올리고는 불쾌감을 느꼈다. '뇌룡공에게 아스화리탈을 주는 거지.' 그 말이 기억에 남아있었던 듯하다. 엘시는 도움이 되지 않는 불쾌감 을 재빨리 떨치고 지멘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지멘의 얼굴 또한 불쾌감과 비슷한 것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지멘은 벼슬이 찢어질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자 리에서 엘시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아실이었다. 지멘은 자신이 엘시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건드렸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 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려면 어 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것은 지멘에게는 헤엄을 치는 방법에 대한 것 처럼 느껴졌다. 그런 일은 아실의 것이다. 맹세를 했다는 사실을 후 회하는 지멘의 심정은 그의 좌절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지멘은 엘시 를 구타하거나 협박해서 그것을 끌어낸다는 방법 외에 아무 것도 떠 올릴 수 없었다. 물론 그가 한 맹세가 그를 구속하고 있었다. 지멘은 최대한 아실처럼 말하려 했다. "제기랄. 거기 간 김에 그것도 보면 좋겠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엘시를 본 지멘은 그만 벽에 머리를 찧고 싶다고 생각했다. 욕설을 섞는 버릇까지 따라할 이유는 없었다. 지멘 은 자신이 저지른 말도 안 되는 실수가 엘시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이 대화를 끝장내게 될 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대장군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군요." "어, 그래. 있지." "무슨 이유입니까?" '나도 그것이 알고 싶어.' 지멘은 자기도 모르게 방 구석에 놓여있 는 망치 쪽을 바라보았다. '저걸 이용해서 네 머리속에서 그걸 끌어 내고 싶단 말이야…… 아차!' 또다른 실수였다. 지멘은 엘시가 당장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지멘이 맹세를 잊지 않았 다고 외치려 했을 때 엘시가 말했다. "그걸 쥐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면, 그래도 됩니다." "응?" "그런 레콘들도 있지요. 무기를 잠시도 손에서 못 떼는 레콘 말입니 다. 당신이 맹세를 지킬 거라고 믿으니 쥐어도 됩니다." "그래도 되겠어?" "무기를 쥐고 있든 그렇지 않든 당신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엘시의 호의는 지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지멘은 망치를 집어들었다. 어쩌면 엘시의 오해처럼 마음이 안정될지도 모르니까. 지멘은 엘시를 배려한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 망치를 거꾸로 쥐어 무릎에 얹었다. 그리고 머리속으로는 모호 한 말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한 가지 걱정이 되는군." "무슨 걱정입니까?" "내가 그 이유를 말하면 이것이 갑자기 군사 행동으로 바뀔지도 모 른다는 것." 지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엘시가 미 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는 더욱 긴장했다. 엘시가 말했다. "당신은 제국군이 동원될 만한 이유로 하텐그라쥬에 가고 있다는 겁 니까?" 엘시가 질문으로 대답한 것은 지멘을 미칠 지경으로 만들었다. 질문 대신 말을 하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빳빳하게 서려는 벼슬을 억누르기 위해 지멘은 그냥 가려워서 그런다는 것처럼 벼슬을 내리긁 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아실에 대해 생각했다. 아실이라면 어떻 게 대답했을까. "내가 그런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엘시의 정신 상태에 대해 지멘이 알게 된다면 지멘은 세상에 공정함 이 있다는 확신을 얻을 것이다. 엘시의 머릿속은 지멘의 그것만큼이 나 분주했다. 엘시는 순간적으로 무수한 가능성을 떠올렸고 그것들을 재빨리 폐기했다. 확실한 사실인 두 가지뿐이다. 지멘은 황제를 죽이 고자 한다. 하텐그라쥬에는 그녀가 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사실을 연결하는 다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낭패감 속에서 엘시는 엉뚱한 생 각마저 떠올렸다. '이곳의 유료도로당에 부탁해서 그 사실들 사이에 유료수도라도 뚫어달라고 해야 하나.' 자신의 엉뚱함에 책망을 보내 던 엘시는 갑자기 어떤 관념이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엘시 가 본 것은 그 관념의 잔광이었다. 엘시는 다급하게 그것을 역추적했 다. 유료수도 - 그리미 유료수도 - 첫번째 고객은 남부로 이동하던 제국군 - 치천제의 심장적출 - 적국에 보관되고 있는 치천제의 심장 병. 치천제의 심장병. 지멘의 숙원은 황제 살해. 엘시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지멘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조금 벌린 대장군의 모습을 놓칠 만큼 눈이 나쁘지도 않았다. 자신의 감정이 이미 노출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엘시는 더 이상 그것을 감추 려 하지 않았다. 엘시는 노여움과 불안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지 멘은 그 급격한 변화에 당황했다. "잘못 생각한 겁니다. 지멘." 사실대로 말하면 아무 생각이 없는데. 지멘은 무표정을 애써 유지했 다. 엘시가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시련이 당신을 도와줄 것 같습니까? 나가들은 이성 적인 사람입니다. 시련이 그 작은 일 때문에 아라짓 제국과 전쟁을 벌일지도 모르는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왜 갑자기 도시연합이 언급되는 것인지 알 리가 없는 지멘은 무표정 을 유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무표정은 엘시를 초 조하게 했다. "만에 하나 시련의 가장 극렬한 회고주의자를 당신이 만날 수도 있 겠지요. 세상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으니 시련에도 그런 사람이 분명 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폐하의 심장병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도 모르니까." 지멘은 펄쩍 뛸 뻔했다. 무릎 위에 망치를 얹어두지 않았다면 그랬 을지도 모른다. 지멘은 불과 얼마 전 황제의 심장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참여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지멘은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아실과 살인기사가 나눈 대화에서 심장병이 거론 되었다. 당시 살인기사는 알려진 바와 달리 황제의 심장병은 지도그 라쥬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남겨둔 쪽지에는 하텐그라 쥬를 주목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황제의 대장군이 지금 심장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멘은 더 이상 의식적인 방법으로 침착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가 여전히 침착했던 것은 충격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당신의 불가능한 소망 때문에 그 분이 다치는 것입니다." '그 분은 또 누구야, 빌어먹을!' 꺼낼 수 없는 말밖에 떠올리지 못 하는 지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엘시가 먼저 말했다. 그는 지멘에게 경고를 보냈다. "지멘. 나는 당신의 숙원에 절대로 찬성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숙 원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는 레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반대하지만 당신을 경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 나 지금 나는 당신을 경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의혹을 느낍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 분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당신은 불가능한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폐하의 심장병과 그 분을 교환할 수는 없습니 다. 시련에서 교환에 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모릅니다. 그 것은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지멘은 가까스로 꺼내도 무방한 말을 떠올렸다. "두고 보지." "……두고 봅시다!" 엘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가지 감사해야겠군요. 나는 조금 전 이 추적행을 계속해야 하는 지 의문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과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의문은 사라졌습니다. 나는 당신을 저지할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두고 보자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그것은 이미 했던 말 이다. 그래서 지멘은 말없이 엘시를 노려보았다. 엘시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엘시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지멘은 뒤로 쓰러지듯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엘시를 만나기로 한 것은 잘한 일 같았다. 긴장감 이 탁 풀리면서 지멘은 쏟아지는 졸음을 느꼈다. 바깥에 네 명의 레 콘 추적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단히 무시하며 지멘은 잠들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0-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3-15 조회수 : 1851 피를 마시는 새 10. 바람 속에 던진 돌 - 3 지멘의 방을 나온 엘시가 본 것은 복도에서 분개한 얼굴로 서있는 자신의 몸종이었다. 이레는 엘시를 보자마자 말했다. "가주님. 저는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네 명 이라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문제는 레콘 네 명이라는 거지요. 저 는 도저히 그 무신경한 자들을 붙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무슨…… 지금 레콘들을 여기 붙잡아둘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사과 하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가주님께서 그런 위기에 처해 계신데 어떻게 가서 술이나 마시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 습니다." 엘시는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구나. 이레. 그들이 왜 복도에 할 일 없이 서있어야 하느냐. 지멘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에 걸고 맹세했다." 이레는 황급히 주인의 뒤를 따라가며 자신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가주님. 그 자가 존엄하신 폐하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여신 은 두려워하겠습니까? 자기 여신의 신전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것 이 레콘이잖습니까." 엘시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약간 낯설어 하는 얼굴로 몸종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황제와 신 사이에 계급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둘은 서로 무관한 존재다. 하지만 이레의 논리에는 그런 관념이 담겨 있었다. 만물의 지배자인 황제를 무서워하지 않는데 레콘을 보살피는 여신을 무서워하랴? 신전이 어디 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은 여신인 것을. 엘시는 그것을 당장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그 래서 엘시는 보다 탓하기 쉬운 잘못을 지적했다. "나는 가주가 아니다. 이레." "죄송합니다. 주인님." "유념해두는 것이 좋겠다. 네가 가주니 뭐니 하면 두억시니 장군은 혼동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이레는 눈을 크게 떴다. "예? 두억시니 장군…… 토프탈 상장군님 말씀입니까?" "그래. 서신을 써줄 테니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에게 가서 전하거라. 그리고 너는 그곳에 있도록 해라. 다음 연락은 아마 뱀단지로 보낼 것이다." 이레는 얼굴 가득히 거부감을 담아보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몸종입니다. 주인님의 곁을 그렇게 오래 떠 나있을 수는 없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겁니까?" "꼭 그래야만 한다." 더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었다. 이레는 방으로 향하는 엘시를 말 없이 따랐다. 그 시각, 쵸지는 약간 취기가 오른 주테카로부터 정의의 고귀함에 대한 연설을 듣고 있었다. 그는 조용한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이었기 에 주테카에게 부리 좀 닫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쵸지는 론솔피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연 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더 보고 있기 힘들었다. 하지만 론솔피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난 몰랐어."라고 말하자 쵸지는 그만 아무 말 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술이나 마시자는 심정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주전자를 끌어오던 쵸 지는 고개를 숙인 채 상념에 잠겨 있는 준람을 보았다. 쵸지는 준람 마저 론솔피와 같은 증세를 보이는 것인가 하는 걱정 속에서 그를 바 라보았다. 준람은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응?" "정의는 중요하지." "뭐? 무슨 소리야?" "감사합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아니야. 신경쓰지마. 무 슨 생각을 골똘하게 하고 있는 것 같군." "지멘." "지멘, 뭐?" "아냐." 쵸지는 부리를 슬쩍 부딪히고는 잔에 술을 따랐다. 준람도 자기가 한 짓이 머쓱했는지 괜히 수염볏을 주물럭거리며 주테카와 론솔피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대화를 잠시 경청한 준람은 쵸지가 왜 정의에 관 한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게 되었다. 술잔을 비운 쵸지가 말했다. "준람. 뭐 하나 물어보자. 다섯 명이 전부 좋아? 그러니까 부인 말 이야." 준람은 갑자기 벼슬을 경직시켰다. 쵸지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뺏을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으니까 벼슬 풀어. 이거야 원, 누가 기혼자 아니랄까봐. 그냥 물어보는 거야." "너도 결혼한 다음에 신부 탐색자에게 그런 말 들어봐라. 그 커다란 벼슬로 천장을 찌르게 될 테니. 다섯 명이 전부 좋냐니, 그건 무슨 뜻이야? 좋으니까 결혼했지."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다섯 명이 똑같이 좋은 건 아닐 텐데. 거, 왜 사계절에도 좋아하는 계절이 따로 있는 법이잖아." "그런 법 없어." "응?" "그런 법 없다고. 겨울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부리에 고드름 맺힐 지경이 되면 빌어먹을 겨울은 꺼지고 빨리 봄이 오라고 말할걸. 여름 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위 때문에 깃털 다 뽑아버리고 싶은 지경 이 되면 도대체 올해 가을은 오지 않을 작정이냐고 투덜거릴 테고." "그렇지." "난 내 아내들이 전부 좋아. 모든 계절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셈 이지." 쵸지는 부리 옆을 긁적거리며 준람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럼 아내들은 너를 좋아해?" "이거 점점 불쾌해지는데." "사과하지. 아무 뜻 없어. 난 그냥 아내들은 가지고 있는 계절이 하 나뿐이라는 점이 이상해서." 준람은 어린 레콘하고는 말 못하겠다는 기분을 느꼈다. 쵸지의 나이 가 특별히 어린 것은 아니지만 나발칸의 레콘이 보기에 숙원추구자도 아닌 주제에 아직 결혼 생활을 해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린 레콘이 다. 준람은 타이르듯 설명했다. "그 대신 아내들에게는 언제나 더 좋은 계절이 오잖아." "더 좋은 계절?" "그래. 나는 언제든 지거나 죽을 수 있어." "아아, 신부탐색자." "맞아. 능력 있는 남자는 모든 계절을 가질 수 있고 능력 있는 여자 에게는 언제나 더 좋은 계절이 오게 되어 있는 거야. 그게 남자하고 여자의 차이야.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지." "자연스럽다고?" "자연스럽지. 더 강하고 더 빠른 수컷은 지금을 다루기 좋게 되어 있어. 그리고 새끼를 낳는 암컷은 미래를 다루기 좋게 되어 있지. 그 러니 수컷에겐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암컷에겐 점점 더 좋은 것이 찾 아오게 하는 우리 결혼이 좋은 거야. 인간들에게 참견하고 싶지는 않 지만 그 녀석들의 결혼은 좀 이해하기 어려워. 인간들의 결혼에서는 수컷은 만족할 수 없고 암컷에겐 미래가 없어. 바람을 피운다는 말 알아?" "아, 그래. 알아." "인간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야. 잘 보면 알 수 있 어. 인간 남자는 자기 아내보다 훨씬 모자란 여자하고도 바람을 피우 지. 그냥 다른 계절이 그립기 때문이야. 하지만 인간 여자는 보통 자 기 남편보다 훨씬 괜찮은 남자하고만 바람을 피우지. 더 나은 계절을 원하기 때문이야." "그렇게 되는 건가. 흐음." 쵸지는 멍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어쩐지 론솔피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본 쵸지는 휴게실에 있는 인간들 이 준람의 말에 한 마디 참견하고 싶다는 듯이 꿈틀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레콘과 언쟁을 벌일 만큼 절실한 사 람은 없었다. 준람이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은 하는 거야?" "글쎄. 나는 정말 좋은 것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나늬 같은 여자를 찾느라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지?" "그래, 맞아." "참견하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남자라면 그건 불가능한 소망이야. 왕벼슬. 어떤 여자를 고르든 다른 여자가 그리워질 때가 있을 테니 까." "하지만 나늬는……" "전설이지." 쵸지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늬에 대한 설명은 그녀가 모든 선민종족 에게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뿐이다. 그녀가 마침내 발견되었다는 이야 기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쵸지도 아마 웃어버릴 것 이다. 준람의 말대로 그것은 전설이다. "네 인생 네 것이지만, 쓸데없는 전설이나 막연한 기대로 인생 낭비 하는 거 나는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아.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여 자가 있으면 결혼해달라고 요청해. 옆에 남편이 있으면 싸워. 그녀를 얻었으면 목숨 걸고 그녀를 지키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게 제대로 산 거야. 나늬? 글쎄. 나는 그런 맹랑한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 만, 만약 나늬 같은 여자를 찾았는데 그 곁에 남편이 있으면 어쩔 테 지?" "남편?" "그래. 그 남편은 나늬 같은 아내 지키느라 엄청나게 싸웠을걸. 그 렇게 강하지 못하다면 더 강한 남편에게 뺏겼을 테고. 그러니 네가 찾은 나늬 곁에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편이 있을 거야. 그 런데 그 때까지 그 여자 찾느라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 네가 어떻게 이기겠어?" 쵸지는 신음을 흘릴 뻔했다. "음. 그 생각은 못해봤군." 벼슬 찢어지는 지적이었다. 불과 반나절 전 쵸지는 지멘 앞에서 자 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기술이나 힘과 무관한 순간이었다. 단지 지멘이 그보다 더 노련했다는 사실이 그런 순간을 만들어내었다. 쵸지는 조금 다급하게 질문했다. "나늬를 찾을 때를 대비해서라도 싸우라는 거지. 하지만 끝내 나늬 를 찾지 못한다면? 아니면 나늬를 찾기 전에 내가 죽으면?" "누구는 안 그래?" "무슨 소리야?"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 다 마찬가지라고. 너만 그런 것이 아냐. 아무도 모르는 거야." 쵸지는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본 말의 변형처럼 들렸지만 진부성이 진실성을 훼손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쵸지는, 갑자기 어떤 이름을 떠올렸다. "지멘은 안 그렇잖아." 지멘의 이름은 준람을 불쾌하게 했다. 하지만 조금 전 지멘과 술 한 잔을 나눈 그가 지멘의 이름 때문에 화를 내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일 같았다. 준람은 냉정하려 애쓰며 말했다. "왕벼슬. 지멘이 어쨌다는 거지?" "타이모가 죽자 지멘은 부인들을 버렸어. 지멘은 부인들을 얻고 지 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더 참기 어려웠다. 쵸지가 그에 대한 별다른 반감 없이 말하고 있다 는 것은 분명했지만 준람은 지멘이 버린 고라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람은 탁자를 내리치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그가 싸움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추적대의 분위기를 어 지럽힌다면 엘시에게 폐가 될 것이다. 심지어 지멘에게 역공의 기회 를 허락할 수도 있다. "왕벼슬. 내가 알기로 현명한 사람은 조언이 받는 사람에게도 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내가 아는 대로, 내가 겪은 대로, 내가 믿는 대로 말했어. 네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였어. 하지만 네가 조금 전 거론한 지멘의 과거사는 내게 의미 가 큰 일이야. 게다가 좋은 의미도 아니지. 몰라서 그랬던 것이겠지 만 사과는 받아야겠군." 쵸지는 아뿔싸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과하겠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알았다면 됐어." 준람은 화를 가라앉혔다. 그는 쵸지에게 다시는 해당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게 될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쵸지 는 준람 대신 지멘에게 질문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탐욕의 안개와 위선의 그림자에 뒤덮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 는 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유일한 등불인 정의에게 연거푸 건배 를 바치던 주테카와 론솔피가 나가떨어지고 준람이 잠을 청하기 위해 물러간 후에도 지멘은 나타나지 않았다. 휴게실의 마지막 - 제정신인 - 손님이 되어 기다리던 쵸지는 결국 지멘을 만나는 것을 다음날로 미루기로 했다. 쵸지는 바닥에 쓰러진 론솔피와 주테카를 못본 척하 며 떠남으로써 휴게실 담당 당원에게 깊은 배신감과 좌절감을 안겨주 었다. 홀로 남은 당원은 우선 레콘들의 몸을 흔들어보기로 했다. 건 물을 흔드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당원은 죽을 힘을 다해 주테카의 벼슬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주테카가 귀찮다는 듯이 휘두른 손을 아 슬아슬하게 피한 당원은 자신이 수명 단축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동이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기상법은 이 경우 도 저히 적용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당원은 그냥 두 사람을 휴게실 에 새로 생긴 장식품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주테카와 론솔피가 다시 일어난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휴게실을 청소하기 위해 일찍 일어난 휴게실 담당 당원이 바닥에 누워있는 두 레콘을 답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준람이 성큼 걸어들어왔 다. 준람이 주테카에게 곧바로 걸어가는 것을 본 당원은 기어코 저들 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기대대로 되었지만, 그 방식은 예상 외의 것이었다. 준람은 레콘의 무지막지한 힘을 이용하 여 주정뱅이들을 깨우지 않았다. "호리병!" 그 후 오랫동안 당원은 준람이 마법사라는 가설을 포기하지 못했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레콘들을 말 한 마디로 깨울 수 있다는 것은 마법 외엔 설명이 안된다.(그 말도 어쩐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꼭 주문 같았다.)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아직 정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없는 주테카와 론솔피는 여숙 앞의 마당까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끌려갔다. 마 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쵸지는 그들의 배낭을 던져주었다. 얼떨결에 배낭을 받아든 주테카는 그것을 먹으려 했다. 쵸지가 만류했다. "먹지마. 지멘이 출발했다." "이런 잔인무도한 놈. 해장할 틈도 안 주다니." 론솔피 또한 지멘을 붙잡으면 술을 잔뜩 먹이고 숙취에 고통스러워 하게 해주겠다는 협박이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두 사람 때문에 아침이 번거롭겠다는 생 각을 하고 있던 준람은 두 손으로 솥을 들고 걸어오는 엘시를 보았 다. 엘시는 꽤 먼 곳에서부터 말했다. "솥에 든 것은 국입니다." 긴장하던 레콘들은 그 말에 안도했다. 엘시는 주테카와 론솔피 앞에 솥을 내려놓았다. 그곳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구수 한 냄새에 두 레콘은 만족했다. "속 풀고 출발합시다." 론솔피와 주테카가 번갈아 솥을 비우는 모습을 보던 쵸지는 의아해 하며 말했다. "그런데 왜 네가 이걸 들고온 거지? 몸종은 어디 갔어? 지멘을 추적 하러 갔나?" "아닙니다. 내 몸종은 급히 전달할 서신을 가지고 어제 오후에 떠났 습니다." "곧 돌아오나? 딱정벌레가 한 마리면 정찰하기가 힘들 텐데." "빨리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지멘도 천천히 걸 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 "보이니까." 엘시는 손을 들어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어둑어둑한 산 아래를 본 쵸지는 황야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일군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가운 데 걷고 있는 것은 검은색이 두드러지는 지멘이었다. 그리고 그 주위 에 말을 탄 유료도로당원들이 걷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그들은 횃불을 들고 있었고 그래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 았다. 같은 방향을 보던 준람이 말했다. "서두르지 않는군." "예. 힘을 비축하는 것 같습니다." "왜 힘을 비축하지?" "내 생각이 맞다면 푼텐 사막까지 휴식 없이 달려가려고 그러는 겁 니다." "푼텐 사막? 사막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거기가 목적지가 아닙니다. 지멘은 사막을 지나쳐 계속 남하할 겁 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데?" "하텐그라쥬." 준람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지멘 쪽을 바라보았다. 국솥을 주테카 에게 건네던 론솔피 또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허! 잘하면 제국 종단하겠네. 한계선 남쪽으로 가는 거라면 나가도 볼 수 있겠군. 나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지멘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어." 엘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론솔피. 당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되도록이면 나가는 구경하지 않 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나가들은 레콘을 싫어하나?" "아니오. 그 전에 지멘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되도록이면 오늘 내에 지멘을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라도 지 멘이 한계선을 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한계선을?" "예. 만일 지멘이 한계선을 넘는다면 나는 제국군을 출동시킬 겁니 다. 내 몸종이 떠난 것도 그런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겁니다." 론솔피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설마 군단이 움직이는 거야?" 론솔피의 말을 들은 세 명의 레콘은 심각한 얼굴로 엘시를 바라보았 다. 그들 모두는 한 때 군대에 몸을 담았었고 따라서 제국 위기 상황 이나 그에 준하는 사태가 아니라면 군단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단이 움직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전쟁이다. 엘시 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독립 중대 몇 개 정도는 움직여야 할 겁니다." "왜? 지멘이 도시 연합으로 도망칠까봐?" "미안하지만 그 이유는 알려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 는 것은 지멘이 하텐그라쥬에 절대로 도달해서는 안된다는 것뿐입니 다." 예비역들인 추적자들은 그것이 군사 기밀일 거라 짐작하고는 더 이 상 질문하지 않았다. 주테카는 남은 국을 황급히 들이키고는 솥을 아 무 곳에나 내려놓았다. "됐어. 가자." 엘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딱정벌레에 올랐다. 다섯 명의 추적자들 은 도로와 하늘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나갔다. 출발의 박력은, 그러나 반 시간도 계속되지 않았다. 추적자들은 곧 지멘의 뒤편에 도달했고 지멘과 유료도로당원들은 속 도를 높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추적자들은 어제의 일을 재현해야 했 다. 그들은 터벅터벅 걸어서 지멘과 유료도로당원들을 따랐다. 물론 땅으로 내려온 엘시 또한 딱정벌레를 걷게 해야 했다. 엘시는 딱정벌레의 등 위에 꼿꼿하게 앉아서 참을성 있게 앞쪽을 바 라보았지만 준람은 짜증스러워 했고 쵸지는 초조해 했으며 주테카와 론솔피는 아주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지멘의 뒤통수를 노려 보았다. 네 명의 레콘들은 거의 비슷한 시각에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 다. 공격은 못하더라도 지멘이 신나게 달려주면 좋겠다고. 하지만 지 멘은 해가 떠오르고 봄의 오전이 부드럽게 흘러갈 동안 한결 같이 느 긋한 속도로 걸어갔다. 참다 못한 주테카가 도로 옆의 들판을 통해 지멘을 앞질러가서는 매우 건전하지 못한 손짓과 욕설을 퍼부으며 도 발했을 때도, 뒤를 이어받은 론솔피가 "이 놈의 도로, 확 없애버린 다!" 같은 기괴한 협박을 할 때도 지멘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지지 않 았다. 격분을 참지 못한 론솔피는 지멘의 앞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서는 도로 옆의 흙을 도끼창으로 퍼서 도로 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보기 딱한 광경이었다. 유료도로당원들은 엘시에게 성난 어조로 도로 를 훼손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항의했고 엘시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엘시에게 원상 복구를 명령받은 론솔피는 으르릉거리며 흙을 치웠다. 그가 흙을 치운 자리를 지멘이 통과하는 모습을 보던 론솔피는 그만 발작을 일으킬 뻔했다. 정오가 다가오자 운동량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명의 레콘 들은 제 분을 참지 못해 지쳐버리고 말았다. 유료도로당원들은 분노 한 레콘들이 유료도로당의 규칙을 무시하기로 결심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빠졌고 그 걱정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참다 못한 그들은 지 멘에게 빨리 걸으면 안되겠냐고 제안했지만 지멘은 그것을 무시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지멘을 미워하게 되었다. 지멘에 대한 공분에 휩쓸 리지 않은 것은 말들과 딱정벌레, 그리고 엘시뿐인 것 같았다. 엘시 는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였고 정오가 되자 태양의 높이를 살펴보고 는 도로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추적자들에게 식사하고 따라가자 고 말했다. 레콘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식사하는 동안 지멘이 갑자기 달려가면 어쩌냐는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금 후 그들 은 더욱 당황했는데, 엘시가 딱정벌레에서 내리는 순간 지멘도 도로 가장자리 쪽에 앉아 배낭에서 먹을 것을 꺼냈기 때문이다. 유료도로 당원들과 레콘들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각자 지멘과 엘시를 바라보 았다. 결국 두 무리는 30 미터 쯤의 거리를 둔 채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끝낸 후에도 지멘은 서둘러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추적자들 을 흘끔 바라보고는 오전과 똑같은 속도로 걸었다. 레콘들은 빨리 지 멘을 따라가자고 성화를 부렸지만 엘시는 이레가 남겨놓고 간 짐 속 에서 조그마한 바둑판과 작은 돌통을 꺼낸 후에야 딱정벌레를 도로 위에 올렸다. 그리고 레콘들이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엘시는 딱정벌레의 넓은 등 위에 바둑 둘 준비를 갖추었다. 딱정벌레가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엘시는 혼자서 바둑을 두었 다. 주테카는 약간 겁먹은 얼굴로 '바둑을 혼자서도 두냐?'고 다른 레콘 들에게 질문했는데 그 어조가 마치 엘시의 정신병을 발견했다는 듯한 투였다. 다행히 준람은 건축업 때문에 인간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고 그래서 바둑이라는 놀이에 대해서도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준 람은 언젠가 다른 사람과 두었던 바둑을 혼자서 복기하고 있다고 설 명하여 주테카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준람도 엘시가 왜 그러고 있는 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 날 안에 지멘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 은 엘시였다. 론솔피는 못 볼 광경이나 되는 것처럼 엘시를 외면했고 쵸지는 바둑판을 기웃거렸다. 혼자 둬도 즐거울 만큼 바둑이 재미있 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 행동이지만 움직이는 바둑판에 놓인 검고 흰 돌을 보고 있으니 재미는커녕 멀미가 날 것 같은 당혹스러운 느낌만 들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쵸지는 더이상 바둑판을 바라보 지 않았다. 태양이 남쪽보다는 서쪽에 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는 시각, 엘시는 바둑판 위에 있는 돌들을 돌통에 쓸어담았다. 돌통의 마개를 단단히 닫은 엘시는 바둑판과 돌통을 도로 짐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준비합시다." 주테카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대관식?" "예?" "옛날 이야기를 들으니 인간들은 그런 병에 걸린다던데." "제왕병자 말이군요." "그래. 제왕병. 나는 네가 자신을 바둑왕이라고 부를까봐 걱정하고 있었어." 엘시는 그 내용의 불충을 꾸짖어야 되는지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여 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결국 엘시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따질 시간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 삭였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행동하십시오. 지멘이 곧 도로 밖으로 뛰쳐나갈 겁니다." 말을 끝낸 엘시는 자신이 너무 큰 소망을 품었다고 생각했다. 잔뜩 늘어져 있던 네 명의 레콘들은 일제히 깃털을 일으켰던 것이다. 서로 의 모습을 확인한 네 사람은 당혹하여 엘시를 쳐다보았다. 엘시는 한 숨을 내쉬었다. "이 지점에서 뛰쳐나가면 밤이 올 때 아픽스 산지로 들어갈 수 있습 니다. 밤새도록 산속을 달린 다음 새벽에 몸을 숨기고 잠을 청할 테 지요. 그리고 우리들의 추적을 피해 푼텐 사막 쪽으로 치달릴 겁니 다. 지멘의 계획은 대충 그런 것…… 출발!" 엘시의 외침과 지멘의 거대한 도약 소리는 동시에 들렸다. 네 사람 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멘은 이미 도로 남쪽으로 수백 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화살처럼 달리고 있었다. 네 사람은 각자 괴성을 지르며 그 뒤를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엘시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안도하는 유료도로당원들을 뒤로 한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열두 시간 뒤, 지멘은 아픽스 산지의 남단에서 바위 틈에 몸을 숨긴 채 헐떡거렸다. 해가 남아있는 동안 추적자들은 미친듯이 지멘을 따라왔다. 딱정벌 레가 머리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기에 지멘은 감히 몸을 숨길 엄 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태양이 떠있는 동안 줄곧 달렸다. 몇 번 잡 힐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호리병과 행운의 도움으로 지멘은 일몰까지 버틸 수 있었다. 지멘은 그것으로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지멘은 곧 당황했다. 그가 보인다는 듯이 똑바로 다가 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 만 지멘은 주저없이 달렸다. 그 발소리를 들은 추적자들은 다시 맹렬 하게 따라왔다. 밤의 어둠 때문에 그와 추적자 모두 속도가 느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숨가쁜 속도였다. 새벽이 두어 시간 남았을 무렵 지멘은 겨우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시험 삼아 몸을 숨겼다. 망치와 호리병을 꽉 쥔 채. 지멘의 예상과 바람대로 추적자들은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지멘은 발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꾹 참았던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었 다. 지멘을 보고 쫓아온 것이 아니다. 그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던 것뿐이다. 지멘이 하텐그라쥬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엘시는 지멘 이 선택할 길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멘은 자신의 부주의 함에 화가 났다. 엘시에게 목적지를 가르쳐준 덕분에 몇 가지 심상치 않은 정보들을 들을 수 있긴 했지만 그것을 정리하여 사실을 가르쳐 줄 아실이 없는 이상 지멘에겐 쓸모가 없는 정보였다. 따라서 엘시에 게 목적지를 가르쳐준 덕분에 얻게 된 것은 골칫거리뿐이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지멘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 은 추적자들이 다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지멘은 바위 틈에서 몸을 빼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주의하며 지멘은 어둠 속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산릉을 몇 개 넘은 다음 지멘은 외지고 어두운 계곡에 몸을 눕혔다. 지멘이 잠을 깬 것은 오후 무렵이었다. 그는 산을 따라 조금 더 움 직인 다음 평야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멈췄다. 남쪽 어딘가에서 방 황하고 있을 추적자들은 두렵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딱정벌레는 귀찮았다. 그는 숲 속에 몸을 숨긴 채 요기를 끝냈다. 그 가 식사를 마칠 때 쯤 갑자기 저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 멘은 하늘을 살펴보고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먼 남쪽 하늘에서 딱정 벌레가 배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엘시는 지멘이 뒤쪽에 있을 가능 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먼 곳에서 검은 점이 되어 움직이는 딱정벌레 를 보면서 지멘은 오직 밤에만 움직이겠다는 원래의 결심을 되새겼 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지멘은 낮에는 몸을 숨 긴 채 잠을 자거나 끼니를 떼웠고 밤에는 소리로 이루어지는 술래잡 기를 벌였다. 간간이 나타나는 엘시의 딱정벌레와 밤중에 근처로 다 가오는 발소리를 통해 지멘은 엘시와 추적자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엘시는 추적자들을 지멘과 마찬가지로 낮에 자고 밤에 움직 이도록 해놓고 자신은 낮 동안 지멘의 모습을 찾아다녔다. 낮 동안에 는 엘시가 레콘들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멘은 그 시간을 틈타 엘시를 붙잡으면 어떨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엘시는 높 은 고도에 떠있었다. 그리고 네 명의 추적자들을 두 개조로 나눠 한 조를 대기시켜놓았을지도 모른다. 지멘은 끝까지 같은 방식으로 움직 이기로 했다. 그것은 의례 같은 것이 되었다. 밤은 소리와 활력의 시간이었다. 지 멘이 힘껏 달리면 어느새 그 발소리를 따라 다른 발소리들이 다가온 다. 오늘 밤엔 발소리가 나타나지 않나 생각했을 때 그 발소리들은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그 발소리를 듣다가 마음 속으로 정해둔 것 이 상으로 소리가 커지면 지멘은 달리기를 멈추거나 몸을 숨겼다. 그러 면 그 발소리들은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 하다가 사라졌다. 때론 발 소리 자체가 뚝 멈춘 채 지멘이 다시 움직이기를 기다릴 때도 있었 다. 지형이 유리할 경우 지멘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걸었지만 조금이 라도 위험하면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실망과 격분에 찬 외침 이 들려오곤 했다. 물론 지멘은 거기에 마주 대답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지멘은 조용히 듣기만 했으며 곧 네 사람의 성격을 대충 파 악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후 지멘은 발소리를 통해서도 네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낮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멘은 몸을 숨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봄의 따스한 기운 속에서 마음껏 잠을 자거나 한가롭게 빈둥거 렸다. 추적자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가끔 하늘 한쪽에 나타나는 검은 점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네 명의 레콘들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하 여 지멘은 점점 엘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에게 엘시 에더리는 하 늘에서 빙글빙글 도는 검은 점이었다. 낮 동안 잠을 자면서 지멘은 가끔 꿈속에서도 엘시를 보았다. 그 때도 엘시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도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지멘은 자신이 실제로 엘시를 본 것인지 꿈속에서 엘시를 본 것인지 혼동하곤 했다.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기에 봄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지멘에게 다 가왔다. 혼란스러운 봄빛과 비상식적인 박탈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 다. 지멘의 몸에 눌린 꽃에서 훔쳐온 화향이 그의 깃털에 배었다. 낮 과 밤은 너무 다르다. 지멘은 두 세계를 번갈아 오가는 것 같은 혼란 을 느꼈다. 소리들이 폭주하는 밤, 검은 점이 날아다니는 낮. 그리고 갑자기 낮과 밤이 하나가 되었다. 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밤은 기묘하게 탈색된 채 주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멘은 자신도 모르게 최후의 대장간으로 돌아왔 다고 생각했다. 남쪽으로 가고 있던 그를 세상이 제멋대로 북쪽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그 공포스러운 순간, 갑자기 지멘은 자신이 푼텐 사막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하얀 것은 눈이 아니라 모래였다. 다 만 그 모래들은 누른 빛 대신 눈처럼 하얀 흰빛이었다. 그 백색이 어 찌나 짙은지 푸르게 보일 지경이었다. 지멘은 밤이 왜 이토록 창백한 것인지 의아하게 여겼다. 하늘을 올려다본 지멘은 그 이유를 깨달았 다. 보름달이 사막과 그를 관조하고 있었다. 차갑고 둥근 달이 아니 었다. 이글거리는 달이었다. 밤은 광란하는 달빛에 타들어가고 있었 다. 모래는 달빛에 하얗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폭발하는 달빛 아래 별들은 바스러지고 있었다. 지멘은 한없는 생경함으로 달을 바라보았 다. 문득 검은 점이 달의 얼굴을 스쳤다. 동시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 멘은 고개를 내렸고 그를 향해 달려오는 네 개의 모래 구름을 발견했 다. 그 구름 앞쪽에는 각자의 무기를 뽑아든 네 명의 레콘이 있었다. 오늘 밤에도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똑같은 밤이었다. 타 들어가는 달빛 때문에 그 모습이 하얗게 빛나는 것만 제외하면. 지멘이 그들을 볼 수 있다면 그들 또한 지멘을 볼 수 있다. 지멘은 몸을 부풀렸다. 그는 다시 달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엘시였 다. 지멘은 네 명의 레콘을 보았다. 준람, 주테카, 쵸지, 론솔피. 그 들은 화가 난 채 지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성난 눈들이 보였다. 지멘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여덟 개의 눈. 지멘은 그들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은 거 리였는데도. 그리고 갑자기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 오다가 후퇴했다. 지멘은 자신이 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의식중 에 지멘은 몸을 돌려 도망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 자각 때문에 지멘은 멈춰설 뻔했다. 지멘은 속도를 늦추려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도망쳐야 한다. 달이 저 지경이니, 도망쳐야 마 땅하지 않은가. 모래가 발목을 잡아챈다. 바람이 뒤로 떠민다. 지평선은 자꾸만 도 망친다. 하얀 세상이 계속된다. 달빛이 어깨를 잡아당긴다. 사구의 정상에서 날아오른다. 허공을 걷는다. 저 아래에서 거대하게 솟아오 르는 저 괴물은 무엇인가! 부리다. 부리라고? 지멘은 자신의 부리를 보고 있다. 모래가 그의 발을 게걸스럽게 삼킨다. 놔. 모래 속에 입 이 있다니. 그 입을 찢어발기며 지멘은 다시 도약했다. 분노한 모래가 자라난다. 하얀 모래가 미친 듯이 자라난다. 그를 삼 키고 싶어한다. 그를 통째로 삼키고 싶어하는 저 갈망에 찬 모래. 불 타는 달. 달? 아니, 태양이다. 무슨 상관인가. 모래가 푸르게 부풀어 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데. 아라짓력 31년 1월 28일. 레콘 지멘은 키보렌의 밀림에 뛰어들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레 달비는 오랫동안 잊었던 표정과 동작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마 냥 신기하고 반갑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가가 말했다. "포기하세요. 그렇게 봐도 나가가 되는 비법은 알아낼 수 없습니 다." 이레는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루시닌 수교위님. 저는 사실 시모그라쥬에서 자랐습니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세요?" "예. 대장군님의 몸종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가 의 모습이 반갑나요?" "한계선 이북에서는 볼 수가 없으니까요. 물론 폐하와 비스그라쥬백 이 계십니다만 제 처지에 폐하를 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스그라쥬 백 또한 자주 뵙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그곳에서는 추위 때문에…… 음. 무례로 생각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비스그라쥬백께서는 그다지 나가답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지요?" "나가 같은 손동작이나 걸음걸이 같은 것을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 다." 루시닌 수교위는 자신의 손을 새삼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게 차이가 있습니까? 똑같은 손발인데. 저는 인간들이 저와 다르 게 움직인다는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게, 어, 조금 다릅니다. 비유로 말씀드리자면 나가의 동작은 현 악기 같습니다. 인간의 동작은 관악기 같고요…… 이런. 전혀 어울리 지 않는 비유를 말했군요." 루시닌 수교위는 빙긋 웃었다. "예. 이해할 수 없군요. 제가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듣고 싶습니다 만 저기 두억시니 장군님이 오시는군요." 이레는 조금 늦게야 루시닌 수교위가 상관을 별명으로 불렀다는 것 을 깨달았다. 그는 며칠 전에 깨달은 사실로 거부감을 억눌렀다. 한 계선 이남의 제국군은 북부의 제국군과는 많이 다르다. 이레는 자신 도 덩달아 두억시니 장군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다짐하며 다가오 는 상장군을 바라보았다. '어? 잠깐.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두억시니 장군은 연병장을 가로질러 그에게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 다. 연병장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이레의 견해로 그것은 정원이었다. 이렇게 조경이 잘 되어 있는 땅이 어떻게 연병장이라는 말인가. 하지 만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이곳은 수목애호가들의 땅이다. 어디를 봐 도 목조 건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군단사령부 건물이 하늘누리에 서도 보기 힘든 장엄한 석조 건물이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안녕. 내가 베로시 토프탈이다." 인생을 감미롭게 하는 행운이며 동시에 이레를 당혹시키는 또다른 이질감이다.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 각하를 모시고 있는 이레 달비라고 합니다. 상장군님." "응. 그래. 완연한 1월 날씨니 좀 걸을까?" 농담임이 분명하다. 이레가 입고 있는 북부의 옷이 땀에 푹 절 만한 날씨니까. 이곳은 한계선 이남이고 이곳의 계절은 여름밖에 없다. 베 로시 토프탈 상장군이 입고 있는 옷이 훨씬 이곳의 날씨에 잘 어울린 다. 하지만 그것은 상장군의 옷이 아니었다. 이레는 반팔 상의에 반 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상장군을 본 적이 없었다. 손에 지휘봉이 아니라 부채를 들고 있다는 것도 조금 파격적이었다. 이레는 당황하 여 말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대장군님의 몸종은 역시 대단하군! 이런 날씨에 걷다니. 하지만 나 는 그러고 싶지 않아. 저기 정자에 가서 앉도록 하지. 그늘 비슷한 것이 있으니까." 토프탈 상장군은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이레는 완벽한 혼란 상태에 서 상장군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를 구제해준 것은 루시닌 수교위였 다. "좀 놀라셨겠군요. 한계선 이북에서 오신 분들은 항상 그러셔서 잘 압니다." "예. 좀 낯설군요." "조금만 겪어보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루시닌 수교위는 결코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 다. 이레는 고개를 조금 가로젓고는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이미 정자에 앉아있던 베로시는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앉 으라는 말을 해줄 것 같지 않았기에 이레는 그냥 상장군의 앞쪽에 앉 았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이레를 보고 있던 루시닌 수교위는 그 거 동을 보고 이레에게 합격점을 주고 있었다. 그는 정자의 문을 닫고는 이레의 뒤쪽에 섰다. 베로시는 이레를 보다가 부채를 접어 건넸다. "나야 익숙하니 자네가 쓰도록 해." "아니오. 괜찮습니다." "나는 두 번 안 권하는데." "예." "알았어." 베로시는 다시 부채를 쳐 부채질을 했다. 이레는 잠시 베로시를 관 찰했다. 그녀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두억시니 장군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대단히 잘못 붙은 별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베로시는 어떻게 봐도 인상 좋은 중년 여성이었고 이레가 막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거동조 차 편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레는 그 별명이 베로시 토프탈의 외모나 평소 언행 때문에 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삽하지만 방대한 별명작성법전에는 많은 세부항목이 있다. 베로시의 별명은 양서류를 연구하는 교수가 개구리 교수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 한 경우다. 베로시는 두억시니 애호가였다. 두억시니에 관한 전문가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억시니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무서운 분 위기와 장군이라는 직업의 성격 때문에 그 별명은 잔혹무비한 무사를 나타내는 것이라 오해되곤 한다. 오해 받는 장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네를 부른 이유는 짐작하겠지?" "주인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까?" "그래. 한 시간 전에. 페로그라쥬에서 온 거야. 며칠 전 대장군님과 추적자들은 황제사냥꾼을 쫓아 키보렌으로 들어왔어. 지금쯤 악타그 라쥬를 향하고 있을 것 같아." "무슨 내용입니까?" "지원군을 보내라는 거야. 황제사냥꾼을 체포하기 위해."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베로시가 질문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이상하군요. 한 시간 전이라면 지금 상장군님께서는 주인님께 보낼 지원군을 준비하고 계셔야 합니다. 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저를 부르시는 것이라면 부대를 출발시키기 전이라도 무방합니다." "지원군은 이미 오래 전에 준비해뒀거든." "준비해두셨다고요?" "그래. 자네가 편지를 들고 온 날부터 준비하고 있었어. 내가 출발 신호만 하면 당장 출발할 수 있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출발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대장군 님께 전할 말씀은 무엇인지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레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엘시에게 지원군이 간다면 그도 그들 을 따라 엘시에게 가야 한다. 이레는 토프탈 상장군이 그를 불러들인 것은 대장군에게 긴히 전할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이레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말씀이 아니고 서신입니까?" "자네, 대장군님께 가려고?" "예? 예.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까." "아냐. 자네는 가지 않아." "무슨 말씀입니까?" 토프탈 상장군은 부채질을 멈췄다. 이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 가 문득 그녀의 부채를 보았다. 조금 전 그에게 주려 했던 그 부채에 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부채에 그림이 있는 것이야 당연하지 만 이레는 그 그림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두억시 니인가?' 그렇지 않았다. 부채에 그려져 있는 것은 가위 그림이었다. 시모그라쥬공의 가위 문장이다. 당연한 일이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 군은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의 조카니까. 하지만 이레는 그 문 장이 어쩐지 꺼림칙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베로시가 말했다. "처음에는 자네를 함께 보낼까 했지만 관두기로 했어. 자네 소문 때 문에 좀 겁이 났거든. 물론 소문이야 과장이 섞여있게 마련이지만 자 네가 정말 영민하고 민첩하고 고금에 짝을 찾을 수 없이 훌륭한 몸종 일지도 모르니까." 자신에 관한 말도 안되는 소문을 또다시 접하게 된 이레는 웃으며 그 평가를 사양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레는 의문을 느꼈다. 그렇게 훌륭한 몸종이 주인에게 가는 병사들을 따라가게 하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레는 얼굴을 굳혔다. 이레에 대한 평가는 어쩌면 공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단번에 사태를 깨달은 이레는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이레는 곧 불에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그것을 놓쳤다. 이레는 크게 베인 자신의 오른팔 을 보다가 옆을 쳐다보았다. 이레는 나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는 루시닌 수교위가 소드락을 먹었음을 당장 알아볼 수 있었다. 이레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베로시를 바라보았다. 베로시는 빙그레 웃었다. 여전히 인상 좋은 중년 여인의 웃음이었지만 이레는 이제 그 것이 두억시니 같다고 생각했다. 베로시가 말했다. "생각대로군. 자네라면 그것이 지원군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테 지. 정말 어울리는 주종관계야. 주인과 몸종이 똑같이 뛰어난 능력 때문에 불행을 맞이하는군."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0-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3-16 조회수 : 2155 피를 마시는 새 10. 바람 속에 던진 돌 - 4 키보렌. 숲이 아니다. 숲을 나타내는, 숲이나 비의 천성으로 여겨지는 수직선은 이곳에서 는 끝없는 혼돈에 봉사하는 무수한 구성품들의 하나일 뿐이다. 천향 의 본능은 사라지고 나무들은 비스듬히, 옆으로, 때론 거꾸로 자란 다. 어떤 것은 다른 것을 휘감거나 심지어 뚫기도 한다. 거미줄 같은 나뭇가지들에 붙잡혀 말라죽어가는 바람의 단말마가 들리는 땅. 이 땅은 숲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크다. 이곳에 유료도로가 있다는 것은 과장 없는 기적이다. 수목애호가들인 나가들은 자연스럽게 자란 나무와 풀들이 허락해준 길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이고 유료도로당은 대륙의 등뼈에도 구멍을 내는 자들이다. 악타그라쥬에서 시작하여 시모그라쥬에서 끝나는 키 보렌 유료도로에는 유료도로당의 애증이 서려있다. 키보렌 전체를 인 간의 몸에 비유한다면 손가락 한 마디밖에 안되는 짧은 도로에 키보 렌 유료도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것은 이것이 키보렌 내에 있는 유일한 유료도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료도로당이라도 나무들을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옮겨심는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의 공사를 두 번이나 실행할 수는 없었다. 곧게 뻗은 도로를 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유료도로당원들이 보기에 키보렌 유료도로가 창피스러울 만큼 구불구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원래부터 존재했던 길을 최대한 이용 하고 나무들이 적은 장소를 이어가며 도로를 냈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키보렌 유료도로가 완공되었을 때 유료도로당의 재정은 파탄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나무를 옮겨심는 막대한 비용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유료도로당이 익숙한 다른 재난도 발생했다면 대공사는 결국 좌절되어야 했을 것이다. 나가들이 수목애호가라는 사실과 달리 그들이 이성적인 종족이라는 사실은 유료도로당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공사 방해는 없었다. 도로 파괴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착민들의 저항감에 비례하여 기 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공기와 추가비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유료도 로당은 협조도 없지만 방해도 없다는 사실에 춤을 출 만큼 좋아했다. 유료도로당은 나무와 풀, 그리고 무수한 야생동물만 상대하면 되었 다. 하지만 그것도 지난한 일이었다. 가까스로 도로가 완공되었을 때 유료도로당이 얻은 것은 언제까지 갚아야 할지 짐작하기도 힘든 빚이 었고 잃은 것은 과로나 사고로 순직한 수백 명의 당원이었다. 하지만 왜 향후 100년 내에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 어려운 도로를 만들었느 냐는 질문에 대한 유료도로당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길을 준비 한다.' "뭐, 길을 내기로 했으면 내야지." 준람이 내린 평가였다. 듣기에 따라서 상당한 폄하로 여겨질 수 있 지만 그것은 꽤 높은 평가였다. 준람이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왜 이 런 쓸데없는 도로를 만들어서 지멘을 멍청하게 따라가게 만들어놨냐 는 항의였다. 하지만 조금 전 공사중 사망한 순직자들을 위한 위령비 를 지나쳤던 준람은 이 도로를 만들기 위해 유료도로당이 겪어야 했 던 고통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었다. 준람은 불만을 애써 억누르며 지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주변도 으슥한데. 젠장." 론솔피의 협박 섞인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지멘을 호위하고 있는 악 타그라쥬 징수소의 유료도로당원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두 가 지 이유에서 그러했다. 그들은 뒤쪽에서 따라오는 레콘들을 별로 두 려워 하지 않았다. 또 그들은 론솔피가 계명성이라도 지르지 않는 한 그의 목소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나가들이었다. 악타 그라쥬 징수소장이 지멘을 호위할 당원으로 나가들을 선출한 것은 현 명한 판단이었다. 나가들에게 심장이 없다는 사실이나 나가들을 17분 동안 초인적인 활동력을 주는 소드락 등도 징수소장이 나가 당원들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지만 그보다는 나가의 성격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나가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황제의 대장군이 유료도로당과 대립 할 경우 지게 될 정치적 부담감은 그 당사자에게서만 끝나지는 않는 다. 따라서 엘시는 결코 유료도로당의 규칙을 어길 수 없다. 그것이 나가들의 판단이었고, 그래서 나가들은 겁내지 않았다. 론솔피는 자 신이 협박하는 재능을 영구히 잃은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꼈 다. "세상에는 반드시 오는 것이 있어. 숙취와 정의의 실현이지." 주테카의 다짐이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지독하게 덥군." 쵸지는 얼굴에 달라붙는 벼슬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겼다. 커다란 벼슬이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준다고 좋아하던 것도 이제 기억이 가물 가물한 일이 되었다. 이제 그의 벼슬은 얼굴 근처에서 출렁거리며 짜 증과 두통을 유발하는 끔찍한 부가물이었다. 요컨대, 네 명의 레콘들은 뒤에서 따라오는 한 인간을 무시하기 위 해 애쓰고 있었다. 엘시 에더리는 딱정벌레의 등 위에 펼쳐놓은 바둑판을 들여다볼 뿐 레콘들의 뒤통수를 물어뜯고 싶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손이 뻗어가는 것은 돌통이었지 물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레콘 들은 뒤통수의 깃털이 불쑥불쑥 일어서려는 기분을 자꾸만 느꼈다. 그들은 지멘이 한계선을 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엘시가 한 마디 말이나 눈짓, 몸짓 등으로 그 사실을 꾸짖은 적은 없지만 레콘들은 엘시가 꾸짖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꺼림칙했다. 그들은 엘시가 속 으로 그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엘시가 그 순간 누군가를 탓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레콘들 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무려 팔천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따라왔 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멘은 그의 수중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멘 은 하텐그라쥬까지의 거리를 착실하게 줄여나가고 있었다. 엘시는 수 치스럽다고 생각했다. 무향 규리하를 무너뜨리는데도 한 달의 시간밖 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명의 레콘을 잡는 것에 이렇게 많은 노 고를 낭비해야 하다니. 엘시는 백돌을 집어들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기보 없이는 자신의 대국을 전부 재현하기 어렵겠지만 엘시는 대국 회수가 많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대국을 기보 없이 복기할 수 있었다. 그가 복기하고 있는 것은 언젠가 살인기사 제이어 솔한과 두었던 바둑이었다. 엘시는 제 이어를 존중하기 위해 맞바둑을 두겠다고 했지만 제이어는 그에게 두 점을 접어줄 것을 요청했다. 특이한 일이었다. 두 점은 천지차이를 의미한다. 여러 번 사양했던 엘시는 결국 그것이 좀 묘하게 표현된 겸손함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바둑이 시작 되고 얼마 있지 않아 엘시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게 되었다. 살인기 사는 어떻게든 엘시를 이길 작정이었다. 천지차이를 의미하는 두 점 을 접어서라도. 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품위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격상 지는 것을 절대로 감내하지 못하는 기사들도 있긴 하지 만 그 경우엔 대국을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제이어는 석 점이든 넉 점이든 이길 때까지 무한정 칫수고치기를 할 작정으로 보 였다. 치기가 아니라 집착, 광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둑도 아니 다. 흑돌을 집어들던 엘시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착점이 떠오르지 않아 서가 아니라 자신이 왜 그런 불쾌한 바둑을 복기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엘시는 가만히 국면을 살폈다. 해도 너무한다는 말 이 나올 국면이었다. 제이어는 한 수의 가치가 있는 수만을 두고 있 었다. 한 번의 수가 그만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말인 듯하 지만 두 수, 세 수의 가치가 있는 한 수를 두고자 하는 고수들의 바 둑에서 제이어의 행마는 어울릴 마음이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선작오십가자 필패 같은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 제이어는 꾸준히 집 만 짓고 있었다. 건축바둑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비마를 달린 것이지?' 엘시는 우변의 비마를 보았다. 그 자신의 수였고 그 이후 국면을 뒤 집어놓은 수였다. 엘시는 자신의 손에 있는 흑돌을 보았다. 살인기사 가 둘 차례였다. 제이어 솔한은 당시 그 비마를 무시했다. 아마 계속 집만 짓던 관성 때문에, 싸움을 피하던 버릇 때문에 제이어는 엘시의 수에 담긴 전투적 의미를 느끼고는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이어는 자신의 집을 돌보러 가버렸다. 엘시는 흑돌을 내려놓는 대신 그것을 움켜쥐었다. '졌어야 했다. 바둑판 위에서 이기고 제이어에게는 졌다.' 두 점을 접어주고도 이긴 훌륭한 바둑이 아니라 어울릴 생각도 없는 사람을 싸움에 끌어들여 억지로 이긴 졸렬한 바둑이었다. 이기는 것 만 생각하는 상대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 엘시는 살인기사가 왜 살 인기사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둑판에서 지고 엘시에게 이겼다. 바둑 대신 사람을 노리니 살인기사랄 밖에. 엘시는 제이어의 착점을 내려놓는 대신 돌통을 끌어당겼다. 그는 돌들을 쓸어담았다. 대장군이 바둑판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 자 앞쪽의 레콘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준람은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 로 고개를 숙였고 쵸지는 허허롭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테카는 반 박의 말을 떠올렸고 론솔피는 앞쪽의 나가들을 다 때려눕히고 지금이 라도 지멘을 잡으면 어떨까 하는 망상에 시달려다. 엘시가 그들을 불 렀다. "잠깐만." "가서 잡아올게!" 엘시와 쵸지, 준람, 주테카는 론솔피를 빤히 바라보았다. 론솔피는 바람 소리가 나도록 도끼창을 돌려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소리를 들은 지멘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가 당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론솔피가 말했다. "충분히 으슥해. 지금이면 괜찮아." "유료도로당원들을 공격하겠다는 겁니까?" "내가 단독으로 공격했다고 하면 돼. 그러니까 너한텐 별일 없을 거 야." "그 의견은 각하하겠습니다. 모두들 가까이 오십시오." 네 명의 레콘은 엘시에게 다가갔다. 엘시는 목소리를 낮춰 말을 시 작했다. 앞쪽에서 그 모습을 보던 지멘은 초조함을 느꼈다. 화가 나서 주위 를 잘 살피지 않았던 추적자들과 달리 지멘은 이정표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그래서 지멘은 조금 전 지나쳤던 이정표가 마지막 이정표임 을 알고 있었다. 시모그라쥬까지 남은 거리는 2킬로미터다. 다시 앞으로 걸어가면서 지멘은 엘시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해 보았 다. 시모그라쥬에서 체포를 시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시모그라쥬 같 은 대도시에서 다섯 명의 레콘이 싸움을 벌인다면 그 피해가 이만저 만하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역시 유료도로당의 징수 소를 지나친 곳, 그러니까 유료도로가 끝나고 시모그라쥬가 나타나기 직전의 공간에서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레콘들을 불 러들이는 것은? 지멘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주테카와 론솔피, 쵸지 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가 당원들은 조금 긴장했고 그 중에는 허리 에 찬 주머니에 손을 뻗는 당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두 레콘은 지멘 과 당원들을 무시하며 그들을 앞질러갔다. 주테카만이 조금 지체하면 서 '정의의 그물은 가늘어서 보이지 않지만 질기기가 별철 같다'느니 하는 말을 했지만 그 역시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곧 그들의 모습 이 사라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쫓던 지멘은 뒤쪽을 보았다. 이제 엘 시는 준람과 둘이서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엘시는 세 명의 레콘들에게 매복을 지시한 것이다. 역시 징수소를 지나친 직후에 기습이 있을 것이다. 지멘은 동행하던 당원에게 징수 소와 시모그라쥬 사이의 거리가 얼마냐고 물었고 대략 1킬로미터 쯤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지멘은 어떻게 하면 1킬로미터 동안 잡히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멘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준람이 시선을 그곳에 둔 채 엘시에게 질 문했다. "엘시. 뭐 하나 물어볼까. 왕벼슬을 왜 불렀지?" "무슨 뜻입니까?" "벼슬은 멋지지만 왕벼슬은 싸움 경험이 없어. 주테카는 현상범 쫓 아다니니 제법 노련하고 론솔피도 금군에 들어가려고 싸움박질 제법 하고 다녔던 것 같아. 나도 아내가 다섯이니 건물만 짓고 있을 수야 없었지." 준람은 지멘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술을 연마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벼슬은 황당한 소망 때문에 한 번도 싸울 일이 없었어. 지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너는 왕벼슬을 불러들 였지. 왜 그랬지? 불러들일 수 있는 사람이 적어서 어쩔 수 없이 불 러들인 것 같지는 않은데." "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지멘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만 소환했습니다." "왕벼슬을 믿어? 왜지?" "그는 자기 철봉을 칼처럼 씁니다. 나는 검술에 대해서는 조금 압니 다. 왕벼슬은 좋은 검사의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물론 연습하지 않으면 아무리 우수한 자질이라도 동편 한 닢의 가 치도 없습니다. 하지만 왕벼슬은 다행히 레콘이니 경험 부족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레콘은 사실상 전사로 태어나니까요. 지금은 다 포기하고 그냥 재미만 쫓아다니는 파락호처럼 굴고 있습니 다만 지멘을 상대하다보면 자기 자질을 알게 될 겁니다." "다 포기해? 그 친구 패배주의자처럼 보이지는 않던데." "나늬 없는 세상을 비웃고 그러면서 자기 소망도 비웃고 있습니다." 준람은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나발칸의 레콘은 평가를 내렸다. "어리군." 엘시는 그 평가에 대답하지 않았다. 준람은 쌍창을 양손에 나눠쥐다 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왕벼슬이 네 곁에 항상 있었던 것 도 아닌데. 용인 같군." 질문이 아니었기에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뇌룡공 륜 페이 의 고향으로 다가가는 시점에서 용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인 상적이었다. '내가 용인 같다고?' 엘시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라고 생 각했다. 그는 데라시의 속셈도 알지 못했고 스카리의 계획도 알지 못 했다. 뇌룡공 륜 페이라면 자신이 어디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짓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시는 하늘누리에 있는 대 신 이토록 먼 남쪽, 키보렌의 밀림을 방황하고 있다. 물론 그 때문에 하텐그라쥬에 있는 그녀의 위험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엘시의 노 련함 덕분이 아니라 우연의 보살핌 덕분이었다. 엘시는 그 말이 차라 리 핀잔 같다고 생각했다. 징수소가 보였다. 징수소는 작은 바위산의 허리를 잘라 끼워넣은 관문처럼 생긴 건물 이었다. 반구형으로 만들어진 통로는 높이가 10미터는 됨직했고 넓이 또한 그 정도는 되었다. 통로 중앙의 양쪽 벽에 이용료를 받는 창구 가 있었다. 지멘은 그곳으로 다가가 이용료의 반액을 지불했다. 반액 은 악타그라쥬 징수소에서 지불했기 때문이다. "내 앞에 레콘 세 명이 지나갔나?" 인간인 징수원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지멘을 따라온 당원들을 보고 꽤 놀랐지만 유료도로당원답게 지멘에게 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 았다. 지멘을 따라왔던 나가 당원들은 통로 옆으로 물러났다. 지멘은 관문 끝에 섰다. 지멘은 배낭끈을 단단히 고쳐매고 망치를 꽉 움켜쥐었다. 그가 서있 는 곳까지가 유료도로당의 소유여였다. 한 걸음만 내딛으면 이제 그 곳에는 유료도로당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곳에 서서, 지멘은 뒤를 돌아보았다. 엘시와 준람은 이용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지멘의 예상이 맞다면 엘시는 그곳에서 멈출 것이다. 인질이 될 위험이 있으 니까. 따라오는 것은 준람뿐이다. 까다로운 병기를 가지고 있는 준람 은 쉽사리 인질이 되지 않을 것이다. 준람과 어울리는 동안 매복하고 있던 다른 세 레콘이 합류하면 지멘은 포위될 것이다. 지멘은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것이 최선책임을 확신했다. 준람이 다가왔다. 엘시는 딱정벌레와 함께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기 다렸다. 지멘의 뒤쪽 5미터 쯤 되는 거리까지 다가온 준람은 쌍창을 양손에 꽉 움켜쥐고는 허리를 낮췄다. "시작해볼까, 지멘?" 지멘은 준람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앞쪽을 돌아보았다. 도시는 보이지 않았지만 숲의 머리 위로 높이 솟아있는 시모그라쥬의 심장탑 은 똑똑히 보였다. 희고 우아한 건물이다. 하늘이 맑다. 그러나 새소 리는 들리지 않는다. 길 좌우의 숲속에 긴장한 레콘 세 명이 숨어있 을 테니. 관문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서 지멘은 바깥이 너무 밝다고 생각했다. 눈이 부시다. 지멘이 뛰쳐나갔다. 지멘은 망치를 쥔 손을 허리 뒤쪽에, 그리고 다른 손을 품속에 꽂아 넣은 채 달렸다. 어디서 나타나더라도 호리병을 집어던지겠다고 말하 는 자세로 지멘은 번개처럼 달렸다. 길 좌우의 나무들이 푸른 급류가 되어 뒤로 후퇴했다. 햇빛이 너무 뜨겁다. 이제 곧 습격이 있을 것이 다. 론솔피가? 왕벼슬이? 주테카가? 누가 먼저냐! 지멘은 좌우의 숲 을 살폈다. 지금 당장…… 습격은 없었다. 지멘은 당황했다. 시시각각으로 심장탑의 모습이 커졌지만 길 좌우 에서 뻗어나오는 습격은 없었다. 지멘은 그를 뒤따르는 발소리도 없 음을 깨달았다. 준람이 따라오고 있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지멘은 당장 시모그라쥬에 뛰어들 어야 했다. 도시 안쪽이라면 싸움은 불가능하다. 시모그라쥬를 100미터 남겨두고, 지멘은 살수관 앞에 몸을 내밀게 되었다. 앞쪽에서 번쩍이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전에 지멘의 몸이 반사적 으로 멈췄다. 지멘은 두려움에 차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다시 세상이 그를 북쪽으로 데려온 것 같았다. 나나본에서 지멘은 비슷한 것을 보 았다. 그를 겨냥하고 있는 살수관들. 그 때와 다른 점은 살수관의 숫 자가 훨씬 많다는 것과, 소화차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주로 나가 병사들이라는 것이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거부감 때문에 지멘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때 뒤에서 발소리와 수레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지멘의 머리가 뒤로 돌았다. 좌우의 숲에서 굴러나온 소화차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앞쪽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숫자의 소화차들이었다. 역시 나가 병사들이 소화차를 보호하고 있었 다. 지멘은 그 뒤편으로 론솔피와 주테카, 쵸지, 그리고 준람이 걸어 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길을 막고 있는 소화차들의 뒤편에서 멈춰섰다. 그들도 소화 차들의 모습에 조금 질린 기색이었지만 승리감을 감출 정도는 아니었 다. 주테카는 부리가 찢어져라 웃고 있었고 론솔피는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쵸지는 안됐다는 표정 비슷한 것을 짓고 있었다. 지멘 은 준람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멘은 좌우의 숲을 둘러보았다. 숲 속으로 뛰어든다면…… 그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시모그라쥬 주변에는 습지가 많습니다. 길이 아닌 곳에서 함부로 뛰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지멘은 다리가 땅에 달라붙는 것처럼 느꼈다. 지멘은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살폈다. 엘시 에더리였다. 어느새 다가온 엘시는 딱정벌 레에서 내려 가까운 소화차 위에 서있었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 지만 지멘은 시모그라쥬의 지형을 알지 못한다. 엘시가 매복을 위장 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지멘은 그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엘시는 고 의로 매복한 척 위장하여 지멘이 정신없이 달려가도록 했다. 빠져나 갈 수 없는 곳에 곧장 몰아넣기 위해. 그렇다면 이 주변에는 정말 습 지가 있을 것이다. 지멘은 도망칠 수 없다. 엘시가 다시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땅에 엎드리십시오." 지멘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습지를 품은 숲은 음침하게 그를 굽어보고 있었고 살수관들은 빈틈없이 그를 겨냥 하고 있었다. 지멘은 크게 호흡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의 망치가 움직였다. 아래가 아닌 위로. 엘시는 눈 주위를 꿈틀거렸다. 서서히 올라간 망치가 지멘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지멘은 망치를 넓게 잡은 채 그것을 머리 뒤로 넘겼 다. 뒤로 빠진 오른발을 땅속에 비벼넣듯 고정시킨 지멘은 왼다리를 살짝 구부렸다. 지멘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깃털 이 하나 둘 일어섰다. 어깨에서, 등에서, 팔에서. 레콘들의 깃털은 보통 일제히 일어선다. 하지만 지금 지멘은 억지로 깃털 하나하나를 잡아당기듯 깃털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화차 뒤편에 있던 준람이 신음했다. 주테카는 눈을 크게 떴고 론솔피는 부리를 벌렸다. 쵸지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속삭였다. "싸울…… 생각인가?" 지멘의 몸이 부풀었다. 검은 레콘의 거대한 몸이 세 배로 커졌다. 꼿꼿하게 일어선 깃털들은 이제 쇳소리를 내며 지멘의 몸에서 튕겨져 나갈 것 같다. 엘시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소화차들의 양수 손잡이 를 쥐고 있는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 때 지멘이 눈을 떴다. '아실. 구해야 한다.' 지멘의 오른발이 앞으로 움직였다. 거대한 멍치를 어깨 위에 띄운 채 지멘은 앞으로 한 걸음 걸어나갔 다. 두번째 걸음은 훨씬 어렵게, 하지만 분명히 이루어졌다. 모든 병 사들과 레콘들이 숨을 죽였다. 절대로 나갈 리 없다고 생각한 세번째 걸음이 이루어졌을 때 준람은 부리를 틀어쥐었다. 가지말라는 외침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가 고함을 지르면 긴장한 소화 차의 병사들이 일제히 살수를 개시할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 네번째 걸음이 힘겹게 뻗어나왔다. 지멘은 자신이 어떻게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햇빛은 찌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살수관 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멘은 놀랐다. 다시 빙글빙글 도는 검은 점 이 나타났다. 한계선 이북에서 나타났던 그것이었다. 이제 꺼져라! 엘시 에더리, 이 알 수 없는 괴물아! 검은 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멘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것을 보았 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이었다. 앞쪽의 소화차 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 손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 다. 소화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가 병사들이 달렸다. 나가들은 함성을 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무섭도록 침묵하며 달려왔 다. 지멘은 눈물이 날 만큼 고맙다고 생각했다. 왜 물을 쏘는 대신 병사들이 달려오는 것인지 지멘은 알 수 있었다. 싸우다가 죽게 해주 겠다는 거지, 그렇지? 지멘은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으로 망치를 부여잡았다. 그래, 고맙다! 대호의 형상을 한 망치를 휘두르기 직전, 지멘은 묘한 것을 보았다. '저것은…… 가위?' 지멘은 눈을 다시 깜빡이다가 아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집중 하여 바라보았다. 가위가 있었다. 누군가의 방패에. 지멘은 그 방패 의 주인이 조금 전 손을 돌렸던 인간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가위가 어쨌다는 거지? 가위.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지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실? 여기 있나?' 아실은 기억 속에 있었다. 지멘은 그곳에서 들려오는 아실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아실이 말했던 가위가 있었다. 아실의 예언과 달리 지멘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실이 말했던 가위였다. 지멘은 어리 둥절해 하다가 문득 자신이 나가들에게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지멘 은 계명성을 내지르려 했다. 부수어줄 머리를 찾으려던 지멘은 그것이 자꾸 도망친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멘은 포위되어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지멘이 느낀 당혹감은 나가 병사들 이 그를 지나쳐 달리고 있음을 확인했을 때 겨우 해소되었다. 나가들은 그를 지나치고 있었다. 지멘은 뒤에서 비명과 거친 함성, 그리고 신음 등이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돌아보았다.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엘시는 칼을 뽑아 나가 병사들과 싸우고 있었고 네 명의 레콘들은 방향을 바꾼 소 화차들에 포위되어 몸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나가들은 엘시를 다 치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만큼 자신의 몸을 돌 보지 않는 종족도 찾기 어렵다. 나가들은 칼에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엘시에게 쇄도했다. 결국 검술이나 무력이 아닌 무수한 나가 들의 무게 때문에 엘시는 굴복하게 되었다. 칼을 뺏긴 엘시는 땅에 내팽개쳐졌고 그 위에 나가 병사들이 올라탔다. 한편 다른 무리의 나 가 병사들은 추적자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지멘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이토록 혼돈스러운 광경은 처음이었다. 아실. 네가 한 일이 야? 이게 가위야? "수고했습니다. 지멘." 지멘은 허리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패를 들고 있는 인간 남자가 그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지멘은 그 방패에 있는 가위를 진귀한 것을 보듯 바라보았다. "엘시 에더리는 우리가 맡아야겠습니다만 다른 레콘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전해들은 바가 없습니다. 혹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라도 있다 면 건네드리지요. 저 자들 때문에 고생이 많았을 거라 짐작합니다.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요." 지멘의 부리가 열렸다. "가위군." "예? 아아, 이런. 미안합니다. 자기 소개부터 해야겠지요. 흥분해서 그랬습니다. 나는 아쉬존 토프탈입니다.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 각하의 손자입니다." 지멘은 가위가 아쉬존 토프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아실의 말처럼 어떤 이해를 선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실은 알게 될 거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것이 답일 거예요. 이제 알겠어요. 가위. 당신도 알게 될 거 예요…… 하텐그라쥬로 꼭 가요. '그렇군. 하텐그라쥬로 가야 되는 것이군.' 지멘은 이해했다. 하텐그라쥬로 가야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멘은 자신의 멍청함을 꾸짖고 싶었다. 그는 아직 하텐그라쥬에 도 달하지 못했다. 하텐그라쥬로 가야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멘 은 뒤를 돌아보았다. 추적자들은 완전히 억류되어 있었다. 엘시는 분노와 좌절 때문에 하 얗게 질린 얼굴로 지멘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대신 엘시는 이를 악물었다. 지멘이 아쉬존 토프탈을 바라 보았다. 앳된 얼굴이 흥분과 승리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하텐그라쥬로 간다." 아쉬존 토프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텐그라쥬로? 거기에는 왜죠? 거기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발케네 로 돌아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멘은 놀랐다. 아쉬존의 말은 그의 바람이었다. "하텐그라쥬에 간 다음에 거기로 가야 해." 아쉬존은 입을 조금 벌렸다가 곧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간 소년은 공모자의 얼굴을 한 채 지멘을 바라보았다. 예. 알았습 니다. 그것도 계획인가 보군요. 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동지니까. "알겠습니다. 뭐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지멘은 더 이상의 도움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가위가 추적자들을 붙잡아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아실은 하텐그라쥬로 가 는 것을 가위가 도와줄 거라는 뜻으로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없어." "예. 그럼 수고하십시오. 다음에 만날 때 우리는 승리자일 겁니다!" 아쉬존은 활기차게 주먹을 쥐어올렸다. 지멘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 신이 붙잡은 제국만병장의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아쉬존은 지멘의 반응에 별로 개의치 않은 채 달려갔다. 지멘은 어쩐지 소외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화차와 병사들은 모두 추적자들에게만 주 의를 쏟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상황은 팔천 킬로미터를 달려오는 동안 지멘이 계속 원했던 것이기는 하다. 하지 만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시간에 뜻밖의 방법으로 나타났다. 지멘은 자신이 아직까지도 몸을 부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 멘은 깃털들을 눕혔다. 그는 한 번 더 엘시 에더리의 모습을 보려했 지만 잔뜩 모여있는 병사들 때문에 엘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네 명의 레콘들은 성난 목소리로 뭔가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네 명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고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지멘은 몸을 돌렸다. 시모그라쥬의 심장탑을 보며 지멘은 똑바로 걸 었다. 다음은 하텐그라쥬다. 엘시 에더리는 눈을 뜨자마자 함성을 지르며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 였는데, 주위는 캄캄한 암흑이었다. 엘시는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순간 몸에서 지독한 통 증이 느껴졌다. 엘시는 일어서는 것을 잠시 보류한 채 상황을 파악하 기로 했다. '그것은 악몽이 아니었나?' 엘시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그리고 엘시는 자신이 위아래 옷 외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칼은 물 론이거니와 겉옷, 허리띠, 심지어 신발까지 없었다. 엘시는 주위를 더듬었다. 벽과 바닥에서 거친 돌이 만져졌다. 안락함이나 편의성 대 신 오직 굳건함에만 중점을 둔 벽과 바닥이었다. 죄수와 유사한 복장을 한 채 감옥과 유사한 곳에 갇혀있거나. 죄수 가 되어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 쪽에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고민은 무의미하다. 갑자기 빨라지는 맥박을 느끼며 엘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진정시키며, 또한 암흑에 익숙해져야 했다. 조금 후 눈을 뜬 엘시는 암흑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줌의 빛 도 없는 공간에 있는 것이다. 지하. 엘시는 어렴풋이 지하라는 느낌을 받았다. 새에게는 고도를 느끼는 감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지표면과의 거리를 느 끼는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육감 같 은 것이 엘시에게 그곳이 지하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엘시는 고통을 억누르며 일어났다. '공격받았어. 배신이었어.' 엘시는 일단 그 두 가지 사실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쩐지 생각할 시 간은 많이 있을 것 같았다. 엘시는 일단 손의 감각을 활용하여 자신 의 처지를 알아두기로 했다. 조금 후 엘시는 자신이 조그마한 원형 돌방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넓은 편이지만 원형이기 때문에 인간 다섯 명이 눕기엔 약간 벅찬 정도의 방이었다. 이상하게도 문으로 짐작되는 것이 만져지지 않았다. 엘시는 한 번 더 방을 한 바퀴 돌면서 벽을 만져보았지만 문 은 없었다. 위쪽? 엘시는 손을 위로 뻗었다. 아무 것도 닿지 않았다. 엘시는 훌 쩍 뛰어보았지만 여전히 손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원형의 문이 없고 천장이 높은 방. 우물 같았다. 엘시가 그 생각을 했을 때 갑자기 위쪽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엘시는 위쪽을 쳐다보았 다. 그러나 쏟아지는 빛이 그의 눈을 찔렀다. 엘시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렸다. "울고 있습니까, 대장군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엘시는 억지로 손을 떼고 위를 쳐다 보았다. 빛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탈 것 같았다. 하 지만 엘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쨌든 청력은 어둠 속에서도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 "오래간만이군요. 대장군님." 엘시는 어렴풋이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엘시는 고개 를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래쪽은 훨씬 알아보기 쉬웠다. 빛 속 에 드러난 방의 형태는 엘시가 짐작한 것처럼 우물 형태였다. 하지만 그 면적은 어둠 속에서 더듬어 짐작했을 때보다 훨씬 좁았다. 다섯 명은커녕 엘시 혼자 눕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우물이 맞는 것 같았다. 물이 없으니 마른 우물이다. 엘시는 다시 위를 쳐다 보았다. 이번에는 인간 여자 같은 것이 보였다. 엘시는 차분하게 말 했다. "발케네공에게 무엇을 받기로 했지?"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엘시는 자신의 기습이 성공했음을 알게 되 었다. 대장군이 황제사냥꾼을 추적하다가 우연히 '사고'를 당해 행방 불명이 되길 원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고 누가 목록을 작성하든 암살 공의 이름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어렵지 않은 추측이었 다. 하지만 엘시는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살려 둘 경우 화근이 될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설마 나를 회유하려는 것인가?'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가설이다. 엘시는 자신의 의지를 과신하고 있 는 것이 아니다. 회유는 통제가 가능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상식이 다. 하지만 엘시는 대장군이며 제국만병장이다. 자유의 몸이 되는 즉 시 엘시는 통제가 불가능한 사람이 된다. 결코 놓아줄 수 없는 사람 에게 회유란 의미가 없다. 엘시는 일단 베로시에게 말을 시키기로 했 다. "돈인가?" "돈? 어처구니가 없군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난 자네에게 어울리는 동기를 생각해보고 있을 따름이야." 베로시는 곧 엘시가 야유를 보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분노했다. "나를 천박한 사람으로 몰아붙여서 도움될 것이 없을 텐데요." "연구 대상과 비슷해지는 학자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지." "뭐라고요!" "두억시니처럼 말하지 마라. 베로시 토프탈. 어떻게 해도 나를 도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도움될 것이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 나." "아직은 기가 팔팔 살아있군요. 며칠 후 당신이 내놓은 배변 무더기 속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도 그럴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엘시는 이곳이 밀폐 공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은 기가 꺾일 때가 아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그 때 찾아올 것이지 왜 지금 찾아왔지?" "그런 꼴을 안 당하게 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간단해요. 글 한 줄이면 되죠." "무슨 글이지?" "아라짓의 제위를 북부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지지한다고 쓰면 돼 요." 엘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왜 그를 살려두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대장 군을 제거하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반역이었다. 베로시 토프탈은 팔디곤 토프탈의 조카. 이 건의 배후에는 시모그라쥬공이 있다. 그리 고 발케네공도. 제국 남극와 북극의 공작들이 야합하여 치천제의 폐 위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치천제의 곁에는 대장군 엘시 에 더리가 없다. 엘시는 분노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발칙한 것들……" "아직은 거부감이 있을 테죠. 그것이 사라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 니까 지금 말해두는 거예요. 빨리 알면 거부감도 빨리 사라지겠지 요." "가능하지도 않은 짓을 하나! 비록 내가 없다 해도 폐하께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하늘누리는 아무도 정복할 수 없다!"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대장군님." "무슨 말이냐?" "얼마 전 하늘누리는 발케네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암 살공은 하늘누리를 잡을 준비를 하고 계시지요." "하늘누리를 어떻게!" "그건 천천히 알려드리지요.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을 돌보는 겁니 다. 대장군님. 암살공은 하늘누리를 암살할 겁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출혈은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당신의 서신 한 통이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당신이 어떻게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아요. 괜한 고집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바보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닥쳐라…… 닥쳐!" 베로시는 엘시의 반응에 조금도 당황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 녀 자신의 말대로 베로시는 빨리 알려줘야 빨리 포기한다는 정도의 의미밖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에서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알려드렸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며칠 뒤에 뵙지요." 엘시는 노여움에 차서 위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뭔가 뚜껑 같은 것이 움직이면서 빛이 사라졌다. 엘시는 캄캄한 암흑 속에 홀로 남았 다. 엘시는 분노를 어쩌지 못한 채 좌우로 움직였다. 벽에 몸이 부딪 히자 분노는 더욱 커졌다. 주먹으로 벽을 후려치려던 엘시는 문득 팔 을 멈췄다. 이래서는 안된다. 긴 싸움이 될 것이다. 벌써부터 침착을 잃고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엘시는 자신을 억눌렀다. 참을 수 없는 분노 가 꿈틀거렸지만 엘시는 애써 그것을 잊었다. 그는 아예 바닥에 드러 누웠다. 당장 일어나려는 몸을 억제하며 엘시는 호흡에 전념했다. 천 천히 침착이 되돌아왔다. 엘시는 베로시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베로시 토프탈은 암살공이 하늘누리를 잡을 거라고 했다. 어떻게? 엘시는 지멘에 대해 생각했다. 말도 안되는 구조물을 상상한 지멘은 하늘누리에 침입할 수 있었다. 규리하성 공격 시기가 앞당겨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설마 발케네공은 지멘의 일을 재현해보기로 한 것인가? 하지만 그런 구조물을 상상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하늘누리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자신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누리에 익숙하지 않을 암살공의 병사들이 그런 것을 당장 상상할 수 있을까? 엘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가능성이 있는 것 이라면 도깨비 감투를 이용한 암살 정도다. 하지만 심장을 적출한 황 제를 단숨에 죽일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렇지만 일격에 죽이지 못한다면 암살은 꽤 우스운 일이 되어버린다. 방법이 없다. 엘시는 적합한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암살공은 자신있게 반역을 벌인 것일까? 뭔가 말도 안되는 힘, 상상 할 수 없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 일까. 엘시는 발케네공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천천히 되짚어 나갔다. 지멘은 울분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그 함성은 대선풍의 굉음 속에 서도 크게 울렸다. 대선풍은 말로 듣던 것 이상이었다. 수십 년 동안 움직이지 않은 그 비정상적인 회오리는 조금 전 생겨난 것처럼 치열한 속도로 맴돌고 있었다. 그것이 자아내는 굉음은 먼 곳에서도 지멘을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주위의 폐허는 놀랍도록 고요했다. 식물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물이다. 생물은 자의에 따라 움직이며, 식물 또한 놀라운 속도로 움직인다. 그것은 뿌리를 뻗고 가지를 늘어 뜨리고 씨를 뿌린다. 지멘을 둘러싸고 있는 폐허는 식물과의 영역 다 툼에 그다지 열의가 없었다. 부러진 기둥은 넝쿨을 위한 지지대가 되 었고 반파된 벽은 음지를 선호하는 풀들을 위한 일산이 되었다. 나무 뿌리는 포석을 파헤치고 부수어 흙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하텐그라쥬였다. 나가들의 도시들 중 가장 오래된 냉혹의 도시. 인간들은 그것을 침 묵의 도시라고 불렀다. 더 오래 살아남은 명칭은 결국 인간의 것이 된 듯하다. 2차 대확장 전쟁 당시 파괴된 나가들의 도시는 거의 재건 되었지만 하텐그라쥬는 재건되지 않았다. 도시 한가운데서 자리를 떠 나지 않는 대선풍 때문에 재건이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북부의 승리에 대한 증거로서 이곳을 폐허로 남겨둔다고 말하 는 이들도 있다. 어떤 설명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 폐 허와 식물, 그리고 대선풍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만큼은 명백 하다. 그리고 그것은 지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몇 시간 동안 주위의 폐허를 뒤졌지만 지멘이 찾아낸 것은 원래 무 엇이었는지 짐작하기도 힘든 녹슨 쇠붙이 몇 개뿐이었다. 이곳은 완 전한 폐허다. 고고학자들이라면 보물창고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지 멘은 고고학자가 아니다. 그는 이곳에서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었 다. 왜 제국을 종단하여 이곳까지 왔는지 지멘은 알 수 없었다. 대답 해줄 수 있는 것은 제국의 남쪽 끝을 지키고 있는 대선풍뿐이지만, 그것은 주위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외에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 다. 지멘은 잡초 속에 묻혀있던 돌을 뽑아들었다. 어떤 건물의 일부였을 그 돌은 오래된 침식에 닳아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지멘은 그것을 힘껏 집어던졌다. 대선풍에 휘말린 돌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지멘은 잠깐 동안 그 것을 추적할 수 있었지만 회오리 반대편으로 사라진 후에는 더이상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어딘가에 떨어졌거나 혹은 바람을 타고 계속 돌고 있을지도…… "나도 가끔 그런 일을 하지." 놀랍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지멘은 그 고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상대가 나가임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린 지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역 시 나가 여자였다. 나가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지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멘은 그 옷 차림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입는 것인지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든 그 옷은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은 별로 없어 보였다. 나가들에게 완전히 적합한 환경이니 그런 옷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기괴하지만 조야하지는 않은 옷이었다. 나이는 알 수 없었 다. 허물을 벗는 나가들에게는 노화의 증거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가들끼리는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이 있다고도 들었던 것 같지만 지 멘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나가가 아닌 자들은 알아볼 수 없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폐허를 뒤졌을 때는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지멘 은 기묘한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멘이 바라보는 가운데 나 가는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조그마한 돌을 든 여자는 그것을 힘껏 집어던졌다. 꽤 먼 거리였지만 여자는 익숙하게 대선풍 속에 돌을 던 져넣었다. 돌은 순식간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네가 던진 돌처럼 잘 보이지는 않는구나. 머리 위를 조심해. 네가 던진 돌은 꽤 크니까 금방 떨어질지도 몰라." 그 순간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꽤 먼 곳이었다. 지멘은 자 신이 던진 돌이 회오리에서 빠져나와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가의 지적이 맞았다고 말해주려던 지멘은 문득 하대를 들었다는 것 을 깨달았다. 하지만 분노가 치밀어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말투는 자 연스러웠다. 지멘은 억지로 화를 내는 대신 주의를 촉구하기로 했다. "겸손함을 보여라. 나가." 여자는 고개를 갸웃한 채 지멘을 바라보다가 곧 미소를 머금었다. "아아, 그래. 정말 레콘과 똑같구나." "레콘과 똑같다니. 나는 레콘이다.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여자는 미소를 거두었다. 지멘은 자신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짓는 표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군. 네가 내 추측과 다른 인물이거나, 그렇잖 으면 네가 네 정체를 알지 못하거나. 둘 다 가능성이 충분하군. 일단 묻겠어. 너는 용이 아니야?" 지멘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력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여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용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 "그거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여자는 두 손을 조금 펼쳐보이며 말했다. "너는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 거야. 내 말을 잘 생각해봐. 용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 그러니까 용은 나가나 인간, 도깨비, 혹은 레콘이 될 수도 있지. 물론 보통 레콘보다 훨씬 큰 레 콘이 될 수도 있어." 지멘은 경악했다. 여자의 말대로였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용이라면 당연히 선민 종족이 될 수도 있다. 여자는 과거를 회상하듯 말했다. "아스화리탈이 뿌린 포자에서 두 그루의 용화가 발화했어. 황제가 그 중 하나를 원했지. 황제는 물론 용인이 될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그녀는 그것을 자기를 도울 존재로 키워낼 거라고 닐렀어. 나는 두 번째 아스화리탈 같은 것을 원하는 거라면 주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 다. 아스화리탈 같은 힘은 불행을 부르지. 사람이 키워냈기에 아스화 리탈은 무엇보다 무서운 용이 되었어. 두 번 다시 그런 것이 이 하늘 을 날아서는 안돼. 하지만 황제는 아무도 용이라는 것을 알 수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어." 아무도 그것이 용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용을 선민 종족의 모습으로 키워낸다면. 그것도 놀라운 발언이었지만, 지멘은 다른 종 류의 충격도 느꼈다. 황제를 이렇듯 평이하게 부르는 나가 여자는 누 구인가? 지멘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가를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지?" 여자는 과거의 깊은 울림으로 말했다. "나는 쉬크톨을 버린 암살자며 왕위를 버린 왕이다. 내 본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으니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사모 페이라고 불러야겠군." =============================================================== 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11.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 1 ……바둑판은 차려졌고 사어가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하 는 일만 남았다. 산공부차사 파라말 아이솔은 아무 말이든 시험삼아 해보라는 뱀부리미의 요청에 따라 말했다. "바둑에 사용되는 돌은 두 가지죠. 흰 돌과 검은 돌." 뱀부리미는 파라말의 말을 사어로 바꿔 미라그라쥬로 보 냈다. 조금 후 뱀들은 미라그라쥬에서 온 아르키스 대수호 자의 대답을 몸으로 표현했다. 뱀부리미는 그것을 읽었다. "아니오. 바둑에 사용되는 돌은 361개입니다. 패싸움이 많다면 더 늘어날 수도 있고." 파라말은 그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대국이 시작된 것을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미라그라쥬에 있던 아르키스 대수 호자는 상대방이 첫수부터 장고를 하는 것인가 의심했다. - 어느 해, 비스그라쥬에 있던 아라짓 제국의 산공부차사 파라말 아이솔과 미라그라쥬에 있던 도시연합의 대수호자 아르키스 사이에 있었던 대국에서. 근심 섞인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다미갈 카루스 부위는 짧은 외 침을 듣고 아래쪽을 보았다. 그의 상관이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카 루스 부위는 걷어올렸던 줄사다리를 아래로 내렸다. 니어엘 헨로 수 교위는 날렵하게 줄사다리를 붙잡고 망루 위로 올라왔다. 카루스 부 위는 손을 붙잡아 수교위를 망루 위로 끌어올렸다. "아래에서도 잘 보이실 텐데 어쩐 일로 올라오셨습니까?"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줄사다리를 오르느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 로하며 말했다. "물론 귀관을 보기 위해서." "말씀하십시오." "애들 분위기가 수상하다. 설명해." 카루스는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 했던 일이 어느새 중대장의 귀까지 들어갔다는 사실에 난감함을 느꼈다. 수교위가 이렇듯 찾아왔으니 사 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3소대 2반장 릭 몰테이 아십니까?" "입이 가볍지." "정확하십니다. 바로 그 입이 문제입니다. 어제 석식 시간에 발케네 것들은 빠지라는 식으로 큰 소리로 떠들었나 봅니다. 그런데 석식을 마치고 나가던 3소대 1반장 소람 퍼기스가 그것을 들었습니다. 소람 퍼기스는 발케네 출신이고, 지난번 중대 체육 대회의 비각술 우승자 입니다." 니어엘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 가벼운 입에 무거운 혹을 달아줬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 아." "다행히 릭 몰테이가 재빨리 몸을 피했습니다. 퍼기스도 처음에는 그 사건을 확대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몰테이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가시를 세운 모양입니다. 그러니 퍼기스도 체면이 깎 이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몰테이를 손봐줘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대치 상태입니다. 몰테이 쪽 녀석들이 많긴 하지만 거긴 잔챙 이들이 좀 섞여 있습니다. 반면 퍼기스 주변에 있는 녀석들은 진짜배 기들이지요. 하지만 진짜 문제는 3소대장 가리아 릿폴입니다." "뭐가 문제지?"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녀를 타이르면서도 소대 운용에 간 섭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았나?" "릿폴 부위는 군단 문화에 익숙하지요. 독립 중대에서는 부위도 마 냥 놀 수는 없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시기가 괜찮 다면 그 점을 천천히 가르쳐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니어엘 헨로는 카루스 부위가 왜 말끝을 흐리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카루스가 바라보던 하늘에 그 대답이 떠있었다. 니어엘은 하늘을 바 라보았다. 광활한 하늘의 주인인 태양이 오늘처럼 볼품없어 보인 적도 드물다. 태양은 하늘누리의 거대한 지느러미 끝에 끼인 조그마한 가락지처럼 보였다. 며칠 전 홀연히 나타난 제국 수도는 나나본의 상공에서 그 거체를 멈췄다. 그 시각 나나본에서 일어났던 소동을 니어엘은 되새기기도 싫었다. 무스키 드레 태수는 침착한 인물이었고 자신이 하늘누리가 출동해서라도 교정해야 할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태수의 침착한 태도를 궁지에 몰린 사람의 자포자기로 해석했다. 태수관에 파견나가있던 부하로부터 사람들이 태수를 붙잡아 사형(私刑)하려 한다는 첩보를 접했을 때 니어엘은 웃 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가까스로 제 시각에 도달하여 태수를 구출한 니어엘은 소동을 일으킨 나나본 사람들을 몹시 꾸짖었다. 드레 태수 는 아무 잘못이 없으며, 만에 하나 그에게 부덕한 면이 있다면 하늘 누리 대신 사자패주가 오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는 니어엘의 설명은 사람들을 납득시켰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돌아갔고 드레 태수는 화를 내지 않았다. "누군들 저 광경을 보고 침착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사람 들은 규리하에서 일어난 일을 좀 지나치게 전해들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고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동자들을 엄중히 벌하십시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태수님. 보십시오. 머리 위에 제국 수도가 떠있습니다. 폐하께서 내려다보시는 이 땅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것은 태수님의 의무입니 다." 무스키 드레 태수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니어엘의 조언을 받아들 였다. 몇몇 극렬 분자가 태수관으로 끌려와 태수 모독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머리 위에 제국 수도가 떠있는데도 엄격한 신상필벌을 행하 는 태수를 보자 사람들은 태수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 었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나고 밤 동안 머리를 식힌 후에는 하늘누리 의 모습이 태수의 위엄을 돋보이게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피 지배자들에게 구타당할 뻔했던 무스키 드레 태수는 불과 하루 만에 완전히 뒤바뀐 사람들의 태도, 즉 공포에 가까운 경애를 보내는 사람 들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하늘누리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 평화는 없다. 공교롭게도 그 시각 니어엘의 중대는 하늘누리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몇 시간 만 지나면 움직일 그림자가 니어엘을 심란하게 하고 있었다. 중대를 덮고 있는 하늘누리의 그림자는 중대에 만연한 불안한 기류를 시각적 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불행하게도 중대원들의 판단은 나나 본 사람들의 성급한 판단보다 훨씬 사실에 가까웠다. 전쟁, 발케네와 의, 충격적인. 가리아 릿폴 부위는 그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전 쟁이 발발한다면 부위는 부위답게 돌격해야 한다. 가리아 릿폴은 이 미 삶에 대한 애착을 의식 밖으로 쫓아내는 단계로 접어들었을 것이 다. 그런 자기 조정에 들어간 부위에게 소대 관리에 힘쓰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혼란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카루스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 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니어엘 헨로의 고민이기도 하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직 가슴으로 받 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는 자신의 중대가 전쟁에 투 입될지 그러지 않을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발케네의 접경 지대에 주 둔하고 있는 그녀의 중대는 발케네 국경수비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국경 돌파에 그녀의 중대가 기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다르게 살펴보면 나나본의 지역민들과 친숙한 그녀의 중대는 효과적 으로 나나본 수비를 담당할 수 있다. 배후 수비를 위한 효과적인 병 력이라는 것이다. 전쟁 상황에 대비한 임무가 규정되어 있다면 니어엘은 고민할 필요 가 없을 것이다. 도시연합과 마주하고 있는 남부의 제국군이라면 그 것은 당연히 규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전쟁 발발 시 최우선 목표와 우선 목표, 그리고 차선 목표까지도 상세히 기록된 지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중대는 시련과 마주하고 있는 것 이 아니다. 제국군은 제국내 영주와의 전쟁을 상정한 작전 계획을 명 문화해둘 수 없었다. 귀족원으로부터의 격분에 찬 항의를 감당할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중대 지휘관으로서 니어엘 헨로의 임무는 어디 까지나 나나본 태수와 협조하여 국경 지대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다. 절대로 발케네 공격의 최선봉 부대가 아니다. 하지만 발케네 출신자들과 함께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떠들어대는 릭 몰테이 같은 자를 보면 알 수 있듯 중대의 의무에 모 종의 변경이 가해질 거라 예측하고 있는 중대원들은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군인들은 전쟁이 직업이고 돈벌이다. 가 장 강력한 승진 기회이기도 하다. 어차피 살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며 돈을 받는다면 이왕이면 보수가 더 두둑한 곳에서 곡예를 피우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생각, 저런 추측, 그런 망발 따위를 하고 있는 중대원들을 안 정시키려면 니어엘 헨로는 중대의 전망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니어엘은 아직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 했다. 그녀의 임무에 변화가 생겼다는 통보도, 현재의 임무를 계속 유지하라는 통보도 없었다. 하늘누리는 그저 나타나서 고요히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을 비좁게 만드는 그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시각 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니어엘은 답답한 기분에서 말했다. "몰티에와 릿폴은 이미 전쟁 준비중이군. 자네는 전쟁에 나가고 싶 나?" 카루스는 조금 뜸을 들이고서 말했다. "출전하지 마십시오." 니어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엉뚱한 대답을 하는 부하 장교를 바라 보았다. 카루스가 말했다. "수교위님의 동생이 저곳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동기를 의심받을 테니 공을 세울 수 있는 자리에는 가지도 못할 겁니 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보답 대신 의심이나 실컷 얻게 될 겁니다. 그러면 중대원들은 그들대로 불만을 느낄 테고 사기가 말도 아니게 될 겁니다. 최악의 경우 수교위님은 진짜 유혹을 느끼게 되실지도 모 릅니다." "상관의 군기를 의심하다니, 괘씸하군." 카루스는 싱긋 웃었다. "무슨 말이든 다 받아주시는 상관을 모시고 있는 행운을 즐길 따름 입니다." "관용에도 한계가 있다. 군인에게 싸우지 말라는 말은 너무하지 않 아?" "훌륭한 군인이라면 명령을 들을 귀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손만 가 지고 있으면 됩니다. 훌륭한 군인의 귀와 손 사이에는 나가들처럼 심 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군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런 군인은 전부 남부에 가있나 봅니다." "군인도 사람이라는 건가?"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잖으면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니어엘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20년 근속 휘장을 가지고 있는 부 위의 입에서 사람이기 때문에 싸운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예상 키 어려운 일이었다. 문득 니어엘은 카루스 부위에게 극히 받기 어려 운 선물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니어엘은 몸을 옆으로 조금 돌렸다. 지평선 가까이 까마득히 먼 곳 에 발케네의 땅이 조금 보였다. 땅과 하늘 사이에 끼여있는 흐릿한 선을 바라보며 니어엘은 말했다. "카루스 부위. 그것은 자네나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나나본 수비에 우리 중대보다 적합한 부대는 없습니다. 진격에 앞 서 배후를 살피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뭘 살핀다고?" "예?" "카루스 부위. 하늘누리의 배후엔 아무 것도 없다. 허공뿐이야." 카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니어엘은 망루의 난간을 움켜쥔 채 물끄러 미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영내를 이리저리 오가는 병사들의 모습이 분주하다. 이 차가운 북부에서 봄은 달력 상에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병사들의 움직임에서는 겨울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니어엘은 몸을 돌렸다. 부위를 똑바로 향한 수교위는 손을 들어 부 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뜻밖의 행동에 카루스는 주춤했다. 니 어엘은 빙긋 웃었다. "고마워. 하지만 나는 이 중대의 모든 얼간이들처럼 폐하의 병사 다." "그렇습니까?" "그렇다." 니어엘은 망루 가장자리로 성큼 걸어갔다. 줄사다리를 잡고 내려가 던 니어엘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릿폴 부위는 내가 만나보겠다. 자네는 상관 걱정 그만하고 다른 소 대장들 단속이나 해줘. 군인은 내일 전투가 벌어질 것처럼 먹고 백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자야 한다. 그렇게 해." 니어엘의 모습이 줄사다리를 따라 아래로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카루스 부위는 난간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상념에 잠겼다. 기유 구마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서류를 바라보 았다. 지극한 정성으로 기원하면 종이 위의 글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 다고 믿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 유는 종이 위의 글자 대신 그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백작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몽화각에 소개 명령을 내리시는 것 같군요?" 데라시는 에두르지 않고 말했다. "그런 명령입니다." 단도직입적인 대답에 당황한 기유는 다른 사람의 팔을 빌려온 사람 처럼 행동했다. 두 팔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하는 기유를 보며 데라시는 다음 말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상식적인 대답 은 이런 것이다. 제국 정부와 하늘누리를 위해 봉사하고 있지만 몽화 각은 하늘누리 산하의 기관은 아니다. 몽화각을 폐쇄할 수 있는 것은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뿐이다. 따라서 이 명령서는 원인무효 다. 기유가 말했다. "딱정벌레들에게 안된 일이군요." 데라시는 생각했다. 이것이 도깨비다. "유수부의 갑충사들은 당신들의 도움이 없어도 딱정벌레들을 잘 관 리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듣기로 갑충사들 중에는 당신들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뭐, 사실 이곳의 갑충사들은 어지간한 도깨비들보 다 비행 경험이 더 많은 편이지요. 밥 먹고 하는 일이 날아다니는 것 이니까요. 하지만 좋은 기수가 곧 좋은 사육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요. 백작님. 그리고 좋은 의사와는 거리가 훨씬 멀 겁니다." "딱정벌레들이 갑자기 단체로 병에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단체로 전쟁에 나가잖습니까." 데라시는 생각했다. 이것이 몽화각의 도깨비다. 데라시는 입을 다문 채 덩치 큰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기유는 어눌한 말투로 웅얼거렸다. "창칼이 부딪히는 곳은 땅 위라고 해도 화살은 하늘까지 솟아오르지 요. 딱정벌레의 껍질이 단단하긴 하지만 크기는 지나치게 큽니다. 화 살 피하기에는 불리한 조건이지요. 어, 발케네에 좋은 궁사가 한 명 도 없지는 않을 테고요." 발케네라는 지명까지 거론한 것은 실언일 수도, 실언하는 척하는 것 일 수도 있다. 혹은 아예 눙치는 짓은 집어치우고 깨놓고 말하자는 압박일 수도 있다. 데라시는 냉엄하게 말했다. "숙고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하늘누리를 떠나십시오." 기유는 상심한 얼굴로 말했다. "백작님. 그렇게 큰 전쟁이 됩니까?" 데라시는 그 말을 못들은 척하기로 했다.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 았다. "거기 보면 적혀있습니다. 기한은 보름입니다. 보름 후에도 여전히 하늘누리에 남아있다면 강제 퇴거를 실시하겠습니다. 몽화장 모란 기 픈골에게 정확히 전달하십시오." 기유는 영리했지만 또한 어진 도깨비이기도 했다. 그는 데라시를 더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고개를 꾸벅하고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도깨비 를 보면서 데라시는 팔을 쓸어내렸다. 비늘이 손바닥 아래에서 쓸리 는 느낌이 간지러웠다. 서신에는 어떤 설명도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데라시가 몽화장에게 보내는 서신은 종이가 아닌 기유 구마리 자신이다. 기유는 데라시가 별 특색없이 끼워넣은 '정확히'라는 말을 놓치진 않을 것이다. 기유 는 정확하게 살피고 정확하게 보고할 것이다. 데라시가 막대한 유혈 을 예상하고 있음을, 그래서 피에 놀란 도깨비들이 난동을 부릴까봐 아예 하늘누리에서 쫓아내는 작업에 착수했음을. 데라시는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꺾었다. 무익한 전쟁이다. 하늘누 리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는 규리하 전쟁으로 이미 충분하다. 발케네를 초토화시키는 것은 무익한 희생이다. 그러나 황제는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데라시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의 대담을 떠올렸다. 발케네 진공 계획을 검토하라는 데라시의 요청에 시허릭은 노골적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태위도 안계시고 대장군도 안계신데……'라고 말끝 을 흐렸다. 상장군까지 진급한 군인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야망이 없거나 군인 정신이 부족한 인물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면 능 력이 출중한 것이 그의 문제였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이것이 역사의 분수령이 될 전쟁임을 간파한 시허릭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승 리할 경우, 그 다음은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 데라시는 비늘 서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데라시 는 원시제를 떠올렸다. '당신의 나날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었겠지요.' 원시제가 붕어했을 때 데라시는 심장을 가지고 있는 애송이였다. 심 장을 적출하지 않은 나가들을 집밖에 내보내길 꺼리는 나가의 전통에 도 불구하고 데라시는 한 번 원시제를 목격할 뻔했다. 황제가 그의 집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황제를 경시하던 나가들의 풍 조에 젖어 덩달아 황제를 시시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데라시는 그 기 회를 낭비했다. 그가 접한 것은 원시제의 니름 뿐이다. 시시한 사람 이지만 찾아왔으니 한 번 봐준다는 오만한 기분으로 데라시가 일층에 내려갔을 때 황제는 이미 문간에 서있었다. 데라시는 그의 어머니에 게 니르는 황제의 니름을 잠깐 들을 수 있었다. [쓸만한 아이가 그 애뿐이라면, 그 애를 받겠다. 소메로. 준비시키 거라.] [폐하. 우리 가문이 언제까지 북부에 가문의 일원을 바쳐야 합니 까?] [너는 가문을 버리지 않았느냐. 소메로 투나.] 무슨 니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예의 바른 소년이었던 데라시는 엿듣 는다는 것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을 때 이미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간에 서있는 것은 가주인 그의 어머니뿐이었다. 데라시는 가주에게 예의를 표시했지만 가주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데라시는 황제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 다. 그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것이다. 가주는 심장을 적출하면 출가 외인이 될 남자가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그에게 직접 가르치기 시작 했다. 처음엔 당황하고 거부감을 느꼈던 데라시는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새로 알게 된 것들에 매혹되었다. 그리하여 데라시는 자신이 원시제와 남매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인간들은 사촌이라고 표현한다. 원시제의 어머니가 내 자매였으니 까.] [하지만 저는 데라시 투나잖습니까. 가주님. 폐하의 존함은 그리미 마케로우인데요.] [나는 원래 소메로 마케로우였다.] [네?] [나는 하텐그라쥬의 소메로 마케로우였다. 내가 소메로 투나가 된 것은 2차 대확장 전쟁이 끝난 후 비스그라쥬로 와서 전쟁 때 대가 끊 어진 투나 가문을 대신 이었기 때문이다.] 놀랄 만한 이야기를, 가주는 꺼리낌 없는 태도로 닐렀다. 그것은 어 쩌면 음모와 야사, 은밀한 비밀 따위에 꼼짝못할 나이였던 데라시를 유혹하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주의 속마음이 무엇이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데라시는 그 모든 것에 놀라고 열광했다. 그리고 심장을 적출한 후 더 이상 투나라는 성을 쓸 수 없게 된 데라시에게 주어진 것은 비스그라쥬 백작이라는 지위였다. 데라시는 놀라지 않았 다. 대신 기다리던 것을 받는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물론 그 즈음 황 제에 대한 그의 평가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원시제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파괴된 세상을 재수 좋게 차지한 모험가가 아니라 위대한 제 국의 시조였다. 그러나 제국 정부를 위해 본격적으로 일하면서 데라시는 자신이 원 시제를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보고 알게 된 제국은 충격적 인 것이었다. 데라시는 어떻게 한 사람이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원시제가 쓸 수 있었던 시간은 겨우 12년뿐이었다.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것을 만들려 했던 원시제에게는 역사의 가르 침이나 과거의 전범, 다른 이의 조언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자 신의 확신 외에는 어떤 보장도 없는 내일을 기다려야 했을 원시제를 생각하며 데라시는 비늘이 서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지도 없이 미답지를 걷는 것 이상이었다. 어떤 절벽이, 어떤 산맥이, 어떤 늪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간 어떤 모험가도 원시제가 감당해야 했 던 중압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시제에게는 수억 명의 삶에 대한 책임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원시제는 그것을 이룩했다. 그녀가 이룩한 것을 목도한 데라 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황제로 길러진 남동생이 아니었어. 그럴 수도 없지.' 스스로에게도 고백하기 어려운 소망이었지만 데라시의 가장 은밀한 마음 속에는 그런 희망이 있었다. 원시제가 다른 사람을 황위 계승자 로 지명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데라시의 내부에는 아쉬움이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제국을 본 후 데라시는 그런 희망의 가장 희미한 흔적마저도 마음 속에서 깨끗이 지워냈다. 이런 것을 만든 사람이 선 택한 후계자다. 그 선택은 반드시 옳다. 데라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드시 옳아야 한다.' 자신을 안정시킨 데라시는 손을 뻗어 서류들을 집어들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준비는 할 수 없지만 그곳까지 걸어갈 준비는 할 수 있 다. 발케네 공작 락토 빌파는 마지막 편지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허무 감을 담은 눈으로 편지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암살공의 집무실 책상 위에 가득 쌓여있는 편지들은 모두들 그의 봉 신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비슷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요약하면 다 음과 같다. '나에게 맹세한 충성의 이름으로 그대를 소환하노라.' 락 토의 속마음은 조금도 반영하지 못한 서신이다. 락토가 솔직함을 지 상 가치로 믿는 사람이었다면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을 것이다.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그곳에서 얌전히 내가 준 땅을 지키고 있어라.' 락토는 봉신들 중 아무도 믿지 않았다. 군사를 이끌고 도와주러 오 는 자가 있다면 그를 견제하고 감시하느라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게 될 테고, 그것은 암살공이 조금도 바라지 않는 낭비였다. 지나친 피 해의식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태도다. 막상 하늘누리의 거대한 모습이, 즉 제국의 압도적인 힘의 완벽한 상징이 하늘을 꽉 채우며 나타났을 때 휘하의 모든 이가 위엄과 용기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면 그것이 오히려 낭만주의자의 몽상일 것이다. 따라서 봉신들을 불 러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배신할 기회를 제공하는 우행일 뿐이다. 하지만 불러들일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봉신들을 소환하는 것은 군량과 군비를 가장 손쉽게 조달하는 방법이 다. 암살공은 '병사들의 건강 악화로 소환에 응할 수 없는 바, 대신 약소하지만 군량과 군비를 보내어 저의 한결 같은 충성심을 증명하고 자 합니다'라는 답장을 강렬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둘째, 암살공은 제국 곳곳에서 암중모색하고 있는 서약지지파에게 자신이 서약 안에 서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갑자기 문이 열려서 락토의 사고가 헝클어졌다. 문쪽을 보기도 전에 락토는 방문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방을 통고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인물은 암살성에 한 사람뿐이다. "접니다." 스카리 빌파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척척 걸어왔다. 락토는 아들이 의자를 꺼내 앉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말했다. "가서 문을 닫고 오너라." 스카리는 아버지가 고의적으로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에서 분노 를 느꼈다. 기를 꺾어놓겠다는 뜻이 엿보이는 졸렬한 방법이다. 물론 스카리는 그만큼 야비해질 수 있다. "야! 문 닫아!" 문 밖에서 시종이 나타나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스카리는 미간을 찡그리는 아버지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냈다. 암살공은 침착하게 말했다. "간 일은 어떻게 됐느냐." "도대체 왜 저를 그 애꾸눈 꼬마에게 보내신 겁니까? 설마 미인계입 니까? 그렇다면 아버지의 심미안을 의심할 수밖에 없군요." 이죽거리는 스카리에게 락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케네의 공작에게 개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개뿐이다. 닥치고 질 문에나 대답해라.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스카리는 '이 망할 노인네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락토는 아들의 눈과 코, 입매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치솟는 격분을 억누르며 락토는 더욱 차가운 눈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결국 스카리 가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난폭한 어조로 말했다. "제법 똑똑한 소리를 할 줄 아는 꼬마이긴 했습니다." "아실이 무슨 말을 했느냐?" "황제의 무력 시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락토는 의자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무력 시위?' 암살공 은 약간 성급하게 질문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지?" "저를 아시잖습니까? 그런 허풍에 겁을 먹을 것 같았으면 애초에 부 냐를 훔치지도 않았습니다. 황제는 발케네 남자를 대상으로 배짱을 겨루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배짱을 겨룬다고?" "가소롭지 않습니까? 하늘누리를 나나본에 이동시키면 아버지나 제 가 겁을 집어먹고 사과할 거라 믿다니, 현실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긴 그런 감각이 있었다면 충성 서약을 거부한다느니 하는 망발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이제라도 가르쳐주는 것이 좋을 겁니다. 자신이 누구의 양해 하에 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것인지. 규리하의 무사가 못 했다면 발케네의 도둑이 나서야지요." 일반적으로 암살공은 바보의 언행을 즐기는 편이었다. 만약 앞에 있 는 사람이 아들이 아니었다면 암살공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진지한 반응은 냉소에 찬 경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지함도 소중한 자원 이라 믿는 암살공이 보다 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반응은 무시였을 것 이다. 하지만 스카리 빌파는 그의 아들이었다. 그 사실은 냉소도, 무 시도 아닌 암살공 자신도 놀랄 정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암살공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와서 일어서라는 손짓을 해 보였을 때 스카리는 자신이 뺨을 맞을 것이라 상상하진 못했다. 그리 고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스카리는 한동안 그 사실을 받아 들이지 못했다. 뺨을 만질 생각도 못한 채 스카리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암살공의 대답은 두번째 따귀였다. 혀를 움직여 볼 안쪽을 핥아본 스카리는 피맛을 느꼈다. 그 순간 스카리는 짜증이 왈칵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도, 억울함도 아닌 짜증이었다. 스카리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이러십니까?" "이 바보 자식! 조그마한 계집애에게 그렇게 농락당하고도 자신이 바보가 됐다는 것도 모르느냐! 내가 창피해서 아실을 볼 낯이 없구 나. 이 멍청한 놈!" "농락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분노 때문에 암살공은 조리 있게 말할 여유도 끌어낼 수 없었다. "아실 그 괘씸한 것이, 그래, 너를 시험했구나. 귀중한 지혜를 나눠 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군. 그래. 판단할 자유가 있지. 시험 할 수 있지. 네가 얼간이라는 것을 알아낼 권한이 있지! 하지만, 제 기랄. 그것이 나를 이렇게 창피하게 만들다니. 내가 아들을 보낸 뜻 을 헤아렸다면 알아서 가르쳐주어야 할 것을…… 내 아들을…… 나 의……" "아버지!" "닥쳐라!" 스카리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암살공을 노려보았다. 암살공은 책상 을 짚으며 힘없이 의자 쪽으로 돌아갔다.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은 락토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스카리는 책상 앞에 우뚝 선 채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혀끝의 피맛이 입안 전체로 퍼졌다. 호흡을 고른 락토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것이 무슨 전쟁인지 알아야 한다." "알게 해주시죠." "이것은 일원주의자와 분리주의자의 전쟁이다." 스카리는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 쟁룡해의 포말 속에 흩어진 분리주의의 이름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락토가 말했다. "잘난 체하고 싶어서 황제에게 가르쳐주느니 어쩌느니 말했지만, 너 는 속으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 믿고 있겠지. 비셀스 규리하 와 엘시 에더리를 짝지어주고 싶어하는 황제는 네 행동에 박수를 보 낼 거라고 예상하고 있겠지. 하지만 황제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 는 없으니까, 마침 제국 수도는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이렇게 인상적인 무력 시위를 한 번 하는 거라고, 이것은 비용은 싸게 먹히고 감동은 큰 공연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스카리는 찔끔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락토는 황혼 같 은 눈길로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예고대로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밤처럼 차가운 말이었다. "바보들이 너를 위한 환영회를 준비하겠구나." "제가 왜 바보입니까?" "네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바보들의 만족 기준이다. 한 번에 한 가지만 고려할 수 있는 너와 달리 황제는 두 가지, 세 가지를 고려했다. 황제가 계획한 것은 엘시 에더리와 비 셀스 규리하의 혼례 준비이면서 동시에 발케네 진공의 명분 획득이 다." "황제가 발케네를 친다고요? 어림도 없습니다." "왜지?" "예?" "왜지! 설명해라. 규리하 전쟁 전에도 너처럼 말하는 자들이 있었 다. 발케네만 규리하로 바꿔서. 그들은 그 말로 규리하를 구하진 못 했다. 너는 네 말로 발케네를 구할 수 있느냐? 네 말이 얼마나 메질 이 잘 되어있는지 보여라. 네 말이 얼마나 담금질이 잘 되어있는지 보여라. 네 말에 얼마나 날이 잘 서있는지 보여라! 왜지? 왜 황제가 발케네를 치는 것이 어림도 없는 짓이냐! 말해!" "그렇게 다그치시는 건 제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뜻인데 제 가 왜 말해야……" "할 말이 없는 것이군." 스카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기 논리를 증명하는 방법 중에서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것은 하 지하의 수법입니다. 좀 더 나은 방법을 쓰시지요. 황제가 왜 발케네 를 친다는 것인지 직접 설명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물론 해주마." 그리고 락토는 설명했다. 그러나 스카리는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 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락토가 한 말은 그가 아는 아버지가 할 말이 아니었다. 스카리는 처용 산맥과 후사린강 사이의 모든 땅이 하 나의 가치관을 따르고 라호친에서 하텐그라쥬까지의 모든 도시가 하 나의 전망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왜 악몽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 발케네에서 일어나는 일의 확장에 불과하지 않은가? 스카리는 아버지에게 그렇다면 발케네의 통치에 아버지 이외의 의지가 개입하 게끔 허락하고 싶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또한 스카리는 각기 무게와 길이가 다른 서까래를 억지로 이어 만든 지붕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무너져내릴 것은 자명하지 않냐는 비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는 그 비유에 대해 설명했다. "원시제는 제국을 만들었다. 아무도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위대한 제국이지. 그 업적은 최상의 언어로 칭송되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원시제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한계 가 있었다. 12년이라는 시간 말이다. 만약 선황에게 그 두 배의 시간 이 주어졌다면 제국은 완벽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일지 상상할 수 없지만, 그거야 아라짓 제국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다. 선황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국에 완전성을 부여했 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모든 권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죽음 때문 에 제국은 최고의 미완성작으로 남게 되었다. 건물에서 미관이나 편 의성만큼 중요한 것은 내구성이다. 그런데 제국이라는 이 아름다운 건물에는 그 마지막 요건이 결여되어 있다. 그 때문에 치천제는 끝없 는 유혈로 건물의 균열을 봉합할 수밖에 없단 말이다. 원시제의 위대 한 작품은 결국 피를 마시는 새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피 를 마셔야 하는, 그래서 피비린내를 풍기는 새 말이다." 스카리는 뚱한 얼굴로 말했다. "피를 마시는 새가 뭡니까?" "키탈저 사냥꾼의 이야기도 모르느냐?" 스카리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옛이야기라니. 그의 아버지라는 책 은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이 났다. 지금 스카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지나 치게 긴 후기일 뿐이다. "이제 알았습니다." "뭘 알았다는 거냐?" "아버지께서 하인샤 대사원에 들어가셔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 게 되었습니다." 락토는 숨이 막혔다. 가슴을 움켜쥐지 않은 것은 발케네공의 자존심 이다. 그는 돌처럼 굳은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무표정을 또 다른 종류의 냉소로 생각한 스카리는 모진 말들을 꺼냈다. "그곳의 착한 중들이라면 아버지의 희떠운 소리도 자상하게 들어주 겠지요. 가장 바람직한 청중입니다. 좋은 모범을 보인 많은 선현들의 예를 따르시지요. 다만 라수 규리하의 예는 따르지 않으시는 편이 좋 겠습니다." "그리고 네가 발케네의 공작이 되는 거냐?" "공작부인은 부냐에게 가장 어울리는 지위입니다. 사실 지나치게 긴 시간 동안 발케네에는 안주인이 없었지요. 늙은 홀아비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해야겠지요." "탈옥수가 발케네 공작부인이 된다?" 락토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카리는 그것을 조롱으 로 받아들였다. "끝까지 이러실 겁니까! 저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제 여자를 그런 식으로 비웃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스카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명확하지만 그가 끝장낸 것은 대화였다. 스카리는 문가로 휙 걸어갔다. 문을 연 스카리는 밖 으로 나가기 전에 난폭하게 말했다. "제발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문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락토는 그 문을 매섭게 노려 보았다. 몇 분 후, 꼼짝도 않고 앉아있던 암살공이 부스스 일어섰다. 락토 빌파는 스카리가 앉았던 의자로 다가갔다. 의자를 집어든 락토는 잠 시 방향을 가늠했다. 그날 오후 암살성의 사람들은 암살공의 집무실 창문을 부수며 튀어 나온 의자에 도대체 어떤 통치 철학이 담겨있는지 고민해야 했다. 부냐 헨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백화각의 냉동실로 돌아와 있었다. 암흑과 광활함, 즐비한 선반들 때문에 알아차린 것은 아니다. 부냐는 익숙한 추위로 그곳이 냉동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 다. '나는 분명히 스카리 빌파와 함께 백화각을 빠져나와 발케네로 갔는데……' 소름끼치는 깨달음. 모든 염사와 염사보조인들이 경고하는 재난이 부냐에게 찾아온 것이다. 어둡고 넓은 냉동실을 배회하다가 길을 잃 고, 반쯤 졸면서 냉동실 안을 정처없이 걸어다니지만, 추위와 암흑에 마비된 그녀의 머리는 위험을 경고하는 대신 이루어질 리 없는 환상 을 제공하는 배신을 저질렀다. 부냐는 자신이 죽음에 목까지 잠겼었 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저리를 쳤다. 부냐는 황급히 출구를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저 선반 뒤를 돌아가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수렴하는 선반의 행렬뿐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얹혀있 는 관들. 추위와 허기 속에서 비틀거리던 부냐는 손을 옆으로 뻗었 다. 그녀의 손이 닿은 곳은 선반이 아니라 관이었다. 부냐는 황급히 손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부냐의 손바닥은 차가운 관에 달라붙어 있 었다. 손바닥이 찢어지는 통증에 부냐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입밖 으로 나오는 소리는 그녀 자신의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애처로 운 신음이었다. 손바닥을 떼어내지 못하면 냉동실 안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수밖 에 없다. 부냐는 다시 손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녀의 얼어붙은 팔 을 움직인 힘은 작았고 손바닥의 통증은 엄청나게 컸다. 부냐는 자지 러지듯 주저앉았다. 관에 달라붙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부냐는 팔 을 한껏 쳐든 자세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깨가 빠지는 것 같 았다. 주루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놀랍도록 차가웠다. "헨로?" 부냐는 깜짝 놀랐다. 염사장 두이만 길토의 목소리였다. "헨로? 헨로. 어디 있는 거야?" 염사장은 냉동실에 들어간 부냐가 나오지 않자 직접 찾으러 들어왔 다. 부냐는 기뻐하며 말했다. 여기 있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얼어 붙은 목은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부냐는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관에 붙어있는 손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이 번에야말로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팠다. 부냐는 서럽게 울었다. 염사장 이 저기 있는데. 그녀가 흘린 눈물이 얼어붙었다. 말을 할 수 없었 다. 볼에 얼어붙은 눈물의 더께가 쌓였다. 얼굴에 쌓인 얼음 때문에 이젠 입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저 앞에서 불빛이 움직였 다. 얼어붙은 눈물과 암흑 때문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적었지만 부냐 는 그것이 등불을 들고 있는 두이만 길토임을 깨달았다. 여기 있어 요. 여기 있어요! 얼어붙은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헨로, 대답해!" 두이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불빛은 멀어졌다. 두이만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부냐는 미칠 것 같았다. 나가들처 럼 니를 줄 안다면, 그렇다면…… [여기 있어요!] 멀어지던 불빛이 멈추었다. '내가 니른 것일까?' 얼어붙은 눈물은 어느새 부냐의 턱과 가슴 사이에 기둥처럼 늘어서 있었고 그래서 부 냐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부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니름뿐이 었다. 부냐는 결사적으로 닐렀다. [제발, 여기 있어요. 염사장님. 여기에요!] 놀랍게도, 불빛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주춤거리며 움직이던 불빛 은 조금 후 확신을 가진 듯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부냐는 불빛 아래 에서 다가오는 발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헨로? 거기야?" 주저앉은 그녀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불빛이 다가왔다. 그 리고 그 다리는 점점 뚜렷한 것이 되었다. 얼굴과 상체에 얼어붙은 얼음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던 부냐는 두이만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닐렀다. 맞아요. 여기에요. 그래요. 불빛이 그녀의 앞쪽에 도달했다. 그녀의 눈 앞에 서있는 두 개의 무릎을 보며 부냐 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환희를 느꼈다. 불빛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안도감이 찾아들었 다. 살아난 것이다. 두이만의 얼굴이 나타나길 기다리던 부냐는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두이만이 어떻게 니름을 들은 것일까? 니름 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위에서 내려온 것은 비늘에 덮인 두이만의 얼굴이었다. 두이만이 닐 렀다. [헨로.] "으아아아!" 부냐는 눈을 뜨면서 비명을 질렀다. 벌떡 일어서려는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부냐, 정신 차려!" 부냐는 도리질을 하며 두 팔을 내저었다. 이건 안돼, 이럴 수는 없 어. 그러나 목소리는 다시 외쳤다. "나야! 스카리야. 왜 이러는 거야? 정신 차려!" 부냐는 몸부림을 멈췄다. 가까스로 진정한 그녀의 눈에 스카리의 놀 란 얼굴이 들어왔다. 파리조의 암살성이었다. 부냐는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냉동실의 차 가운 바닥이 아니라 의자 위임을 깨달았다. 목과 겨드랑이는 땀으로 미끈거렸고 지독하게 차가웠다. 부냐는 소름이 돋은 두 팔을 내려다 보다가 다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 "그래. 나야. 악몽을 꾼 모양이군. 이제 괜찮아." "스카리…… 스카리?" 스카리는 웃으며 부냐의 손을 붙잡았다. 부냐의 손을 자신의 뺨에 대고 누르며 스카리는 말했다. "괜찮아. 나쁜 꿈이었어." 부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스카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스카리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고는 손수건을 꺼냈다. 부냐는 스카 리의 손에 쥐어진 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입술을 모아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수건을 펼쳐 부냐의 얼굴을 닦 았다. 손수건이 닿은 순간 부냐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굉장히 나쁜 꿈이었나 보군. 미안해." 부냐는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스카리가 설명했다. "더 빨리 구해냈어야 하는 건데. 백화각에서 몸이 너무 상한 거야. 젠장. 파리조의 날씨는 치병에 아무런 도움이 안돼…… 아, 그래. 선 조해 쪽에 별장을 만들도록 하겠어. 공작부인이라면 자신의 별성을 가져야겠지." 부냐는 스카리가 말하는 것이 좋았다. 비록 그 뜻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육성이었고 니름이 아니었다. 스카리는 부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기대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세 좋게 외쳤다. "맞아! 부냐 헨로. 그대가 발케네 공작부인이 되는 거야!" 부냐는 스카리의 고함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이 울리는 것 같았다. 어두워지는 그녀의 얼굴을 본 스카리는 재빨리 말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 내가 당신 곁에 있는 한 당신은 세상에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고,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태양이 당 신을 경배하게 할 거야. 바다가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겠어. 당신은 모든 여인들 중의 여인이 될 거야……" 부냐는 스카리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육 성도 이제 충분히 들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온기였다. 정직한 체온. 부냐가 말했다. "스카리." "응?" 부냐는 더 말하는 대신 스카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스카리는 약 간 당황했지만 곧 자신을 끌어당기는 그 팔에 순응했다. =============================================================== 11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1-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3-23 조회수 : 1932 피를 마시는 새 11.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 2 주테카는 조약돌을 검지와 엄지 사이에 끼운 채 바닥에 쌓여있는 돌 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살피던 주테카는 결국 결심 을 한 듯 손에 있던 돌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돌무더기는 달각거 렸고 주테카는 긴장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살핀 보람이 있어 돌무더 기는 무너지지 않았다. 주테카는 조그마한 돌무더기를 흡족하게 바라 보았다. 주테카는 돌무더기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돌무더기가 박살이 났다. 튕겨져 날아간 돌이 나무들을 땅땅 때렸고 돌무더기 안쪽에 있던 돌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주테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는 다시 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준람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깃털을 부풀렸다. 깃털들 사이에서 조 약돌들이 후두둑 튀어나왔다. 몸을 툭툭 털면서 준람은 다섯 번이면 충분히 참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해라. 아프다." 주테카는 퀭한 눈을 들어 준람을 바라보았다. 준람 근처에 떨어져 있는 돌들을, 나무 반대편에 앉아있는 쵸지를, 그리고 으르릉거리며 투석기 탄환으로 쓰임직한 돌멩이들을 모으고 있는 론솔피를 본 주테 카는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쌓고 있던 돌무더기를 발로 밀었다. 준람은 론솔피에게도 말했다. "하지 마라." 론솔피는 주테카가 다섯 번 한 일이라면 자신도 그만큼 할 수 있다 는 일종의 만민평등 사상을 개진하려 했다. 그 때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조약돌의 비산을 피하고 있던 쵸지가 말했다. "누가 온다." 쵸지가 일어섰고 다른 세 명의 레콘들도 벌떡 일어섰다. 무의식 중 에 바닥을 찬 론솔피는 도끼창 자루가 떠오르지 않자 의아해하다가 곧 침울해졌다. 숲 사이에서 수레들이 나타났다. 수레들 주위에는 별다른 호위가 없었다. 맨앞쪽의 수레 옆에 있는 사람만이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 사람도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레콘들은 다른 종족에게서 공포를 느끼기 어려우며, 그 다른 종족이 손이 하나뿐이라면 공포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루시닌 수교위 또한 자신이 네 명의 포악한 레콘들을 겁줄 능력이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루시닌은 매섭게 노려보는 레콘들을 무시한 채 수레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는 한 손으로 수레에 담긴 무엇인가를 붙잡아 끌어내렸다. 곧 레콘들은 처참하게 두드려맞고 꽁꽁 묶인 대 장군의 몸종을 보게 되었다. "이레?" 준람의 말에 이레 달비가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은 두꺼비마냥 부 어 있어 거의 감겨 있었고 다른 눈도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변해 있 었다. 하지만 이레는 기세 좋게 몸을 일으켰다. 준람은 이레가 그러 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팔이 묶여있는 탓에 균형을 제 대로 잡을 수 없었던 이레는 채 반도 일어나지 않아 다시 고꾸라졌 다. 땅에 쓰러져 죽는 소리를 내는 이레를 보던 루시닌은 한손으로 사이 커를 뽑아들었다. 그 순간 론솔피는 주테카를 머리 위로 집어들었다. "허튼 짓하면 던진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던 주테카는 론솔피의 말을 듣고는 재빨리 무시무 시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쵸지는 커다란 벼슬을 끌어내려 론솔피 쪽 을 가렸고 준람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시닌은 조금 기가 막혔지만 이 가공할 투척 병기의 위협을 순순히 수용하는 편이 좋겠 다고 생각했다. 수교위는 충분히 세심한 동작으로 이레의 결박을 끊 은 다음 사이커를 도로 꽂아넣었다. 이레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루시닌은 수레를 끌고 있던 사람들에 게 신호를 보냈고 그러자 사람들은 수레를 놔둔 채 모여들었다. 루시 닌은 그들을 인솔하여 걸어갔다. 루시닌과 일꾼들이 숲 사이로 사라지자 쵸지와 준람은 이레에게 다 가갔다. 이레 또한 황급히 그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가주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가주님?" "아니, 그러니까 대장군님이오." "아, 엘시. 모르겠어. 따로 끌고갔거든." 이레는 도대체 레콘이 네 명이나 있으면서 어떻게 대장군 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냐는 눈으로 준람을 바라보았다. 준람은 창피스러운 표정 으로 이레를 외면했다. 쵸지가 설명했다. "그거, 소화차 말이야. 그것이 우리를 포위했어. 그 놈들은 엘시를 따로 데려가고 우리는 이렇게…… 음. 여기를 그러니까……" "늪지요." "……그래. 그 한가운데 가뒀어. 나는 이게 레콘만 빠져나갈 수 없 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너까지 집어넣은 것을 보니 인간도 제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인가 보군. 그런데 너는 어떻게 된 거냐?" 이레는 기운이 쭉 빠진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쵸지와 준람, 그리고 주테카를 내려놓은 론솔피도 바닥에 앉았다. 이레는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의 망고 군단에서 있었던 일을 죽 설명했다. "그리고 아까 그 나가 녀석이 저를 덮쳤습니다." "손이 하나뿐인 놈한테 당했나? 무슨 대장군 몸종이 그래?" "저를 잡느라 손을 하나 잃은 겁니다." "그래? 어떻게?" 이레는 아픈 눈두덩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소드락 먹고 덤비기에 포기한 척하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소드락 은 17분이 한계죠. 소드락의 효과는 놀랍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 다.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나가들이 소드락을 먹고 심하게 움직이면 약효가 떨어졌을 때 졸도할 수도 있습니다. 활동이 거의 없었다 해도 잠깐 동안의 무력 상태는 어쩔 수 없지요. 세심하게 보면 약기운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루시닌 수교위는 설마 인간이 그런 것을 알 리 없다고 생각해서 방심했겠지요. 그 때 한 방 먹이고 사이 커를 빼앗았습니다. 그 불쌍한 수교위는 제가 사이커에 익숙하다는 것도 짐작하지 못했겠지요. 재생시킬 수 있을 테니 부담 없이 잘랐습 니다." "그런데 왜 잡힌 거야?" "장소가 안 좋았습니다. 하필이면 군단 사령부였습니다. 저는 군단 전체가 이미 배신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더군요." 설명하던 이레의 앞에 주테카가 병을 하나 내려놓았다. 이레는 의아 한 얼굴로 주테카를 올려다보았다. 주테카는 수레들을 가리켰다. "저기 있더군. 먹을 것 실려있더라. 이거 술 같은데, 좀 마셔. 그래 야 할 것 같은 얼굴이군." 이레는 고맙다는 얼굴로 병을 열었다. 향긋한 술 냄새가 번져가자 주테카는 만족한 얼굴로 수레로 달려갔다. 그제서야 이레는 주테카가 병에 담긴 것이 술인지 물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에게 먼저 건넸음 을 알게 되었다. 이레가 핏 웃는 모습을 못본 척하며 주테카는 술병 의 주둥이를 깨물어 부수었다. 열린 부리 속으로 술을 콸콸 쏟아붓는 주테카를 보던 준람이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남쪽의 제국군 일부가 말썽을 부리고 있는 것 같 은데." 몸종은 단순한 하인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고위 인사의 지근거 리에서 그들을 보좌하는 몸종들은 주인의 업무에 꽤 익숙하고 또한 주인의 사회 관계를 흡수한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 정부의 동량으로 취급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레 달비 또한 대장군의 몸종이니 장차 제 국군에서 귀하게 중용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의 종형처럼 전투 분야 에 종사하기는 조금 어렵겠지만 제국군에 전투병만 필요한 것은 아니 다. 준람은 이레가 엘시에 버금가는 상황 파악을 해줄 수 있을 것이 라 믿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군의 반란은 아닐 겁니다. 베로시 토프탈 상 장군은 시모그라쥬 공작 팔디곤 토프탈의 조카입니다. 이 배후에 있 는 것이 시모그라쥬 공작이라고 판단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는 조금 전에 군단 전체가 배신했다고 말했잖아." "좀 창피스러운 이야기가 되겠군요. 제국군 전체에서 항상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시련과 마주하고 있는 남부의 제국군뿐입니다. 태위청에서는 군단의 장교들을 순환시키려 애씁니다만, 남부에서는 밀림과 나가에 익숙하지 않은 북부의 장교들을 꺼립니다. 그것은 당 연한 기피지요. 그러다보니 한계선 이남의 군인들은 계속 한계선 남 쪽에서만 돌게 됩니다. 순환 자체도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요. 아무래 도 사병화가 된 것 같습니다." 준람은 부리를 부딪쳤다. "군단이 사병이 되었다? 웃기는군. 그건 그렇다치고 이유는 뭐지? 황제의 대장군을 붙잡는다고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거지?" 이레는 어두운 얼굴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긴 시간 동안 술병 을 기울이고 있던 이레는 한참 후에야 그것을 내려놓고는 숨을 몰아 쉬었다. "미안합니다. 몸이 아파서. 음. 글쎄요. 주인님이 행방불명이 된다 면 시모그라쥬공은 공석이 된 대장군 자리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인 물을 천거할 수 있겠지요. 혹은 황제의 자리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고를 수도 있을 테고." 쵸지는 벼슬을 곧추세웠다. "황제의 자리?" 이레는 입 주위를 훔치며 말했다. "최악의 경우 반역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반역이라는 말의 어감이 좋았다. 그것은 두 억시니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어감과 비슷했다. 두억시니는 혼란이다. 두억시니는 귀납법의 적용을 거부한다. 모든 두억시니는 모든 두억시니와 다르며 그렇기에 그것이 두억시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을 잃은 이 가련한 종족은 보살펴줄 어떤 법칙도 가지지 못했기에 아무렇게나 존재한다. 거의 대부분의 역사에서 상종 할 수 없는 괴물로 기록되어 있는 이 기괴한 존재는, 하지만 단 한 번 역사의 중심에서 활약한 적이 있다. 모든 면에서 언어도단적 존재 였던 대호왕이 자신의 수호자로 선택했던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가 바 로 그들이다. 현재의 이십이금군은 이들을 기원으로 한다. 그리고 베 로시 토프탈이 구할 수 있었던 두억시니 자료는 대부분 대호왕의 이 십이 두억시니에 대한 관찰 기록이다. 두억시니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베로시는 그 기괴한 존재 에 매혹되었다. 단어에는 지시 대상이 따르는 법이지만 두억시니의 경우에는 그 방식이 독특하다. 두 사람이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 눈다면, 비록 그 털빛이나 크기 같은 것은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동물적이라 는 말은 고양이라는 말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도덕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동물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은 상대편이 기 민함과 직관적 행동에 대한 이야기로 잘못 이해하는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약간의 오해를 조정할 수 있다면 동물적이라는 말은 사 용할 수 있고 실제로 사용된다. 그런데 두억시니에 이르면 그 단어의 지시 대상은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두억시니는 이렇다, 혹은 두억시니는 저렇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두억시니는 모든 두억 시니와 다르므로. 두억시니의 그런 무규칙성에 매혹된 베로시 토프탈에게, 대호왕의 이십이 두억시니에 대한 기록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대호왕의 두억시니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좌우 대칭의 몸을 가지고 있었고 대호왕을 따랐다. 대호왕의 수호자로 선택된 존재들이 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특징이겠지만 베로시에게 그런 공통점은 매 우 두억시니답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베로시는 다른 자료들을 원 했다. 하지만 두억시니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별로 없었다. 흔 치 않은 우연으로 두억시니와 조우하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기록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관찰하기보다는 재빨리 피하는 쪽을 선 택했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상대에 대한 현명한 대 처법이지만 베로시는 그런 현명함 때문에 그 불성실한 기록자들을 용 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베로시가 더욱 끌리는 가설은 그들이 현명했다는 것이 아니 다. 그들이 무지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베로시를 한없는 흥분으로 몰아갔다. 즉 그들은 자신이 본 것이 두억시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두억시니에게는 어떤 규칙도 없다. 그것은 숲속에 서있는 한 그루 나무일지도 모른다. 발에 부딪히는 돌멩이였을지도 모른다. 불 가능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두억시니에게는 규칙이 없는데. 그러나 목격자들은 나무를 봤다거나 돌을 걷어찼다는 식으로 말할 것이다. 모든 것이 두억시니일 수 있다. 어쩌면 베로시가 앉아있는 의자가,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두억시니일지도 모른다. 대지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산처럼 생긴 두억시니일지도 모르고 개미굴을 향해 걸어가 는 개미떼 중에는 개미처럼 생긴 두억시니가 섞여있을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세상이 한 마리 두억시니일 수도 있고, 베로시 토프탈이 두억시니일지도 모른다…… 사고가 그 지점에 도달하면 베로시는 늘상 가슴이 쿵쿵 뛰곤 했다. 실재의 수수께끼를 살살 건드리고 있는 듯한 아스라한 고양감. 그러 나 해석은 불가능하다. 베로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좌 절감 속에서 베로시는 지극히 짧은 거리를 넘지 못하고 항상 좌절한 다는 느낌을 받았다. 베로시는 우물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저 우물이 두억시니일 수도 있고, 그 위에 덮여있는 뚜껑이 두억시니일 수도 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한 인간은, 어쩌면 두억시니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베로시는 자신의 악덕에 매료되는 버릇은 없었지만 짓궂은 즐거움은 느꼈다. 베로시가 신호를 보내자 힘센 병사들이 무거운 뚜 껑을 들어 우물 옆에 세웠다. 굉장한 악취에 베로시는 코를 틀어막았다. 다른 병사들 또한 그렇게 했다. 그 냄새만으로도 우물 속에 갇혀있는 엘시 에더리가 어떤 꼴일 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물 속에서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심하게 울리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이 쇠약해져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베로시는 손을 옆으로 내밀었고 그러자 병사는 등롱을 건넸다. 베로시는 우물가로 다가가 안쪽으로 등롱을 비췄다. 불빛이 있었지만 우물 속의 정경은 한번에 알아볼 수 없었다. 우둘투 둘한 돌의 질감이 시야를 혼돈스럽게 해서 제대로 초점을 맞출 수 있 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래쪽에서 보는 이에겐 하늘을 배경 으로 한 베로시의 얼굴이 잘 보이는 듯했다. "베로시인가?" 엘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을 때 베로시는 그 웅웅거리는 목소리에 의해 간신히 엘시의 위치를 찾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 기 때문에 엘시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모습을 제대로 파 악하는 것은 시간이 조금 걸렸다. 고개를 한껏 쳐든 채 그녀를 바라 보고 있는 것은 턱수염과 헝클어진 머리로 엉망이 된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똑바로 서있기도 힘든지 엘시는 오른팔을 아 래로 늘어뜨린 채 구부정하게 서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쾌해 보이진 않는군요. 대장군님." 그 순간 엘시의 허리가 튕겨지며 아래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던 그의 오른팔이 갑자기 치솟아올랐다. 무엇인가가 그의 손을 떠나 베 로시의 얼굴로 날아왔다. 베로시는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차갑고 찐득찐득한 무엇인가가 얼굴에 달라붙는 것을 느낀 베로시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얼굴을 감싸쥔 채 우물 옆으로 물러나던 베로시는, 문득 입안에 기묘한 맛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베로시는 눈을 떴 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묻어있는 것을 보았다. 짙은 갈색의 똥이 잔뜩 묻어있었다. 베로시는 비명을 질렀다. 병사들은 당황하여 물을 뜨러 달려가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신경질적 인 웃음을 터뜨렸다. 베로시는 두 눈을 흡뜬 채 웃는 병사를 찾아 두 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을 때마다 턱과 목 사이 가 미끈거렸고 가슴께는 차갑게 젖어들었다. 베로시는 눈을 감았다. 그 때 병사들이 돌아와 외쳤다. "구, 군단장님. 물입니다. 물 가져왔습니다." "부어! 부으라고!" 병사들은 황급히 들고 온 물동이의 물을 베로시의 머리 위에 쏟아부 었다. 베로시는 얼굴과 머리를 문지르려 했지만 손끝에 닿는 물컹물 컹한 느낌이 죽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베로시는 다시 비명을 질렀 다. 병사들은 당황해하다가 결국 계속해서 물을 붓기로 했다. 여러 개의 물동이가 빈 다음 베로시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온몸 에서 똥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으로 우물가에 다가갔다. 아래쪽에서 묘하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쾌해 보이진 않는군. 상장군." "죽이겠다! 엘시, 죽이겠어!" 엘시는 피식 웃고는 오른손을 아래로 뻗었다. 베로시는 질겁하며 위 로 물러났다. 우물 속에서 웃음소리가 진동했다. 베로시는 그 웃음을 견딜 수 없었다. "기름을 가져와 저 안에 붓고 불을 붙여라!" 병사들은 당황했다. 그들 중 상급자인 나가 수교위 한 명이 당황하 여 걸어나왔다. "군단장님." "뭐냐, 지셀!" "군단장님. 고정하십시오. 일단 씻고 옷을 갈아입으셔야겠습니다." "저 놈부터 태워죽이고나서!" 지셀 수교위는 군단장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듣고 있는 병사들을 고려하여 지셀은 낮게 말했다. "군단장님. 안됩니다. 황제의 대장군을 그런 식으로 죽였다간 뒷감 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참을 수 없으신 것 잘 알지만 제발 두 번, 세 번 살펴주십시오." 우물 속에서 울려나오는 웃음 소리가 조금씩 약해졌다. 하지만 베로 시의 선고에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쇠약해진 몸 때문에 큰 소리로 웃는 것은 힘들다는 투였다. 베로시는 다시 격분에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러나 지셀이 재빨리 말했다. "홧김에 대장군을 죽인다면 그것이 오히려 대장군의 술수에 넘어가 는 일입니다. 제발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베로시 토프탈은 분노 때문에 하얗게 변한 얼굴로 우물을 노려보았 다. 우물 속의 웃음은 이제 작은 킬킬거림으로 변해 있었다. 베로시 는 말했다. "식사 반입을 하루 국 한 그릇으로 줄여라. 저런 인간에게 제대로 된 식사는 사치다!" 나가인 지셀은 인간이 하루 세 끼를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그의 군단장에게 괜히 질문하여 가까스로 진정된 상황을 다시 악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지셀은 그대 로 수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베로시는 거친 동작으로 몸을 돌려 걸어 갔다. 지셀 수교위는 우물 뚜껑을 도로 닫은 다음 병사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절대로 함구하라고 명령했다. 그 자신이라도 지키기 어려 운 명령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병사들을 돌 려보낸 지셀은 우물 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우물 뚜껑이 닫힌 이후부 터 엘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지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우물가를 떠났다. 엘시는 우물 바닥에 앉아 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무를 짜맞추어 만든 뚜껑에는 가느다른 틈이 있어 그 틈으로 빛이 새어들었다. 초점 을 맞추어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빛이었다. 엘시는 우물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마른 우물 안쪽은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우물 안의 공기는 혼탁 했고 열기가 가득했다. 엘시는 우물 벽에 귀를 댄 채 자극을 추구했 다. 돌로 된 우물벽은 먼곳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소리들을 엘시에 게 들려주었다. 물 소리나 바람 소리, 어떻게 들으면 사람들이 뛰는 소리 같은 희미한 소음들이 들려왔다. 가끔 그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밤이 찾아들었다. 뚜껑 쪽에서 더 이상 하얀 선이 보이지 않아서 엘 시는 밤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물벽에 귀를 갖다대어도 신통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엘시는 자야 한다고 느꼈다. 세상이 몇 걸음 안되는 거리로 좁혀진 상태에서 아무런 자극도 없이 앉아있 다간 미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낮 동안 뜨거워진 공기는 쉬 식지 않았다. 하지만 잘 수가 없었다. 엘시는 옆으로 누워 몸을 동글게 말았다. 자야 한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서. 엘시는 자신이 잔다고 생각했다. 기만이다. 그는 잠들지 않았다. 견딜 수 없이 추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더웠는데, 이상한 일이 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위아랫니가 계속 부딪혔다. 키보렌의 한 가운데, 이 열대의 땅에서 추위를 느끼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 이다. 자결? 엘시는 그런 생각은 더 약해졌을 때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 다. 의지가 남아있는 한 자결은 생각하지 않았다. 지셀은 그런 식으 로 추측했지만 엘시는 베로시 토프탈에게 살해당하기 위해 그녀를 격 분시킨 것은 아니다. 베로시는 그를 죽일 수 없다. 그 사실을 확신하 고 있는 엘시에게 있어 낮의 행동은 그저 감정 표출이었을 뿐이다. '자결은 이성을 잃었을 때나 하는 짓이다. 나는 이성적이다. 대장군 의 행방이 묘연하다면 틀림없이 수색이 있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졌 는데도 대장군이 연락하지 않는다면 역시 수색이 있을 것이다. 그리 고 이레와 쵸지, 주테카, 준람, 론솔피가 있다. 기회는 온다. 기회는 반드시 온다.' 밤, 아직도 밤이었다. 엘시는 의아해졌다. 밤이 너무 길다. 뚜껑의 틈을 막은 것일까? 아무리 위쪽을 바라보아도 빛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밤일 리가 없다. 문득 엘시는 자신이 이성을 잃고 있 는 것인가 의심했다. 그 누구도 밤을 잡아늘일 수는 없다. 그리고 베 로시 토프탈도 물론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세상을 의심하는 것은 정 신이상의 강력한 징후일 것이다. 엘시는 자신의 시간 감각을 무시하 기로 했다. 잠들어야 한다. 다시 해가 뜰 때까지 푹 잠들어야 한다. 충분한 수 면은 현 상황에서 엘시가 시도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자 기보호책이다. 엘시는 잠들려 애썼다. 하지만 엘시가 기껏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비몽사몽에 가까운 멍한 상태였다. 왜 잠이 오지 않을까.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기에, 지멘은 눈을 떴다. 그리고 이곳이 여 전히 하텐그라쥬라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보았다. 바람은 없고, 열대의 밤은 불타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별들이 밤을 고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멘을 잠못들게 하는 빛은 따로 있었다. 지멘은 고개를 돌려 아스화리탈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마지막 날, 쓰러진 뇌룡공 륜 페이의 곁에서 마 지막 용 아스화리탈은 나무가 되었다. 하텐그라쥬 외곽에는 아직도 그 나무가 서있다. 번갯불을 날개 삼아 날아다니며 나가들의 공포로 하늘에 군림했던 뇌룡은 나무로 변한 후에도 빛으로 나뭇가지들을 물 들이고 있었다. 모든 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별들이 아스화리탈의 가지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마치 보석이 열리는 나무 같다. 깊은 밤이 지나 새벽이 다가오면 그 빛은 낙엽처 럼 떨어져 나무 아래를 환하게 비추다가 해가 떠오르면 사라진다. 그 리고 열대의 뜨거운 낮 동안 아스화리탈의 가지 사이에서는 어떤 빛 도 번뜩이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찾아오면 아스화리탈은 다시 빛의 과일을 맺는다. 그런 순환이 매일 밤 계속된다. 아스화리탈의 거대한 크기 때문에 관찰자는 눈여겨보아야 뇌룡공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쓰러진 뇌룡공 륜 페이는, 아마도 아스화리탈 이 그랬을 거라 짐작할 뿐 그 누구도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로 인해 나무로 바뀌어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무로 변한 것은 그의 등을 찌른 칼이다. 륜 페이는 땅에 엎드린 모습이었고 잔디와 뿌리 등이 그의 온몸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륜 페이의 등에서 비죽 솟아있는, 그를 찌른 칼에서는 금속성의 가지와 덩굴, 그리고 나뭇잎 들이 돋아 있었다. 사모 페이는 그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지멘은 몸을 일으켰다. 망치를 집어든 지멘은 쿵쿵거리며 사모에게 다가갔다. 사모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멘은 사모의 곁에 서서 뇌룡공과 마지막 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모의 말에 따르면 아스화리탈은 마지막 용이 아니다. 사모 는 두 그루의 용화가 피어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멘이 그 중 하나 일 거라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놀라운 말이다. 용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지멘은 사모의 곁에 천천히 앉았다. 사모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륜 페이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멘은 고개를 돌려 아스화리탈과 륜 페 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호왕." 사모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 페이." "사모 페이. 아직도 내가 용이라고 확신하나?" "아직도? 나는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어." 지멘은 당황하여 사모를 돌아보았다. "없다고?" 사모는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지멘은 그녀가 왜 머뭇거리는지에 대 한 설명을 들었다. 말은 나가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고 긴 세월 홀로 이곳에서 살아온 사모는 니름을 나눌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사모는 자신의 생각을 니름으로 정리하고 다시 말로 바꾸기 위해 시간이 조 금 필요했다. "그래. 내가 본 것은 거대한 레콘이었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 씬 큰 레콘이었지. 그래서 황제가 나에게 용을 보낸 거라고 생각했 지. 레콘의 모습이니까 황제가 기른 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 지." "왜 레콘이면 황제가 기른 용이 되는 거지?" "두번째 용화는 레콘이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으니까." "두번째 용화? 그러고보니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두 그루의 용화가 있었다고 했지. 두번째 용화는 그러면 어떻게 된 거지?" 사모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지멘을 바라보았다. 아스화리탈의 가지 사이에서 빛이 소근거렸다.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에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운 그 빛 속에서 사모가 말했다. "두번째 용화는 즈믄누리로 갔어." "도깨비에게?"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는 열광적인 화훼 재배가였지. 안타깝 게도 밤의 다섯 딸의 도움으로 건설된 즈믄누리 주변은 항상 어둡지. 그래서 바우 성주가 얻은 성과는 보잘 것 없었어. 하지만 용화는 아 마도 그의 마지막, 어쩌면 유일한 성공작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용은 손보다는 마음으로 키우는 것이니까." "그런가." "만약 대선풍 앞에 나타난 것이 도깨비였다면 나는 즈믄누리에서 온 용일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너는 레콘이었고, 그래서 나는 네가 황제가 키운 용일 것 같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확신한 것은 아 니야." "용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나?" "용 외엔 아무도 올 자가 없으니까." "아무도 없어? 당신은 왕이었다. 아라짓 왕국의 마지막 왕이고 북부 를 구한 사람이다. 그런데 당신을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았어?" 지멘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무도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모르나?" "황제는 알 거야. 그리고 아마 사도와 태위, 천경유수도 알고 있겠 지. 그 외의 사람들에게 나는 죽은 사람이야. 그렇게 되어 있는 편이 내게도 좋지." "왜지?" "너는 내가 북부를 구했다고 말했어. 그렇다면 남부에게 나는 무엇 이 되지?" 대호왕 사모 페이는 배신자다. 까마득한 옛날, 나가들은 제1차 대확장 전쟁을 통해 다른 세 종족을 모두 한계선 너머 북방으로 쫓아버렸다. 북부를 지배하던 아라짓 왕 국은 나가들과의 기나긴 싸움 끝에 멸망했고 왕국의 멸망 이후로 북 부의 사람들은 더 이상 나가들과 싸울 힘을 결집시킬 수 없었다. 북 부의 사람들을 멸망으로부터 지켜준 것은 사라진 왕국이 아니라 한계 선이라는 절대적인 장벽이었다. 나가들은 한계선을 넘을 방법이 없기 에, 그리고 북부인들은 왕국과 왕을 잃었기에 그들의 싸움은 자연스 럽게 중단되었다. 그 상황 위에 모래를 짓눌러 바위로 만드는 시간의 무게가 더해졌 다. 서로를 공격할 수 없는 남북의 처지가 태초부터 그래왔고 종말까 지 그러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시각, 세계가 서로 관계 없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착각이 드는 시각, 남부의 나가들이 그 상황 을 뒤바꿀 방법을 찾아내었다. 냉혹의 도시에서 시작된 전대미문의 음모는 신의 힘을 훔쳐 기온을 변화시킨다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성공했다. 장구한 세월 동안 나가들의 북진을 막았던 한계선 이 무너졌다. 기이한 온기와 함께 나가들이 북상했다. 북부인들에게 나가는 전설의 이름에 가까웠고 따라서 북부인들은 그 공격에 공포보 다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피는 현실이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른 후 에야 북부인들은 가까스로 제1차 대학장 전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동시에 과거에는 왕과 왕국이 있었기에 나가들과 싸울 수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러나 북부에 왕은 없었다. 왕이 되 고자 날뛰는 제왕병자들뿐이었다. 나가들의 진격은 무자비했고 북부 인들은 멸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좌절의 끝에 서있던 북부인들에게 기이한 소문이 들려왔다. 그 소문 은 믿기 어려웠지만 또한 믿고 싶은 것이었다. 나가들을 피해 숨어있 던 이들은, 나가들의 귀가 어둡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큰 소리로 말 하면 그것이 거짓이 될까봐 소리죽여 그 소문을 나누었다. 돌아왔어. 뭐가? 왕이. 뭐라고? 왕이 돌아왔어. 사람들은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하지만 소망하는 걸음으로 모였다. 그곳에는 왕이 있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고 왕국 아라짓의 상징 인 흑사자의 모피를 몸에 두른 여인이 있었다. 거대한 대호가 그녀에 게 복종하고 있었고 스물 두 명의 두억시니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 다. 그리고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용도 있었다. 하늘을 날며 화염을 토해 모든 것을 불사른다는, 옛이야기 속의 용이 현실이 되어 왕의 곁에 있었다. 좌절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북부인의 나날 쯤으로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충격이었다. 물론 나가들에게도 지 독한 충격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대호왕이었다. 대호왕의 깃발 아래 북부에 남아있던 마지막 힘들이 결집했다. 이미 북부의 대부분이 나가들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대호왕은 나가들 전체와 싸우는 대신 남부의 심장을 취하기 로 했다. 그녀는 하텐그라쥬로 돌격했다. 나가들의 결사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분노한 신들이 왕을 돕고 나섰다. 신의 힘을 훔친 나가들을 징벌하기 위해 제신은 화신이 되어 왕의 곁에서 싸웠다. 그 무엇도 대호왕의 남진을 막을 수 없었다. 하텐그라쥬는 파괴되었다. 대가가 작지는 않았다. 용을 부리며 왕을 돕던 뇌룡공은 피습당했다. 무수한 북부의 장병들이 사망했다. 제신 은 자신들의 분노를 증거하기 위해 대선풍을 남겨두고 왕의 곁을 떠 났다. 모든 힘을 하텐그라쥬 공격에 쏟아부은 대호왕에게는 더 이상 키보렌 전체와 싸울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신의 힘을 훔친 결과가 어 떻게 나타났는지 확인한 나가들은 한계선 이남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 었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발발 전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끝났다. 하지 만 북부인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느꼈고 나가들은 그것을 반대하 지 않았다. 그것은 멸망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던 순간 북부가 얻어낸 기적 같은 승리였다. 그러나 대호왕이 가면을 벗었을 때 승리감에 젖은 북부인들도, 패배 감에 슬퍼하던 나가들도 모두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가 면 아래에서 나타난 얼굴은 비늘 덮인 나가의 얼굴이었다. 나가가 북부의 왕이 되어 나가를 물리친 것이다. "그렇군.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이 알려지면 그 녀석 말대로 시련의 회고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군."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엘시 에더리. 황제의 대장군. 나를 쫓고 있었어. 우연히 말 섞을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하텐그라쥬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화 를 내면서 말하더군. 그 분은 아무 관련이 없으니 그 분을 시련에 팔 지는 마라. 그런 내용의 말이었어. 그 당시 나는 그 분이 누군지도 몰랐으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 하지만 이제 알겠군." 사모는 긍정했다. "맞아. 도시연합의 나가들 중에는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나를 사 고싶어하는 회고주의자들이 있겠지. 나가들은 이성적이지만 하텐그라 쥬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너무 큰 충격이었거든. 게다가 그것을 주도 한 이가 바로 나가였지." 지멘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모가 말했다. "비에나가라는 말 알아?" "나가들이 욕할 때 쓰는 말이지. 도깨비가 낳은 나가, 도깨비의 나 가, 비에나가." "나는 나가 전체의 비에나가인 셈이지." "……왜 동포를 배신하고 북부의 왕이 된 거지? 왕위가 좋아서?" "지멘. 네 질문에 대해서는, 그 추측은 틀렸다고 말하겠어. 나는 왕 위를 버렸어. 하지만 설명하지는 않겠어. 내가 했던 일을 설명하고 싶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모든 사람들이 그 설명을 들었을 거야. 나 는 왕이었으니까." "알았어. 묻지 않겠어." "고마워." "다른 건 물어도 되나?" "들어보고 대답하지." "왜 황제가 당신에게 용을 보낼 거라고 생각한 건가?" "글쎄. 그것이 어울리잖아?" "무슨 말이지?" "나는 왕이었어. 그런 나를 죽인다면 선민종족들보다는 용이 어울리 겠지." 지멘은 몸을 조금 부풀렸다. 사모는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용의 불은 깨끗해. 완전히 태워 소멸시킬 수 있지." "황제가…… 왜 당신을 죽인다는 건가?" 침묵. "라수 규리하를 아나?" "들어 안다." "나는 수많은 특이한 사람들과, 사람이 아닌 것들을 보고 겪었어. 가끔은 내 인생에 정말 감사하고 싶을 때가 있어. 물론 같은 정도로 내 인생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라수 규리하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에서도 특별히 놀라운 사람 중 하나였지. 왕위에서 물러날 때 그는 내게 선택이 필요하다고 알려줬어. 왕위에 남아있는다면 천수를 누리 겠지만 왕위에서 물러난다면 언젠가 나를 죽일 자객이 찾아갈 거라 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지. 30년 정도가 지났고, 나는 그의 예견이 빗나갔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네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내 현명하면 서도 자존심 센 사도가 자신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무덤 속에서도 증 명해보이는 거라고 생각했지." "그건, 시련에서 자객이 올지도 모른다는 뜻인가?" "아냐. 황제가 나를 죽인다는 뜻이지." "왜 황제가? 이해할 수 없어." "유명인의 애환이지." 사모는 농담처럼 말했다. 지멘은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긴 침묵이 지나고, 사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확실히 용이 아닌가 보군. 내 입으로 설명해야겠구나. 지멘. 나는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나는 전설적인 존재라고. 부정하 긴 어렵겠지." "부정하지 않아. 당신은 전설이니까.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지?" "나보다 덜 전설적인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그건 당신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야." "끝까지 들어. 나보다 덜 전설적이면서 나의 지위에 도달해야 하는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당신의 지위에 도달해야 하는 사람?" "황위 계승자." 지멘의 몸이 세 배로 부풀었다. 사모는 설명했다. "안정적인 황권을 위해 세습이 시행되겠지. 나가들은 그래왔어. 최 연장자에게 가문을 맡겨왔지. 최연장자가 가장 어리석은 계승 후보일 수도 있고 가문 바깥에 더 나은 인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일 일이 고려할 수 없어. 그랬다간 계승 시기가 될 때마다 혼란이 일어 날 테니까. 최연장자에게 맡기고나서 가문 전체가 그녀에게 협조하는 것이 나아. 그것이 안정적이지. 제국도 그래야 해. 어떤 방식으로든 세습이 있어야 해." 사모는 다시 침묵하며 말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최초에 실행될 때는 거부감이 있 지. 그래서 후계자의 경쟁자를 다 제거하는 슬픈 작업이 필요하지. 후계자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어 자연스럽게 계승이 이루어져야 하거 든." "그래서 당신을……" "맞아. 나도 그런 경쟁자가 될 수 있어. 나 정도면 상당히 위협적이 겠지?" "당신은 다시 왕이, 아니, 황제가 될 건가?" "그럴 의향이 있었다면 애초에 왕위를 버리지 않았어. 나는 그럴 의 사가 없어. 그리고 내게 그런 의사가 없다는 것은 황제도 잘 알아." "그런데 왜 당신을 제거해야 하나?" "지멘. 제왕병자라는 말을 알지 모르겠군. 그들 중에는 타인의 추종 자가 되고 싶어하는 자들도 있지." "그렇다면,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가 생길까봐?" "맞아." "하지만…… 하지만 나가 황제에겐 자식이 없다. 황위를 세습할 후 계자가 없어." "나가일 가능성은 적어." "뭐?" "다음 후계자는 나가일 가능성이 없어. 제국의 영토는 이제 한계선 이남에도 뻗어있지만 나가들에게 북부는 여전히 힘든 장소야. 도깨비 는 황위에 어울리는 종족이 아니고, 또 황위에 있는 기간이 너무 길 어질 테지. 몇백년 동안 바뀌지 않는 도깨비 지배자를 견딜 수 있는 건 같은 도깨비들 뿐이야. 레콘은 나가나 도깨비보다는 유리하지. 영 웅왕도 레콘이었으니까. 하지만 레콘은 세습이 어려워. 영웅왕의 왕 위도 레콘에게 이어지진 않았지. 인간이 가장 나은 선택이지." "인간이라고?" "그래. 인간. 인간은 왕위나 황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종족이야. 그 들만의 병인 제왕병도 있잖아. 아마 황제는 인간들 중 한 명을 골라 제국을 물려줄 거야.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만 약 계승자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좋은 짝도 찾아주고, 그리고 필요한 모든 권위를 준 후에. 그런 인간 없어? 황제로부터 모든 것을 받은 인간. 그런 인간이 없다면 황제는 황위 계승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이겠지." 지멘은 그런 인간을 알고 있었다. "있어. 그런 인간이 있어." "있다고?" "그래." 사모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황위 계승 절차가 이미 시작되었군. 네가 자객이 아니라 도 조만간 다른 자객이 오겠어. 그런데 너 정말 용 아니야?" "아니야. 나는 레콘이야." "미안하지만 자신이 용이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어. 완벽하게 위장 하려면 그래야 하니까. 왜 여기 온 건지 설명해봐. 나를 제거하러 온 거라면 너는 용일 가능성이 높아." "내가 제거해야 할 사람은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아냐. 나는 황제사냥꾼이라고 불린다." "황제사냥꾼?" "내 숙원은 황제의 제거다." 지멘은 사모가 놀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모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지멘은 초조하게 말했다. "왜 웃는 거야?" "아니. 준비가 확실하구나 싶어서." "무슨 준비가 확실하다는 거야?" 사모는 입을 가린 채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다시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지멘은 아스화리탈을 보았다. 빛들이 하나둘씩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밤은 캄캄했지만 새벽이 머지 않은 모양이다. 그 광경은 듣던 것처럼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 만 지멘은 그 광경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지멘은 사모를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그 눈길을 느낀 사모가 조용히 말했다. "지멘. 조금 전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계승자의 경쟁자가 될 자 는 모두 제거된다고 말했지. 그런데 그 경쟁자에는 황제 자신도 포함 돼." 지멘은 벼슬을 곧추세웠다. 그는 사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 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아실을 흉내내려고 할 때 일깨워지곤 하는 부 분에서는 사모의 말을 이해하는 지멘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 멘은 수염볏을 떨며 사모를 바라보았다. 소리없이 떨어지는 빛 속에 서 사모의 얼굴은 계속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모가 말했다. "계승자가 황위 계승을 하기 직전이나 직후에 황제도 제거되어야 해. 그녀도 경쟁자니까. 누군가가 그녀를 죽여야 하지만, 실제로 누 군가가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후계자를 의심할 거야. 그러니 의심 받지 않을 사람이 필요하지. 황제 살해의 숙원을 가지고 있는 레콘이 라면 꽤 괜찮지. 아무도 레콘이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숙원을 행사한 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황제를 죽이려는 숙원을 가진 레콘을 준비해두는 것은 황제의 죽음도 달성하면서 동시에 후계자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는 괜찮은 방법이지." 지멘은 망치를 꽉 움켜쥐었다. "내 숙원은, 내가 결정했다. 난, 나는 나 스스로 결정했어. 누구도, 누구도 내게 그걸 부탁하지 않았어. 황제가 내게 그것을. 명령한 것 이 아니다." "알아. 그랬을 거야. 그냥 소극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지. 우연히 네가 그런 숙원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너를 내버려둔 것일지도 몰라. 필요할 때까지." 지멘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버려뒀다고? 6년 동안 말이지. 내가 6년 동안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황제가 내버려뒀기 때문이라고?' "아냐." 지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황제는 내게 가장 강한 금군을 보냈어. 나를 제거하려고 했 다.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죽였을 거야." "가장 강한 금군?" "즈라더. 즈라더를 알겠지?" 사모는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지멘은 그 충격에 매달리 고 싶었다. "즈라더가…… 죽었구나." "그래. 내가 그랬어. 그러니 황제가 나를 내버려둔 것은 아니잖아?" 지멘의 초조함과 반비례하여 사모는 더욱 침중해졌다. 지멘은 그녀 를 다그치고 싶었다. 그 때 사모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강한가?" "필요한 만큼은 강해." "그렇다면 즈라더가 그렇게 약한가?" "즈라더는 강해. 훌륭한 전사였지." 사모는 무겁게 말했다. "지멘. 과거형으로 말하지마. 그는 지금도 훌륭한 전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테니까." "그를 비방하고 싶지는 않지만 죽은 전사는 싸울 수 없어." "숙원을 위해 죽은 자는 영원히 이겼고, 아무도 그를 패배하게 할 수 없어. 지지 않는 전사라면 싸우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 지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지멘은 몸을 부풀리며 벌떡 일어났다. 지멘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사모를 내려다보았다. "즈라더가 일부러 자신의 실력을 다하지 않은 것인지, 그렇잖으면 어떻게 해도 네게 질 수밖에 없다고 믿고 힘껏 싸웠는지는 나도 몰 라. 하지만 그에게 이길 생각은 없었을 거라고 믿어. 결국 즈라더는 황제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쳤지. 자신의 목숨도. 그의 죽음은 만족스 러웠겠지."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1-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3-24 조회수 : 1990 피를 마시는 새 11.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 3 캄캄한 밤을 바라보던 제이어 솔한은 별들이 바둑판 위의 포석 같다 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계속 다른 생각을 불러들였고 제이어는 바둑 판이 모두 비슷한 색깔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검은 바둑판을 만들면 어떨까? 검은색으로 칠하고 하얀 줄을 긋는다면. 그러나 제이어는 곧 왜 그런 바둑판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흑돌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고보니 완전히 흰 바둑판도 없다. 바둑판의 빛깔은 대개 나무 빛깔 그대로다. 흑돌과 백돌을 잘 두드러 지게 하는 바둑판은 흑도, 백도 아니다. 제이어는 그 쯤에서 잡념을 멈추고 암살성을 바라보았다. 암살성의 경비병들은 제이어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의 하얀 옷으 로 제이어를 알아보았다. 제이어는 타고 있던 말을 마구간지기에 건 네준 다음 정문에 나타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인사를 교환한 다음 제이어가 말했다. "공작님께 안내해주십시오." 시종장은 약간 난감한 얼굴을 해보였다. "먼저 씻고 좀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로에 피로하실 텐데 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게, 하루 종일 집무실에 계신 채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공 자님과 언쟁을 벌이셔서 속상하신 것 같습니다." "공자님? 발케네공 스카리가 왔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비셀스 규리하도?" 시종장은 굉장히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제이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때 제이어는 이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의 얼 굴에 있는 검은 안대는 그의 흰 옷만큼이나 잘 보였다. 제이어는 놀 랐다. "아실?" "역시 당신이군요. 창밖을 보는데 하얀 옷이 보여서 내려왔어요."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좀 복잡한 이야기가 되겠네요. 바쁘시지 않으면 저와 이야기 좀 하 지요. 당신도 이곳의 사정에 대해 뭘 좀 들어야할 테니까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당장 암살공을 만나기는 어렵기에 제이어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괜찮다면 식당에서 하지. 난 뭘 좀 먹어야겠어." 시종장은 두 사람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식당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젊은 청년이 하녀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다. 이이타 규리하였다. 이이타는 식당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가 일 어서자 아실이 재빨리 말했다. "공자님! 여기 계셨군요. 반가워요. 같은 성 안에 계시는데 정말 뵙 기 어렵군요." 아실은 재빨리 식당을 가로질러 이이타에게 접근했다. 이이타는 부 드럽게 말했다. "그렇군. 하지만 너와 나눌 이야기가 없는데. 아실." "아아, 변경백께서 나쁜 아이와 사귀지 말라고 하셨군요?" 이이타는 피식 웃었다. 아실은 제이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제이어 솔한과 제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실 텐데요. 춘부장께서도 그것은 반대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실의 말처럼 이이타는 아실과 살인기사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 다. 그는 제이어에게 말했다. "들어도 되겠나?" "저는 춘부장의 친구입니다. 그러셔도 됩니다. 공자님." 제이어와 아실을 안내한 시종장은 이이타 곁에 있던 소리 로베자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세 사람의 시중을 들도록 명령했다. 소리는 고 개를 숙이고는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소리의 뒷모습을 보던 아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하녀가 소문의 그 하녀군요." 이이타는 대화에 참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꽤 관심이 가는 주제였다. "무슨 소문이 났는데?" "뭐 그냥 아랫사람들의 꿈이지요. 규리하 공자님의 눈에 든 행운의 하녀 이야기. 하지만 저라면 조심하겠어요." "발케네공이 보낸 사람일 테니까?" 아실은 놀랐다는 눈으로 이이타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미소를 지었 다. "변경백께서 이미 가르쳐주셨군요." "그래. 그러니 나는 네가 왜 발케네공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 인지 묻고 싶군." "이간질? 아니에요. 그냥 친절이지요. 공자님은 많은 것을 아시는 편이 좋아요. 그래야 아버님께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일단은 공자 님이 잘 아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어요. 제이어 솔한은 지금 막 도착했고 그래서 상황을 잘 모르고 있으니까." 아실은 제이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간단하게 말하죠. 스카리 빌파는 비셀스 규리하 대신 부냐 헨로를 구출해서 이곳으로 왔어요. 그리고 황제는 그 사실에 격분하여 다수 의 제국군을 발케네 국경으로 이동시켰어요. 그래서 암살공은 지금 봉신들에게 소환령을 내리고 있는 중이에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였다. 제이어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황 제와 발케네의 전쟁. 제이어가 한 일의 목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은 그가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도달 과정은 그의 예상과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이거, 뭔가가 상당히 복잡하게 뒤틀려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 "그렇다면 여기서 제 추측을 잠시 이야기하지요. 이이타 공자님. 이 전쟁은 원래 계획되어 있었던 거예요. 스카리 빌파가 훔쳐와야 하는 것은 당신의 누님이지요. 아시죠? 당신의 누님이신 비셀스 규리하 공 녀님은 춘부장의 유일한 약점이에요. 그래서 그녀가 이곳에 온 다음 에 춘부장께서 서약지지파를 결집시키고 황제와 싸울 작정이었어요." 이이타와 제이어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각자 상대방이 아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이어가 말했다. "네가 추리한 건가?" "예. 계속 추리할 테니 맞는지 들어주세요. 그걸로 명분은 구할 수 있지만 실제적인 문제는 남아요. 강대한 황제의 제국군과 어떻게 맞 서 싸우는가. 그것을 위해 두 가지 방안이 준비되었어요. 첫번째는 황제의 대장군을 황제에게서 떼어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이어 솔한 당신은 저와 지멘에게 하텐그라쥬로 가라는 암시를 한 거에요. 대장 군이 저희들을 뒤쫓게 될 거예요. 저희들은 악명 높은 수배범이자 최 근에는 제국공신도 살해한 흉악한 자들이고, 또 대장군은 약혼자를 구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도맡아 하는 처지니까. 그런데 하텐그라쥬 로 가는 길에는 시모그라쥬가 있지요. 대장군을 포획하는 것은 시모 그라쥬에서 맡게 될 거예요." 아실의 말을 듣던 이이타는 깜짝 놀랐다. "솔한. 그것이 사실인가?" 이이타의 말을 듣자 이번에는 제이어가 놀랐다. "모르셨습니까?" "몰랐어. 아버님은 그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없어." "음. 천천히 말씀해주실 작정이셨겠지요. 이곳에도 황제나 데라시의 간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비밀은 엄수되어야겠지요." 이이타는 그런 설명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는 유 일한 자식이었다. 복잡한 심회 속에서 이이타가 침묵하자 아실이 계 속 말했다. "그렇게 대장군을 황제에게서 떼어낸 다음 이곳에서 서약지지파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황제는 규리하를 친 것처럼 직 접 이곳으로 올 거예요. 거기서 하늘누리를 상대할 두번째 방안이 필 요한 거죠." 이이타는 천경비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 실의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스카리 요새에 있는 일만 명의 레콘이지요." 이이타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만 명의 레콘에 대한 이야기 를 들은 적이 없었다. 이이타는 제이어의 안색을 살폈고 제이어가 놀 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이어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 다. 아실이 그것을 확인해주었다. "그 일만 명의 레콘을 무장시키기 위해 당신이 최후의 대장간에 간 거죠. 그곳에 레콘들의 무장을 주문하려고. 맞지요?" "그래. 맞아." 차분하게 대답하는 제이어를 보면서 이이타는 뱃속에서 뭔가가 꿈틀 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이타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실의 말이 계속되었다. "좋아요. 원래 계획은 그런 순서였어요. 비셀스 규리하 구출, 대장 군 납치, 서약지지파 봉기, 그리고 전쟁. 그런데 스카리 빌파가 데려 온 것은 비셀스 규리하가 아니라 부냐 헨로였어요. 모든 것이 뒤죽박 죽이 된 거죠. 그런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황제가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어요." 제이어가 질문했다. "대장군은 어떻게 되었지? 네가 여기 있는 것을 보니 너와 지멘이 대장군을 시모그라쥬 쪽으로 유인한다는 계획도 뒤죽박죽이 된 것 같 은데." "아니에요. 저와 지멘은 헤어졌어요. 저는 그 때 당신들의 계획을 대충 짐작했거든요. 그래서 지멘에게 하텐그라쥬로 가라고 부탁했어 요. 지금 쯤은 틀림없이 그곳에 도달했을 거예요. 그리고 대장군도 그 뒤를 쫓고 있거나, 혹은 시모그라쥬공의 손에 붙잡혔을 테죠." 제이어는 다시 머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눈에 잠시 이이타의 어두운 얼굴이 들어왔지만 자신의 추리에 빠져있던 제이어는 그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제이어가 말했다. "그렇다면, 음. 뭔가가 뒤틀리긴 했지만 결국 뜻밖에도 상황이 원래 계획했던 대로 된 것이군. 대장군은 황제의 곁에 있지 않고 황제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곳으로 온다는 거지. 그러면 발케네를 황제의 무덤으로 만드는 일만 남았군. 됐어!" 이이타가 마치 잠꼬대처럼 말했다. "그러면 천경비록은?" 제이어와 아실은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실이 먼저 말 했다. "천경비록이 뭐죠?" 이이타는 제이어의 얼굴을 살폈다. 제이어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이이타는 잠깐 동안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이타의 뱃속 에서 꿈틀거리던 무엇이 그의 입을 열었다. "천경비록은 라수 규리하가 쓴 책이야. 하늘누리에 관한 것들이 쓰 여져 있지.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아버님은 황제가 규리하를 공격한 이유 중에는 천경비록의 회수도 포함되어 있 다고 추측하시지.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칠 때 그것을 가져오셨어." 주먹을 꽉 움켜쥔 아실이 신음하듯 말했다. "그 책 때문에 황제가 규리하를 공격했다고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어. 아실. 책 한 권을 손에 넣는 방법으로 전 쟁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야. 솜씨 좋은 도둑을 한 명 고용하는 것이 낫지. 규리하 전쟁은 어디까지나 황제와 서약지지파 사이의 전쟁이 야. 하지만 황제는 규리하를 쳐 서약지지파를 분쇄시키면서 동시에 천경비록도 손에 넣으려고 한 것 같아. 그런데…… 암살공도 아버님 도 그 책이 빨리 해석되길 바라는 것 같아." "해석? 알아볼 수 없는 책이에요?" "아냐. 아버님의 말씀으로는 굉장히 복잡하게 쓰여져 있는 것 같아. 어쨌든 그 안에는 뭔가가 들어있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이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라수 규리하만한 인물이 쓴 책이라면 그 안에 놀라운 비밀이 담겨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아실의 생각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적극적이었다. "제가 그 책을 볼 수 있을까요?" 이이타는 다시 거부감과 뱃속의 꿈틀거림을 동시에 느꼈다. 아실은 그 지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모든 것이 아버님과 암살공이 바라던 대로 됐어요. 천경 비록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당면 상황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아버님은 그것을 비밀로 하셨어." "그러면 계속 비밀로 놔두지요. 몰래 보여주세요." "이봐, 아실." 아실은 하나뿐인 눈을 흡떠서 이이타를 노려보았다. "공자님! 저도 황제의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에요. 누구보다도! 공자 님은 자신이 황제와 싸우고 있다고 말씀하시겠지요. 하지만 공자님이 이곳에서 편하게 보낸 짧은 시간보다 몇 배나 더 긴 시간 동안 저는 황야에서 황제와 싸웠어요. 도대체 뭘 걱정하세요? 싫으시다면 관두 세요. 춘부장께 직접 부탁하지요." 그렇게 된다면 이이타가 천경비록에 대해 아실에게 이야기했다는 사 실이 밝혀질 것이다. 이이타는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좋아. 잠깐 살펴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그렇게 하지." "그럼 지금." "뭐?" 아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죠. 변경백께서 주무시는 동안 잠깐 보고 일어나시기 전에 돌려놓죠." 이이타는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 하지만 그는 아실의 행동력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아실을 따라 일어났 다. 때마침 식사가 준비되었기에 제이어는 식당에 남았다.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책을 꺼내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실에 게 건네줄 때도 이이타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책의 두께를 본 아실은 소리 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빨리 읽어야겠군요." "아버님이 깨시기 전에 돌려놔야 해." "염려 마세요. 어서 읽어야 하니까 저는 제 방으로 가겠어요. 고마 워요, 공자님." 아실은 자신의 말대로 행동했다. 총총 걸어가는 아실을 보며 이이타 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실은 재빨리 불을 켰다. 책상에 책을 내려 놓은 아실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일어났다. 뭔지 모를 불안감 때 문에 아실은 문을 걸어잠궜다. 창문까지 확인한 다음에야 아실은 다 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책 표지는 적당히 낡은 것으로 만지는 느낌이 좋았다. 표지에는 뚜 렷하게 천경비록이라는 제목이 있었고 라수 규리하라는 저자의 이름 도 선명했다. 멍하니 표지를 바라보던 아실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 을 떠올렸다. 아실은 재빨리 책장을 넘겼다. 니어엘 헨로는 조용히 벽에 걸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군사용으로 사용될 만한 지도는 아니다. 넓은 제국 영토를 한 장에 담고 있으니 그 축적이 너무 큰 편이다. 바늘 끝에 먹물을 묻혀 지도에 살짝 찍는 다 해도 니어엘이 있는 중대 본부보다 몇십 배나 넓은 지역을 가리게 될 것이다. 바깥은 아직 캄캄했다. 하지만 제국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니어엘은 해가 이미 뜬 지역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을 대충 가늠해본 니어엘은 지금쯤 일출이 일어나고 있을 지역들을 북에서 남으로 죽 읽어내려갔다. 라지프, 구룬, 휘포리나 카라보라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테고, 비스그라쥬도 마찬가지. 소리그라쥬에서는 일출이 이미 끝 났을 테고, 하텐그라쥬. 하텐그라쥬에서는 지금 일출이 시작되고 있 을 것이다. 니어엘은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책상 위에 놓인 촛불을 끌어당 긴 니어엘은 그 앞에 왼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바닥이 드리우는 그 림자가 벽에 있는 제국 지도를 덮었다. 니어엘은 손과 초의 위치를 조절하여 지도 위에 주야경계선을 만들었다. 그림자가 덮고 있는 곳 은 밤이다. 니어엘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하텐그라쥬의 일출을 재현 했다. 지도는 너무 작고 제국은 너무 넓다. 손을 충분히 느리게 움직이지 못한 니어엘은 순식간에 시모그라쥬의 일출까지 만들어버렸다. 원래 는 반 시간 쯤 후에 일어날 일이다. 니어엘은 씩 웃으며 손을 내렸 다. '밤을 치우는 것도 손바닥을 움직이는 것처럼 쉬우면 좋을 테지.' 니어엘 헨로는 칼을 허리에 찼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니어엘은 옆 구리에 투구를 끼고 문밖으로 나갔다. 집무실 바깥에는 중대 행보관 이 기다리고 있었다. 행보관 커레이야 만스 교위의 거무죽죽한 얼굴은 요즘들어 더욱 초 췌해져 환자 수준에 가까웠다. 30년 근속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속칭 장군급 교위지만 그의 장구한 복무 기간 동안에도 요즘과 같은 나날 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만스 교위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니어엘 은 부위의 시간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병들에겐 장교라고 따돌림 당하고 장교들에겐 사병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는, 하 지만 결코 기죽지 않는 군대 계급의 이단아들의 시간인 것이다. 만스 교위의 경례를 받은 니어엘이 말했다. "수고했어. 만스 교위." 집중력이 떨어져 있던 커레이야 만스 교위는 중대장의 말을 이해하 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커레이야 만스는 새벽부터 자신이 뭘 수 고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만스는 중대장이 이 며칠 동 안의 일을 한꺼번에 말한 것임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건물 밖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거대한 함성과 욕설들, 그리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니어엘은 그쪽을 보고 빙긋 웃었다. 부위들이 뭔가 사납고 난폭한 이야기들로 사병들을 흥분시키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또한 자신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부위들은 그들의 시간이 온 것을 그런 식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니어엘은 웃음띤 얼굴로 만스 를 바라보았다. 만스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스, 왜 그러지?" "예? 아, 아닙니다. 중대장님." "여긴 우리 둘밖에 없어. 걱정하지 말고 말해." "참 어린 애들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어엘은 동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커레이야 만스는 그녀의 아버 지보다도 나이가 많다. 인생을 값있게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커레이 야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만스는 또한 군인이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수교위님이 저희 중대를 맡고 계신 것이 얼마 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북부에는 온통 연공서열로 계급 받아먹은 장교들 뿐입니다." 장군급 교위라면 이 정도 품평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교위님은 다르십니다." 니어엘은 빙긋 웃었다. "타이모 사건? 나는 좋은 교위님을 모시고 있었던 부위였을 뿐이야. 내 가치는 지금부터 증명하게 되겠지."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고맙군. 그러면 나가서 저 바보들을 중대장의 말 한 마디 들을 수 있을 만큼만 진정시켜놔." 만스 교위는 경례하고 밖으로 나갔다. 짧은 함성이 몇 번 들리고 곧 고요해졌다. 니어엘은 싱긋 웃으며 투구를 썼다. 그리고 문을 열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연병장에는 중대원 천 명이 도열해 있었다. 개인 무장은 모두 완비 했고 게다가 한결같이 질 좋은 것들이다. 보이는 것이 그 정도이니, 원래 잘 보이지 않는 노고를 하게 되어 있는 행보관의 업무 특성상 그의 노고를 짐작할 만하다. 니어엘이 단상에 오르는 동안 중대원들 은 투구 아래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쫓 았다. 아직은 밤이었다. 하늘 어디에도 푸른 기운은 보이지 않았고 까불거 리는 것은 연병장 이곳저곳에 피워놓은 화톳불과 선임반장들이 들고 있는 횃불 뿐이다. 천 명이 내쉬는 숨소리는 분명치 않지만 그 열기 는 뚜렷하다. 니어엘은 칼자루 끝에 왼손을 올려놓은 채 중대원들을 죽 둘러보았다. "밥 잘 먹었냐?" 횃불 몇 개가 흔들렸다. 병사들 대부분이 시루에서 막 쪄낸 떡 같은 얼굴로 중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중대장이 다시 질문 했다. "밥 잘 먹었냐고." 우레 같은 함성이 대답했다. "자, 잘 먹었습니다!" "응. 그럼 배 좀 꺼트리자. 1소대 1반부터 출발." 1소대 1반장 도라 머시튼 수전사는 1소대장 다미갈 카루스 부위의 엄한 눈빛을 받은 후에야 겨우 자신의 반을 출발시킬 수 있었다. 물 론 그녀의 머릿속은 다른 중대원 전부의 머릿속과 비슷한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도대체 전우애와 조국, 불굴의 투쟁심, 폐하께 바치는 위대한 승리 따위는 다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중대장은 싸울 생각이 없는 건가? 머시튼 수전사와 중대원들 전부의 의문은 다섯 시간 후에 해소되었 다. 다섯 시간의 행군 끝에 니어엘 헨로의 중대는 경비대 본부 앞쪽에 나와 진을 치고 있는 텡 마바노 조장의 발케네 국경수비대와 조우했 다. 니어엘 헨로와 텡 마바노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다음과 같이 전 개되었다. "어어이-! 뭐 하러 왔습니까!" "그쪽 경비대 접수하러 왔습니다!" "꼭 그래야겠습니까?" "까라면 까야지 뭐, 별 수 있나요." "젠장. 이틀만 더 있다 오면 좋았을 텐데요." "왜지요?" "내일까지 지켜야 한 달로 쳐준단 말입니다. 오늘 도망치면 반급이 지요. 그래서 말인데, 물러갔다가 모레 다시 와주면 안되겠습니까?" "월급 반 주면 고려해보지요." "쳇." 텡 마바노 조장은 엄숙하게 퇴각을 명령했다. 총 전투시간 30초였 다. 발케네 국경 경비대는 본부 쪽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퇴각했 다. 그쪽에는 이미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지고 있는 수레들이 보였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다시 시루에 들어가 있는 부하 장교들과 사병 들에게 말했다. "그러면 경비대 건물 접수하고 밥 지어 먹자. 점심 먹을 때가 됐 네." "추…… 추적하여 섬멸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수레에는 필 시 중요한 것들이 있을 텐데요." "끽해야 냄새나는 속옷 정도일 거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장 병들은 가도 좋다." 니어엘은 그런 대답으로 부위들의 입을 틀어막아 놓고는 말을 몰아 국경경비대 본부 건물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중대원들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중대장의 뒤를 따 라갔다. 니어엘 헨로의 중대가 본부 건물을 접수하고나서 사흘 뒤,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은 정체가 불분명한 군대의 출현을 알려왔다. 부위 들은 즉각 소대원들에게 전투 준비를 외쳤다. 그러나 뒤늦게 나타난 니어엘 헨로는 한가로운 태도로 말했다. "몇 명이야?" "서른 명 쯤 됩니다." "알았어. 말을 가져와." 말이 대령되었다. 니어엘은 당직 사관에게 지휘권도 반환받지 않은 채 몇 명의 병사를 골라 진지 밖으로 나갔다. 장병들은 다시 어처구 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니어엘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다. 접근하고 있던 부대는 달려오는 니어엘과 병사들을 보고는 재빨리 방어진을 구축했다. 니어엘은 충분히 먼 거리에서 말을 멈춰세우고는 외쳤다. "여, 날씨 좋지요? 저는 제국군 수전사 히어엘 넨로입니다." 방어진 가운데서 늙수그레한 무사가 걸어나왔다. 조금 낡았지만 손 질이 잘 된 무구들로 몸을 감싼 무사는 니어엘 헨로가 지휘하는 병사 들을 죽 둘러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바질튼의 남작 친 피타오다. 그래, 좋은 날씨군." "오늘 밤은 보름달이 뜰 겁니다." "응."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쪽도." 니어엘은 말을 돌렸다. 니어엘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울상이 된 얼굴 을 적군에게 보여주느니 표정 없는 엉덩이를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니어엘은 병사들과 함께 진지로 돌아왔고 친 피타오 남작은 진지를 한참 우회하여 사라졌다. 그 날 밤에는 니어엘의 말처럼 환한 보름달이 떴다. 석식이 끝난 다 음 니어엘은 당직 사관을 제외한 장교들을 전부 불러들였다. 장교들 은 전부 자신들이 뜻하지 않게 반역자의 일원이 된 듯한 얼굴을 하고 모여들었다. 니어엘은 빙긋 웃고는 화두 같은 질문으로 회의 시작을 알렸다. "군인은 뭐 하는 사람인가." 중대장이 화두 같은 말로 시작한 탓인지 장교들은 회의실을 선방 같 은 분위기로 바꿔버렸다. 모든 장교들이 동시에 참선 수행에 들어가 자 그 분위기가 자못 경건했다. 그러나 군대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정신 세계의 비경을 탐구할 권한도 서열순으로 주어지는 것은 분명하 다. 서열 최하위자인 가리아 릿폴 부위가 마지 못해 손을 드는 것을 본 니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릿폴 부위가 말했다. "군인은 황제 폐하와 제국을 위해 싸우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말해. 나한테는 그러지 말고." "……모르겠습니다." 니어엘은 웃으며 1소대장 다미갈 카루스 부위를 바라보았다. 카루스 부위는 중대장님이 말씀하시죠 하는 눈빛을 되돌려주었다. 니어엘은 말했다. "군인은 걷는 사람이다." 장교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병들이나 할 말이 중대장의 입에서 나오고 있으니 그들의 충격도 이해할 만하다. "군인은 지겹게 걷지. 비가 와도 걷고 눈이 와도 걷고 진흙탕이든 늪이든 가리지 않고 걷지. 뚜벅뚜벅 걸어다녀. 그러다가 가끔 기분 전환할 일이 생기지. 전투 말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그 냥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것이 군인의 일이야." 니어엘은 자신의 이론을 현실적 예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텡 마바노 조장은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해 퇴각을 결심하고 있었고 그래서 주저없이 퇴각했다. 이 지역은 전술적 요충지는 아니야. 나 또한 전투력을 보존해야 하고, 그래서 친 피타오 남작을 두드려잡지 는 않았어. 지금쯤 남작은 졸린 얼굴로 걸어가고 있겠지. 내가 이 근 처에서 야영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니까." 그날 낮 니어엘과 피타오 남작 사이에 있었던 대담은 이미 중대 전 체에 퍼져있었고, 따라서 장교들은 보름달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 었다. 2소대장 맥키 네미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중대장님. 저 남작을 공격하여 물리치면 그만큼 적의 세력 이 약화되는 것이잖습니까." "친 피타오 남작이 발케네공의 소환에 응한 것은 그러지 않을 능력 이 없기 때문이야. 그는 빨리 전쟁터에 도달하고 싶은 생각 뿐이겠 지. 그러면 자기 의무는 다한 셈이니까. 그 때부터는 고향이 걱정되 니 빨리 돌아가게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 남작의 주된 전투 행동이 될 거야. 그런 인물 쯤 발케네공의 전력에 포함되어도 문제될 것은 없 어. 그 자가 군량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보지 못했나? 가서 발 케네공의 군량이나 축내게 놔두는 편이 나아." 맥키 네미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중대장님. 죄송합니다만 우리들의 행동과 친 피타오 남작의 그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적당히 징계 받지 않을 만큼만 의무를 다하려는 거냐고 묻 고 싶은 거지?" "무례를 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맥키 네미의 표정은 제발 무례로 해석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니어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한 장교들의 시선 속에서 니어엘은 벽에 붙여놓은 지도로 다가갔다. 발케네 지역의 상세지도였다. "우리 중대의 목표는 펜스터다. 레드마 브릭 자작이 이곳을 지키고 있지. 이 친구는 한동안은 펜스터를 빠져나올 수 없다. 브릭은 발케 네 동쪽의 소영주들이 암살공의 소환에 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 는 일을 해야 하니까. 마지막 소영주가 지나간 후에야 레드마는 암살 공의 본진에 합류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차단해야 한다. 당 장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는 이유는 짐작하겠지? 그래. 브릭과 싸우면 서 동시에 동쪽에서 오는 소영주들과도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야. 우 리 또한 마지막 소영주가 지나간 다음에 펜스터를 압박해야 한다. 우 리는 그 때까지 전투력을 보존해야 한다." 장교들은 재빨리 지도를 살피면서 니어엘의 설명을 따져보았다. 3소 대장 가리아 릿폴이 다시 발언을 요청했다. "중대장님. 하지만 왜 상부에서는 우리들만 이곳으로 보내는 겁니 까? 아예 처음부터 대규모 군사를 투입하여 펜스터를 점령하면 펜스 터 동쪽 지역을 고립시킬 수 있을 텐데요. 제 생각에는 펜스터 동쪽 의 병력이 모두 암살공의 휘하에 집결한 후에 싸우는 것보다는 그것 이 낫습니다." "상부에서는 아마도 부위가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라고 하겠지. 하 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니 말해주겠어. 그런 식으로 이동하는 소영주 들의 병력은 대단치 않아. 하지만 레드마 브릭은 나오면 안돼. 브릭 이 참전할 경우에만 움직이는 병력들이 있는데 이곳, 군스, 미차도, 노바일의 병력이다. 대충 합쳐서 일만 정도. 이곳의 지배자들은 암살 공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았어. 이들은 브릭에게 서약했지. 따라서 브릭이 움직이지 않는 한 이들은 암살공을 도와줄 의무가 없어." 릿폴은 아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키 네미가 약간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브릭을 도울 의무는 있는 것이군요. 우리가 브릭을 압박하면 그들은 우리들을 공격하겠군요." "맞아. 따라서 우리는 펜스터를 점령할 수는 없어. 브릭의 병력만 상대한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군스와 미차도, 노바일의 병력 전부와 싸울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브릭이 암살공에게 합류하는 것 만 저지하면 돼. 닷새 뒤 이 계곡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병력을 최대 한 위장한 채 브릭을 겁준다. 서너 개 정도의 중대가 펜스터 주위에 틀어박혀 있다고 믿게 해야 해. 그러면 브릭은 자기가 펜스터를 비우 면 당장 제국군이 쳐들어와서 분탕질을 칠 거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브릭이 펜스터에 틀어박히면 다른 세 곳의 병력도 움직이지 않아." 장교들의 얼굴이 훨씬 밝아졌다. 니어엘이 말했다. "아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고 말했지? 그것은 이번에만 설명하겠 다는 뜻이야. 다음에는 설명이 없어. 알겠나!" 니어엘은 책상을 쾅 내리쳤다. 방심 상태였기에 때문에 장교들은 소 스라치게 놀랐다. 니어엘은 그들이 진정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말 했다. "알았냐고! 귀관들이 도적을 잡고 산적을 쫓아다니고 있을 때 나는 레콘들과 싸웠다. 그래서 수교위가 되고 귀관들의 중대장이 된 거야. 나는 이제 귀관들을 진급시켜주겠어. 전쟁 영웅이 되게 해주겠다고. 내가 취미 삼아 중대원들과 귀관들에게 애기살을 가르쳤는 줄 아나? 귀관들의 상관이 적당주의에 빠진 군인이라면 그럴 것 같나! 틀렸어. 나는 귀관들과 중대원들을 폐하의 군인으로 만들어왔어. 그리고 이제 폐하를 위해 싸울 자리로 귀관들을 이끌어가고 있어. 하지만 귀관들 이 나를 의심하면 그럴 수 없어. 군인 정신이 빠져가지고 상관을 품 평하려든다면 그럴 수 없어! 황당하다는 표정도, 항의하고 싶다는 표 정도, 체념한 듯한 표정도 짓지마. 귀관들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준비하지마! 귀관들 중 벌써부터 화려하게 싸우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소대원들이 서로 싸우건 후장을 따먹건 신경 안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 알고 있 다!" 가리아 릿폴 부위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다른 장교들이 가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은 것은 어린 장교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다. 모두들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니어엘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그들이 이 며칠 동안 보인 태도였다. 고개를 들면 중대장의 입에서 애기살이 날아와 눈에 꽂힐 거라 믿는 장교가 한두 명이 아니 었다. "마음의 준비 따위 집어치워! 그런 걸 해야할 때가 오면 내가 알려 주겠다. 귀관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나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마. 늘상 하던대로 해! 그리고 이 시간 이 후로 내가 귀관들에게 사병들도 잘 아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없 도록 해. 내가 걸으라고 하면 걸어! 서라고 하면 서! 자라고 하면 자! 그리고 어느 날, 진짜 귀관들의 시간이 왔을 때 싸워! 머리 속으 로 수백 명을 학살하느라 지쳐빠져서 진짜 전투에서는 도망치는 바보 들은 보고 싶지 않다! 일어나!" 장교들은 황급히 일어섰다. 그 중 많은 이가 탁자에 무릎이나 허벅 지를 부딪힌 것이 분명하다. 탁자가 몇 번 들썩였으니까. 하지만 아 무도 감히 비명이나 신음을 내지 못했다. 니어엘은 씹어먹을 듯한 얼 굴로 장교들을 노려보았다. "소대원들에게 가라. 귀관들이 화려하게 죽을 장소까지 데려다주고 곁에서 함께 싸울 사람들에게 가라. 가서 보살펴라! 해산!" 장교들은 황급히 경례하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에 빠져나간 것은 역시 가리아 릿폴 부위였는데 앞에 있는 사람을 떠밀고 싶어하 는 것이 역력하게 보였다. 니어엘은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에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릿폴은 감 히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고 그래서 니어엘의 행동은 과잉 친절이 되 고 말았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1-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3-25 조회수 : 2289 피를 마시는 새 11.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 4 그로부터 여드레 뒤, 니어엘의 공언은 실현되었다. 파리조의 남동쪽 요충지를 지키고 있는 레드마 브릭 자작에게는 그 특별한 위치 때문에 많은 것이 주어져 있었다. 혈족들인 몇몇 지배자 들이 암살공이 아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도 그런 특별한 선 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레드마는 더 많은 권한이 더 많은 책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 정도로 성숙한 인물이었고 자신이 책임을 다하기 전에는 권한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자작이 발케네공의 소환령을 받은 순간 종군을 결심한 것은 발케네공에 대한 충성심이나 의리 때문은 아니다. 그것이 해야 하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발케 네에서 퍽 보기 드문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무적인 지배자 브릭 자작도 사천 명의 병사들이 소 환되어 출진 준비를 갖추었을 때는 가슴이 약간 설레는 것을 느꼈다. 어떠한 합리적 이유도 없이 그저 힘을 보여주고 싶은 과시욕은 본능 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브릭 자작도 자신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 능력자인지 궁금해졌다. 이런 심리는 모든 건전한 지배자를 망 가뜨리는 병이며, 안타깝게도 안전한 치유법은커녕 적절한 예방책도 없다. 브릭 자작의 초기 증세는 감동적인 연설로 나타났다. 브릭 자 작이 감동하는 것만큼 그의 가신들은 당황하게 되는 연설이긴 했지만 어쨌든 아름다운 말들은 효과를 발휘했다. 병사들은 기개 있는 함성 과 높이 쳐든 창으로 감동의 되먹임을 보여주었다. 브릭 자작은 거의 울 뻔했다. 그리고 출진 한 시간 후, 브릭 자작은 정말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를 감싸쥐고 정신없이 도망칠 때 몸밖으로 내보낼 수 있 는 물의 종류는 제한된다. 브릭 자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쏟아지는 애기살을 피해야 했다. 그것은 언뜻 보면 가랑비처럼 보였다. 날아오는 궤적을 보기 어려울 만큼 작은 화살이라 화살을 쏘아보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토록 작은 화살은 브릭 자작의 눈 앞에서 어떤 불쌍한 병사의 투구를 꿰뚫고 뒤통수로 빠져나오는 괴력을 보여주었 다. 그 화살의 비 앞에서는 방패도 적절한 방어책이 되지 못했다. 조 금 부실한 방패의 경우 애기살은 여지 없이 그것을 관통했다. 그리고 인간이 드는 방패는 무게의 한계가 있는 법이다. 브릭 자작을 보호하 고 있는 가신들은 특별히 잘 만들어진 방패를 들고 있었지만 화살의 일제 사격 속에서 몇 분이 지나자 그들의 방패 뒷면은 뚫고 들어온 화살촉 때문에 손을 갖다 대기도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브릭 자 작은 죽을 힘을 다해 성 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직후 브릭 자작은 자신의 팔을 관통한 채 빛나고 있는 화살을 보고는 생애 처음으로 졸도했다. 졸도가 지배자의 적절한 처신인 경우는 별로 없 는데, 바깥에서 그의 병사들이 학살당하고 있을 때는 특히 그러하다. 니어엘 헨로는 서전에 강력한 타격을 주어 공포를 안겨주기로 결심 하고 있었다. 애기살의 집중 사격은 순식간에 지휘 체계를 와해시켰 고 니어엘은 때를 놓치지 않고 중대원들을 돌격시켰다. 그녀의 중대 원들은 궁병이 아니다. 니어엘에게 철저히 궁술을 교육 받은 보병이 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군사 교육을 받은 직업 병사와 밭 갈다가 영주의 소환 때문에 창을 쥔 농부 사이에 괄목할 만한 전투력의 차이 가 있는지 의심한다. 그 의심은 부분적으로 옳다. 개인 단위에서 전 투력은 사실 별로 논할 가치가 없다. 힘 세고 민첩한 농부는 노련한 부위를 때려죽일 수도 있다. 엄격한 훈련의 결과는 오직 집단 단위에 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나타날 정도의 단위가 되면 그 순간부터 농부들은 - 그들이 곡괭이의 달인이거나 낫 질의 명인이라 하더라도 - 군인들의 상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소대 장들이 사살한 숫자만 합쳐도 백 명에 육박한다는 결과 앞에서는 니 어엘도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리품을 수거하는 데도 그 날의 남은 시간이 다 지나갔다. 계곡 은 밀한 곳에 건설한 진지로 물러나 진지의 문을 닫았을 때 중대원들은 피에 취해 흥분해 있었다. 내킨 김에 야음을 틈타 브릭 자작의 성을 공격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소대장들은 만장일치로 그 의견을 받 아들였다. 하지만 중대장은 펜스터를 점령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지금이라면 저 성은 문제없이 점령할 수 있어. 이봐, 중대장 은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했잖아. 결국 소대장 전원이 찾아간다 는 의견이 채택되었다. 다미갈 카루스 부위는 다른 부위들과의 의리 때문에 할 수 없이 동참했다. 니어엘 헨로는 소대장들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한 다음 말했다. "모조리 다 온 것을 보니 전부 찬성인가?" 소대장들은 씩씩하게 외쳤다. "예! 그렇습니다." "누가 제일 목청이 크지?" "예?" "아니, 됐어. 다미갈 카루스 부위. 천막 밖에 나가서 중대가를 부른 다. 노랫소리가 작거나 끊어질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겠다." 다미갈 카루스 부위는 씁쓸한 얼굴로 밖에 나갔다. 헛기침을 몇 번 한 카루스는 목청껏 중대가를 불러 병사들을 당황시켰다. 긴 시간 후, 천막의 휘장이 들리며 가리아 릿폴 부위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릿폴은 카루스에게 말했다. "교대입니다. 들어가십시오. 카루스 부위." "뭘 각오하면 됩니까, 릿폴 부위?" 가리아 릿폴은 고개를 들어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 물이 글썽했다. "전 왜 살고 있을까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던 카루스는 그냥 그녀를 지나쳐 천막 안으 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서는 니어엘이 밖에서 들려오는 릿폴의 중대 가에 묻힐 만큼 낮은 소리로 조용조용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 을 들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루스는 얼어붙어 있는 다른 부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제국군의 쓰레기라고 느끼게 되었다. 중대가를 부르던 릿폴의 목이 쉴 무렵 다시 휘장이 들렸다. 릿폴은 두려움에 차서 뒤쪽을 돌아보았다. 소대장들이 모두 귀신을 본 것 같 은 얼굴을 한 채 걸어나왔다. 그 뒤편에서는 니어엘이 빙그레 웃었 다. "유익한 토론이었다. 그러면 귀관들의 의견에 따라 진지 보강에 돌 입하기로 한다." 니어엘이 휘장을 내리자 소대장들은 전부 치를 떨었다. 서전의 강력한 공격은 니어엘이 기대한 효과를 가져왔다. 펜스터의 브릭 자작은 팔의 상처와 함께 마음에도 혹독한 상처를 입었다. 궁술 에 조예가 깊은 가신 한 명이 그의 팔에서 제거된 화살이 애기살이라 는 것을 가르쳐주면서 또한 애기살에 숙련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도 가르쳐주었을 때 브릭 자작은 자신이 제국의 특수 병과와 싸우 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작도 지도를 볼 줄 알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지휘관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다친 팔을 싸맨 채 자작이 주관한 간부 회의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그렇습니다. 각하. 적의 지휘관은 우리를 봉쇄함으로써 미차도와 군스, 노바일의 병력 또한 봉쇄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봉쇄가 목적이라면 우리를 적극적으로 공략할 가능성은 없겠군." "예. 지난번의 뼈아픈 타격은 섬멸전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리 고 그 후로도 성 근처에 적의 병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공성이 목적이라면 그 기습의 직후가 적절했을 겁니다." "적의 병력에 대한 추정치는?" "그것이, 정말 추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애기살은 잘 보이지 않아서 몇 발이 동시에 날아오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사격 직후에 이루어 진 돌격에서 적과 싸웠던 병사들 중 어떤 이는 삼천 이하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절대로 오천 이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국군 편제로 어떻게 되지? 대대급인가?" "인원으로는 대충 그 정도가 됩니다만 제국군에서 대대 단위라면 보 통 전략 임무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공격은 전술 수준이 고, 아무래도 몇 개의 독립 중대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 다." "그렇다면 애기살 쏘기가 특기인 중대 하나와 보병 중대 몇 개라고 봐야 하나." "저, 각하.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나나본에 애기살의 명수인 제국 군 수교위가 있다고 합니다. 엘시 에더리 대장군과 함께 고속 진급을 한 그의 부하들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안 듣느니만 못한 우울한 정보였다. 레드마 브릭 자작과 가신들에게 그 정보는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대장군이 심혈을 기울여 키 워낸 특수병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일단 적에 대해 안 연후에 대응을 세워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수 색을 시작하라. 인근의 지형에 대해 잘 아는 자들을 모두 내보내 제 국군의 자취를 추적해라." 곧 제국군의 진지로 추정되는 목책과 야영지가 브릭 자작의 정찰병 에게 포착되었다. 정찰병의 보고는 자작과 그의 군사전문가들을 당황 하게 했는데 아무래도 천 명 이상은 들어가기 어려울 규모라는 것이 다. 그리고 브릭 자작과 그의 가신들은 자신들이 받은 공격을 절대로 천 명의 공격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이 여러 개의 독립중대 중 하나일 거라 믿었다. 그러나 더 많은 정찰병 을 내보내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 되었는데, 몇몇 정찰조가 미귀환하 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레드마 브릭은 군량의 압박을 느낄 적군이 먼저 공격을 시작할 때까지 응전을 삼가고 잠시 기다린다는 결론을 내렸다. 레드마 브릭 자작이 그런 결정을 내리던 시각, 니어엘 헨로 수교위 는 진지에서 한 명의 교위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무운을 빌겠다. 신뷰레 교위." "무운을 빕니다. 헨로 수교위." 니어엘 헨로가 구축한 진지를 인계받게 된 것은 가시나무 군단 21 중대장 눈하츠 신뷰레 교위였다. 단독 작전을 행하는 것이 처음인 눈 하츠 신뷰레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 높은 신뷰레 가문 의 후손답게 눈하츠 신뷰레에게는 기품이 있었다. 좋은 장교의 재목 을 좋은 장교로 만드는 것은 경험이고 그것은 조언이나 조력으로 어 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니어엘에게는 그를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몇 명의 솜씨 좋은 수전사를 신뷰레에게 붙여주면 어 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곧 니어엘은 그 안을 파기했다. 오비삼 척인 처지다.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지."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 질문하던 눈하츠 신뷰레는 저편에서 니어엘의 소대장들이 얼굴을 무 섭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는 말끝을 흐렸다. 부위들은 잡아먹을 듯 한 눈빛과 제발 살려달라는 눈빛을 뒤섞어 보냈는데, 어쨌든 꽤나 진 지한 표정이었다. 니어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어디로 가지, 가리아 릿폴 부위?" "모릅니다!" "몰라도 상관없나?" "예!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섭니다!" "까라면?" "깝니다!" "귀관은 그게 없잖아." "그래도 깝니다!" 눈하츠 신뷰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가리아 릿폴 부위를 바라 보았다. 그것이 없는 가리아 릿폴 부위가 어떻게 '깔' 수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막 입대한 하전사보다 더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부위라 는 것은 신뷰레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안되는 일이었다. 부위는 전 투의 주인이다. 전쟁은 그들의 시간이다. 눈하츠 신뷰레의 소대장들 만 해도 그들의 중대장에게 고양이가 주인에게 보내는 것 정도의 경 의만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군의 전통을 높이 평가하는 신뷰레 는 그런 소대장들을 꾸짖기는커녕 오히려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편이 었다. 그런 신뷰레의 눈에 니어엘 헨로의 부위들은 너무도 이질적이 었다. 눈하츠 신뷰레는 부위를 그렇게 다그쳐서 전투력이 유지될 수 있냐 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교위는 상급자의 부대 운용 방식에 참견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질문할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눈하츠 신뷰레는 아무 질문도 못한 채 니어엘 헨로와 그녀의 중대를 배웅해 야 했다. 니어엘의 걱정과 달리 눈하츠 신뷰레는 그 후 꽤 편한 시간 을 보낼 수 있었다. 애기살의 명수인 수교위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 던 브릭 자작은 감히 진지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펜스터를 떠난 니어엘 헨로의 중대는 이틀 뒤 이름 없는 마을에 도 달했다. 소대장들은 그곳에 이미 행보관 커레이야 만스 교위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것이다. 그들은 니어엘 헨로가 이끌고 간 곳에 보급품과 함께 커레이 야 만스 교위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니어엘은 만스 교위의 얼굴에 가득한 피로를 놓치지 않았다. "힘들지?" "괜찮습니다." "어떻게 이걸 가져왔는지 설명해주겠나?" "고참 교위에게는 나름의 방법이 있게 마련이지요." 커레이야 만스 교위는 가시나무 군단의 보급대에 약간의 장난을 쳤 다는 것을 실토했지만 그 장난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 다. 매우 비공식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짐작한 니어엘은 더 묻지 않았 다. 대신 다음 보급 일자와 장소에 대해 전달했다. 만스 교위는 더욱 시커매진 얼굴로 떠났다. 소대장들과 중대원들은 니어엘이 말한 '군인은 걷는다'라는 말의 의 미를 체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걸었다. 정말 지겹게 걸었다. 자면서 걸었고 먹으면서 걸었다. 어떤 곳에서는 전투가 있었고 어떤 곳에서 는 진지 구축이 있었지만 그것은 기분 전환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시 간 동안 중대는 걸었다. 니어엘 헨로는 전투가 있기 전에는 반드시 가르쳐주었고 남아 있는 시간은 언제나 가까스로 준비를 끝낼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다. 매번의 전투는 언제나 이전의 전투와 달랐다. 도무 지 전투가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도 있었다. 하루 종일 나무를 한 다음 목재를 쌓아놓고 그 자리를 떠나거나 하는 일이 그에 해당한 다. 전투는 맞는데 적은 없는 경우도 있었다. 니어엘이 지정한 방향 으로 화살만 잔뜩 쏘고는 적군의 모습도 보지 못한 채 물러나는 경우 가 그러하다. 그러나 가끔은 칼과 칼이 부딪히는 일도 있었다. 소대 장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부위의 재미가 아니었다. 니어엘이 지 금부터 전투를 시작한다고 말한 장소는 언제나 그들이 이길 수 있는 장소였다. 니어엘이 깨부수라고 말한 적은 언제나 깨부술 수 있는 적 이었다. 이길 수 있는 장소에서 이길 수 있는 상대하고만 싸우니 연 전연승이었고, 그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흥분되거나 피가 끓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대원들은 점점 자신이 전투를 수 행 중이라는 느낌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걸었다. 발케네의 깊은 계곡과 울울창창한 숲을 걸었 다. 흙과 나무와 바위, 시냇물. 점점 중대원들은 세상에 자기 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때론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고 볼 때마다 점점 시체 같은 얼굴이 되는 만스 교위가 나타나서 군량과 애기살을 공급 해줄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백일몽만큼도 현실에 영향을 주지 않았 다. 그들의 현실은 흙과 나무와 바위, 시냇물이었다. 그 사이를 끝없 이 걷는 것이 중대의 일이었다. 땔감을 모으느라 걸었고 마초를 모으 느라 걸었고 천막을 치느라 걸었다. 전투는 잠깐씩 스쳐가는 산들바 람 같았다. 이길 수 있는 장소에서 이길 수 있는 적만 상대했으니까. 그들은 함성도 없이 무표정하게 돌격했고 조금 후에는 좋은 땔감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나누며 적들의 시체 사이에서 걸어나왔다. 니어 엘의 말처럼 그들은 아무런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싸워서 이기면 되니까. 그들은 싸우면서도 걸었다. 멈출 때도 있긴 했다. 햇빛이 좋으면 중대는 멈춰서서 빨래를 했다. 이 때야말로 빨래 방망이가 바람을 가르며 춤추고 물방울이 무시무시 하게 튀는 박진감 넘치는 시간이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늘어뜨린 빨 랫줄에 깨끗하게 세탁된 옷가지를 걸어놓고 그 아래에 반라 차림으로 드러누워 잡담을 나누기엔 좋은 계절이었다. 만춘이니까. 여자 병사 들이 가슴을 예쁘게 그을리는 동안 남자 병사들은 엉덩이를 실룩거리 며 개울을 첨벙첨벙 뛰어다녔다. 아비규환의 천렵이었다. "이 무례한 모래무지가 장교를 몰라보고!" "부위님, 좀 제대로 몰아요! 어푸!" "젠장, 오와 열을 맞춰 헤엄치란 말이다! 군기가 빠져가지고!" "붕어다!" "잠깐! 그 분은 이 개울의 중대장님이시다!" "그렇다면 중대장탕을 먹을 수 있겠군요?" "훌륭하다, 병사!" 회심의 중대장탕은 대실패로 끝났는데, 취사병의 조악한 실력 때문 이 아니라 참견하는 장교들이 너무 많아서였다. 하지만 장교들은 그 런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몸도 마르고 옷도 마른 후 그들은 다 시 걸었다. 중대장탕의 실패 원인에 대해 토론하며. 논의는 어느덧 군단장탕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졌다. 군단장탕에 들어가야할 재료는 과연 무엇인가? 어떤 물고기가 군단장탕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물고기일까? 잉어, 쏘가리, 가물치, 송어, 메기 등이 접전을 벌였다. 좀 특이한 의견도 있었다. 그 다음 전투가 끝난 후 머리를 세게 맞은 가리아 릿폴 부위로부터 고래라는 신음이 잠깐 흘러나온 것이다. 하 지만 다른 소대장들은 고래가 개울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 아 니라 고래라면 대장군탕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그 안을 기각했다. 그 후에야 그들은 졸도한 릿폴 부위를 들것에 옮겨 놓았 다. 그리고 그들은 걸었다. 릿폴 부위도 며칠 후에는 걷게 되었다. 흙과 나무와 바위, 시냇물. 봄은 폭발하고 있었다. 지평선을 향해 유목민 무리처럼 묵묵히 한 줄로 걸어가는 천 명의 중대는 지루했다. 정말 전쟁이 벌어진 것일까? 우리는 그냥 중대 본부를 나와서 여기저 기 쏘다니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 중대원들은 어느새 커레이야 만스 교위가 그들과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행보관님, 언제 오셨어요?" "……이틀 전부터 있었다." 만스 교위뿐만이 아니었다. 중대 본부에 남아있던 경비대와 보급계 병사들 또한 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달랐다. 뭔가가 이상했다. 소대장들은 의리둥절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 만 아무도 중대의 맨앞에서 걸어가는 중대장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먼저 명령을 내린 것은 중대장이었다. 지평선 쪽에 흩어진 몇 개의 산릉이 다가왔을 때 니어엘이 손을 들었다. "준비해라." 만스 교위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중대원들의 반응을 바라보았다. 중대원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주섬주섬 갑옷끈을 고쳐매고 활을 점검했다. 하지만 그들이 덧살을 준비하려 했을 때 중대장이 말했다. "덧살은 필요없다." 중대원들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 다. 그들은 무덤덤하게 산릉을 향해 걸어갔다. 야산 저편에서 엄청난 연기와 소음이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중대원들의 반응은 시큰 둥한 편에 가까웠다. 아무도 긴장하지 않았다. 이길 수 있는 장소일 테고, 이길 수 있는 상대일 테니까. 어떤 분대장은 빨래하기 좋은 날 씨라고 생각했고 어떤 반장은 반원에게 여동생의 미모에 대해 추궁 했다. 그리고 어떤 하전사는…… 그들이 산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갑자기 모든 것이 나타났다. 무기력한 관조자에 가깝던 중대원들 전부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받은 첫번째 인상은 자신들이 엄청난 대도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침착을 되찾은 후에 중대원들은 그것이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덕 아래의 평야에는 엄청 나게 많은 천막과 끝이 보이지 않는 목책이 있었다. 임시로 지었다고 보기 힘들만큼 거대한 목조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넓은 공지에는 군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군마들이 풀을 뜯는 대규모 초지가 여러 개 보였다.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연기는 수십 개의 노천 대 장간과 취사장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새카맣게 뒤덮고 있는 대군이 있었다. 구획이 잘 된 밭에 자라난 옥 수수처럼 땅을 빽빽히 뒤덮은 군사였다. 도무지 몇 명인지 어림짐작 하기도 어렵다. "레콘이다." 레콘들도 있었다. 광활한 옥수수밭에서 느티나무들이 걸어다니는 것 같은 광경이다. 어떤 성질 급한 레콘은 수십 명의 인간 병사 위를 훌 쩍훌쩍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쿵쿵 하는 소리와 병사들이 비명이 들려왔다. 펄럭이는 무수한 깃발들. 대대기와 군단기가 보였 다. 레콘들의 여단기는 특별히 거창했고 바람에 잘 날리지도 않았다. "하늘치…… 하늘누리다!" 그 모든 것들 위에 하늘누리가 고고하게 떠서 아래쪽에 있는 광대한 군영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산이 하나 떠있는 것 같았다. 하 늘누리 아래쪽에는 사람들이 둥둥 떠다녔다. 눈을 닦고 바라본 중대 원들이 그들이 하늘누리에 오르내리고 있는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거 리가 먼 탓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허공을 걸으며 올라가 거나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는 하늘을 날아다니 는 무수한 딱정벌레들이 보였다. 대부분 하늘누리 주변에서 선회 비 행을 하고 있었지만 지평선 저편으로 다급한 용무를 가지고 날아가는 것들도 있었다. "내려가자." 중대원들은 반사적으로 중대장의 말을 따랐다. 그들은 앞쪽에 잘 닦 여진 길이 있었다. 최근에 만들어진 길처럼 보였다. 다시 군영쪽을 본 중대원들은 그들이 걸어내려가고 있는 길 외에도 많은 길이 사방 으로 뻗어있고 그곳에서 중대나 소대 단위로 보이는 병력들이 행군하 고 있음을 발견했다. 막대한 물자를 실은 수레들의 행렬도 보였다. 빈 수레들이 어딘가로 떠나는 광경도 보였다. 물자를 나르는데 사용 되는 것은 수레만은 아닌 것 같았다. 군영 쪽으로 이어진 강에는 커 다란 돛단배들이 떠있었다. 중대원들은 군량이 야적되어 있는 곳이 가설 부두에 면하고 있는 지점임을 깨달았다. 레콘들이 주로 움직이 는 지역이 강에서 꽤 먼 곳임을 발견한 중대원들은 재미있어 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제국군이었다. 전쟁은 확실히 실행중이었다. 중대원들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흥분을 느꼈다. 전쟁은 있었다. 그들 도 전쟁을 하고 있었다. 도무지 그랬다는 기억이 없긴 하지만. 갑자 기 중대원들은 자신들이 외로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새벽, 나 나본의 중대 본부를 떠난 이후로 그들은 언제나 혼자 걸어다녔다. 가 끔 나타나는 만스 교위와 더 가끔 나타나는 적 외엔 흙과 나무와 바 위, 시냇물뿐이었다. 언제나 보이는 얼굴은 전우라기보다는 동료 방 랑자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눈앞에는 전우들이 있었다. 전우. 가 슴 벅차는 말이다. 소대장들의 눈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군인의 빛을 뿜었다. 이제 그들은 땔감이나 군단장탕 같은 맹랑한 이야기 대신 진 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길 끝에 거창한 규모의 위병소가 나타났다. 살벌하게 무장한 위병들을 보자 중대원들은 초조감 비슷한 것을 느 꼈다. 그들은 진짜 군인처럼 보였다. 반면 그들은 황야를 걸어다니고 빨래하고 천렵하다가 온 방랑자들이었다. 전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 만 그 전투들은 어떻게 보아도 혈투라고 할 수 없었다. 나타나는 적 들은 간단히 이길 수 있는 오합지졸들뿐이었으니까. 다른 병력들도 그렇게 손쉽게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모 두들 사선을 넘나드는 고통을 감수하며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들 은 그제서야 목책 안쪽에는 진료소처럼 보이는 건물들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건물이다. 세상에, 저 자들과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을 했었다니! 중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위병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보며 소대장들은 원망하는 마음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마 침내 대규모 공격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부대와 나눌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조무래기들과 싸우면서 이곳까지 온 것은 중 대장이 어떤 질문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그것 을 즐겼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어떤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들은 천렵하고 빨래하면서 노닥거릴 수 있었다. 소대장들 은 원망보다는 자괴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대장에게만 책임 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방기했던 장교다운 태도가 그들에게 서 살아났다. 장교들은 이 사태에 대해서는 장교답게 중대장과 함께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위병소장이 외쳤다. "문 열어! 헨로 중대다!" 중대원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중대장이 니어엘 헨 로니까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대의 공식 명칭이 아니 었다.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며 중대원들은 다시 알 수 없는 초조함 을 느꼈다. 우리가 저기 들어가도 될까? 정식 명칭으로 불리지도 못 하는데? 하지만 니어엘은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중대원들은 다시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그들은 일제히 앞으로 걸어 갔다. 의기소침하여 걷던 맥키 네미 부위가 다미갈 카루스 부위의 당 황한 손짓을 본 것은 그 때의 일이었다. 카루스는 위병소 쪽을 가리 키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쪽을 본 네미는 급하게 호흡을 들 이켰다. 위병소장과 위병들이 그들에게 경례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 만 놀랄 일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헨로 중대다!" "헨로 중대가 왔다!" 외침들이 들리면서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말이 놀랐기에 소대장들은 황급이 말고삐를 잡아당겨야 했다. 병사들은 눈이 여덟 개면 좋겠다 는 태도로 사방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레콘들이 쿵쿵거리며 뛰어오 는 모습도 보였다. 삽시간이 그들이 걷고 있던 진입로 좌우에 제국병 의 벽이 생겼다. 제국병들은 굉장히 희한한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 중 대를 바라보았다. 중대원들은 완전히 혼란스러워졌다. 그 때 카루스는 몰려든 제국병들이 자신을 가리키며 수군거리는 것 을 발견했다. 카루스는 자신을 내려다보았지만 특별히 잘못된 점은 없었다. 중대 본부를 떠난 이후로 한 일이라곤 빨래와 목욕, 천렵 따 위였으니 차림새가 깨끗한 것은 당연하다. '너무 깨끗해서 그러는 건 가? 하긴 그렇겠군.' 그 때 병사들 사이에서 숨죽인 속삭임이 들려왔 다. "미친 개 카루스지?" 다미갈 카루스는 낙마할 뻔했다. 별명에 담긴 악의를 존중의 척도로 삼던 철없던 어린 시절에도 카루스는 이런 흉측한 별명을 들어본 적 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보다는 자신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 고 씹던 음식과 불필요한 말은 모두 입 밖으로 내면 안된다고 믿는 차분한 부위 카루스에게 이 별명은 끔찍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만의 체험이 아니었다. "맞아. 식인부위 네미다!" 맥키 네미는 자신이 약간 괴팍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음 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취사병을 구워서 가져오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하지만 두 아이의 번듯한 아버지에게 - 물론 아이들의 얼굴을 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지금은 맞닥뜨려도 알아볼 자신이 없긴 하지만 - 이런 별명은 좀 지나치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 러나 그들은 가장 불행한 자들은 아니었다. "저 여장교야! 저 부위가 까는 릿폴이야!" 지나치게 익은 홍시 같은 가리아 릿폴 부위의 얼굴을 곁눈질 하면 서, 다미갈 카루스와 맥키 네미는 자신의 별명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정말 사랑스러운 별명이다. '살인 9단'이라거나 '사지절단기' 같은 별명으로 불리게 된 다른 소대장들도 가리아 릿폴이 듣는 곳에서는 감히 불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그 별명이 무 슨 이유로 생긴 것인지 미칠 듯이 궁금해했다. 백주에 보는 환상 같은 체험은 그들에게 배당된 야영지처럼 보이는 넓은 구간에 들어섰을 때 극도에 도달했다. 그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분열을 시작했다. 군인이라면 수없이 훈련하여 익숙한 동작이지만 야 영지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든 제국병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 며 옆사람과 다급하게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 다. 그들은 가까스로 정렬할 수 있었다. 열병 준비가 끝나자 니어엘 헨로는 말에서 내려 중대 앞에 섰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풍채 좋은 장교들이 나타났다. 중대원들은 눈을 닦고 싶었다. 하장군과 장군, 수교위들의 모습도 충분히 놀라운 것이지만 그들 제일 앞쪽에서 걸어 오고 있는 것은 상장군이었다. "상장군님께 경례!" 니어엘의 경례를 받은 것은 가시나무 군단장인 시허릭 마지오 상장 군이었다. 경례를 마친 마지오 상장군은 니어엘에게 악수를 요청했 다. "오래 기다렸어. 전설의 독립중대를 보고 싶었으니까. 마침내 도착 했군." 니어엘은 그 손을 마주잡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상장군님." "천만의 말이야. 귀관들이 아니었다면 발케네의 심장부에 이렇게 집 결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지. 모든 제국군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 겠어." 마지오 상장군은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니어엘만이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물론 합당한 포상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을 거라 고 알고 있어." 니어엘은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말했다. "제가 황제 폐하의 군인임을 믿어주시면 됩니다." 마지오 상장군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참모도 더 이상 니어엘 헨로 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말을 할 수 없게 된지 오래였다. 제국군의 전 설이 되어버린 중대의 지휘관을 의심하는 것은 이제 그 자신의 안위 에 관련된 문제가 된 것이다. "귀관은 그것을 증명했다. 귀관과 귀관의 부하장병들은 폐하의 자랑 스러운 군인이다." "감사합니다. 상장군님." "피곤할 테지만, 간략히 환영 연설을 하고 싶군. 해도 되겠나?" 마지오 상장군이 마지막에 붙인 질문은 니어엘과 그녀의 중대에 대 한 제국군 수뇌부의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니어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단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단상에 오른 상장군은 중대원들을 정신 착란 상태로 몰아갔다. 중대원들은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보았 지만 상장군의 입에서 나오는 '제국군의 자랑', '위대한 군인 정신', '폐하의 기쁨', '고금에 비교할 바 없는 초인적인 의지와 용기' 같은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시원찮은 반응 밖에 보낼 수 없었다. 상장군은 그것마저도 엄격한 자제력으로 해석 했다. "그대들에게 바칠 적절한 찬사를 생각해내는 것은 보다 혀가 매끄러 운 이들에게나 가능할 것이다. 투박한 군인인 본관에게는 그럴 능력 이 없다. 그래서 다만 말하겠다.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중대원들에게 경례를 보냈다. 기겁한 소대 장들은 마주 경례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웃으며 수행 장교들 과 함께 떠났다. 니어엘 헨로는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술 좀 마셔도 되겠군. 그 생각에 스스로 웃음을 보내던 니어엘은 맥키 네미 와 눈이 마주쳤다. 네미는 눈 주위를 부들부들 떨며 중대장을 바라보 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자신들이 전쟁 영웅이 되어 있음을 깨닫고 하얗게 질려 있는 가리아 릿폴의 모습도 보였다. 니어엘은 피 식 웃으며 단상을 바라보았다. 니어엘은 그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중대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니어엘을 바라보았다. "얘들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니어엘은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씻고 밥 먹자. 영웅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누군가가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가리아 릿폴 부위일 거라 는 생각에 모든 중대원들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릿폴 부위는 당혹한 표정으로 서있을 뿐이었다. 릿폴 부위가 가리키는 곳을 본 중 대원들은 눈을 뒤집은 채 쓰러져 있는 다미갈 카루스 부위를 목격하 고는 뭐라 말하기 힘든 심회를 느꼈다. 스카리 빌파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버 럭 화를 내었다. "들어와, 빌어먹을!" 문이 열리며 시종장이 들어섰다. 원래가 빈상이지만 오늘은 바라보 기 힘들 정도로 우울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은 스카리의 비위를 건드 려다. "그래서? 내가 나가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각하." "공작님이 출전하니까 그 후계자가 배웅해야 한다는 거지?" "나가야 하십니다. 각하." 스카리는 시종장을 쫓아내는 것을 고려해보았다. 하지만 쫓아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똑같이 우울한 얼굴을 한 채 지치지도 않고. 그 것도 참기 어려운 일이지만 스카리는 아버지가 시종장 대신 병사들을 보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스카리는 넌더리를 내며 일어섰다. "좋아, 가지!" "옷을 갈아입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됐어!" 스카리는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 시종장을 휙 지나쳐 걸어갔다. 시종장은 곤혹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암살성의 연병장에는 완전 무장을 한 암살공이 있었다. 병사의 숫자 는 많지 않았다. 암살공의 본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곳에 있는 자들은 출정식을 위해 필요한 오백 명 정도였다. 하지만 모두들 화려한 무구로 장식하고 있어 숫자가 적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주 위에는 가신들과 고위 귀족들이 서있었다. 그 중에는 아이저 규리하 와 이이타 규리하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암살성의 사용인들도 모 여 있었다. 스카리는 문기둥에 기대서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다. 락토 빌파는 투구를 옆에 낀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출정식을 잠시 중단한 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카리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기에 락토 빌파는 그가 온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 만 병사들과 귀족들이 조금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자 락토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카리와 락토의 눈이 마주쳤다. 락토의 눈이 잠시 스카리의 옷차림을 훑어내렸다. 암살공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지만 스카리는 씩 웃었다. 어제 저녁에 억 지로 끌려간 작전 회의에서도 스카리와 락토는 크게 싸웠다. 스카리 는 제국군의 발케네 진공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군사력 으로 맞상대할 필요는 없다고 강변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아들의 말을 듣던 락토는 아들의 말이 끝나자 회의장에서 나가서 머리를 좀 식히고 올 것을 명령했다. 스카리는 문을 쾅 닫고 나왔다. 그가 떠난 후에도 회의는 밤늦게 계속되었지만 스카리는 회의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락토가 말했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결례다. 가서 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다시 오너 라." "저는 이 전쟁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네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황제가 보낸 것은 항의서입니다. 선전포고문이 아닙니다. 협상의 여지를 준 거란 말입니다." "발케네의 공작은 적이 발케네에 들어와 있을 때 협상하지 않는다." "그런 공작이 발케네에 필요할까요?" 병사들은 간신히 침착을 유지했지만 주위에 있던 군중들은 신음과 낮은 비명을 토해냈다. 락토는 강철 같은 얼굴로 아들을 바라볼 뿐이 었다. 스카리는 계단을 뚜벅뚜벅 걸어내려왔다. 아버지의 곁에 선 스카리 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겠다면 가십시오." "그 손은 뭐냐?" "열쇠를 주셔야할 것 아닙니까. 옷차림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않겠 습니다. 이 옷은 부냐가 지어준 것입니다. 최고의 옷이지요." 스카리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빨리 열쇠를 받아 돌아가겠다는 듯이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출정식에서 성을 지키게 된 후계자에게 성의 열쇠를 넘기는 행사를 말하는 것이다. 황금으로 된 그 열쇠는 상징적 인 의미만 가지고 있을 뿐 성 안의 어느 문에도 맞지 않는다. 진짜 열쇠뭉치는 시종장이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그 황금 열쇠는 출정식 을 잠시 중단하고 후계자에게 참가할 것을 강요할 정도의 의미는 있 다. 락토는 그 손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버지의 손 이 손바닥에 닿았을 때 스카리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열쇠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카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그의 손 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스카리는 이 상황에서 웬 악수냐고 생각했 다. 그 때 암살공이 스카리의 팔을 잡아당기며 오른발로는 아들의 발 목을 받쳤다. 허공에 떠오른 스카리는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계단에 나동그라졌 다. 데굴데굴 굴러내려가는 젊은 발케네공을 보며 다시 구경꾼들이 비명 을 질렀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처박히며 굴러내려간 스카리는 연병 장에 거칠게 나동그라졌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꿈틀거리는 아들을 경멸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던 락토가 말 했다. "일으켜 세워라." 가까이 있던 병사들 중 몇 명이 황급히 스카리를 일으켜 세웠다. 스 카리는 두 발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렸기 때문에 그들은 스 카리를 계속 부축해야 했다. 암살공이 말했다. "가서 그의 자리에 세워라." 스카리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병사들은 그를 구경꾼들 자리로 데 려가고 있었다. 스카리는 당황하여 계단 위쪽을 보았다. 락토는 차가 운 얼굴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던 스카리의 눈이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계단 위쪽에 시종장이 서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스카리가 더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웃음이었다. 스카리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 다. 그 때 병사들이 그를 구경꾼들 사이에 세웠다. "놔…… 이거 놔!" "꽉 잡고 있어라." "아버지!" "시끄럽다." "아버지! 도대체 무슨……" 암살공은 조금도 지체없이 말했다. "무릎을 꿇리고 재갈을 물려라. 참석자들에게 결례다." 병사들은 당황했지만 주어진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힘센 병사 들이 어깨를 짓누르자 스카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곧 병사 한 명이 손수건을 둘둘 말아 스카리의 뒤편에서 재갈을 물려 잡아당겼다. 스카리는 거칠게 몸부림쳤지만 그를 억압하고 있는 병사 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암살공이 말했다. "그러면 출정식을 계속하도록 하겠다. 시종장."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시종장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 스카리는 그것이 아실임을 알고는 충격 에 몸부림을 멈췄다. 아실은 약간 긴장했지만 두려움 없는 태도로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락토 앞에 선 아실은 살짝 목례했다. 락토가 말했다. "발케네의 공작 락토 빌파는 무도한 적에 맞서 발케네를 지키기 위 해 출정한다. 파리조와 그룸성에 대한 내 책임은 나의 스승인 이 소 녀가 대신할 것이다." 스카리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재갈 때문에 '음, 음' 하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락토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암살공은 품안에서 황금열쇠를 꺼내었다. "무릎을 꿇어라." 아실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인 채 아실은 낮게 속삭였다. "공작님. 꼭 이러셔야겠어요?" "너는 내가 존경하는 스승이다." 아실은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지도 모를 애꾸눈 소녀는 스카리를 화나게 만들 수 있는 인물로 적격이라 할 것이다. 아실은 이런 우행에 끼여들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락토가 말했다. "손을 들어라." 아실은 손을 들어올렸다. 락토는 그 손에 황금열쇠를 올려놓았다. 아실은 미리 지시받은대로 그것을 두 손으로 쥐어 이마에 대었다가 가슴에 대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아실은 스카리 쪽을 보고 싶지 않 았지만 눈이 그쪽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스카리는 살기등 등한 눈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아실이 아니 라 락토 빌파쪽이었다. 아실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 다. "다시 돌아오셔서 제 의무를 해제시켜주실 때까지 주어진 책무, 목 숨을 바쳐 이행하겠습니다." 락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낮게 말했다. "들어가거라." 아실은 목례하고 계단을 올랐다. 원래는 열쇠의 보관자가 주재해야 하는 행사는 더 많았지만 암살공은 그 행사들을 생략했다. 그가 원하 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까. 계단을 다 오른 아실은 시종장에게 황금 열쇠를 건넸다. 시종장은 빈상인 얼굴에 용케 웃음을 담아보이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래쪽에 서는 락토가 연설을 시작했다. 아실은 시종장과 함께 그것을 구경하 며 말했다. "기쁜 것처럼 보이는군요. 시종장님. 스카리를 싫어하세요?" "해서는 안되는 질문이다." "그러지 마세요. 저도 이젠 어쩔 수 없이 발을 빠트렸다고요. 당신 이 함구해야 할 대상이 아닌 거죠." 시종장은 조금 고민하다가 속삭였다. "나는 좋은 주인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때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을 그 분과 비교하게 되는군." "정치적인 대답이군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정치잖느냐." "하긴 그렇네요." 아실은 혼란을 채 가라앉히지 못한 구경꾼들과 분노 때문에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스카리를 보았다. 병사들도 출정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가로운 태도로 구 경꾼들을 보던 아실은 그제서야 그 속에 섞여 있는 헤어릿 에렉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어릿은 평소에 입는 옷 대신 성장한 채 서있었고 그 때문에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 다. 하지만 그녀를 미인이라고 말할 사람은 있을지언정 사랑스럽다고 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실은 그 표정이 분노인지 실망감인지 알 수 없었다. 헤어릿은 스카리가 당 한 일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던 아실은 아이저 규리하와 이이타 규리하를 발견했 다. 그들은 서로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 일어난 일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 때 문득 아실의 머리 속에 한 가 지 착상이 떠올랐다. 지금 아이저의 방은 비어있을 것이다. 아실은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전 들어가겠어요. 여기 있으려니 스카리가 신경쓰여서." "그래라. 더 할 일도 없으니까." 아실은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시종장의 곁을 떠났다. 성 안으로 들어 선 아실은 주위를 살피며 아이저의 방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아이저의 방에 도달할 때까지 아실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아실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문을 연 아실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안에서 누군가가 말했 다. "어서 와, 아실. 책은 거기 있어." 아실은 몸을 홱 돌려다. 창가에 제이어 솔한이 서있었다. 제이어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천경비록을 가리켰다. 아실은 주위를 살짝 둘러보고는 탁자로 똑바로 다가갔다. 제이어는 웃으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출정식이 끝나면 알려줄 테니 읽어봐." "읽어봤어요?" "조금. 하지만 내 취향이 아니더군." 아실은 연유를 따질 시간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출정식은 길지 않을 것이다. '제이어가 감시를 맡아주겠다면 그러라고 하지.' 아실 은 책을 훌훌 넘기다가 한 부분에서 멈췄다. 제이어가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거기까지 읽었었나?" "아니오. 다 읽었어요." "그래? 대단하군. 꽤 두꺼운 책인데. 그럼 왜 온 건데?"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여기죠." "알았어." 아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기구를 찾아낸 아실은 그것을 책 옆에 펼쳐놓고는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제이어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실이 말했다. "감시 잘 하고 있는 거예요?" "걱정마." 아실은 책장을 휙휙 넘기며 다시 무엇인가를 썼다. "제이어. 당신 생각엔 어때요. 암살공이 하늘누리를 정말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거야 알 수 없지." 아실은 쓰던 것을 멈추고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어가 말했다. "황제는 명석한 사람이야. 태위도, 대장군도 없는 상황에서 황제는 발케네로 왔어.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아. 뭔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암살공을 돕고 있잖아요. 황제가 패하길 바라 죠, 그렇죠?" 질문하던 아실은 문득 제이어가 어떤 사람인지 떠올렸다. 그는 화려 한 실패주의자다. 자신이 기획하는 일이 절대로 성공하지 않을 거라 는 믿음이 제이어를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다. 어쩌면 황제 타도를 위 한 그의 노력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제이어는 황제 가 패망할 리 없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 다. 아실은 혐오감을 느꼈다. "당신은 거기서 무엇을 보고 있지요?" 출정식이라고 대답하려던 제이어는 아실의 질문이 그런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조금 생각한 후에 말했다. "분쟁." "분쟁?" "그래. 내가 일조한 분쟁. 커다랗고 화려한. 그것이 장대하기만을 바라. 결과는 내 관심사가 아니야." 분노와 혐오감 속에서 아실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제 이어를 바라보지 않았다. =============================================================== 11 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12.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 1 "전쟁의 진선미는 힘, 승리, 빠른 종전이다." - 엘시 에 더리. 딱정벌레가 겉날개를 폈다. 날개를 퍼득이는 동작은 빠르다. 어떤 새들처럼 천천히 날개를 치다가 점점 가속하는 과정은 없다. 빠르게 경련하는 날개가 굉음을 만들어내자마자 딱정벌레는 순식간에 날아올 랐다. 회의실 창가에 서서 마지막 딱정벌레가 날아오르는 광경을 보던 치 천제가 고개를 돌렸다. 탁자는 넓었고 주변에는 제국의 고위 관료들 과 장성들이 참을성 있는 태도로 서있었다. 그들은 황제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황급히 일어선 것이다. 황제는 나직하게 말했다. "앉아라." 사람들은 당혹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 었다. "두 번 말할까." 사도 락신 치올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았 다. 그를 따라 하나둘 사람들이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마지막까지 서있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 말했다. "그래서, 락토는?" 마지오는 황제에게 목례하고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상황도를 가리켰 다. 발케네의 지형이 잘 나타나 있는 상황도 위에는 몇 개의 모형이 얹혀져 있었다. 제국군과 발케네군을 나타내는 모형이다. 특히 인상 적인 것은 하늘누리의 모형인데, 모형 제작자는 하늘누리가 하늘에 떠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가느다란 철사 위에 하늘치 모 형을 얹어 하늘누리를 만들었다. 마지오 상장군은 발케네군을 나타내 는 모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십칠만 병력을 이끌어 이쪽을 향해 똑바로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별동대의 활동은 포착되지 않았으며 공작에게 별동대로 돌릴 여유 병 력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별다른 잔재주 없이 정면 대결을 하 려는 것 같습니다.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옳은 판단인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아직까지 적군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 을 잊지 않았다. "발케네군의 주축은 공작가의 정예 병력이긴 합니다만 그 숫자는 팔 만 정도입니다. 나머지 병력은 공작의 봉신들의 병력인데 이들은 통 일된 교전규칙 같은 것도 없고 합동훈련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습니 다. 이곳의 지형에 더 익숙한 것은 저쪽이니 광역 전선을 형성하면 유리할 테지만 기왕에 말씀드린 문제 때문에 발케네군의 수뇌부는 신 뢰성 있는 명령 체계를 확보하기 어려울 겁니다." "넓게 퍼져 있으면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참모부는 처음부터 공작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대회 전일 거라고 추측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전은 수립되어 있겠군." 사도 락신 치올은 어딘가에서 벼슬이 치솟는다는 기분을 느꼈다. 고 개를 돌린 사도는 벼슬을 빳빳이 세우고 있는 쥘칸 장군을 발견하고 는 우려를 느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쥘칸 장군의 관계는 군부 바깥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도가 보기에 지금 상황은 기름과 불씨가 한 자리에 있는 형국이다. 우려 속에서 사도는 요즘들어 수천 번 이상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이곳에 대장군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쥘칸 장군이 말했다. "한 마디 하지. 황제."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목이 벌겋게 변했다. 쥘칸 장군의 말투 때 문은 아니다. "본관에게 질문하라. 쥘칸 장군." 쥘칸은 시허릭을 무시했다. "그 작전 말인데, 시허릭의 모자란 참모들이 내놓은 작전에 좀 문제 가 있어. 선봉이 엉겅퀴가 아니야." 황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시허릭이 재빨리 말했다. "선봉은 당연히 기병이다." "자기보다 똑똑한 동물 타고 다니는 그 녀석들이 얼쩡거리면 우리가 싸우기 힘들어." 시허릭은 격분했다. 그는 살본 출신이고, 그곳 출신들이 으레 그러 하듯 애마인이다. 그리고 전술이론가로서 시허릭은 기병 돌격의 예찬 자에 가깝다. 하지만 제국군의 현실에서 기병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다. 기병보다 훨씬 빠르면서 방향 전환도 손쉽고 기병이 절대로 도 달할 수 없는 고도까지 자신의 전장으로 삼는 레콘들이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레콘도 무적은 아니다. "쥘칸 장군. 공작은 당연히 소화차를 전진배치시킬 것이다. 거기에 귀관의 부하 장병을 돌격시키는 것은 다시 없는 우행이다. 당연히 기 병 돌격이 우선이다." 쥘칸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허릭의 말이 끝 나자 쥘칸은 숨쉴 틈도 없이 대답했다. "헨로 중대가 있잖아." 시허릭은 흠칫했다. "9014 독립중대 말인가?" "그게 니어엘 헨로의 중대라면, 맞아. 그 깜찍한 수교위는 소화차들 이 10분은 굴러와야 할 거리에서 그 잡스러운 물건들을 간단히 무력 화시킬 수 있어. 그러면 우리가 돌격하는 거야. 간단하잖아. 알기도 쉽고." 사도 락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엘시 에더리라면 황제의 면전 에서 이런 지엽적인 전술적 논쟁이 벌어지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회의 전에 모든 의견을 종합하여 통일한 다음 간략히 보고했 을 것이다. 아마도 세 문장이면 충분했으리라. '격파할까요? 알겠습 니다. 폐하 만세.' 사도는 씁쓸한 기분 속에서 두 사람을 꾸짖기로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도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격한 이가 있었다. "참으로 어이 없는 꼴을 다 보는군." 사도는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그리워했다. 레이헬 라보 태위가 있었 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곳에는 누군가가 화를 낼 것을 미리 짐 작하고는 유쾌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호전시킬 태위가 없었고, 그래서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서슬 퍼런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대들의 토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척하지 않 겠다. 비전문가의 참견 정도로 취급할 여지를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의견 통일도 해놓지 않고서 감히 폐하께서 주관하시는 회의에 참석한 그대들의 낯두꺼움에 대해서는 분명한 해명을 듣고 싶다. 말 해보라." 시허릭은 창피한 듯 고개를 떨구었고 쥘칸은 약간 더듬거렸다. "지알데. 화 난 것은 알겠는데, 그러니까 그건 다 시허릭의 멍청한 참모들이……" "그 참모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폐하께 선봉을 맡겨달라고 조르는 것 이 낫다고 생각했군." 쥘칸은 부리를 닫았다. 자신이 명령 계통을 무시했다는 것을 인정하 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지알데는 칼날 같은 눈으로 시허릭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대 마지오 상장군은 폐하께서 그대의 작전을 승인하도록 함으로써 쥘칸 장군을 설득하는 노고도 폐하께 맡겼고?" "천경유수님. 저는 그런 생각을……" "대장군 없는 티를 아주 제대로 내는군. 도대체 그만한 지위를 가진 자들의 행동거지가 그렇게 졸렬한가? 그것도 제국의 존망을 최후에 책임져야 하는 자들이?" 점점 거세어지는 천경유수의 말투를 들으며 사도는 상장군과 장군을 거들기로 했다. "락바이. 고정하시게. 폐하께서 보고 계시니." 지알데 락바이는 험악한 표정으로 두 장수를 노려보았지만 락신의 말을 받아들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늙은이의 주제 넘은 언동을 꾸짖어주십시오." 황제는 오른손으로 흑사자 모피의 자락을 붙잡은 채 시허릭과 쥘칸 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떤가. 짐이 천경유수를 꾸짖어야 하나?" 두 장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쥘칸이 말했다. "내 잘못이다. 황제." "아닙니다. 폐하. 신의 불찰이었습니다." 황제는 창가를 떠나 그녀의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은 황제는 두 장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장군 시허릭 마지오와 장군 쥘칸은 천경유수의 충고를 고깝다 여 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곳은 그대들에게 수단을 제시하기 위한 자 리가 아니라 거꾸로 그대들로부터 그것을 받기 위한 자리다. 제국군 의 장수로서 그대들은 짐이 선택한 목적을 획득하기 위한 최선의 군 사적 수단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대들은 열성을 다해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대신 그대들의 갈등을 이 자리로 끌고 왔 다. 비록 제국군의 지휘 서열이 두 단계나 부재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그대들이 느끼는 곤혹감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대들의 행동이 직무 태만에 해당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쥘칸과 시허릭은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황제가 말했다. "어쨌든 락토가 대적할 의도를 내비치고 있음은 확실히 알게 되었 군. 밝혀진 바와 같이 군사적인 대응책은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두 장수가 짐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면 그것을 곧 준비할 것이다. 따라 서 모든 종류의 대응책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어떤 대응책을 선택 해야 할지 말해보라. 사도부터." 락신 치올은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폐하. 먼저 무례를 범함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신은 지금도 부 냐 헨로에게 장병 수십만 명의 귀한 목숨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 럽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현 상황의 핵심은 부냐 헨로가 아닌 발케네공의 적대적인 반응에 있 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적의를 드러내는 상황이라면 제국군은 절대로 물러날 수 없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강력한 공격으로 명명백백한 승 리를 거둔 다음 부냐 헨로의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현책이라 생각합 니다." 지알데 락바이가 눈을 부라렸다. 황제는 그에게 발언을 허락했다. 천경유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즉각 발케네령 밖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쥘칸 장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천경유수 를 바라보았다. 천경유수는 매서운 눈길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왜? 전투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고 힐난한 자에게서 전투를 피하 자는 말이 나오는 것이 이상한가? 전쟁이 없어도 훈련을 해야 하는 군인이라면 전투가 없어도 전투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이유도 알 것 이다." 지당한 말이다. 두 장수는 황급히 천경유수를 외면했다. 지알데는 황제에게 말했다. "제국의 위대함은 싸우면 이기는 강대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폐 하.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과오 없이 무참한 꼴을 당하지는 않는 세상을 약속해줄 수 있다는 것에 제국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따라서 굶주리는 이들과 배우지 못하는 어린이들, 그리고 부양 받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돌아가야할 돈이 무익한 전쟁에 사용되는 것은 부당합니 다." "전쟁이 무익하다고 보는가." "젊은 발케네공이 폐하의 법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 다. 더 큰 권한을 누리는 자로서 그가 받아야 할 벌은 더욱 큽니다. 하지만 그 벌은 젊은 발케네공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전쟁 외에 어떤 방법으로 발케네에서 스카리 빌파를 끌어낼 수 있 지?" "귀족원에 그의 계승권 몰수를 요청하십시오." 참석자들은 천경유수의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발케네공이 귀 족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귀족원은 황제 의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카리 빌파의 계승권이 없어진 다면 락토는 헤어릿 에렉스를 인지하거나, 양자를 들이거나, 스카리 에게 (작위를 제외한) 발케네를 넘겨줌으로써 공작가를 끝장낼 수밖 에 없다. 마지막 선택은 거의 불가능하니 스카리는 고립무원이 될 것 이다. 치천제가 말했다. "그대의 정신은 고귀하다. 지알데 락바이. 우리 모두가 후대에 물려 줄 수 있는 것은 값진 물건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나은 것들 을 만들 수 있을 테니.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갈 고 닦은 정신뿐이다. 제국이 자신의 위대함을 확보하는 방법에 대한 그대의 사상은 틀림없이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자산 중 하나로 후손 에게 전해질 것이다." 치천제는 탁자 위의 상황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우리의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경유수의 눈이 커졌다. 반면 사도의 눈은 움푹 들어갔다. 청중의 반응을 조용히 살피던 치천제의 눈이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의 얼굴 에 잠시 멎었다. 사라말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지루함을 극복하려 애 쓰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치천제가 말했다. "천경유수의 제안에 대한 도덕적 차원의 평가에 앞서 그 제안이 비 현실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겠다. 이곳에 집결한 제국군이 피해 없이 발케네령 밖으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상에 있는 모든 제국 군을 하늘누리에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은 천경유수가 더 잘 알 것이 다. 걸어서 도망치는 제국군에게 발케네공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피해를 강요할 수 있다. 싸우도록 한다. 이 논의는 싸움의 결과를 본 후 재개하도록 하겠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쥘칸 장군이 동의하 는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짐에게 가져오도록. 이만 회의를 끝내겠 다." 대신들과 장수들이 일어났다. 황제가 말했다. "천경유수는 잠시 기다려라." 가장 위대한 도시를 총괄하는 대신은 황제를 잠깐 보다가 자리에 앉 았다. 황제는 상황도 위의 모형들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사람들이 회 의실을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락신 치올 사도가 황제와 천경유수를 한 번씩 본 다음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갔다. 황제는 하늘누리의 모 형을 눈 앞으로 가져와 바라보았다. "천경유수." "예. 폐하." "지금 시점에서 회군은 불가능하다. 억지를 쓰는 이유가 뭐지?" "폐하. 외람됩니다만 모든 이가 우리의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 니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대의 짐작을 말해보라." "내일의 제국에 발케네인은 없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럴 것이다." 천경유수는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 로 발케네에 제국군이 진공한 이후부터 그가 품어왔던 의심이 마침내 사실로 판명되었다. 지알데는 말했다. "그들이 왜 내일을 가질 수 없습니까?" "짐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폐하!" "짐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아무도 그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대는 정원사에게 가지를 칠 권리가 없다고 말하겠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정원사. 가위와 톱으로 나뭇가지를 자르는 사람 말이다. 자네가 만 난 정원사들은 나무와 협의 하에 가지를 치던가? 혹은 나무로부터 그 럴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말하던가? 희언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말하진 않겠지." 천경유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를 향한 표정으로는 무례가 될 정 도로. 하지만 치천제는 노여움 없이 말했다.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 잎의 총합이 아니다. 나무는 그 이상이 다. 나무의 모든 부분을 모아서 땅 위에 세워놓는다 한들 그것이 나 무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원사의 머리 속에 있는 나무는 현존하 는 나무와 또 다르다. 잘리는 나뭇가지와 보존되는 나뭇가지의 생득 적 차이는 없다. 다만 정원사의 머리 속에 있는 나무와 다르기 때문 에 잘리거나 보존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에게 설명할 수는 없다. 가지는 이해할 수 없으니까. 나뭇가지가 이해할 수 있는 권리나 이유 를 찾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런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나뭇가지가 아닙니다." "약간 더 복잡하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맞아. 그런데?" "무슨 말씀입니까? 신 이외에 그 누구도 사람을 가지치기할 수는 없 습니다." "신은 파종자일 뿐 정원사가 아니다. 모든 살인 현장에 나타나 자신 의 피조물이 입은 피해를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신을, 짐은 본 적이 없다. 신은 전일 근무 가능한 무보수 만능 하인이 아니다. 신에게 아 무 것도 바랄 수 없다는 가이너 카쉬냅의 그 말에는 신에게 행동의 기준이나 도덕적 판단도 바라서는 안된다는 뜻이 들어있다는 것을 그 대는 모르는가?" "궤변입니다. 폐하." "증명하라." "신의 언어를 제게 주십시오. 폐하. 그러면 증명하겠습니다." "자가당착에 빠지는군. 그대는 신의 언어를 얻기 전에는 증명이 불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궤변이라는 주장 또한 불가능한 것 아 닌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도덕으로서 거부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합당한 이유 없이 죽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모듬살이의 약 속입니다." "법 위에 있는 짐은 약속에 구속되지 않는다." 천경유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폐하! 설명해주십시오. 왜 발케네를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치천제는 약간 흘러내린 흑사자 모피를 끌어올렸다. 지알데 락바이 는 어쩐지 나약하게 보이는 그런 동작이 세상의 지배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탈성과 부조화 때문에 그녀는 더 욱 예견할 수 없는 무서운 존재처럼 보였다. "발케네는 그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대호왕 이전까지 한 번도 통일된 세력을 가지지 못한 땅이다. 도깨비 감투를 착복한 세 괴걸이 억지로 이 땅을 통일시켜놓았지만 공포로 지배하는 그들의 한계는 뚜 렷하다. 발케네의 지배자는 몸을 감출 도깨비 감투 외에 정치적인 도 깨비 감투도 필요하다. 그들에게 향할 두려움과 증오의 눈길에서 자 신을 감추어주는 것. 모든 편의주의적인 지배자는 그런 경우 항상 외 부의 적을 동원한다. 그들이 다른 지방에 있었다면 그런 것을 훨씬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세상의 북쪽 끝에 있다. 그들이 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제국뿐이다. 주저 없이 십칠만 대 군을 몰아 짐에게 오고 있는 락토 빌파를 보라. 그것은 미래에 기어 코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징조다." 지알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죄를 저지를 것 같다는 이유에서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도면밀한 범죄 계획서를 읽으며 예행 연습을 하고 있다면 처벌할 수 있겠지." "발케네가 불손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제국을 적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적대하게 되면 이미 늦다." "폐하…… 안됩니다. 그 누구도 출생지 같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치천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오른손은 흑사자 모피를, 그리 고 왼손은 모피 아래에서 쉬크톨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대호왕의 권위를 몸에 두르고 원시제의 지명을 받은 아라짓 제국의 통치자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나가들이 살 수 없는 이 땅에서 세 명의 나 가 지배자는 흑사자 모피로 몸을 감싼 채 북부의 진짜 황제에게 입힐 옷을 준비해왔다. 대호왕께서 실을 자았고, 원시제께서는 아름다운 베를 짰다. 이제 짐이 마름질을 할 차례다. 차기 황제에게는 더 이상 이런 모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천경유수는 충격 속에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지알데 또한 심장을 적출한 황제가 오랜 세월 동안 제 국을 다스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매일의 해가 서쪽으로 질 것이 분명한 것처럼 지알데의 황제는 치천제일 것 이라는 것이 천경유수의 믿음이었다. 그런데 치천제는 차기 황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정원사의 머리 속에 있는 나무를 알 수 없다. 천은 옷 이라는 차원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정원사는 가지를 치고 재단사 는 마름질을 한다. 짐이 그러할 것이다. 그것을 납득해달라고 요청하 지 않겠다. 천만에. 짐이 원하는 것은 정반대다. 그것을 죄로 받아들 여다오. 나뭇가지와 천이 말하듯이. 그 정도의 이해면 짐은 만족할 것이다." 치천제는 증오를 이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알데는 소름이 끼친다 고 생각했다. 그의 입이 무의식 중에 열렸다. "누가 계승자입니까?" 치천제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대는 알 것이다." 지금은 헨로 중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제국군 9014 독 립중대의 2소대장 맥키 네미 부위는 자신이 중대장의 술책에 깨끗하 게 넘어갔음을 인정했다. 그것은 근사한 속임수였다.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작전을 수행했는지 네미는 지금도 짐작밖에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중대장은 휘하 장병들에게 불안을 안겨주느니 그들을 무지한 상태로 둔 채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하기로 결정했다. 거기까지는 다른 장병들과 마찬가지로 중대장에게 놀아난 처지지만, 발케네 출신인 맥키 네미는 그 이상의 배려도 있음을 깨달았다. 니어 엘 헨로는 그와 다른 발케네 출신 장병들에게서 갈등의 소지를 원천 적으로 제거했다. 이제 맥키 네미는 발케네군에게 뼈아픈 타격을 입 힌 독립중대의 소대장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그러기가 힘든 처지다. 주위의 제국 군들이 보내는 흠모와 존경의 눈길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 처지에서 우쭐해지지 않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런 눈길이 없었더라도 네미는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제국군이었다. 또한 장교였 다. 네미는 자신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니어엘 헨로는 그가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그 것은 그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기회만 오면 서로의 턱이나 갈비뼈를 부술 태세였던 3소대의 릭 몰테이와 소람 퍼기스가 돈독한 우정을 과 시하는 모습을 보며 네미는 싱긋 웃으며 3소대장 곁으로 말을 몰아갔 다. "한 시름 놓았겠군요. 까는 릿폴." 가리아 릿폴은 도끼눈으로 맥키를 노려보았다. "전역금 받게 됩니다. 부위." "억울하면 부위도 식인부위라고 불러요." "그게 같습니까? 저는 그 별명 때문에 시집도 못갈 처지입니다." "걱정말아요. 입맛대로 골라서 갈 수 있을 테니까. 우리 아들들도 희망 신부감은 전부 여군이던걸." 릿폴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이 훌륭한 군인이니 그렇겠지요." "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부는 훌륭한 군인이 필요 없는 땅이었습니다. 적당한 군인만 있으면 되었지요. 자 신있게 말하지만 저는 적당한 군인은 될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염치 없는 일이니까. 저보다는 부위가 진짜 훌륭한 군인이겠지요. 그 런데 왜 북쪽으로 온 겁니까?" 네미는 자신이 충분히 조심스러웠는지 궁금했다. 도시연합과 대치하 고 있는 남부의 군단들은 경험자를 존중하기 때문에 남부의 군인은 퇴역할 때까지 남부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남부 군 단의 군인이 북부로 와야만 했다면 대단히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리아 릿폴 부위가 중대에 온 것도 꽤 된 일이지만 이제서야 그것을 묻는 것도 그런 가능성 때문이다. 하지만 릿폴 부위 는 멋쩍은 투로 말했다. "일사병에 너무 자주 걸렸습니다. 체질이 더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네미는 황당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무례가 될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네미는 말했다. "아아. 그랬군요. 거 참 안타까운…… 아니, 잘됐다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군인이 빛나는 곳은 전쟁터고, 뜻밖에도 제국의 북부에서 연달아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군요. 전쟁이 좋다는 것은 아 닙니다만 군인이 자기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은 분명하겠 지요." 릿폴은 약간 감상적인 표정을 지었다. "예. 군인은 누군가가 다쳐야만 성공할 수 있는 직업이지요." 네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는 것이 그렇지요." "사는 것이오?" "세상이라는 떡은 정해져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더 많이 먹으 려고 아웅다웅 다투다가 죽는 거죠. 그 다툼이 교양 있는 수준에서 벌어지면 문화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입니다. 우리는 솔직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릿폴은 그 '우리'에 맥키 네미 부위가 포함되는 것은 확실하겠지만 자신도 포함되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감이 정당한 것인지, 또한 군인에게 어울리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가리아는 그냥 듣기만 하기로 했다. 하지만 네미는 연설가 기질은 아 니었다. "솔직하게 싸우다가 재수없으면 죽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멋진 중대 장을 모시고 있으니 재수가 좋을 겁니다." "동감입니다." 네미는 빙긋 웃고는 딴청 부리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호칭 문제인데 말입니다." 릿폴은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채 네미를 바라보았다. 네미는 볼을 긁 적이며 말했다. "아름다운 별명이지만 잘못 불렀다가 예비역 되고 싶지는 않으니, 가리아라고 불러도 될까요?" 가리아는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맥키라고 부르게 해준다면." 맥키와 가리아는 피식 웃으며 주먹을 가볍게 부딪혔다. 맥키는 말을 몰아 다시 자신의 소대로 돌아갔고 가리아는 자신의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중대의 행군로 옆의 언 덕에서 말에 탄 채 그들을 내려다보던 니어엘 헨로 수교위와 다미갈 카루스 부위였다. 카루스가 말했다. "묘한 광경이군요." "뭐가?" "수교위님도 아시잖습니까? 부위는 전투를 앞두고 친구를 만들지 않 습니다." "글쎄. 누가 진짜 내 옆에서 싸울 자인지 분명히 해두려고 하지. 이 분법적이라서 조금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건 오래 전에 확인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분 명히 확인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봐." 카루스는 말 갈기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수교위님은 저희들을 영웅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어도 불만 없는 부위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니어엘은 자상하게 말했다. "영웅이 싫은가?" 카루스는 자신의 중대장이 무슨 말이든 받아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는 꾸밈 없이 말했다. "저는 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낯설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건 생각 못해봤습니다. 예. 이왕이면 무명 부위보다는 영웅이 낫지요. 하지만 저는 이 전쟁의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유 없이 싸워서 영웅이 되었다면 그것은 바보입니다. 수교위님은 이 전 쟁의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발케네의 낭만적인 철부지가 폐하 의 죄수를 탈옥시켰다는 것뿐입니까? 제가 이제껏 잡아먹은 나이가 약간의 살은 되었을 겁니다. 이 세상은 좀 희한해서 한 젊은이의 사 랑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압니 다. 하지만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 "귀관의 짐작부터 말해봐." "황당한 생각밖에 안 떠오릅니다." "괜찮으니 말해." "발케네공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 방법은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그가 황위 계승에 관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후계자에게 정면으로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발케네공뿐입니다. 물론 폐하께서 후계자에 대한 고려 를 하시려면 앞으로 수십 년 후에나 그러셔야 합니다. 하지만 현 시 점에 발케네의 지배자를 친황제적인 성격의 지배자로 교체하신다면 수십 년 후에 일이 쉬워질 수는 있겠지요. 때마침 발케네 가까운 곳 에 규리하를 공격한 전력이 그대로 남아있고 젊은 발케네공이 황당한 짓으로 전쟁의 빌미도 제공해주었으니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겁니 다." "일리 있는 설명이군." "하지만 그렇다면 대장군께서 계셔야 합니다. 대장군님이 이곳에 계 신다면 발케네군은 무향의 정복자에 대한 압박감을 느낄 겁니다. 그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군. 하지만 스카리 빌파가 백화각을 습격하여 부 냐 헨로를 훔친 것은 대장군께서 떠난 이후의 일 아니던가?" "그것도 그렇군요." 니어엘 헨로는 중대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턱 으로 그쪽을 가리키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카루스는 그녀의 뒤를 따 라 언덕을 내려갔다. 니어엘이 말했다. "군인의 미덕은 절대 복종이고, 군인은 명령을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하지. 하지만 자네가 말했다시피 군인도 사람이야. 자네는 사람으로 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지. 그래. 이것이 두 강대한 지배자 사이의 자 존심 다툼이라면 김빠지는 일이지. 이왕이면 차기 황제를 위한 싸움 이면 좋겠지. 나도 그 편이 더 즐거울 것 같아. 하지만 그것을 자네 에게 확인해주거나 할 수는 없겠군. 내 마음대로 폐하의 뜻을 해석해 서 자네에게 말하는 것은 주제 넘은 짓일 뿐만 아니라 월권이니까. 그러니 나는 라수 규리하가 왜 싸우느냐고 물었을 때 괄하이드 규리 하가 해줬던 대답밖에 해줄 수 없겠군." "죄송합니다. 교양이 부족해서 충의공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 르겠습니다." "아, 그래. 충의공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개좆 같은 적이 저기 있기 때문이라고.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말 아래로 좀 빠른 속도로 내려가려는 것처럼 보이던데." "아닙니다. 그냥 자세를 좀 바꿨을 뿐입니다." 다미갈 카루스는 니어엘의 시선을 회피하며 자신이 왜 충의공 괄하 이드 규리하의 전쟁론을 몰랐던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니어 엘은 투구를 고쳐 쓰며 말했다.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분은 포악하거나 멍청한 군인이 아니셨어. 그 분이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사랑을 나누면서 사랑에 대 한 논문을 구상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과 똑같아. 전쟁에 이미 발을 빠트렸다면 싸움의 의미를 고민하는 건 좀 미뤄도 된다는 뜻이지."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당면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지. 자네는 1소대 와 5소대를 이끌고 저 산 중턱으로 올라가. 저기, 바위 보이지? 저 정도면 괜찮겠군. 그리고 북쪽과 북서쪽 방향에 적이 보이면 무조건 공격해. 우리의 기본적인 임무가 뭔지 말해봐." 기본 전투 계획과 명령 서열에 대한 확인을 끝낸 다음 니어엘과 카 루스는 언덕 아래에서 헤어졌다. 잠시 후 헨로 중대는 둘로 갈라져 예정된 전장으로 움직였다. 그와 비슷한 움직임이 드넓은 전장 곳곳에서 일어났다. 제국군의 참 모와 발케네군의 참모가 - 물론 의견 교환은 없었다. - 전장으로 합 의한 그곳은 사라티본 평야라고 불리는 장소였다. 십칠만 명의 발케 네군은 사라티본 평야 북서쪽과 북쪽의 완만한 저지에 진을 치고 있 었고 구만 명 가량인 제국군은 남쪽의 구릉 지역에 진을 치고 있었 다. 절대적인 숫자로 따진다면 발케네군은 제국군의 두 배에 가까웠 지만 그 사실에 좌절하는 제국군 장교는 거의 없었다. 제국군의 참모 들이 주목하는 병력은 발케네군 중앙에 있는 파리조군 팔만 명이었 다. 갑충사들이 하늘에서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발케네 각 지역의 영 주들이 이끌고 온 소환군 구만 명은 파리조군의 진격을 방해하지 않 고서는 돌격하기 어려운 곳에 서있었다. 참모들은 그 진형에 따라 파 리조군과 소환군 중 하나가 예비대라고 판단했다. 약간의 토의 끝에 마지오 상장군과 참모들은 파리조군이 예비대라고 판단했다. 소환군 을 먼저 내보내 제국군과 싸우게 한 다음 얼마 후 파리조군을 전선 측면에서 전장에 투입시키는 것이 암살공의 작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투 초반에 제국군이 상대해야 하는 병력은 똑같은 구만이다. 하지 만 제국군의 구만 병력에는 쥘칸 장군의 엉겅퀴 여단이 포함되어 있 었다. 선봉에 대한 마지오 상장군과 쥘칸 장군의 갈등은 결국 공작의 병력 배치 덕분에 타협책을 찾게 되었다. 쥘칸 장군은 소환군과 제국군이 싸우는 동안 그것을 무시한 채 팔만 명의 파리조군이 지키고 있는 암 살공의 본영에 곧장 침투한다는 마지오 상장군의 작전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병력이 방패가 되는 동안 엉겅퀴 여단이 칼이 되는 것이다. 그 칼이 방패 뒤편에 있는 적의 숨통을 공략할 수 있다면 적의 방패 인 소환군은 지리멸렬하게 무너질 것이다. 만에 하나 파리조군에 레 콘들에 대한 철저한 방비책이 있어 본영에 뛰어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경우에 엉겅퀴 여단은 곧 방향을 돌려 소환군의 후방을 공격하면 된다. 그런 작전에 따라 헨로 중대가 향하고 있는 곳은 사라티본 평 야 남서쪽의 산지였다. 그곳에서 엉겅퀴 여단의 진격로를 확보하고 파리조군의 투입시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헨로 중대의 목표었다. 헨 로 중대 외에도 몇몇 독립중대가 같은 위치에 근처 지역에 투입되어 있었다. 헨로 중대가 자리를 잡고나서 얼마 후 레콘들의 모습이 보였 다. 니어엘 헨로와 그녀의 중대원들은 산 남서쪽 사면에 조용히 모여 드는 엉겅퀴 여단의 레콘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레콘들은 순식간 에 산을 넘을 수 있고 산을 넘으면 곧장 사라티본 평야 북서쪽이다. 그곳에서 레콘의 기준으로는 지척인 곳에 암살공의 본영이 있다. 지 형을 읽을 줄 아는 것은 발케네군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곳에 는 파리조군 팔만 명이 엄중한 기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수 평방킬로미터의 전장을 빠짐없이 볼 수 있었던 니어엘은 파리조군의 위치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 자 신이 언젠가 지멘을 추적했기 때문에 니어엘은 레콘을 상대할 경우 고지대의 유리함은 몇 배임을 잘 알고 있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 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리조군이 있는 곳은 평야 북쪽의 저지대였 다. 그들이 물을 준비했다 한들 그 물은 그들 뒤편으로 흘러갈 가능 성이 더 높았다. 니어엘은 겉으로 드러난 병력 배치 면에서는 제국군 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전쟁에서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전 략가를 좌절시키고 병사의 목숨을 뺏는다. 오전 내내 계속된 진형 구축에서 이미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의 효 과가 나타났다. 각기 구만과 십칠만의 병력을 적절한 장소에 배치하 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제국군 쪽이 좀 더 빠르게 병력 배치를 마칠 거라고 예측했다. 그들 의 숫자가 더 적었고, 또한 그들에게는 하늘누리에서 파견나온 갑충 사들이 있었다. 갑충사들은 하늘에서 제국군의 배치 현황을 관찰하여 즉각 참모부에 전달했고 또 참모부의 명령을 각 지휘관들에게 전달했 다. 그 때문에 시허릭은 놀라운 속도로 제국군 전체를 섬세하게 조정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케네군의 병력 배치 또한 빨랐다. 발케네군 의 병력 배치에 더 이상 조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갑충사들의 보고 는 시허릭과 참모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것은 병력 배치에 관한 철저 한 작전이 수립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발케네군의 명 령 전달 체계는 예상외로 튼튼할지도 모른다. 시허릭은 그 점에 대해 고민했지만 결국 명령 전달 체계의 완벽성은 급박한 전투 도중에 드 러난다는 사실을 믿기로 했다. 암살공에 대한 존경은 진짜 전투에서 도 능수능란한 운용을 보여준 후에 바쳐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제국군과 발케네군은 정오가 되기 훨씬 전에 병력 배치를 마치고 진군을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두번째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났다. 아니, 보이는 것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지오 상장군은 적군의 중앙에 돌출하는 것 이 팔만 명의 파리조군임을 확인하고 놀랐다. 그의 참모들도 약간 놀 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제국군 정예병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역시 정예를 내보내는 것이 좋 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런 것 같군. 쥘칸 장군은 아주 신나겠군." "소환군에 혹시 레콘을 상대할 특수 병과가 있는 것 아냐?" "레콘을 제압할 수 있는 특수 무기는 물밖에 없어. 그런데 그 옛날 의 나가 수호장군들이 아니라면 누가 저런 지역에서 물을 마음대로 다루겠어?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쥘칸 장군은 파리조군 의 배후를 치기로 되어 있어. 암살공 대신 적의 주축군을 박살내는 거지." 시허릭은 참모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파리조군의 모습을 확인한 후 에도 제국군은 주저 없이 걸어갔다. 전투에 앞서 마지오 상장군은 작지만 파괴적인 계략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 그 단순한 계략은, 그러나 제국군이 받은 훈련을 완전히 뒤 엎는 것이기 때문에 시허릭은 반장 단위까지 철저한 반복 교육을 실 시하도록 했다. 거리를 세심히 관찰하던 시허릭은 잠시 후 그 계략을 발동시켰다. 통상적인 돌격거리보다 조금 먼 곳에서 제국군들의 나팔수들이 돌격 나팔을 일제히 불었다. 선수를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한 파리조군 또 한 재빨리 돌격 나팔을 불었다. 파리조군은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 다. 하지만 제국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허릭은 환호를 외치고 싶은 것을 참느라 목이 간지러웠다. 두 번의 돌격나팔 후 돌격. 시허릭이 발케네군의 본대와 예비대를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 놓아 쥘칸 장군의 돌격을 쉽게 하기 위해 짜낸 계략이다. 그의 작전대로 파리조군은 순식간에 예비대와의 거리를 떨 어뜨려 놓았다. 시허릭은 지체 없이 두번째 돌격 나팔을 불게 했다. 제국군 중앙에서 3개 군단에서 차출된 육천 기병들이 창을 곧게 세 웠다. 대열을 맞추어 걷는 걸음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말들은 그 대열을 유지한 채 속도를 높였다. 투닥투닥 하던 말발굽 소리는 곧 투다다다 하는 빠른 연속음이 되었다가 뭐가 뭔지도 모를 혼돈의 굉음으로 높아졌다. 땅이 전율하고 바람이 아우성쳤다. 기병들은 세 모꼴 모양을 한 채 몰려오는 파리조군을 향해 똑바로 찔러들어갔다. 똑바로 세워졌던 창들이 정면을 겨냥했다. 바늘끝처럼 날카로운 그 첨단의 기병, 그가 들고 있는 창끝에 수백 미터의 돌격력과 육천 명 의 사람, 육천 기의 말의 무게가 모두 집중되었다. 파리조군은 정예 병력답게 달리면서 재빨리 좌우로 흩어졌다. 긴 거리를 정신없이 달 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환은 빨랐다. 돌격하는 파리조군의 각 열이 말 두 마리가 통과할 만한 간격으로 벌어지는 것을 보며 시허릭 은 감탄했다. 방어 밀도를 낮춤으로서 기병을 그냥 통과시키려는 움 직임이었다. 하지만 제국 기병들의 공격 밀도는 그 이상이었다. 쇠망치가 속이 빈 호박을 깨트리는 기세로, 제국 기병들은 파리조군 을 파괴해들어갔다. 먼 거리였지만 시허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병들의 첨단이 부딪 힌 곳에서부터 파리조군의 병사들 위로 파문이 거칠게 번져갔다. 각 열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떨어져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수만 명이 동시에 쓰러지는 끔찍한 장면이 벌어질 뻔했다. 흥분 때문 에 난폭해진 군마들은 보병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달리기까지 했 다. 살이 찢겨지고 뼈가 박살나며 선혈이 폭풍처럼 일어났다. 파리조군의 낮은 방어 밀도를 본 기병 지휘관 테룸 나마스 하장군은 아예 파리조군을 관통하기로 결정했다. 파리조군을 양단시켜 배후에 서 파리조군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 뜻은 시허릭과 참모들에게도 정 확하게 전달되었다. 파리조군이 거대하게 양쪽으로 무너지는 것을 본 시허릭은 지체없이 보병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 의 외침은 그보다 더 날카로운 외침 때문에 묻혀졌다. 참모 하나가 비명처럼 외쳤다. "레콘이다!" "그래! 쥘칸이다! 그걸 모르는가?" "엉겅퀴 여단이 아닙니다!" 시허릭은 잠깐 동안 웃으려 했다. 재미 없는 농담이지만 어쨌든 농 담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비명을 지른 참모의 얼굴에는 농담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로 전장 한편을 가리켰다. 그쪽을 본 순간 시허릭은 자신이 어떤 악의에 찬 자들이 세심하게 준비한 악몽에 초대되었다고 생각했다. 사라티본 평야 동쪽에서 일만 명의 레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바위 를 깨고 하늘을 나는 레콘의 모습 그대로였다. =============================================================== 12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2-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01 조회수 : 2170 피를 마시는 새 12.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 2 기병을 지휘하던 테룸 나마스 하장군이 처음 느낀 인상은 대해일이 밀려온다는 것이었다. 짐승이든 인간이든 일정수 이상의 무리가 되면 그것은 액체처럼 평 면을 따라 움직인다. 인간의 경우라면 2 미터에 못미치는 두께의 액 체일 것이다. 하지만 수십 미터씩 뛰어오르며 달려오는 레콘들의 움 직임은 조금도 평면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미쳐 광분하는 구름이나 안개처럼 보였고, 뤼도파 출신의 나마스에게는 쟁룡열도의 태풍이 밀 고 오는 대해일처럼 보였다. 물을 극도로 싫어하는 레콘들이 들끓는 파도의 기세로 움직인다는 것은 나마스에게 정말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의아함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막대한 레콘들이 명백한 적의를 분출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역사가 기록한 가장 강력한 용이라도 도망쳐야 할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 한 것은 나마스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가까운 곳에서 제국군 교위 한 명이 미친 듯이 외쳤다. "도, 도망쳐! 도망쳐라!" 나마스는 순간 자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 다. "네 이 놈!" 그는 창을 매섭게 내뻗어 비명을 지르는 교위의 등을 찔렀다. 두 팔 을 들어올린 채 고함을 지르던 교위는 입에서 피거품을 쏟으며 말 아 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기병들은 물론이거니와 파리 조 병사들 또한 멈칫했다. 나마스는 창을 휘둘러 그들과 파리조 병사 들의 얼굴에 피를 뿌린 다음 창끝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포효했다. "황제 폐하께서 보고 계신다!" 자기도 모르게 제국병과 파리조병의 눈이 나마스의 창끝을 따랐다. 하늘누리가 그곳에 있었다. 하늘누리는 지형도, 병력도 아니기에 그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지만 하늘치는 자신의 압도적 존재감으로 전장 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마스가 외쳤다. "너희들의 맹세를 기억해! 제국군이 될 때 너희들 모두는 제국과 폐 하를 위해 죽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느냐! 드디어 그 때가 왔다. 그런 데 도망치겠다는 거냐! 제기랄, 폐하께서 보고 계신다. 나는 창피해 서라도 도망 못 쳐!" "개수작 치워!" 발케네의 거친 병사 한 명이 발악하며 나마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상대방의 계급을 봐두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테룸 나마스는 하장군 이며 시허릭 마지오가 기병대의 지휘를 맡긴 인물이었다. 나마스는 다리로 말을 돌진시키며 창을 내찔렀다. 지극히 효율적이고 단순한 동작에 파리조병은 창에 꿰뚫려 몸을 부르르 떨게 되었다. 다음 순간 나마스는 보는 눈을 의심케 하는 짓을 했다. 나마스는 창대를 단단히 휘어잡으며 그것을 들어올렸다. 창에 꿰인 병사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 발이 땅에서 떨어진 순간 나마스의 목에서 쥐어짜는 괴성이 터져나왔다. "폐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테룸 나마스는 창끝에 꿴 병사를 깃발처 럼 꼿꼿하게 들어올렸다. 달리는 말의 속도와 절묘한 창술 덕분에 가 능한 일이었고 나마스는 그 동작을 몇 초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 만 창끝에 꿰인 시체가 허공에서 팔다리를 출렁이는 그 충격적인 모 습은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망막에 낙인처럼 찍혔다. 나마스가 창대 를 떨어뜨리자 시체는 창끝에서 빠져나와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시 체에서 떨어뜨린 피로 투구와 얼굴을 흠뻑 적신 채 나마스는 외쳤다. "내 싸움도, 내 죽음도! 폐하께서 보실 것이다! 돌격!" 기병들은 깨달았다. 그들의 황제는 하늘에 있다. 그녀는 그들과 함 께 있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군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폐하께서 나를 보신다!" 기병들은 제국군의 맹세를 떠올렸다. 기수의 불안 때문에 허둥거리 던 말들이 다시 명백한 통제를 느꼈다. 제국군 기병들의 돌격이 재개 되었다. 이전보다 훨씬 거친 기세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파리조군 의 열이 넓은 간격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군 기병들은 몸부림 에 가까운 기세로 파리조군 한가운데를 달렸다. "폐하께서 나를 보신다!" 테룸 나마스는 단순한 승부욕 때문에 돌격을 재개시킨 것은 아니다. 동쪽에서 접근하고 있는 레콘들에 대한 최선의 방책은 그들과 레콘 사이에 파리조군을 두는 것이었다. 그 이상의 대비책은 시허릭 마지 오 상장군의 몫이었다. 저런 말도 안되는 폭력에 대한 대비책이 상장 군에게 과연 있을지는 나마스도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제국군 전체에 대한 책임은 시허릭에게 있었다. 나마스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신 에게 맡겨진 기병들이었다. 나마스는 셀 수 없는 적병들을 거꾸러뜨 리며 파리조군을 돌파했다. 기병대의 뜻밖의 분투를 보며 시허릭은 숨이 콱 막히는 기분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나마스가 이미 판단한 것처럼 전장의 상황이 어떻게 돌변하건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것은 시허릭의 책임이었다. 후퇴 결정밖에 내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두려움이나 좌절 대신 냉철한 판단에 의해 내려져야 한다. 시허릭은 접근하는 레콘들을 노 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방향이 기병대가 아닌 제국군 본대쪽을 향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소화차는?" 시허릭은 자신의 냉철한 질문에 스스로 놀랐다. 참모들 또한 충격에 서 벗어나 말했다. "본영에 있습니다." "아무나 빨리 가서 그것들을 다 가져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라 도 필요하다!" "본대는 어떻게……" "돌격시켜야지!" 시허릭은 또다시 놀랐다. 자신의 입에서 레콘들의 부대에 인간 부대 를 돌격시키라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 다. 하지만 그것은 무턱대고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도주하다가는 더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즉각 엉겅퀴 여단에 명령 을 전해라. 파리조군의 배후를 돌아 저 정체불명의 레콘들의 좌측을 공격하라고…… 제기랄, 그럴 필요 없겠군!" 갑충사에게 달려가려던 참모는 당황하여 시허릭을 바라보았다. 시허 릭은 전장 남서쪽의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엉겅퀴 여단 의 레콘들이 산봉우리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쥘칸 장군은 바보가 아니었다. 시허릭이 내린 것과 똑같은 결정을 그 또한 내린 참이었 다. 엉겅퀴 여단의 움직임을 보던 시허릭은 그것을 깨달았다. '쥘칸 이 멍청아, 빨리 와서 나 좀 살려줘!' 자신의 명령에 병사들이 폭소 를 터뜨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시허릭은 외쳤다. "돌격!" 상장군의 명령은 즉각 제국군에게 전달되었다. 불 속으로 뛰어들라 는 명령이 떨어졌어도 이보다 더 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병들 중 적지 않은 수의 제국병들이 시허릭이 우려하던 반응과 비슷한 것 을 보였다. 달려오는 레콘들에게 인간을 돌격시키다니, 기가 막혀 말 이 안나오는 명령이다. 하지만 그 순간 전투의 주인들이 눈을 떴다. 제국군은 정렬하고 있던 그들 앞쪽으로 갑자기 한 명의 여성 부위가 말을 몰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것을 당혹하여 바라보았다. 제국군은 당황하여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 앞쪽에서는 시시각각으 로 거대해지는 레콘들이 거대한 홍수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참나무 군단 114소대장 아소레 메신 부위는 고개를 뒤로 홱 젖혔다. "하하하!" 맑은 웃음소리에 제국군들은 피부가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 다. 아소레는 웃음을 거두며 외쳤다. "아소레 메신 부위다! 더 큰 것 없냐!" 두번째 부위가 전열 앞쪽으로 걸어나왔다. 땅이 쿵쿵 울렸고 일만의 레콘들이 밀어내는 공기가 얼굴을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지 만 참나무 군단 331소대장 진 소립튼 부위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제국군 부위 진 소립튼이다. 황제 폐하 만세." 고개를 돌린 아소레 메신 부위와 진 소립튼 부위의 눈이 살짝 마주 쳤다. 그들은 희미한 미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세번째, 네번째 부위들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부위 젤피 매그번, 간다!" "밥맛 없는 깃털 뭉치들아. 이 어른은 카니락 센토멜 부위다!" 얼어붙은 제국군 앞으로 걸어나온 부위들은 여덟 명이 되었다. 숨소 리조차 내지 못하는 구만 명의 제국병 앞에서 여덟 명의 부위들은 꼿 꼿하게 선 채 다가오는 레콘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의 생각을 입 밖으로 표현한 사람은 아홉 번째의 부위였다. 졸참나무 군단 125소대 장 사리 탄드로 부위는 앞쪽을 바라보는 대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중 얼거렸다. "사리 탄드로 부위입니다. 제 자리를 준비해두십시오." 사리 탄드로의 좌우에 있던 부위들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들은 피식 웃거나 미소를 지었다. 탄드로는 허리로 손을 뻗어 제국검을 뽑 아들었다. 다른 부위들 또한 차례로 제국검을 뽑았다. 폭풍처럼 다가 오는 레콘들 앞쪽에서 아홉 자루의 제국검이 둔한 빛을 뿌렸다. 아무도 외치지 않았지만 아홉 부위들은 동시에 말을 돌격시켰다. 일만 명의 레콘들을 향해 아홉 마리의 말들은 놀랍도록 고요한 직선 을 그리며 달려갔다. 다급하게 맥동 치는 사라티본 평야. 아홉 줄기 의 먼지 구름이 바람에 나부낀다. 하늘과 땅을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레콘들. 뒤쪽에서 뛰어올랐다가 계속 떨어지는 레콘들의 움직임 때문 에 그 모습은 폭포의 진격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홉 부위가, 그곳을 향해, 분명하기 짝이 없는 죽음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어느 수전사가 비통하게 절규했다. "부위님 가신다!" 초현실적인 광경에 혼을 뺏겼던 제국병들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을 느꼈다. 고함을 지르는 수전사는 참나무 군단 114소대의 1분 대장이었다.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린 수전사는 비틀거리며 달려나 갔다. 그의 입에서 패악스러운 고함이 다시 터져나왔다. "씨발놈들아! 뭐 하고 있냐? 소대장님 가신다!" 순간 114소대가 전열 앞쪽으로 출렁 뛰쳐나왔다. 그 움직임에 이끌 리듯 각 부위들의 소대가 미친 듯한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중대 돌격! 부위를 따르라!" "으아아아!" 더 이상 제국병들의 함성을 의미 있는 말로 바꿔 듣는 것이 불가능 해졌다. 구만 명의 제국군은 불꽃의 형상으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구 만 개의 칼날이 폭풍우 속의 벼락처럼 번득였다. 구만 명이 내뿜는 열기로 주위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호흡은 하나도 없 다. 구만 명의 제국병은 숨도 쉬지 않은 채 달렸다. 충격 때문에 미 처 앞으로 나서지 못했던 부위들은 아홉 전우들의 곁에 서기 위해 자 신의 소대마저 포기한 듯한 모습으로 달렸다. 중대장들은 그런 소대 들을 독전하며 부위들의 뒤를 따랐다. 그 시간에 관련된 어떤 참혹한 예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간은 시작되었다. 전대미문의 살육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달려간 아홉 부위들은 불과 몇 초 만에 모조리 살해되었 다. 진 소립튼 부위가 당한 공격은 특히 끔찍한 것이었다. 어떤 거대 한 칼날이 말의 목과 소립튼 부위의 가슴 윗부분을 단숨에 절단해버 렸다. 사리 탄드로 부위의 몸은 그녀의 마지막 말을 실행하듯 하늘로 치솟았다. 팔다리를 우쭐거리며 하늘누리 위쪽까지라도 솟아오를 것 같은 기세로 튕겨져 오른 사체는 뒤쪽에서 뛰어오른 레콘이 성을 내 며 휘두른 손에 맞아 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죽음의 장면 이 목격된 것은 그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부위들은 폭포 아래로 사라지는 조각배처럼 레콘들의 격랑에 부딪히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 다. 그리고 그것은 뒤이어 도착한 제국병들의 운명이 되었다. 레콘들은 휘두르고 짓밟고 걷어차고 내리쪼았다. 그 모든 행동 하나 하나는 소름끼치도록 파괴적이었고 두 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달려와 부딪히기만 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거인들이 흉흉한 무기를 휘두르며 살의를 불사르고 있었다. 열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어도 도망칠 수 없는 형세다. 그러나 도망친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첫번째 레콘이 경미한 상처를 입을 때까지 수천 명의 제국군 장병들이 죽어야 했다. 돌진하는 제국군은 그 말도 안되는 비 례식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레콘의 무릎을 밟고 뛰어올라 그 눈 을 찌르려 했고 그 다리에 매달려 칼을 도끼질하듯 휘둘렀다. 무익하 고 무익한 행동이다. 레콘들이 계명성을 내지를 때마다 병사들은 우 당탕 쓰러졌다. 두 팔을 조금 휘두르기만 해도 제국병들의 목과 척추 가 데걱데걱 부러졌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피보라와 귀를 멀 게 할 것 같은 비명에 제국병들은 미쳐버렸다. 시허릭은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암살공은 어디서 저런 것을 가져온 것일까? 일 초에 백 명 꼴로 제국군이 쓰러지는 것 같았 다. 도대체 왜 발휘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산수 능력은 시허릭에게 일 초에 백 명이 죽으면 구만 명이 몰사할 때까지 15분밖에 안 걸린 다는 답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그 어이 없는 계산은 시허릭에게 중 요한 단어 하나를 남겨주었다. 몰사. 시허릭은 이제 패배를 걱정할 때가 아님을 인정해야 함을 깨달았다. 구만 명의 귀한 목숨들이 순식 간에 사라질 형국이었다. 시허릭은 더 이상 전술가일 수 없었다. 그 는 구조자가 되어야 했다. 사라티본 평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전 쟁이 아니라 재난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종류의 재난에서 인명을 구조할 수 있는 구조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릎에 힘이 빠져나가 는 것을 느끼며 시허릭은 가까이 있던 참모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참모가 먼저 그를 부축했다. 자신의 모습이 누가 보아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해졌다는 것 은 시허릭을 놀라게 했다. 시허릭은 참모의 손을 뿌리치며 자신의 불 안도 뿌리쳤다. 살려내야 했다. 다만 천 명이라도, 아니 열 명이라 도. 시허릭은 전장 북쪽을 가로지르고 있는 쥘칸 장군의 엉겅퀴 여단 을 바라보며 목을 놓아 외쳤다. "쥘칸! 이 익사할 놈아! 빨리 가! 빨리 가라고!" 시허릭의 말이 들렸을 리는 없지만, 쥘칸은 시허릭이 어떤 기분일지 잘 알 수 있었다. 그의 마음과 똑같을 테니까. 눈앞에서 쓰러지는 인 간 병사들을 보며 쥘칸은 속이 뒤집히는 기분을 느꼈다. 비록 우스꽝 스럽게 생각하는 인간 병사들이지만 그들은 같은 제국군이었다. 그 연약하고 멍청한 바보들은 쥘칸의 전우들이었다. 쥘칸 장군은 격분하 여 외쳤다. "제기랄 것들아, 그 비겁한 짓 그만둬! 레콘끼리 싸우자!" 인간을 기준으로 했을 경우 제국군 여단의 규모는 2개 대대 일만 명 이다. 하지만 레콘 여단들일 경우 그 편성은 현저하게 달라진다. 엉 겅퀴 여단의 경우 4개 대대 천이백 명 정도다. 벼슬이 찢어질 것 같 은 흥분 속에서도 쥘칸 장군은 자신들의 숫자가 상대방의 십분의 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쥘칸은 어쨌든 장군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것이 필요했던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쥘칸은 순식간 에 전술 비슷한 것을 구상했다. 그것은 레콘들도 수행할 수 있는 종 류의 것이었다. "1-대-대-와-2-대-대-! 옆-으-로-달-려-가-좌-측-을-후-려-쳐-! 3- 대-대-는-천-천-히-뛰-어-중-앙-돌-파-! 4-대-대-는-계-명-성-을-지- 르-며-천-천-히-걸-어-가-라-! 너-희-들-은-우-측-이-다-!" 엉겅퀴 여단병들은 쥘칸 장군의 계명성대로 움직였다. 각 대대의 속 도가 미묘하게 변하면서 그들은 엉성한 사선진 같은 것을 형성했다. 그 순간 쥘칸 장군의 두번째 계명성이 터져나왔다. "각-소-대-는-함-께-움-직-여-라-! 흩-어-지-지-마-!" 오랜 제국군 생활을 통해 쥘칸 장군은 인간 장수들의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이 있었다. 쥘칸 장군의 외침은 단순한 소대 전술 개념이 다. 인간 병사들이라면 소대 단위로 움직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 령을 전투 도중에 내리는 지휘관에게 어처구니 없다는 눈길을 보내겠 지만 레콘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레콘들의 편제는 어디까지나 부대 생활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성격이 강했으며 전술과는 별로 상관 이 없는 편이다. 레콘 여단들을 가리켜 부대가 아니라고 말하는 전술 이론가들도 많은데 그들의 지적에 따르면 레콘 여단은 홀로 싸우는 전사들이 많이 모여있는 것일뿐 함께 싸우는 부대가 아닌 것이다. 정 확한 지적이지만 지금까지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다. 전투력 의 면에서 따질 때 레콘은 혼자 있어도 부대니까. 하지만 똑같은 레콘으로 이루어진, 거의 열 배나 많은 악몽 같은 병 력 앞에서 쥘칸은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하들이 단독으로 무용을 펼치는 것에 더 익숙하다는 것은 쥘칸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 었고 따라서 그들에게 익숙한 움직임 대신 낯선 소대 전술을 실시하 라고 명령하는 것은 자칫하면 대혼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도박이었 다. 하지만 쥘칸 장군은 군대 훈련의 성과를 믿기로 했다. 아니면 단 체 생활의 효과라도. 그것도 아니면 그의 계명성의 크기라도. 쥘칸의 믿음은 보상받았다. 엉겅퀴 여단의 천이백 레콘들이 부딪힌 순간 발케네측의 일만 레콘 은 먼 곳에서 보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동요를 일으켰다. 시허릭은 그만 참지 못하고 펄쩍 뛰고 말았다. "제대로 꽂혔다!" 거대한 검 이쑤시개를 휘둘러 앞쪽의 인간 병사 두 명을 '부순' 힌 치오는 무리 오른쪽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벼슬을 세웠다. 검을 회수 하며 무릎을 구부린 힌치오는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잠깐 동안의 비행에서 힌치오는 볼 것을 대충 보았다. 엉겅퀴 여단 의 병사들이 스카리 요새군의 우익을 두드리고 있었다. 전술 파악을 할 능력이 없기에 쥘칸이 급조한 사선진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힌치오는 제국군들이 덩어리지어 움직인다는 인상 정도는 받을 수 있 었다. 그것은 전투에 앞서 팔리탐 지소어가 미리 말해준 것이기도 하 다. '그들도 평소에는 우리 레콘들처럼 움직이지. 같은 레콘이니까 당연 하오. 하지만 우리 레콘들의 모습을 목격한 후에는 집단 운영을 시도 할지도 모르오. 나라면 그렇게 할 거요. 위험한 시도이긴 하지만 적 어도 엉겅퀴 여단병은 우리 레콘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을 할 줄 아니까.' '그게 뭔데?' '그들은 분열 행진을 할 수 있소.' '……분열 행진? 줄 맞춰 걷는 것?' '그거요.' '젠장. 농담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농담처럼 들려. 그 따위 것이 뭐 라고.' '힌치오. 군인은 잘 싸우는 자가 아니오. 줄 맞춰 걸을 수 있으면 군인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얼마나 잘 싸우건 그건 그냥 폭도요. 줄 맞춰 걷는 것에는 군인에게 필요한 덕목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소. 물론 집단 운영에 필요한 덕목들도.' '좋아. 그러면 그 집단 운영이라는 걸 하면 어떻게 되는데?' '우리는 아주 골치 아파질 거요.' 팔리탐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말투는 충분히 우울했다. 그리고 힌치오 는 무시하고 싶었던 그 예측이 들어맞는 것을 보며 언짢음을 느꼈다. 두번째로 뛰어볼 필요도 없었다. 스카리 요새군의 우측에서 벌어진 소란은 이제 좌측 끝에 있는 레콘들도 느낄 정도로 커졌다. 미쳐 날 뛰는 인간 병사들을 제거하면서도 레콘들은 불안한 얼굴로 우측을 바 라보았다. 힌치오는 부리를 딱 부딪혔다. '당신이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면서 당신이 좋아할 만한 해결책은 여단장을 잡는 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레콘인 쥘칸은 안전한 사령부에 있지는 않을 거요. 쥘칸을 상대할 수 있겠소?' 힌치오는 이쑤시개를 머리 위로 들어올려 붕붕 돌렸다. "너! 너! 너! 날 따라와! 우측으로 간다!" 힌치오는 스카리 요새군의 머리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 그를 따라 세 명의 레콘들도 뛰어올랐다. 힌치오는 훌쩍훌쩍 뛰어가면서 적의 대장을 찾아볼 결심이었다. "쥘칸을 찾아라! 대장처럼 보이는 놈을 찾아! 쥘-칸-! 쥘-칸-!" 주위를 둘러보느라 힌치오는 아래쪽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했다. 오 뢰사수 같은 희귀한 예를 제외한다면 투사 무기를 가진 레콘은 별로 없고 따라서 힌치오가 높이의 안전을 과신했다 하더라도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제국군에서 날아온 유성추가 발목에 감겼을 때 힌치 오는 자신의 높이가 그렇게 안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힌치오는 순식간에 끌어내려졌다. 어떻게 중심을 잡으려 해보았지만 아래쪽에 레콘이 너무 많았다. 힌치오는 몇 명의 레콘과 부딪힌 다음 마지막으로 대지와 장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렸 다. 머리가 띵했지만 힌치오는 몸을 확 부풀리며 일어났다. 그의 발 목에 감겼던 유성추는 어느새 풀려 있었고 그것은 날렵한 호선을 그 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힌치오는 유성추를 받아드는 제국군 레콘을 발견했다. 제국군 레콘은 힌치오의 이쑤시개 - 4미터짜리 레콘용 양 손검 - 를 보고는 부리를 딱 부딪혔다. "정말 저 같이 생긴 걸 들고 이렇게 솔래하신 분은 누군가?" 솔래는 조금 늦게 뛰어내린 세 명의 레콘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4:1이라는 비례는 힌치오에게 복잡한 추락을 하느라 잠시 잃었던 자 신감을 되찾아주었다. 힌치오는 이쑤시개로 제국군 레콘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쥘칸이냐?" 레콘은 유성추를 좌우로 세차게 돌려 양쪽 땅에 밭고랑 같은 자국을 만들어놓았다. "팡탄 하장군이다." "팡탄? 젠장. 너하곤 안 놀아." "쌀쌀맞긴. 좀 놀아줘. 우리 애들 실망하잖아." 힌치오는 팡탄이 자식들을 전부 데리고 출전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말도 안되는 생각을 스스로 지우며 힌치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리고 자신과 세 명의 부하가 스무 명 쯤 되는 레콘, 즉 레콘 소대 안 쪽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힌치오는 벼슬을 꼿꼿하게 세웠 다. 그의 머리 속에서 팔리탐의 경고가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아주 골치 아파질 거요.' 힌치오는 벼락처럼 외쳤다. "뛰어올라!" "어딜!" 네 명의 스카리 요새군과 레콘 일개 소대가 동시에 하늘로 뛰어올랐 다. 공중에서 레콘의 거병들이 춤을 추었다. 시허릭은 엉겅퀴 여단의 분전에 환호하면서도 초조함을 느꼈다. 쥘 칸의 전술적 판단은 옳았다. 소대 단위, 즉 스무 명의 레콘들이 발케 네측 레콘 한 명씩을 상대하는 전술은 적의 우익을 확실하게 깨트리 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무자비하게 적진을 가로지르는 레콘 특 유의 속도가 나타나지 않았다. 엉겅퀴 여단은 착실하게 적의 우익을 분쇄하고 있었지만 일만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것이었고 그 때문에 지 금도 돌격한 본대는 빠른 속도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쥘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활약을 펼쳐주고 있음은 분명했고, 따라서 책임은 다시 시허릭에게 돌아왔다. 그는 인간 병사들을 전장에서 빼낼 의무가 있 었다. 하지만 지금 시허릭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실시하고 있 는 전술, 즉 전열의 병사들이 살해당하는 시간을 이용하여 후열의 병 사들의 생존 시간을 버는 방법뿐이었다. "소화차는 어떻게 됐나!" "상장군님. 조금 전에 갔습니다. 빨라도 두 시간은 있어야 도착할 겁니다." "두 시간? 젠장! 두 시간은 안돼. 그러면 저 놈들은 아군을 다 죽이 고 내키면 장례까지 치러줄 수도 있어! 그걸 빨리 가져올 방법을 생 각해! 갑충사들을 다 불러모아! 수통이라도 던지게 해!" 시허릭의 임시 방편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다. 하늘을 날고 있 던 갑충사들은 사령부로 귀환하여 음료수용 물통을 받아들게 되었다. 물통을 든 갑충사들이 다시 레콘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 며 시허릭은 기원했다. 제발 저 불가사의한 레콘들이 물도 무서워하 지 않는 괴물은 아니기를. 실현 가능성이 있는 소망을 품는 사람은 현명하다. 갑충사들이 물통을 떨어뜨리자 곳곳에서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다. 시허릭은 혹 퇴각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가슴 설레는 희 망을 느꼈다. 하지만 시허릭은 곧 엄청난 좌절을 느꼈다. 물에 대한 레콘의 고지식한 반응은 정반대로 도망치는 것인데 위에서 떨어지는 물의 경우 정반대로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발케네측 레콘들은 모든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그 모든 방향 중에는 제국군 본대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광분하는 것은 제 국군뿐이었지만 이제는 레콘들도 광분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전선은 끔찍하게 혼란스러워졌다. 그 혼란상에서 제국군을 빼내는 것은 티나 한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제기랄, 물 그만 부어!" "더 쏟을 수도 없습니다.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참모들 중 한 명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 때 다른 참모가 외쳤다. "테룸 하장군이 옵니다!" 시허릭은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끼며 전장의 서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기병대가 보이지 않았다. 시허릭은 당황하여 눈을 돌렸고 조금 후 북동쪽 방향에서 기병대를 발견했다. 파리조군을 관 통한 기병대는 파리조군을 내버려둔 채 발케네측 레콘의 뒤쪽에 집결 하고 있었다. 그들이 돌격 태세를 갖추고 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시허릭은 그것에 찬성할 수 없었다. "제기랄! 암살공에게는 아직 소환군이 있다! 소환군에게 뒤쪽을 보 이게 된단 말이야! 암살공이 예비대를 돌진시키면 끝장이야! 갑충사, 당장 날아가서……" "소환군은 못 올 것 같습니다." 참모의 말에 시허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냐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허릭에게 참모는 손을 들어 전장의 서쪽 산지를 가리켰다. 남서쪽 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야산들의 분수령에서는 제국군 천여 명이 숨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시허릭이 외쳤다. "헨로 중대!" 쥘칸 장군의 엉겅퀴 여단이 전장 한가운데로 돌진했기에 니어엘은 더 이상 그들의 진격로를 보호할 필요가 없었다. 독립중대의 지휘관 답게 니어엘은 냉철하게 전황을 파악한 다음 스스로 전술을 구사하기 로 했다. 그녀의 한 차례 명령이 떨어지자 두 개로 양분되었던 헨로 중대는 빠르게 합류했다. 니어엘은 그들을 곧장 분수령을 따라 달리 게 했다. 대대 단위에게는 좀 벅찬 지형인 분수령은 헨로 중대 같은 규모의 병력에게는 안성맞춤의 이동로였다. 분수령은 좁지만 대신 산지에서 의 평균적인 이동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분수령을 따라 움직일 경우 평지의 사람들이 보면 놀랄 정도의 이동이 가능하다. 물론 산 아래로 다시 내려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이 소모되니 보통의 경우 분수령은 매력 없는 이동로다. 하지만 니어 엘은 산 아래로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전장 북서쪽 가까이에 도달한 니어엘은 산사면을 따라 중대를 빠르게 포진시켰다. 오십 명 씩 스무 줄로 늘어선 중대가 팔부 능선 쯤을 뒤덮었다. 니어엘은 외쳤다. "덧살 착용!" 니어엘의 이어진 명령에 따라 천 발의 애기살이 활에 걸렸다. 니어 엘은 암살공의 본영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소환군 쪽을 가리켰 다. 그쪽에서도 헨로 중대를 볼 수 있지만 별다른 방어 동작은 보이 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올 수 없는 거리였으니까. 하지만 헨로 중대 의 장기인 애기살은 보통 화살의 몇 배나 되는 거리를 날아간다. "발사!" 일제히 놓인 활줄들의 탄성음은 요란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것은 보 이지 않았다. 어쨌든 장대한 전쟁가를 노래하고 싶어하는 노랫꾼들을 설레게 할 장면은 없었다. 하지만 애기살의 무서움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눈 좋은 레콘들이라면 하늘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거무스름한 기운 같은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환군의 구만 병력은 그것을 더 이상 대비할 수 없는 거리에서 가까스로 애기 살을 발견했다. 끝까지 애기살을 발견하지 못한 소환군의 병사들은 갑자기 쓰러지는 천 명의 전우들을 보며 기겁해야 했다. 소환군 사이 에서 무서운 동요가 일어났다. 니어엘 또한 자신들이 쏜 애기살의 궤적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 지만 소환군 사이에서 일어난 혼란을 본 니어엘은 애기살이 적절한 방향으로 날아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니어엘은 외쳤다. "좋다! 명령 기다리지말고 준비 되는대로 연속 사격!" 니어엘의 명령에 따라 헨로 중대원들은 보이지 않는 치명타를 전장 의 하늘 너머로 계속해서 날려보냈다. 과녁이 구만 명이나 되는 병력 인 만큼 명중률은 말할 필요도 없이 좋았다. 또한 애기살의 파괴력 때문에 한 발의 화살은 한 명의 사살을 가져왔다. 한 번 발사가 실시 될 때마다 정확히 천 명씩 죽어나가는 형편이었다. 소환군은 방패를 머리 위로 쳐든 채 얼어붙었다. 소환군이 봉쇄된 것을 본 테룸 나마스 하장군은 호탕하게 웃고는 북 서쪽 산맥을 향해 경례를 보냈다. "자, 우리 차례다! 가자! 폐하께서 나를 보신다!" 기병대들은 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폐하께서 나를 보신다!" 파리조군을 돌파하느라 조금 줄어들었지만 나마스의 기병대는 아직 도 사천오백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마스는 그 병력을 이 열로 배치했다. 사천오백 마리의 말이 발굽을 굴렀다. "돌격!" 전장의 북동쪽으로부터 거대한 써레가 땅을 갈듯 제국 기병들이 흙 먼지와 풀뿌리를 날리며 돌격했다. 그 정면에는 스카리 요새군의 레 콘 병사들이 등을 보인 채 서있었다. 달리는 말의 관통력이 레콘의 등을 꿰뚫었을 때 기병 돌격 예찬자인 시허릭은 잠깐이지만 황홀경을 느꼈다. 치천제는 하늘누리의 나루터에서 아래쪽의 상황을 냉엄하게 노려보 았다. 보안의 필요성 때문에 황제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두 명의 금군이 있을 뿐이었다. 각자 이를 갈고 벼슬을 빳빳하게 세우고 있는 두 금군은 구레와 부악 타였다. 흑사자 모피 덕분에 나루터에 서있을 수 있는 황제와 달리 비스그라 쥬백 데라시는 자신의 벽난로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보온복은 그렇게 오랜 시간의 활동을 보장해주지 않으며 그를 위해 도깨비불을 만들어 줄 도깨비도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데라시 에게 전달했다. 곧 두번째 벽난로방으로 데라시의 공포스러워 하는 니름이 전달되어 왔다. [저것이었군요. 암살공의 덫. 저렇게 많은 레콘이라니!] [암살공의 격에 어울리는 것이군.] [도대체 어떻게 저런 것을 준비했을까요?] [그의 영지는 최후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레콘들과 그곳에서 무기를 받아서 나온 레콘들이 항상 지나치는 곳이니 어렵진 않았겠지. 그리 고 그 스카리 요새라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군. 어쩌면 락토는 요새를 짓는다는 소문을 퍼뜨려 일하러 온 레콘들을 모아들였을지도 모른 다.] [그렇겠군요. 어쨌든 어느 정도 세력 균형은 회복한 것 같군요.] [균형이 고작이야. 그것도 오래 가진 않겠지.] [예?] 황제는 전장을 내려다보며 설명했다. [남쪽 본대 병력과 서쪽의 엉겅퀴 여단, 그리고 북동쪽에서 기병대 가 공격하고 있지만 저 레콘들은 무너지지 않았어. 원래 무너질 것이 없기 때문이야. 레콘의 단점이자 강점이지. 저들은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자기 싸움을 수행할 수 있어. 엉겅퀴 여단의 모습에 비하면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아무리 비효율적이라도 저건 레콘이야. 1 더하 기 1로 2밖에 만들지 못한다 해도 그 2가 너무 크군.] [그렇군요. 폐하. 그렇다면 제국군은 궤멸하는 것 아닙니까?]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사실이군.] [폐하!] [짐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데라시.] 데라시의 얼굴을 직접 본다면 사실을 말하는 것도 끔찍한 일이라고 니르고 싶은 표정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라시는 자신 의 니름을 통제하려고 애썼고, 따라서 그의 니름에서 데라시의 속마 음을 읽기는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폐하.] [사과할 것은 없어. 구레와 부악타도 당장 뛰어내려가고 싶어하는 것 같군.] 금군의 임무는 황제를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제국군의 전투 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 해 제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면 주저없이 그렇게 할 자들이다. 하지만 아래쪽 사라티본 평야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그들을 흥분시켰다. 구레 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규리하성을 박살낼 때도 태연했던 오뢰사수 부악타 또한 흥분으로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 는 것은 가소로운 인간들의 싸움이 아니라 레콘들의 싸움이었다. 부 악타는 결국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부리를 열기도 전 에 황제가 말했다. "안돼. 고정된 성벽 같은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저건 그런 것이 아니야. 너희 다섯 명이 내려간다고 해서 전황이 바뀌지는 않는 다. 너희들은 황제의 보호자다." 부악타는 머리를 떨구었다. "싸우고 싶어. 황제. 우리 화살은 단창으로 쓸 수도 있어." "이해한다. 하지만 너희들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다." "뭐? 그게 어디지?" "바로 여기." 부악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구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발케네군이 환상계단을 만들어 하늘누리에 침입할 것을 걱정 하시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그런 셈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 치천제는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면 어떤 남자가 머리 끝까지 화 날 정도는 되는군. 그 남자 가 결심했을 때 너희들은 하늘누리를 지켜야 한다."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구레와 부악타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 그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처럼 갑자기 맹렬한 종소 리가 들려왔다. 금군들은 놀란 눈으로 하늘누리쪽을 바라보았다. 하늘누리의 중앙쪽 유수부에서 종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낯선 소리였지만 금군들은 그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하늘누리의 시민들은 다 알고 있 는 소리다. 조금 늦게 고개를 돌린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는군.] "시작하는군." [예?] "예?" 데라시와 금군들이 동시에 질문했다. 치천제는 데라시의 질문에 대 답했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짐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천경유수를 설득하셨습니까?] [아니.] [예? 설득하지 않으셨다고요?] [그는 짐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아마 끝까지 그럴 것이다. 지알데 락바이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짐을 도울 것이다. 잠 시 입을 닫은 채 이 전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전투를 끝낸 다음 다시 짐에게 반대할 것이다.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도울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치천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지금쯤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을 거다. 그는 천성이 그런 인 물이다.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건 저런 몰지각한 살해를 눈 뜨고 볼 수 없지.] 치천제의 예상대로였다. 천경유수는 유수부 천경통제실에서 뜨거운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사람의 가치가 그렇게 급속도로 훼손되는 광경은 지알데 락바이를 참을 수 없게 했다. "보안판(保眼板) 작동!" 주기적으로 보안판을 세심하게 점검했지만, 천경통제실의 보안판 담 당자는 혹여나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 그 물건이 녹슬기라도 해서 작 동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천경유수는 틀림없이 그의 머리를 물어뜯을 태세였다. 보안판을 작동 시킨 담당자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작동 현 황을 살폈다. 잠시 후 그는 하늘누리의 온갖 기묘한 설비들의 대부분 을 설계, 제작한 도깨비 대장장이들에게 그의 아내에게도 바치지 않 았던 찬사를 보냈다. 하늘누리의 앞쪽, 하늘치의 머리 부분에 장치된 신묘한 장비들이 움 직였다. 가장 작은 구성품도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장비들이 움 직이는 모습은 마치 사자가 갈기를 흔드는 것 같았다. 엄청나게 거대 하고 지독하게 복잡하지만, 보안판의 기본 원리는 말의 눈가리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하늘치의 거대한 입 뒤쪽에 흩어 져 있는 수천 개의 눈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치다. 하늘 치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눈을 보호한다는 것은 황제와 하 늘누리라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존재들을 보호하려는 것이거나, 혹은 그 존재들에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늘치가 공세에 나선다는 의미다. 이 경우에는 후자다. 보안판이 수천 개의 눈을 빈틈 없이 가 린 후 지알데 락바이가 외쳤다. "하강하라!" 미리 경고 타종이 있었지만 하늘누리의 시민들은 하늘치의 급격한 움직임에 기겁해야 했다. 하늘누리의 이동 담당자들은 어떤 이동에서 도 탁자 위에 놓아둔 도깨비지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그릇에 부어 놓은 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자랑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 순간 하늘치는 하늘누리의 구조적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속도로 하강했다. 비로소 하늘누리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생 물의 등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유수부 통제실에서 지알데가 외쳤다. "레콘들의 상공으로 접근하라!" 아래로 하강하던 하늘누리가 거대한 몸을 레콘들의 상공으로 이동시 켰다. 갑자기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전쟁에 흥분해 있던 병사들을 자 극하지는 않았다. 하지마 그 거대한 물체의 이동은 보거나 듣지 않아 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분전하고 있던 제국군 본대와 기병대, 스카 리 요새군, 그리고 엉겅퀴 여단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다. 문득 쥘 칸이 끔찍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다시 스 카리 요새군을 보았다. 모든 사실이 명백했다. 쥘칸이 외쳤다. "모-두-도-망-쳐-! 서-쪽-으-로-도-망-쳐-!" 지알데 락바이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레콘 일만 명의 분노가 부당하게 황제에게 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직접 알려줄 수 있다 면 그렇게 했겠지만 지알데 락바이는 대신 통제실의 유수부원들에게 외쳤다. "이것은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의 명령이다!" 유수부원들은 다행히도 얼핏 듣기에 황당하게 들리는 그 명령의 의 미를 짐작할 정도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숨을 멈춘 채 지알데의 명 령을 기다렸다. 지알데가 외쳤다. "수문 개방! 저수를 전량 방류하라!" 어떤 익살스러운 유수부원은 천경유수가 내린 명령이 흘레 붙은 개 들에게 과부가 하는 짓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곤 호흡 곤란의 고통을 느꼈다. 하늘누리 아래쪽에 있던 레콘들도 비슷한 고통을 느 꼈다. 하지만 고통의 원인은 완전히 달랐다. 참혹한 공포 속에서 레 콘들은 하늘누리의 옆구리에서 빛나기 시작하는 물방울들을 바라보았 다. 하늘누리 시민들의 식수원이 그 거대한 수조를 비우기 시작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2-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02 조회수 : 2193 피를 마시는 새 12.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 3 유수부 수도국원 오니 보는 자신이 하늘누리의 초강력 비밀병기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생각했다. 틸러 녀석이 이 이 야기를 들으면 숨 넘어가겠군. 오니 보는 하늘누리의 저수조가 그 물을 순식간에 전량 방출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수조에는 당연히 있 어야 하는 시설이다. 고여있는 물은 상할 수 있고 수인성 질환 같은 것이 발생할 경우 하늘누리는 심각한 타격을 입기 때문에 저수를 완 전 방류하고 새로 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가 갖춰져 있어야 한 다. 오니 보도 그 방류 시설을 점검하곤 한다. 하지만 오니는 그 방 류 시설이 대(對)레콘 병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니, 미리 생각했어야 하는 걸까? 한두 명의 레콘에게 그 많은 물 을 쏟을 필요는 없으니 상대가 레콘 부대일 경우에만 저수 방류는 유 의미한 공격 수단이 될 터인데, 레콘 부대가 하늘누리를 공격한다는 것부터가 어처구니 없는 개념이니 오니 보가 그런 생각을 못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껏 하늘누리를 공격한 레콘은 황제사 냥꾼 한 명 뿐이다. 하지만 오니는 레콘 부대가 이미 존재한다는 점 을 간과할 수 없었다. 제국군에는 레콘 여단들이 포함되어 있다. 생 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하늘누 리는 그것을 제압할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니 보는 그런 만 약의 경우를 가정해서 방류 시설이 설계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 했다. 하늘누리가 저수를 방류하는 모습은 그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특이한 것이었다. 초당 방류량 천 톤. 수도국원 오니 보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수치 다. 그 막대한 수량을 일시에 뿜어낼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은 방류 관 덕분이다. 그런데 그 방류관들은 하늘누리 아래쪽의 모든 방향과 모든 각도를 대부분 포함하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수직으로 떨 어지는 물줄기부터 수평으로 힘차게 뻗어나가는 것, 그리고 높은 수 압을 이용하여 위쪽으로 쏘아지는 것까지 있었다. 그 때문에 하늘누 리의 거대한 몸이 덮는 것보다 몇 배나 넓은 지역에 살수가 가능했 다. 방류관이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수도관을 보호하려면 수압 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단순한 방류를 위해서라면 그 런 복잡한 배치를 할 필요가 없다. 모든 방류관이 일시에 개방된 모 습을 보며 오니는 그것이 원래부터 되도록 넓은 지역에 살수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되었음을 확신했다. 그 순간 하늘누리는 같은 크 기의 구름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폭우 발생기였다. 오니는 아래쪽의 레콘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경 고 타종이 있은 후에는 급격한 움직임 때문에 추락이 일어날지도 모 르기 때문에 하늘누리 외곽으로의 통행이 금지된다. 오니 보는 다시 생각했다. 본 것이 없다고 말하면 틸러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할 텐 데. 오니 보라는 유수부 수도국원에게 목격담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니 지만, 팔리탐 지소어는 전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관찰했다. 하늘누리에서 쏟아지는 파괴적인 낙수를 바라보던 팔리탐 지소어는 자신이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차분함의 원인 을 찾던 팔리탐은 주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팔리탐은 깨달았다. 자 신이 차분한 것은 주군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암살공의 호인형 얼굴 에는 어떤 긴장감도, 초조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팔리탐은 고개를 설 레설레 젓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순간이다. 아직 정식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기에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스카리 요새군은 암살공이 긴 시간 동안 구상하여 힘겹게 완성한 회심의 무기다. 그런데 압도적 인 제국의 힘에 대항하여 암살공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병기가 지 금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공포에 정신을 잃은 레콘들이 사방으로 도주하면 스카리 요새군은 순식간에 와해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니, 농후하다. 그러면 암살공은 패망한다. 사라티본 평 야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로 그런 일이다. 하지만 암살공은 주먹으로 뺨을 받친 채 느긋하기까지 한 태도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시원하게 쏟아 붓는군." 방패를 든 채 뻣뻣하게 경직해 있던 암살공의 참모들이 한숨을 내쉬 거나 헛기침을 했다. 어떤 이는 사레가 들려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 러다가 무심히 방패를 내린 참모는 화들짝 놀라 그것을 위로 들어올 렸다. 보이지 않는 애기살은 그것이 계속되고 있는지, 아니면 중단되 었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고보니 암살공은 목숨 이외의 모든 것을 잃을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었고, 또한 목숨을 잃을 가능성에 노 출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암살공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락토 빌파는 그 낙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누리가 이동수도로서 독립 수원을 탑재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일만 레콘의 원한을 사는 것을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하늘누리의 낙수 공격은 충격적인 것이지만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렇 기에 락토 빌파는 스카리 요새군 일만 명 전원의 출전을 명령했다. 팔리탐은 그것을 반대했다. 이삼천 명으로도 바라는 효과는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테니 그 정도만 출전시키자는 것이 팔리탐의 주장이었 다. 하지만 락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삼천 명이면 잃어도 된다는 건가?' '칠팔천 명은 남습니다. 각하. 레콘 칠팔천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도 이삼천 명 정도만 잃으면 되겠군. 그 다음에 도. 네 번 쯤은 그럴 수 있겠군. 그 다음에는 뭐가 남지? 쥐딤의 재 현?' 팔리탐은 나약한 낙관론 밖에 제시할 것이 없었다. '도망친 레콘들이 다시 귀환할지도 모릅니다.' '나도 얼마나 돌아올지 궁금하군. 전부 내보내.' 팔리탐은 웃기는 전투라고 생각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고 비장한 전투지만, 웃기는 전투다. 제국군 수뇌부 측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이긴다는 생각은 포기했을 것이다. 아마도 최대한 많은 수의 제국병 들을 구출해내는 것으로 전투 목적을 변경한지 오래일 것이다. 그런 데 발케네 측에서는 처음부터 이길 생각이 없었다. 암살공은 낙수의 공포에서도 침착을 잃지 않은 채 돌아오는 레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사라져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레콘들만 데리고 전쟁을 수행할 작정이다. 따라서 발케네측의 관점에서 사라티 본 전투는 전투라기보다는 대규모 선별 작업이었다. 선별 작업을 통 과한 레콘의 숫자에 따라 향후 전쟁의 형태가 결정될 것이다. 팔리탐 지소어가 마음 속으로 그어둔 한계선은 삼천 명이었다. 그 숫자로도 발케네를 보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 이하라 면 팔리탐이 보기에 발케네공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노후 대비책은 자결이다. '쉽지 않은 도박이지.' 모욕에 가까운 평가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하는 어떤 도박꾼도 암살공의 배짱에 자신의 배짱을 비교할 수는 없 을 것이다. 강인한 의지인 것일까, 자포자기인 것일까. 둘은 사실 구 별하기 어렵고, 그저 결과에 의해 판정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역사가 기록을 책임지기로 한 모든 위인들 중 자포자기했던 행운아가 몇 할 정도나 포함되어 있는지는 결코 밝혀지지 않겠지만 그 비율은 0보다 는 분명히 클 것이다. 만약 자포자기라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팔리탐은 스카리와 헤어릿을 생각했다. 암살공의 자녀들. 아버지를 혐오하는 아들과 증오하는 딸. 두 사람은 락토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그다지 숨기지 않았지만 반대로 락토는 자녀들에 대한 논평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 대한 락토의 태도는 통제가 가능하면 감정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쪽이다. 하지만 그 통제는 실패했다. 팔리탐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락토에게 통 제당하지 않는다. 스카리가 부냐 헨로를 데리고 온 행동은 무수히 많 은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빌파 가문에 한정지어 볼 때는 가문 에 생긴 봉합할 수 없는 균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팔리 탐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니 락토 또한 알 것이다. 팔리탐은 락토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낙수가 멈췄다. 당장 식수를 공급해야 하는 천경 시민들이 있기 때문에 하늘누리는 모든 물을 다 쏟아붓지는 않았다. 하지만 파괴적인 낙수가 끝나자 전 장은 거대한 수렁으로 바뀌었다. 그 속에 레콘들이 서있었다. 살수 지역 외곽에 있던 레콘들과 쥘칸 장군의 외침을 들은 엉겅퀴 여단의 레콘들은 간신히 낙수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수 지역 중앙에 있던 레콘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수는 적지 않았다. 적어도 수천은 되는 것처럼 보였다. 살수 지역 바깥으로 도망친 레콘 들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그 레콘들을 바라보았다. 엉겅퀴 여단 1대대장 팡탄 하장군 또한 물을 피하지 못한 레콘들 중 하나였다. 서까래 같은 양손검을 들고 날뛰는 레콘과 어울리느라 팡 탄 하장군은 하늘누리가 접근하는 것도, 쥘칸 장군의 명령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떨어지는 물이 그를 때린 것은 하늘로 높이 치솟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물에 맞아 곤두박질쳤다. 팡탄 하장군은 푹 젖은 깃털 속에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기절한 것처럼 보이는 레콘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레콘도 보였다. 팡탄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쓰러져 죽는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밖에는. 앞쪽에 있는 커다란 레콘을 보았을 때도 팡탄은 산이나 언덕을 보듯 무감동한 기분만 느꼈다. 그것은 힌치오였다. 힌치오는 이쑤시개의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그 칼은 땅에 깊숙히 꽂혀 있었고 힌치오는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칼이 없었다면 그는 당 장 쓰러졌을 것이다. 힌치오를 바라보던 팡탄은 머리 속에서 뭔가가 꾸물거리는 기분을 느끼고는 벼슬 근처를 헤집었다. 그러나 손에 닿 는 젖은 깃털의 감각은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팡탄은 손을 떼며 비명 을 질렀다. 그 비명에 힌치오가 고개를 들었다. 힌치오의 두 눈 또한 생기를 잃고 있었다. 당장 칼을 휘둘러 자신의 목을 잘라도 놀랄 필 요가 없을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힌치오는 구부정하게 서있었다. 그가 갑자기 몸을 똑바로 세웠다. 방만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있던 암살공이 갑자기 상체를 일으켰 다. 호인의 얼굴에서 암살자의 눈이 번득였다. 힌치오를 똑바로 바라 보던 락토는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났다. 참모들은 기겁하며 방패의 위치를 옮겼다. 락토는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려 송곳니를 드러내었 다. "그래. 해!" 힌치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힌치오는 자신이 보고 있는 사물을 자신이 알고 있는 사물과 연결지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눈 에 들어오는 것은 총체적 무의미였다. 힌치오는 거북했다. 알 수 없 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질퍽거리는 수렁도, 반짝이는 수면 도 그가 모르는 것이었다. 힌치오는 물이 무엇인지 몰랐다. 똑바로 선 채 힌치오는 자신이 아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의 상 태는 미로에 갖혀있는 것과 같았다. 무엇인지 모를 것이 주위를 틀어 막고 있었다. 젖어있는 레콘은 젖어있는 레콘이 아니었고 하늘에 떠 있는 하늘누리는 하늘에 떠있는 하늘누리가 아니었다. 전장은 전장이 아니었고 힌치오는 힌치오가 아닐지도 모른다. 힌치오는 자신이 아는 것을 찾기로 했다. 눈은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손은 무 엇인가를 찾아내었다. 힌치오는 장님처럼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쥔다는 동작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힌치오는 무엇인가 를 쥐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힌치오는 고개를 돌 렸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힌치오 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이 어 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힌치오는 당황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여러 번 고개를 움직이는 시도를 했다. 몇 번 정도 머리가 아닌 다리 나 다른 것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얼마 후 힌치오는 자신의 오른손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칼을 쥐고 있었다. 힌치오는 반가움을 느꼈다. 힌치 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낯설음의 세계 속에서 처음 발견 한 낯익음이었다. 그것은 레콘의 무기였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그의 자부심처럼 녹슬지 않는 별철로 만들어진 양손검이었다. 힌치오는 그 것을 움켜쥐었다. 그는 이제 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늘누리의 나루터에서 부악타는 지켜야할 황제를 내버려둔 채 두 눈을 가리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구레는 그런 부악타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가 발작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고마운 처지였다. 구레 는 혹 일어날지도 모르는 레콘의 난동을 걱정하여 치천제에게 말했 다. "폐하.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저것들이 미쳐서 환상계단을 만들어내어 돌격할지도 모릅니다." 치천제는 구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 으로 전장 한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구레는 황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황제의 어깨 너머로 그녀의 시선을 쫓았 다. 곧 구레의 눈이 수렁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레콘에게 멈췄다. 까 마득한 거리 때문에 구레는 조금 후에야 그 레콘이 자신이 본 가장 큰 레콘임을 깨달았다. 감탄과 함께 구레는 약간의 동정심도 느꼈다. 틀림없이 자부심 강한 전사일 그 레콘이 겪은 타격은 끔찍한 것일 테 니까. 그 때 구레는 그 레콘에게 좀 기묘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똑바로 서있었다. 그 평범한 동작은 낙수의 공격을 받 은 전장에서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황제가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돼." 그리고 닐렀 다. [쟁룡해 바닥에 처박혀 있어!] 그 니름을 들은 데라시는 꽤 당황 했다. 힌치오는 팔뚝에 힘을 주었다. 이쑤시개를 뽑으려는 것이다. 깊숙히 박혀 있기는 하지만 힌치오가 뽑아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힌치오는 팔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칼을 뽑아내고 있는지 아니면 땅속으로 더 밀어넣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힌 치오는 자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는 왼손을 뻗어 오른팔을 받쳤 다. 오른팔을 붙잡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잡아당길지도 모르니까. 힌 치오는 왼손이 오른팔을 밀어올리기를 바라며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오른팔이 위로 갑자기 솟아올랐다. 그와 함께 이쑤시개도 튕기듯 솟 아올랐고 하마터면 힌치오는 그것을 놓칠 뻔했다. 힌치오는 허둥거리 며 두 손으로 이쑤시개를 부여잡았다. 이쑤시개. 레콘은 이를 쑤시지 않는다. 그 이름은 팔리탐 지소어가 붙여준 이름이다. 힌치오는 이제 팔리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며 힌치 오는 이쑤시개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크고 길다. 손에 최후의 대장간에서 받은 무기를 들고 있으며 그것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이상 레콘은 언제나 젊은이고 언제나 투사다. 아무 것 도 아니었던 힌치오는 젊은이가 되었고 투사가 되었다. 방금 뭍으로 끌어올려진 물고기처럼 젖어있어도. 힌치오는 두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아-아-아-아-아-!" 암살공을 지키던 자들이 알면 대단히 좋아할 일이 있다. 헨로 중대 의 사격은 멎어 있었다. 하늘누리가 급속히 하강하던 시점부터 그들 은 경악에 빠져 사라티본 평원에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 어엘 헨로는 그런 중대원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어떤 성벽으로도 막 을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 무리에게 강력한 자극이 주어진 상태였고, 따라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맹렬히 잡아당기던 활을 잠시 내려놓은 니어엘은 평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레콘들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거나 비틀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깃털을 뭉텅이로 뽑아내어 팽개치고 있는 레콘들도 있었다. 그냥 제자리에서 위로 펄쩍펄쩍 뛰 는 레콘들도 있었는데, 어떻게든 땅에서 떨어지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중 어떤 레콘들은 하늘누리를 붙잡으려는 듯 팔을 휘둘렀다. 하지 만 하늘누리는 그들이 뛰어서 잡을 수 있을 만한 높이에 떠있지는 않 았다. 당장은 한심하거나 슬픈 모습이었고 어떤 폭력이 시작될 기미 는 보이지 않았다. 니어엘은 방류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잠깐 동안 의 살수였다면 레콘들은 아마도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누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긴 시간 동안 쏟아부었다. 인공적인 것이라고 느끼기 어려운 규모의 낙수였다. 레콘들은 폭포나 바다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다. 다만 두려워하며 피할 뿐이다. 레콘들은 폭우나 해 일 같은 자연적 규모의 살수에 노출되었고 그 때문에…… 갑자기 들려온 계명성에 니어엘의 사고가 중단되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니어엘은 눈을 찌푸리며 계명성이 들려온 위치 를 가늠했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니어엘은 유난히 큰 레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니어엘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본 거대한 레콘을 떠올렸다. 그 레콘은 검었고 강변에 서있었다. 지금 니어엘이 보는 레콘은 흰빛이었고 거대한 수렁 한가운데 서있었다. 니어엘은 그런 유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걱정스러웠다. 동시에 니 어엘은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검은 레콘 지멘은 그녀가 보는 가운데 기적을 만들었다. 비명을 지르던 팡탄 하장군은 커다란 소리를 내는 물체를 바라보았 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소리는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팡탄은 부리를 닫은 채 그 물체를 보았다. 그러자 그것은 조금 전까 지 싸우던 덩치 큰 레콘이 되었다. "아-아-아-아-아-! 나-는-싫-어-! 여-기-가-싫-어-!" 여기가 싫다고? 동감이야. 팡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유를 명쾌하 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팡탄은 그곳이 싫었다. 왜 그럴까? 덩치 큰 레콘의 외침이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곳이 싫다고 했다. 따라서 팡탄은 이곳이 싫었다. 팡탄은 그런 논리에서 아무런 오류도 느낄 수 없었다. 말이 된다. 팡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여기가 싫어. 힌치오가 몸을 부풀렸다. 젖은 깃털들이 강제로 일어났다. 물방울이 튕겼다. 힌치오는 몸을 웅크렸다가 다시 펼치며 깃털을 일으켰다. 뭉 쳐진 깃털들이 떨어지며 그의 몸이 크게 부풀었다. "가자."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갑자기 팡탄에게 잊혀졌던 세계가 돌아왔다. 정중하다기보다는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모습으로. 팡탄은 눈을 껌 뻑거리며 주위를 인지했다. 사라티본 평야였다. 막대한 물이 쏟아져 곳곳에 웅덩이가 펼쳐져 있었다. 레콘인 팡탄의 눈에 그 광경은 유리 기픈골 무사장이 휩쓸고 지나간 페시론 섬이나 다를 것이 없다. 힌치 오의 말이 옳았다. 정말 싫은 곳이었다. "가자!" 힌치오가 다시 외쳤다. 팡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쓰러져 있던 레콘들도 어느새 일어났다. 진구렁 속에서 레콘이 일어났다. 물을 뚝 뚝 떨어뜨리며 레콘이 몸을 일으켰다. 주저앉은 채 깃털을 잡아뜯던 레콘이 주먹을 움켜쥔 채 일어났다. 맹목적으로 뛰던 레콘이 힌치오 를 보며 똑바로 섰다. 힌치오는 위로 높이 들었던 이쑤시개로 전장 동쪽을 가리키며 세번째로 외쳤다. "가-자-!" 힌치오가 날아올랐다. 진흙을 뿌리며 힌치오가 날았다. 거대한 하늘누리와 진흙탕으로 바 뀐 사라티본 평야 사이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힌치오가 날았다. 그리 고 레콘들이 날아올랐다. 그들은 철벅거리며 힌치오의 뒤를 따랐다. 수천 명의 레콘들이 달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달려갔다. 마른 땅으 로 날아가는 레콘들을 보며 팡탄은 묘한 충동을 느꼈다. 그도 달려가 고 싶었다. 이 축축하고 지저분한 땅에서 벗어나는 그들을 보며 팡탄 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황당한 충동이었다. 팡탄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인간에게 물어본다면 인간은 팡탄에 게 그것이 군중심리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레콘은 군중심 리와 관련이 없다는 대답을 해줌으로써 자신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을 고백할 것이다. 어쨌든 그곳에는 팡탄의 상담을 받아줄 인간은 없 었다. 팡탄은 달리려 했고 또한 멈추려 했다.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 였다. 팡탄은 쏜살 같이 달려가는 대신 비틀거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한 몇 번의 서툰 걸음 후에 팡탄은 꽈당 쓰러졌다. 하장군은 진흙 탕에 머리와 가슴을 들이받았다. 팡탄은 진저리를 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발이 미끄러지며 반대쪽으로 쓰러졌다. 팡탄은 진흙탕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일어나려는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손에 진흙을 잔뜩 쥐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팡탄은 마른 땅으로 날아가는 레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팡탄은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락토 빌파가 외쳤다. "좋아, 퇴각한다! 퇴각 신호를 보내라!" 넋이 빠진 채 달리는 레콘들을 보던 참모들은 깜짝 놀라서 암살공을 바라보았다. 암살공은 엄한 눈으로 그들을 마주보았다. 참모들은 황 급히 락토의 명령을 실행에 옮겼다. 계속된 충격적인 상황에 넋을 잃 고 있었던 그들에게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어쨌든 환영할 만한 일이 었다. 퇴각은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소환군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제 국 기병의 돌격에 난자당한 파리조군은 전장 곳곳에 소규모 단위로 집결하여 있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는 제국군 본대, 기병대, 그리 고 엉겅퀴 여단 같은 골치 아픈 병력들이 있어서 파리조군이 다시 집 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더군다나 전장 남서쪽에서는 엉겅퀴 여단의 진격로를 확보하기 위해 배치되었던 중대 병력들이 하산하고 있었다. 만약 제국군이 그 시점에서 섬멸 행동에 들어간다면 파리조 군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라수 규리하가 부활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제국군은 섬멸 행동을 개시할 여유가 없었다. 몸을 빼낸 엉 겅퀴 여단은 수렁으로 변한 전장에 진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스카리 요새군과 맞닥뜨렸던 제국군 본대의 피해가 심각 했다. 너무나도 파괴적인 힘에 노출되었기에 많은 병사들이 즉사했지 만 부상병의 숫자도 적지는 않았다. 상처의 고통에 갑자기 쏟아진 낙 수까지 더해져 그 부상병들은 명재경각의 상태였다. 그들을 놔두고 전투를 벌였다가는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결국 제국군도 발케네군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 럽게 전장 남북쪽으로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서로 싸우지 말자는 협 정이 암묵적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상대편의 부상병을 옮겨갈 수 있 도록 조심스럽게 옆걸음질 치는 모습이나 말없이 손짓으로 부상병의 위치를 가르쳐주는 모습, 심지어 부상병을 등에 업을 수 있도록 상대 편을 도와주는 모습까지 나타났다. 완전한 선의에서 한 행동이라기보 다는 꺼림칙한 상대가 빨리 주위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었지만 어쨌든 놀라운 일이었다. 차마 감사의 말까지 주고받기는 어 려웠기에 그들은 눈인사만 나누고는 헤어졌다. 부하들의 그런 이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는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장교들은 결국 모르는 체하기로 했다. 그런 부상병 수습에 그 날의 남은 낮이 다 소모되었다. 하지만 황혼이 찾아올 무렵 발케네군은 대 오를 갖추어 물러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군의 시허릭 마지오 상장 군 또한 본영까지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시허릭의 결정이 하늘누리에 전해졌고 하늘누리 또한 남쪽으로 물러났다. 팔리탐 지소어의 예견대 로 되었다. 그것은 아무도 이겼다고 말할 수 없는 전투가 되었다. 전장에 황혼이 내려앉았다. 그 때까지도 바닥에 앉아있던 팡탄 하장 군은 힌치오와 레콘들이 사라진 동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 몸에 묻었던 진흙은 말라붙었고 땅은 다시 건조해진 후였다. 퇴각 하기 위해 근처를 지나던 제국군 중대 하나가 하장군의 모습을 발견 했다. 그것은 헨로 중대였다. 그들은 가장 북쪽까지 진출했었고 고지 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야가 탁 트인 그곳에서 혹 발케네군 이 되돌아오지 않는지 감시하느라 퇴각이 늦었다. 처참한 전장 한가 운데 우두커니 앉아있는 팡탄 하장군을 본 니어엘은 카루스 부위를 불러 중대 지휘를 잠시 맡겼다. 그리고 말을 몰아 팡탄 하장군에게 다가갔다. 미처 양측이 수습해가지 못한 시체들 사이를 가로질러 팡 탄에게 다가간 니어엘은 말에서 내렸다. "팡탄 하장군님." 팡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앉아있는 그는 서있는 니어엘을 똑바 로 볼 수 있었다. 니어엘은 경례했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입니다. 본영으로 돌아가셔야지요." 팡탄은 고개를 갸웃했다. 니어엘은 그 동작이 왜 엉겅퀴 여단병이 아닌 그녀가 다가온 것인지 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엉겅퀴 여단병들은, 음. 이곳 상태가 안 좋아서 아까 물러갔습니 다. 그 때 하장군님을 모셔가지 못한 모양입니다. 저희 중대와 함께 귀환하시지요." 팡탄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그는 포돗빛으로 변한 동쪽을 물끄러 미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어." "예. 그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유수부에서도 워낙 전황이 다급하 고 다른 수단이 없어서 그런 수단을 썼을 겁니다." "아까 그 괴물 같은 녀석." "예?" "그 커다란 칼 쓰던 놈 말이야. 잘 뛰던데." "아아, 예. 레콘들을 이끌고 가던 그 덩치 큰 레콘 말씀이군요." "그래. 잘 뛰지?" "잘 뛰더군요." 팡탄은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기다린 후 니어엘은 부드럽 게 그를 불렀다. "팡탄 하장군님?" "응?" "가셔야지요." "아, 가야지." "팡탄 하장군님?" "내가 아직 안 일어섰나?" "아니오. 일어나셨습니다." "그러면 걷지 않고 있나 보군." "걷고 계십니다." "좋아. 내가 졌어. 뭐가 내 문제야?" "저희 중대에 가서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자네는 내가 만난 최고의 군인이야." "자만하지 않고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오른쪽엔 석양, 왼쪽에는 별이 뜬 하늘. 말에 탄 인간 수교위와 뚜 벅뚜벅 걸어가는 레콘 하장군 옆으로 늘어진 늘씬한 그림자가 게으르 게 휘청거렸다. 아라짓력 31년 2월 30일. 사라티본 평야에서 일어난 제국군과 발케 네군의 교전 행위는 전투라 불릴 만한 요건을 거의 대부분 가지고 있 었다. 따라서 전사학자들은 틀림없이 그것을 전투라고 기록할 것이 다. 하지만 해당 행위에 대한 교전 당사자들의 평가는 후대에 쓰여질 기록과 상관없이 제각기 달랐다. 그 중 가장 이질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발케네공 락토 빌파였다. 전후 처리 - 전투에서의 논 공행상 - 제자리에 서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느라 급급했던 봉신들에 게 주군을 구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비할 바 없는 영웅 적 행위였다는 칭찬을 되도록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귀찮은 의식 - 을 끝낸 후 자신의 천막에 돌아와 팔리탐 지소어의 보고를 받게 되었을 때 암살공이 느낀 감정은 시험 답안지 채점자의 그것과 비슷했다. "칠천 명?" "대충 그 정도입니다. 엉겅퀴 여단의 집단 운영은 상당히 파괴적이 었습니다." "그 숫자가 전부 귀환했다는 건가?" "힌치오가 방향을 가르쳐주었으니까요. 전부 힌치오를 따라왔습니 다. 그리고 힌치오는 이곳으로 왔습니다." 암살공은 싱긋 웃고는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들었다. 잔에 술 을 따른 암살공은 그것을 들어올려 보였다. "좋은 귀환율이군." 팔리탐은 가면을 찌푸려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표정 한 가면 때문에 팔리탐은 자신의 감정을 입으로 드러내야 했다. "각하. 만족하신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십니까?" "자네는 만족 못하나?" "만약 각하께서 그 칠천 명은 앞으로 각하를 위해 센범 폭포에라도 뛰어들 거라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저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암살공은 팔리탐의 말에 대해 생각하며 술잔을 비웠다.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은 암살공은 의자 앞으로 두 다리를 뻗으며 말했다. "그렇게 큰 희망은 품고 있지 않은데. 어쨌든 자네도 그들이 그 낙 수를 겪은 후에도 통제불가능한 상황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귀환 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훈련의 결과도 아니고 레콘에게 어울리는 일도 아닙니다. 행운입니다." "앉아서 설명해봐." 팔리탐은 주군에게 목례하고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각하. 야생마를 사냥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말고기를 먹는 지방 이야기인가 보군." "아닙니다. 야생마를 잡는 것은 그 고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육 하기 위해서입니다. 길들여서 탈 수도 있고, 아니면 사육마와 교잡하 여 좋은 혈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러기 위해서는 생포해 야 합니다. 하지만 생포한다고 해서 야생마 무리 전부에게 올가미를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두머리만 찾아낸 다음 그 놈을 생포해서 끌 고 오면 나머지 무리 전부가 그냥 따라옵니다." "자네가 말하는 것은 무리를 짓는 동물의 특징인 것 같군." "우두머리가 적을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무리가 도망치는 동물들도 있긴 합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린 특징이 무엇인지는 아신 것 같군 요." "우리 레콘 무리의 우두머리인 힌치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군." "레콘을 동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명의 수컷이 많 은 암컷을 거느리는 것은 동물들이 잘 하는 짓입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신부를 얻기 위해 싸우는 건 수컷 동물들의 세력 다툼인 셈이 지요.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무서워하는 것을 희화화해서 공포를 감 추려는 가소로운 술책입니다. 세상에 숙원을 정하고 추구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레콘은 하등한 동물이 아니고 본능대로 행동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충분히 지적인 개인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오늘 낮 스카리 요새군은……" "이름을 바꾸겠다." "예?" "그 이름을 바꾸겠다. 지금부터 사라티본군이라고 부른다." 팔리탐 지소어는 무참한 꼴을 당하고 도망쳤던 곳의 이름을 따서 부 대명을 붙이는 암살공의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암살공은 그들이 사라티본에서 혹독하게 선별되어 탄생한 정예군이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붙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오늘 낮 사라티본군은 무리 동물처럼 행동했습니다. 그것은 레콘 같은 지적인 개인주의자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닙니다. 다음에도 또 그럴 거라고는 절대로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혹 사라티본군이 그렇게 행동한다 해도 힌치오가 다음에도 제정신을 유 지하며 그들을 이끌어줄 거라고는, 역시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그건 행운이었다는 건가?" "각하. 훈련이 부족합니다. 그것은…… 오늘 낮의 그것은 얼핏 보기 에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행 운이었습니다. 힌치오가 제정신을 유지했고 레콘들이 그들답지 않게 행동했기에 일어난 행운입니다. 쥘칸 장군의 급조한 전술에도 3할이 나 되는 병력을 잃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라티본군은 절대로 군인이 아닙니다. 각하께서 그들을 쓰시려면 행운을 기대하셔서는 안 됩니다. 군인이 된 후에 쓰셔야 합니다." 암살공은 다시 술잔을 채웠다. "싸울 수 있고, 싸운 다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으면 돼." "각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레콘 무리는 이미 있었습니다. 7년 전 쥐딤에 있었지요. 분리주의자들에게도 타이모라는 우두머리가 있었습 니다. 하지만 엘시 에더리 대장군이 그들을 격파했습니다. 군인이 되 지 않은 레콘은 대장군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엘시 에더리는 없어." "시모그라쥬공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으십니까?" "그렇게 믿지 않아." "믿지 않으신다고요?" "그래. 믿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시모그라쥬공은 이미 약 속을 지켰어." 팔리탐의 가면이 락토를 똑바로 향했다. 락토는 천막 한쪽의 상자를 가리켰다. "저 상자를 열고 제일 위의 서신을 가져오게." 팔리탐은 서신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 서신 겉봉에는 처음 보 는 사람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락토가 말했다. "그 이름은 신경쓸 것 없어. 가짜니까. 편지를 꺼내어 읽어보게." 팔리탐 지소어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곧 몰두하게 되었다. 편지를 두 번 읽은 다음 팔리탐은 그것을 다시 접어 피봉 안에 집어 넣었다. 암살공이 말했다. "거기에 쓰여져 있는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겠지? 그래. 엘시 에 더리야. 팔디곤 토프탈은 이미 엘시 에더리의 신병을 확보했어. 엘시 는 절대로 한계선을 넘어올 수 없어." "그렇군요. 살인기사의 계획대로 되었군요." 락토는 빙글 웃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제이어 솔한의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니지. 원래는 아실과 지멘이 모두 하텐그라쥬로 가야 하는데 간 것은 지멘뿐이지. 그리고 엘시 에더리는 그들을 뒤쫓으라는 압력을 넣기도 전에 자발적 으로 지멘을 뒤쫓아갔지. 그리고…… 황제는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발 케네로 왔고." 팔리탐은 빠진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스카리는 계획대로 비셀스 규 리하를 데려오는 대신 부냐 헨로를 데려왔다는 진술이 빠져 있었다. 팔리탐은 그 진술이 의도적으로 생략된 거라 생각했다. 락토가 말했 다. "하지만 상황은 제이어가 계획했던 대로 되었어. 반드시 계획했던 일을 실패하는 것은 제이어답군. 그리고 칼을 뽑아 휘두른 것도 아닌 데 사람이 죽는 것은 살인기사답고." 팔리탐은 신중하게 말했다. "각하. 칼리도백이 알려지기 전에는 아무도 엘시 에더리 같은 사람 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각하께서 예상하실 수 없는 인물이 제국군이나 하늘누리에서 레콘들을 물리칠 방도를 준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전쟁 중이야. 팔리탐. 어떻게 그들을 훈련시킨다는 건가? 내 생각엔 실전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 같군. 다 른 방법이 있나? 설마 휴전하자고 말하지는 않겠지. 이쪽에서 휴전하 자고 해도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사라티본군의 모습을 보았 으니까." "포로 송환을 조건으로 휴전을 신청하면 됩니다." "포로?" "원래는 부냐 헨로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좋은 포로가 있습니다." 락토는 얼굴을 찡그리며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엘시 에더리를 돌려보내고 휴전하자는 건가?" "예. 제게 시간을 더 주신다면 칼리도백이 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레콘 군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미 사라티본군은 집단 활동에 상당 히 익숙해져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길어야 반 년 정도입니다." "재미있는 의견이었어." "각하……" 암살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가 엘시를 돌려받은 후에도 반 년을 기다려줄 것 같나? 그럴 리가 없어. 혹 기다린다면 다른 이유로 기다리겠지. 엘시 에더리를 규리하 변경백으로 만들어서 발케네를 칠 준비를 갖추게 하느라 그 시간을 쓰겠지. 그렇게 되어서는 안돼. 자네의 훈련을 믿게. 팔리탐. 사라티본군은 군인이 될 거야." 팔리탐의 머릿속에 낮에 떠올렸던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자포자기. 물론 전쟁을 일으킨 것은 발케네공이 아니라 황제다. 발케네공이 자 포자기로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발케네공은 그 전 쟁에 매달리고 있었다. 정성들여 레콘 군대를 만들고 끈질기게 황제 의 주의를 발케네로 끌어오던 때와는 많이 달랐다. 팔리탐은 암살성을 떠날 때 락토가 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 다. 공작은 스카리에게 끔찍한 창피를 줬다고 한다. 아들의 성격을 잘 알면서 그렇게 한 것은 어떤 대책이 있기 때문일까? 팔리탐은 그 대책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오늘 낮에도 암살공은 아무런 대 비책이 없는 상황에서 억수 속에 일만 명의 레콘을 노출시켰다. 성공 하면 물을 극복한 레콘 전사들을 얻게 되지만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 는 도박이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과감한 결단력이라고 표현할까? 팔리탐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평가를 받으려면 이겨야 할 것이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2-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03 조회수 : 1967 피를 마시는 새 12.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 4 발케네측의 논공행상은 많은 봉신들의 위신을 세워주어야 하는 그 구성 특징 때문에 복잡했다. 하지만 제국군의 논공행상은 어렵지 않 았다. 공을 논할 사람은 거의 죽거나 자신이 공을 세웠다고 주장하지 않은 탓이다. 누구나 인정할 수훈자인 아홉 명의 부위는 모두 살해당 했다. 그 예측 불능의 위험한 전장에서 기병들을 이끌고 분전했던 테 룸 나마스 하장군은 자신이 파리조군을 완파하지도 못했고 정체 불명 의 레콘들에게 절대적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포상을 거부했다. 그의 주장이 틀린 것도 아니었는데, 기병대를 완전히 통제 하여 안전하게 복귀한 것만으로도 위대한 전과지만 그 전과는 제국군 이 입은 끔찍한 피해에 비하면 소박한 것이었다. 발케네측 레콘을 측 면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던 쥘칸 장군도 자신이 적전 도피 행 위 비슷한 것을 했다고 주장했다. 하늘누리의 저수 방류 직전에 쥘칸 장군은 도망치라고 외쳤던 것이다. 레콘의 특성을 감안하면 그것은 훌륭한 통솔 행위지만 쥘칸 장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거 뿌리지 않았으면 우리가 그 놈들 다 때려잡았을 거 아냐." 제국군 장교들은 반론하기도 귀찮았다. 쥘칸 장군도 홧김에 그렇게 말했을 뿐 그 주장을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천이백 명이 일만 명을 물리치는 말도 안되는 전과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때 제국군 본대는 몰살당한 후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니어엘 헨로 수교위였다. 그녀는 분명한 전과 를 올렸고 도망치기는커녕 마지막까지 제국군의 퇴각을 지켰다. 제국 군 장교들은 니어엘 헨로의 전과를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상처 입은 제국군에게 위로를 주면 어떨까 하는 발상을 떠올렸다. 영웅의 탄생 방식에는 그런 것도 있으니까. 하지만 헨로 중대의 행위는 전투에 참 가한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와닿지 않는 것이었다. 헨로 중대는 전 투에 참가하지 않은 병력에게 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물론 전술적으 로는 매우 바람직한 행동이었지만, 레콘들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한 자들에게 다른 폭행을 막아줬다고 주장해봐야 분노밖에 끌어낼 수 없 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결국 본대의 피해가 지나치게 컸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본대의 경우엔 수훈자를 찾을 수도 없었다. 모두 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싸웠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뚜렷 하게 기억하는 병사가 별로 없었다. 사망자의 숫자는 막대했고 살아 남은 병사들도 정신적 충격 때문에 도저히 병사라고 부를 상태가 아 니었다. 아무리 군인 정신을 부르짖는다 해도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 계가 있다.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망상이 나 우울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같은 것을 보였다. 그런 병사들 중 에는 복무 기간이 긴 고참 병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지휘관 들도 그런 그들을 군인답지 못하다고 꾸짖을 수 없었다. 졸참나무 군 단 1대대장 우르마 커 하장군이 병사들의 상태를 간략히 요약했다. "전쟁 경험자가 아니라 재난 생존자 같습니다. 사고나 치지 않고 얌 전히 있으면 좋겠군요."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은 초췌한 모습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 이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군." "그런 정신 상태를 가진 병사들을 데리고는 진지 구축도 하기 어렵 습니다. 삽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갑충사들은 그 정체 불분명한 레콘들이 암살공의 본진 근처에 합류 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무사히 귀환했으니 다시 공세가 있을지도 모릅 니다." 시허릭은 날카로운 눈으로 쥘칸을 바라보았다. "레콘의 의견이 필요하군. 쥘칸 장군. 귀관의 부하 장병들이라면 오 늘 낮에 있었던 것 같은 공격을 받고 제대로 귀환할 수 있겠나? 그리 고 다시 하늘누리 쪽으로 공세에 나설 수 있겠나?" 쥘칸은 이것이 의견 요구인지 살수를 피해 도망친 자신에 대한 비웃 음인지 궁금했다. 평소 그와 시허릭의 관계에 비춰본다면 후자일 가 능성도 꽤 높았다. 그리고 도발하는 것인지 아닌지 불분명하게 말하 는 시허릭의 말투는 쥘칸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시허릭 의 철저한 준비성은 그 말투에도 드러나는데, 그는 모든 경우를 다 대비할 수 있는 말을 즐긴다. 항상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약삭빠 른 놈. "팡탄은 제대로 귀환했어. 발광하지도 않았고 눈 뒤집고 돌아다니지 도 않아." "그게 정상인가?" 쥘칸은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어. 돌아오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천경유수의 멱살을 붙잡고 한번만 더 내 전장에 그걸 뿌리면 죽이겠다고 경고해 야겠다는 생각이었어. 간신히 참았어. 나는 그 놈들이 그 꼴을 당하 고 다시 하늘누리 근처에 다가올 거라고는 정말 믿고 싶지 않아. 암 살공이 어떻게 훈련시켰건 레콘은 레콘이야." 쥘칸의 말투는 시허릭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쥘칸은 한 번에 한 가지밖에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발언의 주체가 되는 것 은 보통 그 자신이다.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물론 덕 목이지만 이 경우 쥘칸은 자기 기분을 표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 을 뿐 삼고인 천경유수가 받아야 할 경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 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천경유수의 권위를 회복하는 귀찮은 일을 해야 한다. 혀를 조금만 더 놀리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을. 게으른 놈. "잘 참았다. 쥘칸 장군. 귀관도 잘 알겠지만 자네들 레콘에 대한 우 리들의 생각은 모든 생을 통틀어 한 사람의 레콘도 적으로 두고 싶지 않다는 거야. 하지만 그 분은 용감하게도 일만 명의 레콘을 적으로 돌렸지. 그리고 그 분의 결단 덕분에 4개 군단이 궤멸되는 참사를 피 할 수 있었다." 시허릭은 유수부에서 파견나온 갑충사 대표에게 목례했다. "제국군 전체를 대신하여 그 분께 감사를 표한다고 전해주겠나?" "그러겠습니다." 시허릭은 그 행동으로서 쥘칸에게 이곳에 유수부의 귀도 있으니 제 발 조심하라는 뜻을 전달했지만 쥘칸은 딴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미 련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시허릭은 말했다. "일단은 중요 시설들을 강 남쪽으로 옮기도록 한다. 그리고 본영 곳 곳에 물통을 비치하도록 하라. 되도록 큰 물통이 좋겠다." 쥘칸이 놀라서 말했다. "이봐!" "엉겅퀴 여단은 높은 지대로 이동하면 되겠군. 귀관이 직접 적당한 장소를 고르도록 하게. 쥘칸 장군." 물통이 즐비한 본영에 갇힐 것을 우려했던 쥘칸 장군은 시허릭의 말 에 불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시허릭이 준비한 충격은 따로 있었다. "충분히 넓은 장소를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추냉이 여단과 왜 솜다리 여단, 그리고 민들레 여단이 합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명성 높은 레콘 여단들의 이름을 들은 쥘칸은 부리를 쩍 벌렸다. 엉 겅퀴 여단이 이미 있는데 다른 레콘 여단이 온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 에 대한 모독이었다. 하지만 시허릭은 쥘칸이 항의할 기회를 주지 않 았다. "본관은 이 전쟁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폐하의 군인으로서 나 는 그 분의 명령에 따라 싸울 뿐이니까. 하지만 약이 오르는군. 발케 네공이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 제국군의 진짜 힘을 볼 수 있었던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공작에 게 그런 영광을 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봐야겠군." 주눅이 들어있던 장교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아왔다. 쥘칸은 시허릭 이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을 깨달았다. 서로에게 지독하게 짜 증을 내는 두 사람은, 그래서 서로를 잘 안다. 시허릭이 꺼낸 4개 여 단 동원령은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이다. 제국의 존망에 관련된 심대한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4개 레콘 여단이 한꺼번에 동원되는 일 은 불가능하다. 도시연합에서 보낼 미친 듯한 항의는 둘째치더라도 귀족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허릭은 바닥 에 떨어진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장교들에게 제국군의 자부심 을 되돌려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시허릭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계획을 꺼내놓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허릭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닌 권위도 잠시 빌려오기로 했다. "대장군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더 강한 자가 이긴다. 그것이 전쟁의 진리다. 패배는 군인의 죄악이다. 그것이 전쟁의 도덕이다. 그리고 전쟁이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아름다움은 빨리 끝나는 것이다. 그것 이 전쟁의 예술이다. 더 강한 전력을 투입해서 최대한 빠른 시간 내 에 이기는 것이 전쟁에 임한 군인의 사명이다. 다른 건 없다. 귀관들 에게 요청한다. 상처 입은 병사들을 추슬러 최대한 빨리 더 강한 전 력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이기자. 대장군께서 돌아오셨을 때 자랑스 러운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하자. 빌어먹을. 귀관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변변찮게 행동해서 그 분이 돌아오셔야 한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거야." 쥘칸이 싫어하는 시허릭의 특징이 다시 발휘되었다. 시허릭은 장교 들에게 대장군이 없기 때문에 잠깐 주춤한 것이라는 변명거리를 주면 서 또한 대장군이라는 희망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장 군에게 창피를 보일 수 없으니 분발하라는 뜻도 전달했다. 하지만 이 번만큼은 쥘칸도 그 말투에 짜증을 낼 수 없었다. 필요한 일임을 인 식했으니까. 장교들의 얼굴에 군인다운 표정이 돌아오는 것을 본 시허릭은 그 정 도만 해두기로 했다. 주로 부상자 처리와 본영 재배치에 대한 이야기 를 나누면서 시허릭은 다음 전투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했다. 또 레콘 일만 명과 싸워야 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려면 더 나은 시간이 있을 테니까. 힌치오는 또 하늘누리에 가까이 가야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서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레콘들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그 들은 주로 엉겅퀴 여단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무도 하늘누리가 퍼부 은 낙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팔리탐 지소어는 힌치오가 딴청을 피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 다. 야산의 완만한 사면을 따라 이리저리 피워져 있는 모닥불을 바라 보던 팔리탐은 고개를 돌려 힌치오에게 말했다. "하늘누리의 낙수를 또 견딜 수 있겠소?" 힌치오는 몸을 움츠렸다. 팔리탐의 말을 못들은 척하고 싶었다. 하 지만 주위는 고요했고 팔리탐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힌 치오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야 해?" 팔리탐은 대답하려다가 힌치오가 대답을 원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다시 산 아래쪽을 보았다. 발케네군의 주둔지는 산 아래쪽, 꽤 떨어진 곳이었다. 십칠만 명이 주둔하고 있는 그 거대한 규모의 주둔지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한 눈 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곳곳에 피워져 있는 횃불과 화톳불 덕분이다. 이제 사라티본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레콘들이 머물러 있는 곳은 주둔지에서 꽤 떨어진 야산이었다. 팔리탐은 왜 그렇게 멀리 떨 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묻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일이 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레콘들은 높은 곳을 원했다. 힌치오가 앉아있는 곳은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는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 은 곳에서 옆에 이쑤시개를 꽂아놓은 채 앉아있었다. 그 거대한 칼은 바람에 떠밀리며 자라난 나무처럼 비스듬하게 서있었다. 팔리탐은 타고 온 말의 갈기를 쓸어주고는 말했다. "소환군의 영주들은 꽤 놀라고 기뻐했소. 맹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맹세에 대한 책임감이 제국군에 대한 두려 움까지 몰아내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오늘 낮 당신들이 보여준 모 습을 보고 그들은……" "도망치는 것?" "아니오. 제국군 4개 군단을 거의 섬멸할 뻔했던 모습 말이오." "인간들 깬 것은 자랑거리도 아냐. 네가 경고했던 것처럼 쥘칸은 꽤 골치 아프게 굴더군. 팡탄이라는 녀석에게 걸렸을 때 나도 조금 아찔 했어." "팡탄 하장군은 헐씬 더 무서웠을 거요." 힌치오는 부리를 딱 부딪쳤다. 팔리탐은 계속 말했다. "어쨌든 공작 각하의 봉신들은 이제 승리의 예감을 느끼고 있소. 참 전하는 대신 군량이나 군자금을 보낸 영주들에 대한 조롱도 나오는 것 같더군. 몸 사리다가 영광을 얻을 기회를 놓쳤다는 거지. 모두 당 신들 덕분이오. 어쩌면 더 많은 봉신들이 황급히 군사를 이끌고 참전 할지도 모르겠소." "그 녀석들이 오면 또 하늘누리 아래로 가서 그걸 맞아야 하나? 그 녀석들 기운나게 해주려고?" "힌치오." "팔리탐. 너는 몰라. 나는 그 때 죽었어." 힌치오는 갑자기 옆으로 팔을 뻗었다. 이쑤시개의 칼몸을 때려 그것 을 자기 쪽으로 쓰러지게 한 힌치오는 그 칼자루를 붙잡았다. 힌치오 는 그것을 단단히 붙잡아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겨냥해보았다. "이 놈이 아니었으면 나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거야." 레콘은 납병을 해야 노인이다. 노인은 죽음을 대비하는 사람이다. 바꿔 말하면 레콘의 무기는 음식이나 수면처럼 죽음에 대항하는 생명 의 방어 수단인 것이다. 팔리탐은 힌치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소. 그 칼을 쥐고 있는 한 당신은 죽지 않소. 최후의 대장간에 서 받은 한 자루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이상 레콘이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소?" 힌치오는 주춤했다. 그는 이쑤시개를 아래쪽으로 내려 그 칼끝을 땅 에 짚었다. 팔리탐이 말했다. "당신은 저들을 이끌고 그 끔찍한 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소. 어떤 레콘도 그렇게 할 수 없소. 당신이 그 일을 해냈지." "무작정 달린 걸 가지고 흰소리는." "당신만 무작정 달릴 수 있었소. 이제 당신은 사라티본군의 구원자 요." "얼씨구." "발케네의 구원자라고 할 수도 있지." "절씨구." "그리고 당신 자신의 구원자요." 힌치오는 부리를 부딪쳤다. 팔리탐은 가면 뒤쪽에서 웃으며 땅바닥 에 주저앉았다. 힌치오의 곁에 앉은 팔리탐은 아래쪽에서 수군거리는 레콘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개소리였소." "잘 짖더라." "나의 주군께서는 사리티본군이 빠짐없이 귀환했다는 사실에 기뻐하 고 계시오. 그 분에게 이제 사라티본군은 무엇이든 돌파할 준비가 되 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소." "락토가 기뻐한다고?" "그렇소." "조금 이르군. 오늘 밤은 지난 다음에 기뻐해야 하는데." "오늘 밤?" "이보라고, 팔리탐. 저기들 누워있지? 불도 피워놓고 이야기도 나누 고 있지? 하지만 밤이 오면 머리가 식는단 말이야. 저렇게 누워서 차 가운 머리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더 럭 나는 거지. 어이쿠, 그 꼴을 또 당하면 어쩐다? 발케네공이 나한 테 뭘 해줬다고? 안되겠다. 도망쳐야지. 그러면 내일 아침에 볼 수 있는 것은 타버린 재뿐일 거야. 그 때도 락토가 좋아할 수 있을까?" 팔리탐은 그것은 탈영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암살공 앞에서 사 라티본군의 레콘들이 아직 군인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은 그 자신이었 다. 군인이 아니라면 탈영도 성립되지 않는다. 힌치오는 수염볏을 만 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도망친다고 해도 별 도리 없지. 그 꼴을 겪었으니." "안되오. 지금 레콘들이 도망치면 간신히 기세가 오른 봉신들도 당 황할 거요. 아무 희망도 없을 때보다 약간의 희망이 있었을 때 좌절 이 더 큰 법이오. 그러면 우리 군은 자멸하게 될 거요. 절대로 레콘 들이 도망쳐서는 안되오." 팔리탐의 다급한 말에 힌치오는 수염볏을 벅벅 긁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몇 놈 지키게 해뒀어." "지키게? 무슨 말이오?" "크락스, 파미, 야키보로, 그리고 또 누구더라? 아, 비시올. 그 놈 들에게 부하들 단속하라고 말해놨어." 팔리탐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사라티본군의 레콘들 중 파벌을 이룬 중심 인물들로 팔리탐이 마음 속으로 대대장이라고 부르는 자들 이었다. 그들 모두는 나머지 셋을 싫어하고 힌치오에게 협조하기 위 해 경쟁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비슷하다. 하지만 힌치오는 심드렁했 다. "하지만 거꾸로 그 놈들 중 하나가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하면 그 파 벌 전체가 전부 사라질 거야.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팔리탐은 소름이 끼친다고 생각했다. 힌치오는 단순한 전투력의 손 실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팔리탐은 그렇게 분리된 자들이 어떻게 행동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인간들이 많은 예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들 네 명은 장악력이 강하기 때문에 우두머리들이 될 수 있었던 자들이 다. 분리된 무리는 간단히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경우 그들이 제국군에 투항하는 것은 차라리 반가운 일이 될 것이다. 이천 명 쯤 되는 레콘 산적떼가 생긴다면 발케네는 초토화될지도 모른다. 발케네 공의 희망이었던 것이 발케네의 재앙으로 바뀌는 것이다. 직면한 위 험을 인지한 팔리탐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들 네 명을 불러들이시오." "뭐? 이봐. 말했잖아. 부하들 지키게 해뒀다니까." "아니오. 불러들여야 하오. 하지만 동시에 불러들이지는 말고 한 번 에 한 명씩 부르시오. 그렇게 네 명을 차례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 시오. 그러면 모두들 내일 아침까지 남아있을 거요." "남아있어 달라고 부탁하라는 거야?" "그런 이야기는 꺼낼 필요도 없고 꺼내서도 안되오." "이거야 원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러면 뭐하러 부르는 거 야?" "아무 이야기나 상관없소. 어디서 태어났냐거나 어떤 여자가 좋으 냐, 무슨 술을 좋아하냐. 뭐 아무 이야기라도 좋소. 내가 도와줄 테 니 걱정말고 웃기나 하시오." 힌치오는 불가사의하다는 얼굴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웃어?" "웃으시오. 내가 웃기는 이야기를 하면 그냥 마음 놓고 웃으면 되 오." "쓸모 있는 일인 것 맞지?" "어서 부르시오. 계명성으로." 힌치오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외쳤다. "크-락-스-! 여-기-좀-와- 봐-!" 조금 후 레콘 하나가 성큼성큼 달려왔다. 크락스가 가까이 오 자 힌치오는 막막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왜 불렀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리탐이 약속대로 그를 도와주었다. 팔리탐은 크 락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잡담을 늘어놓게 했고 힌치오도 거기에 동 참하도록 했다. 힌치오는 팔리탐 지소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수다 스러운 인물임을 알고 놀라워했다. 데라시는 치천제가 수다로 자신의 심리적 긴장감을 완화하는 인물이 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천제에게는 그런 습관이 없었다. 정신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니름을 사용하는 나가들은 다른 나가의 정신 상태를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 정신을 닫을 경우 그런 탐지는 불가능하지만 황제는 정신을 닫지 않았다. 그래서 데라시는 황제의 긴장감을 잘 느낄 수 있었다. 황제가 좀 니르기라도 하면 그 긴장감에서 주의를 돌릴 수 있겠지만 황제는 아무 니름도 하지 않았 다. 그녀는 벽난로 앞에 서서 불꽃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결국 데 라시는 무례가 될 것을 각오하고 닐렀다. [시키실 일이 없으면 물러가겠습니다.] 황제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거기 앉아서 짐의 침묵을 견디는 것이 네가 할 일이다.] [……알겠습니다.] 데라시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벽난로 속에서 나무와 함께 시간도 불타는 것 같았다. 치천제는 동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자극이 없자 데라시는 주의력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데라시는 마주 하고 싶지 않은 치천제의 긴장감을 관찰했다. 묘한 느낌이었다. 황제 는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감정은 보이지 않았 다. 마치 어려운 국면에 도달하여 장고하는 기사 같았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긴장되어 있지만 증오나 희열, 고통 같은 감정은 없었다. 황 제를 관찰하면서 데라시는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쓰여진 책을 펼쳐놓 고 글자수를 세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 한 명의 치천제가 그의 앞에 서있었다. 데라시는 깜짝 놀라 황제를 올려다보다가 벽난로 쪽을 보았다. 벽난 로 앞의 황제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던 데라시는 자신이 잠 시 졸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가 닐렀다. [피곤한가.] [죄송합니다. 폐하. 용서하십시오.] [방 안에서 전쟁 치르느라 힘든 모양이군.]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지만 데라시는 자신의 방 안에서 전쟁을 치 르고 있었다. 전쟁은 적대하는 두 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전쟁은 제국 곳곳의 동정을 파악하거나, 혹은 동정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데라시는 비나간의 퍼스 노후작이 귀족원 임시 회의를 소집하려 애쓴다는 점, 회의가 개최되 면 틀림없이 발케네 전쟁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점, 그리고 이 전쟁 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아직 알 수 없었던 귀족들이 회의 개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을 알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그가 그렇게 되도록 조작한 일이었다. 데라시는 이 전쟁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결정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화려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피 곤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 귀족원 임시 회의는?]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퍼스 후작이 상당한 물질적, 정 치적 영향력을 소모한다면 억지로 개최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회의 전개는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차라리 퍼스 후 작이 고집을 부려주면 더 좋겠군요.] [노후작이 원하는 것은?] [발케네공을 용서하기를 바란다는 귀족원 성명을 내는 것입니다. 위 기 의식을 느낄 정도의 정치 감각은 있는 모양입니다.] 간단한 이치지만, 누군가가 힘 센 말썽꾼들을 상대하고 있을 땐 작 은 말썽꾼은 내버려두게 된다. 그리고 힘 센 말썽꾼이 사라지면 작은 말썽꾼은 큰 말썽꾼이 되거나 사라져야 한다. 이 경우 힘 센 말썽꾼 은 서약지지파의 우두머리였던 규리하 변경백과 공공연히 규리하 변 경백의 딸을 원했던 발케네공 락토 빌파다. 그들 모두가 황제에게 무 너진다면 퍼스 후작은 마음 놓고 불평을 할 수 없다. 그는 큰 말썽꾼 이 되기엔 배짱이 부족한 인물이다. [그가 야심가라면 반황제 세력의 유일한 주도자가 될 수 있는 기회 를 반기겠지요.] [글쎄. 퍼스가 귀족원을 동원하여 발케네공을 구하면 그것은 상징적 인 일이 될 테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귀족원의 권위가 높아질 테고, 권위가 높아진 귀족원 내에서 퍼스의 영향력도 높아질 테고, 락토는 그에게 정치적 채무를 지게 되는 거지. 설령 실패한다 한들 별다른 피해도 입지 않고. 그에게 어울리는 방식이지.] [그에게 시대를 읽는 눈이 없다는 것이 문제군요. 다른 때라면 그것 도 나름대로 괜찮은 방식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지금이 어떤 시대지?] 무심히 니르던 데라시는 치천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당황했 다. 치천제를 올려다보던 데라시는 곧 반항심 같은 것을 느꼈다. [실력의 시대지요. 칼로 부딪혀 해결을 보는 시대입니다. 가장 안정 된 것 같고 가장 번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대 입니다.] 치천제는 빙긋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 다. [불만이 많은 것 같군. 데라시.] [저는 폐하의 선택을 따를 겁니다. 하지만 불안은 어쩔 수 없습니 다. 엘시 에더리는 군사적 재능밖에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칼리도를 안정되게 다스리고 있는 것은 그의 모친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잘 다스리고 있지.] [그가 자기 통제에 철저한 인물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배자는 타인을 통제해야 하는 사람이잖습니까? 타인은 자기 와 다르기 때문에 타인입니다. 외람되지만 질문하겠습니다. 폐하께서 그의 적이 될 인물을 모두 제거하시는 것은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닙니까?] [데라시. 짐을 자극해서 무엇을 보고 싶은 거지?] 데라시는 정신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사람의 적을 완전히 제거 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어코 다시 생기니까. 치천제가 그것을 모 를 리 없다. 데라시는 그녀의 동기일 리 없는 이유를 고의로 거론함 으로써 황제를 자극해 보려 했지만 황제는 그것을 쉽게 간파했다. [폐하께서 그를 변호하시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왜?] [폐하께서는 수십 년 동안 제국을 더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 수십 년을 왜 엘시에게 주느냐는 말이군.] [폐하보다 그가 낫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구체적으 로 어떤 점이 낫습니까?] [아무 것도.] [예?] [그는 나보다 나은 점이 없어.] 데라시의 충격은 복합적이었다. 데라시는 황제가 니른 내용에 놀랐 고 황제가 '나'라는 대명사를 사용했다는 것에 놀랐다. 데라시는 갑 자기 깨달았다. 그 니름은 완벽한 황제의 진심이었다. 데라시를 속이 려면 속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하지만 데라시 는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은 점이 없다고 하셨습니까?] [있으면 닐러봐.] [예?] [닐러보라고. 어서. 그의 장점이 뭐지?] 데라시는 당황했다. [그는…… 어, 그는 세습 황조의 시조가 될 수 있습니다. 나가인 폐 하와 달리 그는 북부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습니다. 그는 좋은 배필을 얻어 안정적인 세습 체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북부인들이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북부의 최대 적은 나가였는데, 그 나가들 중 한 명이 현재 그들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은 어쨌든 제국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배자가 인간이라면 곤혹스러움은 필요없지요.] [또?] [일단 떠오르는 것은 그 두 가지뿐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돌멩이는 안 되나?] 데라시는 넋이 빠질 것 같았다. [무슨 니름이신지……] [돌. 바위 말이다. 바위도 네가 니른 장점은 다 가지고 있다. 세습 체제라는 것은 황위의 안정성을 말하는 것이겠지. 바위는 안정적이지 않느냐?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죽지 않는다면 계승 투쟁이 벌어질 일도 없지. 참으로 안정적이지. 그 다음으로 너는 북부인들의 곤혹스 러움을 닐렀지. 결국 북부인들이 그들의 나가 지배자를 사랑해야 할 지 증오해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니름이겠지. 하지만 바위는 아무도 증오하지 않겠지. 이 땅에 살아있는 그 누구보 다도 오랜 세월 북부의 땅에 있었던 북부의 바위가 북부의 황제가 된 다면 정통성 면에서도 문제가 없겠군. 네 니름대로라면 나보다 훨씬 뛰어난 장점들을 가진 바위를 옥좌에 앉혀두면 되겠구나.] 데라시는 황제의 농담 같은 니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필사적으 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데라시는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바위는 사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폐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황제도 사람을 다스리지 않으니까.] 점입가경이다. 데라시는 힘겹게 닐렀다. [폐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만물의 지배자이십니다.] 황제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네 머릿속에 있는 황제다. 내가 아냐. 만물을 지배한다면 나는 산에게 일어나 춤추라고 명령할 수 있어야 하고 바다에게 몸을 갈라 밑바닥을 보이라고 할 수도 있어야 한다. 데라시.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아마 그렇지 않겠지. 너희들의 머릿속에 황제 가 있고 그 황제가 너희를 지배하니, 실제의 황제는 돌이라도 상관 없지 않느냐. 물론 엘시 에더리라도 상관 없겠지.] [엘시 에더리가 아무렇게나 고른 후계자라는 니름이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는 나보다 낫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선택되었지. 그리고 그 다른 점은 돌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어떤 점이 다른지요?] [짐은 대답하지 않겠다.] 다시 '짐'이 되었다. 데라시는 니르지 못할 안타까움을 느꼈다. 귀 한 시간을 헛된 질문으로 낭비한 것만 같았다. 데라시는 감히 추궁해 보기로 했다. [폐하. 모든 것을 폐하께 바치고자 하는 이 자의 소망을 부디 들어 주십시오. 왜 엘시 에더리입니까? 아니, 이것만 닐러주십시오. 그것 이 제국에게 가장 좋은 선택입니까?] [최선의 선택이다.] 데라시는 안도하려 했다. 하지만 의혹이 생겼다. 그것이 짐의 대답 인지 나의 대답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따져 물을 수 있을까? 데 라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황제에 게 아주 약간 더 가까울 뿐이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데라시를 짓눌 렀다. 치천제가 닐렀다. [바다를 가른다는 니름을 하고보니 쟁룡해 밑바닥에서 튀어나온 타 이모의 망령이 떠오르는군.] 황제는 전장을 보지 못한 데라시에게 힌치오의 모습에 관한 그녀의 기억을 보냈다. 데라시가 힘없이 닐렀다. [대단한 모습이군요.] 데라시의 풀죽은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있었지만 황제는 그것에 대해 니르지 않았다. [그 자에 대해 알아내라. 락토에게 레콘 일만 명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 일만 레콘에게 그 자가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실이다. 타이모 처럼 그 자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그것이 더욱 빠르게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 그러면 분리주의 운동의 부활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데라시는 할 일이 생긴 것에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집무 실을 떠날 수 있으니까. 황제는 닐렀다. [가라. 그리고 구레에게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를 부르라고 전해 라.] [알겠습니다.] 데라시는 일어나서 보온복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의자를 돌 려 벽난로쪽을 향하게 했다. 불꽃에 고정된 그녀의 눈은 깊었고 아무 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찬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느낀 황제 는 문쪽을 돌아보았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두 손에 무엇인가 를 든 채 서있었다. 쟁반에 담긴 커다란 물건처럼 보였다. 두꺼운 천 으로 덮여 있어서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위험한 물건일 리 는 없다. 그랬다간 구레가 통과시키지 않았을 테니까. 황제는 그 물 건을 보다가 지알데에게 말했다. "와서 앉으라." 지알데는 뚜벅뚜벅 걸어와 손에 든 쟁반을 앞으로 조금 내밀었다. "책상 위에 놓아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라." 지알데는 그 물건을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는 지알데를 보며 황제는 그가 그 물건에 대해 설명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지알데의 첫마디 는 황제의 기대와 달랐다. "폐하. 전쟁을 중단하십시오." 황제는 놀랄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대가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이 일을 반대할 거라는 것은 잘 안 다." "오늘 낮,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죽은 이가 만 명을 넘습니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셈입니다. 죽은 이들의 가족들이 느끼게 될 고 통을 생각한다면 슬픔은 그 이상입니다." "그대가 더 큰 피를 부를 뻔했지." 그런 지적은 지알데를 조금도 당황하게 하지 않았다. 지알데는 엄격 하게 말했다. "레콘들이 광란하여 난동을 부릴지 도주할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 습니다. 그리고 난동을 부린다면 그들이 도망치는 것이 낫다고 판단 할 때까지 방류할 작정이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번의 인생이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레콘 원수를 만든 기분이 어떠냐고도 묻지 않았다. 추호의 후회 도, 두려움도 없다는 대답을 들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엄격한 천경유수가 말했다. "폐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을 숙고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제위를 양위하시기로 결심하셨다고 판단했습니다. 계승자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입니까?" "그의 계승을 반대하나?" "백작은 좋은 천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그를 계승자로 지명하시고 저에게 협조를 명령하신다면 저는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나마 최대한 그가 좋은 계승자가 될 수 있도록 협조하겠습니 다." "반가운 말이군." 지알데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백작이 어떤 피도 발에 묻히지 않고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돕겠다 는 뜻입니다." "짐의 천경유수답군." "폐하. 먼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그러 신 것처럼 의견을 구하셔야 합니다. 만약 반대 의견이 있다면 설득하 십시오. 그리고 그 반대의 사유가 옳은 것이라면 귀담아 들은 후 백 작에게서 그 사유가 될 것을 제거하십시오. 그것이 순리입니다. 하지 만 폐하께서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기도 전에 아직 반대하지도 않은 반대자를 찾아내셔서 처단하시려 하십니다. 부도덕합니다. 폐하께서 는 모든 증오를 직접 받으시고 대신 후계자가 도덕적으로 순결한 상 태로 황위에 오르시길 바라십니다. 불합리합니다. 그리고 그런 폐하 의 결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앞으로도 죽게 될 겁니다. 부 당합니다." "부도덕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다. 발케네는 반드시 반대하게 될 거라고 말했고, 반대하게 되면 이미 늦다고도 말했다. 한 번 더 말하 지는 않겠다. 불합리에 대해서는 그대가 미래를 예언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겠다. 무시무시한 폭군의 후계자는 우유부단함이 신중함으로, 난폭함이 용기로, 고집이 의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게다 가 그대는 백작이 좋은 천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백작이 우유부단하거나 난폭하거나 고집스럽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는 좋은 황제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부당함에 대해서는, 짐의 결정이 옳지 않 다는 것을 그대가 증명하기 전까지는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 고 그대는 아직 증명하지 못했다." 지알데는 여전히 웃지도 않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황제는 웃었다. "그 불가능에는 왜 서설이 붙지 않는 것이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물건이 그 불가능의 이유인 모양이군. 보여다오." 지알데는 천을 들어올렸다. 그 아래에서 나온 것은 새장 비슷한 물 건이었다. 그리고 안쪽에는 갑작스러운 빛에 놀란 조그마한 동물이 불안한 듯 움직였다. 황제는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가 천경유수를 쳐 다보았다. "다람쥐인가?" "날다람쥐입니다." "그 날다람쥐가 엘시 에더리의 황위 계승을 반대한다면, 굉장히 정 치적인 날다람쥐임이 분명하겠군." "이 날다람쥐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아 는 것은 이것이 날다람쥐이며 동시에 편지지라는 것입니다." 치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보 태위의 사임 요청서로군. 그 동물이 서식하는 곳이 어디지?" "유수부에는 동물학에 밝은 이가 없습니다만 날다람쥐는 여러 종류 가 있고 꽤 여러 곳에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날다람쥐는 아마 도 한계선 남쪽에서 온 것 같습니다." 치천제는 이전에 왔던 사임 요청서에 대해 생각했다. "태위는 황금해를 따라 남하하고 있었지. 그렇다면 한계선 아래로 내려갔을 수도 있겠군. 그런데 라보 태위의 사임 요청서와 우리가 나 누던 이야기 사이의 연관성을, 짐은 아직 짐작할 수 없군." "이 동물의 몸에 쓰여 있는 것은 사임 요청서가 아닙니다."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알데는 직접 보여주기 위해 새장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동물들에게는 유능한 행정가이 며 제국 수도의 지배자인 자를 알아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황제는 그녀의 엄격한 천경유수에게 말했다. "그냥 비명을 질러도 돼." "괜찮습니다." "손가락에서 피나는데." "괜찮…… 습니…… 다." 황제는 지알데 락바이를 구해주기로 했다. 손가락을 난자당하면서도 무뚝뚝한 얼굴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 천경유수를 보고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근시일 내에 우리 안의 날다람쥐가 협 조적으로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읽었다면 그대가 말하는 편이 낫겠군." 지알데 락바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는 우리를 조심스럽게 닫고 상처 난 손을 뒤로 감추고는 말했다. "태위가 이 난폭한 동물에게 어떻게 글을 썼는지 궁금하군요." "어떻게 읽었나?" "젊은 유수부원들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태위의 서신을 보았겠군." "아닙니다. 태위는 암호로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유수부원들은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황제는 탁자 위에 손을 얹으며 우리 안의 날다람쥐를 바라보았다. "암호라고?" "그렇습니다. 여기 그 암호와 해석본을 적어왔습니……"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던 천경유수는 갑자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 다. 그리고 황제는 적어왔다면 왜 날다람쥐를 꺼내느라 그런 고생을 했냐고 묻지 않았다. 원본과 복사본, 해석본의 순서대로 제시해야 된 다는 생각 때문에 엄격한 사람이 저지를 만한 실수니까. 황제는 기막 히다는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은 채 천경유수가 내민 두 장의 도깨비 지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경유수를 위해 암호부터 보지는 않았다. 시간 낭비니까. 황제는 해석본을 벽난로 앞쪽에 들어올린 다음 도깨비지를 통과하는 빛을 통해 그 글을 읽었다. 내용은 짧았다. '폐하. 대장군이 시모그라쥬공에게 억류되었습니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황제가 느낀 충격이 무엇이건 그것은 나 가들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치천제의 모습은 조금 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꽤 긴 시간 동안 침묵했다. 지알데 는 초조함을 엄격함으로 단속하며 기다렸다. 얼마 후 황제는 그 해석본을 구겨 벽난로 안에 던져넣었다. 그녀는 천경유수 쪽으로 돌아앉았지만 그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녀는 우리 안의 날다람쥐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시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황제가 말했다. "팔디곤이 왜 그랬을까."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에서도 충격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지알 데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 서신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시모그라쥬공이 발 케네공과 손을 잡은 것이라면, 폐하. 황위 계승자가 적의 수중에 있 는 셈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으신 것은 이 경 우에는 다행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는 사람이 차기 황 제 내정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만약 저들이 그 사실을 눈치챈다면 백작은 인질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 해를 입을지도 모릅니 다. 어쩌면 벌써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이 날다람쥐가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을 고려한다면 이 날다람쥐는 꽤 오래 전에 출발했을 거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속히 전쟁을 중단하고 백작을 구출해야 합니다." 지알데는 잠시 쉬었다가 말했다. "폐하. 저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 해도 제국군 총지휘관이 억류된 상 황에서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대장군이라는 지위만 해도 이미 훌 륭한 인질입니다." 황제는 물끄러미 날다람쥐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거처럼 암호 가 쓰여 있는 도깨비지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그 종이도 벽난로 안에 넣었다. 불길 속에서 종이는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황제는 똑바로 앉아서 말했다. "전쟁 중단은 없다." "폐하?" "이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지알데." "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위 계승자를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친 다 하더라도 계승자가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엘시는 돌아올 것이다." "어떻게 돌아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가 돌아오도록 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엘시 가까운 곳에." 천경유수는 시모그라쥬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머릿속으로 더듬어 보 았다. 하지만 그는 하늘누리의 관리자였고 지상의 일에 대해서는 그 렇게 해박한 편이 아니었다. 천경유수는 남부에 있는 제국군들을 말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설마…… 하텐그라쥬에 계시는 그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분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비밀이다." "모르겠습니다. 폐하. 누가 백작을 구해낸다는 말씀이십니까?" 치천제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설명은 그가 돌아온 후로 미루겠다. 그 때까지는 모르는 것이 낫 다." "하지만 폐하. 이 전쟁은……" "부도덕하고 불합리하고 부당하다는 것이겠지. 돌아가라." 천경유수는 오랜 시간 치천제를 모셔왔다. 황제는 지상에 내려서는 것을 극도로 피하고 그는 하늘누리의 관리자였으니 제국의 다른 관료 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시간 동안 그녀를 접한 셈이다. 따라서 천경유 수 지알데 락바이는 황제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을 작정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알데는 황제가 들을 생각이 있든 없든 자신 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녀가 입은 타격을 떠 올렸다. 그녀가 선택한 황위 계승자가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황제를 모신 지알데 락바이는 그 순간 황제에게 모질게 굴 수 없었다. "폐하. 늦은 시간이니 오늘은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다시 찾 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지알데는 우리를 들어올리려 했다. 황제가 말했다. "그 동물은 놔두고 가거라." 지알데 락바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날다람쥐에게 무슨 용도가 있을 지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치천제는 다른 나가들처럼 산 것을 먹는다. 하지만 지알데는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았다. "폐하. 이 동물은 좀 난폭합니다." "괜찮아." 지알데는 목례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지알데가 나가고 나서 치천제 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있었다. 하지만 날다람쥐를 바라보고 있었 던 것은 아니다. 황제는 집무실 한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 외에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던 황제는 한참 후에야 의 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끝이 우리를 스쳤고, 황제는 잠시 방기해 두었던 날다람쥐를 떠올렸다. 해석본도, 복사본도 없앴으니 그 다음 은 원본일 것이다. 그녀는 우리로 손을 뻗었다. 황제는 천경유수만큼 고생하지는 않았다. =============================================================== 12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13. 비밀의 불씨 - 1 "말에서 떨어진 사람은 말에 탄 사람이다. 패배한 장수는 전쟁에 참가한 장수다. 익사한 레콘은 물에 들어간 레콘이 다…… 모든 패배자는 패배하기 직전까지는 승리를 거듭한 자다. 삶은 패배하기 위한 긴 여정이다. 삶은 승리하기 위 해서가 아니라 패배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 이레 달비는 의심의 눈으로 앞쪽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 중간 쯤에 진흙이 발라져 있었고 거기엔 무엇인가로 긁은 듯한 자국이 나 있었다. 자취와 흔적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도 평균적 인 추리력만 가지고 있다면 그 자취를 남긴 존재에 대해 몇 가지 사 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취를 남긴 것이 동물일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동물이 동그라미 같은 자국을 만들기는 어려울 테니까. 바닥에서의 높이로 미루어보건대 아주 어린 레콘이나 도깨비, 혹은 성인 인간이나 나가의 크기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전설적 몸종인 이레는 몇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신 장은 1.9미터 가량, 왼손잡이일 것이며 인간이다. 깊은 발자국을 남 기는 무거운 체중, 따라서 상당한 신장이지만 휘청거리지 않는 체형, 남자이며 이십 대 후반, 검은 머리, 그리고 이름은 이레 달비다. 모 든 수수께끼를 푼 이레는, 통쾌감 속에서 자신의 추리력을 칭찬하지 는 않았다. 대신 욕설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자신이 남겨둔 표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주위를 한참 둘러본 이레는 겨우 묵직해 뵈는 돌멩 이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레는 그것을 앞으로 집어던졌다. 첫번째 돌멩이는 주위의 빽빽한 나무에 부딪혀 이레가 원하던 방향 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이레는 한 번 더 시도했다. 다행히 두번째 돌 멩이는 똑바로 땅에 부딪혔다. 그러자 땅이 출렁하다가 위로 솟구쳤 다. 위로 뛰쳐나온 것은 악어였다. 악어는 허공을 물어뜯고는 제 성질을 못이겨 몸을 뒤틀었다. 처음 보는 일이었다면 질겁했겠지만 이레는 차분하게 도망쳤다. 좌절감마저 느끼며. 그곳은 이레가 표시해둔 것 처럼 늪이었다. 악어에게서 안전한 거리까지 떨어진 이레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 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지난 며칠 동안 이레가 집어던진 돌멩이가 몇 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표현인데, 모두 늪과 수 렁이 삼켜버렸기 때문에 셀 수가 없다. 빠져나갈 길은 어디에도 없었 다. 하지만 길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식량을 가져다주는 수레가 늪 위를 굴러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수레바퀴가 굴러왔으니 분명히 바퀴 자국이 남아야 하는데 이레는 그 자국도 찾지 못했다. 결론은 간단하다. 분명히 어딘가에 이레가 찾지 못한 길이 있을 테고 그 길에는 바퀴 자국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결책은 간단하지 않 다. 이레는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탈진할 것 같은 더위였다. 밀림은 바 람을 고사시켰지만 태양에게는 협조적이었다. 내리찌르는 햇살 때문 에 머리에 구멍이 날 것 같다. 위쪽만 빼고 모든 방향으로 자라고 있 는 것 같은 나무들은 균형 감각을 왜곡시킨다. 극히 짧은 시계 때문 에 이곳에서 지형을 관찰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 자신의 기억에만 의지하던 이레가 결국 나무에 표시를 남겨두기로 한 것이 벌써 며칠 전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레는 자신의 표시도 믿을 수 없는 처지다. 이레는 머리를 싸매고 싶은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곳을 따라 이레는 힘겹게 레콘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레콘들을 본 순간 이레는 동정심보다 혐오감을 느꼈다. 이레는 자신 을 억누르며 레콘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주테카는 사지를 펼친 채 땅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는 루시닌이 점 점 더 많은 술을 가져오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어 떻게 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주테카는 술을 줄일 수 없었다. 그것은 함께 갇혀있는 동료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 두선 레콘들은 사소한 일에도 죽일 듯한 시선을 교환하곤 했다. 누군 가를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망가지기로 결정한 주테카는 깨어 있는 동안 계속 술을 마셨다. 주테카의 주변에는 빈 술병이 가득했고 그의 진득진득한 부리 주변에는 파리들이 윙윙거렸다. 론솔피는 말없이 밧줄을 꼬고 있었다. 벗겨낸 나무 껍질과 넝쿨을 이용하여 론솔피는 이레의 팔뚝보다 더 굵은 밧줄을 꼬고 있었다. 이 레는 그 밧줄의 용도를 누차 질문했지만 론솔피는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레는 그 밧줄이 레콘을 매달아도 됨직한 굵기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몸을 좀 움직이거나 그냥 부풀리기만 하더라도 낡은 깃털이 빠질 테지만 론솔피는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래 서 그의 모습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론솔피에 비하면 준람은 꽤 통이 큰 편이다. 준람은 거대한 규모의 구조물을 만들고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동교가 될 그 구조 물은 만약 완성된다면 토목공학의 전설이 될 물건이다. 준람은 들고 다닐 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 늪지를 빠져나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 결심을 처음 들었을 땐 이레도 반신반의했다. 실제로 그런 물건은 존재하는데, 이동식 공성탑이 바로 그런 물건이다. 공성탑은 수직적 간격을 극복하는 물건이고 준람의 이동교는 수평적 간격을 극복하는 것이지만 그 기본 개념은 비슷하다. 그래서 이레는 약간의 희망을 가 지고 준람의 대역사를 관찰했다. 하지만 지금 이레는 준람의 고안품 에 어떤 희망도 품지 않았다. 적절한 연장이 없는 준람은 두 손과 부 리만 쓸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이동교는 완성된다 해도 들고 다 닐 수 없을 정도로 거북한 물건이 될 처지다. 이레는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가볍게 만들라고 조언했지만 물 위에 놓일 구조물을 경량화하 는 것은 레콘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급품을 가져다놓던 자들도 이레와 같은 결론을 내린 듯 준람의 작업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 았다. 애써 한심하다는 심정을 억누르며 레콘들을 보던 이레는 쵸지가 보 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람. 왕벼슬은 어디 있죠?" 준람은 말없이 손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이레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몇 분 쯤 걸어간 이레는 쵸지의 커다란 몸을 발견했다. 쵸지는 땅에 앉아 앞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이 며칠 동안 가장 많이 보여준 모습이다. 그리고 이레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취해 있는 주테카나 밧줄을 꼬는 론솔피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준람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불가능한 작업에 매진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쵸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누군가 에게 시비를 걸거나 벼슬을 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레 달비 는 그가 고도의 정신 노동 속에서 다른 세 명의 레콘처럼 자신을 통 제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렇다면 가만히 앉 아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은 설명된다. 또한 그가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는 것도. 하지만 이레는 도대체 레콘을 바닥에 가만히 앉아 며칠씩 사유하게 할 수 있는 주제가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이레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방해해보기로 했다. "왕벼슬?" 쵸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이레. 그만해." 이레는 당황했다. "뭘 그만하라는 거죠?" "응? 그거. 아, 이런. 미안해." 이레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애쓰며 두 걸음 더 물러났다. 쵸지가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니까…… 그렇잖아?" "그런가요?" "그렇지. 아, 너도 알아차렸나? 그러면 왜 그러는 건데?" 이레는 자신이 왜 그런 가설을 세우지 못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 또한 광증의 증상일 수 있다. 그리고 사방 이 늪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레콘보다 더 미치기 쉬 운 레콘도 없을 것이다. 이레는 도망 치는 것이 나을지 주테카와 준 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나을지 고민했다. 쵸지가 다시 말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잖아." "아…… 저, 그러니까……" "다른 길을 찾고 있는 거야? 우리들도 데리고 나가려고? 그런 건 있 을 리가 없지." "없다고요?" "그래. 다른 길 같은 것은 없는 것이 당연하잖아. 혼자 가도록 해." "어디를요?" "글쎄. 어디라도 여기보다는 낫지 않겠어?" 이레는 혼란 속에서 쵸지를 바라보았다. 쵸지가 말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그 다음에 우리를 구할 방법을 생각해봐." 이레는 눈을 부릅떴다. 헛된 희망을 갖지 않으려 애쓰며 이레가 말 했다. "밖으로 나갈 방법이 있어요?" "어? 몰랐어?" "예. 무슨 방법이죠?" "다리로 가면 되잖아. 수레 들어오는 다리 말이야." "다리라뇨? 다리가 어디 있다는 거죠?" "그야 저기 있지." 쵸지는 앞쪽을 가리키다가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리고는 길다란 나 무 작대기 하나를 집어 이레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이 레는 묻는 눈으로 쵸지를 바라보았다. 쵸지가 말했다. "저기 가서 찔러봐." 이레는 다시 작대기를 보다가 쵸지를 보았다. 그러다가 이레는 문득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이레는 화들짝 놀라서 쵸지를 보다가 황급히 쵸지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얼마 후 이레가 몇 번이나 지나쳤 던 늪이 나타났다. 주위에는 이레가 남겨둔 표시가 몇 개 보였다. 이 레는 쵸지가 준 작대기로 흙탕물을 때렸다. 대여섯 번 정도 찔렀을 때 손목이 홱 젖혀지는 충격이 있었다. 이레 는 작대기를 들어올렸다가 좀 더 조심스럽게 수면을 찔렀다. 확실한 감촉이 있었다. "제기랄, 이런 방법이었군!" 이레는 작대기를 팽개치고는 팔을 수면 아래로 집어넣었다. 한 시간 후, 이레는 자신의 팔다리를 깨끗이 닦아내고는 쵸지에게 돌아왔다. 쵸지는 한 시간 전과 같은 자세로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레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왜 제게 알려주지 않으셨지요?" "난 네가 이미 찾아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그 속에 조금 들어 가는 것이 어렵지 않잖아." "어렵습니다. 악어 때문에 물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악어? 아아. 악어. 그 생각을 못했군." "그리고 악어가 없었다고 해도 설마 다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수레가 날아오는 것이 아닌 바에야 다리는 당연히 있어야 해. 수레 바퀴와 여기 오는 녀석들 발이 항상 젖어있는 것 못 봤어?" 이레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빈틈 없는 전설적 몸종이라니, 말도 안된다. "보긴 봤습니다만 늪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상상 하기 어려웠습니까. 어떤 사람이 다리를 수면 아래 10센티미터에 만 들겠습니까?" 수면 아래에 있는 돌다리를 만져보았을 때 이레는 그 건설자에게 진 심으로 경의를 보냈다. 누구인지 모를 그 건설자는 다리가 물 위를 건너게 해주는 물건이라는 상식을 뒤집음으로써 평범한 다리를 놀라 운 비밀 통로로 바꿔놓았다. 대장군의 몸종이 보내는 경의를 받을 만 하다. 쵸지가 말했다. "깊군." 얕군을 잘못 말했다고 생각하던 이레는 곧 상대가 레콘임을 깨달았 다. "상관없습니다. 당신들은 20미터 정도는 뛰실 수 있지요?" "20미터?" "예. 다리 길이는 그 정도입니다. 그 너머는 난로처럼 메말라 있습 니다. 바로 떠나도록 하지요. 시모그라쥬까지만 가면 됩니다. 저는 그 도시 출신입니다. 지금도 거기는 손바닥처럼 훤합니다. 숨어들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가주님을 구출할 방법을 찾든지, 아니면 제국 정부에 현 상황을 알릴 방법을 찾아보지요. 아무래도 남쪽의 제국군 은 신뢰하기 어려우니까……" 이레는 쵸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말끝을 흐 렸다. 쵸지는 깊은 고뇌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20미터라." "도움닫기를 하면 그 정도는 뛰실 수 있잖습니까. 좀 짧긴 하지만 도움닫기 할 만한 공간도 있습니다." "한 번 가 보자." 이레는 활기차게 쵸지를 안내했다. 숲을 헤치고 돌다리가 있는 곳까 지 걸어간 이레는 그 위를 찰박찰닥 뛰어갔다. 발목이 잠기는 깊이여 서 조금 힘들었지만 이레는 곧 다리 건너편의 땅에 도달했다. 그곳에 서 이레는 늪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쵸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레는 당황하여 다시 다리를 건너갔다. 온갖 생각과 상상을 하면서 수풀을 헤치고 걸어간 이레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있는 쵸지를 발견 했다. 그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큼직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레는 난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벼슬?" "못보고 있겠다. 젠장. 왜 그렇게 철벅거리는 거냐? 꼭 빠져죽는 것 처럼 보이잖아." 자신이 물 위를 달리는 것처럼 보이리라 믿었던 이레는 당황했다. "아, 죄송합니다. 다리가 튼튼하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랬 습니다. 다시 가시죠." "됐어. 보고 싶지 않아. 혼자 가." "예?" "혼자 빠져나가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마세요. 여러분들은 여기 더 계셔서는 안됩니다. 같이 가셔야 합니다." 쵸지는 말없이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머리 양쪽을 누르고 있는 모습은 마치 떨어뜨리면 깨지는 물건을 조심스럽게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레는 레콘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 성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 다. 쵸지가 타인에게 이해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말문을 열 테고 그러면 이레는 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쵸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건 신경쓰 지 않는 레콘의 태도로 침묵한 채 앉아있었다. 절대로 창피해서 침묵 하는 것은 아니다. 레콘에게 익숙한 주인만큼은 아니지만 이레는 이 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레는 쵸지를 위로할 수도 없다. 레콘은 이 해 받고 싶지 않은 것만큼 위로도 원하지 않으며, 위로 받고 싶지 않 은 사람에게 하는 위로는 귀찮은 참견일 뿐이다. 인간의 방식이나 나 가의 방식에 능숙한 이레는 이제 새로운 방식을 개발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의기소침해진 레콘은 도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저는 주인님을 구해드려야 합니다. 왕벼슬. 도와주십시오." 쵸지의 머리가 조금 움직였다. 그는 수풀과 나무 사이로 먼 곳을 바 라보았다.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이레는 간절한 눈으로 쵸지의 옆모습 을 바라보았다. 쵸지가 웅얼거렸다. "이레. 우리끼리 여기 남겨두면 서로 때려죽일까봐 걱정돼서 함께 가자는 거지?" "아닙니다." "거짓말 하지마. 레콘 네 명이 몰려다니면 장님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어떻게 숨어다니겠다는 거야?" "어렵긴 하겠지요. 하지만 주인님을 구출하려면 망고 군단 전체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거기엔 나가들이 많습니다. 소드락 먹은 나가들을 상대하려면 여러분들이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소화차만 나타나면 꼼짝 못하는데 무슨 쓸모가 있다고?" "그러면 돌아가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소화차도 앙감질하는 레콘보다는 느립니다." 쵸지는 신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이레는 기운 없는 걸음으로 걸어가 는 그를 재빨리 따라갔다. 쵸지는 조금 전 도망쳤던 돌다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건너봐." 이레는 물을 철벅거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다리 위를 천천히 걸었다. 열대의 햇살을 담뿍 빨아들인 물은 미지근했다. 이레는 몇 걸음 걷고 는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쵸지는 나뭇가지에 팔을 얹은 채 그를 바 라보고 있었다. 긴장한 그의 벼슬이 꼿꼿하게 서있었다. 이레는 다시 걸어갔다. 발목에 감기는 물이 거추장스러웠지만 이레는 물방울이 튀 지 않도록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뒤쪽에서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 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레가 다리 끝까지 다가섰을 때였다.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밀림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원숭이 들이 꺅꺅거리며 나뭇가지 사이를 뛰었다. 이레는 기겁하여 뒤를 돌 아보았다. 쵸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레는 포악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뒤로 돌아 달려갔다. 쵸지는 없었다. 거대한 것이 정신없이 달려간 자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레는 머리 끝까지 치솟은 분노를 그대 로 둔 채 다른 레콘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달려가는 동안에도 계속 꽝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터에 도달한 이레는 큼직한 통나무 를 망치 삼아 나무를 때리고 있는 준람을 보고는 잠시 살해 충동을 느꼈다. "준람!" 준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쓰레기 더미처럼 보일 뿐 절대로 효용이 있어 보이지 않는 그의 고안품을 쾅쾅 때리는 준람을 보다가 이레는 고함을 빽 질렀다. "집어치워요, 준람! 물 끼얹어버리기 전에!" 준람은 휘두르던 통나무를 놓치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올린 론솔피 는 얼굴로 날아온 통나무를 나꿔채서는 그것을 으스러뜨렸다. 그 나 무 조각들이 일어나던 주테카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복잡한 의식 같 은 행동을 끝낸 세 레콘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레를 노려보았다. 준람 이 말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주테카는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이레에게 다가갔다. 이레는 꽉 움켜쥔 주테카의 주먹을 보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흐음. 주정뱅이에게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뭉개질래?" "해보시죠." 주테카는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주먹을 폈다. 때렸다간 죽을 테니 손가락으로 허리나 튕겨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주테카는 이레의 허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주테카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이레는 몸을 옆으로 홱 비틀었다. 이레는 주테카의 손가락 끝을 왼손으로 떠받쳤다. 그리고 오른쪽 팔 뚝으로는 손가락 윗부분을 내려치며 그대로 쓰러졌다. 손가락이 위로 꺾인 주테카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아래로 떨어지는 주 테카의 위험한 부리를 피하기 위해 이레는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훌 쩍 자반뒤집기를 했다. 론솔피가 눈을 껌뻑였다. "저 놈 봐라?" 론솔피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레는 세차게 몸을 돌렸다. 그는 두 팔을 옆으로 던져둔 채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만약 이레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굵게 변해서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것이 싸움을 대비하는 자세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레콘인 론솔피는 당 연히 흥분했다. 론솔피는 벼슬을 세웠다. 그 때 준람이 외쳤다. "그만해. 똑바로 봐. 인간이다." 론솔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준람을 돌아보았다. 주테카는 손을 세 차게 흔들었다.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긴 주테 카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려면 이레가 몇 명 더 있어야 할 것이다. 충 격을 받은 손가락을 주무르며 주테카가 말했다. "제법인데." "저한테 손대지 마십시오. 당신하곤 다릅니다." "무슨 소리지?" "제 몸은 주인님을 구해야 할 몸입니다. 당신처럼 한가롭게 망가뜨 릴 수 없단 말입니다."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이레는 주테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준람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준람.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익하다는 점에서 당신의 그 물건은 주테카의 술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요. 당신도 거기에 취해 있죠. 그리고 취기가 사라질 때 쯤 되면 술처럼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준람은 벼슬을 뻣뻣하게 경직시켰다. 론솔피가 사납게 말했다. "나한테도 한 마디 해보시지 그래. 요 꼬마야. 죽을 각오를 한 것 같으니까." "당신의 그 밧줄에 대해서는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레콘 도 아닙니다." "뭐야, 이 자식아?" "자살하고 싶으시면 늪에 몸을 던지세요. 그게 훨씬 간단하니까. 또 그렇게 하면 오해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나 사고 칠지도 모르는 놈 이니까 신경 써달라고 떼 쓰시는 걸로 말입니다." 론솔피는 격노로 벼슬을 벌겋게 물들였다. 준람은 이레가 죽을 작정 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난폭한 레콘 세 명을 동시에 적대 하는 행동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자살 기도다. 하지만 이레의 말 대로 주인을 구해야 하는 몸이라면 그런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쨌든 이레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세 명 의 레콘을 동시에 보기 위해 포식 곤충처럼 빠르게 머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은 별 것 아닙니다. 죽을 만큼 배가 고프면 어린애 손에 있는 음식도 뺏어먹습니다. 목에 칼을 겨누고 바지를 까라고 하면 누구나 허리띠를 풉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자기 수준을 떨어뜨리 고 있는 거야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 땅은 당신들에겐 죽을 것 같은 허기나 목을 찌르고 있는 칼 같을 테지요. 그리고 아무리 힘 세고 튼 튼하다 해도 당신들도 사람이죠. 좌절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세 명의 레콘은 이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레도 자기 말이 좀 헷갈린다고 생각했다. 급하게 말을 쏟아낸 탓만은 아니다. 감히 하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혼란은 진의 전달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레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곧장 꺼냈다. "당신들이 레콘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세 레콘은 몸을 약간 부풀렸다. 이레는 말했다. "동정해줄 벗이 필요합니까? 레콘이? 당신들은 혼자 일어서서 혼자 걸어가잖습니까. 좌절은 할 수 있어요. 좌절은 절대로 나쁜 것도 아 니고 창피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레콘이 혼자 일어나지 않으면 나 쁜 일이고 창피한 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다그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습니다. 이런 꼴을 피하려고 지금까지 당신들을 내버려둔 제가 불쌍합니다. 당신들이 레콘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려 했던 것이 후 회스럽습니다." "혀 때문에 죽은 자들의 묘지에 네 자리를 예약해뒀나 보구나." 험악한 경고를 중얼거렸지만 주테카의 말에는 미심쩍어하는 기운이 섞여 있었다. 이레가 응수했다. "제발 그러기를 바랍니다." "뭐?" "저를 죽여보세요. 그러려면 저를 따라와야겠지요. 당신들이 그럴 수 있을까요?" 론솔피는 갇혀있는 처지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 물으려 했다. 그러나 이레가 고함을 질렀다. "쵸지! 저는 떠나겠습니다! 함께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안되는군 요. 또 만나길 바랍니다!" 세 레콘은 당황했다. 선언을 마친 이레는 그대로 뒤로 두어 걸음 물 러나다가 몸을 홱 돌렸다. 정신없이 뛰어가는 이레의 모습을 걸맞는 것으로 만드려면 세 레콘이 그 뒤를 추적해야겠지만 준람과 론솔피, 주테카는 서로의 당혹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때 론솔피가 벌 떡 일어섰다. "떠난다고 했지?" 론솔피의 말과 행동 중 어느 것에 자극받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주 테카와 준람도 따라 일어섰다. 그들은 바람 같은 속도로 이레의 뒤를 따랐다. 주테카가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이레의 비난은 사실과 약간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긴 시간 동안 폭음을 일삼았던 주테카도 다른 두 레콘과 마찬가지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지상 최강의 종족 레콘인 것이다. 그래서, 이레의 모습을 목격한 세 사람은 얼어붙었다. 이레는 몸 일부를 물에 담근 채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몸 일부가 물 속에 있다 해서 그것을 수영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당혹스러 웠지만 세 사람은 그것이 물 위를 걷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했다.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이레는 흙탕물 위를 죽죽 걸어갔다. 준람이 만들어내던 소음도 사라진 한낮의 밀림은 고요했다. 그악스러운 곤충 의 울음이나 쾌활한 새 노래도 들려오지 않았다. 밀림은 무겁도록 고 요했다. 그리고 이레는 물 위를 소금쟁이처럼 가볍게 걸어갔다. 넋빠진 세 사람이 바라보는 가운데 이레는 건너편 뭍으로 올라섰다. 뒤를 돌아본 이레는 세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이레는 피로감에 가까 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피곤함이 아니었다. 주테카와 론솔피, 준람은 어쩐지 그 표정을 해석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 다. 이레의 모습이 나뭇가지와 덩굴 사이로 사라졌다. 준람은 나발칸 출신답게 눈을 비비는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주 테카는 물을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어쨌든 물이 사람을 떠 받친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론솔피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주테카를 물 위에 집어던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지나 치게 끔찍한 일이라서 곧 포기하긴 했지만. 그렇게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당혹감을 표현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스르륵 나타난 쵸지는 세 사람을 구해주었다. "아래에 다리가 있다." "다리? 다리라고?" "그래. 수레가 들어오는 다리다." "다리가 왜 저 아래에 있는 거야? 그게 다리야?" "숨은 다리지. 여긴 감옥이잖아." 주테카는 쵸지가 이곳의 관리자인 양 거듭 질문했다. "그러면 저기만 건너면 빠져나갈 수 있는 거야?" "해봐." 주테카는 다리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오랫동안 집념에 찬 눈으 로 수면을 응시하던 주테카는 심호흡을 하고는 움직였다. 뒤쪽 방향이었다. 아무도 정의를 사랑하는 그들의 동료를 야유하지 않았다. 주테카는 수염볏을 꽉 움켜쥐었다. 네 사람을 비추는 햇살이 참 투명했다. 어떤 불쌍한 이들은 평생 동안 알지 못하지만, 부는 창고 가득한 황 금에 있지 않다. 창고를 가득 메운 황금은 같은 부피의 돌과 완벽하 게 등가를 이룬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황금 창고를 가진 자 는 창고 관리인일 뿐 부자가 아니다. 부자에게는 창고가 필요 없다. 시모그라쥬의 부 또한 그러하다. 사과 표면을 아무리 핥아도 사과 맛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세상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같 은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 안타까운 사례들이 많다. 그런 자들에게 시 모그라쥬는 그 부의 규모에 있어 한계선 이남 최대라는, 그리고 제국 전체로 따져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평판이 어울리지 않는 구질구질한 도시다. 전통적인 나가 건축의 철학은 다른 종족들의 그것과 좀 다르다. 자 신들에게 최적의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를 구분짓기 위해 한계선이 라는 지리학적이라기보다는 기후학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나가들은 외 부의 환경으로부터 거주민을 보호한다는 건축 개념이 희박하다. 그들 이 사는 땅은 그들에게 가장 잘 맞는 땅이다.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거주민을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두꺼운 벽이나 난방 시 설, 작은 창문 따위는 나가 건축가들에게 말도 안되는 개념이다. 다 만 수평적으로 개방적인 그들도 수직적으로는 갈등에 직면한다. 비는 나가들의 체온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비는 수직으로 이동한다. 그런 데 햇빛 또한 주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이동한다. 햇빛은 나가들의 체온을 상승시킨다. 나가들의 건축물들을 위쪽에서 보면 독특한 느낌 이 드는 것은 그런 갈등의 흔적 때문이다. 건물 내의 방과 방을 잇는 복도가 개방되어 있는 식으로 개방과 폐쇄가 정신없이 반복된다. 그 러나 하늘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전경까지 신경 쓰는 건축가들은 별로 없고, 나가 건축가들도 수평적으로는 꽤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 수 있 다. 시모그라쥬도 원래는 그런 아름다운 도시였다. 물론 지금도 다른 나가들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위풍당당한 석조 건물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오래된 석조 건물들에 기대어 있는 온갖 종류의 가 건물들은 미인의 얼굴에 난 부스럼처럼 곤혹스럽다. 가건물들은 오래 된 이끼처럼 도시의 이마와 가슴과 정강이를 뒤덮고 있다.원래 쾌적 한 대로였던 곳은 난립한 가건물들 때문에 두 사람이 어깨를 부딪히 지 않고는 지나기 어려운 미로로 바뀌었고 장려한 건물의 벽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건물의 방 안쪽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것이 되어있 다. 가건물 위에 가건물들이 쌓여있고 공중의 가건물들을 잇는 판자 다리나 사다리 같은 것이 얼기설기 얽혀져 있어 시모그라쥬의 혼란상 은 입체적인 완벽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물론 시모그라쥬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도시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도시가 구현할 수 있는 혼란의 최대치를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난립한 가건물들은 골칫거리였다. 시모그라쥬가 그렇게 된 것은 또한 그 이름 높은 부 때문이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말기, 궤멸 직전의 북부룰 규합하여 권토중래한 대호왕이 무서운 기세로 남 쪽을 향해 치달릴 때 시모그라쥬의 통치자였던 칸비야 고소리 의장은 그 누구도 내릴 수 없었던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시모그라쥬는 중립 을 선언했다. 나가들은 이를 배신으로 여겼지만 그 정도는 다른 종족들이 생각하 는 것보다는 약한 것이었다. 나가들은 원래 도시 단위의 생활권에 익 숙하며 다른 도시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북부군은 이 결정을 열렬히 환영했다. 서로를 멸망시키겠다는 기세로 싸웠던 그 치열한 전쟁에서 중립이라는 놀라운 개념을 떠올리고 그것을 완강하 게 실천에 옮긴 칸비야 고소리 의장은 결국 시모그라쥬를 온전히 보 호했다. 하지만 칸비야 고소리 의장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녀 자신이 창안해내다시피 한 중립이라는 개념을 주저없이 포기했던 사건 때문 이다. 천일전쟁이 시작되자 고소리 의장은 자신을 배신자로 규정할 나가들의 도시에 스스로를 변명해보이는 대신 재빨리 원시제에게 충 성을 맹세했다. 그 행동의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시모그라쥬는 또다 시 아무런 참화를 겪지 않은 것이다. 고소리 의장의 행동을 기회주의적인 행태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기회주의와 합리주의의 구별은 언제나 어렵다. 그리고 이겼기에 정당하다는 논리를 아는 자들은 정당하기에 이겼다는 논리 를 패자의 피로 써서 후손에게 전할 불가침의 권리를 얻는다. 시모그 라쥬는 그런 권리를 획득했다. 두 번의 대전을 겪은 후에도 아무런 참화를 겪지 않은 시모그라쥬는 한계선 남쪽과 북쪽의 재화를 마음대 로 유통시키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그 부는 재건 사업을 통해 더욱 커졌다. 시모그라쥬의 부스럼 투성이 얼굴은 바로 그런 찬란한 역사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부를 쫓아 몰려든 막대한 유입 인구 앞에서 나가들은 당혹했다. 나가들의 도시가 폐쇄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통적 인 나가의 성 역할에서 나가 남자들은 방랑자다. 가문과 재산을 소유 한 여성들의 집을 전전하며 보살핌을 받고 그 대신 여성이 아이를 가 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남자들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도 시를 드나드는 나가 남자들에게 익숙하다. 바꿔 말한다면 그들은 재 생산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인간이나 도깨비, 레콘 유입자들을 상대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심리적인 충격 또한 컸다. 1차 대확장 전쟁과 2차 대확장 전쟁 사이의 긴 기간 동안 북부의 사람들에게 나가가 전설적 존재가 된 만 큼 나가들에게도 다른 세 종족은 낯설어서 신비한 종족으로 변해 있 었다. 그들은 갑자기 그들의 도시로 들어와 '육성'이라는 낯선 방식 으로 의사 소통을 요구하는 방문자들을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 에 없었다. 다행히도 심각한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시제는 북부 의 사람들이 나가들의 도시에 들어가서 점령군처럼 구는 것을 용납하 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지가 없었다 하더라도 나가들의 경악스러 울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며 방문자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 었다. 하지만 도시는 몸살을 겪어야 했다. 제한된 공간에 너무 많은 물건 을 집어넣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도시는 급속히 혼란스러워졌다. 이대로 놔둬선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렸을 땐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였다. 도시를 확장하는 것이 가장 온건한 방법이겠지만 '나무 도살'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 을 보이는 나가들을 달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입 인구를 차단하는 것은 유통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시모그라쥬의 성격 때문에 또한 불 가능했다. 시모그라쥬의 위정자들은 할 수 없이 완전 해결책의 추구 에서 연속적인 미봉책으로 선회해야 했다. 막대한 부를 가진, 후줄근 한 도시의 탄생이었다. 지더미는 시모그라쥬와 비슷한 인간이었다. 시모그라쥬의 번화가, 양지 바른 곳에 지저분한 돗자리 하나 깔아놓 고 뭉기적거리는 지더미의 모습은 어떻게 보아도 햇빛에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거지였다. 남루한 옷차림과 지저분한 몸, 그리고 구부정한 자세는 거지가 갖추어야 할 요건들을 완벽하게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이 독특한 도시 구성원에 대해 남다 른 식견을 가진 사람만이 지더미의 모습에서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독특한 것은 지더미의 영업 장소였 다. 오래 전에 자리를 박차고 떠났어야 마땅한 위치였다. 통행인이 부족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통행인들이 멈출 일이 거의 없는 자리였 다. 자신의 앞에 멈춰서서 그림자를 떨어뜨리는 사람을 보자마자 지 더미가 다른 거지보다 몇 배나 더 정중하게 굽신거린 것은 평소에 그 럴 일이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쪽의 동냥 그릇에 뭔가가 떨어졌다. 지더미는 다시 굽신거리고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동냥 그릇에 든 돌멩이를 보았을 때 지더미는 낙담하지 않았다. 주먹이 근질거려 아무에게나 시비를 거는 취객들에게 욕을 당한 경험이 그를 자제시켰을 것이다. 지더미 는 조금도 상심하지 않은 태도로 돌멩이를 집어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적선자가 말했다. "더 괜찮은 것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주신 걸로 충분합니다." "저를 도와주시면 노인장께서 절대로 잊지 못할 저녁 식사를 대접하 겠습니다." 아마 눈 감고 이 악물기만 하면 충분히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이겠 지. 지더미는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적 빈곤보다 더 괴로운 것은 상대적 빈곤이다. 시모그라쥬에 흐르는 막대한 부의 흐름에 자 신의 손을 담그지 못한 자들은 언제나 욕구 불만이다. 물론 지더미는 그런 자를 위해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치아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는 도와드릴 것이 없습니다." "아뇨. 있을 겁니다. 염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시면 됩니다." 염소? 지더미는 어이가 없었다. 혹 미친 놈에게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을 한 지더미는 상대방의 공격 수단을 알아둬야겠다 고 생각했다. 지더미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살폈다. 그리고 더 큰 혼 란을 느꼈다. 상대방은 키 큰 인간 남자였고 제국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지더미는 그것이 부위의 차림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무턱 대고 폭력을 행사할 자는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지더미는 말했 다. "염소야 농장에 있겠지요. 부위님" 부위는 약간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는 거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부위의 체통을 손상시키지는 않나 걱정하는 눈으로 주위를 둘 러보고는 갑자기 웃었다. 몹시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 같은 표 정이었다. 지더미는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부위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요즘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어릴 적엔 염소라고 불렀지요. 좀 산문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군요. 저는 지 금 이 도시의 음성적인 조직에 접촉하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도무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만해. 지금은 가락이 다 바뀌어서 이렇게 장단도 못 맞추고 변변 찮게 굴고 있지만, 이렇게 앉아 노랫말 사고 파는 것은 나도 해 본 일이야. 촌수 따져보면 노인장은 내 손자뻘 이하일걸." 지더미의 눈빛이 약간 바뀌었다. "피소 아십니까?" "몰라." "듀리는?" "몰라." 지더미는 씩 웃었다. "나도 몰라." 부위도 덩달아 웃었다. 지더미는 이제 할 일 없는 통행자와 농담을 주고 받는 거지의 모습을 잘 구현내고 있었다. 부위가 바라던 바였 다. 지더미는 손을 활기 있게 움직이며 말했다. "손바닥 한 번 볼까?" 부위는 손을 펴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니까. "이 바닥에서는 허수아비라고 불렸어. 혹시 곰발이나 못대가리를 아 는지……" 부위는 말끝을 흐렸다. 지더미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기 때문이 다. 거지는 부위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말했다. "허수아비? 공작님의 몸종?"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의 몸종인 이레 달비는 안도하며 지더미의 오 류를 교정해주었다. 이레는 안도했지만, 완전히 안도한 것은 아니었다. 끔찍한 밀림을 빠져나와 간신히 시모그라쥬에 들어선 후에도 이레는 모든 것을 이루 었다는 착각에 빠지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는 편이 훨 씬 옳았다. 그가 상대할 자들은 사람을 자연과 하나 되게 해주길 꺼 리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레는 당분간은 인적 드문 숲속에서 흙 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될 계획이 없었다. 아직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사내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레가 자 신의 생존 의지를 마음껏 표현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제대로 못 드시고 지냈소?" "그렇기도 하고, 먹을 수 있을 때 꽉꽉 채워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서." 몇 번의 복잡한 인계 끝에 이레는 음식점에서 사내와 마주하게 되었 다. 초로의 사내는 입구에서 나타나는 대신 주방에서 음식 접시를 들 고 나타남으로써 이레를 약간 당혹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레는 음식 에만 관심을 보였다. 접시를 들고 나타나긴 했지만 사내는 주인이나 종업원처럼 행동하지 는 않았고 오히려 종업원들이 그를 못본 척했다. 사내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있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이레는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이곳에는 그의 영향력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누군가 의 세력권에 들어감으로써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편이 낫다. 이레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무기를 하나둘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사내가 까 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옷은?" 질문에는 질문으로. "빌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 밥을 먹고 있는 거죠?" "내가 사는 거요." "이름을 알아야 갚을 텐데." 사내는 약간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위체 파림. 위츠면 되오." 모르는 이름이다. 이레는 잠자코 식사에 열중했다. 위츠라 불리길 바라는 남자가 말했다. "나중에 알면 속였다고 생각할까봐 말해주겠는데, 나는 당신이 찾는 부류가 아니오." "음?" "허수아비 이레의 이름은 이 바닥에서 아직 잊혀지진 않았소. 하지 만 그거야 워낙 별난 이야기라서 기억되고 있는 거지. 즉 당신이 아 니라 당신 이야기가 기억되고 있는 거요. 허수아비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거요." "저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죠. 그런 데 제가 찾던 부류가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난 손 털었소. 난 당신이 여기저기 찔러보다가 무슨 곤란 한 사고라도 일으킬까봐 이리로 데려오게 한 거요. 또 옛날 생각도 나고. 못대가리 후미조하고 난 죽이 잘 맞았거든. 같이 작업도 꽤 여 러 번 했소. 후미조가 당신 이야기를 해줬소." "아아. 어떻게 지내죠?" "몇 년 전에 죽었소. 어떻게 죽었을지 맞춰보시오." "추락사했군요." 위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못대가리만 있어도 밟고 올라간다던 벽타기꾼이 내 노모도 타고 올 라갈 만한 나무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졌소. 웃기는 노릇이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레는 빠르게 생각했다. 위츠가 옛친구에 대한 의리 때문에 밥 한 끼 사주고 아무 데나 머리 들이밀지 말라는 쓸데 없는 충고를 후식으로 대접한 다음 그를 돌려보낼 작정인지, 그 렇잖으면 뭔가 다른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이레는 자신이 시모그라쥬의 범죄 집단에 대해 아는 것을 떠올렸다. 범죄자들에도 온갖 유형이 있는데, 시모그라쥬의 범죄자들은 이레 달비가 그렇듯이 수백년 만에 열린 한계선을 꺼리낌 없이 넘어온 자 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모험가에 가까웠던 그들의 선조는 미지의 땅에서 살아갈 그들에게 자신만을 믿으라고 가르쳤다. 그리하 여 중립과 생존에 관한 칸비야 고소리 의장의 철학은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보다는 시모그라쥬의 범법 집단에 더 잘 살아남아 있게 되었다. 이들의 좌우명은 절대 중립이다. 어느 수준 이상으로 세력이 커지면 권력가들과 결탁하여 생존권을 보장받으려는 다른 범죄 집단 과 달리 시모그라쥬의 범죄 집단은 시모그라쥬공을 가장 통렬하게 비 웃는 자들이다. 암흑 경제에 종사하고 있긴 하지만 이들은 진정한 정 경분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재화가 유통되면서도 난잡하기 짝이 없는 시모그라쥬의 도시 구조는 범죄 집단에겐 좋은 환경이지만 이들은 대단히 조심스럽다. 그리고 나누어 먹을 것이 풍부하기 때문에 시모그라쥬공이 골치 아파 할 만큼의 분쟁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시모그라쥬가 괜찮은 치안 수준을 유지하는 도시라고 오 해될 법도 하다. 하지만 단지 일처리가 조용할 뿐 이들의 일이 보잘 것없는 수준은 아니다. 시모그라쥬에 유통되는 부의 많은 부분이 불 분명한데, 그 배후에는 이들 범죄집단들이 있다. 한편 조용한 일처리 방식에 대한 선호는 이들로 하여금 서로의 세력 을 비교해야 할 불가피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덜 시끄러운 방식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이레가 주력으로 삼던 일도 그것이었다. 이레는 일종의 절도범이었는데, 금붙이나 보석 대신 주로 사람을 절도 대상 으로 삼았다. 하지만 금붙이나 보석과 달리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원 한을 가질 능력도 갖춘 사람은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다. 따라서 그런 직업은 범죄자들에게도 최후의 선택이고, 언제나 뒤끝이 좋지 않다. 백작의 몸종이 된 이레의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레는 결론을 내렸다. 단지 옛 추억과 옛 의리 때문에 만나기에 이 레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다. 이레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많 을 테고 그런 그와 접촉한다면 위츠는 그 자신이 언급했던 편지풍파 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레는 위츠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알아내 기로 했다. 빈 식기들을 옆으로 치운 이레는 탁자 위에 두 팔꿈치를 얹으며 위츠에게 몸을 기울였다. "손을 터셨다면,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아, 유기를 팔고 있소.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 가게가 있지." "그리고 부업 삼아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합니까?" 위츠는 빙긋 웃을 뿐 그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아직 무기를 충 분히 모으지는 못했지만, 이레는 일단 부딪히기로 했다. "장차 일어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위츠는 눈꼬리를 살짝 올렸다. =============================================================== 13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3-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10 조회수 : 1857 피를 마시는 새 13. 비밀의 불씨 - 2 시모그라쥬 공작 팔디곤 토프탈은 시모그라쥬를 지배하지 않는다. 궤변을 즐기는 자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는 이 명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 중 좀 공식적인 해석도 있다. 팔디곤 토프탈은 시모그라쥬의 공작이라기보다는 시모그라쥬 시민의 첫 번째 벗이다. 이 명칭은 칸비야 고소리 의장의 충성 맹세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원시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당시 칸비야가 시모그라쥬 가 문 평의회의 의장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칸비야가 개인의 자격으로 충성을 맹세했는지, 혹은 평의회 의장의 자격으로 맹세했는 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그 자격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또다른 논쟁거리다. 나가들의 가문 평의회는 입법, 사법, 행정 중 어느 부분에 속하는지 따지기 어려운 정치 체제이며 굳이 범주를 규정짓는다면 그 모든 것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문 평의회가 도시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가문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주들, 혹은 그녀들의 대리인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일 뿐 어떤 종류의 공적 구속력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각 가주가 가문 내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다는 말은 바꿔 말하자면 어떤 가주도 다른 가문의 구성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따라 서 구속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쇼자인-테-쉬크톨처럼 둘 이상의 가문들이 공통된 문제에 결부되어 해결책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평의회 의결 사항은 각 가주들의 양해 하에 가문의 구성원들 - 그러 니까 시민들 - 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가주가 양해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그 사실이 제국 정부를 골치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한 명의 통치자와 서약을 맺어 통치자에게는 권위를 주고 동시에 그의 피통치 인 전부를 황제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통적인 방식이 훨씬 간단하고 효율적인 일이지만 나가들의 사회에서는 그런 방식을 적용 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칸비야 고 소리는 시모그라쥬의 지배자가 아니라 가문 평의회의 사회자에 가깝 고 비록 고소리가 의장에 있는 동안은 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황 제의 시모그라쥬에 대한 통제권은 고소리가 의장 자리에서 물러날 경 우 사라지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제국 정부 뿐만 아니라 시모그라쥬 시민들 또한 그런 상황에 불안해했다는 점이다. 시모그라쥬 시민들은 이왕 북부에 기원 한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기로 결정했으니 확실히 편입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했다. 평의회 의장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어정쩡한 방식은 그들에게도 안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주들의 전 통적인 권한을 축소시키는 형태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 도 쉽지 않았다. 이 갈등을 해결한 것은 원시제의 결정이었다. 대호왕의 시절부터 공신인 세미쿼가 원시제의 명을 받아 시모그라쥬 의 공작이 되었다. 하지만 시모그라쥬공 세미쿼는 미심쩍게 바라보는 시모그라쥬 시민들 앞에서 자신이 모든 가주들의 친구로 온 것이며 주된 임무는 가주들과 황제를 연결짓는 것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본 질적으로는 시모그라쥬 대사였던 데오늬 달비의 일과 비슷하다. 하지 만 시모그라쥬는 더이상 외국이 아니므로 대사는 둘 수 없고 다른 지 역에 대해 시모그라쥬의 권위를 세우려면 공작이 필요하다는 것이 세 미쿼의 설명이었다. 그것은 또한 원시제의 설명이기도 했다. 시모그 라쥬의 가주들은 그 태도에 만족했다. 그리고 가주들이 만족한 이상 시민들도 만족했다. 시모그라쥬의 공작이 된 세미쿼는 에시올 산맥의 고산족인 자신의 부족을 시모그라쥬로 불러들였다. 그 중에는 제2차 대확장 전쟁에 복 무하느라 처남에게 맡겼던 그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들의 이 름은 팔디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먹서먹했다. 아버지 는 자신이 전쟁에서 죽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유복자가 될지도 모를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기피했고, 그래서 팔디곤이라는 이름은 외 삼촌이 지어주게 되었다. 부족의 풍습상 낳아준 자보다는 이름을 지 어준 자가 보호자에 가깝다. 팔디곤은 느닷없이 만나게 된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아버지 또한 아들 을 처남의 피보호자로 해석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두 사람은 서로가 다 살아남았으니 부자의 운명을 건 도박은 성공이라는 결론을 내렸 다. 팔디곤이 성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키워준 외삼촌의 이름을 성 으로 쓰겠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했을 때 세미쿼는 웃으며 그렇게 하라 고 했다. 시모그라쥬공 계승권자 팔디곤 토프탈의 탄생이었다. 그러 나 세미쿼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세미쿼의 무기였던 가위가 토프탈 가문의 문장에 남게 되었으니까. 세미쿼가 사냥 중 사망하고 팔디곤 토프탈이 시모그라쥬공이 되었을 때 공작의 외척들은 머나먼 남부로 와서 마침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팔디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의 이름 을 성으로 물려준 외삼촌 토프탈은 인격자였다. 그는 자신의 매부가 아들도, 목숨도 포기한 채 대호왕 휘하에서 북부의 운명을 위해 싸웠 던 영웅임을 친지들에게 상기시킨 다음 그의 유훈이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세미쿼의 유훈은 '시모그라쥬 공작은 시모그라쥬 시민의 첫 번째 벗이 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권력을 탐할 친지 들이 젊은 공작의 주위에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 토프탈은 담담하 게 말했다. "고향의 산봉우리를 다시 봅시다." 원래 산의 민족이었던 그들은 씩 웃고는 토프탈의 인도 하에 북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팔디 곤의 어머니도 낯선 기후에서 건강을 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향하는 그들과 함께 떠났다. 이야깃꾼이라면 이야기를 끝낼 시점이다. 하지만 역사는 휴식도, 중 단도 없다. 토프탈은 담백한 인격자였지만 권력 구조에 대해서는 좀 무지한 편 이었다. 원래부터 친가 쪽의 혈통은 끊어졌고 어머니와 그를 키워준 외가 쪽 사람들도 떠나자 팔디곤의 주변에는 그를 제어할 만한 사람 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토프탈은 자신의 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교육은 산사나이의 교육이었고 재화가 넘 치는 열대의 땅 시모그라쥬에서의 처신에 도움이 되는 교육은 아니었 다. 팔디곤은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했다. 그의 자기 구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두 개의 지위 뿐이었다. 시모그라쥬 공작과 시모그라쥬 시민의 첫 번째 벗. 팔디곤은 둘 중 어느 것을 자신의 추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했다. 아 버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팔디곤은 아버 지에 대해 레콘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세미쿼는 생물학적으로만 팔디곤의 아버지일 뿐, 토프탈을 성으로 쓴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팔디곤의 정신적 아버지는 외삼촌 토프 탈이었다. 그런데 그 토프탈은 북부로 돌아갔다. 팔디곤은 차례로 자 신을 떠난 두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을 느꼈고 그 반항심은 '시모그라 쥬 시민의 첫 번째 벗'이라는 지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팔 디곤 토프탈이 자신을 시모그라쥬공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을 때, 그 것이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시모그라쥬 시민들은 난처하고 우 스꽝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보통 그러하듯 자질 시비가 일어났다. '당신은 대호왕을 모시고 불침의 키보렌을 꿰뚫었던 아버지가 아니 다. 당신은 나무가 된 자, 하늘로 올라간 자, 죽은 채 싸웠던 자 등 과 같은 반열에 설 수 없다.' 앞쪽의 지적은 사실이지만 뒤쪽은 가혹한 것이었다. 팔디곤의 아버 지 세미쿼 자신이라 해도 뇌룡공 륜 페이나 승천한 티나한, 충의공 괄하이드 규리하와 같은 희대의 영웅들에 비교되면 난감한 기분을 느 꼈을 테니까. 하지만 세미쿼는 그들과 함께 싸웠고 그들에게 전우라 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팔디곤은 아니었다. 팔디곤은 바보가 될 생각은 없었다. 무익한 싸움에 뛰어들어 온몸에 피칠을 한 채 이겼노라고 울부짖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자기 변호를 하지 않았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어떤 정책도 시행하 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악의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으니 까. 팔디곤은 그저 묵묵히, 고집스럽게 자신을 시모그라쥬공이라고 지칭했다. 그리고 시모그라쥬에 고집 센 사람이 그만 있는 것은 아니 었다. 시모그라쥬인들은 고집스럽게 새해가 올 때마다 '벗에게'라는 명목으로 팔디곤에게 새해 선물을 보냈다. 용솟음 치는 부와 정신 없 는 난잡함의 도시 시모그라쥬는 또한 유쾌함과 재치를 사랑하는 사람 들의 땅이기도 했다. 위츠라 불리는 위체 파림의 유기점으로 자리를 옮긴 이레 달비는 팔 디곤 토프탈이 시민들 모두의 조롱을 받는 즐거운 지배자에서 무서운 원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피력했다. 뜨거운 햇살 속에서 따끈하게 달아오른 유기를 보던 위츠는 미심쩍은 어투로 말했다. "우리 팔디곤 토프탈 각하께서 제왕병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 요?" "그건 인간의 병입니다. 시모그라쥬공은 인간이지요." "정리해봅시다. 공작은 대장군을 납치했소. 당신은 그 이유가 새로 운 대장군을 선출하기 위한 음모라고 보는 거요?" 위츠는 약간 지체한 다음 덧붙여 말했다. "그건 전문가의 의견인 거요?" 이레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는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희 가주님이 가진 것 중에 시 모그라쥬공이 탐낼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칼리도령은 계승할 수 없습니다. 만병장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장군일 겁니 다. 그리고 어쩌면 그 다음엔 차기 황제일지도 모르지요." "어,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 "너무 나간다고요? 주인님의 몸종으로 있으면서 제가 알게 된 사실 이 하나 있습니다. 권력에는 너무라는 것이 없습니다. 추락할 때까지 도약하는 거죠. 중단은 없습니다. 만일 중단했다면 도약을 방해하는 것이 있거나 힘을 모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 그 높이에 만족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좀 천천히 합시다. 어쩌면 영원히 안할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당신은 주인의 소재 파악과 구출을 위해 시모그라쥬 잡놈들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군? 하지만 거래가 되려면 오가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글쎄요. 당신은 손을 털었다고 하셨는데." "호기심이야 있으니까." "젠장, 모르겠습니까? 대장군이 이곳에 억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 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폐하께서는 그 분의 위신 때문에라도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이 공공연한 것이 되기 전에 대장군님은 구 출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시모그라쥬가 불타는 대신 팔디곤 토프탈만 처형되는 것으로 끝날 겁니다." "폐하께서는 그러실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예?" 위츠는 옆으로 몸을 기울여 부채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이레에게 내밀었지만 이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츠는 느긋하게 부 채질을 하며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쟁은 시작되었소. 암살공과 폐하 사이에 전쟁이지." 이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레는 생각의 갈피들을 정신없이 정리 하며 위츠의 말에 집중했다. "표면적으로는 죄수 반환 전쟁이오. 스카리 빌파가 백화각을 파옥하 고 부냐 헨로를 구출하여 발케네로 도망쳤거든. 좀 더 본질적인 이유 는 당신이 생각해 보시구려. 어쨌든 놀랄 일이 하나 있소. 위풍당당 하게 발케네로 진공한 제국군 앞을 막아선 것은 암살공이 길러낸 일 만 레콘 병사였소." 이레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일만이라고요?" "그래요. 일만이오. 권력에 관한 당신의 철학이 적용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군. 암살공이 설마 발케네를 평안히 다스리기 위해 그런 무지막지한 병력을 모은 것은 아니겠지. 암살공은 이 전쟁을 준비하 고 있었소. 당신은 이 사실에 당신이 아는 사실들을 끼워넣을 수 있 겠지." "하늘을 잡기 위해 땅의 북극과 남극이 손을 잡았군요." 이레는 놀랐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유기들의 진열 상태를 가 늠했다. 가게의 위치는 개방적이었다. 어느 쪽으로 달리든 인파 사이 로 뛰어들 수 있었다. "대장군은 7년 전 쥐딤에서 무수한 레콘을 격파했소. 살아있는 사람 중에 암살공의 그 병력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지." "시모그라쥬공이 주인님을, 그리고 암살공이 폐하를 맡은 것이군 요." "그런 것 같소. 우리 토프탈 각하께서 상당한 사고를 치신 거지." "맙소사……" 이레는 어지럽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상대방 의 눈을 자신의 이마로 끌어오며 왼손으로는 놋그릇 하나를 잽싸게 움켜쥐었다. 이레는 몸을 튕기며 위츠에게 놋그릇을 집어던졌다. 위츠는 엉겁결에 부채를 내밀어 그릇을 쳐냈다. 부채는 부서졌지만 그 덕분에 위츠는 머리가 깨지는 일을 모면했다. 이레는 훌쩍 뛰어 가게 밖으로 나섰다. 기대하던 공격이 이레에게 날아들었다. 가게가 그렇게 개방되어 있 으니 당연히 보초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격은 이레가 미처 포함시 키기 어려운 위치에서 다가왔다. 이레의 머리 위, 가게의 이층 창문 을 통해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이레는 어깨를 짓밟는 충격에 휘청했 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도망가지는 않았다. 폭력을 둘로 나누 어 그 중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폭력에 대해 관대한 것은 시모 그라쥬 시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레가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다가 용케 균형을 잡고 몸을 똑바로 세우자 환호까지 보냈다. 그 중 어떤 이는 공격자를 찾는 이레에게 조언도 해주었다. "어이, 청년! 왼쪽이야!" "고맙습니다!" 이레는 되는 대로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왼쪽을 후려찼다. 100킬 로그램의 체중이 가득 실린 무서운 타격이었다. 발 끝부분에 뭔가 반 응이 있었다. 이레는 재빨리 발끝을 보았다. 그리고 얼이 빠졌다. 어떤 인간 처녀가 코를 감싸쥔 채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얼 굴을 감싸쥔 손 아래로는 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지도 않고 가한 공격으로 애꿎은 처녀 코를 내려앉혔으니 이토록 무안한 일도 따로 없을 것이다. 이레는 황급히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이런 결례가…… 꽥!" 하늘이 새파랗다. 처녀는 이레의 사죄를 우아한 발따귀로 거절했다. 목이 홱 젖혀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등 뒤를 볼 뻔한 이레는 두 팔을 맹렬히 휘둘러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았다. 턱과 얼굴을 만져본 이레 는 손바닥이 벌겋게 변한 것을 발견했다. 처녀는 코 아래를 쓱 닦고 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관중들이 폭발적인 함성을 내뱉었다. "둘 다 비각술꾼이다!" "발따귀 멋지다! 여자한테 걸었다!" "저 청년 몸 좀 봐. 나는 남자!" 이레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앞쪽의 처녀에 게 말했다. "아가씨는 누구한테 걸 겁니까?" "물론 저요." "저도 아가씨에게 걸죠." 이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시모그라쥬 시민들은 이레가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바짝 붙여 이레를 밀어냈다. "좀 비켜줘요!" "붙어! 붙어라!" 행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이레를 안으로 밀어붙였다. 이레는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고, 그리고 더욱 의기소침해 지는 광경을 발견했다. 이레와 눈이 마주치자 처녀는 소맷자락으로 코 아래를 쓱 닦고는 갑자기 발재주를 펼쳐보였다. 몸놀림이 보통 가 벼운 것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들리지 않는 비명이 울려퍼지는 것 같 다. 가상의 적 열 명 정도를 때려잡은 처녀는 비스듬히 서서 새침하 게 말했다. "섰거라." 행인들이 '와!' 하는 환호를 올렸다. 이레는 일단 위츠의 동태를 살 피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들을 둘러싼 인파 때문에 위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잠깐 고민한 이레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다면 차라 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어울리다가 기회를 봐서 몸을 빼 내야겠다고 생각한 이레는 처녀에게 다가섰다. 그냥 다가선 것은 아 니다. 이레는 두 손과 두 발을 적당히 흔들다가 갑자기 휙 뛰어올랐 다. 투계가 두 날개를 펼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상대를 후려차는 듯한 동작으로 이레는 허공을 걷어찼다. 사람들은 지대한 관심으로 이레의 몸놀림을 살폈고 그것은 처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처녀는 잘못 맞았다간 뼈가 무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다. 실려 있는 힘이 보 통이 아니었다. 처녀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상대들을 몰살시키며 걸어간 이레는 가슴까지나 올까말까한 처녀를 내려다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섰다." 압도적인 체격차에도 처녀는 주눅 들지 않았다. 처녀는 우아하게 오 른쪽 발목을 내보였다. 이레는 그 발목을 슬쩍 걷어찼다. 그 조그마 한 충돌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관중은 다시 환호를 보냈다. 바야흐로 조금 전 보이지 않은 자들을 멸종시켜버린 두 사람이 치명 적인 발기술이 서로에게 펼쳐지려는 찰라, 누군가의 찢어지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만해라, 세레지!" 처녀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레도 재빨리 몸을 빼고는 고함이 들려온 곳을 보았다. 사람들 위로 펄쩍펄쩍 뛰고 있는 것은 위츠였 다. 위츠는 거의 팔꿈치로 사람을 가격하는 듯한 동작으로 인파를 헤 치고 들어왔다. 이레는 다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위 츠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사람이 바로 네 오라버니다!" 이레의 사고가 딱 멎어버렸다. 이레는 이 해괴한 선언을 어떻게든 자신의 의식 구조에 끼워맞추려는 애처로운 노력을 경주했다. 실패했 다. 세레지는 이레보다는 훨씬 적응력이 우수했다. 그녀는 울음을 터 뜨릴 것 같은 얼굴로 훌쩍 다가왔다. 이레가 째차기라도 날아오는 것 아닐까 하고 긴장했을 때 세레지는 울먹이며 외쳤다. "어릴 때 원숭이들에게 유괴되셨다는 그 오빠군요! 어쩐지 발놀림이 익숙했어요. 돌아오셨군요!" 그리고 세레지는 이레에게 매달렸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두 사 람의 키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레지는 이레를 끌어내 리듯이 하여 강제로 그 목을 끌어안았다.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서있 던 이레의 귀에 세레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빨리 맞장구쳐." 이레는 졸도할 것 같은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인들은 감동 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기 힘든 압박감 속에서 이레는 중얼거렸다. "우우…… 꺅꺅꺅……" 시모그라쥬는 참으로 놀라운 도시다. 이레 달비는 그것이 유치하고 조악하고 천박하고 통속적인 수법이라 고 평가했다. 위체 파림은 그 평가를 겸허하게 수용했다. "맞소. 그래서 효과적이지." 이레는 끙 하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위츠의 말처럼 그 유치하 고 조악하고 천박하고 통속적인 연극은 싸움 구경에 신이 난 인파를 단숨에 물리치고 이레를 가게 안으로 끌어들이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 했던 것이다. "그렇군요. 아버님." "뭣 때문에 도망쳤는지 대충 짐작하오. 내가 공작의 사람이라고 추 측한 거지?"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제기되기 전까지는 안전을 위해 그 믿음을 계속 견지할 작정입니다. 그렇잖으면 까마득하게 먼 제국 북부의 소 식을 그렇게 소상하게 알고 있을 이유가 없잖습니까." 이레는 유기점 지하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방을 의심에 찬 눈으로 둘러보았다. 무슨 물건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잘 포장되어 쌓여있고 벽에는 서가가 꽉 들어차 있었다. 서가 한쪽에는 뱀단지로 보이는 물 건도 놓여있었고 그 앞에는 뱀들을 풀어놓을 가장자리가 약간 올라간 탁자도 있었다. 유기점 지하에 있을 필요가 없는, 수상쩍기 짝이 없 는 공간이었다. 위츠가 말했다. "내가 손 털었다고 했지? 그건 사실이오. 난 더 이상 시모그라쥬의 범죄 조직과는 관련이 없소. 가끔 거래를 하긴 하지만. 그리고 이 위 쪽에 있는 유기점이 내 호구지책이라는 것도 사실이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피고용인들에게 일정 수준의 자립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하 거든." 위츠를 일부러 무시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이레는 데라시라는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세레지가 불평했다. "아빠. 이 사람 놀라게 하지 마. 베일 것 같잖아." 이레는 깜짝 놀라서 세레지의 목을 누르고 있던 제국검을 뗐다. 이 레가 안심하고 지하까지 따라내려올 수 있도록 인질이 되어준 세레지 는 이레에게 목을 내준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이레는 세레지에게 사 과하고는 다시 위츠에게 말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라고 하셨습니까?"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제국 전역에 자기 눈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 듣지 못했소? 그리고 비스그라쥬에서 나는 황금은 전부 그 눈들을 유 지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이야기도? 그거 다 진짜요." "제가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지요?" "내가 시모그라쥬공의 사람이라면 왜 이런 지하 본부 같은 것을 만 들겠소?" 맞는 말이다. 이런 장소는 적성 지역에서 활동해야 할 지하 운동가 에게나 필요한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지하 운동가들은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 유치하고 조악하고 천박하고 통속적인……" 세레지는 '대단한 고집'이라고 중얼거렸고 위츠도 피식 웃었다. 이 레는 두 사람의 반응에 개의치 않은 채 말했다. "……이야기는 오늘 일몰 전에 모든 시모그라쥬인들에게 퍼질 겁니 다. 당장 원숭이 사이에서 자라났다는 청년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올 겁니다. 지하 운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주목을 끄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옳은 지적이오. 하지만 우리는 이곳을 떠날 테니 상관없소." "떠난다고요?" 세레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위츠는 아쉽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 러보고는 단조롭게 말했다. "우리도 갑자기 소식이 사라진 대장군을 수색하고 있었소. 망고 군 단 쪽에서 뭔가 미심쩍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주의하고 있 었지만 설마 대장군이 제국군에게 납치되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지. 나는 온갖 가설들을 검토해봐야했소. 당신 이야기를 들은 후에 야 겨우 이해가 되더군." "그 우리가 누구죠?" 이레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 질문했다. 하지만 위츠는 선선히 말했다. "나와 내 딸, 두 사람이오." "겨우 둘이오?" "둘이면 충분하지. 우리가 무슨 파괴 공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정보 수집만 하니까. 게다가 이곳은 시모그라쥬요. 정보를 파는 사람 이 가득하니 많은 인력은 필요 없소. 정보를 사들일 돈만 있으면 되 오. 하지만 대장군을 구출하고나면 여기 더 있을 수 없소." 이레는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 후 이레는 세레지의 목을 누르 고 있던 칼을 치우고는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세레지는 목을 만질 뿐 별다른 말 없이 일어섰다. 그녀는 가게에 가 있겠다고 말하곤 위로 통하는 계단을 통해 사라졌다. 위츠가 말했다. "이제 믿는 거요?"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라면 대장군의 몸종 한 명을 붙잡기 위한 것 치곤 너무 장황한 거짓말이니까요." 이레는 위츠와 세레지가 이중 간첩일 가능성을 버리진 않았다는 말 까지는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니까. 위츠는 고개를 끄덕 였다. "저 뱀단지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하늘누리로부터 지령을 받을 수 있소. 하지만 보내는 것은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리지. 뱀부리미들이 과묵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 끌어들일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 는 급박한 상황에선 스스로 판단해야 하오. 평소 그런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군단 전체를 상대하며 대장군 을 구출해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그러니 당신 계획부터 듣고 싶소. 어떻게 할 작정이었소?" 이레는 세레지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일단은 가주님의 소재를 파악할 작정이었습니다. 할 수 있으십니 까?" "목표를 정확하게 알았으니 한 시간 안에는 할 수 있을 거요." "한 시간? 굉장하군요. 망고 군단 내부에 조력자를 구할 수 있겠습 니까?" "흐음. 아까 말했지만 우리는 정보 수집만 하고 누군가를 포섭해두 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소. 당신이 말한 조력자는 지금부터 만들어내 야겠군. 잠시만 기다리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위츠는 벽의 서가로 다가가서는 두툼한 장부 같은 것을 꺼냈다. 위츠는 그것을 탁자 위에 놓고는 말했다. "망고 군단 장교들에 관한 분석 자료들이오. 아마 망고 군단의 인사 기록도 이것보다는 덜 상세할걸. 약점을 잡거나 매수할 수 있는 요건 이 있는 자들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지금 몇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 으니 우선 그들의 기록부터 보도록 하지." "잠깐만요. 평소에 기초 작업 같은 것을 전혀 해두지 않았다는 말씀 입니까? 친교를 터두거나 돈을 빌려주거나 하는 일 말인데요." "해두지 않았소." "그러면 관두지요. 지금 망고 군단은 상당한 경계 태세에 있을 테니 서툴게 접근했다가는 역탐지 당할지도 모릅니다." 위츠는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모아놓은 자료들을 자랑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과묵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이룩한 일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유혹은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위츠는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대장군의 몸종은 역시 다르군. 아니면 이건 그 유명한 허수아비의 솜씨인 거요? 어쨌든 꽤 믿음직하게 보이는구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위츠는 또 현명한 대답을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이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뱀단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특별히 그것이 보고싶어서라기보다는 아무 곳에나 던진 시선이 그곳 에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위츠는 충분히 기다린 다음 조심스 럽게 말했다. "이레?" "예? 예, 죄송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좀 했습니다." "무슨 생각이오?" "별 것 아닙니다. 일단 가주님의 현상황에 대해 알아야겠군요. 그 다음에 구출 방법을 궁리하도록 하지요." "음. 알겠소. 그러면 쉬도록 하시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두겠는데, 그 옷의 원래 주인은 어떻게 되었소? 당신이 제국병 한 명을 제거하 고 탈출했다면 군단은 발칵 뒤집혔을 테니까 알아둬야겠소." "제 탈출로에 있더군요. 도리가 없었습니다. 머리를 호되게 때렸는 데, 죽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알겠소. 그러면 더욱 서둘러야겠군. 당신이 제국병의 복장을 하고 시모그라쥬에 잠입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저들이 알고 있으니까. 한 시간 후에 돌아오겠소. 아, 참. 저기 상자 보이오? 그 상자에는 바닥 이 없소." 위츠는 그렇게 말하고는 떠났다. 이레는 위츠가 가리킨 상자에 다가 가서 뚜껑을 열어보았다. 위츠의 말과 달리 안에는 바닥이 있었지만 이레는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더듬었다. 조금 후 상자 바닥이 통째로 들려올라왔다. 그 아래에는 검은 굴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공간에 출입구가 하나뿐일 리는 없다. 상자를 도로 닫아둔 이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갇혔다는 생각은 들 지 않았다. 위츠가 공작의 부하들과 함께 돌아올 작정이라면 비밀 통 로의 위치를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다. 이레는 이렇게 끝없이 누군가 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 지겨웠다. 두 가지 상념이 동시에 떠올랐 다. 시모그라쥬에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 난다는 생각과 네 명의 레콘 들이 그립다는 생각이었다. 그들 오만한 거인들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라면 누군가를 속이느니 때려서 자기 말을 듣 게 할 것이다. 속이는 것과 억압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이냐 는 비교는 우스운 것이지만 후자의 대상이 될 경우에는 정신력 소모 가 필요 없다. 이레는 후회스러웠다. 끝까지 설득해서 함께 나왔어야 했다. 이레는 엘시보다 그들을 먼저 구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들의 전 력이라면 엘시를 구출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 게? 네 사람을 가두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공포다. 물리적인 장애 는 없다. 어쨌든 이레의 발목을 적시는 얕은 물은 물리적 장애가 될 수 없다. 그들을 가두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이고 제국군 전체가 동 원된다 해도 누군가를 그 자신으로부터 구출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하늘누리를 침입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실제로 지멘이 그렇게 한 이상 하늘누리 침입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이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는 어느새 탁자에 엎드려 잠 들어 있었다. 그런데 각성의 순간 이레는 무의식 속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레는 그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 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위츠의 질문이 떠올랐다. 대장군의 몸종은 역시 다르군. 아니면 이건 그 유명한 허수아비의 솜씨인 거요? 이레를 상념에 빠지게 한 질문이었다. 이레는 자신이 그 질문에 대 답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장군의 몸종으로 일하며 그는 많 은 것을 배웠지만 그 전에도 이레는 일종의 전문가였다. 암살자라는 말은 장사꾼이나 군인, 농부와 같은 말처럼 사용된다. 하지만 납치자라는 말은 취침자나 보행자, 고객 같은 말처럼 사용된 다. 즉 납치라는 말에는 해당 행위의 전문가가 없다는 선입관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행 전문가는 없을지언정 납치 전문가는 존재 할 수 있다. 이레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보수를 받고 어떤 사람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이 시모그라쥬에서 이레가 하던 일이었다. 같 은 맥락에서 이레는 구조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레의 작업 대상들은 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느끼겠지만 이레에겐 똑같은 일이었 다. 허수아비라는 별명은 이레가 했던 무수한 납치 및 구조에서 단 한 번 일어났던 사건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납치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들키지 않아야 하는 일이 있었다. 이레는 잠자 리에 허수아비를 집어넣어 대상으로 위장했다. 딱 한 번뿐이었다. 하 지만 전설은 그런 사건에서 생기는 법이다. '누군가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허수아비가 남아있다 면, 그가 다녀간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너무도 좋아한다. 이레는 피식 웃었다. 위츠의 유치하고 조악하고 천박하고 통속적인 수법은 사람들의 본성을 꿰뚫 는 교활한 수법인 셈이다. 이레는 이제 위츠에게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납치 전 문가 허수아비를 본 것이라고. 허수아비 이레는…… '허수아비 이레가 누구지?' 이레는 갑자기 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귓볼이 화끈거리고 관 자놀이가 뒤로 당겨지는 기분, 뱃속을 차가운 면도칼이 훑고 지나가 는 것 같은 느낌. 이레는 주먹을 움켜쥔 채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 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낯선 풍경이다. 이곳에 익숙 해질 만큼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 묘한 불일치가 이레를 불 안하게 했다. 이레는 자신이 어떻게 허수아비 이레를 모를 수 있는지 생각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이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레는 기억이 희미해지는 가장 먼 옛날까지의 기억을 대부 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느낌이 기묘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대기를 쓴 책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일시 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레는 이레 달비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말 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없었다. 내가 많이 바뀐 건가? 그럴 법도 하다. 시모그라쥬의 범죄자에서 칼 리도백 엘시 에더리의 몸종이 되었으니 모든 제국을 통틀어도 찾아보 기 힘든 극적인 인생 전환인 셈이다. 사고와 가치관이 바뀌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개운치 않았다. 그 설명은 무엇인가를 빠 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레는 미간을 찡그린 채 위츠가 돌아올 때 까지 상념에 잠겼다. 루시닌 수교위는 주테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주테카는 흥 미롭다는 표정으로 루시닌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레에게 잘렸던 그 손은 이제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아직 손가락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었지만 조막손이라고 할 만한 것이 팔목 아래에 달려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주테카는 진심으로 말했다. "거 참 편리하겠네." 루시닌은 비늘을 부딪치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물통을 들 어올리는 모습을 본 주테카는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루시닌은 물 이 출렁하고 넘치도록 물통을 세차게 내려놓고는 말했다. "편리하지요. 완전히 부숴놓지 않으면 기어코 재생합니다. 저를 겁 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당신을 겁줄 수 있는지 궁금 해졌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주테카는 도저히 뒤로 물러날 수 없었다. 깃털을 부 풀리는 주테카를 보며 루시닌이 말했다. "언제 도망쳤습니까?" 주테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부리를 꽉 닫은 채 루시닌을 바라 볼 뿐이었다. 루시닌은 압박의 강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물통을 집어들었다. 다시 허리를 폈을 때 수교위는 레콘이 두 명으로 늘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테카의 곁에는 왕벼슬 쵸지가 서있었다. 쵸지는 팔짱을 낀 채 루 시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주테카가 뒤로 물러 서지 않는 것보다 더. 루시닌은 당혹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쵸 지를 바라보았다. 쵸지가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해봐." "예?" 쵸지는 주테카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슬쩍 밀었다. 주테카가 비틀거 리며 물러나자 쵸지는 그 앞을 가로막듯이 섰다. 주테카는 부리를 벌 린 채 쵸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쵸지가 말했다. "해보라고. 내가 그 꼴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졌어. 미 친다면, 뭐 미친 사람이야 자기가 미쳤다는 걸 모르니 상관없겠지. 안 미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을 것 같으 니 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쵸지는 자신의 초조감과 두려움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그는 부들 부들 떨리는 수염볏을 내버려둔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게도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군. 미친다면 내가 너를 어떻 게 할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안 미친다면 나는 너를 하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딱 백 토막 내겠어." 루시닌은 비늘이 빠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두려움은 이 레에게 손을 잘린 이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공 포 속에서 루시닌은 자신이 지상 최강 종족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 을 갑작스럽게 자각했다. 한 그릇의 물에도 두려움에 젖지만 맨손으 로 소의 머리를 뽑아낼 수 있는 자들. 이 기묘한 불균형. 비록 좋아 하는 예술 양식은 많이 다르지만 나가도 다른 종족들도 미학에 대해 서는 같은 관념을 공유한다. 균형은 아름답다. 불균형은 아름답지 않 다. 아름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혐오스럽고 때론 무섭다. 레콘에게는 극단의 나약함과 강인함이 공존한다. 그들은 무섭다. 루시닌은 말했다. "가치가 없겠군요." 쵸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루시닌은 물통을 들어 다시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이 결과에 만족해야 할지 그 렇지 않은지 알 수 없었다. 그 광경은 루시닌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 다. 하지만 병사들은 레콘에게 물을 뿌리고 미치는지 그렇지 않은지 실험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루시닌은 자존심 을 회복하려는 헛된 시도를 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군요. 이 손목의 빚을 갚아야 하는데, 갇혀있는 자를 괴롭힐 수는 없지요. 그를 추적하면서 빚을 갚을 수 있겠군요." 나가의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루시닌의 말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말에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하는 루시닌 자신의 의 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닌은 그만두고 물러나기로 했다. 그 는 소리 없이 손으로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은 빈 수레를 챙겨 물러났 다. 하지만 떠나는 방향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루시닌은 다리가 있는 방향으로 곧장 떠났다. 이레가 이미 다리를 찾아낸 이상 다리의 위치 를 감추기 위해 돌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루시닌과 빈 수레, 그리고 병사들이 떠난 것을 확인한 주테카는 조 심스럽게 쵸지의 앞으로 다가섰다. 쵸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수 교위가 떠난 방향을 노려보았다. 주테카가 말했다. "왕벼슬?" "주테카." "젠장. 누가 너에게 도와달라고 했어?" 쵸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테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가로저 었다. "아냐. 너 도와주려고 한 것 아냐. 나는 진짜 궁금해졌어." 쵸지가 허풍을 친 거라고 믿고 있었던 주테카는 기가 막히다는 눈으 로 쵸지를 바라보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것을 궁금해할 까닭이 있는가. 주테카는 쵸지의 위아래를 죽 훑어보고는, 다시 아래위를 훑 어보았다. 쵸지는 주테카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주테카. 난 안 미쳤어." "왕벼슬." 쵸지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실이 아쉽긴 하지만." "뭐?" "길은 있어. 분명히 있어. 이레가 떠난 길, 그리고 저 놈들이 떠난 길." "왕벼슬. 그건 길이 아냐." "미치면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약간만 미치면." 주테카는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그가 부정의 말을 하려 할 때 쵸지가 말했다. "주테카. 세상에 나늬가 있다고 믿어?" "나늬?" "저 바깥에 나늬가 있을까?" 쵸지는 그 질문을 준람에게도 했었다. 준람은 그것이 전설이라고 일 축했다. 하지만 정의를 사랑하는 동료의 의견은 달랐다. "있어." "있어? 어떻게 확신하지?" 주테카는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루시닌이 가져다놓은 수레로 다가갔 다. 언제나처럼 술병을 꺼낸 주테카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떻게는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필요 없어. 이봐. 세상이 완벽하게 정의로워질 거라고 내가 진짜 믿는 줄 알아? 그런 상태가 올 것 같아? 현실 감각이 전무한 몽상가 나 그런 걸 믿어. 하지만 나는 정의가 중요하다고 믿고, 그래서 그걸 추구하고 있어. 네가 대답해봐. 네게 나늬가 중요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면 네 나늬는 있어." 주테카는 술병을 단숨에 비웠다. 쵸지는 그 병이 비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주테카는 빈 술병을 휙 집어던지고는 투덜거렸다. "젠장. 쓸데없는 소리를 했더니 술맛도 별로군…… 응? 이봐. 뭐 해?" "뭐 하는 것처럼 보여?" 주테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쵸지가 갑자기 물통으로 다가가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주테카는 몸을 확 부풀렸다. 쵸지는 중얼거렸다. "나늬는 있어." 쵸지의 손이 물통으로 뻗어갔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3-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11 조회수 : 1070 피를 마시는 새 13. 비밀의 불씨 - 3 검푸른 저녁 하늘, 암적색 파도가 서쪽 하늘을 부드럽게 때린다. 화 끈 달아올랐던 공기 속으로 희미하지만 시원한 바람 줄기가 흐른다. 열대림이 사스락거림으로 밤의 재래를 예고하고 성급하게 떠오른 별 이 민망하게 반짝거리는 열대의 황혼이다. 이레는 무릎에 팔을 얹은 채 망고 군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군 단 사령부의 아름다운 건물들은 이레의 앞쪽 낮은 곳에 펼쳐져 있었 다. 비록 건물들은 군사적인 용도보다는 연회장으로 쓰이는 것이 적합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경계는 여느 병영과 마찬가지로 철저했다. 돌담이 나 목책들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소리가 나는 장치 들이 빽빽히 늘어서 있었다. 인간 초병들이 있기 때문이다. 높은 곳 의 감시탑에는 나가 감시병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열을 본다. 열 을 보는 나가와 소리를 듣는 인간이 함께 있을 경우 밤에도 높은 수 준의 경계망을 펼 수 있다. 이레는 밤이 깊어지면 나가 감시병들의 몸이 식을 거라는 점을 지적했지만 위츠는 그들이 몸이 식기 전에 교 대한다고 알려주었다. 하긴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한 마디로 소리와 체온을 한꺼번에 없애지 않고서는 잠입이 어려운 곳이다. 이레는 왜 자신이 이런 우직한 방법 밖에 선택할 수 없는지 안타까 웠다. '철통 같은 경계를 뚫고 몰래 잠입하여 목표물을 데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온다.' 낭만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사람이 있을지 는 모르지만 이레가 보기엔 구출 활동의 가장 한심하고 저급한 형태 다. 엄청난 현금을 일시에 투입하여 모든 감시자들을 매수한 다음 그 들이 직접 구출 대상을 데리고 오게 한다면 이레는 그것이 가장 화려 한 구출 작전이라고 평할 것이다. 구출의 목적은 결국 구출 대상에게 안전을 돌려주는 것이다. 자유가 아니다. 구출 받은 사람은 구출의 빚을 지게 되므로 자유롭지 못하다. 오직 안전이 중요하며, 그렇다면 가장 안전한 방법이 구출의 본질과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츠는 망고 군단 전체를 매수할 만한 현금을 동원할 수 없 었다. 그런 일은 자유무역당의 지테를 시야니 당주나 가능한 일일 것 이다. 그리고 필요한 몇몇 사람을 매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망고 군단의 보안 책임자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접촉을 예측하고 있을 테니까. 결국 이레는 가장 저급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대장군의 현 위치는 간단히 파악할 수 있었다. 대장군이 베 로시 토프탈 상장군에게 저지른 좀 몰상식한 폭행은 도저히 덮어둘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위츠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레는 즐거움을 느꼈다. 두억시니 상장군이 당한 봉변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가 즐거워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주님은 자기 소재를 알려주신 겁니다. 혹 있을지 모르는 구출을 대비하기 위해.' 위츠는 오 하듯 입술을 둥글게 말았다. '음. 죄수의 난동에 지나지 않는 일을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해석하 는 거 아니오?' '난동이지요. 하지만 저희 주인님이 난동을 부린다면 그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분풀이 삼아 그러지는 않으십니다. 그 분은 점잖으신 분입니다. 속상하시면 곡차를 드시고 목검이나 좀 휘두르시거나, 그 것도 여의치 않으시면 한숨을 내쉬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레는 신이 나서 말했지만 위츠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아래를 내 려다보았다. 이레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위츠가 대답했다. '글쎄. 나이를 먹으면 사람살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조금 보이 지. 내가 대장군이라면 정말 답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사람의 주변에서 그가 이런 사람이다, 저런 사람이다라는 말 이 많이 들릴수록 그 사람은 사는 것이 답답하지.' 대장군은 줏대 있는 사람이라고 반박하려던 이레는 갑자기 자신의 옛별명을 떠올렸다. 허수아비라는 별명은 그가 단 한 번 했던 일 때 문에 붙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레가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말한다. 대장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위츠는 그가 홧김에 그러했을 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레는 그 행동이 주도면밀한 계획 하 에 이루어진 영리한 구조 요청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어느 것이 사 실일까. 위츠가 말했다. '하긴 그런 것을 답답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으니 나처럼 빌빌거리 는 대신 젊은 나이에 황제의 대장군이 된 것이겠지. 그런 사람이 우 리 같은 범인하고 같겠소. 당신 말처럼 그 분은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 때문에 그 분이 계신 곳은 확실해졌소. 어떻게 하 시겠소?' '밧줄을 준비해주십시오.' 위츠가 준비해준 밧줄은 둥글게 말려 이레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이레는 혼자 들어갈 작정이었다. 이왕 저급한 수단을 쓴다면 피해는 최소화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시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엘시가 밧줄을 몸에 묶을 수도 없는 상태라면 누군가가 우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이레가 내려가면 끌어올려줄 사람이 없다. 위츠는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내놓았다. 이레의 상념 속으로 그 방법이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고 온 세레 지 파림이 이레를 보며 활기차게 말했다. "이레. 싸러 가자." "……내가 좀 여성적이긴 하지." "무슨 소리야?" "세레지. 난 남자야. 볼 일 보러 같이 가는 건 여자들의 특권이고." "네가 여성적이라면 무서워. 쳐들어가려면 몸 가볍게 해야 할 거 아 냐." 옳은 말이다. 이레는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 걸어 으슥한 수풀 속 에 들어가자 세레지는 별 거리낌 없이 허리띠를 풀고 쭈그려 앉았다. 이레는 정중하게 몸을 돌려 나무에 방뇨했다. 잠시 쏴 하는 시원한 소리의 이중창이 두 사람의 존재를 대변했다. 좀 실례였지만 이레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 리기 위해. 조금 후 이레는 몸을 돌렸다. 세레지는 바지끈을 묶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세레지는 이레가 서있던 자리로 돌아와 망고 군단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엔 태양의 항적이 반짝이고 있었고 잠입하기엔 너무 밝았다. 이 레는 일몰 직후를 잠입 시간으로 선택했다. 나가 감시병들의 몸이 아 직 따끈할 때를 굳이 선택한 것은 상대방의 의표를 찌른다는 의미도 있었고 망고 군단의 아름다운 석조 건물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실제적 인 이유도 있었다. 하루 동안 달궈진 돌 건축물들이 아직 뜨거울 때 그 열기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없 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밝았다. 세레지는 잡담을 늘어놓았다. "이레. 하늘누리 이야기 해봐. 시골 처녀 가슴에 바람 좀 불어넣어 보라고." "응? 시모그라쥬가 시골이야?" "하늘누리에 비하면 전부 시골이지." 의외로 정확한 표현이다. 하늘누리에 비교될 수 있는 도시는 지상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레는 하늘누리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었다. "거기는 젊은이들에겐 별로 재미 없는 도시야. 엄숙하고 진지하고 따분해. 술도가도 겨우 하나 들어와 있지. 술 익는 냄새를 맡고 싶어 몸살이 난 도깨비들이 몽화각에서 술을 빚자 애주가인 대신들이 극성 을 부려서 하나 생기게 된 거야. 정치에 관심이 많다면 무지무지하게 재미있는 곳이겠지만." "환상계단 이야기 좀 해봐." "아. 그게 있구나. 그건 처음 보면 정말 신기하지. 하지만 그건 어 떻다고 이야기해줄 수가 없어. 내가 만드는 건 네가 보지 못하고 네 가 만드는 것은 내가 보지 못하니까. 각자 자기 계단을 만드는 거지. 내가 이런 것을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싶어도 상대에게 보여줄 수가 없고…… 같은 환상계단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까 아 예 이야기를 하지 않아. 그래서 나도 그걸 이야기한다는 생각을 못했 어." "나는 그 이야기 들을 때마다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정말 아 무 것도 안 보여?" "자기가 만든 건 자기 눈에는 보여. 그러니까 밟고 다니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안 보이고?" "그렇지." "그게 헷갈린단 말이야.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계단을 상 상하면?" 이레는 놀라지 않았다. 환상계단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들은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레도 그러했다. "안 보여. 만약 보인다면 그건 네 설명을 듣고 다른 사람이 네가 밟 고 있는 계단을 상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건 네가 상상한 계단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상상한 계단이지. 그런 일이라도 일어나려면 설명 을 아주 잘 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내가 밟고 있는 계단을 본다면 그것은 내가 밟고 있는 계단을 상상한 그 사람의 계단라는 거지? 그리고나는 내가 밟고 있는 계단을 상상한 그 사람의 계단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마 그렇겠지?" "아마는 뭐야?" "미안. 네 말이 어지러워서 이해를 못했어." "뭐가 어지럽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내가 밟고 있는 계 단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는 계단으로 상상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 람은 내가 내가 상상한 계단을 밟고 있는 것을 상상한 것이고 그것은 내가 상상한 계단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상상한 내가 상상한 계단이니 까……" "용서해줘. 나는 어렸어. 원숭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어. 아버지와 둘이 살기 힘들었지?" "오빠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우리, 앞으로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 요." 이레와 세레지는 싱긋 웃었다. 세레지는 오른발을 높이 올려 발뒤꿈 치를 근처의 나무에 기댄 다음 가슴으로 무릎을 내리눌렀다. 몸을 푸 는 동작이었다. 이레가 질문했다. "비각술은 어떻게 배웠지?" "아빠 지키려고." "네 아버지는 정보만 모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원한 가진 사람이 습 격할 만큼 위험한 일은 아니잖아." "맞아. 그런데 아빠가 이름만 무시무시한 간첩이고 사실 양지 바른 곳에 앉아 동네 소식 모으는 할머니와 별로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비녀를 찰 수 있게 된 후였거든." 세레지는 오른발을 내리고 왼발을 올렸다. "그리고 배워두니까 써먹을 곳은 있더라. 시모그라쥬가 좀 험하잖 아.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건달이 아니라 진짜 전문가였다고 하던 데. 납치 전문가?" "응." "그게 무슨 일이야?" "글쎄…… 어떤 조직을 이끄는 부두목 쯤 되는 이가 경쟁 조직에게 납치당하면 그 사람들은 나를 찾아. 사실 그 부두목을 납치해서 경쟁 조직에게 넘겨준 것이 나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 부두목을 구해다주지. 양쪽으로 다 돈을 벌 수 있는 거지. 그런 식이야." "모르겠어. 그런 일을 특별히 잘하려면 무슨 능력이 필요한데?" "옛날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지금 나는 주인님의 몸종이 야." "하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옛날에 네가 하던 일이잖아. 도움 될 이야기 좀 듣자. 어떻게 하면……" "인생 포기하면 돼." 세레지는 정강이에 뺨을 댄 채 이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뒤끝이 안좋아. 보통 사람은 납치를 당하면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하지. 힘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 권위가 위험하기 때문에 꼭 보복을 해. 그 때문에 되도록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 지가 않아." "사람 마음이 어떤데?" 이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냥감에게 친절하기 어렵다는 거야. 상대를 얕잡아보게 되지. 이 자식아, 너는 내 손안에 있다. 이런 마음이 든다고. 아무리 친절하게 대하려고 해도 그런 속마음은 무의식 중에 드러나게 되지. 그리고 신 경이 곤두서 있는 사람은 그런 걸 쉽게 알아차려. 그래서 더 화가 나 서 복수하려고 하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어떤 미친 놈들은 구조를 해줘도 죽이려고 들지. 자기가 도움 받았 다는 사실이 창피하다는 거야. 할 만한 일이 못돼. 그러니 말종이나 그런 일을 하는 거지. 그리고 나는 말종이었어. 다른 재주는 필요없 어." "미안해. 괜히 물어본 것 같네." "괜찮아." 세레지는 왼발을 내렸다. 이레의 곁으로 다가온 세레지는 바닥에 앉 으며 짐짓 활기차게 말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어떻게 그런 말종이 대장군님의 몸종이 되었 어?" "내가 몸종이 되었을 땐 대장군님이 아니셨지." "어쨌든 백작님의 몸종이 된 것은 맞잖아. 어떻게?" "폐하께서 나를 주인님에게 선물하셨지." 세레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황제 폐하도 만나봤어?" "아니. 폐하께서는 나를 알지도 못하실 거야. 아, 지금은 혹 아실지 도 모르지만 그 때는 모르셨을 거야. 주인님이 쥐딤에서 큰 공훈을 세우신 직후 폐하께서 무슨 상을 바라냐고 하문하셨지. 그 때 주인님 은 연고 없는 죄수들 중에 모범적인 이가 있으면 하인으로 쓰겠다고 하셨어." "오, 근사하신 백작님이로군. 죄수 갱생을 맡겠다는 거 아냐." "뭐 그런 셈이지. 주인님이 맡게 된 죄수들 중 하나가 나였어. 사실 전부 칼리도로 데려갈 작정이셨겠지. 그 분은 전쟁이 끝났으니 고향 으로 돌아갈 생각이셨거든.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어. 그 후로 계 속 제국군에 매달려야 했거든. 우습게도 주인님이 받은 죄수들만 칼 리도로 가게 되었지. 하지만 나는 몸종이 되어 주인님 곁에 남았지." 해가 졌다. 빠르게 어둠이 내리는 것을 본 이레는 몸을 일으켰다. 세레지 또한 가벼운 동작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미리 파악해둔 우물의 위치에 가장 가까운 돌담으로 다가가며 엘시 는 감시탑의 위치를 살폈다. 우물이 있는 곳을 시야에 둘 수 있는 감 시탑은 하나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돌담의 모든 부분 은 최소 두 개 이상의 감시탑에서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넘 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레는 돌담을 바라보며 어떻게 들 키지 않고 넘어갈 것인지 고민했다. 그 때 세레지가 그의 어깨를 두 드렸다. "저기 좀 봐." 세레지는 손가락을 뻗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나무가 돌담 바깥에 있었다. 세레지는 그 나무의 가지 중 돌담 안쪽을 향해 뻗어 있는 커다란 가지를 가리켰다. 그 가지의 연장선상에는 마구간으로 쓰이는 것 같은 헛간이 있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본 이레는 세레지의 의도를 이해했다. "확실하지 않잖아." "거의 확실해." "일단 가보자." 그들은 몸을 낮춘 채 나무로 다가갔다. 나무에 도착하자 세레지는 아무 말 없이 나무를 기어올라갔다. 조금 전 가리켰던 나뭇가지에 올 라탄 세레지는 그곳에서 헛간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 안쪽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레지는 고민하지 않았 다. 그녀는 가지 위에 발을 조심스럽게 끌어올렸다. 커다란 부엉이 같았다. 용케 균형을 잡은 세레지는 앞쪽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그리 고 어느 순간 그녀의 몸이 앞으로 휙 뻗었다. 아마도 병사들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판단 하 에, 아니, 판단은커녕 상상도 못했기에 나무를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미터 쯤 되는 거리를 날아간 세레지는 마구간 창문으로 뛰 어들었다. 이레는 비명이 들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감시탑 쪽 에서 고함이나 종소리 같은 것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무 위로 올라갔다. 병사들의 생각이 옳았다. 쉬운 도전이 아니었다. 앞쪽에 보이는 창 문은 너무 작아 보였고 거리는 너무 멀었다. 하지만 세레지는 가능하 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레는 자신이 세레지보다 훨씬 무겁고 나가 감시병에게 포착될 가능성도 훨씬 크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빨리 가지 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레는 앞쪽의 창문을 향해 훌쩍 뛰었 다. 짧은 순간 동안 엄청난 후회를 한 끝에 이레는 건초 더미에 떨어졌 다. 세레지가 예상한 것처럼 그 창문 너머는 마구간 이층이었고 그곳에 는 건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미 일어나 있던 세레지는 손을 뻗 어 이레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아래쪽에서 말들이 뜻밖의 손님에 놀라 콧김을 툴툴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냄새나 소리로 느꼈을 것이 다.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찾기 위해 잠시 더듬거렸다. 조금 후 이레가 그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아래로 내려갔 다. 말들이 불안해 하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가늠한 다음 마구간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만약 문이 밖에서 잠겨 있다면 꽤 곤란할 테지만 이레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간 큰 말도둑이라도 군마를 훔치지는 않을 테고 급하게 출동 할 때를 대비해서 마구간 문은 열어둔다. 그의 예상대로 쪽문은 열려 있었다. 그들은 머리를 마주한 채 마구간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꽤 먼 곳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이 있 는 마구간에서 엘시가 갇혀 있는 우물까지는 대략 30미터 쯤 떨어져 있었다. 원래는 말들의 식수를 담당하는 우물이었던 모양이다. 마구 간과 우물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지만 곤란하게도 우물 주위 에는 네 명의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감시탑의 시야가 부족하 기에 보초병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레는 어떻게 그들을 조 용히 제거할지 고민했다. 이번에도 해결책을 찾아낸 것은 세레지였 다. 어디론가 달려간 세레지는 곧 안장 아래에 까는 담요를 들고 돌아왔 다. 웃옷을 걷어올린 세레지는 그 속에 담요를 쑤셔넣었다. 이레가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옷 아래 담요를 채워넣은 세레지는 똑바로 서서 불룩해진 배를 내밀었다. "어때?" "……애 아버지가 레콘이야?" "너무 불룩한가." 세레지는 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담요의 위치를 재조정했다. 그럭저 럭 만삭의 몸이 만들어지자 세레지는 쪽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비틀거리며 우물을 향해 뛰어갔다. 병사들은 깜짝 놀라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비틀거리며 달려간 세레 지는 그들이 '누구냐!' 같은 통상적인 말조차 외칠 기회를 주지 않았 다. "부위님을 찾아왔어요!" 병사들은 당황했다. 그들 중 선임자로 보이는 상전사가 말했다. "뭐?" "부위님이오! 부위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제발요. 그 사람이 여기 계신다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여긴 부위가 한두 명이 아닌데." "괜찮아요. 다 만나게 해주세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무리 많아도 저는 알아볼 수 있어요!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세레지는 배를 불쑥 내밀었다. 상전사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그리고 병사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킥킥거리는 병사를 본 세레지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건 정말 그 사람의 핏줄이에요! 확실해요. 날짜도 맞고 발놀림을 봐도 그 사람을 닮은 아들이 분명해요. 그 사람은 아들을 갖고 싶어 하셨다고요. 늘상 베갯머리에서 그 사람은……" 상전사는 간신히 자신의 당황을 옆으로 치워놓았다. "자, 잠깐만.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대에 숨어들 어오시면 안됩니다. 아니,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그 몸을 하고 들 어온 겁니까?" "만나주지 않잖아요! 이 애가 그걸 원해요.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한 다고요. 저는 알 수 있어요!" 어머니는 정말 강하구나 하는 아름다운 생각을 끝으로, 세레지의 말 을 꼬박꼬박 받아주던 상전사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웃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던 하전사들은 조금 늦게야 상전사의 모습에 반응했다. 무슨 일인가 하여 돌아보던 하전사의 얼굴에 큼직한 발이 날아들었 다. 병사는 데굴데굴 굴러갔다. 놀라서 칼자루를 뽑아든 두번째 하전 사는 끔찍한 모습에 숨을 멈췄다. 눈앞에 있던 임산부가 갑자기 몸을 옆으로 내던진 것이다. 하전사가 놀란 것은 이해하지만 바람직한 태 교의 측면에서 권장할 수 없는 동작이라는 뜻의 비명을 지르려 했을 때 임산부의 왼발이 그의 허리를 찼다. 그리고 거의 인식할 수 없는 순간이 지난 후 뒤따라온 오른발이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날카로운 휘몰차기다. 몸을 팽그르르 돌린 세레지가 똑바로 섰을 때 하전사는 얼굴이 뭉개져 뒤로 쓰러졌다. 이레와 세레지는 기습의 효과를 낭비하지 않았다. 네 명의 병사들은 채 반항 한 번 못해보고 혼절했다. 그들은 재빨리 근심스러운 얼굴 로 감시탑 쪽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가 감시 병들은 모두 바깥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레지는 병사들의 투구 를 거꾸로 씌웠고 이레는 그들의 손발을 재빨리 묶었다. 그들은 혹 감시탑 쪽에서 보더라도 의심을 사지 않도록 두 명의 병사들을 빼냈 다. 이레가 두 명의 병사들을 감시탑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놓 는 동안 세레지는 그들을 우물 주위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돌아온 이레는 홀쭉해진 세레지의 배를 보며 진지하게 질문했다. "파림 가문의 가풍은 다른 사람의 인생 가지고 이야기 만들기였냐?" "도움 되는 가풍이지." "무서운 가풍이야." 농담은 그 쯤 하기로 하고 이레는 우물 뚜껑을 붙잡았다. 꽤 무거운 것이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움직이느라 더욱 힘들었지만 이레는 그것을 들어올려 우물 옆에 내려놓았다. 세레지는 감탄했다. "힘 좋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이레가 뚜껑을 옮겨놓자 끔찍한 악취가 퍼져나왔다. 인간이든 나가 든 모두 알아차릴 수 있을 냄새에 이레는 조바심을 느꼈다. 그는 황 급히 우물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쪽은 캄캄했다. 이레는 조 심스럽게 말했다. "가주…… 주인님?" 대답은 없었다. 이레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지만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안쪽에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이레 는 세레지에게 숨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우물 안쪽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 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거칠고 불안정한 숨소리였다. 우물 안쪽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레는 세레지에게 안에 사 람이 있다는 손짓을 해보였다. 세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내려가지. 더 가벼우니까." "알았어. 잠깐. 여기 등롱이 있군." 이레는 병사들이 순찰할 때 쓰는 등롱을 집어들었다. 허리에 밧줄을 묶은 세레지는 손에 등롱을 들었다. 이레는 밧줄을 허리에 감고 팔뚝 에도 감고는 우물 바깥벽에 발을 받치고 몸을 뒤로 기울였다. 만약 감시탑 쪽에서 본다면 완전히 들통날 자세였다. 세레지 또한 그렇게 판단했기에 빠르게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세레지는 바닥을 몇 번 차고는 곧 아래쪽에 도달했다. 떨어지는 것 에 가까운 속도였다. 바닥에 선 세레지는 악취에 정신이 다 몽롱해지 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코와 입을 틀어막은 세레지는 등롱을 눈높이 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세레지는 호흡을 멈췄다. 후각이 아닌 시각적 충격 때문에. "이봐, 세레지? 어때?" 위에서 이레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세레지는 대답하 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우물 벽을 바라보았다. 벽 가득히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무수히 많은 사 람들에게 주시 당하는 기분을 느낀 세레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조 금 후에야 세레지는 그것이 벽에 그려진 그림임을 깨달았다. 하긴 진 짜 사람이라기엔 크기 차이가 너무 크다. 어떤 것은 실물대에 가까운 크기였지만 어떤 것은 조그마했다. 세레지는 등롱을 서서히 돌렸다. 그녀는 그림에 둘러싸여 있었다. 원형 벽화였다. 시작도 끝도 찾을 수 없는 그 그림 속에 인간과 레 콘, 도깨비, 나가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진지한 이 야기를 나누고 걷고 달리고 있었다. 그림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 또한 그림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기묘한 혼란 속에서 세레지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투박하고 거친 그림이었다. 조명이 시 원찮았기 때문에 선은 마구 어긋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모를 감 정이 절제 없이 표현된 그림이었다. 분변과 피와 땀과 침과 때로 그린 그림이었다.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낀 세레지는 황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위 쪽에서 다시 초조해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세레지?" "조금 기다려." 세레지는 힘겹게 등롱을 내렸다. 바닥을 살핀 세레지는 곧 웅크리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 이상한 모습 때문에 사람처럼 보 이지 않았다. 조금 후에야 세레지는 바닥과 닿은 우물 벽의 아랫부분 에 손을 댄 채 쓰러진 사람을 알아보았다. 세레지는 그가 엎드려서 그림의 아랫부분을 그리다가 그대로 잠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세레 지는 무릎을 구부렸다. 헝클어진 머리와 덮수룩한 수염 속에서 세레지는 겨우 사람의 눈 같 은 것을 찾아내었다. 차마 만지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세레지는 남자를 불렀다. "엘시 백작님?" 반응이 없었다. 세레지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갑자기 손을 내뻗어 그의 어깨를 찰싹 두드렸다. "엘시 백작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조금 후 남자가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남자 는 황급히 눈을 가렸다. 등롱의 빛이 그의 눈을 찔렀기 때문이다. 세 레지는 등롱을 옆으로 치웠다. 그녀가 사죄하려 했을 때 남자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소속은?" 세레지는 놀랐다. "세레지라고 합니다. 이레 달비와 함께 왔어요." "이레가 왔군. 그렇다면 조용히 나가야 하는 것이군." "예?" 되물었던 세레지는 곧 엘시의 추리를 짐작했다. 이레가 직접 내려오 지 않았다면 끌어올리기 위해 남았다는 뜻이고 그가 끌어올려야 한다 면 이것이 소규모의 비밀 작전이라는 뜻이 된다. 세레지는 고개를 끄 덕였다. "아, 예. 그래요. 백작님." 엘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세레지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군. 시력이 안 좋아졌나 봐. 밧줄을 내 손 에 쥐어줘야겠어." 세레지는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던 밧줄을 풀어 엘시에게 건넸다. 엘시는 그것을 몸에 묶으려 꿈틀거렸다. 하지만 손아귀에 힘이 제대 로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세레지는 묵묵히 엘시의 몸에 밧줄을 묶어주었다. 엘시가 말했다. "고맙다. 밧줄을 잡고 먼저 올라가거라." "먼저요?" "내 힘을 자신할 수 없군. 두 사람이 끌어올리는 편이 쉽겠지." 세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엘시가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 고는 알았다고 말했다. 밧줄을 붙잡으려던 세레지는 문득 생각난 것 처럼 등롱을 들어올려 벽화를 보았다. 뚫어지게 그것을 바라보던 세 레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밧줄을 움켜쥐었다. "이레. 올라갈게. 꽉 붙잡아. 하지만 당기지는 마. 반대쪽 끝을 백 작님에게 묶어놨어." 그리고 세레지는 밧줄을 타고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그 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꽉 잡아. 둘 다 끌어올릴 테니까." 세레지는 놀라서 위쪽을 쳐다보았다. 그 때 밧줄이 무서운 힘으로 끌어올려졌다. 세레지는 엉겁결에 밧줄에 매달렸다. 우물 가에 서있던 이레는 놀란 눈으로 갑자기 나타난 레콘을 바라보 았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레콘은 이레의 손에 있던 밧줄을 움켜쥐었다. 엉겁결에 밧줄을 뺏긴 이레는 레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 다. 그리고 이레는 레콘의 얼굴 옆으로 늘어진 커다란 벼슬을 발견했 다. "왕벼슬!" 쵸지는 고개를 돌려 이레에게 미소를 지어보였. 그 때 세 명의 레콘 이 더 나타났다. 고개를 돌린 이레는 주테카와 준람, 그리고 론솔피 의 모습을 확인했다. "빠져나왔군요!" 주테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따라와서 죽여보라며? 이제 죽은 목숨인데 기분이 어때?" 죽을 때가 되면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 모양이다. 이레는 더없이 즐 거운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레는 왜 감시탑 쪽이 조용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네 사람이 감시병들을 침묵시켰던 것이다. 그 것을 확인하려던 이레는 갑자기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네 사람 은 섬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이곳에 있다. 물이라고 말 할 뻔했던 이레는 가까스로 그것을 대명사로 바꿨다. "그걸 극복하셨습니까?" 세 레콘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밧줄을 끌어올리던 쵸지가 말했다. "아냐." "아니라고요?" "아냐." 밧줄을 쓱쓱 잡아당기며 쵸지는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주테카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 지 않았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쵸지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돌로 만 들어진 것마냥 생기 없이 움직인 그 손은 이제 물통 근처에 떠있었 다. 몇 센티미터만 더 움직이면 물통에 손이 닿을 것 같았다. 그 때 벽력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됐어! 왕벼슬, 주테카! 이리 와봐!" 쵸지는 깜짝 놀라 손을 끌어당겼다. 주테카는 기뻐하면서도 뭔지 모 를 아쉬움을 느꼈다. 쵸지는 멍한 표정으로 고함이 들려온 쪽을 바라 보았다. 그것은 론솔피의 외침이었다. 뒤이어 준람의 외침도 들려왔 다. "빨리 오지 않고 뭐해?" 주테카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쵸지의 어깨를 감싸쥐며 끌어당겼다. 급한 움직임 때문에 쵸지 는 몇 걸음 비틀거렸다. 주테카가 말했다. "빨리 가보자, 왕벼슬!" 쵸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채 달려 갔다. 그가 달려가는 모습을 본 주테카는 안도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물통이 있었다. 주테카는 물통을 향해 부리를 한 번 딱 부딪 쳐준 다음 쵸지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 쪽은 다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주테카는 론솔피와 준람이 왜 기 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그 다리가 물 위로 떠오르기라도 했나? 자신의 생각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을 때 주테카는 물가에 도달했다. 그리고 주테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어처구 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물 위로 떠올라 있었다. 정신없이 웃으며 주테카는 생각했다. 이게 환상계단인가? 생각한대 로 변하네? 하지만 겨우 웃음을 멈춘 주테카는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 다. 물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은 준람의 이동교였다. 준람은 자신 의 이동교 일부를 해체하여 수면 아래에 있는 돌다리 위에 얹어놓은 것이다. 그러자 그것은 나무 다리가 되었다. 물 위에 있는 나무 다리였다. 시커먼 것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론솔피였다. 론솔피는 다리를 밟지 는 않았다. 대신 그 위를 날아갔다. 이레의 말처럼 그들은 20미터 정 도는 손쉽게 뛸 수 있었다. 도약하는 공간 아래쪽에 무엇이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론솔피는 건너편에 내려서서는 주먹을 힘껏 들어올렸 다. "빠져나왔어! 젠장. 너무 쉬워서 화가 나네!" 이동교의 제작자인 준람도 자신의 다리를 밟지는 않았다. 그는 론솔 피처럼 앞으로 훌쩍 뛰었다. 다리 위를 붕 날아간 준람은 가볍게 땅 에 내려섰다. 나발칸의 레콘 준람은 점잖게 자신의 기쁨을 표현했다. "같은 바람이 불어도 이쪽의 냄새가 더 좋군." 주테카는 껄껄 웃었다. 두 사람을 따라 앞으로 뛰려던 주테카는 문 득 쵸지를 떠올렸다. 고개를 돌린 주테카는 쵸지의 커다란 벼슬을 보 았다. 그것은 주테카가 있는 쪽으로 늘어져 있었고 그래서 쵸지의 얼 굴을 조금 가리고 있었다. "어이, 왕벼슬?" 쵸지는 흠칫 하며 주테카를 돌아보았다. 주테카의 눈 속에서 자기 얼굴을 보던 쵸지는 웃으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주먹을 우두둑 우두 둑 꺾은 쵸지가 말했다. "가자, 주테카." 쵸지는 땅을 박찼다. 물 위로 힘차게 날아오른 쵸지는 앞의 두 레콘 처럼 건너편에 도달했다. 하지만 두 사람과 달리 쵸지는 그대로 달려 갔다. 준람과 론솔피는 당황하여 쵸지의 뒤를 따랐고 주테카도 물 위 를 건넜다. 세 사람이 쵸지를 따라잡았을 때 쵸지가 기운차게 외쳤 다. "어어이, 아직은 한 토막!" 쵸지의 앞쪽에는 조금 전 보급품을 가져다놓고 떠나던 루시닌 수교 위와 병사들이 있었다. 쵸지의 외침을 들은 루시닌은 황급히 뒤로 돌 았고 쵸지를 발견하자마자 온몸의 비늘을 부딪쳤다. 쵸지는 무도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쵸지는 두 손으로 무엇인가를 갈가리 찢는 시늉을 해 보이는 장난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두 토막, 세 토막, 네 토막……" 그 동작과 외침에 혼이 빠져버린 루시닌은 가지고 있던 소드락을 모 두 입에 털어넣어버렸다. 굉장한 속도로 도망치기는커녕 발작을 일으 켜 그 자리에 고꾸라지는 루시닌을 보며 쵸지는 약간의 미안함을 느 꼈다. 준람의 다리를 돌다리 위에 놓고 빠져나왔다는 주테카의 설명을 들 은 이레는 손뼉을 딱 쳤다. 이레는 준람에게 말했다. "당신의 다리가 쓸모 있었군요." "네가 그 다리를 찾아준 덕분이지." 이레는 그제서야 네 사람이 모두 자기 무기를 들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는 론솔피의 도끼창을 가리켰고 론솔피가 말했다. "아, 루시닌을 좀 협조적으로 만들어줬지. 술술 말하더군." 레콘들이 무기부터 찾은 후에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레는 그 사실에 섭섭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콘에게 무기가 얼 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냐 나중이냐 하는 것 이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때 황당한 표정을 한 세레지와 엘시가 우물 밖으로 끌려나왔다. 세레지는 밧줄을 놓고 우물 가장자리를 밟으며 가볍게 뛰어내려지만 엘시는 쵸지가 내려줄 때까지 밧줄 끝에서 대롱거렸다. 똑바로 서지 못한 엘시는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이레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엘시 에게 달려들었다. "가주님?" 엘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레는 그를 조심스럽게 돌려놓았다. 덥수 룩한 수염과 지저분한 머리, 그리고 피폐해진 주인의 얼굴을 본 이레 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엘시의 어깨를 붙잡았다. 엘시 가 눈을 떴다. "주인이다. 이레." 이레는 목이 메었다. "주인님……" "나를 좀 앉혀다오." 이레는 엘시를 부축하여 앉혔다. 엘시는 주위에 서있는 네 사람을 어렵게 돌아보았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어서 내 시력이 좀 좋지 않습니다. 준람과 론 솔피, 주테카, 왕벼슬인 것 같은데, 알아볼 수는 없군요. 와줘서 고 맙습니다." 긴장하고 있던 세레지는 엘시가 레콘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보고 는 안도했다. 준람이 말했다. "우리가 늦어서 눈이 상했군. 미안해." "아니오. 여러분은 내 마음의-" "침입자다!" 네 레콘과 세 인간은 얼빠진 얼굴로 외침이 들려온 곳을 보았다. 그 곳에는 이레가 기절시켰던 병사가 고함을 빽빽 지르고 있었다. 엘시 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뭔가 좀 묘하게 낭만적인 말이 된 것 같군. 도망갑시다." 다음 순간 엘시를 제외한 여섯 사람은 법석을 떨었다. 쵸지와 준람 이 동시에 엘시를 집어드느라 하마터면 엘시를 찌그러뜨릴 뻔했다. 론솔피는 주테카를 집어들어 비명을 지르는 병사에게 집어던졌다. 아 마 병사를 침묵시키기 위한 조처였겠지만 개미 잡으려고 아스화리탈 을 부른 격이다. 게다가 서두르느라 겨냥도 맞지 않았다. 주테카는 병사 옆의 벽을 뚫고 들어가버렸다. 기겁한 병사가 입을 다물긴 했지 만 건물 무너지는 소리는 병사의 외침 이상이었다. "이런, 젠장! 건 물 좀 조용히 못 부수나, 주테카!" 론솔피는 정말 뻔뻔한 레콘이라는 듯이 바라보는 세레지의 눈길을 무시한 채 외쳤다. 그 동안 쵸지와 준람 사이에서는 겨우 타협이 일어났다. 쵸지가 "네 무기는 쌍병이잖 아!" 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쵸지가 엘시를 어깨에 매었고 준람은 이레를 론솔피에게 던졌다. 세레지는 그 모습을 보더니 무너 진 벽 쪽으로 달려갔다. 잔해 속에서 주테카가 걸어나오자 세레지는 두 팔을 들어올렸다. "저를 집어들 사람은 당신인가 보네요. 잘 부탁 해요." 그렇게 쵸지가 엘시를, 론솔피가 이레를, 주테카가 세레지를 집어들자 준람이 쌍창을 서로 부딪치고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외쳤다. "내가 길을 열지!" 용감한 외침이었지만, 이레는 방향이 잘못되었다 고 말해주고 싶었다. 준람은 이레가 넘어왔던 담과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간 것이다. 가까운 곳에 담이 있다고 외치려 했지만 론솔피가 후 다닥 달렸기 때문에 이레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긴 네 명의 레콘 이 그들의 무기와 함께 있으니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셀 수교위는 그 많지 않은 사람에 포함되는 인물이 었다. 지셀 수교위는 침입이 일어난 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 마도 높은 확률로 대장군이 갇혀 있는 우물 쪽일 것이다. 그리고 뒤 이어 들려온 굉음을 듣자 지셀 수교위는 그런 소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레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갇혀 있던 레콘들이 어떤 방법으로 도망쳤거나 다른 레콘이 온 것이다. 지셀은 둘 중 어느 쪽이 옳을지 고민하는 대신 그들이 레콘이라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셀은 밤 동안 내려간 체온 때문에 밖으로 나와 침입자를 확인하기 는커녕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한 상태에서 고함을 질렀다. "저기 온다, 물을 뿌려라!" 그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들려온 엄청난 소음에 지셀은 자신의 행동 이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지셀의 외침을 들은 순간 준람은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살수관을 보 았다. 사실 그것은 살수관이 아니라 정원에 피어있던 양란이었고 준 람도 곧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 미 몸을 옆으로 날린 후였다. 준람은 흙벽을 부수고 건물 안으로 뛰 어들었다. 주테카의 어깨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세레지는 도와주러 온 것 같은 이 레콘들이 망고 군단에 대해 상당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와주러 온 건가? 엘시가 힘겹게 말했다. "긴장하지 말아요! 저건 그냥 질러보는 함성일 겁니다. 벌써 소화차 를 끌고 나왔을 리가 없습니다!" 레콘들은 엘시의 지적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두려움은 합리성이라는 친구를 소개받은 적이 없다. 주테카와 론솔피 가 달리던 기세를 잃고 주위를 불안하게 두리번거릴 때 엘시를 메고 있던 쵸지가 앞으로 나섰다. "가자. 엘시의 말이 맞을 거야. 준람!" 하지만 어느 군단에나 있는 노련한 교위들은 망고 군단에도 있었다. 나가인 지셀이 벌써 일어났을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교위들은 지 셀의 의도를 눈치 챘다. 곧 여러 곳에서 물을 뿌리라거나 물통을 뒤 엎으라거나 소화차를 굴려버리라는 등의 외침들이 들려왔다. 앞으로 나서던 쵸지도 당혹하여 걸음을 멈췄다. 쵸지는 커다란 벼슬을 꼿꼿 이 세웠다. 그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늬는 있어.' 하지만 그 순간 상상력이 풍부한 어느 교위가 물독을 깨트렸다. 물독 깨지는 소리에 쵸지의 발이 다시 멈췄다. 그 때 검은 레콘이 더 난폭하다는 속설의 신봉자가 보면 좋아할 일이 벌어졌다. 이레를 떠메고 있던 론솔피는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다가 도끼창에 부 리를 부딪혔다. 그 순간 론솔피는 자신에 대해 분노했고, 곧 그 분노 를 외부로 돌렸다.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말장난으로 레콘을 이길 작정이냐!" 론솔피가 위로 거세게 뛰어올랐다. 론솔피의 어깨에 있던 이레는 숨이 턱 막혔다. 까마득한 높이로 솟 아오른 론솔피는 도끼창을 옆으로 휙 뿌렸다. 지지점이 없는 공중에 서 론솔피는 도끼창의 무게를 평형추 삼아 자신을 회전시켰다. 그렇 게 론솔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별로 없었 다. 하지만 론솔피는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 각하기로 했다. 그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 론 솔피가 외쳤다. "아무 것도 없다! 바보들아, 달려!" 무너진 건물에서 뛰쳐나오던 준람은 자신의 앞을 휙 지나치는 론솔 피를 보았다. 그 뒤를 따라 쵸지와 주테카도 달렸다. 세 사람의 거침 없는 달리기를 본 준람은 기세 좋게 몸을 부풀렸다. 흙먼지를 날려보 낸 준람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한 후였다. 그리고 망고 군단 의 대비는 충분했다. 맹렬히 달려가던 론솔피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쿠르르 하는 소리를 들었다. 수레바퀴 소리였다. 그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누군가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론솔피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앞쪽에 있던 단층 건물을 뛰어넘었다. 그것이 앞을 막고 있었기 때문 에 뛴 것이지만 그 때문에 론솔피는 곧장 부대 정문에 도달하게 되었 다. 정문을 확인한 론솔피는 환호를 내질렀다. 그곳에는 공포에 질린 몇몇 제국병들이 있었지만 그 제국병들은 론솔피가 멈춰서서 상황을 고려하게 할 만한 요소는 아니었다. 론솔피는 정문으로 성큼성큼 걸 어갔다. 동시에 정문 바깥으로부터 소화차들이 굴러들어왔다. 론솔피가 우뚝 멈춰섰다. 그를 따라 건물을 뛰어넘은 세 레콘도 소 화차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소화차를 담 안쪽에 둘 경우 밖으로 물을 쏘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베로시 토프탈은 부대 바깥에 두 대의 소 화차를 배치하고 그것을 위장해두었다. 그 소화차들이 부대 안쪽의 소란을 듣고 급히 이동하는 것이었다. 레콘들이 멈춰서는 것을 본 제국병들은 재빨리 소화차에 접근했다. 소화차 위에서는 드센 병사들이 이를 악문 채 살수관을 내밀고 있었 다. 레콘들은 재빨리 좌우를 돌아보았다. 고무적인 광경은 보이지 않 았다. 부대 안쪽에 있던 소화차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모습 은 어쨌든 고무적이라고 할 수 없다. 키보렌 유료도로에서 겪었던 일 의 재현이었다. 론솔피는 억울함과 분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 다. 똑같은 일을 두 번 당할 수는 없다. 이레가 그의 어깨에서 떨어져내렸다. 화를 내고 있던 론솔피는 조금 후에야 이레가 떨어진 것을 깨달았 다. 이레는 바닥에 서서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소화차들을 상대해보겠습니다." "네가? 맨손으로?" "다른 방법이 없잖습니까. 우물쭈물하다간 완전히 포위됩니다. 어떻 게든 그걸 뿌리는 것은 막아보겠습니다. 그 사이에 도망치십시오. 주 인님을 부탁합니다." "이레." "괜찮습니다. 저도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감시탑을 처 리해줘서 화살은 날아오지 않습니다. 칼싸움이라면……" "뭐? 감시탑은 네가 처리했잖아?" 이레는 어리둥절하여 론솔피를 돌아보았다. 론솔피 또한 이상한 것 을 느끼고는 높이 솟아있는 감시탑들을 바라보았다. 부대 내에서 소 동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감시탑은 고요했다. 그곳에 있는 감시병들이 누군가에 의해 공격당해서 침묵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레는 의아하여 말했다. "당신들이 한 것 아닙니까?" "아냐. 감시탑은 비어있던데." "예?" "달려오다가 잠깐 봤어. 모두 비어있었어. 그래서 우리는 네가 들어 와있다고 생각했는데." 레콘들은 눈이 좋다. 희미한 빛이 있다면 먼 곳에서도 감시탑 내부 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레는 론솔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았다. "여기에 우리 외에 다른 자들이 있다는 겁니까? 그럼 누구……!" 이레는 말을 삼키고는 경악한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론솔피 는 이레의 시선을 쫓았다. 이레가 보고 있는 것은 감시탑이었다. 새파란 달빛이 떨어지는 감시탑 위에 무엇인가가 서있었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 니었다. 그런 그림자를 떨어뜨리는 동물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 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날개인지 뒷다리인지 꼬리인지 알 수 없는 것 을 기운차게 움직이며 그것은 자신의 생명성을 공고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우렁차게 외쳤다. "행복은 불타는 이단옆차기-!" 론솔피는 펄쩍 뛸 뻔했다. 주테카는 괴상한 소리를 냈고 준람은 휘 청하다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리고 쵸지는 부리를 쩍 벌렸다. 세레지와 이레도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로 감시탑을 바라보았다. 소화차들을 끌고 오던 병사들 또한 깜짝 놀라서, 그리고 황당해 하며 감시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감시탑 위에서 꿈틀거리는 기묘한 존재 에 다시 놀랐다. 외침의 여운이 사라질 무렵 다른 감시탑 쪽에서도 기괴한 외침들이 들려왔다. "흥미로운 거미줄의 어금니!" "동쪽이 세 개! 우, 송아지! 늦가을은 빨래집게의 맹장을 따라!" 감시탑마다 기괴한 존재들이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 달 랐다. 그리고 모두 기묘했다. 이치에 맞지 않고 상황에 맞지 않고, 어쨌든 총체적으로 불합리한 외침들은 사람들의 넋을 빼버렸다. 그 때 쵸지의 어깨에 있던 엘시가 충격 때문에 약간 날카로워진 목소리 로 속삭였다. "저것이 뭔지 알 것 같군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저것은……" 엘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의 경악에 찬 비명 - 혹은 전문가의 진단 - 이 대장군의 말을 덮었다. "두억시니!"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3-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12 조회수 : 2227 피를 마시는 새 13. 비밀의 불씨 - 4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몸이 둘로 나뉘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 의 상반신은 희열을, 그리고 하반신은 공포를 느꼈다. 제대로 옷이나 갑옷도 갖춰 입지 못한 상태에서 칼만 들고 나온 베 로시 토프탈은 달빛 찬란한 열대의 밤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감시탑 위, 그리고 지붕과 담 위에 그것들이 있었다. 두억시니였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에 두억시니였다. 무엇 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두억시니였다.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두억시니였다. 그 순간 베로시는 자신이 평범한 인물임을 깨달았다. 범용한 자의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는 말은 아니다. 제국군 계급에 공짜는 없고, 상장군의 재목이 아닌 자에게 상장군의 계급은 주어지 지 않는다. 상장군 베로시 토프탈이 깨달은 자신의 평범함은 두억시 니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거부감을 느꼈다. 놀라운 일이었다. 베로시는 그런 자신에 대해 슬픔마저 느꼈다. 두 억시니에 대한 열렬한 애호로 두억시니 장군이라는 별호까지 얻은 그 녀가 예고 없이 나타난 두억시니에 대해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은 슬프고 억울한 일이었다. 왜 하필 지금이고 이곳인가. 베로시는 조건을 탓해보았다. 대장군이 있는 장소에서는 안돼. 만족감은 느껴 지지 않았다. 그러나 할 일은 떠올랐다. "두억시니는 내버려둔 채 침입자들을 잡아!" 부하 장병들에게 명령하며 베로시 또한 자신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누군지도 모를 병사가 말을 끌고 왔고 베로시는 그 위에 뛰어올랐다. 그녀는 말을 몰아 부대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말발굽의 굉음은 최면 상태에 빠져있던 병사들을 일깨웠다. 망고 군단의 장병들은 말발굽 소리를 따라 달렸다. 어쨌든 그곳은 군단 사령부였고 얼마 있지 않아 발소리는 수천 배로 늘어났다. 말을 달리던 베로시는 가까이 다가온 작전 참모를 보고 외쳤다. "군단장으로부터 2, 4 대대에 명령! 전투 태세로 출동이다. 2대대, 펠데그! 4대대, 키보렌 유로도로 시모그라쥬 징수소! 거기로 출동해 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고 해!" 작전 참모는 경례도 생략한 채 달려갔다. 베로시는 또다른 장교를 보았다. 그녀는 상대의 이름이 무엇인지, 직책이 무엇인지도 확인하 지 않은 채 생각나는 대로 외쳤다. "시모그라쥬공에게 시모그라쥬를 봉쇄하라고 연락해라!" 정문으로 달려가면서 베로시는 그런 식으로 장교를 볼 때마다 명령 을 내렸다. 혼란에 빠져 제멋대로 외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시 모그라쥬 주변을 촉발경계 태세로 만들어놓는 명령들이었다. 상장군 의 처신이었다. 전투는 수교위나 교위들이 맡아야 하는 것이다. 상장 군은 수교위나 교위가 그러지 못할 때 엄벌을 내릴 뿐이다. 망고 군단의 수교위와 교위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억류되 어 있던 대장군이 부대에서 빠져나갈 경우 향후 정국에 미치게 될 영 향을 가늠하거나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저지선을 펼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았다. 지셀 수교위는 비로소 목격하게 된 네 명의 레콘 과 세 인간을 현위치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 고 병력을 배치했다. 창을 꼬나든 경비대 병사들이 통로들을 막았다. 장애물도 설치되었다. 수레와 의자와 탁자 등이 쌓인 것이 아니라 급 히 가져온 물동이나 물그릇, 물주전자 등이 병사들 앞에 죽 늘어섰 다. 그리고 더 많은 용기들이 서둘러 운반되었다. 정문에 도달한 베로시가 본 것은 일곱 사람이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광경이었다. 그 주변에는 수천 명의 병사들과 충분한 물이 에워싸고 있었다. 베로시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두억시니들이 어떻게 되었는 지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두억시니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위쪽에서 거대한 무엇이 무서운 기세로 떨어졌다. 꽈광 하는 소리에 땅이 내려앉을 것 같다. 말이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베로시는 결사적 으로 고삐에 매달려야 했다. 병사들은 비명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위 에서 떨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의 시선 속에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그것이 몸을 폈다. 몸을 펴자 그것은 레콘과 같은 크기였다. 그 리고…… 괴상했다. 그것은 두 다리와 두 팔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상당히 정상 적으로 - 두억시니의 정상은 아니다. 두억시니에겐 정상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선민 종족과 비슷하다는 의미다. - 보였다. 하지만 그 외 의 나머지는 완전히 두억시니적이었다. 그 두억시니의 두 무릎은 뒤 로 꺾여 있었다. 다리 끝에 있는 발에는 불가사리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는 발가락들이 있었다. 두 팔 끝에는 손 대신 덮수룩한 수염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왼팔 끝에 붙어있어야 할 왼손은 엉뚱하게도 사타 구니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팔 끝에 붙어있어야 할 오른손은 어 깨 중간, 그러니까 보통은 머리가 붙어 있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오 른손에게 자리를 뺏긴 머리가 어느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 두억시 니에겐 머리가 두 개 있었으니까. 왼쪽 어깨에 붙어있는 머리가 베로시를 보며 말했다. "여자 인간." 그러자 오른쪽 어깨에 붙어있는 머리가 말했다. "인간 여자." 두 머리는 터무니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머리는 고함을 질렀다. "여자 인간!" "인간 여자!" 제국 신민들에겐 전설적인 모습이다. 론솔피는 숨 넘어가는 표정으 로 주테카에게 속삭였다. "이런 세상에! 저게 뭔지 알 것 같아. 너도 알지?" "갈바마리지? 그래. 저건 진짜 대호왕의 갈바마리야!" 주테카 또한 눈은 부릅뜨고 부리는 최대한 붙인 채 속삭였다. 그들 거친 두 레콘도 느닷없이 나타난 이 과거의 권세 앞에서는 자신도 모 르게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하늘누리의 대로에 그 이름을 남 겨놓은 두억시니. 위대한 두억시니라는 어쩐지 꽤나 모순적으로 들리 는 호칭의 주인. 대호왕을 지키던 스물 두 두억시니의 우두머리 갈바 마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두억시니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눈이 좋고 시야가 높은 레콘이 조금 유리했다. 준람은 순식간에 두 억시니들의 숫자를 셌다. 좀 기묘했다. 그가 파악한 숫자는 스물 셋 이었다. 하지만 이 두억시니들이 정말 대호왕의 이십이금군이라면 그 숫자는 스물 둘이어야 한다. 준람은 다시 세어보았다. 마치 레콘처럼 생긴 것까지 포함하여 그 숫자는 스물 셋이 분명…… 레콘처럼 생긴 것? "너-는-!" 레콘과 인간, 그리고 나가들은 소스라치듯 놀라 준람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서 준람이 빳빳하게 세운 벼슬과 부리로 방향을 가르쳐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쪽을 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둘러 선 병사들의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큼직한 머리가 다가오고 있 었다. 그 머리 아래쪽에는 검고 거대한 몸이 있었다. 엘시가 신음을 흘렸다. "지멘." 황제사냥꾼 지멘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제국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좌우로 벌어졌 다. 지멘은 병사들 사이를 뚜벅뚜벅 걸었다. 좌우로 벌려선 병사들의 가장 앞줄에 있던 병사들은 자신의 코앞을 지나가는 그 거대한 몸에 생침을 삼켜야 했다. 병사들 사이를 빠져나온 지멘은 그들이 만들고 있던 공터에 들어섰 다. 그곳에는 네 명의 레콘과 세 인간, 그리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두억시니가 있었다. 지멘은 네 레콘들을 죽 둘러보고는 눈높이를 조 금 낮춰 인간들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을 빠르게 지나쳤던 지멘의 눈 은 엘시의 얼굴에서 조금 지체했다. 엘시는 지멘의 눈길을 해석할 수 없었다. 지멘은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을 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멘이 엘시의 얼굴에서 눈을 뗐다. 그는 자신과 싸우고 있는 갈바 마리에게 말했다. "둘 다." 갈바마리는 몸을 돌렸다. 삐거덕 하는 소리가 났다. 그의 몸 곳곳에 는 금속 부착물들이 붙어 있었다. 몸에 붙어있어서 얼핏 보면 갑옷처 럼 여겨지지만 자세히 보면 무기로도 생각되는 그 물건들은 그 옛날 도깨비 대장장이들이 이십이금군을 위해 만들어준 것이다. 정교한 솜 씨로 제작된 것이지만 세월의 얼룩이 묻어 군데군데 녹슬거나 마모되 어 있었다. 하지만 초라해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갈바마리가 어깨에 지고 있는 아라짓 제국의 역사를 드러내는 흔적이었다. 지멘이 다시 말했다. "둘 다." 오른쪽 머리가 지멘의 말을 따라했다. "둘 다." 지멘은 재빨리 왼쪽 머리 쪽을 향해 말했다. "맞아." 왼쪽 머리가 따라했다. "맞아." 지멘은 부리를 닫았다. 갈바마리의 두 머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말했 다. "둘 다." "맞아." "둘 다." "맞아." 갈바마리는 싸움을 멈췄다. 엘시는 경이에 휩싸여 지멘을 바라보았 다. 그것 또한 전설의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전설에는 거대한 크기 의 검은 레콘 대신 우아한 나가 여인이 있었다. 난폭한 갈바마리를 달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호왕뿐이었다고 한다. 엘시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무거웠지만 엘 시는 혼란을 뿌리치며 생각했다. 지멘은 하텐그라쥬로 향하고 있었고 하텐그라쥬에는 사모 페이가 있다. 그리고 갈바마리와 두억시니 금군 들은 사모 페이의 수호자들이다. 그들은 황제의 수호자가 아니라 사 모 페이의 수호자였기에 사모가 왕위를 떠났을 때 그녀와 함께 사라 졌다. 엘시는 지멘이 대호왕을 해치고 두억시니들을 포섭했을 가능성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능성이 없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갈바마리는 지멘을 공격했을 것이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갈바 마리와 두억시니들은 그 때문에 배신도 모른다. 대호왕의 의지를 위 장하여 그들을 속이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지멘이 그럴 것 같 지는 않다. 그렇다면 지멘과 두억시니들이 함께 행동하는 것의 이면 에는 대호왕의 의지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엘시는 대호 왕의 이름을 거론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지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주테카가 말했다. "어, 지멘. 어떻게 네가 대호왕의 두억시니들과 함께 있는 거지?" 모든 사람이 기대하던 질문이었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던 사람들 의 시선이 모두 지멘에게 집중되었다. 지멘은 주테카를 바라보다가 다시 엘시를 보았다. 조금 전 엘시를 향하던 그 이상한 눈길이 다시 나타났다. 지멘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태도로 말했다. "키보렌의 어두운 밀림을 걷던 중, 홀연히 나타난 안개 속에서 꿈인 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을 방황하다가 나는 대호왕과 마주쳤 다." 아마도 가풍 탓이겠지만 세레지는 지멘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쉽 게 파악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그 지나치게 현란한 서두 가 꾸며낸 것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군단이 발칵 뒤집히고 네 명의 레콘이 난동을 부리고 키보렌의 밤하늘에서 전설이 느닷없이 떨어져 고함을 지를 경우에는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 이 당연하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지멘의 말을 경청했다. 세레지는 그 들 대부분이 지멘의 말을 믿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수만 명을 속여 넘길 이야기를 꾸며내는 지멘을 보며 세레지는 아빠가 보면 정말 좋 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멘의 말이 계속되었다. "나는 니름을 들었다." "뭐?" 론솔피와 주테카가 동시에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어이가 없다는 표 정을 지었지만 세레지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전문가로서 세레 지는 거짓말은 어처구니 없는 것일수록 더 잘 받아들여진다는 거짓말 의 기본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세레지의 예상대로 지멘이 니름을 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청중들은 지멘에게 완 전히 몰입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호왕이 하는 니름을 들을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 대호왕은 내게 황제의 대장군을 구출하라고 닐렀다. 내가 그들이 사용하는 어떤 액체가 두렵다고 말하자 대호왕 은 이들을 소환하여 나를 돕게 하셨다. 그래서 함께 오게 된 것이 다." 지멘은 엘시에게 척척 다가갔다. 엘시의 곁에 있던 쵸지는 긴장했 다. 지멘은 쵸지가 적대적으로 바뀌지 않을 거리에 멈춰서서 엘시를 가리켰다. 그는 아마도 심판을 내리는 듯한 단호한 동작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레지가 보기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고 누 군가가 가르쳐준 것을 엉성하게 되풀이하는 것이 분명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지멘을 바라보았다. 지멘이 말했다. "들어라. 나는 대장군과 그 일행을 데리고 이곳을 나갈 것이다. 그 것은 대호왕의 뜻이다. 이곳에 있는 위대한 갈바마리와 두억시니들이 그 증거다. 따라서 나와 대장군을 방해하는 자는 세세손손 대호왕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세레지는 갈바마리에게도 배역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갈바마리는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지멘의 말을 반복했다. "대호왕의!" "저주를!" 두억시니와 권위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짝이지만, 제국 전체를 통 틀어서 지금 갈바마리가 내뿜고 있는 것 같은 권위를 흉내낼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우스꽝스럽고 거친 외침은 대호왕의 갈 바마리가 내뿜는 선언이었다. 병사들은 하얗게 질렸고 혹 엘시 일행 에게 손끝이라도 닿으면 당장 그 부분이 시커멓게 타들어갈 거라는 식으로 행동했다. 망고 군단의 지휘자들은 몸을 뒤로 밀어대는 병사 들을 보며 제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멘이 말했다. "정문을 비워라." 정문에 있던 소화차들과 병사들이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엘시는 어 두운 표정으로 지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갑시다." 엘시가 먼저 걸음을 뗐다. 이레가 그에게 다가와 부축했고 세레지 또한 반대편에 섰다. 네 레콘들은 엘시의 전후좌우에 섰다. 그들이 정문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배신자!"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베로시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고 개를 돌린 베로시는 아쉬존 토프탈을 발견했다. 그 어린 소년은 손을 마구 흔들었다. 지멘을 가리키려는 것이었지만 통제가 잘 안되는 것 같았다. 소년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배신자! 당신이 배신을……" "닥쳐라, 아쉬존!" 베로시의 외침에 아쉬존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베로시는 갑자 기 아쉬존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흥분한 소년이 토프탈 가문의 위엄을 더럽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계획 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가위와 감투의 연합은 이 미 엘시 에더리에게 간파되었다. 엘시를 유인하여 남쪽으로 끌고 왔 던 지멘이 엘시를 도로 구출해가겠다는 것은 분명히 놀랄 일이었지만 어차피 엘시에겐 시간이 없다. 발케네공과 황제 사이의 전쟁은 시작 되었고 엘시가 쇠약한 몸을 이끌고 제국을 종단할 때 쯤이면 전쟁은 끝날 것이다. 지금은 위엄을 지켜야할 때였다. 베로시는 말을 몰아 아쉬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 옆으로 상체를 기울여 팔뚝으로 아 쉬존의 목을 감쌌다. 비틀거리며 반항하는 아쉬존을 가까이 끌어온 베로시는 그 귀에 대고 속삭였다. "토프탈 가문은 배신당했다고 칭얼거리지 않는다! 여기엔 목격담을 남길 수많은 병사들이 있다. 당당하고 냉혹하고 무자비한 것은 좋지 만 칭얼거리는 것은 절대 안돼!" "하, 하지만 종고모님. 저 신의도 없는 레콘이……" "멍청한 놈. 네가 지금 수백 마디의 말을 떠든다 해도 그 말 때문에 지멘의 깃털 하나라도 빠지는 것은 아니다. 네가 아무리 옳다 해도 힘 없는 자의 불평밖에 되지 않는다. 분풀이는 이럴 때 하는 것이 아 니다. 상대의 손발을 다 끊어놓고 꼼짝할 수 없을 때 하는 거다." 베로시는 아쉬존의 목을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녀는 이마 를 맞부딪힌 채 말했다. "지금이 무슨 때인지 아느냐? 소년이 더 이상 소년으로 있을 수 없 는 시대가 시작되는 때다. 억울하다고 칭얼거리는 소년 대신 칼을 들 고 나서는 남자가 필요하다. 그 외에는 다 죽을 거다. 절대로 정의를 말하지 마라! 정의는 그것이 자기 발도 묶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의 도구다. 칼을 들고 큰 소리로 말해라!" 베로시는 아쉬존을 놓아주었다. 아쉬존은 눈을 껌뻑거리며 종고모를 바라보았지만 베로시는 그에게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안 장 위에 똑바로 앉은 베로시는 엘시를 향해 말했다. "가십시오. 대장군님." 엘시는 날카로운 눈으로 베로시를 응시했다. "가서 폭군의 파멸을 보십시오. 당신은 황제의 대장군이니까요." 엘시는 베로시의 대담함과 교활함에 마음 속으로 씁쓸한 찬사를 보 내었다. 황제의 병사들인 제국병 앞에서 하는 발언이다. 놀라운 배짱 이다. 병사들은 놀랍다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는 충격을 받 았다. 그리고 아쉬존은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거부의 외침을 말하지 않 는 것을 보고는 종고모의 말을 이해했다. 바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 는 것이 아니다. 단호하게 말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베로 시 토프탈이 대담하게 황제를 부정한 순간 망고 군단의 병사들은 자 신이 반역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치천제가 폭군임을 받아들이 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소년이 지혜로운 자의 조용한 말보다는 권위 있는 자의 큰 목소리를 따르는 사람의 특징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 소년의 변화를 감상하고 있을 만큼 여유로운 관 찰자는 없었다. "잘된 일입니다. 황제가 없다면 황제의 대장군도 필요 없습니다. 폭 군 대신 당신이 창피를 당할 필요는 없지요. 자기가 싼 똥이나 뭉개 고 있는 대신 어서 달려가서 폭군의 종말을 지키십시오. 역사는 당신 을 멋진 패배자로 기억해줄 겁니다. 나는 그러기 어렵겠지만." 엘시는 부축하던 이레를 밀어내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 기엔 몸이 너무 쇠약했다. 엘시는 어쩔 수 없이 이레의 팔에 매달려 말했다. "폐하께서 왜 폭군인가." "위대하신 선황께서는 제국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을 물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둥과 벽에 매일 피가 마르지 않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 까? 누가 매일 무고한 자의 피를 짜내어 제국을 치장하고 있습니까?" "폐하께서 무슨 피를 그토록 받아내었다는 건가." 베로시는 엄하게 말했다. "당신도 폭군과 마찬가지군요! 하긴 그러니 대장군이 될 수 있었겠 지요. 당신 자신이 한 일도 편리하게 망각하는군요. 북부에서 사라진 왕을 대신하여 수백년 간 왕의 땅을 지켰던 규리하 가문이 누구의 손 에 파괴되었습니까! 선황을 위해 죽은 채 싸웠던 충의공께서 이 사실 을 아신다면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실 겁니다!" "아이저 규리하는 폐하께 공공연히 반항했다." "사람이기에 그러신 겁니다! 그 분은 사람다워질 수 있는 길을 선택 하셨습니다. 고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여 제국 신민을 개돼지 취급 하는 폭군에 사람으로서 대항하신 겁니다!" 엘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다시 베로시를 바라보았다. 그 때 그의 시력에 약간 회복되며 엘시는 베로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 다.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베로시의 두 눈은 똑똑히 보였다. 그 눈을 들여다보던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했다. "가자, 이레." 이레와 세레지는 엘시를 부축하여 정문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네 레콘도 그들을 호위하며 걸어갔다. 뒤쪽에 있던 지멘은 그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멘은 베로시를 잠깐 돌아보았다. 베로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 다. 지멘은 부리 끝을 한 번 부딪치고는 발을 뗐다. "갈바마리. 가자." 갈바마리는 뜻없는 짧은 외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감시탑 쪽에서 괴 성이 들려왔다. 병사들은 저마다 기겁하여 감시탑 쪽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향해 괴성을 지르던 두억시니들은 감시탑에서 내려왔다. 어 떤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동작으로 기둥을 붙잡고 내려왔고 어떤 것 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훌쩍 뛰어내렸다. 나는 것과 비슷하게 보이는 동작으로 내려서는 것도 있었다. 잠시 후 두억시니들이 모두 사라졌 다. 그리고 병사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멘과 갈바마리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베로시는 말고삐를 붙잡은 채 똑바로 앉아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쉬존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베로시는 고개를 돌려 어린 종조카를 바라보았다. 아쉬존이 속삭였다. "종고모님. 제게 정의를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왜 종고모님께서는……" 아쉬존은 말끝을 침과 함께 삼켰다. 토프탈 가문의 어린 소년은 종 고모의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그는 눈으로 질문했다. 황제가 폭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아쉬존은 불과 몇 분의 시간 동안 자신이 몇 번씩이나 바뀌는 것 같 다고 생각했다. 베로시는 말 옆으로 손을 뻗어 아쉬존의 어깨를 붙잡 았다. 불과 피의 시대가 올 것이다. 행복한 소년은 도태된다. 베로시는 똑바로 일어섰다. 망고 군단의 장병들이 혼란의 여운 속에 서 침묵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로시가 그들에게 정체를 주 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베로시는 그들에게 폭군에 대항하여 일어선 정의로운 병사라는 정체 를 주었다. 단호한 연설이었다. 계곡의 머리 위로는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늘은 이미 투명 하다. 위츠는 마차가 있는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차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모그라쥬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남은 것은 마차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필요 없거나 다시 구입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남겨두고 왔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위츠는 그러지 않았다. 언젠가 겪을 일이라고 믿어왔고 실 제로 겪게 되자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해서 좀 우스꽝스러웠다. 그의 곁에 서있던 세레지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아빠. 우리 정말 시모그라쥬를 떠나는 것 맞아?" "응. 맞아." "이럴 때는 섭섭해하고 아쉬워하고 해야 하는 거지? 그런데 나는 그 런 기분이 안 드네. 소풍 떠나는 것 같아." "그러면 계속 그렇게 생각하자. 그 편이 재미있잖아?" "에이, 그게 뭐야." 세레지는 헛웃음을 지었다. 위츠는 다가오고 있는 두억시니들을 바 라보았다. 두억시니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동작을 취하며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긴 두억시니들에게 이유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들의 기묘한 동작들은 아침을 맞이하는 기쁨을 몸으로 표 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인간이나 레콘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경 지의 이해를 알려주려 애쓰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시간을 떼우기 위 한 동작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기묘한 자세를 취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나마 좀 이해하기 쉬운 것은 갈바마리였다. 조금 전 곳곳 에 흩어져 있던 두억시니들을 찾으러 떠났던 갈바마리는 대장군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엘시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이레가 서있었고 쵸 지와 준람, 그리고 주테카와 론솔피가 좌우에 서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지멘이 커다란 바위에 기대어 서있었다. 갈바마리가 엘시 앞에 섰다. 엘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라." 위츠는 이것이 영락 없는 두억시니 화법이라고 생각했다. 세레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시도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갈바마 리를 바라보았다. 갈바마리는 반복했다.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라." 엘시는 갈바마리에게 질문해봐야 대답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호왕…… 사모 페이에게 전하십시오. 주신 말씀을 확실히 전해들 었다고." 갈바마리는 두 머리를 동시에 끄덕였다. 그는 몸을 돌렸다.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동작을 취하고 있는 두억시니 들에게 다가간 갈바마리는 그들을 지나쳐 달려갔다. 그러자 두억시니 들은 여전히 몸을 괴상하게 비틀며 그 뒤를 따라갔다. 엘시는 계곡 아래편의 밀림 속으로 사라지는 두억시니들을 바라보았 다. 바위벽에 기대어 서있던 지멘이 부리를 열었다. "처음부터 약속한 거야. 사모 페이는 내가 두억시니들을 전부 데려 가도 좋다고 말했지. 어떤 액체를 싫어하는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하지만 나는 너를 구한 다음 돌려보내겠다고 했어. 사모 페이는 좋을 대로 하라더군." 지멘은 엘시와 마찬가지로 두억시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시의 뒤편에 서있던 이레가 정말 궁금하다는 투로 말했다. "지멘. 대호왕께서 정말 이 근방에 생존해 계십니까?" "그래." "그런데 왜 직접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나타나면 안되지." "왜죠?" "그녀는 북부가 위기에 빠졌을 때 북부의 왕이 되어 북부를 구한 전 설적인 존재니까. 그런 전설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틀림없이 그녀를 옹위하여 황제에게 도전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날 테지." 이레는 눈을 끔뻑이며 엘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엘시의 흐트러진 머리밖에 볼 수 없었다. 이레는 지멘에게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자의로 왕위를 떠나신 분인데……" "황제에게 도전하기 위해 충성 서약의 권위를 옹위한 사람도 있잖 아. 엘시가 무너뜨렸지." 이레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멘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쵸지 가 벼슬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지멘. 너 많이 똑똑해진 것 같군?" "사모 페이가 많은 이야기를 해줬지." "왜 사모 페이야? 대호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녀가 그렇게 부르라더군. 자기는 더이상 왕이 아니라고." 말을 끝낸 지멘은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는 엘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쪽에 서있던 쵸지와 준람은 조금 긴장하여 지멘을 노려 보았다. 지멘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듯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엘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시가 질문했다. "왜 그렇게 나를 보는 겁니까?" "황명을 뭐라고 붙이면 좋을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 "황명?" "취검제는 농담처럼 들리겠지. 만병제도 이상하군." 지멘의 말뜻을 이해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엘시와 지멘 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시가 말했다. "황위는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지멘. 그리고 나 또한 당신 의 농담에 이용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사모 페이에게서 설명을 들었어." 엘시는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조금 내밀었다. 지멘이 말했다. "사모는 그러더군. 제국의 황위는 아마도 인간에게 이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는 후사를 두지 않을 것이다. 후사는 그 인간 계승자에 게 경쟁자가 될 테니까.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경쟁자들도 단호하게 제거될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인간만은 황제의 보호를 받으며 아마 도 제국에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가 바로 차기 황제다. 그것이 사모의 설명이었 어. 놀랐어. 죽은 사람처럼 지내던 사람이 설명한 것이 맞았어. 나는 그런 인간을 알아." 이레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의 주인이 황제로부터 받은 것 을 일일이 셀 필요도 없었다. 만병장이라는 가공할 권한 하나만 보더 라도 황제가 엘시에게 보내는 감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레 는 그것이 엘시의 인품과 능력을 귀하게 여기는 황제의 뜻이라는 사 람들의 해석에 대강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멘은 그것을 다른 방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어. 그런 인간이 있기는 한데, 시모그라쥬공에게 잡혀갔 다고. 그러니까 사모는 가서 차기 황제를 구하라더군. 내가 왜 그래 야 하냐고 물었어. 그러자 사모는 내가 무시할 수 없는 설명을 하더 군." "……무슨 설명이오?" "내가 차기 황제를 구해서 황제에게 데려가면 황제는 내게 죽어줄 거라는 거야. 네가 황제가 되기 위해선 모든 경쟁자가 제거되어야 하 는데, 치천제 또한 그런 경쟁자이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듣기엔 말이 되는 것 같더군." 엘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쵸지는 벼슬을 움켜쥔 채 준람을 바라보았 고 준람은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주테카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 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론솔피가 말했다. "잠깐만! 지멘. 엘시가 차기 황제라면 황제는 엘시를 보호해야 해. 왜 엘시가 위험하게 너를 쫓아가게 놔둔 거야?" "나도 그 질문을 했지." "대호왕의 대답은?" "황위 계승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다면 그건 그가 도덕적 책임을 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거라고 하더군." "무슨 이야기야?" "무수히 많은 피가 흐를 거라더군." 이레는 주인이 무릎 위에 놓아둔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미미하 게 떨리고 있었다. 이레는 주인의 어깨를 붙잡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지멘이 말했다. "전쟁이야. 엄청난 전쟁이 벌어질 거야. 그런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차 기 황제는 다른 일에 바빠서 그러지 못했다는 변명거리를 만들어둬야 된다더군. 남부에서 황제사냥꾼을 쫓느라 바빴다는 식으로." 레콘들은 전쟁이라니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위츠가 갑자기 엘시에게 걸어갔다. 놀란 세레지는 아버지를 따 라갔다. 위츠는 헛기침을 하여 엘시의 주의를 끌고는 말했다. "각하. 끼여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멘의 이야기가 맞습니 다.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발케네공이 폐하께 대적했는가?" 엘시는 메마른 목소리로 반문했다. 위츠는 당황하여 말했다. "예? 어떻게…… 예. 그렇습니다. 제국군은 발케네령에 진공했습니 다만 뜻밖의 장애를 만나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발케 네공은 일만 명의 레콘을 양성해두었습니다." "일만!" 론솔피가 비명처럼 외쳤다. 다른 레콘들도 경악한 얼굴로 서로를 바 라보았다. 그들은 군대를 경험한 예비역 레콘들이지만 그들이 소속되 어 있던 레콘 여단은 천이백 명 정도가 보통이다. 그런데 일만 명의 레콘은 레콘 여단 여덟 개에 해당한다. 레콘들은 그 숫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지멘은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그걸 봤지." 준람이 황급하게 되물었다. "뭐? 봤다고?" "봤어. 발케네령을 떠나기 전에 우연히 스카리 요새에 가본 적이 있 어. 아실이 그게 수상하다고 하더군." 그리고 지멘은 스카리 요새에서 일어났던 일, 아실과 갑자기 헤어진 일, 그리고 아실의 부탁 때문에 하텐그라쥬로 달려왔지만 그 부탁은 사실 살인기사에게 이미 받았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살인기사라 는 이름에 엘시의 눈이 번득였다. 엘시는 침통하게 말했다. "그 자가 벼락을 끌어내렸군."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좀 더 평범한 말로 바꿔 말한 것은 주테카였다. 주테카는 자기 머리를 딱 치고는 말했다. "아! 전쟁이 벌어졌을 때 황제 옆에 대장군이 없도록 하기 위한 술 책이었군! 굉장하군. 제국의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 끝까지를 한꺼번 에 이용한 거잖아." 론솔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테카. 왜 대장군이 황제 옆에 없어야 하지?" "엘시는 제국군의 우두머리잖아. 그리고 발케네공의 무기가 레콘이 라면 엘시보다 신경 쓰이는 사람도 없지. 엘시가 쥐딤에서 했던 일을 생각해 봐." 타당한 설명이다. 그리고 쥐딤에서의 일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있는 지멘이 그 자리에 있음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도 레콘다운 태도 였다. 지멘은 그들을 잠깐 노려보았지만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 다. 오히려 엘시가 그 눈길을 알아차렸다. 엘시는 지멘의 주의를 돌 릴 겸 말했다. "당신은 살인기사의 팻감이었군요. 지멘. 살인기사는 내가 당신을 수습하기 위해 제국 하변에 신경쓰도록 해두고 제국 상변에서 대마를 잡으려는 것입니다." 위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이 누구인 지 분명해졌다. 바둑을 모르는 지멘은 미심쩍은 어투로 말했다. "잘 모르겠지만 내가 너를 잡기 위한 미끼로 사용되었다는 뜻인 것 같군." "그런 뜻입니다." 지멘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테카와 론솔피는 여전히 자기 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맞아. 두 사람의 뜻이 맞아떨어진 거야." "암살공은 껄끄러운 엘시를 치워두고 황제를 상대할 작정이었지. 그 래서 지멘을 이곳으로 보내서 엘시가 뒤쫓아오길 바랐던 거야." "그런데 황제도 엘시를 잠시 치워두고 직접 암살공을 작살낼 작정이 었지. 후계자의 손에 피가 묻으면 안되니까. 그래서 옳다구나 하고는 지멘을 따라가도 좋다고 한 거야." "그래. 그 뜻이 서로 희한하게 맞아떨어진 것이군. 이거 기막힌데." "그러면 시모그라쥬공은 뭘까?" "암살공과 손 잡은 거지. 황제가 없어진 후에 제국을 나눠먹을 작정 으로 도와준 거야." 세레지는 졌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가 꾸며낸 온 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도 지금 거론되고 있는 이야기와는 비교될 수 가 없었다. 세레지는 '파림 가문은 더욱 노력해야겠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싱긋 웃었다. 그녀가 웃을 수 있는 것도 도무지 현실감 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엘시는 충분한 현실감을 느꼈다. 상황을 따져본 엘시는 로세 이즈 징수소장 마리번 도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위 츠에게 질문했다. "전쟁의 명분은 부냐 헨로의 탈옥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그 순간 엘시의 내부에서 데라시는 확정범이 되었다. 스카리 빌파는 분명히 데라시에게 조종당했다. 그리고 데라시가 그렇게 한 것은 엘 시를 파혼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발케네 침공의 명분 을 얻기 위해서다. 엘시는 자신이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규리하는 발케네의 지척이다. 그런데 규리하에는 아이저 규 리하를 토벌하기 위해 제국군이 모여 있었다. 데라시가 이런 호기를 놓칠 리가 없다.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데라시가 지금 곤경을 겪고 있는 것은 발케네공 또한 그런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일만 레콘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데라시라 도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엘시는 데라시를 용서 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겪을 필요가 없는 곤경이다. 이제 황제는 굴욕적인 퇴각이나 상처 뿐인 승리 외에 얻을 것이 없게 되었다. 엘시는 황제가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러자 갈바마리가 남겨둔 대호왕의 전언이 떠올랐다.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라.' 그것은 빨리 황제에게 돌아가서 황제가 퇴각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시는 대호왕이 발케네 전쟁이나 일만 레 콘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엘시는 지멘에게 말 했다. "지멘. 일만 레콘에 대해 대호왕께 말했습니까?" "했던 것 같아." "확실하지 않다는 겁니까?" 지멘은 대답이 곤궁했다. 그는 대호왕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설명 할 수가 없었다. 대선풍의 웅웅거림이 아스라하게 들려오고 아스화리 탈이 떨어뜨리는 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지멘은 대호왕과 온갖 이야기 를 나누었다. 그것은 지멘이 처음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지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으니 그 이야 기도 했을 것이다. "했을 거야." 엘시는 그 불확실한 대답으로는 사태를 단정하기 어려웠다. 제국군 이 발케네에서 겪고 있는 곤경을 대호왕이 알지 못했다면 대호왕의 전언은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엘시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엘시는 결국 급한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일단 북부로 돌아가야겠군요." 사람들의 시선이 엘시에게로 향했다. 엘시는 말했다. "나는 발케네로 가야 합니다. 이레는 나를 따를 것이고 위체 파림과 세레지 파림 또한 함께 가야겠지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나와 함께 갈 의무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멘을 체포하는 것을 돕기 위해 왔는 데, 미안합니다만 그 임무는 잠시 보류해야겠습니다.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발케네까지 나를 호위해준 다면 크게 사례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지멘 또한 발케네로 향할 생각 인 것 같군요. 맞습니까?" "맞아. 황제가 거기 있으니까." 지멘은 아실도 거기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엘시는 그 말이 마음 에 들지 않았지만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내가 발케네에 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암살공의 사주를 받은 다른 자들이 공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몸도 지금은 좋은 상 태라 하기 어렵고 망고 군단에 뺏긴 딱정벌레들도 빼오지 못했습니 다. 북부로 돌아가는 길은 훨씬 힘들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와 주면 좋겠군요." 론솔피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황제를 만날 수 있을까? 황제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면 괜 찮은 금군이 필요할 거야." "폐하를 배알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론솔피는 만족했다. 주테카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 다. "여기까지 같이 왔고 함께 거기서 빠져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같이 가야지." "재미있겠군. 나도 가겠어." 쵸지의 대답이었다. 엘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람을 바라보았다. 준람은 지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지멘과 맺은 것을 아직 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냥 돌아가서 죽을 때까지 아쉬워한 다면 그의 첫째부인 란쉐는 걱정할 것이다. "간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떠날 채비를 갖췄다. 위츠는 마차에서 짐을 내려 네 등분했 다. 마차로 발케네까지 가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래서 네 명의 레콘이 각자 짐 한 더미와 인간 한 명씩을 들고 달리기로 했다. 짐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레콘들에게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그들 은 북쪽을 향해 달렸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악취를 더이상 느끼지 못했다. 후각은 무뎌 진지 오래였고 이젠 시각도 조금 피로했다. 베로시는 눈을 깜빡였다. 그만 나가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베로시는 다시 우물벽을 바라보았다. 엘시가 그려놓은 그림은 어떻게 보아도 심미적이라고 하기 어려웠 다. 기교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아무렇게나 그려놓 은 그 그림은 투박했다. 사용된 물감은 역겨운 것이었다. 하지만 베 로시는 그 그림을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 걱정이 된 병사들이 위에서 가끔 그녀를 부를 만큼 긴 시간이었다. 사람들. 다른 것은 없었다. 엘시가 그려놓은 것은 모두 사람들이었 다. 인간과 나가, 레콘, 도깨비. 베로시는 무엇이 엘시로 하여금 그 토록 절박하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지 궁금했다. 엘시는 자신이 그 린 그림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정신을 붙잡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베로시는 그 소재 선택에 신경이 쓰였다. '차기 황제는 왜 자신의 주위를 사람으로 둘러놓은 것일까.' 베로시가 보기에 엘시는 차기 황제였다. 원시제는 제국을 만들었다. 아무도 생각해낼 수 없었던 위대한 제국 이었다. 치천제는 자신이 선황의 작품에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음을 누 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치천제는 선황의 작품에 내구성만 부여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원시제가 짧은 수명 때문에 달성하지 못한 것, 세습 황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아이를 갖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귀찮은 일 을 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이미 아들이 있다. 베로 시는 자신의 생각에 미소를 머금었다. 엘시 에더리는 황제의 정신적 아들이다. 나가는 이성적인 종족이고 치천제도 그러하다. 피붙이가 아닐 뿐 그 외 필요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후보가 있는데 미래가 불확실한 자식을 낳아 기르는 바 보짓을 할 필요는 없다. 엘시가 차기 황제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황 위 계승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또 그렇게 해석해야만 엘 시가 받은 것들이 설명된다. 베로시는 엘시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곱씹었다. 엘시는 치천제 를 압박할 강력한 인질이 될 수 있다. 황태자보다 더 좋은 인질은 없 다. 하지만 엘시는 이미 떠났다. 베로시는 자신을 위로하기로 했다. 냉철한 황제라면 엘시를 주저 없 이 포기하고 다른 후보를 찾아나설지도 모른다. 그리고 암살공이 황 제를 제대로 상대한다면 치천제가 내정한 차기 황제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엘시가 후계자임을 공포했다면 문제가 좀 달랐겠지만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어떤 공식적인 후계자도 없다. 환란이 뒤따를 것이 다. 베로시는 환란이 일어날 것임을 확신했다. 발케네에서 일어나는 전 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암살공은 치천제로부터 제국을 고스란히 빼앗는다는 몽상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베로시는 그렇게 될 리 가 없다고 믿었다. 황제 파멸 후 제국은 사분오열될 것이다. 시모그 라쥬공이 암살공과 손을 잡은 것도 그런 전망 때문이다. 제국을 고스 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면 대장군을 억류해두는 소극적인 역할만 맡을 필요가 없다. 암살공이 지금 그러는 것처럼 황제를 처단하는 역할을 맡는 편이 훨씬 타당하다. 하지만 시모그라쥬공은 장차 도래할 환란 에 대비하여 전력을 비축해두기로 결정했다. 역사는 암살공을 환란의 주모자로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붓이 시모그라쥬공을 환란의 구원자로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 시모그라쥬공의 심모원려다. 모든 것이 팔디곤 토프탈의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베로시는 기꺼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물 벽에 있는 지저분한 그림이 그녀 를 주춤하게 하고 있었다. 베로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경이 쓰인다면 없애면 된다. 그녀는 우물벽에 기대어놓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밖으로 나오자 코가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던 베로시는 병사들이 곤혹스러워 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에게서 나는 냄새 때 문일 것이다. 차마 코를 막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들은 숨을 쉬지 않 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베로시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래. 지독하군." 병사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베로시는 우물을 가리켰다. "흙으로 메워라. 그리고 우물벽은 없애라. 여기를 평지로 만들어라. 지금 당장." 병사들은 즉각 베로시의 명령을 실행했다. 베로시는 북쪽을 잠깐 바 라보았다. 도망치고 있는 황태자는 어쩌면 다가올 환란에서 좋은 불 씨가 될지도 모른다. 만약 발케네공이 패배한다면 팔디곤 토프탈의 배신을 알게 된 황제는 다음 목표를 시모그라쥬로 정할지도 모르지만 베로시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아무리 치천제라도 규리하와 발케네 를 연달아 깨트린 후 그것을 배후에 둔 채 제국의 남쪽 끝으로 날아 올 수는 없다. 황제는 당분간 북쪽을 떠날 수 없다. 그리고 발케네공 이 승리한다면 황태자는 바로 암살공이 불태운 재 속에서 일어나 그 를 공격할 멋진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 베로시는 즐거운 기분으로 우물 곁을 떠났다. =============================================================== 13 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며칠 있으면 총선이군 요. 투표권 있는 분들은 즐거운 주권 행사 하시길 바랍니다. 좋은 밤 되세요. 14.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 1 제국의 동쪽 끝을 막고 있는 처용 산맥 너머는 어떤 사람 들의 오해와 달리 네번째 바다가 아니다. 그곳에는 넓은 미답지가 있다. 분리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땅이 다. 레콘이 배타적 독립국을 만든다면 기존의 제국민들과 마찰을 일으킬 거라는 우려는, 따라서 무의미하다. 분리주 의자가 바라는 특권은 해가 떠오르는 땅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햇빛을 맞이한다는 것뿐이다. 그외에는 미답지를 새 로 개간하는 고통이 있을 뿐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 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누군가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전술했듯이 레콘 독립국은 그 종말이 정해져 있는 특이한 정치 단위다. 제국에서 분리되 어 나온 레콘 독립국은 장차 제국에 다시 편입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제국민들은 레콘들이 개간해 놓은 광활한 땅 을 선물받게 될 것이다. 부디 단순하게 생각하라. 먼 곳으 로 떠나서 자기들끼리 살겠다는 사람들을 그냥 보내주면 안될 것 없잖은가? 더군다나 여러분의 도움 없이 그 땅을 개간해놓고는 여러분의 후손에게 개방하겠다는데? 후손에 게 주는 선물로 이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 쥐딤 선언문 中 "헤어릿? 슬픈 얼굴을 하고 있네요?" 말의 갈기를 쓸어주던 헤어릿 에렉스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 보았다. 아실이 울타리 아랫단에 발을 올린 채 울타리에 매달려 그녀 를 보고 있었다. "내가 슬퍼 보였어?" "예. 말들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어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말 등에 앉아있던 헤어릿은 고삐를 손목에 감았다. 그리고 목장 여 기저기서 풀을 뜯는 말들을 바라보았다. "전쟁터로 보낼 말들을 고를 수가 없네." "물어보지 그래요? 발케네의 물로 피를 삼고 발케네의 풀로 살을 지 운 그대들이여. 발케네가 그대들의 힘찬 다리를 원하노라. 선착순." "어두운 농담이구나." 아실은 울타리를 사다리 타듯 올라가 제일 높은 단에 걸터앉았다. 예민한 말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노련한 기수에게만 허락되는 자리 지만 헤어릿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지상 3미터 쯤 되는 높이에서 제 국을 주유한 소녀에게 울타리 꼭대기는 그리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목장은 울타리 반대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구름이 살짝 낀 하늘은 낮았고 조금 높은 구릉 꼭대기에 오르면 하늘에 손자국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구릉의 틈바구니나 사면에서는 수말들이 가 볍게 싸움을 하고 있었다. 락토 빌파의 봉신들 중에는 병사 대신 말 을 보낸 영주들도 있었다. 낯이 선 말들이 서로의 힘을 알아보느라 티격태격하고 있다. 말은 병사보다 훨씬 비싸고 돌려 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므로 군마 지원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지극한 경애의 표시다. 하지만 헤어릿은 다르게 해석했다. 말을 보내는 것은 암살공에겐 확실히 체면을 세우 는 일이고 황제에게도 직접적인 저항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교묘한 처사다. 돈 몇 푼을 아끼기 위해 병사들을 보낸 자는 더 큰 것을 도 박에 건 셈이지만 거대한 재산을 아끼지 않은 자는 보다 안정되게 미 래를 가늠해볼 자격이 있다. 그러나 후자는 헤어릿의 호의를 얻기 어 려울 것이다. 헤어릿은 말들이 자신과 무관한 전쟁에서 다치게 되는 것이 화가 났다. 구릉을 따라 달려온 바람이 헤어릿과 아실을 스쳤다. 아실은 바람에 대비하여 울타리를 꼭 움켜쥐었다. "발케네공의 주력은 힌치오의 일만 레콘이잖아요. 말들은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아실. 나는 말이 레콘보다 쓸모 없다는 것이 더 겁나. 일만 레콘을 먹이는 일은 쉽지 않을걸." "아? 아아." "락토 빌파는 쓸모도 없는 말이 얼쩡거리는 것을 보면 모두 잡아서 레콘에게 주라고 말할 사람이지." "공작님을 싫어하시는 것 같네요." 헤어릿은 쓰게 웃었다. 싫어한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그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락토는 공작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한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몰 랐을까? 그 어떤 남자도 암살공의 여자를 받아들일만큼 용감하지는 못했다. 만약 락토가 내연의 연인에서 후원자가 될 정도의 아량을 가 졌다면 그녀의 어머니 셀소 에렉스는 괜찮은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 었을 것이다. 실제로 셀소는 암살공에게 그것을 요구했었다. 셀소 자 신은 한 번도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몰락한 남작가의 말예인 헤어릿의 외조부 그림터 에렉스는 자주 취하는 사람이었고 취하면 온 갖 이야기를 다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그림터가 취한 채 밤길을 걷 다가 개울에 빠져죽었을 때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헤어릿은 외조부에게 들은 이야기로 자신의 출생 즈음에 일어났던 일을 하나 빠짐없이 재구성할 수 있었다. 셀소는 발케네의 공작과 결혼한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암살공이 연인과 혈육에게 좋은 바람막이 가 되어줄 남자 정도는 제공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그림터의 기대이기도 했다. 헤어릿은 셀소가 원했던 남자가 팔리탐 지소어였다 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공작가의 충신이고 망가진 얼굴 때문에 독신 으로 지내던 팔리탐이라면 주군의 여자와 혈육을 잘 거둬줄 것이라는 것이 어머니와 외조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락토는 어떤 남자에게 자신의 혈육을 맡겨 부채를 지거나 심 지어 인질을 잡히는 처지에 빠지는 것은 발케네의 공작이 할 만한 짓 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헤어릿도 거기까지는 자신의 친부를 이 해할 수 있었다. 암살공이 무정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녀의 어 머니도 처신이 현명하지는 않았다. 락토는 그녀의 어머니를 겁탈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발케네의 공작과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애초에 락토를 뿌리치던가, 그렇잖으면 남편감을 미리 요구 했어야 했다. 게다가 뒤늦은 겨냥은 지나치게 먼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빼어난 미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팔리탐이 전과자이며 얼굴 을 가린 채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팔리탐 을 알게 된 후 헤어릿은 팔리탐에게 은혜나 베푸는 것처럼 굴던 어머 니와 외조부의 태도가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팔리탐 지소어는 그저 다른 사람보다 가면을 하나 더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두 개의 가면 아래의 인물은 고상했다. 결국 셀소는 처신도 서툴렀고 처세도 시원찮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릿은 아 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병을 알리기 위해 훔친 말을 타고 생전 처음 친부를 향해 달려갔던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었나? 헤어릿은 그 혼란스럽고 기묘 한 밤을 기억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던 것도 같고 그 여정의 모든 과정을 함께 한 것은 자신의 그림자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몇몇 사람들과 마주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암살성의 위치를 물었을 테고, 또 암살공을 만나기 위해 층층시하의 사람들을 거쳐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헤어릿이 기억하는 것은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얼굴뿐이었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얼굴 이었다. 락토가 자신을 소개하기도 전에 헤어릿은 그 남자가 친부임 을 알 수 있었다. 락토는 걱정 말고 쉬라고 했다. 격한 흥분과 급격 한 안도감 때문에 헤어릿은 탈진해 쓰러졌다. 아버지의 꿈을 꾸기를 바라며. 며칠이 지나 겨우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헤어릿은 셀소가 죽 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존경하거나 연모하기보다는 동정하고 비웃음을 보내던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셀소는 어머니였다. 헤어릿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는 사실에 대해 슬퍼하기로 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든 고독감 속에 서 헤어릿은 자신이 철저하게 암살공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헤어릿은 자신에게 질문했다. 그녀에겐 왜 아버지가 없는 걸 까? 어머니는 정말 죽을 병에 걸렸던 것일까? 외조부는 정말 술 때문 에 죽은 것일까? 혼란스러워 하던 헤어릿은 자신의 얼굴에서 답을 찾 았다. 헤어릿 에렉스는 어느새 어머니를 닮은 미인이 되어 있었다. 헤어릿은 그 사실에 진저리를 쳤다. 놀라운 미모를 뒷받침할 정신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바로 곁에서 보았 던 헤어릿에게 미모는 파멸의 낙인이었다. 암살공은 헤어릿에게 자신의 말을 돌보라고 말했다. 헤어릿은 그것 을 핏줄에 대한 부양 책임을 다하려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그 것은 적절한 대가를 제시할 구매자가 나타날 때까지 귀중품을 금고에 보관해두는 처사와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헤어릿은 그 금고를 빠 져나가지 못했다. 그녀는 혼자였고 자신을 죽이기 전까지는 떼어낼 수 없는 두 가지 짐까지 지고 있었다. 탁월한 미모와 암살공의 혈육 이라는 짐. 모두 락토로부터 온 것이다. 헤어릿은 그렇게 판결했다. 그리고 죽은 어머니의 책임은 무시했다. 그녀가 혼자라는 것, 미인이 라는 것,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는 핏줄이라는 것은 모두 락토 때문이 다. "나는 그 남자의 주검을 보고 싶어." 아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쓰게 말 했다. "내 눈으로." 그리고, "무슨 일로 온 거지, 아실?" 아실은 웃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 다. "말 타는 법 좀 배우려고요." "여기서 도망치려고?" "저는 암살성의 주인이에요. 제가 왜 암살성에서 도망치겠어요?" 헤어릿은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출정식 날 일어났던 사건은 헤어 릿에게 있어 아직 고찰 대상이다. 결론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꼭 스 카리를 곯려주고 싶었다면 스카리에게 전권을 넘겨주는 척하고는 실 제로는 아무 짓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암살공다운 수법이다. 그 렇다면 지금처럼 스카리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을 테니 까. 발케네의 차기 지배자가 당한 모욕은 스카리 본인에겐 혀를 깨물 고 죽고 싶은 비극이겠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호의적으로 바꾼 계기이기도 했다. 헤어릿이 보기에 락토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 람들에게 스카리라는 결집 대상을 선사한 셈이다. 암살공이 그것을 내다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설마 이것이 암살공류의 권력 이양 방식인가? 제국군에 복무하고 하 늘누리에서 근무하느라 오랫동안 발케네를 떠나있었던 스카리에게는 발케네 내의 지지 세력이 희박하다. 만약 암살공이 후계자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면 자신을 악역으로 만드는 식의 연출도 해봄직하다. 보 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상황이 다. 발케네의 힘은 암살공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후계자를 영 웅으로 만들고 싶다면 전쟁 상황 내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 다. 좋은 부관을 붙여준다면, 아니, 제국군 군단장까지 올랐던 스카 리이니 혼자서 전공을 세우는 것도 어렵잖을 것이다. 헤어릿은 암살 공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헤어릿이 아는 암살공은 얼굴에 진흙이 튈 것을 알면서도 홧김에 진흙탕을 걷어차는 사람은 아니다. 아실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에 헤어릿은 상념을 잠시 치워놓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현실이군. 규리하령의 지배자도 열아홉 살의 여자인데 발 케네령 또한 그렇단 말이지." "아아? 정말 그렇네요. 하지만 입장은 다르군요. 비셀스 규리하는 탐스러운 신부감이지만 저는 수배자니까." 헤어릿은 주춤하여 아실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헤어릿이 보는 아실은 제국이라는 목장의 울타리 바깥을 떠돌며 울타 리 안쪽의 중심을 노리는 고독한 맹수다. 아실에 대해 헤어릿은 어떤 가정의 한쪽 날개가 된다는 평범한 생각은 아예 할 수가 없었다. 그 리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헤어릿은 그것이 어렵다는 판단까지 한꺼번에 내렸다. 난관이 너무 많다. 하지만 헤어릿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 되겠지만 그것은 헤어릿의 성 격이었다. "네 처지는 네가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조건은 되지 않아." 아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자신의 바보 같은 이야기에 아실이 실망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실이 말했다. "어, 우습네요." "뭐가 우습지?" 아실은 머뭇거렸다. 헤어릿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생 각했다. 아실이 말했다. "당신을 위로하려고 했죠. 그런데 오히려 당신이 저를 위로하는군 요. 흐음. 여기엔 위로 받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나 보군요." 이번에는 헤어릿이 당황했다. 그녀는 아실이 비셀스를 부러워할 거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실 또한 헤어릿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릿은 아실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 다. 헤어릿은 비셀스가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헤어릿이 비셀스에 대 해 느낄 수 있는 것은 공감이었다.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규리하성에 붙잡혀 있는 비셀스의 처지는 파리조성에 붙잡혀 있는 헤어릿의 처지 와 비슷했다. 헤어릿은 생각을 조금 바꿨다. 아실은 어쩌면 헤어릿이 그녀 자신을 부러워한다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실은 아버지의 이름에 붙잡혀 있는 두 딸과 달리 자유로웠으니까. 헤어릿은 길벗과 도 말을 제대로 나눌 수 없는 도망자 처지가 부러워할 만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실이 그녀의 생각을 방해했다. "그런데, 말타기 가르쳐줄 거예요?" "왜 그걸 배우려는 건지 듣지 못했어. 말에 관심이 있는 거니?" "그렇진 않아요. 전 무엇을 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요." 헤어릿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실이 말했다. "지멘? 아뇨. 지멘은 자기 뜻대로 움직여요. 저는 제 뜻대로 움직이 는 것을 탄 적이 없어요."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네. 아실. 말도 살아있는 생물이야. 감정이 있어. 신발이나 바둑돌처럼 네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어." "좋아요. 시작이군요.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는지 알려주고 제가 뭘 알아야 하는지 알려주길 바라요. 그렇게 해주겠어요?" "나는 말 관리자지 승마 선생이 아냐. 둘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겠 지만 조금 달라." "또 하나 알게 되었네요. 말 관리자에게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아실은 뒤쪽을 잠깐 돌아보는 시늉을 했다. "성 안에서 시간 보내다간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어요." 헤어릿은 탄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스카리의 증오를 받을 충분한 조건을 갖춘 아실에겐 스카리와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것은 몹 시 신경 쓰이는 일일 것이다. "좋아. 넌 높은 곳은 무서워 하지 않을 테지. 옷차림도 그 정도면 괜찮지만 장갑은 끼어야겠군…… 뭐 하는 거니?" 아실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울타리 위에 발을 올리는 아실을 본 헤 어릿은 그녀가 안장 위로 건너올 작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헤어릿 은 빠르게 말했다. "그만둬. 위험해." "아, 저는 괜찮아요. 이 정도 높이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너를 걱정하는 것이 아냐. 말과 나를 걱정하는 거야. 말은 뒤쪽도 볼 수 있어. 그렇게 다가오면 겁 먹는단 말이야." 아실은 머쓱해진 얼굴로 헤어릿을 태우고 있는 말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본 헤어릿은 갑자기 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헤어릿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또 하나 배웠지?" "예. 그렇네요.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몇 개나 배웠 어요. 대단한 스승이네요." "그 생각이 오래가진 않을 거야. 저기 마구간 보이지? 그쪽으로 가. 나도 따라갈 테니까." 아실은 울타리에서 내려서서 마구간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 모 습을 바라보던 헤어릿은 문득 아실이 어떤 일에 즐거워 하는지 궁금 하다고 생각했다. 창가에 서있던 제어이는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 은 채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아이저는 문가에 서서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제이 어의 뒤통수를 보던 아이저는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닫았다. "여긴 내 방인데. 솔한." "알고 있습니다." 제이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마땅한 눈으로 제이어를 바라보던 아이저는 제이어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제이어는 아이저의 반응을 무시한 채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한가롭 게 넘겼다. "각하의 종조부께서는 이름 높은 저술가였습니다. 저술가는 사상가 와 다르지요. 전자는 읽히는 글을 쓸 줄 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저술가 라수 규리하의 명성에 도무지 부합하지 않는군요. 아무 래도 고의로 이렇게 쓰신 모양입니다." "내 생각도 그래. 솔한." "탁월한 저술가가 고의로 알아보기 어렵게 쓴 것이니만큼 이것을 해 석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군요.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제이어는 책을 탁 덮고는 아이저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마치 아이저 가 그것을 읽어보라고 권하기라도 했다는 듯한 동작이다. 아이저는 묵묵히 책을 받아들고는 그것을 책상 위에 놓았다. "또 누가 알지?" 제이어는 빙그레 웃었다. 아이저는 허리를 똑바로 펴 제이어를 노려 보았다. "또 누가 알지?" "아실이 알고 있습니다. 이미 읽었지요." "그 아이가 황제의 간자일 리는 없으니 다행이군." "아실이 그 책을 해석했을 거라는 생각은 못하십니까?" 아이저는 팔짱을 꼈다. "해석했다고 하던가?" "이제 그 책을 더 볼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더 볼 필요가 없다고?" "예." 아이저는 신경 쓰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해석의 포기인지, 아니면 책 없이도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저는 아실에게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이어가 말했다. "각하. 왜 황제가 그 책을 회수하길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제 목처럼 거기에 정말 하늘누리에 관한 놀랄 만한 비밀이라도 들어있는 겁니까?" "반환 요구가 있었으니까." "황제가 그것을 요구했습니까?" 아이저는 의자에 앉았다. "숭문각의 요청이었다. 라수 규리하의 서적을 전부 구비하고 싶으니 협조해달라고 하더군. 규리하성에 보관하고 있는 종조부의 책 목록을 보내달라고 했어. 그렇게 했지. 그런데 빠진 것이 있는 것 같다면서 재조사를 해달라고 하더군. 하지만 빠진 것은 없었어. 이상하다고 생 각하다가 라수의 방을 떠올렸지." "거기서 그 책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래. 보다시피 조야한 제목이지. 나는 종조부께서 그런 비결서 같 은 것을 집필하셨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더군. 어떤 시덥잖은 인사가 종조부의 권위를 훔치기 위해 그런 저자명을 사용했고 규리하가의 어 떤 부주의한 자가 그것을 구해 종조부의 유품에 포함시킨 거라는 것 이 내 결론이었어. 만일 그렇다면 이런 물건을 굳이 내보일 필요는 없지.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정말 종조부의 것인지 확인한 후에 공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빠진 책이 없다는 회신을 보냈지. 그런데 돌 아온 대답은 인상적인 것이더군. 천경비록이라는 책이 없냐는 것이었 어." 그래서 아이저는 그런 책이 있긴 하지만 라수의 책이 맞는지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숭문각에서는 자신들이 확인해줄 테니 책을 보내라고 했다. 아이저는 라수의 방에 보관된 물건을 밖으로 꺼낸다 는 것이 탐탁찮았고, 또한 수상하다는 생각도 떠올렸다. 아이저 자신 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책의 이름을 숭문각이 정확하게 알고 있다 면 그들은 라수 규리하가 천경비록이라는 책을 썼다는 믿을 만한 증 거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 증거부터 라수의 후손인 아 이저에게 공개하는 것이 상식이다. 결국 아이저는 보낼 수 없다는 대 답을 보냈다. 당시는 황제와 그의 사이가 악화되던 시점이었다. 라수 는 황제에게 무엇인가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 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전쟁과 그 책의 상관 관계는 불확실한 것이잖습니까." "전쟁 자체가 이 책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것이지. 천경비록을 요구 하던 시점에 이미 전쟁 준비는 진행되고 있었을 테지. 그렇다면 하늘 누리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하늘누리가 전쟁을 준비하면 서 하늘누리의 비밀스러운 기록이라는 책을 원한다면 그 책이 보통 책일 리는 없잖은가." 아이저의 말대로다. 수상한 일이다. 하지만 제이어는 반론가의 위치 를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전쟁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책이 소실되는 것을 우려한 것 일 수도 있잖습니까." "솔한. 나는 바보가 아니야. 자기 생각을 의심해볼 줄은 안다는 말 이지. 전쟁 직전 나는 숭문각을 무시한 채 데라시에게 직접 서신을 보냈지. 그 책을 돌려보낸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어. 공격 일시를 늦추겠다는 암시를 담은 대답이 오더군. 재미있는 이야기잖은가?" 데라시의 대답을 받은 아이저는 천경비록을 원하는 것이 라수 규리 하의 전집을 완성하고 싶은 사서가 아니라 최소한 비스그라쥬백 데라 시, 혹은 황제 자신일 거라고 판단했다. 만약 아이저가 상대하고 있 었던 것이 숭문각의 사서였다면 데라시가 '그 책'이라는 말에 반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제이어는 아이저의 판단을 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책에는 황제나 데라시가 중요하다고 믿는 내용이 들어 있는 모양이군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셨습니까?" "아니. 그리고 앞으로도 알아내고 싶은 생각이 없군." 제이어는 놀랐다. "알아내고 싶지 않으시다고요?" 아이저는 희미한 분노를 드러내며 천경비록을 노려보았다. "비밀스러운 책이나 수수께끼, 비결, 전설 따위에 매달리는 것이 치 졸하다는 생각을 내가 왜 못했는지 궁금하군. 그것은 인생을 우습게 만들길 좋아하는 자들의 태도야. 마법의 말 한 마디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버릴 수 있다는 식의 나태함과 몽상이지. 이 정도 나이 를 먹었으면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하는 일이야. 산다는 것은 그런 것 이 아니잖나." 아이저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움켜쥐었다. "산다는 것은 끝이 없는 싸움이야. 모든 적을 일격에 거꾸러뜨리는 무적의 무기 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을 쉽게 만드는 최후의 비결도 없어. 그런 것을 바라며 물러나는 것 자체가 이미 싸움에서 지는 것이야. 칼을 움켜쥐고 한 발 더 걸어나가는 것이 낫지." "그러면 그 책은 포기하셨습니까?" "이 책은 규리하의 물건이니 내가 지켜야겠지. 하지만 더 읽지는 않 겠다. 내 칼을 벼리거나 내 아들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도 부족할 것 같으니까." 제이어는 이채롭다는 표정으로 규리하의 전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아이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던지고 말했다. "내 아들이 더 큰 반항을 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착한 애의 반항은 아버지의 귀한 책을 다른 사람에게 몰래 보여주 는 것이었군. 게다가 그것은 사실 아버지에겐 더 이상 귀한 책도 아 니었다. 몰락한 아버지를 곁에서 보면서 그럴 수 있는 아들이 세상에 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범위 내엔 한 명뿐이다. 나는 이 이타가 이 책을 빼돌렸다는 것이 기쁘다." 놀라운 추리는 아니다. 천경비록의 존재를 노출시킬 사람은 이이타 외엔 없는 형편이다. 제이어는 다른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참 특이한 경험인 것 같군요." 아이저는 늙은 독신자를 바라보았다. "후회되나?"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못한 것은 후회되지 않습니다. 각하." 과거 오세느 시야니라는 한 명의 여자를 두고 대립했던 두 남자는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늙었 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리고 아 이저가 해묵은 매듭을 풀기로 결심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이기도 하다. "아직도 취해있군. 살인기사." 제이어는 무표정하게 아이저를 바라보았다. 아이저는 차분하게 말했 다. "오세느가 나를 택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게 된다면 몹시 상심했겠지. 하지 만 다행히도 오세느는 현명했다. 경쟁심에 눈이 먼 나는 알지 못했지 만 오세느는 네가 원하는 것이 사랑의 승리자가 아니라 화려한 패배 자임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거역할 필요가 없었지." "부인께서는 보기 드문 여자였지요. 저를 받아들인 것도 부인의 뜻 이었습니까?" "그래. 오세느는 네가 위험한 남자라고 말했다. 나는 우습다고 생각 했지. 그것이 신혼의 신부에게 생길 수 있는 불안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세느는 어리숙한 남편에게 부인을 존중하는 법을 알려주었 어. 나는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오세느는 네가 위험하긴 하 지만 또한 그 위험을 피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하더군. 그냥 네 뜻 을 따라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 화려한 패배자에서 과거의 연적과 우정을 나누는 멋진 남자로 바뀌었다고 하면서. 나는 그녀를 존중했고 또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했다." 제이어는 서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우정은 가짜였군요." "내게 죄책감이나 부채감 같은 것은 없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 다. 우선 네가 우정을 나누고 싶었던 대상은 아이저 규리하가 아니라 과거의 연적이었으니까 나는 우정을 교환할 의무가 없었지. 너는 내 연적이 아니었다." "아니라고요?" "네가 원한 것은 실패였잖나." "두번째 이유는 뭡니까?"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짜 우정을 주었다. 따라서 죄책 감은 없다." 제이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였다고요?" "삶에 대한 너의 태도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는 주당처럼 너는 실 패할 것을 알면서 그 실패를 즐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지 만 그런 네 모습이 흥미로웠다. 패배주의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었다. 패배주의자는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패배가 두렵기 때문이지. 하지만 너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 시도한다. 오세느가 말한 너의 위험 성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하게 되면서 나는 네게 매혹되었다. 나는 너 와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기쁘다." 제이어는 조금 전에 군령자가 된 사람마냥 행동했다. 자신의 몸에 낯설어하듯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제이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오세느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세느의 아들을 부탁한다 고 말하면 너는 옛연인의 아들을 결사적으로 지키겠지. 네 인생을 소 재로 명작을 연출하는 것이 네 방식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부탁 하지 않겠다. 친구의 아들을 지켜달라고 말하겠다. 그것이 내 방식이 니까." 제이어는 아이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규리하로 돌아가실 생각이군요." "그곳에는 약간의 수비 병력만 남아있다. 승전보다 더 어려운 뒷처 리를 게을리한 황제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앞뒤로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보통은 괴롭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늘누리에는 앞뒤가 없습니다. 모두 아래지요." "맞아. 그래서 그것은 갈팡질팡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지." 제이어는 그것이 재미있는 농담이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하늘누리의 최대 강점으로 일컬어지는 이동 능력을 거꾸로 약점으로 삼겠다는 그 태도는 탁월한 발상의 전환이다. 아이저가 지 적한 연출하는 버릇이 발휘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제이어는 안전한 망명지에서 적의 약점을 탐지하는 것보다는 칼을 뽑아들고 강대한 적 의 지배 하에 있는 고토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이저에게 훨씬 어울린 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규리하니까. 그리고 이이타도 규리하다. "아드님을 데려가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자님은 이곳까지 아버님을 따라왔습니다. 각하를 모시지 못할 수완은 아닐 거라 생각 합니다." "그 아이를 못 믿어서 데려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이타는 내 후 계자다." 제이어는 기대하던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충격을 느꼈다. 아이저의 선언은 딸과 아들을 대립시킨다는 뜻이다. 아이저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비셀스를 세 번 죽였다. 태어났을 때 그 애를 포기했지. 그리 고 규리하성 낙성 당시에 그 애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로 그 애를 죽이려고 한다. 한 번도 할 수 없는 일을 세 번이나 해야 한 다는 것은 너무 끔찍하군." "각하. 이이타 공자님에게 대립시키기 위해 황제는 비셀스를 더욱 보호할 겁니다. 각하의 결정은 결국 공녀님을 보호하는 것이 될 겁니 다." "고맙군. 솔한. 내 후계자를 지켜주겠나?" 제이어는 결심했다. "그러겠습니다." "고마워. 내일부터 나를 볼 수 없을 거야." "그렇게 빨리 떠나십니까?" "암살공과 황제의 전투가 결판나기 전에 되도록 많이 움직여야 하니 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네 용건은 뭔가?" 제이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중요한 것을 건네듯 주위를 살피고는 아이저에게 다가갔다. 살인기사는 속삭 이듯 말했다. "이제야 제 용건을 물어보시는군요." 제이어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꺼냈다. 거기에는 날이 새파랗게 선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쥘칸 장군은 얼어붙은 얼굴로 시허릭 마지오를 바라보았다. 사람들 은 그렇게 착각할지도 모르지만 쥘칸 장군과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서로를 증오하는 사이는 아니다. 그들은 그저 서로를 싫어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 쥘칸은 시허릭을 증오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쥘칸은 벼슬을 빳빳하게 세운 채 말했다. "농담이겠지." 시허릭은 콧방귀를 뀌고는 탁자 위의 지도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군령에 희언은 없다. 쥘칸 장군." "그런 말도 안되는……" "아니, 충분히 말이 된다. 귀관의 부하장병들 중에도 성채매장자의 지휘를 받아 하룻밤 만에 성을 파묻은 장병들이 있다. 또 여기에는 없지만 과거 고추냉이 여단은 유료도로당과의 계약에 의해 시구리아 트 산맥의 허리를 뚫었다. 같은 일을 또 못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 나." "그게 같은 일이냐?" "똑같은 토목공사다. 그리고 공사의 난이도를 보면 그리미 유료수도 의 경우보다는 훨씬 용이한 일이다." 시허릭은 갑자기 손을 뻗어 바라보던 지도를 짚었다. "귀관과 귀관의 여단은 파리조까지 운하를 파야 한다." 제국군의 장교들은 신음을 흘리거나 깊은 생각에 빠져 고개를 끄덕 이거나 했다. 그곳에 쥘칸이나 시허릭을 거들고 나서려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리고 레콘인 쥘칸은 누가 자신을 거들어주길 기다리 지 않았다. "운하는…… 그게 흐르는 길인데?" "귀관에겐 미안하지만 전술 용어로서 대명사는 적합하지 않으니 나 는 직접 말하겠다. 운하는 물이 흐르는 길이다." 어떤 수교위는 쥘칸의 주먹에 박살나는 시허릭의 머리를 보는 것 같 다고 생각했다. 쥘칸은 당장이라도 그 수교위의 몽상을 현실로 만들 어줄 기세였다. 온몸의 깃털을 세운 채 쥘칸은 시허릭을 무섭게 노려 보았다. 시허릭은 말했다. "소화차의 기동력은 형편없다. 그리고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다면 소화차는 무용지물이다. 소화차가 전장과 멀리 떨어진 수원 사이를 왕복하게 할 수는 없다. 소화차를 위한 용수 공급은 용이해야 한다." 쥘칸은 제국군의 장성으로서 타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자신은 참아 야겠지만 자기 주먹은 더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쥘칸은 주먹 을 움켜쥐었다. 그 때 시허릭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레콘과 싸우려면 강을 접하는 편이 좋다. 적당한 강이 없다 면 강을 가져가면 된다." 시허릭의 말은 쥘칸의 주먹을 붙잡았다. 그리고 사태를 예의주시하 던 장교들의 입에서 신음을 뽑아내었다. 쥘칸은 주먹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져간다고?" "강을." 그 말의 호방함은 쥘칸의 마음에 들었다. 시허릭에게 기대했던 적이 없는 성격이기 때문에 쥘칸은 약간의 충격도 느꼈다. 쥘칸은 팔짱을 끼고는 시허릭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장군들은 희미한 두통 을 느끼며 같은 일을 시도했다. 전장은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경우 매우 좁은 선택폭 안에서.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절대 불리한 전장에서의 전투를 받 아들일 리가 없기 때문에 약간의 불리함이라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 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머리를 짜내는 것이 전장 선택이다. 고금의 어떤 군대나 명장도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가지고 다닐 수 는 없었다. 시허릭은 그저 평범한 운하를 파자고 말했지만 그것은 전 쟁의 기본적인 상식을 무너뜨리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 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스캄에서 하룻밤만에 성채를 파묻기 위해 필요했던 물리력은 엉겅퀴 여단의 1대대였다. 모든 엉겅퀴 여단 병이 동원된다면 운하를 파는 것이 어려울 까닭이 없다. 물에 대한 레콘의 절대적인 거부감을 논외로 했을 경우 그렇다는 말 이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현명한 자도 레콘에게서 물에 대한 거부감 을 제거할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에 비하면 고양이가 헤엄치 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고양이는 주먹을 휘둘 러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까. 쥘칸은 풀이 죽어서 말했다. "나는 내 부하들에게 그런 것을 만들자고 말할 자신이 없어." 시허릭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째서? 운하가 물 속에서 땅을 파는 일인 줄 아나? 운하를 만드는 도중에는 물과 만날 일은 하나도 없다. 공사에 방해되니 오히려 물이 없어야 하지. 운하에 물이 흐르는 것은 공사가 끝난 후 수문을 열었 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수문을 여는 것은 인간 병사들만으로도 얼마 든지 할 수 있다. 결국 귀관들은 바싹 마른 땅만 파면 된다." "그래서?" "귀관은 부하 장병들에게 땅을 파라고 말하고, 부하 장병들은 그 명 령을 따라 땅을 파면 된다. 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땅만 다룰 뿐 이다." "웃기는 소리를. 내 부하들이 자기가 파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할 까닭이 없잖아. 땅을 파는 도중에 그, 어, 문이라는 것이 터지 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 외에 다른 불만은 없나?" "다른 불만?" "그래. 수문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외에 다른 걱정은 없는 거 지? 그렇다면 됐군. 가서 부하 장병과 함께 수문의 형태를 결정해오 도록. 기술적 조언을 해줄 사람을 초빙해두었다." 그 순간 쥘칸은 시허릭이 자신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허릭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결정해두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 레콘에게 강압이 통할 리도 없다. -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을 직접 찾아오도록 명령하는 것이 시허릭의 해 결책이었다. 그리고 쥘칸은 자신이 그 해결책을 거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허릭이 어딘가로 명령을 보내자 곧 제국병들이 민간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체구가 굉장히 좋은 인간이었다. 그 인간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 가볍 게 목례하고는 그 곁에 섰다. 시허릭은 그의 얼굴을 보려면 올려다보 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보는 것을 포기했다. "이 사람은 유수부 수도국에서 온 오니 보다." 오니 보는 다시 고개를 꾸벅했다. "안녕하십니까." "유수부의 수도국은 하늘누리 시민들 전체가 쓸 물을 하늘누리에서 흘러내리지 않도록 보관하는 곳이다. 따라서 물을 가둬두는 안전한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늘에 뜬 저수지 를 만들거나 관리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유수부 수도국의 국원들은 아마도 수리학에 관해서는 제국 내의 최고 전문가들이겠지. 따라서 그들에겐 지상에 있는 운하의 수문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 정 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이 귀관을 도와줄 것이다." 오니 보는 이 뻔뻔한 거짓말이 참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하늘누리 의 저수 시설이 경이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설계한 사람은 유수 부 수도국원이 아니라 도깨비 대장장이와 목수, 건축가들이었다. 유 수부 수도국은 그저 그것을 관리할 뿐이며, 따라서 제국 최고의 수리 전문가 어쩌고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오니 보는 자신이 그런 식 으로 소개되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오 상장군은 레콘 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상장군의 말처럼 운하의 수문을 설계하는 것 정도는 오니 보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오니는 쥘칸 장군이 마지오 상장군의 거짓말을 받아 들이는지 궁금해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니는 불안함을 느꼈다. 쥘칸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오니를 노려 보았다. 당장이라도 호통을 칠 것 같은 표정에 오니는 조바심을 느꼈 다. 그 때 시허릭이 약간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암살공은 일만 명의 레콘을 준비해두고는 우리에게 한 방 먹일 기 회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이젠 우리가 암살공에게 한 방 먹일 차례 다. 나는 정말 그러고 싶다. 쥘칸 장군. 전장을 가지고 가는 우리들 을 보고 암살공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고 싶다." 쥘칸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결정하면 돼?" 시허릭은 웃지 않았다. 다만 신발 속에서 발가락을 꽉 움츠렸을 뿐 이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알았어. 따라와. 오니." 쥘칸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오니는 시허릭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시허릭은 큰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자 리에 앉았다. 쥘칸을 분기시키기 위해 한 말이지만, 그것은 시허릭의 진심이기도 했다. 쥘칸도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를 분기시키려는 의 도를 짐작하면서도 묵인했을 것이다. 시허릭은 정말 암살공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통쾌하고 짜릿하게. 그리고 그것은 사라티본 평야에서 끔찍한 재난을 당해 사기가 바닥 으로 떨어진 제국군에게도 필요한 일이었다. 나머지 회의를 주관하며 시허릭은 부하 장병들에게 말해야 할 내용을 알려주었다. 제국의 수 도는 통치상 필요하면 직접 그곳으로 간다. 그리고 제국군은 전략상 필요하면 전장을 가지고 간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군인이니까. 우리는 황제 폐하의 영광 아래 반드시 이긴다. =============================================================== 14챕터 시작합니다. 잊어버리신 분들을 위한 지난 줄거리 요약 : 까마득한 옛날, 약육강식의 지엄한 원칙에 아직 자신의 도덕을 편입 시킬 힘을 가지지 못했던 우리의 선조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돌. 검은 돌을 만진 우리의 선조들 중 어떤 이가 눈에 이채를 띠고는 뼈다귀를 집어든다. 그는 그것을 힘차게 집어던졌다. 그러자 뼈다귀 는 감자탕이 되었다. 진화의 극단에 도달한 우주 저편의 형제들이 우 리에게 보낸 감자탕 요리법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그 비밀의 열쇠 를 추적하기 위해서 세 명의 위대한 요리사가 힘을 합쳤다. 각자의 전공 분야가 달랐지만 힘을 합치면 제빵계의 전설인 제트 슈크림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세 사람은 코스믹 감자탕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 해 기계화 부엌을 시공해준다는 은드로메다 주방시설 전문점을 향해 은하철도를 타고 먼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아틀란티스 문명의 비밀 을 간직한 노틸러스 부동산 중개소는 대서양에 대한 영토권 설정을 노리고 '독도는 우리 땅'을 개사하여 '아틀란티스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해적방송을 시작한다. 김국환 씨의 열혈스러운 음색에 - 외로운 기적소리에 눈물마저 메마르고♪ - 익숙했던 은하철도는 이 뜻밖의 노래에 그만 탈선을 일으켜 알 수 없는 전뇌공간으로 워프해 버리고 만다. 그곳에서 세 요리사는 자신의 기억을 잃는다. 그들 앞 에 나타난 엘프들의 왕은 빨간 약을 먹으면 기억을 잃지만 진실을 알 게 되고 파란 약을 먹으면 진실은 모르지만 기억은 회복된다고 말한 다. 그러자 세 요리사는 둘을 절묘하게 배합하여 보라색 드레싱을 만 들어보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강철의 압력밥솥이 필요하다……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4-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19 조회수 : 535 피를 마시는 새 14.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 2 제이어 솔한은 단검을 잘 보이도록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것을 당신 몸 어딘가에 꽂아 생명이 새어나오게 하는 것이 제 용 건이었습니다." 규리하의 변경백은 제이어를 감동시켰다. 아이저는 눈썹을 약간 꿈 틀할 뿐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암살공이 자신의 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기묘하군." "제가 요청했지요." "그랬군." 제이어는 단검을 뒤집어 날 부분을 잡고는 손잡이쪽을 아이저에게 내밀었다. 아이저는 그것을 받아들며 말했다. "칼날에 독을 발랐어야지. 단검에 능숙하지는 않을 텐데." "저는 독 같은 것 다룰 줄 모릅니다. 그리고 어지간히 단검 다룰 줄 몰라도 목을 찌르면 확실하다더군요." 아이저는 목을 한 번 쓸어만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암살공이 벌써 패전 대비를 한다는 것은 기묘하군. 그럴 사람이 아 닌데." "패전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대비할 뿐이지요." "모든 것을 대비한다면 내가 살아있는 편이 좋지 않나?" "아닙니다." "아니라고?" "각하에겐 가치가 없습니다. 각하와 같은 자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루기는 훨씬 쉬운 공자가 있습니다." "이이타가 나와 같은 자격을 가지고 있나." "규리하에서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공녀께서도 규리하의 통치자 노 릇을 하고 있습니다. 각하. 규리하에서 반란이나 폭동 같은 것이 일 어났어야 합니다. 하지만 규리하는 평온합니다. 규리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규리하라는 이름 하나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아이저 규리하일 필요는 없습니다." 명심해둘 만한 지적이었다. 아이저는 콧등을 살짝 만지며 말했다. "내 백성들은 당황했겠지. 규리하는 왕이 돌아올 때까지 변경백령을 지켰다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어. 왕이 황제로 바뀌긴 했지 만 그 변화의 중심에는 충의공도 계셨고, 따라서 왕에 대한 규리하 사람들의 애정은 그대로 황제에게 이어졌어. 내 백성들은 그들의 지 배자가 황제와 다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야. 그리고 그들의 지배자를 위해 황제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은 더욱 어렵지. 그 래서 조용한 거지." "그렇군요. 어쨌든 비셀스 규리하가 규리하에서 반황제 세력의 결집 을 차단할 수 있다면 이이타 규리하도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 면 규리하 사람들을 포섭할 수 있다는 당신의 가치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혹 그 책을 해석할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당신 은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당신이 살아있을 경우의 가치는 그 정도입 니다. 하지만 죽으면 상당한 가치가 발생하지요." 아이저는 이해했다. 발케네공이 상황이 나빠져서 휴전이라도 벌여야 한다면 황제에게 보낼 선물로는 살아있는 아이저보다는 죽은 아이저 가 낫다. 살아있는 아이저는 규리하의 전 통치자를 죽인다는 부담감 을 가지고 죽여야 하지만 죽은 아이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아이저가 죽으면 이이타를 통제하는 것은 더욱 간단한 일이 된다. 아 이저는 암살공과 살인기사 중 누가 적극적으로 주장했을지 짐작해보 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어쨌든 결행을 맡기로 한 자는 살인기사다. 그리고 살인기사는 지금 자신의 실패담을 하나 늘린 상태였다. "그러면 왜 나를 가치있게 만드는 것을 포기했지?" "저는 친구를 죽이지 않습니다." 연출이다. 아이저는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의 심스러웠지만 제이어의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밖에 떠올릴 수 없었 다. 확고한 결단력으로 의지로 성공보다 연출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실패를 선택하고 마는 제이어의 버릇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러나 아이저는 그것을 경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일어 나서 손을 내밀었다. 제이어의 말은 거짓이다. 아이저는 제이어의 친 구가 아니다. 하지만 제이어는 아이저의 친구다. 앞으로 내민 아이저 의 손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제이어는 그 손을 마주잡았다. "암살공에겐 당신이 저를 때려눕히고 도망쳤다고 하겠습니다." 아이저는 말했다. "행운을 바란다. 친구." "동감입니다." 제이어는 몸을 돌려 떠났다. 평범해서 화려한 몸짓이다. 세 시간 뒤, 아이저 규리하의 모습은 암살성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 게 되었다. 아실은 반쯤 쓰러진 자세로 그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었 다. "그 이야기를 왜 제게 하시죠, 시종장님?" 방 안에 두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시종장은 편한 자세로 앉아서 말 했다. "네가 암살성의 주인이니까." "스카리에게 '아실에겐 이미 보고했습니다'라고 말해주기 위해서군 요. 그런 방식이 좋다고 생각하세요? 스카리는 굉장히 고집센 사람인 데." "나도 가끔 헷갈리긴 하지만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어린애가 아 니라 서른두 살 먹은 남자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말은 맞춰야겠군요. 제가 허술한 성의 보안 태 세에 대해 무엇을 지적하고 무엇을 보완하라고 명령한 거죠?" 시종장 주보 네서파는 빙긋 웃었다. 세인들의 눈에 아실에게 황금 열쇠를 넘긴 락토의 행동은 파격적인 인사지만 네서파 시종장은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실은 영리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다. 가 장 야박하게 평가한다 해도 그 행적이나 대외적 숙원을 보고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통제가 안 되는 미치광이는 절대로 아니었다. 자신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에 그 역량을 쓴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도 있었 을 소녀를 보며 주보는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네가 굳이 알아둘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공자는 네게 질문하러 오 지는 않을 테니까. 혹 그런다 해도 몸이 아파서 만날 수 없다고 말하 면 될 거야. 그런데 몸은 괜찮니?" "말은 네 발 달린 것 중에 가장 환멸스러운 동물이에요. 저는 높은 곳에서 흔들리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아프다 니." "힘으로 통제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말한테 네 힘이 통할 리가 없으 니 결국 네 몸을 스스로 아프게 한 거야. 말 때문이 아니야." "헤어릿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포기했니?" "아니오. 헤어릿은 제가 빠르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높이와 흔들 림에 익숙한 것이 좀 도움이 되나 봐요. 마지막엔 혼자서 좀 달리기 도 했어요. 그 땐 기분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지금은 머리카락 끝까지 아파요." "말타기를 꼭 배우겠다면 나는 솜씨 좋은 궁수들을 배치해야 한다. 괜찮겠어?" 아실은 피식 웃었다. "지멘이 돌아올 때까지는 여기서 떠날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안심 하시라고 말씀드려도 배치하실 테니, 좋도록 하세요." "걸어서 도망치는 거야 어렵잖게 되잡아올 수 있지만 말 타고 도망 치면 어쩔 수 없잖아." "괜찮아요. 신경쓰지 않아요. 그런데 급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전황 이야기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일만 레콘은 제국군을 박살냈나요?" "지금은 일만이 아냐. 육천이지." "예? 육천이오? 왜 그렇게 된 거죠?" "전투 중 사망자와 탈영자들이 있으니까." "그래도 어떻게 반이나 없어진 거죠?" "하늘누리에서 물을 부었다." 아실은 눈을 빛냈다. 주보는 탐탁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늘누리를 전장 바로 위로 이동시킨 다음 하늘누리의 용수를 한꺼 번에 방류했다. 굉장한 소나기였던 모양이야. 아래에서 싸우던 사라 티본 부대는……" "사라티본 부대?" "스카리 요새군의 새 이름이야. 사라티본 부대는 정통으로 물벼락을 맞게 되었지. 엉겅퀴 여단과 싸우느라 사상자가 많이 생겼지만 그 물 벼락이 결정적이었어. 많은 레콘이 도망쳤지. 남은 숫자를 끌어모아 보니 그 정도가 된 모양이다. 현재 발케네공께서는 그 병력과 함께 라이옥 성에 물러나 계시지." "그렇다면 그 육천 명은 물벼락을 맞고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군 요?" "전장에서는 이탈했어." "하지만 탈영하지는 않았고?" "맞아." "기적적인 성공이네요." 주보는 조금 전 아실의 말을 반복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강력한 부대가 반토막난 것을 성공이라 고 표현하는 거냐?" "시종장님. 저는 한 명의 레콘과 함께 황제를 잡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공작님에게는 육천 명이나 있어요. 육천 명의 지멘인 셈이 죠." "육천 명의 지멘?" "도망치지 않은 이상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일에 대해 정당한 대가 를 받아내고야 말 테니까요. 무엇이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 머나먼 북쪽에서 아실이 던진 질문을 힌치오가 들었다면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사라티본 부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운하를 파는 레 콘들이다. 얼어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 힌치오의 곁에는 팔리탐 지소어가 말 에 탄 채 서있었다. 팔리탐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팔리탐은 고민 속에서 말고삐를 손목에 감았다 풀었다 했다. 그들이 서있는 높은 산등성이에서는 저 먼 곳의 평야에 펼쳐져 있는 불야성이 뚜렷하게 보였다. 무수히 많은 횃불과 화톳불로 밝혀져 있 는 그곳에서는 여느 공사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의 공사가 이 루어지고 있었다. 폭 5미터, 그리고 지형에 따라 바뀌긴 하지만 평균 적으로 깊이가 3미터는 되는 운하가 마치 풍경화를 그리는 듯한 빠른 속도로 평야 위에 드러나고 있었다. 제국군 측에 질의서를 보낸 것은 아니지만 팔리탐은 그 가공할 속도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 것 같 았다. 엉겅퀴 여단의 레콘들은 대대 단위로 교대 작업을 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할당 구간을 빨리 끝낼수록 운하 공사 현장에서 빨리 떠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들도 운하 공사가 내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공사 속도는 매우 빨랐다. 팔리탐이 말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한 전장을 가 지고 오겠다는 뜻이군. 사라티본에서 겪은 일에도 불구하고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대장군에게 낯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소." 힌치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국군엔 대장군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군." "그렇소. 대장군이 없어도 제국군은 여전히 제국군이오." 그럴 기세처럼 보였지만, 제국군은 파리조까지 운하를 팔 수는 없을 것이다. 팔리탐은 측량의 지식이 없었고 파리조의 고도에 대해 알아 본 적도 없지만 파리조가 고지대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저 지대라면 밀려들어온 물이 오래 전에 파리조의 바위들을 침식시켰을 테니까. 하지만 파리조 가까운 지점까지 운하를 팔 수 있다면 그것만 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그리고 심리적인 영향력은 이미 현실화되 고 있다. 파리조까지 운하를 파서라도 진격하겠다는 제국군의 태도는 아라짓 제국의 강대한 힘을 유감 없이 드러내는 대역사였다. 암살공 의 소환에 응한 소영주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사라티본군의 맹전에 고무되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의지를 잃었다. 이미 불안한 표정과 불쾌한 잡음들이 감지되고 있다. 그들을 다시 안심시키려면 운하 공사를 중단시켜야 한다. 레콘들의 공사를 방해하려면 당연히 레콘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하지만 힌치오 는 사라티본 부대가 투입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팔리탐 자신이라도 공사장에 적의 레콘이 나타난다면 수문을 열어버리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암살공은 힌치오를 몰아붙였다. 운하를 파는 것도 레콘인데 그것을 방해하는 일을 왜 못하냐는 락토의 질책은 힌치오를 몹시 동 요시켰다. 힌치오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락토를 노려보았다. 결국 팔리탐이 타개책을 내야 했다. 락토는 팔리탐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 와 힌치오가 공사 현장을 직접 보고 오는 것에 동의했다. 공사 규모가 워낙 거대한 것이기 때문에 안전한 거리에서도 그것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밤이었고 휴월의 희미한 빛밖에 없었기 때 문에 그들이 포착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팔리탐은 만약 자신들이 포착된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운하 공사의 경비 태세를 알면 공 격 가능성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팔리탐은 힌치오에게 어떤 이상이 생길 경우 사라티본 부대의 통제가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간 과할 수 없었다. 팔리탐은 불안하게 툴툴거리는 말의 목을 쓸어주었다. 그가 보기에 이 전쟁은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 되고 있었다. 한쪽에는 물벼락을 맞 고도 안전하게 귀환한 육천 명의 레콘들이 있다. 그런데 그 레콘들의 맞은편에는 다른 레콘들이 운하를 파고 있었다. 레콘이 물을 싫어한 다는 것은 공리다. 해석의 기초가 되는 그 공리가 무시되고 있기 때 문에 해석은 불가능했고 따라서 전망도 어려운 것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팔리탐은 전쟁의 흐름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불안감 이상의 것을 느꼈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연계의 질서가 바뀌는 일이었다. 레콘은 개인주의자이고 세상의 흐름에 큰 관심이 없다. 하 지만 그들도 세상의 일부이며 또한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비록 조그마한 것이라도 그들 모두가 변화를 일으킨다면 세상 자체도 직간 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팔리탐은 황제가 왜 분리주 의 운동을 허용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무턱대고 만들어내는 일이다. 물론 새로운 세상 의 구축은 원시제도 행한 일이었고 그 결과는 위대한 제국의 탄생이 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원시제 같은 천재는 아니다. 아라짓 제국 의 탄생은 일어나기 힘든 행운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전쟁은 위험하군.' 팔리탐은 그렇게 생각했다. 위험에 처한 것은 암살공이나 황제가 아 니라 그보다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락토가 먼저 시작했고 이제는 제국군도 그렇게 하고 있듯이, 그들은 승리를 위해 레콘을 함부로 변 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진 쪽은 물론이거니와 이긴 쪽도 승리로 상 쇄시킬 수 없는 끔찍한 피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전쟁은 빨리 끝 나야 한다. 힌치오가 뭐라고 말했다.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팔리탐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소?" "가까이 가보자." 팔리탐은 놀란 얼굴로 힌치오를 바라보았다. 힌치오는 이쑤시개를 어깨에 걸친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팔리탐은 말을 재빨리 움직 이며 말했다. "어디까지 가려는 거요? 여기서도 잘 보이는데." 힌치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단한 걸음으로 운하 공사장 쪽을 향해 걸어갔다. 팔리탐은 미심쩍은 눈으로 휴월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 힌치오의 크고 하얀 몸은 어둠 속에서 얼마나 잘 보일지 생각해보 았다. 지금이 충분히 어두울까? 팔리탐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두 번째 생각했을 때도 힌치오는 멈 추지 않았다. 이제 가장 가까운 공사장과의 거리는 몇백 미터에 불과 했고 레콘에게 그것은 먼 거리가 아니다. 팔리탐은 당황하여 힌치오 를 불렀다. "힌치오!" 힌치오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어깨에 걸쳐두었던 이쑤시개를 내려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팔리탐은 어쩐지 그것이 돌격 자세 같다 고 생각했다. 힌치오가 말했다. "시험해봐야겠어." "시험? 무엇을?" "두고봐." 팔리탐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공사장과 힌치오를 번갈아 쳐다보았 다. 그가 다시 설명을 요구하려 했을 때 힌치오가 이쑤시개를 높이 들어올렸다. 힌치오는 하늘을 찌를 듯이 꼿꼿하게 세운 이쑤시개를 잠시 그대로 두었다가 앞쪽의 바위를 내리쳤다. 귀가 멀 것 같은 충격음에 팔리탐 은 기겁했다. 흥분하여 난동을 부리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팔 리탐은 고삐에 결사적으로 매달려야 했다. 그 때 힌치오가 커다란 계 명성으로 외쳤다. "수-문-이-터-졌-다-!" 팔리탐은 기어코 말에서 떨어졌다. 고삐를 놓지 않은 것은 오랜 세 월의 훈련 탓이다. 고삐를 놓칠 경우 크게 다치거나 말에게 밟힐 수 도 있다. 힌치오가 손을 옆으로 뻗어 말의 고삐를 나꿔챈 후에야 팔 리탐은 몸을 굴려 말 주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팔리탐은 몸의 아픔 을 돌볼 생각도 못한 채 운하 공사장에 펼쳐진 난동을 정신없이 바라 보았다. 땅이 길게 갈라지며 불꽃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길다란 운하에서 작업하던 레콘들이 한꺼번에 위로 뛰어올랐다. 장관이라면 장관이고 비극이라면 비극일 텐데, 어쨌든 엄청난 구경거리라는 점은 분명했 다. 비명과 발 구르는 소리는 태풍의 한가운데 들어선 것 같다. 레콘 들답게 장관은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레콘들은 서로를 걷어차며 더 높이 뛰어오르려는 놀라운 시도를 했다. 자갈들을 넣은 커다란 통을 위아래로 흔드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무수히 많은 깃털들이 하늘 에서 떨어져 마치 폭설이 쏟아지는 것 같은 형국이 되었다. 최초의 도약 이후 용케 다른 레콘들을 걷어차며 아직까지도 하늘에 머물러 있는 재주 좋은 레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레콘들은 하나 둘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다시 뛰어올랐지만 어떤 레콘들 은 자신이 운하에서 충분히 떨어졌음을 깨닫고는 운하의 상류쪽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뭔가 기묘하다는 것을 느꼈다. 수문이 정말 터졌다면 지금쯤 물이 쏟아져 흐르고 있어야 했다. 그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운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다른 레콘들의 주의를 끌었 다. 운하에서 멀리 떨어진 레콘들부터 제자리에 멈춰서서 상류쪽을 바라보았다. 몇 분 후에는 모든 레콘들이 멈춰섰다. 급류가 흘러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땅이 울리지도 않았다. 레 콘들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운하나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때 어떤 레콘이 분에 못이기는 목소리로 외쳤다. "속았다! 근-처-에-발-케-네-레-콘-이-있-어-!" 제국군의 레콘들은 멈칫하다가 조금 후에야 그 계명성의 의미를 깨 달았다. 그들은 두 번째 소동을 일으켰다. 고함을 지른 괘씸한 레콘 을 찾아내기 위한 소동이었다. 그들에겐 불행하게도 근처에 발케네 레콘이 있다는 지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레콘들이 첫 번째 소동을 부리는 동안 힌치오는 팔리 탐을 허리에 끼고 말고삐를 끌며 원래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 고 제국군 레콘들의 두 번째 소동이 일어날 때는 이미 충분히 먼 거 리에서 팔리탐을 내려놓고는 공사장 쪽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 다. 팔리탐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급한 움직임 때문에 비틀어진 가면 을 바로 잡아 시야를 확보했다. 힌치오를 볼 수 있게 되자 팔리탐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힌치오!" "생각대로군. 이런 식으로 방해할 수 있겠어." 어쩌면 폭발적으로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겉모습만 놓고 본다면 꽤 유쾌한 장면이니까. 하지만 팔리탐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수염볏을 쓰다듬는 힌치오를 보며 팔리탐은 고통과 비슷한 거부감을 느꼈다. 물에 빠졌다가 돌아온 레콘도 보았고 운하를 파는 레콘도 보았다. 하지만 팔리탐은 물을 무기로 이용하는 레콘을 보며 감당키 어려운 충격을 느꼈다. 그것이 비록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격적이다. 하지만 락토는 그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시간 뒤 라 이옥 성에서 힌치오와 팔리탐의 보고를 받은 락토는 크게 웃었다. 밤새 정찰을 하고 돌아온 두 사람을 위해 락토는 회의실로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두 사람이 음식을 먹는 동안 락토는 회의실 한쪽에 있는 발케네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팔리탐과 힌치오가 식사를 끝낸 것을 확인한 락토는 빠르게 말했다. "좋아. 그런 식으로 전진 속도를 늦추며 기다리도록 하자." "무엇을 기다립니까?" "조만간 펜스터에서 레드마 브릭이 올 것이다." "정체를 모를 제국군에게 봉쇄되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얼마 전에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애기살로 공격을 당했다고 하더군." "헨로 중대였군요. 하지만 그 중대는 이곳에 있는데?" "맞아. 헨로 중대는 오래 전에 펜스터를 떠났고 레드마를 막고 있었 던 것은 소규모의 분견대였다. 그 분견대는 정체가 노출되자 곧 도망 쳤고 레드마는 군사를 정비하여 이곳으로 출발했다. 노바일과 군스, 미차도의 병력도 오게 될 것이다. 그들이 도착하는대로 공격하지." "공격입니까?" "제국군을 더 전진시킬 수는 없지. 그러면 후방에서 항구적인 전략 거점을 구축할 수 있을 테니까. 운하를 가져오겠다는 배짱은 마음에 들지만 그러면 제국군도 엉겅퀴 여단을 전장에 투입시킬 수 없다. 인 간끼리 싸우게 될 텐데, 인간의 숫자만 놓고 보면 우리는 적의 세 배 다. 사라티본 부대가 엉겅퀴 여단을 붙잡아두고 있는 동안 본대를 처 리하면 돼." 암살공의 계획은 단순했지만 단순한 만큼 허점도 별로 없었다. 압도 적 병력이 있는데 전술 숙지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아군에 혼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복잡한 전술을 굳이 구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다. 암살공의 결정에 따라 발케네군의 행동이 정해졌다. 사라티본 부대 의 목청 좋은 병사들이 번갈아 운하 공사장 주변으로 찾아가 엉겅퀴 여단병들을 혼란시키고 도망치는 일이 시작되었다. 끔찍하게 화를 내 는 쥘칸을 달래기 위해 오니는 수문이 혹 열릴 경우 종소리로 신호한 다는 안을 내었다. 그것은 하늘누리에서 급격한 기동이 있을 때 사용 되는 방법이었다. 얼마 후 힌치오는 운하 공사장으로 갔던 병사들로부터 제국군이 아 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듣게 되었다. 힌치오는 지나치 게 거짓말을 많이 해서 제국군이 더 믿지 않게 된 것인가 생각했지만 팔리탐은 제국군이 신호를 바꿨을 거라고 추측했다. 운하 상류의 수 문에 대한 정찰 활동이 강화되었다. 얼마 후 수문 근처에 종이 있음 이 보고되었다. 힌치오는 큼직한 종을 준비하여 직접 운하 공사장으 로 갔다. 밤중에 들려온 귀가 멍멍한 종소리는 작업 중이던 레콘들을 발작하게 만들었다. 시허릭은 고민해보았다. 상대방이 라이옥 성에 틀어박힌 채 그저 제 국군의 전진 속도만 늦추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는 의미다. 아마도 추가 병력의 합류일 것이다. 그런 합류를 저지하 려면 광정면 분산 배치를 해야 할 터였지만 이곳은 발케네 땅이다. 적지에서 든든한 근거지도 부족한 상태에서 광정면 분산 배치를 하기 는 어려웠다. 그리고 운하 근처를 떠날 경우 적의 레콘 부대에 기습 당할 위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대회전으로 가야 한다. 결국 시허릭 은 운하의 건설 속도를 높여서 발케네공이 견디지 못하고 성을 빠져 나와 싸움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고 지대에 있는 라이옥 성에는 해자가 없으므로 레콘의 공격에는 취약하 다. 따라서 발케네공이 라이옥 성에 의지하여 농성을 시도할 가능성 은 별로 없었다. 결론을 내린 시허릭은 쥘칸에게 섬게하게 짜증을 부 렸다. 쥘칸은 시허릭의 짜증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오니와 함께 머리를 짜내어 봉화를 만들기로 했다. 수문 방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목 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신호에도 동요하지 말라는 명령이 엉 겅퀴 여단병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 다. 락토 빌파는 더 이상 운하 공사를 방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 다. 제국군이 파내는 운하가 라이옥 성 남동쪽 4킬로미터까지 도달했 을 때 락토 빌파는 모든 방해를 중단한 채 기다리기로 했다. 이틀 뒤, 기다리고 있던 발케네군의 눈앞에 펜스터 자작 레드마 브 릭의 깃발이 나타났다. 하지만 레드마 브릭이나 그의 병력은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브릭의 깃발을 들고 나타나 제국군에 합류하는 고추 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단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락토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을 묻는군. 짐이 그들을 불렀다. 두 여단이 황제의 명령 외에 누구의 명령을 듣겠는가.] 치천제의 니름을 들으며 데라시는 이마를 짚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그는 혼자 있지 않았다. 벽난로가 활활 불타고 있는 방안에는 사도 락신 치올과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지 알데 락바이는 데라시로 하여금 벽난로의 불을 꺼도 되지 않을까 의 심하게 할 만큼 열기를 뿜어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데라시는 조 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폐하의 명령을 받고 온 것입니다." 지알데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황제가 접견을 거부하자 데라시의 방 으로 찾아와 황제에게 니르라고 강요했던 이 삼고의 일원은 그런 대 답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귀족원에서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백작. 폐하께서는 어떻게 그들을 진정시킬 작정이신지 여쭤봐 주게." 데라시는 자신이 뱀단지나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노하고 있는 천경유수에게 불평을 늘어놓아봤자 통할 리가 없기 때문에 데라 시는 순순히 황제에게 닐렀다. 조금 후 데라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벽난로 옆의 의자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천경유수님. 폐하께서는 천경유수의 뱀단지 노릇은 그 만두라고 하셨습니다." 지알데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데라시를 노려보았다. 사도가 말했 다. "지알데. 이미 온 것을 어쩌겠나. 또 발케네공이 일만 명의 레콘이 라는 흉악한 준비를 해두었으니 이쪽에서도 그에 어울리는 대비를 갖 추는 것이 마땅하겠지. 귀족원은 레콘 여단 세 개가 동원되었다는 것 에 분노하기에 앞서 일만이라는 맹랑한 숫자의 레콘 병사를 기른 발 케네공을 지탄해야 해." 지알데는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락신을 바라보았다. "락신! 일만이라는 소리는 집어치우게. 그것은 육천이야. 그리고 실 제 전투력으로 따지면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거야. 그것은 그냥 많은 숫자의 레콘일뿐이야. 그냥 폐하의 신민이 많이 모여있을 뿐이 라고! 하지만 레콘 여단은 전투를 위해 훈련받은 병사들이야. 어떻게 숫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 둘을 비슷하게 보는 망발을 할 수 있는 건가?" "레콘은 레콘이야. 그들은 혼자 있어도 군대라고 하지. 자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자네도 암살공이 데리고 있는 병력이 인간 육천 명이 모여있는 것과 같은 거라고 말하지는 않겠 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도륙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야! 게다가 이 것은 선례가 된단 말이야. 아라짓 제국의 황제는 외적에 대비하기 위 해 제국군이라는 고금에 없었던 막강한 병력을 거느릴 수 있는 거야. 두 번의 대확장 전쟁과 천일전쟁을 통해 북부에 엄청난 위험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나가들이 저 남쪽에 있기 때문이야. 그 엄청난 무기를 제국 내부에 쓸 권리는 없어!" 락신은 눈을 부릅떴다. "말 조심하게. 지알데. 자네가 폐하의 권리를 정할 수는 없어." "나는 도덕을 말하는 거야. 락신! 폐하께서 법 위에 있다 하셔도 도 덕 위에 있으실 수는 없어. 대호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기 배를 찢 던가? 용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던가?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 어나서도 안돼!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도덕의 기본 중의 기본 이야.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가 혹 있다면 아무 규칙도 없는 두 억시니뿐이야. 폐하께서는 제국을 두억시니로 만드실 수는 없어!" 데라시는 두 고귀한 대신들이 나가는 소리에 둔하기 때문에 제외해 도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했다. 이곳은 그의 방이었고 다 른 사람의 방에서 그 주인을 제외한 채 언쟁을 벌이는 것은 분명히 무례다. 천경유수의 도무지 자제할 줄 모르는 말에 곤혹스러워 하던 락신도 그것을 깨달은 듯 데라시를 논의에 초청했다. "비스그라쥬백.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이다. 데라시는 사도가 원하는 것이 천경유수 를 설득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가의 목소리 에 정말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마법이 들어있기를 바라며. "저는 지금 저들을 돌려보낸다면 폐하께서 웃음거리가 되실 거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마법은 없는 모양이다. 지알데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데라시를 노 려보았다.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범죄를 저지르는 얼간이들에 대해 나 는 아주 많이 들었네. 백작." 효과가 잘 알려져 있는 몸짓의 마법을 기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 다. 데라시는 겸손한 몸짓을 해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예. 그저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 고 해서 잘못된 일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귀족 원의 귀족들 모두가 그렇게 선의로 해석해줄지 의문스럽습니다. 특히 퍼스 후작 같은 이가 어떻게 나올지 정말 걱정됩니다." 퍼스 후작의 이름은 지알데를 입 다물게 했다. 지알데는 퍼스 후작 을 입과 욕심만 크고 나머지는 모두 작은 위인 정도로 취급하지만 큰 입이 물어뜯으면 때론 큰 상처가 남는 법이다. 데라시는 조용히 말했 다. "그리고 제국군의 사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국군 은 외적에 대비하여 제국을 지킬 책임이 있는 황제의 군대입니다. 그 들의 주인이 귀족들에게 굴하여 그들을 위험에 빠트린다면 제국군은 크게 실망할 겁니다." "위험이라고?"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부하 장병에게 땅을 뒤덮은 채 달려오는 레콘들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의 주인인 부 위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많은 부위들이 죽었고, 상 장군은 두번째 돌격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곁에 레 콘 여단들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후퇴하면 돼." 간단한 대답이었다. 데라시도 그 의견에 동조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단지 그 단순함의 아름다움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데라시는 그럴 수 없었다. 부질없는 희망을 담아 데라시는 잠시 닐러보았다. [천경유수는 후퇴하면 된다고 하는군요. 폐하.] 대답이 없었다. 데라시는 소맷자락을 가다듬는 척하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후퇴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발케네공이 진지하게 사과하고 부냐 헨로를 돌려보낼 때, 그리고 제국에 큰 위험이 될 수도 있는 레콘 부 대를 자진 해산할 것을 약속했을 때 물러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후퇴는 불가능합니다. 현재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 미래의 분란을 조 장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발케네공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지알데는 날카로운 눈으로 데라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네도 이 전쟁의 이유를 알고 있나?" 데라시는 비늘이 약간 부딪히려는 것을 느꼈다. 지알데는 꿰뚫을 듯 한 눈으로 비스그라쥬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자신도 믿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 니." 락신 치올 사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지알데를 바라보았다. 지알데 는 거침없이 말했다. "이것은 황위 계승 전쟁이야. 백작도 그것을 아는 것이지? 그리고 락신. 자네도 짐작하고 있지?" 데라시와 락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알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두르는 이야기는 관두지. 이 이야기는 밖으로 흘러나가서는 안되 겠지만 우리 사이에도 벽을 세우는 것은 귀찮고 혼란스러운 일이야. 자네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싫어. 그러니 이 고집 센 늙은이가 툭 털어놓고 말하는 것을 용서하게. 폐하께서는 엘시 에 더리를 차기 황제로 내정하셨어. 그리고 차기 황제에게 방해자가 될 인물은 모두 제거하실 작정이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황 제가 되실 작정이지. 선황제를 증오할수록 차기 황제에 대한 애정이 높아질 테니까." 데라시는 불편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경유수를 익히 잘 아 는 락신은 그저 한숨을 내쉬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엘시 에더리는 좋은 황제가 될 수 있겠지. 어쩌면 위대한 황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 락신은 물끄러미 지알데를 바라보았다. 지알데는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의 황제가 아니야. 자신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황제여야 해.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폐하께서는 엘시를 사랑하는 자들만 남겨줄 작정이신 것 같지만 그것 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야. 언젠가 또 황제에게 거역하는 자들이 나타 날 거야. 황제를 깔보고 미워하고 혐오하는 자들이 나타날 거야. 그 것은 절대로 막을 수 없어. 그러니 황제는 그것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돼. 그것을 놔두어야 해." 락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은 그렇지." "실제는 다르다?" "엘시의 계승을 반대하는 자가 즉위 초기에 나타나는 것을 막는 것 에는 의미가 있어. 원시제께서 그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으셨던 것 은 대호왕이라는 선임자가 있었기 때문이지. 북부는 돌아온 왕을 반 겼고, 그 왕이 지명한 후계자에게 만장일치의 지지를 보냈어. 만약 원시제께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일에 시간을 소모하셔야 했다 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 같은 업적은 불가능하셨을지도 몰라." "단 하나의 예일 뿐이야! 만약 엘시가 황위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 라면? 그렇다면 그는 즉위 초기에 반대 세력에 의해 물러나야겠지. 하지만 폐하께서 반대 세력이 될 자들을 모두 없애버리셨기에 폭군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다면, 그러면 어쩔 텐가?" "엘시가 폭군이 될 것 같지는 않군." "자네가 예언가인가?" "나는 확률을 믿을 뿐이야. 확률 외에 무엇이 있나? 자네도 엘시가 폭군이 될 확률이 많다고 믿지는 않겠지." 지알데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락신 치올은 허허로 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내게 엘시가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도울 시간 정도는 남아있을지도 모르지. 자네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럴 시간이 있 을 거야. 폐하께서는 황위 이양을 서두르시는 것 같으니." 지알데는 무력감을 느꼈다. 락신은 이미 황제에게 찬성하고 있었다. 삼고의 마지막 일원인 태위가 있었다면 세력차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완고한 대립각 외에는 세울 것이 없다. 그리 고 지알데는 대립 자체의 의의는 믿지만 그것이 소비하는 시간에 대 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데라시를 바라보았지만 황제의 첩이 그를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지알데의 생각은 틀렸다. 데라시가 그를 도와주었다. "엘시 본인에게 물어보면 어떻겠습니까?" "뭐?" "결국 황위를 받을 사람은 엘시입니다. 그가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황위를 이양받는 방식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고 생각합니다." 지알데는 두 말 할 것 없이 엘시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알데는 기뻐할 수 없었다. 엘시는 현재 시모그라쥬공에게 억류되어 있으니까. 그 사실을 말하려던 지알데는 문득 황제의 말을 떠올렸다. 치천제는 엘시가 돌아오도록 해줄 사람이 엘시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했다. 만 약 치천제의 말이 맞다면 엘시는 억류에서 벗어나 돌아올지도 모른 다. 그리고 그것이 상식적이었다. 치천제가 엘시를 계승자로 내정했 다면 그에게 안전 보장을 해줬을 것이 분명하니까. 지알데는 데라시의 말에 동의했다. 데라시의 말대로 황위를 받는 것 은 엘시 자신이다. 따라서 엘시의 의사는 황제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의 백 마디 주장보다는 엘시의 한 마디가 황제 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지알데는 엘시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다른 두 사람의 생각도 같았다. =============================================================== 정말 오래간만의 비입니다. 기분 좋네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4-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20 조회수 : 2207 피를 마시는 새 14.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 3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 고 하늘에 검고 흰 돌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하늘을 바라본 파라말은 자신의 곤경을 타파하기 위해 어디에도 없는 신이 신수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바둑판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망막에 잔영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라말은 목을 몇 번 비튼 다음 그를 장고하게 했던 바둑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바둑판은 끝내기 단계 직전에 느닷없이 전개된 일련의 큰 바꿔치기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바로 옆에서 뻗어나온 그림자가 한낱 나뭇가지인지 목을 노리는 칼날인지 알 수 없는 형국이었다. 승부가 미세하다고 보고 끝내기 단계에 정신 을 집중하던 파라말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변의 대마가 자칫 하면 양단될 처지였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계가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마를 수습하면서 동시에 중앙에 있는 상대의 집을 삭감할 방도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중앙에서 느닷없 이 출현한 상대의 집은 10여 호. 적다면 적은 집이겠지만 승부가 미 세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크기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기뻐하겠군." 느닷없는 말에 파라말은 깜짝 놀랐다. 건너편의 상대는 바둑판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파라말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지나가는 말처럼 대답하려던 파라 말은, 그러나 자신이 승부에 집중하여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꼈다. 파라말은 한 번 바둑판을 힐끗 바라보고 는 곧 뇌리 속에서 바둑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그렇습니다. 평소보다 더 독한 양파 냄새를 풍겼다고 하더군요." 상대방은 점잖게 웃었다. "고추냉이와 왜솜다리가 펜스터의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고 하던데." "이곳으로 오던 도중 브릭 자작의 군대를 발견하고는 기분풀이 삼아 부수고 온 모양입니다. 우아한 맹주 레드마 브릭에게 이 전쟁은 지나 치게 가혹한 것이군요. 발케네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걸물이 고 이번 전쟁에 큰 활약을 할 거라고 자타 공인하던 위인인데 전쟁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말도 안되는 적만 만나서 명예를 쌓기는커녕 수모 만 겪는군요." "전사했나?" "아닙니다. 살아났습니다만 전쟁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은 채 펜 스터에 틀어박힌 모양입니다. 그리고 출정 준비를 갖추었던 노바일과 미차도, 군스의 병력 또한 성문을 걸어잠그고 모든 교섭에 불응하고 있습니다." "중립선언이군." "그런 셈이지요." 그렇게 화려하게 도착했지만 고추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단은 자신 들의 업적이 별로 무용담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엉겅퀴 여단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엉겅퀴 여단이 만들고 있는 것이 운하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그들의 정신 상 태에 대한 의문을 표시했다. 시허릭은 두 여단장에게 강을 가지고 가 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은 두 여단장의 마음에 들었다. 특히 고추냉이 여단은 땅을 파는 일에 대해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구리아트 산맥을 관통하는 그리미 유료수도를 만든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추냉이 여단병 중 유료수도 공사 에 참가했던 자들은 일부 고급장교뿐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고 그것을 레콘 병사들에게 가르쳤다. 대대 단 위로 교대되던 작업 방식은 이제 여단 단위로 교대되었다. 운하의 건 설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운하는 곧 라이옥 성 동쪽의 저지대를 관통했다. 그리고 성을 뒤에 내버려둔 채 파리조를 향해 똑바로 뻗어 갔다. 암살공은 어쩔 수 없이 라이옥 성에서 빠져나왔다. 전투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고추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단이 합류하는 바람에 제국군의 레콘은 삼천오백 명 정도가 되었고 그 숫자는 사라티본군의 병력보다 이천오백 명 정도가 작았다. 하지만 병력차가 열 배에 가까 웠던 사라티본 평야에서도 엉겅퀴 여단은 사라티본군을 상대로 상당 한 출혈을 강요했었다. 따라서 이천오백 명의 격차는 도저히 승리를 담보할 수 없는 차이다. 락토 빌파가 라이옥 성을 떠난 것은 파리조 에 더 가까우며 규모도 훨씬 큰 코네도 성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락토가 휘하 병력의 사기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하 늘에서 내려온 티나한이거나 다시 사람으로 바뀐 뇌룡공 륜 페이, 혹 은 죽은 채 싸우러 온 충의공 괄하이드 규리하일 것이다. 파라말은 담담하게 말했다. "저쪽에는 악몽을 그리고 있을 겁니다. 레콘 여단 3개의 실전투입이 현실화되었다면 200만 제국군 전부가 동원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 다."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말도 안되는 소리가 아닙니다. 군대에는 온갖 상황을 대비한 전쟁 계획이 구비되어있고 그 중에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농담처럼 보 이는 것도 버젓이 극비 표시를 단 채 보관되어 있습니다. 200만 제국 군의 총동원도 그런 계획 중에 하나입니다. 역시 농담 같은 이야기 하나 더 해볼까요? 2차 대확장 전쟁 당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 던 유료도로당이 오늘날 제국 전역에 자신의 도로를 낼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근면함이나 투철한 애당심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 군." "진지하게 듣지는 마십시오. 어떤 가설에 따르자면 유료도로당은 제 국군 측으로부터 도로이용료를 선불로 지급하고 도로를 건설했다더군 요. 200만 제국군을 제국 내부의 특정 지점에 집결시켜야 하는 경우 제국군은 제국 전역으로 뻗어있는 이동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료 도로당에 도로이용료를 주고 도로를 만들게 했다는 거지요?" "자네는 그 이야기를 믿나?"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자는 아마도 그리미 유료수도의 이야기에서 발상을 얻었을 겁니다. 그것은 제국군이 유료도로당의 사업을 도왔던 경우지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제국군에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서 취할 것은 있다고 생각합 니다. 제국 전역에 훌륭한 도로망이 건설되어 있는 이상 제국군은 마 음 먹으면 200만 제국군 전부를 빠른 시간 내에 제국 내 특정 지점에 집결시킬 수 있습니다." "남부의 적은 어떻게 하고?" "남부의 군사력을 총동원할 경우 시련에 대한 저지력을 잃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련이 혹 군사적 모험을 시도한다 해도 한계선 이라는 절대적 장벽이 있는 이상 제국은 최악의 경우에도 한계선 이 남만 잃을 뿐입니다. 한계선 북부에서 긴 시간 동안 차분하게 반격전 을 준비한 후 재침공해서 탈환할 수 있다는 거지요." 상대방은 완전히 침착을 잃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파라말은 말했다. "할 수 있다는 것과 한다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손실이 너무 크며 위험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 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현실적으로만 말한다면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는 불가능합니다. 도르 자작." 도르 헨로 자작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내 딸이 있네. 부사." 파라말은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도르는 힘겨운 얼굴로 말했다. "내 딸 때문에 제국군이 싸우고 있어…… 이곳이 하늘누리라서 다행 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만약 지상의 어느 도시였다면 밤중에 흉한 물 건들이 날아들거나 급습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파라말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질 서나 예의를 파괴함으로써 조직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려는 바보들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하늘누리에는 철없는 젊은이들의 숫자 가 적었고 그 시민들은 대부분 품위를 중히 여기는 높은 신분의 사람 들이었다. 그리고 수도의 치안을 책임지는 유수부 야경꾼들의 순찰은 엄하다. 도르의 말처럼 다른 곳보다는 차라리 하늘누리에 있는 것이 봉변 당할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이동수도는 일반적 으로 전쟁터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게 마련인 수도와 다르다. 발 아래 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헨로 가문 사람들의 심적 고통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파라말은 헨로 가문에 대한 출입을 계속하고 있었다. 원 래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와 파라말 아이솔은 헨로 가문에 대한 암살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측했다. 제국 정부가 부냐 헨로의 탈옥 에 분개하여 죄없는 헨로 가문 사람들을 해쳤다는 식의 누명이 조장 된다면 암살공은 자신의 정치적 부채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 하지 만 뜻밖에도 황제가 암살공의 빚을 전쟁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섰기 때 문에 오히려 도르 헨로와 그의 가솔들은 안전해졌다. 암살공이 힘들 여 도르 헨로를 제거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따라서 파라말은 더 이상 헨로 가문을 돌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도르 헨로의 몸은 안전해졌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대외적으로 볼 때 이 전쟁은 부냐 헨로의 탈옥 때 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헨로가 사람들은 떳떳하게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수치를 느끼는 것이다. 불행한 그들의 위안거리가 있다 면 니어엘 헨로의 분전과 산공부사 파라말이 그들을 찾아온다는 사실 뿐이었다. 부냐 헨로의 탈옥을 조장했던 파라말은, 도의적 책임감의 호소에 귀를 많이 기울이는 성격은 아니지만 기가 꺾일 대로 꺾인 도 르를 외면할 정도로 모질지도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발케네가 헨로 가에 접촉하려고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딸의 목숨을 위해 하늘누 리에 혼란을 일으키라는 밀명을 받으면 옥좌 앞에서 자살 시위를 기 도하기까지 했던 도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인 정과 실효 양자를 위해 파라말은 헨로가에 대한 출입을 유지하고 있 었다. 그리고 서글픈 도르의 얼굴을 본 파라말은 그를 위로하기로 했 다. "제국군의 전설이 된 다른 따님도 있습니다. 자작." 도르의 얼굴에 약간의 기쁜 빛이 떠올랐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었다. "그래. 그 애 때문에 우리가 숨이라도 쉴 수 있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자작께서 아래로 내려가 제국군에게 니 어엘 헨로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면 병사들은 자작의 옷깃이라도 만 져보려고 난동을 부릴 겁니다." "위로해주려고 애쓰는군. 고맙네. 부사." "발케네공이 뜻밖의 무기를 꺼내어 서전에 상당한 기세를 올린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듯이 제국군의 힘은 강대합니다. 200만 제국군의 일시동원은 물론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이곳에 도 착한 두 여단만으로도 저 곤혹스러운 발케네공의 레콘들을 물리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제국군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공과를 따질 때 니어엘의 배분은 결코 작지 않을 겁니다. 작은 따님 을 생각하면 속상하시겠지만, 기운 내십시오." 파라말의 말은 혹 발케네의 밀명이 있더라도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도르는 그저 위로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밀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지나치게 헤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유불급 은 전쟁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정치 또한 전쟁이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파라말은 과유불급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그의 위로는 좀 지나친 것임이 분명하다. 도르 헨로는 제국 정부의 유명한 형제 부사가 모두 미혼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국군의 영웅이 된 딸이 율형부의 수장이나 산공부의 수 장과 결혼하게 된다면 가문의 안전은 확실한 것이 될 터였기에 도르 는 꽤 집요하게 두 형제의 여성 관계에 대해 추궁했다. 파라말에게 그것은 일종의 위기였다. 파라말은 자신의 이성관에 대해서는 잘 알 고 있었지만 형의 이성관에 대해 아무 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 고, 형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간 사라말을 동생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인으로 확정지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파라말이 애쓰지 않아도 사라말의 평가는 이미 공식화되어 있었다. 파라말은 도르의 질문에서 그의 형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여 자를 좋아하긴 하는지 궁금하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파라말은 자신도 궁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바둑판 위에 까다로운 착점 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르는 꽤 장고해야 했다. "그래서 여쭙는 건데, 여자를 좋아하십니까, 형님?"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은 동생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리 고 파라말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장난기를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 "다른 남자를 찾아봐." "……제가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말은 게으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파라말 은 좀 더 부정하고 싶었지만 주장을 덧붙여봐야 더 괴상하게 꼬여서 되돌아올 것임을 알기에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파라말은 사라말이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에 관심을 두었다. "집까지 무슨 일감을 가져온 겁니까?" "전범 때문에 정리할 일이 있구나." "예? 벌써 발케네 전쟁의 전범을 정하는 겁니까?" "아니. 규리하다." "아아." "규리하공 비셀스께 보낼 물건이다. 떠나오기 전에 전해드렸어야 하 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군. 별로 대단한 것은 없다. 대장군이 대부분 의 죄인에 대한 처벌은 끝냈으니까. 다만 몇 가지 미진한 항목이 있 긴 하다." "예를 들자면?" "아이저 규리하와 이이타 규리하에 대한 항목." 정우의 아버지와 남동생이다. 파라말은 미진한 것이 아니라 곤란한 항목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되죠?" "물론 사형이지." "규리하공 비셀스가 아버지와 남동생의 사형을 주관해야 하는 겁니 까?" "설마. 반역자는 폐하께서 처벌하시는 거다. 나는 공에게 아버지와 남동생을 위해 항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는 거야." "반역에도 항소가 가능합니까?"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변경백령의 특징 때문에 좀 까다롭다. 너도 알겠지만 고 아라짓 왕국 시절 변경백령은 왕의 힘이 미치기 어 려운 곳에 설치되었지. 그 때문에 변경백은 자기 땅에 대한 사법권을 가진다. 그리고 아라짓 제국은 현재의 법과 충돌하지 않는 한 고 아 라짓과 신 아라짓의 법률을 인정한다. 그런데 법리 해석 결과 아무래 도 변경백령의 법 서열은 공작의 그것보다 더 높은 것 같다." "더 높다고요?" "그래. 변경백은 험지를 다스리기 때문에 현지 사정에 따라 자의적 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던 것 같다. 따라서 반역자에 대한 항소권도 인정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군. 항소는 가능하겠지만 판결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항소 는 변경백의 권위를 인정해주기 위한 절차가 될 거야." "재미있군요. 그러면 발케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스카리 빌파는 탈옥교사죄입니까, 납치입니까?" "탈옥죄라는 것은 없다. 도주죄라고 하지. 그리고 탈옥 교사죄라는 것도 없다. 도주원조죄라고 해야겠지. 그리고 스카리 빌파라면 순진 죄다." 파라말은 웃었다. "왜 순진죄지요?" "산공부사의 손에 놀아났으니까." 파라말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라말은 서탁 뒤에서 차분한 눈 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묻지 않았지만 네 경우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부냐 헨로 도주 사건 에서의 네 역할은 법률에 의해 체포 구금된 사람의 도주를 야기하거 나 용이하게 한 것에 해당하므로 도주원조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하늘누리 위였으니 규리하의 법 대신 폐하의 법으로 처벌된다. 10년 이하의 징역이지." 파라말은 약간 창백한 얼굴로 형을 쳐다보았다. 비록 사라말의 동생 인 그였지만 파라말은 형이 농담을 하는 것인지 진담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파라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가 스카리 빌파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핑계가 뭐 였나?" "바둑을 가르쳤습니다." "재미있군." "농담이 아닙니다. 스카리가 정말 그렇게 요청했습니다." 파라말은 스카리 빌파가 왜 바둑을 배우고 싶어했는지에 대해 설명 했다. 사라말은 잠시 회상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보니 지난 몇 년 동안 네 자금 사정이 괜찮았던 것 같군. 봉 급 내놔." "형…… 님." "목적이 이 전쟁이었냐?" "예? 아, 아니오. 아닙니다. 엘시 에더리 파혼작전이라고 해야겠군 요. 이 전쟁은 저도 뜻밖입니다." "용에게 날개를 주려는 것이었군."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었던 스카리와 달리 파라말은 사라말이 말하 는 용이 누구인지 짐작했다. 사라말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용근을 탐내는 자들 을 쫓아내는 일이고. 그렇다면 너와 비스그라쥬백 모두 폐하께 조종 당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비, 비스그라쥬백이오?" "다른 남자 찾아보라니까." "예?"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며 내숭 부리는 건 아직도 나를 노린다는 뜻 이잖아." 파라말은 입을 다물었다. 사라말은 선고하듯이 말했다. "네가 혼자 그 일 꾸몄을 리 없고, 누구랑 손발을 맞췄는지 짐작하 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러니 내숭은 그만둬. 그런데 내가 보기엔 백 작과 너는 모두 폐하께 조종당한 것 같군. 그러니 네 도주원조죄는 원인무효다. 무죄." "감사합니다. 앞으로 똑바로 살겠습니다." "그래. 봉급 삭감당한 형에게 돈도 좀 나눠주고." "……집요하시군요. 그런데 이 모든 것 뒤에 폐하가 계신 거란 것은 확실합니까?" "아니. 그냥 짐작이다." 파라말은 맥빠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라말이 아래쪽을 바라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을 때 파라말은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레콘 여단들이 왔는지는 알 것 같군." 파라말은 자신도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운하는 코네도 성을 향해 줄기차게 뻗어갔다. 세상이 처음 만들어지는 시간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여기엔 산을, 여기엔 호수를 만들자. 이곳엔 흘러들어온 물이 모이는 진흙탕 을 만들어 늦봄이 오면 개구리들이 목이 터져라 노래부르게 하자. 그 리고 이곳엔 강을 만들자. 마치 그런 의지가 현실로 나타나듯 대지 위에 굵은 운하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운하 양쪽으로는 파낸 흙을 이 용하여 튼튼한 제방이 만들어졌다. 황당한 수준의 물리력이 서슴없이 동원되다보니 복잡한 건축 기술은 별로 필요없었다. "파라!" 땅이 죽 죽 파여나갔다. "구보 시작!" 레콘 여단들을 파낸 운하 밑바닥에서 몇 번 구보하게 하면 그대로 달구질이 되었다. 건축학과 수리공학에 뜻을 품은 자들이 보면 인생 설계를 잘못했다는 공학적인 좌절감을 느낄 광경이었다. 그 대공사에 사용되는 도구들의 면면은 더욱 놀라 웠다. 공사의 실무 책임을 맡은 오니 보는 병사들의 창검을 제작하고 수리하던 대장장이들에게 특별한 물건들을 만들어내게 했다. 그에 따 라 대형 방패의 아랫부분에 금속 이빨이라 할 만한 것이 부착되고 양 쪽에 긴 쇠사슬이 연결되어 레콘용 가래가 만들어졌다. 외발수레의 바퀴를 떼어낸 후 금속판으로 보강하고 손잡이를 달아 레콘용 삽이 제작되었다. "파라!" "구보 시작!" 운하에 충분한 수량을 공급하기 위해 두 개의 강이 흐름을 바꾸게 되었다. 흐름이 바뀐 강 하류 지역의 발케네인들은 꽤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물 흐름에 방해가 되는 지형을 변경하기 위해 야산 몇 개가 사라졌다. 발케네의 지도 제작자들은 당분간은 지도 제작을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형이 매일 변경되니까. 공사의 진척 상황을 보며 오니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분명 제 국의 토목공학사에 길이 남을 수 있는 규모의 공사였지만 오니가 감 독하는 그 운하 공사는 건축의 가장 중요한 요건인 내구성이 결여되 어 있었다. 물론 운하의 엄청난 흔적은 긴 세월 동안 남게 될 테지만 운하 자체는 몇 년 내에 운하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 들이 만드는 운하는 소화차에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며 제국군에게 적절한 방어력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 항구적인 수리 시설은 아니었 다. 따라서 오니는 토목공학보다는 전사학에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 다. 자신을 공학자로 생각하는 오니는 그 사실이 만족스럽지 않았지 만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성인답게 곧 위안거리를 찾아내었다. 그 래서 오니는 갑충사들의 등 뒤에 앉아 공사 현장의 하늘을 날아다니 며 후세의 전사학자들이 틸러 달비의 이름은 몰라도 오니 보의 이름 은 알게 될 거라는 내용의 농담을 가장 통렬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코네도 성을 지척에 둔 거리에서 운하는 미리 예정해둔 계곡을 향해 방향을 바꿨다. 운하가 계곡과 연결된 다음 레콘 여단들이 공사 현장 에서 물러났다. 봉화가 올랐고, 두 개의 강에 건설되어 있던 수문이 개방되었다. 물론 그 작업에는 인간 병사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제국군이 만든 것이 마침내 대지 위에 아로새겨졌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바라본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장관일 것이 다. 세세년년 변함이 없는 지형이 느닷없이 변화되는 광경이었으니 까. 서로 멀찌감치 떨어진 두 강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대지 위에 푸른 선을 남기며 뻗어나갔다. 합류 지점은 세심한 계산 하에 깊이 파여져 있었고 따라서 범람은 없었다. 경쾌한 속도로 흘러간 강물은 코네도 성 근처에 도달한 후 계곡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곧 우레 같 은 소리가 울려퍼지며 계곡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가 나 타났다. 폭포 위에 걸리는 무지개를 보며 오니는 그만 눈물이 찔끔하 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강을 만들어내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조용히 먹을 갈았다. 벼루에 먹물이 흥건하 게 고이자 시허릭은 종이를 펼쳐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먹물 이 마르길 기다려 그것을 고이 접은 시허릭은 기다리고 있던 니어엘 헨로 수교위에게 그것을 주었다. 최고 사수의 자격으로 대기하던 니 어엘은 그것을 화살에 묶었다. 애기살을 쓰지는 않았다. 덧살을 쓰는 애기살에는 종이를 묶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어엘은 식인부 위라는 아름다운 별호를 쓰는 맥키 네미 부위의 강궁을 빌려온 참이 다. 화살이 시위에 걸리고 힘껏 잡아당겨졌다. 그리고 화살은 낮하늘 에 뜬 별이 되었다. 화살은 대단한 거리를 단숨에 날아갔기 때문에 눈이 좀 나쁜 자들은 화살의 궤적을 쫓기 어려웠다. 그러나 코네도성에서는 유성처럼 날아 오는 화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할 수 도 있는 장소에 꽂힌 화살은, 그래서 안전하게 수거되었다. 얼마 후 화살에 묶여있던 편지는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발케네공 락토 빌파의 손에 들어갔다. 락토는 종이를 펼쳤다. 항복은 군인의 불명예지만 지배자에겐 과감한 결단일 수 도 있습니다. 문 앞에 도달해 있는 운하를 보십시오. 에둘 러 말할 필요도 없이 각하는 지셨습니다. 불행을 자초하지 마십시오. 침착하게 생각하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을러 메는 짓은 통하지 않습니다. 쏘아진 화살이 하늘을 덮은 후는 이미 늦습니다. 아쉬운 마음 한량 없음을 짐작합니 다. 주먹으로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 고 손을 펴 들어올리면 하늘의 그 분이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어색한 글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락토는 각 문장의 첫글자만 읽 어보았다. 그리고 발케네공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사라티본에서 겪은 일에 상당히 상심했음을 알게 되었다. 락토는 편지를 고이 접어 놓은 다음 말했다. "회답을 보내야겠군." 락토의 명령에 따라 힘 좋은 레콘이 성루 위에 뛰어올랐다. 잠시 후 거대한 바윗덩이가 제국군을 향해 날아갔다. 자칫하면 병사 수십 명 을 다치게 했을지도 모르는 그 바윗덩이는 일시에 뛰어오른 몇 명의 레콘들에 의해 허공에서 붙잡혀 끌어내려졌다. 시허릭은 그 회답의 의미를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아라짓력 4월 2일, 코네도 성 공략전이 시작되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오뢰사수의 출동을 요구했지만 황제는 받아 들이지 않았다. 황제의 대답은 '금군은 황제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 이었다. 규리하 전쟁 당시 엘시의 요청이 있었을 때 치천제가 오뢰사 수들을 주저 없이 내주었던 것과 비교할 때 그것은 좀 기묘한 대답이 었다. 하지만 시허릭은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에겐 엉겅퀴 여단 외에도 고추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단이 있었다. 제국군의 역사에서 이토록 강력한 병력을 지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허릭은 여기 에 오뢰사수까지 요구하는 것은 좀 염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 각했다. 그리고 그에겐 오뢰사수의 공격보다는 덜 극적이지만 살상력 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 이상의 공격을 펼칠 수 있는 부대도 있었다. 시허릭의 첫번째 명령은 바로 그 부대에 떨어졌다. 원래 헨로 중대의 위치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믿어지는 운하 바로 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니어엘은 독립 중대는 자기 판단에 따라 기동성 있게 움직여야 함을 이유로 들어 넓은 배후지를 원했다. 따라서 제국군의 첫번째 공격은 그들의 머리 위로 세차게 날아가는 수많은 애기살이었다. 검은 구름처럼 날아간 애기살이 코네도 성 안 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제국군은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시 허릭은 지체 없이 레콘 여단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엉겅퀴 여단은 성 동쪽, 그리고 왜솜다리 여단은 성의 남쪽에서 일 거에 쇄도해 들어갔다. 땅이 쿵쾅쾅쾅 울렸고 자욱한 먼지 구름이 수 십 미터 이상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조금 기묘했다. 성으로 다가갈수록 발소리는 커졌지만 보폭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따 라서 전진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 때문에 코네도성에서 뿜어져나온 소화차의 물줄기는 레콘들에게 닿지 못했다. 장대한 물줄기가 성벽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락토 빌파는 일 을 대충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가 배치한 소화차는 성벽이 넓은 폭 포로 보일 지경으로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물줄기는 이 미 속도를 늦추고 멈춰있는 레콘들에겐 닿지 않았다. 시허릭은 땀 때문에 미끌미끌해진 손바닥을 비비며 그 모습을 바라 보았다. 레콘들의 돌격에 대한 반응은 틀림없이 수공일 것이다. 엉겅 퀴 여단장 쥘칸과 왜솜다리 여단장 무타루는 모두 그 예상에 동의했 다. 그리고 물을 쏘도록 유인하라는 시허릭의 요구에 대해서는 굉장 히 난감한 반응을 보였다. 작전대로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서도 시허 릭은 레콘들이 과연 흥분하지 않고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을지 고심 했다. 그리고 시허릭은 쾌재를 올렸다. 왜솜다리 여단과 엉겅퀴 여단은 침착하게 뒤로 물러났다. 미리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철저하게 교육시킨 것이 보람이 있었다. 시허릭은 젖어있는 바닥을 향해 제국군 본대를 진격시켰다. 성으로 다가가는 것이지만 또한 젖은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제국군 본대는 기운차 게 돌격했다. 젖은 땅으로 들어가면 사라티본 부대의 공격을 받지 않 는다. 거대한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돌격하는 제국군 사이에서 사다리들이 머리를 세우는 뱀처럼 들어올 려졌다. 독을 뿜을 듯 머리를 들어올린 사다리들이 성벽에 걸려졌다. 쿵, 쿠쿵! 만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시허릭은 조금 후 고개를 갸웃했 다. 들려오는 소리는 사다리가 내는 소리치곤 너무 크다. 그의 참모 들도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첫 번째 제국병 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 국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쿵, 쿵! 시허릭은 다시 당황했다. 코네도 성에서는 아무런 반격이 없었다. 화살이 날아오지도, 돌을 던지거나 기름을 붓지도 않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병사들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하 지만 아무 반격이 없다고 해서 도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뒤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병사들 때문에라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쿵! 돌격이 시작되었기에 사격을 멈춘 니어엘 헨로도 기묘하다는 표정으 로 코네도 성을 바라보았다. 이미 병사들의 물결이 성벽을 뒤덮었지 만 성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들려오는 것은 제국병들의 함성 과 원인 모를 충격음뿐이었다. 쿵! 쿵! 쿵! 그 때 니어엘 헨로의 근 처에 있던 가리아 릿폴 부위가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중대장님. 레콘들이 또 돌격하기로 되어 있습니까?" "왜?" "땅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 성은 분명히 흔들리는데 요." 니어엘은 그 말에 당황하여 코네도 성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 리고 가리아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은 흔들리고 있었 다. 그것도 쿵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러했다. 순간 니어엘은 모 든 것을 깨달았다. "전령! 사령부로 즉각 전달해! 후퇴해야 해!" 니어엘이 비명을 지른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먼저 성벽에 걸쳐져 있던 사다리들이 아래로 쓰러졌다. 제국병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전우들에 놀랐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제 국병들의 머리 위로 코네도성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먼 곳에 있는 헨 로 중대원들이 보기엔 마치 거대한 손바닥이 개미떼를 누르는 것 같 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개미떼는 제국군 본대였다. 아래로 기울어지는 성벽을 보며 시허릭은 니어엘이 깨달은 것을 그 대로 깨달았다. 성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앞에 집중되어 있는 제 국병들의 머리 위로. 시허릭의 극도로 흥분된 의식 속에서 그 성벽은 지독하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허릭은 그것이 기울어지다가 그냥 멈출지도 모른다는 소망마저 품어보았다. 하지만 멈추기는커녕 성벽은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실제로는 2, 3초에 불과 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시허릭에겐 2, 3년 같은 시간이었다. 시허릭의 3년이 지났을 때 성벽은 돌의 급류가 되어 제국병들을 난 타했다. "안돼!" 어떤 명령도 불가능했다.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시허릭은 덜덜 떨면서 코네도 성을 바라보았다. 절규는 들리지 않았다. 성이 무너지 는 굉음 때문에 모든 소음이 묻힌 탓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먼지 구름이 모든 것을 뒤덮은 탓이다. 비명도 피도 없었다. 그저 땅이 흐느끼는 소리와 자욱한 먼지 구름뿐이었다. 눈앞이 캄캄 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허릭은 그 먼지 구름이 가라앉지 않기를 기원 했다. 굉음에 말을 멈춰세운 락토 빌파는 매서운 눈으로 코네도 성이 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화산에서 뿜어져나오는 것 같은 먼지구름이 뭉게 뭉게 일어나 성이 있던 자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가 서있는 곳은 코네도 성 북쪽의 산마루였다. 그의 주위에는 별 다른 병력이 없었다. 파리조군과 소환군은 그의 북쪽에서 파리조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락토는 산마루에서 성 안에 남아있던 사라티 본군과 소화차 부대가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곧 먼지 구름 사이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사라티 본군의 레콘들이 소화차를 작동시켰던 인간 병사들을 데리고 먼지 구 름의 북쪽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코네도 성의 주민들은 제국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라고 명령해두었다. 어차피 성벽의 전면부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저항할 수도 없을 것이 다. 락토는 제국군이 무방비의 주민들에게 어떻게 대할지 궁금했다. 도덕적인 군대라는 말은 모순이고 끔찍한 타격을 입은 부대의 지휘관 은 애꿎은 피로 부하들의 공포를 닦아내는 일을 시도하기도 한다. 무 너진 성벽에 깔려죽은 제국병보다 더 많은 숫자가 살해될까? 락토는 생각했다. 그러려면 시허릭은 꽤 긴 시간을 소모해야 할 거 라고. 락토는 쾌활한 기분으로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하늘누리와 제국군은 충격에 빠졌다. 코네도 성을 무너뜨린 기술은 꽤 정교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건축 물은 아래로 붕괴되게 되어 있지만 코네도 성은 앞쪽으로 비스듬하게 쓰러졌다. 되도록 많은 타격을 입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무너 뜨린 것이 분명했다. 성벽을 그런 식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정확히 어 떤 기술이 사용되었는지는, 그러나 당장 알아낼 수는 없었다. 무너진 잔해 아래에 혹 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를 구출하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시허릭은 락토가 예상한 보복 행위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레콘 여단들이 모두 동원되어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운 하를 팔 때 사용되던 기술과 도구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하지만 잔해 를 안전하게 치우는 것은 무작정 땅을 파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 다. 이차 붕괴를 막으려면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레콘 의 무지막지한 힘에도 불구하고 잔해를 치우는 속도는 느렸다. 잔해 속에서 발견된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대부분이었다. 그 리고 겨우 발견된 생존자들은 죽은 전우들을 부러워했다. 몸 이곳저 곳이 으깨진 상태로 죽여달라고 외치는 병사들 때문에 일찍 찾아온 밤은 무시무시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무서운 밤의 절정은 하늘누리로부터 보복 명령이 내려왔 을 때 이루어졌다. 9세 이하의 아동과 59세 이상의 노인을 제외한 모 든 코네도 성 주민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아들었을 때 분노 때문에 미쳐 있었던 시허릭은 그 부당성에 대한 의심도 할 수 없었다. 한쪽 에서 구조 작업이 펼쳐지는 동안 다른쪽에서는 무차별 살해가 벌어졌 다. 나이를 물어보고 죽이는 귀찮은 일은 대부분의 경우 생략되었다. 누가 봐도 젖먹이로 보이는 아이나 지팡이 없이는 걷지도 못하는 노 인만이 안전했다. 그리고 비명은 구조 현장에서도, 살해 현장에서도 똑같이 처절했다. 아침은 죽은 이들에겐 영원히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찾아오지 않았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4-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21 조회수 : 2194 피를 마시는 새 14.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 4 파라말 아이솔은 추위를 느꼈다. 4월이었다. 제국 최북단의 이 땅에 도 여름이 찾아든지 오래였다. 미지근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여름이지 만 어쨌든 여름이었다. 하지만 파라말은 옷을 더 입고 올걸 하는 느 낌을 받았다. 제국 정부의 고위 대신이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병들은 방만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지 바른 곳에 드러누워 하 늘을 보고 있거나 옷을 벗어 바느질을 하거나 했고, 어쨌든 똑바로 서서 대신에게 예의를 표할 생각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 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파라말은 신분을 나타낼 만한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왔다. 그래서 제국병들은 파라말이 함께 걸어가고 있는 자들과 마찬 가지로 기술자 쯤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발 앞쪽으로 투구가 굴러왔을 때 파라말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 다. 파라말은 투구를 주워들었고 그러자 옆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어, 젊은 양반. 고마워. 이쪽이야." 파라말은 하늘누리에서 도저히 들을 수 없는 호칭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미소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산공부 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늙은 제국병에게는 반대편 팔이 없었다. 팔 없는 전사라는 것은 눈 없는 화가만큼이나 어이 없고 슬픈 존재 다. 파라말은 감정적 동요를 애써 누르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 척 보 기에도 30년 근속 휘장 쯤은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교위였다. 파라말 은 그에게 투구를 건네려다가 생각을 바꿔 교위의 무릎에 그것을 내 려놓았다. 교위는 씩 웃으며 투구 위에 손을 얹었다. "이거, 무겁지는 않은데 부피가 있어서 한 손으로는 다루기가 버겁 단 말이야." "이번 전투에서 그렇게 되셨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예?" "돌 틈에서 찔찔 울고 있는 하전사 녀석 꺼내려다가 돌이 무너져 팔 이 끼었거든. 하전사 놈이 교위님 팔을 잘라먹은 거지. 못된 놈." "그 하전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위는 턱으로 하늘 쪽을 가리켰다. "내 팔 가지고 저 위로 갔어. 두 배로 못된 놈이지. 카악, 퇘!" 교위는 가래를 탁 뱉고는 입 주위를 슥 닦았다. 그러자 투구가 무릎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파라말은 재빨리 그것을 붙잡아 다시 원래 자 리에 놓아주었다. 교위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 산공부에서 온 기술자지? 성벽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알아보려 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알아야 또 당하지 않지요." "알아내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파라말은 감탄했다. 고참 교위의 발언에는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 분 명한 전술적 통찰력이 담겨 있었다. 산공부에서도 암살공이 코네도성 을 무너뜨린 그 방법이 만약 쉽게 재현 가능한 것이라면 성에 의지한 방어 전략이라는 것이 전쟁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임을 직감하 고 기술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예. 성이라는 것이 사라지게 되겠지요. 혹은 전혀 새로운 축성술이 고안될지도 모르고요." 교위는 파라말의 말에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암살성을 안쪽으 로 무너뜨려 빌어먹을 암살공 놈을 돌무덤에 묻어버릴 수 있다는 거 아닌가?" 파라말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교위는 복수를 말하고 있었 다.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에게 돌려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파라말이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코네도성 낙성 직후 일어났 던 무차별 살육은 하늘누리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을 체포하여 즉각 처형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전쟁을 진행 중인 장수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하다거 나 제국군 장교에 대한 처벌은 태위청의 소관이라는 사실은 격분한 천경유수에겐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허릭은 자신이 하늘누리로부터 명령을 받았음을 증언했다. 하늘누리가 대명사로 사용될 때는 물론 황제의 뜻을 의미한다. 황궁 은 시허릭의 증언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긍정 으로 해석되었다. 아무도 황제의 뜻을 위조할 수는 없으니 긍정일 수 밖에 없다. 그 길로 황궁으로 달려간 지알데 락바이는 앞을 막아서는 금군 구레에게 노성을 질렀지만 구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레는 삼고의 지위를 존중하여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겐 그럴 권 리도 있음을 시사했다. 천경유수는 그 경고에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더욱 화를 냈지만 뒤따라간 유수부원들은 겁을 먹었다. 그들은 천경 유수를 강제로 끌고나와야 했다. 지알데 락바이의 행동은 그의 유별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비극의 밤에 대한 하늘누리의 견해를 웅변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해석 해야 할 것이다. 무차별 살육은 범죄다.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황제가 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의 일원으로 서 파라말은 이곳에 내려와서 죄의식에 시달리는 병사들을 볼 것이라 고 예상했다. 파라말은 파괴된 자신을 필사적으로 추스르는 병사들 사이를 걷게 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그의 앞에 있는 교위는 보복 을 말하고 있었다. 그 많은 피로 부족하다는 태도를, 파라말은 이해 할 수 없었다. 이 증오는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 많은 피를 삼키고 도 아직도 불타고 있는 것일까. 파라말은 아직 이름을 모르는 교위를 바라보았다. 팔을 잃은 것에 대해 그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투구를 제대로 붙잡기 어 렵다는 것 이상의 많은 불편과 고통을 겪고나면 그는 자신의 상실에 대한 절절한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교위 는 잃어버린 팔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발케네공이 행한 일 자체에 대해 분노한다는 것은 파라말에겐 걸맞지 않는 일처럼 느 껴졌다. 발케네공은 최선을 다해 승리의 방법을 찾아내었을 뿐이다. 그것은 전쟁에서 당연한 일이고 덕목이기까지 하다. 발케네공의 행동 또한 분노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전우의 희생? 성벽 붕괴는 극적이 긴 하지만 그 사상자는 이천 명에 못미친다. 그것이 결코 작은 숫자 는 아니다. 하지만 코네도성에서 희생당한 사람의 숫자는 그 열 배가 넘는다. 파라말은 열 배의 민간인 희생자를 강요하고도 아직 분노할 수 있다면 몰염치한 수준을 넘어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라말은 교위에게 무엇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 어볼 수는 없었다. 전투를 치른 직후의 군인에게 그것은 너무도 어울 리지 않는 질문이 될 수 있다. 파라말은 의심과 불만 속에 교위를 떠 났다. 그는 다시 추위를 느꼈다. 기술자들을 현장에 남겨놓고 다시 하늘누리로 올라온 후에도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늘누리는 분주했다. 하늘누리는 정치 도시이고 전쟁이 벌어지면 위축되는 시장이나 극성을 띠게 되는 암시장 같은 것은 없다. 하늘누 리의 분주함은 전쟁 업무 때문이다. 평소와 다른 모습은 곳곳에서 달 려가는 제국병들의 모습뿐이었다. 하늘누리에서 이용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은 자신의 두 발뿐이므로 병사들은 씩씩하게 달려갔다. 그리고 파라말 또한 자신의 두 발을 이용하여 태화각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 를 바쁘게 달리는 제국병과 관료들을 보던 파라말은 문득 하늘누리의 이동 수단에는 환상계단도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비셀스 규리하는 하늘누리 주변을 날아다녔다. 그녀라면 하늘누리에서 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신 우아하게 날아갈 것이다. 파라말은 자신도 그럴 수 있 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파라말은 파라말 아이솔을 가지고 모험할 의 향은 있었지만 산공부사를 가지고 모험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 래서 파라말은 자신의 집무실까지 두 발로 걸어가 비스그라쥬백 데라 시의 전언을 발견했다. 그리고 황궁을 향해 역시 두 발로 걸어갔다. 하늘누리의 다른 지역과 달리 황궁의 분위기는 고요했다. 다만 금군 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오뢰사수나 구레 외에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다른 금군들도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파라말은 황제가 왜 황궁 경비를 강화시켰는지 생각해 보았 다. 아래쪽에서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에 대해 해명도 변명도 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그래서 접근을 금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전쟁 때문에 황궁 경비가 강화된 것일까? 파라말은 그것에 대해 데라 시에게 질문해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데라시의 방으로 들어가 무더 운 공기를 쐬자 파라말은 머리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4월, 계절은 분명 여름이었지만 데라시의 방 벽난로는 기운차게 불 꽃을 펄럭이고 있었다. 파라말은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은 벽난로 바 로 앞자리에 데라시가 앉아있었다. 파라말은 어깨를 으쓱였다. "되도록 멀리 떨어져 앉고 싶군요." "덥겠지. 하지만 내 귀가 어두우니 허락할 수 없군." 둘 다 과장이다. 방 안에서 아무리 거리를 둔다 한들 시원해질 리 도, 목소리가 잘 안들릴 리도 없다. 파라말은 데라시에게 다가가 의 자에 앉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코네도성 파성에 대해서는 조금 전 조사 를 시작했고 잔해 때문에 적절한 설명을 찾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자네가 아래로 내려갔기에 부른 거야. 아래의 분위기를 좀 전해듣 고 싶군." "분위기요?" "그래. 병사들의 분위기." 문득 파라말은 자신의 대화 상대가 한 명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다. 어쩌면 데라시와 니름으로 연결되어 있는 치천제가 이 대화에 참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가 파라말에게 보고를 받고 싶다면 직접 불러서 대화할 수도 있다. 파라말은 자신이 왜 그런 생 각을 했나 궁금해하며 입을 열었다.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병사들은 락토 빌파에게 받을 것이 많이 남 았다고 여기는 것 같더군요. 저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분풀이는 이미 있었습니다. 지나친 분풀이였지요. 분풀이할 것이 뭐가 더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데라시는 갑자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놀란 파라말은 그가 허물벗 기라도 하나 생각했다. 데라시는 벽난로 쪽을 돌아보며 목의 비늘을 살짝 부딪쳤다. "그래. 지나친 분풀이였지." 파라말은 다시 이곳에 황제가 참가하고 있다는 가설을 떠올렸다. 파 라말은 황제에게 질문하듯 말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 파성 때문에 제국군이 입은 피해 는 이천여 명 정도입니다. 그 이천여 명 중 귀하지 않은 목숨이 없겠 지만, 그 정도 피해는 이런 거대한 규모의 전투에서 일어날 수도 있 습니다. 그런 피해 때문에 제국군이 민간인을 주살한 예는 없습니다. 제국군이 살인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분풀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마치 누군가의 앞에서 파라말을 거들듯이 말하는 데라시를 보며 파 라말은 자신의 직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파라말은 좀 더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라시가 그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가 할 일이 있네. 헨로가를 관찰하는 일은 그만해도 돼." 파라말은 입맛을 조금 다시고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데라시는 옆으로 손을 뻗어 두루마리를 집어올렸다. 파라말은 그 호 화스러운 두루마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데라시는 그것을 파라말 에게 내밀었다. 파라말이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자 데라시가 말했 다. "자네는 유수부차사에 임명되었어. 즉각 유수부 경비국을 장악한 다 음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를 자택에 유폐하도록 하게. 죄명은 황궁 내 소란이야. 그리고 유수부차사로서 천경유수의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게." 파라말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툭 떨어졌다. 데라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여 두루마리를 집어들었다. 그가 다시 허리를 폈을 때 파라말이 말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알아들었을 텐데." "유, 유수부차사라는 것은 없습니다. 유수부는 사도의 휘하에 있는 것이 아니며……" "새로 생겼어." "저는, 어, 제가 어떻게……" "금군들이 유수부를 장악하도록 도와줄 거야." 파라말은 넋이 나간 채 생각했다. 왜 금군들이 많이 나와있는지 알 겠다고. 파라말은 갑자기 사고가 명료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라말은 쥐어짜듯 말했다.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 데라시는 두루마리를 파라말의 무릎에 툭 던졌다. 파라말이 엉겁결 에 그것을 붙잡자 데라시는 말했다. "가서 명령을 수행하십시오. 유수부차사." 데라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파라말은 몸을 일으켰다. 암살성의 주인에게 주어지는 상징인 황금 열쇠에는 짧은 야사가 숨 겨져 있다. 무법의 땅 발케네를 통일하고 그룸성을 건축했던 그룸 빌 파는 발케네의 전통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속이고 훔치고 빼앗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삶의 철학으로 삼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런 그에게 보관과 수호의 의미인 열쇠는 어울리지 않는 물 건이다. 그리고 그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그룸의 마음에 들었다. 성 안 어디에도 맞지 않는 황금 열쇠는 보관과 수호의 상징이라기보 다는 속임수와 기만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는 발케네의 지배 자에게 어울린다. 목검으로 타격대를 후려갈기고 있는 스카리는, 따라서 자신이 암살 성을 수호할 수 없기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속임 수와 기만의 권위를 갖지 못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퍽퍽 하는 소리가 방을 가득 울렸다. 꽤 긴 시간의 몸부림이었다. 스카리 주변에는 떨어진 땀 때문에 바닥이 질퍽질퍽했다. 발이 미끄 러질 지경이 되면 스카리는 목검으로 바닥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자 신이 타격대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인 하인이 냉큼 달려 와 바닥을 닦고나면 스카리는 다시 목검으로 타격대를 후려갈겼다. 하인은 탈수 증상과 손목 골절, 그리고 타격대 완파 중 어느 것이 가 장 먼저 일어날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일어나기 전에는 이 광란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우려도 느꼈다. 굳이 따진다면 세 번째 경우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 스카리가 힘 껏 내찌른 목검이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타격대의 배에 콱 꽂혔다. 스카리는 목검을 다시 뽑기 위해 타격대를 걷어찼지만 목검은 타격대 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스카리의 손을 떠났다. 땀 때문에 손바닥이 미 끄러웠던 탓이다. 타격대는 목검을 배에 꽂은 채 바닥에 쿵 쓰러졌 다. 하인은 장렬한 전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카리는 적장에 대한 예우를 다하지 않았다. "네 녀석이 내 칼을 뺏어가!" 스카리는 쓰러진 타격대를 걷어찼다. 광태라고 할 수 있다. 스카리 가 몸을 돌렸을 때 하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투로 딴청을 피 웠다. 스카리는 그런 하인을 무시한 채 연습실 한쪽에 있는 음료수용 물통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것을 쏟아부었다. 급하게 목으로 넘어간 물은 굉장한 기침을 유발했다. 스카리는 정신 없이 기침을 했고 그것이 겨우 끝나자 몸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싸늘해진 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카리는 물통을 내팽개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는 스카리에게 하인이 황송해 하며 다가왔다. 하인이 건넨 수건을 받아든 스카리는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하인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냐 아가씨로부터 전갈이 있었습니다." 스카리는 부냐라는 말에 이를 악물었다. "뭐냐?"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하셨습니다." 스카리는 수건을 깨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온한 목소리를 내려 애 쓰며 스카리는 말했다. "도저히 미룰 수 없는 바쁜 일이 있어서 안 된다고 전해라." 하인은 되묻거나 하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여러 번 겪은 일이기 때문에 하인은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인은 쓰러진 타격대 에 묘한 감정 이입을 느끼며 연습실을 떠났다. 넓은 연습실에 홀로 남게 된 스카리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그것을 내팽개쳤다. 몸이 아팠다. 녹초가 될 정도로 시달려 뜨거워진 몸에 찬물을 쏟아 부은 탓에 살갗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스카리는 머리를 뒤로 젖혀 돌벽에 부딪쳤다. 쿵. 머리의 충격 때문에 다른 곳의 통증이 잠시 잊 혀졌다. 눈앞에 가물거리는 광점들을 바라보며 스카리는 마음 속의 통증도 그런 식으로 덮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스카리가 부냐와 함께 오고 싶어했던 발케네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의 성, 나의 영토, 나의 힘. 부냐에 게 스카리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곳은 발케네다. 이곳에서만 큼은 대장군도 대단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발케네의 주인은 빌파다. 그리고 빌파는 스카리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스카 리는 부냐가 인생의 패배자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발케네의 공작 후 계자에게 온 것임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발케네가 그를 배신했다. 오랜 시간 발케네를 떠나있었던 그에게 이 땅을 맡기기 어려워서 이 땅에 더 익숙한 자에게 잠시 맡기는 것이라면 스카리는 그것을 받아 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사냥꾼과 함께 다니던 정신 나간 여자애가 그의 자리를 뺏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아실이 스카 리보다 발케네를 더 잘 알 거라고 말하는 것은 농담도 되지 않는다. 스카리는 이해하고 싶지가 않았다. 락토의 그 행동에는 아들을 모욕 하려는 의도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이런 꼴을 부냐에게 보일 수는 없다. 사나이라면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여자를 모욕하는 짓이 다. 스카리는 어금니가 내려앉도록 이를 깨물었다. "왜 그러시죠, 스카리?" 스카리는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부냐 헨로의 얼굴을 보고는 질겁했 다. "부냐!" 부냐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이 공포에 물드는 것을 보며 스카리는 당황하여 일어났다. 그 동작은 적절한 것이 아니 었다. 부냐는 두 걸음 더 물러났다. 스카리는 두 손을 펼쳐보였다. "부냐, 왜? 내가 당신을 놀라게 했나?" "아, 저, 미안해요. 저를 때리려는 줄로…… 왜 그런 이상한 생각 을…… 죄송해요." "왜 그런 어이 없는 생각을? 왜 그러는 거야?" 스카리는 그만 다그치는 투로 말했다. 부냐는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도리질했다. 스카리는 뭔가가 속에서 부글거리는 것을 느 끼며 애써 조용히 기다렸다. 조금 후 부냐가 손을 어디론가로 던지며 말했다. "저것." 부냐가 가리킨 것은 쓰러진 타격대였다. 목검이 꽂혀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람이 죽어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서요." "당신에게 화 난 것은 아냐." "정말이에요? 저를 피하시는 것 같던데요." 스카리는 이를 악물었다. "바빴어." 부냐는 스카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스카리가 보기에 그 눈길 은 성의 주인도 아니면서 바쁠 일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여기서 타격대나 두드려부수는 일이 바쁜 일이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 대신 부냐는 다른 말을 꺼냈다. "무서웠어요. 저는, 그러니까 여기서 저는 혼자에요. 스카리. 당신 의 여동생은 저를 무시해요." "헤어릿?" "아, 죄송해요! 여동생이 아니죠. 제가 실수했어요." 스카리는 눈 주위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부냐는 주눅 들어 있 었다. 마치 이곳이 발케네가 아니라 하늘누리의 백화각이고 자신이 발케네공의 연인이 아니라 여전히 수인인 것처럼. 스카리는 분노했 다. "실수가 아냐! 당신은 실수하지 않았어. 그 애의 아버지는 그 미친 노인네가 맞아. 그 애는 내 여동생이야. 당신 말이 맞아!" 스카리의 확언은 부냐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부냐는 금방이라도 눈 물이 터져나올 것 같은 눈으로 젊은 발케네공을 바라보았다. "스카리?" "왜?" "제발 소리지르지 마세요." "나는 소리지르지 않았어." 부냐는 치맛단을 움켜쥐었다. 크게 호흡하느라 어깨가 들썩이는 것 이 보였다. 부냐는 속삭이듯 말했다. "예. 알겠어요." 부냐는 몸을 돌렸다. 놀란 스카리를 뒤로 한 채 부냐는 종종걸음으 로 걸어갔다. 스카리는 그 뒤를 따라가며 말햇다. "어디 가는 거야?" "죽으러요." "뭐?" "죽으러 가요." "빌어먹을, 무슨 소리야!" 스카리는 부냐의 팔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휘청한 부냐 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카락이 크게 출렁여 얼굴을 덮었다. 스카 리는 부냐의 팔을 놓았고 그러자 부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어깨를 떨며 소리없이 울었다. 스카리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손을 뻗어 부냐의 어깨를 짚었지만 부냐는 어깨를 뒤로 잡아당겨 그 손에서 빠져나갔다. 스카리는 부냐를 놓친 손을 주먹 쥐어 바닥에 짚 었다. "부냐? 부냐. 울지마. 왜 우는 거야?" 부냐는 헐떡였다. 그녀는 울음소리를 애써 삼키며 동시에 말을 꺼내 려고 애썼다. 한참 후에야 부냐는 겨우 말소리 같은 것을 냈다. "기, 그, 그거, 예. 알아요. 저 때문에 아버지와, 예, 공작님과 사 이가 나빠지셨죠. 저 때문에 전쟁이, 전쟁이 일어났죠. 저 때문이라 는 거 알아요. 제가 없어지면, 없어지면 되겠지요. 그러면 모두 깨끗 하게 끄, 끄, 끝나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저를 데려왔잖아 요. 억울해요. 저는 너무 억울해요. 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예. 제가 그 편지가 간자의 것이라는, 어떻게?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 요? 당신이 제 마루나래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믿었어요. 아 니에요. 저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제가 없어지면 돼요." "아니야. 부냐." "아니에요. 저 때문에 아버지와 사이가 벌어지셨죠. 수치를 당하셨 지요. 저 때문이에요." "빌어먹을, 아니야! 당신과 미친 노인네라면 내게 선택은 쉬워! 당 신이 내 선택이야. 당신이!" 부냐는 두 손을 입 앞에 깍지 낀 채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걸 몰라? 왜 모르는 거야? 나는 당신 때문에 유수부원의 자리를 포기했어.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겼어." 스카리는 자신이 언제부터 유수부원 자리에 애정이 있었는지, 그리 고 아버지의 명령을 귀하게 여겼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 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부냐가 믿고 싶다는 얼굴로 바라보 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부냐. 나는 비셀스 규리하를 포기했어.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하면 규리하의 지배자가 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규리하를 포기 했어!" 비셀스 규리하가 그와의 결혼에 대해 아무런 약조를 한 바 없으며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그 결혼에 반대했다는, 즉 그 결혼이 실현 가능 성이 없다는 사실 또한 스카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겐 부냐의 떨리는 입술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만이 중대사였다. 부냐의 얼굴은 정말 그 모든 것을 포기했냐고 묻고 있었다. 스카리는 그녀가 왜 의 문스러워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에 대해서는 생각할 줄 아는 모든 이들이 찬성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스카리 빌파는 오직 한 여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그 들의 말은 옳다. "당신을 위해서야."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믿어줘." 스카리는 부냐가 믿는다고 말하길 애타게 기원했다. 하지만 부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깍지낀 두 손을 스카리의 무릎 위에 포갰다. 그리고 그 손등에 이마를 얹었다. 그리고, 요청했다. "믿게 해주세요." 스카리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아실은 황제를 비평했다. "미친 년." 별다른 미사여구가 없는 소박한 비평을 들으며 주보 네서파는 고개 를 끄덕였다. 품위 있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완전히 동의하고 싶은 말이었다. 코네도는 주보의 고향이다. 지금도 그곳에는 주보의 친척과 지인들이 많이 있었다. 아니, 이제는 있지 않다. 발케네공 락 토 빌파의 시종장 주보 네서파는 참담한 기분으로 말했다. "코네도에서 물러난 공작님께서는 파르바리 계곡에 진을 치셨다. 이 곳에서 남쪽으로 150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이지. 공작님께서는 그룸 성이 지원을 맡으라고 명령하셨다. 우선 지원품은……" 아실은 벌떡 일어섰다. 주보는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녀의 오른쪽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미친 년, 미친 년, 미친 년! 그 많은 사람들을, 그 많은 사람들 을!" "아실. 내 말 듣고 있니?" "안 들어요! 상관 없잖아요!" 아실의 말이 맞았다. 실제로 그룸성을 통치하고 있는 것은 시종장 주보 네서파였고 주보는 형식적으로 아실에게 보고하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주보는 형식적인 보고를 계속했다. 그는 암살성에서 징발하거 나 구입해야 하는 것들과 그것을 보관, 운송할 방법들에 대해 말했 다. 아실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을 빙글빙글 돌 았다. 황제에 대한 포악한 말들을 쏟아내면서. 두 사람이 각자 떠들 었기 때문에 방안이 꽤 시끄러웠다. 먼저 침묵한 것은 주보였다. 주보는 할말을 다 했다. 하지만 아실의 욕설은 동어반복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주보는 아실을 지그시 바라 보다가 말했다. "그만해라. 아실. 그렇게 욕설을 내뱉어서 죽은 이들이 돌아온다면 야 나도……" "모든 발케네인들을 죽이겠다고!" 주보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아실을 바라보았다. 살해당 한 것은 코네도의 주민들이지 '모든 발케네인'이 아니다. 아실은 제 자리에 서서 발을 쾅쾅 구르며 말했다. "그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제국군을 집단 살인마로 바꿀 기 회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어려운 것은 한 번이야. 그래. 처음이 어렵 지. 그 다음은 쉬워. 이제 죽이라고 말하면 주저없이 죽일 병사들을 얻었군. 그걸로 발케네인들을 다 조질 작정이지!" 주보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실의 말을 이해할 수 있 었다. 이미 피가 묻은 손에는 또 피가 묻어도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다. 아실은 광포한 혼잣말을 계속했다. "쥐딤에선 레콘들을 쓸어버리더니, 이젠 발케네 도둑놈들이야?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다 없애버릴 작정이야? 그것이 일원주의야?" 주보는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아실! 발케네인들이 다 죽는다는 거냐?" "예!" 명쾌하기까지 한 대답에 주보는 할말을 잃었다. 시종장은 손을 옆으 로 뻗어 탁자를 짚었다. 아실도 자신의 대답에 놀란 듯 당황한 표정 으로 주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흠칫흠칫하며 주보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걸음은 곧 멈췄다. 아실은 분노를 오랫동안 억누르지 못한 다. 다시금 피어오른 노기에 아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 죽을 거예요. 다! 노인과 아이는 살았다고요? 씨를 말리겠다는 것이군요. 노인은 곧 죽겠지요. 아이는 발케네 도둑이 아닌 사람으로 자라겠지요. 그래요, 제국인이 되겠군요. 그러면 발케네인은 다 죽는 거지요. 사라지는 거예요! 분리주의를 없애버렸던 것처럼 그 년은 발 케네 도둑도 없앨 생각이에요!" "그런 일은 불가능해. 황제가 그럴 리가 없어." "천만에요. 그렇잖으면 왜 제국군을 통제하기도 어려운 살인자 집단 으로 바꿔놓았겠어요?" "살인자 집단……" "죄의식 없는 살인자 집단이지요. 황제의 드높은 권위가 있기 때문 에 그들은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아라짓만을 위해 싸우는 전 사…… 아라짓 전사! 황제는 아라짓 전사를 부활시킨 거예요!" 아실이 말한 것은 유사 이래 가장 잔인했던 전투 집단의 이름이었 다. 고 아라짓 시절 아라짓의 왕을 위해 싸웠던 아라짓 전사는 사람 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강하고 난폭했으며 자신이 자비를 모른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주보는 미칠 것 같 은 기분을 느꼈다. "그건 옛날 이야기야." "시종장님. 그 옛날의 아라짓 전사는 우리와 종족이 다른 자들이었 던 것 같아요? 그들도 지금의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아라짓 전사가 될 수 있어요. 앞다리를 걷는 데 쓰지 않는 짐 승은 그 다리로 다른 짐승을 죽일 수 있어요." 주보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도 난폭하고 잔인하다고 알려 진 발케네인이었다. 그의 성격과 무관하게 주보는 발케네에서 일어나 는 소름끼치는 일을 목격하며 늙어왔다. 그는 사람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짓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인 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주보는 다시 부정하려고 했다. 그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주보는 말하지 못했다. 아실이 심상치 않은 얼굴을 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아실의 얼굴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 여인의 얼굴과 다가 오는 땅을 바라보는 투신자의 얼굴을 뒤섞어놓은 것 같았다. 주보가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실을 더 바라본 주보는 그녀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한 주보가 앞으로 걸어갔을 때 아 실이 갑자기 말했다. "앞다리를 걷는 데 쓰지 않아." 그것은 아실이 조금 전 했던 말이다. 그것을 미친 사람처럼 반복하 고 있었다. 주보는 아실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그 때 아실이 다시 말했다. "지느러미를 헤엄치는 데 쓰지 않아." 비록 먼젓번보다는 조금 명료한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괴이한 말이었 다. 주보의 긴장감 때문에 방 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 다. 주보는 그 긴장감이 싫었다. 갑자기 아실이 펄쩍 뛰어올랐다. 주보는 그렇게 느꼈다. 아실이 위로 치솟는다고. 아니었다. 다시 바 라본 주보의 눈에 탁자 쪽으로 달리듯 걸어가는 아실의 모습이 들어 왔다. 빠르게 달려간 아실은 탁자를 짚으며 간신히 멈춰섰다. 탁자 위에는 주보가 들어오기 전 그녀가 휘갈겨 쓰던 도깨비지 뭉치 가 놓여 있었다. 아실은 도깨비지를 탁자 아래로 밀어 던졌다. 그렇 게 수십 장의 종이들을 내팽개친 아실은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그녀 는 눈앞에 나타난 종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 보가 조금 후에 말했다. "아실?" 아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종이를 가져와 앞쪽에 놓았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였다. 아실은 붓을 들어 그 위에 무엇인가를 휘갈겨 썼다. 그리고 붓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자신 이 쓴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더 기다릴 수 없었던 주보가 일어나려 했을 때 아실이 말했다. "시종장님." "응?" "솜씨 좋은 궁수들은 지금도 배치되어 있나요?" 주보는 조금 후에야 아실이 말을 타고 도망칠 경우 저격하기 위해 그런 병사들을 배치할 거라고 경고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사 실이 아니었다. 노련한 병사들이 암살성 주위를 경계하고 있긴 하지 만 그것은 전쟁 때문이지 아실을 저격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주보는 그 사실을 말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주보는 아실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주보는 아실의 하 나뿐인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 떠오른 결의를 읽었다. 그 순간 주보는 무엇인지 모를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이이타는 멍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가신들을 바라보았다. 아이저가 남기고 떠난 자들이었고, 그에게 맡겨진 가신들이었다. 능 력이 부족해서 남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능력이 과한 것이 문제일 것이다. 아이저는 규리하에 잠입할 작정이었고 따라서 규리하에 얼굴 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들은 데려갈 수가 없었다. 아이저 자신은 오히려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규리하성에서 일하는 자들 이 아니라면 나랏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저의 능력 있는 가신들은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그들의 나이다. 아이저는 적의 점령지에 숨어 들어갈 작정이었고 따라서 상당 수준의 활극을 감당할 수 있는 민첩 한 이들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이타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 들은 그런 활극이 부담스러운 연배였다. 이이타는 이들의 나이에 감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늙은이들 을 장악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었다. 장악할 수도 없는 연배니까. 이이타에게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인정하게 하여 아버지에게 향하 고 있는 그들의 충성심을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끌어오는 정치적 묘기 를 펼칠 여유가 없었다. 아이저는 이이타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 고 떠났다. 이이타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미 힘겨웠다. 규리하의 늙은 가신들은 그런 이이타의 처지를 잘 짐작했다. 다행히 도 이이타는 위로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각할 정도의 정신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상심한 소년을 달래는 일까지 맡긴다면 실 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이타는 자신감을 강조하지도 않지만 축 늘 어지지도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르사 돌 하장군." 자신의 사병들에게 제국군의 계급 명칭을 부여하는 귀족은 없었지만 규리하 변경백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다. 고 아라짓이 사라진 후에도 왕의 것을 지키며 남았던 규리하 변경백령은 고 아라짓의 많은 것을 보관해왔고 그것은 대호왕의 신 아라짓과 그 뒤를 이은 원시제의 아 라짓 제국에 전달되었다. 계급 명칭도 그런 고대의 유산 중 하나였 다. 따라서 원조를 따진다면 제국군이 규리하 변경백령의 계급 명칭 을 모방한 셈이다. 무향의 군인다운 절도있는 태도로 그를 바라보는 두르사 돌에게 이이타는 질문했다. "코네도성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미친 짓입니다. 공자." "설명해줘." 두르사 돌은 그래, 미친 짓이지. 하는 맞장구 대신 솔직하게 설명을 요구하는 이이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으 니까요. 그것은 귀족원과의 극한 대립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 는 짓입니다. 발케네공은 귀족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 다." "귀족원은 우리도 돕지 않았어." "그것은 변경백께서 귀족원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비근한 자격지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귀족원에 소속된 모든 귀족의 역사를 다 합쳐도 고 아라짓 시대까지 이어지는 규리하 변경백의 장구한 역사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이타는 생각했다. 그 계보가 수상쩍은 과텔과 케나린 시대를 무시 한다면 말이지. 과텔 규리하가 사라질 뻔한 규리하 가문을 재건한 것 은 분명하지만 그가 규리하 가문의 적통을 잇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물론 이이타도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가문이 고 아라짓 시대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다른 귀족들을 자극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변경백께서는 그들을 제국의 같은 귀족으로 공정하게 대하셨지만 그들은 변경백을 시기했습니다. 벼락출세한 그들이 진짜 귀족을 시기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규리하를 돕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발케네는 다릅니다." 이이타는 사태를 지나치게 간략화해서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했 다. 두르사 돌의 설명에는 서약지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그리고 지테를 당주와 굴도하 남작부인의 침묵에 대한 이야기도 빠져 있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공개적으로 규리하를 지원했다 면 귀족원들도 그 뒤를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침묵했 고, 그러자 그들의 영향력이 닿는 귀족들도 침묵했다. 또한 두르사는 엘시 에더리의 경이적인 전쟁 수행 속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 다. 엘시 에더리는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규리하를 굴복시켰다. 그에 비하면 치천제는 새해 초 규리하를 떠난 이래 4월이 되도록 아 직 발케네를 정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이타는 두르사의 설명을 바 로잡는 대신 그것을 계속 경청했다. "귀족원에서 반전 여론이 형성되어 황제가 회군할 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 발케네공은 승리하는 셈입니다. 발케네공이 코네도성을 무너 뜨린 것은 제국군에게 타격을 주기보다는 코네도성 주민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드려는 것이 더 큰 이유였을 겁니다. 그런데 황제는 그 미 끼를 덥석 물었습니다. 귀족원에게 빌미를 주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황제는 아무래도 이성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우 리에게 거둔 승리에 취해서 발케네에 싸움을 걸 때부터 황제는 자제 력의 징후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규리하 전쟁은 황제 의 승리가 아니라 엘시 에더리의 승리였지요." 가신들은 두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타는 문득 기묘한 느 낌을 받았다. 이들은 무향인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아닌 엘시 에더리에게 진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 엘시 에더 리에 대한 평가는 황제에 대한 평가 이상이었다. 무향인이 그렇게 생 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이상일 것이다. 이이타는 대장군이 그토 록 위험하다면 시모그라쥬공은 반드시 그를 붙잡고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이타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엘시 에더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었다. 이이타는 가신들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 엘시 에더리가 있었다면 미끼를 물지는 않았겠지." "영리해서가 아니라, 그는 원래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어." "옳은 지적입니다. 바르지 않은 일은 하지 않지요." "발케네공이 끝까지 버텨서 황제를 물러나게 한다면, 황제는 지도력 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거야." "양위?" "압력이 충분히 높다면요." "그러면 발케네공이?" "비약이야. 우리가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엘시 에더리?" "가능할까요?" "생각해보니 가장 강력한 후보라는 것은 분명해." "대장군이고 만병장이니까요." 이이타는 이들이 엘시 에더리의 황위 계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이타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을 무너뜨리고 도망치게 만든 사람을 차기 황제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이타에겐 이율배반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그에게 패배한 것은 수치가 아니라는 생각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이타가 말했다. "지금 엘시 에더리가 차기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규리하가의 가신들은 이이타를 돌아보았다. 이이타는 조금 부드럽게 표현하기로 했다. "치천제의 나이는 많지 않다. 황제가 죽을 무렵이면 엘시도 늙은이 가 될 텐데." 두르사가 말했다. "하지만, 공자.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황제는 퇴위 압력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것을 조장할 수도 있겠지요. 그녀 를 대신할 수 있는 더 나은 황제감이 있다면 퇴위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황제가 퇴위한다고?" "제국 역사상 첫번째 퇴위가 되겠군요." 가신들의 얼굴에 즐거움이 떠올랐다. 이이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전쟁에서 진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무리한 전쟁이었고 끔찍한 살해였습니다." "하지만 이긴다면?" "예?" 이이타는 생각을 조금 정리해서 말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거야.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 황제 도 그럴 테고. 황제는 자신이 지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어. 시련을 막을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제국군을 전부 발케네로 소환하면 돼. 그럴 방법이 있는데 황제가 왜 일부러 패배를 선택하지?" 두르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방법이 분명히 있습니다. 공자." "그렇다면 차기 황제 이야기는 너무 많이 나간 것 같군." 이이타는 되묻는 얼굴로 두르사를 바라보았다. 두르사는 괴로운 표 정을 지었다. "예…… 그런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방법을 쓴다면, 제국 신민을 도륙하기 위해 제국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제국군을 소환한다면,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황제는 자신이 제국에 대한 범죄자가 되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제국에 대한 범죄자?" "그렇습니다." 하늘치의 등 위에 있는 하늘누리에서도 여름의 긴 오후는 저물고 있 었다. 오전까지 산공부사였지만 이제는 유수부차사가 된 파라말 아이솔은 힘겨운 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마중했던 하인에게 손짓으 로 물러가라고 명령한 다음 파라말은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마루에 도달한 파라말은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 다. 그리고 파라말은 중얼거렸다. "끔찍합니다." 그의 옆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뭐가?" 파라말은 고개를 돌려 형의 모습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마 소문이 좍 퍼졌지요?"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의자를 들고 금군과 싸우려 했다는 이야 기까지 들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뿐만 아니라 진실이 왜곡되는 속도도 놀랍군요. 상관을 지키기 위해 의자를 집어들고 대적한 것은 한 용감한 유수부 원이었습니다. 천경유수께서는 근엄하게 서서 우리를 꾸짖는 눈으로 바라보셨지요. 자신의 우매함을 부디 자각하라는 눈빛으로……" "작문이냐?" "의자를 휘두르신 건 천경유수셨습니다. 머리가 깨질 뻔했지요." "머리가 안 깨져서 끔찍한 것이구나." "형님, 형님!" "말해라. 아우야." 파라말은 고개를 돌려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동생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형을 한참 쳐다보던 파라말은 고 개를 떨구고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는 폭군이 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 "폭군은 명군만큼이나 되기 어렵지요. 상당한 피가 필요합니다." "그래." "끔찍합니다." "그것도 끔찍하지." 파라말은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더 끔찍한 것이 있단 말입니까?" "있다." "그게 뭡니까?" 사라말은 일어섰다. 그는 마당 쪽으로 한 발 걸어가서는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율형부사는 단조롭게 말했다. "레콘." "예?" "이 전쟁에서 드러나고 있는 레콘의 위협. 나는 그것 때문에 뼈가 저리도록 무섭다. 아우야." 파라말은 그 표현에 놀랐다. 그가 아는 형이 사용할 법한 표현이 아 니었다. 파라말은 약간 당황하여 말했다. "예. 암살공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이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레콘은 끔찍하다." 사라말이 사라티본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 은 파라말은 눈을 끔뻑이며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 전쟁에 는 사라티본군 외에도 엉겅퀴 여단과 고추냉이 여단, 그리고 왜솜다 리 여단의 레콘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큰 활약을 펼치고 있다. 사라말 은 그 레콘들 전부가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율형부사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레콘이 끼여들면 모든 것이 바뀌어버려." "모든 것이 바뀐다고 하셨습니까?" "성채매장자는 성을 파묻었고,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전장을 휴대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발케네공은 성을 공격 무기로 바꿔 버렸어." 파라말은 입을 조금 벌렸다. 형의 말처럼 락토 빌파는 수비 시설인 성을 공격 무기로 바꾸는 폭거를 감행했다. 폭거라는 말을 떠올린 파 라말은 그것이 적절한 표현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명백한 폭거다. "그런데 그것이 성채매장자나 마지오 상장군, 혹은 발케네공이 한 일인가? 그들이 결정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누가 힘을 제공했지?" "레콘입니다." "집단을 이룬 레콘은 상식과 전례와 법을 뛰어넘는다. 그런데 그것 은 사람의 자산이지. 법은 물론 편리한 생활을 위한 도구지. 도구에 게 바치는 것 이상의 존중을 법이 받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물도 살 아가는데 필요한 도구야. 그것이 없어져도 될까? 사람이 사회적인 동 물인 이상 사람에게 법은 물과 같은 수준의 도구야. 레콘들이 아무리 물을 싫어한다 해도, 그들 또한 물을 마셔야 해." 아라짓 제국의 모든 법 사무를 관장하는 남자는 선언했다. "레콘은,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개인주의자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사람이 사라진다." 살인기사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문을 열어젖혔다. 그 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방 안의 모습은 정갈함과는 아주 멀었다. 황혼의 붉은 빛이 떨어지 고 있는 방 안에는 여기저기 팽개쳐진 도깨비지들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한 제이어는 그 도깨비지들 때문에 마치 큰 싸움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인상이지만 다른 가구들은 정확한 위 치에 똑바로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 싸움은 없었다. 다만 성질 급한 저술가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덧붙여 제이어는 아 실이 방 안에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제이어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아실이 이곳에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따라서 현재의 상황은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제 이어는 종이들을 밟으며 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탁자 앞에 도달한 제이어는 시선을 끄는 종이를 발견했다. 그 종이 는 다른 종이들을 내팽개친 후 마지막에 쓰여진 것 같았다. 종이 위 에 떨어져 있는 먹물 자국들이 그대로 벼루까지 이어져 있었다. 제이 어는 그 종이에 쓰인 글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탁자 위는 너무 어두 웠다. 옆으로 길게 늘어진 황혼의 그림자들이 탁자 위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어는 그 종이를 들어올린 다음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 때 제이어는 말이 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제이어는 창문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큰 말 한 마리가 정문 쪽 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제이어는 말에 탄 기수가 혹 아실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실치고는 기수의 체격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래쪽의 조명도 좋지 않았고, 그래서 제이어는 기수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제이어는 성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기수를 잠시 바라 보다가 손에 든 도깨비지를 떠올렸다. 그는 빛이 잘 비치는 각도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제이어는 기수를 더 볼 수 없게 되었다. 제이어는 종이를 옆으로 기울여 빛이 잘 떨어지도록 했다. 급하게 휘갈겨 쓴 글이 보였다. 제이어는 그것을 입속으로 읽었다. '환상계단, 부드러운 돌, 혹은 단단한 바람.' 제이어는 두 번 더 그 글을 읽었다. 그리고 숙고에 들어갔다. 제이어가 숙고를 끝냈을 땐 황혼의 빛도 사라져 주위는 어두웠다. 사물의 윤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검푸른 어둠 속에서 제이어는 고 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제이어는 쥐고 있던 도깨비지를 접어 품 속에 넣었다. 그리고 방을 나왔다. =============================================================== 14챕터 끝났습니다. 신뢰도 0 퍼센트에 도전하는 다음 챕터 예고 : 호러지아의 세계에 떨어진 조나단 다이빙스톤. '이것은 한 갈매기의 작은 걸음이지만 호러물의 큰 도약이다'라고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피 던 조나단은 하얀 하키마스크를 쓴 사내를 발견한다. 사내의 손에 들 려있는 도끼를 본 조나단은 그가 나뭇꾼일 거라 생각했다. 산신령을 만나면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조나단은 하키마스크 나뭇 꾼에게 도끼를 웅덩이에 빠트려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하키마스크 나뭇꾼은 아무 말 없이 조나단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도끼가 웅덩이에 빠지자 평 하고 연기가 터진다. 연기가 걷힌 곳에서는 손에 전기톱을 부착하고 다른 손에는 엽총을 사내가 나타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젠장, 여섯 방울이었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광분한다.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 산신령이라고 생각한 조나단은 '산신령과는 다르다, 산신령과는!' 시험 삼아 하키마스크 나뭇꾼이 쇠도끼를 잃었다고 말했고 그러자 상태 안 좋은 산신령은 정직하다고 말하며 쇠도끼뿐만 아니라 전기톱도 떼어준다. 고전은 영원한 법. 조 나단은 역시 산신령이 맞다는 판단 하에 자신에게 조언을 베풀어 달 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엽총을 든 산신령은 자신도 잘못된 시간대에 떨어졌으니 호러지아의 공주를 만나봐야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름 다운 우정의 시작이지.'라고 말한 조나단은 엽총을 든 산신령의 동행 을 받아들였고 쇠도끼와 전기톱을 얻은 하키마스크 나뭇꾼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따라왔다. 지독하게 과묵한 나뭇꾼이었다. 호러지아의 공주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호러지아에서 일어난 이변의 배 후에는 누가 있을까? 비밀의 실마리에 접근하는 다음 챕터 '화이트 데이트' 많이 기대해주세요.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15. 파멸을 경배하는 태도 - 1 "그렇다면 하늘치의 환상 계단은 상상하지 않은 사람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공작." "원 참. 재미없군요. 어떤 것을 만들어도 보여줄 수 없다 면." "아닙니다. 공작. 대단히 다행한 일이지요." "다행이라고요? 잘못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아니오. 큰 다행입니다." - 발케네공 그룸 빌파와 사도 라수 규리하의 대화 中. 두 개의 수문이 닫혔다. 코네도성을 향해 뻗어나간 긴 운하는 얼마 후 그 바닥을 드러내었다. 공사가 재개되었고, 머리를 비트는 뱀처럼 운하의 진로가 바뀌었다. 파헤쳐진 땅에서 뿜어져나오는 지하의 냄새들. 살갗에 진득하게 달 라붙는 것 같은 끈끈한 햇빛. 바람은 노역자와의 오랜 갈등 관계를 청산함으로써 발케네에 지방색을 부여할 계획은 없었다. 다른 모든 세계와 마찬가지로 발케네에서도 지친 노역자들에게 부는 바람은 무 풍이나 흙먼지를 날려보내는 돌풍 뿐, 그 중간은 없다. 무풍일 때는 운하 공사장에서 피어오른 흙먼지 때문에 주위가 온통 뿌옇다. 그래 서 돌풍 쪽이 조금 더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바람에 의미를 부여하 기 위해 애쓰는 노역자가 많았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파헤쳐진 땅과 파헤칠 땅이 있을 뿐이다. 세상, 단순했다. 두더지들에겐 암울한 나날이었다. 그들의 세계에 닥쳐온 이 비극적 참사를, 두더지들은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로 재구성하여 훗날의 고 전이 되게 할 것이다. 삽날에 머리를 맞아 갑자기 그들 종족에게 알 려지지 않았던 재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면 그럴 거라는 말 이다.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삽날에 뒷다리를 잘린 채 흙더미와 함께 팽개쳐진 한 두더지가 있다. 빛은 두더지에게 무의 미했고 냄새는 혼란스러웠다. 뾰족한 주둥이 끝에 돋아있는 수염은 텅 빈 공간이라는 무서운 관념을 두더지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 순 간 두더지는 매우 격이 높은 생물이 되었다. 미친 것이다. 그것을 사 람의 광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여기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두 더지는 미쳤다. 햇빛에 타들어가다가 날아든 새매에게 찢겨질 여생이 기다리고 있을 땐 그것도 괜찮다. 그리고 아마도 태생적 한계 때문이 겠지만 그렇게 많이 미친 것도 아니다. 제국군의 상장군이 되지는 않 았으니 딱 알맞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견해는 그러했다. 군인이 되기로 한 것은 아주 미친 결정이었다. 왜 장제사가 되지 않 았을까. 말을 사랑하는 살본 사람들은 아무리 고집세고 괴팍한 성벽 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장제사 앞에서는 겸손해진다. 장제사가 되었다 면 성질 고약한 말에게 걷어채이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허릭은 말에게 걷어채이는 것이 이 북부의 동토를 파헤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운하, 빌어먹을 발케네, 빌어먹을 암살공. 빌어먹을 눈. '눈?' 시허릭은 고삐를 움켜쥐었다. '눈? 누구의 눈?' 그 꼬마의 눈이다. 개벼룩 만큼이나 평범해빠진 꼬마였다. 다시 권할 것을 기대하며 사 양하고 어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기뻐하는 아이였다. 시허릭은 그 런 부류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으며 그들이 애용하는 가소로운 전략 들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아침, 시체를 파묻을 병력을 지원해달라는 말을 가지고 온 그 꼬마 전령의 눈은 시허릭의 심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코네도에는 시체를 처리할 만한 노동력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그들은 학살자들에게 그것을 요청해야 했다. 한편 그것은 얼마 남지도 않은 목숨을 아까워 하는 늙은이들과 그런 늙은 이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꼬마의 속셈이 맞아떨어 져 만들어낸 촌극이었다. 늙은이들은 차마 아이를 죽이지는 않을 거 라 믿고 그 꼬마를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는 물론이거니 와 옆집 아저씨까지 사라진 상황에서 꼬마는 자신을 인정해줄 수 있 는 자들이 그런 늙은이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꼬 마에게 인정받는 것은 중요하다. '걱정마세요. 제가 갈게요. 저는 착 한 어린이잖아요.' 교활하고 미련한 눈빛이었고 거대한 슬픔이나 형 언할 수 없는 두려움, 잔혹한 복수의 결심 같은 노랫꾼이나 좋아할 것들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시허릭은 흔들렸다. 그 꼬마가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삶에 천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 기 때문이다. 물론 그 꼬마가 자신의 근거로 살기를 원할 리는 없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테니까. 그것은 모방이다. 꼬마는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열심히 살았던 부모들을 흉내내고 있었다. 자신이 죽인 자들이 삶의 갈망을 살아남은 자식에게 담아보내는 것 을 목격할 수 있는 것. 상장군의 소박한 여흥이다. 장제사쪽이 백 번 낫다. 말고삐를 잡아채며 시허릭은 생각했다. 이 전쟁을 끝내고 퇴역해야 겠군. 단순히 감상적인 결정은 아니다. 발케네공이 보여주었고 그 자 신도 일조했듯 이 전쟁은 집단화된 레콘의 힘이 부각된 전쟁이었다. 전쟁의 모든 규칙이 바뀌고 있었고 전쟁은 옛규칙을 고집하는 자들에 게 너그러운 분야가 아니다. 기병 돌격의 예찬자인 늙은 군인은 물러 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원활하게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코네도의 학살자보다는 발 케네공의 정복자인 편이 좋을 것이다. 딱정벌레 뒤편에 탄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오니 보는 뒤통수를 긁적 였다. 발케네군이 진을 치고 있는 파르바리 계곡 앞까지 운하를 끌고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계곡 아래쪽의 선단 부분에 흐르는 강에 운하를 연결시키는 것이 현재 오니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량의 문 제가 만만치 않았다. 선단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물만으로 이미 포화 상태인 듯했고 만약 그곳에 운하를 연결 시킨다면 경사가 완만한 선단을 따라 범람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 긴 거리를 따라 이어진 운하는 이제 완만한 유속을 보이고 있었고 따라 서 단위시간당 유량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니는 작은 위험도 무 릅쓰고 싶지 않았다. 레콘들의 전장을 진흙탕으로 만들어놨다간 제 명에 죽기 어려울 것이다. 수도국의 더 많은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오니는 지원 요청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원 요청을 하고 싶지 않았 다. 혼자 해결하겠다는 공명심은 아니었다. 오니는 자신의 상관과 약 간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오니의 상관인 수도국장은 자신이 천경유수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오니가 보기엔 마음 속으로만 즐기면 무방한 환상의 일종 이었지만 국장은 진지했고, 따라서 천경유수가 자택에 연금된 현재의 상황은 그에겐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후원자를 잃은 야심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보통 세 가지다. 몸을 낮추거나, 다른 후원자를 찾거 나, 실각한 후원자의 복권을 위해 애쓰는 것. 국장의 선택은 세번째 였다. 국장은 수도국에도 잘 나타나지 않은 채 하늘누리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국장의 갸륵한 정성으로 천경유수의 복 권이 이루어진다면 천경유수는 수도국장의 진짜 후원자가 되어줄지도 모르지만, 오니는 그런 날이 레콘 뱃사공이 부리는 배를 타고 올 거 라고 확신했다. 산공부사가 있지도 않은 지위를 가지고 나타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천경유수가 갈등을 일으킨 상대는 황제다. 그리고 황제와 갈등을 일으킨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저 하 늘누리 아래쪽을 잠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국장은 벼 락을 떨어뜨리는 것이 누군지 모르니 위를 볼 줄 모르는 것이고 발에 채이는 시체에 자신의 미래를 대입하지 못하니 아래도 볼 줄 모르는 것이다. 오니는 오직 동정심 때문에 국장에게 그것을 암시해주었다. 그리고 국장은 오니의 거대한 체구에 대해 평소 가졌던 의심을 기괴 하게 비틀어놓았다. 오니를 '저 세력'의 첩자로 규정한 것이다. 오니 는 저 세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틀림없이 국장도 모를 테지만, 아무래도 국장은 오니가 천경유수의 실각을 일으킨 세력의 첩자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내 배후는 황제 폐하로군.' 오니 보는 노력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오니는 틸러 달비 같 은 종자가 제국군 부위가 된 것을 노력이 이루어낸 아름다운 쾌거로 여겼다. 하지만 오니는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 람이 아직도 팔을 휘저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은 노력이 부족해서 가 결코 아니다. 사람은 노력과 상관 없이 하늘을 날 수 없다. 그리 고 바보는 노력해도 바보다. 오니는 국장이 즐거운 바보의 인생을 즐 기길 기원하고는 국장과의 교류를 끊었다. 그 때문에 오니는 적절한 지원을 요청하기 껄끄러운 상태에 빠졌다. 국장은 수도국원 전원이 천경유수의 구명을 위해 결사항쟁의 정신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도무지 운하 같지도 않은 운하를 설계하기 위한 지원 인력을 요청할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운하 같지도 않은 운하였다. 전투가 남기는 것 중 영구한 것은 무덤뿐이다. 피 흘려 확립한 경계선조차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오니의 운하 또한 영구성과는 관련이 없 다. 그저 전투용수 - 이것은 오니가 쓰는 말이었다. - 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것이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붕괴되든 말든 상관없다. 그런 엉성한 구조물을 설계하기 위해 인력을 지원해달라고 말하면 국 장은 천경유수 구명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술책으로 여길 것이다. 오 니가 반길 수 없는 오해였다. '아래를 볼 줄 모르면 내려와서 보라고. 여기 분위기가 어떤지.' 제국군은 살기가 등등했다. 참신성 때문에 의미가 희석될까 두려워 참신한 표현 대신 진부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데, 오 니가 보는 제국군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들은 살기 등등했다. 운하 설계를 잘못해서 전장을 진구렁텅이로 만든 공학자 쯤은 눈도 깜빡이 지 않고 목을 부러뜨려놓을 것 같았다. 그들이 코네도에서 학살한 민 간인의 숫자는 아직 파악할 수도 없다. 그 생각을 떠올린 오니는 몸 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불쾌한 의혹이 떠올랐다. 오니는 앞쪽에서 딱정벌레를 조종하는 갑 충사의 등을 두드려 아래로 내려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땅으 로 내려오면서 그의 고향 친구 틸러가 코네도에서 학살을 벌인 자들 과 같은 제국군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도 애써 잊었다. 니어엘 헨로는 새끼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긁힌 상처에서 피가 배 어나오고 있었다. 니어엘은 새끼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았다. 니어엘은 아픔보다는 황당함을 느끼며 전통을 바라보았다. 거꾸로 꽂혀있는 화살이 핏방울을 머금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보통의 궁사 처럼 니어엘도 자신의 활과 화살을 스스로 관리한다. 전통에 화살이 거꾸로 꽂혀있다면 그녀 자신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어엘 은 자신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니어엘은 거꾸로 꽂혀있는 화살을 꺼내어 잠시 들여다보고는 똑바로 꽂아넣었다. 그녀는 주인의 피를 먹은 재수 없는 화살에 대한 거리낌 은 없었다. 니어엘은 입에서 꺼낸 새끼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큰 상처 는 아니었다. 니어엘은 새끼손가락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위를 당기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시험 삼아 공현을 퉁겨본 니어엘은 자 신이 활을 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니어엘은 전통을 다시 허리에 찼 다. "다쳤니?" 니어엘은 머리 끝이 쭈볏 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 해 화가 났다. 니어엘은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별 것 아니에요. 어머니." "정말이야?" 니어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 안쪽이 뜨거웠다. 니어엘은 내면을 향해 한숨을 쉬고는 눈을 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헨로 자작부인 모디사가 기운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어엘은 어머니를 만날 거라는 기대를 조금도 품지 않았다. 지금 쯤 이면 어머니는 낮잠을 잘 시간이다. 그 직후 니어엘은 모디사 헨로가 요즘들어 '정상적'인 움직임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 다. 그렇다면 모디사 헨로는 이 시간대에 낮잠을 자고 있었을 가능성 이 없다. 그보다는 원숭이를 붙잡고 털고르기를 해주고 있었을 가능 성이 결단코 더 높다. 니어엘의 암담하기까지 한 상상과 달리 모디사 헨로는 원숭이를 껴 안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물뿌리개였다. 화분을 돌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니어엘은 그것이 날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상 상을 하기 시작했다. 모디사가 말했다. "자세히 살펴봐. 넌 활을 쏘잖아. 손가락을 다치면 활쏘기 어렵잖 아." "괜찮아요. 활 쏘는데 지장 없는 손가락이에요." "똑바로 보고 말해." 니어엘은 고개를 숙여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는 척했다. "괜찮아요." "기어코 네 동생에게 활을 쏘겠다는 거야?" 모디사의 질문은 내게 활을 쏘느냐는 것 같았다. 니어엘은 틀린 인 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생에게 쏘는 것이 아니라 폐하의 적에게 쏘는 거예요. 어머니." "폐하의 적? 내 딸의 은인을 그런 식으로도 부르는 모양이군." "어머니. 저 이만 내려가야 해요." "제국군 수교위는 낳아준 어미를 무시해도 되나 보지?" "무시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 정말 바빠요. 다음에 이야기 해요." "다음은 없어. 니어엘. 코네도에서처럼 파리조에서도 다 죽을 거야. 네 동생이 죽는다고. 네가 바라는 것이 그런 거야?" "그러면 절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이제는 대드는구나. 못된 병정놀이에 빠져 지내더니 천륜을 무시하 는구나." 니어엘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반항하기 위 해 원추리문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참한 신부감이 될 생 각도 없었고 하늘누리 위에 화분 대신 진짜 화단을 꾸밀 수 있는 능 력자에게 시집갈 생각도 없었고 그럼으로써 어머니를 위로할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와 결혼한 것을 후회한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자유다. 하지만 그 때문에 딸이 어머니를 대신할 수는 없다. 부냐를 또 한 명 의 모디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디사의 자유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니 어엘이 부냐를 모디사처럼 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그것 을 알아야 한다. 니어엘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둬!" "어머니. 저는 어쩔 수가 없어요. 저는 제국군이에요. 싸워야 한다 고요. 어머니가 속상하신 것은 알아요. 하지만 폐하의 군인이 전투를 거부하는 것은 반역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멸문을……"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은 니어엘은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말하는 편 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실수를 인정하는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 을 테니까. 하지만 니어엘은 그런 모습을 보였고 모디사는 물어뜯을 듯이 말했다. "뭐? 네 은공을 알라는 거야? 오호, 그것이군. 그러면 네 발이라도 핥을까?" 모디사는 일정하지 않은 걸음으로 니어엘에게 다가왔다. 니어엘의 지척에 선 모디사는 니어엘의 발을 핥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대신 턱 을 꼿꼿이 들어올렸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이런 거였어? 그랬군. 아주 신이 나겠지. 기어코 얄미운 어머니를 무릎 꿇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겠지. 천만 에!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던 네 힘이 얼마나 세지든 나는 내 배로 낳은 딸에게 무릎 꿇지 않아!" "어머니가 제게 무릎 꿇길 바란 적 없어요." "닥쳐, 이 못된 년!" 피할 수 있었지만 니어엘은 그냥 어머니의 손이 뺨을 후려갈기도록 내버려두었다. 뺨은 아프기보다 차라리 시원했다. 하지만 가슴 속은 뜨거웠다. 니어엘은 눈을 감았다. "무슨 짓이오!" 아버지의 목소리였지만 니어엘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는 눈앞을 맴도는 무수히 많은 반딧불이를 보며 서있었다. 아버지의 말이 들려 왔다. "집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아이에게 감사는 못할 망 정 이 무슨 해괴한 짓이오?"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요. 집안 말아먹을 년이라고." "뭐요?" "이 애가 동생을 망가뜨리고 있어요. 집안을 망가뜨리고 있는 거 죠." "어째서 그렇다는 거요?" "부냐는 발케네 공작부인이 될 거예요!" 아버지의 신음이 들려왔다. 눈을 뜨지 않았지만 니어엘은 아버지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는 듯했다. "천만에. 그 애는 반역자가 될 거요. 그 애가 빠져나갔던 곳으로 돌 아올 수 있다면 큰 행운이겠지." "황제가 이긴다면 그렇겠지요." "말조심하시오! 폐하를 함부로 부르지 마시오!" "하지만 발케네가 이긴다면 그렇게 될 리 없어요. 그 애는 발케네 공작부인이 될 거예요. 저는 발케네공의 사부인이 되는 거죠. 이 동 생 질투할 줄밖에 모르는 못된 년이 그악스럽게 날뛰지만 않으면 그 렇게 될 거라고요! 저도 귀가 있어요. 모두 다 그래요. 이 애가 없었 다면 제국군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고! 이 년이 동생 신세 망 칠 자들을 안내한 거라고요!" "물러가시오." "그리고 이제 이 년은 동생에게 활을 쏘려고……" "물러가시오!" 니어엘은 눈을 떴다. 어머니는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구조물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 끝에는 더 나을 것이 없어 보이는 아버 지가 서있었다. 니어엘은 두 사람에 대한 참기 어려운 환멸감을 느꼈 다. 그 때 모디사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물뿌리개를 집어던지듯 팽 개치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니어엘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아버지는 마당을 구르는 물뿌리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미미하게 떨렸다. 니어엘은 동정심도, 안쓰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 녀는 그저 피로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도르 헨로가 말했다. "네 어머니는 많이 힘들어서…… 네가 이해를……" "저, 이만 내려갈게요. 아버지." 도르는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는 듯 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르는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만 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몸 조심해라." 니어엘은 고개만 한 번 까딱였다. 그리고 니어엘은 아버지의 곁을 떠났다. 어디선가 '미안하다'는 말이 들여온 것 같았지만 그녀는 뒤 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루터를 향하던 니어엘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바쁘게 달려가는 유 수부원을 보게 되었다. 유수부의 분위기는 말이 아닐 것이다. 유수부 가 산공부사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끔찍한 기분을 들게 할 것 이다. 니어엘은 제국 정부에 쓸만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 만 천경유수가 강경한 반전주의자라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는 것은 대강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지각 있는 시민들을 근심하게 하는 처사였 다. 제국 정부를 통괄하는 사도나 제국군의 수장인 태위에 비하면 하 늘누리만을 통제하는 천경유수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는 조 금 협소하지만 그 또한 삼고의 일원이다. 그리고 하늘누리가 실제로 제국의 두뇌이자 심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천경유수의 무게감은 다른 두 명의 삼고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인물을 모호한 근거로 자택에 유폐하는 것은 황제가 모든 타협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이미 충성 서약을 거부한 황제가 제국 관료들과의 타협 또 한 거부한 채 제국을 통치할 수 있을까? 이 전쟁 초기에 니어엘은 부 하장교들의 어떤 협조도 받지 않은 채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하 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고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이 었으며 또한 단기간 동안의 일이었다. 제국은 지상에 알려진 가장 거 대한 규모의 집단이다. 니어엘은 황제가 중간 관리자들의 도움 없이 그 거대한 집단을 지배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유수부 수도국장 푸타르 만룩스는 조금 떨어진 곳을 걸어가는 제국 군 수교위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상당히 강해보이는 활과 짧은 애기살이 가득 담긴 전통 외에도 확실한 증거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헨로가에서 나왔다. 푸타르 만룩스는 그녀가 니어엘 헨로일 거라고 짐작했고 자신의 짐작을 의심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만룩스 국장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니어엘은 상당히 저명한 인사였고 그녀가 천경유수의 구명운동에 동 참한다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만룩스는 그녀가 전 쟁 영웅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반 전주의자였기에 유폐당했다. 그런 천경유수에게 전쟁 영웅이 호감을 가질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만룩스 국장은 니어엘을 그냥 보내기로 했다. 수도국에도 상대편의 첩자가 잠입해 있는 상황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만룩스는 자신의 결정을 기특하게 여기며 다시 걸어 갔다. 얼마 후 만룩스는 천경유수와 독대하게 되었다. 금군이 지알데 락바 이의 집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만룩스는 감히 상관을 만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금군은 곧 황궁으로 돌아갔고 지금 락바이의 집을 지 키고 있는 것은 유수부 경비국원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유수부 소속 의 국장에게 모질게 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알데 락바이는 그를 모질게 대했다. "황명에 의해 유폐된 죄인에게 사사로이 찾아오다니, 네가 죽고 싶 은 게로구나." 서슬이 퍼런 질타에 만룩스는 목을 움츠렸다. 예의 삼아 하는 말이 나 농담이 아니었다. 만룩스는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유수님. 제 분을 참을 수 없어서 그만 큰 무례를 범했 습니다." 당장 돌아가라고 외칠 채비를 하던 지알데 락바이는 분이라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이라니, 무엇이 분이라는 거냐?" "유수님께서 저 주전론자들의 계략에 억울하게 희생되는 모습을 보 고 분을 느끼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는 지엄한 황궁의 기율을 어지럽혔기에 벌을 받는 것이다." "아닙니다. 유수님. 폐하의 대전에서 광태를 부렸던 율형부사와 산 공부사도 매를 몇 차례 맞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 삼고의 일원을 자택에 유폐한단 말입니까?" "더 큰 자중을 해야 할 자가 받는 벌은 더 크다." "유수님.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이 전쟁에는 주전론자들의 입김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장군이 아니 계신 틈을 타서 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예? 에더리 대장군님이 아니 계신 틈을 타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했 습니다만? 제가 실언이라도……" "아니다. 계속해보거라." 지알데 락바이는 만룩스 국장을 내쫓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 그의 말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만룩스 국장은 제국 정부 내에 주전론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태위 의 실종은 어쩌면 그들의 공작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규리하 전 쟁 또한 그들의 활약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하늘누리에 있었다면 반 드시 반대했을 엘시 에더리가 마침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들은 황 제를 미혹하여 발케네 전쟁에 나선 것이다. 그들이 왜 싸우려는 것인 가? 그들은 황제와 제국군을 두 축으로 삼는 강력한 제국 정부를 원 하는 자들이고 따라서 귀족원의 실력자들을 모두 제거할 작정인 것이 다. 아마도 그 중심에는 비스그라쥬백 데라시가 있을 것이다. 근거 없는 추리와 매혹적이라는 것 외엔 쓸모가 없는 음모론이 지나 치게 많이 들어 있는 이야기였다. 지알데는 그 내용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으며 심지어 짜증도 조금 느꼈다. 만룩스가 말하는 주전론 자들이 있다면 그 중심에는 비스그라쥬백 대신 치천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하지만 지알데는 '엘시 에더리가 없는 틈을 타서'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만룩스 수도국장은 엘시 에더리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전쟁에 반대했을 거라고 말했다. 지알데는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엘시의 위명은 전쟁을 잘 수행해서 얻은 것이지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얻은 것은 아니다. 엘시 에더리가 공정한 인물이라 는 것에는 지알데도 동의했다. 하지만 엘시가 이곳에 있었다면 묵묵 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했을 거라는 추측이 더 자연스럽 지 않을까? 지알데의 생각은 그러했다. 하지만 만룩스는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만약 만룩스의 생각이 일반적인 여론이라면 황제의 황위 이양 계획 은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지알데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놀라움을 느꼈다. 무적장군을 평화주의자로 인식되게 했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소리 없는 선동이 있었던 것일까? 지알데는 어쩌면 황위 계승 작업이 최근에 결정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엘 시는 7년 전 쥐딤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속도 로 대장군이 되었다. 지알데는 엘시가 젊은 장군들에게 맡기지 않는 보훈국장 같은 좀 기묘한 직위도 거쳤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어 떻게 보아도 좋은 장수를 만들어내는 경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것은 좋은 황제를 만들어내는 경로였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지알데는 자신이 엘시의 황위 계승을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드시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 었다.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엘시는 시모그라쥬공에게 붙잡혀 있단 말이야.' 치천제는 엘시를 구할 사람이 그의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 다. 하지만 아직 레이헬 라보 태위로부터 엘시가 탈출했다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엘시의 피랍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온 것이 레이헬 라 보 태위였으니 그 탈출 소식도 태위가 알려오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그의 소식이 없다면 엘시는 아직 탈출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엘시 에더리에게 주어진 안전 보장책이 불확실한 것이라 면, 이 전쟁은 황위 계승자를 위한 전쟁이며 동시에 황위 계승자를 잃는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 지알데는 소름이 돋는다고 생각했다. 도덕적으로 이미 불합격점을 받은 이 전쟁은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불합격의 위험에 처해있다. 아 무런 소득 없이 무수한 사람이 사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알데가 보 기에 사람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소득은 없다. 지알데는 푸타르 만룩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유수부의 국장이고 바 깥에 있다. 지알데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도모해볼 만한 근거가 된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알데는 자신이 무엇을 도모해야 할지 생각했다. 운하가 완공되었다. 전장을 크게 휘감아도는 운하는 강에 연결되었 다. 수문에 서있던 오니는 제대로 말도 할 수 없는 흥분 때문에 간략 한 수신호를 보냈다. 수문이 다시 열렸고 긴 시간 동안 고였던 물이 터져나갔다. 오니는 즉각 대기하고 있던 딱정벌레에 올랐다. 갑충사 는 명령도 듣지 않은 채 상승했다. 딱정벌레는 운하 위를 따라 비행했다. 급류의 첨단을 따라 나는 딱 정벌레 위에서 오니는 물살의 흐름을 살폈다. 아직까지 그 기세는 강 했다. 땅이 보다 완만해지는 지역에 도달하면 유속이 느려질 것임을 알고 있는 오니였지만 그 거친 기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범람이라 는 말은 지난 며칠 동안 오니에겐 금기어였고, 새삼스럽게 그 말을 반추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오니는 도주나 은둔 같은 말에 대해 생각했다. 대륙을 가로질러 쟁룡열도 쯤으로 도망치는 것이 그나마 분노한 레콘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최선책이 될 것이다. 고향에 소식 을 전하는 것은 틸러에게 맡겨야지. 예상 전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오니는 의기소침해지는 광경을 보았 다. 레콘들이 있었다. 물론 운하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어떻게도 물이 그 높이까지 올라갈 리는 없는 고지대였다. 그곳에서 레콘들 몇 명이 서서 운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더 많은 인간 병 사들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운하 주변에 서있었지만 오니는 그 레콘들만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그 레콘들 주위에 던지기 알맞은 바위들이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그런 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니는 갑충사가 좀 더 높은 고도로 올라가줬으면 하고 바랐다. 딱정벌레가 상승했다. 오니는 경이감에 사로잡혀 갑충사의 등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후 오니는 자신의 속마음이 갑충사에게 전달 된 것이 아니라 적에게 가까운 곳이기에 저격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딱정벌레가 상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니는 머쓱한 기분으로 아래 쪽의 운하를 살폈다. 급류가 강에 도착했다. 오니는 뜻밖의 고요한 합류에 놀랐다. 그제 서야 오니는 유속이 상당히 느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나긴 운하가 끝난 그 지점에서 유속은 초당 반 미터도 되지 않았다. 오니는 자신 이 걱정해야 했던 것이 범람이 아니라 운하가 멈추는 것임을 깨달았 다. 다행이군. 오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운하는 끊이지 않고 강까지 이어졌으며 범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니는 전장을 휘감아도는 물길 을 만들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나 쥘칸 장군으로부터 상세한 전술계획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오니는 자신이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제국군은 배후나 우회 기습을 걱정할 필요 없이 파르바리 계곡에 진을 친 발케네군의 정면에 설 수 있다. 오니는 할일을 다 끝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국장에게 우는 소리를 할 필요도 없고, 설계 실수로 처벌을 받을 필요도 없고, 쟁룡열도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 살육은 다른 사람의 일이다. 살육에 필요한 무대를 제공했다는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오니는 인생을 너 무 까다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명령받은 일을 수행했을 뿐 이다. 그리고 그것은 제국병의 희생을 줄이는 일이 될 것이다. 오니 는 오래간만에 한숨을 내쉬었다. 테룸 나마스 하장군은 말갈기를 쓸어주며 운하를 바라보았다. 겁이 많은 말들도 뒤로 물러서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합류였다. 유수부 수 도국에서 파견나온 기술자의 수준이 상당히 놀라운 듯했다. 공학적으 로 볼 때 분명히 호평받을 일이지만 나마스는 애석함을 느꼈다. 나마 스는 그 운하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사라티본에서 전투의 서막을 알렸던 테룸 나마스의 기병대는 해체되 어 각 소속군단으로 돌아갔다. 파르바리 계곡은 수천의 단일기병을 운용하기엔 협소했다. 따라서 사령부는 기병대를 소규모 병력으로 분 할하여 보병 병력이나 레콘 병력의 전황에 따라 기동성 있게 협응하 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나마스도 찬성한 일이었다. 이 전쟁에서 기병은 더 이상 전장의 꽃이 아니다.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나마스는 자신에게 내적 정당성을 부여해두었다. 그 정당성을 따르자면 말을 타든 두 발로 걷든 황제를 위해 싸울 수 있 다면 상관 없다. 그것이 황제에게 더 큰 승리를 바치는 것이라면 기 병의 화려함을 포기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기 병의 역할이 단번에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레콘들이 활동하기 힘든 운하 가까운 땅에서 기병은 여전히 호평받는 전력이다. 테룸이 그곳 에 서있는 것 또한 운하 이편과 저편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도하 지점을 미리 선정하기 위해서였다. 테룸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 구 상을 하고 있었다. 레콘들과 기병이 적절한 협동작전을 펼 수 있다면 지형에 구애되지 않는 빠른 전쟁 수행이 가능하다. 그것은 향후 제국 군의 주력 전술이 될지도 모른다. 나마스는 그 발상에 내재된 문제들 에 대해 고민했다. 레콘-기병 합동 전술의 문제점은 레콘은 레콘의 지휘만 받기 때문에 그들만의 여단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마스가 구상하는 것은 조금 더 적은 규모의 단위병력이었 다. 나마스는 레콘 스무 명과 기병 백 기로 구성되는 독립 중대에 대 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독립 작전을 펼치기에 충분한 전력이 며 기동성도 우수하고 보급망을 지나치게 압박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급망은 단순할수록 좋은데 지나치게 세분화된 병력은 보급을 어렵 게 한다. 아마도 주된 전술 행동은 강습이 될 것이다. 방어에는 적절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제국군의 전술 철학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나마스를 주춤하게 했다. 제국군은 최소한의 기간 동 안 - 전투 지역의 특성에 따라 그 기간의 길이는 조금씩 변동한다. - 점거 지역을 방어할 수 있도록 각 전술 단위를 구성하며 나마스가 구 상하고 있는 전술 단위는 그런 조건을 만족시키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마스는 문제가 대충 두 가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전쟁이 끝나면 그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해결책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의미 있는 작업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황제 폐하의 영광을 더 큰 영광을 실현하는 일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자신에게 일거리를 부여한 나마스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도하 지점 선정에 들어갔다. 아라짓력 31년 4월 24일. 제국군은 파르바리 계곡에 주둔한 발케네 군을 공격할 채비를 마쳤다. 전장은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편이었다. 제국군은 크게 휘감아도는 운하로 자신들의 배후와 좌측 측면을 보호했다. 물론 레콘들의 기습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우측 에는 강이 없었지만 대신 소화차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제국군의 전면에는 레콘들이 있었다. 그런 배치에 대응하기 위해 발 케네측에서도 레콘을 정면에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우회 기습이 불 가능한 상황에서 레콘들을 두 부대 이상으로 분할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따라서 발케네공은 가장 거센 공격이 집중될 전면에 똑같은 레콘들을 배치시켰다. 그것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바라던 바였 다. 시허릭의 복안은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현 단계에선 잠시 보류된 상태였다. 4월 24일 오후, 제국군 사령부에서 엉겅퀴 여단 1 대대로 간 명령은 시허릭의 복안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었다. 그리 고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다. 엉겅퀴 여단 1대대장 팡탄 하장군은 도열한 대대원들 앞으로 나왔 다. 대대원들은 팡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팡탄은 그들에게 등을 보 인 채 알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넓은 개활지 저편의 계곡 입구에는 사라티본군이 서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팡탄은 조금 후 몸을 돌려 대대원들을 향했다. 팡탄은 자신의 철편을 머리 위로 휘두르다가 땅을 내려쳤다.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가 사라지자 팡탄은 벼슬을 날카롭게 세운 채 말했 다. "싸우고 싶냐!" 팡탄 앞쪽에 서있던 대대원들은 번득이는 눈으로 자신의 상관을 바 라보았다. 팡탄은 철편을 두 손으로 쥐어 양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쇠사슬들이 부딪히며 예리한 소음들이 부서져나갔다. "미치도록 싸우고 싶냐! 피가 끓어서 몸이 부풀어오르냐! 정말 강한 상대와 죽을 힘을 다해 싸운 다음 상대의 머리를 잘라내어 발로 뻥 걷어차고는 하늘을 향해 고함 지르고 싶냐!" 레콘들은 벼슬을 빳빳하게 세우는 것으로 팡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중 성급한 레콘은 몸을 부풀리고 발을 구르기까지 했다. 팡탄은 말했다. "보라고! 내가 이겼다고 외치고 싶냐!" 거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레콘 대대원들은 자제력 없이 계명성을 뿜어내었고 그 때문에 조금 가까운 곳에 있던 인간 병사들과 군마들 은 약간의 소란을 일으켰다. 물론 레콘들의 소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팡탄은 쇠사슬을 움켜쥔 두 팔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려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내가 이-겼-다-고-!" "이겼다! 이겼다!" 레콘들은 팡탄의 말을 되풀이했다. 함성은 곧 우레 같은 뜻없는 외 침으로 바뀌었다. 팡탄은 거대한 철편으로 양쪽 땅을 후려쳐 외침을 가라앉혔다. 대대원들은 미처 추스르지 못한 흥분 속에서 팡탄을 바 라보았다. 팡탄은 씩 웃으며 말했다. "가서 이기자!" 팡탄은 몸을 돌리며 뛰어올랐다. 레콘들은 그 뒤를 따라 뛰어올랐 다. 곧 엉겅퀴 여단 1대대원들은 개활지 저편의 레콘들을 향해 질풍 처럼 치달렸다. 그들은 이길 것이다. 일생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강 한 상대와 죽을 힘을 다해 겨뤄 이길 것이다. 그들은 확신했다. 그들의 선두에서 달리는 한 명의 레콘만 제외하고 그렇게 생각했다. 락토 빌파는 파르바리 계곡을 바라보았다. 빌파 가문의 수장이자 발 케네의 통치자인 락토 빌파는 당연히 리버즌을 떠올렸다. 그 용감한 도둑은 태양 대신 다른 것을 훔쳐야 했다. 그룸 빌파는 발케네의 지배자와 용감한 도둑의 친구라는 호칭 사이 에서 재미있는 타개책을 내었다. 파르바리 계곡에서 붙잡힌 리버즌에 게 태양을 훔치면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을 때 그룸이 일식을 알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락토 자신도 그것에 대해 질문 했지만 그룸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케네에는 일식을 예측할 만한 기 관이나 시설이 없었지만 그룸이 원했다면 하늘누리에 도움을 청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하늘누리에서 일식이 일어날 테니 놀라지 말라는 경고를 미리 보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일식은 일어났고 대도 리버 즌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다행히 리버즌은 자제력이 있는 인물이었 다. 그는 자신이 발케네공의 은덕을 입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이 후로 두 번 다시 발케네공을 곤혹스럽게 할 만한 절도 행각을 벌이지 않은 채 은둔하며 지냈다. 그것이 세상에 알려진 유쾌한 이야깃거리 이고, 락토가 아는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락토가 보기에 리버즌은 대도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도둑이 아니었 다. 영리한 도둑은 훔칠 가치가 있는 물건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하며 또한 훔쳐선 안되는 물건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욕심만 대도급인 리버즌은 공개되면 안될 물건을 훔쳤다. 공교롭게도 리버즌 은 체포될 당시 그 물건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그룸은 그를 체포할 수 없었다. 그를 체포하면 그가 지니고 있던 물건 또한 공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룸이 짜낸 묘안 덕분에 리버즌은 다시 자유를 얻었 다. 그리고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으슥한 숲속에서 리버즌은 더 큰 자유를 얻게 되었다. 날카로운 단검이 그를 육체에서 해방시켜준 것 이다. 락토가 추측하는 바는 대충 그러했다. 그룸은 그 이후로 리버 즌에 대해 더 이상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으니까. 계곡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무시하며 락토는 리버즌에 대해 생각했다. 리버즌이 훔쳐야 할 것은 태양이 아니라 하늘누리였다. 물 론 리버즌이 살아돌아온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락토는 고 개를 숙였다. 사라티본 부대와 엉겅퀴 여단 1대대가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었다. 전술 같은 것은 별로 찾을 수 없는 대결이었다. 그 증거로 제국군의 다른 병력은 후열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락토 또한 다른 병력은 내보내지 않기로 했다. 상대가 유인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 다. 전황을 바라보면서 락토는 시허릭을 비난했다. "이제는 여유도 없군. 락토의 말에 몇몇 참모들이 고개를 돌렸다. 락토는 씩 웃었다. "시허릭 마지오 말이다. 사라티본에서 두 번의 돌격신호를 보낼 때 는 재치있었다. 그리고 전장을 가지고 올 때는 당당했다. 그 때만 해 도 조야하지만 농담을 담은 편지 한 통 보낼 여유가 있었지. 하지만 이젠 아무 것도 없군." "각하께서 재치와 당당함과 농담을 암살하셨습니다." 대답한 것은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 서있던 팔리탐 지소어였다. 참 모들은 그것이 지나치게 대담한 말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락토 는 마음에 든 듯했다. 락토는 애정을 담은 눈으로 팔리탐의 가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논평을 내지는 않았다. 락토는 팔짱을 꼈 다. "적당히 어울리다가, 제국군이 물러나면 그에 호응하여 물러나도록 해라." 팔리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참모들은 약간 당혹하여 말했다. "물러납니까?" "우리가 고지대에 있지만, 저들은 우리보다 더 높은 곳에 있으니 까." "예?" "우리를 떠보는 거다. 우리가 모든 레콘 병사들을 계곡 아래로 내려 보내는지 알아보려는 거지. 그렇다고 판단되면 다음 전투 때는 하늘 누리를 계곡 위쪽으로 이동시켜 물을 붓겠다는 것이겠지. 사라티본 부대의 뒤편으로 물이 흘러내려가도록. 시허릭은 밑천이 다 드러났 군." 참모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락토가 몸을 돌렸다. "그들이 그렇게 판단하도록 내버려두어라." 참모들은 락토가 상대를 다시 속여넘길 작정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 다. 그들은 기분 좋은 미소로 락토를 배웅했다. 하지만 미소를 지을 수 없는 팔리탐은 무표정하게 락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전투의 소음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온 락토는 뜻밖의 손님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 15 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5-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28 조회수 : 2026 피를 마시는 새 15. 파멸을 경배하는 태도 - 2 락토는 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주위의 장병들 또한 그러했다. 주군 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모방 심리가 발휘된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병사들은 락토와 달리 넋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 그 대로 '병사들'이었는데, 여자 병사들 또한 남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 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어릿의 눈부신 외모는 남녀 모 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 압도적인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헤어릿은 정확하게 방관자적인 거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공작의 천막 앞에 놓아둔 안장에 걸터앉 아 승천한 티나한이 돌아오는 것과 같은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어디에도 주의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무심하게 허공을 바라 보고 있었다. 헤어릿이 자신에게 절대로 눈길을 주지 않을 작정이라 는 것을 파악한 락토는 먼저 말했다. "헤어릿. 여기 어쩐 일이지?" 목소리를 들은 헤어릿은 공작을 한 번 돌아보고는 안장에서 일어났 다. 똑바로 선 그녀는 공작의 가슴 언저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실을 호위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실? 호위?" "아실이 이곳에 오고 싶어했습니다. 그 애는 말타기를 연습하고 있 지만 아직 서툰 편이고, 그래서 제가 따라왔습니다." "네가 따라왔기 때문에 저격이 없었던 건가, 그렇잖으면 주보가 허 락한 건가?" "네서파 시종장이 저격병들을 치워주었습니다." "아실이 주보를 설득했다는 말이군. 그렇다면 아마 나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다면. 그 애는 어디에 있지?" 헤어릿은 대답 대신 위쪽을 가리켰다. 락토는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뭐지?" "좀 더 자세히 보십시오." "새와 구름, 태양 밖에 안 보이는데." "그 새 중에 하나가 아실입니다." 락토는 눈꺼풀을 꿈틀했다. 헤어릿이 말했다. "작년에 아실과 지멘이 하늘누리에 침입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 침입을 성공시키기 위해 지멘은 10킬로미터나 되는 환상계단을 상 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실이 가르쳐준 겁니다." 락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후 빙글빙글 돌지 않는 점을 발견했다. 락토는 다시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헤어릿이 안장에 앉아 허공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를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외감에 사로잡혀 아실을 보고 있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의 머리 위 까마득한 곳에서 아실은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실은 넓은 계단을 상상했다. 상공의 바람은 거셀 것이고 그녀를 붙잡아줄 지멘이 없다면 꽤 위험할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리 고 그녀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어떤 것에도 저항을 받지 않고 제 멋대로 치닫는 상공의 바람은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복잡한 계단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아실은 난간과 같은 것을 배제했었다. 그리고 아실은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계단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 었기 때문이다. 아실은 자신이 분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예측은 맞지 않았다. 아 실은 기쁨과 비통함과 공포를 느꼈고, 분노는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워 하며 아래에서 싸우는 레콘들을 내려다보 았다. 하나의 목표 아래에 결집하면 지형을 바꿀 수도 있는 자들이 서로에게 흉흉한 기세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실은 기뻤다. 그것은 레콘이었다. 레콘만이 그렇게 싸울 수 있다. 레콘만이 모든 냉엄한 시간들에게 멈춰서서 나를 보라고 외치듯이 싸 울 수 있다. 아실은 슬펐다. 레콘들이 싸우고 있었다. 자신의 이유가 아닌 이유 로. 숙원을 위해서도 신부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황제와 어떤 공작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아실은 무서웠다. 섬뜩한 기시감에 아실은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 전에 그런 모습을 보았다. 다시 경험해야 한다면 차라리 튼튼한 밧줄 을 요구하게 될 시간, 그 여름 쥐딤에서 혼란에 빠진 레콘들은 서로 를 공격했다. "그만해. 제발." 아실은 계단에 주저앉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아실은 곧 주먹을 쥐어 입 속에 쑤셔넣었다. 그녀는 손등을 깨물었다. 얇은 살갗을 사 이에 두고 뼈와 이가 부딪혔다. 제발 계속해. 환호하고 싶으며 동시에 안타까운 것을 더 볼 수 없었다. 아실은 눈 을 감았다. 그러자 그렁해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볼이 얼 어붙는 것 같았다. 아실은 얼굴을 훔쳤지만 이젠 손까지 차가웠다. 아실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그러다가 아실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 하늘누리가 떠있었다. 그녀가 만든 계단을 따라 계속 걸어가 면 하늘누리에 닿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참 걸어야 할 것이다. 거리 는 엄청났다. 하늘누리가 그녀의 손가락보다 작게 보였다. 하지만 아 실에겐 충분한 거리였다. 아실은 증오에 차서 하늘누리를 노려보았 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보기 위해 하늘 위로 올라왔던 것인지 떠 올렸다. 아실은 재빨리 하늘누리 주변을 살폈다. 아무 것도 없는 허 공이었다. 아실은 조금 더 가까이 가는 것에 대해 고려해보았다. 무 의미했다. 거리는 상관없었다. 아실은 자신의 가설을 다시 검토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아실은 하늘누리를 노려보았다.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 끓는 물 속에 담겨있는 물체처럼 괴상하게 보였지만 아실은 무엇인 가를 보았다. 아실은 환호를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환상계단 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아실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나타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다행히 아실은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궁 리해둔 논리 실험이 있었다. 그 실험에 성공하면 아실의 가설은 증명 된다. 하지만 그 실험을 실시하면 하늘누리에게 탐지당하게 될 것이 다. 아실은 애달픈 눈으로 하늘누리를 바라보았다. 맥박이 빠르게 뛰 어 머리 속에 굉음이 울려퍼졌다. 아니었다. 굉음이 들려오고 있는 것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녀의 등 뒤쪽이었다. 아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실은 갑충사와 눈이 똑바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에게서 이십 미터 쯤 떨어진 곳에 딱정벌레가 떠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남자 갑충사가 타고 있었다. 잘 맞는 비행복을 입고 있었 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자를 쓴 모습이 어쩐지 타고 있는 딱정벌 레와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노출된 얼굴은 충격으로 딱딱하 게 굳어 있었다. 멀다면 먼 곳이지만 아실은 그의 충격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아실은 그 충격이 무엇 때문일지 생각해 보았다. 그 리고 답을 얻었다. 이 까마득한 고도에서 아무런 도움도 없이 떠있는 소녀의 모습. 불가지론의 영토에 거주하는 자들에 관한 오래된 기억 을 되새기기에 적합한 소재다. 어쨌든 이곳은 환상계단을 떠올리기엔 하늘누리에서 너무 먼 곳이다. 따라서 갑충사가 아실의 모습에서 허 공에서 만난 망령을 보는 것은 그리 탓할 일은 아니다. 물론 갑충사의 모습은 아실에게 조금도 기괴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 실은 냉큼 몸을 돌려 계단을 달려내려갔다. 그 모습이 비명을 지르려 던 갑충사를 진정시켰다. 갑충사는 도망치는 망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실의 다리를 본 갑충사는 그 움직임이 마치 계단을 달려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갑충사 는 갑자기 환상계단과 하늘누리 침입자와 황제사냥꾼에 대한 모든 사 실을 떠올렸다. 갑충사는 격분해야 할지 환호해야 할지 알 수 없었 다. 다행히 그의 몸은 재빨리 딱정벌레를 전진시켰다. 앞에서 도망치 는 아실의 모습은 갑충사의 추적 본능을 자극했다. 갑충사는 등에 매 고 있던 제국검을 뽑아들었다. 헤어릿은 안장에서 벌떡 일어났다. 락토 또한 그 모습을 보았다. 명 령을 외치려던 락토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은 굴러떨어지는 속도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갑충 사의 딱정벌레는 그런 아실에게 쉴새 없이 접근했다. 딱정벌레가 가 까이 다가올 때마다 아실은 머리를 감싸쥐며 쭈그려 앉았다. 아실에 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술래잡기처럼 보였지만 갑충사에게도 그것은 만만찮은 도전이었다. 딱정벌레 날개 쪽에 아실이 부딪히기라도 하면 아실은 당연히 크게 다치겠지만 그 자신도 안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 가지 좋은 점은 아실이 상상한 계단이 갑충사에게는 무의미하다는 점이었다. 아실을 떠받치는 계단은 갑충사에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충사는 아래쪽에서 치고 올라가는 방식으로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아실은 상대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녀는 뛰는 속도를 불규칙적으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떨어지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죽을 것 같은 까마 득한 높이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상황이라면 동작이 불안정한 것은 당 연하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속도를 급격하게 변화시키자 불안정은 더욱 커졌다. 아실은 자신이 매우 복잡한 자살 시도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모습을 보던 락토는 아실의 근처로 뻗어올라가는 환상계단을 상 상하려 했다. 하지만 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락토는 하늘누리의 위치를 찾았지만 그가 서있는 높이에서는 나무들에 가려 하늘누리가 보이지 않았다. 락토는 도대체 어떻게 아실이 계단을 상상할 수 있었 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를 갈며 주위를 보던 락토는 헤어릿이 얼굴을 굳힌 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헤어 릿 또한 락토와 같은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상을 딛고 있는 그녀의 두 발을 보건대 그녀의 시도 또한 실패인 듯했다. 활을 쏠 수 는 없다. 제국군의 니어엘 헨로 같은 명궁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지 도 모르지만 이곳에는 까마득한 고도에서 미친 듯 내달리는 소녀를 피해 이리저리 휙휙 움직이는 딱정벌레를 맞출 만한 궁사가 없었다. 누군가가 올라가서 구해야 했다. 헤어릿 또한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갑자기 눈을 떠서 외쳤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 자들은 모두 계단을 상상해주세요! 이곳에서 저 소녀가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계단입니다! 계단을 만들어 아실을 구하는 자에겐 그의 투구에 금편을 가득 담아주겠습니다!" 락토는 눈을 가늘게 떠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채비가 되어있던 병사들과 금편의 매력에 이끌린 병사 들이 헤어릿의 요청을 시도했지만 그들 중에서도 성공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헤어릿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갑자기 위로 뛰어오 르는 병사는 없었다. 절망적으로 두리번거리던 헤어릿의 눈이 락토에 게 멎었다. 헤어릿은 분노와 원망으로 락토를 노려보았다. 락토는 그 시선에 의 아함을 느꼈다. 이 상황 어디에도 그가 개입한 바는 없다. 그러나 조 금 후 락토는 그 개입 없음에 대해 헤어릿이 원망하고 있음을 깨달았 다. 락토는 헤어릿과 닮은 어떤 여인을 떠올렸다. 락토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가까이 있던 병사에게 다가간 락토는 주춤하는 병사에게서 창을 뺏어들었다. 기병저지용의 길고 튼튼한 창 이었다. 그것을 몇 번 휘둘러본 락토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헤어릿은 숨이 멎는 충격 속에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발 은 땅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발은 점점 땅에서 멀어졌다. 아실은 더 이상 자신의 다리를 신뢰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비틀거 리는 그녀의 다리는 아실을 아래로 떨어뜨리기로 결의한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분명히 보이는 계단은 딱정벌레의 내습은 막지 않았다. 딱정벌레가 그녀의 계단을 뚫고 날아다니는 모습은 아실을 질리게 했 다. 이성으로 아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감성이 자아내는 공포를 억누르기엔 상황이 지나치게 나빴다. 도와줄 사람은 커녕 몸을 숨길 곳 하나도 없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거대한 딱정벌레 의 공격을 받고 있다면 침착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급강하한 딱정벌레가 다시 아래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실은 몸 어디 가 다칠 것을 각오하며 뒤로 벌렁 쓰러졌다. 딱정벌레의 속날개가 뿜 어내는 무서운 굉음이 다가올 때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쓰러졌기에 갑충사는 목표를 잃고 말았다. 아실은 딱정벌레가 그녀의 발 바로 아래를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 에 타고 있는 갑충사의 얼굴도. 갑충사는 화를 내고 있었다. 도깨비 가 키워낸 딱정벌레라면 그녀를 붙잡아 올리는 일도 가능하겠지만 그 의 딱정벌레는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없었다. 물론 그도 도깨비 기수 만큼 우수한 조종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억력은 남부 럽지 않게 가지고 있었다. 그가 노리는 목표는 황제사냥꾼의 동료인 아실이다. 감히 하늘누리를 침입했던 당돌한 범죄자가 그의 손이 닿 을락말락하는 곳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절대로 놓칠 수 없 는 목표였다. 갑충사는 자신의 기술을 모두 끌어모아 딱정벌레를 통 제했다. 다시 날아드는 딱정벌레를 보며 아실은 황급히 일어섰다. 그러나 그 순간 다리에서 숨이 턱 막히는 고통이 전해져 왔다. 휘청하던 아실은 환상계단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쓰러졌다. 저 아래의 땅을 본 아실은 정신이 번쩍 들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이 발목이 삐었다고 생 각했다. 운이 나쁘면 부러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실은 다리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딱정벌레의 위치를 찾는 것이 급했다. 아실은 다가오는 굉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딱정벌레는 몇 미터 쯤 떨어진 조금 낮은 위치에 떠있었다. 갑충사 는 힘겨워하며 딱정벌레를 통제하고 있었다. 아실은 어리둥절한 표정 으로 갑충사를 바라보다가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실의 다리가 성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갑충사가 생포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 다. 그래서 갑충사는 허공에 떠있는 아실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아실은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발목이 끊어지는 아픔 외엔 별 다른 소득이 없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아실은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계단에 무릎을 꿇은 채 갑충사를 향해 단검을 내밀었다. 갑충사는 아실을 비웃지 않았다. 지상이라면 다리를 다친 소녀가 내 밀고 있는 단검 쯤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서툰 동작이 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추락사를 일으킬 수 있는 높이였다. 그리고 갑충사는 아실이 딱정벌레의 민감한 부분으로 단검을 집어던질까봐 걱정스러웠다. 단검을 꼭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그런 생각은 떠올리 지 못한 것 같았지만 갑충사는 아실의 손동작을 주의깊게 바라보며 딱정벌레를 통제했다. 진땀 나는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갑충사는 아래에서 다가오는 위험을 발견하지 못했다. 딱정벌레가 갑자기 진동했다. 위로 훌쩍 떠오른 갑충사는 죽을 힘을 다해 딱정벌레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자신이 매달린 것이 안전한 구 명책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래를 볼 수는 없었지만 갑충사는 딱정벌 레의 날개가 기묘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딱정벌레에게 무슨 일 이 일어난 것이다. 아실은 갑충사에게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딱정벌레의 커다란 몸 아래를 찌르고 있는 긴 창이 있었다. 그리고 그 창 물미 쪽에서는 암살공이 창을 감아쥐듯 움켜쥐고 있었다. 락토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아실의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아실 이 보기엔 락토가 딱정벌레에게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일어난 딱정벌레의 움직임 때문에 그런 인상은 사라졌다. 딱정벌레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 중심에는 락토가 서있었다. 그래서 아실의 눈에는 락토가 창끝에 꿴 딱정벌레를 휘두 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창끝에 꿰어 휘두르기엔 지나치게 큰 물체 이긴 하지만. 락토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딱정벌레가 아실의 반대 방향으로 올 때까지 버티다가 창을 놓아주었다. 암살공의 손에서 해방된 딱정 벌레는 배에 창을 꽂은 채 비틀거리며 날아갔다. 아실은 갑충사를 보 지 않기 위해 눈을 돌렸다. 락토는 어지러운 궤도를 그리던 딱정벌레 가 산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딱정벌레가 돌아올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진 락토는 아실에게 다가갔 다. 그의 계단은 꽤 넓었다. 싸움이 일어날 것을 대비했기 때문이다. 각도가 약간 맞지 않았지만 다행히 락토는 아실의 몸에 손이 닿는 위 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락토는 아실의 어깨를 건드렸고 아실은 몸을 돌렸다. 락토를 본 아실은 두 사람의 위치 관계를 깨달았다. 아실은 다리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옆으로 기는 동작으로 락토에게 다가 왔다. 곧 락토는 선반 위의 물건을 내리듯 아실을 끌어내릴 수 있었 다. 아실을 두 팔로 받쳐 안은 락토는 무의식중에 그녀를 똑바로 세 워주려 했지만 그 순간 아실이 결사적으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공작님! 이건 공작님 계단이에요!" 락토는 아실이 자신의 계단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 깨를 으쓱이고는 그대로 내려가려 했지만 아실을 가슴 앞에 받쳐 안 은 자세로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발 아래가 잘 안 보였다. 락토는 아실을 한쪽 어깨에 둘러메었다. 락토의 사정을 이해한 아실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암살공의 엉덩이 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자세를 감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곧 아실은 신음을 흘렸다. 암살공의 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끔찍했 다. 그녀가 보는 락토의 다리는 허공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저 아래쪽의 땅이 똑바로 내려다보였다. 아실의 불평 을 접수한 락토는 다시 자세를 바꿨다. 최종적으로 락토는 아실을 등 에 업게 되었다. 마침내 두 사람 모두 만족하게 되었다. 아실이 말했 다. "대단하시네요. 공작님. 어떻게 여기서 환상계단을 만드셨지요?" "너도 한 일이잖아." "물론 저도 대단하죠." "그래, 대단한 스승.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올라온 거지? 이곳 이 전쟁터라는 것이 그렇게 큰 비밀인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늘누리를 좀 보려고요." "하늘누리? 너는 전에도 봤을 텐데. 거기에 발도 디뎌봤을 테고." "볼 일이 생겼어요." "무슨 볼 일?" "비밀." 암살공은 멈춰서서 말했다. "놓는다." 아실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 팔은 암살공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락토는 피식 웃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아실이 말했다. "천경비록을 읽었어요." 잠깐 동안 락토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움직이며 말했다. "네가 숙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 변경백의 허락은 없었 을 테지?" "예." "그래서, 뭐 재미있는 거라도 읽었니?" 락토는 자신의 목소리가 갈망에 차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랐 다. 아실은 조금 기다렸다가 말했다. "공작님. 비꼬는 것이 아니라 궁금해서 묻는 건데, 승리할 수 있다 고 생각하세요?" "그게 중요하니?" "예?" 지상으로 내려올수록 바람의 영향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락토는 계 곡을 타고 느닷없이 불어올지도 모르는 돌풍에 주의하며 발디딤을 단 단하게 유지했다. "아냐. 나는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제국군에게 후퇴를 강요할 수 있다면 성공이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공작님은 귀족원을 강화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을 장악할 수 있으실 거 예요. 국정 중심이 귀족원으로 옮겨오게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공작님의 전쟁이 제국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지는 않군요. 공작님은 제게 왕의 시대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것이 가능할까요?" "황권이 약화되면 귀족들의 세력은 자연히 강해진다. 그렇다면 왕이 나타날 수 있어." "추상적이잖아요." "더 많은 실제 계획을 네가 알아야 하니?" "예." "왜지?" 아실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새 땅에 가까워지고 있었 다. 모여선 채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발케네 병사들의 얼굴이 보 였다. 아실은 약간 빠르게 말했다. "언젠가 제게 협조할 거냐고 물으셨지요?" "셋을 세겠다고 했지." "지금 대답하겠어요. 그 동안 많이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저는 제가 황제를 여전히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년은 발케네를 멸망 시킬 작정이에요." 락토의 어깨가 꿈틀했다. 설명을 길게 할 시간이 없었던 아실은 요 약해서 말했다. "각하를 돕겠어요. 대신 제국의 레콘들이 저와 함께 처용 산맥 너머 에 우리들의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것이 조건이에 요." 락토 역시 계단의 남은 단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국의 모든 레콘이 너를 따라가게 해달라고?" "그건 불가능하겠지요. 대신 각하께서 모아들인 레콘들과 제국군 레 콘 포로들 중에 저를 따라오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전부 제게 넘겨 주세요. 그리고 우리가 처용 산맥 너머에 쓸만한 것을 만들어놓을 수 있을 때까지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요구가 지나친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면 셋을 세겠어요. 하나, 둘. 생각이 정리 되시면 대답해주세요." 락토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사라졌다. 병사들은 환호를 보내고 싶어했다. 그들의 주군은 하늘에서 딱정벌 레를 퇴치하고 젊은 처녀를 구해서 돌아온 영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도 분위기가 좀 기묘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락토는 그 기묘한 분위기가 시작되는 곳을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헤어릿 에렉스가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먼지 투성이의 남자가 서있었다. 말을 타고 긴 거리를 정신없 이 달려온 듯 머리와 어깨엔 흙먼지가 자욱했다. 남자는 사나운 눈빛 으로 락토를 노려보고 있었다. 락토는 아실이 등에서 빠져나가려 하 는 것을 느끼곤 우선 그녀를 내려주었다. 똑바로 선 락토는 말했다. "네가 여기 왜 있는 거냐, 스카리." 스카리는 락토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아실을 노려보았다. 헤어릿에 게 다가가려던 아실은 그 시선을 느끼곤 주춤했다. 무시하기엔 너무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 때 헤어릿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헤어릿은 아 실에게 다가와 그녀를 살짝 끌어안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올라가지 못하게 했을 텐데. 무서웠 지?" "아뇨. 괜찮아요." "왜 업혀내려온 거지? 다리를 다쳤어?" "예. 조금 삔 것 같아요." "내게 기대. 좀 자세히 살펴보자. 공작님. 괜찮으시다면 공작님의 천막을 좀 이용해도 될까요?" 락토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길은 여전히 스카리에게 고정시켜두었 다. 헤어릿은 아실을 부축한 채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스카리는 끝 까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아버지에게로 눈을 돌렸다. 몰려선 병사들을 의식한 스카리는 간단히 경의를 표했다. 락토는 거 기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회의실로 쓰이는 큰 천막 쪽으로 걸어갔 다. "따라오너라. 병사들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라." 병사들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고는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스카 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걸음을 뗐다. 락토는 탁자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천막 안에는 그 외에 아무도 없 었다. 스카리는 주위를 잠깐 둘러보았지만 서서 회의를 진행하는 듯 의자는 없었다. 락토가 말했다. "저기 상자에라도 앉아라." "말을 한참 탔습니다." "그런 것 같군." 스카리는 상자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그는 어정쩡한 방향을 가리키 며 말했다. "전투가 진행 중인 것 아닙니까? 저 소리도 그렇고 여기에 지휘관들 이 없는 것을 봐도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순간 락토는 어떤 희망을 느꼈다. 락토는 아들의 모습을 세심하게 살폈다. 아버지의 곁에서 싸우러 온 것이라면 갑옷과 무장을 챙겨 왔 겠지만 스카리의 모습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하지만 빨리 달려오기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왔을 수도 있다. 무장은 이곳에서 구하거나 혹 뒤에서 따라오게 해도 되니까. 락토는 기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어투 로 담담하게 전황을 설명했다. "제국군은 저 너머 계곡 아래쪽에 진을 치고 있다. 지금 들리는 이 소음은 엉겅퀴 여단과 사라티본군이 싸우는 소리다. 하지만 다른 병 력은 움직이지 않는다. 제국군도, 우리도." 스카리는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왜 그렇습니까?" "제국군은 우리가 사라티본군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떠보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라티본군을 충분히 전진시킨다는 것을 확인하 면, 하긴 우리가 고지대에 있으니 아래에서 올라오는 쪽보다 더 빠르 게 내려갈 수 있지.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다음 전투에서 우리 본대 와 사라티본 부대를 절단하려고 할 것이다. 하늘누리를 전장 상공으 로 보내어 물을 뿌리겠지." "그러면 사라티본 부대는……" "그래. 등 뒤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과 앞쪽의 제국병들에게 포위당하 지." "무서운 작전이군요. 그러면 아버지는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이십니 까?" "이곳에서 기다리면 직접 볼 수 있을 거다." 스카리는 싸늘하게 웃었다. "제가 부냐를 위험하게 할 것 같습니까?" 락토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무표정한 얼굴을 가까스로 바 꾸지 않은 채 락토는 말했다. "그 계집을 죽이려면 벌써 죽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네가 그 계집 옆에 있거나 없는 것은 상관이 없다. 주제를 알고 착각 에서 깨어나라." 스카리는 궤짝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로와 노기로 핏발 선 눈을 부 라리며 스카리는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그 눈을 조용히 마주보며 락 토는 아들이 무슨 말을 하건 꿈쩍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카리의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 애꾸 계집애는 업고 다니면서, 친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에겐 왜 그러시는 겁니까!" 락토는 눈을 꿈틀거렸다. 스카리는 쏟아내듯 말했다. "생전 그런 모습 처음 봤습니다! 손녀딸 업고 다니는 할아버지처럼 보이더군요. 제가 헛것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환상계단에 대해서라면 네가 더 잘 알 텐데. 그 애는 다리를 다쳤 고, 내가 만든 계단을 밟을 수 없다." "그 전에 아버지는 그 애를 구하러 올라가셨습니다!" 락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헤어릿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말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헤어릿은 셀소 에렉스를 죽게 내버려두었 듯이 아실을 죽게 내버려둘 참이냐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만 락토를 쏘아보았을 뿐이다. 스카리가 말했다. "저를 좋아해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설사 그러셔도 제 가 아버지를 좋아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부냐는 제가 아닙니다. 저를 미워하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만 부냐를 미워하지는 마십시오. 무릎을 꿇을까요? 그러겠습니다." 스카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진부한 동작이지만 언제나 충격적 이다. 그리고 락토는 아들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 광경을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스카리의 아버지였고 아들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스카리는 자신의 일로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 지는 않을 것이다. 락토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무엇을 바라는 거냐." "제게 열쇠를 주십시오." "황금열쇠를 말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부냐를 위해 그렇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룸성은 지 금까지처럼 시종장이 다스려도 좋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부냐에게 열쇠를 보여주고 싶습니 다.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의지가지할 것 없는 이 땅에서 두려 움에 떨고 있습니다. 불쌍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저밖에 없 습니다. 부디 동정심을 베풀어 주십시오."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행동에서 느꼈던 충격은 여전했지만, 락토는 마음 한 구석에서 역겨움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암살공은 차갑 게 말했다. "불쌍하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가련한……" "닥쳐라." 스카리는 입을 다물었다. 들끓어오른 흥분을 아직 가라앉히지 못한 스카리는 혼란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락토는 살의에 가까운 분노를 느꼈다. "그 년이 염치가 있었다면 칼 한 자루 들고 싸우려 했을 것이다. 그 년을 위해 죽어가는 병사들의 곁에서. 그 년이 용기가 있었다면 창밖 으로 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 년 때문에 한 번 파괴된 가족들을 두 번 파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부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 다. 부냐가 염치와 용기를 가지고 있건 없건 나와는 상관 없다.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 년이 불쌍하다고는 말하지 마." 스카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락토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부냐가 얼빠진 네녀석과 함께 도망침으로써 헨로 가에 사망 선고를 내렸는데도 그 가족들이 왜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아느냐? 부냐의 언 니가 가족을 구하고 있다. 부냐의 언니 니어엘 헨로는 제국군의 영웅 이 되었다. 물론 너는 니어엘이 헨로 가 사람들을 이끌고 발케네로 도망쳤어야 했다고 말하겠지. 그건 중요한 것이 아냐. 중요한 것은 니어엘이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다는 거다. 부냐는 무엇 을 하고 있냐? 그 년이 주보를 죽이고 황금열쇠를 뺏어 그룸성을 장 악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지금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거다. 아니, 만일 그랬다면 나는 박수를 쳤을 거다. 하지만 부냐는 아무 것도 하 지 않았어. 세상이 그녀를 위해 바뀌기만을 바라고 있어." "그런 말도 안되는 중상을……" "언제 부냐가 자기를 위해 행동했지? 스스로 백화각에서 탈출했나? 엘시가 구해주기만을 넋놓고 기다렸지. 스스로 내게 자기 가치를 증 명해 보였나?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어. 스스로 암살성에서 자기 입지 를 만들었나? 네가 입지를 가지기만 바라고 있어." "시체보관소에서 노역하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을……" "네가 말하는 그 애꾸눈 소녀는 6년 동안 제국과 싸웠다. 아이저 규 리하와 내가 황제와 싸운 기간을 합쳐도 그 애가 싸운 기간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애가 시체 같은 꼴을 하고 있더냐?" 스카리는 달려들 듯 가슴을 불쑥 내밀었다. "그런 막 굴러먹은 애를 누구에게 비교하십니까? 부냐는 귀족입니 다! 아실인지 뭔지 하는 그 미친 꼬마와 다릅니다. 헤어릿의 어미인 그 가짜 귀족과도 다릅니다! 부냐는 진짜 귀족입니다!" 다음 순간 스카리는 천막 밖으로 튕겨나갔다. 스카리는 황금 열쇠의 전달식이 있었던 날 일어난 사건으로 짐작했 어야 했다. 비록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일은 없지만 암살공 락토 빌파 가 꾸준하게 비각술을 수련하고 있음을. 스카리는 자신이 어디를 어 떻게 맞았는지도 모르는 채 천막 밖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흙먼지 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스카리의 상체를 뒤덮었다. 주위를 지나거나 가까이 있던 발케네 병사들은 깜짝 놀라서 스카리 를 부축하기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락토가 먼저 천막 밖으로 나왔 다. 그리고 락토는 스카리의 옆구리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이것이 가 족사임을 깨달은 병사들은 주춤하다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되도록 락토와 스카리를 못본 척했다. 암살공의 성미를 거스를 경우 입을지 도 모르는 피해를 고려한다면 현명한 행동이다. 락토는 아무런 방해 도 없이 아들의 갈비뼈 강도를 시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카리는 젊었다. 몇 번 걷어차인 다음 스카리는 아버지의 발을 피해 몸을 굴 렸다. 그는 재빨리 일어났고 괴성을 지르며 아버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암살공은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목끝에 와닿은 칼날에 스카 리의 동작이 얼어붙었다. 스카리는 터질 것처럼 붉게 변한 얼굴로 락 토를 노려보았다. 락토가 묘하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그룸성으로 돌아가라." 스카리는 어깨로 숨을 쉬며 락토를 바라보았다. 락토의 선고가 계속 되었다. "도착하는 즉시 부냐 헨로와 함께 그룸성을 떠나라." 이 세상의 평화로움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던 발케네 병사들도 그 이야기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스카리의 얼굴색도 바뀌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 두 필과 사흘 먹을 식량을 허락한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그룸 성에서 가지고 나가서는 안된다. 이후로 너나 부냐가 내 눈에 뜨이면 그 즉시 죽이겠다." 스카리는 기가 막혀 말도 못했다. 그리고 락토는 최후 변론은 생략 했다. 그는 자신의 선고를 완강하게 실행에 옮겼다. 곧 지휘관 한 명 이 불려왔다. 불려온 것은 발케네 국경수비대의 텡 마바노 조장이었 다. 그는 조원들을 데리고 락토의 선고가 실현되도록 하는 중책을 맡 게 되었다. 조치는 신속했다.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스카리는 비 무장 상태로 말 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말을 탄 텡 마바노의 조원들이 둘러쌌다. 스카리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락토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락토는 아들에게 아무런 시선도 낭비 하지 않았다. "가라." 텡 마바노는 단호한 태도로 경례하고는 스카리를 돌아보았다. 스카 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텡은 주저없이 칼을 뽑아 스카리가 타고 있는 말의 볼기를 후려쳤다. 말은 기겁하여 출발했고 스카리는 낙마 하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추어야 했다. 락토는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 스카리 빌파가 발케네군 본영을 떠나던 시각, 사라티본 군과 어울리 던 엉겅퀴 여단은 뒤로 물러났다. 발케네군의 참모들은 암살공이 남 겨둔 지시에 따라 사라티본 부대를 물러나게 했다.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더 싸우고 싶어했지만 힌치오는 그들을 잘 통제했다. 본영으로 돌아온 락토의 참모들은 그들이 없던 동안 일어난 일을 전 해듣고 깜짝 놀랐다. 어떤 장수는 발케네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암시를 했고 어떤 장수는 발케네공이 강력한 지휘력을 발휘하 기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중론은 후자쪽에 가까웠 다. 비록 패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발케네공은 제국군을 자기 식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 날의 전투만 해도 발케네공이 내다본 대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서 의혹과 불안을 제거하기 충분 했다. 다만 팔리탐 지소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가면으로 감춰 진 그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얼굴을 내비치지 않던 암살공은 그 날 저녁 늦게 지휘관들 앞에 나 타났다. 그는 묻는 눈길을 무시한 채 내일 사용할 작전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말하고는 전달이 끝나자마자 다시 사라졌다. 지휘관들은 당 황한 채 락토를 배웅했다. 다음 날, 전투는 이른 아침부터 속개되었다. 제국군의 움직임이 포 착되자 발케네측에서도 신속하게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파르바리 계 곡 앞에 펼쳐진 제국군의 진형은 전날과 같았다. 다만 발케네군의 진 형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제국군의 진형을 거울에 비추기라도 한 듯 똑같은 배치를 선택했다. 단지 좌우가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앞쪽에 레콘들이, 뒤쪽에 보병대가, 그리고 좌측에 소화차들이 배치되었다. 전투는 제국군측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제국군 뒤쪽에 조용히 떠있 던 하늘누리가 갑자기 종소리를 울리고는 파르바리 계곡 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국군의 선봉에 서있던 왜솜다리 여 단과 고추냉이 여단의 레콘 병사들이 계곡 위쪽을 향해 달렸다. 발케 네측에서도 그에 대응하여 앞쪽에 있던 사라티본 부대가 달려나왔다. 그런데 사라티본 부대의 움직임은 제국군 레콘 병사들의 움직임과 달 랐다. 사라티본 부대는 둘로 크게 갈라지듯 하며 레콘 제국병들의 양 쪽으로 치달렸다. 발케네군 사령부의 참모들과 지휘관들은 아래를 바라보며 쾌재를 올 렸다. 그것은 사라티본 부대가 쉽게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움 직임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느새 나타난 락토 빌파도 포함되어 있었 다. 잠을 제대로 못잤는지 얼굴이 조금 상한 암살공은 아무런 말도 없이 전장과 하늘을 번갈아 응시했다. 둘로 나뉘어진 사라티본 부대는 제국병들의 양쪽을 스치듯 달렸다. 그리고 발케네군의 좌측에 있던 소화차들이 재빨리 우회하여 사라티 본 부대가 있던 위치로 이동했다. 둘로 나뉘어진 사라티본 부대의 가 운데를 지나친 제국군들은 앞쪽에 나타난 소화차들과 맞닥뜨리게 되 었다. 그리고 사라티본 부대는 그들의 좌우를 스쳐 제국군 본대를 향 해 달려들고 있었다. 하늘누리는 어느새 전장의 상공에 도달했지만 이제 계곡에 물을 쏟아부었다가는 사라티본 부대가 아니라 그들과 자 리를 바꾸듯이 움직이게 된 제국군 레콘들에게 물벼락을 씌울 형국이 었다. 발케네 사령부에서는 환호가 올랐다. 어제의 좋지 않은 사건으 로 상심해 있을 암살공을 위해 그들은 의도적으로 더 크게 흥분했다. 그들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암살공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 이 암살공의 기분이 쉬 풀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락토가 벌떡 일어났다. 락토는 목을 부들부들 떨며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참모들은 의아해 했지만 전장의 상황은 그들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사라티본 부대가 그들 뒤편으로 돌아갔지만 그 대신 소화차가 있기 때문에 제국군 레 콘들은 발케네군을 공격할 수 없다. 그들은 몸을 돌려 사라티본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사라티본군은 앞을 가 로막은 소화차가 없기에…… 참모들은 질겁했다. 제국군 또한 발케네군과 똑같은 움직임을 보였 다. 레콘 병사들이 뛰쳐나간 자리에는 우측에서 이동해온 소화차들이 서있었다. 사라티본 부대 또한 제국군 레콘들처럼 상대방의 본대를 공격할 수 없는 것이다. 발케네군 지휘관들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레 콘들의 싸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락토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시허릭!" 통분의 외침이 혹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시 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 일어난 일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발케네공 락토 빌파가 외친 직후 제국군 사령부에서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입을 연 것은 혼잣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허릭 마지오 상장 군은 자신의 말이 발케네공에게 들린다고 가정했다. "각하는 통치자입니다. 각하께서는 누구와, 왜, 어디서 싸우는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군 인입니다. 누구와, 왜, 어디서 싸우는지는 제 손 밖에 있습니다. 하 지만 제게도 고통스러운 경험과 평생을 바친 훈련으로 얻은 한 가지 사소한 능력이 있습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것은 신호였고 그 뜻은 곧 사라티본 군 배후로 이동해 있던 왜솜다리 여단과 고추냉이 여단에 전달되었다. 자신의 명령이 일사불란하게 전달되는 것을 보며 시허릭은 말했다. "저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압니다." 이동을 끝낸 하늘누리는 전장의 상공에 대단히 낮게 떠있었다. 그리 고 왜솜다리 여단병과 고추냉이 여단병들 중 환상계단을 상상할 줄 아는 레콘들이 환상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환상계단에 대한 종족별 적응력을 연구한 사람은 없다. 불쾌한 종족 차별의 의혹 때문은 아니다. 학문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혼동하는 사람은 많지만 제국의 모든 학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정치적 온당성 을 발휘하기 위해 닭도 새처럼 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희 극일 뿐이다. 그리고 닭에겐 비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닭은 날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닭 차별이 아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것이 분명한 네 종류의 사람들에게 구분 가능한 차이점들이 있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은 학문적 사명이 될 것이다. 공평함은 다름을 인정 할 때 발휘될 수 있으므로 그것은 또한 진정한 정치적 온당성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족이 환상 계단을 더 잘 다루고 어 떤 종족이 다른 종족에 비해 좀 뒤떨어지는지를 연구한 학자는 없다. 환상계단의 경험은 학문적으로 정량화하기 어려운 개인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피실험자가 만든 계단을 볼 수 없다. 하지만 학문적 엄격함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하늘누리 시민들에게는 경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있다. 비행의 경험이 풍부하고 도깨비불을 다루는 도깨비들이 조금 더 능숙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선입견이 지만 하늘누리 시민들의 경험에 따르면 놀랍게도 환상계단에 대한 각 종족의 적응성에는 괄목할 만한 차이가 없다. 어떤 종족이든 환상계 단을 능숙하게 다루는 자들과 도무지 그러지 못하는 자들의 비율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왜솜다리 여단과 고추냉이 여단의 레콘들의 경우에도 그 비 율은 비슷했다. 그 비율은 절반보다 많이 낮다. 환상계단을 만들어낼 수 없는 병사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시허릭은 그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 시허릭의 계획에 따라 환상계단을 상상할 수 있는 레콘들 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허공에 자리를 잡았다. 각자 상상한 계단은 달랐지만 비슷한 고도에 자리 잡은 그들은 허리를 굽히고 서로의 어 깨를 붙잡은 채 단단히 버티어 섰다. 그리고 오래된 야사가 재현되었다. 과거 대호 별비의 습격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자보로는 대호가 감 히 뛰어넘을 수 없는 성벽으로 도시를 둘러쌌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당시 그 장대한 성벽은 무너졌지만 자보로 성벽에 얽힌 온갖 놀라운 전설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돌아온 북부의 왕, 대호왕에 관한 전설도 있다. 한계선을 넘은 대호왕이 자보로에 이르 렀을 때 그녀는 온당치 못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대호왕은 그들을 공격하는 대신 그들의 오만함의 근원인 성벽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대호왕의 왕명이 된 위대한 대호 마루나래가 자보로 성벽을 넘게 되었다. 그런 놀라운 위업을 가능하게 한 대호왕의 재치는 그녀 스스로 대호를 위한 도약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성벽 중간에 암 살자의 검 쉬크톨을 꽂아넣고는 그 칼자루에 매달려 대호에게 등을 내주었다. 그리고 도약한 마루나래는 그녀의 등을 밟고 재도약하여 별비 이후로 그 어떤 호환도 겪지 않았던 자보로 사람들에게 대호의 공격에 대한 옛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파르바리 계곡 상공 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때의 일과 비슷했다. "가-자-!" 레콘들이 도약했다. 전우들이 허공에 만들어준 도약대를 밟으며 레 콘들은 하늘누리 위로 뛰어올랐다. 레콘들이 짓밟는 힘은 무지막지했 지만 같은 레콘인 전우들은 그 힘을 거뜬히 견뎌내었다. 허공에 떠있 는 자들을 밟으며 하늘로 일제히 상승하는 레콘 병사들의 모습은 어 떤 의미에선 소름끼쳤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국병들은 피 부가 잔뜩 당겨지는 듯한 희열 속에서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외쳤다. "레콘 계단이다!" "올라가! 올라가!" 인간 제국병들의 응원을 받으며 레콘들은 순식간에 하늘치 위로 뛰 어올랐다. 전우들을 위해 받침대 역할을 해주던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계단을 올랐다. 사라티본 부대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천경통제실에서 모든 레콘 여단병의 탑승을 알리는 보고가 울려퍼지 자 유수부차사 파라말 아이솔은 가장 겸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판단에 따라 전진하라, 통제국장." 통제국장은 파라말의 언동에 감탄했다. 젊은 유수부차사는 지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신비한 탈것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황은 노련한 통제관도 가슴이 설렐 정도로 극적이다. 위대한 승리의 역사에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상황에서, 파 라말은 권위를 포기하고 화합을 택했다. 아직 천경유수의 추억을 잊 지 못하는 통제국원들과 국장에게 그런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국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경계 타종 실시. 고도 유지한 채 전진." 하늘누리에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하늘누리의 거체가 레콘 들을 태운 채 파르바리 계곡의 위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이들에겐 폐소공포증을 일으킬 것 같은 광경이 었다. 계곡의 밝기는 순식간에 떨어졌고 주위는 가장 짙은 먹구름이 끼었을 때보다 더 어두워졌다. 다른 때보다 밤이 일찍 찾아왔나 놀란 야행성 동물들이 갑자기 뛰쳐나오는 모습은 몽환적이었다. 넋이 나가 버린 상태에서 팔리탐 지소어는 파르바리 계곡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리버즌이 태양을 훔친 날도 아마 이러했 을 것이다. 그 날도 사물이 보름달 아래의 빛을 내뿜고 혼란에 빠진 부엉이들이 울부짖었을 것이다. 발케네 병사들은 침묵했다. 귀가 따 가운 침묵이었다. 그 고요 속에서 발케네공 락토 빌파의 처절한 외침 이 울려퍼졌다. "소화차! 소화차! 짝수열 즉시 후방으로 이동해! 제기랄, 물 대신 레콘을 퍼부을 작정이다!" 발케네공의 외침에 참모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바뀌었다. 전장을 선 택하는 대신 휴대하고 왔던 적의 장수가 이제 무기 대신 병사를 던지 려 하고 있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5-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29 조회수 : 2058 피를 마시는 새 15. 파멸을 경배하는 태도 - 3 힌치오는 깃털을 뻣뻣하게 세운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모 여있는 전쟁 전문가들의 숫자는 엄청났고 그 자들 대부분은 소화차 방어진 돌파를 위해 하늘누리를 이용한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전술 에 대해 감탄하거나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 작전의 완성을 위해 시 허릭은 겉으로는 간단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매우 복잡한 심리전을 구 사했다. 작일의 전투에서 시허릭은 의도적으로 레콘들만 싸우게 함으 로써 발케네 측에게 그들의 레콘 운용을 탐지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 었다. 사라티본 부대가 발케네 본대와 충분히 분리되면 그 사이를 하 늘누리의 낙수로 단절하는 것이 제국군의 계획이라는 락토의 판단은 혜안이었다. 하지만 시허릭이 바란 것이 그 혜안이었다. 그 때문에 시허릭은 의심받지 않고 하늘누리를 전쟁터 상공으로 이동시킬 수 있 었다. 하늘누리가 충분히 가까이 다가왔기에 왜솜다리 여단과 고추냉 이 여단의 레콘들은 순식간에 탑승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하늘누리는 두 여단을 태운 채 발케네 본대 뒤편으로 날아들고 있었 다. 뒤편에 두 여단이 투하된다면 발케네군은 파르바리 계곡에 갇히 게 될 것이다. 하지만 힌치오는 전쟁 전문가라기보다는 전투 전문가였고 그가 깊은 인상을 받은 부분 또한 다른 자들과 달랐다. 힌치오는 하늘누리에 탑 승하는 두 여단의 움직임에 충격을 받았다. 어떤 레콘이 다른 레콘을 위해 계단이 되어준다는 것. 힌치오에겐 어처구니 없는 관념이었다. 힌치오는 이것이 분열 행진을 할 수 있는 레콘의 기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힌치오는 팔리탐이 왜 줄 맞 춰 걷는 것을 그렇게 높이 평가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줄을 맞춰 걸으려면 옆 사람의 걸음걸이를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전체의 걷는 방식을 위해 자기가 걷는 방식을 잠시 포기해야 한다. 그 포기 가 중요한 것이다. "힌치오! 어떻게 하지요?" 힌치오는 고개를 돌렸다. 야키보로가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 고 있었다. 힌치오는 새로운 놀라움으로 야키보로를 바라보았다. 왜 스스로 판단하여 움직이지 않고 내게 물어보는 거냐. 힌치오는 물론 야키보로가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크락스, 파미, 비시올도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팔리탐이 그렇게 만들어두었고 힌치 오도 그것을 납득했다. 하지만 그 순간 힌치오는 신기하다는 표정으 로 야키보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너무도 분명하기 때 문이다. 계곡 아래쪽의 제국군은 소화차를 좍 깔아놓았다. 힌치오는 그 쪽으 로 갈 마음이 없었고 그것은 사라티본 부대 전부가 마찬가지일 것이 다. 그리고 하늘누리는 바야흐로 발케네 본대 뒤편에 파괴적인 공대 지 공격을 퍼부으려고 하고 있었다. 당연히 뒤로 돌아가 발케네 본대 를 구해야 한다. 야키보로도 그것을 알 것이다. 따라서 야키보로가 원하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 명령하는 권위였다. 힌치오는 그것을 주었다. "뒤로 돌아간다! 애들 데리고 나를 따라와!" 일단 명령을 시작하자 힌치오는 말하는 것이 점점 쉬워지는 것을 느 꼈다. 발케네 본대 오른쪽을 향해 달리며 그는 머릿속에 빠르게 떠오 르는 생각을 그대로 토해내었다. "파-미-! 크-락-스-! 너-희-애-들-을-데-리-고-왼-쪽-으-로-돌-아- 본-대-뒤-편-으-로-가-라-!" 힌치오는 계곡 아래쪽에 있는 제국군 본대도 잊지 않았다. "비-시-올-은-여-기-남-아-! 계-곡-아-래-쪽-의-제-국-군-이-밀-고- 올-라-오-면-뭐-든-집-어-던-져-서-전-진-속-도-를-늦-춰-!" 비시올은 질겁했다. 계곡 아래쪽의 제국군이 올라온다는 것은 곧 소 화차가 올라온다는 뜻이었다. 힌치오는 그를 안심시켰다. "명-심-해-! 우-리-가-높-은-쪽-에-있-다-! 소-화-차-를-부-수-면- 그-건-제-국-군-쪽-으-로-흘-러-간-다-!" 비시올은 부리를 조금 벌렸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부하 들에게 바위를 주워모으라고 명령하는 것을 들으며 힌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발케네 본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전면에 배치되어 있던 소화차의 절반이 방어를 위해 황급히 본대 뒤편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그들이 본대를 헤치자 쟁기가 땅을 헤치듯에 본대 전체에 엄청난 혼 란이 일어났다. 발케네 병사들에게 주위를 살필 여유가 있었다면 좋 았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머리를 짓누를 것 같은 하늘누리의 모습을 올려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계곡 양쪽의 산과 위쪽의 하늘누리 때 문에 계곡 안쪽은 폭우가 쏟아질 때만큼이나 어두웠다. 누가 횃불을 켜든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 어둠과 혼란 속에 사라티본 부대까지 들어간다면 발케네 군은 자멸할지도 모른다. 본대에 이르러 그 모습을 본 힌치오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지체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힌치오는 할 수 있는 유일한 친절 을 베풀었다. "비켜! 비켜라!" 그리고 힌치오는 이쑤시개를 좌우로 휘두르며 발케네군 안쪽으로 뛰 어들었다. 그 때 발케네군 뒤쪽에 도달한 하늘누리가 레콘 병사들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탑승할 때와 같은 모습이 반대로 진행되었다. 환상계단을 상상할 수 있는 레콘들이 먼저 허공에 자리를 잡았고 그 후에 계단을 상상할 수 없는 병사들이 뛰어내렸다. 하지만 하늘누리에 오를 때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다. 게다가 아래에 충분한 숫자의 레콘들이 내려선 후에 는 그냥 바닥으로 곧장 뛰어내리기는 과감한 레콘들도 했다. 아래에 서있던 레콘들이 위로 뛰어올라 그렇게 떨어지는 전우들을 받아주었 다. 그렇게 레콘들이 내려선 곳은 발케네 본대 뒤편이었다. 선봉과는 거리가 먼 그 위치에 배치된 것에 안도하던 발케네 병사들은 하늘에 서 내려온 이 가공할 운명에 경악했다. 뒷걸음질치는 그들에게 제국 군 레콘들이 달려들었다. 사라티본 평야에서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일이 발케네 군 배후에서 일어났다. 차이점은 두 가지였다. 발케네 군에는 아홉 부위가 없었다 는 것, 그리고 제국군은 훨씬 조직적인 살해를 했다는 것이다. 제국군은 무작정 인간들 틈에 뛰어들어 흥분하여 펄쩍펄쩍 뛰던 사 라티본 부대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별로 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정연하게 열을 맞춰 서서 발케네 군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뛰어오르는 것은 발케네 병사를 붙잡았을 때 뿐이었다. 그들 은 발케네 병사를 붙잡아 위로 뛰어올라서는 그것을 집어던졌다. 그 렇게 병사들이 쓰러지면 제국군 레콘들은 그들을 짓밟으며 걸어갔다. 화려함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살상 속도는 훨씬 높았다. 그리고 거병 을 휘두르느라 아까운 힘을 낭비하지도 않으니 효율적이었다. 투석전 이라는 말 대신 투인전이라는 말이 만들어져야 할 것 같았다. 다가오 는 우악스러운 손과 주위를 휙휙 날아다니는 병사들의 모습, 그리고 앞뒤에서 일어나는 혼란에 발케네 병사들은 미쳐버리고 말았다. 병사가 날아온다. 골통이 부딪힌다. 깨진 두개골이 흩어진다. 받아 주려는 시도는 포기한지 오래고 이제는 옆으로 피하기 바쁘다. 그러 다가 서로 엉킨다. 넘어지면 안되지만, 기어코 넘어진다. 일어서려는 몸부림은 주위의 더 많은 병사들을 쓰러뜨린다. 넘어진 그들의 몸을 짓밟는 레콘의 피에 젖은 발. 물에 넣으면 가라앉는 레콘의 몸은 그 크기 이상으로 무겁다. 하지만 제국군 레콘들은 확실한 것을 선호했 다. 그들의 다리는 평소보다 훨씬 높이 올라갔다가 거세게 떨어진다. 우지끈 우지끈 뼈가 부러진다. 복부가 터져 내장이 흘러나온다. 심장 이나 간이 짓밟혀 터질 땐 어마어마한 피가 주위로 팍 튄다. 속이 뒤 집히는 피냄새. 짓밟혀 터진 병사들을 그 뒤의 레콘이 짓밟고, 다시 그 뒤의 레콘이 짓밟는다. 시체는 잘 다져진다. 그들의 부모는 그렇 게 죽을 자식을 키울 생각이 없었겠지만, 어차피 자식들은 부모의 바 람대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결손 가정이 경이적인 속도로 생산된다. 사람이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 너의 아들이 죽었 다. 다시는 웃지 마라. 너의 아버지가 죽었다.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다. 너의 어머니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는 그녀가 웃는 모습 을 볼 수 없다. 왜 죽었냐고? 네가 누워서 빈둥거리며 씹을 것과 네 가 친구들에게 보여주려고 입을 것을 공급하기 위해 싸우다가 레콘에 게 밟혀죽었다. 사람이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 울어 라. 숨이 막혀 기절할 정도로 울어라. 이럴 때는 우는 법이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하나. 산 사람이라도 잘 살아야지. 잊어버리자. 언젠 가는 다 죽는 법이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생각하자. 머리 속으로 만지작거릴 추억이 있잖아. 남는 것은 추억뿐이지. 다른 것 있나. 다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거야. 그것뿐이지.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 비시올은 자신의 부하들을 이열 횡대로 배치 했다. 충분한 간격을 두었지만 제국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는 간격 이었다. 그리고 모아들인 바위들은 후열 뒤편에 배치했다. 전열이 바 위를 던지고 후열이 바위를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급조한 것이지만 그 정도면 소화차의 진격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비시 올은 자신을 치하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시올의 판단은 성급한 것이었다. 그 엉성한 진형은 그의 예상처럼 소화차를 막는 것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애기살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제국군 뒤편에서 거무스름한 기운이 확 퍼져올랐을 때 비시올은 바위를 던지는 대신 무릎을 꿇고 그걸로 얼 굴을 가리라고 외쳐야 했다. 레콘들은 그의 명령을 따라 바위들을 들 어올렸다. 그러자마자 바위에 애기살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는 제국군에게 보이는 것은 불꽃 뿐이었다. 애기살의 화살 촉이 바위에 부딪혀 번쩍거리는 불꽃들이 파바박 피어났다. 제국군에 서 헨로 중대의 이름이 크게 터져나왔다. 신나게 애기살을 날려보내는 헨로 중대 안에서 니어엘 헨로 수교위 는 쾌활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부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독 려했고 그 독려 중간중간에는 커다란 웃음을 집어넣었다. "까는 릿폴! 뭐 하냐? 덧살에 불이 나도록 쏴라!" "중대장님, 제발 시집 좀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젠장, 무슨 군대가 이 모양이야? 네 상관도 아직 시집 못 갔다고!" "결혼도 계급순입니까?" "아니, 미모순이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지. 음? 이봐, 미친 개 카루 스. 뭐가 불만이지?" "월월월." "윽. 그건 뭐야?" "개는 사람 말 못한다는 뜻입니다. 수교위님." "귀엽기도 해라. 턱 긁어줄까?" "……가까이 오시면 벼룩 옮겨버릴 겁니다." "하하하! 자, 열심히 쏴라! 이제 곧 소화차가 움직일 거다!" 니어엘의 말처럼 소화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화차들은 계곡 위 편을 향해 느리게 굴러갔다. 비시올은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지만 애 기살의 강습 속에서는 몸을 일으키기도 어려웠다. 벌써 몸 여기저기 에 애기살이 박혀 쓰라렸다. 비시올은 넌더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라 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아놓은 바위를 내버려둔 채 계곡 위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 다음에는 제국군 본대가 움직였 다. 니어엘은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뒤를 힐끔 돌아본 힌치오는 비시올이 물러나는 모습을 목격했다. 소 화차들을 앞세운 채 제국군이 올라오고 있었고 비시올에겐 던질 물건 이 없었다. 물론 힌치오는 비시올이 부하들과 함께 소화차로 돌격하 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퇴로를 뚫는 수밖에 없었다. 힌치오는 노성을 지르며 발케네 병사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착지했을 때 힌치오는 도열한 레콘 여단 앞에 떨어졌다. 하지만 힌 치오는 레콘들을 보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굉장한 바닥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체가 가득한 전장과는 달랐다. 짓밟혀 으깨 진 시체들이 촘촘히 깔려있는 바닥이었다. "이런 바닥에서는 처음 싸워보는군." 힌치오는 벼슬을 빳빳하게 세우고는 레콘들에게 달려들었다. 제국군 레콘들은 힌치오의 바람과 달리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힌치오와 가까운 곳에 있는 레콘들은 자신의 무기를 집어들고 힌치오와 맞섰지 만 다른 지점에서는 인간 병사에 대한 학살이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힌치오는 시체의 무도장 위에서 제국군 레콘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싸움의 흐름에서 순간을 힘겹게 짜낸 힌 치오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소화차가 옆으로 기울고 있 었다. 어떤 제국군 레콘이 집어던진 병사가 일으킨 파문이 소화차를 전복시키고 있었다. 급경사를 오르던 그 소화차는 옆으로 기울다가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계곡 아래쪽을 향해 두어 바퀴 데굴데굴 굴렀 다. 깔린 병사들이 애처로운 신음을 흘렸다. 그런 전복 사고는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발케네 본대를 가로질러 오던 소화차들 중 많은 수 가 공포에 질린 병사들에게 붙잡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거나 거꾸로 뒤집혔다. 소화차가 와서 힌치오를 도와주기는 어려울 것 같았고, 힌 치오는 거기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소화차가 다가와 물 을 뿌리는 것은 그에게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화차가 엉 뚱한 곳에서 구르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를 따라오던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이 소화차가 전복된 장소에서 급정지를 했다. 그 난감 한 상황에서 그들이 선택한 타개책은 소화차 전복 사고 지점을 피해 힌치오에게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힌치오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혼 자 싸워야 함을 깨달았다. 힌치오는 이쑤시개가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힌치오를 상대하고 있는 레콘들 중 일부도 꽤 큰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그 중 곤혹스러운 것은 긴 철극이었다. 그 길이만 해도 골칫거리였지만 극에 달린 부속날들은 금방이라도 이쑤시개를 잡아챌 것 같았다. 다행히 이쑤시개보다 더 무겁기 때문에 철극의 공격은 간 헐적이었지만 힌치오가 쉴틈은 없었다. 철극이 물러난 시간에는 다른 제국병들이 그를 몰아붙였다. 결국 힌치오는 어깨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한 번 상처를 입어 몸이 주춤하자 상처는 빠르게 늘어났다. 힌치오는 자신이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싸우다가 죽는 것이니 나쁘지는 않 다. 힌치오는 피식 웃으며 빈틈을 보였고, 그 빈틈에 매혹된 제국병 의 머리를 쪼개어놓았다. 제국병들은 좀 더 경의를 가지고 힌치오를 대하기로 했다. 시간을 조금 번 힌치오는 싸움의 시간을 연장하기 위 해 잠시 물러나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신 없는 싸움의 끝에 갑자기 찾아온 고요가 힌치오와 그의 상대들을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에 빠져 들게 했다. 맥이 풀리는 느낌과도 비슷했다. 철극을 들고 힌치오를 괴롭히던 레콘이 말했다. "다시 싸울까?" "음. 숨 좀 더 고르고." "곡차나 한 잔 마시고 싸우면 더 좋겠다. 쩝." "아아, 곡차. 괜찮네. 내가 죽으면 내 몫까지 좀 마셔줘." "이름이 뭐야?" "힌치오." "알았어. 힌치오에게 한 잔. 기억했다." "고마워." 힌치오는 핏 웃으며 이쑤시개를 들어올렸다. 그 때 힌치오의 눈에 엉뚱한 것이 들어왔다. 철극을 들고 있던 레콘은 힌치오가 왜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힌치오가 말했다. "나늬?" 철극을 든 레콘은 부리를 쩍 벌렸다. "내가 나늬라고?" "무슨 그런 술맛 떨어지는 농담을." 철극을 든 레콘은 그제서야 힌치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이 아닌 다 른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다른 레콘들은 힌치오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곧 벼슬을 경련시켰다. 그들의 뒤편 하늘에 어떤 소녀가 떠있었다. 소녀는 불타오르는 눈과 검은 안대로 바닥에 깔려있는 시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레지 파림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나무 위를 노려보았다. "백작님. 놀라서 죽을 뻔했어요." 엘시는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혼도 사그라드는 시각이었 고 주위는 어두웠다. 팔 하나로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목을 매 단 시체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세레지는 그런 엘시를 보자마자 주저앉았다. 그리고 엘시가 자신의 몸을 팔 하나로 끌어올리는 것을 보고는 겨우 사태를 이해했다. 도저히 더 끌어올릴 수 없다고 판단한 다음 엘시는 손을 놓았다. 그 는 나무 아래로 살짝 떨어졌다. 두 팔을 주무르며 엘시가 말했다. "몸을 회복해야 하는데, 레콘들의 등 위에선 그러기 어렵군." "너무 애쓰지 마세요. 대장군께서 칼 들고 앞에서 싸우실 것도 아니 잖아요. 대장군은 명령만 잘 내리면 되는 것 아닌가요?" "병자의 명령에는 장악력이 없다. 세레지. 너도 아픈 사람이 내리는 명령을 귀담아 듣기는 어렵겠지." "아아. 그런 문제가 있었네요." 엘시의 말에 동의했지만 세레지는 여전히 팔 하나로 턱걸이를 할 필 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무 아래에 똑바로 서서 옷차림을 가다 듬는 엘시의 모습은 충분히 건강해 보였다. 우물에서 나왔을 때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우물 속에서 지낸 시간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엘 시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은 주지 않았다. 엘시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자. 가면서 갔던 일에 대해 말해줘." 세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멘을 포함한 다섯 명의 레콘들은 정보 수집에 적합하지 않았고 엘시는 자신을 노출할 수 없었다. 제국 남북 극의 두 공작이 손을 잡았고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은 제국 전 체다. 어디서 엘시를 노리는 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부의 상황을 알아야 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근처의 야산에 몸을 숨기 고 있는 동안 세레지가 렐스리로 갔다. 렐스리에서 반나절 정도 보내 고 돌아온 세레지는 자신의 모험에 대해 말했다. "이곳 사람들에 비하면 제 얼굴이나 손발은 많이 탔잖아요. 그래서 좀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한계선 남쪽에서 왔다고 말했어요. 그러면 이런 저런 일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테고요." 엘시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이레는 네가 틀림없이 북부로 떠난 남편을 찾아 달려온 아내로 위 장했을 거라고 말하더군." "아니오. 아버지와 싸우고는 제국군이 되겠다면서 집을 뛰쳐나간 남 동생을 찾으러 온 누나였어요. 죽어가는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이 오 기 전에 아들과 화해하고 싶어하거든요. 그리고 현명한 누나인 저는 남동생이 필요로 하는 것이, 그 나이의 남자애가 흔히 그렇듯 명분이 라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 누나가 부탁해서 돌아간다는 명분이면 제 남동생은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어요." "……대단하군.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어?" "예. 제가 말한 이름의 제국병을 봤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어요. 남동 생 하나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국병의 추가 소환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추가 소환? 어떤 부대지?" "고추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단이에요." 엘시는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그는 주먹을 꼭 움켜쥔 채 세 레지를 돌아보았다. "확실해?" "확실해요. 나무 이름이 아니라 풀 이름을 쓰니까 레콘 부대죠?" "그래. 레콘 부대다." "백작님. 왜 제국군은 나무나 풀 이름 같은 것을 쓰죠? 대호 부대나 왕독수리 부대, 아니면 천둥벼락 부대 같은 무서운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텐데." 엘시는 상념에 잠겨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건 천일전쟁을 거치며 생긴 전통이다. 나가들이 나무 이름을 쓰 기 때문에 똑같이 나무 이름을 붙이면 나가들이 혼란스러워 할 거라 고 생각했지. 물론 나가들은 자신들이 노획한 서류에 나타난 나무 이 름의 부대명에 몇 번 당황하긴 했다. 하지만 몇 번뿐이었지. 그런데 전통은 이미 만들어진 거지. 레콘 여단이 편성되었을 때는 이해를 편 하게 하기 위해 풀 이름을 쓰기로 했고." "그래요? 저는 뭐 엄청난 비밀이 있는 줄 알았어요." "그래." "저, 안 좋은 소식인가요, 백작님? 저는 발케네공이 레콘을 준비했 으니까 제국군도 레콘을 모으나 보다고 생각했는데요. 레콘 말고 다 른 걸로는 레콘을 상대할 수 없잖아요." 세레지는 고개를 약간 가로젓고는 말했다. "아, 백작님은 빼고요. 백작님은 레콘 없이도 레콘을 이기셨지요. 하지만 백작님이 없으니까 제국군은 레콘들을 데려와야 할 텐데요." "그렇겠지." "백작님. 저는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백작님도 제게 설 명하시다 보면 생각을 더 잘 정리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 렇던데요." 엘시는 세레지를 잠깐 돌아보았다. "네 말처럼 레콘을 상대하려면 레콘이 필요하지. 그렇다면 그건 상 대를 물리치겠다는 거다." "전쟁은 상대를 물리치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요?" "전쟁은 절대우위가 아니라 상대우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엄청난 강력함은 필요 없어. 낭비지. 상대방보다 조금 더 강하면 된다. 그래 도 이기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호랑이를 키운다면 근사하긴 하겠지 만, 쥐를 잡기 위해서라면 그건 낭비야. 고양이를 키우면 충분하다." "여자들은 잘 아는 이야기네요." "그런가?" 세레지는 빙긋 웃었다. "호랑이를 키우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마 남자일 거예요." 조금 생각해본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어쨌든 상대 우위만 구축할 수 있다면 상대방이 온 전하게 남아있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레콘 2개 여단의 추가 소환이라 는 것은 상대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뜻이군." 세레지는 엘시의 말투가 스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시의 말에 대해 생각해본 세레지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제국군이 발케네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말씀이세요?" 엘시는 침울하게 질문했다. "귀족들이 불평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나?" "불평이오?" "그러니까 폐하께서 제국 안위를 위해 쓰여야 할 강대한 병력을 제 국 내부에 쓰고 있다는 식의 불평을 말하는 거다. 더 조야하게 말하 자면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저는 귀족들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듣지 못했다고? 아무 이야기도? 퍼스 후작이나 규리하 변경백의 이 야기 같은 것도 없었나?" "예.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어요." 엘시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선가 분명히 목소 리가 있어야 한다. 이 전쟁을 중재하기 위해 나선다거나 황제가 발케 네를 용서하기를 바란다거나, 하다 못해 황제의 뜻을 지지한다는 이 야기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침묵은 있을 수 없다. 기묘한 일이다. 엘시는 데라시에 대해 생각했다. 비스그라쥬백이 고명한 솜씨로 귀 족들을 모두 침묵시킨 것일까? 데라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일 지도 모르지만 엘시는 그럴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 콘 여단 2개의 추가 소환이 일어난 시점까지 귀족들을 침묵시킬 방법 은 데라시에게도 없을 것이다. 엘시의 예측대로 레콘 여단 두 개가 더 동원되었다는 것은 전쟁의 목표가 발케네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발케네에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어차피 그 레콘 일만 명의 숙원이 발케네공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숙원사업이나 신부탐색에 필요한 돈벌이다. 필요한 것은 제국 금고다. 더 많은 돈을 제공한다 면 그 레콘들은 발케네공에게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하고는 돌아설 것 이다. 그렇다 해도 제국군처럼 탈영의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그런 데 왜 엉뚱하게도 레콘 여단 두 개의 추가 소환이냐. 데라시.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거지?' 엘시는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라시일 리가 없 다. 태위도 없고 대장군도 없는 상황에서 왜솜다리 여단과 고추냉이 여단이 움직였다면 그들을 움직이게 한 명령은 첫 번째 벽난로방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전쟁은 황제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 고 엘시는 황제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혹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힌치오는 아실이 환상계단을 밟고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왜솜다리 여단과 고추냉이 여단에는 환상계단을 이용할 수 있는 병사 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위치는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힌 치오는 위험하다고 외치려 했다. 그러나 힌치오는 선뜻 부리를 열지 못했다. 아실은 노여움에 가득찬 얼굴로 시체로 포장되다시피 한 땅 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위쪽에는 조금 전 레콘 제국병들을 내려놓은 하늘누리가 떠있었다. 아실은 하늘누리를 뚫어 지게 노려보았다. 그 시각, 하늘누리의 유수부 통제국에서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규모는 작았고 그 파장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한 통제국 원을 몹시 당혹하게 했다. 통제국장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 받은 부탁에 따라 하늘누리를 뒤로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은 하늘누리를 우회전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누리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얼마 후 통제국장과 통제국원들은 당황했다. 유수부차사 파라말 아이솔은 고개를 갸웃거 리며 말했다. "통제국장. 우회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아무래도 왼쪽으로 돌고 있는 것 같은데." 통제국장은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하늘치의 회전을 맡고 있는 통제 국원을 노려보았다. 통제국원은 얼굴이 창백하게 바뀐 채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하늘과 하늘치를 헷갈린 것 같습니다." 유수부차사 파라말 아이솔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통제국장 은 이해했다. 그는 파라말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것은 하늘누리를 움직일 때 가끔 발생하는 실수입니 다. 하늘누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착각 하는 일입니다. 정말 가끔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아. 그러면 눈에 보이는 하늘이 오른쪽으로 가도록 했다는 건가? 그래서 하늘누리는 왼쪽으로 움직였고?" "예.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실수군. 지금 다시 되돌려봐야 시간 낭비고 어차피 뒤로 도는 것이 목적이니까 어느 쪽으로 돌아도 상관 없겠지?" "지금은 상관없습니다만 하늘누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 은 용서할 수 없는 실수입니다." 파라말은 어깨를 으쓱한 다음 통제국의 관습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 경우 통제국이 일반적으로 시행하는 처벌이 있겠지. 판단에 따 라 처벌하게. 통제국장." 회전 담당 통제국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파라말은 그 처 벌이 꽤 무서운 것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 다. 통제국원은 자신이 받을 처벌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거 리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드물게 그런 실수를 하는 경 우를 목격했기에 그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알 수 있었 다. 바꿔 말한다면 그는 한 번도 하늘누리의 통제를 실수하지 않았 다. 통제국에 들어온 이후로 하늘누리를 움직이는 것에 있어서 한 번 도 실수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자부심이었고, 따라서 작금의 사태 는 그에게 꽤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하늘누리가 뒤로 돌았다. 하늘누리는 천천히 계곡 아래로 움직였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파르바리 계곡 전투를 섬멸전으로 가져갈 생 각은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부활을 꿈꾸는 잔당들의 끝없는 보복과 재정복의 악순환을 피할 수 있는 섬멸전이 합리적인 수단이다. 하지 만 이 경우에는 좀 다른 정치적 고려가 필요하다. 발케네공이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는다면 그의 봉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 렇다면 발케네 전체가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엄격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는 규리하와 억압으로 묶여 있는 발케네를 처리하는 방법은 달라야 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발케네공이 발케네의 지배자인 채로 제국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늘누리가 자신의 머리 위로 온 것을 확인한 레콘들은 몰살을 기다 리고 있는 발케네군을 내버려둔 채 뒤로 물러났다. 철극을 든 레콘 또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어이, 힌치오. 돌아가야겠어." "그래? 왜?" "원래 명령이 그거야. 너희들 적당히 때려죽이고 물러나는 거. 하늘 누리가 왔지? 난 올라갈 거야." "알았어. 아, 곡차는 잊어도 돼. 난 안 죽었으니까." "알았어." 힌치오는 뒤로 물러났다. 제국군 레콘들은 계곡 아래쪽에서 그러했 던 것처럼 레콘 계단을 만들었다. 발케네군 본대를 때려눕히고 있던 제국군 레콘들은 얼마 후 모두 하늘누리에 탑승했다. 그러자 하늘누 리는 계곡 아래쪽, 제국군 본대가 있는 곳으로 유유히 날아갔다. 힌치오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아실을 떠올렸다. 힌치오는 자신의 머리를 찰싹 두드렸다. 하늘누리가 움직였으니 환상계단에 서있던 아 실은 상상했던 것을 잃고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힌치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실이 떠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불길하게도 아실은 그곳에 없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본 힌치오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똑바 로 서있는 아실을 발견했다. 힌치오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달려갔다. 힌치오를 바라보던 아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개를 갸웃하던 힌치오는 곧 그녀가 왜 그러는 지 깨달았다. 바닥을 살핀 힌치오는 시체가 없는 곳을 밟으며 아실에 게 다가갔다. 아실은 몸을 부르르 떨고는 힌치오의 발쪽에서 눈을 뗐 다. "아실. 괜찮아? 어쩌려고 싸움터에 온 거야?" 아실은 힌치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온갖 표정을 뒤섞어 놓은 것 같았다. 아실이 몸을 돌렸다. 그녀는 계곡 뒤쪽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힌치오는 그녀를 한 번 더 부를 것인지 그렇잖으면 가도록 내버려둘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힌치오는 사라티본 부대 의 현황을 살피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때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힌치오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아실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머 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두 번, 세 번. 몇 번인가 비명을 지르던 아실은 다시 일어섰다. 그리 고 저편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힌치오는 다시 몸을 돌렸다. 사라티본 부대를 수습해야 했다. 하지 만 앞으로 달려가려던 힌치오는 잠깐 멈췄다. 힌치오는 바닥을 살폈 다. 그리고 힌치오는 시체가 없는 곳을 골라 밟으며 걸어갔다. 발케네 군의 지휘관들은 본대 뒤편을 유린하던 레콘 여단병들이 갑 자기 떠난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곡 뒤편의 탈출로를 통해 파르바리 계곡에서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숫자는 원래 있었던 숫자의 2할에도 미치지 못했다. 추격의 유혹은 강렬했지만, 시허릭은 냉정하게 자신을 억눌렀다. 그 는 계곡 뒤편에 있던 발케네군의 진지를 접수하고 가득히 남아있던 전리품을 수거하는 것에 만족했다. 병장기와 군수품은 산을 이룰 지 경이었고 수거한 소화차들은 소화차 중대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사라티본 부대를 대적하기 위한 좋은 병기였고, 고지대인 파 리조까지 운하를 팔 수 없었던 시허릭에게는 대단히 반가운 전리품이 었다. 크나큰 승리를 거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 바치는 찬사가 드높았다. 발케네군이 남겨놓은 진지에 대한 보수 작업을 명령한 시허릭은 유 수부 통제국에 사의를 표하기 위해 하늘누리 위로 올라갔다. 통제국 에서는 유수부차사 파라말 아이솔과 통제국원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박수로 시허릭을 환영했다. 시허릭은 겸손한 표정을 지었고 그들의 조력에 감사했다. 예의 바른 대화가 오간 다음 파라말이 시허 릭에게 말했다. "올라오시면 즉시 내방하시라는 폐하의 황명이 있었습니다." "내방이오?" "그렇습니다. 첫번째 벽난로방으로 가십시오. 수행인 없이 홀로 오 라 하셨습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뜻밖의 일에 놀랐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사라티본 평원과 코네도에서 겪은 일을 몇 배로 되돌려 주긴 했지만 이 또한 한 번의 전투일 뿐이다. 시허릭은 치하를 받는 일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전이 더 어울릴 테니까. 시허 릭은 뭔가 비밀스러운 작전 변화가 있나 보다고 생각하며 수행하던 장교들에게 아래로 내려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허릭은 황제의 집무 실로 갔다. 집무실에는 금군 구레가 언제나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시허릭은 차 고 있던 제국검을 풀어 구레에게 넘겨주었다. 무기를 받아든 구레는 방안쪽을 향해 말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왔습니다." "들여보내." 치천제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자 구레는 문앞에서 비켜섰다. 시 허릭은 그를 지나쳐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방안은 어둡고 열기로 가득했다. 시허릭은 반갑잖은 열기에 불쾌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황제의 모습을 찾았다. 치천제는 방안의 유일한 조명 역할을 하고 있는 벽난로 앞에서 그에게 등을 보 인 채 앉아 있었다. 시허릭은 헛기침을 했다. 황제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가까이 와." 시허릭은 조심스럽게 방을 가로질러 의자 뒤편으로 다가갔다. 경의 를 표시하기 위해 시허릭이 선택한 거리는 2미터였다. 치천제가 말했 다. "짐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큰 승리를 거둔 그대를 치하한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대가 전투를 끝내는 방식에 약간 의문을 느낀다. 왜 섬멸전을 펴 지 않았는지 설명하라." 시허릭은 자신있게 말했다. "발케네의 지배구조는 발케네공 락토 빌파의 장악력에 의해 유지됩 니다. 이곳 사람들의 성정은 사납고 야비합니다. 만약 발케네공의 무 력이 갑자기 약화된다면 그 구조는 무너질 겁니다. 봉신들의 반란이 일어나면 발케네공의 몰락은 더 빨라지겠지만, 향후 전후복구를 책임 져야 할 제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발케네공이 발케네를 장악한 채 항복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 서 그가 최소의 병력을 가지고 파리조로 돌아가도록 배려했습니다." "그래. 이곳은 도둑놈들의 땅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발케네공이 살아있다면 그대에겐 좋지 않을 텐데." "예?" 치천제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시허릭을 향해 몸을 돌렸고 벽 난로를 등진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치천제가 말했다. "이 전쟁의 목적을 아는가?" 시허릭 마지오는 침을 삼켰다. 치천제는 본질적인 이유에 대한 질문 을 하고 있었고 시허릭은 그것에 대해 짐작하는 바는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증거랄 것이 없었다. 그는 상식적인 대답을 하기로 했다. "페하. 군인은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명령을 실행합니다." "이 전쟁은 차기 황제를 위한 전쟁이다." 직설적인 말에 시허릭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지독한 열기도 호 흡을 어렵게 하는 요소였다. 그는 호흡 소리를 약간 높였다. 그것이 실례가 되진 않을 것이다. 나가 황제는 귀가 어두우니까. 치천제가 계속 말했다. "차기 황제에게 대적할 인물인 발케네공을 제거하는 것이 전쟁의 목 적이다. 전쟁이 끝나면 짐은 황위에서 물러날 수 있겠지. 그리고 엘 시 에더리가 황위에 오르기로 되어있었다." 시허릭은 역시 대장군이 차기 황제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후 시허릭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치천제는 '되어있었다'고 말했다. 그 렇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일까? "그런데 엘시는 이곳에 없다.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설명하지 않았다. "짐에겐 만약을 위해 다른 후보자가 필요하다." 시허릭은 그 순간 방안 가득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이 서늘해 지는 것을 느꼈다. 겨울의 바람이 가슴을 관통하여 지나가는 것 같았 다. 시허릭은 눈만 꿈뻑거리며 치천제를 바라보았다. 치천제의 그늘 진 얼굴에서 그는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설령 조명 상태가 좋다 하더라도 황제의 심중을 읽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얼굴이 시허릭에게 황제가 되라고 말하고 있다면? 치천제가 말했다. "섬멸전이 좋다." "섬멸전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코네도에서처럼. 모두 죽여라. 네 말처럼 이곳은 도둑놈들의 땅이다. 이곳을 억압하던 발케네공이 사라진다면 이곳에서 끝없이 반 란이 일어날 것이다. 차기 황제에겐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황위에 오르기 전에 정리해두는 것이 좋겠지." "……대장군께서 그것을 바라실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후보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시허릭은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라니, 말도 안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장제사가 될 것이다. 말발굽을 또각거리며 재미있게 살 생각이다. 그것이 시허릭의 목표다. 살본의 둥그런 언덕과 흙맛이 나는 시냇물이 황위보다 훨씬 낫다. 시허릭은 입을 열었다. "대장군은 훌륭한 분입니다. 그 분이 아닌 다른 후보자라면, 난관은 없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받들어 거행하겠습니다." 황제는 친밀감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림자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시허릭은 황제가 그렇게 그를 바라본다고 생각했다. 시허릭은 절하고 물러났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5-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4-30 조회수 : 2349 피를 마시는 새 15. 파멸을 경배하는 태도 - 4 론솔피는 도끼창을 길게 잡았다. 마치 지휘봉을 잡듯 한 손으로 창 끝을 가볍게 쥐어올리는 론솔피를 보며 세레지는 도대체 레콘의 힘이 어느 정도일까 생각했다. 세레지라면 두 손으로도 그런 식으로 쥘 수 는 없을 것이다. 론솔피는 그렇게 쥔 창으로 망치질 하듯 성벽을 때 렸다. 성벽이 쿵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균열이나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론솔피는 끄떡없이 서있는 성벽을 바라보다가 도끼창을 손가락 사이 로 미끄러지게 했다. 도끼창으로 바닥을 짚은 론솔피는 건축가 준람 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튼튼한 성을 어떻게 떡 자르듯 잘라 넘어뜨렸다는 거야?" 론솔피가 때린 위치를 주의깊게 바라보던 주테카도 의아하다는 얼굴 로 준람을 돌아보았다. 준람은 수염볏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확하게 알아보려면 장시간 조사해봐야겠지만 가설은 있어." "말해봐." "이 성, 아마 증축했을 거야." "증축?" "그래. 간단히 말해서 원래 있던 성 허물고 새로 덧붙인 부분이 있 다는 거야. 이 성의 주민들은 당연히 원래의 성벽과 새로 만든 부분 이 이어지는 곳을 알고 있었겠지. 그 부분을 잘 이용한 것이겠지. 바 위를 깰 때도 결을 잘 이용하면 쉽게 깨지지. 원리는 그런 식일 거 야. 물론 레콘의 힘이 있었으니 가능했겠지만." "아아, 그렇게 한 거야?" 론솔피는 고개를 끄덕였고 세레지도 그러했다. 세레지는 뒷짐을 진 채 엘시를 쳐다보았다. 엘시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너진 코네도성을 보고 있진 않았다. 그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코네도성 점령군을 지휘하고 있는 수교위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엘시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 다.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엘시를 보자 세레지는 즉시 머리속으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코네도에 살고 있던 그도 죽었단 말이냐? 그는 고 아라짓 왕국의 비보가 숨겨진 위치를 암시하는 노래의 유일한 전승자인데!' '그것이 무슨 비보입니까, 대장군님?' '이제는 잊혀진 고대의 기술로 제작된 레콘용 틀니다.' 자신의 생각에 소리 없이 낄낄거리던 세레지는 그들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들 가까이에 있는 나무 쪽으로 움직였다. 세레지 가 나무에 등을 기대자 엘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 없다." "황명이었습니다. 대장군님." "황명이라고? 확실한가?"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대장군님." 황명이라는 말에 세레지는 약간 겁을 먹었다. 그녀의 생활에서는 그 리 필요하지 않은 어휘였고 따라서 말을 하려면 약간 긴장해야 하는 어휘였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엘시는 세레지의 눈에 정말 대 장군처럼 보였다. 이 비현실적인 여행 동안 그것은 세레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변화였다. 역겨운 땅굴에서 꺼낸 다 죽어가던 남자가 제국 내에 비교할 자 없는 강력한 권력자로 변해가는 모습은 그녀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속도 이상이었다. 세레지는 엘시를 그의 세계에 남겨두고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방어심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선 그의 세계는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 다. 나무 아래를 벗어나던 세레지는 이레를 발견했다. 이레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세레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다 가갔다. 이레가 말했다. "무슨 염탐이냐? 아무 생각 없나 보지만 너 큰 죄 지을 수도 있다." "겁주지마. 이레. 나도 슬슬 겁이 나니까." "음? 왜?" 세레지는 기지개를 켜듯 몸을 죽 펴고 말했다. "소풍이 아닌 것 같아." 세레지는 이레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녀는 아버지를 불렀고 곧 저편 에서 위체 파림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테카와 론솔피, 그리고 준람은 성을 무너뜨린 발케네 군의 재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레지는 아버지와 함께 성벽에 대한 농담 을 나누고 있었고 엘시는 심각한 얼굴로 수교위와 이야기하고 있었 다. 쵸지는 땅에 누워 자고 있었고 지멘은 식사 중이었다. 이레는 자 신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먹거나 자면서 이곳에서 일어난 일 을 잠시 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아홉 살부터 쉰아홉 살까지의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이레는 그 학살에서 어떤 당위성도 찾아낼 수 없었다. 코네도의 주 민들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그들이 저지른 유일한 일은 9년 전 부터 59년 전 사이의 어느 기간에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 혹은 이 땅으로 왔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엘시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코네도 점령군은 어떤 해명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비 록 대장군의 느닷없는 출현에 놀라긴 했겠지만 그래도 이것이 아무런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풍이 아니군.' 이레는 자신들이 떠났던 북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돌아온 북부에서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 다. 비늘 빠지는 대학살이 크게 언급할 가치가 없는 중간 단계라면 최종 단계는 과연 무엇일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일으킨 애정의 도 피에서 시작된 이 전쟁의 끝은 무엇일까. 엘시가 돌아왔다. 이레는 저쪽에서 멀어져가는 수교위를 보았다. 이 레에게 가까이 다가온 엘시는 생각에 잠겨 땅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말 했다. "길게 붙잡아두고 있을 수 없더군. 점령군이 하는 일은 시체를 파묻 는 일뿐이야. 고아들과 노인들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겨울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군.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 켜야겠다." "이주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일을 할 수 있는 인구가 완전히 소멸된 이상 이주가 최선책 이다." 이레는 그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피난길을 떠 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불가능 할 것이다. 여름에는 먹을 것을 그럭저럭 구할 수 있겠지만 겨울이 오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 겨울을 날 수는 없고, 그 때가 되어 황급히 피난을 가려 해도 발케네의 추위 속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금 즉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이 레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주인님은 발케네 정벌군 사령관이 아니신데요." 이레의 지적대로 엘시에겐 피정복민들의 거취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 다. 그런 권한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 있다. 하지만 엘시는 그 런 사실 때문에 곤란해할 생각은 없었다. "이레. 네가 그들을 인솔해라. 이곳의 노인들과 어린이들에겐 좀 고 되겠지만 나나본이 좋겠다. 가까운 곳에는 전쟁의 여파가 미칠 수 있 고 또 군량 징발이 있었을 테니 무수한 노인과 어린이들을 부양할 능 력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나본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서 나나본 태수 무스키 드레에게 도움을 청해라. 위체 파림과 세레지 파림도 너 와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 이레는 울고 싶은 기분과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을 동시에 느꼈 다. 그의 주인과 무원칙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주인님.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것입니다만 그것이 반역 행위라는 것 은 아시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레는 경악으로 입을 쩍 벌렸다. 그런 시원시원한 태도가 어울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의 주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엘시가 고통스러 워 하며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이레도 그를 위로하며 사람 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열성적으로 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주인의 모습은 오직 충격 적일 뿐이었다. 이레는 이것이 우물 후유증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엘시는 좋은 주인답게 몸종의 당혹을 해소해주었다. "이레. 네 주인은 바르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떠날 수 있 는 사람은 오래 전에 다른 도시에 사는 친지들을 찾아 떠났고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은 만 명이 채 안되는 것 같다. 나는 그들 중 떠나겠다 는 사람들을 내 만병으로 삼아 나나본으로 보낼 생각이다." 이레는 자기 머리를 때리고 싶었다. 그런 동작이 경각심과 지혜의 증진을 가져온다는 논리적 증거는 없지만, 자책하는 데는 도움이 되 니까. 코네도 점령군은 코네도의 생존자들을 자신의 만병으로 삼아 데리고 가겠다는 엘시의 선언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이 엘시의 권리이며 완벽하게 정당한 행위라는 것을 이해하자 그들은 대장군의 명령을 충 실하게 실행했다. 도망칠 힘도 없어서 코네도에 남아있던 노인과 아 이들을 집결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코네도 점령군이 사람들을 광장에 집결시키자 주테카가 계명성으로 외쳐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 가 주어졌음을 알려주었다. 여름이 다 지나고 가을이 온다 해도 들판 에는 걷을 것도, 걷을 사람도 없다. 겨울이 오면 죽을 가능성이 높 다. 하지만 지금 출발하면 한 달 쯤 뒤에는 나나본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엘시가 그렇게 말했기에 한 달이라고 말했지만 주테카는 한 달이나 걸린다는 자신의 말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에겐 느긋하게 걸 어도 사흘이면 충분하고 달리면 하루 만에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 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네도의 노인들은 그 거리를 뼈저리게 절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도. 노인들이 엘시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이레가 떠올린 첫 번째 생각은 노인들이 그 엄청난 거리에 겁을 집어먹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본 이레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주테카가 말한 것처럼 이곳 에 있어봐야 기다리는 것은 확실한 죽음뿐이다. 이곳에서 죽으나 걷 다가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걸어보겠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에겐 어린 손자 손녀들이 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엘시 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을 법했다. 하지만 나나본으로 가겠 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주테카는 화가 났다. "무슨 생각이야! 여기 있어봐야 죽는다고! 어린 것들 눈 좀 보고 생 각해봐. 너희들은 살 날 얼마 안 남았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애들 은? 그 애들도 다 죽일 거야?" 주테카에게 되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코네도의 생존자들은 행동으 로 대답했다. 몰려 서 있던 군중의 뒷부분에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 했다. 노인들은 지팡이나 그들을 이곳까지 부축해온 어린 손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광장 여기저기로 느릿느릿 떠났다. 세레지는 노인들을 부축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노인들의 겨드랑 이 아래에 묻힐 것 같은 조그마한 꼬마들이 얼굴이 빨갛게 된 채 할 아버지와 할머니를 부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노인들의 느린 걸음걸 이에 자신의 잽싼 걸음걸이를 맞추지 못하는 아이들은 자꾸 비틀거렸 고 노인을 부축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쳐 그들의 몸은 옆으로 비스 듬히 기울어 있을 지경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눈은 퀭하고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옷차림도 시원찮았다. 흙먼지와 음식 국 물로 얼룩진 그들의 옷은 제국을 종단한 세레지의 옷차림보다 더 지 저분했다. 머리를 얼마나 긁었는지 땀으로 엉긴 머리카락에는 피딱지 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세레지는 그 아이들 중 많은 수가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가슴 속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세레지는 아버지의 팔을 꽉 움켜쥐며 속삭였다. "아, 아빠?" "모르겠군. 저 영감들 의욕이라는 걸 완전히 상실한 것 같군." "아빠. 무서워. 저 애들 모두가 내년 봄까지 살아있진 않겠지?" 위체 파림은 세레지의 손에서 팔을 빼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주테카는 떠나는 노인들에게 영아살해자니 존속 살해자니 하는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 외침은 노인들의 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주테카가 기가 막혀 잠시 부리를 닫았을 때 어떤 노 인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쳇. 병 주고 약 주나." "뭐라고!" 격분하여 달려가려는 주테카의 어깨를 준람이 붙잡았다. "놔둬. 저 사람들에겐 우리도 똑같은 제국군으로 보이겠지. 너도 나 도 예비역이니 틀리지는 않군." 주테카는 소화불량과 편두통의 합병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레는 엘시를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그는 주인이 좌절감에 빠져있 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장군은 엄격하게 통제된 얼굴로 떠나는 노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얼굴에 떠다니는 희미한 감 정은 의문이었다. 코네도의 생존자들이 모두 광장을 떠났다. 북부의 미지근한 여름이 남아있는 자들의 머리 위에 늘어졌다. 코네도 점령군은 황송한 표정 으로 대장군을 바라보았고 엘시는 그들에게 바쁠 테니 돌아가서 일을 보라고 말했다. 그들마저 떠나자 남은 것은 시모그라쥬를 떠났던 자 들뿐이었다. 엘시는 그 중에 지멘이 포함되어 있음을 조금 늦게 깨달 았다. 엘시는 황제사냥꾼을 돌아보았다. 황제사냥꾼은 검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 다. 엘시의 시선을 느낀 지멘은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엘시. 내가 황제를 죽인 다음에 황위에 오르거든, 사람들이 살고 싶은 생각까지 포기하게 되는 황제는 되지 마라." 엘시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당신은 폐하를 시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황제가 바라는 거다. 대호왕이 그렇게 말했지. 황제는 폭군 으로 죽을 준비를 끝낸 것 같군." 얼굴 옆으로 늘어진 벼슬을 만지작거리던 쵸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 렸다. "그렇군. 이 상황에서 엘시가 황제가 된다면 발케네인들도 환호를 보내겠군. 황제에게 불손하기로 유명했던 발케네인도 말이야." 지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는 우물로 되돌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방적으로 떨어지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물 바닥엔 피에 젖은 옥좌가 있을 것이다. 엘시 는 대호왕의 전언을 떠올렸다.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라는 것은 반항 하지 말고 황위에 오르라는 뜻이었을까? 황위가 패배의 상징이 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지만 엘시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엘시 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것은 선왕의 말씀이시고 당신의 말입니다. 나는 아직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의하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을 저지할 겁니다." 지멘은 말없이 엘시를 외면했다. 지멘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엘시는 조금 후 코네도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하늘누리는 구름을 거슬러 움직였다. 맞바람이 불고 있었다. 구름은 하늘누리의 뒤편으로 움직였고 앞으 로 나아가는 하늘누리의 속도가 더해지자 구름의 속도는 놀랄 정도였 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수부 수도국장 푸타르 만룩스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국장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어지러움은 사라지지 않았 다. 만룩스 국장은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천경유수의 방면을 위해 애쓰고 있는 그였지 만 천경유수의 요구는 황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도 지알데 락바 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만룩스는 자신이 뭔가를 오해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천경유수는 도무지 오해의 소지가 없는 명쾌한 단 어들을 사용했다.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 는 것이라는 자각이 있었지만, 천경유수는 사납게 약속을 요구했고 국장은 얼떨결에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룩스 국장은 양산을 든 채 이른 아침의 하늘누리를 걷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해가 좀 더 높이 떠오른 시각이라면 여 름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양산을 쓰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지 금은 사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아침 시각이었다. 만룩스 국장 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본다고 느꼈다. 그러나 관찰력이 우수 한 사람은 언제나 적은 법이다. 사람들은 계절이 여름이라는 것을 알 고 있었고 따라서 양산에 대해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만룩 스 국장의 걱정과 달리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 만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의 집 앞에 도달했을 때 만룩스 국장은 양 산을 집어던지고 저택을 지키고 있던 경비국원들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누구에게 다행스러운지 따진다면 아마도 지알데 락바이에게 다행스 러운 일일 것이다. 천경유수의 집에 사람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경비국원들은 서둘러 푸타르 만룩스를 통과시켰다. 만룩스는 엉겁결에 집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천경유수의 앞에 도달했 을 땐 모든 것을 체념했다. 지알데 락바이가 말했다. "좋아. 벗게." 푸타르 만룩스는 옷을 벗었다. 자신 또한 옷을 벗은 천경유수는 푸 타르의 옷을 걸쳐 입었다. 두 사람의 체격은 비슷했다. 처음부터 그 때문에 이런 계획을 짜내었다. 만룩스는 천경유수의 옷을 입고 그의 방에 앉았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영달을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알데는 말했다. "자, 갔다오겠네." 긴장감에 몸을 떨던 푸타르 만룩스는 이 계획을 중단할 구실을 힘겹 게 찾아내었다. "저, 천경유수님. 혹시 손님이라도 오면……" "유폐된 죄인을 찾아오는 손님은 자네뿐이야." 만룩스는 입을 닫았다. 이미 작별인사를 했던 지알데는 더 이상의 말 없이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에게 몸종이 다가왔다. 몸종은 지알데에게 만룩스의 양산을 건넸고 그것을 받아든 지알데는 몸종에게 만룩스가 허튼 짓 못하도록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했다. 대문 앞에 도달한 지알데는 만 룩스의 양산을 펼쳐들어 머리 바로 위까지 눌러썼다. 그리고 심호흡 을 한 다음 대문을 열고 나섰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유수부 경비국원들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도 이곳에 드나들지 않았다는 투로 서있을 뿐이었다. 천경유수는 속으로 경비국원들을 꾸짖으며 황급히 태화각 쪽으로 걸어갔다. 멀리 태화각이 보였다. 태화각의 경비는 그의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엄중했지만 천경유수는 그 경비를 통과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태화각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집으로 들어섰다. 그 집은 파시크 남작 의 집으로 알려져있지만 거주자는 파시크 남작이 아니다. 그 집의 거 주자에겐 또다른 특징이 있는데 방문자가 특정한 표식을 가지고 있을 경우 방문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흥미로운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었다. 양산을 거둔 천경유수가 표식을 보여주자 거주자는 곧 아무도 못봤다는 태도로 정원을 거닐었다. 천경유수는 지체없이 마루를 올랐 다. 방안으로 들어선 천경유수는 벽장을 열었다. 그러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지알데는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아침 햇빛과 떠들썩한 소음이 아실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 만 아실의 왼쪽 눈은 언제나처럼 밤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 눈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지난 열 시간 동안 보고 있었던 천 장이다. 아실은 방 가운데 드러누워 있었다. 지난 밤 바다에 누운 이래로 밤 이 지나고 아침이 다가왔다. 등이 배기고 숨을 쉴 때마다 아팠지만 아실은 움직이지 않았다. 천장에 떠오른 모습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 다. 천장의 무늬는 으깨진 시체들처럼 보였다. 피부를 찢고 튀어나온 부 러진 뼈, 흙과 피로 더럽혀진 내장들, 으스러진 얼굴에 매달려 있는 턱, 몸 뒤로 꺾여있는 팔다리. 그런 것들이 천장에 있었다. 아니, 그 것은 그녀의 망막에 찍힌 화인인지도 모른다. 아실은 피와 살점과 뼛 조각으로 직조된 사체의 융단 위에서 싸우는 레콘을 보았다. 그것은 양손검을 든 채 싸우는 힌치오였다. 아실은 그를 불렀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이름은 엉뚱한 것이었다. "지멘." 아실은 소스라치며 일어나 앉았다. 엘시를 시모그라쥬까지 유인한 일은 오래 전에 끝났을 테니 지멘은 그녀를 찾아 북쪽으로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아실은 지멘이 이곳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았다. 두 번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지멘은 황제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아실은 그것을 용납해선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은 바닥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미끄러져 볼을 바닥에 쾅 부딪혔다. 아실은 입가를 만졌고 손에 피가 묻어나는 것을 보았다. 아실은 주먹으로 바닥을 쾅 치고는 다시 일어났다. 다리가 비틀거렸 다. 아실은 벽에 손을 짚었다. 현기증이 났다. 아실은 벽에 몸을 기댔다가 머리를 벽에 붙였다. 그 렇게 위태위태하게 선 아실은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아실은 성안이 시끄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음이 벽을 타고 그녀의 머리를 둥둥 울 렸다.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거친 외침도 전해져 왔다. 아실은 벽을 밀었다. 쓰러질 듯 걸어간 아실은 탁자를 짚고 섰 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마지막 동작은 쓰러지 는 것 같았다. 의자에 앉은 아실은 탁자 위에 엎드렸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 지만 머리 안쪽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지멘. 당신은 황제를 죽이면 안돼요.' 아실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몸이 부서져내릴 것 같았다. 아실은 작은 비명을 지르며 탁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그녀는 벽에 몸 을 부딪혔다. 가슴으로, 그리고 몸을 뒤집어 등으로. 벽에 몸을 계속 부딪히자 고통이 사라졌다. 사라졌다기보다 마비된 것에 가깝지만 아 실은 휘청거리며 탁자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아실은 팔을 뻗어 지필 묵을 챙겼다. 소맷자락이 시커멓게 얼룩지고 얼굴에도 먹물을 잔뜩 묻힌 후에야 아실은 글을 쓸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아실은 종이를 펼쳐 글을 휘갈겨 썼다. 그것은 편지였다. 두 통의 편지로 하나는 지멘에게, 그리고 하나는 발케네공에게 보내는 것이었 다. 편지를 다 쓴 아실은 그것이 마르도록 내버려둔 채 창가로 다가 갔다. 성의 마당에서는 병사들이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곳곳에 물통 이 옮겨졌고 그 근처에 빗자루들이 쌓였다. 아실은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물건인가 생각했지만 곧 암살성에 대해 화공은 무의미하다는 것 을 깨달았다. 암살성의 노출된 부분은 모두 석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물통과 빗자루는 불이 아니라 하늘누리에서 떨어지는 레콘을 대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하늘에서 내려온 레콘들을 상대하기 위해 발케네 병사들이 사용할 무기가 물에 적신 빗자루뿐만은 아니었다. 성 안을 더 살펴본 아실은 곳곳에 소화차도 배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 했다. 그룸성은 레콘들의 내습에 대한 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제국 군이 머지 않은 곳까지 온 모양이다. 아실은 창가를 떠났다. 탁자 위의 편지는 말라있었고 아실은 그것을 접어 겉면에 수신인의 이름을 쓴 다음 잘 보이는 곳에 놓았다. 혹 날 려갈 것을 대비해 벼루로 그것을 눌러놓은 아실은 몸을 죽 폈다. 춤 을 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무리가 없을 듯 했다. 그 때 아실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아실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음식을 넣으라고?" 아실은 자신의 배를 찰싹 때렸다. 몸이 울렸다. 텅 빈 물체를 때리 는 것 같았다. 아실은 실제로 자신의 몸이 텅 비어있다고 생각했다. 피부 아래엔 아무 것도 없다. 거기엔 무지무지하게 큰 공허가 있을 뿐이다. 아실이 문으로 다가갔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실은 의심에 빠진 눈으로 문을 바라보다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 다.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목소리도. "아실? 들어가도 돼?" 헤어릿의 목소리였다. 아실은 갑자기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 화는 그녀의 예정표에 없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아실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와요."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헤어릿은 방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낭 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실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일어났구나. 아까 들어왔을 땐 자고 있더니." 아실은 당황했다. 헤어릿이 방안에 들어왔다는 기억이 없었다. 그녀 의 의식이 생각보다 더 불분명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헤어릿이 말했 다. "왜 바닥에서 자니. 몸 아프지?" 아실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대화는 배가 고픈 것보다 더 나 쁘다. 아실은 성급하게 말했다. "잘 있어요. 헤어릿." 헤어릿은 턱을 조금 끌어당겼다. 아실을 유심히 바라보던 헤어릿은 탁자 쪽을 보았다. 그리고 벼루로 눌러놓은 편지를 발견했다. 헤어릿 이 말했다. "떠나는구나." 아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릿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보 았다. 문이 잘 닫혀있다는 것을 확인한 헤어릿은 아실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잘 생각했어. 불타는 집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아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 릿은 결심했다. "함께 가." "예?" "함께 가. 너와 함께라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말을 준비하지." "헤어릿?" "어서 가자." "잠깐만요, 헤어릿. 무슨 말이죠?" 헤어릿은 아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두 팔을 살짝 붙잡았 다. "아실. 나는 진작 여기서 도망쳤어야 해. 팔아먹기 위해 나를 사육 하는 공작에게서.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 변명거리는 있었어. 그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아실은 헤어릿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헤어릿은 암살공의 주검을 보 고 싶다고 말했다. 헤어릿은 스스로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이야. 나는 무서웠던 거야. 어머니처럼, 그리고 외할아버지 처럼 죽게 될까봐 무서웠어. 그래서 포기한 채 공작이 나를 팔아넘기 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되면 공작이 나를 죽이지는 않겠 지. 판매한 물건에 하자가 생기면 고객이 화를 내겠지?" 아실은 미간을 찡그렸다. 헤어릿은 서늘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젠 도망칠 수 있어. 공작은 나를 못 쫓아와. 자기 처지가 더 급하니까. 이제 곧 제국군이 성에 밀어닥칠 거야." 아실은 헤어릿이 말한 불타는 집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헤어릿은 아실의 팔을 놓았다. "발케네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 거야. 가자. 아실." 헤어릿은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아실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가에 도 달한 헤어릿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화난 눈 과 울고 싶은 입매로 헤어릿을 쳐다보고 있었다. "헤어릿." "왜?" "저, 언젠가 당신을 위로하려고 했었죠?" 헤어릿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 기억나지 않는 일이었다. 아실은 계 속 말했다. "비셀스 규리하는 힘 센 남편을 얻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예쁜데도 권세 있는 남자와 결혼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위로 하려고 했던 거예요." "뭐?" "헤어릿. 공작님은 당신을 '팔' 수 없어요. 그건 능력 있는 사위를 고른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능력 있는 사위는 스카리의 경쟁자가 될 거예요. 그리고 공작님은 스카리의 경쟁자가 되기엔 조금 부족한 사위를 고르지도 않았어요. 처음부터 당신을 팔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질문하는 헤어릿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실의 말에 담겨있는 확고함 이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아실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헤어릿. 당신은 스물일곱 살이죠?" "그래." "성인이 된 이후로 십 년이 지난 거죠?" "그런데?" "술과 친구는 오래된 것이 좋다지요. 그런데 남자들은 여자에겐 다 른 잣대를 적용하더군요."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말에 헤어릿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헤어릿은 그 말이 의미하는 내용을 깨달았다. 헤어릿의 얼굴이 충격 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아실이 말했다. "헤어릿. 만약 제가 딸을 팔고 싶었다면 십 년이나 기다리진 않아 요. 값이 최고로 비쌀 때 팔아치웠을 거예요. 하지만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데려오기를 기다리는 거라면 십 년은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 에요. 딸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거니까." 헤어릿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 했을 때 아실이 손을 들었다. "안 믿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확인은 해봐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겠는데, 이 집은 불타지 않아요. 저는 불 탈 집에 서신 남겨두진 않아요." 헤어릿은 탁자 위에 놓여있는 편지를 보았다. 그녀가 다시 아실을 보았을 때 아실은 그녀의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아실은 문을 열었 다. 그리고 문을 붙잡은 채 헤어릿을 돌아보았다. "꼭 확인해봐요." 문이 닫혔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멀리 암살성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 다. 암살성은 주변 2킬로미터 지대가 전부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주 위에 가득한 바위들 때문에 대군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갑충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사라티본 부대는 암살성 바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하늘누리가 물을 쏟을 경우를 대비하여 밀집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성 안에 레콘을 쏟을 경우를 대비한 준비도 되어 있었다. 성 안쪽에 물을 기반으로 한 방어 준비가 철저하게 되 어 있음을 보고 받은 시허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공은 할 수 있 는 모든 방어 준비를 마친 채 농성을 대비하는 듯했다. 시허릭은 피식 웃었다. 그 정도 준비로는 장제황제가 될 자를 대비 하는 것치곤 약해. 시허릭은 자신이 뭔가 기묘한 생각을 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시허릭 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승리에 대한 예감 때문에 조금 흥 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허릭은 머리를 가로젓고는 준비했던 전술을 시행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명령에 따라 레콘들이 움직였다. 엉겅퀴 여 단, 고추냉이 여단, 그리고 왜솜다리 여단에서 특정한 병사들이 모였 다. 그들은 환상계단을 상상할 수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 레콘들은 하늘누리로 향하는 자신의 계단을 만든 다음 뛰어올랐다. 파르바리 전투의 모습과 비슷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레콘들이 밟고 뛰어오를 수 있도록 허공에 듬성듬성 퍼져 있던 파르바리 전투와 달 리 레콘들은 하늘누리 좌우에 한 줄로 늘어섰다. 조정이 필요했지만 곧 그들은 지상에서 하늘누리로 이어지는 두 개의 줄을 만들었다. 마 치 하나의 긴 계단이 하늘누리 좌우에 있고 레콘들이 계단마다 서있 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그런 배치를 준비하는 동안 환상계단을 만들지 못하는 레콘 병사들은 주위로 흩어졌다. 그리고 암살성 주변에 잔뜩 있는 것들을 주워모았다. 바위들이 속속 하늘누리 아래로 모였다. 환상계단에 서 있던 레콘들은 그 바위를 집어 손에서 손으로 옮겼다. 암살성 주변의 바위들이 빠른 속도로 하늘누리 위편으로 옮겨졌다. 그 모습을 보며 시허릭은 씩 웃었다. '똑같은 전술을 또 쓸 것 같습니까, 공작? 장제황제는 어떻게 싸우 는지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즐거워 하던 시허릭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이 또 이상한 생 각을 한 것 같았다. 시허릭은 머리를 가로젓고는 작업현황을 관찰했 다. 갑충사는 없었지만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다른 레콘들처럼 눈이 좋았다. 그들은 제국군이 하고 있는 일을 목격했고 그들의 목격담은 곧 성 안의 사령부로 전달되었다. 사령부는 발칵 뒤집혔다. "물도 아니고 레콘도 아닙니다! 바위를 성 안에 쏟아부을 작정입니 다!" 디팝에서 온 젊은 참모가 비명을 질렀다. 락토 빌파는 그 젊은이가 디팝 자작 페리닌 스베이크의 아들이며 병에 걸린 아버지를 대신해 참전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이름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 서 락토는 그의 이름을 생략한 채 말했다. "그렇다. 사라티본 부대에 연락해서 돌을 모으는 작업을 방해하라고 해라." 팔리탐 지소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됩니다. 공작님. 그들은 파르바리 계곡에서 노획한 우리 소화차 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화차를 모두 동원하여 돌을 모으는 레콘 들을 엄호하고 있습니다. 사라티본 부대는 가까이 가지 못할 겁니 다." "사라티본 부대도 돌을 던지면 돼. 이 주변에 바위는 많다." "그들에게 돌을 모아주는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 도 있습니다. 사라티본 부대는 흩어져 있습니다. 제국군 레콘들에게 함부로 싸움을 걸었다간 각개격파당할지도 모릅니다." "항복해야 합니다!" 스베이크의 아들이 다시 외쳤다. 다른 지휘관들은 언짢은 표정을 지 었지만 젊은 자작 계승자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공작의 눈치를 살피는 쪽을 선택했다. 스베이크의 아들이 계속 말했다. "공작님. 결단을 내리십시오. 사태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미 승패는 기울었습니다. 아무도 제국군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락토는 젊은이를 꾸짖지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젊은이를 바라보다 가 갑자기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것을 수용하겠다. 볼존 스베이크." 참모들은 비통한 표정을 지으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팔리탐은 그들의 얼굴에 살았다는 안도감이 더 진하게 번지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 볼존 스베이크는 고양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고집센 주군에 게 바른 길을 관철시킨 의사의 연기를 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볼 존이 락토의 결단을 칭찬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 결단을 이끌어내었 음을 암시하는 연설을 할 시간은 없었다. 락토가 말했다. "네가 가서 항복한다고 말해라. 볼존 스베이크." 볼존은 조금 주춤했지만 곧 자신이 끝까지 주역을 할 수 있다는 사 실에 기뻐했다. 팔리탐은 갑자기 가슴이 옥죄는 것을 느꼈다. 팔리탐 은 볼존과 락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락토는 텅 빈 듯한 얼굴로 말 했다. "조건은 없다. 무조건 항복이다. 지금 즉시 출발하라." 볼존은 화려한 동작으로 예를 표시했다. 볼존 스베이크가 밖으로 나 가는 모습을 쫓던 팔리탐은 의혹의 눈길로 락토를 바라보았다. 락토 는 볼존 스베이크가 앉아있던 자리를 노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한 시간 후 볼존 스베이크의 목이 없어진 시체가 말에 묶인 채 되돌아왔을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암살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제국군이 항복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 을 것임을 확인한 봉신들은 대탈주를 감행했다. 암살공은 그런 탈주 를 막지 않았다. 데리고 왔던 병사들과 함께 암살성을 나온 그들은 제국군이 있는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몇몇 잽싼 봉신들은 자신이 데 리고 온 부하들도 팽개친 채 도망쳤다. 좀 더 빨리 도망치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끝까지 암살성에 남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각자 자신의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도망쳐봐야 살 수 없다고 느꼈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항복을 거부당한 암 살공의 운명은 바로 그들의 운명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 이 있었다. 그들은 싸우다 죽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 을 암살공에게 알리기로 했다. 그러나 암살공은 볼존 스베이크의 시 체가 돌아온 이후로 사람들 앞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락토를 찾아낼 수 없었다. 자신들끼리라도 방어 작전을 수립해보려던 그들에게 하늘누리가 움 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하늘누리는 바위 탑재를 마쳤고 바위를 모으고 위로 날랐던 레콘들도 모두 하늘누리 위로 올랐다. 바 위를 집어던지기 위해서였다. 그 소식을 들은 지휘관들은 창가나 성 벽 위처럼 전망이 좋은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하늘누리가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에 두 사람의 모 습이 목격되었다. 먼저 목격된 것은 락토 빌파의 모습이었다. 락토는 암살성의 4층 노 대에 서 있었다. 세찬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흩날렸지만 암살공은 꼿 꼿하게 서서 다가오는 파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묘하게 발 케네군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울 음을 터뜨렸다. 냉소하는 자들도 있긴 했지만 두려움 속에서 냉소하 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그 냉소는 곧 사라졌다. 그 때 락토가 갑자기 하늘 한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아실?" 발케네군 병사들과 지휘관들은 당황하여 하늘을 바라보았다. 락토가 본 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녀가 있었다. 하늘을 달리고 있 었다. 손에는 잘 보이도록 횃불을 들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무럭무 럭 피어오르는 횃불을 높이 든 채 소녀는 날아오는 하늘누리를 향해 허공을 달리고 있었다. 하늘누리 주변을 비행하던 갑충사들도 아실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들은 아실이 하늘누리의 비행 궤도 정면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지 만, 잠깐 동안 충격에 사로잡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아실이 환상계단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 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늘누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충격이 사라진 후에도 갑충사들은 선뜻 아실에게 날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하늘누리와 아실을 번갈아 바라보는 일만 계 속했다. 그 때문에 아실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늘누리 앞쪽 400 미터 쯤 되는 곳까지 이르렀다. 아실은 멈춰섰다. 그리고 횃불을 빙 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이리 나와." 유수부 천경통제실에서도 아실의 모습은 보였다. 천경통제실의 자기 자리에서 파라말 아이솔은 초조한 기분을 느꼈다. 아실은 하늘누리 정면에 있었다. 그리고 하늘누리와 아실의 비례는 코끼리와 개미의 비례 이상이다. 따라서 충돌한다 해도 하늘누리에는 아무 이상이 없 을 것이다. 하늘누리를 떠받치고 있는 하늘치는 벼락을 맞아도 끄떡 없다. - 벼락에 반응을 보였다면 하늘누리는 오래전에 파괴되었을 것 이다. - 아실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파라말은 그 조 그마한 소녀에게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을 충돌시키는 것이 내키 지 않았다. 그런 심정은 통제국의 모든 국원들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 다. 그들은 파라말을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마침내 파라말이 속도를 늦춘다는 타협안을 떠올렸다. 아실이 하늘누리에 충돌하는 대신 부드 럽게 하늘치 위로 올라올 수 있게 하면 유수부 경비국원이 그녀를 체 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라말이 그런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황급하게 통제국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의 눈 이 집중된 곳에는 시종장 블레드 백작이 헐떡거리고 있었다. 파라말 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 "블레드 백작? 무슨 일입니까?" "하늘누리를 멈추시오! 폐하께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파라말은 기겁하여 정지 명령을 내렸다. 하늘누리는 부드럽게 멈춰 섰다. 아실과의 거리는 30미터 정도였다. 하늘누리의 크기를 고려한 다면 그 거리는 붙어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눈앞에 떠있는 거대한 생명체를 보면서, 아니, 보지 못하면서 아실 은 호흡을 멈췄다. 아실은 하늘누리를 볼 수 없었다. 고개를 위아래 좌우로 한참 움직이기 전에는 하늘누리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산 속에서 산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호흡을 회복했을 때 아실은 다가오는 검은 점을 발견했다. 아실은 처음으로 아라짓 제국의 황제를 보게 되었다. 아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은 검은 모피로 몸을 감싼 나가였다. 체구 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화려한 장식 같은 것도 없었다. 아라짓 제국 을 통치하는 막대한 힘을 나타내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아실은 그녀가 황제임을 잘 알 수 있었다. 검은 모피로 몸을 감싼 채 이 북국의 하늘에 떠있을 수 있는 나가가 황제 외에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꼿꼿이 선 채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고 발을 움직이지 는 않았다. 아실은 횃불을 옆으로 집어던졌다. 횃불이 파르륵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치천제는 아실의 앞쪽 몇 미터 쯤 되는 거리에 멈춰섰다. "그래. 드디어 만나는구나. 아실. 짐이 아라짓 제국의 황제다." 아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해야 할 말을 준비해두 었지만 그 말들은 치천제의 모습을 보자마자 사라졌다. 그래서 아실 은 허리를 조금 구부린 채 황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치천제가 말했 다. "네가 천경비록을 해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실의 입이 갑자기 열렸다. "환상벽을 통해?" 치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너를 위해 천경유수 자리를 준비했다." 아실은 놀라지 않았다. 아무 것도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 로 아실은 황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황제는 아 실이 알아듣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말했다. "짐이 고른 새 황제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그에게도 부족한 점은 있 다. 그 점은 네가 보충해줄 수 있겠지. 다른 두 사람처럼." 아실은 더 이상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실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비명을 지르듯 말했 다. "코네도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지!" 자신의 외침을 들은 순간 아실은 정신이 명료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실은 눈을 떠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보 고 있었다. 아실이 다시 말했다. "코네도에서 많은 사람을…… 많은 사람을 죽였어. 그렇지?" 황제는 선심 쓰듯 대답했다. "그랬는데?" "나,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설명한다고?" "아홉 살부터 쉰아홉 살까지의 모든 코네도인의 죽음." 치천제는 만족감과 비슷한 표정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만족감을? 그러나 조금 후 아실은 황제가 그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의 사교관 계를 나타내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외롭다는 것이다. 갑 자기 아실의 해묵은 기억이 떠올랐다. "즈라더, 금군 즈라더는 당신이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어." 치천제는 미소를 지은 채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침을 삼키려 했다. 하지만 침은 돌덩이나 되는 것처럼 목 뒤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실은 목을 비틀어 억지로 침을 삼키곤 가까스로 말했다. "그 말이 맞아?" 치천제는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실이 다시 말했다. "그 말이 맞아? 당신이 정말 불쌍한 '사람'이야? 사람이냐고?" 아실은 손가락을 내뻗어 치천제를 가리켰다. "당신과 같은 정신억압자가?" 아실은 자신이 말한 정신억압자가 무슨 뜻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아 실은 스스로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도덕, 나는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냐. 실현성의 문제야. 그 밤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코네도에 불이라도 지르지 않는다면! 도망치는 사람이, 도망치 는 사람이 있어야 해.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어. 모두 죽었어. 아홉 살부터 쉰아홉 살까지의 모든 사람이? 그리고 제국군, 제국군도 마찬 가지야. 그들은 그 명령을 수행했어.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어. 마치, 마치 제국군도 코네도 사람들도 꼭두각시처럼 살인극을 연출했어. 네 가 그랬어! 너는 사람을 정신억압할 수 있는 거야! 그렇지?" 치천제는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락토 빌파는 노대에서 아실과 황제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락토도 놀라운 충격에 빠져 그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하늘누리를 향해 달려간 소녀도, 그리고 황궁 바깥으로 나온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도 현실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락토는 자신의 존재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그 모습에 몰입했다. 갑자기 그의 존재가 락토를 끌어당겼다. 락토는 어리둥절함을 느끼 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락토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잘 알고 있는 사물도 특정한 각도에서 볼 때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 게 되는 일이 있다. 지도를 뒤집어 놓는 경우가 좋은 예다. 그리고 락토의 가슴을 뚫고 나와있는 것 또한 평소에 볼 수 없는 각도였다. 락토는 그것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이 따끔했다. 락토는 그제서야 그것이 칼임을 깨달았다. 락토 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 내 가슴을 뚫고 나와있군. 그 사실을 이해 했지만, 락토는 만족할 수 없었다. 칼이 가슴을 뚫고 나오는 일은 아 무래도 낯선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없었다. 눈 앞이 흐려지고 몸이 차가워졌다. 머리가 무거웠다. 그는 하늘누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입에서 피 가 흘러나와 가슴을 적셨다.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락토는 무엇인가를 경배하는 태도로 노대 위에 무릎을 꿇었다. =============================================================== 15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16. 늦은 것과 낮은 것 - 1 "아버지는 제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반짝거리기, 흩어지기, 흐르기, 녹기, 줄어들기, 쪼개지 기, 납작해지기, 끓기 등의 무수히 많은 것들을 뺀다면, 대충 맞는 말이야." - 사르마크가에서 있었던 할머니와 손 자의 대화 中. 갈 길 잃은 조각 구름이 바람의 부재를 슬퍼한다. 하늘과 지평선이 묘하게 비슷한 거리감을 준다. 지평선까지의 거리 가 그대로 천정까지의 거리일 듯한 텅 빈 느낌의 평야 한 구석, 자신 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결정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늙은 나무 아래에 레 콘이 걸터앉아 있다. 그의 이름은 히베리였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 기억하는 전설적인 사고를 겪은 후 그는 언제나 그을린발이었다. 그을린발은 켄테롭 평야를 어정거리는 코끼리 무리를 바라보았다. 외견상 코끼리와 나가의 공통점을 찾는 것은 어렵다. 한쪽이 육중하 다면 한쪽은 날렵하다. 한쪽은 더운 피의 초식동물이고 한쪽은 차가 운 피의 육식동물이다. 하지만 그을린발의 눈에 나가와 코끼리는 판 에 박은 듯 비슷하다. 나가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때때로 가문을 방 문하여 후손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그 대신 휴식과 음식을 제공받 은 다음 떠나는 남자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태어난 후손들은 한 명의 어머니만을 가지게 된다. 생물학적인 관계는 그리 고려되지 않 는다. 모든 나가의 어머니는 가문을 지배하는 가주다. 만약 생물학적 인 어머니가 가주가 아니라면 자식은 어머니를 이모로 취급한다. 코끼리의 무리에서도 성인 수컷은 자신의 참정권을 주장할 수 없다. 무리를 이끄는 연륜 있는 암코끼리 - 편의상 그녀를 가주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 는 수컷의 필요성에 대한 명쾌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코끼리 무리가 성장한 수코끼리를 만났을 경우 무리 내에 가임기의 암코끼리가 있다면 가주 코끼리는 짝짓기를 허용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수코끼리는 무리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리하여 태어난 어린 코끼리는 모든 무리의 자식이다. 암코끼리들은 함께 새끼들을 키우며 뜻하지 않은 사고로 새끼가 죽으면 그들은 죽은 새끼를 둘러 싼 채 함께 슬퍼한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감수성 예민한 관찰자들을 뭉클하게 만들지만 통찰력 있는 관찰자는 그것이 생물학적인 어머니 를 인정하지 않는 나가들의 냉정한 모습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 다. 코끼리들이 자신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만족스럽지 않다면 오래 전에 바꿨을 테니 아마도 만족하고 있 을 것이다. 하지만 그을린발은 만족할 수 없었다. 코끼리는 훌륭한 가축이 될 수 있다. 길들여진 코끼리를 한 번만 바 라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코끼리는 압도적인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단지 코끼리가 힘이 세기 때문만은 아니다. 호랑이가 개보다 힘이 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개 썰매 대신 호랑이 썰매를 제작하려 했던 미치광이는 한 명도 없다. 사역동물이 되기 위해서는 사육을 받 아들이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행히 코끼리는 이미 오래 전 에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해보였다. 또 한 가지 코끼리는 다른 어떤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적적인 신체 기관을 가지 고 있다. 코끼리의 길고 예민한 코는 사람의 손에 버금가는 일을 할 수 있다. 그을린발이 코끼리의 가축화에 대한 계시를 느낀 부분 또한 코끼리의 강력한 힘이나 사육을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닌 그 코였다. 그런 신체 기관을 가진 동물을 가축으로 쓰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아 까운 일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코끼리는 끔찍하게 많이 먹고 성장이 느리며 아 주 가끔이지만 사육자를 죽여버릴 정도로 난폭해진다. 하지만 그을린 발은 코기리의 장점에 비하면 그런 단점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 했다. 많이 먹지만 먹는 만큼 일한다. 성장이 느리지만 대신 오래 산 다. 그리고 어차피 모든 가축들은 가끔은 난폭하게 군다. 사람의 가 장 친한 친구라는 개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가장 광범위해서 그런 것 이겠지만, 사람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입히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리 고 레콘인 그을린발은 코끼리의 폭행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 웠다. 하지만 번식을 통제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이 될 수 없다. 코끼리는 자손을 남기는 일에 대해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을린발은 사 육자에게 협력하는 것이 더 안정적인 종족번식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코끼리에게 납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을린발은 실제로 코끼리에게 더 유익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축을 이용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죄없는 가 축에게 모질게 대한 이의 비참한 말로는 교훈적 도덕극의 낡은 소재 다. 하지만 그을린발은 그런 이야기가 누가 주인인지 모르는 멍청한 자에게 닥친 비극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의심하곤 했다. 누가 주인인 가? 사람들이 가축을 이용하는 만큼 가축들도 사람들을 이용한다. 생 명의 첫번째 목표가 종족번식이라면 가축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 의 번식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것에 성공한 생물들이다. 가축에게 있 어 사육자는 매파이고 산파이며 유모이며 집사다. 많은 사람들이 농 업을 위대한 발명으로 여기지만 그을린발이 보기엔 가축들은 그보다 더 굉장한 것을 발명했다. 농사를 짓지 않고도 농업 생산품을 풍족하 게 제공받는 가축들을 볼 때 그을린발은 그들의 간접농업법에 감탄하 고픈 충동을 느끼곤 했다. 도축? 물론 도축은 한 마리의 돼지에겐 크나큰 비극이다. 하지만 그 런 일은 사람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은 법이 자신을 돌보게 하고 법이 사람을 처형하게 한다. 돼지는 사람이 자신을 돌보게 하고 사람이 자 신을 처형하게 한다. 사형은 도축이다. 돼지는 특별히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돼지에겐 선택권이 없다는 항의는 농담일 뿐이다. 사람에게도 무법을 선택할 선택권은 없으니까. 따라서 어떤 동물을 가축으로 만드려면 그들이 사람에게 도움이 된 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 또한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을린발이 보기에 코끼리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람이 코끼리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좀 불명확하 다. 사람이 번식까지 포함한 코끼리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면, 그 통 제가 코끼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코끼리는 사람이 자 신에게 봉사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을린발은 두 발을 죽 폈다. 발의 해묵은 상처가 약간 저릿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을린발은 당황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머리 뒤를 받친 그을린발은 하늘을 가린 나뭇가지들을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을린발은 엘시 에더리를 생각했다. 엘시는 그에게 자신의 일을 도우면 정신억압자를 주선하겠다는 약속 을 보냈다. 엘시가 그런 제안을 보낸 것은 그것이 그을린발 자신의 착상이기 때문이다. 한 때 그을린발은 정신적으로 코끼리를 통제하여 몇 세대 정도 사람의 통제 하에 번식하도록 유도한다면 정신억압 없 이도 사람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후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계획을 엘시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사색과 연구 끝에 그을린발은 그런 계획을 폐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 없는 계 획이다. 정신억압은 개체 단위로 적용되는 기술이다. 하지만 그을린 발은 가축화가 개체의 문제가 아닌 종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 떤 종 전체의 번식율이 유의미한 증가를 보일 때만 그 종은 가축이 된다. 하지만 사람이 코끼리의 번식율을 증대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코끼리는 자신의 규칙에 따라 번식을 결정하며 사람은 그 번 식에 관여하기 어렵다. 새끼에 대한 보호책을 제공하는 것도 무의미 하다. 성장한 코끼리를 제압할 수 있는 육식동물은 오직 대호뿐인데 대호는 쇠약해져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새끼 코끼리를 그 다지 공격하지 않는 기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육 식동물은 감히 무리의 보호를 받는 새끼 코끼리를 공격할 수 없다. 그을린발의 추론은 결국 이전의 수만번의 경우처럼 답이 없는 것으 로 결정났다. 그을린발은 한숨을 내쉬고는 수만 번째가 될 잠에 빠져 들었다. 그는 좌절할 바엔 낮잠을 자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세계 대 부분의 지역에서 나무 그늘은 잠들기 좋은 곳이다. 파르바리 계곡을 바라보던 이레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이레는 코와 입을 가렸다. 파르바리 계곡을 떠도는 공기를 들이마신 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이 역겨운 기분을 선사했다. 생명이 땅을 거닌 이후로 모든 사체를 쉼없이 받아들여온 대지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체를 받아들인 적은 없었을 것이다. 파르바리 계곡의 참혹한 모습 은 대지가 수령을 거부한 시체들이 쌓여있는 것 같았다. 시체를 거부하는 것은 악명 높은 시체 처리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레는 발케네의 조류 분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 든 시체들의 향연을 즐기는 날개 달린 문상객들은 존재하게 마련이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레는 어떤 새도 볼 수 없었다. 네 발 로 걷는 문상객 또한 마찬가지다. 낮이라 그런지도 모르지만 사체의 일부분을 주둥이에 문 채 뛰어다니는 작은 육식 동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도 이곳의 상황에 질려버렸는지 모른다. 혹은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자들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 때 문인지도. 이레는 시체들 위로 나있는 바퀴 자국에 충격을 받았다. 소화차의 바퀴 자국으로 추정되는 자취가 여러 곳에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었 다. 바닥에 너저분하게 깔려있는 사체들을 피하려 했던 흔적은 어디 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소화차의 바퀴는 크다. 잘 짖이겨진 시체는 소화차에게 큰 방해가 되지는 않았 을 것이다. 하지만 이레 달비는 그들이 심리적인 저항감을 어떻게 해 소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덜컹거리며 시체들 위를 굴러가는 소 화차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레는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 다. 그리고 그런 의견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만나게 될 것은 미치광이 부대일지도 모르겠군. 제국군 전 부가 제정신으로 여기를 통과했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소." 이레는 위체 파림을 돌아보았다. 시모그라쥬에서 온 정보수집가는 바닥에 앉아서 기절한 딸을 무릎에 앉힌 채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고 있었다. 세레지는 속이 뒤집힐 만큼 토하다가 혼절한 참이었다. 새하 얗게 굳어있는 세레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위츠는 비통하게 중얼거 렸다. "발케네공이 왜 반역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이 레?" "전후가…… 바뀌었습니다. 발케네공이 반역을 저질렀기에 이런 일 이 벌어진 겁니다." "그런 논리에 만족하시오?" "솔직히, 어렵군요." 이레는 더 말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그곳을 떠나왔지만 위츠와 세레 지는 시모그라쥬 사람이다. 이레는 시모그라쥬 사람에게 눈앞의 광경 이 시모그라쥬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 지만 위츠는 이레와 같은 예측을 했다. "시모그라쥬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시오?" 이레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발케네공이 크게 패 한다면 시모그라쥬공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 장군을 억류했던 그의 죄는 용서받기 어렵고 시모그라쥬공이 영민을 위해 깨끗한 죽음을 선택하는 대신 결사항전을 결심한다면 파르바리 계곡의 모습은 그대로 시모그라쥬의 모습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절대로 안돼!" 이레는 자신 대신 대답한 것이 누군지 돌아보았다. 주테카가 몸의 깃털을 부풀리고 있었다. 이레와 위츠를 번갈아 쳐다보던 주테카는 몸을 돌려 엘시에게 척척 걸어갔다. "시모그라쥬공은 빌어먹을 자식이야. 하지만 그 때문에 시모그라쥬 사람 전체가 이런 꼴을 당해서는 안돼. 그건 정의가 아냐!" 주테카는 홀로 서서 파르바리 계곡을 내려다보던 엘시 앞에 섰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말했다. "엘시. 황제가 돼라." 엘시는 말하기도 힘들다는 얼굴로 주테카를 올려다보았다. 주테카의 몸은 성벽을 연상시키리만큼 부풀어 있었고 그 때문에 얼굴은 몸에 파묻혀 있다시피 했다. 정의를 사랑하는 현상금 사냥꾼은 주먹을 으 스러져라 움켜쥔 채 씨근거리며 말했다. "이건 아냐. 이런 황제가 더이상 제국을 다스려선 안돼. 다른 황제 가 필요해. 치천제를 더 이상 제위에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네가 황제가 되어야 해. 그것이 치천제가 바라는 것이겠지. 지독한 악당이 되어서 사람들이 너를 환영하게 하겠다는 거지? 그래. 그 뜻을 받아 들여. 그렇게 해. 그렇잖으면 황제는 더 끔찍한 짓을 할지도 몰라." 엘시는 머리 속이 복잡해서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그 때 론솔피가 성큼 다가와 주테카의 곁에 섰다. "내가 네 금군이 되지. 엘시." 주테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치천제의 금군이 될 작정 아니었어?" "아니. 내 숙원은 황제의 금군이 되는 거야. 치천제의 금군이 아니 고. 내가 엘시의 금군이 되고 엘시가 황제가 되면, 순서가 좀 바뀌긴 하지만 내 숙원은 이루어지는 거야." 주테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저편에서 지멘이 말했 다. "치천제는 내가 죽여주지." 론솔피와 주테카, 그리고 엘시의 눈이 지멘을 향했다. 지멘은 망치 머리로 땅을 짚은 채 파르바리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수왕은 말했지. 두 태양은 있을 수 없으니 두 번째 태양은 떨어 져야 한다고. 하지만 첫 번째 태양이 떨어져도 돼. 그렇게 해도 태양 은 하나야." 엘시는 힘겨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솔직히 고민이 좀 있었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를 죽일 작 정이야. 하지만 제국에 황제가 없어지면 꽤 곤란하겠지." 지멘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형형한 눈으로 엘시의 눈을 들여다보았 다. "다음 황제가 준비되어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군."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 때 준람이 말했다. "그게 좋겠다. 엘시." "왜 그렇습니까?" 엘시는 반문했다. 딱히 준람의 말이었기 때문에 반문하는 것이 아니 라 그럴 수밖에 없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엘시가 바라본 나발칸의 레 콘은 비통한 심사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다. 점잖지 못한 일이기 때 문이다. 하지만 준람의 눈은 슬퍼보였다. "너나 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짓을 한 것이 레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르는 척해 봐야 속보이는 짓이다. 레 콘들만이 시체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다." 일부러 그런 언급을 피하고 있던 주테카와 론솔피, 그리고 지멘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준람이 말했다. "고추냉이 여단도 왔다고 들었다. 나는 거기 출신이야. 어쩌면 내가 아는 장교가 여기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시체를 뭉개고 있었겠지. 어 쩌면 살아있는 사람을 뭉개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이레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위츠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 던 이레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군대의 목적이 살인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야. 어떻게 레콘 들이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놔둬서는 안돼." 주테카는 고개를 힘있게 끄덕이고는 쵸지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한 마디씩 하니 너도 한 마디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태도였다. 하지만 쵸지는 누구도 바라보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엘시는 두 손 으로 이마 양쪽을 지그시 눌렀다. "폐하를 봬야겠습니다." 주테카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엘시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만난 다음에는 어쩔 건데?" 엘시는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막연하게 황제가 변 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떠올랐지만 엘시는 이런 살육에 대한 변명이 가능한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상대가 일만 레콘이라는 무서운 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쪽에서도 악랄하게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네도에서 일어난 참사와 파르바리 계곡에서 일어난 참사는 모두 인간들이 그 대상이었다. 악랄함이 필 요하다면 그것은 레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레콘 병사들이 없다면 발케네공에겐 제국군에 대항할 수단이 없다. 엘시는 억누르고 싶은 의혹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멸종 전쟁이라는 증거가 너무 많다. 레콘 여단 2개의 추가 소환, 코네도의 대학살, 그리고 파르바리 계곡에 펼쳐져 있는 상식 밖의 광경. 엘시의 침묵이 길어지자 주테카는 조바심을 냈다. "배신이 아니잖아! 황제도 그것을 원한다면서. 그렇다면 네가 황제 가 되는 것은 곧 황제의 뜻을 따르는 거야. 그렇잖아?" "나는 장물아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엘시가 단숨에 꺼낸 말은 사람들을 침묵하게 했다. 그 침묵은 조금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엘시를 쳐다 보았다. 엘시는 그들 모두를 무시한 채 말했다. "황제가 주는 황위는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세가 훔친 황위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침착을 잃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론솔피가 뜨 악한 얼굴로 그들의 당황을 표현했다. "라세가 뭐냐?" 지멘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사냥꾼이 사냥감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당연하다. "치천제의 이름이다." "치천제? 이름? 황제도 이름이…… 어, 있겠군. 그래. 황제의 이름 이 그거야?" 지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본명은 아니다. 나가들의 본명은 가장 가까운 사람만 아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외의 사람에게 황제는 라세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아실은 황제의 이름을 불렀다. "라세. 당신은 정말 사람들을 정신억압할 수 있어?" "왜 그걸 알고 싶어하지?" 아실은 몸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치천제를 바 라보았다. 그녀는 황제가 왜 반문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녀는 코네도의 사람들이 도망치지 않은 것이 정신억압을 당한 것 때문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쥐딤에서 몰락한 분리주의자들이 한 명의 초인적인 장수가 아니라 한 명의 초인적인 정신억압자에게 당한 것인지 궁금했 다. 그녀는 지멘이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황제의 자살 도구인지 궁금했다. 끔찍한 일이다. 사람을 정신억압할 수 있는 정신억압자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도무지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일조차도. 반문은 있 을 수 없다. 그것을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반문은 정신억압을 위해 필요한 행동일까? 아실은 당황하여 자신의 정신 상 태를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정신억압을 당하는 사람이 자신의 정신 을 더듬어 이상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실은 혼란을 느꼈다. 그 혼란은 정신억압을 쉽게 하려는 의도일까? 아무 것도 제대로 생각 할 수 없었다. 사람을 정신억압할 수 있는 정신억압자는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 일조차도. 아실은 울음을 터뜨 리고 싶었다. 울음을 터뜨리고 싶다는 것은 그녀 자신의 느낌일까, 치천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일까? 아실은 오른손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실은 아스라한 지평선을 보고 싶었다. 불타는 태양이 광막한 땅에 그림자를 아로새기는 것을, 수십만 년의 바위에 몇 시간의 이슬이 엉기는 것을 보고 싶었다. 벼락과 돌풍의 산꼭대기들이 굽어보는 가운데 흙내음 가득한 진한 바람을 어깨에 매 달고 대지의 살결에 남은 오래된 흉터들 사이를 거닐고 싶었다. 하지 만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누리를 등진 채 허공에 떠있는 치천제뿐이 다.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움켜잡은 채 아실은 신음처럼 말했다. "나는 지멘이 당신을 죽여선 안된다고 생각해." 지멘. 아실은 지멘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모를 말하는 것은 이 제 그녀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락토는 타이모의 사상이 바 로 아실 자신의 것임을 증명했다. 타이모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아실 은 바로 그녀 자신이 타이모에게 덧씌운 허위 때문에 타이모의 이름 에서 신뢰감을 느낄 수 없었다. 치천제가 말했다. "그것은 지멘의 숙원인 것으로 아는데." 아실은 어깨를 감싼 손가락을 세웠다. 손톱이 어깨를 파고드는 날카 로운 느낌은 그녀에게 대답할 힘을 주었다. "레콘은…… 자신의 숙원을 추구해야 해. 진짜 레콘은 자신이 중요 하다고 판단한 일을 자기에게 부과하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의 평가 에 신경 쓰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매 달리는 것은 가짜 레콘이야." 만약 지멘이 황제에게 정신억압을 당해서 황제를 죽일 결심을 했다 면, 아실은 가짜 레콘들을 욕하면서 최악의 가짜 레콘과 함께 7년을 보낸 것이다. 아실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그럴 수 없어." "내가 지멘을 정신억압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너는 그것을 믿을 수 있나?" "뭐라고?" "나를 믿을 수 있나? 아니, 내가 방금 너에게 말을 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나?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들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겠 지. 그 기억은 사실일까? 아니면 내가 너로 하여금 그런 기억을 가지 게 만든 것일까? 아실. 너는 나를 보고 있다고 믿고 있겠지. 하지만 네가 정말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아실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치천제가 먼저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있다는 대답은 도움이 안될걸. 너는 다 른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된 것인지도 모르니까." "그건, 그건…… 나는……" "너는 아실이야?" "나는……" "너는 자신이 아실이라고 믿게 된 터무니 없이 다른 존재인지도 모 르지. 지멘은 정말 실존 인물일까? 타이모는 어때? 지멘이나 타이모 는 내가 만들어서 네 머리속에 집어넣은 기억인지도 모르잖아. 나는 어때? 제국은 어떨까? 제국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고 치천제가 그것 을 다스리고 있는 것일까? 지금이 아라짓력 31년일까? 자, 아실. 왜 그걸 알고 싶어하지?" 아실은 눈물 없이, 소리 없이 흐느꼈다. 치천제가 옳았다. 그녀는 반문해야 한다.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니. 아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긍정이라면 그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다. 긍정 자체까지도 포 함해서. 질문은 무의미하다. 잠든 사람에겐 세계가 없다. 정신이 왜 곡된다면 세계는 없다. 그런데 왜 내 눈은 하나뿐인 걸까? 아실은 치천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뒤쪽에 떠있는 하늘누 리를 바라보았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하늘누리와 조그마한 치천제. 아실은 원래부터 애꾸가 아니었다. 그녀는 눈 하나를 잃기 전의 시각 을 기억한다. 그리고 눈 하나를 잃은 후 자신의 시각에 생긴 변화를 알고 있다. 아실은 재빨리 손을 들었다. 그녀는 집게손가락을 펴 눈 앞으로 들어올렸다. 치천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실의 기묘한 행동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치천제를 무시한 채 자신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하나다. 그 뒤의 치천제도 하나다. 그 뒤의 하늘누리도 하나다. 하지만, 눈이 두 개인 사람은 그 중 하나를 바라봄으로써 다른 것을 두 개로 만들 수 있다. 아실은 미칠 듯한 열망으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환상이 라는, 그녀의 억압된 정신 속에 구현된 현실의 모사라는 가능성은 물 론 존재한다. 그녀는 하나의 눈으로 보는 세계의 모습을 느끼도록 조 작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실에게 그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 다. 무엇에 집중하든 그 외에 다른 것들이 둘로 나뉘어지지 않는 시 각은, 모든 것이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는 시각은 바로 그녀의 시각이 었다. 아실은 천천히 손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래. 이 모습마저 조작당한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은 내 시각이야. 그것도 환상일지 모르지만, 환상 속에서 환상을 타파할 수 는 없어. 나는 내 것을 가지겠어. 내 눈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세상 을 보겠어. 나는 조작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어." 치천제는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녀는 마치 만들어진 존재처럼 보였 다. 아실은 말했다. "당신을 죽이겠어." "그럴 생각이니?" "그럴 생각이야." "어떻게?" 아실은 치천제의 등 너머 하늘누리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치천제의 모습은 하나였다. 암살성 내의 모든 사람들이 치천제와 아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서 발케네공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사람은 공격자 외에는 없었다. 그 공격자는 뒤로 물러나 크게 숨을 몰아쉬며 락토를 바라보았다. 락토는 두 무릎을 가지런히 바닥에 대고 두 손은 주먹 쥔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머리는 땅을 향해 숙여 있고 등뒤에는 깊숙히 박힌 칼자루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공격자는 락토가 쓰러지기를 기다 렸다. 하지만 락토는 절을 하는 듯한 자세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공격자는 앞으로 한 발 걸어갔다. 그는 서두르는 동 작으로 락토를 밀었다. 락토는 옆으로 쓰러졌다. 공격자는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락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고 그 눈은 모호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격자는 그 눈을 피하고 싶었다. 그 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공격자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공격자는 위아랫니를 부딪히며 모로 쓰러진 락토에게 다가갔다. 결심보다 먼저 손이 움직였다. 공격자는 피해자의 품속을 뒤지는 강도처럼 락토의 옷 속에 손을 집 어넣었다. 이곳저곳을 더듬던 공격자는 곧 목표하던 물건을 찾아내었 다. 공격자는 피에 젖은 감투를 꺼내었다. 공격자는 그것을 세심하게 살폈다. 피에 젖어있지만 다행히 찢어지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피 를 닦아내면 다시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격자는 안도하며 쓰러 진 락토를 바라보았다. 목숨도, 감투도 잃은 암살공의 모습을 보며 공격자는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웃음이 자연스럽게 나오지는 않았 지만 공격자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공격자는 그를 조롱하려 했다. 그 때 락토의 눈이 갑자기 움직였다. 공격자는 뒤로 물러나서 경악에 찬 표정으로 암살공을 바라보았다. 암살공은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칼을 꽂은 채 암살공은 느리지만 확 고한 동작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락토는 가부좌를 틀고 노대에 앉았 다. 락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아침에 일어나 몸치장을 하듯 틀에 박힌 동작이었다. 머리카락을 정돈한 락토는 조금 전 공격 자가 헤집어놓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암살공이 태연하게 소맷자 락을 바로잡았을 때 공격자는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락토는 그 소리 를 들었다. 그는 입매를 살짝 들어올렸다. "어설프구나. 스카리." 공격자는 뒤로 화다닥 물러났다. 락토의 머리가 신음과 발소리가 들 려온 곳으로 서서히 돌아갔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락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이리저리 둘러 보며 말했다. "도깨비 감투는 암살을 쉽게 하는 도구가 아니다. 더 어렵지. 어디 서나 구할 수 있는 칼 같은 거야 아무런 증거가 되지 않지만 도깨비 감투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지금 상황을 봐라. 세 개의 감투 중 내 것을 빼면 두 개가 남는다. 나는 그것을 두 사람에게 나눠주지 않았 다.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는 꼴을 피하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너 를 아는 거다." 스카리는 어깨로 숨을 쉬었다. 아버지의 눈길이 몸을 스칠 때마다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도깨비 감투로 몸을 감추고 있었지 만 스카리는 벌거벗은 채 서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락토는 그를 보 지 못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는 락토의 입에서 피가 왈 칵 흘러나왔다. 락토는 가슴에서 비죽 튀어나온 칼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용기를 버리고 승리했구나. 훌륭하다. 내가 너를 과소평가했구나." 입 안 가득 질퍽거리는 피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피를 뱉어내고 싶었지만 락토는 그런 동작을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발케네의 공작은 피를 씹으며 말했다. "도깨비 감투는 앞으로 쓰지 마라. 너는 너무 자주 쓴다. 나처럼 자 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만 사용해라. 도깨비들은 너 자신을 위해 그 것을 쓰는 것은 눈 감아주겠지만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쓰는 일이 반복되면 무사장을 보내어 결자해지하려 할 거다. 네가 즈믄누리 무 사장의 반환 요구를 거부할 수 있겠느냐?" 스카리는 얼어붙었다. 락토가 말했다. "떠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멍청한 놈. 빨리 가라. 내 목을 들고가서 황제에게 진상할 필요는 없다. 누가 이 일을 했는지 모르게 하는 것이 좋다. 모호한 추측이 네 무기가 될 거다. 빨리 가!" 스카리는 주춤하다가 몸을 돌렸다. 그 때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 다. "공작님!" 스카리는 기겁했다. 그의 앞쪽, 노대로 통하는 문 앞에 헤어릿이 서 있었다. 헤어릿은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채 달려왔다. 마치 스카리의 목을 조르려 하는 것 같았다. 스카리의 칼은 락토에게 꽂혀 있었고 그에겐 무기가 없었다. 스카리는 엉겁결에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 다. 헤어릿은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뒤를 돌아본 스카리는 헤어릿이 락 토의 앞쪽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스카리는 진저리를 치며 조심스럽 게 노대를 떠났다. 헤어릿은 무릎을 꿇고 락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가슴에서 튀어나 온 칼날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헤어릿은 토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칼날과 락토의 얼굴을 바라보던 헤어릿이 말했다. "공작님? 자, 잠깐만요. 사람을 데려오겠어요." 헤어릿은 일어섰다. 하지만 락토의 손이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헤어릿은 깜짝 놀라 팔을 잡아당겼다. 앞으로 휘청하던 락토의 몸이 뒤로 기울였다. 헤어릿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숙였다. 그녀는 락토의 곁에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락토의 몸은 무거웠다. 헤어릿은 팔에 힘을 주어 락토를 끌어안았다. "공작님! 죄송해요, 놀라서, 공작님?" "다른 사람은 부르지 마라." "예?" "발케네의 공작이 죽을 땐 한 명의 참관인이면 충분하다." 헤어릿은 양볼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락 토가 오히려 뜨겁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락토가 말했다. "쓸모없다. 내 삶과 죽음의 권위 있는 해석권자는 나뿐이다. 그 유 일한 해석자가 죽는 거다. 나 외에 아무도 해석할 수 없다. 내 마지 막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그가 이랬느니 저랬느니 떠들 바보는 초대하 지 않는다. 사망을 고지할 한 사람이면 돼. 그 놈이 확실히 뒈졌다고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한 사람이면 충분해. 누군가는 그 소식에 관심 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문득 헤어릿은 락토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락토 는 그의 존재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죽으면 안돼요." 락토는 눈동자를 굴려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자신의 말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입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죽으면 안돼요. 물어볼 것이 있어요. 확인해야 해요. 평생 의심하 면서 살 수는 없어요. 제발, 죽지 말아요." "무엇이 알고 싶으냐." 헤어릿은 질문하려 했다. 누가 이랬냐고. 누가 암살공을 암살한 것 이냐고. 하지만 헤어릿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왜 혼자가 된 저를 거둬들이셨죠?" "미인이니까." "저를 왜 원추리문에 보내셨죠?" "가격이 오르니까." 화가 나지 않았다. 헤어릿은 알싸한 무서움 같은 것을 느꼈다. 연약 하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새끼 동물을 옷속에 품고 있는 듯했다. 가렵고 두렵다. 그리고 초조하다. 시간이 없다. 헤어릿은 시간이 있 었다면 절대로 말하지 않았을 말을 했다. "예. 공작님. 저는 발케네 공작의 혈육이고, 예쁘고, 좋은 교육도 받았어요. 훌륭한 상품이지요. 그런데 왜 십 년 동안이나 팔지 않으 신 거죠?" "나머지 하나의 감투를 찾아라. 헤어릿." 헤어릿은 발케네 가문에 세 개의 감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 나는 암살공 자신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스카리가 가지고 있다. 세 번째 감투의 소유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치 세 번째 벽난로방 의 소재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헤어릿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제가 왜 그것을 가져야 하지요?" "네가 이유를 찾아라. 죽은 자의 이유를 네 이유로 삼지 말고. 나는 찾으라 했지 가지라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가 왜 그것을 찾아야 하지요?" "그것을 찾으면 네 질문에 대한 내 대답도 알게 될 거다." "어디에 있지요?" 락토는 일어났다. 헤어릿은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물러났다. 어쩌면 암살공이 그녀를 밀어냈는지도 모르지만 헤어릿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있 었던 것은 락토가 어느새 그녀의 품을 떠나 노대 끄트머리로 걸어가 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헤어릿은 그 앞에 있는 허공을 보다가 갑 자기 어깨를 꿈틀했다. 락토는 노대 끝에 잠시 멈춰서지도 않았다. 한결같은 걸음으로 락토 는 허공을 밟았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치천제는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꽤 의도적인 동작이다. 하늘누리를 한 번 바라본 황제는 다시 아실을 돌아보았다. 아실은 온 몸을 긴장시켜 작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치천제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네가 하늘누리를 움직이는 방법을 알아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치천제는 흑사자 모피를 살짝 들어올렸다. 모피 아래로 손을 집어넣 으며 치천제는 계속 말했다. "네가 엘시의 천경유수가 되길 바랐기 때문에 그걸 알도록 내버려두 었다. 하지만 네게 하늘누리를 넘겨준 것은 아니다. 너는 그렇게 생 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실의 얼굴에 공포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은 치천제의 모피 아래에서 나온 칼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한계선 이북에 단 한 자루만 존재하는 칼이었다. 육친을 죽이는 의무를 짊어진 자에게 지 급되는 나가들의 검 쉬크톨이 북부의 하늘 아래에서 빛났다. "네가 알아낸 것은 라수 규리하가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라수 규리하가 천경비록을 쓴 이래 하늘누리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너는 그 변화까지는 알지 못한다." 주저앉고 싶은 공포 속에서 아실은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원칙은 바뀌지 않아. 하늘치는 물고기야. 저기엔 날개가 아 닌 지느러미가 달려 있어. 그것은 바꿀 수 없어." "유수부 통제국에는 많은 통제국원이 있지." "뭐?" "회전 담당, 고도 담당, 전후진 담당이 따로 있지. 물론 속도 담당 도 따로 있고. 그들 모두를 지휘하는 통제국장도 있지." 아실은 겁먹은 얼굴로 치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황제의 말을 이 해할 수 있었고 그 이해는 아실을 두렵게 했다. 그 때 치천제가 앞으 로 걸어나왔다. 치천제는 쉬크톨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 아실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허공을 딛는 그녀의 걸음걸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던 아실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황제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너를 정신억압하지는 않았다." 아실은 그 말에서 아무런 위로도 느낄 수 없었다. 좌절감에 사로잡 힌 아실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정신억압이 죽음보다 낫다는 생각도 떠돌았다. 아실은 그 생각을 뿌리치려 애썼다. "지멘도 정신억압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식으로 정신억압을 하지 는 않는다." 아실은 또 한 발 물러나며 외쳤다. "그러면 어떤 식이야…… 어떤 식이냐고!" "너는 알고 싶은 것이 아니야. 그저 시간을 벌려는 거지." 아실은 흠칫했다. 충격 때문에 물러나는 걸음이 흔들렸고 아실은 비 틀거리다가 겨우 똑바로 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발을 뗄 수 없게 되었다. "네가 너로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을뿐이야." "왜! 왜 내게만 특별 대우지? 코네도에서 죽은 사람들은 왜 그들 자 신으로 죽을 수 없었던 거야!" "그들도 그들 자신으로 죽었다." "무슨 소리야?" "그만두자. 아실. 점잖게 죽도록 해라." "안돼. 너는 날 죽일 수 없어." "왜지?" 왜일까? 아실은 혼란 속에서 말했다. "나를 죽이는 건 지멘이야. 내 목숨은 지멘 것이라고." 치천제는 쉬크톨을 들어올렸다. "나도 그렇지." 아실은 그 칼끝이 하나라는 사실에 진저리를 쳤다. 치천제를 보아 도, 그 뒤의 하늘누리를 보아도 쉬크톨의 칼끝은 예리한 한 점이었 다. "나를 죽이는 것도 지멘이지. 우리는 죽음으로 연결된 자매로군. 혈 육을 죽이는 이 칼이 좋은 사냥감을 얻었군." 아실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실은 비 통함을 느꼈다. 자신의 다리조차 움직이지 못하면서 하늘누리를 움직 이려 했던 것이 어처구니 없게 느껴졌다. 아실은 절망감을 담아 다시 하늘누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실은 기묘한 것을 보았다. 그녀는 하늘누리의 거대한 눈들이 갑자기 빛났다고 느꼈다. 원래부 터 보석과 비슷한 눈들이지만 아실은 그 순간 보석에는 없는 생기 같 은 것을 느꼈다. 아실의 표정을 본 황제는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황제 와 아실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몸이 두 다리가 아 닌 다른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느꼈다. 아실과 황제는 똑같이 자신의 다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녀들이 서있 는 환상계단이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환상계단의 기원을 바라 보았다. 하늘누리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 16챕터 시작합니다. 방언과 유사해지는 다음회 예고 : 왕자를 찾아낸 철이와 흡혈안드로이드, 그리고 치바에서 온 카우보 이.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폭주갈매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10년 일렀나?" 철이의 안타까운 독백에 발맞춰 나타난 것은 현상금 사냥꾼! 지겹게 돌아오는 현상금사냥꾼의 모습에 흡혈안드로 이드는 비명을 지른다. "피닉스좌냐!" 현상금 사냥꾼은 요염한 모습 으로 대답한다. "아니. 매력이 최고인 전갈좌." 카우보이가 진지하게 말한다. "아마 2인가 보군." 그다지 도움 안되는 지적이었다. 세 사 람이 우물쭈물하는 가운데 자칭 매력이 최고라는 현상금 사냥꾼은 장 도리 비슷한 물건을 꺼내며 외친다. "봉인 해제!" 그러자 카드에 봉 인되어 있던 정령이 뛰쳐나온다. 공포스러운 정령의 정체는 카드 정 지! 급격히 떨어지는 생존점수. 세 사람은 공포에 젖어든다. 그 때 과묵하게 앉아있던 왕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선다. 그가 망토를 벗어 던지자 그 아래에서 나타나는 검은 교복. 그리고 왕자의 이마에 갑자 기 기묘한 문양이 나타난다. "어둠의 왕자가……!" 카우보이의 외침 에 왕자는 씨익 웃는다. "예전에도 교복 입고 이마에 문양 번득이던 분이 계셨지. 그 분 스타일이 이래." 무슨 소리인지 알 길 없는 소리 를 하던 왕자는 그 스타일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준다. 왕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친다. "지구의 평화를 위해 세 명의 종에게 명령이다! 하늘을 날아라!" 카우보이는 갑자기 어깨가 가려운 것을 느낀다. 보 라, 그에게서 솟아나는 날개! "바다를 가라!" 괴수도 아닌데 흡혈안 드로이드가 갑자기 거대로봇으로 변한다. "땅을 달려라!" 그러자 철 이가 갑자기 두 손을 땅에 짚고 네 발로 선다. 그렇다. 왕자는 모든 외국어를 제멋대로 번역하는 권능을 지닌 바벨피쉬 2세였다. 번역의 신비가 펼쳐지는 다음회 "시간 파리는 화살을 좋아한다." 많 이 기대해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6-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5-07 조회수 : 2054 피를 마시는 새 16. 늦은 것과 낮은 것 - 2 지알데 락바이는 하늘누리의 움직임을 느끼고는 만족했다. 몸은 땀 에 젖어있었고 팔과 허리엔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지만 지알데는 뿌듯 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경유수가 서있는 곳은 유수부 통제국의 지하실이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하늘누리에서 지하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지만 보다 합리적인 다른 말을 강구해낸 사람은 없다. 새로운 단어는 새로운 대 상이 있을 때 만들어지지만 또한 그 새로운 대상에 대해 충분히 많은 사람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때 만들어진다. 하지만 지알데 락바이 가 서있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은 극소수이다. 극소수의 사람 을 위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비경제적이다. 따라서 지알데 가 서있는 곳은 통제국 지하실이다. 원래 통제국 지하실의 모습은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가득하다는 인 상을 준다. 지금도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약간의 차이 점이 있는데, 현재 지하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부서진 기계 장 치들이기 때문이다. 지알데 락바이는 결연한 의지와 날카로운 절단기 를 가지고 있었고 지하실의 기계 장치들은 그 둘의 조합을 견뎌내지 못했다. 지알데는 기계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의 파괴에 심한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 기계들은 가장 반기계적인 기계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다. 기계의 목적은 사람의 노동을 절감하는 것이지 만 통제국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계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알데가 그 기계들을 때려부순 지금 통제국원들은 자신의 노동이 더 쉬워졌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었다. 파라말은 하늘누리의 통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상황이 예사 롭지 않다는 것은 간단히 알 수 있었다. 느닷없는 움직임에 당황한 통제국원들은 그 원인을 알아내려 했고 잠시 후 통제국원들은 미친 듯이 자신의 조종기를 움직였다. 그들의 조종기는 아무런 저항 없이 우쭐거렸다. 바라보고 있는 파라말도 그 움직임에서 갈대를 흔드는 것 만큼의 반동도 느낄 수 없었다. 하늘누리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국 원들이 드디어 비명을 질렀다. "안됩니다! 통제가 안됩니다!" "제멋대로 놉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조종기가 부러졌나 봅니다!" 통제국장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유수부차사를 돌아보았다. 파라말은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통제국장. 점검이나 수리를 담당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왜 부르지 않는 거지?" "저, 그게, 없습니다." "없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있기는 하겠지만 저는 모릅니다. 그건 비밀입니다. 천경유수님만 이……" "천경유수에게 직속 관리반이 있다는 건가?" "예. 아마 그럴 겁니다." "아마는 또 뭔가! 아니, 관두지. 지금 당장 천경유수의 댁에 사람을 보내! 조종기가 문제를 일으켰으니 당장 수리해야 한다고 전해! 폐하 께서 바깥에 계신단 말이야! 나는 경비국에 가겠다. 폐하를 안으로 모셔야……" 일어나서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파라말은, 그러나 발을 헛디디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누리가 이동 속도를 갑자기 높인 탓이다. 떨 어지는 물건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감싸던 파라말은 갑자기 소름끼치 는 예감을 느꼈다. 그는 이리저리 우쭐거리는 조종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백해진 통제국원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파라말은 제국 수도가 폭주한다는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두 번째 벽난로방에서, 데라시는 벽난로에서 쏟아져나온 장작들을 당황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자칫하면 방에 불이 붙을 판국이다. 그 리고 데라시는 방밖으로 도망치기 어렵다. 데라시는 황급히 장작을 집어 벽난로 속에 던져넣었다. 그 와중에 비늘이 타들어갔지만 데라 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재생될 테니까. 가까스로 장작들을 벽 난로 안으로 몰아넣은 데라시는 바닥에 흩어진 불똥을 짓밟았다. 그 리고 머리 속으로는 유수부 통제국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하늘누 리를 전쟁 도구로 이용한다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전술에는 데라 시도 전폭적인 찬성을 보냈다. 따라서 데라시는 통제국이 그를 돕는 것에도 찬성했다. 하지만 데라시는 통제국원들이 지나치게 흥분하여 자신들이 전사가 아니라 도시 관리자임을 망각하는 것은 반길 수 없 었다. 그들이 다루고 있는 것은 초거대 병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다. 이런 거친 움직임은…… 그 때 데라시에게 갑자기 니름 이 들려왔다. [데라시! 데라시 투나!] 데라시는 온몸의 비늘을 한꺼번에 부딪혔다. 니름은 날카로웠다. 죽 음이 부르는 것 만큼이나 강력한 부름에 데라시는 몸이 마비되는 것 만 같았다. 그리고 치천제는 데라시가 진정할 틈을 주지 않았다. 폐 부를 찔러들어오는 창끝 같은 니름이 비스그라쥬백을 덮쳤다. [데라시! 당장 지알데 락바이를 찾아라!] [예? 어, 저, 폐하. 저는 방 바깥으로 나갈 수가……] [그러면 다른 사람을 보내! 지알데가 하늘누리를 움직이려 한다!] [지알데요? 이것은 유수부가……] [지알데다!] 데라시의 정신을 후벼파는 니름은 도무지 반문이 불가능했다. 데라 시는 그것이 자신의 판단인 것처럼 느꼈다. 아니, 그 자신의 판단이 라 해도 이토록 확신에 찰 수는 없을 것이다. 데라시는 지알데 락바 이가 하늘누리를 움직이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데라시의 기억에는 그 사실과 양립하는 다른 기억도 있었다. 천경유수는 자신의 집에 유폐되어 있다. 그런 지알데가 어떻게 하늘 누리를 움직인다는 것인지 데라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상충하는 기 억은 데라시를 완벽한 무력 상태에 빠트렸다. 데라시는 호흡도 제대 로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치천제는 그런 데라시의 상태를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설 명을 보냈다.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데라시는 치천제가 하늘누리의 움 직임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만큼 이해하게 되었다. 데라시는 충격 으로 비늘을 세웠다. [하늘누리가…… 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요?] 아실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자연 세계에도 아실이 보고 있는 것에 비교될 만큼 거대한 물체는 극히 드물다. 시구리아트 산맥의 고봉들은 분명 아실이 보고 있는 것 보다 더 높지만 산은 부피감을 느끼기 어려운 물체이며, 또한 움직이 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실이 보고 있는 것은 움직였다. 육상에 있는 물체 중 그런 부피를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움직이는 물체는 하나 뿐 이다. 그 때문에 그것이 홍염처럼 들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실은 빙하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야를 준비한다. 그곳에 물을 붇고 물고기 한 마리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것을 겨울의 바람 속에 방치하여 얼어붙게 만든다. 충분히 얼어붙은 다음 대야를 뒤집어 얼음덩이가 땅 위에 엎어지게 한다. 투 명한 얼음 사이로 얼어붙은 물고기가 언뜻언뜻 보인다. 얼음이 지극 히 투명하다면 물고기는 땅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물 고기에 하늘누리를 대입한다면 물고기를 둘러싼 얼음은 지금 아실이 보고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환상계단이었다. 환상계단은 상상한 자에게만 영향을 끼친다고 알려져 있다. 한가한 장난꾼부터 진지한 학자까지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온갖 실험을 했지 만 자신이 창조한 환상계단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그리하여 환상계단의 비공유성은 공리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천경비록을 완전히 이해한 아실은 환상계단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환상계단을 창조한 자는 그 환상계단을 하늘치와 공유할 수 있다. 물이 없는 곳에 배를 띄울 수 없듯 하늘치가 없는 곳에서는 환상계 단을 만들 수 없다. 환상계단은 하늘치에게 속한다. 따라서 환상계단 은 하늘치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며, 그 역 또한 성립한다. 그리고 배 가 물에 영향을 받아 뜨듯이 물 또한 배의 영향을 받아 배의 부피만 큼 물러나게 된다. 하늘치 또한 환상계단에 영향을 받는다. 일반적으 로 환상계단을 상상하는 것은 사람이고 그 사람이 가장 거대한 레콘 이라 해도 하늘치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작다. 따라서 사람이 상상한 환상계단이 하늘치에 끼치는 영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 다. 하지만 물 속에 극히 거대한 물건을 집어넣으면 물은 넘치게 된다. 지금 아실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규모의 환상계단은 하늘치를 움직 일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계단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아실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낼 필요를 절감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적절한 명 칭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실은 하늘 치를 움직이길 바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만든 환상계단이 하늘 치를 붙잡아두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의 환상계단이기 때문에 아실은 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아실보다 몇 배나 많은 통제력이었다. 오 직 회전에만 신경을 쓰는 통제국원, 오직 고도에만 신경을 쓰는 통제 국원, 오직 전후진에만 신경을 쓰는 통제국원 등 많은 이들이 만들어 낸 - 그녀가 볼 수 없는 - 환상계단들이 그녀를 막고 있었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파괴한 것은 통제국원들의 상상을 돕는 장치들이었다. 통제국원들이 조종기를 움직일 때마다 적당한 저항을 주는 것, 무엇 인가를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되먹임하는 것이 그 기계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유수부 통제국원들은 자신의 팔힘이 아닌 자신의 상상력 으로 하늘치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정교하게 만들어 진 그 저항 기계는 그런 느낌을 유지하는 것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것은 값비싼 장난감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세심한 배려였다. 하늘 치가 한 사람의 상상력만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공개된다면 제 국 수도의 기적적인 장점인 이동성은 거꾸로 최악의 취약점이 될 수 있다. 통제국원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하늘누리가 단 한 사람의 상상력 우수한 반란자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늘누리의 통제는 되도록 많은 사람 이 참여하는 것으로 분할되었다. 하지만 지알데 락바이가 저항 기계들을 파괴했기 때문에 통제국원들 은 자신이 하늘누리의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만약 그 들이 제자리에 앉아 지금까지 했던 일을, 즉 하늘누리를 통제하는 일 을 의지만으로 하려 했다면 지알데는 그들에게서 통제능력을 빼앗아 올 수 없을 것이다. 통제국원들은 고도로 훈련된 자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지알 데는 하늘누리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는 방 안에서도 하늘누리의 통 제권을 빼앗아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하늘누리를 그대로 제국 령까지 끌고 간 다음 황제에게 종전 선언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 다음에는 아마도 투하형을 당한 첫번째 죄수가 될 테지만, 지알데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지알데는 어차피 다른 것에 두려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지알데는 건물 내부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늘누리를 올바른 방향 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의도하는 움직임 은 하늘누리를 선회시키는 것이었다. 발케네 남쪽의 제국령으로 돌아 가는 것이 그의 목적이므로. 하지만 지알데는 회전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지알데는 불안감을 느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황제가 전해준 지식을 검토했다. 방 바깥으 로 나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하늘누리의 폭주를 막아야할 상황에 처 한다면 누구나 떠올릴 법한 생각이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얼마 후 의 일이었다. 데라시는 닐렀다. [폐하. 그렇다면 제가 하늘누리를 움직일 수도 있습니까?] [뭐? 그래. 할 수 있다! 해라! 이것을 멈춰라!] 데라시는 황제의 니름이 다급하다고 느꼈다. 그녀가 어떤 불안정한 상황에 빠져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비스그라쥬백을 얼어붙게 했 다. 데라시는 비틀거리며 바닥의 물건을 옆으로 치운 다음 주저앉았 다. 그리고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고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일을 시도했다. 데라시의 추측처럼 황제는 꽤 다급한 처지였다. 그러나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치천제는 누군가를 위험에 빠트리기 위해 다급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아실이었다. "멈춰!" 황제는 환상계단 위를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아실은 자신에게 다가 오는 쉬크톨을 보며 질겁했다.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대비책은 황제의 환상계단을 흔드는 것이었다. 물론 황제의 환상계단은 황제의 것이었 고 아실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황제의 환상계단이 이어져 있는 하늘치는 통제할 수 있었다. 아실의 다급한 시도에 의해 하늘치 가 갑자기 속도를 바꿨다. 하늘치는 갑자기 느려졌다가 다시 움직였 다. 그녀의 시도는 성공했다. 황제는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치천제는 한 손으로 환상계단을 짚은 채 아실을 노려보았다. 아실은 저 편에서 두려움에 빠진 얼굴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아니, 그 녀를 보고 있는지 불명확하다. 아실의 눈은 하나고 그 초점은 찾기 어렵다. 치천제는 그녀가 하늘누리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했다. 환상계단이 거칠게 진동했다. 치천제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누리 가 그녀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당장 충돌이 일어날 것 같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하늘누리가 움직이고 있는 만큼 치천제 또한 움직 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확고하게 인정한 치천제는 눈을 떼기 어려운 그 광경에서 주저없이 고개를 돌렸다. 치천제는 아실을 향해 말했다. "이 짓을 그만둬라." 아실은 치천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치천제는 그녀가 보 고 있는 것이 쉬크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치천제는 쉬크톨을 칼집에 도로 꽂아넣었다. "아실. 그만둬." "하지마!" 아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쭈그리고 앉았다. 그 순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돌풍이 치천제의 살갗을 두드렸다. 치천제는 기막힌 표 정으로 날아가는 철시를 바라보았다. 오뢰사수의 거대한 철시가 아실 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파리를 잡기 위해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격이 다. 날아간 철시는 곧 보이지도 않게 되었지만 치천제는 저 먼 곳의 돌산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먼지 구름을 볼 수 있었다. 뒤이어 먼 곳 의 천둥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하늘누리 위에서 철시를 쏘아붙였던 금군 부악타는 벼슬을 빳빳하게 세웠다. 하지만 안타까워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의 철궁을 저격 무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부악타는 두번째 철시를 철궁에 걸면서 외쳤다. "황제! 돌아와!" 계명성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부악타는 그러지는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서있는 황제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 다. 부악타는 황제가 뒤를 돌아보기를 애타게 바랐다. 하지만 치천제 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수교위님."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말한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저 앞쪽 하늘에서 움직이는 하늘누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녀에게 말을 걸었던 다미갈 카루스 부위 또한 하늘누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누리가 꼭 정신 나간 말이 끄는 수레처럼 움직이는군요. 뭔가 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돌을 이상한 방향으로 던지는군요." "그게 돌이었을까? 돌이라면 너무 멀리 날아가는 것 같지 않아?" "하긴 그렇습니다. 그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까 하늘누리 앞쪽에서 불빛이 움직였지?" "예. 그랬습니다." "아무래도 가봐야겠군. 그 불빛이 마음에 걸린다." "예? 하지만 저 아래에는 발케네의 레콘들이 잔뜩 있습니다." "그 불빛이 어떤 침입자고, 날아간 것이 돌이 아니라 오뢰사수의 철 시라면, 하늘누리는 지금 침입자를 저격하려고 애쓰는 거다. 그리고 하늘누리가 저렇게 비틀거리는 것도 침입자 때문이겠지." 카루스는 니어엘의 설명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숨이 막히는 것 을 느꼈다. "누가 하늘누리를 움직일 수 있단 말입니까?" "통제국에서는 항상 하는 일이잖아." "예? 어,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가봐야겠어. 철시로 뭔가를 저격하기는 어려워." "제가 가겠습니다." 다른 목소리가 갑자기 끼여들었다. 맥키 네미 부위였다. 맥키는 말 고삐를 당겨 쥐며 말했다. "암살성 주변에는 레콘들이 깔려있습니다. 중대장님은 여기 계셔야 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니어엘은 잠깐 생각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하늘누리 근방에 대고 활을 쏴야 할지도 몰라. 활은 귀관보 다는 내가 나아." "그래도 안 됩니다. 중대장님은 중대를 지키셔야 합니다." "카루스 부위가 맡으면 돼." 그 때 누군가가 손을 들어올렸다. 니어엘과 카루스, 맥키가 돌아본 곳에는 가리아 릿폴 부위가 창백한 얼굴로 서있었다. "이런 중재안을 내게 되어 좀 유감입니다만, 지금 당장은 아무도 가 실 수 없겠습니다. 적이 오고 있습니다." 니어엘과 부위들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지금껏 하늘을 보고 있느 라 미처 파악하지 못했지만 암살성 주변에 흩어져 있던 레콘들은 한 자리로 집결한 후였다. 하나가 된 사라티본 부대는 지상에 남아있던 제국군 본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긴 고민을 끝낸 힌치오는 쾌적한 기분을 느꼈다.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지만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은 몸에 힘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제국군의 레콘들이 바위를 모을 때부터 힌치오는 한 가지 전술을 떠 올렸다. 제국군 레콘들이 파르바리 계곡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하늘누 리를 통해 그들의 배후로 내려온다면 사라티본 부대는 그 기습을 막 아야 한다. 하지만 제국군은 암살성 안쪽에 준비되어 있는 물을 기반 으로 한 방어체계 때문에 직접 내려오는 대신 투석을 선택했다. 제국 군 레콘들이 내려오지 않는다면 사라티본 부대는 싸울 상대가 없다. 하지만 지상에는 또다른 제국군이 남아있었다. 힌치오는 떨어지는 바위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지상에 있는 인간 병 사들을 공격하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지상에 남아있는 본대에 철저한 공격을 가하면 암살성으로 향하던 하늘누리 를 회귀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일한 문제는 제국군 본대에 막대한 숫자의 소화차가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힌치오는 제국군 레콘들의 전술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물을 준 비한 암살성에 대해 그들은 바위를 던지기로 했다. 그들이 할 수 있 는 일을 사라티본 부대가 할 수 없을 까닭은 없다. 그리고 암살성 주 변에는 바위가 많다. "달릴 필요 없다! 야키보로! 앞으로 뛰어나가는 그 녀석 뭐야? 말 안 들으면 뒤통수라도 부숴버려! 윽.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안 죽었 냐? 아, 다행이군. 그 자식 안 걸리는 곳에 던져놔! 정신 차리면 따 라오라고 해. 자, 우리도 분열인지 뭔지 한 번 해보자. 이 녀석들아! 달리지마!" 레콘들에겐 고통스럽기까지 한 주문이었다. 하지만 힌치오는 사라티 본 부대가 돌격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다. 함부로 돌진한 레콘들이 소화차의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진다면 부대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른 다. 힌치오는 줄을 서서 제국군 본대를 향해 걸어가게 했다. 그에 대 비하여 제국군측에서는 소화차들이 살수관을 높이 쳐들었다. 레콘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감돌 무렵 힌치오는 사라티본 부대를 멈 추게 했다. 그리고 그는 조금 더 복잡한 주문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비시올, 파미, 크락스, 그리고 야키보로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 는 레콘들 중 오십 명 씩을 골라 일렬로 서게 했다. 이백 명의 레콘 들이 일렬 횡대로 서서 제국군을 마주하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 도 돌격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던 레콘들은 이제 힌치오가 돌격을 명령할까봐 걱정했다. 그들 앞쪽에는 살수관이 성난 뱀처럼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하지만 힌치오가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탄성을 내질 렀다. "다 섰냐? 그러면 나머지는 가서 돌 모아와! 앞에 서있는 놈들은 돌 오는 대로 받아서 집어던져!" 제국군 사령부에서 사라티본 부대의 움직임을 보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이를 갈았다. "소화차! 전진! 그리고 헨로 중대!"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뒤쪽에서 시위를 튕기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시허릭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잠 시 후 천 개의 애기살과 이백 개의 바위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암살성의 성벽 위에 서있던 팔리탐 지소어는 사라티본 부대의 움직 임을 보면서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힌치오는 지휘관처럼 행동하고 있었고 사라티본 부대는 지휘를 받는 부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비록 서툴고 굼뜬 동작이었지만 그것은 경험의 부족을 나타낼 뿐 이해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팔리 탐은 자신이 성공할 리 없다고 믿었던 일이 레콘 자신들에 의해 성공 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심회를 느꼈다. 그들은 군대였다. 팔리탐은 가면을 쓸어만졌다. 이제 사라티본 부대에겐 그가 필요없 었다. 팔리탐은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제 사라티본 부대의 참모가 아니라 발케네공 의 가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상실감이 가득했지만 팔리탐은 자신의 판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주저하지는 않았다. 그는 암살공이 있 던 노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팔리탐은 잠깐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 때 팔리탐의 눈에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팔리탐은 그것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숨을 들이쉬었다. 노대 아래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추락 때문에 모양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지만 분 명히 시체였다. 그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추락한 위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팔리탐은 계단을 따라 빠르게 성 벽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팔리탐은 시체 옆에 도달했다. 암살성 내부의 사람들은 모 두 하늘과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팔리탐이 도착할 때까지 시체 곁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팔리탐은 속이 타들어가는 불안감 속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시체의 얼굴을 조심 스럽게 돌려놓았다. 떨어지면서 머리가 깨져 얼굴 한쪽이 움푹 들어 가 있었지만 팔리탐은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각하……" 팔리탐은 발케네 공작의 사체 앞에 고개를 떨구었다. "각하. 돌아가셨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팔리탐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공작의 사체를 똑바로 눕혔다. 그러다가 팔리탐은 공작의 몸에 꽂혀있는 칼 조각을 발견했 다. 그것 또한 충격 때문에 부러진 듯 칼자루는 보이지 않았다. 팔리 탐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 쇳조각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께서 자살하셨군." 팔리탐은 고개를 들었다. 새파랗게 질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스카리 빌파가 락토 곁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리 탐은 스카리의 눈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카 리는 책을 읽듯 무미건조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패배하실 바에는 자결을 선택하셨군. 아버지다운 일이야. 그래. 내 가 알고 자네가 아는 아버지는 그런 성격이셨어. 황제와 타협할 바에 는 전쟁을 선택하셨지. 그리고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자결하 셨고. 맞아. 그것이 아버지답지." 팔리탐은 스카리의 허리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를 황급히 뜯어낸 듯한 흔적이 보였다. 팔리탐은 그것이 빈 칼집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팔리탐은 락토의 몸에 꽂혀있는 칼 조각을 바라보았다. 스카 리의 목소리는 열병에 걸린 사람마냥 새된 목소리로 바뀌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뒷처리를 해야겠지. 발케네의 공작은 이렇게 가셨 지만 발케네는 아직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에 빠져 있지. 누 군가가 도탄에 빠진 발케네를 맡아야 돼. 나는 아버지의 계승권자다. 나 스카리 빌파가 아버지의 책무와 아버지의 빚을 상속할 것이다." 팔리탐이 부스스 일어났다. 팔리탐은 허리를 똑바로 펴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그 표 정 없는 가면이 거북했다. 그의 속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스카리 는 손으로 아래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내가 명령하니 아버님의 유해를……" 팔리탐은 손등을 세차게 휘둘러 스카리의 말을 중단시켰다. 느닷없이 따귀를 맞은 스카리는 몇 걸음 비틀거렸다. 스카리는 볼을 감싸쥔 채 핏발 선 눈으로 팔리탐을 쏘아보았다. 팔리탐은 고개를 가 로저었다. "제가 아닙니다. 아버님을 보십시오." 포악한 말을 쏟아내려던 스카리는 그 요구에 입을 다물었다. 팔리탐 이 다시 말했다. "손가락질은 안됩니다. 무릎을 꿇고 발케네의 공작을 보십시오." 스카리는 그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 팔리탐은 더 이상 말을 낭비하 지 않았다. 그는 스카리에게 성큼 걸어갔다. 스카리는 허리로 손을 가져갔지만 거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팔리탐은 스카리의 멱살을 붙 잡아 아래로 확 끌어내렸다. 스카리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팔리탐은 그의 곁에 나란히 무릎을 꿇으며 팔로는 스카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스카리가 몸부림을 쳤지만 팔리탐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이 멍청아! 슬퍼하는 척해!" 스카리의 몸부림이 멈추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팔리탐의 가면을 바라보았다. 팔리탐이 윽박질렀다. "내가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를 봐!" 스카리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락토의 얼굴을 보자마자 스 카리는 진저리를 치며 눈을 감았다. 팔리탐은 가면 아래에서 코방귀 를 뀌고는 스카리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스카리는 턱으로 가슴을 찌 르게 되었다. 스카리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팔리탐은 다시 일어나 락 토에게 다가갔다. 팔리탐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던 스카리는 실 눈을 떠서 팔리탐을 살폈다. 팔리탐은 락토의 몸을 똑바로 수습했다. 락토의 의복을 바로하던 팔 리탐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락토의 가슴에서 칼 조각을 뽑아내었다. 스카리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킬 수 있었다. 팔리탐은 빼낸 칼 조각을 자신의 소매 속에 밀어넣고는 락토의 옷 앞섶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팔리탐은 일어섰다. "예. 노대 아래로 몸을 던지셨군요." 스카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팔리탐은 약간 냉기가 감도는 어조로 말 했다. "공작님께서 이렇게 가신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만 다행히 계승권 자가 이렇듯 계시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새 공작님의 명령은 무엇입 니까?" 스카리는 입을 열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주저하자 팔리 탐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 각하. 사람들을 불러모아 아버님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당연 한 명령이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부친을 잃은 슬픔으 로 정신을 가다듬기 어려우실 거라는 점 이해합니다만 새 공작님께서 는 이 전쟁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스카리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전쟁을 끝내기를 원하십니까, 각하?" "전쟁을…… 그래. 전쟁을……" "항복입니까?" "항복을……" "물론입니다. 각하. 우선은 휴전을 요청해야겠지요. 아버님의 죽음 을 황제에게 알리고 휴전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리고 차차 항복을 의 논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네 아버지가 모두 뒤집어써줄 거다. 개 자식아. 손가락으로 네 눈이라도 찔러서 사람들이 왔을 때 눈물을 보 여라. 그러면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스카리는 팔리탐이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 다. 똑바로 누워있는 아버지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스카리는 자신 의 손을 보았다. 팔리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스카리는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스카리는 그 손으로 자신의 눈꺼풀 위를 찔렀다. 엄청나게 아팠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부악타의 외침을 들은 치천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아실은 머 리를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아실의 얼굴은 창백 했고 또한 땀에 젖어있어 마치 익사체 같았다. 아실은 목으로 으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늘누리를 응시했다. 그 순간 부악타는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하늘누리가 위아래로 크 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부악타는 가장 가까운 지붕을 부여잡았다. 하 지만 부악타가 지붕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그 집은 레콘을 위 한 집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렇게 튼튼하지도 않았다. 부악타는 철궁 과 지붕 더미에 깔리게 되었다. 분노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환상계단 위에 서있던 치천제 또한 그 진동을 피할 수 없었다. 황제 는 두 손으로 땅을 짚어야 했다. 아실이 사납게 말했다. "땅이 그립지?" 치천제는 고개만 들어 아실을 쳐다보았다. 아실 또한 엎드린 자세였 지만 그것은 볼품없다기보다는 민첩한 맹수처럼 보였다. 치천제는 아 실의 입 안에 송곳니가 자라고 있지 않나 살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 다. 아실이 말했다. "땅에 발을 딛지 않는 것이 자랑이야?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 을 통치하는 황제가? 법 위에 있다는 것이 즐거워? 법으로 사람들을 통치하는 황제가?" 치천제는 아실이 하늘누리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사 방이 막힌 방 안에 있는 천경유수나 데라시는 하늘누리의 외관을 바 깥에서 볼 수 있는 아실에 비해 불리했다. 그리고 치천제는 아실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분노에 빠져있다는 것 또한 인정했다. 미증유 의 정신억압자일지도 모르는 상대와 마주섰을 때 아실은 이미 의식의 상당 부분을 공포에 잠식당한 상태였고 그런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가혹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쉬크톨과 철시의 공격은 그런 아실을 더 큰 노여움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렇게 해서 나머지를 몽땅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거지? 땅에 사는 것들, 법 아래에 있는 것들! 네멋대로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놓고 그 하나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차없이 잘라내지…… 그 빌어먹을 정신억 압으로 말려죽였지!" "그래서?" 아실은 하나 뿐인 눈을 치켜떠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을 짐이 말해볼까. 다른 것들은 따로 살아 야 한다는 거지? 레콘들은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유사 이래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정체(政體)를 고안해 내고 확립한 다음 다시 제국에 통합한다. 아마 이것이 분리주의지?" "그래!" 황제는 흘러내리는 흑사자 모피를 끌어당겼다. "분리된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느냐?" "무슨 소리야?" "지상에는 네 선민종족이 있다. 레콘, 인간, 도깨비, 그리고 나가가 있지. 그런데 나가는 네가 제안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한 번 겪었다. 그들은 한계선을 통해 다른 세 종족과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 정체를 확립했지. 각 가문을 장악한 가주들로 구성되는 가주평의회가 도시 단위로 그들을 다스렸지. 네가 제안하는 일은 이 미 나가들에 의해 실험되었고, 그 결과도 나와 있다. 남과 북으로 분 리되었던 세계는 어떻게 되었지?" 아실은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제는 날카롭게 말했다. "대확장 전쟁이 벌어졌지." 소화차에 바위가 부딪혔다. 수조가 박살나며 튀어오르는 물보라가 마치 피처럼 보였다. 치솟아오르는 목재와 수레바퀴들이 하늘을 어지 럽히다가 대지를 강타했다. 소화차를 밀고 있던 병사들은 이 순간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소화차가 상대해야 할 것은 어차피 불 아니 면 레콘이다. 사람 머리통 만한 바위에서 황소의 몸통 만한 바위들까 지 온갖 바위들이 날아들었지만 각 소화차를 지휘하던 상전사들은 고 함을 내질렀다. "멈추면 죽는다! 달려! 밀어! 가서 물을 뿌려야 산단 말이다!" 소화차 위에 뛰어올라 칼을 휘두르며 독려하던 상전사 한 명이 날아 든 바위에 맞았다. 머리가 으스러지며 상전사는 뒤로 공중제비를 넘 었다. 상전사는 즉사했지만 그 몸은 살았을 적엔 한 번도 할 수 없었 던 복잡한 묘기를 죽은 채 보여주었다. 소화차를 밀던 병사들은 질겁 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 위로 상전사들의 외침이 채찍처럼 내리떨 어졌다. "가야 해! 멈추지마!" 그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사라티본 부대의 살아있는 투석기라고 할 만한 레콘들도 난처한 꼴 을 겪고 있었다. 소낙비처럼 날아온 애기살들이 그들의 사지를 매섭 게 파고들었다. 레콘의 밝은 눈은 애기살들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래 서 그들은 들어올린 바위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그 때문에 투석률은 많이 떨어졌다. 기어코 가장 그악스럽게 달려온 소화차가 살수 가능 거리까지 좁혀들어왔다. 소화차 위에 있던 상전사는 노기로 턱을 떨 며 살수관을 흔들었다. "살수!" 하전사들이 양수 손잡이를 부서져라 내리눌렀다. 강력한 수압은 좁 은 살수관을 통과하며 더욱 거세어졌다. 물줄기가 레콘들을 향해 뿜 어져나갔다. 물줄기가 목표한 곳에 서있던 레콘들은 놀라운 순간 동작으로 그것 을 피했다. 하지만 그들이 피한 곳은 뒤쪽이었고 그 때문에 돌을 들 고오던 레콘들과 연쇄 충돌이 일어났다. 거친 욕짓거리와 비명이 터 져나왔다. 균열이 일어난 곳은 레콘 크락스가 지휘하던 곳이었고 크 락스는 격분하여 그 소화차에 바위를 집어던졌다. 물을 뿌릴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고 바위는 거대했다. 소화차는 사지를 뚫고 힘겹 게 가져온 물을 채 1할도 쏟아내지 못한 채 박살났다. 하지만 크락스 는 만족할 수 없었다. 부서진 소화차에서 물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휘하 레콘들에게 더 큰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크락스는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힌치오 또한 그 모습을 보았다. "뒤로! 계속 바위를 던지면서 뒤로 물러나!"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뒤로 물러섰다. 거리가 멀어지는 만큼 죽 을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화차들은 기를 쓰고 그들을 따라 전진했다. 아실은 움켜쥔 주먹으로 환상계단을 후려쳤다. "레콘은 나가가 아니야!" "어떻게 다르지?" "레콘에겐, 레콘에겐 숲이 필요없어! 나가들처럼 지상을 뒤덮는 숲 을 원하지는 않는단 말이야!" "나가들에게도 필요없었다." 아실은 호흡을 멈췄다. 그녀는 황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녀가 짐작하는 이야기를 했다. "2차 대확장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도 나가들에겐 이미 키보렌이라는 광대한 밀림이 있었어. 그들만의 숲이었지. 왕이 없었던 북부가 그 숲을 빼앗아갈 리도 없었고. 하지만 나가들은 신의 힘을 훔쳐서 한계 선을 넘었어. 아실. 네가 말하는 분리주의는 아무리 보아도 3차 대확 장 전쟁을 위한 준비 작업처럼 보이는군. 레콘 대 다른 세 종족의 전 쟁 말이야. 레콘들은 신의 힘을 훔칠 필요가 없겠지. 그들 자신이 힘 이고 무기니까. 저기를 봐." 아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치천제는 팔을 뒤쪽으로 뻗었다. "저기를 봐. 저게 네가 만들려고 하는 세상이니까." 아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하늘치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계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먼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라티본 부대와 제국군 본대의 전투였다. 환상계단의 속도가 일정해졌다. 그것은 아직도 앞으로 움직이고 있 었지만 이제 그 속도는 변화되지 않았다. 황제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 다. "분리된 것은 반목한다. 너는 레콘들을 사랑하지. 레콘들에게 정말 그들 외의 다른 세계와 끊임없이 싸우는 운명을 주려는 거냐? 그것이 타이모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실은 멍하니 전장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선 황제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실이 그 손을 마주잡기엔 거리가 멀었지만 그 동작의 의 미는 분명했다. "일어나라, 아실." "엎드려!" 아실이 날카롭게 외친 순간 하늘누리가 다시 경련하듯 속도를 변화 시켰다. 황제는 비틀거리다가 주저앉았다. 아실이 고개를 돌려 황제 를 노려보았다. "그런 속 보이는 거짓말로 나를 속여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치천제는 목 주위의 비늘을 조금 세웠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아 실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아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건 레콘의 싸움이 아니야. 너와 발케네공의 싸움이지. 레콘의 악 몽은 바로 네가 만드는 세상이야! 싸움? 세상과 싸워? 레콘이 싸움이 야! 레콘은 숙원의 전사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의 증오를 위해 싸우는 것은 레콘이 아냐! 네가 만드려는 세상, 모든 것 이 비슷비슷한 세상에서 레콘들이 다른 자들과 비슷해진다면, 황제를 위해 싸우고 공작을 위해 싸우는 자들과 마찬가지가 된다면 그것이 바로 비극이야! 저걸 보라고? 저걸 봐야 할 것은 바로 너야! 저것은 네가 만드려는 세상이니까!" 황제는 아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황제는 앉은 채 쉬 크톨을 다시 뽑아들었다. 아실은 격분하여 하늘누리를 뒤흔들었다. 바질튼의 남작 친 피타오는 말이 힘들어하는 것을 느꼈다. 볼존 스베이크의 사체가 돌아온 직후 암살성에서 함께 도망쳤던 무 리들은 하나둘씩 흩어졌다. 아직 많은 무리가 함께 달리고 있었지만 친 피타오는 바질튼으로 가기 위해선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는 말을 멈춰세웠다. 도망자 무리들은 친 피타오를 흘끔 쳐다 보았지만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달려왔던 방 향을 유지하며 계속 도주했다. 친 티파오는 도주자 무리들에게 방해 가 되지 않도록 옆으로 멀찍이 비켜섰다. 남작의 기수는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피타오 남작은 기수에 게 깃발을 높이 들어올리도록 명령했다. 말이 아닌 두 발로 달리는 바질튼의 보병들은 뒤쳐져 있었다. 친 피타오는 뒤쳐진 보병들이 따 라오기를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암살공이 패배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이제 피타오 남작은 자신 의 앞날을 고민해야 했다. 진작 도망쳤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암살공 의 소환을 받고 바질튼을 떠날 무렵 그의 계획은 소환에 응했다는 사 실만 고지한 다음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바질튼으로 돌아가는 것이었 다. 하지만 사라티본 부대의 모습을 목격한 피타오 남작은 다른 사람 들과 마찬가지로 그 모습에 매료되어버렸다. '인생은 도박이다. 그리 고 많은 것을 걸수록 이겼을 때 돌아오는 것 또한 크다. 어쩌면 공작 에게 승기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그의 곁에 있어야 승리의 영 광을 조금이라도 나눠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일을 다 안다는 듯 이 똑똑한 소리를 하는 자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피타오 남작은 그 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를 저질렀다. 친 피타오는 어떻게 제국을 이길 수 있다는 황당한 소리를 믿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친 피타오와 그의 병사들은 별다른 전공을 세우 지 못했다. 전투는 대부분 사라티본 부대에 의해 수행되었다. 한 때 는 그런 저조한 전적이 전리품 분배에서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초조해했지만 이제 남작은 그 때문에 살아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공작이 소환해서 어쩔 수 없이 갔던 것입니다. 차마 폐하께 대 적할 수 없어서 제 병사들에게는 전투 행위를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확인해 보옵소서……' 상념에 잠겨 있던 남작의 눈에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피타오 남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나무 다 리가 있었다. 판자와 목재로 제법 잘 만들어진 튼튼한 다리였다. 너 무도 의외의 장소에 뜻밖의 물건이 있는지라 남작은 그것을 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작은 그것이 떨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마치 가랑잎처럼 유유히 떨어진 나무 다리는 땅에 부딪혔다. 그리고 가랑잎 수만 장이 모여도 이루어낼 수 없는 굉음을 내며 박살났다. 땅이 울리는 그 충격에 말이 발길질을 했고 남작은 가까스로 제정신 을 차렸다. 결사적으로 말에 매달린 남작은 도망치려는 말을 달래며 황급히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작은 잠깐 동안 자신이 눈을 뜬 채 악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늘누리가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날아오고 있었다. 아래로 떨어져 남작의 말을 기겁하게 한 것은 그 옆구리에 붙어있던 나루터들 중 하 나였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6-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5-08 조회수 : 1908 피를 마시는 새 16. 늦은 것과 낮은 것 - 3 맥키 네미 부위는 9014 독립중대, 일명 헨로 중대의 자랑인 애기살 의 공격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라티본 부대의 모습에 조바심 을 느꼈다. 호의적인 전략가라면 전원 레콘으로 구성된 사라티본 부 대의 공격 효율을 그 정도까지 떨어뜨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전과라며 칭찬하겠지만 맥키 네미는 그런 칭찬에 관심이 없었다. 제국군의 레 콘들은 모두 하늘누리로 올라가 있고 돌격하는 발케네의 레콘을 저지 할 수 있는 것은 애기살과 소화차 뿐이다. 그 둘만으로 궤멸적인 타 격을 입히지 못한다면 호의적인 칭찬은 추도사로나 사용될 것이다. 하지만 네미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는 않았다. "젠장, 더럽게 안 자빠지네. 쏴! 오늘 레콘이 찰과상으로 죽는 꼴 한 번 보자! 계속 쏴!" 다른 부위들도 병사들을 대하는 네미의 태도에 공감했다. 가리아 릿 폴 부위가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럽혀서 죽이는 건 어때?" "둘 다 멍청하긴! 쏜 데 또 쏘면 돼. 한 군데만 계속 쏘라고!" "이런 나약한 것들 같으니라고. 잔인해질 필요가 있어! 침 발라서 쏴!" 9014 독립중대의 부위들은 실로 다채로운 대(對)레콘 사법의 오의들 을 창안해내어 병사들에게 전파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만한 태 도도 전파했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후자에 있다. 병사들 모두는 승 리에 대한 확신으로 시위를 잡아당겼다. 부위들과 병사들의 모습을 본 니어엘은 빙긋 웃으며 활을 잡아당겼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온작을 했을 때, 니어엘은 가슴 한 구석이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니어엘은 활을 내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눈썹에 차갑게 매달렸다. 니어엘은 눈썹을 문 질렀다. 미끈거리는 손가락을 무심하게, 혹은 초조하게 비벼 문지르 며 니어엘은 하늘을 살폈다. 그리고 니어엘은 자신이 받은 인상이 잘 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하늘누리가 예상 외로 작았다. 하늘누리의 거대한 크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다. 아 직 그 인상적인 거대함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이제 하늘누리는 말을 타고 달려도 한참 걸릴 거리에 있었다. 암살성에 레콘들을 떨어뜨리 기는커녕 조만간 파리조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나 싶은 거리였다. 뭔가가 엄청나게 잘못되고 있었다. 하늘누리는 제국군을 남겨둔 채 북녘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니어엘은 입안이 말할 수 없이 쓰다고 생 각했다. 손 안의 활이 낯설었다. 그녀의 땀이 묻어 미끌거리는 활은 징그러운 동물 같았다. 니어엘은 활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두 손으 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호흡이 터져나왔다. 니어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외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의 지휘를 받는 부하 장병들이 있었다. 이곳에서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니어엘은 그 어떤 단어보다 부하 장병들의 마음을 휘저어버 리게 될 단어들을 입 속으로 외쳤다. '아버지, 어머니!' 니어엘은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하늘누리의 통제에 잠깐의 이상이 생긴 것이다. 어쩌면 멈추는 기능에 작은 문제가 생겨 정지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곧 회복되고 하늘누 리는 돌아올 것이다. 니어엘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슴 이 두근거리는 것은 쉬 멈추지 않았다. 철사로 가슴을 감아놓은 것 같은 답답함에 니어엘은 앞섶을 잡아당겼다. 익숙한 활쏘기를 하며 다른 곳에 신경을 쏟고 싶은 마음이야 한량 없었지만 니어엘은 애기 살을 쏠 수 없었다. 흔들리는 마음으로 쏘기에 애기살은 지나치게 위 험한 무기다. 그래서 니어엘은 고함을 지르며 다른 부위들처럼 부하 들을 독전하기로 했다. 도르 헨로는 사태가 심상찮다고 생각했다. 하늘누리는 오래 전에 멈 췄어야 했다. 하지만 하늘누리는 멈추기는커녕 여러 차례에 걸쳐 속 도를 높이고 있었다. 도르 헨로는 도시 외곽쪽에서 들리는 굉음도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그 굉음은 하늘누리의 비정 상적인 움직임과 분명히 연관이 있을 것이다. 도르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어쩌면 나루터가 떨어졌을지도 모르겠군." 도르 헨로는 마당에 앉아 있었다. 집 안에서는 온갖 물건들이 떨어 져 위험했다. 어쩌면 집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르는 하늘누리의 속도가 변할 때마다 삐걱거리는 지붕을 보며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상황은 지진에 가까운 것이 니까. 모디사 헨로는 그의 곁에 앉아 도르의 팔을 끌어안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집안의 사용인들이 주저앉아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 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 사용인들을 바라보던 모디사가 지나가는 말 처럼 말했다. "아래로 내려가요." "뭐?" 모디사는 도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래로 내려가요. 아래는 그룸성이죠. 부냐가 우리를 환영해줄 거 예요." 도르는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최소한 백작부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소녀가 있었다. 권 력욕이나 허영심과는 조금 다르다. 소녀는 많은 주의력 부족한 부모 들이 행하는 쓸데없는 짓의 희생자일 따름이다. 소녀의 부모는 소녀 가 공작부인이나 후작부인, 최소한 백작부인은 될 거라고 말하곤 했 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딸에게 예의 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동기 부여 쯤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고, 혹은 그저 계급 개념에 기초한 애정 표현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다행 히 그런 말을 듣고 자라난 많은 아이들은 인생의 난이도를 체감하게 될 무렵에는 어린 시절의 꿈을 가볍게 무시하는 방법도 배우게 된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배우지 못하거나 배우기를 거부하는 일부 아이들 도 있다. 그런 아이들은 어린 시절에 주입된 성인상에 걸맞지 않는 성인으로 자라났을 경우 어떤 성취에서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고 심 지어 원망할 상대를 찾지 못할 경우 죄의식마저 느끼게 된다. 그리고 모디사는 그런 아이였다. 자작부인이 되었다는 것은 모디사에게 있어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직 사랑의 술에 세월의 물이 적게 들어가 그 농도가 짙 던 무렵 도르는 모디사의 우울함에 당황해하고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모디사는 그것을 죄인에게 바치는 동정으로 해 석했다. 도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모디사가 그를 원망하지 않 았다는 것이다. 도르가 생각하기에 자작부인이 된 것이 불만이라면 남편을 원망하는 것이 평범한 반응일 것 같았다. 하지만 모디사는 자 신을 원망하고 자신을 증오했다. 그리고 딸이 자신의 실패를 되풀이 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모디사 자신의 해석에 따르자면 모디사와 니어엘이 일으킨 갈등의 원인은 모정이었다. 니어엘이 궁술에 좋은 자질이 있다는 것이 밝혀 졌을 때 모디사가 보인 반응은 다른 말이 필요 없는 발광이었다. 공 교롭게도 당시 니어엘은 어머니의 말을 반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쯤 으로 생각하는 나이였다. 니어엘은 차갑게 어머니를 무시하고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좀 더 나이를 먹은 다음 니어엘은 자신의 행 동을 후회했다. 니어엘은 죄의식을 가지고 어머니를 대했고 그 태도 는 둘의 관계를 호전시키기는커녕 더욱 냉각시켰다. 모디사의 모든 열망이 그대로 체화된 것처럼 자라난 부냐가 대장군 엘시 에더리와 약혼하게 되었을 때, 물론 모디사는 뛸듯이 기뻐했지만 도르는 속으 로 그보다 더 기뻐했다. 대장군의 장인이 된다는 것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의 가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 다. 실제로 모디사와 니어엘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호전되기까지 했 다. 부냐를 대장군에게 소개한 것이 니어엘이기 때문이다. 도르는 어 쩌면 니어엘이 바로 그것을 노리고 대장군에게 부냐를 소개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이 들 때마다 도르는 그것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어머니에게 괴롭힘 당할 때 그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던 딸이 그 자신이 방치해둔 가정의 평화를 홀로 힘겹게 회 복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도르는 견디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희망의 날개짓이 클수록 추락 거리는 늘어난다. 부냐가 태위청에 끌려간 이후로 도르는 모디사가 정상인인 것처럼 대하려 애썼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디사는 두 딸 모 두가 자신처럼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흔들리는 하늘누리 위에서, 도르는 아내를 뿌리치고 싶다는 생각과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을 동시에 느꼈다. 도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모디사 가 정상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모디사의 말이 합리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하늘누리가 위험에 빠진 것이라면 대피해야겠지. 그리고 대피한다 면 가장 가까운 곳은 암살성이고, 그곳에는 우리 딸도 있지. 일리 있 는 말이오." 말해놓고 보니 정말 합리적인 말처럼 들렸다. 도르는 반대할 명분을 떠올릴 수 없었다. 피로감 속에서 도르는 그 말에 반대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느꼈다. 황제는 그의 딸을 가두고 거듭된 탄원을 모두 거부했다. 도르는 당황하며 황제에 대한 애정의 발로를 찾아보려 했 지만 그런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하늘누리가 진동했다. 사용인들 무리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신경이 곤두선 모디사가 거친 호흡소리를 내며 그의 팔을 부여잡았 다. 도르는 그 모든 것이 싫었다. 그는 평화를 원했다. 그 외의 모든 것을 지불하고서라도 얻고 싶을 만큼. "하지만 내려갈 방법이 없소. 하늘누리는 움직이고 있소. 환상계단 이나 승강기, 그 무엇으로도 내려갈 수가 없소." 모디사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도르는 덜컥 겁이 났다. 그 는 탐색하는 눈으로 아내의 얼굴을 살폈다.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모 디사가 말했다. "딱정벌레가 있잖아요." 말을 하면서 모디사는 하늘 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올린 도르는 하늘을 날고 있는 많은 딱정벌레들을 발견했다. 하늘누리의 갑충사 전원이 하늘로 날아오른 것 같았다. 도르가 질문했다. "갑충사들? 그들이 우리를 태워준단 말이오?" 모디사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물론이죠. 우리는 부냐의 부모니까." 도르는 그것이 알맞은 대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때 하늘누리가 다시 거세게 진동했다. 도르가 진저리를 칠 때였다. "이봐요, 거기! 헨로 남작입니까? 위를 보십시오!" 도르 헨로와 모디사 헨로는 놀란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율형부 사 사라말 아이솔이 허공에 떠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 율형부사. 어떻게 거기 있는 건가?" 사라말은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승천한 티나한처럼 위로 뻗는 환상계단을 상상했지요. 당신들 도 그러는 것이 좋을 겁니다. 뭔가가 떨어지는 높이보다 더 높은 곳 에 있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대단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사용인들 중 몇 명이 하늘로 뛰어올라가는 것을 보며 도르 헨로는 안타까운 표 정을 지었다. 그가 말을 하려 할 때 사라말이 사태를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상상을 못하시는군요. 잠깐 기다리십시오. 곧 구해드 리겠습니다." 도르는 사라말이 어떻게 자신을 구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사라말이 허공을 빠르게 뛰어가는 바람에 그는 질문할 수가 없었다. 도르 헨로는 걱정 반, 희망 반의 얼굴로 아내를 끌어안았다. 파라말 아이솔은 자신이 어떻게 유수부 경비국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물었다면 파라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애매한 미소뿐일 것이다. 그가 경비국까지 이동하면서 사용한 수단은 주로 쓰러지고 미끄러지고 구르는 것이었으며 걷거나 달린 기억은 별로 없 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주변으로 계속해서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렸 으며 발 아래는 몸서리쳐지도록 흔들렸다. 그런 간난신고 끝에 경비국에 도달했지만 파라말은 끝내 경비국에 도달하지 못했다. 유수부차사가 경비국이 있는 위치에 도달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경비국이 없었다. 무너진 폐허뿐이었다. 파라말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발 아래가 조금이라도 평온했 다면 파라말을 발을 굴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늘누리는 그런 행 동을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진동하고 있었다. 전진 속도를 변화시 킴으로서 그 탑승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던 하늘누리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행동에 좌우의 진동을 추가한 상태였다. 파라말은 하늘치가 춤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파라말은 반파된 벽을 짚은 채 정신을 뒤덮은 혼란을 걷어내려 애썼 다. 일의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다. 하늘 누리가 파괴되는 한이 있어도 황제는 구출해야 한다. 파라말은 일단 황제의 상태를 살피기로 했다. 그리고나서 파라말은 자신의 아둔함에 경악했다. 파라말은 자신의 착상을 시험해보았다. 곧 그의 앞에 넓은 경사로가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뻗어올라간 경사로는 호를 그리며 하늘누리 앞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파라말은 자신이 온갖 고생을 하며 경비국 에 온 사실을 누가 알까 두렵다고 생각하며 경사로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파라말은 뜻밖의 상황에 놀랐다. 하늘치가 진동할 때마다 그 가 만든 경사로 또한 진동했기 때문이다. 파라말 아이솔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환상계단이 다른 사람에 게 영향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는 공리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파라 말에게 있어 하늘치의 움직임에 자신의 환상계단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꽤 당혹스러운 규칙 위반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조금 후 파라 말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상계단은 하늘치에 속하는 것이다. 하늘치가 없는 곳에서는 환상계단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하늘치가 움직이면 환상계단 또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의 그 지점에 도달했을 때 파라말은 충격을 받고는 멈춰섰다. 그는 자신이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색 에 잠기기엔 상황이 지나치게 나빴다. 파라말은 자신이 멈춰섰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었다. 최우선순위는 황제의 안위를 확보하는 것 이다. 파라말은 상념을 집어치우고 다시 경사로 위를 달렸다. 하늘누리 위 높은 곳에 이르자 파라말은 주위를 날아다니는 많은 딱 정벌레들을 볼 수 있었다. 파라말은 하늘누리의 진동에 딱정벌레가 겁을 먹자 갑충사들이 전부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라고 판단했다. 파 라말은 그들에게 신호를 보내 자신을 돕게 할 방법이 없을지 생각해 보았다. 소리는 통하지 않을 테니 몸짓밖에 없었다. 그는 팔을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딱정벌레는 없었다. 대부 분은 너무 멀리 있었고, 그를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딱정벌레 는 전부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파라말은 그 딱정 벌레들이 하늘치 앞쪽의 허공에 주의를 쏟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마 황제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파라말은 딱정벌레의 주의를 끄는 것을 포기하고는 경사로를 따라 달렸다. 조금 후 동그스름한 경사로가 아래를 향하기 시작했다. 파라 말은 자신이 지나치게 급한 경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유수부차사 는 앞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해 상체를 뒤로 한껏 젖힌 채 경사로 를 따라 내려갔다. 그 때 그의 눈에 금군 부악타의 모습이 보였다. 부악타는 철궁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파라말은 그가 도대체 무엇을 겨냥하나 알아보기 위해 앞쪽을 바라보았다. 파라말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질주하는 하늘누리의 앞쪽 허공에는 치천제가 앉아있었다. 부정의 외침을 내뱉으려던 파라말은 문득 그 허공에 치천제 외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그마한 인간 소녀가 엎드린 자세 로 허공에 떠서 치천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부악타는 철궁을 만작했다. "하지마!" 소녀의 가느다란 외침이 들려온 순간 파라말은 조금 전 그를 괴롭혔 던 진동을 다시 느꼈다. 하늘누리는 왼쪽으로 출렁하듯 움직였다. 파 라말은 경사로에서 벗어나 떨어질 뻔했다. 파라말은 황급히 몸을 뒤 집어 경사로 위에 엎드렸다. 그 때문에 파라말은 완전히 엉뚱한 방향 으로 날아가는 부악타의 철시를 보지 못했다. 철시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던 치천제는 뒤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부악타는 그 뜻을 이해했다. 자꾸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철시는 자 칫하면 주위를 날아다니는 딱정벌레나 황제 자신을 맞출지도 모른다. 부악타는 분노에 벼슬을 떨면서 철궁을 내렸다. 치천제는 왼쪽 무릎과 왼손으로 환상 계단을 짚은 채 환상벽을 주위 에 펼쳤다. 황제의 의지의 의해 그녀만이 볼 수 있는 벽이 주위에 나 타났다. 황제는 그 위에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의 모습이 나타나길 바랐다. 그리고 그 소망은 그대로 구현되었다. 그곳에는 부서진 기계 사이에 쓰러져 있는 지알데 락바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하늘누리의 격한 진동 때문에 무너진 기계들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잔해 사이에서는 뜨거 운 피가 바닥을 적시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거나 일어날 일일 수 있다. 혹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황제가 지알데에게 어떤 기대를 품는 것을 관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기엔 충분한 영상이었다. 그녀의 천경유수에게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황제는 환상벽 에 비치는 모습을 바꿨다. 환상벽 속에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은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모습이 었다. 반쯤 엎드린 자세로 서있는 데라시는 몹시나 당혹한 표정으로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벽난로 안쪽을 본 황제는 데라시의 당황 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벽난로의 불이 꺼져 있었다. 굴뚝에서 떨어져 내린 무엇인가가 불을 꺼트린 듯했다. 아직까지는 방안의 온기가 남 아있지만 그것은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지알데와 데라시에게 닥친 위기를 차례로 본 치천제는 환상벽을 거 두었다. 더 이상 볼 사람이 없었다. 하늘누리를 관장하기에 하늘누리 조작의 비밀을 알고 있는 천경유수가 죽었고 황제가 알려주었기에 하 늘누리 조작의 비밀을 알고 있는 데라시가 쓰러졌다. 혹은 그와 유사 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아실을 막을 수 없었다. 황제는 억지로 허리를 폈다. 발을 딛고 있는 환상계단이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황제는 용케 똑바로 설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을 두르고 있던 검은 모피가 살아있는 것인 양 우쭐거렸다. 치천제는 외 쳤다. "이 우스꽝스러운 짓을 그만둬! 아실!" 아실은 여전히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홱 젖혀 황제를 올 려다보았다. "엎드리라고 했어!" 하늘치가 위아래로 진동했다. 황제는 춤을 추듯 휘청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황제는 꼿꼿하게 서서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의 등 뒤에 서는 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산 주위에 엉겨있다면 산 안개라고 불 렸을 낮은 고도의 구름이 하늘치에게 덮쳐오고 있었다. 하늘누리가 구름 속에 뛰어들었다. 용해시킨 진주의 흐름, 들고양이 뛰어든 닭장, 얼음이 벗어놓은 허 물, 굳힌 햇빛, 걷어채인 국화, 만년설을 태운 연기, 시든 번개, 번 진 백작약, 구름이 날아왔다. 스며들고 흩어지고 엉겨붙었다. 빠르게 날아온 구름 덩이들이 그들의 곁을 숨가쁘게 스쳐지나갔다. 구름이 떨친 소매가 태양을 뒤덮었다. 그러자 태양은 하얀 눈동자로 바뀌었 다. 치천제는 숨을 죽였다. 비늘을 파고드는 바람이 매서웠다. 낮은 구 름이었지만 그 속엔 비가 될 것인지 심사숙고하는 비의 씨앗들이 가 득했다. 그것이 흑사자 모피를 젖어들게 했다. 황제는 무거워지고 차 가워지는 모피를 끌어올렸다. 바람이 그런 그녀의 노력을 비웃었다. 고함으로 속삭이는 바람 속에서 황제는 갑자기 자신이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꽤 여러 번의 속도 변화 때문에 알아차 리지 못했지만 하늘누리는 이제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었다. 황제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았다. 산맥이 흘렀다. 늪인지 숲인지 알 수 없는 푸른 멍자국 같은 것이 구름 사이로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잿빛 황야가 격류처럼 하늘 누리 뒤편으로 흘렀다. 평야보다 더 작은 것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속도가 빨랐다. 치명적인 속도였다. 아실이 신음했다. 강력한 풍압 때문에 아실은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바람은 망치 처럼 그녀의 등을 쾅쾅 때렸다. 속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환상계단에 서 잠깐이라도 몸이 떨어지면 그대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고통 속에서 아실은 이상하다는 듯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 는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는 모습으로 꼿꼿하게 서있었다. 치천제의 모습을 살핀 아실은 조금 후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실은 치천제와 같은 행동을 했다. 아실은 천천히 일어서서 황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환상계단에 조 작을 가했다. 그녀는 환상계단이 자신의 몸을 둘러싸도록 했다. 황제 가 쓰러지지 않는 것은 그녀 또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아실의 몸 이 환상계단에 의해 고정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하늘누리 앞쪽에 있던 갑충사들은 아실을 공격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아실과 하늘누리의 이상 움직임 사이의 연관성을 알지 못했고,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실이 황제를 마주 보고 있는 광경이었다. 만약 그들이 대화 중이라면 끼여드는 것은 황 제에 대한 실례가 될 터였다. 그들은 하릴없이 그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기만 했다. 그러나 뒤쪽에 있는 갑충사들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본 것은 어떤 인간 남자가 허공에 떠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었다. 남자에게 다가간 갑충사들은 그 남자가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라말은 가까이 다가온 갑충사들에 게 아래를 가리켰다. 하늘누리 위에 앉으라는 뜻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는 레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딱정벌레들 중 몇 마리가 레콘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섰다. 갑충 사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폈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광경이 보였다. 레콘들은 어디론가 달려가서 하늘누리의 시민들을 데 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시민들을 갑충사 뒤에 태웠다. 다시 날아 오른 딱정벌레는 시민을 태운 채 땅쪽으로 날아내려갔다. 곧 더 많은 딱정벌레들이 하늘누리 위로 내려섰다. 레콘들은 거센 바람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시민들을 운반했다. 더 많은 딱정벌레들 이 시민들을 태운 채 땅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땅에 시민을 내려놓은 딱정벌레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갑충사를 제외하면 딱정 벌레에는 한 사람 정도가 더 탈 수 있었고 따라서 그것은 시간이 많 이 걸리는 대피작업이었다. 실제로 대피 작업은 여섯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갑충사들은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다. 그들은 쉴새없이 하늘누리와 땅을 왕복하며 시민들을 대피시켰다. 그 동안 하늘누리가 계속 움직 였다. 첫번째 대피자가 내려선 곳은 파리조 북부였지만 마지막 대피 자가 내려선 곳은 라호친 남쪽이었다. 공기가 말할 수 없이 차가운 그 땅에서 누적된 피로에 지친 딱정벌레는 더 이상 날아오르지 못했 다. 라호친의 싸늘한 눈밭에 쓰러져 죽은 딱정벌레들도 많았다. 하지 만 하늘누리 위에는 아직도 오백여 명 남짓한 시민들과 레콘 여단병 들이 남아 있었다. 레콘들은 갑충사와 함께 딱정벌레에 탈 수 없을 만큼 무겁기 때문이다. 하늘누리 위에 앉아있던 사라말은 우울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 다. 하늘누리의 미친 질주는 계속되고 있었고 더이상 딱정벌레는 돌 아오지 않았다. 주위에는 굳은 얼굴의 레콘들과 시민들이 서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지만 라호친은 백야를 볼 수 있는 땅이었고, 그래서 아직 주위는 밝았다. 그리고 추웠다. 사라말은 선 채 얼어죽을 것 같 다고 생각했다. 레콘 여단병들이 바람 불어오는 쪽에 어깨를 붙인 채 서서 바람을 막아주었지만 시민들은 견딜 수 없이 추웠다. 그들은 당 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고, 사라말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늘누리 앞쪽에서는 파라말이 추위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 그를 발견한 부악타가 바닥에 앉아 그를 끌어안고 있었지만 하늘누리 앞쪽의 그곳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 별로 없었다. 파라 말은 미친 듯이 떨고 있었고 자신이 더 떨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 했다. 부악타의 뒤편에는 다른 금군들이 모여서 있었다. 지난 여섯 시간에 걸쳐 하나 둘 도착한 금군들은 바람에 밀리지 않기 위해 바닥 에 앉아서 황제와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황제를 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환상계단을 만들 줄 아는 금군들이 몇 번이나 황제 곁으로 뻗어가는 환상계단을 만들었다. 그들은 정면으로 불어닥치는 바람에 맞서 황제에게 다가가 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늘누리가 진동하여 그들을 쓰러뜨렸 다.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정확한 방해가 계속되자 금군들은 더 이상 황제 구출을 시도할 수 없었다. 바람 소리가 짐승의 비명 같았다. 살을 찢어발기는 삭풍 사이로 하 늘누리의 눈 먼 질주는 계속되었다. 누구보다도 바람에 노출되어 있는 아실은 꼿꼿하게 선 채 꿈쩍도 하 지 않았다. 그녀의 옷과 머리카락에는 얼음조각들이 엉겨붙어 있었 다. 하지만 그녀는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부악타는 어떻게 인간이 여 섯 시간 동안이나 그렇게 서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점에선 황제도 마찬가지였지만. 지평선을 따라 떠도는 유령 같은 백야의 태양. 햇빛이 그런 각도에 서 비추니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야겠지만 백설로 뒤덮인 라호친의 땅 에는 설광 때문에 그림자가 지지 않았다. 하늘도 희고 땅도 희다. 빛 은 모든 곳에서 방향성 없이 부서지고 있었고 바람은…… "가라." 부악타는 움찔했다. 창칼 같은 바람 사이로 들려온 것은 황제의 목 소리였다. "가라. 가서 승강기를 이용해라. 그러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황제! 나는 너의 금군……" "명령이다. 가라. 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황제?" 황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외쳤다. "늦기 전에 어서 가라." 부악타는 파라말을 안은 채 서서히 일어섰다. 다른 금군들도 자리에 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들은 뒤돌아서지 못했다. 황제가 다시 말했 다. "나는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금군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 렸다. 인간인 금군들은 레콘 금군들에게 부축을 받아야 했다. 몸을 돌린 그들은 하늘누리가 꽤 낮게 날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 달았다. 사라말은 거의 죽을 뻔했다.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는 그의 잠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깨운 것 같았다. 사라말은 살아났다. 하지 만 신통한 것이라곤 별로 없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무슨 말 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승강기가 어쩌느니 하는 시시한 소리 였다. 살아날 이유치곤 한심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존재는 계속 승강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걸 어 찌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사라말은 어찌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덮고 자." 그렇게 대답한 것 같았다. 그러자 또다시 쓸데없 는 말들이 그를 번잡스럽게 했다. 사라말은 그냥 죽기로 했다. 그런 데 그 목소리가…… "파라말이 어쨌다고?" 사라말은 눈을 떴다. 사실 조금 전부터 계속 뜨고 있었다. 사라말은 레콘에게 안겨있는 파라말을 보았다. 그리고 초조한 표정 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금군 구레의 모습도 보았다. 사라말이 질문 하려 할 때 구레가 외쳤다. "승강기! 승강기를 이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라는 말씀이지요?" "그렇게 낮게 날고 있소?" 구레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말은 말했다. "모두 승강기로 갑시다. 그리고 누가 나를 좀 움직여줘야 할 것 같 군." 레콘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떠매거나 껴안은 채 아 직까지 기능하고 있는 승강기로 이동했다. 사라말은 무성의한 어조로 승강기의 우리를 사슬에서 떼어내라고 말했다. 레콘들이 달려들어 우 리를 떼어내자 사라말은 가까이 있던 레콘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 다. 그 지시에 따라 레콘은 사라말을 왼팔로 안고는 오른손으로 승강기 의 사슬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레콘들이 서서히 승강기를 풀었다. 사 슬이 풀림에 따라 사라말을 안은 레콘이 서서히 내려갔다. 조금 후 레콘의 발이 땅에 닿았다. 레콘은 미리 지시받은 대로 다리 를 들어올렸고 그러자 레콘은 사슬로 하늘누리에 연결된 채 눈밭에 등을 댄 채 세차게 미끄러졌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분명했다. 레 콘은 사슬을 놓았다. 그는 눈밭 위를 미끄러지다가 서서히 멈췄다. 하늘누리에 남아있던 레콘들은 환호를 질렀다. 그들은 같은 일을 반 복했다. 아실을 바라보던 치천제는 갑자기 환상계단을 없앴다. 그녀의 몸을 고정시키고 있던 환상계단이 사라지자 황제는 바람에 떠밀려 휙 날아갔다. 황제는 하늘누리 위를 굴렀다. 아실은 그 모습 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들으면 비명 같기도 한 소리였다. 황제는 똑바로 일어서서 아실을 무시한 채 달려갔다. 그녀는 황궁을 향해 똑바로 달려갔다. 얼마 후 황제는 두 번째 벽난로 방에 도달했다. 황제는 바닥을 바라 보았다. 그곳에는 꽁꽁 얼어붙어있는 데라시가 쓰러져 있었다. 황제가 데라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지상이 몹시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은 레콘들이 한꺼번에 뛰어내렸 다. 사라말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실이 노래 같은 비명을 질렀다. 계속 고도를 낮추던 하늘누리가 빙해에 충돌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6-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5-09 조회수 : 738 피를 마시는 새 16. 늦은 것과 낮은 것 - 4 충격은 반경 수 킬로미터 범위의 얼음을 전율시켰다. 빙해에 금이 가자마자 그것들은 아래에서 쳐올리는 압력을 느꼈다. 하늘누리의 거 대한 몸이 밀어낸 물이 옆으로 밀려나며 얼음판을 아래에서부터 강타 했기 때문이다. 직경이 수백 미터는 넘을 얼음판들이 한꺼번에 뒤집 히며 위로 치솟았다. 서로 맞물린 얼음판들이 까마득한 높이로 솟아 오르며 순식간에 빙해 위에 산맥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아마도 화 산이었던 모양이다. 극히 차가운 바닷물이 얼음 산맥의 능선을 따라 거세게 분출되었다. 물과 함께 얼음덩이들이, 그리고 빙해 위를 뒤덮 고 있던 눈이 치솟았다. 안개와 진눈깨비의 자식 쯤 될 것 같은 것들 이 새하얗게 울부짖으며 얼음 산맥의 옆구리를 휩쓸었다. 얼음 산맥은 잠시도 고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 면서도 치솟아올랐다. 경이적으로 가늘게 쪼개진 얼음판들이 하늘을 향해 내뻗은 수십 미터 길이의 얼음 송곳처럼 치솟다가 뒤로 넘어졌 다. 굉음은 살인적이었다. 위로 비스듬히 솟아오르는 얼음판 위에서 수백 마리의 백마가 달리는 것 같은 얼음덩이들의 추락이 나타났다. 지독하게 하얀 하늘과 들끓는 얼음산 사이에서 춤추는 바닷물은 먹물 처럼 검게 보였다. 사라말은 하늘누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도에 그려도 될 것 같은 크기의 얼음산들이 계속 솟구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하늘누리의 모 습을 감추지 못했다. 하늘누리는 스스로 모습을 감추었다. 하늘누리 의 뒤편으로 떨어진 사라말은 하늘누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낮아졌다. 수십 킬로미터의 무시무시한 자취 를 뒤로 남기며 하늘누리는 빙해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사라말은 중얼거렸다. "이건 곤란한데." 누군가가 그를 나꿔챘다. 사라말은 레콘의 어깨 위에 자신이 올라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레콘은 하늘치 반대 방향으로 맹렬히 달리 고 있었다. 사라말은 레콘의 어깨에서 위아래로 출렁거리며 말했다. "흐음. 이러고 있으니 돌아가신 외삼촌 생각이 나는군요." "무등 많이 태워주셨나 보지?" "아니오. 머리 냄새가 심하셨습니다." 레콘은 웃느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등 뒤에서 빙해가 깨지고 있고, 굳이 물을 두려워하는 레콘이 아니라도 꽤 두려워함직한 상황 이다. 그들은 얼음판 위에 있었다. 레콘은 바닥을 힘차게 걷어차며 도약했다. "농담 좀 하지마! 제기랄.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이라고!" 숨이 막혔던 사라말은 레콘이 다시 땅으로 떨어질 때야 겨우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글쎄. 폐하께선 돌아가신 것 같은데." 사라말은 목에 무엇이 걸린 사람처럼 기침을 했다. 아무런 힘이 남 아있지 않아서 기침이랄 수도 없는, 그저 약간 거친 한숨 같은 것이 었다. 하지만 사라말은 폐부가 찢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돌아가시면…… 안되는데?" 사라말은 비명을 질렀다. 레콘은 얼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에 깜짝 놀랐다. 그 것은 어떻게 들으면 으아아아! 하는 소리 같았고 또 다르게 들으면 폐하! 폐하! 하는 소리 같았다. 레콘은 사라말을 달래려다가 그냥 도 망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율형부사가 비명을 지르도록 내버려둔 채 바람처럼 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음은 길지 않았 다. 미친 듯이 울부짖던 율형부사는 혼절해버렸다. 정신이 있는 자들 은 모두 반대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늘누리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 제국군은 그룸성을 등지고 체구 좋은 기수를 태운 말 한 마리가 놀 라운 기세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좋은 말이고, 좋은 기수다. 그리고 서로 신뢰하는 듯하다. 바로 곁 에서 레콘들이 난폭한 기세로 뛰어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은 가 진 재주를 다해 그들을 피하고 바위를 피하며 속도를 유지했다. 기수 또한 노련하게 몸을 움직여 말의 체중 이동을 돕고 있으니 말을 몬다 기보다 힘을 합쳐 함께 달리는 것 같았다. 제국군의 병사들 중 말 좀 탄다는 이들은 모두 부지불식간에 그 모습에 감탄했다. 기수는 거대한 양손검을 든 사라티본 부대의 우두머리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 위명을 제국군에 떨치고 있는 레콘 힌치오는 꽤나 성의 있는 태도로 기수를 대하는 것 같았다. 기수와의 짧은 이야기를 끝낸 힌치오는 양손검을 머리 높이 들어올렸다. "뒤-로-물-러-나-라-!" 소화차를 향해 맹렬하게 돌을 던지던 레콘들은 당황하여 뒤를 돌아 보았다. 그 중 자신의 행동을 미처 통제하지 못한 레콘 한 명이 바위 를 던졌다. 그러자 힌치오는 격노하여 말했다. "그-자-식-뒤-통-수-를-…… 좀-만-져-줘-라-야-키-보-로-!" 야키보로는 뚜벅뚜벅 걸어가 돌을 던진 레콘의 뒤통수를 쓰다듬었 다. 돌을 던진 레콘은 어쩔 줄 몰라했고 다른 레콘들은 일단 멈추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힌치오가 말했다. "모-두-바-위-내-려-놓-고-내-뒤-까-지-물-러-나-!" 레콘들은 그대로 했다. 그들은 바위를 팽개치고 재빨리 달려갔다. 소화차를 밀던 병사들은 뜻밖의 사태에 당황했다. 전력으로 도망치는 레콘들을 따라잡는 것은 그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 힌치오 가 그들의 결심을 도울 말을 외쳤다. "제-국-군-도-멈-춰-! 할-말-이-있-다-!" 소화차를 밀던 병사들은 당황하여 본대 쪽을 바라보았다. 본대에서 조금 후 정지 명령이 내렸다. 병사들은 소화차를 멈추고 그 뒤에 서 서 레콘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헨로 중대 또한 애기살 쏘기를 중단했 다. 그러자 힌치오와 이야기를 나누던 기수가 제국군 쪽을 향해 천천 히 다가왔다. 소화차 뒤에 있던 병사들은 칼을 뽑아들고는 기수의 움 직임을 세심하게 살폈다. 기수는 말을 천천히 걷게 하고는 빈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회담 요청이 분명했다. 소화차의 병사들은 본대 쪽 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본대에서 하장군 한 명이 말에 올라 달려나왔다. 창을 거꾸 로 쥐고 있는 테룸 나마스 하장군이었다. 긴장된 순간이었지만 병사 들은 왜 테룸 나마스 하장군이 선택되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마스는 기수 못지 않은 훌륭한 기마술을 선보이 며 바람처럼 달려왔다. 소화차들의 열에 도달한 하장군은 소화차와 소화차 사이에 서서 다가오는 기수를 기다렸다. 다가오는 기수를 보던 나마스는 기수의 얼굴이 이상하다고 생각했 다. 조금 후 나마스는 상대방이 가면을 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표정 을 살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마스는 자신 또한 표정을 보이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기수의 도착을 기다렸다. 기수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다. 소화차 뒤편에 있는 제국 병이 달려들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리까지 다가온 기수는 나마스에 게 말했다. "나는 팔리탐 지소어입니다. 전권을 위임 받고 왔습니다." "하장군 테룸 나마스입니다. 미안합니다만 나는 이야기나 들으러 왔 습니다. 용건을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러면 가서 전하십시오." "뭐라고 전하면 됩니까?" "오늘부터 석 달 동안 휴전을 요청합니다. 조금 전 발케네공 락토 빌파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어떤 말에도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나마스는 그 이야기에 깜 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거짓말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 지 궁리하며 나마스는 말했다. "암살공…… 실례했습니다. 공작께서 왜 갑자기?" "자결하셨습니다. 4층 노대에서 아래로 투신하셨지요. 우리는 공작 의 장례식을 거행해야 하고 그 뒷처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석 달 동안 휴전을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분이 내방하시는 겁니까? 그쪽에서 오실 분을 알아야 이쪽에서도…… 적절한 답방 사절을 준비할 수 있을 듯합니다." "미안합니다만 보내드릴 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적합한 자격을 갖 춘 분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공작님의 마지막 추억을 되새기는 자리에 참석하고자 하실 테니까요." 나마스는 팔리탐의 이야기를 이해했다. 발케네의 고위 인사들은 공 작 계승 문제가 현안이 된 지금 제국군에 인질로 붙잡혀 있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인질 교환 없는 휴전 협정에 무슨 강제력이 있겠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나마스는 자신이 결정권자가 아니라 전달자임을 떠올렸다. 나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사라티본 부대와 함께 기다릴 테니 정리가 되면 사람을 보내십시오." 팔리탐은 말을 돌려 떠나갔다. 나마스 역시 본대 쪽으로 말을 돌렸 다. 본대 쪽을 향하던 나마스는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병사들 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사령부쪽으로 다가가던 나마스는 조금 더 놀 랐다. 사령부의 장교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마스는 다 른 사람의 시선 속에서 고양감을 느끼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회담에 나갔던 장교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 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 후 나마스는 그들이 그러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 또한 자신이 가져온 소식을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병사들 사이로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사령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대장군이 다가옴에 따라 차례로 경례했다. 대장군은 약간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걸음걸이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여 덟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다. 테룸 나마스는 이레 달비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일곱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그 중 둘 은 인간 남녀였다. 부녀 쯤으로 보이는 나이차가 있었다. 나머지는 다섯은 레콘이었다. 보기 드문 검은 레콘이 둘이나 섞여 있었다. 테 룸 나마스가 확인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나마스는 대장군의 수행인들 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테룸 나마스는 한 번의 동작으로 하마했다. 점잖지 못한 일이라서 참았지만 나마스는 눈을 비비고 엘시를 바라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엘시는 갑주나 투구, 무장은 없는 평상복 차림이었고 두 발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나마스는 이제야 제국군이 제국군다워졌다고 느꼈다. 칼의 힘은 칼날의 힘일까, 칼자루의 힘일까? 최고의 칼날도 칼자루 없이는 쥘 수 없어서 무용지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칼자루가 칼의 힘 을 나타낸다고 하기는 어렵다. 엘시는 칼자루와 같았다. 그가 칼날인 제국군과 함께 있음으로써 제국군은 완벽한 한 자루의 검이 된다. 그 리고 그 조합은 둘 중 누구의 힘이라고 구분지어 말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칼을 쥔 황제의 뜻에 따라…… 황제에 대해 생각하던 나마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보았 다. 느닷없이 북쪽으로 날아간 하늘누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사 령부의 누구도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제 그것 을 공론화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대장군의 첫번째 질문이 바로 그 것일 테니. 나마스의 생각대로였다. 사령부에 도달한 엘시는 시허릭 마지오 상 장군의 경례를 받고 곧장 질문했다. "하늘누리는 어디에 있지?" 시허릭은 대답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다. "조금 전 엉겅퀴 여단과 고추냉이 여단, 왜솜다리 여단을 태운 채 북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원래 계획은 그룸성 상공에서 3개 여단이 투 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룸성의 상공을 지나쳐 그냥 날아가버렸습니다." 엘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뱀단지를 통한 연락도 없었나?" "예. 없습니다. 갑충사도 오지 않았습니다." "기이한 일이군. 전황은? 멀리서 볼 땐 전투 중으로 보였는데 도착 해 보니 대치 중인 것처럼 보이는군." 테룸 나마스 하장군이 나설 차례였다. 그는 팔리탐 지소어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발케네공이 자결했다는 소식에 제국군 장수들은 나마스가 그랬듯 놀라기보다 그것이 거짓말일 가능성에 대해 고민했 다. 시허릭은 이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라티본 부대는 용전분투하 고 있고 하늘누리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 에서 죽음을 위장하여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하늘누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본대를 공격하는 쪽이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발케네공이 정말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허릭은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시허릭을 마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발케네 정벌군 사령관의 생각은?" 엘시의 지적을 받은 시허릭은 아차 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곳의 총 책임자는 엘시가 아니라 시허릭 자신이었다. 자격을 따진다면 엘시는 방문자였다. "일단은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늘누리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할 테니까요." 엘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참모들의 의견을 들을 차례라는 뜻인 듯했다. 그는 시허릭과 그의 참모들이 논의를 나누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제국군 사령부는 엘시가 방문자의 입장 을 고수하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는 그를 배제한 채 휴전 제안을 받 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석달의 기간은 너무 길다는 것이 중론 이었다. 엘시가 입을 연 것은 휴전 기간을 두고 벌어진 격론이 타협 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점이었다. 엘시는 인질 교환이 없는 휴 전이니 한쪽의 선언으로 언제든 휴전을 끝낼 수 있으며, 따라서 석 달의 기간을 받아들인다 해도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대장군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테룸 나마스 하장군이 휴전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고 다시 떠났다. 엘시가 다가오는 것을 본 이레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레콘들도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위츠와 세레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엘시가 질문하기 전 이레가 말했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병사들에게 물어보러 갔습니다."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기다리던 레콘들의 눈을 차례로 돌 아본 엘시는 마지막으로 지멘의 모습을 보았다. 지멘은 제국병들에게 신비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유명한 황제사냥꾼 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지멘의 검은 깃털과 대호 모양의 망치는 신분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황제사냥꾼임이 분 명한 그 레콘은 대장군과 일행인 것처럼 보였다. 가능한 설명은 두 가지뿐이다. 황제사냥꾼이 개심했거나, 세상엔 지멘과 대단히 흡사한 또다른 레콘이 있거나. 병사들은 마음의 평화를 위해 후자를 선택했 다. 그 편이 숙원을 포기하는 레콘보다는 훨씬 상식적으로 보였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그렇게 닮을 수 있다는 사실에 병사들은 흥미로 워 했다. 병사들에게 더 큰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던 엘시는 지멘에 게 가까이 다가가서 속삭였다. 지멘은 잠자코 엘시의 설명을 들었다. 하늘누리가 폭주했으며 공교 롭게도 그 때 아실이 하늘누리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는 엘시의 설명 을 다 들은 지멘은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 지멘은 고개를 숙 인 채 말했다. "뱀단지로 연락해봤어?" "연락이 없었습니다." "어느 방향이지?" "북쪽." 지멘은 일어섰다. 엘시가 말했다. "추적할 겁니까?" "그래." 지멘은 앞으로 성큼 걸었다. 엘시는 옆으로 비켜서야 했다. 하지만 지멘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앞에는 준람이 서있었다. 준람은 단창 두 개를 겹쳐 쥐어 어깨에 건 채 지멘을 지그시 바라보 고 있었다. 지멘은 망치를 움켜쥐었다. 주테카와 론솔피, 그리고 쵸 지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 다. 지멘이 말했다. "준람." "어느 쪽이야?" 한 호흡의 침묵. "북쪽." "알았어." 준람은 몸을 돌렸다. 그는 앞으로 걸어가며 비어있는 손바닥을 옆으 로 내밀었다. 주테카와 쵸지의 내민 손바닥이 차례로 그 손에 부딪혔 다. 론솔피의 손바닥과 마주친 다음 준람은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다음에 보자. 엘시." 엘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람은 앞으로 걸어갔고, 뒤이어 지멘이 그 뒤를 따랐다. 몇 시간 뒤 제국군은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라티본 부대가 당장이라도 달려올 수 있는 곳에 서 있는 것은 제국군에게 내키는 일 이 아니었다. 소화차로 하여금 배후를 지키게 하며 질서정연하게 물 러나는 제국군을 보며 암살성 내부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팔리탐은 힌치오에게 암살성의 동서남북에 네 무리를 배치하게끔 부 탁한 다음 성으로 돌아왔다. 성안의 분위기는 약간 들떠 있었다. 패 퇴시켰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물러나는 쪽이 제국군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보장을 사소한 징조 에서 찾고 싶어하는 이들은 그것을 좋은 징조로 해석했다. 팔리탐은 그런 그들에게 더 좋은 징조를 주는 대신 스카리 빌파를 찾았다. 그 리고 스카리가 부냐 헨로의 방에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정신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부냐의 방으로 곧장 찾아갔다. 그리고 혹 부냐나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막기 위해 칼을 쥐고 결연 하게 부냐의 방을 지키고 있는 스카리를 붙잡아 끌어냈다. 행동은 공 손했지만 그 태도는 귀를 붙잡고 끌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방 바깥으 로 나온 팔리탐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복도에 서서 속삭였 다. "정신이 있습니까? 당신은 상주입니다. 아버지의 시신 곁에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발케네의 새 주인이지. 젠장. 이 성안에는 발케네 곳곳에서 아버지가 소환한 야심가들이 그득해. 전부 부하들을 데리고 있고. 지 금쯤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부 알고 있겠지. 그러면 그 중에 선 나나 부냐를 제국군에 바치고 영달을 도모하려는 놈들도 나타날 거야. 나는 부냐를 지켜야 해." 팔리탐은 아버지를 죽인 개자식과 목숨을 걸고 연인을 지키는 청년 은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한 마디 쏘아주고 싶었다. 팔리탐의 표 정을 볼 길 없는 스카리는 다급하게 말했다. "팔리탐. 당신 힌치오의 상관이지? 사라티본 부대에서 병사들 몇 명 데려와 나와 부냐를 지키게 해. 이 놈들 빨리 쫓아내지 않고선 안심 할 수가 없어. 그리고 황제에게 항복하자고." 팔리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힌치오의 상관이 아닙니다. 사라티본 부대는 힌치오의 것이고 힌치오는 타계하신 춘부장에게만 책임을 집니다. 그런 부탁을 하려면 힌치오에게 직접 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그 부탁을 힌치오에게 전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러면 그렇게 해. 어차피 똑같잖아. 나는 부냐 곁에 있을 테니 당 신이 알아서……" "아버지의 시신을 지키십시오!" 스카리는 이를 악물었다. "꼭 그래야 해?"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다음에 또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팔리탐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버지의 시신 대신 연인의 곁에 붙어있음으로써 당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홍보할 생각입니까? 지금은 경황 중이라 당신이 이 성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지만 파르바리 계곡에서 있었던 일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신은 추방당했습니다. 모르겠습 니까?" 스카리는 침을 삼켰다. 팔리탐은 가면을 그의 얼굴 가까이로 바싹 가져갔다. 얼굴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압박감이 훨씬 심하다. "말을 맞춰야 합니다. 부친의 자결 때문에 제가 떠났던 당신을 다시 불러들인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 성에 돌아왔고, 아버지의 시신 곁에서 슬퍼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스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고마워." "부냐 헨로에게도 그렇게 전하십시오. 아니, 그냥 아무도 만나지 말 라고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러지." 스카리는 팔리탐 지소어의 지시를 완벽하게 이행했다. 그는 아버지 의 시신 곁에서 꼬박 며칠을 보냈다. 그 동안 팔리탐은 파리조군과 소환군, 사라티본 부대를 단속하며 제국군과의 휴전 협정서를 체결하 는 일로 분주하게 보냈다. 하늘누리에서 대피한 시민이 암살성 근처에 나타난 것은 휴전 협정 서가 교환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들은 파리조 북부에 떨어진 최초의 대피자 무리였다. 그 시민들은 주위를 순찰하던 사라티본 부대에게 붙잡혔다. 사실 붙잡혔다기보다는 구조되었다는 것에 가깝다. 당장이 라도 죽을 듯한 얼굴로 나타났으니까. 사라티본 부대에 의해 암살성 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그들은 하늘누리가 통제력을 상실한 모습으 로 북극을 향해 폭주했으며 그 시민들은 모두 지상으로 대피했다는 것을 말했다. 비슷한 시각 제국군측에서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케네군을 잘 피해 제국군 쪽으로 도망친 대피자도 있었다. 발케네군과 제국군은 모두 하늘누리에 뭔가 치명적인 사고가 생겼음 을 짐작했다. 만약 하늘누리가 그대로 귀환하지 못한다면 제국군은 황제와 제국수도, 제국정부, 그리고 레콘 여단 3개를 송두리째 잃게 되는 셈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라짓 제국은 사라진 셈이다. 몸의 다 른 곳이 모두 온전하다는 이유로 머리가 없어진 사람을 살아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이 었다. 제국군 장병들은 하늘누리가 다시 통제력을 회복하여 되돌아올 거라고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의 낙관 주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뱀단지의 침묵이 그것이 었다. 그것은 하늘누리의 상황에 대한 불안한 전망을 야기하는 것임과 동 시에 실제적인 어려움도 불러일으켰다. 하늘누리의 뱀단지가 작동하 지 않는다면 제국 전체로부터 제국군으로 이어지는 섬세한 보급망 또 한 작동하지 않는다. 제국군의 장교들 대다수는 군인이 된 이후 처음 으로 군량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되었다. 결국 엘시 에더리가 시허릭 마지오에게 조언하는 형식으로 제국군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사라티본 부대로 일컬어지는 저 레콘 부대가 현존하는 이상 정복지 점령은 무의미하다. 발케네군은 언제든 휴전 협정을 파기하고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 발케네에서 철군하기로 한다. 규리하로 돌아가 하늘 누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규리하입니까? 우기츠나 러크, 나나본 같은 제국령도 있을 텐데요. 규리하는 아직 전후 복구도 끝나지 않은 점령지입니다." "맞아. 하지만 거기엔 규리하 점령군이 남아있고, 또 즈믄누리의 무 사장도 체류중이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을 거론한 엘시의 말에 시허릭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시허릭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 했다. "알겠습니다." 제국력 31년 5월 30일, 발케네 점령군은 철군을 시작했다. 5개월 전 발케네로 진격했을 때에 비해 3분의 2 정도로 줄어든 병력이었다. 그 리고 잃은 것은 어쩌면 아라짓 제국일지도 모른다. 암살성의 1층 대식당에서 벌어지는 주연의 소음은 3층까지 전해져 왔다. 헤어릿 에렉스는 4층에서는 제발 그 소음을 듣지 않기를 바랐 다. 하지만 그녀가 4층에 도달했을 때도 웃음소리와 기괴한 노랫소리 의 메아리는 계속되었다. 헤어릿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제국군이 발케네를 빠져나가자 스카리 빌파는 성대한 주연을 개최했 다. 마치 승전을 거둔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사실 그 의미가 모호한 주연이었다. 하지만 소환군의 영주들은 기뻐하며 주연에 참석했다. 그리고 침략군이 물러갔으니 사실 승전이나 다름없는 것이긴 하다. 헤어릿은 텅 비어있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4층은 락토의 층이다. 락 토의 집무실이 있고 락토의 침실이 있고 락토의 서재와 그 외 그의 필요를 위한 다른 공간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복도에는 오가는 사람 하나 없고 복도에 불빛조차 없었다. 성안의 모든 하인들이 주연에 동 원되었기 때문이다. 의복이나 서적담당자까지 부엌에 갔으니 4층에 불을 켤 하인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헤어릿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대 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흘러내려 볼을 적셨다. 하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헤어릿은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 다. 두근거림. 헤어릿은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 꼈다. 헤어릿은 벽을 밀며 쓰러지듯 복도 가운데 섰다. 그녀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곧장 걸어갔다. 불빛은 없었지만 헤어 릿은 곧 목적하던 방문 앞에 도달했다. 헤어릿은 그것을 살짝 밀어보 았다. 놀랍게도 잠겨 있지 않았다. 열쇠를 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 던 헤어릿은 당황하여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달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헤어릿은 푸른 빛이 감도는 방안 을 살펴보다가 바닥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촛농이 떨어져 있었 다. 헤어릿은 잠금 장치를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부서진 흔적은 없었 다. 그리고 누군가가 몰래 침입했다면 다시 잠궈놓고 갔을 것이다. 헤어릿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했다. 촛농이 떨어진 것은 어젯밤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오늘밤, 그것도 얼마 전에 이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가지러 왔던 것이다. 그것도 촛농을 지저분하게 떨어뜨릴 정도로 다급하게. 얼마나 다급했던지 그 사람은 문을 도로 잠그는 것도 잊었다. 헤어릿 은 어떤 물건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 방에 자주 찾아 오지는 않았다.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방이기 때문이다. 헤어 릿은 자신이 찾는 물건이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그 물건은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헤어릿은 선반에 놓여있 는 그 물건을 꺼내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녀는 다시 문으로 돌아가 그것을 잠궜다. 그 다음 헤어릿은 선반에 놓여있는 큼직한 원통을 꺼 냈다. 그 원통은 위로 꽤 길었다. 하지만 헤어릿이 어렵잖게 다룰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은 원래 무거울 수 없는 물건 이다. 달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원통을 가져간 헤어릿은 그것을 창턱 에 놓았다. 헤어릿은 원통 아랫부분에 있는 걸쇠를 벗기고 원통을 들 어올렸다. 그러자 대족장의 상징인 뿔관이 나타났다. 헤어릿은 손에 원통을 든 채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헤어릿은 코네도 빌파의 초상화를 통해 그 모습을 알고 있었다. 코네도 빌파는 락토 빌파의 증조부이며 발케네의 족장들을 강권으로 때려눕혀 뿔관을 얻어낸 자다. 그가 발 케네를 통일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뿔관의 권위를 이용하여 발케네왕이 될 뻔한 자라고 말할 수는 있다. 만약 제2차 대확장 전쟁 이 발발하지 않고 대호왕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그는 발케네에 소왕국 하나 쯤은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초상화 속의 코네도 빌파는 언제나 사슴뿔로 만들어진 대족장의 뿔관을 쓰고 있었다. 헤어릿은 원통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허리 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뿔관의 모습을 살폈다. 초상화 속의 뿔관이 더 근사했다는 것이 헤어릿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초상화 속에서 코 네도 빌파의 머리에 있는 뿔관은 무엇이든 들이받을 듯 용맹하게 보 였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동물의 사체 일부를 붙여놓은 모자일 뿐이었다. 어쩌면 달빛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 지만 헤어릿은 뿔관의 모습에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헤어릿은 뿔관을 집어들었다. 밑받침이 있을 뿐 그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헤어릿은 뿔관 안 쪽을 들여다 보았지만 빛이 부족하여 보이는 것이 없었다. 헤어릿은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어 안쪽 면을 더듬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흥미로운 느낌이 포착되었다. 헤어릿은 뿔관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아라짓 제국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며 발케네의 통치자, 자유무 역당의 후원자, 용감한 도둑들의 친구, 그리고 뿔관의 주인." 앞의 네 가지는 발케네공의 칭호다. 하지만 뿔관은 대족장의 상징이 다. 황제로부터 나오는 공작위와 발케네 사람들이 선출한 대족장은 그 기원부터가 다르다. "언제나 발케네공. 죽을 때까지, 죽은 후에도." 발케네의 공작에겐 대족장의 상징은 필요없다. 헤어릿은 뿔관 안에 집어넣은 손을 꺼냈다. 그 손에는 도깨비 감투가 들려 있었다. 헤어릿은 뿔관을 다시 밑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원통을 씌워 걸쇠를 건 헤어릿은 그 원통을 원래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헤어릿 은 감투를 두 손바닥 위에 놓은 채 창가로 돌아왔다. "이게 대답인가요." 헤어릿은 알 수 있었다. 헤어릿은 왈칵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고 생 각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렸던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헤어릿은 피로한 표정으로 감 투를 내려다보았다. 락토는 헤어릿에게 감투를 가질 이유를 스스로 찾으라고 했다. 헤어 릿은 이유가 하나 쯤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가 더 떠 오를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락토의 유품이었다. 한편 가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헤어릿은 감투를 가지기로 했다. 헤어릿은 감투를 머리에 쓰고 방을 나왔다. 2층에 도달했을 때 헤어 릿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주쳤다. 하인 한 명과 하녀 한 명이 술에 진탕으로 취한 누군가를 부축하며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를 침실에 데려다놓을 작정인 것 같았다. 헤어릿은 그 사람 이 누군지 살폈다. 그리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이 이이타 규리하 라는 것을 깨달았다. 헤어릿은 그들이 자신을 잘 볼 수 있도록 복도 가운데서 그들을 막 아섰다. 하지만 술에 취한 이이타는 물론이거니와 그를 부축하고 있 는 하인들도 헤어릿을 알아본 척하지 않았다. 도깨비 감투는 온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재미를 느꼈을지도 모르 지만 헤어릿은 그저 실험에 성공했다는 생각만 하며 옆으로 비켜섰 다. 이이타와 하인들은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헤어릿은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몸을 돌리 려 했을 때 갑자기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요. 제가 안으로 모실게요. 바쁘실 텐데 돌아가세요." "침대에 눕힐 수 있겠어?" "예. 걱정마세요." 헤어릿은 하녀의 목소리가 소리 로베자의 것임을 깨달았다. 하인은 이이타를 바닥에 앉혔다. 이이타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떨구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그리고 소리는 그런 이이타의 곁에 무릎을 꿇고는 두 손으로 이이타의 어깨를 붙잡아 이이타가 앞 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눌렀다. 하인은 바빠서 어쩔 수 없다는 소리를 늘어놓다가 황급히 달려갔다. 헤어릿은 소리가 이이타를 일으켜 세울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소리는 이이타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됐어요. 갔어요. 공자님." 이이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갑자기 이이타의 모습이 만취한 주정 뱅이에서 평범한 소년의 것으로 바뀌었다. 헤어릿은 그 변화에 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소리가 말했다. "일어나세요. 공자님. 침실로 들어가셔야지요." "글쎄. 앉으니 일어나기 싫은데? 조금만 앉아있자. 어차피 모두들 주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아무도 안 올라올 테니까. 너도 벽에 등 기대고 앉아봐." 소리는 아래로 내려가서 다른 하인들을 도와야 된다고 말했다. 하지 만 이이타는 고집을 부려 소리를 앉혔다. 소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닥에 앉아 이이타처럼 다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소리는 이이타가 왜 그런 자세를 고집하는지 알게 되었다. 복 도 반대편의 창을 통해 별들이 무리지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이타 는 두 팔로 머리를 받친 채 중얼거렸다. "그 꼬락서니하곤. 믿을 수 있겠어? 증조부의 초상화를 찢어버리더 군. 다른 놈들은 그것을 보며 웃고. 나는 그게 우스운지 모르겠어. 소리. 그게 발케네식이야?" "글쎄요. 어떻게 보면 우습잖아요? 뭐라고 하셨더라. 사랑해요, 증 조할아버지! 이랬던가? 그리고……" "으악. 죄송합니다. 증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를 찢고 말았어요. 이걸 어쩌나, 친구. 기껏 초상화를 가져와서 사슴뿔의 가지가 몇 개 인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그만 증조부를 찢고 말았어. 이 그림 너무 잘 그렸단 말이야." 헤어릿은 구역질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이타가 흉내내고 있는 것은 스카리였다. 헤어릿은 촛농을 떨어뜨렸던 하인이 가지고 간 것 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헤어릿과 달리 소리는 이이타의 흉내를 보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이이타가 미소도 짓지 않아서 소리의 깔깔거림 은 곧 사그라들었다. 소리는 멋적어 하다가 말했다. "기억력 대단하시네요. 공자님.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기억하시다 니, 역시 술에 취하지 않으셨군요." "조금도 안 취하더군."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쁘신 거죠? 공자님도 제국군을 싫어하시잖아 요. 제국군이 저렇게 도망치는 것을 보면 기분 좋아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이타는 설명할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이타는 다시 입을 닫고 는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 하나를 풀어내어 소리의 어깨에 둘렀다. 소리는 웃으며 이이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이타가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소리. 내가 중뿔나게 구는 꼬마고 심술꾸러기 남자 애라서 그런가 보지." "공자님. 지금 저를 비웃고 계세요?" "난 내 새끼손가락보다 더 긴 칼 숨기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안 비 웃어." 소리는 웃으며 비수를 꺼냈다. 칼날을 쥔 소리는 비수를 이이타에게 건넸다. 이이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소리가 말했 다. "이제 비웃어보세요." "……주먹으로 때리려고?" "공자님. 저에게 털어놓고 말하기 싫으시면 비웃기라도 하세요. 괜 찮으니까. 전 공자님이 비웃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속 상하신 일이 뭐죠? 전 머리가 나빠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귀는 잘 들려요. 들어드릴 수 있어요." 이이타는 비수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 아라짓 제국이 사라졌는지도 몰라." 소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국이 사라져요? 땅이 어떻게…… 아, 아뇨. 말씀하세요. 들을게 요." "땅은 사라지지 않지. 하지만 아라짓 제국은 그 모든 것을 하늘누리 에 집중시켜놓았고, 따라서 하늘누리가 없으면 제국도 없어. 북부는 순식간에 대호왕 이전으로 돌아갈지도 몰라. 사실 그보다 더 나쁠 수 도 있어. 곳곳에 잘 훈련된 제국군이 있으니까. 주인을 잃은 그 군대 들은 먼저 차지하는 쪽이 임자일 수도 있지. 가혹한 혼란이 찾아올 거야. 이 아래에서 퍼마시는 것들은 기회의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여 기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무서워." "무섭다뇨. 무향 규리하의 당당한 공자님이." "많은 소리 로베자들이 죽게 되는 것이 무서워." 소리는 입을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리 로베자는 하나인데요." "안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취하긴 했나봐. 그러니까 너처럼 힘 없는 처녀들이 많이 죽게 될 거라는 뜻이야." "사람들이 많이 죽어요?"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이타는 말끝을 흐리더니 침묵했다. 소리는 가슴을 눌렀다. 같은 동작을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헤어릿은 가슴을 누른 채 이이 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맞다. 헤어릿은 두 사람을 남겨둔 채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헤치카는 칼날의 연마를 끝낸 단검을 상자 속에 던져넣었다. 상자 안에는 똑같은 단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정확히 아흔아홉 개고, 조금 전 던져넣은 것은 백 번째 단검이다. 그리고 그 상자는 그와 똑 같은 상자 아홉 개의 뒤를 잇는 열 번째 상자다. 헤치카는 상자의 뚜껑을 닫고는 허리를 폈다. 마침내 천 자루의 단 검을 완성한 것이다. 헤치카는 눈 주위를 문지르며 말했다. "돔. 곡차 좀 가져오너라." 대답이나 발소리는 없었다. 헤치카는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업장에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헤치카는 돔이 없다는 것을 깨달 았다. 헤치카가 살인기사에게 주문받은 천 자루의 단검을 만드느라 판매용 단검을 더 만들지 않자 그의 판매 대리인인 돔은 할일이 없게 되었 다. 돔은 처음에는 그것을 난생 처음 맞이하는 휴식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돔도 휴식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간혹 백색의 땅까지 얼어붙지 않은 동정심을 가지고 찾아온 상인들이 난폭한 레콘에게 붙 잡혀 가축처럼 혹사당하는 고아 소년에 대한 비분강개를 토로하곤 했 기 때문이다. 돔은 그런 평가를 즐기는 편이었는데, 그것을 사실이라 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상인들에게 물건을 싼값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물건을 산 적은 없다. 주로 헤치카와 돔이 일상 생 활에 쓰는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물건값을 깎는 재미에 도취 된 나머지 쓸모없는 물건을 구입하기도 한다. 그런 물건이 큰 상자로 가득이었지만 헤치카는 '어린애에겐 장난감이 필요한 법'이라는 한 마디로 돔과 자신에게 모든 설명을 끝낸 다음 돔의 구매 활동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어쨌든 그런 상인들에게 주워들은 말로 돔은 노동과 휴식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후자가 오락이나 취미, 기타 흥미로운 일 들을 위한 시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돔은 휴식 활동을 제법 진 지하게 시작하려 했던 것 같다. 상자 속에서 잠자던 온갖 물건들이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돔은 곧 자신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일이 흥 정이고 고객으로부터 대금을 받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시간이 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휴식에 대한 돔의 장밋빛 선입견 과 배치되는 것이었고 돔은 혼란에 빠졌다. 돔은 책을 읽으려 했지만 그 속에 묘사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돔은 악기를 연주해보려 했지만 적절한 연주법을 알 수 없었다. 돔은 인형놀이를 해보려고 했 지만 인형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돔 자신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상자 속에 있는 물건들이 아무 쓸모도 없 는 것이라는 판단을 돔이 내리는 데는 반나절로 충분했다. 그리고 돔은 그 물건들을 팔려 시도했다. 단검을 파는 것은 아니니 까 그것도 휴식 활동이라는 것이 돔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돔은 자신 이 파는 물건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결과적으로 돔은 상인의 좌절 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돔은 휴식이고 뭐고 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장사꾼의 천품을 타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지기 싫어하는 고집불통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돔은 과감하게 개썰 매를 구입했고 헤치카는 이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돔은 개썰매 에 익숙해지자 그 물건들을 싣고 라호친으로 갔다. 최후의 대장간에 는 대장장이와 무기 구입자,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한 장사꾼밖에 없 으니 제대로 된 고객을 만나려면 라호친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돔의 판단이었다. 돔은 기필코 이문을 남기고 말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라 호친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약이 올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으 로 돌아왔다. 헤치카는 돔이 개썰매 조작법을 익히게 될 테니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헤치카의 생각대로 돔은 훌륭한 개썰매꾼이 되었다. 돔 자신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돔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헤치카는 일어서서 손수 술병을 찾았다. 그는 돔과 달리 휴식을 즐기는 방법에 대해서는 자신의 철학 과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헤치카는 술동이 하나를 천천히 비웠다. 헤치카가 뒷정리까지 끝내고 잘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돔이 돌아 왔다. 돔이 방한복의 두건을 젖혔을 때 헤치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돔의 얼굴엔 지금까지 익숙하게 보아왔던 약오른 표정 대신 좀 다른 표정이 묻어 있었다. 헤치카는 물었다. "뭐라도 팔았냐?" "아뇨. 하지만 오늘 길에 뭐 하나 주웠어요." "뭔데?" 돔은 개 먹이로 준비해두었던 생선을 꺼내 토막치며 말했다. "같이 가요. 제가 여기까지 들고 올 수가 없어요." 헤치카는 일어섰다. 최후의 대장간은 고요했다. 해가 지지 않는 시 점이라 알기 어려웠지만 밤으로 취급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람들 은 잠들어 있었다. 약간의 취기가 있던 헤치카는 뒷짐을 진 채 느긋 하게 걸으려 했지만 돔이 그를 재촉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주워왔나 보다고 생각하며 헤치카는 걸음을 약간 빨리했다. 개썰매 옆에는 지친 개들이 쓰러져 있었다. 돔이 바구니에 담아온 생선 토막을 던져주었는데도 개들은 느리게 움직였다. 헤치카는 돔이 서둘러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주워왔나 기대 하며 바라보던 헤치카는 돔이 썰매 위의 덮개를 벗기자 벼슬을 꿈틀 했다. "음. 못 먹는 것이군." "아직 살아있어요." "그러니 주워왔겠지. 어디 보자." 헤치카는 허리를 굽혀 썰매 위에 누워있는 소녀를 집어들었다. 아무 래도 시체처럼 보였다. 헤치카는 일단 소녀를 안은 채 최후의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돔이 먼저 달려들어가 난로에 불을 지폈다. 헤치카 는 난로 앞에 소녀를 내려놓았다. 돔은 방한복을 벗으며 말했다. "며칠 전에 굉장한 소리 났었죠? 아마 여기서도 들렸을 것 같은데." "그래. 들었다. 빙하가 심하게 부서진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에요. 도로도곶 북쪽인데, 아무래도 운석이 떨어진 것 같 아요." "운석?" 헤치카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운석이 떨어졌다면 그가 느 꼈던 소음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소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헤치카는 돔이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돔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 때 저는 라호친에 있었거든요? 라호친 사람들하고 같이 거기에 가봤어요. 얼음바다가 수평선까지 박살이 나서 파도가 치고 있었어요." "뭐? 파도가 칠 정도로 깨졌다고?" "예. 우리는 사흘 쯤 후에 도달했는데 그 때까지도 바다는 얼어붙지 않았어요. 그리고 도로도 곶 주위에는 넘친 바닷물이 얼어붙어서 말 도 못할 지경이 되어 있었어요. 틀림없이 운석이에요. 라호친 사람들 은 겁이 나서 그대로 도시로 돌아갔고 저는 여기로 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도로도곶 동쪽으로 도는 곳에 누가 쓰러져 있는 거 아니겠어 요?" "거기에 아실이 쓰러져 있었다고?" 돔은 자신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맞다, 아실! 지금까지 생각이 안 났어요. 이 여자 이름이 아실이었 죠? 애꾸눈만 기억나고 이름은 생각 안 나더라고요." 헤치카는 기묘하다고 생각하며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아실은 그가 내려놓은 대로 쓰러져 있었다.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숨쉬는 시 체에 가까웠다. 아실이 정말 숨을 쉬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던 헤치카 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허리를 숙였다. 아실의 호흡은 미약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헤치카는 허리를 펴고 돔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지멘이 없었냐?" "그 검은 레콘 말이죠?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고함을 질러 봐도 아무 대답이 없던데요. 더 지체하면 이 여자 죽을 것 같아서 일 단 여기로 데려왔어요." "이 애 옷은 어디 있냐." "옷이라뇨? 입고 있잖아요." 헤치카는 어리둥절하여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아실은 보다 기후가 덜 추운 곳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 애 방한복이 젖어서 얼어붙을까봐 네가 벗긴 거 아냐?" "아니오. 원래부터 그 모양이었어요." "이런 꼴로 이 추위에 쓰러져 있었다고?" "예." "그런데 살아있다고? 원, 참. 별일 다 보겠군. 그러면 이 애가 도대 체 며칠 동안 이런 상태였던 거야?" "제가 발견한 건 사흘 전이었어요. 뭘 먹어야겠다 싶어서 여기로 오 면서 하루에 한 번 죽 묽게 끓여서 입에 부어넣어줬어요." "이 녀석, 이 애 잡을 뻔했군. 밥통이 아니라 허파로 들어갔으면 어 쩌려고?" "그런 바보짓은 안 하죠. 봐요. 살아있잖아요." 돔의 말대로 아실은 살아있었다. 헤치카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흐음. 습득물은 주인이 올 때까지 보관하면 되겠지." "지멘이오?" "물론 이 애 정신이다. 이 녀석아." 어리둥절해하던 돔은 조금 늦게 헤치카의 말을 이해했다. =============================================================== 16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17. 불씨의 군무 - 1 "사람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바둑의 문외한 들은 몇 년 전에 둔 바둑도 복기해 내는 기객의 재주에 감 탄하곤 한다. 하지만 바둑을 전혀 둘 줄 모르는 사람이 흑 돌과 백돌을 번갈아 바둑판 아무 곳에나 내려놓은 다음 돌 을 놓은 순서를 재현할 것을 요청하면 국수급의 기사라 하 더라도 재현하지 못한다. 기사는 돌이 놓인 반면의 좌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돌들의 관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의 시각 전부에 해당하는 특징이다. 사 람은 눈을 통해 들어온 빛이나 열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사 람은 자신이 해석한 세상을 본다. 같은 수준의 화가 두 명 이 같은 풍경을 그려도 같은 풍경화가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 남성 여러분의 환상과 달리 - 한 남자를 세상의 모든 여자가 사랑하지는 않는 것도 그 때문 이다." - 제이어 솔한. 노레조 서쪽으로 백 킬로미터 쯤, 지러쿼터 산맥의 활엽수와 침엽수 가 자리바꿈하는 장소에 요새가 하나 있다. 상주 인원은 명확히 알려 져 있지 않지만 같은 규모의 다른 요새보다는 적은 편이다. 사람들이 사는 땅 어디에도 전설 한 토막이 없을까만은 이 요새에는 전설은커녕 야사 같은 것도 없다. 일부러 그런 장소를 택해 건설된 요새이기 때문이다. 굳이 세상의 끝까지 가지 않아도, 오히려 사람들 이 많이 거주하는 땅 근처에서도 끄트머리의 분위기를 가지는 장소가 있을 때가 있다. 눈 밝은 사람은 도시 내부에서도 그런 장소를 발견 하곤 한다. 그곳에 도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나칠 수는 없고 항상 되돌아와야 한다. 요새가 위치한 장소 또한 그러했다.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서쪽은 지러쿼터 산맥으로 막혀 있고 동쪽 방면으로만 제국에 열려 있다. 북 쪽이나 서쪽으로 지러쿼터 산맥을 넘으면 규리하 땅으로 갈 수도 있 지만 극기 정신을 함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래야 할 이유가 별 로 없다. 요새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노레조 사람들은 동쪽의 하글 센이나 남쪽의 밀, 혹은 더 남쪽의 나발칸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지 고 있고 자신들의 서쪽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표독한 짐승들이 출몰하는 거친 산과 질 나쁜 흙, 익숙해지기 전에는 속을 뒤집어놓는 물 등 사람에게 불쾌한 것이 잔뜩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간편하다. 사람에게 흥미를 불러일 으킬 수 없는 땅에는 전설도 부여되지 않는 법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런 땅에는 요새가 필요없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전설을 만드는 것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조용히 살고 있는 요새가 있었다. 요새 사람들은 노레조 사람들의 태도가 모 든 사람들의 태도가 되길 바란다. 어쩌면 노레조 사람들의 무관심은 그 기원이 요새에 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땅에서 가을걷이가 끝 난 7월의 어느 오후, 요새 사람들이 뜻밖의 관심에 흥분하기보다는 짜증을 느끼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관심은 요새 성벽 앞쪽에 나타난 사람들의 옷차림을 통해 충분히 나 타나고 있었다. 요새 앞쪽의 협곡에서는 수십 마리의 말과 그 위에 올라앉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근심과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주막은 고사하고 괜찮은 샘터 하나도 없는 백 킬로미터의 길을 걸어 온 사람들치곤 꽤 옷차림이 근사하다. 옷차림이 착용자의 인격을 담 보하긴 어렵다. 하지만 착용자가 어떤 대접을 원하는지를 짐작할 만 한 근거는 된다. 그 점에서 볼 때 요새의 대접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 한 것이었다. 양쪽 절벽에 이어져 협곡을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성벽 위에는 단 한 사람,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가 이상하게 비틀어진 젊은 여자가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행의 대표자인 듯한 화려한 모자를 쓴 사내가 성벽 위를 향해 애 처롭게 외쳤다. 문을 열고 일단 지친 사람들과 말들을 들여보내 쉬게 해주는 것이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겠냐는 내용으로 보건 대 이미 많은 발언들이 실패한 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자는 마비된 얼굴에 뚱한 심기를 담은 채 아래를 바라보다가 무슨 말인가 를 외쳤다. 어버버나 이비비, 혹은 가가가 쯤 되는 말들이었다. 화려 한 모자를 쓴 남자는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자신들의 처지에 기막히는 심정밖에 느낄 수 없는 듯했다. 남자가 외 쳤다. "그래, 역시 곡차엔 도토리묵이 최고지!" 성벽 위의 여자는 가가대소했다. 끄이끄이 하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소아마비를 앓았던 것이 분명하다. 여 자의 웃음을 본 남자는 덩달아 웃으며 이것을 계기로 분위기가 좀 바 뀌길 기대해보았다. "이봐, 아가씨! 아가씨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지만, 우리는 중요 한 용무를 가지고 왔거든? 이야기가 좀 통하는 사람을 불러다줘. 아 가씨가 이 요새 최고의 달변가인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여자는 흥분한 투로 재잘거렸다. 약간의 호의를 품은 것처럼 느껴지 긴 하지만 여전히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화려한 모자를 쓴 남자는 지친 표정으로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가을이지 만 풀 한 포기 볼 수 없는 협곡 밑바닥은 더웠다. 남자는 어떻게 구 경꾼 하나 없나 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성벽 앞에 도착한 이후로 한 시간 동안 성벽 위에 나타난 것은 한 사람뿐이다. 그 외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곳으로 출발할 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남자는 우울함을 느꼈다. 그를 이곳으로 보낸 사람들 은 피를 말리는 협상과 정신력을 다투는 논쟁을 예상했고 그 때문에 선출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자신을 선출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 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뾰족한 수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를 보좌하거 나 감시하기 위해 온 동행들은 이미 참을성을 잃은 후였다. 더위에 시들어 있지만 여건이 괜찮다면 꽤 멋있게 보일 법한 수염을 달고 있 는 노인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이건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백작? 일방적인 대화 거부보다 더 고약합니다. 이 자들은 너무도 외딴 곳에 고립되어 있다 보니 예의고 뭐고 다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백작이라 불린 남자는 모자 아래에 다시 땀이 고이는 불쾌한 느낌에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자네는 이 성벽을 부수기라도 하자는 건가?" 후줄근한 수염을 단 노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성벽을 바라보았다. 성 벽의 넓이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지만 그 높이는 대단했다. 협곡의 가장 낮은 부분에서부터 성벽 위까지의 높이는 얼추 삼, 사십 미터는 될 듯하다. 성벽 바깥에서는 그 두께를 보기 어렵지만 그저 그 높이 를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그 두께는 만만치 않은 수준일 것이다. 격분 한 레콘 여단이나 무수히 많은 공성기의 공격이 있기 전에는 부서지 지 않을 성벽이었고, 레콘들이나 공성기는 이곳으로 오기 어렵다. 협 곡의 입구 바깥에는 협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고이는 호수가 있었 다. 협곡의 요새에 접근하는 방법은 백작의 무리들도 그러했듯 호수 를 가로지르는 거룻배에 타거나, 혹은 딱정벌레를 타고 하늘로 접근 하는 방법뿐이었다. 레콘 여단이나 무수한 공성기를 이동시키기엔 적 합하지 않은 방법들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들에겐 그런 파괴력도 없 었다. 후줄근한 수염의 노인이 말했다. "그냥 돌아가지요. 우리를 만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건 안될 말이지.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는 이 요새를 가져야 해."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도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 게 하면 그만이잖습니까?" "또 그 이야기인가?" "예. 또 그 이야기입니다. 노레조 백작을 회유해야 합니다. 백작의 영향력은 결코 좌시할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원칙이라는 것이 있는 거야, 원칙. 그저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문제가 있는 인사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들어오면 우리 모임의 순수성은……" "누가 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백작과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과연 성벽 위에 새 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백작은 처음에 난쟁이인가 생각했다. 새로 나타난 것은 머리통이 제 법 큰 성인 남자였지만 그 남자의 머리는 여자의 허리쯤에 오는 높이 였다. 머리 아래는 흉벽 때문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리만 보 이는 남자는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여자에게 다가갔고 여자는 멀뚱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때 백작은 남자의 머리가 일정한 높이 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바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다리가 불편한 듯했다. 바퀴 의자 사내는 지금껏 백작의 무리를 상대하던 여자에게 다가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번엔 뭐래?" 여자는 무슨 소리를 내었다. 성벽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듣기엔 신 음이나 비명의 범주에 들어가 있는 소리였다. 하지만 바퀴 의자 남자 가 입을 열었을 때 성벽 아래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제국 재건 범신민 연대?" 그것은 바로 백작이 대표하고 있는 무리의 이름이었다. 여자에게 그 렇게 소개하긴 했지만 백작은 남자가 어떻게 여자의 말을 알아들었는 지 알 수 없었다. 바퀴 의자 남자가 투덜거렸다. "또 재건이야? 중흥하고 재건은 지겹게 쓰이는군. 좀 참신한 이름 없나. 제국 발굴은 어때? 제국이 장사까지 치르고 땅에 묻힌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 많은 것 같은데 말이야."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경의가 부족한 말투다. 그리고 바퀴 의자 남 자의 말을 호의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이 - 특히 알아야 할 사람들은 - 그것이 비꼬는 말임을 이해했다. 하 지만 백작은 분노와 별개로 이 요새의 사람들이 왜 이토록 무관심한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보다 먼저 이곳을 방문했던 다른 무리들이 있는 것이다. 백작이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성벽 위의 남자는 바퀴 의자를 흉벽 가까이 밀어붙이고는 상체를 조금 내밀었다. "나는 요새 사령관 리슬 캄프리입니다." 백작은 사령관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서 말을 약간 더듬었다. "아, 나는……" 리슬 캄프리가 잽싸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직 당신을 소개하지 말아요. 이건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 이름을 알게 되면 나는 일지에다가 당신 이름을 적어야 한단 말 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지고하신 황제 폐하, 삼고, 보류부사, 그리고 그들의 대리인 등 이곳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 중 하 나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 나는 당신 이름에다가 침입자라는 주석을 붙여야 하거든. 혹 내가 거론한 자격들 중 하나에 해당하십니까?" "나는 제국 재건 범신민 연대의 사절 자격으로……" "아니시군. 돌아가십시오." 수염 후줄근한 노인을 비롯하여 백작의 수행인들은 격분했다. 백작 은 다른 자들이 분노를 드러내기 전에 황급히 말했다. "인정을 좀 보이게, 캄프리 사령관! 말이라도 좀 들어봐야 할 것 아 닌가? 나는 자네를 만나러 그 먼 길을 찾아왔단 말이야." "초대한 적이 없는데요." "그래, 알아.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 불청객에게 무 슨 권한이 있을 리 없지. 하지만 거기 서서 이야기 좀 나눈다고 해서 자네에게 큰 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나? 자네에게 이 가을 오후를 보 낼 더 유익하고 더 즐거운 방법이 있다면 물러가겠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발 시간 좀 나눠주게!" 백작의 간곡한 태도에도 캄프리 사령관의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방법을 압니다만." "그게 뭔가?" "연초 한 대 피우며 마음의 양식이 될 책을 읽는 것. 사람들이 모두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런 방법을 애용하면 세계가 훨씬 평화로워질 텐데 말입니다." 그를 대표로 선출한 사람들이 기대한 것처럼 백작에겐 참을성의 여 유가 조금 남아있었다. 하지만 수염 후줄근한 노인은 그렇지 못했다. 노인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외쳤다.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아! 이 분이 누구신지 아느냐? 칸디드 백 작님이시다! 이 분의 부친은 제국삼등공신이시며 본인 또한 그 드높 은 학문으로 십병장의 지위를 받은 첫 번째 분이시다! 네가 감히 희 롱할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이다!" 칸디드 백작이 잠깐 동안 우쭐한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슬 캄프리는 전혀 감동 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캄프리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꺼낸 것인지 알 수 없는 지휘봉 을 꺼낸 캄프리는 그것으로 칸디드 백작을 겨냥했다. "지금부터 코세 칸디드 백작 외 17명을 침입자로 규정한다. 수교위 리슬 캄프리가 지휘하는 9087 독립 중대는 황제 폐하의 영광 아래 침 입자를 격퇴할 때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싸운다." 칸디드 백작은 캄프리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리고 그의 이름이 거론된 이상 캄프리는 더 이상 모르는 척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사태의 악화를 막기 위해 입을 열던 칸디드 백작은 협곡 좌우에서 들려온 심상찮은 소음에 말을 삼켰다. 백작은 사람들이 좌 우를 가리키며 호들갑을 떠는 것을 발견했다. 그 또한 좌우를 돌아보 았고, 충격적인 광경에 숨을 들이마셨다. 협곡 좌우의 벼랑 위에 일군의 제국병들이 나타났다. 얼추 이백 명 쯤 되어보이는 그들은 손에 든 활로 아래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칸디 드 백작이 이끄는 제국 재건 범신민 연대의 무리들은 경악하여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리슬 캄프리가 말했다. "저 사람들은 맹인입니다, 각하." "뭐라고?" "맹인 모르십니까?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장 큰 아량으로 눈 감아주 는 벗들 말입니다. 각하." 맹인 궁수라니,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게다가 그런 자들이 절벽 위 에 설 수 있을 리 없다. 코세 칸디드 백작은 그것을 지적하려 했다. 하지만 리슬 캄프리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저 병사들은 아무렇게나 활을 쏘고, 죄의식 같은 것은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각하. 눈에 뵈는 것이 없으니까요." 절벽 위에서 메마른 웃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백작은 그들이 맹인이 든 아니든 화살은 똑같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칸디드 백 작은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리슬 캄프리가 말 했다. "돌아가십시오. 각하. 원한다면 제국 제 3 금고요새엔 전부 귀머거 리만 있어서 말이 통하지 않더라고 보고해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믿 어줄 겁니다. 이 정도나마 배려하는 것도 제가 당신 책을 잘 읽었기 때문입니다." 백작은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슬은 절대로 그를 요새 안으로 들이지 않을 것이며 그의 말에도 신경쓰지 않을 것 이다. 리슬의 말마따나 그가 호의를 베푸는데 이 이상 그를 자극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닐 것이다. 일행에게 물러나자는 말을 하기에 앞서 백작은 허영심을 조금 충족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책인가?" "사유와 세계의 상호귀속." "아아, 그거. 감상을 말해주겠나?" "솔직히 십병장 받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각하." 칸디드 백작은 빙긋 웃었다. "내 생각도 그래. 아버님 덕택에 받은 거지. 창피한 노릇이야. 하지 만 동료들은 그것이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으니 사양하지 말라 고……" "예. 더 좋은 글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각하. 다음 책 기대하겠습니 다." 그것이 애독자의 말이라 생각하려던 칸디드 백작은 조금 후 다시 리 슬 캄프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백작은 캄프리의 진의를 깨달았 다.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책이나 쓰시라는 요구에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던 칸디드 백작은 그냥 침묵하기로 했다. 그는 물러나자고 말 했고 수염 후줄근한 노인을 포함하여 절벽 위의 눈 먼 활에 질려있던 다른 사람들은 황급히 그 말을 따랐다. 제국 재건 범신민 연대의 대표단이 협곡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보던 캄프리 수교위는 절벽 양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궁수들은 협곡 아 래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쇠막대기를 따라 걸어갔다. 쇠막대기는 땅과 수평으로 뻗어있었고 궁수들의 허리에는 짧은 줄이 있었다. 그 줄의 끝에 있는 고리가 쇠막대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칸디드 백작은 그들 이 맹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그들은 정말 맹인이었다. 다만 견고한 안전장치가 있기에 절벽 가장자리를 걸을 수 있을 뿐이 다. 맹인 궁수들이 역시 아래에선 보이지 않는 계단을 따라 요새 안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캄프리는 바퀴 의자를 돌렸다. 그는 성벽 왼쪽을 향해 바퀴를 굴렸다. 그러자 여자가 그의 뒤편으로 따라와 바퀴 의자 를 밀었다. 그녀의 오른쪽 반신은 심하게 뒤틀려 있었고 바퀴 의자를 미는 것은 그녀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캄프리는 그만두라고 말하진 않았다. "고맙다. 주에나 수전사." 주에나 수전사라 불린 여자는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캄프리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우리 금고에 있는 금? 그거 기밀인데. 액수로 따지면 감이 잘 안오 고 무게로 따지려면 잴 저울이 없기 때문에 용적으로 따지는 편이라 고만 알려주지." 주에나는 흥분하여 재잘거렸다. 새소리 비슷했지만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올 새는 없다. 캄프리가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저번에 온 녀석이 그 따위 소리를 했던 거지. 병신 들에겐 그렇게 많은 금을 가지고 있을 권리가 없다고 했던가? 코세 칸디드 백작은 그래도 품위는 지키더군. 백작의 책을 좀 읽어줘야겠 어." 수전사 주에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웅얼거렸다. 캄프리는 방어 적으로 웃었다. "아예 들여다 보지도 않고 그런 감상 말한 것은 아니다. 수전사. 내 방엔 정말 그의 책이 있어. 다만 초반 열 장을 넘기니까 그 책을 다 읽으면 수명이 십 년은 짧아질 거라는 생각이 덜컥 들더라고. 가이너 카쉬냅이나 라수 규리하 같은 이가 읽을 책인 것 같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번엔 정말 마음 단단히 잡고 읽어야지. 이해를 하든 못하든 말이야." 캄프리는 자신의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 그 날 밤, 사유와 세계의 상호귀속 20쪽을 읽은 캄프리는 그 책의 주제가 예의를 지키는 것보 다는 오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책을 덮고 곧장 잠들었다. 죄책감이 그의 안면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제국 제 3 금고요새의 일상이 계속되었다. 누군가는 게으름을 부리 고, 다른 누군가는 그런 자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누군가는 귀가 들 리지 않는다는 시늉을 했고, 그러면 다른 누군가는 그런 자들의 엉덩 이를 걷어찼다. 발이 없을 경우엔 좀 저렴한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허위를 눈치채는 순간이 다가왔 다. 쾅이 아니라 스르륵으로. 9087 독립중대원들은 모두 일상이 계속 되는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환상은 그들의 노력만으로 유지 가 능한 것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요새를 찾아오는 자들은 언제나 중 흥이나 재건, 부활, 수호 따위의 단어가 들어가는 단체에 소속된 자 들이었고 요새병들에게 익숙한 제국 관리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 바깥의 세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분명했다. 정말 제국이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가 바깥에 나가 상황을 알아 보기 위해선 제비뽑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들은 요새 바깥을 싫어했 다. 요새병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일상은 그들 스스로 잘 꾸려가고 있다. 왜 바깥 세상은 제멋대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제국을 잃어버린 거지? 잃어버리기도 쉽지 않을 만큼 큰 물건이잖아. 요새 사령관 리슬 캄프리가 성벽으로 나와 방문자를 맞이하는 회수 도 점점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수전사 주에나가 방문자들을 맞 이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그만두게 되었다. 성질 고약한 방문자 한 명이 수전사를 향해 활을 쏘아버린 것이다. 주에나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지만 캄프리는 접객 원칙을 바꿨다. 그 다음 방문자들은 텅 빈 성벽을 향해 고함을 지르다가 물러나야 했다. 어쩌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제국의 금을 맡아 지키고 있는 병사들 은 더 이상 일상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제국의 금은 거북한 위탁물 이었다. 그들이 야심가였다면 용적으로 따져야 할 막대한 금은 강력 한 힘이 될 테지만 9087 중대원들은 금보다는 요새를 더 사랑했다. 금고요새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들은 장님이거나 귀머거리, 앉은뱅 이, 지진아가 된다. 하지만 요새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제국군이었다. 요새는 그들에게 하늘누리와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그리고 깨달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요새병들은 침울한 서로의 얼굴에서 분명한 미래를 읽었다. 적당한 야심가에게 제국의 금을 내어주고 일신의 안녕을 제공받는 것은 그들 의 미래가 될 수 없다. 제국에 대한 배신이라는 도덕적 거부감을 제 외하더라도 더 본질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금이 없는 금고요새는 쓸 모가 없다. 금을 내어주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따라 서 금은 내어줄 수 없다. 조금씩 금을 내어주며 긴 시간을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금의 양이 워낙 막대하니 아마도 그들 모두가 늙어죽을 때까지 버티는 것도 가 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존 외엔 아무 것도 아닌 삶이 될 것이 다. 더 이상의 신병도 없을 것이고, 장애인은 도저히 벌 수 없는 전 역금을 받아 전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의 요새는 그들의 무덤 이 될 것이다. 요새병들은 굳건한 성벽을 보며 늘상 느끼던 믿음직한 느낌 대신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외엔 아무런 방도가 없다. 좌절감 속에서 그들은 문을 열어줘야 할 상대가 야심가 들이 아니라 식료품을 팔러 온 상인임을 인정했다.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7월도 다 지나간 시점, 딱정벌레를 타고 온 손님은 아무리 봐도 상 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런 동행인도 없이 혼자 왔고 딱정 벌레를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새 내부가 아닌 성벽 앞에 착륙했 다. 요새사령관 캄프리 수교위가 그 등장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관례를 깨고 그는 직접 성벽 위에 나타났다. 건장한 체구 와 딱정벌레 때문에 얼핏 도깨비라고 착각할 법도 하지만 성벽 앞에 서있는 것은 인간 남자였다. 그는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리슬 캄프리 사령관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서서히 쌓였기에 다른 요새 병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수심이 싹 걷혔다. 사령관 은 성문 개방 명령을 내렸다. 요새병들이 황급히 성문을 여는 것을 보며 캄프리 수교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있던 주에나 수 전사가 사령관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이제야 말 좀 나눌 상대가 왔군." 정우 규리하는 뒷짐을 쥔 채 걸으며 속삭였다. "찾아간 사람을 전부 문전박대했다고 하던데, 대장군님은 왜 이레는 만나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틸러는 그녀의 곁을 따라 걸으며 턱을 살짝 어루만졌다. "글쎄요. 이레도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요새 사령관 리슬 캄프리 수교위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 습니다." "어째서죠?" "문전박대가 바로 만날 의향이 있다는 의사 표시이기 때문이죠." 정우는 환하게 웃었다. "틸러. 설마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심술 부리는 남자애 괴벽이라고 설명하려 건 아니죠?" "감사하게도 아닙니다. 이걸 생각해 보세요. 규리하공 아가씨. 금고 요새 사령관이 누군가와 만났다는 소문은 널리 퍼지지 않습니다. 신 기할 것이 없는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이야 기는 다릅니다. 금고요새 안에 있는 막대한 금과 결합되면 상당히 흥 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됩니다. 고립된 처지에서 캄프리 수교위가 널리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선 그보다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틸러는 정우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고, 소득이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사람들은 묵묵히 시지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우는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다시 걸음을 뗐다. "하지만 캄프리 수교위가 정말 제국 금고를 지키고 싶어서 그런 것 일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공격했을 겁니다." "공격?" "예. 정말 금고를 지킬 생각이었다면 공격을 했을 겁니다. 예비 약 탈자 무리에 대한 경고로 말입니다. 하지만 수교위는 아무도 공격하 지 않았습니다. 주인 잃은 막대한 금이 있는데 약탈자 무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비록 굳건한 요새라곤 해도 거길 지키는 병사들은 대부분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인 걸요. 그보다 더 유 혹적인 보물도 없습니다." "그래서 경고가 필요하다는 건가요?" "예. 하지만 수교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겠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인다면 이상할 것이 없습니 다. 공격하지 않을 테니 정말 쓸만한 작자가 오라는 뜻입니다. 수교 위는 몸이 성치 않은 자기 자신과 부하들을 확실히 도와줄 사람이 필 요한 겁니다. 당장 금을 빼갈 필요가 없이 단지 보유만 해도 되는 유 력자 말입니다." "그런가요." 다시 고개가 홱! 이번엔 동작이 좀 급격했고 정우는 옆으로 나동그 라질 뻔했다. 틸러는 "실례하겠습니다." 정우의 어깨를 붙잡아 똑바 로 세워주었다. 똑바로 선 정우가 상기된 볼을 감싸쥔 채 호흡을 고 르는 것을 보던 틸러가 속삭였다. "저, 너무 열성을 보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쉬엄쉬엄 하시지요." "하지만 감독하겠다고 했는걸요. 열심히 해야죠." 틸러는 감독관이 정우에게 감독을 보도록 허락해준 것은 무경 시험 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틸러는 과장을 둘러보았다. 규리하에서 과거는 일년에 두 차례 시행되며 춘계 과거는 문과, 추 계 과거는 무과 시험이다. 책 읽기 좋은 겨울 동안 지식을 쌓아 봄에 문과를 보고 활동하기 좋은 여름에 체력을 길러 가을에 무과를 보는 셈이다. 가을에 치뤄지는 이번 과거는 따라서 무과 시험이고, 그 중 지금 시행되는 무경 시험에는 큰 의미가 없다. 다른 지방이라면 모르 되 무향 규리하에서 각종 병서들은 청소년 애독서다. 아무래도 무과 시험의 진짜 볼거리는 무경 시험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될 무술 시험이고 틸러가 기대하는 것도 그것이다. 틸러는 제국군 부위가 응 시해도 입격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그 무시무시한 시험이 어느 정도인 지 궁금했다. 그러나 틸러의 호기심이나 정우의 열성과 별개로 이번 과거의 의미 는 각별하다. 규리하공이 주관하는 과거가 제대로 치뤄진다는 것은 규리하의 정세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의미가 있 다. 또한 이번 과거에 입격한 이들은 규리하공 아이저 규리하의 세력 에 맞서는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의 지지세력이 될 터이다. 호사스 러운 말을 남용한다면 이것은 '정우의 아이들'을 선출하는 일이다. 감독을 보겠다는 정우의 말에 틸러가 보안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찬 성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번 과거에 응시한 자들에게 정우가 직접 과거를 감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 다. 틸러는 그 지점에서 문제의 해법을 찾기로 했다. "성실히 하시는 것은 좋습니다만 이 사람들은 세심한 감독관보다는 존경할 만한 주군을 원할 겁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이런 덜 중요한 시험에서는 의연한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짜 시험은 무술 시험입니다." "저는 그거 볼 자신이 없어요. 틸러. 평이 무서워요. 그거 안 보려 고 여기서 열심히 감독하는 거예요." "직접 나와 계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럴까요?" "예. 그리고 저 사람들도 창피해서라도 부정행위 같은 건 안 할 겁 니다. 자장가로 포위섬멸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던 자들이니 까요." 틸러는 정우가 재미있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는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저는 그런 자장가 못들었어요. 틸러." 틸러는 정우가 들었을 자장가는 전부 도깨비의 것이라는 사실을 떠 올렸다. 정우가 말했다. "어쨌든, 그래서 귀족원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규리하가 그 금고요 새를 수중에 넣어야 한다는 거죠?" "이왕이면 귀족원 회의도 규리하에서 개최하면 더 좋겠습니다만 그 것은 좀 어렵습니다. 규리하는 제국 서쪽에 너무 치우쳐 있으니까요. 그러니 하인샤 대사원이어야 합니다. 그곳은 확실한 중립 지역이니까 요." "그 말 들었어요. 하지만 대사원에서 귀족원 회의가 열린 적은 한 번도 없다는 말도 들었는데요."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반대는 일축할 수 있는 명분이 있습니다. 대호왕께서 북부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내신 곳이 하인샤 대사원이었니까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국이 잉태 된 장소는 하인샤 대사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우는 발걸음을 돌렸다. 응시자들의 오른쪽을 따라 걸어간 두 사람 은 이제 사람들의 뒤편을 따라 걸었다. 정우가 말했다. "대장군님은 왜 규리하에게 제국의 기사회생을 맡기려 하시는 거 죠?" "두려우신가요?" "글쎄요. 흐으음. 이건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해도 될 거예요. 저는 즈믄누리를 고향으로 여기고 아직도 꿈 속에선 도깨비처럼 행동할 때 가 많은 킴이니까. 그런 제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이 참 기묘하다는 생 각이 들어요. 규리하는 왕이 사라진 뒤에도 수백 년 동안 왕의 것을 지켰지요. 그리고 돌아온 왕에게 규리하의 가장 귀한 보물 둘을 바쳤 지요." 틸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괄하이드 규리하와 라수 규리하. 정우가 말했다. "그리고 왕국은 제국이 되었고, 제국은 규리하를 파괴했어요. 그런 데 규리하는 이제 빈사 상태에 빠진,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제국 을 위해 다시 일어서야 하는군요. 규리하가 버렸던 사람을 그들의 주 인으로 내세워서." 정우의 표현처럼 그녀는 객관적이었다. 정우의 말투에는 규리하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관찰자의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틸러도 곁에 있는 여인이 규리하의 주인이 아니라 함께 규리하를 관찰하는 국외자인 것처럼 말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후사린 규리하의 여한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후사린 규리하가 여기에 남아 있었다면 왕의 변경백령은 지킬 수 있었을 겁 니다. 더 일찍 떠났다면 왕국은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 만 후사린 규리하는 너무 늦게 결정을 내렸고, 그래서 둘 다 지키지 못했지요." "그래서 그 후손들은 모두 변경백령과 왕국을 양손에 들고 그 중 하 나를 놓지 못해 쩔쩔매야 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건가요?" "그 저주를 풀 방법이 있긴 하지요." "뭔가요?" "규리하가 제국이 되면 됩니다." 틸러는 자신의 말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 정우를 똑바로 바라보았 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정우의 어깨 너머 먼 곳의 응시자에게 향했 다. 시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응시자들 가운데 앉아있던 그 남자는 붓 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그 붓은 남자의 손에서 둘로 분해되 었다. 순간적으로 틸러는 그가 문제의 난해함에 좌절하여 붓을 부러뜨린다 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 붓이 사실은 붓이 아니라 바람총이고 그가 응시자가 아니라 암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다. 물론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능성이 현실화되었다. 현실은 그런 법 이다. 남자가 붓대를 입으로 가져갔을 때 틸러는 정우를 와락 끌어당 겼다. "아라짓 제국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군요. 예상하기 쉬운 것은 역시 수도나 계승권자를 두고 다투는 군웅들의 쟁탈전이지요. 하지만 아라 짓 제국의 경우에는 확보함으로써 정통성까지 획득할 수 있는 특정 지역이나 특정 인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행한 일이오. 제국 곳곳에서 군웅들이 병사를 이끌고 발호하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되니." "하, 그래. 모두들 자기 세력권에 엉덩이를 단단히 붙이고 있지." "예. '지시'도 그들의 엉덩이를 붙잡아두는데 큰 몫을 한 것 같습니 다. 최소한 시구리아트 서쪽에서는." "하지만 입은 바쁜 것 같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온갖 합종연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산맥 서쪽에서만 대략 스무 개 남짓 한 조직이 포착되었습니다. 동쪽의 사정도 다르지는 않겠지요. 폭발 적으로 늘어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곧 조정 국면으로 접어들 테 고, 아마 병합이 이루어지겠지요. 귀족원 회의 개최 전까지는 숫자가 많이 줄어들 겁니다." "자유무역당에 대한 접촉 시도는?" "상당합니다." "당연히 그럴 거요. 지테를 시야니 당주의 영향력을 제외한 향후 예 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무의미하니까 말이오." "하지만 지테를 당주와 손을 잡으면 게라임 당주와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습니다." 세퀴라도의 자유무역당사 회의장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유무역당의 고위 당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대화 방식에 서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나 눈앞에 있 는 사람을 3인칭으로 말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례나 심지어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자유무역당에서는 '값싼 대화'라고 불리는 보편적인 대화다. 자유무역당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의나 사회적 관습, 대화 참가자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돌려말하는 것은 같 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불필요한 비용을 들이는 행위이며, 따라서 효율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이들을 산문적이고 직설적인 사람들로 생 각하는 외부인들의 견해는 오해다. 문필가들에게 잘 알려져 있듯 좋 은 은유는 수많은 의미를 한꺼번에 전달할 수 있다. 자유무역당원들 은 적은 비용으로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은유를 즐긴다. 다만 문필가가 아닌 그들은 참신한 은유를 개발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 다. 어쨌든 그들은 희극적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 는 것도 아니고, 상석에 앉아있는 지테를 시야니 당주를 당혹시키기 위해 그를 제3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테를 시야 니 당주 또한 그런 화법에 아무런 낯설음을 느끼지 않았다. 낯설어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지테를 당주는 적극적으로 대명사를 배제했 다. "지테를 시야니 당주와 게라임 지울비 당주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귀족은 의외로 많지 않을 거다. 지테를과 게라임에 겐 각자 상대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문과 도로지." 회의장의 장식은 검박하다 못해 초라할 지경이다. 지테를 시야니가 앉아있는 의자도 위치상 상석일 뿐 다른 의자와 똑같이 등받이 없는 의자였다. 대패질로 모든 마무리를 끝낸 것인가 싶은 탁자는 낡았다 는 점에서 호평받는다. 표면이 닳고 닳아 거스러미 때문에 옷을 찢거 나 팔뚝을 찌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테를은 그 맨들맨들한 표면에 팔을 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제한을 두지는 말도록 하자. 그 제한은 우리 에게도 작용할지 모르니까." "유료도로당과의 협력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가능성은 열어둔다는 거지."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유료도로당과의 전략적 제휴가 가능 한지부터 고민해보았다. 모든 사람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가로젓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유료도로당의 수입 중 상당액이 자유무역당이 낸 도로 사용료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유무역당이 유료도로당에 의 지하는 바는 그보다 더 크다. 도로가 없이는 무역이 불가능하니까. 한쪽이 다른쪽에 일방적으로 의존한다면 대등한 거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결국 화제가 바뀌었다. "제국군의 동향은?" "물론 지금까지 들어온 소식은 모두 시구리아트 서쪽의 이야기라는 것을 전제해두겠습니다. '지시'는 아직 동쪽까지 전달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서쪽의 상황은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우선 발케 네 공작에게 하늘누리 실종의 책임을 묻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는데, 인기가 별로 없습니다. 하늘누리의 실종에 발케네공이 관련되었을 거 라고 보기 어렵거니와 만약 그랬다면 공작이 자결했을 리가 없습니 다. 하늘누리의 실종은 역시 하늘누리 자체에 발생한 어떤 문제 때문 에 일어난 사건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제국군은 궐기하 여 발케네로 진군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 하고 있습니다." "주전론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상은 언제나 스스로 싸울 필요가 없 는 사람들이오. 군대를 대상으로 한 주전론은 인기가 없소. 더군다나 저기엔 수천 명의 레콘이 있으니. 두 번째는?" "당장 새 황제를 찾아 옹립해야 한다는 것들이야. 이 부류에는 아무 래도 서약지지파의 입김이 있는 듯해. 빨리 새로운 황제를 찾아 그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와." "새 황제를 선출하는 권리를 귀족원에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조금 섞여 있을 테고요." "목숨을 걸고 제국을 지키는 자들에게 제국의 최고지배자를 선출할 권한이 있다는 논리도 조금 엿보입니다. 반응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 습니다. 황제가 돌아올 경우를 차치하더라도 귀족원과의 대립은 필연 적일 테니까요. 더군다나 '지시'가 있습니다." "그래. 그 지시. 따라서?" "따라서, 대부분의 제국군은 일단 사태를 관망하는 쪽으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지시가 산맥을 넘으면 아마 동쪽에서도 비슷한 분위기 가 포착될 것 같습니다." 당원은 제국군의 동향에 대해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시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건 지시에 대한 긍정적 평가인 거요?" "아…… 예. 겉으로 보면 싱겁기 짝이 없는 지시입니다만 씹을수록 짭짤한 맛이 있습니다." "어이, 이봐들. 난 그 지시 우습다고 생각해. 누가 좀 설명해줘. 그 거 비품 관리 잘하라는 뜻 아니야?" 자유무역당원들의 화제가 되고 있는 지시는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모든 제국군에 보낸 '긴급지시'를 말하는 것이다. 지시 내용은 조금 당황스러운 것이었는데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부대가 보유한 어떤 솥 도 병영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보기에 따라서 는 비품 관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듯한, 전혀 시국과 맞지 않는 지 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은 영토 확장을 꿈꿨던 귀족 들에게 보내는 경고입니다." "뭐? 어째서 그렇게 된다는 거지?" "아, 그건 이런 말이야. 제국 정부가 사라진 이상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할 자들은 분명히 있을 거야. 하지만 그 런 자들도 다른 귀족들의 영토를 건드릴 수는 없지. 어떤 관계 설정 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섣불리 다른 귀족을 건드 렸다간 무수히 많은 귀족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르잖아? 따라 서 봉토는 건드릴 수 없지. 하지만 황제의 행정관이 지배하는 제국령 은 다르지." "흐음. 그래서?" "그렇다면 인접한 제국령을 자신의 영토에 병합시켜 그것을 기정사 실화한 다음에 귀족원 회의에 출석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귀족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말이야. 이해했어?" "했다고 생각해." "그런데 남의 땅을 먹으려면 힘이 필요하지. 어디서 힘을 끌어올까? 보유하고 있는 사병은 자기 땅 지키는데 써야 해. 따라서 제국군에 대해 침을 흘릴 수 있단 말이야. 하지만 대장군은 모든 제국군에게 병영 내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내용의 지시를 보냈지. 솥을 안 들고 나가면 식사를 못하잖아." "그게 그런 뜻이야?" "한 가지 더 있지. 그들은 도시락 들고 이동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는 작전을 펼칠 수 있어." "점점…… 그건 무슨 뜻이지?" "만약 어떤 정신나간 귀족이 제국령을 치면 제국군은 도시락 지참하 고 뛰어와서 그 귀족을 쫓아낸 다음 다시 병영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야. 솥이 병영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원정 활동은 불허하 고 치안 활동은 허락한다는 뜻이야." "헤! 그래서 지시가 귀족들의 엉덩이를 붙잡아뒀다는 것이군." 지테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원 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 모든 상황을 고정시켜두겠다는 거 지.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면 통제 불가능한 지경으로 폭주할 가능성 이 높으니까 바람직한 태도이긴 해. 그리고 그가 무대의 중앙에 있는 것 같군. 그렇다면 자유무역당의 배역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지? 선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라고 보는데. 대장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서 그의 현상유지 정책에 힘을 실어줄 것인지, 아니면 침묵한 채 상 황을 주시하든지, 이도저도 아니면 다른 길을 걸을 것인지. 어느 쪽 의 이문이 클까?" "대장군을 지지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지?" "자유무역당은 대장군의 정책에 반감을 보이는 귀족들로 하여금 곤 혹스러운 경제적 피로감을 경험하게 할 수 있소."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겠군." "사업환경 유지비용으로 생각하면 되겠지. 전쟁은 어떻게 봐도 좋은 사업환경이라 할 수 없으니까." "다른 길에는 뭐가 있지?" "비셀스 규리하의 황위 등극, 새 황제와 협조 하에 유료도로당을 해 체, 모든 도로를 국가 재산으로 귀속, 혹은 자유무역당이 위탁 관리, 영구적인 사업로 확보." 자유무역당원들은 돌려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테를 시야니 당주 의 표정에 유의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대장군 대신 비셀스 규리하를 지지해야 하는 건가? 둘이 함께 무대 중앙에 있으니 자유무역당이 보내는 박수의 방향을 불분명 하게 하는 건 간단하겠군." "저, 여러분." 조금 전 제국군의 동태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던 당원이었다. 사람들 은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논의된 이야기는 전부 시구리아트 산맥 서쪽의 상황에 국 한된 것입니다. 저는 동쪽의 반응도 아마 서쪽과 비슷할 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남쪽의 반응은 다를지도 모릅니다." "남쪽?" "예. 제국군의 가장 강력한 군단들은 대부분 제국 남부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잘들 아시겠지만 그들은 제국을 지키는 것은 자신들이라고 믿고 있고 따라서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대장군의 지시가 시구리아트 를 넘는 것만큼이나 한계선을 넘는 것에도 시간이 걸릴 테고, 산맥 동쪽이 서쪽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해도 남쪽 또한 그러리라는 보 장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발케네공과 시모그라쥬공 사이에서 뭔가 밀 약이 있었던 듯한 증거도 포착되었습니다. 대장군이 제때 발케네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에는 시모그라쥬공의 손길이 있었던 듯합니다." "시모그라쥬공이 대장군을 억류했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놓 아준 거지? 발케네공을 배신한 건가?" "탈출했을 수도 있소." "그렇군. 그렇다면?" 지테를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원은 말했다. "엘시 에더리와 비셀스 규리하가 무대 중앙에 있다는 것에는 동의합 니다. 하지만 무대 뒤편엔 다음 막의 주인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 르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대본에는 전막의 주연을 해치운 다는 흥미로운 전개가 쓰여있을 수도 있습니다." =============================================================== 17챕터 시작합니다. 여름이란? : 제때 담배를 털지 않으면 담뱃재가 코로 날아 들어오는 계절. (그러나 선풍기는 포기할 수 없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7-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5-16 조회수 : 716 피를 마시는 새 17. 불씨의 군무 - 2 정우를 끌어안고 빙글 돈 순간, 틸러는 귀 옆을 스쳐지나가는 예리 한 바람 소리를 들었다. 독침은 건너편의 벽에 맞고 틱 하며 떨어졌다. 정우는 틸러의 하얗 게 변한 얼굴을 보곤 숨을 멈췄다. 틸러는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 등 뒤에 붙으세요." 그리고 틸러는 정우를 놓은 채 다시 암살자를 향해 돌아섰다. 정우 를 끌어안고 그대로 도망치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이겠지만 틸러는 눈 길을 끄는 모습을 보았다. 다시 몸을 돌려 확인한 틸러는 자신이 제 대로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암살자는 쓰러져 있었다. 그 곁에는 손에 벼루를 든 응시자 한 명이 서있었다. 꽤 묵직한 벼루다. 바람총을 쏘려는 사람의 볼을 후려칠 경우 어금니를 부술 수 있을 만큼. 암살자는 거기에 더하여 기절까지 한 모양이다. 벼루를 들고 있던 응시자는 그것을 내팽개치고는 틸러 쪽을 향해 달려왔다. "규리하공께서는 괜찮으십니까!" 틸러의 등 뒤에 붙어있던 정우는 그 소리에 고개를 내밀었다. 바닥 에 쓰러져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암살자를 본 정우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감사 인사는 해야 해.' 정우는 다가오는 구원 자에게 손을 들어보이려 했다. 그 때 틸러가 정우를 나꿔챘다. 정우 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정우를 팽개친 틸러는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앞으로 튕겨져나갔다. 바람처럼 달려간 틸러는 다가오는 구원자의 허벅지를 찔렀다. 구원자는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틸러는 구원자의 턱을 호되 게 걷어찼다. 넋나간 얼굴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정우가 말했 다. "그건 감사 표시는 아닌 것 같군요." 틸러는 정우의 의문을 풀어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칼끝으로 구원자 의 품속을 헤치며 고함을 질렀다. "저 놈 붙잡아! 그 쓰러진 놈! 규리하공 아가씨, 피하십시오! 이봐, 경비! 경비병!" 응시자들은 당황하여 틸러의 말을 따랐다. 벼루에 맞아 쓰러진 암살 자의 주위에 있던 건장한 응시자들이 그의 사지를 움켜쥐었다. 그리 고 저편에서는 경비병이 달려왔다. 하지만 정우는 틸러의 말을 따르 지 않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틸러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사람의 품속을 헤치던 틸러의 칼끝에 곧 예리한 비수 하나가 끌려나와다. 틸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올리는 대신 칼끝으로 툭 쳐 냈다. 발로 비수를 밟은 틸러는 정우가 아직 제자리에 서있는 것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패거리입니다. 바람총이 실패할 경우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비수로 찌르지요. 이 칼에는 맹독이 묻어있을 겁니다." 정우는 고개를 꾸벅했다. 친절한 설명에 감사한다는 뜻이었고, 완전 히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그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틸러는 이를 악문 채 응시자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총을 쏜 암살자를 붙잡고 있는 자들도, 그리고 다른 응시자들도 충격으로 굳은 얼굴을 한 채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딱딱한 얼굴을 둘러본 틸러는 만사가 글렀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암 살은 실패했지만 규리하의 안정을 과시하기 위해 개최한 과거에서 암 살자가 난동을 부렸으니 오히려 규리하의 불안정함을 과시한 셈이다. 과장에 암살자가 들어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신원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초시 단계, 혹은 추천 단계에서부터 거대한 음 모가 있었다는 결론뿐이다. 틸러는 이를 갈면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암살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때 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놓아줘요." 틸러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우가 경비병들의 손을 뿌리치며 그를 향 해 걸어오고 있었다. 틸러는 기겁하여 외쳤다. "규리하공 아가씨! 뭣들 하는 거야, 빨리 아가씨를 안전한 곳으 로……" "놓아주세요!" 정우는 단호하게 외치며 경비병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틸러는 엉겁 결에 그녀를 밀어내는 듯한 동작을 취했지만 정우는 그의 팔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져들어왔다. 그리고 정우는 쓰러진 암살자를 내려다보 았다. 틸러는 황급히 칼끝을 암살자의 목에 가져갔다. 정우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게 된 틸러는 그녀의 입술에 핏기가 하나 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우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틸러가 다시 떠날 것을 종용해볼까 생각했을 때 정우가 말했다. "저, 많이 아프시죠?" 암살자는 허벅지를 움켜쥔 채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극심한 고통 속 에서도 암살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틸러는 그 표정이 혀 아래에 넣어둔 독주머니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그는 상당 히 예민해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정우가 말했다. "치료해드릴게요. 그런데 당신을 놓아준다면 아버님께 제 말을 전해 주실 건가요?" 틸러는 쾅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조금 전과 격이 다른 침묵 이 과장을 뒤덮었다. 응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정우를 끌고 가 야 할 경비병들조차 호흡을 멈춘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충격 속에서 틸러는 정우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정우는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틸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규, 규리하공 아가씨. 소용없습니다. 이런 암살자들에겐 붙잡힐 경 우를 대비하여 아무런 정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버……" 틸러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배후 주모자를 찾아갈 방법은 이 자들도 모를 겁니다." 정우는 틸러를 한 번 돌아보고는 과장을 죽 둘러보았다. 그녀의 오 른손이 가슴으로 올라왔다. 정우는 호흡이 힘든 사람처럼 앞섶을 움 켜쥐었다. 틸러는 그녀가 오랫동안 지연된 기절에 드디어 돌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는 기절하는 대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래도 제 말은 전해지겠지요. 아버님." 보통보다 조금 큰 목소리일 뿐 고성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요 한 과장에서 정우의 목소리는 우레처럼 울렸다. 틸러는 목구멍이 홧 홧 뜨거워지는 느낌 속에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다. 이 암살 기도 사건이 규리하 전체에 퍼져나가는 속도와 비례하여 정우의 말 또한 퍼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아이저 규리하에게도 전해 질 것이다. 틸러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딸의 통보 를 듣고 싶지 않았다. 정우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말을 전할 기회를 느닷없이 얻었다. 아무런 마음의 대비 없이. 틸러는 폭 포처럼 쏟아져나올 원망의 말들이 응시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하 자 앞이 아득해져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우에게 집중하고 있 는 경비병 쪽을 돌아보았다. 강제로라도 규리하공을 끌어내라는 틸러 의 명령이 떨어지기 직전, 정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빠! 힘내요!" 누군가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혀를 깨문 모양이다. 틸러는 다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칼을 놓칠 뻔했기 때문이다. 틸러는 황 급히 칼자루를 두 손으로 쥔 후에야 정우를 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 만 그가 본 것은 정우의 옆모습뿐이었다. 정우는 몸을 돌려 총총 걸 어갔다. 경비병들은 황급히 그녀를 둘러쌌다. 틸러는 경비병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멀어져가는 정우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당황을 다룰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이봐요, 머리 좋은 부위님." 틸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피로 물든 허벅지를 움켜쥔 암살자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통증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암살자는 어려 보였다. 암살자가 어쩐지 매제를 닮았다는 불쾌한 생각을 떠올린 틸 러는 눈앞으로 늘어지는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한 번 더 말해봐." 암살자는 코방귀를 뀌었다. "싫어요. 그런데 저 여자 원래 저렇게 대담합니까?" "규리하공이시다. 그런데 대담하냐고?" "우, 썅. 빌어먹게 아프네. 하긴, 성을 파묻었다고 들었어요. 도깨 비들 사이에서 자랐어도 대호 새끼는 역시 대호군요. '아빠, 힘내요' 라고? 부위님은 저럴 수 있겠어요?" 틸러는 그러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린 틸러는 시험 감독관을 바라보았다. 감독관은 벌겋게 변한 얼굴로 무경 시험 을 내일, 혹은 모레, 어쨌든 미래의 어느 시간으로 연기한다는 내용 을 떠들고 있었다. 당연히 거센 항의가 일어나야겠지만 응시자들은 감독관의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도 보내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탄복 한 얼굴로 정우의 뒷모습을 좋고 있었다. 엘시 에더리는 몸서리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규리하의 가을은 싸늘했지만 엘시의 목덜미는 축축했다. 엘시는 팔 뚝에 소름이 돋아있는 것을 느꼈다. 팔뚝을 쓸어내리던 엘시는 갑자 기 팔을 뻗어 탁자 저편에 놓아두었던 칼을 집어들었다. 엘시는 돌의자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낙엽이 수북이 떨어 진 규리하성 후원은 고요했다. 나무들 사이의 그림자를 세심히 바라 보던 엘시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칼을 조금 뽑았다. 그리고 칼날이 약 간 드러나게 한 채 칼을 다시 돌탁자 위에 얹어놓았다. 엘시는 돌의자에 걸터앉았다. 5분 정도 잔 것인지 두어 시간 정도 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 만 오랫동안 잠들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엘시는 자신이 잠깐 졸 았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까. 엘시는 탁자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돌아보았다. 글을 읽으 려 시도했지만 한 줄도 제대로 읽기 어려웠다. 차라리 두어 시간 낮 잠이라도 잔 후에 다시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엘시는 잠들 수 없었다. 엘시는 머리를 감싸쥔 채 눈앞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 자신이 그 린 그림이다. 얼핏 보면 복잡한 사고를 당한 새처럼 보인다. 왼쪽 날개가 기이하 게 크고 뭉툭하며 반면 오른쪽 날개는 가늘고 길다. 그리고 꼬리가 공작을 연상시키리만큼 크다. 새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홱 꺾여 있다. 대장군의 조악한 그림 실력 때문에 그런 이상한 새가 그려진 것은 아 니다. 약간의 지리학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세계의 모습 을 그린 것, 즉 지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대륙의 등뼈로 불리는 시구리아트 산맥은 지도 속의 새에서도 등뼈 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같은 비유를 적용한다면 지러쿼터 산맥은 왼쪽 날개뼈에 해당한다. 엘시는 왼쪽 날개뼈의 왼쪽, 즉 지러쿼터 산맥 서쪽의 규리하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그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 겨 지러쿼터 산맥을 넘으면 잔하일이 보인다. 잔하일 남쪽으로 세퀴 라도, 사빈, 하글센, 노레조, 투마 등이 보인다. 거기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발칸 지역으로 불리는 나포츠, 칸라크, 발란카 등이 나타 난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는 대신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카시다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지러쿼터 산맥과 시구리아트 산맥에서 발원한 많은 강들이 합류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강물을 따라 남하하면 뤼도파, 마토라, 쥐딤, 칼리도 등 쟁룡해에 면한 지역들이 나타난다. 이로써 규리하에서 칼리도까지 4천 킬로미터 가량의 여정이 끝나지 만, 이것은 제국 전체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일 뿐이다. 규리하에서 칼리도까지 가는 길을 더듬어보았던 엘시는 한숨을 내쉬 었다. 제국은 광대하다. 엘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뱀단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지금 그 광대함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칼리도까 지 가는 것만으로도 직선 거리로 4천 킬로미터고, 엘시는 그곳까지 자신의 지시가 전해졌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국의 동쪽 끝 자이아 치나 남쪽 끝 하텐그라쥬까지 지시가 전해지려면 몇 달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 광대한 제국 곳곳에 200만의 제국군이 흩어져 있다. 좋은 무기와 훌륭한 살인술을 익혔으며, 굶주리게 될지도 모르는 200만 명의 사 람. 엘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굶은 군대는 포악해진다. 도덕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나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후천적인 습득물에 불과하고, 위장의 공격 에 취약하다. 소화시켜야 할 다른 음식이 없으면 위장은 서슴없이 도 덕을 소화시킨다. 물론 군인의 위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것은 없 다. 어떻게든 제국군에 식량을 제대로 공급되어야 한다. 드물지만 전용 농토를 가지고 있는 부대들의 경우엔 몇 년 동안이라 도 보급에 문제 없이 제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엘시는 그런 부 대들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부대가 농토를 가지 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전략상 요충지가 비옥한 곡창지대일 수는 없으니까. 그런 부대들에게 제국 곳곳에서 사들인 식량 및 필요한 물 자를 분배하는 것은 태위청의 일이다. 하지만 태위청은 하늘누리와 함께 사라졌고, 그래서 엘시는 혼자서 태위청의 일을 대신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물론 무리한 시도다. 관련 자료가 태위청과 함께 모 두 사라졌기 때문에 엘시는 제국군 전체의 배치 현황조차 알 수 없었 다. 중요 부대들의 위치는 대략 기억하고 있었지만 200만이나 되는 제국군 전부의 위치를 알 수는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제국군의 배치 현황을 파악 - 혹은 추론하여 지도 위에 그렸지만 엘시는 그 지도를 믿기 어려웠다. 피로감 속에서 엘시는 자신이 괜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제국군 장교들 중엔 멍청이가 없다. 보급이 중단 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의 재주를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임기응변은 그들의 처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대장군이 어림짐작한 보급 계획보다 훨씬 효율적인 것일 수도 있다. 엘시는 주먹으로 이마를 눌렀다. 당연히 그러하다. 지금쯤 제국군의 지휘관들은 엘시와 마찬가지로 보급이 불분명해진 상황에서 휘하의 장병들을 어떻게 먹여살릴지 고 민하고 있을 테고 그 고민의 결과물은 엘시의 그것보다는 훨씬 현지 상황에 적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엘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있지. 내가 미쳐버리지 않는다는 것.' 엘시는 상체를 숙여 돌탁자에 이마를 대고 눌렀다. 서늘한 느낌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엘시는 머리를 떼지 않았다. 엘시는 겨우 인정했다.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미칠지도 모른다. 그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을 보조하며 발케네 정벌군을 모두 규리하 로 이동시켰고 칼리도 백작의 자격으로 귀족원 회의를 요청했고 대장 군의 자격으로 모든 제국군에게 경거망동을 삼가는 명령을 내렸다. 인생에 두 번 다시 찾아오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끔찍한 여름이었 다. 그리고 규리하에는 이미 쌀쌀한 가을이 찾아왔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필요했다. 어떤 사실을 잊기 위해. '하늘누리가 없다.' 엘시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늘누리가 사라졌다. 황제가 없어졌다. 제국이 죽었다. 세상에 제국이라는 정체가 도입된 것은 31년 전이다. 31년. 보통 인 간의 평생 중 반에 미칠까 말까 하는 짧은 기간이며, 따라서 지금의 4,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겐 제국이 없었던 시절의 기억이 선명할 것 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건 사회를 실제로 이끄는 것은 4, 50대의 사 람들이다. 제국 어느 곳엘 가든 그곳의 지배자들은 제국이 없었던 시 절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국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감 당하기 힘들 만큼의 충격은 아닐지도 모른다. 엘시는 최소한 칼리도 를 다스리고 있는 그의 어머니는 당황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열아홉 살의 변경백이 지배하는 땅 규리하에서 서른한 살의 대장군은 제국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저, 대장군님?" 엘시는 머리를 들었다. 정우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정우."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던데요." "내가 어떻게 보였습니까?" 정우는 엘시가 앉아있던 돌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상체를 숙여 탁자 에 쿵 찧듯 이마를 갖다대고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입으 로는 짓눌린 신음을 흘렸다. "으흥, 으흐흥!" 조금 후 정우는 상체를 들고는 엘시를 돌아보았다. "이렇게요." "……그랬군요. 확실히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알겠어요. 자당을 걱정하시는 거죠?" 엘시는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걱정할지언정 엘시는 어머니를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시련이 다시 신의 힘을 훔쳐 한계선을 넘어왔다는 이야기나 레콘 해군이 칼리도의 앞바 다에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전까지는 엘시는 칼리도를 조금도 염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시가 말하기 전에 정우가 먼저 말했다. "저도 아버님이 걱정돼요." "아버님이오?" 정우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사람들 눈이 싫었어요." "눈이오? 그 사람들이오?" "응시자들 말이에요. 그 사람들도 그럴 테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러겠지요." 엘시는 정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뭘 한다는 말씀입니까?" "우리 아버지를 욕하겠지요. 필요하면 딸도 죽이는 인면수심의 남자 라고." 엘시는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엘시는 다시 정우의 모습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하지만 엘시는 어디에서도 암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서 고함이나 비명이 들려오지도 않았다. 그의 곁에 앉아있는 정우의 옷차림은 완벽했다. 어깨 뒤로 늘어져 땅까지 미치는 긴 머리 어디에도 핏자국이나 흐트러진 모습은…… 엘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우의 머리카락은 길었다. 그리고 엘시는 정우의 긴 머리를 고정시 키는 어떤 장치도 보지 못했다. 엘시는 그녀의 머리를 고정시키던 비 녀가 어디로 간 것인가 생각했다. 정우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불쌍한 분이세요." "불쌍한 분이라고요?" "평생 동안 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못하는 아버지는 드물 거예요. 딸을 위해 좋은 신랑감 대신 좋은 암살자를 찾아야 하는 아 버지도 드물 테지요. 그런데 이제 사람들에게 욕을 듣게 되었어요. 동정을 받아야 할 분인데. 음.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에게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힘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정우." "그래서 아빠라고 불러봤어요.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어서, 음. 제 말이 아버지에게 전해질 기회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부르고 싶 었어요. 열아홉 살이나 먹어서, 처음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기회가 없겠지요." 엘시는 정우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우가 거론한 암살자라는 말은 그를 긴장시켰다. "정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과장에서 누가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엘시는 잠깐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붙잡혔습니까?" "예. 틸러가 붙잡았어요. 그리고 과거 보러 와주신 분들도 도와주셨 고요." "날씨가 이젠 제법 싸늘하군요. 감기 드실지도 모르니 외출을 삼가 셔야겠습니다." 정우는 빙긋 웃었다. "애먼 칼 맞을지 모르니 몸조심하라는 말보다는 듣기 좋네요." 엘시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돌탁자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와 문방 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우 또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란 히 앉은 두 사람이 침묵하는 동안 가을의 햇살은 연한 구름 사이에서 흩어지고 희미한 바람이 흔들어놓은 낙엽들이 바스락거렸다. 정우가 말했다. "대장군님?" "예."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결혼해달라고 해주세요." 엘시는 뜨악한 눈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손사래를 치고 말 했다. "아뇨, 아뇨. 진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로만. 말만 그렇게 해달라는 거예요. 다른 뜻은 없어요." 엘시는 정우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와 결혼해주십시오. 정우." "싫어요!" 정우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 옆으로 빠져나가던 정우는 돌탁자 에 다리를 세게 부딪혔다. 꽤 아플 것 같았지만 정우는 잠깐 멈추지 도 않고 뛰어갔다. 긴 머리채가 춤추듯 흔들렸다. 도망치듯 달려가는 정우를 보던 엘시가 의자에서 일어나 칼을 집어들었다. 그 때 정우가 뒤로 돌아섰다. 빙글 돈 머리카락이 정우의 등 뒤에서 망토처럼 흩날 렸다. 정우는 엘시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어려운 부탁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대장군님!" 엘시가 그녀를 제지하듯 손을 내밀었다. "기다리십시오. 방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정우는 놀란 눈으로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예? 어, 아뇨. 그게 더 안전하긴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울리지 않아요. 대장군님과 함께 방까지 걸어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어 색함 때문에 얼굴이 익을 것 같아요. 그냥 계세요. 안전할 테니까 걱 정마시고요. 아시잖아요? 저는 언제든 라수의 방으로 도망칠 수 있어 요. 그럼 갈게요!" 정우는 엘시가 정말 따라오는 것이 두렵다는 듯 빠르게 도망쳤다. 엘시는 정우의 말처럼 꽤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정우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엘시가 도로 앉은 것을 본 정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정우는 조금 더 안전한 속도로 걸어갔다. 곧 후원의 나무들이 정우의 모습을 감추었다.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의 손자인 아쉬존 토프탈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하지만 상쾌한 느낌 대신 축축한 불쾌감만 느껴졌다. 손수건이 이미 젖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쉬존은 그것을 신경질적으 로 뭉쳐서 소매 속에 밀어넣었다. 아쉬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벼랑 위쪽이었다. 주위는 탁 트여있었고 조금 떨어 진 곳에는 수십 미터는 됨직한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그 너머로는 초록의 밀림과 푸른 하늘이 그 넓이를 어림할 수 없을 만큼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벼랑 위에는 나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따라서 직사 광선에 그대로 노출된 자리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머리 위 에는 넓은 차양이 펼쳐져 있었다. 병사들이 바위를 쪼아 구멍을 내고 기둥을 세워 펼쳐놓은 차양이었다. 바람이 잘 부는 높은 지대고, 머리 위에는 차양이 햇빛을 막아주고 있었다. 북부에서 태어난 할아버지와 달리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열 대 출신인 아쉬존이 더위를 느낄 이유는 별로 없다. 따라서 그런 그 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은 더위 때문이 아니다. 아쉬존은 극심 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고 베로시 토프탈은 종조카가 그런 긴장감 을 내색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쉬존과 함께 돗자리 위에 앉아있던 베로시는 종조카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을 받아든 아쉬존은 그제서야 베로시가 땀 한 방울 흘 리지 않은 채 태연히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로시가 말했다. "아쉬존. 네가 견딜 수 없다면 병사들과 함께 있어도 좋아." "괜찮습니다. 종고모님." "다행이군. 나는 네가 있어줬으면 하고 바라니까." "바라신다고요?" 베로시는 잠깐 생각한 끝에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로 결정했다. "나는 또 이런 회담에 참석할 수는 없어. 그리고 가문의 다른 사람 들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우리는 꽤 바쁜 시간들을 보내야 할 테니 까. 따라서 다음 회담에는 네가 가문을 대표해서 나와야 해." 아쉬존은 움찔했다. 베로시는 그의 얼굴에 기대감이나 의욕, 야심의 빛이 떠오르는지 세심하게 살폈지만 아쉬존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당혹감과 희미한 거부감 뿐이었다. 베로시는 말을 꺼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쉬존이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 으니까. 아직 회담 상대가 나타날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베로 시는 아쉬존을 준비시키는 데 남아있는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너를 여기에 데리고 온 것도 그 때문이야. 회담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 대충 감이라도 잡으라고 데리고 왔어. 하지만 미리 걱정할 것은 없어. 네가 가문을 대표하여 회담 자리에 나온다 해도 네가 할 일은 그것으로 끝일 테니까. 가문을 대표하는 것 말이야. 그 외에는 할 일 이 없을 거야. 너는 그냥 자리에 앉아있으면 돼. 우리는 네가 무엇인 가를 결정하게 놔두지는 않을 거야. 어차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 는 자리엔 너를 내보내지도 않을 테지만." "종고모님. 저는 싸우고 싶어요." 베로시는 피식 웃었다. "그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네가 정말 회담에 소질이 없다는 것 이 밝혀진다면 너를 전장으로 불러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 할아버 지는 그것을 원하지 않을 거야." 그 때 벼랑으로 올라오는 길에 약간의 소음이 들려왔다. 베로시는 그쪽을 쳐다보았고 길을 지키던 병사들이 눈짓을 보내는 것을 보았 다. 기다리던 상대가 마침내 도착하여 벼랑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 다. 베로시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아쉬존 또한 종고모를 따라 일어섰다. 벼랑 위로 올라온 사람은 화려한 의복을 걸친 나가 여자였다. 아쉬 존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가를 바라보았다. 한계선 이남 출신인 아 쉬존은 나가의 모습에 익숙했지만 벼랑 위에 나타난 나가가 입고 있 는 것 같은 복장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쉬존은 그 옷을 어떻 게 입고 벗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나가 여자는 벼랑을 가로질러 차양 쪽으로 다가왔다. 돗자리 위에 올라선 나가는 베로시에게 살짝 목례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베로시가 말했다. "아니오. 조금 전에 왔습니다." "이 소년은?" "제 종조카 아쉬존 토프탈입니다. 아쉬존. 이 분이 미라그라쥬에서 오신 매너링 이젤사이시다." 아쉬존은 매너링 이젤사에게 정중하게 목례했다. 하지만 매너링은 그에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베로시에게 말했다. "앉으시지요." 베로시는 매너링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매너링. 제 종조카의 인사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만." 아쉬존은 자신이 레콘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불쑥 내밀었 다. 그리고 약간 불쾌한 듯한 얼굴로 베로시를 보던 매너링이 그에게 목례했을 때 아쉬존은 자신이 하늘치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베로시의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긴장하고 있는 아쉬존 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였지만 그 때문에 베로시는 회담이 시작되기 도 전에 매너링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매너링은 도시연합에서 온 나 가였고, 도시연합의 나가들은 나가의 전통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 다. 그들에게는 호위자 없는 미성년 남자는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인 것이다. 베로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 다. 세 사람이 작은 소탁을 가운데 둔 채 돗자리에 앉게 되었다. 매너링 은 그들의 머리 위를 덮고 있는 차양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은 햇빛을 왜 가리는지 알 수 없군요. 당신들은 어떤 상태에서도 체온을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잖습니까?" "예. 하지만 공짜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노력이 필요 하지요. 매너링. 너무 더울 땐 땀을 흘려 몸을 식히고 추울 땐 몸을 떨어서 체온을 높이지요. 그런 식으로 우리는 똑같은 체온을 유지하 는 겁니다. 하지만 때론 그런 일이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도 구를 사용하여 노력을 절감합니다." "그렇군요. 친절한 설명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대수호자께서는 평안하시겠지요?" 베로시와 매너링은 잡담을 계속 나눴다. 아쉬존은 그 대화에 어떤 중요한 의미라도 있지 않을까 의심하며 주의깊게 들었지만 두 여자가 나누고 있는 것은 완벽한 잡담이라는 평가밖에 내릴 수 없었다. 아쉬 존은 주의력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느새 매너링의 옷을 다 시 바라보았다. 어떤 방식으로 입고 벗는지 알기 어려운 그 옷에는 조금 특이한 수가 놓여 있었다. 인상적인 문양을 수놓는데 사용된 것 은 아무래도 금속인 것 같았다. '구리일까?' 아쉬존은 열을 보는 나 가들이 쉬 뜨거워지는 구리를 장식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제국의 나가들은 그런 옷을 더 이상 입지 않았다. 한계선 북부의 복식을 많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아쉬존 은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열을 보는 나가들에겐 어떻게 보일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눈에 구리 장식은 마치 옷에 철사를 꿰 어놓은 것마냥 이상하게 보였고, 또 서로 부딪칠 때마다 소음을 일으 켰다. 나가들에겐 소음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인간인 아쉬존에 겐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아쉬존은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대화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 있 었다. 두 여자는 침묵한 채 서로 상대방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아쉬 존은 긴장을 끌어모으며 탁자를 바라보았다.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매너링이었다. "우리는 원시제를 높이 평가합니다." 베로시는 물끄러미 매너링을 바라보았다. 매너링은 두 손을 모아 무 릎 위에 얹고 말했다. "뱀단지는 나가의 발명품입니다. 원시제는 우리들의 발명품인 뱀단 지를 이용하여 우리들이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대한 체계를 만들어내 었습니다. 그 넓은 땅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뜻을 따른 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원시제가 나가이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고 도 니릅니다. 못말리는 종족 차별이지요. 교양인이라면 모두 그런 주 장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반박하지도 않습니다. 그 런 자들은 원시제의 작품인 아라짓 제국에 대해 호의를 보입니다. 도 시연합과 아라짓 제국의 건설적인 동반 관계에 도움이 되는 성향이지 요." "저도 두 체제가 항상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를 견지하기를 바 랍니다." 매너링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 다. "하늘누리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베로시는 조금의 감정적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사 실을 말했다. "우리들은 아직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전해받지 못했습니다. 우리 가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뜬소문 뿐입니다. 그 소문에 의하면 하늘 누리는 실종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하늘누리는 우리가 데리고 있는 뱀부리미들의 접촉 시도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지요?" "두 달 전부터입니다." "뱀들은 어떻습니까?" "예?" "하늘누리에 연결된 뱀단지의 뱀들 말입니다." "아, 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뱀단지의 뱀들은 아무 이상이 없습니 다. 하늘누리 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아쉬존은 문득 베로시가 대답을 잘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아쉬존은 매너링의 얼굴에 희미한 망설임과 자신감 같은 것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매너링이 말했다. "도시가 실종되었다니 기묘한 느낌이 드는군요. 하긴 움직일 수 있 는 도시이니 잃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많이 불안하시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팔디곤 토프탈 각하께서는 크게 염려하고 계십니다. 모든 도시가 시모그라쥬처럼 완벽한 법치로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니 까요." 아쉬존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시모그라쥬와 법치라니,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매너링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시가 계속 말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도시 하나를 통째로 잃는 당혹스러운 경험 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는 제국 수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현 상황은 명백한 국가 비상 상황입니다. 정부로부터의 지시가 없으 면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한 행정관이나 제국의 부재를 곧 자신의 검 은 야욕을 실현시킬 기회로 여길 귀족들에게 제국 신민들을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무법자들에게서 제국 신민을 지키는 것은 정통성 있 고 합당한 제국 정부를 새로 수립하는 일 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정부 가 수립되어도 신민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시모그라쥬공께서는 행패를 일삼는 무뢰배들을 잠시 억류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들을 처벌하는 것은 새로운 정부에 맡겨 두더라도 그들이 신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저지해야 하니까요. 그런 일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경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제국군의 북진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지금 국경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제국군들에게는 중대한 의무가 있지요." "그 의무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있습니다. 도시연합은 침략 전쟁 을 거부합니다." 아쉬존은 매너링이 낯뜨겁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과 50여년 전 남부 의 나가들은 신의 힘을 훔쳐 북부를 침공했다. 물론 그 때는 제국도 없었고 도시연합도 없었지만 지금의 제국은 50여년 전 침공당한 자들 의 후예이며 도시연합은 침공한 자들의 후예다. 그런 처지에서 침략 전쟁을 거부한다는 말을 어떻게 태연하게 할 수 있는지 아쉬존은 궁 금했다. 아쉬존은 베로시가 그것을 지적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 만 베로시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양피지 위에 쓰여있는 글 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가련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 또한 우리가 보듬어 안아야 할 이웃이지요." 아쉬존은 베로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베로시는 불가 침 서약을 원하고 있었다. 남부의 제국군을 움직이기 전 시련의 나가 들이 제국을 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싶은 것이다. 또한 그런 서 약서는 시모그라쥬공의 영향력 밖에 있는 제국군들을 규합시키는 강 력한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제국 정부가 실종된 상황에서 시련으로 부터 불가침 서약을 받아낸 시모그라쥬공은 제국의 영웅이 될 테니 까. 물론 아쉬존이 그 모든 사실을 스스로 생각해낸 것은 아니다. 베 로시는 종조카가 알아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에 열심이었다. 매너링은 진지한 표정으로 베로시를 바라보았다. "굳이 그런 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양자 모두가 지 켜지길 바라는 고귀하고 중요한 약속이라면 담보를 아낄 필요는 없겠 지요." 베로시 토프탈은 마주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매너링의 요구 조건 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이 회담에 임하면서 그녀가 가장 고민했던 부 분이 바로 그것이다. 시련이 요구할 요구 조건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요구 조건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 가침 서약은 시련이 제국에 대해 가장 바라는 것이었을 테니까. 하지 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황제와 제국 정부, 제국 수도가 실종된 상 황에서 시련이 아라짓 제국의 침략을 겁낼 이유는 없다. 또한 시모그 라쥬공의 불가침 조약은 도시연합에겐 별 의미가 없다. 시모그라쥬공 이 아라짓 제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도시연합의 불 가침 조약의 대가로 팔디곤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매너링 이젤사는 빙긋 웃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7-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5-17 조회수 : 1939 피를 마시는 새 17. 불씨의 군무 - 3 틸러 달비는 허리를 숙였다. 다시 일어난 그의 손에는 비녀가 들려 있었다. 틸러는 문득 자신의 행동을 본 사람이 없나 궁금하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장은 텅 비어있었다. 시험 감독관과 경비들은 재빨리 응시자들을 과장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 중엔 혹 세 번째나 네 번째의 암살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들 모두를 붙잡아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빨리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 사실상 가능한 유일한 해법이 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고, 물론 응시자들도 동의했다. 그들은 별 다른 저항 없이 신속하게 자신들의 처소로 돌아갔다. 과장에 남아있 는 것은 파지 몇 조각과 수많은 발자국, 그리고 약간의 핏자국 뿐이 었다. 틸러는 비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생각했다. 이 사건을 책임지 고 조사할 사람이 누구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역시 규리하공 자신일 것이다. 하지만 틸러는 제국군이고 이곳에 대장군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런 조사라면 군에서 맡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군이 이 일에 개입할 권한이 있을까? 틸러는 자신의 직속 상관이 누군지 알기 어렵다는 사실에 난감함을 느꼈다. 평상시라면 고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쟈마 데시마스 수교 위에게 상황을 보고한 다음 수교위가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뭔가 재미있어 보이는 일 - 그리고 다른 사람에겐 불행으로 받아들여 질 일 - 을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제국은 사라졌고, 따라서 제국군은 정통성을 잃은 무장 집단일 뿐이다. 제국이 없다면 제국군 도 산적 무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틸러는 대장군이 느끼고 있을 심적 부담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 다. 그리고 왜 엘시가 규리하를 필요로 하는지도. 정우가 지적한 것 처럼 규리하에는 장구한 역사에서 비롯된 엄청난 권위가 있고, 그 권 위는 제국의 유무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제국 내 최강의 무장 집 단인 제국군조차 그 역사는 31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규리하의 역사 는 천 년을 훌쩍 넘으며, 과텔과 케나린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의 연 속성을 부정한다 해도 수백 년이다. 귀족원 회의가 개최되어 제국을 부활시키기 전까지 현 정국을 주도할 자는 당연히 제국군보다는 규리 하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제국군은 규리하를 지원해야 한다…… 틸 러는 엘시의 생각이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부터는 틸러 의 생각이다. '그리고 부활한 제국의 황위에는 이 비녀의 주인이 앉 을지도 모른다.' 정우는 그런 제안에 대답하지 않았다. 암살자의 공격 때문에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틸러는 그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우의 대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틸러는 자신에 대해 황당함을 느꼈다. 정우. 이상한 사람이다.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랐고, 성채를 파묻었 고, 빨간 우산 하나를 든 채 비 오는 하늘을 산책했고,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시간을 견뎌냈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자신을 죽이려는 아버 지에게 응원을 보냈다. 틸러가 죽을 때까지 비슷한 사람을 볼 수 없 을 독특한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 중 무엇이 탁월한 정치력의 증거일까? 아니, 상관없다. 만약 제국군 전체가 엘시의 지휘하에 적극적으로 규리하를 지원하고 모든 도깨비가 즈믄누리의 의사를 따라 정우를 지 지한다면 정우의 주도 하에 이루어질 새로운 질서를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완력이나 주력, 지력과 달리 어떤 사람의 정치력 은 그를 따르는 자의 능력으로도 계산할 수 있고 그렇다면 정우의 정 치력은 나쁘지 않다. 아니, 비교할 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그것이 정우에게 공정한 일일까? 아버지 때문에 즈믄누리에서 끌려나 와 억지로 규리하공이 되었던 그녀가 이제 제국의 문제 때문에 황제 가 되어야 하나? 틸러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젠장. 틸러 달비 가라사대, 일개 부위한테 이따위 밥 안 생기는 고 민이나 시키는 시대는 잘못된 것이다. 증명은 별지에 첨부함." "뭐훠훠! 깜찍한 청년이군!" 틸러는 황급히 몸을 돌리며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사람들의 주의가 산만해질 시점을 기다려 돌아온 세 번째 암살자를 겨냥한 틸러의 눈 길은, 약간의 당혹감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여자 오니다! 아니, 여자 이레인가?' 잠깐 동안 틸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95센티미터는 넘을 인간 여자였다. 여자가 그렇 게 클 경우 보통 깡마른 인상을 주게 마련이지만 틸러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는 깡마름과는 하텐그라쥬와 라호친 사이의 거리 만큼 거리 를 두고 있었다. 우람한 가슴은 무기고를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아닌 가 싶고 몸통은 옷 아래에 갑옷을 받쳐 입은 것이 아닌가 싶게 튼실 하다. 통 넓은 치마에 가린 다리는 볼 수 없었지만 그 치마라는 것이 범선에 동력을 부여할 수 있을 듯한 크기였다. 인간의 외형에 그런 형용사를 쓰는 것이 어울리는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틸러는 그 여자 를 장엄하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틸러는 결론을 내렸다. '알았다. 인 간-레콘 혼혈이다.' 틸러에 의해 생물학적 언어도단의 판정을 받은 여자는 수행인들로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높이로 서있었다. 그녀가 암살자 일 가능성은 적다고 틸러가 생각했을 때 그녀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 로 걸어왔다. 성채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틸러는 침을 삼키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타조 눈과 사자 코와 딱정 벌레 턱이 그를 마주보았다. 틸러는 경례했다. "틸러 달비 부위입니다. 혹 굴도하 남작부인이십니까?" 남작부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뭐훠훠! 각하! 내 말이 맞았지요? 이 청년이 달비 부위일 거라고 했잖아요!" '각하?' 틸러는 수행인으로 보이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이 곧 땅 딸막하게 생긴 남자 한 명에 멈추었다. 남작부인의 장대한 풍모 때문 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도저히 수행인이라 할 수 없는 복장의 남자 가 있었다. 틸러의 눈길을 받은 남자는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와 남작 부인 곁에 섰다. 그리하여 틸러 달비는 희대의 양주를 보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고 발리츠 굴도하 남작의 불만은 특별히 남다른 것도 아니었다. 그를 난쟁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아담하다 대신 적당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어렵다. 물론 조랑말을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악의에 찬 헛소문이지만, 발 리츠가 자신의 애마에 오를 때 애를 먹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 지만 남작이 안장 위에 자리를 잡을 경우 도전자는 재고를 해야 한 다. 발리츠 굴도하 남작이 대단한 완력으로 휘두르는 장창은 누군가 에게 존경심을 가르쳐주는 것에 부족함이 없다. 판사이의 지배자이며 능숙한 전사인 그는, 따라서 자신의 단구에 큰 불만을 품지 않을 요 소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하지만 굴도하 남작은 불만을 느꼈다. 자신을 닮은 자녀가 태어날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는 큰 자녀를 원했고, 따라서 남작이 규리하의 도깨비 처녀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 의 천생연분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일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남자는 큰 여자에 지대한 관심이 있 었지만 여자는 작은 남자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 남자란 모두 자신보다 작았으니 아이넬 규리하는 남자의 키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 다. 규리하 가문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처럼 규리하에 대한 자긍심 이 남달랐던 아이넬이 원했던 것은 규리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남 편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판사이의 지배자가 눈에 찰 까닭이 없다. 제 2 차 대확장 전쟁 당시 나가들의 수공에 의해 판사이 계곡이 판 사이 호수로 바뀐 것은 판사이에게 씻을 수 없는 타격이었다. 거기에 상고토의 맹주로서 판사이를 다스리던 베미온 굴도하 마립간이 전쟁 의 충격 때문에 정신 이상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판사이의 세력은 쇠약해졌고 상고토의 맹약은 깨졌다. 육형제 탑의 여섯 열쇠를 가지 고 있던 여섯 명의 지배자들은 서로를 적대하게 되었다. 발리츠 굴도 하는 바로 그런 상태에서 판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자신의 단구에 가혹한 부담을 주면서 높은 수준의 무예를 획득한 것 도 그 때문이다. 발판을 이용하든 시종의 도움을 받든 일단 발리츠 굴도하가 애마 위에 오르고 그의 손에 한 자루 장창이 쥐어지면 상고 토 사람들은 그를 시체 양산가로 대접했다. 발리츠가 닦은 절륜한 무 예는 무향의 아이넬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그가 다스리고 있는 땅은 결코 강대하다고 할 수 없었다. 상 고토의 다섯 귀족들은 판사이의 세력이 다시 번성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정 지역에 필요 이상의 많은 귀족들이 할거하는 것은 당연 히 부작용이 더 많고 따라서 제국 정부는 상고토 전체를 여섯 남작이 다스리는 상황을 내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국 정부는 상고토 전체 를 묶어 한 사람에게 넘기려 애써왔고 그 후보자들 중 첫 번째는 당 연히 굴도하 남작이었다. 판사이의 세력이 조금만 더 강해지면 발리 츠 굴도하가 백작이나 후작이 되어 상고토 전체를 다스릴 수 있게 된 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상고토의 다섯 남작들은 굴도하 남작에게 끊 임없이 양보와 절충을 필요로 하는 각종 조약을 강요했다. 그 결과로 판사이는, 약간 과장하여 말한다면 병사 하나를 뽑으려 해도 다른 다 섯 남작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땅의 지배자가 규리하에게 도움이 될 리는 없다. 결국 아이넬은 훌륭한 무사에게 어 울리는 정중한 거절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즈음 이미 아이넬 의 큰 체구뿐만 아니라 그 몸에 들어있는 정신까지 사랑하게 된 발리 츠는 도박적인 제안을 꺼냈다. "당신이 익은 과일이 떨어지길 바라는 게으름뱅이로 인생을 낭비할 생각이 없다면, 와서 친정에 도움이 될 힘을 직접 기르십시오. 내가 돕겠습니다." 그 제안은 아이넬의 마음에 들었다. 판사이의 주민들은 결혼식장에 서 신랑 신부의 신장 차이를 보며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지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 그리고 상고토의 다른 다섯 남작들은 아찔한 기분 을 느꼈다. 굴도하 남작부인의 엄청난 체구 때문이 아니라 판사이가 무향과 결합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굴도하 남작부인은 때론 어르고 때론 달랬지만, 주로 으르릉거리며 불평등한 조약들을 깨부쉈다. 그 리고 굴도하 남작부인의 배후에 있는 무향의 이름에 겁을 먹은 다섯 지배자들은 남작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활약 상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상고토의 맹약이 부활할 지경이라는 농담이 있다. 판사이의 안주인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다섯 남작들이 조만간 대(對)남작부인 동맹을 맺을 거라는 뜻이다. 남작 부부가 나란히 서는 짧은 시간 동안 틸러의 머리 속엔 그런 정 보들이 휙 스쳐지나갔다. 틸러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판사이에 남 아있는 대신 둘 모두 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 남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판사이 남작 발리츠 굴도하다. 틸러 달비 부위 맞나?" "맞습니다. 각하." "우리는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를 배알하러 왔네. 정문에서 알려주 길 그러려면 자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자네를 찾 아온 거야. 안사람이 이곳의 지리를 잘 알기에 안내는 필요하지 않았 네." "그러신가요. 미리 예고를 하시고 오셨으면 적절히 준비할 수 있었 을 텐데요." "사과도 자네에게 해야 하나? 나는 규리하공께 사과할 생각이었는 데." 작지만 고명한 무예가로 통하는 남편과 주먹으로 그를 때려눕히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아내를 앞에 두고 틸러는 상당한 용기를 끌 어모아야 했다. "제게 사과하시면 규리하공께 가장 잘 전달될 겁니다." 남작은 씩 웃었다. 틸러의 배짱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리고 남작 부인은 손뼉을 딱 쳤다. "아유, 요거 귀엽네. 하긴 제국군 부위니 오죽할까. 제국군 계급에 공짜는 없다는 거지?" 틸러는 남작부인이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를 헤집지나 않을까 걱정 했다. 다행히 남작부인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규리하공을 만나는 것을 방해해보겠다는 거야?" 남작부인은 혼자 말해도 합창단의 도움을 받는 것 같다. 틸러는 조 심스럽게 말했다.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작부인. 하지만 저는 규리하공 을 보호해야 합니다. 조금 전 이곳에서는 규리하공을 겨냥한 암살 기 도가 있었습니다." 굴도하 남작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규리하공께서는 무사하신가?" "무사하십니다." 남작부인은 남편에게 몸을 크게 숙이며 말했다. "이런, 고약한! 각하. 어쩐지 뒤숭숭한 것 같다고 제가 말했지요?" "예. 부인의 추측이 맞았군요." 남편의 호응을 받은 남작부인은 이번엔 틸러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이봐, 달비 부위.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귀여운 부위는 나를 막아선 안돼. 나는 조카님이 무사하신지 무지무지하게 궁금하고, 그걸 확인 하지 못하면 화를 내게 될 거야. 나는 정말 화내고 싶지 않아. 알았 어? 당장 규리하공께 우리를 안내해." '티나한이 돌아왔나?' 갈수록 틸러의 생각이 기묘해졌다. 압박감 때 문일 것이다. 다행히 굴도하 남작이 그를 구해주었다. 남작은 이곳에 서 기다릴 테니 규리하공에게 방문을 알리고 허락을 받아오라고 말했 다. 틸러는 대남작부인 동맹에 가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떠났다. 비나간의 7월말은 단풍을 구경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하지만 가 을은 자신을 표현할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 홀빈 퍼스 노후작은 그런 수단들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제국력 31년의 대표 농부로 선출된 것은 팔지 남작이었다. 팔지 남 작은 농사라곤 구경도 못해본 사람이다. 그의 주된 수입원은 광산이 다. 그는 커다란 암염 광산을 가지고 있고 거기서 나오는 소금은, 질 이 좀 나쁘기는 하지만 비나간 사람 대부분을 염분 결핍에서 해방시 켜줄 만큼 양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팔지 남작이 광업 전문가인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누군가는 그 해의 햇곡식들을 소담스럽게 담 은 광주리를 들고 퍼스 후작을 향해 걸어가야 했고 올해 그 순번이 돌아온 것은 팔지 남작이었다. 그래서 팔지 남작은 희화화한 것이 아 닌가 싶을 만큼 화려한 작업복을 입고 무거운 바구니에 힘겨워 하며 퍼스 후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후작이 앉아있는 옥좌 앞에 도달한 팔지 남작은 손에 든 광주리를 옥좌 앞에 내려놓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맛보십시오. 비나간의 대추장이여. 당신의 은혜로 거두게 된 올해 의 신선한 작물입니다." 퍼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일 뿐 요리하지도 않은 작물을 으적으적 씹 어먹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후작은 손짓을 보냈고 그러자 대기하 고 있던 시종장이 다가왔다. 시종장은 후작에게 돈주머니가 얹혀져 있는 쟁반을 내밀었다. 예전에는 위대한 추장이 때려잡은 멧돼지나 사슴 등을 몇 마리씩 내 줬다고 한다. 추장의 용맹을 자랑하고 또 추장이 농부가 아니라 사냥 꾼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례였다. 비나간의 추장은 그가 설령 대농장 의 주인이라도 사냥꾼으로 간주되었다. 비나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키 탈저 사냥꾼들로부터 갈려져 나온 분파라고 믿기 때문이다. 양심적인 학자들은 그것을 일종의 신화나 전설로 여길 뿐 학문적으 로 고찰할 필요가 있는 주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키탈저 사냥꾼들 은 폐쇄적인 사람들이었고 비나간의 문화 어디에서도 키탈저 사냥꾼 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비나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 길 좋아하고 그 때문에 과거 비나간의 대추장들은 익숙하지도 않은 사냥 때문에 가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런 귀찮은 의례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은 오래 전에 사라졌고 지금은 돈을 내준다. 과 거의 의례에 담긴 의미를 소급적용한다면 비나간의 후작은 상인이 된 셈이다. 퍼스 후작은 돈주머니를 들어올렸다. 용돈 정도의 금액이 들어있는 돈주머니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후작 은 팔지 남작에게 그것을 건넸다. 팔지 남작은 주머니의 가벼움에 크 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지 남 작은 봉헌식 후의 축제를 자신의 돈으로 주최해야 할 것이다. 멧돼지나 사슴이 선물이었던 시절이라면 이런 속임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기를 통째로 구워 즐겁게 먹고 마시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호방한 대추장이 있었던 시절엔 적잖은 돈을 내주었기에 역시 성대한 축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퍼스 후작은 잔돈만 내주었고 그것을 받은 대표 농부는 어쩔 수 없이 축제 비용으로 자신의 돈을 사용해야 했 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팔지 남작은 상당 한 지출을 각오했다. 사람들은 축제가 간소하면 별 기대도 갖지 않았 던 후작을 욕하는 대신 팔지 남작을 욕할 것이다. 팔지 남작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던 홀빈 퍼스 후작은 간단하게 내일부터 축제를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대전에 서있던 사람들은 의례 적으로 만세를 외쳤고 후작이 일어서는 모습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았 다. 후작이 대전을 떠나자 비로소 사람들은 조금 더 생기있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대전 밖으로 걸어나가며 어떤 이들은 팔지 남작에게 다 가가 주머니 속의 금액을 물어보고는 남작을 위로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축제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퍼스 후작의 손자 레데른 퍼스도 그들 중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사 람들은 비나간후의 호칭을 쓸 수 있는 또다른 사람 앞에서 퍼스 후작 의 째째함을 말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다. 퍼스 후작이 째째하다면 그 손자 레데른 퍼스는 지나친 호인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레데른은 그런 행동이 지지자를 얻어두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레데른은 자신의 아버지 마진이 할아버지에게 당한 이유가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데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의 생각은 달랐다. 레데른의 아버지 마진 퍼스가 홀빈 퍼스 후작에게 처형당한 이유는 유능하기 때문이다. 비꼬길 좋아하는 인사들이 퍼스 가문에 그런 인재가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하는 마진은 지나치게 유능했다. 홀빈은 아들의 재능을 시기했고 아들의 나이에 겁을 먹었다. 홀빈 퍼스가 여든다섯 살이 되 었을 때 마진 퍼스는 예순두 살이 되었고, 상황이 그러하니 누구나 마진이 아버지의 죽음을 간절히 바랄 거라고 짐작했다. 홀빈도 그러 했다. 예순둘이나 된 아들이 더 참을 수 없어서 자신을 제거할 거라 확신한 홀빈은 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는 단순한 논리에 따라 아들을 독살했다. 어떤 증거도 없지만 모든 비나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레데른이 살아있는 이유는 그가 많은 지지자 를 데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퍼스 가문 사람답게 멍청하기 때문이 라고 믿고 있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우정으로 레데른에게 말해준 친구는 없다. 그들은 공모자의 기분으로 레데른의 멍청함을 즐겼다. 사람들이 그나마 좀 진지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레데른 퍼스의 딸 지키멜 퍼스였다. 사람들과 함께 대전 밖으로 걸어나오는 지키멜의 모습은 겸손해 보였지만 그녀 주위에는 노후작의 째째함과 그 아들의 대책 없는 호인스러움에 질려버린 젊은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 녀는 아버지나 증조부 대신 할아버지인 마진 퍼스를 닮았다. 어쩌면 퍼스 가문에는 격세유전하는 재능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키멜. 발케네공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원칙대로 따진다면 레데른의 장녀인 지키멜은 비나간후로 불릴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엔 살아있는 비나간후만 세 명이 되기 때문에 좀 혼동스러웠다. 만약 마진이 살아있었다면 살아있는 네 번째의 비 나간후가 되었을 지키멜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름으로 부를 것을 요구했고 그런 그녀의 태도는 비나간의 젊은이들에게 호평받는 요소 중 하나였다. 지키멜이 대답했다. "팩스벗. 그 서두는 여름 내내 들었던 거야. 내게 말을 건 사람들은 모두 발케네공 이야기를 들었냐고 묻더군. 그대가 새로운 이야기를 더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를 놀라게 해주겠어?" 팩스벗은 싱긋 웃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케네공 락토 빌파가 수천 명의 레콘 을 거느릴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가능한 설명은 하나밖에 없습니 다. 그는 용인임이 분명합니다." 지키멜 주변에 있던 자들은 일단 반응을 유보한 채 지키멜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키멜의 태도에 따라 숙고나 조소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속셈이다. 지키멜이 말했다. "재미있군. 그렇다면 락토 빌파가 어디서 용근을 구한 거지?" "물론 역사에 기록된 마지막 용 아스화리탈이지요."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좀 배치되는 가설이군. 아스화리탈이 뿌 린 포자 중에 용화가 된 것은 하나밖에 없고 그것은 뇌룡공 륜 페이 가 먹었다고 알고 있는데." "하지만 당시 북부군에는 락토의 아버지인 그룸과 삼촌인 토카리, 그리고 조부인 코네도가 있었습니다. 발케네 공작가의 보물인 도깨비 감투도 원래 그들 세 명의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들 세 사람은 속이 고 훔치고 빼앗는 진짜 발케네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아스 화리탈의 포자들을 빼돌렸을 겁니다. 그리고 그 포자들 중 하나가 파 리조에서 발아한 거지요." "그리고 그것을 락토 빌파가 먹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락토는 용인이 된 겁니다. 그는 그 능력으로 최후의 대장간으로 오는 레콘들을 유혹했을 겁니다." "팩스벗. 그게 그대의 상상력이라면, 감탄을 금할 수 없지만 동시에 애석함을 느끼게 되는군." 사람들은 재빨리 조소할 준비를 했다. 팩스벗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지키멜을 바라보았다. 지키멜이 말했다. "용인은 사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놀라운 예민 함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뿐이지. 그대가 말하는 것 은 용인이 아니라 정신억압자의 이야기 같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약간의 재주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지키멜." "좋은 지적이군. 하지만 발케네공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왜 레 콘들을 모으지? 그냥 황제의 마음을 읽어서 자신을 황위 계승자로 지 명하게 유도하는 것이 더 간편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그것이 합리 적일 것 같은데." 사람들은 충분히 준비했던 폭소를 터뜨렸다. 팩스벗은 뒤통수를 긁 적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아, 저, 그건 제 생각이 아닙니다. 누가 제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저도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뭔가 이상하 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하게 정리할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각하에 게 조언을 얻으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랬군.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팩스벗." 사람들은 웃으며 대전을 나왔다. 팩스벗이 침묵하자 사람들의 화제 가 바뀌었고 축제에 대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걷 고 있는 대전 앞마당은 넓었고 가을 햇살은 풍요롭게 떨어지고 있었 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 "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판사이의 저 유명한 부부도 여 행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지키멜의 표정이 약간 변한 것을 깨달았다. 지키멜은 상당한 관심으로 발언자를 바라보았고 사람들은 지키멜의 관심을 받는 그 발언자를 부러움으로, 혹은 시기심으로 노려보았다. 여행에 관한 잡담을 꺼낸 사람은 젊은 남자였고 그곳에 있는 대부분 의 사람들과 좀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강도 높은 야외 활동에 어울리는 복장이었다. 그 옷차림에 걸맞게 남자의 피부는 거칠었고 그 머리카락은 햇빛에 변색되어 있었다. 야외에서 보낸 시간이 많은 듯한 남자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지키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키멜 은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팩스벗이 먼저 말했다. "시오크. 자네가 여기 있는 줄은 몰랐군. 여기엔 어쩐 일인가?" "물론 내가 비나간의 추수 축제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작년 축제 때 자네의 모습을 못 본 것 같은데?" 시오크는 빙긋 웃었다. "축제가 벌어지는 곳은 많고, 나는 제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축 제를 좋아해. 팩스벗. 작년 이맘때쯤이라면 나는 아마 뤼도파에 있었 을 거야. 어쩌면 사펜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올해는 비나간의 축제에 참석하기로 했네." 팩스벗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지키멜이 멈춰섰다. "그러면 여러분. 잘 살펴가길. 나는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 야겠어. 서고에서 찾아볼 책이 좀 있거든." 그대로 지키멜의 응접실까지 따라가서 잡담을 나눌 생각이었던 젊은 이들은 약간 당혹했다. 팩스벗은 혹 먼저 응접실에 가있으면 천천히 나타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얼굴로 지키멜을 바라보았지 만 지키멜은 그런 가능성을 일축했다. "내일 축제에서 보도록 하지." 가보라는 뜻이었다. 젊은이들은 아쉬움을 억누르며 지키멜에게 인사 했다. 지키멜은 몸을 돌려 서고 쪽을 향해 걸어갔고 젊은이들은 잡담 을 나누며 후작의 궁궐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대 전을 나오는 다른 무리들과 합류하면서 걸었기 때문에 아무도 시오크 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시오크는 누구의 주의도 받지 않고 궁궐의 정원에 몸을 숨겼다. 커 다란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시오크는 조금 후 상당히 거대한 느티나 무 옆에 멈춰섰다. 주변을 잠시 둘러본 시오크는 나무 아래쪽에 아무 렇게나 주저앉았다. 다리를 쭉 펼친 시오크는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나무에 기대었다. 그는 약간의 졸음을 느꼈고, 한숨 자는 것도 괜 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자마자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시오크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그 발소리에 집중했다. 발소리는 그를 향해 똑바 로 다가왔다. 조금 후 묵직한 것이 시오크의 다리를 눌렀다. 시오크 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고, 자신의 다리 위에 앉아있는 지키멜을 발견했다. "다리는 내 중요한 재산이야, 지키멜. 그렇게 학대하지 말라고." "아예 부러뜨리고 싶은데. 여기서 떠나지 못하도록." "다리 부러진 유료도로당원을 어디에 쓰려고?" 지키멜은 씩 웃으며 시오크에게 몸을 기울였다. 시오크의 몸에 상체 를 기댄 지키멜은 그의 귀에 입을 가져가 한참 동안 속삭였다. 시오 크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조금 후 지키멜은 시오크의 어깨를 밀 며 똑바로 앉았다. 지키멜은 약간 흐릿해진 눈빛으로 시오크를 바라 보았다. "그런 일에 쓰지." 시오크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 대해 심각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 같군. 너를 만족시킬 수 있 을지 모르겠어." "괜찮아. 난 아량이 넓으니까." 시오크는 웃으며 머리를 떠받치고 있던 손을 꺼냈다. 그는 지키멜의 볼을 만지려 했지만 지키멜은 그 손을 밀어내고는 시오크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지키멜은 시오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조금 후 지키멜은 눈을 찌푸리며 입을 뗐다. "왜 그래?" "아아, 미안해." "혹시 다른 여자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응." 지키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어떤 여자야?" "등자를 밟지 않고도 말에 탈 수 있는 여자." 지키멜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녀는 시오크의 턱을 가 볍게 튕겼고 시오크는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키멜이 말했다. "굴도하 남작부인? 그래. 아까도 그 이야기를 했지. 정말 두 사람 모두 규리하로 떠난 거야?" "맞아." 지키멜은 시오크의 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시오크의 곁에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상당히 위험한 시도인데. 이런 시기에 자기 영토를 비우는 것은 바 보짓이지. 게다가 상고토에서는 자살 행위에 가까워. 두 사람도 그것 을 잘 알 텐데 왜 그런 모험을 하는 거지?" 시오크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위쪽을 바라보았다. 느티나무의 무 성한 잎이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었고 거칠게 구부러진 검은 가지들 은 거리감을 왜곡시켰다. "지키멜. 굴도하 남작부인이 아이저 규리하를 돕지 않은 이유가 뭘 까?" "비스그라쥬백의 공작이겠지." "내 생각도 그래. 데라시는 틀림없이 남작부인에게 전쟁 불참을 대 가로 상당한 보상을 제시했을 거야. 하지만 그 보상이 미처 주어지기 도 전에 우리가 다 아는 놀랄 만한 사건이 일어난 것 같아." "하늘누리가 사라졌지." "맞아. 남작부인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지. 제국과 오라버니 사이 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렸는데 소득이 하나도 없게 되었지." 지키멜은 시오크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그리 고 다른 손의 집게손가락으로 시오크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조카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랴부랴 남편까지 대 동하고 규리하로 갔다는 거야?" "규리하에는 대장군도 있어." "비셀스 규리하가 아니라 엘시 에더리가 목표라고 말하는 거야?" "그 둘을 굳이 나눌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 지키멜은 움찔했다. 그녀는 시오크의 손등을 간지럽히던 손을 들어 시오크의 턱을 붙잡았다. 그리고 시오크가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시 오크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시오크 지울비?" "이 이야기는 규리하 전쟁 직후부터 나왔던 걸로 알고 있는데? 엘시 에더리와 비셀스 규리하의 결혼 말이야." "그 이야기는 끝장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랬지. 바보 같은 대장군은 부냐 헨로를 위해 황제사냥꾼을 잡으 러 떠났지. 그런데 부냐 헨로가 지금 어디에 있지?" "흐음. 계속해." "비셀스 규리하를 시집 보낼 만한 집안의 어른은 아이넬 굴도하뿐이 지." "재미있군. 그렇다면 남편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지?" "아이저 규리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좋은 무사가 필요하겠지. 사람 들은 발리츠 굴도하가 말 위에서만 강한 줄로 알고 있지만 그는 말 아래에서도 대단한 수준의 무사야." "아이저 규리하가 규리하에 잠입했을까?" "네가 그라면 지금 어디에 있겠어?" "말은 되는군. 하지만 아이넬 굴도하가 자기 조카와 대장군을 결혼 시켜서 얻는 것이 뭐지?" 시오크는 대단한 말을 한다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새 황제의 사돈이 될 수 있지. 혹은 새 황제의 고모일 수도 있고." 지키멜은 움찔했다. "가능할까?" "그보다 더 황위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현재로선 두 명뿐이야." "두 명? 어떻게 두 명이지?" "한 명은 스카리 빌파야." "아아, 그렇군. 스카리가 있어서 두 명이군." 시오크는 깊은 생각에 빠진 눈으로 지키멜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보던 지키멜은 조금 후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머지 하나는 퍼스가 아니라는 거야?" "미안해. 지키멜. 내 생각에 퍼스는 아니야." "그러면 누구지?" 시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키멜을 외면하며 다시 위쪽을 바 라보았다. 지키멜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오크의 배 위에 앉았다. 그리 고 시오크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누구지?" 시오크는 못이기는 척 대답했다.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 "망고 군단 하나밖에 없어! 두억시니 장군은 공작을 돕겠지만 그 외 에 뭐가 있지?" "지키멜. 너는 한계선 이북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어." "그러면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하지?" "한계선 이남에서 군단 하나를 완전히 가진다는 것은 몇 개나 되는 군단이 뒤따르게 할 수 있다는 뜻이야. 남쪽의 제국군은 그곳에서만 순회하니까." 지키멜은 허를 찔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조 금 후 지키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모그라쥬공은 시모그라쥬인들을 지배하지 않아. 그는 시민들의 첫 번째 벗이니까. 공작은 자기 백성들에게 전사가 되라고 요구하기 어려울걸." "지금은 가능해." "지금? 무슨 뜻이지?" "시모그라쥬공이 제국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 영민들을 끌어내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지금 제국은 사라졌어. 너도 알고 있겠지만 지금 제국 중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꽤 많아. 공작이 그 자들 흉내를 못 낼 까닭이 어디 있지? 더군다나 시련에는 제 2 차 대확장 전쟁 당 시 칸비야 고소리 의장의 중립 선언을 잊지 못하는 나가들이 많이 있 겠지. 제국이 없어지면 시모그라쥬인들은 상당히 불안하지 않겠어?" 지키멜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번의 침묵은 훨씬 길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7-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5-18 조회수 : 2060 피를 마시는 새 17. 불씨의 군무 - 4 배 위에 생각에 잠긴 여자가 앉아있으니 시오크는 꼼짝할 수 없었 다. 물론 움직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시오크는 지키멜의 날렵한 턱과 목덜미, 그리고 멋진 어깨 등을 바라보았다. 특히 마지막이 그 의 시선을 오랫동안 붙잡아두었다. 어깨가 넓은 여자에게 꼼짝 못하 는 시오크는 지키멜에게 시원한 어깨를 준 그 부모에게 감사했다. 사라말 아이솔의 칼에 목이 떨어지기 전까지 파델 미호린은 유료도 로 위에서만 생활했다고 한다. 시오크 지울비의 생활은 파델 미호린 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는 유료도로를 이용하여 이동하고 주로 당의 숙박 시설을 통해 숙식을 해결한다. 하지만 시오크가 범죄자이거나 막대한 재력가인 것은 아니다. 그는 유료도로당 감찰관이다. 도로의 정비 상태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유료도로 위를 직접 걸어야 하니 그 의 떠돌이 생활은 정당한 직업 활동인 셈이다. 방랑벽이 있는 사람에 겐 이보다 더 나은 직업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방랑벽이 방랑증이라 면 시오크 지울비는 중증 환자였다. 철이 든 이래로 시오크는 유료도로당의 도로와 시설을 무료로 이용 하며 제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의 교육 대부분은 도로 위에서 이루 어졌고 그가 기억하는 추억 또한 대부분 도로 위에서 일어난 일들이 다. 그리고 지키멜 퍼스를 만난 것 또한 도로 위의 일이었다. 하이스 대학에 다니다가 할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비나간으로 돌아오던 지키 멜은 살본 징수소에서 통행료가 없어 곤란해하고 있었다. 유료도로당 은 신용 거래 같은 것은 취급하지 않으며 설령 제국의 황제라 하더라 도 외상은 없다. 비나간후의 칭호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예외 는 될 수 없었다. 시오크는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되었고, 할아버지 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할 처지에 빠진 처녀를 동정했다. 그는 지키 멜에게 몰래 돈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그 또한 당원이기 때문에 통행 료를 대납해주는 것은 좀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살본 징수소에 머물고 있는 시오크에게 쪽지가 왔다. 쪽 지에 적힌 장소를 찾아간 시오크는 살본 시내의 모처에서 거창한 술 자리를 주관하고 있는 지키멜을 보게 되었다. 당신의 돈으로 벌인 술 자리니 당신도 참석해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다고 말하는 지키멜은 이 미 꽤 취해있었다. 취기 속에서 지키멜은 솔직한 태도로 할아버지의 죽음에 아무런 애 석함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생각도 없으며, 그 때문에 여비를 일부러 흥청망청 써버렸기 때문에 통행료 가 없었다는 것도 고백했다. "할아버지든 증조할아버지든 둘 중 하나는 곧 죽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그리고 누가 먼저 공격할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 증조할 아버지가 조금 더 엉큼하지. 나는 할아버지가 반격에 성공할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는 못하셨군." 시오크는 자신이 가문 내부의 비정한 암투에 힘들어하는 귀족 처녀 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 추측이었 다. 그리고 지키멜도 시오크의 추측이 맞는지 틀린지 말해줄 수 없었 다. 그녀는 시오크의 추측에 맞춰 행동했다. 그녀는 권력욕의 불길로 피도 눈물도 태워버린 집안의 어른들 때문에 무섭고 슬프다고 말했 다. 시오크는 그것이 지키멜의 진심인지 술 때문에 왜곡되고 창작된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술자리 다음에 이어진 잠자리 또 한…… "그 때 왜 나를 유혹했지, 지키멜?" "뭐라고 했어?" "그 때, 살본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나는 네가 비정한 가족들 사이에서 외로워 하는 처녀라고 생각했어." 지키멜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유료도로당주의 인심 좋고 착한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대로 이용해먹을 수 있는 철부지 말이야." 시오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지키멜 또한 웃었다. 시오 크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자기가 갖지 못한 순수함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있었다는 것이군." "둘 다 어렸으니까. 자기는 내키는대로 살아도 세상은 공정하고 정 당해야 한다는 떼쟁이 심리였지." "그랬지. 하지만 참 좋은 시절이었어. 우리 같은 불한당들에게도." "무릎 좀 세워봐. 시오크." 시오크는 그대로 했다. 그의 배 위에 앉아있던 지키멜은 시오크의 다리를 등받이 삼아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 며 말했다. "시오크 지울비." "왜?" "네 아버지는 너에게 당주 자리를 주지 않을 거야." 시오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늦게 말을 덧붙였다. "알고 있어." "너 아버지 때문에 당내에서 지지기반을 얻을 수 없어서 퍼스 후작 의 증손녀랑 사귄 거잖아." "응. 그랬지." "그랬다고? 그럼 이젠 아냐?" "넌 어때? 유료도로당주의 아들은 쓸모가 있을 것 같아?" "그 아들이 옛날의 그 생각을 아직도 품고 있다면. 어때? 유료도로 당은 바뀌어야 해?" "잔인하다, 지키멜." "처음 안 사실도 아니잖아. 자, 옛날의 그 청년이 남아있다면 빨리 보여줘." 시오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키멜. 너는 무려 천오백 년 가까이 하나의 가치관만 고집하는 체 제를 상상하기 어려울 거야. 유료도로당은 무덤 속의 시체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50여년 전 바뀔 기회가 있었어. 하지만 끝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 우리는 길을 준비한다. 나 는 구역질이 나." "그 좌우명의 어떤 점이 너를 그렇게 거칠게 만들지?" "길이 뭐지? 그건 사람들을 잇는다는 거야. 제멋대로 사람들을 이어 놓고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겠다고? 그건 지독한 위선이야. 파델 미호린 사건을 봐. 당이 처한 고민을 보라고. 통행료를 받았으니 그 개자식을 보호해야 했지. 결국 도로를 팔았다가 다시 되사는 촌극을 벌여야 했어." "기지 넘치는 해법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많아." "나는 당의 지도부를 점령하고 있는 노인들에게 물어밨어. 왜 그 개 자식을 보호해야 하냐고. 지겹게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은 말을 대답 이랍시고 해주더군.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해 길 을 준비하며, 그 의지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이보다 더 우스운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어.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의지에 대한 존중인 것 처럼 보이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그것은 무관심이고, 저평가보다 더 무례한 짓이야. 그런 논리 앞에서는 어떤 고귀한 의지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지." 지키멜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목소리 를 높일 수도 있는 대목이었지만 시오크는 한결같이 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옛날엔 그런 논리가 쓸모 있었을 수도 있겠지. 세상이 지금보다 훨 씬 넓었던 시절엔 낯선 지방에서 온 이방인에 대해 오해를 하느니 아 예 평가하지 않는 것이 안전할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 세상 은 좁아졌어. 유료도로는 제국 곳곳에 혈관처럼 뻗어있고. 유료도로 당은 자신의 기준을 세워 적극적으로 세상을 평가해야 해. 아무 것도 평가하지 않겠다면 사람들 사이에 길을 만들어서도 안돼. 이왕 길을 만들었다면 평가를 해야 해. 그래야 범죄자의 도피로를 제공하는 일 을 그만둘 수 있어." 지키멜은 웃으며 시오크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 청년 그대로구나."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응. 네가 유료도로당주가 되도록 도와주겠어. 그 대신 너는 내가 왕이 되도록 해줘." "왕?" "그래. 왕." "왜? 황제가 되지 그래?" "제국이 있다면 황제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제국은 없어졌 어. 이런 상태에서 황제가 되려면 제국도 만들어야 해. 귀찮은 일이 야. 하지만 왕이 되려면 그런 고생은 필요없겠지. 주갈과 카시다, 그 리고 파름산에서 키탈저 사이의 땅이면 왕국으로 충분해. 그 나머지 는 관심없어. 다른 녀석들이 찢어가지라지. 나 참 소박하지?" 시오크는 손을 옆으로 뻗어 지키멜의 신발을 벗겼다. "왕이 되어서 뭐하려고?" "재미있을 것 같잖아?" "그거야 확실히 그렇겠지만." "글쎄. 우선 내 치유할 수 없는 권력욕을 만족시킬 수 있겠지. 으리 으리한 옷을 입고 사치품으로 몸을 감싼 채 돌아다녀서 사람들이 개 탄하게 할 수도 있을 테고. 아, 반역자들에게 목표가 되어줄 수도 있 을 거야."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차군." "그리고, 어쩌면 미몽에 빠졌던 사람들 몇 명 정도는 도울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시오크는 지키멜의 발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지키멜은 간지 러움에 조금 낄낄거리다가 말했다. "펜조일은 뻔뻔하게도 하늘치는 하늘치라고 말했지. 차라리 아무 말 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어. 그래. 우리는 하늘치가 뭔지 몰라. 뱀 단지는 나가들의 기술이고 나가 정신억압자만이 다룰 수 있지. 그리 고 원래 나가들은 한계선을 넘을 수 없어. 원시제의 기막힌 머리는 그 자신의 것이고 후계자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리고 아라짓 제국은 바로 그런 것들에 의해 탄생되고 유지되어왔지. 알지 도 못하는 것, 자기 것이 아닌 것, 그리고 후대에 전할 수 없는 것. 제국이 망하는 것은 당연해. 아라짓 제국이 다스렸던 짧은 시기는, 그래. 네 말처럼 좋은 시기였어. 우리 세대는 행운아들이지. 우리 후 대는 그렇지 않을 거야." "흐음." "언젠가는 잘 아는 것, 자기 것, 그리고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것들 로 보다 나은 제국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주 먼 미래에는 말 이야. 하지만 당장은 꽤 험악한 시대가 펼쳐질 거야. 다가올 험악한 시대에 튼튼한 왕국 하나 쯤 있는 것도 나쁠 것은 없잖아. 안 그래?" "엘시가 제안한 귀족원 회의엔 별 기대가 없는 모양이군." "조금은 있었지만 네 말 듣고는 없어졌어." "조금 있었던 것은 뭐지?" "그 귀족원 회의에서 퍼스가 새 황제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 각했지." "너는 알지 못하는 것, 자기 것이 아닌 것, 그리고 물려줄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진 제국은 망할 수밖에 없다고 했잖아." "맞아. 그 귀족원 회의에서 누가 새 황제로 선출되든 제국은 곧 다 시 무너질 거야." "그런데 기대했다고?" "퍼스가 새 황제가 된다면 새 황제의 첫번째 사업은 제국을 축소하 는, 그러니까 뱀단지나 하늘누리 없이도 다룰 수 있는 크기로 줄이는 일이 되었을 거야." "아하." "그런데 네가 알려줬지. 제국 북부와 남부엔 굉장한 인간들이 있다 고. 그런 자들이 있다면 퍼스에겐 기회가 없겠지. 그 자들이 황제가 된 다음 제국을 왕국으로 바꿀지도 모르지만, 발케네든 시모그라쥬든 비나간에서는 너무 멀어. 우리는 발케네 왕국이나 시모그라쥬 왕국 밖에 위치하게 될 거야. 차라리 지금부터 독자적으로 왕국을 준비하 는 것이 낫겠어. 누가 새 황제가 되든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말이 야." "으흠. 이해했어." "재미있을 것 같으면 너도 끼라고." 시오크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조 금 후 그의 손에 동편 하나가 끌려나왔다. 지키멜은 낄낄 웃었다. "동편 던지기?" "앞면이면 계약 성립이야. 뒷면이면 관두고" "좋아, 던져봐." 시오크는 동편을 위로 튕겨올렸다. 동편이 아래로 떨어질 때 지키멜 이 손을 뻗어 그것을 나꿔챘다. 지키멜은 자신의 얼굴 앞에 손을 가 져가 손바닥 안의 동편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오크 의 바지 주머니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앞면이었어." 시오크는 빙긋 웃었다. "그럴 것 같더라." 정우는 주위를 잠깐 둘러보았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구성은 그녀 를 꽤 재미있게 했다. 방안의 가구 대부분은 표준 크기의 인간에게 맞춰진 것이었다. 하지만 굴도하 남작부인과 탈해 머리돌은 너무 컸 고 정우와 굴도하 남작은 너무 작았다. 결과적으로 방안에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저, 그러니까 고모……" 남작부인이 타조 눈을 더욱 크게 떠서 부라렸다. 정우는 말투를 바 꿨다. "남작부인. 대장군님은 몹시 분주하니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하 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정우의 말투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남작부인의 잡아먹을 듯한 태 도 때문에 규리하공 정우는 남작부인에게 하대를 해야 했다.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탈해는 싱긋 웃었고 굴도하 남작도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남작부인은 만족했다. "아쉽군요. 유일무이한 제국만병장이신 백작님을 뵐 수 있기를 손꼽 아 기대했는데. 제 사소한 소망 때문에 바쁘신 분을 오라가라 하는 결례를 범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그 분이 제안한 귀족원 회의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예? 어, 아니, 응? 감명을 받았다고?" "그렇습니다. 지금 자신의 기회주의를 감출 정도의 재능도 없는 많 은 이들이 제국을 구하기 위한 방책이라며 시시껄렁한 소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 귀가 더러워지는 기분이 드는 헛소리 들이지요! 반면 책임감을 발휘해야 할 귀족들은 더러운 야욕을 공유 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다니며 암중모색하고 있습니다. 폐하께 받은 작위를 반환하고 자결해야 할 괘씸한 것들입니다. 그 때 칼리도백께 서는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기 위한 귀족원 회의 개최를 당당히 요구 하셨습니다. 그것은 귀족의 책무를 잊고 있던 많은 함량 미달의 귀족 들에게 그들의 책무를 일깨워주는 정의의 외침이었습니다." "아, 저, 그랬나?" "그렇습니다! 귀족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에게 더 큰 권한이 주어진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의 짐을 대신 지고 앞장서서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 다. 그렇지 않다면 귀족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평민들이 주는 밥을 받아먹는 돼지일 뿐이지요!" 정우는 감동했다. 남작부인의 말은 언젠가 정우가 골케 남작에게 했 던 말과 비슷하다. "고모님의 말씀이, 아니, 저, 미안. 남작부인의 말이 맞아. 나도 그 렇게 생각해. 더 많은 것을 받은 자는 필요할 때 더 많은 것을 내줄 수 있지 않겠어?" "그렇습니다! 규리하공께서도 그러실 생각이셨군요." 정우는 약간 움찔하며 고모를 바라보았다. 남작부인은 상체를 앞으 로 조금 내밀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정우는 어려워 하는 얼굴로 탈해를 돌아보았다. 탈해는 어깨를 으쓱 였다. 정우는 약간 주눅든 태도로 말했다. "아니…… 저, 내가 뭔가를 받았다면 그것을 준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나는 그것을 돌려줄 거야. 하지만 내가 뭘 받았지?" "각하께서는 규리하공이십니다." "글쎄. 여기 있는 탈해 머리돌 무사장이 잘 알겠지만,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정우 규리하였지 규리하공이었던 적이 없어." 탈해는 마치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남작부인 은 조금 생각하고는 곧 명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계속 규리하공이실 테지요. 순서가 좀 바뀌긴 했 지만, 먼저 베푸시고 나중에 받으시면 됩니다." 정우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한동안은 그래야겠지." "한동안? 무슨 뜻입니까?" "대장군님은 규리하를 제국 재건의 기틀로 삼으려는 것 같아. 귀족 원 회의가 개최될 때까지 이곳에 계시면서 제국의 안정을 유지하실 거예요. 그래서 요즘 그렇게 바쁘세요. 그 분은 정말 제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지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돌려줄 생각이신 것 같아 요. 그래서 저는 그 분께 신랑감 찾아달라는 말도 못 하고…… 어머, 저, 미안. 혼잣말이었어." 남작부인은 커다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얼핏 보면 불만스러 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생각에 잠긴 표정일 뿐이다. 하지만 고모를 처음 보는 정우는 그 표정에 겁을 집어먹었다. 다행히 남작이 상황을 짐작하고 말을 꺼냈다. "졸처의 표정에 너무 놀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각하. 지금 이 사람 은 그저 생각에 잠겨 있는 겁니다. 물론 누군가를 때려죽이겠다는 생 각 같은 것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남작의 말을 들은 남작부인은 황급히 정우에게 사과했다. 정우는 고 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입을 열자 남작은 계속 말을 꺼냈 다. "그런데, 각하. 신랑감을 찾아달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요?" "예? 아, 그거. 그건 대장군님과 나와의 약속이야." "무슨 약속이죠?" "응. 원래 나는 결혼해서 남편에게 규리하를 넘기기로 되어 있었어. 그리고 대장군님이 내 신랑감 찾아주기로 하셨지. 하지만 그 분이 계 속 바쁘다 보니 그 약속 아직 못지켜지고 있어. 그리고 난 조르지도 못하겠어. 요즘 그 분 정말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거든." 정우의 태연한 발언에 남작과 남작부인은 경악했다. 남작은 그것을 억눌렀지만 남작부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 다. "대장군이 어떻게!" 정우는 허옇게 질렸다.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란 그녀가 상대방의 크 기에 놀랄 일은 없지만 남작부인이 뿜어내는 박력은 도깨비들이 흉내 도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정우의 상태를 본 남작이 황급히 남작부인 의 팔을 건드렸고 그러자 굴도하 남작부인도 당황하여 고개를 꾸벅했 다. "죄송합니다. 각하. 결례였습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칼리도백은 규리하 가문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각하의 결혼 문제 라면 당연히 규리하 가문 사람이 담당해야 합니다!" 정우가 다시 말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는데." "예?" "규리하 가문 사람 말이야. 여기에 있는 규리하 가문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시카트뿐이야. 내년이나 되어야 성인이 될 시카트가 내 결 혼을 맡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이제는 있습니다! 제가 왔으니까요! 비록 이젠 굴도하의 성을 씁니 다만 저는 각하의 고모입니다." 정우는 굴도하 남작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말했다. "나 대장군님께 청혼 받았어." 충격을 받은 탈해는 무의식중에 도깨비불을 만들어냈다. 허공에 깜 짝 놀란 도깨비의 얼굴이 거대하게 떠올랐다. 정우의 말에 놀란 남작 과 남작부인은 탈해가 만든 도깨비불에 다시 놀라야 했다. 그들의 경 악에 찬 얼굴을 본 탈해는 사과하며 황급히 도깨비불을 지웠다. 정우 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미안. 진짜 청혼은 아니야. 내가 해달라고 부탁했어. 청혼의 말을 해달라고. 그래서 대장군님이 부탁을 들어주신 거야." 세 사람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굴도하 남작 이 먼저 당황을 수습하고 말했다.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싫다고 했어." 굴도하 남작부인은 다시 벌떡 일어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남작이 그런 그녀에게 잠시 눈짓을 보내고는 정우에게 말했다. "각하. 왜 그런 부탁을 하고 그런 대답을 하셨지요?" "응. 내가 결혼을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그렇잖아도 그 분은 지금 제국에 대한 걱정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으실 텐데 내 남편감에 대한 고민까지 하게 할 수가 없었 어." 굴도하 남작은 웃고 싶었다. 결혼이 다급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는 기묘하게 느껴졌다. 남작은 그것이 혹 도깨비식인가 생각했지만 탈해의 놀란 얼굴을 보고는 그런 의심을 거뒀다. 남작은 턱을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그러면 직접 찾으시지요?" "응?" "부군 말입니다. 대장군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신 거라면 각하께 서 직접 부군될 분을 찾아보시면 되잖습니까." 정우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약속했는걸. 대장군님께 내 결혼 문제를 맡기겠다고. 킴 남자와 결 혼해야 할 텐데 나는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라서 킴을 잘 모르고…… 또……" 정우를 제외한 세 사람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 우는 그 시선에 약간 질려서 황급하게 말했다. "남작부인.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나는 대장군님이 찾아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엘시 에더리는 결국 제국군 전체의 보급망을 구상하는 일을 포기하 기로 했다. 고민은 깊었지만 결단은 빨랐고, 오래간만에 약간의 개운 함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엘시는 그 느낌을 즐기는 대신 다른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굴도하 남작 부부의 초청을 거부했던 일이었 다. 엘시는 보급망 수립 계획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었고, 또한 남 작 부부가 한꺼번에 규리하성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초청을 거부하기로 했다. 엘시는 두 사람이 한꺼번에 나타난 이유에 대해 고민해봐야겠다고 결정했다. 그 는 책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에는 7월의 맑은 하늘이 펼쳐져있었다. 엘시는 제국군이 주둔하 고 있는 방향을 흘깃 바라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그가 발케네에서 인솔하여 데리고 온 제국군의 숫자는 적지 않았고 그 병 력 모두를 규리하성 내부에 두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제국군은 규리 하성에서 좀 떨어진 위치에 임시 요새를 건설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그 방향을 바라보던 엘시는 니어엘 헨로를 떠올렸다. 하늘누리가 실 종됨으로써 가족의 생사를 모르게 된 제국병은 니어엘 헨로 외에도 많았지만 엘시는 니어엘이 걱정스러웠다. 부냐 헨로의 존재 때문이 다. 발케네 전쟁은 명목상 부냐 헨로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따라서 하늘누리가 실종된 것 또한 부냐 헨로 때문이라는 소급적용을 하고 싶은 사람들 또한 있을지도 모른다. 엘시는 그런 사람들이 니어엘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니어엘 헨로는 제국군의 영웅이었으니까. 하지만 뒤늦게 전쟁터에 나타난 엘시는 미 처 그 이야기를 전해듣지 못했다. 엘시는 니어엘과 그녀의 독립중대 에게 규리하성의 경비를 맡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암살 시도가 있었던 만큼 경비 강화는 필요할 테고 그렇다면 틸러 달비의 소대보다는 니어엘 헨로의 중대가 경비를 맡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 정우와 니어엘은 같은 여자이니 더 편할지도 모른다. 엘시는 그 정도 까지 생각해둔 다음 그 생각을 머리 한곳에 치워두었다. 정우와 니어 엘, 그리고 틸러의 의견을 들은 다음 결정할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엘시는 다시 남작 부부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왔다. 사실 숙고할 필요는 없는 문제였다. 엘시는 남작 부부의 동반 출현 이 무슨 의미인지 간단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 실종이라는 전대미 문의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서 차기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이나 무리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굴도하 남작이나 남작부인이 그들 자신 의 힘으로 신황제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영민하게 굴 고 싶다면 가능성 높은 황제 후보자를 찾아 동맹을 맺으려 할 것이 다. 그런데 남작부인에겐 규리하공이라는 강력한 친척이 있다. 남작 부부는 아마도 정우를 신황제로 추대하기 위해 황급히 달려왔을 것이 다. 엘시는 갑자기 비애를 느꼈다. '폐하. 아무도 폐하의 실종을 슬퍼하지 않는군요.' 엘시 자신이 추측한 것처럼 지금 제국의 지배자들 중 상당수는 제국 이 없어도 당황하지 않을 연배인 것이다. 그리고 무릇 훌륭한 지배자 들은 비상 상황에서 행동이 빠른 법이다. 엘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시는 한 명이라도 자신과 함께 황제 실종에 대해 걱정하고 슬퍼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냐.' 엘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함께 슬퍼하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것은 바르지 못하다.' 엘시는 지금이라도 치천제와 하늘누리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노력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엘시는 자신의 노 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작정이었다. 황제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경우를 상정한 다음 최선을 다해 새 황제가 등극할 때까지 제국을 지 킬 것. 발케네를 징벌하거나 시모그라쥬공을 처벌하는 것은 모두 그 다음의 일이다. 지금은 오로지 제국을 변함없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 만이 중요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시는 당번병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병사는 굴도하 남작이 찾아 왔다고 알렸다. 엘시는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안으로 모시라고 말했 다. 조금 후 굴도하 남작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 각하. 저는 판사이의 발리츠 굴도하 남작입 니다." 엘시는 굴도하 남작과 초대면이었다. 듣던대로 상당한 단신이었다. 엘시는 빨리 앉히는 것이 그를 편하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앉게. 남작." 굴도하 남작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엘시는 탁자를 사 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규리하공은 뵈었는가?" "예. 각하. 제게는 처질이 되는 분이신데 진작 찾아뵙지 못해 매우 송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고맙게도 크게 허물치 않으셨습니다." "비스그라쥬백의 약속이 지켜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나도 안타깝 게 생각해." 굴도하 남작은 당황하지 않았다. 엘시 에더리는 규리하 전쟁을 지휘 한 사람이니 굴도하 남작부인이 규리하를 지지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비스그라쥬백의 약속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비스 그라쥬백의 생사지요. 백작께서 무탈하시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옥체 보존하고 계시겠지요." 엘시는 가슴에 무엇인가가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엘시는 가까스로 말했다. "충격적인 사건이었지." "그렇습니다. 백작님."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나?" "백작님. 제 몸종을 안으로 불러들여도 될까요? 밖에 있습니다만." 엘시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당번병을 불러 남작의 몸종을 들어오게 하라고 했다. 남작의 몸종은 손에 묵직한 바둑판과 돌통을 들고 들어 섰다. 그는 들고 온 물건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 다. 엘시는 당혹하여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발리츠 굴도하가 말했다. "무례를 탓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심히 바쁘신 줄은 압니다만 당대 최고의 기사를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엘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설마 지금 바둑을 두자는 말 인가? 이런 상황에서?' 엘시는 고개를 갸웃하며 남작을 바라보았다. "미안하군. 나는 남작이 고명한 무인이라는 말은 들어 알지만 혁기 에도 재능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 "스승으로부터 간신히 싸울 줄은 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기품이 투력, 즉 3단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굴도하 남작은 치수까지 연이어 말했다. "백작님과 어울리려면 제가 여섯 점을 깔아야겠군요." "남작.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여유롭지 못해서……" "백작님. 우리의 좋은 결정들은 대개 정신적 풍요에서 나오지요."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말이지만 얼마 전까지 불가능한 계획 에 매달렸던 엘시에겐 각별한 말이었다. 남작은 웃으며 말했다. "분주하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작님께서는 작년의 규리하 전쟁 때부터, 아니, 타이모 사건 때부터 끊임없이 분주하셨습 니다. 제 단견으로는 잠시라도 쉬시며 심로를 푸셔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제 작은 재주가 그런 휴식에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 광일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왕이면 백작님께서 즐기시는 것을 나 누며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그러면 제 미욱한 말재주도 좀 감춰질 듯하니까요." 엘시는 더 거부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엘시가 허락하자 발리츠 는 손수 돌통을 나누고는 흑돌을 앞으로 가져왔다. 굴도하 남작의 치 석이 놓이자 엘시가 백돌을 집어들었다. 바둑은 일방적이었다. 엘시 에더리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돌을 척척 내려놓았다. 발리츠 굴도하는 바둑을 두는 것인지 춤을 추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엘시는 그에게 어울리려 하고 있었고 거스르거나 반발하려 하지 않았다. 우형을 짓지는 않았지만 묘수도 없었다. 비록 기품의 차이가 크다 해도 맞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그런 바둑으로는 여 섯 점 접바둑을 뒤집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중반이 끝났을 때도 굴도하 남작이 가진 여섯 점의 이득은 그 대로 살아남게 되었다. 큰 싸움이 없었으니 돌을 던질 기회가 별로 없었고 그래서 엘시는 계속 바둑을 두었다. 하지만 그대로 계가까지 간다 해도 승패의 변화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엘시의 패배 가 분명하다. 굴도하 남작은 어디 가서도 이것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남작의 머리에 바둑을 청한 진짜 이유가 떠올랐다. 제국최강기사와 겨룬다는 긴장감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다. 굴도하 남작은 장고가 필요 없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런 생각 해보셨습니까, 백작님? 세 사람이 바둑을 두면 어떨까 요?" 엘시는 고개를 들었다. "다면기를 말하는 건가?" "아니오. 바둑판 하나를 두고 세 사람이 싸우는 겁니다." "색깔이 다른 세 종류의 돌을 사용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서는 바 둑을 둘 수 없어. 일호도 만들 수 없을 테니까." 굴도하 남작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세 번째 사람에겐 흑돌과 백돌이 모두 담겨있 는 돌통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내키는대로 흑돌이나 백돌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세 번째 사람이 이기거나 지는 것은 불가능합니 다. 하지만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 까?"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생각엔 전혀 재미 없을 것 같군. 공정하지가 않아. 세 번째 사 람이 누구의 승리를 바라는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야. 그가 한 종 류의 돌만 계속 쓴다면 그 돌이 이기지 않겠나." "만약 세 번째 사람이 두 사람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해 애쓴다면? 한쪽의 실착을 만회하거나 반면으로 지고 있는 사람의 회 복을 돕기 위해서만 돌을 쓴다면 어떻겠습니까?" "여전히 불공평해. 실착을 만회한다는 것은 무의미한데, 세 번째 사 람 또한 실착을 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곤경에 처한 대국자를 돕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를 곤경에 몰아넣는데 성공한 상대편 대국자를 방해하는 일이지. 그렇다면 모든 지혜를 다해 그런 성취를 이룬 상대방에게 불공평한 일이지. 게다가 그런 상태라면 다른 두 대 국자는 아무런 전략도 쓸 수 없어. 거기엔 기리도 없고 승부도 없 어." "역시 그렇겠지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굴도하 남작은 한참 동안 바라보던 곳에 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백작님께서 세 번째 기사 역할을 하시려는 것 같아서입니다." 지금껏 남작이 착수할 때마다 곧바로 돌을 집어들던 엘시가 처음으 로 손을 멈추었다. 엘시는 돌통에 손을 넣은 채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반상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바둑이 아닌 듯했다. 엘시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음을 알게 된 굴도하 남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작님은 그것이 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공정한 선 출을 통해 새 황제가 등극하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제국을 현상 유지 하는 것이 백작님의 사명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백작님이 하려는 일은 세 번째 바둑기사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겉으론 공정 해 보여도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불공평한 일입니다. 두 개의 돌을 자유롭게 쓸 막강한 힘을 가진 자가 부리는 횡포입니다." "횡포라." "백작님은 제국군에게 금족령을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그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려고. 백작님은 금고요새 사령관을 포섭하려 하십니다. 누군가가 그 금을 쓰지 못하도록 하려고. 백작님에겐 그럴 힘이 있습 니다. 두 개의 돌을 쓰는 것과 같은 힘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공정한 일일까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황제를 찾아낼 기회를 균등하게 주 는 것일까요? 그렇게 믿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그건 잘못된 일입니 다. 다른 사람들처럼 싸움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황제가 되려고 하십 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원하는 황제라도 찾아내시든가요. 그것 이 정말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일입니다." 딱. 조용한 소리와 함께 엘시가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효과적으로 말문 을 막는 방법이었다. 굴도하 남작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엘시의 착점 을 물끄러미 보다가 흑돌을 집어들었다. 빨리 바둑을 끝내고 본격적 으로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남작의 다음 착점이 끝나자마자 엘시 또한 백돌을 내려놓았다. 산들 바람에 뭉게구름 떠가는 듯한 행마다. 평온하고 고요한…… 착수하려던 남작은 움찔하며 돌을 끌어당겼다. 하마터면 반면에 내 려놓을 뻔한 돌을 아예 두 손으로 감싸쥔 채 남작은 바둑판을 살폈 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어 엘시를 보았다. 엘시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바둑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지 금까지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저항하지 않고, 거스르지 않는 수 다. 남작의 다음 착점은 절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놓을 곳이 없었다. 굴도하 남작은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절대의 수를 놓고 고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은 조금 늦게 떠올랐다. 남 작은 자신없는 태도로 착수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엘시의 오른손이 홀로 살아있는 것마냥 움직여 백돌을 내려놓았다. 물 흐르는 듯한 동 작이고, 착수는 여전히 평온하다. 너무 평온하다. 또다시 절대수다. 남작이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은 가로 십구로, 세로 십구로의 바둑판 위에 오직 한 군데뿐이었다. 패착은커녕 완착도 아 니다. 분명히 이길 수 있는 외길수순이었다. 하지만 남작은 그 절대 성이 못마땅했다. 조금 전부터 호흡이 불안해지는 것 또한 거슬렸다. 예의를 더 돌볼 수 없었던 남작은 다음 착수를 하기에 앞서 장고했 다. 엘시는 다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도저히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없 었던 남작이 착수하자 조용히 백돌을 집어들어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 다. 굴도하 남작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왔다. 남작의 시야가 좁아졌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엘시도 볼 수 없었 다. 굴도하 남작의 시야는 바둑판 하나로 집약되었다. 가로 열아홉 줄, 세로 열아홉 줄의 세계 속에서 남작은 스산함을 느꼈다. 그대로 바둑판 속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아찔함에 남작은 놀랐다. 자신의 손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남작은 더듬더듬 돌을 집어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마치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바둑판을 밀어내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려 할 때 바둑판 위에 새로운 백돌이 나타났다. 남작은 눈을 부릅뜬 채 그 돌을 바라보았다. 그 돌이 두 개, 네 개, 여덟 개로 늘어났다. 수십 년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놓을 곳이 없군." 굴도하 남작은 고개를 들었다. 낮잠이라도 한 숨 잔 것 같았다. 몸 곳곳이 묘하게 뜨겁고 일어나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고 싶어지는 그런 종류의 낮잠이었다. 굴도하 남작은 눈을 비비고 엘시를 응시했다. 조 금 후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묵묵히 바둑돌을 옮겼다. 굴도하 남작은 계가가 끝난 바 둑판을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백이 열아홉 집 앞서있다. 굴도하 남작은 마지막으로 그런 대패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 지 않았다. 아마도 환격 배우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도대체 어디 서 어떻게 진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엘시의 바둑은 평온했다. 무겁 지도, 가볍지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남작의 바둑에 도 실착은 없었다. 같은 상황에 또 처하게 된다면 남작은 자신이 똑 같은 바둑을 둘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둘 수밖에 없 다. 그런데 그는 졌다. '여섯 점 접바둑으로 열아홉 집을 졌다고?' 수졸과 입신의 대결에서도 나오기 힘든 결과다. 엘시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복기는 어렵겠군. 양해해주 게." 굴도하 남작은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황당함을 느꼈다. 겨우 복기를 생략하겠다는 말에 살의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발리츠 굴도하는 그것이 진솔한 반응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엘시의 멱살을 붙잡고서라도 어떻게 진 것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복기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발리츠는 가까스로 자신을 진 정시키고는 고개를 들어 엘시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수 잘 배웠습니 다." 엘시는 옅은 미소로 화답하고는 잠자코 돌을 쓸어 통에 담았다. 굴 도하 남작은 누구에게 끌어올려지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몸종을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몸종은 남작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 랐다. 남작은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몸종은 황급히 돌통과 바둑 판을 챙겨 들었다. 대장군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 굴도하 남작 은 몸종에게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몸종은 그와 얼굴을 마주치 는 것도 두렵다는 듯 멀찌감치 떨어져서 다가왔다. 남작은 자신이 도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의 의문은 얼마 있지 않아 풀렸다. 남작부인은 남작을 보자마자 기겁하여 말했다. "각하? 무슨 일이죠?" "왜 그러십니까, 부인?" "각하의 얼굴이 꼭 레누카 만난 수수깨비 같은데요?" 굴도하 남작은 자신에게 감탄했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부인을 얻 었을까. 굴도하 남작의 심정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도 없을 것 같았다. 남작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부인 말이 맞습니다. 나는 조금 전에 귀신을 보았습니다." "각하. 규리하성이 오래되긴 했지만 여기에 귀신 같은 것은 없어요. 후사린 규리하의 망령이 떠돈다는 이야기는 일고의 가치도……" "아니, 아닙니다. 규리하도 아니고 죽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귀신 입니다." "허! 그 귀신 이름은 있나요?" "예. 엘시 에더리입니다." 남작은 부인에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바둑을 익힌 적은 없지만 남편의 취미 때문에 바둑에 대해 대강 알고 있는 남작부인은 남작이 받았을 충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중반까지는 분명히 이기고 있었습니다. 초반부터 괴수가 등장해서 곤마가 즐비하게 나타나는 그런 바둑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중반 이 후에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순리대로 둔 바둑입니다. 그런데 열아홉 집입니다. 이거 원, 즈믄누리에서 숨바꼭질하고 온 기분입니 다." 남작부인은 허! 하고 웃고는 말했다. "이거 참 곤란하군요. 각하. 신부는 어린애고 신랑은 귀신이라니." "어린애? 글쎄요. 좀 다르다고 표현하고 싶군요." "그런 표현은 온당하긴 하겠지만 도움은 안돼요. 어린애라고 부르겠 어요." "그러시지요. 부인. 부인 말대로 참 당혹스러운 짝이로군요. "어쨌든 두 사람을 결혼시켜야 해요. 각하. 스카리 빌파에겐 레콘 부대가 있고 시모그라쥬공에겐 남부군이 있어요. 그렇다면 비셀스에 게도 대장군이 있어야 하지요."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아이넬 굴도하는 자신있게 말했다. "제게 맡겨두세요." 이레 달비는 특정한 종류의 질투심에 익숙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레 달비의 몸을 부러워했고, 이레 달비도 자신의 몸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조금 작은 도깨비라고 해도 통할 만 한 그의 거대한 몸은 비각술로 다져져 놀랍도록 유연하다. 하지만 이 레가 그런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제아무리 강력한 몸이라 해도 한 방울의 독이나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짧은 비 수를 이겨낼 수는 없다는 것이 시모그라쥬에서 보낸 유년기를 통해 이레가 얻은 교훈이다. 레콘들이 말하듯 마지막까지 잃지 않는 무기 이기 때문에 몸을 단련하기는 하지만 이레는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 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슬 캄프리 수교위의 생각은 달랐다. "자랑스러워 해도 돼. 자네 몸으로 하루만 살 수 있다면 난 무슨 짓 이든 할걸." 이레는 그것을 질투라고 생각하지 않고 위로라고 생각했다. 위로를 받을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는 한 번 더 졸라보기로 했다. "수교위님. 다시 생각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그걸 원한다면 몇 번이라도 다시 생각할 수 있지만 대답이 바뀌진 않을 거야." 이레는 더 이상 조를 수 없었다. 그는 딱정벌레에 올라탔다. "혹여라도 생각이 바뀌신다면 연락 주십시오. 수교위님." "그러겠네. 잠깐. 물러나야겠어." 리슬 캄프리 수교위는 딱정벌레의 날개 바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바퀴 의자를 뒤쪽으로 굴러가게 했다. 근처에 있던 주에나 수전사가 바퀴 의자를 잡아 끌어당겼기 때문에 수교위는 재빨리 물러날 수 있 었다. 주에나는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 듯 바퀴 의자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레는 그에게 목례를 보내고는 딱정벌레를 날아오르게 했 다. 리슬과 주에나는 흙먼지를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들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을 때 딱정벌레는 높이 솟아있었다. 금고 요새 상공에서 가볍게 선회한 딱정벌레는 곧 북쪽 방향으로 날 아갔다. 주에나는 딱정벌레가 날아가는 모습에 감명을 받은 듯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리슬 캄프리 또한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딱정벌 레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검은 점이 되었던 딱정벌레가 이윽고 사라졌다. 리슬은 주에나에게 안으로 들어가자는 몸짓을 해보였다. 주에나 수전사는 바퀴 의자를 밀면서 웅얼거렸다. 그 웅얼거림을 주의깊게 듣고 있던 리슬이 말했 다. "왜 거절했느냐? 참 어려운 질문이군." 주에나가 다시 웅얼거렸다. 리슬이 말했다. "대장군이 황제가 되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나는 금고를 열어 줬을 거야. 하지만 대장군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내주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더군." 우이이 히이아 아우노이. "맞아. 야심 없는 인격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야심 없는 사 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안돼. 차라리 야심가가 나아." 이에지에? "잘못 말한 것이 아냐. 야심가가 더 나아. 우리가 기다려야 할 사람 도 그런 사람이고." 리슬은 옷깃을 여몄다. 계곡의 바람이 차가웠다. 그는 짧게 쿨럭거 리고 말했다. "이왕이면 겨울이 오기 전에 그런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군. 제대 로 불꽃을 튕겨줄 사람이." =============================================================== 17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18. 돌 속의 바람 - 1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 희망 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은 생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 어떤 지혜로운 자에 의해 그 의문이 풀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 다면 그 자는 그 때부터 의문 없는 생을 살아야 할 것이 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전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생 이다. 의문 없는 생이 생일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설 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혹은 그 지혜로운 자가 사기꾼이라는 것. 우리의 현명함을 포기할 수 없기에 전자를 선택할 수도 없고 우리의 멍청함을 강조할 수 없기에 후자를 선택할 수 도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둘 모두를 끌어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전제는 정확하며, 사기꾼은 사기꾼이 아니다. 그렇 다면 이 경우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 가이너 카쉬냅 의 <생각하는 동물들> 서문. 허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 파라말 아이솔은 무의식 중에 허리 를 매만졌다. 하지만 두툼한 방한복의 감각만 느껴질 뿐 신통한 느낌 은 없었다. 파라말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 는 살인적인 추위 하에서는 쑤시는 허리를 주무를 수 없다고 의기소 침하는 것보다는 방한복을 완전히 갖춰입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 나으리라. 파라말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고, 몇 분 후에는 추 위와 허리와 방한복 모두를 저주하게 되었다. 파라말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님. 불이 꺼진 것 같은데요." 사라말은 고개를 돌려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 꺼졌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사라말은 동생이 몇 분 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고 그 때도 같은 대답 을 해주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냐.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런데 왜 불을 피우지 않습니까?" "장작이 부족하다." "그렇군요." 파라말은 눈을 감았다. 동생의 새하얀 얼굴을 보던 사라말은 굼뜬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문을 꼭 붙잡은 사라말은 바깥의 바람을 가 늠해보았다. 이전에 문을 열 때 세찬 바람이 몰아쳐 오두막 안쪽을 뒤엎어놓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바람의 압력은 별로 느껴 지지 않았다. 사라말은 문을 조금만 열고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 대단한 동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밖으로 나와 문을 닫은 직후 사라말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라말은 오두막 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들이 있는 오두막은 순록을 방목하는 이들이나 연어 낚시꾼, 혹은 사냥꾼을 위해 만들어진 오두막인 듯하다. 그리고 순록은 이 주위의 풀을 다 뜯어먹었고 연어는 회귀성을 잃어버리고 사냥꾼은 대자연에 게 사냥당한 듯하다. 황폐한 풍경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 라말은 주변의 풍경에서 어떤 생산성도 느낄 수 없었다. 오두막 주위 엔 얼어붙은 바위들이 비죽비죽 솟아있는 구릉이 시야를 답답하게 하 고 과거 십년 동안은 꽃이나 잎을 피웠을 것 같지 않은 나무들이 반 쯤 석화되어 풍경 이곳저곳에 매달려 있다. 거센 바람에 뿌리째 쓰러 진 나무들의 모습은 사토 속에 드러난 동물의 유골처럼 보인다. 그 모든 것 위로 유령 같은 낮이 펼쳐져 있다. 낮은 궤도에서 전전반측 하는 짙은 구름은 햇빛을 옹골차게 막아내며 사라말이 선 땅 위에 밤 과 낮의 근친교배로 태어난 듯한 박명을 뿌리고 있다. 먼 곳에서 들 려오는 폭풍 소리…… 혹은 과거에서 들려오는 듯한. 사라말은 비틀거리며 수레 쪽으로 걸어갔다. 연료가 필요했다. 사라말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수레를 태우는 것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다리를 잘라먹는 정도의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 다. 수레가 없다면 이 황량한 땅에 묶이고 말 테니까. '즉 사람의 품격에 어울리는 세련된 자살법이지. 생명 그 자체에 타 격을 입히는 대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것.' 수레 앞에 도달한 사라말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고문이었다. 공기는 악의에 차 있었고 몸 속의 모든 피가 발쪽으로 가라앉아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수레를 부술 수는 없었다. 아트밀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수레 없이는 두 사람을 이동시킬 수 없 다. 하지만 이곳에서 수레는 사라말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연료였 다. 가까이 있는 죽은 나무들은 아트밀이 모두 부러뜨렸고 사라말은 그것 모두를 재로 바꿔놓았다.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 중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사라말이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다가갈 수 없는 위치에 있 었으며, 설령 사라말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한들 그에겐 벌목을 위한 최소한의 장비도 없었다. 살기 위해선 연료가 필요하다. 연료를 얻으려면 수레를 부숴야 한 다. 수레를 부수면 이곳에서 떠날 수 없다. 이곳에서 떠날 수 없으면 죽는다. 사라말은 자신이 아주 단순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는 상태임 을 깨달았다. 몸의 고통은 영의 활동을 제약한다. 영은 육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때만 기능할 수 있다. 도깨비들의 어르신은 살아있는 도깨비가 근처에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군령자는 그가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 한들 현재에 존재하려면 현재에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이 도깨비도, 군령자도 아닌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죽으면 신께 가는 거지. 신께서 육의 역할을 대신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죽은 영은 도깨비들의 어르신처럼 신의 곁에 머물게 되지.' 대여섯 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질문을 한 것은 그였지만 대답을 해준 것이 누군지 사라말은 떠올릴 수 없었다. 아마도 양친 중 한 명 이지만 사라말은 기억할 수 없었다. 그 대답이 너무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런 대답에서 신의 곁에 갈 때를 대비 하여 도와 덕을 닦아야 한다는 교훈을 유도할 수 있겠지만 사라말이 유도한 것은 좀 특이한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신이 죽은 다음엔 누구에게 가야 하지?' 사라말은 그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는 느껴졌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질문하고는 심한 창피를 당하거나 꾸중을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순간 사라말은 미심쩍은 눈으로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지금 내가 올라가면, 언제까지 담보해줄 수 있지요?"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는 거냐?" "임대 계약 목적물의 사용 연한에 대해 논의중입니다." "그건 좋아. 그런데 왜 썰매 난간을 손날로 문지르고 있는 거지?" 사라말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오른손이 썰매 난간 위에서 톱질하듯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고개를 돌린 사라 말은 아트밀의 장중한 체구를 보았다. 아트밀은 왼손에 전나무 쯤으로 보이는 물체를 움켜쥔 채 서있었다. 마치 큰 빗자루를 등 뒤로 끌고 오는 것 같았다. 빗자루의 아랫부분, 그러니까 전나무의 수관 부분 위에는 해체되어 있어 무슨 동물인지 알기 어려운 동물의 사체가 얹혀져 있었다. 피냄새는 별로 나지 않았 다.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세계 평화를 가져온다고 알려진 우리 가문의 비전입니다." "그래? 그럼 너희 가문 사람들이 좀 게을렀나봐." "그런 듯합니다." 사라말은 아트밀에게 쓰러졌다. 아트밀은 재빨리 허리를 낮춰 사라말의 상체를 붙잡았다. 아트밀은 사라말을 똑바로 세워주려 했지만 사라말은 이미 혼절한 후였다. 아 트밀은 부리를 탁 부딪치고는 사라말을 집어 어깨에 맸다. 오두막 앞에 돌아온 아트밀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전나무를 내려놓 고는 문을 열었다. 사라말을 파라말 곁에 뉘어놓은 아트밀은 밖으로 다시 나왔다. 그는 전나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 위에 손날을 가져 가서 톱질하는 시늉을 했다. 정중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만족할 만 큼 손을 움직인 아트밀은 수염볏을 한 번 쓰다듬고는 다시 부리를 부 딪쳤다.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사라말 아이솔은 눈을 떴다. 오두막 안의 공기는 훈훈했다. 벽난로에서는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 고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래서 사라말은 순간적으로 갈등을 느꼈다. 벽난로와 고소한 냄새의 방향이 서로 반대였다. 벽난 로에서 몸을 녹인 후 고소한 냄새쪽으로 가는 것이 낫다는 상식적인 생각을 떠올렸을 때 사라말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 같은 만 족감을 느꼈다. 그가 간신히 벽난로 쪽으로 굴러갔을 때 아트밀이 문 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잘 구워졌다기보다 시커멓게 탄 고기가 얹혀 져 있는 돌을 들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폭풍처럼 사라말에게 몰아 쳤다. 아트밀이 말했다. "일어났어? 젠장. 도구 하나도 없이 요리하기 힘드네. 보기 안 좋 지? 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야." 아트밀은 성큼 걸어와 사라말 앞에 돌을 내려놓았다. 사라말은 고깃 덩이를 황급히 집어들었다. 어떤 동물의 뒷다리 쯤으로 생각되는 고 기를 뜯어먹으려던 사라말은 당혹감을 느꼈다. 턱에 힘이 하나도 들 어가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손가락과 손톱으로 고기를 뜯었 다. 탄 고기는 찢어진다기보다 부서졌지만 사라말은 용케 자갈 같은 고기 조각 하나를 입에 넣을 수 있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곧장 뱉 어냈을 고기를 질겅거리며 사라말은 행복을 느꼈다. 사라말의 고군분 투를 본 아트밀은 돌 위의 고기를 잘게 찢기 시작했다. 사라말은 감 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아트밀. 내가 먹어본 최고의…… 이거 무슨 고기입니까?" "늑대." "내가 먹어본 최고의 늑대 고기군요. 빈말은 아닙니다. 이번이 처음 이니까." 아트밀은 껄껄 웃었다. 사라말이 말했다. "당신은 안 드십니까?" "밖에서 구우면서 좀 집어먹었어." 사라말은 더 묻지 않고 뱃속에 늑대 고기를 채워넣었다. 아트밀은 재와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깃털에 대충 닦고는 사라말이 식사를 끝 낼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파라말도 눈을 떴다. 사라말은 동생을 부축하여 앉혔고 형제는 늑대 고기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입 안에 집 어넣었다. 마침내 형제가 시체로 오인되지는 않을 정도의 몰골이 되 자 아트밀이 말했다. "락토 빌파가 죽었어." 파라말은 움찔했고 사라말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서?" "그 날, 하늘누리가 폭주하기 직전에 투신했어. 절망감 때문이었나 봐. 조금만 더 버텼으면 그 친구 승리자가 되는 건데, 좀 조급했지. 그래서 지금 발케네를 통치하고 있는 것은 스카리 빌파야." 파라말이 질문했다. "스카리 빌파가 발케네공이 되었다고요?" "아니. 아직은 아냐.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발케네를 통치하고 있어. 탈출한 하늘누리 시민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고 있는 것도 그 친구 의 생각인 것 같아." "이유는? 역시 전쟁 포로입니까?" 지난 몇 달 동안 남하하면서 그들은 발케네의 병사들이나 밀고자들 의 눈을 피해야 했다. 발케네 병사들은 하늘누리에서 탈출한 시민들 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였다. 처음에 꽤 큰 무리였던 탈출자 무리가 지 금 세 명으로 줄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고추냉이 여단병인 아트밀 교위는 아이솔 형제를 이곳까지 남하시키느라 상당한 고생을 해야했 지만 그 사실에 별 불만은 없었다. 그리고 아트밀이 그들의 보호자라 는 사실은 형제에게 상당한 행운이었다. 그는 좋은 눈썰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일단 표명상의 이유인 것 같은데, 난 별로 믿고 싶지가 않아. 전쟁 포로가 목적이라면 지금쯤 수색이 시들해질 때도 되었잖아? 그 런데 안 그렇거든.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아. 이상하잖아?" "우리를 찾고 있군." 사라말이 말했다. 파라말과 아트밀은 율형부사를 돌아보았다. "탈출은 오랜 시간 동안, 긴 거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제일 마지막에, 가장 북쪽에서 탈출했지요. 그리고 지금 이곳까지 남 하했고. 스카리 빌파는 하늘누리에서 제일 마지막에 탈출한 자를 잡 으려는 겁니다. 어쩌면 황제 폐하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해봤는데 그럴 것 같아. 스카리 빌파가 지금 제일 알고 싶은 것은 하늘누리가 어떻게 됐는가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하늘누리 시민들이라면 제국에서 제일 똑똑한 인재들이잖아?" 파라말은 피식 웃었다. "설마. 똑똑한 사람들은 정치 안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려는 것이 제국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의 수준이라면 그 말에 찬성입니다." "그래. 잘난 사람들이잖아. 그 사람들을 붙잡아두면 뭔가 근사한 일 에 써먹을 수 있을 거야." 사라말이 질문했다. "규리하로 물러난 대장군과 제국군은 어떻게 됐습니까?" "계속 거기에 있어. 아, 대장군은 임시 귀족원 회의를 소집했어." "귀족원 회의?" "응. 아마 황제 실종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귀족원 회의인 것 같지 만 아마도 차기 황제를 선출하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 내 가 만난 발케네 사람들은 모두 스카리가 새해에 열리는 귀족원 회의 를 통해 황제로 선출될 거라고 말하던데." 파라말은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사라말과 아트밀이 그를 바 라보았지만 파라말은 자신의 웃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일단 갑작스러운 웃음 때문에 허리가 아팠고, 또 4년 동안 스카리에게 바 둑을 가르친 그는 스카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힘든 묘 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파라말이 꺼낼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은 이 러했다. "황제의 재목이 어떤 건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젊은 발케네공은 절 대로 아닙니다." 아트밀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내가 알아온 건 대충 이 정도야. 혹시 까먹은 것이 있을지 도 모르지만 생각 안나는 걸로 봐서 중요하지 않은 건가 보지. 어떻 게 하면 좋겠어?" 지난 몇 달 동안 그래온 것처럼 아트밀과 파라말은 사라말을 돌아보 았다. 사라말이 말했다. "어렵군. 규리하로 가야 하는데." "규리하로?" "제가 폐하의 진의를 제대로 읽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폐하의 흉중에 있었던 후계자는 대장군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장군이 후계자라고?" "예. 그렇다면 대장군을 찾아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할 길을 함 께 모색하는 것이 아라짓 제국의 신료가 취해야 할 온당한 행동일 텐 데…… 이런 흰소리는 집어치우고, 일단 대장군은 현재 제국 내 가장 강력한 무력 집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백만 제국군이지요." "하지만 그건 너무 흩어져 있습니다. 형님. 뱀단지가 있어야만 그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데, 세 번째 벽난로방이 사라진 지금은 대장군 도 이백만 제국군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이백만 제국군 은 현재 공중분해되어 군벌이 되거나 다른 귀족의 수하로 들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무서운 전망이군." "게다가 대장군의 근거지는 칼리도인데 규리하와 칼리도는 너무 멉 니다. 현실적으로 그의 병력은 규리하로 데려간 발케네 정벌군이 전 부라고 봐야할 겁니다. 그는 가장 강력한 무력 집단의 소유자는 아닙 니다." "그런데 말이야. 대장군은 규리하로 갔어." "그런데요?" "규리하에는 자유무역당주의 외손녀와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있거 든." 파라말은 흠칫했다. "자유무역당과 즈믄누리가 뱀단지를 대신할 수 있을까요?" "뱀단지를 제외하면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대장군이 그걸 결행하느냐 하는 거야." 아트밀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결행하느냐? 뭘?" "자유무역당주의 외손녀와 결혼하고 자신의 친구인 즈믄누리의 무사 장을 통해 즈믄누리를 움직이는 것 말입니다. 그리하여 제국군 전체 에 대한 통솔력을 회복한 다음 귀족원 회의에 출석하면, 그는 황제 납시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회의장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다른 사 람이라면 당장 그렇게 하겠지만 저는 엘시 에더리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군요. 황제 폐하께서 엘시 에더리가 후계자라는 말씀 한 마디만 남겨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사라말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파라말은 덩달아 고민스 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조금 후 파라말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사라말을 돌아보았다.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사라말의 정수리를 보던 파라말은 말했다. "형님!" 사라말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파라말이 약 오른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이 순간에도 그렇게 돌려말하십니까?" 아트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솔 형제를 돌아보았다. 형의 어 깨를 붙잡아 흔들던 파라말은 아트밀에게 말했다. "아트밀! 우리는 규리하로 가야 합니다." "왜지?" "우리는 황제 폐하의 유언을 대장군에게 전달해야 하니까요." "유언? 무슨 유언? 그런 거 없었잖아." 대답하던 아트밀은 갑자기 파라말이 깨달은 사실을 깨달았다. "아차, 그렇지! 우리가 마지막에 하늘누리를 탈출했었지?" "그렇죠. 우리가 폐하의 유언을 들었다고 말하면 누가 그걸 부정하 겠습니까? 우리는 대장군에게 가서 그 유언을 전달해야 합니다. '엘 시 에더리가 내 후계자다'라는 말씀을요." 아트밀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조금 후 아트밀은 모호한 표정으로 형제를 바라보았다. 파라말이 말했다.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는 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아트밀. 사람들은 율형부사나 유수부차사의 말에 더 신경을 쓸 겁니다. 당신에게 뭔가 를 따지지는……" "응? 아냐. 그런 문제가 아냐. 내가 역시 뭔가를 잊어먹었어." "뭘 잊어버리셨는데요?" "응. 아이톤 남쪽으로 강력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어." 아이솔 형제가 동시에 반문했다. "경계망?" "그래. 아까 하늘누리 시민들에 대한 수색이 더 심해졌다고 했지? 간단히 말해서 아이톤 남쪽으로는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는 것 같아. 나 혼자라면 최후의 대장간에서 무기 받아온 척하면서 어떻 게 통과할 수 있겠지만 너희들을 데리고 빠져나가긴 어려울 거야. 그 런데 나 혼자 규리하에 가서 황제의 유언을 들었다고 말하면 아무도 안 믿어줄 텐데." 사라말 아이솔과 파라말 아이솔은 동시에 아트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외모였고 실제로 그들을 이곳까지 무사히 데려온 훌륭한 수완가였다. 게다가 제국군의 자랑스러운 교위 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실들이 황제의 유언에 신빙성을 더하는 것 은 아니다. 형제는 거의 동시에 아트밀이 황제의 유언을 전달하긴 어 렵겠다고 판단했다. 부냐 헨로는 냉동실에 눈을 떴다. 익숙한 냉기. 부냐는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밤하늘이 있었다. 깨진 접시 같은 휴월이 밤하늘의 어두움에 질려 무뚝뚝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별은 하 나도 보이지 않았다. 냉동실에서 밤하늘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부냐 를 당혹시키지는 않았다. 부냐를 놀라게 한 것은 별이 보이지 않는다 는 사실이었다. 부냐는 걱정했다. 별이 없다면 방향을 잡을 수 없는데. 부냐는 티나한로 서쪽에 있는 집을 말하던 쿠스와 같은 오류를 범하 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늘누리는 넓다. 냉동실도 넓다. 그 런 것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쿠스의 오류는 그렇게 잘못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늘누리는 북쪽으로 날아갔는데. 그럼 여기는 어딜까? 부냐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냉동실이었다. 길을 잃을 정도로 넓은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얼음과 서리와 사체들. 그리고 희부연 안개. 안개는 출렁거리며 선반과 골목과 모퉁이를 배 회했다. 손을 넣어 휘저으면 손가락에 감길 것 같은 안개다. 만약 얼 굴에 닿으면 입과 콧구멍 속으로 뭉클거리며 쏟아져들어올 것 같다. 부냐는 황급히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지독하게 진한 안개다. 냉동실 에 이토록 짙은 안개가 꿈틀거릴 까닭이 없다. 이곳에는 물기가 부족 하다. 게다가 얼마 되지도 않는 물기는 오래 전에 얼어붙어 안개가 될 수 없다. 그 순간 안개가 몸을 돌렸다. 악의에 찬 생물처럼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안개를 본 부냐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그녀의 등이 선반에 부딪혔다. 깜짝 놀랄 만 한 소음이 들려왔다.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에 부냐는 비명을 내질렀 다. 그녀가 관을 떨어뜨린 것이다. 관 속에서 얼어붙은 시체가 데굴 데굴 굴러나와 이곳저곳에 부딪히고 있을 것이다. 얼어붙은 신체가 깨져 몸조각들이 흩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한 순간 부냐 는 미칠 듯한 구토감을 느꼈다. 부냐는 안개 반대쪽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채 몇 걸음도 걷지 않아 부냐는 안개의 벽을 만나게 되었다. 부냐는 안개가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안개는 부냐를 향해 서서히 치맛자락을 움직였다. 안개가 그녀를 보고 있었 다. 부냐는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숨을 곳이 없다. 안개는 넓디 넓은 냉동실을 점령하고 있었고 뚜렷 한 의지로 이질적인 존재를 추적하고 있었다. 부냐는 이질적이었다. 이곳엔 시체밖에 없으니까. 그녀는 살아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것 은 이질적이었다. 그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궁리하던 부냐는 관속에 들어가 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관 속에 누워 있다면 안개는 그녀를 찾지 못할 것이다. 부냐는 뒤로 물러나다가 관을 보았다.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관이 있지만 부냐는 바로 그 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 가 조금 전에 부딪혔던 관이다. 부냐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관뚜껑을 보았다. 그녀가 부딪히는 바람에 뚜껑이 떨어진 모양이다. 부냐는 비 틀거리며 관으로 다가갔다. 뚜껑이 열려 있어서 부냐는 안쪽의 시체 를 볼 수 있었다. 부냐는 냉동실을 점령한 안개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 시체의 코와 입을 통해 입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차가운 냉동실의 공기를 만나자마자 하얗게 변했고, 보통 입김처럼 금세 사 라지지도 않았다. 부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관의 틈에서 흘 러나오는 하얀 기체를 보았다. 안개는 시체들이 내뿜는 입김이었다. 하지만 시체는 숨을 쉬지 않는다. 부냐는 공포에 질려 뚜껑이 열린 관을 다시 돌아보았다. 시체가 입김을 내뿜고 있다는 것은…… 시체가 눈을 떴다. "아아악!" 부냐는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부냐는 드 러누워서 두 팔과 두 다리를 사방으로 내저었다. 그 다리에 무엇인가 가 맞았다. 시체를 걷어찼다는 생각에 부냐는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진짜로 기절했다. 헨로 자작부인 모디사는 악몽을 꾼 딸을 진정시킬 때는 그 딸의 다리를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자칫하면 얼굴을 정통으로 걷어차이고 졸도할지도 모르니까. 반 시간 후 그 소식은 스카리 빌파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스카 리는 약간의 즐거움을 느꼈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수색대에 발견되 어 파리조로 오게 된 헨로 자작 부부는 도착한 순간부터 스카리의 고 민거리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디사 헨로가 그의 고민거리였다. 모 디사는 부냐와 스카리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스카리도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모디사는 락토 빌파가 사 망한 이상 스카리의 장모인 자신이 파리조 - 그리고 발케네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스카리는 어이가 없었다. 어떤 여 인을 사랑하는 철없는 청년이 어느날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 즉 그 녀에게도 부모가 있고 친지가 있고 또한 역사가 있다는 지극히 당연 한 사실을 갑자기 깨닫는 사건이 스카리에게는 좀 극적인 방법으로 일어난 셈이다. 팔리탐 지소어가 논평했다. "그래서 남자들은 철이 좀 늦게 든다는 겁니다. 모든 남자들은 연인 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건 머리로만 아는 겁니다. 남자들이 진짜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대개 결혼 후 친정 쪽의 일로 아내와 싸우게 된 이후입니다. 젊은 남 자들은 대개 눈앞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한 여자만 사랑하지 그녀의 역사 전부를 사랑할 줄은 모르지요." "젠장. 정말 맞는 말이야." "가보시겠습니까? 가서 두 사람을 위문하시겠다면 여기서 잠시 접도 록 하지요." "팔리탐. 나는 부냐를 보고 싶지만 그 어머니는 싫어. 그런데 지금 가면 두 여자가 함께 있겠지. 아주 싫어." "좋습니다. 각하와 저는 도저히 중단할 수 없는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고마워. 팔리탐." "그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힌치오는 새로운 계약을 원합니다." "새로운 계약? 무슨 말이야?" "각하. 힌치오와 사라티본 부대는 선친과 계약한 겁니다. 그들은 발 케네인도 아니고 빌파 가문에 종속된 사람들도 아닙니다. 각하께선 선친의 다른 것들처럼 사라티본 부대도 승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 다. 각하께서 승계하신 것은 선친의 채무뿐입니다. 선친께서는 사라 티본 부대에 돈을 지불하기로 하셨습니다. 올해 말이면 계약 기간이 끝나고, 그 때 각하께선 선친이 약속하신 금액을 그들에게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뿔뿔히 흩어져 떠나겠지요." 스카리는 당신의 고환을 자르겠다는 선고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 었다. "사라티본 부대가 없어진다고!" "힌치오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뭐? 무슨 말이야?" 팔리탐은 가면의 방향을 주군의 얼굴에서 탁자로 돌리며 말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힌치오는 새로운 계약을 원합니다. 선친과 했던 계약과 같은 방식으로 각하와 계약하길 원하는 거죠. 돈을 받고 각하 를 위해 싸우겠다는 겁니다." "해! 좋아. 당연히 계약해야지." 팔리탐은 탁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그의 가면에서 스 카리는 그의 속마음을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스카리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좋아. 팔리탐. 내가 뭘 실언했지? 말해주면 고치겠어." 팔리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면을 다시 주군에게 향한 팔리탐 은 천천히 말했다. "각하. 힌치오가 왜 계약을 원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 뜻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라티본 부대가 해체되면 힌치오 는 더 이상 누군가를 지휘할 수 없습니다." "지휘?" "헨로 자작부인의 어떤 점이 각하를 언짢게 합니까?" 스카리는 조금 생각했다. "힌치오가 지배욕을 느끼고 있다는 건가?" "우리가 쓰는 지배욕이라는 말에는 좀 부정적인 의미가 섞여 있지 요. 힌치오는 사라티본 부대를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 닙니다. 그가 느끼는 것은 흥미와 책임감에 더 가깝습니다. 사라티본 부대를 움직여서 어떤 일을 성취할 때 느끼는 재미와 그들에 대한 책 임감입니다." "지배욕이군." "그렇게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그러셔도 좋습니다. 어쨌든 이제 질문 하겠습니다. 왜 사라티본 부대를 붙잡아두려 하셨습니까?" 스카리의 눈이 번득였다. 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말했다. "일국의 지배자가 강력한 병력을 포기할 이유가 없잖아?" "고래로 강력한 병력을 가졌던 지배자가 항상 걱정했던 것은 지휘관 의 반란입니다." 스카리는 입을 쩍 벌렸다. "무슨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하나? 사라티본 부대가 왜 반란을 일으 킨다는 건가?" "그거야 모릅니다." "도대체 무슨……" 팔리탐은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반란자는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있고 어떤 상황에선 반드시 반란이 일어난다는 법칙 같은 것도 없습니다. 사라티본 부대가 무슨 이유로 반란을 일으킬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 다. 하지만 사라티본 부대가 해체된다면 반란은 어떤 이유에서도 일 어나지 않습니다. 반란을 일으킬 자들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한편, 그들을 데리고 있을 경우의 이득이 충분하다면 반란의 위험을 무릅쓰 고서라도 그들을 보유할 이유가 될 겁니다. 하지만 무슨 이득이 있습 니까? 발케네를 통치하고 지키는데는 지금의 병력으로도 충분합니다. 선친께서는 황제와 싸우기 위해 사라티본 부대를 필요로 하셨지만 지 금 싸울 황제가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사라티본 부 대를 보유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스카리는 답답하다는 듯 상체를 뒤로 젖혔다. 어깨를 가만히 주무르 던 스카리는 꼼짝도 않는 팔리탐에게 말했다. "팔리탐. 조금 전에 싸울 황제가 없다고 했지. 맞는 말이야. 그러면 누가 치천제를 물리쳤나?" "하늘누리의 폭주입니다." "그건 중요한 것이 아냐. 치천제는 발케네와 싸우다가 그렇게 되었 어. 승자는 패자의 것을 가지는 법이야. 그렇다면 내가 치천제의 것 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황제가 되시겠다는 겁니까?" "팔리탐. 나를 제왕병자 쯤으로 판정하고 싶은 것 같은 말투군. 하 지만 사실을 따져보자고. 귀족원 회의에서 그들이 새 황제로 추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지? 한계선 남부로 내려가서 또 나가 여자 한 명을 데려올 건가? 이젠 그 짓도 더 할 수 없어. 흑사자 모피가 없어졌으니까. 그리고 셋이면 충분하지. 이젠 북부에서 황제가 나올 때가 되었어." 팔리탐은 조용히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그것이 흥미로워하 는 태도라고 생각하며 계속 설명했다. "그렇다면 북부의 누가? 설마 즈믄누리의 바우 성주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퍼스 후작 같은 얼간이를 거론하지도 않을 테고. 허영심 따 위 없이 질문하겠는데, 나 외에 누가 있지? 내가 사라티본 부대를 보 유한다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더 확실하게 깨달을 거야." 팔리탐은 손끝으로 탁자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 럼 말했다.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은 선친과 모종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뭐?" "선친께서 황제와 싸우는 동안 시모그라쥬공이 대장군을 억류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대가로 선친이 시모그라쥬공에게 무엇을 약속하 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차하면 제국군의 남부 주둔군 상 당수를 동원할 수 있는 강자가 시시한 것에 만족할 것 같지는 않습니 다. 뭔가 대단히 큰 것을 약속받았겠지요." "제기랄, 영감이 시모그라쥬공에게 속았군." "속았다고 하셨습니까?" 스카리는 흥분하여 탁자를 꽝 내리쳤다. "팔디곤 토프탈이 원했던 거야 간단하지! 제국군과 우리가 싸우다가 둘 다 무너지기를 원했을 거야. 그리고 둘 다 만신창이가 되면 슬슬 남쪽에서 거병할 생각이었겠지.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사라티본 부대 를 보유해야 해! 그 엉큼한 공작이 원하는 것을 내줄 생각은 없어!" 팔리탐은 스카리의 분석력에 감탄하는 시늉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 했다. 결국 팔리탐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도저히 감탄할 수준이 아 니었다. "각하. 각하께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선친께서도 당연히 짐작 할 수 있으셨을 겁니다." 스카리는 험악한 표정으로 팔리탐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감히 자기 앞에서 락토 빌파를 칭찬할 수 있느냐는 눈길이었다. 하지만 팔리탐 은 가면을 움직이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선친께서는 시모그라쥬공을 통제할 어떤 안전 장치를 가지고 계셨 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라티본 부대였을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시모그라쥬공이 원하는 것은 각하의 분석과 다른 것일지도 모르고요. 각하께서 하셔야 할 일은 선친께서도 하실 수 있었던 분석을 하는 대 신 시모그라쥬공과 선친의 계약이 정확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는 일입 니다." 스카리는 뭔가 그럴 듯한 욕설을 퍼부을 생각에 빠져 있었다. 팔리 탐은 그의 기를 약간 살려주기로 했다. "각하의 말씀대로 각하는 현재 제국에 몇 안 되는 강자들 중 하나입 니다. 힌치오와 사라티본 부대가 없다 하더라도 무력에서 각하와 맞 설 수 있는 사람은 적을 겁니다." "적은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 아냐?" 스카리는 엘시 에더리의 이름이 나오길 기대하며 질문했다. 그 이름 이 나오면 엘시를 심하게 모욕하기 위해서였다. 스카리에겐 뱀단지가 없는 상황에서 엘시는 제국군을 다루지 못한다는 근거도 있었다. 하 지만 팔리탐은 제국군의 대장군인 엘시를 거론하지 않았다. "각하. 즈믄누리에는 단 한 명의 병력이 있지만 그 병력은 제국 최 강입니다." 스카리는 신음을 흘렸다. "즈믄누리의 무사장. 그래, 맞군. 하지만 무사장이 정말 싸움에 나 선 것은 단 한 번뿐이야." "그렇지요. 그래서 그 이후로 즈믄누리는 무사장이 개입한다는 소문 만으로도 많은 상황을 조종할 수 있었습니다." 스카리는 할말이 없었다. 페시론 섬의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실 제로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나설 거라는 풍문만으로도 사태를 정리해 버리곤 했다. 팔리탐은 스카리가 고개를 떨구는 것을 본 이후에 천천 히 덧붙였다. "그리고 현재의 무사장 탈해 머리돌은 엘시 에더리의 친우입니다." 스카리는 움찔하며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팔리탐은 그가 유도한 것 처럼 엘시의 이름을 꺼내놓았지만 스카리의 생각과 조금 다른 방법으 로 거론했다. 스카리는 팔리탐이 자기 머리속을 훤히 들여다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팔리탐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또한 규리하에는 비셀스 규리하가 있습니다. 그녀의 외조부는 자유 무역당의 지테를 시야니 당주입니다. 자유무역당은 빠른 연락망을 가 지고 있습니다. 뱀단지보다야 당연히 느리지만, 자유무역당주가 대장 군을 돕기로 한다면 대장군은 훨씬 쉽게 제국군을 통제할 수 있을 겁 니다." 스카리는 분노 서린 말투로 말했다. "자유무역당주가 왜 엘시를 돕는다는 건가?" "각하께서 비셀스 규리하 대신 부냐 헨로를 데려왔기 때문이지요." 와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스카리는 일어섰다. 스카리는 쳐죽일 듯한 태도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팔리탐 지소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폭언을 퍼부으려던 스카리는 팔리탐의 가면 앞에서 혀가 굳 는 것을 느꼈다. 팔리탐은 말했다. "각하께서 비셀스 규리하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비셀스 규리하 에겐 다른 남편감을 찾을 자유가 주어졌지요. 각하께선 부냐 헨로를 데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엘시 에더리에겐 다른 아내감을 찾을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규리하에 함께 있습니다. 매파의 역사 같은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것이 있다면 각하는 그 역사에서 한 장을 차지할 수 있을 겁니다. 아주 멋지게 두 남녀를 연결해주었으니까요." =============================================================== 18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8-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5-25 조회수 : 1766 피를 마시는 새 18. 돌 속의 바람 - 2 팔리탐 지소어가 몇 가지 시시한 이야기를 더하고 떠난 후, 자신의 방에 홀로 남은 스카리 빌파는 두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탁자를 바 라보았다. 팔리탐은 직접적인 제안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스카리도 하 나 더하기 하나 정도는 어렵잖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팔리탐이 나 열한 상황 설명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노선은 명백하다. 사라티본군을 해체할 것. 그리고 엘시 에더리의 황위 등극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 '내가 엘시 에더리와 손을 잡는다?' 그 의외성이 스카리의 마음에 들었다. 엘시 에더리가 어떻게 평가하 건 스카리 빌파가 보기에 그 계획은 언어도단에 가까웠다. 엘시와 스 카리를 아는 모든 사람에겐 경악스러운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특히 시모그라쥬공에게 그러할 것이다. 한계선 남쪽의 시모그 라쥬공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든 제국군 대장군과 발케네의 공작 연합을 깨트릴 수는 없다. 시모그라쥬공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이는 일 이고, 그것은 속이고 훔치고 빼앗는 발케네인 스카리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팔리탐이 암시한 제안은 대담하면서도 현명한 것이다. 사라티본군을 해체함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실로 적지 않다. 다루는 것이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보유하는 것에서 오는 부담감, 그 강력한 병력이 불러오게 될 다른 이들의 강력한 견제, 황제와 직접 싸웠던 아버지로 부터 승계한 정치적 부채.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청산할 수 있다. 거기에 사라티본군의 유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포함한 다면 단점을 생각해보는 것이 무의미할 지경이다. 스카리는 책상 위에 두 발을 얹었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넓게 보아 야 한다. 엘시의 황위 등극에 협조하면서 최대한의 것을 얻어낼 수 있다. 또한 신황제 엘시가 자신을 억류했던 시모그라쥬공과 싸우는 동안 다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둘이 공멸한다면? 그건 최상이 된다. 엘시와의 전략적 제휴는 모든 면에서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리는 한 가지 떨치기 어려운 사실에 이를 갈 았다. 마치 손이 묶인 상태에서 관자놀이에 커다란 모기가 붙은 것 같다. 그는 엘시 에더리를 폐하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스카리는 뜻모를 욕설을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밖 으로 나가려던 스카리는 문득 품속을 뒤졌다. 조금 후 도깨비 감투가 그의 손에 들려져 나왔다. 스카리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너무 자주 쓴다.' 스카리는 볼에 깊은 우물이 팰 정도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고작 잘 때만 이걸 써? 멍청한 늙은이. 잘 보라고. 이걸 가끔 이용 하면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돼. 어디서 스쳐지나간 기억은 있지만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지. 그리고 전혀 대비하지 않은 순간에 등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이 되지.' 모디사 헨로는 공포에 질려 심신이 쇠약해진 딸을 내버려두고 쓸데 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사위를 꾸짖으려 했다. 윗사람의 위엄을 가득 담아서.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스카리를 찾을 수 없 었다. 아무도 스카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모디사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그 특이한 경험을 일상에 수용 해야 했던 사람은 그룸성내의 모든 사람들이었다. 스카리를 만날 거라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들의 등 뒤에서 스카리는 갑자기 나타났다. 스쳐지나가며 스카리에게 인사를 한 사람은 많았지 만 그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카리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스카 리가 암살성의 모든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스카리가 들었을 리 없는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경험은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스카리는 멍청하게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다. 마치 '당신이라면 누군가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 같다고 짐작된다는 전제 하에 말하겠는데'라는 투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스 카리의 말을 듣는 것은 실로 오금 저리는 경험이 되었다. 이이타 규리하는 그런 상황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 사실에 치 통을 겪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규리하 가문의 가신들은 정보망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투덜거리게 되었다. 그들은 암살성의 손님들이었고 일종의 망명자인 그들의 궁금 증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암살성의 사용인들이 선의로, 혹은 소박한 계약에 의해 전해주는 정보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암살성의 사용인들 은 스카리가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자 지나칠 정도로 과묵하게 행동했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없었지만 규리하 가문 의 가신들이 느끼는 기분이 무엇일지 이이타는 정확히 읽을 수 있었 다. '우리는 유령이 지배하는 성에 갇혀 있다.' "변경백 각하께 갑시다. 공자님. 답답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이이타는 짜증이 물씬 묻어나는 어투로 말한 두르사 돌 하장군을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장군은 어디서 목검이라도 한참 휘두르다가 갑자기 달려온 듯했 다. 어깨엔 목검이 얹혀져 있었고 몸에선 땀내가 물씬 풍겨나왔다. 이이타는 그 냄새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선 염소똥 냄새가 잔 뜩 날 테니 향기 대결에서 밀릴 것은 없는 셈이다. 이이타는 짜고 있 던 염소젖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려 염소유가 작은 그릇에 들어가도 록 애쓰며 말했다. "혹시 나 몰래 아버님과 서신이라도 주고 받고 있나, 두르사 돌 하 장군?" "아니오." "그런데 어떻게 아버님을 찾아가자는 거지?" "규리하로 가면 무슨 수가 생길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지금 뭘 하 시는 겁니까?" "일찍도 물어보는군. 염소유를 짜고 있어." "왜죠?" "물론 마시기 위해서지. 설마 이 암염소가 젖몸살을 하고 있어서 도 와주려고 이러겠어?" "공자님. 그런 일을 왜 직접 하시냐는 겁니다." 이이타는 염소젖을 주물러주고는 그릇을 꺼내들었다. 거품이 보글거 리는 그릇 안쪽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이이타는 옆에 두었던 뚜껑을 들어 그릇에 덮었다. 그리고 이이타는 그릇을 두르사에게 내밀었다. 두르사는 목검을 허리에 꽂고는 그릇을 받아들었다. 이이타는 나무에 묶여있던 염소를 풀어주고는 그것을 쫓아내었다. 염소가 풀밭을 따라 달려가는 모습을 보던 이이타는 두르사 돌 하장군에게 턱짓으로 따라 오라는 시늉을 했다. 두르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이타를 따라 걸어갔다. 이이타는 방목 장 한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 바위 투성이 땅에 이런 목초지가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하지 않 나?" "예. 신기하군요." 두르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과 소, 염소 따위가 가득했다. 락토 빌파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봉신들이 보낸 군마와 가축들이다. 발 케네측에서 전쟁을 도맡아 한 것은 주로 사라티본 부대였기에 군마의 피해는 적었다. 원래는 소도 꽤 많았지만 그것들은 전쟁 기간과 그 이후의 축제 때 꽤 많이 도살되어 이젠 숫자가 현격히 줄어있었다. 만약 그 소들이 다 남아있었다면 이 목초지는 심하게 훼손되었을 것 이다. 이이타가 말했다. "이 땅이 누구 땅인지 아나?" "예? 당연히 발케네공의 땅이겠지요." "그렇지 않아. 이 땅은 저 오두막에 살고 있는 사람 것이지. 그 주 인은 발케네공과 계약에 의해 군마와 가축들을 여기서 기르도록 하는 거야." 두르사는 이이타가 가리키는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목초지를 가로지 르는 냇물의 수원인 듯한 작은 샘터 근처에 오두막 하나가 울타리를 두른 채 서있었다. 오두막이라기보다는 목조 저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듯한 커다란 규모였다. 전체적인 구조는 일반적인 농가와 비 슷했다. 생활이 이루어지는 본채, 그리고 각종 도구들이 들어있을 커 다란 헛간과 창고, 각종 작업장으로 쓰일 듯한 넓은 마당. 샘터 바로 곁에 오두막이 있기에 오두막의 거주자는 가축의 분변이 섞여들어간 냇물을 마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위치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잘 지어진 오두막이었다. 늘그막에 소일하면서 살고 싶은 이들의 꿈이라 고 할 만한 오두막을 본 두르사는, 그래서 마당 한쪽에서 젊은 여자 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여자는 이이타와 두르사를 보 지 못했다. 치마폭에 담아 운반중인 물체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 이다. 이이타가 말했다. "소리! 뭐하지?" 소리 로베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이타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짓던 소리는 그 뒤에서 따라오는 두르사 돌 하장군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소리는 자신의 치마폭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계란을 찾아왔습니다. 공자님." "아, 그래. 조심해." 멈칫거리던 소리는 그 말이 떠나도 좋다는 의미일 거라 생각한 것처 럼 재빨리 오두막의 본채 안으로 들어갔다. 빙그레 웃으며 오두막 마 당쪽으로 걸어가려던 이이타는 두르사 돌 하장군을 돌아보곤 걸음을 멈췄다. "뭔가, 하장군?" "멋지군요. 공자님. 젊은 연인들이 만나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엔 좋은 장소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장소를 빌리셨습니까? 공자님 껜 돈도 별로 없을 텐데." "나는 빌리지 않았는데." "설마 저 어린 하녀에게 이런 멋진 오두막이 있을 리는 없을 텐데 요. 이 땅의 주인에게 밀회 장소로 쓰기 위해 빌린 것 아닙니까?" "앞뒤 생각 좀 하고 말해. 하장군. 밀회 장소에 깐깐한 부모 노릇을 할 노인을 끌어들이는 멍청한 청년이 세상에 어디 있나?" 두르사는 이이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노인' 부분에서는 찬성 하기 어려웠지만. 이이타가 설명했다. "소리와 나는 저 오두막의 주인의 초대를 받아 온 거야. 그리고 주 인의 접대를 돕기 위해 나는 염소젖을 짜러갔던 것이고 소리는 계란 을 찾아온 거지." "그럼 저 오두막의 주인은 누굽니까?" 이이타가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 때 오두막의 주인이 밖으로 나 왔기 때문이다. 작업복 차림의 주인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약간 곤 란하다는 듯한 미소로 이이타를 바라보았다. 이이타가 말했다. "다녀왔어. 헤어릿." "오셨군요. 공자님. 그리고 두르사 돌 하장군." 헤어릿 에렉스는 두르사 돌 하장군의 이름을 명확하게 부른 것 이외 에는 그의 방문에 대한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았다. 헤어릿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남자를 오두막 안쪽으로 들였고 두르사에게 염소젖이 든 그릇을 받아들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헤어릿은 소 리가 있는 듯한 부엌으로 들어섰고 조금 후 이이타가 뭐 도울 거 없 나? 하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모시고 있던 공자를 따라 두르사 돌 하장군 또한 부엌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좁은 부엌에 네 사람이 북적 거리게 되었다. 헤어릿이 정리했다. "두 남자는 식당으로 가세요. 요리에 재능이 있어 뵈는 분은 없으니 까." 이이타는 웃으며 밖으로 나갔고 두르사 또한 그 뒤를 따라나왔다. 두르사는 이 모임의 성격을 이이타에게 질문하고 싶었지만 이이타는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이타는 부엌에 있는 소리에게 큰 소리로 이야기를 걸었고 그러자 소리가 띄엄띄엄 대답했다. 두르사 돌 하장 군을 의식한 듯 소리의 대답은 주저하는 기색이 분명했지만 이이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잡담이 계속 오가는 것을 보며 두르사 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반드시 알아내겠다고 생각했다. 헤어릿과 소리는 빠르게 음식 준비를 마쳤다. 간단한 음식이었기에 준비하는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농가에서 먹을 듯한 음식 종류에, 그 양은 농가 음식의 1/3 정도였다. 어쩐지 농가 음식 을 귀족풍으로 차려놓은 것 같았다. 목검을 휘둘러서 배가 고팠던 두 르사 돌 하장군은 음식의 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두르사 돌 하장군의 생각처럼 식사는 귀족풍으로 진행되었다. 헤어 릿이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듯했고 이이타는 안주인의 대접을 칭 찬하는 손님다운 말을 재치있게 건넸다. 그래서 두르사 또한 이이타 를 거들어야 했다. 헤어릿의 응대도 정확했다. 두르사 돌 하장군은 락토의 사생아인 그녀가 말과 가축 다루는 기술 외에 어딘가에서 전 문적인 귀족 교육을 받았을 거라고 판단했다. 덕분에 소리 로베자가 약간 위축된 듯했지만 이이타는 그녀 또한 대화에 끌어들이려고 애썼 다. 두르사는 조금 고민하다가 주군의 아들을 수행하는 무사 대신 고 생하는 젊은 연인을 돕는 어른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그는 소리가 자 신있게 말할 수 있는 소재들을 몇 가지 대화에 끌어들였다. 이이타는 두르사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럭저럭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 고 식사도 대충 끝났을 무렵, 헤어릿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칼리도 백작님이 귀족원 회의를 요구했다고 하더군요." 소리 로베자와 너구리 기름의 사용법에 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르사 돌 하장군은 약간 긴장했다. 지난 한 시간 동안 약간이 나마 정치적인 대화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헤어릿의 말은 대상이 명확치 않았다. 자신이 소리와 대화 중이었다는 것을 떠올린 두르사 돌은 일단 예의를 갖춘 반응만 보이고 대화 자체는 이이타에 게 양보하기로 했다. 이이타가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아마도 지금의 사태를 의논하기 위한 회의겠지요." "그럴 거야. 만약 귀족원 회의가 개최될 때까지 황제 폐하께서 돌아 오지 않는다면 새 황제 선출에 대한 이야기도 오가게 되겠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군요. 누가 새 황제가 될까요?" "그거야 알 수 없지. 원론적으로 따진다면 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분이 선출되겠지. 즈믄누리의 바우 성주 같은 이면 좋 겠지만 바우 성주는 즈믄누리를 떠날 리가 없고 게다가 어르신이니 어렵겠지." 두르사 돌은 헤어릿의 얼굴에 비치는 것이 실망감이라고 생각했다. 헤어릿이 말했다. "황제는 혼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제국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모든 도구들과 함께 사라졌지요. 공자님. 하늘누리, 뱀단지, 제국 정부." "맞아. 그랬지. 그래서, 헤어릿. 덕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국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다른 도구들을 갖춘 사람이 좋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폐하와 함께 사라진 것들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지?" 헤어릿은 이이타에 대한 평가를 약간 상향조종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이타는 당신이 떠올릴 만한 것은 나도 떠올릴 수 있으니 떠보는 짓은 관두라고 말한 셈이다. 헤어릿이 말했다. "일단은 군사력이겠지요. 다른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능력?" "어쨌든, 참가하고 싶으시죠? 귀족원 회의." "무슨 말이지?" "제 이야기는 이런 의미에요. 공자님과 하장군님은 규리하의 지배자 가 아이저 규리하 변경백이라고 믿으시겠지만, 그건 눈에 잘 드러나 는 사실은 아니지요. 사람들은 규리하 변경백의 자격으로 귀족원 회 의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공자님의 누님이라고 말할 테죠. 그리고 그들을 설득시키긴 매우 어려울 테지요." 두르사 돌 하장군은 불편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이타는 정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는 지적이야." "여러분들의 비원은 물론 아이저 규리하 변경백께서 규리하의 지배 자로 복귀하는 것이겠지요. 보통 수복을 노리는 도망자는 초조해하지 않는 법부터 익혀야겠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다르죠. 여러분들은 초 조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황제 후보자에게 협력하는 대신 규리 하를 되찾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재미있는 말이군. 하지만 우리는 황제 후보자에게 내놓을 것이 없 는데." "정통성." "정통성은 아버님만큼 누님도 가지고 계시지. 누님의 정통성엔 의혹 의 여지가 없어. 정통 규리하공의 지원을 받고 싶은 황제 후보라면 두 명의 규리하공 중에서 지금 규리하성의 옥좌를 차지하고 있는 규 리하공을 찾아갈 거야." "서약지지파." "아버님은 서약지지파를 결집시켜 그 지도자가 되기엔 심각한 문제 가 있지. 지금 규리하를 지배하고 있지 못하시거든. 그러고보니 그건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가 되겠군. 규리하를 되찾으려면 황제 후보자에 게 서약지지파의 지지를 이끌어주고 대신 규리하를 받으면 된다. 하 지만 서약지지파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면 규리하의 지배자여야 한다." "꼭 규리하의 지배자여야 할까요?" "아니라면 어렵지. 서약지지파는 이왕이면 강력한 대표자를 원할 테 니까." "하지만 변경백에겐 황제와 싸웠다는 상징성이 있잖아요." "그 정도는 지금 암살성을 지배하고 있는 발케네공에게도 있지. 오 히려 발케네공의 상징성이 더 높아. 황제에게 패하고 도망친 것이 아 니라 침략해온 황제를 실종처리했으니까. 내가 서약지지파라면 발케 네공에게 대표자 자리를 맡을 생각이 없냐고 물어볼 것 같은데." 헤어릿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 말씀도 맞군요. 공자님." "그래서?" "예?" 이이타는 두 손을 식탁 위에 얹어 깍지를 꼈다. "이야기가 이어져야 하잖아. 거기까지는 당신도 다 생각해두었을 테 고, 나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도 끝났으니, 이젠 제안이 나와야 할 것 같군. 제안이 뭐지?" 헤어릿은 빙그레 웃었다. 이이타는 웃음 없이 차분히 헤어릿의 말을 기다렸다. 헤어릿은 식탁을 이루고 있는 나무판의 옹이를 만지작거리 다가 말했다. "당신들이 규리하로 갈 수 있도록 해드리겠어요." "가는 건 우리끼리도 할 수 있어. 지금 당장 출발해도 지러쿼터 산 맥까지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을 거라고 자신해. 하지만 산맥을 넘 으면 지나치게 많은 제국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헤어릿은 이이타의 말을 못들은 척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규리하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드리겠어요. 그렇다면 아이저 규리하 변경백은 서약지지파를 집결시킬 수 있겠지요." 두르사 돌 하장군은 더 이상 소리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소리도 오래 전에 두르사에게 흥미를 잃은 채 놀란 눈으로 헤어릿을 바라보 고 있었다. 두르사는 헤어릿의 입에서 어떤 미친 소리가 더 나올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헤어릿을 노려보았다. 이이타가 말했다. "규리하를 되찾는다 해도…… 여전히 발케네공의 상징성엔 변화가 없을 듯하군."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어떻게?" "락토 빌파를 죽인 것은 스카리 빌파에요." 소리 로베자는 초원 저편으로 걸어가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확 하게 말하자면 소리가 보고 있는 것은 둘 중 이이타 규리하였다. 그 녀는 간절히 기원해보았다. '뒤를 한 번 돌아봐요, 공자님.' 그 기원이 니름이 되어 전해진 것 같았다. 이이타는 뒤를 돌아보았 다. 그는 오두막 앞에 서있는 소리를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소 리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각도 못한 채 두 팔을 들어 맹렬하 게 흔들었다. 그녀가 그 동작을 멈춘 것은 "그러다 팔 빠지겠구나." 라는 헤어릿의 핀잔 때문이 아니라 이이타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리는 빨갛게 변한 볼을 만지작거리며 뒤로 돌았다. 헤어릿 에렉스 는 정문 옆의 긴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길게 뻗고 있었다. 헤어릿은 자신의 옆자리를 살짝 두드렸다. 소리는 그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이이타 공자는 참 점잖지?" 이이타에 대한 화제는 소리를 행복하게 했다. 소리는 평소 공작의 사생아를 조금 어려워 하던 것도 잊고 재잘거렸다. "예. 그래요. 공자님하고 함께 있으면 제가 한 살 더 많다는 것을 굉장히 자주 까먹게 돼요. 제가 동생 같다니까요! 아마 높은 귀족이 라서 그러신가 봐요. 고향에서 쫓겨났으니 막 술 마시고 막 화를 낼 것 같은데 전혀 그러지 않으세요. 꼭 언니하고 함께 있는 것 같아 요." 헤어릿은 고개를 돌려 소리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서 뭔가를 본 것 같다는 몸짓으로. 조금 후 헤어릿은 여전히 소리를 외 면한 채 농담하듯 말했다. "그런 말 남자가 들으면 굉장히 상심할 텐데." "예? 아, 언니와 함께 있다는 거요? 아니에요. 공자님은 제게 남자 로 보여요. 아주 멋진 남자지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러니까 저는 언니를 존경해요. 이이타 공자님하고 함께 있으면 언니하고 있 을 때처럼 어리광 부리고 싶어진다는 거예요." 언니에 대한 화제는 소리를 약간 우울하게 했다. 소리는 자신의 발 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언니는 스카리 요새에 복무하고 있어요. 그 때, 그러니까 제국군이 성 앞까지 왔을 때 말이에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겁먹었지만, 저 는 언니가 구해주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상황이 위급하니까 비밀 요새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오게 될지 모르잖아요? 하지만 언니는 끝 내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갑자기 전쟁이 끝났고요. 그건 정말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저는 언니가 오지 않고 전쟁이 끝나서 속상했어요. 게다가 공작님이……" 소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미인은 공작의 딸이다. 하지만 또한 공작의 딸이 아니기도 하다. 소리는 어떻게 말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 다. 헤어릿은 락토 빌파가 죽은 것은 스카리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 야기는 소리를 다시 전율시켰다. "저, 헤어릿 에렉스." "헤어릿이라고 불러." "예. 헤어릿. 그게 정말인가요? 스카리 공자님이……" "정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글쎄. 나는 조금 이해가 되는데. 나도 락토 빌파를 죽이고 싶었으 니까." 소리는 입을 딱 벌린 채 헤어릿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여전히 그녀의 눈을 피하고 있었기에 소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헤어릿 의 귀와 볼 약간이었다. 소리는 애써 생각해보았다. "저, 그러니까…… 헤어릿. 당신은……" "사생아지. 맞아. 그런 이야기야." "하지만 스카리 공자님은 아니잖아요." "사생아가 아니지. 그래서 락토가 죽으면 락토의 것을 물려받을 수 있지." "끔찍해요." "맞아. 끔찍한 이야기야.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 "예?" 헤어릿은 그제서야 천천히 소리에게 얼굴을 돌렸다. "락토가 너에게 약속했지? 이이타를 유혹하면 언니를 좋은 곳으로 보내겠다고." 소리는 뒤로 물러나다가 하마터면 의자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짐작이야." "짐작? 정말이에요? 공작님이 말씀하신 것 아니에요?" "락토 빌파가 나에게 뭐하러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 내가 짐작한 거 야." 소리 로베자는 그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헤어릿은 한참 설 득했고, 겨우 소리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때 소리는 다른 걱정을 느끼고 있었다. 헤어릿은 조금 의아해하다 가 겨우 소리의 걱정을 이해했다. 소리는 자신이 명령 때문에 이이타 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헤어릿은 입가 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즉 소리는 자신의 사랑이 진짜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에 놀란 것은 헤어릿이 아 니라 소리 자신이었다. 소리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저는 그 분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랬던 거예요." "소리." "저는…… 안되는 일인데…… 그러면 안되는데…… 신분의 차이 가……" 헤어릿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소리!" "예! 예?" 소리는 화들짝 놀라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이 말했다. "소리. 내 말 잘 들어. 그래서 너에게 남으라고 말한 거야." "뭐죠?" "뭐냐고 묻고 있지만 넌 지금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소리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헤어릿을 보다가 자신의 두 뺨을 찰싹 찰싹 때렸다. 그리고 소리는 턱을 약간 내민 자세로 헤어릿을 바라보 았다. 헤어릿이 말했다. "아까 내가 내건 조건 기억나지? 저 사람들을 규리하로 데려다주는 대신 나와 네가 함께 가야 한다는 조건." "예. 기억나요. 왜 그런 조건을 말씀하신 거죠?" "그건 다음에 말할게. 혹은 영원히 말하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 내 가 묻는 질문에 대답해. 너는 이이타 규리하를 따라가고 싶은 거니, 아니면 나를 따라가고 싶은 거니?" "무슨 질문이 그래요? 전부 한꺼번에 간다면서요?" "맞아. 하지만 규리하에 도달한 이후 내가 규리하를 떠날 수도 있잖 아. 그런 때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이이타 곁에 남고 싶니, 아니면 나와 함께 떠나고 싶니? 눈치 볼 것 없이 그냥 솔직하게 말해." 소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헤어릿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저는 이곳을 떠날 수 없어요. 언니가 이곳에 있으니까요. 물론 공자님을 따라가고 싶지만, 음, 공자님과 저는 신분의 차이가……" 헤어릿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리." 대답하려던 소리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문 득 소리는 헤어릿의 입을 막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리는 그냥 헤어릿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헤어릿이 말했다. "너희 언니는 죽었어." 소리는 호흡을 멈췄다. 그녀는 얼어붙은 모습으로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외면하고 싶었다. 소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며 창백하게 변하는 모습 을, 헤어릿은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사실을 깨닫는 것을 보 고 싶지 않았다. 헤어릿은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 대신 헤어 릿은 소리를 끌어안았다. 소리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 바위를 끌어안 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소리의 어깨 너머를 향해 말했다. "수핀 로베자. 네 언니야. 맞지? 그녀는 오래 전에 죽었어." 헤어릿은 발케네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것은 발케네공 락토 빌파가 죽기 전에 이미 내린 결정이었고, 락토의 죽음은 그 결심을 더욱 굳 어지게 했다. 헤어릿은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완벽한 이별을 원했 다. 발케네 바깥에서 뭔가 조용히 생각을 좀 해야할 것 같았다. 하지 만 이곳에 수핀 로베자의 동생이 있고 그 동생이 공작의 명령에 의해 이이타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헤어릿은 그녀를 남겨 두고 갈 수 없다고 느꼈다.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스 카리 요새에서 수핀 로베자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부담감 때문일 수도 있고, 락토가 망가뜨린 자매들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이 책임지고 싶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언니가 죽고 이이타마저 떠나 면 천애고아 신세가 될 소리 로베자를 동정했는지도 모른다. 이도저 도 아니라면 그저 또다른 셀소 에렉스가 생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 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혼할 수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를 또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어쨌든 헤어릿은 소리를 데리고 가야 했다. 헤어릿의 생각은 확고했다. 하지만 발케네를 떠난 이후에 대해 서 헤어릿은 모호한 계획밖에 없었고, 그래서 헤어릿은 소리를 어디 까지 책임질지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이이타를 따라갈 거니, 나를 따라올 거니? 하지만 소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생각도, 발케네를 떠난다는 생각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니의 죽음부터 받아들 어야 했는데, 소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어릿의 품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트밀은 뒤를 흘깃 한 번 돌아보았다. 그의 허리와 어깨에는 밧줄이 묶여 있었고 그 밧줄은 뒤로 이어져 썰매에 이어져 있었다. 썰매 안에 있는 형제는 조용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조용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늘누리에서 떨어지면서 허리 를 다친 파라말은 썰매가 흔들릴 때마다 꾹 참는 신음을 흘렸고 파라 말의 상체와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얹어놓은 사라말은 파라말이 괴로워할 때마다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런 소리들 은 지난 며칠 동안 계속된 것이라 이제는 어떤 이성적, 감성적 자극 도 느낄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트밀은 그들이 자 신에게 한 마디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파하는 파라말은 물론이거 니와 이 여행을 지시한 사라말도 아트밀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라거나 다 잘 될 거라는 판에 박은 말이라도 괜찮을 텐 데. 아트밀은 부리를 딱 부딪치고 앞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사라말은 아 트밀을 존중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콘이 인간에게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다. 혹은 사라말은 아트밀 이 스스로 상황을 받아들이길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트밀은 상황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 았다. 그는 철극으로 다시 땅을 짚으며 썰매를 힘껏 끌어당겼다. 설원은 넓고 평탄했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썰매를 끄는 것은 아트 밀에게 조금도 고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트밀은 넓고 평탄하다는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산이나 언덕을 보기 어렵고 눈은 푸지게 쏟아져 있었다. 근처에 바다가 있는 것이다. 아트밀을 괴롭히 는 것은 그 사실이다. 아이톤은 항구 도시는 아니다. 아이톤에 배가 들어오거나 나가는 일 은 없다. 하지만 아이톤 서쪽은 바다다. 언제나 얼어붙어있기 때문에 어떤 배도 드나들 수 없다. 배가 다닐 수 없으니 그 바다는 답사된 적이 없다. 하지만 규리하령의 북쪽이자 발케네령의 서쪽 - 대륙의 형태를 새처럼 그린 엘시 에더리 대장군이라면 왼쪽 날개와 머리 사 이의 공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에 해당하는 이 바다를 통해 규리하령과 발케네령 사이를 오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 부터 전해져내려온다. 규리하령의 최북단에 해당하는 스지우나 데린 보트 등에서는 북쪽으로 광막하게 펼쳐진 얼음바다를 볼 수 있다. 그 리고 아이톤 서쪽에서는 역시 얼음바다가 펼쳐져 있다. 따라서 두 얼 음바다가 사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두 발로 확인한 사람은 없다. 아니, 확인하려 시도한 사람은 있다. '못 가는 곳이 없는' 인간들 중 정신이 좀 이상 하거나 호기심이 과다발달한 자들이 그런 시도를 했다. 얼음바다를 통해 발케네와 규리하를 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도대 체 뭐가 중요한지 아트밀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런 인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숙도, 보급지도 당연히 없는 천 킬로미터의 얼음바 다에 도전한 자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보다 상식적인 상식적인 사람들은 규리하에서 발케네로 가기 위해서는 지러쿼터 산 맥을 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지러쿼터 산맥도 고래로 여행객들에게 만만찮은 피해를 입혀왔지만, 그것은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인간 외에는 아무도 그 얼음바다에 도전하지 않았다. 나가는 올 수 도 없는 땅이다. 딱정벌레를 타고다니는 도깨비들은 새로운 길을 답 사할 이유가 없다. 레콘은? 발 딛고 있는 얼음 아래가 바다라면 레콘이 거길 건널 수 있을까? 아트밀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이 제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전해듣기는 했다. 최후의 대장간이 있는 곳이 바로 얼음바다 중간의 섬인 것이다. 거기로 가기 위해서는 얼음 위를 걸어야 한다. 고대의 극연왕이 육지와 최후의 대장간 사이에 길을 놓 아주기 전까지 레콘들은 실제로 얼음바다 위를 걸었다고 한다. 그것 은 전설이 아닌 명백한 사실이다. 물론 반쯤 미치광이가 되어 건넜다 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그러나 고대의 레콘들이 걸어야 했던 거리는 이백 미터에 불과하다. 천 킬로미터도 넘는 빙해 위가 아니다. 따라서 그 바다에 도전했던 레콘은 없다. 그런데 사라말은 규리하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아이톤 남쪽의 길이 막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톤으로 가자고 말했다. 또한 아이톤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항구도시가 아 닌 해안도시 아이톤으로 향하는 평탄한 길을 걸으며 아트밀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썰매를 멈추고 왜 아이톤으로 가야하는지 물어볼까? 좋아. 저 언덕 만 넘은 다음에 물어보자. 거기라면 바람도 별로 없을 것 같으니까.' 아트밀의 예상은 틀렸다. 언덕을 넘자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또한 아트밀의 결심은 뒤늦은 것이었다. 언덕 너머에는 아이톤이 있었다. 아트밀은 웃는 것이 좋은 해결책인지 고민하며 아이톤을 바라보았다. 언덕을 때리고 있는 거센 바람은 아이톤의 서쪽에 펼쳐진 넓은 빙원 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 하 얀 평야였지만 아트밀은 그것이 빙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원은 아무리 평탄하다 하더라도 약간의 요철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아이 톤 서쪽의 그 빙원은 놀랍도록 평평했다. 그 위로는 개썰매로 보이는 것들이 두어 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얼어붙은 바다라는 결론을 내린 아트밀은 그곳을 더 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아이톤 자체를 바 라보았다. 아이톤은 땅에 납작 붙어있는 도시였다. 이층 이상의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반지하에 가까운 구조인 듯했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없었다. 이런 곳에 성을 세우는 일은 도시민을 다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도시가 개방되어 있다는 점은 아트밀의 마음에 들었다. 발케네의 병사들이 겁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겐 여 차 하면 인질이 될 수 있는 인물이 두 명이나 있었다. 문득 아트밀은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부는 언덕에 형제를 방치하고 있 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트밀은 황급히 썰매를 끌어당기며 언덕을 내 려갔다. 언덕 아래로 내려와 도시가 가까워졌을 때 아트밀은 아이톤 시민들에게 땔감을 보급하는 듯한 숲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들어갔 다. 숲 속에서 썰매를 멈춘 아트밀은 허리의 줄을 풀고 형제들에게 다가 갔다. 사라말은 동생의 몸 위에 엎드리듯 한 채 파라말을 감싸고 있 었다. 아트밀은 혹 잠이라도 들었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라말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조금 후 사라말이 몸을 일으켰다. "어딥니까?" "아이톤이야. 그러니까 아이톤 외곽의 숲이지." "도착했군요." 사라말은 썰매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아트밀이 부축해준 후에야 겨 우 사라말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썰매 밖에 서게 된 사라말은 파라 말을 잠시 살폈다. 파라말은 잠들어 있었지만 사라말과 달리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얼어죽을 염려는 없었다. 파라말의 숨소리가 고른 것 을 확인한 사라말은 파라말의 머리 주위를 잘 감싸주고는 허리를 폈 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라말은 온기를 끌어내려 했다. 잠시 후 사라말은 자신이 몇백 미터의 산책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과가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사라말은 고개를 돌려 아트밀을 바 라보았다. 아트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사라말의 지친 얼굴 속엔 도저히 꺼낼 수 없는 말을 꺼내야겠다는 결의가 엿보였다. 아트 밀은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사라말이 말했다. "아트밀." "싫어!" "예?" "싫어! 말할 필요 없어. 나는 싫어!" "아트밀. 저……" "말할 필요 없다니까! 듣지도 않을 거야. 젠장. 다시 썰매 속으로 들어가! 설마 했는데 그 소리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옛날 레콘들 이 어쨌던 나는 옛날 레콘들이 아냐! 그리고 옛날 레콘들도 그 짓은 하지 않았어!" "그 짓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그…… 그…… 젠장. 얼음 위를 걷는 거 말이야!" 사라말은 한쪽 눈꼬리만 올린 채 아트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빙상 활동을 개척하겠다는 숙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뭐?" "그렇잖으면 왜 얼음 위를 걷겠다는 거지요?" 아트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고개 를 갸웃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당신이 착각했군요. 내가 하려던 말은 여기서 헤어지자는 겁니다." "헤어져? 여기서?" "예. 나는 아이톤에서 썰매개를 구한 다음 얼음바다 위를 통해 규리 하로 갈 겁니다. 우리가 없으면 당신은 아이톤 남쪽의 경계망을 통과 하기 쉬울 겁니다. 당신은 지러쿼터 산맥을 통해 규리하로 가십시오. 그리고 규리하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헤어졌다가 오후에 만나서 차나 한 잔 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투였 다. 아트밀은 그러면 있다가 보자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아트밀은 곧 사라말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너 방금 역사상 아무도 횡단하지 못한 길을 횡단하겠다고 말한 거 야?" "예." "너 미쳤냐?" "미치면 얼음 바다를 횡단하기 쉽습니까?" "잘 모르겠는데. ……잠깐. 그런 질문이 아니잖아!" 사라말은 허리를 조금씩 돌리면서 말했다. "아트밀. 이건 성공 확률을 최고로 높이는 일입니다. 물론 나나 내 동생이 규리하에 도착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면 당신이라도 도착해야 합니다. 어쨌든 셋 중 하나는 규리하에 도착 해서 황제 폐하의 유언을 전달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동의합니까?" "젠장. 그렇다치고. 그래서?" "셋 중 하나가 도착하는 것이 성공이라면, 셋이 한꺼번에 움직일 필 요는 없습니다. 그럴 경우 사고가 일어나면 셋 모두에게 일어날 테니 까요. 게다가 우리가 없으면 당신이 규리하에 도달할 확률은 굉장히 높아집니다." "그래서?" "셋 모두가 지러쿼터 산맥으로 가느냐, 셋 모두가 얼음바다를 건널 거냐, 아니면 둘로 나뉘느냐. 뭐 이런 선택지가 있는데 조금 전 말했 듯이 셋이 한꺼번에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셋이 한꺼 번에 지러쿼터 산맥을 넘기는 어렵습니다. 얼음바다에서 사고를 만나 면 역시 셋 모두 죽겠지요. 하지만 둘로 나눈다면? 내가 얼음바다를 건널 확률은 여전히 별볼일 없겠지만, 당신 혼자서 지러쿼터 산맥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성공 확률을 높이는 일입니 다. 반론 있습니까?" 아트밀은 벼슬을 부풀린 채 외쳤다. "있어! 맞아. 나 혼자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해. 그러면 너희들은 여 기 어디에 숨어있으라고. 그래. 아이톤에 숨어있으면 되겠군. 야외도 아닌 도시니까 숨어지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거 아냐. 그러면 그만 이잖아?" "아트밀. 이미 말했듯 나나 동생이 규리하에 도착하는 것이 당신 혼 자 가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나와 파라말이 여기에 숨어있는다면 결국 우리 두 사람이 규리하에 도착할 확률은 없어집니다. 하지만 얼 음바다를 건너면 약간의 확률이 있을 겁니다. 최소한 확률이 영은 아 니겠지요. 당연히 건너야 합니다." 아트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약간의 확률에 거는 것은 사라말과 파라말의 목숨이다. 아트밀은 절대로 안된다고 말했다. 필요하다면 백 번이라도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라말은 아트밀의 주장을 백 번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사라말은 할 말을 다했고, 동어반복함으로 써 자신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어법엔 관심이 없었다. "아트밀.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고함을 지르려던 아트밀은 부리를 닫고 사라말이 꿈지럭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라말이 꺼낸 수통을 보고는 온몸을 부풀렸다. 앞으 로 달려나가 사라말의 손에서 수통을 쳐내려 했지만 아트밀의 발은 그를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사라말이 수통 뚜껑을 힘겹게 열었을 때 아트밀은 이미 물을 뿌려선 닿지도 않을 거리로 물러나 있었다. 그래서 사라말은 수통을 가볍게 들어보였다. "떠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뿌리겠습니다." 아트밀은 온몸을 부풀린 채 사라말을 쏘아보았다. 사라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있는 수통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치 가 더 길어졌다간 사라말이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시간이 되었을 때 아트밀이 움직였다. 아트밀은 손을 들었다. 그는 사라말을 외면한 채 말했다. "규리하에서 보자." "규리하에서 봅시다." 아트밀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하지만 사라말은 아트밀이 갑자기 되돌아오더라도 수통을 제때 들어 올릴 수 있는 거리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레콘이 마음껏 내는 속도 는 굉장한 것이기에 그 거리는 길었다. 마침내 아트밀이 나무들에 가 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사라말은 수통을 내렸다. 팔의 감각이 무뎠다. 사라말은 팔을 주무르며 썰매 곁으로 돌아왔 다. 그 때 썰매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들었습니다. 형님." "그랬냐." 파라말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있는 경험 하게 되겠군요. 아무도 못 건넌 길을 건너다니." "이건 전염병이로군." "예?" "아트밀에 이어 너도 착각하는 걸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재미있는 경험, 너는 못한다." 파라말은 가득 쌓여있는 담요와 모피 사이에서 힘겹게 몸을 움직였 다. 가까스로 사라말의 얼굴을 보게 된 파라말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형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전 안 남을 겁니다." "뿌릴래? 수통 줄까?" "전 안 남을 겁니다! 같이 갈 겁니다." 사라말은 아트밀이 벗어놓은 줄을 대충 주워모아 자신의 허리에 묶 었다. 그리고 아트밀이 아이톤에 충분히 가까운 곳에 썰매를 세워놓 았기를 기원하며 말했다. "아니. 너는 아이톤에 남아서 허리 치료를 하는 거다. 요양하기 좋 은 곳이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네 적응력을 발휘해봐." "같이 가야 합니다…… 형님 혼자 보낼 순 없어요!" 사라말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들을 생각도 없었고, 썰매를 끄느라 들을 여유도 없었다. 동생의 숨막히는 고함을 무시하며 사라말은 아 이톤으로 향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8-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5-26 조회수 : 783 피를 마시는 새 18. 돌 속의 바람 - 3 나흘 뒤 정오, 사라말 아이솔은 아이톤의 현지민들이 그럴 듯한 이 름 하나 쯤은 붙여놓았을 것 같은 바위 앞에 서있었다. 그는 잘 정비된 개썰매에 타고 있었다. 썰매에는 보급품이 잔뜩 실 려있었고 썰매 앞쪽엔 기운찬 라호친가히들이 매어 있었다. 보급품은 대부분 건조식량이었지만 그외에도 얼음집을 짓는데 필요한 도끼와 삽, 큰 칼 외에 얼음뚫는 송곳과 낚시, 작살, 노궁도 있었다. 사라말 이 계획하고 있는 모험을 성공시킬 수 있는 준비가 어떤 것인지는 아 무도 모르지만 사라말이 준비를 대충 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 다. 그리고 사라말은 자신이 그 모든 장비들을 다루는데 필요한 최소 한의 기술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기 로 했다.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까. 아이톤에도 자유무역당사는 있었고 사라말 아이솔은 특정한 구좌를 활성화시켜 자유무역당사가 그에게 필요한 돈을 지급하게 하는 수단 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무역당의 정산 담당자는 약간 곤혹스러 움을 느낄 것이다. 그의 원활한 정산을 비밀리에 도와줄 정부 모처가 북국의 빙해 속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사라말이 자유무역당에 입힌 피해가 자유무역당의 전체 규모에 비해보면 여드름을 짜내는 정 도의 피해밖에 되지 않을 테지만 사라말은 마음속으로 진지하게 자유 무역당에게 사과했다. 어쨌든 그 여드름은 파라말의 1년 하숙비와 사 라말의 여행 준비금을 충분히 부담했다. 하숙집에서, 파라말은 악화된 허리를 의자에 의지한 채 형을 쏘아보 았다. 하지만 파라말은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 다. 공포로 가득찬 야외 생활에서 갑자기 편안한 하숙집 안으로 들어 서자 파라말은 긴장을 풀었고 그 때문에 파라말의 허리는 악화되었 다. 파라말은 채 몇 걸음도 제대로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다. 자신의 나약함에 파라말은 분노했고, 비록 형을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있었지 만 그 스스로도 그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사라말이 말했다. "이게 가능성을 가장 높이는 일이다. 환자가 없으면 횡단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 또한 횡단에 실패할 경우에도 형제 중 한 사람은 살아 남는 것이기도 하고." "둘 모두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트밀 교위에게 다 맡겨둘 순 없다. 귀족원 회의의 장소와 일시, 그리고 참가자의 면면이 뚜렷해지기 전에 폐하의 유지는 엘시 에더리 대장군에게 확실히 전달되어야 한다. 귀족들이 누구를 새 황제로 추 대해야 하는지 알고서 회의에 참가해야 하니까." "아트밀 교위가 엉성하게 전달해도 대장군은 정리할 수 있을 겁니 다. 왜 형님까지 가셔야 합니까?" "돈 받았으니까." "예? 돈이오?" "응. 필요할 때 이런 짓 하기로 하고 봉급 받았다." 파라말 아이솔은 제국의 율과 형을 총괄하는 대가로 봉급을 받은 것 아니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라말이 보낸 인사는 손을 한 번 흔드는 것뿐이었고 파라말은 아무 대답도 하 지 못했다. 그리고 사라말은 준비된 개썰매에 올라 아이톤을 떠났다. 그리고 현지민들이 그럴 듯한 이름 하나는 붙여놓았을 것 같은 바위 앞에서 사라말은 기진맥진했다. 그것은 의견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문제였다. 자유무역당 에서 탈취한 돈을 마구 써서 친화력이 좋은 개들을 골랐기 때문에 썰 매개들은 분명 낯선 주인에게 협조할 의사가 있었다. 그리고 사라말 또한 썰매개들의 잠재력을 끌어낼 의도가 충분했다. 하지만 사라말에 겐 개와 의사소통을 할 수단이 결핍되어 있었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가까스로 끌어내리고 뒤를 돌아본 사라말 아이솔은 아직까지도 아이 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였 다. "고무적인 소식이 있습니다. 썰매개 여러분. 아이톤은 우리 뒤에 있 습니다.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말이나 소에겐 정지 명령이라는 것이 있지만 썰매개에게는 정지 명 령이 없다. 출발하면 달리고 지치면 멈춘다는 단순명쾌한 운송수단이 개썰매다. 부득이하게 멈춰야 한다면 배의 닻처럼 작동하는 제동 장 치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현지인들이 그럴 듯한 이름을 붙였을 것 같은 바위 앞에서 멈췄을 때 사라말은 제동 장치를 사용하지 않았다. 개들이 통제력을 잃고 사방팔방으로 달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멈 춘 것이다. 썰매에서 빠져나온 사라말이 우두머리 개에게 다가갔을 때 우두머리 개는 이 사태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사라말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사라말은 우두머리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말했다. "우리, 대승적 차원에서 불필요한 책임 소재 논란은 그만둡시다. 대 장." 우두머리 개는 점잖게 킹킹거렸다. 사라말은 두 손을 살짝 들어보였 다. "좋습니다. 내 책임입니다. 인정합니다." 우두머리 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라말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썰매 개들을 다시 정렬시키고 썰매로 돌아왔다. 썰매 뒤에 선 사라말은 현 지인들이 그럴 듯한 이름을 붙였을 것 같은 바위를 돌아보았다. 현지인들은 그 바위에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그곳까지 나오 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바위는 사라말 아이솔에게 처음으 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사라말이 책임을 인정한 바위다." 자신의 책임이행 불성실을 자연물에 위탁하여 후대에 전하게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서, 사라말은 개썰매를 출발시켰다. 사라진 제국의 율형부사는 사라말이 백곰을 본 만, 사라말이 졸다가 빠질 뻔한 균열, 사라말이 노궁을 잘못 맞은 바다표범에게 쫓겨다닌 빙원, 사라말이 잃어버린 썰매를 되찾은 유빙, 사라말이 헛것을 본 얼음산, 사라말이 극광을 보며 맛있어 보인다고 생각한 난빙대, 사라 말이 유목을 주운 수맥 등을 지났다. 사라말이 횡단하는 바다에는 다 행히 군데군데 섬으로 짐작되는 융기가 있었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균열이나 유빙 또한 존재했다. 유빙이 부딪히며 형성된 난빙대는 개 썰매의 진로를 만취한 사람의 그것처럼 바뀌놓았다. 직선 거리로 따졌을 때 아이톤에서 사라말이 목표하고 있는 데린보 트까지는 1,500킬로미터 쯤 되며, 아이톤의 개썰매꾼들에게 그 거리 는 좋은 썰매개들과 능숙한 썰매꾼이 보름 정도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는 거리로 알려져 있다. 물론 썰매가 지나가는 곳이 땅일 경우에 그렇다는 의미다. 바다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썰매개들의 기량은 훌륭했지만 사라말은 능숙한 썰매꾼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라 말은 한 달을 예상하고 식량을 준비했다. 하지만 잔여 식량이 반으로 줄었을 때 사라말은 자신이 통과한 거리를 도저히 절반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사라말이 준비해온 사냥도구들이 쓸모있었 다. 사람을 본 적이 없는 동물들은 사라말 같은 초보 사냥꾼에게도 쉽게 붙잡혔다. 그것들은 주로 썰매개들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되었 다. 개들과 사라말의 관계는 점차 호전되었다. 어쩌면 사라진 제국의 율 형부사는 사라말류 의사소통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을 터득했는지도 모 른다. 사라말은 개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무관심했다는 뜻은 아니 다. 사라말은 사람을 대하듯 개를 대했다. 사라말은 썰매를 끄는 라 호친가히들을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계속 통제해야 하는 야수로 생각 하지도 않았고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각고의 희생을 치러야 하는 불쌍한 짐승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사라말은 라호친가히들을 계 약당사자로 생각했다. 썰매를 끄는 것이 개의 일이다. 그리고 개의 식량을 제공하고 백곰의 습격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사라말의 일이다. 둘은 서로의 책임만 다하면 된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사색과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면 그만이다. 라호친가히들은 사라말의 태도를 쉽게 깨달았다. 사라말이 개를 대하는 태도를 간략히 요약한다면 '존중하 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는다'에 가까웠다. 그래서 개들도 사라말을 그 렇게 대했다. 그리고 망망한 빙원 가운데를 달리며 사라말이 신에게 말을 걸 때도 개들은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시 묻겠는데, 언제까지 보장할 수 있습니까?" 보름달이 뜬 밤이었고 밤하늘 아래 주위는 새하얗다. 난빙대나 수맥 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깨끗한 빙원이었고 돌풍도 없었다. 그들은 쾌 활하게 달리고 있었고 정지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생물처럼 행동 했다. 바닥조차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은 바닥이 없 어도 달렸을지도 모른다. "이건 중요한 문제란 말입니다. 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살았습니 다. 산다는 것이 뭔지는 압니다. 계통학적으로 볼 때 나는 음식의 하 위에 있고 분변의 상위에 있습니다. 입이 위에 있고 항문이 아래에 있는 건 우연이 아니지요. 음식과 분변 사이에 있는 나는 끊임없이 음식을 모아 나를 만들고, 나를 다시 분변으로 바꿉니다. 위로 올라 가도 안되고 아래로 내려가도 안되지요. 필사적으로 그 중간의 위치 를 지켜야 합니다. 땔감과 재 사이에 있는 불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것이 사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새카만 밤하늘에서 드문드문 흩어지는 하얀 구름은 달의 발자취처럼 보인다. 정순한 공기 속에는 달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먼지 같은 것은 없다. 지극히 투명한 물 속을 달리는 것 같다. 개썰매는 빙해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개들의 부담을 줄 이기 위해 가볍게 만들어져 있긴 하지만 또한 마찰력을 줄이기 위해 지면과 닿는 부분이 날부분으로 제한되어 있어 아래쪽의 얼음에 상당 한 압력을 가하게 된다. 때론 달리는 도중에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밤이 낮에 그을리고, 낮이 밤에 얼어붙었다. 장중하게 다가온 폭풍우가 불꽃마저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로 사라 말과 개들을 난타했다. 운이 나빴다. 사방이 탁 트여있어 먼 곳에서 부터 폭풍을 볼 수 있었지만 주위엔 대피할 지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폭풍의 정면에 있는 난빙대 뒤편이었다. 난빙대가 바람을 막아주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산으로 홍수를 막으려는 시 도와 비슷한 것이었다. 북국의 폭풍은 눈폭풍이라기보다는 모래폭풍 에 가까웠다. 폭풍을 포화상태로 만들고 있는 것은 얼음 조각이었고 그것들은 날고 부딪히며 굉음과 섬광을 가득 뿌렸다. 난빙대에 몸을 반쯤 파묻은 채 사라말은 개들과 함께 한나절을 버텼 다. 가까스로 폭풍이 멎었을 때는 밤이었다. 사라말은 살아있다는 사 실을 신비로 간주했다. 품 속에서 얼어붙은 손을 꺼내는데 반 시간이 걸렸고 그 손으로 다시 썰매 속의 식량을 꺼내는데 반 시간이 걸렸 다. 사라말은 말없이 개들과 식량을 나눠먹었다. 밤이 낮에 그을리고, 낮이 밤에 얼어붙었다. 사라말이 여섯 번째의 얼음집을 지은 섬에서, 사라말은 육포를 질겅 거렸다. 연료가 없어서 조리는커녕 난방도 할 수 없었다. 육지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유목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음도 조금씩 얇아지고 있었다. 사라말의 여행은 지리학적으 로 말한다면 항해에 더 가까운 것이 되어 있었다. 사라말은 육포를 씹으며 신에게 말했다. "그런데 음식을 분변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몇 가지 부산물들이 발생 합니다. 사실 꽤 많은 부산물들이지요. 미학, 나, 이득, 구분, 호기 심, 친구 찾기, 존엄성, 소득재분배, 너, 우리, 윤리, 단추 꿰는 법, 평등, 질투, 투쟁, 미래예측, 범주화, 농담, 금기, 동정심, 사랑. 음. 이거 밤새겠군요. 어쨌든 저는 제 육체를 음식과 분변 사이에 위 치시키는 노동을 통해 상당한 가외소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영의 음식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라말은 마지막 육포 조각을 입안에 털어넣고는 잠을 청했다. 사람들이 가을이라고 말할 겨울에, 사람들이 바다라고 말할 얼음 위 를 달리며 사라말은 꿈의 창문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았다. 개들은 조 금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사라말이 불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 나 사라말의 전망이 찬란한 것은 아니다. 사라말은 이 여행이 무수한 선구자들의 행적을 답습하는 형태로 끝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난빙대가 비틀어놓은 진로는 다시 유빙에 의해 왜곡되었다. 익숙한 지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사라말은 자신이 빙글빙글 돌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가을이 더 깊어지고 바다가 꽝꽝 얼어붙으면 유 빙의 장난은 피할 수 있을 테지만, 그 때가 되면 사람을 선 채로 얼 어붙게 하고도 남을 폭풍이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식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북국의 동물들은 얼어붙은 빙원을 떠나 얼지 않은 바다로 떠 났고 사라말이 목격할 수 있는 동물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하 지만 사라말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확률이 더 높다는 것 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라말은 내가 나이기 때문에 가장 적은 확률을 보장받는다는 기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 면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입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재미있는 생 각에 빠지는 편이 낫다. 아이톤을 떠난지 19일째 되는 날, 사라말은 자신이 유빙에 갇혔음을 알게 되었다. 유빙은 장지름이 800 미터 쯤 되는 타원형에 가까웠다. 그리고 바닷 물이 유빙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닷물이 가장 좁아지는 구간은 그가 지나온 후 갈라진 부분으로 폭이 20미터 쯤 되었다. 어떤 방법 으로도 넘을 수 없는 거리였다. 유빙을 한 바퀴 돌아본 사라말은 썰 매로 돌아왔다. 썰매개들은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 다. 사라말은 썰매에 걸터앉았다. 폭풍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 강력한 바람이 찾아오면 틈 은 얼어붙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노출된 유빙 위에서 폭풍을 맞이 할 경우 살아남기 어렵다. 사라말은 얼음집 만드는 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것을 집어들었다. 얼음집은 정확하게 말하면 눈집이다. 다루기 쉬운 눈을 입방체로 만 들어 집을 만든 후 얼리는 것이 얼음집이다. 하지만 사라말이 유빙 위에서 긁어모은 눈은 별로 많지 않았다. 유빙 위를 모조리 긁어내다 시피 한 후에야 사라말은 조그마한 얼음집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완성된 얼음집 옆에서 사라말이 금방 멈출 듯한 호흡을 달랠 때 짧은 낮이 저물었다. 사라말은 묵묵히 썰매 속에 담아두었던 바다표범의 사체를 개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사라말은 다음 날 개에게 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라말은 낚시를 꺼낸 다음 유빙의 가장자리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주위는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가장자리가 잘 보이지 않았 다. 한 발 앞쪽이 얼음장 같은 바다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걷는 것 은 고문이었다. 사라말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유빙 가장자리에 바 닷물이 물결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먼 곳을 쓰다듬는 바람 소리와 썰매개들이 바다표범을 뜯어먹는 소리뿐이었 다. 사라말은 걸음을 멈추었다.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등불을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에 사라말은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놓 은 얼음집과 썰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라말이 걷는 짧은 시간 동안 북국의 밤은 이미 그의 주위를 새카맣게 덧칠했다. 묽은 별빛조 차 없는 어둠이었다. 얼음집과 썰매를 찾기 위해 몸을 여기저기로 돌린 사라말은 자신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얼음이 갈라 진 틈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말은 다시 개들이 내는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머리를 둘러싸고 있는 털모자 때문에 소리 가 기묘하게 들렸다. 사라말은 털모자를 잠시 벗어도 괜찮을지 생각 해 보았다. 노출된 바닷물이 얼지 않았으니 기온은 빙점 근처일 것이 다. 잠깐 동안은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사라말은 털모자를 벗었다. 그러나 더 큰 곤란이 찾아왔다. 얼어붙은 그의 옷이 내는 버석거리 는 소리 때문에 개들의 소리를 찾기 어려웠다. 언제 거칠어졌는지 알 수 없는 자신의 호흡 소리 또한 사라말의 청각을 혼란시켰다. 사라말 은 필사적으로 개들이 내는 소리를 찾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묘하게 이곳저곳에서 분산되어 들려왔다. 사라말은 잠시 후 한쪽 방향을 자신 없게 선택하고는 황급히 모자를 도로 썼다. 그러나 이번엔 모자가 옷에 달라붙어 애를 먹였다. 사라 말은 악전고투 끝에 모자를 도로 쓸 수 있었다. 차가워진 모자를 쓰 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사라말은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 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공기가 극히 차가운데도 불구하고 목구멍은 불타는 것 같았다. 감은 눈 속에서 명멸하는 반딧불들을 보다가, 사 라말은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방향으로 조심스 럽게 걸어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사는 땅에 찾아드는 밤과는 전 혀 다르다. 그리고 산야에서 맞이할 수 있는 밤과도 다르다. 사라말 을 둘러싼 밤에서는 생명의 물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우지지는 밤새 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야행성 생물의 발소리도, 바람에 흩날리는 나 뭇잎과 풀잎의 소리도 없다. 들리는 것은 그 자신의 고통스러운 발소 리와 썰매개들이 내고 있는 방향마저 혼란스러운 소음, 그리고 먼 곳 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바람 소리 뿐이다. 그 바람소리마저 이질적이 다. 바람은 얼음과 눈에 부딪히자마자 얼어붙어 살점이 떨어진 후에 야 해방되는 듯하다. 찢어지는 바람의 비명. 사라말은 멈춰섰다. 개들이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혹은 그가 개들의 소리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주위 800미터 이내에 얼음집과 각종 장비가 있는 썰매가 있을 테지만 사라말은 그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그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800미터 는 800킬로미터와 마찬가지다. 사라말은 얼어붙은 입술을 모아 억지 로 휘파람을 불었다. 흐느낌 같은 소리에 사라말은 질겁했다. 유빙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얼어붙은 침묵 속에서 그 소리는 오싹하리만 큼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개들은 사라말의 의도를 이해했다. 컹! 사라말은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바닷 물에 뛰어들게 될지도 모른다. 사라말은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가 늠하여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얼어서 고체가 된 것 같은 어둠. 혹은 수억 마리의 검은 뱀 사이에 떨어진 것 같은 어둠. 미끈거리고 차갑고 꿈틀거리는 어둠. 아니, 그것은 방한복 아래를 흐르는 그의 땀이다. 땀냄새도 소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 중에 하나다. 사라말은 중얼거렸다. "고백하십시오." 입밖으로 나온 순간 사라말의 말은 얼어붙어 아래로 떨어졌다. 사라 말은 자신의 얼어붙은 말을 밟으며 걸었다. "당신도 죽을 수 있습니다. 불사는 그 개념도 모르는 자들의 허무맹 랑한 소리입니다. 불사는 불생입니다. 당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죽 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를 보장할 수 있습니까?" 사라말은 발을 멈췄다. 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시간 감각은 제멋대로 왜곡되 었지만 처음으로 움직인 이후로 최소한 반 시간은 흐른 듯하다. 그리 고 아직도 썰매나 얼음집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척에 있는지도 모른다. 겨우 두어 걸음 저편에 몸을 피할 수 있는 얼음집이 있을지 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수백 미터 저편에 있는지도 모른다. 구역 질과 한기가 동시에 찾아들었다. 사라말은 허리를 굽히려다가 그만 중심을 잃었다. 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빙판에 부딪히는 느낌은 놀랄 만큼 아팠다. 몸이 다 얼어붙어 아무 런 감각을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라말은 그 뜻밖의 고통에 괴로워하다가 똑바로 누웠다. 바닥의 냉기는 슬그머니가 아니라 쏟아 지듯 사라말의 몸을 파고들었다. 사라말은 자신이 다시 일어설 수 없 을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사라말은 빙그레 웃었다. 적어도 그의 의 도는 그러했다. 하지만 사라말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똑바로 누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라말은 빙해의 밤하늘을 향 해 말했다. "음. 직접 물어볼 수 있겠군요." 사라말은 눈을 감았다. 별로 더 어두워지지도 않았다. 시카트는 눈을 떴다. 규리하의 밤은 시카트 규리하를 불타오르게 했 다. 시카트는 눈에 힘을 주면 나가들처럼 어둠 속의 열이라도 볼 수 있 을 것 같다고 느꼈다. 손에 힘을 주면 도깨비들처럼 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과감하게 뛰어오르면 레콘처럼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카트는 환호를 지르고 싶었다. 규리하의 밤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 시카트는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정우는 오래 전에 동생을 감옥에 서 그의 방으로 옮겨주었다. 그리고 문 앞에 경비병을 세웠다. 수감 에서 연금으로 격상된 셈이다. 그런데, 입장의 변화를 느낀 것은 시 카트뿐만이 아니었다. 시카트는 문으로 다가가 그것을 열었다. 바깥에는 두 명의 경비병이 있었지만 시카트는 거리낌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 아 있는 경비병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눈을 뜨는 것은 아 마도 내일 정오쯤일 것이다. 그들이 먹은 저녁 식사에는 음식에 잘 사용되지 않는 특별한 첨가물이 들어갔다. 첨가물을 음식에 넣은 것 은 어떤 하녀였고, 그 하녀의 외삼촌은 모 인사에게 상당한 채무를 지고 있었다. 그리고 채권자인 모 인사는 규리하공과 동문수학한 것 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이었다. 경비병에서 숨쉬는 시체로 입장 변 화를 경험하고 있는 남자들의 곁에서 등롱을 주워든 시카트는 소리없 이 복도를 걸어갔다. 조금 후 시카트는 의상실에 도달했다. 아이저 규리하의 의복이 보관 된 곳이었고 그 때문에 지금은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문을 닫 은 시카트는 품 속에서 편지를 꺼내었다. 그의 방을 청소하던 하녀가 수줍은 표정으로 건넨 편지였다. 수신인은 시카트였지만 발신인은 하 녀가 아니었다. 등롱의 빛으로 편지를 다시 읽어본 시카트는 의상실의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벽을 더듬던 그의 손이 묘하게 움직인 순간 벽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나선계단이 펼쳐졌다. 시카트는 등롱 으로 발 아래를 비추며 나선계단을 따라내려갔다. 조금 후 시카트는 비밀통로에 도착했다. 흥분과 성취감으로 시카트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그리고 조금 후 시카트의 심장은 더 세게 고동쳤다. 고된 노동 때문이었다. 쓸고 닦는 손길 같은 것을 기대도 할 수 없는 비밀통로는 거미줄과 먼지 투성이였다. 시카트는 거칠게 팔을 휘저어 낡은 거미줄을 떼내 느라 자주 멈춰서야 했다.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 바닥은 낙석으로 장 애물 투성이였다. 규리하 전쟁 당시 오뢰사수가 퍼부었던 철시 공격 은 지상의 성뿐만 아니라 지하의 비밀통로에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 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돌을 걷어차거나 균열에 발이 빠질 지경이 었다. 가을이라 곤충이나 뱀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규리하 가문의 비밀 통로를 무상으로 이용하는 것들 중엔 더운 피를 가진 동물들도 있었 다. 곳곳에서 쥐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박쥐 들도 있었다. 원래는 박쥐가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지만 비밀통로에 생긴 균열 때문에 박쥐가 들어올 수 있는 틈이 생긴 모양이다. 박쥐 들은 등롱의 빛을 보자 혼비백산하여 날아올랐고 그 때마다 시카트는 목을 목을 움츠려야 했다. 하지만 시카트는 비명을 지르거나 경거망 동으로 소음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비밀통로의 끝이 다가왔다. 통로의 균열을 경험했던 시카트는 약간 의 우려를 느꼈다. 비밀통로의 문을 여닫는 장치가 고장났을지도 모 른다. 다시 편지를 꺼내어 필요한 대목을 확인한 시카트는 편지를 다 시 갈무리하고는 조심스럽게 문 옆을 더듬었다. 조금 후 두드러진 돌 하나가 만져졌다. 시카트는 그 돌을 밀었다. 낮지만 육중한 소리가 들렸다. 시카트는 간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 다. 심호흡을 하며 시카트는 문을 살폈다. 문은 손 하나가 들락날락 할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잠금 장치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시카트 가 바라보는 가운데 문틈 사이로 몇 개의 손이 들어왔다. 손들은 문 을 붙잡아 옆으로 밀었다. 곧 문이 열렸다. 시카트는 바깥의 어둠을 향해 횃불을 움직였다. 불 빛 속에서 여러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시카트는 그들 중 목 표했던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사람들 사이에서 등골을 싸늘 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카트." 시카트는 반가움으로 소름이 돋은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 후 시카트 규리하는 아이저 규리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시카트는 터지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다. 아이저는 아들의 등을 힘 있게 두드려주고는 다시 그를 밀어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한이 없지만, 서둘러야겠다. 조금 참아줄 수 있지, 시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애칭을 들은 시카트는 성난 표정을 지었다. 그 리고 아이저 또한 자신의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맙소사. 몇 달이나 지났다고?' 시카트는 아이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소년이 아니었다. 아이저는 온갖 각오를 하고 찾아왔지만 어느새 청년의 냄새를 풍기는 막내아들 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그래. 벌써 열여섯이지. 몇 달 후면 열일곱이 될 테고. 나이도 나 이지만 마음 고생이 많았겠지.' 아이저는 막내 아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 에 상실감을 느꼈다. 복잡한 심회에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저에게 누 군가가 말을 걸었다. "변경백 각하." 아이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시카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이끌고 있던 무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비밀통 로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시카트는 그 지시 내용 중 두 사람이 남 아서 시카트를 지키라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버님?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아냐. 너는 여기 남아있어라." 그것이 원래 계획이었지만 청년의 모습이 된 아들을 본 아이저는 약 간 자신없는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시카트는 당당하게 주장했다. "한 사람이라도 많으면 더 좋지 않습니까?" "아냐. 네가 쓸데없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이 길을 열어준 것으로 오늘밤 네 몫은 충분히 했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더 큰 일 을 해낸 거지. 이제는 아버지의 퇴로를 지키고 있거라. 만약 일이 잘 못될 경우를 대비해서 퇴로는 확보되어야 하니까." 시카트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아이저는 미리 준비해온 칼을 꺼내 시 카트에게 내밀었다. 시카트는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체념하는 표정으 로 칼을 받아들었다. "좋습니다. 비밀통로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대신 정문으로 들어가 겠습니다." 아이저는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는 대신 아이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주마." 시카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를 지키기로 한 사람들과 나란히 섰다. 아이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섰다. 비밀통로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아이저는 놀라지 않았다. 작년 의 낙성 당시 아이저가 성을 탈출할 때 사용했던 통로가 바로 그곳이 었고, 그 때 이미 비밀통로는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아이저의 부 하들 또한 통로의 상황에 대해 전해들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달려간 후였다. 아이저는 빠르게 달렸지만 비밀통로의 끝부분에서야 겨우 앞 사람을 따라잡았다. 조금 후 그와 부하들은 의상실 안에 들어섰다. 부하들 중 한 명이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이저의 무리들은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목표 인 물은 정우 규리하였다. 정우를 가장 먼저 인질로 확보한 후에야 성을 장악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빠른 속력으로 정우 의 방으로 향했다. 계획에 따르면 정우의 방을 지키는 경비병들도 시 카트의 방을 지키던 경비병들과 같은 감미료를 먹게 되어 있었다. 정 우의 방앞에 도달한 그들은 계획대로 경비병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계획에 없는 인물이 있었다. 쓰러진 경비병들 사이에 조그마한 남자가 서있었다. 남자는 그 체격 에 부담스럽지나 않을까 싶은 긴 창을 들고 있었다. 마치 철창을 든 티나한을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습격자 들의 선두에 있던 이는 재빨리 비수를 던졌다. 목격자를 소리 없이 빠르게 해치워야 하기 때문에 선두에 선 남자였고, 그 비수 던지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비수는 정확히 남자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하지 만 남자는 창대로 비수를 튕겨냈다. 그러면서도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남자는 물끄러미 습격자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습격자 들은 당황했지만 재빨리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때 일행의 뒤편에 서있던 아이저 규리하가 장창을 든 남자를 보았다. 아이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 때 남자도 아이저를 보았다. "오래간만입니다. 각하." 아이저에게 인사하면서 남자는 창을 기습적으로 내뻗었다.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해 움직이던 습격자 한 명이 갑자기 다리를 붙잡고 나 뒹굴었다. 용케 비명은 억눌렀지만 남자의 얼굴은 격심한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허벅지에 큼직한 구멍이 난 것이다. 찔린 자도, 그리고 다른 자들도 도대체 언제 창이 뻗어온 것인지 보지 못했다. 아이저가 말했다. "매제님인가." 아이저는 재빨리 노궁을 꺼내어들었다. 그러나 노궁을 겨냥한 곳에 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매제이자 판사이의 남작 발리츠 굴도하는 바 람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창은 발리츠와 상관없는 물체인 것처 럼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발리츠가 세 걸음을 걷자 두 명의 남 자가 다리를 부여잡은 채 쓰러졌다. 그리고 네번째 걸음을 걸었을 때 발리츠는 아이저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발리츠는 아이저의 눈을 똑바 로 들여다보며 빙긋 웃었다. "습격이다!" 발리츠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습격자들은 기겁했다. 그리 고 그들 중엔 왜 이제서야 고함을 지르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 사람을 보고는 발리 츠의 속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아이저는 쓰러져 있는 사람 중 한 명에게 노궁을 겨냥했다. "너는 진정한 규리하의 아들이다." 노궁 화살이 날아가 남자의 목에 박혔다. 남자는 부르르 떨다가 숨 을 거뒀다. 습격자들은 놀라서 아이저를 돌아보았고 발리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저가 냉정하게 말했다. "규리하의 아들들에게 포로가 되는 굴욕을 줄 수는 없다." 쓰러진 자들은 아이저의 말을 이해했다. 처음부터 습격자 모두를 상 대하는 묘기를 부릴 생각이 없었던 발리츠는 몇 명의 포로만 확보할 작정이었다. 상황을 깨달은 그들은 동료의 손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 다. 쓰러진 자들은 단검을 꺼내었다. 한 명은 손목을 그었고 다른 한 명은 대담하게도 목을 찔렀다. 팍 튀는 피를 보며 발리츠는 입술을 깨물었다. 발리츠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저와 습격자들은 달 려왔던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성 안 곳곳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자신의 고함에 반응하는 소리를 들으며 발리츠는 손목을 벤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전에 자살 기 도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었던 듯 손목을 가로로 베었다. 널리 알려 져 있는 것과 달리 손목을 가로로 벨 때는 충분히 강하게 베지 않으 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힘줄의 방해를 피하려면 세로로 긋는 것이 낫다. 발리츠는 쓰러져 신음하는 남자의 가슴을 밟고는 손목을 재빨 리 지혈하려 했다. 하지만 발리츠의 의도를 짐작한 남자는 무섭게 반 항했다. 발리츠는 자신이 작은 만큼 몸무게도 작다는 사실을 확인받 게 되었다. 남자는 발리츠를 거의 날려보낼 뻔했다. 가까스로 자세를 회복했을 때 발리츠는 남자가 똑바로 서서 칼을 부여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발리츠는 남자의 허벅지와 손목 양쪽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는 사태가 급하다고 생각했다. "포기해, 멍청아!" "나는 규리하 사람이다! 규리하 사람은 변경백을 위해 죽는다!" "다음에 죽어! 네 어머니에게 말이나 하고 말이야!" 손목과 다리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는 그 말에 코방귀를 뀌었다. "졸렬한 수법이군. 그런데 어쩌나? 내 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 발리츠는 혀를 차고는 남자의 어깨 너머를 향해 말했다. "젠장. 할 수 없군. 어이, 거기! 그 놈 붙잡아!" 남자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또 졸렬한 수법이야?" "그게 아니거든…… 음? 아냐! 돌아가! 오지마!" 곧 죽을 처지였지만 남자는 보다보다 이런 해괴한 장난은 처음 보겠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발리츠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 을 깨달았다. 일군의 습격자와 자신을 겨냥한 노궁 앞에서도 대담하 게 행동하던 발리츠 굴도하 남작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말 그대로 새파랗게 질려있는 남작을 보던 남자는 복도 벽을 향해 움직이며 뒤 를 돌아보았다. 발리츠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뒤쪽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남자는 그 사람의 엄청난 체구에 놀랐다. '굴도하 남작부인 인가? 남편을 도우러……' 아니었다. 그것은 여자도 아니었고 인간도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사람은 도깨비였다. 도깨비의 어진 성 품을 떠올린 남자는 안도하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곧 자신이 흘리고 있는 피와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웅덩이를 보았다. 남자의 얼굴에 핏 기가 싹 사라졌다. 꼭 실혈 때문은 아니었다. 발리츠 굴도하 남작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무사장! 탈해! 눈을 감으시오! 뒤로 물러나시오!" 즈믄누리의 무사장 탈해 머리돌은 발리츠의 말을 듣지 못했다. 습격 자라는 말에 놀라 정우의 방으로 무작정 달려온 무사장은 부들부들 떨면서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커다란 몸이 마구 떨리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웃을 수 있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리츠는 이미 탈해가 이성을 잃었다고 판 단했다. 아킨스로우 협곡. 십만 명 몰살 사건. 이성을 잃은 도깨비 한 명이 저지른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사건을 떠올린 발리츠는 이를 악물었다. 탈해를 죽여야 한다. 그나마 어르신이 될 테니 다행이군. 무사장도 이해하겠지. 발리츠는 창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순간 탈 해의 손에서 불꽃이 불쑥 일어났다. 발리츠는 땅을 박찼지만, 그 때 피를 흘리던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기절했다. 남자가 쓰러진 곳은 발 리츠의 창 위였다. 남자는 창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고 창을 놓친 발 리츠는 충혈된 눈으로 탈해를 바라보았다. 탈해의 손에서 일렁이던 불꽃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헤어릿 에렉스는 발케네의 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곁에선 말들이 툴툴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하지만 발굽 소리 는 없었다. 꽤 많은 수의 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음이 나지 않 는 것은 헤어릿이 정성스럽게 말들의 발을 싸맸기 때문이다. 언덕을 치달리는 바람은 쌀쌀했고 헤어릿은 모닥불이 간절했다. 하지만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헤어릿은 어깨를 감싸쥔 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 는 것을 선택했다. 헤어릿이 왔다갔다 하는 것에도 질려 멈춰섰을 때 그녀의 뒤편 숲속 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어릿은 그 소리를 못들은 척했 다. 목소리의 주인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보다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어릿 에렉스?" 헤어릿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게 되었다. "공자님?" 어둠 속에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이이타 규리하였다. 그리고 그의 뒤편으로 파리조에 남아있는 규리하 가문의 가신들이 하 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규리하성 낙성 당 시 아이저를 따라온 숫자가 많지 않았고, 또 그들 중 상당수를 아이 저 규리하가 데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이이타는 말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 숫자에 비해 말이 많은 것 같군." "갈아타며 달릴 겁니다." "그렇군. 우리가 떠난 것을 알면 추적하겠지." 몰래 떠나야 했다. 제국이 사라지고 귀족들의 암중모색이 심화되고 있는 지금 수중에 있는 예비 인질을 놓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 다. 이이타 규리하의 경우, 아이저 규리하가 규리하 수복에 성공할 경우 스카리 빌파는 아이저에 대항하기 위한 인질로 그를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없이 도망쳐야 했다. 이이타는 헤어릿의 말이 그런 뜻이라고 생각했다. "멈추지 말고 도망쳐야겠군." 하지만 헤어릿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그런 의미도 있지만, 말들이 피곤해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저는 먼 길을 나설 땐 꼭 여러 마리의 말을 데리고 다 닙니다." 이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우리 관점에서 본 것이고 헤어릿은 말들의 관점에서 본 것이 겠지. 관점은 달라도 겉모습은 같겠지. 그렇잖아?" "예. 공자님." "그래. 어느 말이 제일 순하지?" 헤어릿은 말 한 마리를 가리키며 질문했다. "규리하 가문의 공자님께서 설마 승마에 자신이 없으신 것은 아닐 텐데요." "내가 아니고 소리." 이이타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을 본 헤어릿은 소리 로베자가 서있는 모습을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헤어릿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소리는 바지도 아닌 치마를 입고 가슴엔 보따리를 안고 있었다. 옛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지나치게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낯설게 보이는 '도망치는 처녀'의 모습이었다. 헤어릿은 손끝으로 미간을 찔렀다. 혹시 이이타 공자님의 앞쪽에 옆안장으로 타겠다고 나서지는 않을까? 소리는 그렇게 행동했다. 한숨을 내쉰 헤어릿은 이이타에게 다가갔다. 이이타는 말 위에 올라 타 소리를 끌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헤어릿은 이이타의 손을 살짝 밀 어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소리를 끌어당겼다. "그 보따리 안에 바지 있어?" "예? 어, 없는데요." 헤어릿은 자신의 말에 맨 짐을 끌어내렸다. 그 속에서 바지 한 벌을 찾아낸 헤어릿은 소리에게 내밀었다. "숲속에서 갈아입어. 그리고 나와 함께 타고가는 거야." "예?" "정숙하게 행동하라느니 하는 취지는 아니고, 나는 말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공자님보다야 내가 가볍겠지." 이이타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소리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그녀는 바지로 갈아입은 모습으로 나타났 다. 헤어릿은 말을 끌고 직접 소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소리를 자 신의 등 뒤로 끌어올렸다. 소리는 하마터면 반대편으로 떨어질 뻔했 다. 말을 몰아 재빨리 다가온 이이타가 소리를 부축했다. 헤어릿은 소리에게 자신의 허리를 붙잡으라고 말하고는 이이타에게 말했다. "모두들 다른 말들을 데리고 달릴 수 있죠?" "나는 한 마리 정도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거야. 다른 사람들 은……" "됐어요. 모두들 한 마리씩만 맡아요." 일행들이 자신이 탄 말 외에 한 마리씩 말을 붙잡자 다섯 마리가 남 게 되었다. 헤어릿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 다섯 마리를 자신 의 주위에 정렬시켰다. 탁월한 솜씨에 낮은 감탄사들이 터져나왔다. 헤어릿은 그들에게 따라오라고 말하고는 앞장서서 다섯 마리의 말을 끌고 움직였다. 달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발굽을 싸맸다 하더라도 달 리는 소리까지 감추기는 어렵다. 헤어릿을 선두로 일행은 조용히 밤길을 걸었다. 달도 없는 밤이었고 아무도 불을 밝히진 않았다. 묽은 별빛 뿐이었지만 길을 잘 아는 헤 어릿은 거침없이 일행을 인도했다. 헤어릿이 걱정하는 것은 소리였 다. 소리는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은 채 자꾸만 좌우로 휘청거렸고, 그 때문에 헤어릿의 자세가 자꾸 불안해졌다. 헤어릿이 말했다. "소리. 몸에 힘을 빼. 날 도와주려고 애쓰지마. 그게 더 위험해." "예, 예." "아니, 몸에 힘을 빼라고. 매달리라는 것이 아냐. 가볍게." "우리 언니 정말 죽은 거죠?" 헤어릿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소리가 말했다. "확실한 것이군요." "그래." "당신이 죽였어요?" 헤어릿은 심장이 덜컹하는 것을 느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헤어릿. 당신이 저를 책임지려는 것처럼 보여서요." 북쪽의 땅 발케네의 가을밤은 차갑다. 이곳과 저곳의 산들이 웅웅거 리는 바람으로 격론을 벌이고 나무들이 비명을 지른다. 이리저리 날 아다니는 낙엽들이 가끔 팔다리를 스쳤다. 폭풍 속을 걷는 정도는 아 니었지만 조용한 야행도 아니었다. "네 언니를 죽였기 때문에 죄책감으로 너에게 잘해준다는 거니?" "아니에요?" "하지만 내가 네 언니를 죽일 이유도 없잖아." 소리는 침묵했다. "언니가 첩자니까." "뭐?" "우리 언니, 어쩌면 누군가의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이상한 사람과 만나기도 하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던 적도 있어요. 그 때문에 죽인 것 아니에요?" 헤어릿은 팔리탐 지소어가 해주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락토 빌파는 세 사람 중에 데라시의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죽였다. 헤어릿은 소리의 언니 수핀 로베자가 데라시의 첩자인 거라 고 생각하며 말했다. "아냐. 나는 네 언니를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네 언니가 죽는 것을 막지도 못했어." "예?" "그 때…… 있었어. 그걸 보았어.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질 못했 어." 소리는 다시 침묵했다. 헤어릿은 지금이 낮이었으면, 그리고 소리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한 그러 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그 때 소리가 날 선 목소리로 말 했다. "누구죠? 누가 우리 언니를?" 헤어릿은 그런 질문을 예상했다. 당연한 질문이니까. "락토 빌파. 네 말대로 언니가 첩자여서 그랬나봐." 소리가 다시 침묵했다. 조금 후 소리가 말했다. "그렇군요." 헤어릿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다가 헤어릿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소리의 '그렇군요'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헤어 릿은 소리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헤어릿 은 뒤로 돌아서 묻고 싶었다. '아버지의 죄를 딸이 대속하는 것이라 고 생각하는 거야?' 헤어릿은 그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헤어릿 은 락토의 죄를 대속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헤어릿은 그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질문할 시간도 없었다. 그녀의 앞쪽에 갑자기 불빛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가리개로 감추고 있던 등롱을 들어올린 것 같았다. 헤어릿은 긴장하며 불빛을 바라보 았다. 길 옆에서 나타난 불빛은 길 가운데로 걸어왔다. 조금 후 가리 개가 벗겨졌을 때 헤어릿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불빛 속에 나타난 얼굴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헤어릿은 조금 후 그것이 익숙한 가 면임을 깨달았다. "팔리탐?" 등롱을 높이 들어올려 기수를 확인하려던 팔리탐 지소어는 헤어릿의 목소리를 듣고는 다시 등롱을 내렸다. 그는 비어있는 손을 허리에 얹 은 채 말 위의 헤어릿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헤어릿."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 "어디로 가는 거지?" 뒤쪽에서 약간 급한 발굽 소리들이 들려왔다. 따라오던 이이타 규리 하의 일행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곧 헤어릿을 중심으로 펼쳐져 반원형으로 팔리탐을 감쌌다. 팔리탐은 주 위를 슬쯕 훑어보고는 다시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규리하로 가는군." "그래요." "그럴 수가 없겠는데." 규리하의 가신들이 칼을 뽑아들었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지만 팔리탐은 움찔하지도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대신 신호해줘서 고맙군." 이이타는 신호라는 말에 당황했다. 그 때 이이타의 등 뒤에서 더 큰 소리들 - 하지만 같은 종류에 속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병장기 부 딪히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소음을 낼 수 있는 병장기는 레콘의 것뿐이다. 이이타와 그의 일행들은 질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레콘들이 나타났다.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이 병풍처 럼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말 위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부분 레콘들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런 명령은 없었지만, 모두들 꼼짝하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웠다. 서툰 짓을 하는 순간 레콘들의 공격이 날아올 것이다. 그 때 이이타는 좀 기묘한 것을 느꼈다. 그는 레콘들이 비슷비슷하 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이타는 자신이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궁 금해하며 레콘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이이타는 그 원인을 알게 되었 다. 레콘들은 비슷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무기는 달랐지만 모두들 똑같은 단검을 허리에 차고 똑같은 흉갑을 입고 똑같은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이이타는 숨이 넘어갈 듯한 충격을 받았 다. 그들은 군대였다. 그것도 제국군의 레콘 여단과 같은 군대가 아 니었다. 레콘 여단들은 최후의 대장간에서 받은 제각기 다른 무기들 을 소지하며 방어구 같은 것은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다 니는 것들 중 규격화된 소지품이 있다면 배낭이나 식기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이타 규리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라티본 부대원들은 일반 제국군처럼 완전히 규격화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이이타는 믿 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콘들이 들고 있는 흉갑과 방패를 바라보았 다. '레콘이 방어구를 하고 있다고? 규격화된? 누가 그걸 만들었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이이타는 그 이야기를 이미 들었다. 살 인기사 제이어 솔한과 아실이 나눈 이야기였다. 설명을 한 것은 아실 이었다. '그 일만 명의 레콘을 무장시키기 위해 당신이 최후의 대장간에 간 거죠. 그곳에 레콘들의 무장을 주문하려고. 맞지요?' '그래. 맞아.' 그게 이런 것이었나? 이이타는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것은 상상 하기 어려운 광경이었고,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주는 모습이었다. 이 이타가 잘 알고 있는 압박감이었다. 통일된 복장을 한 열 사람은 각 기 다른 복장을 한 열 사람보다 훨씬 압박감을 준다. 그리고 그저 서 있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레콘들이 통일된 방어구를 착용한 채 서있는 모습은 신경을 짓누를 것 같았다. 이이타는 모든 것이 틀렸다고 생각 하며 소리를 보았다. 소리 또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 었다. 그런데…… '왜 소리가 보이는 거지?' 소리의 앞쪽에 있어야 할 헤어릿이 보이지 않았다. 이이타는 어리둥 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헤어릿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이이타가 팔리탐을 보았을 때였다. 갑자기 팔리탐이 무릎을 꿇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8-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5-27 조회수 : 1915 피를 마시는 새 18. 돌 속의 바람 - 4 사라진 제국의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은 바다에 누워 있었다. 얼어붙은 바다가 아니었다. 쾌청한 날 쟁룡열도에서 볼 법한 바다 다. 수평선에서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구름은 눈이 멀 정도로 희고 하 늘도 탈색된 것마냥 하얗다. 하늘이 백열하고 있기에 태양을 찾기 어 렵다. 바다는 평온했다. 넘실대는 물마루는 곳곳에 존재했지만 그것 이 수면을 주름진 노인의 얼굴처럼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건강하 게 꿈틀대는 젊은이의 살갗처럼 매끄럽게 보인다. 사라말은 부표처럼 수면 위에 둥둥 떠있었다. 가벼운 부침은 있었지만 몸 전체가 가라앉는 일은 없다. 지친 날개 를 쉬기 위해 나뭇가지 대신 수면을 이용할 수 있는 새들처럼 사라말 은 물 위에서 절대적인 부력으로 떠있었다. 그물 침대에 누워있는 듯 하다. 얼음과 어둠과 추위는 어디로 간 것일까? 얼굴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 속에서 사라말은 피식 웃었다. 엄격한 그의 정신은 환상을 배격한다. 이것은 죽음 후의 세계이거나 육체의 소멸 위기 상황에서 그의 정신이 창조해낸 세계일 터였다. '이제 어디선가 가벼운 물소리가 들리고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 면 거울 같은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걸어오는, 음. 바다의 지혜를 담 고 있는 듯한 얼굴의 수염 허연 노인? 취향에 안 맞아. 나신의 여인 으로 하겠어. 보석 가루를 뿌린 것 같은 몸, 수치와 갈급함을 모르는 고요한 눈, 그리고 이마에서 자라나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지. 그 머리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것은 푸른 물결. 매끄러운 어깨와 등 을 감싸고 쏟아지는 물결은 그대로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바다에 뒤섞인다.' 사라말이 정리를 끝냈을 때 가벼운 물소리가 들렸다. 사라말은 고개 를 돌렸다. '이런. 되는 것이 없군. 나신은 분명 나신인데……' 레콘이다. 수치와 갈급함을 모르는 그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레 콘이었다. 사라말은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안 이한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 때 레콘이 말을 걸었기에 사라말은 고개를 돌릴 기회를 잃었다. "정신 차렸어?" "전에는 미쳤냐고 물었지요." "그랬지." "아트밀." 아트밀은 히죽 웃으면서 하얀 하늘과 구름을 얼음집 천장으로, 넘실 거리는 바다를 담요로 바꿔놓았다. 사라말은 미간을 찡그렸다가, 다 시 잠이 들었다. 어쩌면 나신의 여인을 만나러 간 것인지도 모른 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라말은 묵직한 몸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이었다. 먼젓번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고, 거북한 느낌이지만 동 시에 살아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누운 채 담요의 느낌을 즐기고 싶었지만 사라말은 잠자코 그것을 밀어냈다. 똑바로 앉은 사라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음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꿈을 꾼 것인가 하는 판단을 내리려 다가 사라말은 얼음집 안의 공기가 따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 가가 잊지 않고 물을 뿌린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사라말 자신 이 그랬을 리는 없고 설령 아트밀이 이곳에 온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 도 물을 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라말은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켰 다. 그는 옷을 완전히 차려입고 장갑도 끼고 있었다. 자신의 옷차림 을 내려다보던 사라말은 가벼운 소음을 들었다. 소음의 위치는 바깥 이었지만 얼음집의 입구를 막고 있는 털가죽 때문에 소음의 정체는 알기 어려웠다. 사라말은 일어서서 털가죽을 밀치고 밖으로 기어나갔 다. 밖으로 나온 사라말은 똑바로 일어섰다. 희부연 낮이었다. 얼음집이 있는 유빙 위는 고요하고 개들이 까불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의 현기증 때문에 사라말은 얼음집을 짚 었다. 그 때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사라말!" 사라말은 고개를 돌렸다. 상당히 험악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덩 치 좋은 레콘이 백곰인 듯한 동물의 사체를 토막내고 있었다. 말끔하 게 벗겨진 모피가 옆에 뭉쳐져 있었고 그 위에서는 활달한 썰매개 두 어 마리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썰매개들은 해체되 는 고기를 보며 낑낑거리고 있었다. 사라말은 눈을 비볐다가, 다시 레콘을 보았다. "아트밀?" 아트밀은 웃으며 손을 조금 들어보였다. 조금 기다리라는 손짓이었 다. 사라말은 휘청거리며 가까이 있던 썰매로 다가가 그 위에 걸터앉 았다. 아트밀은 사라말의 큰 칼을 단도처럼 이용하여 고기를 베어내 어서 꽁꽁 얼어붙은 고깃덩이를 썰매개들에게 던져주었다. 이곳에선 김이 무럭무럭 나는 고기 같은 것은 죽은 직후가 아니면 보기 어렵 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라말은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 오는 것을 보았다. 사라말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은 손에 양동이를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사라말은 이 사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민하며 말했다. "파라말." 발밑을 살피며 걷던 파라말이 고개를 들었다. 사라말을 본 파라말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려 했다. 사라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어붙어서 못 떼내는 수가 있다." 파라말은 허! 하는 소리를 내는 표정을 짓고는 양동이를 들고 걸어 왔다. 양동이를 썰매 위에 얹어놓은 파라말은 형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렸다. "침착한 소리는 그만두시고, 한 번 안아봅시다! 형님!" 사라말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파라말은 형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 나 파라말은 곧 윽!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허리를 황급히 붙잡았 다. 사라말은 논평했다. "급조한 티가 나지만 훌륭한 위문공연이다. 웃겼다." 허리를 붙잡고 낑낑거리던 파라말은 사라말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 다. 사라말은 일어서서 동생을 부축하여 옆의 썰매에 앉혔다. 그런 후에야 사라말은 썰매가 두 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라말은 개들의 숫자를 살폈다. 하지만 썰매개는 그가 데리고 있던 놈들뿐이었다. 사 라말은 아트밀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설명할 겁니까?" 파라말은 여전히 오른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왼손만 들어 아트밀을 가리켰다. 썰매개들에게 고기를 분배한 아트밀은 남은 고깃덩이들을 챙겨들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아트밀은 썰매 위에 놓여있는 양동이를 보고는 멈칫했다. 사라말이 양동이를 얼음집 안으로 옮겨놓 은 다음에야 겨우 설명이 시작되었다. "지러쿼터 산맥을 향해 내려가던 중이었어. 아마 우기츠 쯤에 이르 렀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성공 확률을 가장 높일 방법 이 떠올랐어." "뭡니까?" "생각해봐. 네가 말했던 계획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나 혼자 규리하에 도착하는 것, 그리고 너와 파라말이 도착하는 것, 그리고 우리 셋 모두가 도착하는 것과 셋 모두 도착하지 못하는 것. 이렇게 네 가지 경우가 있지.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은 셋 모두 도착하는 것, 그 다음으로는 너와 파라말이 도착하는 것, 그리고 내가 도착하 는 것이 세 번째고, 아무도 못가는 것이 가장 나쁘지. 맞지?" "맞습니다. 그래서?" "즉 내가 아무리 열심히 규리하로 가봐야 세 번째로 좋은 결과밖에 얻지 못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세 번째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노 력을 차라리 첫 번째나 두 번째 목표에 쓰는 것이 낫다 이거야. 너와 파라말이 규리하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어때? 나 그 생각 떠 올리고 정말 내 머리에 감탄했어. 너도 그 생각은 못했지?" 아트밀은 자기 머리를 두드렸다. 자신의 영리함을 칭찬하는 행동인 것 같았고, 사라말은 박수를 치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아트밀은 약간 의아해하며 계속 설명했다. "그래서 난 재빨리 아이톤으로 돌아갔지. 그런데 거기에 파라말이 썰매를 사서 형을 뒤쫓겠다고 하고 있잖아? 그래서 너 혼자 간 걸 알 고는 내가 개 대신 썰매를 끌면서 따라왔지. 자취고 뭐고 아무 것도 없었는데, 야, 정말 찾기 어렵더라. 그런데 겨우 얼음집을 발견했지. 네가 만든 것일 수밖에 없잖아. 거기서 계속 서쪽으로 오다가 개 짓 는 소리를 들었지. 그래서 너를 찾은 거라고. 도착해보니 개들이 네 주위에서 컹컹거리고 있더라? 라호친가히들은 주인도 뜯어먹는다고 들었는데 사이가 꽤 좋았나 보지. 그런데 얼음이 갈라져 있잖아. 젠 장." 파라말이 거들었다. "어떻게 건넜을 것 같습니까? 저쪽에서 눈을 모아 얼음집 만들 때처 럼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파라말은 한 지점을 가리켰다. 바닷물이 넘실대는 틈 위로 얼음다리가 얹혀져 있었다. 커다랗고 긴 얼음덩이를 만든 다음 그냥 밀어놓은 것 같다. 레콘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제가 썰매를 끌고 저 위로 건넜고 아트밀은 뛰어서 건넜죠." 두 사람의 설명을 경청한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담하게 말 했다. "아트밀." "왜?" "수학 못하죠?" 아트밀은 긴장하여 벼슬을 빳빳이 세운 채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 라말은 방한복에 붙은 얼음을 장갑 낀 손으로 문질러 떼내며 말했다. "이런 확률 계산은 탁상공론이지만 한 번 해 봅시다. 우리 셋이 한 꺼번에 움직이면 모두 도착하거나 모두 도착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 입니다. 성공 확률은 1/2. 당신이 거론했던 네 가지 경우 중 세 가지 경우에는 황제 폐하의 유언이 대장군에게 전달됩니다. 성공 확률은 3/4." 아트밀은 부리를 쩍 벌렸다. 사라말이 선고했다. "계산 착오입니다." 순간 아트밀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나 수-학-못-해-!" 사라말과 파라말은 썰매 안으로 나동그라졌고 썰매개들은 펄쩍 뛰어 올랐다. 황급히 일어난 파라말은 유빙이 갈라지지 않았나 살폈다. 다 행히 그런 기색은 없었다. 한편 아트밀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 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젠장! 종군 10년! 10년 근속! 그거면 됐지 군사 수학이라니 무슨 빌어먹을 소리야? 엉? 싸우는데 구구단이 무슨 소용이냐구? 철극 휘 두를 때 계산해서 휘두르냐! 구구단 못하면 똥구멍에서 깃털이 자라 냐! 구구단 못해도 싸움 잘하고 구구단 못해도 잘 걸어다녀! 군인이 걸을 줄 알고 싸울 줄 알면 끝이지, 구구단이 무슨 소용이냐!" 천천히 일어나 앉은 사라말이 상황을 정리했다. "수교위 진급 시험에 떨어졌군요." "네 번이다! 크하하!" 멍청한 얼굴로 아트밀을 바라보던 파라말은 크하하가 왜 따라붙는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의 형은 전혀 다른 의문을 품었다. "몇 단이 문제입니까?" "7단 만든 놈 만나면 죽여버릴 거야!"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죠." 순간 아트밀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떠올랐다. 아트밀은 믿을 수 없다 는 얼굴로 사라말을 노려보다가 율형부사를 향해 성큼 걸어왔다. 허 리를 굽힌 아트밀은 율형부사의 얼굴에 자신의 부리를 가까이 가져가 말했다. "다른 건 양보해도 그 놈은 안돼. 그 놈은 내 것이다. 사라말 아이 솔!" 아트밀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고 사라말은 태연히 아트밀의 두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곁에서 호흡 곤 란으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라진 제국의 유수부차사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후 웃음이 폭발했다. 그것은 아트밀의 부리에서 나왔다. 아트밀은 바닥에 주저앉아 미친 듯이 낄낄거렸고 파라말 또한 뒤늦 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라말은 팔짱을 낀 채 빙그레 웃었다. 한참 후 에야 겨우 웃음을 멈춘 아트밀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사라말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쳇. 좀 같이 가자. 응? 신경 쓰여서 놔두고 못가겠더라."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할 수 없군요. 1/2 확률에 도전해봅시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말도 있으니까." "좋아! 바로 그거야. 셋이 하나를 상대하는 거지. 어디 보자. 그래. 개썰매에 너와 동생이 타라. 저 썰매에 장비를 옮겨싣고 내가 끌지. 그러면 되겠지?"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체구가 큰 아트밀을 대신해서 얼 음집 안의 물건들을 꺼내오기 위해 일어섰다. 얼음집 안으로 기어들어간 사라말은 양동이의 물을 사방에 뿌리고는 바닥의 모포를 주워모았다. 그것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려던 사라말은 문득 멈춰섰다. 사라말은 벽에서 얼어붙는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트밀은 얼어붙은 '바다'위를 건너왔을까? 평평하고 단단하 다 해도 얼어붙은 바다는 땅이 될 수 없다. 사라말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음집 천장을 향해 속삭였다. "이전의 질문은 다음으로 유보하겠습니다.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께 제 질문 좀 전해주십시오. 조금 깁니다." 사라말은 헛기침을 했다. "저는 사람들이 레콘을 집단화하면 집단화한 레콘은 다시 사람을 죽 일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레콘이 더 이상 레콘이 아니게 되니까요. 그런데 저 밖에 이상한 레콘이 있습니다. 물 위를 달려온 레콘입니 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사라말은 입구 쪽을 보았다. 바깥에선 장비 옮겨 싣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라말은 다시 얼음집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레콘은 도대체 무엇이 되고 있는 겁니까? 그것은 저를 살렸습니다. 다른 사람도 살릴까요?" 탈해 머리돌이 두 손을 높이 들어올린 순간 그 손에서 부풀어오르던 불길이 폭발했다. 발리츠 굴도하 남작은 몸을 던지거나 눈을 감아야 한다는 생각을 떠 올리지 못했다. 그럴 수 없는 광경이었다. 탈해는 두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높이 들어올리고 있었고 그 손에서는 용출하는 간헐천처럼 불길이 쏟아져나왔다. 탈해의 손에서 두 개의 불회오리가 솟아나오는 듯했다. 그것은 복도의 천장에 부딪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 다. 길다란 복도의 천장은 불의 강으로 변했고 갑자기 높아진 광도에 발리츠는 눈을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천장에서 물결치듯 일렁이는 불의 강, 두 개의 불 회오리, 그것은 탈해의 손으로 수렴되는 두 개 의 뒤집혀진 용오름이었다. 탈해의 허리가 뒤로 기울었다. 두 팔은 한껏 뒤로 젖혀졌고 그 급격 한 동작에 따라 두 줄기의 불회오리는 수 미터 쯤 뒤로 출렁였다. 그 리고 탈해는 허리와 함께 두 팔을 앞으로 집어던졌다. 두 개의 불회 오리는 이제 불의 채찍이 되어 복도 바닥을 난타했다. 발리츠는 그 무서운 공격을 피해 옆으로 몸을 던졌다. 복도의 벽에 몸을 부딪힌 남작은 숨이 끊어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탈해는 두 팔 을 마구 휘둘렀고 그 격렬한 팔의 움직임에 따라 두 줄기의 불회오리 는 복도의 사방을 두드렸다. 하지만 탈해가 주로 원하는 것은 바닥을 때리는 일인 것처럼 보였다. 눈을 감은 채 휘두르는 것이어서 방향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불줄기가 주로 날아드는 곳은 바닥에 낭자한 피 였다. 발리츠는 머리를 감싼 채 벽과 바닥 사이로 몸을 쑤셔넣었다. 이젠 늦었다. 파멸이다. 규리하성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의 모든 땅에 서 바위는 녹아내리고 흙은 엉겨붙을 것이다. 발리츠는 눈앞으로 스 쳐지나갈 인생의 모든 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저 맨발은 뭘까? 머리를 감싸쥔 두 팔 사이로 발리츠는 두 개의 맨발을 보았다. 작은 발이다. 그 위로 보이는 것은 풍성한 아랫도리와 넉넉한 윗도리. 발 리츠는 눈을 들었다. 잠옷인가? 도깨비식? 그리고 이 불로 가득찬 세 상에서 빗줄기처럼 시원하게 보이는 길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흐르고 있다. 도깨비의 옷을 입고 있는 그 사람은 너무도 조그맣다. 발리츠 굴도하 남작의 앞에 서있는 사람은 방에서 나온 정우 규리하 였다. "각하!" 남작이 고함을 지른 순간 정우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탈해는 여전히 두 팔을 맹렬하게 휘둘렀고 불줄기는 터무니없이 긴 한삼 자락처럼 모든 것을 스쳤다. 그리고 정우는 탈해의 정면, 바로 그 불회오리가 가장 격렬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곧 불길이 그녀의 몸을 둘러쌌다. 발리츠는 입을 딱 벌렸다. '도깨비와 함께 자랐어도 각하는 인간입니다! 불에 탄다고요!' 불길은 정우의 몸 이곳저곳을 거침없이 둘러쌌다. 남작은 사람이 산 채로 불타오르는 것을 처음 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처조카 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발리츠는 정우의 옷이 삽시간에 불타 는 것을, 그 길다란 머릿결에 불이 옮겨붙는 것을, 그리고 검은 잿더 미가 되어 고통스럽게 뒹구는 정우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확실히, 발리츠는 볼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충격 때문에 정신이 멍해졌지만 발리츠의 눈은 다행히도 그 주인에 게 충실히 세계의 모습을 전달했다. 정우는 숨쉴 새 없이 내려쳐지는 불길 속을 태연히 뛰어갔고 그녀의 몸 어느 부분도 타오르지 않았다. 인간이 어릴 때부터 도깨비와 함께 자라면 도깨비와 같은 피화(避火) 의 능력을 얻게 되는 건가? 선천적인 능력과 후천적인 습득능력 사이 의 경계를 허무는 해괴한 가설을 떠올리던 남작은 갑자기 정신을 차 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쯤 복도는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고 있어야 한다. 최소한 바닥에 쓰러진 사체들은 익은 고깃덩이로 변하고 피 웅덩이는 지글지글 끓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발리츠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발리츠는 온도를 느끼려는 시도를 해보았다. 뜨거움은커녕 더위도 느낄 수 없 었다. 복도는 북방의 규리하에 어울리는 싸늘함으로 가득했다. 뜨거 운 것이라곤 자신의 몸 뿐인 상황에서, 남작은 갑작스럽게 상황을 이 해했다. '열이 없다. 빛뿐이다!' 발리츠는 자신과 정우, 그리고 규리하성과 그 주변 모든 사람들이 맞이한 행운에 놀랐다. 도깨비들은 불을 자유롭게 다룬다. 그리고 불 에 대한 그들의 통제력은 불의 크기나 형태뿐만 아니라 온도에도 적 용된다. 낭자한 피에 이성을 반쯤 잃어버린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무 시무시한 불을 만들어내었지만, 바로 그 분노 때문에 불의 형태에만 집중했고 열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못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 불은 조금도 뜨겁지 않았다. 발리츠는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여 러 번 전해들었던 유명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즈믄누리의 무사장 탈 해 머리돌이 얼음 위에 불길을 피워 마치 얼음을 태우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제 발리츠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그 사이, 정우는 탈해의 가슴 앞쪽에 도달했다. 참으로 작은 소녀 다. 그녀의 정수리는 탈해의 명치에 이를까 말까 하다. 정우는 고개 를 한껏 젖혔고 그러자 검은 머릿결이 크게 출렁였다. 탈해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정우는 꼭 쥔 주먹을 들어올려 탈해의 가슴 을 콩콩 두드렸다. "탈해, 탈해!" 탈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손을 휘두를 뿐이었다. 정우는 까치발을 하고 손을 쭉 뻗어올렸 다. 그녀의 손이 가까스로 탈해의 입과 코 언저리를 만질 수 있었다. 정우는 탈해의 턱을 긁다가 그 입술을 붙잡아 비틀고 꼬집었다. "탈해!" 탈해 머리돌이 눈을 떴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본 것은 쓰러진 사내들과 낭자한 피였다. 먼곳 이었지만 발리츠는 탈해의 눈이 서서히 뒤집히는 것을 보았다. 발리 츠는 숨을 쉬지 못했다. 만약 탈해가 도깨비불의 열을 끌어올린다면 조금 유예되었던 파국은 결국 찾아들 것이다. 그러나 정우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탈해의 턱을 쓰다듬고 그 입술을 두드렸다. 그녀는 소근거리듯 말했다. "탈해. 제발, 아래를 봐. 나야. 탈해. 나 여기 있어." 탈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탈해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신의 가슴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정우를 보던 탈해가 갑자기 말했다. "정우?" "응. 탈해. 나야. 나 여기 있어. 괜찮아. 다 괜찮아." 탈해의 손에서 뿜어져나오던 불길이 사라졌다. 발리츠는 복도를 재빨리 살폈다. 불 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의 강이 펼쳐졌던 복도의 천장에도 그을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열도 없었던 것이다. 탈해는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다가 다시 복도 저편을 바라 보려 했다. 그의 가슴에도 닿지 않는 정우의 머리 너머를 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탈해가 다시 유혈이 흐르는 곳을 보려 하는 것을 깨달은 정우는 힘껏 탈해의 어깨를 붙잡았다. 끌어내리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손을 가까스로 얹을 수 있는 신장 차이와 두 사람의 체중 차이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시도였다. 하지만 갑자기 탈해가 무릎을 구부렸다. 서있을 힘도 없는 사람이 조그마한 충격에 쓰러지는 것 같았다. 탈해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정우의 얼굴이 가득차게 되었다. 탈해의 얼굴에 약간씩 표정이 돌아왔다. 탈해는 당혹감과 수치심, 안도감과 공포를 동시에 표현하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웃으며 탈해의 이마와 뺨을 쓰다듬었다. "응. 다 괜찮아. 탈해. 나쁜 것은 없어. 여긴 다 좋아." 탈해는 가만히 손을 들어올려 정우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의 두 손 안에 정우의 조그마한 손은 완전히 가려졌다. "정우. 내가 뭘……" "아무 것도 아냐." "나, 정우, 나는……" "쉿." 정우는 탈해의 큼직한 손에서 자신의 두 손을 억지로 빼냈다. 탈해 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 허둥거렸지만 정우는 탈해의 손을 재 빨리 피한 다음 갑자기 탈해의 얼굴 쪽으로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탈해의 얼굴은 커다랗고 그녀의 두 손은 작다. 그래서 정우는 두 손 으로 탈해의 두 눈을 덮었다. 탈해는 다가오는 손을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정우는 탈해의 두 눈을 덮은 채 그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정우가 속삭였다. "잊어." 조금 후 정우는 탈해의 눈에서 손을 뗐다. 탈해는 눈을 크게 뜬 채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탈해의 머리 양 쪽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탈해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정 우는 탈해의 이마에 뺨을 누른 채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잊어." 발리츠는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뒤늦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정우는 탈해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팔리탐 지소어는 말고삐를 짧게 잡으며 손목에 감았다. 그 순간 목 을 누르는 섬뜩한 느낌이 다가왔다. "하지 마세요. 몸 상해요." "하지 말라고?" "미안하지만 그 연세에 마상재는 어울리지 않아요. 저를 말 아래로 떨어뜨리는 대신 당신 팔다리를 부러뜨리게 될 거예요." 속마음을 들킨 팔리탐은 가면 아래에서 한숨을 내쉬고는 불평했다. "다리라면 이미 부러진 것 같은데. 네가 걷어찼을 때 말이야." "미안해요. 하지만 부러졌다는 건 과장이군요." 확실히 과장이다. 몇 시간 전 헤어릿이 그에게 가한 폭행은 그의 뒤 편으로 다가와 오금을 강하게 걷어찬 것 뿐이다. 무릎을 꿇은 팔리탐 은 목을 누르는 칼날의 감각을 느꼈다. 적이 등 바로 뒤까지 다가왔 는데 도대체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뭐하고 있었던 거냐고 불평하 려 했을 때 팔리탐은 갑자기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팔리탐 은 헤어릿이 명령하기도 전에 레콘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외쳤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레콘들이 섣불리 움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꽤 해괴하게 어떻게 보면 우습기까지 한 모습을 보게 되었 다. 팔리탐은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비틀거리며 헤어릿이 끌고 있던 말들 중 한 마리를 향해 걸어갔다. 절름발이나 실에 문제가 생긴 꼭 두각시가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말에 다가간 팔리탐은 여전히 괴상한 모습으로 말에 올랐다.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지 만,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그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보느라 움직 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때 이이타가 놀라서 외쳤다. '도깨비 감 투!' "원래부터 세 번째 감투를 네가 가지고 있었니?" 팔리탐은 고삐에서 손목을 풀며 질문했다. 그의 등 뒤에 앉아있는 보이지 않는 여인이 대답했다. "아니오. 공작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가지라고 하셨지요." "돌아가시기 전에?" 헤어릿은 건조한 어투로 피습당한 락토의 모습을 목격한 것부터 락 토가 투신할 때까지의 모습을 설명했다. 팔리탐은 가면 아래에서 입 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서, 네가 찾아냈다고?" "예." "그 힘으로 저 규리하 사람들을 규리하로 데려다주려는 거야? 왜 지?" "전 여길 떠나고 싶으니까요." 하늘이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심야의 완전한 칠흑보다 새벽녘의 검 푸른 하늘에서 더 맑게 빛나는 별들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산야의 윤곽이 밤 속에서 성큼 걸어나오고 야행성 동물들이 일과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너 혼자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동행이 있으면 좋잖아요."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팔리탐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진 지하게 말했다. "헤어릿. 규리하를 혼란스럽게 해선 안돼." 헤어릿은 침묵으로 팔리탐의 설명을 재촉했다. 팔리탐은 잠깐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칼날이 목을 누르고 있었기에 포기했 다. 뒤편의 광경을 봐야 사기가 고무되진 않을 것이다. 사라티본 부 대가 분노를 억누르며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팔리탐은 이이타 규리 하와 소리 로베자, 그리고 규리하의 가신들이 걷고 있는 앞쪽을 바라 보며 말했다. "산모를 괴롭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헤어릿. 지금 이 시각, 규리 하는 새로운 제국을 잉태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새로운 제국이 원만 하게 태어난다면 사라진 제국의 뒤를 이을 수 있겠지." 헤어릿의 숨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규리하에서 사라진 제국을 대신할 새로운 제국이 태어난다고요? 발 케네가 아니고?" "왜 발케네라고 생각하지?"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는 레콘들. 저렇게 중무장한 레콘들을 어디 에 쓸 작정이지요?" "저 무장들은 락토 공작님이 오래 전에 최후의 대장간에 주문한 것 이야. 하지만 저것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이 벌어졌고, 또 끝났 지. 레콘들 외엔 쓸모가 없는 것이라서 그냥 준 거야." 헤어릿은 뭔가 엉성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팔리탐이 계속 말했다. "저 중무장한 레콘 부대를 데리고 제국 점령에 나설 거라고 생각하 는 거야? 그렇지 않아. 나는 스카리에게 사라티본 부대를 해체하라고 권했다." "예? 왜죠?" "사라티본 부대는 치천제에게 대항한 빌파 가문의 역심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그런 유산은 스카리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지. 스카리 는 자신이 락토 공작님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야 해. 그리고 규리하가 새로운 제국을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그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사라티본 부대는 필요 없어." "저렇게 잘 무장시켜놓고 포기한다고요? 그럴 사람이 있을까요?" "저것이 화근덩어리라는 것을 스카리가 깨달으면 포기할 거야. 헤어 릿. 규리하에 분란거리를 가져가지 마라." "묘하군요. 당신은 빌파 가문의 사람인데, 왜 빌파 가문을 황가가 될 수도 있는 일을 반대하는 거죠?" "내가 빌파 가문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다. 빌파 가문이 망하 는 것을 볼 수 없어." "스카리 요새에서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가면을 쓴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헤어릿은 남자의 등을 향해 말했 다. "당신의 태도를 종잡을 수 없군요. 왜 스카리를 막으려 하는 거죠? 락토를 막지 그랬어요? 락토에게 북부의 지배자 자리는 북부인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 집어치우고 발케네나 잘 보전하라고 권하는 것이 나았을 거예요. 당신이 락토를 설득했다면 락토는 죽지 않았을 테고 당신이 보호하고 싶어하는 빌파 가문은 지금도 발케네를 다스리며 잘 살고 있었을 테지요. 왜 그러지 않았죠?" "제 아비를 죽인 패륜아에게 제국을 줄 수는 없다." 헤어릿은 입을 다물었다. 팔리탐은 약간 노여워하는 투로 말했다. "공작님은 빌파 가문이 북부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 다. 북부인이 북부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그리고 규리하에 서 태어나는 새 제국을 지배하는 것은 북부의 사람일 거다. 그것은 암살의 주인이 품었던 여망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 성취를 위해서 나는 스카리를 막는 거다." "그래서……" "만약 공작님이 너를 인지했다면 나는 스카리를 죽였을 거다." 헤어릿 에렉스는 무엇인가가 쾅 하고 머리를 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팔리탐은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스카리가 공작님을 죽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공 작님의 곁에 스카리가 나타났을 때 이미 알아차렸다. 공작님께서 투 신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 스카리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했 다.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빌파 가문은 끝장나는 거지. 만약 네가 헤어릿 에렉스가 아니라 헤어릿 빌파였다면 나는 아무런 부담을 느끼 지 않고 스카리를 공작님 곁으로 보냈을 거다. 하지만 공작님은 너를 인지하지 않으셨고, 나는 감히 내 손으로 빌파 가문을 멸망시킬 수는 없었다. 내겐 스카리밖에 없다." 팔리탐은 허허로운 몸짓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스카리도 보호해야 하고 암살의 주인이 품었던 소망도 이루어 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긴 침묵 후에 헤어릿이 말했다. "스카리를 도와 빌파 가문을 지키면서 동시에 북부인이 지배하는 제 국도 만들겠다는 건가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녘에서 태양의 통고가 번져나갔다. 땅을 뒤덮은 낙엽 무더기 속에 서 서리가 반짝였다. 파리조를 벗어난 것이다. 돌투성이 땅 바깥에서 가을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가 몇 살인지 아세요?" "스물일곱 아니니?" "아실이 알려줬어요. 락토 빌파는 제가 성인이 되고도 10년이 지날 때까지 팔지 않았다고. 저를 거둬들이고, 원추리문에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팔아치울 모든 준비를 끝낸 후에도 10년 동안 미적거렸다 는 거지요. 저는 락토에게 물었어요. 왜 그랬냐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감투를 찾으라는 거였어요." 팔리탐은 말갈기 속에서 드러나는 그림자들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미세하게 떠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감투는 뿔관 속에 있었어요. 뿔관은 대족장의 상징이죠. 발케네공 의 상징이 아니에요. 하지만 락토는 죽을 때까지, 죽은 후에도 발케 네공이지요. 발케네공에게 뿔관은 필요없어요. 하지만 락토는 자신이 뿔관의 주인이라고 말했지요." 헤어릿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또다른 자식은 필요없어요. 당신이 내비친 것처럼 또다른 자식은 스카리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니까. 결과적으로 옳았죠. 그 의 그런 태도 덕분에 스카리가 당신의 칼 앞에서 살아났으니까. 하지 만 그는 또다른 자식을 놓아주지도 못했죠. 그래서 10년이나 붙잡고 있었어요." "헤어릿." "그게 사랑이에요? 자기 자신을 조금도 포기하지 못하면서 딸을 놓 아주지도 못해 붙잡고 있는 것이?" 팔리탐은 앞쪽을 바라보았다. 밝고 맑은 아침 대기 속에서 말들이 내뿜는 하얀 콧김이 뭉게뭉게 퍼져나갔다. 문득 그들 중 이이타가 고 개를 돌렸다. 팔리탐과 헤어릿이 잘 따라오는지 궁금하다는 듯한 얼 굴로 뒤를 본 이이타는 잠시 후 다시 앞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 슴 앞에 태우고 있는 소리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두 사람이 잘 따 라오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팔리탐이 이이타를 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챈 헤어릿이 말했다. "감투를 찾은 직후에, 저는 저 앞에서 걸어가는 이이타의 말을 엿듣 게 되었어요. 취한 채 중얼거렸으니 아마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이 이타는 그러더군요. 무수한 소리 로베자가 죽게 되는 것이 싫다고. 마음에 들었어요. 저 애를…… 아니, 저 남자라고 해야겠군요. 저 남 자를 규리하에 데려다줄 거예요. 취한 김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제국을 걱정하는 대신 무수한 소리 로베자를 걱정했으니까요. 그리고 락토에게 언니를 잃은 소녀도 데려다주겠어요. 새 제국의 잉 태? 저는 그런 것 모르겠어요. 그리고 락토의 여망에는 관심이 없어 요." 헤어릿이 갑자기 칼을 쥐지 않은 손을 앞으로 뻗어 고삐를 붙잡았 다. 두 사람을 태우고 있던 말이 멈춰섰다. 헤어릿이 말했다. "내리세요. 천천히." 칼날이 여전히 목을 누르고 있는 상태에서 팔리탐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사라티본 부대가 웅성거렸지만 목을 누르 는 칼날을 느낀 팔리탐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말안장 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허공에서 헤어릿이 말했다. "이 앞쪽에 개울 있는 거 아시죠?" "알아. 일부러 이 길로 왔군."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 갑자기 헤어릿이 나타났다. 그녀는 안장에 앉아 허리를 옆으로 기울인 채 팔리탐의 목에 단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감투를 들고 있었다. 단검이 보이는 이상 팔리탐 은 그것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냥 뒤로 물러나면 말 옆으로 몸을 늘 어뜨리고 있는 헤어릿은 그를 찌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팔리탐은 그러지 않았다. 정중한 작별을 위해 모습을 드러낸 헤어릿을 존중하 기 위해서, 팔리탐은 헤어릿이 단검을 당길 때까지 기다렸다. 헤어릿 은 안장 위에 똑바로 앉아 단검과 감투를 갈무리했다. "바람이 모든 나그네의 등을 밀어주고 별이 모든 나그네의 길을 인 도해주는 것은 아니죠. 하지만 나그네는 자신이 갈 길을 알아요." "헤어릿. 너는 네 길을 알고 있니?" 팔리탐은 단검에 약간 쓸린 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헤어릿은 감투 를 집어넣은 품속을 살짝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제 길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거예요." 갑작스럽게, 헤어릿은 말을 출발시켰다. 그녀는 순식간에 앞쪽에 있 는 사람들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규리하의 가신들이 끌고 가던 말들 을 인수했다. 팔리탐은 길가에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팔리탐이 암살성으로 돌아왔을 때 태양은 그다지 높지도 않은 남중 점을 지나 하강하고 있었다. 밤이 길어지는 계절이 오고 있었다. 헤 어릿 에렉스와 규리하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이미 암살성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소리 로베자라는 하녀도 한 명 사라졌 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하녀 한 명에게는 관심이 없었 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모든 곳에 출현하는 스카리 빌파 때문에 함부 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기색은 분명히 확 인할 수 있었다. 스카리에게 상황을 보고해야 하지만, 팔리탐은 숨바꼭질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팔리탐은 스카리를 찾아가 보고하는 대신 데 리고 갔던 레콘 병사들을 이끌고 사라티본 부대의 진지 쪽으로 향했 다. 보고를 듣고 싶으면 스카리가 직접 찾아올 테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보고할 수 없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팔리탐은 노쇠한 태양이 여름의 추억을 반추하며 둥둥 떠가는 모습을 보며 진지로 들어섰다. 그런데 스카리는 진지 안에 있었다. 회의실로 쓰이는 커다란 목조 건물로 향하던 팔리탐은 힌치오가 거 기서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문가에는 스카리가 서서 힌치 오를 배웅하고 있었다. 팔리탐을 본 스카리는 그에게 이리 오라고 손 짓했다. 팔리탐은 힌치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스카리에게 다가갔 다. 스카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레콘들의 진지이다 보니 내부 공간은 물론이거니와 가구들도 큼직큼 직했다. 스카리는 높은 의자에 앉아도 가슴 높이까지 올라오는 탁자 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그 곁에 섰다. 팔리탐이 그의 맞은편에 서자 스카리가 말했다. "못 잡아왔군. 왜지?" "헤어릿이 도깨비 감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카리는 깜짝 놀랐다. "헤어릿이?" 팔리탐은 헤어릿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하여 스카리에게 들려주 었다. 헤어릿이 세 번째 감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스카리를 꽤 동요시켰다. 하지만 스카리는 규리하 인들이 도망친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팔리탐은 곧 스카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게 되었다. 스카리는 도깨비 감투가 규리하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신 경을 쓰고 있었다. 스카리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오늘 아침, 부냐가 또 악몽을 꾸었어." 팔리탐은 왈칵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부냐 헨로라니, 그 여자 가 작금의 상황에서 무슨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팔리탐은 퉁명스럽 게 반응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또 냉동실에서 길을 잃는 꿈입니까?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 그런 다니 유감이군요." "아마 평생 그럴지도 몰라. 엄청난 충격이었을 테니까." 팔리탐은 백화각에서 노역했던 죄수는 부냐 외에도 많았고 그들 중 평생 남을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싶 었다. 시체를 처리하는 일일 뿐이다. 어디에서나 사람은 죽고 따라서 그것은 제국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스카리가 이해할 것 같지 않았기에 팔리탐은 그저 가면으로 그를 응시했다. 스카리가 이를 갈았다. "시모그라쥬공은 에더리를 죽였어야 했어. 황제도 죽고 제국도 사라 졌는데, 그 놈은 아직도 규리하에서 살아있어. 황제의 대장군이라면 깨끗하게 자결해야 하는 거 아냐?" 친족살해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사실에 대한 경멸감에 앞 서, 팔리탐은 약간 긴장했다. 그는 스카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 지 궁금했다. 스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놈이 부냐를 그곳에 가둬두었어. 평생 남을 고통을 줬지." "각하." 태양의 궤도가 낮았다. 사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살 또한 비스듬했다. 창문 양쪽에 선 스카리와 팔리탐 사 이로 그 빛살이 완만하게 미끄러졌다. 빛줄기 사이를 떠다니는 먼지 가 스카리의 모습을 흐리게 만들었다. 팔리탐이 다급하게 말했다. "각하. 빨리 규리하에 이이타 규리하의 탈출 사실을 통고해야 합니 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측에서 고의로 이이타 규리하에게 감투를 가 진 조력자를 붙여서 규리하에 잠입시켰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오 해를 받지 않으려면……" "통고? 내가? 에더리에게?" "비셀스 규리하에게 통고하시면 됩니다. 규리하의 현재 지배자니까 요." "에더리의 아내에게? 네가 그랬잖아. 내가 둘을 짝지었다고." 팔리탐은 입을 다물었다. 파리조를 둘러싼 돌들에서 그림자가 길게 흘러내렸다. 돌이 흘리는 검은 눈물처럼 보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지났다. "규리하를 친다." 팔리탐은 움찔했다. 스카리는 어느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규리하를 친다." "각하……" "지적해줘서 고마워. 그래. 에더리가 자유무역당과 결합하기 전에 쳐야 해. 그러면 자유무역당은 나를 지지하겠지. 지테를 시야니는 사 위의 곤경도 돕지 않았어. 한 번 보지도 못한 외손녀 때문에 판단을 그르치지는 않을 거야. 그의 판단을 도와야겠지. 누가 이 사태를 정 리할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줘야지. 저기엔 잘 무장한 레콘 병사들 이 있고, 내겐 발케네가 있으며, 제국의 주인은 없어졌어. 이것은 다 시 오지 않을 기회야. 이 기회를 놓친 다음 평생 후회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어." 팔리탐은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었다. 스카리는 씩 웃었다. 투명 한 미소였다. "나는 제국을 가지겠어. 사나이가 일생을 던질 만한 일 아닌가?" 파리조의 돌 사이에서 세찬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 18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19. 언약을 이행하는 태도 - 1 아라짓 제국은 두억시니다. - 원시제가 말했다고 알려졌 지만, 아무도 그 출처를 믿지 않는 말. 겨울비가 쏴아아아 내린다. 하늘이 투명하고 일방적인 손길로 땅을 촉진한다. 땅의 모든 비밀을 낱낱이 캐어낼 듯 세찬 손길이지만 땅은 허연 물안개로 자신을 감추 고 하늘을 묵묵히 마주본다. 땅은 가면과 육체와 굴곡의 영역. 하늘 에 굴곡이 있으면 어떨까. 매일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 춤추다가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좀 더 고상한 존재가 되었을까, 비루한 존재가 되었을까. 알 수 없다. 떨어진 빗물이 이랑치는 지금의 땅 위로 말에 탄 채 걷고 있는 어떤 사내가 있다. 목깃을 파고드는 빗물은 얼음장 같고 드러난 손은 장갑 에 둘러싸여 있어도 시리다. 남자에게 이 시간은 일종의 갈림길이며, 같은 환경이 10시간 이상 지속된다면 남자는 틀림없이 비루해질 것이 다. 추위와 허기는 비루함에의 좋은 안내자 겸 동반자다. 그러나 남 자의 걸음은 그쪽을 향하고 있지 않다. 남자는 타인의 재산을 불태우 고 타인의 비명을 먹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의 끝, 추위와 허기가 사라진 지점에서 남자는 어쩌면 고상함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뚜걱뚜걱 걸어가는 그 사람은 스카리 빌파다. 스카리가 걸어감에 따라 병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들 은 호연지기 따위는 상상하기 어려운 겨울비 아래에서 회의와 의심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스카리 빌파의 걸음이 그들의 시선을 끌 어당겨 턱을 들어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평소 어디에 있는지도 잘 알 려져 있지 않은 그들의 주군이 갑자기 그들 사이에 나타나 걷고 있는 모습은 호기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일어섰 고, 어떤 이들은 행동을 유보한 채 스카리를 관찰했다. 어쨌든 그들 대부분은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스카리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 았다. 흠뻑 젖은 군대를 가로지르는 스카리는 고독한 도깨비불이다. 방패를 세워든 채 가장 앞쪽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보다 스무 걸음 이상 걸어나온 스카리는 빗물 속에서 말을 멈춰세웠다. "나는 스카리 빌파다." 스카리 빌파는 투구를 벗어 말 옆으로 떨어뜨렸다. 물웅덩이에 떨어 진 투구가 철퍼덕 물보라를 일으켰다. 습기 찬 공기 속에서 그 소리 가 여러 번 메아리쳤다. 가볍게 투레질하는 말을 달랜 스카리는 칼자 루를 쥐었다. "초라한 인연을 구걸하기도 싫고 지조 없는 운명에 휘둘리기도 싫 다." 스카리는 검을 뽑아들었다. 앉아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그 들의 몸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빗줄기 사이로 하얀 입김들 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스카 리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등을 보인 채 칼을 높이 들어올렸다. 완만하고 정확한 동작으로 스카리는 빗줄기 사이에 때이 른 무지개를 만들어보였다. "발케네인들아!" 뜻밖의 호출에 일어서던 병사들은 주춤했다. 스카리는 계속 외쳤다. "더러운 것들아, 사나운 것들아, 지독한 것들아!" 병사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난폭한 함성을 내질렀다. 스카리는 그제서야 천천히 말을 돌렸다. 십만 대군이 지평선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줄을 지어 서있다. 비 때 문에 깃발은 거둬들였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하얀 입김들이 수만의 깃발처럼 일렁거렸다. 같은 이름의 소지자가 몇 무리씩 나타 날 그 대군은 차가운 겨울비 속에서 두 눈을 불태우며 스카리를 바라 보았다. 스카리는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는 병사들 앞을 천천히 걸으며 외 쳤다. "그래. 발케네인은 더럽고 사납고 지독한 것들이다. 저들은 우리를 손가락질한다. 우리를 비웃는다. 우리를 증오한다. 저것들은 우리를 두억시니 보듯 피한다. 왜 그런지 아느냐? 저것들은 우리를 두려워하 기 때문이다! 발케네인들을 두려워한다!" 발케네 병사들이 거친 고함을 내뿜었다. 불길 같은 함성은 회색의 대지를 불사를 듯 퍼져나갔다. "저것들이 황제의 법에 기대어 자신이 지킬 수도 없는 것들을 주위 에 쌓아놓은 채 흥청망청하는 동안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싸웠다! 허 무맹랑한 아라짓 전사나 밀렵꾼이나 다름없는 키탈저 사냥꾼들 따위 는 노랫말이나 채우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진짜 전사를 보고 싶다면, 진짜 싸움꾼을 보고 싶다면 너희들의 옆을 보라! 너희 자신을 보라! 누가 우리처럼 싸우고 누가 우리처럼 사는가! 저들은 누가 진짜인지 안다. 그래서 저 간악한 것들은 우리가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더럽 고 사납고 지독한 발케네인들이 서로 싸우다 멸망하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멸망하지 않았다!" 스카리는 가슴을 홱 젖히고 홍소를 터뜨렸다. "우리는 살아서 여기 있다. 빙토에서도 얼어붙지 않는 발케네인의 끓는 피! 저들이 진짜 두려워 하는 우리들의 피! 그 피를 나에게 다 오. 너희들에게 제국을 주겠다! 우리의 자녀들은, 발케네의 자녀들은 제국을 발 아래에 두고 웃으리라!" 스카리는 말고삐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말이 크게 발길질을 하는 순 간 스카리는 검을 하늘로 뿌렸다. "발케네! 발케네!" 병사들이 함성으로 스카리의 말을 따라했다. "발케네! 발케네!" 병사들의 붉게 변한 얼굴을 보던 스카리가 말을 돌렸다. 병사들은 그가 달려갈 거라 생각하며 창검을 움켜쥐었다. 굽힌 무릎이 긴장으 로 떨렸다. 감춰진 살육의 본능을 해방시키는 질주의 춤이 시작될 순 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스카리는 달리지 않았다. 그는 칼을 옆으로 뻗은 채 씩씩하 게 걸어갔다. 그의 손길에 따라 병사들도 한 걸음씩 발을 뗐다. 흥분 을 이기지 못한 몇몇 병사들이 앞으로 뛰어나오려 했지만 스카리는 엄하게 칼을 좌우로 휘둘러 그들을 제지시켰다. 병사들은 안달했다. 격노했다. 그리고 웃었다. 걸었다. 촥, 촥, 촥. 바닥에 고인 물을 날 려보내는 일사불란한 발소리. 꽝꽝 내려딛는 발이 땅을 진감시켰다. 병사들은 그 소리에 매혹되었다. 촥, 촥, 촥.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병사들이 스스로 줄을 맞추었다. 동물들은 아무리 많은 숫자 가 모인다 한들 흉내낼 수 없는 동작이다. 촥, 촥, 촥. 갑자기 스카 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을 질렀다. "내놔라!" 촥, 촥, 촥. 병사들은 목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쏟아지는 비 는 더 이상 군대를 비참하게 만들고 병사를 우수에 젖게 만드는 방해 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가 왔기에 군대는 더욱 사납게 끓어올랐다. 담금질을 당하는 생철처럼 군대는 물보라를 일으키고 입김을 무럭무 럭 토해냈다. 스카리가 다시 앞쪽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내놔라!" 병사들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십만의 병사들이 스카리의 말을 복창했다. "내놔라! 내놔라! 내놔라!" "내놔라! 내놔라! 내놔라!" 돌격도 아니고 행군도 아니다. 발케네 병사들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 로 두서없이 외쳤다. 촥, 촥, 촥. 그들은 창검을 쥔 팔을 위로 내둘 렀다. 촥, 촥, 촥. 화살이 날아와 박힌들, 창과 돌이 하늘을 뒤덮은 들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다. 병사들은 방패도 들어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가슴을 불쑥 내밀었다. 침을 튀기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심장을 쾅쾅 울리며, 쏟아지는 비에 턱을 내밀며 그들은 걸었다. 촥, 촥, 촥. 투구를 벗은 스카리의 머리카락은 빠르게 젖어들었다. 스카리는 머 리를 뒤로 휘둘러 젖은 머리카락을 뿌려넘겼다. 우레처럼 들려오는 '내놔라! 내놔라!' 하는 함성이 그를 밀어내는 듯하다. 등이 가렵고 팔다리가 가렵고 목과 볼이 가렵다. 스카리는 젖은 짐승이고 미친 짐 승이었다. 그리고 짐승들의 우두머리였다. 스카리는 불길 같은 눈으 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앞쪽에는 성벽이 있었다. 스카리는 집어삼킬 것 같은 눈으로 성벽을 바라보았다. 참모들은 투석기를 제작해야 한다고, 사다리와 충차와 공성탑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스카리는 아무 것도 만들지 않았고 기다리 지도 않았다. 그는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발악하듯 고함을 지르며 걷는 병사들의 앞쪽에 서서. "내놔라! 내놔라! 내놔라……" 성벽 위로 무엇인가가 올라왔다. 스카리가 말을 멈춰세웠다. 그에 따라 십만 명의 물결이 서서히 멈 춰섰다. 스카리는 얼굴 근육을 경련시켰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스카리는 비 내리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 혔다. 그는 칼과 방패를 하늘로 뻗어올려 서로를 거세게 부딪히고는 두 팔을 아래로 던졌다. 그의 입에서 짐승 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에-야하아아!"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은 항기였다. 나나본 태수 무스키 드레는 스카 리가 이끄는 발케네군에게 항복하고 발케네의 지배를 받겠다고 선언 했다. 퍼붓는 비 속에서 젖은 항기는 초라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 무너지는 듯한 깃발을 보며 스카리는 희열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리 고 그 함성은 두 개, 네 개, 백 개, 십만 개가 되었다. 아라짓력 31년 9월말, 눈이 내려야할 시기에 엉뚱하게 내린 겨울비 는 발케네가 자랑하는 레콘 부대를 봉인했다. 나나본 태수 무스키 드 레는 그 비가 협상의 주연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협상의 보조자 정 도는 될 거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발케네군을 이끄는 스카리 빌파는 아무도 움직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시점에 아무도 다가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장소로 군대를 이동시킴으로써 무스키 드레에게 선택 을 강요했다. 그것은 돌격도 아니고 공성도 아닌 확실한 '이동'이었 지만 무스키 드레가 결정을 내릴 요건은 되었다. 무스키 드레는 이기 지 못할 전쟁에서 희생될 나나본 사람들뿐만 아니라 승리를 가져가기 위해 희생될 발케네 병사들의 목숨까지 고려한 다음 주저 없이 성벽 위에 항기를 게양했다. 발케네군은 사라티본 부대의 힘 없이 나나본 을 무혈점령했다. 그리고 나나본은 스카리 빌파의 지배, 발케네군에 대한 군량 지급, 그리고 군사 징발까지 약속했다. 드레 태수가 가공할 정치력을 발휘 하여 가까스로 덧붙인 단서 조항은 '제국이 다시 황제를 가질 때까 지'였다. 그것은 행방불명된 치천제의 귀환을 의미할 수도 있고 스카 리 빌파가 아닌 다른 인물의 등극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스카리 빌파 는 그 조건을 응락했다. "발케네공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그 조건은 무의미한 것이니까." 바질튼 남작 친 피타오는 스스로에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팔리탐 지소어는 피타 오 남작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피타오 남작은 약간 머쓱해 하며 다시 말했다. "발케네공은 첫 번째 시험을 무사히 넘긴 것 같지 않은가? 모든 사 람들이 공의 힘은 사라티본 부대뿐이라고, 물론 뿐이라는 말을 쓴다 는 것이 우습지만, 어쨌든 그것뿐이라고 생각할 때 공은 발케네 병사 들을 나나본 성 앞으로 움직였지. 그리고 승리했고, 병사들을 자신의 부하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고, 또한 자신이 레콘 부대의 주인이 아니 라 발케네의 유일무이한 지배자임을 확인시켰어. 자네 생각은 어떤 가?" 피타오 남작의 말은 명백한 질문이었지만 팔리탐은 다시 그 말을 무 시했다. 그는 탁자 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고개도 들지 않았다. 남작은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팔리탐 지소어의 가면을 향해 분노한다는 것은 남작에겐 거북한 일이었다. 남작의 곤 경을 알아차린 레드마 브릭 자작이 중재에 나섰다. "남작. 그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지는 말게. 그는 자신의 주군을 평 가하거나 할 수는 없잖은가." 피타오 남작은 자작의 중재에 시름을 덜게 되었다. "아, 이런. 그렇 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작." 운운하며 남작은 대화의 방향을 자작에게로 옮겼다. 자신과 대화하려는 헛된 시도를 하던 마지막 사람이 끝내 그 시도를 포기하는 것을 보며 팔리탐은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느 낌은 그의 속에서 불타오르는 심화를 꺼트리기엔 너무도 미약했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팔리탐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가면을 쓴 자는 도깨비 감투를 쓴 자처럼 누구의 눈 아래에서도 자유롭게 표정을 지 을 수 있다. 발케네군의 나나본 무혈점령 소식은 지금 쯤 우기츠와 잔하일에 전 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 소식은 사빈과 세퀴라도까지 전파될 것이다. 고 아라짓 왕국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과텔과 케나린 의 시대에도, 그리고 지러쿼터 산맥 동쪽의 인구가 급증한 그 이후 시대에도 지러쿼터 산맥 동쪽은 단일 세력에게 지배당한 적이 없다. 다른 것들을 합병할 만큼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던 적도 없고 합병될 만큼 약한 세력이 존재했던 적도 없다. 규리하의 방패인 지러쿼터 산 맥 동편에는 언제나 분리된 적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산맥 동편이 단 일 세력으로 통합되었을 때 규리하는 자신의 무적을 자랑할 수 없다. 지러쿼터 산맥은 지나치게 광활하고 규리하는 산맥의 모든 지역을 방 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산맥 동쪽이 단일 세력에게 지배될 경우 험 준한 지러쿼터 산맥은 오히려 적의 내습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바뀐 다. 지러쿼터 산맥은 규리하의 방패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역사가 되지는 못한 사건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 다. 지러쿼터 산맥 동쪽을 포함하여 제국의 모든 땅을 지배했던 치천 제의 휘하에서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무향을 격파했다. 스카리의 전략적 판단은 정확했다. 그는 단숨에 지러쿼터 산맥을 넘 어 규리하로 진공하는 대신 산맥 동쪽의 땅들을 정복하기로 결정했 다. 스카리가 노레조까지, 아니, 사빈까지만 정복한다면 규리하는 지 러쿼터 산맥을 기반으로 한 방어 전략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방어력은 이미 엘시 에더리 자신에 의해 많이 축소되어 있 다…… 스카리 빌파가 회의장에 나타났다. 아무도 그가 회의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고개 를 돌렸을 때 스카리는 그곳에 서있었고 그가 인사를 한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스카리의 존재를 깨달았다. 당황 속에서도 그들은 스카리가 문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는 듯이 행동했다. 스카리가 지금 껏 감투를 쓴 채 회의장 한쪽에 서서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고 생각하 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그들에겐 다행스럽게도 스카리 또한 자신이 지금 회의장에 들어섰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들의 회의장은 나나본의 시청 회의실이었다. 스카리는 탁자의 상 석으로 가서는 막료들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막료들이 모두 자 리에 앉자 스카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좋아. 우리는 한 방울의 피도, 그리고 한 조각의 깃털도 떨어뜨리 지 않고 나나본을 점령했다." 막료들은 가벼운 웃음으로 스카리를 마주했다. 미소를 짓지 않는 것 은 팔리탐뿐이었다. 그 가면으로는 어떤 표정도 만들 수 없으니까. 팔리탐은 묵묵히 가면으로 스카리를 겨눈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마디 농담을 더 꺼낸 스카리가 본론을 꺼내었다.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스카리는 영광과 승리를 말했고 발케네가 그 것을 가져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말했다. 가면 속에서 팔리탐은 친 피타오 남작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스카리는 자신이 가져야 하는 영광과 승리가 아닌 발케네의 영광과 승리를 말하고 있었고 그것은 대전쟁을 치르려는 자에겐 당연하다 할 만큼 필요한 태도였다. 스카 리가 사라티본 부대 하나에 모든 것을 건 도박꾼은 아니라는 것이 분 명했다. 스카리 자신도 그것을 강조했다. 팔리탐은 그 강조가 아버지 와의 차이점을 말하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황제의 습격에 대응하면서 락토는 파리조군이나 소환군에 대해 대단한 임무를 맡긴 적이 없었 다. 락토의 전쟁은 모두 사라티본 부대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은 황제와 락토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 카리는 발케네의 전쟁을 역설했다. 문득 팔리탐은 불쾌한 느낌을 받 았다. 제국을 상대로 싸움을 건 것은 발케네지 스카리 빌파가 아니라는 식 이라면…… 발케네만 남고 스카리 빌파는 사라지는군. 도깨비 감투를 쓴 것처럼. 사라말 아이솔은 썰매 옆에 서서 미심쩍은 눈으로 앞쪽의 얼음을 바 라보았다. 수평선, 아니 지평선, 아니 빙평선? 어쨌든 저 먼 곳 밤하늘의 뿌리 부분에 명멸하는 불빛의 도시가 있었다. 사라말은 그것이 스지우나 데린보트이길 바랐고, 그 희망이 크게 배신당할 것 같지는 않다. 그 것이 데린보트나 스지우가 아니라면 진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사라말과 파라말, 그리고 아트밀이 일만 킬로미터 이상 헤맸어야 한 다. 진젤은 제국 남쪽에 있으니까. 사라말은 자신이 일만 킬로미터 쯤 방황할 정도로 멍청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나 그의 동행들에겐 그런 방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것은 분명 히 데린보트나 스지우일 것이다. 따라서 사라말이 의심에 빠진 것은 눈앞에 보이는 도시의 정체가 궁금해서는 아니다. 사라말은 앞쪽의 얼음이 자신과 개썰매, 그리고 아트밀을 감당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스지우나 데린보트도 아이톤 못지 않게 북쪽에 있 는 도시였고 계절은 바다가 얼어붙는 시기였다. 하지만 요 며칠 동안 사라말은 구름 낀 하늘만 보았다. 두꺼운 구름은 고공의 무서운 추위 가 지상을 덮치는 것을 막아주는 이불 역할을 한다. 만약 구름 아래 에 상대적으로 따스한 공기가 갇혀 있었다면 빙해는 약화되어 있을지 도 모른다. 바닥에 닿는 압력을 줄이려면 썰매에서 내려 직접 걸어가는 것도 가 능할 것이다. 하지만 아트밀은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없다. 사라말은 아트밀을 돌아보았다. 구름 때문에 달빛은커녕 별빛도 없었다. 얼어 붙은 바다 위에서 아트밀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라말이 이리저 리 둘러볼 때 밤눈이 좋은 편인 아트밀이 먼저 말을 걸었다. "뭐하냐?" 사라말은 그 목소리로 아트밀의 방향을 가늠했다. 그 쪽을 바라보았 지만 사라말은 여전히 아트밀을 볼 수 없었다. 사라말은 어둠을 향해 말했다. "거기 있군요. 발 아래에 닿는 바닥의 느낌이 어떻습니까?" "글쎄. 단단한데?" "얼마나?" 사라말은 질문을 후회했다. 썰매와 연결된 줄들을 풀어낸 아트밀이 위로 훌쩍 뛰어오른 것이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것이 갑자기 움직이면서 일어난 바람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라말이 원했던 가볍게 발을 굴러보는 수준 이 아니라 레콘의 도약에 가까웠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사라말의 옆쪽에서 쿨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썰매 안에 앉아있 던 파라말이 충격 때문에 불유쾌한 생체 반응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 았다. 사라말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아트밀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아트밀이 말했다. "상당히 단단해." 사라말은 그 실험이 실패해서 얼음이 깨졌으면 어쩔 작정이었냐고 묻지 않았다. 사후약방문이고 말하고 싶지도 않은 내용이었다. 사라 말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가물거리는 불빛이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심사숙고 끝에 사라말은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파라말이 썰매 밖으로 나오도록 한 다음 썰매 뒤편에서 손잡이를 붙 잡은 채 걸었다. 아트밀은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지금 왜 썰매 밖으 로 나오는지 궁금하다는 듯 부리를 부딪혔지만 질문하지는 않았다. 불빛은 쉬 가까워지지 않았다. 장애물이 없는 바다 위인지라 꽤 먼 곳의 불빛이 보인 듯했다. 사라말은 다급해하지 않기 위해 상념에 빠 졌다. 그가 모험가였다면 흥분으로 통제력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가로지르지 못한 빙해의 최초 정복자가 되기 일보 직전이니 까. 하지만 사라말은 그 사실에 별다른 감회를 느끼지는 않았다. 사 라말에게 모험가 기질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가 생각하는 모 험은 지리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엘시 에더리를 황제로 만드는 모험에 대해 생각했다. 그 모험이라면 이제 첫걸음을 내디딘 정도다. 그리고 가야할 길은 장구하다. 흥분할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사라말은 엘시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뒤쪽에서 따라오 는 발소리의 주인에 대해 생각했다. 아트밀은 레콘이다. 파악하기 어려운 사실이 아니다. 레콘은 물을 싫어하고 두려워 한다. 절대로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 아트밀은 얼어 붙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사라말의 여행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아트 밀이 그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라말을 존경하여 어디라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아트밀은 복잡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제국군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제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모호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멸사봉공의 투철한 사명의식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보편적인 직업인의 도의에 가까웠다. 새로운 제국과 새로운 황제를 만들겠다는 사라말의 행동을 돕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사라진 제 국과 황제에 커다란 애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어쩌 면 아트밀은 사라말의 일을 돕다가 새 황제의 수교위로 진급할 수 있 다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트밀은 투 철한 동기의식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없거나, 혹은 숙원을 위해 어딘가에 비장해두었을 것이다. 사라말은 그런 것을 보지 못했다. 바다 위를 가로지른 레콘에게 필사적인 동기가 없다면 그는 어떤 레 콘일까? 사라말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가설은 정신질환이었다. 자신이 겪은 일이 다른 사람의 목격담이었다면 사라말은 틀림없이 그 렇게 판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트밀을 보았고 그에게서 바다 위를 걸었다는 것 외에 정신병의 징후를 찾지 못했다. 사라말은 떠올 렸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정신질환 가설을 포기했다. 그가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은 두 번째 가설이었다. 레콘에게 무엇인 가가 일어나고 있다. 사라말은 긴 시간 동안 관찰하여 레콘들이 집단 화하고 있다는 징후를 발견했다. 그런데 집단은 가끔 특이한 개체를 출현시킨다. 가족이라는 기본적인 집단의 개념조차 취약한 레콘들이 갑자기 거대 집단화한다면 기묘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 쩌면 물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를 극복하는 레콘은 레콘 집단이 만 들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사라말은 사라티본 전투를 떠올렸다. '그 레콘의 이름이 뭐더라? 아, 힌치오.' 사라티본 부대의 힌치오는 물벼락을 맞은 레콘들을 통 솔하여 도주했다. 사라말은 그것이 힌치오의 능력인지 사라티본 부대 라는 집단이 와해되지 않기 위해 발휘한 능력인지 생각해보았다. '사람은 음식과 분변 사이에 위치하려고 애쓴다. 집단도?' 불빛이 가까워졌다. 사라말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발 아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라말은 발의 느낌과 썰매의 움 직임, 그리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 아래는 단단했고 얼음이 갈 라지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다는 잘 얼어있는 듯하다. 사라말 은 다시 불빛을 바라보았다. 구름처럼 엉겨있던 불빛이 구분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다. 몇 킬로미터…… 몇백 미터? 썰매개들은 흥분하여 달려가려 했다. 도시가 가까웠다. 그것이 데린보트이든 스지우이든, 이제 빙해를 건너는 역사적인 모험은 그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바다를 벗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저기에 도시 가…… 사라말은 얼어붙었다. 도시가 있는 만큼 그 주변에는 강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강 하구의 얼음은 위험하다.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계속 유입되기 때문에 겉만 살짝 얼어있는 살얼음으로 덮혀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 라말은 지금이 모험의 결말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순간임을 깨달았 다. 주위는 캄캄하고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육지인지 알 수 없다. 만약 강 하구 근처로 접어들면 아트밀뿐만 아니라 그와 파라말도 위 험했다. 강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알 수 없 었다. 강을 피하려는 동작이 오히려 강을 찾아드는 일이 될지도 모른 다. 사라말은 황급히 개썰매를 멈춰세웠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다가 오는 아트밀이 자신들에게 부딪힐 것을 대비하여 고함을 질렀다. "아트밀, 멈춰요!" 그 순간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제이어 솔한은 언덕 꼭대기에 서서 어깨를 털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눈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제이어는 한숨을 내쉬듯 어깨를 늘어뜨리 고는 앞쪽의 빙원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그래서 몸서리쳐지도록 추웠다. 하지만 최후의 대장 간 앞쪽의 계단에 걸터앉아 있는 젊은 레콘들은 기온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는 듯했다. 불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들의 앉음새 는 대학교 교정에 앉아 담론하는 젊은 대학생들만큼이나 편안해 보였 다. 만약 제이어가 같은 일을 시도한다면 평생 동안 온갖 한랭 증후 군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제이어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개썰매로 다 가갔다. 제이어가 썰매에 올라타자 썰매 뒤쪽에 있던 개썰매꾼은 언 덕 아래로 개썰매를 몰았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며 제이어는 왜 레콘 들이 밖에 나와있는지 생각했다. 계단에 앉아있던 레콘들은 다가가는 제이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간 제이어는 그 숫자가 꽤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통행로를 남겨두기 위해 가운데 약간의 틈만 남겨둔 채 계단을 점령 하고 있었다. 썰매가 멈췄다. 제이어는 썰매 밖으로 나왔고 이곳까지 그를 태워준 개썰매꾼은 썰매와 개들을 보관할 수 있는 부속건물 쪽 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제이어는 레콘들 사이의 틈을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마치 다가올 누군가를 환영하기 위해 나와 앉아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제 이어는 레콘들 사이의 틈을 걸어가는 대신 가까이 있는 레콘에게 다 가갔다. "실례합니다." 레콘은 수염볏을 만지작거리며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어는 손을 가볍게 움직여 계단에 앉아있는 레콘들에게 가리키는 시늉을 하곤 말 했다. "단체로 누구를 기다리시는 겁니까?" "아냐." "그러면 여러분들은 왜 이렇게 밖에 나와있는 거죠?" 레콘은 불만스럽게 부리를 딱 부딪혔다. "안쪽이 복잡해서. 하지만 이곳도 마찬가지군." "복잡하다고요? 왜지요?" 여기저기서 경쟁적으로 대답이 타져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대답이 되지 못했다. 말이 뒤섞여서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이어는 그들이 불만에 차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귀기울 여 들은 제이어는 그들의 불만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들은 무기를 가지러 온 레콘들이었다. 하지만 대장장이들이 발케 네로 보낼 무기들을 만드느라 바빠서 그들에게 팔 무기를 만들지 못 했다. 그래서 최후의 대장간에는 지금 무기가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 었다. 최후의 대장간에 무기가 없다니, 레콘이 아닌 제이어에게도 우 스꽝스럽게 들리는 말이었다. 대장장이들은 열심히 무기를 만들고 있 지만 그 동안 도착한 젊은 레콘들은 고스란히 적체되었다. 지금 최후 의 대장간 안쪽은 레콘만큼 뼈대가 단단하지 못한 사람은 그냥 걸어 다니는 것도 조심해야 할 만큼 젊은 레콘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다는 이야기에 제이어는 혀를 찼다. 계단에 앉아있는 레콘들은 답답한 안 쪽이 싫어서 그곳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앉음새 자체 가 이미 꽤 답답해보였다. 제이어는 한숨을 내쉬고는 질문했다. "혹시 여기 있으시면서 검은 레콘이 지나가는 것 보지 못하셨습니 까?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는데." 레콘은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사냥꾼 말하는 거야?" "왔습니까?" "응. 안에 있어." 제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멘이 이곳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지만 제이어는 그가 북쪽으로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여러 곳 에서 전해들었다. 제이어는 라호친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라 호친 북쪽에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은 최후의 대장간뿐이다. 제 이어는 어느 곳으로 가면 지멘을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려 했 다. 그런데 제이어의 질문에 대답하던 젊은 레콘이 먼저 말했다. "그 애꾸눈 꼬마하고 같이 있지." 제이어는 충격을 받았다. "애꾸눈 꼬마? 아실 말입니까?" "아실? 아, 그래. 아실. 이름이 그랬지." 제이어가 본 아실의 마지막 모습은 횃불을 들고 하늘누리를 향해 달 려가는 모습이었다. 그 이후로 하늘누리와 아실은 함께 사라졌다. 그 런데 아실이 살아있다면, 어쩌면 그녀는 하늘누리의 행방에 대해 뭔 가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이어는 다급하게 그들이 어디에 있냐 고 질문했다. 그리고 데걱데걱 대답해주던 젊은 레콘은 지멘과 아실 이 헤치카의 작업실에 있다는 이야기로 시종일관한 모습을 보였다. 제이어는 최후의 대장간 안쪽으로 들어섰다. 계단에 앉아있던 젊은 레콘은 과장이나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제이어는 목숨을 조심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 다. 대장간 안쪽에는 레콘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꽤 불편해보였다. 다른 사람의 어깨에 부딪히지 않고서는 십 미터도 걷기 어려울 만큼 많은 레콘들이 여기저기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물론 걷다가 어 깨를 부딪히는 것은 그들에게 작은 귀찮음일 뿐이다. 하지만 레콘들 의 어깨 사이에 끼인 인간은 단순히 귀찮다는 느낌을 받는 것에서 끝 나지 않을 것이다. 제이어는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시야는 나빴다. 제이어가 볼 수 있는 것은 무섭게 움직이는 레콘들의 주먹과 부딪혔다간 어딘가가 부 러질 것 같은 레콘들의 허리뿐이었다. 제이어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옆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채 몇 걸음도 옮기기 전에 제이어는 난관에 부딪혔다. 벽에 의지한 노점상과 판매대들이 그의 진로를 가로막았 다. 이전에 들렀을 때보다 그 숫자는 적었다. 무기가 품귀 현상을 일 으킨다는 말을 반증이라도 하듯 어디에서도 무기를 파는 상인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외의 다른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무수한 레콘들 사이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 의 발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가게와 목숨을 한꺼번에 잃게 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은 그들의 판매열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레콘들의 발소리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상인들은 목이 터져라 호객성을 외쳤고 제이어를 위해 잠시 길을 터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제이어는 간신히 차지한 벽 일부에 몸을 기댄 채 난 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 때 제이어는 꽤 인상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인간 소년이 레콘들 사이에서 걷고 있었다. 두터운 방한복을 입고 있지만 소년의 모습에서는 숲 사이의 지름길을 걷는 목동 같은 편안 함이 엿보였다. 긴 시간 동안 수도없이 오간 길을 걷는 것처럼 방심 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소년의 길이 익숙한 것일 리는 없다. 계속 움직이는 무수한 레콘들 사이로 난 길이니까. 소년의 걸음새도 엄밀 하게 말해서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소년은 계속 고개를 까딱거렸고 허리를 비틀었으며 걸음의 폭과 속도를 바꿨다. 그리고 그 때마다 소 년의 주위로 레콘의 커다란 주먹이나 힘이 담긴 발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소년의 몸에 닿는 것은 없었다. 제이어는 감탄을 금할 수 없 었다. 소년은 둘러보지도 않았고 세심하게 가늠하지도 않았다. 내키 는대로 춤추듯 걷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어떤 방해에도 부딪히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걸었다. 소년이 그런 묘기를 부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돔이고 이곳에서 태어나 레콘들을 상대하며 자랐으니까. 태평한 표정으로 몸을 홱 돌 려 레콘의 다리 하나가 스쳐지나가게 한 돔은 다시 방향을 바꾸려 하 다가 제이어와 눈을 마주쳤다. 돔은 잠깐 동안 제이어를 보다가 휘적휘적 그를 향해 걸어왔다. 제 이어는 턱을 쓸어만지며 돔의 묘기를 감상했다. 돔은 많은 레콘들의 진로와 부딪히는 방향으로 걸어왔지만 어떤 레콘과도 부딪히지 않았 다. 종잡을 수 없는 걸음걸이였기에 제이어는 그가 언제쯤 도달할지 알 수 없었다. 돔은 늦지 않게 도착했다. "그 하얀 옷 기억나는데. 살인기사죠?" "제이어 솔한이야. 너는 헤치카가 데리고 있던 아이구나." "맞아요. 당신이 헤치카에게 단검을 주문했지요. 뭐 더 주문하러 왔 어요? 하지만 주문을 받기는 어렵겠는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기 받 으러 온 레콘들이 엄청나게 많이 밀려서." "나는 주문하러 온 것이 아니다. 지멘과 아실이 헤치카와 함께 있다 던데, 맞나?" 돔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제이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 어는 살인적인 레콘의 인파를 보며 말했다. "나를 두 사람에게 무사히 데려다주면 은편 한 닢 주마. 어때?" 돔은 피식 웃었다. "좋아요. 은편 준비해둬요." 돔은 제이어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잘 살피는 기색도 없 이 레콘의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제이어는 돔이 자신을 죽게 내버 려둔 다음 은편 한 닢 대신 지갑 전부를 가져갈 작정을 한 것이 아닌 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돔은 계약에 충실했다. 그는 걷다가 멈췄다 가 달리다가 다시 몸을 비틀었다. 그 걸음걸이를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돔이 멈춰섰을 때 제이어는 숨만 좀 가쁠 뿐 얼굴에 타박상이 생기거나 레콘의 발에 짓밟혀 발가락이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이어는 기쁜 마음으로 은편을 지불했다. 그리고 제이어는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살폈다. 그는 헤치카의 거처 앞에 서있었다. 돔은 문을 열더니 안쪽으로 들 어갔다. 그리고 어디론가로 외쳤다. "지멘! 누가 당신 찾아왔어요!" 제이어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문 안쪽의 넓은 공간은 헤치카의 작업 실이었고 거기서 헤치카는 단검을 만드느라 메질을 하고 있었다. 헤 치카는 제이어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어 솔한? 여기는 웬일인가?" "조금 전 저 소년이 외친 것처럼……" 돔을 가리키려던 제이어는 어디를 가리켜야 되는지 알 수 없게 되었 다. 돔은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다만 작업실 옆에 딸려있는 복도 쪽 에서 여러 가지 소음들이 들려왔다. 제이어는 손을 내리고 말했다. "그 소년이 외친 것처럼 지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래? 참. 단검은 쓸만하던가?" 제이어는 헤치카가 만든 단검이 사라티본 부대에 어떤 평가를 받는 지 알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제이어는 호 평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을 적당히 들려주었다. 그 때 다른 레콘이 복 도 쪽에서 쓱 나타났다. 나타난 것은 지멘이 아니었다. 완고해 보이는 얼굴을 한 레콘이 제 이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이어는 이곳까지 오면서 들었던 황제 사냥꾼의 목격담에서 지멘이 쌍창을 든 다른 레콘과 동행하고 있었다 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의 앞에 나타난 레콘이 바로 지멘과 동행 중이라는 그 레콘인 듯했다. "제이어 솔한입니다." "나는 준람이다. 지멘을 만나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무슨 용건인지 말해봐." "왜 당신에게?" "상황이 좀 그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그가 어디 아프기라도 하다는 겁니까?" "아냐. 아니, 그래. 아파." 제이어는 아랫입술을 조금 내밀었다. 준람은 벼슬을 긁적거리다가 제이어에게 손짓했다. "따라와." 제이어는 그 뒤를 따라갔다. 조금 후 준람은 어두운 방 안으로 제이 어를 안내했다. 그 방은 추위를 막기 좋은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래서 빛 이 잘 들어오지 못했다. 몇 개의 초가 방안을 밝히고 있었지만 하얀 세상에서 이곳으로 들어온 제이어는 사물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제이어는 이상한 그림자를 발견했고 조금 후 그 것은 웅크리고 있는 지멘임을 깨달았다. 지멘은 벽쪽을 향해 앉아있었다. 제이어는 마치 서탁을 놓고 책이라 도 읽는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무엇인 가를 살피고 있었다. 그 때 준람이 손가락으로 지멘의 옆으로 돌아가 보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제이어는 조심스럽게 지멘의 옆으로 돌아갔 다. 그리고 지멘의 앞쪽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 아실이 누워 있었다. 한눈에 제이어는 아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의 작 은 몸 대부분은 두터운 모피로 감춰져 있었지만 드러난 그 얼굴은 놀 랍도록 창백했고 눈 주위는 거무죽죽했다. 제이어는 그녀가 눈을 감 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아실의 왼쪽 눈은 언제나 처럼 안대에 덮혀 있었지만 그 오른쪽 눈은 천장 쪽을 향해 열려 있 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눈 을 뜬 것이 아니라 눈꺼풀이 벌어져 있는 것이었다. 아실의 눈빛에는 아무런 생기가 없었다. 제이어는 지멘을 보았다. 앉아있는 지멘이 오히려 눈을 감고 있었 다. 촛불빛에 익숙해진 제이어는 좀 더 자세히 지멘을 살폈고 그가 졸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멘은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제이어는 당 혹하여 준람을 바라보았다. 준람은 속삭였다. "며칠 동안 그러고 있다가 겨우 잠든 거니 내버려두고 나와. 나와 이야기하자." 제이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아실을 내려다보았 다. "아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준람은 제이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약간 초조함을 느끼며 말했다. "넋이 나간 상태지." "넋이 나갔다고요?" "그래. 그게 전문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아실과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까?" "그럴 수 없어. 자, 지멘이 깨기 전에 나와." 준람은 제이어를 인도하듯 밖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제이어는 여전 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눈 뜬 아실과 눈을 감은 지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선 준람은 그 모습을 보다가 짜증스러운 걸음으로 제이어에게 다가왔다. 그는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어!" 제이어는 준람을 돌아보고는 빙긋 웃었다. 그러나 살인기사는 준람 을 향해 걷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턱을 매만지던 손을 품속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지멘을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이곳에 아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제 용건이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렇지가 않군요. 아실이 이런 상태라면 역시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준람의 질문에 제이어는 서신 한 통을 꺼내들었다. 그는 그것을 가 볍게 흔들다가 그 손등으로 지멘의 팔뚝을 툭 쳤다. 지멘이 피로한 표정으로 눈꺼풀을 꿈틀거릴 때 제이어가 말했다. "지멘. 아실이 보낸 편지입니다." 지멘의 눈보다 그 벼슬이 먼저 깨어났다. 지멘은 벼슬을 빳빳하게 세웠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다. =============================================================== 19챕터 시작합니다. 컴퓨터 바이러스 만드는 사람들, 정말 싫습니다. (가까스로 복구.)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9-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03 조회수 : 1270 피를 마시는 새 19. 언약을 이행하는 태도 - 2 눈을 떴지만, 잠깐 동안 지멘은 현재가 아니라 현재에 이어져 있는 과거의 물길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때늦은 상황 파악이기도 하다. 지 멘은 지난 몇 달 동안 겪은 일을 정리하지 못했다. 남아있는 여러 기 억들을 시간 순서와 인과 관계에 맞춰 정리하면서 지멘은 지난 몇 달 을 다시 경험했다. 파리조의 성벽 앞에서 엘시와 헤어진 후 지멘과 준람은 거침 없이 북상했다. 하늘누리의 자취를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곳곳에 뚜렷 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엄격한 나발칸 레콘 준람으로 하여금 분노에 가까운 당혹을 느끼게 했다. 등에 도시를 진 채 하늘을 나는 생물이 폭주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 날까? 하늘치는 광활한 빙토에 제국의 수도를 흩뿌려 놓았다. 그와 같은 참극은 존재했던 적도 없기에 이름을 붙이거나 비유를 찾기도 어렵다. 도시의 파편들을 수십 킬로미터까지 퍼뜨려놓는 대홍수도 하 늘누리에 일어난 일에는 비교될 수 없다. 대홍수에서 가장 멀리 떠내 려가는 것은 가장 가벼운 것들이다. 하지만 하늘누리에서는 가장 무 거운 물건들이 마지막에 떨어졌다. 그 범위는 거의 1700킬로미터에 달했다. 준람은 인구 밀도가 낮은 발케네 북부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 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페시론섬이나 아 킨스로우 협곡의 사건에 버금가는 비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 만 어떤 잔해들은 마을이나 도시 가까운 곳에 떨어졌고, 그래서 그들 은 굉장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구름 속에서 떨어진 집이 나 기둥, 포석은 신들의 저택에 일어난 불화에 대한 장대무비한 이야 기의 소재가 되기 충분하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부엌칼을 주운 자는 영웅왕의 성검을 하사받은 용사로 둔갑했다. 식품을 구하기 위 해 사람들의 거주지로 찾아들 때마다 지멘과 준람은 듣기 싫어도 천 상의 재난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보기 싫어도 선택받은 용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멘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았고 준람은 딱 한 번 논평했다. 두 사람이 카날티 북쪽의 어딘가 에서 어두운 밤길을 질주할 때 준람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늘누리가 없다면 황제는 황제가 아니지. 그렇다면 황제는 살아도 죽은 셈인가."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갗을 벗겨내는 대패 같은 겨울 바람이 지배하는 낙막한 땅에서 두 레콘은 줄기차게 달렸다. 간혹 멈출 때도 있었다. 폭주하는 하늘누리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만 날 때가 그러했다. 지멘은 그들에게 황제와 아실의 안위에 대해 질문 했다. 대답은 시원찮았다. 보다 나은 대답을 끌어내기 위해 애쓰는 지멘의 곁에서 준람은 자신이 죽여야 하는 두 여인의 생사 여부를 묻 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레콘의 침묵이었고 지멘은 준람 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준람은 지멘의 침묵에 대해 신 경 쓰지 않았다. 지멘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함께 움직이고 있는 동 행에 대해 침묵했다. 빙토가 설원이 되고, 빙해로 바뀌었다. 라호친에서 지멘은 두 가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늘누리에서 마지 막으로 탈출한 사람들은 주로 레콘이며 그들은 오래 전에 남쪽으로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라호친 사람들은 도로도곶 바깥의 빙해 에 생긴 거대한 구멍에 대해 말했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가설 은 하늘누리가 빙해에 빠졌다는 것이지만 그것을 입증해줄 사람은 없 었다. 지멘과 준람은 라호친 사람들이 가르쳐준 빙해로 향했지만 가 혹한 추위와 폭설은 사건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놓았다. 두 사람은 그 곳에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혹 하늘누리에서 탈출한 레콘들 중 일부가 최후의 대장간으로 대피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내놓은 것은 준람이었다. 지멘은 지친 표 정으로 준람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헤치카와 돔의 간호를 받고 있는 아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지멘은 아실을 만날 수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아실의 껍 데기뿐이었다. 아실은 음식을 먹이면 받아먹고 눕혀놓으면 잠들었다. 하지만 그녀 는 옷을 입은 채 배변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실은 울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아기만큼 도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 없는 동물이라도 고함을 지르면 무서 워하지만 그녀는 바로 곁에서 들리는 계명성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 녀가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안대 를 건드릴 수 없었다. 지멘과 준람이 도착하기 전 아실을 씻겨야겠다 고 생각한 돔은 그녀의 안대를 벗기려 했다. 하지만 아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돔을 할퀴고 물어뜯었다. 돔은 홧김에 아실을 빙원에 내버리자고 외쳤지만 결국 그녀의 안대를 놓아둔 채 씻긴다는 타협안 을 받아들였다. 아실도 그 타협안에는 순응했다. 헤치카는 그 사실에서 몇 가지 가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실은 외 부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안대를 건드릴 경우 아실은 분명히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아실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 지 않는 것은 그 자극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에 신경 을 쓰지 않는 것이다. 헤치카는 지멘에게 자신의 가설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 대화가 양쪽으로 단절되었다. 지멘은 아실에게 말할 수 없지만 그녀의 말을 들을 수는 있었다. 하 지만 아실은 이제 말하지 않는다. 양쪽의 벽이 모두 막혔다. 지멘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 실의 곁에서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지멘은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시도했다. 준람은 불평하지 않았다. 지멘이 가끔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치는 준람의 눈빛에는 아무런 짜증도, 안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준람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지멘을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그 눈에서 아무 런 요구도 읽지 않은 지멘은 준람을 잊었다. 그는 시간이 풍화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그녀가 편지를 보냈다. 지멘은 고개를 돌렸다. 제이어는 빙긋 웃으며 서신을 내밀었다. "제이어 솔한." "그렇습니다. 아실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실의 편지를?" "예. 저 애가 그룸성에 남겨놓은 성입니다. 수신인이 지멘인데, 당 신 외에 다른 지멘일 것 같지는 않군요. 받겠습니까?" 지멘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는 몸을 움직이는 법을 잊어버 린 것 같았다. 지멘은 마치 꺼림칙하다는 듯한 눈으로 제이어의 손에 있는 서신을 바라보았다. 제이어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지멘의 손이 움직였다. 지멘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주위를 둘러본 제이어는 양초가 담긴 상자를 발견하고는 초 몇 개에 불을 더 붙여 세웠다. 방안이 밝아졌다. 지멘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꺼냈 다. 지멘. 당신이 이 편지를 받게 되었을 때 내가 무엇이 되어있을 지 알 수 없네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말하고 싶지만, 나는 지금 그 최악이 어떤 것일지조차 짐작할 수 없어요.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말한다면, 나는 당신의 숙원을 훔칠 생각이에요. 예. 나는 치천제를 죽일 거예요. 그래야 해요. 지멘. 우리가 라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지요? 그녀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서 나는 라세에 대해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알아내기 위해 애썼어요.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 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라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원시 제 그리미 마케로우가 그녀를 계승자로 지명했다는 사실뿐 이지요. 황위에 등극하기 전의 그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 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나는 거꾸로 생각해봐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녀가 계승자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원시제는 왜 그토록 무명인 사람을 지 명했을까요? 그녀가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 그녀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어요. 누구나 그 말에 찬 성하겠지요. 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처럼 찬성하는 것은 아 닐 거예요. 나는 그녀가 말 그대로 사람을 지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라세는, 아라짓 제국의 황제는 정신억압자일 거예요. 아 마도 역사상 최고의. 그녀는 사람을 정신억압할 수 있을 거예요. 믿기 어렵겠지요. 나도 믿기 어려워요. 그것이 사실이라 면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또 어떤 것이든 상상할 수 있 게 되죠. 그녀가 원시제를 정신억압해서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만들었을까요? 옛날 우리가 쥐딤에서 겪었던 일 은 무장 투쟁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타이모가 아니라 레콘과 제국에게 경고를 주고 싶었던 라 세가 일으킨 일일까요? 스카리 빌파는 자신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엘시 에더리를 자유롭게 하면서 동시에 발케네 공 략의 명분을 만들고 싶어하는 라세에 의해 부냐의 탈주를 도운 걸까요? 코네도에서 벌어진 살육극은 지켜줄 성벽과 군인을 잃은 사람들의 좌절과 제국군의 복수심 때문에 일 어난 일이 아니라 발케네를 초토화하려는 그녀의 의도에 부합하는 살육 도구를 얻기 위해 라세가 일으킨 일일까요? 구름이 생기고 바람이 불고 해와 별이 움직이는 것은 그녀 의 뜻일까요? 당신과 나는 라세에게 조종당해서 7년 동안 방황한 걸까 요? 지멘은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황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숨쉬 는 것을 잊고 있었다. 다급한 호흡을 하던 지멘은 하텐그라쥬의 기억 을 떠올렸다. 지멘은 사모의 눈빛을 어제 본 것처럼 떠올릴 수 있었 다. 사모는 말했다. '황제를 죽이려는 숙원을 가진 레콘을 준비해두는 것은 황제의 죽음 도 달성하면서 동시에 후계자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는 괜찮은 방 법이지.' 지멘은 머리를 쓸어만졌다. 딱딱하게 일어선 벼슬이 손길에 걸렸다. 그는 벼슬을 쓸어넘기려다가 포기했다. 갑자기 지멘은 불안감 속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이어는 어느새 의자 하나를 찾아 그 위에 걸터 앉아 있었고 준람은 보이지 않았다. 지멘은 누워있는 아실을 보았다. 아실은 눈 하나로 세상을 마주한 채 가만히 누워있었다. 지멘은 다시 편지를 읽었다. 그런 생각까지 떠올리면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어요. 어쩌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는 황제의 의도 때문인지도…… 제기랄. 그만두겠어요. 이 편지를 다 쓴 다음 나는 라세를 죽이러 갈 거예요. 성 공할지 실패할지 모르겠어요. 만약 내가 성공하고 살아남 는다면 이 편지는 쓸모없겠지요. 하지만 내가 실패해서 죽 는다면 내가 왜 그랬는지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겠지요. 라세가 정신억압자라는 내 가설이 잘못된 것일 경우, 우 리는 우리의 복수심에 의해 그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에 요. 라세가 정신억압자라서 우리가 조종당한 것이라면, 나 는 그녀가 그 능력으로 저지른 일들을 용서할 수 없어요. 따라서 황제를 죽일 거예요. 나에겐 그녀가 정신억압자이 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에겐 상관이 있어 요. 당신은 자신의 숙원을 추구해야 해요. 괴물 같은 정신 억압자의 손에 놀아나선 안돼요. 그녀가 정신억압자라면 당신은 그녀를 공격해선 안돼요. 어떻게 그걸 알아낼 수 있는지는 발케네공이 가르쳐줄 거 에요. 아니, 가르쳐줄지도 모른다고 해야겠군요. 그가 선 택할 일이니까. 나는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어요. 그가 내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려 줄 거예요. 하지만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부탁이 에요. 당신의 숙원을 포기하는 것을 검토해봐요. 그 숙원 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아요. 빌어먹을. 끝낼 때가 되었군요. 더 쓰고 싶은데. 지멘. 나는 편지는 끝났다. 지멘은 분노에 빠져 편지의 마지막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애달픔을 느끼며 편지의 마지막을 바라보았다. 어떤 글도 나타나지 않았다. 레 콘의 모든 힘을 끌어내어도 쓰여지지 않은 글자를 종이 아래에서 끌 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실이 쓴 편지였다. 그 글씨로 알아차린 것이 아니다. 지멘 은 그 내용으로 알아차렸다. 편지는 설명만 하고 있었다. 설명 외에 다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상대 방의 품에 안겨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지 않으니까. 아실이 쓸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지멘. 나는' 지멘은 하늘을 향해 계명성을 내뿜었다. 사라말 아이솔이 처음 느낀 재난은 익사가 아니라 지진이었다. 땅이, 아니, 바닥의 얼음이 흔들렸다. 그것은 명백하게 한쪽으로 기 울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딛고 있는 얼음이 깨진 채 기우는 것이다. 사라말은 깨진 얼음 사이에서 물이 분출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그들 앞쪽에서 들려왔다. 썰매가 앞쪽으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사라말과 파라말은 썰매를 놓 치고는 주저앉았다. 앞으로 구르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취한 동작 이지만, 미래지향적인 동작이라고 하긴 어렵다. 앉은 사람은 움직이 기 어렵다. 사라말과 파라말이 할 수 있는 동작이라고는 주저앉은 채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얼음의 경사는 점점 급해 졌고 두터운 방한복도 그들을 괴롭혔다. 뒤로 물러나기 어려웠다. 끼 기기긱! 하는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깨진 얼음들이 비벼지며 나는 소리인 듯했다. 아이솔 형제는 땅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귀를 틀어 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마찰음에 썰매개들의 비통한 비명이 보 태졌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물이 분출하는 소리, 그리고 분출한 물이 어딘가에 얼어붙는 소리가 찢어지듯 들려왔다. 사라말은 자꾸 앞으로 미끄러지려는 몸을 뒤로 눕히며 논평했다. "시끄러워서 유언도 못하겠군." 파라말이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내질렀다. 사라말은 그것이 '어차 피 유언 들어줄 사람도 없지 않느냐, 우리 다 죽었다, 형을 사랑한 다, 봉급 안 나눠준거 미안하게 생각한다.'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 각하기로 했다. 억울하다면 꽤 억울한 상황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바다 위의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육지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하지만 사라말은 웃긴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생각하 면 퍽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무엇인가가 그의 허리를 콱 잡아당겼다. "몸-에-힘-빼-!" "아트밀!" 파라말이 겨우 말이 되는 소리를 내질렀다. 사라말은 자신의 몸이 무엇인가에 붙잡혀 부웅 날아오른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어 쩐지 낯익었다. 추억을 더듬어본 사라말은 언젠가 금군 부악타에게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와 파라말은 아트밀의 양쪽 겨드랑이에 끼여있었다. 그리고 사라 진 제국의 대신들을 붙잡은 아트밀은 갈라지는 빙판 위를 치달리고 있었다. 몸이 깃털에 파묻혀 있는 것이지만 안온한 느낌은 전혀 없었 다. 아트밀의 깃털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고 세찬 바람이 얼굴에 닿는 느낌은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사라말은 그런 사실들에 불 평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불평하고 싶은 것은 아트밀이 앞으로 달린다는 사실이었다. 빙판은 앞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그곳에 는 틈이 있을 것이다. 사라말은 아트밀에게 수영을 할 작정이냐고 묻 고 싶었다. 그 때 갑자기 아트밀이 그를 내려놓았다. 떨어뜨리는 것 에 가까웠다. 사라말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불길하게 미끄러졌 다. 사라말은 수영이라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 이런 보복을 당하는 것 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수영이라는 말을 입밖에 낸 것도 아닌데. 당신 용인이었습니까?' 사라말이 말도 안되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디선가 섬뜩한 충 격음이 들렸다. 아무래도 철극을 휘두르는 소리 같았고 무엇인가가 투두둑 끊어지는 소리도 뒤이어 들려왔다. 사라말은 아트밀이 개들의 줄을 끊어놓은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좀 더 심화발전 시킬 겨를은 없었다. 사라말은 다시 들어올려져 조금 전의 자리로 복 귀했다. "고향 같은 곳은 없다니까." 사라말이 상황 개선에 별 도움이 안되는 소리를 중얼거릴 수 있었던 것은 아트밀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트밀은 주위를 살피듯 제자리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방향을 정했다. 그는 위로 훌쩍 뛰 어올랐다.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었다. 사라말은 어떤 실수로 심장탑에 끌려가 적출을 당하게 된 인간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속이 뒤집어지고 목구멍에서 신물이 치솟았다. 도약의 정점에서 도약력과 중력이 평형 을 이루는 그 순간은 끔찍했다. 사라말은 자신이 잠깐 사라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굴을 할퀴는 바람은 '그런 착각 집어치우 세요.'라고 친절하게 권했다.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트밀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몇 걸음 달리다가 다시 뛰어올랐다. 그 때마다 빙판이 깨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달리는 시간은 점 점 줄어들었고 어떤 경우 아트밀은 착지하자마자 재도약했다. 쿵, 쾅, 쿠쾅! 아트밀은 갈라지는 바다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라말 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암흑을 저주했다. 물론 눈으로 볼 수 있다 면 굉장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라말은 몸의 통증을 잊기 위 해 무엇인가 집중하여 볼 것이 필요했다. 몸이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 다 사라말은 내장을 토해놓을 것 같은 구토감을 느꼈다. 벼룩이여. 너희들은 위대하다. 내 진작 너희들의 경이로움을 알아야 하거늘…… 도약이 멈췄다. 사라말은 아트밀의 겨드랑이에서 풀려났다. 아트밀은 그를 내동댕이 치지는 않았지만 추위와 통증으로 얼어붙은 사라말의 몸은 땅에 닿자 마자 그 주인을 혼수 상태로 밀어붙였다. 엎드린 채로 사라말은 눈앞 이 부옇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조금 후 사라말은 진짜 눈앞의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떤 돌을 보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땅 위에 하얀 돌이 놓여있 었다. 사라말은 꿈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검푸른 하늘이 보였다. 새 벽녘이었다. 그는 땅에 누워 있었다. 사라말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파라말?" "이어아." "넌 누구냐?" "아이이익……! 여기 있……!" "음. 파라말. 거기 있었구나. 조금 전에 네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던 괴생물체가 있었는데. 너도 들었냐?" 파라말은 비명인지 신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를 흘렸다. 사라말 은 히죽 웃고는 기운차게 허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사라말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맹렬하게 토했다. 평생 먹은 것을 다 토해놓는 듯한 구역질이 느껴졌지만 입밖으로 나 오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라말이 흘린 것은 약간의 침과 위액이 전 부였다. 마지막 식사를 한지 오래되었으니 위장 안에는 내용물이 거 의 없을 것이다. 사라말은 차라리 뭔가가 좀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 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구역질은 더 괴로웠고, 쉽게 멈춰지지도 않았다. 한참 후에야 사라말은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겨우 고개를 들어올렸 다. 주위는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았다. 아니, 그의 눈앞에 불빛이 명 멸하는 것이었다. 사라말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런 동 작을 몇 번 반복한 후 사라말은 주위를 둘러볼 정도의 시야를 회복했 다. 사라말이 제일 먼저 본 것은 바다였다. 바다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깨진 얼음들이 서로 부딪히며 물보라 와 거품을 잔뜩 튕겨올렸다. 사라말은 하늘누리의 추락을 떠올리고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그 때보다는 훨씬 소규모였다. 하지만 그 때보다 훨씬 넓은 곳까지 볼 수 있었다. 그 때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말은 자신이 해안가의 언덕에 앉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 진 바닷바람이 쉼없이 불어닥치는 언덕이었고 나무나 풀은 없었다. 비탈을 뒤덮고 있는 것은 온갖 무채색의 자갈과 흙이었다. 다른 때라 면 을씨년스럽다고 표현할 모습이었지만 사라말은 그 땅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라말은 고개를 돌려 파라말과 아트밀을 찾았다. 파라말은 그에게서 약간 떨어진 땅에 엎드려 있었다. 그를 부르려던 사라말은 파라말이 잠인지 기절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 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잠든다면 얼어죽을지도 모른다. 걱정스러 운 눈으로 파라말을 보던 사라말은 아트밀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았 다. 조금 후 사라말은 낮은 위치에서 아트밀을 찾았다. 아트밀은 걱정스 러운 표정으로 바다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트밀의 시선을 따라 간 사라말은 헤엄을 치고 있는 썰매개들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풍덩거리며 해안을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사라말은 자신 도 모르게 그 숫자를 세려 했다. 하지만 눈이 가물거렸고 아직 충분 히 밝지 않아서 그 숫자를 세는 것은 힘들었다. 사라말은 아트밀을 부르기로 했다. 개들이 모두 빠져나온다 해도 불을 피우지 않으면 모 두 죽게 될 것이다. 북극에서도 야외에서 잠잘 수 썰매개라 해도 몸 이 푹 젖은 상태에선 버틸 수 없으니까. 그러니 아트밀이 해야 할 일 은 개들이 잘 빠져나오는지 보는 것이 아니라 불을 피우는 일이었다. 사라말은 대충 그런 취지의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잘 나 오지 않았다. 사라말은 자신이 혼절하기 직전의 상황이라는 것을 뒤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그에겐 선택의 기회 가 없었다. 사라말은 급속히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 사라말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사라말은 그 생각을 매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붙잡히지 않았다. 사라말은 씁쓸한 기분으로 졸도했다. 엘시는 말에 탄 채 제국군 병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병사들은 불만에 차있었다. 그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의 병사들은 규리하 전쟁부터 계속 전투에 참가했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지쳐 있었다. 발케네로 진공하여 파리조성 앞까지 도달하는 동안에는, 이길 때도 있었고 질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전쟁을 수행중 이었다. 그들은 황제를 위해 싸운다는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 만 규리하로 물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주둔하는 것은 사 기를 유지하는데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제국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국 없는 제국군이 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기율이 흐트러지고 여기저기서 말썽이 일어 났다. 만약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제국군은 순식간에 와해될 것이 다. 그들에게 음식을 제대로 공급하고 제 때 급료를 지불할 수 있다면 그럭저럭 그들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 정부가 사라진 지금 그들에게 군자금을 보낼 사람은 없었다. 발케네 진공을 위해 조 성된 막대한 군자금을 소모하며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도 곧 바닥이 날 것이다. 엘시는 자유무역당에게 돈이라도 빌려야 하나 하 는 우울한 생각을 했다. 물론 그의 얼굴에는 우울한 심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장군이 그들 곁에 있다는 것을 큰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대장군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제국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다. 엘시는 자신감 있는 얼굴을 하려 애쓰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들을 규리하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곁에서 말을 몰고 있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즐거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전혀 즐겁지 않았 다. "그리고 대장군님과 저는 규리하의 장교가 되어야 합니까?" "도리가 없지. 군대는 근거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적이나 다름없어. 게다가 제국을 재건하려면 규리하의 힘을 빌려야 해." "칼리도의 군사가 되면 안됩니까?" "너무 멀다." 시허릭은 말안장을 내려다보았다. "대장군님은 참 대단하십니다. 대장군님께서 규리하를 무너뜨린 것 은 오래된 일도 아닙니다. 자신이 패배시킨 적의 부하가 되겠다는 것 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요. 존경합니다만, 더 쉬운 방법도 있습니다. 규리하를 가지시면 어떻겠습니까?" "산적질을 하자는 건가?" "그럴 필요 없습니다.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하십시오. 사태를 가장 깔끔하게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규리하를 가지신 다음 그 힘을 배경 으로 제국 재건에 나서십시오." 엘시는 입매를 약간 꿈틀했다. "그녀가 싫다더군." "예?" "아냐. 신경쓰지 마라. 굴도하 남작부인과 만났었나?" 시허릭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알려주긴 했습니다만 저도 그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비셀스 규리하는 유서 깊은 가문을 가지고 있고 대장군님은 주인 잃 은 군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자를 위해 결합해야 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지러쿼터 산맥 동쪽에서는 스카리 빌파가 올가미 를 만들고 있습니다. 정복당하지 않더라도 자칫하면 귀족원 회의에 출석도 못하게 될 겁니다." 한 호흡 쉰 다음, 시허릭은 간곡하게 말했다. "그녀의 마루나래가 되십시오." 시허릭은 자신에게 문장가의 재능이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표현이 그토록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시허릭은 엘시 에더리가 그 말을 듣자마자 비수로 찔린 듯한 표정으 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시허릭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엘시는 자제력을 발휘하여 간신히 고개 를 돌렸다. 그는 말갈기를 필사적으로 바라보며 가슴을 진정시킨 후 에 말했다. "……그녀에게 나를 섭정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제안하겠다." "섭정이오?" "그래. 한시적으로 그녀의 섭정이 되겠다. 귀족원 회의가 개최될 때 까지." 시허릭 마지오는 그 제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결혼과 같은 영속적 결합이 아니므로 굴도하 남작부인은 만족하기 어렵겠지만 엘시의 제 안은 타당한 해결책이었다. 시허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법이군요. 알겠습니다. 그녀도 받아들일 겁니다. 언제 제안 하시겠습니까?" "지금 곧." 엘시 에더리는 시허릭과 헤어져 진지를 빠져나왔다. 수행인이나 호 위무사는 없었으므로 엘시는 홀로 규리하성으로 돌아가는 길로 접어 들었다. 그는 혼자서 생각에 잠길 시간이 필요했다. 엘시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겨울이 내려앉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엘시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생 각했다. 그것은 숙고 끝에 나온 결론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떠올린 생 각이었고, 정우와의 결혼을 거부하기 위해 짜낸 생각이었다. 엘시는 자신이 왜 그토록 정우와의 결혼을 거부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부냐 헨로 이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안된다는 책임감일까? 엘시와 부 냐 헨로는 공식적인 선언만 없을 뿐 파혼 상태나 다름없었다. 스카리 빌파와 부냐 헨로가 공식적인 혼례만 없을 뿐 부부인 것처럼. 엘시는 스카리가 왜 혼례를 올리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어쩌면 전쟁을 끝 내고 결혼할 생각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부냐 헨로와 약혼 때문에 다 른 여자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엘시는 갑자기 자신의 사고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부냐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약혼의 책임감 뿐이다. 엘시는 갑자기 자신이 한 번이라도 부냐를 사랑했던 적이 있 는지 의심스러워졌다. 그 의심을 버리고 싶었지만 마음의 창문은 자 유로이 여닫을 수 없다. 의심은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부냐 헨로를 사랑했던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던 엘시는 더 당혹스러운 기억을 떠 올렸다. '부냐 헨로를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탈해 머리돌의 질문이었다. 엘시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떠올리고 싶 지 않았다. '그랬다면 이토록 괴롭진 않겠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엘시는 자신이 부냐를 사랑한다고 말하 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탈해는 뭐라고 말했더라? '죄송합니다. 각하.' '아니, 탈해. 자네 사과는 받지 않겠어. 그 사과는 내 제국이 부냐 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듣도록 하지.' 왜 제국의 보증이 필요한가? 그는 황제의 대장군이기 때문이다. 하 지만 지금 제국은 없다. 그가 기어이 부냐를 사랑하게 만들고 싶었던 그 제국은 사라졌다. 엘시는 오한을 느꼈다. 제국이 사라졌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의 기억이 탈해가 아닌 다 른 사람의 말을 떠올렸다. '대장군님도 제국인데요.' 정우의 말이었다. 소복이 쌓이듯 내리는 비 속에서 빨간 우산을 쓴 채 허공을 걷던 그녀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엘시를 보며 말했다. 엘시 는 그 일이 몇십 년 전의 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의 표정 은, 그리고 그 목소리는 조금 전의 일인 것처럼 생생하다. 엘시는 정 우를 직접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 제국이 부냐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제국이다. 나는 내가 부냐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순하다. 엘 시는 눈에 보이는 듯한 정우의 얼굴을 향해 말했다. 나는 부냐를 사랑하지 않았군요. 그러자 정우가 말했다. "미안해요, 대장군님!" 엘시는 눈을 껌뻑였다. 정우는 그의 앞쪽에서 겁먹은 얼굴로 서있었 다. 기억이 아닌 현실이었다. 엘시는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처 자각하지도 못한 채 규리하성에 돌아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그가 있는 곳은 여전히 바깥이었다. 엘시는 다시 정우 를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엘시는 정우의 뒤편에 있는 탈해를 보았 다. 다시 정우를 본 엘시는 약간 어처구니 없는 느낌을 받았다. 정우는 길 한가운데서 두 팔을 벌린 채 탈해를 감추려 애쓰고 있었 다.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시도고, 정우도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에 만족하려는 것 같았다. 엘시는 말에서 내렸다. 탈해는 그의 눈 을 피했다. 엘시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 "그러니까요. 성 안에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만 탈해가, 사람들이 탈해를 이상한 눈으로 봐요. 겁먹은 눈으로 봐요. 절대로 탈해가 그 럴 리 없는데. 그걸 몰라요. 탈해가 힘들어해요. 너무해요. 탈해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잖아요?" 엘시는 정우가 밖으로 나온 것에 대해 변명하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우의 말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본 엘시는 자신의 인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탈해를 두려워 한다는 말입니까?" 정우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정우는 엘시를 빤히 바라 보았다. "대장군님하고 다르게." "예?" "대장군님은 안 무서워하시는군요? 말에서 내리셨어요." "말에서 내린 것이 왜…… 아, 도망치는 것 말입니까?" 정우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엘시를 보다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깍지를 꼈다. "일부러 그러시는 것 아니군요." 엘시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탈해에게 시선을 옮 겼다. 그의 시선을 느낀 탈해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엘시를 돌아보 았다. "탈해. 미처 신경쓰지 못했군. 사람들이 자네를 경원시하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각하." 탈해는 체념이 아닌 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 속에는 하나 도 당연하지 않다는 어감이 약간 섞여 있었다. 엘시는 탈해가 일으킬 뻔한 재난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기막힌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탈해는 도깨비불을 아끼 기보다는 즐겨 사용하는 도깨비다. 하지만 그가 평소에 만들어내곤 하는 불은 열이 없는 불이었다. 엘시는 바우 성주의 모습을 재현하던 탈해의 재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외에 탈해가 즐겨 보여주는 도깨비불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즈믄누리 바깥에 나와있는 도깨비답 게 탈해는 열이 있는 불은 사용하지 않았다. 주위에 화상을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잔뜩 있으니까. 다행히도 그는 곰방대에 불을 붙일 때 조차 열을 쓸 필요가 없다. 그의 뻐끔이에는 발화 장치가 있으니까. 탈해가 유혈극 속에서 열 없는 불을 폭발시킨 것은 그런 평소의 버릇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행운이 계속될 거라고 믿 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곁에 있는 도깨비가 페시론섬의 재난을 일 으킨 도깨비와 같은 무사장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몸서리쳐지도록 느 낄 것이다. 게다가 아이저 규리하의 존재가 확인된 지금 규리하성에 는 언제 또다른 유혈이 흐를지 모르는 상태다. "왜 안 무서워하세요?" 엘시는 고개를 돌렸다. 정우는 집게 손가락으로 입술 아래쪽을 누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시가 말했다. "당신은 왜 안 무서워합니까?" "예? 저요? 어…… 저는……" 정우는 당혹하여 탈해와 엘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엘시는 그녀 를 도와주기로 했다. "탈해는 내 친구입니다." 엘시는 그녀가 그 대답에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정우는 놀란 표정과 미안한 표정, 그리고 기뻐하는 표정을 뒤섞어서 표현해보였고 그것은 만족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엘시는 고개를 약 간 갸웃하고는 탈해에게 말했다. "그들은 생각을 잘못하고 있군. 자네는 아이저 규리하가 감히 서툰 짓을 할 수 없도록 보장해주고 있어. 이제 아이저는 규리하성을 상대 로 싸움을 걸기 전에 다시 생각하겠지." 탈해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게 됩니까?" "그래. 산책 중이었나?" 탈해 대신 정우가 빠르게 대답했다.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정우는 성밖으로 나온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는 듯했다. 엘시가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돌아가도록 하지. 할말도 조금 있고. 정우? 말에 타 겠습니까?" "아뇨. 걸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요." 엘시는 고삐를 길게 쥐었다. 정우는 환한 얼굴로 엘시를 바라보고는 탈해의 팔을 잡아당겼다. 탈해는 그녀에게 끌리듯 몸을 돌려 규리하 성을 향했다. 엘시는 정우를 가운데 두고 탈해의 맞은편에 서서 걸었 다. 정우는 히죽히죽 웃으며 양쪽을 돌아보았다. 엘시는 섭정건에 대 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우가 먼저 말했다. "팔짱 껴도 돼요?" 엘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그 표정이 승락이라고 생각하는 듯 양쪽으로 손을 뻗었다. 엘시는 정우가 원하 는 것이 탈해와 자신에게 팔짱을 끼는 것임을 깨닫고는 약간 우려를 느꼈다. 엘시의 신장도 작지 않지만 탈해는 도깨비의 신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엘시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탈해는 허리를 약간 낮춰서 정우를 도와주었다. 그러자 정우는 탈해와 엘시에게 팔짱을 끼게 되 었다. 거의 매달린 것에 가까웠다. 정우는 까르륵 웃고는 두 발을 허공에 띄웠다. 엘시는 황급히 허리에 힘을 주었고 탈해는 싱긋 웃었다. 정 우는 그네를 타듯 발을 구르고 허공을 찼다. 엘시가 생각하기에 그것 은 규리하 섭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에 어울리는 상황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엘시는 규리하성에 도착한 후에 이야기를 하기로 했 다. 그는 탈해에게 맞춰 보폭을 늘였고 탈해는 그를 위해 보폭을 줄 였다. 두 사람은 정우를 가운데 매단 채 규리하성을 향해 걸어갔다. =============================================================== 해도 해도 끝이 없는 포맷 후 재설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익 숙해지지 않는군요.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9-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04 조회수 : 1344 피를 마시는 새 19. 언약을 이행하는 태도 - 3 틸러 달비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사랑하는 종제여. 무슨 향기 같은 것이 나는 듯한데." "사랑하지마." 이레 달비는 으르릉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종형 틸러 달비에 대해 사람들은 호평을 내리는 듯했고, 이레가 보기에 그것 대부분은 이레 자신에 대한 것처럼 실제와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레는 틸러가 도 무지 상황파악을 못하는 바보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의 발언 같은 경 우가 그러했다. 이레는 사랑이 아름다운 말이라는 것에 찬성했다. 그 것은 지고의 가치다.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말도 삼가해야 할 경우 가 있는데, 예를 들어 두 남자가 누워있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라면 그것은 몹시나 듣기 부담스러운 말이 된 다. 하지만 이레는 그 상황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건은 이레나 틸러의 잘못이 아니라 짐마차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마차가 다시 덜커덩거렸다. 그것은 건초나 낟가리, 채소, 땔감 등을 나르기 위해 농가에서 사용함직한 보통의 짐마차였다. 어쨌든 틸러는 그 마차에서 아무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레는 과 거 시모그라쥬에서 그와 비슷한 마차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이레는 어렵잖게 이중바닥을 찾아내었고 그로써 그들은 운송 정보를 캐낸 파 림 부녀에게 낯을 들 수 있게 되었다. 이중 바닥에서 발견한 - 원래 아이저 규리하에게 가기로 되어 있었던 - 금붙이의 양은 상당했다. 이레는 그것이 임무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틸러는 흥미로운 발상을 떠올림으로써 그것을 임무의 시작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종제 에게 금붙이가 되자고 제안했다. 이레는 그것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 했다. "아이저의 소굴에 몇 명이나 기다리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서?" 공교롭게도 이레에게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 은 모두 그것이 멋지고 흥미로운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들은 전문가가 아니다. 이레는 납치 및 구출 전문가인 자신의 견해에 서 볼 때 그런 몽상적인 침입 계획은 이야기 장식용으로는 어울리겠 지만 말도 안되는 것이며 도무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역설했다. 하 지만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이저 규리하의 지난번 침입에서 규리하성은 완전파괴의 위험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그 런 일이 또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아이저 규리 하의 일당을 체포하거나 최소한 규리하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레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이저가 또다시 공격할 가능성은 적다고 말했지만 그 주장은 묵살되었다. 이레는 다 수결에 승복해야 했고, 또 이중바닥에 틸러와 함께 숨는 것에도 동의 해야 했다. 이레는 양심상 도저히 틸러에게 아래에 깔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 다. 양자의 체격차를 볼 때 그것은 폭행에 가깝다. 이레는 투덜거리 며 아래에 누웠고 틸러는 그 위에 드러누웠다. 마부 곁에 앉기로 한 사람은 세레지 파림이었다. 세레지는 겉으로 보기에 위험해 보이지 않았고 또한 이레는 그녀라면 귀머거리라도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짐마차의 이중바닥에서 틸러를 가슴 위에 눕힌 채 사랑한다 느니 하는 말이나 들어야 하는 처지에 빠져서, 이레는 자신이 왜 좀 더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나 후회했다. 다행히도 틸러가 강조하고 싶 었던 것은 향기 쪽이었던 듯하다. "아무 것도 안보이니 냄새라도 맡아야 하잖아. 무슨 냄새 안나? 나 는 과일향 같은 것을 맡았어. 혹시 과수원 같은 곳을 지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레는 틸러의 발랄한 추리욕을 냉정하게 꺾었다. "틸러. 여기가 설령 진짜 과수원이라도 이 계절에 무슨 과일향이 나 겠어? 이 마차가 여름철에 과일을 많이 날랐나 보지." 틸러는 그 의견에 대해 다시 반론을 제시하려 했다. 그 때 이중바닥 과 그 위에 쌓인 건초 때문에 희미하게 들리는 세레지의 외침이 들려 왔다. "이 놈의 말들이 발정이 났나, 왜 이렇게 숨소리가 시끄러워? 조용 히 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이레와 틸러는 동시에 숨소리를 낮추었다. 짐칸에서 들려온 소음을 차단한 세레지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곁에는 불운한 마부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몰고 있었다. 겨울철 에 그토록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이상하게 보였다. 세레지는 즉각 진화에 들어갔다. 그녀는 짜랑짜랑하게 말했다. "당신들이에요?" 마차 앞쪽에 나타난 두 남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세레지와 마부를 바라보았다. 세레지는 그들의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들이 몸살 걸려서 쉬어야 할 사람에게 여기까지 짐마차를 몰고 오라고 말한 몰인정한 사람들이에요? 삼촌. 도대체 얼마나 받기로 한 거에요?" 놀란 마부는 머뭇거렸고 세레지는 그 머뭇거림도 대답으로 만들었 다. "말 못하는 거 보니 또 공짜로 해주기로 한 것이군요! 도대체 뭐 하 는 짓이에요? 사람이 좋은 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지, 삼촌은 친구 부 탁이라면 자기가 죽어나가도 모를 지경이잖아요. 이건 안돼요. 약값 이라도 받아야 해요! 세상에, 이 땀 좀 봐. 이봐요, 당신들도 눈이 있으면 좀 보라구요! 이 사람이 이 엄동설한에 마차 몰 수 있을 것처 럼 보여요?" 극도로 당황한 마부는 당장이라도 거품을 물고 졸도할 것 같은 표정 을 지었다. 그러자 그 얼굴이 정말 병자의 그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다행히도 비밀스러운 화물이 실린 마차를 누가 몰고 오는지 알지 못 했던 남자들은 이것이 좋은 성격 때문에 뒤가 구린 일에도 쉽게 이용 당하곤 하는 삼촌과 극성스러운 조카 사이에 오가는 대화라고 판단했 다. 나무랄데 없는 판단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커다란 농장의 입구였다. 농장은 산 몇 개에 둘러 싸인 분지에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는 그들이 서 있는 산 사이의 소로 였다. 소로는 분지에 고이는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로 역할도 했다. 마차가 서있는 길 바로 옆에 좁지만 세차게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외풍을 많이 타지 않는 분지 저편의 산뿌리 부근에 조성된 거주지는 많은 가옥들이 모여 있어 마을에 가깝게 보였다. 세레지는 농장의 사 용인들이 적어도 백 명은 될 거라고 추측했고, 그래서 그것을 농장이 아닌 장원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장원이라 기엔 규모가 좀 작고 수비에 이용될 성채나 성벽이 보이지 않으니 역 시 농장이 맞을 것이다. 세레지는 이런 곳에 규리하의 전 지배자가 숨어있다면 참 놀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위치는 규리하성에서 인 간의 발로 걸어서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겨울철이라 곳곳의 밭은 텅 비어 있었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관찰을 끝낸 세레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남자들에게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뭐해요? 이 추위에 아픈 사람 세워둘 거예요? 어서 문 열어요! 빌 어먹을 건초 부리고 빨리 몸이라도 좀 녹여야겠어요." 두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소란을 일으키지 말자고 결심한 듯했다. 그 들은 가축이나 짐승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문을 열었다. 세레 지는 마부를 빤히 바라보았고 마부는 경기를 일으키듯 짐마차를 출발 시켰다. 입구에 서있던 두 남자 중 한 사람이 마차를 따라 걸어왔다. 세레지 는 그 남자와 마부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자에게 온갖 이야기를 꺼냈고 마침내 짐마차가 창고 쯤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 도 달하게 되었을 때 남자는 사람이 사람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며, 그런 일이 세레지에게 일어났다고 믿게 되었다. 세레지는 그의 착각을 더욱 부추겼다. 낮고 끈적한 목소리를 내며 어깨를 기묘 하게 늘어뜨리고 걷기 시작한 남자를 보며 마부는 자신이 그와 같은 남자라는 사실에 비애를 느꼈다. 창고 안쪽은 어두컴컴했다. 안쪽에는 세 명의 남자가 더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저 규리하의 얼굴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세레지는 그 중 에 아이저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노련해보였지만 누군가를 지휘 하는 일에 노련하다기보다는 받은 명령을 정확히 수행하는 것에 노련 해보였다. 그들은 근엄하고 사무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낮고 끈적 한 목소리를 내며 어깨를 기묘하게 늘어뜨리고 걷던 남자도 세 남자 와 마주하게 되자 갑자기 그런 태도를 잃고 그들과 비슷한 태도를 취 했다. 세레지는 흥미롭게 그 변화를 바라보았다. '여자들은 혼자 있 어도 여럿 있어도 똑같은데 남자들은 왜 혼자 있을 때와 여럿 있을 때가 다를까?' 남자가 세레지에게 말했다. "마차에서 내려요." 세레지는 내리려는 마부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저씨들 농부처럼 안 보이는데? 농부 맞아요?" 네 남자는 당혹하여 세레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모범적이라 할 만큼 완벽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건초를 내리기 위해 쇠 스랑까지 들고 있었다. 턱이 꽤 장대한 남자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가씨?" "겨울에 땀수건 차고 다니는 농부는 없다, 이 말이지요. 좀 심하게 변장하셨어." 턱이 장대한 남자가 당황하여 말했다. "내가 땀이 좀 많아." 턱이 장대한 남자가 체질에 관한 설명으로 난국을 타개하려 할 때, 마부가 마차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네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마부를 바라보았다. 마부는 두 발에 두 손까지 사용하여 바닥을 기며 외쳤 다. "도망가! 저 여자는……" 세레지가 마부석에서 훌쩍 날아올랐다. 잠깐 동안 세레지는 두 다리를 앞뒤로 크게 벌린 채 허공에 거꾸로 떠있었다. 공중에서 빙글 돈 세레지는 위를 쳐다보는 남자의 장대한 턱을 짓밟았다. 남자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남자의 턱 위에 서 재도약한 세레지는 땅바닥에 사뿐 내려앉아서 빙긋 웃었다. 그 순 간 마부의 고발이 좀 늦게 완료되었다. "……괴물이라고." 턱이 안 깨진 남자들은 당황하여 쇠스랑을 앞으로 내밀었다. "넌 누구냐!" 세레지는 두 눈을 확 불태우며 말했다. "나쁜 녀석들! 벌써 잊었구나. 4년 전의 그 일을!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어. 그 날, 너희들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진 날을!" 남자들은 동시에 4년 전에 자신이 무슨 일을 했나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남자들의 당황이 해소된 것 은 세레지가 원수를 갚기 위해 비각술의 고수를 찾아 나무하기 3년, 물긷기 3년, 불때기 3년을 하고 고수의 아들 일곱을 낳아준 후에야 마침내 비각술의 진수를 익혀 원한을 갚으러 왔다는, 산술적으로 말 이 안되는 부연을 덧붙인 후였다. "잠깐. 4년 전이라고 했는데……?" 놀림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남자들이 격분했다. 하지만 그 들이 지체한 시간은 세레지가 짐마차 옆으로 가서 마차벽을 탕탕 두 드리기에 충분했다. 이레가 생각하기에 그 부분은 틸러의 멍청하고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침입 계획에서 유일하게 합리적인 부분이었다. 이레가 틸러와 겹쳐져 있어야 했던 것은 이중바닥의 나머지 공간에 레콘 한 명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레콘은 마차에서 일어나는 것 이 아니라 거의 마차를 부수면서 뛰쳐나갔다. 놀란 세 남자들 앞에 선 레콘은 호탕하게 외쳤다. "너희들의 행운을 축하한다! 정의가 실현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언 제나 큰 기쁨이지!" 주테카와 그의 철저가 빠져나가서 숨쉬기 좀 편해진 공간에 누워 이 레는 후회했다. 왜 자신이 더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던 것일까. 주테카는 철저를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세 남자와 마부는 쇠스랑을 떨어뜨리고는 턱이 깨진 남자 옆에 무릎을 꿇었다. 현명한 판단이었 다. 한편 주위를 둘러본 주테카는 의아해하며 세레지에게 말했다. "적이 어디 있어?" "저기 다 앉아 있잖아요." "이게 다야? 그런데 왜 불러낸 거야?" "당신이 나와야 아무도 안 다치고 끝나잖아요." 땅에 앉아있던 남자들은 누군가의 턱을 쪼개놓은 여자가 꺼내놓는 평화주의적인 발언에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주테카는 대단 히 정의로운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훌륭한 태도야. 그런데 누가 아이저 규리하야?" 남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차에서 빠져나와서 이레가 나오도록 도와주던 틸러 달비는 남자들을 대충 둘러보고는 말했다. "여긴 없습니다. 하긴 그럴 거라 생각했지요." 마차 곁에 똑바로 서려던 이레는 틸러의 말에 휘청할 뻔했다. "없을 줄 알았다고? 아이저 규리하를 잡으러 온 것 아니었어?" "변경백이 운송 계획이 탄로날 정도로 허술한 곳에 숨어 있을 리는 없지. 여긴 그냥 물건 건네받는 중간 연락점일 거야. 마차 건네주면 저 친구들이 아이저 규리하의 소굴로 마차를 끌고 갈 생각이었겠지." 세레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저 아저씨들이 알고 있겠군? 고문?" 평화주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자들은 입을 쩍 벌렸고 주테카도 좀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세레지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손사래를 쳤 다. "그럴 필요 없어." "아, 농장 주인을 족쳐야 해?" "아무도 족치지 않아. 세레지. 난 이 친구들에게 전할 말이 있거든. 이레. 가서 문밖을 살펴봐." 이레는 창고의 문쪽으로 달려가 바깥을 살펴보았다. 바람이 휭휭 부 는 겨울의 텅 빈 농장 풍경만 보일 뿐 수상한 낌새는 없었다. 이곳저 곳을 세심하게 살핀 이레는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틸러는 땅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들 곁에 다가가 섰다. "나는 가시나무 군단 312 소대장 틸러 달비 부위다. 그쪽의 이름은 말할 필요 없으니 그냥 들어라. 너희들에게 올 예정이던 금편 상자는 우리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금편을 보낸 모인사의 집에는 지금쯤 레 콘 두 명과 내 소대원들이 방문하고 있을 거야." 남자들은 분노를 - 주테카를 감안하여 조금만 - 드러내었다. "그 인사와 그 가권들은 체포되겠지만 너희들은 체포하지 않아. 놓 아줄 테니 변경백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해라." 남자들은 깜짝 놀랐다. 세레지는 일이 재미있어진다는 표정을 지었 고 이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저 규리하에게 말을 전하고 싶었다 면 빼낸 상자 대신 서신이나 한 통 담아서 보내면 그만이다. 이것은 틸러의 화려취미일 뿐이다. 물론 언제든지 체포할 수 있다는 식의 엄 포를 전달하는 효과는 더 크겠지만. 틸러가 말했다. "아이저 규리하. 투항하십시오. 지금 제국의 정부는 실종되었고 만 방에서 군웅들이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 폭풍이 다가온 밤 길에서 길을 잃고 등불까지 꺼트린 위급한 상황이나 진배없습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규리하의 가련한 민초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규 리하의 굳건한 지배자입니다. 그런데 한 때 규리하의 지배자였던 당 신이 규리하의 지배구조에 분란을 일으켜 그 백성들을 불안하게 만드 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투항하여 따님을 도와 규리하를 안정 시키고 불안한 외세로부터 규리하를 지키십시오. 당신의 결단은 규리 하 백성들의 홍복이 될 것입니다. 제국을 위해 변경백의 보좌를 초개 처럼 버리고 남쪽으로 떠났던 후사린 규리하를 떠올리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고통에 시달리는 어린 딸에 대한 아비의 측은지심을 떠올리 십시오. 아버지는 그 딸의 방패가 되고 성채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 의 심장을 겨누는 아버지를, 딸은 원하지 않을 겁니다. 부디 훌륭한 결단으로 깨끗한 이름을 후대에 전하십시오. 당신의 딸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국군 부위 틸러 달비." 틸러 달비에 대한 이레의 평가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지 만 세레지와 주테카의 경우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세레지는 감 탄한 표정으로 틸러를 바라보았고 주테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침내 으흐흑 하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이레는 참담한 심정으로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만졌다. 틸러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알겠어?" 남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엉뚱한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적어주는 편이 좋겠군. 너무 길어." 틸러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문도 창문도 없는 벽에 한 남자가 기대어 서있었다. 세레지는 재빨리 문을 바라보았지만 그 곳에는 이레가 걸어둔 그대로 걸쇠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처 음부터 창고에 있었다면 보였어야 했다. 틸러가 말했다. "이중 속임수였군요. 지하입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때 문앞에 있던 이레가 훌쩍 달려와 사 촌형 곁에 섰다. 그는 사촌형에게 속삭였다. "결국 여기 있었군." "내 생각이 짧았어. 이곳 지하에 숨어있었군. 그렇다면 저 마차는 이곳에서 금편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떠날 작정이었겠지. 우리를 속이 려고." 사촌형제의 대화를 듣던 주테카는 깃털을 조금 세웠다. 이레는 종형 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반갑습니다. 아이저 규리하 변경백." 아이저 규리하는 틸러와 이레, 세레지, 그리고 주테카를 죽 둘러보 고는 다시 틸러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담하군. 네 명이서." 틸러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각하께서 여기 안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계신 줄 알았다면 더 데려왔을 겁니다." "뭘 더 데려와? 잡아가면 되지." 주테카가 앞으로 훌쩍 걸어나왔다. 그러자 이레와 틸러가 동시에 손 을 올려 주테카의 앞쪽을 가렸다. 어리둥절해 하던 주테카는 아이저 의 발 근처에 물통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테카는 흠칫하며 뒤 로 물러났다. 아이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을 전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군?" "그렇습니다." "나도 자네를 그냥 보내주겠어. 내 대답을 전해야 하니까." 세레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아이저의 전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주테카의 감시 아래에 놓여있는 다섯 사람뿐, 다른 사람이 숨어있을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홀연히 나 타난 아이저의 경우를 놓고 볼 때 발견하지 못한 비밀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저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혼자 나타났을 것 같지도 않았다. 틸러와 이레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제자리를 지키며 아이저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뭡니까?" "비셀스에게 전해라. 위기에 빠진 규리하의 백성들을 정말 돕고 싶 다면 변경백위에는 그 자리에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런데 즈믄누리에서 자란 그 애가 통치에 대해 무엇을 알겠느냐? 아버 지에게 투항하라. 그러면 즈믄누리로 돌아가도록 보살펴주겠다." 틸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각하는 반란자입니다." "반란자? 무엇의? 나를 반란자로 지목한 황제는 사라졌다." "폐하는 사라졌어도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틸러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가 어딘가의 모호한 방향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제국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셀스 규리하에게 충성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각하의 병사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저 와 그들에게 지나친 요구입니다." 아이저는 침묵하며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가 말했다. "각하도 아시겠지만 3개 군단을 편성할 수 있는 잘 훈련된 제국군이 규리하성 근처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무장이 그들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지금 규리하를 차지하신다 하더 라도 언제 그만한 군대를 가질 수 있으시겠습니까? 스카리 빌파는 이 미 움직였습니다. 속셈이 뻔히 드러나는 움직임입니다. 가질 수 있는 만큼의 힘을 확보한 다음 자의대로 귀족원 회의를 개최하고 귀족들의 추대를 강요하여 황위에 등극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왜지?" "이레." 틸러는 이레를 돌아보았다. 이레는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모그라쥬가 반대할 겁니다. 팔디곤 토프탈 공작은……" "대장군을 억류했었지." 이레는 눈을 꿈틀했다. 아이저가 말했다. "나는 발케네에 있었다. 락토 빌파의 계획을 대강 알고 있다." "그것이 뭡니까?" "아마도 공작이 제국을 원했다는 식으로 착각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제국을 훔치길 원한 적이 없다. 그가 원했던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제국을 쪼개는 것이었다. 그가 그런 속내를 말한 적 은 없지만, 시모그라쥬공과의 위험한 연합을 선택한 것을 보면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공작은 자신이 제국의 주인을 암살한 후에 제국 의 남부는 시모그라쥬가 가져도 좋다고 생각했겠지." 틸러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이저가 말을 맺었다. "락토 빌파의 갑작스러운 사망 때문에 발케네와 시모그라쥬의 연합 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변화는 재조정될 수 도 있어. 스카리는 팔디곤 토프탈 공작과 잘 지낼 수도 있겠지." "각하." 틸러가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저를 바라보았다. "각하. 갈가리 찢어진 제국을 원하십니까? 기회만 오면 서로를 침략 하려고 벼르는 자들이 할거하는 세상을 원하십니까? 보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사람들의 귀한 힘이 경쟁과 분쟁으로 낭비 되는 세상을 원하십니까?" 아이저는 속마음을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런 세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국을 잃은 대장군과 언제나 북부의 방패였던 규리하는 서로 손을 잡고 귀족원 회의를 주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국의 새주인을 선출해야 합니다." "발케네와 시모그라쥬, 둘과 싸우면서? 발케네에는 무적의 레콘 부 대가 있다. 시모그라쥬에는 불사의 나가 군대가 있고. 이 시대 최강 의 무장이라는 그 남자는 그들 모두를 잠재우고 공평한 귀족원 회의 를 열 수 있다는 건가? 그리고 그 귀족원 회의가 그 남자 아닌 다른 사람을 황제로 선출하면 새 황제의 대장군이 되기라도 할 거라는 건 가?" 틸러는 두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 분이 그러실 수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분도 모르 실 겁니다. 하지만 그 분은 그렇게 하시려 합니다. 그런데……" 틸러는 앞으로 한 걸음 불쑥 걸어갔다. "각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아이저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대답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아이저 규리하는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 다. 그가 원하는 것은 복수였다. 충성 서약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그를 무참히 짓밟았던 치천제에 대한 복수. 치천제에게 복수하고 규리하를 되찾는 것이 그의 복수심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 만 치천제는 홀연히 사라졌다. 복수의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만약 황제에게 후손이 있었다면 아이저는 그 자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겠 지만 치천제에게는 후손도 없다. 복수심은 남아있지만 그 대상은 없다. 복수심을 전이시킬 대상도 없 다. 황제는 제국 정부와 함께 사라졌고 남아있는 것은 정부 잃은 제 국의 사람들이다. 황제의 백성이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복수한다는 것 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아이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규리하를 되찾아 내 후손에게 그것을 물려주는 것.' '정우를 나의 후손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아이저는 그것이 문제의 관건임을 알게 되었다. 정우를 규리하로 인 정할 수 있는가. 그러기 어려웠다. 정우는 즈믄누리의 도깨비에 가깝 다. 정우에게 규리하를 넘기는 것은 타인에게 넘기는 것이나 마찬가 지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딸이기도 하다. 갑자기 아이저는 결단을 내렸다. "회담을 요청하겠다." "예?" "가서 비셀스 규리하에게 전해라. 비무장 회담을 요청하겠다. 그 애 의 아버지이긴 하지만, 사실상 나는 그 애에 대해 모른다. 아마 나보 다 자네가 그 애에 대해 더 잘 알 것이다. 나는 일단 그 애를 알아야 겠다. 지금은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다. 닷새 후 시간과 장소를 알 릴 사람이 규리하성 정문에 나타날 것이다." 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물러가라. 그 마차를 가지고 떠나는 것이 좋겠군. 되돌아오지 는 마라. 우리는 이곳을 떠날 테니까." 틸러는 뒤로 물러났다. 세레지는 마부석에 앉았고 틸러는 천연덕스 럽게도 그 옆에 올라앉았다. 이레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짐칸에 몸을 얹었다. 혹 추적이 있을 경우 마차 밖에 있는 편이 싸우기 좋다고 생 각한 주테카는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들이 일어나 창고의 문을 열었다. 세 레지는 마차를 출발시켰고 주테카는 그 뒤를 엄호하듯 하며 뒤따랐 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저는 고개를 돌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다른 바닥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바닥의 일부가 갑자기 아래로 꺼졌다. 그곳에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고 그 계단을 통해 몇 명의 사 람들이 올라왔다. 가장 앞쪽에 서있는 것은 시카트 규리하였다. 비밀 문 아래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엿들었던 시카트는 곤혹스럽다는 얼굴 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왜 회담을 요청하셨습니까?" "네가 들은 그대로다. 나는 네 누나를 알아야겠다." "누나에 대해 알게 된 다음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누나는 황제 의 개입니다! 황제는 아버님에게서 규리하를 뺏어 누나에게 넘겨주었 습니다. 누나가 규리하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거부하고 자결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누나는 뻔뻔하게 황제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었습니다! 그럴 자격이라고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으 면서!" 아이저는 시카트와 재회하면서 느꼈던 낯설음을 다시 느꼈다. 그곳 에는 아이저가 알던 막내아들 대신 낯선 청년이 있었다. 그리고 아이 저는 그 낯선 청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 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침묵을 바라보던 시카트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누나는 사라진 황제의 곁으로 가야합니다." 피라말 아이솔은 아스캄이 목가적인 도시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 다. 아마도 성채매장자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해들은 듯했다. 그리고 그가 직접 목격한 아스캄은 들었던 이야기에 정확하 게 일치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굉장히 심심한 땅이었다. 아스캄의 주력산업은 농업이었고 겨울은 농한기다. 가을에 거둔 곡 식은 아직 창고에 푸지게 쌓여있었고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그리고 할일이 없어서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남작의 파묻힌 성 앞에 서있 는 사라말과 파라말, 그리고 아트밀 주위에 당장 소대 편성을 해도 무방할 정도의 인파가 몰려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스캄 사람들은 단지 구경을 위해 그들 주위에 몰려든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라말과 파라말에게 용건을 가지고 있었고 그 용건 은 패기가 넘쳐 보이는 청년의 입을 통해 나왔다. 청년은 얼굴을 붉 힌 채 파라말에게 말했다. "이젠 정말 우리가 쪽팔려서…… 아, 이런.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민망하다." "예. 민망합니다. 거지 남작이 다스리고 있다고 다른 지방 것들이 깔봅니다. 확 때려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남작님은 아 스캄을 잘 다스리고 있거든요? 이젠 성을 파내주셔도 될 것 같습니 다.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때요!" 인파는 동의의 함성을 와 내질렀다. 청년은 그 응원의 함성에 자신 이 레콘이라도 된 듯한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헤헤, 저 뭐랄까. 남작님께 식사 대접하고 잠자리 돌봐드 리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울 것 전혀 없지요. 하지만 남 작님이 집에 계시면 서로가 불편하거든요. 남작님도 불편해하시는 것 같고요. 저희 집에서도 몇 번 머무셨는데, 와, 저는 남작님이 그렇게 일을 많이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그 전까지는 남작님은 놀고 먹는다 고…… 아, 이런. 그러니까 제 말은……" "한가하다." "예. 굉장히 한가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소 송 하나 된통 걸리면 판결 내릴 때까지 며칠씩 잠도 제대로 못 주무 시더군요. 그것 말고도 무슨 골치 아픈 일이 그렇게 많은지, 어이구. 선친이 물려주신 밭떼기 갈아먹고 사는 것이 백 번 편하지 귀족은 되 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런 일들을 저 희들 집안에서 하시면 남작님도 저희들도 좀 불편하거든요?" 사람들은 덩달아 자신의 집에 골케 남작이 머무를 때 일어났던 불편 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족들이 제멋대로 뒹굴던 자신의 집이 법정이나 회담장, 심의처, 심지어 수사전담반으로 사용되는 것은 그 들에게 꽤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던 듯하다. 파라말은 그들의 주장을 대충 정리했고 그것이 '골케 남작 일 잘하니 성 줘서 쫓아내자!'임을 확인했다. "여러분들의 뜻은 잘 알았지만 그건 규리하공께서 정할 일이군요." 청년은 고개를 꾸벅였다. "예.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랏님께 말씀드리려 누구를 보낼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모두들 먹고 살기 바쁜지라……" 파라말은 그들이 지루해 죽을 지경 아니었나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마 수줍음과 두려움이 더 정확한 이유일 것 이다. "나랏님에게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청년은 조금 전 들었던 파라말의 직함을 떠올리려는 듯 잠시 고통스 러운 표정을 짓다가 포기했다. "……귀한 분들이 오셨으니 말입니다. 사실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나랏님 앞에서 무슨 말이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귀한 분들이 직접 살 피시고 골케 남작님의 성을 파내주십사 탄원하면 나랏님께서도 진지 하게 생각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저기 남작님이 오시는군요!" 파라말 아이솔은 청년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누가 남작인지는 알 기 어려웠지만 몇 명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 다. 파라말은 잠시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형을 바라보았다. 이제 껏 자신이 사람들을 상대했으니 좀 교대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심정 에서 그런 것이지만, 파라말은 곧 관두기로 했다. 교대를 하면 지금 사라말이 하고 있는 일, 즉 아트밀을 상대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 고 파라말은 그것이 정말 난감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골케 남작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인파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서있던 사라말은 파라말이 자신을 흘끔 쳐다본 것을 느꼈다. 사라말은 모든 것이 엉망이며 우리는 대파국을 목전에 두고 있다에 해당하는 눈짓을 보내주려 했지만 파라말이 먼저 고개를 돌렸기에 그 시도는 시도되지도 못했다. 사라말은 뚱한 표정 으로 최근 아이솔 형제의 고민거리로 급부상하고 있는 존재를 바라보 았다. "사막은 아름다울 거야. 사라말……" 아트밀은 우수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말은 살을 지지는 열 기, 죽음 같은 목마름, 살인적인 모래폭풍, 얼어죽을 것 같은 밤의 추위 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말했던 것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사라말은 이 현상이 도대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생각 했다. 빙해를 가로지르는 위대한 업적의 종착점은 데린보트였다. 비록 썰 매는 물에 빠졌지만 썰매개들은 모두 안전하게 상륙했고 아트밀은 그 것들과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솔 형제를 데린보트 시내에 무사히 데려 다놓았다. 며칠 동안 요양한 후 사라말은 아이톤에서 썼던 것과 비슷한 수법으 로 자유무역당사를 노략질하려 했다. 하지만 데린보트에는 자유무역 당사가 없었다. 난처한 처지에 빠질 뻔한 일행을 구한 것은 바다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썰매개들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빙해를 가로질러왔 다는 그들의 설명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믿었 고, 그 사람들 중에는 그런 위대한 일을 성공시킨 개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라말은 썰매개들의 역량보다는 아트밀의 역량 이 더 컸다고 생각했지만 그 개들의 품종이 좋은 것도 사실이었기에 양심의 부담 없는 가격으로 개들을 팔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같은 일 을 시도하려면 바다 위를 건널 수 있는 레콘을 찾아보라는 주의도 남 겨주었다. 개들을 팔고 벌어들인 돈으로 그들은 숙박비를 제공하고 말 두 마리 도 구입할 수 있었다. 사라말과 파라말은 말에 올랐고 아트밀은 그 곁을 달렸다. 그 때까지도 규리하까지 남은 여정은 탄탄대로인 듯했 다. 하지만 데린보트를 떠나고나서 얼마 후 아트밀이 기묘한 언행을 시작했다. 그는 규리하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길 원했다. 그리고 아 트밀이 원하는 목적지는 사막이었다. 어떤 사막이냐고 묻는 형제들의 질문에 아트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사막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가자, 사막으로. 고혹적인 아지랑이가 황금빛 모래 위에서 춤추는 곳.' 대략 이런 식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언행의 기저에 있는 것을 사라말이 조금이나마 끌어낸 것은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아트 밀은 물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빙해 위에서 드러나 지 않았던 물에 대한 공포증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사라말은 잘됐다고 생각해야 할지 잘못됐다고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트밀이 그 공포를 빙해 위에서 드러내지 않은 것은 행운이 었다. 사라말이 이미 인정하고 있듯이 그 여행은 얼어붙은 바다 위를 건널 수 있는 레콘이 존재했기에 성공할 수 있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한꺼번에 쏟아져나온 공포는 사라말과 파라말을 꽤 곤혹스럽 게 만들었다. "생각해봐. 사라말. 사막의 투명한 햇빛 아래 드러누워 티 없이 맑 은 하늘을 바라보면……" 화상을 입고 데굴데굴 구르게 되지. 실명은 부록으로 따라올 테고. 사라말은 머리를 내젓고 싶었다. "아트밀. 예. 사막으로 갑시다. 하지만 우선 규리하에 들른 다음에 갑시다." "지금 당장 가자." "우리는 황제의 유지를 대장군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아트밀은 다 안다는 듯한 천진한 얼굴로 사라말을 보며 말했다. "그거 거짓말이잖아." 사라말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아트밀. 그러면 혼자 가면 되잖습니까. 우리는 규리하에 있을 테니 아무 사막에나 가서 실컷 투명한 햇빛 즐기고 돌아오세요." 아트밀은 부리를 콱 다물었다. 이것은 처음 나온 말이 아니다. 파라 말이 이전에 몇 번이나 그렇게 사막에 가고싶다면 혼자 가면 되지 않 냐고 말했지만 아트밀은 그것을 거부했다. 혼자 가는 것은 싫다는 것 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트밀은 규리하에 간 다음 사막으로 가자는 사라말의 설득에 수긍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트밀이 사막행을 주장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아트밀은 사막으로 가자 고 주장하다가도 파라말과 사라말의 반대에 부딪히면 자신의 주장을 보류했다. 하지만 점점 아트밀의 주장을 보류시키는데 쓰이는 단어들 이 많아지고 있었다. 한숨을 돌린 사라말은 동생과 아스캄 사람들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라말은 아트밀이 다 음에 사막행을 주장하면 그걸 보류시키기 위해 한나절은 소모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19-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05 조회수 : 484 피를 마시는 새 19. 언약을 이행하는 태도 - 4 정우는 눈을 깜빡깜빡하며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그것이 무슨 표정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셨습니까?" 질문하면서도 엘시는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이해하지 못했다면 웃었을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역시 정우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아뇨. 섭정이 뭔지는 알아요. 대신 통치하는 거죠." 대답한 정우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정우는 창가 가까운 곳에 놓여있는 새장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엘시는 문 득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에 저편에 앉아있던 탈해가 고개를 홱 돌리 는 모습이 들어왔다. 엘시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탈해의 뒤통수를 보다가 정우를 쳐다보았다. 정우는 허리를 굽혀 새장 속의 인조새를 바라보았다. "제가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를 섭정으로 삼아야 할까요?" "방귀 냄새만으로 대장 질환의 종류를 판별하긴 어렵다." "고맙습니다." 엘시는 얼굴에 벌집이 생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탈해 쪽으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고 그제서야 탈해가 어깨를 떨고 있는 것을 보았 다. 탈해는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정우가 말했다. "항상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이에요." "그렇습니까." "대장군님은 시시하지 않은 분이세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시시한 분이라면 황제 폐하께서 실종되었다는 것을 안 즉시 칼리도 로 돌아가 자기 땅을 지키면서 누구를 차기 황제로 지지해야 가장 많 은 것을 얻을 수 있을지 계산하시겠지요." "그건 바르지 않습니다. 나는 황제의 대장군입니다." "그것이 바른지 바르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시시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대장군님은 시시하지 않아요." 엘시는 현상을 보는 두 사람의 시각차를 느꼈다. 그것은 둘 이상의 사람이 한곳에 있을 경우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정우와 엘시 의 시각차는 특이했다. 엘시는 그것에 대해 조금 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우가 먼저 말했다. "대장군님. 섭정은 들이지 않겠어요." 엘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정우의 권한이니 존중 하는 것이 바르다는 의사를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자신의 대답을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양쪽에 모두 공정한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군정자문위원회는 해체 되었고 그 소속위원이셨던 분들은 지금 규리하 정부를 잘 이끌고 계 세요. 그 분들에게 특별히 섭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리 고 칼리도의 주인이신 대장군님이 다른 땅의 대리통치자가 된다는 것 도 어울리는 일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그것이 대장군님의 고민을 해 결할 방법인 것 같지도 않고요. 조금 전 새님도 현상이 원인을 설명 하지는 않는다고 말씀해주셨잖아요?" 엘시는 그게 그런 뜻이었나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그런 뜻인 듯도 했다. "제국군을 규리하군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질환을 해결하는 방법 이 아닐 거예요. 왜냐 하면 대장군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군사로 규 리하를 돕는 것이 아니니까요. 대장군님은 제국을 원하시죠?" "그렇습니다." "왜지요?" "나는 황제의 대장군입니다." 단호한 대답에 정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한손으로 뺨을 받친 채 대장군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입술은 무슨 말을 할듯 움찔거렸 지만, 정우는 말하지 않았다. 혹 나올지도 모를 말을 기다리며 그 입 술을 바라보던 엘시는 갑자기 몸 어딘가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 같 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또다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제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고. 엘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정우의 다리 쪽을 보다가 서서히 시선을 낮춰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엘시는 자신의 무릎을 바 라보았다. 오래된 회칠이 벗겨지듯 현실의 일부가 아래로 떨어졌다. 엘시는 그 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 어떤 남자가 있다. 지저분한 머리카락 을 갈기처럼 흩뜨려놓은 채 꿈틀거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사람이 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깝다. 추잡한 동물이다. 그 동물은 좁고 어두운 곳에 갇혀 있었다. 몸 하나 눕히기도 힘든 좁고 냄새 나는 공간에서 동물은 앞발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앞발이 움직일 때마다 주위에 사람이 나타났다. 동물은 사람을 그렸다. 작은 사람, 큰 사람, 옆을 보인 사람, 웃는 사람, 고함 지르는 사람. 동물은 사람을 볼 수 없었다. 그곳은 자기 콧등도 보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다. 하지만 동물은 자기 몸에서 나온 침과 피와 분변과 때를 이개어서 사람을 그렸다. 가끔은 눈물이 섞일 때도 있었다. 엘시는 그 남자가 되었다. 엘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자신이 그린 사람들을, 엘시는 볼 수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그렸는데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엘시는 덜 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둠은 본질적인 장애물이 될 수 없다. 그림을 덜 그렸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을 그려야 한 다. 그러면 그 중 한 사람은 보일 것이다. 엘시는 계속 사람을 그렸 다. 주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을 그렸는데 한 사람도 볼 수 없다는 것 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엘시는 자거나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사람을 그리는 것에 몰두했다. 그림 속의 누군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엘시는 추락감에 가까운 만족감을 느꼈다. 마침내 사람이 나타났다. 어둠을 가로지르고 그의 손을 잡은 사람을, 엘시는 조용히 바라보았 다. 당신이 거기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대장군님?" 정우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엘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거운 그의 손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정우의 두 손이 었다. 엘시는 다시 정우를 보았다. "대장군님은 쉬셔야 해요." "괜찮습니다." "괜찮지가 않아요. 대장군님." 정우가 탈해처럼 보였다. 엘시는 놀랐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엘시는 탈해가 정우 뒤편에 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 음을 알게 되었다. 엘시는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 궁금 해했다. 어쨌든 정우와 탈해 모두가 걱정할 만한 짓을 한 것은 분명 했다. "왜 내가 괜찮지 않다는 겁니까? 내가 무슨 일을 했지요?" "대장군님. 대장군님은 고개를 떨군 채 신음하셨어요. 편찮으신 것 이 분명해요." "나는……" "자기가 어떤지도 잘 모르시잖아요." 엘시는 할말이 없었다. 정우가 그의 손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시모그라쥬에서 고초를 겪어셨잖아요. 그리고 정신없이 제국을 종 단하셨고, 그리고 발케네에서 제국군을 거두어 이곳으로 오셨어요." 엘시는 정우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꺼내놓은 지명이 엘 시의 머리를 온통 헤집어놓았다. "시모그라쥬." "예?" "시모그라쥬는 거병할 수 있습니다. 시련의 아르키스 대수호자는 이 성적인 사람이고 제국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려줄 겁니다. 한계선을 넘을 수 없는 것이 나가의 운명인 바에야 그들은 혼란스러 운 제국보다는 질서를 가진 제국을 상대하고 싶을 테니까요. 물론 그 과정에서 시련의 이득을 챙기긴 하겠지만 원칙적으로 아르키스 대수 호자는 제국의 내전에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시모그라쥬공은 시련에 구애되지 않고 거병할 수 있을 겁니다." "예…… 예. 대장군님." 내가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떠들고 있나? 왜 이 이야기에 놀라는 대 신 저렇게 동정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거지? 정말 놀랄 만 한 이야기인데. "아르키스 대수호자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시모그라쥬를 붙잡아놓고 있어달라고." "뱀단지가 없어요. 대장군님." "그렇다면 탈해. 자네가 좀 가주면 안될까? 자네의 번뜩이는 한 달 이면 미라그라쥬까지 날아갈 수 있을 거야. 미라그라쥬로 가서 아르 키스 대수호자의 거병을 막아달라고……" "대장군님!" 정우가 그의 손을 놓고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코가 부딪힐 정도 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부딪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엘시가 퍼뜩 그녀에게 주의를 돌렸다. 정우는 엘시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먼 곳으로 가지 마세요." 엘시는 정우의 속눈썹을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로 물러나고 싶었 지만 엘시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 때 정우가 엘시의 속마음을 알아 차린 것처럼 뒤로 조금 물러났다. 하지만 어깨를 짚고 있는 그녀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모그라쥬까지 가세요? 굉장히 멀군요. 그냥 여기 계세요." "나는 여기 있습니다." 정우는 힐난하는 듯한 눈으로 엘시를 보다가 그의 어깨를 놓고 똑바 로 섰다.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탈해를 돌아보고는 다시 대장군 을 쳐다보았다. "탈해를 미라그라쥬로 보낸다 한들 아르키스 대수호자께서 대장군님 의 요구를 들어주실 것 같지는 않군요. 아르키스 대수호자는 대장군 님이 반드시 귀족원 회의를 개최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엘시는 신음을 흘릴 뻔했다. 당연한 지적이다. 아르키스 대수호자는 제국이 어떻게 안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제국이 빠르게 안정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귀족원 회의를 통한 신황제의 선출이라는 엘시의 방식이 시모그라쥬 의 힘에 의한 제압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이상 아 르키스 대수호자는 엘시의 요청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성 적인 사람이니까. 정우가 말했다. "발케네도 막지 못한 상태에서 시모그라쥬까지 신경쓰시려면 너무 힘들지 않아요?" "예. 발케네의 거병도 막아야 합니다. 아무도 싸움을 일으키지 말 고, 아무도 다치지 않는 상태에서 귀족원 회의를…… 평화적으로 새 제국을……"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가서 막으세요. 하지만 일단 좀 쉬시고요." "예?" "푹 쉬신 다음에 군대를 데리고 규리하를 떠나세요. 그리고 싸움질 하는 사람들 말리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앞으로 안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으세요." 만약 틸러 달비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는 눈빛을 빛냈을 것이 다. 하지만 엘시는 틸러가 아니었고, 그래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엘시는 그것이 축객령이라고 생각했다. 규리하의 통치 자인 그녀에겐 제국군에게 봉지 밖으로 나가라고 말할 권한이 있다. 그리고 엘시는 그 권리를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성격이다. 하지만 규 리하 밖으로 나가면 그 순간 제국군은 와해될 것이다. 그들을 먹이고 입힐 방법이 없으므로. 정우는 열을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제국군을 규합하세요." "제국군을 규합하라고요?" "예. 말씀하신 것처럼 시련이 제국의 빠른 안정을 원한다면 제3차 대확장 전쟁을 벌어지는 않겠지요. 제국 곳곳을 돌며 빠른 시일 내에 200만 제국군을 모으세요. 이곳에서 솥이 병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좋지만 직접 그들을 통솔하시는 것이 더 좋 지 않을까요?" 엘시는 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규리하를 걱정하시는 거죠? 괜찮아요. 제가 제국의 주인이 되고 싶 은 사람이라면 규리하를 공격하는 것보다는 대장군이 제국군을 규합 하지 못하도록 쫓아다닐 것 같아요. 대장군님이 이곳을 떠나면 규리 하는 오히려 안전해질 거예요." "그렇군요. 하지만 그러기가 어렵습니다." "왜죠?"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저는 200만 명을 먹일 방법이 없습니다." 정우는 멍한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다가 조금 후 몸을 홱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던 엘시는 정우가 인조새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는 그 만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우는 정성껏 질문했다. "저, 새님. 대장군님이 제국군들을 유지할 방법이 없을까요?" "염소의 뿔은 비어 있다." "그렇구나!" 엘시는 당황하여 탈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탈해도 엘시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 정우는 새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는 다시 엘시를 돌 아보았다. "알았어요. 그게 답이에요." 엘시는 반쯤 포기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다행히 양쪽 귀 모두 바쁘지 않습니다." "음. 예. 저희 종증조부님은 많은 일을 하셨지요." 엘시는 왜 라수 규리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짐작도 할 수 없 었다. 다행히 정우는 계속 말했다. "하늘누리에는 밭이나 목장 같은 것은 없어요. 하지만 하늘누리 시 민들이 아사의 위험에 빠져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그것도 종증조부님 덕분이겠지요."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우의 말처럼 하늘누리에는 식량 공급원 이라고는 없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식수는 빗물로 해결하 고 음식은 땅에서…… 그 순간 엘시는 벌떡 일어났다. "라수 규리하가 만든 비밀 보급소?" 제국 전역에는 하늘누리를 위한 보급소들이 있다. 하늘누리의 보급 은 지상의 도시들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주로 그 보급소를 통 해 이루어진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걸 이용하시면 될 거예요. 제국 곳곳에 퍼져 있다고 들었어 요. 저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대장군님은 아시겠지요?" 엘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제국군이나 태위청이 아닌 유수부의 관 할 구역이지만 그 소재는 군사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은 유수부의 관할지인데……" 정우는 난처한 듯이 웃었다. "유수부도 실종되었잖아요." 엘시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의 말처럼 유수부도 사라 졌다. 엘시는 그 보급소에 보관되어 있는 비축 물량을 가늠해보았다. 정확한 수량은 유수부의 기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겠지만 엘시는 귀 족원 회의를 개최할 때까지 필요한 병력을 유지할 정도는 될 거라고 확신했다. "가서, 제국군을 모으세요. 대장군님. 근거지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안 될 거예요. 대장군님의 근거지는 제국 전역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사람들에게 귀족원 회의를 열자고 주장하세요. 아마 잘 받아 들여질 거라고 생각해요." "……장교들과 의논해봐야겠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은 상당히 타당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규리하를 떠나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럼, 예. 저, 가서 의논해보겠습니다." 엘시는 목례하고는 몸을 돌렸다. 각지의 비밀 보급소를 이용하며 제 국 전역에서 제국군을 모으라는 정우의 조언은 대담한 것이었다. 엘 시는 그 합리성보다 그 대담성에 매료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성채 매장자의 배포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엘시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정우의 방에서 꽤 먼 곳까지 떠나와 있었다. 엘시는 지금 정우 에게 돌아와 염소의 뿔이 비어 있다는 사실과 라수의 비밀 보급소가 무슨 관계인지 묻는 것이 어울리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잔하일의 자유무역당 사무소에서 스카리 빌파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앞에 있는 자유무역당원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무소는 소박했다. 초라할 지경이었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찻잔에 는 스카리가 마시지도 않고 내버려둔 찻물이 싸늘하게 식고 있었고 커다란 창문에서는 싸늘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조 명기구를 아끼기 위해 창문을 크게 만든 듯했다. 여름에는 시원하겠 지만 겨울인 지금 그 창문들은 실내 공기를 급랭시키고 있었다. 스카 리는 당원들의 입과 코에서 허연 김이 흘러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그렇지 않아도 옹색한 차림새와 빈상 때문에 초라해 보이는 당원 들이 입김을 내뿜자 더욱 빈한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두 눈은 두 려움 없이 맑았다. 스카리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좀 더 알아듣기 쉬운 말로 말해봐." 자신을 사이케라 호미스라고 말한 자유무역당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세퀴라도의 평화를 사겠다는 겁니다." "내가 더 간단히 정리하는 것을 용서했으면 좋겠군. 돈을 낼 테니 세퀴라도를 치지 말라는 건가?" "예." 스카리는 피식 웃었다. "얼마에?" 자유무역당원은 돌려말하거나 종이에 쓰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 다. 사이케라는 분명한 목소리로 금액을 말했다. 하지만 스카리는 자 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잘못 말한 거 아냐?" 사이케라는 똑같은 목소리로 한 번 더 금액을 말했다. 스카리는 신 음을 흘렸다. "역시 자유무역당이군. 그걸 모두……" "현금 박치기입니다." 스카리는 사이케라가 말한 액수를 실감할 수 없었다. 엄청난 금액이 기 때문이다. 스카리는 미간을 문지르다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세퀴라도의 너희 당사를 점령하면 더 많은 금을 얻을 수도 있 을 텐데, 왜 너희들의 구매에 응해야 하지?" "잘못된 전망입니다. 자유무역당사를 점거해도 그 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시도를 하신다면 저희들은 그 돈으로 사 라티본 부대를 사겠습니다." 스카리는 흠칫했다. 그리고 조금 후 스카리는 격분했다. "뭐라고 했나?" "사라티본 부대를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만 발케네군을 모두 사겠습니다." "감히……" "만약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발케네를 살 수도 있습니다." 스카리는 입을 다물었다. 사이케라가 그를 협박하는 즐거움을 느끼 려 시도하는 것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이케라는 1 더하기 1은 2가 된다는 식으로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거기엔 협박도, 과장도, 은유도 없었다. 원래 제22상단장이지만 자유무역당사로부터 급한 지 령을 받고 전권 대리인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나온 사이케라는 합리 적인 판매 행위에 대해 한 수 가르쳐준다는 식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저희 구매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선택일 겁니다." 당연히 좋은 선택이다. 그들의 조건을 바꿔 말한다면 아무 일도 하 지 않고 돈을 받는 셈이니까. 하지만 세퀴라도를 정복하지 않으면 지 러쿼터 산맥 동쪽에 대 포위진을 만든다는 스카리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스카리가 말했다. "나나본을 지나 우기츠, 그리고 이곳 잔하일까지 오면서 나는 어떤 피도 흘리지 않았다. 그곳의 너희 사무소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면 너 희들도 알 것이다. 세퀴라도 또한 같은 방식으로 내 지배를 받아들이 게 될 것이며, 그러면 너희들에겐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는다. 그런 데 왜 세퀴라도를 지키겠다는 건가?" 스카리는 이 질문에도 사이케라가 직설적으로 대답할지 궁금했다. 사이케라는 과연 그러했다. "그야 세퀴라도가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카리는 혀를 찼다. 세퀴라도가 자유무역당의 소유라는 것은 명문 화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세퀴라도의 태수관은 그 분원부터 태수 까지 모두 자유무역당의 비밀 당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령 비당원 이 어렵게 세퀴라도의 행정조직에 들어간다 해도 그는 1년 내에 자의 로 입당하게 된다. 지테를 시야니 당주가 영주들처럼 '세퀴라도의 지 테를'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밀 당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 알려진 비밀에 속하는 것이고 황 제는 그 사실에 대해 특별히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황 제를 위해서도 완벽하게 봉사했다. 그리고 세퀴라도의 어린이들 대부 분이 자유무역당에 입당하는 것을 일종의 성인식 쯤으로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당원이 아닌 자가 세퀴라도를 다스린다는 것도 좀 우스꽝스 럽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스카리는 자신 또한 직설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세퀴라도가 너희들의 것이라고 해도 너희들은 황제의 지배를 받았 잖느냐." "각하는 황제가 아닙니다." 스카리는 턱을 긴장시켰다. 그 때 사이케라가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 였다. "아직은." 스카리는 사이케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곳은 지나치게 불편하군." 스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원들은 따라 일어나려 했지만 스카 리의 호위병들이 엄한 눈길을 보내어 그들을 다시 앉혔다. 스카리는 사이케라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요구에 대해 생각해보고 대답할 사람을 보내겠다." 그리고 스카리는 인사도 없이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스카리의 호위 병들이 떠나고나서 사이케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곁에 있던 당원이 말했다. "상단장. 그가 우리 요구를 받아들일까?" "알 수 없는 일이지." 다른 당원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거짓말을 눈치챈다면 어쩌지요?" "그럴 리 없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니까." 질문한 당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이케라의 말대로 그가 스카리에 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자유무역당은 스카리의 군사 모두를 매 수할 수도 있고, 심지어 발케네를 사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후에 자유무역당은 소멸될 것이다. 그들의 압도적인 재원의 상당수는 현재 상단의 보호에 많이 소모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무역당이 제국 어느 곳에서도 통과세를 내지 않는 것은 제국이 그것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이 사라진 지금 각지의 영주들은 그들에게 통과세를 거두거나 심지어 상단을 약탈할 움직임 을 보이고 있었다. 자유무역당은 자구책을 동원해야 했다. 당장은 그 들의 막대한 현금살포 능력으로 상단을 보호할 수 있지만 그런 비용 이 계속 소모된다면 그들이 취급하는 상품의 최종가가 올라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면 통과세를 내지 않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는 자유무역당의 저가 정책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유 무역당이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사이케라는 차라리 스카리에게 전폭적으로 협조해서 그를 빨리 새황 제로 만드는 것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당에서는 아직 관망할 때라고 결정한 듯했다. 당의 고위층에서는 사이케라가 알지 못하는 다른 정보들이 있을 테고 관망한다는 결정은 그런 정보 들을 검토한 끝에 나온 것일 것이다. 사이케라는 그들의 판단을 믿기 로 했다. 피곤한 몸을 일으키던 사이케라는 문득 용재 숙박소의 숙박소장 리 존 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의문을 느꼈다. 유료도로당의 향후 대책은 무엇일까? 대답이 곧바로 나왔다. 유료도로당은 황제의 시절에도, 왕의 시절에도, 그리고 북부를 침략한 나가들에게도 똑같 이 대응했다. '돈 내면 통과시켜주겠지. 돈 안 내면 통과 안 시키고.' 사이케라는 피식 웃으며 휴식을 취하러 회담장을 떠났다. 사이케라 호미스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에 있는 유료도로당사의 대회의실을 주도하고 있는 분위기는 그러했다. 유료도로당은 어떤 입장 변화도 검토할 필요가 없다는 것. 통행료를 내는 자에겐 통행을 허락하고, 그러지 않는 자에겐 무기를 준비한다. 시오크 지울비는 그들의 교조적 사고에 두통을 느낄 것 같았다. 시오크가 즐기는 회의는 자신이 관찰자로 있을 수 있는 회의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요구로 이루어진 회의이기 때문에 시오크는 관찰 자로 있을 수 없었다. 시오크는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고 위 당원들의 눈길을 무시하며 말했다. "여러분. 현재 제국의 정세는 혼란스럽고 그 혼란을 반길 수 있는 것은 모험주의에 경도된 인물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당은 제국 곳 곳에 거미줄처럼 깔린 도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로를 이용 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오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흐름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회의장 곳곳에서 불만에 찬 소음들이 터져나왔다. 흐름을 통제한다 는 말만으로도 그들은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시오크는 목 소리를 드높였다. "여러분! 우리의 철학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잖습니 까? 사악하지만 부유한 자들은 도로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로를 침략로로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들이 정의롭지 만 가난한 자들에게 쳐들어가는 것을 돕게 될 겁니다! 우리는 배금주 의와 금권주의가 세상을 점령하는 것을 돕게 될 겁니다. 가진 자들의 횡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대가로 그들에게 떡고물을 받아먹게 될 거란 말입니다!" '닥쳐라!' '이 자유무역당원!' 같은 욕설들이 터져나왔다. 거센 반 응 때문에 시오크가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시오크는 입을 다물고 회의장 상석에 앉아있는 당주를 바라보았다. 게라임 지울비 당주는 아들의 눈을 물끄러미 마주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감찰관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십시오." 게라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제압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그리미 유로수도 공사를 성공시키면서 당을 부흥시켜 마 침내 당의 도로를 제국의 혈관으로 만든 자 앞에서, 고위 당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게라임은 계속 말하라는 듯 시오크에게 턱짓 을 보냈다. 시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당주님. 그러면 계속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도로를 준 비합니다. 그것은 도로 위를 걸을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로를 걸을 사람이 없다면 도로도 필요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겁니다. 우리는 시구리아트 산맥에도 굴을 뚫었고 키보렌의 밀림에도 도로를 냈습니다. 우리가 제국의 미래로 향하는 도로를 만 들지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선가 '허!' 하는 기막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오크는 그 소 리를 무시하며 계속 말했다. "그 도로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삽을 들거나 곡괭이를 휘두 를 필요도 없습니다. 제국의 미래에 방해되는 자들에게 길을 닫고 그 렇지 않은 자들에게 길을 열어주면 됩니다." 게라임이 손을 다시 들었다. "질문이 있는데. 감찰관."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누구에게 길을 열어주고 누구에게 길을 닫을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간단합니다. 당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엘시 에더리 대장군은 귀족 원 회의를 제안했습니다. 그것을 따르면 됩니다. 다른 땅을 공격하러 가는 자들은 전부 막습니다. 그리고 귀족원 회의에 참석하려는 자들 에게만 길을 열어주면 됩니다. 그 분들이 현명한 결정으로 좋은 황제 를 뽑겠지요." "그들이 좋은 황제를 뽑지 못한다면?" "예? 그것은 그 분들의 책임입니다." 게라임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 말은 우리가 책임지기 싫으니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 기자는 말일 뿐이군." 시오크의 얼굴이 굳었다. 게라임은 날카로운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 았다. "자네 화법은 기묘하군. 자네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봉사한다고 말했 지. 그 때문에 우리가 비인간적인 배금주의에 협조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말했어. 그건 우리가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 여지는군. 그런데 자네는 기껏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강조해 놓고는 그 책임 자체는 귀족들에게 전가시키는군." 게라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편해보이지 않는 의식적인 한숨 이었다. "물론 세상의 부조리를 소리 높여 고발한 다음 개선할 방법론이나 책임은 연장자에게 떠넘기는 것이 젊은이의 특징이긴 하지만, 감찰 관. 그런 태도는 이런 진지한 자리에선 어울리지 않는 듯하군." 회의장에 있던 당원들은 실소했다. 그들은 비웃는 표정으로 시오크 를 바라보았다. 시오크는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느끼며 애써 호흡 을 가다듬었다.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론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보다 나은 방법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 오. 당주님." "가르쳐주지. 당의 원칙을 지키면 돼." "그것은-" "금권주의에 고개를 숙이는 짓이며 가진 자들의 횡포에 침묵으로 동 의하는 짓이라는 거지. 자네는 사악한 자만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선 입관에 빠져 있군. 그것도 젊은이의 특징이지. 돈은 돈이고 품성은 품성이야. 그 사이에는 다른 것보다 유별나게 밀접한 관계 같은 것은 없어. 자네는 사악하지만 부유한 자들이 정의롭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쳐들어가는 것을 돕게 될 거라 말했지. 어처구니가 없는 단정이군. 우리가 정의롭고 부유한 이들이 사악하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쳐들어 가는 것을 돕게 될 경우는 생각하지 않나?" "정의로운 자들이 왜 남을 공격하겠습니까?" "사악을 멸절하기 위해 그러는지도 모르지." "그것은 궤변입니다." "맞아. 자네 말처럼 궤변이지." 시오크는 입을 다물었다. 게라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한 분들을 모신 자리에 생각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나온 청년을 위해 회의를 계속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군. 여러분.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시오크는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유료도로당원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게라임 지울비 당주가 회의장을 나가는 것을 전송하고는 시오크를 돌아보았다. 딱하다는 표정, 비웃는 표정, 성난 표정 등이 있었고 긍정적인 표정은 없었다. 시오크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들 중 아버지에게 호된 비난을 들은 아들에게 비난을 추가하는 악 취미를 가진 자들은 없었다. 그들은 표정으로만 시오크를 꾸짖은 다 음 아무 말 없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사람이 회의장을 빠져나가고 나자 시오크는 혼자 남게 되었 다. 시오크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화는 별로 나지 않았다. 거의 예상했던 결말이기 때문이다. 시오크 는 텅 빈 회의장을 둘러보다가 게라임 당주가 앉아있던 자리를 쳐다 보았다. 무심한 눈으로 그 자리를 바라보던 시오크가 일어났다. 탁자 옆을 돌아간 시오크는 게라임 당주의 자리에 도달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시오크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두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린 다음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시오크는 눈을 감았다. 그의 입에서 낮은 휘파람이 들려나왔 다. 시오크는 즐거웠다. 게라임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기 때문이 다. 그는 게라임이 한참 기다리게 할 작정이었다. 개썰매꾼을 도와 물건을 나르던 제이어는 준람의 모습을 보았다. 준람은 쌍창을 양손에 나눠진 채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 다. 제이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손에 든 물건을 썰매 안에 실었다. 그리고 제이어는 썰매꾼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준람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 전 그친 눈이 아직 얼지 않아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람에게 가까이 다가간 제이어는 그가 배낭을 메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준람은 떠나려는 행색이었다. 제이어는 그것을 확인했다. "당신도 떠날 생각입니까?" "눈도 그쳤으니."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던 겁니까?" "지멘을 죽이러." 제이어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최후의 대장간 쪽을 쳐다보았다. 그곳 에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젊은 레콘들이 앉아있었고 특별한 움직 임은 보이지 않았다. 제이어는 다시 준람을 쳐다보았다. 준람은 말했 다. "안 죽였다." "그렇군요. 왜 그를 죽일 생각입니까?" 준람은 걷기 시작했다. 제이어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걸어야 했 다. 준람은 최후의 대장간을 등지고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앞쪽에는 빙 해 위로 나있는 길을 나타내는 두 기둥이 눈 속에 솟아 있었고 눈을 잔뜩 뿌린 구름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제이어가 너무 멀리 걷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준람이 말했다. "지멘은 내 둘째 부인을 뺏어간 다음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내게 돌아와야 했지.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어. 하지만 내겐 다섯 명 의 부인이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멘에게 복수를 함부로 시도할 수 없었지. 하지만 내가 존경하는 첫째 부인은 가서 복수하라고 나를 쫓아냈어. 그녀도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 아. 훌륭한 첫째 부인이라면 가족이 깨질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을 피 하지.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했어. 왜 그랬는지 생각했어. 그리고, 복수가 끝난 지금 겨우 알게 되었어." "복수가 끝났다고요? 안 죽였다고 했잖습니까?" "다른 방식으로 복수가 이루어졌다." "어떤 방식?" "내가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지멘도 둘째 부인을 잃었다." "둘째 부인?" 제이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준람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 최후의 대장간을 돌아보았다. 살인기사는 다시 준람을 보았고 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쟁룡해에 빠진 것은 그가 존경하는 첫째 부인이지. 그리고 저기 망 각의 바다에 빠져 있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둘째 부인이고." 제이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준람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나발칸의 레콘에게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제이어가 알았다면 더욱 놀랐겠지만 어차피 충격은 충분했다. 제이어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준람은 제이 어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부리를 움직였다. "고라이, 내 둘째 부인은 가족으로 돌아왔지만, 사실 아직 돌아오지 못했어. 내가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했거든. 고라이는 내 나약함을 상 징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 나는 뭐가 더 중요한지 알아. 나는 이제 야 잃었던 둘째 부인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어. 나는 내가 죽거나 지 멘이 죽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첫째 부인은 역 시 현명했다. 나는 살아서 내 둘째 부인을 맞으러 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멘도 잃어버린 둘째 부인을 되찾길 바라." 제이어는 입을 열어봐야 한숨밖에 나올 것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 다. 준람은 말을 맺었다. "내 첫째 부인 란쉐는 복수를 끝내고 돌아와 웃으며 살자고 했지. 설마 이런 식으로 이행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어. 이제 내 가족에게 돌아가겠다." 제이어는 겨우 말했다. "예. 귀향길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너는 어디로 갈 작정인가?" 그것은 조금 의외였다. 제이어는 준람이 왜 자신의 목적지를 묻는지 궁금해하며 말했다. "아, 저는 옛연적의 아들을 찾아갈 겁니다." 제이어는 내 이야기도 당신 것만큼 황당하지 않느냐는 투로 웃으며 말했다. 준람은 별로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왜?" "옛연적에게 아들을 지키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최근에 관심 두던 일 도 이젠 흥미가 없어졌고요." "나는 네가 최근에 관심 두던 일이 무엇인지 안다." 제이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준람은 깊고 어두운 눈으로 제이어를 노 려보았다. "너는 암살공과 손잡고 황제 사냥에 매달리고 있었다. 너는 지멘을 남부로 보내어 대장군을 유인했지. 그리고 대장군과 황제가 갈라진 틈을 타 암살공은 황제와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실패했지요." 제이어는 빙긋 웃었다. 준람은 몸을 조금 부풀린 채 무죄처럼 하얀 옷을 입은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암살공은 황제를 잡지 못했습니다. 황제를 잡아버린 것은 저기 누 워있는 넋나간 꼬마죠. 하지만 어쨌든 황제는 사라졌습니다. 제가 한 일은 아니지만 아이저 규리하의 복수는 완료되었고, 그러니 저는 약 속이나 지키러 갈까 합니다." 준람은 제이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괴상하군." 준람은 갑자기 두 팔을 조금 벌렸다. 그의 손에 있는 쌍창이 약간의 바람을 일으켰다. "너를 제거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다." 제이어는 시원한 웃음으로 레콘을 마주했다. 준람은 정말 모르겠다 고 생각하며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다치 게 한 죄를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제이어는 그 자신이 말하듯 실패자였 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치천제였고 그것을 받아준 이는 락토 공작이 었으며 그것을 끝낸 사람은 아실이다. 제이어가 한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준람은 혼란 속에서 말했다. "그런데 너를 살려둘 이유는 하나 있군. 너는 지멘에게 아실의 편지 를 전달했다. 그것이 너를 살렸다." 제이어는 반갑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였다. 준람은 자신의 설 명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준람은 부리를 살짝 부딪치고 말했 다. "너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넓은 것이 아니라서 약속드리긴 어렵겠군요." 준람은 제이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준람은 몸을 홱 돌렸다. 그는 작별 인사 없이 훌쩍훌쩍 뛰어갔고 조금 후 준 람의 모습은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이어는 손 을 비비며 몸을 돌렸다. 그는 개썰매를 향해 걸었다. =============================================================== 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0. 바른 것과 부른 것 - 1 ……목마름을 잊기 위해 덴데로는 자신이 대호 별비에게 희생당한 몇 번째 키탈저 사냥꾼인지 생각해보았다. 그러 나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죽은 자들의 숫자를 세는 것 은 어려웠다. 먼 곳에서 윙윙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덴데로는 찢어진 복부에 벌써 파리들이 모여드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를 살리긴 어렵겠군." 덴데로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 다. 낯선 인물이라는 희미한 인식만 있을 뿐 덴데로는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괜찮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근방에서 키탈저 사냥꾼들이 별비를 쫓고 있다고 들 었는데, 자네는 그 중 한 명인가?" 덴데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상대방은 덴데로의 죽음을 지켜줄 작정인 듯 그의 곁에 머문 채 계속 말을 걸었다. 그래서 덴데로는 별비에게 희생당한 동료들을 말했고 어떻 게 별비를 추적했는지 말했고 어떤 기막힌 방법으로 별비 를 궁지로 몰아넣었는지도 말했다. 그러면서 덴데로는 조 금씩 집중력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죽기 직전 잠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덴데로는 자신의 대화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덴데로는 조금 의아했 다. 떠돌이처럼 보이는 그 사람은 아무리 많이 봐줘도 이 십대 초반을 넘기지 않앗을 것 같은 인간 여자였다. 그런 데 그 말투는 노숙한 남자의 것이었다. 덴데로는 그것에 대해 질문했다. "나는 군령자야." "그렇군. 남자의 영인가." 덴데로의 곁을 지키고 있는 방랑자는 하나의 육신에 많은 영을 담고 있는 군령자였다. 자신의 정체를 고백한 군령자 가 말했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자네 영을 받아줄 수도 있어." "복수를?" "자네는 키탈저 사냥꾼이지. 별비에게 복수하고 싶을 거 라 생각하는데." 덴데로는 그 말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 펜조일의 <별 비와 키탈저 사냥꾼> 하늘치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온갖 하늘치 가운데서 그 하늘치를 찾아낼 수 있는 특징 같은 것은 없다. 저공비행을 하면 지상의 사람들에게 폐소공포증을 선사할 수 있는 거대한 몸, 무엇을 보기 위해 그렇게 많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수천 개의 눈, 터무니 없이 거대한 지느러미들. 하늘치를 이루 고 있는 모든 부분들은 다른 모든 하늘치와 마찬가지였고, 다만 크기 가 다른 것들에 비해 좀 작았다. 하늘치에 대해 주의깊게 연구한 자 들은 크기가 작을수록 낮게 나는 편이라고 주장한다. 하늘치가 그 주 장을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하늘치는 낮게 날고 있었다. 물 론 '작다'거나 '낮다'는 것은 다른 하늘치와 비교에서 그렇다는 것이 다. 저층운들이 하늘치의 몸을 휘감아 돌았고 새들의 무리가 하늘치의 가슴 지느러미 주위를 맴돌았다. 태양은 겨울의 낮은 궤도에서 우울 증에 빠져 있고 땅은 얼어붙어 있다. 그리고 하늘치는 그것이 한다고 알려져 있는 유일한 일, 즉 하늘을 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 늘치는 그런 일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둔감함을 가지고 있다. 장님 새 의 공격이나 낙뢰의 직격, 혹은 철없는 돌풍이 하늘치를 번거롭게 하 는 일은 없다. 따라서 하늘치의 등 위에 드러누워 있는 레콘 한 명 같은 것은 하늘 치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네 선민종족 중 가장 거대한 레콘의 몸도 하늘치의 광활한 등 위에 서는 들판을 엎드린 개미나 다름없다. 하지만 레콘은 자신의 그런 미 소한 모습에 괘념치 않는 듯했다. 레콘은 장쾌한 자세로 누워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제멋대로 던진 채 레콘은 하늘을 보며 참으로 활 발하게 자고 있었다. 레콘의 곁에는 커다란 배낭과 함께 특이한 물건이 하나 놓여있다. 아주 긴 철봉이었는데, 그래서 승천한 티나한의 전설에 매료된 관찰 자라면 누워있는 레콘을 주저없이 티나한이라고 판단했을 것 같다. 하지만 보다 주의 깊은 관찰자는 그 철봉이 철창이라기엔 가늘고 지 나치게 길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충분히 단단해 보였고 무기로 쓴 다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도 무리가 없어 보였지만, 그 철봉 은 사용하는 자에게도 부담스러울 만큼 긴 길이였다. 게다가 그 철봉 에는 기묘한 부속품이 달려 있었다. 철봉의 한쪽 끝에는 쇠사슬이 부 착되어 있었고 그것은 철봉의 주위에 치렁치렁 감겨 있었다. 그 때 레콘이 부스스 일어났다. 레콘은 하늘치의 등에 앉은 채 멍하니 자신의 발을 바라보았다. 레 콘은 자신의 발을 까딱거리며 흥미롭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레콘은 똑바로 일어서서 두 팔을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거 대한 기지개를 켠 레콘은 허리를 굽혀 배낭과 철봉을 집어들었다. 레 콘은 배낭을 맨 다음 철봉을 어깨에 걸쳤고, 그러자 이제 어떤 관찰 자라도 그 철봉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모습은 강변 이나 호숫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최후의 대장간에 있는 대장장이들은 세계에서 찾아온 온갖 레콘들의 온갖 무기들을 만들었지만 그들도 이런 물건은 한 번밖에 만들지 못 했다. 그 철봉은 레콘용 낚싯대였다. 조간을 어깨에 맨 레콘 조사 야리키는 졸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 다. 야리키가 알고 싶었던 것은 어느 쪽이 가까운 가슴 지느러미인가 하 는 것이었다. 하지만 굴곡진 하늘치의 등 위에서 야리키는 가슴 지느 러미를 찾기는커녕 어느쪽이 머리고 어느쪽이 꼬리인지도 알기 어려 웠다. 야리키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까마득한 높이로 솟아오른 야리키는 주위를 대강 둘러보았다. 시야 에 가슴 지느러미로 추정되는 것이 목격되었다. 야리키는 하늘치의 등 위에 쿵 떨어졌다. 상당한 충격이 있었겠지만 하늘치는 아랑곳하 지 않았다. 그리고 야리키도 자신의 행동이 하늘치에게 자극을 줄 거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전에 많이 해본 일이기 때문이다. 똑바로 선 야리키는 생각났다는 듯 허리로 손을 뻗었다. 야리키의 허리띠에 는 큼직한 주머니들이 몇 개나 붙어있었다. 그 주머니들에서 두툼한 육포 하나를 꺼낸 야리키는 부리로 그것을 찢어삼켰다. 야리키는 육포를 베어먹으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하늘누리의 환상계단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후 사람들은 다른 하늘 치에도 그것을 시험해보았다. 그리고 모든 하늘치를 대상으로 환상계 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 사실이 처음 알려진 이후 하늘치들은 꽤 번거로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열기는 빨리 식었다. 그것이 표류선에 몸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 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환상계단을 잘 만들면 하늘치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땅에 내 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하늘치는 제멋대로 움직인다. 자 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 위에 몸을 싣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무의미 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이 바라는 것처럼 - 아마 자유무역당원이었을 것이다, - 하늘치를 초대형 공중수송선으로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 다. 물론 이동수단으로 쓰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 으니까. 점차 하늘치에 오르는 것은 일종의 괴벽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환 상계단을 다루는 것에 능숙하면서 탁월한 전망을 원하거나 남달리 고 독을 사랑한다면 하늘치에 올라 몇 시간 정도 보낼 수도 있을 것이 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었다. 하늘누리를 제외한 모든 하늘치는 제멋대로 움직이며 그렇게 움직이는 상태에서 환상계단을 자유로이 만들어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많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 분 하늘누리에서 제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하늘치들은 다시 과거 의 고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야리키는 특정한 목적지가 없을 때가 더 많은 방랑자였고, 또 환상계단을 다루는 것에 능숙했다. 그래서 야리키는 승천한 티나 한이 그랬듯이 즐겨 하늘치에 올랐다. 그 행동의 이면에는 좀 남다른 의미도 담겨있다. 야리키는 낚시꾼이다. 그런데 하늘치는 아무리 봐도 물고기처럼 생 겼다. 만약 하늘치를 물고기에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이견이 있을 리 없는 대물이다. 조사 야리키는 대물의 등에 타는 것이 좋았다. 야리키는 가슴 지느러미에 도달했다. 그는 수염볏을 만지작거리며 가슴 지느러미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 았다. 산, 산, 산. 전세계에서 고봉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세상 돌 아가는 일을 이야기 하기 위해 회합을 가진 듯한 광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야리키는 아래 쪽의 광활한 산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하늘치에 오른 것은 카시다 근방이었고 하늘치의 이동 방향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마도 지러쿼터 산맥과 시구리아트 산맥 중 하 나일 것이다. 야리키는 호수나 큰 강 같은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만약 그런 것 이 있다면 그는 하늘치에서 내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레콘의 밝은 눈 으로 둘러본 결과 조행을 결심할 만한 물은 보이지 않았다. 산의 소 맷자락에 숨어있는 작은 호수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야리키는 내려가서 확인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왜 확인할 필 요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낚시터가 나타 날 때까지 다시 표류를 재개하기로 한 야리키는 하늘치의 등쪽으로 움직였다. 몇 걸음 걸었을 때 야리키는 걸음을 멈췄다. 야리키는 몸을 돌려 세계를 바라보았다. 지평선에서는 하늘과 땅의 패권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늘은 땅 을 물들이고 땅은 하늘을 물들인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소실점들이 모여 나타난 소실선이 세계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 다. 세계는 텅 빈 공허 속에 떠있는 원판이다. 야리키는 주저앉았다. 어깨에 맨 낚시대를 두 손으로 쥔 야리키는 그것을 높이 세워들었다. 야리키는 하늘을 찌르는 낚시대 끝을 보다가 다시 세상을 내려다보았 다. 과연 그 기분이 어떠할까. 하늘치의 나라미에 걸터앉아 세상을 낚는다면. 신새벽이 동쪽에서 부풀었다. 스카리는 무거운 망토를 어깨 너머로 쓸어넘기고는 가슴을 폈다. 동식물의 기지개 때문에 산중의 새벽은 고요하기 어렵지만 지금은 아예 소란스럽다. 곳곳에서 달려오는 레콘들이 그 거창한 발소리로 절벽과 산릉을 꽝꽝 때리고 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두. 지난밤의 작전을 완료한 사라티본 부대가 귀대하고 있었다. 아마도 피로할 테지만 레콘들은 일찌감치 진지에 도착해 아침을 먹기 위함인 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진지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들은 그들의 귀환을 더욱 재촉했다. 절벽 위에서 스카리는 사방에서 달려 오는 레콘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질주는 일반적으로 길이라 생각 하기 어려운 지형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라티본 부대원들은 숲 을 부수고 언덕을 뛰어넘고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평지처럼 달렸다. 작전의 내용은 산중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부락민들을 소개시키는 것이었다. 스카리는 지러쿼터 산중에 산막보다 더 큰 규모의 거주 지 역은 남겨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배후에 규리하군이 유격전을 펼칠 근거지를 남겨두지 않기 위함이었다. 팔리탐 지소어는 그 작전에 격 렬하게 반대했다. "여름이라면 모를까 이런 계절이라면 그런 산중 부락들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유격전의 근거지 역할을 하기는커녕 자기들 살아남는 일도 벅찰 지경입니다. 게다가 곧 매서운 추위가 다가올 텐데 이런 시점에 그들의 근거지를 파괴하면 사망자가 엄청나게 발생할 겁니다." "그러니까 더욱 서둘러야지. 그들이 과텔이나 규리하, 케나린으로 피난을 갈 여유를 줘야하니까." 이 계절에 근거지를 잃으면 겨울을 넘길 수 없는 산사람들은 평지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스카리는 배후의 위험 요소를 일소함과 동시에 남부여대한 피난민들의 행렬을 대량으로 발생시켜 규리하에 선사할 작정이었다. 스카리의 속셈을 이해한 팔리탐은 스카리의 권위가 손상 을 입지 않을 정도까지 반대한 다음 입을 다물었다. 스카리는 그가 다음 번에도 입을 다물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입을 다물 것이다. 스카리는 팔리탐이 자신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팔 리탐 지소어는 빌파 가문이 망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주군의 사체 에서 부러진 단검을 뽑아내어 소맷자락에 숨겼을 때 팔리탐은 스카리 가 아닌 빌파를 보호한 것이다. 하지만 스카리는 빌파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자신이 얻거나 얻게 될 것의 일부도 빌파 가문에 돌릴 생각이 없었다. 힘겹게 산릉을 기어오른 햇빛이 하늘에 번져나갔다. 지러쿼터 산맥, 이 땅의 주인은 산이고, 하루를 인식하지 않는 산에게 태양 따위는 자발없이 깜빡거리는 불빛이다. 산의 무겁고 거대한 안개를 뚫는다는 것이 언감생심임을 아는 태양은 산의 그림자와 산의 어둠, 그리고 산 의 비밀을 외면한 채 하늘로 흘러갔다. 깨진 사기조각 같은 날카로운 산봉우리들 사이에서 스카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스카리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가면을 쓴 남자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카리는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산을 보고 있었다." 팔리탐이 그의 등 뒤에서 말했다. "등을 보이지 마십시오. 각하." "나를 밀 건가?" "항상 조심하시라는 의미로 드린 말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몰랐습니다. 사라티본 부대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러 올라왔습니 다." "그럼 와서 봐." 팔리탐은 스카리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는 가면 뒤의 눈으로 산 을 뛰어넘어오는 사라티본 부대를 바라보았다. 기운 없는 태양을 대신하여 레콘들이 아침을 가져오는 것 같았다. 달리고 뛰고 떨어지며 레콘들은 지러쿼터 산맥을 종횡무진으로 누볐 다. 사라티본 부대를 직접 키워내다시피 한 팔리탐은 그 모습에서 감 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팔리탐은 근심만 느꼈다. 팔리 탐은 그런 폭력이 규리하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 다. "각하. 꼭 규리하로 들어가셔야겠습니까?" "규리하를 내버려둔 채로는 제국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설명해줘야 만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닐 텐데." 물론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규리하를 공격하기 위해 꼭 대군을 몰고 갈 필요는 없습니 다. 각하. 지금 규리하에는 아이저 규리하와 그의 두 아들이 있을 겁 니다. 그들을 지원해서 규리하에 내전을 일으키거나, 혹은 아이저 규 리하가 복권하게끔 한다면 규리하는 발케네의 위협이 되지 않을 겁니 다." "그럴 수는 없어." "왜 그렇습니까?" "규리하는 자네 것이야. 그러니 아이저에게 줄 수는 없지." 팔리탐의 어깨가 움찔했다. 팔리탐은 스카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스카리는 가면 뒤에 어떤 표정이 있을지 궁금해하며 말했다. "놀랐나 보군. 하지만 내가 자네 외에 누구에게 규리하를 맡길 수 있겠어?" 팔리탐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뜻밖의 말씀이군요. 각하." "자네가 내게 해준 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보답일 뿐이야." 팔리탐은 친부살해를 눈감아준 일에 대해 스카리가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보답이라면 받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스카리는 팔리탐이 짐작하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스카 리는 진지로 들어서는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가 내게 저런 것을 줄 수 있겠어? 오직 자네뿐이지." 팔리탐은 가면 뒤에서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라티본 부대는 락토에 의해 만들어졌고 팔리탐은 락토를 위해 사라티본 부대를 훈련 시켰다. 그런데 스카리는 몇 마디 말로 그 모든 역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았다. 게다가 그 말투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규리하 변경백령은 왕국의 방패였지. 자네도 나의 방패가 되어주 게. 규리하를 가져. 팔리탐. 내가 줄 테니까." 팔리탐은 조금 침묵했다가 말했다. "엘시 에더리 대장군과 탈해 머리돌 무사장이 그것을 허락할지 모르 겠군요." 스카리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그는 팔리탐을 돌아볼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카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무사장은 아무나 태워죽여도 되는 도깨비가 아니라 도깨비들이 누 군가를 태우기로 결정했을 때 그 일을 담당하는 도깨비야. 즈믄누리 가 그렇게 결정하지 않는 이상 탈해 머리돌이 단독으로 우리를 공격 할 리는 없어. 그리고 즈므누리는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아. 페시론 섬의 이야기는 필요 없어. 단 하나의 예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아. 게다가 그 반대 사례가 있을 때는 더더욱 무의미해. 자네가 만약 페 시론섬의 이야기를 하겠다면 그 전에 먼저 보다 최근의 사례부터 생 각해보는 것이 좋을 거야. 북부의 멸망이 목전까지 다가왔던 제2차 대확장 전쟁 당시에도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움직이지 않았어." 팔리탐은 탈해에 대한 스카리의 설명에 반박하기 어려웠다. 북부의 위기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던 무사장이 고작 규리하를 위해 움직인다 는 것은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카리의 대답에는 엘시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스카리가 거의 고의적으로 그랬다는 것을 짐작 했지만 팔리탐은 엘시에 대해 다시 강조해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팔리탐은 스카리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스카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바로 곁에 있던 스카리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팔리 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려다가 그 행동을 멈췄다. 그는 스카리를 볼 수 없지만 스카리는 그를 볼 수 있다. 팔리탐은 그에게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팔리탐은 스카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아무런 구애됨이 없다 는 태도로 사라티본 부대의 귀환을 바라보았다. 팩스벗 졸다비는 계단참에 걸터앉아 비나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나간은 열린 대도시다. 예전에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있었지만 제2차대확장 전쟁에서 입은 피해와 도시 자체의 발전에 의해 그 성벽 은 사라졌다. 하지만 고고학자가 아니라도 옛성벽이 있던 자리를 찾 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나간의 중심에 있는 후작궁에서 어느 방 향으로든 육, 칠백 미터 쯤 걸어가면 계단이나 경사로, 혹은 축담을 만날 수 있다. 그 계단과 경사로와 축담들을 이어보면 하나의 폐곡선 을 형성하게 되며 이로써 원래 비나간의 성벽이 있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물이 고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방어상의 편의를 위해 성 안쪽은 바깥쪽보다 조금 높게 만들어지게 되는데 원래 성 안쪽이었던 중심부는 그 때문에 새로 건설된 외곽보다 1층 정도 지대가 높다. 팩 스벗이 앉아있는 계단은 중심부와 외곽을 잇는 무수한 계단들 중 하 나였다. 하지만 이름 없는 다른 계단과 달리 그 계단은 마진 계단이라는 이 름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지키멜의 조부이자 홀빈 퍼스 후작의 아들 인 그 마진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밟고 다니는 것에 대해 죽은 마진 퍼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지만 팩스벗은 그 계단을 좋아했다. 마진 계단은 넓었고 경사는 완만했다. 원활한 통행을 위해 계단 위에서 행 상을 벌이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지만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의 노변 에서 행상을 벌이는 것은 자유다. 고정적인 계단 이용객들이 있으니 마진 계단 주변에서는 항상 행상인들의 왁자지껄한 호객성과 흥정하 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팩스벗은 그 활기찬 소음들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마진 계단 주변은 조용했다. 해가 뜰 때까지 바둑 한 판 두고도 남을 시간이 있으니 조용한 것이 당연하다. 밤의 비나간을 바라보는 팩스벗에게 어떤 발소리가 다가왔다. 팩스벗은 그 발소리가 기다리던 자의 것이라고 판단했다. 야경꾼이 라면 발소리보다 고함이 먼저 들렸을 테니까. 팩스벗은 허리춤에 숨 겨둔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발소리의 접근을 기다렸다. 폭력적인 사태 가 일어날 이유는 없지만 팩스벗은 다가오는 자에 대한 상당한 악평 을 들었고 자신이 그 악평 때문에 기가 죽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다가오던 발소리가 약간 완만해졌다. 계단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 발소리가 계단을 올라왔다. 팩스벗은 어둠 속 에서 불분명하게 보이는 그림자를 향해 하품을 해보였다. 팩스벗은 그것이 참 영리한 암호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밤에 하품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당연 한 일은 아니다. 인간은 어둠 속에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다가올 때 하품을 하지 않는다. 그 암호를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팩스벗은 상대방의 퉁명 스러운 말에 당황했다. "가짜로 하는 티가 너무 나잖소." "어, 그렇습니까?" 악평을 가진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는 팩스벗의 옆을 지나치며 말했다. "숙녀께 전하시오. 다섯 명의 서명이 확보되었으니 계획을 진행하라 고." 사내는 그대로 팩스벗을 지나 마진 계단을 올라갔다. 팩스벗은 그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 어나 바지를 털었다. 차가운 계단에 앉아있느라 식었던 피가 어느새 다시 뜨거워져 있었다. 팩스벗은 자신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돌아가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거야.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고 자신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는 투로. 그리고 팩스벗은 자신을 비웃었다. 젠장. 성공할 리가 없어. 나는 연기에 소질이 없다니까. 영리한 그녀는 내 흥분을 눈 깜짝할 사이에 알아차리겠지. 지키멜은 실로 영리하다. 팩스벗은 그녀가 어떻게 비나간후의 스물 여섯 봉신들 중 열한 명을 자신쪽으로 끌어들였는지 짐작할 수 없었 다. 하지만 그 일이 일으킨 일은 알 수 있었다. 지키멜은 열한 명의 명단을 보냈고 그 명단은 사태를 관망하려는 태도를 명백히 보이던 자들 중 다섯 명이 지키멜 측으로 선회하도록 만들었다. 반(反) 지키 멜이나 비(非) 지키멜로 분류할 수 있는 인사는 이로써 열 명으로 줄 어들었다. 그리고 지키멜이 그 열 명의 포섭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굳이 포섭하지 않아도 바람 방향을 잘 탈 거라 짐작했기 에 포섭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은 인물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팩스벗은 후작궁이 있는 방향으로 싸늘한 웃음을 보냈다. 지나치게 많은 나이 때문에 타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노후작은 관찰력이라도 남달라야 할 것이다. 팩스벗은 비나 간의 대로에 냉소를 잔뜩 뿌려놓고는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이틀 후 비나간 중앙법정에 고발장 하나가 제출되었다. 고발인의 명단은 화려했다. 전부 쉰일곱 명이나 되는 공동 고발자들 중에는 비나간후의 이십육 봉신들 중 열여섯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발장을 받은 서기를 경악하게 한 것은 그 고발 내용이었다. 비나간의 앞날을 염려하는 쉰일곱 명의 인사들이 제출한 고발장은 비 나간후 홀빈 퍼스를 살인 교사범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마진 퍼스 살 해를 사주했다는 것이다. 서기는 비꼬는 투로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고 발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녀의 일이고 아무도 그녀에게 책임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서기는 그 고발장을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그녀가 뇌룡공 륜 페이가 아니기 때문에 가져야 했던 고민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고발장이 제출되던 그 시각 후작궁에 정 체 모를 인물들이 난입하여 홀빈 퍼스를 체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방도가 없었다. 납치자들은 홀빈 퍼스가 체포 도중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아흔 살이나 먹은 노인은 작은 충격에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홀빈은 격 렬한 저항으로 납치자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기 에 허탈했고, 그 저항이 역시 아흔 살 노인의 것이라 허탈했다. 납치 자들은 간단히 홀빈 퍼스를 억류했다. 노후작은 자신의 침실에 억류되었다. 납치자들은 문을 닫아건 채 그 를 홀로 내버려두었다. 홀빈 퍼스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머리를 진 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납치자들은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지만 홀 빈 퍼스는 자신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레데른 퍼스가 반 역을 일으킨 것이라는 판단 하에 홀빈 퍼스는 손자의 등장을 기다렸 다. 하지만 홀빈 퍼스가 초조감을 느낄 무렵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레데른 퍼스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비나간 수비대장 슈매치 사이지 였다. 얼떨떨해하던 홀빈 퍼스는 자신이 구출되었다고 생각했다. 슈 매치 사이지의 아버지도 비나간의 수비대장이었고 따라서 슈매치 사 이지는 2대째 노후작에게 봉사하고 있는 홀빈 퍼스의 총신이었다. 퍼 스 노후작이 안도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슈매치 사이지가 책을 읽 는 듯한 어색한 어조로 살해 교사 혐의를 설명하자 노후작의 안도감 은 사라졌다. 그리고 노후작은, 납치자들의 앞에서도 느끼지 않았던 두려움을 느꼈다. "비나간의 법정이 비나간후를 재판한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각하." "누가 재판장이 된다는 거냐? 나 외에 누가?" "잘 아시겠지만 비나간에는 세 분의 비나간후가 있으며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하." "레데른이 재판장이라는 거냐?" "아닙니다. 각하. 지키멜 퍼스 각하이십니다." "지키멜?" "그렇습니다. 각하. 레데른 퍼스 각하께서는 영애께서 하이스 대학 에서 법학을 공부하신 것을 높이 사 그 분께 재판장의 지위를 양보하 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후작은 신음했다. "지키멜이었군." 슈매치는 노후작의 말을 듣지 못한 척했다. 홀빈 퍼스가 말했다. "밖으로 나가 지키멜과 레데른을 체포한 다음 나를 이곳에서 꺼내 라. 슈매치.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 슈매치는 자유를 잃은 주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지키멜 퍼스 각하께 전할 다른 말씀은 없습니까?" 홀빈은 이를 악물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한 것이지만 슈매치는 그를 놀리고 있었다. 홀빈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수비대장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 침묵은 전할 말씀이 없으시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그러면 쉬 십시오.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될 것이며 소명 기회는 충분히 주어질 겁니다." 슈매치는 민첩하게 몸을 돌렸다. 홀빈 퍼스 후작은 그를 부르려 했 지만 입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때 후작 은 이미 홀로 방안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후작은 욕설을 중얼거리는 것에 입을 사용했다. 시모그라쥬를 지배하지 않는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은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공작은 대전에 면해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정좌하여 앉아 있었다. 열대의 도시인 시모그라쥬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이 많이 개방되어 있 고 그것은 공작의 집무실도 마찬가지였다. 바람과 햇빛 뿐만 아니라 도시의 소음들도 그대로 집무실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다행히 그 소 음은 상념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쉬존이라는 장성한 손자까지 있는 공작이지만 노쇠한 모습은 아니 다. 공작도, 그리고 공작의 아들도 일찍 결혼했기 때문이다. 퍼스 노 후작 같은 이에 비하면 어린 귀족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수염이 나 머리카락 빛깔은 조금 바래어 있지만 토프탈 공작의 앉음새는 꼿 꼿했고 거동은 단단했다. 그의 앞에는 다기가 차려진 자그마한 다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에는 베로시 토프탈이 앉아 부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공 작의 숙고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베로시는 약간의 초조감을 느꼈다. 공작의 생각은 길었다. 팔디곤 토프탈의 겉모습은 노인이라 할 수 없 지만 그 사고 방식은 노인의 그것이었다. 자식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소년일 수 없듯 손자를 가진 자는 싫어도 노인이 되는 듯하다. 조카 의 초조함을 눈치챈 시모그라쥬공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말은 손자 를 끔찍하게 위하는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런데 아쉬존은 좀 어떤가?" "아쉬존 말씀입니까? 전쟁에 따라나가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인 것 같습니다." 팔디곤은 빙그레 웃으면서도 걱정스러워 하는 어조로 말했다. "절대로 안된다고 잘 타일렀겠지?" "물론입니다. 각하." 팔디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디곤을 안심시킨 베로시는 종조카를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애를 무조건 시모그라쥬에 붙잡아두는 것이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각하. 그 애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도 좋을 텐데 요." "그 애는 아직 어려. 경험을 쌓을 기회는 전후에도 충분히 많을 거 다." "물론 전쟁터에서 칼 휘두르는 것은 겉보기 만큼 알찬 경험은 아니 지만, 사람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한 명의 승리한 전 사 뒤에는 과로로 쓰러진 세 명의 행정관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요. 그리고 그 행정관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전쟁에서 작은 공훈이라도 몇 개 세우게 한다면 아쉬존의 앞 날에 큰 재산이 될 겁니다." 시모그라쥬공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안고 어르던 손자를 며느 리에게 뺏긴 할아버지 같은 얼굴이었다. 공작은 그 주제에 대해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원래의 주제를 불쑥 꺼냈다. "전쟁이 일어나려면 시련의 양해가 있어야하지. 매너링의 요구에 대 해 생각해볼까." 베로시는 아쉬존이 자신을 원망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더 편들지는 않았다. "매너링의 요구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팔디곤 토프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모그라쥬 시민의 첫 번째 벗은 조카의 말을 꼭꼭 씹듯이 한참 생각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쉽다거나 어렵다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야. 중요한 것은 동기 지. 그런데 그들의 동기를 알 수가 없군." 베로시 또한 동기를 정확히 지적할 수 없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팔디곤은 찻잔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하곤 다시 손을 끌어당겼다. "왜 갈로텍 대장군이지? 대호왕 사모 페이를 원한다면 이해할 수 있 어. 대호왕은 그들의 원수니까. 하지만 그를 찾는 이유는 모르겠군. 나가들이 신들의 분노를 경험해야 했던 원인은 대호왕이 아닌 갈로텍 에게 있다는 걸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각하." 베로시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냈다. 공작은 자신의 생각에 감겨서 말 했다. "갈로텍은 제2차 대확장 전쟁의 주역이었어. 제2차 대확장 전쟁은 사실상 그가 일으킨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아르키스 대수 호자가 그런 사람을 찾길 원한단 말이지." 대답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었기에 베로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모 그라쥬공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갈로텍을 찾아서 그들에게 보냅니까?" "아니." 베로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팔디곤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로부터 군령자들을 받겠지만, 그 중에 갈로텍은 없을 거다." "갈로텍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군령자만 보냅니까?" "그래. 갈로텍이 살아있다는 그들의 주장 자체가 의심스럽긴 하지 만, 만약 진짜 갈로텍이 살아있다면 그들이 갈로텍을 원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전에는 보내지 않는다. 만약 갈로텍을 발견한다면 꼭 붙잡 아두어라." 베로시가 예상했던 결론이었다. 베로시는 내색하지 않은 채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매너링에겐 갈로텍 수색에 적극적으로 임하 겠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래. 편성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지?" 베로시는 그 질문도 예상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거의 끝났습니다." "거의라는 것은 어느 정도지?"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앞으로 한달 후면 시모그라쥬군은 북진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 20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0-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12 조회수 : 2023 피를 마시는 새 20. 바른 것과 부른 것 - 2 토프탈 공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북진이라." 베로시는 다른 사람의 반응을 통해 자신이 한 말의 무게를 느꼈다. 북진. 팔뚝에 소름을 돋게 하는 종류의 말이다. 아라짓 제국의 역사는 짧다. 하지만 비록 나가에 의해 창건되었다 해도 아라짓 제국 또한 북부의 유구한 전통을 따르는 북부의 나라다. 그리고 북부의 적은 당연하겠지만 언제나 남쪽에 있다. 인간은 1년도 못되어 만들어진다. 어떤 뜨거운 사랑도 3년 이상은 계속되지 않는다. 소년은 5년이면 청년이 된다. 그러나 북부는 무려 천오백여 년 동안 남부와 대치했다. 북부가 가진 적개심의 나침반은 언제나 남쪽을 가리켜 왔으며 그런 북부의 역사를 그 몸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라짓 제국인에게 북진이라는 말은 도착적이기까지 하다. 팔디곤과 베로시는 거의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서로가 어떤 기분일 지 알 수 있었다. 팔디곤은 그 짜릿한 기분 속에 숨어있는 위험을 느 꼈다. "그래. 북진이다. 하지만 그 말은 함부로 쓰지 마라." "잘 알고 있습니다." "대호왕의 자취를 추적하는 것은 어떻게 되었느냐? 뭔가가 좀 발견 됐나?" "하텐그라쥬를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 두억시니들도 보이지 않았고요. 팔디곤은 다시 자신의 생각에 잠겨서 말했다. "대호왕에게 있는 것이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밖에 없다 해도 그녀는 존재 자체로 최대의 위험이다. 하지만 또한 최대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베로시는 정말 말할 필요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들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팔디곤은 그런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 다. 지금 제국의 정세를 분석하고 그런 분석을 통해 뭔가를 얻어내고 자 하는 자들은 차기 황제 후보의 명단을 상당히 압축시켜놓았을 것 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의 명단에도 대호왕의 이름은 없을 것이 다. 죽은 자를 그런 명단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알려 진 것과 달리 대호왕이 살아있다면 그녀는 모든 명단에서 최고 순위 에 놓일 것이다. 그녀가 시모그라쥬공의 경쟁자가 된다면 그보다 더 두려운 경쟁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망고 군단에 나타난 대호왕의 두억시니들은 대호왕이 생존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함께 그녀의 지지가 엘시 에더리에게 향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시사해보였다. 만약 엘시 에더리가 대호왕의 지지를 획득한다면…… 그것은 북부의 구원자가 내리는 승 인이다.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대호왕이 살아있고 주인이 사라진 제국에 새 주인을 추천할 작정이 라면 그 추천 대상은 시모그라쥬공이어야 한다. 팔디곤이 말했다. "편성 작업이 거의 완료되었다면 여유가 좀 있겠군. 네가 직접 하텐 그라쥬에 가보지 않겠느냐?" "각하. 저는 믿을 만한 자들을 보냈습니다. 제가 간다고 해서 그들 이 찾지 못한 사람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차라리 대호왕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수 색에 드는 낭비도 필요없을 테고요." "기다린다고?" "그렇습니다. 각하. 대호왕께서 살아계신다 해도 그 분은 한계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흑사자 모피를 북부에 남겨두고 돌아오셨으니까 요. 그 분이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곳은 한계선 이남 일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빨리 우리가 그 분에게 도달할 수 있 을 겁니다." "흑사자 모피가 없어도 도깨비가 있으면 나가는 한계선을 넘을 수 있다." "즈믄누리는 침묵 중입니다." 팔디곤은 도깨비들이 황제 실종이라는 이 놀라운 상황에서도 아무런 정치적 요구나 제안을 내놓지 않았다는 베로시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공작은 조금 생각한 후에 말했다. "좋아. 네가 직접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색을 완 전히 그만두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소수의 수색대는 계속 유지한 다. 능력 있는 자들을 선출하여 대호왕의 자취를 추적하게끔 해라. 아, 그래. 아쉬존에게는 그 일을 맡기는 것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각하." 베로시는 부채를 감아쥐고는 일어났다. 세레지 파림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이레 달비에게 외쳤다. "네 사촌형이 말해주었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 말 거짓말이 었지? 그런 배려는 원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야. 사실을 말해줘. 정말, 정말 너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만 든 거야? 그런 거야?" 숨 한 번 쉬지않고 그 말을 다 토해놓은 세레지는 급히 숨을 들이쉬 고는 짜내듯이 외쳤다. "대답해줘!" 이레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은 극진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이레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레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이레의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레에게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의 얼굴에 말의 발길질이 부럽지 않은 파괴력의 째차기가 작렬했다. 남자들은 이레의 행동에 놀랐지만 또한 멍청한 행동이라고 생각했 다. 이레는 자신의 왼쪽을 향해 훌륭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의 오른 쪽에도 두 명의 남자가 더 있었고, 따라서 이레는 두 개의 칼에 등을 노출시킨 셈이었다. 남자들은 그 생각 없는 행동을 응징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금 후 그들은 생각 없는 행동을 한 것은 이레가 아니라 바 로 자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세레지에 대해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 갈 공격을 받게 되었다. 순식간에 네 명의 남자들을 병아리 만큼의 위험성도 발휘하기 어려 운 상태로 만들어놓은 이레와 세레지는 바지를 툭툭 털며 남자들의 무기를 주워모았다. 남자들은 제발 말은 놔두고 가라고 속으로 빌었 지만 두 남녀는 그들의 기원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네 필의 말을 모 조리 끌고 사라지는 두 사람을 향해 남자들은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 만 그 욕설은 그다지 격렬하지는 않았다. 남자들은 탁월한 솜씨로 자 신들을 거꾸러뜨리고 말을 훔쳐가는 두 남녀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이 다. 그것은 용감한 도둑을 존중하는 발케네인의 태도였다. 발케네 병 사들이 발케네인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뒤를 잠깐 돌아보고 발케네군의 척후병들이 충분히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이레는 말의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세레지 또한 말의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이레. 이 말들 어떻게 할 거야? 우리 둘이 탈 것 빼도 두 마리가 남잖아. 이 근처 아무 농장에 들러서 헐값에 팔아버리자." "안돼." "왜 안돼?" "이 말들은 군마야. 낙인을 봐도, 마구를 봐도 발케네의 군마라는 것을 당장 알 수 있어. 이 앞쪽의 마을은 모두 발케네군의 예상 진격 로에 위치해 있는데 그런 마을에서 발케네의 군마를 가지고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하겠어?" "아, 이런. 그러면 이 말들 어떻게 하지?" "너와 네 아버지가 가져." "응? 나랑 아빠랑?" "그래. 타고 시모그라쥬로 돌아가. 아니면 다른 곳이라도." 세레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레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레는 눈 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척후조가 여기까지 왔으니 발케네군은 이미 지러쿼터 산맥을 넘었 을 거야. 그렇다면 앞으로 보름이면 규리하성 앞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저항할 세력이 별로 없으니까. 그 전에 여기를 떠나도록 해. 너희 아버지와 너는 이 전쟁과 관련이 없어." 세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는 규리하 사람도 아니고 발케네에 무슨 원한 가진 것도 없고. 네 말이 맞네? 떠나야겠다." "무슨 대답이 그래?" "왜? 성의가 없어서? 하지만 너도 성의가 없잖아." "성의? 내가? 걱정해주는 건 성의있는 것 아냐?" "그런 건 아무나 해요. 이레 어린이. 어른의 성의는 그런 것이 아니 지." "설명해주세요. 아주머니." "아빠와 내가 평화를 찾아 떠난다면 어디로 가지? 지금은 어디로 가 든 평화로운 곳은 없을 것 같은데." 이레는 겨울 들판을 가로지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세레지의 말에 대 해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뱀단지가 없어서 알기 어렵지만 어쩌면 제국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빠와 내가 가진 재주는 군사용이야. 우리 재주를 팔아먹 고 다니려면 평화로운 곳보다는 오히려 전쟁터가 좋지. 규리하공은 우리 부녀를 식객으로 대접해주었지만, 이젠 본격적으로 관계 변화를 꾀해볼 때가 된 것 같아. 규리하공을 모실까봐. 백작의 부하에서 변 경백의 부하가 된다면 그것도 신분 상승이다. 그렇지?" 위체 파림과 세레지 파림은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정보원이었으니 백작의 부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데라시는 보통의 백작이 아니었으니 그런 비교는 무의미하다. "제국군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 "글쎄……" "아, 미안해. 내가 성의 없이 말했군." 세레지는 빙긋 웃었다. 제국이 없어진 상황에서 제국군에 들어가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 양식이라고 하기 어렵다. 두어 시간 후 세레지와 이레는 론솔피와 조우했다. 그들은 집결 장 소로 정해져 있던 빈 농가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테룸 나마스 하장군 과 쵸지, 주테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테룸은 이레와 세레지가 끌고 오는 말들을 보고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발케네의 척후조를 만났군. 안 다쳤나?" "괜찮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두 시간 거리 쯤 떨어진 곳에서 척후 조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대단하군. 론솔피?" 론솔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본 건 피난민뿐이었어. 꽤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는데, 척후조 를 만났다면 쓸모가 없군." 그들은 피난민들에게 발케네군의 동향을 물어보기 위해 온 것이다. 하지만 발케네의 척후병과 직접 맞닥뜨린 이상 피난민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쵸지도 척후조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여기까지 척후조가 왔다면 발 케네군은 최대 이틀 거리 안에 있을 겁니다. 빨리 돌아가야겠습니 다." 쵸지와 주테카가 일어났다. 이레와 테룸 나마스 하장군은 각각 두 사람에게 업혔고 속상한 표정으로 말들을 보던 세레지도 곧 아쉬움을 털어버리곤 론솔피에게 업혔다. 세 사람을 업은 세 레콘은 곧 질풍 같은 속도로 규리하성을 향해 달렸다. 만 하루에서 몇 시간 모자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여섯 사람은 규리 하성에 도달했다. 세 레콘은 꽤 피곤해했고 자신의 발로 달린 것은 아니지만 세 인간도 기절할 정도로 힘들어 했다. 테룸 나마스 하장군 은 가까스로 엘시에게 보고를 마친 다음 그 자리에서 졸도하듯이 잠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레에게 나마스 하장군을 옮기라고 명령하려 던 엘시는 이레 또한 비정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른 병사들을 불 러들여 하장군을 옮기게 했다. 이레와 세레지에게도 가서 자라고 말 한 엘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규리하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함께 보고를 들었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말했다. "싸우다 죽는 수밖에 없군요." 엘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허릭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군대를 해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른 선택도 있다. 항복하는 것. 하지만 시허릭은 차마 항복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군인의 자존심 문제도 있거니와, 어차피 시 허릭은 항복할 수 없다. 발케네 정벌군 사령관이었던 그가 발케네에 입힌 피해는 막심하다. 엘시는 만사가 지독하게도 뒤틀려가기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원래 떠날 생각이었다. 제국 곳곳에서 제국군을 규합하기 위 한 대장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유무역당이 스카리 빌파로부 터 세퀴라도의 안전을 구입했고 그러자 스카리는 지러쿼터 산맥 바깥 을 포위하는 것을 중단하고 곧장 지러쿼터 산맥을 넘어와버렸다. 그 리고 그들은 아직 떠나지 못했다. 엘시는 시허릭이 차마 꺼내지 못한 세 번째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 다. 스카리 빌파에게 항복한다는 생각은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지만 엘시는 고통을 참으며 병사들에 대해 생각했다. 시허릭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장교, 그리고 그 자신의 목숨은 보존하기 어 렵겠지만 병사들의 목숨은 보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카리가 바 보가 아닌 이상 잘 훈련된 병사들을 학살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제국은? 제국은 누가 부활시키지? 스카리가?' 엘시는 엄청난 감정적 거부감 속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만약 스카리 빌파가 제국을 부활시킨다면…… 그에겐 사라티본 부대 가 있다. 스카리에겐 모든 불평분자를 쓸어버리고 신황조를 세울 가 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역사가 선택한 제국의 주인이 스카리 라면 그에게 항복하고 병사를 건네주는 것은 병사들의 목숨을 보존함 과 동시에 제국 부활에 일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의미가 있나? 회의를 통하지 않고 가장 강한 자가 모든 것 을 가지는 것이?' 엘시는 자신이 그런 황당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랐다. 병사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 제국을 잃은 제국 신민들에게 제국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대장군의 책임감,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중압감 때문에 엘시는 그 무엇도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웠 다. 하지만 스카리의 신황조 개창을 돕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 다. '그것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엘시에겐 바른 길을 추구할 힘이 없다. 엘시는 고개를 들었다. 시허릭이 지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엘시는 이 철두철미한 부하장수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탈해 머리돌에게 부탁해보겠다." 시허릭은 놀랐다. 그 표정은 기쁨이 아니었다. 시허릭은 대장군이 그런 황당한 발언을 한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무사장이 우리를 위해 발케네군을 태워줄 거란 말씀입니까?" "아니. 하지만 기만은 할 수 있겠지." 시허릭은 엘시가 말하는 기만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후에야 시허릭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다가오면 태우겠다는?" "탈해가 즈믄누리의 결정을 위조하는 것을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하 지만 당장은 다른 생각이 안 떠오르니 어쩔 수 없군. 규리하성으로 가겠다." 엘시가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시허릭은 문득 비감을 느꼈다. 제국군의 대장군이며 무적의 무장이었던 자가 이제 도깨비에게 거짓 말을 구걸하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허릭은 그런 상황을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엘시를 전송하는 그의 말투는 퍽 기묘했다. 엘시가 떠나고 홀로 남게 된 시허릭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펑펑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달리 진지를 떠나 규리하성으로 향하던 엘 시는 별다른 감정적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런 동요를 느낄까봐 말 을 미친듯이 달렸기 때문이다. 엘시는 맞바람에 질식할 것 같은 속도로 말을 달렸다. 말은 대장군 의 질주에 당황했고 조금 후에는 달리기를 거부할 듯한 태도를 보였 다. 하지만 엘시는 무자비하게 말을 재촉했다.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 이 천성이 될 정도로 훈련을 받은 군마는 저항을 포기하고 자신의 한 계 속도로 달렸다. 그러나 엘시는 규리하성까지의 길이 너무 멀다고 느꼈다. 그 길은 거의 평생 만큼이나 길었다. 규리하성에 도착했을 때 말은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비틀거렸 다. 말에서 내린 엘시는 그 모습에 갑자기 죄책감을 느꼈다. 엘시는 자신이 끔찍하게 싫고 증오스럽다고 생각했다. 엘시는 말의 목을 쓸 어주고는 달려온 마구간지기에게 말을 세심하게 돌봐줄 것을 부탁했 다. 그가 성의 정문 계단을 오를 때였다. 계단 위쪽에서 누군가가 다급 하게 뛰어내려왔다. 엘시는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것 이 정우임을 알게 되었다. 정우의 걸음은 꽤 급했다. 엘시는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조금 벌렸다. 그녀가 굴러떨어지면 받아내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그 동작을 본 정우는 눈을 크게 뜨며 걸음을 늦추었다. 문득 엘시는 자신의 모습이 정우를 끌어안으려는 의도로 보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엘시는 당황하여 팔을 내렸다. 그 때 정우가 엘시의 앞에 도달했다. 엘시는 정우에게 사과하고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정 우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가물치 좋아하세요?" 엘시는 누군가가 - 아마도 레콘인 듯한 -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예?" "가물치요! 가물치 좋아하세요?" "아니…… 저……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론 좋아하시게 될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정우는 대답 대신 엘시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정우는 달려내려왔 던 계단을 반대로 뛰어올랐다. 엘시는 그녀에게 끌려가듯 뛰어야 했 다. 정우가 그를 끌고 간 곳은 식당 방향이었다. 엘시는 자신이 곧 가물치 요리를 먹게 될 거라고 짐작했다. 아니었다. 정우는 식당을 지나쳐 주방으로 엘시를 안내했다. 그곳에 는 목욕을 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 커다란 통이 놓여 있었고 통 주 위에는 몇 명의 병사들이 엄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엘시는 당 황하여 정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달리느라 숨이 가빠진 정우는 가 슴을 누른 채 헐떡거릴 뿐 설명을 하지 못했다. 정우는 손으로 통을 가리켰다. 통 안을 보라는 뜻이라고 짐작한 엘시는 그렇게 했다. 통 안에는 절 반쯤 물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꽤 커다란 가물치 한 마리 가 지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엘시는 가물치의 모습에서 귀 엽다거나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궁금했다. 다시 정우를 돌아보며 호흡이 좀 진정되었으면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하려 던 엘시는, 그러나 갑자기 통 안으로 상체를 확 집어넣었다. 잠시 후 정우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엘시는 가물치를 사랑하게 되었 다. 그리고 또 엘시는 도망친 태위의 무한한 능력에 불가사의한 기분 을 느겼다. 엘시는 태위 레이헬 라보가 도대체 어떻게 가물치의 옆구 리에 글을 써서 보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해가 저물었다. 비나간의 하루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야기들은 저녁 식사 후의 시간 을 기약하며 잠시 사그라들었다. 어쨌든 비나간 후작이 살인교사 혐 의로 체포되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저녁 식사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 드문 사람들 중 한 명인 지키멜 퍼스는 자신의 응접실 창가에 서서 비나간 의 곳곳에서 피어나는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키멜은 대학생이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하이스 대학에서 그녀를 감동하게 한 것은 심화된 지식도 아니고 새로운 만남도 아니었다. 지 키멜은 대학의 불빛에 감탄했다. 하이스 대학의 밤은 밝았다. 부족한 학업을 보충하고 새로 얻은 지식을 심화시키기 위한 불빛이었다면 기 특한 일이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가족의 질서와 익숙한 제약에서 벗어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기에 피어난 불빛들이었다. 낮 동안 근면한 학생이었던 젊은이들은 해가 지면 도깨비들의 회합이 아닌가 싶을 만큼이나 불을 피워놓은 채 밤에 할 수 있는 온갖 일들을 궁리 했다. 그리고 학교측은 그런 야간 활동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다. 학 생들도 자신이 누리는 자유의 한계를 넘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알고 있었기에 그 밤들은 탈선과 부조리의 시간이라기보다는 느슨 하고 유쾌한 시간으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지키멜은 그런 밤들을 사 랑했다. 그녀는 교수에게 충혈된 눈을 지적당하는 것조차 좋아했다. 창가에 서있던 지키멜은 방쪽으로 돌아섰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저녁 식사도 미룬 채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특별히 한 자리에 모일 필요가 없어 보이 는 무리였다. 도서관에 찾아와 음침한 목소리로 비전을 찾는 사람에 게 더 음침한 표정으로 그 책을 대출받고 싶으면 처녀의 피 한 병을 가져와야 된다고 말하면 어울릴 것 같은 사서형 청년과 이야기를 나 누고 있는 것은 지금 당장 사냥이라도 떠나려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거 친 복장의 처녀였고, 그들의 이야기에 참가하지 않은 채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은 약냄새를 잔뜩 풍기기 때문에 의사라는 것을 당장 알아차 릴 수 있는 청년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거친 작업복에 톱밥을 잔뜩 묻히고 있어 건재상인이나 목수 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열 명 쯤 은 되는 예비 신랑에게 추파를 받고 있을 법한 단아한 처녀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외에도 얼핏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많은 젊은이들 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그들 모두는 저녁을 아직 먹지 못했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추종의 방식이나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지키 멜 퍼스의 추종자들이었다. 지키멜은 그들에게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까 했다. 바깥 을 보던 지키멜은 비나간의 야경뿐만 아니라 황급히 달려오는 어떤 사람도 보았다. 하지만 지키멜은 그만두기로 했다. 아마도 도착하는 인물은 깜짝 놀라길 기대할 것이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응접실의 문을 부수듯이 하며 들어선 팩스벗 졸다비는 기겁한 동지들의 얼굴에 곧장 말을 던졌다. 아마 달려오면 서 줄곧 그렇게 외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파마크가 잡혔다!" 젊은이들은 놀라면서도 그 말이 조금 부적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약 냄새를 풍기던 젊은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빨리 그 말이 왜 부적 절한지 깨달았다. "파마크는 중요하지 않아. 열쇠는?" 다른 젊은이들은 팩스벗의 외침이 왜 이상한지 깨달았다. 팩스벗은 의사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마크는 우리에게 열쇠를 줄 수 없어." 젊은이들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창가에 서있던 지키멜은 태연히 팩 스벗을 바라보았다. 팩스벗은 싱긋 웃으며 품속에서 큼직한 열쇠 꾸 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당황한 동지들을 향해 말했다. "이미 줬으니까." 젊은이들은 안도했다. 그들은 박수를 치거나 탄성을 내질렀고 어떤 이는 팩스벗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팩스벗은 두 손을 들어 동지 들에게 진정하라는 몸짓을 하고는 갑자기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그는 엄숙한 걸음으로 지키멜 퍼스에게 다가갔다. 지키멜은 벽에 기댄 채 팩스벗을 바라보았다. 지키멜의 앞에 도달한 팩스벗은 겸손한 동작으로 열쇠 꾸러미를 내 밀었다. "자야스텐의 열쇠입니다. 각하." 지키멜은 빙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젊은이들은 홀빈 퍼스 후작의 시종장이 보관하고 있던 자야스텐의 창고 열쇠가 지키멜의 손에 들어 가는 것을 보았다. 자야스텐의 창고에는 후작가의 보물들이 잔뜩 들어있다. 금권주의적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은 보상을 약속하고 협조를 얻은 이들에게 줄 것이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그 방에는 비나간의 중요서 류들도 잔뜩 들어있다. 정보의 중요성을 최우선시하는 젊은이들은 자 신들이 막강한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야스텐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비나간의 국새를 떠올리며 즐거워 했다. 국새 의 상징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홀빈 퍼스 후작에게 무기징역을 언도한다 해도 국새가 없어 명령서를 발부할 수 없다면 황당하기 짝 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키멜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 방에 있는 젊은이들 중 누 구와도 달랐다. 어쩔 수 없는 입장차 때문일 것이다. 지키멜은 자신 의 손에 들어와 있는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보며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되돌릴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홀빈 퍼스 후작에 대 한 고발장이 제출된 시점부터 이미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졌다. 하지만 지키멜의 손 안에서 확실한 무게감으로 그녀의 손을 내 리누르는 열쇠 꾸러미는 그녀의 팔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신도 긴장시 켰다. 지키멜은 추락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좋은 기분이었 다. 지키멜은 열쇠 꾸러미를 머리 위로 힘차게 들어보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열쇠가 부딪히며 거세게 절그렁거 리는 소리는 몇 백 단어의 연설 이상이었다. 젊은이들은 함성을 내질 렀다. 지키멜은 입술을 단단히 붙인 채 눈으로 웃었다. 그녀는 열쇠 를 내리며 말했다. "좋아. 동지들. 이제부터는 정말 바쁘게 되었다. 지금부터 가장 필 요없는 말은 잠깐 생각 좀 해보자거나 다른 방법은 없나 등의 말이 다. 생각할 시간은 확실히 지났으니 이제부터는 재빨리 저지른 실수 가 성공을 보장하는 숙고보다 훨씬 낫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의 비 나간 앞에 떳떳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키멜이 그 말을 꺼 낸 것은 젊은이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에서였다. "오늘 같은 일은 오늘로 끝나야 한다. 모두들 초조하고 걱정돼서 이 렇게 모여있는 것은 알지만, 그리고 같은 기분일 것이 분명한 동지들 과 한 자리에 있음으로써 위안받고 싶은 것도 이해하지만, 이렇게 모 여있는다고 해서 이 열쇠가 더 빨리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 그럴 시 간이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고 한 마디라도 더 하는 것이 나 지 않을까?" 젊은이들은 당황했다. 지키멜은 그들이 당황을 통제하거나 반격논리 를 구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 응접실에는 내게도, 여러분에게도 많은 추억이 있지." 대화 소재가 갑자기 바뀌자 당항했던 젊은이들은 지키멜의 말에 집 중했다. 지키멜은 손을 가볍게 붙였다가 뗐다. 그녀의 손에 있던 열 쇠가 다시 잘그락거렸다. "여러분들도 나만큼 이곳을 사랑할 거라 생각해. 이곳은 편하고 즐 겁지. 술 한 잔 손에 든 채 여러분처럼 좋은 친구들과 함께 앉아있기 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어. 하지만 안락함과 즐거움은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맛볼 수 있는 위안이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그래. 이제 시작이야. 우리는 늙은이를 보좌에서 끌 어내렸고 자야스텐의 열쇠를 손에 넣었다. 그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늙은이의 일을 해야 하고 우리가 자야스텐의 창고에 있는 것들을 써 야 한다는 의미지. 이제 비나간은 우리 책임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루었고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될 때 까지 이 응접실은 폐쇄하겠다. 앞으로 우리의 대화 장소는 노변이 되 어야 하고 우리의 작별 인사는 달리자가 되어야 한다. 일어나." 지키멜의 추종자들은 황급히 일어났다. 지키멜은 그들에게 다가갔 다. 팩스벗에게 다가간 지키멜은 두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붙잡았 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달리자." 팩스벗은 활기차게 대답했다. "달리자!" 그리고 팩스벗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지키멜은 그 옆의 젊은이에 게 다가가 똑같이 손을 붙잡았다. 어떤 처녀는 지키멜과 포옹했고 어 떤 청년은 지키멜과 주먹을 부딪혔다. 그리고 모두들 달리자고 외친 다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사람이 응접실을 빠져나간 다음 지키멜은 방 안에 홀로 서서 손에 쥔 자야스텐의 열쇠를 내려다보았 다. 잠시 후 그녀는 열쇠들을 꽉 움켜쥐었다. "재미있을까?" 대답은 없었다. 지키멜은 피식 웃고는 자야스텐의 열쇠를 갈무리했 다. 그녀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반 시간 후, 비나간후 홀빈 퍼스의 방 앞에서 기묘한 일이 일어났 다. 홀빈 퍼스가 자신의 방에 연금된 이후 그의 방문 앞에는 줄곧 두 명의 경비병들이 서있었다. 밤 시간의 경비를 맡은 병사들은 저녁 식 사를 든든히 하고 다음날 아침이 올 때까지 그곳에 서있을 예정이었 다. 그런데 사람들이 잠자리로 들 무렵 병사들은 이미 아침이 다가왔 으며 교대병도 나타났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런 놀라운 시간 왜곡 이 일어난 것에는 어디선가 나타나 병사들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주머니가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하다. 어쨌든 자신들이 그곳을 떠날 시 간이 되었다고 생각한 병사들은 주저없이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경 비병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지키멜 퍼스와 몇 명의 동행자가 남게 되 었다. 지키멜의 동행자들은 응접실에 있던 추종자들과는 구성 방식이 달랐 다. 한 자리에 모여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제각기 다른 모 습을 하고 있던 추종자 무리들과 달리 그들은 똑같이 험상궂은 얼굴 을 가지고 있었고 똑같이 큼직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다. 지키멜은 그들과 함께 증조부의 방 안으로 들어 갔다. 비나간의 후작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노인은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의 무릎에는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지키멜은 방을 가로질 러 후작에게 다가가는 대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 주무셨군요. 그런데 책 아래에는 뭐가 있지요?" 퍼스 노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키멜은 동행한 무사들 중 한 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무사는 후작에게 다가가서는 실례한다는 말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후작은 저항하지 않았다. 무사는 책과 그 아래에 놓여있던 단검을 집어들고는 뒤로 물러났다. 지키멜은 후작에 게 다가갔다. "촛불빛으로 책을 보실 수 없게 되신지가 10년도 넘었잖아요. 증조 부님." 홀빈은 쭈글쭈글한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다른 무사가 의자를 가져 왔고 지키멜은 거기에 앉아 후작을 마주보았다. 그녀는 단검을 들고 있던 무사에게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지키멜은 단검을 세 심하게 관찰했다. "예쁘군요." "뭘 할 작정이냐, 지키멜." "필요한 일들을 할 거예요." "무슨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지키멜은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증조부님도 모르는 증조부님의 속마음을 말씀해드릴까요. 증조부님 이 질문하시는 것은 궁금해서가 아니라 제 대답을 가지고 훈계를 시 작하기 위해서예요. 그러겠다고 결정하신 것도 아니죠. 증조부님의 화법이 그렇죠…… 아, 아뇨.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말라니?"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말이야…… 이런 말씀은 하지 마시라고 요. 훈계를 위해 훈계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훈계는 제발 하지 마세요. 견디기 힘드니까." 홀빈은 배 위에 손을 얹고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야무지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지키멜." "왜 할아버지를 죽였지요?" 홀빈의 목에서 기름기 없는 피부가 꿈틀거렸다. 노후작은 움푹 들어 간 볼을 비틀어 비웃음을 만들어내려 했다. 성공적이라고 하기는 어 려웠다. "제 아비를 노렸으니까." "그런가요? 그러면 재산과 권리를 몰수한 다음 비나간 바깥으로 추 방하셔도 되셨을 텐데요." 홀빈은 흠칫했다. 지키멜은 말했다. "아뇨. 제가 증조부님을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정말 궁금 해서 여쭙는 거예요." "그것은 분란을 잠시 미뤄두는 짓이지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지키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의 끝에서 지키멜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는 그녀의 목은 고왔다. 지키멜은 위쪽을 보며 말했다. "경고하고 싶으셨던 거지요?" "뭐?" "아들을 죽일 수도 있는 냉혹한 사람이니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시고 싶으셨던 거지요?" "웃기는 생각이구나." "저는 안 우스운데요." "비나간의 후작인 내가 누구에게 경고를 한다는 거냐?" "물론 비나간의 후작에게 경고하신 거죠."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온 거냐?" 지키멜은 어깨를 장난스럽게 움츠렸다. 홀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뭐 라 말하려 했다. 그 때 지키멜의 손이 갑자기 움직였다. 지키멜은 품속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들어올렸다. 홀빈은 흐린 눈으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지키멜이 말했다. "자야스텐의 열쇠입니다. 증조부님. 파마크 시종장은 꽤 빨리 도망 쳤지만 충분히 빠르지는 못했어요." 홀빈의 어깨가 눈에 보이게 꿈틀거렸다. 지키멜은 열쇠를 무릎에 얹 어놓으며 말했다.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온 것은 아니고,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 지 여쭤보려고 왔어요." 홀빈 퍼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인색한 눈물이었다. 흘러내리지 도 않고 눈꺼풀을 몇 번 껌뻑이면 모두 사라지는. 홀빈은 가만히 생 각해보았다. "잠처럼 강한 것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준비해라." 지키멜은 움찔했다. "지금이요?" "그래. 지금. 그리고 바쁘지 않다면 그것이 올 때까지 나와 이야기 나 좀 하자. 괜찮겠니?" 지키멜은 고개를 조금 떨어뜨렸다. 조금 후 지키멜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것을 또 떨어뜨렸다. "그렇게 하겠어요." 지키멜의 명령을 받은 무사는 약간 당혹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지키 멜은 다른 무사들도 모두 내보냈다. 그들은 못마땅하지만 거부하기도 어렵다는 표정으로 떠났다. 지키멜은 직접 문을 닫은 다음 증조부의 앞으로 돌아왔다. 의자를 주의깊게 배치한 지키멜은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지키멜은 자결할 증조부와 대화를 시작했다. =============================================================== 유로 2004가 코앞이군요. 어째 소개되는 정보라곤 도박사들 배당률 이야기뿐이니 좀 김빠집니다.(배당률로 우승팀을 알아맞출 수 있다는 논조인데, 일단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도 의심스럽거니와, 만 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우승팀 알아맞추려고 축구 보나?)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0-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13 조회수 : 689 피를 마시는 새 20. 바른 것과 부른 것 - 3 홀빈 퍼스는, 지키멜의 희미한 우려와 달리 90년의 역사로 증손녀를 침몰시키지는 않았다. 홀빈 퍼스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이한 일이었다. 옛날 이야기만 하는 노인에게 젊은이들은 짜증을 내지만 절대로 자신의 것이 될 리 없는 것에 대해 사람이 무관심한 것은 당연하다. 노인에겐 미래가 그러하다. 하지만 홀빈은 미래에 대 해 이야기했다. 비나간후는 황제가 사라진 제국의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이 야기했다. 그리고 지키멜이 비나간의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속성으로 이루어지는 후계자 교육 같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통찰력과 풍부한 지식의 향연은 아니었다. 비나간후는 정치적, 지리적 세부 사항들을 혼동했고 가끔은 죽은 인 물을 살아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보다 나중에 태어난 이가 먼저 죽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장수한 노인 이 당연히 저지를 수 있는 정도의 실수였다. 죽을 사람의 말을 방해 하는 것이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주저하던 지키멜이 어렵게 증조부 의 실수를 지적했을 때 홀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실수를 교정 하고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몽땅 실언이나 상식적인 수준인 것은 아니었 다. 홀빈은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든 즈믄누리의 지지를 얻도록 해라." "즈믄누리요?" "그래. 즈믄누리는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리는 결정들과 마찬가지지. 신경쓰지는 않지만 그냥 무시하기도 찜찜하지. 그것은 사실 엄청난 힘이다. 백만 명의 레콘보다 강한 힘이지." "그렇긴 하지만, 그들은 유사 이래 한 번도 다른 사람들의 모듬살이 에 개입하지 않았는데요. 아, 한 번은 있었군요. 페시론섬. 하지만 그것은 소각이지 개입이 아니었어요. 그건 파괴지 정치가 아니었지 요. 태풍이나 지진을 정치적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증손녀의 표현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홀빈은 홀쭉한 볼을 조금 부풀 리며 웃었다. "그렇구나. 정치적인 태풍이나 정치적인 지진은 없지. 하지만 네가 태풍이나 지진을 일으킬 수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게 된다면 너는 정치적인 태풍이나 정치적인 지진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취급될 거 다." "아." "그래. 그리고 다른 사람…… 유료도로당의 젊은이가 너를 도와주겠 다고 했니?" 지키멜은 조금 당황했다. 홀빈이 말했다. "그냥 짐작한 거다. 이름이 뭐였더라?" "시오크 지울비." "유료도로당주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 젊은이도 참 은자처럼 살아왔나 보구나. 너처럼 자기 통제를 잘 하는 젊은이냐?" "게으름뱅이에요." 홀빈은 빙긋 웃었다. 지키멜은 입을 닫았다. 홀빈은 더 할 말이 없나 하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차례로 손을 내미는 시간들에 아무런 단어도 내주지 않은 채 앉아있던 노후작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황제가 될 생각이냐?" 지키멜은 호흡을 멈췄다. 그녀는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홀빈의 질문 내용에 놀란 것은 아니다. 지키멜은 지금 이 순간이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질문을 대비하여 그녀는 많은 말을 준비해두었다. 하지만 지금 지키멜은 그런 말들을 입밖으로 꺼내놓는 것은 바보밖에 없을 거라는 확신에 차있었다. 그녀는 당혹했고, 억울 했으며, 예민해졌다. 지키멜은 어디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가 난 다고 생각했다. 그 냄새는 고통스러웠던 몸살과 숙취의 아침을 떠올 리게 했고 가구 아래에서 끌어낸 먼지 덩어리를 떠올리게 했다. 지키 멜은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비나간의 왕이 될 생각이에요." "왕이라." "저는 제국이 너무 일찍 찾아왔다고 생각해요. 원시제께서 최선을 다해 기반을 닦으셨다는 것은 인정해요. 아무도 그 분이 만든 것 같 은 것을 만들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충분 히 튼튼하지 못했어요. 아직 세상에 제국은 어울리지 않아요. 스카리 빌파나 팔디곤 토프탈이 아무리 원한다 해도 발케네국이나 시모그라 쥬국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 고작일 거예요. 귀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제국을 부활시키자는 엘시 에더리의 부르짖음도 마찬가지죠. 못 된 몽상가든 멋진 몽상가든 몽상가는 전부 몽상이나 하게 내버려두고 미리 우리 살 길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목표치가 낮으니 까 성공 가능성도 더 높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숨에 말을 끝낸 지키멜은 증조부를 바라보았다. 퍼스 노후작은 가 냘픈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그 모든 이야기는 선황의 모든 구상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구나." "그렇지 않은가요?" "선황께서는 아라짓 제국이 두억시니라고 하셨지." 지키멜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거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내가 들었으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죠?" 후작은 손바닥으로 볼을 쓸었다.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지만 마음에 드는 설명은 하나도 없었다. 하 지만 지금 갑자기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긴 하다." "뭐죠?" "두억시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 그러니 두억시니 같다는 말은 쓸 수 있지만 '두억시니처럼 보이지 않는'이라는 말은 쓸 수가 없어." 지키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라짓 제국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씀이세요?" 홀빈은 피로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들어 눈 주위를 비볐 다. "지키멜.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행동을 시작한 거지?" 지키멜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나간 후작 홀빈 퍼스는 앙상한 팔을 의자의 팔걸이 위에 고정시키려 애쓰며 말했다. "너는 선황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 은 좀 다르다. 나는 선황을 만났을 때 이미 보는 눈이 어느 정도는 틔어있는 연배였다. 그런 눈으로 본 선황은 실패할 일에 도전하지는 않으셨을 분이었다. 너는 다른 사람들처럼 선황께서 제국을 만들었다 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홀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빛나는 눈빛으로 말했다. "원시제 폐하께서 만드신 것은 따로 있고, 우리가 제국이라고 생각 했던 것은 그 '무엇'이 만들어낸 한 가지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제국의 실종 또한 그 '무엇'이 만들어낸 모습 일 수도 있다. 선황께서는 2대만에 사라질 부실한 제국을 만드시느라 수명이 단축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지만 훨씬 튼튼 한 무엇인가를 만드셨던 것이다." 홀빈은 원시제와 만나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했다. 지키멜은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말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뭐죠?" 노후작의 몸짓과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평생의 노화를 몇 분만 에 재현해보인 홀빈은 다시 자결을 앞두고 있는 아흔 살 노인으로 돌 아와 말했다. "나도 모르겠다." 지키멜은 좀 더 기운을 내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홀빈의 말에는 그 녀가 예상할 수도 없었던 특이한 통찰이 있었다. 지키멜은 그것이 신 경 쓰였다. 하지만 홀빈은 잠깐 동안의 과거 회귀를 이미 잊은 듯 자 신에 대해 말했다. "너는 현실 안주를 위한 변명거리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겐 그런 느 낌이 있었다. 걱정할 것은 없다고. 선황께서는 쉽게 망해버릴 제국을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내가 집적거려서 위험해질 것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지키멜은 모든 사람들이 불평꾼이자 능력 없는 야심가 쯤으로 여기 는 증조부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홀빈 퍼스는 선황을 존경하 고 신뢰했다. 그런 그가 왜 사사건건 제국 정부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고 방해를 일삼았던 것일까? 지키멜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는 아들을 죽인 인물이다. "그래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한 기분이 없었다. 그래. 이건 환 상을 가지고 변명하는 꼴일지도 모르지. 내겐 주관적인 느낌 외에 아 무런 증거가 없다. 흥. 네가 옳을 거다. 지금은 행동이 중요한 시점 이겠지." "증조부님." "나는 그저 귀찮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나간에겐 나보다 네가 필 요하겠지. 과감히 행동에 나서줘서 고맙다고 해야겠군." 비꼬는 투였다. 지키멜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보다 지키멜은 홀빈 이 원시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지키 멜은 증조부가 평생을 지켜온 믿음을 죽기 직전에 포기하게 하고 싶 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홀빈은 문쪽을 돌아보았고 지키멜은 그 소리를 무시했다. 홀빈은 침 묵하고 있는 증소년를 곁눈질하고는 문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며 무사가 들어섰다. 무사는 손에 약병을 들고 오지는 않 을 만큼 재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잔이 놓인 쟁반을 든 채 정중 한 동작으로 방안으로 걸어왔다. 지키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 했고 일어나서 무사에게 쟁반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무사에게 다시 나가도록 명령했다. 쟁반을 든 지키멜은 고개를 숙인 채 증조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퍼스 노후작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거안제미했다. 조그마한 잔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지키멜은 그 무게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지키멜은 쟁반을 내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홀빈은 손에 쥔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키멜은 뒷걸음질쳐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사람에겐 손이 있다. 그것은 쥐고 만지고 밀며 주변의 환경을 통제 한다. 하지만 그 부모가 따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 쥔 최초의 물건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홀빈 또 한 구십여 년 전 자신이 처음으로 쥔 물건이 무엇인지는 기억하지 못 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쥐는 물건이 무엇이 될지 생각 해 본 적이 있었다. 가족의 손? 이불 끄트머리? 붓이나 칼일 수도 있 고 술잔일 수도 있다. 준비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쥐고 죽을지 알 수 없고, 그래서 홀빈은 어떤 물건을 쥐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마진이 죽은 이후로 홀빈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의 늙은 몸은 언제 기능을 그만둘지 알 수 없고 만약 자다가 죽는다면 고민은 필요없다. 예상치 못했지만 자신이 곧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대비할 수 있게 되자 홀빈은 예전에 그만둔 그 고민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 고 대답도 바로 떠올랐다. 홀빈은 맨손으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홀빈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증손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나가거라." 지키멜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여기 있겠어요." "필요하지 않다." "제게 필요해요. 증조부님." "네게?" "예." "그러하냐. 알겠다." 홀빈은 잔을 조금 들어 지키멜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냉랭한 목소 리로 말했다. "이 잔을 들고가서 잘 씻어서 다른 잔과 함께 놓아라. 홀빈 퍼스 후 작이 마셨던 독배라는 식으로 후대에 전해지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홀빈은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는 입술에 잔을 댄 채 잠깐 주춤했 다. 그리고 노후작은 잔을 단숨에 비웠다. 노인의 앙상한 목에서 목 젖이 꿈틀거렸다. 지키멜은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홀빈은 잔을 내밀었고 지키멜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홀빈은 의자에 몸을 기대었 다. "쓰구나." 지키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 다. 후작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바 라보았다. 후작의 호흡이 가빠졌다. 후작은 팔을 들어올릴 듯 어깨를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후작이 눈을 감았다. 메마른 입술이 바람에 비벼지는 잎사귀들처럼 움직였다. "마진." 후작이 숨을 거두었다. 아라짓력 31년 10월, 살해교사의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던 비나간 후작 홀빈 퍼스가 자신의 방에서 자결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람들 은 거의 공공연한 비밀 취급을 받는 마진 퍼스 독살 사건은 조사자가 약간의 열의만 있으면 쉽게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니만큼 노후작이 빠져나갈 길은 없고, 강대한 권력자로 평생을 살아온 노후작이 생의 마지막에 끔찍한 꼴을 보지 않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생을 포기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생각은 "나라도 그러겠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피의자가 죽었기에 재판은 중지되었고 비나간의 지배자를 재판하기 위해 모인 유력인사들은 즉각 비나간후의 장례와 비나간의 차기 지배 자를 선출하는 일에 매달렸다. 장례를 주관하는 것은 당연히 후작의 손자인 레데른 퍼스여야겠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명문화된 규 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차기 지배자가 전 지배자의 장례 를 주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 말은 바꿔 말한다면 레데른 퍼스가 후작위를 승계받는 것은 그렇게 당연하지 않 다는 의미다. 레데른의 입장에서는 꽤 수치스러운 상황일 수도 있지 만 그 소문난 호인은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 마진 과 달리 살아남았으며 무서운 할아버지가 죽었기에 이제는 안전하다 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리고 그에게 언제는 위험했냐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무능한 레데른은 한 번도 위험했던 적이 없다. 레데 른은 호인처럼 웃으며 사람들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비나간의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지키멜이 후작위를 계승하 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것은 사람들이 차마 레데른에게 직접 말하기 어려워 아직 꺼내지 못한 요구였지만 사람들은 경악한 얼굴로 어떻게 딸이 아버지의 자리 를 뺏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런 모습은 레데른을 자극했고 레데른 은 범인들이 내릴 수 없는 탁월한 용단을 내린 자처럼 행동했다. 지 키멜이 반드시 후작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지키 멜과 사람들은 적당한 수준까지 반대한 다음 그처럼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레데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행동이 공정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세심하기는 했다. 사람들은 레데른이 자 신의 '대범한 양보'에 도취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쩌면 비나간 사람들의 태도는 공정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군." 유료도로당주 게라임 지울비는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논평했다. 시오 크가 질문했다. "왜 공정하다는 거죠, 아버지? 그들은 레데른을 기만했는데요." "진실을 받아들일 능력도 없는 바보에게 진실을 가르쳐주는 것은 공 정하지 않아. 그 반대가 공정하지." 시오크는 웃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의 당주의 방이다. 꽤나 큼직했지만 그것은 품위를 거주지의 용적으로 나타내는 악취미는 아니다. 가끔 보다 내 밀한 회의를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커다란 것뿐이다. 꽤 많은 사람들 이 둘러앉을 수 있는 커다란 탁자에는 지금 게라임과 시오크가 앉아 있었다. 게라임은 연초를 피우며 비나간의 유료도로당 지부로부터 보 내온 보고서를 읽고 있었고 시오크는 그 앞에서 차를 홀짝거리고 있 었다. 유료도로당 외부의 사람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알고 있는 유료 도로당주와 그 아들의 대립은, 그 자리에선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만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는 보통의 부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꾸며낸 상황이 아니다. 유료도로당의 앞날에 대해 두 사람은 도저히 화해가 불가능한 이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게 라임은 시오크의 승진을 감찰관에 못박아둘 작정이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런 상황이 자신들의 부자 관계에 특별히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이가 좋은 부자였고 그것은 아버지가 아 들을 공개적인 회의석상에서 똥오줌도 못가리는 주제에 별을 따려고 덤비는 급진주의자로 만들어놓거나 반대로 아들이 아버지를 정신적으 로는 임종을 지난 수구주의자로 몰아붙인 후에도 그러했다. 시오크는 아무런 승리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새 비나간후를 등에 업고 젊은 당원들을 선 동해볼까 하는데요." 게라임 또한 그 말에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비꼬는 기색이 전혀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거 좀 어렵지 않겠냐? 내가 너를 상당한 바보로 만들어놨는데." "그게 좀 지나치셨거든요. 동정을 얻고 있습니다." "동정은 다른 경우엔 꽤 도움이 되지만 혁명에 도움이 안돼. 네가 일으키고 싶은 것은 유료도로당의 혁명이잖아. 혁명에 도움이 되는 것은 미치광이들이지." "미친 친구들도 제법 모아놨습니다." "잘했군. 그래서? 네 계획은?" "당원 대회를 열어서 지도부에 대한 불신임 결정을 내릴까 합니다. 물론 비나간에서 하게 되겠지요." "비나간의 새 후작이 내가 훼방 놓을 수 없도록 막는 것이군. 상당 히 껄끄럽겠는데." "그냥 사임하시고 저를 후임 당주로 지명하시지요?" "아들아. 난 유료도로당을 사랑한단다." 시오크는 미소를 지었다. 게라임 또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에게 유료도로당을 맡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하다. 너는 너 만이 공정함과 불공정함을 가릴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 속에서 당의 도로를 사람들의 정치적 도구로 제공하겠지. 그리고 자신과 당을 모 두 정치의 그물에 빠져 허둥거리게 만든 다음 결국 당이 지켜온 철학 이 옳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겠지. 원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지나치 게 많은 낭비를 하는 셈이다." 시오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단정적이십니다. 아버지. 철없는 아들은 보통 그런 태도에 반항하 게 되는데요." "넌 철없는 아들이 아니니까 괜찮아." "제가 철없는 아들이 아니라고요?" "그래. 넌 멍청한 아들이지 절대로 철없는 아들은 아니다." "누구 아들인데, 어련하겠습니까." 게라임은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잠시 후 게라임은 웃음을 거두 고 말했다. "하지 마라. 시오크. 시기가 안 좋다. 당내 분란이 일어나도 피해를 간단히 수습할 수 있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 당은 천 조각, 만 조각으로 찢어지고 당원들은 귀족들과 결탁하여 유료도 로당의 도로를 그들에게 바치고 개인적인 영달을 꾀할 수도 있다. 우 리가 다른 단체들처럼 그들에게서 당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느냐. 우리는 도로를 되찾아오거나 할 수 없지. 그게 우리의 문제란 말이야. 지금 당 지도부는 가장 확고한 태도로 당을 장악해야 한다. 당주의 아들이 벌인 사고는 지도부에게 부담이 너무 크다." 시오크는 탁자 위에 놓인 두 손을 깍지 끼고는 말했다. "반대로 생각하실 수는 없으십니까? 이런 안 좋은 시기야말로 유료 도로당이 사람들을 위해 나설 시기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길 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앞날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길을 제공해 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목적지를 알고 있다면 길을 뚫을 수도 있지. 하지만 모르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우리 유료도로당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우수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월등히 더 멍청한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전쟁을 정당화하 는 명분은 없습니다. 어떤 전쟁도 나쁜 겁니다. 이런 것은 꼭 증명하 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을 아는데 대단한 지혜가 필요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침략 전쟁을 일으키려는 모든 군 대의 길을 막자는 겁니다. 그 주장이 그렇게 황당한 겁니까?" "황당하다." "왜지요?" "왜냐 하면 그건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주전론자 들의 고질적인 모순 논리를 답습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시오크는 몸을 뒤로 물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게라임은 웃음기를 거두고 침중하게 말했다. "우리가 길을 막으면 그들이 '예. 잘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 오.' 라고 하겠느냐? 그럴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자는 우리와 싸워서 길을 얻으려고 할 거다. 그건 전쟁이 아니냐? 너는 전쟁을 막 기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저 바깥에는 제국의 재건을 위해 자신들이 싸워야 한다는 사명 의식에 불타고 있겠지. 차이가 뭐지? 우리는 옳고 그들은 틀렸다고 말할 거 냐?" 시오크는 팔짱을 끼고 아버지를 바라보아다. 게라임이 계속 말했다. "우리 피를 흘리기 싫으니 다른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이야 기는 말이 안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거다. 시오크. 만약 도로 사용료 를 내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나는 피를 흘리기 싫어서 그것을 용인하는 대신 무기를 준비할 거다. 그것이 우리 규칙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 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싸운다면 다른 사람들 도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말하겠다. 그것이 양자에게 공정하다. 하지만 너희들은 싸우면 안되고 우리는 싸워도 된다는 네 주장은 공정하지 않다. 싸움은 둘이서 하는 거니 네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 서 너에게 반대하는 거다." 찻잔 속에 남은 찻물 속에서 앙금이 검게 가라앉았다. 시오크는 찻 잔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앙금이 사라진 차를 다시 내려놓은 시오 크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공정함은 공정함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고 싶은대로 할 테니까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는 거죠." 게라임은 약간 어두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황당한 거냐?" "황당합니다. 나와 너를 구분하고 절대로 합칠 생각이 없다고 말하 는 거니까. 우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두는 거니까. 다른 사람 들의 경우에도 그런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 못되지만, 길을 만들어 사 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우리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게 반대하는 겁니다." 시오크는 말끝에서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아버지?" "왜?" "다른 부자들은 마주 앉으면 좋은 며느리감 있는데 관심 있느냐, 그 여자 예뻐요? 뭐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데 우리는 왜 그럴 수 없는 거죠?" "그러게 말이다. 끙." 그들은 사이 좋은 부자였다. 한쪽이 다른쪽을 파멸시킨 후에도 그들 은 여전히 사이 돈독한 부자로 남을 것이다. 아트밀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라말. 사막의 여자들은 아름답다고 들었어." 파라말 아이솔은 이것을 미인계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수레 위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골케 남작과 지노피 말 티, 그리고 히다 켄의 얼굴을 무시하며 파라말은 말했다. "관심 없습니다." "어째서? 너 여자 구경한지가 엄청나게 오래 되었잖아." 파라말은 설명하기 귀찮았다. "저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지노피는 휘청했고 골케 남작은 헛기침을 했으며 수레를 몰던 히다 켄은 못볼 것을 봤다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트밀은 부리를 딱 벌린 채 파라말을 바라보았지만 파라말이 말을 멈추지 않았기에 곧 뒤쳐지게 되었다. 아트밀은 고개를 심하게 내젓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몇 분 후, 아트밀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라말. 사막의 남자들은 아름답다고 들었어." 휘청하고 헛기침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 다음, 파라말은 형을 잡아 먹을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라말은 동생이 곤경에서 빠 져나오도록 도와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아트밀이 파라말을 괴롭히고 있다면 그것은 바꿔 말해 아트밀이 자신을 괴롭힐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는, 따라서 행복하다는 듯한 얼굴로 사라말은 태평하게 말을 몰 고 있었다. 하지만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라말이 사막으로 달려가고픈 충 동에 빠지게 하는데 실패한 아트밀은 일행의 사막행을 포기하는 대신 사라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파라말은 그 상황이 너무너무 행복하다 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그리고 파라말은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 다고 생각했다.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남작과 지노피와 히다를 무시하며 파라말은 규리하성까지 도대체 얼마나 남았을까 고 민해보았다. 규리하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일행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골케 남작과 지노피 말티, 그리고 히다 켄은 남작의 수레에 타고 있었고 사라말과 파라말은 말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아트밀은 그들 중 가장 빠른 이동수단인 자신의 두 다리를 타고 있었다. 보통 이렇게 여러 종류의 이동수단이 한꺼번에 동원되면 가장 속도가 느린 이동수단에 맞춰 이동속도가 결정되게 마련이지만, 일행의 이동속도를 늦추는 것 은 가장 빠른 아트밀이었다. 아트밀은 일행 모두에게 사막추구열을 전파시키려고 애썼다. 그 때문에 일행은 수레의 평균 속도에도 미치 지 못하는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아스캄에서 합류한 세 남자는 그런 속도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골 케 남작은 이 여행을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도중에 들른 마을과 도 시들에서 규리하를 침공한 발케네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기 때 문이다. 규리하공이 오비삼척인 상황이라면 골케 남작의 성을 파내주 는 일에 신경을 쓸 수는 없을 테고 괜히 전쟁터에 발을 들이밀었다가 좋지 않은 꼴이나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남작은 느린 이 동 속도에 초조해하지는 않았다. 골케 남작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아스캄 수비대원 히다 켄이나 히다가 간다면 자신도 가야한다는 알 수 없는 논리로 따라온 지노피 말티의 경우에는 남작만큼 걱정하지는 않았다. 중늙은이라 할 수 있는 두 남자는 그들의 짧지 않은 생에서 처음으로 아스캄 바깥으로 나온 것이고 그 때문에 꽤 즐거워하고 있 었다. 지노피가 왜 따라온 것인지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 다. 어쨌든 그 때문에 그들도 이동속도가 느린 것에는 특별히 불만을 품지 않았다. 파라말의 경우엔 느린 속도에 화를 내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발케네군이 이미 규리하에 침공했다면 최악의 경우 그들 이 도착하기도 전에 규리하공이나 엘시 에더리가 죽거나 포로로 붙잡 힐지도 모른다. 파라말은 한시라도 빨리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늦 지 않게 도착해서 황제의 유지를 전달한다 해도 전진해오고 있던 스 카리 빌파가 '황제의 유언이 그렇다면 물러가겠습니다'라며 되돌아갈 지는 의심스러웠다. 파라말은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했 다. 그런 좌절을 맛보는 것이 두려웠고, 그래서 파라말은 속도를 높 이자고 재촉하는 것도 삼갔다. 자신의 이중적인 태도에 진저리를 내 며 파라말은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사라말은 발케네군의 침공 소식을 들은 이후로 주로 생각에 잠겨 있 었다. 파라말은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사 라말은 거의 하루 종일 생각하는 일에 빠져있었다. 아트밀이 그를 향 해 사막의 온갖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도 사라말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생각을 계속했다. 놀라운 능력이었다. 강이 나타났다. 겨울이라 수량이 많이 줄어 있어 그냥 걸어서도 지나갈 수 있엇지만 파라말은 그곳에 다리가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튼튼한 돌다리가 있 었다. 아마 아트밀은 밟지 않고 뛰어넘겠지만 뛰어넘으려 해도 아래 에 다리가 있기는 해야 한다. 사라말에게 사막행을 역설하던 아트밀 은 강의 모습에 움찔하다가 파라말이 발견한 다리를 보고 안도했다. 일행은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수레와 두 마리의 말이 건넌 다음 아 트밀이 파라말의 예상처럼 다리를 한꺼번에 뛰어넘었다. 반대편 강변 에 선 아트밀은 다시 출발하는 사라말의 뒤를 따라잡아 사막행에 대 해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라말은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말 에서 내려 아트밀을 바라보고 있었다. 걸어가려던 파라말과 수레의 아스캄 사람들은 그 모습에 놀라 멈춰섰다. 사라말은 말고삐를 끌며 파라말에게 다가갔다. 그는 동생에게 고삐 를 넘겼고 파라말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다시 아트밀의 앞 으로 돌아온 사라말은 레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다시 뒤로 조금 물러났다. 마치 거리를 재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트밀을 포함하여 모 든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때 적당한 거리에 도달한 것처럼 사라말이 멈춰섰다. 그는 아트밀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아트밀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트밀." "왜?" "나 잡아봐라!" 사라말은 발랄하게 강둑을 달려갔다. 파라말은 기절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히다 켄은 이번엔 수레를 끌 고 있는 말 궁둥이를 바라보았고 골케 남작은 "허!" 하는 뜻모를 소 리를 냈다. 그리고 지노피 말티는 "역시 그랬나?"라고 중얼거렸다. 파라말은 뭐가 역시냐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 때 더 당황스러 운 일이 일어났기에 파라말은 그러지 못했다. "거기 서!" 아트밀은 쿵쿵거리며 사라말을 따라 달렸다. 파라말은 자신이 주피 그라쥬 쯤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처용 산맥 동쪽이 라도. 어쨌든 파라말은 이곳에 서서 달려가는 형과 그 뒤를 따라 뛰 어가는 아트밀을 보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파라말은 도대체 무슨 장난이냐고 외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시도 또한 무위로 돌 아갔다. 파라말은 머리카락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 다. 사라말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파라말이 예상한 것처럼 수면 은 낮았고 물은 사라말의 발목 정도를 적셨다. 사라말은 거침없이 달 려 강 반대쪽에 도달했다. 그리고 아트밀도 그러했다. 아트밀은 거대한 발로 물보라를 크게 일으키며 강물을 달렸다. 어쩌 면 창조 이후 처음 일어난 것일지도 모르는 사건을 보며 파라말은 호 흡 곤란을 느꼈다. 그리고 아스캄 사람들 또한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 을 토했다. 주저없이 강물을 가로지른 아트밀은 사라말 앞에 도달했 다. 사라말은 그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트밀은 고개를 갸웃하고 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확 부풀었다. 잠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파라말 은 일행의 아침 식사에 대해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중에서 집 단 환각을 일으킬 만한 음식이 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파라말 은 아트밀이 변장한 인간이라는 가설을 검토해보았다. 그건 변장이 아니라 변신이다. 파라말은 결국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듯한 그의 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엄청나게 부푼 아트밀 때문에 사 라말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사라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가 놀랍도록 고요해서 파라말은 그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 다. "다리로 갑시다." 부풀어오른 아트밀의 옆으로 생각에 잠긴 표정의 사라말이 나타났 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리를 향해 강둑을 올라갔다. 잠시 후 아트밀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채 힘없이 그 뒤를 따랐 다. 다미갈 카루스 부위는 땅에 납작하게 몸을 낮췄다. 풀잎이 콧구멍을 찌를 정도의 높이였고, 다행히 겨울이라 그런 풀잎은 없었다. 대신 섬뜩한 냉기가 몸속으로 확 밀려왔다. 카루스는 이를 악문 채 땅 위 를 뱀처럼 기어갔다. 구릉 뒤편을 기어간 카루스는 조금 후 맥키 네미 부위와 만났다. 맥 키 네미 또한 그와 비슷한 자세로 땅에 엎드려 있었다. 맥키에게 가 까이 다가간 카루스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사라티본 부대는 안 보였어." "나도 못 봤어. 안 보인다는 것은 좋지만, 이왕이면 어디에 있는지 알면 더 좋겠는데." "가자." 구릉 반대편에서 그들을 볼 수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곳까지 기 어간 두 부위는 일어났다. 그리고 말을 묶어둔 곳까지 전력으로 달렸 다. 말에 오른 두 부위는 빠른 속도로 말을 달렸다. 잠시 후 그들은 헨로 중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달했다. 중대는 한 때 채석장으로 쓰였던 계곡에 숨어있었다. 채석장이 흔히 그렇듯 계곡은 터무니없는 각도와 형태였고 그래서 외부에서는 안쪽이 잘 보 이지 않았다. 중대를 가로지른 두 부위는 지휘부에 도달했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가 야외에 놓아둔 탁자 위에 도깨비지를 펼쳐놓고는 그들 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멩이로 눌러놓은 도깨비지에는 이 주변의 지 형이 대략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탁자 뒤편에서 니어엘은 추위 때문 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두 부위가 도착하는 것을 본 니어엘은 경례 도 생략한 채 말했다. "어때?" "사라티본 부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그럼 여기는 없고……" 니어엘 헨로는 붓을 들어 지도 위에 표시했다. 니어엘은 자신이 표 시한 자취와 주변의 지형을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겠군. 강물이 있으니 이쪽으로는 오지 않았을 테고. 여기로 간 것이 시집 가기 어려운 우리 미녀 부위던가?" 카루스와 맥키는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상당히 작위적인 미소였 다. 그들은 니어엘이 활기차게 구는 것이 싫었지만 그것을 그만두라 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니어엘은 여전히 제국군의 영웅이었지만 그 사실에 기뻐하는 헨로 중대원들은 별로 없었다. 특별히 둔한 병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 대원들은 니어엘 헨로가 힘겨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동생을 잃은 후에도 오히려 9014 독립중대를 전설의 중대로 바꿔놓았던 니어 엘이지만 양친이 하늘누리와 함께 사라진 후에는 빛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것은 실제의 꽃과 종이에 그린 꽃이 비슷하게 보인다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림 속의 꽃 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종이는 계속 때를 타고 구 겨지는 것 같았다. 니어엘이 말했다. "릿폴이 돌아오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소대로 돌아가 쉬도록 해." 두 부위는 경례하고는 자신들의 소대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1소 대와 2소대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갈라져야 했 지만 둘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상대편이 할말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결국 맥키가 말했다. "저기 좀 앉자." 맥키가 가리킨 바위를 본 카루스는 거기에 앉았다. 맥키는 그 곁에 나란히 앉아서 말했다. "간단히 말하지. 이젠 우리가 보답할 차례야." 카루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맥키가 계속 말했다. "중대장님은 우리를 잘 이끌어주셨어. 어, 물론 제국군 내에서 중대 장님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러셨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럼 어때? 덕분에 우리는 심각한 피해 입지도 않고 잘 싸웠고 명예도 얻 었지. 이젠 우리가 저 분을 도울 차례야. 그것도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지. 중대장이 넋빠진 사람처럼 굴면 중대원이 살아남을 수 있겠 냐." "아직 수교위님이 넋빠진 사람처럼 구는 것은 보지 못했는데." "그거야 전투가 없었으니 그렇지.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 수 있어. 지금 꼴을 봐. 제기랄, 언제 저런 식으로 말 했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까라면 깐다." "맞아.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뭐야. 릿폴이 돌아오면 알 수 있겠 지. 가서 쉬어. 이게 뭐냐고. 옛날 같았으면 릿폴이 돌아오면 출발한 다. 가서 준비해! 이렇게 말했을 거야." 카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지적이다. 맥키는 투덜거렸다. "솔직히 겁이 난다고. 다 알아서 우리가 이기게 해주던 사람이 기운 빠진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내가 뭔지 떠올 랐어. 나는 부위야. 원래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죽으러 나가는 부위 말이야." 맥키는 재채기를 하고는 고뿔인가 하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뭐, 그렇게 되어야지. 중대장님이 훌륭하셔서 아직 안죽은 건 특별 한 선물이었어. 이젠 그 아홉 명처럼 죽으러 나가야지. 안 그래?" "너무 빨리 죽지는 마." 맥키는 씩 웃으며 일어났다. 그는 카루스에게 손을 한 번 흔들고는 자신의 소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카루스는 지휘부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제법 되었지만 탁자 위에 허리를 숙인 채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니어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카루스는 가슴 속이 싸 늘하게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일어났다. 잠시 후 가리아 릿폴 부위가 돌아왔다. 다섯 명의 소대장은 다시 지 휘부로 모였다. 니어엘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라티본 부대의 위치는 이곳이다. 작전 목표는 발케네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는 것이고……" 니어엘의 설명을 듣던 카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맥키를 돌아보았다. 맥키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언제 설명하셨던 적이 있습니까, 중대장님?'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카루스는 쓰디쓴 입맛에 혀를 굴리며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다가 카루스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카루스는 주위가 기묘하게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든 카 루스는 니어엘이 팔짱을 낀 채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 다. 카루스는 주위를 곁눈질했다. 부위들은 모두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맥키의 경우엔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카루스는 어디서 본 듯한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갑자기 니어엘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렸다. 설명을 마친 니어엘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카루스는 놀라서 얼굴을 숙였다. 그가 그 질문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질문의 정답을 생각하는 어려운 작업에 헐떡일 때 니어엘이 나직 하게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 언제 사람 될래?" 카루스는 머리 속에 번개가 번쩍 하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고 싶 은 것을 가까스로 억누른 카루스는 고개를 숙인 채 맥키 쪽을 쳐다보 았다. 맥키 네미 또한 놀라 얼굴로 그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니어엘 의 말이 계속되었다. "도무지 발전이라고는 없구나. 영웅으로 만들어줬으면 영웅 흉내는 좀 내야 할 거 아냐. 중대장님 심기 언짢은 거 느꼈으면 머리 좀 굴 려볼 생각은 해야지. 너희들 때문에 난 전사도 못하고 우아하게 수심 에 잠긴 척하지도 못하겠다. 까짓거, 퇴역할 때까지 너희들 보살펴주 지. 그러니 너희들도 전사하지마." 카루스는 고개를 들었다. 니어엘은 싱긋 웃고는 빠르게 말했다. "설명 관두자. 도와줄 생각 없는 거 알았으니. 즉각 출발한다. 가서 소대 챙겨!" 다섯 부위는 엉덩이를 걷어차인 사람마냥 황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 중 놀라거나 겁먹은 사람은 없어보였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 았고 다른 전우들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정말 기 뻤다. =============================================================== 으으. 두드리면서 보느라 그리스 한 골 넣는 거 못 봤음. 타자 후반 전 보러 갑니다.(스페인-러시아전까지 보면 해뜨겠구나. 그런데 이게 7월 5일까지 계속인가? 으윽.)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0-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14 조회수 : 1954 피를 마시는 새 20. 바른 것과 부른 것 - 4 니어엘은 달려가는 부위들의 씩씩한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기뻐했 고 긍정적인 감정의 탁월한 전파력에 대한 실례가 되듯, 니어엘도 기 뻐했다. 니어엘은 자신의 승리에 만족했다. 위로 받고 싶어. 위로를 받으면 더 약해지겠지. 그건 싫어. 니어엘은 어깨를 뒤로 젖혔다. 견갑골 쪽에서 뚜둑 하는 당혹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니어엘은 혀를 조금 내밀었다. 그녀는 자신이 곡차 한 동이와 누가 선물하고 간 것 같은 시간을 가질 자격 정도는 있다 고 믿었지만 억울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원망하면 안돼. 허리에는 잘 벼린 제국검을 차고 있고 전통엔 예리한 애기살이 가득 하다. 그녀는 제국군 수교위고 독립중대의 중대장이다. 그것을 확인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농부가 작물로 자신을 증거하고 작가가 책으 로 자신을 증거하듯 공인 받은 살인자인 그녀는 적의 시체로 자신을 증거한다. 많은 적을 적이면 그녀는 유능한 군인이 된다. 가서, 적을 죽이자. 니어엘은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를 그들이 죽일 것이다." 다짐한 대로 그들을 죽이기 위해, 니어엘은 중대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많은 자들이 죽었다. 두르사 돌 하장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답답할 정도로 막혀 있었다. 높은 산마루와 고개들이 위압적 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얼굴을 조금 들기 전에는 하늘을 보기 어 려울 지경이었다. 이토록 깊고 외진 곳에 오두막이 있으면 좀 기묘하 게 보이겠지만 그것이 숯막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의구심은 사라질 것이다. 숯막은 물론 나무들이 많은 곳에 세워지지만 또한 바람이 적 은 곳을 선택해야 한다. 숯과 재를 경계짓는 것은 불조절인데 바람이 심한 곳에서는 불조절하기가 어렵다. 세즈비 돌의 숯막도 그런 조건 을 따라 바람이 잘 들지 않는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향 규리하에서 무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누대에 걸 쳐 규리하 가문을 섬겨운 돌 가문은 규리하에서도 무문의 명가로 받 아들여지며 그 구성원들은 세상에 무사 외에 다른 직업도 있다는 사 실을 가끔 망각할 지경이다. 그런 긍지 높은 가문에서 세즈비 돌은 가문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다. 두르사 돌의 동생인 세즈비 돌은 방 랑자였다. 방랑자 중에서도 세즈비 돌은 사람살이의 곁을 스치는 방 랑자라기보다는 사람살이를 벗어나려 애쓰는 방랑자에 가까웠다. 그 는 사람들을 사귀길 싫어했고 방랑 도중 들른 숯막에서 숯장이 기술 을 익힌 후에는 아예 숯가마를 차려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하지만 그런 세즈비도 돌 가문의 사람이었고 그 자신이 원하든 원하 치 않든 규리하 내에 여러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세즈비의 숯막을 찾아오며 두르사는 동생이 자신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맞았다. 형의 무사 귀환에 대해 그다운 조용한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한 다음 세즈비는 묻지도 않았는데 정보들을 알려주기 시 작했다. "회담이라고?" 그들은 오두막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서 땅을 파며 이야기하고 있 었다. 세즈비는 휘두르던 괭이를 잠시 내려놓고는 말했다. "그래. 나도 변경백께서 어디에 계신지는 모르지만 그 회담 장소로 찾아가면 각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회담 장소가 어디지?" "규리하 남쪽에 탈리톤 동굴 있는 곳 알지? 그 동굴로 가기 전에 샛 길로 빠져서 몇백 미터 쯤 가면 나타나는 곳인데, 음. 이름을 까먹었 군." "소발굽 바위?" "아, 맞아. 소발굽 바위. 거기 지형이 좀 묘하잖아." "거기라면…… 그래. 무슨 소리인지 알겠군. 날짜는?" "나흘 뒤 정오. 그 동안 여기서 지내다가 가도록 해." "그래. 고마워." 세즈비는 다시 괭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오두막의 마루 쪽을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공자님이랑 함께 있는 저 여자들은 누구지?" 숯막 앞의 마당에는 발케네에서 도망친 규리하 가문의 가신들이 이 리저리 흩어져 앉아있었다. 그리고 오두막의 마루에는 이이타 규리하 와 두 명의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아니, 앉아있는 것은 두 사람이었 고 좀 어린 소녀는 지친 표정으로 마루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두르 사가 말했다. "손위는 헤어릿 에렉스, 발케네공의 사생아. 손아래는 소리 로베자, 발케네공의 하녀였지." 세즈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재미있는 조합이군. 어떤 관계지?" "그게 좀 복잡하군. 공자님은 소리를 연인인 것처럼 대하고 있어. 가당찮은 일이지." "둘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발케네공의 사생아는 왜 따라온 거지?" "우리를 발케네에서 꺼내준 것이 저 여자야." "어떻게?" "저 처녀 도깨비 감투를 가지고 있어." 세즈비의 괭이질이 멈췄다. 그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형을 보다가 헤어릿을 잠시 돌아보았다. "빌파 가문의?" "그래. 세 개의 감투가 있었지. 스카리가 하나 가지고 있었고, 락토 공작의 것도 스카리에게 넘어간 것 같아. 하지만 마지막 감투는 저 처녀가 가지고 있어. 우리가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은 그 감투 덕분 이었지." "그런가. 그런데 왜 이이타 공자를 돕는 건데?" "글쎄. 본인이 설명하지 않아서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말투나 행동 으로 짐작해보면 원래 발케네를 떠날 생각이었나봐. 그래서 떠나는 김에 공자를 데려다주는 거지. 그리고 공자에게 호의적이기도 하고." "공자에게?" "그래. 그래서 규리하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더군." "대가는?" "소리 로베자를 데려가라더군." 세즈비는 빙그레 웃었다. "연인의 수호자인가." 두르사 돌 하장군은 그 낭만적인 표현에 대해 뭐라 한 마디 하고 싶 었다. 하지만 그 때 세즈비의 괭이가 금속성의 소리를 냈다. 세즈비 는 괭이를 조심스럽게 긁어 땅속에서 큼직한 상자가 드러나도록 했 다. 세즈비는 상자 주변을 팠고, 잠시 후 두르사와 세즈비는 힘을 합 쳐 상자를 땅 위로 끌어올렸다. 상자 뚜껑을 열자 몇 개의 술병이 나타났다. 두르사는 빙긋 웃었다. "왜 묻어둔 거지? 설마 도망쳤던 형이 돌아왔을 때 마시려고 묻어둔 것은 아닐 텐데." "의미는 없어. 여기 처음 숯가마 차렸을 때 일인데, 혼자 있으니 계 속 술 마시게 되더군. 언젠가 술에 취한 채 산길 걷다가 다리 부러진 이후로 다 치웠지. 이건 축하할 일이 생기면 꺼내기로 하고 따로 묻 어둔 것이고." 상자를 옆으로 치워놓은 세즈비는 빠져서 다리 부러질지도 모른다며 구덩이를 다시 메웠다. 세즈비는 괭이로, 그리고 두르사는 발로 흙더 미를 밀었다. 땅을 다지던 세즈비가 갑자기 말했다. "그런데 좀 어둡지 않아? 구름이 끼나." 세즈비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라, 하늘치군." 두르사는 깜짝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주위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산들 때문에 하늘치는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정신없이 하늘치를 살펴본 두르사는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두려운 예상과 달리 그것은 하늘누리가 아니었다. 하늘치처럼 놀라운 것에게 그런 말이 어울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평범한 하늘치 였다. 하늘치는 북동쪽에서 산들을 뒤덮을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 하늘을 가렸다. 그 머리쪽이 남서쪽 산을 넘어가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그 몸의 반대편은 아직 북동쪽 산 저편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하늘의 대부분이 하늘치의 몸에 가려졌다. 세즈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 하늘은 코딱지만한데 저런 것이 나타나니 캄캄하군." 세즈비의 말처럼 숯막 주위의 숲은 일몰이 찾아온 것처럼 어두워졌 다. 하늘치의 모습이 언제 다 지나갈지 짐작하기 어려웠던 세즈비와 두르사는 각자 술병을 들고 마루쪽으로 걸어갔다. 규리하로 진공하면서 발케네군의 병사들이 두려워한 것은 무향의 전 설이었다. 비록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그 불패의 신화를 재조정했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공포는 여전했다. 하지만 지러쿼터 산 맥을 넘은 그들을 괴롭힌 것은 낯선 땅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서 깊 은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에게 이미 익숙한 두려움이었다. 헨로 중대는 공병 부대를 공격하고 건재를 불태웠다. 다리가 건설되 지 못해 사라티본 부대가 강을 건너지 못했다. 헨로 중대는 사라티본 부대로 가는 명령서를 위조했다. 늪지로 곧장 진격하게 된 사라티본 부대가 광란을 일으켰다. 헨로 중대는 규리하 지방의 지역 명물이라 고 할 수 있는 독특한 간헐천에 대한 소문을 유포시켰다. 사라티본 부대의 진격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격분한 스카리 빌파는 니어엘 헨로의 수급에 금편 천 닢을 걸었다. 그러자 얼마 후 발케네군 내부에는 니어엘 헨로의 이름으로 스카리 빌파의 고환 한 쪽당 금편 오천 닢을 지불하겠다는 내용의 유인물이 돌아다니게 되었다. 일만금의 불알을 가진 사나이가 된 스카리가 그 사실에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진지에 밤이 찾아오면 화톳불 주위에 모여앉은 발케네 병사들은 니 어엘 헨로와 그녀의 다섯 소대장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당연 하게도 상당히 저속한 내용이나 익살맞은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 여자 부위는 깐다더군. 그러니 상관은 어떻겠어?' 정답으로 간주될 만한 것이 제시된 적은 없지만 토론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명답은 많 이 제출되었다. 물론 공포의 대상을 희화화하려는 것이 그들의 무의 식적인 목적이었지만 헨로 중대로부터 혹독한 피해를 입은 병사들의 가세로 효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발케네 병사들은 자신들이 이토록 이야기를 나누는 대상이 보통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헨로 중대가 입힌 피해는 과장되었고 헨로 중대에 대한 두 려움은 심화되었다. 발케네군의 이동 속도는 정착을 고려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둔화되었다. 발케네의 지휘부는 고민에 빠졌다. 헨로 중대의 애기살 집중사격은 비슷한 규모의 부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전투력이었다. 하지 만 일개 독립 중대를 붙잡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 다. 사람의 모든 행위가 그렇듯 군사 작전도 경제성의 논리에서 자유 롭지는 못하며,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쳐 독립중대 하나를 분쇄한다 해도 그것은 승리라고 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짜증나게 하는 것은 헨로 중대가 입히는 피해가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헨로 중대가 입히고 있는 심리적인 피해는 막대했지만 물질적인 피해는 그에 훨씬 못미쳤다. 일개 독립 중대가 입힐 수 있는 피해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어정쩡했다. 전략 목표로 삼고 본격적으로 추적하기엔 피해 규모에 비해볼 때 과잉 대응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참기엔 꺼림칙하다. 결 국 규리하성으로 최대한 빨리 진격하여 승부를 대회전으로 이끄는 것 이 최선의 대응책이었다. 하지만 헨로 중대의 목표가 바로 발케네군 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회의용 막사에서 고민하고 있던 지 휘부의 장수들 앞에, 그 소재도 잘 파악되지 않는 스카리 빌파가 갑 자기 나타났다. 장수들은 당황하여, 혹은 왜 이제야 나타났냐는 듯한 힐난의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카리는 그들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보내 고는 탁자의 상석으로 갔다. 그곳에는 스카리가 나타날 경우를 대비 하여 빈 의자가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은 스카리는 장수들을 둘러보 았다. "여기서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거지?" 누군가를 지명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스카리 또한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던 듯 계속 말했다. "독립 중대 하나 때문에 바람에 십만 병의 병사들이 꼼짝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시맘 자작. 대답해봐." 미차도 자작 아이고스 시맘은 얼굴을 아주 약간 찌푸렸다. 그는 자 신에게 그럴 정도의 권한이 있다고 믿었다. 그의 충성을 받는 대상은 발케네공이 아닌 펜스터 자작 레드마 브릭이다. 아이고스 시맘과 레 드마 브릭은 같은 자작이지만 혈족의 서열을 따지면 아이고스는 레드 마보다 하위에 해당하고 서약은 그 혈족 서열을 기반으로 이루어졌 다. 어쨌든 아이고스는 자신이 스카리 때문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레 드마 브릭을 따라 참전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레드마 브 릭이 아닌 스카리에게 힐난 당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고스 의 찌푸림은 그런 상황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스카리는 싸늘한 얼굴 로 그 찌푸림을 무시했다. 아이고스가 말했다. "각하. 헨로 중대가 막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십만 병사가 아니라 사 라티본 부대입니다. 니어엘 헨로의 작전은 모조리 사라티본 부대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라티본 부 대가 진격하지 않으면 다른 병사들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곳에는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있으니까요." 아이고스는 알지 못했지만 스카리를 정말 자극한 것은 그의 찌푸림 이 아니라 엘시 에더리라는 이름이었다. 스카리는 얼음장 같은 표정 으로 아이고스를 노려보았다. 아이고스는 그 눈초리에 조금 주눅 들 었지만 계속 말했다. "니어엘 헨로는 놀랍도록 교활하게 우리의 약점을 추궁하고 있는 겁 니다.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간단합니다. 힌치오를 불러 사라티본 부 대를 진격시키십시오. 그러면 모든 발케네군은 그 뒤를 따를 겁니 다." '우리를 닦달하지는 말고.'라는 아이고스의 속마음은 거의 육성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스카리는 매서운 눈으로 아이고스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에더리가 그렇게 두렵나?" 아이고스는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병사들이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두렵나?" 아이고스의 성난 표정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리고 기 죽은 얼굴로 바뀌었다. "무향을 거꾸러뜨린 사람은 무향을 지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레 콘 여단 없이도 무향을 정복했습니다. 누가 그처럼 할 수 있겠습니 까? 저는 그를 존경합니다." "나는 폭우가 쏟아지던 날 사라티본 부대 없이도 나나본을 점령했 다.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아이고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폭우에 관한 기억은 없다. 레콘이 움직일 수 없는 평범한 비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나본은 무향과 도저 히 비교할 수 없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힐난하는 것과 침묵으 로 무시해버리는 것을 놓고 저울질하던 아이고스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쨌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스카리가 말했다. "나를 존경하지는 않나?" "존경합니다. 각하." "나에 대한 존경과 에더리에 대한 존경 중 어느 것이 더 큰가?" "각하. 무슨 말씀을……" "너희들을 지휘하는 나는 믿지 못하고 에더리는 두려워 하니 에더리 를 더 존경하나 보군." "각하. 저는 각하를 존경합니다." "그래도 에더리는 무섭고?" 아이고스는 대답을 그만두었다. 스카리는 눈빛으로 아이고스를 지져 대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팔리탐 지소어에게 머물렀다. "팔리탐 지소어." "예. 각하." "힌치오에게 가서 전해라. 지금 당장 사라티본 부대를 출발시키고, 규리하성 앞에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말라고. 너도 함께 가라. 네가 가면 니어엘 헨로인지 뭔지 하는 여자의 장난질은 막을 수 있을 것이 다." "규리하성에 도달한 다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죽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죽여라." 팔리탐의 가면은 묵묵히 스카리를 마주보며 꼼짝하지 않았다. 스카 리는 거친 콧김을 뿜어내었다. "이것들에겐 시체를 찌를 정도의 용기밖에 없는 것 같으니, 시체나 남겨두면 된다." 장수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팔리탐의 가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스카리는 목에 힘줄을 잔뜩 세우며 말했다. "왜? 내 명령을 받을 수 없나?" 스카리는 팔리탐의 가면을 향해 속으로 말했다. 너는 나를 포기할 수 없어. 내가 유일한 빌파니까. 팔리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팔리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시간 후, 사라티본 부대가 발케네군 앞으로 돌출했다. 넓게 펼쳐 진 그들은 곧 한쪽 방향을 향해 달렸다. 레콘의 질주는 아니었지만 말이 가볍게 뛰는 속도는 훨씬 상회했다. 그들 앞쪽에는 이쑤시개를 든 힌치오와 그 곁에서 말을 달리는 팔리탐 지소어가 있었다. 소발굽 바위는 그 생김새가 소의 발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 다. 소의 발굽은 말의 그것과 달리 가운데가 갈라져 두 개로 이루어 져 있는데 소발굽 바위 또한 가운데가 크게 갈라져 있다. 그 갈라진 곳의 간격은 약 15미터 쯤 되며 그 사이로 낮은 곳에는 계곡물이 흐 르고 있다. 두 개의 바위 중 북쪽에 있는 바위 위에서 제국군 부위 틸러 달비는 지형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틸러는 왜 회담 장소로 그곳이 선정되었 는지 깨달았다. 두 바위 사이의 거리는 목소리를 높이면 대화가 가능 할 정도였지만 결코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레콘이라면 뛰 어넘을 수도 있겠지만 아래에 물이 흐르는 곳에서 레콘은 결코 뛰지 않는다. 그리고 사이를 흐르는 물이 지형을 그렇게 만들어놓았는지 한쪽 바위에서 다른쪽 바위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산 아래를 통해 몇 시간 정도 산행을 해야 했다. 따라서 두 바위 위에 사람이 선다면 서 로 이야기는 할 수 있겠지만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로를 믿기 어려운 회담자들에겐 안성맞춤인 회담 장소였다. 하지만 틸러는 노궁이나 투창이 동원된다면 공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틸러는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산 아래쪽, 틸러가 서있는 북쪽 바위로 통하는 진입로에는 그의 소 대원 중 절반 가량과 탈해, 쵸지, 그리고 정우가 서있었다. 먼저 살 펴보러 올라온 틸러가 두 팔로 동그라미를 그릴 경우 탈해는 번뜩이 에 정우를 태우고 날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틸러를 유 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틸러의 팔이 움직였다. 하지만 틸러는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았다. 잠시 후 틸러를 올려다보던 사람들은 그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 닌가 의심했다. 틸러는 두 팔을 휘두르고 앞으로 뛰었다 뒤로 뛰었다 했다. 사람들은 틸러가 무엇인가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 다. 쵸지가 말했다. "저 친구 헛것과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 탈해는 당혹한 표정으로 정우를 내려다보았다. 그 때 정우가 말했 다. "방패 주세요." 틸러의 소대원들은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 중 선임자가 말했다. "방패라고 하셨습니까, 각하?" "예? 예. 그래요. 틸러가 방패를 가져오라고 하잖아요?" 탈해와 소대원들은 헛것과 싸우고 있는 틸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틸러는 오른팔을 휘둘렀다가 왼팔로 무엇인가를 막는 동 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방패를 가져오라는 뜻이 되 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병사들 중 한 명이 시험 삼아 자신의 방 패를 들어 정우에게 건넸다. 그러자 틸러는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 려보였다. 병사들은 감탄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와 탈해는 번뜩이 위에 올랐다. 푸드득 날아오른 번뜩이는 빠른 속도로 틸러가 서있는 바위로 접근했다. 틸러는 날개 바람에 날려가 지 않도록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었다. 탈해는 방패를 든 정 우를 바위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날아올랐다. 번뜩이가 원래 위치로 돌아간 다음 틸러는 일어섰다. 정우는 두 손 으로 힘겹게 방패를 들고 있었다. 틸러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말했다. "투사 무기를 가지고 오면 골치 아플 것 같아서요." 정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틸러는 바닥을 가리켰다. "춘부장께서 오실 때까지 앉아계세요." "어디서 저격할까봐?" "서서 기다리면 다리 아프시잖습니까." 정우는 부드럽게 웃고는 바닥에 앉았다. 틸러는 저격이 있기는 어려 울 거라 생각했다. 소발굽 바위는 꽤 뾰족한 산 꼭대기에 있었고 아 래에서 바위산 위쪽을 저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력 때문 에 속도가 줄어드니 파괴력도 떨어진다. 하지만 틸러는 작은 위험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이 화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틸러였고, 따라서 틸러는 정우에게 긁힌 상처 하나도 나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담에 반대했다. 군정 출신이 주를 이루는 정우의 신하들은 아이저에게 별 호감이 없었다. 그들은 아이저가 해 야 할 일은 회담이 아니라 무기를 버리고 규리하성으로 찾아오는 것 이라고 주장했다. 정우는 엘시의 의견을 궁금해 했지만 엘시는 이것 이 규리하의 내정 문제라고 판단하고는 개입하지 않았다. 대장군이 생각하기에 규리하의 지배자가 규리하 내에서 누구를 만나거나 말거 나 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 결정할 일이었다. 하지만 틸러는 규리하의 문제든 뭐든 자신은 알 바 없고 할 말은 해 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아이저와 정우의 문제는 서로 만난 이후로, 그러니까 정우가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틸러는 딸을 서슴없이 죽이려 했던 아이저 의 태도 또한 그런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따 라서 양자가 취해야 할 가장 시급한 행동은 대화라고 믿었다. 정우를 알아야겠다는 아이저의 결정은 옳았다. 정우는 틸러의 의견을 받아들 여 회담에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이 바람 세찬 바위산 위에서 회담 결정에 대해 더 후회하고 있는 사람은 틸러였다. 틸러는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올 거라 믿는 사 람처럼 행동했다. '당신이 회담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잖아요'라고 말하는 듯이 웃는 눈으로 틸러를 바라보던 정우는 고개를 돌려 남쪽 하늘을 배회하는 태양을 살폈다. "정오가 되려면 시간이 좀 남아있는 것 같네요. 당신도 앉지 그래 요?" "아뇨, 괜찮습니다. 서있어야 잘 보이니까요." "비무장 회담인데 방패를 들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그걸 지적당하면 방패는 무기가 아니라고 주장할 겁니다." "아버지는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 분을 아시려고 노력하세요. 제게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누군가를 알면 그를 이해시킬 수 있다고 믿으신다고." 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고 싶다고 했지요. 그건 달라요." 틸러는 남쪽에 있는 바위를 향해 서서 정우를 곁눈질했다. "아직 믿지 못하십니까?" "틸러. 아버지에게 규리하를 돌려드리고 제가 즈믄누리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틸러는 움찔했다. 그러나 그가 대답을 가다듬기도 전에 정우가 말했 다. "저는 왜 규리하를 다스리고 있지요? 황제 폐하께서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지요. 제가 그것을 원했던 적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황제 폐하께서 안 계시죠. 그런데도 제가 원하지도 않는 규리하 변경백위 를 계속 유지해야 할까요? 저는 고민스러웠어요. 그런데 제국군이 왔 지요.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한 대장군님과 함께." 정우는 뺨을 쓰다듬었다. 높은 바위산 위를 치달리는 바람은 사나웠 다. "만약 제국군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전 도망쳤을지도 몰아요. 도망친 태위님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제국을 잃어버린 군대가 왔어요. 제국 을 되찾고 싶으니 도와달라면서. 저는 그러라고 했어요. 힘들어보여 서. 대장군님에겐 제가 변경백인 것이 편하시겠지요. 그래서 계속 변 경백으로 남아있었어요. 그런데, 제국을 되찾으려면 대장군님과 제국 군은 떠나야 해요. 저는 제국군을 전송할 수 있어요. 안녕, 잘 가요. 가서 잃어버린 제국을 꼭 되찾으세요. 그런데 발케네군이 쳐들어왔어 요. 제국군은 떠나지 못했지요." 정우는 갑자기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말이지요. 태위님이 가, 가, 가물치를…… 우하하하!" 정우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틸러는 따라 웃으려 했지만 어쩐지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정우는 허리를 꺾은 채 웃다가 눈물이 그 렁해진 채 말했다. "태위님은 발케네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며 기다리면 제국을 되찾을 수단을 보내겠다고 했어요! 그게 뭘까요? 정말 궁금해요. 어쨌든 니 어엘 헨로 수교위는 그 수단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주겠지요. 그리고 그 수단이 도착하면 대장군님은 규리하를 떠날 수 있겠지요. 제국을 되찾으러요." 정우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예. 대장군님과 제국군은 떠나겠지요. 그 다음에도 제가 계속 변경 백이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저는 그런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봐요. 누가 일부러 준비한 것처럼 때맞춰 아버지가 규리하로 돌아왔어요. 와!" "와." "예. 와! 틸러. 세상이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아요? 귓속에 메아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정우야으야으…… 그 동안 수고했다으다 으…… 이젠 변경백위를 아버지에게 돌려드리고 즈믄누리로 돌아가라 으라으……" 틸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우는 그를 웃기려 는 것 같았지만 또한 웃음 같은 것을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틸러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기다렸다. 정우와 틸러는 알지 못했지만 그곳에는 세 번째 사람이 있었다. 그 리고 그 사람도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 했다. 그 사람은 도깨비 감투를 쓴 채 틸러와 정우에게서 조금 떨어 진 위치에 앉아있던 헤어릿 에렉스였다. 헤어릿은 정우나 틸러가 위험해서 다가오지 않을 바위 끄트머리에 앉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이타에게 규리하를 되찾아주 겠다고 약속했고, 그래서 회담 장소에서 정우를 억류할 생각이었다. 그 후에 이곳에 나타날 아이저 규리하에게 정우를 넘겨주면 가장 적 은 노고로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될 것이다. 헤어릿의 고려는 그러했 다. 하지만 지금 헤어릿은 상당한 혼란을 느꼈다. 그녀는 비셀스 규리하라는 사람이 어떤 자일지 깊이 생각해두지 않 았다. 헤어릿이 알고 있는 비셀스는 아이저를 거꾸러뜨린 황제가 엘 시 에더리에게 규리하를 주기 위해 찾아낸 아이저의 버린 자식이었 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필요성 때문에 갑자기 부각된 잊혀진 핏줄이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헤어릿은, 멍청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용당 하는 줄도 모른 채 벼락 출세에 흥분한 여자를 만나게 될 거라고 생 각했다. 하지만 정우는 그렇지 않았다. 정우는 변경백위에 눈꼽만큼 의 애정도 없지만 사람들이 불편해할까봐 그것을 맡고 있었다는 식으 로 이야기했다. 그것은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말이었다. 헤어릿은 발 케네공의 핏줄이라는 사실에 조금도 감사해본 적이 없다. 갑자기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기에 헤어릿은 황급히 코를 막았다. 도깨비 감투도 소리를 막아주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재채기를 억누른 헤어릿은 팔리탐의 말을 생각했다. 팔리탐은 그녀가 인지되었다면 그녀에게 발케네를 줬을지도 모른다 는 식으로 말했다. 헤어릿은 자신이 발케네공이 된다면 어떠했을지 생각해보았다. 헤어릿이 그 생각이 두렵다고 생각했을 때 틸러가 말했다. "오는군요." 헤어릿은 남쪽 바위를 바라보았다. 15미터 쯤 떨어진 그곳에 두 명 의 남자가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헤어릿은 그 중 한 사람이 아이저 규리하임을 알아보았다. 그 곁에는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틸 러처럼 큰 방패를 든 채 따라오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들었던 이야 기를 종합해본 헤어릿은 그가 규리하성에서 탈출했다는 시카트 규리 하일 거라 짐작했다. 그녀는 짧게 고민한 다음 소리를 죽여 단검을 칼집에서 꺼냈다. 그러나 일어나지는 않았다. 헤어릿은 부녀의 대화 를 듣기로 했다. 아이저 규리하와 시카트 규리하가 바위 위에 섰다. 진지의 회의실에 앉아있던 엘시는 척후로 나가 있던 주테카와 론솔 피의 보고에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그대로 명령을 외치려 했다. 하지 만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멍한 눈으로 시허 릭 마지오 상장군을 바라보았다. 시허릭 또한 두 레콘의 보고에 충격 을 받은 듯했다. 사라티본 부대가 달려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니어엘 헨로의 분투도 한계에 도달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태위가 보낸다는 것은 아직 도 착하지 않았다. 엘시는 가물치의 옆구리에 쓰여 있던 태위의 편지 내 용을 떠올렸다. '발케네군의 도착을 지연시키며 기다리게. 제국을 되찾을 수단을 보 내겠네.' 레이헬 라보 태위는 허튼 소리를 할 인물이 아니다. 그를 믿고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스카리는 엘시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엘시 가 가진 병력을 모조리 동원하여 사라티본 부대의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얻을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시간이라도 버티며 기다려야 하나? 그렇잖으면 당장 부대 해체령 을 내리고 부대를 해산시켜야 하나? 엘시는 대답이 듣고 싶다는 눈으 로 시허릭을 바라보았다. 시허릭은 엘시가 말하지 않은 엘시의 질문 을 이해했다. 대답은 분명하다. 그리고 시허릭은 자신의 입으로는 그 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장제황제는 항복하지 않는다. 시허릭은 자신에 대한 의심을 느꼈다. 시허릭은 이상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시허릭이 압박감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엘시 가 말했다. "전병력을 이동시킨다." "어디로 이동합니까?" "동쪽으로." 엘시는 군사지휘자라기보다는 뱃사람처럼 말했다. 그래서 시허릭은 잠깐 동안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허릭은 깨달았다. 사라티본 부대는 동쪽에서 오고 있었다. "대장군님!" "시간을 끌어서 태위를 도와야 한다. 가서 회담을 요청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부대를 진격시켜야 한다.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회담을 하기 위해서다. 태위에게…… 그리고 규리하공에게 시간을 주 어야 한다. 론솔피! 규리하공이 있는 곳으로 가서 빨리 그녀에게 돌 아오라고 전하십시오." 론솔피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달려갔다. 엘시는 뒤따라 움직이며 외쳤 다. "일단 움직여라! 배치는 가면서 하겠다. 주테카! 나를 따라오십시 오!" 주테카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와 주테카가 달려 가는 모습을 보던 시허릭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도 거의 믿을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규리하에 주둔하고 있던 발케네 점령군이 모두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해 초 치천제와 락토 빌파의 대결로 시작되었던 전쟁이 개전 1년여만에 전혀 다른 장소에서 엘시 에더리와 스카리 빌파의 대 결로 그 결말을 지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허릭은 그 결말이 두 려웠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하늘을 가렸다. 대지가 울리는 소리는 몇 십 킬로미터 바깥까지 퍼져나갈 것 같다. 돌이 튀고 땅이 파헤쳐졌 다. 사라티본 부대가 달리고 있었다. 팔리탐 지소어는 몇 시간째 계속된 기마행의 후유증에 고통스러워했 다. 힌치오는 그가 뒤쳐지지 않도록 사라티본 부대의 진격 속도를 상 당히 느긋한 수준으로 유지했지만 그래도 팔리탐은 전력 질주에 가까 운 속도로 달려야 했다. 어쩌면 규리하에 도달하기 전에 말이 쓰러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팔리탐은 잠시 멈춰 쉬자는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고통을 잊기 위해 팔리탐은 자신에게 동기의식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왜 규리하성에 가는지 생각했다. '암살의 주인을 위해.' 팔리탐은 스카리의 말을 떠올리고는 이를 갈았다. 부술 수 있는 것 은 다 부수고 죽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죽이라고 했다. 팔리탐은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달려가는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을 돌아보았 다. 숲이 움직인다면, 그것도 해일처럼 움직인다면 이 모습과 같지 않을 까. 말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리탐은 그들 중 가장 낮은 곳에 있 었다. 레콘들은 가벼운 구보를 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내재된 힘은 소 름끼치는 것이었다. 쿵쿵쿵쿵, 쾅쾅쾅쾅. 레콘들의 발소리는 음악적 이다. 귀가 멀 것 같은 음악이다. 팔리탐은 재앙이라 할 수 있는 그 힘을 규리하성으로 데려가야 한 다. 어쩌면 새 제국이 잉태되고 있는지도 모를 그곳으로. 팔리탐은 답답함을 느꼈다. 가면이 너무도 답답했다. 팔리탐은 그것을 떼어 던 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따라오는데." 힌치오의 목소리였다. 팔리탐은 힘겹게 그를 바라보았다. 힌치오는 뒤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이 둘 있어. 그 중 하나는 하늘치야." 팔리탐은 그 말에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곧 지평선 쪽에서 구름이 솟아나듯 솟아오르고 있는 하늘치의 모습을 보았다. 팔리탐은 하늘누 리가 돌아오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고 그 판단은 옳았다. 날아오고 있는 하늘치의 동에는 도시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팔리탐이 말했 다. "그러면 두 번째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인간들이 따라오고 있었어. 헨로 중대인 것 같아." "헨로 중대?" "그래. 저쪽, 우리 오른쪽 뒤편에서 달리고 있었어. 뒤쳐져서 지금 은 안 보여." "하긴, 다급할 거요." "또 무슨 장난질을 하는 거 아냐?" "뒤쳐졌다면 괜찮을 거요. 그들은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니까. 걱정 하지 말고 갑시다." 힌치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러면 앞쪽에 있는 건 뭘까." "앞쪽?" "지평선 쪽에 먼지 구름이 일어나고 있어. 뭔가 꽤 숫자가 많은 것 이 움직이고 있나 봐." "제국군이군요." 그랬다. 틸러 달비는 시카트 규리하를 향해 웃었다. 남쪽 바위 위의 시카트 는 웃음을 짓지 않았다. 그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틸러를 마주보았 다. 틸러는 빙긋 웃고는 왼손 손가락으로 허공을 슥 훑었다. 그리고 틸러는 그것을 입쪽으로 가져왔다. 시카트는 그 동작을 무시하려 애 쎴지만 15미터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틸러는 시카트의 호흡이 급해진 것을 알 수 있어다. 틸러는 속으로 웃으며 아이저 규리하를 돌아보았 다. 아이저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감식하는 눈으로 정우의 위아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오래간만이구나. 비셀스." "예. 그 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아버지?" "괜찮았다. 그럭저럭." "다행이에요." 정우는 어색해했고 그것은 아이저도 마찬가지였다. 틸러는 흥미진진 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반응을 관찰했다. 아이저는 자신에 대해 심술 이 난 사람처럼 말했다. "이곳에 돌아와서 너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 성을 파묻었다더 구나." "아, 예! 그렇잖아도 아스캄으로 돌아가서 골케 남작님의 성을 파내 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레콘 부대가 없 어서 참 곤란하네요." "그러면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거냐?" "사실인데요. 아, 제가 묻지는 않았고 엉겅퀴 여단의 레콘들이 묻었 어요." 아이저 규리하는 입술 끝을 조금 꿈틀거렸다.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뇨. 환상계단이었어요." "하늘누리의?" "예. 그런데 제게 질문 많이 하시네요. 제가 어떻게 있는지 궁금하 셨어요?" "……넌 네 아버지가 주지 않은 것을 제멋대로 가졌다." 아이저의 말에 시카트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누나를 노려보았다. 정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시카트. 그 눈 안 예뻐. 아버지. 제가 가질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 있기는 있나요? 아버지는 제 목숨도 제가 가져선 안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 생각이 틀렸나요?" 아이저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네 목숨은 네 것이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비셀스. 하지만 규리하가 원하면 너는 그것을 내놓아야 한다." "아버지가 원한 것이 아니었나요?" "규리하가 원한 것이다." "죄송하지만 저는 규리하가 제게 그런 이야기 하는 것 듣지 못했어 요." "여기에 농담이나 나누려고 나온 거냐?" "그건 정말 오해세요. 저는……" 정우는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 다. 마치 그곳에 책이 한 권 있는 것처럼 손바닥을 바라보던 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돌아서지 않았다. 정우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이저가, 시카트가, 그리고 틸러와 헤어릿이 차례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정우가 무엇 을 보고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 곧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 먼 곳에서 하늘치 한 마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정우가 보고 있는 것은 그 하늘치였다. 세 남자와 보이지 않는 한 여자는 의아해했다. 하늘치의 모습이 볼만한 것이긴 하지만 정우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 안 침묵할 이유인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침내 더 기다릴 수 없었던 아 이저가 말했다. "비셀스." 정우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하늘치만 바라 보았다. 아이저는 한 번 더 정우를 불렀다. "비셀스!" "아버지!" 정우는 몸을 홱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이저는 정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정우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다는 표정으 로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다음에……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해야겠어요. 지금은 꼭 가봐야할 일이 있어요." "어디를 간다는 거냐?" "어디가 아니라 누구예요." "누구에게 간다는 거냐?" "제 신랑 찾아주기로 한 사람에게요." 정우가 날아올랐다. 틸러가 황급히 손을 뻗어 정우의 허리를 안으려는 몸짓을 취한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예감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그 동작은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틸러는 놀라워했지만 그보다는 안타까워 하는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틸러가 느낀 예감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아이저 규리하와 시카트 규 리하는 충격으로 얼이 빠졌다. 그들이 들었던 말도 안되는 풍문이 사 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바위산 위로 높이 날아오른 정우는 아래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카트와 아이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했고 틸러는 체념한 얼굴로 손을 마주 흔들었다. "곧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틸러는 바위산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아이저는 틸러를 붙잡 고 어떻게 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가 지정한 회담장소의 특성 때 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이저는 손톱을 물어뜯고 싶은 기분 속에 서 하늘에 떠있는 딸을 바라보았다. 정우는 규리하성을 향해 매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것은 분명 히 비행이었고 아이저가 사람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 각한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아이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 었다. 그리고 아이저나 시카트는 알지 못했지만, 헤어릿 에렉스 또한 그들 만큼이나 경악했다. 비록 그녀의 경악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지 만. 엘시는 달리는 병사들 앞으로 말을 달리며 계속해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엉성하나마 진형이 갖추어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엘시의 탁월한 용병술에 때문이며 또한 제국군의 높은 훈련도 때문이기도 하 다. 분명히 그 행동 하나만은 찬사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찬 사받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진형을 갖추고 다시 병사들 앞쪽으로 돌아왔을 때 엘시는 앞쪽 지평선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보았다. 흙먼지의 크기에서부터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엘시는 말없이 손을 움직여 속도를 서서히 늦출 것을 지시했다. 제국군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달리던 것이 서서히 걷는 수준으로, 그리고 마침내 멈춰섰다. 장병들은 엘시가 구축한 진형대로 서서 맞 은편에서 다가오는 흙먼지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시는 그들 에게 기운을 내라는 연설이라도 한 마디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사라 티본 부대의 접근 속도로 볼 때 그럴 시간이 없을 듯했다. 입술을 깨 문 채 앞을 바라보던 엘시는 곁에 있는 주테카에게 말했다. "주테카. 멈춰서서 회담을 하자고 계명성으로……" "대장군님!" 엘시는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그것은 정우의 목소리였다. 엘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정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엘시는 장병들이 그의 머리 위쪽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엘시는 고 개를 들었다. 그리고 엘시는 그의 위쪽 몇 미터 쯤 되는 곳에 떠있는 정우를 발견했다. "저, 정우?" 엘시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고삐를 바짝 부여잡고 발에 힘을 주었다. 빠르게 호흡하며 침착을 되찾은 엘시는 못믿겠다는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역시 태위님이 보내주셨어요!" "예?" "대장군님과 제국군을 규리하 바깥으로 데려다줄 것이요." "예?" "아, 참. 말씀 안드렸군요. 저 움직일 줄 알아요." "예?" 엘시는 이곳에서 영원히 '예?'만 반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느꼈다. 정우는 방긋 웃고는 위쪽으로 명랑하게 손을 흔들었 다. "이리 와! 착하지. 이리!" 하늘에서 강아지가 뛰어내려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엘시는 조금 후 급한 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형태는 다르지만 그 취지는 대장군의 그것과 비슷한 다양한 반응들이 제국군의 장병들 사이에서도 경쟁적 으로 일어났다. 정우의 손짓에 따라 하늘에서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것은 하늘치였 다. 힌치오는 멈추라는 명령을 내린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사라티본 부 대의 병사들은 모두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힌치오는 그것을 탓할 생 각이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벼슬을 주물럭거리며 애타게 말했다. "저게 뭐야? 저 하늘치가 왜 자꾸 내려오는 거야?" 그 말투는 누구에게서든 동정심을 잔뜩 끌어낼 만큼 애달펐지만 아 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힌치오는 계속 질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팔리탐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힌치오." "아, 대답해주려고?" "아니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뭔데?" "우리 상당히 외로운 것 같지 않소?" 힌치오는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팔리탐의 말이 맞았다. 그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황하여 뒤를 돌아본 힌치오는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는 레콘들을 보았다.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뒤로 물 러나고 있었다. 힌치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앞쪽을 바 라보았다. 앞쪽에서는, 그냥 하늘치가 날아내려오고 있을 뿐…… 하늘치가 날아오고 있다고? 낮은 궤도로? 그것은 하늘누리가 아니다. 따라서 물을 뿌릴 수 없다. 그 위에 레 콘 여단이 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을 겨냥한 낙석이 일 어날 리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치다. 하늘을 나는 산과도 같이 거대한 생물이다. 만약, 정말 만약의 경우지만, 하늘치가 머리를 쓰다듬으면 어떻게 될까. 다음 순간 팔리탐은 힌치오의 의리를 갈비뼈로 느끼게 되었다. 힌치 오는 말 위에서 팔리탐을 나꿔챈 다음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도망치는 것보다는 힌치오 자신이 데리고 가는 것이 더 빠르다 는 생각에서 취한 행동이지만, 팔리탐은 당장은 고마워 하기 어려웠 다. 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팔리탐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은 힌치오의 계명성에 파묻였다. "도-망-쳐-!" 레콘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던 길로 도망쳤다. 질풍 같은 속도였 다. 아라짓력 11월 9일, 규리하성을 향해 돌진하던 사라티본 부대는 어 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난 하늘치에 의해 도주하게 되었다. 발케네군의 본진으로 귀환한 레콘들은 한결같이 그 하늘치가 지극히 '공격적인' 비행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과 동행했던 팔리탐 지소어는 약간 주 저하며 그 하늘치가 단지 하강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 놓았다. 하지만 그 또한 상황을 제대로 관찰하기엔 여러 가지 애로사 항이 많았기에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했다. 스카리 빌파는 어처구니 없어하다가 겨우 정찰병들을 파견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소식은 기겁할 만한 것이었다. 낮게 내려온 하늘치는 지상에서 몇십 미터 쯤 되는 높이에 멈춰섰으며, 제국군들 이 그 등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발케네군의 수뇌부는 어 디로 가버릴지 모르는 하늘치의 등에 올라가다니 제국군이 자살여행 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런 말을 주 고받으며 장수들은 상대방의 눈속에 담겨있는 자신과 똑같은 의심을 읽었다. '설마…… 그들이 두 번째 하늘누리를 찾아낸 것은 아니겠 지?' 아무도 그 의심을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발케네군의 장병들은 모두 그 의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 번째 보고가 들어왔을 때 그들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제국군들 중 환상계단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의 탑승이 끝나자 하늘치가 갑자기 뒤로 방향을 돌려 그들을 향해 날아온다는 것이었다. 정찰병의 보고 가 도달하고나서 얼마 후 발케네 병사들은 두 눈으로 직접 그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서쪽 하늘에서 나타난 하늘치는 그들의 머리 위를 유유히 지나쳐갔 다. 아래쪽에서는 그 위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었기에 발케네군은 그 위에 제국군이 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치 그들의 고민을 덜어주기라도 하듯 하늘치의 등 위에서 딱정벌레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딱정벌레는 발케네군의 머리 위로 곧장 내려왔다. 그리고 충격과 의 혹으로 굳어버린 발케네군 사이로 내려선 딱정벌레에서 도깨비 한 명 이 뛰어내렸다. 도깨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병사 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병사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자 도깨 비는 싱긋 웃고는 다시 딱정벌레를 타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치 위로 사라졌다. 잠시 후 마비 상태에서 풀려난 병사는 그 봉투를 가지고 발케네군의 지휘부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스카리는 봉투 속에서 도깨비 지 한 장을 꺼냈다. 그 위에는 짤막한 글이 쓰여 있었다. '나는 제국군의 상황을 살펴보러 갑니다. 발케네로 돌아가 귀족원 회의를 기다리십시오. 엘시 에더리.' 스카리는 숨이 막혔다. 엘시 에더리는 발케네로 돌아가지 않으면 제 국군을 모두 데리고 돌아와 치겠다는 협박을 한 것이었다. 잠시 후 스카리는 멈추었던 호흡을 욕설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지러쿼터 산맥 동쪽에서는 작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작별에 참석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 주역은 엘시 에더리와 정우 규리 하였다. 엘시는 아쉬운 표정으로 하늘에 떠있는 하늘치를 바라보았다. 그 하 늘치를 타고 제국군을 규합하러 다닌다는 것은 매력적인 생각이었지 만 몇 가지 이유에서 그 계획은 불가능했다. 하늘치를 조종할 수 있 는 것은 정우 뿐이었다. 그리고 정우는 규리하로 돌아가야 했다. 그 리고 정우가 그들과 함께 떠난다고 해도 여전히 그 하늘치는 적절한 탑승 수단이 되지 못했다. 온갖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는 하늘누리와 달리 그 위에는 추위를 막아줄 집도 없었고 기본적인 급수 시설도 없 었다. 그 위로 음식과 물을 계속 실어올리는 것은 끔찍한 일이 될 것 이다. 그리고 병사 개인이 지참할 수 있는 음식과 물만 가지고 다닌 다면 그 거대한 몸이 쉴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면에서 불편함이 더 많다. 엘시는 아쉬움을 가누고는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모든 사람에 게 관심을 받고 있었지만, 특히 야리키에게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었 다. 그들이 탄 하늘치의 등 위에는 엘시가 소환했지만 오지 않았던 레콘 야리키가 있었다. 야리키는 하늘치의 등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 냈기 때문에 부른 줄 몰랐다고 대답했고 그 사실에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다. 야리키는 정우에게 연모에 가까운 관심을 보내어 그녀를 당 황시키고 있었다. 그는 정우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 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천천히 말하지. 엘시. 나 불렀다는데, 미안하지만 나 이 아가씨 옆 에 있어야겠는데?"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을 부른 용건은 이미 끝났으니까요. 정우 곁 에 있어도 되는지는 본인에게 물어보십시오." 정우는 좋다고 했고 그제서야 겨우 야리키에게서 풀려났다. 엘시는 정우에게 말했다. "덕분에 발케네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지러쿼터 산맥을 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떠난 이후 발케네군이 우리를 따라올까요? 서신을 보 내긴 했습니다만." 밤새도록 싸늘한 하늘치 위에 있었던 정우는 두 팔로 가슴을 끌어안 은 채 와들와들 떨며 말했다. "좋게 생각해야지요. 으하…… 춥다. 감기 들겠어요." 엘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번뜩이를 타고 돌아가신다고 했지요?" "예. 번뜩이가 있는데 겨우 저 한 명 태워달라고 하늘치에게 또 부 탁하기는 어렵네요. 야리키는 달려와야겠어요." "딱정벌레 위도 꽤 추울 텐데요." 정우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보던 엘시가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딱 짚었다. "탈해. 자네의 도깨비불로 정우를 감싸드리면 되잖나? 적당히 따뜻 한 불로. 왜 지난 밤에는 그 생각을 못했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엘시를 보던 탈해가 그만 고개를 확 숙였다. 정우는 지난 밤 내내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 아니냐는 듯이 웃으며 탈해의 손을 두드리고는 다시 자신의 몸을 끌 어안았다. "돌아갈 때 그러면 되겠네요. 고마워요. 대장군님. 그럼 빨리 가셔 야지요? 만약 발케네군이 쫓아온다면 레콘 부대는 굉장히 빨리 올 텐 데." "예. 알겠습니다." 정우는 왼손으로는 여전히 몸을 감싼 채 오른손을 내밀었다. 엘시는 그 손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마주잡았다. 정우가 말했다. "제국을 찾아오세요. 대장군님." "제국을 찾아오겠습니다. 정우." 정우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시간 나시면 제 신랑도요. 약속하셨죠?" "……꼭 찾아오겠습니다." 정우는 환하게 미소 짓고는 엘시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탈해에게 다가가 폭 안기듯 그 겨드랑이에 파고들었다. 그들은 딱정벌레 번뜩 이에 올라탔고 번뜩이는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야리키는 엘시에게 가볍게 손을 흔든 다음 지러쿼터 산맥을 향해 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시는 몸을 돌렸다. 반대편에는 오만 명의 제국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발케네 정벌 군의 병력은 구만이었지만 이제 그의 곁에 남아있는 것은 그 절반 정 도였다. 엘시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럼, 제국을 찾으러 가자." =============================================================== 챕터 끝났습니다. (하프 타임이다. 올리자……) 으윽. 유로2004 때 문에 피곤하군요.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1. 부활의 불씨 - 1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황궁에는 시의가 없었다. 경애 하는 치천제 폐하께서는 감사하게도 의사의 도움이 필요 없는 옥체를 가지고 계시지만 선황께서는 시의를 둘 수가 없으셨다. 나가에게 질병이란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어린 아이나 걸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들에겐 소드락이나 제 초제, 살충제 등을 제조하는 약술사가 있을 뿐 성인 나가 를 대상으로 한 의사가 없었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 는 일이지만, 세계의 지배자는 자신을 보살펴줄 의사 한 명도 둘 수 없으셨다. (중략)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눈 앞이 흐려진다. 그 때는 누구 하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회고하는 나 또한 당시에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고 따라서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별 로 없다.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필설로 언급하기도 힘든 두려움과 슬픔 뿐이다. 맹세컨대 내 생애에서 그 때만큼 무섭고 슬펐던 때는 없었다. 성인 나가가, 제국의 지배자 가 죽어가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중략) 뚜렷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보 자면, 그 순간 기묘한 이해의 공유가 일어난 듯하다. 아무 도 감히 말문을 열지 못했지만 모든 이가 그 순간이 찾아 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때 선황께서 갑자기 눈을 뜨셨다. 그 분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본 우리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그곳에 모 여있던 모든 이가 한꺼번에 소음을 내었기 때문에 아무도 선황 폐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곳에 있었던 이들 중 가장 귀가 밝았던 레이헬 라보가 들었던 내용조차 도 온전하지 못하다. 레이헬 라보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은 "……은 너무 길다." 라는 불완전한 문장뿐이 었다. - 에스커 헬토의 회고록. 발리츠 굴도하는 건성으로 말했다. "……따라서 대략 정리한다면 이렇게 되겠군.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 에게 고합니다.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는 귀측과 시허릭 마지오 상 장군이 지휘하는 발케네 정벌군 사이의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으십니 다. 이미 보아서 알겠지만 귀측이 추격해온 제국군은 규리하를 떠났 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리하에 계속 머문다면 이것은 규리하에 대한 명백한 침략 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군하십시오. 한 달 후에도 지러쿼터 산맥 서쪽에 발케네의 병사가 있다면 그는 경고 없이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끝이야." "끝입니까? 잘 들었습니다. 경고는 잘 접수했고, 그러면 용건이 끝 났으니 이야기나 좀 하지요." "그러지." 대단히 중요하지만 언제나 불필요한 듯한 느낌을 주는 공식 행사가 끝났다. 팔리탐 지소어와 판사이 남작 발리츠 굴도하는 악의적인 세 파 속에 부침하다가 세상의 평화로운 고도에서 우연히 만난 표류자처 럼, 혹은 멍청하기 때문에 잔인한 부하들과 잔인하기 때문에 멍청한 상관 사이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중간 관리자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장소는 상당히 중립적인 느낌을 주는 주막이고, 양자는 그 느낌을 더욱 강화하려고 애쓰고 있다. 발리츠 굴도하는 주막 저편에서 솥을 닦고 있는 남자는 절대로 주막 주인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자기 가 게에서 문의 위치를 헷갈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마도 정체는 발케 네 병사겠지만 남작은 그 남자를 복병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바보 가 아닌 이상 당연히 의심받을 수 있는 복병을 사용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그저 오래 전에 피난가버린 주막 주인을 대신하여 구색을 맞추 기 위해 세워놓은 병사일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앉아있는 탁자를 메우고 있는 술병과 술잔도 마찬가지다. 발리츠 굴도하는 술을 마시 는 것이 가능하지만 팔리탐은 가면을 벗지 않고는 그럴 수 없다. 하 지만 팔리탐은 자신의 앞에 술잔을 놓아두었고 그 안에는 술까지 담 겨 있었다. 발리츠의 앞쪽에도 같은 술잔이 놓여있었고, 지금 두 술 잔에는 가득 내려앉은 먼지 때문에 술잔 안쪽 면에 굵은 선이 생길 지경이었다. 술잔을 내려다보던 팔리탐이 시선을 그곳에 둔 채 지나가는 말처럼 질문했다. "그 하늘치를 움직인 것은 규리하공이십니까? 그 분은 다른 하늘치 를 조종하는 것도 가능한 겁니까? 그 조종의 범주에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하늘치를 떨어뜨리는 것도 포함됩니까?" "그 질문들이 모두 가능성에 대한 것이라면, 부정할 질문은 없군." 팔리탐은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어떻게?" "나는 모르겠어. 그 분은 설명을 하실 수 없는 모양이야. 귀관은 귀 관의 팔이 왜 귀관의 생각대로 움직이는지 설명할 수 있나? 귀관은 혹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내 팔을 움직여 사랑하는 나의 아내를 포옹할 수 있지. 규리하공께서도 어떻게 하늘치를 움직이는지 설명하실 수는 없어. 하지만 하늘치를 움직이실 수는 있어. 아마도 유수부의 통제국에서 사용하는 방법과는 다른 방법이겠지." 팔리탐은 고개를 들었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를 막기 위해 창문과 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두 사람이 앉아있는 탁자에는 초 한 자루가 불타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팔리탐의 가 면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대장군도 모르겠군요." 팔리탐의 추리를 들은 발리츠는 자신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았다. 쉽게 추리할 수 있는 사실이니까. 그래서 발리츠는 팔리탐을 조금 자 극해 보기로 했다. "그래. 규리하공께서는 대장군께 하늘치 조종법을 알려줄 수 없었 어. 발케네공께서는 대장군이 하늘치를 타고 발케네로 진공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팔리탐은 완벽한 무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 이다. 남다른 자기 통제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면을 쓰기 때문이 다. 발리츠는 팔리탐이 표정이 필요할 때조차도 표정을 지을 수 없다 는 것을 생각해보았지만 그래도 이런 회담에서 그 무표정은 꽤 부러 운 것이었다. 팔리탐은 눈으로 알 수 있는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 은 채 말했다. "대장군의 목표는 제국군의 규합인 것 같은데, 혹 자유무역당이 그 를 돕고 있습니까?" 발리츠는 대답 없이 팔리탐의 가면을 보았다. 팔리탐은 한 손을 조 금 펼치며 말했다. "제국이 없어진 지금 자유무역당이 아니면 그런 대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테를 당주는 규리하공의 외조부이시지 요." 얼핏 보기에 그 상황은 팔리탐이 발리츠로부터 정보를 끌어내려 하 는 것처럼 보이지만 발리츠의 생각은 달랐다. 정보를 원한다면 대놓 고 물어보는 것은 지극히 조악한 방법이다. 발리츠는 팔리탐이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그러도록 도와주겠습니까?'라고 요청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남작은 팔리탐이 왜 그것을 원하는지 추측해보 았다. 팔리탐 지소어는 락토 빌파 사망시 제국군과 발케네군 사이에 휴전 협정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발리츠는 어쩌면 팔리탐이 주군에게 들려줄 회군의 이유를 수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았 다. 그렇잖다면 대장군의 향후 거취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일 수도 있고. "나는 대장군과 자유무역당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 그리고 내게는 대장군이나 자유무역당을 대신해서 귀관의 질문을 확 인해줄 자격도 없는 것 같군. 그런데 왜 그걸 알고 싶어하나?" 팔리탐은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발리츠가 그의 가면 위에 제멋대 로 그려놓은 표정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가 잠시 침묵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발리츠는 팔리탐이 침묵의 끝까지 차분히 걸어올라 갈 수 있도록 그의 침묵에 자신의 침묵을 기대어 세워놓았다. 팔리탐 이 침묵의 꼭대기에서 말했다. "직접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대장군이 원하는 것이 무엇 일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지?" "대장군은 놔두면 굶주린 폭력집단으로 변해 우환거리가 될 수 있는 제국군을 수습하러 간 것이며, 또한 그 힘을 압박 기제로 이용하여 귀족들에게 귀족원 회의를 강요할 작정이며, 그리하여 새 황제가 선 출되면 차기 황제에게 온전히 간수해두었던 그 힘을 넘길 작정일 겁 니다." 발리츠는 오! 하듯 입술을 오므렸다가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평인지 의심스러운 호평이군. 만약 내가 그런 호평의 대상이 된다면 부담감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겠 는걸. 하지만 대장군이 자신의 황조를 열기 위해 필요한 힘을 모으러 간 것이라고 해석할 사람도 있을 텐데." "멍청한 해석입니다. 대장군이 자신의 황조를 열고 싶었다면 규리하 를 가졌을 겁니다. 그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오만의 병력과 함께 규리 하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발리츠는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팔 리탐이 말했다. "저는 대장군의 목적은 대강 짐작합니다만 가능성에 대해서는 짐작 하기 어렵습니다. 자유무역당이 그를 지원하는 것인지 알고 싶은 것 은 그 때문입니다." "귀관은 나를 위험한 대화로 이끄는군." "이곳은 주막입니다." 온갖 이야기가 모였다가 흩어지며, 거기에 대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곳입니다. 발리츠는 부담 없이 질문했다. "좋아. 그에게 가능성이 있다면? 그러면 귀관은 제위를 향한 주군의 걸음을 막을 생각인가?" "각하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발리츠는 솔직하게 말했다. "내 처조카님은 막을 필요도 없어. 제위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으 시니까. 대장군에게 아무런 약속도 받지 않고 지러쿼터 산맥 너머로 보내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팔리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일신에 높은 수준의 무예를 쌓았지 만 시기심 많은 이웃들 때문에 날개를 펼 수 없었던 무인이 혼란기를 맞아 유서 깊은 무향의 지배자를 찾아왔다면 그 속내는 뻔하다. 나쁘 게 말한다면 매무자(賣武者), 좋게 말한다면 새 시대의 주춧돌이 될 작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찾아낸 자는 한 시대가 한 사람에게만 허락하는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주인을 잘못 고른 명검이라고 할까. 발리츠의 대답에 아쉬움 같은 것이 약간 섞여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 이다. 하지만 발리츠는 판사이로 돌아가는 대신 규리하공의 대변인으로 회 담장에 나왔다. 팔리탐은 남작이 사태를 조금 더 관망하려는 것인지 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대장군의 원대한 꿈이 실패하고 상대방의 혈관에서 짜낸 동의로 자신의 방패에 서명을 받는 시기가 온다면 규 리하공 또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실력 행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대장군의 소망이 이루어져 새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귀족원 회의가 개최된다 해도 규리하의 변경백은 강력한 후보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정도면 사태를 관망할 만하다. 발리츠는 감추는 것이 적은 사람이었다. 발리츠의 솔직한 대답에 팔리탐은 솔직함으로 보답하기로 했다. "제 생각에, 발케네공은 발케네를 다스려야 합니다." 굴도하 남작은 희미한 웃음을 팔리탐에게 보내었다. 가면의 무장은 제국이라고 말하지 않고 발케네라고 말했다. 그것은 발케네공의 지배 범위를 발케네로 한정지은 것도 된다. "주군을 잘 모시고 돌아가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굴도하 남작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팔리탐은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 을 보여주기 위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남작은 가지고 온 경고장을 팔리탐 쪽으로 조금 밀어놓고는 그대로 주막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 서 기다리던 수행인들이 인사를 하는 소리가 조금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후 여러 개의 말발굽 소리가 일어났다가 빠르게 멀어져갔다. 팔리탐은 고개를 돌려 주막 주인으로 변장한 병사를 바라보았다. 병 사는 그 때까지도 충실하게 주막 주인인 것처럼 솥을 닦고 있었다. 팔리탐은 쓴웃음을 지었다. "솥은 그만 닦아도 된다. 수고했으니 와서 이거나 좀 먹거라." 군것질을 싫어하는 병사가 혹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병사는 그렇지 않았다. 병사는 반색하며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곧 걸음을 멈추고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팔리탐이 의아해할 때 탁자 맞은편에서 목소 리가 들려왔다. "괜찮으니 가져가라." 팔리탐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발리츠 굴도하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스카리 빌파가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병사는 쭈볏거리며 다가왔다. 스카리는 손을 들어 부엌쪽을 가리켰 다. 그 뜻을 이해한 병사는 쟁반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여있는 것들 을 재빨리 담아들고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팔리탐은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 병사를 조금 동경했다. 그 자신은 당분간은 즐거움 을 느끼지 못하게 될 테니까. 병사가 부엌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스카리는 두 손을 앞으로 뻗어 탁자 모서리를 붙잡았다. "발케네공은 발케네를 다스려야 한다고 믿나?" 팔리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안되나?" "왜 다른 것이 필요합니까?" "자네가 현자연하는 소인배들의 말투를 구사할 줄은 몰랐군. 그것들 은 필요나 의미를 말한다. 하지만 가능성을 말하는 자도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해도 되 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누가 정하지? 자네가 그걸 정하나?" "사람들이 정합니다." "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자들이 정한다는 말이군. 조금도 공평하지 않군." 팔리탐은 공평이라는 말이 그렇게 쓰인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 다. 스카리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렇잖나? 정말 웃기는 일이지. 글을 쓸 줄 모르는 자가 모든 사람 에게 글을 쓰지 말라고 명령하면 그보다 더 주제 넘은 일이 어디 있 겠나? 그것은 글을 쓸 줄 아는 자들에게 공평하지 않아. 따라서 자네 가 말하는 그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내게 해선 안된다고 요청해선 안돼." "그렇다면 그럴 능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각하의 영토를 짓밟고 각하 의 재물을 약탈하고 각하의 눈앞에서 부냐 헨로를 능욕해도 된다는 겁니까?" 팔리탐의 과격한 언사에 스카리는 격분했다.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 을 간신히 억누른 스카리는 목에 핏줄을 세워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말은 가려서 해라. 그 질문에 대 해 답하자면, 누구라도 시도할 수는 있다. 나는 그것들에게 해도 된 다거나 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러면 나에게 죽는다 는 것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사나이라면 혀가 아닌 주먹으로 자 기 것을 지키는 법이다." 팔리탐은 물끄러미 스카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혀가 아닌 주먹으로?" "혀가 아닌 주먹으로." 팔리탐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가면이 주막의 천장을 향해 고정되었 다. 팔리탐은 그런 자세로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나 무례가 될 동작이고 주군을 대하는 태도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 는 외면이다. 스카리는 그 불충을 꾸짖으려 했다. 그 때 팔리탐이 말 했다. "이젠 더 못 참겠군." 충격적인 말에 스카리는 눈 주위를 험악하게 찡그렸다. 조금 후 그 눈은 크게 열렸다. 팔리탐은 머리 뒤로 손을 가져갔다. 가면을 머리에 고정시키고 있는 끈을 더듬어 찾은 팔리탐은 그것을 풀었다. 팔리탐 지소어를 아는 모 든 사람에게 익숙한 가면이 아래로 기울었다. 팔리탐은 그것을 붙잡 아 탁자 위에 엎어놓고는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이것이 기를 죽이기 위한 전술적 행동일 거라 생각했다. 또는 가식 없는 진실한 말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어 쩌면, 확률은 낮지만 그냥 답답해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 카리의 이성적인 부분은 팔리탐의 행동을 그렇게 다각도로 고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카리의 감성은 그 주인을 생경한 공포로 몰아갔다. 스카리는 몸을 돌리거나, 혹은 감투를 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 해 탁자를 꽉 붙잡았다. 시모그라쥬의 베로시 토프탈은 두억시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두억시 니 장군으로 불린다. 스카리는 그녀가 이곳에 있다면 평생의 소망을 이루었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면을 벗은 팔리탐의 얼굴은 어떤 면에서는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결코 동요되지 않는 냉 정함으로 통제된 악의만이 그런 얼굴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얼굴을 만들었다는 팔리탐의 옛상관은 팔리탐을 죽이지 않기 위해 세 심한 동작을 지겹도록 여러 번 반복했을 것이다. 분노만으로는 결코 그런 얼굴을 만들어낼 수 없다. 바늘로 한 땀 한 땀 문신을 새겨넣는 문신 기술자와도 같은 집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팔리탐의 얼굴은 악의의 기념비였다. 터져 나오려 애쓰는 비명이 스카리의 목을 간지럽히다가 아예 숨통 을 조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카리는 '아무래도 잠 자리가 염려되니 가면 도로 쓰시게' 등으로 가볍게 말하려 했다. 하 지만 팔리탐은 스카리가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회복하도록 내버려두 지 않았다. 일그러진 입술, 도대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해하 기 힘든 입술이 움직였다. "네가 받아들여야 하는 거래가 있다. 스카리." 스카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어느새 떨고 있었지만 그 사 실을 알지 못했다. 팔리탐이 말했다. "발케네로 돌아가라. 가서 감히 발케네를 공격했던 제국군을 규리하 까지 추격하여 혼쭐을 내줬다고 자랑해라. 그리고나서 부냐 헨로를 아내로 맞이하고 발케네를 다스려라. 거기까지는 도와주겠다." 스카리는 헐떡였다. "네가……" "발케네의 위대한 지배자가 될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겠다. 부냐 헨 로의 몸을 통해 빌파 가문의 후사를 얻어라. 네게도 여자를 임신시키 는 능력은 있겠지. 그리고 그 여자에게도 최소한 아이를 잉태하는 재 주는 있겠지. 내 조력의 대가로 네가 내놓아야 하는 것은 그것뿐이 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 아닌가?" "감히……"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고 있는 스카리의 손이 꿈틀거렸다. 그 손이 허리 쪽으로 갈지 가슴 쪽으로 갈지 관찰하는 것은 나름대로 흥미로 운 일이 되겠지만 팔리탐은 그런 흥미를 포기했다. 대신 팔리탐은 탁 자 위로 손을 뻗어 엎어놓은 자신의 가면을 붙잡았다. 그리고 팔리탐 은 가면을 뒤집어 얼굴에 닿는 안쪽 면이 위로 올라오게 했다. 스카 리는 핏발 선 눈을 돌려 가면 안쪽을 보았다. 다음 순간 스카리 빌파는 탁자를 밀어내며 벌떡 일어났다. 가면 안쪽에는 길고 예리한 쇳조각이 붙어있었다. 스카리가 그것을 알아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카리는 팔리탐 지소어가 락토 빌파의 사체에서 부러진 비 수를 뽑아내는 것을, 그리고 그 칼토막을 소매 속으로 숨기는 것을 보았다. 스카리는 아버지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눈을 찔렀던 것을 기억해냈다. 스카리의 내부에서 모멸감과 공포감, 분노 가 뒤섞여 회오리를 만들어내었다. 비틀거리던 스카리는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두 손을 벽에 붙인 채 팔리탐을 노려보았다. 팔리탐은 가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비수 조각이 붙어있는 안쪽 면 을 스카리에게 보여주었다. "내 눈 앞에는 항상 육친을 죽인 이 저주받을 쇳조각이 있다. 나는 결코 잊지 않는다." 팔리탐은 가면을 끌어당겼다. 그는 가면을 얼굴에 대고 서두르지 않 는 동작으로 끈을 묶었다. 그 끔찍한 얼굴은 다시 가면 뒤로 사라졌 지만, 스카리의 기억을 가려줄 가면은 없었다. 스카리의 눈에는 여전 히 그 가면 뒤에 있는 소름 끼치는 얼굴과 칼토막이 보이는 듯했다. 팔리탐은 서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탁자 옆으로 나와 스카리의 정 면에 선 팔리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투를 쓰고 나를 죽이는 것은 너 자신의 목을 조르는 일이 될 것 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너를 도와줄 유일한 사람을 너 스스로 없애는 일이 될 테니. 이 말이 네게 너무 어렵다면 이렇게 설명해주마. 너는 불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무언가를 태울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 고 있다. 하지만 그 불이 태울 수 있는 것에는 너 자신도 포함된다. 네 깜냥으로는 사라티본 부대를 다룰 수 없다. 만약 너의 작은 실수 로 그들이 너에 대해 분노하는 날이 오면 백 개의 도깨비 감투도 너 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스카리는 벽에 붙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팔리탐은 간단히 예를 갖추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주막 밖으로 나갔다. 스카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팔리탐이 빠져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그는 분노했고, 그 분노에서 낯익음을 느꼈다. 그는 분노의 형제를 추적했다. 그리고 스카리는 두 명의 형제를 찾아내었다. 하나는 엘시 에더리에 대한 분노였고 나머지 하나는 락토 빌파에 대한 분노였다. 엘시 에더리와 락토 빌파, 그리고 팔리탐 지소어는 비슷한 면이 전혀 없다. 하지만 스카리는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내었다. 그 세 사람은 스카리의 통제 밖에서 그를 마주했다. 스카리는 벽을 밀어냈다. 앞으로 걸어간 스카리는 허리를 숙여 의자 를 붙잡았다. 그리고 스카리는 괴성을 지르며 의자로 벽을 후려쳤다. 아라짓력 11월 말, 제국의 많은 땅에서 겨울의 성미가 조금씩 누그 러드는 시기지만 북방의 규리하에서는 아직도 겨울의 폭압이 계속되 고 있었다. 규리하의 모든 건물들은 눈과 얼음 속에 잠겨 있었다. 사 람의 손길이나 발길이 드문 곳에 겨울 내내 쌓였던 얼음은 이제 석공 의 재능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해보기도 어려울 만큼 무겁게 자리잡았 고 상인방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들은 문에 들어가는 행동을 마치 이름 모를 괴수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일처럼 보이게끔 만들었 다. 물론 사람들이 문 출입을 자주 하지 않는 것은 상상력 과잉 때문 이 아니라 문을 자주 여닫으면 집안의 기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 지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은 계절이 여름인 양 문을 활짝 열고 뛰어들었다. 열린 문을 통해 휘몰아치는 바람에 화가 난 사람들은 그 바람과 함께 들어온 소식에 그만 분노를 잊었다. 발케네군이 떠난다 는 소식이었다. '이 계절에 지러쿼터 산맥을 넘어간다고?' 사실이었다. 발케네군은 오만하게 지러쿼터 산맥을 넘어갔다. 후퇴라고 할 수도 있는 행동이 오만한 것은 겨울에 지러쿼터 산맥을 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도전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케네군은 막대한 목재를 아낌없이 불태워가 며 산맥을 넘었다. 사라티본 부대가 있었기에 그런 무지막지한 목재 공급이 가능했다. 결국 발케네군은 부주의 때문에 동사한 몇 명의 병 사만 잃은 채 지러쿼터 산맥을 넘어갔다. 그러나 과텔, 규리하, 그리고 케나린과 그 주변의 중소도시들에서 피난촌을 형성하고 있던 피난민들은 발케네군의 그런 행동을 흉내낼 수 없었다. 일부 수완 좋은 자들이나 고집 센 자들은 겨울 여행을 시 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봄이 올 때까지 귀향을 미룬다 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덕분에 규리하 정부는 그들의 귀향과 재정 착을 지원하는 부담을 조금 유예시킬 수 있었다. 규리하공 비셀스 규 리하는 익년의 최우선 사업을 전후 복구로 결정하고 예산안을 편성하 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규리하 정부에는 재원이 부족했다. 30년과 31 년에 그들이 겪은 두 번의 전쟁 동안 많은 재원이 사라졌다. 그 중에 는 아이저 규리하가 반란자로 지목된 것 때문에 동결되거나 소실된 국외 재산도 상당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세수 증대는 바라기 힘들었 다. 오히려 세금을 면제시켜야 할 처지니까. 침통한 표정으로 규리하공을 찾아온 예산안 담당자는 채권을 발행해 서 자유무역당에 판다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의 말을 경청하던 정 우는 예산안 담당자의 말투 속에서 자유무역당주가 외손녀의 채권을 사줄 거라는 믿음을 발견했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지적했고 예산안 담당자 또한 순순히 인정했다. 정우는 잠깐 생각하고는 말했 다. "하지만 저라면 사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지금 같은 불안한 정세에서 급전이 필요한 곳은 많을 테고 자유무역당은 그 모든 손에 돈을 내주 기는 어려울 거예요. 규리하의 채권에 어느 정도의 신인도가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예산안 담당자는 규리하 정부의 신인도가 높다고 말하고 싶었다. 2 년 전이라면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반란자로 지목당하고 제국군에게 패배하고 발케네군에게 유린당한 지금은 어렵다. 예산안 담당자가 침 묵하자 정우는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로 걸어갔다. 예산안 담당자는 창가에 놓여있는 새장을 보고는 꽤 유 명한 장면을 보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기뻐해 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는 새장 속에 있는 인조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의아 해하던 예산안 담당자는 인조새가 잠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햇빛에 의해 움직이는 그 인조새는 겨울의 희박한 햇빛에서 충분한 활력을 얻지 못하는 듯했다. 창가에 서서 창밖을 보던 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자유무역당은 연초 취급권을 얻었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 "그렇습니다." "연초 제조인들에게 거래선을 확보해야겠군요. 많이 확보했나요?" "모르겠습니다. 필요하면 상당히 공격적인 자유무역당이니 아마 많 이 확보하지 않았을까요?" "음. 그래도 싼값에 연초를 공급하겠다면 사겠지요?" 예산안 담당자는 의아해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각하. 혹 연초를 제배하시려는 생각이십니까? 규 리하에서는 연초를 제배할 수 없습니다." "판사이에서는 재배가 가능하지요?" "판사이요? 예. 가능합니다. 그 남부에서 실제로 재배하고 있는 것 으로 압니다." "그럼 됐네요. 고모부님을 통해 연초밭을 구입하도록 해요. 그리고 판매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규리하에는 연초 재배 전문가가 없습니다. 어떻게 자유무역 당이 만족할 만한 생산 단가를 맞출 수 있습니까?" "생산은 현지 소작인들이 할 테고, 건조 비용을 아끼기로 하지요. 듣자니 하늘누리는 발케네로 진공하기 전에 몽화각의 도깨비들을 철 수시켰다고 하더군요. 그 분들은 지금 즈믄누리에 계실 테고 꽤 심심 해하실 거예요." 어리둥절해하던 예산안 담당자는 잠시 후 머리를 탁 치고 싶은 것을 느꼈다. 연초는 수확한 다음 연초 건조막에서 건조시키는데, 이 때 대략 7, 8일 정도 계속 불을 때서 연초를 건조시킨다. 그러므로 연료 비용을 감안한다면 대규모 건조막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만 일 도깨비들이 도깨비불을 이용하여 연초를 건조시킨다면 연료는 전 혀 들지 않으며, 따라서 대규모 건조막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예 산안 담당자는 흥분하여 말했다. "그 분들이 와주실까요?" "부탁해봐야지요. 그러려면 좋은 계획이 있어야할 테고요. 물론 자 유무역당에 제출하고 선금을 받으려 해도 좋은 계획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니, 파라말. 좋은 계획을 만들어주세요. 하실 수 있죠?" 전 산공부사이자 전 유수부차사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규리하공을 위해 잠시 일하고 있는 파라말 아이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저,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무슨 질문이시죠?" 파라말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새님은 주무시고 계신데, 어디서 조언을 얻으셨습니까?" 정우는 웃고는 파라말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파라말이 옆에 와 서자 정우는 창밖을 가리켰다. 창밖을 본 파라말은 탈해 머리돌이 조 금 떨어진 성벽 위에서 뻐끔이를 입에 문 채 연기를 뭉게뭉게 피워 올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따라서 그곳에는 정우가 말한 계획의 가장 중요한 요소 두 가지, 즉 연초와 도깨비가 모두 있는 셈이다. 파라말은 실소하듯 웃었다. 그 때 성벽 위에 있던 탈해가 정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정우는 열렬한 동작으로 손을 마주 흔들었다. 정우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본 탈해는 큼직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더욱 크게 흔들며 외쳤다. "추우니까 들어가!" 정우는 환한 웃음을 남겨놓고 창문 안으로 사라졌다. 정우가 안으로 사라지고나서 파라말도 탈해에게 목례한 다음 사라졌다. 탈해는 기쁜 표정으로 연기를 가득 내뿜었다. 그가 성벽 위에 서있었던 것은 바람을 쐬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렇 다면 정우의 창문에서 잘 보이는 위치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니까. 탈 해는 정우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정우는 규 리하의 관리들과 매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래서 탈해는 정 우를 보기 힘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벽에서 정우의 방을 바라 보던 탈해는 고맙게도 정우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그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정우의 모습이 다시 사라진 지금 탈해는 아쉬움을 느 꼈다. 자신을 달래고 싶었던 탈해는 한 자리에 오래 서있느라 약간 뻣뻣해진 몸을 짐짓 좌우로 비틀었다. 탈해는 아래쪽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한 명은 거대한 레콘 아 트밀이었고 그 곁에 서있는 것은 사라말 아이솔이었다. 두 사람은 탈 해의 고함에 고개를 든 듯했다. 탈해는 그들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아트밀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라말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 들었다. 탈해는 싱긋 웃었다. 탈해를 향해 손을 흔들었던 사라말은 그것을 내리고 말했다. "어쩌면 아이저 규리하는 저기 있는 도깨비 무사장의 존재 때문에 정공이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정우가 전쟁 피해의 수습에 실패하길 기 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우가 규리하 사람들의 신망을 잃기를 기다리는 거지요. 파라말은 그럴 가능성에 대비해서 정우를 돕고 있 습니다." 아트밀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라말의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사라말은 아트밀이 그의 이야기에 관심이 아주 많다 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트밀은 사라말이 눈치가 없 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트밀은 거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무관심을 밝혔지만 사라말은 그것에 개의 치 않았다. "대장군은 규리하를 떠났고 이제 우리는 그를 추적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황제의 유지를 발표한다 해서 소용은 없을 겁니다. 그것을 발표 하려면 대장군이 성공하여 귀족원 회의가 개최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그 회의장에서 하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그 때쯤이면 발케네공은 하늘치에서 탈출한 자들을 잔뜩 모아놓았을 겁니다. 우리처럼 발케네 를 탈출할 수 있었던 자들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아트밀은 지겹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던 그 는 다시 한 번 사라말의 말에 관심이 없음을 밝힐 좋은 방법을 찾아 냈다. "저기 있는 건 야리키인가? 뭘 하는 거지?" 아트밀이 가리킨 곳은 규리하성 꼭대기였다. 그곳을 올려다본 사라 말은 꼭대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는 야리키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저 그곳에 앉아있다면 아트밀이 '뭘 하는 거냐'고 말했을 리가 없 다. 그는 확실히 눈여겨 볼만한 희한한 짓을 하고 있었다. 야리키는 그의 긴 조간을 앞으로 뻗은 다음 쇠사슬 낚시줄을 아래로 늘어뜨리 고 있었다. 아트밀이 말했다. "새를 낚으려는 건가?" 사라말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정우 규리하는 6억 명의 사람들 중 단 한 명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우리가 잘 알 고 있는 그 사고, 즉 하늘누리가 유수부 통제국과 함께 사라진 지금 그녀는 세상에 딱 한 사람뿐인,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하 늘치 조종자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새로운 제국에 새로운 하늘누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데……" 아트밀은 질렸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가 사라말의 말에 관심이 있 었다면 사라말의 계속된 말이 별 연관성 없이 이것저것 아무 거나 말 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지만 아트밀은 그것을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사라말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눈이 좋은 레콘인 야리키는 저 아래쪽에 있는 아트밀의 표정을 생생 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아트밀이 지겨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리키는 아이솔 형제와 함께 온 그 젊은 레콘이 무엇 때문에 지겨운 대화를 그만두고 어딘가로 훨씬 재미있는 일을 하러 떠나지 않는 것 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건 하늘낚시터라는 거죠?" 야리키는 움찔하여 몸을 부풀렸다. 그는 일단 낚싯대를 꽉 붙잡았 다. 자칫하여 놓쳤다간 아래에 있는 사물을 부수거나 사람을 상하게 할지도 모르니까. 낚싯대를 단단히 세워잡은 야리키는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을 돌아보았다. 낯익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야리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이름이……" "세레지 파림. 고 아라짓 왕국의 개조 영웅왕이 남겼다는 영웅왕의 낚싯대를 찾아다니는 보물사냥꾼." 낚싯대라는 말에 흠칫했던 야리키는 곧 자신을 진정시켰다. "네 이름은 기억 못해지만 네가 하는 말의 9할은 믿지 말라던 경고 는 기억나는군." "세상을 재미없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악의 세력을 만나셨군요. 더 노력해야겠어요." "금방 전의 그 소리는 뭐냐?" 세레지는 활짝 웃었다. 두터운 방한복으로 몸을 둘러싼 세레지는 바 닥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맞았나 보네?" "뭐가 맞았다는 거냐?" "우와, 당황스럽다. 그냥 이야기 하나 만들어본 건데. 정말 무…… 그거 없는 낚시터를 원하세요?" 세레지는 물이라는 말을 황급히 대명사로 바꿨다. 야리키는 부리를 탁 부딪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세레지는 그 뒷모습을 향해 고개 를 끄덕였다. "쑥스러워 하지 마세요. 멋진 해결책이네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하늘치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하늘치가 왜 떠있는지도 알 수 있 다. 그 사람은 그 방법을 이용하여 다른 생선도 공중에 띄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거 없는 낚시터를 가지게 된다. 숙 원 달성, 인생 성공. 그런데 규리하공은 자신의 방법을 설명할 수 없 는 모양이던데요." 야리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렇게 되길 바라지요. 그런데 바쁘지 않다면 저 좀 도와줄래요? 그 말 하려고 올라왔는데." "뭘 도와달라는 거야?" "꿈에 그리던 제 이상형을 만났어요. 그는 완벽한 남자에요. 하지만 저는 너무 부끄러워서……" 야리키는 벌떡 일어났다. "알았어." 세레지는 킥 웃었다. =============================================================== 21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1-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21 조회수 : 1676 피를 마시는 새 21. 부활의 불씨 - 2 세레지의 요구 조건은 간단했다. 그녀는 야리키에게 자신의 이상형 을 '낚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 었다. 세레지는 그것을 처녀의 수줍음이 반영된 혁신적 구혼법이라고 불렀고 야리키는 거기에 대해 아무 논평도 하지 않았다. 세레지와 함 께 걸어간 야리키는 세레지가 어떤 병사를 지목하자 그에게 불쑥 손 을 내밀었다. 병사는 마주 손을 내밀지 않았다. 물론 레콘과 태연히 악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병사의 반응은 조금 더 극적이었다. 병사는 뒤로 돌아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던 것이다. 야리키는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낚싯대를 쓱 내찔렀다. 도망치는 병사의 다리 사이로 낚싯대가 파고들었다. 병사는 그의 남 은 평생에 두 번 다시 할 일이 없을 공중회전을 보여주며 나가떨어졌 다. 모든 면에서 극적인 남자였고, 세레지가 이상형으로 지목할 만했 다. 야리키는 쓰러진 남자에게 성큼 다가가서는 그 허리띠에 낚시를 끼웠다. 그리고 야리키는 남자를 낚시에 매단 채 옆으로 두 걸음 걸 었다. 그러자 병사는 성벽에서 바깥 7 미터 거리에 매달리게 되었다. 지상까지는 추락사를 확실히 보장하는 거리였다. 야리키는 조간을 좌우로 흔들었고 매달린 병사는 비명을 꽥꽥 질렀 다. 당연히 구경꾼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어리둥절해하는 구경꾼들 을 위해 세레지가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정말 재미있어 보이죠? 동편 다섯 닢씩 받아요!" 야리키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구경꾼들은 좀 위험한 오락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병사가 내지르는 사람 살리 라는 외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매달린 병사는 언제나 동일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언 어는 없으며 사람은 언어 못지않게 상황에서도 많은 정보를 얻는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마 영원히 웅변술 강좌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병사가 더 이상 비명도 내지르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을 확인한 세 레지는 야리키에게 그를 내리라고 손짓했다. 야리키는 이것이 손맛이 라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병사를 성벽 위의 통행로에 내려놓았다. 약간 얼빠진 것처럼 보이는 구경꾼 하나가 "다섯 닢이라고 했습니 까?"라고 질문했지만 세레지는 그를 무시하며 바닥에 앉아 헛구역질 을 하는 남자에게 말했다. "자, 내가 질문하고 자기는 대답하는 거야. 대답이 시원찮으면 우리 자기는 한 번 더 하늘을 날아다니게 될 거야. 그런데 두번째는 내가 낚싯대를 들 생각이거든? 그러니 잘 생각해서 대답해. 켄토릭이 누구 지?" 야리키는 벼슬을 꿈틀했다. 무기라고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그의 조간은 최후의 대장간에서 받은 것이고 야리키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만지도록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병사는 침착했다 면 알아차릴 수 있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대신 병사는 야리키 가 아닌 세레지라면 자신을 반드시 떨어뜨리게 될 거라는 생각만 떠 올렸다. 곧 병사는 켄토릭에 대해 자신이 아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 다. 켄토릭이 사람 이름이 아니라 특정한 암호라는 사실, 그리고 그 암호를 말해야 하는 장소까지 알게 된 세레지는 빙긋 웃고는 상황을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 구경꾼에게 병사를 넘겼다. "가요, 야리키." 야리키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바쁜 용건 있어요?" 없었다. 야리키는 조간을 어깨에 맸고 세레지는 앞장서서 척척 걸어 갔다. 얼마 후 그 두 사람은 규리하 시의 주점 중 한 가운데에 나타났다. 세레지는 켄토릭을 주문했고 그러자 주인은 문을 향해 미친 듯이 도 망쳤다. 그러나 채 몇 걸음도 달리기 전에 주인은 꽤 묵직한 것이 머 리를 내리누르는 것을 느꼈다. 큼직한 손으로 주인의 머리를 붙잡은 야리키는 차분하게 말했다. "반항하면 목 부러진다." 그리고 야리키는 팔을 끌어당겼다. 훌륭한 뒷걸음질로 되돌아온 주 인은 조금 후 어떤 이름을 알려주었다. 세레지는 빙긋 웃었다. "가요, 야리키." "지금?" "바쁜 용건 있어요?" 방랑자는 발바닥에 세상의 흙먼지를 모아들이는 자다. 하지만 하늘 치의 등을 이용하기 좋아하는 야리키는 방랑자이면서도 지상과 유리 되어 있었다. 또한 신부 탐색자가 아니라 숙원 추구자이기에 야리키 는 다른 레콘들과도 관계를 맺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 날 오후 세레 지 파림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야리키는 몇 년 동안 겪을까 말 까 하는 교제를 한꺼번에 치르게 되었다. 그 대부분이 폭력적인 것이 긴 하지만 숫자 자체는 많았다. 야리키는 그 익숙하지 않은 경험들이 싫었다. 해가 질 무렵, 누군지 이름도 기억해두지 않은 작자의 입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혀를 뽑아내려는 시늉을 하던 야리키는 문득 고개를 돌 려 세레지를 바라보았다. 세레지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야리키는 특별히 강요하는 어조도 아 닌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그만하자." "한 명만 더 만나고." "알았다." 야리키는 낚싯대를 어깨에 걸쳤다. 세레지는 오후 내내 그러했던 것 처럼 그의 앞쪽에서 걸어갔다. 혀를 뜯길 뻔한 남자는 황혼에 버려졌 다. 세레지와 야리키는 규리하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다가오는 밤 속에서 기온은 급감했다. 혹독한 바람에 세레지는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북부의 이 어처구니 없는 추위에 대해 입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 야리키는 깃털들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를 들었다. 빛은 여위어가다가, 창백하게 바뀌었다. 눈과 얼음이 파르스 름하게 반짝거렸다. 빙판길에는 재와 흙이 무성의하게 뿌려져 있다. 얼어붙은 도시를 걷던 야리키는 멀리 보이는 규리하성을 잠시 바라보 다가 말했다. "하늘낚시터는 비밀이다." 세레지는 잠시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걸었다. "왜죠?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말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레콘이잖 아요." "비밀이다." "알았어요. 저는 입이 무거우니까 걱정 말아요." 야리키는 세레지가 입이 무겁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그녀가 즐겨 취급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사실일 리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니 입이 무겁다고 해도 될 것이다. 야리키는 안심했다. 장갑 낀 손을 겨드랑이에 묻은 채 걸어가던 세레지가 갑자기 발을 쾅쾅 굴렀다. "야리키. 저는 한계선 남쪽에서 왔어요. 이 추위는 정말 싫어요. 세 상이 쓸쓸하게 죽어가는 것 같아. 세상이 죽을 땐 쓸쓸하겠지요?" "뭐?" "그렇잖아요. 세상은 혼자고 친구 세상이나 가족 세상 같은 것은 없 으니까요. 세상은 혼자 죽게 될 거예요." 야리키는 부리를 살짝 부딪혔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주제고 지금 그럴 충동이 드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구태여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세레지는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침묵했다. 바람이 줄어들었다. 바람마저 사라진 곳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얼어붙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밤풍경 이다. 시린 공기 그 자체도 자신 속에서 얼어붙고 있는 듯했다. 어쩌 면 바람도 얼어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레지는 눈이 왔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야리키는 몰라도 세레지 자신에겐 굉장한 고생이 될 테 지만 그래도 세레지는 눈을 기대하며 하늘을 보았다. 하지만 별이 얼 어붙어있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아침은 다가올 것이다. 의 심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밤도 다시 다가올 것이다. 다시 아침이 왔 다가, 밤이 올 것이다.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세레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큰 차이는 없다. 세레지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던 세상은 세레지가 없어진 후에도 있을 것이 다. 혼자 외롭게 있을 것이다. '아아, 춥다.' 세레지는 생각이 얼어붙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 추 위는 정말 싫었다. 세레지는 빨리 봄이라는 것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 각했다. 그 다음엔 기필코 여름이 올 테고 가을과 빌어먹을 겨울도 다시 오겠지만, 그래도 세레지는 봄을 기다렸다. 목적지가 나타났다. 세레지는 걸음을 늦추다가 천천히 멈춰섰다. 등 뒤에서 레콘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되지?" 세레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앞쪽에 있는 것은 큼직한 3 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다.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이들이 모여 사는 공 동 주택이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건물에서는 많은 소음이 들 려왔다. 아마도 피난민들 때문에 거주민의 숫자가 상당히 늘어난 듯 했다. 안마당 쪽에는 얼핏 보아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짐들이 두 서없이 쌓여있었고 건물 주위에도 만만찮게 많은 쓰레기들이 보였다. 세레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안마당 쪽으로 들어섰다. 야리키와 세레지는 2층으로 올라갔다. 안마당에 면한 길다란 복도에 도 미처 집 안으로 들이지 못한 많은 짐들이 놓여있었고, 그래서 야 리키는 꽤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다. 물론 그의 조간 또한 주의 깊게 다루어야 했다. 용케 아무 것도 무너뜨리지 않고 목표한 문 앞에 도 달한 세레지는 그것을 가볍게 두드렸다. 문 안쪽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세레지는 다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추우니까 빨리 열어요!" 친구 집이라도 찾아온 듯했다. 야리키는 안마당 쪽으로 조간을 드리 운 채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그 문 안쪽에서 인간 소년의 것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굽니까?" "세레지 파림과 야리키." "그게 누군데요?" "좋은 사람들." "당신 어디서 진하게 마시고 오기라도 한 겁니까? 이 밤중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빨리 문 여세요. 부수고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시카트 공자 님." 야리키는 공자님이라는 호칭에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후 문이 열렸 다.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말쑥한 얼굴의 젊은이였다. 손에 촛대를 든 젊은이는 낭패한 얼굴로 세레지와 야리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레지는 문이 열리자마자 안쪽으로 뛰어들듯 걸어들어갔다. 젊은이 는 엉겁결에 옆으로 밀려났고 그러자 야리키 또한 복도에 낚싯대를 내려놓고는 머리를 숙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젊은이는 야리키 를 막지 못했다. 야리키는 그를 대신하여 문을 닫았다. 세레지는 장갑을 하나씩 벗으며 젊은이에게 말했다. "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카트 공자님. 각하께서는 어디 계시죠?" 시카트 규리하는 차분한 표정으로 세레지와 야리키를 관찰하다가 세 레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체포하러 온 것치곤 좀 이상한 구성이군." "체포하러 온 것은 아니에요." 시카트는 몸을 돌렸다. "일단 좀 앉는 것이 좋겠군. 뜨거운 거라도 좀 마시면서 이야기하 지." "감사합니다." 시카트는 응접실로 쓰이는 듯한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세레지 는 그것이 응접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저 두 사람을 안내했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방안에는 아무 것도 없 었다. 바닥에 놓는 것도, 벽에 거는 것도 없이 그저 텅 빈 공간이었 다. 세레지는 웃으며 바닥에 앉았고 야리키도 그렇게 했다. 응접실이 아니라 야영터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시카트는 두 사람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손에 든 초를 바닥 에 내려놓고 방을 나갔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고, 야리키는 어쩌 면 시카트가 그대로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시카트는 손에 큼직한 술 함지를 든 채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쟁반을 손에 든 소녀 한 명이 따르고 있었다. 시카트는 바닥에 함지를 내려놓고는 소녀에게 쟁반을 받아들었다. 소녀는 다시 밖으로 나갔고 시카트는 쟁반을 함 지 옆에 내려놓았다. 쟁반에는 술잔과 바가지, 그리고 간단한 안주거 리가 놓여있었다. 시카트가 말했다. "레콘이 있으니 양이 많아야겠는데, 조리할 필요 없이 많은 양을 빨 리 구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군. 양해해줬으면 좋겠어." 야리키는 충분히 양해했다. 그는 어느 것이 자기 것이냐고 묻지도 않은 채 - 물을 필요가 없었다. - 바가지를 집어들어서는 함지에서 큼직하게 술을 퍼올렸다. 세레지는 킥 웃고는 술잔 하나를 채워서는 시카트에게 내밀었다. 잠시 곡차를 마시느라 세 사람이 침묵했다. 한 잔을 깔끔하게 비우고 입을 닦은 세레지는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이저 규리하 각하께서는 이곳에 안 계신가 보군요?" "그래. 아버님께서는 다른 곳에 계시지." "왜 함께 계시지 않고? 흩어져 있는 것이 안전하긴 하지만." "그쪽은 누님의 전권 대리인인가?" "아니에요. 아이저 규리하 각하와 공자님을 추적할 의무만 가지고 있지요. 소재를 알았으니 돌아가서 보고하면 끝이긴 하지만, 그러면 유혈 사태가 일어나겠지요. 그래서 저는 투항하시라고 설득할까 해 요." "재미있는 아가씨군." "감사합니다. 시카트 공자님." 시카트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군. 나는 시카트 규리하가 아니야." 야리키는 술잔을 부리 쪽으로 가져가려다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세 레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카트가 아니라는 젊은이를 바라보았 다. 그가 말했다. "아마 규리하의 공자를 추적해온 모양이군. 그것은 맞았어. 하지만 나는 시카트 규리하가 아니라 이이타 규리하야. 시카트의 형이지." "아버님과 함께 돌아오셨던 건가요?" "따로따로 돌아왔지. 아버님이 먼저 규리하로 돌아오셨고 내가 그 뒤를 따라왔지. 그리고 나도 아직 아버님이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해." 세레지는 볼을 부풀렸다. "이런 말씀 실례가 되겠지만, 어쩐지 추적이 쉬웠어요." "아아, 추적 대상이 아버님이라기엔 쉬웠다는 말이지? 자식이 아버 지에 비해 못하다는 말은 실례가 아니지." "음. 공자님이 이이타 규리하 공자님이시고 춘부장이 어디 계신지 모르신다면……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공자님을 그냥 붙잡아갈 수 밖에 없겠는데요." "그런가? 급한 일이 아니라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좀 천천히 이야기 하지. 세레지 파림. 이렇게 술도 많이 남아있는데 벌써 술자리를 끝 내기엔 아쉽잖아." 세레지는 고개를 갸웃한 채 이이타를 바라보다가 야리키를 돌아보았 다. 야리키는 그 말에 벌써 동의한 듯 묵묵히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세레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죠, 뭐. 아버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역시 춘부장께서는 투항하셔야겠지요?" 이이타는 이 무지막지한 서두에 미소를 지었다. "왜 '역시'가 되는 거지?" "딸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니까요." 이이타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조금 치떠서 세레지를 바라보았다. 세레지는 입매를 약간 비튼 채 말했다. "아버지가 딸을 공격하는 일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세레지 파림. 그 문제에 대해서 나는 슬프다고 생각해. 물론 슬프 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가 없어. 아버님은 충성서약을 거부한 황제가 지명한 규리하 변경백 을 인정할 수 없어. 그것은 당신이 지켜온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 될 테니까." "그 황제는 사라졌어요. 이이타 공자님." 이이타는 입을 다물었다. 세레지는 약간씩 오르는 취기에 추위가 사 라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춘부장께서는 황제에게 반대하셨고 황제와 싸우신 거예요. 그 황제 가 사라졌으니까 이제 황제를 대신하여 따님과 싸우겠다는 식인 것 같은데, 동의하기 어렵네요. 황제가 사라졌다면 황제에 대한 적개심 과 분노도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와 딸이에요. 왜 싸워야 하지요? 아이저 규리하 각하께서는 그냥 따님께 사과하고 지난 일은 잊자고 말하시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자고 하면 되잖아요?" "일이 그렇게 쉬우면 얼마나 좋겠나." "어려울 것은 뭐죠?" "누님의 정부가 아버님을 용납할까? 그러긴 어렵지. 그리고 지금 아 버님을 따르고 있는 옛 가신들은 누님을 용납할까? 역시 어렵지. 이 것은 한 사람의 기득권 문제가 아니거든." "그러면 온건한 해결책이라는 것은 없다는 건가요?" "규리하 변경백의 자리는 하나뿐이야. 전부가 아니면 전무지. 그것 을 나눠가질 수는 없어." "그러면 역시 딸을 공격하시겠다는 건가요? 하지만 그곳에는 도깨비 무사장이 있어요." "그건 큰 문제가 아니야." "예?" 이이타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했어. 유혈 없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니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지." "그게 뭐죠?" 이이타는 허리를 똑바로 폈다. "세레지 파림. 나는 누님에 대한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어. 우리 누 님은 정말 하늘을 날고 하늘치를 부리나? 발케네군이 물러간 것은 그 능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인가?" "아, 예. 사실이에요." 이이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도 들어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군. 어떻게?" "저도 잘 몰라요. 환상계단을 굉장히 능숙하게 이용하시다보니 그런 일이 가능하신 것 같아요. 하지만 각하께서도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 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하지는 못하세요." "하지만 하실 수는 있다?" "예. 확실히." "바로 그게 문제야." "그게 왜 문제지요?" "제국이 사라진 지금 규리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누님뿐이 라는 것. 혼자서 군대인 즈믄누리의 무사장처럼 누님은 지금 규리하 의 일인 군대라고 할 수 있어. 그 분은 사라티본 부대를 앞세우고 규 리하로 진공한 십만 발케네군을 편지 한 통으로 물러나게 하신 분이 지." "아……" "조금 전 딸에 대한 범죄라고 했던가? 그것만이 아니지. 지금 아버 님께서 누님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규리하에 대한 범죄가 되는 거야. 제국 실종의 혼란기에서 규리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제거하 는 일이 될 테니까."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세레지는 이것이 자신이 꾸며낸 어떤 이야기보다도 재미있다고 생각 했다. 아이저 규리하는 빼앗긴 자리를 되찾아야 하지만, 만약 그런다 면 그 자리는 유지될 수 없다.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로군.' 세레지 는 마음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면 춘부장께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신다는 건가요?" "바로 그래." "그렇다면 춘부장께서는 더욱 투항하셔야 해요. 방법이 없잖아요? 되찾지도 못할 자리에 연연하며 불가능한 지하투쟁을 벌이는 것보다 는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잖아요. 비셀스 각하께서도 투항한 아버님을 혹독하게 대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오랜 기간은 아 니지만 곁에서 지켜본 제 느낌으로 그 분은 오히려 아버님을 반기실 거라고 생각해요." "엄청나게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확실히 인정하겠어. 세레지 파림." "하지만 역시 안 된다?" "미안하군. 많이 노력했는데." 세레지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설게요. 그래도 뭐 하나 건졌네요. 춘부장께서는 지금 당장은 규리하공을 도저히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야리 키?" "잠깐." 야리키는 손을 뻗어 함지를 붙잡고는 이이타를 바라보았다. 이이타 는 졌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내밀어 마음대로 하라는 손짓을 해보였 고 그러자 야리키는 함지를 들어 통째로 벌컥벌컥 마셨다. 순식간에 남은 술을 비운 야리키는 구부정하게 일어났다. 세레지와 이이타도 일어났다. 세레지가 말했다. "좋은 소식 가져갈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자님. 이제 가실까요?" 이이타는 웃었다. "그냥 모르는 척해주면 안될까? 내가 누님을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는 것을 알았잖아." "글쎄요. 저는 이것이 공자님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사양하겠어." "어떻게?" "응. 지금 도깨비 감투를 쓴 사람이 너를 겨냥하고 있어." 느긋한 자세로 서있던 야리키는 순간적으로 몸을 부풀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느라 야리키는 세레지의 말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야리키! 공자를 잡아요!" 야리키가 이이타에게 몸을 돌렸을 때 이이타는 이미 뒤로 물러나 있 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는 물통이 쥐어져 있었다. 야리키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이타가 허공 에 손을 뻗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통을 꺼내는 모습을 본 세레지는 감투를 쓴 자가 있다는 말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이타가 말했다. "야리키라고 했지요? 불상사는 피하도록 합시다. 저는 정말 그런 짓 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통은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 니다. 보이지 않는 것도 있지요." 야리키는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세레지는 취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감투는…… 발케네공의……" "세 개가 있었지. 발케네공이 사망한 후에 그 중 하나를 손에 넣은 사람이 나를 돕고 있어. 물론 소개시켜줄 수는 없군. 자, 세레지?" "유혈 없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이런 뜻이었 군요." "그래." 세레지는 어깨를 늘어뜨리는 동작을 해보이고는 주저없이 문쪽으로 걸어갔다. 문앞에 선 세레지는 야리키에게 손짓했고 그러자 야리키는 이이타를 똑바로 노려보며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야리키가 빠져나간 후 이이타는 세레지에게 말했다. "밤길은 위험하니까 보이지 않는 내 동료가 두 사람을 규리하성까지 바래다줄 거야. 그리고 두 사람이 떠난 후에 우리도 곧 사라질 거야. 그러니 괜히 돌아올 필요는 없어." 감시자가 있으니 규리하성까지 달리지 말고 천천히 돌아가라는 경고 였다. 세레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곧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문 닫히는 소리를 들은 이이타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 을 통해 두 사람이 공동주택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내려다보던 이이타는 그것을 다시 닫았다. 몸을 돌린 이이타는 방 가운데 앉아있 는 헤어릿 에렉스를 보았다. 헤어릿이 세레지와 야리키를 따라가며 감시할 필요는 없다. 두 사람 이 그렇게 믿기만 하면 되니까. 헤어릿은 한 손으로 뺨을 만지작거리 며 말했다. "공자님. 그 여자의 말에 찬성하시죠?" "헤어릿." "춘부장께는 투항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믿으시죠?" 이이타는 묵묵히 술함지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야리키가 비워놓았다. 괘씸하다는 듯이 빈 함지를 내려다보던 이이타는 헤어릿 의 앞쪽에 앉아 그녀를 마주보았다. "헤어릿. 당신은 우리를 이곳까지 데려다줬고 아버님을 만나게 해줬 어. 정말 많은 것을 해줬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보답이지 요구가 아닐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보답할 것이 없어. 그러니 나를 더 돕고 싶지 않다면 언제든 떠나도 좋아." "공자님. 떠나고 싶어서 투항하라는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에요. 투 항하는 것 외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뭐가 있지요? 공자님이나 춘부 장께서는 비셀스 규리하를 공격할 수 없어요. 그러면 규리하가 무방 비 상태가 되니까." "따라서, 규리하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지." "예?" "하늘치를 한 사람이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어. 누님이 보 여주었고, 어쩌면 하늘누리의 실종은 아실이 저지른 일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아실도 그런 일을 했다는 거지." 헤어릿은 놀랐다. "아실이……" "아, 이건 가정일 뿐이야. 어쨌든 아실을 제외하더라도 누님이 하늘 치를 움직였다는 것은 확실하지. 누님이 그러셨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을 거야. 아버님께서 그런 사람을 찾아내거나, 혹은 그런 사람 이 되시면 규리하의 방어 문제는 해결되지." "춘부장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으러 가신 건가요?" 이이타는 세레지에게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거 짓말이다. 헤어릿은 소발굽 바위에서 아이저와 시카트를 찾았고 그들 에게 이이타가 규리하로 돌아왔음을 알렸다. 세 부자는 이미 오래 전 에 재회했다. 하지만 아이저와 시카트는 이이타를 남겨두고 다시 떠 났다. 이이타가 말했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을지는 알기 어렵지." "그러면 그런 사람이 되려고 떠나신 건가요?" "라수 종증조부께서는 하늘치의 비밀에 관한 내용을 책으로 써서 남 기셨지. 그 책의 이름은 천경비록이야. 아버님이 규리하를 탈출할 때 도 간직하셨던 책이지. 아버님은 그 책을 이해해 보려 하셨지만 끝내 그러지 못하셨어. 하지만 암살성에서 아실은 우연히 그 책을 엿보게 되었고, 그 내용을 이해했던 것 같아. 아실이 하늘치를 움직이는 법 을 터득했다면 바로 그 책에서 얻었겠지." "그렇다면 그 책에 하늘치 조종법이 있다는 건가요? 하지만 춘부장 께서는……" "그래. 이해하지 못하셨어." "그러면?" "그 책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 셨지." "어디죠?" "당신도 알겠지만 하늘치에 최초로 오른 사람은 하늘치 발굴대였던 막타드 신뷰레와 킬소 펜, 주키 네미, 그리고 우연히 참가하게 되었 던 오레놀 선사였지. 그런데 하늘치는 그들을 태운 채 대호왕이 싸우 던 하텐그라쥬로 갔어. 그리고 대호왕의 탈출을 도왔지. 사람들은 제 신들이 대호왕을 돕기 위해 하늘치를 그곳으로 보냈다고 알고 있지 만, 사실은 그 네 명이 하늘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을 거야. 아마도 오레놀 선사였을 테지." "그렇다면……" "파름산의 승려들은 자신들이 고아라짓 왕국 시절의 기록까지 가지 고 있다고 자랑하지. 그렇다면 그곳에는 오레놀 대덕의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그럴 가능성이 높아. 만약 그런 기록을 찾아낸다면 천경비록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버님은 하인샤 대사원으 로 가셨어." 헤어릿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이타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이이타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감상하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니, 헤어릿. 당신은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면 언제든 떠나도 좋아. 나는 규리하를 되찾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말 할 만큼 염치 없는 사람은 아니야. 그리고 이것은 이제 도깨비 감투 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당신은 당신에게 소중한 일을 하면 훨씬 즐겁게 살 수 있어. 소리는 내가 반드시 지킬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들에게 감투를 쓴 조력자가 있다는 것도 알려줬으니 저 들은 나를 함부로 공격할 수 없을 거야." "그래서 그 두 사람을 받아들였군요. 감투를 쓴 조력자가 있다는 것 을 과시하려고." "그런 이유도 있었지. 그리고 그 두 사람을 통해 누님이 어떤 인물 인지 짐작해보려는 의도도 있었고." 헤어릿은 이이타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공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아버님과 누님의 싸움을." "어려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은인이지.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려면 자신도 스스로를 정리할 수 있게 되니까. 나는 정리했어. 나는 아버 님에게 찬성해."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누님보다는 아버님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요?" 공격적인 질문이지만 이이타는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누님보다는 아버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해. 하지만 누가 규리하의 지배자가 되느냐는 다른 문제 아닐까? 나는 소리를 정말 사 랑하지만 소리가 규리하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거야." 약간 취해 있던 이이타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탄성을 듣지 못했 지만 헤어릿은 그것을 들었다. 헤어릿은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무례한 질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왜 아버님께 찬성하시 죠?" "나는 사람에겐 자신이 복종할 대상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믿거 든." "충성 서약." "맞아. 충성 서약. 아버님은 서약지지파야. 하지만 누님은 서약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어. 어쩌면 누님은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훌륭한 인물일 수도 있지만, 나는 서약을 지지하지 않는 규리하의 지배자는 받아들일 수 없어. 충성 서약을 거부했던 황제가 고맙게도 사라졌으니, 새 제국은 충성 서약 속에서 태어나야 해. 그 러려면 아버지는 규리하공으로써 서약지지파를 집결시켜야 하지. 그 게 내 선택의 이유야." 헤어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 헤어릿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았습니다. 진지하고 성의있게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거취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얼마든지." 헤어릿은 일어났다. 그녀는 이이타에게 목례하고는 문밖으로 나갔 다. 그리고 그곳에서 헤어릿은 벽 옆에 서있는 소리를 발견했다. 소리는 절대로 훔쳐듣지 않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임으로써 훔쳐들었음을 알 려주었다. 헤어릿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리." "예? 예?" "소리의 공자님이 자꾸 나를 흔들리게 하는데." 순간 소리는 경악과 공포에 빠진 얼굴로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그다 지 밝다고 보기 힘든 복도였지만 헤어릿은 소리의 표정에서 그녀의 속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오, 안돼. 당신 같은 미녀가 경쟁 자라는 것은 불공평해……' 헤어릿은 손을 뻗어 소리의 손을 꼭 붙잡 았다. "무슨 걱정을 하는 거야, 이 아가씨야." "헤어릿. 뭐가 흔들린다는 거죠?" "나는 발케네를 떠나고 싶었어. 그리고 소리 로베자를 걱정하는 한 청년과 그 청년만 의지하는 한 처녀를 그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보내 주고 싶었어. 그리고나서 나는 내 삶을 생각해볼 작정이었지. 내 증 오의 대상도 사라졌고 공작의 사생아라는 지위도 없어진 상태에서 말 이야. 나는 그 일이 어렵잖을 거라고 생각했어. 도깨비 감투가 있으 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군. 나는 비셀스 규리하가 황제의 괴뢰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직접 본 그녀는 충격적인 인물이었 지. 그리고 규리하에 있어 그녀의 의미는 황제의 괴뢰 이상이야. 그 녀는 지금 규리하의 수호자지……" 소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헤어릿을 바라보았지만 그녀가 완전한 이해 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헤어릿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만두자. 소리. 너를 규리하의 지배자로 추천하지는 않겠지 만 그래도 너를 정말 사랑하는 공자님께 빨리 가보렴." 자신이 엿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소리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 다. 헤어릿은 그녀의 손을 놓고는 소리를 가볍게 밀었다. 소리는 헤 어릿에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이이타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1-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22 조회수 : 1738 피를 마시는 새 21. 부활의 불씨 - 3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헤어릿은 걸음을 멈췄다.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지만 헤어릿은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없었 다. 이 공동주택의 다른 집에는 규리하 가문의 다른 가신들도 있었지 만 헤어릿은 그들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그냥 바람을 쐴까? 바깥 은 겨울밤이다. 발케네 출신인 헤어릿은, 그렇기에 추위가 얼마나 무 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답답했다. 헤어릿은 조금 고민하다가 결국 외투를 집어들었다. 헤어릿은 공동주택 바깥으로 나왔다. 헤어릿은 규리하성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 지 않나 살펴보았지만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헤어릿은 그들이 뛰쳐나올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세레지 파림은 분명히 이이타 공자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보다 그의 주변에 보이지 않 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을 테고 그 보고를 들은 경비 책임자 는 틀림없이 성의 경비부터 강화할 것이다. 도깨비 감투는 근처에 그 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행동을 상당히 제약해버 린다. 헤어릿은 성을 관찰하는 일을 그만두고 그냥 밤거리를 거닐기 로 했다. 춥고 어두운 길을 거닐던 헤어릿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주점을 발견했다. 헤어릿은 특별한 의도 없이 불빛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여전히 의도 없이 불빛이 새어나오는 덧창의 틈 사이로 주점 안쪽을 훔쳐보았다. 해가 진 것이 조금 전이니 영업을 할 시간이지만 가느다 란 덧창 사이로 보이는 주점 안쪽은 한산했다. 고향에서 쫓겨나 타향 의 밤하늘을 바라봐야 하는 처지라면 한 잔 술로 자신의 비참한 소회 를 달래고 싶어하는 자들도 있음직하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지나치게 추웠다. 주점 안에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고 그들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두 대국자 중 한 남 자를 본 헤어릿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감발한 발이나 팔뚝에 낀 토시, 그리고 옷차림으로 보건대 남자는 여행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헤어릿은 그 옷차림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가 의심하며 헤어릿은 덧창 사이의 좁 은 틈으로 다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고개를 약간 돌리고 있었지 만 헤어릿은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헤어릿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주점의 문을 밀었다. 주점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자 종소리가 났다. 바둑판이 놓여있는 탁 자에 앉아있던 남자 중 하나가 문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영업 안 합니다." 헤어릿은 뒤돌아나가는 대신 문을 닫아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 았다. 그녀가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주인은 짜증 난 얼굴로 헤 어릿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주인의 얼굴은 감탄과 환영의 표정 으로 바뀌었다. 짜증을 낼 기분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미소 하나 되돌 려줄 마음도 없었던 헤어릿은 무표정하게 탁자 쪽을 향해 걸어갔다. 여행자 차림의 남자는 헤어릿이 다가오는 것에도 신경쓰지 않은 채 바둑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도깨비와 나가의 혼례식이 벌어져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집중력이었다. 헤어릿은 이 또한 어 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범 은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토끼를 향해 털을 곤두세우고 미친듯이 울 부짖는 범은 어떨까. 헤어릿이 보기에 드넓은 기계에서 그 명성이 가 볍지 않은 자가 주점 주인과의 바둑에 이토록 고도의 집중력을 보인 다는 것은 유치한 집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주점 주인이 범상치 않은 기력을 가지고 있나 싶어 바둑판을 살펴본 헤어릿은 그 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둑을 두는 방법을 간신히 아는 정 도인 헤어릿이 보기에도 그 바둑은 백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그리고 백돌의 기사는 여행자 차림의 사내였다. 이 정도의 바둑이라면 방해해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헤어릿은 주저없이 말했다. "살인기사가 여기서 뭐 하고 있죠?" 주점 주인은 흠칫했고, 조금 후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대국 상 대자를 반드시 죽음으로 이끄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모 양이다. 하지만 제이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헤어릿은 목소리를 높 여 말했다. "제이어 솔한." 제이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제이어는 고개를 들어 헤어 릿을 올려다보았다. "헤어릿 에렉스." 주점 주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바둑판을 쳐다보았다. 모 든 면에서 섬뜩한 바둑판이다. 흑의 입장에서 봐도 그렇고, 상대 기 사의 이름에서도 그러하다. 만약 상대가 살인기사 제이어 솔한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주인은 절대로 바둑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후 주인은 바둑을 두지 않았을 거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 다르 게 해석했다. 그리고 주인은 공포 대신 분노를 느꼈다. 그는 욱하는 얼굴로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그 때 제이어가 말했다. "그만 두기로 합시다." "젠장, 이 아가씨 아니었으면 끝까지 속였으려고……" "미안합니다." "어디서 수작을……" "그만해요. 살려줄 테니까." 주인은 섬뜩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다시 공포가 되살아났다. 어쨌든 상대방은 살인기사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주인과 제이어의 대 화를 듣고 있던 헤어릿은 갑자기 상황을 이해했다. "솔한. 혹시 방내기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제이어는 피곤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장. 가서 술상이나 좀 봐오시십오. 술값 낼 테니까." "그쪽이 정말 제이어 솔한이오?" "그래요. 그러니까 고맙다고 해요. 당신이 나하고 두려면 지도료 내 야 된다고." 주인은 벌떡 일어나서는 격노한 얼굴로 제이어를 쏘아보았다. 하지 만 제이어는 두둑한 배짱을 과시하듯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 은 채 차분히 돌을 들어내었다. 주인은 그의 정수리를 노려보다가 몸 을 홱 돌려 쿵쿵 걸어갔다. 헤어릿은 주방으로 사라지는 주인의 뒷모 습을 보다가 약간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솔한. 술상 대신 장작이나 부엌칼 들고 올지도 몰라요. 방내기에서 기력 속이다가는 잘못하면 칼 맞는다고 들었는데." "헛소리. 기력 조금씩 안 낮추는 방내기가 어디 있어." "당신은 조금 낮춰서는 대국이 성립 안 될 텐데요." "보시다시피 성립되었고, 네가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 하지 않았다면 만방으로 깔끔하게 끝났을 거야. 앉지 그래?"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럴 일 없어. 부엌에 들어갈 때는 그런 생각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쯤은 겁 잔뜩 집어먹었을 테니까. 틀림없이 거하게 차려나와서 는 제발 죽지는 않게 해달라고 빌 거야. 걱정마." 헤어릿은 혐오감으로 얼굴을 찌푸린 채 제이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제이어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헤어릿의 시선을 알아차린 제이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얗게 입고 있으면 정체 다 밝혀지는데 내기 바둑을 어떻게 두 나." "타계하신 기사들에 대한 조의를 표하기 위해 백의를 입는다더니, 그거 참 편리한 조의 표시법이군요. 내기 바둑 둘 땐 바꿔 입나요?" "그럼. 그리고 잘 때나 목욕할 때도 백의는 입지 않아. 당연한 거 아닌가." "혐오스럽군요." 제이어는 빙그레 웃었다. 헤어릿은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장작이나 부엌칼 하나 집어들고 오기엔 시 간이 많이 지났다. 아마도 제이어의 말처럼 술상을 차리고 있는 듯했 다. 헤어릿은 다시 혐오감을 느꼈다. "솔한. 여기에 왜 나타난 거죠?" "이이타 공자님을 찾아왔어. 이 근처까진 추적했는데 위치를 못찾았 지. 그런데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니 공자님도 확실히 이 근처에 계시 나 보군. 주인이 차려온 술이나 마시고나서 안내해줘." "제가 왜 당신을 안내해야 하죠?" "네가 왜 이이타 규리하의 손님을 막아야 하지?" "그야 당신은 살인기사니까. 당신하고 겨루다가 다섯이나 죽었어요. 그 정도면 위험하지요." "다섯? 넷인데?" "가장 최근에 죽은 상대는 계산 안하나 보군요." "누구 말이야?" "제국." "제국?" "예. 아라짓 제국. 당신은 제국을 상대로 한 판을 두려 했지요. 당 신이 이긴 것 같지는 않지만 제국은 죽었어요. 그야말로 살인기사의 바둑이군요." 제이어는 파안대소했다. 숨이 넘어갈 듯 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헤 어릿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만 웃어요. 제이어." "하지만, 하, 하지만 정말 재미, 재미있는 말인걸!" 제이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헤어릿 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면 안되는 이유 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헤어릿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제이어는 힘겹게 손을 올려 말했다. "아, 앉아. 알았어. 그만 웃을게. 앉으라고." "왜?" "제발 앉아줘." 잠시 지체한 다음 헤어릿은 자리에 앉았다. 제이어는 자신의 말을 지키려는 듯 웃음을 멈추기 위해 애썼다. 볼을 주무르던 제이어는 길 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는 이이타 공자와 '한 판 둘' 생각은 없어." "왜 발케네를 떠났죠?" "거기엔 더 이상 볼일이 없어." "여기엔 있다는 건가요?" "그럼, 있지. 나는 이이타 공자를 지키기로 약속했어." "누구에게?" "변경백 아이저 규리하에게. 그는 나에게 규리하의 계승권자를 맡기 고 이곳으로 떠났거든." 헤어릿은 그 말을 듣자 온갖 질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어떤 단어에 대한 것이었다. "규리하의 계승권자?" "변경백 자신이 말했어. 이이타 규리하가 자신의 후계자라고." "변경백이 그랬어요?" "맞아. 따라서 내가 한 판 둔다면 그 상대는 비셀스 규리하가 되겠 군. 흐음. 네 논리대로라면 내가 이길지 질지는 알 수 없지만 비셀스 규리하는 죽겠군?" 헤어릿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그건 안되겠군요. 비셀스 규리하는 지금 규리하의 수호자니까. 발 케네군이 그녀가 무서워 도망쳤다는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들었어. 하늘치를 움직였다지?" "저는 직접 봤어요." "그거 참 재미있군." "뭐가 재미있다는 거죠?" "아아, 나는 하늘치를 움직였을지도 모르는 또 한 명의 소녀를 알고 있거든." 헤어릿은 아실이 하늘누리를 움직였을지도 모른다는 이이타의 말을 떠올렸다. 이어지는 제이어의 말은 그 소녀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그 소녀는 라수 규리하의 책을 통해 그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아. 그 런데 다른 소녀는 라수 규리하의 종증손이군." "그게 뭐가 재미있다는 거죠?" "아라짓 제국은 원시제 폐하께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 선황 폐 하께서는 그런 평가에 부족함이 없는 대단한 분이셨지. 그건 확실해. 하지만 그 때문에 동시대를 살았던 라수 규리하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받지. 사람들은 대호왕 폐하와 원시제 폐하를 모두 섬겼던 그 사도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말하지만 선황 폐하 때문에 그 걸물은 태 양 때문에 희미해지는 낮달처럼 취급된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하늘누리를 만든 것은 선황 폐하가 아니라 라수 규리하였지. 그리 고 하늘누리가 사라졌을 때 제국도 사라졌어." 헤어릿은 미심쩍은 어조로 말했다. "제국을 만든 것이 라수 규리하라는 건가요?" 제이어 솔한은 천진한 얼굴로 탁자를 바라보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 게, 그리고 그 별호에 걸맞지 않게 순진한 얼굴이다. 그는 조용히 말 했다. "어쨌든 지금 사라진 것은 라수 규리하가 만든 것이야." 틀린 표현은 아니다. 물질적으로 사라진 것은 하늘누리고 제국의 땅 이나 제국 신민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늘누리는 라수 규 리하가 만든 것이다. 하지만 헤어릿은 그런 식의 사고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헤어릿은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라수 규리하가 제국을 만들었다면 선황 폐하께서는 뭘 만드셨는데 요?" 제이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때 주방 쪽에서 주인이 나타났다. 주 인은 술병과 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와서는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 고는 안주를 가져오겠다며 중얼거리며 다시 떠났다. 헤어릿은 주인이 제이어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이어는 심 술궂은 얼굴로 떠나는 주인의 뒷모습을 쏘아보고는 술잔에 술을 채워 헤어릿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운 제이어는 그 것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우리 곁을 떠난 암살의 주인을 위해 건배할까?" 헤어릿은 차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싫어요. 하시고 싶으시면 혼자 하세요." "아, 그러지." 제이어는 빙긋 웃고는 주위를 조금 둘러보았다. 어느 쪽이 북쪽인지 찾는 듯했다. 조금 후 제이어는 북쪽을 향해 잔을 살짝 들어올려 보 였다. 그리고 제이어는 술잔을 입쪽으로 가져갔다. 헤어릿은 탁자에 놓여있는 술잔을 바라보며 이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어떻 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지키멜 퍼스는 낭랑하게 말했다. "무적 군단의 청년 군주와 하늘치의 처녀 지배자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면서도 서로를 용납하기로 결정했다는 거지. 험준한 지러쿼터 산맥을 두 자부심의 보증인으로 세운 채. 이런 것이 거물들의 싸움이 라는 거지." "근사하다는 거야?" "아니. 결판이 잘 안난다는 거야. 시원시원하게 결판 내는 것이 멋 지다고 생각들 하는 모양이지만, 결판을 쉽게 낸다는 것은 잔챙이라 는 증거지."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혹시 오늘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미리 위로하는 거야?" "어? 시오크. 왜 나를 상냥한 여자로 만들려 하는 거지?" "긴장했나봐. 여기는 어디지? 나는 누구고?" 지키멜은 빙긋 웃고는 손을 들어 시오크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은 활짝 펴서 어깨 뒤로 한참 끌어당겼다. 시오크는 저 멀리 서 날아올 준비를 하고 있는 손바닥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 풀렸어." "필요해지면 부담 갖지 말고 또 말해." "그러지." 지키멜은 시오크의 구겨진 앞섶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치며 말했다. "당당하게 보여야 해. 시오크. 잘 할 거야. 어깨 펴고 배에 힘 주고 항문은 꽉 조여." "부디 검사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줘." 시오크는 두 손으로 짐짓 뒤쪽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지키멜은 낄 낄 웃고는 뒤로 물러나 시오크의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음. 내 눈에는 괜찮아 보여. 유료도로당 기준으로는 어떤지 모르겠 지만." "유료도로당 기준? 이쪽에서 사람 평가하는 기준은 도로 사용료를 내느냐 내지 않느냐 뿐이야." "오늘 이후부터 바뀔 거야." 시오크는 지키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멜. 혹시 내 입술에서 무슨 맛 나는지 궁금하지 않아?" 지키멜은 웃으며 앞으로 시오크의 목을 휘어감았다. 입맞춤은 길지 도 짧지도 않았고, 그것이 끝났을 때 시오크는 옷차림을 다시 가다듬 어야 했다. 준비를 끝낸 시오크는 문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갔다 올게." 지키멜은 대답 없이 손을 흔들었다. 시오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 갔다. 조금 후 지키멜도 거기서 나갔다. 대회가 열리는 대극장으로 들어가는 시오크의 모습이 보였다. 대극 장 정문을 지키며 당원패를 검사하던 당원들은 시오크의 뒤에서 문을 닫으려다가 지키멜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들어올 생각이냐는 표정 으로 지키멜을 바라보았다. 지키멜은 신분을 알릴 만한 것은 아무 것 도 걸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은 지키멜이 비나간의 새로운 후작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당원 대회가 열릴 수 있 도록 음지에서 무수한 공작을 펼친 사람이라는 것은 더욱 알 수 없을 것이다. 지키멜은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당 원들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회장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비당원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대회장 안쪽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지키멜은 아마도 시오크의 입장이 소개되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지키멜은 갑자기 당원패를 위조하여 참석했으면 어 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본 지키멜은 역시 그 러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비나간의 새 후작의 얼 굴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만약 대회장 안에서 지키멜의 정체가 탄로 난다면 시오크에게 도움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서있을 필요가 없는 지키멜은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비나 간 문예회관의 복도는 넓었지만 지금 그곳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유료도로당의 당원 대회가 왜 비나간 문예회관에서 열리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 당원 대회를 무산시키고자 하는 자들을 막기 위해 회관 정문에서부터 입장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키멜은 복도 양쪽에 있는 예술 작품들에 별다른 눈 길을 주지 않은 채 재빨리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문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신분을 알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착용하지 않은 병사들이 서있었다. 이 대회가 비나간 후작의 후원으 로 열리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그래도 정체를 공공연히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지키멜을 못알아보는 척했다. 하지 만 계단 아래쪽에 있던 팩스벗 졸다비는 그녀를 모르는 체하지 않았 다. 지키멜이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팩스벗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대회가 시작되었습니까?" "그래. 시작되었어. 그런데도 아직까지 조용하군. 저쪽의 움직임 은?" "포착되는 것이 없습니다. 게라임은 이 대회를 방해하지 않을 생각 인가 봅니다. 그리고는 그 결과도 무시할 테지요." "하긴 서툴게 폭력을 행사하기는 어렵겠지. 우리로서도 그건 바랄 수 없어. 파당 이야기가 공론화될지도 모르니까. 유료도로당을 얻으 려다가 그것을 분해시키게 된다면 바보짓도 그런 바보짓이 없지. 자 유무역당 쪽은?" "조용합니다. 그런데 왜 그 쪽에 신경을 쓰십니까?" "유료도로당의 노선이 혹 변경될지도 모른다면 누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겠어?" "하지만 유료도로당의 노선이 아무리 경천동지하게 바뀐다 한들 자 유무역당에게 호의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자유무역당이 내놓 는 도로사용료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결국 자유무역당도 유료도 로당이 제공하는 안전한 상업로를 필요로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간 섭하지 않고 그저 관찰만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필요하면 엄청나게 공격적이야. 발케네공에게 세퀴라도를 사버린 것을 기억 못하나?" "그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어라?" 팩스벗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나간 문예 회관 앞쪽에 있는 커다 란 광장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지키멜은 그곳에서 기괴한 것을 발견했다. 어떤 인간 남자가 커다란 깃발을 들고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깃발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지키멜은 남자의 복장에 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남자의 무복장에서 놀라움을 느꼈다. 비 나간이 남쪽이긴 하지만 그래도 열대는 아니며 이곳의 겨울이 아랫도 리만 대충 차려입은 차림으로 걸어다닐 정도로 따스한 것은 아니다. 아니, 설령 따스하다 해도 그런 옷차림은 예의에도 맞지 않는다. 광 장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기막힌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중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소녀나 부인네들도 보였다. 하지만 남자는 풍성한 수염을 흩날리며 거침없이 걸어갔다. 몸은 상당히 심하게 노 출되어 있는데 반해 그 얼굴은 제멋대로 풀어헤친 장발과 덮수룩한 수염으로 상당히 꼼꼼하게 감춰져 있었다. 지키멜은 어처구니 없는 기분으로 '얼굴은 정중하군.' 따위의 생각을 해보았다. 팩스벗이 곤 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시인 자이 가텔입니다. 약간 기인이긴 한데, 저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요." "깃발에 뭐라고 쓰여있는 거야?" 고맙게도 바람이 깃발을 조금 움직여 그 내용을 보여주었다. 그곳에 는 대필로 단숨에 휘갈겨 쓴 듯한 글이 얼핏얼핏 보였다. 팩스벗이 조금씩 보이는 그 글자들을 소리내어 읽었다. "근……조 비나간…… 예술?" 지키멜은 그 문구에 얼떨떨해하다가 고개를 돌려 비나간 문예 회관 을 바라보았다. 연극이나 낭독회, 음악회, 전시회 등이 열리지만 오 늘은 유료도로당 당원대회가 열리고 있다. 지키멜은 다시 자이 가텔 의 깃발을 바라보았고 곧 눈을 감았다. "아, 이런 젠장." 그 때 자이 가텔이 입을 열었다. 이 추운 날씨에 반나체 차림으로 광장을 걷고 있는 남자치곤 대단히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물러가라, 도둑놈들아! 예술의 성지에서 물러가라!" 지키멜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미학과 윤리학의 갈등 문제가 아니 었다. 지키멜이 궁금해한 것은 자이 가텔이 요즘 창작 활동의 침체기 에 빠져 있나 하는 것이었다. 정체를 감춘 병사들과 팩스벗, 그리고 지키멜과 조금씩 모여드는 구경꾼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자이 가텔은 비나간의 새 후작이 된 지키멜 퍼스의 악덕을 준엄하게 꾸짖기 시작 했다. 그의 성토가 간부와 간부가 손을 잡고 비나간의 예술혼을 증명 하는 성지를 더러운 정치적 개싸움판에 제공했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도 지키멜은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과 시오 크 모두 미혼이니 간부와 간부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팩스벗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주먹을 움켜 쥐었다. "가서 쫓아내겠습니다. 각하." "놔둬. 재미있잖아." "저 자는 각하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예술가의 모욕은 모욕이 아니야." "하지만, 각하!" "알았어, 알았어. 저 자도 계속 저러다간 감기 걸리겠군. 가서 쫓아 내. 면식이 있나?" "아니오." "그래도 이름을 아는 것을 보니 작품은 읽어봤겠군?" "제목만 몇 개 기억합니다." "그러면 됐어. 가서 예술가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라고. 무슨 말인지 알지?" 팩스벗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시인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지키멜은 계단 장식물에 기댄 채 팩스벗이 어느 정도의 수완가인지 알아보겠다는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팩스벗은 자이 가텔의 근처에 도달했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기 에 지키멜은 팩스벗의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우리 시대의 시성 자이 가텔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똑똑 히 보았다. 지키멜은 피식 웃었다. 팩스벗 졸다비는 그녀의 의도를 잘 이해한 모양이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키멜은 자이 가텔이 '시성은 무 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 안 굶어죽으려고 희작질하는 말종에게 뭐 얻어먹을 것 있다고 아부냐?' 등으로 대답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팩스벗은 공손하게 허리를 연신 굽히고 있었지만 자이 가텔의 얼굴은 여전히 노기등등했다. '선생님의 분노에는 저도 십분 공감합니다만 이러다가 자칫 몸이라도 상하시면 선생님의 시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 에겐 커다란 슬픔이 될 것입니다.' '귀한 밥 먹고 할 짓 없어서 내 글쪼가리나 읽는 것들한텐 신경 안 쓴다.' '무슨 그런 겸양의 말씀 을. 저는 선생님의 이러이러한 시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제가 받은 감동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 '망할 놈아. 가서 좋은 글 좀 읽어라! 좋은 글 안 읽으니까 말 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겠다는 식의 모순이나 지껄이지!' 지키 멜의 추측은 대략 이런 식으로 계속되었고 실제 상황은 그녀의 추측 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팩스벗은 말로 설득하기 어렵다고 생각 한 듯 슬쩍 자이의 팔을 붙잡았지만 자이는 그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 며 고함을 질렀다. 지키멜은 그 고함에 대해서는 추측할 필요 없었 다. 잘 들렸으니까. "네 이 놈! 알았다. 너 그 어린 독녀가 보낸 놈이렷다!" '어머, 고마워라. 어리게 봐주다니.' 지키멜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처지라면 자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팩스벗 은 점점 분노를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듯했다. 그의 어깨는 굳었고 팔 동작은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이가 깃대를 휘둘렀 다. 팩스벗은 어깨에 정통으로 깃대를 맞았다. 자이 가텔은 아무리 봐도 근육질은 아닌데다 바람이 깃발을 잡아챘기 때문에 그 깃대의 속도는 느렸다. 팩스벗에게 육체적 손상을 입히기는 힘든 공격이었다. 하지 만 팩스벗을 화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날 쳤어?" 팩스벗은 자이의 깃대를 확 움켜쥐었다. 자이는 깃발을 뺏기지 않기 위해 매달렸고 그래서 두 사람은 깃대를 붙잡은 채 빙글빙글 돌게 되 었다. 그러다가 자이는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팩스벗의 가슴에 뛰어 들었다. "어이쿠!" 팩스벗은 뒤로 나동그라졌고 자이 또한 깃대에 이 마를 부딪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광장을 데굴데굴 구르게 되었다. 지키멜은 혀를 차며 계단 위쪽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곧 변복한 채 대회장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 중 몇 명이 싸움을 말리려는 좋은 이웃 들처럼 달려내려왔다. 그들은 세상의 평화를 자신의 두 손으로 지킬 수 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지키멜이 '재미있다'고 표 현할 모습으로 비화될 뿐이었다. "으아, 이 놈이 문다! 이 개 같은 놈이!" "커, 컥! 놔라, 이 놈아! 어디를 붙잡아! 네가 내 애인이냐!" 지키멜은 소리 없이 웃었고 그래서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병사 들은 가까스로 자이와 팩스벗을 떼놓았지만 자이는 자신을 붙잡은 병 사들을 할퀴고 꼬집어댔으며 팩스벗도 협조적이지는 않았다. 팩스벗 은 내 분노의 목표가 저곳에 있으니 인정으로 구속을 풀어달라는 내 용을 정중하지도, 길지도 않은 단어로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두 손으로 배를 붙잡던 지키멜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췄다. 지키멜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이 가텔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문예회관 안으로 들어가서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 다.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키멜은 신발을 벗어 팽개치고는 복도를 달렸다. 발소리를 지운 채 지키멜은 문예 회관 곳곳을 수색했 다. 병사들을 불러들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지키멜은 자 신의 의심을 확신할 수 없었다. '설마, 공연한 의심일 거야.' 공연한 의심이 아니었다. 대극장 2층 방청석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달했을 때 지키멜은 무엇인가가 계단 아래로 황급히 숨는다는 느낌 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계단을 두어 개 올라가다가 갑자기 옆으로 몸을 던졌다. 계단 난간을 붙잡고 뛰어넘은 지키멜은 계단 바로 옆에 내려섰다. 그녀의 앞쪽에는 세 남자가 서있었다. 지키멜은 그들의 손을 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통이 들려 있었다. 지키멜은 그곳에서 확 풍겨오는 기름 냄새를 맡았다. 지키멜은 똑바로 서며 생각했다. 역시 병사들을 데려왔어야 하는 건대. 그리고 지키멜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당주님이 명령을 취소하셨습니다!" 고맙게도 유료무역당주도, 자유무역당주도 모두 당주님으로 언급될 수 있다. 따라서 그녀의 말이 통할 확률은 낮지 않지만 지키멜은 혹 이들이 의뢰주의 정체를 모르는 청부업자들이 아닐까 의심하며 남자 들을 바라보았다. 그 날은 지키멜의 예상이 잘 들어맞는 날이었다. 예상에 걸맞는 대비를 할 수 있다면 행운의 날이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지키멜에겐 불운한 날이었다. 남자들은 기름통을 내려놓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영리하게도 그들 세 명은 지키멜의 퇴로를 막는 방 향으로 흩어졌다. 지키멜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받기로 한 돈의 세 배를 주지." 남자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지키멜을 포위해왔다. 지키멜은 서른 배를 주겠다고 외치려다가 그냥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장 가까 이 있는 남자의 다리 사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황급히 다리 를 오므렸고, 그것을 기다렸던 지키멜은 남자의 눈을 콱 찔렀다. 비명은 듣기 좋았다. 지키멜에게 타인의 비명을 즐기는 취미는 없었 지만 누군가에게 들리긴 할 테니까. 뒤쪽에서 다가온 팔뚝이 목을 휘 어감을 때 지키멜은 당신도 비명 좀 질러달라고 속으로 바라며 그 팔 뚝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그 팔뚝의 소유자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지 키멜의 목을 졸랐다. 지키멜은 발버둥쳤지만 목을 조르고 있는 팔뚝 은 완강했다. 지키멜은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비 내리는 날의 수면처럼 보였다. 지키멜은 그 혼란스러운 풍 경을 향해 소리 없이 외쳤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는 그녀도 몰랐다. 지키멜은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을 것 같은 더위라고 생각하며, 아쉬존 토프탈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하늘이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아쉬존은 앞쪽을 막고 있는 나뭇잎 무더기를 향해 신경질적인 동작 으로 팔을 휘둘렀다. 공교롭게도 팔이 나뭇잎 사이에 숨어있던 단단 한 나뭇가지에 부딪혔다. 아쉬존은 저린 팔뚝을 움켜쥔 채 몸을 웅크 려야 했다. 그리고 아쉬존은 한 시간만에 처음으로 그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팔뚝의 저림이 사라졌다. 나뭇잎을 헤쳐 숨어있던 나뭇가지를 찾아 낸 아쉬존은 그것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허리에 찬 칼을 붙잡았 다. 그는 사이커를 가지고 있었고 나가들이 만드는 이 예리한 칼은 어렵잖게 아쉬존의 팔뚝을 막은 나뭇가지를 잘라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존은 그만두기로 했다. 나가는 아니지만 그는 시모그라쥬인이었 다. 홧김에 나뭇가지를 자르는 것은 아쉬존에게는 끔찍한 비행으로 여겨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피해 앞으로 걸어갔다. 덤불과 넝쿨, 그리고 나뭇잎이 끊임없이 아쉬존의 팔다리를 붙잡았 다. 길이 아닌 곳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아쉬존은 밀림에서 그런 식 으로 움직이면 금방 지쳐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는 한쪽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아쉬존은 자신의 올바른 방향으로 걷는 것인지 다시 확인해보았다. "어이! 거기 있나?" 대답이 없었다. 틀림없이 소리에 집중하는 것을 잠시 잊은 모양이 다. 아쉬존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어어이!" "아, 예! 여깁니다!" 나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그의 앞쪽에서 들려왔다. 다행히 아쉬존 은 다가오는 나가 병사들을 향해 똑바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도무지 길이나, 혹은 길 비슷한 것으로 쓰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아쉬존은 또다시 나뭇가지에 이마를 부딪히게 되었 다. 아쉬존은 자신이 왜 투구를 벗고 있었나 생각하며 주저앉았다. 이마를 만져본 아쉬존은 다행히 이마가 찢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아쉬존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춤에 매달아둔 투구를 풀어 다시 머리에 썼다. 아쉬존은 자신이 처지가 참으로 우울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쯤 그곳 에서는 시모그라쥬공의 소환으로 보인 각 군단들이 엄청난 장관을 연 출하고 있을 텐데 아쉬존은 빽빽한 밀림 속에서 몸으로 길을 만드는 한심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종고모가 그에게 하텐그라쥬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닌 하텐그라쥬. 신 비로운 대선풍과 나무가 된 뇌룡공이 있긴 하지만 그 외에는 폐허밖 에 없는 곳이다. 이전에 몇 번 구경했기에 대선풍과 뇌룡공의 모습에 익숙한 아쉬존에게 그곳은 도무지 재미있는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만약 이곳에 정말 대호왕이 있다면, 그리고 아쉬존이 그녀를 찾아낼 수 있다면 이 수색은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 되겠지만 아쉬존은 대호 왕이나 두억시니들의 자취는커녕 누군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열성적인 수색열은 곧 시들해졌다. 그리고 긴장감 도 사라졌을 때 아쉬존은 세수를 하러 샘터를 찾았다가 그만 길을 잃 어버린 것이다. 아쉬존을 수행하고 있는 수색대의 병사들은 모두 나가였다. 종고모 베로시 토프탈은 시모그라쥬공의 호칭을 쓸 수 있는 소년을 보호하려 면 소드락을 복용할 수 있는 나가가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수색대 를 그렇게 편성했지만 그 배려는 공교로운 문제를 낳았다. 몸을 물로 씻는 것은 인간뿐이다. 아쉬존은 수색대에서 유일하게 아침에 세수를 하는 사람이었다. 한편 나가 병사들은 아침에 햇빛을 쬔다. 차가워진 몸을 빨리 따스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서 아쉬존은 그들이 햇빛 을 받도록 내버려둔 채 혼자 야영지를 떠났다. 길을 잃은 아쉬존의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키보렌의 한가운데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아쉬존은 도시 출신의 귀족 이었다. 키보렌 바깥에서 태어난 이보다야 낫겠지만 그도 키보렌에서 길을 잃을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쉬존은 그 가능성이 현실 화되었다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어어이!" "여깁니다!" 거리는 조금 전보다 가까웠지만 방향이 정면에서 조금 오른쪽이었 다. 아쉬존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고, 절망감을 느꼈다. 그곳에 있 는 것은 나무뿌리와 암석들이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지형이었다. 아쉬 존은 그곳을 걸으면 수평으로 암벽 등반을 하는 기분을 느끼게 될 거 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가까스로 그곳을 지났을 때 아쉬존은 숨이 끊어질 정도로 다급하게 호흡을 몰아쉬게 되었다. 아쉬존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함을 질러 정확한 방향으로 움직였 는지 확인해야겠지만 아쉬존은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도 없었다. 눈 앞이 빙빙 돈다고 생각하며 아쉬존은 앞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빨 리 병사들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걸어왔지만, 이제는 더 걸을 수 없다. 아쉬존은 이곳에 앉아서 병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후, 마침내 아쉬존의 앞쪽 수풀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나 가의 다리가 나타났다. 아쉬존은 기쁨에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 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쉬존은 힘겹게 손을 들어올렸다. 일 어설 힘이 없으니 부축해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가는 그의 손을 붙잡지 않았다. 아쉬존은 의아해 하며 다시 나가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아쉬존은 그 나가가 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 다. 아쉬존은 어리둥절해 하며 나가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폈다. 나가 가 입고 있는 것은 구식 복장이었다. 아쉬존은 나이가 아주 많은 나 가들이 그런 옷을 입는 것을 보았다. 아쉬존은 나가들의 그런 옛날 복장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서있는 나가가 입고 있는 것은 그 복식들보다 월등히 아름다웠다. 장식이 많거나 거추장 스럽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나가의 복식을 이해할 수 있는 아쉬 존 같은 이가 음미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아쉬존은 하텐그라쥬 에서 그런 예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서 있는 나가가 누굴지 생각해보 았다.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아쉬존은 깜짝 놀랐다. 아쉬존은 왜 나가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소년은 지 친 몸을 황급히 움직여 일어났다. 왕의 앞에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물론 왕에게 부축을 요구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아쉬존은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대호왕 폐하?" 나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위는 버렸으니 사모 페이라고 불러라." 아쉬존은 자신의 처지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 무서운 밤입니다. 김선일님의 무사 귀환을 바랍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1-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23 조회수 : 1869 피를 마시는 새 21. 부활의 불씨 - 4 부냐 헨로는 의자에 앉은 채 울고 있었다. 부냐는 자신이 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왜 울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기온은 차갑고 젖은 볼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부냐는 손등 으로 눈 주위를 문질렀다. 세게 문질렀다. 눈 주위가 쓰라렸다. 부냐 는 팔걸이 옆으로 팔을 내던졌다. "다 죽어." 바깥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함성과 박수, 그리고 저벅거리는 발소리 들이 떠들썩한 축제의 분위기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봄은 아 직 방문 예고장도 보내지 않은 이 차가운 계절에 그것은 아껴둔 지난 여름의 작은 조각을 꺼내어 맛보는 듯한 같은 활기였다. 하지만 부냐 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자 앞으로 길게 뻗어둔 다리는 오랫동안 앉아있어 부어 있었고 등은 몹시 배겼지만 부냐는 움직이는 것은 상 상도 하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들려왔다. 부냐는 트림 하듯 말했다. "다 죽으라고." 박수와 웃음, 함성들이 조금씩 장기화할 채비를 갖추었다. 연회가 시작될 모양이다. 부냐는 손을 들어 목을 긁었다. 시원해지기는커녕 신경을 바늘로 쑤시는 듯한 아픔만이 느껴졌다. 부냐는 상처 입은 사 람처럼 손으로 목을 감쌌다. 손바닥은 시원했다. 부냐는 다른 손도 들어올려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부냐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눌렀 다. 억지로 침을 삼키자 손바닥에 꿈틀거리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부 냐는 소름이 끼쳤다. 징그러운 동물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부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뒤통수와 관자놀이가 뜨거워졌고 목구멍에서는 뜨거운 입김이 쉿쉿 흘러나왔다. 부냐는 그 모든 느낌이 다 싫었다. 부냐는 자신의 목을 힘껏 졸랐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부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무시하면 질문한 사람도 사라질 거 라 믿는 것처럼. 하지만 질문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뭐 하는 거냐고!" 부냐는 손을 풀었다. 눈 앞에 조그마한 광점들이 떠다녔다. 부냐는 다시 눈을 비볐다. 목을 졸랐을 때 배어나온 땀이 눈물에 뒤섞여 진 득거렸다. 부냐는 소맷자락으로 눈을 비비고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 났다. "스카리." 스카리는 무장한 차림으로 문앞에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부냐 헨로는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지?" "미안해요…… 우리 언니는 군인이죠." 자신의 모처에 현상금을 건 부냐의 언니를 잘 알고 있는 스카리는 혹 누군가가 부냐에게 그 이야기를 이미 전했고 그래서 부냐가 자신 을 보고 웃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부냐가 웃은 이유는 다른 것 이었다. "당신 모습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 같지 않네요." 스카리의 갑옷은 깨끗했다. 개선식을 위해 준비된 무구들이기에 거 기엔 먼지나 피얼룩, 흠집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개선식을 하는 장 수라면 당연히 무구를 받쳐 입어야겠지만 부냐에겐 그 깨끗한 갑옷이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다. 부냐는 대략 그런 의미로 웃었다고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스카리의 굳은 얼굴을 본 부냐는 입을 다물었다. 스카리는 가슴에 노 궁 화살이라도 맞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카리가 말했 다. "나는 싸웠어. 부냐." "알아요. 스카리." "싸웠다고. 젠장. 언제까지 옛날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야? 누가 들 으면 내가 항상 진중에서 취해있는 줄 알겠군." "아니에요, 스카리.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스카리는 손바닥을 들어 부냐 쪽으로 내밀었다. "마음에도 없는 위로는 그만둬." 부냐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카리는 성큼 걸어서 의자에 앉았다. 부 냐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카리는 바닥 어디 쯤을 쏘아보 았고 부냐는 그런 스카리의 모습을 보다가 벽걸이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 고인 침묵이 발목을 적실 무렵이 되었을 때 스카리가 으르릉거 리듯 말했다. "젠장, 부냐. 왜 내 기분을 다 망쳐놓는 거지?" "스카리. 저는……" "나나본과 우기츠, 잔하일을 병합했다. 발케네 영토의 7분의 1은 되 는 거대한 영토가 새로 생겼어. 게다가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땅이 대부분인 우리 발케네에 비하면 그 땅들은 훨씬 비옥하지. 발케네는 내 손에 의해 두 배로 늘어난 거나 마찬가지야. 이제 쟁룡해 쪽에서 무기를 받기 위해 최후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레콘은 그 여정의 절반 은 발케네 땅을 걸어야 해." 부냐는 멍한 기분으로 황금해쪽에서 오는 레콘에겐 아무 변화가 없 을 것이며, 어차피 레콘은 자기가 누구 땅을 걷는지에 대해 크게 신 경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카리가 계속 말했다. "그걸 부하들에게 시켜서 얻은 건 줄 아나? 내 손으로 해냈어." "부하들 없이 혼자 가셨어도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부냐!" 부냐는 완강하게 입을 다물었다. 스카리는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고 는 일어날 듯한 몸짓을 했다. 하지만 일어나면 상황을 걷잡을 수 없 게 될 거라는 것을 짐작한 스카리는 팔걸이를 놓았다. "왜 말을 비꼬는 거야? 빌어먹을. 내가 그들을 지휘했어. 나는 취해 있지 않았단 말이야. 인정해줄 수 있잖아." "인정해요. 위대한 업적이세요." 스카리의 목이 벌겋게 변했다. 반대로 부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녀의 목에 남아있는 멍자국을 본 스카리는 조금 전 문을 열었다가 보게 된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그만두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목에 뭐라도 걸렸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부냐는 확 불타오르는 눈으로 스카리를 쏘아보았다. 스카리는 눈 주 위를 꿈틀거렸다. "왜 그러는 거야?" "무슨 가축 이야기 하듯이…… 제가 당신이 키우는 짐승이에요? 몸 이 왜 그러냐, 뭘 잘못 먹은 거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뭐예요?" "내가 언제 당신이 가축이라고 했어? 무슨 그런 어처구니 없는 소리 를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제기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러면 전리품인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당신은 제가 엘시 에더리의 여자이기 때문에 뺏은 거죠?" 부냐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 아니다. "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넌 그 전부터 내 여자였어. 나 는 되찾아온 것이지 뺏아온 것이 아냐." "알고 지내던 여자가 뺏고 싶은 여자로 바뀐 것이 언제죠? 저는 훔 치고 싶은 물건이었던 거죠? 그리고 이제 당신이 훔친 이 성에 전시 해두는 또 하나의 절도품이지요?" "자학은 그만둬. 자기를 비참하게 만들어놓고 즐기지 말라고. 꼭 그 래야겠다면 혼자 그래. 내 감정까지 모욕하지는 마! 참을 수 없으니 까!" 스카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 아니다. "당신 감정?" "그래!" "당신은 제 것 아니었어요?" 스카리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부냐를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긴 시 간 동안 말을 탄 다음 땅에 내려섰을 때, 혹은 잠에서 깨어 바라본 천장이 기묘한 각도일 때 느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혼란 속에서 스카리는 암살성의 어느 부분인지 알 수 없는 부분이 과거에 들었던 어떤 말을, 간직하고 있던 어떤 말을 그 새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들었다. '제 남은 시간은 모두 부냐의 것이니까요.' 비나간 후작 지키멜 퍼스는 눈을 꼭 감은 채 코를 벌름거렸다. 의식 은 조금 전부터 명료했다. 하지만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 며 우주 속의 자신의 위치를 규정짓지는 않았다. 대신 지키멜은 냄새 를 맡았다. 하지만 그녀의 후각은 별다른 자극을 느끼지 못했고 대신 지키멜은 두통이 심하다는 것만 깨달았다. 그리고 지키멜은 자신이 왜 눈을 뜨지 않은 것인지 깨달았다. 두통 때문에 지키멜은 빛을 보 기 어려웠다. "눈 아프니까, 누구 있으면 초를 꺼줘." "태양이야." "태양? 아아, 그 새. 알아." "새?" "둥지로 돌아와 잠들지 않는 새 말한 거 아냐?" "대화 나눌 기회가 생기면 동쪽으로 돌아가서 잘 생각이 없냐고 물 어봐주지." "부탁해." 지키멜은 눈을 떴다. 그곳에는 그녀가 기대하던 남자가 없었다. 지 키멜은 고개를 조금 돌렸고 잠자리 옆에 앉아있는 시오크를 발견했 다. 시오크는 대회장에 들어갔던 옷차림 그대로였지만 그 옷은 여기 저기 구겨져 있고 어떤 곳은 찢어져있었다. 지키멜의 시선을 깨달은 시오크는 자신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내 걱정할 때가 아닌데." "배후가 누구야?" "아버지." 지키멜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자이 가텔은?" "이용당한 거야. 어젯밤에 우연히 술자리에서 동석하게 된 작자에게 충동질 당한 거지." "대회 장소가 사고의 원인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희 아 버님은 참 대단하셔. 대회는 어떻게 됐지?" "지키멜 퍼스." "왜 불러?" "여기 앉아 정신을 잃은 네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봐. 꼭 그렇게 속 뒤집힌다는 표정 지을 것은 없잖아?" "어, 내가 그랬어? 사과할게.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 어.' 따위의 말을 네가 할 리가 없는데 말이야. 그래. 나 보면서 무 슨 생각 했는데?" 지키멜은 시오크의 옅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 지 않은 채 눈을 감고 기다렸다. 문득 지키멜은 어떤 것이 얼굴 가까 이로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을 감아도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 소리, 그리고 살냄새. 지키멜은 이불 속에서 두 팔을 허리에 꼭 붙인 채 숨을 멈추었다. 조금 후 그것이 다시 물러났다. 그리고 시오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참 얼간이라고 생각했어." "어쩜 그런 실례의 말을." "지키멜. 네가 왜 살아난 것 같아? 그거야 방화자들이 네 숨통을 조 르는 대신 기절만 시켰기 때문이야. 왜 그랬을 거 같아? 약속된 순간 까지 기다렸다가 불을 질러야 하기 때문이야. 누구하고 그런 약속을 했을 것 같아? 물론 나야." 지키멜은 눈을 떠서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시 오크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면 네 작품이야? 네 아버지와는 상관 없어?" "우리 아버지가 준비한 것은 그런 것이 아냐. 이 대회가 부당한 것 은 아니지만 이 대회가 설령 지도부 불신임을 결의한다 해도 그 결의 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 내가 모아들인 것은 중앙위원과 청년위원 약 간명 정도…… 아니, 간단히 말하지. 이 대회를 통해서는 당을 내 손 에 집어넣을 수 없어.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어버렸으니까." "대회 자체를 김빠지게 한 거구나." "그래. 그래서 그 불장난을 준비한 거야." "내가 뛰어들어 훼방놓은 거네. 실패했어?" "성공했어. 아직까지는 비나간의 예술가들이 홧김에 저지른 일 쯤으 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러다가 그건 좀 어울리지 않으며 혹시 예 술가들이 누명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오를 때 쯤 되면 내가 사실은 아버지의 소행이었다고 폭로하는 거지." 지키멜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아는 가장 특이한 이상주의자를 바 라보았다. 그 어떤 현실주의자보다 더 쉽게 현실과 타협해버리고 심 지어 현실을 농단하려는 시도도 서슴치 않지만 그의 정신은 치열하게 이상에 천착한다. 보통 그러한 행태는 이상주의의 타락이나 위선으로 치부되고 지키멜도 대부분의 경우엔 그런 판단에 동의하지만 시오크 를 안 이후로 그녀는 예외가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기로 했다. 물론 예외는 없고 시오크는 엉터리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른다. 지키멜은 상 관없다고 생각했다. "당원 대회장에 불을 지르는 당주라면 추문으로는 최상급에 속하겠 지만, 그것만 가지고 충분할까? 횡령 사건 몇 개 덧붙이지 그래? 독 직이면 결정타일 텐데." "우리 아버지에겐 안 어울려. 역효과가 날 거야. 네가 좀 강하게 비 판해주면 도움이 되겠어. 불탈 뻔한 것은 비나간 문예회관이잖아." "아아, 그런 작전이군. 알았어. 다행히 자이 가텔에게 쓸만한 말도 많이 수집해뒀어. 비나간의 예술정신을 수호하는 투사가 되지. 유료 도로당주 게라임 지울비를 방화범이자 예술에 대한 범죄자로 규정하 고 비나간에 인도하라고 요구하면 되겠지? 당시 당원 대회가 열리고 있었으니 현주건조물방화죄가 되겠군. 미수범이라는 것을 참작하더라 도 상당한 구형이 가능하겠어." "지키멜. 나는……" "물론 서류상으로만 투옥되게 될 거야. 실제로는 화려한 무위도식자 가 되게 해드리지. 그렇게 부탁할 생각이었지?" 시오크는 싱긋 웃었다. "지키멜. 혹시 너 어릴 때 이상한 풀뿌리 하나 캐어먹은 기억 없 어?" "용인이 아니라도 네가 뭘 원하는가 하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을까? 너희 아버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킨 다 음에 육신의 안락함을 제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야.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있 는 것이 그런 것뿐이라는 것을 우리 아버지도 아실 거라는 거지. 그 러니 무의미하진 않아. 처지가 바뀌었다 해도 나는 화를 안 낼걸. 우 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테고." "너희 부자는 정말 특이해." 서로를 매장시킨 후에도 사이 좋은 부자로 남을거라 확신하는 두 사 람. 지키멜은 바로 그 부분에 실용적 이상주의자 시오크를 이해할 단 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키멜은 그 단서를 찾아내려 애쓰진 않았다. "그럼 더 정리해둘 것은 없지? 그런데, 시오크. 어떻게 이렇게 오랫 동안 비나간후를 혼자 있게 할 수 있었던 거야? 비나간후가 졸도해 있다면 주위가 난리법석이어야 할 텐데." "지키멜. 여긴 궁전이 아냐." "어, 아냐?" 지키멜은 침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기절한 자신을 궁전으로 옮겼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곳은 궁전이 아니었다.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키멜은 검소한 방에 야전용인 듯한 이 부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여긴 비나간 문예회관이야. 이 방은 대극장 옆의 부속실이고." "그래? 그럼 궁전에선 아직 몰라?" "그래. 궁전에서 너는 아직 외출 중으로 되어 있어. 설마 우리 아버 지에게 비나간후 살인미수죄까지 덧붙이고 싶은 거야?" "아니. 그런 의미로 물은 건 아니야. 궁전에서 아직 모른다면 잘됐 네. 천천히 돌아가도 될 테니까." 시오크는 그것이 좀 쉬며 몸을 추스린 다음 돌아가겠다는 의미일 거 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키멜은 손을 뻗어 시오크의 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시오크를 끌어당기며 빙그레 웃었고 시오크는 눈 주위를 찡그 렸다. "지키멜. 너 목이 졸려서 기절했던 사람이야." "살아났으니 축하해야지." "좋은 생각인 것 같지 않은데." "나는 네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라. 시오크 지울비. 다른 것이 필요하지. 어서 비나간후를 기쁘게 하라. 명령 받들지 못하겠느냐?" 시오크는 혀를 차고는 지키멜의 옷 앞섶에 손을 가져갔다.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각하." 시오크는 지키멜의 옷을 천천히 풀어헤쳤다. 지키멜은 큼직한 미소 를 지은 채 시오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그녀의 얼굴이 일 그러졌다. 시오크는 그 반응을 무심히 지나치려다가, 문득 지키멜의 몸을 더듬던 손을 멈추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오크가 말했다. "지키멜?" 지키멜이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우는 거지?" 지키멜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만졌다. 그녀의 눈과 볼은 축축했다. "정말? 내가 울고 있네? 왜지?" 시오크는 가만히 지키멜을 보다가 그녀의 어깨 아래에 손을 집어넣 었다. 그는 지키멜을 앉히고는 두 팔로 그녀를 보듬었다. 지키멜은 시오크를 밀어내려다가, 갑자기 머리를 떨구었다. 그녀는 시오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시오크는 지키 멜의 등을 쓸어만졌다. "시오크. 나는……" "그래." "죽는 줄 알았어." "응." "목이 졸려서…… 눈앞이 캄캄하게……" "미안해.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야." 지키멜은 한참 헐떡이다가 간신히 말했다. "그 늙은이도 그런 기분이었겠지?" "네가 자야스텐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 증조부님도 어 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테지. 그래서 주저없이 독약을 선택했고. 너는 친절을 베풀었던 거야. 공개적으로 끔찍한 모욕을 받은 다음 목 을 매달거나 잘리게 되는 것보다는 그것이 훨씬 낫지." "제기랄. 나는 그 늙은이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 것을 봤어. 그 늙은이는 떠나라고 했지만, 나는 책임을 피하고 싶지 않았어. 독약이 그런 짓을 했다, 홀빈 퍼스가 스스로 그렇게 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속일 방법이 무궁무진하잖아? 그런 자기기만을 하고 싶지 않아서 내 눈으로 봤어. 하지만 난 내가 보는 것이 뭔지 몰랐어. 그 늙은이도…… 시오크!" "응." 지키멜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녀 는 시오크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듯이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 리고 시오크도 그렇게 했다. 시오크는 한참 동안 소리 없이 울던 지 키멜이 마침내 잠이 들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상장군 베로시 토프탈은 매서운 눈으로 병사들의 모습을 살펴보았 다. 그녀는 그 병사들이 위엄 있고 당당하게 보이기를 바랐다. 그 바 람은 달성되지 않았는데, 병사들의 나태함이나 자질 부족 때문이 아 니라 그녀의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 때문이다. 베로시는 자신이 현실 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도열한 병사들이 흥분 한 수코뿔소가 그들을 암코뿔소로 판단하는 치명적인 오해를 일으킨 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모습으로 서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망은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설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베로시는 결국 절망감에 빠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절망감은 그녀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통고된 것은 아니지만 병사들도 귓속말과 암시로 가득한 잡담들을 통 해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병사 들은 베로시의 태도에 실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베로시에게 영웅왕이 부활하여 저녁식사를 제안해도 태연하게 식탁으로 걸어갈 정도의 대 범함을 기대했지만 그들의 눈에 베로시는 빚쟁이를 피해다니는 파산 자처럼 보였다. 따라서 그곳은, 전설의 재래를 기다리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총체적 상호 좌절의 장이었다. 호의를 가지고 본다면 그렇게 초라한 모습은 아니었다. 입지는 사실 좋지 않았다. 방문자는 시모그라쥬 시내를 거절했고 망고 군단 사령 부 또한 거절했다. 통고된 장소는 시모그라쥬 외곽의 바위 계곡이었 다. 사람이 거닐기 어려울 정도로 험준한 지형은 아니지만 오와 열을 맞춘 일개 군단을 당당히 도열시키기엔 분명히 협소한 장소였다. 베 로시 토프탈의 참모들은 결국 계곡의 경사면을 따라 병사들을 세운다 는 타개책을 내놓았다. 무장한 병사들이 절벽의 경사면과 바위턱에 거대한 산양 무리처럼 서있는 모습은 평지에 도열한 것과는 다른 입 체적인 멋이 있었다. 또 그것은 만남의 장이 될 계곡 바닥을 극장의 무대처럼 보이게도 만들었다. 베로시가 약간의 연극적 감각이 있었다 면 그들을 관객석의 관객처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침착 을 잃은 베로시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방문자가 베로시의 일을 대 신했다. 계곡 입구쪽의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바위턱에 서있던 병사가 짧은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모습이 계곡 입구쪽에 나타났다. 베로시는 모든 병사들이 무대에 오르는 주연배우를 보는 관객처럼 그 녀에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고는 감탄했다. 방문자는 단 두 명의 수행인만 동반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긴 장감 때문에 당장 쓰러질 듯한 얼굴의 아시존 토프탈이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서있는 수행자는 참으로 위압감에 넘치는 모습을 한 두억시 니 갈바마리였다. 대략 반년 전 쯤 베로시는 그 모습을 이미 목격했 지만 낮에 보는 갈바마리의 모습은 그 때보다 더욱 무서웠다. 아무리 무서운 것이라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백주에 보는 것은 무서워 보이 기 힘들지만 갈바마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 일탈적인 모습, 그 일탈 적인 움직임, 그 일탈적인 걸음걸이는 관찰 시간이나 관찰자의 숫자 에 관계 없는 섬뜩함을 내뿜었다. 베로시는 그만 갈바마리에게서 시 선을 돌렸다. 그리고 베로시는 사모 페이의 모습을 보았다. 사모 페이는 나가의 예스러운 옷차림을 한 채 침착하게 걷고 있었 다. 그녀의 모습에는 갈바마리와 같은 위압감이 없었다. 돌아온 왕, 북부의 구원자, 영원히 남을 전설은 한계선 이남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가의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베로시는 당혹감을 느꼈 고 심지어 약간의 배신감도 느꼈다. 이 긴장된 자리에서도 침착을 잃 지 않는 그녀의 거동도 특별한 것이라고 하긴 어려운데 침착한 모습 은 나가에겐 흔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베로시는 갑자기 자신이 거대 한 사기극에 말려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사모 페이의 도착을 지연시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영원히. 그러나 차일 아래에 있던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은 그럴 생각 이 없었다.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팔디곤 토프탈은 옛 왕의 모습 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장차 북부를 떠나 한계선 이남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어린 시절, 팔디곤 토프탈은 아버지 세 미쿼와 함께 에시올 산맥을 방문했던 대호왕을 보았다. 팔디곤은 정 확히 무슨 일로 아버지와 대호왕이 부락을 방문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당시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를 낯설어 하며 피하고 있었다. 하지 만 왕이 온다는 소식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찾게 만들었다. 그리고 팔디곤은 그곳에서 흑사자 모피를 몸에 두른 채 대호 마루나래와 갈 바마리 등과 함께 있는 대호왕을 보았다. 머릿속으로 팔디곤은 그녀 와 인사를 나누는 광경을 엄청나게 많이 상상했지만 그는 끝내 그러 지 못했다. 먼 곳에서 숨어서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사람들 이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팔디곤은 도망쳐버렸다. 왜 그러 는지 알지도 못한 채 산속으로 숨어버린 팔디곤은 왕과 아버지가 돌 아간 후에야 부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노느라 정신이 팔려 왕의 모 습도 못보았다고 놀려대는 친구들에게 정말 억울하고 분하다는 반응 을 되돌려주었다. 이제 소년은 시모그라쥬의 공작이 되어 있었다. 팔디곤 토프탈은 나 가들의 잘 변하지 않는 얼굴에 감사했다. 그를 향해 단아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나가의 모습은 까마득하게까지 느껴지는 옛날의 어느 서툰 풋내기가 정체 모를 두려움과 설레임 속에서 훔쳐본 모습 그대로였 다. 팔디곤 토프탈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시모그라쥬공의 많은 가 신들도 그 뒤를 따랐고 베로시 토프탈은 약간 늦게 걸음을 뗐다. 계곡 바닥을 따라 걸어간 팔디곤은 사모 페이의 모습이 십 미터 쯤 전방에 있을 때 걸음을 멈췄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놀란 가신들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에 대한 예법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그들 은 왕에 대한 예법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신 아라짓 왕국은 왕에 대 한 예법을 체계화할 시간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송구스럽다는 표정 을 지으며 허리를 깊이 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모는 가신들의 그런 당황이나 주변의 절벽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병사들의 긴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시모 그라쥬공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팔디곤 토프탈 이 말했다. "대호왕 폐하. 세미쿼의 아들 팔디곤 토프탈입니다." 사모 페이는 묵묵히 팔디곤을 바라보았다. 팔디곤이 말했다. "폐하께서 북부로 오시기 전 북부는 다스리는 이 없어서 혼돈스러웠 습니다. 폐하의 은덕 속에 자란 저희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폐하께 서는 기억하실 겁니다. 제왕병자는 많았지만 참된 다스림은 없었고 고통과 절망은 많았지만 보살핌과 자부심은 없었던 시절을 기억하실 겁니다. 지금 북부는 그 암울했던 시기로 되돌아갔습니다. 사라졌던 제왕병자들이 다시 북부의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량하 나 힘없는 이들의 피로 자신의 야만적인 깃발에 참월한 왕명을 쓰려 하고 있습니다." 팔디곤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계곡은 그 목소리를 증폭시켰다. 베로 시는 처음으로 이 계곡에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팔디곤은 분노에 차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선조와 다릅니다. 그 옛날의 제왕병자들은 교활한 언변이나 천박한 돈으로 몇 명의 불한당을 사는 것이 고작이 었습니다. 그들은 시랑이의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제왕병자들 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제국의 보살핌 속에서 자신을 살 찌웠고 그들의 이빨과 발톱은 만인의 가슴에 흉터를 남길 만합니다. 그들은 가을이 낙엽을 거두듯 타인의 재산과 생명을 거둘 수 있습니 다. 그들은 미친 용입니다!" 팔디곤은 귀머거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격정적인 태도로 말했다. "폐하께서 북부로 오셨던 시절 북부의 적은 남쪽에 있었습니다. 하 지만 지금 북부의 적은 북부에 있습니다. 폐하. 다시 한 번 북부를 구해주시옵소서. 고통 받는 이들의 눈물을 거두시고 사악한 이들에게 징벌을 내리소서. 왕의 이름으로!" 팔디곤은 고개를 떨구었다. 사모 페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가 말한 그 자이며, 그대가 말한 그 일을 했다." 베로시 토프탈은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가의 미성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베로시는 나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베로시는 다른 나가들과 사모 페이의 화법이 어떻 게 다른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거기엔 단 한 문장으로도 알 수 있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베로시는 그것이 무엇인지 더듬어 보았고, 마침내 알게 되었다. 어떤 나가도, 심지어 미라그라쥬의 아 르키스 수호자라 하더라도 내가 바로 너희들 모두가 당연히 아는 바 로 그 사람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만함과는 다르 다. 절대적인 지배력 그 자체였던 자의 화법이었다. 비로소 베로시 토프탈은 지금껏 발을 담그고 있던 의심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베 로시는 왕을 바라보았다. 사모 페이가 말했다. "어떤 이의 밤을 밝힐 기름이 다른 이들의 피 속에서 흘러나와서는 안된다. 어둠을 쫓고 싶다면 그 스스로 불꽃이 되어야 한다." 팔디곤 토프탈은 고개를 들었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나는 다시 북부를 덮은 어둠을 쫓아낼 불꽃이 되겠다. 그것이 나의 선언이니, 이제 대답하라. 그대들은 대호왕을 원하는가." 팔디곤 토프탈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계곡이 울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는 대호왕을 원합니다!" 숨 쉴 새도 없이 베로시 토프탈이 외쳤다. "저는 대호왕을 원합니다!" 뒤이어 가신들이, 가까이 있던 병사들이, 그리고 마침내 계곡 내에 있던 모든 자들이 외쳤다. 함성은 울부짖는 폭풍이 되었다. "대호왕을 원합니다!" "대호왕을 원합니다!" 그 폭풍은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그 속에 서있는 나가는 그 옛날 북부에 서있던 나가가 그러했듯 이미 대호왕 사모 페이였다. =============================================================== You damn murderer, George Bush. 챕터 끝났습니다. 좋은 밤 되긴 어렵겠군요. 22. 바람을 가둔 돌 - 1 "두억시니는 신을 잃었지만, 갈바마리에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아. 갈바마리는 자신의 신을 찾았거든." "신? 누구 말이야?" "물론 대호왕이지." - 세미쿼와 무핀토의 대화 中 조프 엔킬더는 행복에 젖어있었고 공포에 젖어있었다. 그는 몹시 슬 펐고 동시에 기뻐 날뛰고 싶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을 모두 껴안아주 고 싶어했지만 정작 사람들이 나타날 때는 어디로 숨으려는 듯이 행 동했다. 그렇기에 그의 걸음걸이나 몸짓, 눈짓은 꽤 이상한 것이 되 고 말았다. 그러나 성미 급한 관찰자가 조프를 천성적 멍청이로 판정 한다면 그것은 야멸찬 행동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위험한 행동이 될 것이다. 지난 밤 조프 엔킬더는 그녀와 잤고,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 의 눈을 피하며 그녀와 아침을 먹었으며, 우물거리는 말로 작별 인사 를 나눈 다음 그녀와 헤어졌다. 그것이 그 날 아침의 조프 엔킬더였 고 그런 청년이 멍청이처럼 굴지 않는다면 세상은 참 재미없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따라서 조프의 멍청이 같은 행동은 세 상을 구원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는 영웅이다. 그러나 영웅들이 흔히 그렇듯이 조프 엔킬더는 세상은 구했는지 몰 라도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데는 실패하고 있었다. 조프의 무의식은 어젯밤에 머물러 있었지만 조프의 의식이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은 그 소름끼치는 아침 식사와 잊어버리고 싶은 작별 인사였다. 조 프 엔킬더는 노련한 연인처럼 행동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언행은 퇴물 바람둥이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잡화점의 젊은 과부는 그런 조프 엔킬더를 비웃지 않을 정도로 사려 깊은 여인이었지만 조프 또 한 자신이 얼간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의 감수성은 가 지고 있었다. 조프는 비참한 심정으로 자신이 앞으로 한 달은 잡화점 근처에도 가지 못할 거라 예견했다. 조프의 허리 아래쪽에서는 좀 다 른 계획이 자라고 있었지만. 페로그리미의 아침은 조프의 기묘하고 모순된 태도를 적나라하게 비 추며 즐거워하는 듯했다. 조프는 최근 몇 년 동안 이렇게 밝은 아침 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페로그리미는 페로그라쥬의 근교도시다.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 듯 페로그라쥬는 한계선 이남의 전통적인 나가 도시였다. 전통적으로 나가들의 도시는 거대하다. 중소도시를 이곳저곳에 난립시켜 숲을 파 괴하는 것보다는 한 곳에 모여사는 것이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리고 농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가들은 식량을 공급하는 근교도시는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라짓 제국에 편입된 이후 페로그라쥬는 인간과, 드물지만 도깨비와 레콘 거주자들도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과 적으로 페로그라쥬에는 근교도시가 필요하게 되었다. 페로그리미는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중소도시였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전통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런 근교도시들의 이 름에는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원 시제 그리미 마케로우는 어떤 근교도시의 건설에도 적극적으로 개입 하지는 않았다. 게링그리미, 악타그리미, 무니그리미 등은 모두 페로 그리미와 마찬가지로 인근의 대도시에서 분리되어 자생적으로 발생한 도시들이다. 아마도 이 신도시들의 이름에 원시제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나가들의 전통적인 도시관에 부합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지역에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충동 외에 다른 특별한 이유 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페로그리미에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의 이름이 붙어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것을 증언해줄 사람 들 대부분은 조프가 걸어가는 대로 옆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조프 엔킬더는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대로 바 로 곁, 피와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기둥에는 여러 구의 시체들이 거리 조경의 일환인 양 매달려 있었다. 조프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 다. 윤리가 아닌 생리적 측면에서의 거부감 때문이다. 한계선 이남의 더운 날씨에서 그 시체들은 무서운 속도로 썩고 있었다. 엄청난 악취 에 조프는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낮추었다. 조프가 생각하기에 시체를 그렇게 매달아놓는 것은 보다 추운 지역에 어울리는 처형법이었다. 조프는 썩어서 너덜너덜해진 살갗 사이로 노출되어 누렇게 변해가는 뼈를 보며 혀를 찼다. 숲에 던져서 나무들의 비료나 되게 하는 것이 나을 텐데. 아니면 쥐 사육자들에게 주거나. 어쨌든, 저렇게 매달아 두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 있을 텐데. 문득 조프는 어떤 사실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조 프는 보지 않는 척하면서 포목점 옆골목을 조심스럽게 엿보았다. 그 리고 그곳에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감춘 처녀가 서있는 것을 확인했다. 사람들은 모두 레바일 쿠기언이 매달린 이후로 매일 사람들이 뜸한 시간에 찾아와 멍하니 서있곤 하는 파르다 쿠기언을 못본 척하기로 결정한 듯했다. 그리고 조프는 유별나다는 평은 들어본 적이 없는 사 람이다. 가끔 파르다 쿠기언에게 다가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거 나, 놀랐지만 또한 위로해줄 사람을 기다렸기에 도망치지 않는 그녀 의 어깨를 붙잡은 채 상냥한 말을 건네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했지만 조프는 그 이상의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조프는 구역질을 느꼈다. 아버지를 잃은 딸을 위로하는 상냥한 청년의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던 조프는 또한 조 금 전 시체들을 무의미하게 방치하는 것에 개탄한 사람이기도 했다. 조프는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벽에 몸을 기댔다. 그의 눈앞에 다시 잡화점의 젊은 과부가 떠올랐다. 미끈거리는 땀, 진득한 침, 젖 은 이부자리,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공기. 조프는 시원한 바람을 갈구했다. 조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파르다 쿠기언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프는 당황 속에서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검은 너울을 쓴 처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 는 것은 길고 짙은 그림자들이 사물을 기이하게 가로지르는 아침뿐이 다. 낭패스러운 기분 속에 주춤거리던 조프는 그 때까지 깨닫지 못하 던 사실을 깨달았다. 시체가 매달려 있는 대로 주변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각자의 의식을 하고 있는데도. 보 이는 것은 밤의 발자취 같은 짙은 그림자와 관자놀이를 찔러대는 따 가운 햇빛뿐이다. 조프는 얼굴을 문질렀다. 턱은 까슬까슬했고 볼은 끈적거렸다. 조프는 고개를 살짝 가로젓고는 발걸음을 뗐다.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조금 후 조프는 페로그리미 남작의 성으로 들어섰다. 성안으로 들어 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이죽거리는 코에디를 보며 조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코에디는 조프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음탕한 목소 리로 말했다. "벗이여, 지난 밤의 자네 업적을 들려주게. 그대도 잘 알겠지만 나 에게는 타인의 참담한 실수담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는 구 제 못할 악습이 있다네." "벗이여, 부디 그 입 닥쳐주게." 늘상 주고받는 말투라고 생각한 코에디는 계속 싱글거리며 말하려 했다. 그러나 코에디는 조프의 얼굴을 관찰하고는 꺼내려던 말을 바 꿨다. "왜 그래?" 조프는 목공소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오는 길에 파르다를 봤어." "딜로의 딸?" "딜로가 아니야. 레바일 쿠기언의 딸 파르다 쿠기언 말이야." "그랬나? 아, 맞아. 그랬지. 뭐야, 그럼. 아침부터 우중충한 얼굴을 봐서 기분이 나쁘다는 거야?" "코에디. 그 여자의 아버지가 대로에 매달려 썩고 있어. 그 여자 기 분이 어떻겠어?"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그래. 모르겠어. 이제 확실해졌군. 나는 용인이 아니었던 거야. 젠 장. 그러니 내기에서 항상 지지." "코에디. 이게 그렇게 농담 삼아 말할 일이야?" "그러면 어떻게 말할 일인데?" 조프는 코에디를 노려보았다. 코에디는 깊은 눈매로 친구의 눈빛을 받아주며 침묵했다. 조프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난 밤 일은 어떻게 알았어?" "네 속이야 내 손금보다 더 훤하지. 분위기 이렇게 뒤숭숭할 땐 외 로운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거 괜찮지. 젠장. 나도 우리 빔 안고 자고 싶더라. 그 놈이 침만 좀 적게 흘렸으면 그랬을지도 몰라." 조프가 알기로 빔은 페로그리미에서 가장 막대한 침을 쏟아내는 개 다. 피식 웃은 조프는 목공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작업복으로 갈 아입으려던 조프는 바닥에 쌓여있는 막대한 판재를 보고는 고개를 갸 웃했다. 귀한 가구를 만들 때나 쓰이는 고급스러운 판재였다. 조프는 코에디를 바라보았고 코에디는 설명했다. "어가를 만들라더군. 새벽에 병사들이 가져다놓았어." 조프는 깜짝 놀랐다. "어가? 나랏님 타는 수레? 그걸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죽은 푸아 편수라면 몰라도." 코에디는 작업대 한쪽에 잘 놓아둔 양피지를 들어올렸다. "설계도도 가져왔어. 대강 살펴보니 만들 수 있겠더라. 임시로 쓰는 거니까 상관없어." "왜 우리가 그걸 만들어야 해?" "페로그라쥬 나무가 한계선 이남에서 최고잖아." "그거야 당연한데, 왜 페로그라쥬에서 안 만들고 우리가 만드냐는 거야." "임시로 쓰는 거라는 말 못 들었어? 폐하께서 페로그라쥬에 입성하 려면 어가를 타고 들어가셔야 할 거 아냐. 그 다음에 페로그라쥬에서 좋은 차장 찾아서 제대로 된 어가를 만들겠지. 어려울 거 없어. 바퀴 도 원래 있던 바퀴 떼서 쓰면 되고…… 그런데 좀 서둘러야겠어. 말 미가 사흘뿐이거든." "이런, 젠장!" 조프는 황급히 옷을 벗어던지고는 작업복을 집어들었다. 코에디는 싱긋 웃으며 먹통을 집어들었다. 페로그리미 남작의 편수 로기 푸아는 어질고 현명한 목수였다. 어질 다는 것은 도제들의 코피가 터진 후에는 더이상 그들을 두드려패지 않았다는 뜻이고 현명하다는 것은 남작의 신임을 독차지하기 위해 도 제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철저한 자기 관 리 끝에 로기 푸아는 몇십 년 동안 공방을 틀어쥔 채 편수 자리를 지 킬 수 있었다. 조프 엔킬더와 코에디 미도는 로기 푸아의 마지막 도제였다. 그들은 이를테면 생존자였다고 할 수 있다. 코에디는 처음 몇 년 동안 로기 의 주먹질을 잠자코 견딘 다음 어떤 조처를 취했다. 코에디는 조프에 게도 그 조처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조프는 그들의 스승 이 코에디를 볼 때마다 흠칫흠칫하는 것을 몇 번 목격했다. 그 조처 가 있은 후부터 로기 푸아는 더 이상 코에디에게 주먹질을 하지 않았 고 또한 조프까지도 주먹질에서 해방되었다. 조프는 코에디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친구까지 구했음을 짐작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가 일방적인 수혜 관계는 아니었다. 코에디보다 눈썰미가 좋은 조프는 푸아 편수의 기술을 어깨 너머로 훔친 다음 재주가 조금 뒤쳐지는 코 에디에게 가르쳤다. 둘은 서로에 의지하여 도망친 다른 도제들과 달 리 살아남았고, 그리고 마침내 로기 푸아가 대로에 매달린 후에도 살 아남게 되었다. 좋은 목수를 매다는 것은 명백한 손실이지만 푸아 편 수의 경우엔 개전의 여지가 없었다. 그 난폭하고 야비한 스승이 주군 에 대한 뜻밖의 충성을 드러내었을 때는 조프와 코에디도 깜짝 놀랐 다. 결국 점령군 사령관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로기 푸아를 매달 수밖에 없었다. 조프와 코에디에게는 남작에 대한 특별한 의리가 없었고, 약간 남아 있던 거부감마저도 로기 푸아의 충정을 목격한 후에는 싹 사라졌다. 그 지긋지긋한 스승이 남작에게 충성했다면 자신들은 결코 남작을 사 랑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 조프와 코에디의 결정이었 다. 그들은 아무런 꺼리낌 없이 전향했다. 하지만 전향은 단순히 선 언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다. 조프와 코에디는 그 사실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흘 내에 어가를 만들 어내지 못하면 그들의 전향이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느꼈다. 그들의 작업 속도는 그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빨랐다. 그리고 점령군 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잘 지원해주었다. 사흘째 되던 날, 조프와 코에디는 완성된 어가 옆에 서서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심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심사관의 정체를 알게 되자 조프와 코에디의 자부심은 공포로 바뀌었다. 어쩌면 미리 짐작했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가를 심사하기 위 해 두 사람의 공방을 찾아온 사람은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이었다. 페로그리미의 대로에 기둥을 세우고 무수히 많은 유지들을 매달라는 명령을 내렸던 사람 앞에서 조프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하지 만 코에디가 결코 나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완성된 어가의 다양한 장점을 설명하는 것은 조프의 일이 되었다. 조프는 어 가의 튼튼함과 화려함, 가벼움을 열거한 다음 그것이 그가 만든 최고 의 작품이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처음 만든 수레니 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베로시는 그의 말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탄 느낌이 어떤지 알고 싶은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타볼 수도 없 고." 조프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상장군의 말은 아무래도 타볼 이유를 하나 제공해달라고 요청하는 말인 듯했다. "저희들도 감히 불충을 저지를 수 없어 이것을 시험해보지는 못했습 니다. 하지만 폐하를 불편한 어가에 모시는 것은 더 큰 불충이 아닐 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행히 각하께서 오셨으니, 꺼리지 않으신다 면 저희들을 대신하여 이것을 시험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알기 로 나랏님의 수라상 곁에는 혹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음식을 먼저 맛보는 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을 무례라고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가를 바라보던 베로시는 고개를 돌려 조프를 쳐다보았다. "목수치곤 혀가 매끄럽구나." "감사합니다, 각하." 베로시는 동행한 병사들에게 말했다. "가서 말을 가져와 매어라. 시승해보겠다." 몇몇 병사들이 말을 가지러 갔고 나머지 병사들은 코에디와 조프의 지시에 따라 수레를 목공소 밖으로 밀고나갔다. 조프가 자신한 것처 럼 그 수레는 가벼웠기에 밖으로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조프나 코에디의 탁월한 솜씨 덕분이 아니라 사용한 목재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수레를 밖에 내놓고 얼마 후 병사들이 말을 가지고 돌아왔다. 직접 말을 맨 조프와 코에디는 약간 물러나서는 초조한 기분으로 베로시가 어가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베로시는 우쭐한 표정을 짓지 않 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성공적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조프는 그녀가 페로그리미의 지배층을 일거에 소멸시켰다는 사실도 잠시 잊 은 채 어쩌면 그녀가 순진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수레는 병사 한 명의 인도에 따라 공방 앞의 마당을 가볍게 몇 바퀴 돌았다. 베로시는 그 이상 욕심을 내지 않고 수레를 멈추게 했다. 수 레에서 내린 베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군. 수고했다." 조프는 안도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조프는 코에디를 살짝 훔쳐보았다. 베로시가 공방에 나타났을 때부터 하얗게 질려있던 코에 디의 얼굴에도 살짝 핏기가 돌았다. 하지만 코에디는 조프처럼 고개 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화통하게 웃으며 조프를 가리켰다. "하하하! 이 녀석 솜씨가 좋거든!" 병사들의 얼굴이 굳었다. 조프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베로시를 보았다. 베로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코에디의 위아래를 훑 어보고 있었다. 주변의 그 긴장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코에디는 여 전히 싱글거리고 있었다. 베로시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 녀석의 솜씨가 좋다고?" "그럼! 그 못된 편수놈은 아무 것도 안 가르쳐줬는데 이 녀석이 혼 자서 다 배운 거야. 눈썰미가 정말 좋거든." "……레콘?" "응? 아, 그래. 레콘이다. 솔티그." "레콘 솔티그." "맞아." 병사들의 얼굴에서 경악이 조금씩 사라졌다. 분명히 인간처럼 보이 는 자가 자신이 레콘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다. 제정신 이 아니거나 군령자이거나. 그리고 조프는 코에디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코에디는 푸아 편수에게 행한 조처가 무엇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지 만 조프는 대강 짐작하는 것이 있었다. 그의 친구 코에디는 많은 타 인의 영들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군령자였다. 아마도 그의 몸에 깃 들어 있는 죽은 자들의 영 중 누군가가 푸아 편수를 협박하는 일을 맡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레콘 솔티그일 것이다. 솔티그는 코에 디의 몸에 깃들어있는 영들 중 가장 난폭한 영은 아니다. 하지만 레 콘은 다른 종족에겐 충분히 난폭하게 보일 수 있다. 조프는 솔티그가 해준 일에 대해 항상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앞 으로 나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각하. 여기 있는 자는 제 동료 인 코에디 미도입니다만 지금 각하께서 말씀 나누고 계신 사람은 레 콘 솔티그입니다. 제 동료는 죽은 자들의 영을 데리고 있거든요." "알아. 군령자로군." "그렇습니다. 각하." 베로시 토프탈은 침착한 얼굴로 코에디를 바라보았다. "그래, 레콘 솔티그. 언젯적 사람입니까?" "언젯적이라니? 지금 사람이지." "질문이 잘못됐군요. 당신이 자신의 육체에 살고 있었던 때가 언제 입니까?" "아아, 한 200년 쯤 되었을 거야. 정확하진 않지만. 왜? 옛날 이야 기 알고 싶어? 우리들 중엔 아주 오래된 영도 있어." "옛날 이야기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코에디이자 솔티그인 자는 싱글벙글 웃었다. "언제 살았냐고 묻는 녀석들은 항상 그걸 궁금해하던데."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따로있군요. 혹시 당신들 중에 나가도 있습니 까?" "나가? 있지. 아주 최근 사람이 있어. 천일전쟁 때 죽은 친구지. 안 녕하십니까, 각하. 저는 낙스그라쥬 출신의 헤네리라고 합니다. 야, 내가 이야기 중이잖아. 죄송합니다. 솔티그. 두 사람 모두 그만하세 요. 장군님이 어지럽지 않겠습니까." 병사들은 맹렬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정신없이 코에디를 바라보았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전부 코에디의 것이었다. 영들이 사용하는 것은 코에디의 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투들에는 분명한 개별성이 있었 다. 베로시 토프탈 또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군령자가 맞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지금 제가 보는 몸의 주인에게 할 말이 있군요. 그러니 그 사람이 앞으로 나오 길 바랍니다." 코에디는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각하.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요?" "자넨 체포됐어." 코에디는 눈을 껌뻑거렸다. 베로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조프 또한 어리둥절하여 베로시와 코에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 만 베로시의 병사들은 상관의 말을 이해했고 베로시가 손짓을 보내자 마자 재빨리 코에디에게 달려들었다. 코에디는 목수답게 완력이 좋은 편이었지만 당황 때문에 병사가 자신의 팔을 꺾어올릴 때까지 제대로 반항도 못했다. 세차게 꺾인 팔 때문에 비명을 지른 후에야 코에디는 격렬한 항의를 시작했다. "각하! 각하, 왜 이러십니까? 야, 너 왜 이래? 어머?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각하! 이봐요, 누가 지금 상황 설명 좀 해줄래요? 지금 이 왜 갑자기 난리죠? 음. 저건 군인처럼 보이는데. 혹시 사라진 왕 께서 돌아오셨나? 젠장, 각하!" 베로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긴 하지만 시끄럽군. 입 다물게 해." 다른 병사 하나가 코에디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먹으로 코에 디의 명치 부위를 후려쳤다. 코에디는 입술 사이로 거품을 내뿜으며 주저앉았다. 힘센 병사들이 그의 두 팔을 꺾어올리자 코에디는 두 다 리를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일어섰다. 넋이 빠진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각하! 장군님! 무슨…… 제 동료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너는 알 것 없다." "장군님!" "물러가라. 방해하면 너 또한 용서하지 않겠다." 조프는 어금니를 깨문 채 공방의 벽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작업대가 보였고 그곳에 놓여있는 여러 공구들 가운데 날카로 운 까뀌에 조프의 눈이 머물렀다. 그 때 베로시 상장군이 말했다. "들고 덤벼보겠느냐?" 조프는 움찔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음을 깨 달았다. 말을 듣기 전에 움직이거나 들은 직후에 움직여야 한다. 움 찔한 순간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조프는 창문 쪽으로 조금도 움직 이지 못했다. 베로시는 빙긋 웃었다. "어가를 가져가겠다. 오후에 사람을 보낼 테니 제작비를 청구하도록 해라."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대로 떠나 갔고 코에디를 붙잡고 있던 병사들 또한 그의 팔을 마구 꺾으며 걸음 을 재촉했다. 코에디는 나직하게 비명을 지르고는 걸음을 옮겼다. 하 지만 그의 눈은 조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코에디는 분노와 애원을 가득 담은 눈으로 조프를 바라보았다. 조프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하 고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는 코에디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코에디였다. 분노와 애원이 허탈감으로 바뀌었을 때 코에디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개 를 늘어뜨린 채 아래만 보며 걸었다. 그리고 조프의 입이 열렸다. "코에디……" 그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조프는 쓰러지듯 한 발을 내디뎠고, 다른 발은 그 뒤를 따르지 않았다. 걷다 가 그대로 멈춘 모습으로 조프는 끌려가는 코에디의 뒷모습을 바라보 았다. 조프 엔킬더는 잡화점의 문을 걷어찼다. 취한 사람치곤 괜찮은 발길 질이었다. 잡화점의 젊은 과부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문에 서있는 시커먼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군인들이 행패를 부리러 온 것이라 생 각했다. 그 때 과부는 가게 안에 있던 유일한 손님 또한 그녀와 비슷 한 생각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손님은 팔짱을 꼈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가 갑자기 추위를 느꼈다고 생각하는 것은, 페로그리미에선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과부는 손님이 소매 속에 감춘 단검을 붙잡은 거라고 생각했다. 과부는 자칫하면 유혈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긴장했다. 문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조프 엔킬더임을 깨달았을 때 과부가 목소리를 유별나게 높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어머나, 조프! 무슨 일이야?" 과부는 이 요란한 방문자가 자신이 아는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 애썼 다. 그녀의 뜻이 전달되었는지 손님은 천천히 팔을 풀었다. 옆으로 내려온 두 손은 비어있었다. 과부는 안도하며 조프에게 다가갔다. 그 리고 확 풍겨오는 술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조프? 취한 거야?" 조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옙! 취했슴다. 루마. 아주 제대로 꼭지가 돌았지요. 푸하!" "세상에, 이게 무슨 망나니 짓이야! 일어나!" 조프는 그 말을 따르려는 듯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 쯤 일어났을 때 조프는 다시 균형을 잃었고 몹시 불안한 각도로 바닥 에 쓰러졌다. 잡화점 주인 루마는 조프의 머리가 아주 제대로 바닥에 부딪히는 것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조프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이, 씨. 아프네. 뭐야?" 조프는 머리를 더듬어보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벌건 피가 묻어있었 다. 하지만 조프는 자신의 손바닥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얼굴 앞에 서 손을 이리저리 흔들던 조프는 곧 팔을 옆으로 내팽개쳤다. "조프! 조프!" "아이, 시끄럿! 음, 쩝. 난 잔다고. 눈 뜨고 있어야 뭐해? 잔다고. 잤다고. 자는 거지 뭐." 조프는 팔다리를 펼친 채 눈을 감았다. 곧 코를 골 태세였다. 루마 는 얼굴을 있는대로 찡그린 채 조프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문득 손 님의 존재를 깨달은 루마는 그가 서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손님은 도 와주겠다는 듯이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루마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만취한 조프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 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남자가 말했다. "어디로 옮기면 되겠습니까?" "아,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 안쪽에 방이 있는데……" "알았습니다. 일단 일으키지요." 남자와 루마는 악전고투 끝에 쓰러진 조프를 일으켜세웠다. 남자는 조프를 업었고 루마는 뒤에서 그를 받쳤다. 그리고 남자는 루마가 가 르쳐주는대로 가게 뒤쪽에 있는 주거공간으로 걸어갔다. 취한 사람을 옮기는 힘든 노역이 끝났을 때 남자는 바닥에 누운 조프 곁에 주저앉 아 숨을 헐떡이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침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넌더리를 내며 일어났다. 남자는 그대로 가게 쪽으로 돌아나왔다. 루마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왔다. 남자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들어가서 돌봐주십시오. 머리를 다친 것 같던데. 물건은 다음에 사 러오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렇게 취하는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가……" 친절한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족 아닙니까?" "예?" "예. 취해서 집에 돌아온 남동생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 예. 맞아요. 남동생이에요." 친절한 남자는 루마를 잠깐 바라보았다. 남동생이라면 저렇게 취하 는 '사람'보다는 저렇게 취하는 '애'가 어울리겠지만 남자는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동생 잘 돌봐주십시오." 친절한 남자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루마는 남자의 등을 향해 머리를 꾸벅하고는 문을 닫았다. 그녀는 가게 문을 걸어잠그고는 어처구니 없어하며 조프를 향해 달려갔다. 남자가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칼은 이미 그녀의 뇌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소매에 칼을 숨긴 친절한 남자는 가게에서 몇 걸음 걸어나와서는 기 대기 좋은 벽을 발견했다. 그는 그곳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하늘을 본 남자는 조만간 해가 질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남자는 조프가 낮술 을 심하게 하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무엇을 추리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곧 남자는 외부인에게 점령당한 도시에 서 좌절한 주정뱅이가 돌아다니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한 가지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었다. 남자는 잡화 점 주인이 남동생이 아닌 남자를 왜 남동생이라고 주장했는지 의아하 게 생각했다. 이 도시에 들어온 이래 남자는 그 무엇이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닥 치는 대로 관찰했고 또한 그것을 분석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남자는 루마의 언행을 분석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잡화점 건물을 살펴보았 다. 자신이 조프를 눕혀놓은 장소를 생각해본 남자는 조금 후 발을 옮겼다. 남자는 조프가 누워있는 방의 바깥 벽에 도달했다. 페로그리미는 더 운 지방이기 때문에 벽은 얇았고 게다가 어디에나 커다란 창문이 있 었다. 남자는 창문 바깥, 황혼녘의 그림자가 떨어지는 곳에 몸을 밀 어넣었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며 남자는 방 안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프의 불분명한 웅얼거림과 그를 야단치는 루마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남자는 그것이 주정뱅이와 그를 야단치는 가족의 평범한 대화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대화는 그렇게 진행되었 다. 마침내 남자는 루마가 그냥 말실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 자가 쯧 소리를 내며 창문 곁을 떠나려 했을 때였다. "도대체, 루마. 군령자가 뭐 어쨌다는 거죠?" 남자는 눈꺼풀을 꿈틀하며 다시 벽에 몸을 붙였다. 조프가 계속 말 했다. "너 군령자냐? 알았다. 너를 체포한다. 그게 다였다고요. 그리고 그 녀석을…… 안돼. 코에디를 매달 거야. 대로에…… 안돼! 그럴 수는 없어! 나 가야 해요, 루마. 가야 해요!" 창밖의 남자도, 그리고 조프의 곁에서 그의 머리를 살피던 루마도 조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행히 루마는 조프의 주의를 다른 곳 으로 돌리기 위해 계속 말을 시켰다. 창밖의 남자는 조프의 횡설수설 을 꽤 많이 수집하게 되었다. 얼마 후 남자는 조프와 코에디에게 일 어났던 일을 거의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조프가 잠든 다음 남자는 소리 없이 창문 곁을 떠났다. 남자는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딘가에 들러서 식사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자에겐 약속이 있었고, 루마의 잡화점에 들어 간 것은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 시간이 되었다. 약 속 시간은 해가 진 직후였다. 남자는 이미 확인해두었던 약속 장소로 걸어가며 조프와 코에디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남자가 걸음을 멈춘 것은 시체들이 매달려 있는 대로 근처였다. 이 미 확인해두었기에 남자는 황혼녘의 불그스름한 대기 속에 매달려 있 는 그 시체들에 기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라볼 생각도 들지 않았 기에 남자는 언짢은 기분 속에 눈길을 낮추었다. 그 때 누군가가 그 의 곁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그 접근을 느꼈지만 모른 체하며 기다렸 다. 곧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연초 사실래요?" "안 좋아합니다." "싼 값에 드릴게요. 요즘 연초 피울 일 많잖아요?" "글쎄요. 사실 세상은 나아지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유치한 암호라고 생각해요. 시오크 지울비." 시오크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감추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페로그리미 사람들과 달리 시오크는 그녀를 파르다 쿠기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더 나은 것 있으면 제안해봐. 미누쉬." 유료도로당원 미누쉬는 창의적인 암호문 후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경청한 시오크는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어쩐지 배가 고파지는 암호들이 많군." 미누쉬는 너울 아래에서 웃고는 시오크를 안내했다. 얼마 후 검푸른 하늘이 검게 변했다. 미누쉬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배부르게 식사한 시오크는 촛대를 들고 식당으로 들어오는 파르다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파르다는 아무 말 없이 미누쉬에게 촛대를 건네 고는 소리없이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떠나고나서 시오크는 묻는 눈으로 미누쉬를 바라보았다. "파르다는 저를 돕고 있어요. 그래서 그녀로 변장할 수 있었죠." "우리 정체를 아나?" "정확하게는 몰라요. 시모그라쥬공에게 저항하는 세력이라고 생각하 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곁에서 말벗이라도 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아요. 불쌍 하게도 갑자기 고아가 되어버렸으니. 그녀의 아버지는 페로그리미 남 작의 가신이었고 뛰어난 무사였지요." "잠깐. 그렇다면 이 집은 감시되고 있는 거 아냐?" "예. 제가 감시하고 있지요." "뭐? 당신이?" "루시닌 수교위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다하는 여자 한 명을 저항 세력으로 위장시켜 파르다를 감시하게 했지요. 그건 물론 저예요." 시오크는 감탄했다. "대단하군. 당신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 이상인 데." "악명이 늘어나겠군요. 그러면 보고를 할까요?" "여기는 페로그라쥬 공략의 전진기지였던 것 같더군." "예. 당신이 도착하기 얼마 전에 페로그라쥬 공략은 끝났어요. 완전 항복이지요." "페로그라쥬백의 정확한 저항 이유가 뭐지? 내가 들은 것은 모두 불 분명하고 모순적인 이야기들이었어. 왜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지?" "협상은 시도되었어요. 하지만 페로그라쥬백이 좀 지나친 요구를 했 던 것 같아요. 협상을 파탄낼 정도로. 백작은 대호왕을 옹위하는 것 에는 동의하지만 시모그라쥬공과 자신은 대호왕 아래에서 동격이 되 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아마도 백작은 자신의 영지에서도 지배자로 존중받지 못하는 시모그라쥬공의 힘이 별 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오판이었어요. 대호왕의 지지 때문에 시모그라쥬 는 공작을 완전히 지지하고 있어요. 물론 베로시 토프탈이 모아들인 제국군 또한 마찬가지고. 그리고 시모그라쥬공도 처음부터 협상을 파 탄낼 작정이었던 것 같아요.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오크는 긴장했다. 미누쉬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어떤 이름은 그로 하여금 북부의 다른 긴급한 일들을 제쳐두고 직접 이곳까지 오 게 만들었다. "그래. 진짜 대호왕인가?" 미누쉬는 의자를 탁자 쪽으로 바짝 당기며 말했다. "9할 이상 확실한 것 같아요." "근거는?" "일단 나가 여자 한 명이 있어요. 제가 직접 봤지요. 물론 그것은 한 명의 나가 여자일 뿐이에요. 나가들은 늙어도 용모가 별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 아시죠? 저는 그녀가 대호왕의 연배인지도 잘 모르겠어 요.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두억시니가 있어요. 머리가 둘 달리고 손 이 이상한 곳에 달린." 시오크는 신음했다. "갈바마리." "물론 그 두억시니가 갈바마리라는 증거는 없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갈바마리를 연상시키는 모습의 두억시니일뿐이니까요. 두억시니에겐 규칙이 없죠. 똑같이 생긴 두억시니가 또 있어서는 안된다는 규칙도 없지 않겠어요?" "대단히 조심스럽군. 미누쉬. 나라면 오래 전에 그녀가 대호왕이라 고 결정했을 텐데. 당신의 조심성을 받아들여 나도 9할 정도만 믿기 로 하지. 그녀에게 접촉할 수 있을까?" "어려워요. 그녀는 엄중하게 보호되고 있고 저도 먼 발치에서 겨우 본 것뿐이에요. 도깨비 감투라도 있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을 거예 요." "서신은?" "그녀에게만 은밀하게 서신을 보낼 방법은 없어요. 활에 묶어서 쏘 아보내는 식이라면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그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될 텐데요." 시오크는 꼭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 더 급한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 그렇다면 대호왕은 시모그라쥬공을 장악하고 있는 것 아닌 가?" "상황은 오히려 반대에 가까워요. 대호왕이라는 그 사람은 시모그라 쥬공에게 지지만 보낼 뿐 전혀 전면으로 나서지 않고 있어요. 시모그 라쥬공으로서는 신나는 일이지요. 대호왕의 위엄과 정통성은 마음대 로 이용할 수 있으면서 간섭은 전혀 받지 않으니까. 제가 1할의 의심 을 남겨두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꼭 시모그라쥬공이 괜찮은 꼭두각 시를 하나 구한 것처럼 보여요. 꼭두각시라면 최고급이지요. 그런 두 억시니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두억시니를 찾아낸다?" "예. 왜요?" "아니…… 이곳으로 오던 도중에 겪은 일이 하나 떠올랐어. 혹 그들 이 군령자를 찾으려 애쓰는 일이 없나?" 미누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잠시 기다리라는 듯 한 손 을 들어보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시오크는 초를 바라보며 이곳의 경 제 사정은 괜찮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일어났던 도시에서 초 를 마음대로 태울 수 있다면, 그것도 전범으로 처형당한 자의 힘없는 딸이 그럴 수 있다면 이 도시에서 물가 폭등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 은 것이다. 아마도 상업 활동은 완벽하게 보장받고 있는 듯하다. 이윽고 미누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보니 기묘한 점이 있군요. 물론 전쟁통이니 갑자기 아무런 통고나 설명 없이 사람들이 붙잡혀가는 일은 일어나고 있어요. 그들 이 사실은 저항세력이거나 구세력의 중요인물이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붙잡혀간 사람들 중에는 몇몇 군령자들도 있어 요. 그런데 그건 좀 기묘한 일이지요. 제가 아는 군령자들은 대부분 비정치적이에요. 그들 속에는 온갖 종족들이 다 있고, 그들 대부분은 현재와 상관없는 과거의 인물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어떤 종족에게 도 특별한 적의나 호의가 없고 현재의 정치 상황에도 무관심한 편이 에요." "갈로텍의 몸에 깃들어 우리 당을 공격했던 주퀘도 사르마크를 생각 해봐." "그는 과거의 원한을 해소하려 했던 거죠. 현재가 아니에요." "하지만 그 때문에 현재에 굉장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 잠깐. 갈 로텍?" 시오크는 의심에 빠져 입을 다물었다. 조금 후 미누쉬가 믿기 어렵 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시오크. 혹시 그들이 갈로텍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거장이야. 시모그라쥬공이 거창한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면 누구를 찾겠나? 역사상 최고의 전략 가라면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겠지." 미누쉬는 혀를 내둘렀다. "과거에서 명장을 모셔오는 것이군요. 군령자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 런 일도 가능하겠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군령자 실종에 대해 좀 더 조사해봐.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군. 다시 대호왕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그녀가 대호왕이 맞는지, 그렇다 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중요해. 아무래도 그녀에게 접촉 해야겠군." "시오크. 저에 대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제게도 불가 능은 있어요. 먼 곳에서 고도로 집중된 니름을 보내는 것까지 생각해 봤어요. 나가들은 그런 식으로 집중된 니름을 보내면 다른 나가들에 게 들키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경우에는 우 리가 대화에 직접 참여할 수 없고, 따라서 신뢰성이 떨어져요." "많은 고민을 한 것 같군. 미누쉬. 내가 그 고민을 덜어줄 수 있어 서 기쁘군." 미누쉬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시오크가 말했 다. "대호왕으로 알려진 그녀는 급조한 어가를 타고 페로그라쥬에 입성 할 거야. 거기에는 물론 그녀만 타겠지. 어가니까. 그 어가를 이용하 면 그녀에게 서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미누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시오크 지울비는 빙그레 웃었다. "돕고 사는 정신을 발휘한 덕분에." =============================================================== 22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2-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6-30 조회수 : 1463 피를 마시는 새 22. 바람을 가둔 돌 - 2 조프 엔킬더는 숙취에 고통스러워 하며 깨어난 경험이 적다. 지긋지 긋한 도제 생활 동안 스승은 그에게 만취할 만한 용돈을 준 적이 없 다. 몇 달이 걸리는 큰 대목일이 끝난 후에도 곡차 한 동이 내 준 적 이 없는 쩨쩨한 인물이다. 어제, 난생 처음으로 조프는 스스로 청구서를 작성했다. 그는 자신 이 작성한 문건의 조악함이 창피했지만 청구서를 받아든 군인은 군인 특유의 무관심한 태도로 제작비를 지불했다. 조프는 그 돈으로 술을 마셔야 한다고 결정했다. 자신은 친구가 억울하게 붙잡혀가는 것을 막지 못한 자니까. 그리고 술이 어느 정도 오르자 조프는 자신이 정 말 개자식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조프는 자신의 비겁함이 슬펐고 난 생 처음 스스로 번 돈으로 그런 우울한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 슬 펐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비겁자로 남게될 한 고비를 넘었다는 것이 슬펐다. 생에 대해 투박한 관념 이상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조프는 생에 여러 가지 갈림길들이 있으며 그것을 지나칠 경우 다시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찮기 때문에, 무섭 기 때문에, 아깝기 때문에. 사는 것이 다 그렇다는 한 마디 말을 지 팡이 삼아 송장의 휴식터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는 보잘 것 없는 늙은 이. 눈을 뜬 곳이 잡화점의 젊은 과부 루마의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 을 때 조프는 이대로 이 집이 무너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리고 한편으로는 루마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조프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루마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일어 난 조프를 본 루마는 씻고 식사하자는 말만 했다. 그리고 톱밥을 우 물거리는 듯한 식사 시간 내내 루마는 조프에게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않았다. 루마는 날씨와 이웃들의 일상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사를 끝낸 루마는 일어나서 떠날 것을 바라는 눈으로 조프를 바라보았다. 조프는 심술이 나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한 숨 자고 갈게요." "뭐?" "술도 좀 깨야겠고. 자고 간다고요. 사람들에게 안 보이도록 방안에 만 있을 거예요." "조프.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어서 일어나서 가. 자려거든 네 작 업장에 가서 자." "왜 그래요? 방안에만 있겠다고 했잖아요. 한낮에 나가는 것이 오히 려 낫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물건 사러왔다가 가는 손님인 줄 알 테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야. 조프."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루마는 설명하려는 듯 두 손을 펼쳐보였다. 그러나 루마는 마음을 바꿔먹은 듯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명할 필요 없어. 여긴 내 집이야. 험한 소리 듣기 전에 어서 나 가." "정말 이러기에요? 우리가……' "우리가, 뭐?" 조프는 입을 다물고 루마를 바라보았다. 루마는 당당하게 보이려는 듯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조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 굴은 창백했고 두 눈은 자꾸 움직였다. 조프는 "쳇." 하며 일어났다. 루마는 빈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일어난 조프를 노려보았다. 조프 가 한 번 더 묻는 눈을 보냈을 때 루마는 고개를 작게, 하지만 분명 하게 가로저었다. 그 때 밖에서 주인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십니까?" 루마는 당황하며 몸을 돌렸다. 조금 후 루마는 "나갑니다!" 라고 외 쳤다. 하지만 바로 나가는 대신 루마는 조프를 한 번 돌아보았다. 조 프는 그 눈에 진지한 무엇인가가 담겨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루마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뒤를 따라나가려던 조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루마에게 도움이 안 될거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조프는 옷을 챙겨입고는 문 옆 에 기대섰다. 손님이 떠나면 슬쩍 나가는 것이…… 아니, 창문으로 나갈까? 조프는 커다란 창문을 쳐다보다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조프. 이리 나와봐." 루마의 목소리가 가게쪽에서 들렸다. 조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밖으 로 나갔다. 여러 잡화들이 쌓여있는 복잡한 선반을 지난 조프는 루마 와 어떤 남자가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프는 그 남자를 쳐다보았지 만 면식이 없었다. 그러자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못알아보는군요. 어제 과음하셨나 봅니다." 조프는 겁을 집어먹었다. 과음한 주당이 다음 날 친구들로부터 자신 이 기억 못하는 어젯밤의 행동을 보고받는 것은 고역이지만 그 보고 자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공포에 가까운 것이 된다. 남자가 웃기는 것 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불쾌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 기에 조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남자가 먼 저 말했다. "그러면 정식으로 소개하지요. 나는 시오크라고 합니다. 그쪽은 조 프 엔킬더, 페로그리미 남작의 편수지요?" "어, 편수 아닙니다. 편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쪽이 책임자지요. 그렇잖습니까?" "책임자요? 글쎄요.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런데 무슨 일이신 지요." "아, 보여드릴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남자는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조프는 루마가 질겁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조프가 혹 남자의 소매 속에 위험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남자는 무엇인가를 꺼냈다. 조프는 긴 장했지만, 곧 의아해졌다. 그것은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꺼낸 것은 동그란 금속판이었다. 집어던지면 아프기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용도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용도라면 잘 다듬은 금속판에 흑사자의 모습을 새겨둘 리가…… 조프는 굳어버렸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는군. 이것은 사자패다." "사, 사, 사자패주…… 하, 하지만 폐하는……?" "목소리를 낮춰라! 나는 대호왕의 사자패주다." 시오크 지울비는 보라는 듯 사자패를 들어보이며 자신의 말을 강조 했다. 그는 조프나 루마가 그것이 가짜임을 알아볼 거라고 걱정하지 는 않았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가짜였고, 관인과 증패에 익숙한 관 료라도 한참 관찰하지 않고서는 알아보기 힘든 물건이다. 물론 제국 이 건재하고 황제가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 시기라면 시오크도 이런 물건을 함부로 쓸 배짱은 없었을 것이다. 사자패주를 사칭했다는 것 이 탄로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를 처형할 황제는 없었다. 시오크는 필요하다면 만지게 해줄 수도 있다는 듯이 가짜 사자패를 내밀어보였다. 그리고 루마나 조프는 그것을 만졌다간 벼락이라도 맞을 거라 믿는 사람처럼 손을 감췄다. 그리고 아직 제위 에 오르지도 않은 대호왕이 사자패주를 파견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 는 이야기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시오크는 천천히 사자패를 소매 속 으로 숨기며 말했다.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여기는 영업하는 곳이 니…… 따라와라." 시오크는 그대로 가게 밖으로 나갔다. 조프는 루마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도망치고 싶은 사람처럼 그 뒤를 따랐다. 시오크는 대로를 뚜벅뚜벅 걸었다. 조프는 그 뒤에 뒤쳐져 걸었지만 시오크가 짜증을 냈다. "곁에 붙어라. 멍청한 놈. 동행인 것처럼 행동해." 조프는 화들짝 놀라며 시오크의 곁으로 다가섰다. 시오크는 태연하 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시모그라쥬공은 군령자들을 붙잡아들이고 있다." 조프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매우 관심이 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시오크가 의도했던 것이다. "대호왕께서는 그 일을 괴이하게 여기고 계신다. 그래서 나를 파견 하여 상황을 조사하게 하셨다. 그리고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내었 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놀라지 말거라. 괴악한 시모그라쥬공은 폐하를 시해한 다음 그 분 의 영을 군령자에게 집어넣을 작정이다." 조프는 주저앉을 뻔했다. 시오크는 재빨리 그를 부축하고는 큰소리 로 말했다. "이런, 아직도 어지러운가? 다친 머리가 아직 낫지 않았나 보군. 저 기 벽에라도 좀 기댔다 가지." 시오크는 루마가 감아놓은 붕대를 가리키며 걱정스럽게 말하고는 조 프를 벽쪽으로 밀고 갔다. 조프는 비틀거리며 걸어가서는 시오크가 이끄는 대로 벽에 기대섰다. 시오크는 그의 건강을 염려하듯 머리를 더듬으며 속삭였다. "이런 멍청한 놈." "죄, 죄송합니다." "쯧. 아니다. 놀랄 일이긴 하지." "하지만…… 공작께서 왜……" "아둔한 놈. 가르쳐주마. 나가는 한계선을 넘을 수 있느냐, 없느 냐?" "예?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런데 폐하께서는 나가이시다. 옛날 흑사자 모피가 있을 때는 그 분도 한계선을 넘어가실 수 있으셨지만 지금 그 보물은 치천제와 함 께 사라졌다. 따라서 대호왕 폐하께서는 한계선을 넘어가실 수 없다. 하지만 폐하의 영을 인간이나 레콘 군령자의 몸에 집어넣으면 어찌 되겠느냐?" "예?" "인간이나 레콘 군령자 말이다! 인간이나 레콘은 한계선을 넘을 수 있지?" 시오크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긴장했다. 그것은 조프의 친구인 군령자가 체포된 일과 대호왕을 억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만들 어낸 이야기지만 도무지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다. 대호왕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시모그라쥬공에게는 나가 모습을 하고 있는 대호왕이 필 요한 것이지 자신이 대호왕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이나 레콘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가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가짜라고 의심받을 수 있는 판국에 인간이나 레콘의 모습이라면 신뢰성은 대폭 추락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계획은 시모그라쥬공이 꿈에도 생각하지 않을 계 획이었다. 시오크는 조프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방해했다. "생각해봐라. 무섭도록 악독한 계획이지만 또한 영리한 계획이다. 시모그라쥬공은 폐하께 한계선을 넘을 수 있는 몸을 강제로 씌워 한 계선 너머로 폐하를 끌고갈 작정인 것이다. 생각해봐. 나가는 한계선 을 넘지 못하지만, 인간이나 레콘이라면 어떠냐? 응? 한계선을?" 시오크는 긴장 속에서 동어반복적인 질문으로 조프의 대답을 강요했 다. 조프가 황급하게 대답했다. "너, 넘을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 영리하구나. 조프 엔킬더." 조금 전까지 조프의 지능을 폄하하는 발언을 일삼았던 시오크가 그 의 영리함을 칭찬했지만 조프는 그 모순도 깨닫지 못했다. 조프는 한 계선이라는 절대적 장벽이 깨진 것에 충격을 받았고 다른 것에 대해 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시오크는 조프가 차분히 생각할 여 유를 주지 않았다. "조속히 이 무서운 계획을 폐하께 알려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신분이 저들에게 노출되었다. 나는 현재 폐하께 가까이 갈 수 없 다. 그러니 네가 내 대신 그 일을 맡아야겠다." "예?" 시오크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어 조프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조프 는 옷속에 뱀이 들어온 사람처럼 질겁했지만 시오크는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이것을 어가에 숨겨라. 네가 만든 어가 말이다." "어가에요?" "그래. 앉으시면 알아차릴 수 있는 곳에 숨겨라." "하, 하지만 어가는 이미 완성해서…… 가져갔는데요." "가서 손볼 것이 남았다고 하면 되잖느냐. 생각해 보니 미진한 곳이 있었다고 하거라. 그러면 손보도록 해줄 거다. 가서 어가를 손보는 척하며 서신을 숨겨라. 이것은 폐하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그리고 시오크는 준비해두었던 말을 덧붙였다. "그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끌려간 군령자들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 다." 조프는 고개를 뒤로 끌어당겼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코에디 미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프는 코에디를 구할 기회를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것은 군대와 싸우고 파옥을 감행하는 무시무시 한 일도 아니다. 서신 한 통을 수레에 숨기는 간단한 일이다. 게다가 대호왕 폐하까지 구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조프는 가슴쪽을 움켜잡았다. "알겠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시오크는 엄숙하게 목례했다. "그대의 용기에 폐하를 대신하여 감사드리리다. 만약 그 일을 성공 시킨다면 그대는 폐하의 은인이 되는 것이오." 시오크는 조프를 힘있게 끌어안았다. 그제서야 조프는 아까부터 가 슴이 쿵쾅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쉬존 토프탈은 분노한 눈으로 사모 페이를 바라보았다. 어울리는 표정이라고 하기 어려웠지만 아쉬존이 지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 다. 관객 절반에 해당하는 아쉬존의 그런 반응에 사모는 개의치 않았 다. 페로그라쥬의 타오민성. 넓은 대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사모와 아쉬 존, 그리고 사람에 포함되지 않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갈바마리뿐이 다. 그 외에 몇 개의 소도구가 있다. 아쉬존은 그 중 하나인 화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것을 요구했을 때 아쉬존은 그녀가 무엇인가를 지지거나 태울 필요가 있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사모의 요청에 따라 춤채들을 준비하면서도 아쉬존은 그녀가 춤을 출 거라고 생각하진 않 았다. 하지만 달구어진 화로에 춤채를 꽂아놓고 기다리던 사모는 춤 채가 알맞게 뜨거워지자 조용히 일어나 그것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온도를 볼 능력이 없는 아쉬존과 온도를 볼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 지만 춤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 갈바마리를 앞에 둔 채 춤을 추 기 시작했다. 아쉬존은 이전에도 그런 춤을 본 적이 있었다. 나가들과 함께 있던 자리였기에 나가 무용수는 춤채를 사용했고, 동석한 나가들은 아쉬존 에게 재미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아쉬존은 지루함만 느꼈다. 아쉬존은 뜨거운 춤채를 볼 수 없었으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열류 또 한 볼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본 것은 춤의 절반뿐이다. 게다가 거 기엔 음악이 없었기에 빈 절반을 채울 방법도 없었다. 소리에 무관심 한 나가들은 음악 없이 춤을 춘다. 아쉬존은 좀 이상한 체조를 보는 정도의 기분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대호왕의 춤 또한 아쉬 존이 예전에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존은 거기에서 약간의 노련미는 느낄 수 있었다. 응축과 신장, 회전과 왕복, 전개와 포용. 사모는 공간을 자르고 맺어주었으 며 그것들에 새 의미를 부여했다. 사모는 공간을 다스렸고 또한 공간 을 경애했다. 어쩌면 그녀의 몸짓에서 음악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 다. 아쉬존이 조금 더 집중했다면. 하지만 아쉬존은 손의 언어를 대 신하는 춤채의 언어를 듣거나 읽을 수 없었고 그의 마음은 답답함과 분노로 가득했다. 아쉬존은 사모를 원망하고 또한 감히 대호왕을 따 돌리고 있는 조부를 원망했다. 조부는 대호왕의 이름으로 온갖 전횡 을 일삼고 있지만 아쉬존은 조부가 대호왕에게 논의를 요청하거나 허 락을 구하는 것을, 심지어 사후보고를 하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그 리고 사모는 그에 개의치 않았다. 사모는 마치 비굴한 종이라도 되는 양 조부가 가라는 곳에 가고 조부가 하라는 말을 했다. 그런 사모를 대하는 조부의 태도에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사라질 때가 많았다. 아 쉬존이 모멸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아쉬존은 조부와 종고모의 바람에 도 불구하고 그들을 멀리했으며 보다 많은 시간을 사모의 곁에서 보 내려 애썼다. 그리고 그녀의 요구나 명령, 가능하다면 바람을 들어주 려 애썼다. 그러면서 아쉬존은 자신이 조부를 대신하여 사모에게 사 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아쉬존은 그것이 일종의 과대망상임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아쉬존은 자신에 대 해서도 분노했다. 사모의 발이 바닥을 미끄러진다. 사모는 춤의 한 동작처럼 화로로 접근해서는 그것의 주위를 춤채로 쓰다듬었다. 아쉬존은 사모가 화로 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지 만 그의 부릅뜬 눈에 보이는 것은 희미한 아지랑이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사모는 우아한 동작으로 식은 춤채를 화로에 꽂아넣고는 다른 춤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사모는 긴 한삼 자락을 떨치듯 춤채 두 개를 위로 쳐올렸다. 아쉬존은 상상하려 해보았다. 그는 사모의 쳐올린 손을 따라 크게 치솟아오르는 길다란 천 같은 열기를 상상했다. 아쉬존은 열기가 그 렇게 움직이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그가 원하는 것은 아름 다운 환상일뿐이다. 아쉬존은 사모의 주위에서 춤추는 수 미터 길이 의 한삼을 그려보았다. 다만 그것은 진짜 한삼과 달리 춤꾼의 팔이 멈춰졌을 때 땅에 축 늘어지지 않고 위로 물결치며 솟아오른다. 뜨겁 기 때문에……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쉬존은 좌절감을 느꼈다. 사모의 동작이 멎었다. 사모는 식은 춤채를 옆으로 늘어뜨린 채 똑바로 섰다. 아쉬존은 멍 한 기분 속에서 화로에 물방울을 던져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춤의 절반도 보지 못한 그가 물방울을 던진다면 찬사보다는 야유가 될 것 같았다. 고민하던 아쉬존은 문득 애초에 물그릇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사모는 물그릇을 가져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고 나가 가 아닌 아쉬존은 그것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아쉬존은 박 수라도 칠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사모가 그에게 다가왔다. 사모는 춤채들을 화로에 꽂아넣었다. 대전 한쪽에는 보좌가 있었지 만 그녀는 보좌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앉아 흐 트러진 옷자락을 추슬렀다. 아쉬존은 그녀의 호흡이 평온하다는 사실 을 깨달았다. "숨차지 않으십니까, 폐하." 사모는 아쉬존의 말을 듣지 못했다. 청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모양이다. 아쉬존은 한 번 더 말할까 하다가 무슨 소용이냐 싶은 기 분을 느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쉬존은 갑자기 거대한 단절을 느꼈다. 나가와 다른 종족들은 애초에 분리되게 만들어진 것 아닐까. 아니다. 도깨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두 번 죽는다. 즈믄누리를 다 스리고 있는 도깨비는 죽은 도깨비다. 레콘은 또 어떨까? 그들은 태 생적 개인주의자다. 분리주의 운동이 레콘에 의해 시작된 것은 당연 하다. "아라짓 제국은 두억시니다." 아쉬존은 고개를 들었다. 사모는 갈바마리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의 향수를 담은 그윽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해의 폭포를 기억해?" 갈바마리의 두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유해의 폭포." "기억한다." 아쉬존은 그 끔찍한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약간 불편 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억시니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 다. 하지만 사모의 표정은 격분이나 슬픔을 느끼는 나가의 표정은 아 니었다. 사모가 말했다. "유해들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거기에서 두억시니가 탄생하지. 그것 들은 두억시니 같은 일을 하다가 폭포의 발원지에서 다시 분해되었 지. 그리고 유해의 폭포가 되었어." 사모는 두 손을 모아붙여 입 앞에 세웠다. "제국의 유해가 쏟아질 때가 되었을까? 거대한 유해의 흐름이 시작 될까?" "폐하!" 사모는 입앞에 손을 붙인 채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공포와 분노에 차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아쉬존은 턱을 떨며 말했다. "폐하…… 왜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세상을 구 하기 위해 우리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우리 곁에 계신 이 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쉬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국은 부활할 겁니다. 저희들이 한계선 북부로 뱀단지를 가져갈 겁니다. 하늘누리를 다시 만들 수 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그것이 꼭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늘누리에 있었던 세 번째 벽난로방은 시모그라쥬에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좋습니다. 뱀부 리미들은 거대한 벽난로가 없이도 훨씬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늘누리가 없다 해도 뱀단지만 있으면 제국의 끊어진 신경은 다시 이어질 겁니다." 아쉬존은 자신이 연설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멈추 지는 않았다. 피가 부글부글 끓는 기분 속에서 아쉬존은 마지막 말을 외쳤다. "폐하의 이름 아래에서 그 일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는 이 남부에서 다시 제국을 다스리실 겁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누가 북부의 구원자 대호왕을 거부하겠습니까!" "아쉬존을 거부하는 자는?" "예?" 사모는 아쉬존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아쉬존이 주저하며 앉자 사모는 담담하게 말했다. "짐은 늙었지. 네 조부는 짐의 이름 하에 제국을 세운 다음 너에게 물려줄 작정이다. 짐이 죽을 무렵이면 너는 충분한 나이가 되겠지. 그렇잖으면 네가 충분한 나이가 되었을 때 짐이 죽을 수도 있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말에 아쉬존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 모는 질문했다. "자, 대답해보거라. 아쉬존 토프탈을 거부하는 자는 어떻게 하겠느 냐?" "그런 일은…… 그런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맙소사. 어떻게 그런 일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폐하." "명령이다. 대답하라. 아쉬존 토프탈. 황제가 되면 너를 거부하는 자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폐하……" "대답하라." 아쉬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몸이 흔들리고 이가 덜그럭거리는 것 같았다. 아쉬존은 입술을 한참 축이 고 말했다. "그들을 설득하겠습니다. 그들이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럴 수 있도록 제 자신을 바꾸겠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너에게 찬성하던 이들이 네 모습이 바뀐다면 찬 성을 철회하겠다고 하면 어쩌겠느냐? 그들은 바뀌기 전 너의 모습에 찬성한 것이니 철회할 수도 있겠지. 어떤가?" "그들도 설득시켜야겠지요. 양자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 모 습을 바꾸겠습니다." "그렇다면 너 자신이 너의 그런 변화를 찬성할 수 없다고 하면 어쩌 겠느냐?" "저 자신도 설득시키겠습니다. 저에게 반대하는 이와 저에게 찬성하 는 이와 저 자신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길을 찾겠습니다." "너만이 그 길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느냐." "예?" "네가 찾아낼 수 있는 길이었다면 다른 이들도 오래 전에 찾아낼 수 있었을 거라 가정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아쉬존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그들은 황제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길을 찾는다 해도 사 람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네가 말하는 그 길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길인데 왜 그들을 인 도해야 하지? 인도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그 길로 가지 않겠느냐?" "……모르겠습니다. 폐하. 저의 무지함을 꾸짖어주십시오." "그러고 싶지 않구나. 너를 꾸짖는다면 짐 또한 꾸짖어야 할 테니 까." "폐하……" 사모 페이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서찰을 꺼내었다. "이곳으로 오던 중 짐은 이것을 손에 넣었다. 누군가가 짐에게 보낸 서찰이야." 아쉬존은 자신이 모르는 서찰이 대호왕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에 놀 랐다. 그가 서찰의 전달에 대해 질문하려 했을 때 사모가 말했다. "발신인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싶은 사 람인 듯하군. 하지만 짐이 짐작하기로 이 자는 한계선 너머에서 온 것 같아." "폐하. 무슨 내용입니까?" "이 자는 먼저 짐이 사모 페이가 아니라면 기만으로 제국을 일확하 려는 꿈 따위는 포기하라고 준엄한 어조로 경고하는군. 짐은 사모 페 이니까 이 부분은 넘어가도 되겠지. 그 다음 이 자는 짐이 사모 페이 일 경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늘어놓고 있군. 폐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말하는데, 북부는 언제나 사모 페이를 사랑하고 그 녀를 환영할 것입니다……" 사모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서신을 들여다 보았다. 춤을 춘 직후에도 평온하던 사모의 호흡이 조금 급해졌다. 사모는 심호흡으로 자신을 안정시키고는 말했다. "바로 그렇기에 폐하께서 시모그라쥬공의 가마를 타고 오시는 것은 거부합니다. 폐하는 우리 모두의 왕입니다. 그 옛날 폐하께서는 군대 없이 북부에 오셨습니다. 폐하께서 가져오신 유일한 무기는 북부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북부는 폐하를 돌아오신 왕으로 받아들이고 폐하께 부복했습니다. 그 때처럼 오소서. 이곳에서 귀족 원 회의를 선포하옵소서. 제국의 공후장상들이 달려와 폐하께 부복할 것입니다. 부디 알아주옵소서. 북부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눈물을 거 두어갈 분이지 우리의 피를 짜낼 분이 아닙니다." 사모는 서신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천천히 접었다. 그리고 그것을 화 로에 집어넣었다. 무관심한 태도로 앉아있던 갈바마리는 확 불타오르 는 서신을 보곤 놀란 소리를 냈다. 아쉬존은 그것을 도로 꺼내야 하 는 것 아닌가 하는 충동을 느꼈지만 움직이지는 못했다. 사모는 재로 변하는 서신을 보며 말했다. "이 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짐을 떠받들 수는 있지만 다른 자가 다른 방식으로 짐을 떠받드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 군. 짐에겐 찬성하지만 시모그라쥬공에겐 반대한다는 거지." 아쉬존은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팔 짱을 끼고는 대전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통치는,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문제라기보다는 피통치자들 사이의 문제다. 그런데 그렇게 내버려두면 통치자가 눈물 속에 죽고 말지. 황제가 되고 싶으냐, 아쉬존 토프탈?" 아쉬존은 움찔했다. 사모는 여전히 천장을 본 채 반복했다. "되고 싶으냐?"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나를 용서해라. 아쉬존." 아쉬존은 그 대명사 사용에 당황했다. 다시 대호왕이 되겠다고 선언 한 이후로 사모 페이는 그런 대명사를 쓴 적이 없었다. 아쉬존은 희 미한 목마름 같은 것을 느끼며 사모의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사모가 말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지금은 그것이 네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계속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너는 나를 증오하고 저주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쉬존은 눈 주위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 모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쉬존 토프탈. 너는 황제가 될 수 없다." 아쉬존은 서글픔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다.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 각은 해 본 적도 없으니 그 길이 막혔다는 것에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제국을 구하고 토프탈 가문의 영광을 빛낼 수 있다면 충분하 다. 하지만 아쉬존은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사 모의 목소리 때문인 듯하다. 그 애틋하고 고운 목소리에 가득 묻어있 는 슬픔의 꽃가루들이 소리 없이 아쉬존의 어깨에 떨어지는 듯했다. 아쉬존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어깨를 폈다. "폐하. 저는 폐하를 섬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행복할 겁니다." 사모는 시선을 내려 아쉬존을 보지는 않았다. "아쉬존." "예. 폐하." "병사들을 준비시켜라. 서신을 보낸 자를 잡아야겠다." 아쉬존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쉬존은 사 모가 일어나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갈바마리의 거대한 몸이 뒤뚱거리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쉬존은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 동을 느꼈다. 당신만이 유일한 왕이며 내 생명과 내 정신은 모두 당 신의 것이라고. 하지만 아쉬존은 자신의 생명과 정신이 가치 있는 선 물이 될지, 대호왕에게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 다. 그 때문에 아쉬존은 슬픔을 느꼈다. 아쉬존은 울고 싶다는 느낌 을 받으며 대전 밖으로 나갔다. 조프 엔킬더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심하게 주물럭거린 것이 분 명하다. 손에 감아둔 천조각이 축축해졌다. 아물던 상처가 벌어지며 다시 피가 배어나오는 모양이다. 조프는 한심함과 우울함에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조프는 멍한 상태와 극도로 긴장된 상태를 번갈아 경험했고 그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었 다. 그런 날은 위험한 작업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조프는 대패 질이 위험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프는 대팻날에 손 을 베이고 말았다. 목수가 된 이후로 처음 겪는 일이었고 화도 나지 않았다. 상처는 얕지 않았다. 한동안 두 손 쓰는 일은 좀 어려울 것 같다. 천을 풀었다가 다시 단단하게 묶을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둘지 고민 하던 조프는 저쪽 골목에 서있는 파르다 쿠기언을 보았다. 조프는 걸 음을 멈추었다. 검은 너울을 쓴 파르다 쿠기언은 매달린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시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기둥에 매달려 있는 것은 도대체 뭔지도 모를 덩어리였다. 조프는 육탈이 끝나면 해골이 걸려 있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썩은 관절 부위들이 툭툭 떨어져내렸기 때 문에 사체는 사람의 기본적인 형태조차 찾기 어려운 모습으로 변해있 었다. 떨어져내린 것들은 쥐나 개 따위가 물어간 모양이다. 기둥 아 래쪽엔 별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조프는 가슴이 메었다. 저런 것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자신에게는 자 학이다. 조프는 그녀에게 말을 걸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 하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자패주는 혹 답장이 오면 파르다 쿠기언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조 프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은 그 지시 때문 이다. 조프는 험상궂은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와 아무 말 없이 서 신을 건네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는 새 주머니나 연장통 속에 들어와 있는 서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목공소 문을 닫기 전 조프는 두어 번 정도 공방 내 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많은 먼지와 잃어버린 줄 알았던 공구 하나를 찾아낸 것이 전부였다. 받은 것이 없으니 건넬 것도 없었지만 조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혹 파르다가 괴로운 기분 속에서도 답장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렇다 면 그녀에게 다가가서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리고 그런 말을 하면서 그렇게 괴로운 일을 계속할 필요는 없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빨간 황혼이 대로에 범람하여 포석들을 적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 다. 조프가 얼마 전 깨달은 것처럼 매달린 시체 주변은 고요했다. 사 람들이 하루 일을 마치는 시간인데도. 골목에 서있던 파르다 쿠기언은 다가오는 조프를 아는 척하지 않았 다. 그녀의 너울은 시체들 사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프는 그녀의 곁에서 말했다. "저, 아가씨." 파르다의 너울이 조금 움직였다. 검은 너울의 이랑마다 검붉은 물결 이 넘실거렸다. "기다리시는 편지는 오지 않았습니다. 저, 내일 올지도 모르겠습니 다." 파르다의 너울이 다시 움직였다. 조프는 그것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파르다는 아래로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조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아, 작업 중에 다친 겁니다. 정신이 좀 뒤숭숭해서. 멍청하게 대팻 날에 베었지요. 좀처럼 이런 일이 없는데. 정말 처음입니다." 조프는 슬그머니 손을 뒤로 감췄다. 그 손이 사라지자 파르다 쿠기 언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파르다는 다시 시체쪽으로 몸을 돌 렸다. "아가씨. 이제 해도 지는데 댁에 돌아가셔야지요? 고인께서도 그것 을 바라실 겁니다. 시내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병사들도 많이 돌아 다니고…… 댁까지 바래다드리겠습니다." 조프는 자신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당황한 조프는 코를 긁적거렸 다. 파르다는 다시 조프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파 르다는 몸을 돌려 골목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조프는 창피함을 느 꼈다. 그는 파르다를 몰래 뒤따라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조프는 이대로 잡화점에 찾아가서 루마에게 사과하고 가게문 닫는 것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루마는 사과를 받아줄지도 모른다. 아니, 받아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조프를 재워줄지도 모 르고. 조프는 자신이 정말 지저분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루마가 그리웠다. 그리고 파르다를 따라가고 싶었다. 시체인지 뭔지 도 알 수 없는 덩어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대로에서 조프는 혼란 스러웠다. '빔.' 조프는 코에디의 개를 떠올렸다. 코에디가 잡혀갔으니 그 개는 어찌 되었을까. 조프는 자신을 저주하며 코에디의 셋방으로 향했다. 아마 도 집주인이 보살펴주고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프는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후 그는 정신없이 달렸다.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어 코에디의 셋방에 도달한 조프는 빔에게 먹 이를 주고 있는 집주인을 발견했다. 조프의 얼굴을 알고 있는 주인은 뚱한 표정으로 왜 코에디가 돌아오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조프는 며 칠 전에 코에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사들에게 붙잡혀갔다는 이야 기를 하고 그 동안 자신은 그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느라 찾아오지 못했다는 변명까지 늘어놓았다. 조프는 자신에 대한 환멸감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주인은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한 듯 코에디의 신상만 걱 정했다. 그리고 개를 가져가겠다고 말하자 그러라고 했다. 그는 광에 서 줄을 가져와 빔의 목에 묶었다. 하지만 빔이 조프를 따라가는 것을 거부했다. 조프가 줄을 잡아당기 자 빔은 엉덩이를 뒤로 뺀 채 저항했다. 그러다가 빔은 컹 소리를 내 며 달려들려는 시늉을 했다. 빔은 막대한 침을 쏟아내기에 알맞은 거 대한 턱을 가지고 있었고 조프는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주인이 그를 대신하여 줄을 잡아챘다. "놔두고 가게." "예?" "여기가 이 놈 집이잖나. 제 주인 돌아올 곳에서 기다리겠다는 거 지. 개 한 마리 먹이는 거야 어렵잖으니 내가 돌보지. 자넨 가끔 들 러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나 좀 알려주게." 헐떡거리던 조프는 하릴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주인을 도 와 빔을 다시 제자리에 묶어놓았다. 그곳을 떠나려던 조프는 빔을 다 시 돌아보았다. 빔은 또다시 끌고 가려는 것이냐는 듯 의심에 찬 표 정으로 조프를 바라보았다. 조프는 다시 창피함을 느꼈다. 그는 몸을 돌렸고 지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조프는 다시 취한 채 루마를 찾아가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그러다가 조프는 내일 답장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찍 공방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조프는 그것이 코에디를 구하는 길 이라고 말했던 사자패주를 떠올렸다. 조프는 긍지를 되찾았다. 그는 코에디를 위해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약간의 기운을 되찾은 조프 는 집까지 단숨에 돌아갔다.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빨리 잔 다음 공 방에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려야 한다. 집에 돌아온 조프는 병사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2-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7-01 조회수 : 1588 피를 마시는 새 22. 바람을 가둔 돌 - 3 병사들의 지휘자는 상황을 간명한 것으로 만들었다. 조프가 그들에 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은 한 문장뿐이었다. 우선 눈앞에 불이 나도록 따귀를 한 대 맞은 다음 지휘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거다." "예?" 대답이 반대편 뺨으로 돌아왔다. 조프는 휘청거리다가 왜 때리느냐 고 묻는 실수를 범했다. 지휘자는 그거 머저리일세 라든가 정말 느리 구먼 따위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프는 그보다 더 이해심에 넘치는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손바닥을 휘두른 후에도 지휘자는 참을성 있는 얼굴로 조 프에게 확인할 것 남았으면 확인하라는 턱짓을 했다. 공감대를 기반 으로 한 협조정신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지루한 반복작업도 마다하지 않는, 국록을 먹는 이다운 봉사정신이었다. 조프는 얼굴 전체에 불이 난 듯한 고통 속에서 그에게 더이상 수고를 끼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조프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지휘자는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며 잠시 하전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혼으로 세수한 별들이 말끔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휘자는 시들한 동작으로 품속에서 자루 같은 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조프의 얼굴에 뒤집어 씌웠 다. 엄청난 밀폐감에 조프는 신음을 흘렸다. 그 때 누군가가 양쪽에 서 그의 팔을 꺾어들었다. 그리고 그를 앞으로 밀어붙였다. 조프는 엉겁결에 걸음을 뗐다. 그러자 많은 발소리가 따라왔다. 병사들에게 두 팔을 붙잡힌 채 끌려가면서 조프는 입안을 더듬었다. 혀가 닿는 곳마다 피맛이 났고 이 몇 개가 흔들리는 듯했다. 조프는 입안의 피를 뱉어내려 했지만 자신이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그만두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알 것 같다. 사자패주의 서신을 어가 에 숨긴 것 때문이다. 조프는 그 사실에서 희망을 느꼈다. 설령 수감 된다 해도 만약 사자패주가 출또를 한다면 그는 풀려날 것이다. 사자 패주가 출또할 때를 대비해서라도 함구해야 한다. 조프는 어떤 고문 에도 의연히 맞서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사자패주는 비틀거리 며 감옥에서 걸어나오는 그를 끌어안고 그의 용기를 칭송할 것이다. 어쩌면 대호왕이 서신을 전달한 용감한 목수를 불러들일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저앞 어딘가에서 걸어가고 있는 이름 모를 장교는 내 발목을 붙잡고 매달리겠지. 조프는 누가 이 사태를 지배하고 있는지 모르는 멍청한 군인을 비웃었다. 아마 시킨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하 겠지! 그게 군인의 변명이잖아. 내가 그런 소리에 눈 한 번 깜빡이나 봐라. 지저분한 손버릇 때문에 인생 망치게 될 거라는 경고를 듣지 못했어, 군인 아저씨? 대호왕 폐하께서 보상을 말해보라고 하면 뭐라 고 대답할까? 우선 붙잡혀간 코에디를 풀어달라고 하고 그 다음 엔…… 파르다 쿠기언. 그래, 파르다 쿠기언에게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주라고 말하자. 조프 는 그 생각을 떠올린 자신에게 감탄했다. 파르다 쿠기언은 아버지의 유해를 돌려준 젊은 목수에게 감사할 것이다. 잠깐, 그러면 루마가 어떻게 생각할까? 조프는 혼란스러웠다. 조프는 루마가 그 사실에 대 해 화를 낼 것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왜 루마가 화를 내어야 하는지 조프는 알 수 없었다. 신경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자루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조 프의 거친 숨소리였다. 그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병사들 은 잡담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주위에서 다른 소리도 들리 지 않았다. 분명히 도시 한가운데를 걷고 있을 텐데 나와서 구경하는 이가 없는 모양이다. 죽은 도시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자루의 올 사이로 이곳저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조프는 그 소리가 어쩐지 빔의 소리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 을 가리고 두 팔이 붙잡힌 채 걷는 것은 신경 곤두서도록 불편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자세는 아닌데도. 입안에 다시 피가 고였 다. 조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뱉었다. 하지만 침은 자루에 붙었고 그러자 자루가 그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따뜻하고 끈적거리는 것이 입과 코 주변에 천이 달라붙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양손이 붙잡 혀있기에 얼굴에 붙은 천을 뗄 수 없었다. 조프는 푸, 푸 하며 자루 를 불었다. 천은 진득하게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조프가 다 시 천을 불었을 때 누군가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시끄럽다." 조프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목에서 욱, 욱 하는 소리가 흘 러나왔다. 조프는 자신의 소리에 겁을 집어먹었다. 그 때 갑자기 양 쪽에서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병사들이 걸음을 멈춘 것이다. 앞으로 휘청했다가 다시 뒤로 휘청한 조프는 두 발을 넓게 벌려 가까스로 쓰 러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다가와 자루를 벗겼다. 조프는 눈을 껌뻑였 다. 스산해 보이는 목조 건물 앞에 난폭해 보이는 병사들이 모여 서있었 다. 인간과 나가 병사들이 뒤섞여 있었고 목조 건물의 문 앞에는 누 군가가 의자를 놓고 앉아있었다. 조프는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 으려 애썼다. 그를 붙잡아온 손버릇 나쁜 장교가 말했다. "붙잡아왔습니다. 수교위님." "꿇려." 조프는 엉거주춤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가 뭘 하 려는 건지 관심도 없다는 태도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조프는 비 명을 삼키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때 조프는 이곳이 자신의 공 방임을 깨달았다. 조프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 머리를 떨어뜨렸다. 의자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게 서신을 준 것이 누구냐." 명쾌하다. 조프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조프는 배가 터지는 통증을 느끼며 나가떨어졌다. 가까이 있던 장교 하나가 엎드리고 있는 그의 복부를 걷어찬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은 조금 후였다. 조프는 배를 움켜쥔 채 몸을 옆으로 말았다. 병사들 이 그를 붙잡아 다시 무릎을 꿇렸다. 의자에 앉아있던 수교위가 다시 말했다. "눕히고 팔다리 붙잡아." 그대로 실행되었다. 조프는 껍질 벗겨진 게마냥 무력하게 누워 밤하 늘을 보게 되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수교위가 일어나더니 천천히 조 프의 다리 사이로 움직였다. 그는 메스껍다는 표정으로 사이커를 뽑 아들었다. 그리고 조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 칼날을 조프의 국부에 세웠다. 조프는 그곳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수교위가 혀를 차며 말했다. "망할 새끼, 빨리도 지리네. 이거 완전 조루 아냐?" 병사들의 키들거림이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조프는 턱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감았다. 수교위는 칼끝으로 조프의 국부를 톡톡 건드리 며 말했다. "휘유, 지린내. 내 칼에 오줌칠할 수야 있나. 어이, 누가 가서 도끼 찾아와. 여기 공방이잖아." "사자패주!" "뭐?" "사자패주요! 사자패주가 편지 줬어요! 사자패주가, 사자패주가 어 가에 편지 숨기라고 했어요!" "이거 무슨 레콘 자맥질하는 소리야. 사자패주라니?" 조프는 사자패주가 뭔지도 모르냐고 되묻고 싶었다. 위아랫니가 마 구 부딪히지 않았다면 그렇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 누군가가 말 했다. "수교위님. 이 덜떨어진 놈이 속았나 봅니다. 편지 준 놈이 사자패 주라고 공갈을 쳤나 봅니다." "설마. 황제가 사라졌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사자패주라는 말에 속는 쪼다가 있겠어?" 조프는 자신이 그런 멍청이가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 때 고맙게 도 수교위가 질문했다. "야, 병신 자식아. 너한테 편지 준 것이 사자패주냐?" "그그그래요! 대대대호왕의 사자패주입니다!" 조프는 자신이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뻤다. 이제 이들은 놀라 서 자신을 일으켜세워주리라. 그리고 사과할 것이다. 조프는 결코 이 들을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조프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위의 병사들을 보았다. 바닥에 누운 채 보는 그들의 얼굴은 까마득하게 높 은 곳에 있었고 어둠 때문에 표정을 살피기도 어려웠다. 조프는 다리 사이에 서있는 수교위를 보았다. 그나마 그쪽의 얼굴은 보기 좋은 각 도였다. 그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옳거니, 너무 놀라서 움직이지 도 못하고 있구나. 어서 세우라고 꾸짖어야겠다…… 수교위가 폭소를 터뜨렸다. 수교위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웃었다. 다른 병사들 또한 정신없이 웃었다. 조프는 혼란에 빠졌다. 조프는 혹 이것이 시험인지도 모르겠 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사자패주나 대호왕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연극을 꾸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조프는 대호왕이 그 를 시험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조프 엔킬더다. 어가에 서신을 숨길 정도로 용감하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의리 있는 사내다. 그러니 시험을 받을 수도 있다. 조프는 그것이 당연하 다고 생각했다. 수교위가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머릿속에 톱밥만 들어찬 얼간이 목수쟁이 놈아. 대호왕의 사자패주 라고? 불손한 편지 보낸 놈 잡아오라고 우리를 보내신 분이 바로 대 호왕 폐하이시다." "예?" "쯧쯧. 이거 오줌싸개일뿐만 아니라 완전 바보구만. 족칠 기분도 안 나네. 야, 새끼야. 네가 속은 거다. 알아먹도록 쉽게 설명해주지. 너 한테 편지 준 녀석은 사자패주가 아니거든? 그냥 바보 목수 하나를 속여먹은 것이거든? 그리고 그 바보 목수는 바로 너거든? 너무 어렵 니? 미안해. 나는 바보가 아니라서 바보말을 잘 못해." 병사들이 요란하게 웃었다. 조프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코 와 목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없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코속이 짜릿했다. 그러다가 조프는 울기 시작했다. 그는 목을 놓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수교위는 그렇게 내 버려두지 않았다. 조프는 누군가의 발이 자신의 국부를 지그시 밟는 것을 느꼈다. 조프는 황급히 울음을 삼켰다. 그 때문에 딸꾹질이 일 어났다. 조프는 꺽, 꺽 하는 소리를 내며 수교위를 바라보았다. 수교 위는 웃음기 없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 놈 어디 있어?" "파, 꺽! 파, 꺽!" "지랄하네. 뭐?" 파르다 쿠기언. 꺽! 파르다 쿠기언을 찾아가면 돼. 그 여자가 알고 있을 거야. 꺽! 몰라? 매일 골목에 숨어서 자기 아버지 시체, 꺽! 바 라보는 여자 말이야. 그러니 나는 제발 내버려둬. 난 속았어. 불쌍하 잖아? 꺽! 머리가 나빠서 속았단 말이야. 생각해봐. 나는 친구를 구 하려고 속은 거야. 꺽! 존경할 수 있잖아? 아냐, 존경은 필요없어. 그냥 내 집에 돌아가서, 꺽! 내 잠자리에서 잘 수 있게 해줘. 그러면 돼.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파르다 쿠기언에게나 가. 그 불길한 너울 로 얼굴 감추고, 꺽! 썩어문드러지는 시체나 바라보는 기분 나쁜 여 자에게 가라고. 꺽! 그 여자 아버지를 추모하느라 그러는 거, 꺽! 아 냐. 틀림없이 변태라서 그러는 거야. 가서 변태나 잡아. 꺽! 힘없고 착한 나는 내버려두라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잠깐만, 꺽! 내가 똥 을 쌌나? 설마 그럴 리가! "파르다 쿠기언? 파르다 쿠기언이라고 했어?" 수교위가 질문했다. 조프는 자신이 그 이름을 말했는지 하지 않았는 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워서 그러느라 조 프는 뒤통수를 바닥에 쿵쿵 찧게 되었다. 아팠다. 다시 눈물이 배어 나왔다. 이제 나는 집에 가도 되지? "빨리 가서 잡아와. 이 놈은 일단 감옥에 처넣어." 병사들이 난폭한 동작으로 조프를 일으켰다. 병사들에게 의지하듯 서게 된 조프는 자신의 가랑이를 바라보았다. 검게 젖어있는 그곳에 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조프는 구역질을 느꼈다. 그가 토하는 시늉을 하자 병사들은 벌컥 화를 내며 조프를 내팽개쳤다. 조프는 바닥을 짚고 왁 토했다. 속이 뒤집히는 듯한 구토였다. 병사들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가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조프는 토사물에 얼굴을 부딪혔 다. 입안으로 흙과 토사물이 뒤섞여 들어왔다. 병사들은 그를 내버려둔 채 끌고가야할 놈을 이렇게 더럽혀놓으면 어떡하냐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조프는 그 무관심이 고마웠다. 주 의를 끌지 않기 위해 조프는 토사물에 얼굴을 문지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오크 지울비는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쳤다. 그가 앉아있는 지 붕 위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일부러 주위의 건물에 의해 막힌 장소 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시오크는 몸을 잘 숨기고 있었지만, 또한 더위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다. 시오크는 손바닥에 미끌거리는 땀을 바짓자락에 닦으며 건너편의 건 물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파르다 쿠기언이 살고 있는 집이다. 대호왕 의 답장이 병사일 경우 파르다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나 보다 긍정적인 답장이 올 경우를 대비해서 떠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오크는 건물주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이 지붕을 빌리기로 했다. 이곳에선 파르다의 집을 감시할 수 있고 또 쉽게 눈에 띠지 않 는다. 미누쉬는 그 계획이 멍청하다고 말했다. "지붕에 갇히면 날아갈 건가요?" 그것은 고려해볼만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적을 한 미누쉬조 차 지금은 시오크의 곁에서 파르다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파르다를 진정시키고 싶은 듯했지만 그것이 필요한 행동인지는 의심 스러웠다. 파르다는 지붕에 올라온 이후로 몸을 웅크린 채 꼼짝도 하 지 않았고, 미누쉬가 달래지 않아도 계속 그렇게 무정물처럼 앉아있 을 것처럼 보였다. 파르다의 집에서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오크와 미누쉬는 움찔하며 파르다의 동정을 살폈다. 하지만 파르다는 공허한 얼굴로 밤하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불이 나도 그 무관심 은 변치 않을 것 같았다. 미누쉬는 그런 파르다를 꼭 껴안으며 말했 다. "시오크. 계획은?" "생각 좀 정리하게 해줘." 미누쉬는 입을 앙다물었다. 시오크는 한손으로 꺼칠꺼칠한 턱을 만 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반응은 기묘하다. 시오크는 자신이 보낸 편지에 그 발신인을 수 중에 넣을 경우 얻게 될 이득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시오크가 보낸 편지에는 페로그리미나 페로그라쥬, 기타 남 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급은 없었다. 누가 봐도 북부에서 온 사람이 쓴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 편지를 역추적해서 페로그리미의 저항세력을 소탕할 수 있다는 식의 망상을 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오크는 혹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일부러 북부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도록 편지를 썼다. 시오크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몇 명의 병사들이 방문하는 것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면 시오크는 편지가 대호왕에게 도달하지 못했 거나, 혹은 대호왕의 마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는 주저없이 북쪽으로 도망칠 작정이었다. 그런데 파르다의 집을 찾아온 것은 몇 명의 병사가 아니었다. 고작 불온한 편지를 보낸 자를 찾기 위해서 동원된 것치곤 지나치게 많은 병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정치적 이득보다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던 그 편지의 어느 부분이 대호왕, 혹은 그 편지를 발 견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발신인을 반드시 붙잡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일까? 시오크는 그것이 궁금했고, 그래서 아직 도주를 보류하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고함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할 수 없군. 흩어져서 주위를 탐문해봐." 병사들이 나와서 흩어졌다. 그들 중에는 시오크와 미누쉬, 파르다가 숨어있는 집의 문을 두드리는 자들도 있었다. 미누쉬는 걱정스러웠 다. 집주인은 귀가 반쯤 멀어있는 노인이고 따라서 지붕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누쉬는 병사들이 귀 어두운 주인이 살고 있는 집의 지붕 위를 의심할까 걱정 했다. 그녀는 확실히 조심성 많은 성격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왔던 병사들은 귀 어두운 노인에게 고함을 몇 번 지른 다음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미누쉬 는 이곳저곳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다가 시오크를 돌 아보았다. 시오크가 말했다. "파르다.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지?" 파르다는 시오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미누쉬는 약간 초조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시오크. 저는 저 때문에 누가 손해보게 하지 않아요. 동정심이나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경험상 항상 그게 이득이었기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파르다는 제가 책임지겠어요. 파르다. 나와 함 께 갈 거지?" 파르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미누쉬는 그것이 동의라고 생각했다. 시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도시 북쪽 끝으로 가면 조일? 조엘? 뭐 그런 이름의 친구가 하는 여숙이 있어." "조일이에요. 그런데?" "그 친구는 좋은 말 한 마리를 맡아두고 있어. 내가 타고 온 말이 지." "조일이 왜 당신 말을 맡아준 거죠?" "내가 여숙비가 없다고 말하곤 이 도시에 있는 친구들에게 빌려올 테니 며칠 맡아달라고 했기 때문이야. 여기 돈주머니 있으니 받아. 그 안엔 그 친구가 써준 보관증도 있으니 말을 내줄 거야. 나와의 관 계는 알아서 대고, 그걸 받은 다음 타고 도망쳐. 엔거 지부로 가면 될 거야." "잠깐. 당신은 안 간다는 건가요?" "난 좀 더 알아볼 것이 있어." "위험한 짓 하지 말아요. 시오크. 함께 도망쳐요." "조심할 테고, 그리고 붙잡힌다 해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그 편지는 대호왕의 전설을 경애하는 북부의 한 청년이 우연히 남부에 들렀다가 그 위대한 전설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쓴 편지일 뿐이야. 그렇게 해석되도록 썼지. 그러니 그 편지를 가지고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해." "당신은 유료도로당주의 아들이에요. 시모그라쥬공이 당신을 손에 넣으면 유료도로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 각은 못하나요?" "그는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내 자격 문제인데, 나 는 당주의 아들이 아니라 당주야." "뭐라고요?" "당주라고. 내가 이곳으로 오기 직전 아버지는 불신임되었고 당 특 위가 아버지를 조사하고 있었지. 어쩌면 지금쯤 아버지는 비나간에서 한 잔 하시며 내 욕을 하고 계실 거야. 어쩌면 나를 옭아맬 함정을 꾸미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지도 모르지. 당주가 되면 재미있 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기분으로는 아버지 처지가 부럽군." 미누쉬는 비나간의 지키멜 퍼스와 시오크 지울비의 관계에 대해 알 고 있었다. 따라서 시오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 다. 시오크는 게라임 지울비를 당주 자리에서 쫓아낸 다음 자기 연인 에게 맡긴 것이다. "멋지군요. 당주님." "고마워. 자, 그럼 난 이만 내려가볼게." "예?" "내려간다고. 그래야 수색이 중단되고 당신들이 편히 떠날 것 아닌 가." "그럼 일부러 체포되러 가신다는 건가요?" "맞아." "당주님. 도저히 찬성할 수 없는 계획이네요. 도대체 뭘 알아보셔야 되는 거죠?" 시오크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시오크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바닥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미 누쉬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시오크는 싱긋 웃 은 다음 지붕 끄트머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손을 놓았다. 다행히 다리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시오크는 일어나 몸을 툭툭 털고 는 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병사들이 문을 쾅쾅 두드리 는 모습, 그리고 문가에 서서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 다. 시오크는 가장 가까이 있는 병사를 찾다가 부위 한 명이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 부위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보십시오." 부위는 무슨 용건이냐는 표정으로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바쁘니 방 해하지 말라는 표정도 조금 섞여 있었다. 시오크는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전쟁의 주인인 부위라도 자신을 향해 똑바 로 걸어오는 사람이 추적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기 어려울 테니까. 시오크는 상냥하게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예. 체포되고 싶어서요." "뭐라고요?" "저를 찾고 있지 않았습니까? 편지를 쓴 것은 저였습니다. 그리고 대호왕 폐하의 어가에 그 편지를 숨기도록 했지요. 이렇게 마중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위는 얼빠진 표정으로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시오크는 다가가 그 의 어깨를 툭 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꾹 참기로 했다. 부위가 멍청 이처럼 굴었다는 자괴감에 빠지도록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래서 시오크는 그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들 편히 쉴 수 있도록 병사들 부르도록 하세요." 부위는 시오크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관계 없는 미친 놈이라고 생 각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오크가 말한 내용이 정확하다. 부위는 허 하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배짱 대단하시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무기 같은 거 가지고 있소?" "소매 속에 비수 하나 있고 발목 쪽에도 하나 있지요. 내가 꺼낼까 요, 그쪽이 꺼내겠습니까?" 부위는 조금 고민하다가 자신의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병사들을 불러들였다. 민가의 문을 두드리던 병사들이 달려오자 부위가 말했 다. "흐음. 그쪽이 꺼내쇼. 서툰 짓하면 내가 공격해야 하니까." "그러시죠." 시오크는 느린 동작으로 두 개의 칼을 꺼내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부위는 가까이 온 병사에게 그것을 집어들게 했다. 그리고 부위는 다 시 고민에 빠졌다. 몸수색을 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그랬다간 스스 로 몸을 드러내고 무장을 해체한 대범한 사내에게 비웃음을 살 것 같 았다. 시오크는 그의 고민을 안다는 듯이 말했다. "뭣하시면 수색해보시죠. 괜찮습니다." 부위는 그 말에 고민을 그만두기로 했다. "관두도록 합시다. 가지요." "그럽시다." 부위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리고 시오크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 뒤를 따라갔다. 시오크는 지붕 위에 숨어있는 두 여인을 돌아 보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의심을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시오크는 기지 개를 켜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상황을 보고 있던 병사들은 그 대담 한 동작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지붕 위의 미누쉬는 그것을 작별 인 사로 해석했다. 시오크가 볼 수 없는데도 미누쉬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든 것은 그 때문이다. 게라임 지울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문쪽을 향 해 활기차게 말했다. "난 죄수다. 죄수한테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법도 있나?"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던 병사는 대답이 없었다. 게라임은 히죽 웃으 며 문을 바라보았다. 곧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비 나간후 지키멜 퍼스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편에는 두 명의 병사들이 따라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든 다기들을 탁자에 늘어놓았다. 지키멜 은 그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들은 모두 귀머거리고 높은 수준의 무예가다. 이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시오크는 이러라더군." 게라임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은 저를 잘 알지요. 후작님. 병사들이 없었다면 저는 후작 님을 인질로 붙잡고 탈출극을 벌였을 겁니다." 지키멜은 그것이 자랑스럽게 말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자랑스럽 다면 뭐가 자랑스러운 것인지 궁금했다. 아들의 혜안을 자랑스러워 하는 걸까. "기묘하군. 그런 낭만적이지만 쓸데없는 짓을 왜? 그 때야말로 당신 은 확실히 비나간후 모독죄를 저지르게 되는 거다. 바보짓 같지 않 나?" "아, 탈출에 성공하면 저는 당으로 돌아간 다음 당을 망칠 아들을 견제할 온갖 수단을 강구해놓고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죄를 받을 겁니다. 당에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지키멜은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은 다기를 다 차려놓고 물러 났다.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앉거라. 그게 당신의 사고방식이고, 시오크는 그런 당신의 사고방 식을 안다는 것이군. 아들을 왜 그렇게 믿지 못하지?" 게라임은 귀머거리 무사들을 긴장시키지 않을 느린 동작으로 지키멜 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찻잔에 조심스레 차를 따라 지키멜에게 내밀었다. 무사들은 매서운 눈으로 게라임의 손동작을 살폈다. 게라 임은 잔을 내려놓고는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저는 제 아들이 절대로 마음을 바꿔먹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 걸 믿기 때문에 아들에게 반대하는 거죠. 아마 제 아들도……" "아버지가 절대로 설득될 리가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아버지를 몰락시켰다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믿어주는 아들을 얻기는 어렵지요." "당신들은 모두 정상에서 조금 어긋나 있는 듯하군." "증조부를 독살한 증손녀는 정상입니까?" 지키멜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에게서 그 질문을 듣게 될 날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분이 그것을 원했다." 게라임은 찻잔을 들어 두 손으로 따스한 찻잔을 감싸쥔 채 말했다. "진실을 말하고 계시는군요. 알 것 같습니다. 하긴 늘그막에 험한 꼴 당하느니 패배를 인정하고 편한 죽음을 구하는 것도 이해할 만합 니다." "당신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는 투 같군." "예. 저는 독약을 요청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더 용감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각하의 증조부님께서는 비나간을 그리 걱정하지 않으 셨겠지만 저는 아들의 손에 파괴될 유료도로당이 걱정됩니다. 그러니 경고해두겠습니다. 이곳은 마음에 듭니다. 베풀어주신 여러 친절은 즐겁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떻게든 탈출할 겁니다. 너 무 상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시오크에게는 뭘 받기로 하셨습니까?" 지키멜은 빙그레 웃었다. "짐작해보지 그러나?" "유료도로당을 비나간의 울타리로 삼을 작정이십니까?" 지키멜은 찻잔을 들어 입안을 적셨다. 게라임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척하며 귀머거리 무사들의 위치를 가늠했다. 고무적이지 않았다. 무 사들은 완벽한 각도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지키멜이 말했다. "그대들은 징수가 편리한 곳에 징수소를 가지고 있지. 바꿔 말한다 면 사람이 반드시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곳에 관문과 무장병력을 가지 고 있다는 거지." "우리는 통행료를 내지 않는 자에게만 무기를 준비합니다." "시오크의 생각은 달라. 그는 통과시켜선 안될 자에게 무기를 준비 해야 한다고 믿지." 게라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녀석의 문제지요." "설명해주겠나? 왜 시오크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지?" "공감대 형성을 시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각하. 저는 각하 주변의 어린애가 아닙니다.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지키멜은 약간 머쓱함을 느꼈다. "그래. 내 주변에는 젊은이들이 많지. 비나간의 지배층 대부분은 증 조부님만큼이나 늙은 자들이고 그들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는 것보다 그 엉덩이 무거운 자들을 움직이게 하는데 소모되는 것이 더 많을 지 경이야. 반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지만 어쩔 수 없는 미숙함 때문에 여러 곳에서 한계에 부딪히더군." "저를 어디에 쓰실 작정입니까? 한 번 들어보지요. 유료도로당의 당 주였던 자에게 시킬 일이 뭔지." "다시 유료도로당주가 되어 비나간의 울타리가 되어줘." 게라임도 그 말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 아들을 배신할 생각이십니까? 도덕적 비난은 잠시 제외하더라 도, 그래야 할 이유가 뭡니까?" "아직 조건을 듣지 않았어. 당신 아들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게라임은 움찔했다. 그의 주먹이 탁자에 올라왔다. 귀머거리 무사들 이 삼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게라임은 그들에게 두 손을 내밀어 보 이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오크가 어디로 갔습니까?" "남쪽으로. 당신은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했지. 대호왕께서 다시 나타나셨다." "대호…… 왕 폐하께서?" "그래. 시모그라쥬공과 함께 나타나 다시 북부의 왕이 될 것을 선언 했다. 우리가 가진 정보력으로는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 만 그 파괴력은 상당해. 남부의 제국군은 완전히 규합되었고 움직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악타그라쥬와 페로그라쥬, 그리고 그 인근 의 중소도시 전부가 시모그라쥬공의 지배하에 들어갔어. 시오크는 그 대호왕이 진짜인지, 그리고 진짜라면 무엇을 원하는지 확인해야겠다 면서 떠났어." "페로그라쥬까지 진격했습니까? 시련은 가만히 있습니까?" "도시연합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어. 거래가 있었던 모양 이야." "……푼텐 사막을 넘고 싶지 않다면 엔거로 오겠군요. 그 다음은 키 탈저이고, 림츠나 하이스, 살본까지 진격하는 것에 큰 저항은 없을 테니……" "그 다음은 칼리도로 서진하느냐, 아니면 비나간으로 북진하느냐겠 지." "안됐지만, 각하. 비나간일 겁니다." "왜지?" "칼리도를 건드리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니까요. 칼리도백의 모친 은 백작 아드님이 돌아올 때까지 칼리도를 지킬 작정일 테고, 또 그 것을 거부하는 자는 엄청나게 귀찮게 만들어줄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 다. 칼리도백의 레콘 친우들 중에는 칼리도백의 모친 또한 좋아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칼리도백의 모친이 소환하면 적지 않은 수의 레콘 들이 모여들 겁니다. 아시겠지만 레콘은 혼자서도 부대입니다. 거기 까지 나가 병사들을 끌고 올 수도 없고 발케네공처럼 레콘 부대를 가 지고 있지도 않은 바에야 시모그라쥬공의 입장에서 칼리도를 치는 것 은 늪에 발을 집어넣는 꼴이 될 겁니다. 패배하지는 않겠지만 점령하 기도 힘들 테고, 출혈은 엄청날 겁니다. 비나간을 노리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봐도 비나간을 얻는 것이 북부 점령 의 교두보라는 취지에서 유리합니다." "참 고마운 전망이군." "유감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각하께서도 예측하셨을 텐데요." "그러니 당신을 찾아왔지. 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나?" "제안의 정확한 내용은, 시오크가 돌아오지 않을 경우 당주로 복귀 하여 비나간으로 오는 시모그라쥬공의 부대를 당의 징수소에서 저지 해달라는 겁니까? 그들이 통행료를 내든 내지 않든?" "그래." 게라임은 두 손을 깍지 껴 탁자 위에 얹었다. 전(前)유료도로당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아들에 대한 배신이 될 겁니다." "아들의 뜻을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배신입니다. 시오크는 제가 자기 뜻을 절대로 따르 지 않을 거라 믿으니까요.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의 믿음을 어찌 배신 하겠습니까." "말장난을 하는 것 같군. 게라임." 게라임은 웃으며 매서운 표정으로 서있는 두 병사를 가리켰다. "이들이 귀머거리라고요?" "그렇다." "그러면 증언할 수 없겠군요." "뭐?" "이런 상황 말입니다." 그리고 게라임은 부드러운 얼굴로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게라임은 환한 얼굴로 조야하고 잔인한 욕설들을, 후작에게 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여염집의 여인에게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욕설들을 쏟아내었다. 그 표정만 보면 게라임이 지키멜을 칭송하고 있다고 해 도믿을 법했기에 무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키멜은 무표정한 얼굴 로 욕설을 경청했다. 그녀는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게라임은 그녀 를 욕하기보다는 장난을 치고 있는 듯했다. 지키멜은 전유료도로당주 가 누군가의 등 뒤에서 혀를 내미는 것처럼 듣지 못하는 자들 옆에서 폭언을 쏟아내는 재미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욕설을 끝낸 게 라임은 사랑스러운 딸을 보듯 그윽한 눈으로 지키멜을 바라보며 말했 다. "그러니, 돌아가라. 아, 그리고 다음에는 더 괜찮은 것을 준비해오 도록. 아르히까지 바라지는 않겠지만 차는 사양하겠다." 지키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났다. 게라임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를 배웅하러 일어났다. 지키멜은 그의 배웅을 받고 싶지 않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곧장 떠나는 대신 지키멜은 무사 한 명에 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무사는 지키멜에게 손바닥을 내밀었고 그 러자 지키멜은 그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얹어 글씨를 쓰듯 움직였다. 잠시 후 무사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더니 게라임에게 다가왔다. 그 리고 멀뚱히 바라보는 게라임의 복부를 걷어찼다. 게라임은 점잖치 못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는 배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어 지키멜을 바라보았다. 지키멜은 상냥하게 웃었다. "이들은 귀머거리니 당신의 증언도 듣지 못하겠군." "……뭐라고 썼지?" "응. 당신이 이들을 귀머거리라고 놀렸다고 썼어." 게라임은 고통 속에서도 히죽 웃었다. 지키멜은 잘 있으라고 말하고 는 무사들과 함께 떠났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2-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7-02 조회수 : 1758 피를 마시는 새 22. 바람을 가둔 돌 - 4 캄캄한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조프 엔킬더는 울었다. 턱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가슴의 맨살에 떨어져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조프는 오래 전에 웃옷을 벗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옥 안은 무더웠다. 낮 동안 달아올랐던 돌건 물이 후끈후끈한 열기를 토해놓는 듯했다. 어둠과 더위 때문에 숨이 콱콱 막혔다.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지, 다음 심문은 언제인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조프는 알 수 없었다. 조프는 할일이 많았 다. 편수에 이어 두 도제까지 사라진 공방도 문제거리였고 소식을 기 다리고 있는 코에디의 집주인에게 이야기도 전해야하고 잡화점의 루 마에게 자기 소식도 알려야 했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몇 평방미터로 축소되었고 그것을 넘는 것은 별에 도달하는 일보다 어려운 것이 되 어있었다. 그래서 조프는 울었다. 맞은 곳이 아팠다. 그는 뺨을 세 대나 맞았고 발길질에 걷어차이기 까지 했다. 철든 이후로 당해본 적이 없는 끔찍한 폭력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게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조프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제국군 입대조건에 정신병질 소지자일 것이라는 항목이 있 다는 가설이 훨씬 타당했다. 틀림없다. 제국군은 미친놈들만 모아들 이는 곳이다. 만에 하나 정상인이 입대하면 최대한 빠른 기간 내에 미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조프는 울었다. 목이 말랐다. 조프는 목이 마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물은 언제나 손 닿는 곳에 있었다. 공방에도, 집에도. 물독이나 물주 전자에 물을 채워두는 일이 귀찮아서, 혹은 손 놓기 어려운 작업을 계속 진행시키기 위해서 조프는 가끔 목마름을 참기도 했다. 조프는 그럴 때 자신이 극기력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필요하면 언제 든 물을 구할 수 있는 상태에서의 목마름과 자기 손으로 물을 구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목마름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구토 때문에 입안 은 시큼했고 대패질 덜 된 소나무마냥 까슬까슬했다. 혀에서는 식은 인두 같은 맛이 났다. 인두에 혀를 대 본 적은 없지만 조프의 인상은 그러했다. 그는 여기서 나가면 인두에 혀를 대어봐야겠다고 생각했 다. '여기서 나가면?' 조프는 다른 종류의 목마름을 느꼈다. 그는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빛이 들어오는 곳이 없는 지하였고 불을 피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뜨뜻한 공기만이 가득 할 뿐이었다. 조프는 목이 타는 느낌을 받았다. 시원하든 미지근하든 물을 마셔야 했다. 하지만 조프는 밤중에 간수를 부르면 그가 귀찮아 하고 화를 내지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는 얌전한 죄수로 취급받고 싶었다. 품위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그래서 인간적인 대화의 상대 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을 가 지고 있었다. 간수는 그를 존중해야 한다. 조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간수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잠을 자 면 된다. 아침이면 어차피 간수는 음식과 물을 가져올 것이다. 그 때 태연히 일어나 품위있게 그것을 받아들면 된다. 아무 말도 없이 한심 하다는 투로 바라봄으로써 간수로 하여금 그를 이곳에 가둬두는 것은 엄청난 착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혹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간수가 상관들에게 저 사나이를 가둬야 하 는지 묻도록 만들어야 한다. 조프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는 위엄 있게 누워 자기로 했다. 주위를 더듬어 벗어둔 웃옷을 찾은 조프는 그것을 뭉쳤다. 그리고 조프는 돌방에 누웠다. 다시 몸이 아팠다. 조 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팔을 놀려 뭉쳐둔 옷을 베개 처럼 머리에 받쳤다. 그리고 조프는 눈을 감았다. 5분 후 조프는 벌떡 일어났다. 조프는 미치도록 물을 마시고 싶었다. 목마름 때문이 아니었다. 누 군가가 와서 그에게 물을 준다는 행위 그 자체가 필요했다. 아무 것 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 그를 향해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조 프는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해야 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것이 아 니다. 조프는 생각했다. 병사들이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조프 는 이곳까지 오던 도중의 일을 생각해봤지만 공포와 고통으로 얼룩진 그 기억들 대부분은 명료하지 않았다. 만약 병사들이 감옥이 아닌 엉 뚱한 곳을 감옥으로 착각하고 조프를 가둬두었다면, 열흘이나 한 달 이 지나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곳에 조프를 가둬두었다면 조프는 굶어죽고 말 것이다. 간수를 불러야 했다. 목마름이 문제가 아니다. 불렀을 때 누군가가 온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조프는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통증을 참으며 일어 났다.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조프는 벽을 찾았다. 조금 후 손이 무엇 인가에 닿았다. 조프는 그것이 돌벽임을 깨달았다. 조프는 벽에 손을 짚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조금 후 벽이 꺾였다. 조프는 벽을 따라 몸을 돌렸다. 벽은 계속되 다가 다시 꺾였다. 조프도 돌았다. 진행 방향을 네 번 꺾은 다음 조 프는 자신이 숫자를 잘못 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벽이 두 번 더 꺾일 때까지 움직였다. 그러자 조프는 자신이 감옥 안 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았음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문은 만 져지지 않았다. 조프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문도 없는 곳에 갇혀 있어? 어떻 게?' 조프는 이 모든 것이 악몽이 아닐까 의심했다. 조프는 두려움 속에 주저앉았다. 조프는 혹 병사들은 그를 가두고 문을 막아버린 것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병사들이 왜 그런 노역을 해야 하 는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문이 없었다. 그가 들어온…… 조프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후 자신의 멍청함에 웃음을 터뜨 렸다. 그는 서서 감옥을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문은 더 낮은 위치 에 있을 것이다. 이제서야 떠올랐지만, 그 문은 그가 허리를 숙여야 만 통과할 수 있는 낮은 크기였다. 조프는 허리를 숙인 채 보다 낮은 위치의 벽을 더듬었다. 조금 후 조프는 돌과 확실히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을 만지게 되었다. 목수인 그에게 너무나도 반가운 나무 재질이었다. 조프는 황급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문의 목재와 철제 보강재를 더듬었다. 높 이 1.2미터, 폭 0.7미터 쯤 되는 크기였고 꽤나 두꺼운 듯했다. 그리 고 조프는 문 아래쪽에서 음식을 넣어주는 배식구 같은 것을 찾았다. 그 모든 발견은 그를 고무시켰다. 문의 생김새에 대해 알게 된 그는 이 감옥에 대해 알 것을 다 알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지식은 또한 그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느낌도 주었다. 조프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무릎이 아팠다. 조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헛기침을 했다. 겁먹은 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봐요! 여기요!" 그는 문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문에 귀를 댔다. 그리고 침묵한 채 대답을, 혹은 다가오는 발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그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조프는 문에 귀를 댄 채 손바닥으로 문 을 탕탕 두드렸다. "이봐요!" 반응이 있었다. 대단히 멀게 느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거 아는 목소리 같은데. 혹시 조프야?" 두꺼운 문과 돌벽을 사이에 두고 들려온 소리였기에 그 목소리는 낯 설게 들렸다. 조프는 되물었다. "누구십니까? 저를 아세요?" "조프 엔킬더 아냐? 나 코에디 미도인데." "코에디! 나야, 조프!" 조프는 문에 코를 비비듯이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저 먼곳에서 코 에디가 말했다. "너 어디에 있는 거야? 이 시간에 여기에 왜…… 혹시 잡혀온 거 야?" "맞아! 나 잡혀왔어! 사자패주 때문에, 그러니까 나는 너를 구하려 고……" 조프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코에디를 구하 려다가 이곳에 억울하게 붙잡혀온 것이다. 갑자기 분노가 왈칵 치솟 았다. "정말이야? 조프 네가?" "제기랄, 그래! 너 구하려다가 잡혀온 거야!" 자신의 노한 목소리를 듣자 조프는 그 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말 이 사실이었다. 코에디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잘못 봤군. 세상에. 네가 그럴 줄은 몰랐어. 허, 이거 눈 물 나네." "뭐야, 그 소리는?" "솔직히 엄청나게 의외라서." 조프는 무도한 친구에 대한 분노에 들끓었다. 조프는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냐고 따져묻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를 구하려 했다는 것을 더 강조하는 것은 잘난 체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까 걱 정되었다. 그것이 사실인데 괜히 강조해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다. 코에디가 말했다. "어쨌든, 조프. 그렇게 고함 치지마. 여기 온통 돌벽이라서 아주 잘 울려. 그리고 간수 중에 피제트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녀석 잠귀가 밝고 성격이 더러워. 조용히 하고 있어야 해." "하지만 난 목이 말라." "그러면 물통에서 물 마시면 되잖아." "물통? 그런 것 없어." "무슨 소리야. 그 안에 있을 텐데." 조프는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캄캄한 암흑뿐이었다. "여긴 그런 것 없어! 뭐가 잘못된 거야. 나 조금 전에 들어왔고 그 래서 아직 그 물통이라는 것 안 갔다 놨나봐." "그런가. 그러면 어쩔 수 없군. 아침에 음식 가져올 때 물통도 가져 올 거야. 그 때까지 좀 참아." "목이 말라서 잘 수가 없어. 제기랄, 사람을 넣었으면 물통도 넣어 줘야 할 거 아냐? 말라죽으라는 거야, 뭐야? 이봐, 간수!" "조프. 그러지마." 조프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친구를 구하려다가 이렇게 됐는데 그 친 구라는 놈은 참고 기다리라는 소리만 하고 있다. 도와주려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조프는 그에 대한 분노를 담아 외쳤다. "됐어. 이름이 뭐라고? 아, 피제트. 간수 피제트! 피제트! 이리 좀 와요!" 코에디가 다시 뭐라고 했지만 조프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카 랑카랑한 목소리로 피제트를 불렀다. 그러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무엇인가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같았 다. 그 소리는 꽤 다급했다. 갑자기 조프는 겁을 집어먹었다. 저 먼 곳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지른 놈 누구야!" 조프는 문쪽에서 화다닥 물러났다. 그는 반대쪽 벽에 머리를 부딪혔 다. 비명을 지를 뻔한 조프는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서러움과 함 께 움츠러들었던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 "접니다! 여깁니다! 젠장, 전 목이 말라요. 사람을 집어넣었으면 살 수는 있게 해줘야 할 거 아닙니까! 그게 당신 하는 일……"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후 문 앞에서 그 발소리가 멈췄다. 절거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바깥에서 빛이 새어들어왔다. 조프는 그 문이 그렇게 작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둠 속이라 그의 추측이 잘못된 모양이다. 보이는 것은 두 다리뿐이었다. 조프는 그 다리를 향해 기어가며 말했다. "왔습니까? 이 안에는 물통이 없어요. 그런데 저는 목이 마르단 말 입니다. 저도 이런 일로 당신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갑자기 눈앞이 확 불타올랐다. 조프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 다. 바깥에 있던 누군가가 횃불을 안쪽으로 확 밀어넣은 것이다. 조 프는 앞머리가 바자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던 조프는 다시 벽에 몸을 부딪혔다. 갑자기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목소 리가 들려왔다. "이 놈이 겁도 없이 문앞으로 다가와? 문 열었을 땐 반대쪽 벽에 붙 어있어야 한다는 말 못 들었어?" 조프는 맹세코 그런 이야기 들은 적이 없었다. 눈 주위가 화끈거렸 다. 화상을 입었는지도 모르겠다. 조프는 눈을 깜빡였다. 눈을 찌르 는 빛이 보였다. 조프는 눈을 가늘게 뜨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무 엇인가가 턱을 강타했다. 조프는 머리를 감싸며 나동그라졌다. 그는 몸을 모로 누인 채 반사적으로 팔다리를 웅크렸다. "눈 떠, 이 새끼야!" 조프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피제트가 그의 허리를 걷어찼다. 조 프는 컥 하는 소리를 냈다. 피제트가 다시 외쳤다. "눈 안 뜨면 확 지져버린다!" 조프는 황급히 눈을 떴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 보였다. 빛과 어둠 이 혼재되어 춤추고 있었다. 조프는 아무 것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 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조프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누워있었기에 물은 코와 입으로 흘러 들어왔다. 조프는 켁켁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피제트가 화가 나서 외 쳤다. "봤지? 이 자식, 물통이 없다고? 어디서 수작질이야? 물통이 없다 고? 그래, 물통 필요없지?" 다시 무엇인가가 조프의 머리를 강타했다. 조프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까무러치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타격이 날 아왔다. 엄밀하게 말해서 피제트는 조프를 때릴 생각이 없었다. 다만 피제트 는 물통을 부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가 물통을 부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조프의 몸에 그것을 휘둘러 박살내는 것이었다. 그 물통은 꽤 튼튼한 것이었다. 조프는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듣다가 혼절했다. 그 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쉬존 토프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러자 정말 납득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폐하. 폐하께서 친히 그 자를 심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무지 위 엄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짐이 하려는 것은 심문이 아니다. 짐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 답을 써서 제게 주십시오. 제가 그에게 전하겠습니다. 그 자의 정체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가 발케네의 공작이건 자 이아치의 파락호이든 폐하의 편지를 받는 것만으로 그에겐 크나큰 영 광일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건 상관없다. 그 방식이 좀 조야하고 깊은 맛이 없지만 그는 짐의 선언에 대해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북부인이다. 그의 정체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한 일 때문에 짐은 그를 만나야 한다. 들어오게 하라." 아쉬존은 무례를 무릅쓰고 고개를 내젓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대호왕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쉬 존의 반대는 마지막으로 재고를 요청한 것이었고 편지의 발신인은 이 미 대전 앞에서 병사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쉬존은 곧 남자와 함께 대전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차분한 동작으로 걸어들어와 보좌에 앉아있는 대호왕을 바라 보았다. 그의 표정엔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예를 갖출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아쉬존은 벌컥 화를 내며 병사들에게 남자를 무릎 꿇리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그 전에 대호왕이 말했다. "병사들은 물러가라." 아쉬존은 다시 고개를 내젓고 싶었다. 하지만 위험할 거라고 생각되 진 않았다. 보좌 곁에 앉아있는 갈바마리는 두 얼굴 모두 믿음직하지 않은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믿음직했 다. 아쉬존은 하릴없이 병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예를 표시한 다음 대전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보좌에서 10미터는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고 앞으로 움직이 지는 않았다. 아쉬존은 대호왕의 곁으로 갈까 하다가 만약을 대비하 여 남자를 감시하기로 했다. 종고모 베로시가 자신의 오른손은 상대 에게 가깝고 상대의 오른손은 자신에게 먼 곳에 서라고 가르쳤던 것 을 떠올린 아쉬존은 남자의 왼쪽 뒤편에 서기로 했다. 하지만 그곳에 서고 보니 아쉬존은 남자의 시종이나 된 듯이 보였다. 위치를 바꿀까 했지만 남자가 말을 시작하는 바람에 아쉬존은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지 않는 것을 양해해주십시오. 나는 아직 당 신이 북부의 구원자 대호왕 폐하라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본 것은 갈바마리를 연상케하는 두억시니 한 명과 나가 여인일 뿐입 니다." "너는 누구냐." 대답하려던 남자는 멈칫하고는 대호왕을 바라보았다. 보좌 위에서 대호왕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망설 이다가 말했다. "시오크 지울비입니다." 아쉬존은 그 이름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그 이름과 비슷한 유명한 이름을 떠올렸다. 아쉬존은 놀란 표정으로 시오크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대호왕이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너는 자신이 시오크 지울비라고 주장 하는 한 인간 남자일 뿐이다." 시오크가 대답을 망설인 것은 정체의 노출을 꺼리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런 질문이 있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시오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그곳에 있는 두억시니가 유료도로를 걷는다면 그 통행료로 얼마를 지불하겠습니까?" 아쉬존은 당황해버렸다. 시오크 지울비는 유료도로당주 게라임 지울 비의 아들이니 유료도로의 사용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두억시니의 도로사용료가 얼마일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아쉬존은 갈바마리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거의 레콘 만 큼이나 덩치가 크니 레콘 만큼은 내야하지 않을까? 아니, 도로사용자 들을 불안하게 할 테니 더 주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 때 무표정하게 시오크를 바라보던 사모 페이가 말했다. "동편 한 닢을 주겠다." 아쉬존은 그 대답에 깜짝 놀랐다. 그는 갈바마리가 이 저평가에 화 를 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쉬존은 갈바마리의 태연함 에, 그리고 무릎을 꿇는 시오크의 모습에 놀랐다. 시오크는 한쪽 무 릎을 꿇고 말했다. "모든 두억시니의 도로사용료는 동편 한 닢입니다. 폐하께서 최초로 지불하셨을 때 그렇게 결정되었습니다. 폐하." "유료도로당과 관련이 있는 자인가?" "그렇습니다." 시오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존은 설명을 덧붙이기 로 했다. "폐하. 이 자는 유료도로당의 감찰관이며, 당주 게라임 지울비의 아 들입니다." 시오크는 그 오류를 정정하지 않았다. 사모가 말했다. "이해하기 어렵군. 짐이 아는 유료도로당은 길을 준비하는 자들이 다. 그런데 왜 여행자의 목적에 관심을 둔 거지? 네가 짐에게 보낸 편지는 유료도로당원답지 않은 것이었다. 설명하라." "그것은 당의 공식입장이 아니라 제 견해입니다. 폐하. 그리고 저는 유료도로당이 여행자의 목적을 평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행자가 흘린 눈물을 조용히 기억하는 대신 그를 따라가 그 눈물 을 닦아주어야 한다는 거냐?" 시오크는 동요를 느꼈다. 사모와의 대화는 유료도로당원과 이야기하 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당원의 화법을 쓰기 때문이 아니라 당을 잘 이 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처럼 생각하는 자가 많느냐?" "많다고 믿습니다." 시오크를 따르는 자들이 이미 당을 장악하고 있으니 많다고 대답해 도 될 것이다. 사모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바람이 부는구나." 아쉬존은 자신도 모르게 대전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들어오는지 살 폈다. 시오크 또한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모는 두 사람 의 당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옛날, 그 마음이 돌처럼 굳어버린 남자가 있었다. 그의 가슴 속에 는 터무니없이 오랜 기간 동안 정체된 바람이 갇혀 있었지. 짐은 그 바람이 깨어나는 것을 보았다." 시오크와 아쉬존은 동시에 사모가 말하는 남자가 누굴지 추측해보았 다. 북부의 위기가 도래할 때까지 하인샤 대사원에 은거하고 있었던 라수 규리하나 지러쿼터 산맥 서쪽에서 묵묵히 왕을 기다리고 있던 괄하이드 규리하일 수도 있다. 어쩌면 왕이 없는 상태에서 수백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북부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두 사 람은 사모가 말하는 자가 누굴지 짐작하기 어렵다는 결론도 동시에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비로소 그들의 앞에 있는 여인이 역사에 속하는 자들과 같은 반열에, 아니 그 이상의 위치에 있는 현재임을 느끼며 오싹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사모가 말했다. "그 바람을 타고 가장 무거운 것이 가장 높이 오를 것이다. 따라서 추락은 더 잔혹하겠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기에 시오크는 잠자코 기다렸다. 사모는 그 를 향해 고개를 들어 말했다. "시오크 지울비." "예. 폐하." "너는 짐을 반대하느냐?" "이미 말씀드렸듯이 시모그라쥬공의 가마를 타고 오시는 것은 반대 합니다." 시오크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아쉬존을 슬쩍 곁눈질하고는 말했 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다른 짐승들을 억누른다는 말이 있습 니다.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은 모든 이들의 벗인 척하는 여우 이며, 위대한 호랑이의 위세를 빌고 있습니다. 북부는 여우가 아닌 호랑이를 원합니다." 아쉬존은 닥치라고 외치고 싶었다. 대호왕의 면전인지라 차마 그러 지 못했지만 아쉬존은 노여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시오크를 노려보았 다. 시오크는 뒤통수에 신경이 쓰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시모그라쥬공을 물리치십시오. 폐하. 귀족원 회의를 선포하십시오. 유료도로당은 황제를 잃은 자들을 다시 돌아온 왕께 인도할 것입니 다." "짐에게 내민 손이 아닌 다른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느냐." "모든 도로를 막고 관문을 닫아 팔디곤 토프탈을 막겠습니다." 분노에 앞서 아쉬존은 이것이 유료도로당의 조건부 제안임을 깨달았 다. 제국 대부분의 중요 교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유료도로당이 대호 왕에게 시모그라쥬공과의 공조를 파기하지 않는 한 협조를 제공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이것이 치기 어린 투서를 보낸 청년과 변덕 을 부린 왕의 대면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알게 된 아쉬존은 초조함을 느꼈다. 이런 대화는 이런 식으 로 벌어져서는 안된다. 조부와 종고모, 그리고 많은 실무자들이 참여 한 가운데 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를 부르러 가 기는 어려웠다. 아쉬존은 낭패감 속에서 대호왕을 바라보았다. 대호 왕은 아무런 인상도 받지 않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짐이 네가 말한 것처럼 한다면 너는 네가 말한 그 여우가 되겠구 나." "예? 폐하. 그 무슨……" "너는 이미 누가 짐의 곁에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려고 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시모그라쥬공이 짐의 곁에 있는 것을 거부했지. 그렇다 면 다른 사람이 짐을 찾으려 할 때도 너는 그 자가 짐의 곁에 있어도 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려고 하겠지." 시오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 논리를 깨트리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 하고 싶었지만 사모는 쉴새 없이 말했다. "너의 언어는 성긴 그물이다. 시오크 지울비. 커다란 것을 잡아낼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네가 그것이 커다랗기 때문에 그럴 듯하다고 생 각하는 동안 보석은 그물눈 사이로 빠져나갈 것이다." 시오크는 굳은 턱을 쳐든 채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보좌에서 일어났다. "너를 돌려보내겠다. 시오크 지울비. 너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언제 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하지만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희 무리에게 왕의 말을 전해야 하니까. 왕은 도로 사용료를 지불하 고 유료도로당의 길을 이용할 것이다. 유료도로당은 그것을 받고 길 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너희들의 의무이자 권리다. 너희들에게 왕 의 목적을 판단할 권리는 없다." 사모는 갈바마리와 함께 걸어나갔다. 시오크는 분한 표정으로 그 뒤 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대호왕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어서이 기도 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을 아쉬존의 모습을 보기 싫어 서이기도 하다. 조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시체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파르다 쿠기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파르다는 언제나처럼 골목에 서있지 않았다. 그리고 너울을 쓰고 있 지도 않았다. 그녀는 흐린 하늘을 머리에 이고 대로 가운데 서있었 다. 주위를 지나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프는 파르다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그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 람이었던 파르다를 조프가 주목하게 된 것은 그녀가 너울을 쓰고 골 목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조프는 파르다의 얼 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조프는 너울을 벗고 꼿꼿하게 서있는 그녀 가 파르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달빛 속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 파르다가 그를 보지 않았기에 조프는 자신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저 먼곳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시 신일 것이다. 조프는 그녀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위로해줄 사람이 없어서 울고 있었다. 부당한 일이다. 누군가는 저 너울을 걷 고 그녀를 위로해야 한다. 조프는 파르다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너울 을 들어올리려 했다. 그러자 파르다는 그를 보았다. 조프는 그 왼쪽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조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파르다의 앞쪽에 있었다. 그런데 파르다의 오른쪽 눈에는 엉뚱한 사람이 비치고 있었다. 조프 는 어리둥절해 하며 너울을 내버려둔 채 그 오른쪽 눈을 보았다. 거기에는 목에 줄을 맨 레바일 쿠기언의 뒷모습이 떠있었다. 조프는 정신없이 그 눈동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파르다의 오른쪽 눈은 거대 한 거울이었다. 그의 전신이 비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비춰지는 것 은 매달려 있는 레바일 쿠기언의 뒷모습이었다. 거울 속의 레바일 쿠기언이 빙글 돌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조프! 조프!" 조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레바일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 다. 파르다 쿠기언을 부탁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조프는 루마의 아들 이었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조프! 조프! 젠장, 조프!" 혼란 속에서 조프는 고개를 돌렸다. 기묘한 것이 보였다. 마름질 당한 빛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빛의 한쪽 부분에 어떤 그릇의 귀퉁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 파리들이 윙윙거리며 날고 있었다. 조프는 머리를 들려고 했다. 하지 만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프는 신음을 토하며 자신 의 머리를 만졌다. 그 느낌은 소름끼쳤다. 얼굴이 아니라 생선살을 만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조프의 손가락이 파리에 닿았다. 파리는 그의 얼굴에서 피를 빨다가 조프의 손가락 사이에서 거칠게 날아올랐 다. 조프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킥, 킥 하는 이상한 소리가 목에 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조프…… 제발 대답 좀 해." 코에디의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멀리서 외쳤다. "닥쳐! 이 놈아. 제발 조용히 좀 해!" "네놈이나 닥쳐! 조프!" 코에디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조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이 부서진 것 같았고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프는 신음하며 마름질된 빛을 보았다. 빛 속에 먼지들이 둥둥 떠다녔다. 파리들이 윙윙거리며 날 때마다 먼지들이 소용돌이쳤다. 공기는 뜨거웠다. 숨 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조프는 빛이 들어오는 곳을 보았다. 천장 한 귀퉁이에 창이 있었다. 거기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감옥 안을 위쪽에서 감시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창인 듯했다. 마름질 된 빛은 거기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코에…… 디!" "조프!" "코에…… 디!" "그래, 조프. 괜찮아? 너 죽은 줄 알았어. 몸은 좀 어때?" 조프는 일어나려 애썼다. 바닥을 짚으려던 그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손가락뼈 어딘가가 잘못된 모양이다. 무슨 힘이 남아있었는지 조프는 데굴데굴 굴렀다. 손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코에디가 다급 하게 불렀다. "조프!" 조프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는 손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서럽게 울 었다. 숨이 차고 눈물이 얼굴을 다 적실 때까지 울었다. 코에디는 계 속 그를 불렀다. 조프는 그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코에디는 그가 당 장 죽을 것처럼 부르고 있었다. 어서 죽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조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신세에 슬퍼하며 울었 다. 한참을 운 다음 조프는 벽을 따라 상체를 밀어올리듯 하며 일어나 앉았다. 코에디는 그 때까지도 띄엄띄엄 간격을 둔 채 조프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성난 죄수들의 항의가 들려왔다. 지난밤에는 코 에디의 목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곳엔 의외로 많 은 죄수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간수들은 죄수들이 낮에 피우는 소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험한 어조로 코에디를 협박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코에디는 그 협박을 무시하다가 가끔 더 난 폭한 말로 대꾸했다. 그는 전혀 기가 죽지 않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저 놈은 독방에 있어도 많은 친구들하고 같이 있는 셈이니까.' 조프는 자기가 멍청했다고 생각했다. 코에디는 군령자다. 무수히 많 은 친구들하고 언제든 함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조프는 자신만이 그 를 구할 친구라고 생각하고는 코에디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 다. 그 때문에 이곳에 들어와 이렇게 비참한 꼴로 앉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 놈은 기가 펄펄 살아서 저렇게 건강하게 있다. 조프는 넌 더리를 냈다. 그러다가 조프는 그릇을 보았다. 그 동안 햇빛이 이동하여 귀퉁이만 보이던 그릇이 이제 좀 더 많이 보였다. 조프는 그 안에 뭔지 모를 것이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조금 후 조프는 그것이 음식일 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조프는 다시 보았다. 눈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 았지만 그것은 음식이 분명했다. 갑자기 조프는 자신이 엄청나게 배 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프는 허겁지겁 문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몸 이곳저곳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다가왔다. 다시 졸도할 뻔한 조프는 한참 숨을 고른 다음 바닥에 엉덩이를 댄 채 보다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면서 조프는 파리들이 계속 그릇 안팎으로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았다. 조 프는 분노했다. 그는 약간 속도를 높여 그릇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조프는 아프지 않은 손을 휘저어 파리를 쫓아냈다. 그릇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지 모를 국물이었다. 조프는 아프지 않 은 손으로 그것을 들어올리려 했다. 그 때 조프는 국물 안을 둥둥 떠 다니는 파리 시체를 발견했다. 조프는 화가 났다. 그는 다시 그릇을 내려놓고는 그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파리를 건지려 했다. 그러나 조프는 자신의 손이 마른 피와 얼룩으로 엉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조프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릇 근처에 떨어지던 빛이 그의 몸을 비춰주었다. 피에 젖은 사지가 보였다. 배와 가슴에는 찢 어진 상처와 피멍이 가득했고 바짓자락 아래로 보이는 그의 발은 자 신의 발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어 있었다. 조프는 현기증을 느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조프는 그릇을 쳤다. 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조프는 뒤집힌 그릇과 바닥을 흐르는 국물을 보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조프는 털썩 드러누웠다. 부연 빛이 시야를 가려 감옥의 천장은 잘 보이지 않았다. 조프는 눈을 감았다. 먼 곳에서 코에디가 부르는 소 리가 들려왔다. 조프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는 파르다를 생각했다. 그리고 루마를 생각했다. 그리고 코에디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잠이 들었다. 파리가 귓가에서 잉잉거렸다. 너무 더웠다. 사모 페이는 언덕 아래에 모여서 있는 무수한 열을 보았다. 인간의 눈으로도 그곳에 있는 많은 횃불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 모처럼 병사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열까지 볼 수는 없었다. 가장 뜨 거운 한낮이 오기 전에 많은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시모그라쥬군은 새벽이 오기도 전, 아직 캄캄한 밤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해 출 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모 페이가 보고 있는 열은 상대적으로 뜨거 운 인간 병사들의 열이었고 그것은 북진하는 시모그라쥬공의 모든 병 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 병사들은 어차피 이 이상 북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는 막대했다. 그들은 푼 텐 사막의 서쪽을 통해 북진하여 엔거로 치달을 것이다. 한편 뒤에 남게 되어 있는 나가 병사들은 배후를 수비함과 동시에 카라보라-비 스그라쥬 방면, 즉 푼텐 사막 동쪽을 경유하는 길을 막기로 되어 있 었다. 수십만의 병사들 때문에 그들 주변의 공기마저 조금 뜨거워졌다. 사 모는 위로 피어오르는 희미한 구름 같은 열기를 보았다. 그 광경을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에 비유한다면 거대한 바다를 뒤덮은 안개와 비 슷했다. 사모가 있는 언덕은 안개 위로 솟아있는 섬의 꼭대기였다. 하지만 안개와 달리 사모가 보고 있는 것은 뜨거움이었고 그 속에는 불길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사모는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다. 옷속에 서 비늘을 살짝 세우며 사모는 생각했다. '그래, 그리미. 30만 년은 너무 길지. 하지만 저들에게 남아있을지 도 모르는 30년은?' "폐하!" 사모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언덕 위로 뛰어온 베로시 토프탈 상장 군이 으리으리한 갑옷을 입은 채 서있었다. 사모의 눈에 그녀는 몹시 뜨겁게 보였다. 조금 전까지 그녀는 말을 탄 채 직접 장병들 사이를 달리며 부위나 되는 것처럼 그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체온 이 오른 모양이다. 또한 그녀 자신의 흥분 또한 그 몸이 뜨거워진 이 유일 것이다. 베로시 토프탈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부디 보소서, 폐하! 폐하께 제국을 가져올 이들입니다!" 순간 사모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시원하다기보다는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모는 들썩거리는 비늘을 억누르며 천천히 일어났 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주위에는 인간 병사들이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많은 횃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횃불을 들고 있는 이들은 한계선 이남의 고위 귀족들이었고 그 중에는 두 명의 시모그라쥬공도 있었다. 아쉬 존 토프탈은 긴장 때문에 약간 어지러운 듯한 표정이었고 팔디곤 토 프탈은 차분하지만 빛나는 눈으로 사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가 그들 사이를 지나쳤을 때 두 시모그라쥬공이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 라 움직였다. 아쉬존은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선택되었는지 알고 있었 다. 조부는 병사들 앞에서 손자를 부각시키려 하고 있었다. 아쉬존은 할아버지를 동정했다. 대호왕은 그가 황제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아쉬존은 노인의 소망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그 일 자체가 마음에 들었기에 횃불을 들고 대호왕을 따르는 것에 동의했다. 이윽 고 그들 세 명은 언덕 끝에 있는 구조물에 도착했다. 그것은 허공을 향해 완만한 각도로 뻗어있는 계단처럼 보였고 복잡한 격자 구조의 기둥이 그것을 떠받치고 있었다. 대호왕은 계단을 올랐다. 잠시 후 대호왕은 계단 끝에 섰다. 그리고 횃불을 든 두 시모그라쥬 공은 그녀의 뒤편, 한 단 낮은 곳에 섰다. 아쉬존은 발 딛고 있는 계 단 좌우로 보이는 불빛의 바다 같은 광경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 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횃불들을 보며 아쉬존은 이 어둠 속에서도 지평선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횃불이 끝나는 지점 이 아마도 지평선일 것이며 그 뒤쪽의 어둠은 밤하늘일 것이다. 그들 모두가 침묵한 채 왕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짐의 말을 들으라." "내 말 들려? 제기랄, 대답하라고! 조프!" 갑작스럽게 코에디의 외침이 희미한 여명처럼 들려왔다. 조프는 대 답하지 못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깨어 있었지만, 자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코에디의 외침 때문에 조프는 자신이 깨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위는 어두웠다. 밤인 모양이다. 밤에 고함을 지르면 안되는데, 저 멍청한 자식. 여기엔 피제트라는 성질 나쁜 간수가 있다고.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프는 그것 보라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더럭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조프는 자는 척하기로 했다. 자는 사람이 고함 을 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조프는 눈을 꼭 감은 채 꼼짝 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팔다리가 긴장되어 더욱 아팠다. 조프의 눈 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 새끼가 아직 매운 맛을 덜 봐서!" "나다! 피제트!" "뭐야?" "나라고! 코에디 미도! 이 나쁜 자식아. 내가 고함을 질렀다!" 멍청이, 얼간이, 병신 같은 새끼. 진작 그랬어야지. 왜 저번에는 그 렇게 말하지 않았어? 조프는 어둠을 향해 코에디를 비난했다. 그리고 조프는 코에디의 비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엉뚱한 소리 였다. "이 자식아, 입 닥치고 잠이나 자!" "그렇게 못하겠는데? 왜? 나도 한 번 때려보시지?" "너 그 아가리 안 닥칠래?" "하, 군령자는 다치지 않게 하라고 했지? 이 멍청한 놈아, 다 알아 차렸다!" 조프는 깜짝 놀랐다. 군령자는 보호한다고? 왜? 똑같이 때리라고! 왜 군령자만 봐주는 거야? 저 자식, 저 나쁜 놈을 때려죽여! 그의 소 리 없는 항의에 대답한 것은 침을 퇘 뱉는 소리였다. 이윽고 쿵쿵거 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점점 멀어졌다. 코에디의 외침이 다시 들렸다. "피제-트! 어딜 가나? 나랑 놀자고!" 발소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코에디의 웃음이 들려왔다. 조프는 억울 함에 미칠 것 같았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 좋은 사람은 무참한 꼴만 당한다. 의리를 지키려 했던 사람이 누구냐? 조프는 통곡했다. 그러자 코에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프! 조프, 너냐? 네가 낸 소리야?" 조프는 대답 없이 울었다. 입에서 침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났다. 코에디는 계속 그를 불렀다. 조프는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사모는 연설을 했다. 그녀는 영광과 명예와 헌신과 용기에 대해 말했다. 또 그녀는 겁쟁 이의 죽음과 용감한 자의 죽음의 차이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용감한 이들이 죽을 때 그는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살게 되는 것 임을 역설했다. 사모의 연설을 짧게 요약한다면 그것은 대호왕의 영 광 아래에서 싸우다 죽으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연설 은 아름다웠다. 병사들은 전율했다. 그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세계의 유일한 구원자인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장병 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사모의 연설 이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다. "이름을 말하라!" 병사들은 극도의 긴장감과 흥분 속에서 재빨리 반응하지 못했다. 사 모가 다시 외쳤다. "누가 짐에게 제국을 가져올 텐가! 이름을 말하라!" "베로시 토프탈!" 베로시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사모의 뒤편에서 헐떡 거리던 아쉬존이 외쳤다. "아쉬존 토프탈!" 그리고 병사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외쳤다. 에브린 마카이! 네츠 고 하! 몇 번이고 외쳤다. 이데 그리몰스! 사리앙 에스베르타! 이름과 이름이 뒤섞였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소음에 뒤덮혀 사라지지 않 도록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외쳤다. 사모는 군대가 뿜어내는 거대한 열기를 보았다. 그것은 차가운 밤하 늘을 향해 꿈틀거리며 피어올랐다. 하나의 단일한 생명체가, 한 발로 산꼭대기를 짚고 다른 발로는 평야를 밟은 채 팔을 휘둘러 달을 쳐 떨어뜨릴 수 있는 거대한 생명체가 고고성을 터뜨리며 일어나는 듯했 다. 사모는 고개를 꼿꼿이 세워든 채 그 열기의 생명체를 바라보았 다. 그것은 별을 향해 으르릉거리는 사람을 닮은 맹수였다. 조프 엔킬더는 비틀거리며 걷다가 벽을 짚었다. 아침인 듯했다. 어쩌면 저녁인지도 모른다. 그를 갑자기 감옥에서 끌어낸 간수들 - 피제트는 없었다. - 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 다. 재수 좋다거나 다시는 오지 말라는 등의 잡담도 없었다. 그들은 귀찮은 표정으로 조프를 끌고 나와 어딘가에 내팽개쳤다. 조프는 몸 을 말아쥔 채 다가올 발길질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었다. 주저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조프는 자신이 길에 엎드려 있음을 알 게 되었다. 조프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감옥의 커다란 문이 보 였다. 페로그리미 남작의 성 지하감옥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조프는 진저리치며 일어났다. 그리고 허겁지겁 달렸다. 더 이상 달 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조프는 벽을 짚었다. 그것이 어디의 무슨 벽인 지는 몰랐다. 조프에겐 상관이 없었다. 조프는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대었다. 아침인 듯했다. 어쩌면 저녁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검푸른 빛이었다. 조프는 간신히 새벽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저녁의 이 즈음이라면 어딘가에 불빛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주위에 보이는 건물들에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 사람들이 지난 밤의 꿈을 잊어버릴 채비를 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조프는 일어났다. 그는 비틀거리며 걸었다. 가끔 벽을 짚고, 가끔은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걷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감옥 앞에서 도망칠 때 그는 무작정 달렸고, 그래서 방향을 가늠하지 않았다. 조프는 아는 곳이 나올 때까지 걷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페로그리미 시내는 알 만큼 안다. 곧 자신 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걸은 후에도 조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혹 그가 페로그리미가 아닌 다른 도시 에 갇혀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 포기하고 길가에 쓰러져 자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조프는 겨우 매달린 시체들을 발견 했다. 조프는 길에 앉았다. 검푸른 새벽 하늘 아래에 떠있는 것은 밧줄과 한 점의 고깃덩이들이었다. 조만간 이것을 철거해야 할 것이다. 시체 들이 너무 빨리 썩었다. 조프는 잠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문 득 조프는 이 근처에 파르다 쿠기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프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파르다가 서있곤 하는 골목을 찾 았다. 하지만 조프는 그 골목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까스 로 조프는 시력에 이상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조프는 시력보다는 기억에 의지하여 그 골목을 찾 아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파르다가 없었다. 조프는 텅 빈 골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다리가 질질 끌리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이 너무 빨리 썩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둘 사지가 썩어 떨어져나가면, 그는 마침내 고깃덩이가 될 것이 다. 페로그리미의 새벽을 걷고 있는 정체 모를 고깃덩이. 코에디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프는 멍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코에디 미도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푸아 편수 아래에서 나와 함께 일한 도제. 건조한 설명만이 떠올랐다. 조프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문제는 코에디 미도가 아니었다. 팔다리가 너무 빨리 썩는다는 것이었다. 어느 새 조프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문을 붙잡았다. 그 때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것은 루마였다. 루마는 그를 바라보고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조 프!"라고 외치고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조프는 허물어지듯 주 저앉았다. 루마가 다시 외쳤다. 조프는 그녀의 무릎쪽에 쓰러졌다. 뭔가 물건들이 와르르 떨어진 듯했다. 그 소리가 너무도 멀게 들렸 다. 호흡이 어려웠다. 조프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쓰러지며 열린 문 밖으로 검푸른 하늘이 보였다. 무엇인가가 그곳에 있었다. 하늘을 이고 똑바로 서있는 것. 그곳에 너울을 쓴 파르다 쿠기언이 있었다. 조프는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3. 죽음을 평가하는 태도 - 1 "안녕하세요. 언젠가 죽을 여러분." - 가이너 카쉬냅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지만, 수전사는 이마를 훔치지 않았다. 아까 부터 마른 나뭇잎이나 나무 껍질이 아닐까 생각되는 꺼끌꺼끌한 물건 이 웃옷 속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수전사는 감히 옷속에 손을 넣어 그 물건을 꺼낼 생각을 못했다. 가늘고 길게 숨을 내쉰 수 전사는 공기를 들이마시지 않았다. 호흡을 멈춘 채 수전사는 눈을 가 늘게 떴다. 먼 곳에서 무엇인지 모를 소음이 들려왔다. 수전사는 그 소리를 듣 지 못했지만 그가 노려보고 있는 여자가 소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은 보았다. 그 순간 수전사는 몸의 다른 부분은 움직이지 않은 채 왼발 엄지발가락과 오른손의 중지와 약지, 그리고 왼쪽 팔꿈치에 들 어가는 힘의 정도를 바꿨다. 그의 모습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수전사 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겠지만 수전사는 몸의 무게 분포 를 상당히 변화시키고 있었다. 여자는 그 소리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썹은 화가 나있 는 것 같았고 입은 체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눈은 꿈을 꾸 고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으면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 지도 모른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못된 버릇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코를 벌름거리다가 그 소리를 향해 왼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가 오 른발이 움직이려 할 때, 덤불 사이에 엎드려 있던 수전사는 땅을 밀 어붙이며 자신의 오른발을 가슴쪽으로 끌어당겼다. 수전사는 날아오르듯 펄쩍 뛰어올랐다. 여자는 당혹하여 몸을 돌렸 지만 그 때 수전사는 여자의 가슴 쪽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여자는 수전사의 투구와 번들거리는 눈까지는 보았다. 하지만 그 아래에 있 는 단검은 보지 못했다. 수전사는 여자의 몸에 부딪치며 단검을 그녀 의 배에 꽂아넣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쓰러졌다. 여자가 낮게 외 쳤다. "아야!" 수전사는 당황하여 왼손으로 여자의 코와 입을 틀어먹았다. 그리고 오른손에 쥔 단검을 비틀었다. 그 단검은 바닥에 쓰러지는 충격 속에 서도 여전히 여자의 배에 꽂혀 있었다. 수전사가 손목을 비틀자 여자 의 목이 뒤로 홱 젖혀졌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나왔 다. 수전사는 여자의 입을 뭉개버릴 듯 왼손에 힘을 주었다. 땀과 침, 콧물로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여자는 허옇게 변한 얼굴로 그를 바라 보았다. 수전사에겐 그녀의 눈을 가릴 손이 남아있지 않았다. 수전사 는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오른손을 다시 비틀며 더 세게 찔러 넣었다. 여자는 틀어막힌 입 대신 목으로 비명을 질렀다. 우욱, 윽,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전사는 오른손이 뜨거운 액체로 젖는 것 을 느꼈다. 여자의 피가 그의 단검과 그것을 쥔 손을 흠뻑 적시고 있 었다. 여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힘이 남아있다는 것이 믿어지 지 않을 정도로 격하게 여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전사는 그만 여 자의 입을 놓쳤다. 입을 막은 손이 사라지자 여자는 헐떡이듯 말했 다. "죽이지마." 수전사는 다시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심 하게 도리질치며 계속 말했다. "살 수 있어. 놔줘. 아, 아파. 아파. 칼을 뽑아. 흐윽. 죽이지…… 마. 제발." 수전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칼을 다시 비틀었다. 그의 단검은 여 자의 뱃속을 휘젓듯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는 작살 맞은 물고기인 양 몸을 크게 비틀었다. 갑자기 여자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눈물이 왈 칵 밀려나왔다. 여자는 입을 뻐끔거리며 몹시 졸린 사람처럼 머리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했다. 그러다가 여자는 잠꼬대처럼 말했다. "내일을 보……" 수전사는 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전사는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복부가 파헤쳐진 채로 피웅덩이 속 에 누워있었다. 수전사의 갑옷과 오른팔은 새빨간 피로 미끈거렸다. 수전사는 피와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자신의 단검을 바라보다가 그것 을 땅에 꽂아넣었다. 수전사는 다시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반나절 후에 찾아올 2월 7일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수전사는 잽싼 손놀림으로 여자의 소지품을 뒤졌다. 몇 닢의 은편과 무엇인지 모를 고약, 호부 삼아 가지고 있었던 듯한 염주, 올이 굵은 천으로 만든 손수건 등을 발견했다. 무엇인가를 감싸고 있는 손수건 은 묵직했다. 수전사는 손수건을 펼쳤다. 손수건 안에는 잘 닦아둔 수저가 들어있었다. 가끔 모래로 닦았던 듯 잔금이 많았지만 반들반들했다. 어쩐지 집에 서 쓰던 물건인 것 같다.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지 않게 된 이후부터 쓴 물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전사는 수저를 팽개쳤다. 단검을 뽑아든 수전사는 손수건으로 그 것을 닦았다. 그리고 오른팔과 갑옷도 대충 닦아내었다. 큰 성과는 없었다. 물에 넣어 박박 씻지 않는 이상 그 피는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다. 수전사는 피범벅이 된 손수건을 버리고 일어났다. 다리가 조금 저렸다. 여자는 눈을 뜬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선홍빛이었던 유혈 은 떠다니는 먼지와 땅의 흙을 빨아들여 혼탁하게 변하고 있었다. 수 전사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는 여자의 무기를 챙겨들었다. 힘이 모 조리 빠져나간 것 같았고 새로 추가된 무게는 부담스러웠다. 수전사 는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여자의 곁을 떠났다. 조금 전 그의 몸을 싸늘하게 만들었던 감정은 사라졌다. 수전사는 그것이 무슨 감정이었 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일어난 일은 별 것 아니다. 시모그 라쥬군 한 명이 죽었다. 그것뿐이다. 수전사는 햇빛이 따스하다고 생 각했다. 전역은 확대되고 있었다. 독수리와 까마귀의 오랜 적대 관계는 풍부한 영양 공급원 앞에서 마 침내 해소될지도 모른다. 32년 최초로 일어난 전쟁은 시모그라쥬의 엔거 침입이 아니다. 엔거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뽕나무 군단과 두 개의 독립중대는 하늘누리의 실종 이후 엔거 태수 잔디머 파르벳의 호의에 의지하여 지낼 수 있었고, 따라서 시모그라쥬군의 북진이 시 작되어 파르벳 태수가 그들을 소환하자 큰 고민 없이 그의 지휘를 따 르기로 했다. 하지만 파르벳 태수는 전쟁을 빌미로 엔거인들을 수탈 하는 일에 그들을 주로 이용하였다. 전쟁 상황에서만 가능한 긴급조 치를 남발하여 막대한 재물을 끌어모은 파르벳 태수는 시모그라쥬공 에게 밀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뽕나무 군단과 두 독립중대들을 넘기 는 대가로 엔거가 시모그라쥬공이 아닌 대호왕의 정복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파르벳은 정복자가 시모그라쥬공이 아닌 대호왕이라면 엔거인들도 받아들일 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협 상이 시작되자마자 잔디머 파르벳은 시모그라쥬공이 왜 그 졸렬한 활 약을 내버려두었는지 알게 되었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태수를 붙잡아 매단 다음 부당하게 획득한 재물을 엔거인들에게 돌려주며 대 호왕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주장했다. 엔거인들은 정의의 실현과 수 탈당한 재물의 반환에 환호했다. 점잖은 이들은 자신이 전자에 환호 한다고 말했고 보다 솔직한 이들은 후자에 기뻐했다. 그리고 통찰력 있는 이들은 엔거 전쟁이 전쟁이 아니라 멋진 사기극이라고 생각했 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엔거를 무혈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뽕나 무 군단과 두 독립중대도 아무런 출혈 없이 손에 넣었다. 엔거 태수 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그들은 엔거 태수가 매달리자마자 같은 제 국군인 시모그라쥬군에 합류하는 것이 낫다고 결정했다. 솥이 병영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결정은 그들을 만족시켰다. 키 탈저에 도착할 때까지. 본격적인 전쟁의 불꽃은 키탈저에서 피어올랐다. 키탈저 사냥꾼의 무서운 전설이 태어난 고향답게 키탈저 사람들의 성정은 거칠다. 대 호왕의 대행자인 시모그라쥬공의 대행인 자격으로 베로시 토프탈 상 장군이 보낸 항복 권고를 받은 키탈저 태수 아지엣 사카라는 "항복? 먹는 거냐?"라는 짤막한 답장을 써보냈다. 베로시 토프탈은 행간에서 낄낄거림이 묻어나는 문체로 항복은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력함 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굴복하는 것이라는 상냥한 답을 보냈다. 그러 자 아지엣 사카라는 "못 먹는 것이면 관심 없다."는 답장을 보냈다. 답장을 보낸 직후 사카라 태수는 키탈저의 유지들과 그 부근에 주둔 하고 있던 제국군을 모조리 소환했다. 키탈저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것은 여섯 개 독립중대였다. 여섯 명의 중대장과 키탈저의 유지들을 불러들인 사카라 태수는 건배를 제안한 다음 차분하게 말했다. "대호왕의 권리니 정통성이니 하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히 말하지요. 나는 시모그라쥬공이 마음에 안 듭니다. 새 황제를 선출한 다면 귀족원 회의를 열든지 고대의 만민회의를 부활시키든지 여러 방 법이 있습니다. 그런 취지라면 나는 호응했을 겁니다. 하지만 군대를 이끌고 오는 자와는 대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 방식입니다. 그러 니 싸울 사람은 남고, 살고 싶은 사람은 남으십시오." 모여든 사람들은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사 카라 태수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아, 죄송합니다. 한 마디 빠졌군요. 죽고 싶은 사람은 떠나십시 오."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 해소 차원에서 묻는 것임을 전제한 다음 어떻 게 떠나는 사람을 따라가서 죽이겠다는 것이냐고 물었다. 아지엣 사 카라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야 떠나는 사람들은 방금 비운 잔에 들어있는 독의 해독제를 나 한테서 받지 못할 테니까." 사람들은 그런 불쾌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무례라고 말한 다음 자신들은 그 독에 대해 알기도 전에 이미 사카라 태수와 함께 싸울 작정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사카라 태수는 크게 감동하여 그들의 저항 의지를 표현한 연판장을 쓰자고 말했다. 모여든 사람들은 그 연판장에 서명했다. 그 다음 태수는 그들에게 좋 은 음식을 먹고 푹 자라고 말했다. 수명을 단축시키는 독인 술을 해 독하는 것에는 그만한 방법이 없다면서. 좋은 해독방법을 알게 되어 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그 직후 유지들과 중대장들은 독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카라 태수가 알려준 해독방법으로 몸을 다스린 키탈저의 유지들과 중대장들은, 원래 태수와 함께 싸울 작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태수와 함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얼마 후 북쪽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이 도달하자 그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비나간이 자신들의 고토와 형제 자매들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 는 소식이었다. 키탈저인들은 기뻐했지만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난감한 기분도 약간 느꼈다. 키탈저인들은 비나간인과 달리 자신들이 키탈저 사냥꾼의 후 예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키탈저인들도 키 탈저 사냥꾼들은 제1차 대확장 전쟁 당시, 그러니까 800여년 전에 멸 망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스스로를 키탈저 사냥꾼들의 후예라고 믿 는 비나간인들의 모습은 키탈저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촌극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과거 비나간을 방문한 키탈저인들은 '형제자매'니 '먼 친척'이니 하는 은근히 친근한 척하는 대접에 당황하거나 웃으며 얼버무렸고, 속으로는 그런 태도를 비웃었다. 그런데 그 비나간인들 이 키탈저인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낸 것이다. 반신반의하는 그들 앞에 비나간 군대가 진짜 나타났을 때 키탈저인들은 은근히 따돌렸던 친구가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친구니까!'라고 말하는 것 을 목격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그런 낭만극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 녀가 보기에 비나간후는 단지 자신의 담장 밖에서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한 것뿐이다. 물론 전술상의 고찰 외에 전략적인 고찰도 있었을 것이다. 비나간의 완만한 평야보다는 키탈저의 험한 지형이 유격전에 더 적절한 장소이기도 했다. 하물며 그 지형에 익숙한 키탈저인들의 감성적 호의를 얻을 수 있다면 유리함은 몇 배로 늘어난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에 대한 평가를 '제국 실종의 혼란기를 틈타 증조부의 자리를 훔친 진부한 야심가'에서 '관찰이 필 요한 대상'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진지한 대접을 해주기로 결정했 다. 비나간-키탈저 연합군은 남부의 제국군이 왜 최강인지 뼈저리게 느 끼게 되었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유격전을 실시하는 그들을 주 의깊게 끌어내었다. 독립중대의 여섯 중대장은 끝까지 유격전을 고집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승부를 보기 위해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키 탈저의 유지들과 비나간군은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의 유인에 말려들 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회전에 응하자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아젤 키버 계곡과 허비트리 강변에서 나흘에 걸쳐 연속적으로 벌어진 세 번의 전투를 통해 그들을 가뭄 든 땅의 지렁이꼴로 만들어놓았다. 키 탈저군과 비나간군은 머리를 감싸쥔 채 도망쳐야 했다. "대호왕의 권 위에 복종하여 새 제국의 건설에 동참하라!" 바보가 아니라면 받아들 일 요구였다. 그러나 비나간인과 키탈저인은 바보가 되기로 했다. 험악한 전투에 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에게서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서로를 진짜 육친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키탈저인들은 그들에겐 삶의 터전이 라 오히려 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땅이 비나간인에겐 키탈저 사냥꾼의 성지라는 사실에 감동하며 자신의 땅을 새로운 눈으로 되돌아보게 되 었다. 그리고 비나간인은 키탈저인의 거친 모습에서 자신들이 잊어버 렸던 본류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기원을 지켜야 한 다고 결심했다. 고대의 전설이 - 그리고 공통의 적이 - 관계 없는 두 부류의 인간들을 묶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섯 명의 수교위를 보다 존중하게 되었다. 그들은 진작 그러는 편이 좋았다. 키탈저군은 키탈저의 유지들이 인맥과 사 재로 마련한 의용군이었기에 군사적 숙련도는 기대할 수 없었다. 비 나간후의 봉신들이 주축이 된 비나간군은 형편이 약간 나았지만 그 봉신들은 군사전문가라기보다는 통치전문가들이었다. 전문적인 훈련 이 왜 중요한가를 알게 된 그들은 여섯 명의 수교위를 주축으로 재결 집했다. 그리고 그들은 악착 같은 유격전으로 시모그라쥬군을 괴롭히 기 시작했다. 베로시 토프탈은 다시 그들을 회전으로 끌어내기 위해 애썼지만 연합군은 두 번 속아넘어가지는 않았다. "대호왕은 이전에 왔던 것처럼 군대 없이, 정복욕 없이 북부에 와야 한다!" 주고 받는 문구는 장엄했지만 주고 받는 죽음은 모두 장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배후에 유료도로당이 있었다. "결국 대장군이나 규리하공, 발케네공이 아니라 시모그라쥬공이 주 역이었군." "하지만 유료도로당의 배역은 짐작 못했어." "유료도로당은 비나간후에게 쏟아붓는 듯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최우선 도로 사용권 보장, 도로 사용료 면제, 도로 부대시설 완전 개방. 게다가 유료도로당원들이 비나간후를 위한 전령 노릇까지 하고 있으며,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당비가 비나간후에게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라는 끔찍한 사업을 진행하면서도 비나간후 의 재정과 출납 담당자들 중 그 누구도 화병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증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평범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도 세상 곳곳에 찾아드는 봄을 알아차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당히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추운 지 방에 속하는 세퀴라도에서도 봄의 재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 지만 세퀴라도에 갑자기 용인이 나타난다 해도 세퀴라도의 자유무역 당사 회의장에서는 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회의장에 앉아 있는 고위당원들 중에 화사한 봄옷을 입고 있는 이는 한 명도 없고 그들 중 그 누구도 날씨나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 때문이 다. 말도 아껴야할 재화라고 믿는 그들은 잡담에 조금의 시간도 할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가 진지하게 보였느냐 하면, 그렇지 는 않았다.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들의 말투 자체가 잡담 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별다른 감정의 변화 없는 담담한 어투를 이용하여 어떤 이들이라면 상당한 긴장감과 흥분을 표 현했을 주제들을 말하고 있었다. "비나간후의 재정관들은 화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해도 게라임 지울 비는 아들 때문에 화병이 나있겠군. 시오크 지울비의 주장은?" "귀족원 회의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설령 대호왕이라 해도 황제가 될 수 없다." "그게 당원들에게 먹혀들어갑니까?" "지금까지는 잘 먹혀들어가오." "거, 참. 재정이 굉장히 악화되고 있을 텐데." "은편 열 닢 받으려고 죽음의 거장과 전쟁을 벌였고 도로사용료 안 준다고 대장군 갈로텍도 막았으며 키보렌에 도로도 뚫었던 자들이오. 재정 악화에 대해서는 눈도 꿈쩍하지 않을 자들이지. 이상한 점은 따 로 있소." "그게 뭐지?" "도로의 평등을 포기했다는 것이죠. 유료도로당이 발칵 뒤집힌다면 재정 악화보다 그것 때문에 뒤집혀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안 뒤집히고 있소." "저 말이야, 제국군은 어떻지?" "제국군?" "저번 회의에서 제국군의 동향은 두 가지라고 들었어. 발케네공을 때려잡아 황제의 원한을 갚든가 제국군이 주축이 되어 새 황제를 선 출하는 것. 그런데 최근에 합류한 뽕나무 군단까지 포함해서 지금 적 지 않은 제국군이 시모그라쥬공의 휘하에 들어갔지. 그런 상황에서 다른 제국군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지? 그들이 다른 제국군처럼 우리도 시모그라쥬공을 지지한다고 떠들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끝나는 거 아냐?" "사실은 오늘 회의를 소집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겁니다." "제국군이 무슨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아무 반응도 안 보이고 있습니다." "뭐?" "아무 반응도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사라졌으니까요." 자유무역당의 고위당원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발언자를 돌아보았 다. 상석에 앉아있던 자유무역당주 지테를 시야니는 입매를 약간 씰 룩거렸다. "설명해봐." "제국군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대 주둔지 주변의 주민들은 그들이 어느 날 홀연히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이동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그 냥 사라졌습니다. 그런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라졌지?" "확인된 것만 20만 정도입니다." 천이 북 찢어지는 기세로 작은 비명과 한숨들이 터져나왔다. 자유무 역당의 회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발언자는 진지한 얼 굴로 말했다. "누군가가 그들을 규합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라진 태위? 아니면 대장군?" "이상하잖아. 20만이나 되는 병력을 호주머니에 넣어다니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 숫자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는 거대한 행정 조직과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텐데. 태위나 대장군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걸." "아니오.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다고?" "하늘누리의 비밀 보급소입니다. 그걸로 병사들을 먹이고 있는 거지 요. 태위 아니면 대장군이 분명합니다. 그 두 사람은 그 위치를 잘 알 테고, 또 그들의 명령이 아니고선 제국군이 그렇게 주저없이 따라 나서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대장군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지?" "제국군을 규합한 다음 규리하로 돌아가 하늘치를 다룰 수 있는 처 녀와 결혼한 다음 귀족원 회의를 열어 규리하공을 새 황제로 선포하 려면 태위보다는 대장군이 어울리니까요." 무지막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당원들은 입을 닫았다. 오 늘의 회의는 여러 모로 다른 때의 회의와 달랐다. 조금 후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듯하긴 한데, 증거가 있나?" "먼저 두 번째 안건을 들어주십시오." "그러고보니 회의 소집의 이유가 두 개라고 했지. 두 번째는 뭔데?"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에게서 재미있는 제안이 왔습니다. 도깨비 들을 건조막 대신 사용하는 대규모 연초 제조 시설을 만들어 연초를 싸게 납품하겠다는군요." 뭔가 맥락에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렸기에 당원들은 당황했다. 가 장 먼저 나온 질문이 연초의 북방한계선에 관한 이야기인 것은 그 때 문일 것이다. "규리하에서 연초를 어떻게? 거기서는 추워서 재배 못해." "규리하가 아닌 판사이입니다." "판사이? 아, 굴도하 남작?" "그렇습니다. 발리츠 굴도하 남작이 연초밭과 연초 재배자들을 담당 하는 계획인가 봅니다. 그러니 싼 연초에 관심이 있으면 투자비용 겸 선금조로 돈을 내랍니다. 자신들이 발케네공의 침략 때문에 재정적으 로 좀 피곤하다는 것까지 밝혔습니다." "그거 참 흥미로운 사업 제안이군." "이상한 제안 아닐까요?"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규리하공이 돈이 필요하다면 그냥 외조부인 지테 를 시야니 당주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간단할 겁니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지 않을까요?" 지테를 시야니 당주는 그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가볍게 턱을 움직였다. 발언자가 말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규리하공이 그런 사업 계획을 내놓은 것은 자신과 즈믄누리의 관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라고." 자유무역당원들은 동시에 입을 닫았다. 약간 어려워 하는 투의 목소 리가 조금 늦게 들려왔다. "그렇다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말이군." 발언자는 느리지만 힘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규리하, 하늘치, 즈믄누리와의 관계, 대장군이 데려올 제국군. 보통내기가 아닌 그 처녀가 가지고 있거나 가지게 될 힘입니 다. 그 중 몇 가지는 다른 사람이 흉내도 낼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들이 앉아있는 의자에는 등받이가 없었기에 당원들은 허리를 젖히 는 대신 거친 탁자 위에 팔을 얹었다. 그 자세로 그들은 탁자를 보며 당주의 말을 기다렸다. 지테를 시야니 당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의 지지를 받을 황제 후보를 찾은 것 같습니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몇몇 부하 장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 가 떠올린 얼굴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비늘에 덮혀 있었다. 그녀는 한계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놔두고 온 나가 장교들을 생각하 고 있었다. 한계선 남쪽에 있을 때 베로시는 자신이 실력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나가든 인간이든 관계없이 더 뛰어난 자를 귀하게 쓴다는 것이 그녀 의 지휘 철학이었다. 철학이랄 것도 없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지 금 베로시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부하 장교들은 나가 장교들이 아 니었나 의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옆에 없는 것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일 것이다. 그리고 곁에 있는 인간 장교들에 대한 실망도 그런 느낌을 부채질하고 있을 것이다. 베로시는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 고 있었다. 그래서 베로시는 말의 배를 확 걷어찼다. 그녀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는 것을 무시한 채 베로시는 말을 달려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녀는 괴물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성 기 사이를 달렸다. 공성기는 탕! 탕! 하는 신음을 토하며 돌을 날려 보내고 있었고 병사들의 구불구불한 진형은 파도처럼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돌과 화살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스팔성은 산이 되려다가 만 듯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이 었다. 멀리서 보면 그 경사가 그렇게 다급하게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서 보면 사정이 다르다. 흘러내리는 자갈과 흙모래, 그리고 복잡하게 쪼개진 바위들 때문에 비교적 완만한 경사도에도 불구하고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일이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까다롭다. 게다가 경사가 완 만하기 때문에 걸어야 하는 거리는 더 길다. 소나기처럼 퍼붓는 화살 과 투창을 용케 피해 그 미로를 통과한다 해도 장애물은 끝나지 않는 다. 자연암과 어우러지게 만든 이중 성벽은 방어자에겐 광활한 시각 을 제공하지만 공격자에겐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을 제공한다. 지형 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탁월한 축성술로 지어진 그 성벽 앞에 선 사람 은 성벽의 견고함이 아니라 성벽의 부실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것은 공격자의 사기를 북돋는 부실함이 아니다. 공격자는 벽이 자신 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압 박감 속에 공격자는 이미 주눅이 들고 거기에 투석과 화살이 더해지 면 성벽을 기어오를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된다. 도망친 사카라 태수와 비나간-키탈저 연합군의 주력 부대가 자리잡 고 농성하고 있는 곳은 바로 그런 성이었다. 나스팔성을 보자마자 베 로시는 그 성의 함락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베로 시는 공성기를 제작하도록 명령했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제작된 공 성기들은 마치 용의 무리처럼 장대한 모습으로 서있었지만, 그 파괴 력은 도저히 용에게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공성기의 조작을 맡은 장 교와 병사들은 도무지 탄착군을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특별히 질이 떨어지는 몇 기의 공성기는 사격을 포기한 상태였는데, 그것은 언덕을 오르는 아군의 머리 위로 돌이 떨어지는 낭패스러운 꼴을 몇 번 연출한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베로시 상장군이 아쉬워 하는 나가 장교들이 기온의 한계를 뛰어넘 어 이곳에 도달한다 해도 상황을 개선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예 제국군으로 일컬어지는 그들도 공성기에는 친숙하지 않았다. 밀림에 서 공성기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다. 또한 나가들은 성을 만들지 않 는다. 그들은 공성기를 제작하거나 다룰 이유가 없었다. 공성기의 제 조 방법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제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 공성 기들이 자신들이 낭비한 노동력과 자원의 기념비인 것 같다고 생각했 다. 그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아직 사격을 포기하지 않은 공성 기들은 자신의 무용함을 감추기 위해 열심히 돌을 날려보내고 있었지 만 성에 제대로 탄환을 날려보내는 것은 한 기도 없었다. 그래서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그녀는 말을 달려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교위들과 부위들의 지 휘를 받으며 힘겹게 언덕을 오르던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최고 지 휘관의 모습에 경악했다. 기겁한 그들을 향해 베로시는 노호했다. "일어나라! 일어나!" 베로시는 사이커를 뽑아들었다. 바위 틈에서 화살을 피하며 숨을 돌 리던 병사들이 일어났다. 쓰러진 시체 뒤편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병 사들이, 말라죽은 고목 뒤편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일어났다. 그녀는 병사들의 후열을 따라 달리며 독전했다. "물러서는 자는 내 손에 죽는다! 달려라! 숨이 터지도록 달려라! 서 있으면 죽는다! 몇 걸음만 더 오르면 거기가 정상이다! 너희들은 최 고다! 저까짓 잡병들이 너희들을 막지는 못한다! 누가 도시연합과 마 주한 채 매일 전쟁을 준비했나! 너희들이다! 누가 앞이 보이지도 않 는 키보렌을 걸었나! 너희들이다! 누가 제국을 되찾을 것인가! 너희 들이다!" 그녀를 알아본 수비자들이 화살을 집중적으로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날아온 화살 무더기가 주위에 꽂히는 것을 보며 베로시는 격분했다. 분노로 달아오른 볼을 부풀리며 베로시는 외쳤다. "대호왕의 병사들아! 가라!" 병사들은 충성스럽게 베로시의 외침을 따랐다. 그들은 바위를 기어 오르고 비탈을 달려올라갔다. 자꾸 미끄러지는 몸을 악착 같이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와 꿈과 미래와 헤어졌다. 시체들이 자갈을 타고 굴러내렸다. 시체들이 길을 막고 쓰러져 후열의 전진을 막았다. 시체들이 바위에 부딪히며 튀어올랐다가 아직 살아있는 전우 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급류 같은 죽음이 시모그라쥬군에게 몰아 닥쳤다. 공격자들의 공세도 대단했지만 방어자들의 의지는 더 놀라웠다. 해 가 떠있는 동안 계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성벽을 넘은 시모 그라쥬군은 얼마 되지 않았고 두 번째 성벽을 넘은 병사는 극소수였 다. 해가 지는 것을 본 베로시 토프탈은 어쩔 수 없이 퇴각을 명령했 다. 물러나는 시모그라쥬군을 보며 성벽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 다. 밤은 슬픔과 고통의 수행을 받으며 찾아왔다. 상처 입은 병사들의 신음과 비명, 울음소리가 시모그라쥬군의 진지 위로 범람했다. 그런 소음 속에서 시작된 작전 회의의 분위기는 당연히 침울했다. 베로시 는 먼지를 잔뜩 마신 목을 달래기 위해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좀 더 진한 것이었다. 술에 대한 유혹을 떨쳐낸 베로시 는 참모들에게 타개책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타개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스팔성 공략에 참가한 시모그라쥬군 은 전체 시모그라쥬군의 일부였다. 넓어진 전선을 감당하기 위해 시 모그라쥬군은 키탈저 이곳저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만약 그 병력이 모두 결집한다면 나스팔성은 결코 난공불락을 자랑할 수 없다. 참모 들 대다수는 그 타개책에 유혹을 느꼈고 베로시 또한 그러했다. 하지 만 베로시는 고개를 세로젓지 않았다. 그 병력들이 현재 주둔하고 있 는 곳에서 물러나면 그곳에서는 새로운 저항세력이 나타날 것이다. 그 병력들이 현지민들 사이에 협력 조직을 만들어놓기 전에는 그들을 불러들일 수 없다. 급진적인 참모들은 베로시의 교전 원리가 지나치게 구식이라고 주장 했다. 베로시는 가만히 그들의 말을 경청한 다음 느리지만 분명한 방 법으로 그들을 얼간이로 만들어놓았다. "대호왕 폐하의 폭풍 같은 남진이 멋있다고 생각하겠지. 기동전을 하고 싶다는 것이겠지. 잘 들어라. 대호왕 폐하께서는 북부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고 그 분의 전략 목표는 하텐그라쥬라는 단 하나의 도시 뿐이었다. 그 도시만 섬멸하면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폐하께서는, 그리고 라수 규리하는 전사상 유래가 없고 앞으로도 있 기 힘든 기동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정반대다! 우리에게 하 나의 목표가 어디 있나? 그곳을 점거하면 제국을 재건할 수 있는 한 장소가 있다면 본관에게 좀 말해주기 바란다. 본관은 그런 곳이 어딘 지 모르겠거니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우니까. 대답하지 않을 텐가? 제기랄, 당연하지! 그런 곳은 없다. 우리가 노리는 것은 하나의 도시 가 아니라 제국 전체다. 그런 상황에서 손실율이 가장 높은 기동전을 실시하자는 것은 멋있게 죽자는 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귀관들은 장교의 자격이 없다. 게다 가 오늘의 패배로 수치를 알아야 할 귀관들이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 고 상관의 교리를 폄하하는 모습에서는 책임 회피의 의도도 엿보인 다. 장교가 절대적 명령권을 가지는 것은 무거운 책임을 거부하지 않 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교가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면 그것은 죽음으 로도 갚을 수 없는 죄다!" 베로시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장교들을 쏘아보며 생각했다. '아쉬 존. 나는 이 말 한 마디도 안 믿는다. 이걸 보여줘야 되는 건데.' 하 지만 아쉬존 토프탈은 대호왕의 곁에 있었다. 장차의 제국은 아쉬존 의 것이 된다는 것이 일족의 결정이었다. 따라서 아쉬존은 보호되어 야 한다. 장교들은 도도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딱딱하 게 굳어 있어 자존심 때문에 위장한 표정이라는 것을 당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베로시는 그 표정을 보며 그들을 좀 더 몰아붙일 것인지, 그렇잖으면 조금 풀어줄 것인지 고민했다. 그 때 한 수교위가 말했 다. "귀족원 회의를 개최하면 되겠군요." 수교위는 말을 끝낸 후에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혹하고 있었지만 이미 다른 장교들과 베로시 는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교위는 우물쭈물하다가 갑자기 터지듯 입을 열었다. "제국을 재건할 수 있는 하나의 장소를 알려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 까? 그런 장소는 만들 수 있습니다. 귀족원 회의지요. 그리고 대호왕 폐하를 선출하면 됩니다. 그렇잖습니까?" 베로시는 수교위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말했다. "저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 있나?" 장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베로시와 수교위를 바라보았다. 그 중에는 드물지만 호기심을 드러내는 표정도 있었다. 베로시는 말하고 싶었다. 공정한 귀족원 회의가 가능할 거라 믿는 거냐고. 고 아라짓 왕국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규리하공이 나 귀족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발케네공과 같은 자들에 비 하면, 비록 공작이라 해도 시모그라쥬공은 신흥귀족이나 다름없다. 지금의 시모그라쥬공은 외숙부의 이름을 따 스스로 토프탈이라는 성 을 붙이기 전까지는 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였다. 그런 시모그라쥬 공은 오직 실력으로 자신을 증거할 수밖에 없다. 대호왕이 나타나기 전, 일족은 토프탈의 후예를 황제로 만드는 방법은 오직 실력 행사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호왕이 나타난 이후에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수교위의 말처 럼 지금 당장 귀족원 회의를 개최한다면 대호왕 자신이 새 황제로 선 출될 가능성은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귀족원 회의를 통해 대호왕을 새 황제로 선출한다면 그녀를 황제로 만든 이는 모든 귀족이 된다. 그 경우 시모그라쥬공이 끝까지 대호왕을 통제할 방법은 없게 되며, 따라서 아쉬존으로 하여금 대호왕의 뒤를 잇게 하는 계획도 성공 가 능성이 불분명해진다. 다른 모든 방법은 고려할 수 있지만 귀족원 회 의만큼은 절대로 고려할 수 없다. 그것은 대호왕에게 이용당하는 꼴 이다. 이용하는 쪽은 일족이어야 한다. 발케네공을 이용하여 치천제 를 사라지게 한 것처럼, 대호왕을 이용하여 토프탈의 제위 획득을 노 려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었다. 베로시는 수교위를 노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다행이군. 귀족원의 첩자로 의심할 사람이 한 사람뿐이니." "상장군님!" "우리가 그 분을 찾았다. 그리고 그 분이 찾으신 것이 바로 우리다. 그런데 귀족원 회의 따위를 열어 저들에게 그 분을 선출하는 영광을 나눠주자는 건가? 심지어 저들은 폐하께서 한계선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트집 잡아 다른 황제의 선출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런 짓을 용납해야 하나? 명심해라. 우리는 한계선을 넘을 수 없기에 저 남쪽 에 계신 분의 대행자다. 이곳에서 우리는 그 분을 대행하고 있는 것 이다. 우리는 스스로 황제라 생각해야 한다. 우리 한 명 한 명은 황 제답게 행동해야 한다." 자랑스러움을 고취시키는 말이긴 하지만 뭔가 맥락이 불분명한 말이 었다. 하지만 장교들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아차렸다 해도 지적하지 않았다. 분노와 공포로 하얗게 변한 수교위의 얼굴에 서 알 수 있듯 다른 곳도 아닌 병영에서 첩자라는 섬뜩한 지명을 받 는 일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들은 열성적으로 베로시 의 말에 찬성했다. =============================================================== 23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3-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7-09 조회수 : 1470 피를 마시는 새 23. 죽음을 평가하는 태도 - 2 오늘의 실패원인을 검토하고 내일의 타개책을 모색하기 위해 시작된 회의는 단합대회 비슷한 것으로 끝났다. 화려한 단어들을 무차별적으 로 동원하여 베로시는 그들에게 자부심을 잔뜩 불어넣었다. 자부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군인의 밥상에 항상 오른다. 베로시가 한 일은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유익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의 병사들은 원래 군기가 투철한 편이다. 부위급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 는 일을 최고지휘관이 했다는 것은 결국 그녀가 그 회의를 통제할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 베로시는 이 전쟁이 대호왕의 황위 등극이 아니 라 토프탈 일족의 심모원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 부각되는 것 을 원치 않았다. 회의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베로시는 그래서 정신적인 피로감을 느꼈다. 그녀는 간이 의자에 앉아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이것은 첫 번째 난관일 뿐이다. 늦든 이르든 키탈저는 가질 수 있 다. 키탈저를 정복하면 칼리도, 림츠, 살본, 하이스로 가는 길이 열 린다. 그 다음은 시구리아트 산맥 서쪽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시구리 아트 동쪽은 보다 정치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은근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즈믄누리와 직접 격돌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베로시는 시구리아트 동쪽의 누군가가 즈믄누리에 도움을 요청하고 즈믄누리가 그 요청에 호응하는 모습은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구리아트 서쪽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단 한 군 데, 시구리아트 서쪽에서도 가장 서쪽에…… 베로시는 지도의 북서쪽에 있는 규리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즈 믄누리에서 자라난 신비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제국의 극동에 있는 즈믄누리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규리하라는 지명을 진지하게 바라 보던 베로시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멀리 보고 있다. 지금 목전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훨씬 가 까운 곳에 있는 여자다. 베로시는 지도를 바라보던 시선을 남쪽으로 옮겨 비나간을 보았다. 탁상공론과 현실의 차이를 은유하는 속담이나 금언은 많지만 그래도 베로시는 비나간후와 유료도로당의 결합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유료도로당이 비나간후에게 협력하 고 있다면 비나간군은 안전한 퇴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지금 적극 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은 그런 안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키탈저, 비나간, 유료도로당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게라임 지울비를 구출해야겠군." 베로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이 떨 어진 곳은 지도 위에서 정치적 영향력의 등고선을 그려내곤 하는 사 람들의 시각에는 별로 포착되지 않는 평야였다. 그곳에는 켄테롭이라 는 이름이 있었다. 태양이 산봉우리에 걸터누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물의 측면 에 그림자가 지고 그 외의 다른 부분은 금적색으로 변했다. 정우는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부신 듯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하늘낚시터?" 정우의 질문에 세레지가 말했다. "예. 각하. 야리키가 원하는 것은 물고기가 허공에 동동 떠다녀서 물이 필요없는 낚시터에요. 야리키는 당신이 그걸 만들어줄 수 있다 고 생각해요." "어쩌죠. 저는 그런 것 못하는데." "야리키도 알아요. 그래서 각하께서 그런 능력을 개발할 때까지 기 다릴 생각이에요." 쿵쿵 하는 발소리에 세레지는 고개를 돌렸다. 야리키가 부서진 삽을 들고 노천대장간을 향해 걷고 있었다. 노천대장간에 도달한 야리키는 분노와 공포로 질린 지노피를 무시한 채 부서진 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리가 끝난 삽을 집어들고는 뚜 벅뚜벅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지노피 말티는 갑자기 비명을 지 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노피를 돕고 있던 히다 켄은 당황하여 친 구의 허리를 붙잡았다. 지노피는 팔다리를 내두르며 외쳤다. "놔! 더 못 고쳐! 나 죽는다고! 제발, 네가 내 친구라면 이것 놔!" "야, 이 멍청한 대장장이야, 네가 삽 안 고치면 누가 고치냐?" "저거 도대체 뭐야? 뭐냐고? 왜 쉬지도 않는 거야? 삽질하는 사람은 끄떡없는데 삽 고치는 사람이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 말이 되냐!" 정우의 곁에서 지노피의 침 섞인 외침을 듣던 세레지는 고개를 끄덕 였다. "확실히 말이 안되지." 지노피가 처음부터 야리키의 노역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불 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지노피는 야리키의 최대 협력자였다. 사흘 전은 정우가 골케 남작과 지노피 말티, 그리고 히다 켄과 함께 아스캄에 도착한 날이었다. 아스캄에 도달한 정우는 곧 근방의 노인 들을 모아들여 위문잔치를 벌이고 청원자들을 만나 의견을 듣고 재판 을 주재했지만, 성을 도로 파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정우가 성을 도로 파내주기 위해 함께 온 것이라 짐작한 골 케 남작은 그만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혹시 성을 도로 파내줄 생각은 없냐고 묻지도 못했는데, 정우가 데려온 인원은 변경백의 수행인으로 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큰 공사를 할 인력은 아니었다. 골케 남작은 결국 엉겅퀴 여단이 없으니 정우도 성을 도로 파낼 능력이 없으며 아 스캄에 온 것은 그 사실을 고백하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판단 했다. 정우에게 불가능한 소망을 말해서 그녀를 미안하게 만들 필요 는 없다고 생각한 골케 남작은 달관한 심정으로 파묻힌 성을 잊기로 했다. 그런데 정우를 따라왔던 야리키가 지나치게 눈에 잘 들어오는 그 성 무덤을 보고는 그것이 뭐냐고 묻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야리키는 정우가 엉겅퀴 여단을 동원하여 그것을 파묻었고 때가 되면 도로 파 내줄 거라 약속했으며, 세 명의 아스캄 사람들이 아이솔 형제와 함께 규리하성에 찾아온 것은 그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답을 들은 야리키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러면 내가 파 내주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을 때 유일 하게 야리키를 거들고 나선 것은 지노피였다. 지노피는 야리키를 적 극적으로 지지하며 연장에 대해서는 자신이 모두 책임을 지겠다고 나 섰다. 그리고 지노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도 지노피의 제안이 무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무모 한 것은 야리키 쪽이었다. 하지만 야리키는 사람들의 상식을 거부했다. 지노피가 단단한 나무 판자를 쇠테와 쇠막대 등으로 보강한 대형삽을 만들자 야리키는 그것 을 들어올리며 다른 삽을 계속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삽을 어깨 에 매고 성무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지노피는 의아해하며 두 번째와 세 번째 삽을 만들었다. 그가 네 번째 삽을 만들었을 때 야리 키는 부서진 삽을 내려놓고는 새 삽을 들고 돌아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노피는 야리키의 지구력에 순수하게 감탄할 수 있었다. 하지 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노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야 리키는 레콘의 특징적인 폭발력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는 결코 서 두르지 않았다. 이틀째 되던 날 찾아와 그 모습을 관찰하던 세레지는 그런 태도가 조사를 목표로 하기에 체득한 것이라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어쨌든 야리키는 서두르지 않았지만, 또한 쉬지도 않았다. 그는 계속 땅을 팠다. 그리고 계속 삽을 망가뜨렸다. 지노피는 긴장 하며 부서진 삽을 고쳤다. 하지만 한 번 망가졌다가 고친 삽은 더 빨 리 파손되었고 그래서 삽의 사용 시간이 점점 짧아지자 지노피는 여 유를 잃었다.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삽을 고쳤고, 그의 얼굴에는 점 점 공포가 피어올랐다. 정신없이 망치와 집게를 휘두르며 지노피는 야리키가 쉬려는 기색이 없는지 살폈다. 하지만 야리키는 처음 성무 덤을 향해 걸어갔을 때처럼 완만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땅을 팠다. 그 리고 잠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그 의 손 아래에서 지형이 변경되었다. 땅파기가 시작된지 사흘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 장관 을 구경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바쁜 일정을 쪼개어 찾아온 정우도 있 었다. 아스캄 사람들은 오래 전 지형이 변경되는 것을 보았다. 하지 만 단 한 사람의 손 아래에서 지형이 변경되는 것을 보자 그들도 침 착을 유지할 수 없었다. 물론 엉겅퀴 여단의 300명이 동원되었던 이 전에 비해 그 속도는 현저하게 느렸다. 땅파기가 시작된지 사흘째였 지만 겨우 성의 최상부가 약간 드러났을 뿐이다. 하지만 야리키는 그 삼백 명과 똑같은 태도, 즉 자신이 성채를 파묻거나 파내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특별한 결의 없이, 그저 식탁으로 걸어갈 때 필요한 정도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듯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삽이 다시 부서졌다. 도망쳐야겠다느니 그래선 안된다느니 하며 다투던 지노피 말티와 히 다 켄은 동시에 멈춰섰다. 그들은 성무덤의 정상쪽을 바라보았다. 어 느 정도 드러난 성의 최상층부 사이에서 작업하던 야리키는 부서진 삽을 집어들고 있었다. 잔해를 주워모은 야리키는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뚜벅뚜벅 걸어내려왔다. 하지만 노천대장간에 도달해서 삽의 잔해를 떨어뜨린 야리키는 새 삽을 주워들지 않았다. 지노피가 새 삽을 준비해두지 못한 탓이다. 부서진 삽들 사이를 둘러보며 새 삽이 있는지 찾던 야리키는 얼어붙 어있는 대장장이와 그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야리키는 두 팔을 천천 히 들어올려 양쪽으로 뻗었다. 그의 어깨와 관절 쪽에서 건물 무너지 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레지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지만 정우는 감탄하며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야리키는 두 팔을 다시 늘 어뜨리며 말했다. "좀 튼튼하게 만들어라. 오래 쓰도록." 지노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야리키는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해도 졌으니 오늘은 그만하자. 배가 고프군." "음식 여기 있어요!" 정우가 외쳤다. 고개를 돌린 야리키는 정우와 세레지, 그리고 몇 명 의 병사들을 발견했다. 야리키는 그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 뒤편에서는 지노피와 히다가 땅에 주저앉았다. 정우 앞에 도달한 야 리키는 질문했다. "언제 왔어?" "삽 다섯 개 전에요." 정우의 독특하지만 적절한 시간 단위에 세레지는 킥 하는 소리를 냈 다. 야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왔어?" "세레지가 병사들과 함께 엄청난 음식을 준비해서 이곳으로 오려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그게 다 누구 먹을 거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여기서 일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사흘 전부터 그랬다고요?" "맞아. 그런데 음식은?" "저기 있어요." 정우가 가리킨 곳에는 수레가 있었다. 거기엔 큼직한 시루와 함지들 이 놓여 있었다. 야리키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곤 그쪽으로 걸어갔다. 술함지를 발견한 야리키는 세레지 쪽을 쳐다보았다. 세레지는 제가 규리하공에게 말했거든요? 하는 표정을 돌려주었다. 야리키는 눈으로 살짝 웃고는 술함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함지째로 마시기 시작했 다. 이미 한 번 본 모습이지만 세레지는 다시 감탄했고 정우는 놀라 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야리키는 그날 종일 그랬듯이 느리지만 끊임없는 동작으로 통돼지 한 마리, 삶은 감자 한 바구니, 구운 생선 일곱 마리, 국 두 솥, 그 리고 술 세 함지를 비운 다음 성무덤이 잘 보이는 나무 아래로 걸어 갔다. 그 나무 아래에는 야리키의 낚시대가 놓여 있었다. 하늘을 잠 시 살펴본 야리키는 밤 동안 비가 올 것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는 그대로 낚시대 옆에 누웠다. 털썩도 아니고 조심스럽지도 않았다. 눕는다기보다는 느리고 확실하게 몸을 땅에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 게 자리를 잡은 야리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가 식사를 시작할 때부터 정신없이 바라보던 세레지는 혀를 차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주위에 상당수의 사람이 있었지만 야리키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 했다. 야리키는 먹거나 자는 일을 하지 않고도 계속 땅을 팔 수 있다 면 그랬을 것 같았고, 따라서 잡담을 나누거나 하는 일에 시간을 할 애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사흘 동안 한 번도 잘 먹었다느니 먼저 자겠다느니 하는 말을 듣지 못한 세레지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 예. 피곤하고 배 부르니 먼저 자겠다고요? 그러세요!" 야리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우가 당혹하여 입 앞에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몹시 낮춰 속삭였다. "잘 모양이니 떠들지 말아요, 세레지." "아, 예. 그러죠. 각하께서도 돌아가서 저녁 드셔야지요?" 정우와 세레지, 그리고 그들의 수행병들은 아스캄 시내에 마련된 처 소로 돌아갔다. 넋빠진 표정의 지노피도 히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 났고 몰려와 구경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중 에는 드러누워 있는 야리키에게 뭔가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 아무도 야리키에게 다가오지 않았 다. 누군가가 다가갔다 해도 무관심보다 나은 반응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땅에 드러누워 눈을 감은 직후 야리키는 이미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자던 야리키가 눈을 떴을 때 밤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심야인지 새벽인지 알 수 없었다. 야리키는 별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왜 잠에서 깼는지 생각해 보았다. 조금 후 그 답이 그의 머리가 아닌 귀를 통해 떠올랐다. 고개를 조금 돌린 야리키는 노천대장간 쪽에 불 이 밝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는 지노피가 등을 보인 채 부서진 삽을 고치고 있었다. 야리키는 일어날까 하다가 그냥 누워있 기로 했다. 지노피에게 시간을 좀 주는 의미도 있었지만 야리키는 공 복에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야리키는 세 레지가 아침 식사를 가지고 도달할 때까지 좀 더 자기로 했다. 하지만 또다른 방해가 있었다. 야리키가 다시 머리를 똑바로 했을 때 저편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 있었어요?" 야리키는 눈만 흘끔 움직였다. 어둠 속에 조그마한 그림자가 보였 다. 야리키는 그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와 옆에 서는 것을 기다려 말 했다. "지금 새벽이냐, 밤이냐?" "새벽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왜 혼자냐?" "다른 사람들은 자고 있어서 그냥 몰래 나왔어요. 당신이 일 시작하 기 전에 이야기도 좀 하고 싶었고." "무슨 이야기?"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저는 하늘낚시터를 만들 수 없어 요. 야리키." "세레지가 말했군."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야리키의 머리 옆에 앉았다. 하늘의 빛이 조금씩 바래고 있었고 풀잎 사이에서는 바람이 결로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제 당신 일하는 거 보면서 세레지가 말해줬어요. 저한테 바라는 것이 있어서 저렇게 일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뭘 바라는 거냐고 물었 더니 당신이 하늘낚시터를 원한다고……" "잘못 알려줬다." "그런가요?" "그래. 내가 땅을 판 건 다른 바쁜 용건도 없기 때문이야." 정우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선택한 소일거리치고는 그 규모가 좀 지나치게 막대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하늘낚시터를 만들어주길 기대하시는 것은 사실이죠?" 야리키는 별들을 두서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잖아도 그거 여쭙고 싶어요. 왜 세레지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 셨죠? 당신 숙원을 이룰 방법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싫어서." "예?" 야리키는 손을 약간 들어 기다리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리고 어떻 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정우는 일하고 있는 지노피의 모습을 보며 잠자코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 야리키가 부리를 열었다. "내 숙원은 하늘낚시터를 가지는 것이 아니야. 조사가 되는 거지." "아, 예." "하늘낚시터는 조사가 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지. 하지만 네게 하늘낚시터를 만들라고 말하면 나는 곧 하늘낚시터가 내 숙원인 것처 럼 착각하게 될 거야. 그래서 조사가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찾아보 려고 하지도 않을 테고." "음. 그런 성격이세요?" "내가 아냐. 인간이 그런 성격이지." "예?" "인간하고 이야기 하다 보면 항상 뭐가 목적이고 뭐가 수단인지 헷 갈리게 되더라고. 그래서 아예 말을 하지 않아." "어, 킴이 그런가요?" "킴? 너 도깨비냐?" "태어나자마자 즈믄누리로 가서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거기서 살았 어요. 그래서 반은 도깨비나 마찬가지죠." 야리키는 부스스 일어났다. 그는 정우의 얼굴을 보았다. 일출을 예 고하는 투명한 공기 속에서 야리키는 정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 다. 야리키는 그 얼굴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정우 규리하. 나의 숙원은 조사가 되는 것이다. 만약 네가 하늘치 를 자유롭게 다룬다면 하늘치가 공중에 떠있는 이유도 알 수 있을 테 고, 그렇다면 하늘치가 아닌 다른 생선들도 공중에 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나는 내가 레콘이기에 가지 는 애로점에 구애되지 않고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하 늘치가 허공에 뜨는 방법을, 그리고 그 방법을 다른 생선들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어주면 좋겠다." 정우는 멍한 표정으로 야리키의 진지한 말을 들었다. 그 말이 끝난 후에도 정우는 한참 동안 정신없이 야리키를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지금 제가 반은 도깨비라는 말을 들어서 그렇게 말씀하 시는 거예요?" "그래. 노력해줘." "지금 당장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러죠. 그 런데 제가 완전한 인간이었다면 그 말씀 안하셨을 거란 말이죠?" "안해." "목적과 수단을 헷갈리게 될 테니까?" "가능성이 높아." "왜 킴하고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데요?" "몰라." "음. 하지만 경험상 그렇더라는 거죠?" "경험상 그래." "묘하네요." "뭐가?" 정우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제가 킴들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저 는 시시한 것에 열중하는 킴들을 봤거든요. 저는 그 사람들에게 주어 진 시간이 짧아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말씀 듣고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들이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서 그러는 건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건가? 아, 어렵다. 새님이 있으시면 좋을 텐데." "그 쇳덩어리 장난감 말이야?" "나이가 오백 살이세요. 규리하성에 돌아가면 여쭤봐야겠어요."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해주셔서 고맙고요, 어떻게 하면 하늘낚시터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해볼게요. 사람들이 저 없어진 것 알면 놀랄 테니까 이만 돌아가 볼게요." "여기엔 며칠 동안 있을 거지?" "뚜렷한 계획은 없어요. 이 순례행은 민심을 관찰하고 청원을 듣고 전쟁 때문에 놀란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이고, 그래서 필요하다면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도 있고 빨리 떠날 수도 있어요. 아스캄에서의 일은 며칠 있으면 대충 끝날 것 같아요. 그런데 왜 물어보시죠?" "그 동안 성을 파내고 함께 떠나려고." "예? 300명의 레콘이 반나절 걸려서 파묻었어요. 당신은 혼자니까 단순히 계산해도 150일은 걸릴 텐데요." 야리키는 눈을 끔뻑거렸다. 문득 정우는 의심을 느꼈다. "설마 짐작 안해보신 거예요?" "전에 해 본 일도 아닌데 어떻게 짐작했겠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 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우는 빙그레 웃었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야리키의 태연 함은 그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 한 것이었다. 정우는 야리키가 이리저리 가늠해보기에 앞서 일단 시 작하는 성격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늘치를 다루는 정우를 보자마자 그녀 곁에 남은 거나 성무덤을 보자마자 별 생각없이 삽을 집어든 것 을 보면 그런 추측이 맞는 것 같다. "며칠 안에 저걸 다 파내지는 못하겠지요. 그냥 하시는 데까지만 하 시고 저와 함께 떠나요." "성을 파내줄 생각이 없었군." "예? 설마요. 다시 파내주겠다고 약속했는 걸요." 야리키는 미심쩍은 눈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가 말했다. "곧 성을 파낼 사람들이 올 거예요." "파낼 사람들?" "전쟁유민들. 파라말 아이솔 산공부사께서 상당히 애써주셔서 모집 은 이미 끝났고 곧 도착할 거예요. 레콘들은 아니고 전부 킴이지만 그래도 숫자는 많아요. 몇 달 작업하면 성을 파낼 수 있을 거예요." "아아." "그럼 이만 가볼게요." 정우는 몸을 돌렸다. 야리키는 그녀의 뒷모습을 쫓는 대신 다시 드 러눕기로 했다. 땅을 팔 힘을 비축해두려면 아침 식사가 올 때까지 푹 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 뒤통수를 대기 직전 야리키는 뭔가 꺼림칙한 것을 느꼈 다. 다시 일어난 야리키는 정우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검푸른 풍경 사이로 걸어가는 정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외로워 보이는 모 습이 야리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리키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야리키는 낚시대를 집어들고는 정우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의 발소 리를 들은 정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야리키는 그녀의 곁에 서며 말했 다. "바래다주지." "예? 왜죠?" "규리하의 변경백이 혼자 다닌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침 먹 을 때까지 별로 바쁜 용건도 없으니 데려다주지." 정우는 그러냐는 표정을 짓고는 보폭을 조금 넓혔다. 그리고 보폭을 좁히는 야리키를 보고는 고맙다는 눈인사를 했다. 야리키는 그 눈짓 에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하지만 정우가 다시 앞을 바라보자 야리키 는 그녀의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자신의 머리를 좌우로 돌렸 다. 그리고 매서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별한 것은 발견되 지 않았다. 하지만 야리키는 정우가 거처에 도달할 때까지 경계를 늦 추지 않았다. 누군가가 꺼낸 진부한 농담에 크게 웃던 비나간 후작 지키멜 퍼스는 취기가 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당황했다. 모든 술주정뱅이는 얼마 안 마셨다고 주장하지만 지키멜은 정말 소 량의 술밖에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지키멜은 술 한 잔에 쓰러진다거 나 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떨쳐낼 창의적인 방 법이 없었기에 지키멜은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은 방법을 쓰기로 했 다. 그녀는 화장실에 가야겠다는 은유로 간신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 져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화장실로 가는 대신 바람이 부는 노대로 빠 져나왔다. 연회장 안쪽의 소음을 등진 지키멜은 밤바람에 가슴을 펼 쳤다. 노대 아래쪽의 정원은 봄밤에 어울리는 신선한 방향을 잔뜩 뿜 어내고 있었다. 노대 난간을 짚은 채 지키멜은 자신이 쇠약해진 것인가 생각했다. 그녀는 극단적으로 주의 깊게 주량을 조절했다. 연회를 즐길 생각은 없었다. 그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지키멜은 아마도 푹신한 잠자리에 누워 가벼운 책을 읽다가 잠드는 것을 선택했을 것 이다. 이 연회는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비나간인들의 호의를 북돋기 위해, 비나간 군대의 국외 파병이 성공적인 결실을 거 두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누군지 모를 나가 여자 한 명을 데 려와 대호왕이니 어쩌니 하는 사기극을 펼치고 있는 시모그라쥬공을 비웃기 위해 마련한 연회였다. 그런 자리였기에 그녀가 사용할 수 있 는 언어들은 중의적이고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의적으로 해석하고 싶어지는 언어뿐이었다. 취한 채 그런 언어를 계속 구사하 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키멜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 고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녀는 농담하고 떠들 고 크게 웃는 일에만…… 지키멜은 자신의 이마를 딱 치고 싶은 것을 느꼈다. 취기를 가져온 것은 술이 아니다. 흥겹게 취한 척하기 위해 꾸며댄 행동들이 그녀를 진짜로 취하게 만든 것이다.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는데 성공한 지키 멜은 씁쓸하게 웃으며 난간에 팔꿈치를 기댔다. 푹신한 잠자리 대신 봄밤의 고요한 정원도 괜찮을 것 같다. 지키멜은 자신을 동정하는 문장 몇 개를 떠올려보았다. 그 문장들의 진부함이 그녀를 어처구니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분 전환 삼아서 도 자기연민을 즐길 수 없었다. 그래서 지키멜은 자신을 비웃어보기 로 했다. '쳇, 머릿속 쓸데없이 복잡한 계집애야. 편안하게 잘 살 수도 있는 데 왜 구렁텅이에 발을 집어넣었니. 후작위나 왕위 따위엔 관심도 없 잖아.' 그러자 당장 그녀의 마음 속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꺼져, 그릇 옆에 말라붙은 음식 찌꺼기. 나는 내 한계를 알아볼 거 야. 그러지 못한 채 죽는 바보짓은 바보들에게나 하라고 해.' '아무도 네가 만든 왕국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을걸. 살아난 자들은 언제나 자기가 잘나서 그렇다고 생각해. 사람들을 구하기보다는 이용 하라고. 그게 훨씬 즐겁다는 것을 너도 알잖아?' '내 말 못 들었어? 한계를 알아본다고 했잖아. 즐거운 일이라면 거 기엔 관심 없어. 어려운 일을 줘. 더 어려운 일, 힘든 일을 달라고!' "후작님? 여기 계셨군요! 지금 재미있는 놀이가 시작됩니다!" 지키멜은 재빨리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가장 환한 얼굴을 만든 다 음 기운찬 동작으로 뱅그르르 돌았다. 그녀는 흥분한 소녀처럼 새된 비명을 지르며 연회장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지키멜은 열성적으로 노력했다. 그래서 지키멜은 참석자들로 하여금 비나간 후작이 쩨쩨한 늙은이에서 활기찬 젊은 여자로 바뀌자 분위기 부터 확 달라졌다고 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불안감을 가진 유력자 들에게서는 그것을 몰아내었다. 연회가 끝날 무렵이 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비나간후 지키멜 퍼 스 덕분이라고 믿게 되었다. 아니, 믿게 될 것이다. 연회가 끝날 무 렵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화려하게 취한 척하던 지키멜은 겨우 붙잡는 이들 없이 연회장 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지키멜은 몸이 오싹해 지는 것을 느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호위자들에게 둘러싸 여 집무실로 돌아올 때까지는 몸을 꼿꼿하게 유지할 수 있었지만 방 안에 홀로 남게 되자 지키멜은 곧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몇 분 동안 지키멜은 약간 몽롱한 기분 속에서 이마를 두 손으로 받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쇠약해진 것도 사실인 듯하다. 자신이 참석해야 하는 회의의 개수와 내일까지 결정해야 할 사안의 숫자를 떠올려본 지키멜은 기가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일이 너무 많다. 지키멜은 입술을 모았다. 그리고 풋 하는 소리를 냈다. "에라!" 지키멜은 벌떡 일어났다. 당당하게 일어나려 했지만 사실은 조금 비 틀거렸다. 지키멜은 피식 웃고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놓여있 는 서류들을 대충 훑어본 지키멜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그것을 정돈했 다. "순서대로 덤비란 말이야, 순서대로." 즉흥적으로 결정했지만 꽤 합리적인 순서로 서류를 정돈해놓은 지키 멜은 난폭한 기세로 그것에 달려들었다. 그녀는 의견을 격파하고 제 안과 춤을 추고 보고와 뒹굴었다. 그리고 명령의 말을 타고 도깨비지 위를 질주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지키멜은 녹초가 되어 책상에서 물러났 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서류들을 향해 집게손가락을 내밀어 흔들었다. "나한텐 안돼." 지키멜은 킬킬거렸다. 시녀를 부른 지키멜은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침소로 향했다. 지키멜은 그날 해야 할 일을 모두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래서 후련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작정이었다. 어쨌든 지키멜은 그 녀의 잠을 완전히 날려버릴 존재가 궁궐 정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는 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궁궐 정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장도 다가오는 사람이 그런 존 재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약간 긴장하기는 했다. 레콘 이 궁궐 정문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다면 누구라도 약간 긴장하 지 않을 수 없다. 레콘은 옆을 한 번 돌아보거나 하지도 않은 채 똑바로 궁궐을 향해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수문장은 부하에게 만 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소화차를 준비하라고 속삭였다. 조금 후 부하 가 돌아와서 준비가 끝났다고 보고했을 때 레콘은 평상적인 목소리로 말해도 들릴 거리에 도달했다. 레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방향을 바꿀 골목이나 길은 없 었고 그가 궁궐에 볼일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밤시간 엔 후작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궁궐 출입을 할 수 없다. 수문장은 우렁차게 외쳤다. "멈추시오!" 레콘은 멈춰섰다. 그의 머리는 화톳불의 빛이 닿는 곳 바깥에 있었 기에 수문장은 레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칼자루에 손을 얹 으며 말했다. "이곳은 후작궁이오." "알고 왔어." "그 말씀을 후작궁의 야경을 보러 왔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만." "아닌데." "그렇다면 후작궁에 들어가시겠다는 겁니까?" "맞아."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십니까?" 레콘은 잠깐 고민하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 다리가 있지." 수문장은 웃고 싶은 기분과 울고 싶은 기분을 함께 느끼며 부하에게 손짓을 보냈다. "부족합니다." "내 생각엔 충분해." "당신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후작님의 생각이 중요하지요. 그 리고 후작님은 그럴 자격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밤 에 후작궁에 드나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말하겠는데, 후작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내 생각이 중요하지. 그리고 나는 너희들이 거기서 당장 비키지 않으면 긴 시간 동안 후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 수문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문을 향해 돌아섰다. 반대쪽 문에는 이 미 부하 중 한 명이 붙어있었다. 수문장과 부하는 문을 좌우로 활짝 열어젖혔다. 거기엔 여러 대의 소화차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쪽에 있는 두 대 의 소화차에는 병사들이 살수관을 들고 레콘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레콘은 다른 레콘들이 대개 그러하듯 뒤로 물러났다. 하지 만 그 동작은 다급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일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수문장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담장 안쪽엔 도랑과 연못 등이 있습니다." 그러니 문이 아니면 담을 뛰어넘으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이거 야. 수문장은 레콘의 대답을 기다리며 침을 삼켰다. 레콘은 아무 말 도 없이 묵묵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 레콘은 뒤로 물러났다. 저벅저벅 뒷걸음질쳐 물러나 는 레콘을 보며 수문장은 잠깐 동안 그를 체포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 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수문장은 그만두기로 했다. 소화차를 끌고 레 콘을 추격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임무는 궁궐 수비가 우선이다. 비록 이상한 난동을 부린 레콘을 붙잡지는 못하더라도 궁궐만 지킬 수 있다면 그의 임무는…… 레콘이 멈춰섰다. 동시에 맹렬한 계명성이 터져나왔다. 아무 내용도 없는 고함이었다. 하지만 천둥에 필적할 소리였다. 수 문장과 그의 부하들은 귀를 틀어막았지만 살수관을 쥔 병사들은 그러 지 못했다. 그것을 놓쳤다간 레콘이 당장 뛰어들지도 모르니까. 하지 만 레콘의 계명성은 살수관을 쥔 병사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 었다. 그것은 호출이었다. 계명성의 여운이 사라지자 거대한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수문장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는 재빨리 정문 옆에 있는 북으로 달려가 그것을 두드렸다. 군대가 오고 있었다. 아마도 반역이 나 그 비슷한 상황이 분명하다! 정신없이 북을 두드리던 수문장은, 그러나 북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발소리가 너무 크다. 수문장은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아 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이렇게 거대한 소리가 날 수는 없다. 엄청나 게 많은, 엄청나게 많은…… 그 순간 수문장은 비틀거리며 정문 앞으 로 걸어갔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본 순간 미쳐버렸다. 거대한 코끼리 떼가 후작궁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3-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7-10 조회수 : 910 피를 마시는 새 23. 죽음을 평가하는 태도 - 3 레콘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달려오던 코끼리떼는 그를 알아모시듯 좌우로 갈라졌다. 바위가 급류를 갈라내는 것 같았다. 좌우로 갈라진 코끼리떼는 비나간의 모든 나팔이 한꺼번에 연주되는 듯한 굉음을 내 뿜었다. 그리고 코끼리떼는 열렬히 애모하듯 후작궁에 부딪혔다. 담장과 문의 약한 부분은 공중에서 분해되었고 좀 튼튼한 부분들도 결합이 깨지며 쓰러졌다. 코끼리떼는 파편 속을 치달려 소화차 위로 뛰어들었다. 소화차들은 순식간에 어떤 재활용도 불가능할 정도로 파 괴되었다. 다행히 코끼리를 향해 물을 쏜다는 황당한 시도를 포기한 소화차의 병사들이 오래 전에 도망친 후였다. 코끼리들은 소화차를 짓밟고 코로 그 파편을 집어들어 사방으로 내던졌다. 바퀴가 허공을 구르고 살수관이 빙글빙글 돌며 날았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가 구름처럼 사방을 뒤덮었다. 레콘이 다시 계명성을 내질렀다. 얼핏 듣기에 "테-하-!" 어쩌고 하 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그 계명성은 회오리처럼 먼지를 휘감 아 날려보냈고 코끼리의 속도가 느려지게 만들었다. 조금 후 코끼리 들이 멈춰섰다. 레콘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옆으로 손을 뻗어 코끼리의 목을 긁어주거나 콧등을 두드렸다. 그 모습이 마치 말 무리를 다스리는 살본 목동 같았다. 코끼리들이 만들어놓은 대로를 따라 잔해를 밟으며 걸어간 레콘은 후작궁 안쪽에 섰다. 그리고 잠깐 동안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작궁에는 무수히 많은 건물이 있었다. 레콘은 손을 들 어 부리를 매만지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나 한 놈 잡아서 물어봐야겠군. 이-라-리-!" 역시 무의미하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코끼리들은 반응했다. 쿵, 쿵 하며 코끼리들이 걷기 시작했다. 레콘은 코끼리떼를 뒤에 거느린 채 후작궁 안을 산책하듯 걷기 시작했다. 달려나오던 야간 경비조들은 이 어처구니 없는 습격자에 당혹했다. 반도의 습격이나 질병의 내습, 지진이나 폭우 같은 자연재해에 대한 대처방안까지 숙지하고 있었던 그들이지만 '만인이 곤히 잠든 한밤중 에 백여 마리의 코끼리가 내습할 경우'의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거니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창검을 움켜쥔 채 엄폐물 뒤에 숨어 도대체 그 코끼리들이 무엇을 할 작정인 지 살피는 것밖에 없었다. 다행히 코끼리는 인솔자의 지휘에 따라 질 서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안도했지만, 또한 그 인솔자가 도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이 인솔자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어이, 한 명만 와봐." 석물 뒤에 숨어있던 병사 중 한 명이 고함을 빽 질렀다. "당신 누굽니까! 물러가십시오! 안 물러가면 쏘겠습니다!" "그래. 알았으니 게라임 지울비가 어디 있는지나 말해." "뭐요?" "게라임 지울비. 유료도로당주 말이야. 어디 있지?" "내가 당신한테 그걸 왜 가르쳐줍니까!" "수수께끼로 내봐. 맞춰볼게." "싫습니다!" "이런 재미없는 녀석." 그리고 레콘은 튕기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석물 위에 있던 병사들은 당황하여 활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들이 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레콘은 석물 앞에 도달해서 그것을 옆으로 후 려쳤다. 데굴데굴 굴러간 석물이 담장을 부수는 소리를 들으며 병사 들은 기겁하여 도망쳤다. 레콘은 석물을 후려친 주먹을 다른 손으로 어루만지며 허리를 숙여 부리로 병사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는 허 리를 뒤로 홱 젖혔고 그러자 팔다리를 버둥거리던 병사는 레콘의 머 리 위로 유려한 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정점에서 부리를 놓았다면 병사는 호된 꼴을 당했겠지만 레콘은 친 절하게도 뒤로 돌아서 병사가 땅에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쩍 당기듯 하며 부리를 놓았다. 그래도 땅에 떨어진 병사는 숨이 턱 막 히는 충격을 느꼈다. 레콘은 발을 병사의 가슴에 얹었다. 병사는 오 줌을 지릴 것 같은 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가슴을 덮은 발이 오래된 화상 자국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레콘이 말했다. "엄마가 길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라고 가르쳐줬겠 지? 엄마 말 들어야지. 게라임 지울비 어디 있지?" 병사는 모친의 말씀을 잘 따르는 아들이 되기로 했다. 후작궁 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겁했고 그 중에는 연금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게라임 지울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잠자리에서 황급히 뛰쳐 나온 그는 잠깐 동안 어리둥절해 하다가 재빨리 의복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전 유료도로당주는 철창이 붙어있는 창문쪽으로 다가갔다. 지 진이 난 듯한 괴성은 사라졌지만 대신 끔찍하게 크고 파괴적인 무엇 인가가 후작궁 안을 어슬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쇠로 된 안 개가 후작궁 안을 떠도는 것 같았다. 쿵, 쾅, 딱, 퍽 하는 소리가 심 심찮게 들렸다. 그리고 비명과 다급한 명령의 외침들이 이곳저곳에서 부산하게 들려왔다. 게라임은 개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난리가 다 있나! 나도 좀 끼워주면 좋겠군." 그런데 그의 소망이 전달된 것처럼 궁궐 건축물들을 상대로 파괴 검 사를 실시하고 있던 강철의 안개가 가까이 다가왔다. 쿵, 쾅, 딱, 퍽. 게라임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그 소음의 접근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도 소음의 정체가 백여 마리의 코끼리와 레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대범함을 잃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눈을 비 비는 진부한 반응을 보였을 때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레콘이 창 문에 있는 그의 얼굴을 발견했다. 레콘은 창문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말했다. "네가 게라임 지울비냐?" "게라임 지울비에게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나는 그을린발이다. 그렇게 부르면 돼. 나는 이곳에 전 유료도로당 주 게라임 지울비를 구하기 위해 왔다." 게라임 지울비는 흥미를 느꼈다. "왜 그을린발이 게라임 지울비를 구해야 하죠?" "그건 후원자가 원했기 때문이야." "후원자?" "어, 정식 명칭은 코끼리 가축화 사업 연대 투자단이지만, 사실은 내가 돈 많은 한량들 돈 쓰라고 만든 단체야. 나는 그 돈으로 코끼리 를 보살피지." 어쩐지 사업가들의 담소 같았다. 게라임은 자신도 모르게 예비 동업 자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면 그 투자가들은 뭘 얻습니까?" "응. 코끼리의 가축화에 성공하면 그 기술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 하지만 사실은 어디 가서 모험사업가인 척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내가 가끔 그 친구들 불러들여서 화끈하게 사업설명회 해주거든. 그러면 그 자들은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은 이성 친구나 콧 대를 눌러주고 싶은 동성 친구 따위를 대동하고는 참석해. 그리고는 내가 존경하는 투자가 여러분 어쩌고 하면서 그 친구들 추켜주고는 내가 재주 가르친 코끼리들 데리고 볼거리 보여주는 거지." 게라임은 감탄했다. 인간 사업가들 사이에서라면 어렵지 않게 포착 할 수 있는 감각이기에 놀랄 것이 없지만 그 감각의 소유자가 레콘이 라면 감탄할 만하다. "영리하군요. 저 코끼리들이 가축화된 코끼리인 겁니까?" "아냐. 길들여진 코끼리지." "그게 다릅니까?" "다르지. 사자나 호랑이 중에도 조련사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있지. 하지만 사자나 호랑이를 가축이라고 하지는 않잖아. 번식을 통제할 수 있어야 가축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그러면 저 코끼리들은 당신에게 길들여진 코끼리군요." "응. 가축화하려면 일단 내 말을 따르도록 해야 하니까. 전부 다 말 잘 듣는 건 아냐. 내가 데리고 있는 얘들 중에서 특히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얘들로 골라와서 이렇게 점잖은 거지." 게라임은 그 점잖다는 평가에 그을린발과 코끼리들 자신, 그리고 어 쩌면 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후작궁의 사람 들은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을린발이 계속 설명했 다. "그러니까 그 투자가들 중 한 명이 게라임 지울비를 구해오라고 했 어. 그래서 온 거야. 일종의 과외업무지만, 투자가들 비위 맞추기가 어디 쉬워야지. 이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투자가와 소비자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업가의 앞날은 밝을 겁 니다. 그런데 나를 구해오라고 한 사람이 누굽니까?" "네가 게라임 지울비인가?" "맞습니다." "그럼 직접 확인해." "하긴 그렇겠군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잠깐만." 그을린발은 창문을 막고 있는 철창을 붙잡았다. 바야흐로 철창이 우 지직 뜯겨나올 판국에, 갑자기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내가 당신 사업에 전액 투자하겠어요!" 그을린발은 철창을 붙잡은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함이 들려온 쪽 을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를 알고 있는 게라임은 약간 초조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이 겪게 될지도 모르는 숭고한 희생에 감동한 얼굴의 병사들이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를 둘러싼 채 서있었다. 목 소리를 아는 게라임은 그들 사이에 지키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 지만 그을린발이 본 것은 병사들 뿐이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모두 남자 병사들이었다. 자신이 들은 것과 본 것을 일치시키지 못한 그을 린발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 목소리였는데." 그러자 병사들의 허리와 팔을 옆으로 밀어붙이며 그들 사이에서 젊 은 여자가 걸어나왔다. 병사들은 당황하여 그녀를 제지하려 했지만 그녀는 병사들의 제지를 뿌리치며 말했다. "내가 말했어요." "너 누구냐? 코끼리 가축화 사업에 관심 있어?" "나는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이고, 필요하다면 비행 코끼리 개발 사 업이라도 관심을 두겠어요." 그을린발은 수염볏을 붙잡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을 린발은 코끼리떼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딱정벌레와 교배시키면……" 게라임은 코끼리들이 질겁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등에 딱정벌레 날개를 달고 코를 휘두르며 날아다니는 코끼리를 상상하느라 약간 멍 한 표정을 짓던 지키멜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의적이시군요. 어쨌든 내 투자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죠?" 그을린발은 담담하게 말했다. "지키멜 퍼스. 일단 게라임 지울비를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이야기해 보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할 거지?" "게라임 지울비를 그대로 놔두는 것이 투자 조건이라고 대답하겠지 요." "그럴 것 같았어." 그을린발은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철창 쪽으로 손을 뻗었 다. 지키멜이 황급하게 말했다. "두 배로 주겠어요!" 그을린발은 철창을 확 뜯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철창을 팽 개친 그을린발은 게라임 지울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게라임은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그을린발은 코끼리들을 돌아보며 뭐라 외쳤다. 게라임에게는 그 소리가 "하쿨, 리, 리."로 들렸고, 그래서 코끼리 한 마리가 성큼 걸어왔을 때 조금 놀랐다. 그을린발은 한 손으로 게 라임을 번쩍 들어 다가온 코끼리의 등 위에 얹었다. 게라임은 떨어지 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저격의 각도를 줄이기 위해 코끼리의 등 위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을린발은 지키멜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내 길을 막고 있군. 비나간후." 지키멜은 입매를 비틀며 그을린발의 벼슬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당신이 먼저인데." 그을린발은 미소지었다. 그는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병사들은 찔끔 하며 물러났지만 지키멜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을린발은 지키멜 바로 앞에 서서 팔짱을 끼며 우뚝 섰다. 그 모습을 본 게라임 은 입맛을 다셨고 병사들의 얼굴은 험악하게 바뀌었다. 지키멜의 신장은 그을린발의 반을 넘을까 말까 한 정도였다. 단지 그을린발이 앞에 서는 것만으로 지키멜은 폐소공포증을 느낄 것 같았 다. 그녀는 그을린발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뒤통수 가 등에 닿을 정도로 목을 젖혀야 했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해도 그 을린발의 가슴 때문에 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의도가 뚜렷 한 신장 비교를 해보인 그을린발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쩔 건데?" 지키멜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정말 싫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 다. 피곤하고 화가 났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문장밖에 없었다. '내 한계를 알아볼 거야.' 지키멜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했다. "소금쟁이 연병장 아래에 묻어줄 거야." 그을린발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이 비나간 후작의 위로 쳐든 얼 굴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을린발의 손이 후작의 얼굴을 덮었다. 지키멜은 갑자기 겨울이 되돌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말 하면 겨울의 잠자리였다. 그을린발의 손바닥이 얼굴을 덮자 두꺼운 겨울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린 것 같았다. 어둡고 답답하고 호흡 이 약간 힘들었다. 하지만 그을린발은 지키멜의 얼굴을 누르지는 않 았다. 그을린발은 그저 지키멜의 얼굴을 가리듯 손을 얹어두었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그을린발의 손이 사라지자 지키멜은 눈을 깜빡거리 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을린발은 손을 어깨 근처에 들어올린 채 싱긋 웃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냐?" 지키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입을 열면 비명을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 키멜은 이를 꽉 깨문 채 그을린발을 올려다보았다. 그을린발은 들어 올렸던 손을 구부렸다가 손가락을 세게 튕겼다. 딱! 서까래가 무너지 는 듯한 소리에 얼어붙어 있던 병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그을린발은 병사들에게 말했다. "와서 후작을 데려가라." 병사들은 주저하면서 앞으로 나왔다. 지키멜은 여러 명의 손들이 그 녀의 어깨와 허리, 팔 등을 붙잡은 채 뒤로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지 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키멜은 뒤로 끌려가면서 계속 그을린발 을 노려보았다. 지키멜이 꽤 먼곳까지 끌려가자 그을린발이 말했다.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 나는 히베리다." 병사들은 움찔했다. 지키멜은 계속 그을린발을 노려보며 중얼거렸 다. "히베리." "나를 찾고 싶다면 그을린발을 찾는 편이 나아. 모두들 그 별명으로 나를 부르니까." 지키멜은 눈으로 말했다. 좋아. 찾아가지. 찾아가서 너를 붙잡아 물 에 빠트려죽이겠어. 하지만 그 말을 입밖으로 내기 직전 지키멜은 어 느 병사가 조금 들어올린 횃불에 환히 드러나는 그을린발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동정심이었다. 지키멜은 그을린발이 동정심을 느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에 공포를 느꼈다. 비로소 지키멜은 다리에 힘이 빠지 며 주저앉고 싶은 것을 느꼈다. 다행히도 그 때는 많은 병사들이 그 녀를 붙잡고 있었다. 지키멜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어금니를 질 끈 깨물었다가 간신히 말했다. "다시 만나지 않길 바라." 그을린발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고개를 어깨쪽으로 조금 젖혔 다. "이-라-리-!" 코끼리들이 동시에 발을 들어올렸다가 앞으로 내딛었다. 그 절도 있 는 동작에 어떤 병사들은 감동마저 느꼈다. 동물들의 무리에서는 보 기 힘든 동작의 일치였다. 코끼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을린발 또한 앞으로 걸었다. 병사들은 비나간후를 호위하며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병사들이 비워준 길을 통해 그을린발은 털레털레 걸었다. 그가 비나간후의 앞쪽을 지나칠 때 갑자기 지키멜이 말했다. "고마워요. 그을린발. 부탁인데 또 이러진 말아요." 그을린발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봐서." 그을린발이 앞으로 걸어갔다. 백여 마리의 코끼리들이 쿵쾅거리며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소리는 요란했지만 묘하게 자취는 별로 남지 않았다. 마지막 코끼리가 사라지자 지키멜과 병사들은 자신들이 눈을 뜬 채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느꼈다. 하지만 창문을 본 지키멜은 그것이 현실임을 확인했다. 창문은 이 빠진 잇몸처럼 보였고 그을린발이 뜯어낸 철창은 창문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지키멜은 이제 정말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 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불분명한 말을 꺼내고 있었다. "추적해라. 어떻게든 게라임 지울비가 유료도로당으로 가지 못하도 록 해야 한다. 비나간 영토 안에서 그를 되찾아라." 누군가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 다. 자신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지키멜은 자신의 모습이 확신에 차있고 당당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녀는 잠이 들었다. 똑바로 누운 제이어 솔한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이 두었던 바둑들을 복기해보았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둔 방내기까지 포함한다면 제이어 솔한은 수없이 많은 바둑을 두었다. 전문 방내기꾼이 아닌 바에야 입신의 기 사들이 방내기를 두는 경우는 없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멍청 한 방내기꾼은 없으므로 제이어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고수들 가운데 서는 아마도 대국 회수가 가장 많을 것이다. 그런 그도 첫수부터 계 가까지 완전히 머릿속에서 복기할 수 있는 바둑은 다른 기사들보다 특별히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뚜렷하게 기억하는 대국들 중 가장 많은 것은 엘시 에더리와 둔 것이다. 지금 살인기사가 마음 속으로 복기하고 있는 바둑의 상대 또한 엘시 에더리였다. 언제 둔 것인지 명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 다. 복기를 하면서 제이어는 실전 대국에서의 어지러움, 즉 고도의 집중 상태에서 느끼는 아련한 혼미함을 다시 느꼈다. 그런 상태에서 제이어는 돌의 노래를 듣곤 했다. 주변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곳에 서 돌들은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삶을 노래한다. 한 곳에 놓인 돌은 죽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자리는 오직 그 돌의 것이다. 돌을 겹쳐놓을 수야 없는 법이다. 상대편의 돌은 물론이거니와 아군의 돌조차도 그 돌의 자리를 범접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돌은 떠밀리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채 목숨으 로 그 자리를 지킨다. 죽음만이 그 돌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죽은 돌은 바둑판 위로 돌아오지 않는다. 승부를 낼 때 바둑판 위로 다시 올라오는 돌은 자신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 니라 승부를 계산하기 위해서 올라올 뿐이다. 기사는 요석과 폐석을 말하지만 모든 돌은 그것을 놓은 기사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권리의 측 면에서 보면 모든 돌은 똑같다. 361개의 개별적이고 완전히 평등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등은 평등일뿐 동일은 아니다. 어떤 돌의 역사는 찬란하고 어떤 돌의 역사는 비참하다. 그것들이 평등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다. 제이어는 머릿속에서 방금 착점한 자신의 돌을 보았다. 그 돌의 노 래는 음울하다. 살 수 없는 돌이기에 그러하다. 제이어는 교묘한 사 석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사석은 버린 돌이다. 사석(捨石)은 버림 받았기에 죽음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기에 사석(死石)이 된다. 그런데 건축가이기도 한 제이어 는 그 말의 다른 쓰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토목공사를 할 때 물 아래에 던져넣어 기초를 다질 때 쓰이는 돌 또한 사석이라고 부른 다. 의미는 서로 통한다. 바둑의 사석은 그저 죽이고 싶은 괴벽 때문 에 버리는 돌이 아니라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서 버리는 돌이다. 물 아래에 던져넣는 사석 또한 튼튼한 기반을 얻기 위해 버리는 돌이다. 사석 두는 곳에 수 있다는 바둑 격언에서 알 수 있듯 바둑이라는 놀 이는 특이해서 상대를 잘 죽여야 할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잘 죽어야 한다. 상대편뿐만 아니라 자신의 돌까지 무참하게 죽인 자가 승리한 다. 죽은 돌이 산 돌과 함께 승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고급 기사 들이 방내기를 혐오하는 것은 그런 바둑의 기본 철학에 배치되기 때 문이다. 돌의 노래가 바뀌었다. 제이어는 마음의 귀로 그 노래에 집중했다. 그 돌은 더 이상 음울하 게 노래하지 않았다. 제이어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살펴보았다. 백의 착점을 살펴본 제이어는 자신이 내려놓은 흑돌이 살아났음을 깨달았 다. 백은 흑의 사석 작전을 무시했다. 왜? 백은 이미 자신이 이겼음 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제이어가 거 대한 사석 작전을 시도한 것은 기울어가는 승부를 뒤집기 위해서였으 니까.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백은 나를 죽여서 나를 이기게 해 달라는 제이어의 요청을 거부했다. 제이어는 복기를 그만두었다. 그 이후의 흐름은 잘 알고 있다. 끝까 지 백에게 끌려가게 된다. 백이 어떤 손찌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을 던질 적절한 기회가 없었다. 당연히 집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 렇게 끌려가는 바둑을 복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제이어는 복기 를 중단한 채 돌의 노래를 들었다. 돌은 살아났음을 즐거워하고 있었 다. 자신이 소속된 진영이 패했다는 것은 돌에겐 관심이 없는 모양이 다. 돌은 자신의 삶을 즐거워하고 자신의 역사를 찬양하고 있었다. 제이어는 그 돌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너는 졌어.' '나는 살았어. 살아남은 자가 승자라고 하지 않던가?' '개개의 돌이 살고 죽는 것 이상의 문제가 있지.' 돌은 옆을 돌아보았다. '여기선 안 보이는데.' '위에서 보면 보여.' '위? 위가 뭐지?' 반면에는 고저가 없다. 제이어는 돌에게 고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돌은 겹쳐쌓을 수 없는 법이다. 그는 상대방이라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바둑판 건너편을 보았다. 그 자리는 비어있었다. 엘시 에더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혼자 복기한 바둑이다. 엘시는 없었다. 제이어는 눈을 떴다. 어디선가 소음이 들려왔다. 제이어는 그곳이 어느 쪽인가 생각하다 가 겨우 자신은 돌과 달리 고저를 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소음 은 제이어의 등 아래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제이어가 새벽 녘부터 열 시간 이상 기다리던 소음이었다. 제이어는 아래쪽을 살피기에 앞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팔다리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리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동작은 느렸다. 제이어는 조바심 내지 않고 느 리게 팔다리를 비틀었다. 제이어가 있는 곳은 일종의 다락방이었다. 지붕을 떠받치는 들보들 이 주위에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창문이 없어서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주위는 캄캄했고 그 어둠 속에서 제이어는 느리게 꿈틀거렸다. 마침내 무리 없이 팔다리를 놀릴 수 있다는 확신을 내린 제이어는 조심스럽게 몸 을 뒤집었다. 배를 바닥에 깐 제이어는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곧 새벽에 그가 뚫어둔 구멍이 보였다. 제이어는 그 구멍을 통해 아 래를 살폈다. 아래에는 막 연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제이어는 자신의 각도가 조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상체를 조심스럽게 밀어 움직였다. 조금 후 제이어는 연회장의 상석을 보게 되었다. 상석에 앉는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곳에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젊은 사람도 있었 다. 제이어는 그 중 한 젊은이를 보았다. 긴 머리를 비녀로 틀어올리 고 인간의 옷과 약간 다른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젊은 여자가 상 석 가운데 앉아 있었다. '바둑판 아래로 내려갈 때가 되었습니다.' 살인기사는 옆으로 손을 뻗었다. 눈을 돌려봐야 보이는 것이 없으므 로 손으로 더듬는 것이 나았다. 마침내 살인기사는 거기 있어야 하는 물건을 찾아내었다. 살인기사는 천천히 그것을 끌어당겼다. 어둠 속 에서 엎드려 누운 채 작업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살인 기사는 새벽녘에 몇 번 연습을 해보았다. 그 연습 덕분에 살인기사는 큰 소음을 내지 않고 노궁에 화살을 장전할 수 있었다. 아스캄의 공회당 천장 속에서 살인기사는 화살이 걸린 노궁을 쥔 채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를 바라보았다. 세레지 파림은 지금껏 자신을 무시해왔던 야리키도 이번에는 반응을 보일 거라 믿으며 말했다. "우와, 저것봐! 야리키다!" 삽을 고치느라 정신이 없었던 지노피와 그를 돕던 히다도 당황한 표 정으로 세레지를 돌아보았지만 야리키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야리키는 무심히 부서진 삽을 내려놓고는 지노피가 가까스로 고쳐놓 은 삽을 집어들었다. 세레지는 설마 그대로 돌아서시지는 않으시겠 지? 하는 눈으로 야리키를 애써 노려보았지만 야리키는 그대로 돌아 섰다. 성무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야리키를 보던 세레지는 앓 는 소리 같은 것을 내고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다. 야리키 를 향해 달려간 세레지는 그의 옆에 서자마자 말했다. "규리하공이성을파내줄사람을준비했는데왜계속땅을파고있는거죠?" 숨도 쉬지 않고 말해버린 세레지는 야리키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야 리키는 부리를 슬쩍 부딪치고는 말했다. "다른 할 일이 없으니까." "어, 규리하공에게 잘 보이려고 이 일 하겠다고 나선 것 아니었어 요?" 야리키는 멈춰섰다. 그는 삽으로 바닥을 짚고는 놀란 얼굴의 세레지 를 향해 말했다. "너 그래서 규리하공에게 하늘낚시터에 대해 이야기했지?" "예. 그래요. 뭐가 수줍어서 직접 말도 못하죠?" "수줍어서가 아니다. 혼란스러울까봐지." "혼란?" 야리키는 정우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세레지는 한 손으로 뺨 을 누른 채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간하고 이야기하다보면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모으기 위해 돈을 모으는 일 같은 것이 벌 어진다는 건가요? 혹은 즐겁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해 술을 마시는 일 같은 것?" "그런 거지." "멍청한 인간만 그래요." "똑똑한 인간도 그래." "선입견?" "아냐." "설명해봐요." 야리키는 아랫부리를 긁적이다가 손을 들어 윗부리도 긁적거렸다. 문득 세레지는 그러면 시원한지, 아니 거기에 감각이나 있는지 궁금 했다. 세레지가 보기에 그 부리는 엄청나게 단단해 보였고 그래서 피 부처럼 민감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긁고 있는 것을 보니 무슨 느낌이 있긴 한 모양이다. 세레지가 자신의 추리가 맞냐고 물어보려 했을 때 야리키가 부리를 열었다. 세레지는 꺼내려던 말을 도로 삼키 고 야리키의 말을 기다렸다. 야리키가 말했다. "관둘래." "야리키, 나 기대하고 있었다고요!" "너 인간이잖아." "인간…… 아아, 괜찮아요. 저는 나가 부모 아래에서 자라났어요. 저는 사실 시모그라쥬공의 손녀였거든요. 야심가였던 시모그라쥬공은 손녀를 나가 사이에서 자라게 해서 니름을 터득하게 하면 나가들을 통치하는 것이 더 쉬워질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특별히 선택된 나 가 남녀가 저를 키우게 된 거죠. 하지만 막상 저를 받아들고 보니 그 들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어린 생명체에 그만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된 거죠. 그래서 그들은 니름 도구로 키워지게 될 저를 야심가 할아 버지에게서 구하기로 하고…… 당신 아직도 악의 세력의 영향하에 있 군요!" "어떻게 알았어?" "두 눈에서 불신감이 반짝반짝 빛나니까." "정우의 이야기를 적당히 도용한 흔적이 지나치게 나." "좀 더 노력해야 당신을 구원할 수 있겠군요." "구원하지마." 그 말을 끝으로 야리키는 삽을 다시 집어들었다. 불과 몇 걸음 저편 에 야리키가 땅을 파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본 세레지는 야리키를 따라 가는 것을 포기했다. 불안한 지반에서 넘어지거나 흙더미를 뒤집어쓰 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레지는 아쉬움을 얼굴 가득히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그 때 야리키가 말했다. "세레지." "어서 오세요, 즐거움의 세계로!" "무슨 소리야." "구원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려는 거 아니었어요?" "아냐. 정우의 주위를 잘 살펴봐." "규리하공이오? 왜요?" "몰라. 그냥 기분이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요?"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꼭 누가 정우를 노리는 것 같다는 느낌 이 들어." 무심히 말하던 야리키는 세레지의 엄청난 얼굴에 놀랐다. 세레지는 경악에 빠진 표정으로 외쳤다. "왜 진작 말 안했어요!" "느낌일 뿐이라니까." "레콘의 감이잖아요!" "이봐, 세레지. 너 이야기 지나치게 좋아하는 거 같다." 뒤이어 야리키는 세레지에게 허구와 현실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중 요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의 과묵함이나 그 자신도 그 불안감 때문에 정우를 배웅했 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가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은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할 세레지가 전속력으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시 내 쪽을 향해 쓰러질 듯 달려가는 세레지를 보던 야리키는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다시 삽을 움켜쥐었다. 야리키가 예견한 것처럼 세레지는 몇 번 넘어졌다. 그냥 달렸더라면 넘어지지 않았겠지만 세레지는 수레를 뛰어넘고 도랑을 뛰어넘었으며 심지어 돌담을 박차고 올라 어느 집의 지붕 위까지 뛰어올랐다. 최단 시간 내에 정우에게 도달하기 위해 세레지는 어떤 장애물도 피하지 않았고, 그래서 몇 번인가 땅에 넘어졌다.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은 것은 안전하게 몸을 굴린 덕분이다. 세레지는 불과 몇 분만에 정우가 있는 연회장에 도달했다. 공회장 외곽을 지키던 병사들은 세레지의 모습에 놀랐다. 세레지는 힘겹게 말했다. "혹시 이상한 일 없었어요?" 상급자인 수전사가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옷이 흙투성이가 된 채 숨 넘어갈 정도로 헐떡거리는 어떤 여자 제 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그 여자 제외하고." "……없었어. 괜찮은 거야?" "주위를 경계해요. 감이 안 좋아요." 수전사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질문을 할까 하다가 대신 부하들에게 다가가서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동안 세레지는 옷을 털었다. 그럭저럭 깨끗한 모습이 된 세레지는 공회당 안으로 들어섰 다. 안쪽의 주통로에도 약간 명의 경비병들이 있었다. 규리하의 지배자 가 있는 곳이니 당연하다. 세레지는 그들에게 공회당 안쪽의 출입로 를 조사하라는 부탁을 하고는 곧장 연회장으로 향했다. 일단 정우의 곁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낌새가 안 좋다면 그대로 정우를 끌어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세레지는 연회장 안쪽에 도달했다. 연회장은 흥겨운 분위기였다. 누군가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규리하공이 오신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설은 재미있는 편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즐거워 하고 있었다. 세레지는 정우의 모습을 확인했다. 정우는 상석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연설 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안위를 확인한 세레지는 벽을 따라 움직 이며 사람들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아서 그런지 모 르지만 모든 사람이 수상하게 보였다. 세레지는 머리를 조금 내젓고 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규리하공에게 당장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자 혐의 자를 대폭 축소할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검사를 받았을 테니 대형 투사 병기는 없을 테고, 따라서 근거리에서 사용할 수 있 는 작은 병기들 뿐일 것이다. 세레지는 정우의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 게 주의하며 천천히 정우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정우와의 거리를 십 미터 쯤으로 줄였을 때 세레지는 자신이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혹시 창문이나 천장 을 통해 투사병기를 쓸 수는 있지 않을까? 세레지는 먼저 창문을 살 펴보았다. 연회장에는 밝은 조명을 위해 꽤 많은 창문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우는 창문을 통해 공격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세레지 는 안도하며 천장 쪽을 살폈다. 그리고 세레지는 절망감과 공포를 느 꼈다. 고개를 들자마자 세레지는 천장에 나있는 조그마한 틈을 발견했다. 그 틈은 벌어졌다. 누군가가 미리 잘라놓은 천장의 판자를 떼어내는 것 같았다. "엎드려!" 세레지는 괴성을 지르며 가장 가까운 탁자로 뛰어올랐다. 그대로 정 우에게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탁자보가 옆으로 미끄러졌고 그 때문에 세레지는 옆으로 조금 미끄러지며 균형을 잃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자세를 낮추던 세레지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일어 나는 정우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세레지의 급한 외침은 알아듣기 어려웠고 그래서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정우는 그녀를 돕기 위해 일어 서고 있었다. 세레지는 공포 속에서 다시 뛰어오르려 했지만 그러기 위해선 자세를 더 낮추어야 했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암살자는 세레지에게, 그리고 정우에게 그 순간을 허 락하지 않았다. 세레지가 몸을 낮춘 순간 정우의 복부에 화살이 꽂혔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3-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7-11 조회수 : 567 피를 마시는 새 23. 죽음을 평가하는 태도 - 4 충격으로 정우는 뒤로 두 걸음 춤추듯 물러났다. 그녀의 머리를 틀 어올렸던 비녀가 풀리며 검은 머릿결이 크게 출렁였다. 고개를 숙인 정우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녀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염료로 붉게 물드는 옷에서 피를 머금고 자라난 곧은 식물 처럼 화살이 돋아 있었다. 꽃술 같은 활깃에 점점이 튄 핏방울이 놀 랍도록 선명하다. 정우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리고 정우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우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탁자와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 들 중엔 자신들의 안전보다는 저격을 당한 규리하공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정우를 돌보기 위 해 황급하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도착한 청년은 위쪽에서 날아온 발에 관자놀이를 맞고는 옆으로 쓰러져야 했다. 공중에서 청 년을 걷어찬 세레지는 그대로 몸을 낮추고는 날카롭게 외쳤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마! 오지마!" 세레지는 자신의 몸으로 정우를 감추듯 하며 주위로 손을 내저었다. 아스캄인들은 당황하다가 겨우 세레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깨달았 다. 암살자가 한 명이라는 보장은 없다. 혼란을 틈타 일을 마무리지 으려는 자가 섞여있을지도 모른다. 당황하여 멈춰선 그들에게 세레지 는 할 일을 주기로 했다. "천장이다! 천장에 암살자가 있어!" 사람들의 시선이 천장으로 쏠렸다. 그 위에 있던 제이어는 벌떡 일 어났다. 실패일까? 노린 것은 정우의 심장쪽이었지만 정우가 세레지 를 돕기 위해 일어나는 바람에 살인기사가 쏜 화살은 그녀의 배에 꽂 혔다. 제이어는 그 화살이 확실한 죽음을 가져올지 자신할 수 없었 다. 그러나 제이어는 두 번째 화살을 날리는 바보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암살자의 공격은 성공이든 실패든 오직 한 번이다. 경계에 들 어간 상대를 억지로 공격하다가 붙잡혀서 정보를 노출시키는 것보다 는 실패를 인정하고 도주하는 것이 훨씬 낫다. 제이어는 주저없이 노궁을 집어던지고 옷을 벗었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병사의 복장이었다. 제이어는 준비해두었던 투구를 머리에 쓰고 는 속으로 다섯까지 침착하게 세었다. 그리고 제이어는 조금 전 화살 을 쏘기 위해 열었던 판자를 벌컥 잡아당겼다. 그는 아래로 상체를 내밀며 외쳤다. "여긴 없습니다! 노궁뿐입니다!" 연회장 안쪽으로 달려들어오던 수전사는 천장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에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병사의 복장을 본 그는 이를 갈았다. "노궁? 여자가 다룰 수 있는 크기냐!" "안될 것 같습니다!" "제기랄, 출입 통제해! 손에 노궁이 없을 테니 남자는 전부 조사해! 힘세 보이는 여자도! 반드시 찾아내!" 그리고 수전사는 부하들과 함께 정우가 있는 쪽을 향해 거침없이 달 려갔다. 제이어는 구멍 가장자리를 붙잡고 아래로 몸을 미끄러뜨렸 다. 잠시 매달렸다가 손을 놓은 제이어는 탁자 위에 떨어졌다. 제이 어는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정신없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제이어는 투구를 고쳐쓰며 정우가 있는 쪽을 살폈다. 그는 정우가 죽었는지 궁금했지만 주변에 몰려선 사람들 때문에 정우의 모습을 확 인할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주군의 안위를 살피는 척하다가 아직 살아있으면 단검으로 찌른다는 계획이 갑자기 떠올랐지만 제이어는 포기하기로 했다. 도저히 몸을 빼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제이어 는 도망친 암살자를 붙잡겠다는 결의를 얼굴 가득히 떠올렸고, 그에 덧붙여 고함까지 질렀다. "출입을 통제한다! 통제한다!" 연회장 안쪽에 있던 사람들은 제이어가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 할 수 있도록 황급히 좌우로 비켜섰다. 그래서 제이어는 아무런 방해 없이 연회장 밖으로 달려나갈 수 있었다. 한편 세레지는 여전히 정우의 몸을 가린 채 다가오는 자는 전부 죽 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을 때 세레지는 그 손을 물어뜯을 뻔했다. 그러나 그 손의 주인은 수전사였 다. 세레지는 그를 보다가 앙칼지게 외쳤다. "사람들을 물러나게 해요!" "벌써 그러고 있어!" 세레지는 그제서야 병사들이 창으로 사람들을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 을 보았다. 수전사는 세레지의 곁에 무릎을 꿇고는 정우를 살폈다. 세레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안전한 곳으로…… 치료할 수 있는…… 여기 의사 없어!" 수전사는 세레지의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를 의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활이나 칼, 창 등에 의한 상처는 그에게 익숙했다. 수전사는 정우가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고 판단했다. 당장 조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수전사는 정우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따끔하시죠?" 비록 그녀 자신이 세상을 농담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사명을 가진 사 람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수전사의 말을 들은 세레지는 어처구니 없 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바닥에 누워있던 정우가 힘없 이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지금은 멍한 느낌이네요. 상처에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어 울리지 않겠지만 좀 우울하게 아파요." 수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은 그 파괴력 외에 정신적 충격으로 도 사람을 죽인다. 하지만 그는 정우가 충격으로 죽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자라나서 그런 것인지 도 모르겠다는 설명까지 순식간에 떠올랐지만 수전사는 그 이상의 고 찰을 하느라 여유를 부리지는 않았다. "의사를 수배해! 깨끗한 물하고 물 끓일 도구도 가져와! 이 근처에 방 없나!" "저쪽입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수전사는 다시 정우에게 말했다. "각하. 여기는 노출되어 있습니다. 옮기겠습니다." 정우는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수전사는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충격으로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자신에게 계속 들려주며 수전사는 정 우를 안아올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알려준 방을 향해 달려갔다. 수전 사보다 먼저 도착한 세레지가 문을 열었다. 회의실 정도로 쓰이는 듯 한 작은 방이었고 창문 하나에 다른 문은 없었다. 세레지는 덧창을 닫고는 두 팔을 휘둘러 탁자 위의 잡동사니들을 싹 쓸어내었다. 수전 사는 그 위에 정우를 내려놓았다. 세레지는 덧창에 몸을 기댔고 병사 들은 밖에서 문을 막았다. 방 안에는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수전사는 단검을 꺼내어들었다. 순간 세레지는 실성할 듯한 눈을 해 보였지만 수전사가 정우의 옷을 자르는 것을 보고는 겨우 자신을 억 눌렀다. 수전사는 그 와중에도 정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정우가 고통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말들이기에 그것은 대수롭지 않으며 많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질문에 대답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난 세레지는 탁자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정우의 얼굴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불규칙적이긴 했지만 정우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레지는 갑자 기 서럽다고 생각했다. 무엇인지 모를 서러움이 공기를 가득 물들이 고 세레지의 코를 통해 그녀의 폐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세레지 는 정우가 누워있는 탁자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때 세 레지는 수전사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도 이 이상한 공기를 느끼는 거냐고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세레지 는 기묘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수전사는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커다랗게 벌어져 있었다. 지금껏 놀랄 정도로 침착하게 행동하던 수전사는 그런 모습 을 잃은 채 거친 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검을 쥐 지 않은 그의 손은 위로 조금 떠올라 있었는데 그 손의 모습은 마치 자신이 만진 것에 놀란 것 같았다. 세레지는 의아했다. 설마 상처의 끔찍함에 놀란 것은 아닐 텐데. 그녀는 수전사가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잘린 옷이 탁자 좌우로 늘 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정우의 조그마한 몸이 드러나 있었다. 피냄새 가 짜릿할 정도로 풍겨왔지만 덧창이 빛을 막고 있어서 그 몸은 어슴 푸레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세레지는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인간 여자의 몸을 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단지 피 때문 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세레지는 옆으로 걸어 정우의 몸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전사도 자신이 만졌던 것을 눈으로 확 인하기 위해 머리를 낮추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두 사람의 눈은 마침내 정우의 몸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숨을 멈추었다. "이게…… 어떻게 된……" 중얼거리던 수전사는 흠칫하며 입을 닫았다. 그는 고개를 들었고 세 레지 또한 그렇게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충격과 당혹감이 담긴 네 개의 눈길이 얽혔다. 그 때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 가 들려왔다. 순간 수전사와 세레지는 간통이라도 하고 있었던 사람 들인 양 당황했다. 수전사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허둥댔 다. 그 때 세레지가 좌우로 벌어진 정우의 옷자락을 나꿔채었다. 그 녀가 재빨리 정우의 몸을 가렸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허리를 숙인 채 방 안으로 들어선 것은 야리키였다. 야리키는 정우 의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은 듯 벼슬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당황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세레지와 수전사의 모습은 그에게 별다른 위안을 주지 않았다. 야리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죽었나?" "아뇨." 대답한 것은 정우였다. 세레지와 수전사는 기겁했다. 야리키는 안심 했지만 또한 꽤나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의아해했 다. 두 사람이 놀라서 그런 거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야리키는 곧장 말했다. "화살은 왜 놔두는 거야? 뽑아야지." 야리키는 허리를 숙였다. 세레지가 기겁하여 외쳤다. "하지 말아요! 그러면 죽을지도 몰라요!" 그 말은 사실이다. 화살촉이 상처를 찢어서 벌려놓으면 충격이나 과 다 출혈로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세레지의 마음 속에는 야리키가 화 살을 뽑다가 정우의 몸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야 리키는 내뻗던 손을 다시 끌어당겼다. "맞아. 인간이지. 그러면 어떻게 하지?" 세레지는 자신도 그것이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때 수전사가 말했다. "부탁인데 가서 의사 한 명만 찾아오십시오. 제 부하들에게 말했는 데 아직 안 오는군요." 야리키는 알았다는 말조차 생략한 채 몸을 돌렸다. 그가 밖으로 나 가자 수전사와 세레지는 이유가 불분명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굳 은 얼굴로 정우를 돌아보았다. 정우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녀가 듣기는 하지만 보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세레지는 입만 움직여서 이 일을 어찌 하면 좋겠냐고 수전사에게 물었다. 수전사는 세레지의 뻐끔거리는 입을 완전히 읽지는 못했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세레지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전사는 피 묻은 주먹으로 이마 를 짚었다가 말했다. "노궁 화살이니까 촉은 그렇게 크지 않을 테고…… 뽑는 것이 낫겠 군. 세레지. 이걸 각하에게 물려드리고 각하의 어깨를 붙잡아." 수전사는 단검을 세레지에게 건넸다. 세레지는 그 자루를 정우의 입 에 가져갔다. "각하. 입을 벌리세요." 정우는 입을 벌려 단검 자루를 깨물었다. 세레지는 정우의 어깨를 누르고는 수전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수전사는 허리춤을 뒤지고 있었 다. 손수건을 꺼낸 수전사는 그것을 입에 물고는 화살을 붙잡았다. 수전사는 잠시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발 피가 팍 튀어오르지는 마 라. 그리고 수전사는 단숨에 화살을 뽑아내었다. 정우의 몸이 급하게 튕겨져올라 세레지는 하마터면 손목이 꺾일 뻔 했다. 화살이 빠진 자리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수전사가 두려워하던 것처럼 용솟음치지는 않았다. 수전사는 동맥이 상하지 않았다는 사실 에 안도하며 입에 문 손수건을 재빨리 정우의 상처 위에 대고 눌렀 다. 정우는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팔만으로 정우를 고정시킬 수 없었던 세레지는 자신의 몸으로 정우를 눌렀다. 수전사가 찢어낸 자 신의 옷자락으로 손수건을 고정시키는 동안 단검 자루를 물고 있는 정우의 입에서 꽉 눌린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에서 계속 흘 러나오는 눈물을 보던 세레지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세레지는 자신의 울음을 씹어먹듯 하며 정우의 몸을 눌렀다. 얼마 후 야리키가 허리에 의사를 끼고 돌아왔다. 나이 적지 않게 먹 은 의사는 벗겨진 머리까지 시뻘겋게 변한 채 헐떡거리면서도 환자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황급히 탁자로 다가갔다. 그러나 의사가 방안으 로 들어오자마자 수전사는 의사의 어깨를 붙잡았고 세레지는 그들의 등 뒤에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의사의 어깨 너머로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수전사는 당황한 의사에게 살벌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분은 규리하 변경백이십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말 끊지 마십시오! 당신이 알아야 하는 방식으로 알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이런 표정 하는 것에 대해서도 쓸데없는 추측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규리하공을 살리지 않으면 당신도 죽이겠다는 말을 들을까봐 걱정하고 있겠지요." 늙은 의사는 주눅이 들어 수전사를 바라보았다. 수전사는 의사의 어 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의사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수전사는 의사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나는 그런 말 안 합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 이 치료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규리하 변경백의 개 인사입니다. 당신은 규리하 변경백의 허락 없이는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벌을 받을 겁니다. 침묵을 맹세하십 시오." "나는 의사로서 당연히 환자의 개인적인 비밀을 지키……" "맹세하십시오!" 수전사의 낮은 울부짖음 같은 소리에 의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 다. "맹세합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각하를 치료하십시오. 아, 그리고 방금 마음이 바뀌었는 데, 각하를 살려내지 못하면 당신 죽습니다." 의사는 넋이 빠진 얼굴로 수전사를 바라보았다. 수전사는 의사의 어 깨를 와락 끌어안고는 탁자 옆으로 끌고갔다. 유혈로 벌겋게 물들어 있는 탁자 위에서 정우는 통증으로 괴로워 하고 있었다. 피는 오래 전에 말랐지만 풀어헤쳐진 긴 머리가 탁자 주위로 흘러 떨어져 마치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수전사가 정우 의 몸을 덮고 있는 옷을 옆으로 치웠을 때 의사는 눈을 껌뻑거렸다. 조금 전 수전사와 세레지가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의사는 정우의 몸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고 의사는 왜 침묵의 맹세를 강요당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밖으로 나온 세레지는 잠깐 동안 문에 등을 기댄 채 급히 호흡을 내 쉬었다. 그리고 세레지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야리키. 각하의 안위를 묻고 싶었죠?" 야리키는 부리를 닫은 채 그녀 앞에 서있었다. 야리키 외에 많은 병 사들, 그리고 접근을 허락받지 못했기에 좀 떨어진 곳에 서있는 아스 캄 사람들도 궁금함 때문에 이마에 세 번째 귀를 만들어낼 것 같은 얼굴로 세레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레지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야 리키에게 허리를 숙이라는 손짓을 했다. 야리키가 허리를 숙이자 세 레지는 낮게 속삭였다. "피는 멎었지만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의사가 알아서 하겠지요. 부탁할 일이 있어요. 지금 당장 규리하성으로 달려가주세 요." "사고를 알리라고?" "그런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반란을 막는 거죠. 지금 규리하 공은 규리하성밖에 있어요. 돌아가시지 않더라도 그것은 굉장한 약점 이지요." "흐음." "규리하성에 도달하면……" 거기서 세레지는 잠깐 동안 입을 닫았다. 정우의 아스캄행은 특별히 비밀도 아니었으니 이곳에서 저격이 일어났다는 것은 정보가 새고 있 다는 반증이 되지는 않겠지만, 세레지는 규리하의 관료들 중 옛주인 의 영향권에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어려웠 다. 야리키의 전언을 받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면 곤란하다. 세레지 는 규리하성에 있는 사람들 중 아이저 규리하의 영향을 받을 리 없으 며 동시에 일처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을 생각해 보 았다. 곧 적당한 인물이 떠올랐다. "파라말 아이솔에게 이 사실을 전해요. 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고 규리하공 없는 규리하성을 지킬 좋은 방법도 생각해낼 수 있을 거예 요. 해주실 수 있겠어요?" 야리키는 허리를 폈다. "달리 바쁜 용건도 없어." 야리키는 몸을 돌렸다. 그는 규리하공을 잘 부탁한다거나 이제 떠나 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마치 필요한 물건이라도 하나 챙겨오려는 사람처럼 연회장 밖으로 척척 걸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세레지는 잠깐이지만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곧 스러졌 다. 세레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 그 녀에게 상황을 묻고 싶었던 병사들과 아스캄 사람들은 답답함 속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을린발은 발끝을 땅에 댔다. 그는 한쪽 다리로 움직이며 땅에 금 을 주욱 그었다. 고갯길의 이쪽편에서 저쪽편까지 금을 그은 그을린 발은 다시 길 가운데로 돌아와서는 자신이 그어놓은 금을 가리키며 고갯길 아래쪽을 향해 외쳤다. "금 넘어오지마!" 고개 아래쪽에서 돌아온 것은 얼어붙은 듯한 침묵뿐이었다. 그을린 발은 그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코끼리들이 참을성 있게 서있었다. 그을린발은 코 끼리의 몸을 토닥이거나 그 머리를 두드리며 코끼리 사이를 걸어갔 다. 코끼리들의 선두에는 전 유료도로당주 게라임 지울비가 한 손으 로 턱을 쥔 채 그을린발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을린발이 기괴한 계명성으로 다시 코끼리를 출발시키자 게라임은 속이 울렁거 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넘어오면 어쩔 겁니까?" "글쎄. 어떻게 하지? 별로 생각은 안했는데." 게라임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울렁거림 때문에 그 웃음은 곧 사라 졌다. 코끼리 멀미라는 병명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게라임 은 그 질병에 고통 받는 환자는 한 명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게라임 은 힘들게 호흡을 안정시키고 질문했다. "정말 다른 요구 조건은 없었습니까?" "없었어. 후원자는 네가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보내주면 끝이라고 하더군." 게라임이 선택한 방향은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로 향하는 비나간 남동 쪽 방향이었다. 아직 완전히 비나간을 벗어났다고 하긴 어렵지만 지 형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비나간의 평탄한 지형 대신 고개나 구릉이 약간씩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시구리아트에 약간 가까워졌다고 말하 려면 그런 길을 한참 더 걸어야 할 것이다. 게라임은 그 후원자가 누굴지 생각해 보았다. 유료도로당의 옛당주 를 탈출시키면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사람은 누구일까? 이곳까지 오면서 게라임은 더 쉬운 의문 해결법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그을 린발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후원자는 자기 정체를 알려줘 도 된다고 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게라임은 코끼리 멀미에 시달리는 그다지 좋다고 하기 힘든 상태에서 그 후원자의 정체에 대해 추리했 다. 그 후원자는 게라임의 탈출 그 자체가 보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 다. 그렇다면 게라임의 탈출은 어떤 일을 가져오게 될까? 게라임은 철없는 아들을 물리치고 유료도로당주의 지위를 되찾게 된다는 식의 즐거운 상상을 배격했다. 희망과 전망을 혼동하는 짓이다. 게라임은 최후의 승자가 시오크가 될 가능성을 아무런 꺼리낌 없이 인정했다. 따라서 보다 객관적인 전망은 유료도로당주의 자리를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싸움을 벌여 당 전체가 일시적, 혹은 장기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지금 그의 뱃속처럼. '제기랄, 울렁거려서 죽겠군.' 게라임은 호흡을 멈춘 채 생각을 계속했다. 분명히 그을린발의 후원 자가 바라는 것은 유료도로당의 혼란이다. 후원자가 그 이상의 것, 그러니까 게라임이 당주로 복위하는 것을 바랐다면 그을린발이 받은 명령은 게라임을 유료도로당에 데려다주고 그의 복권을 도우라는 내 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을린발이 받은 명령은 그를 탈출시키고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보내주라는 것이었다. 게라임은 혼란에 대해서 만 한정지어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유료도로당의 혼란은 누구에게 이 득이 되는가? 자유무역당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게라임은 그 이름을 즉 시 잊어버렸다. 너무도 자유무역당답지 않은 구출작전이다. 게다가 자유무역당의 누군가가 그을린발이 말하는 '돈 쓰는 재미를 위해 돈 을 쓰는 한량짓'을 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장래의 쓰임에 대비 하여 위장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비나간후와 정면으 로 대립하게 될 일을 자행했을 것 같지는 않다. 게라임은 입을 황급 히 틀어막으며 생각했다. '시모그라쥬로군.' 새 비나간후의 가장 큰 협력자는 새 유료도로당주이고, 따라서 유료 도로당의 내분을 통해 둘의 협력관계를 무력화시키면 비나간후는 약 화된다. 그리고 비나간은 북진하는 시모그라쥬와 전쟁 중이다. 연금 된 상태였지만 게라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금 넘어왔네." 게라임은 힘없는 머리를 움직여 그을린발을 보았다. 그을린발은 벼 슬을 꿈틀거리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게라임 은 먼 곳에서 고갯길을 올라오는 비나간의 병사들을 발견했다. 게라 임이 말했다. "저렇게 계속 따라오는 걸 보니 이 앞쪽에 당신이 싫어하는 것이 있 나 봅니다. 그곳에 우리를 몰아넣을 생각이겠지요." "그렇겠지. 그렇잖다면 오래 전에 어떻게든 공격했을 테니까." "어쩔 생각입니까?" 그을린발은 좌우를 둘러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몇 번 냈 다. 그러자 대열 속에 있던 몇 마리의 코끼리가 걸어나와 그을린발의 옆에 섰다. 지금껏 여러 번 본 것이지만 게라임은 감탄을 금할 수 없 었다. 대열 가운데서 몇 마리의 코끼리만이 움직였다는 것은 그을린 발이 코끼리들과 개별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코끼리를 골라낸 그을린발은 그 놈들과 함께 뒤편으로 걸어갔다. 게 라임은 그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을린발이 코끼리들과 힘을 합쳐 커다란 거목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다. 뿌리째 뽑혀나온 거목은 옆 으로 쓰러져 길을 막았다. 그을린발은 같은 방식으로 나무를 몇 그루 더 쓰러뜨린 다음 코끼리들과 함께 돌아왔다. 뒤편에는 길을 틀어막 은 나무 무더기가 남게 되었다. 게라임이 탄 코끼리 옆으로 돌아온 그을린발은 손을 털며 말했다. "말이나 소화차는 못 넘을 테니 시간은 좀 벌었고. 이제 네 차례 야." "저요?" "응. 코끼리 타느라 죽을 것 같은 모양이니 이만 내려. 계속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네 움직임이 다 노출되잖아? 네가 시구리아트 산맥 근처에 가기도 전에 네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테고 그러면 네 아들은 만반의 준비를 할 테지." 게라임은 힘을 보여주기보다 농담을 즐기고, 힘을 보여줄 때도 동정 심을 생각하며, 모든 상황을 간파하지만 말은 별로 하지 않는 레콘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 사업에 투자하고 싶어지는군요." 그을린발은 싱긋 웃었다. "코끼리 가축화 사업이 아니라 나한테 투자하고 싶은 거지?" 게라임은 웃었다. 그을린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돼. 사업에 방해되니까." "이미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비나간에게 적대적 인사로 분류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후원자는 한 번 활용한 것을 두 번 활 용하면 안되는 법이 있는지 확인하려 하겠지요."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미 투자가로 받아들였으니까. 백 날 가봐야 큰 일 못할 한량이라고 잘못 판단한 내가 잘못이지. 뭐 부탁 한 번 들어줬으니까 다음엔 거절하기가 쉽겠지." 코끼리 멀미라는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던 질환에 시달리고 있지만 게라임은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을린발이 유한계급자 들만 투자가로 받아들인 것은 그들의 돈씀씀이가 헤프다는 이유 외에 도 그의 코끼리로 장난을 칠 생각은 하지 못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을린발이 불필요하게 많은 코끼리를 끌고 온 것은 부탁 을 확실히 들어줬다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것은 다음 번의 거절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게라임은 그을린발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코끼리들을 보 았을 때부터 기필코 일어나리라 짐작했던 일이 결국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세계에 닥쳐오는 파란 속에서도 게라임은 어딘가에 대규모 코끼리 부대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리 고 게라임은 어떤 사람이라면 느꼈을지도 모르는 아쉬움, 즉 좋은 변 화일지 나쁜 변화일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올수 있 는 힘이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사라진다는 사실에 대 한 아쉬움은 느끼지 않았다. 게라임 지울비 또한 세상에 온갖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유료도로당의 힘을 만인에게 똑같이 나눠주길 원하 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라임은 이제 다시는 그을린발을 보 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만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내디뎠던 한 번의 걸음을 끝낸 그을린발은 이제 다시는 세상에 발을 내디디지 않을 테니까. 그을린발의 도움을 받아 게라임은 코끼리에서 내려왔다. 코끼리 멀 미가 남긴 후유증으로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다. 게라임은 한숨을 내 쉬며 그을린발을 올려다보았다. "비나간 병사들은 서쪽으로 끌고 가 주십시오." "그러지. 가는 거 안 어렵겠지?" "예. 당신이 싫어하는 그것이 앞에 있으니, 근처에 사람 사는 곳도 있겠지요." 그을린발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외쳤다. "이-라-리-!" 코끼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게라임은 길 옆으로 물러나 코끼리 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풀숲 사이로 몸을 숨겼다. 봄이 찾아온 고갯길에는 몸을 숨길 곳이 많았다. 뒤를 추적하는 병사들이 장애물 을 치우고 도달하기 전에 게라임은 거리를 충분히 벌려두기로 했다. 울창한 숲을 헤치고 걸어가던 게라임은 얼마 후 고갯길 옆의 고지대 에 도달했다. 그는 그곳에서 문득 발을 멈추고는 그을린발과 그의 코 끼리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고갯길을 넘어 평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야트막한 야산들 사이의 구불구불한 평지를 따라 걸어가는 코끼리들과 그 앞쪽에서 여유롭게 걸어가는 그을린발을 보 던 게라임은 마음 속으로 한 가지 소망을 빌어보았다. 게라임은 레콘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무기를 그을린발에게서 발 견하지 못했다.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게라임은 그을린발에게 코 끼리떼가 아닌 자신의 무기를 들고 세상에 돌아와야 할 일이 일어나 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것은 그가 사려 깊게 지켜준 침묵에 대한 배 신이므로. 헤어릿 에렉스는 이이타 규리하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 다. 이이타는 아래턱을 경직시킨 채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나?" 그들이 있는 곳은 폐광의 갱내사무실이었다. 뒷처리가 깔끔하지 않 은 폐광은 거대한 허방다리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곳의 광산주는 양 심적인 사람이었던 듯 충분한 보강공사를 해둔 채 떠났다. 따라서 이 이타가 목소리를 낮춘 것은 혹시나 고함 때문에 낙반사고가 일어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이타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온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이타의 질문을 받은 이는 그런 이이타의 태도에 아무런 구 애됨 없이 말했다. "비셀스 규리하를 쏘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죽었는지는 확실하 지 않지만 어쨌든 상당한 상처를 입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규리하성을 되찾아야……" "네가 누님을 쏘았다고!" 이이타는 제이어 솔한에게 달려들어 그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에게서 보기 힘든 과격한 모습에 소리 로베자가 놀란 신음을 흘렸 다. 움직인 사람은 이이타 하나뿐이지만 소리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 람들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이타가 일으킨 바람이 촛불 을 흔들어 벽에 있는 그림자들을 날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 소리는 이이타 외에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 다. 제이어 또한 누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 듯 이이타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힘겹게 말했다. "공자님. 이건 규리하 가문의 사고 방식입니까? 육친이 육친을 죽이 는 것은 괜찮지만 가문 외부의 사람이 육친을 죽이는 것은 안된다는 겁니까?" "이런 멍청한 놈! 지금 누님은 규리하의 방패야! 그 분이 없으면 규 리하도 없어!" "그런 나라라면 있을 필요도 없지요." "뭐라고?" 제이어는 이이타의 손목을 아래로 확 끌어내렸다. 제이어의 말에 놀 랐던 이이타는 그의 멱살을 놓쳤다. 이이타는 무의식 중에 다시 제이 어를 붙잡으려 했지만 제이어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이이타를 피했 다. 그리고 제이어는 목을 쓸어만지며 말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공자님의 말씀대로라면 비셀스 규리하가 어느 날 변덕을 부려 즈믄누리로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규리하는 당장 망하 겠군요. 오직 한 사람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무슨 나라입니까? 게 다가 그 능력이라는 것이 사람이 배워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닌 어처 구니 없는 것인데요. 그런 나라라면 사라져도 상관없습니다." 이이타는 주먹을 떨며 살인기사를 보다가 호소하듯 말했다. "도대체 왜 누님을 쏜 거야? 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나라는 가치가 없다는 네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니오. 춘부장께서 공자님을 당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셨고, 또 제 가 춘부장께 공자님을 지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째서……" 제이어는 화려한 동작으로 이이타를 가리켰다. "자신을 보십시오." 이이타는 입을 다물었다. 제이어는 두 손을 펼쳐보이며 말했다. "공자님은 도망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폐광의 갱내사무실에 앉아 그을음 섞인 해묵은 공기나 마시며 신분 낮은 여자에게 위로를 받고 있지는 있지는 않겠지요. 나는 멍청이가 아닙니다. 공자님이 잘 도망 쳐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공자님을 지키는 것은 아니지요. 공 자님이 도망쳐다닐 이유가 없어지도록 하는 것이 진정 지키는 겁니 다. 규리하의 지배자가 되십시오." 벽쪽의 의자에 앉아 상황을 관찰하던 두르사 돌 하장군의 눈이 번득 였다. 그는 제이어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을 핥았다. 제이어는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그녀가 죽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불확실하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지금 그녀가 규리하성에 없고 당장은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 이 중요합니다. 기회는 이 때뿐입니다. 규리하성을 되찾고 정부를 장 악하십시오." 이이타는 이를 악물었다. "정신 나갔나? 우리에게 무슨 병력이 있다고?" 그 질문에 제이어는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살인기사의 눈길을 따라 갔고 그 끝에서 팔짱을 낀 채 사무실 벽에 기대어 서있는 헤어릿 에 렉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이타와 두르사 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도 헤어릿에게 향했고 그 가운데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옅은 신 음을 흘리는 사람 등이 있었다. 헤어릿은 날카로운 눈으로 제이어를 마주보았다. 제이어가 말했다. "헤어릿. 너는 공자님께 규리하를 되찾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지? 약속을 대하는 내 태도가 너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좋겠 군." 헤어릿은 천천히 시선을 옮겨 이이타를 바라보았다. 이이타는 사무 실 가운데 서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헤어릿은 그를 동정했다. 아 버지도 동생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엄청나게 큰 결정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제이어 솔한." "예. 공자님." "한 번의 실수는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기에, 그러고 싶 지 않지만 나는 너를 용서한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소리에 대한 허튼 소리를 하면 너는 네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대국을 갖게 될 것이다. 바둑판이 아닌 결투장에서, 돌이 아닌 칼로 무향의 공자를 상대하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면 네 방자한 혀를 단속하라." 제이어 솔한이 신분 낮은 여자의 위로 운운하는 말을 했을 때부터 울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애쓰던 소리 로베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이이타가 몸을 홱 돌려 그녀를 향해 걸어오자 소리는 그만 기절해버리는 것이 어떨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절하지 않았고 이이타는 그녀를 붙잡아 그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 리고 이이타는 소리와 나란히 서서 제이어를 노려보았다. 헤어릿은 규리하 가문의 가신들의 반응을 재빨리 관찰했다. 그들은 희미한 미 소를 짓거나 무표정했으며 완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 다. 제이어는 천천히, 하지만 별로 기죽지도 않은 태도로 고개를 숙여보 였다. 이이타는 날카로운 눈으로 살인기사를 노려보다가 헤어릿에게 말했다. "헤어릿 에렉스. 나를 도와주겠나?" 헤어릿은 짧은 침묵을 서두로 삼아 말했다. "진심인지 알고 싶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어. 한 사람에게 기대는 나라는 무의미하다는 제이 어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 생각해 보니 누님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 하면서 규리하의 안전은 누님에게 떠넘겼던 내 태도도 역겨운 것이었 던 것 같군. 나는 아버님과 시카트가 누님을 대신할 방법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기회야. 누님이 규리하성 밖에서, 규리하시 밖에서 장시간 고립될 테니까. 그 리고 실행하지 않는 경우…… 누님이 공격당한 이상 대규모 단속과 보복이 있을 테지. 어쩌면 벌써 시작되었는지도 몰라. 우리가 숨어있 던 곳에 태연하게 찾아와 술 마시고 돌아갔던 세레지 파림 같은 이가 있는 이상 몸을 피하기는 쉽지 않겠지. 그렇다면 먼저 공격할 수밖에 없지. 내가 고려할 수 있는 모든 국면에서 이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군. 만약 내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면 알려줘. 들을 테니까." "밀고 나가는 것이 옳습니다." 대답한 것은 헤어릿이 아니라 두르사 돌 하장군이었다. 두르사 돌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허리에 찬 장검의 칼자루를 붙잡은 두르사는 당 당하게 말했다, "변경백께서는 규리하의 안전을 위해 황제께 무릎을 꿇는 대신 일어 나 충성 서약 수호의 깃발 아래 싸우셨습니다. 규리하의 안전을 지킨 다는 핑계로 비셀스 규리하에게 규리하를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되 찾아야 합니다." 규리하 가문의 다른 가신들도 일어나 이이타에게 말했다. "밀고 나가야 합니다." "되찾아야 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이이타는 손을 들어 점점 높아지는 그들의 말을 제지했다. 그는 그 목소리가 헤어릿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눈 빛으로 헤어릿을 돌아보았다. 헤어릿은 그 공정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을 알려주세요." 이이타는 그녀에게 목례했다. "고마워, 헤어릿. 두르사 돌 하장군. 최소한의 공격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목표들은? 내 생각에는 먼저 규리하성 경비대부터 장악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일 것 같은데. 지금 거기 명령 체계가 어 떻게 되어있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대로인가?" 두르사 돌 하장군은 신난다는 표정으로 바뀐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 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이타는 헤어릿에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는 당신 자신이 잘 알겠지. 하장군과 의논해봐." 헤어릿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르사 돌 하장군에게 다가갔다. 두 사 람과 규리하 가문의 가신들이 의논을 시작하는 것을 본 이이타는 고 개를 조금 떨구었다. 소리가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 게 붙잡았다. "공자님?" 이이타는 소리에게 고개를 돌려 웃어주고는 다시 제이어 솔한이 서 있던 곳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제이어는 공격 작전을 검토하는 무리 에 끼여 있었다. 제이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이타는 속삭이듯 말 했다. "잠시 나가서 바람 좀 쐬자." 이이타는 소리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가까운 곳에 있던 촛대를 집어들었다. 이이타 는 소리를 데리고 갱내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커다란 공동이었다. 막장으로 통하는 갱도들은 꼼꼼한 광산 업자가 막아두었고 지상으로 통하는 사갱만이 열려 있었다. 이이타는 그 길로 소리를 이끌었다. 몇 번 가볍게 꼬부라진 길을 따라 걷던 두 사람은 얼마 후 두 사람은 광산 입구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을 보게 되 었다. 입구를 감추기 위해 덤불과 나뭇가지 등으로 위장해두었지만 빛은 그 사이를 뚫고 갱도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이타는 입 구 가까운 곳에 멈춰서서는 촛대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소리를 앉게 한 이이타는 그녀의 옆에 주저앉았다. 소리는 이이타의 옆얼굴을 보 다가 말했다. "저, 공자님?" "응?" "아니…… 아니에요." "응." 이이타는 소리의 등 뒤로 팔을 집어넣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안았 다. 소리는 공자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공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소리는 해야 할 말을 도무지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리는 가슴이 아팠다. 가슴이 저릿한 느낌에 소리는 답답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때 이이타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군." "예?" "제이어 솔한이 해준 일. 아버지와 시카트가 성공하여 하인샤 대사 원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누님에게 그 동안 수고했으니 잘 죽으라는 말 외엔 할 것이 없겠지. 역겨운 일이야.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제이 어가 그 일을 대신 해준 것이 고마워. 제이어는 누님이 죽었는지 죽 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이왕이면 죽었으면 좋겠군." "……공자님. 제 말에 화내지 마세요." "무슨 말이지?" "저는 언니가 더 이상 곁에 없다는 것이 미치도록 끔찍해요." 이이타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소리의 이마가 보였다. 소리가 약간씩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이 계셔서 정말 좋지만, 그래도 언니가 없다는 것을 잊을 수 는 없어요. 사람 마음은 참 이상해요. 빈 물통에 물을 채워넣으면 더 이상 빈 곳이 없죠. 그런데 사람 마음은 흘러 넘칠 만큼 채워넣어도 빈 곳은 여전히 비어있어요." "네 말이 맞아. 소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면 공자님 마음 도 아프겠지요?" "응." "불쌍한 공자님." "소리." "예?" "빈 곳은 영원히 비어있겠지만, 그래도 네가 있어서 좋구나." 소리는 머리를 뒤로 젖혀 이이타의 얼굴을 보았다. 잠시 후 소리는 이이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이이타의 얼굴에 가득했다. =============================================================== 23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4. 보는 것과 베는 것 - 1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다." - 태어나자마자 헤어 진 쌍둥이가 서로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 똑같은 취미와 똑같은 직업, 심지어 비슷하게 생긴 반려를 얻은 어른으로 성장한다면 그 사실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 해 우슬라 사르마크 부인이 한 대답. 가장자리 거친 바람이 틸러 달비 부위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부위의 머리카락이 바람 탄 모닥불처럼 흩날리다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다가 오던 사람이 틸러 달비의 손에 있는 물건과 그 머리카락을 연결지은 것은 그 광경 때문일 것이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편이 낫잖아?" 틸러 달비는 그를 향해 걸어오는 니어엘 헨로 수교위를 보았다. 그 리고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틸러는 수교위의 말을 이해했다. "제가 쓸 거 아닙니다. 수교위님." 틸러의 손에 있는 것은 비녀였다. 니어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머리꼴 때문에 귀관이 쓸 것인 줄 알았지. 그럼 비녀는 왜 가지 고 있지? 아, 연인이 준 건가?" 틸러는 그냥 빙그레 웃기로 했다. 그것은 언젠가 정우가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리고 틸러는 자신이 그것을 주운 다음 왜 지금까지 돌려 주지 않은 것인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물론 지금은 돌려줄 수도 없 다. 그러려면 틸러의 팔 길이가 4천 킬로미터 쯤 되어야 할 테니까. 틸러에게 받은 침묵을 잠깐 가지고 놀던 니어엘은 곧 거기에 싫증을 느끼고는 뚜벅뚜벅 걸어 부위 옆에 섰다. 틸러는 산꼭대기의 바위 무 더기 중 허공으로 돌출한 암반 위에 앉아있었고 그 곁에 서자 치맛자 락처럼 물결치며 아래로 떨어지는 가파른 산자락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쪽에는 넓은 분지가 펼쳐져 있었다. 틸러가 있는 위치에서는 직경이 대략 20킬로미터 쯤인 분지의 모든 부분이 국그릇 안쪽을 들 여다보는 것처럼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틸러가 상급자의 접근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이유는 그 전망 때문이다. 분지 전체를 물끄러미 살펴보던 틸러는 갑자기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바둑판과 묵직한 나무판에 붙여둔 도깨비지, 그리고 몇 개 의 깃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판자를 집어 종이 위의 내용을 빠 르게 확인한 틸러는 바둑판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깃발 중 두 개를 집 어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어엘은 그를 존중하듯 옆으로 약간 물러났다. 암반 위에 똑바로 선 틸러는 몇 번 깃발을 상하좌우로 펄럭거린 다 음 다시 허리를 숙여 깃발을 바꿔들었다. 다시 깃발이 몇 번 바쁘게 춤을 추었다. 필요한 동작을 완료한 틸러는 깃발을 깃대에 감으며 바 닥에 앉았다. 니어엘은 넓은 분지 전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방금 전에 보낸 신호는 뭐였어?" "적 이천 명 정도가 五9에서 五10으로 이동했다는 뜻이었습니다." 니어엘 헨로는 틸러가 들여다보았던 바둑판을 보았다. 그곳에는 분 지의 형태를 나타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와 똑같은 그림이 그려 진 바둑판이 분지 내에 하나 더 있다. 니어엘은 그 바둑판을 바라보 고 있을 사람을 잠시 생각했다. 틸러가 있는 곳에서는 분지 전체가 보이지만 그것은 바꿔 말한다면 분지 어느 곳에 있든 틸러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리고 틸러는 세상의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 즉 만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찬성하게 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분지 내부에는 깃발을 이용하는 틸러의 작은 공연에 찬성하기 어려운 자들이 꽤 많 았다. 헨로 중대는 그런 자들이 틸러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7 부 능선과 8부 능선에 걸쳐 산을 에워싸듯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그 곳에 사흘치 물자와 함께 올라왔고 사흘째 정오가 될 때까지 전령이 오지 않으면 작전 실패로 간주하고 조속히 산에서 물러나도록 예정되 어 있었다. 하지만 이틀째 오후인 그 시간에도 니어엘도, 틸러도 초 조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니어엘은 암벽에 등을 기대었다. "솔직히 이 일은 똑똑한 상전사 한 명에게 시켜도 되는 일이지. 소 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 틸러는 의아한 표정으로 니어엘을 흘깃 돌아보고는 다시 분지로 시 선을 옮겼다. "그건 왜 질문하십니까?" "쟈마가 물어보라더군." "데시마스 수교위의 부탁을 받고 오신 겁니까?" "올라오기 전에 그러더군. 조용한 곳에서 한 마디 해보라고. 조용하 기는. 이곳은 분지 내의 모든 적이 이를 갈면서 노려보는 최전선이 야. 어쨌거나 쟈마는 틸러 달비의 소대가 소대장 없이도 잘 굴러가는 것은 그 정도로 소대장의 능력이 좋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된다더군. 그런 소대장이라면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길래 내 생각 에도 그렇다고 대답했어." "데시마스 수교위는 제가 비뚤어질까봐 걱정하고 계신 겁니다." 니어엘은 틸러의 귓바퀴 부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틸러는 빙글 빙글 웃고 있었다. "규리하의 지배자와 친분을 맺고 있는 젊은 소대장이 자신의 소대엔 관심을 적게 두는 것처럼 보인다면 다른 누구라도 신경이 쓰일 겁니 다. 특히나 데시마스 수교위 같은 분이라면 자기 부하가 잘못된 길로 간다고 걱정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수교위는 저를 단단히 붙잡아두어 야겠다고 결정하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아, 조금 더 있습니다. 아마 데시마스 수교위는 수교위님에게도 암 시를 주고 싶으셨을 겁니다." "뭐? 나?" 틸러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니어엘은 펄럭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틸러의 머리꼴에 대한 우려는 그녀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년 전이라면 그들은 장교의 품위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견책 대상이 되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가끔 주정뱅이로 변신하 곤 하는 니어엘 헨로 수교위조차 과거에는 지금처럼 털가죽으로 어깨 와 등을 덮거나 손가락을 잘라낸 장갑을 끼고 다니거나 끈을 칭칭 감 아 수선한 칼집을 허리에 차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리고 틸러는 니어 엘과 다른 성별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꼴이 더 심각했다. 니어엘은 수염이 나지 않는 자신의 턱과 뺨에 감사하듯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틸러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중대로 돌아왔다." "제가 알기로는 떠난 적도 없으십니다." "귀관은 떠났나?" 니어엘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조금 늦게 받았다. 틸러가 주 저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서 깃발을 흔들 일이 생겼기 때문 이다. 틸러는 깃발을 감으며 말했다. "곧 돌아갈 겁니다." "왜 아직 안 돌아갔지?" "제 혼란을 부하들에게 전파시키지 않을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뭐가 혼란스럽지?" "저는 나라 잃은 군인입니다. 수교위님. 국가가 위험하다면 군인은 당연히 그 앞에서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면?" "그래서 혼란스럽다는 건가?"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 수교위님." "아무래도 내 신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안되겠습니까?" 니어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말은 틸 러의 요청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쟈마가 걱정한 것은 귀관이 아니라 나였군." 틸러는 움찔했다. 니어엘은 이 관심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잠시 고 민해보았다. 쟈마 데시마스가 아니라 어쩌면 더 높은 곳,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 의 관심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시허릭 마지 오 상장군이 니어엘 헨로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했고 쟈마 데시마스 수교위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소극의 대본을 썼으며 틸러 달비가 충성의 대상을 잃은 군인의 배역을 맡은 것이다. 니어엘 헨로는 어떤 대사가 어울릴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 소극의 진행 방식으로 보건 대 아마도 쟈마 데시마스는 이런 대사를 기대했을 것 같다. '달비 부 위. 나 또한 선택이 힘든 갈림길에서 혼란을 겪었던 적이 있지. 사랑 하는 가족과 영광이 기다리는 곳으로 갈 것인지, 그렇잖으면 존재하 지도 않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멍청한 군인이 되어야 할지 선 택해야했지. 결국 약삭빠르지 못한 나는 멍청이가 되기로 했어……' 니어엘은 빙긋 웃었다. "돌아가거든 귀관의 상관에게 전해. 달비 부위. 헨로 수교위는 이런 연극에 넋이 빠져서 본색 다 드러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고. 그리 고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께서 도대체 나를 어디에 써먹을 작정을 했 기에 갑자기 내 충성도를 확인하고 싶어하게 된 건지 알아내서 나한 테 보고해." 틸러는 두 손 들었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리고 틸러는 호기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뒤에 하신 이야기는 저도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중요한 작전이 있 어서 수교위님의 충성도를 확인한 거란 말씀입니까?" "이미 영웅으로 인정된 사람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면 그런 이유밖에 없지. 충성도를 믿기 어려우면 사소한 작전에만 투입시키면 되지. 나 를 자극하지도 않거니와 헨로 중대의 무적 신화는 신화대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 틸러는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헨로 중대를 간단한 작전에만 계속 투입하여 연승을 거두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아군 전체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니어엘은 싸늘하게 말 했다. "그런데 나를 자극할 위험을 무릅쓰고 내 충성도를 확인하고 나섰단 말이야. 그렇다면 나와 내 중대를 사지로 보낼 작정을 한 거지. 내가 '에라, 못하겠다! 부모님이랑 동생 찾아갈래!' 하고 외칠지도 모르는 작전 말이야. 딱정벌레다." 틸러는 그 작전이 딱정벌레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되묻지는 않았다. 대신 틸러는 하늘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하늘은 꽤 큰 관찰 대상이지 만 또한 시야를 뺏거나 가리는 것이 없다. 곧 틸러는 산꼭대기에 올 라올 때부터 일어날 거라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 들을 향해 몇 개의 점이 날아오고 있었다. 틸러는 그것이 여섯이 되 기를 바라며 숫자를 세었다. 여섯이었다. 니어엘이 말했다. "귀관이 이겼군." 그들이 낮에 올 거라고 장담했던 틸러는 빙긋 웃었다. 틸러는 밤에 도 딱정벌레의 소리는 나니까 기습은 안 되고 게다가 틸러의 위치도 포착할 수 없으니 낮에 올 거라고 예견했다. 니어엘은 그 판단에 동 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밤에 올 거라고 예견했다. 그들 이 낮에 열린 하늘을 통해 날아오는 것은 헨로 중대의 궁술을 무시하 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니어엘은 활을 꺼내들며 말했다. "이렇게 대놓고 무시해서야. 섭섭하게." 그녀의 손에 끌려나온 덧살이 활시위에 걸렸다. 덧살이 빈틈없이 걸 리자 니어엘은 시위를 붙잡고 있던 오른손을 놓았다. 그리고 니어엘 은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집게손가락이 허공에 있는 딱정벌레 기수들 중 가장 앞쪽에 있는 자를 겨냥했다. 그리고 니어엘은 몸을 옆으로 돌렸다. 니어엘은 날아오는 딱정벌레들에 옆을 보인 자세로 섰다. 다시 시위 를 잡은 그녀는 그것을 힘껏 잡아당겼다. 옆에 앉은 채 그 모습을 보 던 틸러는 니어엘이 어깨를 긴장시킨 채 으르릉거리는 맹수를 안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니어엘이 그 맹수를 해방시켰다. 애기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틸러는 니어엘이 활을 쏜 직후 저 먼 하늘에서 종류를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정상 아래쪽에서 헨로 중대의 장병들이 함성을 질렀다. 니어엘은 다시 딱정벌레들에게 몸을 돌렸다. 눈을 딱정벌레들에게 고 정시킨 채 그녀는 조금 전의 동작을 반복했다. 여섯 마리의 딱정벌레는 차례차례 크게 선회했다. 니어엘은 그 딱정 벌레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활을 내리고는 입 옆에 손 바닥을 세워 말했다. "다음엔 좀 더 작은 거 타고 와! 여자들이 큰 거 좋아한다는 선입견 은 버려!" "……듣기 힘든 조언인데, 안됐군요. 딱정벌레 날개 소리 때문에 그 말 못들을 겁니다." "쯧쯧. 운이 그 정도밖에 안되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난 이만 내려 가겠어." "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수교위님." "그럴 필요 없어. 상관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을 미리 사과드린다는 겁니다. 왜 부모님과 동생에게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몸을 반쯤 돌렸던 니어엘은 얼굴을 돌려 어깨 너머로 틸러를 노려보 았다. 틸러의 얼굴에 비난이나 의심이 없음을 확인한 니어엘은 손을 들어 미간을 붙잡아 눌렀다. "귀관은 왜 여기에 있나?" "저요? 저는 서약 무용론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서약 무용론? 서약 지지파와 반대되는 건가 보군. 왜 반대하는데?" "충성서약에는 잘못된 가정이 들어있거든요. 규리하공 아가씨를 보 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니어엘은 흥미를 느꼈다. 그녀는 틸러를 향해 돌아서서 암벽에 몸 옆을 붙인 채 질문했다. "규리하공께서 뭐라고 하셨는데?" "규리하가 자신에게 목숨을 요구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하셨습니 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음. 저희들이 규리하를 빠져나오기 직전에 규리하 가문의 두 부녀 가 회담을 가졌다는 것은 아시지요? 저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버지 는 딸에게 규리하가 원한다면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 다. 그러자 딸은 규리하가 자신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을 듣지 못했 다고 대답했지요." "그런데?" 틸러는 갑자기 서늘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규리하공 아가씨의 말이 맞습니다. 저 또한 규리하공 아가씨의 목 숨을 원한다는 규리하의 통고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규리하공 아 가씨의 목숨을 원한 것은 아이저 규리하입니다. 하지만 아이저 규리 하는 규리하의 이름으로 규리하공 아가씨의 목숨을 원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가 서약 지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지?" "저는 어떤 경우에 한해 제 소대원을 즉결처단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래." "제 소대원들도 그 권한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소대원 중 그 누 구도 제가 누가 죽고 누가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놀라운 판단력을 가졌다고 믿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소대장이기 때문에 그 런 권한이 있는 것이지, 그런 능력이 있어서 소대장이 된 것은 아니 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도 제 자리에 앉으면 그것을 결정할 수 있습 니다. 만약 제가 312소대의 소대장이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이 살거나 죽는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소대원 중 누구에게 죽으라고 말하면 그 소대원은 뭐라고 대답하겠습 니까?" "귀관의 정신적 문제를 난폭한 어휘로 지적하겠군." "충성 서약에는 바로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가?" "예. 시카트 규리하는 우리가 개돼지가 아니기 때문에 지배자를 선 택할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지배자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생 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거꾸로죠. 우리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이저 규리하는 서약지 지파이기 때문에 지배자는 지배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배자 로 선택된다는 논리를 믿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더 이상 지배권이 없 어도 자신이 모든 규리하를 대표해서 누군가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능 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상당한 부하에게 노궁을 쏘고 딸의 목숨을 요구하면서 규리하가 그것을 원한다는 식의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충성 서약의 문제입니다. 선택되었기 때문에 타 인을 지배할 수 있는 지배자가 남을 지배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택 된다는 식의 착각을 만들어냅니다." 틸러는 갑자기 자신이 연설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 굴을 붉혔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분지를 관 찰하는 임무에 감사하며 틸러는 니어엘을 외면한 채 빠르게 말했다. "우리는 저녁으로 감자를 먹을 수도 있고 옥수수죽을 먹을 수도 있 습니다. 선택권이 있지요. 하지만 그 선택권 때문에 우리가 개돼지보 다 나은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다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 다워지는 것은 훨씬 복잡한 문제입니다. 저녁거리나 지배자를 선택하 는 것 따위가 사람다움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 람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충성 서약이 필요하다는 식의 논리를 거 부합니다. 충성서약 따위는 없어도 아무 상관없고, 그것이 없다고 해 서 우리의 사람다움이 훼손되지도 않습니다." 니어엘은 짓궂어지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명연설이야, 틸러 달비 부위. 귀관은 방금 인류에게 고상함을 부여 했어." 틸러는 귀까지 빨갛게 변한 채 말했다. "좋은 여가 활동이지요. 인류 구원은." "그런데 서약 무용론과 귀관이 이곳에 있는 것 사이에는 무슨 관련 이 있는 거지?" "예? 아아, 그거요. 흥분해서 그 이야기를 못했군요. 제가 아는 자 들 중 유일하게 대장군님만이 어떤 특정인을 찾아내자고 주장하지 않 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배할 능력이 있는 사람?" "예. 지금 거병하는 자들 대부분은 그런 특별한 사람을 찾아내자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그 사람이 바로 자 신이라고 주장하지요. 뭐 뒤의 이야기는 참아줄 수 있는 허영심으로 취급한다 해도 앞의 이야기는 제가 최근들어 싫어하게 된 주장입니 다. 누군가를 지배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지배자로 선택된다는 논리 말입니다. 하지만 대장군님은 누군가를 선택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족원 회의를 열어서." "귀관은 타인을 지배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었기 때문에 타인을 지배할 수 있다고 했지. 그래서 선택의 장 을 만들기 위해 애쓰시는 대장군님을 따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귀관은 상당히 철학적으로 자신의 길을 결정하는군." "자기합리화는 중요하거든요." "꼬리를 슬슬 빼는군. 쑥스러워졌나? 좋아. 그런데 내게 왜 부모와 동생에게 가지 않느냐고 물은 이유는 뭐야? 내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 하나?" "수교위님의 거취는 수교위님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저는 수교위님 이 어떻게 해야 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틸러는 잠깐 멈추었다가 말했다. "그럴 능력도 없고요. 물론 수교위님께서 저를 거취결정자로 선택하 신다면야……" 니어엘은 빙긋 웃었다. 틸러는 따라 웃으며 말했다. "안 그러시겠지요?" "귀관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싶지는 않군." "예. 그저 호기심일 뿐입니다. 저에겐 걸리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 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렵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교위님께는 여러 가지 부담이 되는 것이 있으실 텐데요." "축머리." "예?" 니어엘은 쓸쓸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축머리라고. 대장군과 발케네공은 대립할 가능성이 높지. 만약 대 장군께서 이기신다면 축에 몰린 내 부모님이나 동생을 구할 사람이 이쪽에 있어야 하지." "아……" "내게는 귀관과 같은 철학이 없어. 우리 아버지가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르며 부냐의 구명을 도모할 때 나는 황제 폐하를 위해 지멘을 잡 으려 했지. 황제 폐하께서 기분이 좋아지실지도 모르잖아? 부냐가 발 케네로 도망쳤을 땐 중대를 이끌고 나가서 발케네를 온통 휘저어놓았 고. 제국군이 이길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지금은 혹 새 황제를 선출 하시는 일에 성공할지도 모르는 대장군 곁에 있기로 한 거지. 나는 가족들과 함께 싸우기보다 먼 곳에서 만약을 도모하는 편이 어울려. 우리 가족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아. 그러고 싶어도 우리 어머니 때문 에 못 그러지." "어머님과 사이가 나쁘십니까?" "응. 우리 어머니는 당신의 모든 불행이 나 때문이라고 믿고 계셔. 그리고 그 믿음은 소급적용되는 것 같아. 나는 가끔 당신이 우리 아 버지와 결혼한 것조차 나 때문에 일어난 일로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느끼곤 하지." 틸러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니어엘은 틸러의 위 로를 바라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보고하지 않아줬으면 좋겠군. 귀관의 솔직한 대답 때 문에 나도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야. 하지만 만약의 경우 가족을 보호 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다는 보고가 올라간다면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 은 나를 의심할 거야. 달비 부위. 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 장군의 가장 신뢰하는 부하가 되어야해." "하지만…… 만약 대장군께서 실패하신다면……" "젠장, 그 때가 되면 줄행랑칠 거 아니냐고? 그러면 안돼? 대장군께 서 자살동반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걱정마. 줄행랑치지 않을 거니까." "예?" "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사실은 가족들을 위해서 그랬다는 말 따 위 할 생각 없어. 그게 내 자존심이야. 아마도 마지막 자존심이겠지. 대장군께서 끝내 귀족원 회의를 열지 못하고 대륙에 휘몰아칠 군웅할 거의 바람을 막지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일은 내가 죽은 다음 에 일어날 거야.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 해도 대장군 각하에 대한 의 리는 지킬 생각이니까." 틸러는 그것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틸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니어엘은 짤막한 작별 인사를 남겨놓고 떠났다. 그날 일몰 무렵 이레 달비가 산으로 올라왔다. 이레 달비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으니 산에서 내려와도 좋다는 대장군의 전갈을 가져왔다. 호두나무 군단의 군단장 하스마 빌 상장군은 이복동생인 잠바이 태수 돈테이 빌을 지켜주는 것보다 대장군에게 합류하여 빨리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낫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스마 빌 상장군이 남달리 거시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처음 엘시 에더리의 합류 요구가 전 달되었을 때 하스마 빌 상장군은 그것을 거부했다. 빌 상장군은 제국 이 사라진 상황에서 전략적인 중요성이 말할 수 없이 높은 도시를 지 배하고 있는 이복동생을 지켜줄 존재는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서 그는 대장군에게 저항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합류할 수도 없노라고 대답했다. 중립선언을 한 셈이다. 하지만 엘시는 저항을 용 납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중립 또한 허용할 수 없었다. 이미 합류한 제국군이 자신들 또한 친지나 가족에게 가겠다고 동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시는 호두나무 군단에게 그 중립 의지를 실력으 로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름 높은 대장군과 싸워야 한다는 부담감 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하스마 빌 상장군은 조심스럽게 싸움에 응했 다. 동생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한 상장군은,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싸움을 겪게 되었다. 산을 내려온 니어엘 헨로와 틸러 달비는 호두나 무 군단의 교위 한 명에게 어떤 싸움이 벌어졌는지를 듣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산 위에서 모두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직접 그 싸움에 참 가했던 현장 증인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을 사양하지는 않았다. 콧수 염이 멋진 교위는 완전히 흥분해 있었다. "말이 됩니까? 우리 중대 피해는 딱 두 명 죽은 것 뿐입니다. 그 두 명도 놀란 말에 가슴을 채여 죽은 놈 하나하고 도망치다가 아군 발에 깔려죽은 놈 하나입니다. 전투로 죽은 인원은 한 명도 없단 말입니 다. 그런데 우리는 졌습니다. 저도 그걸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졌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진 건지 모르겠다는 말입니 다! 우리는 이틀 동안 여기저기로 이동하고 적을 추격하거나 회피 행 동을 한 것 외에 아무 짓도 안했습니다. 전투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분명히 졌단 말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명령 계통은 다 작살나 있고 아군 사령부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대장군은 마법사입니까?" 그 교위는 무장해제당한 채 중대원들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감시 를 받고 있었지만 수치스러워하거나 분노하기보다는 황당해하고 있었 다. 틸러는 대장군이 어떻게 호두나무 군단을 수십 개로 쪼개어놓은 다음 그것을 흩어놓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테카와 론솔피, 쵸 지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그 자신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세 레콘은 여기서 저 기로 열심히 달리거나 그냥 멍하니 한 자리에 서있거나 가끔 계명성 으로 뿜어내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일 중 몇 가지는 틸러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쵸지가 명백히 호두나무 군단의 분견대임이 분명한 병력에게 달려가면서 "왜 이제 오냐. 대대는 저쪽에 있다. 빨리 합류해!" 등의 고함을 지르고는 그 들을 스쳐 지나간 일이 있다. 쵸지가 떠난 다음 분견대는 부리나케 반대방향으로 도망쳤고, 그곳은 바로 아군의 대대가 주테카와 함께 있는 곳이었다. 주테카는 공포에 빠진 그들 사이를 쓱 달려감으로써 분견대를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그런 일들은 틸러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틸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았다. 그 래서 틸러는 대장군은 마법사가 아니라는 말만 해주었다. 콧수염이 멋진 교위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틸러가 바둑판과 깃발 등을 챙겨들고 사령부로 떠난 다음 니어엘은 자신의 중대에게 할당된 야영지로 이동해서는 야영 준비를 명령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전령이 달려와 사령부로 오라는 명령을 전했 다. 니어엘은 어떤 말을 들을지 궁금해 하며 사령부로 향했다. 그것 은 꽤 긴 길이었다. 호두나무 군단이 합류함으로써 엘시 에더리 휘하 의 장병은 52만이 되었기 때문이다. 52만이 주둔하고 있는 야영지는 거대한 도시 이상이었다. 그것은 발케네 정벌군의 여섯 배나 되는 숫 자였다. 하지만 니어엘은 지금이 그때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머 리 위에 하늘누리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니어엘이 중대 본부를 빠져 나와 발케네 남부를 관통한 후에 목격한 발케네 정벌군의 본영은 제 국의 막대한 군자금이 아낌없이 투입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잠바이 동쪽의 이 야영지에는 여섯 배나 되는 병력이 있었지만 돈의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보급창의 숫자도 적었 고 물자 운반은 주로 인력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편의시설은 꼭 필 요한 것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하루에 먹어치울 음식을 생각 해본 니어엘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숫자에 질려버렸다. 그리고 이들 이 하루에 내놓을 배설물을 생각해본 니어엘은 자신도 모르게 발 아 래를 살피게 되었다. 사령부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는 얼굴을 한 병사들이 서로의 발을 밟을 듯한 기세로 오가고 있는 거대한 천막촌이었다. 간단한 검문을 받은 니어엘은 몇십 개나 되는 천막 사이를 지나친 후에 겨우 엘시 에더리가 있는 천막에 도달했다. 천막 안에서 엘시는 몇 명이나 되는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 다. 그 명령들은 중복되는 것이 없었고 엘시는 생각을 하고 말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속도로 명령을 계속 내렸다. 하지만 니어엘은 그 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는데 명령을 받기 위해 계속 다른 장교들 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엘시는 니어엘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고 니어엘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천막 구석으로 옮겨가 섰다. 엘시의 곁 에는 몇 명의 상장군들이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또 한 엘시에게 가끔 의향을 묻곤 했기 때문에 엘시의 일이 그들 덕분에 많이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니어엘이 천막에 들어온지 반 시간 정 도가 지난 후에야 겨우 장교들이 모두 사라졌다. 엘시는 상장군들도 모두 내보낸 다음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만 남게 했다. 시허릭은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엘시는 니어엘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많이 기다렸지?" 니어엘은 괜찮다는 표정을 하고는 엘시에게 다가갔다. 엘시는 의자 에 앉아서는 니어엘에게 탁자 맞은편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마자 이레가 들어와 엘시에게 식사를 할 것인지 질문했다. 엘 시는 조금 후에 먹겠다고 대답했고 그러자 시허릭이 매우 불행한 표 정을 지었다. 니어엘은 엘시가 이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대장군의 모습을 살 폈다. 이곳의 남자 병사들은 거의 대부분 텁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 었지만 엘시는 깔끔하게 면도를 한 상태였다. 이레 달비가 결사적으 로 엘시의 뒤치닥거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 충성스러운 몸종의 노고 는 엘시의 옷차림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레도 엘시의 표 정까지 관리할 수는 없었다. 니어엘은 엄격히 단속되고 있는 엘시의 얼굴에서 피로함을 읽었다. 당연한 일이다. 하늘누리 실종 전 태위청 이 하고 있었던 일을 혼자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더군다나 엘시에겐 태위청이 산하에 거느리고 있던 거대한 행정기구가 없다. 엘시는 이레가 나가자마자 니어엘에게 몸을 돌리며 말을 꺼내려 했 다. 니어엘은 재빨리 몸가짐을 바로했다. "산 위에서 수고해줬다. 수교위. 덕분에 상호피해 없이 호두나무 군 단을 규합할 수 있었다." "한 일이 적습니다. 대장군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적대적인 군단 하 나를 아무런 피해 없이 굴복시킨다는 것은 저로서는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만과 혼란…… 왕벼슬과 론솔피, 주테카가 많은 일을 해주었지. 빌 상장군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또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합류에 반대하는 제국군은 이제 없을 겁니다. 빌 상장군은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꼭 그렇지는 않을 거야. 다음 번의 합류 대상은 만만찮거든." 시허릭은 엘시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니어엘은 고개를 약 간 갸웃한 채 설명을 기다렸다. 엘시는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진 사 람처럼 잠시 침묵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나는 이곳을 잠시 떠날 거야." 니어엘은 놀랐다. "떠나신다고요?" "그래. 민들레 여단을 찾아가 합류 요구를 할 생각이다." "민들레 여단이오?" "발케네 정벌 당시 마지오 상장군은 고추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 단, 그리고 민들레 여단을 움직이길 원했지만 폐하께서는 두 개 여단 만 부르셨다. 그러니 민들레 여단은 여전히 은누리에 남아있다. 그들 과 합류할 생각이다. 최대한 빨리 그들과 접촉해야 되기 때문에 그곳 에는 나와 이레, 그리고 왕벼슬만 가게 될 것이다." "세 명? 민들레 여단은 대단히 난폭하다고 들었습니다. 세 명이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난폭하다는 말은 모든 레콘에게 쓸 수 있는 말이야." 니어엘은 센시엣 특수수용소에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투 입되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부대 구성원 전부가 절망감으로 반쯤 돌아있는 레콘 부대라면 난폭하다는 말도 그 의미가 조금 각별하지 않나 생각했다. 하지만 니어엘은 엘시의 뒤이은 설명 때문에 그 말을 삼켰다. "그리고 어차피 병력으로 그들을 억압할 수는 없어. 수십만 명을 데 리고 가든 두 명을 데리고 가든 마찬가지야." "유감스럽게도 그 말씀이 맞군요. 차라리 그들을 규합하는 것을 포 기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대장군님. 지금 대장군님께 무슨 일이 생긴 다면 아군은 걷어차인 잿더미 같은 꼴이 겁니다." 엘시는 무거운 눈으로 니어엘을 보며 말했다. "니어엘. 나는 가야 한다. 우리가 병력을 규합하는 것은 다른 세력 이 제국군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도 크지. 민들레 여단 같은 경우는 아주 취약해. 앞으로 절대 센시엣에 투입될 일이 없다는 약속 이 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봐. 나는 지금도 이미 늦지 않았나 걱정되는군." 니어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민들레 여단이 다른 세력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과 맞서게 된다는 상황은 절대로 피하고 싶은 것 이다. 민들레 여단에 대해 생각하던 니어엘은 그들이 비상시에 맡기 로 되어 있는 다른 레콘 무리도 떠올렸다. "그렇다면 센시엣 특수수용소의 재소자들도 데려오실 작정이십니까?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곳을 나오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면……" "그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관두기로 했다. 그들이 자기통제 력은커녕 제정신을 가지고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어떤 미치광이라 해도 센시엣 특수수용소의 재소자들을 끌어낼 생각은 하지 못할 거 다. 나는 민들레 여단만 데려올 것이다." 니어엘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군대인 민들레 여단 은 대장군의 지위를 마냥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엘시가 절망 도의 죄수들도 데려올 작정을 하고 있었다면 니어엘은 그를 결박해서 라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시허릭의 눈치를 살펴본 니어엘은 그 또 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니어엘은 다른 문제를 거론해보았다. "은누리까지 가신다면 꽤 먼 길이군요. 오랫동안 못뵙게 되는 겁니 까? 대장군님의 장기간 부재도 상당한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그래. 그래서 오늘 합류한 호두나무 군단의 딱정벌레를 잠시 빌릴 생각이다." 그날 낮에 그녀와 틸러를 향해 날아왔던 여섯 마리의 딱정벌레는 호 두나무 군단이 자랑하는 갑충 정찰병들이다. 그녀 자신이 증명한 것 처럼 딱정벌레는 집중적인 활 공격에 취약하고 사육은 어렵기 때문에 제국군에게 별로 호평받지 않지만, 가끔은 특수 병과에 대한 독특한 기호를 보이는 지휘관도 있는 법이고 하스마 빌 상장군은 갑충 정찰 병을 가지는 일을 좋아했다. 니어엘은 왜 호두나무 군단의 합류가 이 시점으로 정해졌는지 알게 되었다. 엘시는 충분한 숫자의 병력을 규합시켜놓은 다음 민들레 여 단과 담판을 지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내 자리는 마지오 상장군이 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어. 현재 아군의 병력은 제국군 창설 이래 한 자리에 집결한 적이 없을 만큼 방대한 규모로 늘어났고 그것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해 시허릭은 사령부 규모를 크게 확대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나도 거기 에 동감했어. 하지만 인력 충당이 만만찮다. 연락 장교만 수십 명이 필요할 지경이니까. 따라서 몇몇 장교들의 진급이 불가피하고, 그 중 에는 귀관도 포함된다." "예? 진급이라고 하셨습니까?" "간단히 말하지. 상장군으로 진급해서 가시나무 군단을 맡아라." 니어엘은 멍한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리 독립중 대의 중대장이라 해도 대대장을 뛰어넘어 곧바로 군단장이 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지, 복무연한에 대한 제국군의 불문율이 그런 식으로 깨져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인사에 가시나무 군단의 선임 대대 장이 동의할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니어엘을 침묵하게 한 것은 쟈마 데시마스와 틸러 달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즉석 진급 심사였다는 사실이었다. 니어엘은 그것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시허릭 마지 오 상장군이 자신의 군단을 맡길 사람에게 고작 그 정도의 시험밖에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니어엘은 충격 속에서 말했다. "가시나무 군단에는 저보다 군단 사정에 훨씬 해박하며 자질도 충분 한 대대장들이 있을 텐데요." 엘시는 시허릭을 돌아보았다. 시허릭이 설명했다. "그래.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흑사자군 사령부로 이동하게 될 거 야." "흑사자군?" 니어엘의 반문에 시허릭이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엘시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 그건 사령부 구성을 준비 중인 자들 사이에서 쓰이는 가칭이 야. 제국군이라는 이름이 약간의 혼란을 일으키거든. 우리도 제국군 이지만 아직 우리에게 합류하지 않은 제국군도 있지. 짐작하겠지만 둘을 구분지어야 할 일은 많지. 그래서 시인성의 문제 때문에 그 이 름이 쓰이고 있는 모양이야. 흑사자군이라고. 하지만 대장군께서는 그 이름을 허락하지 않으셨어. 제국군의 정통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짓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제국군이야." 니어엘의 뇌리에 단순히 시인성의 문제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 이 떠올랐다. 아마도 남쪽에서 눈을 뜬 대호 때문이다. 아라짓 제국 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대호왕 사모 페이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해 더 오래된 권위, 고아라짓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북부의 상징이 발굴된 것이다…… 그런데 용은? 대호 마루나래를 거느린 사모 페이가 북부로 돌아와 흑사자의 나라 를 부활시켰을 때 그곳에는 뇌룡 아스화리탈을 거느린 륜 페이가 있 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흑사자가 부활했다. 대호는 저 남쪽에 있는 데 용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망상에 잠겼던 니어엘은 잠시 침묵했고 그러자 엘시가 말했다. "귀관의 생각은 어떤가." 니어엘은 당황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망상 때문이기도 하 지만 또한 자신의 의향을 말하거나 하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직 변경은 통고될 뿐이다. 어쨌든 대장군이 일개 수교위 에게 의향이 어떠냐고 묻는 일은 니어엘이 아는 군대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다. 니어엘은 얼굴 가득히 당혹감을 드러내어 엘시를 바라보 았다. 그러자 엘시는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귀관의 9014 독립중대 때문이다. 헨로 중대라고 하더군. 귀관을 가 시나무 군단장으로 영전시킨다면 귀관의 선임 소대장을 진급시켜 헨 로 중대를 맡게 하거나 혹은 헨로 중대를 해체시켜 가시나무 군단에 편입시켜야겠지. 하지만 헨로 중대는 탁월한 명성을 가지고 있고 군 은 명성 있는 부대는 함부로 해체하지 않아." 명성은 적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북돋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엘시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전술적으로 봐도 귀관의 부대는 단독활동이 어울린다. 전원 사격 후 전원의 일격이탈이 부대의 장기인 것 같더군. 그런 장점을 잘 살리려면 역시 독립된 편이 좋겠지. 따라서 중대 해체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 그런데 귀관이 낯선 가시나무 군단을 맡아서 보여줄 수 있는 기여와 귀관이 이미 익숙한 헨로 중대와 함께 있으면서 보여줄 수 있는 기여 중 어느 것이 클지 판단하기 어렵다. 귀관이 군단장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야. 그보다는 헨로 중대가 군 단급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겠지."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야. 물론 적의 군단에 대응하기 위해 귀관의 중대를 내 보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어렵겠지. 하지만 귀관의 중대를 전략 단위로 이용할 수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아. 따라서 사령부 는 귀관이 가시나무 군단을 맡든 헨로 중대장 자리를 유지하든 만족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니 귀관이 결정하도록. 한 시간 주겠다." 니어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했다. 그대로 물러나려던 니어엘은 잠깐 머뭇거렸다. 탁자 위의 서류들로 손을 뻗던 엘시는 그녀를 돌아 보았다. "대장군님. 식사는 제 때 하시길 바랍니다." 엘시는 물끄러미 니어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니어엘은 다시 경례하려다가 이미 경례했음을 깨달았다. 당황하던 그녀는 그냥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에 더욱 당혹 했다. 니어엘은 황급히 천막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는 그렇 게 했다. =============================================================== 24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4-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7-18 조회수 : 422 피를 마시는 새 24. 보는 것과 베는 것 - 2 당연하지만 니어엘 헨로는 그날 대장군을 독대하게 된 유일한 지휘 관은 아니었다. 많은 지휘관과 사무관, 행정병들이 불려왔고 많은 보 직 변경과 편제 변경, 세부 조종이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을 곁에서 본 사람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뿐이었다. 이레 달비도 곁에 붙여둘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부족했지만 엘시는 자리를 넘겨줄 시허릭에게 제반사항을 확실히 이해시키기 위해 그를 앉혀두었다. 결과적으로 시 허릭은 신경이 잔뜩 곤두서게 되었다. 마치 사람의 달리기를 해석하려는 것 같았다. 누구라도 다른 사람에 게 달리라고 - 이왕이면 정중한 어조로 -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다 른 사람에게 발가락들의 각도, 관절의 회전, 근육의 수축과 이완, 체 중 이동, 호흡량의 변화를 일으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엘시는 그런 식으로 명령을 내렸다. 왼발 엄지발가락, 힘을 준다, 오른쪽 허벅지, 수축해라. 오른쪽 어깨 관절, 뒤로 회전해라, 아, 옆구리를 때리지 않도록 주의해라. 그리고 콧구멍, 확장해라. 걱정마. 허파에겐 아까 명령을 내렸다. 시허릭은 그 명령들이 명령 대상으로 하여금 달리게 할 것인지 공중 제비를 넘게 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지막 장교가 물러난 다 음 시허릭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질문했고 엘시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 하자 충격을 받았다. "잘 모르시겠다고요?" 엘시는 피로한 눈 주위를 비비며, 그리고 어느새 천막 한쪽에 나타 나 비난하는 눈길을 보내는 이레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내가 머릿속에 흠결 없는 계획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는 것은 알아.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명령을 받아야 하는 쪽을 안심시키기 위해 취해보인 태도일 뿐 나는 전능자 도 아니고 부활한 라수 규리하도 아니야. 시허릭. 많은 시간을 들여 섬세하게 구성된 조직도 가끔 말도 안되는 행태를 보이는데 이렇게 임기응변으로 두드려 맞춘 조직이 제대로 움직인다면 그야말로 놀랄 일이겠지. 아마 어처구니 없는 사고들이 축차적으로 드러나게 될 거 야. 나는 그 명령들이 내려지는 것을 모두 관찰한 그대가 사고의 원 인을 짐작할 수 있게만 되면 좋겠어. 그러면 좀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레. 우리는 곧 야간 비행을 할 거잖아. 그러 니 식사는 그냥 생략하지. 너는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식사 직후에 비행하면 속이 안 좋던데." 이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드셨어야 했습니다. 가주님." "네 말이 맞아. 이레. 다음엔 네 말을 따르지." "그 다음이라는 때에 아마도 티나한의 귀환도 볼 수 있을 거라는 예 감이 드는데요." 엘시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이레는 피곤한 주인을 비난하는 것은 그쯤 해두기로 했다. 주인에게 음식을 먹이길 포기한 이레는 비행 준 비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탁자 위에 그대로 엎드리고 싶은 충 동 속에서 고개를 돌린 엘시는 시허릭의 근심스러운 표정을 보게 되 었다. "곧장 떠날 생각이십니까." "헨로 수교위가 돌아와 보고하면." "그래서 한 시간이었군요. 잠시 쉬셨다가 가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아예 푹 주무신 다음 내일 아침 모든 장병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결속력 강화를 위한 좋은 요식행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하긴 밤에 떠나면 마치 혼자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군. 장 병들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줘." "대장군님." 엘시는 주먹으로 이마를 받치며 중얼거렸다. "시허릭. 나를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잠자리에 든다 한들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군. 몇 분만에 뛰쳐나와 딱정벌레로 달려가게 될 거야." 시허릭은 엘시가 느끼고 있을 압박감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압박감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은 시허릭이 생각하기에 한 사람밖 에 없었다. "태위께서 빨리 오셨으면 좋겠군요." "뭐?" "레이헬 라보 태위님 말입니다. 합류가 늦으시군요." 엘시는 주먹 위에 얹었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 으로 시허릭을 바라보았다. "그 분에게서 또 동물이 왔나? 좀 정신 없긴 했지만 그런 보고를 내 가 잊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직 보고하지 않았던 건가?" "예? 아, 그렇지 않습니다. 합류하겠다는 서신이 온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합류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참모들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여 기고 있습니다." 엘시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엷게 하품을 하고는 두 손으 로 이마를 짚었다. "글쎄. 합류하실 작정이라면 하늘치를 타고 직접 오셨을 것 같은데. 그러면 발케네군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곧장 오실 수 있으셨을 테니까. 하지만 그 하늘치에는 우연히 타고 있던 야리키 외엔 아무도 없었 어." 시허릭은 약간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태위가 곧 장죽을 흔들며 돌아올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분에겐 다른 계획이 있는 것……" 시허릭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주의깊게 엘시를 살펴보았고 그가 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허릭은 피곤한 대장군에게 계속 말을 시키는 바보짓을 한 자신을 꾸짖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천막밖으로 나갔다. 엘시는 시허릭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엘시는 자신이 졸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거나 엎드려 한 숨 자야 한다는 식의 결 정은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엘시는 시야 한구석에 있는 발을 보았을 때도 그 발이 거기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엘시는 그 발의 주인을 보지 못했지만 확인 을 위해 고개를 들어올리지도 않았다. 엘시는 그 발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관찰은 완벽하게 이 루어졌다. 그 발은 인간 여자의 발이었다.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 었고 작은 편이었다. 발의 주인은 나이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 외 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그 때 그 발이 시야 바깥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엘시의 뒤편으로 움직인 모양이다. 사라진 발 대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람도 저처럼 자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죠." "예?" "졸면서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다 보고 들은 경험이 없어요?" "아아, 있어요." 엘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러면 깨어난 다음에 제가 왔다는 것을 기억할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죠." "모르세요? 사람들은 당신이 미래를 안다고 믿던데." "당신은 미래를 알아요?" "저요? 모르죠." "그러면 저도 몰라요." "예? 어떻게 해서 그런 논리가…… 잠깐. 저 지금 제 자신과 이야기 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요." "혼란스럽네요. 그러면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안돼요." "안된다고요?" "예." "왜죠?" "이 사람은 자고 있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음. 시험해봐야겠군요. 대장군님?" 엘시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대장군님?" 엘시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무거웠고 목 주위는 식은땀으로 끈적거렸다. 엘시는 눈을 몇 번 껌뻑거렸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시야에 어떤 여자가 보였다. 엘 시는 그 여자의 얼굴에 집중했다. 그러자 그 얼굴이 아는 얼굴로 바 뀌었다. "헨로 수교위." 니어엘 헨로가 자신을 책망하는 얼굴을 한 채 서있었다. 엘시는 손 바닥으로 목을 살짝 어루만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 모습을 보던 니어엘이 속상한 어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무셨군요. 저는 생각을 하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 다." "괜찮아. 그냥 잠깐 졸았던 거야. 잘 생각은 없었어." "그러면 생각을 바꾸셔서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오겠습니다." "그건 안되겠는데. 내일 아침에 나는 이곳에 없을 테니까." 니어엘은 놀랐다. "설마 오늘 밤에 은누리로 떠나시는 겁니까?" "그래서 한 시간 준 거였어." 대답하면서 엘시는 두 팔을 들어올려 기지개를 쭉 폈다. 몸 이곳저 곳이 축적된 피로를 호소해왔지만 불쾌감은 없었다. 엘시는 기묘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황야에서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맑은 하늘을 마주보는 것 같았다. 어깨를 주무르던 엘시는 시 허릭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장군의 조는 모습을 보 고 자리를 비켜준 것이라고 생각한 엘시는 고개를 들어 니어엘을 바 라보았다. "결정했나?" 니어엘은 측은하다는 얼굴로 엘시를 보다가 마지못한 듯 말했다. "예. 계속 제 중대를 맡고 싶습니다." "알았어. 짧게 설명하게." 니어엘은 미소지었다. 짧은 미소였다. "간단한 이유입니다. 제 편의를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만, 제 소대장 들은 제게 익숙해져 있습니다. 교위님. 따라서 제가 제 중대를 계속 맡으면 제 중대는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군단급 중대로 있을 겁 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가시나무 군단을 맡아도 가시나무 군단은 여전히 군단일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가시나무 군단을 맡으면 가시나 무 군단은 여전히 군단이겠지만 다른 사람이 맡은 제 중대는 중대급 중대로 돌아갈 겁니다." "뒤쪽이 손해군." "그렇습니다." "알겠어. 귀관이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 그렇게 전하도록." 엘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어엘은 엘시가 혹 휘청거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탁자 옆을 돌아 니어엘 곁으 로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이레를 찾아 이대로 떠나야 하니까." "지금이오?" "그래. 지금. 이만 작별해야겠군." 니어엘은 안타까운 얼굴로 대장군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경례를 했 다. 경례를 받은 대장군은 그대로 몸을 돌리려다가 잠시 멈춰섰다. 그는 다시 니어엘에게 몸을 돌리며 빙그레 웃었다. 니어엘은 갑자기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엘시가 작별 인사로 경 례 외에 다른 것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니어엘은 엘 시가 그럴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엘시가 말했다. "이레와 사귀어볼 생각 없나?" 니어엘은 얼이 빠졌다. "예?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어울린다고요?" "그래. 이레는 나를 가주라고 부르는 버릇을 도저히 버리지 못하거 든." 니어엘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엘시가 웃으며 천 막을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엘시를 교위 라고 불렀다는 것을 니어엘이 깨달은 것은 그보다 조금 후의 일이었 다. 니어엘은 탁자에 머리를 부딪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사이커의 검신으로 말의 볼기를 후려쳤다. 뛰쳐나가는 말 위에서 베로시는 계명성을 내지르듯 거칠게 고함 질렀 다. 그 고함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지만 무서운 살기가 어려 있었 다. 적병들은 당혹하여 베로시를 돌아보았다. 저항의 의지가 칼날과 창으로 표현되었다. 베로시는 자신의 들끓는 노여움에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사이커를 끌어당겼다. 그 남부의 칼 날이 휘둘러지자 그녀를 향해 엉거주춤 뻗어오던 창대와 그 창을 쥐 고 있던 팔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적병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자신 의 잘린 팔을 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듣는 이의 고막을 찢을 듯한 날 카로운 비명이었다. 갑자기 달려나간 베로시를 호위하기 위해 뛰쳐나 온 장교들이 창과 검을 내찌를 때까지 그 비명은 끊임없이 계속되었 다. 베로시는 말을 되돌려 다시 돌격했다. 하지만 그녀의 일격이 남긴 결과와 달려오는 장교들의 모습을 본 적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 었다. 베로시는 끈질기게 그들 중 한 명을 뒤쫓아가서는 사이커로 적 병의 등을 후려쳤다. 적병은 몸이 거의 갈라질 지경이 되어 쓰러졌 다. 칼날에 묻은 피를 흩뿌린 베로시는 그제서야 처음의 위치로 돌아 왔다. 그곳에는 몇 명의 장교들이 서있었다. 베로시는 외쳤다. "기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베로시는 그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적병들에게 둘러싸여 분전하던 기수는 가슴에 창이 꽂힌 채 땅에 엎드려 있었다. 기수의 입장에서 보면 베로시는 약간 늦은 것이다. 하지만 베로시는 자신이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베로시는 탈취당하지 않은 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 이리 내놔!" 장교들의 얼굴에 동시에 거부 의사가 떠올랐다. 베로시는 그들이 자 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이커를 칼집에 꽂아넣은 그녀는 장교들을 향해 말을 돌격시켰다. 깜짝 놀란 장교들 은 상장군이 미치지 않았나 의심하며 황급히 좌우로 비켜섰다. 그 빈 틈으로 뛰어든 베로시는 말 옆으로 몸을 숙여 군기를 나꿔챘다. 베로 시의 의도를 알아차린 장교들이 경악하여 외쳤다. "상장군님!" 베로시는 군기를 높이 들어올렸다. 바람이 군기를 잡아당겨 그 그림 을 드러내었다. 그곳에는 대호가 그려져 있었다. 최근에 제작된 깃발 이기에 그림은 선명했다. 베로시는 대호왕의 깃발을 펄럭이며 돌진했 다. "대호왕의 병사들아, 나를 따르라!" 뒤쪽에서 들려오는 만류의 외침들을 무시하며 베로시는 격전이 벌어 지고 있는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녀를 겨냥한 화살과 투창들이 날아왔다. 심지어 손도끼와 돌멩이 까지도 날아왔다. 베로시는 그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조금도 믿지 않는 말을 외쳤다. "대호왕의 깃발이 가호한다!" 난전을 벌이던 병사들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얼굴로 베로시를 돌 아보았다. 베로시의 주변에는 흉기들이 눈보라처럼 날아다니고 있었 다. 하지만 베로시의 얼굴 어디에도 공포는 없었다. 베로시는 던지는 것이든 쏘는 것이든 그 어떤 무기도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라 믿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호왕의 깃발이 가호한다! 모여라! 나를 따르라! 대호왕의 가호를 받으라!" 거대한 전장이 크게 출렁였다. 많은 병사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바꿨 기 때문에 일어난 파문이었다. 그 움직임을 나스팔성의 여섯 수교위 들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대략 한 시간 전 그들은 결사적인 노력으로 시모그라쥬군의 광정면 을 우회기동하는데 성공했고 그 영웅적인 노고는 시모그라쥬군의 종 심을 타격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전열이 전장 바깥으로 밀려나고 후 열이 순식간에 최전선 병력이 되는 그런 상황은 어떤 정예병력에게도 반드시 혼란을 야기시킨다. 피할 수 없는 그 혼란에서 얼마나 빨리 회복하느냐에 따라 정예와 오합지졸이 구분될 뿐이다. 그리고 시모그 라쥬군은 분명히 정예 병력이었다. 여섯 수교위는 시모그라쥬군이 혼 란 속에서 무한정 도륙당할 것이라는 환상은 품지 않았다. 그들은 시 모그라쥬군에게 상당히 우울한 손익계산서만 안겨준 다음 최대한 빨 리 전장을 이탈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스팔성으로 오고 있는 보급 부대를 호위하며 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 작전의 결말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빠져나가기 직전 베로시가 갑자기 군대를 재 편하기 시작했다. "대호왕의 가호를 받으라!" 병사들이 베로시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 중 어떤 이는 다른 이들을 따라가기 위해, 그리고 어떤 이는 전열을 정비하려는 베로시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모였다. 하지만 대호왕의 가호를 바라며 다급하게 달려 가는 병사들도 많았다. 베로시는 말의 속도와 방향을 교묘하게 변화 시키며 달려온 병사들이 합류할 수 있도록 했다. 곧 시모그라쥬군은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난전을 벌이던 시모그라쥬군을 그런 식으로 급속히 규합한 베로시는 여섯 수교위의 병력을 무시한 채 곧장 나스팔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성에는 수비병력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물 론 인간의 손으로는 성벽을 부수거나 성문을 파괴할 수 없다. 그리고 난전 중이었기에 충차나 공성기 등은 전장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으며 시모그라쥬군에게는 사다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 는 베로시가 성으로 곧장 돌격하는 모습은 여섯 수교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섯 수교위들은 재빨리 의견을 교환했다. "두억시니 장군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성은 못 열어. 창칼로 성을 부술 건가?" "제기랄. 마음대로 하라지. 집합시켜! 성앞에 도달하면 갑자기 멈추 느라 보나마나 혼란이 일어날 거야. 그 때 배후로 돌격하자!" 그 의견이 채택되었다. 맞서 싸우던 시모그라쥬군이 물러나버리는 바람에 자유로워진 연합군의 병력은 시모그라쥬군의 배후로 돌격하기 위해 한 자리로 재빨리 모였다. 그것이 그들의 패착이었다. 연합군이 한 자리로 집결하는 시간 동안 베로시는 성문 앞으로 병사들을 휘몰아갔다. 성문이 가까워지자 베로 시는 깃발을 앞으로 내뻗으며 외쳤다. "대호왕의 이름을 명한다! 열려라!" 최고지휘관을 존경하고 있었지만 시모그라쥬군의 병사들은 그 순간 베로시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로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성문이 좌우로 열리는 것을 본 병사들은 집결을 끝내고 돌격 준비를 하던 연합군의 병사들이 그러했 던 것 만큼이나 놀랐다. 베로시는 희열에 들뜬 목소리로 자신이 전혀 믿지 않는 말을 외쳤다. "폐하께서 문을 열어주셨다!" 대호왕의 깃발이 파르락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충격 속에서 어떤 병사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어떤 병사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펄럭이는 대호왕의 깃발과 그것을 휘두르는 베로시를 보며 고함을 질렀다. 웃으며, 혹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들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대호왕 만세, 대호왕 만세, 대호왕 만세! 마치 함성에 의해 떠밀리는 것처럼 베로시는 성문 안으 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연합군의 여섯 수교위들이 절망 속에서 돌격 을 명령했을 때 시모그라쥬군의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노도 같은 기세로 나스팔성 안으로 뛰어들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키탈저인들은 용감했다. 그들은 칼을 세워든 채 주랑에서 아래로 뛰어내리고 통로를 막기 위해 수레를 밀며 달려왔 다. 위에서 뛰어내린 연합군 병사는 시모그라쥬군의 병사들 중 한두 명의 목을 부러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적군과 함께 뒹굴었던 연합군 병사들 중 다시 일어서는 자는 별로 없었다. 사방에서 날아온 창칼이 그들의 몸을 파헤쳐놓았기 때문이다. 용케 일어나서 칼을 휘두르며 맹전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성문을 통해 들어오는 시모그라쥬군은 그냥 그 무게만으로도 수비병력을 짓눌러 터뜨릴 것 같았다. 베로시 토프탈은 수레를 밀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키탈저 소녀를 보 았다. 묶은 머리는 절반쯤 풀어져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노여움으 로 벌겋게 변해 있었다. 그 소녀는 수레로 통로를 막는 대신 베로시 의 말에 부딪힐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베로시는 말의 진로를 수레의 정면에서 비켜서게 했다. 그리고 깃발을 왼손으로 바꿔드는 대신 그 것을 앞으로 내뻗었다. 놀라서 크게 벌어진 소녀의 입으로 깃발이 그 대로 날아들었다. 깃발 끝의 뾰족한 부분은 소녀의 앞니를 박살내고 혀를 찢은 다음 소녀의 뺨을 뚫고 나갔다. 베로시는 깃대를 통해 그 느낌을 만지듯이 느낄 수 있었다. 깃대에 입이 꿰인 소녀는 달리는 말의 속도 때문에 쓰러지지 못한 채 뒤로 주욱 밀려갔다. 베로시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잔뜩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말을 멈춰세우자 비로소 소녀는 깃대 끝에서 떨어져나갔다. 격심한 충격이었지만 소녀는 기절하지 않았고 그래서 무시무시한 비명을 토 해내었다. 피와 침이 비명과 뒤섞여 입과 찢어진 볼의 구멍로 뿜어져 나왔다. 소녀는 찢어진 볼을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미친 듯 이 비명을 질렀다. 베로시는 뒤에서 따라오는 병사들에게 그녀의 처 리를 맡기기로 하고는 그대로 소녀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말에 탄 채 계단을 오르고 협로를 달리던 베로시는 성탑 앞에서 멈 춰섰다. 커다란 성탑 앞에는 넓은 계단이 있었고 그 위쪽에는 중년 남자 한 명이 커다란 양손검을 쥔 채 서있었다. 남자는 베로시를 보 고는 코를 씰룩였다. "손에 든 건 뭐냐?" "대호왕 폐하의 깃발이다." "먹는 거냐?" 베로시는 씩 웃었다. "아니. 이것은 대호왕 폐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야. 아지엣 사카라 태수." "넌 뭐냐?" "상장군 베로시 토프탈." "뭐하러 왔냐?" "그대의 항복을 받기 위해." 키탈저 태수 아지엣 사카라 태수는 칼을 쥐고 있던 손 중 하나를 들 어올려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건 안 가지고 있는데. 빈손으로 보내긴 그렇고, 이거라도 가 지고 가." 사카라 태수는 품에서 은편 하나를 꺼내 베로시에게 던졌다. 은편이 돌바닥에 부딪혀 댕그랑 소리를 냈다. 베로시는 바닥에 떨어진 은편 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여움으로 확 불타오르는 그녀의 눈을 보며 사카라 태수는 점잖게 말했다. "먹지도 못할 거 들고 설치지 말고 가서 밥이나 사먹어라." "이 개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베로시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아지엣 사카라는 고개를 숙이고는 입 속으로 몇 년 전에 죽은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사카라 태수 는 칼을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러나 칼끝으로 베로시 를 겨냥하려던 사카라는 곧 얼굴색을 확 바꾸었다. 베로시는 말 옆에 서서 노궁으로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사카라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입을 열었을 때 베로시는 노궁을 쏘 았다. 화살은 태수의 가슴에 정통으로 꽂혔다. 사카라 태수는 뒤로 휘청하다가 쓰러졌다. 그가 놓친 양손검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계단 을 굴러내려갔다. 베로시는 코방귀를 뀌고는 허리를 숙여 은편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노궁을 다시 말안장에 걸어두고는 사이커를 뽑아들고 계단을 올라갔 다. 사카라 태수는 피범벅이 된 채 누워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 다. 베로시는 입매를 비틀어 이를 드러낸 채 왼손 주먹을 앞으로 뻗 었다. 주먹을 사카라 태수의 머리 위로 오게 한 베로시는 손을 폈다. 그 손에서 은편이 떨어졌다. 놀란 태수는 눈을 꽉 감았다. 은편은 태 수의 뺨을 때리고는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사카라 태수가 다시 눈을 떴다. 베로시는 오른발을 들어 태수의 가 슴을 지그시 밟았다. 그녀의 발이 떨어진 곳은 화살이 꽂힌 곳 바로 옆이었다. 태수의 입에서 흐느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베로시는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사카라 태수를 보다가 발에 힘을 주었다. 그 녀는 무릎에 손을 얹고는 체중을 발에 잔뜩 실었다. 태수는 팔을 들 어 베로시의 발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 팔에는 힘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베로시의 발은 태수의 가슴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 허우적거리던 사카라 태수의 손이 힘없이 허리쪽으로 떨어졌 다. 아지엣 사카라 태수는 절명했다. 베로시는 죽은 사카라 태수의 얼굴을 보다가 침을 퇘 뱉었다. 피투 성이 발을 들어올린 베로시는 태수를 내버려둔 채 성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뒤편에는 붉은 발자국이 한 줄로 나 있었다. 오른 발뿐인 발자국이었다. 성 바깥에 있던 여섯 수교위는 결국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시모 그라쥬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나스팔 성을 느긋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키탈저인들 개개인의 저항은 매서웠지만 그들 전체의 숫 자는 적었다. 성탑 위에 있던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에게 나스팔성을 완전히 점령했다는 보고가 도달한 것은 그녀가 성에 들어온지 반 시 간도 되기 전의 일이었다. 상장군은 보고를 가져온 전령에게 곧 내려 갈 거라고 전하도록 명령했다. 전령이 내려가자 상장군은 홀로 성탑 위에 남게 되었다. 베로시는 흉벽에 두 손을 얹은 채 성 아래쪽과 주위의 언덕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이 성을 얻기 위해 소모한 시간을 생각해보았다. 결 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흘 전 편지 한 통이 도착할 때까지 베로 시는 그 시간이 유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편지는 베로시 의 생각이 착오였음을 알려주었다. 자신의 착각을 깨달은 베로시는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대호왕의 깃발이 제작되었고 동시에 나스팔성 안쪽의 모 인사에겐 재 산상의 변동이 일어났다. 금편 일만 닢 가량의 재산이 증식된 것이 다. 그리고 반 시간 전, 성 밖에서 대호왕의 깃발이 성문을 겨냥했을 때 성 안에서는 일만 닢의 금편이 비밀스러운 작용을 했다. 베로시는 바깥의 깃발과 안쪽의 금편 일만 닢 중 어느 것이 성문의 개방에 더 큰 작용을 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반대로 알게 될 거라 확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일만 닢을 다시 회수하 여 군자금에 채워넣어야 할 것이다. 물론 조금 전 베로시의 비밀스러 운 명령을 받은 몇 명의 병사들이 그 일에 착수했다. 베로시는 그 모 인사가 이미 죽었을지 그렇지 않을지 궁금했다. 싱긋 웃으며 그런 잡념에 빠져있던 베로시에게 갑작스러운 분노가 찾아왔다. 베로시는 흉벽 위에 얹힌 두 손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성 바깥을 바라보던 베로시는 잠시 후 품 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녀의 손에 끌려나온 것은 구깃구깃해진 편지봉투였다. 베 로시는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내어 그것을 펼쳤다. 베로시 토프탈은 격분에 찬 눈으로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세 번째 읽는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행간의 의미 들이 보다 잘 보였다. 하지만 행간에는 유의할 만한 내용이 숨어있지 는 않았다. 게라임 지울비는 에두르지 않고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다. 편지의 서두에서 게라임 지울비는 자신을 탈출시켜준 것에 대해 호 사스러운 말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게라임은 자신은 유료도로당에 어떤 풍파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아들의 솜씨를 두고 보겠노라고 썼다. 당의 노선이 변경되는 것은 큰 위험이지만 그것을 시정하기 위 해 당 자체의 존속이 위태로워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 었다. 예의를 차리기 위해 쓰여진 문장들과 어휘들을 제외하면 편지 의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곳에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게라임 지 울비라는 증거도 없었다. 서명도 없었거니와 발신인이나 발신인의 정 체를 알 수 있는 어휘들은 모두 대명사로 처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게라임 지울비가 보낸 편지였다. 그리고 베로시가 이제야 발견한 행간에는 게라임이 편지를 쓴 이유 가 쓰여 있었다. 게라임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을린발이 오해를 받 는 것이었다. 행간을 통해 게라임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유료도 로당에 아무런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을린발이 나를 탈 출시키지도 않았으면서 그랬다고 거짓말을 한 거라고 판단하지는 마 십시오. 그는 당신에 대한 의리를 지켜 나를 분명히 탈출시켰습니다. 유료도로당에 아무런 풍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러기로 결정 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려주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겁니다.' 하지만 베로시는 그을린발이 그런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것은 쓸데없는 배려였다. 베로시는 뼈아픈 기분으로 자신의 판단 착오를 인정했다. 그녀는 게 라임 지울비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유료도로당의 정통성을 지킬 거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게라임은 유료도로당의 정통성은 다른 많은 조건들과 함께 유료도로당 자체가 존재할 때만 유지될 수 있다고 생 각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일으키는 갈등은 이 수상한 시절에 는 당의 파멸까지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재앙이 될 거라 생각한 것이 다. 분노와 좌절 속에서 베로시는 비나간후의 곁에서 유료도로당을 떼어낼 다른 방법이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시모그라쥬군의 북진은 상당한 난관에 봉착하 게 될 것이다. 시오크 지울비는 웃으려 했다. 하지만 목에 칼날이 밀착해 있기에 마음놓고 웃기가 어려웠다. 시오크는 입술만으로 웃었다. "정말 그렇게 쓰셨습니까, 아버지?" 게라임 지울비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시오크와 똑같은 문제 때 문에 그 행동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게라임은 입을 열어 말했다. "응." "이해할 수가 없군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지요?" 시오크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게라임의 수하와 게라임의 목에 칼 을 겨누고 있는 시오크의 수하는 오래 전에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아버지에서 면전에서 아들의 목을, 혹은 아들의 면전에서 아버지의 목을 벨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이었다. 그들이 보기 에 이 부자는 굉장히 사이가 좋았다. 서로를 파멸시키려 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렇다는 의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적잖게 안심하고 있 었다. 하지만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기묘한 회담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사의 회의 장이었다. 그리고 유료도로당사 내에서도 그런 회담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당원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회담의 진행방식은 모두 게라 임이 제안한 것이고 시오크는 그것을 모두 받아들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을 할 수 없도록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등 뒤에는 상 대편의 수하가 칼을 든 채 서있었다. 그리고 회담장 안에 있는 사람 은 그들 네 명뿐이었다. 양자에게 모두 공정하고 안전 보장이 확실한 회담이었다. 칼날이 목을 누르고 있는 상황이 과연 '안전'한 것인지 는 조금 불명확하지만. 게라임이 말했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냐?" 시오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칼을 쥔 자가 긴장하지 않을 만큼. "제가 아는 아버지는 파멸한 당은 재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실 분 이니까요. 파멸의 위험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문제도 안 됩니다." "그건 내 성격이 아니라 유료도로당의 정신이다. 당은 파멸이 무서 워 죽음의 거장과 타협하지도 않았고 갈로텍 대장군에게 문을 열어주 지도 않았다. 그것이 유료도로당이다. 잘못된 길을 걸을지언정 차라 리 파멸하는 것이-" "저는 그런 교조적 태도에 찬성하기 어렵습니다만, 어쨌든 아버지께 서 거짓말을 하신 것은 분명하지요. 왜 그러셨습니까?" 말꼬리를 빼앗긴 게라임은 약간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고는 말했다. "그건 내 나름의 보답이다." "보답이오?" "그래. 비나간후는 날 잘 보살펴주었지. 물론 너나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겠지만 어쨌든 후의를 받았다. 그건 갚아야 지. 후작이 정말 바라는 것은 네가 지금 그녀에게 해주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겠지만 나는 그런 일은 해줄 수 없다. 그래서 두억시니 장 군에게 비나간을 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암시를 준 거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야." "그런가요. 그러면 두억시니 장군에게 받은 후의는 어떻게 갚으시겠 습니까? 그녀는 아버지가 탈출할 수 있도록 해줬는데요." "그건 갚을 필요 없어." "왜죠?" "탈출하도록 도와준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내게 알리지 않았으니 까." "담백해서 좋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조력 자가 베로시 토프탈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아신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되잖습니까?" "그 편지에는 내 이름 없다." "존경합니다." "당연하다." 시오크는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아버지의 침착한 눈을 물끄러미 바 라보던 시오크는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의 향후 계획은 뭡니까?" "물론 너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당을 맡아 당의 노선을 올 바른 방향으로 돌려놓는 거지." "오늘 오신 이유는 뭡니까?" "비나간후를 도와주다가 슬슬 환멸을 느끼게 되지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서." "환멸? 후작에게요?" "아니. 너 자신의 착각에 대해서." 시오크의 두 뺨이 약간 굳었다. 게라임은 빈틈없는 표정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시오크. 당비와 공짜 도로, 당의 연락망, 심지어 당원까지 제공해 서 비나간 후작을 도와줘보니 어떻더냐? 정의를 지켰다는 만족감이 들더냐? 너는 이웃을 침략하려는 자들만 막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키탈저를 침략한 비나간 후작은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 거냐?" "침략이라니오? 키탈저를 침략한 것은 후작이 아니라 시모그라쥬공 입니다. 후작은 키탈저를 돕기 위해 병력을 보낸 겁니다." "후작이 비나간에 전화가 피어오르는 것이 싫어서 키탈저에 전장을 차렸다는 것은 너도 아는 사실일 텐데." "키탈저를 도우면서 동시에 비나간도 지키기 위해 그랬다고 말할 수 도 있습니다. 어감은 달라도 내용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시모그라쥬공은 제국을 잃어버린 제국민들을 도우면서 동시에 시모그라쥬도 지키기 위해 군사를 한계 선 너머로 보낸 거라고. 어감은 달라도 내용은 같지." 시오크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가슴을 내밀었다. 그러자 칼날이 그 의 목을 눌렀다. 게라임은 아들의 목에 칼날이 닿는 것을 보고는 인 상을 찌푸렸다. 시오크는 다시 허리를 젖히고 말했다. "어떻게 그 둘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말씀하십니까? 키탈저는 비나간 을 환영했지만 시모그라쥬공은 북부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호왕이 군대 없이, 정복욕 없이 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 니다." "일단 한 마디 해두겠다. 좀 조심하거라." "예. 그러겠습니다. 어쨌든 비나간후의 파병과 시모그라쥬공의 파병 은 다릅니다. 전자는 환영받고 후자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같다." "어째서 같습니까?" "시모그라쥬공은 비나간후의 파병을 환영하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시오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아버지를 보다가 시선을 낮추어 목 앞에 떠있는 칼날을 보았다. 그는 팔짱을 더 단단 하게 끼었다. 어깨가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시오크는 아버지의 가슴 쪽을 보며 말했다. "시모그라쥬공은 침략자입니다." "아니. 용서할 수 없는 적과 싸우기 위해 북진했지. 대호왕이 군대 없이, 정복욕 없이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호왕의 적들 말이다." "그가 먼저 공격했습니다!" "비나간후는 비나간이 침략당하기도 전에 시모그라쥬공을 공격했지. 잠깐. 시모그라쥬공은 보나마나 비나간을 공격할 테니까 그건 정당방 어라고 말하지는 마라. 시모그라쥬공도 보나마나 대호왕을 반대할 자 들을 상대로 정당방어에 들어간 거라고 대답할 테니까." 시오크는 이를 악물었다.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4-3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7-19 조회수 : 1645 피를 마시는 새 24. 보는 것과 베는 것 - 3 상처 입은 인마가 대로를 걷고 있었다. 말에 탄 장교들은 상체를 당당하게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 지만 그들의 피로한 어깨는 땅을 향해 계속 기울어졌다. 자신의 몸이 지나치게 기울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장교들은 허리를 폈고 그 간격은 비참하리만큼 짧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상체를 앞뒤로 흔드 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더욱 볼썽사나웠다. 그래서 몇몇 장교들은 허리를 펴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발로 걷는 병사들은 아예 처 음부터 품위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은 발을 질질 끌거나 절뚝 거리며 걸었고 대부분 쓰러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흙과 먼지, 피와 땀, 지저분한 붕대조각 등을 떨어뜨리며 인마가 대 로를 걸었다. 말라서 갈라진 입술을 한 병사들이 악몽에 시달리는 표 정으로 걸었다. 다리를 다친 이들을 부축하며 걷고 있는 자들도 있었 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책임감이나 전우애는 별로 보이지 않았 다. 그들은 상대를 떨쳐버릴 힘이나 의지도 없어서 그냥 타성적으로 부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팔에 감긴 붕대가 풀리는 것을 막으려 애쓰는 병사도 있었다. 그는 성한 팔과 입을 이용해 붕대를 묶으려 애썼고 그 때문에 자꾸 주위의 병사들에게 부딪혔다. 병사들은 성난 소리를 내었지만 그 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슬그머니 대오에서 빠져 나와 그늘에 주저앉는 병사도 있었다. 병사는 마치 깊은 상념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사는 옆으로 쓰러졌다. 조금 후 지친 표정의 병사 몇 명이 발을 끌 며 다가와 열의 없는 동작으로 그를 일으켰다. 병사는 토하고나니까 기분이 좋다는 둥의 말을 중얼거리며 전우들의 부축을 받아 걸어갔 다. 대로의 양쪽에는 인파가 몰려와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혀를 차는 소리, 조용히 눈물을 닦아내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를 찾는 소리 등 이 어지럽게 뒤섞여 들려왔다.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었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갑자기 달려나와 누군 가를 끌어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은,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안긴 자들은 잠깐이지만 행복한 표정과 웃음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 작은 행복은 주위에 만연한 무기력감과 피로감, 그리고 분노를 닮은 듯한 멍한 시선 속에서 사그라졌다. 패배감이 심한 악취처럼 공기 속 에 떠돌고 있었다. 하늘은 기묘하리만큼 맑았고 바람은 없었다. 육중 하게 떨어지는 햇살이 병사들의 머리를 지글지글 태웠다. 녹아내리는 듯한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그들은 비나간-키탈저 연 합군이었다. 개선식은 대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지만 패배한 병사 들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람들에게 우울함과 불안함을 준다 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는 그들에게 밤도 아닌 백주에 비나간을 가로지르라고 명령했다. 지키멜은 비나간 사람들에게 비나간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똑똑히 알려줄 작정이었다. 물론 그녀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그런 모험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대비는 인파 한가운데서 느닷없이 고함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제기랄! 고개 들어!" 뜻밖의 외침에 사람들은 조금 당혹했다. 장교들과 병사들도 얼떨떨 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그 외침이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 외침에 호응하는 외침이 다른 곳에서 터져나 왔다. "고개 들어요!" 그 외침은 약간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침의 주 인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소녀가 이층 창문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병사들에게 두 손 을 내밀어 호소했다. "비나간의 병사들은 고개를 들어요! 제발 졌다는 표정 짓지 말아 요!" 그리고 소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창틀에 매달려 펑펑 울면서 외쳤다. "비나가아안! 비나간은 안 졌어! 고개 들어요!" 소녀의 울음이 다른 여인들에게 전염되었다. 대로 좌우에 있던 여인 들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군인들의 얼굴이 푸르르 떨렸다. 그들은 힘겹게 침을 삼켰다. 여인들의 울음을 보던 남자들이 주먹을 내뻗으 며 외쳤다. "고개 들어! 지지 않았다!" "아직은 지지 않았다! 고개 들어!" "고개 들어! 고개 들어!" 병사들의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그들의 허리가 펴졌고 어깨는 활짝 열렸다. 병사들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 렸다. 여인들은 눈물로 젖은 볼을 크게 부풀리며 외쳤다. "고개 들 어! 고개 들어!" 남자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땅을 쾅쾅 짓밟으며 외쳤다. "지지 않았다! 비나간은 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서도 눈 물이 흘러내렸다. 병사들도 울고 장교들도 울었다. 피와 땀 대신 눈 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누군가가 외쳤다. "시모그라쥬 놈들을 죽여라!" 낙수처럼 눈물을 흘리던 병사들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노기가 피어올 랐다. 몸의 털이 한꺼번에 치솟는 느낌이 병사들을 전율시켰다. 그들 은 이를 갈았다. 그들의 패배, 그들의 도주, 그들의 치욕과 고통과 슬픔과 공포. 갑자기 그들은 피로 속에서 희미해졌던 지난 시간들이 생생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추억이었다. 병사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도 분노했다. "시모그라쥬공을 죽여라!" "고개 들어! 지지 않았다! 남부놈들을 죽여라!" 창검이 바로 섰다. 질질 끌고 있었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군기가 똑 바로 섰다. 말들의 눈빛마저도 바뀌었다. 말들은 두려움 때문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씨근거리는 말들의 모습은 대로에 가득한 흥분을 고 조시켰다. 행군하는 병사와 구경꾼은 사라지고 분노한 사람들만이 남 게 되었다. 그들은 핏값을 원했다. 그들은 빼앗긴 명예와 잃어버린 긍지를 되찾길 원했다. 그들은 그것을 가져간 적을 죽이길 원했다. 화살처럼 내리떨어지는 햇살은 사람들을 용해시켜 들끓게 하는 용광 로가 되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병사들과 함께 걸었다. 그들은 뒤섞였 다. 힘빠진 전우의 부축을 받던 부상병들은 새로 나타난 많은 사람들 의 힘센 팔에 의해 똑바로 서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걸고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지르며 행진했다. 그렇게 행진하는 그들 앞에 마진 계단이 나타났다. 마진 계단 위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고고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은 옷차림의 여인이 몇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서있었다. 하지만 호위자 들은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계단 아래쪽에서는 여인이 홀로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여인의 얼굴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놀라며 멈춰섰다. 고함이 서서히 사라졌다. 하지만 눈물은 남았다. 사람들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여인을 바라보았 다. 숨소리마저 지워진 듯한 고요함 속에서 한 장교가 말에서 내렸다. 털썩 하는 소리가 둔한 여음을 남기며 퍼져나갔다. 장교는 멈춰선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그 장교 와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계단 앞에 도달한 장교는 여인을 한 번 우르러 보고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후작님."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는 아무 말 없이 계단 아래의 장교를 바라보았 다. 장교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의 어깨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 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였다. 사람들의 갈증이 더욱 심해졌 다. 그 때 장교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주먹이 으스러질 것 같 은 동작이었다. 장교는 주먹으로 바닥을 짚은 채 비나간후를 올려다 보며 외쳤다. "복수를 허락하소서!" 비나간후는 딱딱하게 굳어 약간 창백한 얼굴로 장교를 내려다보았 다. 그 때 다른 장교가 말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나왔다. 두번째 장교 는 원래 제국군이었던 여성 수교위였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장교의 곁으로 다가와 역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나간후여, 복수를 허락하소서!" 다른 장교가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인파 중에 있던 병 사들이 장교들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병사들과 함께 걸어왔던 사람 들도 무릎을 꿇었다. 대로를 메운 채 행진해왔던 모든 사람들이 무릎 을 꿇고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거대한 함성을 내질렀다. "복수를 허락하소서!" "후작님! 복수를!" 지키멜은 입술을 꽉 다문 채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손을 들어올린 후에도 한참 동안 복수를 갈구하는 외 침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입을 닫았고 곧 주변의 다른 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다시 침묵에 빠져 비나간후를 바라 보았다. 그것은 떠들썩한 침묵이었다. 애타고 원통하고 갈망하는 침 묵이었다. 지키멜이 손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복수는 이루어질 것이다." 분노한 레콘의 깃털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후작님 만세! 복수를!" 사람들은 복수를 외치고 비나간후를 외치고 남부의 군세에 보낼 죽 음을 외쳤다. 비나간후는 꼿꼿하게 서서 그 파도 같은 분노를 직시했 다. 그녀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창백했지마 그 눈은 넘실대는 불꽃 으로 빛나고 있었다. 쵸지는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딱정벌레 두 마리가 아래쪽을 확인하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딱정벌레들이 내려서기엔 문제 없는 장소였기에 쵸지는 그들의 착륙이 지연되고 있 다는 사실에 조금 의아해했다. 쵸지는 그들이 내려오면 물어봐야겠다 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쵸지가 있는 곳은 야트막한 구릉이었다. 구릉 아래쪽으로는 밀밭이 펼쳐져 있었지만 일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꽤 잘 닦여 있는 농로가 모여드는 곳에는 작은 강을 옆에 낀 마을이 있었다. 쵸 지는 그 마을이 백여 호 정도 될 거라 추측했다. 그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하늘의 딱정벌레에 놀란 개가 짖어대고 있 는 모양이다. 마을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기에 쵸지는 곧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이 주변의 토착민들에게는 여단의 산이라 불리는 거대한 암석을 바라 보았다. 볼수록 특이하게 생긴 바위였다. 그것은 시구리아트나 지러쿼터 같 은 산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어느 고산의 왕관이 되어 눈에 덮혀 었 어야 할 바위였다. 마치 산꼭대기를 떼어다가 평야에 가져다놓은 것 같았고, 그래서 쵸지는 땅을 파내려가면 그 아래에 묻혀있는 산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확신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렇지는 않 을 것이다. 그것은 평야에 있는 거대한 바위일 뿐이다. 하지만 산이 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큰 바위였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민들레 요 새가 있었다. 사령부는 바위 윗부분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바위와 뒤섞여 있었다. 벽의 동쪽면은 바위고 남쪽면은 벽돌인 식의 건물들 이 얼기설기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들을 잇는 것은 자연암 을 깎아낸 계단과 다리, 통로 등이었다. 민들레 여단장 다이렌은 같은 레콘에게도 유난스럽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심각한 공수증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 한 조각만 있어 도 절대로 야외로 나오지 않는다거나 만성적인 탈수증 때문에 누워있 는 시간이 더 많다는 말은 아마도 과장일 테지만 어쨌든 다이렌의 공 수증은 꽤 심각했다. 그런 그가 지휘하는 민들레 여단이 절망도의 폭 동 사태에 대비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은 꽤나 역설적인 말처럼 들린 다. 하지만 다이렌은 심한 공수증은 가지고 있을지언정 머리는 나쁘 지 않은 인물이었다. 다이렌은 그 임무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지금 쵸지가 보고 있는 요새의 건설을 허락받았다. 민들레 요새가 어떤 끔 찍한 홍수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사실이다. 민들레 요새를 완성한 이후로 다이렌은 자신의 공수증이 요구하는 공포대상 중 홍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폭우에 대해서도 상당히 안심하게 되었다. 요새는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었고 식수로 쓰일 빗물 외에는 빗물이 건물 안으로 한 방울도 흘러들어오 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어려운 결단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어낸 다이렌이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쵸지는 은누리로 오던 중 엘시에게 다이렌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들었다. 엘시의 증언에 의하면 다이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고민 총량 불변의 법칙을 빠져나가지 못한 모양이다. 다이렌 장 군은 자신이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홍수와 폭 우에 대해 안심하게 된 순간부터 장군은 센시엣 특수수용소로부터 구 조 요청이 오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다이렌 장군은 방문객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다. 먼 곳에서 정부 관리처럼 보이는 여행자들이 나타나면 여단병을 은밀히 내보내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살해하게 한다는 살벌한 소문이 퍼져있을 지경이다. 쵸지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혹 근처에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 르는 민들레 여단병들을 찾아내기 위해 저렇게 선회하고 있는 것일 까? 쵸지는 주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은 이레 라면 혹 몰라도 엘시가 그런 풍설을 믿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얼마 후 땅에 내려온 엘시는 쵸지에게 혹 매복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민들레 여단병을 찾아내기 위해 하늘을 선회했다고 설명 했다. 쵸지는 자신의 커다란 벼슬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엘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소문을 믿나?" "소문?" "혹시 절망도에서 오는 관리일까봐 관리가 다가오면 암살한다는 소 문 말이야." "아아, 그 소문이오. 믿지 않습니다. 내가 걱정한 것은 민들레 여단 이 이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간 경우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 면 적대적인 반응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군. 내려온 것을 보니 수상한 것은 없나 보지?" "없었습니다. 요새로 가지요." 걸음을 떼려는 엘시를 이레가 막아섰다. 이레는 근심스러운 표정으 로 말했다. "가주, 아니, 주인님. 주인님께서 직접 가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 까? 주인님과 왕벼슬은 걱정하지 않으실지 몰라도 저는 그 소문이 걱 정스럽습니다. 도깨비 지나가자 불났다는 식일지도 모르지만 조심해 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주인님께서 걱정하시는 바로 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민들레 여단이 더 이상 제국과 제 국군을 존중하지 않을 가능성 말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저 혼자 요새 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다이렌 장군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열려 있는 곳에서 만나시는 편이 좋습니 다." "그건 바르지 못하다. 비록 내가 상급자이긴 하지만 이곳의 책임자 는 다이렌이지. 이곳으로 그를 불러내는 것은 이곳의 책임자인 그를 존중하는 일이 아니다. 네가 먼저 가서 그가 영접할 수 있도록 하겠 다는 의도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필요없다. 요새 안 의 누군가는 우리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으니 가다 보면 그쪽에서 사람이 올 거다." "이미 오는데." 엘시와 이레가 고개를 돌렸다. 쵸지는 먼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레콘 네 명이 오고 있다. 마을쪽을 봐." 쵸지가 가리킨 방향을 본 이레는 마을에서 벗어나 농로를 따라 달려 오고 있는 네 명의 레콘을 보았다. 이레는 주인에게 딱정벌레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있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엘시는 그것을 거절했 다. 대신 엘시는 누가 책임자인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두 사람 앞 으로 걸어가 섰다. 이레는 씁쓸한 얼굴로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그 곳을 내려다본 쵸지는 물통을 발견했다. 네 명의 레콘은 놀랄만한 속도로 다가와 구릉에 다가섰다. 그곳에서 부터 네 사람은 속도를 낮춰 천천히 걸어올라왔다. 이레는 그들을 관 찰했다. 세 명은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그 중에서 이레는 손에 든 철창으로 야트막한 관목을 툭툭 쳐내며 걸어오는 선두의 레콘에 주의했다. 다른 레콘들보다 월등히 크지는 않았지만 그 생김새는 굉 장했다. 더 이상 깃털도 나지 않는 오래된 흉터가 얼굴과 목, 그리고 어깨에 그득했다. 레콘들은 상처가 잘 아무는 편이고 좀 심한 상처도 보통은 주위의 깃털 때문에 덮여서 보이지 않게 되지만 그 레콘의 흉 터들은 워낙 끔찍했다. 이레는 마음 속으로 그가 넘어오면 안되는 선 을 땅 위에 그려보았다. 이레의 마음이 통했는지 레콘은 그 근처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레콘은 이레나 쵸지가 생각하기엔 대단히 잘 어울 리는 질문을 했다. "절망도에서 왔냐?" 질문하는 레콘은 약간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뒤의 레콘들 또한 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긴장 해 있었다. 깃털들이 조금 뻣뻣해져 있었기에 그들의 긴장은 잘 드러 나고 있었다. 엘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네 명의 레콘들이 긴장을 푸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그 중 한 명 은 눈에 웃음기 같은 것도 담아보였다. 엘시는 선두의 레콘을 올려다 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대장군 엘시 에더리입니다." "대장군?" 레콘들의 깃털이 다시 뻣뻣해졌다. 이번에는 긴장이 아닌 놀라움 때 문인 것 같았지만 이레는 물통 가까이 있는 손을 조금 꿈틀거렸다. 선두에 있던 레콘이 엘시의 위아래를 살펴보며 말했다. "네가 대장군이야? 제국군에서 제일 높은 사람?" "그렇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내치다." "……소속과 계급은?" "응? 아, 민들레 여단 2대대…… 아마 2중대일걸. 계급은, 글쎄. 부 위일 거야. 우리 노망쟁이가 가끔 나를 부위라고 부르니까. 그런데 대장군이면 우리 노망쟁이보다 더 높은 거지?" 엘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노망쟁이가 누굽니까?" "몰라? 무슨 대장군이 그런 것도 몰라? 다이렌 말이야. 늙은 노망쟁 이." "다이렌 장군?" "그래. 당신 다이렌보다 높지?" "그렇습니다." "잘됐군. 그러면 그 짓 좀 그만두라고 해." "그 짓이라니?" 내치 부위는 '대장군이 그런 것도 몰라?'하는 눈으로 엘시를 보다가 혼란에 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레는 내치 부위가 민들레 여 단의 표준상이라면 여단의 실상이 굉장히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예비 역인 쵸지 또한 무슨 이런 군대가 있느냐는 표정으로 내치 부위를 살 펴보았다. 혼란 속에서 버둥거리던 내치 부위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아, 납병. 납병례 말이야. 우리 노망쟁이 요새 납병하겠다고 고집 을 부려서 아주 귀찮아 죽겠어. 사람을 못살게 굴어. 밤중에 갑자기 종을 쾅쾅 쳐서 자던 사람 다 깨워놓고는 납병하겠다고 횡설수설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야. 자려고 누워서 생각해보니 지금 해치워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그런다고 해서 납병을 하는 것도 아니 야. 히도큰이 화가 잔뜩 나서 그러면 내가 해주겠다고 한 적이 있거 든? 그러니까 노망쟁이 잔뜩 골이 나서는 히도큰에게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욕을 퍼붓는 거야. 벼슬 찢어질 노릇이지. 그렇잖아? 그래도 히도큰이니까 노망쟁이 때려죽이는 대신 가서 마시고 잠이나 자라고 술통 하나 안겨줬지. 나 같으면 요새 밖으로 집어던졌을 거야. 파사 락도 그렇게 생각하던데. 이봐, 파사락? 너 그렇게 말했지?" 내치 뒤쪽에 있던 레콘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내치는 세 상 만인에게 공인을 받은 사람 같은 얼굴로 엘시를 돌아보았다. 엘시 는 이 난감함을 희석시킬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며 말했다. "일단 가서 장군을 만나야겠습니다. 안내하십시오. 당신들 중 한 명 은 먼저 가서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간다는 것을 알리십시오." 내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파사락이라 불렸던 병사에게 요새 로 먼저 달려가라고 명령했다. 엘시는 자신이 맞닥뜨리게 될 광경이 무엇일지 의심하며 내치의 안내를 받아 민들레 요새로 걸어갔다. 밀밭을 가로질러 마을로 접어들자 몇몇 마을 주민들이 밖으로 나와 그들을 구경했다. 정신 상태가 약간 뒤숭숭한 것 같은 내치 부위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대부분 인간들 인 마을 주민들은 허물 없는 태도로 내치에게 누굴 안내하는 거냐고 물었고 내치는 꺼리낌 없는 목소리로 "아, 대장군이야!"라고 외쳤다. 마치 이건 장에서 사오는 수탉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태도였고 자신 이 안내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 레는 내치 부위가 엘시의 이름을 이미 잊어버렸다는 의혹까지 느꼈 다. 내치 부위보다는 마을 사람들이 엘시에 대해 보다 진지한 반응을 보 였다. 그 이전까지는 주로 딱정벌레에게 쏠리던 관심이 내치 부위의 대답 후에는 엘시 에더리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엘 시를 살펴보았고 그 중에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인간도 있었다. 내 치는 그 반응에 꽤 놀랐다. 마을을 빠져나온 내치는 "너 정말 높은 사람인가 보지?" 하는, 주객이 한참 전도된 말을 했다. 엘시는 대답 하지 않았고 이레와 쵸지 또한 말하고 싶은 열의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강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거대한 돌다리를 지났다. 이레는 레콘 여단이 주둔한 요새로 이어지는 다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크고 튼튼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요새가 있는 바위는 그들이 다가감에 따 라 점점 커져서 그들의 머리를 덮어왔다. 가까이서 본 바위는 정말 거대했다. 암벽 사이로 계단이 보였다. 계단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계단 의 가운뎃부분은 레콘에게 적당한 큼직큼직한 크기의 계단이었고 그 좌우에는 보다 인간에게 적합한 크기의 작은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계단 제일 아래쪽에는 레콘 한 명이 허리에 큰 칼을 찬 채 서 있었 다. 레콘의 벼슬은 꽤나 너덜너덜했고 그 깃털도 기운없이 늘어져 있 었다. 나이가 적지 않은 그 레콘을 본 쵸지는 그가 다이렌 장군인가 보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 짐작은 틀렸다. 레콘은 엘시가 가까이 다가오자 말했다. "민들레 요새에 온 것을 환영한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 나는 민들 레 여단 1대대장 히도큰 하장군이다." 엘시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치 부위가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히도큰! 이 인간 녀석 꽤 높은가 봐요. 대장군이니까 제국군에서 제일 높은 건 아는데, 군인도 아닌 마을 사람들도 이 녀석한테 쩔쩔 매던데요?" 하장군 히도큰은 찌푸린 눈으로 내치를 보다가 엘시에게 말했다. "요새의 상황에 대해 실망할 것을 대비하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군. 대장군. 이미 충분히 실망하고 있을 테니까."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감사하나이다. 이곳은 제국군 산하의 정신 요양원이 아니라 요새가 맞았나 보군요.' 이레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 거리며 이곳에 정상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히도큰을 바라보았다. 히도큰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내가 할 경고는 조심하라는 것뿐이겠군." "조심하라고?" "내치 부위는 보기에 거칠어 보이지만 성격은 상냥한 편이지. 그래 서 내보냈어. 하지만 요새 안쪽에는 네 눈빛이 마음에 안들면 눈알을 뽑아내서 밥에 비벼 먹을 놈들도 있다." 이레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역시 정신요양원입니까?' 히도큰은 이 레와 쵸지를 바라보았다. "수행인을 좀 소개시켜주겠나?" "이쪽은 내 몸종인 이레 달비. 그리고 이쪽은 쵸지. 예비역 수교위 입니다." 히도큰은 이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쵸지에게 말했다. "반갑군. 쵸지 수교위." "그냥 쵸지나 왕벼슬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런데 그 눈알에 관한 주의는 나한테도 해당됩니까?" "종족 차별을 하는 놈은 없다." "대단한 군기군요." 히도큰은 피로한 듯이 눈을 껌뻑거렸다. "이 안쪽에 있는 친구들은 낯선 사람들을 안 좋아해. 내 곁에 항상 가까이 붙어있고, 위험하다 싶으면 주저하지 말고 그…… 그걸 뭐라 고 부르나? 어쨌든 자네 무기를 쓰게. 내게 신경 쓰지 말고." 쵸지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삼각철봉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히도큰은 엘시와 이레의 딱정벌레를 보고는 잠시 생각 에 잠겼다. "그 딱정벌레는 계단을 오르거나 하기 어렵겠군. 저 위에 딱정벌레 가 내릴 만한 곳이 있어. 요새 안을 가로지르는 것보다는 날아서 오 는 것이 그 딱정벌레들한테도, 그리고 자네들한테도 낫겠군. 내가 먼 저 올라가서 신호를 보낼 테니 그 때 날아올라와. 괜찮겠지?" 엘시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엘시와 이레가 뒤에 남고 민들레 여 단의 레콘들과 쵸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조금 후 그들의 모습이 암벽 사이로 사라졌다. 이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시를 돌아보았다. "가주님. 예사롭지 않은 곳에 온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그냥 돌아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여단 꼴이 이 지경이라면 합류시킨 다 한들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른 자들이 민들레 여단을 손에 넣는다 한들 역시 통제하지 못할 테고요." 엘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묵했다. 이레는 주인의 일에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걱정 에 빠진 표정으로 요새 위쪽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위쪽에서 "올라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시는 묵묵히 딱 정벌레에 올라 날아올랐다. 이레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안전을 위해 암벽을 등지며 날아오른 두 사람은 공중에서 선회하여 요새를 살폈 다. 곧 아래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노대가 보였다. 그곳에는 히도큰 하장군과 쵸지가 서있었다. 두 사람이 날아가자 그들은 뒤로 물러났 다. 곧 엘시와 이레는 노대에 내려섰다. 딱정벌레가 속날개를 접은 다음 이레는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 재빨리 쵸지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고 이레는 걱정이 한층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쵸지는 별다른 표 정 없이 서 있었지만 그의 삼각 철봉에는 피를 닦아낸 듯한 자국이 있었다. 요새 아래에서 헤어지기 전에는 없었던 자국이었다. 엘시 또 한 그 철봉을 보다가 쵸지를 올려다보았다. 쵸지는 부드럽게 웃었다. "죽지는 않았어. 내일 아침에는 심한 두통을 느끼겠지만. 사유가 재 미있었어." "사유가 뭡니까?" "내가 금을 밟았다더군." "금?" "포석 사이의 금 말이야." 이레는 당장 딱정벌레에 올라 이곳으로부터 떠나자는 말이 목구멍까 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엘시는 그 말이 정말이냐는 표정으로 히도 큰을 보았지만 히도큰은 그것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딱정벌레는 여기 두고 따라와." 히도큰은 노대 반대편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빗물이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오른 히도큰은 묵직한 나무 문을 열고 말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왔습니다. 다이렌 장군님…… 장군님?" 갑자기 히도큰이 몸을 부풀렸다. 그는 안쪽에서 뛰쳐나오려는 누군 가를 붙잡는 듯했다. 잠깐 동안 짧지만 드센 드잡이를 하던 히도큰은 누군가의 허리를 껴안은 채 질질 끌려왔다. 히도큰을 질질 끌면서 노 대를 가로질러 오는 것은 약간 땅딸막하다는 인상을 주는 늙은 레콘 이었다. 히도큰처럼 잔뜩 부풀어 있는 그 레콘의 허리에는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이레는 그 한쪽에 묵직한 표창 같은 것이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승표의 일종인 것 같았다. 아니, 쇠사슬이니 쇄 표(鎖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쇄표를 감고 있는 레콘은 이리저리 버둥거리다가 엘시를 보았다. 그 는 노호하듯 외쳤다. "엘시 에더리!" 엘시는 대답하기에 앞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쵸지와 이레에 게 옆으로 비키라고 말해야 했다. 이레와 쵸지는 쇄표가 장거리 무기 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조금만 움직였다. "오래간만이군요. 다이렌 장군." "안 가!" "예?" "절망도에는 안 가! 아무리 대장군이 직접 와서 요청한다 해도 안 가! 그게 임무라고 말하지 마! 나는 납병했어! 아니, 할 거야!" 엘시는 한숨을 내쉬듯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고개를 든 엘시는 이 레와 쵸지가 깜짝 놀랄 행동을 했다. 그는 두 사람을 밀치듯 하며 그 들 앞으로 나섰다. 이레가 무례를 무릅쓰고 주인의 어깨를 붙잡으려 할 때 엘시가 외쳤다. "추태를 멈추시오! 다이렌 장군!" 히도큰의 품에서 버둥거리던 다이렌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벼슬 을 빳빳하게 세운 채 엘시를 노려보았다. 그 틈을 타 히도큰은 다이 렌을 더 확실하게 붙잡았다. 엘시는 다이렌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 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나는 센시엣 특수수용소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로 왔습니다. 다 이렌 장군." "엘시. 나는 납병할 거야. 곧 할 거라고!" 이레는 다이렌 장군이 왜 납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것 같 다고 생각했다. 다이렌 장군은 센시엣 특수수용소에 일어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응하기로 하고 이 요새를 얻었으며, 따라서 이미 요새를 얻 은 이상 차마 자신의 의무를 못하겠다고 말할 수 없어서 대신 납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납병을 하면 모든 은원이 사라질 뿐만 아 니라 노인으로 인정된다. 다이렌은 자신이 노인임을 내세워 절망도에 가지 않겠다고 주장할 작정인 것이다. 하지만 차마 무기를 손에서 놓 을 수 없어서 납병례를 치르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이레와 비슷한 추 리를 한 엘시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다이렌 장군. 센시엣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관계 없어? 확실해?" "확실합니다. 그러니 제국군 장군의 품위를 지키십시오. 히도큰 하 장군. 장군을 놓아주시오." 히도큰은 고개를 가로젓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이렌 장군 이 움직임을 멈췄기에 히도큰은 조심스럽게 팔을 풀었다. 하지만 그 는 언제든 장군에게 덤벼들 자세로 서있었다. 다이렌은 수염볏을 세 게 주무르다가 의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럼 뭐하러 왔는데?"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을 동료를 구하기 위해." 다이렌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히도큰은 그 말에 조금 놀란 표정 으로 엘시를 돌아보았다. 엘시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다이렌을 올려 다보았다. 다이렌은 절망도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에 갑자기 찾아온 안도감으로 맥이 풀려 있었고 그 때문에 엘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 다. 그는 엘시가 뭘 잃어서 자기를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인상은 엘시가 요새에 왔다가 뭘 흘리고 간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이 어졌을 뿐이다. '그 분실물의 이름이 제국이라고 발음되는 모양이군.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발음인데.' 다이렌 장군은 자신의 혼란을 여실히 드러내는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가 말했다. "다이렌 장군. 하늘누리가 실종되었다는 것은 압니까?" "하늘누리? 어, 들었어. 아직 안 돌아왔어?" "안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이렌은 고개를 숙여 노대를 내려다보았다. 이레는 그것이 발 딛고 있는 곳을 확인하려는 동작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다이렌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라졌다고? 제국이? 그게 무슨 말이야?" "황제 폐하와 제국 정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국도 없습 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해야지. 황제와 정부가 없어졌다고. 이 땅도, 이 사람들도 다 그대로 있는데 제국이 없어지다니." 쵸지는 다이렌이 형이상학과 관계가 매우 나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엘시는 조직의 수뇌부가 사라졌다면 조직의 다른 구성원이 남아있어 도 조직 자체는 와해된 것이라는 설명을 하려다가 그냥 간단히 말하 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황제와 정부가 없어졌습니다. 제국에는 황제와 정부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과 나는 제국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황제와 정부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누리를 찾으러 가자는 거야?" "아닙니다. 하늘누리가 되돌아올 수 있는 상태라면 이미 오래 전에 되돌아왔을 겁니다. 그것이 길을 잃거나 어디에 고립되는 것은 상상 하기 어려우니까요. 나는 새 황제를 선출하고 그 분을 도와 새 정부 를 수립하길 원합니다." "새 황제를 선출해? 누구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는 모양입니다." 다이렌은 부리를 꽉 닫은 채 엘시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벼슬을 조 금 잡아당기고 수염볏을 약간 비튼 다음 다이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제가 없어졌으니까 자기가 황제 되겠다고 나서는 놈들이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대로 두면 그 자들은 실력 대결도 펼치게 되겠지요. 우리가 아는 모든 세계가 분란으로 빠져들 겁니다. 무수히 많은 피가 흐른 다음 최후의 승자가 새 황제가 될 수도 있겠지요." "말 되네. 제일 센 놈이 황제가 된다는 거지?" "사람들이 많이 다칠 겁니다." "싸워봐야 누가 센지 알잖아. 안 싸우고 어떻게 알아?" "다이렌. 황제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다스리는 존재이지 사람들을 죽 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레는 근래 보기 드물었던 질박한 대화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질박 하다면 명쾌해야겠지만 지나친 질박함 때문에 명쾌함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엘시는 차분함을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서로 싸우지 않고도 새 황제를 선출할 방법은 있습니다. 귀족원 회 의를 개최하여 새 황제를 뽑으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새 황제와 새 정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겠네." "이미 그것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칼리도백의 자격으로 귀족원 회의 개최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싸워서 제위를 얻고 싶은 야심가들은 귀족원 회의에 관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야 심가들의 눈치를 보느라 귀족원 회의에 별다른 열의를 보여주지 않았 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국군을 규합하여 강제로 귀족원 회의를 열기 로 했습니다." 다이렌은 다시 벼슬과 수염볏을 이용하는 사고과정에 들어갔다. 그 리고는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러면 가서 사람들한테 귀족원 회의를 열자고 하는 거야? 그 거 반대하는 놈들은 혼내주고? 하지만 엘시. 싸우지 않고 황제를 뽑 기 위해 귀족원 회의를 열자고 했잖아. 그런데 귀족원 회의를 열기 위해 싸운다고? 앞뒤가 안 맞잖아." "다이렌. 제국군이 모두 모이면 아무도 맞서 싸우려 하지 않을 겁니 다. 인간이 레콘에게 덤빌 수 있겠습니까? 나는 싸움이 아예 일어나 지 않을 상황으로 만들려는 겁니다." "그렇군. 알겠어.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놈이 있으면 어 쩔 거야? 나는 죽어도 귀족원 회의 못하겠다는 놈이 있으면?" 엘시는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한숨을 내쉬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장군은 한숨을 내쉬는 대신 조용한 선고를 내뱉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겠지요." ===============================================================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4-4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7-20 조회수 : 1779 피를 마시는 새 24. 보는 것과 베는 것 - 4 시오크는 뻣뻣한 목을 비틀어 긴장한 어깨를 좀 편하게 하고 싶었 다. 하지만 그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칼잡이가 그 요청에 귀 기울 일 것 같지는 않았다. 시오크는 아버지도 불편한지 궁금했다. 그는 게라임의 표정을 살폈다. 게라임은 무표정했다. 공기가 노르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달걀 껍질 색깔과 비슷한 황혼 이 시구리아트 산맥의 서쪽면들에 부딪쳐 흘러내렸다. 거대한 산봉 우리들과 깊은 협곡 사이로 밤의 도래를 알리는 바람들이 질주했다. 시오크가 말했다. "아버지. 아무리 이야기가 돌고 돌아도…… 항상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왜 평가하지 않으십니까?" 게라임은 다리를 꼬아올렸다. 깍지낀 두 손을 무릎에 얹은 게라임은 아들의 입을 응시했다. 시오크는 칼날을 피해 목을 긁었다. "아버지가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압니다. 비나간후도 결국 자기 자신의 이득을 위해 싸우는 것이고 시모그라쥬공도 자기 자신의 이득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똑같다는 것이겠지요. 맞 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잖습니까? 그건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가지고 모두 똑같다고 말해선 안됩니다. 상인의 장사와 강도의 살해 가 똑같다는 말씀입니까? 통행료 내면 다 통과입니까?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장사는 나쁘지 않고 살해는 나쁘다고 평가해야 합니다. 장사 꾼이든 살인강도든 자기가 선택한 길을 걸어가는 거니까 똑같다고 말 해선 안됩니다." 목을 긁던 시오크의 손가락이 칼날에 베일 뻔했다. 칼잡이는 재빨리 칼날을 눕혀서 시오크의 손가락이 칼몸을 건드리도록 했다. 시오크는 고개를 돌려 칼잡이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는 말했다. "물론 잘못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 평가할 수 있으니 모두 평가를 하는 건 그만두자고 말해선 안됩니다. 모두 한꺼번에 평 가하자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수치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 람도 나를 평가할 테니까요. 잘못 평가하는 것이 무서워서 수치심 모 르는 동물이 되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게라임은 입을 다문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많은 관련 증인들이 게라임과 시오크의, 흡사 대칭성으로 보일 정도 의 유사성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다른 이들이 쉽게 간과하는 절대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두 사람이 가장 첨예한 대립을 펼칠 때에도 맞바람에 파랑이 이는 수면 아래에는 그 절대적인 차이 가 은은하지만 분명한 저류를 형성한다. 두 사람은 부자다. 따라서 시오크는 게라임의 출생을 보지 못했지만 게라임은 시오크의 출생을 보았다. 그것이 절대적인 차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존재에 책임이 없 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존재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대칭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게라임이 입을 연 그 순간에도 여전히 불가능했다. "시오크. 나는 네가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너는 약간 어긋나 있다." "어디가 어긋나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그걸 말해주면 너는 네 생각을 바꾸는 대신 반대 논리를 수집하기 시작할 거다. 내가 그런 것처럼. 하지만 말해주지. 너는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서 말할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는 노인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시오크는 빙그레 웃었다. 게라임은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네 말에 대 해 나도 동의한다는 말이다. 네가 어긋나 있다고 하는 것은, 네가 영 원불멸의 평가 기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말이다."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럼 말해봐라. 평가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너는 불멸의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런 건 없습니다. 세상에, 아버지. 저는 모든 사람이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다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기준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면 너는 네 기준으로 다른 사람에게 농부가 되라거나, 혹은 광 부가 되라고 말할 거란 말이냐?" "예? 천만에요. 그건 그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너는 왜 그 사람들의 목적을 평가하지 않는 거냐?" "다른 사람의 직업 선택에 참견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평가했기 때 문이지요." "참견과 불참견의 기준은 뭐냐?" "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느냐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장님에게 찾아가 둘밖에 없는 방 안에서 장님에 대 한 욕설을 써놓은 종이를 펼쳐보이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시오크의 얼굴이 굳었다. "예가 좀 그렇군요. 아버지. 그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너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잖느냐. 게다가 그 장님에게도 아무 영향 이 없지. 둘밖에 없었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은 없다." "그래도 그것은 나쁜 짓입니다." 게라임은 칼날에 주의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불멸의 기준을 믿고 있다. 시오크. 그리고 그것은 도덕이지. 가장 모호한 기준 말이다. 아니, 대답하지 마라. 너는 네 견해를 바 꿀 생각이 없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난 너에게 이해받고 싶어서 말 한 것이 아니라 너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말한 거다. 이만 일어나겠다." 시오크는 불만 섞인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게라임은 고개 를 돌려 칼잡이를 바라보았다. "나 이만 일어나겠다." 칼잡이는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시오크는 동의의 눈짓을 보냈고 그 러자 칼잡이는 게라임이 일어날 수 있도록 칼날을 옆으로 치웠다. 그 리고 시오크를 제압하고 있던 칼잡이 또한 그렇게 했다. 게라임과 시 오크가 일어난 다음 두 칼잡이는 재빨리 부자의 등 뒤에 칼을 겨누었 다. 게라임은 목을 쓸어만졌다. "내가 너에게서 당을 되찾을 때까지 이곳을 잘 보살피도록 해라. 비 나간후를 돕는 일에 정신이 빠져서 당을 피폐하게 만들지는 마라." "아버지. 저도 당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당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싶어하는 거죠." "그 말 들으니 고맙구나. 내가 안전한 곳에 도달한 다음 이 자를 돌 려보내겠다. 아, 미안하지만 당사 바깥까지 바래다주어야겠다." 게라임이 안전하게 나가려면 인질이 필요했다. 시오크는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게라임은 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 문은 회의실에서 당 바깥으로 곧장 이어지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상대의 수하 가 등 뒤에서 칼을 겨누게 한 채 좁은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얼마 후 그들은 시구리아트 산맥의 준령들이 굽어보는 대로에 나오 게 되었다. 그들은 산의 그늘에 서있었기에 당원들은 그들을 보지 못 했다. 그리고 두 부자는 조금 복잡한 행동에 들어갔다. 먼저 두 부자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두 칼잡이는 각자 인질의 목에 칼을 겨눈 채 천천히 두 사람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곧 두 칼잡이는 서로 등을 보인 채 두 부자 사이에 서게 되었다. 두 칼잡이는 칼을 쥐지 않은 손을 뒤로 뻗어 서로를 붙잡았다. 칼잡이들이 서로의 손을 꽉 붙잡은 것을 확인한 두 부자는 동시에 뒤로 걸었다. 그들의 목이 칼끝에서 물러났다. 물론 칼잡이들은 서로 를 붙잡고 있기에 인질이 멀어지는 것을 수수방관해야 했다. 그렇게 칼끝에서 벗어난 두 부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사이 좋은 부자였 고,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서로를 공격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칼잡이들이 손을 붙잡은 채 빙글 돌았다. 각자 자신의 주인 에게로 향한 칼잡이는 동시에 손을 놓았다. 그리고 게라임과 그의 수 하는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곳은 시오크가 장악하고 있는 장소이므로 게라임은 재빨리 도망쳐야 했다. 말을 숨겨둔 곳으로 달리던 게라임의 등 뒤에서 시오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라임은 그것이 추격대를 부르는 소리일 거라 생각했지만 시오크의 외침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당은 걱정마시고, 몸조심 하세요!" 게라임은 빙긋 웃었다. 그는 달리면서 손을 들어 뒤쪽을 향해 흔들 었다. 조금 후 시오크의 외침이 다시 들려왔다. "추적해라!" 게라임과 그의 수하는 추격자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어둠이 깔리는 산길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엘시는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엘시는 자신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엘시는 자신이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누워있는 그의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는 것도 알지 못했다. "대장군님?"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목소리가 공기를 춤추게 했다. "또 자는 것이기도 하고 깨어있는 것이기도 한 상태인 건가요?" "그렇군요." "벌써 두번째네요." "굉장히 피곤하거든요.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은 불쌍하리만큼 위축되어 있어요. 자기도 어느 정도 그걸 느끼고 있고, 그래서 요즘 은 원칙적인 말밖에 하지 않아요. 실수하는 것이 싫어서. 그러면 주 위 사람들을 걱정시키게 될 테고 그랬다간 제국군 규합이나 귀족원 회의 개최는 레콘 뱃노래 같은 것이 되겠지요. 게다가 근심과 두려움 으로 자기한테 잠도 허락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 있어요. 그래서 제대로 못자는 거죠." "이 사람과 사이가 좋은 모양이군요?" 웃음이 풍겨왔다. 그 웃음은 향기였다. "이 사람과 저는 사이가 좋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요." "이 사람에 대해 좀 더 알려줄래요?" 엘시는 고개를 돌렸다. 뒤척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만, 어쨌든 엘시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두게 되었다. 대화를 나누 던 것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곳에 서있는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그 런데 얼굴이 굉장히 많았다. 형태가 뚜렷한 얼굴만 수십 개가 넘었고 약간 흐린 것이나 불분명한 것까지 포함시키면 숫자를 셀 수도 없었 다. 서있는 것은 한 사람이지만 보이는 얼굴은 무수하다는 그 상황 을, 엘시는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실 제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를 보네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요." "엘시 에더리에 대해 말해주세요." "엘시 에더리는 천박하고 비겁한 사람이지요. 의지 박약하고 줏대 없고 분수를 몰라요. 우둔하고 겁 많은데다 동정심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 냉혈한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를 동정하기엔 너 무 게을러서 그렇지요." 엘시의 눈에 눈물이 조금 고였지만 엘시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수 없이 많은 얼굴이 말했다. "왜 그런 심한 말을 하죠?"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예? 그럼 혹시 제가?" "아뇨. 여기엔 당신과 저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어요." "그러면 이 사람이? 어? 그러면 이 사람이 제 질문에 대답한 거예 요? 혹시 대장군님과 대화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럴 것 같기도 하군요. 그럴 수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이야기하 고 싶어요?" "이야기하고 싶어요. 대장군님?"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대장군님!" 엘시는 그 소리를 "땡땡땡땡!"으로 들었다. 벌떡 일어나면서 엘시의 손은 칼자루로 향했다. 뽑아든 칼로 문쪽을 겨냥하며 엘시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떤 가공할 공격이 다가오는 대 신 다시 고막을 진동시키는 소음이 들려왔다. "땡땡땡땡!" 머리 주위를 차갑고 끈적한 것이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엘시는 이 마와 눈 주위를 만졌다.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고 영문 모를 눈물 이 조금 묻어났다. 창문으로 떨어지는 달빛을 보며 엘시는 이곳이 어 디인지 생각해보았다. 근래의 기억 몇 가지를 더듬은 후에야 엘시는 이곳이 민들레 요새의 객실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이렌 장군은 엘시의 요청에 대해 즉답을 거부했다. 그는 그것이 시간을 두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엘시는 다이렌이 엘시 의 요청 자체보다 요새를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다그치지는 않기로 했다. 다이렌 장군 은 엘시와 그의 일행에게 요새에서 하룻밤 쉬라고 말했다. 이레는 마 을로 돌아가거나 혹은 그 중간에 있는 강변에서 야영하고 싶다는 표 정을 강력하게 지어보였지만 엘시는 몸종의 요구를 묵살했다. 합류를 요청하러 와서 불신을 보여주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 엘시의 생각이었다. 주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이레는 저수조와 가장 가 까운 곳에 있는 객실에 대장군을 모시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자신의 현황을 알아차린 엘시는 온 요새를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고 그 자신에게는 급성 두통을 가져오고 있는 종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요새에 긴급 사태가 벌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엘시는 재빨리 갑옷을 챙겨입었다. 그러나 투구를 들어올릴 때 엘시는 문득 종소리에 관한 제보를 들은 것을 떠올렸다. 엘시는 그들을 마중하러 나왔던 내치 부 위가 어떻게 말했는지 생각했다. '밤중에 갑자기 종을 쾅쾅 쳐서 자던 사람 다 깨워놓고는 납병하겠 다고 횡설수설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야.' 이게 그 소리인가? 엘시는 소리를 듣는 것에 방해가 되는 투구를 쓰 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 그리고 종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려오는지 청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투구를 썼더라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요새 의 돌벽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뚜렷한 계명성들이 들려왔다. "다이렌! 이 개구리에게 박치기할 놈아! 그만두지 못해!" "노망쟁이 또 지랄이야! 죽여버려!" "그 빌어먹을 종 떼서 그 자식 부리에 쑤셔넣어!" 엘시는 이것이 자신들의 사령관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엘시가 곤혹스러워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그 리고 자던 자리에서 그대로 뛰쳐나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반라 차림인 이레 달비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네가 걱정되는군. 감기 걸리겠어."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눈을 깜빡거리던 이레는 주인이 완전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무방비한 모습을 내려다본 이 레는 주인의 갑옷이 되는 대신 자물쇠 노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 다. 이레는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그가 몸을 완전히 밀착시키기 직전 문이 다시 열렸고 그래서 이레는 엉덩이를 걷어차인 사람과 비슷한 꼴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이레는 볼품없이 쓰러 지는 대신 땅 위를 부드럽게 굴러 자세를 회복했다. 엘시는 문을 열 고 안으로 들어선 것이 쵸지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레에게 손을 내 밀었다. 이레는 그 손을 사양하며 벌떡 일어났다. "왕벼슬! 코 깨질 뻔했잖습니까!" "그러게 문은 왜 닫냐. 열어둬야지." 쵸지는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는 그 것이 닫히지 않도록 상자를 끌어와 문 아래에 받쳤다. 어이없다는 표 정으로 쵸지를 바라보는 이레에게 엘시가 설명했다. "놀라지 마라. 이레. 여기엔 레콘들밖에 없다. 저런 나무문이 레콘 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열어두는 것이 나아. 갑자기 날 아온 파편에 맞을 일도 없고 누가 오는지 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저 문이 없어야 더 좋은 문을 가져다 놓을 수도 있고." "더 좋은 문이오?" 이레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쵸지가 삼각철봉을 늘어뜨 린 채 문 앞에 섰다. 좋은 내구성이 있는데다 피아 식별도 가능하며 불청객을 공격할 수도 있는 훌륭한 문이었다. 이레는 안도하며 뒤로 물러났다. 엘시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천장을 살폈다. 종소리는 멎어 있었다. 하지만 험악한 욕설과 노성은 계속되고 있었 다. 이레는 그 소리들 사이에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섞여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운 채 상관의 악덕에 대해 불평하는 것 이상의 행동이 일어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엘시는 의자를 끌 어와 그 위에 앉았다. "다이렌 장군이 밤중에 납병례 하겠다고 병사들을 깨우곤 하는 일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가봐야 하나." "가보다니오? 화가 난 레콘들이 있는 곳으로요?" "다이렌 장군이 정말 납병례를 한다면 여러 가지 신경 쓸 일이 생길 거야. 물론 제국군 군규 어디에도 납병과 전역의 관계를 명시한 부분 은 없지만, 그리고 레콘은 맨손이라도 무기를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 지라고 하지만, 그래도 손에서 무기를 놓고 영원히 싸우지 않을 것을 다짐한 레콘이 군인이라는 것은 어색한 일이야. 그가 납병을 한다면 우리는 민들레 여단장을 잃는다고 생각해야겠지. 신임 여단장이 선출 되고 인수인계가 끝날 때까지 민들레 여단은 움직이지 못할 테지." "내일 아침에 알아보셔도 늦지 않습니다. 어차피 아침에 장군에게 의향을 듣기로 하셨잖습니까? 지금은 그냥 이곳에서 몸조심하면서 기 다리셔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당장 딱정벌레 타고 떠나든가요. 가주 님. 도대체 저게 상관에게 할 소리입니까? 저런 자들을 합류시키면 아군도 끔찍한 곤욕을 치르게 될 겁니다." "죽고 싶어하는 것 같아." 말을 한 것은 문을 막아서고 있는 쵸지였다. 엘시와 이레는 그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쵸지는 요새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욕설을 잘 들으 려는 듯 머리를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이레. 시모그라쥬에서 늪에 갇혀있을 때 생각나?" 이레는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잊겠습니까?" 문득 이레는 그 때 엘시가 마른 우물에 갇혀 고초를 겪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자 신음을 흘렸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 레는 엘시의 눈치를 살폈다. 엘시는 별 반응 없이 쵸지의 등만 바라 보았다. 이레가 침묵하자 쵸지가 말했다. "론솔피와 주테카, 그리고 준람이 어떻게 굴었는지 기억하지? 그 중 에서 론솔피가 뭘 했지?" "밧줄을 꼬고 있었지요. 레콘을 매달아도 될 만큼 튼튼한 것으로." "그 친구는 죽고 싶었지. 나처럼 무서워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 야." "당신이오? 제가 기억하기로 당신이 가장 침착했습니다. 우리가 빠 져나온 다리를 찾아낸 것도 당신이잖습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내가 아마 가장 무서워했을걸." 약간씩 싸늘해지는 어깨를 감싸고 있던 이레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조용히 듣던 엘시는 눈을 가늘게 떴 다. 쵸지가 계속 말했다. "있잖아, 이레. 사람은 어느 정도 무서운 것은 피해. 하지만 무서움 이 극도로 심해지면 오히려 무서운 것에 정면으로 부딪쳐. 물론 어떤 사람은 정말 용감해서 그렇겠지. 하지만 무서운 것에 부딪혀 자기를 죽여버리면 최소한 공포는 그만 느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자포자기식 의 심정 때문에 그러는 수도 있어. 내가 그랬지. 나 그 때 물에 몸을 담가보려고 했어." 약간 흔들리긴 했지만 쵸지는 비교적 명확하게 '물'이라고 발음했 다. 최후의 대장간에 있는 극히 특수한 몇몇 레콘이 아니면 부리 밖 으로 내지 않는 단어에 엘시와 이레는 크게 놀랐다. "내가 다리를 찾아낸 것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물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대신 그 아래에도 뭐가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 거지." "그랬습니까?" "그래. 난 미쳐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준람의 다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물에 몸을 담가봤을 거야. 그리고는 미쳤겠지. 론솔 피는 목을 매달았을 테고." 쵸지는 비어있는 손으로 벼슬을 쓸어만지며 담담하게 말했다. "금 밟았다고 나한테 싸움 걸었던 그 녀석 때문에 여러 가지로 생각 해봤어. 아무래도 이 친구들 물과 레콘을 싫어하는 것 같아. 물이야 원래 싫은 것이고 레콘은, 절망도에 있는 건 레콘이잖아? 이 친구들 이 비참한 것은 절망도에 있는 어떤 레콘들 때문이라는 거지." "그렇군요." "그래. 차라리 자기를 부수고 싶어서 싸움을 걸고 또 레콘이 증오스 럽기 때문에 싸움을 거는 것 같아. 그래서 이렇게들 서로에게 난폭한 거야. 내 제멋대로의 추리가 맞다면 너나 엘시는 오히려 안전할지도 모르겠군." 욕설이 줄어들었다. 발소리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레는 요새가 평온 을 되찾는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이 요새 안에 흘러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난폭한 욕설과 다급한 발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속삭임, 숨 죽인 탄식, 그리고 화를 억누르는 듯한 신음 등이 새로 나타났다. 그 소리들은 이 밤의 불행은 이제 시작이라고 경고하 는 것 같았다. 이레는 몸에 땀이 배는 것을 느꼈다. 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쵸지의 등을 보던 엘시가 말했다. "왕벼슬. 이제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무서워." "하지만 자연스럽게 말하는군요." "그렇게 쉽지는 않아. 그 말 할 때마다 부리가 어긋나는 기분이야." "당신은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쵸지가 고개를 조금 돌려 어깨 너머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가 말했다. "당신은 물이 무서워서 물에 빠져죽을 생각을 했다고 말해지만 그건 론솔피를 변호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론솔피가 겁쟁이로 보일까봐 당신도 무서웠다고 말한 거지요. 똑같이 무서웠다면 론솔피도 당신처 럼 물을 말할 수 있게 되었어야 하지요. 하지만 론솔피는 그렇지 않 습니다. 당신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가 왜 생기는지는 간단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론솔피는 당신이 말한 대로 물이 무서워 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당신은 반대입니다. 당신은 죽기 위 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물과 싸울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제 물 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 잊은 겁니다." 쵸지는 어깨를 조금 들썩거렸다. 소리 없이 웃는 것이었다. "엘시. 나를 왜 그렇게 용감한 인물로 만들지?" "당신은 용감하니까요.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신은 나늬 없는 세상을 비웃었지요. 그런데 왜 물과 싸워서라도 살 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쵸지는 부리를 닫았다. 엘시는 그의 등에서 아무런 대답도 읽을 수 없었다. 쵸지가 영영 대답하지 않을 작정이라고 엘시가 판단했을 때 쵸지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나늬는 있어." "있다고요?" "내가 원하니까." 이레는 쵸지의 등을 향해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때 발소 리가 다가왔다. 그 소리를 들은 이레는 갑작스러운 불안감을 느꼈다. 소리를 내는 사람은 확고한 걸음으로 걷는 것 같았다. 발소리는 규 칙적이었고 뚜렷했다. 발을 질질 끌어서 발소리의 앞뒷부분이 뭉개지 는 그런 걸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레는 그 확고함과 침착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레는 마른 입술을 적시 며 쵸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그 발 소리가 그들이 있는 방을 향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발소리가 문 근 처까지 다가왔을 때 엘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쵸지가 말했 다. "누구냐?" "히도큰 하장군이다." 이레는 안도했다. 그가 이 요새에서 목격한 레콘들 중 유일하게 정 상적인 레콘이 온 것이다. 문에 히도큰의 모습이 나타나자 쵸지는 옆 으로 비켜섰다. 히도큰 하장군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쵸지에게 목례하고는 이레와 엘시를 바라보았다. "소란 때문에 깨어있었나 보군. 많이 놀랐지?" "놀랐습니다. 혹시 다이렌 장군이 납병을 하겠다고 장병들을 깨운 겁니까?" "그 이야기 들었어? 그래. 다이렌 장군이 종을 쳤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납병이 이루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테고." 대화를 듣던 이레가 혀를 찼다. "역시 그냥 그래보는 것에 불과한 겁니까?" 히도큰은 이레를 무거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레는 그 눈길에 의아 해했다. 히도큰이 말했다. "앞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야." "예?" 쵸지가 벼슬을 세웠다. 그리고 엘시는 날카로운 눈으로 히도큰을 바 라보았다. 히도큰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조금 전 다이렌 장군이 죽었다. 분노한 병사 한 명이 뒤에서 장군 을 공격했고, 일격에 끝장을 냈지. 아마 그 분은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돌아가셨을 거다." 이레가 옷을 챙겨입은 다음 히도큰은 세 사람을 안내했다. 요새 안 의 분위기는 험악했지만 떠들썩하지는 않았다. 우연히 마주친 레콘 병사들은 살기 등등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볼 뿐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레는 죽을 때까지도 그 날 밤을 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 었다. 레콘들이 거주하는 곳이기에 요새의 모든 부분은 큼직큼직했고 그래서 암흑이 대단히 많이 고여있었다. 그 암흑 속에서 레콘 병사들 은 거대한 암흑이 되어 서서 번뜩이는 눈으로 지나가는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히도큰의 안내가 끝났을 때 이레는 정신적 압박감으로 지쳐버렸다. 그곳에는 두 구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요새 최상층의 넓은 방이었다. 아마 의식을 치르기 위한 곳인 듯 대 단히 넓었고 그래서 그 가운데 레콘의 시체도 특별히 크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간 이레는 그 크기에 압도되었다. 레콘이 나 그들이 누워있는 모습에는 이레도 익숙했다. 하지만 그것이 생기 를 잃은 사체가 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당연했다. 이제 그것은 다시는 자기 의지로 움직일 수 없다. 이동성이 없기 때문에 더욱 크고 무겁게 보였다. 주위에 몇몇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있었기에 이레는 다이렌 장군의 얼굴을 쉽게 알아보았다. 장군은 거대한 피웅덩이 가운데 똑바로 누 워있었다. 그 깃털이 많은 피를 흡수했지만 그 거체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워낙 막대했다.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죽었다는 히도큰의 말을 증명하듯 다이렌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이레는 다른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는 땅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주위에도 많은 피가 흐르고 있 었다. 그런데 이레는 그 레콘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다고 생각했 다. 가까이 다가간 이레는 엎드린 레콘의 어깨와 목 등에 있는 오래 된 흉터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철창이 놓여 있었다. 이레는 쵸지에게 손짓했다. "뒤집어주시겠어요?" 쵸지는 그를 뒤집어놓았다. 그러자 그들을 마중나왔던 내치 부위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레와 함께 내치 부위의 얼굴을 확인한 쵸지는 고 개를 가로저었다.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더니, 대신 찔렀나 보군. 누가 이 친구를 죽였죠?" 히도큰이 대답했다. "내가. 종소리를 듣고 오다가 그가 장군님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 지." "종은 어디에 있습니까?" 히도큰은 손을 들어 방 한쪽을 가리켰다. 한쪽 벽에 쇠사슬이 늘어 져 있었고 그것은 천장의 구멍을 통해 위로 이어져 있었다. 이레는 그 위에 종이 매달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엘시는 다이렌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대장군의 시선은 다시 다이렌의 허리로 옮겨졌다. 그곳에 감겨 있는 쇄표를 본 엘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납병을 못하셨군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곁에 있는 당신에게 센시엣 특수수용소의 구조 요청이 갈 일은 없을 겁니다. 편히 쉬십시 오." 엘시는 일어났다. "히도큰. 1대대장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당신이 최선임입니까?" "그래." "여단장이 사망했으니 당신이 여단을 맡아야겠군요. 장군의 관인과 장부, 기밀서류 등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겠지요?" 히도큰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다 가지고 있어. 군무는 내가 다 처리하고 있었거든. 장군이 해야 할 일까지."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업무를 인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군요. 우 리는 물러갈 테니 장군의 장례를 거행하고 여단을 지휘하십시오. 혹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까?" "도움은 필요없지만 할 말은 있다." "뭡니까?" "민들레 여단은 제국을 되찾기 위해 대장군 엘시 에더리와 함께 갈 것이다." 내치 부위의 시체를 보던 이레는 고개를 홱 돌려 히도큰을 보았다. 히도큰은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다이렌 장군도 그것을 원할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장군이 종을 친 것도 납병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결심을 말하기 위해서였는 지도 모르지." 엘시는 바닥에 누워있는 다이렌을 쳐다보며 말했다. "히도큰 하장군. 당신은 모시던 상관의 죽음 때문에 충격을 받았는 지도 모릅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거라면 나는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흥분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아냐. 내 마음은 평온하다. 제국군은 제국을 위해 존재한다. 너에게 협조해서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은 나의 의무다." "진심입니까?" "진심이다." "합류를 환영합니다." 히도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간 피로한 표정으로 다이렌과 내 치 부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은 조금 전 이레가 얼핏 느꼈던 감 정을 보다 분명하게 담고 있었다. 더 이상 자의로 움직일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이 치워야 하는 큰 짐 두 개. "빨리 가야 하지? 장군의 장례는 오늘 밤안에 끝내도록 하겠다. 그 리고 늦어도 내일 오후가 되기 전에는 출발할 수 있도록 해두지. 그 러면 되겠나?" "좋습니다." "그러면 가서 자도록. 미안하지만 바래다줄 수 없겠군. 지금부터 상 당히 바쁠 것 같으니까. 돌아갈 수 있겠어?" 이레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무시무시한 요새를 히도큰의 호위도 없이 걷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하다. 하지만 이레는 그의 주인 이 뭐라고 대답할지 알고 있었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고하십시오." 엘시는 몸을 돌려 방밖으로 나갔다. 이레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재빨 리 주인의 뒤를 따라갔다. 등 뒤에서는 히도큰이 병사들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 바깥으로 나온 이레는 사방을 경 계하려 애썼다. 그 때 쵸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레는 놀라서 쵸지를 올려다보았다. 쵸지는 이레의 어깨를 붙잡아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자 앞쪽에서 걸어가는 엘시와 그들 사이에 거 리가 생겼다. 엘시가 홀로 걸어가는 것을 본 이레는 초조한 표정으로 쵸지를 보았다. 쵸지는 옆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레. 히도큰이 다이렌을 죽였어." 이레는 움찔했다. 엉겁결에 큰소리를 낼 뻔한 이레는 발돋움을 하며 속삭였다. "어째서죠?" 쵸지는 수염볏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감이야. 의심스러운 것도 있고. 히도큰이 내치 부위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생각해봐. 생긴 건 흉하지만 성격은 상냥하다고 했지. 그런데 왜 상냥한 사람이 상관을 죽였을까? 잠을 깬 것이 그렇게 화가 나서? 하지만 그건 이전에도 몇 번 겪었던 일이야. 게다가 다이렌이 쓰러져 있는 모습도 수상해. 히도큰은 다이렌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 는 채 죽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다이렌은 종을 치다가 죽었다는 말인 데, 그럴 경우 종줄 옆에 쓰러져 있어야 해. 방 가운데가 아니라." "종을 치는 것을 멈추고 방 가운데로 돌아와 서있다가 당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면 다이렌은 종소리를 들 은 병사들이 도착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돼. 그런데 누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결코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죽 을 수가 없어. 다이렌도 자기 부하들이 밤중의 종소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 그가 실제로 종을 쳤다면 만반의 대비를 하지 않겠어?" "그렇다면……" "히도큰이 다이렌을 저곳에서 죽였고, 자기가 직접 종을 친 다음,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첫 번째 녀석을 죽여서 누명을 씌운 거지. 그 불운한 첫 번째 녀석은 내치 부위였고." "히도큰이 왜 다이렌을 죽입니까? 여단장이 되고 싶어서요?"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바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히도 큰은 엘시를 따라나서고 싶었던 것 같아. 그렇다면 다이렌이 죽은 것 은 그가 엘시에게 합류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공수증 때문에 요새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싫었나 보지. 좀 더 상상해본다면 저 방에 서 다이렌과 히도큰이 그 문제로 언쟁을 벌였다는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 이레는 쵸지가 말한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히도큰은 엘시에게 합류 하여 제국을 구하자고 주장했고 다이렌은 요새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싫어서 우물쭈물한다. 그러자 히도큰이 나가는 것이 무섭냐고 말하고 화가 난 다이렌은 자신은 절대로 엘시를 따라나서지 않겠다고 외친 다. 그리고 몸을 돌린 다이렌의 등에 히도큰의 칼이 내리떨어진다. 쓰러진 상관을 보던 히도큰은 곧 굳은 결심을 하고는 종줄로 다가가 그것을 잡아당긴다. 이레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뒤를 따라오는 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레는 쵸지에게 속삭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죠?" "일단 여기서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는 함구하도록 하자. 네 주인 에게도 말하지마. 엘시가 그걸 알게 되면 바르지 못하다면서 히도큰 을 처벌하려고 하겠지. 그러면 일이 엉망진창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까지 위험해질 거야. 민들레 여단을 다루려면 히도큰이 필요해. 이 요새의 정신나간 자들을 실제로 지휘해온 자는 히도큰인 것 같으니 까." 이레는 상관 살해의 전과를 가진 자를 주인 곁에 두어도 되는지 의 문스러웠다. 하지만 당장 쵸지의 말을 반박할 논리는 떠오르지 않았 고, 게다가 그와 엘시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레는 빨리 엘시 의 곁으로 다가가야 했다. "알겠습니다." 이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레가 주인의 뒤쪽으 로 다가가는 것을 보던 쵸지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뒤쪽을 돌아보았 다. 방은 멀어져 있었고 문을 통해 움직이는 횃불만이 조금씩 보였 다. 쵸지는 부리를 살짝 부딪치고는 이레의 뒤를 따라갔다. =============================================================== 24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5. 불씨의 은닉 - 1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자유무역당이 세 계를 사버리지 않는 이유는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더 비싼 값에 팔아넘길 대상이 없기 때문이지. 이윤을 남길 수 없다는 거야. 만약 세상을 살 구매자가 있었다면 오래 전에 사버렸을걸. 빨리 사둬야 가격이 오르잖아.' 물론 농 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지만 그 말에는 주의 깊은 유 료도로당원이라면 건져낼 수 있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 하르체 도빈의 <우리는 길을 준비한다.> 中 헤어릿 에렉스는 도깨비 감투를 쓰고 있을 때의 가장 좋은 점은 남 자들이 보내는 목마른 시선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 며 규리하성 경비병을 슬쩍 지나쳤다. 그녀가 감투를 벗고 모습을 드 러낼 경우 경비병이 낯선 자에 대한 경계심을 먼저 드러낼지 보기 드 문 미녀에 대한 호의를 먼저 드러낼지 궁금해할 사람들이 혹 있을지 몰라도 헤어릿은 그 사람들에 포함되지 않는다. 헤어릿은 답을 안다. 분명히 후자다. 그리고 헤어릿은 그 사실을 불쾌한 상식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규리하성을 방문한 첫 번째 미녀는 아닐 것이다. 헤 어릿은 이 성에 몇 명의 미녀들이 안주인 노릇을 했을지 생각해 보았 다. 규리하는 미인으로 유명한 땅은 아니며 규리하 가문 역시 빼어난 용모로 유명한 가문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규리하 가문에 시집온 미녀들이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고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이 성에서 무엇을 찾아내고 무엇을 잃었을까. 긴 통로를 걷던 헤어릿은 문득 발바닥을 바닥에 살짝 비벼보았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헤어릿은 신발을 벗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은 그녀의 발에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 인간에게 주름살을 남기 는 시간은 돌에게는 반대의 작용을 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쳤기에 돌바닥은 맨들맨들했고 심지어 가운데 부분은 약간 파여있다. 발자취에 돌이 닳아버린 그 바닥만 보아도 규리하의 장구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헤어릿은 고개를 들어 궁륭 천장을 바라보았다. 혹 있을지도 모르는 침입자를 대비하기 위해 성 내부의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었지만 궁륭의 꼭대기까지는 빛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곳에는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어둠이 고여 있었다. 헤어릿은 그 어둠 이 그녀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떠나라. 이곳은 규리하의 성역이다.' 헤어릿은 거꾸로 고여 있는 어둠을 향해 말했다. '글쎄. 이 성엔 규리하가 아닌 여자들도 있었을 텐데.' '태어날 때 규리하가 아니었던 그녀들도 죽을 땐 규리하였다.' 헤어릿은 날카로운 지적임을 인정했다. 이 성의 마지막 안주인이었 던 오세느는 오세느 규리하로서 죽었다. '규리하에는 규리하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군.' '그렇다.' '소리 로베자는 소리 규리하가 될 수 있나?' '그것은 내가 정하지 않는다.' 헤어릿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다. 이이타 규리하는 거기까지 생각해두었겠지만 소리는 자신이 세계 어디에서든 그 이름이 곧 신용장으로 통하는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까? 헤어릿은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헤어릿이 관찰해온 바에 따르면 소리의 공자님은 소리에게 그것을 상기하라고 요구한 적 이 없다. "누구냐!" 살벌한 외침에 헤어릿은 움찔했다. 그 외침은 '네가 누군지 알고 싶 다'는 평범한 의미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 있는 외침이었다. 그것은 '너를 죽이는 것이 실수라면 되도록 빨리 알려다오'라는 의미였다. 그 날카로운 외침이 헤어릿의 침착을 상당히 흩어놓았다. 헤어릿은 침착을 상당히 잃은 채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헤어릿이 본 것은 예리한 장창을 들고 있는 단구의 남자였다. 남자 는 남달리 작았고 창은 유달리 길었기에 헤어릿은 남자가 신장의 두 배나 되는 무구를 들고 오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창은 그 정도로 길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시선은 통로의 벽과 천장을 빠짐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고정되었을 때 헤어릿은 긴장감에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약간 빗나가 있었고 그 오차 때문에 헤어릿은 자신이 감투를 쓰고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헤어릿은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리츠 굴도하.' 굴도하 남작은 피로해보였다. 이 밤이 그가 야경꾼 노릇을 하고 있 는 첫 번째 밤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는 최고의 상태가 아니었고 감 투를 쓴 침입자를 찾아내는 묘기를 부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헤어릿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소음을 최대 한 피하기 위해 그가 옆을 지나칠 때까지 가만히 서있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발리츠의 다음 동작에 헤어릿은 다시 긴장감과 두려움을 느꼈 다. 발리츠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헤어릿은 물론 감투를 쓰 고 향수를 뿌리는 괴벽을 부리지는 않았으며 그에 덧붙여, 굴도하 남 작이 아닌 다른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지만, 체취를 지우기 위해 꽤 정성껏 몸을 씻었다. 하지만 헤어릿은 그 대비가 완전했는지 알 수 없었다. 헤어릿은 호흡을 멈춘 채 발리츠를 바라보았다. 발리츠는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코를 약간 든 채 이곳저곳의 공기를 빨아들이던 발리츠는 잠시 후 고개를 살짝 내둘렀다. 그리고 발리츠는 약간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이리저리 매 섭게 노려보다가 갑작스럽게 창을 휘둘렀다. 창끝은 피융 하는 소리를 내며 공기를 잘랐다. 그녀를 위협하기엔 지나치게 먼 곳이었지만 헤어릿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쾅쾅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헤어릿은 발리츠가 그 소리를 들을까 두려웠다. 창을 다시 회수하여 땅에 짚은 발리츠는 통로 가운데 꼿꼿하게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여전히 헤어 릿이 있는 곳과는 약간 어긋난 시선이었다. 발리츠가 다시 움직였다. 그는 창을 옆구리에 끼고는 통로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남작은 헤어 릿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헤어릿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발리츠가 뒤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볼 것 같았다. 그녀는 발리츠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그 소리는 정직하게 멀어졌다. 헤어릿은 한숨을 내쉬는 호사를 누리는 대신 조 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발가락이 땅에서 떨어졌을 때 헤어릿은 무의 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발리츠는 먼 곳에 있었고 더 멀어지고 있 었다. 헤어릿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무거웠다. 성안에 고여있던 해묵은 어둠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떠나라. 침입자.' '미안하지만 지금 이 성엔 규리하라곤 하나도 없거든? 아이저, 비셀 스, 이이타, 시카트 모두 바깥에 있어. 아, 그래. 아이넬이 있긴 하 지만 네 논리를 따른다면 그녀는 이젠 규리하가 아니야. 따라서 이 성에 규리하는 하나도 없지. 너는 주인을 잃은 거대한 분실물이야. 조용히 해.' '내가 주인을 잃었다고?' '왜? 내가 잘못 말했어?' '잘못 말했다. 아이저, 비셀스, 이이타, 시카트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게서 태어났기에 그들이 규리하가 되었던 거다. 그리 고 내게서 태어났기에 그들은 세상 어디에 가도 규리하다.' '그거 재미있는 말인데.' '네가 발케네를 떠나도 빌파인 것처럼.' 헤어릿은 계단 옆의 벽을 짚었다. 어둠이 그녀의 피부를 눌러대는 것 같았다. '비셀스를 보라. 그녀가 살인기사에게 공격당한 것은 그녀의 많은 개성 중 단 하나, 그녀가 규리하라는 사실 때문이다. 살인기사와 그 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들은 그 이전에 서로 만난 적도 없 다. 하지만 그녀가 규리하기에 살인기사는 그녀를 위한 노궁을 준비 했다. 그녀에게 아무리 많은 개성이 있다 한들 그녀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개성은 그 하나로 충분했다. 그리고 너를 보라. 감투로 모습 을 감춘 채 살금살금 걷고 있다. 비록 보이지 않는 초상이긴 하지만 빌파를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이보다 나은 초상은 없다. 에렉스라고 주장하는 너는 지금 빌파다.' '나는 헤어릿이야.' '헤어릿 빌파다.' '네가 뭔지 알아. 너는 주인 없는 성에 숨어들면서 느끼는 내 죄책 감과 자신도 모르게 락토를 흉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로 군.' '너는 나를 호도하고 있다.' '그래? 그러면 너는 과텔의 수백 년 묵은 유령인가 보지.' '과텔도 내게 와서 규리하가 되었다.' 헤어릿은 벽을 밀어냈다. 돌계단은 성의 다른 부분처럼 매끄럽지는 않았다. 계단을 담당한 석공은 장구한 세월에 대비하여 쉬 미끄러워 지지 않는 석재를 사용한 모양이다. 헤어릿은 계단의 거친 표면에 발 을 내리눌렀다. 따끔따끔했다. 계단을 올라 회랑을 따라 걸어간 헤어릿은 객실로 이용되는 공간으 로 접어들었다. 그 구조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객실 이용자는 그곳에서 곧장 외부로 출입할 수 없다. 객실에 찾아가거나 혹 그곳에 서 나오려면 성의 주요공간을 거쳐야 한다. 손님의 움직임을 세심히 살펴 예의를 갖추고, 손님을 보호하며, 동시에 손님이 손님에게 맞는 처신을 하는지 살피겠다는 의도다. 무향의 지배자가 선택할 만한 구 조였지만 그 때문에 헤어릿은 꽤 긴 길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긴장 을 풀 수는 없었다. 이이타가 알려준 지점 중 한 군데가 다가왔다. '나라면 여기에 실을 걸겠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곳이니까. 혹은 잘 훈련된 개를 매어둘 수도 있지.' 헤어릿이 정성껏 몸을 씻은 것은 냄새로 그녀를 찾아낼 개가 있을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복도 어디에도 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헤어릿이 예상한 위험은 하나만 남게 되었다. 검고 질긴 실과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종. 하지만 헤어릿은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실 을 찾아내려 애쓰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표식이 있는지 살폈다. 누군가가 지나칠 때마다 성 전체에 경계가 걸 리는 불상사는 피해야 하므로 성 내의 사람들이라면 그곳에 실이 있 다는 것을 알고 피할 수 있는 표시가 있을 것이다. 물론 전혀 표시처 럼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눈여겨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객사로 이어지는 복 도는 퉁명스럽다 할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이 조각상 앞에서는 허리 를 숙이고 걸어라' 같은 지시를 내릴 만한 조각 같은 것이 없었던 것 이다. 헤어릿은 고심하다가 그냥 통과하기로 했다. 혹 종소리가 난다 해도, 그래서 누군가가 달려온다 해도 그들은 헤어릿을 찾아낼 수 없 다. 약간 더 귀찮아지기는 하겠지만. 복도 끝까지 걸어가도 몸 어딘가가 무엇에 걸리거나 종소리 같은 것 이 나지는 않았다. 헤어릿은 아무런 방비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 다. 그리고 조금 후 헤어릿이 붙잡은 문이 잠겨있지 않다는 것을 확 인했을 때 헤어릿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헤어릿은 잠겨있지 않기에 뒤로 손톱만큼 물러난 문을 내려다보았 다. 안쪽에 불을 밝혀두었고 그 빛은 복도의 횃불보다 더 밝았기에 열린 문틈에서는 가느다란 빛이 흘러나왔다. 빛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은 안에 있는 사람이 깨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헤어릿은 그것을 어찌할까 하다가 일단 문을 열기로 했다. 문이 가로막고 있다면 감투 를 쓰고 있다는 그녀의 우위는 무의미하다. 문은 약간의 소음만 내고 열렸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라말이냐?" 헤어릿은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창가의 책상에는 한 남자가 등을 보인 채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서류더미 사이에 서있는 초가 꽤 위태로워보였다. 초가 넘어지면 책상 위는 당장 불바다가 될 것 같 다. 헤어릿이 문을 완전히 열었을 때 남자는 쓰고 있던 것을 끝내고 는 붓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왼손으로 그 종이를 보지도 않고 옆에 내려놓았다. 종이 모서리가 초 근처를 지나치는 것을 보며 헤어릿은 조마조마한 기분을 느꼈다. 종이는 간신히 초를 피해 그곳에 쌓여있 던 서류더미 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남자는 붓을 벼루에 기대어놓고 는 기지개를 켰다. 아무래도 뒤를 돌아볼 생각이 없어보였기에 헤어 릿은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그리고 방안의 일을 감추기 위해 문을 살짝 닫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남자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남 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남자는 의자를 비틀며 옆으로 돌아앉았 고,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 다. 그리고 남자가 말했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가 내가 바빠 보이는 것을 보고는 다시 닫고 떠났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도깨비 감투를 쓴 누군가가 들어온 거라 고 생각할까?" "뒤쪽이에요. 사라말 아이솔." 사라말은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는 헤어릿 을 감탄하게 했다.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 묻는 건데, 혹시 목소리가 여자 같아서 고민 하는 남자는 아니겠지요?" "여자 맞아요." "좋습니다. 의자를 권하고 싶지만 앉을 리가 없겠고, 내가 일어나는 것도 반기지 않겠지요." 헤어릿은 자신이 그날 밤 도깨비 감투를 쓰고 사라말을 방문한 다섯 번째나 여섯 번째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다. 지금껏 당황과 공포에 빠 진 상대에게서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넘겨받는 일에 익숙해 있던 헤어 릿은 사라말의 태도에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익숙하 지 않은 시도를 하기로 했다. 주도권을 빼앗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사라말이 건넨 뜻밖의 질문은 그녀의 시도를 무마시켰다. "그래, 발케네공의 전갈은 뭡니까?" 헤어릿은 당황하여 질문했다. "예? 발케네공의 전갈?" "그래요. 그냥 편지로 보내도 되었을 그 전갈 말입니다." 놀람 때문에 헤어릿은 침묵했다. 고요가 길어지자 사라말은 짜증을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나한테는 뭘 원하는 겁니까? 규리하에 내분을 일으키는 것에 내가 어떤 보탬이 될 수 있는 거죠?" 헤어릿은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모든 음모의 배후에는 발케네공이 있다.' 사라말은 스카리 빌파가 무력으로 정복하는데 실패한 규리하 에 규리하 부자와 도깨비 감투를 쓴 대리인을 보내어 내분을 조장하 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헤어릿은 그것이 규리하 삼부자의 재결합 과 비셀스 규리하의 저격 사건, 그리고 그녀가 최근에 했던 일들을 해석하는 가장 명쾌한 이론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 니다. "뭘 오해하고 있군요. 나는 이이타 규리하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 다." "진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포섭이 힘들 텐데요." "예?" 사라말은 손가락에 말라붙은 먹물을 긁적거리며 게으르게 말했다. "이이타 공자가 그렇게 생각한다 해서 나까지 그렇게 믿을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 그런 거짓말은 그것을 믿어주는 사람에게나 하십시 오." 의도를 속이고 규리하 부자에게 붙어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었 다. 헤어릿은 그 이론 또한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사라말은 건조 하게 말했다. "감투를 쓴 암살자라. 그러고보니 그 날 소발굽 바위에서의 회합도 부녀 상봉이 아니라 암살을 위한 것이었던 모양이군요. 규리하공이 갑자기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결국 두 번 째 시도에서 공을 저격하는 것에 성공했군요. 그런데도 사라티본 부 대를 몰고 쳐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발케네공은 규리하를 날로 먹 을 작정을 했나 보군요. 내가 할 일은 뭡니까?" 헤어릿은 충동적으로 감투를 벗었다. 사라말은 시야 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의 모습에 움찔했다. 곧 그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누군가에게 옷차림을 보여줄 일이 없 었던 헤어릿은 그저 움직이기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인들을 즐 겁게 하기 위해 그녀들의 옷차림을 칭찬하길 좋아하는 남자라도 입을 열기에 앞서 꽤 고민해야 할 만한 그녀의 옷차림은, 그러나 그 놀랄 만한 용모에 비하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었다. 헤어릿의 얼굴 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헤어릿 에렉스."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발케네에도 물론 미인은 많겠지요. 하지만 그 중에서 발케네공이 안심하고 감투를 넘겨줄 만한 미인은 공의 배다른 여동생뿐일 것 같 군요." 헤어릿은 손에 들려있는 감투를 내려다보았다. "스카리는 내게 이걸 '넘겨준' 적이 없어요."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손에 넣은 겁니까?" 헤어릿은 자신이 왜 감투를 벗고 모습을 드러내었는지, 그리고 왜 감투를 소지하게 된 경위를 말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당혹을 다스리지 못한 채 헤어릿은 사라말의 질문에 대답했다. "락토 빌파가 내게 이것을 줬어요. 아니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아들이 줬든 아버지가 줬든 큰 차이는 없는 것이고 발케네의 지배자 를 위해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생각하는군요. 거듭 말하지 만 나는 스카리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라말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손을 움직였다. 헤어릿은 움 찔했다. 하지만 사라말의 손은 그녀의 근처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앉으시지요. 일어나지도, 누구를 부르지도 않겠습니다." 헤어릿은 사라말이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 만 그녀의 손에는 그 통제권의 향방을 단숨에 바꿔놓을 물건이 들려 있었고, 그래서 헤어릿은 그것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헤어릿은 사라 말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사라말은 두 팔꿈치로 무릎을 짚은 채 상체를 내밀어 헤어릿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전 율형부사 의 시선이 그녀의 겉이 아닌 속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는 생경함을 느꼈다. "그래서, 당신은 발케네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겁니까?" "나는 락토 빌파의 사망 후 발케네를 떠났고 지금은 자의로 공자를 돕고 있어요. 그런 행동이 발케네를 유리하게 한다고 해석하겠다면 반대는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건 내 의도와 상관없는 부산물일 뿐 이에요." "세레지가 이이타 공자 곁에 있다고 말했던 사람이……" "그렇습니다." "왜 이이타 공자를 돕고 있습니까?" "그건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군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찾아온 용건은 뭡니까?" "이이타 공자는 되도록 유혈을 피하고 싶어하세요. 가장 적은 피해 로 규리하를 되찾길 바라시죠. 물론 당신에겐 거기에 대한 결정권이 없겠지요. 공자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이 중계인 역할을 맡아주는 거 에요. 비셀스 규리하의 신하들을 설득해주세요." 헤어릿은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지금은 어렵지 않겠지요." 사라말은 다시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지그파 대장은 살아있습니까?" "우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납치한 겁니까?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인데." "그의 명예를 위해 말해두겠는데, 보이지 않는 칼끝이 사타구니를 누르고 있는 상황은 그가 아닌 누구라도 감당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랬군요. 리시오가 사직서를 내던진 까닭은?" "손녀딸의 잠자리에서 남자 옷가지 일체를 발견하고는 은퇴 결심을 한 거죠." 최근 그녀가 '실종'시키거나 '낙향'시킨 사람의 숫자는 적지 않았지 만 총리대부 리시오와 그의 손녀딸에 대해서는 헤어릿도 좀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모습을 감춘 채 현장에서 보고 있었던 헤어릿 은 그 어린 소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쥐도 새 도 모르게 손녀를 겁탈해버릴 수도 있다는 식의 협박이 아니고서는 강단 있는 총리대부의 고집을 꺾기 어려웠다.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헤어릿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손녀의 마차에 그날 그녀의 잠자 리에 들어갔던 것은 여자였으며 오직 할아버지의 고집을 꺾기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라는 해명서를 살짝 집어넣었다…… 그런데 사라말 이 갑자기 몸을 돌려 그 해명서를 책상 위에서 집어들었다. "사실이었군요." 사라말은 그것을 펼쳐 헤어릿에게 보여주었다. 헤어릿은 자신의 글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라말이 말했다. "리시오의 손녀 르신은 할아버지처럼 용감한 소녀였습니다. 자신이 최근 규리하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괴인에 대한 단서를 손에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 해명서를 당장 우리에게 보냈지요. 이게 당신이 쓴 겁니까?" "그렇습니다." "르신은 혹 당신을 붙잡게 되면 자기가 자고 있을 때 남자가 들어왔 다가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더군요." "비꼬는 투였나요?" "내가 보기엔 진심이었습니다. 협박한 노고가 사라질 위험을 무릅쓰 고 해명서를 넣어준 당신의 친절을 배신하게 되어서 미안해하는 것 같더군요." "그 애가 너무 놀라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됐어요. 그렇다 면 리시오 대부의 낙향은 위장이었습니까?" "아니오. 그건 사실입니다. 설령 침입자가 여자였다 해도 다음엔 남 자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주장하더군요. 그래서 리시오는 당신 이 붙잡히고 감투가 파괴되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하 고 케나린으로 떠났습니다. 손녀를 끔찍히 위하는 사람이거든요. 물 론 당신도 그걸 알아서 그런 장난을 쳤겠지요." 헤어릿은 대답 없이 조용히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그 해명 서를 다시 책상에 얹어놓고는 말했다. "예. 당신 말대로 지금 이곳의 분위기는 규리하의 지배권을 이전하 자는 주장이 먹혀들어갈 만합니다. 보이지 않는 습격에 잔뜩 겁을 집 어먹은 사람들은 전 규리하공의 복귀를 반대하면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방식으로 살해당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런 분위기 를 만들었지요. 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 니다." 사라말은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고 있었다. 사라말이 꺼내기 어려운 말을 찾고 있다는 것을 느낀 헤어릿은 그가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공자의 처신도 놀랍군요. 그래요. 국외자인 나라면 비셀스 규리하 에 대한 죄책감 없이 규리하의 전 지배자를 받아들이라고 조언할 수 있겠지요. 비셀스의 신하인 누군가라면 그러기 어렵겠지만." 헤어릿은 대답을 요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해주겠어요?" 헤어릿의 생각처럼 사라말은 질문을 꺼낼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대장군에 대한 공자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예?" 사라말은 자신의 가슴을 살짝 두드렸다. "아시겠지만 나는 현재 실직자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직장의 회 복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게 되는군요." 헤어릿은 살짝 미소지었다. "제국 부활 말씀이군요." "하늘치를 이용해 대장군의 장도가 시작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을 제외하더라도 규리하공 비셀스 각하께서는 대장군에게 호의적이셨습 니다. 그리고 제국을 되찾으러 떠난 대장군의 입장에서도 그가 변경 백의 자리를 주었다고 할 수 있는 비셀스 규리하께서 지러쿼터 산맥 서쪽에서 발케네를 견제해주는 편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대장군 을 원수로 여길 자들이 돌아온다면 대장군에겐 여러 가지로 불편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농담 따먹기로 봉급을 벌던 나날을 그리워하 는 어떤 실직자에게도 불편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이타 공자는 제국 부활에 대해 어떤 언급을 하 신 적이 없어요. 그 분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규리하의 수 복뿐이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 분이 되찾고 싶어하는 것이 규리하라는 사실이 중요할 것 같군요. 규리하는 언제나 왕국의 방패 였잖아요?" "왕국의 방패…… 예. 하지만 불과 2년 전 규리하는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아니오. 충성 서약을 거부하는 황제를 상대로 반기를 든 거지요. 그들은 제국을 부정한 적이 없어요. 내 생각에 대장군이 적절한 황제 를 찾아온다면 규리하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 같군요. 충의공께서 나 가를 왕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서 오는 거부감을 물리치고 대호왕 을 받아들인 것처럼." 사라말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서 답을 받아오실 수 있겠습니까?" "답이오?" "예. 변경백위를 되찾은 다음에 아이저 규리하가 대장군에 대해, 그 리고 발케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알아야겠습니다." 헤어릿은 사라말을 흉내내듯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라말 아이솔. 내가 그런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사 실 나는 협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에요.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지요. 하지만 더 그럴 수가 없군요. 나는 명 령하러 왔어요. 그리고 조건을 받아들일 계획은 없어요." 사라말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을 보이지 않았다. 헤어릿은 무릎에 얹 어두었던 감투를 집어들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라말 아이솔. 비셀스 규리하의 신하들을 설득하세요. 그렇지 않 으면……" "내 잠자리에 여자 옷 일체를 넣을 거라면 당신 것을 넣어주십시 오." "예?" "당신 것을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저질스러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사라말은 한쪽 눈을 약간 찡그렸다. 문득 헤어릿은 자기 얼굴에 침 을 뱉고 있음을 깨달았다. 르신의 잠자리에 남자 옷을 집어넣었던 것 은 그녀가 한 일이다. 사라말의 퉁명스러운 표정은 그게 당신 특기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헤어릿은 당황했다. "그렇게는 하지 않아요. 당신이 굴복할 협박을 할 거예요." "창의력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나를 거세하겠다는 것 정도로는 안 될 테니까." "그래요? 해볼까요?" 헤어릿은 감투를 썼다. 그러나 곧 기겁하여 감투를 벗었다. "뭐하는 거예요!" "도와주려고." "바, 바지 다시 올려요! 누가 도와달랬어요!" 사라말은 순순히 바지를 다시 끌어올렸다. 헤어릿은 노하여 말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하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던데, 정말이었어요!" "헤어릿. 이쪽을 보고 말해요. 다시 점잖은 차림새가 되었으니까." 엉뚱한 곳을 보고 있던 헤어릿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사라말 은 그의 말처럼 점잖은 차림새가 되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헤어릿은 사라말이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 있는지 살폈지만 전 율형부사는 조금 전 제국의 부활과 규리하의 차기 지배자의 조건에 대해 말하던 때와 똑같이 진지하고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헤어릿은 차라리 능글능글한 미소가 낫다고 생각했다. 사라말의 건조한 얼굴은 조금 전의 그 행동에 지극히 어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 이상설을 뒷받침하는 것 같았다. 당혹한 헤어릿에게 사라말은 웃음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가서 물어보십시오. 규리하를 되찾으면 대장군을 지지할 것인지. 그리고 발케네의 준동을 계속 막으며 귀족원 회의의 개최에 협조할 것인지. 그렇게 하겠다면 나는 협조하는 것을 고려해보겠습니다. 고 려라고 말한 것을 지나치지 마십시오." 사라말의 진지한 발언은 헤어릿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자신이 당황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있던 헤어릿은 사라말의 약점이 무엇일지 생각 하고 있었다. 곧 그녀의 뇌리에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사라말 아이솔. 당신에겐 동생이 있지요." 사라말이 다시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던 헤어릿은 입술을 축이고는 사납게 말했다. "당신이 자신의 동생에게 가해진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해졌 어요." "……거세?" "……그 말 좀 그만해요. 누가 들으면 내게 그거 잘라내는 취미가 있는 줄 알겠어요. 그런 방법 외에도 어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방 법은 많아요."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마침내 대가를 치를 때가 왔군요. 내가 두 살 먹던 해에 제멋대로 태어나서 엄마 젖을 훔쳐간 대가를 치를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헤어릿은 사라말에게 그런 진지한 얼굴로 황당한 소리 좀 하지 말라 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헤어릿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재 빨리 뽑아 사라말을 겨냥했다. "사라말. 나는 필요하다면 규리하성 내의 모든 사람을 납치할 수도 있어요.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당신들이 모든 문과 창을 막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해서 성을 텅 비게 한 다음 이이타 공자님을 이곳으로 안내하는 것도 불가능하 지는 않아요. 하지만 공연한 시간 낭비는 하지 말도록 해요. 비셀스 의 신하들에게 비셀스의 폐위와 아이저 규리하의 복귀를 준비하라고 전하세요." "건투를 바랍니다." "당신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일어나요. 당신이 사라지면 파라말 아이 솔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해졌어요." 사라말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헤어릿은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감투 를 머리에 써서 모습을 감추었다. 사라말은 헤어릿이 사라진 공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조금 후 뾰족한 것이 그의 등을 살짝 찔렀다. "앞으로 걸어가요. 이대로 성 바깥으로 나가지요." "등 뒤에 있습니까?" "그래요.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사라말은 앞으로 한 발 걸었다. 그러나 그 발을 축으로 삼아 사라말 은 뒤로 빙글 돌았다. 그곳에서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 었다. 사라말은 보이지 않는 헤어릿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 해하며 말했다. "난 안 갑니다." "사라말!" 사라말은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이 있는 곳을 툭툭 건드렸다. "찌르십시오." 대답이 없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향해 사라말은 두 팔 을 옆으로 벌렸다. "부탁이 있습니다. 헤어릿. 나를 찌른 다음 내가 의식이 남아있을 때 감투를 벗고 얼굴을 보여주십시오. 나를 찌른 자의 얼굴을 기억해 두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며 죽고 싶을 뿐입 니다." 말도, 그리고 사라말이 귀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도 들리 지 않았다. 사라말은 한숨처럼 말했다. "그리고 나갈 땐 신발을 신고 가십시오. 헤어릿. 발이 차가워보였습 니다." 딸꾹질인지 침을 삼키는 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가 작게 들 려왔다. 그런데 그 방향은 사라말의 등 뒤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라말은 뒤로 돌았다. 문이 닫히고 있었다. 그래서 사라말은 재빨리 손을 들어올려 그것을 흔들었다. 그곳에 헤어릿이 있을지,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사라말은 정성 껏 손을 흔들었다. 조금 후 문이 닫혔다. 사라말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책상 앞에 다시 앉은 사라말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한참 그렇게 앉아있던 사라말은 손 을 치웠다. 그리고 헤어릿을 질리게 했던 건조한 표정으로 그녀가 들 어오기 전에 쓰기를 완료했던 종이를 집어들었다. 먹물이 말라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라말은 그것을 접으려 했다. 그러나 사라말은 손을 멈 추고 그것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서간이었고,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근계. 친애하는 지테를 시야니 자유무역당주……' 사라말은 혹 잘못 쓴 곳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헤어릿에 대한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 았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들은 빙퉁그러진 조명을 제공함과 동시에 매캐한 연기로 시야를 가리고 있다. 보이는 것은 모두 검붉게 일그러 져 있다.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는 자꾸 눈물이 나는 것을 견디기 어 려웠다. 연기는 지독히 무례하다. 연기 때문에 시야가 흐렸고 따라서 횃불을 들지 않느니만 못하지만, 그래도 빛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심리적 차이는 크다. 그들의 주위 에 있는 강물과 진지 곳곳에 놓여있는 소화차가 단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안심하기 어렵다. 그것은 그곳에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눈에 - 불분명하게나마 - 보여야 했다. 잔뜩 화가 난 레콘 들이 저편 어딘가에 있는 밤이라면 그런 확인은 불가결하다. 스카리 는 눈 주위를 닦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필요하지. 붉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성큼 다가왔다. 그것은 레콘처럼 보이 는 그림자였기에 스카리와 그의 주변에 있던 호위병들은 긴장했다. 스카리가 먼저 말했다. "힌치오?" "맞아." 호위병들이 안도했다. 그들도 힌치오의 목소리에 익숙했다. 조금 후 일그러진 그림자가 거대한 양손검을 어깨에 걸친 레콘의 모습으로 바 뀌었다. 힌치오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호위병들 사이에서 스카리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여전히 거기에 있어." "무슨 대비를 하고 있지?" "대비? 없지, 뭐. 돌이라도 있으면 모아뒀을 테지만 거긴 집어던질 돌도 없고. 어떻게 할 거야? 여전히 같은 생각이야?" 스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리의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던 힌치 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 전에 끝난 논쟁을 재개할 생각은 없었다. "좋아. 그러면 나는 사라티본 부대로 돌아가겠어. 잘해봐." "가거든 팔리탐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줘." "안 올 텐데." 스카리는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는 팔리탐이 아니라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힌치오에 대해서. 스 카리는 주위의 호위병들을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힌치 오에게 그런 세련된 배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억 누른 스카리는 나직하게 말했다. "힌치오. 팔리탐의 행동을 추측하라고 요구한 적은 없어. 그에게 내 명령을 전해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야." "전해봐야 안 올 거라고. 팔리탐 화가 났잖아. 그의 말도 맞아. 고 작 서른 명 정도라도 저 녀석들은 제국군이야. 꼭 이렇게 포위하는 대신 그냥 협상을 해도 되잖아. 그 녀석들도 돌아갈 곳이 없어서 머 리가 복잡할 텐데." 스카리는 침착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다. 곤란하게도 그 말은 그룸성을 떠나기 전 부냐에게 들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부냐는 왜 당신이 직접 가야 하냐고, 사절을 보내서 항복을 권하면 되잖느냐고 질문했다. 거기서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부냐는 왜 자 꾸 자신의 곁을 떠나느냐고 그를 원망했다. 그 원망은 스카리에게서 설명해주려는 마음을 앗아갔고 그래서 스카리는 닥치라는 한 마디만 남겨놓고 병사들과 함께 그룸성을 떠나왔다. 스카리는 부냐에게 들려주지 않았던 설명을 힌치오에게 외쳤다. "협상을 요구한다면 저쪽이 먼저 그래야 해. 이 땅이 누구의 땅이 지? 여기는 발케네야! 나의 영토라고! 이 땅에서 저 놈들은 침입자이 며 패잔병이야. 그런데 내가 협상을 요청한다고?" 힌치오는 수염볏을 긁적였다.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왜 네가 직접 가야 하지? 물론 소화차를 밀고 들어가면 항복할 수밖에 없을 테니 안전하긴 하 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서 항복을 권하는 것이 더 안전하잖아." "내 설명을 제대로 못들었군. 내 영토에 들어온 자는 내가 심판해야 해." 힌치오는 스카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갈게. 조심해." "걱정말고 가서 팔리탐에게 내 말을 확실히 전해줘." "그러지." 힌치오는 성큼 몸을 돌렸다. 그리고 흐릿한 연기 속에서 소화차를 걷어차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었다. 인간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은 그의 가슴 정도의 높이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그래서 힌치오는 불빛의 호수를 헤치고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답지 는 않았는데, 그의 머리는 횃불에서 올라오는 연기들이 떠도는 높이 였기 때문이다. 힌치오는 가끔 손을 들어 얼굴 주위에서 흔들어야 했 다. 병사들 사이를 빠져나온 힌치오는 가슴을 펼치고 숨을 크게 들이쉬 었다. 그리곤 깃털 사이에 묻어있을 검댕을 털어내기 위해 몸을 확 부풀렸다. 몸을 부풀린 채 몇 번 세게 흔든 힌치오는 마지막으로 부 리에 묻어있을 검댕을 털어내기 위해 손으로 부리를 문질렀다. 이쑤 시개를 바닥에 꽂아놓고 두 손을 턴 힌치오는 사라티본 부대의 불빛 이 있는 곳을 찾아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모닥불이 피어있는 것이 보였다.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보온을 위한 불은 필요없었고 야습 또한 걱정하지 않았기에 모닥불을 피우지 않는다. 그 불은 팔리탐이 피워둔 것이다. 힌치오는 그쪽을 향해 성 큼성큼 걸어갔다. 얼마 후 힌치오는 제멋대로 쓰러져 있는 레콘들 사이를 지나쳐 모닥 불 근처에 도달했다. 모닥불 옆에는 팔리탐이 앉아있었다. 팔리탐의 가면은 불빛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힌치오는 그의 맞은편에 털썩 주 저앉았다. "스카리가 오라던데." 팔리탐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힌치오는 혹 그가 졸고 있는 것이 아 닌가 생각했다. 가면 때문에 팔리탐이 졸고 있어도 그것을 알아볼 수 는 없었다. 그래서 힌치오는 한 번 더 말해보았다. 그러자 팔리탐이 고개를 들었다. "들었소." 힌치오는 손바닥에 혹 검댕이 남아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닥불에 손을 비추었다. 약간의 검댕을 발견한 힌치오는 그것을 문질렀다. 고원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차갑지는 않지만 세차다. 지상에서는 풀 잎들이 밤바람을 타고 오를 듯 나부꼈고 하늘에서는 편월이 구름을 자신의 도깨비 감투로 삼아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냈다 했다. 고원을 감싸고 있는 것은 어둠뿐이지만, 지난 며칠 동안 엉겅퀴 여단의 팡탄 하장군과 이곳에서 술래잡기를 했기 때문에 힌치오는 이 고원의 생김 새를 잘 알고 있었다. 팡탄 하장군은 기를 쓰고 포위되는 것을 피하 려 했지만 그에게는 고작 서른 명 정도의 부하밖에 없었고 그들을 포 위한 사라티본 부대의 숫자는 막대했다. 흩어져서 각자 도망치는 것 도 불가능할 정도로 촘촘한 포위망이 그들을 압박했고 결국 팡탄 하 장군은 고원 한쪽을 가로지르는 강을 등지고 포위당하게 되었다. 그 것이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제국군 패잔병들을 포위하고 있 던 사라티본 부대는 뒤늦게 찾아온 스카리 빌파의 병력에게 자리를 내주고 이곳으로 물러났다. 힌치오가 말했다. "너 스카리가 협상 사절을 보내는 대신 직접 군대를 데리고 와서 화 가 난 거지? 하지만 스카리가 그러던데. 저 팡탄 패거리들은 침입자 니까 협상을 제안한다면 저쪽에서 먼저 그래야 한다고." 팔리탐은 지친 어조로 대답했다. "허튼 소리요." "왜 허튼 소리야?" "스카리는 자기가 관여하지 않았던 전쟁과 자신이 얻지 못했던 승리 를 느껴보려는 것뿐이오. 불쌍한 패잔병들을 상대로." "이기는 기분을 느끼려는 거라고?" 팔리탐은 허리를 돌려 삭정이를 집어들고는 그것을 부러뜨렸다. 삭 정이를 모닥불에 집어넣은 팔리탐은 팍 피어오르는 불티를 보며 말했 다. "그렇소. 사라티본 부대를 이용해서 팡탄 하장군과 그의 병사들을 강변에 몰아넣고는 최종 경고는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는 꼴을 보시 오. 소화차를 잔뜩 몰고 가서 항복하라고 말하면 기가 꺾인 패잔병들 은 그렇게 하겠지. 그러면 스카리는 자신이 패잔병들이 아닌 강대한 레콘들에게 이겼다고 생각할 거요." "왜 그러는데?" "제국군이 쳐들어올 때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고, 세퀴라도에서는 돈 에 굴복당했고, 규리하에서는 하늘치에 기겁하여 도망쳤고. 발케네령 전체와 사라티본 부대와 막대한 점령지를 얻었지만 그것 중에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소. 내가 기억하기로 그가 직접 한 마지막 일 은…… 부냐 헨로를 데리고 이곳으로 도망쳤던 것뿐이오." 팔리탐이 말하려 했던 것은 '감투를 쓰고 아버지를 찌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이후로 그에겐 온갖 것이 다 주어졌소. 그것은 사실 그의 아버 지가 다 준비해둔 거였소. 제국군과 싸운 것도 그의 아버지, 그에게 온갖 것을 준 사라티본 부대를 창설한 것도 그의 아버지. 흐음. 아마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은 승리의 쾌감을 느끼려는 이유 외에 사라티 본 부대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할 거요. 그렇다면 그것은 그 의 아버지가 거둔 승리가 되거든." 힌치오는 이쑤시개의 칼날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스카리를 싫어하는군." "아버지의 반쪽도 되지 못할 자요." "그럼 죽일까?" 팔리탐은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모닥불빛은 힌치오의 가슴 근방 을 비추고 있었고 그 위쪽, 그리고 약간 뒤쪽에 있는 힌치오의 얼굴 은 조금 어두웠다. 팔리탐은 고개를 내려 힌치오의 손에 있는 이쑤시 개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소?" "네 말 들으니 저 녀석 변변찮은 녀석 같군. 죽이자고. 죽이기 싫으 면 그냥 물러나게 해도 되겠지. 스카리를 쫓아내고 네가 발케네공이 되면 되잖아. 스카리보다는 잘하겠지." "당신…… 그와 계약을……" 힌치오는 빙긋 웃었다. "위약금 돌려주지. 네가 좀 빌려줄래?" 팔리탐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빌파 가문을 지켜야 하오. 그를 똑바로 인도할 수 있을 거 요." "그렇게 생각해?" "그렇소." "가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지? 그 놈의 가문 이야기 참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목적이라면 부냐가 스카리의 아이를 밴 후에 쫓아내면 되겠군. 그리고 스카리의 아이를 네가 잘 키워서 발케네공의 자리를 줘. 어때?" 팔리탐은 이 어마어마한 계획에 놀랐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놀랄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지만 레콘의 부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역시 놀라운 이야기였다. 팔리탐은 다시 침을 삼키고는 머리를 차갑게 하기 위해 애썼다. "힌치오.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소. 그리고 스카리에게 있을 변화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은 그에게 불공평한 일이고." "그런가?" "그렇소." 힌치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힌치오는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벌렁 드러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힌치오는 잠에 빠졌다. 그가 잠들지 않았다 해도 팔리탐이 가면 뒤에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잠든 힌치오를 보던 팔리탐은 삭정이를 집어들었다. 밤바람을 타고 소화차가 굴러가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팔리 탐은 그 소리를 지우듯 삭정이를 딱 부러뜨려서는 모닥불 속에 집어 던졌다. 불티가 파르륵 피어났다. =============================================================== 25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 : 피를 마시는 새 25-2 등록자 : jin46(이영도) 등록일 : 07-27 조회수 : 1268 피를 마시는 새 25. 불씨의 은닉 - 2 후사린 강의 깨끗한 수면 위에 마차와 병사들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 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강변의 도로에는 수면에 그림을 던지는 마차와 병사들이 규리하 방 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촌로가 이끄는 소달구지에 견줄만한 속도로 움직이는 마차 때문에 병사들은 마차를 앞지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마차를 몰고 있는 수전사 타이디 벤토는 마차에 조금의 진동도 허락하지 않을 태세였다. 타이디의 처신은 반은 상식적이고 전체적으로 비상식적이다. 인간인 그는 자기 행동의 의미를 그런 이상한 비율로 분배할 수 있다. 상식 적인 반을 볼 것 같으면 마차 내에 있는 중상자를 배려하여 마차를 느리게 몰고 있는 그의 행동은 상식적이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은 규리하의 현 지배자인 비셀스 규리하이고 따라서 그녀의 안전은 타이 디의 최대 관심사였다. 하지만 지배자가 지배의 모든 근거와 도구가 결집된 곳에서 격리된 상태에서 공격을 당했다면 반격에 앞서 최대한 빨리 그 격리부터 해소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그리고 규리하성에 빨리 돌아가는 것이 규리하공에 대한 최대한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점 을 볼 때, 그리고 느린 이동속도는 공격자에게 두 번째 공격 시도를 허락할 수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그의 행동은 전체적으로 완전히 비 상식적이었다. 타이디도 위험을 무릅쓰고 빨리 달리는 편이 더 합리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얼굴은 괴로워 보였다. 위험스럽게 늘어진 나뭇가지를 피해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올린 수전사는 결국 자기 기만을 인정하기로 했다. 타이디가 이동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은 비셀스 규리하가 규리하성으로 돌아가 다시 규리하 의 오롯한 지배자가 되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지배자에 대한 그런 의심은 성실한 군인인 그에게 정신적 복통을 일 으켰다. 타이디는 자신이 조만간 정신적 구토나 정신적 설사를 일으 킬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전망을 느꼈다. 마차 안에서는 같은 원인에 의한 다른 결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세 레지 파림 또한 마차를 몰고 있는 타이디처럼 비셀스의 자격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규리하의 지배자 자격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타이디 벤토와 달리 세레지는 비셀스가 동정과 가호를 받을 환 자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레지는 그런 자신에 대 해 혐오감을 느꼈다. 세레지는 정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는 옆머리를 마차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자세로 정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세레지는 자신이 정우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세레지는 공 포를 느꼈다. 정우가 죽는다면 고민도 없어진다는 생각을 해버린 자 신이, 세레지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세레지는 입술을 깨문 채 정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세레지. 부탁이에요. 제발 훔쳐보지 말아요." 말을 마친 정우는 눈을 떠서 고개를 돌렸다. 세레지는 창백한 얼굴 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정우는 미안 함을 느꼈다. "미안해요. 세레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무슨 그런 말씀을. 아니에요. 각하." 세레지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지만 그녀는 곧 눈물을 훔치려는 사람 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대신 세레지는 허리를 숙여 마차 바닥의 바 구니를 들어올렸다. "사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갈 때가 되었거든요? 진작 말씀드려야 하 는 건데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아니, 주무시는 것처럼 보여서 말씀 을 못 드리고 계속 곁눈질을 하는 무례를 범했어요. 주무시지 않으셨 다니 잘됐군요. 지금 붕대를 갈아드릴게요." 세레지는 바구니를 두 손으로 든 채 정우의 앞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녀는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옷을 벗으 라는 눈짓이었지만 정우는 주춤한 듯한 모습으로 세레지를 마주보았 다. 세레지가 걱정한 것이 정우의 안면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우 의 몸에 손을 대는 것 자체라는 것을 정우는 잘 알 수 있었다. 하지 만 세레지를 돕기 위해 자기 손으로 직접 붕대를 감겠다고 말하는 것 은 세레지가 감추고 싶어하는 그녀의 속마음을 지적하는 일이 될 것 이다. 정우는 조용히 상의를 벗었다. 정우의 하얀 목과 도담한 가슴, 그리고 오래된 붕대에 감겨 있는 가 는 허리 등이 드러났다. 세레지는 바구니에서 단검을 꺼내어 조심스 럽게 붕대를 잘랐다. 약과 피 등에 절어있는 붕대는 둥그스름한 모습 을 유지한 채 허물처럼 떨어져나왔다. 그 아래에는 미세한 땀 때문에 촉촉한 피부와 꿰맨 상처, 말라붙은 약자국…… 그리고 '다른 것'이 나타났다. 세레지는 상당한 노력을 경주했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가 듣기 거 북할 만큼 거칠어지는 것까지는 통제하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모든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세레지는 자신 의 거칠어진 숨소리는 깨닫지도 못했다. 그리고 정우는 그 소리를 듣 지 못한 척했다. 회피해서는 안된다는 강박 관념은 세레지의 시선을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꿔놓았다. 세레지는 놀라거나 화난 사 람처럼 정우의 몸을 바라보았다. 정우는 그 시선도 보지 못한 척했 다. 정우의 의도적인 무관심 속에서 세레지는 의식을 집전하는 듯한 동작으로 정우의 상처를 보살폈다. 느리게 구르던 마차가 더욱 느려졌다. 그리고 마차가 살짝 올라갔다 가 다시 내려왔다. 노면의 불규칙한 요철을 본 타이디가 충격을 최소 화하기 위해 애쓰는 듯했다. 정우는 억지로 속도를 통제당하는 말들 이 짜증을 내지 않을까 걱정했다. 말과 타이디에 대해 생각하던 정우 가 다시 세레지를 내려다보았을 때 세레지는 새 붕대를 감고 그것을 매듭짓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혀 있는 진땀은 정우를 안타깝게 했다. 세레지를 도와줄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한 정우는 세 레지의 손이 떠나자마자 서둘러 옷을 입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레지 를 편안하게 하는 대신 오히려 죄책감 속에 몰아넣었다. 세레지는 입 술을 깨문 채 바구니를 정리하다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각하. 죄송해요." "세레지.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세레지는 말하고 싶었다. 자신은 정우를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고. 하지만 세레지는 그 말이 곧 정우를 괴물로 생각한다는 의미가 될 것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의 사과는 사과라기 보다 정우와 그녀 자신에 대한 고문이다. 세레지는 입을 다물었다. 정우는 눈 주위를 살짝 닦고는 다시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 의 안색은 파리했다. '훔쳐보면 안돼.' 하지만 세레지는 다시 정우를 보았다. 그녀의 시 선은 정우의 창백한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배 쪽을 향하고 있었다. 세레지는 조금 전 붕대를 풀고 새 붕대를 감기 전 그녀가 보았던 것 을 떠올렸다. 그것은 무서운 것일까? 세레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일까? 세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규정할 수 없다 는 사실이 세레지를 정말 견딜 수 없게 했다. 세레지는 자신도 모르 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비명을 들었을 때 세레지는 그것이 자신이 내지른 것이라고 생각했 다. 세레지는 깜짝 놀라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놀란 얼굴로 마 차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레지는 사과하려 했다. 그 때 정우가 말했다. "밖에서 비명이 들렸죠?" 비명을 들은 순간 마차를 몰던 타이디 벤토 수전사는 자신이 기다려 온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습격을 당해 비 셀스를 지키다가 죽는 것. 그러면 비셀스를 지킨다는 자신의 책임은 위반하지 않으며 또 비셀스가 규리하성으로 돌아가는 것도 저지된다. 하지만 타이디는 곧 그런 생각을 떨쳐내었다.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그래서 타이디는 방패를 들어올리라고 외쳤다. 가장 처음 날아온 공격은 길 옆에 있는 덤불에서 날아온 무수한 돌 멩이였다. 투구를 쓴 병사라 해도 투석을 직격으로 맞으면 쓰러질 수 밖에 없다. 쓰러지지 않은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올리며 기를 쓰고 마 차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투석의 공격이 멎었다. 타이디는 습격 자들이 활 대신 돌을 쓴 것, 그리고 마차 주위로 직접 던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습격자들의 목표가 비셀스 규리하의 살해에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곧 수풀 속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타이디는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였지만 그쪽에서는 아무 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왜 습격자들이 앞뒤로 포위하지 않는지 생각해 본 타이디는 마차를 돌릴 공간이 없기 때문에 뒤로 도망칠 수 없어서 그 랬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습격자들의 입장에서는 한쪽에 집결해서 공세를 높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결론을 내린 타이디는 그래서 앞 쪽에만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 그리고 타이디는 실소할 뻔했다. 그 들이 그다지 윤리적이지 못한 용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그 복장은 좀 너무했다. 정확하게 말하 자면 복장이 아니라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복면들이 그를 웃겼 다.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자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잘 알려져 있거나 목격자를 남기면 곤란한 경우라면 숨쉬기 거추장스러 운 복면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규리하공 납치를 위해 온 자들이라 면 복면은 무의미하다. 계획에 성공한다면 규리하의 새 지배자가 그 들을 보호해줄 테고 실패한다면 복면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든 끝 까지 추적당해서 보복당할 테니까. 타이디는 어쩐지 좀 엉성한 습격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지 만 무기를 쥐고 있는 그들의 손도 어쩐지 어색해보였다. 하지만 그 무기는 모두 새파란 장검이나 창처럼 치명적인 것들이었고 게다가 그 숫자가 꽤 많았다. 타이디가 지휘하는 무기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엉성할지는 몰라도 위협적이기는 했다. 거기까지 관찰하고 타이디가 어떤 결론을 내렸을을 때 복면을 쓴 습 격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외쳤다. "마차를 놔두고 떠나라!" 타이디는 일단 격식을 갖추기로 했다. 그는 배에 힘을 넣어 외쳤다. "닥쳐라! 이 마차에 타고 계신 분이 누군지 아느냐!" "물론 알아. 제 아비 자리 뺏은 버르장머리 없는 딸년이지." 복면의 습격자들이 와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어울릴 것 같아서 화난 척하던 타이디는 진짜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규리하공에 대한 그의 의심이 무엇이든 그녀는 그의 주군이었다. 갑자기 타이디는 아 스캄의 공회당에서 그가 보았던 것을 잊었다. 대신 그는 마차에 있는 사람이 그의 주군이며 또한 상처 입은 처녀임을 떠올랐다. 그는 고삐 를 놓고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타이디 벤토는 칼을 뽑아들며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마차를 둘러싸 고 있던 병사들은 놀란 표정으로 앞으로 나가는 수전사를 바라보았 다. 병사들 앞쪽에 선 타이디는 우두머리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어떤 녀석들인지 안다. 전쟁 유민이지? 배가 고파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지? 그래서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라고 생각하고는 푼돈 받 고 이 짓을 하기로 한 거지?" 습격자들은 복면으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으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 다. 병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지만 타이디는 노여움을 풀지 않 은 채 말했다. "그래서 불쌍하다는 생각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이젠 생각 바뀌었 어. 그 버르장머리 없는 입을 찢어놓을 테다! 돌격 준비!" 병사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꼬나들었다. 습격자들은 자신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는 타이디에게 조금 질려 있었다. 하지만 우두머 리로 보이는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누구 입을 어떻게 해? 네 맘대로 될 것 같으냐! 우리도 죽을 작정 으로 왔다. 해보자!" 그들은 전쟁 유민이되 규리하의 전쟁 유민이었다. 무향의 주민이고 굶주림 때문에 분노한 그들은 살기 등등한 눈빛을 뿜어내었다. 타이 디는 싸움이 쉽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관 없다고 생각했 다. 그의 주군이 그 옷 아래 무엇을 가지고 있건 그녀는 타이디의 주 군이고 규리하공이었다. 타이디는 돌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 가슴을 부풀렸다. 그러나 그 외침은 터져나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어울리지 않는 소리 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타이디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이곳에서 퉁소 소리가 날 까닭이 없었다. 병사들과 습격자들도 당황하여 그 소리에 귀를 기 울였다. 이윽고 그들은 그 소리가 습격자들의 뒤편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습격자들은 앞쪽의 병사들을 경계하며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이윽고 퉁소 소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굽은 길 저편에서 나타난 것 은 두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말이었다. 말 위에는 소박하지만 맵시 있는 옷차림을 한 삼십대의 여자가 타고 있었고 말 아래에는 체구 좋 은 사십대 가량의 남자가 고삐를 잡은 채 걷고 있었다. 퉁소를 불고 있는 것은 말 위에 앉아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타이디는 그 이상의 관찰은 하지 않았다. 보통 정도의 상식만 가지고 있다면 이 수상쩍기 짝이 없는 광경을 뒤로 한 채 열심히 도망칠 테니까. 그들은 상식적이지 못한 사람임이 곧 밝혀졌다. 복면을 한 많은 이 들과 칼을 빼든 많은 병사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소를 향해 그들은 똑 바로 다가왔다. 복면의 습격자들도 타이디와 비슷한 예상의 빗나감을 경험한 듯 약간의 당혹과 분노를 드러내며 남녀를 쏘아보았다. 그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이 길은 막혔다. 다른 길로 돌아가!" 그 외침에 말구종처럼 보이는 남자는 말을 멈춰세웠다. 그리고 남자 는 말을 옆으로 돌렸다. 상황을 약간 늦게 파악하는 모양이라고 생각 했을 때 남자는 다시 말을 멈춰세웠다. 결과적으로 말은 궁둥이를 보 인 채 서게 되었다. 당혹해 하던 타이디와 병사들, 그리고 습격자들 은 그 말이 궁둥이 양편에 상자를 매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퉁소를 불고 있던 여자가 그것을 입에서 뗐다. 그리고 여자는 아 래로 내려왔다. 여자는 습격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상자로 손을 뻗었다. 그곳 에서 무기가 나올 거라 생각한 습격자들은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고 타이디와 병사들은 약간의 기대감을 느꼈다. 하지만 남녀는 이번에도 그들의 예상을 만족시켜주지 않았다. 상자 뚜껑 아래에서 드러난 것은 수백 닢은 족히 넘어보이는 금편이 었다. 교수대에 서있는 사람도 누군가가 금편을 흘리면 다른 사람들과 마 찬가지로 눈을 그쪽으로 돌린다는 이야기처럼 금의 누런 빛에는 어떤 마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습격자들은 잠시 자신의 역할을 잊은 듯 충 격을 받은 표정으로 상자 가득한 금편을 보았다. 사람들이 금편 무더 기를 확실히 인지했다는 것을 확인한 여자는 상자 뚜껑을 닫았다. 그 리고는 우아한 동작으로 말의 볼기를 찰싹 후려갈겼다. 말은 이 모욕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 앞으로 달려갔다. 다가닥, 다 가닥. 대치를 벌이고 있던 자들 모두는 한결 같은 당혹감 속에서 멀어지는 말의 궁둥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그녀 는 말구종처럼 보이는 남자를 향해 두 팔을 펼치고는 극적으로 말했 다. "오, 충성스러운 나의 몸종아! 네 주인이 운이 나빠 말을 잃어버렸 구나." "오, 존귀하신 주인님! 주의하셨어야지요. 어느 놈인지 모르지만 그 말을 주운 놈은 나가라도 노래를 부르겠군요. 일생 동안 놀고 먹을 금편을 주웠으니까요. 게다가 그 무거운 화물을 날라줄 말까지 딸린 채로 말입니다." "오, 지혜로운 나의 몸종아! 네 말이 맞구나. 세상의 누군가가 즐거 워하게 되었으니 나 또한 기쁘다." "오, 고결하신 주인님! 주인님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다음엔 그 즐 거워하는 누군가가 소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이디 벤토와 병사들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근사한 무대에서 능숙한 배우들이 펼치는 연극이 아니라 식후 여흥으 로 연극을 보겠다는 변덕을 부린 영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설무대 로 끌려올라간 경비병들이 펼치는 종류의. 어쩐지 그 퉁소부터가 지 나치게 작위적이었다. 타이디는 얼굴의 통제력을 전반적으로 상실할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 아마도 습격자들 또한 타이디처럼 훈훈한 감 동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임시 연출가를 맡은 경비대장의 절망적인 손짓은 보이지 않았지만, 습격자들은 새로운 배역을 쉽게 받아들였 다. 그들은 달아나는 말을 향해 맹렬히 달리기 시작했다. 현명한 행동이 었다. 어색한 배우들이 원하는 것은 분명했고, 비록 그들의 연기는 어색할지언정 금편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는 진짜이니, 그 어색한 남 녀들이 원하는 배역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 행동이 내 포한 의미를 잠시 젖혀둔다면 복면을 하고 무기를 든 수십 명의 사람 이 일제히 한쪽 방향을 향해 씩씩하게 달려가는 모습은 어떤 연극에 서든 귀하게 쓰일 만한 명장면이었다. 타이디는 하늘에서 막이 내려 오지 않을까 의심스러웠다. 막이 내려오는 대신 명연기를 펼쳐보인 주인과 몸종이 그를 향해 다 가왔다. 주인 역의 여자는 어깨 너머로 습격자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타이디에게 말했다. "안전하십니까?" "누가요?" "젠장. 규리하공 말입니다." 타이디 벤토는 생각했다. 흐음. 돈으로 사태를 깔끔하게 해결하는 걸 좋아하고 말을 길게 하게 만들면 짜증을 낸단 말이지. "자유무역당원이십니까?" "예인데 예입니까?" 타이디는 그 괴상한 말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예인데 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도 예냐?'고 묻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예입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원패를 꺼내어 내밀었다. 그리곤 턱으 로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거기." 타이디는 자신도 모르게 자유무역당원처럼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원패를 다시 집어넣었다. 타이디는 사실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다시 꺼내보이라고 말할 여유는 없었다. 여자가 고함을 빽 질렀기 때문이다. "규리하공 비셀스 각하! 제 때 도착해서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다 행입니다. 남은 여행 평안하시길 바라며 몇 가지 알려드릴 사항이 있 으니…… 왜 그래요?" "이봐요. 왜 갑자기 고함을 지르는 겁니까?" 수전사의 불평에 여자는 뭐 이런 바보를 다 봤나 하는 표정을 지었 다. "마차 가까이 못 가게 할 거 아닙니까?" 타이디는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비록 눈앞에서 습격자들을 퇴치해 주긴 했지만 그것 자체가 복잡한 습격작전의 일부일 수도 있으며, 따 라서 그녀나 그녀의 몸종이 마차 곁으로 접근하려 하면 그는 막아섰 을 것이다. 여자의 말이 옳았다. 그리고 여자는 시간 낭비를 피하기 위해 그냥 제자리에서 고함을 지른다는 선택을 한 모양이다. 당원패 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타이디는 여자가 자유무역당원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알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말하지요. 당신들은 적절한 예 의를 탐구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 규리하공께서는 그런 악쓰는 소리를 들을 분이 아닙니다. 좀 점잖게 행동하도록 하지요. 마차 곁으로 갑시다." 그러나 타이디는 어울리지 않게도 이렇게 고함 지르고 말았다. "세레지! 각하를 문에서 떨어져 계시게 해!" 몸을 돌린 타이디는 당신을 내가 만난 최고의 바보로 인정한다는 표 정을 짓고 있는 자유무역당의 여자를 보게 되었고, 그래서 꽤 부끄러 워졌다. 타이디는 얼굴이 벌개진 채 여자를 마차 곁으로 안내했다. 마차의 창문은 안전을 위해 가려져 있었다. 여자는 가려진 창문을 향해 말을 시작했다. "규리하공 비셀스 각하. 제 때 도착하여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다 행입니다. 남은 여행 평안하시길 바라며 몇 가지 알려드릴 사항이 있 으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저희들은 변경백 각하를 공격한 자 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 신원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규리 하성에서는 많은 납치 사건과 실종 사건, 정부 요인들의 느닷없는 사 직 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각하의 정부는 파탄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몇몇 용감한 이들이 가까스로 정부를 지키고 있었습 니다. 아이솔 형제의 영웅적인 노력은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희는 각하께서 제안하신 사업계획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며 우 선수매권의 대가로 금편 육천 닢을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황제가 되 시겠습니까?" 타이디는 해도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문장 사이에 아무런 접속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접속사가 있다 해도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 문 장들이었다. 특히 마지막의 질문은 검술에 비유한다면 칼로 막고 방 패로 찌르는 식의 파격이었다. 약간의 지체 후 가려진 창문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우 규리하입니다. 좋은 꿈 꾸셨어요?" 여자는 어깨를 으쓱일 뿐 통성명은 하지 않았다. 마차 안의 정우가 다시 말했다. "외조부께서는 제가 황제가 되길 바라시나요? 하지만 저는 귀족원 회의를 통해 새 황제를 선출해야 한다는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의 생 각에 찬성하는데요." "누군가는 선출되어야 하잖습니까. 선출되고 싶은 생각이 있으십니 까?" "없어요." 자유무역당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이디는 그녀가 그저 확인삼아 물어본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리고 당원이 다시 꺼낸 말을 듣고는 자신의 판단이 맞았음을 알게 되 었다. "없습니까?" "없습니다." 자유무역당에서 온 여자는 몇 호흡 정도 침묵한 채 마차를 바라보았 다.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각하. 이동하는 수도와 세계 모든 곳을 이어주는 뱀단지가 사라진 지금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돈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이 광활한 땅과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무수한 사람들 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돈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을 교환할 수 있게 하는 약속된 교환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언어와 같습니 다. 언어도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할 수 있게 하는 약속된 교환가치 입니다." 타이디는 놀라움을 담은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말 잘 하잖아? 여자는 마차를 향해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국가에 대한 가장 짧은 정의가 조세권을 가진 통치집단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국가가 탐욕스럽기 때문에 세금을 걷는다는 말은 물론 농 담이 될 것입니다. 통치조직 유지비용과 공공사업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목적일 뿐입니다. 국가가 조세권을 가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국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일정 부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그 구성원들에게 그들이 특 정 국가의 국민이라는 생각 정도는 강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외에 도 많은 통제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한 통제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가 필요하겠지만, 언어는 강제징 수할 수 있는 품목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언어 대신 세 금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알았던 아라짓 제국 은 좀 특이한 경우였습니다. 아라짓 제국은, 물론 언어 자체는 통제 할 수 없었지만 대신 언어의 유통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뱀단지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라짓 제국은 정부도 작았고 세금도 낮았습니 다. 저희들이 계산해본 바로는 그 정도 크기의 통치 대상을 다스려야 하는 통치 집단이 거둬들이는 세금치곤 확실히 낮은 편이었습니다. 아마 저희들이 크게 융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타이디는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조세가 적었기 때문에 무 역이 크게 활성화되었다는 말인가? 그에겐 그 해석을 검증해볼 만한 경제학 지식이 없었기에 타이디는 일단 그 가설을 받아들이기로 했 다. 여자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졌습니다. 각하. 다시 돈의 시대가 돌아왔습니 다. 그리고 저희들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 희들의 돈 중 일부는 아라짓 제국이 거둬들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저희들에게 온 세금일지도 모릅니다. 그 가설이 맞다면 저희들은 제 국의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장군이 찾으러 떠난 제국군은 가시 적이고 게다가 보기에 그럴 듯한 유산입니다만 그것만이 제국의 유산 은 아닙니다. 저희들이 보관하고 있는 제국의 유산을 찾으십시오. 제 국을 부활시키십시오." "그 사람이 왜 저죠?" "지테를 시야니 당주의 외손녀, 즈믄누리의 친구, 전통있는 규리하 의 계승자, 하늘치의 조종자,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중력을 벗어나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시간을 견뎌낸 오직 한 사람." 여자의 거침 없는 대답은 짧지만 깊은 침묵을 가져왔다. 그 침묵이 사라졌을 때, 마차 안에서 들려온 것은 지금까지 들려온 목소리와 달 랐다. "그런데 당신들은 무엇을 얻죠?" 여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타이디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세레지 파림 의 목소리였다. 타이디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정우 대신 세레지가 말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기 에 그냥 불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뺨을 조금 긁고는 지금 까지처럼 규리하공을 상대하듯이 말했다. "제국이죠. 제국이 있었기에 우리는 어떤 영지에서도 통과세를 내지 않았습니다. 아직 저희들을 상대로 통과세를 요청하는 영주는 없습니 다만 이미 저희들은 다른 형태로 통과세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상단 의 호위를 강화해야 했거든요. 제국 부재가 더 길어진다면 직접적인 통과세 요구도 나타날지 모릅니다. 저희는 그것이 싫습니다." 다시 세레지가 말했다. "간단히 정리하지요. 자유무역당이 지원할 테니 귀족원 회의를 통해 황제가 되라는 거죠?" "예." "생각해볼 시간은 있는 건가요?" "규리하성에 도달할 때까지면 어떻겠습니까?" "규리하성…… 아, 그러고보니 규리하성에서 이상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다고요? 그러면 빨리 돌아가야겠군요." "그렇게 서두르지는 않아도 됩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그랬다고 했 습니다."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요?" "아닙니다. 저희들이 그 상황에 대처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일을 대 강 정리하고 찾아오느라 이렇게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당신 누 굽니까?" "저는 변경백 각하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 그 분은 생각 하실 일이 좀 있으셔서 제가 대신 말하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성까지 돌아가는 길에 동행하겠습니 다." 여자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마부석에 성큼 올라가 앉았다. 타이디 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여자를 보다가 말구종이 어디 있는지 살 폈다. 그는 병사들 사이에 태연하게 서있었다. 타이디는 마차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곳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타이디는 고개를 내두 르고는 여자의 곁에 올라가 앉았다. 고삐를 쥔 타이디는 일행을 다시 출발시켰다. 마차가 움직이고나서 타이디는 여자에게 말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까?" "이왕이면 빨리 도착하는 것이 좋겠지요." "규리하성이 이상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처리했습니다. 조금 전의 그 패거리들은 좀 일찍 출발해서 이곳까 지 따라와서 처리해야 했지요." 타이디는 그 다음에 그녀의 영웅담이 이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녀는 끝까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마부석에 올라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 라는 듯이 여자는 곧 눈을 감고는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서 수 전사는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규리하성의 위험을 처리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이타 규리하는 서신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조용히 초로 가져갔다. 서신은 순식간에 타들어갔고 자욱한 연기를 남겼다. 통풍이 좋지 않 은 광산 내부였기 때문에 연기는 쉬 걷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이타는 손을 휘저어야 했다. 그와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일을 했 다. 연기가 그럭저럭 걷힌 다음 이이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벽쪽으로 다가간 이이타는 그곳에 놓여있던 물통의 뚜껑을 열고는 물 한 바가 지를 떠 벌컥벌컥 마셨다. 입을 닦은 이이타는 물통 속에 바가지를 던져넣고는 다시 탁자로 돌아왔다. 탁자 주변에 있던 이들은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이타가 곧장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쁜 전 조였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이이타는 씁쓸하게 말했 다. "우리는 좀 더 내핍의 정신을 함양해야겠군." 갱내사무실은 무거운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이이타가 받은 편지는 케나린의 모인사가 보낸 것이었다. 케나린 근 교에서 커다란 염색소를 경영하는 대부호였던 모인사는 또한 서약지 지파이기도 했고 규리하의 통치자는 아이저 규리하여야 한다는 믿음 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믿음을 많은 자금으로 표시해주었다. 하지만 편지는 그 신념의 표시가 끝났음을 통고했다. 그의 사업이 갑작스러운 경영난에 빠져 더이상 후원금을 보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이타와 그의 가신들에게 그런 편지는 더 이 상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 편지 이전에 비슷한 내용의 편지나 통고 가 일곱 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탁자 말석에 비스듬하게 앉아있던 제이어가 자신은 별다른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단조롭게 말했다. "누군가가 대규모의 자본을 살포해서 공자님의 목줄을 죄고 있군요.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무래도 지테를 시야니일 것 같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비슷한 예측을 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다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이타는 웃음을 잃지 않으 려 애쓰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 퍽 재미있는 싸움이군. 외조부께서는 당신의 사위나 우리가 아닌 당신의 외손녀를 선택하셨단 말이지. 헤어릿이 규리하 정부를 박살내는 것이 빠를지 우리가 감자 한 부대도 살 수 없는 지경에 빠 지는 것이 빠를지 궁금하군." 냉소주의자나 현실주의자들은 잘 알고 있지만 의행도 선행도 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황제에게 짓밟힌 규리하의 전통을 수복하자는 그 들의 이상도 그들의 정신적 시장기는 해결할 수 있을지언정 육체적 시장기의 해결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위장도 다른 이들의 위장과 마찬가지로 성미 급한 폭군이고 그 폭군을 달래기 위 해서는 그들의 이상을 공유하는 자들이 희사하는 자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자유무역당이 그 자금줄을 막아버렸다. 이이타의 말은 도깨비 감투라는 상대할 수 없이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금전적 빈곤 앞에서는 무력한 그들의 처지를 잘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이타의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두르사 돌 하장군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탁자 위에 얹어둔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그러다가 하 장군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제이어 솔한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왜 한 번 더 쏘지 않았습니까! 이왕 일을 저질렀으면 매듭 은 확실히 지어야 했을 거 아닙니까? 그랬다면 이런 한심한 꼴은 당 하지 않았을 텐데!" 제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이타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르사 돌 하장군. 그 분은 내 누님이시다." 두르사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이이타를 돌아보았다. 이 이타는 딱딱한 표정으로 하장군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타이르듯이 말 했다. "그리고 또한 그 분은 규리하를 지키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놀 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 그 분이 발케네군을 몰아낸 것을 벌써 잊지는 않았겠지. 나는 누님이 살아계셔서 정말 기쁘다. 귀관도 흥분 을 가라앉히면 나처럼 기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를 부드득 갈던 두르사는 나직하게 말했다. "규리하성을 공격해야 합니다." 이이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이…… 아, 그래. 아트밀과 야리키, 그리고 탈해 머리돌이 있 잖나."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전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미 납치해온 인질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앞세워서 성을 공격하면 됩 니다. 공자님. 공자님이 걱정하시는 것이 두 레콘과 도깨비 무사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아버님을 배신한 자들이 스스로 그 배신을 철회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계시지 요." 이이타는 입을 꽉 다문 채 두르사를 바라보았다. 두르사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하지만 이제 그들을 배려할 이유는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게 주어진 기회를 엉뚱한 곳에 썼습니다. 자유무역당을 끌어들였습니 다. 이제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은 배려가 아니라 응징뿐입니다. 누님 께서 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성을 공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을 점거 한 다음 누님께 우리를 도울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누님을 모시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잖나. 그 분이 우리에게 오 시면 더 적은 폭력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들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유무역당이 그녀의 귀환을 돕기 위해 손을 썼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당연히 그럴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셀스 규리하의 안전이니까요. 어디 있는지도 모 르는 우리에게도 공격을 가하는 자들이 그녀에게 손을 쓰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이타는 한 손으로는 허리를 짚고 다른 손은 탁자 위에 얹었다. 그 는 탁자 주위에 앉아있는 이들을 죽 둘러보았다. 황제에 맞서 함께 싸웠고, 함께 발케네로 도망쳤다가 함께 규리하로 돌아온 자들이었 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을 따라가는 대신 또 그의 곁에 남아있는 자들이었다. 2년여의 기간 동안 계속된 도피와 망명, 그리고 지하 활 동으로 그들의 모습은 초췌했다. 이이타는 그들에게 지고 있는 빚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아닌 배신자들을 위하는 것이 그들의 가슴 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인도주의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그 배신자들은 현재 비셀스를 도와 규리하를 통치하고 있는 자들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자발적인 도움은 규리하를 되찾는 것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절대적인 도 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규리하를 되찾는다 해도 지금 이곳에 있는 소 수의 인원만으로 그것을 지탱하기는 어렵다. 그것을 이해하기에 그들 도 배신자들이 노선을 변경할 기회는 주어야 한다는 이이타의 생각에 동의하고 지금까지 따라왔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두르사가 드러내는 복수심도 있을 것이다. 공격의 조건은 충분하다. 헤어릿은 성의 경비대장까지 납치해왔다. 성의 방비는 약화되었고 그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두 명의 레콘과 도깨비 무사장이 있지만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전사가 있다. 헤어릿이 그 세 사람을 쫓아내고 경비대장을 인질로 삼아 순식간에 경비대를 장악한다면 성을 탈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이 타는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그 시선이 자신에게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이타를 마주보았다. 이이타가 말했다. "헤어릿. 세 사람을 쫓아낼 수 있겠나?" "시도는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시 도를 하기 위해선 한 가지 약속해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제가 공자님께 약속한 것은 규리하로의 귀환과 규리하의 탈환을 돕 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쪽의 약속은 이미 이행했고, 지금껏 제가 한 일은 두번째 약속의 이행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는 우리가 갚을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들을 해주었지." "그렇다면 세 사람을 쫓아낸 다음 공자님의 곁을 떠나는 것을 양해 해주십시오." 두르사 돌 하장군이 낭심을 걷어차인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 른 사람들도 대부분 당혹한 표정으로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헤어릿이 그들을 계속 돕고 규리하의 수복이 완료된 후에는 후한 보 답을 받게 될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헤어릿이 그런 종류의 보답을 바란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그들을 돕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이타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헤어릿. 잠시 따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헤어릿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이타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촛대를 집어들고 문으로 나갔고 헤어릿은 그 뒤를 따랐다. 탁자 주변에 있던 규리하 가문의 가신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쫓다가 그 모습이 사라지자 황급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빠져나온 이이타는 지상으로 통하는 사갱을 걸어올라갔다. 지상의 빛이 새어들어오는 곳까지 올라간 이이타는 그곳에 서서 촛대 를 땅에 내려놓고는 헤어릿을 돌아보았다. 헤어릿은 갱도 벽쪽으로 걸어가 거기에 등을 기대었다. 이이타는 그녀의 맞은편 벽에 등을 기 대어 섰다. "일단 당신의 요구 말인데, 나는 양해하겠어." "감사합니다." "감사를 말해야 하는 것은 이쪽이지. 아무런 반대급부도 제공하지 못하면서 당신의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았으니까. 하지만 떠나기 전에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 "뭐지요?" "당신은 소리를 대신한 건가?" 헤어릿은 대답하는 대신 이이타에게 계속 말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이타는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소리는 규리하를 되찾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지. 규리하 의 공자에 비하면 그 신분도 낮고. 그래서 당신은 소리를 대신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한 거야? 당신에 대한 보답으로 소리를 받아들이라 고? 하지만 그것은 내게는 약간 불쾌한 일이군." 헤어릿은 빙그레 웃었다. "그건 공자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었다는 건가요? 세상의 편견과 협 박에 대항하여 소리를 지키는 일은?"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공자님. 그런 이유도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내가 공자님을 도운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그게 뭐지?" 헤어릿은 잠시 침묵했다. 폐광 어딘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 려왔다. 가냘픈 소리인데다가 이리저리 울려서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바위 는 어둠을 흠뻑 머금은 채 고요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헤어릿이 가슴을 조금 부풀렸다가 말했다. "제국이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 그 부활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된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당신은 유일하게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규리하를 잃어버린 사실에 분노해서 그 탈환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은 유일하게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을 도운 거죠." 이이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군." "모르셔도 괜찮아요. 이건 상당히 제멋대로의 행동이니까. 당신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는 말은 아니에요. 저는 옳고 그른 것에 대 해서는 몰라요. 예. 제국의 부활도 중요한 일이겠지요. 그 일에 목숨 을 거는 사람을 얼마 전에 보았어요. 하지만 저는 다른 작은 일에도 신경 쓰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 어요. 그래서 당신을 도왔죠. 하지만 그 일도 이제 끝낼 때가 되었어 요. 이제 오랫동안 소망했던 일을 하고 싶어요." 이이타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건…… 도깨비 감투를 쓰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건가?" "말하자면 그래요." 이이타는 두 손을 마주 잡아 턱을 눌렀다. "나는 보답하고 싶어." "제멋대로 한 일에 대해 보답을 바랄 정도로 뻔뻔하진 않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공자님. 하지만 굳이 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으시 다면, 소리를 잘 부탁해요. 그런데 이건 불쾌한 부탁이겠지요?" 이이타는 어쩔까 하다가 열정적인 청년의 모습을 연기하기로 했다. 그는 머리를 어깨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채 턱을 내밀고 말했다. "확실히 불쾌하군.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소리는 내가 지켜. 내 여자니까." 헤어릿은 방긋 웃었다. 이이타 또한 자신의 모습에 실소했다. 헤어 릿이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이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타는 똑바로 서서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저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래도 당신 은 내 은인이야. 헤어릿 에렉스. 당신은 떠나겠지.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작별 인사뿐이라면 나는 나를 견딜 수 없을 거야. 이이타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헤어 릿 앞에서 이이타는 그 칼을 똑바로 세워들었다. "다가올 어느 날, 만약 당신이 나를 부른다면 당신이 지상의 어느 곳에 있다 한들 나는 내 검과 내 목숨을 가지고 당신에게 찾아가겠 어. 이것은 규리하의 공자가 그의 검에 걸고 하는 약속이야. 받아주 겠어?" 헤어릿은 옆으로 떨어뜨린 두 손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폐광의 출입구에서 떨어지는 빛은 이이타의 칼에 어리었다가 부드럽게 산란 되었다. 그 칼과 그 뒤에 있는 이이타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헤어릿 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이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을 다시 꽂아넣었다. 촛대를 집어든 그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헤어릿은 조금 후 그 뒤를 따라걸었다. 갱내사무실에서는 의미를 구분하기 어려운 소음이 들려나왔다. 그 중에는 두르사 돌 하장군의 열정적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사무실 앞 에 서서 그 소리를 잠시 듣던 이이타는 문을 밀었다. 사무실 안쪽의 소음이 싹 사라졌다. 이이타는 주목하는 시선들 사이로 걸어들어갔 다. 그 뒤를 따랐던 헤어릿은 그래서 아무런 주목도 받지 않고 들어 설 수 있었다. 헤어릿과 이이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사람들은 침묵했다. 자신의 자리에 앉은 헤어릿은 문득 말석 쪽에 있는 소리가 묻는 시선 을 보내는 것을 보았다. 헤어릿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헤어릿은 시선을 조금 옮겨 제이어 솔한을 보았다. 제이어는 들어오 는 공자를 보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천장으로 향한 채 눈을 감고 있 었다. 그 옆얼굴을 보던 헤어릿은 뭔지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그 때 상석에 선 이이타가 말했다. "모두 공격에 찬성하나?" 두르사 돌 하장군의 눈이 '번쩍!' 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 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사람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탁 자 주위를 죽 둘러본 이이타는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승리 속에서 영광을 누릴 수도 있지만 전장에 쓰러진 시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무향의 심장을 너무도 오랫동안 방치했다. 죽은 우리가 흘리는 피는 그 심장에 새로운 맥박을 줄 수 있겠지. 무향은 전사를 원한다." 이이타는 고개를 들었다. "빼앗긴 것을 되찾을 시간이다." =============================================================== 좋은 밤 되세요. 갑자기 예고도 없이 접속이 안되는 하이텔때문에 속상했던 사람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네이버 까페에 올려져 있는 25-3이 있길래 저처럼 접속 안되는 분들을 위해 재불펌합니다. 하이텔 문제가 해결된 후, 혹은 이 재불펌이 눈마새 위키에 맞지 않는다면, 바로 삭제조치하겠습니다. 25. 불씨의 은닉 - 3 대륙의 다른 지방에서는 꽃들이 자신의 방종함을 다스리고 다가올 여름에 대비하여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 시기, 북녘의 땅 규리하에도 마침내 봄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새벽녘, 성탑에 오르기 위해 주랑 을 걷던 파라말 아이솔은 흉벽과 주랑이 만나는 틈에서 피어난 이끼 들을 발견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흉벽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 어둑 어둑한 그곳에는 여러 종류의 이끼들이 회색과 암초록빛으로 돌을 물 들이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이끼들을 내려다보던 파라말은 몸을 펴 흉벽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규리하 정부가 아직도 규리하를 통치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가 서류와 안건과 명령 사이에서 복잡한 장애물 경주를 하는 동안 자연은 환상이 아닌 진짜 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파라말은 배 우고 싶은 일처리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대지의 곳곳에서 툭툭 터지 듯 배어나오는 초록은 진짜였다. 붉고 노란 꽃잎들도 진짜였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하늘은 푸르렀고 파라말은 지평선까지 뚜렷하 게 볼 수 있었다. 그 광활한 땅은 사실적인 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파라말은 가슴을 펴고 차가운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머릿속의 졸음기가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지난 밤 그는 밤새도록 일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고 창밖을 보고 하늘이 푸르다는 것을 확인 하고는 그냥 잠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릴 겸, 오래 간만에 일출을 볼 겸해서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파라말은 나오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성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가 곧 뜰지도 모른 다. 그는 성탑 위에서 그것을 보고 싶었다. 계단을 오르며 파라말은 어젯밤 그에게 온 서류를 생각했다. 그것은 자유무역당이 보낸 것이고 그 내용은 아이저 규리하의 복권을 기도하 는 지하운동가들의 자금줄을 봉쇄했음을 알리는 통고였다. 파라말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수색을 벌여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통쾌하겠 지만 위험한 일이다. 규리하가 내분에 시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 게 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도깨비 감투를 가진 적과 전면전을 벌이 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어떤 강대한 적도 굶주린 채 덤빌 수는 없 다. 파라말은 그 지하운동가들이 곧 흐지부지 흩어질 거라 확신했다. 그러면 그도 진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규리하 정부를 근근히 꾸 리는 대신 그것이 새 제국의 임시 정부 역할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행정력을 함양하도록 하는 것. 황제가 선출되었다고 해서 제국이 다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새 황제가 통치에 이용할 정부 구조가 있어야 했다. 규리하 정부의 현재 모습으로는 도저히 그런 일을 맡을 수 없다. 엘시 에더리가 제국군을 모두 결집시키고 귀족원 회의를 개최하기 전에 규리하 정부를 강화해 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새 황제가 되면…… 파라말은 생각의 흐름을 잠시 놓쳤다. 그는 어느새 성탑 위에 올라 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무사장님?" 탈해 머리돌 무사장이 흉벽을 짚고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라말의 말에 무사장은 고개를 돌렸다. 파라말이 말했다. "일출을 보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규리하공이 오시는 것을 보려고?" "어, 둘 다입니다." "그렇군요." 파라말은 무사장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 때 탈해가 손을 들어 제지 하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파라말이 흠칫하여 멈춰서자 탈해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부사님. 혼자 있고 싶습니다." "예? 혼자요?" "예. 전 킴들에 대해 화가 나있습니다. 킴들이…… 정우에게 한 일 때문에." 파라말은 아 하듯 입을 벌렸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해합니다." "죄송합니다." 탈해는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고는 다시 텅 빈 하늘쪽을 바라보았다. 파라말은 무사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는 성탑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파라말은 계단을 걸어내려가는 대신 재빨리 몸을 낮추었다. 그는 계단에 몸을 누이듯 한 채 성탑 쪽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 도록 했다. 그리고 파라말은 성탑 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조금 후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하셨어요. 무사장님." "제발 그냥 떠나십시오. 보이지 않는 분." "무사장님. 바닥에 앉으세요." 파라말은 긴장한 채 침을 삼켰다. 조금 후 무엇인가가 바닥에 앉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로 눈을 가리세요. 말씀드렸듯이 이곳에서는 곧 큰 싸움이 있 을 거예요." "제발……" "무사장님. 제 동료들은 당신을 어르신으로 만들어 즈믄누리로 보내 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아무리 두 번 죽는 도깨비라도 죽이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에겐 죽음이 아닐지 몰라도 제게는 살해 니까요. 그냥 눈을 가리고 이곳에 계셔주세요." "보이지 않는 분. 당신은 착한 분 같군요. 그러니……" "무사장님. 빨리 눈을 가리지 않으시면 제 팔을 베겠어요." 파라말은 그 말이 자해 공갈이라고 오해하지는 않았다. 팔을 베면 틀림없이 피가 흐를 테고 피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도깨비가 가 장 무서워하는 것이다. 파라말은 탈해가 즈믄누리의 무사장임을, 즈 믄누리의 성주가 피를 볼 일이 있다고 결정했을 때 그것을 실행에 옮 길 의무를 가지고 있는 단 한 명의 도깨비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즈믄누리의 성주가 최근에 그에게 피를 볼 것을 명령한 적은 없다. 파라말은 아이저 규리하가 규리하성에 침입했을 당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뻔했는지 전해들었고 그래서 속으로 아무 저항하지 말고 그냥 그 명령을 받아들이라고 기원했다. 그의 기원이 통한 듯했다. 무엇인가를 묶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다가 여인이 말했다. "고마워요. 무사장님. 제 팔을 다치지 않게 해주셔서." 탈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이지 않는 분. 이곳에는 두 명의 레콘이 있습니다. 공격하면 당 신들만 다칠 겁니다." "그 분들은 움직이지 못해요. 제가 손을 썼으니까. 당신에게 마지막 으로 온 거예요." "서, 설마……?" "아뇨. 죽이지 않았어요." 탈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태가 끝난 다음에 풀어드리지요. 저는 당신 바로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이 불을 일으키려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즈믄누리 로 보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있 겠다고 약속해주세요." 탈해는 약속의 말을 웅얼거렸다. 숨어서 엿듣고 있던 파라말은 그 말을 정확히 듣진 못했지만 좀 더 잘 들리는 위치로 움직이지는 않았 다. 대신 파라말은 몸을 일으켜 계단 아래쪽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내 려갔다. 성탑 위로 올라가서 탈해를 구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대는 보이 지 않는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유혈이라도 발생하면 탈해가 무슨 짓 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는 곧 있을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때 파르륵 하는 깃발 나부끼는 소리가 들렸다. 파라 말은 엉겁결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성탑 위에서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파라말은 성 바깥을 바라보았다. 일군의 무장한 병력이 성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이백 명은 넘는 듯했다. 파라말은 문득 질린 표정으로 흉벽 바깥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는 잇소리를 심하게 내었다. 도개교는 아래로 내려져 있었다. 그의 위치에서는 성문을 볼 수 없 었지만 파라말은 그것이 열려 있으리라 확신했다. 파라말은 고함을 내질렀다. "습격이다!" 눈을 떴을 때 야리키는 기묘한 것을 느꼈다. 그는 규리하성의 객사 쪽에 있는 자신의 방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자신의 거대한 몸에 이런저런 가구들이 부딪히는 것이 싫었던 야리키 는 방 안의 가구를 모두 치웠고 그래서 그의 방은 휑한 편이었다. 그 런데 눈을 뜬 순간 야리키는 협소한 공간에 갇혀있다는 인상을 받았 다. 의아해하던 야리키는 얼굴 위에 떠있는 통을 발견했다. 통이 자신의 머리로 떨어지는 줄 알고 놀랐던 야리키는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창이 아닌가 싶은 네 개의 막대기들이 천막의 지지대마냥 얽혀 통을 떠받치고 있었다. 야리키의 상황은 실 제로 천막에 들어가 있는 것과 비슷했다. 다만 지지대 뿐 천이 없다 는 점과 그 전체적인 규모가 야리키의 상체 정도가 들어갈 정도로 작 았다는 점, 그리고 천막 상단부에 통이 놓여있다는 점 등이 이색적이 었다. 의아해하던 야리키는 그의 눈 바로 앞쪽, 즉 통의 바닥에 붙어 있는 도깨비지를 발견했다. 거기엔 뚜렷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야리 키는 그 앞부분을 읽었다. '움직이면 통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통 안에 있는 것이 쏟아집니 다.' 쏟아진다는 부분에서 야리키는 몸을 부풀릴 뻔했다. 그랬다간 그의 몸 주위에 있는 막대기 중 하나를 칠 것이며 통이 아래로 떨어지고 말 거라는 것을 깨달은 야리키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몸을 다시 수축 시킬 수 있었다. 야리키는 딱딱하게 굳은 눈으로 경고문의 나머지 부 분을 읽었다. '당신의 사지에는 네 개의 밧줄이 묶여 있고 그 밧줄의 반대쪽 끝은 네 개의 막대기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팔다리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 는 것이 좋을 겁니다. 사태가 끝난 다음 돌아와서 치워드릴 테니 누 워서 쉬십시오.' 야리키는 통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 조심하며 자신의 사지를 살폈다. 누워서 발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팔은 어느 정도 보였다. 야리키 는 자신의 손목에 묶여 있는 밧줄을 발견했다. 하지만 누운 채 머리 만 조금씩 움직여 하는 관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야리키는 그 밧줄이 어느 막대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선 손을 들어 통을 집을 수도, 그리고 발로 통을 차낼 수도 없었다. 그 리고 야리키는 밧줄이 없었다 해도 자신이 그런 짓을 하기는 어려웠 을 거라 생각했다. 야리키는 누군가가 와서 물통을 치워줄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 해 문쪽을 바라보았다. 각도가 좋지 않아서 문을 보기 어려웠다. 야 리키는 머리를 크게 비틀었다. 가까스로 문쪽을 본 순간 그의 벼슬이 막대기 중 하나에 닿았고 그러자 막대기들이 삐걱하는 소리를 냈다. 야리키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의심하여 야리키는 물통을 바라보았다. 물통은 여전히 막대기들에 의해 받쳐져 있었다. 물통의 안전을 확인 한 야리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는 곧 눈을 떴다. 물통이 보이지 않자 더 두려웠다. 무심한 경고장을 바라보며 야리키는 자신 이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문을 본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볼 것은 대강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야리키는 문에 빗장이 질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빗장 가운데 는 실이 묶여 있었고 그것은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벼슬 빠질 덫을 만들어놓은 침입 자는 빗장에 실을 묶은 다음 문밖으로 나가서는 실을 잡아당겼다. 그 렇게 빗장을 질러놓은 침입자는 실을 문안으로 쑤셔넣었을 것이다.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야리키의 안부가 궁금해 서 이 방으로 온다면 도끼도 가져와야 할 것이다. 상황을 인정하는 편이 타개책을 찾는 것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야리키는 자신이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 다. 그리고 야리키는 타개책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불행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것을 떠올린 야리키는 이 성에 있는 또 한 명의 레콘 아트밀도 비슷한 덫에 갇혀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레콘을 상황 바깥으로 치워두려 는 수작이고 따라서 또 한 명의 레콘이 간과될 까닭은 없다. 아트밀 또한 비슷한 처지에 빠져있을 거라 생각한 야리키는, 기대와 달리 더 불행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곧 공격이 시작될 테니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규리하성을 공격하려는 자들이 상황에 큰 변수 가 될 수 있는 레콘들을 먼저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엉망진창인 성 의 방어 상태를 떠올린 야리키는 벼슬을 세우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새로운 의심이 야리키의 머리 속에서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야리키는 대강 만들어진 물통의 바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야리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통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하 지만 경고장 때문에 그 바닥이 잘 짜맞춰져 있는지, 어딘가에서 배어 나온 물이 물방울로 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야리키는 필 사적으로 경고장에 젖은 흔적이 없는지 살폈다. 열린 성문을 향해 뛰어들었을 때, 이이타는 위쪽에서 들려온 소리를 들었다. "습격이다!" 이이타의 곁에서 칼을 뽑아든 채 달리던 두르사 돌 하장군이 말했 다. "느리군요. 역시 똑똑한 병사들은 모두 비셀스의 곁에 있나 봅니다. 그러면 저는 발리츠에게 가겠습니다!" "몸조심해. 그는 고명한 무사다." 두르사는 씩 웃었다. "판사이에서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곳은 규리하입니다." 이이타는 마주 웃었다. 두르사는 곧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을 이끌 고 성의 마당 저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른 가신들이 차례로 예정 되었던 공격지점으로 달려갔다. 그들 모두는 이곳 지리에 훤하다. 성 의 경비대를 장악하기 위해 달려가는 자들을 보던 이이타는 본관으로 통하는 계단에 뛰어올랐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지만 이이타는 그들에게 별 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성을 공격하기 위해 규리하에 있던 가신들 각자의 혈족들과 지인들을 끌어모았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았다. 하 늘치를 조종하는 규리하공과 도깨비 무사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 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자금으로 사람들을 급히 사야 했다. 그들 은 부랑자나 다름없는 이들이었고 도저히 정예 병력이라 할 수 없었 다. 이이타는 그들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약탈에 심취하지나 말기 를 바랐다. 곧 이곳저곳에서 고함과 비명 등이 들려왔다. 이이타는 조금씩 흥분 되는 것을 느꼈다. 아직 그의 앞에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 이이타는 많은 이들과 싸워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이타는 굶주린 표정으 로 다가오는 적이 없는지 살폈다. 하지만 이 새벽 성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했다. 헤어릿이 성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의 습격 은 놀랍도록 기습적이었고 그래서 규리하성은 저항 태세를 갖추지 못 했다. 이이타는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본관을 장악하고 저항세력을 일소한 다음 문을 봉쇄하여 본 관과 외부의 연결을 차단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하지만 저항세력 이 달려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약간 곤란한 문제였다. 그들을 찾아다 녀야 할 판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본관의 봉쇄가 늦 어질 것이다. 이이타는 자신을 뒤따르고 있는 자들을 흘끔 돌아보았 다. '안돼. 흩어져서 싸우라고 말했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데리고 있어야 해.' 이이타는 일단 그들에게 주통로를 모두 막아서라고 외쳤다. 그리고 자신은 병사들을 이끌고 대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때 처음으 로 이이타는 성 안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른 새벽 부터 아침 준비를 하기 위해 일어났던 어린 하녀였다. 하녀는 갑자기 터져나온 비명에 놀란 듯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쪼그리고 있었다. 이 이타와 병사들이 다가가자 하녀는 머리를 감싸쥔 채 비명을 빽 질렀 다. 그러자 병사들 중 거칠어 보이는 이가 무기를 들어올렸다. 이이 타가 외쳤다. "멈춰! 뭐 하는 거냐!" "시끄럽잖습니까." "그만둬. 무기를 들고 오는 사람만 상대한다. 너희들은 규리하인이 아니더냐!" 무기를 들어올렸던 병사는 그 말에 주춤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저 녀석을 공격합니까?" 이이타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창을 든 채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손에 든 창 외에 남자에게서는 어떤 전 투 태세도 보이지 않았다. 갑옷이나 투구 같은 것도 없이 평상복 차 림이었다. 이이타는 결정했다.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남자는 그 말에 자신의 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무기를 버릴까 말 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 복도 저편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본 이이타는 무기를 든 하인들이 달려오는 것 을 보았다. 그러자 계단의 남자는 다시 창을 들어올렸다. 이이타는 쯧 하는 소리를 내고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가서 싸워라. 이 친구는 내가 맡지."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고는 하인들에게 달려갔다. 이이타는 계단으로 성큼 올라갔다. 남자는 그 모습에 놀란 듯 움찔하다가 말했다. "저는 파라말 아이솔입니다. 미안하지만 바둑으로 하면 안될까요?" 이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이타 규리하는 부사가 갇힌 감옥으로 바둑판과 돌을 들고 찾 아가겠다고 약속하지." 역시 안되나. 파라말은 쓰게 웃으며 창을 내찔렀다. 이이타는 그 창을 크게 쳐내고는 단번에 쇄도했다. 파라말의 몸 어 딘가가 찢어지지 않은 것은 그가 자신의 무술을 과신하지 않기 때문 이다. 파라말은 명쾌하게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던 파라말은 벽에 걸 려있는 횃대를 보고는 긴 창으로 그것을 후려쳤다. 낮이라 거기에는 횃불이 없었지만 횃대는 재와 먼지를 듬뿍 날렸다. 이이타는 눈을 가 리며 주춤해야 했고 그 동안 파라말은 뒤로 열심히 도망쳐 계단 위에 올라섰다. 다시 눈을 뜬 이이타는 높은 위치에서 긴 무기를 들고 있 는 파라말을 보고는 혀를 찼다. 하지만 파라말은 자신의 유리함을 잘 모르는 사람처럼 긴장한 채 외쳤다. "이이타 공자!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규리하를 돌려받는 거지." "제국이 사라졌다는 것을 모릅니까?" "알아차리기 어려운 비밀은 아닌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공자님의 누님만이 제국을 되찾을 수 있단 말입니다!" 이이타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파라말을 올려다보았다. 파라말 은 창을 치우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과 창을 겨누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듯했다. "새 황제 후보자들 중 공자의 누님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그 분께 없는 것은 오직 압도적인 무력뿐입니다. 무향 규 리하의 지배자에게 다른 것도 아닌 무력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희극적인 일이지요." "나는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아." "저도 압니다. 어제의 일은 잠시 젖혀두고 내일을 보지요. 무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 분의 유일한 약점입니다만, 그것은 해소될 수 있 습니다. 대장군이 제국군을 통합하는데 성공한다면 지금 제국에서 수 위를 다투는 무력의 소유자들은 모두 두 번째나 세 번째 위치로 물러 나야 할 겁니다. 무력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될 거란 말입니다. 그러 면 바로 누님께서 귀족원 회의를 통해 황제가 되시는 거죠. 제국을 부활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규리하 정부는 새 제국의 정부로 이어 져야 합니다." 이이타는 입을 조금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형제들이 누님을 돕고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새 제국 정부의 초석을 다져두기 위해?"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걸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절명 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이기적인 행동이 어디 있습니까?"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 이기적이란 말이냐? 그것은 너도 원하 는 일인 것 같은데." "규리하와 제국이 같습니까? 몇몇 사람의 편협한 이기심 때문에 6억 명의 사람들이 혼돈과 분란 속에 방치되어도 좋단 말입니까? 제국 실 종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피가 흐른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입니다. 규리하를 되찾는 대가로 그 고통의 기간을 늘 이는 것이 규리하의 정신입니까? 그것이 변경백의 명예를 초개처럼 던지고 남쪽으로 갔던 후사린과 지러쿼터 산맥을 넘어와 왕의 변경백 령을 부활시켰던 과텔의 전통을 잇는 일입니까?" 이이타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사가 가진 뜻의 깨끗함을 무시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두 가지는 말해야겠군. 첫째, 그대가 규리하를 미시적인 것으로, 그리고 제국을 거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대가 남달리 통찰력 있는 사람이 기 때문인가? 나는 그대가 규리하인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그런 시각 에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하는데. 둘째, 우리에겐 기회가 주어지 지 않았다. 제국을 위해 희생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결정이어 야 해. 너의 말은 훔쳐간 물건을 더 귀하고 더 소중한 일에 쓸 테니 포기하라고 말하는 도둑과 같아. 그 도둑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 귀하고 소중한 쓰임을 알았다면 나 스스로 그 물건을 내어놓을 수 있 다 해도 절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명예를 위해 무고한 피를 받아내겠단 것이군요." "세상에 무고한 피는 없다." 이이타는 대답 끝에 허리의 단도를 뽑아 파라말에게 던졌다. 원래 던지기 위한 것이 아닌데다 급하게 던졌기 때문에 그것은 회전하며 날아갔고 파라말은 단도의 칼자루에 정강이를 부딪히게 되었다. 파라 말이 비틀거리는 순간 이이타는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야리키는 몸 이곳저곳에서 자꾸만 깃털이 일어나려 하는 것을 억눌 렀다. 바닥에 누워있다 해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은 중노동이다. 거 기에 불안감과 분노, 초조함 등이 가미되면 간단히 고문으로 바뀐다. 야리키는 핏발 선 눈으로 머리 위에 떠있는 물통을 바라보았다. 졸도 할 것 같았지만 성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그러기 어려 웠다. 그것은 레콘의 전사혼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다급한 발소리, 성난 창검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비명과 기합과 호통 치는 소리. 이 상황이 악몽이거나 소름끼치는 종류의 장난이길 바라던 그의 희 망은 오래 전에 무산되었다. 일어날 거라 예상했던 습격이 진짜로 일 어났다. 규리하성은 공격당하고 있었다. 일어나서 달려나가야 했지만 야리키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야리키는 증오에 찬 눈으로 물통을 쏘아 보았다. 긴장감 때문에 정확한 시간 경과는 알 수 없었지만 야리키는 눈을 뜬 이후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물통을 쏘아보고 있 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떠올린 단 한 가지 방법은 물통이 떨어지기 전 잽싸게 움직인다는 것 뿐이지만 그것은 실행할 수 없었다. 그의 사지와 막대기가 밧줄로 연 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이 어떤 구조인지 야리키는 알지 못했다. 잽싸 게 몸을 빼내는 순간 밧줄로 연결된 막대기가 일어나 앉은 그를 향해 물통을 날려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물통은 완전히 엉뚱한 방향 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야리키는 도박을 좋아하지 않았다. 수난(水難) 사고의 위험이 있는 도박이라면 언급할 가치도 없다. "아트밀!" 야리키는 움찔했다. 성의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들려온 그 외침은 사라말의 것이었다. 하지만 야리키의 추리가 맞다면 아트밀도 비슷한 처지에 빠져있을 것이다. "아트밀! 아트밀!" 사라말은 다급하게 아트밀을 불렀다. 야리키는 부리를 신경질적으로 부딪쳤다. 그나 아트밀은 사라말을 도울 수 없다. 도깨비 무사장은 어떨까? 글쎄. 이곳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면 도깨비 무사장은 도 망쳤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 야리키는 유혈 현장에 도 깨비가 머리를 내미는 것은 조금도 반길 수 없었다. 사라말이 다시 외쳤다. "아트밀! 나 잡아봐라! 나 여기 있거든? 젠장, 빨리와!" 짧은 순간이지만 야리키는 분노나 절망감 대신 황당함을 느꼈다. 다 급함 때문에 머리가 좀 이상해진 전 율형부사를 동정하던 야리키는 갑자기 들려온 계명성에 놀랐다. "여-기-간-다-!" 그것은 명백한 계명성이었다. 야리키는 놀라서 일어나 앉을 뻔했다. 아트밀은 분명히 '간다'고 외쳤다. 어떻게? 아트밀은 이런 덫에 갇히 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혹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내었나? "사-라-말-!" 야리키는 두 번째 계명성이 들려온 위치가 첫 번째 위치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트밀은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갇혀 있지 않았다. 와지끈 하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비명을 들으며 야리키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아트밀 또한 갇혀있었다고 생각해야 했 다. 그리고 아트밀은 어떤 방법으로 그런 구속을 벗어났다. 야리키는 아트밀이 어떤 방법으로 자유로워졌는지 열심히 추리해보았다. "사-라-말-! 어-디-있-어-!" 아트밀이 다시 계명성을 질렀을 때 야리키는 머리 속에 벽력이 떨어 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황급히 머리 위에 있는 물통을 바 라보았다. 아트밀이 어떤 탈출 수단을 쓴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것 은 레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엄밀하게 말한다면 모든 선 민 종족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 레콘의 것이 그 중에서 가장 강력 하다. 레콘은 아주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 계명성. 분노한 레콘이 내뿜는 외침은 단지 거대한 소리 이상이다. 어떤 생물도 낼 수 없는 강력한 소리이며…… 어쩌면 그것은 물통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할지도 모른다. 야리키는 자신이 왜 이전에 계명성으로 물체를 움직이려 시도한 적 이 없는지 안타깝게 여겼다. 손발이 멀쩡한데 그런 힘들고 무익한 일 을 할 필요는 없었고, 물론 입김으로 촛불을 끄거나 뜨거운 음식을 불어본 적은 있지만 야리키는 자신의 계명성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짓 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야리키는 자신의 계명성이 어느 정도의 물체 를 움직일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야리키는 그 물통이 얼마나 무거 울지 생각해 보았다. 물이 가득 들어 있다면 제법 무거울 것이다. 초 를 불어 끄는 것이나 음식을 식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아트밀은 성공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아트밀은 그와 다른 형태의 구속에 갇혀 있 을 가능성, 그리고 같은 형태의 구속이라 해도 아트밀의 물통은 그의 물통보다 가벼울 가능성 등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야리키는 그 런 가능성을 고려하기 힘들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 고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야리키는 한 가지 생각밖 에 할 수 없었다. 아트밀이 성공했다면 나도 성공할 수 있다. 야리키 는 자신이 계명성을 지르고 말리라고 느꼈다. 하지만 야리키가 고함 을 질렀을 때 그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폭발적인 계명성은 물통을 날려올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채 야리키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밧줄로 그의 사지에 연결되어 있던 막대기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그의 몸을 따라 날뛰었 다. 야리키는 재빨리 문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두터운 문을 박살 내며 통로로 뛰쳐나온 순간 방 안에서는 위로 떠올랐던 물통이 아래 로 떨어졌다. 철퍼덕 하는 끔찍한 소리에 야리키는 몸을 일으켰다. 방 안쪽에는 떨어져 파괴된 물통이 데구르르 구르고 있었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물을 본 야리키는 몸을 부풀렸다. 벼슬을 빳빳 하게 세운 야리키는 천천히 일어났다. 막대기들이 다시 우쭐거리며 꼭두각시마냥 그의 몸 주위에서 춤을 추었다. 야리키는 밧줄을 푸는 대신 그냥 잡아당겨 뜯어냈다. 밧줄은 갈가리 찢어지며 풀려났다. 야 리키는 허리를 숙여 지나치게 길어서 복도에 놔둔 조간을 들어올렸 다. 그리고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야리키는 허리에 매달린 주머니에서 가죽 책자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을 펼치자 그 안에는 날카롭게 휘어진 갈고리가 나타났다. 그것 은 낚시였다. 사고 위험 때문에 평소에는 낚싯줄에서 분리해두는 그 물건은 소를 매달아도 끄떡없을 크기와 강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끝 부분과 미늘 부분은 무섭도록 예리했다. 조간에서 쇠사슬을 풀어 낸 야리키는 쇠사슬 끝의 잠금 장치를 풀어 그 살벌한 낚시를 연결했 다. 야리키는 낚시 부분을 세심하게 낚시대에 포개쥐고는 복도를 달 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움직일 수 있었다. 야리키는 습격자들에게 레콘이 움직이 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확인시켜줄 작정이었다. 두르사 돌 하장군은 자신의 나이를 원망했다. 허파 속에 불덩이라도 들어있는 것 같았다. 하장군은 고통스럽게 숨 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지금껏 상대하던 적수를 바라보 았다. 두르사는 10년 전이었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거라고 외치고 싶 었다. 하지만 그를 겨냥하고 있는 장창은 오래 전에 그것이 거짓말임 을 증명해보였다. 두르사 돌 하장군을 겨냥하고 있는 장창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두르사는 그 창날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 피는 두르사를 돕기 위해 달려 왔다가 그 창에 찔린 자들의 피였다. 두르사 돌 하장군은 주위에 비 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동지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 다가오는 자들은 없었다. 두르사가 다가오지 말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두르사 돌 하장군이 이끌던 자들은 이제 하장군의 뒤편에 서서 복도를 메운 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기지는 못해도, 다른 곳으로 보내지는 않는다.' 격투가 시작될 때의 목표는 그를 제압하는 것이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이제 두르사 돌 하장군의 목표는 저 판사이산(産) 살 인기계가 다른 곳에서 자신의 탁월한 성능을 뽐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만약 두르사가 쓰러진다면 그의 뒤에 있는 자 가 다시 막아설 것이다. 그리고 그 자가 쓰러지면 그 뒤에 있는 자 가. 판사이 남작 발리츠 굴도하가 이 복도에서 빠져나가려면 적지 않 은 시간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남작은 작았다. 그 작은 키 때문에 그가 창을 쓸 때는 창을 휘두르 는 것처럼 보이기보다는 창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였다. 창 자신이 전 의로 충만한 생명체이고 남작이 하는 일은 그저 그것이 땅에 떨어지 지 않도록 지지하는 것인 듯했다. 하지만 두르사는 그런 인상을 받은 이유에는 작은 키 외에 다른 것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발리츠의 동작을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창이 그 소유주와 따로 움직이는 것 같은 인상이 조장되고 있었다. 눈썹이 더 이상 막지 못 하는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두르사는 신음하듯 말했다. "왜 우리를 막는 겁니까, 각하." 발리츠는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두르사를 살폈다. 그는 두르사가 자 신을 묶어두기 위해 칼 대신 혀를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조를 꺾지 않은 노무사를 마냥 무시하는 것은 그의 성격상 불가능 했다. 발리츠는 혹 빠져나갈 길이 없는지 주위를 살폈지만 그가 있는 복도 끝에는 창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창문 밖으로 뛰 어내리면 몸이 성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가 이동할 수 있는 방향은 오직 앞쪽뿐이었고 그곳에는 차례로 죽겠다는 듯이 서있는 적뿐이었 다. 발리츠가 주위를 곁눈질하는 동안 두르사가 계속 말했다. "당신은 이곳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혹 비셀스 규리하가 제위에 오르기를 기대하시는 겁니까?" 발리츠는 자신도 혀를 이용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누군가는 제위에 올라야 하지 않나. 비록 변경백 각하께서는 그것 을 바라지 않으시지만." "바라지 않으신다고요?" "아아, 그래. 그 분은 바라지 않으신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런 약 속도 없이 대장군의 출발을 도와주셨겠나. 자네도 알겠지만 대장군은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해 간 것도 아니고 황제를 찾으러 간 것도 아 니야. 황제를 선출할 귀족원 회의를 열기 위해 간 것이지. 변경백 각 하께서는 그런 출발을 선뜻 도우셨지. 그렇다면 그 분도 스스로 황제 가 될 생각은 없다고 봐야겠지?" "그렇군요. 그런데 그녀가 제위에 오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분의 생각과 상관없이 그 분은 황위로의 길에 들어서신 것 같 아. 2년 전 그 분이 즈믄누리를 떠나 이곳으로 오셨을 때 대호왕 폐 하께서 한계선을 넘었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아. 그 분도 어 떤 한계선을 넘으셨어. 그 분에겐 미지의 세계인 이곳에서 그 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황위인 거지." 두르사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발리츠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를 동정하는군요?" "변경백 각하께서는 스무 살이야. 하지만 우리가 아는 이 악다구니 가득한 세상에 계신 건 2년 정도이지. 그녀는 스무 살이고 두 살이 야. 그래. 가끔 그녀가 가엾다고 생각해." "글쎄요. 자기가 한 일이라곤 손가락 하나 까딱한 것이 없으면서 규 리하의 지배자가 된 것이 가여운 일인지 잘 모르겠군요." 두르사의 투덜거리는 말투에 발리츠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발리츠 는 창날을 옆으로 조금 치우며 말했다. "이봐. 하장군. 그냥 돌아가서 기다리면 안될까? 그 분이 황위에 오 르신다면 규리하령은 다시 아버지에게 돌려줄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이런 골육상쟁도 피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을 텐데." 두르사는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그런 약속을 했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분은 제위에 관심이 없다고 했잖나. 황 위에 오를 경우를 가정한 약속을 하실 리가 없지. 이건 내 가정이 야." 두르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리츠는 씁쓸한 표정으로 두르사가 칼자루를 틀어쥐는 것을 보았다. 두르사가 말했 다. "설령 그녀가 그런 약속을 했다 해도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규리하는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황제가 될 때까지 잠시 빌려쓰겠다고요? 아니오, 아니오! 절대로 그 럴 수 없습니다. 지러쿼터 산맥 동쪽의 이 들판과 이 강과 이 산은 우리의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규리하가 아닙니다. 지금 변경백위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도 규리하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규리하는 우리의 것입니다. 당신들의 도구가 아닙니다." 두르사는 칼을 옆으로 한 번 뿌렸다가 다시 앞으로 겨누었다. "오십시오." 하지만 발리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피부로, 그리고 귀로 이상 한 것을 느꼈다. 키가 작다는 것은 역시 불편할 때가 있다. 발리츠는 무엇인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고 느꼈다. 하지만 앞쪽을 가로막고 있 는 사람들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었다. 그 때 두르사와 그 의 병력도 발리츠가 느낀 것을 느꼈다. 두르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 지만 뒤쪽에 있는 자들은 경계하며 복도 반대쪽을 돌아보았다. 그리 고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숙였다. 두르사는 보지 못했지만 발리츠는 짧은 번득임을 보았다.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무엇인가가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왔 다. 그것은 두르사의 어깨를 때렸다. 두르사는 갑작스러운 타격에 놀 라 어깨 쪽을 바라보았다. 어깨는 그곳에 있었지만, 팔은 없었다. 두르사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발리츠를 돌아보았다. 발리츠의 상체 에는 조금 전까지 없었던 피가 흠뻑 튀어 있었다. 발리츠는 무슨 일 이 일어나는지 보았다. 뒤에서 날아온 것이 두르사의 왼쪽 어깨에 파 고들기 직전의 짧은 순간 발리츠는 그것이 갈고리처럼 생긴 도구임 을, 그리고 그 뒤편으로 쇠사슬이 길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갈 고리가 두르사의 어깨를 파고들었을 때 쇠사슬은 뒤로 확 잡아당겨졌 다. 그러자 그것은 두르사의 팔과 거기에 매달려 있던 방패와 함께 뒤편으로 사라졌다. 두르사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두르사는 칼 을 놓고는 왼쪽 어깨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발리츠는 다시 갈고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두르사의 뒤편에 있던 병사의 목에 걸 렸다. 쇠사슬이 다시 잡아당겨졌고 병사의 목은 찢어졌다. 발리츠는 격류 같은 피의 분출과 하얀 목뼈를 보았다. 그리고 발리츠는 마침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나타난 레콘의 모습을 보았다. 야리키였다. 야리키는 오른손으로 낚싯대를 뒤로 잡아당기며 왼손으 로는 가까이 있던 병사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옆으로 확 밀어붙였다. 야리키의 손바닥과 석벽 사이에서 병사의 머리뼈가 박살 났다. 와드득! 야리키는 손으로 벽을 짚은 채 앞으로 걸어왔다. 병사 의 부서진 투구와 머리 등이 석벽에 갈리며 끼드득 끼드득 하는 소리 가 났다. 병사들은 주저앉거나 비명을 질렀다. 야리키는 벽에 문지르 던 병사의 머리를 놓았다. 죽은 병사는 머리를 이루던 여러 부분들을 벽에 묻히며 미끄러져 내렸다. 야리키가 말했다. "가." 병사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야리키는 다시 걸음을 뗐다. 주저앉아 있던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비켰지만 그 중 한 명의 다리가 야리키의 왼발에 밟혔다. 병사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 었다. 야리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그의 뒤편에서 병사는 바깥 쪽으로 꺾인 자신의 무릎 관절을 보며 다시 비명을 질렀다. 복도 좌 우로 비켜섰던 병사들은 머리를 감싸거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용케 복도 반대편으로 달아날 용기를 발휘한 자들은 많지 않았다. 야리키는 무릎을 꿇고 있는 두르사의 뒤편에 멈춰섰다. 두르사는 피 가 뿜어져나오는 왼쪽 어깨를 움켜쥔 채 도끼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발리츠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의 입에 서 피섞인 침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야리키는 두르사를 내려다보다 가 낚싯대를 세웠다. 차르륵 소리를 내며 낚싯줄이 풀리자 두르사는 움찔했다. 야리키는 낚싯줄 끝을 붙잡았다. 그리고 갈고리를 붙잡듯 낚시를 붙잡고는 그것으로 아래로 내렸다. 발리츠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깨닫고는 부정의 외침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굳어 있었다. 야리키는 서두르지 않는 동작으로 낚시를 두르사의 목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턱 아래에 끼워넣었다. 투석기에 포탄을 거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두르사는 피하려는 몸짓을 했지만 그 꿈틀거림은 아무런 저항이 되지 못했다. 야리키는 낚시를 쑤욱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제 대로 걸렸는지 확인하듯 낚싯줄을 위로 툭툭 잡아당겼다. 그러자 두 르사의 머리가 위로 홱홱 쳐들려졌다. 발리츠는 그가 절명했기를 바 랐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두르사의 머리는 그의 소망에 대해 죽은 자 가 보내는 긍정 같았다. 낚시가 제대로 걸렸음을 확인한 야리키는 발리츠를 향해 비어있는 손을 뻗었다. 그는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손을 아래로 두 번 흔들 었다. 엎드려. 발리츠는 무릎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 았다. 야리키는 두르사의 등을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에 옷자락을 붙 잡힌 채 두르사가 둥실 떠올랐다. 야리키는 두르사를 창문 쪽으로 집 어던졌다. 발리츠는 두르사의 시체가 자신의 위쪽으로 휙 날아가는 것을 보며 질겁했다. 그의 시체가 창 밖으로 사라지고 낚싯줄로 쓰이는 쇠사슬 이 팽팽해졌다 싶을 때 야리키는 낚싯대를 앞으로 뻗어 쇠사슬이 계 속 뻗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손으로 낚싯대를 퉁기듯 잡아당겼다. 창문 밖에서 무엇인가가 거칠게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발리츠는 온몸의 힘이 죽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쇠사슬은 다시 야리키를 향 해 돌아갔다. 야리키는 날아오는 낚싯줄을 허공에서 붙잡았다. 낚시 끝에는 두르사의 찢어진 머리가 걸려 있었다. 규리하성의 경비대 본부는 성의 뒤쪽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본격적 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습격자들 중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자들 이 몰려간 곳도 그곳이었다. 한편 경비병들은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 어서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본부 건물의 마당에서 벌어진 거창한 싸 움은 그래서 전술도 없이 개개인의 기량을 겨루는 싸움터가 되어 있 었다. 사라말 아이솔이 있었던 곳은 그곳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량은 자신 의 목숨을 보호하기도 급급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사람으 로서는 어울리지 않게도 사라말은 자주 위쪽을 보았다. 그는 아트밀 이 위에서 떨어져 내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라말은 그것을 보았다. 성의 높은 창문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다. 사라말은 반짝거리 는 줄 같은 것이 그에게서 뻗어나와 창문 안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 았다. 누군가가 줄을 붙잡고 창문 밖으로 뛰쳐나온 거라 생각했던 사 라말은 다음 순간 벌어진 끔찍한 장면에 숨을 멈추었다. 느슨한 원호를 그리던 줄이 갑자기 팽팽해졌다. 그 순간 으지직 하 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사람의 머리가 그 몸과 분리되었다. 반짝거 리는 줄은 머리를 매단 채 창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머리가 사라진 시체는 갑자기 잡아당겨졌던 충격 때문에 허공에서 팔다리를 흔들며 우쭐거렸다. 머리 없는 사람이 공중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 다. 사라말은 눈을 감아야 된다는 생각도 못한 채 그 시체가 팔다리 를 흔들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래로 떨어진 시체는 거대한 충돌음을 냈다. 주위에서 격투를 벌이 던 규리하성의 경비병들과 습격자들은 갑자기 난 굉음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사체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사라말은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뭐야, 야리키인가?" 사라말은 그것이 아트밀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아 트밀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사실은 사라말이 그를 향해 몸 을 돌린 것이지만 사라말은 자신의 행동을 깨닫지 못했다. 아트밀은 시체가 튀어나온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라말의 시선을 눈치 챈 아트밀은 그를 돌아보았다. "너도 봤지? 그 쇠사슬, 야리키의 낚싯줄이었지?" 사라말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갑자기 떨어진 끔찍한 시체와 아트밀의 모습 때문에 싸움은 소강 상태였고 특히 사라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라말은 입을 틀어막은 채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말했다. "아트밀." "왜?" "야리키에게 가십시오." 아트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야리키는 안 도와줘도 될 텐데? 네 옆에 있을게." "도와주라는 것이 아니라 말리라는 겁니다. 필요하면 때려눕혀서라 도." 내습자들이 아닌 동료를 공격하라는 사라말의 말은 아트밀을 더욱 당황시켰다. 사라말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건 그냥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차분하게…… 자기 분노를 어떻 게 표현할지 곰곰히 생각해서 결론을 내린 다음 행동에 옮기고 있습 니다. 다시는 자신을 귀찮게 할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무시 무시한 짓을 할 겁니다. 막아야 합니다." "이 놈들은 어쩌고?" "제정신이 박혔다면 도망치겠지요! 제기랄, 도망치는 것을 도와줘야 할 판국입니다. 빨리 가십시오!" 하지만 아트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이 놈들이 여기 있는 한은 안 돼. 이 놈들부터 쫓아내고." 습격자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철저를 붕붕 휘두르며 걸어가는 아트밀의 뒷모습을 보다가 사라말은 격렬하게 외쳤다. "가! 죽기 싫으면 가라고! 빨리 도망쳐!" =============================================================== 좋은 밤 되세요. 25. 불씨의 은닉 - 4 아트밀과 그의 철극, 그리고 사라말의 외침은 습격자들을 질리게 만 들었다. 하지만 경비대 본부를 공격하기 위해 온 그들의 기백은 출중 했다. 지휘자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허리춤의 물통을 꺼내어들었을 때 사라말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트밀은 철극을 휘두르다가 그대로 멈춰섰다. 레콘의 조각을 만들 길 좋아했던 마루젤이 만들어놓은 작품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사라말 은 위압적인 레콘의 모습 때문에 그의 레콘 조각이 유달리 깊은 인상 을 남길 뿐 사실 마루젤은 온갖 소재를 다 즐겼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아마도 혼란과 당혹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통을 꺼내는 지 휘자는 그것을 위협적으로 흔들며 말했다. "가까이 오면 던지겠다! 나는……" 규리하에 대한 꽃 같은 충정을 간직했던 그 남자의 이름을, 사라말 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허공에서 세차게 날아온 갈고리가 남자의 허리 근처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격한 충격에 남자는 빙그르르 돌며 쓰러졌다. 쿠쾅! 인간 남자 한 명이 쓰러지는 것치곤 지나치게 큰 소 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사라말은 성 위쪽에서 뛰어내린 야리키가 착 지의 충격을 떨쳐내며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사라말이 다시 외쳤 다. "도망……" 그리고 사라말은 거대한 무엇인가가 얼굴 앞쪽을 스쳐지나가는 압박 감에 입을 다물었다. 야리키가 돌풍 같은 속도로 그의 앞쪽을 지나쳤다. 그곳에는 물통을 들고 아트밀을 협박하던 남자가 있었다. 야리키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는 남자의 가슴을 콱 짓밟았다. 남자의 사지가 경련했다. 야리키는 허리를 굽혀서는 낚싯줄 끝의 낚시를 남자의 목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세심하게 남자의 목에 꽂아넣었다. 남자는 꿈틀거리다가 절명 했다. 줄을 몇 번 당겨 낚시가 확실히 박혔는지 확인한 야리키는 상체를 세웠다. 그는 남자를 누르고 있던 발을 떼서는 그것을 남자의 몸 아 래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야리키는 남자의 시체를 차올렸다. 위로 솟 아오르는 떠오르는 남자를 따라 쇠사슬도 떠올랐고 야리키는 낚싯대 를 들어올려 쇠사슬이 마음껏 뻗어올라가도록 했다. 그리고 남자가 하늘 위, 정점에 이르렀을 때 야리키는 갑자기 허리를 회전시키며 낚 싯대를 뒤로 잡아챘다. 찢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뿌리며 남자의 목이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목이 뜯겨지며 허공에 거꾸로 서게 된 남자는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 에게 피를 폭포처럼 뿌렸다. 시운(屍雲)이 떨어뜨리는 혈우(血雨)에 습격자들과 경비병들 모두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피는 따스했다. 사 람들은 얼굴을 때리는 핏방울의 뜨거움에 진저리쳤다. 그들은 허물어 지듯 쓰러지거나 눈을 가리며 몸을 돌렸다. 어떤 이들은 입에 들어온 살점을 게워내느라 땅에 엎드려 꺽꺽거렸다. 목이 없는 시체는, 그래 서 별다른 환영을 받지 못한 채 땅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충돌한 시체는 비인간적인 팔다리의 꿈틀거림을 보여주다가 길게 늘어졌다. 그의 떨어진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어깨와 가슴을 적 시는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웅덩이가 점점 넓어지는 것을 보던 사라 말이 갑작스럽게 돌진했다. 야리키는 사라말의 움직임을 느꼈지만 그것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라말은 방해받지 않고 야리키의 등을 향해 도약할 수 있었 다. 아트밀은 인간치곤 좋은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야리키의 머리는 거북할 정도로 높은 곳에 있었다. 사라말은 가까스로 그의 어 깨를 붙잡았고, 그리고 발로 야리키의 다리와 등쪽을 걷어차며 기어 올랐다. 야리키는 어쩌나 보겠다는 듯이 이 황당한 시도가 계속되도 록 내버려두었다. 가까스로 야리키의 목을 조르게 된 사라말은 두 팔로 그것을 꽉 붙 잡았다. 만약 사라말이 시도하는 것이 교살이라면 그는 자신이 백곰 이나 고릴라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트밀은 그의 정체 성을 회복시켜줘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사라말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야리키의 목을 조르려는 헛된 시도를 계속하며 사라말 은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그만해라. 이 미친 레콘아. 이 성에는 도깨비 무사장이 있다!" 야리키는 그 말에 수염볏을 쓰다듬었다. 등뒤에 버둥거리는 인간을 매단 채 상념에 잠겨 있는 레콘 조사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어깨 너머로 돌려 사라말의 뒷덜미를 잡았다. 사라말은 별다른 저항도 못한 채 야리키의 손에 붙잡혀 들어올려졌다. 아트밀 은 순간 움찔하며 허리를 낮추었다. 그러나 돌진하려던 아트밀은 야 리키가 사라말을 땅에 내려주는 것을 보고는 몸을 멈췄다. 사라말이 똑바로 선 것을 확인한 야리키는 낚싯대를 흔들었다. 낚싯 줄이 호선을 그리며 그에게 날아왔다. 날아온 머리를 붙잡은 야리키 는 그것을 낚시에서 떼어내 앞으로 던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머리 주위에서 사람들이 기함하며 도망쳤다. 야리키는 손가락 사이로 낚싯 대를 미끄러지게 해서는 그것으로 땅을 짚었다. 그의 부리가 딱! 하 는 소리를 냈다. 공포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돌아보자 야리키는 낮지 만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야리키다. 나는 너희들이 치는 장난질에는 관심이 없다." 야리키는 낚싯줄 끝을 잡았다. 그는 피와 살점이 엉겨있는 낚시를 팔뚝의 깃털에 쓱쓱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으면 가서 마음껏 놀아라. 나는 상관하지 않는 다. 내가 그것을 뭐라 한 적 있느냐? 그런 적 없다. 하지만 너희들의 놀이에 나를 끌어들이지는 마라." 야리키는 자신이 연설을 한다는 사실에 약간 낭패감을 느끼는 것처 럼 보였다. 그의 일정표에는 권고 대신 행동으로 가득했던 것이 분명 하다. 야리키는 곤혹스럽다는 듯이 벼슬을 만지작거렸다. 그곳의 목 격자들 모두의 영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될 기억을 만들어주었지만 야리키의 난처해하는 모습은 묘하게 소박하게 보였다. 결국 야리키는 적절한 말을 찾아내기를 그만두었다. 그는 낚싯대를 쥐지 않은 손을 뻗어 천천히 흔들었다. "가라. 내게 오지 마라. 머리가 떨어진다." 습격자들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 느린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야리키는 발로 땅을 쾅 밟았다. 습격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 다. 그리고 도망치는 사람들 중엔 규리하성의 경비병들 또한 섞여 있 었다. 두 손으로 쥔 철극을 앞쪽에 늘어뜨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트밀은 그들 중 몇 명은 지금 사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도망치는 사람들을 보던 야리키는 낚싯줄에서 낚시를 분리했다. 피 는 대강 닦여 있었지만 아직 붉은 빛으로 번들거리는 그 무서운 갈고 리를 보던 야리키는 잠자코 허리에서 기름걸레를 꺼냈다. 그것을 펼 치자 안쪽에는 기름병이 나타났다. 낚시를 닦을 채비를 하던 사라말 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발견했다. "사라말?" 사라말은 주먹을 꼭 쥔 채 야리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 근육은 흉중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 마구 뒤틀려 있었다. 율형 부사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던 야리키가 말했다. "할 말 있나?" 사라말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아트밀이 미 끄러지듯 다가왔다. 아트밀은 사라말의 뒤쪽에 벽처럼 서서 야리키를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아트밀의 말을 들었다. "야리키. 좀 심했잖아. 왜 그렇게 죽이는 거야?" "죽을 작정을 하고 왔잖아." "저렇게 죽을 생각은 안했을 텐데." "죽는 건 똑같아." 아트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 사라말이 팔을 들어올렸다. 그 는 머리 위로 들어올린 팔로 아트밀의 배를 툭 쳤다. "저 대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트밀." 아트밀은 고개를 숙여 사라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사라말은 앞으로 한 발 걸어가 야리키를 바라보다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다른 곳에도 침입자들이 있을 겁니다. 쫓아내주겠습니까?" 야리키는 물끄러미 사라말을 보다가 기름병을 다시 기름걸레로 감쌌 다. 그것을 허리춤의 주머니에 집어넣은 야리키는 낚싯대를 들어올려 동글게 돌렸다. 쇠사슬 낚싯줄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회전했다. 카라라락! 쇠사슬 낚싯줄을 낚싯대에 감은 야리키는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성큼 걸어갔다. 사라말은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손으로 이마 를 짚었다. 그가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던 아트밀이 말했다. "사라말. 괜찮아?" "아트밀." "응." "갑시다." 사라말은 손을 얼굴에서 떼며 걸어갔다. 그는 질린 표정으로 서있거 나 앉아있는 경비병들에게 빨리 피를 지우라고 말했다. 피를 지우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올린 아트밀은 황급히 걸음을 옮겼 다. 경비병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두 레콘과 사라말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파라말 아이솔은 자신에게 숨겨진 무예의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무술은 공격과 방어로 나뉘고 다양한 방어의 기술 중에 는 도주 또한 포함된다. 파라말 아이솔은 자신이 정말 잘 도망친다고 생각했다. 그 재능으로 자신의 목숨을 훌륭히 지키고 있으니 이 정도 면 빼어난 무술가 아닌가? 커다란 헛손질로 파라말을 놓친 이이타 규 리하는 그 칼을 천천히 끌어당기며 투덜거렸다. "부사. 아까 그 대국 제안 말인데, 받아들이고 싶어졌어. 최소한 바 둑판 앞에서는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파라말은 이이타를 조금 존경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익살을 잃지 않는 여유로운 열아홉 살짜리 청년을 파라말은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동시에 파라말은 약간의 불안도 느꼈다. 저 청년 혹시 사라 말과(科)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겠지? 다행히 이이타는 그의 형보다는 진지한 맛이 있었다. 파라말은 이이타를 공격하기보다는 그가 다가오 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창을 내밀며 말했다. "바둑판을 가져올까요, 공자님?" "무거운 걸로 가져와. 그것을 그대의 발등에 떨어뜨려 줄 테니까." "말씀하시니 생각난 건데 그것과 비슷한 정석에 대해 연구하던 기사 를 알고 있지요." "살인기사?" "아니오.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입니다." "어쩐지 어울리는군." 이이타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를 집어던졌다. 파라말은 냉큼 피하며 창을 세로로 크게 휘둘렀다. 쇄도하려던 이이타는 걸음을 멈춰야 했 다. 무턱대고 휘두른 것이지만 그래서 파라말의 창에는 꽤 힘이 실려 있었다. 헐떡거리며 물러난 파라말은 다시 말했다. "공자님. 누님께 제국을 부활시킬 기회를 주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이이타 또한 파라말을 뒤쫓으며 계속 칼을 휘둘렀기에 숨을 고를 필 요가 있었다. 그는 칼을 앞으로 내민 채 잠시 멈춰섰다. "발케네공에 대해 말하니 나도 생각나는 것이 있군. 부사. 발케네공 락토 빌파가 언젠가 내게 질문했지. 삶은 무엇에 써야 하느냐고. 나 는 신념을 위해 써야 한다고 대답했어. 고인은 그 대답이 틀렸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부사. 말해봐. 제국 부활이 누님 의 신념이신가? 그건 그대들의 신념 아닌가?" "공자님의 말씀을 인정해야겠군요." "그렇다면 누님 핑계는 대지 말아." 파라말은 머리를 뒤로 홱 젖혀 땀에 젖어 늘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러면 제게 기회를 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지금 주고 있잖아." 파라말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신념을 위해 싸울 기회를 주고 계시는군요." "그래. 그러니 내가 내 신념을 위해 싸우는 것도 너무 탓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이이타는 다시 앞으로 돌진했다. 파라말의 창날이 앞으로 뻗어나왔 지만 그 끝은 파라말의 피로 때문에 흔들렸다. 이이타가 칼을 비스듬 히 내려베자 그 끝은 허무하게 잘려나갔다. 파라말은 잘린 창을 이이 타에게 집어던지고는 뒤로 돌아 도망쳤다. 하지만 채 몇 걸음도 걷기 전에 파라말은 우당탕 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쓰러졌다. 코가 깨지는 듯한 충격을 받은 파라말은 그 순간 도주를 포기했다. 그 때문에 여유를 되찾게 된 파라말은 도대체 어떤 벼락 맞을 물건이 자신의 다리를 걸었는지 보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복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두려운 상상을 떠올린 파라말은 이이 타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이이타의 웃는 얼굴을 본 파라말은 혀를 차고 말았다. 이런, 역시 그런 건가? "자네가 자네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은 비밀로 해주지. 부사." 파라말은 머쓱한 얼굴로 감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때 거대한 계명성이 우르릉 들려왔다. "여-기-간-다!" 이이타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곧 그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 다. 이이타는 뭘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계명성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다른 방향에서 계명성이 들려왔다. "사-라-말-! 사-라-말-! 어-디-있-어-!" 이이타와 파라말은 동시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레콘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이타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공포를 느끼며 황급히 뒤를 돌 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등 뒤에서 노한 레콘이 나타나 그의 어깨를 움 켜쥘 것 같은 두려움에 이이타는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까무러 칠 것 같은 자신을 다잡기 위해 이이타는 상황을 정리하듯 말했다. "기쁜 소식이 있다. 부사. 레콘이 풀려났군." 이이타는 한결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일 어나 뒤로 물러나던 파라말도 마찬가지였다. 파라말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했다. "공자님. 투항하십시오. 보호해드리겠습니다." 이이타는 파라말의 빈손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는 비무장의 적이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 는 듯 싱긋 웃었다. 파라말 또한 상황과 말의 불일치에 씩 웃었다. 이이타는 칼을 거두며 말했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사양하겠어." 이이타는 뒤로 돌아섰다. 파라말에게 등을 보인 채 이이타는 복도 반대편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파라말이 다시 외쳤다. "공자님! 돌아가셔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유무역당이 당신들을 고사시켰잖습니까? 이제 당신들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패배자가 되려 하지 마십시오." 파라말은 멈추지 않는 이이타를 보다가 두 팔을 앞으로 내던지며 외 쳤다. "당신은…… 열아홉 살입니다!" 이이타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바닥을 바라보는 것처럼 머리를 떨군 채 잠시 그렇게 서있었 다. 파라말은 조바심 속에서 공자를 바라보다가 발을 내디뎠다. 그 때 이이타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치 이이타가 그의 걸음을 훔쳐간 것처럼 파라말은 멈춰섰다.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는 무향의 공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파라말은 창밖을 쳐다보았다. 규리하의 하늘은 봄빛이었다. 파라말은 저 하늘이 왜 저렇게 투명한 지 원망스럽다고 생각했다. 파리조의 하늘에 몰려든 먹구름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암살성의 메마른 돌들 위에 핏자국처럼 검은 물자국이 나타났다. 비 는 내리기 시작하자마자 거세어졌다. 무수한 얼룩무늬로 채색되었던 암살성은 곧 어두운 빛으로 바뀌었다. 부냐 헨로는 자신의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바느질에 완전히 몰입해 있던 그녀는 빗소리를 듣지 못했다. 부냐는 자신이 누구의 옷 을 만들고 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의도적인 몰입이었고 꽤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는 고통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할 수는 없었다. 손가락 끝이 따끔한 것을 느낀 부냐는 옷감에 피가 떨어지지 않도록 황급히 손가락을 치웠다. 다행히 옷감에 핏자국이 없는 것을 확인한 부냐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부냐는 의아 해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보다가 주위가 어두워졌음을 깨달았다. 그 녀는 창밖을 보았고 그제서야 내리는 비도 확인했다. 하늘이 캄캄했 다. 부냐는 손가락을 눈 가까이로 가져왔다. 그러자 바늘에 찔린 작은 구멍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어나오는 피도 보였다. 부냐는 손 가락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찝찔한 피맛을 느끼며 부냐는 바느질하던 옷을 옆으로 치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부냐는 벽쪽으로 다가가 줄을 당겼다. 곧 하녀가 왔다. "어둡잖아. 왜 아직 불을 켜지 않았지?" 불평하던 부냐는 하녀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음을 깨달았다. 그녀 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었고 손에도 대장간에서 쓰이는 것 같은 두 꺼운 장갑을 끼고 있었다. 가쁜 호흡 때문에 하녀는 잠시 대답을 못 했다. 부냐가 말했다.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예, 예. 가구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가구? 가구를 왜?" "자작부인께서 가구 배치가 지나치게 우중충하다고 하시면서…… 소 리를 못들으셨습니까?" "이 소리가 그거야?" 부냐는 지금껏 바느질에 집중하고 있느라 듣지 못했던 소음을 깨달 았다. 조금 먼 곳이라서 소리가 작긴 했지만 무거운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냐가 두리번거리는 동안 하녀는 부냐의 손을 살폈다. "손을 다치셨나요?" "응. 바늘에 찔렸어. 어두워서 그랬나봐." "정말 죄송합니다. 곧 불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는 밖으로 가서는 곳 불을 밝힌 초를 가져왔다. 그녀는 방 안의 촛대를 돌아다니며 불을 밝혔다. 부냐는 다시 바느질감이 쌓여있는 탁자로 돌아가 앉았다. 그런데 불을 붙이 는 일을 끝낸 하녀가 미적거리고 있었다. "할 말 있어?" 마흔 살이 조금 넘어보이는 하녀는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작 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만 어머님께 그 일을 좀 미루면 안될지 여 쭤봐주시면 안될까요? 저희들은 이 성의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 도 해야 하고, 또 밤에는 전선으로 보낼 붕대와 주머니, 자루, 옷, 천막 등을 만드는 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구 옮기는 일 때문에 오후 내내 다른 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끝나면 좋으련만 자 작부인께서는 계속 가구 배치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보시거든요. 그 때문에 전선 지원품을 만들기 위해 품삯을 받고 왔던 부인네들도 그 일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여자들을 달래기 위해서 시종장님께서는 전선 지원품을 만들지 않아도 오늘치 품삯은 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결국 아무 일도 못한 채 돈만 낭비, 아, 가구를 옮기는 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러니까……" 하녀는 허둥거리며 자신의 말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그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이해한 부냐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가지. 아냐. 어머님께 이쪽으로 와달라고 전해. 그러 면 너희들은 눈치껏 빠져나갈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아가씨." 하녀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잰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그녀가 빠져나 가자마자 부냐는 자신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부냐는 어머니를 상대하기 귀찮았다. 태어난 이래로 그녀는 한 번도 어머니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았던 적이 없었 다. 부냐는 괜한 일을 벌이는 어머니도, 그리고 자기 일을 남에게 맡 기는 하녀도 원망스러웠다. 전반적으로 의기소침하고 머릿속이 복잡 한 상태에서 부냐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예행연습해보았 다. 하지만 손가락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그녀의 주의력을 빼앗아갔 다. 부냐는 그 간질간질하는 느낌을 떨치기 위해 손을 위아래로 흔들 었다. 그 손이 탁자를 쳤다. 부냐는 왈칵 화가 치밀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부냐는 모디사 헨로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모디사는 딸에게 걸어오는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다. "바쁜데 왜 부르는 거니?" "뭐 하시고 계셨지요?" 모디사는 손에 무엇인가가 묻었다는 듯이 툭툭 털었다. 하지만 부냐 가 보기에 그 손은 깨끗했다. 모디사는 땀도 없는 이마를 훔치며 말 했다. "가구를 옮기고 있었어. 발케네인들은 정말이지 야만스러워. 이 성 이 고작 몇십 년 밖에 안되었다는 것 알고 있지? 그런데 규리하성을 보는 것 같아. 규리하성은 고풍스럽기나 하지, 여긴 그냥 엉망진창이 야. 방을 무슨 창고처럼 쓰고 있잖아. 아냐, 어쩌면 일부러 너저분하 게 유지해서 오래되었다는 인상을 주고 싶은 건지도 몰라. 자기들 역 사가 짧다는 것을 숨기려고. 가소로운 짓이지! 사람이 자기 생긴대로 살아야지 누굴 흉내내봐야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냐. 그냥 우스꽝스 러울 뿐이야." "어머니는 규리하성에 가보신 적이 없잖아요." "뭐? 누가 가봤다고 그랬어? 안 가봐도 아는 거 아냐. 제국에서 가 장 오래된 성이니까. 나는 비유를 한 거야. 넌 왜 그것도 못 알아듣 니." "그런데 왜 갑자기 가구를 옮기시는 거죠?" "진작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어. 내 딸의 성이 이런 창고 같은 꼴이 라니, 어머니가 되어서 기가 막힐 지경이었어. 요즘 일하는 여자들이 많이 오잖아? 그래서 시작한 거지. 이런 일은 마음을 먹었을 때 해치 워야지. 그렇잖으면 귀찮아서 계속 미루게 된단 말이야. 그리고는 익 숙해서 좋다느니 하는 말을 하게 되지. 이 성은 젊은 부부의 성이야. 어울리지도 않게 늙은이처럼 굴어선 안돼.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 야. 난 네 어머니잖아. 어머니가 딸 챙겨줘야지. 힘든 일은 내게 다 맡기고 넌 그냥 쉬고 있어. 우리 사위님이 돌아오면 이 칙칙한 성이 완전히 새것이 된 것에 깜짝 놀라서 너를 칭찬하게 될 거야." 부냐는 숨이 조금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호흡을 크게 들이 쉬었다. 모디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한숨을 쉬는데?" "예? 아뇨. 그냥 좀 답답해서." "내가 답답하는 거야?" "아뇨. 가슴이오. 가슴이 답답하다고요." "체했니? 속이 메슥거려?" 부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저, 어머니. 그 여자들은 전선에 보낼 물건들을 만들려 고 온 거예요." "그 여자들이 뭘 하러 온 건지는 나도 알아. 자루나 보자기, 붕대쪼 가리 같은 것을 만들려고 온 거지. 그것만 봐도 여기가 얼마나 촌스 러운 곳인지 알 수 있지. 하늘누리는 전쟁터로 직접 날아갔어. 하지 만 나는 하늘누리에서 부인네들 모여서 바느질하는 거 본 적이 없어. 밑에서 수십만 명이 싸워도 그 위에서는 평소하고 똑같았단 말이야. 야만에서 벗어난지 몇십 년밖에 안된 이곳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 사 는 것이 뭔지 가르쳐줘야지." 부냐는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백화각은 그렇지 않았어요." "뭐?" "백화각은 그렇지 않았다고요. 아래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시체들이 와요. 창칼에 맞고 화살에 맞아서 죽은 시체들이 실려온다고요. 그러 면 옷을 잘라내고 피를 닦아요. 화살이 부러져서 그 끝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참 난처해요. 이미 굳어있는 시체에서 그거 뽑아내려면 정 말 힘들어요. 시체가 꽉 붙잡고 있는 것 같거든요." 모디사는 이마를 찡그렸다. "끔찍한 소리를 하는구나. 왜 그렇게 기분 나쁜 소리를 하니. 그런 건 빨리 잊어야지. 너는 거기를 빠져나왔어. 그 매정하고 못된 엘시 에더리가 나쁜 놈이야. 못된 놈! 제 약혼녀가 그런 곳에 있는데……" "저는 엘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모디사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때 약혼자였다고 편을 드는구나. 다른 남자랑 도망친 것 이 마음에 걸리는 거지? 넌 순진한 것이 탈이야. 그건 도망이 아니었 어. 너를 그런 곳에 팽개쳐둔 그 놈이 나쁜 거야. 너는 아무 잘못 없 었어."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발 제 말 좀 자르지 마세요. 전쟁이 나 면 싸우는 건 군인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에요! 제국군이 싸울 때도 어머니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됐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했기 때문이에요! 저 같은 사람이오!" "그래, 그래. 잊기 힘들지? 어떻게 그런 일을 잊겠니. 하지만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불쌍한 것." 모디사는 부냐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으려 했다. 부냐는 계속 말하기 위해 어머니의 팔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모디사의 팔은 집요하게 그 녀를 추적했고 의자에 앉아있기 때문에 부냐는 그 팔을 피할 수 없었 다. 부냐는 손으로 어머니의 팔을 쳐냈다. 그 동작에 놀란 모디사가 뺨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모디사의 눈이 분노로 불타올 랐다. "이 못된 것! 제 언니를 닮아가는구나!" "어머니, 저는……" 모디사는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듯 부냐의 손이 닿았던 팔을 뒤 로 잡아당겼다. 자작부인은 턱을 앞으로 불쑥 내밀며 말했다. "넌 아무 것도 몰라. 너만 고생했다고 생각해? 자식을 감옥에 둔 부 모 마음이 어떤지 너는 몰라! 매일 아침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기 분으로 일어나는 것이 어떤 건지 알아?" "어머니.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조용히 해! 내가 말하고 있잖아. 어디서 말을 끊는 거야. 응? 너도 니어엘을 닮아가는구나. 같은 배에서 나왔으니 똑같다는 거지? 공작 님의 아내가 되니까 자작의 부인밖에 되지 못한 어머니 같은 것은 눈 에 보이지도 않는 거지? 네가 잘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 응? 네가 누구 배에서 나왔는데!" 부냐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울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부냐는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더럭 겁을 집어먹었다. 그 녀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는 모디사를 더욱 흥분시켰다. 두려워하는 딸의 얼굴을 보며 모디사는 노기탱천하여 말했다. "못된 것, 못된 것. 그래도 딸이라고 전쟁 벌어진 땅을, 죽을 고생 을 다해 전쟁통에서 빠져나와서 찾아왔더니, 목숨을 걸고 찾아왔더니 나를 이렇게 대접해? 잘났구나, 정말 잘났구나! 네 마음대로 해! 난 이제 아무 것도 안 할 테니까!" 모디사는 몸을 홱 돌렸다. 달리듯 걸어가 문을 연 자작부인은 밖으 로 나가며 그것을 쾅 닫았다. 부냐는 헐떡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 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냐는 입을 틀어막으며 탁자 위 에 엎드렸다. 목에서 무엇인가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천둥 소리가 울렸을 때 부냐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팡탄 하장군은 저 멀리서 천둥이 치는 소리를 들었다. 팡탄의 뒤쪽에 서있던 낙오병들은 걱정하는 소리를 냈다. 팡탄은 천 둥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고원 저편, 꽤 멀리 떨어 진 장소인 듯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쪽의 하늘은 당장 비를 뿌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팡탄은 불안해하는 낙오병들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닐 거야." 하지만 이쪽으로 온다면? 비구름이 다가오고 있다면 빨리 실내로 들 어가거나 반대쪽으로 도망쳐야 한다. 두 가지 모두 팡탄에겐 불가능 한 일이었다. 팡탄은 초조감을 느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과 얼 음, 차가운 돌풍을 견딘 고원의 식물들이 뒤틀린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를 굽어보고 있는 산들의 사면은 자갈과 모래로 가득했다. 그 푸석 푸석한 사면 아래쪽, 팡탄의 정면에는 임시로 제작된 단이 놓여 있었 다. 3미터 쯤 되는 단 좌우에는 기치창검을 받쳐든 인간 병사들이 줄 을 맞추어 서있었다. 그들보다 키가 큰 팡탄은 그 뒤편에 있는 소화 차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것은 그 소화차만은 아니었다. 팡탄의 뒤쪽 제법 떨어진 곳에는 사라티본 부 대가 서있었다. 단 위에는 하나의 의자와 한 명의 인간이 있었다. 팡탄은 의자에 앉 아있는 인간이 짓고 있는 미소를 확인했다. 그는 천둥 소리에 놀란 팡탄을 비웃고 있었다. 팡탄은 시선을 약간 낮추어 단 주위에 난간처 럼 놓여있는 물통들을 보았다. 팡탄의 시선은 단 위에 있던 사람을 화나고 불안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초조함을 감추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팡탄은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비구름이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빨리 해치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단 앞쪽 20미터 쯤 되는 곳에 어떤 성실한 자가 창끝으로 땅에 금을 그어 표시를 해두었다. 팡탄이 멈춰 서야 하는 지점이다. 팡탄은 정확히 그 지점에 멈춰섰다. 그러자 병 사들 뒤편에 있는 소화차들의 출수관을 모두 볼 수 있었다. 팡탄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뒤편에 있던 엉겅퀴 여단의 낙오병들도 팡탄을 따라 차례차례 무릎을 꿇었다. 팡탄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분 노에 찬 신음들을 들었다. 팡탄은 고개를 떨구어 바닥에 그여 있는 선을 보았다. 그는 분노보다는 의문을 느꼈다. 꼭 이래야 할까? 팡탄 은 이미 약속했다. 하지만 저들은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자 신이 할 일에 대해 자신의 약속보다 더 큰 보증이 어디에 있는지 팡 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완전히 쓸데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을 원했다. 그래서 팡탄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위대한 발케네 공작 스카리 빌파 만세." 단 위에서 엉덩이를 의자 끝쯤에 걸친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있던 스카리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팡탄은 우스꽝스러운 기분까지 조금 느끼며 말했다. "나 팡탄은 이곳에 있는 레콘들을 대표하여 말한다. 우리들은 발케 네공 스카리 빌파를 섬길 것을 맹세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우리가 납병할 때까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이름으로 이 맹세는 지켜질 것이다." 팡탄이 한 말은 원래 그가 해야 했던 말과는 조금 달랐다. '혹은 우 리가 납병할 때까지'라는 부분은 팡탄이 즉흥적으로 집어넣은 부분이 었다. 팡탄에게 해야 할 말을 알려준 것은 레콘이 아닌 인간이었고 그래서 팡탄은 그 사람이 뭘 몰라서 그런 불가결한 말을 빠트렸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은 스카리에게 꼭 필요했다. 납병을 한 후에는 스 카리가 요구한다 해도 팡탄은 그를 위해 무기를 쓸 수 없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라고 맹세하면 납병한 후에도 아무 일 하지 않고 스카 리를 섬겨야 한다. 섬기기는 하되 그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는 말은 바꿔 말하면 스카리의 짐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팡탄이 그 말을 집어넣은 것은 자신의 충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스카리에게 성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팡탄은 스카리가 자신의 성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바라보았다. 스카리가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기에 팡탄은 의아함을 느꼈다. 스 카리는 의자의 팔걸이를 밀며 일어나서는 단 끝에 섰다. "맹세의 말은 그것이 아니었을 텐데?" 물론 아니지. 너 위해서 내가 한 마디 더 집어넣었지. 왜? 고마워 서? 팡탄은 부리를 닫은 채 대략 그러 표정으로 스카리를 바라보았 다. 스카리는 볼을 꿈틀거렸다. "다시 맹세해라." 팡탄은 벼슬을 조금 세웠다. 뒤쪽에서 험악한 숨소리가 났다. 팡탄 은 나직하게 말했다. "왜?" "납병할 때까지라고? 왜 그런 말을 집어넣었는지 안다. 내일 당장 납병해버리고는 내 곁을 떠날 생각이겠지?" 팡탄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카리에게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납병은 레콘의 관습이지만 레콘들에겐 희귀한 일이기도 하다. 납병을 한 후엔 더 이상 무기를 쥘 수 없기 때문에 미련과 아 쉬움으로 납병례를 미루다가 미처 납병을 못한 채 죽는 것이 일반적 이다. 기껏 성의를 표시했는데 어처구니 없는 오해로 비난당하자 팡 탄은 기분을 잡쳤다. 그 때 다시 먼 곳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팡탄은 스카리를 이해시 키느라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빠르게 말했다. "우리들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를 섬길 것을 맹세한다. 됐냐?" "똑바로 해!" 스카리는 난간 대신 놓여있는 물통을 걷어찰 듯이 앞으로 걸어나오 며 외쳤다. 팡탄은 일어설 뻔했다. 그의 벼슬은 꼿꼿하게 섰고 그 몸 은 세 배로 부풀었다. 팡탄의 살기어린 눈빛을, 스카리는 핏발 선 눈 으로 마주보았다. 팡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병사들 뒤쪽에 있는 소화차와 그들의 뒤쪽에 서있는 사라티본 부대를 생각했다. 팡탄은 벼슬을 숙였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똑똑하게 발음했다. "나 팡탄은 이곳에 있는 레콘들을 대표하여 말한다. 우리들은 발케 네공 스카리 빌파를 섬길 것을 맹세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이름으로 이 맹세는 지켜질 것이다." 스카리는 투덜거렸다. "멍청한 놈. 그걸 한 번에 제대로 못하고." 혼잣말인 양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혼잣말이었다. 팡탄은 손을 들어 뒤쪽의 낙오병들이 동요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이 조용해지자 스카리가 말했다. "나 발케네 공작 스카리 빌파는 그대들의 충성을 받아들인다. 그대 들의 헌신과 용기는 언제나 정당한 보답을 받을 것임을 맹세한다. 내 가 죽을 때까지 어디에도 없는 신의 이름으로 이 맹세는 지켜질 것이 다. 일어나라." 팡탄과 그의 낙오병들은 이제 스카리의 병사가 되어 일어났다. 팡탄 은 약간 피곤한 표정으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다가올지도 모르는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도 떠올랐다. 스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를 피해야겠군?" 스카리의 이죽거리는 태도에 팡탄은 묵묵히 침묵을 돌려주었다. 스 카리는 흡족하여 말했다. "좋아. 연설은 그만두지. 사라티본 부대장 힌치오에게 가라." 팡탄은 목례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뇌리 속에는 사라티본 부대가 없었다면 스카리가 연설을 하며 자신들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즐겼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떠올랐다. 하지만 팡탄은 그 의심을 떨쳤다. 그는 이제 죽을 때까지 스카리를 섬겨야 한다. 충성의 대상을 의심하 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로울 것이다. 사라티본 부대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그들이 같은 레콘이라는 사실 이 팡탄에게 약간 즐거운 기분을 들게 했다. 엉겅퀴 여단의 대대장으 로 복무할 때도 그런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지만 팡탄은 레콘들에게 합류한다는 것이 즐거웠다. 팡탄은 그것이 왜 즐거운지 생각해 보다 가 그 즐거움은 다른 것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스카리 빌파에 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그는 마음 속으로 한 가지 맹세를 더 했다. 물 론 팡탄에겐 상호모순되는 맹세를 하는 저급함은 없었다. 그가 부리 바깥으로 낸 맹세와 마음 속으로 한 맹세는 아무런 모순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팡탄은 그의 두 번째 맹세를 스카리가 알았다면 즐거 워하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팡탄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처럼 죽을 때까 지 스카리 빌파를 충심으로 섬길 것이다. 그리고 죽은 다음 그는 군 령자의 일원이 되어 스카리를 찾아갈 것이다. 스카리에게 충성할 아 무런 의무 없이. 팡탄은 속으로 웃었다. 그 웃음은 공허하고 어둡고 차가웠다. 헤어릿은 구토가 일어나려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아트밀의 계명성이 들려왔을 때부터 헤어릿은 불안감 속에 아래쪽을 살폈다. 그래서 그녀는 두 구의 시체가 목이 분리되는 과정을 모두 내려다보았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느낌에 헤어릿은 쭈그려 앉았 다. 그녀의 눈앞에서 돌로 된 단단한 바닥이 꿈틀거렸다. 헤어릿은 눈을 감았다. 양쪽 관자놀이가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부들부들 떨 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예?" 그것은 탈해의 목소리였다. 헤어릿은 그쪽을 쳐다보았다. 탈해는 눈 을 가린 채 양쪽 어깨를 감싸안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몸이 떨리는 것을 보던 헤어릿은 갑작스럽게 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습격은 실패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두 명의 레콘은 모두 자유로워졌다. 특히 그 중 한 명은 소름 끼치는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 성에서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헤어릿은 탈해를 놔두고 가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이 아프다는 것을 느낀 헤어릿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 다. 그녀의 오른손은 단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헤어릿은 묻는 눈 으로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어쩌라고? 그녀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탈해를 죽여야 한다. 도망칠 때 도망치더라도 규리하성 사람들이 다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남겨둘 수는 없다. 헤어릿은 오른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가 다시 구부렸다. 단검을 확실하게 붙잡은 헤어릿은 도깨비에게 다가갔다. "보이지 않는 분. 공격이 시작된 겁니까? 사람들이 다치고 있습니 까?" 헤어릿은 그 입을 막고 싶다고 생각하며 탈해의 목을 바라보았다. 심장을 찌르는 것이 좋을까? 헤어릿의 시선이 갈팡질팡했다. 규리하 성의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마저도 머리 한구석으로 아득하게 사라졌다. 헤어릿은 멍한 기분으로 탈해의 급소를 살폈다. 그녀의 단 검이 뒤로 당겨졌다. 탈해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왜 이렇게……"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야.' 헤어릿은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헤어릿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탈해는 고개를 떨군 채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 번 죽는 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홀로 세상에 알려진 최대의 파멸을 일으킬 수 있는 자가 두 려움과 슬픔으로 떨고 있었다. 헤어릿은 단검을 칼집에 꽂아넣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헤어릿은 한동안 그렇게 서서 탈해를 내려 다보았다. 이윽고 헤어릿이 말했다. "무사장님." "예. 보이지 않는 분." "무사장님. 저는 떠날 거예요. 무사장님이 여기 있다는 것을 사람들 에게 알려주겠어요. 하지만 눈을 가린 것을 풀지는 마세요. 지금 성 안에서는 분노한 레콘이 끔찍한 폭행을 휘둘렀어요." 탈해의 떨림이 더욱 커졌다. 그는 당장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에게 사태를 다 정리한 다음 당신을 풀어주라고 말하겠어 요. 그 때까지 답답하더라도 참아주세요. 당신도 규리하성을 불살라 버리고 싶지는 않겠지요?" 탈해는 무슨 말을 할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위아래 턱이 다다닥 부딪쳐서 탈해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헤어릿은 그의 어깨를 붙잡았 다. 그 손길에 무사장은 흠칫햇다. 헤어릿은 도깨비의 어깨를 힘있게 붙잡았다. "부탁하겠어요. 무사장님. 일이 다 마무리되면 즈믄누리로 돌아가세 요. 여긴 당신이 계실 곳이 아니에요. 당신 잘못은 아니에요. 이건 우리 잘못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 우행을 멈출 수 없군 요. 즈믄누리로 돌아가주세요." 탈해는 고갯짓도 하지 못했다. 헤어릿은 그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일 으켰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성탑에서 떠났다. 탈해는 어둠 속에서 헤어릿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었다. 다른 소리들도 들렸다. 다급한 발소리들과 이상한 비명, 그리고 성이 나서 외치는 고함. 그런 소리들은 형체를 가진 물체처럼 그에게 날아왔다. 마치 앉아있는 그에게 많은 이들이 돌을 던지는 것 같았다. 탈해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무릎에 안대 가 비벼졌다. 눈을 가려도 소리는 남는다. 탈해는 나가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니를 수 있다면. 정우. 내가 지금 너에게 니를 수 있다면.' 탈해는 정우를 생각했다. 탈해는 정우를 처음 보았을 때를 생각했다. 당시 그의 나이도 많지 않았지만 정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저 꿈틀거리는 생명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리는 시기였다. 탈해는 정우의 특이한 생김새에 놀랐고 그 녀가 도깨비가 아니라 킴이라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정우는 그가 처 음 본 킴이었고 그래서 탈해는 킴들이 모두 정우처럼 생긴 줄 알았 다. 킴도 도깨비처럼 자라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야 탈해는 비로소 그 모습을 양해할 수 있었다. 탈해는 크게 인심 쓰듯 자라면 좀 봐줄 만하게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탈해는 킴이 자란다는 어르신의 설명에 의심을 품었 다. 물론 어르신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탈해는 정우 가 좀 특이한 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즈믄누리에 온지 일 년 이 지났을 때 정우는 두 손을 걷는데 사용하는 대신 쌓여있는 물건을 쓰러뜨리는데 이용하는 놀라운 진전을 보이게 되었지만, 같은 연배의 도깨비에 비해선 그 체구가 지나치게 작았다. 탈해는 자신이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투로 어르신들에게 정우의 특이성을 보고했다. 그 결과로 탈해는 킴들은 원래 작다는 설명을 받게 되었다. '얼마나 작은데요?' 어르신들은 직접 모습을 바꿔 보여주었다. '다 커도 이쯤이지.' 그건 열두 살짜리 도깨비의 크기였다. 탈해는 킴들이 불쌍하다고 생 각했다. 그런 작은 몸으론 제대로 된 씨름을 못할 텐데. 탈해가 정우 에게 낯설음 대신 동정심을 처음 느낀 것은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 다. 물론 얼마 후 탈해는 킴 여자들이 씨름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지식도 얻게 되었다. 그렇게 불쌍할 수가! 정말 안됐다. 탈해는 헤어릿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도깨비 감투를 쓴 보이지 않는 습격자는 그에게 규리하성을 떠나라 고 했다. 그는 그 말을 따르고 싶었다. 이곳은 싫다. 탈해는 피와 비 명으로 가득한 이곳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는 무사장이다. 즈믄누리 의 성주가 명령하면 그는 피와 비명을 찾아 출정해야 한다. 페시론 섬에 상륙한 유리 기픈골 무사장이 그러했듯이. 오직 한 명의 도깨 비. 탈해는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탈해는 도깨비 무사장이다. 사람을 불태우는 도깨비. 살아있는 사람 에게 불을 붙여 쓰러지기도 전에 잿더미로 바꿔놓을 수 있는 도깨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탈해는 웃긴다고 생각했다.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웅크리고 앉아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 운 사람이라니, 말도 안되고 니름도 안된다. 침묵이 낡고, 부서지고, 파편을 떨어뜨리다가, 먼지가 되어 흩어졌 다. 탈해는 정우의 이름을 쉼없이 부르고 있었다. 정우, 정우, 정우, 정우, 정우, 정우…… 도대체 몇 시간이 흐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 시간일까? 탈해는 며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도깨비 감투를 쓴 습격자가 탈해에 대해 보고하는 것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며칠 동안 아무도 성 탑 위에 무사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면…… 하 지만 탈해는 안대를 벗을 수 없었다. 탈해는 수십 년 동안 앉아있는 도깨비 무사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 것은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침묵의 먼지들이 쌓인 절망의 황야 위에서, 갑자기 목소리의 번갯불 이 번뜩였다. "어떻게 된 거야?"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규리하공? 안됩니다!" "괜찮아. 파라말. 공을 놔둬." 규리하공? 탈해는 그 명칭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탈해는 누군가의 손이 안대 근처에 닿았을 때 비로소 그것이 정우를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탈해는 그 깨달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안대가 치워졌다. 탈해는 정우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정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탈해는 그 얼굴이 사실 인지, 그렇잖으면 그가 만들어낸 환상인지 알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 다. 그런데 그의 손은 불타고 있었다. 탈해는 다른 손을 보았다. 그 손 또한 일렁거리는 불로 감싸여 있었다. 탈해의 두 팔과 가슴과 무 릎…… 그의 몸이 불길로 감싸여 있었다. 탈해는 놀라서 그 불길을 지웠다. 정우가 웃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 탈해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우의 뒤편에는 경악한 얼 굴의 사람들이 보였다. 사라말과 파라말 형제, 그리고 세레지와 아트 밀도 보였다. 사라말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놀란 것 같았다. 아트 밀은 크게 부풀어 있었고 세레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파라말은 입을 막은 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그가 입에서 손 을 떼고 말했다. "어떻게? 각하. 어떻게 열이 없이 빛뿐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저 희들이 보기엔 활활 타는 불로 감싸여 있었던 것 같은데." 정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안대를 들어올려 살 짝 흔들었다. 담담하게 바라보던 사라말이 부연했다. "안대도, 옷도 타지 않았잖아." 파라말과 세레지, 그리고 아트밀이 아아 하듯 입과 부리를 벌렸다. 정우는 두 팔을 들어 탈해의 목을 감쌌다. 그녀는 탈해의 가슴 위에 엎드리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탈해는 주춤거리며 손을 들었다. 조금 후 그 손은 정우의 등에 살짝 포개어졌다. 탈해는 정우를 깨지기 쉬운 물건처럼 보듬어안았다. 도 깨비 무사장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정우." =============================================================== 25챕터 끝났습니다. 시스템 정기 점검 때문에 늦었습니다. 하이텔 웹이 사라지고 파란으로 통합되면서 텔넷 시리얼란으로의 접 근이 제한되나 보군요. 이 잡문을 퍼가시겠다는 제안을 하신 분들이 게셔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하겠 습니다. 이 잡문에 대한 비평 보내주십시오. 옛날의 경험 때문에 매수 제한 하겠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쓰라거나 할 수는 없으니 매수 외엔 기준 을 둘 수 있는 것이 없군요. 제가 연재하는 한 회 분량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이백자 원고지 백 매 쯤 됩니다. 동어반복적으로 쓰거나 여러 사람의 글을 모아 하나로 만드는 등의 치트키는 쓰지 말아주시 기 바랍니다. 외계어나 이모티콘 등은 사양하니 한글패치 후 보내주 십시오. 검토 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타자 혼자 볼 테니 검토가 100% 객관적일 거라고 약속드리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불펌하신 분들은 삭제해주십시오. 예의가 아닙니다. 무 례를 눈감아달라고 하시기에 앞서 예의를 지키려 시도하는 모습을 보 여주시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6. 돌을 깨우는 바람 - 1 "나도 가끔 그런 일을 하지." - 사모 페이 아라짓력 32년의 초여름, 비나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움직임 들을 명쾌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당대에도, 그리고 후대에 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은 나무의 초록과 물냄새가 짙어질 무렵, 비나간 사람들에게 지극히 익숙한 골목과 광장에 지극 히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이방인들 의 모습은 이방인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묶어두기엔 그 차이점이 뚜렷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잃어버린 재산과 훼손된 명예 때문에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키탈저 사람들이었다. 시모그라쥬공의 키탈저 침략으로 유 민이 된 키탈저 사람들이 비나간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설명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설명만으로는 비나간에 나타난 키 탈저인들 중 열에 대여섯은 무기를 든 건장한 남녀라는 사실을 납득 하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가족들을 보호하고 있어야겠지만, 두세 명 씩, 혹은 서너 명씩 무리를 이룬 채 비나간의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 는 키탈저인들의 주위에는 노약자나 피보호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비나간인이 그들에게 술 한 잔을 사며 가 족들의 소재에 대해 질문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주는 술만 반갑게 받아마실 뿐 자신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러나 비밀의 서원 같은 것을 모르는 풍문은 키탈저인들의 사정을 낱낱이 까발렸다. 풍문의 지지자들은 다음과 같은 현대적 전설을 듣 게 되었다. 고향에서 도망쳐야 했던 키탈저인들 사이에서 어떤 선출 들이 시행되었다.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우연의 선택을 받아들인 자 들도 있고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손을 들어올린 자들도 있었다. 비 나간에 나타난 이들은 그런 선출을 겪은 자들이었다. 선출되지 않은 다른 자들에게 가족들을 맡긴 채 무기 한 자루를 들고 비나간으로 온 그들은, 그러나 비나간에서 잡일을 하거나 심지어 걸식을 하며 연명 할 뿐 그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같은 키탈저인 들이 비나간의 귀퉁이에서 마주치게 되면 그들은 말이나 눈빛으로 짤 막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대화는 대개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곧……" 언제나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쉽게 구분되는 키탈저인들과 달 리 명백한 특징을 찾아내기 어려운 이방인들도 있었다. 차림새도, 거 동도, 그리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들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도 천 차만별이라 이들을 범주화하는 것은 조금 어렵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관찰력이 남다른 사람에겐 포착되는 공통의 특질이 있기는 하다. 시 시한 농담에 폭소하고 사소한 언쟁에 격분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 다. 주막을 난투장으로 만들고 매일의 일과나 되는 양 결투를 벌이고 술에 만취하여 점잖은 부인네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드는 이 자들은 모 험가, 모험사업가, 매무자들이거나 혹은 그렇게 받아들여지길 간절히 바라는 풋내기들이었다. 이들에 비하면 거친 성정으로 이름 높은 키탈저인들은 오히려 점잖 은 편이었다. 하지만 키탈저인들의 조용한 거동에는 칼집에 든 칼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었다. 필요할 때를 대비하여 칼집 속에 들어가 있 다고 해서 칼이 몽둥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같은 비유를 두 번째 이방인들에게 적용한다면 그들은 칼집을 잃어버린 칼 같았다. 노출된 칼이 굳이 휘둘러지지 않더라도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주위 사 람뿐만 아니라 그 소지자까지 상처입게 하듯 두 번째 부류의 이방인 들은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성가신 사건들을 잔뜩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상처 외에 칼의 매력도 뿌렸다. 그들의 흥분된 모습, 긴장한 거동들은 비나간인들도 격동시켰다. 비나간인들은 입술을 핥으며 그 들에게 주의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리고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마지막 이방인들이 있었다. 그들을 포착하기 힘든 것은 그들이 이방인의 주요한 요소를 결여하 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 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비 나간인들은 갑자기 이방인처럼 변한 이웃과 친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도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스 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한 비나간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이방인 아닌 이방인들은 비나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많은 관심을 할애하고 있었고 그 관심을 어떤 지위에 대한 대화로 표현했다. 그것은 신화적 지위였 고 한 사람의 것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의 것인 지위였다. "왕이 될 것이다." 아라짓력 32년 초여름, 비나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과 움직임 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당대의 사람들도, 그리고 후대의 사 람들도 간단한 문장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혼란이기도 했다. 한 여인이 왕이 되려 하고 있었다. 비나간 후작궁의 후작 집무실에는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얼떨결에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눈을 찌르는 통증을 느끼지는 않는 시간이고 따라서 사람들의 활동이 생존에서 생활로 바뀌는 무렵이다. 하지만 두 사람 중 한 명은 생존 쪽에 관심을 두어야 할 모습이었다. 먹고 자는, 그리고 씻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할 듯한 모습의 여인은 비나간 후 지키멜 퍼스였다. 그 날 오전 외부 행사 계획이 없었던 지키멜은 정오 전에 잠시 눈을 붙일 요량으로 밤새도록 일을 했다. 그러나 느 닷없이 찾아온 방문자 때문에 지키멜의 취침은 미루어지고 있었다. 자꾸만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비빈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팩스벗 졸다비.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그 역사학자가 자신의 학문적 명성을 높이기 위해 나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불 쾌감도 느끼지 않아. 명성을 쫓는 것 자체는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니 까. 하지만 그 자의 방식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느껴. 그 자가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고 아라짓 왕국의 대관식 절차를 정말로 발굴해냈다 면, 그 발굴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방식은 단연코 역사학적인 방법이 어야 해." 팩스벗 졸다비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지키멜 퍼스가 진짜로 비난하 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정도로. 팩스벗의 당혹한 얼굴을 보던 지키멜 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게 내가 대관할 거라고 말했나?" "예. 각하." "그리고 내 대관식을 감독하게 되면 그의 학자인생 최대의 위업을 남길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했고?" "예. 각하." "그 대가로 아드님과 그대의 여동생이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 나?" "그 말은 안했습니다. 각하." "말만 안했다는 거지?" "……예. 각하." "팩스벗. 그대는 그 역사학자를 모욕했어. 그 분이 내 대관을 감독 함으로써 자신의 발견에 권위를 덧붙이려 시도하는 졸렬한 분인 것처 럼 만들었으니까. 교훈적인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내기로 하고," 지키멜은 말을 잠시 멈추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비나간 후는 계명성을 내뿜듯 외쳤다. "이 멍청한 놈!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가장 열렬히 떠들었던 네가 외부인에게 대관식 이야기를 지껄이고 다녔다는 거냐!" "제 여동생이 죽을 것처럼 구는 것이 보기 안쓰러워서…… 그리고 각하. 제가 과거에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제는 상황 이 다르잖습니까. 각하의 대관은 아직 공식 확인이 없었을 뿐 공공연 한 비밀……" 팩스벗은 지키멜의 표정을 보고는 말끝을 삼켰다. 살벌한 표정으로 팩스벗을 노려보던 지키멜은 이를 악물며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었 다. 검지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던 지키멜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 다. "팩스벗. 그대가 나를 실망시켰다는 것을 말해주지. 그대를 비난하 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에는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비밀 엄수의 문제가 아니다. 비밀의 주도권 문제지." "비밀의 주도권이라고 하셨습니까?" "솔직히 말해봐, 팩스벗. 우쭐한 기분이 들었지? 그 학자에게 자신 을 과시하는 즐거움을 느꼈을 거란 말이야." "그야 저도 사람이니까요." "맞아. 그런데 그걸 뒤집어 볼 생각은 못해봤나?" "뒤집는다고 하셨습니까?"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나? 당연하지. 그렇게 되도록 했으니까. 왜 그랬냐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준다는 점 또한 중요한 이유지. 공공연하지만 어쨌든 그건 비밀이고, 비밀을 아 는 자는 공모자인 셈이지. 그들은 자신이 공모자인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자네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 대관에 대해 떠들면? 그러면 다른 자들은 자신이 핵심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 사실이 그렇지 않냐고? 물론이야. 그들은 진짜로 소외되 어 있어. 하지만 그걸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단 말이야. 무관심만 잔 뜩 얻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즉위 기념 사업이 전쟁이 될 우 리 입장에서 가장 사양하고 싶은 것은 무관심이지. 알겠나?" 팩스벗은 이해했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지키멜은 눈 주위를 다시 문질렀다. 그 동작에는 눈의 뻑뻑함을 좀 완화시키고 싶다는 직접적인 의도도 있었고 현시욕에 사로잡혀 사태 를 악화시키는 부하 때문에 일하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관리자의 모습을 연출하려는 간접적인 의도도 있었다. 지키멜이 바라는대로 되 었다. 팩스벗은 자신이 고생하는 주군에게 자신의 뒤치다꺼리까지 맡 기는 멍청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팩스벗의 얼굴을 주의깊게 관찰한 지키멜은 보다 명료해진 눈으로 말했다. "팩스벗. 그대의 주군은 왕이 될 것이다." 팩스벗의 얼굴에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자괴감이 자긍심으로 바뀌 는 속도는 극적이라 할 정도였다. 지키멜이 말했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이 주군을 왕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해선 안된다. 그게 진짜 그대가 한 일이라도. 왜냐 하면 다른 자들이 느껴야 하기 때문이야. 물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자들이 그대와 대등한 척하면 기분이 나쁘겠지. 하지만 그게 정치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들이 영광을 누리고 진짜로 일을 한 자들은 세금 도둑이라는 평을 들어야 제대로 된 정치지." "그렇…… 습니까?" "명백히 그래. 정치의 유일한 목적이 그거니까." 팩스벗은 지키멜이 농담을 하고 있거나 혹 잠꼬대를 하는 것이 아닌 가 의심했다. 그가 듣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파격적인데다 난해 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지키멜은 분명한 표정과 몸짓으로 수면에 대 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었다. 팩스벗은 토론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 멍청함으로 각하의 심기를 어지럽혀드렸을 뿐만 아니라 침소에 드시는 것까지 방해하고 있군요. 물러가서 벌을 기다리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둬. 그대가 말한 그 역사학자에게 가서 그가 발굴한 고대의 대관식 절차가 무엇인지 간략히 적어달라고 해. 검토 는 해봐야겠군." 팩스벗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키멜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물러가라 는 손짓을 했다. 팩스벗은 감사와 사과의 말을 몇 마디 더 남기고 집 무실을 떠났다. 홀로 남은 지키멜은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시녀를 불러 잠자 리로 안내하도록 해야겠지만 지키멜은 그것조차도 잠시 눈을 붙인 후 가 아니라면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자는 편안했다. 의자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것으로 부족한 잠을 보충해야겠다고 결정 한 지키멜은 다리를 뻗고 머리를 어깨 쪽으로 기울였다. 그녀가 부르지 않은 시녀가 찾아왔을 때 지키멜은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듭된 의심에도 불구하고 송구스러운 얼굴로 그녀 를 바라보는 시녀의 얼굴은 사실적이었다. 지키멜은 옆으로 기울였던 머리를 힘겹게 똑바로 세웠다. "뭐지?" "조금 전 기란데스 남작님의 전갈을 가져온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각하. 친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란데스 남작이 비나간후의 이십육 봉신들 중 한 명이며 비나간의 서부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을 지키멜이 떠올 린 것은 시간이 조금 지체된 후였다. 시녀는 무엇 때문에 그런 지체 가 일어났는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민망해 했다. 지키멜은 구부린 검 지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급한 용건이라든가?" "모르겠습니다. 각하."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 사람은 각하께 이걸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급한지 급하 지 않은지는 각하께서 이것을 읽으신 후에 판단하실 거라고 하더군 요." 시녀는 조그마한 피봉을 내밀었다다. 지키멜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느리게 손을 뻗었다. 피봉을 연 지키멜은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녀는 첫줄을 세 번이나 읽어야 했다. 하지만 첫줄을 이해한 후 지 키멜은 빠르게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바라보고 있던 시녀는 지키멜의 눈에 생기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편지를 다 읽었을 때 지키멜은 꽤 긴장한 얼굴로 꼿꼿하게 앉아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지키멜은 시녀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시녀가 나간 다음 지키멜은 달갑잖은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보좌가 아닌 집무실 의자라면 차라리 서있는 쪽이 위엄있게 보일 것 이라 판단한 지키멜은 창가로 다가가 문을 바라보는 각도로 섰다. 하 지만 지키멜은 곧 자신을 비웃었다. '아아, 이런. 보나마나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꾀죄죄한 후작처럼 보일 텐데.' 지키멜은 시녀에게 먼저 내렸던 명령을 취소하고 그녀가 완벽한 상 태가 될 때까지 방문자를 기다리게 하라는 새 명령을 내리는 것에 대 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러면 방문자는 한나절은 기다려야 할 것 이다. 지키멜은 방문자를 기다리게 할 경우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 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느라 지키멜은 명령을 취소 할 시기를 놓쳤다. 불편한 심정을 곱씹던 지키멜은 문득 그을린발의 침입을 생각했다. 그 때도 그녀는 꽤 졸린 상태였다. 지키멜은 자신 에게 곤란한 불청객을 맞이하게 될 때 항상 졸아야 하는 저주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얼마 후 몇 명의 비나간 병사들이 한 명의 낯선 사람과 함께 들어섰 다. 낯선 이는 인간 남자였고 절도 있는 몸가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지키멜에게 목례했다. 지키멜은 비나간 병사들이 문을 막고 사방의 벽으로 흩어지기를 기다려 말했다.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이들은 듣지 못한다." "그렇군요. 이 사람들을 흥분시킬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각하." "기란데스 남작은……" 남자는 빙긋 웃었다. "명의만 빌렸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귀관의 이름은 진짜인가?" "그것은 사실입니다. 각하. 저는 편지에 쓴 것처럼 가시나무 군단 21중대장 눈하츠 신뷰레 교위입니다." 지키멜은 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막상 찾아오자 가슴을 더 떨리게 만 드는 불청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왜 정신이 좀 더 맑을 때 오지 않았냐고 투덜거렸다. 지키멜의 열렬한 관찰에도 눈하츠 신뷰레 교위의 옷차림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수수한 편에 가까웠지만 초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도 지키멜이 찾고 싶어하는 패배감이나 초조감은 보이지 않았 다. 지키멜은 상대를 낙오병으로 취급하여 분기시키는 방법은 쓰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말을 잡아채는 걸로 해볼까. 지키멜 은 침묵으로 교위를 바라보다가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재빨리 말했다. "그럼, 용건은?" 지키멜에겐 아쉽게도 눈하츠 신뷰레는 하려던 말이 목에 걸린 표정 을 짓지는 않았다. 스스로 말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각하. 저는 친서를 가져왔습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각하께 보내는 것입니다." 눈하츠는 바라보는 감시병들을 유념하며 천천히 품속에 손을 집어넣 었다. 그의 손에서 피봉이 나온 것을 본 지키멜은 병사에게 그것을 가져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편지를 받아든 지키멜은 빠르게 그것을 읽었다. 졸음이 사라진 후였기에 지키멜은 어렵잖게 편지의 맥락을 이해했다. 지키멜은 그것을 접어 책상 위에 얹어두고는 눈하츠를 바 라보았다. "귀관의 생각은 어떤가." 눈하츠는 턱을 조금 끌어당겼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귀관에겐 그런 임무도 있을 텐데. 과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 는지 관찰하여 보고하는 것 말이야. 후작궁 정문으로 걸어오기 전 틀 림없이 여러 가지 관찰을 했을 텐데, 그 관찰을 통해 어떤 결론을 얻 었는지 알려주겠나?" "그런 질문에 대답하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각하." "신뷰레 교위. 귀관의 통찰력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동시에 과 대평가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귀관을 모르니까. 따라서 귀관이 나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알고 싶군. 만약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는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니까. 그리고 대화를 하면 귀관의 상관에 게 보고할 것도 늘어나지 않겠나?" 눈하츠 신뷰레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비나간 후작을 바라보았다. 겉 으로 태연하고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지키멜은 눈앞에 있 는 남자가 대표하고 있는 전력의 크기를 생각하며 초조한 기분을 느 낄 수밖에 없었다. 후작령 비나간에는 제국군이 들어올 수 없고 따라서 지키멜은 제국 군에 대해 피상적인 정보밖에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키멜은 제국군 의 엄한 기강과 투철한 군기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모두 선전용 문 구라고 생각했다. 그런 선입견 속에서 지키멜은 엘시 에더리가 제국 군을 규합하기는커녕 영주들의 사병으로 변해버린 제국군들에게 공격 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정보를 종합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엘시 에더리의 제 국군 규합은 호조는 아닐지언정 난항을 겪지는 않고 있었다. 보고마 다 다르고 또한 분석마다 다르긴 하지만 지키멜은 현재 엘시 에더리 의 휘하에 최소 30만에서 최대 70만 사이의 병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 해야 했다. 그 엄청난 숫자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지 키멜의 군사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그 숫자의 두 배를 가정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진언했다. 제국군은 전쟁 기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전문가 들이니 장병의 질이 다르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런 무서운 전력이 보낸 편지였지만 그 문체는 무시무시하지 않았 다. 지키멜은 조금 전 읽다가 실소할 뻔한 편지의 내용을 다시 떠올 렸다. 꿈속에서 저는 아직도 제국을 봅니다. 에누리 없이 말해 도 그것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비극이었습니다. 도무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만 이 늙은 군 인은 존경하는 대장군님에게서 한 가닥 위안과 희망을 얻 었습니다. 즉각적인 귀족원 회의 개최를 요구하는 그 분의 주장에 대해서는 각하께서도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위기는 사람들의 자질을 심사하는 엄격한 심사관입니다. 할반지통 속에서 저는 정신을 수습하여 제가 할 일을 생각 해보았습니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제가 추구해야 할 일 이 제국의 부활임을 깨달았습니다. 각하께서도 제국의 부 활을 바라시지만 처지가 다급하여 귀족원 회의에 관심을 두지 못하시는 거라 생각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저 남부의 흉적들을 퇴치하여 각하의 시름을 덜어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인샤 대사원에서 열리게 될 귀족원 회의에서 각하를 뵙기를 바랍니다. 지상에 다시 제국의 위엄이 떨쳐 지길 앙망하는 늙은 군인의 목소리를 들어주십시오. 마른 나무에 꽃이 필 수 있음을 보여주십시오. 그 문장 어색한 편지를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상장군이나 되는 인물의 소행으로는 기벽에 가깝지만, 그 경 고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키멜은 우울한 기분 속에서 엘시 에더리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군사 전문가가 아닌 그녀였지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만약 팔디곤 토프탈의 시모그라쥬군과 엘시 에더리의 제국군을 앞뒤 로 맞이하게 된다면 지키멜은 즉시 잘 드는 칼 한 자루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자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머리를 박박 밀고 하인샤 대사 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키멜이 승려가 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상상 해보고 있을 때 눈하츠가 말했다. "각하. 제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각하께서는 칼리 도백이 주장한 귀족원 회의 개최에 대해 어떤 공식적인 견해도 말씀 하시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한 적 없어." "그렇다면 각하께서 귀족원 회의 개최에 대해 부정적이시거나 혹은 아무런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지키멜은 긴장감이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아주 주의깊은 대답이 필 요한 시점이었다. 그녀는 숨을 잠시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최후의 대장간은 봄이나 여름, 가을을 모른다. 물론 밤과 낮의 길이 가 극단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일년을 몇 개의 기간으로 나누는 쓸 모있는 일은 이곳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탄생과 성장, 그리고 쇠퇴 는 이곳에 없다. 알려진 가장 오래된 역사보다 더 오래된 옛날부터 최후의 대장간은 얼어붙은 공기와 차가운 얼음 등 변하지 않는 것들 만을 벗삼아 변하지 않는 무기들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하루 동안에도 몇 번이나 바뀌는 맥박처럼 최후의 대장간의 맥박 또한 변화하기는 한다. 예를 들어 구름 낀 나날이 지나치게 오 랫동안 계속되면 최후의 대장간도 어쩔 수 없이 작업을 잠시 중단해 야 한다. 대장장이들이 무기 제작에 사용하는 별철은 최후의 대장간 중심부에 있는 별빛로에서 제련되는데 그 별빛로는 나무나 숯이 아닌 집중된 별빛으로 광석을 제련한다. 그런데 폭풍이나 눈보라 - 이 지 역에서는 대단히 흔한 기상현상이다. - 등이 맹위를 떨치는 기간이 찾아오면 별빛로에 모이는 별빛 또한 줄어들고 그 경우 제련 작업이 불가능해진다.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별빛로의 주인인 최후의 대 장장이는 항상 충분한 별철 여유분이 있도록 배려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워낙 많은 별철이 소비되기 때문에 작업 중단은 심심찮게 일 어난다. 따라서 헤치카는 작업 중단에 대한 돔의 불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서 빨래를 하고 있는 돔을 보던 헤치카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네 면도칼 하나 만들어야겠구나." 허리를 들썩거리며 빨래통 안쪽을 공략하던 돔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헤치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털이 난 것은 벌써 1년 전 의 일이었고 그래서 지금 돔은 무성한 수염을 하고 있었다. "이제 알아차리셨어요?" "응. 그 깃털, 아니, 수염이지? 그거 나니까 보기 좋다만 밥 먹을 때 귀찮겠구나. 밖에 돌아다닐 때 얼음이 달라붙기도 할 테고." 무슨 그런 무신경한 태도가 있냐고 따지려던 돔은 문득 기묘한 사실 을 깨달았다. "잠깐, 방금 제 면도칼 만들어준다고 했어요?" "그래." "저는 레콘이 아닌데요?" "누가 별철로 네 면도칼 만들겠다고 했냐. 그냥 철로 하나 만들어주 지." "아아, 그래요? 괜찮아요. 기를 생각이니까." "그러냐? 알았다." 돔은 다시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헤치카를 보다가 묘한 소리를 내며 빨래를 주무르는 일로 돌아갔다. 헹궈낸 빨랫감을 집어든 돔은 그것 을 난로 옆의 빨랫줄에 걸었다. 헤치카는 방안의 공기가 꽤 습하다고 생각하며 주렁주렁 매달린 빨랫감들을 바라보았다. 돔은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이라는 듯이 행동했지만 세탁된 빨랫감들은 세탁자의 세심함을 증거하듯 깨끗한 상태였다. 그 빨랫감 어디에도 아실의 대소변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돔의 배려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비록 의식을 잃은 채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기묘한 상태로 누워 있었지만 아실은 항상 깨끗한 몸에 깨끗한 옷을 걸친 채 누워있었고 그 머리 또한 가지런히 빗질이 되어 있었 다. 그 모두가 돔이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돔은 결코 아실의 안대는 건드릴 수 없었다. 의식불명 상태로 처음 그들에게 온 이후로 아실은 안대에 대한 접근 금지 조처를 완강하게 유지했다. 돔이 젖은 수건으 로 아실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악어를 세수시켜주는 듯한 긴장감을 느 끼지 않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아실도 이제 돔이 안대를 건드리는 것을 포기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돔은 아실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빨랫감들을 모두 빨랫줄에 걸고 뒤처리까지 끝낸 돔은 다시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닥의 깔개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헤치카는 자신의 피보호자와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 거냐? 별철 공급 중단을 한두 번 겪 은 것도 아닌데.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일어나는 일이지. 덕분에 쉴 수 있게 되었으니 좋잖아." 돔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돔의 얼굴 중 수염으로 덮혀 있지 않은 부분이 벌겋게 변했다. "헤치카!" "왜?" "전 벌써 오래 전부터 쉬고 있었잖아요! 발케네에서 두 번째 주문이 온 이후부터! 아니, 제가 수염 기르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해도 되겠 네. 그 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니까. 그 동안 당신은 계속 주문 받은 단검만 만들었잖아요. 저는 일 년 가까이 장사를 안 했어요!" 헤치카는 머리를 긁적였다. "너 쉬게 된 것이 며칠 전부터 아냐? 별철 공급이 끊겨서……" "예? 뭐라고요? 일 년 전부터에요! 너무하지 않아요?" "음. 그랬구나. 그러고보니 그 동안 계속 주문 받은 단검만 만들었 던 것 같군. 그러면 너 일 년이나 놀고 있었냐?" 헤치카는 그제서야 돔의 짜증을 이해했다. 돔은 별철 공급이 끊어져 작업이 중단된 며칠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일 년 이상 할일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돔은 미치광이를 보는 시선으로 헤치카를 바라보았다. "농담한 거 아니에요? 정말 제가 그 동안 계속 놀았던 거 몰랐어 요?" "미안해. 몰랐어." "말도 안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헤치카도 그것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왜 자신이 돔의 사업 중단을 깨닫지 못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글쎄. 그 동안 주문받은 거 만드느라 계속 바빴고…… 무슨 놈의 주문이 그렇게 끝도 없이 들어오는지. 그리고 네가 심심해하는 것처 럼 보이지는 않던데." "그야 시체나 다름없는 여자 한 명 뒤치다꺼리 하느라 빈둥거릴 시 간은 없었지요. 하지만 장사는 못했어요. 팔 물건이 있어야 팔지요." "그래도 주문 받은 거 보내면 꼬박꼬박 돈은 들어오잖아." 무심히 대답하던 헤치카는 돔이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달 았다. 헤치카는 그 표정이 적개심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는 약간 충 격을 느꼈다. 돔은 콧김을 씩씩 뿜어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치카. 제가 돈이 좋아서 장사하는 거였어요? 돈 있어봐야 쓸 곳 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네가 돈이 아니라 흥정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은 나도 알아. 내 말 뜻은 장사 안해서 굶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지루한 것뿐이니 그렇 게 화를 낼 필요는 없다는……" 돔은 일어나 섰다. 그리고 앉아있는 헤치카를 쏘아보며 외쳤다.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아요, 헤치카! 굶지는 않는다 고요? 그러니 만족하라고요? 젠장.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대장장이 일 계속 하고 있잖아요! 저는 뭐에요?" 돔은 격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벽을 걷어찼다. 단단한 벽은 물론 작은 진동도 보여주지 않았고 대신 돔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주 저앉았다. 돔은 아픈 발을 주무르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헤치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너 성을 가질 때가 된 것 같구나." "뭐요? 성?" "그래. 돔. 네 성을 만들고 여길 떠날 때가 됐구나." 돔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헤치카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장 먼저 지 어보인 표정은 거부감이었고 그 다음 공포감과 분노도 조금씩 나타났 다. 그러다가 돔은 슬픔을 내비쳤다. 헤치카는 부리를 닫은 채 그 표 정 변화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돔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픈 발을 건성으로 주무르며 돔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돔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떠난다고요?" "그래도 될 것 같군." "제가 필요없어요?"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넌 자기 다리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아기였다. 그 당시 네게 무슨 필요가 있었을 것 같냐? 필요는커녕 아주 귀찮기 만 했지." "그거야 어릴 때 이야기죠. 하지만 자라서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후 엔-" "넌 내가 필요했냐?" "예?" "네가 팔 단검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필요했냐? 그래서 나와 함께 살았냐?" 돔은 혼란스러워 했다. 더 이상 발이 아프지 않았지만 돔은 계속 발 을 주무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헤치카는 두 팔을 들어 머리 뒤에 받 치며 말했다.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가라고 하는 것은 아니야. 애초부터 서로가 필요해서 함께 산 건 아니잖아. 우리는 그냥 재미있게 살았어. 17년 동안." 돔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그래." 돔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의미한 동작이었다. 그러다가 돔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치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오줌 좀 누고 올게요." 돔은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나갔다. 요의는 없었다. 돔은 잠시 조용히 있고 싶었다. 하지만 바깥은 돔의 희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후의 대장간 안쪽에는 많은 레콘 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혀를 살짝 빼어물었던 돔은 언젠가 살인기 사를 놀라게 했던 신묘한 걸음걸이로 순식간에 레콘들 사이를 빠져나 왔다. 잠시 후 돔은 최후의 대장간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별철의 공급 중단을 일으킨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도무 지 사색에 잠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돔은 고집스럽게 계단을 내려갔 다. 계단 끝에서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간 돔은 잠깐 동안 의혹에 빠져 뒤를 돌아보았다. 최후의 대장간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돔은 팔짱 을 낀 채 폭풍 한가운데 섰다. 그러자 자못 기분이 괜찮아졌다. 돔은 폭풍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강인하고 과감한 남자의 얼굴이라 생각되 는 표정을 지어보았다. 사실 그곳은 최후의 대장간이 바람을 막아주 는 곳이어서 바람이 좀 약한 곳이었고 돔이 짓고 있는 표정은 흉하게 일그러져 마치 환자처럼 보이는 것이었지만 돔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 는 사람은 없었다. 돔은 약간의 도취감 속에서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을 떠나 남쪽으로 간다고? 폭풍 속으로? 돔은 입술을 비틀어 씩 웃어보았다. 하지만 바람에 밀린 수염이 마 구 입안으로 쏟아져들어와 황급히 입을 도로 닫아야 했다. 그 덕분에 체면이 약간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돔은 팔짱을 풀고 허리에 손을 얹 었다. 그러자 다시 기분이 우쭐해졌다. 성을 만들고 떠날 때가 되었단 말이지? 돔은 폭풍이 꿈틀거리는 어둠을 매섭게 응시했다.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고 꼭 그만큼의 흥분과 호기심도 있었다. 돔은 핏줄 속에서 피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어둠도 부글부글 끓고 있 었다. 돔은 약간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 때 어둠이 말을 걸어왔다. "인간. 말 좀 묻자." 돔은 기절초풍할 뻔했다. 강인하고 과감한 사내는 순식간에 사라졌 다. 돔은 눈을 꿈뻑거리며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돔이 최후의 대장간에서 레콘들과 함께 17년을 살았던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실 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것은 두번째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위쪽을 봐." 돔의 시선은 낮았다. 창피함을 잔뜩 느끼며 돔은 레콘에게 어울리는 높이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희끄무레하게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 곳에 레콘의 머리가 있다고 가정한 돔은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 러자 꿈틀거리는 폭풍처럼 보였던 것이 깃털이 심하게 펄럭거리는 레 콘의 몸으로 바뀌었다. 돔은 두어 걸음 걸으면 부딪힐 곳에 레콘이 서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레콘의 머리가 있는 쪽을 보았다. "뭘 물어보려는 거죠? 여기가 최후의 대장간이냐고요?" 레콘이 우습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왔다." "그러면?" "여기에 혹시 지멘과 아실이 있나?" 돔은 약간의 경계심을 느꼈다. 황제사냥꾼은 황제 자신이 사라진 이 후로 더 이상 황제사냥꾼이 아니게 되었고 살인기사가 마지막으로 방 문한 이래 이곳으로 두 사람을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돔은 레콘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당신은 누군데요?" "나는 뭄토다." =============================================================== 26챕터 시작합니다. 아래의 글은 네이버 카페 '피눈물을 마시는 새'의 운영자이신 네스 트로님이 보내주신 두 편의 글입니다. 이런 분석이 맞다는 것은 아닙 니다.(사실 몇 부분은 타자로 하여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게 하기도 했습니다. 타자가 아무런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적 팬터지' 에 대한 언급이나 타자의 졸문이 훌륭한 글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 게 하는 부분 등이 그렇지요.) 그리고 읽는 분 자신의 감상을 포기하 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다른 분의 감상을 읽어보시는 것도 재미있 으실 것 같아서 게재합니다. [1] 변화의 장, 북부 작가께서 '눈물을 마시는 새' 의 후편으로 연재하고 있는 '피를 마 시는 새' 는 전작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관이 공유되는 것뿐만 아니라 전편의 혈통과 사건, 정통성, 문화적 시류가 이어진다. 그러므로 어떤 세계관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에, 설정상 몇십 년의 시간이 흐른 것을 전제로 변화된 일부를 제외 한다면 나머지는 모두 전편에서 언급된 것들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끝나는 시점에서, 문화적 변화를 담당하는 신인 어디에도 없는 신이 케이건 드라카라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면서 - 혹은 그렇게 추측되면서 - 남북부는 대변화의 계기를 맞이한다. 역시 어떠한 상황에서든 변화는 기존 사회의 반발을 겪기 마련이지만, 북 부와 남부가 정체된 상황을 놓고 가지는 인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 었다. 그것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시대정신의 차이인지, 혹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북부보다는 남부 가 훨씬 보수적이었다는 것이다. 권능왕이 한심스럽게 행방불명된 이후, 북부는 항상 왕을 원해 왔 다. 정치적 구조에서 왕이 있는 구조와 없는 구조가 크게 차이가 나 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 위에 지배자가 하나 더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적어도 일반 백성보다 다스리는 자들에게 엄청난 차 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명시적으로 왕의 귀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인샤 대사원에 모인 각처의 지배자들을 공통적으로 묶어내 야 할 필요가 있다면, 모든 북부인이 그런 것처럼 그들 또한 '왕의 귀환을 바라는 자들'로 이름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현상적 상황만을 놓고 보자면 변화에 적극적인 것은 남 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전쟁을 주도한 자들이, 여존남비의 나가 사회에서 수백 년을 억눌려 지냈던 피지배의 성인 남자라는 사 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전쟁 직전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 는 자들의 대표' 인 갈로텍은 비아스에게 여자들의 보수성을 나무라 며 개전의 필요성을 역설한 적이 있다. 제 2차 대확장 전쟁은 남자인 수호자들이 여신의 힘을 빌어 주도적인 위치에 서지 못했다면 일어나 지 않을 전쟁이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갈로텍과 대립하 게 된 하텐그라쥬 평의회가 소메로 마케로우의 발언을 지지하면서 그 녀를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가 되는 데에 제청하는 것으로 충분히 증 명될 수 있다. 소메로 마케로우는 평화로웠던 이전의 보수적 사회를 지지하고, 수호자들이 일으킨 전쟁을 남자들의 무가치한 소동으로 치 부함으로써 위협받고 있는 여자들의 우위적 성 위치를 회복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정체된 상황을 놓고 언제나 변화를 바라는 자들과 - 물론 그것이 더 옛날로 돌아가는 반동적 복고주의일 가능성은 있지만 -, 지금 이대로 가 좋다며 변화를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자들이 있다고 할 때에 새로 운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 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초기 남부의 도발로 시작된 변화의 양상은 점점 그것을 주도하는 쪽이 북 부로 바뀌게 된다. 이 변화라는 것이 어떤 효과적인 국가 체계를 새 로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를 주도하는 세력의 크기가 커 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라짓 제국과 지도그라쥬를 주축으로 하는 남부가 대결한 것은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남북부가 벌인 마지막 대결이었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사도 라수 규리하와 대수호자 키베인의 회담에 따르자면, 갑작스러운 남북부 판도의 변화에 따른 불안 요소의 축적 이 가져온 비극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단편 적인 분석은 역사학자들을 즐겁게 해줄지는 몰라도 정치학자들을 즐 겁게 해 주지는 못한다. 사실상 변화의 주도권, 남북부 정치적 판도의 주도권은 대호왕과 그 의 군사들이 하텐그라쥬에 난입할 때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보는 편 이 옳다. 천일전쟁은 북부로 넘어간 주도권을 다시 빼앗아 오기 위한 남부의, 나쁘게 말하자면 '마지막 발악'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 다. 속성으로 제국을 완성하고자 했던 천재적인 원시제가 이끄는 북 부의 아라짓 제국을 지도그라쥬가 전쟁으로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 다. 명시적으로 남부가 패배했다는 기록도 없지만, 어쨌든 이로 인하 여 아라짓 제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모든 변화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천년 전에도 천년 후에도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가만히 있는 돌덩 이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빗물에 깎이고 바람에 에면서, 뜨거운 태양과 차가운 달에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 모습이 변해야 그것이 역사가 되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작과 달리 당 작품에서 남부가 이야기의 중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중 있게 등장할 수 없는 것, 그나마 등장한 시모그라쥬도 아라짓 제국으로 북진하는 것은 북 부가 모든 역사와 이야기의 중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2] 신 아라짓 왕국과 아라짓 제국 봉건 국가가 항상 왕권의 약화로 곤란함을 겪고, 이것을 극복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로 나라가 왔다갔다하는 것은 고대와 중세 정치사의 상례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통치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불가결 한 것이 정보통신의 수단이다. 군사력만으로는 창업은 할 수 있다. 춘추시대 비교적 소국 축에 드는 노나라보다도 못했던 나라가 있으니 그것이 주 왕실이다. 이런 주나라도 은주혁명 초기에는 은나라 80만 군사를 격파한 우수한 군사력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제후국이 조공을 소홀히 해도 그것을 파악할 방법이 없고, 제후들이 자신들의 영지에서 몰래 군사력을 키워도 그것을 확인할 수단이 없다 면 이미 그 나라는 망한 것이다. 한 무제는 주금(酎金)으로 왕권 강 화를 꾀했지만 주 왕실에게 있어 기준 미달의 조공이란 왕실의 몰락 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상징이었을 따름이다. 진시황이 제위 내내 나 라를 순시하고, 카롤루스 대제 또한 많은 시간을 들여 변경백령을 일 일이 방문한 것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신 아라짓 왕국은 봉건 국가이다. 그것도, 초기에는 국왕 직할령이 하나도 없는 대단히 위험한 형태의 봉건 국가였다. 제 2차 대확장 전 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돌아온 북부의 왕은 귀환하자마자 불사의 괴물 들인 남부와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떤 일률적이 고 정합성을 담보할 수 있는 행정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일원화된 명령선을 지닌 군사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제 2차 대확장 전쟁 당시의 북부군은 그 또한 왕의 군대이기는 하지만, 굳이 역사학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귀족 연합군의 성격이 강했다. 대호왕이 직접적으로 군대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라수 규리하는 대호왕을 버리고 남 부로 진격했다 -. 라수 규리하가 전략을 맡고, 괄하이드 규리하가 전 술을 맡은 것은 대호왕이 이런 분야에 문외한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 게 작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급조된 북부 연합군을 통제하는 데에 강대한 규리하의 권위가 상당부분 쓸모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 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 2차 대확장 전쟁이 끝나고, 대호왕과 신 아라짓 왕국은 승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만약 하늘누리가 만들어지 지 않았다면 아라짓 제국은 성립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며, 신 아라짓 왕국 또한 존속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북부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호왕이 국왕인 나라가 존속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비 상한 수단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전근대적인 통치권력은 거리에 반비례한다. 수도로부터 멀어질수록 왕권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지방 영주의 권력이 강해진다. 이는 상식 적인 정치사에서 절대로 극복될 수 없는 원초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라수 규리하는 엄청난 면적으로 떠다니는 평반면이라 할 수 있는 하 늘치의 등위에 수도를 건설케 함으로써 이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 하였다 - 물론 라수 규리하가 수도 건설을 주도했다는 기록은 없다 -. 하늘치 위에 건설된 신 아라짓 왕국의 수도 하늘누리가 가져다주 는 이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물리적인 위치의 우위다. 공중을 이용하는 군대가 없었던 세 계관에서의 일상적인 전투는 아군과 적군의 높낮이가 항상 거의 비슷 했다. 이는 어떤 특수한 지형적 상황이 아니고서는 전투상황을 고려 할 때에 고도가 큰 변수가 되지 못해 왔음을 뜻한다. 그런데 하늘누 리는 공중에 떠 있다. 이 하늘누리로부터 무력이 사용될 경우 전략가 들은 기존의 전략 전술을 모조리 폐기해야 한다. 엄청나게 높은 고도 로부터 내리꽂히는 공격이란 유사이래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누리를 통하여 국가를 통제하는 데에 어느 정도 필요한 군사적 물리력을 상상 이상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초기 전쟁의 여파로 따로 더 많은 군사를 둘 수 없었던 북부에 회복의 시간을 줄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200만 제국군이 처음부터 200만이지는 않았 을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수평적인 위치의 변동이다. 말 그대로 하늘누리는 떠 다니는 이동수도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근대적인 통치권력은 거리에 절대적으로 반비례하게 되어있다. 이 거리는 물론 수도와 지 방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때때로 통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천 도가 단행되는 것은,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지만, 수도와 지방의 거리를 새롭게 설정함으로써 중앙정부의 정치적 영향 력을 일신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그런데 이 하늘누리라는 수도는 '언제나 천도중' 이다. 언제나 원할 때마다 수도와 지방의 거리를 마음대로 재설정할 수가 있다. 국왕은 굳이 수도를 비워두고 지방을 순시하는 위험과 수고로움을 감수할 필 요 없이 나라 전체를 언제나 자신의 영향권 하에 둘 수가 있다. 가장 중요한 전투단위와 행정단위가 하나 되어 원하는 장소로 언제든지 이 동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이전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거니와 이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권력이 극단적으로 전제화 될 수 있 다. [3] 치천제와 서약 지지파 원시제의 뒤를 이어 아라짓 제국의 지배자로 등극한 '하늘을 다스리 는 황제' 인 치천제 라세에게는 제국을 완성해야 하는 책무가 있었 다. 초인적이고 천재적이었던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에게 하나의 결 점이 있었다면 너무 일찍 죽었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 하지만, 만약 원시제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규리하를 중심으로 하는 서약지지파의 준동이나 발케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원시제의 뒤를 이은 치천제는 마찬가지로 하늘누리가 가지는 물리적 이점과, 뱀단지를 통한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정보통신 체계를 이용 함으로써 원시제 시대 이상의 전제 권력을 조성한다. 사실 진정한 권 력이란 직접 창칼을 들이대어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 하도록 하게 만드는 힘이다. 200만 제국군과 하늘누리를 가진 치천제 가, 명백하게 저항한 규리하와 발케네를 제외하고는 어떤 곳에 권력 강화를 목적으로 무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은 없다. 우리가 볼 수 있었 던 것은, 제국 각처의 분쟁을 조정하는 조회에서 치천제가 권고의 방 법으로 신민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모습이었다. 원시제와, 그의 뜻을 이은 치천제가 완성하려 했던 제국의 모습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치천제가 황권 강화사업을 벌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아라짓 제국은 황제 국가이지만,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봉건 국가이기도 했다 - 공작령은 제국군의 출입을 거부할 권리가 있 었다 -. 전북부 6억의 신민을 다스리는 데에 일극 직할 체제는 사실 상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봉건 제도는 그것이 상당하든 부분적으로 든 존속시켜둘 필요성이 분명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황권을 위협 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여서는 치천제가 두고볼 수 없는 것이다. 규리하의 서약 지지는 그 의도가 정말 서약이라는 가치를 귀히 여기 는 순수한 것에서 출발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서약 지지파들 의 순수한 대의는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방 법인 서약을 지키기 위하여', 규리하 변경백 아이저 규리하는 '황제 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시니컬한 상황 이외에도, 서약 지지파가 주 장하는 내용을 따른다면 이것은 황제권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책동으 로 볼 수밖에 없다. 지상의 땅을 가지려 하지 않는 치천제의 의지대로 아라짓 제국에 황 제령은 없지만, 새로이 개척되거나 정복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중앙정부로부터 행정관이 파견된 제국령은 각처에 존재했다. 황제가 간섭할 수 없는 지방 영주들의 땅과 달리, 이 제국령이 황권을 공고 히 하는 데에 그 영향력이 크든 작든 하나의 지지력이 되는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제국 행정관의 경우 황제와 봉신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서약이 유지된다면 제국령의 신민들은 황제에게 직접 충성의 서약을 해야 하므로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것을 해결 하는 방법으로 서약 지지파가 내어놓은 대안이 제국령의 점진적인 축 소다. 결국 이는 완전한 제국령의 삭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고, 그 제 국령이 어떠한 형태로든 봉신들에게 하사된다면 상대적으로 황제권은 약화되고 지방 영주들의 세력은 강화될 것이다. 서약을 폐기하여 전 제국에 일률적인 통치 구조를 완성시키고자 하 는 치천제의 의지는, 오히려 충성의 서약으로 유지되는 봉건적인 구 조에서 볼 때에 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개연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규리하는 규리하 변경백 아이저 규리하의 선 언에 따르자면 '제국'이 아닌 '황제'에게 반기를 들게 되었고, 하늘 누리의 압도적 무력에 간단히 진압되어 버리고 말았다. 첨언하자면, 이는 서약 지지라는 가치를 놓고 그를 지지하는 규리하 와 이를 반대하는 황제가 대립한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이는, 서약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상당수의 지방 세력들이 있 음에도 굳이 규리하가 중심이 되고 규리하가 정벌의 목표가 되었다는 점에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전근대적인 통치 구조에서의 국왕과 변경백의 관계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 이다. 변경백은 왕국 내 또 하나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갖 는다. 고 아라짓 왕국법을 상고하여 만들어진 아라짓 제국의 귀족법 에 따르면 변경백의 지위는 공작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이다. 그런데 이런 변경백의 권리는, 변경백이라는 제도가 정착되면서 후세에 정리 된 법률의 의미로 한정시키기에는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이런 막강 한 권력을 어째서 유독 변경백에게 허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느냐 는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변경백의 책무는 말 그대로 변경을 방위하는 것이다. 물론 이 변경 이라는 의미가 반드시 국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자 연적 장애에 의하여 중앙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운 지역을 대리통치하 는 경우에도 그 대리인을 변경백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변경백의 권 력은, 나아가 변경백의 정체성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이 지속적으로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만 유지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 변경백령은 언제까지나 변경으로만 남아야 한다. 이동수도 하늘누리가 건재하는 한 아라짓 제국에 변경은 없다. 모든 지역이 수도 인접 지역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누리가 아라짓의 수도가 되는 그 순간 변경백의 권위는 그저 일반적인 지방 영주의 그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고 아라짓 왕국 시대까지 가문의 혈통이 이어진다고 주장하며, 왕의 귀환을 위하여 왕의 것을 지켜왔 다는 자부심의 규리하에게 이는 실제 이상의 모욕이었을 수 있다. 또 한 황제로서도,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변경백이라는 것 을 제국 내에 그대로 존속시킴으로써 막강한 지방 권력을 용인하기보 다 황제의 영향권 아래에 두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규리하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규리하는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제국 정부는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대 귀족인 규리하 변경백령을 굴복시킴으로서 제국에 그 위엄을 떨치게 되었다 - 한편으로 불순한 의도를 가진 무리들을 더욱 자극하거나, 혹은 그 뜻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 그리고 황권 안정사업의 마지막 귀결인 '북부인에 의한 북부 왕조의 승통'을 이루기 위한 작업의 초 석을 놓았다. 엘시 에더리를 전쟁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4] 엘시 에더리와 발케네 전쟁 우리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치천제는 황권을 강화 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치천제의 모든 정치적 행 동을 그러한 목적의 맥락에서 이해해왔다. 1인자의 절대 권력을 유지 하기 위해서 2인자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2인자가 존 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가능한 2인자를 많이 만들어놓는 것이 그나 마 낫다. 그럼에도 후자가 전자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위험한 상황 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치천제가 황권을 강화하고 안정시키려 하는 과정에서 치천제 는 이에 정면으로 반하는 존재를 함께 키워 왔다. 그가 강대한 칼리 도의 백작이자 200만 제국군을 통솔하는 황제의 대장군인 엘시 에더 리였다. 게다가 엘시 에더리에게는, 동원 병력 만명 미만의 인원으로 벌이는 일에 반역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초 법적인 면책특권을 지닌 만병장이라는 직위가 보태져 있었다. 제국인들은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방기해 왔다. 그 치밀함이 원시제 에 비견되는 치천제의 완벽성을 믿고, 한편으로는 야심이라고는 조금 도 없는 성실함의 화신 엘시 에더리의 성품을 믿었다. 그래서 결국 엘시 에더리는,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크기로 볼 때에 명실상부한 제국의 제 2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제국인에게 어떤 정치적 인 위협을 줄 수 없는 부류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것이 엘시 에더리 의 성품에 기인한 면이 큰 것인지, 아니면 치천제가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조성한 면이 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정 치적 존재로서 엘시 에더리를 우려하는 드러난 제국인이 별로 없게 되었다. 물론 언제나 가능성은 제기되어 왔다. 치천제가 엘시 에더리와 비셀 스 규리하를 혼인시키려 하고자 할 때에 비로소 귀족원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스카리 빌파를 통하여 엘시 에더리와 보다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던 락토 빌파는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 로 우려를 표시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치천제는 지속적으로 엘 시 에더리에게 중첩된 권력을 하사해 왔고, 그래서 정말 제국인들은 어느날 갑자기 '차기 황제가 될지도 모를' 엘시 에더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발케네 전쟁은 엘시 에더리와 관계가 있다기 보다는 치천제와 관계 가 있는 것이다. 발케네가 도둑의 땅으로서 유서가 깊지만, 그룸 빌 파에 의해 빌파 가문의 안정적인 통치 구조가 자리잡게 된 뒤 발케네 또한 하나의 제국을 구성하는 지역으로 인정받아 왔다. 락토 빌파가 처음부터 치천제와 제국에 역심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정황은 충 분히 존재한다. '술 퍼 마시다 대장군 자리를 빼앗긴 얼간이'라는 평 가를 자신의 아들 스카리 빌파에게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자신의 아들이 대장군이 되기를 바랬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제국 질서를 인정하며서 그 속에서 보다 큰 권력을 지향하 고자 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락토 빌파가 언제부터 역심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 은 적어도 그가 제도권 내에서 세력을 키우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의 다른 방법으로서 지속적으로 고려되어 온 것일 가능성 이 높다. 락토 빌파는 아실이 주장한 분리주의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분리주의를 통하여 오래 전부터 제국에 대항할 논리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락토 빌파는, 제국이라는 시스템이 언젠가는 완성되어야 할 것임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것이 이렇게 갑자기 한두 세대만에 완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 래서, 그 이전에는 락토 빌파가 아들 스카리 빌파와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의 혼인을 바란 것이 귀족원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되었 으나, 이 이후 이 또한 하늘누리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정략의 일환으로 이해되고 있다. 시모그라쥬와의 공조는 락토 빌파가 대단히 오랜 시간동안 반역을 준비해 왔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물론 이는 락토 빌파가 대장군 엘시 에더리를 황제로부터 떼어놓음으로써 황제를 전략적으로 불리하게 하겠다는 의도일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엘시 에더리가 발케 네 전쟁에서도 활약하여 그 명성을 다시 한번 제국 전역에 떨치게 되 는 것을 일부 우려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미 락토 빌파는 치천제의 황권 안정사업의 결과가 엘시 에더리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으며, '북부의 지배자는 북부인으로' 라는 거병의 캐치 프레이즈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엘시 에더리는 없는 편이 나았을 것 이다. 나가 지배자를 거부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났는데 인간 엘시 에 더리가 지배자가 되면 그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발케네 전쟁은 '준비된 전격전' 양상을 띄었다. 규리하 전쟁만큼은 아니지만 이 또한 상당히 단기간에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일만의 레 콘으로 이루어진 사라티본 군의 활약으로 초기 발케네에게 유리했던 전세는, 하늘누리가 식수를 방수함으로서 혼전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 다. 결국 아들 스카리 빌파에게 살해당하기 직전 락토 빌파는 하늘누 리에 항복 의사를 전달하게 되었으며, 그대로 모든 상황에 끝났다면 치천제의 의지에 따라 발케네는 제국 지도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하늘누리가 단 한 사람의 상상만으로도 통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라수 규리하의 배짱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증명해줄 뿐, 그로 인하여 제국은 전복의 위기를 맞이했다. 천경비록으로 생각 해 볼 때에 라수 규리하는 생존 당시에도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 럼에도 광활한 제국을 다스리는 정점으로 태연하게 하늘치를 선택했 다 - 물론 이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데, 하늘누리를 건설하고 나서 이미 돌이킬 수 없었을 때에 알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게다가 그것을 기록으로까지 남겼다는 것은, 라수 규리하가 이 사실을 언제 까지나 비밀로 둘 의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아실에 의해 폭주한 하늘누리는 라호친의 저 너머로 날아가 행방불 명이 되었고 제국의 시스템은 완전히 정지되고 말았다. 이것을 제국 의 멸망이라 말하지 않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시스템을 움직일 사람 들만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일 뿐 제국이라는 구조 자체는 북부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제국의 멸망이라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은, 이 광대한 시스템을 움직이려면 반드시 하늘누리 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장나 움직이지 않는 기계는 고물 취급을 받 고 버려질 뿐이다. [5] 무정부상태의 제국과 시모그라쥬의 북진 6억이나 되는 인구와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영역으로 구성되 어 있는 아라짓 제국을 다스려온 것은 하늘누리라는 정점을 지배하는 치천제였다. 하늘누리의 이동성과 뱀단지의 실시간 전달성에 의해 하 나의 단일한 행정 체계로 운영되어 온 아라짓 제국은, 그런 만큼 원 시제가 단기간에 제국을 거의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뒤집어 말 하자면 그런 특이한 요소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유지되기 힘든 구조라 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발케네 전쟁을 통하여 하늘누리 가 실종되면서 제국의 모든 시스템은 일시에 정지되어 버렸다. 이는 정치사적 입장에서 대단한 구조적 후퇴이다. 다시 반동적 봉건 시대, 전국시대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큰 국가 가 무너지고 나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군사권역의 재편이다. 200만 제국군은 아직 그 대부분이 제국 전역에 남아있다. 그러나 상 당수는 그 제국군이 주둔하는 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지방 세력으로의 흡수가 진행되고 있다. 아라짓 제국의 시스템이 정지는 되었어도 완 전히 소거되지 않는 이유는 200만 제국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제국군이 제국 전체의 권력 판도에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 때에, 제국은 사라진다. 구조가 남아있으면 정통성도 남아 있다. 아이솔 형제가 처음에는 엘 시 에더리를, 나중에는 가능성의 측면에서 비셀스 규리하를 차기 황 제로 지지하는 것은 더 이상 혼란이 가중되어 시스템에 가해지는 피 해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전에, 이를 안정시키고자 함이 다. 시모그라쥬가 대호왕의 이름을 빌어 북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 대한 정치적 기로는 이미 넘어선 셈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엘시 에더리는 남아있는 구조 속에서 대장군이라는 지위로 제국군을 규합하고자 한다. 가능은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정지된 구조 속에서 200만 제국군 을 빠른 시일 내에 규합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늘누리가 하던 일을 대지를 밟고 걸어다녀야 하는 대장군 엘시 에더리 일인이 해내 야 하는 것이니 어려움이 없을 수 없다. 라수 규리하가 이런 상황까 지 예측하고 제국 전역에 비밀 보급창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제국의 무정부상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혼란에 빠진 제 국군을 하루빨리 수습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 됨은 재론할 필요가 없 다. 이런 상황에서 시모그라쥬의 북진은 인상적이다. 시모그라쥬공이 은 거중이던 대호왕을 앞세워 북부로 진격하고 있는 것은, 일단 그가 제 국에서 황제 본인이 아닌 이상은 그 정통성에 대항할 수 없는 대호왕 을 내세웠다는 점을 차치한다면 발케네공을 포함한 북부의 귀족들과 다를 바가 없다. 대호왕이 시모그라쥬공에게 협력하고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설사 시모그라쥬공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하여 대 호왕이 아라짓 제국의 제위에 재등극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 그녀의 행적으로 판단할 때 -. 그리 된다 하더라도 실권을 쥐는 것은 시모그라쥬공이지 대호왕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것은 군사권역의 재편에 의한 혼란 이외에도, 정신적인 문제 로 제국 전역을 총체적인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 하다. 제국이라는 구조가 있고, 현재 황제와 중앙정부는 사라져 있지 만 이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추대되기만 하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 다 - 고 믿어진다 -. 이런 상황에서, 비록 대호왕이 신 아라짓 왕국 의 개조開祖이기는 하지만 대호왕은 아라짓 제국과는 분리되어 있는 정통성을 지닌다. 결국 이는 대호왕이라는, 옛날에 있었던 지금과는 다른 신 아라짓 왕국이라는 정통성이 다시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지 지금의 아라짓 제국이라는 정통성을 충족시켜줄 조건이 등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국 시스템의 재개를 도와줄 선택이라기보 다, 치천제의 후계자냐 아니면 대호왕이냐를 선택하는 골치 아픈 선 택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7] 제국 세력의 판도 현재 제국 각처의 지배자의 무리는 '황제 등극의 가능성이 있는 자' 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누어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봉건 제도의 온존으로 제국 정부가 사라진 상태에서 수많은 소국들이 난립 할 가능성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이런 황제 등극의 가능성이 있는 대 귀족간의 세력 조정으로 인해 기대 이상으로 혼란이 억제될 수도 있 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만 노력하면 제국 전체가 평온할 수도 있는 데, 그 가능성을 지닌 자들 중 시모그라쥬공과 발케네공이 여기 저기 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관계로 제국 전체가 어수선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엘시 에더리는 황제의 대장군이자 만병장이었다. 그리고 율형부사와 유수부차사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이제는 선제가 되어버린 치천제의 유지를 잇고 있다. 부사와 부차사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거의 저항할 수 없는 정통성이다. 부사와 부차사의 주장이 어느 정도 신뢰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작용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지금 으로서는 하나의 '주장'일 뿐이고, 그것을 웃는 얼굴로 무시할 수 있 는 자들이 상당수 있는 상황에서 엘시 에더리가 얼마만큼의 권위를 발휘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치천제가 원하는 대로 엘시 에더 리가 비셀스 규리하와 혼인한다면 문제는 거의 정리되지만, 엘시 에 더리와 비셀스 규리하 본인들에게 그럴 의지는 없으므로 비셀스 규리 하는 엘시 에더리와는 분리하여 고려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는 권력에 뜻이 없는 인물이지만 이번에도 성품이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처음부 터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비셀스 규리하는 규리하공에 오르지도 않았 을 것이다. 오랫동안 엘시 에더리와 연결지어 생각되어 왔지만, 결국 양자의 결합은 무산되었고 엘시 에더리가 제국군을 규합하기 위해 규 리하에서 떠난 상황에서 비셀스 규리하는 독립적으로 이해되어야 한 다. 규리하 변경백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이이타 규리하의 무리가 습 격을 하는 상황에서 규리하는 엘시 에더리에게 우호적인 세력으로 계 산될 수는 있겠지만 합산이 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유수부차사의 지적은 옳다. 본인들에게 제위의 의사가 별로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엘시 에더리나 비셀스 규리하나 둘 다 마찬가지일 것 이다. 그러나 비셀스 규리하에게는 강대한 규리하 변경백령이 있고, 판사이의 남작 발리츠 굴도하의 지지를 받으며, 세퀴라도의 지테를 당주를 외조부로 두고 있다. 게다가 비셀스 규리하에게는 하늘치와 관계된 독보적인 능력이 있다. 규리하 전쟁으로 피폐해진 규리하가 외부로부터 안전을 지킬 수 있고, 그 지배자가 차기 황제감으로까지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은 이이타 규리하가 말하는 규리하의 정통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셀스 규리하가 동원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 의 권력에 있는 것이다. 팔리탐의 진술을 따르자면 스카리 빌파는 황제감이 아니다. 그럼에 도 스카리 빌파에게는 황제군을 격파한 발케네와 사라티본 군대가 있 다. 황제의 자격에 개인적인 성품이나 능력이 완전히 배제된다면 스 카리 빌파 또한 가능성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실제로 스카리 빌파는 황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었고, 지금은 팔리탐의 조 언에 따르고 있으나 그것으로 그 야심을 접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팔리탐이 지속적으로 스카리 빌파를 통제할 수 있다면 스카리 빌파가 황제가 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스카리 빌파 를 팔리탐이 언제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모그라쥬는 상당히 의외의 요소다. 시모그라쥬가 지배되는 형태는 북부와는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시 모그라쥬의 군세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아니고, 또한 무엇 보다도 대호왕을 북진의 명분으로 삼고 있는 만큼 이는 어떤 새로운 가치판단의 혼란이 추가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대호왕의 귀환 은 북부가 귀족원 회의를 열어 자결권을 행사하여 차기 황제를 선출 하는 정통성과는 구분되는 독립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이외에도 비셀스 규리하와 관계되는 자유무역당이나, 최근의 혼 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개입 여부를 두고 갈등 중인 유료도로당이 제 국 판도에 상당한 변화의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금권으로 상징되 는 자유무역당의 지지는 곧 경제권의 우위를 가져오고, 제국 전역의 도로망을 통제하고 있는 유료도로당의 협력은 제국 전체의 행정권을 재편할 수 있는 파괴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8] 제국 제국이 너무 갑작스럽게 성립되었다는 발케네 공작 락토 빌파의 말 은 일단 옳은 말이다. 이것이 지난 수백 년간 존재해왔던 고 아라짓 왕국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라는 점에서도, 말하자면 이전에 볼 수 없 었던 너무나도 거대한 정치 체제가 일시에 등장해 버린 셈이다. 원시 제와 치천제에게는 그런 이유로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 제국 을 완성하고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통일을 완수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이제 는 이탈리아인을 만들 차례다." 사실상 원시제의 시대에 제국은 거의 완성되고 그것이 치천제에 의해 완료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럼 에도 제국이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소요를 겪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문 제가 작용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북부에 제국 은 있지만 제국인이 두루 자리잡지 않은 것이다. 황제는 발케네를 지 도에서 지워버리고 발케네인들을 모두 제국인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발케네인들은 아직까지도 온전한 제국인이 아니라 는 말이다. 이이타 규리하는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에게, 파라말 아이솔이 규 리하를 미시적인 것으로, 제국을 거시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산공부 사가 규리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는 이이타 규리하 자신은 규리하인이기 때문에, 제국보다는 규리하를 먼 저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는 왕국을 지키는 방패라는 규리하의 변경 백을 자처하는 자가 사실상 그의 주군인 제국보다 규리하를 더 소중 하게 생각한다는 선언이다. 제국이라는 정치 구조 속에서 절대로 인 정받을 수 없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성립 기간만을 놓고 볼 때에 급 조되었다고 볼 수 있는 - 대충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닌 - 제국에 그 렇게 큰 애정과 충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 또한 당연하다. 이것이 반드시 규리하 가문이 고 아라짓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유서 깊은 가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단정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 다. 먼저, 제국에 대한 불신의 이유는 앞서 여러 번에 걸쳐 밝힌 바와 같이 제국이 가지는 엄청난 영역과 정치력의 크기에 비하여, 그것이 너무나도 빨리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대단한 것은 반드시 천천히 만 들어져야 한다는 법칙은 어디에도 없지만, 대기만성이라는 고정관념 은 여전히 제국인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원시제가 그런 관 념까지 뛰어넘어 제국을 거의 완성했다고 칭송 받는 것은 순전히 원 시제 개인의 초인적인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 다. 북부의 지배자인 제국의 황제가 나가라는 사실은, 대호왕과 원시제 를 거쳐 치천제에 이르기까지 이제 대체로 부자연스러움 없이 받아들 여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에 반발하는 북부인은 계속 존재해왔을 것 이다. 나가가 북부에서 활동이 어렵고, 제국의 완성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안정적인 황권을 위해서는 먼저 안정적인 황위 계승부터 이루 어져야 하는 것임을, 락토 빌파가 북부의 지배자는 북부인이어야 한 다며 반역하기 이전에 치천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치천제에게 있어 제국의 완성은 엘시 에더리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폭군으로 생 을 마감하는 것이었을 수 있다. 황제와 제국 정부 전체를 잃어버린 이 시점에서 북부가 정도 이상으 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 을 것이다. 먼저, 북부인들은 이전의 왕이 없었던 수백 년에 걸친 전 국시대를 거쳤기 때문에 이 정도의 혼란기는 익숙한 것일 수 있다. 몇십 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선조들이 누대에 걸쳐 겪어온 상황이 기 때문에 아예 그런 적이 없었던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제국 성립의 결함에 대한 부연이며, 위에서 밝힌 이전 전국시대에 대한 빠른 적응의 근거이다. 제국이 성 립되고 나서 백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북부인들이 오히려 제국에 아직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아라짓 제국 이 성립된 후에도 규리하 지방의 신민들에게 나라님은 규리하 변경백 이었지 황제는 아니었다.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제국인들과 접 촉하는 지배자는 각처의 영주들이었고 이것은 제국 시대나 이전의 전 국 시대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상 지금 황제와 하늘누리가 사라진 공위 상황이 제국인들에게는 달리 영향을 줄 것이 없는 높고 높은 곳 의 이야기, 먼 나라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9] 분리주의와 제국의 완성 완성만 될 수 있다면 가장 빠른 절차를 밟는 것이 효율적이라 주장 하는 비스그라쥬 백작 데라시는 냉정한 실용주의자이다. 완성품의 질 을 높이기 위해서 정해진 절차를 밟는 것이 오히려 이후에 더 효율적 이라 주장하는 아실은 감상적 실용주의자이다. 둘 다 제국의 완전한 완성이라는 점을 결과로 두었다는 점에는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비스 그라쥬백 데라시는 현재의 치천제 하의 제국 체제에서, 논쟁의 대상 이 되는 레콘들이 자연스럽게 제국 체제로 편입될 것이라 주장하고, 아실은 그것은 종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레콘을 함몰시 키는 획책이라 주장한다. 통치의 효율성이라는 면만을 두고 볼 때에 레콘은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이다. 정치에 관심을 갖는 레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대단히 다 행스러운 일이다 - 그렇기에 정치에 너무 관심이 없어서, 황제가 죽 으면 그 이후의 상황을 추측해 보지도 않고 황제를 죽이겠다는 것을 숙원으로 삼는 레콘이 등장하는 경우 대단히 곤란하다 -. 사실상 생 물학적 구조로 보나 문화적으로나 일반적인 북부인, 즉 인간들과는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는 레콘들을 확실하게 통제할 필요가 있다. 치천제의 방법은 대통합과 편입이었다. 레콘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일부 잃는 한이 있어도 - 소위 가짜 레콘이라 하는 -, 제국인으로 온 전히 편입됨으로써 그것으로 레콘의 위험성을 가능한 최소화하는 것 이 우선적인 과제라고 본 것이다. 숙원이라는 독특한 레콘만의 가치 를 보고 평가할 때에도 치천제의 이런 의도는 일단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숙원이라는 가치가 절대적으로 레콘 자신에게는 소중한 것이 겠지만 그것이 다른 선민 종족의 사정은 전혀 고려치 않고 나오는 것 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제 2차 대확장 전쟁 당시 레콘 즈라더의 숙원은 나가를 죽이는 것이 었다. 이것이 나가들의 북부 침공이라는 매우 특이한 상황에서 이루 어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기기에 문제가 있다. 물론 그럴 가능성 은 거의 없겠지만, 어떤 레콘을 인간들이 지속적으로 불쾌하게 만들 었다고 하자. 그래서 그 레콘이 '인간을 죽이는 것'을 숙원으로 삼았 다고 하자. 당장 인접 사회가 대단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레콘 은 그 숫자에 관계없이, 적으로 돌리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는 존 재다. 이미 그 위험성과 가능성은 황제를 죽이겠다는 숙원을 삼은 레 콘 지멘의 등장으로 온전히 증명이 된 상태다. 아실의 방법은, 그녀가 스스로 밝힌 단편적인 설명 이외에는 실제로 적용된 바가 없기 때문에 그 효용성을 이렇다 저렇다 확실하게 이야 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분리주의의 골자, 즉 레콘만으로 이루어 진 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레콘의 분리된 정치 집단의 독립적 성립 후, 제국의로의 재편입이라는 것이 얼마만큼의 정합성을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비록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치천제와 아실의 대화에서 치천제는, 분리되어 있는 종족은 틀림없이 다른 종족과 반 복하게 된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그것은 나가들의 사례로 볼 때에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논리다. 물론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기간이 길지 않고 치천제가 말 하는 사례로 발전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수단만 있다면 아실의 방 법이 최선일 수 있다. 레콘으로 하여금 종족성을 잃게 하는 것은, 그 것이 정치적인 목적이 있든 없든 간에 종족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적인 살해에 비견되는 잔인한 일이다. 제노사이드는 반드시 생물학적 혈통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순수하게 레 콘으로만 구성된 일만 군사 집단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 다. 처음부터 정치사적으로 접근하느냐, 혹은 문화사적으로 접근하느냐 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치천제의 방법은 실행되어 일부 진행을 보았고, 아실의 분리주의는 아직까지도 '주의'로 남았다 는 것이다. 치천제와 제국 정부 실종 뒤 무정부상태가 된 제국은 단 순히 정치적인 혼란으로 결론지을 것만은 아닌, 이런 종족성이 결부 된 문제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레콘이 일만 부대를 구성한 것이 '레콘의 한계를 뛰어넘은'것인지, 아니면 '레콘의 종족성이 죽어버 린'것인지 평가할 시점은 가까운 장래에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글입니다만 비평문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눈물 을 마시는 새 - 피를 마시는 새'의 역사에 대한 역사분석 같아서 받 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네스트로님은 정치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셨다 고 합니다.)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아래에 있는 것은 두번째로 보내 주신 글입니다.) 1 『퓨처 워커』가 전작인 『드래곤 라자』의 모든 세계관과 다수의 등장인물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연속성은 결여되어 있다. 두 작품은 하나의 세계관과 중복되는 등장인물을 두고 연속적으로 벌어 진 커다란 사건을 그리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어떤 시대적 근접성 이외에 이 두 가지의 사건이 가지는 관련성은 없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작품의 관계는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는 다분히, 『피를 마시는 새』라는 작품을 형식주의적 으로 비평한다고 할 때에 『눈물을 마시는 새』의 비평과 상당 부분 동어반복이 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적이고 생소한, 그러나 동양적인 친근함을 가진 『눈물을 마시는 새』의 온 전한 세계관과 서술방식이 『피를 마시는 새』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반드시 『피를 마시는 새』에 대한 어떤 독립적인 비평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불안하고도 어쩔 수 없는 가능성을 무릅쓰는 시도 외에 달리 방법은 없어 보인다. 『피를 마시는 새』는 장편 소설이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장편 소설 인 전작의 뒤를 이어, 수치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전작과 연속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모든 설정을 능가하고 있다. 장편 소설의 사전적 정의는 분량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문학적인 시각을 보태서 가름한다면 장편 소설이 지녀야 할 필요조건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길다고 말할 수 있는 어 떤 사건 전개의 논리적 아귀를 지키지 못하는 장편 소설은 그저 많은 양의 이면지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미 팬터지라는 문학 장르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작가는 『눈물을 마시는 새』를 통하여 한국적 팬터지의 가능성을 열 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므로 새로이 『피를 마시는 새』에 어 떤 기대적인 언명을 추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장편 소설의 형태를 제시했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떤 정형화된 문학적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 실제로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 『반지의 제왕』 이 명작으로 인정받는 이유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중에 반드시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반지의 제왕이라 는 독립적인 작품은 작가가 구상한, 가상적이지만 거대한 역사의 일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역사학은 본질과 현상에 관한 선후 순서와 인과 관계를 규명하는 학 문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에서 역사를 다룰 때에, 어떤 원인이 없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대개 다음의 두 가지로 정의를 내린다. 아 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규명할 수 없는 숨은 이유가 있거나, 혹은 아 예 그 사건 자체가 모두 거짓이거나. 모든 소설이나 문학 작품이 다 역사적 구조를 담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은 장편 소설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 이다. 우리가 『반지의 제왕』을 읽고 장대한 가운데 땅의 역사 전체 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런 덕목이 작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나라에서 팬터지라는 카테고리를 지니고 선보여지는 작품들 중 아직도 많은 수가 아직도 역사학적 판단으로 볼 때에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다못해 이는 어떤 거시적인 사건의 흐름이 아니더라도, 쉽게 생각 하고 수긍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회색의 간달프가 미스란디르라 불 리게 된 데에는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극연왕의 오라버 니가 스스로 지어 썼던 케이건 드라카라는 이름에도 그것을 사용하게 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설 내의 설정은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연고가 존재 하는 편이 좋다. 그러므로 『눈물을 마시는 새』가 완결되고 『피를 마시는 새』가 연재되면서, 사건 구조의 자체에 역사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작품 내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제국>이라고 생각 한다. 전작들로부터도 작가는 국가가 가지는 여러 문화적 정통성에 무게를 두어 왔다. 그것이 대개의 상황에서는 충성이라는 보편적 가 치로 표현되곤 하였으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부터 이어지는 왕 의 귀환에 관한 하나의 패러다임은 '피를 마시는 새'라고 정의되는 < 제국>으로 귀결된다. <제국>이라는 구조를 중심에 놓고 본다면 오히 려 개성 있는 등장인물들이 한 풀 죽는 듯할 정도로 보일 지경이다. <제국>이라는 것이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이와 함께 드러나는 의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피를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북부의 국가는 전작에서 건국된 나라인 신 아라짓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나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굳이 <제국>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부여하여 등장시킨 것은 이 자체가 왕국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정체성 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에 왕의 귀환을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 리던 북부인들의 모습과, <제국>의 이름으로 짜여진 정치적 구조 아 래에서 부단한 권력 투쟁과 제국 전복을 노리는 사건들이 반복되는 모습을 단순히 조명되는 계층의 차이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 이 있다. 또한, <제국>은 인물과 대상이 역전되는 드라마틱한 상황을 상징적 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위대한 영웅이 단신으로 적들을 물리치 며 분투한 결과 결국 자신의 나라를 가지게 되는 상투적인 상황을 자 주 보아왔다. 주체는 왕국을 만들고 얻어낸 '사람'이고 그에 의해 창 조된 것은 나라이다. 그러나 『피를 마시는 새』에서 <제국>은 수동적인 외부로부터의 완 성을 기다리는 객체라기 보다는, 사건 자체를 설명하는 주인공이다. 제국을 완성하기 위해 황제가 움직이고, 제국을 전복하기 위하여 발 케네 공작이 움직이며, 제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대장군이 움직인다. 다름 아닌 <제국>이 이들을 움직인다. 물론 여기에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전작들이 어떤 비상식 적으로 특화된 존재나 상황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양상이었다면, 『피를 마시는 새』에서 그런 것은 일차적인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 로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드래곤이 등장하여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거나 어느날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 서지는 않지만, 하늘누리가 떠다니는 가운데 대단히 현실적인 정치적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 난다. 그래서 <제국>을 설명하는 것이 작가의 말하고자 하는 바나 의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 되겠지만, 연재가 끝나지 않 은 상황에서 유감스럽게도 아직 단정할 수는 없다. 2 안정된 상황이 불안한 상황으로 치닫는다는 것은 전편인 『눈물을 마시는 새』와 유사한 전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국가가 운영되는 구조에 대한 작가의 상반된 견해 가 함께 들어 있다. 이는 고대 국가와 현대 국가에서 통용되는 사회 학적 근거의 차이, 혹은 단순히 문화사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인식의 차이일 수 있는 흔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작품 초기의 사건 진행의 기제가 되고 곧 작품 전체에 전 반적인 영향을 주게 되면서 이를 작가만의 독보적인 재료로 아이템화 한 것이 있다. 바로 서약 지지론과 서약무용론의 대결이다. 역사를 통하여 충성이라는 가치가 많은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해 내는 데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가치라는 사실은 증명되었지만, 이것 이 실제로 정치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가치일수 있는지에 대 한 의문은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므로 서약무용론은 단순한 국가적 효율성의 문제로 정의해버리고 끝낼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실 제로 문화사의 초기에 어떤 의도를 지니고 성립된 가치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많은 상황에서 충성이라는 가치는 오랜 시간 동안 귀히 여겨야 할 덕목으로 인정받아 왔다. 그것은 전근대적인 국가를 좀 더 오래 존속 시키는 힘으로 믿어져 왔고, 사람이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올바른 정체성을 지닐 수 있게 해 주는 이정표로 대접받고 교육되어 왔다. 그럼에도 작가의 <제국>이 취하는 입장은 이에 대한 냉소마저 묻어 있다. 반역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지만 충성의 반대 개념 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는 <제국>을 설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버려 두었던 딸이 변경백의 자리에 오르는 아이러니컬한 상 황까지 만들어내어 규리하를 욕보인(!) 작가이지만, 한편으로 서약을 지지하는 아이저 규리하와 이이타 규리하의 도전마저 불가능한 것으 로 만들지 않는 것은 단순히 사건의 갈등을 전개시키기 위한 방법이 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치천제의 눈으로 바라본 <제국>이 잃어버린 충성 서약이라는 가치에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냉혹한 정치 구조 아 래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감상적 가치인 충성에 대한 마지막 희망인지, 아니면 잔인한 조롱의 확인사살인지 아직은 확연하 게 결론지을 수 없다. 작품 내의 비중 있는 인물들에 의해 부단히 격파되고 비하된 서약 지지론은, 그러나 결국 아이저의 말과 같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방법적 가치일 수 있다. 그것이 과거 수백, 수천 년간 인간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로 보호받아온 것은 그런 정의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그 충성이라는 가치가 정치적 정합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검증이 없었다는 점은 서약 지지론의 치명 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약점을 받아들인다 해도, 과연 어떤 방식으로 충성이라는 추상적 가치가 검증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선뜻 결 론을 낼 수 없다. 이는 규리하의 변경백이라고 해서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제국의 황제라 하여 검증이 가능한 것도 아 니다. 이에 황제는 검증이라는 절차를 아예 포기함으로써 처음부터 제국을 그것과는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제국>은 대단히 비인간적이다. 등장 인물들은 이런 <제국> 의 비인간성에 찬성하는 부류와 반대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아이 저 규리하로 하여금 황제에게 충성하기 위해 황제에게 반기를 들게 만드는 역설을 강요한 것이 <제국>이다. 이를 가지고 국가가 개인을 어떤 방식으로 구속하고 함몰시키는지에 대한 결과라고 결론지어 버리기에는 논리적인 비약이 있지만, 결국 작가가 <제국>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에 걸맞은 답이 될 것이다. 패러다임은 혼재 되기는 하지만 융화되지는 않는다. 오로지 개종만 이 있을 뿐이다. 서약 지지와 서약 무용이라는 것도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패러다임이다. 서약 지지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 가치이고, 서양무용은 대단히 비인간적인 통치방식이라 는 설명은 현상만을 지칭할 뿐이다. 인간을 신뢰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두 가지의 전제는 사실 정반 대이다. 서약을 지지하고 충성이라는 가치를 귀히 여기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불신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틀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충성을 강요하고 맹세하는 번거 로운 행위는 불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비인간적인 <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서약 무용론은 오히려 제도적 인간에 대한 신뢰로부터 시작된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합성을 담보할 수 있는 구조만 있다면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발전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배 신하리라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 굳이 배신하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말 할 필요는 없다. 충성의 서약을 주고받는 것은, 결국 주종 관계나 군 신 관계에 있어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배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 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무엇은 비인간적으로, 무엇은 인간적으로 나눠 놓고 보 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임을 증명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도 있 다. 그러나 작가의 위치가 두 가지를 놓고 완전한 중립에 있는 것 같 지는 않아 보인다. 이것이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느냐'라는 형이상학적이고도 매우 진부한 철학적 의문으로 치환되는 것은, 세상사 이야기가 다 거 기서 거기인 때문일까. 확신할 수 없는 작가의 입장을 그릇되게 추측 하는 것보다는, 단지 이런 오래된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놓은 사람 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결론이 아닌가 한다. 3 『폴라리스 랩소디』에 정치와 종교가 함께 했다면, 『피를 마시는 새』는 전편을 고려하더라도 종교적인 작가의 입장은 거의 보이지 않 는 데에 비해 정치적인 서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고 전적으로 이어지는 정치사적 발전의 흐름에서 특히 작가의 입장으로 해석되고 적용되는 정치논리에 작품 내의 상당부분이 할애되어 있음 을 뜻한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급박한 정치적인 변화, 중앙정부의 형태가 미치는 지방에 대한 권력의 영향력, 그리고 비록 진부한 부분 이기는 하지만 황위 내지는 황권을 놓고 벌어지는 귀족들의 암투 같 은 것은 모두 하나같이 작가가 바라보는 입장으로 재해석되어 있다. 단일화되어야 하는 정치 체제를 놓고 이루어진 비스그라쥬 백작 데 라시와 아실의 논쟁은 인상적이었다. 첫째,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은 단계를 거치는 쪽 이 더 효율적이다. 이것은 공리다. 타이모의 제안을 염수 얻기라는 일에 비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염전 건설 - 소금 채취 - 물에 소금 용해 - 염수 얻기'. 하지만 염수가 필요하다면 그냥 바닷물을 한 그 릇 떠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 견해로는 그것이 염수를 얻는 훨씬 간단한 방법이다. 타이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소금이 아니라 염수 임을 명백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왜 제국에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제 국에 융합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인가. 레콘들은 제국 내부에서 그렇 게 할 수 있다. (4-1) 데라시의 견해에는 모든 정치적 절차는 최대한 간소화되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상식과, 제국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함께 들어 있다. 데 라시의 제국에 대한 믿음은, 그것이 결국 북부의 선민 종족에 대한 믿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감상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데 라시 자신은 제국이라는 구조적 틀에 대한 신뢰에서 더 나아간 것은 아니지만, 그의 황제와 제국에 대한 믿음은 순진한 데가 있을 정도이 다. 그래서 단순히 작품 내에서의 제국 옹호론자로 치부될 수도 있었 을 데라시의 주장에 설득력이 부여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다음의 논리 즉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에 관한 숫자를 논하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과 함께 제시되어 있어, 일견 무개성적인 주장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한 번도 입밖에 내어 밝힌 적이 없었던 치천제와, 제국을 지지하면서도 오히 려 자신을 신뢰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엘시를 제외한다면 데라시는 적 극적으로 제국을 지지하는 거의 유일하게 드러난 사람이다. 흥미롭게도 황제와 제국을 분리해서 생각한 아이저 규리하와 마찬가 지로, 데라시 또한 황제와 제국을 떼어 설명하면서 제국 자체에 대한 믿음을 피력하는 것으로 황제권을 정당화했다 - 비록 그것이 황제 덕 분에 얻게 된 믿음이라 하더라도 -.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두번째 주장을 보자. 지배권은 지배자가 아 닌 피지배자들에게서 나온다는 그의 분석에는 이의가 없다. 피지배자 의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동의 없이는 어떤 자도 다른 사람들을 지 배할 수 없다. 그런데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고의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능동적 동의만을 전제하고 있다. 비스그라쥬백은 지배 자가 되길 원하는 한두 명의 레콘은 존재할 수도 있지만 피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절대다수의 레콘 집단을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이 유에서 타이모를 비웃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술했 듯이 동의에는 능동적인 동의뿐만 아니라 수동적인 동의도 있다. 레 콘이 왜 수동적인 동의를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능동적이라는 말의 예로서 부족함이 없는 레콘들도 자신의 숙원에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수동적일 수 있으며, 실제로 현재 레콘들은 치천제의 지배 권을 수동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만약 비스그라쥬백 데라시가 능동적 인 동의만을 동의로 인정하겠다면, 나는 그에게 충성 서약에 대한 치 천제의 반감을 설명해보라고 말하겠다. 충성 서약이야말로 황제의 지 배권에 대한 영주들의 능동적인 동의 수단이다. 하지만 치천제는 그 런 능동적 동의를 부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수동적인 동의만을 요구하 고 있다. (5-4) 서약 지지론이 황제와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 지만, 마찬가지로 황제와 사상적 대립을 보인 아실의 분리주의는 서 약 지지론과는 근본적으로 출발부터 다른 것이다. 아실 또한 비인간 적인 <제국>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인간, 나아가 선민종족에 대한 스스 로의 믿음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수 차례 언급하는 수동적인 동의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데라시가 제국을 믿었기에 절차의 간소화를 주장했다면, 아실은 그 제국을 믿기 위한 방법을 위해 레콘들을 믿었다. 사상 전개의 시기적 인 차이는 있지만, 결국 이것이 제국이라는 일원화된 집단으로 결론 지어지는 것은 동일하다. 아실이 치천제와 데라시의 방법에는 반대했 지만 제국 자체의 존속에 반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의견은 우리가 국가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강요나 권위 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물론 전자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은 없어도 된다 하고, 후자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을 요구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국가가 가지는 모순적 틀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 이것이 반드시 어떤 현실적인 상황에 대입시켜 놓고 볼 수 있 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국가라는 것을 놓고 해석하는 방향의 차이 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방법이 어떤 방식으로 대립하는지에 대해 비 교적 명쾌한 답이 될 수 있다. 4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야심차게 구성되었던 사건 전개의 치밀함 은 『피를 마시는 새』에 들어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형이상학 적 담론을 희생하여 얻은 줄거리의 정교함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제국>에 대한 작가의 시점은 한 다리 걸쳐 떨어져 있는 것이라 하기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고 개입적인 것이다. 그래서 <제국 >과 그를 둘러싼 많은 정치적 사건에 작가의 해석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한편으로 혼란한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설정하면서 부차적으 로 설정된 가치판단의 혼란이 수반되어, 상당히 재미있는 논쟁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료도로당주 게라임 지울비와 그의 아들 시오크 지울비의 가치 판 단에 대한 이견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것이라 여기는 가치는, 악인은 악인으로 대접하고 선인은 선인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료도로당이 신봉하는 가치는, 도로 이용 자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여행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일 뿐이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인위적인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모든 도로 이용자를 여행자라는 단순한 분류로 환원 함으로써 유료도로당은 오랜 시간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 결국 이것도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수준으로 신뢰 하느냐의 문제와 닿아 있다. 시오크 지울비는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 기에, 인간을 선험적 가치로 평가하고 유료도로당은 그에 따라 여행 자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상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기준에 알맞지 않은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신으로부터 기 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여행자의 신상에 대해 비인간적으로 무관심해 보이는 앞선 수많은 유료도로당주와 게라임 지울비는 역설적으로 그 누구보 다도 인간을 신뢰한다. 다른 모든 것을 신뢰하기에 유료도로당은 그 사람이 목적을 지닌 여행자인지 아닌지만 평가하면 되는 것이다. 제국 정부가 사라진 혼란의 시기에 제국을 위하여 유료도로당의 윤 리관을 확립하자는 시오크 지울비의 주장이 시의가 적절함에도 불구 하고, 오히려 <제국>과 같은 방식의 가치관을 가진 것은 게라임 지울 비이다. 유료도로당이 자의적인 기준을 세워 도로를 걷는 자들을 제 멋대로 평가했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할 수는 없었을 것이 다. 언제나 자의적 해석은 자의적 반발을 낳기 마련이다.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충성이라는 의무가, 윤리라는 잣대 가, 도덕이라는 강요가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한 결과 만 들어진, 사실은 불필요한 가치들일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추측이다. 이것은 수천 년에 걸쳐 인간 스스로에 의해 수호되어온 것이다. 그러 므로 실제로 이것에 어느 정도의 필요성이나 정합성이 들어있지 않다 고 완전하게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간적이라 믿어왔던 것들이 인간의 비 인간성을 우려하여 나온 결과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그런 것들 의 필요조건이 하나도 없다고 결론짓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대체로 눈물을 마시는 새로부터 시작된 세계관에서 정통성이 라는 가치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정통성을 뒤엎는 것을 출발로 거의 모든 이야기들을 만들어 왔다. 이는 정치사적 흐름 에서 정통성이라는 가치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 이외의 상황에서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믿은 가치 들을 부정함으로써 사건 전개의 부분 부분에 인상적인 굴곡을 주고 있다. 정통성이라는 것은 상당히 자의적인 가치이다. 과거 북부인에게는 왕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정통성이었지만, 반대로 남부의 나가들은 왕과는 무관하게 대가문들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정통성이었다. 그러 므로 우리가 '정통성이 없다'라고 판단하는 상황마저도 그것이 일정 이상의 시간을 두고 유지된 상황이라면, 그에 나름대로 정통성이 주 어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 복잡한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보다 『피를 마시는 새』의 스케일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은 과정의 문 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불모의 땅에 정통성을 새로 세워 올리는 일보 다, 거의 완성되어 있었던 정통성이 무너지고 그것이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 훨씬 장대하고 드라마틱할 것이라는 예상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엘시 에더리는 비인간적인 제국과 인간적인 인간들의 타협선이었다. 엘시 에더리는 황제에게 충성하지만, 주군인 치천제가 원하는 것은 충성보다는 복종이다. 데라시는 사욕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데라 시가 내놓을 답은 황제와 제국을 위해 그랬다는 것일 테고, 유감스럽 게도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엘시는 서로 처지가 바뀌었다 면 데라시가 주저 없이 정우 규리하와 결혼했을 거라는 것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었다. 데라시의 의도와 동인(動因)은 엘시가 온전히 납 득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엘시는 그것에 대해 화를 낼 수 없었 다. 그것이 엘시의 고민이자 엘시를 처참한 기분에 젖게 만드는 원인 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엘시를 미치도록 분노하게 하는 이유였 다. (10-2) 굳이 평가하자면 엘시 에더리는 중간자적 인물이다. 그 또한 이제까 지 북부가 겪어본 적이 없었던 <제국>에 대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거부감을 느끼고 반발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이 적극적으 로 표현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대개 사람들은 황제의 논리에 동의 하거나, 혹은 아이저 규리하의 논리에 동의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특히 락토 빌파는 아실의 논리에 동의한 셈이다. 결국 이런 양분된 입장의 대립은 규리하 전쟁, 발케네 전쟁이라는 불행으로 현실화되었다. 북부의 반발을 무마시키면서도 제국의 시스 템을 유지시킬 수 있는 인물을 꼽는다면 엘시 에더리만한 사람이 없 을 것이다. 이것을 일반적인 국가가 가지는 모순 내지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거부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엘시 에 더리가 상징하는 어떤 심정적인 가치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시 에더리가 황제가 되는 상황을, 작가가 제시한 <제국>이 만들어내는 갈등의 해소로 결론지을 수도 없다. 결국 엘시 에더리 또 한 지금으로서는 미봉책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5 사건 전개의 영향력이나 전반적인 구성력은, 시기적으로 그다지 떨 어져 있지 않은 전편 『눈물을 마시는 새』를 능가하고 있다. 작가의 스케일은 나날이 커지기만 할 뿐 줄어들지는 않는 핸드레이크의 마법 항아리 같다. 자칫 장대한 시나리오에서 잃어버릴 수 있는 정교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첨예하게 발전되어 가고, 비로소 작가는 독자들이 예측할 수 없어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창조자의 반열에 올랐다. 다만 여전히, 등장 인물의 대부분이 입지전적이거나 입체적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약간의 부담감으로 남는다. 대개 평면적 인물 이 작품의 사건을 주도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여겨지지만, 작품에 등 장하는 입체적 인물의 앞날은 아예 예측이 불가능하며 우리가 생각하 기에 비교적 평면적 인물로 여겨지는 자들도 돌발적 행동으로 독자들 을 당황케 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은 언제나 그 렇게 비중 있는 인물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가진 평범한 사람 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작가가 부여한 특화된 성격 을 지닌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독특함은 모두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다. 앞서 말했던 <제국>이라는 키워드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결코 건조하지도, 무심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독특한 해석 적 관점을 부여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객관성을 잃지 않고, 한편으로 는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가치 판단에 적극적이면서도 결코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지 않는 마법을 선보이고 있다. 전편들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작가의 인간적인 시각들이, 작품을 불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을 극복하여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6-2 | 피를 마시는 새 2004/08/05 05:56 네스토르(rpgtown) http://cafe.naver.com/swallowedbird/1161 26. 돌을 깨우는 바람 - 2 지멘은 떨리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앞에 떠있 는 오른손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련했다. 아주 커다란 거미가 그 의 얼굴을 향해 기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꿈틀거리는 손바닥을 불신 과 증오로 바라보던 지멘은 갑작스럽게 머리를 움직였다. 지멘의 머리는 번개처럼 움직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능숙한 암살자처럼 지멘은 자신의 손바닥을 쪼았다. 찢어진 손바닥 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손의 경련이 사라지며 죽은 거미의 다리가 오 그라드는 것처럼 손가락들이 손바닥을 향해 구부러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멘은 몸 어딘가가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 통증 은 쪼인 손바닥과 무슨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멘은 그 연관성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팔을 떨어뜨렸다. 지멘은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침식되고 있었다. 그녀의 뺨은 홀쭉했고 목과 팔다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늘어져 있었다. 장기간 햇빛을 받지 못한 피부는 낡은 양피지처럼 보였고 피 부 아래의 근육들은 푸석푸석했다. 아실은 잿더미를 뭉쳐 만든 조각 같았다. 그녀를 덮고 있는 모포를 들어올리면 그 아래에서 아실의 재 가 풀썩 피어오를 것이다. 그리고 황급히 모포를 다시 내리기도 전에 그녀는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아실을 바라보던 지멘은 왼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를 폈다. 그는 아 실의 코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수백 번의 이전 시도에서 경험했 던 것처럼 미지근한 날숨이 그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아실은 살아있 었다. 지멘은 안도하며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지멘은 그런 안도감에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했다. 아실은 살아있었다. 산다는 말에 담겨있는 온갖 의미중 오직 죽었다 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만 그러했다. 산다는 말의 다른 의미들은 아 실과 무관했다. 쟁룡해에 빠진 타이모처럼 아실은 무의식의 바다에 깊이 빠졌다. 지멘은 두 사람에게 떠오를 수 없다는 공통점도 있을까 두려웠다. 대략 일 년 동안 아실은 아무런 변화도 보여주지 않았다. 먹고 자는 일 외에 그녀가 직접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일조차 그녀의 의식에 의해 통제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실은…… '빌어먹을 쓰레기통이죠.' 지멘은 입이 거친 소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눈 에 싸늘한 비웃음을 담은 채 아실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름은 아실이고, 때 되면 뚜껑 열고 음식 부어넣는 쓰레기통입니다.' 상상 속에서도 지멘은 아실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이기 에 그럴 수 없었다. 만약 아실이 깨어있다면 지멘은 그녀에게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아실을 볼 수 없는 지금 지 멘은 그가 알았던 아실의 모습과 그가 지켰던 아실과의 관계를 상상 속에서도 감히 변화시킬 수 없었다. 눈앞에 누워있는 아실의 껍데기 를 제외하면 그에게 남아있는 아실은 그것뿐이다. '하하. 그건 너무 심하다고요? 하지만 사실인데요. 화분 속의 식물 도 저보다는 낫죠. 꽃 피우고 잎사귀도 만들어내니까. 저는 지금 동 물도, 식물도 아니에요. 그래도 살아있다고요? 천만에요. 저는 무생 물이에요. 쓰레기통이지요.' 지멘은 벼슬을 곤두세웠다. 아실은 우울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목을 톡톡 두드렸다. '당신 손가락 두 개면 되지요. 지멘. 여기를.' 지멘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실 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냥 붙잡아서 비틀어버리면 된다고요. 저를 이런 쓰레기통으로 놔 두지 말아요. 이건 싫어요!' 다른 이야기를 해. 다른 이야기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게다가 제 부탁이 아니라도 어차피 당신은 저를 죽여야 해요. 철의 대화가 우리를 묶고 있어요. 제가 공 격하지 않았다고요? 제가 먼저 공격해야만 당신도 저를 공격할 수 있 다고요? 그런 말 그만둬요. 젠장. 짐작할 수 있잖아요! 제게 단 몇 초만 움직일 시간이 주어지면 당장 당신을 공격했을 거라는 것을!' 황제를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내 숙원을 포기하라고 했잖아. 숙원 에 비하면 그까짓 철의 대화야 아무 것도 아냐. '지멘. 판사이 호수를 떠올려봐요. 당신은 즈라더를 죽였어요. 그것 은 자비였어요.' 자비? 천만에. 대호왕이 말해줬지. 즈라더는 일부러 내게 죽은 거 야. 그래야만 엘시가 나를 추적하기 위해 황제 곁을 떠날 수 있으니 까. 제국 공신을 죽인 자를 추적하기 위해 대장군이 나서는 거지. 그 렇게 엘시가 곁에 없는 틈을 타서 치천제는 발케네를 멸망시킬 작정 이었어. 그러면 제국을 계승할 자의 손에 피가 묻지 않으니까. '나는 지금 즈라더가 마지막으로 느꼈던 기분을 확실히 알 수 있어 요. 지멘.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봐요. 당신이 이런 처지에 빠지면 무엇을 바랄 것 같아요? 제발 생각해봐요.' 생각하지 않겠어. '젠장, 아무 말도 못들었다는 표정 짓지 말아요! 당신은 제 말을 들 을 수 있어요. 단지 제게 말을 할 수 없을 뿐이지요!'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이지. '제 말 안 들려요?' 안 들려. 너는 상상이야. "지멘. 제 말 안 들립니까?" 지멘은 상상치곤 지나치게 사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육성이 들 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멘은 그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멘?" 지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레콘 한 명이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 멘은 헤치카인가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헤치카보다 작은 레콘이었다. 지멘은 그 얼굴이 낯익다는 느낌 을 받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의 뇌리 속에 어떤 이름이 떠올랐 다. 그 때 레콘이 말했다. "뭄토입니다. 기억하죠?" 지멘은 아무 대답 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멘의 깃털들이 부스스 일어나는 것을 본 뭄토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는 방어하듯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기억하는군요." 지멘은 옆으로 손을 뻗어 망치를 움켜쥐고는 벌떡 일어났다. 뭄토는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대신 뭄토 는 아실을 슬쩍 훔쳐보았다. "유감입니다. 지멘." 지멘은 망치로 바닥을 짚은 채 뭄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얼 굴에는 아무런 의사 표시도 나타나지 않았다. 뭄토는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지멘을 잔뜩 안달하게 만든 다음 느긋하게 말해주리라 생각했던 말도 어쩔 수 없이 꺼냈다. "지멘. 그녀를 치료할 방법이 있습니다." 지멘의 벼슬이 치솟으며 천장을 파라락 때렸다. 뭄토는 그 소리에 찔끔했다. 이것은 그가 기대하던 상황이 아니었다. 애걸하는 것은 지 멘이어야 하고 그는 지멘을 희롱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지멘의 위협 앞에서 뭄토가 애걸하는 듯했다. 지멘 또한 그렇게 느꼈 다. 지멘은 협박하듯 말했다. "뭐냐?" "지멘. 우선 좀 앉으면 안되겠습니까? 당신의 조바심이야 이해합니 다만 나는 여기까지 긴 길을 걸어왔습니다. 일단 좀 쉬어야……" 망치가 칼날처럼 날았다. 망치머리는 뭄토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뭄토는 망치가 밀어낸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것을 느꼈다. 지멘은 망치를 단검처럼 뭄토의 목에 겨냥한 채 말했다. "뭐냐?" 뭄토는 벼슬을 벌겋게 물들였다. 화가 나고 짜증도 난 뭄토는 자신 도 모르게 난폭하게 말했다. "제기랄, 이게 부탁하는 태도입니까!" 뭄토의 말을 들은 지멘은 곧장 망치를 옆으로 빙글 돌려 허리 뒤편 으로 보냈다. 뭄토는 기겁하여 머리를 가렸다. 하지만 지멘은 망치를 휘두르지 않았다. 언제라도 그것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망치를 둔 채 지멘은 뭄토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망치가 아래로 내려왔다. 지멘은 망치를 다리 앞으로 가져와 바닥을 짚었다. 망치 자루 위에 두 손을 포개놓은 지멘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말했다. "아실을 치료할 방법을 들으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나?" "예? 어, 일단 망치 내려놓고 앉으시지요. 그렇게 떡하니 서서 노려 보니……"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 앉는 지멘을 보며 뭄토는 말 끝을 흐렸다. 지멘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길은 무서웠지만 뭄토는 자신의 요구를 아무 지체 없이 받아들이는 졘을 보며 자신감을 약간 회복했다. 뭄토는 미적거리는 동작으로 지 멘의 앞쪽에 앉았다. "오래간만이군요." "그래서?" "참 쌀쌀맞군요. 그 때의 일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예. 뒤에서 찌 른 것은 잘못했습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아무 해도 되지 않았잖습니까? 조금 전에 움직이는 거 보니까 멀쩡하더군요. 이제는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지멘은 부리를 꽉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뭄토는 그 표정을 해석했다. "아직도 화가 나있군요?" 지멘이 뭄토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실을 치료할 방 법을 듣는 것. 그 외의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멘은 스카리 요새 근처에서 뭄토가 자신을 공격했던 일 같은 것은 오래 전 에 잊어버렸다고 설명할 시간도 아까웠다. "아실을 치료할 방법을 말해주면 화가 풀릴 거야." "지멘. 내가 그 방법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에 앞서 아실이 여기에 이런 상태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았는지는?" 지멘은 그런 것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뭄토는 자기 이 야기를 하는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멘은 제발 그 만두자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런 건 천천히 들어도 돼." "하지만 그것부터 이야기를 해야 설명이 가능한데요." 지멘이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다. 지멘은 망치로 뭄토의 다리 를 안마해주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 는 희망을 품어보았다. 하지만 지멘이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뭄토가 부리를 열었다. "그러니까 스카리 요새 근처에서 당신들과 헤어진 이후에 말입니 다." 지멘은 신음을 토했다. 그는 뭄토의 지난 과거사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뭄토는 지멘의 신음을 공격당했던 일에 대한 분노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는 황급히 사과의 말을 반복했다. 지멘은 다 포기하는 기분으로 뭄토의 말을 경청했다. 비나간의 후작궁 집무실에는 몇 종류의 긴장감이 뒤얽혀 있었다. 벽 근처에 서있는 병사들의 긴장감은 비교적 단순했다. 그들은 유사시의 사태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보내는 감시의 눈길을 한몸에 받고 있는 눈하츠 신뷰레 교위의 긴장 감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병사들을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벽 근처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대 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은 눈하츠의 표정에 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설령 농담을 하고 있다 해도 긴장된 얼 굴을 노출시킨다면 병사들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처지인지라 눈 하츠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비나간후 지키 멜 퍼스의 긴장감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눈하츠는 후작이 예사롭지 않은 말을 꺼내려는 것이라 추측했다. 이윽고 지키멜 퍼스가 말했다. "나는 귀족원 회의에 관심이 없어." 눈하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설명을 기다리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키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하츠는 헛기침을 하고 말 했다. "왜 관심이 없으신지요?" 지키멜은 두 손을 모아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마 귀관은 내가 실력으로 제국을 얻으려는 무지막지한 자들의 모 임에 가입했다고 생각하겠지. 잘못된 생각이야. 귀관이 제국을 되찾 는 올바른 방법을 추구하는 자들과 그릇된 방법을 추구하는 자들로 사람들을 구분한다면 나는 그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나는 제 국 자체에 관심이 없어. 그렇기 때문에 칼리도백이 주장하는 귀족원 회의에도 관심이 없는 거야." 눈하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국의 수복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까?" "원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그것은 천재의 작품 이었으니까." "원시제 폐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제국을 부활시켜야 한다면 필요한 것은 귀족원 회의가 아니 라 또 한 명의 천재야. 하지만 천재는 필요하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칼리도백이 귀족원 회의의 개최를 주장하는 대신 원 시제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가는 천재를 찾아온다면 나는 관심을 가졌 을지도 몰라. 정리해줄까? 나는 힘으로든 사람들의 합의로든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기적은 그런 식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각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키멜은, 병사들이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한 번 둘 러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내가 통치할 수 있는 현실적인 크기의 왕국." "왕국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내가 왕이 될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지키멜은 불과 반 시간 전 팩스벗에게 비밀 취급 방식이 부적절하다 고 질타했던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팩스벗의 대화 상대는 비 나간인이었고 그녀의 대화 상대는 그렇지 않다. 지키멜은 어떤 가식 도 없이 흉중의 말을 꺼냈다. 그런 태도가 필요했다. "그것은 사실이야. 나는 비나간의 왕이 될 것이다." 눈하츠의 얼굴에 의혹이 조금씩 번져갔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비나 간의 후작을 노려보았다. 지키멜은 당장 입을 열어 말하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 속으로 숫자를 셌다. 느리게 열까지 센 다음 지키멜은 입 을 열었다. 그 모든 솔직한 태도는 바로 지금 그녀가 하려는 말을 위 해 준비된 것이었다. 그녀의 어조는 담담했다. "그리고, 비나간의 왕으로서 귀족원 회의에 참석할 거야." 눈하츠는 놀랐다. 그는 지키멜의 속마음을 읽기 위해 용인이 되고 싶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각하. 귀족원 회의로는 제국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 는 것 아니셨습니까?" "그렇게 믿어. 하지만 칼리도백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참석하는 것 은 어렵지 않아." 눈하츠는 초조감에 입술을 적셨다. 비나간후는 제국이 아닌 왕국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제국 부 활을 기치로 내건 엘시 에더리와 제국군의 입장에서는 비나간후를 공 격할 명분이나 이유가 없는 셈이다. 왕이 되려는 그녀를 황제가 되려 하는 시모그라쥬공과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것은 말장 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키멜은 그것이 말장난이 되지 않는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이미 피력해보였다. 천재와 기적의 도 움 없이는 아무도 제국을 부활시킬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지키멜의 논거였다. 지키멜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제국 을 기다리는 대신 자신의 손 닿는 범위 내의 사람들을 직접 이끌려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눈하츠는 지키멜이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 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더군다나 비나간후는 귀족원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엘시 에 더리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 그녀가 귀족원 회의에 참석하면서 비 나간의 후작이라는 이름 대신 비나간의 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 은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을 문제 삼을 수 있는 황제가 없기 때문이다. 황제가 아닌 엘시 에더리는 도의적인 입장에서 그것 을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처벌할 수는 없다. 그녀가 처벌될 수 있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귀족원 회의가 성사되고 그곳에서 새 황제께서 선출되신다면 어떻 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어떻게 하나. 새 황제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따라야지." "새 황제께서는 왕을 참칭한 자를 용서하시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 다만." "신뷰레 교위. 지금 귀관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아직 내려지 지 않은 결정을 짐작하려 하고 있군?" 눈하츠는 뼈아픈 심정으로 그 말을 인정했다. 지키멜이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결코 나타나지도 않을 사람의, 결코 내려지지도 않 을 결정이야. 물론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지. 그렇다면 그것을 증 명해. 제국과 새 황제를 내게 보여줘. 그러면 나는 내 예견이 틀렸음 을 순순히 받아들일 테니까.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나는 그 것을 방해하지도 않겠어. 칼리도백이 원하는 것은 귀족원 회의지? 나 는 거기에 참석하겠다고 말했어." 눈하츠는 그 순간 결정을 내렸다. 상황은 이미 그가 속한 층위에서 검토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눈하츠는 가볍게 목례 했다. "제가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일은 각하의 말씀을 명확하게 제 상 관께 전달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정확성을 위해 말 씀을 단순화시키겠습니다. 각하께서는 칼리도백의 주장에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시지만 그것을 반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주장 에 의거하여 제시된 귀족원 회의 참석 요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정확하군." "거기에 제가 이런 해석을 덧붙여도 되겠습니까? 각하께서는 천재가 만든 통치도구가 사라진 상태에서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있는 크기 이 상의 영토를 바라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믿으시 기 때문에 비나간 바깥으로의 어떤 영토 확장 시도도 하지 않으실 겁 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면 단지 후작이라는 이름을 왕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뿐인 처신을 보여주실 겁니다. 그런 처신의 대가 로, 또한 칼리도백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각하께서는 칼리도백이 각하를 공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리고 더 깊은 속 마음에서는 칼리도백이 자신을 내버려둔 채 시모그라쥬공이나 두드리 길 바라실 겁니다." 지키멜은 이 쾌활할 정도로 솔직한 태도에 커다란 미소로 화답했다. "맞아."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지키멜은 사방의 벽 근처에서 대화를 감시하고 있던 귀머거리 병사 들에게 눈하츠를 데리고 나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눈하츠는 잠깐 지 체했다가 제국군 교위로서 지키멜에게 경례했다. 그리고 눈하츠는 안 내하는 병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지키멜의 남은 평생 동안 민감 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이런 솔직한 대화를 할 기회가 또 올 것 같지 는 않았고, 그래서 밖으로 나가는 눈하츠를 보며 지키멜은 약간의 아 쉬움마저 느꼈다. 지키멜은 그를 붙잡아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 고 싶다는 희망을 느꼈다. 하지만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온 수면욕이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려 달라고 촉구하기 시작했다. 지키멜은 엘시 에더리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요구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의자에 주저앉아 곧장 잠들었다. 규리하성의 복도를 걸으며 정우는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고 생각 했다. 너무 오래 자서 오히려 피곤한 잠. 하지만 그녀는 저녁 식사 후에 있었던 회의 시간 내내 자기는커녕 잠시 졸지도 않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정우의 속마음이 어떠했건간에 회의에 임하는 정우의 태 도는 진지했다고 기억할 것이다. 목표했던 문앞에 도착한 정우는 문 을 두드렸다. "정우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안쪽에서 약간의 소음이 일어난 후 곧 문이 열렸다. 정우는 잠자리 에서 방금 일어난 듯 옷을 대충 차려입은 파라말 아이솔을 보며 고개 를 까딱했다. 공손한 표정으로 목례하려던 파라말이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혼자이십니까?" "예." "각하! 아니, 일단 들어오십시오." 정우는 파라말의 곁을 지나쳐 방안으로 들어갔다. 수행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파라말은 복도 밖으로 몸을 내밀어 주위 를 살폈지만 어두운 복도 뿐이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파라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닫고는 재빨리 방을 가로질렀다. 창밖을 면밀히 살펴본 다음에야 - 밤이라서 별로 보이는 것도 없었지 만 - 파라말은 정우의 곁으로 돌아왔다. 정우는 이미 의자에 앉아 있 었다. 정우 앞에 선 파라말은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정우는 고 개를 갸웃했다. "남자가 아니라서 실망했어요?" 파라말은 휘청할 뻔했다. "……아트밀입니까?" "예. 남자를 좋아하신다고." "그건 농담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불과 얼마 전 암살 시도를 당했던 군주가 호위자도 없이 밤중에 혼자 다니 는 모습에 기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 모두 피곤해요. 그런데 그렇게 계속 서있으면 제가 목 이 아픈데." 파라말은 고개를 내저으며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각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녁에 있었던 회의에 대해 이야기 좀 하려고요." "그런데 왜 제게 오셨습니까?" "당신과 사라말이 유일하게 의견을 밝히지 않았으니까요. 두 분 중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런 밤중에 찾아오려면 남자를 좋아하는 쪽을…… 그런데 그게 농담이라고요? 어쩌나. 위험 해졌네요." 파라말은 자신의 얼굴이 제발 바보처럼 붉으락푸르락하지 않기를 바 라며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제 의견이 궁금하신 겁니까?" "예. 파라말. 설명해주시겠어요? 왜 그런 일이 필요하지요? 이이타 가 다시 우리를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파라말은 누웠다가 일어나서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말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까 회의 때는 그런 식으로 설명이 되었지만 사실 그것은 재래할 위기를 피하기 위해 위험요소를 제거하 자는 취지의 말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런데 아버님과 제 남동생들이 위험 요소가 아니라면 왜……" "악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정우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파라말 아이솔을 바라보았다. 파라 말은 손가락에 감겨나온 머리카락을 떼내었다. "예. 아버님과 아우분들을 추격, 사살하는 것은 위험 요소의 제거라 는 측면에서는 사실상 효율이 별로 없습니다. 투입되어야 할 인적, 물적 자원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실리는 적습니다. 하지만 악명의 획 득 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악명은 무형의 군사력이지요. 그 리고 그것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천하를 논하는 정치가들뿐만 아 니라 뒷골목 문화에 익숙한 남자애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보복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무서운 보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요." "규리하공을 건드리면 끔찍한 꼴을 당한다는 것을 외부에 알려주라 는 것이군요. 파라말. 당신은 누군가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당신을 죽이겠다고 하면 받아들이겠어요?" 파라말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하지만 제가 먼저 그를 공격했다면 보 복을 받을 것 쯤은 예상했을 겁니다." "그런 도에 넘치는 보복을 통해 혐오 외에 무엇을 얻죠?"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지만 또한 매혹을 느끼는 강인한 지배자. 왕 이 되지 않는 왕자들의 전통에 한 점 부족함 없이 부합하는 강력한 전쟁군주, 이 혼탁한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진정한 지도자, 제국 의 명실상부한 차기지배자." 파라말은 정우가 차기 황제라는 대목에서 놀랄 거라 예상했다. 하지 만 정우가 보인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무도 정우를 원하지 않네요." 그리고 정우는 파라말이 적절한 대답을 떠올릴 틈 없이 말했다. "형님과 당신이 규리하에 오신 것은 저를 차기 황제로 만들고 싶어 서였나요?" 정치가 염료라면 자신이 원래 살빛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염색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파라말은 이 정직한 대화가 조금 어색하다고 생 각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 형제가 원래 차기 황제감으로 지목했던 대상은 칼 리도백입니다. 그리고 황제께서도 그것을 원하셨을 거라 생각합니 다." "그런데 이제는 저인가요. 왜지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요.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이유를 고른다면 역시 각하께서 하늘치를 다룰 수 있으시다는 점입니다. 칼리도백이 가지고 있는 어떤 권한도, 물론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나긴 하 지만 제국의 체제 내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각하 의 권능은 체제를 뛰어넘는 종류의 것입니다." "체제 바깥에 있다면 체제 회복에는 오히려 도움이 안 될 텐데요." 정우의 말에 파라말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칼리도백의 권능이 각하의 그 것보다는 체제 회복에 더 유리합니다. 현재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 지요. 대장군은 자신의 권능을 이용하여 자유로이 세계를 활보하고 계십니다만 각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요. 하지만 황제는 체제를 회복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일은 어차피 모든 사람들이 나서야 하는 일이겠지요. 황제는 체제 회복의 중심이 되는 사람입니다. 원을 그리 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심 말입니다. 중심이 원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요." "제 신하들도 제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악명이 필요하고." "맞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회의장에서 동의한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죠?" "글쎄요. 일단 저는 공식적으로 규리하 정부에 소속된 사람은 아니 지요. 어쩐지 데라시 백작이 떠오르는군요. 그러니 함부로 발언하기 가 어렵더군요." "일단은 그렇고, 그리고?" 파라말은 빙그레 웃으며 턱을 긁었다. 조금 후 그의 미소가 희미해 졌다. 파라말은 진지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각하. 황제가 되셔야 합니다." 정우는 상체를 뒤로 조금 잡아당겼다. 그녀의 얼굴에 살짝 스치는 거부감을 본 파라말은 물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진지하 게 말했다. "해보면 황제도 아주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우는 풋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몇 번 반복되다가 마침내 폭소로 바뀌었다. 한참 웃던 정우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고 힘겹게 말했다. "와! 너무너무 매력적인 유혹이네요." "그리고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도덕적 장점도."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으시죠?" "그래서 침묵하셨던 거예요?" "예. 공정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각하께서 그렇게 느끼실 거 라 생각합니다." "고마워요." "예?" 정우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두 손을 내밀었고 파라말은 얼떨 떨해 하며 손을 마주 내밀었다. 정우는 파라말의 손을 쥐고 말했다. "정우를 생각해주셔서 고마워요." 파라말은 입을 조금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조금 후 그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사라졌다. 정우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가장 열성적으로 정우 규리하 황제 등극을 추진할 거죠?" 파라말은 침묵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는 파라말의 손을 놓았 다. 파라말은 갑자기 벽이 생긴 것 같다고 느꼈다. 조금 전까지 한결 같은 정직함으로 일관된 대화에서 그런 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 만 정우가 그의 손을 놓은 지금 파라말은 정우가 즈믄누리 쯤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정우의 얼굴을 보았다. 정우는 멍한 표정으로 먼 곳을, 그 방 안에 있지 않은 곳을 바라보 고 있었다. 파라말은 왜 이 소녀여야 하느냐고 생각했다. 다른 대안 은 없다. 그리고 다른 대안이 혹 있다 해도 그것을 찾아볼 시간이 없 다. 상황은 여유를 부리는 자를 패배자로 만들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파라말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각하." "돌아갈게요. 밤중에 실례했어요." 정우는 문쪽을 걸었다. 짧은 순간 파라말은 그것이 거절인지 승낙인 지에 대해 꽤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지만 파라말은 적극적 거절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것을 승 낙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문득 파라말은 그보다 더 급한 현안이 있 음을 깨달았다. 파라말은 정우를 황급히 따라걸으며 말했다. "각하.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오실 때는 혼자 오셨어도……" "규, 규리하공이 없어졌다!" 갑자기 터져나온 비명 같은 외침에 파라말과 정우는 입을 다물었다. 곧 성 곳곳에서 굉장한 소란이 일어났다. 비명과 외침과 달음박질 소 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정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바래다주실 필요는 없겠네요." 파라말은 어깨를 으쓱였다. "각하. 호위자를 두셔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지요?" "확실히. 그런데 어쩌죠?" "뭘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여자를 좋아한다면 추문에 휩싸일 수도 있게 되었는데." 빨리 방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된다는 간단한 해결책을 정우가 내놓기 전까지, 파라말은 절망감 속에서 자신에 대 한 오해를 확대 재생산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해야 했다. =============================================================== 날이 더우니 컴퓨터가 불안하군요. 으으.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6-3 | 피를 마시는 새 2004/08/06 10:27 네스토르(rpgtown) http://cafe.naver.com/swallowedbird/1187 26. 돌을 깨우는 바람 - 3 파라말의 방을 떠난 정우는 그러나 사람들에게 달려가 자신의 소재 를 드러내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성 꼭대기로 향했다. 병사들이 달리는 절거렁거리는 소리와 다급하게 문 여닫는 소리 등이 함께 하 는 밤산책이었다. 그리고 많은 먼지. 청소가 잘 되지 않고 있다. 규 리하성에는 인력이 부족했다. 사용인 충원을 위한 긴급 예산을 편성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유무역당에서 온 그 여자는 뭐라고 했더라? 제국의 유산을 가져가 제국 부활에 쓰라고 했지. 글쎄. 사람들은 자 기 집안 청소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가 황제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까? 정우는 빙그레 웃었다. 꼭대기의 문을 열자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비린 듯하면서 묘하게 텁텁한 밤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정우는 옥상으로 나아갔다. 별을 관찰하기 좋은 곳이다. 피부에 묻 을 것 같은 진한 어둠들이 소리 없는 비처럼 떨어졌다. 정우는 두 손 을 깍지 껴 배 앞에 늘어뜨리고는 옥상 위를 걸었다. 언젠가 탈해와 틸러와 함께 이곳에 섰던 적이 있다. 그 때 그녀는 빨간 우산을 들고 있었고 하늘 위에서 어떤 남자를 만날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정우는 난간을 짚은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소근거리던 별들이 정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꼭 다문 채 시치미를 뗐다. 정 우는 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시선을 낮추었다. 지평 선은 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자취를 감추었고 땅은 경계 없는 거대 한 반죽 같았다. 이곳저곳에 명멸하는 불빛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잠을 미루고 있는 규리하 사람들이 밝혀둔 불빛들이 별과는 다른 목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옷깃을 매만지던 정우는 손나팔을 만들어 입 앞에 대고 말했다. "저, 규리하님." 정우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세상님!" 그것이 좀 나은 것 같았다. 더 나은 말이 있을 것 같았지만 정우는 거기에 만족하기로 하고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오른발이 살짝 떠오를 만큼 팔을 높이 든 정우는 그것을 힘차게 흔들었다. "좋은 꿈 꾸셨어요! 저는 정우예요. 안녕하세요!" 열렬히 팔을 흔들다가 정우는 그것을 스르륵 떨어뜨렸다. 아래로 내 린 손으로 뺨을 짚은 채 정우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저는 믿고 싶어요." 정우는 다른 손으로 옷깃을 여몄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규리 하의 밤은 차가웠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믿지는 않아요." 정우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더 멀리 보기 위해. 탁월한 시야의 확장 은 없었지만 정우는 계속 발뒤꿈치를 든 채 서서 말했다. "믿고 싶지만, 믿지는 않아요. 아버지는 제멋대로 저를 죽이려 했어 요. 틸러는 제멋대로 저를 살리려 했어요. 가르치는 것이 싫어요. 왜 제가 살고 죽는 문제에 관여하려고 하죠? 자기들도 어떻게 살거나 어 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면서. 저를 살리려는 킴도 저를 죽이려는 킴만 큼 싫어요. 이건 나쁜 생각이죠? 믿어야겠지요? 그런데 믿지는 않아 요." 특이한 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못 믿겠어요. 그렇게 빨리 스러지는 사람들. 하지만 믿고 싶어요." 다시 특이한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헛기침은 그만하셔도 돼요. 사라말. 거기 계신다는 것 알았으니까. 이리 나오세요." 조금 후 옥상의 구석진 자리에서 사라말 아이솔이 나타났다. 사라말 은 정우에게 다가와 그녀 곁에 섰다. "화살 맞은 사람은 이런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정우. 화살이 서운해 합니다." "성격이 너무 뾰족하니까 좀 상심해 보는 것도 좋겠지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뭐 하고 계셨어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 좀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이지요?" "숭어 요리, 제국, 양치질, 빨강, 정신억압, 연초, 안마, 대장군." 정우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이런저런 생각이었 다. 그런 소재들을 한꺼번에 생각해야 하는 사유가 어떤 것인지 정우 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우는 제일 마지막 것만 들었다는 태 도를 취했다. 그녀는 성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군님…… 대장군님은 제국을 찾아오시겠지요?" "예." "그러면 누군가는 그걸 지배해야 될 테고요." "예." 사라말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정우는 입을 조금 모았다가 말했다. "그건 저인가요?" "아니오." 정우는 사라말에게 몸을 돌렸다. 동그랗게 변한 눈으로 사라말을 훑 어보던 정우는 다시 질문했다. "제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금 전엔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화를 내거나 난처해하는 대신 정우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어보였 다. 도깨비 같은 반응이었다. 정우는 두 검지로 관자놀이를 누른 채 열심히 그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 동안 사라말은 점차 거세어지는 소동에 귀를 기울였다. 사라진 규리하공을 찾는 이들이 허술한 옷차 림을 한 채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잠시 후 정우가 말했다. "제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만, 제가 세상을 지배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예." "와! 설명해주세요. 제국을 지배하지 않는 황제? 그게 뭐죠?" "그게 뭘까요?" "모르세요?" "모릅니다. 저도 굉장히 궁금합니다." "같이 고민해볼까요?" 사라말은 물끄러미 정우를 바라보다가 엉뚱한 질문을 꺼냈다. "세레지 파림이 왜 당신을 귀신 바라보듯 바라보는 겁니까?" "아…… 역시 관찰력이 예사롭지 않으시네요. 세레지는 그걸 정말 잘 숨겼는데. 제가 놀랄 정도로 말이에요. 그런데 알아차리셨군요?" "그렇다면 그건 세레지가 유일하게 방심했을 때였나 보지요. 어쨌든 저는 알아보았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정우?" "제가 대답하지 않겠다면?" "다른 질문을 꺼내겠지요." "다른 질문은 뭐죠?" "탈해 머리돌은 어떻게 무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까?" 정우는 흠칫했다. 사라말은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정우는 두 손으로 뺨을 누른 채 사라말을 보다가 갑자기 손을 들 어 외쳤다. "별똥별이에요!" "많이 봤습니다." "미녀가 지나가요!" "안되겠는데요." "잘못 봤어요. 미남이에요!" "그 방법은 파라말에게 쓰셔야지요. 대답하기 싫으시면 대답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우." 정우는 울상이 된 얼굴로 사라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녀는 사라말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붙잡아 들어올렸다. "사라말.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사라말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정우는 그것을 더 꼭 움켜쥐었다. 그 래서 사라말은 손을 내버려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약속하시는 거죠?" "약속합니다. 대신 황제가 되십시오." "치사해요." "황제가 되신 다음에 제게 벌을 내리시면 됩니다." 정우는 입술 사이로 혀를 불쑥 내밀었다. 사라말은 담담하게 손을 들어 입을 좌우로 찢으며 혀를 내밀어 위아래로 격하게 흔들며 눈을 뒤집었다. 정우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에요?" "아니오. 황제가 되신 후에는 할 수 없으니 미리 해보는 겁니다." "윽. 집요하시네요." 사라말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인 채 어깨를 으쓱였다. "자유무역당을 불러들인 것은 당신인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 쪽에서도 마음을 어느 정도 굳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유무역당의 재원은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이 되겠지요. 새 황제의 임시 정부 노릇을 해야 하는 규리하 정부를 크게 일으켜야 합 니다. 거기에 돈이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새 황제의 진짜 정부가 되 어야 할 제2의 하늘누리를 만드는 데도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요. 하 늘치를 제공하면서 부탁하면 즈믄누리의 도깨비들은 다시 그것을 만 들어줄 겁니다. 하늘누리가 다시 제국의 하늘 위로 날아오르면, 그 때부터는 빚 갚느라 정신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겠군요. 전 떼먹고 싶지는 않거든요." "자유무역당에서 온 여자는 상환 걱정 하지 말고 쓰라는 식으로 말 하던데요. 제국을 되찾는 것 자체가 상환이라면서." 사라말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떼먹어야겠군요." "……단호하시네요." "빠른 은퇴가 제 꿈이거든요." 담담하게 말하던 사라말은 정우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정우는 창백한 얼굴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속 삭였다. "그런 꿈을 가지면 안돼요. 사라말." "그건 농담이었습니다." "정말이지요?" "정말입니다." 정우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사라말은 정우의 그런 급격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그 반응의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려 했을 때 정우가 말했다. "그럼 당신 꿈은 뭐죠?" "저는 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우는 흠칫했다. 사라말은 또 하나의 기묘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정우는 약간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을…… 왜?" "1년 전만 해도 훨씬 쉽게 설명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설명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너무 많은 불확실성과 너무 많은 가설들. 죄송합니다 만 보다 나은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소란도 이 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고요. 빨리 내려가셔야겠습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말은 그녀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려 한 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캐묻는 대신 사라말은 정우 를 성 아래쪽으로 안내했다. 아라짓력 32년 4월 14일. 그 전까지 비나간후로 불려졌던 지키멜 퍼 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부를 때 사용할 이름을 하나 더 알려주었다. 그 이야기는 빠르게 퍼져나갔지만 대파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늦 든 이르든 어느 곳에서 일어날 일이었다는 것이 사람들의 반응이었 다. 하늘누리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실용주의적이라고도, 조 심성 있는 행동이라고도 할 수도 없었다. 그 경이적인 건조물은 그런 것만이 겪을 수 있는 경이적인 사고에 의해 역사에서 영영 사라진 것 이 분명하다. 따라서 황제와 이동수도에 근거를 둔 모든 질서는 섬세 하거나 무자비한 재편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 재편의 움직임에 순서 를 따진다면 지키멜의 행동은 최초라고 할 수 없었다. 발케네공 스카 리 빌파는, 비록 제국 건국의 기치를 높이 들어올리지는 않았지만 북 부에서 상당한 영토 확장을 감행했다. 그리고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은 대호왕을 옹위하여 남부의 군세를 이끌고 북진했다. 비가시 적인 행동을 일으킨 순서로 따지면 순위를 매기기도 어렵고 가시적인 행동을 일으킨 순서로 따져도 세 번째다. 따라서 비나간후 지키멜 퍼 스를 가리켜 행동이 빠르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의 행동에는 곧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최초의 의미가 하나 담겨 있었다. 그 의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들은 말을 한 번 쯤 의심하게 했다. "독행왕? 독행제가 아니야?" "독행왕이야." "황제가 아니라 왕이라면……" 지키멜 퍼스는 제국의 부활을 부정했다. 최초로.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조금 늦게나마 호기 심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낮게 책정했던 지키멜의 순서를 재빨리 상 향조정했다. 그것은 제국의 실종 이후 그것의 부활을 부정하는 최초 의 움직임이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전전긍긍하는 자들의 면전 에 대고 그것은 필요없다고 딱 잘라말하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유료도로당의 새 지배자와 비나간후의 밀접한 관계를 알고 있는 자들은 좀 더 놀랐다. 길은 지역과 지역을 잇는다. 길은 확장이 다. 그런데 비나간후는 세계 전체로 뻗어가는 대신 자신의 영토를 왕 국으로 바꾸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제위와 결혼하기 전에 거행된 지키멜의 약혼인 것일까? 이야기를 전해들은 많은 자들이 관심을 보였고 림츠, 카시다, 진, 그리고 시구리아트 산맥 동쪽의 슈라도스나 잠바이 등 지역적으로 비 나간에 가깝기에 단순한 호기심에서 머물 수 없는 곳에서는 무거운 얼굴과 다급한 발걸음을 한 사람들이 출발했다. 비나간 사람들은 또 다른 이방인의 등장을 경험해야 했다. 황급히 비나간으로 온 그들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온갖 방법으로 독행왕의 속내를 알기 위해 애 썼다. 독행왕은 무엇때문에 자신을 왕으로 지칭했는가. 그 이름은 정 말로 지배력의 확장을 거부한다는 의미인가. 지배할 생각이 아니라면 독행왕은 이웃의 지배자들과 도대체 어떤 관계 설정을 하려 하는가. 특히 비나간을 향해 북진하고 있는 시모그라쥬군에게 그 왕명이 어떻 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것인가. 그런 자들을 골라 뽑아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비나간에 도착한 사절들은 모두 연배 지긋하고 수완 좋고 통찰력 뛰어난 인재들이었 다. 하지만 그들은 뜻하지 않은 난관을 겪어야 했다. 독행왕의 주위 를 둘러싸고 있는 비나간의 새로운 지배층은 그녀 자신만큼이나 어린 자들이었다. 사절들이 알았던 비나간은 지긋지긋하게 나이 많은 홀빈 퍼스 후작의 통치 아래 영원히 바뀔 것 같지 않았던 땅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 사실은 나름대로 비나간의 사정을 잘 안다는 이유에서 뽑혀온 사절들에게 일종의 진입 장벽 역할을 했 다. 그들은 자신이 과거에 보유했던 소식통이 모두 사라졌음을 깨닫 고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소식통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다행히 비나간의 새 지배층은 그런 접촉 시도에 호의적이었다. 그들 젊은이들도 비나간 외부로 연결되는 적절한 소통로를 가지고 있지 않 았기 때문에 사절들의 접촉 시도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사절들은 '내 지인 중에 모모라는 이가 있는데 혹 아시는지?' 같은 간단한 대화만 으로 비나간의 새 지배층에 접근할 수 있었다. '모모는 내 막역지우 입니다. 그 남자는……' 물론 모모가 여자인 경우라도 그 사실을 밝 히는 멍청한 사절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비나간의 새 지배층 과 비나간 외부는 다각도로 연결되었다. 관찰과 탐색이 시작되었다. 사절들이 처음 알아낸 것은 독행왕이 군 사력 증강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영토 확 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북진하는 시모그라쥬군에 대한 대비였다. 그 과정은 인상적이었다. 사절들은 독행왕이 어떻게 군대를 증강시킬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비나간에는 이미 후보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리 비나간에 와있 던 여러 이방인들은 독행왕의 포고를 보자마자 왕의 군대에 지원했 다. 사절들은 뜨악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정신이 아닌 거 아냐? 당연히 비나간인으로 군대를 만들어야 할 텐데." 하지만 독행왕 지키멜은 꺼리낌 없이 외부에서 온 자들을 받아들였 다. 심지어 군대 고위층에 기용되는 외부인들도 있었다. 외부인들의 충성심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리 고 비나간만의 왕이 되겠다는 지키멜의 주장과도 배치되는 일이었다. 사절들은 독행왕이 중심 없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 다. 그러나 독행왕은 중심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연달아 낸 포 고문과 그녀의 군대에 적용되는 몇 가지 특색 있는 의식들을 관찰한 사절들은 그녀의 철학이 처음부터 대단히 명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철학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비나간인들의 왕이 다. 그리고 비나간을 위해 일하고 싸우는 사람은 모두 비나간인이다. 어디서 태어났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제국은 필요없다. 왕국이면 된다. 누구나 비나간 왕국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만인을 포함하는 범세계적인 정치 구조 대신 원하는 자들이 모여 자 신들만의 정치 구조를 이루는 것. 사람들이 기시감을 느낀 것은 당연 하다.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그 본질은 사람들이 한 번 경험했 던 일과 비슷했다. 분리주의였다. 대호왕 사모 페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리주의가 뭐지?" "그것은 타이모라는 레콘의 주장입니다. 폐하." "타이모?" "아십니까?" "안다. 최후의 대장장이의 딸이지. 짐이 처음 만났을 땐 좀 다른 존 재였지만." 아쉬존 토프탈은 대호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호왕은 설명하는 역할은 자신보다는 아쉬존에게 있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과 몸짓을 해보였다. 아쉬존은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설명했다. "그 주장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러 종류의 정치 구조 에 대한 경험이 있었던 다른 종족들과 달리 레콘은 유사 이래로 한 번도 독자적인 정치 구조를 가졌던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레콘은 제 국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될 방법을 모르며 제국 또한 레콘을 자신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직한 방법을 모른다는 거지요. 그래서 타 이모는 처용산맥 너머에 레콘들만의 독립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했습니 다. 레콘들이 우선 정치 구조를 이해한 다음 자연스럽게 제국에 합쳐 지는 것이 분리주의의 최종목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대한 계획이군. 어떻게 되었지?" "치천제 폐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 운동을 지지하 는 자들의 모임에 진압군을 보내어 격파하셨습니다. 많은 레콘들이 절망도에 유폐되었습니다." "타이모는?" "진압 과정에서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모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비늘이 살짝 부딪치는 것을 보며 아 쉬존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모는 깊은 수심을 드러내며 머리를 숙 였다. "짐이 알았던 자들이 이제 더 이상 지상에 없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티나한은 하늘로 떠나버렸고 라수와 괄하이드는 죽었 다. 그리미 또한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지. 짐은 그 외에도 많은 이별들을 경험했다. 하지만 하텐그라쥬에 들어가 있는 동안 짐 은 이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지. 다시 세상으로 나왔을 때 이것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유감입니다. 폐하." 사모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괜찮다. 분리주의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거라. 독행왕이라 자처하는 그 여자의 행동이 분리주의적이라는 것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약간 다릅니다. 분리주의는 이미 존재하는 제국에 서 분리되자는 운동입니다만 지금은 제국 자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제국의 부활을 바라고 그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그녀만이 그것에 관심이 없으니 분리주의적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 고 비나간을 위해 일하고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나간인이라는 그녀의 사상도 분리주의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쉬존이 가져온 편지를 다시 꺼내어들었 다. 그것은 독행왕 지키멜 퍼스가 대호왕 사모 페이에게 보내는 것이 었다. 내용에는 대단한 것이 없었다. 북진하는 시모그라쥬군에 대한 우려와 그들이 최근 키탈저를 친 것에 대한 성토 등이었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상식적인 이야기였고 시모그라 쥬공의 주장, 즉 대호왕 사모 페이의 이름 아래 제국을 부활시키자는 주장에 대한 평은 한 문장도 들어있지 않았다. 사모는 왜 편지 내용 이 그런 것인지 이해했다. 제국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지키멜의 입장이므로 제국을 찾는 시모그라쥬공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그녀로서 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편지는 시모그라쥬군이 만약 비나간의 땅 을 침략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리라는 경고로 끝나고 있었다. 팔디곤 토프탈이 알려줬기 때문에, 아쉬존은 그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아쉬존은 그 사실 때문에 할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었다. 팔디 곤은 대호왕에게 온 편지를 주제넘게 빼앗아 읽었다. 할아버지는 대 호왕을 섬길 생각이 없었다. 대호왕은 그에게 있어 북부 정벌의 빌미 고 손자에게 황위를 넘겨주기 위한 징검다리일뿐이다. 아쉬존은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사모의 예언을 떠올리고는 쾌감을 느 꼈다. 그의 할아버지는 소망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대호왕은 이미 팔디곤의 속셈을 다 간파하고는 이용당하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때 가 오면 대호왕은 자신이 결정한 후계자에게 황위를 넘겨줌으로써 누 가 누구를 이용했는지 팔디곤에게 똑똑히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아 쉬존은 대호왕의 편이었다. 그는 그 통쾌한 때가 빨리 오기를 바랐 다. 대호왕은 서신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답장은 그만두도록 하지. 이 여자도 답장을 기다릴 것 같지는 않으 니." "그러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물러가보거라." 아쉬존이 목례하고 떠나길 기다리던 대호왕은 그 소년이 우물쭈물하 는 것을 보게 되었다. 대호왕이 말했다. "아쉬존?" 아쉬존은 다시 할아버지와, 그리고 종고모에 대한 증오에 휩싸여 있 었다. 그는 힘겹게 말했다. "폐하. 저…… 제 조부가 폐하께 드리는 부탁이 있습니다." "뭐지?" "1차로 시련에 보낼 군령자 100 명이 모였습니다. 제 조부는, 음, 그들을 보내기에 앞서서…… 폐하께서 그들 중에 대장군 갈로텍이 있 는지 알아봐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갈로텍과 동시 대를 사셨던 분이니까……" 사모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래. 우리는 같은 시대에 같은 곳에서 태어 났지. 게다가 서로 싸웠던 적이고. 짐은 북부의 왕이었고 그는 남부 의 대장군이었지. 누군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그의 적이란 말이지. 하지만 이 경우엔 그런 상식을 적용하기 어렵겠군. 짐과 그의 지위 때문에 우리들은 오히려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거든. 혹 직접 만났다 해도 데라시는 짐을 알 수 없었을 거야. 짐은 당시 가면을 쓰고 있었 으니까. 네 할아버지는 실망하게 될 것 같구나. 하지만 노력해보지. 안내하거라." "폐하! 안됩니다!" 사모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쉬존을 바라보았다. 열을 보는 그녀는 아 쉬존의 상승한 체온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아쉬존은 씩씩거리며 말 했다. "폐하께서 포로 취조까지 맡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폐하 의 말씀처럼 폐하께서 갈로텍을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 천박한 조부는 폐하를 능멸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폐하께 서……" "죽었는데 살아있는 척한다고?" 사모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쉬존은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 정으로 대호왕을 바라보았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죽은 짐이 시모그라쥬공의 몸을 빌려 살아있는 척하는 것이 다. 북부를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는 몸은 어디까지나 시모그라쥬공 의 것이다. 갈로텍에게 전략을 빌려줬던 주퀘도 사르마크처럼 짐은 그에게 대호왕의 권위를 빌려주고 있을 뿐이다…… 대강 맞나?" "폐하. 악랄한 제 조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사모는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네 조부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텐데." 아쉬존은 뺨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사모를 바라보았다. 문득 아쉬존 은 사모의 얼굴과 몸짓에 담겨 있는 거대한 허무감을 보았다. 아쉬존 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모가 일어났다. "가자. 아쉬존." "폐하, 절대로……" 사모는 손을 들어 아쉬존의 말을 막았다. "아쉬존. 짐이 네게 말했지. 언젠가 네가 나를 증오하고 저주할 날 이 올 것이라고. 그래도 너는 짐을 용서하겠느냐?"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온다. 그리고 네 조부에게도." 아쉬존은 눈을 크게 떴다. 물기 가득하던 그 눈이 곧 희열과 잔혹한 쾌감으로 가득찼다. 그의 추리가 맞았다. 사모는 결정적인 때가 왔을 때 팔디곤을 배신할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사모는 수모를 참고 이용 당하는 척하는 것이다. 아쉬존은 복수의 쾌감에 몸이 떨릴 것 같았 다. 아쉬존은 황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팔디곤과 베로시는 절망감 속에서 사모를 원망할 것이다. 혹은 비통 한 심정으로 자신들이 왜 사모를 그렇게 대했는지 후회할 것이다. 아 쉬존은 힘차게 말했다. "제게는 오지 않겠지만, 제 조부에게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사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아쉬존을 바라보았다. 아 쉬존은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팔디 곤의 손자라는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팔디곤이 배신당하는 그 날 자신도 웃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쉬존은 그렇게 말했 다. 하지만 아쉬존의 말이 끝난 후에도 사모의 얼굴에서는 수심이 걷 히지 않았다. 비나간에서 거듭 보내는 경고장은 시모그라쥬군의 진격 속도에 아무 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시모그라쥬군은 병참 기지와 요새를 건설 하기 위해서만 멈춰섰고 그 외에는 한결 같은 속도로 북진했다. 하이스의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다. 현실적인 선택은 시모그라쥬군에 항복하고 목숨을 보존받는 것이었다. 하이스 근교에는 키탈저가 동원 할 수 있는 제국군도 없었고 그곳 사람들은 호전적이라 하기 어려웠 다. 하지만 지척에 있는 비나간에서 비나간후가 왕위에 올랐다는 사 실이 그들을 고민하게 했다. 지리적으로도 하이스는 비나간에 가까웠 고 제국 실종 전에도 하이스는 비나간후의 영향력을 직, 간접적으로 받았다. 그들은 머나먼 남부에서 온 공작보다는 독행왕 쪽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행왕이 키탈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함께 시모그 라쥬군과 싸우자고 제안했다면 하이스는 그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실제로 하이스 태수는 독행왕에게 그런 의사가 있는지 은근히 타진하 기도 했다. 하지만 독행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승낙도, 거부도 아닌 무반응이었다. 하이스 태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다 가 결국 사절을 반대 방향으로 보냈다. 항복할 테니 하이스의 안전과 자결권을 보장하라는 밀서를 품은 사자가 북진하는 시모그라쥬군을 향해 달려갔다. 시모그라쥬군을 이끄는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으로서는 그 제안을 거 절할 필요가 없었다. 베로시는 몇 군데의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할양 과 모병권을 요구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베로시는 도대체 왜 독 행왕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게 여겼다. 머나먼 키탈저까지 병사들을 보내어 함께 싸우게 했던 지키멜이 비나간의 현 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스는 내버려두고 있다는 사실은 모순처럼 보였다. 물론 지키멜이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그것을 설명해 준 것은 유료도로당이었다. 하이스를 접수하기 위해 태평하게 진군하던 시모그라쥬군의 선봉 부 대는 하이스-키탈저 유료도로의 제1징수소에서 뜻밖의 선언을 듣게 되었다. 통행료를 내든 내지 않든 통행을 불허한다는 징수소장의 대 답은 선봉 부대를 지휘하던 수교위를 당황하게 했다. 수교위는 설명 을 요구했고 징수소장은 남부로 돌아가라는 대답만 반복했다. 결국 격분한 수교위는 징수소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에게는 잘 훈련 된 제국군 중대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유리함은 그것으로 끝이 었다. 요새지라 할 수 있는 자리에 징수소를 건설하는 유료도로당의 전통에 따라 하이스-키탈저 유료도로 제1징수소 또한 난공불락의 위 치에 있었다. 죽음의 거장 주퀘도 사르마크의 대군을 상대로 5개월 동안 분전하여 끝내 항복을 선언하게 만들었던 유명한 전설을 재현이 라도 하듯 징수소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전투 시작을 외친 후 채 10 분도 지나기 전에 수교위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런 빠른 인정 은 그가 훌륭한 장교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선봉 부대는 신속하게 물러났다. 수교위는 하루라도 빨리 본영에 있는 베로시 토프탈에게 이 긴급 사 태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실천되지 못했 다. 하이스-키탈저 유료도로의 징수소의 번호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하이스에서부터 매겨져 있다. 따라서 키탈저로부터 진군한 수교 위에게 제1징수소는 마지막 징수소였다. 그리고 그의 뒤편에는 이미 지나친 여섯 개의 징수소가 있었다. 수교위는 그 모든 징수소가 동시 에 시모그라쥬군에 대한 통행금지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경악 했다. 싸워서 본대로 귀대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교위는 다시 한 번 남부의 제국군을 지휘하는 장교다운 결정을 내 렸다. 수교위는 유료도로를 우회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을 이용할 수 없었고 게다가 그 근방의 지리는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수교위는 유료도로가 막힌다는 사실이 단지 좋은 통행로의 상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하이스-키탈저 유료도로의 예를 들어보자. 하이스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하이스-키탈저 유료도로 위를 벗어나지 않은 채 걸으면 하이스에 도착할 수 있다. 2킬로미터마다 이정표가 있으니 길 을 잘못 들 까닭이 없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해당 지역의 지리를 전 혀 모르는 장병에게 진군 명령을 내릴 때도 상세한 지도를 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유료도로를 이용할 수 없는 지금, 수교위는 정찰병을 먼저 보내고 해당 지역이 지형을 관찰하게 하고 지역민들에 게 협조를 구하는,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지금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 던 새로운 일을 해야 했다. 복귀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교 위는 군량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빠른 이동 속도를 보장하 는 유료도로가 있었기에 수교위는 적은 군량과 적은 군자금만을 가지 고 있었다. 지역민과의 마찰을 무릅쓰고서라도 징발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졌을 때 수교위는 아슬아슬하게 시모그라쥬군 본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안도하면서 동시에 불평하려 했다. 하지만 곧 수교위는 불평을 삼가기로 했다. 시모그라쥬군 본대에 돌아온 자 들 중에는 징수소를 상대로 더 맹렬하게 싸웠고, 그래서 더 처참하게 패배당한 채 돌아온 장교들도 있었다. 베로시 토프탈은 격분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6-4 | 피를 마시는 새 2004/08/07 09:33 네스토르(rpgtown) http://cafe.naver.com/swallowedbird/1214 26. 돌을 깨우는 바람 - 4 베로시는 그제서야 왜 지키멜이 키탈저에서 싸우고 그 이후에는 싸 우지 않았던 것인지 깨달았다. 물론 키탈저에서 싸우는 것에는 합리 적인 이유들이 있다. 키탈저인들은 사납고 그곳의 지형은 거칠다. 그 리고 그곳에는 제국군 독립중대들이 있었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전장 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자신들이 키탈저 사냥꾼의 후예라는 비나간 인들의 감상적인 믿음을 만족시켜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것은 싸울 때의 유리함을 말하는 것이지 왜 싸우는가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왜 싸웠는가? 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키멜 퍼스에게 필요했던 것은 적이었다. 비나간 사람들을 살해했 기에 그녀가 맞서 싸워야 하는 적. 그래서 지키멜은 비나간 병사들을 보내어 패배당하게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가까운 곳 은 곤란하다. 면전에서 패배를 당하면 항복부터 생각해야 하니까. 비 나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슬픔과 공포 대신 복수심이 자리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비나간에서 제법 거리가 떨어진 키탈저가 선택되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조건들도 있었 다. 그녀의 바람대로 비나간 병사들은 패배했다. 지키멜은 적을 가지게 되었고 복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필요한 것을 얻은데다 왕이 되었다. 그녀는 더 싸울 필요가 없었다. 장래 있을 진짜 싸움에 대비 하여 그녀는 가지고 있는 전력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유료도 로당이 지키멜을 대신하여 싸우게 되었다. 무료도로를 제공하고 당비 를 지원하던 수준을 넘어서서 직접 창검을 들고 시모그라쥬군과 싸우 게 된 것이다. 베로시는 심장이 뒤집히는 기분으로 게라임 지울비의 서신을 떠올렸 다. 그를 탈출시켜주면 유료도로당은 내분에 빠지게 될 테고 따라서 지키멜은 유료도로당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녀 의 예측이었지만 게라임은 그런 그녀의 속셈을 잘 안다는 투로 유료 도로당에는 결코 내분이 없을 거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의 서신대로 였다. 시오크 지울비는 당원들에게 당의 이념을 무시하게 할 정도의 장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유료도로당이 통행료를 내든 내지않든 통 행금지라고 말한다는 것은 토끼가 육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사건이다. 베로시는 유료도로당이 자신을 부정하는 처참 한 꼴이 되었는데도 게라임 지울비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만약 게라임의 도움을 끝까지 기대할 수 없다 면 유료도로당의 문제는 그녀가 직접 처리해야 할 것이다. 베로시는 답답한 가슴을 식히기 위해 막사 바깥으로 달려나왔다. 시모그라쥬군 본영의 거대함이 순식간에 그녀를 에워쌌다. 베로시는 차라리 막사 안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턱없이 많은 장병들이 밤을 보 내고 있는 그곳에서 베로시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좌 절감도 느낄 수 있었다. 베로시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좌절감이길 바 라며 긴장하고 있는 보초병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진영을 순시하고 오겠다고 말한 다음 경례하는 보초병들을 뒤로 한 채 혼자 진영 속으 로 걸어들어갔다. 베로시는 화톳불의 빛이 닿지 않는 공간을 따라 걸으며 진영의 분위 기를 읽어보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잠들어 있었지만 밤의 일을 처 리해야 하는 장교들은 천막이나 야영지의 공터에서 불을 밝혀둔 채 일하고 있었다. 군량을 검사하고 소모품을 충원하고 분배 계획표를 작성하는 장교들에게서, 베로시는 웃음기를 찾을 수 없었다. 정예 제 국군의 기강을 잃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승리를 기대하는 전사처 럼 보이지도 않았다. 두억시니 장군은 그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먼 거리를 유지하며 웃거나 떠들썩하게 구는 자가 없는지 열심히 관 찰했지만 그런 장병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장교들이었다. 베로시는 이를 갈았다. 베로시는 진지의 분위기를 관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혹 다급한 연 락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막사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지만 베로시는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군인답지 않은 결심에서 베로시는 본영 서쪽 에 있는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숲속은 캄캄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진지의 불빛이 보이는 곳까 지만 걸어가기로 했다. 어둠 속을 더듬더듬 걸어가던 베로시는 조금 후 커다란 바위들이 겹쳐 누워있는 곳에 도달했다. 베로시는 그 위에 올라가면 진지의 불빛이나 그녀의 막사 쪽에서 일어나는 다급한 상황 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베로시는 잘 보이지 않는 바위턱을 밟 으며 바위 위로 올라갔다. 약간의 노고 끝에 베로시는 바위 위에 올 라앉을 수 있었다. 그녀의 예상만큼 전망이 좋지는 않았다. 바위는 높았지만 주변의 나무들도 꽤 컸다. 하지만 아래보다는 괜찮은 편이 었기에 베로시는 그 자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차가운 바위 위에 앉아 서 베로시는 지키멜 퍼스와 시오크 지울비에 대해 생각했다. 제국을 부정하는 여자와 당을 부정하는 남자로군. 여자에게 도달하려면 먼저 남자를 해결해야 한다. 별빛이 까슬까슬 하게 뿌려진 바위 위에서 베로시는 유료도로당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민했다. 공성전?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지만 유료도로당의 징수소는 성 이나 다름없다. 그것과 싸우려면 공성전의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베로시에게 절망감을 주는 소재였다. 나스팔 성 전투에서 드러났듯 그녀의 훌륭한 부하들은 공성전에 필요한 소양 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억지로 시행한다면 손실이 많은 승리를 거 둘 수는 있겠지만 베로시는 그런 종류의 승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문의 목표는 제국이다. 아쉬존 토프탈은 토프탈 황조를 열어야 한 다. 벌써부터 막대한 출혈을 일으켜서는 그런 목표의 달성은 불가능 하다. 차라리 나스팔성에서 사용했던 뇌물을 다시 한 번 이용하는 것은 어 떨까. 베로시는 그 지점에 문제 해결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시점이라면 유료도로당에 대해 뇌물을 쓴다거나 하는 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만 지금 유료도로당은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다. 시오크 지울비의 장악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당 내부에는 당의 기본철학이 무시되는 것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이 분명 히 존재할 것이다. 그런 자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녀는 게라임을 대 신할 혼란의 불씨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베로시는 그런 사 람을 찾아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해야 할 일을 결정한 베로시는 가슴 속의 압박감이 조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베로시는 두 손을 뒤로 뻗어 바위를 짚고는 턱을 젖혀 밤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밤하늘의 모습에서 그녀가 꽤 북쪽으로 올 라왔음을 확인했다. 별자리의 분포가 달랐다. 그녀가 남쪽 하늘에 있 으리라 생각한 별자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확실히 북진하고 있었다. 다만 북부가 여름이기에 아직 격렬한 추위는 맞이하지 않은 것이다. 베로시는 자신이 가을이나 겨울이 오면 더 의기소침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계절이 오기 전에 비나간은 반드시 얻어야 한다. 베로시는 그 다음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비나간에서 겨울을 나고 그 다음해에는 시구리아트 산맥을 등 뒤에 둔 채 서진한다. 시구리아트 산맥과 지러쿼터 산맥 사이에 있는 모든 땅을 점령한 다음 다시 겨울을 보낸다. 그리고 대호왕을 황위에 즉위 시킨다. 물론 그녀는 정복지에 오지 못할 것이고, 한계선 이남에서 그녀가 포고하는 첫번째 황명은 아쉬존 토프탈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 는다는 것이 될 것이다……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을 때 베로시는 자신이 흥분 때문에 몸을 떨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숲의 머리 위로 불어온 밤바람이 었다. 바위 주변의 하늘은 열려 있었고 그래서 바람은 베로시의 몸을 세차게 뒤흔들었다. 베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부는군." 로세이즈 징수소장 마리번 도빈은 의자를 걷어차지는 않았다. 그녀 의 분노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의자가 산양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안을 둘러본 마리번 도빈은 자신이 걷어차거나 후려치거 나 집어던질 수 없는 물건들에 포위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마리번은 산양의 모습이나 도안을 가지고 있는 물건을 상대로 도저히 폭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리번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것은 그녀가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지만 그 효과는 별 볼일 없었다.. 분노는 가시지 않았고 대신 머리만 아팠다. 그래서 마 리번은 화가 난 사람들의 가장 초보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그녀는 누 군가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기로 했다. "당주님께 커다란 무례가 되겠지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 군요. 그 놈은 개자식입니다!" 게라임 지울비는 아들 때문에 개가 되었구나 등의 탁식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울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지? 내 아들이야." "당주님!" 게라임은 수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는 잠깐 젖혀두고 생각해보라고. 어 쨌든 대단한 일이잖아. 능력 없으면 나쁜 짓도 크게 못하지." 마리번 도빈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당주를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마리번은 게라임과 시오크가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 랑은 잃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이렇게 확인되 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인정하겠습니다. 당주님. 하지만 그 대단한 능력으로 벌인 대단한 사고 때문에 제 머리가 대단히 아프고 제 어금니가 대단히 닳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좋죠?" "일단 자네에게 말을 시켜야겠다고 생각되는군. 말을 하다 보면 어 금니는 덜 갈 테니까." 마리번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믿음을 뒤집어 보았다. 어떤 상황 에서도 서로를 사랑할 두 사람은, 바꿔 말한다면 서로의 사랑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무슨 짓이든 서로에게 할 것이다. 시오크는 이미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를 쫓아내고 당을 빼앗았으니 까. 마리번은 아버지 또한 아들에게 그럴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생각 하며 말했다. "예. 이야기를 하지요. 아드님은 그냥 감찰만 하고 돌아다녔던 것이 아니에요. 감찰관의 지위로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다른 수단들도 썼 는지 모르겠지만 아드님은 꽤 많은 징수소장들을 포섭해두었던 것이 분명해요. 어떻게 다른 징수소장들의 그런 움직임을 제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요!" 게라임은 자신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내 전통파에 속하는 마리번 도빈 징수소장의 보수성과 자부심은 전통파가 아닌 당 원들에겐 버거운 것이었고 따라서 마리번에게는 당내의 여러 움직임 들을 상세히 전달해줄 친구가 없었다. 마리번이 다른 징수소장들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게라임은 그것을 말 하지는 않았다. "글쎄. 그 친구들은 차기 당주가 될지도 모르는 자와 잘 사귀어두어 야겠다는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지. 정치적 포섭이 아니라 그냥 사교활동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단 말이야." "그냥 사교였다면 시오크가 당을 뒤집어 엎는 것을 보고는 당장 절 교했어야 해요! 그런데 오히려 도와주고 있잖아요." "문제는, 시모그라쥬공이 진짜 나쁜 놈처럼 보인다는 거지." 게라임은 탁자에 놓여있던 찻잔을 들어 입안을 적시고는 말했다. "아라짓 제국이 가진 공식적인 국경은 하나뿐이야. 시련과의 국경이 지. 남부의 제국군은 시련과 싸우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거야. 그런 데 제국이 사라지자마자 시모그라쥬공은 국경을 비운 채 북진했어. 그것도 대호왕을 받든 채. 속셈이 뻔하잖아? 대호왕께서는 과거와 달 리 한계선을 넘어오실 수 없어. 북부에서 시모그라쥬공이 무슨 짓을 하건 그것을 옆에서 견제하실 수 없는 거지. 한계선 이북에서는 시모 그라쥬공 맘대로다 이거지. 게다가 폐하의 연세는 이미 많은 편이시 지. 시모그라쥬공은 대호왕 폐하께 제국을 바칠 생각이 아니라 대호 왕 폐하의 권위만 이용할 작정이지. 그런데 그 수법이 이렇게 졸렬해 서 모든 사람의 눈에 뻔히 보인단 말이야. 그 놈은 국경을 비우고, 제국을 훔치려 하고, 우리의 영원한 영웅을 모욕하는 아주아주 나쁜 놈이란 말이야. 그런 나쁜 놈을 혼내줘야 착한 놈이 될 수 있지. 비 나간 남쪽의 징수소장들은 지금 착한 놈이 되려고 애쓰는 거란 말이 야." 마리번의 어금니가 다시 마모되었다. 게라임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 다. "상황은 내 아들에게 유리해. 시모그라쥬군이 징수소들을 박살내며 당에 회의감을 안겨주기 전까지 그 유리함에는 변동이 없을 거야." "맞아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의견에는 동감합니다만, 그러면 당의 피 해가 너무 큽니다. 그리고, 징수소가 거꾸로 시모그라쥬군을 박살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한 미래를 다각도로 예상해보자는 취지의 말이기도 하지 만 당에 대한 마리번의 드높은 자부심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게 라임은 '우리는 죽음의 거장도 물리쳤다'는 마리번의 니름을 듣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게라임은 '두 번째로 왔을 땐 그러지 못했다' 라고 닐러보았다. 마리번과 게라임 모두 나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 인한 것 외에 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래서 게라임은 육성으로 말했 다. "이번에 남쪽에서 온 공격자들은 과거와 달리 신의 힘을 사용하지는 못하지. 하지만 제국군의 힘을 얕보는 것도 도움은 안돼. 만약 시모 그라쥬공이 발케네공의 전례를 받아들여 레콘을 모병하는 것에 관심 을 둔다면……" 방 바깥쪽에서 들려온 다급한 발소리 때문에 게라임의 무서운 전망 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게라임과 마리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발소리는 확실히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입실 허락도 없이 문을 여는 태도에 마리번은 눈꼬리를 치켜떴다. 무례하게 문을 열어젖힌 것은 젊은 당원이었다. 숨이 턱에 닿아있는 그 당원은 가까스로 짧은 문장을 외쳤다. "소장님, 왔습니다!" 조금 화가 나있던 마리번은 비꼬듯이 대답했다. "티나한이?" "예? 아니오, 왔습니다!" "네 사춘기가?" 마리번의 거듭되는 비아냥에 당원은 차라리 숨을 좀 고르고 또렷하 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심호흡으로 자신을 가라앉 히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소장님. 여행자들이 왔습니다." 그 말은 비아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분노를 일으켰다. 마 리번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래서!" "예?" "통행료 받고 통과시키면 될 거 아냐! 통행료 안 내면 막고! 뭐야, 너도 통행료와 상관없이 통행불가시켜야 하는 자들이 있다고 믿는 거 야? 다른 곳이 어떻건 간에 내 징수소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안돼! 우 리는 길을 준비한다. 알겠냐? 우리는 길을 준비한다고!" 당원은 아무 말 없이 마리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게라임은 그 당원이 모시기 쉽다고 할 수 없는 상관을 오랫동안 모시며 그녀를 어 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체득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마리번은 곧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아냐?" "아닙니다." "그럼 왜?" "그게, 직접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리번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게라임을 쳐다보았다. 게라임은 가보라 는 몸짓을 해보였다. 마리번은 게라임에게 목례하고는 당원과 함께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게라임은 찻잔을 들어올리려다가 도대체 어떤 여행자 들이 왔기에 당원이 그렇게 당황했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게라임 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게라임은 적당한 위치 에 있는 창문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몸을 내밀면 양쪽으로 뻗어가는 길 중 하나는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게라임은 그곳으로 다가갔다. 창문으로 걸어가던 게라임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소음이 있었 다. 지금껏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듣지 못했던 소음들이 건물 밖에 서 들려왔다. 그런데 그 방향이 뚜렷하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창문에 선 게라임은 그것이 방향성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방향은 오히 려 정확했다. 길과 같은 방향이었으니까. 불분명한 것은 거리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아주 먼 곳에 이르는 긴 범위에서 한꺼번에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의미를 생각해본 게라임은 당황했다. 그 는 창문 밖으로 몸을 힘껏 내밀었다. 그러자 유료도로의 모습이 보였 다. 창턱을 짚고 있던 게라임의 손이 미끄러질 뻔했다. 게라임은 눈을 비비고 다시 유료도로를 보았다. 아니, 그는 도로를 볼 수 없었다.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사람들에 의해 점거당해 있었고 그들의 모습 때문에 도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드문드문 있는 횃불 아래에 드 러나는 것은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무장한 병사들의 끝없는 무리가 도로를 가득 메워 도로 자체를 감추고 있었다. 수십만의 군인들이 징수소 앞에 서 있었다. 충격 속에서 게라임은 당원의 당황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도의상 그 다음의 반응은 당원의 당황을 인수하게 된 마리번 도빈 징수소장 에 대한 동정심이어야겠지만 게라임은 마리번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 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수십 만의 병사들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 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 게라임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사라진 제국의 병사,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규합하여 온 제국군임을 깨달았다. 다르게 생각할 수 없었 다. 게라임은 엘시의 모습을 찾기 위해 창밖으로 몸을 힘껏 내밀었 다. 하지만 횃불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고 게라임은 엘시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한 줄기 바람이 병사들의 횃불을 흔들 었다. 먼 곳에서부터 횃불을 후려치며 다가온 바람은 곧 건물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는 게라임을 덮쳤다. 게라임의 머리카락과 옷이 파 르륵 흔들렸다. 게라임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바람이 부는군."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뭄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격정 적으로 말했다. "결국 그 녀석은 깃털을 다 뽑아버려야 했던 겁니다! 그래서 가발이 필요했던 거죠. 깃털 가발인 겁니다!" "낄낄낄. 자, 잠깐. 그렇다면 그게 가발이야, 깃털옷이야?" 지멘은 온몸을 비틀며 웃었다. 수염볏을 잡아당기며 웃던 지멘은 자 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돔을 발견했다. 지멘은 큼직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돔? 왜?" 돔은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들어보였다. 지멘은 고개를 끄 덕이고는 아실의 곁에서 조금 비켜앉는 몸짓을 취했다. 돔은 지멘이 물러난 자리에 앉아 아실의 모포를 벗겼다. 아실은 똑 바로 누운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돔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실의 옷을 벗겼다. 지멘의 손은 민첩하고 섬세했지만 그래도 인간 의 옷을 자유롭게 벗기고 입히기엔 조금 불편할 정도로 컸다. 반면 아실은 인간치고도 작은 편이었다. 그래서 아실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은 돔의 일이었다. 일년이나 지난 지금 선정적인 기분을 느낄 건덕 지는 남아있지 않았고 아실의 옷을 다루는 돔의 손길은 무미건조했 다. 하지만 돔의 기분은 다른 때와 달랐다. 앞에 누워있는 처녀 때문 이 아니라 뒤에 있는 레콘 때문에. 뭄토와 지멘은 다시 농담 하나를 높이 던져올리고는 웃음의 화살을 마구 쏘아보냈다. 집중사격에 농담이 너덜너덜해졌다. 돔은 어깨가 굳는 것을 느꼈다. 레콘들의 농담이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 다. 지금은 잠시 영업중단 중이긴 하지만 돔은 레콘을 상대로 한 장 삿꾼이었다. 세상의 그 어느 레콘보다도 레콘을 더 많이 겪었다고 자 부할 수 있는 돔은 뭄토와 지멘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돔은 그 이야기 를 꺼리낌 없이 평가할 수도 있었다. '시시껄렁한 잡담이다.' 뭄토가 나타난 것은 하루 전의 일이었다. 그는 지멘의 곁에 앉았고 그 순간부터 계속 시시껄렁한 잡담을 줄기차게 늘어놓았다. 간혹 필 요에 의해 그 방에 들어섰던 돔은 그 때마다 더욱 험악하게 바뀌어 있는 지멘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지멘은 당장이라도 뭄토를 때려죽 일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뭄토는 눈치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 았거나 혹은 잃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돔은 뭄토가 혹시 자살하 러 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 돔은 다음 날 아침 뭄토의 부리에 금이 간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최후의 대장간에 새 날이 찾아왔을 때에도 뭄토에게는 아무 런 변화가 없었다. 그의 부리는 여전히 튼튼했고 그 외의 다른 부분 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명백한 변화를 보인 것은 엉뚱하게도 지멘이 었다. 지멘이 즐거운 표정으로 뭄토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돔은 몸 어딘가가 근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돔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평가해보아도 지멘의 지난 일년은 아실보다 약간 나은 정도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지멘이 시시껄렁하고 무가 치한 농담을 정말 즐겁다는 듯이 나누고 있었다. 돔이 보기에 그것은 지멘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레콘답지도 않았다. 아실에게 새옷을 입힌 돔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웃음을 무시 한 채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 표정 없고 생기 없는 표정은 익숙했다. '이봐요. 외눈 아가씨. 저 뒤의 덩치, 어떻게 된 거죠? 심상치 않단 말이야. 당신이 빨리 돌아와서 어떻게 해야할 것 같은데.' 아실은 생기 없는 한쪽 눈으로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돔은 벗겨낸 옷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지멘은 그에게 눈인사도 보내지 않 았기에 돔 또한 지멘을 무시하며 방 바깥으로 나갔다. 돔이 나간 후에도 뭄토와 지멘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웃고, 떠들 고, 가끔은 그냥 아무 말 없이 그냥 서로를 바라보기도 했지만, 그러 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부리를 열었다. 다시 떠들고, 웃었다. 가끔 돔 이 나타났다. 돔은 아실에게 음식을 먹이고 사라졌다. 지멘은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뭄토도 그러했다. 그리고 두 레콘은 기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떠나는 돔에게도 무관심했다. 그들은 무의미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밤이 익었다. 익은 석류가 벌어져 석류알이 튀어나오듯 밤하늘엔 별 이 튀어나왔다. 이야기의 내용이 조금씩 바뀌었다. 하지만 대화자들의 태도에는 변 화가 없었다. 한가롭게 킬킬거리고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이며 지멘과 뭄토는 즐겁게 이야기했다. 그것은 참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뭄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지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알겠지요?" "응. 그래." "아실은 다시 깨어날 겁니다." "맞아." "아실은 다시 당신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요." "멋질 거야." "그러면 가볼까요?" "그러지, 뭐." 뭄토는 싱글벙글 웃으며 일어났다. 그는 지멘이 아실을 모포에 감싸 고 그것이 풀리지 않도록 줄로 묶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자 아실은 얼굴만 약간 내놓은 채 모포 뭉치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편지 한 장 을 써서 아실이 누워있던 자리에 내려놓은 지멘은 만면에 미소를 그 득하게 지은 채 그런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아실의 안대에 멈췄다. 지멘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지멘은 그 검고 동그란, 마치 구멍처럼 보이는 안대를 보았다. 방안은 고요했다. 아마도 돔이 켜두었을 촛불이 태양과 별, 그리고 달 등이 말할 때 쓰는 언어로 중 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오른손으로 위아랫부리를 움켜쥐었다. 아실의 검은 안대에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지멘은 부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때 뭄토가 말했다. "갑시다." 지멘은 고개를 홱 돌렸다. 뭄토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던 지멘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웃음이 돌아왔다. 지멘은 고개를 끄 덕이고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아실을 들어올렸다. 뭄토는 아실을 배낭 에 넣는 지멘을 도와주었다. 지멘은 아실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천 천히 배낭을 들어올려 매었다. 그가 똑바로 서자 뭄토는 문을 열었 다. 밤이었고, 떠들썩한 소음은 없었다. 뭄토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바깥의 어둠 때문에 뭄토의 모습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촛불이 태양과 별과 달의 언어로 중얼거리는 방 안에서 지멘은 사각형 어둠 을 미심쩍은 듯이 바라보았다. 그 어둠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멘?" 지멘은 발을 뗐다. 다음날 아침, 돔은 문틀을 짚은 채 비어있는 방안을 바라보고 있었 다. 뭄토도, 지멘도, 그리고 지난 일 년 동안 그 방을 나가지 못했던 아 실도 보이지 않았다. 벽과 천장, 바닥 등에 밴 그들의 냄새는 아직 흩어지지 않았기에 후각적으로 그 방은 아직 공허하지 않았다. 하지 만 시각적으로는 꽤 공허했다. 지멘은 그들의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 도 빠짐없이 챙겨갔다. 돔은 놀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놀랍지가 않았다. 자 신의 반응에 당황하며 돔은 시선을 방황시켰다. 그 때 돔은 아실이 누워있던 자리에 있는 이질적인 물건을 발견했다. 돔은 그쪽으로 걸 어갔다. 텅 빈 바닥에 접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묵직하게 보이는 주 머니가 그것을 누르고 있었다. 별 생각없이 주머니를 들어올리려 했 던 돔은 예상치 못했던 저항에 놀랐다. 주머니는 꽤 무거웠고 돔은 팔에 더 힘을 준 후에야 그것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돔은 그것을 옆 에 내려놓고는 접힌 종이를 들어올렸다. 그는 그것을 펼쳐보았다. 그 것은 간결한 편지였다. '고맙다.' 돔은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다시 접었다. 돔은 바닥에 무릎 을 꿇고 옆에 내려놓았던 주머니를 열었다. 그 무게 때문에 짐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주머니 안에는 금편이 가득 들어 있었다. 돔은 그 황금빛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주머니를 졸라맸다. 돔은 편지를 품 속에 집어넣고는 두 손으로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돔은 몇 가지 일을 한 후에 헤치카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헤치카는 끌과 망치를 들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끌을 때리는 탕탕탕 소리가 규칙적으로 계속되었다. 돔은 그 소리가 잠시 멈추길 기다려 말했다. "그들이 사라졌어요. 헤치카." 헤치카는 휘두르던 망치를 잠시 멈췄다가 그것으로 다시 끌을 내리 치며 말했다. "그렇구나." "편지랑 이거 하나 남겨놓고 갔어요. 편지에는 그냥 '고맙다'는 말 뿐이네요. 그리고 이것은……" 돔은 돈주머니를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절그렁거리는 소리가 울렸 다. "금편이에요. 꽤 양이 많군요." 헤치카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냐." "이거 내가 가져가도 돼요?" 끌을 톡톡 두드리던 헤치카의 망치가 다시 멈췄다. 커다란 레콘 대 장장이는 망치와 끌을 작업대 옆에 내려놓고는 허리를 뒤로 폈다. 오 른손 검지로 눈 위를 누른 채 헤치카는 잠시 연장과 작업재료들로 가 득한 벽을 바라보았다. "그거 가지고 되겠냐?" "쓰려고 가져가는 것은 아니에요. 정말 다급할 때 쓸 비상금이지요. 쓸 돈이 아니니까 많으면 무겁기만 할뿐이에요." "그 돈을 안 쓴다고?" "예. 먹고 잘 방법은 스스로 찾아야지요." "그러냐." "개썰매 가져갈게요." "그래라. 어차피 나는 그거 못 타니 상관없다." 헤치카는 몸을 일으켰다. 돔을 돌아본 헤치카는 그가 입고 있는 방 한복과 그의 등에 있는 배낭을 보았다. 헤치카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 고는 문쪽을 향해 걸어갔다. 돈주머니를 배낭 속에 집어넣은 돔은 아 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문을 열고 나서기 전 헤치카는 잠깐 생각이 났다는 듯 허리를 옆으 로 숙여 물통을 집어들었다. 바깥에는 많은 레콘들이 오가고 있었다. 헤치카는 돔처럼 레콘들 사이를 민첩하게 움직이는 대신 물통을 등롱 처럼 들어올렸다. 가까운 곳에 있던 레콘들은 그 모습을 목격하자마 자 다른 레콘들에게 부딪치며 다급하게 물러났다. 헤치카는 앞쪽에 텅빈 공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 다음 그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부러 움에 찬 눈으로 그 뒷모습을 보던 돔은 배낭을 한 번 추슬러올리고는 넓게 변한 통로를 걸어갔다. 서로의 머리 위에라도 올라가고 싶다는 모습으로 좌우로 물러나는 레콘들 사이로 늙은 대장장이와 소년은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걸어 갔다. 가끔 욕설을 중얼거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늙은 대장장이뿐만 아니라 그 뒤를 따라 걷는 소년에게서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 았다. 두 사람은 등롱을 들어올린 채 밤의 황야를 걸어가는 것 같았 다. 욕설하던 레콘들은 부리를 닫았다. 그들은 의아함과 당혹스러움 을 느꼈다. 두 사람은 최후의 대장간 바깥으로 나왔다. 돔은 헤치카를 계단에 내버려둔 채 혼자 달려갔다. 조금 후 소년은 달리고 싶어하는 개들을 억제하며 개썰매와 함께 돌아왔다. 헤치카는 무뚝뚝한 얼굴로 계단 위에 서서 돔을 내려다보았다. 돔은 이런 저런 외침으로 개들을 진정시키며 썰매 위의 짐들이 제대로 묶였는지 점검 했다. 그다지 많은 짐은 없었기에 그 점검은 빨리 끝났다. 돔은 개썰 매 뒤편에 서서 가로대를 붙잡고는 헤치카를 돌아보았다. "아, 참. 제 성은 헤치카에요." 헤치카는 물통 속에 나타나는 결빙을 들여다보았다. 극한의 기온 때 문에 물은 촛농이 굳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얼고 있었다. "헤치카?" "예. 돔 헤치카. 그게 제 이름이에요." "알았다. 돔 헤치카." "갈게요." "잘 가라." 돔은 방한모를 단단히 눌러쓰고는 개썰매를 출발시켰다. 개들은 얼 음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개썰매를 밀며 따라가던 돔은 곧 능숙한 솜 씨로 썰매 위에 올라탔다. 헤치카는 극연왕이 만든 두 개의 기둥 사 이로 돔의 썰매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하늘은 이끼 같은 구름 으로 덮여 있었다. 공기는 맑았다. 헤치카는 늙었고 불을 들여다보고 메질을 하며 평생을 보냈기에 같은 연배의 레콘에 비해 그 시력이 나 쁜 편이었다. 하지만 원래가 시력 좋은 레콘이기에 헤치카는 비슷한 연배의 인간 노인보다는 훨씬 잘 볼 수 있었다. 헤치카는 돔의 모습 이 지평선의 일부가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좇았다. 돔은 지평선이 되었다. 헤치카는 고개를 떨구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헤치카는 벼슬을 주물 러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벼슬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확 불 어온 바람이 그의 벼슬을 나꿔챘다. 헤치카는 돌풍을 향해 말했다. "바람이 부는군." 마치 그 말에 대한 대답처럼 헤치카의 등 뒤쪽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었어." 헤치카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향해 몸을 돌리려 했을 때 누 군가가 그의 등을 확 떠밀었다. 헤치카는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훌쩍 뛰었다. 계단 위를 훌쩍 뛰어넘어 바닥에 선 헤치카는 뒤를 돌아보았 다. 그 때 누군가의 발에 걷어차인 물통이 부서지며 날아왔다. 헤치 카는 머리 근처를 휙 지나가는 물통에 놀라 몸을 조금 부풀렸다. 그 는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체격 좋은 레콘 젊은이가 몸을 부풀린 채 서 있었다. 얼어붙은 물통 을 걷어찼던 발이 아래로 내려갔다. 젊은이는 헤치카를 삿대질했다. "야, 이 미친 늙은이야! 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무슨 노망질이야!" 무척 성이 나있는 것 같은 그 레콘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주위에는 조금 체구가 작아보이는 레콘 여럿이 서서 비슷하게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헤치카는 그 레콘들이 가운데 있는 체격 좋은 레콘에게 발언권을 양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헤치카는 그것이 기묘하다 고 생각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고 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 상념에 빠진 헤치카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러자 체격 좋은 레콘은 더욱 격분하여 몸을 부풀렸다. "귓구멍에 깃털 뭉치 박혔어! 왜 대답을 안 해?" 헤치카는 수염볏을 만지작거렸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꼬마야." "뭐라고?" "꼬마야. 나는 헤치카다." "헤치카? 그게 어쨌다는 거야?" "멍청하긴. 무기 받으러 온 거잖아. 그거 받고나서 헤치카를 찾으라 는 말이야. 기다려줄 테니까." 젊은 레콘은 헤치카의 말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헤 치카가 사용한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놓고 도망치려고? 어림 없지. 이봐! 저 늙은이가 도망치려고 꾀부린다. 둘러싸!" 젊은 레콘이 외치자마자 그 주위에 있던 레콘들이 달려나왔다. 그들 은 헤치카의 좌우와 뒤편을 막아서는 모습으로 둘러섰다. 헤치카는 자신이 포위당했다는 사실보다 그들의 움직임에 의아함을 느꼈다. 이 상하군. 저 녀석들도 화가 난 것 같은데 그러면 왜 싸움을 걸지 않는 거지? 자기가 하고 싶은 싸움을 다른 녀석이 대신해줄 테니 싸울 필 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 참 이상하고 이상한 일이네. 헤치 카는 설명을 듣고 싶다는 표정으로 체구 좋은 레콘을 바라보았다. 그 는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머리 굴려봐야 소용 없어. 늙은이. 곱게 늙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지. 이 멍청한 놈께서 직접." 계단 아래에 선 레콘은 두 주먹을 들어올려 눈 높이 정도에 띄웠다. 그리고 그는 그 자세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그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던 헤치카는 부리를 닫은 채 이상하기 짝이 없 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젊은 레콘은 부리를 딱 부딪혔다. 팔을 내린 레콘은 헤치카에게 척척 걸어와서는 검지를 구부렸다가 헤 치카의 수염볏을 딱 튕겼다. 헤치카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젊은 레콘이 말했다. "노망난 척하면서 빠져나가려고? 이거 계속 머리 쓰네. 까불지 말고 준비해." "아…… 그러니까 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린 건가?" "맞아. 이제 좀 알아들었으면 준비해. 늙은이." 헤치카는 준비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젊은이의 아랫부리 근처를 쳐 올렸다. 물 속에 집어넣으면 그대로 가라앉아버리는 레콘의 몸은 그 거대한 몸을 보고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겁다. 하지만 헤치카의 강력한 주먹은 젊은이를 거의 그의 신장 높이만큼 떠오르게 했다. 젊 은이는 뒤로 공중제비를 넘으며 얼굴부터 땅에 떨어졌다. 그 충돌은 레콘다운 장대한 것이었다. 그나마 레콘이기에 젊은이는 그대로 절명하는 대신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벌떡 들어올렸다. 그의 눈엔 얼떨떨함과 분노가 함께 떠올라 있었다. 헤치카는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봐. 아직 집병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 같으니 알려주지. 넌 내가 준비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 무기를 손에 쥔 후로 나는 항상 준 비되어 있어. 내가 싸울 준비를 그만둬도 되는 것은 납병을 한 이후 야. 그런데 난 아직 납병하지 않았단 말이야." 젊은 레콘은 잽싼 동작으로 일어났다. 그래야할 이유가 있었다. 헤 치카가 그의 머리를 겨냥해 발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 발은 아슬아슬 하게 젊은이를 빗나갔고 제자리에서 빙글 돈 헤치카는 다시 젊은이를 향해 섰다. 그는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싸우자고 말했으면 그걸로 됐어." 젊은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헤치카가 잠시 멈춰서지도 않은 채 뻗은 주먹을 피하기 위해 젊은 레콘은 상체를 이리저리 비틀어야 했다. 헤 치카는 빗나간 주먹을 회수하기 위한 짧은 시간 동안에도 공격을 멈 추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계명성을 내뿜었다. "싸-우-자-고-!" 반격하려던 젊은이는 얼굴을 정통으로 때리는 계명성에 움찔해서 다 시 물러나야 했다. 헤치카는 씩 웃으며 몸을 부풀렸다. 마지막으로 몸을 부풀렸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오래간만의 움직 임에 피부가 간질거렸다. 불과 물의 고문으로 깃털이 빠진 팔에서는 근육이 꿈틀거렸다. 헤치카는 두 주먹을 서로 쾅 부딪혔다. 피부의 간지러움과 달아오른 몸의 뜨거움 때문에 헤치카는 움직이고 싶다는 격렬한 욕구를 느꼈다. 그래서 헤치카는 그렇게 했다. =============================================================== 26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7. 평가를 수용하는 태도 - 1 아실은 고개를 도리질쳤다. "큐레 교수님. 분리주의의 대안에 대한 교수님의 말씀이 인상적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그런 것을 사람 이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설령 사람이 만들 수 있다고 해 도 여전히 문제네요. 교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것은 사람 에게 필요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만들면 그 즉시 사람에게 버림받을 테니까요. 이건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가 되네 요." 큐레 교수는 볼을 긁적거렸다. 그 동작에는 만족감과 좌 절감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런 모순을 피할 방법이 있긴 하지." "어떤 방법이지요?" "그야 당연하잖아.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 만들면 돼." 아실은 웃음을 터뜨렸다. - 하이스 대학에서 있었던 아실 과 제디옷 큐레 교수의 대담 中. 먼 곳에서 달려오는 전령의 표정을 보자마자 시오크는 그가 가져오 는 것이 독행왕의 편지임을 짐작했다. 전령은 연서 전달자의 전통적 징후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 무 것도 가져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지겹도록 오래된 속임수이고, 뭔가를 가져오는 것이 목적인 전령이 구사하고 있으니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시오크는 '나는 자네가 가져오는 것이 지키멜의 편지라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만약 놀란다면 그것은 자네 가 태연히 감행하는 시간 낭비에 대한 경악일 뿐'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대신 전령이 내놓는 편지를 놀란 척하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기 진작은 중요한 것이다. 이불을 가슴에 끌어안고 정신없이 달리는 당원에게 길을 비켜주기 위해 - 더 이상한 물건을 들고 달리는 사람도 많이 보았기에 시오크 는 놀라지 않았다. - 시오크는 동행자와 함께 통행에 방해되지 않는 모퉁이 쪽으로 물러났다. 동행자는 모퉁이 바깥쪽에 앉아 두 개의 벽 에 등을 기댔다. 시오크는 그 옆에 서서 피봉을 들어올렸다. 피봉에 자신의 손때가 묻은 것을 본 시오크는 손을 윗옷에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피와 기름때, 재 등으로 얼룩져 뻣뻣해진 그 옷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분간 옷을 갈아입기 어려울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오크는 우울한 기분으로 편지를 꺼냈다. 고맙게도, 편지의 서두는 시오크에게서 우울함을 상당히 걷어내었 다. 이 아래에 입 맞출 것. 내가 입 맞춘 자리니까. 시오크는 속으로 낄낄 웃으며 아래 쪽의 공백에 입을 맞추었다. 그 리고 다음 줄을 읽어내려갔다. 감상적인 이야기 좀 할게. 시오크. 우리는 서표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야. 우리는 북 부에 올 수 없는 나가가 북부에 만든 나라에서 태어나 북 부에 발을 딛지 않는 지배자의 통치를 받으며 자랐지. 우 리는 그것이 역사의 한 장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 것이 역사라는 책에 꽂혀있던 서표였다는 것이 드러났지. 나가는 이제 다시는 북부로 넘어올 수 없고 하늘에 떠있던 수도는 사라졌어. 책을 다시 넘기려면 서표는 뽑아내야겠 지. 생각해봐.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보다는 조부모와 이야기 가 더 잘 통하겠지. 그리고 나가 황제라든지 모든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의 제국이라느니 하는 꿈 같은 소리를 하는 부모를 어릴 때는 당혹스럽게, 머리가 좀 굵어진 후에는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겠지. 어쩌면 어이 없다는 듯이 외칠 지도 몰라. '나가는 한계선을 넘을 수 없어요. 이 커다란 세상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는 없어요.' 하고 말이야. 뽑 혀나간 서표와 함께 우리는 잊혀질 테고 장엄한 역사의 서 가에 우리 자리는 없겠지. 그것이 내가 바라는 거야. 우리 시대는 우리 것이야. 그리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것 이지. 그 둘은 함께 사라질 거야.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에게서, 나는 죽음에 대한 케케묵은 기만을 발견해.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굴고 싶어하지. 그래서 시대의 단절이나 변화를 견디지 못하는 거야. 우리 시대가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시오크. 제국은 아름다웠어.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는 우리에게 정말 멋진 것을 주었지. 하지만 그것이 멋지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어. 더군다나 그것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한없는 유혈의 원인이라면, 시 오크.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떠나간 청춘에 보낼 것은 한 잔의 건배면 충분해. 우리는 그것을 사랑했지. 그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어? 제기랄. 누구에게도 이렇게 말할 수 없단 말이야. 나는 멋지고 훌륭한 전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굴어야 한다 고.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 한 달에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거든. 그러니 어쩌겠 어? 애인에게 투덜거릴밖에. 정신없을 텐데 이런 투정을 늘어놓아서 정말 미안해. 한 마디만 더 하고 그만할게. 시오크. 나는 죽을 너를 사랑해. 시오크는 마지막 문장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열 번 이상 그것을 읽 은 시오크는 빙그레 웃었다. "지키멜. 나도 죽을 너를 사랑해." 시오크의 곁에 앉아 다급하게 달리는 당원들을 바라보던 동행자는 당혹한 얼굴로 시오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본 시오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독행왕은 불치병 같은 것에 걸리진 않았어." "그러면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녀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분명하잖아. 나나 당신이 그런 것처 럼." 동행자는 그 말에 분명한 동요를 보였다. 설명하려던 시오크는 동행 자의 얼굴을 보고는 그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죽음은 언제나 껄끄러 운 소재다. 하물며 그의 동행자인 남자에겐 말할 것도 없다. 편지를 챙겨넣은 시오크는 허리를 굽혀 동행자가 일어나도록 도와주 었다. 두 팔이 손뒤로 묶여 있던 동행자는 그 도움을 받아 절반 쯤 일어났다. 하지만 동행자는 시오크의 손에서 몸을 빼며 다시 주저앉 았다. 그는 시오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시오크는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입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살려주십시오." "일어나라."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 죄를 씻을 기회를 주십시오. 무슨 짓 이든 하겠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였습니다." "일어나."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시오크의 말에서 흔들림을 들었다고 생각했 던 남자는 시오크의 얼굴에서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오 크의 음울한 얼굴을 본 순간 남자는 그 흔들림이 자신의 환상이었음 을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남자의 얼굴에 표독한 표정이 떠올랐다. 남 자는 폐부에서 쥐어짜는 목소리로 외쳤다. "당주에겐 당원을 죽일 권한이 없어! 제명할 수 있을 뿐이야!" 시오크는 지체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천만에! 당주는 당원의 목숨을 요구할 수 있다. 우리의 길을 보호 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든 싸운다. 죽음의 거장 앞에서도, 대장군 갈 로텍의 앞에서도 그러했다!" 남자는 시오크에게 유료도로당의 전통을 가장 통렬하게 파괴했으면 서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유료도로당의 전통을 이용 하냐고 논박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한 정신이 아 니었다. 논박하기는커녕 남자는 시오크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 다. 시오크도 자신의 말을 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 오크가 자신의 말을 들려주고 싶은 대상은 분주히 오가면서도 근심스 러운 눈으로, 혹은 의심의 눈으로 흘깃흘깃 바라보는 당원들이었다. "멋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길과 무기를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의 원 칙이다! 당은 어느 때라도 당원에게 싸우라고 말할 수 있다. 싸움에 서 누군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당은 언제든 당원의 목숨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이다! 너 같은 배신자만이 그걸 모르는 것이다. 금편 몇 닢에 당이 맡긴 징수소와 너를 따르는 당원들을 팔아넘기는 너 따위 녀석이 감히 제명을 요구한다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지들을 배신 한 주제에 당을 떠나 적에게 받은 금편으로 놀고 먹겠다고? 어떻게 감히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징수소장에게 외치며 시오크는 자신의 말을 듣는 진짜 청중의 눈치 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들의 얼굴에 분노가 떠오르는 것을 본 시오 크는 안도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시오크의 말은 절대로 수사 법이 아니었다. 하이스-키탈저 유료도로 제4징수소는 전투중이었다. 따라서 시오크의 말은 놀라운 호소력을 발휘했다. 다만 공포로 넋이 나가 있던 징수소장에겐 시오크의 설명도 별다른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징수소장은 살고 싶다는 말과 억울하다는 말로 간단히 요약가능한 말을 지리멸렬하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시오 크는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운 다음 당주에게 맡길 것 없이 자신이 손으로 직접 배신자를 처단하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당원들 사 이로 걸어들어갔다. 잠시 후 시오크와 결박된 징수소장은 징수소 아래쪽이 훤히 잘 보이 는 주랑 위에 나타났다. 시오크는 그곳에서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이미 여러 번 보았기에 시오크는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징수소 바깥에는 시모그라쥬군의 병사들이 백사장의 모래를 연상시키 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대부분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 서있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징수소의 철문 앞까지 육박하여 징수소 내부로 침입 하려 애쓰고 있었다. 성대한 낙석과 화살, 투창, 끓는 기름 등이 그 들에게 제공되고 있었지만 공격 병력은 물러나지 않았다. 만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어젯밤 이미 한 번 침입에 성공했다. 열린 문 을 통해 들어온 병력은 많지 않았고 게다가 당원들은 재빨리 문을 도 로 봉쇄했지만, 어쨌든 당원들은 징수소 내에서 잘 훈련받은 군인들 과 무술을 비교하는 영광을 누려야 했다. 침입자들은 무서운 기세로 싸웠지만 징수소 내의 지리에 익숙한 당원들을 제압하고 문을 도로 열지는 못했다. 시오크 자신도 칼을 빼들고 당원들과 함께 징수소에 침입한 시모그라쥬군과 싸웠다. 그의 지저분한 옷차림은 영웅적이라 고 하기는 힘들지만 감투 정신은 높이 살 수 있는 지난밤의 격투가 남긴 흔적이었다. 한 번 침입에 성공했기에 두 번째도 가능하다는 상식적인 추론으로 무장한 공격 병력은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은 채 징 수소의 철문을 강타했다. 어쩌면 그들의 예상대로 두 번째 침입이 성 공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시오크는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 다. 그곳에는 시오크의 명령에 따라 미리 준비되어 있던 통나무 기둥 이 서있었다. 시오크는 주변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당원들에게 징수소장을 가리켜 보였다. 엄선된 힘 센 당원들은 징수소장을 질질 끌고가서 기둥에 묵었다. 징수소장은 두 팔이 묶인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 다. 그 때문에 시간이 좀 지체되었지만 시오크는 안달하지 않았다. 주랑 위에서 벌어진 소란 때문에 공격자들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래서 일시적으로 징수소에 대한 공격이 무뎌졌다. 시오크는 만족한 얼굴로 징수소장이 묶이는 광경을 보았다. 징수소장은 거미줄에 칭칭 감긴 파리처럼 통나무에 결박되었다. 입 은 자유로웠기에 징수소장은 계속해서 비명과 애원, 그리고 폭언들을 쏟아내었다. 시오크는 그의 입을 가리켰다. "입을 막아." 징수소장의 윗옷 소매가 뜯겨져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맷자락은 통나무에 단단히 묶였고 징수소장은 말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머 리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징수소장은 어떤 당원이 시오크 에게 무엇인가를 넘겨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시오크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오크가 징수소장의 처벌 시점을 전투 도중이라는, 어떻게 보면 조 금 어색한 시점으로 결정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급박한 처지에 빠져 있는 당원들에게 간단히 처형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시오크가 오면서 확인했던 것처럼 그들은 징수소장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을 보였다. 그리고 둘째로 적 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래쪽에 있는 적들은 의아함과 경 계심을 담은 표정으로 시오크와 징수소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징수 소장과 함께 이곳으로 오기 전 시오크는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고 반복적으로 되뇌었고 마침내 충분한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시 모그라쥬군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시오크는 그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징수소장은 처형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오 크는 특히 후자의 이유가 중요해졌음을 깨달았다. 지금 이 상태에서 물러난다면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기세만 올려 주게 될 것이다. 시오크는 비로소 의식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던 세 번 째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오크는 물러날 수 없는 상황 속에 자신을 밀어넣고 싶었다. 제정신으로는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 다. 물러날 수 없었던 시오크는 톱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묘하게 손은 떨리지 않았다. 손을 떨 정신도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 다. 그 때문에 그의 표정은 묘하게 차분했다. 거리가 있었기에 시모 그라쥬군은 시오크의 얼굴이 무표정한 것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있 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시모그라쥬군은 징수소장의 목을 써는 시오크의 표정이 담담 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모그라쥬군의 선봉 앞에서 벌어진 처형식에 대한 보고를 받은 베 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입 주위를 살짝 문질렀다. "생각보다 더 거친 녀석이군." 그녀가 있는 곳은 제4징수소에서 5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는 농장의 식당이었다. 시모그라쥬군에게 징발당한 그 농장은 참모부 회의소로 쓰이고 있었다. 많은 사용인들이 있었기에 식당과 식탁은 컸고, 그래 서 시모그라쥬군 참모부 전원이 모였지만 비좁다는 느낌은 없었다. 참모들 중 한 명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칼질에 자신이 없어서 톱을 쥐었는지도 모르지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지만 그 말을 하는 참모의 얼굴에는 약간 질 린 기색이 있었다. 다른 참모들의 얼굴에도 그 표정의 여러 변형판들 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던 베로시는 칼질과 톱질의 차이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참모의 지적처럼 칼로 단번에 사람의 목을 자를 기술이 없다 면 톱을 선택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톱질에는 확실히 섬뜩한 면이 있다. 칼로 목을 자르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무엇. 톱이 움직일 때마다 튀는 피나 살점이 너덜너덜해지는 모습, 뼈가 톱날에 갈리는 소리 등의 감각적 효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칼이 나 도끼로 단번에 처형되는 것과 달리 오랜 시간 고통을 당했을 피해 자의 심정에 대한 감정 이입도 고려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만으 로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지도 않은 참모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설 명할 수 없다. 베로시는 참모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생각해 보았 다. 어렵지 않게 답이 나왔다. 그것은 부자연스러움이다. 칼로 목을 자르는 것에는, 살인이라는 행 위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은 보류한채 본다면 자연스러움이 있다. 칼 의 용도가 어차피 그것이니까. 하지만 톱은 사람의 목을 자르는 도구 가 아니다. 따라서 톱으로 사람의 목을 자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런데 부자연스러움이야말로 공포의 정수다. '두억시니.' 두억시니에 대한 열광 때문에 독특한 별명까지 얻은 사람답게 베로 시는 두억시니에 대해 생각했다. 두억시니는 무섭다. 그녀가 직접 목 격했고 지금도 대호왕의 곁에 있는 두억시니 갈바마리는 무섭다. 그 가 거칠게 행동하거나 살해의욕에 휩싸여 돌아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자연스러운 모습 때문에. 시오크의 톱질과 두억시니의 모습에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무엇이 부자연스러운 것인가? 두억시니에게는 규칙이 없다. 따라서 두억시니에게 '자연스럽다'거나 '부자연스럽다'는 말은 적용 될 수 없다. 갈바마리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도,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갈바마리의 모습이 무섭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 을 보는 사람이 세상을 자연스러운 것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나누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익숙함과 낯설음이라고 바꿔 말해도 된다. 베로시는 두억시니의 의미 - 이 말도 어색하다. - 에 접근했다는 느 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포착해서 말로 옮길 수는 없었 다. 그리고 그녀에겐 그런 일에 쓸 시간도 없었다. 자신이 잠시 멍하 게 있음으로써 회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은 베로시는 그 말을 하기 위해 침묵했다는 듯이 말했다. "시오크가 유료도로당의 모든 징수소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고 보 기는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게라임 지울비는 오래 전에 붙잡혔을 테 니까. 하지만 시오크가 상당한 장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 야 할 것이다. 제4징수소의 경우 최상층인 징수소장 자신이 우리에게 포섭되었음에도 시오크는 그 사실을 알고 나타나서 우리에게 나뭇꾼 묘기를 보여주었지. 그것은 그가 직선적인 단순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베로시는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일 시간을 준 다음 말했다. "물론 자신의 정보력이 가져온 승리에 도취되어 시오크의 경계가 느 슨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반대로 아찔함을 느껴서 더 조심스러워 질 수도 있다. 매수는 포기하는 편이 좋겠지. 따라서……" 의도적으로 말을 잠시 끊은 베로시는 코 왼쪽에 주름을 만들었다. "실력을 보여줘야겠다." 참모들은 사나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베로시의 의도대로였다. 하지 만 그들은 고급장교로서의 자질도 가지고 있었다. 모처럼 피어오른 자신만만한 분위기를 해치기 싫다는 듯 참모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 했다. "그렇습니다. 좋은 요새에 틀어박혀 있다 해도 결국 토목기술자들이 거나 징수원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군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틀어박혀 있는 요새가 지나치게 좋습니다. 그곳을 공략하려면, 물론 저는 성공하리라 확신합니다만,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겁니다. 그 경우 병사들의 사기에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됩니다." 베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약간의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열대에 익숙한 우리 병사들은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최고의 전투력을 보여줄 것이 고, 그 이후엔 전투력 보존은커녕 부대 운용까지 힘들어질지도 모른 다. 우리 병사들 중엔 올 겨울이 태어나서 맞이한 첫 번째 겨울인 자 들도 많이 있을 테니까. 따라서 그 시점이 오기 전에 최대한 점령지 를 확대해야 한다. 그래야 이곳 기후에 익숙한 병사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파상공격으로 쉴틈을 주지않고 몰아붙여야 한다. 그 리고 투석기를 준비하도록." 몇몇 장교들의 얼굴에 수심이 떠올랐다. 한계선을 넘어온 후 탁월한 기량이 아니라 불운 때문에 공성기 제작 및 운용에 관련되게 된 장교 들이었다. 나스팔성 전투에서 상당한 수모를 겪었던 그들은 주눅든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베로시가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투석기로 징수소를 때려부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니니 얼굴들 펴라." 장교들은 약간의 희망과 의문을 품은 얼굴로 베로시를 바라보았다. 베로시는 다시 왼쪽 얼굴에 주름을 만들었다. 비틀려 올라간 입술 아 래로 이를 드러내며 베로시가 말했다. "그걸로 적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청년에 게 세상에 거친 사람이 자신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겠다." 그 날부터 시모그라쥬군의 격렬한 파상공격이 하이스-키탈저 유료도 로 제4징수소에 몰아쳤다. 징수소장을 처벌하고 새 징수소장도 임명했지만, 시오크는 징수소를 떠나지 못했다. 시오크가 최전선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전사도 아니거니와 탁월한 전략가도 아니었다.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아무런 능력이 없거니와, 저 바깥에서 자유로이 활보하고 있을 게라 임 지울비를 생각한다면 당의 수뇌부를 떠나 있는 것은 자살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시오크가 떠나는 것은 마치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처형 당한 징수소장은 당원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을 받아 두 번째 사망을 겪었고 공동의 증오 대상은 당원들을 결 집시켰다. 시오크는 그 결집이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만큼 빠르게 사 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시오크는 조금 더 이긴 다음에 떠나 기로 결정했다. 시오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모그라쥬군은 승패를 불분명 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교대로 대대 단위의 병력을 보내어 쉴새없이 징수소를 공격했다. 한 대대가 물러나자마자 다른 대대가 들이닥치는 식이었고, 따라서 징수소의 당원들은 눈앞의 적이 물러나는 것만으로 승리의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다. 무지막지한 파상공격을 잘 버텨내 었지만 당원들은 격한 피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당원들의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피로한 당원들을 얼 어붙게 만들었다. 유료도로의 저편에서 나타난 것은 바퀴 달린 투석 기들이었다. 당원들은 투석 공격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나스팔성 전투 당시 시모그라쥬군이 보여준 투석기 운용 능력에 대해 서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단단한 자연암과 어울려 건설된 징수소는 어지간한 투석 공격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했 다. 하지만 시모그라쥬군은 돌을 날려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괴팍하 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특수한 탄환을 날려보냈다. 그리고 그 탄환은 당원들을 심하게 동요시켰다. 시모그라쥬군은 투석기로 산양을 날려보냈다. 산양들은 산 채로 투석기에 '장전'되었다. 그 때문에 산양들은 발사 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비통한 울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투석기가 발 사되자마자 그 울음은 사라졌다.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겠지만 발사 충격은 산양들의 허파를 짓눌러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게 만들 었다. 산양들은 그저 다리를 버둥거리며 허공을 날았다. 어떻게 보면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발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 산양이 춤을 추는 듯했다. 하지만 당원들은 웃지 못했다. 그리고 산양들이 징수소 나 그 근처의 암석, 절벽, 숲 등에 부딪쳐 피투성이 고깃덩어리가 될 때는 비명을 질렀다. 시오크는 당황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오크의 지휘 하에 유 료도로당은 모든 여행객을 위해 길을 준비한다는 당의 기본 이념까지 도 버렸다. 시모그라쥬군의 진군을 막고 그들과 싸우는 것은 여행자 들의 목적을 평가하지 않았던 유료도로당에겐 절대로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그런 일도 저질렀던 유료도로당이건만, 웃기는 모습으로 하 늘을 날아오는 산양들이 그들을 절규하게 했다. 그들은 울며 그만두 라고 고함을 질렀고 산양이 날아와 죽을 때마다 육친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애통해 했다. '산양의 저주'에 관한 케케묵은 이야기가 다시 사람들이 입에 올랐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당시 유료도로당이 궤멸해버린 것은 나가들의 공세 때문이 아니라 시구리아트 유료도로 에서 살해당한 어떤 산양이 내린 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오크는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산양을 죽인 자에 대해 온갖 가설들밖에 내놓을 수 없는 사람들과 달리 시오크는 그 산양살 해자가 누군지도 알고 있었다. 약 오십여 년 전 유료도로당의 도로 위에서 산양을 태연히 죽여 그들을 경악시켰던 사람은 북부로 오던 중이었던 대호왕 사모 페이였다. 사모 페이는 아마도 단순히 식사를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수백 년만에 한계선을 넘어 북부로 온 나가답게 유료도 로당의 관습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모는 시구리아트 유료 도로에서 태연히 산양을 사냥했다. 당원들의 반응은 그녀를 깜짝 놀 라게 했다. 시오크는 오십여 년 전 그녀가 느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 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산양을 날려보내는 짓을 그만두게 할 수 있다면 징수소를 포기하는 것도 한 번 고려해볼 만하다는 암시가 담 긴 말을 들었을 때 시오크는 누군가가 자신의 두개골을 열고 교반기 를 집어넣어 휘젓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깟 산양이 어쨌다고? 당신들도 마리번 도빈 같은 보수적인 산양 연모자는 경원하잖아. 그런 주제에 왜?' 징수소장의 목을 톱으로 자르는 무시무시한 의식을 통해 진작되었던 당원들의 사기는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 일을 하면서 입었던 정신적 고통을 떠올린 시오크는 씁쓸함뿐만 아니라 억울함마저 느꼈다. 끊임 없는 공격에 지친 방어 병력이 사기마저 잃었다면 속된 말로 볼장 다 본 셈이다. 그리고 거기에 시오크의 실수가 더해졌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꽤 피곤했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였다. 올바른 대처 방법은 그들의 슬픔과 분노에 편승하며 악독한 시모그 라쥬군을 저주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피곤하고 신경이 곤 두서 있던 시오크는 산양에 대한 당원들의 불합리한 감정을 버리라고 종용해버렸다. 그것이 무엇이건 자신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당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에 대해 설 명하기에 앞서 우선 화를 내는 법이다. 당원들은 시오크의 말에 화를 냈다. 그리고 배신감을 느낀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반응을 본 시오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렇다면 좋아. 산양을 구출하지." 반응은 시오크가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시오크는 지키멜이 산양을 구출하다가 죽을 자신도 사랑해줄지 궁금해졌다. =============================================================== 27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판타지 읽기' 의 하리야 헌처크 님이 쓰신 비평문은 칼럼란에 있습니다. 피를 마시는 새 27-2 | 피를 마시는 새 2004/08/14 06:25 네스토르(rpgtown) http://cafe.naver.com/swallowedbird/1657 27. 평가를 수용하는 태도 - 2 여름밤, 하늘에서는 별들이 빛으로 와글거렸고 땅에서는 풀벌레들이 소란을 부렸다. 후끈 달아올랐던 땅의 열기는 사라졌지만 낮 동안 난 폭한 햇빛에게 유린당했던 풀잎들에서는 아직도 뜨거웠던 대낮의 냄 새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베로시 토프탈은 침상에 반쯤 드러누워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사실 은 토프탈 가문의 일원들이 보내어온 편지들이었지만 베로시는 그것 을 보고서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보내는 쪽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토프탈 가문의 가문의 구성원은 많은 편이 아니지만 그들은 모두 팔디곤 토프탈에게 완전히 협조하고 있었다. 가주의 결정에 무 조건적으로 따르는 나가식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실제로 팔디곤은 나가의 가주들에게서 가문을 다스리는 법을 많이 차용했다. 따라서 인간들의 대가문에서라면 발생할 수 있는 서열 다툼이나 지배권 확대 시도 같은 것은 토프탈 가문에 없었다. 아쉬존 토프탈을 황제로. 팔 디곤이 그렇게 결정했고 가문의 구성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따르고 있었다. 베로시 또한 그러했다. 푸근한 기분 속에서 보고서를 읽던 베로시의 눈이 한 지점에 머물렀 다. '그 두 명이 보여주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생각하면 제 젊었을 적이 떠오르는군요. 누님.' 베로시는 그 두 명이 누군지 잠깐 고민해야 했다. 앞쪽의 문장을 다 시 읽어본 베로시는 그 두 명이 독행왕 지키멜 퍼스와 유료도로당주 시오크 게라임을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흥미를 느낀 베로시는 등을 펴 똑바로 앉아서 편지를 읽었다. '지키멜 퍼스는 만인을 통합하여 지배하는 제국이 없어도 사람들은 서로 잘 어울려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키멜은 왕국 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시오크 게라임은 만인이 동의할 수 있는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오크는 유료도로당 이 여행자들의 목적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풍요로왔 던 시대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귀엽지 않습니까?' 물론 그 두 사람을 인간에 대한 신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철부지로 경솔하게 치부하는 것은 두 사람에 대한 무례임에 앞서 사실이 아니 다. 고의로 패배를 조장해서 사람들을 격동시키거나 적과 아군의 시 선 속에서 배신자의 목을 톱질하는 일은 인간을 마냥 신뢰하는 자의 행동은 아니다. 사람의 통찰력을 믿는 자라면 왕국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서 이해를 받으려 시도할 것이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는 자라 면 배신이 나쁜 이유를 설명해서 상대가 개심하도록 애쓸 것이다. 하 지만 지키멜과 시오크는 그런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로 시는 그 설명에 날카로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두억시니 장군은 사람이 약간 불필요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어쩌면 사람을 믿지 않는 척하려 애쓰는 낭만주의자일지도 모 른다. 혹은 반대로 사람을 믿는 척하려 애쓰는 회의주의자일 수도 있 고. 그 시점에서 베로시는 사고를 진행시킬 원동력을 잃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두 사 람을 거꾸러뜨릴 방법이었다. 그래서 베로시는 두 사람의 철학보다는 두 사람이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 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반 시간 후, 베로시는 시오크 지울비가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 힘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목록을 만들 수도 있었다. 장검 한 자루와 단검 한 자루, 위아래 옷, 그리고 그 자신의 몸. 가축우리 근 처에서 체포되었을 때 시오크 지울비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힘이었 다. 시오크 지울비는 절망과 두려움, 분노 그리고 자기 혐오 중 어느 것 에 빠질지 결정하지 못했다. 11만 대군의 눈을 절묘하게 피했으면서 도 단 한 사람의 눈을 피하지 못해 발각당했다는 것에 대해 시오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시오크는 일단 복수심부 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거 거짓말이야. 부위. 그 친구는 가축들 잘 있나 보러 우리에 간 것이 아니라 다섯 명의 애인과 밀회중이었어. 땅에 누워있어서 우리 가 못봤지." 침입자를 발견한 상황에 대해 보고하던 상전사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저열하나마 복수심을 만족시킨 시오크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보고를 받던 부위도 피식 웃었다. 하지만 부위는 가축 우리에 틀어박혀 수음한 병사에게 정확하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부위는 그냥 물러가 쉬라고 말했다. 상전사는 죽일 듯한 눈으로 시오크를 쏘아보고는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하지 만 그의 불운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상전사는 천막 안으로 들어오던 베로시 토프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놀라운 속도로 경례하는 상전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로시는 시선 을 낮추었다. 두억시니 장군의 시선이 자신의 사타구니 쪽을 향하는 것을 느낀 상전사는 그만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결 박당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시오크와 그의 동료들까지 포함 하여 그 광경을 보던 모든 사람들은 폭소를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베로시는 싱긋 웃고는 경례를 받았다. 상전사는 비구름 만난 레콘과 좋은 승부가 예상되는 속도로 도망쳤다. 베로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들을 지나쳐 시오크의 앞쪽으 로 걸어갔다. 준비하고 있던 부위는 냉큼 의자를 내밀었고 베로시는 거기에 걸터앉았다. 베로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자들이 모두 열 한 명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부위에게 누가 시오크냐고 질문했다. 부 위가 가르쳐준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베로시는 못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정말 시오크 지울비인가?" 조금 전의 희극적인 장면 때문에 시오크는 갑작스럽게 화를 내기 어 려웠다. 그래서 시오크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제 아버지께서 불초에게 그런 이름을 주셨지요. 그런데 두억시니 장군이십니까?" 베로시는 그 질문에 의도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믿기 어렵군. 시오크 지울비가 자기 발로 걸어들어와 붙잡히다니. 내가 알기로 자네는 고의로 붙잡히는 버릇이 있지. 혹 그 버릇이 도 진 건가?" 베로시가 말한 것은 페로그리미의 일이었다. 시오크는 그것이 사실 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설마 진짜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베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당시에는 우리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았지. 따라서 그런 패기 만만한 짓도 해볼 수 있었을 테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지. 어쩔 수 없이 나는 자네가 의도에 반하여 붙잡혔다고 생각 해야 되겠군. 그런데 그 경우 자네는 11만 대군 속으로 걸어들어와 가축 도둑질이나 하다가 붙잡히는 얼간이가 되는데." 시오크는 그 말을 인정하는 곤욕을 겪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무시 무시한 눈으로 베로시를 쏘아보던 포로가 고함을 빽 질렀기 때문이 다. "산양 학살자!" 시오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베로시는 자신을 바라보는 포로를 마주 보다가 다시 시오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그런 이유에서?" 시오크는 대답하려 했지만 산양 학살자에 대한 무서운 욕설이 계속 되고 있었기에 말소리가 묻혀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시오크는 고개 만 끄덕였다. 베로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곤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 동안에도 욕설과 비난은 계속되었다. "당신을 투석기에 얹어서 쏘면 좋겠어? 엉? 그러면 즐겁겠어! 그러 면 직접 투석기에 올라가라고! 왜 무고한 산양을 쏘는 거야! 이 정신 나간 살육자야! 아냐, 팔디곤 토프탈인지 뭔지 하는 그 제왕병자를 쏴! 이건 당신 위해서 하는 충고라고!" 포로들을 감시하고 있던 시모그라쥬 장병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그들을 침묵시키겠다는 표정으로 베로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베로 시는 험악한 욕설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시오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로시는 그 욕설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소란 때문에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은 문제였다. 그래서 베로시는 장병 들에게 시오크만을 남겨두고 모두 밖으로 끌고나가라는 명령을 내려 야 했다. 포로들은 주먹질을 당하며 끌려나갔다. 혼자 남게 된 시오크는 자신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지 않 기를 바랐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짓이니까. 좌절한 표정도 곤란 하고 자신만만한 표정도 곤란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타협책은 피곤 한 표정이었다. 실제로 시오크는 피곤했다. 시모그라쥬군에 잠입하느 라 상당한 정신적, 육체적 긴장을 겪었기 때문이다.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다 실제로 피곤했기 때문에 시오크는 하품을 할 뻔했다. 베로시가 말했다. "직접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동감입니다." "그런데 왜 왔나?" "산양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응?" 시오크는 결국 하품을 했다. 그는 입맛을 조금 다시고는 말했다. "처음부터 구하자고 말했다면 다른 사람들만 보낼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놓고서 당원들이 희생되는 것이 싫어 서 그랬을 뿐 사실은 산양을 구하고 싶었다고 주장하려면 직접 나서 야 하지요." "아아, 그러니까 자기 말에 묶였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자살행위라는 생각은 안 했나?" "산양을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베로시는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오크는 스스로 대답했다. "못할 거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오히려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 습니다. 실패한 상황에서 이런 말은 부질 없지만 외로움 타는 상전사 만 아니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습니다." 베로시는 다시 머리를 끄덕이고는 천막에 남아있던 장병들에게 말했 다. "밖으로 나가라. 잠시 둘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단단히 묶여 있는데다 나는 무장도 하고 있다. 괜찮으니 걱 정 말고 나가라." 장병들은 경례하고 나갔다. 천막 안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베 로시는 팔짱을 낀 채 재미있다는 얼굴로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시오 크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조금씩 떠오르는 것을 보며 불편한 듯 헛 기침을 했다. 베로시가 말했다. "정말 기대도 안 했어. 시오크 지울비. 내가 기대한 건 너희들이 화 가 나서 침착성을 잃는 것이었지. 그것도 큰 기대는 아니었어. 그런 데 투석기에 걸어 쏜 산양 때문에 유료도로당주가 걸려들다니. 깜짝 선물 받은 기분이야." 시오크는 지금껏 베로시가 희열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음을 깨달았 다. 상전사에게 장난스러운 눈길을 보낼 때부터 짐작했어야 하는 일 이었다. 시오크는 비꼬았다. "하지만 부하들에게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산양을 쏜 거라고 말씀하 시겠지요." "물론이지. 자, 이제 자네 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무슨 생각으 로 제국 부활을 방해한 거지?" 시오크는 입매를 살짝 비틀고는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오랫 동안 그렇게 있었기에 다리가 저렸다. "의자에 앉으면 안되겠습니까?" "안돼." 거부당하리라 생각했기에 시오크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베 로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국 부활을 방해한 것이 누굽니까? 귀족원 회의를 통해 새 황제를 선출하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 누굽니까?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진 다는 뻔뻔스러운 논리의 대변자인 것처럼 행동한 것이 누굽니까?" "그러면 약한 자가 모든 것을 가져야 하나?"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줄 대상으로 결정한 사람이 그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로시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는 도깨비 감투를 쓴 사람을 좋아하나?" "예?" "말해봐. 주위에 도깨비 감투를 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네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시오크는 베로시가 파놓은 함정을 깨달았다. 그는 그 함정에 발을 밀어넣기로 했다. "물론 무섭고 껄끄러운 느낌부터 들겠지요." "도깨비 감투를 쓴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네를 도와줄지도 모르는데? 기뻐해야 되는 거 아냐?"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건지 알겠습니다. 예. 사람이 다른 사람 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반격당하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 자네도 그걸 알고 있어. 자네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공격성 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반격의 위험이지. 바꿔 말한다면 반격의 위험 이 없을 경우 사람은 당장 공격을 시작하지. 도깨비 감투를 쓴 사람 이 무서운 것은 그 때문이야. 공격하더라도 반격당할 가능성이 적지. 나를 실망시키는군. 시오크 지울비. 왜 꿈 같은 소리를 하는 거지? 사람은 자기 것을 내놓지 않아. 오히려 남의 것을 빼앗지. 자네 자신 도 아버지의 자리를 멋지게 빼앗았잖아." 시오크가 예상한 것과 거의 일치하는 함정이었다. 게라임의 이야기 는 결코 빠질 수가 없다. 시오크는 자신이 꺼내놓는 말에 주의를 기 울이며 말했다. "상장군님. 그런 일반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 사람은 상장군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동물입니다. 그것은 생물의 일반적인 특성일 겁니다. 모든 생물은 음식과 분변 사이에 위치해야 하지요. 생명은 먹습니다.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을 가져와야 합니다." "반론이 준비되어 있다는 어투로군. 어떻게 그것을 반대하지? 생물 은 주위에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해. 그 반대가 아니고. 그 반대가 되면 죽는 거야. 삵괭이에게 잡아먹히는 토끼 같은 경우가 그렇지. 그것이 생물이야. 자네의 어떤 재주로도 그것은 뒤집어놓을 수 없어." "저는 그것을 뒤집을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평가하고 싶을 뿐입니 다. 일반론의 문제는 평가가 차치물론된다는 겁니다. 일반론으로는 아무 것도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평가라고?" "그렇습니다. 물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일반론입니다. 물을 못 먹으 면 죽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반론으로 홍수를 평가할 수 있습니까? 물은 중요하니까 많은 물인 홍수는 굉장히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 습니까? 그런 말은 비웃음을, 만약 상대가 레콘이라면 그 이상으로 위험한 반응을 받을 겁니다. 어떤 물이냐, 무슨 상황에서의 물이냐에 따라 물의 중요성은 달라집니다. 소나기를 직면하게 된 레콘과 사막 에서 길을 잃은 인간은 물에 대해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릴 겁니다. 거기서 일반론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시오크는 자신이 연설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베로시는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시오크는 두 팔을 앞으로 내뻗으려다가 밧줄 에 방해받고는 대신 머리를 흔들었다. "예. 생물은 먹어야 합니다.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끊임없 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것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먹느냐는 문제는 우 리의 능력으로 접근해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먹는 방식들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새가 하늘을 날 수 있고 물고기가 물을 호흡할 수 있는 것처럼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입니다. 왜 그것을 포기해 야 합니까?" 시오크는 열에 들뜬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버지에게서 당을 뺏은 것은 절대로 평가하려 하지 않는 당 과 아버지의 모습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능력을 억지로 빼앗는 짓이기에 사람에 대한 모독입니다. 게다가 종 족적 살해입니다. 새의 날개를 부러뜨리고 창공의 바람을 맛볼 수 없 게 하는 짓을 무엇이라고 부르시겠습니까? 그것은 살해 행위입니다!" "그래서 자네는 아버지와 당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하고는 그 것을 바로잡기로 했다는 건가?" "당신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베로시의 눈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시오크는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걸었다. 베로시는 천천히, 하지만 엄격하게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 다. 시오크는 멈춰서서 말했다. "상장군님. 시모그라쥬공의 방식은 잘못되었습니다. 회군하십시오. 왜 무수한 피를 흘리면서 제국을 얻어야 합니까? 평가해보십시오. 귀 족원 회의쪽이 훨씬 낫습니다. 그곳에서 황제로 선출될 수 있도록 노 력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목적은 같아도 그것이 훨씬 나은 방법입니다." 베로시는 앞으로 내밀었던 손을 끌어당겨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손 가락으로 상완쪽을 톡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원한다면 평가해주지. 그건 훨씬 멍청한 방법이군." 시오크는 깊은 좌절감을 담은 눈으로 베로시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생각해보지. 시오크. 시모그라쥬는 잠깐 멈춰 서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고 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지나쳤어. 앞으로 나아가느냐 무너지느냐일 뿐이야. 그리고 지금 물러나는 것은 무너지는 것에 포함되지. 모든 세상에 패배자로 낙인 찍힌 상황에서 는 귀족원 회의를 통해 황제로 선출되기는커녕 가문의 존립이……" "앞으로 흐를 무수한 피보다는 토프탈 가문의 몰락이 낫습니다!" 베로시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이 사라졌다. 두억시니 장군은 숨소리를 약간 높인 채 시오크를 노려보았다. 시오크는 밧줄에 묶인 몸을 이리 저리 비틀며 말했다. "자기 가문의 망신을 피하기 위해 무수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니오.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베로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이곳으로 오기 전 읽었던 편지를 떠올렸다. 그것은 역시 날카로운 지적이었던 모양이다. '유치한 철부지놈.' 베로시는 고개를 살짝 가로젓고는 바깥을 향해 들어오라고 외쳤다. 시오크는 휘장쪽을 홱 돌아보았다가 다시 베로시를 쳐다보았다. 베로 시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럭저럭 재미있었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이제 놀이는 이쯤에서 끝내야겠군. 놀이가 아닌 진짜 일을 하려면 푹 자야 하니까." 저벅거리는 발소리 때문에 시오크는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들어 온 장병들이 명령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베로시를 바라보았다. 베로시 는 그들에게 시오크를 데려가 감금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던 시오크를 붙잡아 일으켰다. 자신의 발로 서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오크는 그러지 못했다. 다리가 저려서 부축이라도 받아야 할 처지였고, 그래서 시오크는 자신을 붙잡는 병사들의 손길이 오히 려 고마웠다. 병사들이 그의 몸을 뒤로 돌리기 직전 시오크는 재빨리 말했다. "상장군님. 고귀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베로시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한 마디를 덧붙이는 모습이 베로시에 겐 귀엽게 보였다. 베로시의 웃음을 본 시오크는 입을 꽉 다문 채 병 사들에게 끌려나갔다. 유료도로당주 시오크 지울비가 산양 구출을 시도하다가 시모그라쥬 군에게 체포된 다음날, 하이스-키탈저 유료도로 제4징수소는 항복을 선언했다. 당주가 포로가 된 상황과 시모그라쥬군이 더욱 기승스럽게 쏘아보내는 산양 중 항복 결정에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어느 쪽인 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베로시는 제4징수소에 대해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유료도로 는 훌륭한 군사 통행로였고 그것을 유지 관리하는 전문가는 유료도로 당 자신이다. 그래서 베로시는 시모그라쥬군의 무료 통과만 받아들이 면 징수소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처형된 징수소장 대신 새 로 임명된 신임 징수소장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는 비나간과 시구리아트 산맥의 당사로 두 명의 전령을 급파했다. 전 령이 떠난 후 반나절이 지났을 때 시모그라쥬군의 징수소 통과가 시 작되었다. 함께 말을 달리던 두 전령들은 하이스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북동쪽 으로 달려간 동료와 헤어져 비나간을 향해 북쪽으로 달려간 전령은 이틀 뒤 새벽 무렵 독행왕에게 시오크 지울비의 체포를 전달했다. 독 행왕은 얼어붙었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탈진한 전령에게 물러가 쉬 라고 명령한 독행왕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물리친 채 홀로 집 무실에 틀어박혔다. 지키멜은 의자에 앉지는 않았다. 그녀는 방 안을 천천히 걸으며 오 른손으로 왼쪽 소매를 비틀었다. 바닥에 약간씩 끌리는 그녀의 발소 리가 텅빈 방안을 맴돌았다. 벽 앞에서 지키멜은 멈춰섰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이마를 벽에 기대었다. '산양을 구출하러 갔다가 붙잡혔다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 일어났다. 지키멜은 쿡쿡 웃었다. 전혀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았기에 지키멜은 자신의 웃음에 놀랐다. 그녀 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몸은 주인의 의사와 무관한 움 직임에 심취해 잇었다. 지키멜은 웃음과 신음이 섞인 소리를 내며 몸 을 홱 돌렸다. 그녀는 뒤로 넘어지듯 등을 벽에 부딪혔다. 숨이 턱 막히며 웃음이 사라졌다. 지키멜은 사지의 말단 부분이 차갑다고 느 꼈다. 하지만 피부 아래쪽은 간지러울 정도로 뜨거웠다. '시오크. 왜 그랬어?' 지키멜은 유료도로당이 시모그라쥬군을 물리쳐줄 거라는 생각은 하 지 않았다. 그것은 바라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과분한 소망이다. 따 라서 시모그라쥬군이 점점 다가온다는 사실은 그녀를 두렵게 하지 않 았다. 하지만 지키멜은 시오크가 시모그라쥬군에게 붙잡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오크는 그런 일이 현 실에 일어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적에게 붙잡혔다. 지키멜은 등을 벽에 붙인 채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바닥에 앉 을 수밖에 없는 높이가 되었을 때 지키멜은 두 손으로 벽을 짚었다.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왕이었다. 지키멜은 벽을 밀며 다시 일어났다. 불신에 찬 눈으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던 지키멜은 손 닿는 곳에 있는 가구를 짚거나 붙잡으며 천천히 의자 쪽으로 걸어갔 다. 몇 번이나 비틀거렸지만 지키멜은 가까스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 았다. 그녀는 책상에 팔꿈치를 괸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멍청한, 멍청한, 멍청한, 멍청한……' 지키멜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책상을 돌아 방 가운데 서서 외쳤다. "와라!" 문이 열리며 들어선 것은 시종장이었다. 지키멜은 시종장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말했다. "말을 준비해라." "예? 어디를 가실 생각이십니까? 어느 곳으로 가실 생각이신지……" "짐은 말을 준비하라고 했다. 마당에 대령하라!" 시종장은 당황하여 지키멜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조아리고는 물러났 다. 문이 닫히는 것을 노려보던 지키멜은 머리 뒤로 손을 가져갔다. 틀어올렸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풀려났다. 지키멜은 머리카락 속에 손 을 집어넣어 세차게 흔든 다음 머리를 크게 휘둘렀다. 약간 곱슬거리 는 숱 많은 머리카락은 갈기마냥 그녀의 얼굴과 어깨 주위에 늘어졌 다. 지키멜은 몸에 있던 몇 안 되는 장신구를 모두 떼어서 바닥에 떨 어뜨렸다. 그녀가 소매를 걷어부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말이 준 비되었다는 것을 알리러 온 시종장은 왕의 파격적인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지키멜은 소매를 마저 걷어올리며 말했다. "깃발을 가져와라." "예?" "깃발을! 말이 있는 곳으로 가져와라!" 그리고 지키멜은 시종장의 곁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따라 성큼성큼 걷는 그녀의 주위에서 크고 작은 소란들이 끊임없이 벌어졌 다. 뛰어오는 시녀와 경비병들을 본 지키멜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가 달리기 시작했다.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앞을 막 는 자를 밀어붙이고 계단을 몇 개 씩 뛰어내렸다. 잠시 후 지키멜은 마당에 대기하고 있는 말구종과 몇 명의 병사들, 그리고 체구 당당한 말 앞에 도달했다. 임무를 알지 못해 서로에게 질문하던 병사들은 갑 자기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난 왕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지키멜은 그 들도 무시한 채 말 위에 뛰어올랐다. 지키멜은 정문을 바라보았다. 왕의 질주를 따라왔던 자들이 속속 도착해서 그녀 주위의 무리가 커 졌다. 그들은 설명을 애타게 바라는 눈으로 왕을 보았지만 지키멜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의 얼 굴에 비장한 표정이 스쳤다. 시종장이 깃발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지키멜은 그냥 깃발이라고만 말했지만 시종장은 그녀가 원하는 깃발 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말 옆으로 다가온 시종장에게서 깃발을 뺏 다시피 받아든 지키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멜은 궁궐의 정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종장과 구경꾼들, 그리고 병사들은 뜻모를 소리를 내며 그녀의 뒤 를 따라 달렸다. 지키멜은 깃발을 창처럼 앞으로 내뻗은 채 방해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질주했다. 순식간에 정문에 도달한 지키멜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비병들의 곁을 지나쳤다. 궁궐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비로소 지키멜은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달 리는 말의 속도 때문에 깃발은 순식간에 펼쳐졌다.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용이었다. 용은 어떤 모습으로든 자라난다. 따라서 용의 '일반적인' 모습이라 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키멜이 들어올린 깃발 속에 있는 용은 상당히 도식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용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 렵지 않았다. 도깨비 외에 무서운 화염을 토하는 동물은 하나뿐이니 까. 깃발 속의 용은 자신이 토해낸 화염을 주위에 둘러싸고 있었다. 그 화염이 그대로 깃발을 둘러싼 술로 연결되는 솜씨는 절묘했다. 용의 깃발을 펄럭이며 지키멜은 비나간을 질주했다. 놀란 사람들의 눈이 모여들었을 때 지키멜은 말의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용의 자손들아, 들어라!" 비나간 사람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타인들의 조롱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비나간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신 의 조상으로 믿고 있는 키탈저 사냥꾼들은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 독 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키탈저 사냥꾼들은 자신들이 용의 자손 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용이 가지고 있는 모순의 힘을 경배했고 그래 서 누군가에게 저주할 때 모순으로 저주의 힘을 북돋기도 했다. 모순 을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라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용을 자 신의 기원으로 여기기에 키탈저 사냥꾼들은 자신들의 사냥감 목록에 서 하늘치와 함께 용의 이름을 제외했다. 키탈저 사냥꾼이 용의 자손이고, 비나간 사람들이 키탈저 사냥꾼들 의 자손이라면, 손색 없는 논리에 의해 비나간 사람들은 용의 자손이 된다. 지키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이어지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녀의 말이 맞다. 그들은 용의 자손이다. "용의 자손들아, 들어라!"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으로 왕과 함께 달린 것은 아이들과 강아지들 이었다. 그들은 두 눈에 열광과 찬양을 담은 채 두 팔을 휘두르며 왕 을 따라 달렸다. 그리고 뒤이어 길 근처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문을 쾅쾅 두드리며 "좀 나와봐!"라고 외치는 자들, 가게에서 몸을 쑥 내 민 채 "나와서 이것 좀 봐!" 라고 외치는 자들이 나타났다. "왕이시 다!" "독행왕 폐하시다!" 왕을 따라 달리는 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 났다. 말을 타고 따라오던 궁궐 사람들은 갑자기 앞을 막아선 인파에 당황했다. 말을 타고 뛰어들었다간 명백히 대형사고가 생길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골목기로 접어들었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골목들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왔 다. 사람들은 덩어리지어 달렸다. 그리고 그 첨단에는 지키멜이 용의 깃발을 펄럭이며 달렸다. 그녀의 외침이 바뀌었다. "싸움을 준비하라! 용의 자손들아!" 지키멜은 대도시 비나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외쳤다. 광장을 가로 지르며, 대로를 따라 달리며, 말에 탄 채 계단을 오르내리며 외쳤다. 용의 자손들에게 싸움을 준비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인파가 있었다. 이미 인파의 상당 부분은 왕의 모습을 놓쳤다. 하지만 지키멜의 모습 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큰 소란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지나가던 사람들을 붙잡고 외쳤 다. "왕을 보지 못했나?" "뭐? 폐하께서 출궁하셨어?" "내가 봤어! 그 분께서 깃발을 휘두르며 달리시는 것을 봤어!" 지키멜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리고 왕을 찾아 이리저리 달리는 사람 들만이 남게 되었다. 팔베 다리에서 왕이 나타나셨어! 가자! 팔베 다 리다! 아니야, 마진 계단이다! 그곳에서 왕이 연설을 하고 계셔! 어 디라고? 홀빈 광장이다! 홀빈 광장! 누가 나타났다고? 왜들 이러는 거야? 뭐? 독행왕 폐하께서? 용의 자손들아, 들어라! 앗, 들었어? 들 었어! 저기다! 저쪽이야! 젠장, 담을 넘어! 어이쿠, 실례합니다. 폐 하께서 이 뒤쪽 골목에 계신 듯합니다! 뭐요? 그게 진짜요? 싸움을 준비하라! 용의 자손들아! 지붕! 지붕 위로 올라가봐! 뭐가 보여? 저 기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어! 아냐, 저쪽에서! 어이! 거기 이층에 계신 분! 뭐가 보입니까? 저쪽인 것 같습니다! 용의 자손들아! 싸움 을 준비하라! 한 사람에 의해 비나간 전체가 들끓었다. 유혈과 비명이 없을 뿐 마 치 시가전이 벌어진 것 같았다. 지키멜은 이곳저곳에서 느닷없이 출 현했다.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싸움을 준 비하라고 외쳤다. 무슨 소동이냐며 짜증을 부리는 사람 앞에 갑자기 나타나 용의 핏줄임을 자각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흥분하여 달리는 자들의 뒤쪽에 나타나 키탈저 사냥꾼의 복수에 대해 외쳤다. 비나간 은 폭발할 것 같았다. 도로의 포석도, 건물의 벽도, 계단과 광장과 도랑과 다리도 흥분하여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비나간인들은 폭음한 채 지진을 겪는 것 같다고 느꼈다. 용의 자손들아, 싸움을 준비하라! 우리는 빼앗긴 것을 되찾을 것이다! 말을 타고 달리며 비나간 전체에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던 지키멜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비나간 외곽이었다. 소동의 여파는 그곳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변주도 나타나 있었다. 비나간 외곽 에서는 용이 나타났다는 것이 정말이냐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비나간이 침략당한 것이냐는 걱정스러운 이야기도 오고갔다. 지키멜 은 그들에게도 싸움을 준비하라고 외친 다음 말을 달려 비나간군 사 령부 건물로 향했다. 자원한 비나간인들, 키탈저의 유민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모험가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도시 가까운 곳에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비나간군은 비나간의 외곽에서도 제법 떨어 진 곳에 있는 파기보릭 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지키멜은 오솔길을 따 라 파기보릭 성으로 달렸다. 숲의 머리 위로 파기보릭 성의 높은 성탑이 나타났다. 지키멜은 고 함을 지를 준비를 하며 오솔길의 입구로 뛰쳐나갔다. 그곳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 벌판은 성 내에 수용하지 못한 병력들이 기거하고 있는 야영지였다. 야영지로 뛰어들려던 지키멜은 문득 기묘 한 것을 느꼈다. 지키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영지는 텅 비어 있었다. 이곳 저곳에 천막이나 짐수레, 마차, 그 리고 상자 등이 쌓여 있었지만 병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키 멜은 의아해하다가 파기보릭 성쪽을 보았다. 그리고 지키멜은 성의 흉벽 위에 잔뜩 늘어서 있는 병사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병사들이 창검을 든 채 주랑 위에 도열해 있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 이다. 성은 전투 태세였다. 지키멜은 그들이 누구를 상대로 싸울 준 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키멜은 비나 간 군 전체가 성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 면 그 병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지키멜은 갑자기 말을 달리게 했다. 그녀는 성벽을 따라 달렸다. 성 벽 위에서는 그녀를 발견한 병사들이 뜻모를 비명과 고함을 질렀다. 성을 따라 크게 우회한 지키멜은 파기보릭 성의 반대편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지키멜은 병사들을 발견했다. 수만의 병사들은 밀집하여 진형을 짠 채 성 앞에 서있었다. 분명히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준비가 완전하지는 못했 다. 아직 그 기율이 섬세하지 못한 비나간군은 자꾸 대오를 흐트러뜨 렸고 그래서 장교들이 노성을 지르며 그들의 진형을 유지하느라 애쓰 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던 지키멜은 가까운 곳에서 병사들 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는 장교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 장교에게 달려 갔다. "이봐! 거기!" "빌어먹을, 너 누구…… 폐하?" 장교는 기겁하며 말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다리 하나를 들어 올렸던 장교는 마음을 바꿔먹은 듯 다시 안장 위에 몸을 얹었다. "폐하! 어서 성으로 들어가십시오!" "무슨 일인가? 지금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훈련인가?" "아닙니다. 폐하. 저쪽, 평야 반대편에 정체 불명의 병력들이 출현 했습니다. 저쪽인데……" 방향을 가리켜 보이던 장교는 움찔했다. 그 방향을 본 지키멜은 그 가 무엇에 놀랐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도 그 모습을 보았다. 대단히 많은 인원이 파기보릭 성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평선 전체에서 먼지 구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키멜은 그 먼지 구 름을 다 보기 위해서 고개를 좌우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 올림픽 때문에 힘들어지는군요. 음음.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7-3 | 피를 마시는 새 2004/08/15 13:10 네스토르(rpgtown) http://cafe.naver.com/swallowedbird/1767 27. 평가를 수용하는 태도 - 3 자신의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재인이 지평선을 탄주하는 듯하다. 지평선이라는 현이 떨림에 따라 발 딛고 있는 땅은 공명통이 되었 다. 용이 몇 마리 노닐어도 흔적도 나지 않을 것 같은 장대한 먼지 구름은 지평선 너머의 땅이 부서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 다. 지키멜은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녀 자신의 전율 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흔들리는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시모그라쥬군이 벌써?' "……십시오!" 지키멜은 간신히 머리를 돌렸다. "폐하! 어서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지키멜은 고함을 지른 장교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주군에 대한 걱 정과 푼수 같은 처녀에 대한 짜증, 그리고 다가오는 자들에 대한 공 포 등등 때문에 그의 얼굴은 상당히 다채로웠다. 그 중에는 지키멜이 언뜻 알아차리기 어려운 표정도 있었다. 혼란스러워진 지키멜은 다른 병사들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렇지는 않았다. 용 의 깃발을 들고 갑자기 나타난 자가 누군지 알게 된 병사들은 경외감 을 담은 눈으로 지키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지키멜은 자신이 적 과 마주한 병사들 앞에 갑자기 나타난 주군임을 깨달았다. 지키멜은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라고 성화를 부리는 장교를 돌아보았다. 그리 고 그녀가 읽어내지 못했던 표정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달았다. 희망. 근거 없고 논리 없고 실현 가능성 없는 희망. 당신은 우리의 구원자입니까? 지키멜은 말을 달리게 했다. 그 방향은 성의 반대쪽이었다. 장교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지키멜을 따라 달렸다. 조금 떨어진 곳 에서 사태의 추이를 보던 다른 장교들도 당황하여 멈추라는 둥, 돌아 오라는 둥의 말을 외쳤다. 그 어떤 외침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던 지키멜이 말을 멈춰세운 것은 선두의 병사들 앞쪽으로 뛰쳐나간 후였 다. 비나간 군의 거대한 방진 앞에 선 지키멜은 깃발을 높이 든 채 외쳤다. "기다려!" 진형 이곳저곳에서 달려나오던 장교들은 그 말에 움찔했다. 지키멜 은 말을 돌려 다시 달려나갔다. 지평선을 부수며 다가오는 병사들 쪽 으로 지키멜은 화살처럼 달려갔다. 외로운 발굽소리가 긴장한 땅 위 로 퍼져나갔다. 거대한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달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저벅저벅 걸어옴에도 불구하고 워낙 숫자가 많아서 산 불 같은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중간지점이라고 판 단한 지점에 도달한 지키멜은 자신의 공포감이 거리감각을 왜곡시켰 을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조금 더 달려간 다음에 멈춰섰다. 그리고 지 키멜은 걸어오는 병사들을 보았다. 하지만 사람들 하나하나를 떼어내 서 보기가 어려웠다. 밀밭에서 하나하나의 밀을 인지하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 땅에 떨어진 한 웅큼의 쌀은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는 느낌 을 줄 수 있지만 한 부대의 쌀이 쏟아져 있으면 더 이상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병 사들의 무리가 그러했다. 지키멜은 그들을 관찰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지키멜은 자신에게 집중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호흡 소리를 들었다. 다가오는 병사들의 발소리 때문에, 그리고 그 소리가 당장 자신을 덮칠 것 같은 압박감 때문에 눈꺼풀이 떨렸지만 지키멜 은 이를 악문 채 호흡에만 집중했다. 희미한 호흡 소리가 들렸다. 평온하지는 않았다. 낡은 풀무처럼 거 친 소리였다. 입안에서 신맛을 느끼던 지키멜이 갑자기 눈을 떴다. 그 사이에 다가오던 병사들은 훨씬 가까운 곳에 도달해 있었다. 지키 멜은 발작처럼 깃발을 든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서라! 이곳은 우리의 땅이다!" 다가오던 병사들이 멈춰섰다. 지키멜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들었다. 아마도 지휘자들인 듯한 남녀가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들 은 병사들을 한 번에 멈춰세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대열 뒤쪽에 거대한 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대신 그들은 속도를 서 서히 늦추는 것을 선택했다. 지키멜은 병사들의 멋진 움직임에 놀랐 다. 좋은 통솔력을 갖춘 지휘자와 고도의 훈련을 받은 병사들의 조합 이 분명했다. 물론 군사 전문가가 아닌 지키멜이 추측할 수 있는 것 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자신의 요구에 따라 멈춰섰다는 것에 안심 했지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도무지 추측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새 로운 긴장감을 느끼면서 지키멜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키멜의 판단처럼 그들은 숙련 집단이었다. 좌익에서 우익까지 몇 백 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무리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다가 별다른 혼 란이나 충돌 없이 멈춰서는 광경은 인상적이었다. 그 부드러움 때문 에 지키멜은 모든 병사들이 완전히 멈춰서고도 한참 후에야 그들이 멈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때 전열 사이로 한 남자 장교가 어깨 에 깃발을 걸친 채 말을 타고 달려나왔다. 눈을 떴을 때는 그들이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있다고 생각했 지만 지키멜은 비로소 거리가 꽤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교는 말을 빠른 속도로 몰았지만 그가 지키멜에게 접근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 간이 걸렸다. 깃대를 늦춰 땅에 짚은 지키멜은 그렇게 거리가 먼데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렸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안 들 렸던 건가? 다가온 장교는 그녀의 의심을 확인해주었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뭐라고 하셨습니까?" 안 들렸군. 지키멜은 그들이 그저 말에 탄 채 깃발을 휘두르는 여자 를 보고 멈춰섰음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짓고 싶은 것을 느꼈다. 그녀 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곳은 우리의 땅이니 멈추라고 말했다." 장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는 재빨리 지키멜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나이 어려 보이는 여자가 하대하는 것을 보고는 상대방 의 신분을 추측해보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분을 드러낼만한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지키멜은 장교가 더 큰 혼란에 빠지리라 생 각했다. 하지만 장교는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신분 높으신 분이시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지키멜은 장교가 넘겨짚는다고 생각하고는 질문했다. 하지만 장교는 담담하게 말했다. "깨끗한 용모, 손질 잘 된 손톱, 그리고 고가인 것이 분명한 말과 마구 등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키멜은 자신의 실수에 다시 쓴웃음을 짓고 싶었다. 그녀는 장교에 게 목례하는 시늉을 하고는 말했다. "그대의 관찰력과 추리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려면 이쪽 에서도 그대의 신분을 짐작해내는 재주를 보여야겠지. 그런데 그대의 모습만 보고서는 아마도 원래 제국군이었던 것 같다는, 별로 확신 없 는 추리밖에 할 수 없군." 장교는 빙그레 웃었다. 지키멜의 지적처럼 그는 제국군이라기보다는 제국군을 엉성하게 모사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은 제국군 장교의 의복과 원래 군복이 아닌 듯한 의복들이 뒤섞인 것이 엇고 노끈과 철사, 가죽끈 등이 꽤 여러 곳에 사용되어 있었다. 게다 가 투구 아래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이나 뺨과 턱을 덮은 수염 등 은 절대로 군인의 것이 아니었다. 지키멜은 그가 어깨에 매고 있는 깃발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장교의 등뒤로 늘어져 있어 잘 보 이지 않았다. 그 때 장교가 말했다. "제 모습이 좀 사납긴 하지요. 설명해드리고 싶습니다만, 먼저 존함 을 알았으면 좋겠군요. 제가 어떤 분을 뵙고 있는 겁니까?" 지키멜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 그냥 이름만 말하는 안은 가치중립적이기에 유혹적이었다. 설령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라 하더라도 장교는 그것을 이해해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지키멜은 마음을 바꾸었다. "짐은 독행왕 지키멜 퍼스다." 장교의 얼굴에 변화가 일어났다. 한두 가지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표 정이 아니었다. 호기심과 거부감, 만족감과 곤혹감이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키멜이 열심히 찾는 혐오감은 보이지 않았다. 자기 통제를 잘 하는 성격이거나 아니면 지키멜의 칭왕에 대해 실제로 혐 오감이 없는 것이거나. 지키멜은 뒤를 돌아보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장교의 입을 바라보았다. 장교가 말했다. "확실히 잘못 나왔군요." "뭐?" "차림새 때문에 지위가 낮은 인물일 거라 오판했습니다. 그래서 제 가 나왔지요." 장교는 지키멜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자신이 나온 것에 대해 사과하 고 있었다. 지키멜은 그가 왕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하는지 후작에 대 한 실례라고 생각하는지 정말 궁금했다. "저는 흑사자군 부위 틸러 달비라고 합니다." 지키멜은 당황했다. 그녀는 흑사자군이라는 이름을 이전에 들은 적 이 없었다. 그 때 틸러 달비가 어깨에 매고 있던 깃발을 똑바로 세웠 다. 무거운 깃발이 옆으로 펼쳐지자 지키멜은 무의식적으로 그 깃발 의 내용을 살폈다. 그런 눈길은 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잘 만든 깃발은 아니었다. 지키멜이 들고 있는 것에 비하면 조악하 다 할 정도였다. 거칠게 잘라낸 테두리는 마감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풀린 실이 머리카락처럼 흩늘렸고 바람 속을 달리면서 그렇게 되었는지 끝부분은 아예 찢어져 나풀거렸다. 흙먼지로 누렇게 변한 깃발에는 무엇인지 모를 얼룩들도 몇 개 보였다. 그런 세부사항은, 지키멜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깃발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지키멜이 신음처럼 말했다. "케이건." 틸러는 어리둥절해했다. "무슨 말씀이지요?" "흑사자. 키탈저 사냥어로 흑사자를 케이건이라고 하지." 깃발 속에서 뛰쳐나올 듯 몸을 도사리고 있는 것은 흑사자였다. 깃발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림도 건조할 정도로 장식이 없었다. 그냥 붓에 먹을 찍어 한 번에 그려버린 흑사자였고 그래서 터럭처럼 붓자 국이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그림을 그린 자는 묵화에 대한 좋 은 교양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지키멜은 담백하고 힘이 넘치는 흑사 자 그림에서 간신히 시선을 떼어 틸러를 보았다. 틸러는 아 하듯 입 을 벌리고 있었다. "당연히 키탈저 사냥어를 아시겠군요. 그러면 용은 키탈저 사냥어로 뭐라고 합니까?" "드라카." 틸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키멜이 들고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그 드라카의 깃발을 보니 제 설명이 좀 조악해도 쉽게 이해해주실 듯하군요. 저희들은 제국군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름으로는 구분이 안되지요. 시모그라쥬군도 원래는 제국군이었고 비나간군에도 적지 않은 제국군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국의 일부인 비나간이 아닌 비나간 자체인 비나간을 상징하기 위 해 용의 깃발을 만든 지키멜은 틸러의 설명을 이해했다. "그래서 다른 자들과 구분하기 위해 흑사자군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건가?" "그렇습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한 이름이고, 공식적인 이름은 아닙 니다." 지키멜의 눈매에 의혹이 떠올랐다. 독행왕이라는 소개에 대해 공식 적이지 않은 이름을 대는 것은 독행왕이라는 지위 또한 공식적인 것 이 아니라는 선언이 될 수 있다. 지키멜은 틸러 달비에게 독행왕이라 는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 다 더 다급한 의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흑사자군의 총지휘관이지?" "대장군 엘시 에더리입니다. 페하."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지키멜은 엘시 에더리의 이름을 듣는 순간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칼리도의 백작, 황제의 대장군, 제국만병장, 무향의 정복자. 나이를 늘려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호 칭을 늘려가는 듯한 사람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호칭이 하나 더 늘었 다. 제국의 유산 관리자. 신황제가 제국을 상속하게 될 때까지 제국의 유산이 흩어지지 않도록 취합하여 관리하겠노라고 나선 그는 제국의 유산 관리자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놀라운 결정이지만 지키멜은 그 결정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황제가 제국을 상속하지 못하는 것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 이다. '잠깐.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지키멜은 턱을 부르르 떨며 틸러를 바라보았다. 엘시에 대해 생각하 느라 지키멜은 틸러의 말 중에서 더 중요한 부분을 간과했다. '각하가 아니었어.' 틸러는 폐하라고 불렀다. 그녀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틸러는 자 신이 사용한 호칭을 지키멜이 깨달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 었다. 순간 지키멜은 왜 틸러 달비가 흑사자 깃발을 들고 왔는지, 왜 비공식적인 단체명인 흑사자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 이해했다. 그녀의 짐작은 맞으면서 동시에 틀렸다. 틸러 달비가 폐하라는 호칭 을 사용한 이상 그가 독행왕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지키 멜의 짐작은 틀렸다. 하지만 틸러 달비가 진심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키멜의 짐작은 맞았다. 틸러가 꺼내지 않은 말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왕위를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이 왕이라서가 아니라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신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 당신과 싸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당신 은 대장군 엘시 에더리에게 왕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흑사자 군의 지휘자에게 왕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흑사자군이라는 것은 어차피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틸러의 결정이 아닐 것이다. 일개 부위가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니까. 분명히 최고위층이 내린 결정이다. 지키멜은 약간 의 어지러움 속에서 희열에 잠겼다. 진심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엘시는 제국이 부활할 경우를 대비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해줄 수 없는 거지만 제국은 어차피 부활하 지 않을 테니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틸러가 말했다. "저는 독행왕 폐하께 전할 말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지 위에 걸맞는 분이나 전권을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신다면 물러 나서 그런 사람을 대신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까요?" "일단 가져온 말이 무엇인지 듣고 싶군." "알겠습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독행왕 지키멜 퍼스께 드리는 말입니다. 범죄가 성립되려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어야 할 겁니다. 둘 중 하나뿐이라면 범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직 태어나 지 않은 사람에 대한 범죄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재확인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황제에 대한 지키멜의 불충을 묻기는 어렵다는 말에 지키멜은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하지 만 틸러는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산모에 대한 공격은 명백한 범죄입니다." 황제의 탄생을 방해하지는 마라. 지키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절대로 방해하지 않겠어. 나는 그게 상상임신이라고 생각 하지만,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당신의 귀한 재주가 그런 쓸데없는 일에 낭비되는 것을 보면서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은 당신과 사람들에게 부도덕한 일이겠지만, 어쩔 수 없군. 나도 비나간을 지켜 야 하거든.'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던 지키멜은 문득 틸러의 뒤편에 있는 수십만 대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짐의 대답은 이러하다. 짐은 대장군이 뜻을 존중할 것이며 이미 약속했던 것처럼 출산이 이루어진다면 부족하나 마 산파의 손길을 보낼 것이다." 비유에는 비유로. 그리고 지키멜은 틸러의 어깨 너머를 보는 시늉을 해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인가? 그것뿐이라면 한 통의 편지로도 충분했을 텐데." 왜 저렇게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왔냐는 지키멜의 질문에 틸러는 미 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전할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뭐지?" "폐하께서 거두고 계시는 흑사자군을 데려가고 싶습니다." 지키멜은 혀를 차고 싶었다. 물론 저렇게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 대장군이 병력이 부족해서 더 많은 제국군을 원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런 꼼꼼한 유산 관리자 같으니라고. 상속권이 없는 자가 유산을 부당점유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거지?' "원래 짐을 직접 만날 계획은 없을 테니 당장 대답을 받아갈 필요는 없겠군." "그렇습니다. 천천히 대답을 주시겠습니까?" "그래야겠군……" 지키멜은 말끝을 약간 길게 빼서 할 말이 더 있다는 의사 표시를 했 다. 틸러는 가만히 기다렸다. 지키멜은 피부에 소름이 약간 돋는 것을 느꼈다. 깃대를 붙잡은 손 에 힘을 주며 지키멜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런데, 짐도 대장군에게 전할 말이 하나 있다. 요청이라고 해야겠 군."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려던 틸러는 지키멜의 심상치 않은 태도를 깨 달았다. 그는 머리를 조아렸다. "말씀하십시오. 전하겠습니다."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전설에 따르면, 시모그라쥬 대사였던 데오늬 달비는 흔히 원추리문이라고 알려져 있는 데오늬 달비 여성기숙학교 의 건설지를 결정하기 위해 지명이 없는 지도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지명을 모두 삭제한 대륙의 지도를 만든 다음, 2. 제국령의 중심을 면밀하게 찾아내어, 3. 지명이 있는 지도 에서 중심의 지명을 확인한다. 그 결과로 선택된 곳이 하이스라는 것 이다. 전세계에서 오는 여학생들을 받아들이려면 세계의 중심에 있어 야 한다는 것이 그런 결정방식의 이유였다. 물론 상식인들은 그것을 근거 없는 야사로 치부했다. 설령 제국의 중심이 건설지 결정의 중요한 이유였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접근으로 는 지리적 중심을 찾아낼 수 있을 뿐 사회적 중심은 찾아낼 수 없다. 도로망과 인구 분포를 고려하지 않았기에 무의미한 것이다. 지도에서 보면 하이스가 제국령의 가운데 쯤으로 보인다는 사실과 데오늬 달비 라는 인물의 특이한 개성 때문에 그런 전설이 생겼을 뿐 원추리문이 하이스에 건설된 것은 그곳에 대학교가 많아서 교육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상식인들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전설을 좋아했다. 그리고 원추리문에 다니던 학 생들 중에는 그런 전설을 그저 즐거운 이야깃거리 이상으로 대한 한 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반쯤 장난삼아 나무 판자로 제국의 평면 모형 을 만들었다. 그리고 뾰족한 막대기 위에 그것을 얹었다. 놀랍게도 하이스를 접점으로 하자 제국의 평면 모형은 어느 곳으로도 기울어지 지 않고 막대기 위에서 수평을 이루었다. 물론 이 또한 학문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학생들은 - 신비함에 대한 동경을 뿌리 치기 힘든 십대에서 이십대 사이의 처녀들 - 그 실험에 열광했다. 그 리하여 그 실험은 두 번째 전설이 되었다. 베로시 토프탈 장군이 바라보는 석조 조각상에는 그런 내력이 숨어 있었다. 베로시는 싱긋 웃었다. 마루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그 조각상은 사실은 작자 미상이었 다. 어쩌면 조각에 관심을 가졌던 어느 대학생이 만든 다음 집에 가 져갈 수 없어서 버리고 간 물건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작품을 만 든 이는 데오늬 달비의 전설에 창작 동기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조각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었다. 윗부분은 제국의 모형이었다. 그 모형은 전설 속의 학생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판자 모 형과는 격이 다른 물건이었다. 거기에는 시구리아트 산맥과 지러쿼터 산맥, 처용 산맥, 기타 제국의 중요한 산맥들과 강들, 그리고 평야와 계곡 등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물론 정밀한 모형은 아니었 고 베로시 토프탈 장군은 시모그라쥬 근처의 지형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놀라운 집중력과 끈기, 그리고 섬 세한 기술이 엿보이는 예술 작품이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조각상의 아랫부분이었다. 제국 모형을 떠 받치고 있는 것은 경사가 완만한 원뿔이었다. 그리고 원뿔의 뾰족한 끝부분은 제국 모형을 관통하여 하이스 지역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었 다. 그 창작 의도를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구조였다. 높이가 베로시의 허리에 이르고 그 넓이는 원형 탁자 만한 석조 조 각상은 광장의 중앙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조각상의 주위에는 석조 기둥들이 놓여 위쪽의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야외에 있는 조각상에 지붕을 얹는 일은 특이한 일에 속하지만 이 경우에는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비록 무게중심이 잘 맞춰져 있다 하나 그 작품은 아무래도 불안한 형태였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제국 모형에 빗물이 고이거나 하면 무게 중심이 달라질 테고, 그러면 원뿔 위쪽의 제국 모형은 기 울어질 것이다. 또한 그 지붕에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조각상을 감상 하는 베로시는, 그래서 햇빛을 피할 수 있었다. 광장에 서서 찌르는 듯한 햇빛을 받으며 서있어야 하는 자들이 분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분개하고 있는 이들은 조각상에서 5미터 쯤 떨어진 곳에 모여 서 있 는 남녀들이었다. 모두들 나이가 지긋했고 지팡이를 쥔 자도 적지 않 았다. 그들은 한 자리에 오래 서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게다가 그늘 하나 없는 광장에서 여름 햇살을 받는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베 로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들은 꼼짝도 못한 채 그곳에 서 잇었지만 정작 베로시는 조각상만 들여다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 았다. 결국 한 사람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상장군님. 예술 감상은 좀 미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베로시는 고개를 들고는 아직도 거기 서있었냐는 표정을 지었다. 노 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베로시는 뒷짐을 지고 서서 말했다. "여러 학장님들. 이야기는 다 끝난 것이 아니었던가요? 저는 돌아가 기 전에 이걸 좀 보고 갈 생각이었습니다만." 학장님이라 불린 노인들은 당황하거나 격분했다. 먼저 입을 열었던 노인 - 그는 하이스 대학 학장이었다. - 이 볼을 경직시켰다가 타이 르는 어조로 말했다. "서로간에 오해가 있었군요. 저희들은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장군님. 학교는 학생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저희들은 학 생들을 내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학교와 학생을 제대로 보호하는 길은 군령자들을 빨리 학교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학장들의 얼굴이 다채로운 색깔로 물들었다. 베로시의 말은 군령자 들을 계속 보호할 경우 학교에 쳐들어가겠다는 뜻이었다. 학장들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대학교는 치외법권 지대다. 물론 그것은 불 문율이지만 어떤 불문율들은 성문법보다 더 강력하게 지켜진다. 황제 사냥꾼 지멘과 아실도 대학교에서는 자유롭게 정체를 드러내었고 교 수들도 상대방이 황제사냥꾼이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이 야기했다. 학장들의 낭패감을 보던 베로시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 울인 채 말했다. "학장님. 그 재수 없는 군령자들을 무엇 때문에 보호하시는 겁니 까?" "재수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그들도 다른 학생들 과 똑같은 학생일 뿐입니다." "죽었으면서도 죽지 않은 자들입니다. 군령자 속의 영들에게는 아무 런 법적 권리도 없습니다." 법학자이기도 한 학장 한 명이 그런 학문적 오류는 용서할 수 없다 는 듯이 말했다. "그건 법과 군령자 모두 잘 모르는 바보들이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특정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군령자도 법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습 니다. 예. 군령자 문제가 법적으로 까다롭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법 학 쪽에서는 군령자의 법률 행위에 대해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이론이 있는데……" 학장은 제발 그만두라는 동료 학장들의 시선을 받고서야 간신히 입 을 닫았다. 베로시는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아아, 제가 바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아,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러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죠?" 법학자 학장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학장 한 명이 어색해진 분위기 를 만회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베로시의 저지에 막히고 말았다. 손 바닥을 내밀어 학장들의 입을 막은 베로시는 딱딱 끊어지는 어투로 말했다. "여러분.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이미 하이스 내의 모든 군령자들이 체포되었고 남아있는 것은 학교에 숨어 있는 자들뿐입니다. 저는 그 일을 빨리 끝마치고 싶습니다. 하이스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불안을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일을 마무리짓 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병사들을 보내어 그 군령자들을 잡아오게 하 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교육의 권위를 존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그 기회를 잘 이용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내일 정오까지 군령자들을 지정한 장소에 보내십시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베로시는 호위병들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조각상 곁을 떠났다. 그녀 를 쫓아가듯 걸어나간 몇몇 학장들은 험악한 표정을 짓는 호위병들 때문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들은 좌절감을 곱씹으며 서로의 얼굴 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하이스 태수관 쪽으로 걸어가며 베로시는 몇 시간 후 학장들이 겪게 될 당황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내일 정오라는 것은 군령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일 뿐이다. 그렇게 말했으니 군령자들은 밤을 틈타 도망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에 대한 기습 준비는 이미 끝났다. 앞으로 몇 시간 후,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아있는 시간에 전격 적으로 기습 체포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 예상은 베로시를 즐겁게 했 다. 다른 사람의 허를 찌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베로시의 예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태수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베로시가 접한 정보 때문에 시모그라쥬군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그 때문에 변복한 채 대학교에 대한 기습 준 비를 하던 병사들은 황급히 본대로 복귀해야 했다. 베로시 토프탈을 놀라게 하고 대학교에 있던 군령자들을 구출한 것은 비나간 근처에 제국군 96만 명이 나타났다는 첩보였다. 비나간과의 일전이 머지 않았기에 베로시는 비나간에 많은 첩자들을 파견해두었다. 그 첩자들 중 한 명이 파기보릭 성 근처에서 일어난 일을 거의 정확하게 알려왔다. 독행왕 지키멜 퍼스와 제국군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첩자도 알지 못했지만 96만 명의 제국군이 파기보릭성에서 5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주둔했으며 제국군과 비나간군 사이에 무력 충돌의 기미는 없다는 사실은 여러 명의 첩자들이 동시에 보내어온 보고에 의해 확실해졌다. 베로시는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진부한 표현이 놀랍도록 사실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96만 명. 제국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도시들의 인구 를 전부 모아도 비슷해질까말까 하는 엄청난 숫자다. 베로시는 엘시 가 제국군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수자를 이렇게 빨리 모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성공 가능성조 차 높게 치지 않았다. 그런데 대장군은 순식간에 그 대군을 모아서는 하이스에서 직선 거리로 800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비나간 에 나타났다. 800킬로미터는 보통 인간에겐 까마득한 거리지만 96만 명의 대군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에겐 지나치게 짧은 거리다. 준비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아쉬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로시는 우물에 갇힌 엘시에게 기름 을 붇고 불을 지르지 않은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녀가 긴급하게 소집한 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도 하이스와 비나간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는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역시 제국군 이기에 제국군의 이동 속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은 가을이 오 기 전에 제국군이 하이스에 나타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때는 이미 늦여름인 5월이었다. 전반적으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몇 가지 대책안이 제시되었다. 크 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었다. 하이스를 전장으로 삼느냐, 보다 남 쪽을 전장으로 삼느냐. 아무래도 후자쪽이 더 현실적이었다. 하이스 를 전장으로 삼는다면 점령지 안정화를 위해 배후에 남겨두었던 병력 을 모두 북상시켜야 했다. 그러면 점령군이 사라진 점령지의 민심이 이반할 테고 보급선 또한 지나치게 길어진다.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제국군과의 충돌 시점을 더 늦추면서 이미 점령한 지역에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후퇴를 의미한다.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둘째치더라 도 겨울이 오기 전에 최대한 북진한다는 당초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는 것이다. 베로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때 참모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장군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좀 뭣합니다만, 회의 분위기에 서 이해가 안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 "에더리 대장군과 싸운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왜 그래야 합니까?" 베로시는 미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참모를 노려보았다. "그러면 사라진 제국의 대장군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 것 같은가? 제 국을 얻기 위해 나선 우리를 영웅으로 칭송할까?" 참모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상장군님. 저를 바보로 여기셔서 기분이 좋으시다면 그러셔도 좋습 니다만, 그래도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베로시는 퍼뜩 자신을 가다듬었다. 뜻밖의 소식 때문에 지나치게 흥 분해있었던 것이라 생각한 베로시는 사과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군. 자네 말뜻을 짐작하기 어렵군. 설명해주겠나?" "그러겠습니다. 엘시 에더리가 주장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쉬운 말로 바꿔보면 이럴 겁니다. 황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서로 싸우 지 말고 한 자리에 정답게 모여 새 황제를 뽑아봅시다. 대강 이렇지 요. 그리고 엘시는 그 주장을 우리에게 강요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 다. 문제는, 실제로 그가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이미 증명되었습니 다. 아무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반년 만에 제국 북부에 서 전체 제국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의 병력을 규합한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에 그런 사람은 엘시 에더리 한 명뿐입니다." 엘시를 칭송하는 참모를 보며 베로시는 혹시 참모가 항복을 주장하 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경험 때문에 베로시는 조급한 마음을 꾹 참으며 참모의 말을 기다렸다. 참모는 잠 시 기다렸다가 반복하듯 말했다. "엘시 에더리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베로시는 점점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가 화를 내기 직전 참모가 말 했다. "바꿔 말한다면, 에더리 대장군이 없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 니다. 그리고 이미 일어났다 해도 에더리 대장군이 사라지면 일어나 지 않은 일이 될 겁니다." 베로시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암살 말인가?" 참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한다면 제국군은 자연스럽게 흩어질 겁니다. 자신하는데, 그의 부하들은 그것을 유지하지도 못할 겁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7-4 | 피를 마시는 새 2004/08/16 06:47 네스토르(rpgtown) http://cafe.naver.com/swallowedbird/1841 27. 평가를 수용하는 태도 - 4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레 달비는 자신의 주인이 없어지면 흑 사자군이 온갖 문제에 직면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레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그 온갖 문제의 시발점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레는 걱정에 빠진 눈으로 히도큰 하장군과 론솔피, 그리고 주테카를 바라보았다. 론솔피는 몸을 한껏 부풀려 검은 재난 으로 변한 상태에서 히도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벼슬을 부풀 린 채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는데, 나는 그쪽의 지휘를 받을 생각이 없습니 다. 왜냐 하면 나는 엘시의 금군이란 말입니다. 금군은 황제의 지휘 만 받습니다. 알겠습니까?" 흑사자군 중에는 자신이 차기 황제의 병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론솔피만큼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론솔피는 엘시가 황제가 되고 자신은 엘시의 금군이 된다는 것을 우주적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엘시도 론솔피에게 항의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책을 수정해야 했 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것을, 론솔피는 자신의 솔직한 감상을 남김 없이 말했다. "게다가 내가 금군이 아니라 해도 나는 그쪽의 정신 나간 부하놈들 하고 어울리고 싶은 생각이 깃털 반 조각만큼도 없습니다." 히도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부하들 중에 생각이라는 것을 별스러운 취미 활동 쯤으로 여기 는 녀석들이 많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 사실이야. 하지만 명령 체계 는 확실히 서있어야 해. 그렇잖으면 문제가 생긴다. 너희들이 제멋대 로 소속도 없이 그렇게 돌아다니면 그것은 낭비일 뿐만 아니라 혼란 의 원인도 되지." 히도큰이 원하는 것은 흑사자군 내부에 있는 레콘을 모두 민들레 여 단 내에 포함시켜 체제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그의 요구는 합리적이 었다. 히도큰은 엘시와 직접 상대하는 레콘들 때문에 엘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게 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직의 층위를 만드는 기본 이유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엘시가 쵸지와 론솔피, 주테 카를 따로따로 상대하느라 부족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는 이레는 히도큰의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론솔피와 주테카, 쵸지는 각자의 이유에서 히도큰의 지휘를 받는 것 을 거절했다. 엘시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고 결 정했고 그래서 히도큰은 엘시에게 요청하는 대신 그들을 직접 설득하 기로 했다. 그것은 론솔피와 주테카를 화나게 만들었다. 론솔피가 흥 분하여 말했다. "제기랄, 엘시는 안 그래도 된다고 했잖습니까? 부대는 혼자 있어도 레콘이라고!" 주테카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론솔피의 말을 수정했다. "레콘은 혼자 있어도 부대라고 했어. 론솔피." 론솔피는 잠깐 동안 혼란에 빠졌다. 그 동안 주테카는 히도큰에게 말했다. "명령체계, 명령체계 하는데. 이거 보쇼. 우리도 예비역입니다. 군 대 생활은 부족하지 않게 해봤습니다. 엘시가 당신 상관 아닙니까? 상관이 그렇게 결정했으면 그냥 따르면 되는 거지요. 엘시도 레콘 한 명 한 명을 다루는 것이 대장군이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우 리를 내버려둔 겁니다. 레콘은 혼자 있어도 부대라는 것은 그런 뜻이 지요." 론솔피는 자신을 대신하여 말을 정리해주는 주테카에 대한 응원으로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히도큰은 별다른 감명을 받지 않았다는 투 로 말했다. "그 말에는 반대 안 하겠는데, 여기엔 그렇잖아도 부대가 너무 많 아." 론솔피가 왈칵 화를 냈다. 주테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젠장! 그 말귀 더럽게 못 알아먹네. 이것 봐요. 나는 엘시의 금군이란 말입니다!" "당신 부하들 같이 정의롭지 못한 것들은 내 깃털을 상하게 합니다! 알겠습니까?" 히도큰은 그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레는 다급함을 느꼈다. 레 콘을 가리켜 폭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이다. 심상찮은 사태 가 생길 것을 대비하여 이레는 근처에 있던 틸러에게 빨리 대장군님 을 모셔오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직접 달려가지 않은 것은 틸러에게 레콘들을 맡기기가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레는 그나마 론솔피와 주테카 두 레콘과 친분을 쌓아두었다. 하지만 점점 깃털을 부풀리는 론솔피와 주테카를 보며 이레는 자신이 있든 종형이 있든 마찬가지였 던 것 아닐까 생각했다. 이레의 믿음은 보답을 받았다. 주테카가 갑자기 근처에서 얼쩡거리 던 이레에게 외쳤다. "이레! 이리와! 이 꽉 막힌 하장군에게 엘시의 뜻을 들려주라고!" 론솔피와 히도큰도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레는 사태에 개입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세 레콘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히도큰의 퉁명스러운 얼굴을 보며 이레는 쵸지에 대해 생각했다. 론 솔피가 엘시의 금군이 될 것이기에 다른 자의 휘하에 들어갈 수 없고 주테카가 도무지 정의롭다고 할 수 없는 히도큰의 부하들 - 민들레 여단으로 보내진다는 것은 레콘에겐 처벌이다. 그런 처벌을 받은 레 콘들이 어떤 자들일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잖다. - 을 싫어하는 것처 럼 쵸지도 민들레 여단에 포함되는 것을 거부하는 자신의 이유를 가 지고 있었다. 언젠가 이레가 한 질문에 쵸지는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 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만약의 경우요?" "상관 살해가 저 친구의 버릇씩이나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례는 무시하기가 어렵지." 쵸지는 만에 하나 히도큰이 다이렌 장군을 죽였던 것처럼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엘시 또한 공격할 경우 그것을 저지하려면 히도큰 의 지휘를 받는 것은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레는 쵸지의 그 런 이유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주테카와 론솔피에게도 응 원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틸러에 대해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이레는 공손하게 말했다. "히도큰 하장군님. 물론 하장군님께서 주인님을 생각하셔서 그러신 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망하신 저희 주인님을 대신하여 레콘들의 지휘 문제만큼만이라도 자신이 맡으시겠다는 그 뜻을 저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 주인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셔 도 된다고 결정하셨습니다. 그 분께서 그렇게 결정하셨으니 더 왈가 왈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레. 주인의 노고를 못본 체하다니 몸종답지 않군." 이레는 욱하는 기분을 느끼며 히도큰을 바라보았다. 그 자신은 그런 평가에 진저리를 치지만 어쨌든 이레는 전설적인 몸종이다. 그에게 몸종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이레는 겪지 못했다. 이레는 쌀쌀맞 게 말했다. "저는 몸종으로서 주인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히도큰은 부리를 딱 부딪쳤다. "네가 엘시의 말을 반복하려는 거라면, 됐다. 엘시의 말은 이미 들 었으니까." 이레는 화가 나면서도 가까스로 끼여든 상황에서 다시 쫓겨나는 것 에 대한 두려움도 느꼈다. 그는 히도큰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히도 큰은 그나 주테카, 론솔피가 아닌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이레는 드 디어 엘시가 왔구나 생각하며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은 두 사람이었다. 그 중 한 명은 틸러였지 만 다른 사람은 엘시가 아니었다. 무표정하게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쵸지였다. 이레는 틸러쪽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표정을 보냈지 만 틸러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쵸지가 이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레. 주인에게 가봐. 손님맞이를 준비해야지." "아…… 예. 그런데……" "어서." 이레는 쵸지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몸을 빼기로 했다. 그는 틸러에 게 달려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주인님을 모셔오라고 했잖아? 레콘들은 우리 주인 님만 다룰 수 있어." "대장군님을 찾다가 왕벼슬을 만났는데 내게 대장군님을 왜 찾느냐 고 물어보더군. 그래서 사정 설명했더니 대장군님은 바쁘니까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왔어." "자기가 처리해?" 이레는 뒤를 돌아보았다. 쵸지는 팔짱을 낀 채 히도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레는 상황이 안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레콘 한 명 분의 폭력이 더 늘어난 것 아닌가 걱정했다. 그 때 틸러가 그의 어깨 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런데 너 빨리 가봐야지? 지나가다가 들었는데 마차가 안으로 들 어왔대." "어, 벌써? 알았어." 시간이 없음을 알게 된 이레는 걱정 속에서 달려갔다. 틸러는 그 뒷 모습을 보다가 대치하고 있는 레콘들을 보았다. 쵸지는 조용조용한 어투로 뭔가 말하고 있었다. 틸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기 일을 찾 아 떠났다. 하지만 쵸지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알았다면 틸러는 그렇 게 쉽게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인간이 사라진 것을 보고 있던 레콘은 없었다. 히도큰은 쵸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론솔피와 주테카도 히도큰 대신 경악한 얼굴 로 쵸지를 보고 있었다. 쵸지는 부드러운 어조로 전혀 부드럽지 않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절망도에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물을 건너기로 되어 있습니까? 어쨌든 헤엄을 쳐서 건널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민들레 여단 직속의 배가 있습니까? 그러면 평소에 항해 훈련도 합니까?" 주테카와 론솔피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히도큰 은 벼슬을 약간 세운 채 쵸지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큰 감정의 동요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가 부리를 열자 상당히 탁한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배가 있다. 하지만 훈련은 안 한다." "그래요? 그렇다면 문제가 좀 있겠군요. 어쨌든 그 배는 비상시에 이용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될 수 있는 비상 시에 그걸 타야 한다면 평소에 미리 훈련을 해두는 것이 좋을 텐데 요. 배는 마차나 뭐 그런 것처럼 움직이지는 않잖습니까. 아무래도 물 위를 건너는 거니까 이리저리 흔들릴 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너…… 왜 이래……?" "뭐 말씀입니까?" 으르릉거리는 주테카와 론솔피를 앞에 두고도 꿈쩍하지 않았던 히도 큰의 몸이 조금씩 부풀었다. 그는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부하들 중에도…… 도저히 다른 여단에 둘 수 없어서 민들레 여 단으로…… 쫓아버린 놈들 중에도 너만큼 미친 놈은 없어. ……제기 랄." 히도큰은 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몸을 홱 돌렸다. 자부심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은 달리는 대신 걷는 것이었다. 물론 그 걸음은 꽤 빨랐 다. 쵸지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히도큰의 뒷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고개를 돌린 쵸지는 환호를 보내야 할지 저주를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혼란에 빠진 론솔피와 주테카를 보게 되었다. 쵸지는 그들에 게도 미소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그 미소는 호의의 증거가 아닌 정신 질환의 증거로 여겨졌다. 쵸지는 그들이 보내는 평가를 그냥 수용하 기로 했다. 그도 자신이 좀 돌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키멜 퍼스는 기가 죽은 눈으로 마차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백만 대군이 뿜어내는 날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만 대군. 책이나 노래가 아닌 현실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키멜도 아라짓 제국의 총 군사력이 200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백만은 그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러나 그 절반 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는 것은 압도적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백만 대군에는 수십 명의 상장군이 있다. 지키멜은 자신의 군사 전문가에 게 이해하기 쉽게 귀족의 예를 들어줄 것을 요구했고 그녀의 요청을 받은 전문가는 대장군을 황제로 생각한다면 상장군은 적어도 공작이 나 후작에 준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후작은 왕이 되기 전 지키멜 이 가지고 있던 신분이었다. 물론 상장군과 후작의 일대일 대응은 불 가능하지만 상장군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사회에서 지키멜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인물들이 수십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지키멜은 위세를 차리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키멜은 혼자 오기로 결정 했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은 두 명의 시녀뿐이었고 바깥에는 마차를 모는 마부뿐이었다. 독행왕의 영접을 담당한 하스마 빌 상장군은 조금 당혹했다. 마차가 흑사자군의 주둔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빌 상장군은 지키멜이 단지 마차 한 대에 두 명의 시녀만 동반한 채 왔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 상장군은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천천히 멈춰서는 것을 보던 빌 상장군은 옆에 서 있던 니어엘 헨로 수교위에게 속삭였다. "헨로 수교위. 남자라면 대담함을 보여주기 위해 객기를 부리는 거 라고 생각하겠지만 독행왕이 왜 저러는지는 잘 모르겠군. 같은 여자 로서 좀 설명해주겠어? 왜 저렇게 단출하게 온 것 같나?" 니어엘은 싱긋 웃었다. "남자는 함께 목욕한 다음 친해지고 여자는 친해져야 함께 목욕한다 는 이야기 아십니까?" "들어봤어." "목욕은 비무장으로 하는 법이지요. 화려한 수행인 없이 오는 것도 목욕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그렇군." "남자가 친하지 않은, 그러니까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도 비무장을 보여주는 건 말씀하신 것처럼 객기를 부리는 걸 겁니다. 남자들에겐 상대를 믿을 수 있느냐보다 누가 더 세냐가 중요하니까요. 반대로 여 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비무장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여자들에 겐 누가 더 센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믿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독행왕은 우리를 믿는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요. 물론 저 는 용인이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재미있군. 아, 마차에서 내리는군. 가볼까?" 마차를 몰고 온 마부의 도움을 받아 지키멜이 마차 아래로 내려왔 다. 하스마 빌 상장군과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도열한 병사들 사이를 걸어 지키멜에게 다가갔다. 지키멜은 약간 주눅이 든 표정으로 좌우 를 둘러보고 있느라 두 사람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스마 빌 상장군은 그녀가 자신을 인지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경례했다. "독행왕 지키멜 퍼스 폐하 만세. 호두나무 군단장 하스마 빌 상장군 입니다. 폐하를 영접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쪽은 9014 독 립중대 중대장 니어엘 헨로 수교위입니다." 지키멜은 안도했다. 그녀는 영접관이 어떤 계급을 가진 사람일지 궁 금해하고 있었다. '상장군과 여자 장교라면 충분히 극진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지키멜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의 따스한 환영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사열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지키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전 그녀가 넋을 잃고 바라보던 병 사들 사이로 걸어갔다. 어깨를 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걸릴 것 같 았다. 이백 미터 쯤 되는 길 양편으로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엄한 표 정을 지은 채 서있었다. 지키멜은 그 숫자를 세어볼 엄두도 낼 수 없 었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숲을 보는 듯했다. 군악대의 갑작스러운 나 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지키멜은 걸음을 떼지도 못해을 것이다. 웅장한 나팔 소리에 지키멜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뗐다. 그 소리가 마치 움직이라는 신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지키멜은 나팔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스마 빌 상 장군과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그녀의 뒤편에서 걸었다. 그리고 독행 왕을 따라온 두 명의 시녀들은 얼빠진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나팔 소리를 들으며 끝이 없는 것 같은 병사들 사이를 걷던 지키멜 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그녀는 하스마 빌 상장군에게 질문 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니어엘에게 물었다. "혹시 짐을 영접하기 위해 전군이 다 모여있는 건가? 어…… 수교 위?" "니어엘 헨로 수교위입니다. 하문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아닙니다. 폐하. 호두나무 군단과 치자나무 군단이 폐하의 사열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잘 모르니 묻겠는데, 두 개 군단이라면 여러분들의 인원 중 얼마 쯤 되는 거지? 기밀이 아니라면 알려주면 좋겠는데." "이곳에는 35개 군단과 200개 정도의 독립중대, 그리고 1개 여단이 있습니다." 지키멜은 걸음을 멈출 뻔했다. 그녀의 양쪽에 서서 사열을 받고 있 는 저 무수한 병사들이 겨우 두 개의 군단이고 그 외에도 서른세 개 의 군단이 더 있다고? 지키멜은 이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자살행위 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동시에 지키멜은 다른 걱정을 느꼈다. "짐이 식견 없는 소리를 하더라도 용서해주면 좋겠군. 헨로 수교위. 그 많은 병력들이 전부 이곳에 있으면 세상은 현재 치안부재 상태인 것 아닌가?" "타당한 염려이십니다. 폐하. 아쉽게도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 다. 하지만 제 소견으로는 그토록 많은 병력이 지휘하는 이 없이 방 치되면 더 큰 치안 혼란을 가져올 것 같습니다." 지키멜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거칠게 말해 그 병력이 '에라, 강도질이나 하자!'고 나선다면 세상은 쑥밭이 될 것이다. 하스마 빌 상장군이 끼여들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제 예가 도움이 될 듯합니다. 제 불민한 아우는 크나큰 황은에 의해 잠바이의 태수직을 맡고 있습니다." "아아, 잠바이 태수가 귀관의 아우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이 때 아우를 지켜줄 수 있 는 것은 저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장군님은 저에게 더 중 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고, 그래서 저는 아우가 무뢰배와 야 심가들의 공격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우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장군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니어엘은 미소를 짓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하스마 빌 상장군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스마 빌 상장군이 은근히 암 시하는 바와 달리 그는 자의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 자신도 어떻게 해서 그런 패배를 당했는지 모를 기막힌 패배 끝에 합 류를 강제당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니어엘은 하스마 빌 상장군이 자신을 위로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자기 합리화 는 필수영양소이니까. 어느새 사열이 끝났다. 지키멜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길 이 끝났다는데 조금 놀랐다. 하스마 빌 상장군은 그녀를 엘시 에더리 에게 인도했다. 엘시는 지키멜의 예상과 달리 천막 안에 있지는 않았다. 하스마 빌 상장군이 안내한 곳에는 커다란 천막이 있긴 했지만 엘시는 천막 바 깥의 공터에서 독행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의자 두 개와 조 그마한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엘시의 곁에는 체격이 상당히 좋 은 인간 한 명이 서있었다. 지키멜은 생김새가 사람의 성격이나 천성을 결정한다는 의사과학의 신봉자는 아니었지만 대장군의 인상에 대해서는 약간 실망했다. 제국 에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는 위대한 무인은 아무리 봐도 전쟁 9단 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지키멜은 선입견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대장군을 관찰했다. 그리고 지키멜은 엘시가 군인다운 몸과 손 발을 가지고 있으며 그 눈은 이지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것은 누구라도 때려죽일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그 눈도 다른 사람의 귀가 자신의 명령을 듣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자의 그것이 아니었 다. 지키멜이 보기엔 자신이 엘시 에더리라고 소개한 자보다 그 곁에 있는 몸종처럼 보이는 자가 훨씬 대장군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가계에 도깨비의 피가 흐른다고 말해도 믿을 것 같은 몸종의 모습 은 정말 볼만했다. 짧은 순간 지키멜은 엘시가 자신의 감식안을 시험 하기 위해 몸종과 옷을 바꿔 입은 것이 아닌가 의심해보았다. 하지만 엘시가 그런 기벽을 부릴 까닭이 없었다. 더군다나 엘시는 지키멜에게 시녀들을 자신의 몸종과 함께 보내어 대접을 감독하게 하 라고 권했다. 몸종은 진짜 몸종이었고 엘시는 진짜 엘시였다. 지키멜 은 뭔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시녀에게 몸종을 따라가라고 명령했 다. 시녀들이 지키멜이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알려주고 싫어하는 음 식을 제외하기 위해 - 혹은, 가능성은 낮지만 음식에 독이 섞여들어 가는지 감시하기 위해 - 몸종과 함께 천막 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엘시는 탁자를 가운데 두고 지키멜과 마주 앉았다. 지키멜은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다. 백만 대군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공터 주위는 고요했다. 고급 장교들의 숙소와 창고, 기타 부대 시설 들이 주위에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어 일반 병사들이 주위를 시끄럽게 오갈 일이 없는 듯했다. 주위에 대한 관찰을 짧게 마친 지키멜은 다 시 엘시 에더리임이 확실해진 사내를 바라보았다. 지키멜은 조금 전엔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조 용한 자신감으로 미소 짓는 입매, 속눈썹에 묻어나는 깊은 이해력, 역경이 왔을 때 드러내기 위해 주의깊게 감추어진 당당함. 보이지 않 았다. 엘시는 그 기백으로 세상을 덮을 사람으로도, 말하지 않고 행 동하지 않아도 소인배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격조 높은 인품의 소유자 로도 보이지 않았다. 많은 길을 걸어온 나그네처럼 보인다는 것이 지 키멜이 받은 인상이었다. 지키멜은 실망이 더 커진다고 생각했다. 한 눈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비범함을 찾으려 애쓰는 것은 한눈에 뚜렷하 게 드러나는 비천함을 찾으려 애쓰는 것과 비슷하게 불공평한 일이지 만 지키멜은 그런 것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엘시는 보여주지 않았 다. 엘시는 독행왕에게 먼저 말할 기회를 주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키멜은 입을 열었다. "칼리도백.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는 어떤 여자지?" 지키멜이 온갖 궁리 끝에 결정한 서두였다. 그녀가 원하던 만큼은 아니지만 엘시는 당황하는 기색을 조금 내비쳤다.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말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변경백은 도깨비들이 준 이름인 정우 규리하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 합니다. 폐하. 도깨비식이기 때문에 규리하 가문의 정우가 아니라 규 리하에서 태어난 정우입니다." "정우? 그렇군. 그 외에 또 어떤 것들이 있지?" "왜 그 분에 대한 질문을 하십니까?" "짐은 궁금해. 백작은 그녀에게 규리하를 준 것처럼 짐에게 비나간 을 줄지." 엘시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규리하공에게 규리하를 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비나간은 폐하의 땅입니다." "글쎄. 물론 짐은 비나간이 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백작이 그 주장을 거부한다면 짐에겐 백작에 맞서 그 주장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사실 아닌가?" "폐하. 한 가지는 명백하게 말해두겠습니다. 저는 황제 폐하의 명령 외에 어떤 명령도 받지 않습니다. 규리하공은 제게서 변경백위를 받 은 것이 아니라 폐하의 의지가 그러하기에 변경백위를 승계했습니다. 제가 규리하공에게 줄 수 있는, 그리고 주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반 려가 될 남자뿐입니다." 엘시의 의도와 다르게 그 말은 굉장한 오해를 일으켰다. 독행왕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본 순간 엘시도 자신이 오해할 수 있는 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당황한 엘시가 부연하려 할 때 독행왕이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아아, 그래. 어울리는 짝이로군. 선남선녀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아뇨. 폐하. 그게 아닙니다. 저, 그러니까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랐 기에 킴들에 대해 잘 모르는, 인간에 대해 잘 모르는 변경백은 좋은 반려를 찾기 위해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는 변경백의 부친께서는 아시는 바와 같이 그럴 수 있는 처 지가 못됩니다. 그래서 그 분이 반려를 얻을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 리기로 약속했습니다. 물론 저 또한 미혼이고 한 여인의 앞날을 좌지 우지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리기엔 경험도 일천하니 그것은 도단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강력한 부정은 군령자라지. 그 속에 긍정이 들어있으니까." "폐하.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누구누구는 서로 좋아한대 요 같은 놀이를 하실 만한 나이는 지나신 듯합니다." 지키멜은 자신이 안정을 되찾았음을 느꼈다. 그녀는 여유있게 말했 다. "그거 나이 먹어도 꽤 재미있지. 백작. 짐의 예상으로는 앞으로 이 십 년 동안은 다른 사람의 연애담에 흥미를 느낄 것 같아. 더 오래갈 지도 모르고." "저를 그런 흥미의 대상으로 삼지는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실과 다르니까요." "그래서, 찾았나?" "예?" "변경백의 좋은 반려가 될 만한 훌륭한 남자를 찾았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 못합니다." 지키멜은 한 가지는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장군은 타인에게 성 실한 사람이었다. 완전히 무의미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지키멜의 질문에도 성심껏 대답했고 그가 당장 신경쓰지 않아도 아무도, 규리 하공 자신도 탓하지 않을 중매쟁이 일도 가슴에 담아두고 있음이 분 명하다. 지키멜은 그 사실을 마음 속의 비망록에 적어두었다. 엘시가 말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었군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폐 하의 명령만 받습니다. 그리고 저는 비나간에 칭왕한 패역자가 있으 니 가서 처단하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지키멜은 비망록을 쓰던 붓이 미끄러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키 멜은 겨우 자신을 가다듬어 기록을 마쳤다. 아아, 그래. 당신 정말 성실해. 이제 없어진 황제와 제국에게도 성실하단 말이군. 지키멜은 되도록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말했다. "짐이 틸러 달비 부위를 통해 보낸 것은 명령이 아닌 요청인데, 그 요청에 대해서는 어떤 대답을 해줄 텐가?" 천막으로 물러났던 이레와 지키멜의 시녀가 다과를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에 엘시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키멜은 조급함을 억누르려 애쓰며 두 사람이 탁자 위에 다과를 내려놓는 모습을 여유있게 바라보았다. 식기는 화려하다기보다는 질박하고 튼튼한 것이었고 다과도 특별히 호사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키멜은 이레의 몸짓에 약간의 감동을 받았다. 말에 탄 채 추수하듯 적의 목을 뎅겅뎅겅 자르고 있어도 어 울릴 것 같은 모습의 이레였지만 다과를 차리는 동작은 섬세했다. 지 키멜은 대장군의 몸종이 전설적이라더니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물 론 그녀의 상상 속에는 1.9미터짜리 거구의 청년 대신 보다 날렵하고 눈치 빠른 청년이 있었지만. 이레와 시녀가 다시 물러나자 엘시는 지 키멜에게 찻잔을 권했다. 지키멜이 입술을 적시듯 차를 마시고 다시 내려놓자 엘시는 두 손을 깍지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말씀하신 요청은 거절하겠습니 다." 지키멜은 망설이다가 농담처럼 말하기로 했다. "여자를 실망시킬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독행왕은 대장군이 공격적으로 대답한다면 '저는 시오크가 아닙니 다.'일 테고 맞장구를 친다면 '여자들에게 존중받으려면 그녀들을 존 중하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어기게 되어 저도 유감입니다.' 정도일 것 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엘시의 대답은 그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 요청은 바르지 않습니다." "바르지 않다고? 짐의 요청은 이러했지. 가위의 날은 두 개다. 흑사 자의 칼과 용의 칼을 합쳐 우리의 칼날도 두 개로 만드는 것이 어떠 한가. 그 어디에 바르지 않은 부분이 있지?" "가위의 두 칼날은 서로 만나서 협조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실제로 그러고 있습니다." 지키멜은 이중으로 비유를 한 셈이다. 가위는 시모그라쥬공의 문장 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모그라쥬공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두 개의 가윗날은 대호왕과 시모그라쥬공의 결합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 다. 엘시의 대답에서 지키멜은 그가 그 비유를 모두 이해했음을 알게 되었다. 엘시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칼은 협조할 수 없습니다. 만날 수 없이 평행할 뿐 입니다." "왜지?" "가위에는 두 개의 날을 만나게 하는 축이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와 저 사이에는 축이 없습니다." 지키멜은 그 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제국이군." "그렇습니다." 지키멜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제국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과 협조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는 건 가?" "폐하. 폐하께서 비나간 후작의 영토였던 땅 바깥으로 진출하지 않 으신다면 저는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폐하께서 는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땅을 다른 이름으로 다스리고 있을 뿐이니 까요. 물론 그 이름이 적법한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에 대해 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겐 그런 판단을 할 권한이 없습니 다. 제 바람이 이루어져 새 황제께서 선출되신다면 그 분께서 그것을 판단하시겠지요. 하지만 폐하께서 비나간 바깥으로 병사를 내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저에게 협조하시려 는 의사 표현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기에 바르지 않다 한 겁니 다." "제국 부활을 믿지 않는 자와 손을 잡을 수도 없고?" "거부감이 있다는 것은 고백하겠습니다. 폐하. 허락하신다면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눈하츠 신뷰레 교위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편지를 가지고 폐하를 방문했을 때 폐하께서는 비나간 바깥으로 진출 하지는 않을 거라는 내용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 을 믿고 폐하께서 거두고 계신 제국군만 받아들인 다음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적이 오고 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곧 올 거야. 유료도로당이 그들을 더 이상 막지 못하니." "유료도로당 대신 저희들이 막겠습니다." "제국군의 곁에서 함께 싸우면서 제국군의 전쟁 기술을 배우고 싶기 도 했어." "군대를 강화하시고 싶은 뜻은 알겠습니다만 저희들은 교사가 아닙 니다." "시오크가 거기 있어." 엘시는 입을 다물고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지키멜 또한 찻잔 안쪽 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짐의 견해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불쾌해하지 말고 들어줘…… 제 국은 부활할 수 없어." 엘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엘시는 입을 열어 반박하 지 않았다. 자신이 반박할 것을 지키멜이 알고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부활을 위한 모든 시도는 유혈만 가져올 거야. 그대도 제국의 부활 을 원하지만 시모그라쥬공도 그러하지. 그대는 귀족원 회의를 통해 정통성을 획득한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것이고 시모 그라쥬공은 그 자신이 지배하는 제국을 부활시킬 생각인 거지. 그리 고 시모그라쥬공은 이미 많은 피가 흐르게 했고 그대도 센범 폭포 같 은 유혈을 만들어내기 위해 걸어가고 있어. 이 또한 그대에겐 불쾌한 말이겠지만, 짐이 보기엔 두 사람은 똑같아." "폐하께서 제국이 부활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실 수 있으시다면, 그 말씀은 맞습니다." 지키멜은 자신의 첫인상을 버리기로 했다. "놀랍군. 백작. 그대는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야. 화를 내는 것이 보 통일 텐데. 계속 말하지. 부활할 수 없는 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피 를 흘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피를 흘리고 싶지 않은 자들을 위해 그럴 수 있는 나라를 주는 사람도 있어야 해. 짐이 원하는 것 이…… 그것이야. 짐은…… 제기랄. 좋아. 나도 피를 묻혔어!" 엘시는 고개를 들어 지키멜을 보았다. 지키멜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말했다. "이 손엔 내 증조부의 피가 묻어있어. 그리고 키탈저에서 죽은 병사 들의 피가 묻어있어. 내가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 증조부는 증조부 자신의 손을 빌려, 그리고 키탈저에서는 시모그라쥬공의 손을 빌려 그들을 죽였어. 하지만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어." 지키멜은 손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그 손을 탁자에 떨어 뜨렸다. "그리고 더 많은 피를 흘릴 생각이야. 우습지? 피를 흘리고 싶지 않 은 자들을 위해 왕국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여자가 더 많은 유혈을 기 대하고 있다고 말하니? 하지만 피를 강요하는 자들이 있어. 당신 같 은, 시모그라쥬공 같은 자들이! 그러니 어쩌겠어? 깃발을 휘두르며 싸울 준비를 하라고 말할 밖에. 세상에서 가장 큰 계명성을 지를 수 있다면, 처용산맥에서 지러쿼터 산맥에 이르는 모든 세계가 내 외침 을 들을 수 있다면 말하고 싶어. 환상 때문에 사람 죽는 꼴 좀 그만 보자고. 그냥 자기 자리나 지키며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외치고 싶 어." 지키멜의 눈에 핏발이 조금 섰다. 천막 쪽에서는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이레와 시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가 아무런 폭력적 징후가 없다 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엘시는 입을 꾹 다문 채 지 키멜을 바라보았다. "제국은 환상이야. 내 왕국은 환상이 아니야. 내 왕국은 천재가 아 닌 나 같은 사람도 만들고 지킬 수 있어. 대답해봐. 당신은 원시제인 가? 비셀스는 라수 규리하인가? 당신이 감히 제국을 부활시킬 수 있 다고 말하는 건가? 백작. 왜 칼리도로 돌아가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 로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그 귀한 능력을 주지 않는 거지? 왜 시모 그라쥬공은 그의 백성들의 첫 번째 벗이 되어주려 애쓰지 않는 거 지?"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키멜은 입 속에서 말을 질겅거리듯 말했 다. "시오크가 죽는다면, 그것은 내 패배를 의미해." 지키멜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늦여름의 하늘은 빛바랜 천 같았다. 가장자리가 갈기갈기 찢어진 구름 몇 점이 제 갈 길 몰라 허 둥대듯 떠다니고 있었다. "환상을 쫓는 자들이 내 왕국을 멸망시키는 것도 패배야. 하지만 시 오크가 그런 자들에게 죽는 것 또한 패배야. 한 사람이 하나의 왕국 과 같냐고? 한 달 전에 누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그 말을 비 웃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이제 시오크가 내 왕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똑같이 내 왕국이라고 말했지만 의미는 달라. 비나간은 내가 통치하는 왕국이야. 하지만 시오크는 내가 살고 싶은 왕국이야. 당신 이나 시모그라쥬공, 기타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 그만 이 나를 이해해. 나는 비나간을 잃을 수 없는 것처럼 그를 잃을 수 없어." 지키멜은 고개를 숙여 다시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그 눈을 피 하지 않았다. 독행왕이 말했다. "함께 싸우게 해줘." 엘시는 가슴을 조금 부풀렸다가 코로 길게 내쉬었다. "그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독행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그녀에게 엘시는 환상을 쫓는 자 들의 대표였다. 지키멜은 찻잔을 보며 제국만병장의 얼굴에 찻물을 끼얹는 자신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그 때 엘시가 말했다. "시오크 지울비를 구출하겠습니다." 지키멜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저는 시모그라쥬공이 부당하게 점령한 것을 원주인에게 돌려줄 생 각입니다. 그 부당 점유물에는 시오크 지울비 자신의 신병도 포함됩 니다. 폐하나 시오크, 혹은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 니다. 그것은 제 목표입니다." 지키멜은 충격적인 제안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환희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셀스에게도…… 나에게도…… 당신은 여자들에게 반려를 찾아주 겠다고 서원했어?" 말을 끝마칠 무렵 지키멜은 자신의 멍청함에 경악했다. 엘시 에더리 는 반려를 빼앗긴 사람이다. 스카리 빌파가 그의 약혼자인 부냐 헨로 를 데려갔다. 만약 비셀스 규리하에게 엘시가 연심을 가지고 있지 않 다면 그는 여전히 부냐 헨로에 대한 사랑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반려를 찾아준다느니 하는 말은 자기 앞가림도 못한다는 비아냥이 될 수도 있다. 지키멜은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것 을 참으며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 서원은 한 적이 없습니다." "아, 그래. 그런데 또 한 사람이라고 했지? 그건 누구지?" "게라임 지울비 당주입니다." "뭐?" "게라임 지울비 당주가 이곳에 있습니다. 그도 폐하처럼 저에게 아 들의 구출을 요청했습니다." =============================================================== 27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8. 읽는 것과 얽는 것 - 1 "시간은 시간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 역사의 행보에 작용하는 힘들에 대한 견해를 요청받은 우슬라 사르마크 부인의 대답. 밤은 어쩌면 방대한 혈족의 이름일지도 모르며, 그 중에는 다른 혈 족에게 경원시 당하는 가문의 이단아 쯤 되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흑사자군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은 그런 밤이었다. 먹구름이 짙 게 낀 낮이 아닌가 싶은 괴팍한 밤, 도둑과 연인과 주당의 벗이 되기 어려운 밤, 동료들을 잔뜩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불면증 환자들에게 우울한 만족감을 주는 밤이었다. 예민하기에 잠들지 못한 병사들은 낮에 할 만한 일을 주물럭거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방대한 흑사자군 의 진지는 낮의 시장터처럼 떠들썩했다. 파장 분위기의. 하지만 한밤중에 대장군의 천막을 찾은 니어엘 헨로 수교위가 엘시 에더리가 깨어 있으리라 확신한 것은 그 밤의 어색함 때문은 아니었 다. 그녀는 엘시가 잠을 잔다는 당연한 사실을 깜빡깜빡 잊곤 했다. 졸린 눈의 보초병으로부터 면담에 응하겠다는 회답을 전해받고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에야 니어엘은 엘시가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떠올렸다. 니어엘은 그 순간 자신의 멍청함을 꾸짖고 싶었 다. 하지만 엘시는 깨어 있었고 탁자 위에 잔뜩 늘어놓은 지도와 보 고서, 기밀 문서 등을 보건대 잠자리에 들어선 적도 없는 것처럼 보 였다. 니어엘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채 경례했다. 서류 하나에 지 시 사항을 적어놓은 후에야 고개를 든 엘시는 니어엘의 경례를 받고 는 그 지체에 사과하듯 말했다. "군인들의 농담들은 대부분 상식으로부터 실소를, 도덕으로부터 지 탄을 받을 것들이지만 가끔 쓸만한 것도 있지. 전사는 칼로 싸우고 위관은 목소리로 싸운다고 하더군. 장군은?" 니어엘은 부드럽게 웃었다. "종이로 싸웁니다." "맞는 말이야. 전사들의 대결에서는 더 많은 훈련을 받은 쪽이 이기 고 위관들의 대결에서는 통솔력이 더 뛰어난 쪽이 이기고 장군들의 대결에서는 군사 정보를 더 많이 수집, 가공한 쪽이 이긴다는 거지. 거기 앉도록 해." 니어엘은 의자를 끌어와 대장군의 맞은편에 앉았다. 엘시는 밤새 자 란 수염을 살짝 쓸어만지며 말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닐 것 같군. 그래. 무슨 일이지?" "조금 전……" 니어엘은 군인답게 정확한 시간으로 바꿔 말했다. "어제 저녁 토리 이포테 장군과 만나신 것으로 압니다." "그게 벌써 어제가 되었나? 그래. 그런데?" "저는 지금 이포테 장군을 재워놓고 오는 길입니다."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니어엘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장군은 한 잔 하고 싶은 기분이었고, 술상대로는 같은 여자가 좋겠 다고 생각했고, 제게 항상 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시는 팔짱을 끼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미심쩍어 하는 그의 눈을 본 니어엘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맘 아시죠, 를 몇 번이나 반복할 수 있는가 시험하려 온 것은 아닙니다. 저는 거의 마시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다 마셨지요. 그녀 와 대화 중 몇 가지 들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장군이 귀관에게 기밀을 늘어놓았다는 건가?" "제 생각엔 저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저 자신이 아니라 장군인 것 같습니다." "귀관을 충동질했다는 것이군." "예. 저는 쥐딤에서부터 대장군님을 모셨고 또…… 다른 친분도 있 으니까요." 제부와 처형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두 남녀는 그 사실에 대해 말로 도, 표정으로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니어엘이 약간 밝은 어조 로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저를 궁금하게 만들어 대장군님의 속마음을 알아내 려 한 것 같습니다." 엘시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묻힌 채 말했다. "그녀의 전략은 알겠는데 전술은 어떠했나?" "그녀는 기밀을 누설하지는 않았습니다. 대화 도중 분명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녀와 대화 도중 흑사자군의 한계 운 용 기간이 꽤 짧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좀 지나칠 정도로……" "16일." "예?" "16일 후엔 군량이 다 떨어진다. 결국 그 기간 안에 군량을 확보하 거나 햇빛과 물, 토양만으로 살아가는 식물의 비전을 터득하지 않는 한 흑사자군은 16일 후엔 사라지는 거지." 엘시가 반복해서 말해주었기에 니어엘은 도저히 160일을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기가 막힌 숫자에 니어엘은 놀라지도 못한 채 멍하니 말했다. "오늘까지 포함한 겁니까?" "그래. 어제 저녁에 계산한 거니까 오늘부터지." 당혹 때문에 니어엘은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고, 그래서 미리 준비 했던 말을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이포테 장군과 대화 중, 저는 그녀가 같은 사실에 대해 왜 자신은 긴장하는데 대장군님은 긴장하지 않는 것인지 의아해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왜 그런 의아함을 느꼈는지 알 것 같군요." 니어엘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 놀랐다. 엘시는 긴장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있다. 니어엘은 가슴 속에서 희망이 파닥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 추수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맞아. 그걸 감안해서 병력을 규합했지. 대강 계획대로 된 것 같 군." "그러면 추곡을……" "아냐. 16일은 그것을 계산에 넣은 숫자다." 니어엘은 자신의 추리력에 실망했다. 엘시가 말했다. "하지만 그 계산에 포함되지 않은 변수가 있긴 하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비밀 보급소만 고려할 경우 이미 말했듯이 16일이 한계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접근할 수 없는 비밀 보급소도 있지." 니어엘의 눈꺼풀이 크게 열렸다. "맞아. 현재 시모그라쥬군 점령하에 있는 지역, 그리고 더 남쪽에도 비밀 보급소는 있어. 하늘누리는 제국 어디에든 가니 상식적으로 생 각해봐도 비밀 보급소 또한 제국 전역에 있어야 하지." 니어엘은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그녀는 그제서야 엘시가 왜 긴 장하지도 좌절하지도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단순하다. 시모그라쥬군을 물리치면 승리와 함께 군량도 얻게 된다. 그럴 리가 없지만, 혹 패배한다면 어차피 군량은 아무 문제가 아니게 된다. 니 어엘은 안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니어엘의 얼 굴이 밝아진 것과 반대로 엘시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대장군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염려하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제 단견으로는 우려할 만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엘시는 팔짱을 풀고 탁자 위에 두 손을 얹었다. "헨로 수교위. 조금 전의 농담 말이야." "예." "대장군은?" "예?" "전사끼리, 위관끼리, 장군끼리 싸울 때 어느 쪽이 이기는지는 알게 되었지. 그러면 대장군끼리 싸울 때는 어느 쪽이 이기지?" "대장군끼리……? 대장군은 한 명입니다만." 엘시는 무거운 동의의 표정을 지었다. 니어엘은 엘시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곧 니어엘은 엘시의 마음 속에 박혀 있는 가시가 무엇 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한숨을 애써 참았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대장군님. 예. 제국군에 대장군은 한 명이고 대장군님은 저들의 상관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대장군님의 명 령에 따라 순순히 우리에게 규합된다면 그들을 위한 군량도 필요할 테지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장군님의 구상에 대 해 주제넘게 참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의 규합 가능성에 대해 서는 고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그들과의 전투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충고하듯 말하던 니어엘은 갑자기 엘시가 옆으로 치워놓은 서류들 중에 다가올 전투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 섞여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 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니어엘은 엘시가 화를 내더라도 할말이 없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시는 총지휘관의 통찰력을 무시한 채 감히 진부한 훈계를 하는 부하 간부의 대담함을 꾸짖지도, 비꼬지도 않았 다. 그는 좋은 충고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관의 말에 일리가 있군. 내가 쓸데없는 것까지 고민하고 있는지 도 모르겠어." "그런 뜻으로 드린 말은 아닙니다. 대장군님이 모든 일을 고민하지 않았다고 해서 원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유를 가지시고 필 요한 일만 하셔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희들로서도 대장군님께 서 모든 것을 고민하시느라 지치는 것보다는 몇 가지 일만 고민해주 시는 것이 훨씬 더 반가울 것입니다." 밤이 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엘시는 탁자 위에 놓은 등잔불 을 바라보았다. 대장군의 처소였지만 초는 생각하기 어렵다. 물 위에 떨어지기 직전의 꽃잎 같은 불꽃을 보던 엘시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끔찍하군." 니어엘은 자신의 속눈썹이 엘시의 모습을 가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니어엘은 속눈썹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 등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임을 알게 되었다. "귀관도 알겠지만 이틀 전 나는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에게 야심가에 대한 부화뇌동을 멈추고 우리에게 합류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부하들을 이끌고 진짜 합류하겠다고 말하면 내가 그녀에 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사의 위험 속에서 군인 정신을 시험할 기 회뿐일 것이다." "그녀는 그 명령을 거절할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거절할 것이 뻔하다고 해서 내게 책임 이행을 할 수도 없는 명령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명령하지 않을 수도 없잖습니까." "그렇지. 결국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내겐 결정권이 없어. 나는 저 쪽에서 싸움을 원해도 싸워야 하고 싸움을 원하지 않아도 싸워야 한 다. 그러면서도 싸움을 포기하라는 허위에 찬 서신을 보내야 했다. 그것이 끔찍하군." 엘시는 고개를 떨구었다. 니어엘은 입안에 쓴맛을 느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시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 후 엘시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게 뭔가?" "6억 명 중 200만 명은 300분의 1밖에 안된다는 거지요." 엘시는 고개를 들어올려 니어엘을 보았다. 니어엘은 자신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을 펴 무릎에 얹었다. "전세계를 천 명이 사는 마을로 본다면 그 중 세 사람이 제국군인 셈입니다. 나머지 997명의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며 근면하게 살고 있는 가운데 서로 치고받고 있는 건 그 중 세 사람입니다. 보통 그런 경우라면 그 세 명은 존중 받는 공동체의 일원보다는 몸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인 철부지 싸움꾼으로 취급받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풍파를 일으키기 싫어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지만 중요한 일은 절대로 맡기지 않는, 거리의 문제아들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 니까?" "알겠어." "저는 제가 역사의 본류에 서있는 것인지, 그렇잖으면 역사의 조그 마한 지류에서 물장구를 치며 물을 흐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엘시는 동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후세의 역사가들은 우리가 필사적으로 매달린 이 모든 일을 제국 붕궤의 과정에서 통제력을 잃은 군사 세력의 소요 쯤으로 간략하게 처리할지도 모르지. 어쩌면 더 심하게 '그리고 여러 곳에서 혼란이 있었다.' 같은 한 문장으로 처리할지도 모르고. 그리 고 우리 다음 시대는 우리와 전혀 무관한 곳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지도 모르지." 니어엘은 넌더리 난다는 투로 말했다. "실감나는 전망이군요. 고 아라짓 왕국과 신 아라짓 왕국 사이에 살 았던 자들 중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더. 그런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왕국을 부활시키려고 애썼던?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암흑기였 다.'는 서술뿐이지요." "그래. 하지만 누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역사 속에서 가지는 의 미를 인식하며 행동할 수 있겠나? 그런 사람은 없지." "그렇겠지요. 신이라면 모를까." "아냐. 신이라도 불가능해." "예?" "신들은 자신의 선민종족에 대해서는 알겠지. 하지만 다른 신이 보 호하는 다른 선민종족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겠지. 헨로 수교위. 귀관 도 잘 알겠지만 입신의 기사라도 바둑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어. 자신이 모르는 상대방이라는 존재가 있으니까. 더 군다나 신들의 바둑판에는 자기 외에도 기사가 세 명이나 더 있지. 다음 국면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니어엘은 입을 다문 채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담담하게 말했 다. "최상의 한 수를 찾는 수밖에." 니어엘의 마음 속에서 폭풍의 견본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무릎을 내려다본 니어엘은 자신의 손이 다시 구부러져 하얀 주먹으로 변해있 는 것을 보았다. 밤과 낮의 불륜이 만들어낸 것 같은 기묘한 밤은 아 직도 소리 없는 호곡을 계속하고 있었고 불면의 병사들이 웅얼거리는 소리는 니어엘의 신경을 거슬렸다. 니어엘은 해서는 안되는 말이 입 안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대장군의 귀한 시간을 쓸데없는 토론 으로 낭비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니어엘은 입을 열고 말았 다. "대장군님. 싸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끔찍한 상황을 모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흑사자군을 해산시키고 마음대로 떠나라 고 하십시오." 니어엘은 엘시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새하얗게 변한 손톱 만을 바라보았다. 민감해진 청각으로도 니어엘은 엘시의 숨소리가 변 화되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조금의 지연 후 엘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헨로 수교위." 니어엘은 턱을 가슴에 파묻은 채 말했다. "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미래를 모른다는 말씀, 동의합니다.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 동의합니다. 그 누구도 반론을 고민하지 않는 그런 당연한 말씀들을 하셔야 하는 처지, 이해합니다. 부냐를 사랑하십니까?" "……뭐?" "그런 여자가 있습니다. 제 여동생입니다. 제 부모님의 또다른 딸입 니다. 대장군님의 약혼자였고 백화각의 염사보조인이었고 지금은 발 케네공 스카리 빌파의 곁에 있는 여자입니다. 부냐 헨로라고 합니다. 사랑하십니까?" 니어엘은 이포테 장군을 상대하느라 몇 잔 마신 술에 취한 것이 아 닌가 의심했다. 그런 설명이라도 있지 않고서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 었다. 니어엘은 이마에서 정수리 부근에 이르는 부분이 놀랍도록 민 감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장군의 시선이 닿고 있을지도 모르는 부분. 하지만 니어엘은 누군가의 찌르는 시선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저 그 부위가 가려웠다. 니어엘은 호흡을 멈췄다. 자신이 흐느낄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 속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되려 건조했 다. "사랑한 적이 있으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그 애를 보면서 가장 미친 짓을 정당화할 수 있는 힘을 느끼신 적 이 있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머릿속에 회오리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눈이 밝아지면서 동시에 어 두워지는 것 같은, 손가락에 느닷없이 마디가 하나 더 생겨난 것 같 은 느낌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니어엘은 손등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 생각을 하며 잠드신 적이라도……" 대답이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니어엘은 말끝을 흐렸다. 니어엘 은 입과 코에서 쏟아져나오는 뜨거운 공기가 옷깃 속으로 파고들어 가슴에 닿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그녀는 그것이 싫어졌다. 그 생각 을 떠올린 순간 그녀는 머리를 들어 엘시를 보았다. 엘시는 똑바로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눈꺼풀은 금고요새의 성문 같았다. 니어엘은 자신이 후회의 목록에 영원히 빛날 찬란한 한 대목을 기록해넣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훗날의 일이다. 니 어엘은 자신의 잔학함에 정신적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제국을 사랑하십니까?" 겉으로 보기에 엘시의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니어 엘의 말은 가장 난폭한 레콘의 별철 병기가 되어 엘시를 엄습했다. 니어엘은 일어났다. 목적을 달성한 암살자처럼. 그녀는 누군가가 자 신의 범행을 목격할 것을 두려워하듯 발소리를 죽인 채 움직였다. 하 지만 니어엘은 죽은 것이 누군지, 아니 한 명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했다. 니어엘은 오열하는 표정으로 천막을 나갔다. 그녀가 나갈 때까 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엘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니어엘은 불분명한 계보에 속하는 듯한 밤 아래에 섰 다. 시원한 바람은 어디에도 없었고 고상한 어둠도 보이지 않았다. 삽시간에 암살자에서 피살자로 바뀐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던 니 어엘은 자신이 어떤 말을 중얼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니어엘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 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니어엘은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였 다. 잃어버린 약혼녀. 잃어버린 제국. 니어엘은 파르르 떨었다. 불지도 않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 스카리 빌파의 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느닷없이 아침이 드러났 다. 스카리는 눈을 찌르는 통증을 느꼈다. 각성은 무례하고 잔인했다. 신음을 흘리던 스카리는 산산조각난 것이 밤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가까스로 눈을 뜬 스카리는 흐릿한 시야 속의 사물 들을 이질감 속에서 바라보았다. 세계는 낯설었지만 상황은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숙취의 아침이었 다. 모든 주정뱅이가 느끼는 상실감과 흐릿한 두려움 속에서 스카리 는 짜증을 서서히 발효시켰다. 내가 술을 마셨던가? 스카리는 기억나 는 일들을 재구성해보았다. 이곳은 디팝, 혹은 그 비슷한 빌어먹을 곳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본 스카리는 이곳이 디팝이 맞다고 판단했다. 아마도 디팝 자작 페리닌 스베이크의 저택일 것이다. 그가 얼핏 본 것은 화려한 실내였다. 이 곳에 오기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레콘 낙오병들을 추적하고 있 었다. 성공했나? 성공했다. 그 때문에 술을 마셨으니까. 스카리는 도 취감 속에 보냈던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하지만 떠오르는 기억들의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정신없는 추격이었으니까.' 레콘들은 딱정벌레와 속도 경쟁을 펼치겠다고 선언했을 때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들이 받는 반응들을 받지 않아도 되는 종족이다. 그리고 내기를 좋아한다면 - 물론 심각하게 좋아해야 할 테지만 - 레콘의 승 리에 걸 수도 있다. 레콘들은 그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선 건조한 고원지대 같은 곳에 경기장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호수 나 늪지, 하천뿐만 아니라 인간 여행자들이 신발을 벗고 터벅터벅 걸 어서 건너는 개울조차도 레콘에겐 심각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것 뿐이라면 도망치는 레콘들에게도 어느 정도 기회가 있었겠지만 스카 리에겐 도망자들과 똑같은 속도를 낼 수 있는 추적자들이 잔뜩 있었 다. 결과는 처음부터 자명했다. 하지만 체포당하기 직전까지 레콘들 은 멋지게 도망쳤다. 한 잔 마실 가치가 있는 추격전이었다. '그랬나?' 아침을 맞이한 주정뱅이의 우울함이라는, 술의 역사와 함께 해온 유 서 깊은 병이 스카리의 만족감을 갉아먹고 있었다. 스카리는 그것이 정말 한 잔 마실 만한 일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스카리는 그것이 지난 몇 개월 동안 수도 없이 있었던 추격전과 별로 다를 것 도 없음을 깨달았다. 스카리는 자신이 왜 폭음했는지 알 수 없게 되 었다. 왜 그것이 그렇게 기뻤던 것일까? 스카리는 생각의 방식을 바 꿔보기로 했다. 불쾌한 베개에 머리를 짓누르며 스카리는 생각했다. 왜 그것을 기쁜 일로 여겼을까? 답은 질문 속에 있다는 해묵은 금언이 사실로 밝혀졌다. 스카리는 그것을 기쁜 일로 만들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더 이상 기쁘지 않기 때문이다. 레콘 낙오병을 붙잡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스카리는 초조감 속에서 요근래 주위 사람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더이상 즐거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들은 발케네 사회에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 레콘 낙오 병을 쫓는 일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았다. 레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까? 그렇지 않았다. 사라티본 부대와 막대한 소화차의 보호를 받고 있는 스카리가 안심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안심하고 있었다. 그들 의 태도는 두려움이 아니라 시큰둥함이었다. 왜냐 하면 그것이 발케 네 사회에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 레콘 낙오병의 체포가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한 굉장한 규모의 사냥'이었기 때문에. 스카리는 힘줄이 불쑥 솟아오를 정도로 목에 힘을 주었다. 입 근처 의 피부가 아래로 당겨지며 꽉 다문 이가 드러났다. 낙오병들은 발케 네인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사실이 보고 된 적은 없다. 그것은 사냥이었다. 압도적인 준비를 갖춘 한 사냥꾼 이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냥감을 대상으로 탐닉한 도락이었다. 바 위를 깨고 하늘을 나는 사냥감들. 그리고 그를 따라다니는 병사들은 사냥꾼에게 제 때 음식과 침소 등을 제공하고 사냥꾼의 영광에 박수 를 보내는 자신들의 역할에 진력을 내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도 아니 고 치안활동도 아닌 오락이었으니까. 스카리는 자기혐오에 빠지려는 자신을 목격하고는 머뭇거렸다. 구조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스카리는 구조하고 싶지 않다는 충동을 느꼈 다. 자기혐오도 때론 감미로운 오락일 수 있다. 주위 사람들뿐만 아 니라 스스로도 레콘 추적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스카리 는 그것을 굉장히 즐거운 일로 만들어야 했다. 그에게 박살난 아침을 선물로 남겨준 술판은 그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다. 스카리는 이제 자 신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난 일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스카리는 어금 니를 갈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스카리는 남겨진 선물이 하나 더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스카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불이 위로 둥글 게 솟아 있었다. 마치 그 아래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 아래엔 아무 것도 없었다. 우연히 구겨진 이불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이불이 숨을 쉬는 것마냥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일 수는 없다. 스카리는 뒤통수가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 다. 그 기묘한 현상은 바로 그의 옆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스카리는 충혈된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곳에 누워있었다. 바로 그의 잠자리에서. 스카리는 경비병을 부를 것인지 자신의 칼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할 것인지를 놓고 무서운 고민에 빠졌다. 그가 가까스로 경비병을 부르자고 결심했을 때 텅 빈 이불 아래에서 웅얼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스카리의 입이 덜컥 닫혔다. 그는 심장을 쿵쾅거리며 텅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문득 스카리는 충동적으로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손끝에 닿았다. 스카리는 질겁하며 손을 뺐 다. 그러자 그의 손이 벽에 쾅 부딪혔다. 스카리는 아픔에 신음을 흘 렸다. 웅얼거림이 멈춰졌다. "일어나셨어요?" 텅 빈 공간이 여자의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스카리는 자신이 말 도 안되는 짓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현상은 그에게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텅 빈 공간이 손에 도깨비 감투를 든 여자로 바뀌었을 때 스카리는 허무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흐트러진 머릿결과 부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디를 보더라도 현 실감 넘치는 인간 여자였다. 스카리는 그녀의 냄새도 맡을 수 있었 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자는 굉장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또 그 냄새를 감출 만한 옷은 하나도 입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겁을 집 어먹었던 자신을 비웃으려던 스카리는 문득 자신의 잠자리에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알몸으로 누워있고 더군다나 자신의 도깨비 감투가 그 녀의 손에 있다는 것은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스카리 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자 여자는 지겹다는 표정을 살짝 내비쳤다. 지겨워? 뭐가? 여자는 생각을 바꿔먹은 듯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 앉은 그녀 는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상체를 가렸다. 그러느라 여자는 한 손으 로 감투를 들어야 했다. 그녀의 손 안에서 이리저리 우쭐거리는 도깨 비 감투를 보자 스카리에게 분노가 확 피어올랐다. 스카리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내놔." "예?" "네 손에 있어선 안되는 그 물건 말이다! 손목을 자르기 전에 당장 내놔!" 여자는 더럭 겁을 집어먹었다. 그녀는 황급히 감투를 내밀었고 그러 느라 감투는 조금 구겨졌다. 노성을 지르려던 스카리는 그보다는 소 중한 감투부터 받아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투를 살펴본 스 카리는 험악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넌 누구냐?" 여자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구냐고 물었잖아!" "마, 말씀드렸잖아요. 리샤. 리샤예요. 예쁜 이름이라고 하셨잖아 요." "예쁜 이름이라니, 무슨 빌어먹을. 그런데 왜 내 감투를 네가 쓰고 자빠져 자고 있었던 거야!" 리샤는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그녀의 입술이 생존욕구를 담은 채 황급히 움직였다. "공작님이 억지로 씌웠잖아요. 싫다고 그랬는데. 전 그거 무서웠단 말이에요. 저주 받은 물건이잖아요. 하지만 공작님이 억지로 제 머리 에……" "뭐? 씌어줘? 내가?" "그러셨잖아요. 안 보이는 여자하고 하는 기분이 궁금하다고 하시면 서. 그래서 저는 저주 받을 것도 무릅쓰고 그걸 썼어요. 공작님이 그 러라고 하셔서. 전 정말 억지로, 공작님이 시키셔서 쓴 거예요!" 스카리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 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스카리는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인정해야 할지를 모를 뿐이었다. 혼란스러워 하는 스카리를 내버려둔 채 리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 음에도 불구하고 스카리의 얼굴이 화끈해지는 말들이었다. "여자 몸 속에서 내 물건이 이렇게 움직이는구나 하셨잖아요. 그렇 게 좋아하셨어요. 기억 안나세요? 제 몸 속에 방사하실 땐 정말 크게 웃으셨어요. 이것 봐라, 이것 봐라 하시면서. 전 정말 까무러칠 정도 로 무서웠지만 공작님이 좋아하셔서 안심했는데, 어떻게……" "젠장. 그만해!" "전 정말 공작님이 시키셔서 그 무서운 것을 쓴 것뿐……" "입 닥쳐! 한 마디만 더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리샤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북받치는 기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듯 리샤는 이불을 머리 위로 덮어쓰고 잠자리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 다. 스카리는 울지도 마라고 외치려다가 스스로 한심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만두었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감투를 내려놓 고는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에 차가운 기운을 느낀 후에야 스카리는 자신 또한 알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카리는 침대 주변의 양탄자 위에 낙엽처럼 흩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내저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룸성에 부냐가 있는데 자신이 이곳에서 다른 여자와 잘 수 있다니,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빌 어먹을 녀석이 아부한답시고 저 년을 내 침대에 밀어넣은 것 아닐까? 그리고 취중에 자신도 모르게 안은 것이고? 스카리는 그것이 맞으리 라 생각했다. "이봐……" 이름이 뭐였더라? 리, 리, "리냐. 일어나." 리냐? 잠깐. 어쩐지 낯익은 이름인데? 스카리는 조금 후에야 자신이 부냐의 이름을 뒤섞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카리가 자신에 대해 황당해하는 것을 끝마칠 때까지 여자는 이불 속에서 웅크린 채 꺽꺽 거렸다. 스카리는 일어나 침대로 다가가서는 이불을 확 끌어당겼다. "일어나라고 했잖아!" 여자는 기겁하며 돌아누웠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뜻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얼굴을 찌푸리던 스카리의 시선이 문득 무방 비로 드러난 여자의 몸을 훑었다. 옷도 이불도 없었고 두 손 또한 얼 굴로 가있었기에 똑바로 누운 여자의 몸을 감추는 것은 아무 것도 없 었다. 무의식중에 그녀의 부분부분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던 스카리 는 갑작스러운 환멸감을 느끼며 다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이 불을 팽개치고는 여자의 손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조 금 전까지 얼굴을 감추고 있던 것과 어울리지 않게 여자는 스카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여자의 손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는 다시 의자로 물러났다. 의자에 앉은 그는 천장 쪽을 보며 말했다. "이름이 뭐였어?" "리샤입니다." "좋아. 리샤. 누가 너를 내게 보냈지?" "예?" "너를 내게 보낸 것이 누구냐고." 리샤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문득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는 팔을 뻗어 이불을 조심스럽게 거머쥐었다. 그녀는 스카리의 눈치를 살피며 이불 로 몸을 가렸다. 스카리는 그녀가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몸을 가린 리샤는 더듬더듬 말했다. 결과적으로 스카리는 그 날 아침을 저주하 게 되었다. 디팝 자작 페리닌 스베이크가 스카리 빌파를 위해 연 술 자리에서 시중을 들던 그녀를 끌고 잠자리로 온 것은 대취한 그 자신 이었음이 확실해졌다. 리샤가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스카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서서히 안정을 되 찾은 리샤가 말했다. "하나도 기억 안나세요?" 스카리는 끙 하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샤가 고개를 끄덕였 다. "하긴, 어제 정말 많이 드셨어요." "꺼져." "예?" 스카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옷 사이에 팽개쳐져 있는 장신구들을 집어들었다. 팔찌는 대단찮은 것이지만 목걸이는 비싼 물 건이었다. 스카리는 두 개의 장신구를 들고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가 스카리는 리샤가 고민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스카리 는 충동적으로 목걸이를 리샤의 무릎 위에 던졌다. "당장 꺼져." 리샤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스카리를 바라보다가 그가 던진 목걸이 를 주워들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리샤는 바닥에서 자신의 옷가지를 찾아 입고는 스카리에게 목례했다.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스카 리는 방안에 박살난 아침과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아주 멋지게 끝난 엽행이로군. 스카리는 감당하기 힘든 우울감과 상실감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쓸 데없는 짓을 하며 몇 개월 동안 발케네 이곳저곳을 쏘다닌 결과가 그 의 뺨을 후려치듯 나타났다. 발케네의 치안에 위협이 되는 레콘 낙오 병들을 체포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레콘들은 발케네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패배의 복수를 위해 찾아올지도 모르는 레콘 제국병들을 미연에 체포한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직접 레콘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가장 피해야 할 일이 니까. 그것은 거창한 엽행이었고, 하늘누리를 다루는 괴팍한 처녀 때 문에 중단된 정복활동을 다른 방식으로 재개한 것이고, 지긋지긋한 두 명의 헨로로부터의 도피였다. 부냐 헨로와 모디사 헨로. 마지막 결론에서 약간의 동요를 느꼈지만 스카리는 깊은 우울감 때문에 그것 을 그냥 받아들였다. 한 명의 규리하와 두 명의 헨로. 그 세 여자 때 문이다. 문득 추위가 느껴졌다. 스카리는 맥없는 동작으로 일어나 옷을 꿰어 입었다. 왜 옷을 입는 간단한 동작이 이럴 때 남자들에게 지독히 우 울한 일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옷을 대강 차려입은 스카리 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지소어입니다." 오, 젠장. 오, 젠장. 오, 젠장! "들어와." 문이 열리고 가면을 쓴 남자가 들어왔다. 스카리는 아무 표정도 볼 수 없는 것이 차라리 고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팔리탐은 방안을 주 욱 둘러보는, 이럴 경우 상당한 야유가 될 수도 있는 동작조차 취하 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스카리의 앞쪽에 섰다. "리샤에게 기침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팔리탐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스카리가 리샤에게 준 목걸이가 들려있었다. 스카리는 기막힌 표정으로 팔리탐을 보았다. 팔리탐이 말했다. "돈을 주고 바꿨습니다." "돈을 줬다고? 뺏은 것이 아닌가?" "공작가의 물건임이 분명한 이런 물건이 함부로 바깥에 나돌아다니 면 안됩니다. 게다가 그 애는 어차피 이런 물건을 현금화할 능력도 없습니다. 잘 알아듣더군요. 그 애는 고마워하며 돈을 받아갔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스카리는 팔리탐의 가면을 바라볼 뿐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조금 기다린 팔리탐은 그러라는 명령을 받은 것처럼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씻고 조찬을 드셔야겠지만, 혼자 드시고 싶으시다면 이곳으로 가져 오도록 하겠습니다." "……내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군." "노인에겐 경험이라는 좋은 벗이 있습니다." "자네는 그렇게 노인도 아냐. 좋아. 혼자 먹지." 팔리탐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곳으로 가져오라고 말해두었습니다." 스카리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팔리탐은 그 웃음이 멎길 기 다렸다가 말했다. "체포한 레콘들의 맹세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일로 미룰 수도 있지만 그냥 오후 쯤에 하시는 것이 좋으실 듯합니다." "왜지?" "다른 레콘 낙오병들이 목격되었습니다. 카날티 남부입니다. 빨리 추적하지 않으면 놓칠지도 모릅니다. 공작님께서 가시기 어렵다면 사 라티본 부대만이라도 먼저 보내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러면 공작님 이 도착할 때까지 사라티본 부대가 그들을 붙잡아둘 겁니다." "보냈나?" "예? ……아닙니다. 군사 행동은 미리 예견할 수 있다고 해서 비재 량권자가 자의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자네가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힌치오를 보내…… 아니, 보내지 마." 팔리탐은 고개를 갸웃했다. 스카리는 책상 위에 놓인 목걸이를 보았 다. "내버려둬." "내버려두라고 하셨습니까?" "카날티 남부에 나타났다는 그 낙오병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나?" "아무 일도." "그렇다면 내버려둬. 병력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비용은 너무 많이 들고, 얻는 효과는 없다. 그들이 지금껏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당 분간 그러지 않겠지. 그들에겐 내게 충성하라는 내용으로 편지나 한 통 보내고 그룸성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팔리탐은 무표정한 가면으로 스카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스카리 는 그의 정강이를 툭 걷어차는 시늉을 해보였다. "박차를 가해야 움직일 텐가, 노마(老馬)여?" 팔리탐은 어깨를 움찔했다. "알겠습니다. 쉬십시오. 공작님." "그래." 팔리탐은 약간 느린 동작으로 경례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28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8. 읽는 것과 얽는 것 (2) 2004/08/23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28-2 관련자료:없음 [49265]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8-23 06:18 조회:186 피를 마시는 새 28. 읽는 것과 얽는 것 - 2 누군가가 구름을 모루 삼아 오래된 태양을 담금질하고 있는 듯하다. 굉음의 비산. 꾸르릉 하는 소리에 조금 놀란 가미 히스롤 수전사는 연초를 떨어뜨 리고 말았다. 떨어진 연초보다는 헛소문이 생기는 쪽을 염려하며 수 전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에 대해 천둥을 무서워한다는 둥의 헛소문이 생기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부하들이 지휘관을 얕보게 된 다면 낭패다. 하지만 부하들은 모두 하늘을 보고 있어서 그가 연초를 떨어뜨리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히스롤은 태연히 발로 연초 가루를 비벼 풀숲 사이에 묻고는 연초 쌈지에서 새 연초를 꺼냈다. 곰방대에 연초를 채워넣은 히스롤은 모닥불에서 뽑아낸 불붙은 잔가 지로 불을 붙였다. 부하들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렸을 때 히스롤은 여 유있게 연초를 피우고 있는 상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지휘관은 무사가 아니다. 거기에 연기자나 교사, 기타 몇 개의 직업 을 덧붙여야 장교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연기자도 그저 연기 하는 사람은 아니고 교사도 그저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하가 말했다. "중대장님. 비가 올 것 같은데요. 물러나야하지 않겠습니까?" 히스롤은 부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을 결정했지만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하늘을 관찰하는 시늉을 했 다. 장교니까. "자네 예상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물러나야 한다는 결론은 조금 잘못 되었군." "예? 비가 오면 그 사람은 안 올 겁니다." "아냐. 그 사람은 우리가 비를 피할 장소를 준비해두었을 거라 생각 하고는 더 빨리 올 수도 있지. 그렇다면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서는 천막을 쳐야겠군." 어릴 때부터 날씨를 맞추는데 비상한 소질을 가지고 있는 히스롤은 비가 올 확률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나절도 지나기 전에 인내심을 다 잃어버리고는 아침에 떠나온 마을로 돌아가서 사소한 위 락을 즐기자는 눈길을 끈적끈적하게 보내는 대원들에게 할일을 줄 필 요가 있었다. 장교니까. 그래서 히스롤은 그의 대원들의 눈빛에 맞서 지금 당장 일어나서 천막을 치는 것이 치아 건강에 좋을 것이라는 눈 빛을 보내주었다. 대원들이 미적거리는 동작으로 일어나 천막을 치는 것을 보며 히스롤은 우주의 비밀과 세계의 역사, 실존과 의지 등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넌더리난다는 표정을 짓고 싶었다. 거친 연초 연기가 새끼고양이의 혓바닥처럼 목구멍을 핥았다. 두 개 의 콧구멍에서 굴뚝처럼 연기를 뿜어내며 히스롤은 지평선을 바라보 았다. 그리고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표 정이 의문에 찬 것으로 바뀌었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암살자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레콘이 온다고 말했다. 히스롤 수전사가 두 사람이 온다고 이해한 것 은 잘못이 아니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 또한 그런 실수를 탓하지 않은 채 암살자가 레콘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레콘 암살자라고?' 지금껏 히스롤은 레콘이 혼자 있어도 부대라는 말은 레콘은 혼자 있 어도 한 부대가 집결해서 떠드는 것만큼 소란스럽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왔다. 짝을 찾기 어려운 거구와 탁월한 힘 때문에 레콘의 모 든 동작들은, 설령 졸고 있다고 해도 지독하게 웅장한 것이 되어버린 다. 그리고 시각적 소란스러움은 청각적 소란스러움도 동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웅장함과 소음은 모두 암살자라는 직종에 어울리지 않는 다. 하지만 암살의 목적은 결국 목표물의 제거에 있는 것이고 암살자의 대명사나 필수조건 쯤으로 여겨지는 기도비닉 또한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방해를 피하고 목표물에 쉽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 기도비닉이다. 반대로 말한다면 목표물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소리가 나든 말든 상관이 없다. 투석기로 사람을 맞춰죽일 능력이 있으면 그 래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레콘은 가장 정확한 투석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따라 꺾어져 정중히 문을 열고 들어가 목표물을 확인한 다음 타격할 수 있는 투석이라고 할까. 히스롤은 연기를 힘있게 내뿜었다. 레콘 암살자라는 말은 잘못된 것 이 아니다. 레콘은 훌륭한 암살자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 원하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으면 그것은 분명히 무적의 암살자…… 히스롤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누군가의 모루가 되어있는 것은 하늘 한쪽에 곰팡이처럼 묻어있는 검은 구름이었다. 천둥은 그쪽 방향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비는 오 지 않아. 히스롤은 확신을 담아 생각했다. 그 레콘도 날씨를 나만큼 읽을 줄 알면 올 것이다. 오지 못하게 할 수도 없다. 히스롤은 다 피운 곰방대를 뒤집어 탁탁 쳤다. 재가 빠져나가는 모 습을 보며 히스롤은 조금 전 떠올린 문장을 지우려 애썼다. 하지만 그 문장은 방안에 들어와 손 닿지 않는 곳에만 잠깐잠깐 내려앉으며 계속 날아다니는 파리처럼 그를 귀찮게 만들었다. 레콘은 원하는 누 구라도 죽일 수 있다. 그리고 그를 막을 방법은 없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희귀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있는 - 그것이 있어야만 사람이 산다고 해야겠지만 - 보편적인 물질 로 레콘을 막을 수 있다. 물의 위협은 레콘을 격퇴할 수 있다. 하지 만 그것은 자신의 남은 생을 포기하는 짓이라는 점에서 좋은 해결책 이라고 하기 어렵다.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악몽을 스스로 에게 부여하는 극단적인 방법이다. 격분한 레콘은 반드시 돌아와 물 값을 지불하게 할 테니까. 물이 없는 곳에서. 그렇다면, 상식적인 방 식으로 레콘을 막을 수는 없다. 왜 그걸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을까? 레콘은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마찬가 지로 증오도 상당한 관심의 소산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리고 레콘은 레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있는 경우가 많다. 히스롤은 지금껏 '내가 잘 아는 레콘이 한 명 있는데 말이야.' 라는 식으로 말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리를 사랑하지도 않지만 증오하지도 않는 무뚝뚝한 이웃들. 알고 보니 증오하지 않는다는 것에 고마워해 야 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히스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레콘 암살자였다. 히스롤은 자신이 다른 것에 대해 위화감을 느꼈어야 했다고 생각했 다. 지독하게 시끄러운 자가 암살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놀랄 필 요가 없었다. 그보다는 개인주의자가 암살자가 된다는 것에 놀라야 했다. 가미 히스롤의 마음 속에 해묵은 추억이 떠올랐다. 열일곱 살의 히 스롤이 보낸 끈찔긴 애원과 협박에 가까운 부탁 때문에 마침내 반쯤 은 자의로, 반쯤은 거절하기도 지쳐서 옷을 벗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가 옷을 벗는 것을 보며 젊은 가미는 만 족감이나 기쁨보다는 공포를 느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애원을 해서 기어코 이 상황을 이끌어낸 자신이 좀 돈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심 지어 자신의 간원을 수용한 그녀가 밉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같은 상황에 처한 많은 청년들처럼 가미 히스롤을 마지막에 움직이 게 한 것은 성취감이나 승리감이 아닌,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히스롤은 그 날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히스롤 부인이 되었고 이름도 모를 병에게 그녀를 뺏길 때까지 두 사람이 보 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스롤은 머릿속 이 부글부글 끓어서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열일곱 살의 그 날 밤에 공포도 분명히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공포는 지금 히스 롤이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무슨 짓을 해버린 걸까. 정말 내가 그토록 원하는 것이었을까? 고 히스롤 부인의 옷 아래에는 그가 바라 던 것 이상의 것이 있었다. 하지만 레콘에게서 개인주의자의 옷을 벗 겨내었을 때 그 아래에서 나타나는 것도 그러할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가미 히스롤은 부하의 말을 놓쳤다. "뭐라고?" "당연하잖습니까. 저런 먼지 구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분명히 레 콘이겠지요." 히스롤 수교위는 멍한 눈으로 부하의 시선을 쫓았다. 고원 끝부분, 두 개의 산이 만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다가 결국 통행로를 남겨두기로 결정한 듯한 부분에서 부하가 말한 먼지 구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히스롤은 먼지의 아래쪽을 보았다. 그곳에서는 무엇인가가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는데, 물론 거리가 멀어서 작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롤이 알고 있는 무엇과도 다른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 다. 히스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른 부하들도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처지는 다가오는 것과 그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진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히스롤에 게 말을 걸었던 상전사가 미심쩍은 어투로 말했다. "레콘이 아닌가?" 레콘 같은 크기와 레콘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레콘을 보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실수가 가장 좋은 작업 동료일 수도 있다고 굳게 믿는 도깨비 대장장이가 마음껏 실수를 저질러가며 만든 무엇인 가를 보는 것 같았다. 히스롤 수교위는 비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 다. 그와 그의 부하들이 보고 있는 것은…… 몸에 아교를 바르고 철 물점에 들어가 분탕질을 치고 뛰쳐나온 레콘 같았다. 조금 후 히스롤은 자신이 비유가 아닌 사실 묘사를 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레콘의 속도로 다가왔기에 적절한 마음의 여유를 가질 틈도 없이 다 가온 그것은 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들 곁을 지나쳤다. 철커덕, 쿵 쾅, 탕팅통. 그리고 와르르. 당황한 히스롤과 부하들은 뒤를 돌아보 았다. 그 시끄러운 금속성의 물체는 부하들이 조금 전에 쳐놓은 천막 아래에 들어가 장엄하게 헐떡이고 있었다. 히스롤은 잠시 다가가는 것을 보류한 채 그것을 관찰했다. 레콘이 맞았다. 드러난 손발이나 얼굴은 분명히 레콘의 것이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을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은 참으 로 희한한 의복이었다. 히스롤은 그것이 갑옷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레콘은 갑옷을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그 의복 은 갑옷으로 기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갑옷이라면 그 생김새가 어떠 하건 방어적인 특성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은 중요한 부위들을 가리 고 있지 않았다. 다만 엉뚱한 곳에 꽤 무거운 물건들이 매달려 있었 다. 히스롤이 받은 인상은 크고 작은 금속 상자, 철판, 금속 원통 등 을 닥치는 대로 골라 쇠사슬로 연결하여 몸통과 팔다리, 그리고 머리 주위에 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레콘의 모습에는 거대한 금 속 공예품 진열장 같은 인상도 얼마간 섞여 있었다. 관찰을 끝낸 히 스롤은 머뭇거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장교니까. 천막의 방수성이 의심된다는 투로 위쪽을 바라보던 레콘이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대화하기 적당한 눈높이였다. 히스롤은 정중하게 말했다. "귀하가 누군지 짐작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요. 누구십니까?" "나? 그을린발이다." "음. 죄송합니다만 성함은 듣지 못했습니다. 누구의 부탁으로 오셨 습니까?" "베로시 토프탈." "저희들이 기다리던 분이 맞군요. 가미 히스롤 수교위입니다." 가미 히스롤은 정중하게 경례했다. 레콘은 대강 손을 흔드는 것으로 경례를 받아주었다. "달려오셨습니까?" "아아. 하늘이 트림을 해대서." "그런데 몸에 두르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않 겠습니까?" "이거? 내 무기." 히스롤은 당황하여 레콘의 양손을 살폈다. 그곳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레콘은 그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정확히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히스롤은 그것이 방어구의 일종이라고 해도 언어도단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물며 무기라니. 혹시 저런 차림으로 누군가에게 몸 통으로 부딪히면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일까? 레콘의 충돌력이라면 무기로 손색이 없겠지만 그을린발이 걸치고 있는 물건은 그런 희한한 용도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용도라면 차라리 갑옷 같은 생김새 에 뾰족한 뿔 같은 것을 달아두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그을 린발이 두르고 있는 것에는 뿔이나 칼날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이 곳저곳에 많은 구멍이 있을 뿐이었다. "그게 무기입니까?" "맞아. 좀 독특하지?" "좀이 아니라 상당히 독특하군요. 어떻게 쓰는 겁니까? 혹시 제가 보고 있는 것은 부려놓은 활이나 사려놓은 채찍처럼, 어, 그러니까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바꿔놓은 모습인 겁니까?" "아니. 이대로 쓰는 거야." "어떻게 쓰는 건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을린발은 부리를 살짝 부딪쳤다. "그럴 수는 없군." "아, 비밀입니까?" "비밀은 아냐. 다만 여기서 내가 무기를 쓰면 너희들이 다 죽는다는 것이 문제지." 히스롤은 발작적으로 엉덩이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곳에는 수 통이 매달려 있었다. 멍청함으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린 히스롤은 그 손길을 멈추었다. "저희들을……" "죽이고 싶은 생각 없어. 그래서 못 보여준다는 거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그 이해할 수 없는 무기를 사용하시면 저희들이 무조건 죽는다는 겁니까? 귀하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을린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 무기의 사용 시범을 보 는 영광은 포기해야겠군요." "잘 생각했어. 그럼 내가 질문 좀 할까?"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답하겠습니다." 시모그라쥬군을 대표하여 영접을 나온 사람답게 가미 히스롤 수교위 는 품위와 명예를 지키며 그을린발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할 것을 다 짐했다. 하지만 그을린발의 질문은 그의 다짐을 무색케 했다. "코끼리 좋아하냐?" 히스롤은 필사적으로 코끼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은유나 비유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코끼리라는 별명을 가진 중요인 사나 단체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히스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코끼리 말입니까? 코가 길고 덩치 크고 귀가 큰 동물이오?" "맞아." "글쎄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러면 코끼리가 얼마나 먹는지 잘 모르겠군." "모릅니다. 아마 아주 많이 먹겠지요." "응. 많이 먹어. 하루에 인간 두 명의 몸무게 쯤 먹지." "대단하군요. 그런데 제가 코끼리의 식사량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 유가 무엇인지요." "그래야 베로시에게 가서 준비하라고 말할 수 있잖아." "예?" "나 코끼리를 데려왔거든." 꼭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히스롤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코끼리라는 어색한 단어를 들을 때부터 그는 해학 정신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껴왔다. 그는 농담하듯 말했다. "깃털 사이에 넣어오셨습니까?" "그럴 수 있으면 나도 좋겠지만, 아냐. 이쪽으로 오고 있어. 하늘이 방귀를 빵빵 뀌어서 내가 먼저 달려왔거든. 그래도 알아서 잘 따라올 거야. 우두머리가 아주 머리가 좋은데……" "잠깐만요." 히스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농담하시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러니까 코끼리를 데려오던 중이셨는데 천둥 소리가 나서 먼저 달려오신 거란 말씀입니까?" 그을린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기막힌 표정을 짓고 있는 히스롤에게 말했다. "그러니 아무나 먼저 보내서 먹이를 준비해두라고 전하란 거야. 알 겠어?" 히스롤의 얼굴에 약간의 자신감이 돌아왔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들에겐 기병들도 있고 우마차 를 끄는 소도 있기 때문에 마초는 많습니다." "코끼리는 말이나 소보다 훨씬 많이 먹는다고 말했잖아." "저희들은 군대입니다. 그을린발. 군마와 소가 한두 마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코끼리 한 마리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안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을린발을 보며 히스롤은 말끝을 흐렸 다. 그는 묻는 눈으로 그을린발을 보았고 그을린발은 고개를 끄덕였 다. 히스롤은 입술을 살짝 적시고는 긴장한 채 말했다. "몇 마리입니까?" 베로시 토프탈은 편두통에 시달리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말했 다. "오백 마리나 되는 코끼리를 데려와야 했던 이유를 좀 말해주십시 오. 그을린발." 코끼리들이 건초와 채소, 과일 등을 으깨어 먹는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그을린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오백 마리가 아냐. 503 마리야." "예. 503마리. 젠장. 그 때문에 저희들의 우마들이 굶어죽을 지경입 니다." 짜증 때문에 약간 과장하고 있었지만 베로시의 말은 사실과 많이 떨 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코끼리의 식사량은 말의 열 배를 넘는 것 이었고 따라서 오백여 마리의 코끼리는 오천여 마리의 군마와 같은 양을 먹어치운다. 히스롤이 긴급히 보낸 전령 때문에 군마들의 건초 담당자는 그을린발이 도착하기 전에 오천 마리 분의 건초와 채소들을 증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베로시에게 같은 일을 장기간 하기는 어렵다고 명백하게 알려왔다. 베로시가 요청한 것은 그을린발 한 명 이었고, 따라서 그가 데려온 코끼리들은 끔찍한 불청객들인 셈이다. 원래 군마들의 방목장이었지만 코끼리들을 위해 긴급히 비워진 광활 한 초지에서 코끼리들은 이곳저곳에 쌓여있는 건초와 채소 등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언덕 위에 베로시와 함께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그을린발은 코끼리들이 긴 여정에 피로해하지 않는지 살피느라 베로 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베로시는 '물!'이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을린발! 도대체 왜 저 코끼리들을 데려온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을린발은 조금 더 지체한 후에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허 리 쯤에 있는 베로시의 얼굴을 보며 그을린발은 진지하게 말했다.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 "예?" "보라고. 멋지지 않나?" 베로시는 그 광경이 인상적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비록 그 코끼리들 이 야기한 고민은 심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백여 마리의 코끼 리가 한 자리에 운집하여 거니는 모습은 일부러 찾아볼 만한 장관이 었다. 하지만 베로시는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 했다. "멋진 걸 보여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습니다. 그을린발. 제가 요청한 것은 한 명의 수완 좋은 암살자입니다." 그을린발은 부리를 닫고는 무거운 눈으로 베로시를 내려다보았다. 베로시는 히스롤을 고민에 빠지게 했던 그을린발의 착용물을 훑어보 며 말했다. "이게 당신의 무기라고요?" 그을린발은 대답하지 않았다. 베로시는 그 쓰임새를 추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을린발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구멍 투성이의 철물들과 쇠사슬만으로 황급히 상 하의와 두건 등을 만들어야 했던 자가 자포자기 삼아 만들어낸 옷처 럼 보일 뿐이었다. 물론 그 구성품 중 묵직한 철물 하나를 인간의 머 리 위에 떨어뜨린다면 살해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을 무기라고 하기는 어렵다. "도대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군요. 이런 희한한 무기라면 소문이 났을 텐데 왜 제가 알지 못했지요? 당신이 제국군에 복무할 때 이것 을 썼을 것 아닙니까." 베로시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을린발이 체념하듯 말했다. "안 썼어." "예?" "제국군에 있을 땐 이것 안 썼다고. 그냥 맨몸으로 복무했어." 군인이 비무장이라면 농담의 소재일 뿐이지만 레콘이라면 비무장의 복무라도 큰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로시는 왜 군인이면서 무기를 쓰지 않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안 썼습니까?" "다 죽으니까." "예?" "적군이고 아군이고 가릴 것 없이 다 죽으니까 안 썼어. 아무리 성 능이 좋아도 그런 무기를 군대에서 쓸 수는 없잖아." 베로시는 놀란 표정으로 그 괴상한 옷을 바라보았다. "이게 그렇게 치명적입니까?" "치명적이야. 그런데 베로시. 다시 한 번 내 코끼리들을 좀 보지 않 겠어?" "예. 멋지군요. 근사합니다. 장관이군요." "날 좀 내버려둘 수 없겠어?" "예?" 그을린발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베로시와 눈높이를 맞춘 그을린발 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베로시. 이미 부탁 한 번 들어줬어. 그런데 이젠 엘시를 죽이라고? 젠장. 게라임 지울비만 해도 영향력이 대단한 사람이야. 하지만 그래 도 엘시만큼은 아니겠지. 그를 죽이고서도 내가 내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저 코끼리들과 계속 있을 수 있겠냐고." "그러기에 혼자 왔으면 될 것 아닙니까. 복면을 쓰고 들어가서 누군 지도 모르게……"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저쪽에 베로시 토프탈이 보낸 레콘이 누군지 짐작하지도 못할 멍청이들만 있겠어! 그리고 복면이라고? 젠장. 누가 복면을 써? 내가 너 같은 인간으로 보이냐? 보복당할까봐 상대방에게 누가 죽이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죽이는 너희 비겁한 놈들처럼 보이 냐!" 베로시는 재빨리 사과하는 표정을 지었다. 철의 대화를 선언하고는 상대방의 선공을 수년 동안 말없이 기다리기도 하는 종족이 레콘이 다. 레콘인 그을린발은 엘시 에더리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엘시에게 찾아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죽이겠다는 선언까지 한 다음 공격하라 는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복면에 관한 것은 실언이었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예. 당신이 에 더리 대장군을 죽인다면 틀림없이 당신에게 앙심을 품을 사람들도 있 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걱정마십시오. 저희들이 보호해드리겠습니다. 에더리 대장군만 사라지면 흑사자군은 와해될 겁니다." "흑사자군은 뭐야?" "에더리 대장군의 병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기엔 틀림없이 내 후원자들이나 그 가족들, 친구들이 잔뜩 있겠 지?" "당신의 후원금에 피해가 간다면 이쪽에서 전액 보상하겠습니다. 그 조건은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래도 불안하다면 시모그 라쥬공의 이름으로 당신의 사업을 전액 후원하겠습니다." "전액? 그리고는 필요할 때마다 나를 불러내겠지? 그러면 나는 정말 꼼짝없이 부를 때마다 와야겠군. 안 그래?" "다시는 당신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그을린발은 부리를 비틀어 마찰음을 냈다. "그건 전에도 들은 말이야. 게라임 지울비를 탈출시키고나서. 다시 는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말을 번복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믿어주십시오. 절대로 세 번째 요청은 없을 겁니다." 베로시는 '내 부탁을 따르지 않으면'에 해당하는 말은 덧붙이지 않 았다. 할말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 말을 이미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협박은 그을린발로 하여금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 은유 로 표현되었지만 그을린발은 강력한 정신억압자를 보내어 코끼리들을 다 흩어버리겠다는 베로시의 협박을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을린 발의 면전에 대고 이미 했던 협박을 반복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 다. 베로시는 그저 겸손한 표정으로 그을린발을 바라보았다. 위아랫 부리를 단단히 붙힌 채 베로시를 바라보던 그을린발이 무릎을 폈다. 똑바로 선 그는 코끼리들을 바라보았다. 낙조가 떨어지고 있었다. 부족한 빛 때문에 오백여 마리의 코끼리들 을 서로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것은 거대한 덩어리, 검붉은 숲처럼 보였다. 코끼리들은 괴성을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이리저리 움직이고 먹이를 집어먹는 것만으로 많은 소음을 만들어냈 다. 베로시는 문득 언덕 아래에 검붉은 호수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 했다. 바람 때문에 파문이 끝없이 생기는 호수. 하지만 그런 비유를 그을린발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을린발이 탄식처럼 말했다. "엘시는 어디에 있나?" 베로시는 안도감을, 그리고 자신이 말할 대답에 대한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가깝다고? 얼마나 가까운데?" "당신이 하루만 늦었다면 싸우고 있는 우리를 보았을지도 모릅니 다." 자신의 천막 안에서,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잠들기 전에 마지막 여흥을 즐기기로 했다. 그 여흥은 조금 독특했다. 탁자 위에 놓여있 는 지도를 그냥 바라보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여흥에 임하는 시 허릭의 태도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지도에는 조그마한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배부른 표정을 지은 채 돌무더기를 보던 시허릭은 후세의 전사학자들이 지난 열흘 동안 흑사 자군이 한 일에 어떤 멋진 별칭을 붙여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다층포위작전에 의 한 종심선택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하지만 약간이라도 시적 감수 성이 있는 전사학자라면 그런 멋없는 이름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작은 돌멩이로 만들어둔 그 돌무더기는 열 흘 전에는 그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비나간 남쪽에 쌓여있었 다. 열흘 전 엘시는 돌무더기를 사방팔방으로 흩어놓겠다고 선언했 다. 지형과 시모그라쥬군의 배치를 놓고 볼 때 그것은 없는 약점을 일부러 만든 다음 노출시키는 행동이었다. 시허릭은 물론이거니와 흑 사자군의 모든 참모들은 그것이 유인책이라면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흑사자군은 무려 닷새 동안 고속이동을 감행했다. 뿔뿔히 흩어진 채 움직였기 때문에 부대간의 연계작전은커녕 적과 조우하여 구조요청을 보내려 해도 어디에 전령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는 위험 천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위험했기 때문에 시모그라쥬군을 묶어놓았다. 누구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 위험을 일부러 노출시키는 엘시의 병력 이동은 베로시 토프탈에게 그것이 유인책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베로 시는 닷새에 걸쳐 고속이동을 감행하는 흑사자군을 내버려두었다. 그 런 고속이동 끝에 지친 상태로 결집하면 그 때 싸움을 걸어본다는 것 이 베로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엿새째가 되었을 때 흑사자군의 백 만 대군은 하나로 합쳐지는 대신 하이스에서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 서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모든 방향을 봉쇄하는 형태로 출현했다. 그 리고 하이스의 동쪽 방향은 시구리아트 산맥이 길게 가로막고 있었 다. 자신이 흑사자군으로 이루어진 반경 백 킬로미터 쯤 되는 원호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베로시는 황급히 하이스를 포기하고 남 쪽으로 물러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상대가 분산되어 있고 게다가 지친 상태라는 것은 이 경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포위 상 태에서는 전쟁의 시간과 장소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엘시에게 있 기 때문이다. 베로시가 어느 곳으로 공격을 감행하건 그곳에서 싸움 을 고착시킨 채 다른 곳의 병력을 자유로이 운용할 수 있는 흑사자군 의 배치 현황은, 바둑에 비유하자면 무수한 팻감을 가진 상대가 패싸 움을 거는 것과 비슷했다. 패를 이기든 지든 그것을 시도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팻감을 마음 내키는 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패싸움을 받아주는 대신 그냥 패를 무시하겠다는 베로시의 결 정은 훌륭한 것이었지만 그것 또한 엘시의 고려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엘시는 베로시가 내버려둔 하이스를 본체만체했다. 패를 해소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엘시는 시모그라쥬군의 남쪽에 장문을 씌우듯 민들레 여단을 출현시켰다. 베로시는 기겁하여 남쪽으로의 움 직임을 가속했다. 강과 호수 등의 지형을 이용하며 이루어진 고속이 동 덕분에 베로시는 민들레 여단에게 차단당하는 꼴은 면하게 되었 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모그라쥬군 또한 지치게 되었다. 그 동안 엘시는 흩어졌던 흑사자군을 여유있게 합류시킨 다음 지친 시모그라 쥬군의 북부에 출현시켰다. 키탈저 북부 30킬로미터 쯤 되는 곳에서 시모그라쥬군은 흑사자군에게 따라잡히게 되었다. 계속 도망친다면 엘시는 그냥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베로시를 한계선 남쪽까지 밀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베로시는 남쪽으로 계속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 고는 응전을 준비했다. 양쪽 병력의 이동 상황을 지도상에 표시해놓으면 굉장히 현란한 선 들이 나타나게 되지만 단순하게 본다면 그것은 그저 흑사자군이 시모 그라쥬군에 접근한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시모그라쥬군에게 서 도망과 응전의 결정권을 박탈한 일이었으며 또한 대비하고 있는 병력에게 지친 병력을 부딪히는 대신 양쪽 모두 똑같이 지친 상황으 로 만든 일이었다. 병사들의 피로도가 똑같다면 숫자의 차이는 더욱 현격해진다. 96만 대 11만. 흑사자군을 지휘하는 자가 상당히 멍청한 장수라도 지기 어려운 숫자 차이다. 물론 엘시는 멍청한 장수가 아니 다. 시허릭은 전쟁의 진선미가 힘, 승리, 빠른 종전이라고 한 엘시의 말 을 떠올렸다. 힘이 더 센 쪽이 이긴다. 그것은 진리다. 소수가 다수 를 이기는 전투가 그토록 칭송되는 까닭은 일반적인 진리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사학적으로 본다면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양쪽의 절대적인 병력차에도 소수가 다수를 이겼다면 그것은 소수 쪽에서 국지적으로 양자의 처지가 바뀌는 상황을 만든 다음 그 시간적, 공간적으로 특수한 지점에 전력을 투입했기 때문이 다. 그 지점에서는 소수가 다수가 되고 다수는 소수가 된 것이며, 따 라서 여전히 다수가 소수를 이긴 것이 된다. 결국 힘이 더 센 쪽이 이긴다. 그것은 진리다. 시허릭은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그가 느끼는 것은 군인이기에 느 낄 수 있는 기쁨이었다. 베로시 토프탈은 엘시에게 세 번 속았다. 첫 째, 엘시가 보인 약점은 유인책이 아니라 진짜 약점이었다. 둘째, 엘 시는 하이스를 노리는 척했지만 그가 진짜 원한 것은 베로시로 하여 금 군사를 마구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속임수. 베 로시는 남쪽으로 끝없이 밀려버릴 거라는 공포감 때문에 응전을 준비 했지만 그녀가 계속 도망쳤다면 엘시는 그녀를 '밀어버릴' 수 없다. 추격하려 해도 군량이 없기 때문이다. 적장을 한두 번 속여넘기는 것 은 때때로 가능한 일이지만 세 개나 되는 속임수 - 그것도 실패할 경 우 결정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 - 를 모두 성공시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성과였다. 낭자한 유혈과 시체의 벌판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저 병력이 이리저리 움직인 것뿐이지만 혀가 매끄러운 노랫꾼과 시 인들은 이 위업에 정말 멋진 별명을 붙여야 한다. 시허릭은 꼭 그래 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사적인 소양이 약간만 있다면 지난 열흘의 일 에서 지금 장제황제가 느끼는 감동을…… 뜻밖의 소란이 시허릭의 감동을 방해했다. 시허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장제황제가 자신의 즐거움에 빠지는 일 을 누가 방해하는 거지? 순간 시허릭은 잠깐 동안 약한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그를 보았다면 그가 무슨 즐거운 공상에 빠져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을 바라보 던 시허릭은 잠시 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풀어둔 제국검을 집어들 었다. 병영 안에 소란이 생겼다면 무조건 위험 신호로 간주해야 한 다. 시허릭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천막 밖에 있던 경비병들도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시허릭은 그 들을 보자마자 그들에겐 별다른 정보를 얻어내기 어렵겠다고 판단하 고는 주위를 살폈다. 이곳저곳에서 시허릭과 비슷한 상태의 병사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소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그 때 시허릭은 어떤 여자 수전사가 황급히 달리는 모 습을 보았다. 그녀는 대장군이 있는 곳으로 가는 듯했다. 시허릭은 그녀의 뒤를 따라 달리기로 했다. 몇몇 장군들이 시간 순서를 둔 채 시허릭의 주위에 합류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앞쪽에 달려가는 수전사를 보고는 시허릭에게 묻는 표정 을 지었다. 시허릭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전사는 대 장군의 경비병들과 군호를 교환하고는 황급히 천막 안으로 뛰어들었 다. 그 직후에 천막에 들어선 시허릭과 장수들은 수전사의 외침을 들 을 수 있었다. "보고합니다! 신원불명의 레콘 한 명과 오백여 마리의 코끼리가 아 군 진지에 침입했습니다!" 천막 가운데 서서 병사의 보고를 듣던 엘시는 그저 턱을 쓸어만졌을 뿐 이 당혹스러운 보고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던 몸종 이레와 뒤늦게 들어선 장수들은 모두 황당해할 수밖 에 없었다. 엘시가 차분하게 말했다. "코끼리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알았다. 왜 내게 온 거지?" 엘시의 질문은 왜 지휘체계를 거슬러 수전사가 자신에게 직접 온 것 이냐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흥분한 수전사는 엘시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조금 후에야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때리고 싶다 는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레콘은 진지 남쪽 구역에서 침입을 멈춘 채 아군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장군님을 모셔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 서 현장을 지휘하고 계시던 세폴 상장군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 니다. 그 레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길……" "엉겅퀴 연대 2대대 1중대장이었던 예비역 수교위 그을린발." 수전사는 입을 쩍 벌렸다. 말을 할 수 있으면 대장군에게 니름을 할 줄 아느냐고 묻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엘시는 수전사 뒤편에 서있 는 장수들을 보며 말했다. "그가 누군지 알 것 같군. 가봐야겠다." "위험합니다. 대장군님!" 고함을 지른 것은 장수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막 바깥에서 들려왔 다. 밖으로 나간 엘시와 이레, 그리고 장수들은 손님 자격으로 흑사 자군 내에 머물고 있던 게라임 지울비가 병사들과 다투는 모습을 보 게 되었다. 게라임은 앞으로 나서려 하고 있었고 대장군의 천막을 지 키는 경비병들은 창대로 그를 밀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엘시가 명령 한 후에야 자유로워진 게라임은 황급히 말했다. "그 레콘은 그을린발일 겁니다! 그는 비나간에서 저를 탈출시켰습니 다. 그리고 그것은 베로시 토프탈의 명령을 받고 한 일입니다!" 장수들은 일제히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엘시는 게라임에게 대답하 는 대신 몸을 돌려 이레에게 짧게 속삭였다. 이레는 의아해하다가 엘 시의 재촉 어린 눈빛을 받고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엘시는 게라임에 게 말했다. "당주. 그가 베로시 토프탈의 밀명을 받고 왔다고 생각하나?" "분명히 그럴 겁니다! 대장군님을 살해하려고 왔을 겁니다. 절대로 가시면 안됩니다!"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군. 알겠다. 물러가 쉬도록." 게라임은 고개를 꾸벅이고는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레가 돌 아온 것을 보고는 걸음을 멈칫했다. 이레는 혼자 오지 않았다. 그는 대장군의 말을 끌고 있었다. 게라임과 장수들은 의혹에 찬 표정으로 엘시를 보았다. 그리고 엘시가 말에 오르자 그들의 의혹은 더욱 짙어 졌다. 시허릭이 말했다. "대장군님?" "모두들 물러가 쉬도록."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을린발에게." 엘시는 자신의 말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하지 않았 다. 그는 곧장 말을 출발시켰다. 충격에 빠져 굳어있던 사람들은 이 레가 기괴한 비명 같은 것을 지르며 달려간 후에야 마비에서 풀려났 다. 그들은 이레와 같은 행동, 즉 부정의 고함을 지르며 엘시의 뒤를 따라 달리는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말을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엘시의 질주가 외롭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휙 나타난 시커먼 레콘이 엘시의 곁에 붙어섰다. 먼 곳에서 그 광경을 본 이레는 약간 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엘시의 금군으로 자처하는 레콘 론솔피였 다. 론솔피는 거대한 도끼창을 어깨에 맨 채 말에 탄 엘시와 똑같은 속도로 달리며 말했다. "엘시, 시끄럽군. 뭐야?"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을린발이 왔습니다." "그을린발? 아아, 그래. 그 친구. 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 야?" 엘시가 대답하기 전에 또다른 레콘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나타났다. 철저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레콘 주테카였다. 그는 론솔피의 반대 편에서 달리며 외쳤다. "엘시! 밤에 할 수 있는 가장 정의로운 일이 뭔지 아나? 타인들의 귀한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일이라고." 엘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고 론솔피는 그 말에 대해 심각하게 생 각해 보았다. 론솔피가 밤에 일어날 수 있는 더 정의로운 일을 떠올 렸을 때 그들 앞에 몰려선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진지 남쪽 구 역에 도달해 있었다. 말을 멈춰세운 엘시는 병사들의 머리 너머의 광경을 보았다. 병사들 은 무기와 함께 많은 횃불들을 들고 있었고 그 때문에 주위가 밝았 다. 엘시는 그 빛 속에서 레콘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엘시는 그가 그 을린발인가 생각했지만 거대한 벼슬을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쵸지가 병사들의 앞쪽에 서서 병사들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엘시는 그 쪽을 보았다. 수백 마리의 코끼리들이 눈을 번쩍거리며 서있었다. 엘시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 는 것은 코끼리들의 거대한 체구나 그 말도 안되는 숫자가 아니라 그 눈들이었다. 코끼리의 눈은 작고 깊다. 하지만 그 밤 속에 서있는 코 끼리들의 눈은 별들이 잠시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지상을 관찰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 아닌가 싶은 모습으로 반짝거렸다. 엘시는 그 눈길 에서 힘겹게 눈을 돌려 그을린발을 찾았다. 그가 그을린발을 발견했을 때 그을린발 또한 엘시를 발견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지만, 각도는 조금 어긋나 있었다. 그래서 엘시는 병사들의 뒤편을 통해 그을린발의 정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을린발 또한 코끼리들의 앞쪽을 걸어 엘시에게 다가왔다. 그는 코끼 리의 이마를 쓰다듬거나 그 코를 툭툭 치며 산보하듯 태연하게 걸어 왔다. 마침내 두 사람이 병사들을 사이에 두고 마주서게 되었다. 엘 시가 말에 타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을린발의 큰 키 때문에 두 사람 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느새 움 직인 쵸지가 엘시의 앞쪽을 가로막는 식으로 서있었다. 쵸지는 그의 삼각철봉으로 왼쪽 손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그을린발을 바라보았다. 그을린발이 말했다. "왕벼슬. 엘시가 왔다." "알고 있어." "좀 비켜달라고 한 말이야." 쵸지는 고개만 옆으로 살짝 기울일 뿐 움직이진 않았다. 자신의 어 깨 너머로 대화하면 된다는 동작이었다. 그을린발은 부리를 탁 부딪 치고는 엘시를 보았다. 엘시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래간만입니다. 그을린발." "오래간만이야." "몸에 착용하고 계신 그것, 이름이 '무차별학살'이었던가요?" "응." 병사들과 레콘들이 술렁거렸다. 엘시는 물끄러미 그을린발을 바라보 다가 말했다. "왜 오셨지요?" 그을린발은 허리에 두 손을 짚었다. 심상찮은 이름에 긴장한 쵸지와 주테카, 그리고 론솔피는 그을린발에게 뛰어들 준비를 했다. 그을린 발이 부리를 열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8. 읽는 것과 얽는 것 (3) 2004/08/24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28-3 관련자료:없음 [4926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8-24 05:30 조회:28 피를 마시는 새 28. 읽는 것과 얽는 것 - 3 "네가 불렀잖아." 쵸지는 호흡을 가라앉혔다. 실제로 엘시는 지멘을 추적하던 당시 여 섯 명의 레콘을 소환했고 그 중에는 그을린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 라서 그을린발이 엘시의 소환에 늦게나마 응했다는 호의적인 해석은 가능하다. 하지만 퍽이나 수상한 이름의 물건을 몸에 걸치고 500마리 의 사나운 맹수와 함께 밤중에 찾아온 자에게 얼마만큼의 호의를 기 대할 수 있을까? 엘시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듯 표정의 변화 없이 말 했다. "늦었군요." "어쨌든 왔지. 의리는?" "일월에 시들지 않는다. 벗들의 약속은?" "이행될 때까지가 기한이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늦어서 미안해." 쵸지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자신의 뒤쪽에서 주 테카가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엘시와 그을린발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 으리라는 예상은 지울 수 없었다. 도대체 이 무슨 선문답이람. 쵸지 는 약간의 창피함까지 느꼈다. 그을린발이 다시 말했다. "지멘을 잡는 일은 어떻게 되었어?" "체포하지는 못했지만 그 일은 끝났습니다." "그래. 사는 건 좀 어때?" "버틸 만합니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사람도 많고, 시끄럽고. 적도 있더군." "제 적을 보셨습니까?" "응. 베로시 토프탈. 너를 죽이라더군." 깃털을 부풀릴 수 있는 자들은 깃털을 부풀렸고, 그러지 못하는 자 들은 어깨를 긴장시켰다. 그을린발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쵸지 는 삼각철봉을 꽉 움켜쥐며 그을린발의 몸에 걸려 있는 괴상한 물건 들이 도대체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고심해보았다. 상대방의 무기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니 공격 방식을 선택하기로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 늦게 도달한 이레는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근처의 병사에게 소화차가 오고 있는지를 귓속말 로 물었다. 그 속삭임은 엘시에게 들렸다. 엘시가 목소리를 조금 높 여 말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온 겁니까?" 만인의 주의를 끌어모은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대장군이 조금 어떻 게 되지 않았는가 의심하는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고 그 중에는 안 타깝게도 대장군의 몸종 이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을린발 은 빙긋 웃었다. "내가 베로시의 부탁을 안 들어줄 거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 "저를 해치러 온 거라면 코끼리는 데려오지 않았겠지요. 이곳은 비 나간 후작궁과는 다릅니다. 많은 병사들이 있고 그 중에는 레콘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저를 공격하면 코끼 리들이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코끼리 를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고 짐작했습니다." 이레는 자신의 모자람을 반성하며 재빨리 칭송의 눈빛을 보냈다. 하 지만 엘시가 보지 않았기에 그 눈빛은 그 자신만 만족시키는 것이 되 었다. 숨이 턱에 닿아 도달한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다른 장수들, 그리고 게라임 지울비는 상황을 알지 못해서 병사들에게 사정을 묻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잘 들리도록 엘시는 계속 큰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서 당신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그 리고 당신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당신은 제 소환 때문에 온 것도 아닐 겁니다. 그 경우에도 코끼리들을 데려올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 서 왜 이곳에 온 거냐고 물은 겁니다." "코끼리 좀 맡아줄 수 있나 해서." "그 코끼리들을 맡아달라고요?" "그래." "왜지요?" "네 말처럼 싸우러 가면서 코끼리들을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 제국군의 장병들은 침묵하려 했다. 하지만 거칠어진 숨소리와 입술 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혼잣말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그 웅성거림은 피부를 간질이고 털끝을 살짝살짝 잡아당기는 것이었 다. 이런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던 시허릭은 엘시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질문을 대신하라고 니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인간 도 니름을 터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침묵왕의 비원이 달성된 것은 아 니지만 엘시는 정확히 시허릭이 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시모그라쥬군과 싸우러 가겠다는 겁니까?" 그을린발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아." 장병들은 즉각 탄성과 환호를 지를 태세를 갖추었다. 엘시가 그럴 빌미를 하나만 보여주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시는 기 뻐하는 대신 조용히 질문했다. "왜? 당신이 그들을 적대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을린발은 마치 대답을 고민하듯 수염볏을 만지작거리고는 말했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들이 코끼리들을 볼모로 삼아 나를 좌지우지하 려 하고 있기 때문이야. 인질극을 해소하는 방법은 대충 세 가지지. 인질범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인질을 포기하거나 인질범을 제거하는 것이지. 그런데 첫 번째 것은 사실상 해결책이 아니야. 요구하면 들 어준다는 것을 보여줘서 더 많은 인질범을 만들어내는 일이지. 그러 니 남은 건 둘 뿐인데, 내 코끼리들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두 번째도 해결책은 아니지. 그러니 남은 길은 하나뿐이지." 시허릭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양파 냄새를 풍겼다. 흥분 때문 에 체온이 상승한 탓이다. 그러나 비슷하게 흥분하고 있던 주위의 사 람들은 시허릭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들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엘 시를 바라보았다. 엘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환영합니다. 그을린발." 연기되었던 탄성과 환호가 그제서야 터져나왔다. 병사들은 소리 높 여 함성을 질렀다. 쵸지는 삼각철봉을 허리에 꽂아넣고는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웃으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을린발은 자신의 주먹 으로 그 주먹을 툭 쳤다. 그 모습을 보며 더 큰 함성이 터져나왔다. 뒤이어 주테카와 론솔피도 그을린발에게 다가가 환영의 몸짓을 해보 였다.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기쁨을 표시하는 사람들 가운 데서 상장군 시허릭 마지오는 두 손을 깍지껴 배에 붙였다.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길 수밖에 없다.' 조금 전 천막에서 지도를 바라보며 시허릭은 군인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다른 자들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해줄 노래꾼과 시 인을 기대했다. 그을린발은 노래꾼도, 시인도 아니었지만 그 레콘이 야말로 시허릭의 승리감에 대한 최종 확인이었다. 군사적 지식이나 재능 같은 것은 필요없다. 96만 대 11만이라는 양자의 병력차도 볼 필요가 없다. 결전을 앞둔 밤, 최고 지휘관을 살해하기 위해 찾아온 암살자가 거꾸로 아군에 합류하는 것 이상으로 상징적인 사건은 있을 수 없다. 누구라도 흑사자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시 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마음 속에 메아리가 울리도록 외쳤다. '흑사자군은 반드시 이긴다!' 그의 예상은 틀렸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중 레콘과 일대일로 담판을 지을 수 있는 비 레콘들의 목록을 만든다면 팔리탐 지소어의 이름 또한 목록의 한 부 분을 손색 없이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팔리탐 또한 자신이 레콘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몰 려선 레콘들 가운데서 팡탄 하장군이 이름 모를 레콘과 싸우는 모습 을 보며 팔리탐은 용기가 조금 바래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본다면 그들은 간단히 몸 좀 풀고 있 는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팔리탐은 지금껏 그런 모습을 두어 번 보 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리탐은 대련하면서 진짜 살상병기를 사용 하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름 모를 레콘이 들고 있는 단검의 경 우 조심한다면 치명적인 공격은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팡탄 이 들고 있는 유성추는 상대의 몸 앞에서 멈추거나 할 수 있는 병기 가 아니었다. 팔리탐이 바라보는 가운데 팡탄은 그 흉한 물건을 거리 낌 없이 상대방에게 휘두르고 있었다. 대련이 아니라 죽이려고 작정 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과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다 른 레콘들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팔리탐은 고개를 내 젓고는 힌치오를 찾았다. 곧 이쑤시개의 커다란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힌치오는 땅에 이쑤시개를 꽂아둔 채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팡탄의 대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리탐은 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상대방의 머리 위나 배후를 포착하기 위해 두 레콘은 달리고 도약했 다. 그 때마다 땅이 쾅쾅 울렸고 공기마저 떨렸다. 땅바닥은 정신이 좀 이상해진 소가 갈아놓은 밭처럼 움푹움푹 파헤쳐져 있었고 두 레 콘의 급정지나 급선회가 일어날 때마다 풀잎 조각과 흙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커다란 원을 그린 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레콘들 또한 점잖은 관객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련자들의 절묘한 기술이 아슬아슬 하게 무위로 돌아갈 때마다 그들이 내지르는 성난 함성과 안타까워하 는 신음을 듣던 팔리탐은 레콘들이 둘 중 한 명이 죽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굉음 때문에 약간의 두통마저 느끼며 팔리탐은 힌치오 곁에 도달했 다. 힌치오는 대련자들의 재주에 정신이 팔려 팔리탐의 접근을 알아 차리지도 못했다. 팔리탐은 그의 팔을 세게 쳐야 했다. 겨우 고개를 돌린 힌치오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팔리탐을 보았다. 팔리탐은 고함을 지르려다가 그냥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힌치오는 아쉬워하며 일어났다. 조금 후 두 사람은 백 미터 쯤 떨어진 나무 아래에 도달했다. 힌치 오는 대련장 쪽을 흘깃흘깃 바라보다가 말했다. "왜?" "용건은 두 가지요. 첫째. 레콘들은 원래 대련 같은 것 안하오. 상 대를 죽일까봐 씨름도 안 하는 것이 레콘이잖소. 그런데 요즘 이곳에 서 왜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제국군 낙오병이었던 자들 말이야. 우울해하고 있어. 그래서 인간 들 하는 것 흉내 좀 내본 거야." "우울함을 달래는 방식치곤 너무 위험하오. 힌치오." "인간이라면 위험하겠지만 레콘은 괜찮아. 무기 다루는 기술이 다르 니까." "사고는 숙련자, 초보자 가리면서 오는 것이 아니오. 당신이 직접 금지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군. 사람 하나 죽어나가기 전에 당장 그만두게 하시오." "저렇게 재미있어 하는데 어떻게?" "그러면 진짜 병기를 쓰는 것이라도 그만두게 해야 할 거 아니오!" 그 때까지도 대련장 쪽을 흘깃거리던 힌치오는 뜨악한 얼굴로 팔리 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납병한 것도 아닌데 왜 자기 무기를 안 쓴다는 거야? 말도 안돼." "좋소. 무기를 놓을 수 없다면 대련도 금지요." "꼭 그래야 해?" "힌치오. 제발." 힌치오는 불만스럽게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말했다. "알았어. 저것만 끝나고." 팔리탐은 가면 뒤에서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용건인데,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요? 레콘이 포주 노릇이라니." "포주가 뭔데?" "다시 말하겠소. 왜 그 애를 공작님의 침소에 집어넣은 거요?" 힌치오는 웃는 눈으로 팔리탐을 내려보다가 땅바닥에 앉았다. 팔리 탐과 눈높이를 맞춘 그는 수염볏을 주물럭거렸다. "스카리의 후계자가 필요하잖아? 빌파 가문을 이어갈 사람 말이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힌치오의 부리를 통해 추론을 확인받는 것은 팔리탐을 오싹하게 했다. 이질적인 것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 속 에서 팔리탐은 말했다. "힌치오. 그런 부적절한 관계에서 탄생한 후계자는 가문을 잇기 어 렵소." "나도 알아. 그 헤어릿 에렉스가 그렇지? 그 여자는 빌파가 아니라 에렉스지." 헤어릿의 이름에 팔리탐은 조금 주춤한 후에 말했다. "맞소. 헤어릿처럼. 알면서 왜 그런 거요?" 힌치오는 수염볏을 주물럭거리던 손을 들어 부리를 톡톡 두드렸다. "좀 생각해 봤어. 인간 병사들에게 물어본 것도 있고 말이야. 너한 테도 같은 질문을 하지. 만약 스카리가 없이 헤어릿뿐인 상태에서 락 토가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뭐요?" "이해했잖아. 대답해봐. 그런 경우라면 어떻게 되지?" 팔리탐은 인간 병사에게도 물어보았다는 힌치오의 말을 떠올렸다. "……적통 후계자가 없다면 서자가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를 들었겠군." "그렇게 들었어. 맞지? 그러면 그거, 서자라도 상관없는 거 아냐." 팔리탐은 입을 닫았다. 대련하는 레콘들이 내는 소음 속에서 팔리탐 은 힌치오를 생경한 인물처럼 바라보았다. 이윽고 팔리탐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샤가 임신하면 공작을 죽일 거요?" "아니." "아니라고?" "그래. 네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스카리가 변할 수도 있다고." "그러면 왜?" "혹시 안 변할 경우를 대비한 거야. 스카리는 안되겠다고 결정한 다 음에도 후계자가 없으면, 그리고 후계자가 있어도 아직 덜 자랐다면 후계자가 준비될 때까지 계속 스카리를 놔둬야 하잖아. 그건 시간 낭 비지. 그러니 일단 스카리의 후계자부터 만들어서 그 후계자를 잘 키 우면서 스카리가 변할지 안 변할지 보자고. 그리고 안 변하겠다 싶으 면 바로……" 힌치오는 부리를 두드리던 손을 내려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팔리탐은 뒤로 한 발 물러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오?" 팔리탐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도 사람의 미래 변화상을 예견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힌치오는 조금 다르게 이해했다. "내가 왜? 그건 네가 알려줘야지." "내가?" "그래. 네가. 스카리가 몹쓸 놈이라고 가르쳐준 것은 너잖아. 거, 참. 네가 힘들어해서 손을 쓴 건데. 스카리가 마음에 안들지만 빌파 가문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그를 모시는 거잖아. 나는 빌파 가문에 관심 없어. 누가 빌파 가문의 주인이든 내가 알게 뭐야? 그건 네가 결정해야지. 빌파 가문을 위해 스카리가 있는 것이 좋은지 아니 면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좋은지 결정하라고. 필요할 때 바로 바꿀 수 있는 여벌을 준비해 놓고." 팔리탐은 질렸다. 사람을 육종개량용 가축이나 기계의 부속품 정도 로 취급하는 힌치오의 어투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도 물론 컸다. 하지 만 팔리탐을 정말 무섭게 만드는 것은 힌치오의 말이 인간 책략가의 말처럼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세련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말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면, 힌치오가 그 말을 종이에 써서 누구의 생각인지 말하지 않고 건넸다면 팔리탐은 그것을 쓴 사람이 어떤 인간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런 말이 레콘의 부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팔리탐은 힘겹게 말했다. "리샤는 임신하지 않을 거요." "응? 그걸 어떻게 알아?" "혹 임신하면 유산시키라고 명령했으니까. 그리고 페리닌 자작에게 도 그렇게 시행하라고 말해두었소." 힌치오는 실망하여 외쳤다. "팔리탐!" "힌치오.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마시오." "왜? 후계자가 없으면 계속 스카리를 모셔야하잖아. 준비를 해두 면……" "그건 스카리를 죽일 이유를 찾아다니는 짓이오. 그냥 스카리를 죽 이는 것이나 다름없지." 힌치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팔리탐은 그가 자신의 말에 대해 생각하 도록 입을 다문 채 기다렸다. 대련장 쪽에서는 팡탄이 승기를 잡은 것 같았다. 큰 함성과 함께 팡탄의 외침이 들려왔다. "뭄토! 어떠냐. 더 해보겠어?" 대답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레콘들이 실망하는 듯 한 소리를 낸 것으로 보아 팡탄의 상대방은 더 싸우길 포기한 모양이 다. 팔리탐은 누군가가 죽지 않고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힌치 오가 말했다. "팔리탐. 그거 말 되는 거 같네. 이해했어." "이해해주니 고맙소. 그리고 기껏 애를 썼는데 안된다고 말해서 나 도 유감이오." "나야 뭐. 네가 걱정이다. 못난 주인 모시느라 마음 고생하는 건 너 잖아." "그건 내가 선택한 것이니 상관없소. 힘든 숙원 쯤이라고 생각해주 면 좋겠소." "힘든 숙원? 하하. 그렇게 생각하면 되나? 알았어." 힌치오는 일어났다. 몸을 툭툭 턴 힌치오는 나무에 기대두었던 이쑤 시개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럼 더 할말 없지?" "저것은 반드시 금지시키시오." "아, 아. 그래. 알았어. 어, 끝났네? 팡탄이 이긴 모양이군. 가봐야 겠다. 팡탄이 다른 놈 나오라고 떠드는 거 말려야지." 그리고 힌치오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팔리탐은 힌치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안도감을 표현하는 것이긴 하지만 아쉬움도 약간 섞여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팔리 탐은 힌치오가 한 일을 모르는 척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 기 어려웠다. 그런 자신에 대해 씁쓸해 하던 팔리탐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대련 금지를 선언하는 힌치오 때문에 투덜거리고 항의하는 레콘들 사이에서 한 레콘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 미터 쯤 떨어져 있었 지만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를 거리는 아니었다. 팔리탐은 그가 조금 전 팡탄과 싸우던 레콘임을 깨달았다. 그 레콘은 그냥 무심히 보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자신의 시선을 깨달아달라는 듯이 바라보 고 있었다. 팔리탐은 그가 왜 그렇게 바라보는지 의아해했다. 대련 금지가 팔리탐에게서 비롯된 것을 짐작한 것일까? 그 때 그 레콘이 팔리탐을 향해 걸어왔다. 모르는 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팔리 탐은 그를 똑바로 마주보며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레콘의 표정은 화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팔리탐은 힌치오가 그 레콘의 접근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그의 바람과 달리 힌치오는 불평하는 레콘들을 달래느라 팔리탐을 향해 걸어가는 레콘을 보지는 못했다. 성큼성큼 걸어온 레콘은 팔리탐이 지나치게 고개를 들어올리지 않아 도 될 만한 거리에서 멈춰섰다. 위협적이지 않은 거리였다. 팔리탐은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레콘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팔리탐 지소어지?" "그런데?" 그 때 힌치오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힌치오는 앞쪽에 있는 레콘을 뛰어넘었다. 팔리탐은 그 과격한 동작에 놀랐다. 힌치오 는 이쑤시개를 두 손을 들고 맹렬한 속도로 다가왔다. 힌치오의 심상 치 않은 모습에 팔리탐은 두려움을 느꼈다. 팔리탐은 나무 뒤로 숨을 수 있는지를 가늠하며 앞쪽의 레콘을 바라보았다. 레콘은 똑바로 선 채 그를 지그시 내려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팔리탐은 시간을 끌기 위해 말했다. "내가 대답했으니 이제 당신도 자신의 소개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알려주기 어려운 이름이 아니라면 당신의 이름을 듣고 싶군." "나는 뭄토다." 그 순간 힌치오가 뭄토의 뒤에 도달했다. 언젠가 코끼리의 긴 코에 매료된 레콘이 있었다. 어른이 되기 훨씬 전, 그 레콘은 코끼리를 가축화한다는 것을 평생 의 숙원으로 결정했다. 물론 코끼리의 힘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하지 만 사람의 손에 버금가는 활용력을 보이는 코끼리의 코는 레콘에게 가축화의 참된 계시로 느껴졌다. 코끼리의 코에 매료된 그 레콘의 이 름은 히베리였다. 코끼리의 코에 대한 많은 숙고가 있었기 때문에 히베리는 다른 생물 에게서도 그 생물만의 특징을 찾아보려 했다. 생물학자가 될만한 수 준의 고찰은 아니었다. 새에겐 날개가 있기 때문에 날 수 있고 기린 은 목이 길기 때문에 높은 곳의 잎사귀를 먹을 수 있고 원숭이의 꼬 리는 다섯 번째의 수족이나 다름없다는 정도의, 절대로 논문을 쓸 수 는 없는 것들이 히베리가 한 고찰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서 히베리의 비범함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는 그런 관찰을 자신에게 도 적용시켰고 그 결과로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이다. 레콘은 누구나 최후의 대장간에 가서 무기를 받는다. 하지만 레콘의 무기는 그것이 어떤 것이건 간에 다른 선민종족들이 쓰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레콘이 쓰는 칼, 도끼, 망치, 창 등은 인간이나 나가가 쓰는 칼, 도끼, 망치, 창 등의 확장판이다. 물론 그것들은 대개 레콘 의 거대한 힘으로만 다룰 수 있는 무게와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강 력한 힘이라는 레콘만의 특징이 이용된 것이었다. 하지만 개별 생물 들이 가진 특별한 장점을 이용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히베리는 레 콘이 가진 특징이 완전히 이용되지 않는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다른 선민종족이 가지고 있지 않은 레콘만의 특징은 단지 거대한 힘 뿐만은 아니다. 그래서 히베리는 레콘의 또다른 특징을 이용할 수 있 는 무기를 가지기로 결정했다. 그의 제안은 최후의 대장간에 있는 대장장이들을 꽤 당황시켰다. 설 계를 할 능력이 없었던 히베리는 엉성한 설계도 하나 준비하지 못했 다. 그렇다면 설명이라도 잘 해야 할 테지만 히베리가 대장장이들에 게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모호한 개념뿐이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 면 히베리의 요청은 '가위를 만들라'가 아니라 '네 개의 손가락과 그 것을 마주보는 엄지 손가락을 가진 생물이 무엇인가를 자를 수 있는 도구를 만들라'는 식이었다. 대장장이들은 기막혀 했고 그 중 어떤 이들은 히베리에게 그냥 다른 레콘들과 비슷한 무기를 가지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히베리는 자신의 요청 을 철회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후의 대장간의 대장장이들 또한 그런 후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장장이들은 히베리의 요청대로 '유사시 몸을 세 배로 부풀릴 수 있는 생물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 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그것이 히베리가 이용하길 원했던 특징, 코 끼리의 코처럼 다른 선민종족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레콘만의 특징이 었다. 많은 고심 끝에 대장장이들이 내놓은 결론은 그들 자신을 놀라게 했 을 뿐만 아니라 요청자였던 히베리조차 당황하게 했다. 그것은 병기 의 역사에 있어본 적이 없는 무기였다. 대장장이들이 만들어낸 물건 을 받아든 히베리는 그것이 과연 자신이 요청했던 물건이 맞는지 확 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히베리는 그 무기를 시험해볼 수 없었다. 대 장장이들은 주위에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시험하라고 신신당부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베리는 그 물건과 대장장이들이 써준 사용 지시서를 들고 머뭇거리며 최후의 대장간을 떠나야 했다. 남쪽으로 한참 내려와 인적 없는 숲에 도달한 후에야 히베리는 그 무기를 다시 꺼냈다. 지시서를 참고하여 그것을 착용한 히베리는 몸 을 부풀려 보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난 히베리는 자신이 쓸 수도 없는 무기를 받게 되었음을 알고는 크게 실 망했다. 그 무기는 통제할 수 없는 무기였다. 홧김에 무기에게 '무차 별학살'이라는 이름을 붙인 히베리는 자신의 고집과 대장장이들의 황 당한 기술에 욕설을 퍼붓고는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그 무기 를 납병해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귀환은 몇 걸음만에 끝났다. 숲속에 우뚝 서서 히베리는 자신의 무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그 의 무기였다. 그리고 레콘에게 무기는 반려다. 게다가 납병은 은원을 잊고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머뭇거리던 히베리는 결국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보관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관련자 모두에게 욕설을 퍼부은 히베리는 무기 를 배낭 속에 잘 챙겨넣고는 남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것은 히베리 였던 그가 딱 한 번 무차별학살을 사용한 날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의 오래된 지인들은 모두가 그를 그을린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그을린발이 된 레콘은 다시 무차별학살을 사용했다. 그 이름 그대로의 일을 하기 위해. 이전에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무기, 연습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무기였지만 그을린발은 아무 어려움 없이 그것을 사용했다. 어 차피 통제가 안되는 무기니 연습은 불필요했다. 무차별학살의 사용은 그토록 간단했다. 정확하게 착용한 다음, 적들의 한가운데로 걸어들 어가, 몸을 힘차게 부풀린다. 그러면 수백 개의 날카로운 철침이 내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전방 위로 발사된다. 방어는 필요없다. 360×360의 모든 방향으로 철침이 날아간다. 그을 린발은 아래쪽으로도 철침이 날아가는 것은 좀 낭비가 아닌가 생각했 다. 땅 아래에 누가 있다고? 하지만 대장장이들은 무기 사용자의 특 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을린발은 자신이 높이 뛰어올랐을 경우 자 신의 아래쪽에도 적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장 철침은 2 만 개. 물론 전량을 소진한 후에는 철침을 회수하여 재장전하는 따분 한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려면 아주 많은 사격이 있어야 할 것 이다. 착용자의 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움직임을 취했는가에 따 라 발사되는 숫자가 조금씩 차이나기 때문에 정량화는 불가능하지만 대장장이들은 대략 백 번 정도는 재장전의 고민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무차별학살의 백회 사격은 눈에 들어오는 범위 내 의 모든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게다가 그을린발에겐 레콘 의 몸도 있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 하나에 인간의 목이 관통당한다. 발길질에 뼈가 몇 묶음씩 부서져나간다. 천둥 같은 계명성은 적들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고 귀를 틀어막게 만든다. 낮은 곳에 있는 인간들을 상대로 부리 는 자주 사용되지 않았지만 손발이 바쁠 경우 그을린발은 주저없이 부리로 다섯 번째 인간의 투구와 두개골을 깨트려놓았다. 그리고 충 분히 많은 숫자가 모이면, 혹은 가소롭게도 소화차를 밀고 오는 자들 이 보이면 그을린발은 즉시 몸을 폭발시켰다. 죽음이라는 꽃이 날리 는 꽃씨처럼 철침이 폭발음을 내며 날아간다. 어둠 속에서 날렵한 철 침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을린발이 몸을 폭발시킨 순간 주위의 모든 병사들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반경 수십 미터 내의 모든 병사들이 일시에 허물어졌다. 그을린발은 병사들의 시체, 혹은 시체가 되기 직전의 병사들을 짓밟 으며 달렸다. 그리고 지금껏 해왔던 일을 지루해하는 기색도 없이 반 복했다. 때려부수고, 찢어버리고, 걷어차고, 짓밟고, 폭발한다. 그을린발은 치명적인 자연재해이며 또한 초자연적인 무엇이기도 했다. 죽음을 맥 동하며 이러저리 거칠게 뛰어다니는 파멸이었다. 레콘의 모습으로 변 한 구전(球電)이었다. 사방으로 벼락을 뿜어내듯 죽음을 뿌리며 달리 는 그것은 비유의 대상조차 찾기 어려운 미증유의 존재였다. 추악한 살육이 멈췄다. 그을린발은 죽이지 말아야 할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을린발은 부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 피가 흠뻑 묻어나왔다. 그을린발은 그것을 옆으로 뿌리고는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궁금하겠지. 베로시." 베로시 토프탈은 턱이 부서져라 부딪치며 그을린발을 올려다보았다. 그을린발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횃불과 화톳불, 기름통 등이 파괴된 덕분에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고 그 때문에 하늘은 검붉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따져보자구. 나는 네게 투자금을 받았어. 하지만 그건 코끼리 가축 화 기술을 넘겨주는 대가였어. 그것이 우리의 계약이었지. 따라서 너 는 다른 것을 요구할 수 없어." 베로시는 가까스로 말했다. "코끼리를 가, 가축으로 만드는 것…… 성공할 리가 어, 없어. 그런 몽상가의 백일몽에 내가 왜……" 그을린발은 손바닥을 들어 베로시의 말을 막았다. "나도 짐작하는 일을 말할 필요는 없어. 베로시. 그래. 알아. 네가 내 사업의 성공을 믿지 않았다는 것. 다른 욕심이 있어서 투자했을 뿐이라는 것. 하지만 우리의 계약은 그렇지 않았어. 네 속마음이나 내 속마음이 어쨌건간에 우리 계약은 기술개발 대 투자금이었어. 내 쪽에서 아직 계약이행을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 하지만, 그건 도의적 유감일 뿐이야.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 쪽에서는 계약파기를 하고 투자금 반환을 요구하면 되는 거지. 어찌 되었건 나는 계약외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어. 하지만 나는 도의적 책임감 때문에 들어줄 의무가 없는 네 요구를 들어주었지. 그리고 네 가 그런 과외업무에 대해 형식적으로나마 감사를 표할 거라고 기대했 지.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두 번째 요구였어. 세 번째 요구를 암시하 는 것으로 유명한 그 두 번째 요구라는 놈 말이야." 그을린발의 차분한 말투는 베로시를 조금 안정시켰다. 그녀는 땅을 짚고 일어나 앙칼지게 외쳤다. "이것이 마지막 부, 부탁이라고 했어요!" "그런 말은 아무 의미 없어. 쥐가 아무리 자신이 쥐가 아니라고 주 장해도 고양이에겐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야. 두 번째 요구 자체가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내포하고 있으니까. 아아. 왜 세 번째뿐만이 아 니라 첫 번째도 내포하냐고? 하나밖에 없을 땐 처음이라고 하지 않 아. 그냥 하나지. 심지어 하나라는 말조차 생략할 때가 많아. 베로시 토프탈이 하나라고 말할 필요는 없잖아. 두 번째가 있을 때만 첫 번 째가 만들어지는 거야. 두 번째는 그렇게 위험한 거지.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넌 그걸 했어. 그러니 네 보증 은 무의미해." 그을린발은 그 말을 자신에게도 들려주었다. 그는 위험한 두 번째를 겪고 있었다. 무차별학살은 두 번째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집병 직후의 사용은 첫 번째가 되었고, 세 번째는 반드시 오게 될 것 이다. 그을린발은 그 부정할 수 없는 예감에 씁쓸함을 느끼며 말했 다. "너는 세 번째 요구를 막을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막을 수 있지." "마, 막을 수 있다고?" "그래." "어떻게?" "요구할 자가 없어지면 요구도 없는 거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 속에서 베로시는 그을린발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탑을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높다. 그 높이 때문에 베로시는 비현실적인 기분을 느꼈다. 저것은 너무 높이, 너무 멀리 있어. 내게 올 수 없어. 그러니 저것이 나를 죽일 수는 없어. 그을린발은 그녀에게 오지 않았다. 그을린발은 그 높은 곳에서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라." "?" "가라." "저를 살려주는 겁니까?" "너를 죽이겠다고 한 적 없다." "예? 하지만 당신은 요구할 자를 없애겠다고……" "맞아. 그렇게 할 거다. 그리고 그걸 알려줄 생각이다." "도대체 누구에게 뭘 알려준다는 겁니까?" "돌아가서 대호왕 사모 페이와 시모그라쥬공, 그리고 토프탈의 이름 을 쓰는 모든 녀석들과 그들의 친구들에게 전해라. 내가 갈 거라고." 죽음보다 더한 공포에 베로시는 무릎을 떨며 비틀거렸다. 그녀는 후 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싶은 것을 참으며 외쳤다. "그들을 왜! 이건 당신과 제 문제입니다. 저를 죽이면 끝이잖습니 까!" "엉뚱한 소리를 하는군. 너는 대호왕과 시모그라쥬, 그리고 토프탈 가문의 영광을 위해 행동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두 번째 요구가 있게 한 것들이야. 너에겐 관심 없어. 나는 너희들의 방식을 따르고 싶지도 않고." "우리들의 방식이라니 그게 무슨……" "엘시 에더리가 싫어서 그를 죽이려 한 것은 아닐 텐데." 베로시는 입으로 숨을 쉬었다. 헐떡거리는 그녀를 보며 그을린발은 말했다. "나약한 너희들이 한 사람을 황제로 만들어 제국을 만들고 한 명의 황제를 죽여서 제국을 없애는 방식을 취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그 게 너희들이니까. 하지만 내가 너희들의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다. 가서 전해라. 히베리가 너희들의 제국을 부수러 간다고." 베로시 토프탈은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을린발은 아무 제지 도 가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 러나던 베로시는 갑자기 머리를 감싸쥐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불규 칙적인 발소리를 내며 어둠 속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녀가 사라진 곳에서 비명인지 울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괴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을린발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에겐 할일이 조금 남아있었다. 흑사자군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엘시 에더리의 탁월한 지도 아 래에 흑사자군이 위대한 승리를 거둘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승리 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모든 장수가 전망의 달성을 경험하는 행운을 누렸던 것은 아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확신 또한 빗나갔다. 엘시 에더리는 승리하지 못했다. 96만 대군은 승리하지 못했다. 35개 군단, 200여 개의 독립중대, 유난히 사나운 레콘들로 이루어진 한 개 여단은 승리하지 못했다. 제국 부활의 신념은 승리하지 못했다. 시모 그라쥬군을 파괴한 것은 그 중 어떤 것도 아니었다. 시모그라쥬군의 11만 대군은 방해받길 싫어하는 한 명의 레콘에게 학살당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8. 읽는 것과 얽는 것 (4) 2004/08/25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28-4 관련자료:없음 [4927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8-25 06:11 조회:126 피를 마시는 새 28. 읽는 것과 얽는 것 - 4 가을이라고 불러도 좋을 날씨였지만 햇빛이 묘하게 따갑다. 날아드 는 파리를 향해 손을 흔들던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그것이 나비고 바 닥에 있는 것이 꽃이라고 상상해보기로 했다. 조금 후 니어엘은 자신 이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그녀의 판단이 옳다고 맞장구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웨에-엑!" 심현한 토악질 소리다. '우' 부분에서는 터져나오려는 거대한 힘을 억누르지만 동시에 반발하여 꺼트리지도 않는 절제력이 돋보인다. '웨에' 부분의 급격한 편성은 다스려놓은 힘을 강력하게 분출하면서 암시했던 주제를 단번에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엑' 부분의 대담한 단절이야말로 깊은 여운을……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우울함을 달래 보려 했던 니어엘은 머리를 가로젓고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맥키 네미 부위의 부축을 받은 채 가리아 릿폴 부위가 헐떡이고 있 었다. 니어엘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대답할 형편이 아니었던 가리아를 대신하여 맥키가 더듬더듬 설명했 다. 가리아는 복잡한 해부학적 기술이 요구되는 사체를 앞에 두고 맥 키를 불렀으며 두 사람의 협조 작업은 시체를 찢어놓는 참담한 실패 로 돌아갔던 모양이다. 니어엘은 묵묵히 허리를 숙여 찢어진 시체의 흉골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시체 속에서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니어엘은 조금 후 굳 어서 진득진득한 핏덩어리를 끄집어내었다. 그 길죽한 핏덩어리 속에 서 철침의 금속광이 번득였다. 니어엘은 맥키의 옆에 놓여있던 바구 니에 그 철침을 던져넣었다. 챙그랑. "릿폴 부위. 쉬도록." "괘, 괜찮습니다. 잠깐 숨 좀 돌리…… 우욱!" "귀관이 구역질로 중대가를 연주할 실력이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바에야 작업 방해다. 네미 부위. 3소대 1분대장에게 찾아가 지 휘권 인계받으라고 전해라. 바구니는 놔두고 가." 두 부위가 주저하며 물러났다. 니어엘은 바구니 안쪽을 들여다보았 다. 굳은 피 속에 십여 개 쯤 되는 철침들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었다. 니어엘은 그 중 피가 덜 묻어있는 것을 하나 집어들었다. 10그램 쯤 될까? 가볍긴 하지만 이런 물건들이 백 개라면 1킬로그램 이다. 시모그라쥬군의 운 좋은 생존자들은 그을린발이 철침을 수백 개씩 날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을린발은 수 킬로그램의 물체를 날 려보냈다는 뜻이다. 수 킬로그램짜리 화살을 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본 니어엘은 답답한 기분마저 느껴야 했다. 그냥 손으로 던지려 해도 수 킬로그램은 너무 무겁다. 더군다나 무엇인가를 던지는 일은 온몸 의 힘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일이다. 몸 곳곳에서 철침을 날려보낸 그을린발은 결국 힘을 분산시킨 상태에서 그런 일을 했다는 뜻이 된 다. 게다가 그는 2만 개의 철침이 내장된 옷을 입고 있다. 200킬로그 램을 가볍게 상회하는 옷에 대해 생각한 니어엘은 기막힌 한숨밖에 내쉴 것이 없었다. "우리 중대가 애기살을 일제 사격하면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요?" 니어엘은 고개를 들었다. 다미갈 카루스 부위가 손에 몇 개의 철침 을 든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카루스는 바구니에 철침들을 집어넣고 는 허리를 폈다. 니어엘은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딱 한 번 정도는 흉내를 낼 수도 있겠지." "예. 한 번. 하지만 더 먼 곳에서 시도할 수 있겠지요." 니어엘은 카루스가 왜 자신들에게 그을린발을 상대할 능력이 있는지 궁금해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짐작할 것 같다는 느 낌에 어깨를 움츠렸다. 니어엘은 그을린발이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그을린발은 몇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 철침을 주 워모으고 있었다. 그는 혼자서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엘시는 도울 병 력을 제공하기로 했다. 니어엘은 반사적으로 자원했다. 짤막한 투사 병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애기살과 철침은 비슷하다는 것이 니어엘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중대원들은 짤막한 화살을 육체에서 뽑아 내는 일에 좋은 재주를 가지고 있었고 철침은 훨씬 단단했기에 애기 살보다 다루기 쉬웠다. 그녀의 설명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니어엘은 자신이 그 일에 자원한 이유 를 알게 되었다. 상대방의 무기를 관찰하는 것은 그와의 싸움을 앞둔 자의 태도다. 카루스가 보여준 태도는 그녀 자신의 것과 같다. '나만 그 표정을 읽은 것은 아니란 말이군.' 코끼리를 맡기자마자 간다는 말도 없이 달려갔던 그을린발이 시모그 라쥬군을 더 이상 군대라고 부를 수 없는 형편으로 만들어놓고 돌아 왔을 때 니어엘은 공간적, 정신적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관찰해볼 수 있었다. 반응은 대충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었고 그 반응들을 대표하는 것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히도 큰 하장군이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뜻밖에 얻은 원군의 활약에 까무러칠 정도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히도큰 하장군은 그 일을 한 것이 자신이나 민들레 여단이 아니라 그을린발이라는 사실에 불만 족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엘시는 그 중 어떤 것에도 포함되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대 장군은 어떤 초상화가도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위엄 있는 태도로 서있 었지만 니어엘은 그가 당장 부서져내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니어엘 은 엘시의 상실감을 직감했다. 엘시는 불의의 습격으로 자신이 힘겹 게 준비해왔던 것을 도둑맞았다. '죄를 도둑맞았지.' 상황의 겉면을 보는 이들은 영광을 도둑맞았다고 말하겠지만 니어엘 은 그렇게 오판할 수 없었다. 엘시가 도둑맞은 것은 죄다. 죄는 중요하다. 죄가 있어야만 용서를 구할 수 있으니까. '빌어먹을! 어머니. 당신 딸이 어떻게 컸는지 아세요? 조그마한 니 어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꼭 당신의 어린 딸이 자신이 불 필요한 존재, 세상에 있어선 안될 존재라고 생각하며 소리 없이 울게 만들어야 했나요? 그 생일이 기억나네요. 오늘만큼은 그 지긋지긋한 비아냥과 독설을 듣지 말기를 바라고 또 바랐어요. 책잡힐 일을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당신은 저를 생일 선물을 바라고 얄팍한 속임수를 쓰는 유치하고 탐욕스러운 꼬마로 만들었죠. 제 울음이 정 말 떼쓰는 것처럼 보였어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지 는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제 어머니였잖아요.' "수교위님?" 니어엘은 카루스를 보았다. 지난 여름 동안 새카맣게 탄 그의 얼굴 에는 근심이 떠올라 있었다. 니어엘은 차분하게 말했다. "카루스 부위. 도대체 언제나 되어야 나를 중대장님이라고 부를래?" 다미갈 카루스는 움찔했다. 조금 후 그는 평소처럼 엄격한 얼굴로 돌아갔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자신의 중대를 사랑하는 어떤 고집 센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중 대에 어느 날 새 지휘관이 왔지요. 새 지휘관은 어린 여자였습니다. 어리석고 고집 센 병사는 어린 나이에 상관 잘 만나서 고속진급한 행 운아가 중대 말아먹으려고 왔다고 생각하고는 분통을 터뜨렸습니 다…… 수교위님. 지금 헛구역질을 하시는 겁니까?" "미안해. 참아볼게. 계속해." 카루스는 자신을 3인칭으로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정나미가 떨어 진다는 얼굴로 말했다. "관두지요. 예. 저는 중대장님이라고 부르기 싫어서 수교위님이라고 불렀고, 그게 입버릇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거야 수교위님도 마찬 가지 아닙니까?" "내가 뭐?" "제 이름은 다미갈입니다. 하지만 수교위님은 저를 카루스라고만 부 르십니다." "아미라고 부르기 싫어서." "예?" "다미갈이라는 이름 처음 들었을 때 그러면 애칭은 다미나 아미인 가? 하고 생각했지.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죽는 줄 알았어. 아, 아 냐. 나쁜 이름이라는 거 아냐. 하지만 귀관의 점잖은 얼굴 보면서 그 애칭 생각하니 미치겠더라고. 그 이후로도 몇 번 다미갈이라고 부르 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참겠더군. 말하면서 웃어버릴 것 같아서. 그 러면 얼마나 실례겠어. 그래서 포기하고 카루스라고 부른 거야." 카루스는 잠깐 동안 득실을 따져보았다. "카루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중대장님." "내 곤경을 살펴줘서 고마워. 답례로 나도 수교위 허락이다. 나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버릇이 되었으니까 귀관이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깜짝깜짝 놀랄 거야." 카루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니어엘을 바라보 다가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 것이 바보 같을 거라는 생각에 황급히 경 례를 했다. 그리고 카루스는 자신이 무의미하게 경례를 했다는 사실 에 더욱 놀라서는 그만 허둥지둥하게 되었다. 니어엘은 미소지은 채 경례하고는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서 카루스는 그러기 위해 경례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물러날 수 있게 되었다. 멀어져가는 카루스를 보며 미소 짓던 니어엘은 곧 미소를 거두었다. 그녀는 바구니를 집어들고는 멀리 보이는 그을린발을 향해 걸었다. 그을린발은 다가와서 철침을 건네주는 병사들에게 미소나 감사의 몸 짓을 하고 있었다. 그가 양산해낸 시체 속에 서있었지만 그을린발은 단신으로 11만 시모그라쥬군을 격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시체 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걸으며 니어엘은 그을린발이 훔쳐간 엘시의 죄 에 대해 생각했다. 시오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친 표정의 의무병에게 사양하는 손짓 을 했다. 그의 상처는 대단한 것이 아니고 그나마도 이미 치료를 받 았다. 그는 그저 이곳을 떠날 수 없기에 앉아있는 것 뿐이지만 그 때 문에 의무병들은 자주 혼란을 일으켰다. 시오크의 손짓을 본 의무병은 별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무기력한 태도로 다른 부상병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 전우애에 입각한 열의를 기대하는 것은 조금 무리일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스러워 하 고 있는 것은 모두 시모그라쥬군이었으니까. 의술로 사람을 돕겠다 는, 언젠가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을 직업적 사명의식도 기대 하기 힘들다. 부상병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으니까. 저편으로 넘어가려는 자신을 이곳에 붙들어두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상병들을 보며 시오크는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오크는 떠날 수 없었다. 시모그라쥬군이 너무도 빠르게 산 산조각났기 때문에 지금 그의 신원을 확인해줄 사람은 없었다. 시오 크는 시오크 지울비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떠났던 병 사가 그 전달의 의무를 잊어버렸을 가능성에 대해 우울하게 생각해보 았다. 시오크가 불렀을 때 그 병사는 꽤 바빠보였고 시오크 지울비라 는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다는 투로 행동했다. 수중에 돈이라도 몇 푼 있었다면 건네주었을 테지만 시오크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시오크는 당신 상관에게 그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당신은 대단한 곤 경에 빠진다는 식의 진부한 협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병사는 떠나기 전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시오크는 그 병사가 자신의 말을 포로들이 흔히 하는 '내가 누군지 알아?'류의 헛소리로 취급해버렸을 가능성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초조한 심정으로 이해심 많아 보 이는 병사가 주위를 지나가지 않나 살폈다. 하지만 제국군의 군기는 시오크가 예상하던 것보다는 투철했다. 언 덕 위쪽에 두 명의 사내가 나타났을 때 시오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장교로 보이는 제국군이었고 다 른 한 사람은 게라임 지울비였다. 시오크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는 투로 아버지를 바라보 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게라임은 곧 아들의 얼굴을 포착했다. 그 는 옆에 있는 장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말했다. 그러자 장교는 포로들의 감시를 맡고 있는 다른 장교에게 다가갔다. 게라임은 언덕 받이를 따라 내려와서는 시오크의 곁에 섰다. "다리를 다쳤냐?" "대단찮은 상처입니다. 걷는데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어디 보자." 게라임은 조심스럽게 시오크의 다리를 들어올렸다. 아버지에게 다친 다리를 맡긴 채 시오크는 게라임의 옆얼굴을 보았다. 약간 피로해보 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그가 기억하는 것처럼 딱딱했다. 게 라임은 시오크의 다리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어쩌다가 다쳤냐?" "어젯밤 혼란이 일어났을 때 탈출하다가 다쳤습니다." "병사와 싸웠냐?" "아니오. 병사가 던진 칼에 맞았습니다." 시오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포기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 병사는 도망치기 위해 무기를 집어던지던 참이었습니다." "일어나봐." 관절이나 근육이 상한 것은 아니기에 시오크는 어렵잖게 일어났다. 게라임은 시오크의 선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게라임과 함께 왔던 장교가 다가왔다. "당주님." "예." "예." 게라임과 시오크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을 보던 젊은 장교 는 빙긋 웃고는 말했다. "게라임. 아드님을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시오크. 다리를 다친 것 같은데, 부축해드릴까요?" "아닙니다. 걸을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언덕을 올랐다. 시오크는 언덕 위에서 뒤편을 잠시 돌아 보았다. 서너 개의 언덕으로 둘러싸인 넓직한 땅 전체에 투항병들과 포로, 부상병들이 있었다. 그 숫자가 적어도 만 단위는 넘어보였다. 시오크는 시모그라쥬군이 입은 타격은 그것만 보면 충분히 알 수 있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오판이었다. 어디로 걷는지 모른 채 걷던 시오크는 얼마 후 무더기로 널려있는 시체들을 보게 되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 속에서 시오크는 숨을 한껏 들이쉴 수도 없었다. 고요하지는 않았다. 전투를 노래하는 시인들은 승리의 함성을 묘사 한 다음 곧장 화려한 개선과 연인들의 재회로 넘어가기 일쑤지만 전 투 후에는 지루한 뒤처리 작업이 있게 마련이다. 혹 그 장면을 묘사 하는 시인이 있다 해도 대개는 새매의 처연한 울음 외에 다른 청각 요소는 제거한 채 비장미 넘치는 침묵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오크가 보는 광경은 활기 넘치는 도시의 광장처럼 떠들썩했다. 곳 곳에서 레콘들이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고 있었고 손수건으로 입을 가 린 병사들이 시체를 나르고 있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즐거워 보이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인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그 광경은 대규모 공사장 같은 인상마저 주고 있었다. 문득 시오크는 동 물 사체에 달려들어 분해, 운반하는 개미떼를 떠올리고는 오한을 느 꼈다. 그는 옆을 보았다. 장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시오크의 곁에 있는 것은 게라 임뿐이었다. 전장을 바라보던 게라임은 아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 를 돌렸다. 시오크가 말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텐데요." 게라임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깍지껴 아래로 늘어 뜨린 채 아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들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말씀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봐라. 아들아. 이것이 한 명 의 레콘이 자기 기준에 따라 무엇인가를 평가한 결과다. 너도 이런 평가를 받고 싶으냐? 평가가 그렇게 좋으냐?" 게라임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들의 얼굴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보십시오. 아버지. 이래서는 안된다 는 기분을 느끼십니까? 평가가 시작되기 전에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평가를 거부하시겠습니까?" 시오크는 흠칫했다. 그는 앞으로 한 발 걸어가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평가와 평가가 오가 면서 도덕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때까지 도대체 몇 명이나 죽 어야 한단 말이냐?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도덕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 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모순을 납득해야 한다는 거냐?" "그러면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모순을 최소화할 수는 있지만 모순 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법이 준법자들이 아닌 탈법자들에 의해 지탱 되는 것을 보십시오. 모두가 준법자라면 법은 불필요합니다. 법은 탈 법자들을 도태시키고 추방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상 탈 법자들에게서 존재 이유를 받습니다. 그런 법의 모순을 보십시오. 그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법이 불필요해질 때까지 모순이 있더라도 모 두가 평가하면서 법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시오크는 목을 떨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법이 불필요해지는 것이 먼저겠느냐, 사람이 다 없어지는 것이 먼저겠느냐? 레콘이라는 존재는 그 모순을 대재앙으로 만들 수 있지 않느냐?" 게라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모릅니 다. 우리가 레콘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오크는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했던 상처가 좀 심각한 것이었는지 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리의 힘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아 버지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시오크는 끝내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가 무너진 순간 게라임의 팔이 그를 나꿔채듯 붙잡았다. 그는 아버 지의 어깨에 턱을 묻은 채 무릎을 꿇었다. 게라임은 시오크의 앞쪽에 무릎을 꿇은 채 아들의 어깨를 강하게 끌 어안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들아. 나도 모르겠구나." 힌치오는 뭄토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뭄토가 벼슬을 조금 곤두세우 는 것을 본 팔리탐 지소어는 레콘이라도 아파할 만한 악력인가 보다 고 생각했다. 힌치오가 말했다. "이봐. 뭄토. 뭐 하려고 온 거지?" 뭄토는 힌치오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힌치오는 손을 놓지 않은 채 뭄토를 뒤로 돌려세웠다. "뭐 하려고 온 거냐고 물었잖아." "여기 있는 인간과 할 말이 좀 있어서." "네가 팔리탐과 할 말이 뭔데?" "당신이 알 필요는 없는 말인데."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내가 알 필요가 없는 말인지 알 수 있도록 말해봐." 뭄토는 벌쭉 웃었다. 하지만 힌치오는 웃음기 없는 눈으로 뭄토를 노려보았다. 뭄토는 힌치오를 마주보다가 팔리탐을 당황하게 하는 짓 을 했다. 그는 팔리탐에게 힌치오를 좀 어떻게 해달라는 눈짓을 보냈 다. 팔리탐이 주저하는 것을 본 힌치오는 뭄토의 어깨를 살짝 밀듯 하며 손을 놓았다. "팔리탐. 이 녀석은 제국군 패잔병이 아니야." 주춤거리던 뭄토는 알고 있었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팔리탐은 긴 장하며 말했다. "패잔병이 아니라고?" "그래. 아니야. 패잔병인 척하며 섞여든 거지. 원래는 제국군이 아 니야." "그걸 알고 있었으면 왜 지금까지 내버려둔 거요?" "뭐 하려고 온 건지 궁금해서. 안 궁금해? 사라티본 부대에 들어오 고 싶었으면 그냥 들어오면 그만이었을 텐데 왜 패잔병인 척하면서 섞여들어온 걸까?" 팔리탐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군." "그래서 뭐 하나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너한테 접근하는 걸 보니 좀 위험하다 싶군. 이봐, 뭄토. 도망갈 생각은 하지마. 이제 설명을 들어야겠어. 왜 패잔병인 척하면서 섞여들어온 거지?" 뭄토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남몰래 거기 있는 인간을 만나야 했습니다." "남몰래?" "예. 그래서 패잔병인 척하면서 들어왔습니다." 힌치오는 벼슬을 곤두세웠다. "말이 되는 것 같지만 그건 말이 안돼. 자네는 편지라는 발명품을 모르나? 그게 신기술이라 아직 듣지 못한 건가?" 뭄토는 초조해했다.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힌치오에게 붙잡혔던 어깨를 새삼스럽게 주물렀다. 힌치오는 추궁하는 눈빛을 거 두지 않았다. 하지만 뭄토는 힌치오가 아닌 팔리탐에게 말했다. "팔리탐 지소어. 맞지? 가면만 보면 알 수 있는 거니까." 힌치오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 분개한 것 같았지만 팔리탐에게 발언권을 양보했다. 팔리탐은 대답했다. "맞소. 나를 만나러 온 이유가 뭐요?" "당신은 스카리 빌파를 섬기고 있지.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섬기고 있는 것은 아냐. 당신이 마음으로부터 섬기던 사람은 암살의 주인이 지." 힌치오는 이 대담한 말에 놀랐다는 듯 수염볏을 조금 꿈틀거렸다. 팔리탐은 가면의 무표정함으로 뭄토를 마주보다가 말했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오?" "나는 이것저것 많이 봤어. 스카리를 섬기는 일이 지겨워지지 않았 어?" 힌치오는 뭄토가 몰래 잠입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 다. 뭄토는 팔리탐을 만나기 전에 이곳의 동정을 살피고 싶었던 것이 다. 팔리탐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을 보니 꽤 괜찮은 관찰력을 가지 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힌치오는 팔리탐의 가면을 보았다. 팔 리탐이 말했다. "그래서?" "당신에게 어울리는 진짜 주인을 찾아줄 수 있다는 거지." 힌치오는 뭄토가 잘못된 제안을 꺼냈다고 생각하며 이쑤시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섬기는 주인을 바꿔치기할 수도 있다는 제안은 조 금 전 힌치오 자신도 한 것이며 팔리탐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생전 처음 보는 레콘이 하는 말을 팔리탐이 받아들일 리는 없다. 힌치오는 '이 무도한 녀석의 버릇을 고쳐주시오.'라는 말을 기대하며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팔리탐은 조금 후에 말했다. "힌치오.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오." 힌치오는 이쑤시개를 반쯤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 히 들어올리기 전 힌치오는 팔리탐의 말이 자신이 기대하던 것과 다 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힌치오는 의아해하며 이쑤시개를 다시 내렸 다. "뭐?" "뭄토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소. 비밀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은 듯하 니 당신은 자리를 좀 비켜주면 좋겠소." 어리둥절해하던 힌치오는 순간 팔리탐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팔 리탐은 거절할 때 거절하더라도 뭄토의 제안이 무엇인지는 들어보려 하고 있었다. 거절할 제안을 들어보려는 이유야 뻔하다. 스카리에 대 한 팔리탐의 실망감이 그렇게 큰 것이다. 힌치오는 부리를 살짝 부딪 치고는 말했다. "위험하지 않겠어?" "괜찮을 거요." 힌치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힌치오는 주의를 주듯 뭄토를 한 번 노려보고는 이쑤시개를 어깨에 얹었다. 그는 주저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련을 금지당한 레콘들은 힌치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다시 불 평을 늘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힌치오의 무거운 얼굴을 본 그들은 의 아해하며 입을 닫았다. 힌치오는 그들에게 할일 없으면 가서 무기나 손질하라고 말했다. 미적거리며 일어나는 레콘들 중에 팡탄을 본 힌 치오는 그에게 손짓했다. 팡탄은 유성추의 사슬을 감으며 다가왔다. "왜?" 힌치오는 어깨에 걸치고 있는 이쑤시개를 뒤쪽으로 조금 꿈틀거리며 말했다. "팡탄. 저기 있는 녀석, 제국군 아니지? 같은 제국군이면서 네가 몰 랐을 리가 없지." 팡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제국군 아니야." "그러면 왜 숨어들도록 내버려둔 거지?" "내버려두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한테 수상한 레콘이 숨어들어왔다고 보고했어야지." "내 눈엔 하나도 수상해 보이지 않던데. 음식 나눠먹고 같이 논 것 뿐이야. 그 외에 아무 일도 안했어." 힌치오는 팡탄을 똑바로 보았다. "그게 말이 돼?" 팡탄은 더 할말이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떠나려는 그의 등을 향 해 힌치오가 다시 말했다. "저 녀석 무슨 이야기를 했어?" 팡탄은 몸을 돌린 채 말했다. "스카리를 싫어하는 것 같더군."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네 자유라고 말해줬지. 사 실 그렇잖아." 그리고 팡탄은 떠나는 레콘들을 따라잡으려는 듯 성큼성큼 걸어갔 다. 힌치오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이쑤시개를 내려서 땅에 콱 꽂아넣 었다. 이쑤시개는 뿌리를 내린 나무만큼이나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힌치오는 그 곁에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팡탄은 스카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그 맹세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도 실수나 우연에 의해 맹세를 지키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스카리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갑자기 스카리를 죽이겠다고 마음 을 먹는다 하더라도 용인이 아닌 이상 팡탄은 그것을 알 수 없다. 그 렇다면 팡탄은 스카리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맹세를 어긴 것 은 아니다. 퍽이나 조잡한 맹세 회피법이다. 힌치오는 팡탄의 그런 태도에 대해 팔리탐에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팔리탐과 뭄 토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편한 대화를 위해서인지 뭄토는 땅바닥에 앉아있었다. 힌치오는 뭄 토의 앞쪽에 서있는 팔리탐의 모습에서 특이함을 느꼈다. 팔리탐은 앞으로 상체와 팔을 내민 채 뭄토에게 뭐라고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뭄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뭐라 말하자 팔리탐은 뒤로 주 춤 물러나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머리 위쪽, 하늘을 가리고 있 는 나뭇잎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뭄토가 계속 부리를 움 직이고 있었다. 상당히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 듯했다. 힌치오는 뭄토 가 말한 것이 무엇이건간에 팔리탐을 꽤 동요시킨 모양이라고 생각했 다. 팔리탐이 동요한다면 그것은 스카리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힌치오는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조금 후 뭄토가 일어났다. 그는 힌치오 쪽을 잠깐 돌아보고는 반대 쪽으로 걸어갔다. 팔리탐은 여전히 나무에 기대선 채 꿈쩍도 하지 않 았다. 힌치오는 꽂아둔 이쑤시개를 뽑아들고는 팔리탐을 향해 걸어갔 다. 그가 걸어가는 동안에도 팔리탐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좋은 힌치오였지만 팔리탐의 가면에서 그의 속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표 정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힌치오가 바로 곁에 다가섰을 때 팔리탐이 갑자기 움직였다. 그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로 걸어가버렸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는 걸음걸이였다. 힌치오는 팔리탐을 붙잡으려다가 뭄 토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그는 뭄토를 붙잡아서 물어보는 것이 낫 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차피 뭄토를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건지도 불확 실했다. 결정을 내린 힌치오는 뭄토가 걸어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뭄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힌치오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아쉬존 토프탈은 자신이 할아버지와 함께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위화감을 느꼈다. 아쉬존은 자신이 다시는 조부와 감정을 공유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 다. 그는 조부의 절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될 테 니까. 드디어 그가 기다리던 조부의 절망이 찾아왔지만 아쉬존은 그 것을 비웃는 대신 함께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키탈저에서 벌어진 참담한 재난에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은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아쉬존은 그것이 일종의 선전책동이 아닌가 의심 했다. 아무리 레콘이라지만 어떻게 단 한 명의 사람이 11만 명의 적 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그 레콘이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화신 이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베로시 토프탈이 보낸 보고서에는 신격 의 개입을 암시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현실적 이었다. 보고서에는 그 레콘이 제국군에 복무했으며 코끼리를 가축화 하려 하고 있으며 시모그라쥬공의 장부를 뒤져보면 그에게 보낸 후원 금 항목을 찾아볼 수도 있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아쉬존은 그 레콘을 잘 안다는 기분마저 느꼈다. 물론 서면으 로 아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그 레콘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레콘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자가 어떻게? 베로시 토프탈은 그 레콘이 최후의 대장간에서 상당히 언어도단적인 병기를 받았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 설명 또 한 현실적이었다. 초자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억측이 섞여들어갈 여 지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쉬존은 차라리 초현실적인 이유 때문 에 시모그라쥬군이 패배했다는 설명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런 분노도 느낄 수 없을 테니까. "겨우 선봉 부대가 약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팔디곤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아쉬존은 고개를 들어 팔디곤을 보 았다. 팔디곤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말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일에 놀라 자멸한 거야. 너는 여기서 상대방을 놀 랄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력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전 쟁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마찬가지지." 제왕학이라도 가르치려는 모양이다. 아쉬존은 쓸데없는 일에 매진하 는 조부를 바라보며 겨우 분노를 희석시킬 희극적 감정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아쉬존의 낯빛이 변한 것을 본 팔디곤은 그것을 불안감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걱정할 것은 없다. 네 종고모는 이미 도주한 병사들을 재편성하고 있다. 겨우 선봉 부대일 뿐이야. 아직도 내겐 많은 군사들이 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것들이 한계선 남쪽으로 내려온다면 나의 나가 병사들이 그 레콘을 상대할 것이다. 그 레콘이 어떤 기발한 무기를 가지고 있건간에 그 레콘은 신이 아니다. 그리고 신의 개입이 있기 전까지 나가들은 결코 키보렌에서 지지 않았다. 재생력과 소드락을 가진 나가들은 그 레콘을 거름으로 만들 거야.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쉬존은 조부의 가슴 부근을 바라보다가 내뱉듯 말했다. "폐하께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우리들의 주군이신 대호왕 폐하 말입니다. 그 분께 이 비통한 소식 을 전하겠습니다. 그 분께서 자신의 병사들이 입은 피해를 아셔야 하 니까요." 아쉬존은 '자신의'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갈 뻔했다. 만약 강조한다면 오히려 세련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쉬존은 자연스럽 게 말했다. '당신의 많은 군사나 당신의 나가 병사가 아니야. 폐하의 것이지.' 하지만 그의 자연스러움이 지나쳐서인지 팔디곤은 아쉬존이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 가서 보고하거라." 아쉬존은 둔한 조부에 대해 속으로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온 아쉬존은 경비병들에게 괜한 트집을 잡아 불호령을 내리고는 약 간 상쾌해진 기분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상쾌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타오민성의 화려한 복도를 따라 걸으며 아쉬존은 자신이 조부와 함께 분노했다는 사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 마치 오염된 것 같은 기분 이었다. 아쉬존은 자신을 설득시키려 애썼다. 분노의 내용이 달랐다. 팔디곤 토프탈은 자신의 군사가 패배했다는 사실에 화를 내었던 것이고 아쉬 존은 대호왕의 병사들이 패배하여 왕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사실에 분 노한 것이다. 아쉬존은 자신의 분노가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성 바깥 에는 아쉬존과 같은 식으로 분노를 느끼는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팔디곤 토프탈이나 베로시 토프탈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건, 사람들 에게 왕은 대호왕이다. 그들은 왕의 군사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우 려하고 있을 것이다. 아쉬존은 종고모가 패잔병들에게 대호왕 폐하의 명예를 위해 싸우라고 요청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복도에 뚫린 창문을 통해 갈바마리의 모습을 본 아쉬존은 타오민성 의 정원으로 나왔다. 대호왕은 보이지 않았지만 갈바마리가 있다면 대호왕 또한 그곳에 있을 것이다. 태양은 자신이 지지 않을 거라 확신하게 된 양 무시무시한 햇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계선 남부 태생인 아쉬존도 오늘은 유달리 햇빛 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아쉬존은 혹 그런 햇빛이 왕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나가들은 체온을 조절할 수 없다. 물론 불사의 육 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쉬존은 대호왕이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약간 걸음을 빨리하여 갈바마리에게 다가갔 다. 그곳에는 아쉬존의 예상대로 왕이 있었다. 대호왕 사모 페이는 해시계 근처에 서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쉬존은 평범한 해시계라도 햇빛에 잔뜩 달궈지면 나가들에겐 볼만 한 광경이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쉬존의 접근을 알아차린 갈 바마리가 몸을 움직였고 그러자 사모는 아쉬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너라. 아쉬존. 아쉽구나. 너는 이것을 볼 수 없지." 아쉬존의 예상이 맞았다. 아쉬존은 부드럽게 말했다. "뜨거운 돌이 내뿜는 열 말씀입니까?" "그래. 상당히 예쁘단다. 하지만 네가 볼 수 없으니 이것에 대한 이 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무슨 일로 왔느냐?" 아쉬존은 얼굴을 조금 굳혔다.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뭐지?"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이 지휘하는 선봉 부대가 뜻밖의 적을 만나 크게 패했습니다." "뜻밖의 적이라니?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아니었나?" "아닙니다. 한 명의 레콘입니다." 사모는 몸의 비늘을 조금 부딪쳤다. "레콘?" "예." "설명해라." 아쉬존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설명했다. 그을린발이라는 한 명의 레콘이 베로시 토프탈에게 계속 이용당하는 것에 짜증이 나서 시모그 라쥬군을 박살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쉬존은 자신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이니 듣는 사모 페이는 당연히 황당함을 느꼈을 것이다. 아쉬존은 사모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사모는 어처구니 없다거나 기막히다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그녀는 해시계 쪽을 다시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꼼짝 않는 그녀 대신 갈바마리가 무엇에 불안감을 느낀 것인지 몸을 이리저리 뒤뚱거렸다. 사모 페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리를 다 읽었군. 이제 우리와 얽히려 하고 있어." 아쉬존은 당황하여 말했다. "예?" 대호왕 사모 페이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의아한 심정으로 대호왕을 바라보던 아쉬존은 무엇인가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아쉬존은 눈을 크게 떴다. 은루였다. 나가들이 흘리는 은빛 눈물. 그것이 대호왕의 눈에서 흘 러나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굴 끝에서 방울진 그것이 떨어져 해시계의 표면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보던 아쉬존의 눈에서도 눈물이, 투명한 인간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쉬존은 소리 없이 울었 다. 왕께서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바닥에 엎드려 미친 듯이 울고 싶 었지만 아쉬존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는 꼿꼿하게 서서 수액을 흘 리는 나무처럼 울었다. 동시에 아쉬존은, 좀 기묘하지만 만족감도 느 꼈다. 저것이 진짜 왕이다. 병사들의 억울한 죽음에 눈물을 짓는 저 사람이. 아직도 병사는 많다고 말하는 할아버지는 죽었다 깨도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누군가가 묻는다면 아쉬존은 사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울었다 고 증언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다만 닐렀을 뿐이다. 그 나마도 짤막했기에 설령 아쉬존이 니름을 들을 줄 안다 해도 그런 감 정의 동요 속에서는 제대로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무 서운 니름이었기에 사모도 단 한 번밖에 니를 수 없었다. [시작했군.] =============================================================== 28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29. 불씨의 연가 - 1 언제나 헤어진 후에야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는 오래된 친구. - 도깨비들의 수수께끼. 물수리가 남으로 나는 계절, 삶의 가파른 비탈에 선 자들이 숲속을 달리고 있다. 발목에 감기는 풀잎과 나뭇잎을 흩날리며 달리는 자들은 스무 명 남 짓한 인간 남녀다. 바위를 뛰어넘고 나무를 붙잡아 돌고 다급한 내리 막길은 그냥 앉은 채로 미끄러진다. 십 미터 이상 똑바로 보기 힘든 울울창창한 밀림이지만 앞쪽 사람을 무작정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 길을 찾아내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는 모습을 보건대 모두들 근방 의 지리에 익숙한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간혹 혼자서 달리기도 했 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멈춰 서서 동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은 채 덩굴을 잘라내고 나무 등걸을 뛰어넘고 실개울 위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렸다. 흡사 누 가 먼저 목적지에 도달하는지를 놓고 경주를 하는 것 같다. 사실, 그것은 경주다. 하지만 경쟁자는 그들 중엔 없다. 그들 모두 의 경쟁자는 한 사람이며 마지막으로 소재가 확인되었을 때 그들에게 서 대략 5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정신없이 숲속을 달리는 자들이 생각하기엔 지척이나 다름없는 거리다. 목적지에 도착한 첫 번째 사람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살필 때 두 번째로 도착한 인물이 외쳤다. "왔어?" 그것은 사실 확인이라기보다는 희망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질문을 한 자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첫 번째 사람과 같은 일을 했다.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이 있는지 관찰한 것이다. 첫 번째 사람 또한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듯 입을 꾹 다문 채 필사적으로 주위를 관찰했다.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곧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금방 숨이 끊어질 듯 헐떡거리는 여섯 번째 사람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결 론에 도달해 있었다. '아직 오지 않았다.' 숨가쁘게 달려온 자들은 기쁨의 표정을 짧게 교환하고는 미리 정해 둔 움직임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통으로 맞닥뜨린 표범에게 고함 을 왁 질러 쫓아버리고 달려온 마지막 사람이 - 빨리 가야 한다는 생 각에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표범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 양이다. - 도착했을 때 숲 저편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구슬치기와 벌채 사이에 새로운 근연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구슬 대신 1톤 쯤 되는 쇠공을 밀림에 집어던지면 이토록 소름끼치 는 소리가 날 수 있을 것이다. 숲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들은 약간의 돌풍에도 드러누울 생각만 하는 천근성 수종들이 아니다. 뿌리로 땅 을 끌어안듯 단단히 자리잡은 나무들이다. 하지만 응축된 지진 같은 충돌음과 새들의 숨 넘어가는 비명 속에 나무들은 쿠당쿠당 쓰러지고 있다. 제반사항을 고려할 때 나무들은 뿌리와 줄기 사이의 어느 부분 이 부러진 채 쓰러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몸을 숨기 고 있던 스무 명의 남녀는 자신의 머리 위로 나무들이 우르르 쓰러지 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작은 자비. 굉음의 주인공은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이 스스로 자아낸 공상에 기진맥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굉음 보다 먼저 도착해버린 것 같다. 걸리적거리는 작은 나무 하나를 걷어차 부러뜨리며 레콘이 갑작스럽 게 나타났다. 나무 사이에서 걸어나오는 또다른 나무인 양 레콘은 당당하게 걸었 다. 나무 등걸과 관목, 풀숲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자들은 당황했 다. 그들이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 레콘이지만 그들이 보기를 바랐던 것은 레콘이 아니다. 그러니까 순서에 문제가 있었다. 레콘은 두 번째로 도달해야 한다. 미끼의 역할을 자임한 용감한 인간 의 뒤를 따라. 유인이 성공했다면 숨이 턱에 닿은 인간이 먼저 나타 나야 하고 유인에 실패했다면 레콘이 나타날 리가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자들에게 설명하듯 레콘이 말했다. "여기야?" 매복자들은 심장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 레콘의 허리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안 보입니다. 잠깐만요." 매복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 때 나무 위에 숨어있던 인간 한 명이 놀라운 모습을 발견했다. 마치 허리에 사냥감을 묶어놓은 사냥꾼처럼 레콘은 인간을 매달고 있었다. 인간은 허리가 완전히 접혀진 상태에서 자신의 발을 보는 자 세로 레콘의 허리에서 대롱거렸다. 그리고 그 인간은 바로 미끼가 되 겠다고 나선 그들의 용감한 동료였다. 숨어있던 자들은 자신들이 사태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미끼는 유 인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동료를 팔아넘겨 목숨을 보존한다는 배신 까지 저지른 것이다. 그리하여 미끼는 이제 길잡이가 되어 레콘을 이 곳까지 안내한 것이다. 매복자들은 머리가 세어버릴 것 같은 공포와 절망에 배신감을 더하여 괴로워했다. 그 때 레콘의 허리에 매달려있 던 자가 말했다. "조금 더 가야겠군요. 그래야 우리 함정에 빠집니다." "알았어." "그런데, 그을린발. 여기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왜 오는 겁 니까? 제가 미끼라는 걸 눈치챘으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었을 텐 데…… 왜 붙잡은 저를 안내역으로 삼아 이렇게 자기 발로 함정에 들 어오는 겁니까?" "그렇게 상황 설명하듯이 말하면 네 친구들이 이 근처에 숨어 있다 는 것 내가 눈치챌 거라는 생각이 안 드냐?" 그을린발의 허리에 매달려있던 자는 자기 머리로 공놀이를 했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을린발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좀 먼 곳에 있을지도 모르니 내가 알려주지. 함-정-을-준-비-해-라 -! 내-가-왔-다-!" 황급히 귀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매복자들은 어 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레콘의 날카로운 감각은 그들의 서툰 움직임 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배치 상태는 혹 소재가 발각될 경 우 최대한 저항하며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도록 고려된 것이지만 매 복자들은 정말 그을린발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을린발이 같은 내용을 몇 번 더 외치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동안 매복자들은 무정물 처럼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을린발이 완전히 멀어진 후 매복자들은 겨우 자신들의 위치에서 걸어나왔다. 그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을린발 이 사라진 방향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중 한 명이 갑작스러운 딸 꾹질처럼 말했다. "건방진 새끼." 매복자들의 얼굴에 공분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그을린발이 싫었다.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식으로 찾아온 그 거만함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분노가 몸을 숨긴 채 숨죽여 벌벌 떨었던 것에 대한 보상 심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 지 않았다. 지휘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가자. 저 오만한 놈,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어주자." 동의의 몸짓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근심스러운 표정으 로 말했다. "교위님. 테로 수전사가 붙잡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원래 계획 처럼 물에 뛰어들 수 없습니다. 그을린발이 수전사를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테로는 그걸 각오하고 간 거다. 우리가 자기 때문에 머뭇거리면 테 로는 오히려 화를 낼걸." 그을린발에게 붙잡혀 있는 전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자는 곧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의 사망을 집행했다. 비정하달 수만은 없 는 노릇이다. 교위의 말이 옳다. 테로 수전사도 그을린발을 함정으로 유인한 뒤 물에 뛰어든다는 계획을 진심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 다. 침묵의 동의를 주고받은 매복자들은 재빨리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 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입술을 꾹 깨물었고 어떤 자들은 눈물을 삼 켰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그을린발에 대한 증오로 몸을 불살랐다. 테로 수전사의 예정된 최후 때문에 마지못한 듯 움직이던 발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잠시 후 그들은 그곳으로 왔을 때처럼 빠른 속도로 숲속을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그을린발에게 절망을 안겨주기 위해. 교위의 말처럼 테로 수전사는 전우들이 미적거리는 것을 바라지 않 았다. 테로는 그을린발의 허리에서 모욕적인 자세로 흔들거리는 자신 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비록 장애물이 많은 숲이라 하지만 테로는 레콘과 경주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함정이 있을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오히려 테로에게 안내를 명령한 그을린발에 대한 궁금증도 이젠 더 느껴지지 않았다. 좀 이상한 과정을 겪었지만 그는 예정했던 곳에 도착해 있었 다. 이제 숨어있던 동료들이 행동할 차례였다. 테로는 눈을 감은 채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는 그을린발의 발소리도, 그 레콘이 장애 물을 때려부수면서 만들어내는 굉음도 듣지 못했다. 초조감으로 심장 을 혹사시키며 테로는 다른 소리를 기다렸다. 그를 붙잡고 있는 레콘 에게, 시모그라쥬군을 닥치는대로 학살해온 레콘에게 가장 큰 복수가 될 소리를. 하지만 수문이 열리며 물이 범람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긴장감이 풀려버린 테로는 복수의 성취감도 느끼지 못한 채 기절했다. 다른 소리로 오해할 수 없는 소리가 났을 때 그을린발은 걸음을 멈 췄다. 그는 마치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서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 다. 무심히 스쳐지나쳤던 사람이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그을린발은 확신 없고 자신 없고 열의 없는 동작 으로 뒤를 쳐다보았다. 그 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모습은 급류의 굉음을 들은 레콘의 보편적인 반 응에서 한참 먼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제력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가 착용하고 있는 무차별학살이었다. 당황하여 몸을 부풀렸다면 무 차별학살은 일제히 발사될 것이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집병한 이후 장기간 사용하지 않았지만 최근들어 사용 기회가 많았기에 그을린발 은 무차별학살을 착용한 상태에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그을린발의 내부에서는 그가 토해내는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 지만, 몸은 마음의 종이며 동시에 마음의 주인이기도 하다. 태연한 겉모습을 유지하자 그을린발의 정신도 어느 정도 침착을 되찾았다. 그을린발은 허리쪽을 향해 말했다. "역시 그거였어?" 자신의 포로를 내려다본 그을린발은 그가 대답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을린발은 직접 대답을 찾기로 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소리에 집중하며 그을린발은 자신이 있는 곳의 지형을 가늠 했다. 많은 나무들 때문에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을린발은 자신이 조금 높은 지역에 있다고 느꼈다. 수공이라면 좁고 낮은 지역이어야 할 것이다. 수공은 아니다. 그을린발은 수염볏을 쓰다듬으며 자신이 얼마나 합리적인 인물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조금 후 그을린발 은 자신이 레콘을 잘 안다고 믿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짓을 했다. 그을린발은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오던 길을 되짚어 가는 것이었고 그래서 장애물은 없었다. 그을린발 은 지나치게 빠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뚜벅뚜벅 걸었다.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나무들 사이에서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을린발은 앞쪽에서 표범 한 마리가 달려오는 것 을 보았다. 그을린발을 목격한 표범은 으르릉거리다가 방향을 바꿔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 표범이 사라지기 전 그을린발은 표범이 물에 흠뻑 젖어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을린발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어려운 암산을 하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정 체를 알 수 없는 동물들이 숲속 여기저기서 치달려서 꽤나 소란스러 웠다. 머리를 조금 갸웃한 채 꼿꼿하게 서있는 그을린발의 모습은 아 우성 치는 숲속에서 퍽 이질적이었다. 동물들의 소란이 조금 줄어들었을 때 그을린발은 다시 움직였다. 방 향은 멈춰서기 전과 같았다. 그을린발은 물냄새를 맡았다. 그는 움찔하며 멈춰섰다. 그 반응은 비합리적이다.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왔으니 물냄 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을린발은 그것을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느꼈다. 그을린발은 곤혹스러워 하듯 물냄새가 풍겨오 는 숲 저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기절에서 회복한 테로 수전사가 혼 수상태의 후유증과 흥분 때문에 횡설수설하듯 말했다. "기어가는 뱀처럼 강물이 아주 크게 돌아흐르고 있지요. 당신이 강 으로 둘러싸인 땅에 들어섰을 때 당신 뒤쪽에 새 물길을 낸 겁니다. 여기가 땅이라고 생각하지요? 예. 땅은 땅이지요. 섬도 땅이니까. 이 곳은 하중도가 된 겁니다. 레콘이 섬에 갇혔다고요! 이것이 함정입니 다. 이제 후회가 됩니까? 우리는 당신을 여기 내버려둘 겁니다. 미쳐 서 헛소리를 하다가 굶어죽을 때까지. 그 꼴을 보고 싶지만 그러긴 어렵겠군요. 당신이 홧김에 나를 죽일 테니까. 나를 놔줘요. 나는 헤 엄쳐서 건널 수 있어요. 하! 그럴 리 없지. 이건 그냥 살고 싶어서 하는 헛소리야. 당신이 그렇게 착할 리가 없지. 제기랄. 당장 죽이는 것이 좋을걸! 당신도 잠은 잘 테고 그 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난 물 고기처럼 멋지게 헤엄을 쳐서 이 섬을 빠져나갈 거라고. 아니, 그래 도 나를 살려두는 것이 좋을걸? 당신이 항복하고 다리를 놔달라고 간 청할 때가 올지도 모르잖아? 그 때 내가 살아있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의……" 손가락으로 테로 수전사의 턱을 세게 튕겨 다시 기절시킨 그을린발 은 테로가 꺼내지 못한 말이 무엇일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몇몇 단어들이 떠올랐고 그을린발은 그 말들에 감명 을 받지 않았다.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테로 수전사가 말한 물길이 나타났다. 그을린발은 발작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나무껍질이 바스라졌지만 그을린발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것은 큰 비가 올 때 잠깐 나타나는 물길인 듯했다. 평소엔 풀과 나뭇잎 등으로 뒤덮혀 있어 그것이 강바닥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모습이기에 그을린발은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곳을 지나쳤 다. 하지만 테로의 동료들은 상류의 강둑을 제거하여 그곳을 강으로 바꿔놓았다. 그을린발이 걸어오는 동안 유속은 조금 느려져 있었지만 아직도 나뭇잎을 던지면 순식간에 사라질 만큼 거세었다. 그을린발은 물거품이 부글부글 일어나는 수면을 보다가 어지러운 듯 강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인간 여자와 마주쳤다. "빨리 와봐! 와서 이것 좀 봐!" 여자는 흥분하여 뒤쪽을 향해 고함질렀다. 조금 후 몇 명의 사람들 이 숲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소매와 바짓자락 등은 흠뻑 젖어있었 고 몇몇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있었다. 그 모 습은 그을린발을 언짢게 했다. 그의 손가락은 나무 속으로 더욱 거세 게 파고들었다. 그을린발과 스무 명 남짓한 남녀는 강을 사이에 둔 채 말없이 서로 를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승리감과 흥분, 그리고 두려움을 숨김 없이 드러내었다. 하지만 그을린발은 살아있는 나무에서 톱밥을 만들어내려 시도하고 있는 손가락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을린 발은 먼 곳의 지형을 살피는 듯한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함정에 빠트 린 시모그라쥬군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을린발이 좌절감이나 분노 를 드러내길 기다리던 시모그라쥬군 병사들은 실망했다. 그리고 그들 은 더럭 겁을 집어먹었다. 왜 저렇게 무표정한 거지? 누군가가 설마 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싶다는 듯이 외쳤다. "무서워서 말 하는 법도 잊어먹었냐!" 병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함을 지른 자를 돌아보았다. 지휘관인 수교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고 있었다. "너 같은 놈에겐 이것도 과분해! 미친 개 같은 놈. 은혜를 이런 식 으로 갚아? 아무 대가도 바랄 수 없는 도박 같은 짓을 후원해줬거늘, 감사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적하고 내통해서 후원자를 잡아먹 으려 들어? 이 배은망덕한 놈아!" 수교위는 고함 만으로 부족하다는 듯 물가로 다가와 수면을 걷어찼 다. 그의 발길질로 그을린발에게까지 물을 날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하 지만 적의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두려움에 빠져 있던 병사들도 수교 위가 기대한 것처럼 강변으로 다가와 물을 걷어찼다. 그 중에는 투구 를 벗어 물을 떠 끼얹는 자들도 있었다. 다른 경우라면, 그러니까 상 대가 인간이거나 한 경우라면 그것은 즐거운 물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광경 어디에도 유쾌함이나 흥겨움은 없었다. 분노와 증 오뿐이었다. 병사들은 욕설과 저주를 내뱉으며 그 무시무시한 물장난 에 취했다. 하지만 그을린발은 나무에 손가락을 꽂아넣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교위가 발칵 화를 내며 외쳤다. "부리를 놀려봐라! 할말이 있냐, 이 깃털뭉치 자식아!" 그을린발은 아무 대꾸 없이 병사들을 찬찬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네 수치를 알라는 듯한 그 눈길은 수교위를 언짢게 함과 동시에 불안 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먼 곳에서 물장구를 치며 폭언을 퍼붓는 것을 가리켜 용감한 행동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 다. 하지만 수교위의 감정은 불안감 쪽으로 기울어있었다. 섬에 갇힌 레콘이 침묵으로 상대를 비난할 정도의 침착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수 교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교위는 부하들의 폭언이 잠 시 줄어든 틈을 타서 외쳤다. "거기 멍청히 서서 뭐 하고 있는 거냐!" 그을린발이 부리를 열었다. 그는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 처럼 멍한 어조로 말했다. "기억하고 있다." "뭐?" "너희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강변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병사들은 발길질과 물긷기를 조각하려는 예술가를 위해 자세를 취하 는 것처럼 굳었다. 수교위는 입을 조금 벌렸다가 닫았고, 그리고 다 시 벌렸다. "뭐라고?" 우지직. 그을린발은 나무에서 손가락을 뽑아냈다. 그제서야 아픔을 느끼는 듯 그을린발은 부리를 살짝 부딪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 동작으로 손에 묻은 나뭇가루까지 털어낸 그을린발은 똑바로 서서 말했다. "끝났다." 수교위는 그 퉁명스러운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수교위는 그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비틀거리다가 털 썩 주저앉았지만 아무도 그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을린발은 두 손을 부리 앞으로 들어올려 손나팔을 만들었다. "이-라-리-!" 과거 아라짓 제국의 대장군이지만 제국을 잃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군사 집단을 지휘하고 있지만 그것을 소유하지는 않는 남자가 갑자기 허리를 구부렸다. 엘시 에더리는 땅에 손끝을 대었다가 다시 허리를 폈다. 손가락 끝 에 묻은 흙을 바라보던 엘시는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엘시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먼 곳을 보며 흙을 맛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두 명의 관찰자가 있었다. 엘시에게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는 대장군의 몸종 이레 달비였다. 이전에 보지 못한 주인의 행동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레는 그것을 제 지하지 않았다. 엘시의 모습에는 어떤 상식적인 조언이라도 무가치한 것으로 바꿔놓을 듯한 진지함이 있었다. 그래서 이레는 또다른 관찰 자가 그 대신 나서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짝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엘시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만 할 뿐 거기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문득 이레는 그런 삼가함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둘만의 대화에 참 견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리고 엘시는 현재 누군가와 대화 중이 었다. 이레는 그 상대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보았지만 적절하다 고 느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제국, 세계, 운명, 역사. 모두 작 위적인 느낌이 든다. 그것은 엘시의 모습에서 진지함과 함께 스며나 오는 소박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레 달비는 그 대 화 상대를 규정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흙을 삼킨 엘시가 몸을 돌렸다. "그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코세 백작." 코세 칸디드 백작은 실망감을 드러내기에 앞서 흙을 먹는 대장군의 모습에서 느낀 호기심을 지우는 일에 착수해야 했다. "어떤 점에서 바르지 않다는 겁니까, 칼리도백?" "그것은 반역입니다." "백작. 논리나 윤리는 잠시 집어치우고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지요. 감정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우리들 중 누구도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자꾸 우리와 동격이라는 식으로 행동한다면……" "나는 제국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좋아요. 제국군은 제국의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당신의 명령을 따라 걷고 싸우고 죽습니다. 그리고 당신 아닌 다른 누구도 그들에게 같은 일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내게는 그들이 누구 의 것이냐보다 그 사실이 훨씬 중요한 것처럼 생각되는군요." 엘시는 침묵했다. 칸디드 백작은 필요하다면 상당히 폭력적으로 바 뀔 것 같은 대장군의 몸종에게 불신감을 주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신뢰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언제나 고매한 인격자보다 자기 이익을 철저히 추구하는 사람을 신뢰하게 마 련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예상할 수 있는 것을 신뢰하는데, 후자 야말로 그 행동을 예상하기 쉽습니다. 당신이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 한다면 우리 쪽에서는 안도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겠지요.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는 우리에게 멋진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왕이 되십시오. 그것은 당신에게 우리가 복종할 이유를 주는 일이 될 겁니다." "나는 당신들의 복종을 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의 복종을 받 을 사람은 아직 오시지 않은 새 황제 폐하입니다." "백작! 당신도 사람이 어떤지는 알잖습니까." "글쎄요. 나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모를 것 같습니다." 코세 칸디드는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지나치 게 부각되는 몸을 최대한 움츠리려 애쓰고 있던 이레는 그런 칸디드 백작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칸디드 백작이 다시 전의를 추슬러 말했 다. "칼리도백. 아무도 귀족원 회의에 참가하지 않으면 어쩔 생각입니 까?" "예?" "당신이 시모그라쥬공을 물리치고 발케네공을 물리치고, 그리고 또 나타날지도 모르는 제국 찬탈자들을 모두 때려눕힌 다음에 마침내 귀 족원 회의 개최를 선언했을 때 아무도 그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어쩔 생각입니까? 제국을 다시 주유하며 귀족들을 한 명씩 납치할 겁니까? 그래서 당신 자신이 세계를 가장 큰 혼란으로 몰아갈 겁니까?" 엘시는 무거운 눈으로 칸디드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왜 참석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당신의 황제 등극에 증인이 되어주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이 귀찮고 짜증나서 불참을 선언할 수도 있지요." "뭔가를 잘못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오. 당신의 황제 등극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황제가 되기 위해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맙소사, 백작. 당신의 생각이 무슨 상관입니까?" 칸디드 백작의 비명 같은 외침에 엘시는 눈 주위를 꿈틀거렸다. "뭐라고 했습니까?" 칸디드 백작은 몸을 돌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언덕 위였다. 백작은 언덕 아래에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흑사자군을 가리켰다.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흑사자군이라는 근사 한 별칭을 가진 저들을 생각해보시죠. 귀족원에서 귀족들이 새 황제 를 선출하면 흑사자군 장병들이 그것을 참겠습니까? 죽을 고생을 하 며 싸운 것이 누군데 자기들 마음대로 황제를 선출하느니 마느니 하 는 거냐는 불만이 당연히 터져나오지 않겠습니까? 혹 그런 불만을 무 마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고결하게도 귀족원 회의의 결정에 승복하여 새 황제에게 흑사자군을 넘겨준다면 저들이 그것은 또 참겠습니까? 저들은 어떤 황제라도 일단 거부할 겁 니다. 인격이나 능력, 자질 같은 것과 무관하게 그 황제가 엘시 에더 리가 아니라면 무조건 거부할 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엘시는 칸디드 백작의 질문에 부정의 대답을 할 만큼 사람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은 침묵뿐이기에 그는 그렇게 했다. 칸디드 백작이 열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 이 땅 위에 당신과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이 한 일이 간단한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독한 오만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당신처럼 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한다면 당신이 존재하는 이상 그 누구도 가장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귀족원 회의가 개최되고 당신 아닌 누군가가 새 황제 가 선출된다면 저들은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당연히 당신에게 돌아와 야 할 황위를 어떤 약삭빠른 놈이 훔쳐갔다고 생각할 겁니다. 예! 당 연히 그렇게 느끼겠지요. 저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엘시 에더리를 황제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을 겁니 다. 백작, 백작! 흑사자군이 정말로 있지도 않은 제국이나 있지도 않 은 황제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지는 않겠지요? 저들은 엘시 에더 리, 바로 당신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겁니다. 당신은 황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어떤 선택도 제국을 사산하게 될 테니까요." 엘시는 바람에 흔들릴 잔가지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고목처럼 꿈 쩍도 하지 않은 채 칸디드 백작을 마주보았다. "칼리도백. 거듭 말하지만 비나간후는 정말 좋은 것을 알려주었습니 다. 당신이 갑자기 황제가 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금껏 당신 이 주장해온 일과 배치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후작처럼 왕이 된다 면, 황제가 오실 길을 준비할 왕이 되겠다고 주장한다면 상관없습니 다. 그리고 당신이 그런 언질을 주어야만 제국 재건 범신민 연대도 안심하고 당신에게 협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계속 지금처럼 행동 한다면 우리는, 미안하지만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과 흑 사자군을 근거도 없고 대의도 없이 떠도는 힘만 센 유랑자 무리로밖 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믿고 기댈 수 없 단 말입니다." 이레 달비는 대의가 없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근거가 없다는 말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제국군의 근거는 제국인 데 현재 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이레는 종형의 재주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랑과 거의 같은 크기로 저주도 보내는 종 형이지만 이레의 종형 틸러 달비에겐 칸디드 백작의 주장을 반박할 논리가 있을 것 같았다. '하다 못해 비열한 야유로 백작을 격분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 결국 틸러에 대한 이레의 기대치는 그 정도였다. 이레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주인의 안색을 살폈다. "당신도 제국 부활을 믿지 않는군요."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처럼?" "그 분처럼."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나는 믿습니다. 그것을 원합니 다. 우리 이름이 제국 재건 범신민 연대라고 소개해드린 것을 벌써 잊었습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칼리도백 당신이 가장 확실한 제국 재 건의 열쇠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 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정말 힘든 길이 될 겁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 이 걸릴 테고요. 제국의 실종 기간이 길수록 그 회복 기간도 길 겁니 다. 그런 낭비는 피해야 합니다." 엘시는 뭔가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언덕 아래에 있는 흑사자군의 진지를 바라보았다. 주인의 안색을 살피는 일에 열심인 이레는 문득 엘시의 얼굴에서 혐오감 같은 것을 읽어내었다. 칸디드 백작의 요구에 대한 혐오감일 수도 있지만 이레는 그렇지 않다는 직 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레는 불안감이 천장 속을 뛰어다니는 쥐처럼 그의 가슴 속을 뛰어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을린발이 외쳤다. "테하! 마, 손! 리, 리! 테하! 리, 하쿨, 마, 리…… 마! 마, 맛!" 말의 두억시니판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리였지만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소리를 듣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듣는 자'에 코끼리는 해당되지 않는다. 코끼리들은 그을린발의 기묘 한 외침을 잘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들의 발소리를 거대한 행군가 삼아 달려온 코끼리떼는 그을린발 의 외침에 따라 제식훈련을 받는 병사들처럼 움직였다. 코끼리들을 피해 물러난 시모그라쥬군 병사들은 넋을 잃은 채 코끼리들의 움직임 을 보았다. 강으로 달려온 코끼리들은 장사진을 형성하여 차례차례 물속으로 걸어들어왔다. 시모그라쥬군 병사들이 물을 범람시키기 전 까지 단단한 땅이었던 강바닥은 코끼리들의 무게를 견뎌내었다. 코끼 리들은 안정된 자세로 물보라를 첨벙첨벙 일으키며 강을 건넜다. 사 실 그것은 이동 중인 코끼리들이 흔히 보여주는 도강이었지만 그 자 연스러운 모습이 그을린발의 외침과 어우러지자 대단히 이질적인 무 엇처럼 보였다. 그렇게 강을 건너던 코끼리들의 선두가 반대편 강에 도달했을 때였다. "테하!" 코끼리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레콘에게 수심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고 또한 지나치게 물길을 깊게 만들면 그을린발에게 탄 로날 수도 있기 때문에 시모그라쥬군이 만든 물길은 그렇게 깊지 않 았다. 그래서 강심에 있는 코끼리들도 그 몸통 대부분은 물 바깥에 나와 있었다. 코끼리들이 물 속에 가만히 서있는 것에는 아무런 어려 움이 없었다. 문득 수교위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을린 발이 가장 앞쪽에 있는 코끼리의 등 위로 살짝 뛰어올랐을 때 그 깨 달음은 외침이 되었다. "코끼리 징검다리다!" 아니, 그것은 징검다리 이상이었다. 코끼리들의 다리는 그대로 교각 이 되었고 코끼리들의 몸통은 상판이 되었다. 그을린발의 몸은 무거 웠지만 서로 몸통을 기댄 채 뭉쳐 있는 코끼리들은 그 육중한 무게를 어렵잖게 버텨내었다. 그을린발은 서두르지 않았다. 코끼리의 등 위 에서 미끄러지는 것도, 그 과정에서 코끼리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도 원하지 않았던 그들린발은 천천히 세심하게 발을 옮겼다. 그리고 시모그라쥬군 병사들과의 거리를 꾸준하게 줄였다. 누군가가 도망치라고 외치지는 않았다. 다만 가장 먼저 머리를 감싸 쥔 채 도망친 자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절대적인 명령이 되었다. 진귀한 모습에 넋을 잃고 있던 시모그라쥬군 병사들 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곧 몸을 돌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을린발은 여전히 서두 르지 않았다. 그는 미끄러지고 싶지 않았고 코끼리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 자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을린발은 끈기 있 고 지혜로운 코끼리들의 말없는 조력 속에서 자신의 발걸음에만 집중 했다. 바람과 밀담 중인 나뭇잎들의 속삭임과 급조된 강의 옹알이 속에 도 강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그을린발 히베리가 자신의 그을린 발을 강변에 실었을 때 태양은 뜨거운 빛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태양 외에 아무 것도 그을린발의 도강에 환호를 보내지는 않았다. 시 모그라쥬군의 병사들이 모두 도망친 강변은 고요했고 코끼리들은 그 을린발을 사랑하지만 환호를 보낼 능력은 없었다. 그리고 그을린발 또한 긴장되어 있던 팔다리를 가볍게 흔들며 강변에서 떨어진 곳으로 걸어갈 뿐 세상이나 자기 자신에게 환호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강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온 그을린발은 짤막한 외침으로 코끼 리들을 강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그들을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그을 린발은 젖은 코끼리를 만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을린발은 얼굴을 기억해둔 자들을 추적하기로 했다. 그을린발은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 29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9. 불씨의 연가 (2) 2004/09/01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29-2 관련자료:없음 [49282]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9-01 06:22 조회:52 피를 마시는 새 29. 불씨의 연가 - 2 많은 협박과 애원을 남겨놓고 떠나는 코세 칸디드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엘시는 이레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이레. 손님이 더 있나?" "아니오. 이젠 없습니다. 저, 주인님. 버릇없는 말을 용서해주십시 오. 그들을 일일이 만나주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빠서 만날 수 없다고 하십시오." "혼란스러운 시국에 대한 걱정을 나누기 위해 부족한 나를 찾아주신 분들이다." "그 분들은 시국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엘시는 무거운 눈으로 몸종을 돌아보았다. 몸종은 눈을 내리깔아 주 인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주인님. 그 분들이 알고 싶어하는 건 주인님의 즉위 시기이고 그 분들이 원하는 건 주인님의 눈에 들어두는 것입니다." 엘시는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주인에게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 지만 이레는 그 혼잣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이레는 주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말투를 약간 바꿔서 말했다. "조금 전에 만나신 칸디드 백작님은 자신이 아닌 제국에 대해 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장수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용기는 그런 충정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요. 다른 분들은 이 진지를 지나오는 것만으로 진이 빠져서 주인님 앞에 서는 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것만 봐도 칸디드 백작님이 다른 분 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그 분은 정말 제 국의 부활을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엘시는 길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한 황토 위에 떨어지는 그의 그림자는 비교적 명확했다. 꽤나 이운 태양이 아직도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환호도, 부정도 보내지 않 는 모습으로 몸종의 말을 들었다. 이레는 새삼 분통이 터진다는 듯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귀족원 회의를 개최하자는 주인님의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발케네공의 침략 행위를 묵인했고 시모그라쥬공의 그것 또한 묵인했습니다. 시모그라쥬공의 부대가 한계선을 넘어 하이스를 점령 할 때까지 그 행위를 성토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마 술자리에서 의인인 척하고 싶어졌을 때 공작에 대한 비아냥 정도를 중얼거렸을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군대를 일으켜 부당한 침략을 당 한 자들을 도우러 나선 자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주인님이 백만 제국 군을 휘몰아 이곳에 나타나자 제국을 잃은 것이 최근의 일인 양 뻔뻔 하게 찾아와서는 제국에 대한 우국충정을 말하는 그 가식적이고 불쾌 한 모습은 정말이지……" 분노 때문에 험한 말을 내뱉을 것 같다고 느낀 이레는 스스로 말끝 을 삼켰다. 엘시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은 채 묵묵히 바닥만 바라보았 다. 겨우 자신을 진정시킨 이레는 나직하게 말했다. "사람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거야 비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주인님처럼 고상한 사람이 아니라서 자기 것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제국을 찾으러 나서야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머리 나쁜 거짓말쟁이는 싫습니다." 엘시는 무거운 표정으로 이레를 돌아보았다. "이레. 제국은 자기 것이 아닌가?" "예?" "너는 방금 자기 것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제국을 찾을 필요는 없 다는 식으로 말했다. 마치 제국은 네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인 것처럼." "……모든 사람의 것이지요." "그래. 네 것이기도 하지." 이레는 피곤한 주인에게 반박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짧지만 깊 은 고민을 한 다음 말했다. "주인님. 주테카는 현상금 사냥꾼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의 것이며 또한 주테카의 것이기도 한 정의를 되찾는 일 을 하면서 돈을 받습니다. 자기가 자기 것을 되찾는 건데도 말입니 다."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테카가 현상금을 받는 대신 사재를 들여 현상범들을 추적 하지는 않지." "정의 구현이 그의 숙원인데도 말입니다." "물론 주테카의 목적이 현상금은 아니다. 하지만 네가 무슨 말을 하 고 싶은 건지는 알겠어." "주인님. 그들에게 물어보면 자신의 충성심은 제국에게 향해 있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충성심은 좋은 음식과 안락한 잠자 리, 흥분되는 오락과 그것을 위해 쓸 수 있는 여가 시간 등에 돌려져 있을 겁니다. 그것은 탓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일이니까 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며 찾아와 주인님께 뭐라도 얻어내려 하 는 자들을 위해 주인님께서 시간을 할애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 니다. 차라리 칸디드 백작님의 말씀처럼 그들을 지배해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이 원하시는 제국 수복에 그들을 동 원하시는 겁니다. 칸디드 백작님의 말씀도 그런 뜻이었을 겁니다." 엘시는 회피하듯 말했다. "그게 몸종에게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하나, 이레?" "저는 전설적인 몸종이거든요." "어머님께 아랫사람 교육에 대해 많이 여쭙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내가 칼리도를 떠나오기 직전까지도 아랫사람 관리는 그 분께서 담당 하셨기에 난 그런 일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둘 필요가 없었지." 엘시는 생각하듯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게다가 그곳을 떠나온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그런 일에 신경 쓸 필 요가 없었지. 내가 관리해야 하는 몸종은 군단 사령부에 뛰어들어 붙 잡힌 주인을 구해낼 정도로 재능 있는 몸종이었거든. 특별히 관리할 필요가 없었지." 이레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이레. 아랫사람 관리에 대해 도통 모르는 네 주인을 좀 봐 줬으면 좋겠군. 그런 난처한 말은 하지마." "죄송합니다. 주인님. 주인님께서도 많이 고민하셨을 일일 텐데 제 가 주제 넘게 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더 여쭙고 싶습니다." 엘시는 희미하게 못말리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레는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어 말했다. "주인님. 바르지 못한 자들을 일소하시고 모든 이의 동의 속에 새 황제를 선출한다면, 그리고 그 분께 주인님께서 가까스로 지켜낸 옛 제국의 유산을 넘겨드린 후엔 그 분께 무슨 대가를 받으시겠습니까?" "내가 받을 대가?" "예. 그런 대가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으십니까?" "아니, 있다." "예? 있다고요?" "그래." "그것이 무엇입니까?" "걸해할 황제께서 계셔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나." 이레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새삼스러운 고백은 아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기 전,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따지면 규리하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엘시가 어 떤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부 냐 헨로와 함께 칼리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레는 그것을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혼식을 거행하기 위해 칼 리도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레는 그것이 젊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며 꼭 해야겠다면 한 30년 후에 말해도 무방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레는 그렇 게 말하지 않았다. "주인님. 칼리도는 어떤 곳입니까?" 엘시의 몸종이지만 이레는 칼리도를 잘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치천 제가 죄수였던 그를 엘시에게 선물했고 그 이후로 엘시는 칼리도를 딱 한 번 방문했다. 스치는 듯한 그 방문에서 이레는 주인의 고향에 대해 별다른 인상을 얻을 수 없었다. 엘시가 말했다. "다른 곳과 별로 다르지 않아.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니까." 이레는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주인님. 그 말씀은 나가들이 라호친에 대해 하는 말과 비슷하군 요." 엘시는 약간 힘겨워 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칼리도는 어떤 곳이냐고? 음. 거기엔 쟁룡해가 있지." 이레는 쟁룡해라면 칼리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을 굳이 강조하지는 않았다. 하늘은 모든 곳에 있지만 누구나 가슴 속에 자신만의 하늘을 가질 권리가 있을 테니까. 엘시는 느리게 말했 다. "쟁룡해는 용이 싸우는 바다라는 뜻이야. 어부들은, 만약 그들이 가 지고 태어난 것 같은 무뚝뚝함을 잘 꿰뚫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들을 많이 들려줄 수 있지. 지금은 그 정 체도 모호해져서 그저 바다의 보물이라고만 부르는 어떤 물건을 두고 용들이 무슨 싸움을 벌였는지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들을. 하지만 내 가 생각하기에 그 이름은 여름에 찾아오는 태풍 때문에 붙은 것 같 아. 어떤 뱃사람도 여름의 쟁룡해는 믿지 않아. 잔물결 하나 없이 잔 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성난 하늘치마냥 날뛰지. 하지만 물이 무거워 지는 이맘때의 쟁룡해는 용이나 싸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여름 동안 온통 휘저어졌던 쟁룡해는 가을 황혼에 붓꽃 같은 보랏빛으로 변해.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은 차츰 검푸르게 변 해가. 물결 위에 반사광이 반짝거리는 거무스름한 바다는 사그라드는 불잉걸 같지. 그리고 수평선 위로 하나 둘 별이 떠오르면…… 이레. 검은 밤바다 위에 떠있는 온갖 빛깔의 별들을 본 적이 있나?"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은 이레는 놀라워 하던 것을 재빨리 감추고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엘시는 이레의 반응에서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무심히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도록 해. 달빛 아래에서 넘실거리는 바다도 보 기 좋지만 나는 달이 없는 밤의 바다가 좋더군. 별들이 더 가까운 곳 에서 타오르거든." 엘시가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었기에 이레는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당황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대장군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엘시가 시인이나 노랫꾼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놀 란 것은 아니다. 이레는 그의 주인이 바르다거나 바르지 않다는 평가 를 내릴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해 그렇게 공을 들여 말하는 것을 본 적 이 없었다. 그 때 엘시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는 어딘가를 심각한 눈 으로 바라보았다. 이레는 대장군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살폈다.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이레는 대장군이 무엇을 보 는지 간단히 깨달았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당장 알아볼 수 있는 코 끼리떼가 진지에 합류하기 위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을린발의 코끼리 들이었다. 코끼리떼의 앞쪽을 살핀 이레는 그곳에서 그을린발을 발견 했다. 다시 대장군을 본 이레는 두 번째 충격을 느꼈다. 그는 대장군이 왜 불안과 노여움으로 그을린발을 노려보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 다. 찻잔을 들어올리던 시오크 지울비는 그것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해결하기를 원한 것은 목마름이 아니라 차가움이었기에 시오크는 따스함이 남아있는 잔을 두 손에 품은 채 그것을 손 안에서 살짝살짝 굴렸다. 정원은 고즈넉했다.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시오크의 양해를 얻어 작업에 착수한 정원사의 가위질 소리도 그 고요함에 큰 파문을 만들 지는 않았다. 시오크가 아무 걱정 말고 작업하라고 말했음에도 불구 하고 정원사는 국왕의 연인을 어려워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여름 동안 주체할 수 없이 자란 정원수들을 손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정원사는 소리를 죽이느라 작업 속도를 높이지 못하는 것 같 았다. 시오크는 정원사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것에 대해 여섯 번째 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전의 다섯 번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정원보 다 더 나은 곳이 없었다. 시오크는 정원사에게 마음 속으로 사과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국왕의 연인. 시오크는 그 말이 어쩐지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를 생각 나게 한다고 느꼈다. 데라시는 황제의 총애 때문에 그가 가질 자격이 없는 권력을 누리는 사람인 양 행동했다. 아마도 비웃음을 받는 편이 견제를 받는 편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자유무역 당주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임을 인정한다면 데라시 또한 그러하다. 데라시에겐 비스그라쥬의 막대한 황금이 있으니까. 만약 비스그라쥬백이 하늘누리가 아닌 비스그라쥬에 머물렀다면 그는 황제 의 첩이라는 어쩐지 깔보는 듯한 이름 대신 주목할 만한 제국의 대귀 족 중 하나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데라시가 하늘누리에 있 었던 것은 그 편이 황제를 보좌하는 것에 더 편리하다는 현실적인 이 유 때문이었겠지만, 시오크는 그것이 비웃음을 사기 위한 위장이 아 니었을까 하는 공상을 잠깐 즐겨보았다. "가만히 있어!" '거기 서!'나 '당장 잠들어!' 등과 같이 따르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반복되는 명령 중 하나가 들려왔다. 그 말에 반항해 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것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오크는 어디서 소리 가 들려왔고 왜 그런 소리가 나야 했는지 알기 이해 주위를 두리번거 림으로써 그 말에 반항하고 말았다. 그러자 명령자는 행동으로 돌입 했다. 지키멜 퍼스의 부드럽지만 다급한 입술이 시오크의 입술을 눌 렀다. '세상에 마법사는 있어. 그것도 3억 명이나. 이들은 이토록 강력한 결박 주문을 쓸 수 있잖아.' 등의 생각을 하며 시오크는 근접해 있는 지키멜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시오크는 지키멜이 눈을 뜬 채 어딘 가를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어오르려던 열 의가 살짝 식는 것을 느꼈지만 시오크는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다. 대 신 지키멜에게 협조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지키멜을 끌어안았다. 매끄럽고, 약간 숨이 가쁜 시간. 입맞춤을 끝낸 지키멜은 시오크의 무릎에 체중을 실으며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시오크가 말했다. "내가 누구를 쫓아내는 것에 일조한 거지?" "클로다이 총리대부. 상당히 좋은 사람이지만 자기 스스로 권위를 만드는 것에는 재능이 없기 때문에 나를 지나치게 이용하려고들어. 가끔은 스스로 결정해서 밀고 나가도 될 텐데." "그러니까 '폐하께 물어봤는데 역시 동의하시더라'라는 말을 하길 좋아하시는 거야?" "정확해." 그리고 그 클로다이 총리대부는 정원에서 연인과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주군을 보고는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황급히 물러난 것이 다. 시오크는 웃으며 말했다. "너를 동정해주길 바라는 거라면 미안하지만 사양이야." "어머, 왜? 나 안 불쌍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신하들 때문에 이 가냘픈 두 팔만으로 왕국을 일으켜보겠다고 애쓰고 있는 내가?"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지키멜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시오크는 한숨 을 내쉬었다.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라고 말할 수 없어서 너에게 의지하도록 획 책했겠지. 맞지?" 물론 그러하다. 지키멜은 현재 상황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자결권을 쉽게 허락할 수 없는 처지다. 강력한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시기였으 니까. 지키멜은 커다른 미소를 지었다. "시오크. 역시 너는 나의 왕국이야." 지키멜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시오크도 그 말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우스운 사실은 지키멜이 '너는 나를 이해한다'는 의미로 그 말을 했다는 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도 되는 말이야. 자, 이제 반 시간 정도 벌었다. 그 정도면 우 리의 총리대부나 기타 나를 방해하지 못해 안달이 난 누군가가 참아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일 테니까. 우리 뭐 할까? 산책하자. 일어 서." 두 사람은 정원사를 고려하여 이미 손질이 끝난 정원수들이 있는 쪽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사가 잘라놓고 아직 치우지 않은 가지와 잎들에서 약간 비릿하 면서도 청량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낙조 직전, 궁궐은 귤빛으로 가득했다. 다른 것들의 아래에 있는 것들도 옆으로 미끄러지는 빛 때 문에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의 동쪽에 있는 것들도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어쩌면 빛이 가장 많은 시점은 한낮이 아니 라 오후가 끝날 무렵인지도 모른다. 지키멜은 절대적인 빛의 양이 어 떠했건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빛의 양은 확실히 이 시간에 가장 많다 고 느꼈다. 국왕의 안위를 위해, 혹은 국왕의 다급한 요구가 있을 경 우를 대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훔쳐보는 자들이 있겠지만 지키멜 은 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키멜은 흘러넘칠 듯 한 많은 빛 속을 거니는 것은 자신과 시오크뿐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침묵으로 그 시간을 축복했고 느린 걸음으로 그 시간을 장식했다. 하 지만 그녀의 정신은 계속해서 그 고요를 즐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 고 있었다. 커다란 아쉬움을 느끼며 지키멜이 말했다. "시오크. 대답해줘." 시오크는 질문이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맹세하는데, 그녀와는 철없던 시절에 잠깐 만났을 뿐이야. 절대로 진지한 사이가 아니었어. 믿어줘." 지키멜은 빙긋 웃었다. 이런 대화만 계속할 수 있다면. "왜 당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시오크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나무 아래에 쌓여있는 나뭇가지와 잎 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는 이미 당에 대한 자신의 장악력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 는 단계에 돌입했어. 이대로 가면 틀림없이 네 반란은 무마될 거야. 그리고 두 번째 기회는 오지 않겠지. 아버지에게 당을 돌려주기로 한 거야? 아니, 잠깐." 지키멜은 자신의 옷자락을 쓸어내리고 말했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내 말을 들어. 네가 당주여야만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당주 자리를 지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야. 내가 궁금한 건-" "옛날의 그 청년이 어떻게 되었나." 지키멜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독행왕이 아니라 비나간후의 증 손녀였을 때 후작궁 한곳에서 시오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맞아. 나는 그 청년의 안부가 궁금한 거야." 시오크는 팔짱을 끼고는 추위를 타는 사람처럼 자신의 가슴을 단단 히 끌어안았다. 그 얼굴에 빛이 가득한데도. 시오크가 말했다. "지키멜. 1년 전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 아라짓 제국이 사 라졌어." 맞장구를 유도하는 농담인가 생각하며 시오크의 얼굴을 살핀 지키멜 은 그냥 침묵하기로 했다. 시오크는 즐겁기 위해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시오크가 웃음거리로 삼고 싶은 것은 자신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진작 깨달았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깨달았어야 하지?" "제국이 사라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이 사라졌다는 것임을." "시오크? 무슨 말을…… 네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잖아." 시오크는 천천히 지키멜을 돌아보았다. 지키멜은 그의 손을 붙잡아 들어올리며 말했다. "바보들은 네가 그런 것을 쫓는 유치한 이상주의자라고 비난할 테지 만 나는 그런 바보가 아니야. 시오크 지울비. 네가 원하는 것은 기준 이 아니라 평가 그 자체야. 만인이 만인에 대해 각자의 기준으로 평 가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네가 원하는 거야. 만인이 동의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은 없다고 똑똑한 척 말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더이상 나가지 않는 게으른 헛똑똑이들에 대항해서…… 자기 자신의 평가 능 력을 무시하는 불쌍한 자들에 대항해서." 지키멜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시오크의 얼굴이나 몸짓에선 자신감이 피어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악덕을 듣는 사람처럼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지키멜은 그 표정이 싫었다. "너는 당과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어. 평가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 을 무시하니까.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는 시모그라쥬공 또한 용서할 수 없어. 시모그라쥬공은 자기 기준에 따라 세상을 가지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전혀 평가를 하지 않아. 배가 고 프니까 먹는다와 마찬가지인 수준이야. 영역을 확장하고 빼앗는 것은 동물들도 하는 짓이지. 악독한 범죄자도 공격하지 않는 유료도로당과 무고한 사람들을 침략한 시모그라쥬공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지 만, 시오크. 네 눈으로 보면 그들은 똑같아…… 평가하지 않아. 그래 서 넌 아버지와 싸우고 시모그라쥬공과 싸운 거야. 넌 만인이 동의할 수 있는 기준에 따라 그들과 싸운 것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소리 를 하는 거지?" 시오크는 지키멜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내고는 허리를 구부렸다. 그 는 풀밭에 천천히 앉아서 두 다리를 죽 폈다. 지키멜은 서서 그를 내 려다보다가 그의 곁에 앉았다. 시오크는 손으로 눈 주위를 잠시 비비 고는 말했다. "지키멜. 나는 어떤 레콘이 자기 기준에 따라 11만 명의 타인을 '판 단'해버린 것을 보았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모를 리가 없다. 그 날 밤 키탈저 북부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서는 보다 흉흉하게 과장된 소문들이 워낙 많아서 지키멜도 특별히 조사해 보아야 했다. 11만 명이 몰살당했다는 소문 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극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는 규정할 수 없는 사태였음은 분명했다. "우습잖아? 그것은 살기 위해 먹는다는 수준 이상의 행동이었지. 정 복욕이나 번식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참으로 사람다운 일이었어.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모습이지. 하지만 그것은 끔찍했어." "시오크. 그건 끔찍한 일이지만……" "나도 알아. 어차피 평가와 평가는 부딪칠 수밖에 없어. 그 과정에 서 틀림없이 불꽃이 튀지. 나는 그 불씨를 예상하고 있었어. 심지어 그 불꽃이 원동력의 불씨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 불씨가 그렇게 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어. 나는 인간들만 생각했던 거 야. 나가들은 한계선 이북으로 올라오지 않고, 도깨비들은 친절하지. 하지만 그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어. 레콘이 있었던 거야." 시오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키멜은 그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그가 계속 말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제국은 레콘을 포함했어. 그 전까지 완벽하게 그들 자신이었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레콘들이 갑자기 다른 무엇이 되었지. 그들 은 그들 자신이지만 또한 아라짓 제국의 신민도 된 거야. 그건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인데 나는 그들을 간과했어. 어떻게 그랬는지 모 르겠어. 그 일은 며칠 전 키탈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어. 8년 전 에 이미 징조가 있었어." "8년 전?" "지멘. 황제사냥꾼 지멘 말이야." 시오크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신경을 거스르는 웃음이었다. "아마도 레콘의 숙원에 관여하지 말라는 오래된 조언 때문에…… 레 콘이 숙원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필요한 만큼 신경쓰지 않았어. 그것은 불가능할 거라는 선입견도 있었지. 달 을 따겠다는 사람 때문에 등잔 사업에 투자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가 정말 달을 따버리면?" 시오크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는 약간 충혈된 눈으 로 황혼으로 물드는 하늘을 노려보았다. "가능성은 잠시 접어두고 생각해보자고. 황제사냥꾼이 정말 황제를 사냥해버리면? 그가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 일이 일어나면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는 알 수 있어. 지금 이 상황이 바로 황제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니까. 지멘은 이런 일을 벌이려고 했 던 거야. 그런데 거기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지. 제국이 레콘을 포함 한 이래 그것은 예견된 일이었어. 어쩌면 타이모가 분리주의를 주장 한 것도 이런 경우를 내다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녀가 걱정했던 것은 레콘이 아니라 제국인 거지. 제국이 레콘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레콘에게 제국이 살해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건지도 모른다고." "비약이야. 시오크.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다면 오래 전에 일 어났어야 해. 고 아라짓 왕국은 레콘 때문에 멸망하지는 않았어. 오 히려 레콘이었던 영웅왕이 그것을 만들……" 지키멜은 시오크가 할 반론을 직감하며 말을 삼켰다. 그녀가 자신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시오크는 말했다. "그래. 만든 자는 파괴할 수도 있지." "하지만, 시오크." "지금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기막힌 행운일 뿐이야. 그 것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 불행을 당한 자들은 '왜 내게!'라고 말하지. 그건 바꿔 말하면 '왜 지금!'과 마찬가지야. 따라서 이전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안심할 이유가 못돼.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 니까. 세상에 레콘이 있는 이상은 함부로 평가할 기회가 주어져선 안 돼. 어쩔 수 없어. 제국이 필요해. 레콘을 억누를 수도 있는. 그리고 제국의 기준을 모든 사람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야 해. 그러지 않으면 하나의 불씨에 온 세상이 타버릴 수도 있어." 시오크는 뒤로 누웠다.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동작을 느리게 재현하 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는 완연히 어두워진 하늘을 똑바로 바라 보던 시오크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는 그것을 알았어야 했어." 지키멜은 시오크의 속눈썹이 젖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이유 모를 서러움을 느낀 지키멜은 시오크의 가슴 위에 엎드렸다. 시오크는 그 녀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지키멜은 바위 위에 엎드리는 것처럼 느꼈 다. 옷을 사이에 두고 따스한 살과 근육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 고. 지키멜은 시오크의 몸에서 떨어지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을 모시는 사원들의 총본산인 하인샤 대사원이 어 디에 있는지는 만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을 섬기는 승려들은 아주 가끔 그 사실에서 일종의 불안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 다. 그리고 종단의 기나긴 역사에는 그 불안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사건도 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의 사원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 는 상태여야 한다는 교리 해석이 그것이다.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사원들을 총괄하는 총본산의 소재를 비밀로 한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재고의 여지가 없는 망발이다. 엄청난 비 밀 유지 비용이 소모될 테니까. 하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그 냥 외면하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게다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어려 웠다. 세상엔 그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사원이 이미 존재했다. 레콘 들을 가호하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원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미 자기 사원의 존재를 숨기는데 성공한 사제들이 있 는 이상 -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사제들 또한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장은 좀 어색하지만 - 어디에도 없는 신의 사제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비밀주의자들의 근거였다. 하지만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상식의 장애물은 비밀주의자들의 열의 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어디에도 없는 신을 모시는 하인샤 대사원 이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잘 알려져 있었다. 얼마나 잘 알려져 있 느냐 하면 파름산에 간다는 말이 하인샤 대사원에 간다는 말로 이해 될 수 있을 정도로. 따라서 한 때 규리하 변경백이었던 아이저 규리 하는 자신이 하인샤 대사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파 름산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름산의 보호 속에서 아들의 말을 듣던 아이저가 말했다. "살아와줘서 기쁘구나. 이이타." 파름산의 보호를 받고 있기에 아이저는 아들이 추적자를 데려왔을지 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설령 누군가가 이이타를 따라왔다 고 해도 감히 파름산에서 피를 뿌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이타 는 고지식하게 말했다. "추적자는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시카트가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해, 형? 형이 말한 그 레콘들 중 한 명이 따라왔을지도 모르잖 아. 그 레콘들이 비셀스를 돕는 거라면……" "따라오지 않았어." 시카트는 조금 더 반론하고 싶었지만 형과의 재회를 다툼으로 망치 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잠깐 의 침묵 후 이이타가 괴로운 어조로 말했다. "제 잘못된 판단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내가 네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 다. 그 상황에서 네 행동은 최선이었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 다는 것이지." 아이저는 누구의 잘못인지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앉아있는 산사의 객실은 작았고 그래서 제이어 솔한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힘껏 내뻗으면 주먹이 닿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제이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제이어는 여유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곁눈질로 아이저의 주 먹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며 말했다. "저는 공자님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각하." 아이저의 주먹은 그의 무릎 위에서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약속을 지킬 만한 활쏘기 실력이 없어서 실패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습니다만 약속을 지킨 것 자체에 대해서는 떳떳합니다. 저는 공자님을 지킨 겁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비셀스 규리하 잖습니까. 그것은 각하께서도 잘 아시는 일일 텐데요. 따님이 제거해 야 할 위험 요소라는 것은 규리하 낙성 당시에 각하께서 이미 내리신 결정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여기 계신 시카트 공자님이 그 일을 시 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카트는 자신의 무용담을 듣는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이저는 제이 어가 시카트에 빗대어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고 느꼈다. 아이저는 그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미 말했지. 나는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제가요?" "너는 실패를 욕망한다. 제이어 솔한. 이이타를 도우려 했다고? 천 만에. 이이타를 돕는 일에 실패하길 원했겠지!" 이이타는 눈을 번쩍 떠서는 의혹에 빠진 눈으로 제이어를 돌아보았 다. 시카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이상한 말에 대해 생각했다. 아 이저는 죽일 듯한 눈으로 제이어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곳이 하인샤 대사원이라는 것에 고마워하도록 해라. 제이어. 이 곳에서는 너를 주살할 수 없다. 게다가 사원의 손님인 내 입장에서 너를 사찰 밖으로 쫓아낼 수도 없군. 하지만 내 방에 네가 앉아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나가라! 그리고 내게 모습을 보이지 마라! 한 번만 더 네 모습을 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릴지도 모르니 까." 제이어는 볼을 조금 부풀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작은 아이저 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하지만 제이어가 몸을 일으켰기에 아이저는 꺼내려던 폭언을 다시 삼켰다. 제이어는 아이저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는 방문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간 제이어는 문을 닫기 직전 방안을 향해 말했다.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여쭐 것이 있습니다. 천경비록을 해석하는 일은 잘 되셨습니까?" 아이저는 이 대담함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왜 네게 그걸 말해줘야 하나? 당장 꺼져!" "좀 알려주셔도 좋을 텐데요. 저는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더 견디지 못한 아이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제이어는 마치 못말리는 개구쟁이 같은 동작으로 문을 닫고는 황급히 달려갔 다.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던 아이저는 콧김을 심하게 내 뿜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가 분노를 다스릴 동안 두 아들은 침묵한 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이타는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아버님. 저도 그것이 정말 궁금하군요.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이저는 입속으로 무슨 말을 조금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그래. 궁금하겠지. 결론부터 말하는 편이 좋겠구나." 하지만 아이저는 당장 말하는 대신 조금 침묵했다. 그러자 이이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이저는 아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 다.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해야겠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9. 불씨의 연가 (3) 2004/09/02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29-3 관련자료:없음 [49283]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9-02 06:11 조회:46 피를 마시는 새 29. 불씨의 연가 - 3 소리 로베자는 잠자리를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발케네를 탈출한 이 후로 그녀가 가져야 했던 잠자리는 하녀의 신분이었던 그녀가 보기에 도 보잘 것 없는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이타는 그 사실에 대해 미 안해하곤 했다. 하지만 소리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애초에 신분 상승의 기대감으로 무향의 공자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고 그 이후로 도 비슷한 종류의 기대감을 품어본 적이 없었던 소리는 자신에게 주 어지는 것들에 대해 감사할지언정 불만은 전혀 품지 않았다. 그녀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갑작스럽게 드는 불안감, 즉 이이 타가 망향의 수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여자를 포기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소리는 미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는 유서 깊은 욕망을 느끼는 소리에게 상황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외국의 정부 탈환 같은 일은 소리에겐 별까지의 거리를 재는 것만큼이나 모호하게 여겨 질 뿐이었다. 그녀가 이이타 주위에 있는 다른 자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발케네인들이 다른 지방 사람들에 비해 능숙한 것, 즉 여러 가지 사소한 도둑질의 기술을 조금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 만 헤어릿 에렉스가 있는 이상 소리는 자신의 재주를 뽐낼 수 없었 다. 게다가 그녀의 재주는 어차피 사소한 것이었다. 그녀에겐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소리는 비명을 억지로 참으며 잠자리에서 벌벌 떨곤 했다. 소리에게 불면의 밤이 찾아드는 것은 대 부분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하인샤 대사원은 소리가 겪었던 어떤 잠자리와도 달랐다. 소 리는 새로운 불면에 당황하여 일어나 앉았다. 소리가 느낀 불편함은 지나치게 잘 완성된 건물들에서 느낄 수 있는 거부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인샤 대사원은 아름답지만 완성미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긴 세월 동안 증축과 개축을 거듭해온 경내는 소 규모 부락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방대하고 게다가 산에 기대어 건설 되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움은 입체적이다. 사람에게 자신을 경배하라 고 외치는 듯한 거만한 건물들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 대사원의 건물은 사람에게 잘 길들어 있었다. 소리는 건물 자 체에는 아무런 불만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소리의 불편함은 같 은 건물 내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인한 것이리라. 소리는 이이타 가 그렇게 불러야 한다면서 가르쳐준 이름을 떠올렸다. '스님들.' 머리를 박박 깎고 있는 하인샤 대사원의 승려들. 소리는 그 사람들 이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전 부터 알고 있었지만 종교적인 사람들이라 하기 어려운 발케네인의 한 사람으로서 소리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이타는 그 대머리들이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보내는 것은 존경이면 충분하다는 식 으로 행동했다. 공자의 뜻이 그러하기에 소리는 그 뜻을 따르려 했지 만 생경함과 그것에 기인한 위화감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녀가 있는 곳 반경 백여 미터 내에 그런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는 것 은 소리를 꽤나 불안하게 했다. 결국 잠이 들지 못한 소리는 옆에서 잠들어 있는 헤어릿을 보다가 방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작은 암자 앞에는 개 한 마리가 뛰어놀기에도 벅차보이는 조그마한 마당이 있었다. 그 마당 끝은 축담으로 이어져 있었다. 소리는 축담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계단이 있는 쪽 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던 소리는 인기척을 느꼈다. 재빨리 몸을 돌린 소리는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다가온 사람은 박 박 깎은 머리로 보아 승려가 분명했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움직이던 승려는 소리의 모습을 보곤 주춤했다. 그는 두 손을 공손이 모아 합 장했다.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어올린 승려는 자신이 인사를 보냈던 날씬한 처녀가 멧돼지 한 마리 쯤은 간단히 해체할 수 있을 듯한 거대한 비 수를 뽑아들고 있다는 사실에 질겁했다. "아, 아가씨?" 소리는 불신감에 가득한 표정으로 승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멍한 얼굴을 했다. 조금 후 소리는 기겁하며 목례했다. "죄송합니다. 스님. 인사하신 거죠? 그러니까 손바닥 붙인 거요." "예? 예. 그렇습니다." "저를 공격하시려는 줄 알았어요." "공격이오? 손바닥을 붙이는 것 어떻게 공격이 됩니까?" 소리는 설명하려다가 직접 보여주겠다는 듯이 비수를 손바닥 위에 칼날이 손목 쪽을 향하도록 얹었다. 그녀는 가슴 앞에서 두 손바닥을 붙였고 그러자 승려들의 합장과 똑같은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소리 는 그 자세에서 손을 더 비틀어 손끝이 가슴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소리는 두 개의 미닫이문을 재빨리 열듯 두 팔을 바깥쪽으로 세차게 펼쳐냈다. 그러자 그녀의 두 손바닥 사이에서 비수가 튀어나 왔다. 그것이 나무에 날아가 부딪히는 것을 본 승려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쪼르르 달려가서 떨어진 비수를 주워든 소리는 겸연쩍은 얼굴로 말 했다. "제 칼은 투검용이 아니라서 박히진 않네요. 하지만 그런 용도로 만 든 칼이 있으면 더 잘 보여드릴 수 있어요. 이건 어디 앉아있을 때 쓰는 투검술이에요. 턱 받치는 척하다가 재빨리 날릴 수 있거든요." "아, 예. 아가씨는 군인이신가 보군요." "아니오. 발케네인이에요." "그렇습니까? 큰 실례의 말이 될 것 같습니다만 이해가 되는군요. 하지만 저는 발케네에 갈 땐 합장을 조심하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요." "제가 워낙 무식해서 그래요. 스님들의 인사하는 방법도 잘 몰라서. 정말 죄송해요." 승려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파지트 대선이며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졸려서 잠시 산책을 나온 길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때는 지나치게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잡생각이 끊이지 않는데 책만 펼치면 곧 몽롱해지는 땡초입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저는 소리 로베자입니다. 이이타 공자님과 함께 왔어요. 저도 잠이 안 와서, 음, 예. 산책 나온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으십니까? 예. 괜찮으시다면 제가 경내를 안내하도록 해 주십시오. 절대로 농담하는 것이 아닌데, 잘못하면 길을 잃어버릴 수 도 있습니다." 파지트 대선은 소리가 산책하다가 누군가에게 칼을 날려보낼까봐 걱 정되기도 한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던 소리는 대선 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외풍이 없는 방안에서 촛불이 기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벽에서 그 림자들이 우쭐우쭐 춤을 춘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엿듣고 있는 듯한 느낌에 아이저는 주위를 흘끔 둘러보았다. 그러나 방안에는 그들 세 부자뿐이었다. 아이저는 이이타에게 묻는 눈을 보냈다. '헤어릿 에렉 스가 이곳에 있진 않겠지?' 이이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그 럴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열띤 어조로 말했 다. "먼저 우리의 가정을 다시 떠올려보도록 하자. 기억나느냐?" "기억합니다. 널리 알려져 있기로 대호왕의 하텐그라쥬 탈출을 도왔 던 하늘치는 제신에 의해 그곳에 간 것이고 킬소 펜, 주키 네미, 막 타드 신뷰레, 그리고 오레놀 대덕은 때마침 그곳에 타고 있었을 뿐이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욕을 불러일으킨 전설적인 사건이다. 북부가 나가들의 공격 앞에 궤멸의 위기에 빠졌을 때, 수백 년만에 돌아온 북부의 왕은 퇴로를 돌보지 않는 직선적인 공격으로 키보렌 깊숙이 쳐들어가 기어코 하텐그라쥬를 정복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대호왕과 그녀의 군사들은 적의 한가운데 갇히게 되었다. 왕과 왕의 용감한 전사들은 비장한 심정으로 자신들이 믿을 수 없는 승리와 함 께 자신의 파멸 또한 성취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때 그들의 머 리 위로 하늘치 한 마리가 도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왕과 왕의 전 사들은 하늘치의 등에 올라 키보렌을 빠져나왔다. 거기엔 위대한 승 리도, 스스로 선택한 파멸도, 믿을 수 없는 기적도, 그리고 통쾌한 대탈주도 있었다. 예술가들이 흥분한 것은 당연하다. 하늘을 올려다 보는 대호왕과 그곳에서 내려오는 하늘치의 모습을 그린 화가들은 얼 마나 많았고 그 광경을 노래한 노랫꾼은 또 얼마나 많던가. 그 이야 기를 하는 이이타의 목소리 또한 흥분 때문에 약간 울렸다.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널리 알려진 것과 다른 방식으로 그 사건을 설명할 수 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하늘치를 움직인 것은 대호왕을 가호하는 제신이 아니라 그 등에 타고 있던 네 사람 중 한 명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왜냐 하면 우리 시대에도 혼자서 하늘치를 움 직인 사람이, 신이 아닌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리고 그 가정은 사실이었다." "역시 오레놀 대덕이었습니까?" "그래.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원래 참관자 자격으로 바이소 계곡에 간 것이었고 그가 하늘치에 올라가게 된 것은 발굴대원에 결원이 생 겼기 때문이다. 반강제로 끌려올라갔다는 희극적인 상황 때문에 오레 놀 대덕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우리는 킬소 펜, 막타드 신뷰 레, 주키 네미 등은 진짜 모험가이고 오레놀 대덕은 모험의 '모'자도 모르는 승려이면서 운이 좋아서 그 영광의 자리에 함께 설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하인샤 대사원에서 와서 확인해본 결과 나 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세 명의 하늘치 발 굴대원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용감한 모험가들이었다. 하지만 희극적 인 역할로 알려졌던 오레놀 대덕은 진짜 천재였다. 종단의 역사를 통 틀어 그처럼 빨리 대덕의 법계를 받은 사람은 그 이전에도, 그 후에 도 없었다고들 하더구나. 하늘치 위에 올라가자마자 그것을 움직이는 방법을 알아낸 것은 바로 오레놀 대덕이었을 것이다." "그 분이 천재라는 이유만으로 그 분이 하늘치를 움직였을 거라 확 신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하지만 오레놀 대덕은 직접 그 사실을 고백했다." 이이타는 눈을 부릅떴다. 아이저는 두 손을 서로 움켜쥐었다. "그는 이미 입적했지만 그와 함께 수행하던 승려들은 아직 건재하 지. 그들 중 한 명이 오레놀 선사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라수 규리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선사는 그런 이야기를 했던 모 양이야. 자신은 천재가 아니며 라수 규리하야말로 진짜 천재라고. 라 수 규리하는 자신이 힘겹게 알아낸 하늘치 조종법을 간단히 이해했다 고." "그랬군요. 그렇다면 오레놀 대덕이 하늘치를 조종하여 하텐그라쥬 로 간 것이고…… 거기에 있던 또 한 명의 천재가 그 하늘치를 건네 받아 왕과 병사들을 탈출시킨 것이군요. 그리고 그 두 번째 천재는 천경비록을 남겼고." 이이타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렇다면 첫 번째 천재는 두 번째 천재의 난문을 이해할 수 있겠군 요. 선사가 남겨둔 기록이 있습니까?" "있기는 있지만 모두 신학이나 교리에 대한 것뿐이다. 하늘치에 대 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그래서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승려 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뭔가 찾아내신 것이 있습니까?" 아이저는 잠시 수염을 쓰다듬고는 조금 엉뚱하게 들리는 말을 꺼냈 다. "도깨비들의 수수께끼가 있지. 언제나 헤어진 후에야 그 이름을 떠 올릴 수 있는 오래된 친구가 누구지?" 이이타는 그 수수께끼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밤의 다섯째 딸입니다. 꿈은 매일밤 만날 수 있는 오래된 친구지만 만나고 있는 동안은, 그러니까 잠들어 있는 동안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야 그것이 꿈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시카트가 오랜 침묵을 깨고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형. 하늘치 최초 등정자이기 때문에 오레놀 선사는 하늘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요구받았어. 그런데 선사는 그 때마다 그 수수께끼를 말했대." "그래? 꿈과 하늘치가 무슨 관련이 있지?" "생각해봐, 형. 비셀스가 어디에서 자랐는지." "뭐?" "비셀스는 좋은 꿈 꿨냐는 말로 서로 인사하고 잠을 잘 자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랐어." 이이타는 움찔하고는 침묵에 빠졌다. 시카트가 암시하려는 것처럼 오레놀과 비셀스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오레놀은 꿈에 대 해 이야기했고 비셀스는 꿈을 사랑하는 자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리 고 그들은 모두 혼자서 하늘치를 움직였다. 아이저가 말했다. "꿈의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다는 거지." 이이타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갑자기 몸을 경직시켰다. "환상계단도……!" "그래. 자기만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환상계단은 꿈 과 비슷하지. 그리고 자기만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그렇지." 파지트 대선은 뒤통수를 슬쩍 긁적였다. "저희들이 하는 일이오? 바보가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예? 바보요? 공부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공부하는 사람은 보통 학자나 학생이라고 부르지요. 저희들이 하는 공부는 좀 다릅니다. 저희들은 되도록 잊어버리려 노 력합니다." 소리는 참 괴상한 말도 다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두운 계단에 집중하느라 소리는 조금 후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왜 잊어버리시는데요? 저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들 이 있긴 있어요. 하지만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했으면 좋 겠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아주아주 많아요. 수백 개도 넘을 거예요." 파지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잊고 싶지 않으십니까?" "언니요." "혹시……" "예. 죽었어요." "그런가요. 안됐군요." "저는 언니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스님은 그런 사람 없나요?" 파지트는 손을 들어 '저곳은 이주무 선사의 무구들이 보관된 벽월암 입니다. 무기에 관심이 많으실 테니 보여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 이 늦어 그러기 어렵군요. 조심하십시오. 이곳엔 이끼가 있어서 미끄 럽습니다.'라고 말한 후에야 소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제게도 어린 시절에 홍역으로 죽은 남동생이 하나 있지요.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있고." "그 분들을 잊고 싶으세요?" "아니오. 잊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잊어버리려 애쓰신다고 하셨잖아요." "잊어버려야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파지트는 곤혹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제 박약한 말솜씨로 말도 안되는 설명을 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소리. 우리는 어디에도 없는 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없 는 신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분명히 계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녁은 잘 드셨습니까?" "예? 예. 먹었어요." "저도 잘 먹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먹은 음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라졌을까요? 아니오. 아마 제 피와 살이 되는 중일 겁니다. 음. 어 쩌면 그 중 일부는 똥오줌이 되고 있는 중일 테고요. 설명이 좀 뭣해 서 죄송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 때 음식이라고 불렸던 무 엇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은 없어지지 않고 다른 것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 예." "음식은 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죽고나면 어떻게 될까요. 제 시체는 썩어서 흙이 될 겁니다. 이제 좀 복잡하게 나눠볼까요. 제 팔 이었던 부분의 흙은 어떤 풀잎에게 흡수된 다음 토끼에게 먹힙니다. 제 다리였던 부분의 흙은 어떤 버섯에게 흡수된 다음 돼지에게 먹힙 니다. 그리고 제 머리였던 부분의 흙은 지렁이에게 먹힙니다. 저는 흙, 풀잎, 버섯, 토끼, 돼지, 지렁이 등이 되는 거죠. 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것들이 되지요. 만물은 이런 것이 되었다가 흩 어져 저런 것이 되었다가 다시 모여서 그런 것이 되었다를 반복합니 다. 파지트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사실 다른 무엇들이었고, 또 다른 무엇들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들과 구분되는 절대적인 파지트는 없습니다. 그리고 파지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 엇인가를 가리켜 무엇이다라고 말해도 그것은 다른 것들이었고 또 다 른 것들이 될 겁니다. 저희들은 그것을 가리켜 비어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없으면서 있는 것입니다." "우…… 와." "상당히 두서 없는 제 설명을 대강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 은 모든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요? 예. 저 도 그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느낍니다. 왜냐 하면 저는 충분히 잊 지 못했거든요. 저는 아직도 파지트를 잊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다른 것들이었고 다른 것들이 될 텐데도 말입니다. 저희들이 잊으려 애쓰는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영이 있잖아요." "중요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소리는 약간의 우쭐함을 느끼며 말했다. "파지트 스님이 돌아가셔도 스님의 영은 다른 것으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을 거예요. 토끼가 되고 지렁이가 되고 하는 것은 파지트 스님의 육이잖아요. 그렇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영의 세계에서도 육의 세계와 똑같은 일이 일어 납니다. 육 없이 영뿐인 도깨비의 어르신들도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 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음……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는 편 이 좋겠군요." "왜요? 재미있게 들리는데요." 파지트 대선은 조금 더 생각해보면 무섭다고 느낄 테고 그 후에는 허무하다고 느낄 것이며 한참 더 고뇌한 후에야 간신히 허무에서 빠 져나올 수 있는데, 그 허무 탈출은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알 기 어렵기 때문에 조심하는 거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제가 부족해서 점점 이상한 말을 스스로 만들어낼 것 같아서요. 그 리고 젊은 당신에게는 죽은 다음의 일보다는 즐겁게 사는 것이 더 중 요합니다. 산사에 틀어박혀 있어서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고는 도통 모르는 땡초에게 당신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습니까?" 소리는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웃었다. "말씀드려도 잊어버리실 거잖아요." "불쌍하게도 저는 잊고 싶다고 해서 당장 잊어버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파지트는 짐짓 가슴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소리는 말해도 나쁠 것 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발케네를 떠나온 이래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물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던 소녀는 그것을 느끼기로 했다. "대선님의 말대로라면 그 전에 토끼나 지렁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암살성에서 일하는 하녀였어요……" 많은 밤바람이 산사를 스치며 웅웅거렸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밤새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던 이이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하늘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꿈이란 말씀입니까? 하지 만 저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꿈이 아니라 꿈꿀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니, 꿈 속에서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라고 해야겠군. 이이타.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참 황당한 꿈도 다 꾸었다고 말하며 웃을 수도 있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다고 느 끼지 않지. 하늘누리가 있기 전까지 사람들은 허공을 걷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상상을 했다면 하늘치 정복은 꽤 오래 전에 이루어졌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말이 안되니까. 아무도 그런 일을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하 늘치에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환상계단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모두가 믿고 있고 그래서 상상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 사람은 허공을 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늘치를 움직일 수도 있다고 생각 하면 어떨까. 한 점의 의심 없이 그것을 믿는다면?" "움직일 수 있게 됩니까? 하지만 그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한 가지 도움될 것이 있다 "그게 뭡니까?" 아이저는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것은 천경비록이었다. 하지만 이이 타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낡은 모습이었다. 얼마나 책을 넘겼는지 책 가장자리는 울어서 두꺼워져 있었고 그 표지는 날강날강 했다. 이이타는 아버지가 그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알 것 같다 고 생각해다. "천경비록을 거푸 읽은 후에 깨달은 것이다. 환상계단은 그것을 상 상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준다고 하지. 하지만 하늘치가 없는 곳에서 는 환상계단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환상계단은 하늘치에게 속해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환상계단은 그것을 상상한 사람과, 또 하늘치 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만야…… 네가 환상계단 대신 하늘치의 다리를 상상한 다음 그 다리를 움직이려 한다면 하늘치는 다리 달린 생물처럼 걸을지도 모르지." 그 낡은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이타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종증조부님은 왜 그 책을 쓰셨을까요?" 이이타는 자신의 질문에 조금 놀랐다. "이 책을 쓴 이유?" "아…… 예.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그 책이 하늘누리의 비밀을 담 고 있다면 그것은 알아보기 쉽게 쓰여져서 황제의 손에 맡겨졌어야 합니다. 그러면 황제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 책은 알아 보기 어렵게 쓰여져서 우리 가문에 맡겨졌습니다. 종증조부님은 자신 의 후손들이 언젠가 하늘누리에 대적하게 될 것을 짐작하셨던 걸까 요?" 아이저는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던 것인지도 모르지. 이 책에는 집필 이유 같은 것은 쓰여있 지 않더군. 그리고 나는 행간에서 그 의도를 읽어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종증조부님은 황제나 제국보다 가문에 우선 순위를 두셨을 까요?" "글쎄. 알 수 없지. 어쩌면 그 분은 후손 중에 이 책을 이해할 만큼 똑똑한 자가 있으면 황제를 도우라는 의미로 이 책을 어렵게 써서 남 겨두신 것인지도 모르지. 이이타. 지금은 이 책이 쓰여진 이유를 따 질 여유가 없군. 이 책을 이용할 생각부터 해야겠다." 이이타는 약간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저는 목소리의 높이를 조금 바꿔 화제를 전환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말했다. "하인샤 대사원 근처에 출현하는 하늘치가 하나 있다. 무슨 사고를 겪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눈이 몇 개 파괴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하늘치라고 하더군. 대사 원에 오랫동안 있어온 승려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볼 때 올해 가을 쯤에 그 하늘치가 나타날 거라고 하더군. 나는 그 하늘치가 나 타나면 내 이론을 시험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앞으로 한 달 이내엔 나타날 것이다. 내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너도 준비해두거라. 시 카트는 이미 준비하고 있다. 네가 지금 이곳으로 와서 차라리 다행이 군." 이이타는 낙담하여 말했다. "아버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건지 감도 잡 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하늘치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상상하 도록 해라. 내가 조금 전에 예를 든 하늘치의 다리 같은 것이라도 좋 고 다른 것이라도 좋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끝없이 믿어라." "그렇게 하면 됩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가 쉬도록 해라. 먼 길이었으니 피곤할 것이다." 이이타와 시카트는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 속에 서게 된 이이타는 시카트에게 무엇을 상상하고 있냐고 물었다. 시카트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버님은 다리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지만 난 좀 회의적이야. 형. 하늘치는 정말 물고기처럼 보인다고. 물고기에 다리가 달리면 얼마나 어색하게 보이겠어? 그건 상상하기 어려울 거야. 머리속으로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 거라고." "그래서?" "그건 물고기야…… 그래서 나는 낚싯대를 생각하고 있어. 응? 왜?" 시카트는 이이타의 끔찍한 표정에 놀랐다. 야리키를 떠올리며 진저 리를 쳤던 이이타는 겨우 자신을 진정시켰다. "물고기니까 낚싯대라는 거야?" "그래.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엄청난 크기의 낚싯대를 상상할 거야. 꿈속에서라면 낚시대로 고래를 낚아올려도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겠 지. 안 그래?" "그도 그럴 것 같군." "하지만 형은 다른 걸 상상해봐. 누구 한 사람은 성공해야 하잖아. 모두 똑같은 것을 상상할 필요는 없지." "그래. 알았어." 독행왕 지키멜 퍼스는 두 손을 깍지껴 턱을 받친 채 벽 한쪽을 멍하 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마루젤의 소품이 하나 놓여있었지만 그녀가 마루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 다가 문득 지키멜은 놀란 표정으로 팩스벗을 보았다. "언제 말을 멈췄지?" 팩스벗은 짐짓 기지개를 켜는 시늉을 해보였다. 군신간의 예의라 할 수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지만 지키멜은 그런 태도를 묵인하는 편이었 다. 그리고 팩스벗도 자주 그러지는 않았다. "아…… 예. 폐하께서 제 말을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부터입니다. 연초 한 대 피울 시간 정도는 지난 것 같군요." "아아, 미안해. 팩스벗." "괜찮습니다. 급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걱정이 많으신 것 같은데, 폐하. 제가 도와드릴 것이 없을까요?" 지키멜은 눌렸던 턱을 만지작거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팩스벗에게 자신의 고민을 말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팩스벗 외에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 다. 바로 그녀 자신. 지키멜은 자신을 위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신념을 잃은 남자는 너무 보기 안 좋아." 팩스벗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여자? 여자는 괜찮아. 그런 면에서는 강하니까. 남자가 문제야. 워 낙 연약해서." 팩스벗은 웃음으로 동의했다. "시오크가 많이 상심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신념을 잃어버렸습니까?" "그래." 팩스벗 졸다비는 자세를 똑바로 하며 말했따. "폐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을 용서하기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만, 그가 유료도로당주로 복귀할 생각이 없다면 그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 지 못합니다." 팩스벗은 말은 부정확했다. 지키멜은 팩스벗을 용서하기 어려운 것 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팩스벗을 노 려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그가 유료도로당을 이끌며 우리를 위해 해줬던 일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이용했던 겁니 다. 폐하께서 그에게 정도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폐하. 우리 비나간은 신생국가입니다. 폐하의 지휘 아래 국 가의 건설에만 모든 역량을 기울여도 부족한 판에 국왕과 대등한 영 향력을 지녔을지도 모르는 막후 실력자 따위를 키울 여유는 없습니 다." "시오크가 그러려 한 적이 있나?" "시오크가 어떻게 처신하느냐는 상관없습니다. 그가 시오크파의 영 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키멜은 터져나오려는 노성을 억눌렀다. 그녀의 젊은이들이 불안해 하고 있었다. 팩스벗은 그들이 축출한 비나간의 구세력들이 시오크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반격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내비치고 있 었다. 그들이 그런 불안을 느꼈다면 그것은 지키멜이 그들에게 안정 감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팩스벗이 원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키멜은 자신이 그 요구를 들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팩스벗 졸다비. 짐은 짐의 통치에 누군가가 간섭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짐과 함께 이 나라를 만든 자들이 누군지 잊지 않을 것 이고 그들의 헌신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팩스벗의 얼굴에 짧은 희열이 떠올랐다. 지키멜은 속으로 다섯까지 센 다음 말했다. "하지만 짐에게 협조했던 자들이 짐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만으로 짐 을 불신할 권리를 획득했다는 식으로 행동한다면, 그 또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팩스벗은 희열을 떠올렸던 것 만큼이나 솔직하게 공포를 떠올렸다. 지키멜은 어쩔 줄 몰라하는 팩스벗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말했 다. "팩스벗. 짐을 믿었기에 짐의 대업에 동참하지 않았던가?" 팩스벗은 국왕의 면전에서 기지개를 켰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 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폐하. 저는 폐하를 신뢰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입니다." "너희들은 조금 더 여유를 보였어야 했다. 짐의 관심이 잠시 상심한 시오크에게 옮겨갔다 해서 벌써 관심을 잃은 강아지처럼 깽깽거리고 삐친 척해서는 안된단 말이다!" 팩스벗은 바닥에 엎드리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붉게 변한 그의 얼굴과 그의 이마에서 배어나오는 땀을 노려보던 지키멜은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짐에게 상심한 연인을 달랠 잠깐의 여유도 줄 수 없는가? 그래서 그를 견제하겠다면서 나서야 했는가? 그렇게 짐을 믿지 못하나? 실망 할 수밖에 없군." "폐하. 저는 다만……" 자신이 꺼내놓는 어떤 말이라도 반박과 더 큰 노성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팩스벗은 말을 삼켰다. 그는 침묵한 채 머리를 조아렸다. "침묵한 것은 좋은 결정이다. 짐이 바라는 것은 그대의 행동이니까. 짐은 그대를 벌함으로써 그대에게 더 큰 헌신을 받을 기회를 포기하 는 짓은 하지 않겠다. 짐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도록." 팩스벗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멜이 그에게 나가라 명령하 자 팩스벗은 화재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의 표정으로 황급히 방을 나 갔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29. 불씨의 연가 (4) 2004/09/03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29-4 관련자료:없음 [49285]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9-03 06:20 조회:56 피를 마시는 새 29. 불씨의 연가 - 4 문이 닫히는 것을 본 지키멜은 넌더리 난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다리를 죽 뻗어 반쯤 누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았 다. 지키멜은 신념을 잃은 남자는 보기 안 좋을 뿐만 아니라 역겨울 수 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손으로 왕국을 일으킨다는 생각에 열정 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던 팩스벗 졸다비는 이제 시오크를 주 축으로 한 다른 경쟁자들이 지키멜의 관심을 빼앗아갈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호의적으로 생각한다면 팩스벗은 국체 확립에 힘을 써야 할 시기에 소모적인 힘겨룸이 일어날까봐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 니, 그렇게 해석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지키멜은 팩스벗이 자기 밥그릇을 챙기려 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곧 지키멜은 팩스벗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짜증을 느꼈다. '내가 왜 팩스벗을 미워하게 된 거지?' 영민한 지키멜은 곧 이유를 깨달았다. '시오크야. 시오크를 감싸주려 하다 보니 팩스벗에게 날카롭게 대한 거야.' 지키멜은 우울하게 그것을 인정했다. 기진맥진한 시오크는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단지 동정심을 자 극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 부정적인 영향. 삼년 구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단지 구병의 힘겨움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병자는 단지 존재 하는 것만으로 주위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시오크는 정신적인 병자였다. 냉철하게 행동한다면 시오크를 멀리해야 한다. 그것이 위태로운 신 생국가와 그녀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고래로 군주들은 언제나 그런 결정을 내려왔다. 유료도로당주의 아들, 한 때 유료도로당을 장악했 던 남자, 그리고 군주의 연인. 구심점을 찾는 야심가들이 노릴 만한 대상으로는 완벽하다. 시오크가 위험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가 가진 것들은 위험하다. 시오크도 이해할 것이다. 그녀에 대한 것은 전부 이해하는 시오크니까. 하지만 지키멜은 시오크를 지극히 사랑했다. 지키멜은 입술을 깨물고는 두 손등으로 눈주위를 문질렀다. 울지는 않았다. 지키멜은 울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쓰라린 눈을 들어 천장 을 노려보았다. '두 왕국, 모두 지킨다.' 지키멜은 똑바로 앉았다. 그녀는 깊이 생각했다. 비나간의 현재 위 험은 무엇인가? 흑사자군이 나타남으로써 시모그라쥬공이 보내어오던 위험은 사라졌다. 하지만 흑사자군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지키멜은 엘시 에더리가 비나간군의 참전을 거부한 것을 다시 아쉽게 생각했 다. 물론 제국군과 함께 싸운다면 비나간군은 제국군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엘시에게 채무를 안겨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함께 싸웠다는 빚. 하지만 이제 그것은 불가능 하다. 지키멜은 엘시가 시모그라쥬군을 격파하고 그 외 다른 모든 세 력을 진압한 다음 귀족원 회의를 여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제국 부활은 불가능해, 이 지나치게 성능 좋은 영웅 녀석아.' 지키멜은 재빨리 결론을 내렸다. 엘시 에더리는 불가능한 목적에 자 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 끝에 자멸하도록 내버려둔다. 아까운 인물이 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다. 지키멜은 다른 경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약 시모그라쥬공이 이긴다면? 그렇다면 북진은 재개될 것이다. 그 경우엔 무엇으로 시모그라쥬군을 막아야 하는가? 지키멜은 즉각적으 로 두 개의 세력을 떠올렸다. 규리하와 발케네. 하지만 그들은 지나 치게 먼 곳에 있고 또 서로 다투고 있다. 게다가 발케네공은 규리하 에서 하늘치의 처녀에게 놀라 물러나기 전까지 시모그라쥬공과 똑같 은 행태를 보였다. 그들에 대해서는 잊는 편이 낫다. 지키멜은 고뇌에 잠긴 표정으로 다시 마루젤의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증조부 홀빈 퍼스 노후작이 마루젤에게 거금을 주고 조각하게 노후작의 흉상이다. 마루젤은 정직한 예술가였고 그래서 그 흉상에는 의뢰인을 즐겁게 할 과장 같은 것은 없었다. 지키멜은 그것 이 만들어졌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주문한 것을 받아든 노후작이 즐거워했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노후작의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탐욕스럽고 비정하고 수전노였던 증조부. 비록 죽기 직전 그는…… 갑자기 지키멜은 눈을 크게 떴다. 노후작은 증손녀가 내민 독배를 받기 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지키멜은 노후작의 마지막 말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든 즈믄누리의 지지를 얻도록 해라.' 즈믄누리? '즈믄누리는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리는 결정들과 마찬가지지. 신경 쓰지는 않지만 그냥 무시하기도 찜찜하지. 그것은 사실 엄청난 힘이 다. 백만 명의 레콘보다 강한 힘이지.' 즈믄누리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너는 정치적인 태풍이나 정치적인 지진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취급 될 거다.' 지키멜은 흥분 때문에 제멋대로 우쭐거리는 두 손을 깍지꼈다가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증조부의 흉상으로 다가가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루젤이 의뢰인의 약점과 함께 의뢰인의 장점도 표현해놓은 흉상을 마주보던 지키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는 독백처럼 말했다. "즈믄누리. 알았어요." 침착한 표정으로 편지를 들여다보던 베로시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녀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탁자를 후려쳤다. 탁자는 다리 하나 가 부러지며 옆으로 휘청 기울었다. 탁자 위의 물건들이 미끄러져 바 닥에 우당탕 쏟아졌다. 베로시는 자신의 마음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 를 듣는 듯했다. 퉁퉁 붓기 시작하는 주먹을 내버려둔 채 베로시는 짓씹는 어조로 외쳤다. "그을린발! 이 개자식아!" 군사학은 경제학과 비슷하다. 물론 좋은 경제학자가 그대로 전략가 가 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 반대 또한 불가능하다. 하지만 경제학자는 전쟁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전략은 결국 자신이 보유한 자산 - 병력의 투자 항목과 시기를 결정하는 일 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을린발은 도무지 채산성이 맞지 않는 사업 대상이다. 그의 존재는 시모그라쥬군에게 점점 압박감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시모그라쥬군이라면 가리지 않고 박살내고 있는 이 고 약한 레콘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시모그라쥬군의 총지휘관인 베로 시에게 지상 과제가 되고 있었다.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면 그을린발을 제거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 얻는 소득은 레콘 시체 한 구뿐이다. 베로시 가 그을린발에 대해 정말 전율하는 것은 그을린발의 용력이나 뛰어난 기상, 불굴의 투지가 아니라 그런 말도 안되는 채산성이었다. 그을린 발에게 투입할 수 있는 전력으로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도시 몇 개를 정복하거나, 대규모 요새를 만들거나, 하다 못해 모든 시모 그라쥬군에게 토프탈 가문의 가위 문장이 수놓아진 속옷을 지급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레콘 시체 한 구보다는 훨씬 쓸만한 것을 얻 을 수 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본다면 그을린발에 대처하는 가장 좋 은 방법은 회피하는 것이다. 베로시 토프탈은 그런 회피를 자존심 상 하는 일이라 생각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추로 쓸 수 있는 금 속이 황금 뿐이라면 추를 물속에 빠트릴 위험을 무릅쓰고 물고기 한 마리를 노리는 것보다는 낚시를 포기하고 황금으로 물고기를 잔뜩 사 는 편이 훨씬 낫다. 그건 자존심과 상관이 없는 문제다. 그런데 그을린발을 회피할 수가 없다. 흑사자군 때문에. 엘시는 꾸준히 병력을 남하시키고 있었다. 베로시는 그를 저지해야 했다. 하지만 한계선 남쪽으로 물러나 익숙한 키보렌을 전장으로 선 택하는 것은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일이 될 것이다. 한랭 적응이 되어있지 않은 시모그라쥬군은 명년 봄이 올 때까지 북상을 시도하기 어렵다. 정복한 땅을 지키며 겨울을 나야 한다. 따라서 베 로시는 남하하는 흑사자군의 앞쪽에 자신의 병력을 가져갈 수밖에 없 다. 그런데 그러면 그곳에는 반드시 그을린발이 나타나는 것이다. 백만 대군이 미끼가 되고 한 사람이 싸운다. 베로시는 무슨 전쟁이 이 모양이냐고 외치고 싶었다. 그녀는 온갖 것에 대해 대비했다. 참고할 만한 사료는 넘칠 지경이었다.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져왔던 남부의 침공과 역시 끝없이 이어져왔던 북 부의 방어를 통해 일종의 도식화가 가능할 정도의 사료가 남아있다. 규칙은 이러하다. 북부가 분열되었을 때 남부는 불을 지를 권한을 가 지게 된다. 그리고 북부는 첫 번째 빗방울이 떨어졌을 때만 폭우가 되어 남쪽으로부터의 불을 끌 수 있다. 분열. 그것을 만들기 위해 시모그라쥬공은 암살공의 요구를 받아들 여 엘시 에더리를 억류하기로 했다, 애초에 그들이 원한 것은 황제와 암살공이 서로 커다란 싸움을 벌여 제국이 혼란에 빠지는 것 정도였 다. 그런데 상황은 그 이상으로 잘 풀려갔다. 황제와 암살공이 모두 사라졌으며 그들에겐 대호왕이 왔다. 남부에게 불을 지를 기회를 선 사하는 북부의 분열이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팔디곤 토 프탈은 지체 없이 불을 질렀다. 그리고 베로시는 첫 번째 빗방울이 어디에서 나타날지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첫 번째 빗방울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무작위적이고 예상할 수 없다 는 의미에서 적절하다. 북부는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구심점이 나타 났을 때 가까스로 분열되었던 자신을 봉합하여 남부에 대항할 수 있 었다. 고 아라짓 왕국의 극연왕은 오라비가 그 자리를 고사했기에 왕 위에 오른 뜻밖의 인물이지만 강력한 공격으로 제1차 대확장 전쟁에 서 나가들이 얻은 것 대부분을 무효화시켰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당 시 사라진 왕이 돌아올 거라 예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왕은 남부 에서 온 나가라는 놀라운 형태로 나타나 북부를 이끌었다. 그리고 천 일전쟁에서 북부를 결집시킨 자가 누구보다도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 우에게 비판적이었던 괄하이드 규리하였을 거라 예상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좀 당혹스럽기까지 한 대호왕의 선양 때문에 여러 파로 분열되었던 북부는 죽은 채 싸운 충의공의 분전 아래 하나로 결집되 었다. 북부는 이렇듯 남부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하다가 뜻밖의 인 물이 돌출했을 때만 겨우 자신을 수습하여 남부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어떠한가. 제국은 사라졌다. 북부는 분열되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제국의 부활을 바라는 자들의 대표라 할 수 있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은 자신 을 주축으로 한 재건이 아니다. 그는 그 역할을 귀족원 회의에 돌리 려 한다. 그렇기에 엘시의 기적적인 능력은 제국 통합이 아닌 제국군 통합으로 나타난 것이며, 북부는 여전히 사분오열된 상태다. 독행왕 지키멜 퍼스 같은 경우는 그런 분열상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남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진군하 는 남부의 앞쪽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여기까지는 이전의 역사 를 답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똑같다. 첫 번째 빗방울이 떨어진 것이 다. 그러나 그 첫 번째 빗방울은 다른 빗방울들을 불러내리는 대신 혼자서 홍수가 되었다. 그는 단신으로 남부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그을린발, 히베리!' 그을린발은 너희들의 제국을 부수겠다고 말했고 시모그라쥬의 병력 을 모조리 파괴하는 방식으로 그 선언을 실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방식은 점점 악독하게 바뀌고 있었다. 그을린발은 자신의 경고가 대 호왕 사모 페이, 시모그라쥬공, 그리고 토프탈의 이름을 쓰는 모든 자와 그들의 친구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최근 그의 공격 은 토프탈 가문의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베로시가 조금 전에 읽다가 분노해버린 편지에는 그녀의 사촌 한 명이 당한 끔찍한 일이 적혀 있었다. 군단장이기도 한 베로시의 사촌 틀레미 토프탈은 그을린발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담당한 점령지에 있는 인공 호수에 거처를 정했 다. 호수 가운데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었고 정자와 호숫가를 연결하 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무지개다리였다. 그을린발이 쳐들어왔을 때 정자로 숨어든 틀레미는 무지개다리를 파괴하고는 자신이 안전해졌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을 살펴본 그을린발은 물러갔다가 자신의 코끼리떼와 함께 돌아왔다. 그 코끼리떼에는 무수한 기름통이 실려 있었다. 그을린발은 호수에 기름을 붓고는 불을 질렀다. 그 때문에 틀레미 토프탈은 물 위에서 불타 죽는, 토프탈 가문의 사람들뿐만 아 니라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서도 희귀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을린 발이 어디서 그 많은 기름을 구했는지 의아해하던 베로시는 틀레미 토프탈이 담당한 점령지의 특산품이 피마자유라는 것을 알고는 탁자 를 부수고 말았다. 베로시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흩어진 다른 서류들을 노려보았다. 그 중에는 아직 살아있는 토프탈 가문의 사람들이 보낸 편지들도 섞 여 있었다. 원래 그 구성원이 많지 않은 토프탈 사람들은 그을린발의 공격에 죽을 정도로 겁을 내고 있었다. 그들의 공포가 얼마나 컸던지 편지들 중에는 자포자기한 문체로 깨끗한 자살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런 심각한 내용은 고맙게도 하나뿐이었지만 엘시 에 더리와 타협하고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귀족원 회의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 고려해 보자는 내용은 제법 많았다. 제국을 얻는 길이 전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귀족원 회의에서도 대호왕과 시모그라쥬공의 영향 력이면 충분히 제위를 노려봄직하면서. '이런 바보들! 대호왕이 아니라 부활한 영웅왕이라 해도 싸움에 진 자에게 영향력 따위가 남아있을 것 같냐! 사람들은 그을린발이 아니 라 엘시가 우리를 거꾸러뜨렸다고 생각할걸. 차라리 대호왕을 포기하 고 엘시를 황제로 추대하자고 주장하지 그래?' 홧김에 소리 없이 투덜거리던 베로시는 갑자기 자신의 생각에 놀라 움찔했다. 그녀는 무너지듯 의자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대호왕과 시모그라쥬공이 영향력을 잃는 만큼 엘시 에더리의 영향력 은 늘어날 것이다. 그가 승자니까. 그렇다면 그의 황위 등극에 적극 적으로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엘시 에더리와 협상을 해볼 수도 있을 까? 베로시는 자신의 생각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 생각의 질주는 가 로막지 않았다. 만약 그런 협상에 성공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엘시에게 그을린발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장기적 으로는 시모그라쥬공의 지위와 권위를 계속 인정해 달라고 요청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베로시는 자신의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그럴 수는 없다. 만에 하나 엘시가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녀 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엘시를 마른 우물에 가두고 모욕한 사람 이 바로 그녀니까. 그리고 엘시가 정말 황위에 관심이 있다면 오히려 시모그라쥬공을 분쇄하여 자신의 위업을 보이려 할 것이다. 그에겐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협상은 불가능하다. 베로시는 새로운 증오심 으로 바닥에 떨어진 편지들을 노려보았다. 당장의 공포 때문에 이성 을 잃은 그들은 파멸의 길을 제안하고 있었다. 싸워야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그을린발을 피해 흑사자군과 싸 우느냐다. 하지만 베로시가 보기엔 사자를 피해 호랑이굴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상대는 백만 대군이고, 그것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엘시 에더리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막막한 처지에 좌 절한 베로시는 신음을 흘렸다. 그 때 바깥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고함 등이 들려왔 다. 그을린발이 쳐들어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베로시는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끔찍한 죽음의 예감에 헐떡이던 베로시 는 차라리 두 눈으로 그것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 다. 그 때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장군님! 공작님으로부터 사자가 왔습니다!" 놀란 베로시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들어오라고 외쳤다. 조금 후 몸 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부위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부위는 바 닥에 흩어져 있는 편지와 부서진 탁자 등에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베로시에게 경례했다. 그는 빨리 보고를 끝내고 잠자리를 얻 어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그래서 부위는 빠르게 보고했다. 베로시는 놀랐다. "40만이라고?" "그렇습니다. 지금 이곳을 향해 최고 속도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보 름에서 스무날 사이에 합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원군을 요청한 적이 없는데……" "공작 각하께서 결정하신 겁니다. 여기, 공작 각하께서 보내는 편지 입니다." 사자가 꺼낸 것은 두 통의 편지였다. 부위는 두 번째 편지에 대해 약간의 공경심을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폐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알았다. 수고가 많았다. 가서 쉬도록." 부위는 그 말에 만세라도 외치고 싶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베로시 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고는 천막 안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녀는 양손에 든 두 통의 편지를 보다가 먼저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의 편지를 개봉했다. 베로시는 시련이 혹 약속을 어길 경우에 대비하여 남아있던 병력과 정복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들 중 인간 병력 전부가 시모그라쥬공의 명령에 의해 그녀에게 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계선 남쪽에는 나가 병사들만 남게 되었다. 그 사실에 약간의 불안을 느꼈 지만 베로시는 군사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그녀가 그 동안 재정비한 병력과 새로 오고 있는 40만을 합치면 대략 55만은 될 것이다. 그것은 흑사자군의 백만 대군에 비하면 절반을 조금 넘는 정 도지만 싸움을 벌여볼 만한 병력은 된다. 베로시는 조금 전까지 흑사 자군의 병력에 좌절하던 것을 잊었다. '대호왕은 사만 명만 데리고 하텐그라쥬를 정복했어!' 정당한 비교라고 할 수 없다. 대호왕이 금단의 키보렌을 가로질러 하텐그라쥬를 공격할 때 데리고 있었던 병력이 불과 사만 명이라는 것은 맞다. 하지만 대호왕에게는 그녀를 돕는 신들도 있었고 마지막 용 아스화리탈도 있었다. 자신의 오류를 깨달은 베로시는 짧은 우울 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기운을 되찾았다. 비록 세력은 2 : 1 로 불리하지만 적에겐 지구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아마도 모든 병 력을 한꺼번에 쏟아부으려 할 텐데 백만 명이 한 장소에 집중되면 백 만 명의 힘을 내기 어렵다. 그것은 지나치게 많은 숫자니까. 베로시 는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며 대호왕의 편지를 개봉했다. 상장군 베로시 토프탈은 보라. 눈앞에 있는 강대한 적과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의무 때문에 그대는 지금 두려울 것이다. 오십 여년 전 그 누구 도 정복하지 못했던 키보렌을 앞에 둔 짐도 그러했다. 물 론 짐에겐 도움을 주신 신들이 계셨지만 짐의 적 또한 신 의 힘을 훔쳐 쓰고 있었다. 짐에겐 용이 있었지만 짐의 적 은 용을 멸종시킬 뻔한 자들이었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는 듯한 내용에 베로시는 놀랐다. 그녀는 정 신없이 편지에 몰두했다. 그런 상황에서, 짐은 승리와 패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 지 않기로 했다. 다만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용감한 이는 한 번 죽어 영원히 살고, 용렬한 이는 영원히 죽지 않으려 하다가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 도 때가 되면 죽고 도깨비의 어르신들도 영원하지는 않다. 영원한 여름의 땅 키보렌에서도 피어난 꽃은 언젠가 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꽃의 향기는 그윽하다. 그 꽃이 훌륭히 살았기에. 승패를 생각하지 마라. 적이 앞에 있을 뿐이다. 그대의 칼을 들어라. 싸우라. 그리하여 그대의 적으로 하여금 그 대를 두려워하게 하라. 언젠가 식을 춤채라 하더라도 그것이 뜨거운 동안에는 춤 을 추어라. 뜨겁게 춤추라. 그대의 왕 사모 페이로부터. 베로시는 사모 페이의 편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베 로시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접어 가슴에 대고 눌렀다. 한참 동안 그녀 는 그런 모습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억시니 장군은 지금껏 의도적으로 대호왕에 대해 생각하길 거부해 왔다. 그 생각들이 갑작스럽게 그녀의 내부로 밀려들어왔다. 그 늙은 나가는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위대한 지도자였다. 살아서 신화가 된 자였다. 베로시는 그 모든 해석에 동의했으며 또한 냉소해왔다. 그런 화려한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제 베로시는 그녀가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다가올 전투를 기다리곤 하던 외로운 군인이기도 했음을 깨달았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그 순간 베로시는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이나 다른 토프탈 가문의 사람들 그 누구보다도 사모 페이와 강렬한 동질감을 느꼈다. 다른 자 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어깨를 떨며 사선(死線)에 서 본 적이 없다. 북부의 운명을 걸고 싸웠던 사모 페이를 제외한 다른 자들은. 베로시는 속삭였다. "왕이시여. 저는 춤을 추겠습니다." 베로시는 재빨리 탁자를 붙잡아 똑바로 세웠다. 하지만 부러진 다리 때문에 탁자는 다시 기울었다. 베로시는 탁자를 저멀리 밀어버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친척들의 편지를 환멸스럽 다는 얼굴로 밀어내고는 지도와 보고서들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것 을 뒤적거리며 고도의 집중력으로 생각했다. 무려 반 시간의 고민 후 베로시는 자신의 전장을 결정했다. 그곳은 한 때 대호왕이 섰던 곳이기도 하다. "엔거 평원입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불안감이나 공포 가 아닌 다른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목소리를 낮추게 했다. 제2차 대확 장 전쟁 당시 대호왕의 키보렌 침공이 시작된 곳이 바로 엔거 평원이 었다. 북부의 대부분 지역이 나가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을 때 라수 규 리하는 오히려 한계선 가까운 남쪽의 엔거를 전장으로 삼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한계선을 돌파하여 하텐그라쥬까지 밀고 내려갔다. 엔거는 그 전설적인 진격이 시작된 장소였다. 다른 사람들 또한 엔거 평원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느라 잠 시 침묵했다. 시허릭은 엘시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며 상석 에 앉아있는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엘시 에더리의 눈길은 지도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곳에 있지 않 은 다른 무엇을 보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그가 엔거에서 승리를 거 둘 방법을, 그리고 그 후에 시행될 장대한 전략에 대해 고민하는 거 라 판단한 시허릭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시허릭이나 다른 참석자들이 엘시의 상태를 정확히 알았다면 아마 크게 당황하거나 실망했을 것이다. 대장군은 그와 같은 위대한 인물 에게나 어울릴 원대한 계획 같은 것을 숙고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졸고 있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존다기보다는…… "대장군님은 또 자고 있기도 하고 안 자고 있기도 한 거예요?" "비슷해요." "여기는 회의 중인 것 같은데.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그러게 말이에요." "여기는 어디죠?" "엔거죠. 대호왕의 위대한 남진이 시작된 유서 깊은 땅인 엔거 평원 은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어요." 엘시는 무수히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소녀가 있는 곳은 지도가 놓인 탁자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그리고 탁자는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소녀와 탁자는 서로 무관하게 있었다. 많은 얼굴이 있었지만 엘시는 그 소녀를 안다고 생각했다. 엘시는 그 소녀 를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에 만났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엘시는 알 수 없었다. 그 소녀가 말했다. "그 이야기 알아요. 엔거와 엔거 평원은 서로 떨어진 곳에 있지요. 원래 존재하던 엔거는 복수왕이 반역자 기로인을 처벌하면서 파괴했 고, 그래서 엔거였던 곳은 엔거 평원이 되었지요. 그리고 지금의 엔 거는 좀 떨어진 곳에 있고요." "이 사람도 그 생각을 하는군요." "무슨 생각이오?" "원래 아라짓 제국은 파괴되었고 아라짓 평원이 남았다. 역사가 반 복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새 아라짓은 원래의 아라짓과 상관 없는 곳에 생길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연상이군요. 엔거 평원이 라는 말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을 보니 상당히 감상적인 상태인 가 봐요." "왜 감상적이지요?" "자기 죄를 도둑맞았거든요." "죄?" "규리하를 떠난 이래 지금까지 대장군은 피에 젖은 발자국을 뒤에 남길 필요가 없었지요. 그에게 가장 크게 저항했던 하스마 빌 상장군 의 호두나무 군단을 합류시킬 때도 전투라고 말하기도 뭣한 사상자만 내고 규합에 성공했지요. 민들레 여단을 합류시킬 때는 단 한 사람만 죽었지요. 게다가 이 사람이 죽인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대장군은 백 명도 죽이지 않고 백만 대군을 규합시킬 수 있었어요. 하지만 시 모그라쥬군은 합류의 대상이 아니고 전쟁의 대상이었어요. 이 사람은 드디어 제국을 위해 제국민들을 학살한다는 모순에 빠질 수 있게 된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이 그 모순에 빠져들기 직전, 하늘에서 뚝 떨어 진 것이 아닌가 싶은 모습으로 레콘 한 명이 나타났어요. 그 레콘은 황제를 사냥하겠다던 지멘처럼 토프탈 가문의 모든 것을 부수기로 결 정한 레콘이었지요. 그래서 레콘은 시모그라쥬군을 학살하기 시작했 지요. 바로 엘시가 해야 할 일을 가져가버린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은 그 모순에 빠지지 않게 된 건가요?" "예. 그래서 이 사람은 그 레콘에게 화가 나있어요." "이상하군요. 자신이 모순에 빠지지 않게 되었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사람도 겉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모든 장병들을 대신하여 그 레콘에게 고마워할 거예요. 하지만 속으로는 정반대죠." "이 사람이…… 살인마인가요?" "천만에요." "그러면 왜?" "정우. 당신은 규리하를 사랑하나요?" 엘시는 갑자기 현실을 느꼈다. 꽤나 향기로운 방식으로. 엘시를 현 실로 끌어온 것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풍기는 말 냄새와 양파 냄 새였다. 그러나 엘시는 곧장 현실로 이행하는 대신 현실의 관찰력을 얻었다. 엘시는 그녀를 보았고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것은 정우 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우가 아니었다. 아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 는 누군가였다. 엘시는 의심에 빠졌다. 정우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 도 하며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한 사람이기도 한 여자가 말했 다. "……사랑하고 싶어요." "이 사람도 그래요. 제국을 사랑하고 싶어하죠. 그래서 모순을 저질 러야 해요. 자신을 파괴해야 해요. 피를 마셔야 해요.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죠." 탁자가 왜 말을 하고 있지? 엘시는 지도가 놓여있는 탁자를 보았다. 엘시는 자신이 왜 탁자가 말을 한다고 느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후 엘시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엘시가 기억하는 것은 어쩐지 불편 하고 어두운 감정뿐이었다. 엘시는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설명하기로 했다. 그리고 엘시는 설명을 찾아내었다. 그는 엔거에서 벌어질 전투와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고민하느라 그런 감정 을 느낀 것이다. 엘시는 목이 약간 타는 듯한 느낌 속에서 말했다. "큰 싸움이 되겠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동의했다. "이 싸움에 승리한다면 제국은 부활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 제국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자 연스럽게 귀족원 회의가 열릴 겁니다. 그리고 저는 마침내 장제…… 사가 될 수 있겠지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은퇴 후 계획에 대해 알고 있는 흑사자군 장교들은 빙긋 웃었다. 그들 중 몇몇은 상장군의 말에 묘한 얼룩 같 은 것이 묻어있음을 느꼈지만 그 사실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 다. 시허릭도 자신의 말에서 특별한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 서 그들은 잠시 편자에 대한 잡담을 나누었다. 잡담을 중단시키고 회 의를 재개한 사람은 민들레 여단의 히도큰 하장군이었다. "어느 부대를 선봉으로 생각하고 있지, 엘시? 민들레 여단이지?" 히도큰은 초조함을 꾸밈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을린발의 활약이 커질수록 그의 초조함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엘시는 그가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민들레 여단의 반쯤 미친 병사들은 그을린발에 대해 화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엘시가 '레콘은 그을린발 하나면 충분하니 민들레 여단은 절망도를 지키러 돌아가라'고 말할까 봐 무서워하고 있었다. 물론 엘시는 꿈에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 가 제국군을 규합한 것은 준동하는 야심가들과 싸우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제국군이 그런 야심가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 기도 하다. 만약 민들레 여단을 민들레 요새로 돌려보낸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나오게 해주겠다고 말하는 자를 따라가버릴지도 모른다. "민들레 여단이라면 적의 예봉을 꺾고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군은 그 경우에 대비하여 소 화차를 전진배치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을 예비대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그 생각은 해봤어. 대장군. 하지만 전진배치하지는 않을 거 야. 그러면 기병들의 공격에 간단히 파괴될 테니까. 아마 우리들이 우회기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양익에 배치할 테지." "양익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적도 제국군입니다. 레콘 병 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면 어렵잖게 좌우로 물러나며 소화차로 포위 진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 전에 사령부를 박살내면 돼. 아니면 뚫고 지나가든가." 시허릭이 어림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히도큰 하장군. 귀관의 용맹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귀관의 부하들 이 그런 위험한 계획을 받아들일 것 같나? 조금의 지체라도 있으면 당장 소화차들에 포위당할지도 모르는데?" 그 질문을 예상하고 있던 히도큰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받아들이게 하겠어." 시허릭은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히도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선봉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 이 무익한 전쟁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이번엔 시허릭의 표정이 모든 회의 참석자들에게서 떠올랐다. 엘시 역시 그들이 동의하리라 믿지 않았기에 계속 말했다. "그리고 엔거 평원에서 싸운다 하더라도 진형에 대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더 수집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 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논의해야 되는 것은…… 저게 무슨 소리지?" 엘시는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 다. 엘시의 말처럼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꽤 희미했지만 자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느릿한 장단이 있는 소리였다.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보던 장교들 가 운데 한 명이 말했다. "아, 저건 그을린발의 노래입니다." "노래?" "예. 코끼리들에게 가끔 불러주는 노래입니다. 그와 코끼리들이 머 무는 곳이 저희 군단 숙영지 근처라서 몇 번 들었습니다. 원래 작게 부르는 편이라서 가까운 곳에 있어야 들리는데 오늘밤은 소리가 꽤 멀리 퍼지는 모양이군요." "코끼리들에게 왜 노래를 불러주는 거지?" "코끼리들이 좋아한다더군요. 제 생각엔 자장가 비슷한 것인 듯합니 다." 깊은 밤 별빛 아래에 침묵한 채 서있는 코끼리떼와 그 무리를 향해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 코끼리 목동에 대해 생각한 장교들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에는 묘하게 서정적이면서 희극적이었다. 미소를 짓지 않는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그을린발을 좋아하기 힘든 히도큰 상장군은 벼슬을 꿈틀거리며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엘시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노래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 라보다가 다시 회의를 진행시켰다. =============================================================== 29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30. 바람의 탄주, 돌의 춤 - 1 두억시니에겐 법이 없다.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받을 필요가 없는 존경과 찬양을 잊어버리고 바라보라. 법은 평 균값이다. 법은 서로 다름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법은 탄생한 순간부터 사냥꾼이다. 그것은 자신을 유일무 이한 길잡이로 삼아 자신을 잉태한 지고한 차이를 추적한 다. 차이에서 나왔지만 법은 자신을 잉태한 차이를 모욕하 고 억압하는 폭군이 된다. 두억시니는 그런 전복을 겪지 않는다. - 황제의 의지가 제국법 위에 놓이는 것에 반대한 법리학자들에게 한 원시제의 말 中. 모디사 헨로는 자신이 한 마디 말로 만물을 통제할 수 있다는 듯이 굴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카리 빌파 한 명도 통제하지 못했다. 스카리는 그가 어릴 적 잃은 어머니가 되어주겠다는 듯이 행동하는 모디사를 기막힌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스카리가 설령 모친에 대한 상실감을 아직 가지고 있다 해도 그건 딱지를 떼어낼 수 있는 상처가 아니라 건드려도 아무 느낌이 없는 오래된 흉터에 불과할 것이다. 그 리고 만약 그에게 갑자기 어머니가 필요해진다 해도 그의 마음 속 신 전에 모디사 헨로를 자애로운 어머니상으로 봉안할 생각은 없었다. 장하다느니 자랑스럽다느니, 마치 스카리가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해 낸 소년인 양 과장되게 따스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디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스카리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그대가 전쟁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군. 더 자세한 것이 알고 싶다면 팔리탐에게 물어보라. 그가 잘 설명해줄 것이다. 더 할 말이 없는가, 자작부인?" 모디사는 아들에게 제발 나서지도, 참견하지도 말라는 말을 들은 어 머니의 표정을 정확히 지어보였다. 스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자신이 그룸성에 돌아와 아직 옷도 갈아 입지 못한 상태임을 알려주기 위해 스카리는 어깨에 쌓인 먼지를 거 칠게 털어냈다. 스카리의 소망대로 먼지 구름이 모디사를 질식사시키 지는 않았지만 장갑으로 어깨를 때리는 것은 채찍질을 연상시키는 모 습과 강렬한 소리로 모디사의 입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았다. "할 말이 있다 해도 지금은 곤란하군. 그대의 딸을 만나야 하니까. 나는 그대가 딸과 함께 올 거라 생각했는데." 모디사는 자신을 추슬렀다. "젊은 군주여. 집에 돌아와도 반갑게 맞이해주고 아들의 성취에 가 장 큰 찬사를 보내어줄 가족이 없어 제 부족한 여식을 찾으시는 모습 을 보니 제 마음이 미어집니다. 그 어리석은 것이 공작님께 위안을 드릴 수 있기를 저도 간절히 바랍니다만, 공작님께서 가장 잘 아시겠 지만 제 미욱한 딸은 군의 추상 같은 기강도 제대로 알지 못해 사사 로이 편지를 영외로 반출하는 황당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공작님의 노고와 위업을 제대로 이해할 리 없는 그 애는 공작님을 칭송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무지로 공작님을 불쾌하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 이 한 일을 몰라주는 것만큼 불쾌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것이 필부필부의 일이 아니라 발케네의 위대한 군주만이 할 수 있 는 영용한 일이라면 그것은 불쾌함을 넘어 죄악이 될 것입니다. 부디 조금의 시간만 허락해주십시오. 제가 그 애에게 가장 정당한 말들로 공작님을 칭송할 수 있도록……" "그대의 추측을 내가 확인해주지." "예?" "내가 부냐를 만나면 짜증이 날 거라고 예견하지 않았나? 정말 그런 지 확인해보고 알려주지." 자작부인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딸을 어지간히도 믿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스카리는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모디사가 황급 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사실 그 애가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공작님을 뵐 형편이 아닙니다. 공작님께서 성에 돌아오셨는데도 밖으로 나와 공작님을 맞이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부냐가 아프다고? 어디가 아프단 거냐? 아니, 됐다. 가서 보면 되 겠군." "예? 아뇨, 그럴 형편이 아니라……" "부냐가 아프다면 당연히 가서 봐야 하지 않나. 왜 만날 수 없다는 건가? 설마 그녀가 역병이라도 걸렸다는 거냐? 나는 부냐를 보겠다." 스카리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모디사가 쓰러질 듯 달려들었다. "가셔선 안됩니다!" 모디사는 스카리의 팔을 부여잡으려 했다. 하지만 스카리는 발케네 의 공작에게 어울리는 보호를 받고 있었다. 모디사는 얼굴 바로 앞으 로 마차가 전속력으로 지나가는 듯한 느낌에 질겁하며 주저앉았다. 위를 올려다본 모디사는 힌치오가 뻗은 이쑤시개가 순식간에 건설된 장벽 같은 모습으로 그녀의 진로를 틀어막고 있음을 발견했다. 방을 두 개로 구분짓는 듯한 이쑤시개의 뒤편에서 스카리는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서는 안된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모디사는 고개를 도리질치고 손으로는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여미는 등 꽤나 어수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카리는 이쑤시개의 칼날에 손을 얹어 아래로 내리는 시늉을 했고 그러자 그것은 다시 힌치오에 게로 돌아갔다. 스카리는 모디사를 내려다보며 재차 질문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가시면 안됩니다. 제 말을 들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각하께서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스카리는 무서운 표정으로 자작부인을 노려보았다. 질문에 대한 대 답 대신 꼬박꼬박 윗사람인 양 조언하는 모디사의 태도에 대해 분노 하던 스카리는 갑자기 의혹을, 그리고 불안을 느꼈다. 스카리는 몸을 홱 돌렸다. "각하!" 모디사의 외침이 신호가 된 양 갑자기 스카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반쯤 일어섰던 모디사는 깜짝 놀라 우당탕 쓰러졌다. 그리고 모디사 는 얼빠진 표정으로 조금 전 스카리가 있던 공간을 더듬었다. 그 때 누군가의 팔이 다가왔다. "부축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모디사는 다시 진저리를 쳤다. 친절한 조력자는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는 팔리탐 지소어였다. 그 생기 없는 가면이 혼란스러운 모디사에겐 끔찍한 것으로 보였다. 뒤로 몸 을 빼는 모디사를 본 팔리탐은 내밀었던 손을 다시 끌어당기고는 똑 바로 서서 말했다. "그런데, 자작부인. 왜 각하를 막으려 하신 겁니까?" 모디사는 두억시니를 보는 것처럼 팔리탐의 얼굴을 자꾸 외면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팔리탐은 그녀가 공포로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는 불쾌해하다가 갑자기 의아함을 느꼈다. 팔리탐의 가면에 대한 두 려움 외에 다른 것이 있었다. 갑자기 팔리탐은 허리로 손을 돌려 칼 을 잡아뽑았다. 쇳소리에 대경한 모디사에게 칼을 겨누며 팔리탐이 말했다. "힌치오. 공작님께 가시오." "어디 있는지 안 보이잖아." "부냐 헨로의 방으로 가시오. 거기 나타날 테니." 힌치오는 벼슬을 꿈틀하고는 밖으로 훌쩍 나갔다. 팔리탐은 모디사 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시오. 자작부인." 스카리 빌파는 성으로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 때 문에 아직 갑옷 차림이었던 스카리는 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 다. 도깨비 감투는 그의 모습을 감추었지만 그 소리는 사람들을 놀라 게 했다. 사람들은 소음의 원인을 찾으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약간의 관찰력만 있다면 그런 상황을 눈치챘겠지만 스카리는 자신의 소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감투로 모습을 감춘 것은 치 밀한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랑스러운 부냐를 깜짝 놀라게 해준다거나 다른 사람의 방해를 피한다거나 혹은 누군가 가 먼저 부냐에게 달려가 자신의 도착을 알리는 것을 저지한다는 고 려 같은 것은 없었다는 말이다. 스카리는 무의식적으로 감투를 썼고 자신이 감투를 쓰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스카리는 벌거벗은 두 남녀가 왜 의아해 하는지 알 수 없었 다. 부냐 헨로는 침대에 반쯤 누워있었다. 알몸인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 지로 알몸인 어떤 남자의 목을 붙잡고는 자신에게 끌어당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한편 남자는 문소리에 놀라 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스카리를 보지 못하고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남자가 부냐의 팔을 붙 잡으며 말했다. "문이 바람에 열렸나 봅니다. 아가씨. 닫고 오겠습니다." 스카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감투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냐 는 남자의 목을 붙잡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바람이 아닐걸." "예?" "바람이 아니라고." 부냐는 콧소리가 많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중단된 열락의 추구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과 슬픔 때문에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눈 에 눈물이 망울졌다.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부냐를 바라보다가 갑자 기 몸을 일으켰다. 부냐는 그의 목을 놓쳤다. 겁에 질린 남자는 굴러 떨어지듯 침대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스카리는 남자의 몸 곳곳에서 경악으로 실룩거리는 근육을 보았다. 남자는 침대 옆에 떨어진 옷가 지를 집어 황급히 몸을 가리며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스카리 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얼 굴이라고 생각하며 남자를 보던 스카리가 마침내 남자의 정체를 깨달 았을 때 남자가 말했다. "고…… 공작님?"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놈이다. 이름이 뭔지는 기억 안나지만 발케네 의 흔해빠진 도둑놈 중의 하나인 것이다. 다만 이번의 도둑질은 그 대담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으리라. 스카리는 감투를 벗었다. 발케네 공의 모습이 드러나자 남자는 입을 딱 벌렸다. 스카리는 남자의 치아 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는 누렇고 치열은 엉망진창이다. 벌어진 앞니 사이의 시커먼 틈이 어찌나 큰지 그곳에 원래 이 하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악취 나는 입으로 부냐의 입술을 핥았나? 그리고 다른 곳도?' 감투를 품안에 쑤셔넣은 스카리는 그 손으로 칼을 뽑아들었다. 남자는 벽속으로 파고들려는 것처럼 몸을 뒤로 밀어대었다. 스카리 는 경멸감에 찬 눈으로 남자를 보다가 부냐를 돌아보았다. 부냐는 이 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있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남자는 정신 없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이런 경우 흔히 도피로가 되어주는 뒷문이 나 창문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창문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 람이 드나들 수 없는 형태였다. 스카리는 왜 이 방에 그런 것이 없는 지 알고 있었다. '내 보물을 안전한 곳에 두고 싶었거든.' 스카리의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가 터지는 것 같았다. 잘 익은 석류가 터져 내 용물을 드러내듯 스카리는 자신의 뒤통수가 벌어져 뇌가 쏟아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서있는 문이 유일한 출입구였기 때문에 스카리는 잠깐 동안 움 직이지 못했다. 앞으로 달려가 남자의 목을 도려내야 한다는 마음과 문을 막아 남자의 탈출을 저지해야 한다는 마음이 스카리를 앞뒤로 뒤흔들었다. 스카리의 흉폭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던 남자는 갑자기 옷가지 속에서 비수를 뽑아들었다. 조악한 품질이지만 치명상을 입히 기엔 어렵지 않은, 발케네인이 흔히 가지고 다닐 법한 칼이었다. 당 황 속에서 칼을 뽑아들었지만 그 든든한 물건을 손에 쥐자 남자는 침 착을 되찾았다. 여전히 목적 없는 혼란스러운 눈이었지만 그는 조금 전보다 훨씬 집중력 있는 자세로 스카리를 마주보았다. 그 침착한 모 습이 스카리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는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 다. 그 때 무엇인가가 달려가려는 스카리를 붙잡았다. 부냐의 방 쪽으로 걸어오던 힌치오는 문을 막듯이 서있는 스카리를 보았고, 또 그가 칼을 들고 있는 것도 보았다. 뭔지 모르지만 사태가 심상찮다고 생각한 힌치오는 재빨리 몸을 날려 스카리를 붙잡았다. 스카리를 끌어당긴 힌치오는 방안을 재빨리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 지 방안의 상황은 한 눈에 파악하기 쉬운 편이었다. 힌치오는 이쑤시 개로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아?" 힌치오의 거대한 이쑤시개를 본 남자는 손에 든 비수를 떨어뜨렸다. 승산을 따지거나 할 생각을 확 날려버리는 위압감에 남자는 머리를 감싸쥐고 바닥에 엎드려 모든 처분을 달게 받아들인다는 자세를 취했 다. 힌치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버둥거리던 스카리는 그 모습을 보고는 버둥거림을 멈췄다.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 움직임도 멈췄기에 잠시 그곳에 퍽이나 어 색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스카리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입을 열어 이 사태를 현실화시키는 것도 싫었다. 어떤 말, 무슨 내용이든 상관없이 누군가가 한 마디 말만 한다면 그 상황 은 뚜렷한 현실이 되고 조처를 취해야 하는 무엇이 될 것이다. 스카 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침대 옆의 남자는 아무 말 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목숨을 방기할 생각은 없었다. "공작님. 살려주십시오." 스카리는 증오로 남자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제발 닥쳐라. 하지만 남자는 계속 말했다. "아가씨가, 아가씨께서 제게 명령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이러고 싶 지 않았습니다. 아가씨께서 명령하셔서, 저는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 서, 예. 그랬던 겁니다. 공작님이 돌아오신 줄 몰랐습니다. 저는 그 저 명령을 따른 겁니다." 횡설수설하던 남자의 말이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변했다. 공포와 함께 자신의 기막힌 처지에 대한 통분이 그의 혀와 입술, 그 리고 성대를 장악해버린 모양이다. 남자는 이마로 바닥을 쿵쿵 찧으 며 짐승처럼 낑낑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스카리가 늪지의 부글거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냐 헨로." 부냐는, 그녀를 덮고 있는 이불은 움직이지 않았다. 스카리는 그쪽 으로 눈을 돌려 다시 말했다. "부냐 헨로!" 부냐 대신 힌치오가 움직였다. 힌치오는 침대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갑자기 스카리는 공포를 느꼈 다. 그는 힌치오가 이불을 젖혀 부냐를 드러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크고 강력한 손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면 무엇으로도 그것 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스카리는 자신이 그것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허리를 굽힌 힌치오는 이불 대신 남자를 부여잡았다. 마치 그곳에 흘렸던 자기 소지품을 줍듯 담담한 동작이었다. 남자는 숨 넘 어가는 소리를 내며 악동에게 붙잡힌 개구리인 양 끌어올려졌다. 남 자를 집어든 힌치오는 분실물을 되찾았으니 용건은 끝났다는 듯 스카 리와 부냐 어느 쪽에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 히고 방안에는 스카리와 부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스카리는 안도 감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꼈다. 분노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았지 만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스카리는 침대 위를 보았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꿈쩍도 하지 않는 부냐의 모습은 침대가 임신한 것처럼 보였다. 스카리가 말했다. "부냐. 그거 치우고 얼굴을 보여." 부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카리는 벽에 등을 기댔다가,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불그스름한 빛이 창문의 형태를 차용하여 책상 위에 네모를 그려보 이고 있었다. 그 네모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책을 침범했다. 책을 보고 있던 이이타 규리하는 뻐근한 목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 늘이 붉었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고 생각한 이이타는 불을 피우려 했다. 하지만 책상 위에는 이미 초가 불타고 있었다. 이이타는 자신 이 불을 켜두고는 그 사실을 잊었나 보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조금 후 이이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창밖에 있는 것이 황혼이 아니라 여명임을 깨달은 이이타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이타는 눈 주위를 문지르고는 잠시 지난 몇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 았다. 그리고 그가 전날 오후에 시작했던 독서를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계속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느껴지는 심한 허기가 그 사 실을 확인해주었다. 이이타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 다. 하룻밤 분량의 피로가 그를 엄습했다. 재미있는 책이었다고 자위해보았지만 이이타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밤을 희생하여 탐독한 책은 저자에게 존경을 품기는 어렵지만 그의 희작질에 증오를 품을 필요도 없는 평범한 책 이었다. 사실 탐독도 아니었다. 이이타는 그저 하늘치를 움직이는 것 에 관한 생각을 하며 밤을 샜고 책은 그 밤샘의 동반자였을 뿐이다. 그래서, 밤새도록 읽었지만 이이타는 그 책의 내용을 제대로 정리하 기 어려웠다. 안타까운 점은 하늘치를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그의 여 러 고려들도 비슷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무거울까? 상상도 안 되지. 어떤 물건이든 무거우면 그것을 움직이려 할 때 저항력도 큰 법이야. 하늘치를 움직이려 하면 그 저항력은 어느 정도일까. 내가 날려가버리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 은 하늘에 떠있단 말이야.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밤 하나를 고스란히 바쳤지만 이이타가 얻은 것은 불가지론의 증거 들뿐이다. 이이타는 티나한이 왜 하늘치에 오르고 싶어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는 다르다. 등산이 높이 오 르면서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면 하늘치는 높이 오르면서 자신 도 높이는 일이다. 산은 겸손함을 요구하지만 하늘치는 나와 함께 날 아보자고 요구하는 듯하다. 이곳에, 땅과 무관한 이곳에는 너희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가 있다고 말하는 듯한 하늘치의 무수한 눈…… '이런. 소리가 걱정하겠군.' 이이타는 책상을 밀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초를 훅 불어 끄고 밖으로 나온 이이타는 황혼이 아닌 여명에 어울 리는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는 승려와 불목하니들을 보았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건네는 아침 인사를 받으며 이이타는 뜬눈으로 밤을 샌 사람이 자고 일어난 사람을 마주할 때 느끼는 별스러운 감정, 즉 자 신이 다른 세계에 속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하늘치에 대해 떠올렸던 감정들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하늘치는 명 백한 신비다. 다만 지나치게 크고 뚜렷한 모습으로 하늘에 떠있기 때 문에, 즉 일반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다른 신비들과 정반 대이기 때문에 마치 일상에 포함되는 대상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 킬뿐이다. 헤어릿 에렉스는 소리와 함께 머물고 있는 객실의 마루에 앉아 바느 질을 하고 있었다. 규리하에서 하인샤 대사원까지의 여정에서 손상된 옷가지들을 수선하던 헤어릿은 이이타의 모습을 보곤 목례했다. 이이 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말했다. "소리는?" 헤어릿은 바느질을 계속하며 말했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요. 아마 스님과 이야기 중입니다." "스님?" "파지트 대선이라는 분이에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삶과 죽음, 만물의 유전, 어디에도 없는 신의 의미, 우리의 존재 의의. 기타 등등." "하아?" "산사에서 학승과 나눌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파지트라는 스님이 소리에게 그런 걸 가르치고 있다고?" "아니오. 소리가 스님께 그런 걸 묻고 있지요. 제가 보기에 스님은 재미 삼아 대응하는 것 같고 진지한 쪽은 소리인 것 같습니다." 이이타는 헤어릿의 옆에 걸터앉았다. 몸은 피로했지만 머리는 상쾌 했다. 사실상 멍한 상태에 가까웠지만 그런 느낌은 때론 시원한 느낌 과도 비슷하다. 이이타는 두 다리를 뻗고 마당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가을 햇살이 밟으면 사스락사스락 소리가 날 것처럼 마당에 흥건히 고여있었다. 낮은 곳에 있는 건물의 추녀 근방에서 때늦은 잠자리들 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던 이이타가 말했다. "소리가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거야?" "글쎄요. 독특한 곳에 와서 좀 어리둥절해진 건지도 모르지요." "나는 나쁜 놈이군." 헤어릿은 바느질을 멈추고 이이타를 돌아보았다. 이이타는 씁쓸한 눈으로 잠자리들을 좇고 있었다. "소리에게 다만 위안만 바랄 뿐 아무 기회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이 제야 깨달았어. 소리도 뭔가를 배우고 익히고…… 흥미로운 것을 찾 아다닐 권리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어. 그녀도 규리하 수복 의 험난한 노정에 당연히 참가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믿었지. 하 지만 그녀에겐 그럴 의무가 없지. 이 모든 도주와 투쟁을 그저 감내 해야 할 이유가 없어." "이유는 있어요. 공자님을 사랑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것만으로는 내가 소리의 더 나은 연인이 되는 것에 게을렀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어. 헤어릿." "공자님." "왜?" "공자님은 가끔 저를 놀라게 해요. 공자님이 저보다 열 살이나 어리 다는 것이 뭔가 잘못된 사실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죠." 이이타는 어라? 하는 얼굴로 헤어릿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맞아. 열 살이 아니라 열 다섯이나 스무 살 쯤 어릴 거야. 나 동안 이잖아." "어린 척하고 싶으면 그 삐죽삐죽한 수염부터 어떻게 해야할 걸요." 이이타는 턱을 만져보았다. 밤을 새는 동안 자라난 수염이 손바닥을 찔렀다. 이이타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들은 그런 경험 없겠지. 남자들은 수염이 나면 아주 자랑스러 워 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사실 맞아.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남몰래 슬퍼하기도 해." "하긴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천만에." "예?" "남은 평생 동안 아침마다 목에 칼을 대고 위험한 곡예를 부려야 한 다는 것이 슬프지." 헤어릿은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 한 구석에서는 그렇게 우스운 말도 아니라는 판단이 명료하게 떠올랐지만 헤어릿은 웃음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이타의 맥이 빠지 고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이 아주 절묘했다. 그리고 이이타는 우호선린의 정신에 의거하여 존경 받는 이웃들이 그런 경우 취하는 태도를 성실하게 이행했다. 그는 몇 가지 농담을 더 꺼내어 헤어릿을 질식사 상태로 몰아가려 애썼다. 헤어릿은 결국 눈물을 흘리며 황급 히 손을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숨을 몰아쉬는 헤어릿을 푸근한 표정으로 보던 이이타가 마루에서 일어났다. 헤어릿은 어디로 가냐는 눈짓을 보냈다. "소리에게." "소리에게?" "응. 그 스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해. 꽤 좋은 이야기 를 나누는 것 같으니 나도 들으면 도움이 되겠지." 이이타는 손을 어깨 위로 올려 붙임성 있게 쥐었다 폈다 하고는 마 당으로 내려섰다. 그 때 뒤쪽에 있던 헤어릿이 말했다. "공자님. 돌아오셨을 때 저는 없을 거예요." 이이타는 발걸음을 멈췄지만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자신 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아아, 그래?" "미안해요. 공자님. 자기 신발부터 찾는 식객에 대한 비유를 들어도 할말이 없을 것 같군요." "그럴 리가. 지금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식객이라니. 당 치 않은 소리지. 하지만 왜 지금인지 물어보는 건 괜찮겠지? 더 나은 시기가 있었을 텐데. 예를 들어 그 날 미친 레콘 낚시꾼을 피해 도망 쳤을 때라든가." "그건 저도 규리하의 수복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래 서 절망감도 없었지요." "그렇군." "제게 중요한 것은 소리였어요. 하지만 이제 소리는 더 이상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지요. 그 애는 다른 것에도 관심을 둘 만큼 여유를 되찾았어요. 저는 그 여유가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습 니다. 공자님일 리는 없지요. 공자님은 망향의 절망과 수복을 위한 고통을 겪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은 틀렸어요. 그 여유는 공 자님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이이타는 팔짱을 끼고는 한손으로 입을 감싸쥐었다. 헤어릿의 부드 러운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그 애는 공자님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지요. 하지 만 제 생각엔 그 두려움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 없다는 증 거에요. 정말 두렵다면 그런 생각조차 감히 할 수 없을 테지요. 소리 는 공자님을 믿고 있어요. 이젠 제가 없어도 될 테죠." "그래.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소리였지. 소리가 나를 사 랑하니까 나를 도운 것이지. 알고 있었어. 그 사실을 원망하지 않 아." "꼭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당신에게도 관심이 있었어요." "뭐? 나에게?" "예. 저는 공자님에게도 관심이 있었어요." 헤어릿은 잠시 멈췄다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에겐 절대로 이 말 하지 말아요. 저는 연하에는 관심 두지 않 겠다고 생각해왔지만, 만약 소리가 없었다면 저는 그 신조를 깨트렸 을지도 몰라요." 이이타는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면 몸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헤어릿은 그의 등을 향해 장난스럽게 말했 다. "공자님이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 더욱 떠나야겠어요. 소리가 미워 질 것 같아서." "어디로 갈 건지 알려줄 수 있어?" "싸움이 없는 곳으로." "지상에 그런 곳은 없어." "아니. 있어요. 공자님 주위엔 없겠지만." 헤어릿은 조금 전 말하지 않았던 진심을 말했다. 그녀가 떠나는 진 짜 이유를. "언제나 꿋꿋한 분. 공자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 때문에 공자님 같은 사람은 지독한 악당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요. 왜 가장 온순한 도깨비가 최악의 참극을 일으켰는지 알았어야 했 는데. 바르다는 것, 선량하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어떤 힘을 가졌 는가가 문제지요. 그리고 당신은 강한 의지에서 흘러나오는 힘을 가 지고 있지요. 공자님은 하늘치에 올라탄 채 규리하에 피의 폭풍을 가 져갈 테지요. 그것을 혐오하면서도." 이이타는 그렇게 할 것이다. 불가지론의 지나치게 큰 증거처럼 하늘 에 도도히 떠있는 하늘치를 끌어내린 다음 그것을 전차로 삼아 변경 백의 보좌를 차지하고 있는 누나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소리를 데리고 떠나고 싶어요. 하지만 그 애는 그것 을 불행으로 생각할 테지요. 그리고 저는 그것을 반대할 논리를 짜낼 수 없어요. 그러니 저는 혼자 떠나겠어요."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느질을 끝낸 옷을 헤어릿이 입는 모 양이다. 이이타는 그제서야 헤어릿이 수선하던 것이 여행용 의복임을 깨달았다. "소리를 잘 부탁해요. 안녕히. 공자님." 헤어릿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떠나는 소리를 듣던 이이타는 잠시 후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앞에 그득 펼쳐져 있는 가을의 어느 갈피에 있을 소리를 찾아. 스카리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있었다. 딱딱한 갑옷이 몸 이곳저곳에 배겨서 별로 편하지는 않았다. 스카리는 세운 무릎에 두 손을 얹고는 침대 위에 있는 둥그스름한 이불의 둔덕을 바라보았다. 그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지?" 이불은 움직이지 않았다. 스카리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머리 가 잘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기랄. 부냐. 그냥 남자를 원한 거라면 내가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대낮에 네 방에서 일을 벌이지는 않았겠지. 그 얼빠진 놈은 내가 오늘 온다는 것을 모를 수 있어도 너는 알고 있었을 거야.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 내 소중한 보물을 그 따위 천한 놈에게 던져줄 수 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부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카리는 펄쩍 뛰어오르듯 일어섰다. 침대 로 다가간 스카리는 이불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 아래에서 부냐의 모습이 나타났다. 부냐는 신음과 비명의 중간 쯤 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천천히 옆으 로 꼬았다. 그녀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는 것을 보며 스카리는 자신 도 모르게 집어든 이불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마치 교살을 준비하 는 암살자가 밧줄을 잡아당기듯. 이불이 드드득 하는 소리를 냈을 때 스카리는 깜짝 놀라 그것을 놓쳤다. 그 때 부냐가 똑바로 누웠다. 부냐는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좌우로 펼친 무방비한 모습으로 누워 말했다. "나를 죽여. 스카리." 스카리는 주춤했다. "뭐라고?" "네가 멋대로 나를 감옥에서 꺼내와 이곳에 가뒀어. 이젠 지겨워. 그냥 죽여." "네가 따라나섰잖아! 나는 분명히 물었어. 백화각에서 나는 네게 물 었다고! 나를 따라오겠냐고! 네가 그러겠다고 했잖아." 부냐는 갑자기 발버둥을 쳤다.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한 어린아이처 럼 그녀는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몸이 몇 뼘씩 떠오를 만큼 거 칠게 몸부림 치던 부냐가 두 팔로 침대를 퍽퍽 내리치며 외쳤다. "이 멍청한 도둑놈아! 그러면 그 때 뭐라고 대답해야겠어? 네가 나 타나기 전까지 매일 딱딱하면서도 물컹거리는 시체만 만지던 그 여자 가 뭐라고 대답해야겠어? 길을 잃을 것 같은 냉동실에서 신경이 곤두 선 채 방황해야 했던 그 여자가 뭐라고 말해야겠어? 여기 있는 것이 눈물 나도록 좋으니 내버려두라고 해? 넌 생각이라는 것이 있는 거 야! 넌 꽁꽁 얼어붙은 시체들 사이를 맴돌아본 적이 있어?" 부냐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자신이 말하는 그 시체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려는 듯 몸을 경직시켰다. "시체…… 시체…… 끝도 없는 냉동실…… 모퉁이를 아무리 돌아도 계속 관이 나타나. 웃음도, 울음도 울 수 없는…… 살아있는 시체들. 살아있는? 그래. 그것들은 살아있어. 그것들은 계속 내게 말을 걸어 와. 백화각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아니, 이젠 백화각이 사 라졌는데도 그것들은 계속 나를 찾아와. 그것들이 나를 불러 난 거기 로 돌아가야 해. 나를 죽여." 스카리는 부냐의 생기 없는 알몸을 내려다보았다. 요리하기 위해 가 죽을 벗겨놓은 염소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관능미밖에 느낄 수 없 었다. 친절함 때문이 아니라 보기 싫은 것을 감추는 기분으로, 스카 리는 이불을 들어 그녀의 몸을 덮었다. 그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 다. 스카리는 자신이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뛰어난 기지 로 백화각을 파옥하고 연인을 구출했고 대담한 손길로 아버지를 제거 하여 공작위를 쟁취했다. 그는 대담하고 냉혹한 악한이었고 모든 것 을 손에 움켜쥔 승리자였다. 발케네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되길 소 망할 무시무시한 남자였다. 하지만 스카리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승 리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엘시에 대한 네 승리의 증거가 될 수 없어." 부냐의 갑작스러운 말에 스카리는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조금 후 스카리는 왈칵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엘시가 어쨌다고?" "그렇잖아? 너는 엘시에게서 나를 빼앗았어. 엘시가 괴로워하고 슬 퍼하는 모습을 보길 바랐겠지. 하지만 엘시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 는 듯이 제국을 부활시키러 떠났어. 네가 이겼다는 증거가 없어진 거 야. 그래서 넌 규리하를 치러 갔고 불쌍한 레콘들을 괴롭히러 떠난 거지. 네가 강하다는 걸, 네가 최고라는 걸 증명하려고. 하지만 욕망 은 있어도 능력은 없지. 넌 아무 것도 아냐. 스카리 빌파." "그만해." "꿈이 있어? 신념이 있어? 긍지가 있어? 넌 엘시에게서 나를 빼앗았 지만 나를 버렸어. 넌 네 아버지에게서 발케네를 훔쳤지만 그걸 팽개 치고 떠났어. 도대체 진짜 얻고 싶은 것이 있어? 뺏는 것 외에 네가 진정 바라는 것이 있기나 해? 뭘 화를 내는 거야. 훔친 꽃에 벌레가 꾀든 말든 상관없잖아. 넌 꽃을 키울 생각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까!" "그만해!" "죽여! 그러면 침묵하게 될 테니까!" 스카리는 극심한 당혹감 속에서 부냐를 내려다보았다. 목숨이나 자 비를 구걸하는 것이라면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납득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스카리는 목이 타는 느낌 속에서 말했다. "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라. 정신이 뒤엉킨 사람하고는 이야기하지 않겠어. 머리카락 말고 마음 속에도 빗질 좀 해. 그 후에 이야기하지. 하지만 그 때도 난 내 귀환을 네가 이런 식으로 환영했 다는 것을 잊지 않을 거야." 스카리는 몸을 홱 돌렸다.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의 뒤편 에서 부냐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스카리가 다시 발을 옮겼을 때 그것은 달음박질이었다. 스카리는 맹렬히 달렸 다. 하지만 그 울음 소리는 계속 그를 따라오는 듯했다. =============================================================== 30챕터 시작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게시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도 상태가 우울해서 성실 연재를 자신하기가 어렵군요. 건강 주의하세요.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0. 바람의 탄주, 돌의 춤 (2) 2004/09/11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0-2 관련자료:없음 [49293]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9-11 00:43 조회:62 피를 마시는 새 30. 바람의 탄주, 돌의 춤 - 2 자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달리던 스카리는 조금 후 팔리 탐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스카리는 팔리탐을 밀쳐내고 달리려다가 그 가 어딘가를 가리키는 모습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팔리탐은 복도 옆에 있는 조그마한 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방 안을 본 스카리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금 전 부냐의 침실에서 끌어낸 하인놈이 바닥 에 엎드려 있었다. 그 곁에는 힌치오가 이쑤시개로 남자의 목을 누르 고 있어 남자는 마치 초대형 작두에 목이 낀 사람처럼 보였다. 스카 리는 방안으로 성큼 걸어들어갔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선 팔리탐은 보는 눈을 피하기 위해 문을 닫고는 그 앞에 섰다. 남자에게 뚜벅뚜 벅 걸어간 스카리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황 때문에 잠시 잊었던 분 노가 다시 치밀어올랐다. 그는 남자를 가리키며 외쳤다. "팔리탐. 이 놈을 거세하고 이마에 간음자라는 문신을 새겨 쫓아내 라!" 남자는 미숙한 의사라면 간질환자라고 진단할 모습을 보였다. 하지 만 그의 적나라한 반응보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부리를 살짝 부딪히는 힌치오의 모습이 스카리의 주의를 더 끌었다. 스카리가 할말 있냐는 표정으로 힌치오를 노려보자 힌치오는 팔리탐을 흘깃 바라보고는 투 덜거리듯 말했다. "이봐. 그런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듣겠군." "멍청하다니, 감히 그런 소리를……" "공작가의 치부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살아있는 포고문을 만들 작정 인가?" 분노 속에서 힘겹게 힌치오의 지적을 고려해본 스카리는 그 말이 옳 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분노는 침착성을 모조리 빨아들여 침몰시켰다. "그렇다면 이걸 공작가의 치부가 아닌 헨로가의 치부로 만들면 되겠 군. 팔리탐! 부냐 헨로에게도 같은 처벌을 내려라! 감히 발케네의 공 작을 희롱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어 공작가의 추상 같은 위엄을 서게 하라." "뭐? 부냐에게?" 힌치오의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말에 스카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턱의 근육들을 떨며 남자를 바라 보았다. 보기 상쾌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줌을 지려버린 남자는 자신 이 분출한 흥건한 액체 속에서 철벅거리고 있었으니까. 복잡한 감정 이 뒤엉키며 스카리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제기랄, 저 놈을 치워버려! 도무지 생각을 할 수가 없군. 아니, 내 가 나가지. 이 지린내 나는 곳을 참을 수 없으니까. 날 찾지마!" 스카리는 팔리탐을 옆으로 밀치며 문을 열었고 연속동작으로 감투를 꺼내어 머리에 썼다. 팔리탐은 사라진 주군의 거친 발소리가 멀어지 는 것을 듣다가 문을 닫았다. 힌치오가 부리를 탁 부딪힌 다음 말했다. "팔리탐. 이건 간통이 아닌 것 같은데. 간통이라면 몰래 해야 하잖 아." "그렇소." "부냐는 나한테 신경 안써주면 다른 남자랑 어울리겠다고 협박한 거 아냐? 스카리가 자꾸 밖으로 나도니까 짜증이 나서." 오줌 속에서 수영 실력 향상을 꾀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 의 얼굴은 자신이 연인들의 강샘 속에 희생되었음을 강변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저는 이용당했을 뿐입니다!' 팔리탐은 까불 면 머리를 차겠다는 표정을 지어줄 수 없기 때문에 발을 슬쩍 들어올 림으로써 남자를 기겁하게 해놓고는 말했다. "그 이론으로 설명하기엔 상황이 심각하오. 도대체 부냐 헨로가 무 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알 수가 없소. 대장군의 약혼자가 되었을 땐 자기를 죄수로 만들더니 발케네공의 연인이 되자 자기를 간통녀로 만들어버리는군. 자기를 망가뜨리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소." "그런가. 그러면 어쩌면 좋겠어?" "이건 각하께서 결정할 일이오. 그 자는 허튼 소리 못하도록 어디 치워둬야겠군. 들고 따라오시오." "스카리에게 그냥 맡겨둬도 되겠어?" "젠장. 이건 공작의 사생활이오! 내가 왜 그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 오? 내가 오쟁이진 남자를 수호하기로 서원하기라도 했단 말이오?" 힌치오는 벼슬을 꿈틀했다. 그는 부리를 크게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 다. 그리고 가슴의 깃털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왜 그래?" "뭐가 말이오?" 힌치오는 팔리탐의 가면 너머가 보고 싶다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보 며 말했다. "팔리탐.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스카 리가 부냐와 결별하면 제국을 사라지게 했던 작년의 전쟁 자체가 무 의미한 것이 돼. 제국이 사라진 건 따지고 보면 스카리가 부냐를 사 랑했기 때문이야. 그렇잖아? 그런데 스카리와 부냐가 헤어지면, 제국 은 결국 스카리의 변덕 때문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되지. 많은 사람 들이 스카리를 비웃거나 비난할 거야. 일 년도 못가서 싫증낼 여자 때문에 가까이는 아버지를 죽게 하고 멀게는 제국을 사라지게 했다 고." 팔리탐은 약간 당황한 몸짓을 해보였다. 힌치오는 다시 부리를 닫고 는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남자의 관자놀이 쪽 을 세차게 튕겼다. 그렇게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잠시 치우듯 남자를 혼절시킨 힌치오는 어처구니 없는 심정으로 바라보는 팔리탐에게 계 속 말했다. "내가 여러 번 제안했지만 넌 스카리를 죽이지 말자고 했어. 그래서 나도 거기에 동의했고. 안 죽일 거라면 잘 보호해야 하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스카리 따위는 신경 쓰기도 싫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조 금 전에도 네가 해야 할 말 안해서 내가 다 해야 했잖아. 왜 그래?" 팔리탐은 가면 안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내뿜는 입김이 가 면 안에 갇혀 얼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쓴 채 말을 달려도 무리가 없을 만큼 가면에 익숙해진 그였지만 갑자기 팔리탐은 가면이 지독하게 갑갑하다고 느꼈다. 힌치오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정말 스카리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졌나?" 팔리탐은 표정 없는 가면으로 힌치오를 바라보았다. 힌치오는 수염 볏을 쓰다듬었다. "하긴 나도 기분 나쁘더군. 부냐에게도 같은 처벌을 내리라고? 그래 도 한 때 죽도록 좋아했던 여자였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신부를 뺏 겼으면 싸워서 되찾아야…… 아, 참. 인간이지. 어쨌든 그 때문에 기 분이 나쁜 거지, 그렇지?" 힌치오를 향하던 가면이 갑자기 움직였다. 뒤로 돌아선 팔리탐은 문 을 향해 걸어갔다. "이봐, 어디 가?" 팔리탐은 대답 없이 문을 나섰다. 기절한 간통남과 둘만 남게 된 힌 치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했다. 선조해의 물결이 자갈을 자눅자눅 만지작거린다. 맨살을 집어넣으면 고통스러우리만큼 차갑지만 회은빛 구름 아래에서 바다는 평온해 보 인다. 폭풍이나 해일, 눈보라 등으로 심술을 드러낼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그 점잖은 바다가 그 품속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수용소를 품 고 있다는 것은 조금 기묘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것은 잠재적인 평가다. 센시엣 특 수소용소가 생긴 이래 그곳에서는 단 한 건의 탈주도 난동도 일어나 지 않았으니 대단히 모범적인 수용시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범적인 교도시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호드니 근방에서 날씨가 좋고 눈이 좋으면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 센시엣섬에 있는 그 시설은 센시엣 특수교도소가 아닌 센시엣 특수수용소이므로. 그 이름은 제국 정부의 정직성이 드러난 이름이라고 평가할 수 있 다. 교도소는 범죄자를 교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높은 담장으 로 범죄자를 격리시키는 것은 수형자를 교정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수용소라는 이름은 레콘을 상대로 교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선히 인정하는 이름인 셈이다. 그 명칭에는 교화 같은 것은 불가능 하지만 일반인 옆에 놔둘 수 없을 만큼 위험한 곳이니 외따로 떨어진 곳에 강제로 가둬둔다는 의미가 솔직히 드러나 있으며, 따라서 센시 엣 섬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에 자리잡은 관리사무소에 거주하는 특수 수용소 관리들은 자신들의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교화를 위한 접촉 같 은 것을 시도할 의무는 없다. 그들은 그 사실에 대해 지극히 감사하 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센시엣 특수수용소의 수용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세상의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도통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들도 평범한 수준의 관찰력은 가지고 있다. 바다 저편에서 간혹 폭풍 같은 계명성이 들려오거나 하면 그들은 마치 고래의 울음 을 들으며 그 이름을 맞추는 늙은 뱃사람처럼 행동한다. '저건 모모 레콘인데 건강은 괜찮은 것 같다. 아냐. 저건 모모 레콘인 것 같은 데? 27년 가을에 들어올 때 내가 소화차 타고 가까이서 목소리를 들 었거든.' 라는 식이다. 그들이 모여 앉아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관리사무소는 투철한 안전 제일주의와 지나친 피해망상의 결합에 의해 태어난 것 같은 건물이 다. 관리사무소의 설계자는 센시엣 특수수용소의 레콘들이 섬을 벗어 나 공격을 시도해도 - 아마 같은 날 승천한 티나한이 돌아오고 말이 하늘을 날 테지만 - 필요한 시간 동안 버틸 수 있게끔 설계하라는 당 혹스러운 요구를 받았다. 그런 요구 앞에서 설계자는 전통적인 방어 건물의 설계 개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요새나 성곽은 수직적인 장애물로 수평적인 접근을 저지한다는 개념으로 설계되지만 레콘의 엄청난 도약력을 무시할 수 있는 수직 장애물은 엄청난 크기 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런 건축물을 습기찬 해안에 건설한다는 것은 불 가능했다. 또한 설계 조건에 레콘이 섬을 빠져나온다는 가정이 있는 이상 해자 같은 것도 무의미했다. 섬을 빠져나와 바다를 건넌 레콘이 해자를 두려워하겠는가. 곤경에 빠진 설계자를 도와준 것은 거북이였다. 거북이를 본 순간 영감을 얻은 설계자는 수직적인 장벽이라는 개념을 과감히 포기했다. 그는 높이 세우기보다는 땅에 찰싹 달라붙은 형태로 바꿨다. 그리하 여 선조해의 고즈넉한 해변에 거북이 같은, 혹은 땅에 반쯤 파묻힌 계란 같은 반구형의 건물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 위를 걸어서도 반 대편까지 갈 수 있지만 하늘을 나는 새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독특한 성이 되었다. 그런 기상천외한 개념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 설계자가 바로 젊은 마 루젤이었다. 그가 계속 건축에 뜻을 두었다면 사람들은 건축의 역사 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센시엣 특수수용소 관리사무소 를 설계하고 막대한 돈을 받은 마루젤은 충분한 돈을 벌 때까지 보류 해두었던 자신의 진정한 목표로 전향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건축물 대신 아름다운 예술품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손실이라고 생각하는지 이득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실용주 의자와 관능주의자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리사무소의 관리들 또한 각자의 성향에 따라 자신들이 기능적인 건축물에 있다거 나 혹은 마루젤의 예술품 안에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라짓력 32년, 아직 달이 떠오르지 않아 칠흑 같은 어느 가 을밤 관리사무소 안에는 예술과 하나된 생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관리들 모두는 자신들이 튼튼한 요새에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사무소 위쪽에서 상당히 불쾌한 협박문을 외치며 어슬렁거 리는 레콘이 있을 경우 그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나-와-! 나-는-배-가-고-프-단-말-이-다-맛-있-는-인-간-고-기-가- 먹-고-싶-다-!" 사실 상당히 유치한 협박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을 정도로 겁 에 질린 관리들 중엔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없었 다. 그들은 관리사무소의 가장 깊은 방에서 공포로 희번득거리는 눈 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한 여성이 다급하게 말했다. "누군가가 민들레 요새로 가봐야 해!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처리하 라고 그들이 있는 거잖아." 공포 때문에 혼란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정신 상태가 의심 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다른 관리가 침착하게 말했다. "거긴 아무도 없어. 전부 대장군을 따라나섰으니까." "돌아왔을지도 모르잖아. 대장군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절망 도에서 레콘들이 뛰쳐나왔을 때 민들레 요새의 그 미치광이들이 막아 야 하잖아!" "제발 침착해. 저건 절망도에서 나온 레콘이 아니야. 우연히 이 근 처를 지나던 정신 나간 레콘이지. 아니, 어쩌면 그 전까지는 괜찮다 가 갑자기 바다를 보고는 놀라서 저렇게 된 건지도 모르지. 놔두면 제풀에 지쳐서 떠날 거야." 그 때 꽝꽝 하는 섬뜩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사무소의 반구형 지붕 위에서 레콘이 발을 구르는 소리였다. 관리들은 동시에 영이 빠져버 린 얼굴이 되었고 그 중 두 사람은 기절했다. 안타깝게도 기절한 자 들은 응당 받아야할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다른 자들은 모두 위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발을 구르는 소리가 끝난 후에야 그들은 쓰러진 동 료들을 부축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 속에서 마루젤에 대한 신뢰를 키우기 위해 애썼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사무소의 반구형 지붕 위에 있던 레콘 역시 마 루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레콘은 조금 마른 체구였 지만 어쨌든 같은 부피의 물보다 무거운 레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루젤을 얼마나 믿어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마치 그것을 원한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요새를 부수는 것은 절대로 그 레콘의 바 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레콘은 그런 속마음을 들킬 생각도 없었다. 결국 그는 마루젤이 알았다면 상심했을 결정을 내렸다. 그는 발을 구 르는 대신 더 험악한 말들을 쏟아내기로 했다. 바다를 보고 싶지 않 았던 그 레콘은 육지 쪽을 향해 서서 인간 요리법에 대한 가상 이론 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넓적다리 부위는 튀김용으로 좋고 팔 부분 은 향초와 함께 구워먹으면 좋다는 둥, 마치 그런 재료를 여러 번 다 루어본 요리사인 양 말하는 그의 태도는 안쪽에 있는 인간 관리들을 정신적 사망으로 몰아갔다. 반 시간 후, 안쪽에 있는 관리들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 자 신의 말에 무서워졌기 때문에 요리 강의를 끝낸 레콘은 지붕 위에 털 썩 주저앉았다. 그 때 달이 산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돌린 레콘은 달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달을 보며 웃는 그 레콘의 이름은 뭄토였다. 밤길을 걸을 때 그보다 고마운 동반자는 없고 또 다음날의 날씨를 추측하게 해주기 때문에 달을 좋아하긴 했지만 뭄토가 웃은 것은 그런 애정 때문은 아니었다. 뭄토가 웃은 것은 그것이 기다리던 신호였기 때문이다. 뭄토의 그 날 밤 계획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달이 떠오르기 전까지 모든 관리들을 사무소 안에 들어가 있도록 하 는 일이었다. 그것은 달성되었다. 그리고 둘째는 달이 떠오른 후로 한 명의 관리들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달이 떠오 르는 것을 보며 뭄토는 자신이 지나치게 서두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 다. 관리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무소 안에 갇혔고 뭄토는 상당량의 협박을 소모한 후였다. 뭄토는 이제부터 어떤 방법으로 관리들을 사 무소 안에 묶어둘지에 대해 고민했다. 갑작스럽게 뭄토는 무엇인가의 접근을 느꼈다. 그것은 등 뒤로부터의 접근이기 때문에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또 한 발소리나 냄새로 깨달은 것도 아니다. 접근을 알아차린 것은 레콘 들이 감이라고 말하는 것 덕분이었다. 뭄토는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뭄토는 후회했다. 달빛이 출렁거리는 선조해의 모습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밤바다는 그 막대한 부피 만큼의 공포였다. 해가 떠있을 때라고 해서 바다 밑바닥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커먼 바다는 바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것은 그 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뭄토는 눈을 몇 번 껌뻑였지만 그의 인상 은 바뀌지 않았다. 겁에 질린 뭄토가 '바다가 넘친다!'라고 외치기 직전, 어둠의 일부가 갑자기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고개 돌려." 뭄토는 그 말을 따르는 대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그러자 어둠은 큼직한 손이 되어 뭄토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 손은 뭄토의 고개를 돌려 다시 육지쪽을 향하도록 해놓았다. 그 사실에 고마움을 느껴지만 뭄토는 레콘답게 자신의 몸이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를 움직인 어둠이 뭄토의 옆으로 다가와 섰 을 때 뭄토는 화를 억눌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멘? 여기는 왜 온 겁니까?" 몸 일부가 어둠 속에 녹아있는 듯한 검은 레콘 지멘은 주위를 두리 번거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뭄토는 다시 질문했다. "지멘?" "널 보호하려고 왔다." 지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뭄토는 움찔했다. "예?" "네 헛소리 때문이야. 그들이 너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 "저에 대해? 무슨 말씀입니까?" 지멘은 여전히 주위를 둘러보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의 말 에 대해 생각해본 뭄토는 조금 후 질겁하며 일어섰다. "제가 진짜 이 자들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했단 말입니까?" "그 튀겨먹느니 구워먹느니 하는 소리는 뭐냐?" "아니, 그거야 이 밑에 있는 녀석들 겁 주려고…… 설마 그걸 믿는 단 말입니까?" "넌 그 자들이 침착하고 이성적이라고 믿나 보군." 뭄토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더럭 겁이 난 뭄토는 자신의 접칼을 꺼 내어 날을 펼쳤다. 지멘은 망치를 쥔 손을 조금씩 비틀며 말했다. "그들 중 몇 명이 널 처벌하겠다고 사라졌다. 그 자들은 네가 진짜 사람 잡아먹는 레콘이라고 믿고 있어. 곧 나타날 거다…… 왔다." 지멘의 모습은 변함없었지만 당황한 뭄토는 크게 부풀었다. 좋은 행 동이라고 할 수 없다. 달빛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네 명의 레콘은 그 런 뭄토의 모습에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멘은 사나운 눈으로 뭄토 를 쏘아보고는 망치를 약간 늘어뜨렸다. "돌아가라." 네 명의 레콘은 지멘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뭄토를 쏘아보았 다. 상황 전체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그 살벌한 눈길 아래에서 뭄토는 웃을 수 없었다. 지멘이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돌아가라." 네 레콘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는 동포를 잡아먹는 놈이다." 지멘은 뭄토의 협박 대상은 레콘이 아닌 인간이므로 그 말은 오류라 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은 농담이다." "농담이 아니다." "농담이다." "저 안에 있는 자들에겐 농담이 아니다. 저 안에 있는 자들이 얼마 나 두려워할지 생각해보라. 그들은 연약한 인간이다. 레콘이 그런 말 을 한다면 인간은 그것을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받아들이는 쪽 이 진담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건 진담이다. 그리고 의도가 있다. 그 추악한 자는 듣는 자들이 진담으로 받아들이길 바라면서 그런 말을 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담이다. 그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 그 자는 식인 레콘이다." 레콘의 말은 침착했고 논리 또한 분명한 편이다. 하지만 지멘은 침 착하고 이성적인 자들이 아니라는 평가를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 다. 왜냐 하면 그런 논리를 통해 도출되는 결론이 비이성적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인간들을 대신하여 그 식인 레콘을 처단해야 한다." 뭄토는 공포와 분노 양쪽을 두 눈에 담은 채 레콘들을 쏘아보았다. 지멘이 말했다. "이 자는 너희들의 탈주를 도우려고 그런 거다." 지멘은 말을 끝내자마자 후회했다. 뭄토를 향하던 레콘 네 명분의 분노가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보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반이 되지도 않았다. 지멘과 대화하던 레콘은 몸을 서서히 부풀리며 차갑 게 말했다. "그 자의 사악한 행동 때문에 내가 어떤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사악 함을 눈 감아주라는 거냐? 내가 악에 협조해야 한다는 거냐?"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다. 네 이름이 뭐지?" "트리어." "나는 지멘이다. 이쪽은 뭄토고. 트리어.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뭄 토가 자신의 말을 취소하고 이 안에 있는 자들에게 놀라게 한 것을 사과한다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트리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세 레콘들은 스스로 결정을 내 릴 의도가 없는 듯 침묵한 채 기다렸다. 트리어가 혼잣말처럼 말했 다.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지멘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트리어와 세 레콘을 바라보았다. 트리 어는 뭄토를 보며 말했다. "뭄토. 사과하라." 뭄토는 조금 안심했다. 그는 접칼을 쥔 손을 숨기듯 슬그머니 잡아 당기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합니다." "무슨 소리냐?" "그게, 이 자들을 좀 더 붙잡아둬야 하거든요. 트리어. 이해하시겠 지만……" "너는 악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다!" 트리어가 맹포한 동작으로 위로 뛰어올랐다. 그 기세에 눌린 뭄토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지멘은 재빨리 날아올랐다. 지멘은 뭄토를 향해 난폭하게 날아드는 트리어를 어깨로 들이받아 뛰어오르 려 하던 세 명의 레콘들에게 날려보냈다. 그는 망치를 빙글 돌려잡으 며 생각했다. 투쟁으로 점철되다시피 한 그의 생애에서도 이것은 가 장 웃긴 싸움이라고. 하지만 어쩐지 낯익은 투쟁이기도 했다. 즉각적 으로 지멘은 자신이 네 명의 레콘과 마주했던 경험이 이전에 있었음 을 떠올렸다. 그것도 제국을 종단하는 규모로. 준람, 왕벼슬, 주테 카, 론솔피. 그 네 사람 앞에서 지멘은 계속 도망쳐야 했다. 지멘은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벌떡 일어나는 네 명의 레콘을 본 지멘은 뭄토의 팔 하나를 잡으며 뛰어올랐다. 갑자기 잡아당겨진 뭄토는 버둥거리다가 갑자기 뻣뻣해졌다. 도약의 방향이 어딘지 깨달은 것이다. 허공에 떠있는 짧은 시간 동안 뭄토는 평생 같은 긴 시간을 느꼈고, 그 시간은 부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 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첨벙! 하는 굉음과 함께 지멘과 뭄토는 바다 속에 섰다. 바닷물이 그들의 발목까지 차오르는 곳이었다. 지멘은 그곳에서 네 레콘을 지 그시 바라보았고 뭄토는 죽음을 보았다. 감투를 쓴 채 마냥 달리던 스카리는 갑자기 멈춰섰다. 현명한 행동 이었다. 더 달렸다간 발케네의 보이지 않는 군주에서 보이지 않는 시 체로 변했을 테니까. 스카리는 노대 끝에서 헐떡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불쾌감에 스카리는 몸을 경직시켰다. 그곳은 그가 락토 빌파를 찌른 곳이었다. 그 때도 스카리는 감투를 쓰고 있었다. 락토 는 자신을 찌른 아들을 칭찬하고는 스스로 노대 끝으로 걸어가 떨어 졌다. 그 추락을 떠올린 스카리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얼굴에 닿는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감투는 그의 모습을 감출 뿐 바람을 막는 것은 아니지만 스카리는 모습이 사라져 서 바람도 느낄 수 없다는 양 거칠게 감투를 벗고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물론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스카 리는 그 무풍을 저주했다. 스카리는 암살성을 저주하고 부냐 헨로를 저주하고 죽은 락토 빌파를 저주했다. 그리고도 많은 대상을 더 저주 했지만 저주의 목록은 짧아지지 않았다. 스카리는 그 목록을 다 건너 뛰기로 했다. "엘시 에더리!" 스카리는 자신의 목에서 뛰쳐나온 이름에 흠칫했다. 그렇다. 엘시였 다. 엘시 에더리가 암살성에 들어와 부냐 헨로를 겁탈했다. 스카리 빌파가 돌아올 때를 정확히 기다려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자가 세 상에 엘시 외에 누가 있겠는가? 그토록 대담한 자, 그토록 오만한 자, 그토록 스카리를 무시할 수 있는 자가 또 누가 있는가? 그 하인 놈이 엘시가 아니라는 것은 상관없다. 그것은 엘시의 짓이었다. 엘시 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들었으니까 엘시가 부냐를 겁탈한 것이나 다름 없다. 엘시가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에에에엘시!" 모든 것은 엘시 때문이다. 스카리는 이제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락토 빌파가 뭐라고 했건, 그 애꾸눈 꼬마가 뭐라고 했건 이 모든 일은 사실상 엘시가 일으킨 일이다. 그 영악한 놈은 일부러 부냐를 구출하지 않음으로써 스카리로 하여금 파옥의 죄 를 저지르게 했고 발케네와 황제가 대립하게 만들었고 스카리로 하여 금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제국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 놈이 그렇게 한 것이다. 온갖 흉악한 계획을 짜내고 갖은 책동을 부리는 대신, 맙소사.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 써! 그 놈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바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스카리를 파멸시키고 있다. '아직은 아냐.' 스카리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두 개나 세 개로 보였기에 스카리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혼란스럽지 않았고 또 그곳은 엘시가 있는 방향이다. '아직 나는 파멸하지 않았어. 파멸? 허튼 소리. 나는 발케네의 공작 이야. 나는 도깨비 감투를 가지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군 대를 거느리고 있다. 이 악독하고 악독하고 악독한 놈아. 너는 나를 망가뜨릴 수 없어. 나는 스카리 빌파고, 질투에 찬 너 따위 소인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나이가 아니니까. 부냐, 부냐! 왜? 부냐. 너를 위해 내가 무엇을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스카리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화가 났다. 아무리 애써 봐도 모든 것이 자꾸만 수포로 돌아간다. 뒤엉키고 헝클어지고 무너져내린다. 번뜩이는 기지로 연인 을 구출해낸 사내는 영웅시의 주인공이 되는 대신 제국의 적이 되었 다. 당연히 그에게 와야 할 황금 열쇠는 애꾸눈 계집애에게 갔다. 자 유무역당은 그의 야심찬 정복을 황금으로 막았고 규리하의 도깨비 처 녀는 하늘치로 그의 대군을 쫓아냈다. 파리를 향해 휘두르는 손에 담 긴 것 만큼의 경의도 없이! 그리고 그 모든 빗나감과 잘못됨의 종지 부를 찍듯 그가 구출해낸 여인이 그의 성에서…… 어디에도 없는 신 이여! 엘시 에더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내다운 사내에게 패배했다고 느끼게 해줘.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사내가 되라고!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스카리는 눈물을 닦았다. 턱이 무거웠고 얼굴이 심하게 짓눌린 것 같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심호흡을 하던 스카리는 갑작스러운 공포 를 느꼈다. 그는 락토가 떨어진 노대에 앉아있었다. 스카리는 바닥을 밀며 황급히 일어났다. 그는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서는 노대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손이 올라오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 다. 노대 끝을 붙잡은 손가락들이, 그리고 팔꿈치가, 그 뒤를 따라 락토의 부서진 얼굴이…… 그 얼굴이 부서지며 드러난 것은, 부서진 가면 뒤편에서, 엘시 에더리의 얼굴? 스카리는 고개를 맹렬히 휘저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아." 다시 노대 끝을 본 스카리는 그곳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 다. 스카리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뒤로 돌아섰다. 자꾸만 뒤를 돌아 보고 싶었지만 대신 스카리는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도 노대를 벗어나는 것은 너무 오래 걸렸다. 건물 안쪽으로 돌아온 스카리는 크 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때 누군가가 말했다. "공작님?" 스카리는 칼을 뽑을 뻔했다. 칼자루로 항하던 손을 멈춘 스카리는 모디사 헨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체 같은 얼굴 을 하고 있었다. 모디사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머리를 늘어뜨렸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죄송합니다…… 그 애 대신 제가 이렇게 빌겠 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 불쌍한 애는……" 스카리는 모디사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더 궁금하 게 여긴 것은 모디사가 왜 그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스카리는 질문했지만 모디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스카리가 고함을 지른 후 에야 모디사는 울먹이며 말했다. "공작님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무슨 외침을 말하는 거냐고 되물으려던 스카리는 곧 노대에서 질렀 던 고함을 떠올렸다. 그는 엘시 에더리의 이름을 외쳤다. 그 소리를 모디사가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스카리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꼈 다. 모디사는 계속해서 사죄의 구명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스카리가 고함을 빽 질렀다. "그만둬! 누가 부냐를 죽인다는 거야?" 만약 힌치오나 팔리탐이 들었다면 어이없어 했을 테지만 스카리는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모디사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 고 있었다. 스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고 말했다. "결혼식 준비를 해라." "예?" "그대가 신부 어머니잖나! 신랑이 왔으니 더 시간 끌 것 없다." "무슨…… 무슨…… 결혼이오?" "그래. 스카리 빌파와 부냐 헨로의 결혼." 모디사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말 이 안되는 소리였다. 스카리는 약간의 두통을 느끼며 힘들게 말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다. 시간 끌 것 없어." "각하……? 제 딸을 용서하시는 겁니까?" "용서? 그대의 딸은 용서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 모디사는 형언하기 어려운 혼란을 느꼈다. 스카리도 비슷했다. 그는 자신 속에서 자신의 말을 설명할 논리를 찾기 위해 애썼다. 곧 한 마 디 말이 떠올랐다. 엘시 에더리가 나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스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이 된다. 나는 부냐 헨로와 결혼할 것이다. 그것이 엘시에게 지지 않는 방법이다. 부냐는 엘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스카리는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하지만 모디사에 게 쉽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더 묻지 마라. 그냥 내 말을 따르라. 내쪽에서는…… 부모님이 안 계시니 팔리탐에게 부탁해야겠군. 그리고 부냐에게도 말해야겠어. 청 혼의 말을. 자작부인!" "예! 예!"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준비를 하라. 나는 초라한 신부를 맞 이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스카리는 다른 말을 떠올릴 수 없었 다. 그는 잠시 주춤하다가 그냥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마주보던 모디사의 얼굴에서도 커다란 웃음이 떠올랐다. 곧 그녀는 고개를 끄 덕이며 감사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스카리는 손을 내저어 그녀 의 말을 막으려 했지만 모디사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의 동작을 보 지 못했다. 스카리는 그냥 그녀의 곁을 지나쳐 걸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모디사는 스카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했다. 모디사를 내버려두고 복도로 나온 스카리는 혼란 속에서 걸었다. 모 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부냐를 향해 걸어가면서 스카리는 조금 전 보았던 장면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자신을 죽이라고 외치던 그 여자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 았다. 그녀에게 뭐라고 해야 하나? '누가 스카리의 여자를 죽인단 말이냐!' 스카리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부냐 헨로는 스카리 빌파의 여자 다. 스카리가 백화각에 침입하여 시체와 혐오와 억울함 속에서 그녀 를 구출했다. 스카리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엘시가 자신의 모든 것을 망가뜨리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부냐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 이다. 그리고, 그리고…… 용서해달라고! 그렇다. 용서를 구하는 것 이다. 그녀를 상심하게 했음을 사죄할 것이다. 부냐가 그런 것도 당 연하다. 이곳은 그녀에게 완전히 낯선 곳이다. 스카리는 이런 곳에 그녀를 혼자 놔두었다. 곁에 있어달라는 그 많은 애원을 무시한 채. 스카리는 그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사 나이는 오직 연인에게만 무릎을 꿇는다. 점점 빨라지는 스카리의 걸 음이 마침내 달리기가 되었다. 스카리 빌파는 부냐 헨로에게 사과할 것이다! 부정을 저지른 그녀에게 오히려 그가 사과하는 것이다! 부냐 는 얼마나 놀랄까. 또 사람들은 얼마나 놀라워 하겠는가. 스카리는 웃고 싶었다. 팔리탐은 또 얼마나 놀랄까. 그에게 부냐 헨로와의 결 혼을 준비하라고 말하면 아마 가면이 떨어져나오도록 놀랄 것이다. 스카리는 빨리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부냐의 놀란 얼굴을, 팔리탐 의 놀란 몸짓을 보고 싶었다. 스카리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부냐는 자신의 방에 없었다. 그리고 스카리는 팔리탐 또한 찾을 수 없었다. 힌치오를 찾아낸 스카리는 팔리탐의 소재를 물었지만 힌치오 도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들을 풀어 성안을 뒤진 스카리는 도무지 이 해할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부냐 헨로와 팔리탐 지소어는 암살성 어디에도 없었다. 상황을 설명 할 수 있는 이론은 두 가지다. 그들이 갑자기 도깨비 감투를 손에 넣 었거나, 혹은 두 사람이 동시에 성을 떠난 것이다. =============================================================== 오래간만에 나타난 다음 회 예고 : 호러지아의 이상 현상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전기톱 사나이와 손에 엽총 달고 있는 사나이와 함께 문차일드를 찾아 떠나던 조나단 다이빙스톤. 새들도 그들의 여행을 축복하듯 지저귀고 "투낙! 투낙! 투낙 툰 다다다!" 길가의 풀잎도 가볍게 살랑거리며 모스풍구스의 가 루를 흩날린다. 당연히 그들은 머리 위에 조로 사인을 떠올리며 졸도 했다. 가까스로 잠에서 깬 조나단이 본 것은 여자의 뒷모습. 여자는 고개를 돌리며 눈에서 하얀 도트를 반짝인다. 정신 차리기로 시작하 는 참으로 클래식한 게임 시작 장면과 유명한 여주인공 등장신이 뒤 범벅되었으니 조나단의 다음 목표는 틀림없이 몸에 담이 결린 사람만 찾아간다는 담의 탑. 추운 데서 잠든 세 사람은 모두 담이 결려 있었 다. 혹시나 싶어 확인해보려는 주의 깊은 조나단. "혹시 문차일드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문차일드는 늘 있는 곳에 있지 않아. 가끔은 없는 곳에서 찾아질걸." 그리고 여자는 5를 먹고 녹색 괴물로 변해 떠났다. 과연 조나단 다이빙스톤은 평범한 여행이 위험한 모험으로 바뀌는 이 땅을 무사히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인가? 전기톱 사나이의 새로운 무기가 등장하는 다음 회 "톱을 노려라! 가면 쓴 사나이!" 많 이 기대해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0. 바람의 탄주, 돌의 춤 (3) 2004/09/12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0-3 관련자료:없음 [4929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9-12 01:03 조회:7 피를 마시는 새 30. 바람의 탄주, 돌의 춤 - 3 뭄토는 평형 감각을 잃었다. 자신의 중심이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선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 앞으로, 혹은 뒤로 한 발 내딛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쓰러진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왼쪽? 오른 쪽? 그것도 아니라면, 위? 뛰어오를까? 그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 같다. 하지만 뛰어오르려 하면 당장 쓰러질 것이다. 물 위로, 철 퍼덕. 온몸이 물에 닿는다. 젖는다. 빠진다. 끔찍하다. 쑤아아아. 무 슨 소리지? 비가 오나? 아니다. 두 명의 레콘이 수면에 충돌하며 날 려올렸던 물이 아래로 돌아오고 있다! 벼슬에 물이 닿는 순간 뭄토는 앞이 캄캄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 물 위에 쓰 러질 것이다. 무엇인가를 잡아야 한다. 뭄토는 옆에 지멘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곤 그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손가락이 닿았을 때 지멘이 말했다. "잡지마." 뭄토는 지멘의 명령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사나운 맹 수를 만난 초식동물인 양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뭄토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자기 손을 보았다. 물이 그를 강타했을 때 갑자기 뭄토는 정신을 차렸다. 당연하다. 싸움을 앞두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붙잡아선 안된다.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물 속에서 지멘은 궁체 비슷한 모습으로 꼿꼿 하게 서서 망치를 최대한 넓게 잡고 있었다. 앞으로 쭉 내민 왼손으 로는 망치자루 끝을, 그리고 머리 조금 위에 띄워놓은 오른손으로는 망치머리 바로 아래를 쥔 채 지멘은 어두운 표정으로 해변가의 네 레 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물결은 그의 발목을 자분거리고 있지만 얼어붙은 듯 시퍼런 달빛 속에서 지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물 속에서 싸움을 준비하는 그 레콘은 바닷속에 우뚝 솟아 폭풍을 비웃는 바위산 같았다. 떨어지던 물이 기세가 꺾이다가 사라 졌다. 지멘의 망치에서, 위로 쳐든 팔의 팔꿈치에서, 그리고 부리에 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지멘은 눈을 감지 않았다. 뭄토는 자기 도 모르게 벼슬을 꿈틀거렸다. 해변에 있던 네 레콘들 또한 무정물인 양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 만 그들의 정지는 어색했다. 공격을 위한 도약 직전에서 멈춰있었기 때문에 네 사람은 몹시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차마 지멘을 똑바 로 볼 수 없었던 트리어는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멘. 그래선 안 된다. 이리 나와라." 트리어가 꺼낸 말은 사체의 조각을 얼기설기 짜맞춰 놓은 유해 같았 다. 하나하나의 단어들이 죽어 있어 비록 문장의 규칙에 따라 연결되 어 있지만 전체 말도 죽어 있었다. 아무도 그가 말한 것을 이해할 수 가 없었다. 트리어조차도. 트리어는 벼슬을 부르르 떨었다. "지멘." 지멘이 물 묻은 부리를 열었다. 참았던 입김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며 잠깐 동안 지멘의 머리 주변에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서렸다. "돌아가." "이리 나와!" 이리 와서 싸우자는 도전의 외침이 아니다. 그 끔찍한 곳에서 빨리 나오라는 호소였다. 그러나 지멘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돌아가라. 트리어." "너는 미쳤어." "맞아. 꽤 도움돼." 아무 것도 없는 곳을 바라보던 트리어가 갑자기 움직였다. 트리어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세 레콘도 경직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주저없이 떠났다. 지멘은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고개 를 돌리지 않은 채 손을 쭉 뻗었다. 거기에 비스듬히 쓰러지던 뭄토 의 가슴이 와서 부딪혔다. 지멘은 트리어와 세 레콘에게 시선을 둔 채 뭄토를 다시 똑바로 세워서는 그 수염볏 근처를 부여잡아 쓰러지 지 않도록 했다. 네 레콘이 사라졌다. 지멘은 한 손에 망치, 그리고 다른 손에는 비 틀거리는 레콘을 쥔 채 철벅철벅 걸었다. 그 소리는 뭄토의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었다. 뭄토는 계속해서 기우뚱거렸다. 마른 땅으로 돌아올 때까지 지멘은 뭄토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손을 놓았을 때 뭄토는 심하게 구새먹은 나무가 태풍에 부러져 넘어지듯 요란하게 쓰러졌다. 우당탕. 뭄토는 해안가의 자갈 사이에 부리와 수염볏을 꽂은 채 헐떡거렸다. 그의 등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지멘은 별 관심 없는 태도로 가까 이 있던 커다란 유목 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선조해의 무거운 물결을 바라보았다.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뭄토가 자신의 몸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뭄토는 자갈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깃털을 뭉텅뭉텅 뽑아내었다. 젖 은 깃털을 모두 뽑아내고 젖은 살점을 뜯어낼 기세였다. 핏방울이 튀 어올랐을 때 지멘이 움직였다. 지멘은 발을 들어 뭄토의 몸을 짓밟았 다. 그를 고정시키는 동작이었지만 힘이 상당히 실려있었다. 뭄토는 배가 뚫리는 고통 속에서 멈춰서서 위를 쳐다보았다. 그는 밤하늘에 솟아있는 지멘의 부리와 수염볏 등을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 았다. 지멘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바닥에 누운 뭄토와 그를 짓밟은 채 상체를 숙인 지멘은 1미터 쯤 거리를 둔 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지멘이 말했다. "하지마." "어떻게…… 어떻게……" "가만히 있어." "차라리 싸우다 죽게 내버려두지……" "부리 닫아." 뭄토는 부리를 닫았다. 그는 똑바로 누운 채 소리 없이 울었다. 지 멘은 발을 떼어 뭄토가 달빛을 덮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뭄토에게서 떨어진 지멘은 관리사무소 쪽을 향해 뜻없는 고함을 한 번 외치고는 망치를 내려놓고 다시 유목에 걸터앉았다. 괜찮은 식사 한 끼를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물소리 와 경쟁하며 계속되던 작은 흐느낌이 메마른 목소리로 바뀌었다. "아실 때문이지요?" 지멘은 검은 머리를 돌려 뭄토를 바라보았다. 뭄토는 자갈 위에 드 러누운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귀로 파고드는 사포처럼 듣기 거북했다. "아실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그렇지요?" "그 애를 또 노린다면 너를 트리어에게 넘기겠다." "누가 훔치겠다고 했나? 쳇. 아실 때문에 그런 거냐고 물었을 뿐입 니다." "그렇다는 건 뭐냐?" 뭄토는 두 주먹으로 허리 옆의 땅을 꽝 내리치며 외쳤다. "조금 전에 당신이 한 짓 말이야!" 뭄토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몸을 웅크린 채 유목 위에 앉아있는 지 멘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필요하면 어, 저, 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레콘이 될 수 있어요! 그, 그, 그것에 발을 담그고 적들을 비웃을 수 있어! 당 신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야. 끝까지, 끝장이 날 때까지 가 지 않고 되돌아올 수 있어. 다시 시작해. 시작으로 돌아와. 되돌아 와. 그게, 그게 당신입니다. 당신은 그런 것이야. 되돌아오는 것! 다 시 시작하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이 되는 것! 아실이 그렇게 해준 거 죠? 그 애는, 눈이 하나인 애. 그래서 언제나 초점이 맞아 있는 애. 그렇잖아요? 겨냥할 때는 한쪽 눈을 감아. 그렇게 한다고. 그 애는 항상 초점이 맞아 있어. 세상을 언제나 겨냥하듯이 바라본다고. 그 애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어준 거죠? 그렇죠?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 어. 나는, 나는 알아. 아니까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지멘은 그 마지막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뭄토 는 자신의 마지막 말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난 안다고. 알아. 그런 자들이 있어. 그녀도 그렇지. 당신도 느꼈 을 거야. 절망도…… 절망도! 절망이 얼마나 좋은 거야? 희망을 끊는 거지. 우리는 모두 희망이 지독한 덫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풀리지 는 않고 계속 조여들기만 하는 올무처럼. 그래서 끝까지 가버려. 그 덫에 빠져서. 그게 끝내 목을 조르지. 되돌아오지 않아. 그걸 벗어나 려면 희망을 끊어야 해. 그래야 되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거죠. 뭐든 될 수 있어! 그렇잖습니까? 당신은 그걸 알아요. 나도 그걸 알지요. 그녀도 알아요. 제에엔장! 이 무슨 미친 소리야앗!" 뭄토는 고함을 지르고는 마루젤의 건축 예술을 향해 돌격했다. 그는 둥그스름한 벽에 몸을 던졌고 비록 무시무시한 충돌음이 나긴 했지만 그것은 부서지지 않았다. 거북이 등딱지를 닮은 그 둥그스름한 벽은 화살이나 칼날의 세찬 일격을 미끄러지게 만드는 갑옷처럼 뭄토를 옆 으로 튕겨버렸다. 뭄토는 자갈 깔린 해변가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는 조금 전과 다른 위치에서 조금 전과 비슷한 모양으로 쓰러져 누웠다. 뭄토가 외쳤다. "내 말이 맞지!"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수평선이라고 할 수 없다. 별이 사라지는 곳을 더듬어본다면 수평선이 어디에 있을지 짐작할 수 있지만 검은 밤하늘 과 밤바다를 명확히 구분하는 선은 없었다. 지멘이 바라보고 있는 것 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아실일 것이다. 뭄토의 외침 때문에, 그리고 그가 관심 있는 유일한 대상이기에 지 멘은 아실에 대해 생각했다. 뭄토의 말은 조금 빗나갔지만 정확한 것 이다. 지멘은 맹세했다. 자신을 잃어버린 아실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대가로 자신의 망치를 바치기로. 아실이 자신을 되찾아 다시 그가 대 답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멍청한 레콘 한 명 을 구하느라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따라 서 뭄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아실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물론 그 날 밤 그가 담보하기로 한 것은 뭄토의 육체적 안전뿐이다. 뭄토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미치광이가 된다 한들 지멘은 눈도 깜짝하 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멘은 뭄토의 광언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약간 피로한 눈길로 어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밤 동안 정신착란에 가까운 상태로 갔던 것은 뭄토만은 아니다. 관리사무소 안에 갇혀 떨고 있던 관리들은 바깥에서 들려오 는 괴성과 굉음에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그들은 동시에 같은 결정을 내렸다. 관리사무소를 떠 날 것이다. 하늘누리가 사라진 후로 상부의 지시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자력으로 절망도의 레콘들에게 식량을 공급해왔던 그들은 그런 사 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유사시 도 움을 주기로 한 민들레 여단도 대장군을 따라 사라진 지금 그들은 사 라진 제국에 대한 의리나 그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섬에서 모두 굶어 죽을 레콘 수용자들에 대한 동정심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레콘에 게 가장 무서운 장소로 통하는 절망도 가까운 곳에 레콘들이 감히 나 타나 행패를 부리는 것은, 그들이 보기엔 무엇보다 확실한 제국 실종 의 증거이며 미래 없음의 증거였다. 그들은 모두 떠나리라고 결심했 다. 절망도의 레콘 수용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은 빨리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오면 바깥의 레콘이 사 라진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기다릴 수 있는 것이 그것 뿐이기에 그들은 아침을 기다렸다. 그들의 근거 없는 바람은 보답을 받았다. 새벽녘부터 더 이상 바깥 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제비뽑기에 실패한 불운한 관리 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거기엔 어떤 레콘의 모습도 보이지 않 았다. 그리고 관리가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나서 한 시간이 지 났을 때 센시엣 특수수용소 관리사무소에는 인간의 모습도 보이지 않 게 되었다. 부냐 헨로는 얼굴 한쪽이 다른 곳보다 기묘하게 뜨거운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녀는 곧 그 국부적인 열기의 원인을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 왼쪽에 조그마한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눈을 감고 있었기에 그 불빛은 부냐의 눈을 세차게 찔 렀다. 부냐는 다시 눈을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망막에 잔영들이 어른거렸지만 부냐는 주위를 대강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숲이다. 모닥불이 조용히 타오를 수 있을 만큼 바람이 없는 곳이다. 아주 깊은 숲인지도 모른다. 부냐는 온갖 자극적인 냄새들이 뒤섞인 공기에 움찔했지만 곧 그 냄새가 자극적일 뿐 불쾌하지는 않다는 것 을 깨닫고는 편하게 숨을 쉬었다.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본 그녀는 자 신이 모포에 덮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닥불과 모포는 잠의 신호 처럼 여겨졌다. 부냐는 다시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포를 치우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잠들어있던 통증들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 라 깨어났다. 부냐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몸 전체가 맷돌에 들어갔 다가 나온 것 같았다. 자고 있는 동안 폭행이라도 당한 것이 아닌가 싶은 고통에 신음하던 부냐는 조금 후에야 그것이 잠들기 전에 가졌 던 기나긴 기마행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냐는 남부럽지 않게 말을 타는 편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귀 족가의 영애에게 요구되는 수준을 넘어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전투 마에 타고 몇 시간 동안 달려본 경험은 없었다. 여행의 막바지에서 부냐는 말이나 자신 중 하나가 죽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여행의 인솔 자는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하지는 않았다. 아마 말이 죽었다면 그건 그녀가 졸도하듯 잠든 후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녀는 그런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에 있는 숲일까? "일어났구나. 뭣 좀 먹겠니?" 목소리에 부냐는 부은 얼굴을 돌렸다. 그리곤 온몸을 꿈틀했다. 그 곳엔 두억시니가 서있었다. 조금 후에야 부냐는 그것이 가면을 쓴 팔 리탐 지소어임을 깨달았다. 팔리탐은 잠자코 모닥불 옆에 앉아 잿더 미를 뒤적거렸다. 그곳에서 겉이 검게 탄 고구마가 나오는 것을 본 부냐는 뱃속을 할퀴는 듯한 시장기를 느꼈다. 팔리탐은 고구마를 뚝 부러뜨려서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그것 을 나뭇잎에 싸서 부냐에게 내밀었다. 꽤 뜨거웠지만 나뭇잎 덕분에 가까스로 놓치지는 않았다. 부냐는 그것을 호호 불면서 먹었다. 입 주위가 새카맣게 변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구마를 다 먹은 부 냐를 보던 팔리탐은 나머지 한쪽도 나뭇잎에 싸서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수통을 찾아 내밀었다. "물을 떠왔다. 목이 메일 테니 마시면서 먹거라." 부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통을 받아들었다. 그 차가운 물이 목구 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부냐는 위화감을 느꼈다. 물을 마신 부냐는 손 바닥을 오므려 수통의 물을 조금 받고는 그것으로 입 주위를 닦으며 생각했다. 언제부터 팔리탐이 그녀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지? 잠들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함께 성을 빠져나올 때도, 비록 그녀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지만 팔리탐의 말투는 공손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마행 동안 자꾸만 뒤쳐지려는 그녀를 격려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팔리탐은, 퉁명스럽거나 사납지는 않았지만 마치 손녀를 대하듯 그녀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부냐는 그것이 어떤 상황 변화 를 암시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얼굴을 닦아내면서 부냐는 팔리탐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하지만 가면이 그녀의 감시를 방해했다. 가면이 팔리탐의 시선을 감 추고 있어 부냐는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얼굴은 부냐를 향하고 있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는 곁눈질로 그녀의 감시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 때문에 부냐는 팔리탐을 훔쳐보기 힘들었다. 팔리탐이 갑자기 말했을 때 부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내가 물을 떠온 개울이 있어. 물소리가 나니 까 찾기 어렵지 않을 거야. 얼굴을 씻으려면 그곳으로 가서 씻거라." 부냐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조금 후 부냐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팔리탐을 보았다. "내가 달아나면 어쩔 생각이지?" 팔리탐은 삭정이를 부러뜨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냐가 움 직이지 않자 그는 툭 던지듯 말했다. "넌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도 모르잖니." 부냐는 홱 돌아서서 팔리탐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성 큼성큼 걷고 싶었지만 모닥불에서 조금만 멀어지자 발 아래가 잘 보 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조심스럽게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부냐는 팔리탐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어 딘지도 모를 이런 곳에서 도망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물소리가 들려왔다. 부냐는 이끼에 한 번 미끄러질 뻔하고는 겨우 조그마한 실개울을 찾아내었다. 폭이 손가락만한 조그마한 것이었기 에 손을 물 속에 담그고 물이 고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떠올리는 식으 로 얼굴을 씼어야 했다. 얼굴과 목 주위를 대충 닦자 몸 곳곳의 통증 에도 불구하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부냐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모 닥불의 불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무들의 한쪽면을 물들이고 있는 주 홍빛은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부 냐는 적당한 바위에 앉아 상황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팔리탐 지소어가 방으로 들어와 칼을 뽑아들고 옷을 입으라고 했을 때 부냐는 스카리가 자신을 처형하기로 결심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말없이 옷을 입었고 팔리탐의 지시 하에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말을 꺼낸 것은 마굿간에 도달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인 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팔리탐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암살성을 빠져나왔다. 팔리탐 한 사람만이 나선 것에 대해 부냐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발 케네의 공작이 부정을 저지른 연인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이 경우 거 칠다거나 단호하다는 평판을 얻기 어렵다. 부정이 저질러진 장소가 바로 암살성 한가운데였기 때문이다. 용감한 도둑을 존경하고 멋진 절도담을 사랑하는 발케네인들은 자신의 성 한가운데서 자신의 여자 를 도둑맞은 공작을 오히려 비웃을 것이다. 따라서 부냐는 공식적인 처형 대신 비밀리에 살해되고는 실종이나 병사로 처리될 것이다. 비 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공작가의 충신 한 사람이 일처리를 맡는 것 은 당연하다. 성을 빠져나온 후에 이어진 장거리 기마행에 대해서도 부냐는 별 의 문을 품지 않았다. 그녀는 시체가 성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거나 하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지금 부냐 는 뭔가가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왜 팔리탐은 말에서 내 리자마자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까? 말에서 내렸을 때 부냐는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찾아온 것은 칼날이 아니라 -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력한지도 모르지만 - 졸음이었다. 너무도 피곤했던 부냐 는 곧장 잠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팔리탐은 그녀가 잠드는 것을 보고 는 차마 자는 여자를 죽일 수 없어서 내버려둔 것일까? 부냐는 조금 전의 고구마가 최후의 식사이고 세수를 하도록 시킨 것은 깨끗한 모 습으로 죽게 하려는 배려라는 식으로 짜맞춰보았다. 말이 되는 것 같 다. 그렇다면 팔리탐의 하대는 이제 때가 왔다는 암시인 것이다. 하 지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부냐는 당혹감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읽어보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죽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중노동과 수면은 그녀에게서 그 런 욕망을 앗아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런 욕망을 느꼈는 지 생각해보았다. 약혼자가 그녀를 감옥에 팽개쳐두었을 때 느꼈던 배신감, 시체를 다루는 소름 끼치는 노역 동안 잃어버린 용기, 죽기 싫어서 사랑을 연기하고 스카리를 따라나섰을 때 상처 입은 자존심, 그리고 그녀 때문에 일어난 전쟁을 보며 느낀 공포와 좌절감과 절망. 스카리가 과거의 다른 남자처럼 그녀를 내버려둔 채 떠났을 때 느낀 자기 부정, 그녀를 무시하는 어머니, 죽은 사람처럼 구는 아버지…… 그런 것이 도대체 어쨌단 말인가? 그녀는 최근에 그토록 격심한 육체적 노동을 한 적이 없었다. 어쩌 면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움직이면 잡생각이 다 달아난다는 소박한 삶의 지혜는 위대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더 이상 죽음이나 자기 파괴에 대해 생각하기 어려웠다. 부냐는 숲속에 서의 잠과 모닥불가의 소박한 식사, 작고 차가운 개울물이 좋았다. 부냐는 죽음이 싫었다. 부냐는 자신의 팔뚝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엄 청나게 아팠다. 부냐는 꼬집힌 부위를 문지르며 멍하게 생각했다. 칼 에 찔리면 얼마나 아플까? 그리고 죽어가는 기분은…… 갑자기 부냐 는 혼이 빠질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달아나야 해.' 부냐는 두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달아나야 한다. 이제 조금 후 팔 리탐은 칼을 뽑아들고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 칼이 그녀의 몸을 찌 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칼날이 목의 살을 파고들어 뼈에 부딪 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칼끝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조각내 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눈을 감은 다음 다시는 뜨지 못하게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달아나야 해!' 부냐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나무와 어둠이 보 일 뿐이다.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팔리탐의 말대로 그 녀는 이곳이 어딘지도 모른다. 부냐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황야를 헤 매다가 굶어죽는 걸까? 문득 부냐는 졸졸거리는 물소리를 들었다. 개 울을 따라가면 어떨까. 그것은 강으로 이어져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데려다줄까? 숲속의 그런 실개울은 조금 흐르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도 있지만 부냐는 그것 외에는 아무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냐는 다시 모닥불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돌아가서 뭐라도 쓸만 한 것을 가져올 수 있다면.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팔리탐은 차분히 칼을 빼어들 것이다. 그러면 부냐는 달아날 수 없다. 기회는 지금뿐 이다. 걸친 옷밖에 없는 맨몸으로라도 지금 즉시…… '바보 같으니.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여.' 숲속에는 달빛도 별빛도 새어들지 않았다. 몇 걸음도 달리지 못해 쓰러지거나 낭떠러지를 구를지도 모른다. 부냐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 었다. 말과 불이 필요했다. 팔리탐의 곁에 있는 것들이다. 부냐는 허 리를 굽혀 돌을 찾았다. 지나치게 작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큰 돌을 몇 개 지나친 후 부냐는 간신히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크기의 육중한 돌을 집어들었다. 돌은 꽤 무거워서 두 손으로 끌어안듯이 들어야 했 지만 부냐는 그보다 작은 돌을 들 수는 없었다. 한 번에 끝내야 하니 까. 부냐는 그것을 끌어안고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돌아왔다. 부냐는 끔찍한 좌절감을 느꼈다. 팔리탐은 모닥불 뒤편에서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 앉아 있 었다. 부냐는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팔리탐의 얼굴에는 시선을 감추는 가면이 없었다. 그는 손에 장죽을 든 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불빛은 그의 소름 끼치는 얼굴을 뚜렷이 드러내었지만 부냐는 그 얼굴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는 않았다. 전장에서 쓰러진 많은 끔찍한 시체를 다룬 경험 때문일 것이다. 혹은 공포보다 더 큰 좌절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팔리탐은 장죽을 피우며 아무 말 없이 부냐를 바라보았다. 던진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현실성은 없었다. 부냐는 돌을 떨어뜨렸다. 그것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을 때 부냐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무엇 인가가 무너져 내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 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얼마 후 팔리탐이 말했다. "내 얼굴에 놀랐니? 널 겁주려고 그런 건 아냐. 연초를 피우는데 방 해가 돼서 잠시 벗었다." 부냐는 흐느끼며 말했다. "어, 얼굴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야." "날 공격하려고 했니?" "으, 응." 탁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냐는 손을 치우고 보았다. 팔리탐은 다 피운 장죽을 돌에 부딪쳐 재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다시 가면으로 가려 있었다. 팔리탐은 장죽을 짐 속에 꽂아넣고는 두 손을 깍지끼어 무릎에 얹었다. 그리고 부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리 없 고 표정 없는 주시가 길게 이어졌다. 부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죽고 싶지 않아." "누가 너를 죽인다고 했지?" 부냐가 눈을 크게 떴다. "조용히 죽이려고 데리고 온 것 아냐?" "너를 죽일 계획은 없다." "그러면 왜? 왜 여기로 데리고 온 거지?" 팔리탐 지소어는 깍지낀 손의 집게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떻게 대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그는 삭정이 하나를 부러뜨려 모닥불 속에 집어넣었다. 불티가 부스스 피어올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뭣하지만, 너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이 것은 내 사적인 감정이고 진심이다." "고맙다고? 뭐가?" "스카리를 실망시켜준 것." 부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팔리 탐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부냐는 대화를 잇기 위해 말했다. "당신 원래 연초를 피웠어?" 팔리탐이 느리게 대답했다. "조금 전에 본 것처럼 혼자 있을 때 가면 벗고…… 가면 쓴 채 코로 연기를 뿜으면 가면 안에 연기가 꽉 차버리거든." "한두 번이지만 당신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나 궁금해한 적이 있 어. 취미가 있긴 있었군. 혹시 다른 취미는 없어?" 가면 뒤에서 웃음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밤에 숲 속에서 처녀 목 자르는 취미는 없단다." 부냐는 움찔했다. 그녀는 의혹에 빠진 눈으로 가면을 바라보았다. 가면에는 별로 도움될 것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투는 내용과 달리 다정한 편이었다. 부냐는 용기를 끌어내기로 했다. "나를 죽이러 온 것 확실히 아니라는 거야?" "안 죽인다." 확고한 선언이었다. 부냐는 안도했다. 팔리탐이 무슨 이유로 이곳까 지 그녀를 데리고 왔건 그것은 절대로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는 아니 다. 되찾은 여유 속에서 부냐는 다른 경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면 혹시 추방이야? 날 여기 내버리고 갈 거야?" "아니. 나는 당분간 너와 함께 여행할 거다." 여행? 부냐는 그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말해줄 수 있어?" 팔리탐은 선선히 대답했다. "여기는 앗젠 남동쪽이야. 이 숲의 이름은 포리타이, 메세훈, 혹은 리버즌의 숲이라고 불리기도 하지. 마지막 이름은 최근에 생긴 거야. 발케네 역사에 대해 잘 모를 테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 리버즌은 발케네 전역에 이름을 떨친 아주 큰 도둑의 이름이었어. 추격을 당하 거나 해서 몸을 숨길 필요가 있을 때 리버즌은 주로 이 숲에 숨었다 고 알려져 있지. 이름이 여러 가지라는 것, 그리고 도망자가 몸을 숨 겼다는 것 등에서 알 수 있겠지만 이 숲은 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 어. 이 숲을 죽 가로질러 남동쪽으로 좀 더 가면 카지라가 나오지." 부냐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발케네의 지리에 대해 모 르는 그녀로서는 팔리탐의 설명만으로는 이곳이 땅 위의 어느 곳이라 는 사실, 그러니까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밖에 알 수 없었다. 부냐의 표정을 읽은 팔리탐은 좀 더 쉽게 설명했다. "우리는 파리조에서 동쪽으로 왔어." "동쪽이면 선조해가 있는 쪽이야?" "그래. 이 숲을 동쪽으로 빠져나가면 선조해가 나타나지. 남쪽으로 내려가면 키준 산맥과 부딪힐 테고." 그제서야 부냐는 자신이 지상의 어디쯤에 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 었다. 하지만 그녀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은 지도상의 어떤 지점일 뿐 그녀는 여전히 이 근방의 지리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부냐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사람 사는 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의 외진 숲속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데?" "카지라 쪽으로." "왜 거기로 가는 거지?" 팔리탐은 다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곳은 별로 의미가 없어." "의미가 없다고?" "그래. 우리가 스카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지." 부냐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에는 자신 의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왜 공작님을 그렇게 마구 부르는 거지?" "응?" "조금 전에도 스카리라고 불렀어. 한 번은 실수일 수도 있지만 또 그랬어." 팔리탐은 가면을 모닥불로 향했다. "너도 그러는 것 같던데." "그건 당신이 왜 그러는가에 대한 대답이 아니야. 그리고 당신은 나 에 대해서도 하대를 하고 있어. 남몰래 연초를 피우는 것 외에 불손 함을 키우는 일도 했던 거야? 하지만 충성을 맹세한 당신의 주군에 게……" "스카리 빌파는 내 주군이 아냐! 내 주군은 암살의 주인이시다." 손녀와 대화하는 듯한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전혀 다른 날 카로운 팔리탐의 어조에 부냐는 입을 다물었다. 모닥불의 불분명한 조명 속에서도 부냐는 팔리탐의 어깨가 긴장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 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어 모닥불을 보았다. 그녀가 죽은 암살공에 게 바치는 팔리탐의 충성에 대한 말을 떠올렸을 때 갑자기 팔리탐이 벌떡 일어났다. 부냐는 놀란 표정으로 팔리탐을 보았다. 팔리탐은 숲 저편 어딘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후 팔리탐은 욕설인 듯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재빨리 짐을 챙겨들었다. 그는 말 쪽으로 짐을 가 져가 안장에 묶어놓고는 부냐에게 다가왔다. 겁을 집어먹은 부냐는 뒤로 주춤 물러났지만 팔리탐의 손을 피하지는 못했다. 팔리탐은 그 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수통을 기울여 모닥불을 껐다. 파박 하는 소리와 함께 모닥불이 꺼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운 연기에 부냐는 콜록거렸지만 팔리탐은 그녀가 기침을 하고 있도록 내 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부냐를 이끌고 어둠 속을 걸었다. 정신 없이 끌려가던 부냐는 조금 후 말의 안장을 만지게 되었다. "올라." 말로 명령할뿐만 아니라 팔리탐은 부냐의 발을 붙잡아 등자 위에 올 려주었다. 부냐는 말 위에 올라탔다. 팔리탐이 자신의 말에 오르는 짧은 시간 동안 부냐는 겨우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누가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거야?" 팔리탐은 대답 대신 부냐의 말고삐를 채어갔다. 부냐는 갑자기 말에 서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팔리탐에게서 도망쳐서 추격자들 에게 갈 수 있다. 하지만 부냐는 팔리탐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 수 없 었고 그 때문에 팔리탐이 피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추격자가 자신에게 는 호의적일 거라고도 자신할 수 없었다. 뭐가 뭔지 모를 혼동 속에 서 부냐는 머뭇거렸고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기회는 지나갔다. 팔리탐은 부냐의 말을 끌며 숲속으로 걸어들어갔 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상체를 낮추며 부냐는 일단 팔리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에게도 장점은 있다. 그녀를 절대로 죽이지 않 겠다고 확언했으니까. 그것은 꽤 중요한 장점이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0. 바람의 탄주, 돌의 춤 (4) 2004/09/13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0-4 관련자료:없음 [4930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9-13 03:27 조회:85 피를 마시는 새 30. 바람의 탄주, 돌의 춤 - 4 하인샤 대사원에서 젊은 공자 이이타 규리하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소리 로베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발은 호들갑스러운 매파나 되는 양 그를 소리에게 이끌고 싶어 안달했지만 이이타는 제자리에서 움직 이지 않았다. 만약 지금 그녀에게 다가간다면 이이타는 틀림없이 그 녀를 덥석 끌어안을 것이다. 하인샤 대사원의 경내에서 권장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소리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이타의 모습을 보자 마자 소리는 비명 같은 환호를 지르고는 바구니를 팽개치며 달려왔 다. 이이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에게 두 팔을 내밀었 다. 그리고 공자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는 그를 쓰러뜨리려는 것처럼 세게 안겨왔다. 이이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열쇠가 없을 땐 어깨로 들이받는 것도 문 여는 좋은 방법이 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점잖은 방법도 있잖아?" "어떤 방법이죠?" "이를 테면 정중히 문을 두드리고 열어달라고 말하는 거지." 소리는 웃으며 문을 두드리듯 이이타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계세요? 공자님. 전데요. 들어가도 될까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이봐, 소리가 왔어. 빨리 옷장에라도 숨 어. 조금만 기다리면……" "공자님!" 이이타는 빙긋 웃고는 소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소리는 혀를 낼 름 해보이고는 이이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조금 전 팽개쳐 둔 바구니로 다가가서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풀 위에 떨어진 바구니 는 내용물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이타는 그쪽으로 다가가 바구 니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버섯이야?" "예. 공양간에 가져다드리려고요." "불목하니들이 네게 부탁했어?" "아니오. 산책 나오는 셈치고 제가 하기로 한 거예요. 파지트 스님 이 한 말도 있고." "스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소리는 걸으면서 이야기하자는 몸짓을 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이이 타는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버섯을 찾아 응달진 곳을 보며 걷던 소 리는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공자님. 스님들이 뭐가 되려고 애쓰는지 아세요? 바보가 되려고 노 력하는 거래요. 웃기는 말인데 뭔가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요. 그래 서 저도 그 바보라는 거 한 번 되어보겠다고 했어요. 달리 바쁜 일도 없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파지트 스님은 그렇다면 계속 이야기를 청 하거나 하지 말고 할일을 찾아보라고 하시고는 텃밭으로 가셨어요. 혹시 귀찮아서 저를 쫓으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되긴 하지만 일 단 그 말을 따라보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스님이 해주신 이야기는 전 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하는 거요." 소리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이이타가 말했다. "귀찮아서 그런 것은 아닐 거야." 소리는 이이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다시 몸 을 돌렸다. 느타리 버섯의 군락을 발견한 그녀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이타는 그녀 곁에 앉아 함께 버섯을 따려 했지만 소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공자님. 아직 덜 자랐네요. 며칠 후에 와서 따야겠어 요." 이이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소리가 그의 팔을 붙잡아 앉혔다. 이이타는 소리가 이끄는 대로 뒤엉킨 굵은 나무뿌리들 위에 앉게 되었다. 소리는 그의 곁에 앉아서는 무릎 위에 바구니를 얹었다. "공자님. 죄송해요." "뭐가?" "할일 없다고 말한 것이오. 공자님 얼굴 굉장히 피곤해 보여요. 그 런데 전 심심해서 바보나 되어보겠다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죠. 전 바보가 될 필요가 없어요. 진짜 바보니까. 제가 미우시죠?" "이런. 큰일이군." "큰일?" "바보를 사랑하는 걸 보니 나도 바보였어." 소리는 고개를 돌려 이이타의 미소 띤 얼굴을 보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이타는 소리의 등 뒤로 팔을 돌려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내가 소리와 함께 발케네를 나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물 론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때 나는 발케네를 조롱하고 있었지. '발케 네야, 들어라. 난 네 보물을 훔쳐간다.' 발케네로부터 무엇인가를 훔 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잖아. 자손 대대로 자랑할 일이지." 소리는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이이타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했지. 소리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주고 하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하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내겐 그럴 능력이 없었지. 욕심만 컸던 셈이라고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를 내 일 에 억지로 참여시키는 것뿐이었어. 그래도 넌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 지. 소리.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기뻐. 내가 아쉬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그렇게 하도록 해주지 못했다는 것뿐이야. 어 디에도 없는 신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그렇게 해." "어, 저는 머리카락을 깎고 싶지는 않아요." "정말 고마워." "저는 그냥 이 스님들이 이 산 위에 모여서 뭘 하는지 궁금할 뿐이 에요. 신기하잖아요. 말씀하시는 것도 정말 이상하고요. ……그런데 고맙다고요?" "응. 그 애들을 대신해서 감사하는 거야." "예? 그 애들이오?" "다른 엄마들은 머리카락이 있는데 자기네들 엄마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애들이 불쌍하잖아." 소리는 깜짝 놀라서 이이타의 어깨에서 머리를 뗐다. 이이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얼굴을 보던 소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바 구니 속의 버섯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이타가 약간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더 멋진 장소에서 더 멋지게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면 정말 미안해." 소리는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젊은 날 의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소싯적에 공자님과 사랑해봤 다고 자랑하는 비렁뱅이 노파를 비웃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외롭게 늙 어가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벅찬 가슴 때문에 그녀는 뜨거운 한숨 같은 한 마디만을 꺼내놓았다. "아니에요." "규리하성의 신부로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욕심만 크고 능 력은 없군. 하지만 낙엽 떨어지는 하인샤 대사원의 신부도 괜찮을 것 같아." 소리는 어지러운 기분 속에서 말했다. "여기서 혼례식을 할 수 있나요?" "응? 응. 그래. 떠들썩한 피로연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원은 최 고의 하객을 모실 수 있는 장소지. 어디에도 없는 신께서 하객이 되 어주시니까. 그런 하객은 규리하성에서도 모시기 어렵지." "와. 그렇네요." 이이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를 보았다. 그는 그늘진 얼굴로 소리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겠지. 아니. 기뻐해 주길 바라는 쪽이 잘못이겠지. 이렇게 불안한 신랑이라니.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앞날은 위태롭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남편이라니, 악몽도 그런 악 몽이 없겠지. 미안해. 내멋대로……" 소리의 손이 뻗어오는 것을 본 이이타는 말꼬리를 흐렸다. 소리는 가볍게 주먹을 쥐곤 이이타의 가슴을 똑똑 두드렸다. 그 손의 움직임 을 보던 이이타가 소리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소리는 미소 지은 채 울고 있었다. "계세요?" 이이타는 입을 다물었다. 소리는 이이타의 가슴 위에 손을 얹어둔 채 웃으며 울먹거렸다. "이이타 규리하 공자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와 무슨 관계입니까?" "그 분의 아내입니다." 이이타는 문을 열 듯 두 팔을 벌렸다. 소리는 그 품 안으로 들어갔 다. 우연히 행운을 쟁취한 신분 낮은 여인이 아니라, 공후 같은 당당 함으로. 시카트 규리하는 퍽 재미있는 일도 다 보겠다는 듯이 행동했고 그 사실에 대해 특별히 논평할 기회는 원하지 않았다. 형의 결혼 선언에 대해 그가 보인 반응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 말은 불쾌함이나 거부감이 아닌 당혹감의 표현이었다. 아이저 규리하는 조금 당혹한 표정으로 장자를 바라보다가 그 말을 무시했다. 아이저는 명확한 결론 없이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이이타는 다그치지 않은 채 아이저의 대화 방향을 따라갔고 그 날은 더이상 이이타와 소리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아이저는 갑자기 소리를 불러들였다. 잔뜩 긴장한 소 리는 이이타의 부축을 받아야 했고, 도중에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 다. 가까스로 두 사람이 아이저의 방앞까지 갔을 때 그곳에서 기다리 고 있던 시카트가 손을 내밀었다. 소리는 그 손동작이 입장 불가를 의미하는 것이라 지레짐작하고는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시카 트가 원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발케네인이잖아. 칼 가지고 있지?" 소리는 겨우 비수를 꺼내어 시카트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등 떠밀리듯이 아이저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이타와 시카트는 마당에서 기다렸다. 시카트는 이이타가 신경이 날카로워져 뒤스럭거 릴 거라 예상했지만 그의 형은 방문을 등진 채 담담하게 서서 하늘을 보았다. 결국 시카트가 더 못견디게 되었다. "형. 생각 많이 하고 결정한 거지?" "그래." "우리의 몰락을 나타내는 증거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생각해 봤지?" "몰락이라고?" "제기랄. 규리하의 공자가 발케네의 하녀와 결혼할 정도면 얼마나 몰락한 건지 알만하다는, 뭐 그런 것 말이야. 사람들이 비웃지 않겠 어?" 이이타는 동생의 말에 언짢아졌지만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 규리하를 되찾는 것 따위는 포기하고 초 야로 물러나려는 것처럼 보일 거란 말이지. 고마운 지적을 해줬군. 하지만, 시카트. 우리가 하늘치를 다루게 된 후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까? 그렇게 크고 분명한 규리하 수복 의지의 증거 앞에서?" 시카트는 두 손을 펼쳐보였다. "그러면 그 후에 결혼해도 되잖아. 하늘치를 손에 넣고 규리하를 되 찾은 다음에. 지금은, 글쎄. 일부러 약점을 만드는 일이 되잖아." "소리는 자기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 발케네 여자니까. 그리고 소리에겐 인질이 될 가족이나 친지도 없어." "좋아. 약점은 아니라고 치지. 하지만 지금이어야 하는 이유는 없는 거잖아." "아니, 있다." "그게 뭔데?" "소리에게 하늘치를 결혼 예물로 주고 싶으니까." 시카트는 경악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둘렀다. "맙소사…… 형. 그런 예물을 받은 신부는 유사 이래 한 명도 없었 어. 만약 형과 그 여자가 결혼하게 된다면 그 여자는 역사에 길이 남 을 신부가 되겠군." 시카트는 이이타의 선언에 대해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감정을 동요시키는 말이었고 시카트는 정말 그런 결혼이라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저와 소리가 있는 방문쪽을 흘끔 돌 아보고는 형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인샤 대사원을 향해 날아 오고 있는 하늘치를 보듯이. 힌치오는 바위 위에서 아침 햇빛 속에 떠오르는 넓고 조밀한 포리타 이의 원시림을 내려다보며 언짢은 기분을 느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숲은 나뭇꾼의 도끼를 모른다. 따라서 그 숲에서는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레콘이 위로 힘껏 뛰어올라도 빽빽히 우거진 나무들의 수관부 외엔 아무 것도 볼 수 없 다. 설령 수백 명의 도망자들이 그 속에서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다 해도 위에서 봐선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쫓는 도 망자는 단 두 명이다. 그런 상황에서 추격자들이 레콘이라는 것은 추격의 성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스카리 빌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카리 는 그렇게 강한 힘, 무지막지한 속도, 새에 버금가는 도약력을 가지 고 있어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난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이 겨우 늙은이 와 여자 한 명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했다. 그것을 나태함의 증거로 해석하겠다는 듯이 말하려는 스카리에게 맞서 힌치 오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스카리의 말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무시한 것이다. 관계 개선에 도움될 만한 처신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의 관계가 험악하게 바뀌는 것은 힌치오보 다는 스카리에게 더 괴로운 일이었다. 팔리탐 지소어와 부냐 헨로를 추적하기 위해 스카리가 데려온 것은 시중을 들 두 명의 인간을 제외 하면 대부분 사라티본군에서 선발된 레콘들이었다. 그리고 그 레콘들 은 힌치오를 따르는 편이었다. 스카리의 신세는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 레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스카리는 그런 상황이 야기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카리는 부냐가 사라졌다는 사실, 그리고 팔리탐의 배반에 대해 미 친 듯이 화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숲을 바라보던 힌치오는 몸을 돌렸다. 어쨌든 팔리탐이 없으니 스카 리를 상대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어제 종일 사라티본군의 레콘 들을 따라 달리게 했으니 어쩌면 지금 쯤 스카리는 그룸성에 남아있 지 않고 부득부득 따라온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힌치오는 희망을 가지고 바위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숲을 가로질러 걸어간 힌치오는 곧 스카리 빌파에게 도달했다. 힌치 오의 희망과 달리 스카리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소 나무 아래에 앉아 시종들을 꾸짖고 있었다. 힌치오는 그를 억지로 깨 우는 즐거움을 맛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아쉬워 하며 스카리의 앞 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스카리가 말했다.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았나?" 그들이 어제 저녁 멈춘 것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부 냐와 팔리탐의 흔적을 놓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카리는 그것에 대 해 질문하고 있었다. 힌치오가 말했다. "못 찾았어." "제기랄, 벌써 해가 떴잖아! 어디로든 출발해야 해.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른다는 건가?"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아. 지형 때문에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긴 했 지만 팔라팀은 꾸준히 카지라 쪽으로 향하고 있었어. 그러니 그쪽으 로 가도 된다고 생각해. 사실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고." 스카리는 여러 번 논의되었던 그 가설에 대해 반대했다. "젠장. 이미 말했어. 팔리탐은 카지라에 갈 이유가 없어. 거기엔 팔 리탐의 연고가 없어." "팔리탐이 왜 부냐를 납치했는지도 모르잖아." 스카리는 자신이 이미 셀 수 없이 고민해본 문제를 제기하는 힌치오 에 대해 증오를 느꼈다. 마치 그의 멍청함을 지적하는 것처럼 느껴졌 다. 힌치오의 질문에 대답하겠다는 욕구만으로 스카리는 자신이 이미 폐기했던 가설 하나를 꺼내었다. "역모겠지. 그 놈이 그 가면 뒤에 역심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부냐 를 납치해서 인질로 삼으려는 거지." 힌치오는 가소롭다는 듯이 부리를 딱 부딪쳤다. 바닥에서 돌멩이 두 개를 쥐어올린 힌치오는 호두알을 부딪치는 것처럼 그것을 손바닥 안 에 넣어 잘그락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팔리탐은 다른 어디로 가는 대신 그룸성에 있어야 하지. 너를 찌르려면 거기가 제일 좋잖아." "아냐. 그 놈은 엘시에게 가는 거야. 엘시에게 투항하려는 거지. 부 냐는 엘시에게 바치는 그 놈의 진상품인 거지. 발케네공의 약점이자 엘시의 전 약혼자잖아. 힌치오. 카지라가 아니야. 팔리탐은 숲을 빠 져나가자마자 남쪽으로 향할 거야. 시구리아트 산맥 동쪽을 통해 남 하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힌치오는 돌을 세게 부딪혔다. 호두알과 달리 돌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돌이 깎이는 날카로운 소리에 스카리는 이맛살을 찌푸 렸다. 힌치오가 말했다. "팔리탐이 왜 엘시에게 가는 거지?" "엘시가 황제가 될 거라고 믿으니까. 그 늙은 기회주의자는 초조했 을 거야. 황제가 될 자가 남쪽에 있는데 자기는 머나먼 북쪽에 있으 니까. 조바심 때문에 그 놈은 목숨을 걸고 도박에 나선 거야." 스카리의 초조한 목소리를 들은 힌치오는 스카리도 자신의 추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래도 힌치오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스카리. 정말 그렇게 믿나?" 힌치오는 대답이 긍정일 경우 스카리의 후손을 얻은 다음 그를 제거 한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모조리 말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팔리탐이 그 때마다 그 계획을 만류했다는 사실도. 하지만 스카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믿지 않아." 힌치오는 벼슬을 꿈틀했다. 그는 수염볏을 만지작거리며 스카리의 말을 기다렸다. 스카리는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난 아무 것도 모르겠어. 제기랄.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팔 리탐이 내게 질려서 떠난 거라면, 좋아. 그럴 가능성을 인정하겠어. 하지만 그렇다면 팔리탐은 혼자 떠났을 거야. 레이헬 라보 태위처럼 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사직서 한 장은 남겨두고서. 그런데 팔리탐은 부냐를 데리고 떠났어. 왜? 무엇 때문에? 부냐가 팔리탐에게 왜 필요 하지? 믿기 어렵지만, 힌치오. 나는 팔리탐이 남몰래 부냐에게 연심 을 품고 있었다는 생각까지도 해봤어…… 힌치오. 꼭 그렇게 웃어야 겠나?" "제, 젠장. 웃기잖아! 그런데 웃지 말라는 거야?" 힌치오는 가까스로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폭소했다. 화가 나서 그 를 노려보던 스카리도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웃음을 멈춘 힌치 오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 "어, 네 여자를 비웃는 건 아냐. 스카리. 팔리탐이라면 대화가 통할 만한 여자를 좋아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응, 그래. 첫째 부인 같은 여자 말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정말 그렇게 믿 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다 할 정도로 혼란스럽다는 말이야. 제기랄. 난 지금 부냐를 내 품에 되찾고 싶은 마음과 팔리탐을 붙잡 아서 왜 그랬냐고 묻고 싶은 마음 중 어느 것이 더 큰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 어느 쪽이라도 빨리 그들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은 같아. 그렇지?" 힌치오는 수염볏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군. 하지만 네가 올 필요는 없었어. 너는 발케네의 공작이야. 그룸성에서 발케네를 다스려야 하잖아. 지금이라도 추적은 나한테 맡 기고 파리조로 돌아가는 것이 어때? 우리는 제국군 패잔병들을 다 잡 아들이지도 않았어. 그 중 몇 놈이 이 인적 드문 숲에 숨어 있으면 어쩔 거야?" "그 놈들은 무섭지 않아. 파리조에 남아있다가 내 심장이 터져버리 는 것이 무섭지. 힌치오. 도와줘. 오늘 안에 그들을 붙잡을 수 있다 고 말해줘." "스카리. 그런 약속은 할 수 없어." 스카리는 다급하게 말했다. "노력하겠다는 약속은? 그런 약속이라도 듣지 못하면 난 정말 머리 가 어떻게 될 것 같아!" 힌치오는 희미한 웃음기를 담은 표정으로 스카리를 바라보다가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 노력해보지. 나도 팔리탐이 왜 그랬는지 빨리 알고 싶으니 까." "고마워, 힌치오." 힌치오는 부리를 열었다가 다시 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카리 에게서 멀어지며 그는 작은 감동을 느꼈다. 자신의 혼란을 솔직히 고 백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스카리의 진솔한 태도가 그를 흔들었다. 힌 치오는 스카리의 후손을 얻은 다음 그를 제거한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팔리탐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생각했다. 팔리탐은 스카리에게 있 을지도 모르는 변화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은 그에게 불공평한 일이라 고 말했다. 힌치오는 팔리탐의 바람대로 스카리가 정말 변화하고 있 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힌치오의 추측처럼 스카리가 천둥벌거숭이 같은 나이 많은 소년에서 더불어 대화할 만한 남자로 변하고 있는 것이라면, 팔리탐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스카리의 변화를 알았다면 팔리탐은 크게 기뻐했을 테니까. 힌치오는 팔리탐을 빨리 붙잡아서 스카리의 변화를 확인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자신의 감동에 대해 스카리에게 알려 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힌치오의 바람과 달리 스카리는 힌치오가 감동했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그것을 바라며 힌치오를 세심하게 관찰했기 때문이다. 스카리 는 스스로도 감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다른 남자와 간통한 연인을 되찾기 위해 보좌도 비우고 나라도 팽개친 채 위험과 공포 속에 과감 하게 뛰어든 추적자였다. 사람들은 이 낭만적이며 용감하고 한없이 자비로운 젊은 군주를 위해 노래를 지을 것이다. 스카리는 그 사실이 정말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스카리는 자신이 정말 부냐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켕기는 기분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오늘 안에 두 사람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다는 그의 말은 따라서 거 짓말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으므로. 부냐 헨로는 겁먹은 표정으로 팔리탐 지소어를 외면했다. 팔리탐의 가면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만큼 속마음도 드러내지 않 았다. 하지만 부냐는 그가 크나큰 혼란과 절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팔리탐은 끊임없이 욕설을 중얼거리고 신음을 토하 고 자신의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추적자의 존재가 스카 리 빌파와 사라티본군의 레콘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로부터 팔리탐 은 계속 그렇게 행동했다. 부냐는 레콘들에게 쫓기는 자라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 해 보려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팔리탐의 행동은 좀 지나친 편이었다. 팔리탐은 레콘들에게 익숙했다. 그는 추적자들이 거리를 좁히지 못하 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 그 방법들은 제대로 작용했다. 처음 추적 자들의 존재가 파악된 후로 거리가 좁혀지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팔 리탐은 추적자들을 잘 따돌리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할 수도 있겠지만 팔리탐은 그렇지 않았다. 팔리탐이 간혹 부냐를 홱 돌아볼 때 부냐는 가면을 뚫고 그의 절망하는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때마다 부냐는 주눅이 들어 그의 가면 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팔리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뚫어지 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부냐는 견딜 수 없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부냐를 쏘아보던 팔리탐이 다시 말을 출발 시켰다. 부냐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걸으며 주위를 살피던 팔리탐은 추적하는 레콘들에게 장애물을 안겨주기 위해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 있는 조그마한 개울을 건넌 팔리탐은 다시 비탈을 올라갔다. 그 동안 부냐는 계속해서 도망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 다. 하지만 추적자들과의 거리는 멀었고 그녀는 뛰어난 승마술을 가 지고 있는 팔리탐을 따돌릴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공격해서 쫓아오는 것을 지연시켜야 했다. 하지만 말에서 내리지 않는 이상은 팔리탐에게 접근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팔리탐은 말을 멈추지 않았 다. 그러다가 부냐는 스스로 낙마해서 도망치는 속도를 줄여볼까 하 는 생각을 떠올렸다. 부냐는 말 아래로 떨어진 다음 다리가 부러졌노 라고 말한다면 팔리탐이 어떻게 할 것인지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아 래를 내려다본 부냐는 팔리탐의 반응보다 자신의 반응이 더 두려워졌 다. 바닥은 돌투성이였고 아래로 떨어졌다간 크게 다칠 가능성이 높 았다. 낙마는 좀 더 푹신한 곳에 도달할 때까지 미루어야 했다. 부냐에겐 실망스럽게도 땅은 점점 거칠어졌다. 자갈과 모래, 모난 바위들이 계속 나타나서 말들도 걷기 힘들어 했다. 왜 그렇게 땅이 거칠어지는지 의아해하던 부냐는 갑자기 자신들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틈엔가 그들은 바위산을 오르고 있었다. 부냐는 산자락 아래로 널리 펼쳐진 숲을 보았다. 사방의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광대한 숲은 기울어가는 태양의 불그스름한 빛을 머리에 받 으며 노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이 걸어올라가는 바위산 또한 암 적색과 적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석양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 직 충분한 빛이 있었다. 높이 뛰어오를 수 있고 눈이 좋은 레콘이라 면 바위산의 비탈을 오르는 그들을 쉽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것은 마치 여기 있으니 와서 잡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은…… "팔-리-탐-!" 깜짝 놀란 부냐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거리가 상당히 멀었 기에 그 계명성은 치명적인 굉음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직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냥 불러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 냐는 추적자들이 자신들을 발견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 목소리는 네 가 보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부냐는 팔리탐의 뒷모습을 보았다. 팔리탐은 말을 멈췄다. 말에서 내린 그는 부냐에게 다가와 말 아래 로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부냐가 아래로 내려오자 팔리탐은 기묘 한 짓을 했다. 그는 말등에 매어둔 짐을 끌어내리고는 두 말의 안장 과 재갈 등을 풀었다. 잠시 후 말들은 편자 외에는 야생마나 다름없 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팔리탐은 마구들을 아무 곳에나 팽개쳐놓고는 말의 목을 쓸어주었다. "가거라." 팔리탐은 말의 볼기를 찰싹 때렸다. 말들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산비 탈 아래로 내려갔다. 부냐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 모든 광경을 보다가 팔리탐이 그녀를 돌아보았을 때 말했다. "뭐 하는 거지?" "이 이상은 말들이 오르기 어렵다. 두 발로 걸어야겠구나." "산을 올라간다는 거야?" "그래." 부냐는 팔리탐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추적자의 존재가 확인되었는데 말을 버리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물 이 흐르는 계곡 대신 산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도무지 레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도주를 포기했다면 산에는 왜 올라간단 말인가? 그녀가 머뭇거리자 팔리탐은 손짓으로 그녀를 재촉 했다. "어서. 네가 앞장서거라. 길이 좋지 않다. 혹 미끄러지면 내가 받쳐 주마." 부냐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며 걸음을 옮 겼다. 그녀가 걷기 시작하자 팔리탐은 뒤에서 따라왔다. 산을 오르며 부냐는 산의 형태를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그것은 산 맥의 일부가 아니라 숲 속에 혼자 우뚝 솟아있는 바위산이었다. 그렇 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주위에 비교할 만한 다른 산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높아보였다. 다행히 산은 나무와 비탈, 바위, 낭떠러지 등이 제멋대로 뒤엉킨 험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산도 아니었다. 풀이나 나무가 별로 없는 그 바위산은 온통 바 위이거나 미끄러지는 모래였기에 발디딤이 쉽지 않았다. 부냐는 빠르 게 지쳤다. 숲이 저 아래로 보이는 바위 비탈을 네 발로 기듯 오르며 부냐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팔리탐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힘 들어 하는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의 손을 붙잡고 바위 하나를 기어오 르던 부냐는 문득 산 위로 올라온 후로 팔리탐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 아래에서 팔리탐은 영문 모를 노여움으로 그녀를 쏘아보곤 했지만 이제 그는 정성껏 그녀를 도왔다. 그는 더이상 욕설 을 지껄이지도 않았고 머리를 쥐어뜯지도 않았다. 그녀의 기운을 북 돋기 위해 가끔 꺼내어놓는 말들은 평온했다. 아니, 깊은 실의 때문 에 자포자기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부냐가 더 이상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팔리탐은 절벽 위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로 그녀를 이끌어 가서는 바위 위에 앉혔다. 피로한 표정으로 아래를 본 부냐는 덜컥 겁을 집 어먹었다. 만약 팔리탐이 그녀를 민다면 부냐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 로 굴러떨어져 즉사할 것이다. 부냐는 팔리탐이 추적자들에게 그녀의 처형을 보여주기 위해 잘 보이는 곳으로 올라왔을 가능성에 대해 생 각해 보았다. 진저리처지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위 위에 부냐를 앉힌 팔리탐은 그녀 바로 곁에 앉아서는 장죽을 꺼냈다. 장죽에 연초를 채운 팔리탐은 점화통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팔리탐은 노을이 새빨갛게 떨어지는 바위 위에서 가 면을 벗었다. 처음으로 그 얼굴을 보았을 때 부냐는 별다른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 다. 백화각에서 그녀는 끔찍한 상태의 시신들을 많이 보았고 당시에 는 절망 때문에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숲의 나무들 위로 수백 미터 쯤 되는 공중에서 붉은 대기 속에 드러난 팔리탐의 얼굴은 무서웠다. 부냐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외면하고는 그의 얼굴에 서 떨어져 나온 가면을 보았다. 그 가면 안쪽에서 부냐는 황혼의 빛 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팔리탐은 부냐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장죽을 입에 문 채 팔리탐은 가면 안에 붙어있던 것을 떼어냈다. 빛 을 받아 반짝거리는 그것은 금속 조각이었다. 부냐는 그것이 부러진 칼임을 깨달았다. "가면 속에 숨겨둔 비밀 무기야?" 팔리탐은 그것을 황혼 속에 비춰보며 말했다. "아니. 이것은 발케네공 락토 빌파를 찔러죽인 칼의 일부다." "칼에 찔렸다고? 그는 노대에서 몸을 던졌잖아." "칼에 찔린 다음에 그렇게 되었지." 부냐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가 말하려 했을 때 저 멀 리서 다시 계명성이 들려왔다. "팔-리-탐-! 나-힌-치-오-다-! 거-기-그-대-로-있-어-! 내-가-간-다 -!" 조금 전보다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부냐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산의 그림자가 떨어 지고 있어서 어두웠다. 팔리탐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말 했다. "그래. 스카리 빌파가 아버지를 찔렀다." 부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 며칠 동 안 숲속을 걷느라 느끼지 못했던 바람이 바위산 위에 있는 그녀의 몸 을 흔들었다. 아래로 떨어질까 두려워진 부냐는 몸을 뒤로 끌어당겼 다. "스카리가?" "그래." "그걸 알면서도…… 그를 보호한 거야?" 팔리탐은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팔을 뒤로 끌어당겼다가 칼 조각을 멀리 집어던졌다. 그것은 한두 번 반짝거리다가 곧 보이지 않 게 되었다. 그리고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부냐는 묘하게 무시무시한 그 소리에 공포를 느꼈다. 마치 피붙이를 찌른 칼을 받아든 숲이 분 노하는 듯했다. 갑자기 팔리탐이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놀라서 팔리탐 을 본 부냐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팔리탐의 얼굴은 이제 그 두억시 니를 연상시키는 용모 외에 다른 것 때문에 무섭게 변해 있었다. 그 는 분노와 혐오로 부냐를 쏘아보고 있었다. 부냐는 그 시선에 마비되 었다. 팔리탐은 그녀의 어깨를 놓았다. 겁먹은 그녀를 동정하듯 팔리탐은 고개를 돌려 장죽을 피워물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침착했다. "미안하구나. 애야.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단다." 부냐는 무엇이 다행이냐고 묻지도 못했다. 팔리탐이 연기를 내뿜으 며 말했다. "나는 너를 데려와야 했다. 너는 스카리를 움직일 인질이 되기로 되 어 있었거든. 나는 그것을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 주 군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었지. 그런데 네가 스카리를 실망시켰지. 나는 네가 더 이상 인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판단하자 마자 너를 납치한 거야. 그 때가 정말 기회였기 때문에 좀 무지막지 한 납치가 되고 말았지. 하지만 나는 스카리가 너를 용서하기 전에 납치해야 된다는 생각에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부냐는 큰 혼란 속에서 팔리탐의 옆얼굴을 보았다. 팔리탐의 설명은 많은 의문을 해소해주는 것이었다. 왜 그런 특이한 시점에 갑작스러 운 납치가 일어난 것인지 부냐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팔 리탐은 자신의 주군이라는 말을 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스카리 빌파일 리는 없다. 스카리가 자신을 조종하기 위해 인질을 필요로 할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팔리탐은 스카리가 자신의 주군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스카리 대신 팔리탐이 자신의 주군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자였다. "팔-리-탐-! 아-무-짓-도-하-지-마-라-!" 아래쪽에서 계명성이 들려왔다. 그들이 산 가까운 곳에 도달한 것이 분명하다. 계명성은 이제 달래는 투였다. 가만히 있으면 맞이하러 갈 테니 절벽 위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말이었다. 부냐 는 그들이 어디쯤 왔는지 보기 위해 다시 앞으로 조금 나섰다. 하지 만 산 아래는 캄캄했다. 주위는 어느새 상당히 어두웠다. 팔리탐을 본 부냐는 이제 그의 험악한 얼굴이 어둠 속에 잠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빛 대신 찾아온 것은 어둠뿐만이 아니었 다. 맹포한 바람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폭풍이 다가오 고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아니, 폭풍 수십 개가. 그런데도 묘하게 팔리탐의 목소리는 잘 들렸다. "그런데 스카리는 너를 사랑하는구나." 부냐는 바람에 실족하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그녀를 뒤흔드는 바람은 없었다. 초자연적인 바람 소리는 보다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밤은 지나치게 빨리 찾아왔다. 부냐는 서쪽을 보았다. 그런데 태양은 아직 지지 않았다. "너는 이제 내 주군의 인질이 되겠구나. 그리고 스카리는 주군의 뜻 대로……" "죽었잖아!" 도무지 자연적이라 할 수 없는 기묘한 현상 때문에 겁에 질린 부냐 는 고함을 빽 질렀다. 해가 아직 지지 않았는데 밤이 찾아들고 있었 다. 주위가 어둡지는 않았다. 달이나 별이 뜨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 냐는 무거운 것이 머리를 내리누르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것이 미 친 듯한 바람 소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부냐는 위를 올려다볼 수 없 었다. 위를 보는 순간 미쳐버릴 거라 직감한 부냐는 팔리탐에게 매달 리듯 말했다. "다, 당신의 주군은 죽었잖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팔리탐은 다 피운 장죽을 뒤집어 재를 털어내었다. 그 재가 갑자기 휘말려 올라갔다. 하늘 높은 곳에서 굉음을 내던 바람이 마침내 그들 에게 내려오고 있었다. 재를 날려올린 바람은 그 정찰병 쯤 되는 것 인 듯했다. 팔리탐이 말했다. "다시 살아나셨다." "뭐?" 팔리탐은 부냐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의 주군께서는 부활하셨다." 부냐는 뒤로 화다닥 물러나며 일어섰다. 그 순간 바람이 그녀를 나 꿔챘다. 어떻게 손 써 볼 겨를도 없이 부냐의 두 발이 바위 위에서 둥실 떠올랐다. 부냐는 비명을 질렀다. 그 때 팔리탐이 재빨리 몸을 던졌다. 그는 부냐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곳은 허공이었다. 그것은 동반자살 같은 형국이 되었다. 팔리탐은 부냐를 끌어안은 채 아래로 떨어졌다. "저-게-뭐-야-!" 추락이 상승으로 바뀌었다. 부냐는 죽을 듯이 겁에 질려 팔리탐을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녀의 속 마음은 이제 더 이상 추락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아래로 떨어지면 서 자연스럽게 눈이 위를 향했을 때 부냐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팔리탐과 부냐는 그것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하늘치를 향해. 그리고 그 하늘치도 아래로 내려오고 있 었다. 잠시 후 하늘치가 바위산 위에 충돌했다. 바위산이나 하늘치의 규모에서 그것은 스치는 듯한 접촉에 불과했지 만 바위산의 윗부분은 완파되었다. 그리고 산사태가 일어났다. 무수 한 돌들이 춤추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 속에서. =============================================================== 30챕터 끝났습니다. 믿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인 다음 챕터 예고 : 현상금 사냥꾼의 공포 앞에서 마침내 정체를 드러낸 왕자가 씩씩하 게 경고의 말을 외쳤다. "그는 정령이 될 것이다!" 외국어를 제멋대 로 번역하는 바벨피쉬 2세의 놀라운 권능 앞에 비틀거리는 현상금 사 냥꾼. 때를 놓치지 않고 거대로봇으로 변한 흡혈 안드로이드가 괴성 을 지르며 달려간다. 그러나 갑자기 나동그라지는 안드로이드. 뒤를 돌아본 흡혈 안드로이드는 길다란 전선이 자신의 등에서 뻗어나와 어 딘가의 건물로 이어져 있음을 발견한다. 무선화 시대를 역행하는 모 로봇의 약점이 그대로 적용된 자신에 실망하던 흡혈 안드로이드. 대 신 공격을 넘겨받은 것은 괴조로 변한 철이. 괴성을 지르며 급강하한 철이는 버스터 런처를 내뿜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상금 사냥꾼은 외 친다. "나는 지상 최강의 현상금 사냥꾼이다! 어떤 현상범도 2초 내 에 체포한다! 이 따위 버스터 런처, 수정해주겠다! AT 필드!" 현상금 사냥꾼은 3A를 가진 파티마로 변한다. 이니셜의 문제라고 하겠다. 하 지만 현상금 사냥꾼은 흑표범으로 변한 카우보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카우보이는 비행기로 변했다가 오토바이로 변했다가 다시 개 비슷한 것으로 바뀌며 달린다. 안드로 군단을 무찌르러…… 어쩐지 왕자의 종들은 왕자의 번역 실력처럼 비슷하지만 다른 뭔가로 변신한 듯하 다. 하지만 현상금 사냥꾼도 녹록치 않았다. "보인다!" 그렇다. 그는 보고 말았다. "이 영상을 본 자는 일주일 후 이 시간에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실행에 옮겨라. 즉……" 끊어지는 경고. 공포에 빠져 이성을 잃은 현상금 사냥꾼은 자신의 복부에 무려 0.3밀리미터나 되는 깊은 상처를 입히며 자해를 하는 광태에 빠진다. 그 틈을 타서 도망친 세 사람은 폭주갈매기가 떠난 호러지아로 떠나는데. 호지러아의 마법에 적응하기 위한 세 사 람의 모험이 펼쳐지는 다음 챕터, '마력의 임무' 많이 기대해주세요.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앓고 나니 힘이 빠져 서 많이 힘들군요.) 좋은 밤 되세요. 31. 부활을 받아들이는 태도 - 1 "심장 없는 잡놈들아! 들어라! 왕은 절대로 죽지 않아. 죽을 수가 없어! 내가 바로 왕의 심장병이니까! 나를 깨트 려봐!" - 어느 아라짓 전사의 외침. 틸러 달비는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산비탈 아래에 있는 천막들을 바 라보았다. 천막은 중대 병력 정도가 머물고 있는 듯한 큰 규모였지만 목책이나 감시탑 같은 방어 시설은 없었다. 그것은 군사 시설은 아니 었고 그 배치도 불규칙적이었다. 야영지의 모습을 관찰하던 틸러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본 틸러는 그의 소 대원들이 외면하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모순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틸러는 그들이 아무 것도 안 보는 척하면서 열심히 관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틸러 달비의 이마를 두드리고 있는 비녀 는 소대원들의 상상력을 놀랍도록 고취시키고 있는 듯하다. 소대장의 관급품일 리는 없다. 분명히 원래 주인은 여자일 터, 그녀는 누구냐? 연인의 정표라는 단순한 것에서부터 어머니의 유품, 여동생의 기념 품, 어린 딸의 물건이라는 설에서부터 심지어 틸러 달비 본인의 것이 라는 설까지 거론되고 있었다. 마지막 가설에 따르면 틸러 달비는 모 종의 사정에 의해 남장을 하고 있는 여자인 것이며, 억눌러야 하는 여성성을 그런 장신구로 달래고 있는 것이다…… 틸러는 웃을 뿐 그 어떤 가설도 확인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간혹 주인 모를 비녀를 꺼내 어 만지작거리거나 이마를 두드리는 그의 태도가 상징하는 바는 비교 적 명확하다. 그것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약속이다. 비록 틸 러의 비녀는 그의 고향과는 아무 상관없는 물건이고 틸러 본인은 귀 향에 대한 큰 바람이 없었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틸러는 부하들에게 그런 약속을 주고 싶었다. 천막 쪽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느라 비녀를 가지고 놀았던 틸러는 그 것을 갈무리해넣고는 소대원들에게 경계 신호를 보냈다. 천막에서 나 타난 것은 여러 사람이었지만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은 말 한 마리 와 그 위에 타고 있는 남자뿐이었다. 틸러는 다른 자들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선임 수전사에게 중대 지휘권을 넘겼 다. 선임 수전사는 조심하라거나 하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 다. 말에 오른 틸러는 다가오는 자를 향해 똑바로 말을 몰아갔다. 공기는 싸늘하고 가을의 들판은 축축했다. 가을비가 그친 것은 며칠 전이었지만 그 동안 해가 나지 않아 땅은 아직도 습기찼다. 틸러는 이틀 동안 내렸던 비를 생각했다. 대규모 수난 사고 현장에서 보낸 것 같은 이틀이었다. 범람이나 침수, 급류 같은 수난 사고의 단골들 은 하나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수난 사고였다. 하지만 그 수난과 민들레 여단은 아무 관계가 없다. 비가 올 것이 확실해지 자마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엘시 에더리 이하 흑사자군의 지휘부를 경악시키긴 했지만 민들레 여단이 일으킨 소동은 그것뿐이었다. 이틀 동안 흑사자군을 진감케 한 것은 의리를 지켜 대장군의 곁에 남은 주 테카와 론솔피, 쵸지, 그리고 그을린발이었다. 주테카와 론솔피는 가끔 겪는 일인 듯 침착하게 대피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침착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감정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쓰이는 도구적인 성격이 여실했다. 움막을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도하는 자기 최면으로의 침착으로 대피소를 완성한 두 레콘은 그 때부터 대피소 가운데 정좌하고 눈을 감은 채 자신을 멀리멀리 추방 해버렸다. 그을린발의 경우에는 두 레콘의 대피소 대신 자신의 코끼리를 의지 했다. 그는 커다란 수레에 천막 천을 씌워 급조한 우산을 쓴 채 코끼 리의 등을 전전하며 이틀 동안 잠도 자지 않았고 땅에 발도 딛지 않 았다. 코끼리가 피로해할까봐 몇 시간에 한 번씩 다른 코끼리로 갈아 탈 때마다 그을린발은 주위의 흑사자군에게 비상령이 떨어지게 만들 었다. "나, 당황해서 몸 부풀릴지도 몰라." 덕분에 그을린발이 코끼 리를 갈아탈 때마다 주위의 흑사자군들은 대피하거나 방패를 이불 대 신 덮은 채 빗물 속에 엎드려야 했다. 만약 비가 하루만 더 왔다면 끔찍한 사고가 터졌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흑사자군을 당황시킨 것은 의외로 왕벼슬 쵸지였 다. 틸러는 천막 천을 도롱이처럼 몸에 두른 채 빗속을 걸어가는 쵸 지를 목격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론적으로 쵸 지는 완전한 방수 상태였다. 임시변통의 도롱이는 가늘게 뚫어놓은 눈구멍 외에는 쵸지의 몸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며 그의 발도 방패와 양동이로 얼기설기 만든 나막신 비슷한 물건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주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쵸지는 대부분의 시간 동 안 엘시의 천막 안에 머물렀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밖으로 나와야 할 때 쵸지는 그런 차림으로 침착하게 흑사자군 사이를 걸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꽤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도 웃지 않았 다. 쵸지가 용무를 - 주테카와 론솔피의 정신이 아직 정상적인지 확 인하거나 히베리가 자신의 무기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격려하 는 등의 - 마치고 천막으로 돌아갈 때까지 흑사자군의 장병들은 갑자 기 신비주의자가 된 것 같은 표정으로 그 행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쏴아아 하며 쉼없이 들리는 빗소리 속에서 무거운 철벅거림과 함께 걷는 거대한 그림자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 보는 조그마한 인간들의 모습은 감수성 예민한 병사들에게 남다른 추 억을 남겼으리라. 틸러가 보기엔 공중 대피소에 틀어박힌 두 레콘이나 코끼리의 등에 서 내려오지 않는 레콘보다 비 오는 땅 위를 거닐고 있는 레콘이 그 침착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훨씬 위험해 보였다. 틸러는 왕벼슬의 자 기 통제가 잠시라도 흩어지는 순간 대참사가 일어날 거라 확신했고 그래서 자신의 소대원들이 쵸지에게 다가가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 까?' 따위의 멍청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다른 지휘관 들도 대개 비슷한 대처를 했다. 그 덕분인지 모르지만 폭우가 끝날 때까지 이성을 잃은 레콘에 의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비가 멎고 이틀 후 민들레 여단도 떠났을 때처럼 홀연히 돌아왔다. 엘시는 변명을 들어봐야 쓸모없다는 태도를 취했고 히도큰 하장군도 특별히 변명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비가 온 이틀 동안 시모그라쥬군이 전투를 시작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민들레 여단이나 그을린발 이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인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에게 굉장한 이점이 긴 하지만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만한 이점은 아니다. 그들을 제 외하더라도 흑사자군의 병력은 여전히 강대하다. 그래서 베로시 토프 탈 상장군은 그 이틀을 그을린발의 방해를 받지 않고 병력을 규합하 고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데 사용했다. 시모그라쥬군은 엔거 평원의 남쪽에 목책과 호, 그리고 웅덩이 따위를 잔뜩 만들어놓았다. 흑사자군의 장병들이 의아해한 것은 엘시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모그라쥬군이 단 한 번의 전투를 위해 만들어지 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한 규모의 방어 시설을 만드 는 동안 엘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뇌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헨로 중대를 몇 번 출동시켜 먼 거리에서 그들의 작업을 방해하도록 한 것 외에는 아무런 대응책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회고록을 쓰면 곧 기적의 전쟁사 모음집이 될 무장에게 전술적인 충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흑사자군에 없었다. 흑사자군의 장병들은 엘시의 침묵을 더 큰 승리를 위한 포석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승리는 정해져 있는 것이고 문제는 언제 그것을 얻느냐일 뿐이다. 그리고 틸러는 자신이 지금 수행하고 있는 임무가 바로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했 다. 습한 평지를 걷던 틸러는 곧 야영지 쪽에서 온 코세 칸디드 백작과 마주서게 되었다. 두 사람 다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틸러는 말을 옆으로 돌리고는 예 절 바르게 왼쪽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칼집을 차는 쪽이다. 하지만 칼을 차고 있지 않은 칸디드 백작은 틸러와 같은 방향으로 말머리를 서게 했다. 틸러는 그것을 지적하려다가 그냥 서두를 꺼내었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저희 진영을 찾아주셨을 때 멀리서 뵌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가시나무 군단 312 소대장 틸러 부위입니다. 대장군 님의 간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칸디드 백작은 목례하고는 이곳까지 나오게 한 것에 대해 잠깐 불평 했다. "우리 야영지 쪽으로 와서 대접할 수 있게 해주면 좋을 텐데. 달비 부위." "그러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습니다. 각하." 매정하게 대답한 틸러는 눈을 가늘게 뜬 백작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백작은 편지를 받아드는 대신 틸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 다. "그게 무슨 내용인지 자네도 아나?" "압니다. 각하. 이 편지에는 작전 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외에 여러분들이 유의하셔야 되는 사항들이 적 혀 있습니다. 작전 구역 내에 들어오실 땐 반드시 2인 이하여야 하고 일몰 후에는 절대로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낭패한 경우를 당하실 수 있습니다. 부득이한 경우를 대비하여 연락 장교 한 명을 요청하신다 면 보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그 경우 귀측에서도 연락 장교의 안 전을 위해 한 사람이 와주셔야 합니다." 칸디드 백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빡빡하군." "예?" "아, 대장군의 요구가 두억시니 장군의 그것보다 더 빡빡하다고." 백작이 호기심을 자극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틸러는 그것에 넘 어가보기로 했다. 백작이 수령하지 않은 편지를 고집스럽게 내민 채 틸러는 말했다. "저쪽의 요청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아아, 우리의 중립을 존중하며 그 존중을 표시하기 위해 보호할 병 력을 보내어 혹 발생할지도 모르는 불상사로부터 안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더군." 틸러는 씩 웃었다. "백작님. 저희 아버님께서는 세상에 나가는 멍청한 아들이 교활한 사기꾼에게 당할까봐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가장 많이 주는 사람 은 가장 많은 것을 가져가려는 사람이다. 그 말씀을 명심한 덕분에 저는 호된 꼴을 겪지 않았습니다." "아버님께 들은 것은 아니지만 나도 비슷한 금언을 알고 있지. 그래 서 그들의 제안은 사양했어." 백작은 틸러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백작은 그것을 집 어넣는 대신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봄으로써 틸러가 움직이지 못하도 록 했다. 그는 한숨처럼 말했다. "드디어 시작이군." 틸러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며 칸디드 백작의 말을 기다렸다. "흑사자와 대호가 들판의 양끝에 서서 울부짖고 있다. 그들이 들판 을 나눠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흑사자가 사라진 들판을 잠시 지배했던 대호는 이런 도전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멸종한 것으로 알려졌던 제왕이 이런 강대함으로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대호는 고독 하고, 대호는 두렵다. 하지만 대호는 원래 혼자인 것을." 코세 칸디드 백작을 포함한 이들 중립적 관찰자들도 흑사자군의 장 병들과 마찬가지로 엘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사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리고 그 흐 름에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아직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은 주의 깊음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사필귀정. 북쪽의 권세는 다시 북으로." 틸러는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 태도에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그렇다면 레콘에게 돌아가야겠군요." "뭐라고?" "제가 알기로 영웅왕 폐하께서는 레콘이셨습니다. 주목할 만한 북쪽 의 최초 지배자는 레콘이라는 거죠." 칸디드 백작은 당황했다. 틸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 는 상태에서 계속 말했다. "예. 우리가 왕을 잃었고, 대호를 탄 귀인이 남으로부터 와서 우리 에게 왕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셋이 하나 를 상대합니다. 세 명의 나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그 세 분은…… 북쪽의 진정한 통치자를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놀라운 운명에 대해 애잔한 정서를 느껴볼 수도 있 겠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모든 일은 살아서 집에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촌스러운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해낸 일입니다." 틸러는 평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지 않은 것들을 보며 말했다. "오십여 년 전 이곳에도 북부와 남부의 전사들이 대치하고 있었습니 다. 그 때로 가볼 수 있다면 정말 볼만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뇌룡공 륜 페이는 아스화리탈과 함께 서있었겠지요. 충의공 괄하이드 규리하 는 작살검 대신 그의 대도를 들고 진구렁텅이가 된 평야를 주시하고 있었을 테고요. 그리고 대호왕을 가호하기 위해 화신이 된 신들이 있 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패잔병 같은 북부의 병사들도 있었지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엔거 평원은 나가들의 술수 때문에 무덥고 습했다고 합니다. 걷기도, 숨쉬 기도 힘들었을 테고 아마 싸우기도 전에 지쳐있었겠지요. 발은 신발 속에서 질퍽이고 입안에서는 진흙이 씹혔을 겁니다. 자긍심? 신념? 신의 힘이 현현하기에 자연스럽다는 말이 역설적인 농담으로 통하던 환상적인 시대였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겁니다. 따라서 그 병사들이 기대 할 수 있는 가장 큰 성취는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었겠지요." "귀관은 나를 싫어하는군." "저는 각하를 잘 알지도 못합니다. 제가 왜 각하를 싫어하겠습니 까?" "왜 나를 싫어하는 거지?"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관조하기 때문인가? 직접 창칼을 들고 싸우지 않는다고?" "……저는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멸시 받을 이유라고 생각하 는 멍청이 군인은 아닙니다." "말 하는 것 들어 보니 그런 것 같더군. 자네는 '병사들과 그들의 가족'이라고 말했지. 그러면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뭐지?" 어느새 당황을 거둔 칸디드 백작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무력이 아닌 학문으로 십병장의 지위를 받은 학자다운 호기심에 틸러는 주춤했다. 그는 강하게 말하려 했지만 결국 토라진 소년처럼 말하고 말았다. "대장군님이 황제가 되겠다는 말씀을 한 번이라도 하신 적이 있습니 까?" 칸디드 백작은 손바닥으로 넓적다리를 살짝 때렸다. "아하! 그게 불만이었군. 그래. 귀관의 대장군께서는 귀족원 회의를 열기 위해 싸우고 있지. 자신의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작의 말에는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조금도 없었지만 틸러는 그렇게 느꼈다. 틸러는 무거운 의심 속에서 칸디드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 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귀관의 대장군이 목하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것은 당 연하고, 그렇다면 나도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군. 유세를 다녀야겠 어." "뭐라고 하셨습니까?" "유세 말이야. 대귀족과 사업가들, 그리고 다른 것 가져가지 말라고 주는 존경을 받으며 좋아하는 원로들을 찾아가 나를 황제로 뽑아주면 어떤 전망을 획득할 수 있는지 설명해야겠다고. 연습 삼아 자네에게 한 번 해볼까? 아냐. 자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꼭 경쟁해야 한다면 정정당당하게 하자고. 자네도 황위에 관심이 있나?" 틸러 달비는 입 주위를 찡그렸다. 그는 이레 달비를 통해 칸디드 백 작이 대장군에게 어떤 말을 하고 갔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 백작의 말은 대장군에게 했던 말의 반복이다. "들은 바 있습니다. 흑사자군은 어차피 엘시 에더리 외의 그 누구도 황제로 인정하지 않을 테니 대장군님이 어떤 소신을 가지고 계시건 그 분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으시지요. 제가 정확하게 알고 있습 니까?" "상당히 잘 요약했네. 달비 부위. 어떤가. 귀관은 귀관의 대장군이 아닌 내가 황제가 되겠다고 나서면 용납할 수 있겠나? 자네가 말하는 그 고향으로 살아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자들은 납득할 수 있겠나? 나 는 영웅주의자가 아닐세. 최소한 영웅이 모든 것을 이끈다고 믿지는 않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자가 결국 영웅이 된다고 생각하긴 하지 만." 틸러는 사과의 뜻으로 목례했다. 코세 칸디드 백작은 엘시가 모든 것을 정벌한 끝에 황제가 될 거라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정벌 한 자들이 엘시에게 황위를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틸러는 백작이 제기한 의문에 정직하게 접근해보았다. 귀족원 회의에서 엘시 에더리 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황제로 선출될 경우 나는 과연 그 사람을 나 의 황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로 회의적이었다. 틸러의 표정에서 그의 생각을 읽은 칸디드 백작은 더욱 과감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달비 부위. 귀관의 대장군은 강제로 세계 최고의 무장 수십 명을 그들의 병력과 함께 한 자리에 모아놓았어. 그들을 묶어주는 제국이 없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이해의 공유가 없는 무장들을. 그 업적만으 로도 칼리도백은 후대의 전사학자들에게 불가사의로 받아들여지겠지 만 그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어. 그들에게 '자, 모두 끝났다. 이제 누구라도 황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어제의 전우가 오늘의 적이 되는 거야 이젠 더 이상 이야깃거리도 아니지. 나는 흑사자는 엘시 에더리 외에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 하지만 흑사자 가 흑사자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광경은 어떤가?" 틸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흑사자 군의 내분. 피의 합종연횡을 펼치기 시작하는 서른 다섯 명의 군단장 과 이백 명의 중대장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칸디드 백작 은 낮지만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들을 다스릴 수 있는 황제감은 누구인가? 답은 언제나 문제 속에 있지. 그 흑사자들을 안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그 러고 있는 사람이야." 틸러는 더 휘둘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왜 이곳에 계신 겁니까?" "나 말인가?" "백작님과, 그리고 백작님의 동료들. 제국 재건 범신민 연대라고 기 억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단체가 이곳에 와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 금 오고 있는 자들도 있고요. 백작님과 그들은 왜 이곳에 계신 겁니 까? 싸움에 참가하러 오신 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싸움 구경하러 오 신 겁니까?" 칸디드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발케네공은 싸움을 받아주지 않는 처녀 때문에 자신의 강대 함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처럼 군사적 수음이나 하 다가 역사에서 물러나야 할 처지가 되었지. 진짜 싸움이 벌어지고 있 는 곳은 이곳이야. 시모그라쥬군을 물리친 후 칼리도백은 아무도 막 을 수 없는 존재가 되겠지.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자신을 막지 못할 걸. 그리고 가능성은 없다고 보지만 만에 하나 시모그라쥬 공작이 이 긴다면 그 또한 그런 존재가 될 거야. 우리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느냐 고 묻는다면, 이곳에서 황제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 어. 황제에게 바라는 것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야." 틸러는 어깨를 의도적으로 폈다. 하지만 그 어깨는 자꾸 움츠러들었 다. 칸디드 백작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칼리도백은 황제를 선출할 귀족원 회의를 열기 위해 싸운다고 하 지. 하지만 그는 그 회의를 스스로 개최해버렸어. 칼리도백은 부정하 겠지만 지금 이곳, 엔거 평원이 바로 그가 바라던 귀족원 회의장이 야. 이곳에서 기로인을 물리쳤던 복수왕이나 마호가니 군단을 물리쳤 던 대호왕처럼 그는 이곳에서 황제의 길로 걸어들어가게 될 거야."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내디뎠 다. 지금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레 달비는 그녀가 결 심을 내리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교위는 대장군을 만나 러 왔다고 말했다가 곧 그것을 부정했다. 그리고는 같은 자리에서 왔 다갔다 하면서 자신이 대장군을 만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 다. 그 동안 몇 번 다른 장병들이 대장군을 찾았다가 지시나 확인 등 을 받고 돌아갈 때까지. 그 길었던 고민이 마침내 끝난 모양이다. "역시 만나뵈어야겠어." 이레는 대장군에게 면담 요청을 알렸고 곧 수교위를 천막 안으로 안 내했다. 안으로 들어선 니어엘은 엘시의 모습에 약간 충격을 느꼈다. 엘시는 지도를 들여다보거나 작전을 구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바둑판을 펼쳐둔 채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니어엘을 본 엘시는 바둑판에서 물러나는 듯한 몸짓을 취했지만 니어엘은 곧장 그 곁으로 다가가 바둑판을 들여다보았다. 엘시는 그녀가 바둑판을 살피도록 내 버려두었다. 니어엘이 살핀 것은 흑의 바둑이었다. 백은 보나마나 엘시일 것이고 엘시가 누구와 두었던 바둑을 복기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던 니어엘 은 흑의 형세를 살폈다. 혹시 그녀 자신의 바둑일지도 모른다. 하지 만 니어엘은 흑의 기풍을 읽기 어려웠다. 그녀가 둔 바둑은 분명히 아니고 떠오르는 기사도 없었다. 흑을 쥐었던 자는 특징이 잘 드러나 는 기사가 아닌 모양이다. 아니면 그녀가 모르는 기사이거나. 니어엘 은 질문했다. "흑이 누구지요, 대장군님?" "나야." "예?" "흑을 잡은 것은 나였어." 니어엘은 당황했다. 그녀는 엘시가 백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흑 을 쥐었을 기사에 대한 추측에서 엘시는 제외했었다. 하지만 그렇다 고 해도 흑의 기세에서 익숙함은 느꼈어야 할 것이다. 니어엘은 다시 흑을 살폈지만 거기서 엘시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러면 백은 누굽니까?" "모친이시네." 니어엘은 이해했다. 엘시가 어렸을 적에 두었던 바둑인 것이다. 엘 시의 기풍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절의 바둑이라 그의 흔적을 읽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다시 바둑판을 살핀 니어엘은 흑의 완연한 비세 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자당께 상당히 호되게 당하셨던 바둑인가 보군요." "그래. 대여섯 수 후에 돌을 던지게 되지. 무슨 일로 온 건가?" 엘시는 돌을 쓸어모았다. 입을 열기 어려웠던 니어엘은 그를 도와 돌을 추렸다. 흑돌과 백돌이 돌통에 담기고나서 니어엘은 어렵게 말 했다. "대장군님의 실착을 제가 읽은 것 같습니다." 엘시는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몸을 뒤로 기댔다. 의자에 앉은 니 어엘은 정돈된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와 제 중대는 대장군님의 명령에 따라 적군의 방어 시설 구축을 방해하기 위해 5회 출동했습니다. 장소는 매 번 달랐고 공격 정도도 달랐습니다. 조금 전 지도를 들여다보던 저는 제가 무슨 일을 한 것 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것 같습니다." "짐작을 말해보게." "이것은 학살입니다." 어려운 말을 꺼내놓은 니어엘은 숨쉬기가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 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아무 런 동요도 내비치지 않은 채 계속 말하라는 듯이 턱을 끄덕였다. 니 어엘은 말했다. "제 중대의 공격 때문에 시모그라쥬군의 방어력은 오히려 증강되었 습니다. 그들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물자와 인력까지도 방어력에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어시설을 무한정 늘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한된 방어시설로 더 큰 방어 효과를 얻기 위해 적들은 밀집했습니다. 그 때문에 퇴로를 확보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지도를 통해……" "설명할 필요는 없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설마설마 하던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니어엘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 을 느꼈다. 니어엘은 엘시가 실수한 것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실 수를 교정하러 나서기를 바랐다. 하지만 엘시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 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서운 것이다. 니 어엘은 무릎을 움켜쥐었다. "그들을 다 죽일 생각이십니까?" "섬멸은 전쟁의 기본이다. 헨로 수교위. 적의 주력이 도망칠 수 있 게 한다면 그들은 계속 저항할 테지. 굴욕적인 후퇴를 계속 강요하면 그들은 끝내 한계선 이남에서의 싸움도 받아들일 거다. 거기까지 남 하하면 나가들이 적군에게 합류할 거야. 그렇게 되면 승패를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력의 반만 파괴해도 이미 섬멸이잖습니 까. 이것은 섬멸이 아니라 학살이 될 겁니다. 열 명에 한 명도 살아 돌아가기 힘들 겁니다." "그래. 추악한 일이지." "대장군님은 그런 학살 없이도 승리하실 수 있습니다. 저기 있는 것 은 시모그라쥬공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전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 니다. 도망친다고 해서 다시 세력을 늘여 저항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를 왜 그렇게 믿나?" "예?" 엘시를 본 니어엘은 그 얼굴을 덮고 있는 어둠에 놀랐다. 엘시는 자 신의 손바닥을 보며 말했다. "죽음의 거장조차도 최후의 싸움에서는 패배했다. 내가 항상 이길 거라고 믿는 이유가 뭔가? 이번에 승리하더라도 바로 다음 전투에서 나는 대패할 수 있다. 패배를 피하는 방법은 싸우지 않는 것뿐이다. 싸울 상대가 없으면 싸움도 없지. 이길 수 있다면 확실히 이겨 싸울 상대를 사라지게 해야 해. 헨로 수교위. 이런 상식적인 이야기를 계 속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군." 불현듯 니어엘은 엘시의 어둠 속에서 어떤 초조함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엘시의 말대로 그에게 백전백승을 요구하는 것은 - 그런 요 구를 받을 만한 관록을 쌓아왔다 하더라도 - 불합리하고 부당하다. 싸움은 끝낼 수 있을 때 끝내야 한다. 엘시의 말처럼 전쟁에서 성취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그것을 빨리 끝내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니어 엘은 단지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엘시의 초조함은 다 른 곳에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득 니어엘은 엘시의 말에서 익숙한 무엇을 떠올렸다. 엘시는 싸울 상대가 없으면 싸움도 없다고 말했다. 니어엘은 그와 비슷한 이유에 서 싸우는 자를 알고 있었다. 그을린발. 그는 요구받기 싫어서 요구할 상대를 없애고 있다. 니어엘은 자신의 추리에 황당함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가설도 떠오 르지 않기에, 그리고 그 가설에서 묘한 매력을 느꼈기에 니어엘은 그 생각에 골몰했다. 그을린발은 시모그라쥬공이나 대호왕, 베로시 토프 탈 등의 개인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을린발은 무엇이 자신을 귀찮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그들 모 두의 바람인 토프탈 황조 그 자체다. 만약 토프탈 황조가 절대로 성 립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다면 그을린발은 싸움을 멈출 것이다. 그렇다면 엘시는 그을린발에게 무차별 살육을 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빨리 싸움을 끝내려는 것인가? "헨로 수교위. 나는 아군을 그들의 페시론이나 그들의 아킨스로우가 될 한계선 남쪽으로 데리고 갈 수 없다. 이곳에서 이겨야 한다. 다음 의 싸움이 일어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귀관이 학살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면 유감이다. 그 대신 아군을 구한다고 생각하라. 이것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귀관은 아군을 구하는 것이다. 40만 명의 핏값은 내가…… 지고 가겠다." 그것은 내 죄다. 니어엘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침묵하 자 엘시는 계속 말했다. "알아들었다면 물러가라. 그리고 귀관이 짐작한 것에 대해 다른 사 람에겐 말하지 말도록." 니어엘은 무의식적으로 일어섰다. 엘시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올 때도, 그리고 쌀쌀한 가을의 공기 속을 걸어 자신의 중대가 있는 곳 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니어엘의 정신은 탁류에 휘말린 표류물처럼 부침했다. 세레지 파림은 경비병들에게 붙임성 있는 눈인사를 보내며 규리하성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녀의 등에는 커다란 배낭이 있었고 옷은 여로 의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걷던 세레 지는 계단에서 아트밀과 사라말을 발견했다. 사라말은 계단참에 앉아 있었고 아트밀은 그보다 몇 계단 아래에 앉 아 있었다. 그들을 보던 세레지는 방긋 웃고는 아트밀에게 외쳤다. "나 잡아봐라!" "뭐 하는 거야, 세레지?" "음. 제가 사라말보다 못한 것이 뭐죠? 제발 미모라고 말씀하진 마 세요. 남자보다 못하다면 절망이야." 아트밀은 괴이쩍다는 표정으로 세레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레지 가 정말 노렸던 목표였던 사라말 또한 무표정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 다. 세레지는 빙글빙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 던 아트밀이 갑자기 말했다. "너 어디 떠나냐?" "세상에. 정말 밀리고 있어. 그렇게 저에겐 관심이 없어요? 저 몇 달만에 돌아온 거라고요!" "어디 갔었냐?" 세레지는 말을 말자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 때 사라말이 불 쑥 말했다.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되었지, 세레지?" 세레지는 사라말의 강력한 평정을 한 번 더 흔들어보려 시도했다. "저보다 예쁜 남자한텐 말하고 싶지 않은데요?"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세레-징?" 아트밀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엄격한 얼굴로 콧소리 섞인 여자 목소리를 내는 사라말을 본 세레지 또한 경악으로 한참 동안 말 을 잊지 못했다. 사라말은 미소조차 띄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저 사실 여자예용. 그러니 남자보다 못하다는 자괴감을 가질 필요 는……" "그만! 괴, 굉장히 무서우니까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그렇게 하셔 도 여자로 보이지도 않아요!" 사라말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을 고른 세레지는 손짓 을 섞어 말했다.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규리하공도 동석하셔야 하겠지요? 변경백께 서는 지금 어디 계시죠?" "따라와." 스스르 일어선 사라말은 계단을 올라갔다. 세레지는 고개를 홰홰 내 젓고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아트밀을 지나쳐 사라말을 따라올라갔다. 그러다가 세레지는 갑자기 고개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녀의 예상처럼 레콘 야리키는 건물 꼭대기에 앉아 허공에 낚시대 를 드리우고 있었다. 새나 구름을 낚기로 작정한 것 같은 모습이었 다. 세레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야리키가 아래를 쳐다보려 할 때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위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세레지는 정우와 아이솔 형제, 아버지인 위체 파림, 그리고 '당원'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리는 자유무역당의 대표자와 규리하 정부 의 몇몇 관료들이 참석한 소규모 회의장에 안내되었다. 규리하 정부 의 공식 회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공식화하기 어려운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한 비밀회의였다. 그들 모두가 세레지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세레지는 여행 복장 그대로 참석해야 했다. 그녀는 배낭에 서 자신이 기록한 문서들을 잔뜩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잠시 정우를 바라보았다. 탁자 상석에 앉아있는 정우는 부드러운 얼굴로 세레지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의 지금 모습을 초상화를 그린다면 '규리하의 통치자'라 는 화제보다는 '하오의 소녀'라는 화제 쯤을 붙여야 할 것이다. 그녀 는 회의에 참석한 다른 이들처럼 규리하를 수호한다는 무거운 책무에 괴로워하는 표정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평온한 겉모습만 해도 이채롭지만 세레지는 그 안쪽의 것을 떠올렸다. 그녀가 보았던 옷 아 래의 정우. 세레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 다. "이것은 제가 관찰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읽 으실 수 없겠습니다. 분실을 대비해서 모두 암호로 써두었거든요. 암 호를 다시 해석해서 보고서를 쓰겠습니다만 일단은 구두로 말씀드리 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이저 규리하는 하늘치를 조종하 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세레지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소동이 일어났다. 정우와 사라말을 제 외한 모든 사람들이 놀라거나 반문하거나 비명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들 중 일부는 세레지의 유명학 악습을 근거로 그것이 지어낸 이야 기가 아니냐는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정우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 시키고는 세레지에게 말했다. "세레지. 계속해요." "감사합니다. 각하. 제가 말씀드린 것은 농담이나 거짓말이 아닙니 다. 하인샤 대사원의 승려들은 퍽 친절하고 소박한 편이셨지만 대부 분 머리가 좋으시더군요. 그래서 탐문이 원활하지는 않았습니다. 하 지만 몇 가지 알아낸 것들이 있긴 합니다. 이상한 책에 대한 이야기 가 있더군요." "책이라고요?" "규리하성 낙성 당시 아이저 규리하는 라수의 방이라 알려져 있는 지하금고방에서 라수 규리하가 쓴 책 한 권을 가지고 도주한 것 같습 니다." 정우는 라수의 방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던 데라시에 대해 떠올렸 다. 그리고 누군가가 가져다둔 인조새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세레지 가 계속 말했다. "그 책의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파악하기로 그 책은 하늘누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상당한 난문 이라 해석이 용이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이저 규리하가 하인샤 대 사원으로 간 것은 그 해석을 위해서인 듯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하 늘치에 최초로 오른 사람 중 한 명은 오레놀 선사입니다. 아이저 규 리하는 하인샤 대사원의 스님들에게 오레놀 선사에 대한 이야기를 여 러 번 질문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 분이 하늘치에 오른 이야기에 대 해. 하늘누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과 하늘치에 오른 사람의 행적에 대한 탐문을 종합해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 수 있을까요? 아이 저 규리하는 하늘누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싶었던 겁니다." 파라말은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문득 하늘누리 탈출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폭주하는 하늘누리 위에서 파라말은 치천제와 대치하고 있 는 외눈의 소녀를 보았다. 그 외눈의 소녀 아실이 발케네에 있을 당 시 아이저 규리하도 발케네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 책도 발케네에 있 었을 것이다. 파라말은 아귀가 맞아떨어진다는 불쾌한 느낌을 받았 다. 그 때 파라말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의아 해하는 파라말에게 세레지가 대표하듯 질문했다. "부사님. 부사님께서는 일시적이지만 하늘누리를 관리하는 지위에 계셨습니다. 실제로 통제실에도 계셨고요. 하늘누리를 움직이는 방법 에 대해 아십니까?" 파라말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설명했다. 마치 배의 키를 움직이듯 조종 막대기들로 하늘치를 움직인다는 파라말의 설명은 참석자들의 머리 속에 온갖 상상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스스 로도 기이한 상상에 빠졌던 세레지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아, 저,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않았겠지요. 그 건 어려운 조작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한 도구들이었을 겁니다. 실제 로는 그런 도구 없이도 조종이 가능합니다. 여기 계신 규리하공께서 바로 그렇게 하늘치를 조종하시니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우에게 향했다. 정우는 쑥스럽다는 듯 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세레지에게 빨리 말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세 레지가 말했다. "아이저 규리하가 알아내려는 것은 바로 그런 방법인 듯합니다. 그 런데 그곳에 있던 중 저는 우려할 만한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 니다. 하늘치 한 마리가 하인샤 대사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하 늘치는 꽤 규칙적인 궤도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인샤 대 사원에 오래 계셨던 스님들은 그것이 언제 나타날지 알아맞출 수 있 습니다." 당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유무역당원이 말했다. "저희 당의 상단원들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경험 많은 상단 원들은 어느 특정 시기와 장소에 하늘치가 출현한다는 것을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저 유명한 티나한의 하늘치 발굴대도 그런 계산을 할 수 있었다지요." 세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아이저 규리하는 그 하늘치가 하인샤 대사원에 도착하 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한 회의 참석자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총 리대부 리시오가 힘겹게 말했다. "그 하늘치를 조종해보려는 것이군. 그 하늘치는 언제 하인샤 대사 원에 도착하지?" 세레지는 잠깐 동안 침묵한 채 회의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이 사 람 저 사람에게 머물던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에 멈춘 곳은 정우였다. 정우는 깍지낀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둔 채 얌전히 세레지를 마주보 았다. 세레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여기까지 돌아오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정우가 차분하게 말했다. "언제 도착하죠?" "오늘 밤입니다." =============================================================== 31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1. 부활을 받아들이는 태도 (2) 2004/09/20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1-2 관련자료:없음 [49314]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9-20 04:50 조회:45 피를 마시는 새 31. 부활을 받아들이는 태도 - 2 싸늘한 침묵이 곧 폭발 같은 외침들로 불타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상대방의 -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 말보다 자신의 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경우 일어나곤 하는 일이 회의실 에서 일어났다. 대화 상대도 제각기 달랐다. 어떤 자들은 규리하공을 향해, 어떤 자들은 파라말을 향해, 어떤 자들은 세레지를 향해 외쳤 다. 그 외침들은 당연히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소용 돌이 속에 빨려들어갔다. 세레지는 몇 가지 질문들을 동시에 들으려는 헛된 시도를 하다가 그 만 혼란에 빠졌다. 머리를 조금 내두르던 세레지는 가까스로 아버지 의 말을 포착했다. "세레지. 왜 그들의 시도가 성공했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돌아오지 않은 거지?" 그 질문은 몇몇 사람들을 침묵하게 했다. 그리고 세레지는 다른 사 람들의 입도 닫기 위해 목소리를 돋우어 외쳤다. "저도 그럴까 했어요! 아빠! 하지만 만약 그들이 하늘치에 오른 다 음 곧장 규리하로 향하기라도 했다면 규리하는 경고 없이 공격을 받 게 되었을 거예요! 제가 하늘치를 따라잡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사실 확인보다 경고를 먼저 해야겠다고 판단한 거죠! 경고를 하면 좀 더 현명한 분들이 '침착하게' 대안을 생각해낼 거라고 믿었거든요!" 세레지의 짜랑짜랑한 외침 덕분에 소동은 조금 줄어들었다. 정우는 눈으로 세레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보내고는 손을 들어 자신에게 주 의를 집중시켰다. 마지막 소음까지 사라진 다음 정우가 말했다. "세레지의 말이 맞아요. 우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귀한 경고를 가 져온 세레지를 실망시켜서는 안되겠지요." 당원이 살짝 손을 들어 정우의 주의를 끌고 말했다. "여기서 하늘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분은 각하뿐이군요." 정우는 잠깐 기다리다가 갑자기 '그러니 당신이 말 좀 해봐라. 당신 아버지의 성공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 생략된 것임을 깨달았다. 자유무역당에서 온 여인은 예의를 갖춰 말하려 애쓰고 있 었지만 경제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오래된 버릇은 고치기 어렵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두들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제 자신이 어떻게 하늘치를 움직이는 지도 설명할 수 없어요. 그것이 경험이나 숙련을 필요로 하는 일 같 지는 않아요. 만약 그렇다면 하늘누리에서 나고 자란 시민들은 모두 하늘치를 조종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저는 열여덟 살이 된 후에야 처음으로 환상계단을 만들어봤지요." 말을 이으려던 정우는 문득 사라말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발견 했다. 정우는 묻는 눈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사라말이 말 했다. "각하. 하늘누리에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훌륭한 장의시설이 있 었지만 반대로 조산시설은 없었습니다." "어? 하늘누리 위에서 누군가가 태어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건가 요?" "안전상의 이유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뛰어놀기엔 지 나치게 높은 곳이지요. 양육 환경으로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 서,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만 만약 임부가 발생하면 그녀는 대부 분 지상에 있는 거처로 옮겨가서 출산과 양육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아내가 임신하면 그 남편도 지상의 행정관으로 직책을 변경하 거나 했습니다.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늘누리의 정부 구성원 들은 미혼이거나 자녀가 이미 장성한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정우는 그 말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물론 이거니와 그곳에 있는 아이솔 형제, 기타 그녀가 알고 있는 하늘누리 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미혼이었다. 그리고 나가들에겐 부부 관계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 치천제와 데라시 또한 따지고 보면 미혼인 셈이다. 하늘누리가 불임의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정우는 무심하게 말했다. "음. 하늘누리는 사람이 태어나지는 않고 죽기만 하는 곳이었군요." 그 말은 꽤 살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말을 한 사람이 죽음 에 대해 별 두려움이 없는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라난 자이기에 참석 자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정우가 계속 말했다. "그래도 그곳에 계신 분들은 저보다는 하늘치에 대해 훨씬 익숙하시 겠지요. 하지만 그 분들 모두가 하늘치를 조종할 수 있으셨던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 하늘치 조종은 누구에겐 가능하고 누구에겐 불가능 하다는 식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저는 아버지와 동생 들이 그것을 움직일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네요. 그러니 일단은 그 분들이 성공한다고 가정하고 그 경우의 대처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파라말이 지체 없이 말했다. "하늘치를 준비해둬야겠군요." 정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파라말을 보았다. 파라말은 위쪽을 흘깃 바 라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규리하공께서는 하늘치를 다루실 수 있습니다만 지금 현재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노련한 검객이라도 검이 없다면 칼싸움 을 할 수 없지요. 그렇지 않아도 규리하 방어를 위해 하늘치를 보유 해야 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하늘치를 찾아내어 그것을 이곳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무사장 탈해와 그의 딱정벌레가 그런 수색과 견인을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정우는 하늘치를 붙잡아둔다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어, 하늘치가 그것을 좋아할까요?" "하늘누리를 떠받치고 있던 하늘치가 그것에 대해 불쾌해한다는 느 낌은 아무도 받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그것들은 그냥 하늘에 떠서 여 기저기로 왔다갔다 하는 것 외엔 아무 일도 하지 않잖습니까? 각하께 오히려 묻고 싶군요. 발케네군 침공 당시 각하께서는 하늘치를 그들 의 머리 위로 위협 비행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 하늘치가 각하의 조 종에 대해 저항하던가요?" "그 하늘치는 친절했어요." 참석자들은 그 설명에 약간 당혹했다. 설명이 부족한가 보다고 생각 한 정우는 부연했다. "대장군님처럼." 참석자들은 설명의 명쾌함에 즐거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정 우는 다른 비유를 떠올려야 하나 고민했다. 다행히 규리하 방어에 대 한 이야기라면 파라말보다는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병무대부 오니샤 퓨덴이 입을 열었다. "만약 하늘치가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강제할 수는 없겠지요. 누가 그것을 강제할 수 있겠습니까? 결과에 대한 고민은 접어두고 일 단 시도는 해봐야할 겁니다. 각하. 우리에겐 하늘치가 꼭 필요하니까 요. 그리고 한 번 성공했으니 두 번 성공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하늘치를 수배해야겠습니다." "혹은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도 있겠지요." 사라말의 단조로운 말에 정우는 흠칫했다. 사라말은 두 손을 입 앞 에 모으며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상대방의 하늘치를 없 애며 동시에 우리는 가지게 되니까요. 하늘치와 하늘치를 격돌시키는 것보다는 백 배 낫습니다." 사라말의 대담한 발상에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실현 가능하다면 그 것은 백 배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해결책이다. 사람들은 기대감이 잔 뜩 담긴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 분들이 하늘치를 몰고 오면 그것을 빼앗으라는 건가요?" "가능하시겠습니까?" "모르겠네요. 음. 조언이 필요할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 우가 조언을 구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 그 중 몇몇 사람들은 위엄을 침해당하고 싶지 않아서 인조새가 들어있는 새 장이 회의장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못 본 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야기의 노예인 파림 부녀와 사라말 아이솔만은 위엄 따위는 아랑곳하 지 않은 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새장을 바라보았다. 인조새는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을 지나오느라 잠들어 있었다. 정 우는 직접 새장을 창가로 가져가 볕이 잘 드는 곳에 내려놓았다. 잠 시 후 인조새는 금속의 몸을 비틀며 깨어났다. 정우는 꾸벅 목례했 다. "좋은 꿈 꾸셨어요, 새님? 여쭤볼 것이 있어요. 제가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하늘치를 빼앗아 조종할 수 있을까요?" "황새의 울음을 듣겠느냐?" 정우는 놀란 얼굴로 새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동백꽃의 향기요?" 회의장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력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나 고 민했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던 파라말은 형을 바라보았다. 사라말 은 담담하게 속삭였다. "황새는 울지 않아." "예?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황새 소리를 들어봤습니다. 탁타다다 하는 소리를 내지요." "그건 레콘들처럼 부리를 부딪쳐서 내는 소리다. 아우야. 황새는 벙 어리야. 새 중의 새인 황새는 울지 않아. 그리고 겨울도 이겨내는 동 백꽃은 향기가 없지." "허, 나름대로 아픔이 있군요." 사라말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떠들지 않으면 자기가 뭔지도 모르는 바보들처럼 말하지 말거라. 아우야." "예?" "그런 바보들은 시기심 때문에 위대함의 증거를 부족함의 증거로 바 꾸지. 자기를 발전시키는 대신 쑥덕공론으로 타인을 자기에게까지 끌 어내리려 하고. 그 바보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대신 자기를 알리기 위 해 수다스럽게 울거나 향기를 내뿜지 않는 황새와 동백꽃의 고상함을 느껴보지 않겠느냐?" 파라말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수양이 부족하군요. 형님의 말씀대로라면 규리하공께서는?" 사라말이 말하기에 앞서 정우가 사람들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는 스 스로에게 확신을 보내듯 두 손을 꼭 마주잡고는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율형부사님. 좋은 의견이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시도해 보긴 하겠지만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제가 아닐 거에요." 사라말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자기를 드러 낼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그럴 필요를 느낀다면 하늘치도 결정을 내릴 것이고…… 하늘치가 결정합니까?" "예." "알겠습니다." 사라말이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는 표정을 지은 탓에 다른 사람들도 하늘치 강탈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주춤하던 병 무대부는 하늘치 강탈이 어렵다면 역시 하늘치 수배에 힘을 써야 한 다는 논리로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당원은 자신의 상단원들에게 연락을 취해보겠다고 말했고 다른 이들은 규리하로 접근하는 하늘치 를 지금까지처럼 구름 보듯 무심하게 보는 대신 좀 더 자세히 관찰해 야 된다는 등의 이야기로 논의를 계속 이어갔다. 즉 그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라말은 힘들게 습득해온 지식이나 실수를 감수하며 쌓아온 경험으로는 어떻 게 해볼 수 없는 어이 없는 상황의 도래 속에서 그들이 느끼지만 드 러내지는 않는 비감 같은 것을 보는 듯했다. 그것을 꼭 슬프다고 해 야 할까? 파라말은 좌절하지만 물러나지는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격 려 또한 받았다. 모든 것을 앗아가기만 하는 내일이 유일하게 주는 선물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예상할 수 없 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파라말은 어깨를 폈다. 그는 하늘치 를 다스리게 된 자들이 규리하를 공격한다는 황당한 상황을 납득하려 애썼다. 사실 그렇게 황당한 일은 아니다. 규리하는 이미 그런 일을 한 번 겪었으니까. "전설이 생기겠군. 무향 규리하를 취하려는 자는 반드시 하늘치 조 종자여야 한다는 거지." 시카트의 초조한 말에 이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패의 땅 규리하 를 무너뜨린 것은 제국이었고 제국은 하늘치를 자신의 수도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규리하를 탈환하기 위해 그들이 얻으려 하는 것 또한 하늘치다. 전설은 그런 우연의 반복에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이타는 시카트의 말에서 다른 것 또한 읽었다. 규리하 전 쟁 당시 하늘누리는 전투 행위에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 엘시 에더리는 오뢰사수와 제국군만으로 무향을 거꾸러뜨렸다. 시카트가 당연히 엘시에게 돌려져야 마땅할 전과를 하늘치에게 돌리는 것은 무 향이 엘시 에더리라는 한 명의 인간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시카트가 얼마나 엘시에게 신경 쓰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애써 그 위상을 격하시키려 하지도 않 을 테니까. 이이타는 눈 밝은 이라면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장난은 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알려주려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시카트 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하늘치가 그들에게 날아오고 있는 지금은. 하인샤 대사원의 승려들이 한 말이 맞다면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하 늘치는 동쪽 지평선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날아올 방향에는 낮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또한 해가 저물고 있어서 동쪽 하늘은 캄캄했다. 아무래도 하늘치가 지평선 위로 모습 을 드러내는 것은 보기 어려울 것 같다. 하늘치가 그들의 머리 위에 당도할 무렵에는 이미 주위가 캄캄할 것이다. 하지만 밤이라도 그 거 대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은 놓치기 어려울 것이다. 이이타는 어둠 속 에서 그것을 놓칠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승려들의 예언이 적중 하지 않는 사태에 대해 걱정했다. 그렇다면 아이저는…… 이이타는 아이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아이저는 부러뜨린 억새들 위에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다가올 일을 대비하여 마음 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끼리 느낄 수 있는 직감에 의해 이이타는 아버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 오늘 밤 예정했던 대로 하늘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더 나쁜 경우로, 만 약 그들이 하늘치를 통제할 수 없다면? 상식적으로 그들은 후자의 경 우에 좌절해야겠지만 이이타는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사 람을 햇살 속에 부유하는 먼지 조각처럼 초라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그 거대한 존재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다. 펜조일의 말처럼 하늘치는 하늘치일 뿐이고 그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으며 당연히 사람과도 비교될 수 없다. 하늘치와 사람은 대등한 존 재가 아니다. 하지만 하인샤 대사원의 승려들이 잘못된 예언을 한 거 라면 그들은 대등한 존재들에게 속아넘어간 것이 된다. 이이타는 자신이 두려움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억새밭 사이를 걸어갔다. 그 시각, 파름산의 아래쪽에 펼쳐진 넓은 파름 평원에 있던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이이타는 그 네 번째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이타 는 소리 로베자를 동행시켰고 아이저와 시카트는 그녀를 무시하는 방 법으로 동행을 허락했다. 그래서 소리를 향해 걸어가는 이이타를 보 면서 아이저나 시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는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불만은 품지 않 았다. 그녀는 아이저와 시카트가 무시해준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 다. 다가오는 이이타를 보면서도 소리는 두 사람을 자극하지 않기 위 해 손만 조금 흔들었다. 이이타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이이타가 바닥에 앉자마자 소리는 궁금했지만 감히 말할 수 없었던 사실을 재빨리 속삭였다. "뭐 좀 드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녁 때인데요." 이이타는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나 나, 시카트는 지금 뭘 목구멍으로 넘길 자신이 없어. 그 러고보니 눈치 보였겠군. 미안해. 내가 곁에 있을 테니 넌 먹도록 해." 이이타는 소리의 곁에 놓여있는 바구니를 눈으로 가리켰다. 거기엔 기다림이 길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간단한 음식과 불을 피울 도구, 담 요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소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저 배고프지 않아요." "예상이 맞다면 하늘치는 두어 시간 쯤 지나야 올 거야. 아직 밝을 때 먹어두지?" "배 고프면 먹을게요. 신경쓰지 마세요. 변경백님이랑 공자님, 그리 고 작은 공자님이 너무 긴장하시는 것 같아서 뭐라도 드시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말해본 거예요. 시장하실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고프긴 고프네. 배가 아니라 여기가." 이이타는 자기 입술을 가리키고는 소리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소리 는 기겁하며 공자의 가슴을 밀어냈다. "공자님! 아버님이랑 작은 공자님이 계시잖아요!" 이이타는 미소 지으며 다시 똑바로 앉았다. 그가 긴장을 풀기 위해 장난을 쳐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소리는 이이타에게 눈을 흘겼다. 이이타는 근처의 억새 하나를 적당히 꺾어선 만지작거렸다. 그는 그 것을 휘둘렀다 입에 물었다 하며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조금 후 그것 은 힘없이 는지럭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이타는 그것을 버리지 않 았다. 소리는 말 없이 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갑작스럽게 이이타가 말했다. "넌 만족해?" "예?"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 말이야." 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만족해요. 사실 제가 변경백님이라 해도 그렇게 후한 인심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이이타는 무거운 얼굴로 손에 있는 억새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지마. 소리. 아버님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셔. 아버님 은 승낙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셔. 하지만 안된다고 하면 내가 반발하 겠지. 지금 같은 시기에 반항하는 아들 관리까지 하기는 어려우니까 결정을 유예시키신 거야." "그러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타당한 말씀이잖아요? 변경백님은 좀 더 머리가 차가워진 후에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허락하겠다 고 하셨지요. 그 분께서 의심하시는 것처럼 저희들은 불안한 상태에 서 서로 끌린 것일지도 몰라요. 공자님은 나라를 잃으셨고 저는 고아 에요. 의지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없어서 서로에게 의지했을지도 몰라 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니까……" "그 생각을 바꾸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 소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이타의 귓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대로 다듬지 못해서 거친 귀밑머리가 그녀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 다. 이이타가 말했다. "나는 네 마루나래도 뭣도 아냐. 네 사랑을 갈망하는 멍청한 애송이 지. 하지만 그 애송이에게도 꿈은 있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게 하 는 것. 사랑을 하려면 규리하의 그 남자와 발케네의 그 여자처럼 사 랑하라고. 야무진 꿈이지만, 사랑하는 나의 아내가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소리는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이이타에게 몸을 기울였다. 어깨에 닿 는 소리의 머리를 느끼며 이이타는 억새밭을 바라보았다. 검푸른 하 늘에는 이미 별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검게 변한 억새는 검은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에 사스락거리는 억새 소리, 그리고 소리에게 서 풍겨오는 규정하기 힘든 향기. 이이타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소리의 숨소리이기도 했다. 완전히 일치한 두 사람의 호흡은 하나의 호흡처럼 똑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앉아 있었기에 그가 보지 못했던 것을 시카트가 보고 외쳤다. "온다!" 이이타는 아쉬움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다. 소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 자 일어섰고 이이타는 조금 늦게 일어섰다. 시카트는 동쪽 하늘을 가 리키며 외치고 있었다. 이이타는 시카트가 본 것이 그것일 리가 없다 고 생각했다. 아직 한 시간 쯤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시카트의 말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이타의 생각도. 하인샤 대사원의 승려들 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정확하게 말했다. 동쪽 하늘에 조그마한 점으로 나타난 것은 하늘치였다. 그들의 머리 위까지 도달하려면 한 시간 쯤 걸릴 곳이었다. 어둠 때문에 그것의 출현을 확인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한 것은 오산 이었다. 그것은 높은 고도에 떠있었기에 평원에 서 있는 그들에게는 닿지 않는 햇빛이 그 하늘치에는 닿고 있었다. 그래서 검푸른 구름들 아래에서 하늘치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그런 현상은 몇 분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그 고도에 닿던 햇빛도 사라지고 나면 하늘치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검은 하늘 에 던져진 진주처럼 반짝이는 하늘치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직 하늘치가 먼 곳에 있음을 확인한 이이타는 팔을 옆으로 뻗어 소리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그는 소리에게 속삭였다. "맞아. 하늘치군." 소리는 숨가쁘게 말했다. "예. 하늘치에요. 저렇게 작은 것을 보니 정말 멀리 있나 봐요. 이 쪽으로 오는 것이겠지요?" "맞아. 하지만 곧 안 보이게 되겠군. 해가 완전히 지면 저기에도 빛 이 닿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 똑똑히 봐둬." 이이타는 잠깐 멈췄다가 소리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며 말했 다. "저건 내가 너에게 주는 결혼 예물이니까." 하늘에서는 이미 사라진 석양이 소리의 두 볼에 떠올랐다. 이레는 엘시의 모습에서 또다시 작은 흠을 발견했다. 그가 보기에 양쪽 소매의 길이가 동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옷보다는 엘시 자 신의 문제였다. 오랜 시간 반복적인 작업에 종사한 자들이 대부분 느 끼는 변화는 엘시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 쪽 손으로 칼을 다루었기 때문에 엘시의 오른팔은 왼팔보다 약간 더 굵고 길었다. 그것은 눈으 로 봐선 알기 어려운 차이였고 지금 이레가 파악한 소매 길이의 차이 도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지 않다면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하지 만 이레는 그것이 신경 쓰였다. 엘시는 다가오는 이레를 제지했다. "이레. 잠시 후 저들은 내 옷차림 같은 것은 기억하지도 못하게 될 거야. 이제 그만하지." 이레는 움찔했다가 곧 체념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엘시는 곁에 두었던 칼집을 들어 스스로 허리에 차고는 이레의 팔뚝을 한 번 툭 쳤다. 이레의 어깨는 두드리기에 좀 거북할 정도로 높은 곳에 있 었다. "자, 가볼까." 이레는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가 대장군을 밖으로 모셨다. 이레는 엘시가 말에 오를 때까지 보좌했다. 그리고 말에 오른 다음부터 엘시 는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주위는 조용했지만 그 고요 속에서 수많은 시선들이 홀로 걸어가는 엘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은 곳에 있는 인간의 눈, 말에 탄 엘시를 내려다보는 듯 높은 곳에 있는 레콘의 눈. 숨소리는 통제되지 못했 다. 흥분해서 몰아쉬는 숨소리가 먼 곳의 바람처럼 후우웅, 후우웅 들려왔다. 하늘치가 땅에 내려와 그의 곁에 누워 잠자는 것 같았다. 그 상상은 일단 떠오르자 더욱더 명확해졌다. 어느 땅, 태고부터 지 금껏 사람들의 무례한 눈이나 거침 없는 발이 닿지 않은 땅을 상상하 라. 어쩌면 하늘치들이 남몰래 내려와 거체를 누이고 잠이 들지도 모 르는 그런 땅. 산들이 옆으로 누워 잠든 것과 비슷할 것이다. 어느 곳에서도 그 전체를 볼 수 없는 것들이 스스로 어둠이 되어 어둠 대 신 세상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그 사이를 걸어가는 한 사람을 상상하 라. 별은 옹색하게 남아있는 하늘에 몇 개 반짝일 뿐 주위는 캄캄하 다. 그는 잠든 하늘치의 숨소리를 듣는다. 산맥의 심장이 맥동 치는 듯한 소리를…… 엘시는 언덕 위에 올랐다. 백만 대군은 그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바다를 알고 있었다. 지금 언덕 아래에 펼쳐져 있는 것은 횃 불의 바다였다. 모든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횃불을 들고 있는 것은 상당히 적은 수의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애기 살을 이용하지 않는 이상 한쪽 끝에서 반대쪽으로 활을 쏘아도 닿지 않을 넓은 공간에 서있는 백만 대군의 위용을 드러낼 만한 빛은 있었 다. 야습을 위해 밤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어떤 어둠 속에서도 그 거대 한 병력이 움직이는 것은 포착될 것이다. 기습의 효과는 전혀 기대할 수 없지만 엘시는 적의 명령 체계가 흐트러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난 전으로 돌입할 경우 자칫하면 피아 식별도 어려워지는 밤의 어둠 속 에서 수십만 명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고 필요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같은 위험은 흑사자군에게 몇 배 더 크 게 작용한다. 하지만 엘시는 그 어려움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 다. 그 때문에 민들레 여단은 좀 흥미로운 배치를 하게 되었다. 히도 큰 하장군은 그 임무를 마음에 들어했다. 아마도 시허릭 마지오 상장 군이 불만을 늘어놓을지도 모르는 그를 위해 '어둠에 대적하는 선봉'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엘시가 언덕 아래에 밀집한 병사들 모두에게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 록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엘시 곁에는 엘시의 금군으로 자처하는 론솔피가 성큼 다가왔다. 엘시는 론솔피를 보았고 론솔피는 준비되었 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흑사자군은 론솔피의 거대한 계명 성을 통해 엘시의 말을 듣게 되었다. "제국의 몸값은 얼마인가?" 그 질문에 병사들의 바다에서 자그마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소음은 곧 엘시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사라졌다.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으려면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가? 한 사람에게 6억 명의 적을 주지 않으려면 얼마나 내놓아야 하는가? 우리의 긍지 를 사려면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 위 한 대가는 얼마인가?" 니어엘 헨로는 자신의 중대와 함께 엘시의 말을 듣다가 주위를 잠깐 둘러보았다. 카루스 부위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고 맥키 네미 부위 는 칼자루를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엘시를 보 기 위해 발돋움을 하는 가리아를 보다가 니어엘은 자신도 그 방향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 생각했다. 어머니. 우리가 서 로 사랑하기 위한 대가는 얼마일까요. "보라. 제국이 사라진 순간 우리의 이웃이었던 자들은 우리의 울타 리를 짓밟고 우리의 재산을 빼앗아갈 자들로 바뀌었다. 상대가 가진 힘과 자신이 가진 힘을 비교할 뿐 긍지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게 되 었다. 그들에게 창칼로 보답받을까 무서워 똑같은 창칼을 준비하며 그들에게 주어야 할 사랑은 감추어야 했다. 우리는 긍지 잃은 비참한 짐승이 되었다. 제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짐승에서 벗어나려면 우 리는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대들도 알고 나도 알듯 하늘에 서 뚝 떨어지듯 주어지는 것은 없다. 그 무엇에건 우리는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제국을 되찾으려면 그에 합당한 몸값을 내놓아 야 한다. 제국의 몸값은 얼마인가?" 흥분 때문에 꿈틀거리는 병사들에게서 소음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랐 다. 론솔피의 벼락 같은 외침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제국은 원시제 폐하께서 목숨을 내놓으며 건설한 제국이었다. 제국의 몸값은 그것을 원하는 자의 목숨이다. 이보다 더 간단할 수는 없다. 우리의 피 한 방울로 우리의 아들딸이 뛰놀 언덕 하나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피 한 방울로 우리의 형제자매들 이 일할 일터 하나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로 우리는 제국을 살 수 있다. 그 멀고 험한 길을 힘겹게 걸 어 이곳에 모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제국은 이미 존재 한다. 그 제국은 우리를 위해 울고 있다. 내게는 그 울음 소리가 들 린다. 우리가 되사고자 하는 제국. 그것은 우리의 피눈물에 갈급한 폭군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울고 있다. 그런 천박한 것이 우 리 제국이라면 우리는 되사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제국이 우리 를 위해 눈물 짓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보살필 제국임을 알기에 그 것을 되사려 한다. 제신께서 빚어 동물과 다르게 하신 우리들을 야수 로부터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제국임을 알기에 그것을 되사려 한다. 우리가 치를 수 있는 가장 큰 값을 치르고서." 론솔피는 몸을 거대하게 부풀렸다. 지금까지도 그의 목소리는 거세 었지만 그가 부리를 벌리자 압도적인 굉음이 터져나왔다. "아라짓 제국은 우리가 산다!" 우레 같은 동의의 외침이 돌아왔다. 엘시는 칼을 뽑아 높이 들어올 렸다. 그 몸짓은 기다리고 있는 장교들을 통해 흑사자군 전체로 전파 되었다. 백만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도처럼, 폭풍처럼 휘몰아치지는 않았다. 그것은 추수에 나선 농부들처럼 움직였다. 한 포기 한 포기의 곡물을 주의 깊게 베어내는 농부들처럼 흑사자군 이 움직였다. 어쩌면 가을 서리가 내렸을지도 모르는 엔거 평원의 풀 잎들은 저벅저벅 걸어가는 병사들의 발에 짓밟혔다. 어둠 속을 꾸준 히 걸어가면서 그들은 평원 남쪽에 있는 시모그라쥬군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돌풍에 휘말린 모닥불의 불티처럼 미친 듯이 움직이는 횃불들을 볼 수 있었다. 론솔피의 쩌렁쩌렁한 외침은 그곳 에도 도달했다. 시모그라쥬군은 침착한 태도로 방어 태세에 돌입했지만 흑사자군의 도착 지연에 내심 당황했다. 기병대나 레콘 여단의 돌격을 예상하는 것이 당연하다. 시모그라쥬군의 수뇌부 또한 그런 공격을 예상했고 자신들이 짜낼 수 있는 최선의 방어 대책을 결정하여 휘하 장병들에 게 전달해 두었다. 하지만 흑사자군은 전체가 한꺼번에 남쪽으로 이 동하고 있었다. 마치 행진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최일선 지휘관 들은 당황하여 상부에 상황을 보고했고 그 때문에 전령들이 정신없이 내달렸다. 시모그라쥬군의 수뇌부는 엘시가 양측의 압도적인 세력비 를 고려하여 숫자 싸움이 되는 난투로 돌입하려는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에 대비하여 방어 대책이 수정되었을 때 흑사자군은 다시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흑사자군 곳곳에서 짧은 계명성이 터져나왔 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특이한 단어들이었다. 그 때 시모그라쥬군 중 몇 명이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을린발이 코 끼리들을 부릴 때 쓰는 말이었다. 엘시는 그을린발에게 그의 구호를 자신과 민들레 여단병들에게 가르 치도록 부탁했다. 복잡한 체계가 아니었기에 민들레 여단병들은 어렵 잖게 그것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엘시는 민들레 여단을 쉰 개 정 도의 소집단으로 분할하여 각 군단과 중요한 독립중대에 배치했다. 그 방식으로 엘시는 자신을 오십 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을 다루는 지 휘관으로 바꿨다. 그것은 엘시가 어둠 속에서 소리만으로 다룰 수 있는 병력이었다. 그리고 레콘들의 계명성은 엘시의 광활한 작전 구 역 내에서도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엘시는 지휘를 간략화하기 위해 군단 이하의 단위에서 필요한 지휘는 전부 군단장에게 일임했다. 군단장들은 제국군에서 최정점 가까이까지 진 급한 능력 있는 자들이었으므로 자신의 군단 하나를 어둠 속에서 지 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흑사자군과 시모그라쥬군 모두 어둠에 방해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모그라쥬군과 달리 흑사자군은 그 어둠을 꿰뚫을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채 움직이고 있었다. 시모그라쥬군이 그 사실을 깨닫고 해쓱해졌을 때 멈춰선 흑사자군에서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 둠 속에 서있던 흑사자군의 한 부분이 출렁이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 모습을 본 흑사자군의 장병들이 목청껏 외쳤다. "테룸 나마스 하장군이다!" 발케네에서 사라티본군의 배후로 기병 돌격을 감행했던 이 유명한 기병 지휘관의 이름에 시모그라쥬군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흑사자군은 극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기병 돌격을 감행할 작정이었다. 보병에 의한 이차 공격이 순식간에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당황 속 에서 시모그라쥬군의 창병들이 재빨리 돌출되었다. 기병의 돌격을 저 지하기 위한 목책 뒤에서 시모그라쥬군은 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 지만 그들은 곧 당혹에 빠졌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봐. 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는 기병 돌격도 있냐? 그 때 그들이 테 룸 나마스 하장군의 기병들이라 판단했던 무리들로부터 낭랑한 외침 이 들려왔다. "덧살 착용!" 사태를 깨달은 최일선 지휘관들이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당황하여 외쳤다. 빨리 창을 버리고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라고. 그 때 다 시 한 번 무시무시한 선고가 들려왔다. "발사!" 어둠이 비수가 되어 시모그라쥬군을 찌르기 시작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1. 부활을 받아들이는 태도 (3) 2004/09/21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1-3 관련자료:없음 [4931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9-21 04:49 조회:55 피를 마시는 새 31. 부활을 받아들이는 태도 - 3 기계(奇計)에 의지하는 자가 맞이하게 되는 비참한 말로에 대한 무 수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은 흔히 기계의 유혹에 빠진다. 전 쟁은 최후의 외교이고 그 이후에 다른 것은 없다. 무엇을 해 볼 기회 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이상 모든 것을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엘시 에더리의 말처럼 전쟁의 선은 승리다. 그것은 전쟁에서도 선을 추구하라는 자기모순적인 망발이 아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하건 상관없다는 의미다. 물론 엘시 에더리의 말 전체를 보면 전쟁의 잔인함과 비정함에 대한 혐오감을 읽어낼 수 있지만 - 엘시는 전쟁의 아름다움으로 뛰어난 무용이나 불굴의 용기, 기상천외한 지략 따위를 거론하지는 않았다. 오직 빠른 종전만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 전후 맥락을 빼고 그 대목만 바라보면 그것은 꽤나 무시무시한 말이다. 엘 시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라짓력 7월 30일 밤 엔거 평원에서 엘시 에더리는 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선봉으로 나선 것이 레콘도, 기병도 아닌 9014 독립중대라는 것은 그들의 장기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헨로 중대라 불리는 그들의 장기는 2위와 10위가 비슷한 수준이 될 만큼 독보적인 초장거리 타격이다. 전투의 시작을 그런 병력에게 맡긴다는 것은 당 연한 일이기까지 하다. 그렇더라 해도 헨로 중대원은 천 명 남짓이 다. 돌입에 필요한 혼란을 수십만의 적에게 강요할 수준은 아니다. 엘시가 가장 바란 것은 베로시 토프탈이 의심을 품게 하는 일이었다. 기병 돌격이 시작된다는 보고와 애기살이 날아온다는 보고가 연이어 도달하면 시모그라쥬군의 사령부는 최일선의 보고를 우선 의심하게 될 것이다. 전투의 시작 부분에서 엘시가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흑 사자군과 시모그라쥬군의 병력 차이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 전 달 속도의 차이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헨로 중대는 세 번의 사격만 실시한 후 급속히 전방에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난 자리에 선 것은 테룸 나마스 하장군이었다. 이제 베로시 토프탈은 '기병 돌격입니다!'라는 보고에 '그 보고는 아 까 들었다!'라며 분통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육안으로 전황을 살필 수 없는 상황에서 도달하는 보고가 뒤죽박죽이라면 지휘관에겐 악몽 이 될 것이다. 테룸 나마스 하장군은 앞쪽의 어둠을 바라보며 그곳에 있을 목책과 참호, 함정 같은 것을 가늠해보았다. 헨로 중대는 시모그라쥬군의 방 어 시설 건설을 방해하면서 동시에 그 배치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가 져왔다. 엘시는 나마스 하장군에게 적 한 명만 죽이고 나와도 되니 걱정 말고 돌격 진로를 결정하라는, 상당히 부담감을 덜어주는 명령 을 내렸다. 이제 자신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질 시간이 왔음에도 불 구하고 테룸은 걱정하지 않았다. 엘시의 말은 말 그대로 해석해야 하 는 말이었다. '귀관이나 기병들을 깔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두억시 니 장군이 잠깐 동안이나마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누군지 결정하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다. 분명히 약속하는데 귀관은 오늘 밤 진짜 돌격을 몇 번이나 더 시도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는 제발 살 려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러니 처음부터 힘 뺄 필요는 없다.' 부담감도 덜고 긍지도 주는 명령에 테룸은 기뻤다. 성과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고 그래서 테룸은 승마술이 가장 우수한 정예 기병만을 추려 최초의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시모그라쥬군의 방어력이 아직 건재한 상태였고 빠른 일격이탈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므로 그것이 합 리적이다. 전방에 보이는 횃불을 향해 테룸이 외쳤다. "안짱다리들아, 가자!" 엘시의 예견대로 시모그라쥬군의 최일선 장병들은 당혹감의 극치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보이지도 않는 애기살 이 바로 곁에 있던 전우들을 격살시키는 모습에 혼이 빠졌던 병사들 은 느닷없이 들려온 말발굽 소리에 또다시 경악했다. 목책으로 달려 가 창을 내밀어야겠지만 병사들 대부분은 손에 방패를 든 채 우왕좌 왕했다. 물론 혹독한 훈련을 거쳐 제국군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들은 그 혼란을 다스릴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 또한 제 국군이라는 점이었다. 투가닥, 투가닥, 투가닥! 말들의 편자가 대지의 무겁디 무거운 현을 강타한다. 전방의 어둠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어려운 것은 말도 사람과 마찬가지였지만 말들은 그들이 태우고 있는 기수들에게 뒤지 지 않는 고참병, 제대로 훈련받은 군마들이었다. 말들은 재갈을 깨물 고 콧김을 허옇게 내뿜으며 어둠을 찢어발기듯 달렸다. 단단히 매어 졌음에도 덜렁거리는 마구들, 회초리처럼 춤추는 고삐와 등잣줄, 절 벽에 핀 잡초인 양 거세게 나부끼는 말갈기. 테룸 나마스 하장군의 입술 사이에서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흘나온 것은 말들이 모두 다리 를 잃어버렸을 때였다. "워- 헤야, 헤야, 헤야, 헤……" 극도로 빨라진 말발굽 소리가 마침내 침묵처럼 평온해진 곳에서 테 룸 나마스 하장군의 건조한 읊조림이 꿈틀거렸다. 하장군에게 가까이 있던 기병이 그 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병사가 휩쓸려들어갔다. "워- 헤야, 헤야, 헤야, 헤…… 워- 헤야, 헤야, 헤야, 헤……!" 말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다. 현재의 가슴을 얼어붙게 하는 원시의 신음이었다. 의식을 소리 없이 뒤쫓다가 그것이 답보할 때 추월하여 나타나는 비통한 광기였다. 메마르고 거칠고 짓눌린 듯 둔중한 웅얼 거림. 바람이 실어다준 그 소리를 들으며 남부 출신의 제국군들은 전 율했다. 그들은 몽유병에 걸린 듯한 밀림이 부르는 광상곡에 익숙했 다. 하지만 돌격하는 테룸의 기병들이 읊조리는 것은 태고로부터 작 렬하는 여름과 잔혹한 겨울에 담금질 당해온 북부의 노래였다. 어느 것이 더 무시무시하냐는 비교는 의미 없다. 익숙하지 않은 쪽이 무서 운 법이다. 남부였다면 아마도 얼이 빠지는 쪽은 북쪽의 병사들이었 을 것이다. 하지만 엔거 평원은, 한계선에 지극히 가까운 곳이긴 하 지만 엄밀히 북부였다. 소름 끼치는 노래와 함께 흑사자군의 이빨이 시모그라쥬군의 옆구리 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흑사자의 이빨은 아주 많았다. 테룸 나마스 하장군의 돌격 직후 여러 개의 독립 중대가 각자 다른 위치에서 돌격했다. 그 중 하나는 수십 대의 수레를 밀며 돌격하고 있었다. 수레들에는 건초가 잔뜩 들어있었고 그것은 기름에 흠뻑 젖 어있었다. 그들이 돌격하는 곳은 물이 고이는 곳이며, 따라서 레콘들 을 투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 시모그라쥬군은 그곳을 대 레콘의 방어 거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흑사자군은 그들의 강점을 약점으 로 바꿔놓았다. 물이 고인다는 말은 그곳이 저지대라는 의미다. 경사 를 따라 가속하는 수레에 횃불을 집어던지자 수레는 거대한 화염 덩 어리가 되어 시모그라쥬군의 방어 시설들을 덮쳤다. 한편 시모그라쥬군의 양익에 있는 소화차를 향해 돌격하는 독립중대 들도 있었다. 물을 멀리 뿜어내기 위해 높은 곳에 있던 그 소화차들 을 향해 흑사자군의 독립중대들은 지참하고 갔던 투척 도끼를 집어던 졌다. 물론 레콘도 아닌 그들이 바퀴를 때려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퀴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바퀴에 금이 가거 나 도끼가 꽂힌 채로 바퀴를 굴린다면 소화차들은 바퀴를 잃고 멈춰 설 것이다. 소화차 주위를 지키던 시모그라쥬군은 적들이 노리는 바 를 깨닫고는 악을 쓰며 적이 던진 도끼를 주워 되던졌다. 시모그라쥬 군의 양익에서는 무수한 도끼들이 날아다니는 흉흉한 광경이 펼쳐졌 다. 그 외에도 다양한 공격들이 넓은 전선에 걸쳐 시모그라쥬군에게 감행되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베로시에게 시급히 전달되었다. 상호 모순을 일으키는 온갖 보고에 휩쓸려 부유하던 베로시 토프탈 은 힘겹게 엘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밤의 도움으로 베 로시의 눈을 가린 엘시는 그녀의 귀도 막아버릴 생각이었다. 상대방 의 두 배가 넘는 잘 훈련된 병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엘시의 주의 깊음에 감탄하기에 앞서 베로시는 기시감 속에 몸을 떨 었다. 감각을 차단시킨다는 것은 그녀가 엘시에게 저지른 일을 상기 시켰다. 메마른 우물 속에 홀로 갇혔을 때 엘시는 세계와 단절되었을 것이다. 엘시는 밤의 엔거 평원을 수백만 배로 확장된 우물로 만들어 베로시에게 되돌려주고 있었다. 베로시는 이를 악문 채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시모그라쥬군의 말단 부까지 섬세하게 이어지는 신경계를 수복하려 애쓰는 것은 오히려 엘 시의 농간에 휘말리는 일이 될 것이다. 비바람 속에서는 피부에 닿는 빗방울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것은 신경쇠약을 일으킬 뿐이다. 비를 무시한 채 앞으로 갈 길만 생각하는 것이 낫다. 베로시는 과감하게 통제를 포기했다, 자기 판단에 따라 눈앞에 보이는 적을 상대하라는 그녀의 명령을 소지한 전령들이 일선의 지휘관들에게 달려갔다. 어떤 지휘관들은 베로시의 명령이 오기 전부터 그렇게 행동하고 있 었다. 그들은 방어 시설들에 의지하여 다가오는 적에게 창을 던지고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 시야가 닿는 범위 내에서 흑사자군과 시모그 라쥬군은 각자의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거대하면서 치명적인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밤의 어둠은 색적 범위를 대폭 축소시켜 교전 거리를 단축시킨다. 전투에 돌입한 병력들이 각자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안 엘시는 암 흑과 소음을 이용하여 낮이었다면 당장 난전이 벌어졌을 거리까지 흑 사자군의 남은 병력을 전진시켰다. 수십만 명 단위의 전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손 닿을 거리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엘시는 그 상태 에서도 전체 흑사자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거리를 무시하며 대화가 가능한 레콘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추-리-에-서-치-자-나-무-! 동-으-로-리-리-리-! 반-복-한-다- 리-리-리-! 원-추-리-에-서-오-얏-나-무-버-드-나-무! 마-테-하-! 반 -복-한-다-! 오-얏-과-버-들-마-테-하-! 누-가-나-좀-싸-우-게-해-줘 -! 망-할-놈-들-이-다-도-망-가-잖-아-!" "호-두-나-무-에-서-원-추-리-! 봤-다-라-리-크-하-쿨-! 우-리-는- 승-리-한-다-!" 오가는 대화의 뒤에 붙는 말은 종지부의 의미밖에 없다. '전달 종 료'의 의미인 것이다. 엘시는 아무 말이나 써도 좋다고 말했고 그것 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군단장들은 적에게 두려움을 주고 아군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열정적으로 덧붙였다. 그 중에선 가끔 독특한 정신 세계의 주인공도 나타났다. "느-티-나-무-에-서-원-추-리-! 한-다-리-크-하-쿨-! 리-! 미-치-겠 -어-! 적-군-의-발-냄-새-가-너-무-심-해-! 살-려-줘-!" 폭소와 함께 몇몇 조언이 느티나무로 향했다. 대부분 물리적으로 실 현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조금 후 그들을 달래는 것 같은 엄한 계명 성이 들려왔다. "원-추-리-로-부-터-흑-사-자-의-숲-으-로-! 칼-은-매-섭-게-! 잡- 담-은-적-당-히-!" 여러 번 반복되는 '원추리'는 제국군의 어떤 부대를 가리키는 이름 은 아니다. 엘시 에더리는 사령부의 호출명을 정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 식물의 이름을 고르다가 데오늬 달비 여성 기숙 학원의 별명을 떠올리고는 그것을 사령부의 호출명으로 결정했다. 덕분에 사령부의 지시와 다른 부대들의 보고는 쉽게 구분되었지만 그 이름은 몇몇 지 휘관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여학교 기숙생이나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모양이다. 자제를 명하는 엘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장난기 섞 인 전달 종료 문장이 몇 번 더 사용되었다. 계명성으로 울려퍼지는 그 외침들의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베로 시는 소리가 들려오는 광범위한 범위를 통해 캄캄한 엔거 평원에서 거대한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들어버린 시모그 라쥬군의 신경계를 복원시키고 싶어 몸이 움찔거렸지만 베로시는 꾹 참았다. 병력을 장악하려 하면 오히려 엘시에게 당한다. 베로시는 초 조하게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물어뜯으며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일단은 부하들에게 맡겨둔다고 되뇌었다. 그리고 시모그라쥬군의 야전 지휘관들이 반격을 개시했다. 그 첫 번 째 움직임은 몇몇 특정한 소화차들에서 시작되었다. 소화차의 바퀴를 공격하던 독립중대는 기묘한 냄새를 맡았다. 도끼 에 강타당한 어느 소화차에서 물냄새 대신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흑사자군이 당황했을 때 그 소화차가 갑자기 내용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도끼를 집어던지던 흑사자군은 우리가 레콘으로 보이냐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소화차의 살수관을 통해 쏟아져나온 것은 물이 아니었다. 소화차에 올라타고 있던 시모그라쥬군 병사들이 쏟아져 나온 액체 줄기에 횃불을 가져갔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드러 났다. 소화차가 뿜어내고 있는 것은 기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 한 화염의 채찍이 되어 흑사자군을 덮쳤다. 계명성이 지시하는 대로 다른 가시나무 군단병들과 함께 어둠 속의 어딘가로 이동하던 틸러 달비 부위는 어둠 속 저편의 지평선에서 갑 자기 솟구치는 불꽃에 숨을 들이켰다. 대략 1킬로미터 쯤의 간격을 두고 지평선의 두 곳에서 피어오르는 불길들은 마치 땅 아래에 잠들 어 있던 불의 뱀들이 전투의 소음에 성이 나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주위를 밝히고 그 뒤편의 밤하늘을 사위게 했다. 틸러와 함께 그의 소대원들도 걸음을 멈추고는 놀란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 때 틸러는 쟈마 데시마스 수교위의 외침을 들었다. "미친 놈들, 발악을 하는군! 별 것 아냐. 저건 기름 넣은 소화차다. 저런 식으로 불을 쏘면 곧 불이 거꾸로 달려들어 소화차도 불타버린 다! 제 소매를 불쏘시개 삼는 격이지. 불구경 적당히 하고 움직여!" 직속상관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틸러는 황급히 소대원들을 전진시켰 다. 쟈마 데시마스 수교위의 지적처럼 기름을 채운 소화차들은 곧 폭 발을 일으켰다. 틸러는 어둠 속에서 붉고 노란 장미꽃이 갑자기 피어 나듯 폭발하는 소화차들을 보며 그 위에 있던 시모그라쥬병들이 끝까 지 양수 손잡이를 잡고 있었을지 두려움 속에서 궁금해했다. 틸러의 의문에 대한 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 이다. 소화차로 불길을 뿜어대는 기술의 단점에 대해서는 시모그라쥬 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불길이 기름의 흐름을 역류하여 소화차 에 도달하기 전에 대피하려 했다. 덕분에 몇몇 소화차는 혼자 폭발했 다. 하지만 지나치게 빨리 불이 역류하여 소화차와 함께 분사한 시모 그라쥬병들도 많았다. 불꽃 때문에 창백하게 변한 밤하늘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때까지 소화차들을 공격하던 흑사자군들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소화차에게 불길의 직격을 당한 병사들은 옷과 머리카락에 붙은 불에 괴로워 하며 날뛰거나 땅에 굴렀다. 도살당하는 짐승 같은 단말마를 쏟아내는 그들을 돕기 위해 달려가던 병사들은 고온의 열기 류가 몸을 때리는 것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멈춰섰다. 고개를 든 그들은 범람하는 불꽃을 보았다. 기름을 채운 소화차들은 모두 폭발 했을 경우 흑사자군을 향해 불 붙은 기름이 흘러내리게끔 배치된 것 들이었다.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불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흑사자 군은 퍼렇게 질렸다. 그들을 인솔하던 중대장은 모진 결심을 내렸다. "불 붙은 자들은 포기한다! 어차피 늦었어! 후퇴! 후퇴하라!" 중대장의 외침처럼 화염에 직격당한 병사들 대부분은 이미 땅에 엎 드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길을 피한 병사들은 분루를 삼키며 황급 히 물러났다. 주의깊게 배치되긴 했지만 모든 폭발이 흑사자군 방향으로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시모그라쥬군을 향해 뻗어오기도 했다. 기름 대신 정상적으로 물을 탑재하고 있던 소화차들은 그 원래 용도에 맞게 시모그라쥬군을 향해 다가오는 불길을 껐다. 기름에 의 한 화염은 물로도 쉽게 끄기 어렵지만 그들은 가까스로 불길의 방향 이 흑사자군을 향하도록 할 수 있었다. 때마침 바람도 흑사자군을 향 했다. 시모그라쥬군의 양쪽은 불과 물의 이중 방어가 만들어졌다. 인 간도, 레콘도 접근할 수 없게 된 시모그라쥬군의 양쪽을 보던 엘시 에더리는 무거운 표정으로 명령들을 빠르게 외쳤다. 그 명령들은 론 솔피의 계명성을 통해 전체 흑사자군으로 전달되었다. 베로시 토프탈이 원하는 것은 전장을 좁히는 것이었다. 공간을 한정 시키면 아무리 백만 대군이라도 일시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줄어 들게 된다. 양쪽이 똑같은 병력으로 맞붙게 된다면 각종 방어시설을 가지고 있는 시모그라쥬군이 더 유리하다. 베로시가 구사한 전술의 대명제는 '좁고 깊게'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양쪽에 있던 소화 차들 중 일부에 기름을 채워 폭발시킨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의도를 상대방이 못 알아차릴 리는 없다. 베로시가 가장 두려 워한 것은 흑사자군의 예비대가 밀집한 시모그라쥬군의 측면을 돌아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엘시에겐 그런 움직임에 이용할 예비대가 충분히 있었다. 특히 민들레 여단 같은 경우 그런 우회를 순식간에 해낼 것이다. 그래서 베로시는 니어엘 헨로가 '퇴로도 포기했다'고 평가할 만큼 배후에도 많은 방어력을 배치해두었다. 베로시의 전술에 따라 싸우는 시모그라쥬군의 모습은 다리를 모두 딱딱한 딱지 속에 집어넣은 채 머리만 내밀고 있는 난폭한 거북이에 비교할 수 있을 것 이다. 공격할 수 있는 곳은 머리뿐이고, 머리에 다가가면 물리게 된 다. 항상 주인의 곁에 있었지만 이레 달비는 그에 대한 엘시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가들 사이에서 자랐다고 해서 밤을 볼 수 있는 나가의 능력을 얻는 것은 아니고 이레도 거기에 있던 사 람들과 마찬가지로 엔거 평원의 모습을 조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레는 주인을 쳐다보며 말 위에 앉아 엔거 평원을 바라보는 엘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대장군이 나가의 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국수급의 기사가 바둑판을 보지 않고도 바둑을 둘 수 있는 것처럼 엘시는 머리 속에 가상의 지도를 펼쳐둔 채 엔거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상 지도에는 이레나 다 른 사람이 볼 수 없는 흑사자군의 움직임이 빈틈없이 나타나 있을 것 이다. 이레는 그 모습을 짐작해볼 재주가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겸 허히 인정하고는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사나운 거북이를 잡는 방법 은 뭘까? 물론 간단한 방법이 있다. 뒤집으면 된다. 이레는 자기 생각에 실소 하고 말았다. 아무리 엘시라도 시모그라쥬군을 '뒤집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레는 좀 더 합리적이고 고차원적이며 영묘한 전술들 에 대해 몽상해보았다. 기적에 대한 지휘권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주인에게 어울리는…… 이레는 자기 주인을 좀 더 믿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이레도, 그리 고 엘시의 지시를 계명성으로 전달하고 있는 론솔피도 알지 못했지만 엘시는 시모그라쥬군을 뒤집으려 시도하고 있었다. 엘시 에더리는 쟁룡해를 생각했다. 유쾌하거나 감미로운 추억은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쟁 룡해의 여름 폭풍을 만난 배들의 모습이었다. 피할 수 없는 강력한 파도가 엄습할 때, 뱃사람들은 현측으로 파도 를 받기보다는 배의 선수를 파도로 향한다. 그것은 배의 형태와 크게 상관없는 보편적인 항해술이다. 선수로는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파도 도 현측으로 받으면 순식간에 배가 뒤집어진다. 그리고 뒤집힌 배는 그 내부공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돌멩이나 다름없 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레콘이 된다. 불행하게도 현측으로 파도를 만난 뱃사람이라면 엘시가 시모그라쥬 군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했을 것이다. 엘시 는 베로시가 준비한 좁은 전장, 즉 시모그라쥬군의 선수로 파도를 가 져갈 생각은 없었다. 그는 시모그라쥬군의 현측에 커다란 파도를 준 비했다. 시모그라쥬군은 물론이거니와 그 일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흑사자군 자신들도 알지 못했지만 시모그라쥬군의 좌우 측면에는 대 단히 많은 흑사자군이 밀집하고 있었다. 계명성을 통해 전달된 보고 를 통해 배치가 끝났다는 것을 확인한 엘시는 한 가지 명령을 더 내 린 다음 소화차가 폭발하며 일어난 불길이 사그라들기를 차분히 기다 렸다. 베로시 토프탈은 갑자기 몸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 의 의식은 깨닫지 못한 것을 그녀의 무의식이 알려오고 있었다. 베로 시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자신을 진감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다. 상념에 잠긴 그녀를 조롱하듯 계명성이 들려왔다. 짐승의 울 음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장난스러운 외침에 베로시는 발칵 화가 났다. 계명성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저주 섞인 눈길을 보내던 베로시 는 갑자기 입을 벌렸다. 조금 전부터 우측에서 많은 계명성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말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흑사자군이 시모그라쥬군의 우측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몇 명의 레콘 들이 단촐하게 시모그라쥬군의 우측에 와서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닐 까? 베로시는 신음을 흘렸다. 최초의 공격에서 엘시가 보여준 기만 때문에 베로시는 모든 것을 엘시의 기만책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 다. 하지만 그것이 기만이 아니라면? 베로시는 무간섭을 깨고 다시 지휘를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녀의 고민은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시모그라쥬군의 측면에서 대규모 공격을 알리는 함성이 들려왔다. 엉겁결에 우측을 바라보았던 베로시는 자신이 잘못된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격의 함성은 좌측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베로시는 신음했 다. 규리하 가문의 세 부자는 파름 평원에 서서 다가오는 하늘치를 말없 이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는, 정도는 조금씩 달랐지만 좌절감을 느끼 고 있었다. 자신들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 한다는 느낌. 시카트 규리하는 인중에 맺힌 땀방울을 느끼고는 소맷자락으로 그것을 닦았 다. 그가 반 시간 쯤 전에 보았던 하늘치는 이제 거대한 구름처럼 부풀 어 있었다. 그것을 받아들였다간 박살이 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 에 땅이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듯한 거대한 생물. '저것이 과연 생물일까?' 하늘치를 바라보며 시카트는 의혹을 느꼈다. '수 킬로미터 저편에 있는 자신의 손을 자기 것이라고 느낄 수 있을 까? 자기 손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어떤 기분 일까.' 시카트는 거대한 하늘치를 보며 그것에게 너 정말 살아있느냐고 묻 고 싶었다. 그가 하늘치를 처음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움직 여야 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시카트는 하늘치에 대해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갑자기 산을 움직여야 할 처지에 빠진 사람이라면 풍경 의 일부로 무시해왔던 산에 대해 지금의 시카트처럼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이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지만 손을 뻗어 점잖게 하늘치의 맥을 짚어보거나 할 수는 없었던 시카트는 그것의 눈을 보았다. 시카트는 그 눈에서 살아있다는 증거를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하늘치의 수천 개나 되는 눈은 사람이나 사람에게 친숙한 동 물들과는 아주 달랐다. 그 눈은 차라리 잠자리나 벌의 그것과 비슷했 다. 생김새가 아니라 그저 돌출한 껍질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 눈 은 보석처럼 아름다웠고 또한 보석처럼 광물성으로 보였다. 거기서 생기 같은 것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카트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을 발견했다. 하늘치가 충분 히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어둠 속에서도 시카트는 그 눈 중 몇 개가 파 괴되었음을 깨달았다. 승려들의 말은 정확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 에 있는 것은 시커먼 구멍이었다. 어둠 때문에 그 구멍이 정확히 어 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카트는 어떤 사고가 하늘치에게 그런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궁금 했다. 설마 새가 들이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에 부딪혔다고 생각하 기도 어려웠다. 만약 그렇다면 어딘가의 산이 하늘치 때문에 무너졌 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을 것이다. 게다가 산에 부딪혔다면 그렇게 적 은 수의 눈만 파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시카트는 벼 락 또한 사고 원인에서 제외했다. 벼락이라면 보다 많은 수의 눈이 불타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시카트는 벼락 때문에 시커멓게 그을리거 나 한 하늘치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시카트는 거부감 속에서 사람이 사고 원인일 경우에 대해 생각해보 았다. 땅에서라면 레콘이라도 하늘치를 공격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딱정벌레를 탄 사람이라면 투창이나 활, 혹은 제정신으로 하는 짓이 라고 하긴 어렵지만 거창돌격으로 하늘치의 눈을 파괴할 수 있을 것 이다. 일 년 전, 혹은 반 년 전 누군가가 시카트에게 그런 말을 했다 면 시카트는 농담을 들은 자의 반응이나 위험한 미치광이를 만난 자 의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카트는 지금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미치광이 같은 짓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어 쩌면 그에겐 알려지지 않은 선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시카트가 하 늘치의 통제에 이용하려는 것은 환상계단이다. 하지만 환상계단이 사 람에게 알려진 것은 역사 전체를 놓고 본다면 최근의 일이다. 어쩌면 그 알려지지 않은 선험자는 하늘치를 다루어야 할 절박한 사정이 있 었지만 환상계단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에 활 한 자루를 들고 딱정 벌레에 올라 하늘치에게로 날아올랐을지도 모른다. 하늘치를 협박해 서 자신의 의도를 따르게 하려고. 그리고 마치 피해자의 신체 일부를 자르겠노라고 을러대는 악당처럼 하늘치의 눈을 공격했을지도 모른 다. 수천 개나 되니 한두 개 쯤 파괴해서 주의를 촉구해도 괜찮을 거 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그 선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시카트는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시카트는 팔뚝을 쓸어내리고는 팔짱을 꼈다. 그는 더 이상 하늘치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하늘치의 입 주위를 바라보며 시카트는 자신 이나 아버지가 왜 조종 가능성에 대해서만 걱정했는지 의아해 했다. 하늘치를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하늘치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선험자나 그 가 한 일 같은 것은 시카트의 공상일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고, 시카트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런 시도에 화가 난 하늘치가 선험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알려 지지 않게 된 거라면, 그렇다면 저 하늘치는 또다른 조종 시도에 과 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 시카트는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경고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늘치 가 그의 말을 엿들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시카트는 소리 높이 외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카트는 아버지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다리를 바쁘게 놀리며 시카트는 자신의 멍청함에 다시 경악했다. 그는 낚싯 대로 하늘치를 낚으려 했다. 하지만 낚시에 순응하는 물고기 따위는 없다. 그의 시도가 성공했다면 뭍에 올라온, 아니 내려온 하늘치는 그의 근처에서 '퍼덕거렸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시카트는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절대로 낚시는 안 된다. 차라 리 물고기 배에 난 다리가 났지. 시카트는 하늘치를 올려다보고 있는 아버지의 곁에 도달해서 속삭였다. "아버님." 아이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 다. 시카트는 아버지가 이미 하늘치 조종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아이저는 하늘치에게 다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 고 있었다. 시카트는 황급히 아버지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아버님!" 아이저는 미간을 찡그리며 시카트를 바라보았다. 그 방해에 대해 화 를 내려던 아이저는 문득 시카트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분노를 억눌 렀다. "왜 그러느냐?" 시카트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버님. 지금 방해를 받으셔서 기분이 나쁘시지요?"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분명히 기분이 나쁘실 겁니다. 자기 비행을 방해받은 하늘치는 어 떻게 반응할까요?" 혼란스러워하던 아이저는 조금 후에야 시카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아이저는 오른손을 조금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그리 고는 그것을 다시 들어올려 턱을 감싸쥐었다. 그는 얼굴 가득히 낭패 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하늘치를 방해하면 화를 낼 거란 말이냐? 하지만 하늘누리는……" 시카트는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단 하나의 예입니다. 아버님. 하나의 예로 일반화할 수는 없 습니다. 하늘누리를 받치고 있던 그 하늘치는 수동적인 성격이라서 조종당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성격인지도 모르지요. 그 리고 저 하늘치는 눈도 저 꼴인 걸 봐서 좀 거친 성격인지도 모르고 요. 아니, 어쩌면 천경비록을 잘못 해석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엔 하늘치를 움직이는 방법뿐만 아니라 하늘치에게 양해 받는 방법도 쓰 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님. 저걸 그냥 야생동물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붙잡으려 할 때 반항 한 번 안 하는 야생동물이 있 습니까? 야생마 생포하는 사람은 채여죽기도 합니다!" 아이저는 '성격'이나 '야생동물' 같은 말들을 하늘치 같은 초자연적 인 존재에게 적용하는 것은 좀 거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카트 의 경고 자체는 타당성이 있는 말이었다. 아이저는 번민 속에 시카트 를 바라보다가 이이타를 돌아보았다. 이이타는 한 팔로 발케네에서 데려온 하녀를 끌어안은 채 하늘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저는 그 모습에 대해 언짢음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하늘치는 몇 시간 내 에 그들의 머리 위를 완전히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 몇 시간 동안 생각을 좀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저는 마침내 시도를 중단하고 회의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이타를 불렀다. 아이저는 조금 전 시카트가 무슨 기분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았다. 충 분히 목소리가 들릴 거리였다. 이이타에게 안겨 있던 소리는 놀란 표 정으로 아이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이타는 하늘치에게 시선을 고 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찔한 아이저와 시카트는 동시에 이이 타에게 달려갔다. 엘시는 그 날 밤 자신이 한 일 중 자랑할 것이 있다면 레콘의 강력 한 힘이 아닌 그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인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 고 그것조차도 그 자신의 착의력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 다. 설명을 요구받았다면 엘시는 무차별 학살을 사용하는 뭄토를 보 고 레콘에겐 힘 외에도 유용한 많은 특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 이라고 담담하게 말했을 것이다. 엘시는 그 날 밤 레콘의 계명성을 통신 수단이자 기만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것이 엘시가 생각하는 자 랑거리의 전부다. 때로는 상대방이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베로시는 엘시의 흉 악한 영리함을 저주했다. 우측에서 계명성들이 들리다가 좌측에서 공 격이 시작되었을 때 베로시는 그것이 기만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같지는 않았다. 그것 은 기만책이긴 하되 이중 기만이었다. 엘시는 암흑 속에서 시모그라쥬군의 좌우측 모두에 병력을 배치해두 고 있었다. 그리고 시모그라쥬군의 우측에서 고함을 지르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 좌측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베로시는 엘시의 속임수에 치 를 떨며 자신의 우측에는 고함을 지르는 몇 명의 레콘밖에 없다고 생 각했지만 그쪽에는 막대한 병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병력은 어둠 속 에서 한 시간을 기다린 후 갑자기 공격을 시작했다. 그 때 베로시는 병력의 무게 중심을 좌측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우측에는 몇 명의 레콘뿐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쪽에 대한 방어는 취약 했다. 베로시는 좌측에서 간헐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는 흑사자군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들이닥친 우측의 공격은 베로시를 절망하게 했다. 베로시를 정말 약오르게 한 것은 우측에서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두 어 시간 동안 간헐적인 공격을 퍼붓던 좌측의 흑사자군이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병력을 좌측으로 이동시켰지만 이제 그곳에서는 적이 물러나고 있었다. 격심한 고민에 빠졌던 베로시는 결국 이를 갈 며 병력을 다시 우측으로 이동시켰다. 당연히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 다. 하지만 시모그라쥬군이 가까스로 혼란을 극복하고 우측에서 쳐들어 온 흑사자군을 상대하기 시작하자 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다. 한 시간 후, 좌측에서 물러났던 병력이 되돌아와 시모그라쥬군을 공격하기 시 작했다. 그것은 배의 양쪽 현측에서 번갈아 치는 파도였다. 적을 가 운데 두고도 그렇게 정교한 교차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 히 계명성 덕분이다. 하지만 베로시는 엘시의 흉악함은 계명성을 그 렇게 자유자재로 이용한 것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북이마냥 단 단한 방어를 시행하고 있는 시모그라쥬군을 마치 널뛰기를 하듯 좌우 에서 흔들고 있는 엘시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분명하다. 방어 방향을 좌우로 전환할 때마다 시모그라쥬군은 격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거북이의 등딱지 좌우를 번갈아 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 개새끼! 우리를 뒤집으려 하고 있어!" 칼리도에 있는 모친이 개가 되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엘시는 두 억시니 장군이 자신에 대한 상당한 저주를 퍼붓고 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엘시가 알지 못했던 것은 그외에도 많았 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어둠 속에 벌어지는 일들을 많이 알고 있었 지만 엘시는 그 속에서 무수한 영웅담과 비극, 혹은 기이한 이야기들 이 놀라운 속도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짐작만 할 뿐 알지 못했 다. 소화차와 함께 분사한 시모그라쥬 병사들의 이야기는 그 일부에 불과했다. 엘시는 서로 적이 되어 만난 남매 병사가 그 어둠 속에 나 란히 앉아 전투의 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 영리 한 남매는 진 쪽이 이긴 쪽의 포로가 되기로 하고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엘시는 연인이 준 목걸이 때문에 목이 졸려 죽은 불쌍한 부 위의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 연인은 화살을 막아주기를 기 원하며 목걸이를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엘시는 부러진 칼로 세 명이 나 되는 적과 싸우다가 그 중 두 명과 함께 죽어간 용맹한 수전사의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그 수전사가 쓰러지며 집어던진 칼은 주인을 잃고 방황하던 군마를 찔렀고 놀란 군마가 날뛰는 동안 위험에 빠진 수전사의 분대원들은 도망칠 수 있었다. 엔거 평원을 뒤덮고 있는, 여기 저기가 그을려 있고 곳곳에 피가 묻은 그 어둠 속에서 많은 이 야기들이 태어나고 또한 영영 끝났다. 엘시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 자신에 한정지어 말한다면, 엘시는 뒤쪽에서 그을린발이 그를 향 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다행히 엘시의 안위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레와 론솔피는 그것을 곧장 알아차렸다. 그리 고 론솔피는 도끼창을 움켜쥐었으며 이레는 용감하게도 자신의 비각 술 중 그을린발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두 사람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다가오는 그을린발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불운하게도 그을린발은 무차별학살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 가 몸을 부풀리기로 결정할 경우 론솔피나 이레는 도저히 그것을 제 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을린발에게 달려들겠다고 결심했다. 그을린발은 론솔피나 이레의 긴장한 태도를 무시했다. 그는 말에 타 고 있는 엘시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엘시. 나 좀 볼까." 엘시는 말을 돌렸다. 어둠 속을 볼 수 없는 것은 엘시 또한 마찬가 지였기에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엔거 평원 쪽을 향해 서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엘시는 싸우고 있는 병사들에게 등을 보이는 것이 탐 탁찮은 듯했다. "무슨 일입니까?" "왜 밤중에 싸우기로 했는지 깨달았어. 그리고 왜 내 코끼리 부리는 말을 배운 건지도." "그건 설명했습니다. 둘 다 시모그라쥬군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냐. 나를 따돌리려고 그런 거야." 엘시는 설명해 보라는 표정으로 그을린발을 주시했다. 그을린발은 몸을 부풀리기 싫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밤중에 나는 함부로 내 무기를 쓸 수 없어. 근처에 흑사자군이 있 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내 코끼리들도 떼어 놓을 수밖에 없어. 저 소리들 때문에 코끼리들이 헷갈릴지도 모르니까. 조금 전까지 나는 코끼리들 옆에서 네 작전 때문에 내가 오늘 밤엔 못 싸우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거꾸로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를 못 싸우게 하려고 그런 작전을 쓰는 것 인지도 모르지. 생각해보자구. 낮에 나를 쓰면서 얼마든지 작전을 짤 수 있었을 거야. 안 그래?" 이레는 놀랐다. 그는 엔거 평원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 는지는 알지 못했다. 론솔피의 계명성을 통해 엘시의 명령이 전달되 는 것을 들으며 흑사자군이 시모그라쥬군의 양쪽에서 교대로 공격하 고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에 게 어떤 타격을 주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양쪽에서 번갈아 이렇게 오랫동안 공격하는데도 시모그라쥬군이 몰락하지 않는 다면 엘시의 작전에 약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현상황을 교착 상태에서 무의미하게 공격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오해 한 이레는 지금 그을린발을 투입한다면 그 교착이 단번에 깨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을린발의 말처럼 어둠 때문에 그를 투 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레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 았다. 하지만 론솔피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젠장.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을린발. 낮이라면 저 망할 소화차가 너를 똑똑히 볼 수 있을걸?" 그 지적은 물에 대한 공포로 그을린발을 주춤하게 했다. 하지만 그 을린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화차가 얼마나 느린데? 얼마든지 피할 수 있어. 그리고 내 무기 는 달리면서도 쓸 수 있단 말이야. 난 그냥 소화차 피해 뛰어다니면 서도 시모그라쥬군을 섬멸할 수 있어." "네 무기는 저 녀석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어. 저 녀석들도 무슨 수 를 내었겠지. 지금 잘 되고 있는데 괜히 와서 심통 부리지마." 그을린발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론솔피를 노려보았다. "잘 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너 나가 눈이라도 달았냐?" 론솔피는 어 하는 얼굴로 엘시를 돌아보았다. 이레가 떠올렸던 의심 이 그제서야 론솔피의 머리에도 떠올랐다. 전투는 몇 시간 째로 접어 들고 있었다. 길어진 가을밤을 고려하더라도 이제 한두 시간이면 새 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시간이 될 것이다. 론솔피는 조심스럽 게 말했다. "어디서도 지고 있다는 계명성은 안 들려." "이겼다는 이야기는?" 론솔피는 부리를 닫았다. 그 때 엘시가 말했다. "그을린발. 당신의 무기는 폭발입니다. 주위로 퍼져나가지요. 강력 하지만 그 속성 때문에 무엇인가를 모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 은 포위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공격을 받은 적들이 사방 으로 도망치면 다시 지루한 추적을 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밤 시모 그라쥬군과의 전쟁을 끝낼 생각입니다." 론솔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이 정도면 확실한 설명이 되지 않 았느냐는 표정으로 그을린발을 바라보았다. 그을린발은 납득하지 않 았다. "그건 나도 알아. 네 방식으로도 이기긴 이기겠지. 난 진다고 말한 것이 아니야. 흑사자군이 포위하고 내가 안에 들어가면 더 쉽다는 말 이야. 내가 안에서 폭발하고 네 병사들이 그것들이 흩어지지 못하도 록 막으면 되잖아. 그러려면 낮에 싸워야 했고!" "낮에는 계명성에 의한 의사 교환이라는 이점은 약화됩니다. 적들도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으니까요." 그을린발은 그 설명에도 반대하려고 했다. 어차피 방어하려고 작정 한 적이라면 관찰하든 말든 주위를 둘러싸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 이 그가 꺼내려 한 반론이었다. 하지만 엘시가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데 왜 당신이 싸워야 합니까?" "뭐?" "당신의 목적은 시모그라쥬공이 자신의 야심을 위해 당신을 이용하 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시모그라쥬공의 야심 자체를 파괴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파괴해도 당신의 목 적은 달성되는 것 아닙니까? 당신 말대로 내가 싸워도 이기긴 이길 겁니다. 그러면 당신의 불만은 뭡니까? 사람 죽이는 것이 재미있습니 까?" 그을린발은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론솔피는 도끼창을 거의 휘두 를 뻔했다. 하지만 그을린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방해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싫은 거다. 다른 구질구질한 이야 기는 집어치우지. 내 생각이 맞다면 넌 나를 방해한 거야. 그렇다, 아니다만 말해.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도 나를 방해하기 위해 더 어려운 싸움을 벌인 거냐?" 이레는 그을린발의 어조가 마치 호의 속에서 기회를 주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레는 엘시가 아니라고 말하면 그을린발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물러날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레는 엘 시 또한 자신이 느낀 것을 느꼈으리라 생각했다. 엘시는 그저 그렇다 고 대답하기만 하면 된다.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을린발의 눈이 사나워졌다. 침묵이 긍정으로 해석되는 경우야 무 궁하고 아니라는 대답만 하면 더 이상 캐묻지 않으리라는 것을 양자 모두 아는데 침묵하는 것 또한 그런 경우에 포함된다. 이레는 당장 무차별학살의 철침이 날아와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다. 론솔피 또한 벼슬을 부풀리며 돌격할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을린 발은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엘시의 침묵이 곧 긍정이라는 점은 의심 하기 어려웠지만 그을린발은 엘시의 입을 통해 확인하기로 했다. "엘시?" 그 때 그을린발은 엘시가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 지만 죄책감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엘시는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고개를 떨구는 것만큼이나 시선을 회피하는 동작이 될 수 있지만 엘시는 그을린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늘의 무엇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도 모르게 위를 바라볼 뻔했던 그을린발은 문득 이것이 론솔피에게 공격 기회를 주려는 엘시의 세련된 속임수가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 만 그을린발은 곧 한심한 기분을 느꼈다. 엘시의 시선을 알아차린 론 솔피도 멍한 표정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이레마저도 위를 올려다보자 그을린발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반쯤 예상했던 것처럼 거기엔 컴컴한 밤하늘이 보일 뿐이었다. 어두 워서 별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어쨌거나 눈길을 끌만한 빛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빛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하늘에서 보일 리도 없다. 혹 저것처럼 움직이는 어둠이라면 모를까. 그을린발은 움찔했다. 어둠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야의 초점을 맞출 수 있을 만큼 뚜렷하 게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그을린발은 어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것은 명백한 질량과 확고한 부피를 갖춘 물체의 움직임 이었다. 그을린발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공기를 가르며 움직이고 있었 다. 낮지만 거대한 그 소리로 미루어보건대 하늘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론솔피가 말했다. "하늘치?" 그것은 하늘치였다. 그을린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난하는 표정으 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하늘치는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 금 엘시가 그러는 것처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을린발은 엘시가 역시 시선을 외면하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시의 얼굴에 공포 같은 것이 떠올랐을 때 그을린발은 뭔가 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위를 쳐다보았다. 어둠이 많은 것을 감추고 있긴 했지만 지상의 전쟁터에서 피어오른 불빛 때문에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거대 한 압박감이 있었다. 그것을 종합해 본 결과는 그을린발을 경악하게 했다. 엉겁결에 몸을 부풀릴 뻔한 그을린발은 황급히 자신의 몸을 감 싸쥐었다. 두 팔로 몸을 단단히 부여잡은 그을린발은 불신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정녕 무서운 광경이었고 또 믿을 수 없는 광경이기도 했다. 그을린발은 하늘치가 그 규모에 비한다면 땅에 배를 문지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높이에 떠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1. 부활을 받아들이는 태도 (4) 2004/09/22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1-4 관련자료:없음 [4932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09-22 04:44 조회:80 피를 마시는 새 31. 부활을 받아들이는 태도 - 4 틸러 달비는 두 주먹을 쥐어올리며 엘시 에더리에게 저주를 퍼부었 다. "빌어먹을 엘시 에더리!" 그리고 틸러 달비는 앞쪽에 있는 병사의 턱을 걷어찼다. 틸러를 시 모그라쥬군이라 착각하고 안심하던 시모그라쥬군 하전사는 자신이 무 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졸도했다. 틸러는 쓰러진 그에게서 양도 받은 칼을 옆으로 두어 번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저를 위한 대장군님의 희생,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마 그 날 밤 엘시는 틸러를 위해 그런 식으로 희생할 계획은 없었 겠지만 틸러는 그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그는 대인임이 분명하다. 소대와 헤어지고 칼도 잃어버린 난감한 상황에서 다행히 칼은 손에 넣었지만, 소대장으로서 소대를 잃었다는 것은 역시 뼈아픈 일이다. 그것은 지휘관에겐 최악의 수치이며 대인의 포용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사태다. 지휘해야 할 부대를 잃어버린 것에 비하면 전향은 차라 리 덜 창피하다. 전향자에게는 최소한 박수를 보낼 사람이 있긴 할 테니까. 하지만 틸러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어느 재기 넘치는 시모그라 쥬군의 여군 한 명이 "뜨거운 것이 보인다! 흑사자군이다!"라고 외치 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군인답 지 못한 미성을 준 부모님에게 평소 불만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만 그 순간부터는 부모님에게 감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놀라 어둠 속의 상대를 나가라고 착각한 틸러의 소대는 기 겁하여 사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당시 전투의 주인답게 가장 앞쪽에서 분투하고 있었던 틸러는 뒤쪽에 있던 소대원들이 갑자기 도망치는 것 에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느라 틸러는 교전 상대 에게 칼까지 뺏기고 말았다. 그래서 틸러는 도망쳐 수풀 속에 몸을 숨겨야 했고 숨어있는 사람답게 '나가는 한계선 위로 못 올라온다, 이 멍청이들아! 돌아와!'라고 외칠 수도 없었다. 틸러는 소대를 찾기만 하면 수전사들에게 안겨줄 처벌을 머릿속으로 시연하며 어두운 평원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의 집결 지점은 결정되어 있으므로 소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 다. 문제는 거기까지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틸러의 소대가 속한 가 시나무 군단 3대대는 적진 깊숙이 침투했으며 계명성으로 전달된 명 령에 따라 다시 물러났다. 따라서 이곳에는 시모그라쥬군이 득시글거 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틸러가 겪을 위험이란…… "군호!" ……와 같은 것이다. 틸러는 칼을 뽑아든 채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중년의 군인을 보며 다시 한 번 대장군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는 앞 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엘시 에더리, 저주 받아라!" "멈춰! 군호!" 안타깝게도 이번 상대는 군기가 투철한 군인이었다. 약 오르게도 상 대방은 발길질이나 기습 같은 것이 통하기 어려운 거리로 물러나며 칼을 내밀었다. 틸러는 마지막 기대를 걸어볼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에 비참해 하며 흑사자군의 군호를 댔다. "별비." 틸러는 상대방이 '키탈저 사냥꾼'이라고 말하기를, 그래서 상대방이 서로 의지한 채 이곳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흑사자군의 전우이기 를 애타게 바랐다. 그의 희망은 성취되지 못했다. 상대는 칼을 내뻗 어왔다. 최초의 5초가 지났을 때 틸러는 상대방이 상당히 거칠다고 평가했 다. 그리고 틸러는 자신 또한 상대방에게 그런 인상을 주기 위해 애 썼다. 그 과정에서 틸러는 무수한 인파가 최고의 인기인이 된 그와 악수하려, 아니 옷깃이라도 만져보기 위해 사방에서 손을 뻗는 것 같 은 느낌을 받았다. 그 무수한 인파는 모두 죽음이다. 다채롭다는 점 은 반드시 인정해야 할 온갖 종류의 죽음들이 그에게 달려드는 것을 가까스로 피한 틸러는 대략 2분 후 상대방에게 칼끝을 겨눈 채 마주 서게 되었다. 상대는 코와 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격하게 헐떡 거리고 있었다. 좀 더 노력해야만 폭풍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비웃어주려던 틸러는 자신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고는 기가 좀 꺾였다. 어쨌거나 틸러는 자신이 받은 인상만큼 상대방에게 돌려주었던 모양 이다. 상대방은 이것저것 시험하듯 자세를 바꾸고 있었다. 질 수 없 다는 생각에 틸러는 평생 본 적도 없는 자세를 급조하여 이것저것 보 여주었다. 그것은 상대를 당황시킨 듯했다. 틸러는 오직 좀 쉬기 위 해 말을 걸었다. "어이, 난 부위인데, 넌 뭐냐?" "나 교위일세." "……죄송합니다. 교위님. 그런데 교위님이 왜 졸병도 없이 그러고 다니십니까?" "그러는 그 쪽은?" "교위님이 흘린 것이 조금 더 큰 것 같습니다만?" 틸러의 말은 나는 소대를 잃었지만 그쪽은 중대를 잃은 것 아니냐는 뜻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중대장이 아니었다. "너희들이 하는 말로 나는 말교위지. 부러진 칼에 찔려 날뛰는 말이 있다기에 찾으러 나섰다가 길을 잃었어." 늙수그레한 얼굴 때문에 노련해 보이는 상대방이 군마나 기타 부대 에서 이용하는 동물들의 병을 보살피는 수의장교라는 것을 알게 된 틸러는 깜짝 놀랐다. "무슨 말교위가 칼질을…… 실례했습니다. 수의장교께서 어떻게 그 렇게 훌륭한 검술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나는 무슨 부위가 내 칼솜씨로 상대할 정도로 검술이 형편없나 생 각했는데?" "다시 해봅시다!" 말교위는 피식 웃었다. "난 원래 말도둑이었지. 군마를 훔치다가 체포당하고서는 동물 잘 돌보는 것 때문에 처벌을 면했어. 칼은 말도둑질 할 때 익힌 것이 고." "그런 식으로는 장교까지 진급하기 어려울 텐데요." "동물들의 병을 나만큼 잘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 게 되면, 진급할 수 있다네. 부위." 틸러는 상대방이 대단한 인물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군마를 훔친 자 가 그 무지막지한 처벌을 모면한 것도 모자라 장교까지 진급했다면 그 솜씨를 짐작할 만하다. 순간 틸러는 결정을 내렸다. "교위님. 우리 서로를 못 본 것으로 하면 어떨까요?" "그냥 헤어지자는 말인가?" "교위님은 이 따위 전쟁보다 더 중한 일을 하라는 소명을 받으신 분 같군요. 교위님은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저는 세상의 동물들에게 큰 죄를 짓는 짓일지도 모르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틸러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자괴감의 근질거림을 느꼈지만 말교위 는 반갑게 말했다. "그래도 되겠나?" 틸러는 놀랐다. "저, 교위님. 화내지 않으십니까?" "무슨 말인가? 살려준다는데 화라니?" "교위님은 많은 동물들을 살리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수의 학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위대한 책을 쓰실지도 모르지요. 어쨌거나 교위님에겐 사람이 저지르는 이 어리석은 일이 모두 끝난 다음 동물 들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 다. 하지만 제게는 교위님처럼 수많은 동물과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능력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연히 살아야 하는 교위님과 마 찬가지로 저도 살자고 말하는데, 화를 내셔야지요?" 말교위는 빙긋 웃었다. "귀관은 적의 특수장교를 해치울 기회를 포기했잖나. 교위 대 부위 라면 내 쪽이 손해야. 자네는 잃어봐야 부위 한 명이지만 성공하면 교위를 잡을 수 있다고 덤벼들 수 있다는 거지. 안 싸워도 된다면 당 연히 내가 감사해야겠군." "하지만 교위님은……" "그만두게. 사람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말도둑이었던 시절 나는 잘해야 교수대에 매달리는 것 정도가 내 미래일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나는 지금, 비록 말교위이긴 하지만 장교일세. 능력이 없다 고? 무슨 그런 소리를 하나. 전투의 주인 노릇을 하다가 좀 이상한 관념이 박혔나 보군." 말교위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가 그것이 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칼을 꽂아넣기 위해 칼집이 어디 있는지 더듬느라 고 개를 돌렸다. "부위답게 전투를 지배하는 것은 좋지만, 부위답게 전투에서 죽진 말게. 군인이 이런 말 하는 거 좀 웃기지만 전투에서 죽어야 할 사람 은 아무도 없……" 옆을 돌아보던 말교위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틸러는 찔끔하여 칼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 후에야 틸러는 말교위가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만약 제삼자가 있다면 그들은 점잖게 헤어지거나 하기 어렵다. 하지 만 말교위와 같은 방향을 바라본 틸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 다. 있을 리 없는 것이 그곳에 있었다. 틸러는 눈을 비비고 싶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곁에 서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입을 열었다. "……?" 틸러는 옆에 있는 말교위도 자기처럼 소름이 확 돋았을지 궁금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는 기가 막히 게 아름다웠다. 조금 전 틸러를 낙오병으로 만들어버린 시모그라쥬군 여군의 목소리는 그 목소리에 비하면, 좀 과장 섞어 말해서 연초와 말술에 찌든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틸러는 더 이상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없었다. 낮도 아닌 밤에 한계선 북부에 서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나가 남자 였다. 나가 남자는 손에 사이커로 짐작되는 칼을 느슨하게 든 채 두 사람 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두터워 보였지만 아무리 두텁다고 해도 나가들을 보호하기는 어렵다. 틸러는 그것이 체온을 보호하기보다는 방어를 위해 입고 있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 각이 옳았다. 그것은 질긴 가죽과 금속으로 만들어진 갑옷이었다. 비 록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갑옷이긴 하지만. 틸러와 말교위 모두 경악 때문에 침묵하자 그 나가는 뭐가 잘못되었 는지 알겠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조금 알아듣기 쉬웠다. "어느 쪽이 팔디곤의 사람입니까?" 틸러는 자신의 안팎을 뒤집어놓는 것 같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말 교위가 학문적 관심을 드러내었다. "이상하군. 어떻게 나가가 이런 추운 밤에? 당신 정말 나가입니까?" 나가는 마치 말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주의 깊게 말교위의 말을 듣 다가 말했다. "어느 쪽이 팔디곤의 사람입니까?" 최초의 충격에서 조금 벗어난 틸러는 그 나가가 말을 굉장히 힘들게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말교위가 말했다. "어느 쪽이 시모그라쥬군이냐고 묻는 거라면, 납니다." 잔뜩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말교위의 말을 듣던 나가는 그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벼락이 되었다. 틸러가 느낀 것은 지독한 속도감뿐이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틸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당황한 틸러가 자기 보호 본능으로 몸을 움츠렸을 때 뭔가 무거운 것 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그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본 틸러는 그곳에서 말교위의 얼굴을 발견했다. 말교위는 땅바닥에서 의문 가득한 얼굴로 틸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말교위는 그 의 곁에 똑바로 서 있었다. 틸러는 그 불합리에 당황했다. 그가 가까스로 사태를 이해한 것은 머리를 잃은 말교위의 몸이 스르르 기울었을 때였다. 그 몸은 잘려서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따라가듯 휘청거리다가 쿵 쓰러졌다. 제멋대로 우쭐거리던 팔이 하필이면 그 머리를 때렸다. 바닥에 먼저 떨어져 있 던 머리는 자신의 팔에 맞아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모욕적이다. 틸러는 턱을 부들부들 떨며 그 모습을 보았다.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을 틸러는 두 손을 말교위의 몸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 손은 허 공을 긁을 뿐이었다. 틸러는 자기 손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백야가, 그의 혈관엔 빙하가 흘렀다. 틸러는 자신의 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결국 두 팔로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틸러는 갑자기 두통과 같은 분노를 느꼈다. 그는 상체를 확 돌리며 나가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은 말도둑이었어. 그런데 장교들이 그에게 소중한 군마를 맡 겼어. 그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가진 사람이야. 그는 지금까지 그랬 던 것처럼 앞으로 많은 아픈 말들을 치료할 거야. 기병들과 함께 두 려움 없이 전장을 달리다가 도살되어 고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한 군마들에게 목숨과 함께 명예를 돌려주었을 거야. 그는 전쟁 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 도대체 왜 이 사람이 죽어야 하지? 자기 가 죽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말해봐! 이유가 뭐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납득하지 않겠어! 하려는 말들이 모조리 뒤엉켜버려 틸러는 말을 제대로 꺼낼 수 없었 다. 하지만 그가 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해도 틸러는 여전히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말교위의 목을 베어버린 나가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거기에는 틸러와 목이 떨어진 시체밖에 없었다. 틸러는 무릎을 두 주먹으로 짚은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이 서서 히 일그러졌다. 틸러는 눈을 꼭 감은 채 얼굴 전체를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꽉 깨문 위아랫니 사이에서 미약한 흐느낌이 띄엄띄 엄 흘러나왔다. 새벽이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틸러 달비는 어느 새 자기도 모르게 걷고 있었다. 사물은 파르스름 한 박명 속에 떠다녔다. 비명과 거친 달음박질 소리, 땅이 몸을 뒤채 는 소리들이 그에게 촉촉하게 떨어졌다. 틸러는 꿈을 꾸듯 새벽을 방 랑했다. 그는 틸러 달비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찾지 못해도 크게 상 관없다고 생각했다. 틸러 달비를 찾아 방랑하던 틸러는 틸러 대신 한 여자 병사와 만났 다. 그녀는 말교위의 잘린 머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틸러는 당신도 말교위의 죽음을 슬퍼하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틸러의 말은 그녀 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틸러는 그 머리가 말교위의 머리가 아 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떤 남자의 머리이긴 했다. 하지만 말교위는 아니었다. "나가가…… 갑자기 나타나 오빠를…… 팔리탐의 사람이라고 목 을…… 오빠를…… 나가가…… 왜 그래야 하지요……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에요…… 이해할 수 없어요…… 나가 가 갑자기…… 오빠를…… 적인데 서로 안 싸워서 그랬을까요…… 하 지만 오빤데…… 내 오빤데……" 틸러는 그녀를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자의 팔을 건드렸 다. 하지만 여자는 그의 손에 반응하지 않았다. 틸러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서 끌어올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 치 시체의 팔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억지로 끌어올리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무반응은 틸러로 하여금 다시 팔을 놓게 했다. 그녀의 팔은 용수철이 되감기듯 오라버니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틸러는 두 남매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남매를 내버려두 고 다시 틸러를 찾아나섰다. 틸러는 어떤 시체를 만났다. 시체임이 분명하다. 가슴에 많은 칼자 국이 나 있는데다 부러진 창도 꽂혀 있으니. 하지만 그것은 꼿꼿하게 서있었다. 틸러는 똑바로 서있는 시체를 관찰하다가 그 시체가 좀 특 이한 과정을 통해 현재의 자격을 획득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목에 걸 고 있던 가죽끈으로 만든 소박한 목걸이가 나무에 걸리는 바람에 목 이 졸려 죽었다. 그는 서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 었다. 가슴과 배에 난 무수한 상처는 피가 별로 흐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죽은 후에 생긴 것이다. 어둠 속에 꼿꼿하게 서있는 그를 본 사람들이 그가 죽었음을 알지 못하고 놀라서 칼을 찌른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알고는 어이 없어 하거나 투덜 거리며 떠난 모양이다. 그 중에는 부러진 창에 대해 화를 내며 떠난 자도 있었다. 그렇게 그는, 누구도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지 나가던 사람이 한 번씩 찔러보는 시체가 되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질긴 목걸이에 의해.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혼란 때문에 하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틸러 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는 목걸이의 가죽끈을 베었다. 가죽끈이 끊어 지며 시체는 풀썩 주저앉았다가 쓰러졌다. 땅에 쓰러진 시체를 바라 보던 틸러는 허리를 굽혀 그의 눈을 감겨주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틸러 달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틸러 달비를 찾아 헤매던 틸러는 틸러 달비의 소대를 만났다. 소대원들은 크게 기뻐하고 있었고 틸러의 등장은 그들의 기쁨을 주 체할 수 없는 광기로 바꿔놓는 것 같았다. 틸러는 그저 그들이 웃고 떠들고 농담하기에 함께 웃고 떠들고 농담했다. 틸러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사죄를 말하는 수전사들에게 걸죽한 욕을 퍼붓고 엄살을 부리는 그들을 보며 다시 웃었다. 그러면서도 틸러는 마음 속으로 애타게 틸러를 찾았다. 어디에도 틸러를 찾을 수 없었 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단 말 이지. 왜 그래야 하지? 틸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틸러는 웃고 떠들고 농담했다. 틸러를 찾으며. "나가들." "나가였어." "그 밤에. 야, 믿어져?" "그랬어. 멋졌어!"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오셨단 말이지?" "예! 오셨습니다!" "대장군님을 도우러!" "역시!" 틸러는 뭐가 역시인지 알지 못했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역시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역시 그렇군." 시카트는 다가오던 새벽이 놀랄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지금 시카트처럼 공포에 빠진 얼굴로 바라본다면 새벽이 아 닌 다른 것이라도 놀랄 테지만 시카트는 새벽의 기분 같은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이저 또한 오던 새벽이 놀라 도로 돌아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 었다. 하지만 가장 절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소리 로베자였다. 그녀는 시카트와 아이저가 조금 전 포기한 일, 즉 이이타를 움직여보 려는 일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었다. 땅에 주저앉은 소리는 당장이라 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이이타의 다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공자님…… 공자님? 공자님!" 마치 참나무를 붙잡고 흔드는 것 같다. 소리의 절박한 움직임에도 이이타의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은 이이 타의 몸이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이이타는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았 다. 소리는 깜빡 정신을 잃으려 했지만 다시 머리를 내젓고는 이이타 의 다리를 흔들었다. 아이저가 갑자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소리의 허리를 붙잡아 끌 어올렸다. 소리는 버둥거렸지만 다리에 힘이 별로 없었다. 아이저는 소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이이타에게서 떼놓았다. 그는 허물어지려 는 소리를 부여잡은 채 말했다. "그만하거라!" "각하, 변경백 각하! 공자님을 구해야 해요. 공자님을……" "저 애는 괜찮다." 아이저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 아들을 움직 이려던 여러 시도를 하던 중 아이저는 이이타에게 맥박도, 호흡도 없 다는 것을 확인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이이타는 서서 죽은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쓰러지지 않았고 쓰러뜨릴 수도 없었다. 아이저와 시 카트가 모두 매달려 밀거나 끌어보았지만 이이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저가 아들의 무사함을 말하는 것은 그 부동(不動) 때문이다. 역 설적이게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 어려웠던 소리는 그런 사고 같은 것은 할 수 없었다. 소리는 '괜찮다'는 아이저의 말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소 리는 축 늘어지듯 몸에 힘을 빼고는 고개를 돌려 아이저를 올려다보 았다. 아이저는 그녀를 천천히 바닥에 앉히고는 쓰러지지 않도록 어 깨를 붙잡았다.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냥 기다리거라." 아이저는 소리의 어깨에서 손을 떼려 했지만 소리는 황급히 그 손을 부여잡았다. 소리는 아이저의 오른손을 꼭 쥔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기다려요? 기다려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아이저는 소리에게 붙잡힌 손을 낭패한 듯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 다. 그는 붙잡히지 않은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저 하늘치를 봐라. 멈춰있지?" 시카트는 깜짝 놀랐다. 지금껏 이이타에게 신경을 쓰느라 그는 하늘 치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늘치를 망각하고 있던 것은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이저가 발견한 것을 미처 깨 닫지 못했다. 위쪽을 올려다본 두 사람은 하늘치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을 깨달았다. 하늘을 화폭 삼아 어떤 화가가 그려둔 그림처럼 하늘치 는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멈춰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이타의 현재 상태와 같았다.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다시 아 이저를 바라보았다. 아이저가 반신반의하는 투로 말했다. "이이타가 움직이지 않는 것과 저 하늘치가 움직이지 않는 것 사이 엔 분명히 연관성이 있을 거다. 이런 우연이 일어날 리는 없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이이타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저 하늘치를 움 직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솔직히 아무런 근거 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 이이타와 하늘치는 하나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카트와 내가 힘을 합친다 해서 하늘치를 밀거나 끌 수는 없지. 물론 소리 네가 흔든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 시카트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서 형이 안 움직이는 겁니까?" "그냥 추측일 뿐이야. 다른 추측은 안 떠오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이타는 하늘치를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신도 움직일 수 있게 되겠지." 시카트나 소리 또한 다른 추측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저의 추측을 받아들였다. 아이저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이이타는 주변의 상황을 보고 들었으며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 만 그 인지에 대해 그가 느끼는 감정은 좀 의외의 것이었다. 아버지 와 동생, 그리고 소리가 알았다면 몹시 실망했겠지만 이이타는 그들 을 멸시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니, 멸시는 지나치게 적극적인 표현이다. 귀찮게 구는 모기를 손바닥으로 때려잡을 때 사람은 모기 에게 멸시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이이타가 연인과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은 모기를 때려잡을 때 사람이 느끼는 감정보다 미약했다. 이이 타는 아버지와 동생과 소리가 있다는 것, 그들이 놀라며 울며 그를 깨우려 애쓰는 것을 알았지만 거기에 대해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못 했다. 왜냐 하면 그는 인간이 그의 풍경 어느 곳을 기어가는 개미를 대하는 정도의 감정으로 인간을 볼 수 있는 존재, 하늘치가 되어 있 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이타-하늘치다. 소리 로베자, 아이저 규리하, 시카트 규리하 등은 이이타-하늘치에게 풍경일 뿐이다. 숲과 들판과 산맥과 마찬가지로. 그 세사람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찰라의 번득임일 뿐이다. 그는 태고부터 지금껏 하늘을 날아다녔고 그의 시 간은 천년기로 헤아려진다. 다행히도 이이타-하늘치에게는 산이나 바 위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인내심이 있었다. 약속이 달성될 때 까지 그는 언제까지나…… '약속?' 그들을 만나는…… '그들?' 순간 이이타-하늘치는 잠깐 동안 이이타를 느꼈다. 이이타는 아이저의 굳은 얼굴, 시카트의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 그 리고 소리의 비탄에 잠긴 얼굴을 보며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이 이타-하늘치가 기다려왔던 것이 무엇일까? 이이타-하늘치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이타-하늘치는 그것이 아버지 가 자꾸 숨기는 떨리는 손끝과 관련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아버지?' 그리고 이이타-하늘치는 동생의 터질 것 같은 긴장과 자신의 약속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느꼈다. '동생? 동생이 뭐지?' 그 리고 이이타-하늘치는 아내의 눈물이 거대한 거울로 바뀌어 자신의 약속을 비춰주는 것을 보았다. '아내라고?' 나는 이이타-하늘치. 나는 하늘치-이이타. 나는 하늘치-하늘치. 나는 이이타-이이타. "나는 이이타 규리하다." 형의 목소리에 놀란 시카트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주저앉아 있던 소리가 마치 널뛰기를 하듯 솟구치는 모습은 아이저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이이타에게 달려가려는 소리를 붙잡을 정도의 침착성은 유지했다. 몸부림치는 소리를 향해 아이저가 말했 다. "가만, 가만 있어! 이이타에게 맡겨둬! ……그런데 그거 뭐냐?" 소리는 그것이 뭔지는 나도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몸부림쳤지만 곧 아이저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비수를 꺼내어들어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리는 기겁하고는 그것을 땅에 팽개쳤다. "저, 저, 절대로 찌, 찌, 찌를 생각은 아, 아, 아……" "그래. 알았다. 가만히 있기만 해다오." 아이저는 소리의 두 어깨를 누르듯이 땅에 앉혔다. 아이저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 그리고 자신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소리의 어깨 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 소리는 계속 뛰쳐나갈 듯 아이저의 손바닥 아래에서 꿈틀거리며 이이타를 바라보았다. 아이저의 판단은 별로 훌륭한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소리를 보내주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이이타에게는 자극이 필요했다. 그와 상관 없이 부는 바람이나 그와 상관 없이 내리쬐는 햇빛과 달리 그라 는 존재 자체를 향해 다가오는 자극.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도 그 때 문이었다. 만약 소리가 달려와 그를 안았다면 이이타는 그 자극이 무 엇을 향하는 것인지를 통해 자신을 더 빨리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이름도 충분한 자극이었다. 그 이름으로 불렀을 때 대답하 는 자가 있다. 조금 느리지만 분명하게 이이타는 자신을 찾아내어 하늘치와 분리시 켰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서서히 깨달았다. '형. 하늘치는 정말 물고기처럼 보인다고.' 시카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시카트는 낚싯대를 상상해보겠다고 말했다.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다른 것을 상상하기로 한 이이타는 하늘치를 보며 자신이 거꾸로 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상상했다. 모든 것을 뒤집어서 보자. 땅은 사실은 수면이다. 그들 주위의 공기 는 물이다. 검은 밤하늘은 검은 호수다. 하늘치는 배를 수면으로 향 한 채 헤엄친다는 점이 독특한 물고기다. 만약 물이 위로, 그러니까 땅으로 흐른다면 그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땅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이타는 그렇게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하지만 이이타가 간 과한 것은 그 자신도 그 물 속에서 발을 수면으로 향한 채 거꾸로 서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상상한 거대한 물은 사실은 하늘치 와 자신을 한꺼번에 둘러싸고 있는 공기였으며 둘은 동시에 그것에 붙잡혔다. 그는 지나치게 큰 것을 상상했다. 이이타는 거기까지 설명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동화(同化)는 왜 일어난 걸까?' 그와 하늘치는 하나였다. 단지 같은 것에 붙잡혔을 뿐인데 왜 하나 가 된 것인지 이이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수초와 물고기와 소금쟁이 는 같은 물에 얽매어 있고 만약 물이 움직인다면 그것들 모두도 움직 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셋이 하나일 수는 없다. 이이타는 하늘 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하늘치는 아무런 대답도 보내지 않았 다. '거기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하자. 우선 중요한 것은……' 그가 하늘치를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이타는 자신이 생각한 뒤집힌 호수에서 그 자신을 배제시켰다. 그 리고 그 호수 속의 물결을 움직여보았다. 이이타는 그것이 환상계단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좀 우스꽝스러운 비유겠지만 이이타는 자신이 아주 커다란 추두부를 상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환상계단은 두부고 하늘치는 두부 속에 파고든 미꾸라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이타는 그 두부를 움직여보았다. 그러자 그것은 이이타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이이타는 그것을 몇 번 더 움직여보고는 쉽지는 않지만 자신이 그것 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이타는 하늘치를 내버려두었다. 그 가 놔둔 곳에 그대로 떠있는 하늘치를 바라보던 이이타는 고개를 내 렸다. 그는 어둠 속 저편에 서있는 아이저와 시카트, 그리고 아이저 의 손에 붙잡혀 있는 소리를 보았다. 이이타는 천천히 웃었다. "돌아왔습니다." 아이저는 대답하지 못했다. 순간 소리가 마치 네발 짐승이 된 양 바 닥을 불불 기어 아이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어가던 소리는 다시 두발 짐승이 되어 이이타에게 뛰어들었다. "공자님!" 소리는 정신없이 이이타의 얼굴과 목, 가슴을 더듬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이이타는 그녀가 만지도록 내버려두었다. 조금 후 소리는 헐떡이며 다시 말했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이이타는 대답 대신 팔을 뻗어 소리를 살짝 안았다. 어리둥절해 하 던 소리는 갑자기 기쁜 듯, 서러운 듯 울음을 왈칵 터뜨렸다. 아이저와 시카트가 황급히 다가왔지만 소리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 다. 그녀의 울음이 어찌나 거센지 아이저와 시카트는 말도 제대로 꺼 낼 수 없었다. 시카트는 손으로 하늘치를 가리켰다가 이이타를 가리 키며 묻는 표정을 지었고 그러자 이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들은 서로의 문답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저는 하늘치에 대해서는 갑자기 관심을 잃은 듯 뚫어질 듯한 눈으로 아들의 모습만을 살폈다. 이이타가 아버지를 향 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아이저는 작게 한숨을 내쉬 었다. 이이타는 소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소리. 잠깐만. 아버님이랑 동생에게 말 좀 하고 싶은데." 울음이 지나쳐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던 소리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황급히 이이타의 품을 떠났다. 그녀는 사과 하듯 아이저와 시카트에게 머리를 여러 차례 조아렸다. 아이저가 말 했다. "이이타. 확실히 괜찮은 거냐?" "괜찮습니다. 아버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건 설명하자면 좀 길고, 몇몇 부분은 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대답해드리기에 앞서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이저는 그게 뭐냐는 표정으로 이이타를 보다가 갑자기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시카트와 소리도 놀란 얼굴을 하늘로 향하자 이이타는 나직하게 말했다. "왼쪽으로 움직여보겠습니다." 이이타가 말한 대로 되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보면 조금 기묘했다. 하늘치는 사람이나 동물이 그렇듯 둥글게 선회하는 대신 머리와 꼬리 의 방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옆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이이타 의 말처럼 그것이 움직인 방향은 분명히 왼쪽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거대한 물체가 스르륵 움직이는 모습은 우습기는커녕 압도적이었다. "내려오게 하겠습니다." 하늘치가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은 우습지도 않을 뿐더러 압박감은 더욱 컸다. 그것이 조금씩, 그렇지만 확실히 커지는 모습은 아이저와 시카트, 소리를 겁나게 했다. 그것을 움직이는 이이타 자신도 조금 두려워졌기 때문에 그는 약간만 내려오게 한 다음 하늘치를 곧 멈췄 다.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던 하늘치가 멈춰섰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 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일 수 있구나." "예.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시카트가 환호를 질렀다. 그는 형에게 와락 달려들어 형을 높이 끌 어안고는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요란하게 쓰러지고 말 았다. 소리가 작은 비명을 질렀지만 이이타와 시카트는 모두 껄껄 웃 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저가 이이타를 끌어안았다. 잠시 네 사람 은 환희를 나누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었다. 마침내 더 이상 기뻐할 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네 사람은 약속이 나 한 듯 땅바닥에 앉았다. 그들은 말할 수 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하 늘치를 바라보았다. 그 때 이이타가 갑자기 소리를 바라보았다. 연인 을 가만히 바라보는 아들을 보며 아이저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 후 이이타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웃고 고함치느라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저……" 이이타는 말을 못 이은 채 우물쭈물했다. 아이저는 웃고 싶었다. 약 간 공허하면서 체념하는 듯한 잔잔한 웃음. 하지만 아이저는 웃지 않 았다. 그는 다만 약간의 미소만 지은 채 말했다. "저 하늘치가 내 며느리에게 주는 예물이라는 거냐?" 이이타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기쁨을 억누른 채 겸손하게 말했다. "물론 저 하늘치는 아버님을 위해 봉사할 겁니다. 저는 단지 상징적 인 의미로……" "소리라고 부르자." "예?" "저 하늘치를 소리라고 부르자. 그 주인의 이름을 따서." 이이타는 더 이상 기쁨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시카트를 바 라보았고 시카트는 좋을 대로 하라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이타는 소리를 바라보았다. 소리는 지금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이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 다. "소리. 아버님의 말씀 들었지? 감사해야지." 소리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곤란하게도 그녀는 왁 울음을 터뜨 렸다. 이이타는 크게 당황했지만 아이저는 그런 울음이 뭔지 정도는 이해할 만한 연륜이 있었다. 그는 웃으며 일어났다. "소리는 움직이지 않을 테지?" "예?" "저 하늘치 말이다." "아아, 예. 가만히 있을 겁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환상계단을 만들긴 쉽겠지. 시카트. 따라오거 라. 올라가봐야겠다." 시카트는 그제서야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에 놀라며 벌떡 일어 났다. 그는 어서 하늘치에 올라가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아이저는 이이타에게 말했다. "너는 천천히 올라오거라. 그 애가 좀 진정되면." 이이타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에게 다가가는 이이 타를 보며 아이저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아이저는 하늘치를 보며 천 천히 환상계단을 상상했다. 아침이 다가왔을 때 엔거 평원에 갑자기 생긴 천장 같은 하늘치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압박감을, 그리고 폐소공포증을 느꼈다. 그 폐소 공포증은 완전히 합리적인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하늘치의 배는 인 간이 힘껏 돌멩이를 던져도 닿기 어려운 높은 곳에 있었고 그곳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당장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 았다. 하지만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역 시 불안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태양은, 낮은 위치에 있었던 아침 의 잠깐 동안만 하늘치의 배와 땅 사이에 빛을 쏘아보내었지만 곧 하 늘치의 모습에 가려 사라졌다. 그림자 속에 남겨진 그들은 낮이 찾아 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엔거 평원의 가운뎃부분은 폭풍우 가 칠 때 정도의 밝기도 없었다. 엘시가 서있는 곳은 그보다는 밝았다. 그는 하늘치의 왼쪽 나라미 가까운 곳에 서있었다. 덕분에 그와 그 주변에 있던 자들은 하늘도 조금 볼 수 있었다. 하늘은 연마가 잘 된 칼처럼 섬뜩하게 푸르렀다. 그리고 평원에서는 볼 수 없는 태양도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그나마 곧 하늘치의 등 뒤로 사라질 것처럼 보였지만. 엘시는 어젯밤 본 것이 환상이 아닌가 의심했다. 어젯밤 하늘치가 나타나고 얼마 후 갑자기 그의 곁에 나타나서 그가 서있어야 할 장소 를 알려준 것이 정말 나가였을까? 만약 그 혼자 그것을 보았다면 엘 시는 나가가 절대로 이곳에 있을 리 없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경험을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가를 본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이레 가, 론솔피가, 그에게 항의하러 와 있던 그을린발이, 그리고 엘시의 주변에 있던 흑사자군의 수뇌부 전부가 그 나가를 보았고 그녀의 목 소리를 들었다. 도저히 개인적 환상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을 만큼 많 은 증인이 있었다. 하지만 나가는 한계선 북부에 올 수 없다.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내놓은 것은 나가에게 익숙한 대장군 의 몸종이었다. "어쩌면 소드락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틀림없이 소드락이었을 겁니 다." 이레는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설명했다. "잘 아시겠지만 나가들은 소드락을 복용하면 17분 동안은, 설령 라 호친에 있다 해도 한계선 남쪽의 가장 뜨거운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계명성으로 들어온 보고를 종합해보면 엔거 평 원에 나타나 시모그라쥬군을 살해한 나가들은 모두 짧은 시간 동안만 활동한 다음 사라졌습니다. 몇몇 병사들은 나가들이 허공을 뛰어올라 가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보고했습니다. 그 나가들은 저 정체 모를 하 늘치의 등 위에 있다가 소드락을 먹고 내려와 싸운 다음 다시 올라간 겁니다. 지금쯤은 저 위에서 다시 잠들어 있겠지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그 나가들이 누구지? 그들이 도대체 왜 하늘치 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시모그라쥬군을 제거한 거지?" "그들을 다루는, 나가가 아닌 자가 있을 겁니다." "뭐라고?" 이레는 의혹의 눈으로 하늘치를 올려다보며 계속 말했다. "저 하늘치가 그 나가들을 태우고 엔거 평원에 도달했을 때 나가들 은 모두 가사상태였을 겁니다. 누군가는 그들을 깨우고 억지로 소드 락을 먹인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 일을 했다면 그 사람은 나가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가들은 그 나가가 아닌 사람을 무조건 따르 고 있을 겁니다." "어째서지?" "소드락의 효과 시간은 겨우 17분입니다. 자기 눈으로 상황을 관찰 하고 해야 할 일을 결정하려면 17분은 너무 짧습니다. 나가들이 깨어 난 다음 시모그라쥬군을 죽여야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 런 결정을 내린 사람은 나가들을 깨운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가들 은 그 명령을 따랐습니다. 눈 뜨자마자 살해명령을 받았는데 스스로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그 명령을 수행한 겁니다. 그러니 나 가들은 그 사람을 무조건 따르고 있는 겁니다." 이레는 두려움에 빠진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주인님이 만나실 사람은 어젯밤 나타나서 시모그라쥬군을 도륙한 그 신비한 나가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다루는 더욱 신비한 어 떤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 은 이성적인 나가들로 하여금 자기 말을 무조건 따르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저 하늘치를 조종할 수도…… 아니! 틀림없이 조종할 수 있습니다! 저런 낮은 높이로 떠있는 하늘치는 없 습니다. 분명히 조종을 받고 있는 겁니다." 엘시의 얼굴은 다시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 게 굳었다. 근처에서 대장군의 몸종이 꺼내놓는 설명을 엿듣던 사람 들도 충격과 두려움으로 긴장했다. 거기에는 부관에게 평원의 일을 맡겨두고 직접 달려온 많은 군단장들이 있었다. 쵸지와 주테카와 론 솔피, 그리고 그을린발이 있었다. 그들만으로도 좁은 언덕 정상은 포 화상태에 가까웠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엘시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하늘을 가리며 떠있 는 하늘치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알 수 없었기 에 그 의견은 묵살당했다. 아니, 하늘치가 아니라도 여전히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젯밤 암흑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가들은 순식 간에 시모그라쥬군을 학살해버렸다. 아마도 시모그라쥬군은 흑사자군 에게 시달리느라 머리 위의 하늘치로부터 내려온 나가들에 대해 적절 히 반응할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시모그라쥬군들이 다른 종족들 도 아닌 나가들에 대한 대응법을 위주로 훈련을 받아왔던 병사들이라 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전과였다. 짧은 시간 나타 났다가 사라진 그 나가들에게는 분명히 상식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그것에 대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처음 움직임을 발견한 것은 주테카였다. "뭐가 내려오는데? 레콘이잖아?" 주테카의 말처럼 하늘치의 가슴 지느러미에서 나타난 것은 두 명의 레콘이었다. 그들은 약 20미터 정도의 간격을 둔 채 환상계단을 이용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나란히 걸어내려왔다. 그들 뒤편으로 다시 두 명의 레콘이 나타났다. 그리고 또 두 명의 레 콘이. 언덕 위에 있던 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두 줄로 걸어 내려오는 많은 수의 레콘임을 알게 되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그들의 모습에 놀랐다. 환상계단은 상상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므로 걸어내려오는 레콘들은 모두 자신만의 계단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콘들은 하나의 계단을 따라 걸어내려오는 사람들처럼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걸어내려왔다. 백 화각에서 일하던 염사들이나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상상의 일치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장면이었다. 가장 앞쪽에 걸어내려온 두 레콘이 땅에 발을 디뎠다. 그러자 걸어 내려오던 레콘들이 동시에 멈춰섰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돌아섰다. 상당히 이해하기 쉬운 모습이었다. 그 레콘들은 보이지 않는 계단에 정렬하여 그들 가운데로 걸어내려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마치 사열을 받는 모습 같았다. 이레는 그렇다면 저 레콘들도 기다리는 자 가 아닌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 때 이레는 주인의 경악한 얼굴을 발 견했다. 엘시는 보이지 않는 계단에 정렬한 레콘들 중 하나를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동공은 크게 확장되어 있었고 말고삐를 쥔 손 은 조금 떨렸다. 깜짝 놀란 이레는 엘시가 보고 있는 레콘을 보았지 만 그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레는 엘시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아시는 사람입니까?" "트리어?" "예?" 엘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건 트리어다. 예비역 수교위였지. 보훈국장 하고 있을 때 저 자 의 전역금을 그 아내들에게 전달하는 일로 만난 적이 있다." "왜 아내들에게 전달하셨습니까?" "저 자가 센시엣 특수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거든." "예? 절망도요?" "거기에 있어야 하는데 왜 저기에 있는 거지? 그렇다면 저 레콘들 전부 다?" 그랬다. 그곳에 있는 장교들은 센시엣 특수수용소에 들어가 있어야 할 레콘들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 레콘을 체포 하는 일은 당연히 군의 일이었기에 제국군 장교들은 절망도로 보낸 레콘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이름을 확인하는 속삭임이 빠르게 오가 는 것을 보며 이레는 관자놀이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가들이 한계선 북부 에 나타나더니 이제는 절망도에 있어야 할 레콘들이 나타났다. 이레 는 이 다음에 나타날 것이 누구라도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열한 레콘들 사이에서 두 사람이 나타나 걸어내려올 때 이 레는 충격을 가누기 어려웠다. 쵸지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멘?" 도열한 레콘들 사이에서 나타난 두 사람 중 한 명은 검은 레콘 지멘 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함께 걷고 있었다. 엘시는 믿고 싶지 않다는 투로 신음했다. "스카리……" 지멘과 스카리 빌파가 도열한 레콘들 사이로 허공을 걸어내려왔다. 도무지 연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인물들이 마치 동료나 되 는 것처럼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은 언덕 위에 있던 사람들을 극한 혼란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일어난 소동은 곧 사그라들었다. 그들은 침묵한 채 두 사람의 착지를 기다렸다. 잠시 후 지멘과 스카리 빌파가 땅에 발을 딛었다. 쵸지와 론솔피, 주테카는 그것이 정말 지멘인지 가서 만져보고 싶다는 듯이 움찔거렸 다. 그리고 엘시의 눈길은 스카리에게로 향했다. 스카리 또한 언덕 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무시한 채 엘시만을 바라보았다. 하지 만 스카리도, 그리고 지멘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참을 수 없었 던 엘시가 말을 몰아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려 하자 지멘이 갑자기 손 을 들어올렸다. 그는 손바닥을 엘시에게로 향했다. 그 뜻은 간단했 다. 오지 마라. 엘시는 말을 멈췄다. 엘시를 따라 황급히 달려온 이 레는 엘시의 말고삐를 붙잡고 섰다. 스카리가 천천히 말했다. "에더리. 오래간만이군." "발케네공.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이 절망도의 레콘들을 탈출시킨 겁니까?" "아냐. 나는 한낱 종복일 뿐이지." "예?" 엘시의 '예?'에는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는 의문과 당신이 그런 말 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경악이 모두 담겨 있었다. 죽을 때까 지 길이 들 수 없을 듯한 남자인 스카리 빌파가 태연하게 자신이 누 군가의 종복이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엘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 다. 스카리는 엘시의 경악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만 그는 자신의 표현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말에서 내려." 엘시는 뚫어지게 스카리를 바라보다가 빠른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 다. 스카리는 말에 올라 있는 다른 장교들을 돌아보았고 그들은 멈칫 거리며 역시 말에서 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하마하자 스카리는 다시 엘시에게 말했다. "무릎을 꿇어." 엘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에게?" "아냐. 암살의 주인에게." 만약 하늘치가 주인에게 떨어진다면 두 팔로 막아내겠다는 듯이 단 호한 자세로 엘시 곁에 서있던 이레는 스카리의 말에 깜짝 놀랐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몸종임에도 불구하고 이레는 당황하여 말했다. "암살공은 죽었다고……" 스카리는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폭소를 터뜨렸 다. 그는 자신의 웃음을 억누르려 애썼고 그래서 그 모습은 꽤 이상 한 것이 되었다. 곁에 서있던 지멘은 그런 스카리의 모습에 아무 반 응도 보이지 않았다. 스카리가 겨우 자제력을 회복했을 때 허공에 도 열해 있던 레콘들이 갑자기 부리를 열어 외쳤다. "이-라-세-오-날-!" 레콘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았지만 이레는 놀란 말이 주인에게 위해를 끼칠까 두려워 말을 부여잡았다. 다행히 지난 밤 동안 많은 계명성을 들은 말은 다루기 힘들 만큼 놀라지는 않았 다. 엘시가 이레를 도와주었기에 그들은 곧 말을 진정시켰다. 이레는 귀쪽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이라…… 뭐?" "이라세오날." 엘시의 말에 이레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꾸벅였다. 하지만 엘시는 이레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 다시 말 했다. "이라세오날……" "가주님?" 이레의 실언이 갑자기 엘시의 주의를 끌어다. 엘시는 나가를 보는 기분으로 이레를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그가 인간임을 깨달았다. 엘시 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이름인지 알 것 같군." "이름? 그게 사람 이름입니까?" "이레. 너는 잘 알겠지. 이레. 나가에겐 진짜 이름과 널리 쓰이는 이름이 있지." 이레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나가들의 이름은 두 가지고 그 중 본 명은 가족들이나 신뢰하는 친구처럼 긴밀한 사람에게만 알려준다. 보 다 널리 쓰이는 별호는 본명과 다르고 그것은 보통 본명의 특정 음절 을 따서 만들어지기에 인간들의 애칭과 비슷하다. 하지만 공통점은 그것뿐, 그 외에는 차이가 더 많다. 이를 테면 나가들의 별호는 인간 의 애칭과 달리 그것만 듣고는 본명을 추측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나가들은 공식기록에도 본명을 쓰지 않기 때문에 기록의 측면에서 보 면 본명이 오히려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 쓰는 애칭처럼 보이기도 한 다는 점 등이 있다. 엘시가 말했다. "나는 치천제 폐하의 널리 쓰이는 이름을 알고 있다." 엘시의 몸종인 이레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레는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갑자기 흠칫 놀랐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이라세오날?" 이레는 엘시가 깨달은 것을 깨달았다. 놀란 몸종의 얼굴을 보던 엘 시는 눈을 들어 하늘치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한 사람이 있었다. 레콘들 사이에 서있기에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이. 하지만 공교롭게도 하늘치의 등뒤로 향하던 태양이 그 사람 의 뒤편에 있었다. 이레는 역광 때문에 그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보 기 어려웠다. 눈을 잔뜩 지푸려서 그 사람을 보려 애쓰던 이레에게 다시 엘시의 목소리가 들려옸다. "그래. 암살의 주인이시군." "주인님…… 어떻게? 암살공은 락토 빌파……" 엘시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커다란 피로를 느끼는 사람 처럼 같았다. "한계선 북부에 한 자루밖에 없는 칼이 있다. 그 칼은 원래 암살자 에게 주어지는 칼이고 암살이 끝나면 부러지지. 하지만 그 칼의 주인 이셨던 대호왕 폐하께서 암살을 포기하셨기에 그 칼은 부러지지 않았 다. 그리고 그 칼은 그 분께 넘어갔지. 그 분은 쉬크톨의 주인, 암살 의 주인이시다." 역광이 사라졌다. 검은 얼룩처럼 보이던 것이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 었다. 이레는 검은 흑사자 모피를 몸에 두른 채 내려오는 사람의 모 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정체 모를 나가들의 지휘자, 절망도에 있는 레콘들을 탈출시킨 자, 황제 사냥꾼 지멘과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를 종복으로 삼은 자였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한 자였 다. 도열한 레콘들이 다시 외쳤다. "이-라-세-오-날-의-부-활-을-경-배-하-라-!" "……그리고 나의 주인이시다." 엘시가 중얼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떤 의지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모습에 따라 이레는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언 덕 위에 있던 다른 자들도 하나 둘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으로 스카 리와 지멘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자신들의 주인이 부활했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향해 치천제 이라세 오날이 걸어내려왔다. =============================================================== 31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음. 추석 때문에 연재는 조금 늦어질 듯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32. 무거운 것과 무서운 것 - 1 사어를 해석하기 귀찮으면 뱀단지에 뱀을 많이 집어넣으 면 된다. 많은 뱀들은 상대방이 보내어오는 사어를 매끈하 게 표현해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뱀을 집어넣으면 관리가 더 귀찮아진다. 이것이 뱀부리미의 직업적 고민이다. 우리 의 도로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 당원이 있을 것이다. - 하르체 도빈의 <우리는 길을 준비한다> 서문 中. 팔리탐 지소어는 필요하다면 상당히 무례해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는 예의를 존중하는 사람이다. 대화 중인 상대방을 무시한 채 옛추억 에 빠져드는 그의 행동도 이 경우에는 무례가 아니다. 팔리탐은 자신의 살인사에 대해 생각했다. 팔리탐은 군인이고 그런 직업 때문에 몇 번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 다. 칠흑 같은 밤 국경에서 밀수범들과 난투가 벌어졌을 때 젊은 국 경수비대원이었던 팔리탐은 아마도 그의 첫 번째 살인을 경험했을 것 이다. 팔리탐이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칼에 찔린 상대가 물에 뛰어들었고 그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리탐은 그것을 자신의 첫 번째 살인이라고 생각했다. 죽었느냐, 죽지 않았느 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도 자신이 똑같은 행 동을 할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그것은 그의 첫 번째 살 인이다. 그렇다면 주레이 패커는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은 아홉 번째 사람이 된다. 그리고 죽이면서 팔리탐이 기쁨을 느꼈던 상대로는 첫 번째다. 팔리탐은 자신의 입이 주레이 패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패커라는 자는 팔리탐의 상관이었지. 그가 팔리탐의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고 팔리탐은 그것에 대해 상관 살해자가 되는 방 식으로 복수했지. 이건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지만 주레이 패커가 팔 리탐의 얼굴을 왜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 지. 이제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지." 팔리탐은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있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을린 얼굴과 거친 손등, 닳은 손톱 등에서는 야전 군인의 거칠고 투 박한 기상을 읽을 수 있지만 얼굴의 선이나 어릴 적에 익혔기에 평생 그 특징이 사라지지 않을 몸가짐 등에는 귀족다운 우아함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때문에 젊은 남자는 곧은 자세로 흔들림 없이 걷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불안정해 보였다. 그 남자, 엘시 에더리가 말했다. "왜 그는 당신의 얼굴을 그렇게 만든 건가?" 엘시 에더리의 뚜렷한 2인칭에도 불구하고 팔리탐의 입은 여전히 자 신을 3인칭으로 말했다. "그는 팔리탐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견딜 수 없게 만들려고 한 거지. 이런 얼굴로는 살 수 없을 테니 이 몸을 버리게 하려는 거였어." 팔리탐은 다시 가면을 쓰느라 잠시 지체했다. 그 동안 팔리탐의 말 에 대해 생각해본 엘시가 속삭였다. "군령자." "맞아. 팔리탐이 군령자라는 것을 알게 된 패커는 자기도 군령자가 되어 영원히 살겠다고 결심했지. 하지만 팔리탐은 그 요구를 거절했 어. 그는 젊었을 적 멋모르고 군령을 받아들인 실수를 후회하고 있었 고 영생엔 관심이 없었거든. 그래서 패커는 팔리탐이 이 몸을 버리고 자신에게 전령하게 하려고 팔리탐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지. 팔 리탐은 그 협박에 넘어가는 척한 다음, 전령하는 척하며 패커의 몸에 자신의 영이 아닌 자신의 단도를 집어넣었지." 팔리탐은 자신의 입이 말하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그 때의 기억을 떠 올렸다. 그가 유일하게 기쁨을 느꼈던 살인이다. 그리고 팔리탐은 다 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기쁠 거라 생각했다. 엘시는 팔리 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장죽을 바 라보았다.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위님." "반갑네. 칼리도백." 잠시 두 사람은 말 없이 걸었다. 조금 후 엘시는 슬픈 목소리로 말 했다. "그렇다면 태위님의 육체는 죽은 겁니까?" "지금 쯤은 물고기나 조개 같은 것들의 일부가 되어 있을 거야. 그 래. 맞아. 사직서 쓰고 보름 후 자결했어. 내 시체는 팔리탐에게 전 령한 다음 내가 직접 바다에 던졌지. 기분이 참 희한하더군." 엘시는 단순히 희한한 정도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겐 더 궁금한 질문이 있었다.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레이헬 라보 태위는 팔리탐의 입을 이용하여 싱긋 웃었다. "자네가 묻고 싶은 것은 영원히 살고 싶었냐는 것이겠지?" "아닙니다." "아니라고?" "아닙니다. 지금 들어본 바로 짐작하건대 태위님께서 깃들어 계시는 그 팔리탐 지소어라는 인물은 영생을 위한 전령은 거부하는 성격인 것 같군요. 그런데도 팔리탐 지소어가 태위님을 받아들였다면 태위님 께서는 영생에 관심이 없으셨던 겁니다. 아마 다른 이유에서 팔리탐 지소어에게 들어가셨겠지요." 레이헬 라보의 뒤편에서 팔리탐은 엘시의 말대로라고 생각했다. 그 리고 팔리탐은 레이헬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였다. 레이 헬은 입으로 장죽을 가져와 연기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맞아. 그건 내가 팔리탐과 한 두 가지 약속 중 첫 번째 것이지. 팔 리탐이 육체적 죽음에 도달하면 함께 죽음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 "두 번째 약속은 뭡니까?" "빌파 가문을 지킬 것." 엘시는 빌파 가문의 충복이 가문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삼고 중 한 명의 영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엘시의 표정을 본 레이헬이 말했다. "팔리탐. 자네가 직접 말하게." 팔리탐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레이헬 라보는 뒤편으로 물러났다. 뒤 에 있던 팔리탐은 앞으로 나서며 다시 자신의 몸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팔리탐은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장군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팔리탐 지소어. 조금 전엔 자네 입으로 듣기도 했고." 팔리탐은 희미하게 웃었다. "태위님께서 말씀하신 저의 과거사는 모두 사실이지만 그 분께서는 상관을 죽인 저를 그룸 공작님이 살려주셨다는 이야기는 미처 하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빌파가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습니다." "태위님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공작 가문에 진 빚을 갚는 방식이 되는지 모르겠군." "간단합니다. 저는 발케네와 함께 빌파 가문도 멸망하는 경우와 가 문만은 보존하는 경우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아아." "그렇습니다. 태위님께서는 제가 협조하면 빌파 가문만은 살아남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켜주셨습니 다. 고맙습니다. 태위님. 그건 처음부터 약속한 거였어. 감사를 들을 일은 아니야. 그래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태위님께서는 빌파 가 문의…… 씻기 어려운 수치를 보셨습니다. 약속을 파기하셨어도 할말 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 말 말게. 팔리탐." 엘시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군령자에겐 자연스러운 광경일지 몰라도 좀 혼란스럽다고 생각했다. 팔리탐도 자신의 - 자신들의 - 모 습을 깨닫고는 말했다. "태위님께서 말씀하시지요. 알겠네. 자, 칼리도백. 다시 죽은 태위 일세." "예." "원래 계획은 간단했어. 제국군이 발케네로 진공하면 내가 발케네 안쪽에서 돕기로 되어 있었지. 그 세부 사항은 화려했지만 결국 흔해 빠진 매복계였지. 그런데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 하 늘누리가 사라진 거야. 갑자기 제국이 사라지자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네. 잠깐 동안 팔리탐에게 이 몸을 맡겨두고 나는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해봐야 했지. 그 때 나는 자네의 주장에 대해 알게 되었어." "귀족원 회의 개최 말입니까?" "그렇다네. 나는 그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고 팔리탐도 동의했지. 하지만 스카리 빌파가 곧장 규리하에 있는 자네를 공격하기 위해 나 섰어. 나와 팔리탐은 논의 끝에 자네에게 사라티본 부대를 넘겨주기 로 결정했어. 그 가물치 기억나나?" 엘시는 신음을 흘렸다. "저는 태위님께서 하늘치를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치를? 내가 어떻게…… 아, 참. 자넨 그 때 하늘치를 다룰 수 있는 규리하공과 함께 있었지.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모 양이군. 하지만 나는 하늘치를 움직일 수 없어. 당시 자네에게 똑바 로 가고 있었던 것. 그것이 바로 자네에게 나와 팔리탐이 건네주려 했던 거야. 사라티본 부대였지." "그랬군요." "하지만 다시 문제가 생겼어. 자네는 사라티본 부대를 받기 전에 하 늘치를 타고 도망쳤지. 그러고 보니 내 문제는 전부 하늘치에서 비롯 되었군. 하늘누리를 떠받치고 있던 하늘치, 자네를 규리하에서 탈출 시킨 하늘치, 그리고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말리." 레이헬은 하늘치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시 침묵했다. 엘시는 그가 생 각에 잠기도록 내버려두었다. 조금 후 레이헬은 다시 장죽을 입에 물 며 말했다. "뭄토가 내게 폐하의 생존을 알렸어. 그리고 부냐 헨로를 데려오라 는 폐하의 명령을 전달했네." "네." "발케네공으로부터 협조를 얻기 위한…… 아니, 점잖은 척하는 것은 관두지. 부냐는 스카리를 통제하기 위한 인질이었어. 당시 나와 팔리 탐은 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어. 폐하의 생존을 믿기도 어렵거니와 나는 팔리탐에게 빌파 가문만큼은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 다행히 스 카리와 부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어. 그래서 난 따져볼 여유 도 없이 부냐를 납치했지. 나와 팔리탐이 뭄토에게 속은 거라고 해도 부냐가 더 이상 인질의 가치가 없다면 손해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 리고 뭄토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폐하의 명령을 따른 것이 되고 팔 리탐은 빌파 가문의 보존을 폐하께 요구할 권리를 얻게 되지. 뭄토의 말은 사실이었어. 말리가 나타났지." 엘시는 더 참기 어렵다는 듯이 말했다. "이 하늘치는 도대체 뭡니까? 이름이 말리라는 것 외에 알려주실 것 이 없습니까?" 장죽의 연초가 다 탔다. 레이헬은 연초재를 비우고는 말했다. "자네가 잘 아는 이름으로 말한다면 말리는 세 번째 벽난로방이야." 엘시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세 번째 벽난로방이 결코 발견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하늘누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것은 말리에 있었어. 말리는 언제나 폐하의 니름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떠있었지. 그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사람들에게 말리가 포착되지 않을 정도로 멀다 는 것은 분명하겠지." "세 번째 벽난로방뿐입니까? 그 나가들도 여기에 있었던 것 아닙니 까?" "그 나가들? 뱀부리미들 말인가?" "아니오. 엔거 평원에 나타났던 나가들 말입니다." "아아. 그들은 말리에 있지 않았어. 그들은 하늘누리에 있었네." 엘시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세 번째 벽난로방이 말리에 있었다면 하늘누리에 있었던 나가는 두 명뿐입니다. 폐하와 비스그라쥬백이지요. 저는 하늘누리에서 다른 나 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그들이 숨어있었다 해도 그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대규모 난방시설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시설 도……" 엘시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며 헐떡였다. 레 이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규모 난방시설은 없었지만 대규모 냉동시설은 있었지." "백화각의……" "백화각의 냉동시설은 지나치게 큰 편이었지?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하지만 하늘누리에서 사망자가 그렇게 많이 발생할 리가 없 지. 하늘누리 시민들이 나이를 먹으면 은퇴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니 까. 오히려 다른 곳보다 사망율이 낮지. 물론 출생율도 낮지만." "전쟁 때문에……" "맞아. 전쟁 때문에 발생하는 시신들을 보존하기 위해. 그런 핑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대규모 냉동시설을 납득시킬 수 있었지. 하지만 전 쟁이 그렇게 자주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 그 냉동시설은 사실은 다른 이유에서 존재하는 것이었어. 심장을 적출한 후에는 꽁꽁 얼려두어도 죽지 않는 나가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그들은 어디서 온 겁니까?" "치천제 폐하께서 적출식을 위해 남하하셨을 때. 그 때 폐하께서는 2만 명의 적출 대상자와 함께 적출식을 치르셨지. 단순히 계산한다면 그 중 절반인 1만 명은 남자야. 적출식이 끝난 다음에는 어디로 사라 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가 남자 말이야. 그 중 오천 명이 폐 하를 따르기로 했어. 전부 남자는 아니야. 여자도 얼마 섞여 있지." 엘시는 그 나가들이 듣거나 말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는 보고를 떠올렸다. 적출식이 있기 전까지 나가들은 집안에서 엄중 하게 보호된다. 만약 그들이 니름으로 대화할 수 있는 집안에서만 거 주하다가 적출식을 끝내고 바로 냉동되었다면 육성을 사용할 기회는 적었을 것이다. "보통 때 그들은 냉동되어 있기에 먹거나 마실 필요도 없었지.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한 병력이지. 필요없을 땐 얼려 놓으니 먹거나 마실 필요도 없고 사고나 반란을 일으킬 염려도 없지. 필요하면 냉동장치 에서 꺼내면 되고.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병력, 오로지 황제를 위 해서만 봉사하는 전사들이지. 그래서 그들에겐 꽤 유서 깊은 이름이 하사되었다네." "설마?" "짐작하겠나?" "아라짓 전사입니까?" "맞아." 엘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백화각의 냉동고에는 유 사시 황제를 돕기 위해 꽁꽁 얼어붙은 나가 오천 명이 누워있었다. 얼어붙어 있기에 먹거나 마실 필요도 없다. 심장을 적출했기에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는다. 하늘누리에 죽지도, 살지도 않은 병력 오천 명이 언제나 누워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엘시는 견디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더군다나 그들에겐 나가들과 싸우다가 멸망한 아라짓 전사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엘시가 생각하기에 전통에 대한 공격 중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이 왜 그런 일을 받아들였습니까?" "그것은 그들 본인에게 물어봐야겠군. 말리에도 백화각에 있던 것과 똑같은 냉동실이 있지. 지금 아라짓 전사들은 거기에 누워있어." "세 번째 벽난로방과 나가들이 누워있는 냉동실. 다른 것은 없습니 까? 저기에 있는 저 엄청난 장비들은……" "나도 그 이상은 알지 못해. 말리는 폐하의 하늘치야. 그러니 자네 가 더 알고 싶다면 폐하께 직접 여쭤봐야겠군." "폐하께서는 저를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비스그라쥬백에게 물어보게. 그는 혹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 "비스그라쥬백이 여기 있습니까? 잠깐. 여기는 어디입니까?" 태위는 대답 대신 걸음을 멈추고 복도 옆에 있는 벽장처럼 보이는 문을 열었다. 그 안에 두툼한 방한복과 등롱 등이 비치되어 있는 것 을 본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태위는 두 벌의 방한복을 꺼내어 그 중 하나를 엘시에게 내밀었다. 엘시가 말 없이 방한복을 걸치자 태위는 등롱 하나를 꺼내어 점화통으로 불을 붙였다. 불 붙은 등롱을 든 태 위는 다시 복도를 몇 걸음 더 걸어갔다. 그곳은 막다른 곳이었고 재 질을 알기 어려운 문 두 짝이 맞물려 있었다. 태위는 들고 있던 등롱을 엘시에게 건네고는 품속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그 중 하나를 골라든 태위는 손잡이 아래에 있는 구멍에 꽂 아넣었다. 열쇠를 한 바퀴 돌린 태위는 손잡이를 잡아 힘껏 잡아당겼 다. 문은 무거웠고 꽤나 빡빡하게 맞물려 있어 태위는 애를 먹었다. 엘시가 돕고 나선 후에야 문은 저항을 끝내고 빼꼼 열렸다. 그 틈을 통해 안으로 들어선 태위는 그 문을 다시 닫았다. 엘시는 맞은 편에 조금 전 통과한 것과 똑같은 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태위는 다른 열쇠로 그 문도 열었다. 그 뒤에는 또 문이 있었다. 세 번째 문을 열 었을 때 엘시는 기대하던 것을 느꼈다. 싸늘한 냉기가 훅 뿜어져나왔 다. 그 뒤편에는 암흑에 잠겨 있는 거대한 냉동실이 있었다. 태위는 냉기가 빠져나갈까봐 서둘러 문을 닫았다. 엘시는 그를 도와 문을 닫은 다음 등롱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등롱의 빛은 그들 주변에만 조금 뿌려질 뿐 암흑을 조금도 밝히지 못했다. 냉기를 보존 하기 위해 그곳에는 창문 같은 것은 없었고 조명이라고는 엘시의 손 에 있는 조그마한 불빛 뿐이었다. 엘시는 이 냉동실이 백화각에 있던 것과 같다고 말했던 태위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엘시는 냉동실 근 무가 많아졌다고 말하던 부냐를 떠올렸다. '부냐가 일하던 곳이 이런 곳이었나?' 엘시는 그 말을 들었던 것이 엄청나게 오래된 일 같다고 생각했다. '부냐는 이런 곳에서 일을 했구나.'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엘시에게 등롱을 받아든 태위는 어딘가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태위 를 따라가던 엘시는 어둠 속에서 선반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선반 위에는 큼직한 상자들이 놓여있었다. 관이었다. "저기에 그 아라짓 전사들이 누워 있습니까?" "맞아." "봐도 됩니까?" "보게 될 걸세." 엘시는 침묵했다. 한참을 걸어간 태위는 어느 선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태위는 등롱을 옆에 내려놓고는 관 하나를 가리켰다. 무슨 뜻인지 이해한 엘시는 태위와 함께 관을 붙잡았다. 그 관은 매장용이 아니라 사체를 잠시 보관하기 위한 것이고 따라서 운반하기 쉽도록 가볍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라 두 사람의 힘으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바닥에 관을 내려놓은 태위는 뚜껑을 들어올렸다. 엘시는 관 안에 누워있는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데라시는 간단한 옷과, 옷보다 훨씬 묵직할 듯한 얼음 부스러기들에 뒤덮인 채 누워있었다. 인간이 그런 식으로 누워있다면 핏기가 사라 져 창백한 얼굴을 볼 수 있겠지만 나가의 얼굴은 특별히 창백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엇인가가 꺼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엘시가 관 위로 허리를 굽히자 태위가 말했다. "뭐 하려는 건가?" "데리고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태위님께서 예전보다 젊어지긴 하셨 지만 그래도 제가 나을 겁니다. 제가 들지요." "이 딱딱한 친구를 들고 나가는 것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네. 백작." 태위는 품속에서 그 간단한 방법을 꺼내었다. 엘시는 조그마한 병에 서 나오는 붉은 알약을 보았다. "소드락이군요." 태위는 데라시의 입을 크게 벌렸다. 나가의 턱은 인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벌어지기 때문에 태위는 손쉽게 데라시의 목구멍 안쪽에 소드락을 밀어넣을 수 있었다. 보고 있던 엘시는 태위가 데라 시의 위까지 손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레이헬은 황급히 손을 잡아뽑았다. 엘시는 태위가 왜 그렇게 서두르 는지 알게 되었다. 소드락의 효과는 굉장히 빨랐다. 태위의 손이 빠 져나가자마자 데라시의 턱이 콱 닫혔다. 태위가 조금만 늦었다면 팔 을 물렸을 것이다. 재생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사람이 깨어나는 것 이 아니라 기계가 갑자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데라시는 누운 채 비 늘을 부딪쳐 얼음 조각을 팍 날려올렸다. 엘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지만 얼음 조각을 날려올리자마자 데라시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을 땐 그도 조금 놀랐다. 태위 역시 깜짝 놀랐지만 재빨리 자 신을 추슬렀다. 태위는 데라시의 주의를 끌기 위해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말했다. "자, 비스그라쥬백 데라시. 자네는 소드락을 먹었어. 소드락 말이 야. 시간이 얼마 없어. 설명은 있다가 할 테니 일단은 나를 따라와. 알았지?" "알겠습니다." 대답한 후에야 데라시는 눈을 떴다. 그는 엘시의 얼굴에 놀라고 태 위의 가면에도 놀란 것 같았지만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듯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관에 누워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약간의 충격만 보였다. 엘시는 데라시를 부축하려 했지만 데라시는 그것을 거절했다. "걸을 수 있습니다. 칼리도백. 여기는 백화각의 냉동실인가 보군요. 하늘누리는 다시 안전해진 겁니까?" 엘시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데라시는 조급하 게 말했다. "일단은 제 방으로 가야겠군요. 제가 다시 졸도하면 곤란할 테니. 어느 쪽이 출구입니까?" 태위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데라시는 그것이 대답이라는 듯 태위를 따라 걸었다. 다시 삼중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빠르게 발을 놀렸 다. 소드락의 약효 시간 내에 난방이 되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발을 놀리면서도 데라시는 주위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조금 후 데라시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할 듯 입을 꿈틀거리던 데라시는 생각을 바꾼 듯 다시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상층으로 올라왔을 때 데라시는 창문을 통해 바깥 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을 보자마자 데라시는 엘시를 돌아보고는 몹시 당혹한 어조로 말했다. "믿기 힘들지만 여기는 하늘누리가 아니군요. 도대체 이곳은 어디입 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엘시는 데라시가 말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엘시는 실망감을 느꼈고 또 대답할 말도 없었기에 서두 르자는 손짓밖에 할 수 없었다. 소드락의 약효 시간을 떠올린 데라시 는 그 손짓을 따랐다. 데라시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엘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데라시는 이성적인 나가다. 바깥에 있는 하늘치의 등을 보고서 하늘 누리의 모습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대신 대담하게도 이곳이 하늘누 리가 아니라고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엘시는 아직까지도 하늘누리 의 모습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사실 말 리와 하늘누리는 닮은 점이라곤 없다. 하지만 하늘누리 외에는 그런 물체를 본 적이 없었던 엘시는 자꾸만 하늘누리와 말리를 비교하게 되었다. 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엘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라시가 옳 다. 말리는 하늘누리와 다르다. 움직인다는 어처구니 없는 특징을 가 지고 있지만 그래도 하늘누리는 사람을 키우고 역사를 품을 수 있는 도시였다. 말리는 그렇지 않다. 지멘은 망치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방안에 있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방안은 천장에 고기를 매달아놓으면 훈연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뭔가를 태우지는 않지만 대신 그을려버리는 음침한 불꽃들. 가장 큰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은 스카리 빌파였다. 스카리 빌파 는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 방법이 없어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고 싶다는 뜻을 모 든 얼굴로 드러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방 안에는 스카리가 지 분거릴 만한 상대가 없었다. 스카리가 만약 벽에 기대어 서있는 팔리탐 지소어에게 시비를 건다 면 그건 공기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짓이 될 것 이다. 방으로 들어온 이래 팔리탐은 자신이 누군지 - 그러니까 의식 의 전면에 나와서 다른 이들과 같은 방 안에 있는 자가 누군지 - 드 러날 만한 행동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가면과 군령자의 결합을 통해 팔리탐은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접촉할 수 없는 세계에 자신을 두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없고, 따라서 그는 존재하지 않았 다. 정체가 불분명해서 시비를 걸 수 없다는 점에서는 벽난로가에 앉아 있는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도 팔리탐과 마찬가지였다. 데라시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저 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 있지 않은 어떤 나가의 귀 노릇을 하고 있을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 데라시의 무표정한 얼굴만 보아서는 그가 다 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재미있는 농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폐하. 지금부터 스카리 빌파가 제거되어야 하는 이유 일곱 개를 니르겠습니 다]라고 니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스카리는 데라시 를 다그치려다가 치천제에게 시비를 걸게 되는 위험을 무릅쓰기는 어 려웠다. 지멘에 대해서는, 스카리는 오히려 지멘이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경 우를 걱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스카리는 지멘과 눈도 마주치지 않 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섯 번째 사람을 노려보느라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멘은 마지막 인물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엘시 에더리는 가상의 초상화가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음산하게 표현한다면 누군가가 대장군을 암살하고는 박제로 만들 어놓은 것 같다. 자신에게서 내면을 읽을 수 있는 모든 흔적을 지운 채 대장군은 문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팔리탐 지소어는 장죽의 연기로, 데라시는 벽난로의 열기로, 그리고 스카리는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훈연장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었지만 엘시 또한 기여하는 바 가 있었다. 그는 훈연장의 낡은 벽처럼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그을 려지는 고기를 바라봐 온…… 엘시가 일어났다. 지멘은 문이 열렸음을 깨달았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흑사자 모피로 몸을 두른 치천제였다. 황제는 무릎을 꿇으려 하는 엘시를 제지하고 는 조금 늦게 일어서는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모두 앉아라." 일어서려 한 적이 없는 지멘은 다른 이들이 도로 앉는 것을 바라보 았다. 황제는 앉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그녀의 걸 음을 따라가던 사람들의 시선은 황제가 데라시 곁에 멈춰서자 그 의 미를 짐작해보느라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데라시는 황제가 자신이 아닌 벽난로를 찾은 걸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벽난로가에 선 채 말했다. "짐이 돌아왔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럴 시간이 충분히 있었을 테니. 스카리 빌파. 대답하라. 짐의 귀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카리는 그 질문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 제겐 정당한 계승권이 있습니다. 폐하의 부재 동안 날치기로 이루어진 계승으로 만들지는 말아주십시오." 스카리가 언짢아한 것은 치천제가 사용한 호칭이었다. 자신을 발케 네공이라 불러달라는 요청에 대해 치천제는 담담하게 말했다. "짐은 발케네공에게 묻지 않는다. 뻔한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으니 까." 스카리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꽤 멍청하게 보일 거라 는 생각에 스카리는 화가 났다. "발케네공이든 스카리 빌파든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 니다!" 그 대답은 스카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통쾌한 기분을 주지는 않았다. 스카리는 질문 대상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길 바란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 황제의 시선을 외면했다. 치천제는 스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 고개를 돌렸다. "레이헬 라보. 짐의 귀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겠지요." "데라시?" "드리고 싶은 질문이 너무나 많사옵니다. 폐하. 하지만 지금 저는 모든 것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느낌 속에 잠겨 있습니 다." 지멘은 레이헬과 데라시가 잠깐 동안 서로의 시선을 맞추는 것을 보 았다. 그 때 치천제가 말했다. "지멘. 짐을 죽이기로 맹세한 자여. 그대는?"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벼슬을 도낏날처럼 세운 채 치천제를 마주보았다. 치천제는 그 시선을 잠시 가지고 놀다가 곧 흥미를 잃은 듯 팽개쳤다. 그녀는 황제의 대장군을 돌아보았다. "엘시 에더리." "예. 폐하." "그대는 짐이 돌아온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끄럽습니다." 모든 사람이 엘시를 돌아보았다. 황제가 말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폐하." "교육적이군." 치천제는 방을 가로질러 모든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로 움직 였다. 그녀는 창턱에 팔꿈치를 기대었다. 말리의 등에 쏟아지는 햇살 들 중 일부가 창문을 통해 넘어오다가 그 지방에서 만날 거라 예상하 기 힘든 나가 비늘에 놀란 듯 소란스럽게 반짝였다. 손등에서 까불거 리는 빛들을 바라보던 치천제가 말했다. "북이 잠시 멈춘 동안, 씨실들이 스스로 날실이 되려 했다." 세상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도시는 하나뿐이다. 베틀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실은 한 가닥뿐이다. "물론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고운 천 대신 헝클어진 실뭉치를 얻을 수 있을 뿐이지. 북이 다시 움직이기 위해서는 엉킨 것을 풀어야 한 다. 그 중 어떤 것은 잘라야 할 테고. 베틀은 성스러워야 한다. 최소 한 쓰레기통보다는. 스카리 빌파." 단어의 강에 발 밀어넣기 어려운 범람이 일어나는 것을 노려워 하며 바라보던 스카리는 조금 늦게야 호명된 것을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치천제는 그에게 지시했다. "사라티본 부대와 함께 비나간으로 가라. 칭왕자 지키멜 퍼스를 체 포하고 비나간 정부를 장악하라."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폐하." "엘시 에더리." "예. 폐하." "휘하의 병력을 유지하여 시모그라쥬로 진군하라. 반역자 팔디곤 토 프탈을 체포하고 시모그라쥬를 장악하라. 그리고 남부의 잔존 병력과 그대가 데리고 간 병력을 더하여 병력을 임시로 재배치하라. 도시연 합의 도발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국경은 비워둘 수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군량이 없기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지멘." "말해." "엘시와 동행하라. 그에게 짐의 금을 주도록." 지멘이 솟구치듯 일어났다. 스카리 손이 품안으로 움직였다. 엘시는 칼을 반쯤 뽑았고 팔리탐 지소어는 황제를 향해 몸을 날리려는 자세를 취했다. 비명이나 외침 을 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 모든 다급한 동작들 위로 흐르는 데라시의 비늘 부딪치는 소리 때문에 꽤나 소란스러웠다. 지멘은 움직이지 않았다. 치천제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는 분노 보다는 경악쪽에 가까운 무엇이 담겨 있었다. 치천제는 지멘을 올려 다보지 않았다. 지멘이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 "두 사람은 계획서를 제출하고 열흘 후 떠나라." 치천제가 몸을 돌렸다. 추호의 빈틈도 없는 동작 때문에 그녀가 방 문 앞에 도달했을 때에서야 사람들은 대화가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 다. 지멘이 외쳤다. "거기 서!" 치천제가 멈춰섰다. 그녀가 돌아서자 지멘은 부리가 아닌 손으로 말 하듯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확언을…… 해줘. 언제 아실을……?" 스카리가 앞으로 한 발 걸어나왔다. 그는 지멘에게 선수를 뺏긴 것 이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확언을 받고 싶은 사람은 한 명 더 있습니다. 폐하. 부냐는 어디에 있습니까? 안전하게 있는 것입니까?" 지멘과 스카리를 번갈아 쳐다본 치천제는 그들 가운데를 바라보았 다. 타협적인 시선 처리인가 생각하던 스카리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치천제는 엘시를 보고 있었다. "엘시. 그대는 확언받고 싶은 것이 없는가?" 지멘이 몸을 부풀리며 엘시를 돌아보았다. 엘시는 고개를 조금 기울 인 채 말했다. "확언이라 하셨습니까?" "그대의 인질에 대해서." "인질? 무슨 말씀인지……" 엘시는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커지는 그의 눈을 보던 데라시는 불 현듯 칼리도 백작부인을 떠올렸다. 데라시는 놀라서 황제를 바라보았 다. 황제가 말했다. "그녀의 안전에 대해 그대는 확언 받고 싶은 것이 없는가?" "폐하. 그녀란 제 모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치천제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나가인 데라시조차 그녀의 표 정을 읽을 수 없었다. 데라시가 어떻게 닐러야 할지도 모르는 채 경 고의 니름을 니르려 할 때 치천제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데라시는 안도했다. 엘시는 의혹에 잠겨 말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치천제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한 달 후 그대들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지멘이 깃털을 누그러뜨렸다. 스카리는 커다란 환희를 얼굴에 드러 내며 등을 돌린 치천제에게 꾸벅 절했다. 하지만 의혹을 해소하지 못 한 엘시는 문이 닫힐 때까지 치천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치천제 의 모습이 사라지자 엘시는 먼저 팔리탐을, 그리고 데라시를 바라보 았다. 두 사람 모두 아는 바가 없다는 몸짓을 하는 것을 본 엘시는 고개를 떨구었다. =============================================================== 32챕터 시작합니다. 추석 잘들 보내셨습니까? 추석이 지났으니 이제 고3 수험생 여러분 의 건승을 빌어드려야 하는 시기가 왔군요. 현재의 한국인들이야 변 태하는 곤충이지요. 고3들은 번데기고. (흠. 남자들에겐 군대라는 번 데기 시절이 한 번 더 있군요.) 사람이 되기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만 그래도 개구리에게 잡아먹히든 새한테 잡아먹히든 날개는 한 번 파닥 거려 봐야 하니까, 모두들 아자아자!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2. 무거운 것과 무서운 것 (2) 2004/10/02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2-2 관련자료:없음 [4933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02 05:25 조회:24 피를 마시는 새 32. 무거운 것과 무서운 것 - 2 이레 달비는 앞쪽에 있는 물체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갔다. 그것이 깨물거나 할퀴거나 찌르는 성질 사나운 동물인 것처럼. 하지 만 그것은 잘 다듬어진 목재일 뿐이다. 손의 감각이 한 점 의심할 수 없는 나무 느낌을 알려왔을 때 이레는 약간 허무한 기분을 느꼈다. 이레는 그 커다란 목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것은 절대로 하 루 이틀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냐. "이건 하루 이틀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냐." 이레는 움찔하며 틸러 달비 부위를 돌아보았다. 틸러는 압도당한 표 정으로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폐하께서는 이것을 만든 다음 돌아오신 것이 아니라는 거 지. 원래부터 가지고 계셨다는 말이야.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끔 찍하군." "어떻게 끔찍하지?" "주인에게 사실은 좋은 회초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하인의 느 낌이지. 주인은 좋은 회초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쓰지 않았을 뿐이야. 그래서 하인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몰랐지. 회초리를 본 하인은 무엇을 느낄까?" 이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젠장. 주인께서 나를 속였어. 저런 것이 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 조 심했을 거 아냐." 뜻하지 않은 대답에 틸러는 어깨를 흔들며 소리 없이 웃었다. "종제님의 말이 맞군. 나는 기어코 그 회초리를 꺼내게 만든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후회를 말하고 싶었다만. 보라고. 이 하늘치는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꾸짖음이라는 말이야. 깨달아라, 주인이 사라진 집에 서 너희들이 부린 광태를. 부끄러워하라, 주인으로 하여금 도저히 그 냥 올 수 없어 회초리를 들고 돌아오게 만든 너희들의 비근함을. 각 오하라, 너희들이 받을 합당한 벌을……" 틸러의 극적인 말을 듣던 이레는 쓰다듬던 나무를 찰싹 때렸다. "이게 회초리야?" 틸러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는 정신이 뻐근하다는 표정으 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일종의 건물이었다. 다만 기둥이나 서까래, 벽도제로 사용된 것이 일반적인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것은 병기 로 만들어진 초대형 건물이었다. 그 건물을 이루고 있는 각종 병기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기에 근연 관계에 있는 다른 것들이 이름을 차용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공성추와 투석기, 주랑, 노궁, 발석차, 파성퇴, 공성탑, 그리고 기타 공성병기 와 방어병기가 무수한 계단과 통행로와 사다리 등과 뒤섞여 만들어진 거대 구조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많은 무기가 놓여있는 것과 는 달랐다. 왜냐 하면 하나하나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 면 거대한 투석기의 가로대에는 궁사들이 올라서서 활을 쏠 수 있는 주랑이 있고 그 주랑은 다시 복잡한 계단을 통해 어쩐지 노궁처럼 보 이는 물건의 활주부로 이어지며 아무래도 노궁의 시위 고정장치인 듯 한 물체는 파성퇴로 보이는 물체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사용 가능하 다…… 라는 식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단일 작업에 사용되는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짐작하 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이 쏘고 날리고 떨어뜨리는 장거리 전 투 행위를 유사 이래 최대 규모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해 보였다. 그토록 뒤죽박죽이었지만 그 전체 모습은 거대한 균 형미를 가지고 있었고 안에 들어섰다간 길을 잃을 것처럼 복잡했지만 그 구조를 잘 아는 이에겐 뚜렷하게 보일 간명함의 흔적이 있었다. 길이 1200미터, 폭 500미터 쯤 되는 그 어처구니 없는 물체를 바라보 며 이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초리라고? 내가 칼자루가 빠질까봐 걱정하는 하전사처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무지막지한 물건에서는 어지간한 규모의 도 시라도 하루만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이 느껴지는데. 형의 생각은 어떻지?" "가능할 것 같군. 고도는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니까. 다른 것 준비 할 필요없이 여기서 자갈 몇 수레만 쏟아부어도 아래쪽에는…… 상상 하기 끔찍하군." "도대체 누가 이런 것을 설계할 수 있지? 이건 무기 하나를 설계하 는 수준이 아니야. 모든 무기의 각 부분별 특징을 잘 알고 그 특징들 을 다른 무기와 결합시킬 수 있는 천재의 작품…… 천재?" 이레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종형을 바라보았다. 틸러는 고개를 가 로저었다. "설마." "종형이 아는 무기 설계가 중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 나?" "솔직히, 없어. 하지만 그건 내 견문의 부족함으로 이해해야겠지. 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사람 중에 이런 걸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보장은 없어." "글쎄. 그런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유명해졌을걸. 아냐. 역시 그 분이야." "그 분께서 천재셨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만 그 분이 천재적 공학 자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그 분은, 글쎄요. 범주가 좀 다른 부분의 천재셨다고 생각되는데. 정치나 군사 쪽으로." "그럴까? 나는 뱀단지와 하늘치를 결합해서 이동할 수 있는 수도를 만드신 행적에서 공학자적인 면모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건 정치가나 군인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지. 틀림없어. 형이 반대 증거를 가져올 때까지 나는 이걸……" "선황 폐하의 작품이란 말인가?" 이레와 틸러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기에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그곳에 서있다는 것은 두 사람 에게 놀라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엘시의 곁에 서있는 지멘의 모습은 두 사람을 꽤 당황하게 했다. 그 때문에 이레와 틸러는 조금 늦은 목 례와 경례를 보내게 되었다. 경례를 받은 대장군은 그들이 논의의 대 상으로 삼고 있는 물건을 보며 말했다. "그럴 듯한 가설이군." "아…… 대장군님. 그럴 듯하지 않습니다." 틸러는 지멘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엘시는 그를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틸러는 눈을 넣었다 뺐다 하는 게의 재주를 부러 워 하는 듯이 엘시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며 말했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대장군님. 하지만 선황 폐하께서 천 재셨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을 그 분의 작품으로 단정짓는 것은 논리적 이지 않습니다." 이레는 종형과 상전 사이에서 난처한 심정을 느끼며 두 사람을 번갈 아 바라보았다. 엘시가 말했다. "귀관의 태도에는 속단하는 버릇에 대한 경계 이상의 것이 있는 것 같군. 마치 원시제 폐하께서 이것을 설계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착각한 것인가?" "아닙니다. 대장군님. 제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해주셨습니다." "설명하게." "이것은 무기입니다." "그렇게 보이는군." "무기는 적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국에는 적이 있지." "시련은 적이 아닙니다." 엘시는 입을 다문 채 틸러의 옷이라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 게 그를 노려보았다. 틸러는 아버지께서 이 일을 기뻐하려면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고민했다. '기뻐하십시오. 아버님. 저는 드디어 이백 만 제국군의 식사 습관을 통일시켜버릴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주목받 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주목받는다는 중도적인 말의 속 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엔 두 가지 주목이 있지. 어느 쪽이야?' 엘시가 말했다. "말하고픈 바는 알겠지만 네 신분에 어울리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해 라. 너는 아라짓 제국의 군인이다." "죄송합니다. 대장군님." 엘시는 남은 주의는 입 대신 눈으로 준 다음 말했다. "코세 칸디드 백작에게 가서 내가 확인했다고 전해라. 그 분은 우리 의 폐하이시다. 그리고 이것은 폐하의 하늘치다. 이름은 말리라고 한 다." "말리요? 향기 좋고 새하얀 그 꽃 말씀입니까?" "그 꽃이다." 군인인 틸러는 꽃 이름은 레콘 여단에 붙는 것인데 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에겐 말리의 작명 이유보다 더 시급한 의문들이 있었다. 그는 칸디드 백작이 얼마든지 이해할 거라 확신하며 그의 이름을 이용했 다. "칸디드 백작은 이런 질문도 할 것 같습니다. 전투중에 나타나 시모 그라쥬군을 공격한 그 나가들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센시엣 특수수용 소에 있던 레콘들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들은 폐하의 사람들이며 따라서 폐하께 하문해야 할 것이다. 하 지만 칸디드 백작뿐만 아니라 귀관도 폐하께서 직접 설명하길 기다리 는 것이 좋을 것이다. 칸디드 백작께는 당분간 현재의 위치를 지키도 록 하고 경거망동이 없도록 하라고 전하면 된다." 틸러는 자신의 불만에 칸디드 백작이 표시할 불만을 더한 다음 거기 서 대장군 앞에서 부위가 지켜야 할 존중의 정도를 빼는 복잡한 계산 을 거친 끝에 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예. 대장군님." 틸러의 암산은 그럭저럭 정확했다. 엘시는 틸러의 표정에 대한 지적 없이 그의 종제에게 말했다. "이레." "예. 주인님." "칼리도로 가라." 이레는 놀란 얼굴로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대장군도, 그리고 그 곁 에 있던 지멘도 정보가 될 만한 표정은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딱정벌레를 타고 즉각 날아가서 어머님께 폐하께서 생환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해라." 이레는 무례하게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레가 전하지 않아도 이 경악할 만한 소식은 벼락 같은 속도로 번져갈 것이 다. 그리고 엘시는 지금껏 편지를 쓸 뿐 이레를 직접 칼리도로 보낸 적은 없었다. 이레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 다. 하지만 엘시는 부연하지 않았다. 이레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편지를 주시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가도록 해라." "예? 당장이오? 아…… 예. 알겠습니다." "돌아올 때는 어쩌면 나는 시모그라쥬로 남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아서 찾아와라." 사촌형제들은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로 물러갔다. 떠나는 두 사람 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엘시에게 지멘이 갑자기 말했다. "라세는 네 어머니가 인질이 아니라고 했다." 엘시는 이레가 원시제의 설계일지도 모른다는 과감한 가설을 내놓은 물건을 바라보며 지멘을 무시했다. 그리고 지멘은 자신을 무시하는 엘시의 태도를 무시했다. "너의 인질은 누구냐?"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엘시는 지멘에게 몸을 돌렸다. 그는 공 세로 대화를 시작하기로 했다. "당신은 아실 때문에 폐하께 협조하는 겁니까? 아실이 폐하께 붙잡 혀 있습니까?" 지멘은 어깨에 걸친 망치를 두어 바퀴 돌렸다. 지멘의 머리 뒤에서 대호 형상의 망치 머리가 빙글빙글 회전하는 모습은 꿈쩍도 하지 않 는 지멘의 겉모습 대신 그의 정신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멘이 부리를 열어 말했다. "아실의 마음은 닫혀 있다." 엘시는 침묵한 채 기다렸다. 지멘은 몇 마디 단어로 아실의 현재 상 태를 설명하고는 말했다. "황제가 그 애의 닫힌 마음을 열어줄 거다." "폐하께서? 폐하는 의사가 아닙니다. 어떻게 폐하께서 그런 일을 하 실 수 있다는 겁니까?" 지멘은 삐딱한 표정으로 엘시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는 허리춤 에 매달아둔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지멘은 주머니 위에 손을 얹은 채 엘시를 노려보았다. "너의 인질은 누구냐?" 엘시는 피로감을 느꼈다. "지멘.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저도 이 해할 수 없습니다." "너는 네 몸종을 칼리도로 보냈어. 황제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랬지?" 엘시는 긍정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게 인질 같은 것이 없다는 증거이기 도 하잖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어서 폐하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칼리도로 이레를 보냈습니다. 제게 인질 같은 것은 없습니 다." "부냐 헨로는?" 엘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멘은 말리의 거주구역이 있는 곳을 흘끔흘끔 돌아보며 말했다. "부냐는 네 약혼녀였잖아. 하지만 부냐는 스카리의 인질일 텐데. 일 석이조인 건가? 이봐. 엘시. 부냐의 생사를 가지고 너를 협박하면 네 마음이 흔들리겠지? 지금은 비록 거론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약혼 관계가 되었지만 그래도 한 때는 네가 사랑했던……" "그만하십시오." 지멘은 미심쩍은 듯 엘시의 표정을 살폈다. 엘시는 그 시선을 피했 다. 지멘은 조금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감옥을 깨부수고 부냐 헨로를 구하지는 않았지. 부냐를 이용해서 네가 싫어하는 일을 하게끔 강요할 수는 없겠군. 그렇다면 인질이라고 할 수 없지. 부냐는 아닐 거야. 그러면 도대체 누구야?" 엘시는 흐린 눈으로 지멘을 올려보았다. 조금 후 지멘의 손이 주머 니에서 떨어졌다. 그는 엘시에게 허리를 숙여 속삭였다. "엘시. 생각해봐." 만약 비슷한 체구였다면 지멘은 엘시의 어깨를 감싸쥐었을 것 같았 다. 대신 지멘은 주먹을 옆으로 뻗어 나무 기둥을 짚었다. 엘시는 몸 을 뒤로 빼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근접해 있는 지멘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코 앞에서 거대한 부리가 움직였다. "나는 네가 들으면 흥미로워할 만한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네 인 질이 누군지 모르는 이상 네겐 말할 수 없어. 너도 사람이니까 무엇 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을 것 아냐. 당연히 그렇겠지. 조금만 생 각해 보라고." 엘시는 자신의 얼굴을 간단히 찢어놓을 수 있는 부리를 바라보며 말 했다. "당신이 왜 폐하의 금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멘의 벼슬이 꿈틀거렸다. 그는 찌르는 눈으로 엘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가 말하기 전에 엘시가 손을 들어올렸다. 엘시는 지멘의 부리에 손을 얹고는 그것을 슬쩍 미는 시늉을 했다. 지멘이 버텼다면 엘시는 꽤나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겠지만 지멘은 엘시가 미는대로 물러났다. 똑바로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멘에게 엘시는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폐하의 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훔친 세금을 말하는 거다." "세금? 아아. 그렇군요. 그 돈이 있었군요. 어디에 있습니까?" "푼텐 사막 남쪽." "다행이군요. 약간만 돌아가면 되니. 아래로 내려갑시다. 당신은 사 라티본 부대와 함께 머물면 되겠군요." "조금 있다가 내려가겠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엘시는 주저 없이 지멘의 곁을 떠났다. 지멘은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번인가 지멘의 부리가 열렸지만 지멘은 엘시를 부르 는 대신 다시 그것을 닫았다. 환상계단을 만든 엘시가 아래로 사라지 자 지멘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늘은 흐렸다. 엔거 평원 전투에서 발생한 막대한 시체를 적절한 방식에 따라 땅에 묻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흑사자군은 시체를 한 곳에 모아놓고 망자에게 간단히 사과한 다음 불을 지르는 것을 선 택했다. 그들이 화장용 장작으로 삼은 것은 바로 시모그라쥬군이 힘 겹게 만든 방어 시설들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 지는 짐작하기도 어려웠지만 관련자들은 모두 사망자는 최소한 5만 명은 된다는 것에 동의했다. 어지간한 도시 하나의 인구다. 말리가 하루만 일찍 도착했다면 죽지 않았어도 되었을 5만 명의 사람들이 연 기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지멘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이 주머니에서 낡은 종이 하나를 꺼내었다. 큼직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놀려 종이를 펼친 지멘은 거기에 담겨 있는 아실의 글을 보았다. 종이는 약간 변색되어 있지만 글자는 아직 도 날카롭다. 지멘은 그 한 부분을 반복해서 읽었다. '라세는, 아라짓 제국의 황제는 정신억압자일 거예요. 아마도 역사 상 최고의. 그녀는 사람을 정신억압할 수 있을 거예요.' 지멘은 그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 고 도덕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관 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그리고 지멘의 요구는 열렬하게 필요하다에 쏠려 있다. 사람의 정신을 자유 로이 다룰 수 있는 정신억압자는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안에 있 는 사람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혹 있을지 몰라도 지멘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지멘의 희망은 오직 치천제뿐이 다. 지멘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억지로 참은 비명 때문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느낌에 지멘은 눈을 감았다. 하 지만 지멘이 애써 피하던 문구는 그의 눈꺼풀 안쪽까지 잔인하게 파 고들었다. '당신과 나는 라세에게 조종당해서 7년 동안 방황한 걸까요?' 치천제가 정신억압자여야 한다면 지멘은 그녀가 자신을 조종했다는 사실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그녀는 지멘에게 숙원을 세우게 만들 었다. 레콘의 숙원을. 레콘에게 가해질 수 있는 폭력 중에서 이보다 더 끔찍한 것을, 지멘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지멘은 그 폭력이 정말 자신에게 저질러졌기를 바라야 한다. 그래야만 아실을 구할 희 망도 있기 때문에. 벼슬이 갈라지는 것 같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어디서부터 아파 해야 좋을지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온몸이 아프다. 버석거리는 깃 털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다. "아으아…… 아아…… 아아으……" 지멘은 커다란 팔뚝으로 눈 주위를 거세게 눌렀다. 머리 속에서 민 들레씨 같은 불꽃들이 떠다녔다. 지멘은 눈을 떴다. 엔거 평원에서 피어오른 연기들이 기묘한 색깔로 흔들리고 있었다. 지멘은 부리를 크게 벌려 숨을 쉬었다. 들이마실 때는 고통이, 내쉴 때는 역겨움이 느껴졌지만 지멘은 고집스럽게 심호흡을 했다. 마침내 그는 진정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아실이다. 다른 것은 다른 때에 생각하거나, 아예 생각하지 말자. 지멘은 느린 동작으로 종이를 접었다. 그는 시야를 좁혔다. 엘시를 따라가서 그에게 금편을 준다. 그리고 돌아온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치천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랬다간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 치천제가 정신억압자 인지 아닌지 내가 알아낼 수는…… 편지를 주머니에 집어넣던 지멘의 손이 멎었다. 지멘은 다시 편지를 꺼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멘은 차 라리 그곳에 자신이 바라는 것이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글자들은 아 실이 엮어둔 그대로 종이에 매달려 있었다. '어떻게 그걸 알아낼 수 있는지는 발케네공이 가르쳐줄 거에요. 아 니, 가르쳐줄지도 모른다고 해야겠군요. 그가 선택할 일이니까. 나는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어요.' 지멘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발케네공은 스카리 빌파가 아닌 락토 빌파다. 그런데 락토 빌파는 이미 죽었다. 죽은 사 람에게 어떻게 편지를 쓴다는 말인지 지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실 이 그 편지를 쓴 시점에서 락토 빌파는 아직 살아있었을 거라는 간단 한 생각을 떠올리기까지 지멘은 한참 동안이나 혼란스러워 해야 했 다. 가까스로 현실감각을 되찾은 지멘은 그 문구를 다시 읽었다. 아실은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한 통은 지멘에게, 다른 한 통은 락토 빌파에게. 그 중 전자는 정확하게 배달되었다. 하지만 지멘은 후자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락토는 편지를 받은 후에 죽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전에 죽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 전에 죽었다면, 그에게 보낸 아실의 편지는 어디로 갔을까? 제이어 솔한은 언덕의 사면에 드러누운 채 오른손으로 품 속에 있는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팔은 베개 삼아 머리에 베고 있었다. 한 가로워 보이지만 그런 여유를 부려도 좋을 만한 날씨는 아니다. 땅은 반 시간만 누워있어도 근육 경련이 일어날 만큼 차가웠고 바람 또한 댁의 눈썹 좀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듯 거세었다. 제이어가 취하고 있 는 그런 자세는 여름날 오후 슈라도스의 목초지 쯤에서 해야 여유롭 고 평화로워 보이지 늦가을의 파름 평원에서는 자해 행위에 가깝다. 물론 제이어는 단지 객기를 부리거나 고행 수련을 하기 위해 그렇게 늦가을의 야외에 드러누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이어는 하늘을 감시 하고 있었고,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젖히지 않으려면 누워있는 편이 나았다. 확실히 목이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이어는 자신이 5분 도 지나기 전에 일어나 앉아 팔다리를 주물러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누워 바라보는 것이 좀 재미있으면 좋겠지만 제이어는 도통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최초의 경이는 오래 전에 사라졌고 이제 하 늘치의 움직임은 말할 수 없이 지루했다. 말타기를 처음 배우는 사람 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애초부터 멋진 승마 기술을 기대할 수 없 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그 움직임이라는 것이 왔다갔다, 섰다 멈췄다 하는 것뿐이다. 타는 사람은 재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구경꾼의 입 장에서는 하품만 나온다. 제이어는 이이타 규리하가 아주 황당한 실 수라도 저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근방에서 하늘치 를 잘못 다루었다간 건물의 서까래 하나하나가 귀한 골동품이나 다름 없는 하인샤 대사원이 위험해지므로 그것은 절대 일어나선 안되는 일 이다. 이이타는 하늘치를 다루는 것에 쉽게 자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이이타는 한 번에 백 미터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신경질적인 성격이라 판단할 만큼 직선 적이었다. 위면 위, 아래면 아래, 전후좌우 어디로 움직이든 그것은 백 미터 내의 직선 움직임이다. 하늘치의 규모에서 그런 움직임은 한 번 꿈틀해본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을 다루게 되었다면 누구라도 조 심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이타의 조심성은 제이어를 짜증나 게 했다. 간단한 회전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 이이타에게 제이어는 항의 서한을 보내고 싶었다. 도깨비들을 대상으로 기획한 공연이라면 공자께서는 훌륭하게 성공하셨습니다. 도깨비 비평가들은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크나큰 장점으로 받아들이겠지요. 물론 이이타가 구제하기 힘들 만큼 소심한 성격인 것도 아니고 도깨 비들에게 보여줄 공연을 연습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이타가 하 늘치의 가장 간단한 조종 하나도 완벽하게 습득하려 애쓰는 것은 그 의 누나 또한 하늘치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무기가 같다면 사용 이 더 능숙한 쪽이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제이어는 일어나 앉았다. 팔다리를 주무르기 위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제이어는 하늘치와 하 늘치가 싸운다는 생각에서 외경심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사그라들 었던 경이가 다시 불꽃을 발랑발랑 피워올렸다. 하늘치와 하늘치가 싸운다는 것은 산들이 일어나 평야에서 회전을 벌이는 것만큼이나 초현실적이다. 제이어는 자신이 왜 이이타의 하늘 치 조종을 지루하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이타가 하늘 치를 움직일 때마다 그는 현실에서 백 미터씩 멀어지고 있었다. 제이 어는 지금까지 이이타가 하늘치를 움직인 거리를 모두 합하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30만 년은 너무 길지.' 제이어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지나치게 긴 시간이다. 아버지가 아들 을 낳고 그 아들이 다시 아버지가 되어 아들을 낳는 일이 일만 번이 나 반복되어야 한다. 제이어는 일만 대 후의 그 자들이 과연 자신을 선조라고 생각할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30만 년은 그토록 긴 시 간이다. 그 시간에 질려버린 제이어는 다시 땅에 풀썩 드러누웠다. 짜증이 그의 몸 위로 범람했다. 제이어는 있는 힘껏 심호흡을 했지 만 가슴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제이어는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심호흡을 했다. 가슴을 불쑥 내밀자 품속에 들어있는 종이가 가볍게 바스락거렸다. 제이어는 그 종이를 꺼냈다. 살인기사가 꺼낸 것은 편지 피봉이었다. 제이어는 봉투 겉면에 쓰여 있는 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받을 사람의 이름만 간단 히 쓰여져 있었다. 발케네공 락토 빌파. 아실이 쓴 편지였다. 제이어는 계속 품속에 넣고 다녀서 약간 둥글게 구부러진 그 봉투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비벼보았다. 두어 번 봉투를 비빈 제이어는 그것을 귓가로 가져가 흔들었다. 그의 손동작에 따라 팔락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그 소음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보려 시도하던 제이어는 봉투를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봉투를 눈에 붙였다. 물론 그의 시선이 봉투를 뚫고 들어가 그 안의 내용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봉투 가 없었다 해도 그렇게 눈에 가깝게 대었다면 아무 것도 읽을 수 없 겠지만. 제이어는 다시 봉투를 들어올려 겉면에 쓰여있는 글을 읽었다. 발케 네공 락토 빌파. '그런데 말이야. 30만 년은 너무 길어.' 제이어는 봉투를 북 뜯었다. 안에 들어있는 편지는 봉투와 함께 구부러져 있어 흔들어도 빠져나 오지 않았다. 제이어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편지를 꺼냈다. 호기심을 드러내는 바람에게 봉투를 건네준 제이어는 편지를 펼쳤다. 그는 아실의 편지를 읽었다. 이이타가 말했다. "하늘치는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지상 점령을 하려면 보병 병력은 있어야 하는데 하늘치가 보병이 되면…… 제가 이상한 말을 했지요?" 아이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형을 보던 시카트 가 말했다. "그냥 하늘치에만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꼭 그렇게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소리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이타는 하늘치를 움직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늘치를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조작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그 실험은 대화의 파탄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이타의 주의는 자꾸만 하늘치에게로 쏠렸다. 하늘치를 잘못 움직이기라도 해서 그들 네 사람이 아래로 떨어질까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도시도 건설할 수 있는 하늘치의 넓은 등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기우였지만 그래 도 이이타는 추락이 절대로 골절로 끝나지 않을 높이를 무시하기 어 려웠다. 이이타는 하늘치를 멈추게 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겠습니다. 아버님." "그게 좋겠다. 너는 하늘치에만 집중하거라. 지상에 대해서는 나와 시카트가 맡을 테니까." "그런데 병력을 어디서 구하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병력은 병력 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입니다." "맞는 말이다. 두르사 돌 하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가 살아있었다면 하늘치를 움직이는 너를 보며 누구보다 기뻐했겠 지." 이이타는 타계한 하장군을 생각하며 쓴 비감을 느꼈다. 하지만 슬픔 과 아쉬움만 느끼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이이타는 상당한 공포도 느 꼈다. 야리키가 뜯어낸 두르사 돌 하장군의 머리를 본 사람은 이곳에 서 그뿐이다. 하장군의 마지막 모습을 지우기 위해 이이타는 서둘러 말했다.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늘치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 누님께 전해지기 전에 우리는 지러쿼터 산맥을 넘어야 합니 다. 복안이 있으십니까?" 아이저는 팔짱을 꼈다. "두어 가지 있기는 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 에게 보답을 약속하고 군사를 빌리는 것인데, 내키지가 않는다. 우리 역할이 길잡이로 끝날 가능성이 높으니까. 따라서 그것은 최후의 방 법으로 돌려놔야겠지." "동의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아니 다른 방법이 전혀 없어도 그건 내키지 않습니다." 시카트 역시 동의했다. 아버지나 형과 달리 스카리 빌파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발케네 같은 강대한 세력을 잘못 끌여들였다간 그들에게 모든 주도권을 넘겨주고 심지어 규리하까지 뺏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스카리는 이미 규리하를 한 번 침공 했었다. 특별히 발언권을 제지당한 적은 없지만 별로 할말이 없었던 소리는 이이타만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이타는 아버지와 동생 몰래 그 녀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이저가 말했 다. "돈을 풀어 병력을 사는 것도 시간이 너무 걸리니만큼 검토할 가치 가 없고…… 그렇다면 역시 판사이로 가야겠다." 시카트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보이며 말했다. "상고토의 다섯 남작들 말씀입니까?" "그래. 발리츠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들에게 판사이를 주고 군사를 얻어야겠다." "고모부님은 다섯 명이나 되는 적수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그 땅을 비웠습니다. 완벽한 대비 태세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그럴 거다. 하지만 하늘치에 대한 대비는 없겠지." 아버지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본 시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 시점 에서는 그보다 나은 계책은 없었다. 발리츠 굴도하를 포함한 상고토 의 여섯 지배자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강병을 보유하고 있다. 제 국군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예 병력이며 그 군사를 얻을 수 있다 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이타는 회의적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의 군사들이 괜찮은 수준이긴 하겠지만 누님에겐 두 명의 무시 무시한 레콘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제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 다." "그래. 하지만 우리도 레콘을 데려간다면 그들을 상대할 수 있겠 지." "어디서 레콘을 구합니까?" "찾아봐야지. 상대가 두 명이니 우리는 네 명 정도만 구하면 될 거 다. 여기서 규리하까지 이천 킬로미터다. 그 안에서 레콘 네 명을 찾 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다. 일단은 판사이로 가기로 하고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자." "언제 떠납니까?" "하늘치에만 집중한다면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예." "좋아. 그러면 떠날 준비가 되는대로 당장 떠나도록 하자.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아이저는 그 날 밤이라도 출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말했고 이이타 와 시카트 또한 그렇게 이해했다. 하지만 하인샤 대사원으로 돌아온 그들은 출발을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대사원으로 돌아온 네 사람이 처음 느낀 것은 경내가 이상하게 소란 스럽다는 것이었다. 행자들은 서너 명씩 모여서 수근거리고 있었고 승려들도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황급히 이곳저곳으로 걸음 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경내에 돌림병이라도 발생한 것 같은 소란스 러움에 네 사람은 당황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리의 눈에 파지트 대선이 들어왔다. "파지트 대선님!" 소리의 목소리를 들은 파지트 대선은 곧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어 진 대선의 반응은 네 사람을 다시 놀라게 했다. 대선은 몹시 곤혹스 러운 표정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의아해 하던 소리가 대선을 향해 움직이자 대선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주 걸어왔 다. 아이저와 시카트, 그리고 이이타는 소리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 어갔다. 마주 서게 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합장했다. 대선이 먼저 말했다. "소리. 무슨 질문을 할지 압니다. 경내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요? 두 어 시간 전부터 경내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저도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무슨 소문이지요?" "뱀단지가……" "예?" 파지트 대선은 다시 주저했다. 소리는 대선이 그녀의 어깨 너머로 규리하 부자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갑작스러운 두려움 을 느꼈다. 대선은 소리를 향해 말하는 듯한 모습으로 아이저 규리하 에게 말했다. "하늘누리에 연결된 뱀단지가 갑자기 움직였답니다. 뱀단지를 열어 보자 뱀들이 사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카트는 비명 비슷한 소리를 냈고 이이타는 소리의 옆으로 움직여 그녀를 보호하듯 섰다. 아이저는 소리를 지나쳐 대선의 앞으로 나섰 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그것이 소문이라서……" "무슨 내용입니까?" 파지트 대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흉내내 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짐이 돌아왔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2. 무거운 것과 무서운 것 (3) 2004/10/03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2-3 관련자료:없음 [4933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03 06:36 조회:99 피를 마시는 새 32. 무거운 것과 무서운 것 - 3 그 날 전세계의 뱀단지들은 오랜 침묵을 깨고 갑작스럽게 움직였다. 프라뫼의 해맞이탑 4층에서는 한 소녀가 미친 듯이 질주하는 쥐 사 이에 주저앉아 넋나간 표정으로 뱀단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쥐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뱀단지로 다가가다가 갑자기 움직이는 뱀단지에 놀라 바구니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 시각, 카라보라의 태수관에서 는 두 명의 노인이 손에 바둑둘을 든 채 경악한 눈으로 진동하는 뱀 단지를 바라보았다. 그 후 그들은 결코 누가 착수할 차례였는지 알아 내지 못했다. 해묵은 도시 츨란의 뱀단지 담당관은 오후 내내 쓸어모 은 낙엽에 불을 붙이려다가 갑작스러운 종소리에 놀라 자기 옷을 태 워버릴 뻔했다. 옷에 튄 불티를 털어낸 후에야 담당관은 혹 자신이 없을 때 뱀단지가 움직일까봐 철사와 종으로 간단한 경보 장치를 만 들어두었다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대단한 소동을 일으킨 뤼도파의 경우도 빼놓을 수 없다. 늙은 사어 해독자가 지병으로 사망한 후 뤼도파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에게 돈을 지급할 필요는 없다는 이유에서 새 사어 해독자를 채용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때문에 뱀단지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부 터 그들은 미친 듯이 사어를 해독할 줄 아는 자를 수소문했다. 만약 뤼도파 사람들이 제국 반대편의 아제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다 면 자신들의 경우와 비교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제의 사어 해독자 는 당분간은 후임자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는 팔팔한 나이였다. 지 나치게 팔팔한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지루함을 참기 어려워 다른 일 에 정신을 팔았던 사어 해독자는 갑자기 움직인 뱀단지를 황급히 열 어보고는 기겁했다. 그의 관리 소홀로 많은 뱀들이 죽은 탓에 사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아제 사람들은 그들의 사어 해독자를 나무에 매달 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이미 동면에 들어간 뱀들을 찾아 야산을 뒤 져야 했다. 그 움직임 때문에 생명을 구한 자들도 있었다. 자보로에서는 도상 연습에 열중하던 군인들이 갑자기 보고된 뱀단지의 이상 현상에 놀라 메헴 침공 계획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다행스 럽게도 같은 시각 메헴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도 자보로 침공 계획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보로와 메헴의 군인들처럼 운이 좋지 못 했던 자들도 있었다. 안체키르 평원에서 싸우고 있던 팔백 여명의 병 사들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나발칸이라는 이름에 자신을 보태기 위 해서는 나포츠와 발란카, 칸라크 정도의 세력은 되어야 한다는 판단 을 동시에 내렸던 피녹과 부누는 안체키르 평원에서 합병 작업에 전 력을 기울이던 도중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피녹과 부누의 병사들은 조금 전까지 적의 몸을 찌르던 칼을 늘어뜨린 채 넋빠진 얼 굴로 갑자기 친근하게 굴기 시작하는 자기들의 지휘관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참 우스운 일도 다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다니오. 말도 안되지요. 제가 전부터 당신을 존경했다는 것을 말했던가요? 예? 당신도 그렇다 고요? 이렇게 황공할 수가." 부누의 지휘관과 피녹의 지휘관은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 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느라 바빠 당혹한 부하들을 구제하 지 못했다. 그것이 일종의 기만전술이기를 애타게 바라던 병사들은 결국 티나한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전투 행위가 재개되기 어렵다는 것 을 인정했다. 그들은 깃발과 칼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는 빈 두 팔로 거대한 허무감을 포옹했다. 어떤 이는 기뻐하고, 어떤 이는 슬퍼하고, 어떤 이는 허무해했지만, 대부분은 혀가 어디 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놀란 가운데 제국 신 민들은 뱀단지를 통해 전해져오는 치천제의 사어를 숨죽여 바라보았 다. 짐이 돌아왔다. 짐이 돌아왔다. 짐이 돌아왔다. 세 시간 간격으로 세 번 반복. 그리고 침묵. 사람의 감정을 뒤흔드 는 화려한 명연설은커녕 구호나 잠언도 될 수 없는 평이한 말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 담백한 말은 6억 명의 사람들을 전율하게 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은 쓸 일이 없기에 사라졌을 때도 크게 놀라지 않았 던, 하지만 정말로 경이적인 힘을 고통스럽도록 상기시켰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전세계에 자신의 의지를 전할 수 있는 무시무 시한 힘. 상당히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그제서야 아라짓 제 국의 황제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들의 진정한 주인이 어떤 자인지를. 세 번째 사어가 전달된 후에는 알려진 모든 땅에서 가장 해가 늦게 지는 마기체에도 밤이 찾아들었다. 의도적인 시간 선택임이 분명하 다. 낮이 군중의 시간이면 밤은 개인의 시간이다. 낮이었다면 군중들 은 서로에게서 위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불면의 밤 속에 격리된 개인 들은 전전긍긍했다. 밤 외에도 그들의 기를 꺾는 요인은 많았다. 뱀단지는 고함을 지르 는 경우와 달리 상대방의 소재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제국의 대 부분 지역에서 사람들은 황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게 다가 북부에는 뱀부리미가 없기에 뱀단지의 전달은 일방적이다. 그들 은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같은 간단한 말조차 황제에게 되돌 려줄 수 없었다. 통고를 받을뿐 질문하거나 이쪽의 주장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은 황제의 소재 불명과 밤과 더불어 사람들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주눅들게 했다. 잔인한 밤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밤의 불문율에 따라 개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 리고 한계선 이남에서는 나가 정신억압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 다. 비록 밤에는 좀 둔해지긴 하지만 한계선 이남의 뱀부리미들은 권 력자들의 강요와 응원을 받으며 밤늦도록 황제에게 애타게 사어를 보 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지금 어 디에 계십니까?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겁니까? 반복합니다…… 대답은 없었다. 시모그라쥬공 팔디곤 토프탈은 피곤해하는 뱀부리미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뱀부리미가 그렇듯이 그녀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공작이 요 구하는 말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묵묵히 전달할 뿐 거기에 대 해 자신의 의견을 내놓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무익한 일을 계속해야 되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부정할 수 없었다. 공작은 손을 들었다. "이제 됐다. 물러가 쉬도록 해라." 뱀부리미는 '괜찮습니다. 더 할 수 있습니다.'라거나 '고맙습니다. 졸도할 참이었습니다.' 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그녀 만큼이나 지친 뱀들을 쓸어모아 단지 안에 담고는 뚜껑을 덮었다. 뱀 단지를 옆구리에 낀 뱀부리미는 공작에게 목례하고는 누각 아래로 내 려갔다. 공작은 누각 한쪽으로 걸어가 오른손으로 기둥을 짚고 섰다. 누각은 시모그라쥬 외곽의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고 게다가 공작이 있는 곳 은 3층인지라 팔디곤은 달빛에 물든 키보렌의 모습을 효연하게 볼 수 있었다. 시모그라쥬 주변에 있는 많은 소호들에서 물을 찾는 밤짐승 들의 울음, 그리고 휘영한 달빛 속을 부유하는 투명한 날개의 곤충 들. 공작이 있는 곳은 밀림과 도시가 만나는 접경지였고 그래서 양쪽 의 전혀 다른 밤이 뒤섞여 나타나고 있었다. "각하. 어찌하실 겁니까?" 듣는 것만으로 신경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조함과 불안, 그리고 불만과 긴장 때문에 대패질 하지 않은 목재마냥 꺼칠꺼칠한 그 목소리는 누각에 함께 앉아있던 아쉬존 토프탈의 것이었다. 팔디 곤은 뒤돌아 보지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각하!" "아쉬존. 조용하거라." "각하. 지금 각하에게는 망연해하는 것도 사치입니다. 각하의 의무 를 생각하십시오. 각하께서는 대호왕 폐하를 보호하셔야 합니다. 지 금 당장 의관을, 아니 무장을 갖추고 그 분을 찾아가셔야 합니다. 치 천제가 어디서 그 사어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황제는 지 금 당장 시모그라쥬로 쳐들어올 수 있는 곳에서 경고 삼아 사어를 보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금도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팔디곤은 헛웃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저 아이는 지금 상황에서 사모 페이에 대한 이야기가 어울린 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본 팔디곤은 아쉬존이 진심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쉬존에게 사모 페이는 할아버지의 도구가 아니라 그들 모두의 추대를 받는 위대한 영도자이며 그들 모두가 목 숨을 초개처럼 버려서라도 지켜야 하는 희망의 근원이니까. 팔디곤은 이 희극을 참기 어려웠다. 그는 몸을 돌려 손자를 노려보 았다. "집에 불이 났는데 신발이 탈까봐 걱정해야 된다는 거냐? 내 몸을 태워 신발을 구출할까?" 아쉬존은 촛대 옆에 정좌하여 앉은 채 분노 어린 표정으로 할아버지 를 노려보고 있었다. "폐하는…… 할아버지가 옥좌까지 신고 갈 신이었군요." "아니. 그것만은 아니지. 한 가지 가치가 더 있으니까." 팔디곤은 그 가치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존은 깊 이 생각할 것도 없이 팔디곤의 속셈을 깨달았다. "황제에게 대호왕 폐하를 넘겨주고 용서를 빌 작정이군요!" 팔디곤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아쉬존은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 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존경이 없다면 의리라도 생각해 주십시오. 각하를 위해 다시 세상 으로 나와주신 그 분에 대한 의리 말입니다!" "아쉬존. 네 순진한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 여자가 남을 위해 그랬 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황제가 사라지자마자 나타난 그 녀의 소행을 보지 못했느냐? 나는 그녀를 부른 적도 없다. 그녀가 먼 저 나를 찾아왔지. 그녀가 한 때는 영웅이었고 살아서 전설이 된 인 물이라는 것은 나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대 호왕은 이제 과거의 그녀가 아냐. 그녀는 천박한 기회주의자일 뿐이 야. 대장군을 구출한 것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렸느냐? 대호왕의 두억 시니들이었다." 아쉬존은 과거의 이야기에 입을 다물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바라보 는 손자를 보며 팔디곤은 분노를 강조해보았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 기는 해야 했다. "그녀는 나가 황제를, 자기 동포를 돕기 위해 대장군을 구출했다. 하지만 자신을 보호해줄 황제가 사라지자마자 사모 페이는 제풀에 겁 을 집어먹고는 내게 머리를 굽혔다. 의리를 생각하라고? 그런 여자에 게 줄 의리는 없다. 제발 철이 들거라. 아쉬존!" 팔디곤은 손자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붙잡았다. 아쉬존은 할아버지 의 손을 밀어내었지만 팔디곤은 다시 손자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 다. "생각해보거라. 그러면 알 수 있을 거다. 그 여자가 우리를 위해 무 슨 희생을 했느냐? 다시 왕이 된 것이 희생이냐? 토프탈 사람들이 차 가운 북부에서 죽어나갈 때 한계선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핑계 삼아 따뜻한 남쪽에서 호의호식한 것이 희생이냐? 아쉬존. 그런 것은 희생 이 아니지 않느냐? 그 여자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하다. 그 간사한 여자는 과거에 대장군을 구출했던 것을 빌미로 돌아온 황제에 게 용서를 구할 거다.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주저없이 우리 를 팔아넘기겠지. 자기가 우리에게 이용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그녀를 보호한다느니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지 말란 말이다. 가문을 생각하거라." 아쉬존은 규리하 가문도 팔디곤만큼 자주 가문을 말할지 궁금했다. 규리하 가문의 역사는 고 아라짓 왕국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하 지만 토프탈 가문의 역사는 30년도 되지 않았다. 팔디곤조차도 토프 탈이라는 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며, 아쉬존은 토프탈이라는 성 을 가지고 태어난 진짜 토프탈 가문 사람으로는 겨우 2대째다. 갑자기 아쉬존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군. 아 무도 인정해주지 않으니 더더욱 그렇게 가문에 목을 매는 것이군. 공 작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피지배자들 사이에서 홀로 공작이라고 주장 하는 것처럼. 항상 모든 것이 사라질까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겁 쟁이 늙은이. 당신은 나무가 된 자, 하늘로 올라간 자, 죽은 채 싸웠 던 자가 아니니까. 아쉬존은 와락 몸을 뺐다. 그 난폭한 동작에 팔디곤의 몸이 굳었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 로 아쉬존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쉬존." "맞습니다." "뭐라고?" "저를 맞게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쉬존입니다. 토프탈이 아 닙니다." 팔디곤은 관자놀이에 핏줄을 세운 채 손자를 바라보았다. 일찍 죽은 아들 대신 그를 이을 유일한 후계자가 자신은 토프탈이 아니라고 말 하고 있었다. "토프탈 가문이 사라질까봐 무서우셨지요." "사라져? 시모그라쥬 공작가가?" "시모그라쥬 공작가 같은 것은 없어요. 시모그라쥬 시민들의 첫 번 째 벗이 있을 뿐이죠! 그래요. 그렇군요. 공작으로는 안되니까 황제 였군요. 황가로 만들어두지 않으면 토프탈 가문이 사라질까봐 무서우 셨던 거죠? 왜냐 하면 토프탈 가문은 할아버지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거니까요.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를 황제로 만들어둘 생각이셨군 요." 팔디곤은 분기탱천하여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가 그 따위 허튼소리를 하더냐! 아니, 됐다. 사모 페이구나!" "폐하를 더 이상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닥쳐라! 더 이상 떠들지마! 경비병!" 누각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존은 계단쪽을 보고는 다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팔디곤은 허리의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고 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는 달빛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올라와서 아쉬존을 잡아라! 그리고 사모 페이를 붙잡아와! 도망칠 지도 모른다. 아니, 또다른 사람의 귀에 독언을 흘려넣을지도 모른 다! 내 손자를 망가뜨린 그 간악한 여자를 잡아와!" 아쉬존은 겁에 질렸다. 사모 페이에게 위해가 간다는 사실에 아쉬존 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닥에 놓여있던 촛대를 걷어찼다. 촛대는 계 단으로 굴러떨어졌다. 아래쪽에서 병사들의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 기막힌 표정으로 아쉬존을 보던 팔디곤은 손자가 난간 가까이 다가가 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쉬존! 안돼!" 그곳은 3층 누각이었다. 인간이 떨어졌다간 무사하기 어려운 높이였 다. 아쉬존 또한 아래를 보고는 흠칫하며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뒤 로 물러난 아쉬존이 자신을 바라보자 안도하던 팔디곤은 다시 노여움 을 느꼈다. "정신 나간 녀석. 무슨 짓이야! 떨어지면 죽는단 말이야. 거기 얌전 히 있어. 제발 어른스럽게……" 팔디곤은 말끝을 불분명하게 흐리고는 아쉬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쉬존의 표정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손자의 얼굴을 살피던 팔디곤 은 갑자기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촤라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칼을 뽑아들었 다. 앞으로 돌진하려던 아쉬존은 이미 칼을 뽑아들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곤 발을 멈췄다. 두 사람은 서로 칼을 겨눈 채 마주서게 되었다. 아쉬존은 할아버지의 재빠른 눈치에 혀를 찼다. "젠장." "젠장? 할아버지에게 칼을 겨누고는 할말이 그것뿐이냐!" 아쉬존은 그 말에 움찔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다치시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인질만 되어주세요." "이 놈, 이 놈! 이 놈이 뚫린 입이라고……!" 배신감과 격분 때문에 팔디곤의 칼이 부르르 떨렸다. 칼을 놓칠 것 같은 느낌에 두 손으로 그것을 부여잡긴 했지만 공작은 쉽사리 진정 하지 못했다. 토프탈 가문을 이어갈 손자였다. 황제가 될 손자였다. '내가 너를 황제로 만들어주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감히 내게 칼을 겨눠?' 팔디곤의 눈앞이 흐려졌다. 아쉬존이 촛대를 아래로 걷어차서 누각 위를 밝히고 있는 것은 새파란 달빛뿐이었다. 혼란스러워진 시야와 어둠 때문에 팔디곤은 손자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만약 아 쉬존이 달려들었다면 팔디곤은 제대로 반항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존은 달려들지 못했다. 어둠은 아쉬존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초가 있었다면 팔디곤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똑똑히 보였을 테고 그러면 아쉬존도 공격을 단행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둠은 팔디곤 의 무력한 상태를 감춰주고 있었다. 아쉬존은 자칫하면 그나 할아버 지 중 한 명이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사태까 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굴러떨어지는 촛대 때문 에 멈췄던 병사들이 계단을 올라왔다. 아쉬존은 결심했다. 아쉬존은 칼을 버렸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움찔하던 병사들이 곧 우르르 달려들 었다. 아쉬존은 할아버지에게 두 손을 내밀며 말하려 했지만 달려든 병사들 중엔 성격이 급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휘두른 주먹이 아쉬존 의 뺨을 강타했다. 아쉬존은 입을 움켜쥐며 옆으로 쓰러졌다. 곧 우 악스러운 손들이 쓰러진 그를 단단히 붙잡았다. 아쉬존은 입안 가득 히 피맛을 느끼며 외쳤다. "각하! 각하! 대호왕 폐하를 보호하십시오. 그러셔야 합니다!" 팔디곤은 어깨로 숨을 쉬며 병사들에게 짓눌려 있는 손자를 바라보 았다. 흐려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꿈틀거리는 검은 덩어리였지 만 손자의 간청은 똑똑히 들렸다. 그 말은 팔디곤을 미치게 만들었 다. '사과해야 한다. 용서해 달라고 말해야 한다! 너는 내게 칼을 겨누 었다!' 아쉬존은 사과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무게 때문에 헐떡이며 아쉬존 은 계속해서 사모 페이를 보호하라고 외쳤다. 팔디곤이 갈라지는 목 소리로 외쳤다. "그만해!" 아쉬존이 입을 다물었다. 심상치 않은 말에 당혹해하던 병사들도 정 신을 차려 시모그라쥬공을 바라보았다. "그 놈을 데려가서 자기 방에 가둬! 내가 허락할 때까지 거기서 나 오지 못하게 해라. 먹을 것도 주지마!" 병사들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쉬존을 일으켰다. 버둥거리는 아 쉬존을 힘겹게 끌고가는 병사들을 보다가 팔디곤이 다시 고함을 질렀 다. "그 놈을 가둬놓은 다음 사모 페이를 봍잡아와라!" "각하!" "사모 페이가 우리를 배신했다. 자기가 살기 위해 황제에게 우리를 팔았다." "거짓말이야! 믿지마. 저 자야말로 대호왕을 팔아 황제의 분노를 모 면할 작정이야! 저 말을 따르지마. 당신들은 대호왕을 지켜야 해! 누 가 위기에 빠진 북부를 구했는지 생각해! 그 때 저 자는 에시올 산맥 에서 다람쥐나 쫓고 있었어!" "북부를 구했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에게 황제가 없 어진 북부로 쳐들어가라고 부추긴 것은 누구였나? 당장 데려가!" 병사들은 두 명의 시모그라쥬공이 한 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두 명의 시모그라쥬공 중 팔디곤 토프탈이 명령권자라는 사실이었다. 혼란스러웠던 그들에겐 단순함이 절실했다. 그들은 공작의 말을 따르기 위해 아쉬존의 말을 무시하기 로 했다. 아쉬존은 처절한 고함을 질렀지만 그 고함으로는 자신을 구 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모도 구하기 힘들어 보였다. "사모. 슬픈가?" "사모. 슬픈가?" 사모 페이는 고개를 들어 갈바마리를 보았다. 갈바마리의 두 얼굴은 같은 근심을 담은 채 사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 동안 많은 놀라운 사람들을 만났지만 사모의 곁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함께 있었던 것은 머리가 둘 달린 두억시니였다. 사모는 그 사실을 우스워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갈바마리를 웃음의 소재로 삼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사모는 약간 주저하다가 자기 자신을 웃음 의 소재로 삼았다. 그건 웃을 만하다. 갈바마리 다음으로 그녀와 많 은 시간을 함께 한 것은 대호 마루나래였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인 뇌룡공 륜 페이는 아스화리탈과 함께 나무가 되어 있다. 그녀의 생애 전체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셋이 모두 대화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 은 확실히 웃기는 일이었다. 아니, 그 중 하나는 좀 어설프게나마 대 화가 가능하다. 사모가 말했다. "나는 괜찮아." 갈바마리는 고개를 돌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모는" "괜찮아." "우리도" "괜찮아." 갈바마리는 서로의 얼굴을 향해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모 는 자신에게 미소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녀에겐 그 비슷한 일이 필요했다. 그녀는 사모에게 다 괜찮으 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고 또한 사모에게서 그 말 을 듣고 싶었다. 갈바마리는 듣지 못했지만 사모는 그녀를 향해 건네어진 니름을 들 었다. [폐하. 지셀 수교위입니다. 잠시 뵈러 가도 되겠습니까?] 상당히 잘 감추고 있었지만 사모는 그 니름에서 불안감과 약간의 적 의를 읽어내었다. 좋은 일로 찾아오는 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사 모는 그들이 무슨 이유에서 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라.] 대답은 없었다. 사모는 그들이 찾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와 두 번째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대호에 대해 생각했다. 마루나래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는 방식으로 사모의 곁에서 떠났 다. 사모는 그 늙은 대호가 왜 모습을 감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마 루나래는 죽으러 그녀를 떠난 것이다. 홀로 고고히 죽을 시간이 다가 오자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사모와 함께 보냈기에 반쯤 사람이나 다 름없는 모습이 되었던 그 늙은 대호도 늙은 맹수로 돌아간 것이다. 마루나래가 사라진 이유를 짐작했기에 사모는 구태여 그 대호를 찾으 려 애쓰지 않았다. 마루나래가 임종을 지키게 해주었더라면 더 좋았 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조금 느꼈지만 사모는 그것이 대호 마루나래 의 방식일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덕분에 사모는 가장 소중한 세 사람의 죽음을 모두 보지 않게 되었 다. 마루나래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감추었다. 두억시니 갈바마리 는 도대체 죽기나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륜은…… 륜의 모습을 생각한 사모는 정신이 수천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을 느 꼈다. 아스화리탈과 함께 나무로 변한 그는 사모가 죽은 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그런 모습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사모는 자신의 뼈와 살이 흙먼지로 바뀐 후에도 하텐그라쥬의 외로운 나무로 남아있을 륜 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끔찍했다. '군령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륜. 네가 다시 사람으 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이 사람, 저 사람의 몸을 전전하며 영원히 기다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갈바마리가 두 개의 머리를 동시에 돌렸다.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은 것이다. 하지만 소리에 관심이 없는 사모는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 았다. '정말 그러고 싶었어.' 갈바마리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두 팔끝에 달린 털무더기 사이에서 길다란 뿔이 솟아나왔다. 사모는 갈바마리를 제지하듯 손을 들어올렸 다. 뿔은 다시 안으로 사라졌지만 갈바마리는 안정하지는 못했다. 그 리고 사모는 갈바마리를 진정시킬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륜. 정말 고통스러워.' 문이 벌컥 열렸을 때 사모는 반가움을 느꼈다. 그 덕분에 사모는 륜 에 대한 생각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사모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사이커를 빼든 채 걸어오는 나가 병사들을 마주보았다. 비나간 사람들은 황제의 귀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 다. 자신들과 많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흑사자군과 시모그 라쥬군의 동정에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가깝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 구하고 엔거 평원에서 벌어진 일은 얼마 있지 않아 비나간에도 전달 되었다. 황제가 자신의 부재 동안 일어난 시모그라쥬공의 행위를 용 서하지 않으리라는 상식적인 전망은 그 소식으로 인해 사실로 판명되 었다. 사실 다른 전망이 있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비나간 사 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확하게 말한다면 독행왕 지키멜 퍼스 의 행위에 대해 황제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전망할 수 없었다. 시모그라쥬군이 만약 비나간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그에 맞서 싸운 비나간은 당연히 정당한 자기 방어의 권리를 행사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나간이 자기 방어를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시모그라쥬 군은 남부의 많은 도시를 침략하고 북부로 올라와서는 엔거와 키탈저 를 점령했으며 유료도로당의 징수소들을 파괴하는 등 대단히 인상적 인 전과를 보여주었지만, 비나간에는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한 채 흑사 자군에게 쫓겨났다. 시모그라쥬군을 막기 위해 군사를 모은 지키멜의 행동은 명분을 상당히 깎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흑사자군의 출현을 예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지키멜의 군대 모집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남 아있다. 지키멜이 독행왕의 이름으로 군대를 모았다는 사실이 그것이 다. 칭왕은 칭황과 얼마나 다를까? 어떤 비나간인들은 황제가 아니니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했고 또다른 비나간인들은 황제든 왕이든 똑같 이 용서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비나간인들을 형식주의자와 실질주의 자로 나누는 기준이 만들어진 셈이다. 군대를 원활하게 모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왕명을 사용한 것이니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지키멜의 칭왕에 내포된 분리주의적 정신이 황제를 참을 수 없게 만들 거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비나간인 들을 현실주의자와 원칙주의자로 구분하는 선이 있었다. 뭉뚱그려본 다면 결국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다. 지키멜 퍼스는 자신이 낙관주의자여야 하는지 비관주의자여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비관주의자가 되려면 비관적 미래에 대응할 수단을 준비해야 될 테지만 그녀에겐 흑사자군이나 엔거 평원에 나타났다는 정체 모를 군세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아무 대응책이 없다면 차라 리 낙관주의자가 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하지만 황제 는 그녀가 낙관주의를 즐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수한 레콘들이 비나간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은 지나치게 늦게 도착했다. 레콘들은 자신들의 엄청난 속도로 풍문의 속도를 앞지르며 달려왔다. 그들이 사라티본 부대이며 스카리 빌파의 지휘를 받고 있 다는 사실이 독행왕에게 전달되었을 때는 이미 그들이 비나간까지 하 루 거리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지키멜의 입장에서는 '내일 스카리 빌 파와 레콘들이 옵니다.'라는 보고밖에 받지 못한 셈이다. 지키멜은 가장 중요한 것, 즉 그들이 왜 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지키멜은 한 시간 동안 자기 방에 틀어박혀 고민한 다음 밖으로 나 왔다. 그녀의 명령서를 받은 전령이 파기보릭성으로 질주했다. 파기 보릭성에 주둔하고 있던 비나간군은 상대방에게 어떤 적대적 행동도 하지 말 것이며 만약 상대가 공격을 가하면 즉각 항복하라는 지키멜 의 명령서를 받고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 중 정직한 이들은 자신의 안도감을 숨기지 않았다. 파기보릭성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야영하고 있는 사라티본 부대의 모습은 그 어떤 저항도 분쇄할 수 있 는 강력한 힘을 형상화해놓은 듯한 것이었다. 그 병력에 맞서 저항한 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다음 날 아침 파기보릭성으로 진군한 스카리 빌파도 상대편이 아무 런 저항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그가 받은 명령은 비 나간인을 학살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키멜 퍼스를 체포하고 비나간을 장악하는 것이므로 스카리는 살육을 피하기로 했다. 팔리탐 지소어도 그 결정에 동의했다. 스카리는 그 동의가 정확히 누구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태위의 동의인가, 아니면 팔리탐의 동의인가?" 두 사람은 사라티본 부대를 뒤에 둔 채 파기보릭성을 바라보고 있었 다. 팔리탐은 말고삐를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다. "각하. 태위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각하 곁에 있을 때 저는 언제나 팔리탐입니다." "아버지는 네녀석을 신뢰했고 사라티본 부대의 육성을 맡겼어. 그런 데 네가 발케네 공략을 도울 태위를 속에 품고 있었다니……" 스카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팔리탐은 나 때문에 살게 된 것 아니냐 고 말하지 않았지만 스카리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팔리탐은 황제의 태위와 협상하여 원래 패망하기로 되어 있던 빌파 가문을 구해내었을 뿐만 아니라 락토 빌파의 암살을 눈감아줌으로써 스카리를 보호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카리는 팔리탐을 비난하기 어려 웠다. 하지만 하릴없이 분노를 참는 것은 스카리의 성격에 맞는 일이 라고 할 수 없었다. 파기보릭성을 노려보던 스카리는 자신이 분노해 야 하는 이유를 열심히 궁리했다. 곧 그것이 떠올랐다. '저 놈은 나의 부냐를 황제에게 바쳤어.' 모순된 말이지만 스카리는 분노할 수 있게 되어서 환호하고 싶었다. 팔리탐 지소어는 부냐를 또다시 황제의 수인으로 만들었다. 스카리가 팔리탐에게 어떤 은혜를 입었건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부냐 헨로는 스카리에게 자신보다 더 소중하므로. 스카리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담아 팔리탐을 노려보고는 말했다. "1개 대대를 뒤에 남겨두고 후작궁으로 가자. 혹 뒤를 빠져나와 배 후를 공격할지도 모르니까." 그 명령은 팔리탐을 통해 다시 힌치오에게 전달되었다. 힌치오는 야 키보로가 이끄는 3대대를 뒤에 남겨두었다. 사라티본 부대가 비나간 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지만 파기보릭성의 비나간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뒤를 흘깃 바라본 팔리탐이 스카리에게 말했다. "후작은 저항을 포기했나 보군요. 비나간인들을 보호하려면 그것이 옳은 결정입니다." 스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죽을 때까지, 아니 그 후에도 증오할 거다. 스카리의 굳은 얼굴을 본 팔리탐은 가면 뒤에서 쓰게 웃고는 입을 닫았다. 척후병으로 나갔던 병사가 돌아와서 한 보고도 팔리탐의 예상과 같 았다. 척후병은 시내 어디에도 저항의 흔적이 없다고 보고했다. 보고 를 들은 스카리는 사라티본 부대와 함께 비나간 시내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팔리탐은 레콘들 틈에 있는 인간은 두드러지게 잘 보일 것 이고 따라서 저격의 대상이 되기도 쉬우니만큼 레콘들만 들여보내자 고 했지만 스카리는 그런 암습은 없을 거라고 주장했다. "비나간인들은 사라티본 부대의 보복을 받을 일을 하지 않을걸?" 팔리탐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카리는 사라티본 부 대로 하여금 4열 종대로 뒤를 따르게 한 채 전투 중의 지휘관이라면 절대로 서지 않는 자리, 즉 행렬의 가장 앞쪽에서 말을 걷게 했다. 행군이 아니라 개선식 같은 그 모습에 팔리탐은 가면 뒤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팔리탐은 혹여나 스카리에게 기습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힌치오와 함께 스카리의 바로 뒤편에서 걸었다. 비나간 시내 어디에서도 저항은 없었다. 물론 환영객도 없었다. 그 들이 걸어가는 거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문틈이나 창문틈을 통해, 혹은 어두운 골목 언저리에 숨은 채 그들을 훔쳐보는 많은 시 선은 느낄 수 있었다. 팔리탐은 다시 저격에 대한 걱정으로 신경이 곤두섰지만 스카리 빌파는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없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조금 전 그 때문에 한숨을 내쉬었음에도 불구하 고 팔리탐은 스카리의 그런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모습에 혀를 내두 르고 싶었다. 팔리탐은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몇 사람을 후작궁에 먼저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스카리는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또 걱정인가? 바깥의 성에서도, 시내에서도 하지 않았던 저항을 후 작궁에서 한다고?" "방문 예고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럴 필요 없어. 후작궁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것은 나다." "문 뒤편에……" "아무도 없을걸?" 스카리의 말대로였다. 후작궁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팔리탐은 어디서도 매복의 흔적 을 찾지 못했고 그런 감에서는 그보다 훨씬 우수한 힌치오도 수상한 느낌은 없다고 말했다. 양쪽으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 자 그들은 처음으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비나간인을 보게 되었다. 비무장이 분명한 모습으로 포석 깔린 마당 한가운데 서있던 청년은 말을 타고 최선두에서 걸어오는 스카리에게 허리를 꾸벅했다. 스카리 는 손을 들었고 힌치오는 뒤를 따라는 병사들을 정지시켰다. 허리를 숙였던 청년이 말했다. "팩스벗 졸다비라고 합니다. 독행왕 폐하께 안내하겠습니다." 스카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독행왕이 아닌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라 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마친 팩스벗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를 다시 붙잡아 세워 호칭을 정정하는 것도 좀 우스꽝스럽다고 생 각한 스카리는 행동으로 팩스벗의 생각을 바꿔주겠다고 생각했다. 그 는 팩스벗의 뒤를 따라 말을 움직였고 팔리탐 지소어와 힌치오, 그리 고 사라티본 부대도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궁전 안에서도 환영객 같은 사람은 볼 수 없었지만 팩스벗은 호의적 으로 행동했다. 그는 많은 레콘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넓은 길 을 골라 그들을 안내했다. 그 뒤를 따라가면서 팔리탐은 마지막 걱정 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후작궁 내부의 지리를 잘 모르는 그 들을 좁은 곳에 가둬두고 소화차로 공격해온다는 가능성에 대해 걱정 하고 있었다. 그런 공격으로 사라티본 부대를 곤경에 빠트리기는 어 렵겠지만 스카리 빌파에게 위해가 갈지도 모르는 혼란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팩스벗은 매복이 힘든 개방된 장소를 통해 그들 을 안내했다. 곧 그들은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마당에 도착했 다. 그 담은 레콘에겐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는 것이기에 팔리탐은 걱정하지 않았다. 팩스벗은 말없이 마당 맞은편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팩스벗의 손 짓을 따라 이층 노대를 본 스카리는 그곳에 서있는 젊은 여자를 발견 했다. 잠깐 동안 스카리는 그녀가 정말 지키멜 퍼스일까 의심했다. 그녀는 단순하게 뒤로 땋아내린 머리에 활동적이라는 것이 유일한 호 평이 될 수 있는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왕으로 자칭한 자가 입을 만한 옷은 아니었다. 스카리는 팩스벗에게 다시 묻는 시선을 보냈고 그러자 팩스벗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리는 혀를 찼다. "나라면 최고로 화려하게 입었을 텐데. 패배도 위엄있게 맞이해야 지." 팔리탐이 대답했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 저렇게 입고 있나 보지요." "그런 것치곤 자세가 불량하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어야지 노대 에서 내려다보다니. 확인해 보지." 스카리는 말을 몰아 앞으로 두어 걸음 나갔다. 노대에 있는 여자는 한손을 난간에 얹은 채 고요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얼 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떨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다. 그대는 누구인가?" 여자는 약간 지체한 다음 조용히 말했다. "짐은 독행왕 지키멜 퍼스다." 용서를 구하는 말투라고 할 수 없는 지키멜의 말을 듣자 스카리는 이맛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 때 스카리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속삭 임을 들었다. "힌치오. 혹 저 여자가 뛰어내리면 붙잡으시오." 팔리탐의 속삭임을 들은 스카리는 새로운 관점으로 지키멜의 위치를 바라보았다. 노대는 단순히 내려다보기 좋은 높이만은 아니었다. 스 카리는 노대에서 바닥까지의 높이를 가늠해보았고, 그리고 포석이 단 단하게 깔린 바닥의 단단함에 대해 짐작해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조 를 약간 부드럽게 바꿨다.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그 호칭에 대해 불쾌해하는 분이 있다. 지키 멜." "황제 폐하 말인가?" "그렇다. 나는 치천제 폐하의 명에 따라 그대를 체포하러 왔다. 부 탁이니 귀족답게 행동하길 바란다." 지키멜은 무거운 표정으로 스카리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후 난간에 얹어둔 지키멜의 팔이 천천히 올라왔다. 항복을 표시하는 것치곤 팔 하나가 부족하다. 그녀가 들어올린 것은 오른팔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팔은 끝까지 올라가지도 않았다. 그 것은 위로 올라가는 대신 스카리를 향해 똑바로 뻗었다. 의아한 표정 으로 바라보는 스카리를 향해 독행왕은 주먹을 쥐어보였다. 그리고 독행왕은 구부린 검지와 중지 사이로 엄지를 내밀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2. 무거운 것과 무서운 것 (4) 2004/10/04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2-4 관련자료:없음 [4934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04 06:47 조회:46 피를 마시는 새 32. 무거운 것과 무서운 것 - 4 힌치오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스카리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 해 그런 것은 아니다. 만약 웃고 싶었다면 힌치오는 스카리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하지 않고 가가대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힌치오는 웃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스카리가 먼저 웃었기 때문이다. 안장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등자를 꽉 짓밟은 채 스카리는 상 체를 앞뒤로 흔들며 숨막히게 웃었다. 힌치오뿐만 아니라 팔리탐도, 그리고 사라티본 부대의 모든 레콘들도 스카리의 반응에 당황하여 침 묵했기 때문에 그 웃음 소리는 꽤나 또렷하게 들렸다. 지키멜은 그런 스카리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끌어당겨 허리에 얹었다. 한참을 웃고 난 스카리는 거친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고는 눈 주위 를 닦았다. 안정하게 된 스카리는 지키멜을 바라보며 말했다. "왼손잡이가 아니라면, 왼손으로 밥 먹는 법을 연습해야 할 거다. 지키멜." 허리를 짚고 있던 지키멜의 오른쪽 손목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꿈틀했다. 지키멜은 자신의 손목에 화를 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웃은 것 가지고 뭐라 할 수 없겠군. 난폭한 발케네놈. 스카리는 맑은 미소를 지었다. "잘리고 싶은 것 더 없어?" 지키멜은 심호흡을 하고는 배에 힘을 꽉 주었다. "……혀도 취급하나?" "다른 사람이 씹던 음식 찌꺼기 묻어있는 것 만지고 싶지는 않은데. 한 번 놀려봐. 들어본 다음에 결정하지." "너는 멍청한 개자식이다. 스카리 빌파." "좋은 시작이야." 스카리는 미소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지키멜은 난간을 짚 은 채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무슨 이유로 황제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상 관 없어. 간식거리 삼아 지성을 씹어먹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을 해 봐. 짐이 들은 소문의 반이라도 사실이라면 엔거 평원에 치천제가 타 고 나타난 그 물건은 유사 이래 비교할 것이 없는 대량 파괴 병기 야." 스카리는 그게 어쨌다는 거냐는 표정을 돌려주었다. 가슴을 쥐어뜯 고 싶은 기분을 느끼던 지키멜은 스카리의 뒤편에 도열한 수천의 레 콘들을 보았다. 지키멜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스카리 빌파는 유 사 이래 비교할 부대가 없는 최강 부대의 소유자다. '비나간에 도대체 무슨 저주가 내렸기에 이런 작자들만 찾아오는 거 지? 흑사자군을 보고 놀란 심장도 아직 진정시키지 못했는데. 어디에 도 없는 신이여. 왜 이렇게 끔찍한 힘을 가진 자들이 사람이 사는 땅 위를 횡행하는 겁니까?' "그래. 너도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군. 하지만 네 경우에 비 춰 황제를 해석하지는 마. 스카리. 황제는 너와 달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황제가 왜 대량 파괴병기를 가져야 하지? 공식적으로 황제의 적은 도시연합이야. 하지만 제국에는 이백만 제국군이 있어. 나가들이 절 대로 넘어올 수 없는 한계선도 있지. 황제는 도시연합에 대비해서 그 런 것을 만들 필요는 없었어. 황제가 누구에게 쓰려고 그런 무서운 것을 만들었는지 생각해봐. 황제의 적이 누구지?" 팔리탐 지소어는 가면 뒤에서 얼굴을 꿈틀거렸다. 말리를 보기 전이었다면 팔리탐은 지키멜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했을 것이다. 황제의 적은 분리주의자와 서약지지파, 그리고 언제나 그녀 에게 불손한 발케네였다. 황제는 첫째와 둘째 적은 이미 분쇄했다. 쥐딤에서는 분리주의를 격퇴했고 규리하에서는 서약지지파를 고사시 켰다. 그 위업을 놓고 볼 때 그녀가 마지막 적 또한 간단히 물리칠 거라 판단한 팔리탐은 빌파 가문이라도 살려내기 위해 태위의 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말리를 목격한 지금 지키멜의 질문을 듣자 팔리탐은 혼란을 느꼈다. 말리는 쥐딤에서도, 규리하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황제만 을 위한 무기가 황제의 적을 쳐부수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발케네 진공 당시에도 말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토록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제작한 병기로 대비해야 하는 적은 도대 체 누구인가? "짐이 대답해주지. 황제의 적은 제국이다." 지키멜의 명쾌한 말에 팔리탐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때 갑 작스럽게 그의 입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의 내부에 있는 군령 중 하나가 갑자기 입을 사용한 것이다. 레이헬 라보 태위가 가면 안쪽에서 속삭였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 처녀로군." 스카리는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지키멜을 바라보았다. 거리 가 멀었지만 지키멜은 스카리의 눈에 떠오른 호기심을 볼 수 있었다. 지키멜은 열렬하게 말했다. "그리미 마케로우라는 천재가 자신의 천재성을 극한으로 발휘하여 억지로 만들어놓은 아라짓 제국은 결코 그녀 없이는 성립할 수 없어. 황제와 제국 정부는 그것을 부정하겠지만, 사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선황의 뒤를 이은 치천제 자신이야. 짐은 하이스 대 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래서 아라짓 제국의 법률은 원시제 재위 12년 동안 다 만들어졌고 그 이후로는 한 가지도 새로 만들어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법률 외에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야. 치천제 와 제국 정부가 사소한 것 외에 괄목할 만한 변경을 보여준 적이 있 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어. 당연하지. 그들은 결코 천재의 작품을 개량할 수 없어. 그래서 그들은 제국을……" "피를 마시는 새로 만들었다고?" 팔리탐과 힌치오는 지금까지 지키멜에게 보내던 주의를 스카리에게 옮겼다. 키탈저 사냥꾼의 후예로 자부하는 자들의 지배자이기에 그 이야기를 알고 있던 지키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키탈저 사냥꾼의 옛이야기를 알아? 좋은 비유군." "망부께서 그러셨지. 원시제의 위대한 작품은 피를 마시는 새가 되 었다고." "암살공이? 놀랍군. 암살공의 말이 맞아. 치천제는 자신이 원시제의 아라짓 제국을 도저히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래서 치천제는 처음부터 그것을 포기했어. 대신 황제는 재위 20년 동안 무 기만 만들었어." 팔리탐은 다시 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말리의 냉동실에 누워있는 아라짓 전사들은 치천제의 심장 적출식 때 모집된 자들이 다. 즉 치천제가 황위에 등극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자신 만의 병력을 모은 일인 것이다.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엔거 평원에 나타난 그 하늘치야. 왜 그런 무기를 만들었을까?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제국이 바로 그녀의 적이 기 때문이야. 그래서 제국을 부서지게 만드는 요인을 계속 공격해야 하지. 하지만 그 요인들도 제국이야. 너는 제국의 적을 돕고 있는 거 야! 제국의 적은 도시연합이 아니다. 치천제야말로 제국의 적이다!" 단숨에 가슴 속의 말을 토해놓은 지키멜은 숨을 몰아쉬며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안장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키멜이 격한 긴장감 때문에 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을 때 스카리가 손을 들었다. 짝, 짝, 짝. 스카리는 박수를 쳤다. 지키멜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팔리탐과 힌치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던 팩스벗과 사라티 본 부대의 레콘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가 말했다. "연습 잘 끝냈나?" "연습이라고?" "나한테 연습해봤으면 이제 황제에게 가서 말해. 내가 데려다주지." 지키멜은 따귀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너는 패배자야. 지키멜 퍼스." 스카리는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틀림없이 굉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 사상은 네 패배를 조 금도 바꾸지 못해. 너는 약해. 너에겐 힘이 없어. 더 영리해서 다른 멍청한 자들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사람으로서 패배하고 싶다면 그렇 게 해. 상관 없으니까. 한 가지 알려줄까? 자기 영리함을 주장하는 대신 입 꽉 다문 채 칼날을 갈아두는 녀석이 더 무섭고 신경쓰이지. 자기가 옳고 바르다고 주장하는 약자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어. 이봐. 네 사상을 말하고 싶다면 이긴 다음에 하라고." 지키멜은 턱을 미세하게 떨며 스카리를 노려보았다. 조금 후 지키멜 은 침을 퇘 뱉고는 노대 저편으로 사라졌다. 스카리는 히죽 웃었다. "자살도 못할 주제에. 힌치오. 들어가서……" 스카리는 끝까지 명령하지 못했다. 맹렬한 진동음이 들려왔기 때문 이다. 프라라라락! 하는 거친 소리에 팔리탐은 움찔했다. 그 소리에서는 가공할 힘이 느껴졌다. 그는 스카리를 보호하기 위해 말을 앞으로 몰 았다. 그 때 스카리가 말했다. "설마?" 한 때 하늘누리의 경비병이었던 스카리에게 그 소리는 익숙했다. 하 늘누리에 있을 때 스카리는 때에 따라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소리 를 들었다. 하늘누리를 떠나거나 돌아오는 그 맹렬한 소리를. 그 때 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노대를 박차고 날아오른 것은 거대한 딱정벌레였다. 비록 무엇이 나타날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스카리는 놀라고 말았다. 노대에서 뛰쳐나온 딱정벌레는 그가 하늘누리에서 지겹게 보았던 것 과는 종이 다른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거대했다. 그리고 딱정벌레를 몰고 있는 갑충사 또한 대단한 체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크기 차이에 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히 딱정벌레였다. 스카리는 갑충사의 뒤편에 있는 지키멜을 보고는 포효하듯 외쳤다. "힌치오! 잡아!" 힌치오는 이쑤시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딱정벌레가 내려올 경우에 대비한 방어자세였다. 스카리가 바라는 것은 딱정벌레 가 아직 낮은 곳에 있을 때 힌치오가 뛰어올라 그것을 격추시키는 것 이었기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는 힌치오의 모습은 그를 격분시켰다. 스카리가 힌치오를 꾸짖으려 할 때 새로운 진동음, 딱정벌레 날개 소 리가 들렸다. 노대 쪽을 본 스카리는 두 번째 딱정벌레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 다. 스카리는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이 외쳤다. "힌치오!" 하지만 힌치오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 동안 딱정벌레들은 레 콘의 도약으로 닿기에는 어림도 없는 높이까지 치솟아올랐다. 분노 속에서 딱정벌레의 상승을 보던 스카리는 말을 몰아 힌치오에게 달려 갔다. "이 겁쟁이 녀석!" 힌치오의 벼슬이 뻣뻣해졌다. 말 위에 앉아있어도 올려다 봐야 하는 그 모습에 스카리는 약간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분노는 아직 사그라 들지 않았다. 그가 힌치오의 나약함에 대한 폭언을 펼쳐놓으려 할 때 팔리탐이 다가와 주군의 팔을 쥐었다. "각하. 그러지 마십시오." "이 놈은 딱정벌레가 내려올까봐 겁을 집어먹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 어!" "아닙니다. 힌치오는 일부러 공격하지 않은 겁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힌치오는 불만스럽게 부리를 탁 부딪혔다. 팔리탐은 차근차근 설명 하듯이 말했다. "도깨비들 앞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각하." "도깨비? 도깨비라니, 무슨 소리를…… 도깨비라고?" 스카리는 황급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남달리 거대한 그 딱정벌레 위에는 역시 대단한 체구의 갑충사가 있 었다. 아냐, 그건 갑충사가 아니라 대단한 체구의 도깨비였나? "도깨비였어?" "도깨비였습니다. 그리고 저 크기로 보니 딱정벌레를 가장 잘 키워 내는 곳의 딱정벌레인가 보군요." 최고의 딱정벌레를 키워내는 곳이 어디인지는 누구나 안다. 스카리 는 어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즈믄누리?" 즈믄누리의 강한 딱정벌레들은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지키멜 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 며 그녀는 앞에 있는 도깨비가 자신이 태우고 있는 승객이 약한 인간 이라는 것을 까먹고는 도깨비나 견딜 수 있는 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도깨비는 인간 승객에 대해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지키멜 이 기절한 채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을 때 딱정벌레의 상승 속도가 느려져다. 그리고 딱정벌레는 고속 상승을 그대로 전진 으로 바꾸었다. 지키멜은 도깨비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안도했다. 문 득 지키멜은 시오크를 떠올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마자 지키멜은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이미 600미터 고도에 도달해 있었다. 조그맣게 보이 는 지상의 사물들과 쑥 내려간 지평선을, 지키멜은 똑바로 볼 수 없 었다. 지키멜은 도깨비의 허리를 더욱 거세게 움켜쥐었다. 결국 도깨비가 참지 못했다. 도깨비는 지키멜의 손등을 툭툭 쳐서 주의를 환기시키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 만 지키멜은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양쪽에서 폭풍처럼 펄럭이는 날개의 소음 때문에 대화는 불가능해다. 지키멜은 도깨비의 입모양을 읽어보려다가 포기하는 스스로 말했다. '소리를 좀 줄일 수 없어?' 지키멜의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을 읽는 일에 능숙한 도 깨비는 곧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도깨비는 딱정벌레에게 몇 가지 지 시를 보냈다. 그것이 무슨 지시일지 궁금해하던 지키멜은 딱정벌레가 갑자기 날개를 접었을 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악!" 지키멜은 자신의 비명에 놀랐다. 그녀는 다시 좌우를 돌아보았다. 딱정벌레가 접은 것은 속날개 뿐이었다. 여전히 펼쳐놓은 겉날개를 바람에 실어 딱정벌레는 활강 비행을 하고 있었다. 도깨비가 추락 명 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지키멜은 안도하며 말했다. "기유 구마리!" "예. 각하." "겉날개만으로, 날아도, 안전한 건가?" 얼굴을 때리는 바람 때문에 지키멜은 상당히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기유는 딱정벌레의 등이 아니라 응접실에라도 앉아있는 것처럼 편안 하게 말했다. "물론이지요. 바람이 썩 괜찮은 편입니다. 각하. 잠깐 동안은 활강 비행만으로도 꽤 멀리 갈 수 있을 겁니다." "어, 시오크는. 잘 따라오고, 있어?" 고개만 조금 돌리면 볼 수 있다고 말하려던 기유는 곧 지키멜의 상 태를 깨달았다. 어쨌든 이것은 지키멜이 처음 경험하는 비행이었다. 그녀는 기유의 등 외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기유는 그녀를 대신 하여 뒤쪽을 살폈다. 그곳에서는 시오크를 태운 또다른 도깨비가 역 시 활강 비행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예. 잘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하. 제 허리를 단단히 붙잡으시 는 것은 저도 바라마지 않는 일입니다만 그렇게 꼬집으시면 제가 힘 듭니다." "아, 미안해." "제 허리띠를 붙잡으세요. 그러면 될 겁니다. 예. 각하. 손을 넣 고…… 좋습니다. 안심되시지요?" 지키멜은 기유의 명령대로 했다. 안심이 되기는커녕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키멜은 그런 불평을 늘어놓을 여유가 없었다. 기유가 말 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세요. 각하. 기분이 아주 좋을 겁니다." 지키멜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이마로 기유의 등을 눌렀다. "괜찮다면, 그 기분 좋은 일은, 조금 있다가, 시도하지. 계속 이렇 게, 조용하게, 날 수 있나?" "아니오. 조금 후엔 다시 속날개를 꺼내야 할 겁니다. 그러면 아까 경험하셨던 것처럼 굉장히 시끄러워집니다." "그래? 알겠어. 그럼 말할 수 있을 때, 우리 목적지를, 말해둬야겠 군." "저도 그래주시길 바랍니다. 즈믄누리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는 데,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규리하로." "규리하요?" "그래.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규리하에 있잖아." 지키멜은 기유가 왜 무사장이 필요한 거냐고 물을 거라 생각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몇 가지 준비해두었지만 지키멜은 그 중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기유는 질문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규리하로 모시겠습니다." 지키멜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즈믄누리에서 보내어준 도깨비들은 원래 몽화각의 도깨비였다. 또한 지키멜은 몽화 각의 도깨비들은 질문보다는 관찰을 즐긴다는 것도, 그래서 기유가 관찰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지키멜의 설명을 일부러라도 막았을 거 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기유는 상황을 이렇게 저렇게 추리하며 맛볼 즐거움을 기대하며 기뻐했다. "단단히 붙잡으세요. 다시 속날개 폅니다." 또다시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지키멜은 자신의 손이 두 개라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그 손으로 기유의 허리띠를 붙잡고 있었기에 지키멜은 귀를 막을 수가 없었다. 듣다 보면 위아랫 니가 딱딱딱 마주치는 굉음을 들으며 지키멜은 도깨비들이 한 번 날 아오르면 평균 몇 시간 동안 비행하는지에 대해 애타게 궁금해 했다. 규리하의 하얀 하늘이 조금씩 부서져내렸다. 첫눈이었다. 규리하성에 조금씩 새치가 늘어나는 시간은 고요했다. 눈이 내리는 날은 고요하다. 그래서 규리하성의 객사 복도를 따라 걷는 파라말 아 이솔의 발소리는 약간 크게 들렸다. 파라말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자꾸만 발을 멈춰서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목적지 가 멀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그 걸음은 오래 계속 되지 않았다. 멈춰섰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파라말은 자신이 목적지를 지나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 으며 문을 열었다. 방안에서는 벽난로에서 들려오는 자작자작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벽 난로 가까운 곳의 탁자에서는 사라말 아이솔이 책을 읽고 있었다. 사 라말은 고개도 들지 않았고 그런 것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파라말 은 곧장 형에게 다가갔다. 사라말은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집중력으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 다. 그는 싱긋 웃다가 갑자기 미간을 찡그렸고 이를 부득부득 갈다가 갑자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탁자 아래에서는 그의 두 다리가 위아 래로 들썩거리고 있었고 탁자 위에 얹어둔 왼손은 계속해서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형에게 가까이 다가간 파라말은 사라말의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제기랄, 안돼! 그래, 좋았어. 힘을 내. 아냐. 그게 아냐! 말도 안 돼! 으으음. 오오, 오오! 느껴진다. 느껴져. 그거야…… 억? 이런 세 상에!" 파라말은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그렇게 재미있게 보나 하는 기분으 로 사라말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라말이 보고 있는 것 이 수학책이라는 것을 알고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분에 머리 끝까 지 빠져들었다. 파라말은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사라말의 곁을 떠난 다음 탁자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형의 맞은편에 앉은 파라말은 헛기 침을 했다. 사라말이 고개를 들었다. "응?" "주인공은 어떤 처지에 빠져 있습니까?" "악랄한 변수들이 더 큰 악의 실현을 위해 마침내 연합에 성공했다. 삼차항의 질풍 같은 공격 앞에서 인수분해를 자신할 수 없는 주인공 의 운명은 바야흐로 풍전등화다." 당황한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대답하는 사라말 때문에 파라말이 오 히려 당황했다. 그래서 그는 그 말을 무시한 채 본론을 꺼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형님?" "오른쪽으로 세 번 돌린 다음 붉은 색을 칠해라. 그리고 왼쪽 눈을 감은 채 힘껏 걷어차." 파라말은 공포에 빠진 표정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충격적인 소 식 때문에 형이 정신 이상을 일으켰다는 가설을 수용하려던 파라말은 문득 자신의 가설에 포함된 중대한 실수를 깨달았다. 그의 형은 원래 미쳐있었다…… 자신의 생각에 피식 웃으며 안정을 되찾은 파라말은 사라말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주어를 빼먹어서 죄송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 까?" 사라말은 아쉬운 표정으로 책을 들여다보다가 서표를 끼워놓고는 책 을 덮었다. 다음 대목이 궁금해서 못견디겠다고 말하는 듯한 그 동작 을 보며 파라말은 다시 상당한 위화감을 맛봐야 했다. 사라말은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동생을 바라보았다. "점심으로 뭘 먹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은 아닌 것 같군."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우리가 목격했던 그 엄청난 충돌에도 불구하고 하늘누리는 무사했 던 모양입니다. 하늘치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이 해한다 하더라도 그 위에 있는 하늘누리가 그런 충격을 어떻게 이겨 내었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어쨌든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그 분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라말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봉급이 많이 연체되었구나." "그런 문제가 아닌데요." "너 나 몰래 받았냐?" "그만." "알았다." 사라말은 두 손을 모아 양손의 손가락들을 차례로 붙였다 뗐다 하면 서 생각에 잠겼다. 곧 사라말이 말했다. "파라말. 누군가가 네 등에 제16대 아라짓 국왕 정력왕이라고 써놓 았을지도 모르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물론 너는 그걸 자랑스럽게 보 여주고 싶어할지도 모르지만 나를 위해 잠시 민망한 척해 다오." "그거 진짜로 민망한데요." "고마워. 그런 척해 줘서. 어디 불편하냐? 괜찮다면 계속하지. 문제 는 그 글이 정말 쓰여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는지 네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경우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장소는 옷 을 벗을 수 없는 대로. 물론 글을 읽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한낮. 그 리고 행인들 모두가 문맹자일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네겐 껴 입을 수 있는 겉옷은 없으며 몸을 숨길 수 있는 가마 또한 없고 게다 가……" "예. 예. 글이 쓰여 있다면 누구나 그 글을 볼 수 있단 말이지요? 되도록 사람들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집에 가야겠군 요." "등에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잖냐." "하지만 쓰여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지?" "예." "안 간다." "집으로 안 간다고요?" "폐하께 안 간다." 파라말은 자신에게 정신적 공황의 증후가 나타나는지 관찰했다. 고 맙게도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 질문과 우리들의 거취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 까?" 사라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창쪽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오래 전에 고백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뭐가요?" 사라말은 대답 대신 덧창을 열었다. 찬 바람 때문에 파라말은 추위 를 느꼈다. 그는 벽난로로 다가가 장작을 집어들었다. 사라말은 고개 를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찾는 것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고개를 자꾸 내밀던 사 라말은 자신이 자살 기도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몸 을 뒤로 뺐다. 사라말은 고함을 빽 질렀다. "나 잡아봐라!" 파라말은 사라말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장작을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장작이 불티를 팍 피어올렸을 때 바깥에서 거대한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쿵. 고개를 돌린 파라말은 세상에서 가장 큰 부엉이처럼 창턱에 앉아 있는 아트밀을 보게 되었다. 아트밀과 그의 철극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안으로 들어선 아트밀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에서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아트밀은 의아한 눈으로 사라말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사라말?" 사라말은 탁자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아트밀의 다리 부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트밀.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그게 뭔데?" "당신은 정신억압을 당했습니다." 파라말은 놀라지 않았다. 사람을 정신억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니 사라말은 필경 또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파라말 은 그것이 어떤 농담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사라말의 말을 들으면서 파라말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빠져나갔다. "정신억압을 통해 당신에겐 사라말 아이솔을 따라가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력한 욕구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얼어붙은 바다 위를 걷고 시냇물을 건너면서까지 나를 따라왔습니다.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지만 내부의 강력한 욕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당신은 사 막에 대한 동경으로 자신의 모순을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트밀은 사라말이 빠르게 토해놓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 다. 하지만 아트밀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다 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수염볏을 움켜쥐었다. "사라말.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그러니까 정신억압? 내가 누군가의…… 그걸 뭐라고 하더라? 그 왜 있잖아." "꼭두각시." 아트밀은 부리를 탁 부딪쳤다. 조금 후 아트밀은 매서운 눈으로 사 라말을 노려보았다. "내가 그거란 말이야?" "유감입니다만 그렇습니다." 아트밀은 철극을 자꾸 고쳐잡으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 후 아트밀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사라말. 지금 무슨 농담 하는 거지?" 사라말은 두 손을 마주잡아 늘어뜨린 채 아트밀을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아트밀의 얼굴에 얼기설기 얽혀있던 웃음들이 허물어지기 시작 했다. 아트밀은 폐허 같은 얼굴로 사라말을 보았다. "진짜야?"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지? 그건 그냥 네 추측인 거지?" "그렇습니다." 다시 철극이 아트밀의 손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트밀은 사라 말과 파라말, 그리고 자신의 철극을 번갈아 쳐다보며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트밀 자신도 그 중얼거림이 무슨 뜻인지는 모 르는 것 같았다. 탁한 숨을 내쉬면서 아트밀이 속삭였다. "누구지?" "모릅니다." "알게 되면……" "가장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다른 용건은?" "없습니다." 아트밀은 몸을 돌렸다. 한 번 훌쩍 뛰어 아트밀은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굉장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창가로 달려간 파라말은 평온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아트밀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뒷모 습만을 놓고 볼 때 아트밀은 산책하는 듯 한가로워 보였다. 하지만 파라말은 어쩐지 그 뒷모습을 계속 보기 어려웠다. 파라말은 눈길을 들어올렸다. 자늑자늑 떨어지는 눈송이 속에 세상은 고요했다. 덧창을 닫은 파라말은 차가워진 볼을 만지며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세 번째 벽난로방의 뱀부리미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한 겁니까?" 뱀부리미들은 모두 정신억압자이다. 사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뱀들 을 정신억압해서 다루어야 하는 만큼 애초부터 자격 요건이 그러하 다. 사라말은 침중하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나 폐하 또한 나가이니만큼 일단은 의심 대상에 포함시켜야 할 테고." 파라말은 다시 벽난로가로 다가갔다. 후끈한 열기는 그를 기분 좋게 하기보다는 불쾌한 느낌을 선사했다. "형님. 말씀하신 것들은 앞뒤가 들어맞긴 합니다. 사실 아트밀의 행 동에는 이상한 점이 많지요. 하지만 저는 정신억압자가 사람을 정신 억압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정신억압자가 억압할 수 있는 것은 동물뿐입니다." 사라말은 휘파람을 불듯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가 말했다. "파라말." "예?" "사람도 동물이다." 파라말은 집게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말을 잘못했군요. 정신억압자는 지능이 낮은 동물만 억압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정신억압하기엔 지능이 지 나치게 높다고 하던데요. 설마 아트밀이 구구단 7단 때문에 힘들어하 니까 정신억압이 될 정도로 머리가 나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트밀은 절대로 바보가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수학과 친교를 트지는 못했지만 그는 노 련하고 명석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정신억압을 당했다니오?" "간단한 해결책이 있지. 노련하고 명석한 레콘도 정신억압할 수 있 는 희대의 정신억압자." "좋습니다. 그러면 그 희대의 정신억압자는 왜 형님을 보호하려고 애쓴 거죠?"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의심가는 것은 있다. 내가 알기로 사라말 아이솔은 황제의 유언도 조작할 수 있는 구제 불가능한 깡패다." 파라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그들이 규리하로 온 이유였다. "누군가가 엘시 에더리 대장군을 황제로 만들어줄 사람은 형님뿐이 라고 판단하고는 레콘 한 명을 정신억압해서 형님을 보호하게 했다는 겁니까?" "많은 가설 중 하나일뿐이야." 파라말은 탁자로 다가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 댄 파라말은 탁자에 걸터앉아있는 형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형님. 솔직히 너무 허황한 말처럼 들립니다." "참 그럴 듯하다고 말했다면 내가 놀랐을 거다." 사라말은 탁자에서 내려섰다. 동생을 향해 선 사라말은 팔짱을 꼈 다. "하지만 그런 정신억압자가 있다면 그는 황제 폐하와 비스그라쥬백 데라시, 그리고 세 번째 벽난로방의 뱀부리미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짐이 돌아왔다는 사어를 보내고 있는 곳에는 그 모든 용의자들 이 전부 있겠지." "그렇군요." "가설 한 가지 더 들려줄까?' "뭡니까?" "어쩌면 그 정신억압자는 아트밀 외에 다른 사람도 정신억압했을지 도 모르지. 이를 테면 나나 너 말이다." "형님! 저는……" 사라말은 손을 들어 파라말을 제지했다. "자기가 미쳤다고 말하는 정신병자는 없다. 네가 정신억압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네가 정신억압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 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이제 네 등에 쓰여졌을지도 모르는 낙서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이미 정신억압을 당했다면 나는 폐하께 가든 가지 않든 상관없다. 간다면 정신억압을 당해서 가는 것일 테고 가지 않는다면 그 또한 정신억압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테니까. 이 경우에 는 고려할 것이 없다. 하지만 내가 정신억압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 렇다면 나는 폐하께 가지 않는 것이 좋다. 폐하와 폐하의 주변인물들 중 한 명일지도 모르는 정신억압자에게 정신억압을 당할지도 모르니 까. 나는 그것이 반갑지 않다. 그래서 나는 폐하께 가지 않을 생각이 다." 사라말은 벽난로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게다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은 거의 다 지나갔다. 밖에는 첫눈이 오 고 있는데 제국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는 폐하를 찾아 떠나는 것은 현 명한 일이 아니다." 파라말은 혀를 찼다. 형의 추리에 대해 놀랐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 니다. 파라말은 치천제의 소재를 모른다는 사실을 자신이 왜 간과했 는지 알 수 없었다. 사라말의 말처럼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황제를 찾아 헤매기에는 적당한 계절이 아니었다. 파라말은 황제를 찾아간다 는 계획을 마음 속의 소각장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파라말은 형이 말한 어처구니 없는 가설에 대해 생각했다. 정우 규리하는 손바닥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며 불규칙적인 궤도로 움직이는 가벼운 눈은 자꾸만 정우의 손바닥을 빗나갔다. 정우는 약이 오른다는 표정으로 계속 손 을 움직였다. 겨우 그녀의 손바닥 위에 눈이 닿았다. 정우는 기뻐하 며 손바닥을 재빨리 눈 앞으로 가져왔지만 눈송이는 어느새 녹아 물 이 되어 있었다. 정우는 손금 사이에서 살짝 빛나는 물기를 보다가 그것을 핥았다. 고개를 갸웃하던 정우는 곧 단정짓듯 말했다. "음. 하늘의 맛은 싱거운 편이야."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탈해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장 갑을 내밀었다. 그것은 조금 전 정우가 벗어서 그에게 맡겨둔 것이었 다. 정우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눈을 잡기 위해 달려갔다. 탈해 는 그 뒤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두 사람이 그렇게 함께 있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뱀단지가 황제의 귀환을 알린 이래 규리하성은 비상상황에 돌입해 있었다. 하 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뱀단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의 후 속 발언을 기다리느라 긴장한 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관료들을 본 정우는 결단을 내렸다. "모두들 돌아가서 씻고 맛있는 것 드시고 푹 주무세요. 폐하께서는 아마도 다른 지방의 뱀단지로 사어를 보내시느라 바빠서 저희들에겐 미처 언질을 주시지 못하고 있나 봐요. 그렇다면 좋은 일이겠지요. 폐하께서 규리하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시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 하시는 거니까." 소박하게 표현된 말이지만 상당히 그럴 듯한 추측이기도 했다. 돌아 온 황제는 - 세 번이나 반복된 귀환 통고가 있었기에 이제 더 이상 황제의 귀환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있었다. - 부재 기간 동 안 일어난 온갖 사고들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황제의 주의 가 남쪽에, 그러니까 대호왕과 시모그라쥬공에게 집중되고 있을 것이 라 판단하고는 정우의 말처럼 뱀단지의 침묵을 좋은 소식으로 생각하 기로 했다. 그들은 정우에게 감사하고 집으로 떠났다. 물론 모든 사 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늘치를 다루는 것에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아이저 규리하의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렇게 지쳐있다면 좋은 대책도 떠오르지 않겠 지요.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셨다는 것을 아셨을 거예요.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 생각을 좀 하셔야 할 테죠." 정우의 두 번째 지적 또한 정확했다. 황제의 귀환을 알았다면 아이 저 규리하는 경거망동하는 대신 사태의 변화를 살필 것이다. 그제서 야 모든 사람이 안도하며 물러갔고 정우 역시 하품을 하며 잠자리로 들어갔다. 긴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아이저 규리하의 일과 황제 귀환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탈해를 찾았다. 긴 시간만에 만나는 것이지만 두 사람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냥 조용히 정원 을 걸었다. 두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웠기에 첫눈은 뜻밖의 선물 이었다. 다시 한 번 눈을 잡는데 성공한 정우는 그것을 눈으로 가져왔다. 그 녀의 손이 차가워져 있었고 눈송이 또한 큰 편이라 정우는 그것이 녹 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우는 그것이 완전히 녹아 한 방울도 안되 는 물기로 바뀔 때까지 정신없이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탈해가 다시 장갑을 내밀었다. 정우는 이번에는 장갑 을 받아들어 손에 끼었다. 장갑을 손에 밀착시키기 위해 손가락을 쥐 었다 폈다 하던 정우가 갑자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대장군님께서 곧 돌아오시겠네." "백작님이?" "그래. 물론 당장 돌아오시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젠 제국을 되찾 기 위해 혼자 애쓰실 필요는 없지. 새 황제를 선출하기 위한 귀족원 회의를 개최할 필요도 없고." "시모그라쥬로 가실지도 몰라. 대호왕 폐하의 일을 매듭지어야 할 테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거기로 가시면 첫눈은 못보시겠구나. 거기엔 눈 이 안 오지?" 정우는 쭈그리고 앉아 눈을 뭉쳤다. 조금 후 정우는 눈덩이 하나를 만들어 일어났다. 탈해는 정우가 눈덩이를 핥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 기 말했다. "안 돌아오실지도 몰라." 정우는 눈덩이에 입술을 댄 채 눈을 치켜떠 탈해를 올려다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지만 탈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우 는 눈덩이에서 입을 떼고는 말했다. "돌아오실 거야." "왜?" "나랑 약속하셨으니까." 탈해는 입을 다물었다. 정우는 계속 말했다. "신랑감을 찾아다주시기로." 탈해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말하 면 그가 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그저 정우를 외면하고 싶었 다. 그 때 정우가 그의 팔꿈치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탈해는 어쩔 수 없이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두 손으로 눈덩이 를 든 채 말했다. "나 결혼하면 기뻐해줄 거지?" "어떻게……"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다시 세상은 조용해질 거야. 그리고 아버지 와도 화해할 수 있을 거야. 아이를 기르기 좋은 때가 오겠지. 결혼해 서 내 아이를 낳아 기를 거야. 그러니 축하하라고." "정우. 너는……" "대장군님이 돌아오시면 내 남편이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 솔직하 게 말할래." 탈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버 릴 것 같았다. 정우는 그런 탈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 있을 거야. 좋은 사람. 그렇게 머리 누르지마. 아프잖 아." 탈해는 두 팔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정우의 어깨 높이에서 멈췄 다. 탈해는 그곳에 두 손을 띄워놓은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팔이 느리게 안쪽으로 굽혀졌다. 정우는 양쪽에서 다가오는 손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들어 탈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탈해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갑자기 탈해의 두 팔이 지금까지의 방향 과 반대로 움직였다. 탈해의 손은 겁먹은 짐승 같았다. 정우가 두 손 을 들어올렸다. 정우는 두 손에 든 눈덩이를 들여다보았다. 다시 탈 해의 손이 꿈틀하듯 안쪽으로 움직였다. 탈해의 손가락들이 구부러졌 다. 탈해는 주먹을 쥐었다. 두 주먹이 바깥쪽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지대를 잃은 것처럼 아래로 툭 떨어졌다. 두 팔을 늘어뜨린 탈해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옆쪽을 바라보았 다. 조금 후 정우가 입을 벌렸다. 하얀 입김과 함께 정우의 속삭임이 들 렸다. "팔 펄럭거리지마. 바보 가루 날리잖아." 정우는 눈덩이를 던졌다. 그것은 탈해의 가슴에 맞고 팍 부서졌다. 탈해는 멍한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조금 후 그의 입이 일그 러졌다. 울음과 웃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표정이 마침내 웃음에 안착했다. 탈해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비늘 가루를 날려보내려 애쓰는 나비처럼 두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팔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마한 광 점들이 떨어져 나와 풀풀 날렸다. 탈해가 순식간에 만들어낸 미세한 도깨비불이었다. 탈해는 두 팔을 펄럭거리며 정우에게 다가갔다. "바보 되라, 바보 되라." "꺅! 오지마! 묻으면 나도 바보 되는데!" 정우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정신없이 도망쳤다. 탈해는 그 뒤를 따 라 성큼성큼 달렸다. 어느새 쌓인 눈이 두 사람의 다급한 걸음 아래 에서 뽀드득뽀드득 뭉쳐졌다. 그리고 많은 눈이 튀어올랐다. 한참을 달리던 정우가 갑자기 멈춰섰다. 탈해는 급히 멈춰섰지만 바 닥에 눈이 쌓여 있어 발이 주욱 미끄러졌다. 탈해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야야…… 뭐야?" 정우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탈해의 말에 정우는 손을 들어 하 늘을 가리켰다. "딱정벌레다." "뭐?" "저기 봐." 탈해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정우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시야 를 어지럽히는 눈 때문에 관찰이 쉽지 않았지만 탈해는 곧 딱정벌레 의 모습을 발견했다. 규리하성을 향해 날아오는 딱정벌레는 두 마리 였다. 곧 딱정벌레의 요란한 비행음이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정우와 탈해는 몇 시간 뒤 성의 경비대장으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 은 짓을 저질렀다. 탈해는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정우는 규리하의 지배자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탈해는 정우 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우. 안으로 들어가. 누군지 모르잖아." "괜찮을 것 같은데? 즈믄누리 딱정벌레야." "응?" "날개 소리 들어봐. 와! 확실해." 청력에 주의를 집중한 탈해는 정우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즈믄누리에서 길러낸 딱정벌레만이 낼 수 있는 강력한 소리였다. 하지만 즈믄누리에서 누군가가 온다는 것은 탈해를 더욱 불안하게 했 다. 그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정우가 어깨에 얹힌 탈해의 손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그리고 정우는 탈해에게 팔짱을 꼈다. 실제 모습 은 매달리는 것과 비슷했지만, 어쨌든 팔짱 비슷한 것을 낀 정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탈해는 주저하다가 마주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 하얀 눈발 사이로 날아오는 딱정벌 레들을 바라보았다. =============================================================== 32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33. 꺼져가는 불씨 - 1 "라수. 제국은 두억시니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 "아아. 그건 사람은 두억시니라는 뜻이야." - 태위 괄하 이드 규리하와 사도 라수 규리하의 대화 中. 펠도리강의 발원지인 위그세 호수는 비스그라쥬 서쪽 20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가장 가까운 지명이 무려 200킬 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위그세 호반은 사람이 살 기 힘든 험한 땅이다. 하지만 위그세 호반을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처녀지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한계선에 걸쳐 있는 그 독특한 위치 때문에 과거 그곳은 무법자와 도망자들, 그리고 기타 사람들의 이목 을 끌지 않은 채 움직이고 싶어하는 자들의 많은 방문을 받았다. 물 론 한계선이 나가의 세력과 북부의 세력 사이의 중간지대 역할을 하 던 시절의 이야기다. 제국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한계선 지대 전역 에서는 날카로운 눈매와 꽉 다문 입, 그리고 친선의 손길보다는 공격 의 손길에 대비한 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현격히 줄어들었고 그것은 위그세 호반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통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 기에 아직도 그곳에는 밤중에 재빨리 목을 축이는 짐승과 똑같은 모 습으로 황급히 갈증을 해결하고 떠나는 자들의 모습이 간혹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북쪽 지방은 이미 겨울로 접어든 아라짓력 32년 9월, 위그세 호반에 느닷없이 나타난 천여 명의 병사들은 그런 비합법적 여행자들 과는 상관없다. 9014 독립중대, 이른바 헨로 중대가 그곳에 머물게 된 이유는 코끼리의 생태와 한 범죄자의 6년에 걸친 노고, 그리고 니 어엘 헨로 수교위가 '다른 표현이 불필요할 만큼 무모하다'고 평가한 세 명의 레콘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 첫번째 요인인 코끼리들은 호반에 모여서서 풀을 뜯거나 물을 마 시는 등 정상적인 코끼리가 할 만한 일을 하고 있었다. 물에서 멀찌 감치 떨어진 위치에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던 그을린발이 수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더 남았어?"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그것은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레콘 은 살의를 느꼈다. 주테카는 지고 온 금편 무더기를 땅에 쏟아놓고는 발로 땅을 꽝 내리쳤다. 그 동작은 멀찌감치 있는 코끼리 상당수를 불안하게 함으로써 그을린발의 주의를 확실히 끌었다. 언짢은 표정으 로 돌아보는 그을린발을 향해 주테카는 악을 썼다. "코끼리는 그만 봐! 사막을 가로질러 저 불의한 금을 나르는 것이 누구냐?" 그을린발은 노기를 가라앉히고 주테카를 바라보았다. 꼴이 말이 아 니다. "많이 힘드냐?" "……좀 교대해줘." "나야 그래도 좋은데." 그을린발은 의미심장한 휴지를 두었다가 말했다. "너 얘들 데리고 있을 수 있냐?" 주테카는 벼슬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그는 코끼리를 모두를 야생 으로 돌려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코끼리 전부에게 자신에 대한 두려 움을 심어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막에 살지 않는 동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코끼리 또한 사막을 견 딜 수 없다. 그을린발은 코끼리의 그런 생태를 들어 사막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이 멈춘 지점으로부터 목적지까지는 5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가 남아 있었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그을린발의 거부 가 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그 때문에 남은 50킬로미터의 거리를 극복하는 일은 그녀에게 맡겨졌다. 투걸거리며 부대 재편성을 시작하 는 수교위를 멈춰 세운 것은 헨로 중대와 동행한 레콘들이었다. 쵸지 가 물었다. "뭐 할 생각인데?" "중간 지점에 보급소 건설할 병력, 보급 담당할 병력, 실어나를 병 력, 교대 병력, 정찰 병력……" "티나한이 돌아오기 전엔 끝나겠냐?" "티나한이 돌아오면 좋겠군요. 대단한 힘으로 그 금편들 다 들고 와 줄지도 모르니까." 니어엘은 충동질할 의도 같은 것은 없었지만 주테카는 자신이 충동 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주테카는 앉아서 쉬라고 강압적으로 말한 다 음 주저하는 쵸지를 끌고 지멘의 안내를 받아 사막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 왕복을 끝내고 엄청난 금편 무더기를 배낭에 담아 돌아온 주테 카는 꽤나 즐거워 보였다. 무너진 폐허를 파고든 햇살 속에 떠도는 먼지와 그 아래 그늘진 곳에 무겁게 쌓여 있는 언덕 같은 금편을 묘 사할 때 주테카는 거의 시인처럼 보였고, 그 때문에 코끼리를 보살피 느라 동행하지 못한 그을린발은 질투를 느낄 뻔했다. 하지만 왕복 횟 수가 늘어나자 주테카의 흥분은 빠르게 식었다. 돈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숙원을 가진 레콘이나 식구 많은 가족의 첫째 부인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돈에 대한 레콘들의 태도는 무관심 과 오만함, 그리고 게으름을 뒤섞어놓은 것과 비슷하다.(보통은 세 번째에 무게가 실린다.) 레콘은 다른 것들뿐만 아니라 돈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도 참아낼 수 없다. 지멘의 금을 보았을 때 주테카가 느 낀 것도 물욕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감정이다. 주테카는 그저 비경 이나 놀라운 재주를 본 것처럼 흥분했을 뿐이고 따라서 그의 머릿속 에서 380만 닢의 금편은 순식간에 30톤의 짐으로 바뀌었다. 그을린발은 앉아서 끙끙거리고 있는 주테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쵸지가 세 번째 왕복 때 이미 사용했던 수법을 별 기대감 없이 사용 해보았다. "정의를 회복해야지. 주테카." 주테카는 허핍한 미소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홀연히 일어나 장물을 그 원주인에게 가져오는 정의로운 노역에 종사하러 달려갔다. 그을린 발은 이미 효력이 떨어졌을 거라 생각했던 수법이 또 작용하는 것에 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그을린발뿐만은 아니다. 주테카가 부려놓은 금을 코끼리의 등에 싣기 좋게 꾸리는 일을 시작하면서 헨로 중대의 가리아 릿폴 부위는 자신이 구제할 수 없는 속물이 아닌가 의심했다. 아직까지도 금편 무더기에서 '으리으리한 혼례식과 그 후 죽을 때까 지 이어지는 기나긴 무위도식'의 암호를 해독해내는 자신을 느끼며 가리아 릿폴 부위는 의기소침해졌다. 가리아에게 약간의 위안을 준 것은 맥키 네미 부위의 고통에 찬 표정이었다. "젠장. 어지간해야 삥땅을 치든가 하든지, 이건 너무 무지막지해서 그런 생각도 안 나네." 헨로 중대원들의 심리에 대한, 고상하지는 않지만 날카로운 맛이 있 는 분석이다. 비록 삥땅이라는 어휘가 다미갈 카루스 부위의 눈꼬리 를 조금 비틀어놓기는 했지만. '한 명이라도 칼을 뽑으면 모두 죽는 다'와 같은 살벌한 인식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있던 카루스 부위에게 그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발언처럼 여겨졌다. 카루스 부위는 숨소리를 조금 높이며 맥키 네미 부위를 노려보다가 뭐라고 한 마디 해야겠다 는 결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카루스 부위가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니어엘 헨로 수교위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고마워 해라. 안 보이는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귀관의 양 심을 오래간만에 꺼내어 먼지를 털고 곰팡이도 좀 떼어낼 기회가 온 것에 대해." 맥키 네미 부위는 피식 웃고는 자신의 양심에 대한 몇 가지 믿기 어 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시시덕거리는 상관과 동료를 바라보는 카루스 의 표정은 참담했다. 다시 포장 작업을 감독하며 끈질기게 기다리던 카루스는 조금 후에야 자연스럽게 상관의 곁으로 다가서서 속삭일 기 회를 얻었다. "수교위님."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씩 웃었다. "안다. 알아. 피비린내 나는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한다는 거." "네미 부위의 발언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이런 재화 앞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우주적 법칙입니다. 그의 말에 충동질 받은 녀석들에 의해 사고가 일어난다면……" "우주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겠군." 카루스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니어엘이 말했다. "어깨에 힘 빼. 스스로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사고를 막아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귀관의 머리가 잘 안돌아가는 모양이 군." "예?" "이 금의 주인이 누군지 생각해봐. 누가 감히 이 금에 손을 대겠 어?" 카루스는 자신이 왜 지금까지 오소리 만난 뱀처럼 뻣뻣하게 굴었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상관의 말이 맞았다. 그들 모두는 엔거 평원 에 나타난 말리의 모습을 보았다. 누가 감히 그런 자의 황금에 욕심 을 품겠는가. 여기서는 '어라? 놀라운 우연과 뜻하지 않은 실수 등에 의해 금편 몇 닢이 내 주머니에 들어와 있네?'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황금을 둘러싼 혈투의 조짐을 미리 읽어내기 위해 신경 을 곤두세우고 있던 카루스는 갑작스러운 안도감에 기운이 좀 빠졌 다. 그는 금편들을 포장하는 자신의 소대원들을 보며 말했다. "하긴 세계는 다시 폐하의 손에 단단히 붙잡혔군요. 이 세상에 발 디디지 않고 살 재주가 있지 않고서야 폐하의 진노를 살 일을 하지는 않겠군요." 니어엘이 꿈틀했다. 그녀는 희미한 경악이 담긴 눈으로 카루스를 바 라보았다. 그 표정이 카루스에게 포착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말 위에 있었고 카루스가 자신의 소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어엘이 침묵하자 카루스는 다시 자신의 소대를 지휘하러 걸어갔다. 멀어져가는 카루스를 보며 니어엘은 자신의 신경을 튕겨놓은 생각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며 접근했다. 카루스는 세계가 다시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겉모습만 본다면 단지 익숙한 질서의 회복이지만 그런 일은 보수주의자들의 몽상 속에만 존재할 뿐 역사에서는 일어나 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들도 과거의 질서가 회복될 실제적 가능성이 제시되면 일단은 주저할 것이다. 그 어떤 회복의 시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 수는 없다. 황제의 귀환은 황제가 존 재했던 시대와 외견상 비슷하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열었 다. 카루스가 무의식적으로 지적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에 발 디디지 않고 살 재주가 있지 않고서는 황제의 분노를 살 일은 하지 않을 것. 황제는 사라졌다가 돌아옴으로써 그 이전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 게 되었다. 기계로 비유한다면 단순히 부속품 하나를 제거했다가 다 시 끼워 넣음으로써 이전보다 더 훌륭한 기계로 만드는 마술을 보여 준 셈이다. 황제가 새로 획득한 그 마술적 힘은 과연 무엇인가? 니어 엘은 세련되게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아쉬움을 느끼며 그것을 정 의했다. '되돌아와서 복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거지.' 그것은 특이한 힘이다. 다른 대부분의 힘과 달리 귀환의 힘은 실제 로 한 번 떠나야만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치천제는 그것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상념에 잠긴 니어엘이 갑작스러운 위기감을 느꼈다. 그녀의 시야 한 쪽에 위험한 것이 나타났다. 니어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쵸지와 함 께 걸어오는 지멘을 보았다. 지멘은 촛불을 차례로 꺼트리는 바람 같았다. 그가 지나치는 곳마다 병사들의 잡담이 사라졌고 그들의 동작은 활기를 잃었다. 조용해진 병사들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임무에 대한 애착을 드러냄으로써 지멘 을 외면하려 했다. 지멘은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헨로 중대원들이 과민 반응을 보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과 지멘 사이엔 상당히 고약한 관계맺음이 있었다. 자신의 전통 이 제대로 매어져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을 억누르며 니어엘은 지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멘은 주테카가 쏟아놓은 금편 무더기 앞에 멈춰섰다. 배낭을 벗은 지멘은 그것을 위로 들어올리다가 니어엘과 눈이 마주쳤다. 사태를 주목하고 있던 자들 - 바꿔 말하면 시야 안에 있던 모든 자들이다. - 이 느낄 수 있는 잠깐의 지체가 일어났다. 지멘은 니어엘을 똑바로 보면서 배낭을 뒤집었다. 배낭에서 금편이 주루룩 쏟아졌다. 지멘은 빈 배낭을 들고 몸을 돌렸다. 니어엘이 무의식적으로 외쳤 다. "지멘!" 다채로운 별명을 가지고 있는 헨로 중대의 소대장들이 일시에 낯빛 을 바꾸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항의와 공포의 눈빛이 소나기처럼 퍼붓는 가운데 니어엘은 지멘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지멘이 몸을 돌 렸다. "뭐냐?" 니어엘은 자신이 왜 지멘을 불렀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부족보 다는 과잉의 문제였다. 니어엘은 지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굉장 히 많았다. 하지만 그 중 어떤 것들은 '옛날 이곳에서 전설적인 독립 중대 하나가 몰살했지.'와 같은 헨로 중대의 마지막 전설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니어엘은 좀 덜 위험한 화제를 고르기 위 해 일단 말을 몰아가기로 했다. 지멘은 심리를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지은 채 말에 탄 니어엘이 다가오는 모습을 마주보았다. 대화의 거리와 안전의 거리가 상충하는 가운데 어렵게 멈출 자리를 선택한 니어엘이 말했다. "우리,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관심 없다." "예?" 지멘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주테카가 걸어 간 방향을 향해 떠났다. 팽개쳐진 물건처럼 남게 된 니어엘은 지멘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생각했다. 네가 걱정하는 복수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네가 제안할 화해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이도 저도 아니 면 네 말에 관심 없다? 소대장들은 아무런 폭력 사태도 일어나지 않 은 것에 대해 안도했지만 니어엘은 풀 수 없는 의문 때문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 때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배낭을 든 채 관조하듯 바라 보던 왕벼슬 쵸지가 다가왔다. 그는 금편 무더기 위에 배낭을 비우며 말했다. "그 말 그대로야." "말은 칼과 같지요. 지나치게 길어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짧아도 문 제입니다. 그 말 그대로라고 해도 너무 짧잖아요." "좀 길게 말하자면 저 친구는 지금 다른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 과거의 복수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화해해야 되는지 실행해야 되는 지를 결정할 수도 없을 만큼." 엘시에게 소환되었을 때 니어엘에게 보고를 들었던 쵸지는 헨로 중 대와 지멘 사이의 악연을 알고 있었다. 쵸지는 계속 말했다. "그러니 복수할 거냐, 아니면 화해할 거냐고 물어도 저 친구는 대답 할 수 없어. 자기도 모르니까." 니어엘은 지멘이 혹 마음을 바꿔 되돌아올 경우를 대비하여 그가 떠 난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켜둔 채 말했다. "그 애꾸눈 소녀 때문에?" "그래." "아실이 그의 숙원입니까?" "숙원? 비유법인 것 같은데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군." "아실이 지멘에게 존재 의미를 주는 겁니까?" 쵸지는 빈 배낭을 내려놓고는 니어엘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모르겠군. 지멘에게 있어 황제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쟁룡해의 밑 바닥에 있을걸. 아실에게 있지 않고. 하지만 그들은 6년 동안이나 함 께 다녔지. 그것도 그냥 동행이 아니고 그들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 에 함께 맞서는 동행이었지. 게다가 그들은 철의 대화로 얽혀 있어. 속단하기 어려운 관계로군. 네 말이 아실이 지멘에게 큰 의미를 갖느 냐는 것이라면, 그래. 상당히 큰 의미일 거야." "숙원을 포기할 정도로 큰 의미인 겁니까?" "포기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아. 황제만이 아실을 고쳐줄 수 있다잖 아. 지금 숙원을 실행하면 아실을 구할 방법이 없지. 어쩌면 숙원은 아실을 치료한 후로 미루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그건 말이 안됩니다. 아실이 치료되는 순간 자신이 위험진다면 폐 하께서는 아실의 치료를 영원히 미뤄버릴 수도 있지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저렇게 순순히 말을 듣는 것을 보니 무슨 약속을 받았나 보지." "그 애가 도대체 어디가 아픈 겁니까? 그리고 의사가 아닌 폐하께서 어떻게 그 아이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거죠?" "거기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네가 아는 것과 다르지 않아. 나는 몰 라. 황제가 직접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사를 찾아준다거나 귀 한 약을 구해준다거나 뭐 그런 걸지도 모르지. 아, 그런데 내가 뭣 좀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보십시오." 쵸지는 땅바닥에 쌓여 있는 금편 무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걸어오다가 떠오른 건데, 왜 민들레 여단이 오지 않은 거지? 민들 레 여단이 왔으면 저 금편 한꺼번에 다 들고 오는 것도 가능할 텐데. 코끼리에 실어나르는 것보다 훨씬 빠를 테고." "대장군님의 생각에 대해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민들레 여단에 겐 다른 중요한 임무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쵸지는 금편을 가져가기 위해 온 병사들이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민들레 여단 가지고 할 일은 전투밖에 없을 텐데. 진짜 전투를 하는 거야? 황제가 돌아온 이상 시모그라쥬공은 이제 남부에선 절대로 병력을 끌어모으지 못할 테지. 그러니 그냥 걸 어가서 무릎 꿇으라고 말하면 끝나는 것 아닌가? 아니, 걸어갈 필요 도 없지. 와서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될 거야. 그렇잖아?" "남쪽엔 시모그라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도 있습니다. 어쩌 면 시련의 준동에 대비하기 위해 민들레 여단을 급파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쵸지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니어엘을 바라보았다. 니어엘은 그의 표 정에 수긍했다. "예. 저라도 심각한 외교분쟁을 감수할 작정이 아니고선 민들레 여 단을 국경지대에 배치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까요. 하지만 그 외에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선조해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민들레 여단이 얌전해질지도 모르지요." 쵸지는 상대방이 전장에서는 전설적 존재로 통하지만 전체 제국군을 놓고 보면 일개 수교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곧 알게 되겠지. 저 금편 다 싸들고 내려가면." "얼마나 남았습니까?" "한 세 번 정도 왕복하면 끝날 것 같아. 해질 무렵엔 출발한다고 생 각해둬." 쵸지는 지멘의 뒤를 따라 떠났다. 왕복 백 킬로미터의 여정을 떠나 는 모습이 아니라 동네 산책이라도 떠나는 것 같았다. 산책치곤 지나 치게 빠른 속도이긴 하지만. 니어엘은 죽었다 깨도 레콘의 거리 감각 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금편 포장 작업을 지휘하러 돌아갔 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탁자 위에서 미세하게 파닥거리는 나방을 바 라보았다. 조금 전 황홀경에 취해 촛불을 향해 돌진했던 것이 나방의 마지막 비행이었다. 불기운에 몸 어디를 다쳤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나방은 발을 하늘로 향한 채 날개로 탁자를 때리고 있다. 아마 다시 날아오 르기는 힘들 것이다. 엘시는 그 나방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나 다시 날아다닐 수 있게 되면 나방이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했다. 다시는 불 곁으로 가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엘시는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불을 향해 돌진하는 나방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 엘시는 나방에서 눈을 떼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엘시가 생각해 보라고 명령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던 시허릭은 엘 시의 주목을 받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는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습니다." 엘시는 실망감을 억누르며 말했다. "태위께서는 그것이 매복계라고 하셨다. 말이 되는 것 같지. 적의 주력을 장악하고 있다가 전쟁 발발과 동시에 배신시킨다는 것은, 만 약 성공했다면 적의 주력을 이탈시킨다는 것 이상의 강력한 정신적 피해를 암살공에게 주게 되었겠지." "예. 성공했다면 정말 멋졌을 것 같습니다. 그걸 보지 못해서 아쉽 군요." 엘시는 탁자 아래에 있는 손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성공할 기회가 있었어." "예?" "그들이 이름을 얻었던 사라티본 평야에서 태위께서는 그 레콘 부대 를 전향시켰어야 해. 그랬다면 그런 엄청난 인명 피해가 일어날 필요 가 없었지. 나는 전해들었을 뿐이지만 귀관은 그곳에 있었다. 그것이 감내할 만한 일이었나?" 시허릭은 이를 악물었다. 땅을 부수며 달려오는 것 같은 일만 명의 레콘을 목격했을 때의 공포와 절망이 그의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그 리고 시허릭은 그것이 그들의 의무이기에 앞으로 걸어나간 아홉 부위 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절대로 감내할 일이 아니다. 시허릭은 힘겹게 말했다. "천경유수께서 방류를 결심하셨기에…… 폭포처럼 쏟아진 물 때문에 레콘들이 혼란에 빠져서 전향시킬 수가……" "방류는 전투를 끝내기 위해 일어난 일이었을 텐데?" 시허릭은 입을 다물었다. 엘시는 그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누그러뜨 릴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며 계속 말했다. "사라티본 평야에서 불가능했다면 코네도성 전투에서 전향시킬 수도 있었어. 그렇지 않으면 파르바리 계곡에서. 하지만 전투가 그룸성 앞 으로 옮겨갈 때까지도 사라티본 부대의 전향은 일어나지 않았어. 그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지? 나는 파르바리 계곡에서 잘…… 다져진 시체들을 보았다. 귀관은 다져지는 모습을 보았겠지." 시허릭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시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상장군." "아마도 지소어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건 무슨 말이지?" "팔리탐 지소어가 태위님에게 협조하기로 한 것은 발케네가 무슨 수 를 쓰든 폐하께 대적할 수 없다는 전제 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태 위님은 실제로 그 대적 불가능성을 보여주셨어야 할 겁니다. 그렇잖 습니까?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제가 주군을 배신하기로 결심했다 하 더라도 주군에겐 정말 희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배 신을 보류했을 겁니다. 설령 사라티본 부대를 가지고 있다 해도 발케 네공은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허릭 마지오." "예?" "그렇다면 매복계가 무슨 소용인가? 쉽게 승리하기 위해 매복을 하 는 것인데 매복을 위해 죽도록 싸워야 한다면 그건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 아닌가?" 시허릭은 입을 약간 벌린 채 대장군을 바라보다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대단히 유서 깊은 '그렇다면 다른 반론을 제시할 테니 잠시 기다려라.' 자세다.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사실이 지만 동의는 상대방의 이론이 가진 정합성 만큼이나 동의하고 싶다는 생각에 좌우된다. 후자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이론이 아무리 치밀해 도 동의라는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일은 허다하다. 시허릭의 심리가 그러했다. 그는 엘시가 암시하고 싶어하는 사실에 동의하고 싶지 않 았다. 그것은 엘시도 마찬가지였다. 엘시는 자신이 왜 계속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느끼며 말했다. "반대하기 위해 반대하진 말게." 짜디짠 경계심에 절여 보관해두었던 반격의 기술 창고를 뒤적거리던 시허릭이 갑자기 엘시에게로 눈을 돌렸다. 조금 후 그의 얼굴에 미세 한 고통이 떠올랐다. 그리고 증오가. 엘시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 었다. 그것은 다른 장소에 있는 누군가가 아닌 정면에 있는 엘시를 상대로 드러내는 증오였다. 시허릭이 말했다. "그것은 각하 때문입니다." 엘시는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끼며 시허릭을 바라보았다. 시허 릭은 오래 전 파르바리 계곡의 상공에서 이루어졌던 알현을 떠올렸 다. 황제의 방은 어두웠고 열기로 가득했다. 그 날 그곳에 있던 두 명의 황제…… '두 명?' 시허릭은 혼동을 일으켰다. 황제는 한 명이 었다. 시허릭은 자신이 왜 그런 혼란을 일으켰는지 생각하다가 황제 가 거론한 또 한 명의 황제 때문에 혼란을 일으킨 거라고 판단했다. 또 한 명의 황제를 위해 벌어진 전쟁. "사라티본 부대가 좀 더 일찍 전향했다면 전쟁은 단기간에 끝났을 겁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발케네 전쟁 의 목적은 발케네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발케네를 파괴하는 것이었 습니다." "뭐라고?" "대장군님. 폐하께서는 섬멸전을 원하셨습니다. 발케네는 그 분께서 낙점하신 차기 황제에게 귀찮은 골칫거리가 될 거라 판단하셨기 때문 입니다. 원래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만 불가항력의 사태 때문에 그 피비린내 나는 임무에 손 대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에게." 엘시도 파르바리 계곡을 생각하고 있었다. 시허릭과는 고도가 다르 다. 엘시는 계곡 바닥에서, 짓뭉개진 시체 위에서 이루어졌던 대화를 떠올렸다. 레콘들이 그에게 황제가 되라고 말했다. 엘시는 그것을 거 부했다. 라세가 훔친 황위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반역의 말이었다. 자기 것을 자기가 훔칠 수는 없다. 라세가 훔친 황위란 그녀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엘시는 그런 짓을 하는 자에겐 황제의 자격이 없다고 외친 것이다. 시허릭이 조금 전 엘시가 보고 있던 나방을 발견했다. 그는 손을 뻗 어 손가락으로 그것을 튕겼다. 나방의 모습은 사라졌다. "각하께서 남부를 진압하고 돌아오시면 황위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 다." 엘시는 약간 충혈된 눈으로 시허릭을 바라보았다. 시허릭은 아들이 자신에게 삶의 지혜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오해하는 아버지처럼 말 했다. 태도는 가벼웠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황위에 오르시면 곧 어진 황비를 얻으셔서 황자를 생산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잘 교육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황위 세습이 이루어 질 때마다 반대파를 몰살시키는 일이 반복됩니다." 엘시는 침묵했다. 시허릭은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피부로 느끼면서 도 그것을 무시한 채 일어났다. "물러가겠습니다." 시허릭은 어정쩡한 방향으로 경례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두 걸음 을 옮겼을 때 엘시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인가?" 시허릭은 고개를 돌려 조금 전부터 피하던 엘시의 시선에 자신의 시 선을 얽었다. 나가는 아니지만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제위가 싫다는 겁니까?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가 문제 다. 아무도 그런 걸 마다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원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마라. 젠장. 너를 위해 그걸 양보한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 냐. 마지막 말은 엘시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허릭에게도 불분 명하게 전달되었다. 시허릭은 자신이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한다는 희미한 자각을 느꼈고 그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황제가 되어야겠습니까? 발케네공?" 그저 말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지만 그것은 엘시를 순간적으로 당혹 하게 만들었다. 시허릭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그렇잖으면 시모그라쥬공?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가 황제가 되어야 합니까? 제국이라는 것이 사람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큰 단위라고 생각하는 후작이라면 제위를 고사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누가 황제가 되어야겠습니까? 대장군님. 다른 길 모두가 위험하다는 것도 어떤 길을 선택하는 좋은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제국은……" 엘시는 말끝을 흐렸다. 그가 더 말하지 않을 거라 판단한 시허릭 마 지오 상장군은 그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좋은 제국을 만들어주십시오." 시허릭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엘시는 시허릭의 말에 대 해 생각해 보았다. 시허릭은 모든 것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마치 엘 시가 이미 제국과 약혼까지 끝내놓은 것처럼 말했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결합을 축복할 겁니다. 기 쁜 일입니다. 하지만 엘시에게는 파혼 경험이 있다. 헨로 중대가 흑사자군과 조우하기로 한 지점은 위그세 호수에서 남 쪽으로 800킬로미터 쯤 떨어진 페로그라쥬였다. 레콘이라면 몇 일 거 리라고 말했겠지만 코끼리와 사람에겐 상당한 강행군으로도 열흘은 족히 소모될 거리다. 하지만 그들이 늦게 도착하면 전체 흑사자군이 곤경을 겪기 때문에 니어엘 헨로는 포장 작업이 끝나자마자 밤인데도 출발을 명령했다. 다행히 시원한 밤에 움직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 은 없었다. 사막을 왕복하며 금편을 운반했던 주테카와 쵸지는 조금 불행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타개책을 마련했다. 그들은 두어 시간 정도 빠르게 달려간 다음 헨로 중대가 따라올 때까지 잔다 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먼저 출발했다. 그리고 헨로 중대와 그을린 발, 금편을 실은 코끼리들이 뒤따라 움직였다. 지멘은 떠나지 않았다. 지멘이 약속한 것은 금편을 흑사자군에게 넘겨준다는 것뿐이기에 그 들을 뒤따라갈 의무는 없었다. 지멘은 떠나는 자들의 횃불빛을 바라 보다가 호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멘은 달이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는 수면을 바라보다가 호숫가에 앉았다. 정체 모를 물짐승이 물 위로 뛰어오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사람들이 떠나자 곤충들이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아비에게 배 운 적이 없는 노래를. 달빛에 기묘한 색깔로 물든 구름이 계속 자신 의 모습을 바꾸며 밤하늘을 빠르게 흘렀다. 하지만 바람 소리는 없 다. 물결은 잔잔하고 벌레들은 자족한다. 박명의 오염을 걱정할 필요 가 없는 한밤중. 어둠이 어둠의 방식으로 자신을 고양시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멘의 오른손은 옆에 놓아둔 망치 위에 얹혀져 있었다. 쇠망치는 따스했다. 금편을 옮기느라 낮 동안 내내 그곳에 내버려두었기 때문 에 쇠망치는 햇빛을 잔뜩 머금었다. 지멘은 손가락들을 세워 망치를 율동적으로 두드렸다. 다다닥, 다다닥, 다다닥. 그 소리는 지멘의 기분을 상쾌하게 바꾸지 못했다. 지멘은 손을 끌 어당겼다. 그는 알 속에 든 곤충을 흉내내듯 몸을 웅크렸다. 다른 곳 으로 떠날 생각은 없었다. 약속한 장소는 위그세 호수 옆이다. 지멘은 아실과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라세와 정신억압에 대해 생각했다. 정신억압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가장 끔찍한 것은 라세가 자신의 정신에 손을 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라세 는 아실을 치료할 수 없을 수도, 혹은 치료할 생각이 없을 수도 있 다. 하지만 그녀는 지멘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 자신만이 아실을 치 료할 수 있으며 또한 치료할 거라는 식으로 그의 정신을 억압했을 수 있다. 그런 가설은 아실에게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그를 미 칠 지경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라세가 그런 능력을 가진 정신억 압자이길 바라야 한다. 그래야만 아실을 구할 수 있으므로. 정신억압 이 야기하는 거대한 모순은 레콘의 강력한 힘 따윈 가볍게 무시하며 그를 짓눌렀다. 가볍게 몸을 웅크리고 편안하게 앉아있지만 지멘은 익사하는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환상 아닐까? 나는 아실을 데리고 치천제를 찾은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실은 최후의 대장간에서 내가 어디 갔 는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실이라는 소녀가 애초 에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타이모라는 레콘도, 지멘이라는 레 콘도. 내가 레콘일까? 그것은 확실한 사실인가? 여기는 위그세 호숫 가인가?' 정신억압은 모든 확실성을 압살한다. 정신억압은 현실을 비웃는다. 정신억압은 세계를 파괴한다. 지멘은 기진맥진한 채 쓰러졌다. 누군가가 그를 깨웠을 때 지멘은 비로소 자신이 기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어나." 말을 한 것은 어떤 레콘이었다. 지멘은 그가 누군지, 왜 일어나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지멘이 일어나자 레콘은 하늘로 솟아올랐다. 언 젠가 10킬로미터나 되는 환상계단을 만들었던 사람답게 지멘은 어렵 잖게 환상계단을 만들어 그 뒤를 따랐다. 조금 후 지멘은 위그세 호수 위쪽에 떠있는 말리 위에 올라섰다. 지멘을 데리고 온 레콘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지멘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곧 레콘이 나타났다. 다른 레콘이다. 그는 따라오라는 몸 짓을 했다. 지멘은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파괴기계들 사이를 걸었다. 그와 안내자의 발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말리 위에는 우는 곤충은 없다. 어둠이 환하게 죽었다. 지멘은 커다란 방에 서있었다. 앞쪽에는 위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고 주위에는 많은 문이 있다. 커다란 건물의 홀처럼 보인다. 벽에는 많 은 초들이 불타고 있어 환했다. 지멘은 자신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 다. 그리고 안내자도. 그가 언제 곁을 떠났는지 지멘은 알지 못했다. 어쨌든 홀에 서있는 것은 지멘뿐이었다. 아름다운 홀이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왔다. 지멘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그 동작을 무서워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녀는 상당한 집중력으로 자신이 딛는 계단을 보고 있 었기 때문에 지멘은 그녀의 시선을 볼 수 없었다. 서툴게 계단을 내 려오는 그녀를 보며 지멘은 어떤 단위를 떠올렸다.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다. 한 달. 헨로 중대가 엔거 평원에서 위그세 호수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열 이틀이다. 치천제가 약속한 시간은 한 달이다. 열이틀은 한 달의 4할 쯤 된다. 그렇다면 저것은 아실의 4할일까? 아실이 겁먹은 표정으로 남은 계단을 걸어내려오는 동안 지멘은 정 신적으로 수십 번 이상 사망 판정을 받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마침 내 아실은 계단을 정복했고 안도의 한숨으로 그 정복을 자축했다. 똑 바로 선 아실은 고개를 들었다. 하나뿐인 시선이 지멘의 가슴을 강타 했다. 지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실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멘을 바라보았다. 낯설다는 것뿐,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특기할 만한 감정도 엿 보이지 않았다. 아실은 다만 대단히 큰 물체를 보며 놀라워 하는 것 처럼 지멘을 바라보았다. 아주 크기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온다는 듯 이. 지멘은 아실의 그런 옅은 관심이 곧 사라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했다. 아실은 어쩌면 그를 놔두고 다른 곳으로 걸어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몸을 돌려 내려온 계단을 다시 올라갈지도 모른다. 만 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지멘은 자신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실이 발을 움직였다. 아실은 지멘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지멘은 아실의 외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필사적으로 읽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읽은 것은 시선을 끄는 큼직한 물체니까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감정밖에 없었다. 아 실은 지멘이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 다. 그런 큰 생물을 본다면 무서워하는 것이 보통의 반응이겠지만 아 실에게서는 두려움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지멘은 아주 큰 '물체'일 뿐…… 아실은 지멘 앞에 섰다. 그녀가 시선으로 자신을 난도질하는 것은 지멘에게 다시 없는 고통이었다. 그 무관심한 시선. 그 감정 없는 시 선. 아실이 딸꾹질을 하듯 말했다. "아?" 지멘은 호흡을 멈췄다. 아실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지멘을 회피하 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 후 아실은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다시 지멘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슬픔 이 떠올랐을 때 지멘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겁을 집어먹을 만한 큰 동작이지만 아실은 놀라지 않았다. 아실은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멘의 얼 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갑자기 아실은 손을 들어올렸다. 아실은 눈을 떴다. 지멘을 똑바로 보며 아실은 지멘의 수염볏에 손을 얹었다. 지멘은 희망의 장난에 고 통스러워 했다. 그런 큰 희망을 품어서는 안돼. 더 큰 좌절 외엔 아 무 선물도 준비하지 않은 채 찾아오는 못된 희망에게 자신을 내줘선 안돼. 그것을 바라서는 안돼. "지멘?" 지멘은 부리를 열었다. 아실은 다른 사람의 표정을 흉내내는 것처럼 슬픔과 반가움을 어색하게 표정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실의 표정이기도 했다. 지멘은 더 이상 희망에 저항할 수 없었다. "아실." 아실은 미소를 지었다. =============================================================== 33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3. 꺼져가는 불씨 (2) 2004/10/11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3-2 관련자료:없음 [4935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11 04:39 조회:85 피를 마시는 새 33. 꺼져가는 불씨 - 2 철의 대화는 마침내 종결되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지멘은 해방감도, 아쉬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오래 전 부터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뿐이다. "지멘." "아실." 혹 그것은 가장 모범적인 철의 대화인지도 모른다. 아실이 그의 이 름을 불렀을 때 그 목소리는 최후의 대장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무기 보다도 강력하게 지멘의 가슴을 찔렀다. 훌륭한 선공인 셈이다. 아실 이 공격했고 지멘은 반격했다. 둘은 격투를 시작했다. 철의 대화가 그렇듯이 누구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격투는 계속될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것 아닌가? 치천제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멘은 고개를 들기 전부터 계단 위에 서있는 치천제를 알고 있었 다. 레콘의 직감이다. 치천제는 흑사자 모피를 느슨하게 어깨에 걸치 고 있었다. 한계선 가까운 곳이라 그것을 꼭 여밀 필요는 없는 모양 이다. 그래서 지멘은 그 투박한 모피 아래에 있는 황제의 의복을 볼 수 있었다. 무엇이 황제다운 것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아라짓 제국이 가졌던 황 제는 둘뿐이고 두 사람 모두 대중에게 황제의 인상을 주는 일에는 열 심인 편이 못 되었다. 원시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고 게다가 치 세 기간 자체가 짧았다. 그녀는 대중에게 황제의 겉모습이 어떤 것인 지 가르쳐줄 틈을 낼 수 없었다. 그 뒤를 이은 치천제는 지상에 모습 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하늘누리 위에서 접견자들을 만나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그 때도 치천제는 흑사자 모피로 몸을 감싼 채 높은 옥좌에 앉아 간결하게 말하지 않으면 하늘누리 밖으로 던지겠다 는 태도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황제다운 어법, 황제다운 몸가짐, 황 제다운 옷차림에 대해 제국인들이 머릿속에 떠올릴 만한 것은 빈약하 다. 따라서 어깨에 흑사자 모피를 걸치고 허리에 쉬크톨만 차고 있으 면 발가벗고 있어도 격식에 어긋난다고 말하기 어려운 지경인 것이 다. 격식이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까 어긋날 수도 없다. 황궁이 요구 하는 복잡한 의례에 비추어볼 때 그 정점에 있는 황제를 구속하는 예 법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언뜻 기묘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황제다운 일이기도 하다. 아라짓 제국의 황제는 법 위에 있으 며, 따라서 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황제를 구속할 예법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멘은 흑사자 모피 아래에서 드러난 황 제의 모습을 보았을 때 위화감을 느꼈다. 지나치게 검소해서 그런 것 은 아니다.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화려한 편이었다. 하지만, 황제답다는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황제답지 않다는 표현 또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지멘은 치천제의 모습이 황제답지 않다 고 생각했다. 치천제의 뒤편에는 얼핏 보아도 열 명은 되는 듯한 레콘들이 있었 다. 절망도에서 그들을 탈출시켰던 지멘은 그들 대부분과 안면이 있 었지만 지멘은 뭄토의 모습에만 잠깐 집중했을 뿐 곧 그들에 대한 관 심을 버렸다. 그들 자신도 관심받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든 관심이 치천제에게 쏟아지길 바라는 듯한 태도로 그녀의 뒤편에 서있었다. 치천제가 계단을 내려왔다. 지멘은 일어섰다. 지멘의 수염볏을 놓친 아실이 잠깐 발돋움을 했다 가 다시 똑바로 섰다. 그녀가 뒤로 돌아섰을 때 지멘은 아실을 보호 하듯 망치를 두 손으로 쥐어올렸다. 그 동작은 레콘들을 언짢게 만들 었지만 황제는 괘념치 않았다. 계단을 내려온 황제는 잠시 지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기다려." 지멘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을 따랐다. 황제는 아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어깨 너머, 계단쪽을 향했다. 아실의 뒤쪽에 있던 지멘은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앞으로 걸어가는 아실의 뒷모습뿐이었다. 똑바로 걸어간 아실은 황제의 곁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아실의 모습은 내려올 때보다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이었다. 계단 난간을 꼭 붙잡은 채 위태롭게 올라가는 아실을 본 지멘은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 지만 치천제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기다려.' 지멘은 걸음을 멈 추었다. 대신 계단 위에 서있던 레콘들 가운데서 뭄토가 움직였다. 계단을 성큼 내려온 뭄토는 아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실은 그 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뭄토는 벼 슬을 주무르다가 허리를 굽혀 아실을 안아들었다. 아실을 안아든 뭄 토가 계단을 오르기 위해 몸을 돌리자 지멘은 뭄토의 어깨 너머로 조 그맣게 보이는 아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실의 시선은 인형의 그것처럼 뭄토의 움직임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흔들렸다. 지멘은 그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지 않더라도 다른 무엇에 고정되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실을 안아든 뭄토는 이층으로 사라졌다. 지멘은 그의 모습이 완전 히 사라진 후에야 치천제에게 눈을 돌렸다. 황제가 말했다. "따라와." 황제는 왼쪽으로 걸어갔다. 지멘이 따라오리라는 것을 확신하듯 그 녀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지멘은 떠나는 황 제를 무시한 채 아실이 걸어올라간 계단으로 올라갔다. 계단참에 있 던 레콘들은 벽을 만드는 것처럼 완강하게 지멘의 앞을 가로막았다. 싸워서 길을 얻는다는 시도를 해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필요 는 없다. 지멘은 자신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 다. 그것이 정신억압을 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물론 될 수 없다.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도록 억압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모든 논리를 파괴하는 정신억압의 가능성 앞에서 시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멘은 그런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해야될 것이 다. 지멘은 아실의 편지에 있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는 그 편지를 외워 쓸 수도 있다. '어떻게 그걸 알아낼 수 있는지는 발케네공이 가르쳐줄 거에요. 아 니, 가르쳐줄지도 모른다고 해야겠군요. 그가 선택할 일이니까. 나는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어요. 그가 내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에 게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려줄 거예요.' 지멘은 발케네공에게 가기로 되어 있던 그 편지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그 편지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혼돈으로 바 꾸는 정신억압의 가능성 앞에서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실이 분명히 썼을 그 편지는 지금 어디에 있 는지, 아직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하다. 지멘은 자기 기만이라 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어.' 그리고 지멘은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억압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멘은 치천제의 뒤를 따랐다. 계단에 있던 레콘들 중 몇 명이 지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나머지는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지멘은 커다란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치천 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레콘들의 무 게를 느꼈다. 치천제가 커다란 문을 밀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방은 낯익었다. 얼마 전 치천제가 그에게 엘시를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던 방이었다. 커다란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불타고 있었고 그 외에 다른 조명은 없 어 어두웠다. 하지만 벽난로 근처에 앉아 다리를 뻗고 있는 스카리 빌파의 완전무장한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투구에 눌린 머리카락과 먼지를 뒤집어쓴 옷차림도 알아볼 수 있었다. 스카 리는 먼 길을 달려와 조금 전 겨우 앉을 자리를 얻은 사람처럼 보였 다. 스카리는 치천제의 입실을 보고는 일어났다. 황제를 따라 지멘이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등뒤에서 문이 닫혔다. 뒤를 돌아본 지멘은 레콘 들이 따라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안에는 스카리와 지멘, 그리고 황제만이 남겨졌다. 황제의 배짱에 놀랄 만도 하지만 지멘은 그런 느낌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황제는 지멘에게 말했다. "앉아라. 발케네공도." 스카리는 그렇게 했지만 지멘은 다시 한 번 황제를 거부할 수 있는 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바닥에 망치를 내려놓고는 팔짱을 끼며 문에 몸을 기댔다. 바깥에 있는 레콘들이 들어서기 어렵도록 막아섰 다고 할 수도 있다. 황제는 그의 조그마한 불복종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벽난로 주변에 있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발케네공." 스카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 즈믄누리가 폐하께 적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 발언은 지멘조차 조금 긴장하게 했다. 도깨비는 원래 그렇다. 평 화롭고 온화하고 이야깃꾼 세 명의 협공에도 무참하게 무너지지만 정 치적인 대화에서 즈믄누리의 이름은 관련자 모두가 최대한의 집중력 을 발휘하게 된다는 점에서 남학생 기숙사에 던져진 여성용품이나 마 찬가지다. 게다가 '즈믄누리'가 '적대'라는 단어와 한 문장 안에 자 리잡게 되자 충격은 더욱 컸다. 황제는 설명을 요구했다. 스카리는 비나간에서 자신이 목격한 지키 멜 퍼스의 탈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황제의 명령을 제대로 수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스카리의 묘사력을 상 당히 증폭시켰다. 스카리는 황제로 하여금 뇌룡공 륜 페이가 아스화 리탈과 함께 갔다 하더라도 비나간후의 탈출은 저지하지 못했을 거라 고 판단하게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황제가 무슨 판단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스카리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나온 황제의 질문은 왜 그 탈출을 저지하지 못했느냐는 것이 아니었다. "짐은 그대에게 비나간을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그곳에 있었으면 짐 이 갔을 것이다. 왜 비나간을 비워두고 여기로 온 것인가?" 스카리는 당신 바보 아니냐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고 싶었다. "폐하. 제 생각에 즈믄누리의 불온한 움직임을 알려드리는 것에 비 하면 비나간을 장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판단하라고 명령한 적은 없다. 발케네공. 그리 고 네가 본 것은 딱정벌레와 도깨비일 뿐이다." "폐하. 그런 딱정벌레를 길러낼 수 있는 곳은 즈믄누리뿐입니다. 그 리고 저는 그런 사실만 가지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곳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봤습니다. 그 도깨비들은 비나간후가 즈믄 누리에 보낸 편지의 답장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틀림없는 즈믄누리입니다." "짐은 그 딱정벌레가 즈믄누리의 딱정벌레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 았다. 그것이 바우 성주의 뜻인지는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바우 성주 가 짐에게 적대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오래 전에 무사장이 이곳에 나타 났어야 한다. 부냐 헨로를 보러 온 거냐?" 아무런 음색의 변화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마지막 질문은 탁자 아 래로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과 비슷했다. 스카리는 뚜렷이 알아볼 수 있는 고통의 표정을 드러내었다.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어쩐지 불 쾌했지만 지멘은 스카리와 동질감을 느꼈다. "폐하. 저는……" "돌아가서 기다려라." 더 이상 대화를 진행시킬 수 없는 단호한 말이었다. 스카리는 고개 를 떨구었다.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지멘은 갑자기 스카 리의 품속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스카리에겐 도깨비 감투가 있다. 지멘은 용인이 아니지만 스카리 빌파가 황제 시해와 부냐 헨로의 두 번째 구출을 생 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잖게 읽어낼 수 있었다. 도깨비 감투는 말리 위에 득시글거리는 레콘들 사이에서도 그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부냐 헨로의 소재에 대해 스카리가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광대한 말리 전체를 뒤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최 악의 경우 부냐는 말리 위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스카리는 고려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그의 황제 시해를 저지할 존재는 황제 자 신 외에도 한 사람 더 있었다. 지멘은 만약 스카리가 품속으로 손을 뻗는다면 그 즉시 그를 공격할 생각으로 스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황제가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지멘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황제사냥꾼이다. 하지만 지멘은 자신이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용과도 싸울 작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실이 스스로 걷는 것을 보고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스카리가 무너지는 사내의 목소리로 말했다. "앙원합니다. 폐하. 멀리서라도 잠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돌아가라. 발케네공." 스카리의 고통이 증오로 바뀌었다. 지멘은 문에 기댄 등을 살짝 떼 서 도약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스카리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지는 않았다. 스카리는 부냐에게 해가 갈까봐 참아준다는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고는 과장된 동작으로 예를 표시했다. 그리고 그는 문쪽을 향 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멘은 옆으로 비켜섰다. 스카리가 밖으로 나간 다음 지멘은 문을 닫았다. 치천제는 벽난로를 향해 앉아 있었다. 그런 것을 보고 싶다면 그 뒷모습에서 다루기 힘 든 부하의 통제를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지배자의 피로를 읽어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끼워맞추는 식이 될 것이다. 황제의 뒷모습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문득 지멘은 조금 전에 본 광경을 스카리가 정신억압을 당하지 않았 다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계단을 올라가보려 한 것과 마찬가지다. 스카리의 태도는 황제에게 인질을 붙잡혀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는 남자의 것이었지 정신적 노예의 그것은 아니었 다.(그리고 지멘은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도록 정신억압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순식간에 미쳐버릴 수도 있는 생 각이다.) 황제는 방 안에 또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벽난 로만 바라보았다. 지멘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나 생각했 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다. 지멘이 그 중 하나를 꺼내려 했을 때 황제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오라." 지멘은 그녀의 곁으로 걸어가 섰다. 거의 누운 것 비슷한 자세로 의 자에 앉아 있던 황제는 지멘을 보지도 않은 채 손으로 바닥을 가리켰 다. 바닥에 앉으라는 손짓이었다. 지멘은 대화가 어색할 정도의 높이 차이를 고려해서 그 손짓을 따랐다. 하지만 바닥에 앉은 후에도 그는 황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꽃을 마주보던 황제가 말했다. "조금 전의 희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지멘은 자신이 본 광경 어디에서 웃음의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설명하듯 말했다. "스카리 빌파는 부냐 헨로를 보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다." 지멘은 벼슬을 꿈틀했다. "그럼?" "지키멜을 놓친 것을 변명하러 온 거지." 지멘은 퍽이나 화려했던 스카리의 보고를 떠올렸다. "그러면 부냐를 보러 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건가? 변명하러 왔 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아냐. 짐이 부냐를 보러 온 거냐고 물은 후부터는 그 어떤 진실에 비교해도 손색없는 진실이 되었다. 스카리는 부냐 헨로를 보고 싶어 서 온 것이다. 그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거짓이 라 하겠나." 지멘은 황제의 말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다. "그는 가식에 찬 인물인가?" "아니. 보기 드문 진솔한 인물이지. 그에게도 자격이 있다." "자격?" "황제의 자격." "……엘시 에더리가 차기 황제인가?" "그렇다. 그 때문에 스카리는 항상 논외였지. 스카리는 언제나 엘시 의 방해물이었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한다면 스카리에게도 상당한 자격이 있다. 엘시가 가진 것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고, 또 엘시의 것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내가 너를 죽이는 것으로 황위 이양이 일어나는 건가?" "그래. 대호왕이 알려줬나?" "그렇다." 지멘은 잠깐 멈췄다. 할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지멘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왜 좀 더 간단한 방법으로 하지 않는 거지? 그냥 엘시를 불러 너에 게 황위를 선양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 같지는 않은 데." "대호왕이 거기에 대해서도 설명해줬을 텐데." 황제의 말대로였다. 대호왕은 설명해주었다. 원시제가 치천제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과는 다르다. 원시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존경을 받고 있었고 제국을 위해 요절한 인 물이며 또 치천제는 원시제와 같은 나가다. 원시제의 지명과 원시제 와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은 치천제에게 다른 이들이 넘볼 수 없는 정 통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치천제는 원시제와 다르다. 또한 엘시는 인 간이다. 따라서 평범한 선양은 엘시에게 황위뿐만이 아니라 무수한 반대파도 줄 것이다. 원활한 계승을 위해서는 사전에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는 일이 필요하다. 엄청난 증오를 쌓게 되는 그 일은 치천제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이며, 그런 증오를 받는 자의 후계자가 된다면 엘시 또한 그 증오를 고스란히 넘겨받게 된다. 따라서 치천제는 반대 파를 모두 제거한 다음에 살해되어야 하고 엘시는 공위가 된 황위에 올라야 한다. 황제가 말했다. "지멘. 하고 싶은 질문이 뭐지?" 지멘은 황제의 옆얼굴을 노려보다가 손이 아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손은 옆에 내려둔 망치를 움켜쥐고 있었다. 지멘이 말했다. "내가 너를 죽이겠다는 숙원을 선택하도록 나를 정신억압했나?" 황제는 고개를 돌려 지멘의 망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잠깐 머물렀 던 시선이 다시 움직여 지멘의 얼굴을 향했다. 황제는 지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실도 짐에게 그렇게 질문했지." 지멘은 망치가 너무나도 무겁다고 생각했다. 수족처럼 다루던 물건 임에도 불구하고 지멘은 그것을 들어올릴 자신이 없었다. "아실에게 했던 대답을 너에게도 해주지." 지멘은 망치가 바닥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다고 느꼈다. 있을 수 없 는 일이지만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각은 그것이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망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멘은 황 제의 눈길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아실도, 너도 정신억압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식으로 정신억 압하지 않는다." 치천제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진실 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 지멘은 자신의 질문과 치천제의 대답이 모 두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멘은 거짓과 진실, 환상과 실재 사이의 이 곡예가 지긋지긋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하나뿐이다. "아실은 나은 건가?" 황제는 고개를 돌려 다시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한 달 후라고 했다. 오늘도 거의 다 지났으니 17일 정도 더 기다려 야겠군." "걸었어. 계단도 내려왔고. 그리고 내 이름을 불렀어." 황제는 딴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벽난로 속의 불길을 바라보았 다. 지멘은 그녀의 멱살을 붙잡아 자신에게 돌려놓고 싶은 것을 참으 며 말했다. "낫고 있는 거야? 17일 후에는 완전히 낫는 거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멘은 고개를 홱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문 저편에서 레콘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위대한 이라세오날이여. 게라임 지울비가 친견을 바라고 있습니 다." 지멘은 당황했다. 레콘이 사용한 호칭도, 그가 거론한 이름도 모두 기괴하게 들렸다. 하지만 황제는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들여보내 라는 간단한 대답을 했다. 문이 열리고 아마도 지멘만큼이나 당황한 듯한 인간이 걸어들어왔다. 유료도로당주 게라임 지울비였다. 방안을 둘러보던 게라임은 지멘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당신이 이라세오날입니까? 하지만 나에게 온 사람은 황제를 만나야 한다고 했는데 왜 당신이?" 지멘은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게라임이 거기에 누가 앉아있 다는 것을 느꼈을 때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라임은 깜짝 놀랐 다. 얼빠진 표정으로 황제를 보던 게라임이 중얼거렸다. "이라세오날…… 라세. 아아!" 강대한 유료도로당주인 게라임은 황제의 이름인 라세를 알고 있었 다. 물론 본명인 이라세오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치천제가 말 했다. "무릎을 꿇어라." 게라임은 무엇에 홀린 사람 같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의자 옆을 돌아 그에게 다가갔다. 게라임의 앞쪽에 선 황제가 담담하 게 말했다. "게라임 지울비. 그대를 도로의 왕에 봉한다. 왕명은 스스로 정하도 록. 면이 아닌 선에 군림하는 최초의 왕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짓도록 하라." 게라임은 심장이 멎을 만큼 놀라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게라임 지 울비를 처음 보는 지멘은 그가 좀 경망스러운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 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 예를 들어 시오크처럼 - 게라임이 놀 라기도 한다는 사실에 더 놀랐겠지만. "폐하. 저희 당은-" "왕국이다." 선으로 이루어진 왕국이라는 당혹스러운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본 게 라임은 그를 잘 아는 사람에게 익숙한 침착을 되찾았다. 그는 차분하 게 말했다. "저희 당은 당원들의 것입니다." "그 당원들은 짐의 것이다." "폐하. 그 말씀 거두어주십시오. 저희들의 길은 목적을 향해 걷는 자들의 것입니다. 누군가의 왕국이 될 수 없습니다." "알았다." 서로에 대해서는 이름 외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지멘과 게라임이지 만 그 순간에는 놀라운 감정의 일치를 느꼈다. 두 사람은 모두 어이 가 없다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들의 당혹에 신경 쓰지 않은 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들어와서 게라임 지울비를 데려가라." 문이 열리고 레콘이 들어왔다. 레콘은 황제에게 공손히 목례하고는 게라임 지울비를 일으켰다. 게라임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말했다. "데려가서 가둬라." "폐하?" "네 아들이 도로의 왕이 될 것이다." 게라임은 자신이 인질이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격렬하게 저항 하려 했지만 레콘의 동작은 빨랐다. 레콘은 재빨리 게라임의 두 다리 를 붙잡아 그를 거꾸로 들어올렸다. 세상이 확 뒤집히는 감각 때문에 게라임은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그를 들어올린 레콘은 게라임이 자 신의 자세에 적응해서 버둥거릴 틈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레콘은 그를 거꾸로 든 채 밖으로 걸어갔다. 다시 문이 닫혔다. 그 모든 일은 지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물론 그가 도로의 왕이 나 유료도로당의 존재의의 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 멘은 비로소 황제가 누군가를 강제하고 싶을 때 정신억압 같은 신비 한 방식보다는 인질을 붙잡는 평범한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을 깨달았 다. 스카리의 인질은 부냐 헨로이고 지멘의 인질은 아실이다. 그리고 시오크 지울비의 인질은 그의 아버지다. 지멘은 엘시 에더리의 인질 이 누굴지 생각해 보았다. 엘시는 그런 사람은 없다고 말했지만 황제 의 방식으로 보건대 분명히 인질이 있을 것이다. "유료도로당주의 아들이면 비나간후의 연인이라는 그 남자로군." "시오크 지울비. 도로를 능동적으로 이용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니 왕위를 받아들일 것이다." "왜 유료도로를 왕국으로 만드는 거지?" "그래야 황제가 지배하기 편하니까." "그러면 이것도 엘시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그렇다." "왜 진작 왕국으로 만들지 않았지?" "당이 당으로 있는 한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게라임은 당이 왕 국이 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희망의 표현일 뿐이다. 통행료 지불을 거부하지도 않은 시모그라쥬군과 싸운 후부터 유료도로당은 이미 과거의 당이 아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고." 황제는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그녀를 바라보던 지멘이 속삭이듯 말 했다. "그러면 이제 어떤 사람들을 학살할 거지?" 황제는 주먹으로 턱을 고였다. 지멘은 머리 대신 부리로 생각하듯 말했다. "시모그라쥬는 아니군. 바로 엘시가 그곳으로 갔으니까. 엘시의 손 에 피를 묻힐 수는 없지. 다시 발케네인가? 하지만 이젠 명분이 없을 텐데. 스카리 빌파가 사라티본 부대와 함께 너를 돕고 있는데 발케네 를 공격할 수는 없지. 잠깐. 너는 도망친 연인들의 뒤를 군대로 쫓는 일이 특기였지. 지키멜과 시오크는 즈믄누리로 갔어…… 설마 즈믄누 리인가?" "그들이 즈믄누리로 갔다는 보고는 없어. 즈믄누리의 딱정벌레를 타 고 사라졌을 뿐이지. 지키멜 퍼스가 즈믄누리로 갔을 것 같지는 않 군." "즈믄누리가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건가?" "아니. 즈믄누리의 힘이 즈믄누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지멘은 즈믄누리의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규리하로군."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나간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규리하는 굉장히 추운 곳이다. 지키멜 퍼스는 규리하에 도착한 직후부터 벽난로와 배기시설의 열렬한 찬미 자가 되었다. 두꺼운 이불로 몸을 감싸고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서 잠을 자면서도 지키멜은 밤새도록 자신이 한계선을 넘은 나가가 된 꿈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규리하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아직 가시지 않은 장거리 비 행의 피로와 익숙하지 못한 추위에 괴로워 하는 그녀를 방문한 정우 는 그녀에게 정신적인 추위까지 선사하는 말로 아침 인사를 대신했 다. "좋은 꿈 꾸셨어요? 폐하. 폐하를 받아들이면 규리하는 멸망한다더 군요." 지키멜 퍼스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려 시도했고,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제 정우라고 부르라고 했지요? 저를 지키멜이라고 부른다면 그렇 게 하죠." "예. 지키멜." 지키멜은 목례하고는 말했다. "정우. 당신의 신하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할 것 같군요. 우리 두 사람이 또다른 스카리 빌파와 부냐 헨로라고 말했겠지요."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대략 그런 의미였어요." "우락부락한 병사들 대신 당신이 여기에 왔다는 것에 대해 내가 희 망을 품어도 될까요?" 정우는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거부를 말할까봐 두려 워진 지키멜은 정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정우. 황제는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어떤 억지지요?" "말리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도착했나요?" "말리? 꽃이오?" "아뇨. 치천제가 가지고 있는 또다른 하늘치에요. 황제는 그것을 타 고 돌아왔지요." 지키멜은 엔거 평원에 나타난 말리와 거기에서 내려와 시모그라쥬군 을 물리친 나가와 레콘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우는 한계선 북부에 나가들이 나타났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다. "아마도 소드락 덕분이었을 거예요. 그 나가들은 잠깐 동안 활동한 다음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그보다 더 주의해야 하는 것은 레콘들이 에요. 그들은 센시엣 특수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레콘들이었어요. 황제가 타고 돌아온 또다른 하늘치 말리는 하늘누리와 비교도 안되는 병기에요." "그런가요? 그러면 왜 폐하께서는 규리하 전쟁이나 발케네 전쟁에서 말리를 사용하지 않으신 거죠?" "정우.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공개하면 전쟁이 벌어졌을까요?" "예? 어, 그 하늘치가 그렇게 무서운 거라면 아무도 황제와 싸우려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러고보니 왜 오래 전에 공개하지 않은 거죠? 그러면 규리하 전쟁도, 발케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바로 그거예요. 황제에게는 전쟁이 필요했어요. 그러니까 말리를 공개할 수 없었던 거죠." "왜 전쟁이 필요하죠?" "그게 내가 말하는 억지에요. 혹시 네 마리 형제 새에 관한 키탈저 사냥꾼의 이야기 알아요?" 정우는 반색했다. "예. 알아요.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빨리 죽고 피를 마시는 새는 가장 오래 살아요. 독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빠르고 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느리지요." "잘 아는군요. 황제는 제국이 오래 사는 새가 되기를 바라요. 그래 서 제국을 피를 마시는 새로 만들려 하는 거죠. 끝없는 전쟁이 아니 고선 이 터무니 없이 큰 제국을 유지할 방법이 없어요." 정우는 멍한 표정으로 지키멜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말했다. "어, 이건 킴들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요? 미안하지만 도깨비 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주면 좋겠네요. 저는 아무래도 그 쪽이 더 익숙하니까요. 제국이 오래 살기를 바란다면 잘 보살피고 행 복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끝없는 전쟁이라고요? 모 순처럼 들리는데요." 지키멜은 비명을 질러대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렸다. 비나간에서 규리하까지의 비행은 길었다. 지키멜은 정우가 어떻게 즈믄누리에서 규리하까지 비행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아라짓 제국은 놀라운 체제예요. 정우. 움직일 수 있는 수도 때문 에 아라짓에는 변경이 없어요. 하늘누리가 움직이기만 하면 변두리도 곧 중심지가 되니까요. 하지만 변경이 없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중심 이 없다는 이야기도 되지요. 하늘누리가 떠나면 중심지도 곧 변두리 가 되죠." "하지만 뱀단지가 있지요." "맞아요. 뱀단지. 그것이 있으니까 하늘누리의 뜻은 제국 전역에 곧 장 전달되죠. 그 때문에 아라짓이 굉장히 불안한 제국이라는 사실이 감춰지는 거에요. 정치는 인간의 행위들 중에서 가장 상호적인 것 중 하나예요. 그런데 뱀단지는 일방적이지요. 상호 작용이어야 할 정치 가 한쪽의 일방적 행위로 끝나버리는 거에요." "음. 그런가요." "예. 뱀단지보다 더 나은 수단이 있다면 이런 큰 제국도 감당할 수 있을지 몰라요. 어쩌면 언젠가 우리는 그런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런 것이 없어요. 정치 단위는 상호 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는 크기여야 해요. 아라짓 제국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죠. 그 때문 에 아라짓 제국은 그 지배자가 반쪽짜리 정치를 하는, 중심 없는 제 국이죠. 그래서 아라짓은 불안하다는 거예요. 치천제는 그것이 부서 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지요. 그래서 제국의 파괴 요인을 모두 파괴하 겠다고 결정했어요. 하지만 아라짓은 원래 불안하기 때문에 그런 파 괴 요소는 끝없이 나타나죠. 이미 우리는 분리주의나 서약지지파 같 은 것을 겪었어요. 분리주의는 그 이름에서부터 분열을 상징하고 있 지요. 그리고 서약지지파는 간접적이죠. 제국을 황제에게 서약할 수 있는 자와 그럴 수 없는 자로 분리하는 거예요. 하지만 둘 다 제국을 분열시키는 움직임들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겪지 못한 다른 분열 움 직임은 계속 나타날 거예요. 종족과 계급에 의한 분리는 이미 나타났 으니 다음에는 나이나 성별에 의한 분리가 나타날지 모르겠군요. 제 국을 남자 왕국과 여자 왕국으로 분리하자는 이야기가 진짜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뭐 모르는 일이죠. 서약지지파의 경우처럼 간접적으 로 분리할지도……" 지키멜은 무언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희미한 자각 속에서 말끝을 삼 켰다. 정우의 멍한 표정을 본 지키멜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 지 알게 되었다. 도깨비를 죽이는 것은 세 명의 이야깃꾼이다. 정우 는 남자 왕국과 여자 왕국이라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이야깃거리에 대해 공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두 나라의 국경선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라고 물어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키 멜이 정우의 주의를 촉구하기 위해 헛기침이나 여타 수단을 동원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다행히 정우가 정신을 차렸다. "아, 예. 그러면 당신 이야기를 좀 정리해볼게요. 아라짓 제국은 원 래 불안하다. 그것은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모래성처럼 계속 부 서지려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황제는 그것을 계속 두드려 다져 야 한다. 말리는, 이를테면 아주 강력한 두드리기 도구다. 맞나요?" "맞아요. 잘 정리했어요. 그게 황제가 부리는 억지지요. 황제는 제 국이 쪼개지도록, 상호 작용이라는 정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 는 크기로 분리되도록 내버려두어야 해요." "그래서 당신은 비나간 왕국의 왕이 된 것이군요." "그래요. 지금은 도망자지만." 지키멜은 손을 뻗었다. 정우는 흠칫하며 손을 잡아당기려 했지만 그 녀의 손은 지키멜에게 붙잡혔다. 지키멜은 정우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정우. 제국은 어차피 부서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황제에게 그토 록 큰 힘이 있는 이상 황제는 오랫동안 그 파괴에 저항할 거예요. 불 에 맞불을 놓듯 파괴에 파괴로 저항하는 거죠. 그건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에게까지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피해를 남기게 될 거예 요. 황제에 맞서 싸워야 해요." 정우는 조용히 지키멜을 바라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폐하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일 텐데요." 지키멜은 입을 다물었다. 정우는 차근차근 말했다. "당신은 폐하께서 싸움을 원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폐하의 뜻에 대적하기 위해 폐하와 싸운다고요?" "맞아요. 하지만 일격에 황제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당신은 하늘치를 다룰 수 있어요. 그리고 이곳에는 즈믄누리의 무사장도 있 어요. 내가 알기로 무사장은 당신과 친분이 두텁다던데, 맞나요?" 정우는 지키멜의 손에서 와락 손을 뽑아냈다. 지키멜은 그 격한 반 응에 놀랐지만 정우도 자신의 반응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정우는 사 과하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즈믄누리의 성주가 명령할 때만 싸워요. 절대 로 당신이나 저를 위해 싸우지는 않아요!" "예? 아, 물론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무사장이 실제로 행동에 나선 것 은 단 한 번뿐인데도 사람들은 무사장이 나설 거라는 소문만으로 사 태를 급변시켜왔어요. 그 무사장이 실제로 싸울 필요는 없을 거예요. 저도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실제로 불을 쓰는 무서운 사태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요. 무사장이 그냥 규리하에 있기만 해도 규리하의 적 은 두려움을 느낄 거예요." 정우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발케네공은 그렇지 않았어요. 탈해가 여기 있는데도 규리하를 침략 했지요." 지키멜은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스카리 빌파처 럼 무모하지는 않다는 취지의 반론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정우의 뒤 이은 말은 그녀를 침묵하게 했다. "이렇게 말하면 안되겠지만 차라리 발케네공이 고맙군요. 발케네공 은 탈해를 무시무시한 병기로, 생각만 해도 무서운 무기로 취급하진 않았으니까." 지키멜은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정우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았다고 생각했다. 정우는 강대한 규리하의 지배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철부지 소녀다. '친구를 병기로 취급할 순 없어요! 라는 거야? 오, 규리하공. 그러 면 친구가 아닌 사람은 병기가 되어도 된다는 건가? 당신의 군대는 당신의 병기 아닌가? 그 유치한 순수에 하품이 나오는군.' 지키멜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철부지 소녀에게 그런 이 야기는 논리 없는 거부감만 일으키게 할 것이다. 정우에게 부탁해야 하는 처지인 지키멜은 그녀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지키멜은 좀 더 유치한 논리를 고안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말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보겠어요. 쉬도록 해요. 그리고 우락부락한 병사들이 찾아올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요. 다음에도 제가 올 거예요." 정우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붙잡을 틈도 없이 문밖으로 나갔다. 방안 에 홀로 남겨진 지키멜은 추위에 대해 어느새 잊어버린 자신을 발견 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3. 꺼져가는 불씨 (3) 2004/10/12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3-3 관련자료:없음 [4935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12 04:53 조회:72 피를 마시는 새 33. 꺼져가는 불씨 - 3 밖으로 나온 정우는 문에 등을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대부분은 밖으로 나왔다는 것에 대한 안도지만 일부는 다른 의미다. 정우는 말했다. "예. 부사님." 사라말 아이솔이 말했다. "예?" "할말이 있으신 거잖아요." 정우의 말은 엿들은 것이 들키지 않으려면 지나가는 중이었다는 자 세를 취하지 복도 가운데 서서 배 앞에 두 손을 모아쥔 채 정우가 나 오길 기다리고 있는 자세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 엿들은 것이 들키든 말든 꼭 해야 할 말이 있는 것 아니냐는 뜻이다. 정우의 말을 깨달은 호위병들은 - 사 라말의 회유에 넘어가 그가 엿듣도록 해주었던 -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라말이 말했다. "걷죠." "예." 정우와 사라말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침통한 표정의 호위병들이 뒤 를 따라 움직였다. 사라말은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 했다. "탈해 머리돌 무사장은 파괴적인 불을 쓸 수 없습니다. 맞습니까?" 정우는 놀랍도록 초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를 자세히 관찰 한 사라말은 그 침착함이 크게 움찔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 았다. 기절하기 직전의 고요함이라고 할까. 사라말은 만약 그녀가 옆 으로 기울어지면 즉각 부축할 채비를 한 채 말했다. "도깨비답군요. 불을 쓸 수 없는 도깨비를 무사장으로 삼다니." "도깨비다운 건지 모르겠어요. 바우 성주님이 지명했을 땐 탈해도 정말 놀랐거든요. 하지만 즈믄누리의 성주는……" "즈믄누리에 있을 땐 항상 옳은 결정만 내리지요." "부사님. 비밀로 해주겠다고 하셨지요?"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깨비가 발화장치가 달린 곰방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일인지, 그 리고 제국군과 규리하군이 정면으로 맞부닥치는 전쟁터에 도깨비가 가도록 허락한 바우 성주의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그 도깨비가 무려 두 번이나 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열 없는 불만 사용 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우연인지 깨달은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선천적인 겁니까?" "자기가 도깨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어떤 킴 소녀 때 문이에요." 정우는 그 소녀에 대해 생각했다. 개들 사이에서 자라난 고양이는 꼬리를 흔드는 대신 자꾸 목을 골골 거리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규리하공의 어린 자식을 데려 와 기르기로 한 바우 성주의 결정은 어르신들로 하여금 본질과 학습 에 대한 고색창연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어린 규 리하공이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점에서 그 상황은 개와 고양이를 함께 기르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녀가 그것을 흘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성 주님?' '괜찮아. 그건 아무 문제가 안 돼.' 어르신들은 그것이 성주의 낙관주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즈믄 누리의 성주는 즈믄누리에서 언제나 옳은 결정만 내린다. 그것은 아 무 문제가 안되었다. 어르신들은 그 킴이 도깨비들에게 가하게 될 폭 력에 대해 걱정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폭력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임수 서룬뫼도 불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언제 불을 쓸 수 있죠?' '너 또 친구들 만나러 갔구나!' '어? 임수가 불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았을까 요? 저 용인인가 봐요!' 도깨비들은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어린 킴이 용인일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그녀에게 수백 번도 넘게 당부했던 말을 또 반복했다. 하지만 정우는 왜 갑자기 친구들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친구들이 갑자기 불을 다룰 수 있게 된 그런 주 목할 만한 시점에서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친구들이 불을 쓰는 모습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 자신 도 곧 그럴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그녀를 탈출 전문가로 만들었다. 그 시점에서 문제가 된 것은 즈믄누리의 괴팍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신비한 구조였다. 한 마디로 도깨비들은 정우를 가둬둘 수 없었 다. 정우는 언제나 탈출했고, 친구들의 불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았 고, 끝내 우울증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친구들처럼 휘파 람을 불 수 없는 소년의 괴로움에 열심히 궁리했지만 친구들의 농담 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녀의 슬픔을 뒤섞어 세 배 정도 부풀리면 정우 가 느낀 감정과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정우의 탈출에 대해 걱정하던 도깨비들은 그녀가 더 이상 탈출을 시 도하지 않게 되자 그것 또한 걱정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불을 다루는 친구들이 미웠고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깨비들은 우울증에 대해 남자가 임신에 대해 아는 정도밖 에 알지 못한다. 그들과는 관련이 극히 적은 현상인 것이다. 식욕을 잃은 채 방에 틀어박혀 한숨만 내쉬는 정우의 모습은 그들 중 좀 소 심한 이들에겐 거의 공포스럽게 보였다. 그런 정우에게 어떤 도깨비 소년이 머뭇거리며 찾아왔다. 평소 정우 의 이상한 생김새 때문에 그 이전까지 그녀를 대단히 무서워하던 소 년의 이름은 탈해였다. 정우가 멈춰섰다. "사고가 있었어요." 정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사라말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뒤 쪽의 병사들의 시선으로부터 정우를 가리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불을 쓰지 못하는 그 킴 소녀를 위로하기 위해…… 큰 사고가 났고 그 소녀는 죽을 뻔했지요. 그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탈해는 그 후 로 뜨거운 도깨비불은 만들 수 없게 되었어요. 미지근한 불뿐이지 요." 사라말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미지근한 불이라. "굉장히 큰 사고였나 보군요." "제가 옷을 벗으면 아마 굉장히 놀라실 거예요." "그렇다면 세레지는 그것을 본 겁니까?" "예." 사라말은 세레지 같은 대담한 여자가 귀신 보는 듯한 눈으로 정우를 보게 되었다면 사고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 사고는 어떤 도깨비로 하여금 두 번 다시는 열을 만들어낼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만든 사고다. "도깨비불은 육체적인 능력입니다. 육을 잃은 어르신들은 더 이상 도깨비불을 쓸 수 없지요. 무사장이 육체적 손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거라면 그는 다시 불을 쓸 수 있을지도 모릅니 다." "글쎄요. 탈해의 문제에 대해선 킴보다는 도깨비가 더 많이 생각해 봤을 거예요. 하지만 도깨비들도 명백한 결론을 내리진 못했어요." "그렇겠군요. 좋습니다. 각하. 탈해 머리돌이 불을 쓸 수 없다 해도 그는 여전히 무사장입니다. 유리 기픈골 무사장이라는 하나뿐인 예외 를 제외하면 즈믄누리의 무사장들은 대대로 뭔가를 하는 것보다는 아 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해왔습니다. 바우 성주님의 결정은 그렇게 괴팍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탈해에겐 그렇지 않아요. 부사님. 도깨비가 불을 쓸 수 없어요. 날 개가 부러진 수치스러운 새와 같아요.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녔던 기 억만 가진 채 땅을 기어야 되는 새 말이에요. 그런데 탈해는 무사장 이죠. 그건 뭐죠? 이미 날 수 없게 된 새의 새장을 열어준 것이나 다 름없어요. 성주님의 결정이 옳다는 것은 믿지만, 저는 잔인하다고 생 각해요." "그 새가 나는 것은 더 잔인한 일입니다. 그 새가 날길 바라십니 까?"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예. 압니다. 저는 탈해가 어떤 느낌을 받을지 짐작하려 시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빛은 남아있습니다." "빛만 남아있지요." "그가 잃은 열은 친구들이 나눠줄 수도 있겠지요." 사라말의 말을 들은 것이 파라말이라면 아마 경기를 일으켰을 것이 다. 그리고 세레지라면 속이 거북하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하지 만 정우는 여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 사라말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복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사라말은 헤어지겠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정우가 손 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사라말. 했던 말 자꾸 또 해서 미안하지만-" "그 비밀은 소수의 규칙이 발견될 때까지 지키겠습니다." 정우는 사라말의 독특한 맹세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사라말의 터무 니 없이 진지한 얼굴 때문에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안타 깝게도 사라말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은 채 떠났다. 그래서 정우는 사라말과 헤어진 다음부터 그 소수의 규칙이라는 것이 모레나 한 달 쯤 뒤에 발견되면 어쩌나 걱정해야 했다. 탈해 머리돌은 선물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선물을 하는 것이 도깨비라면 약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불쾌한 경험 을 하게 될 가능성은 결코 없지만 굉장한 장난에 휘말릴 각오 쯤은 해두는 것이 안전하다. 그래서 탈해는 기유 구마리가 내놓은 상자를 열기에 앞서 그것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상자는 숟가락보다 더 긴 물건은 넣기 어려운 조그마한 크기였다. 하지만 골무에서 용이 튀어나오게 할 수도 있는 도깨비가 내놓은 상 자인 만큼 크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탈해는 상자의 재질을 살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고 많은 금속판으로 보강해 놓은 육중한 물건이었다. 귀한 물건을 넣어두기 위해 튼튼하게 만든 상자처럼 보 였다. 인간이라면 상자 어디에도 잠금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서 좀 다른 가설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도깨비 대장장이라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잠금 장치를 만드는 것 쯤은 간단하다. 탈해는 알았다 는 표정으로 기유를 바라보았다. 기유는 쉽게 열리지 않는 상자를 내 놓고 그것을 열어보라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기유 구마리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탈해는 히죽 웃고는 상자 뚜껑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 뚜껑은 탈해의 예상과 달리 쉽게 들어올 려졌다. 탈해는 계속되는 상자 장난일까 생각하며 뚜껑을 완전히 열 어젖혔다. 상자 안에는 또다른 상자가 들어있지는 않았다. 탈해는 미심쩍은 표 정으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다음 순간 탈해는 상자 뚜껑을 쾅 닫았다. 탈해는 상자가 놓여있는 탁자에서 화다닥 물러났다. 그 후퇴는 벽에 부딪힐 때까지 계속되었다. 탈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헐떡이며 상자 를 바라보았다. 장난이라면 이것은 최상급의 장난이다. 그런데 슬프 게도 그것은 장난이 될 수 없다. 최소한 도깨비라면 그런 소름끼치는 장난은 치지 않을 것이다. 탁자 맞은편에 있던 기유 구마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상자를 내려다 보다가 벽에 붙어있는 탈해를 보았다. 그의 표정을 본 탈해는 마지막 선고를 들은 기분을 느꼈다. 그 표정 어디에도 장난기는 없었다. 기 유는 상자를 들어 옆으로 옮겨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이리 와서 앉아. 무사장. 잠시 이야기 좀 하지." 탈해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말했다. "그거 가짜죠?" "진짜라는 거 알면서 그렇게 물으면 내가 곤란하잖아. 어서 이리 와." 탈해는 한참 동안이나 지체한 후에 겨우 벽에서 등을 뗐다. 탁자로 걸어오는 동안, 그리고 의자를 붙잡아 앉을 때까지 그의 시선은 계속 탁자 한쪽으로 치워놓은 상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상자가 입을 벌려 그를 물어뜯을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기유는 그런 탈해를 보 다가 박수를 짝짝 쳤다. 탈해가 겨우 그를 돌아보게 되었다. "독행왕이 오자고 해서 여기로 온 줄 알았는데……" "성주님께서는 독행왕이 이곳으로 오자고 할 줄 아셨던 모양이야." "아셨다고요?" "아니, 아시지는 못하셨겠지만…… 음. 성주님께서는 독행왕을 원하 는 곳에 데려다주고 무사장에게 이것을 가져다주라고 하셨어. 그런데 독행왕은 이곳으로 오자고 하더군. 무슨 말인지 알겠지?" 탈해는 알 수 있었다. 즈믄누리의 성주가 한 명령이다. 아마 성주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테지만 기유는 성주의 명령을 한꺼번에 수행 할 수 있게 되었다. 즈믄누리의 성주가 취하는 방식을 알기에, 탈해는 절망감을 느꼈다. "왜 저걸 제게 주는지는 설명하지 않으셨겠지요?" 기유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성주님께서는 무사장에게 이걸 주어야 된다고만 결정하셨 어." 탈해는 반항적인 눈으로 기유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제가 저걸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모르시겠군요. 저는 저걸 성주님께 돌려보내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십시 오." 기유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말했다. "탈해. 여기는 즈믄누리가 아니고 자네는 성주도 아냐." 탈해는 자신이 기유를 난처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보 통의 경우라면 탈해는 곧 기유에게 사과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기 어려 웠다. 그는 두려워하는 눈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기유는 그런 탈해를 보는 것이 괴롭다고 생각했다. 기유는 몽화각의 일원이 될 정도로 관찰력 좋고 영민한 도깨비다. 그는 탈해에게 의혹 을 걷어낼 말 몇 마디 정도는 들려줄 수 있었다. 고민에 빠진 표정으 로 탈해를 보던 기유는 결국 결심을 내렸다. 바우 성주는 그에게 설 명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기유 구마리에게 그 일을 맡겼 을 때부터 그가 탈해에게 설명하는 것 또한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린 결정은 옳지만 그가 내리지 않은 결정까지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유는 자신이 침묵하기를 바랐다면 성주는 침묵하라는 명령 을 내렸을 거라는 억지에 가까운 논리로 자신을 설득하고는 입을 열 었다. "탈해. 어쩌면 규리하에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상자를 노려보고 있던 탈해는 그 말을 퍼뜩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 지만 조금 후 탈해는 놀란 표정으로 기유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선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는 아이저 규리하와 정우의 남동생들이 있지. 아, 제발 그건 묻지마. 자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나도 왜 가 족들끼리 그렇게 싸우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어. 그것이 킴이 라고밖에는 할말이 없군." "……그들이 하늘치를 다루려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아십니까?" 기유는 깜짝 놀랐다. "하늘치를? 확실해?" "그렇습니다. 하인샤 대사원에서 오레놀 선사의 행적을 참고 삼아 시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쯤은 성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규리하의 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군. 잃어버린 것 을 되찾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는 킴이 하늘치를 손에 넣는다면, 맙소사. 보통 일이 아닌데." 기유는 그 사실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과 결합시켜 숙고하기 시 작했다. 탈해가 초조한 목소리로 외칠 때까지. "기유!" "응? 아, 응?" "우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다른 것도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뭐? 아, 그래. 맞아. 황제 폐하가 있지." 탈해는 상체를 뒤로 당겼다.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 보는 탈해에게 기유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 나도 알아. 정우는 폐하께 잘못한 것이 없지. 정우가 그 자 리에 오른 것도 그것이 폐하의 뜻이기 때문이지. 그 말 하려고 했지? 하지만 발케네 전쟁이 왜 벌어졌는지 생각해봐. 발케네공 스카리가 폐하의 죄수 한 명이 탈출시켰기 때문이야. 지금 규리하에는 그 때의 발케네와 비슷한 일이 발생했지." 그것은 탈해에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기나긴 비행 때문에 곧 장 잠든 지키멜과 시오크는 알지 못했지만 어젯밤 내내 규리하성은 두 사람의 문제로 시끄러웠다. 탈해는 두 사람을 받아들이면 발케네 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것이 중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우는 결정을 보류한 채 일단 지키멜과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선언하 여 소란을 가라앉혔다. 아마 지금쯤 정우는 지키멜과 만나고 있을 것 이다. "발케네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스카리 빌파는 고향으로 간 것이지만 두 사람은 자기들 멋대로 여기로 온 겁니다. 폐하께서 그 사실에 대 해 언짢아하신다면 정우는 그들을 그냥 국경 밖으로 내보내면 됩니 다. 아니, 잠깐만요.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아시면서 왜 그들을 여 기로 데려온 겁니까?" "성주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어." "성주님께서 정우가 엄청난 곤경에 빠져야 된다고 결정하셨다고요?" "그 분께서 내린 명령은 독행왕이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라는 것이었 지." "하지만 성주님의 결정이잖습니까!" "맞아. 그러니 그것은 옳은 결정이겠지." 물론 그럴 것이다. 탈해는 거기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없었다. 하지 만 탈해는 그것이 정우를 곤경에 몰아넣는 결정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문득 탈해는 도깨비가 아닌 자들이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리는 결정 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것을 무시하지는 않 지만 무작정 따르지도 않는다. 도깨비가 아닌 자들은 말한다. '그게 도깨비들에겐 옳은 결정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에게도 옳은 결정 이겠어?' 탈해는 그 순간 피를 뒤집어쓴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는 벌떡 일어 나 탁자를 짚은 채 기유를 노려보았다. "정우는…… 도깨비가 아니라고……" "뭐?" "그건…… 저나 당신, 즈믄누리, 도깨비들에겐 옳은 결정이지만…… 도깨비가 아닌 정우에겐…… 정우를 버리는 겁니까!" 기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사장. 무슨 말을 하나?" "그렇잖습니까! 곤란을 겪을 것이 뻔한데 그 두 사람을 규리하로 데 려왔잖습니까. 즈믄누리의 성주는 즈믄누리에서는 언제나 옳은 결정 을 내리지요. 하지만 그 결정은 정우에겐 옳지 않아요! 왜냐 하면, 왜냐 하면 정우는 도깨비가 아니라 킴이니까…… 도깨비에겐 옳아도 정우에겐 옳지 않은……" 기유는 탈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탈해가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도깨비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불이 인간에게는 죽음의 위험이 된다. "탈해. 자네가 정우를 죽일 뻔했을 때 누가 정우를 살렸지?" 탈해는 숨을 멈췄다. 말 그대로 탈해는 호흡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숨을 쉬지 못한 그는 괴로워 했다. 측은한 눈으로 탈해를 바라보던 기유는 의아함을 느꼈다. 조금 후 기유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탈 해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공기 없이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얼 굴은 자신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황급히 탈 해의 곁으로 다가간 기유는 고함을 빽 질렀다. "세상에, 탈해! 숨을 쉬어! 숨을! 이러면 안돼. 오, 맙소사!" 기유는 탈해의 등을 두드리다가 그를 의자 등받이에 밀어붙이고는 가슴을 탕탕 때렸다. 숨이 넘어갈 듯 목을 꿈틀꿈틀 젖히던 탈해가 갑자기 크게 기침했다. 그는 가슴이 터져라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기유는 탈해의 어깨를 짚은 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탈해? 무사장! 대답할 수 있나? 대답해!" "예. 후, 예. 할 수 있습, 후우우, 있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진 기유는 탁자를 짚었다. 다른 손으로 이마를 어루 만지며 기유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어이구, 세상에. 공기 중에서 익사하는 사람을 볼 뻔했군. 어떻게 숨 쉬는 법을 잊어먹나?" 어이가 없기는 탈해도 마찬가지였다. 기유의 말을 들은 순간 숨이 콱 막혀버렸고, 그리고 탈해는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기유가 황급히 가슴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탈해는 정말로 공기 중에서 익사했 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다면 어르신이 되어도 창피했을 것이다. 기유는 의자로 돌아가는 대신 탁자에 걸터앉아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탈해를 보다가 말했다. "미안해. 탈해. 그런 모진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처구니 없는 사건 때문에 탈해는 충격을 조금 잊을 수 있었다. 그 는 침울하고 힘없는 태도로 말했다. "그건 사실입니다. 제가 정우를 죽일 뻔했지요. 그리고 정우를 살린 것이 성주님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음. 자네 말에도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있군. 도깨비들에겐 옳은 결정이라도 도깨비가 아닌 정우에겐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럴 듯한 말이군. 하지만 성주님 은 아기였던 정우를 즈믄누리로 데려와야 한다고 결정하셨어. 그리고 그 결정이 목숨이 위태롭던 그 아기를 살렸지. 그리고, 음. 그 불행 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성주님께서는 두 번째로 정우를 구하셨지. 왜 지금에서야 정우에게 해가 될 일을 하신단 말인가?" 탈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해가 되고 있습니다." 기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면 왜 저것을 자네에게 보냈겠나?" 탈해는 입을 다문 채 상자를 바라보았다. 기유 또한 팔짱을 낀 채 그것을 쳐다보았다. 기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성주님의 결정에 따라 독행왕이 규리하로 왔지만 그와 동시에 저것 도 왔어. 어쩌면 저건 정우를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일지도 몰 라." "정우를 지키기 위해서요?"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야. 위험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 대비책도 같 이 온 것이라는 거지. 어쩌면 전혀 다른 이유에서일지도 모르고. 만 약 정우가……"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상자를 보던 탈해는 기유가 침묵하자 그를 돌아보았다. 기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열중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조 금 후 기유가 탈해에게 말했다. "탈해. 영원히 사는 방법을 아나?" 뜻밖의 질문에 놀란 탈해는 상식적인 대답을 했다. "군령자 말입니까?" "아니. 다른 사람의 육체가 아닌 자기 육체를 가지고." "그건 불가능합니다. 우리 도깨비들도 육체를 잃은 후에 어르신이 되는 걸요. 육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기유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꼭 그렇지는 않아. 선민종족들 중에는 영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시각에서는 영원으로 생각될 만큼 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종족이 있어." 탈해는 그것이 어떤 종족인지 생각해 보았다. 선민종족은 넷이다. 킴, 도깨비, 레콘, 그리고……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충격 속에서 말고삐를 콱 움켜쥐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있는 병사들은 대 장군의 경악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더위 속에서 행군하느라 그들의 관심은 모두 그늘과 수통에 할애되고 있었다. 엘시는 어금니를 꽉 깨 문 채 자신을 진감케 했던 관념으로 돌아갔다. 네 선민종족은 모두 강렬한 개성으로 구분된다. 다른 셋과 유달리 다른 하나 같은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준을 무엇으로 두 느냐에 따라 하나를 다른 셋과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레콘은 다른 셋과 달리 유일하게 물보다 무거운 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도깨비는 다른 셋과 달리 유일하게 두 번 죽는다. 그리고 나가는 다른 셋과 달리 유일하게 심장을 적출한다. 심장을 뽑아내어 심장탑에 보관함으로써 나가는 불사신에 가까운 존 재가 된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맹렬한 살의보 다는 편집증적인 파괴욕이 필요하다. 재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압도적 인 파괴만이 심장을 적출한 나가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을 적 출한 나가도 자연적인 노화만은 피할 수 없다. 주야의 뒤바뀜은 모든 생명체의 연쇄살인자인 셈이다. 바꿔 말한다면, 노화를 피할 수 있다면 나가를 쉽게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노화는 자연스러운 생체 활동이다. 자 연스러운 생체 활동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노화를 피하 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심장을 적출한 나가에겐 그 모순을 피할 방법이 있다. 엘시는 눈앞이 기묘한 색깔이 떠도는 것을 보았다. 이마를 타고 흘 러내리는 땀이 차갑다. 엘시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훔쳤다. 냉동된 나가는 생체활동이 정지된다. 노화는 생체활동이다. 냉동된 나가는 늙지 않는다. '그거였나? 그 오천 명의 아라짓 전사는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약속 때문에 그 이름을 받은 것인가?' 그것은 엘시를 의문스럽게 만들던 점이었다. 심장을 적출하기 전까 지 집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았던 나가 젊은이들이 왜 처음 보는 황제 를 무턱대고 따른 것인지 엘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장받은 것이 영생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꼭 영생이 아니라도, 예를 들어 천년 후의 세상으로의 여행이라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충분히 가능하기도 하다. 현기증이 심해지는 것 같다. 엘시는 고개를 들었다. 주위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키보렌의 밀림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 다. 열대의 하늘은 푸른색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희한한 푸른색으로 번들 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 나무들에서 통일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 었다. 키보렌은 그 젊었던 시절을 사람의 역사가 기억할 수 없을 정 도로 오래된 밀림이고 식물들 사이의 장구한 전쟁 - 아마 전술 시간 단위는 '세기' 쯤 될 것이다. - 때문에 수종의 단일화 같은 것은 찾 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나무들은 북부에서 온 사람들에겐 낯 선 모습이었다. 병사들은 나무들 사이로 뛰어다니는 원숭이와 늘어진 뱀, 그리고 그 이름을 짐작할 수 없는 각종 곤충들에 놀라며 걷고 있 었다. 엘시가 볼 수 있는 것은 흑사자군의 일부뿐이었다. 백만에 가까운 부대가 한꺼번에 이동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게다가 엘시에게는 시모 그라쥬공이 야기한 남부의 공백을 메운다는 임무가 있었다. 그 임무 에 따라 엘시는 흑사자군을 일곱 개로 나누어 남부 곳곳으로 흩어져 진군하게 했다.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엘시의 명령에 따라 시모 그라쥬를 포위하거나 혹은 분리되어 제국의 광활한 국경선을 지키게 될 것이다. 지금 엘시의 곁에 있는 것은 시모그라쥬공을 직접 상대하 기 위해 엄선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오만으로 많지 않았 다. 전투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모그라쥬공은 오래 전에 항복 의 절차를 의논하자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병사들도 자신의 목적이 전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밀림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경계심이 많이 약화되 어 있었다. 그들을 다그친다면 제국군다운 엄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 을지도 모르지만 혹독한 더위 때문에 강행군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시모그라쥬공과 만나기로 한 페로그라쥬는 이 제 하루 거리이다. 지친 모습으로 시모그라쥬공을 만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엘시는 선발대와 정찰대를 빈틈없이 파견했다. 경계 가 흐트러졌다 해서 큰 위험이 찾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바깥을 아무리 둘러봐도 지시할 사항이 없었기에, 엘시는 멈칫거리 며 다시 자신의 내부로 돌아왔다. 말리에 냉동 보관되는 아라짓 전사들은 필요하다면 수천 년이라도 아라짓 전사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누대에 걸쳐 황제에게 봉사하 는 무인 가문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누대 의 황제들을 보필할 수 있다. 영원한 제국의 수호자들, 불멸의 전사 들, 후대의 모든 황제들에게 한꺼번에 주어지는 선물. 말리도 마찬가지다. 하늘치도 늙지 않는다. 그 어떤 역사서에도 노 령의 하늘치가 떨어졌다는 충격적인 이야기 같은 것은 실려 있지 않 다. 영원히 죽지 않는 수호자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엘시는 왜 치천제가 그런 것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다고 생 각했다. '폐하께서는 내구성에 집착하고 계신 것일까? 제국의 내구성에? 북 부에서 안정적인 세습을 할 수 있는 인간을…… 나를 황제로 선택하 신 것도?' 모든 것이 제국의 내구성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세습할 수 있는 인간 황가, 그 가문을 영원히 지켜줄 전사 들, 그 전사들을 영원히 지켜줄 하늘치. 그리하여 영원히 이어지는 아라짓 제국. 황제와 제국 사이의 영원한 싸움. 엘시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황제가 후대의 모든 황 제들에게 한꺼번에 준 것은 제도도, 도덕도, 재력도 아닌 무기다. 엘 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갈등은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배자에게 영구적 무기를 쥐어주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대장군의 복잡한 심회와 상관없이 열대의 저녁이 찾아왔다. 선발대는 빽빽한 밀림 사이에서 요행히 오만 명이 야영할 장소를 찾 아내었다. 강까지 끼고 있는 좋은 장소였지만 약간 협소해서 나무를 자르는 일이 필요했다. 불을 피우기 위해서도 벌목은 필요한 일이었 기에 곧 흑사자군의 병사들은 흩어져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야영 준비를 하는 떠들썩한 소음 사이에서 엘시는 약간의 고독감을 느꼈 다. 선발대가 찾아낸 야영지를 인정한 것으로 엘시의 일은 끝났다. 야영지를 만드는 일에 대장군의 지시까지는 필요없었고, 그래서 엘시 는 병사들이 거북해하지 않도록 당번병이 쳐놓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 다. 더위 때문에 바깥에 있는 편이 훨씬 좋았지만 대장군에겐 대장군 의 고충이 있는 것이다. 엘시는 갑옷까지 차려입은 그대로 탁자에 앉 아 일거리를 꺼내었다. 엘시가 장교들의 상벌 문제를 끝내고 복무 기간이 초과한 병사들의 보상 문제에 관한 보고서와 제안서를 검토하고 있을 때 천막 천이 들 춰졌다. 저녁 식사를 가져온 당번병일 거라 생각했지만 엘시는 입실 허가도 구하지 않고 들어오는 그 태도에 불쾌감을 느꼈다. 만약 이레 라면…… "이레?" 안으로 들어선 것은 이레 달비였다. 엘시에게 꾸벅 목례한 이레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가주님." 엘시는 자신이 왜 익숙한 상황에서 고독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칼 리도를 떠난 이래 군대와 함께 보낸 8년 세월이지만 사실 엘시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은 그를 각하라고도, 주인님이라고도 부르지 않는 이레 달비였다. 엘시는 꾸밈 없는 반가움을 드러내었다. "수고했다. 돌아와서 기쁘구나." 엘시는 자신의 몸종이 어떻게 행군하는 군대를 찾아낸 것인지는 묻 지 않았다. 그는 전설적인 몸종이니까. 이레 역시 자신이 엘시를 찾 느라 얼마나 고생했는가 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백작부인께서 잘 계신다는 것을 알려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가 주님. 자당께서는 건강하시고 칼리도에도 유념할 만한 문제는 없습니 다." "그런가. 다행이군. 애썼다." "그리고 백작부인께서 가주님께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간찰로 써 주십사 했습니다만 길지 않으니 그냥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뭐지?" 이레는 조금 머뭇거렸다. "솔직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 겨울이 찾아오면 불씨를 지켜라." "겨울이 찾아오면 불씨를 지켜라?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 "예. 그 말씀뿐이었습니다." "서신으로 쓰지 않으셔도 될 만큼 짧기는 하군. 무슨 뜻인지는 생각 해 봐야겠다만. 알았다. 먼 길 움직이느라 피곤할 테니 쉬거라." 하지만 이레는 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재기간 동안 엘시가 어 떤 꼴이 되었는지에 대해 개탄하기 시작했다. 그의 다채롭고도 끊임 없는 지적 사항들을 들으며 엘시는 자신이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 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꼈다. 다음날, 흑사자군은 하룻밤만에 경이적으로 말쑥해진 엘시 에더리와 함께 페로그라쥬에 들어섰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3. 꺼져가는 불씨 (4) 2004/10/13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3-4 관련자료:없음 [49354]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13 04:40 조회:65 피를 마시는 새 33. 꺼져가는 불씨 - 4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의자에 앉은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쏟아져내릴 듯한 푸른 빛이다. 삶아 빨아서 하늘에 널어놓은 듯한 하얀 구름이 지평선으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베로시는 폭풍우가 몰아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오하며 일어섰다. 그녀는 투구를 벗어 땅에 딸어뜨렸다. 그 뒤를 따라 칼 없는 칼집과 갑옷이 떨어졌다. 베로시는 묶어올린 머리카락을 풀었다. 오랫동안 묶여있던 머리카락은 구깃구깃한 모습으로 흘러내렸다.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내버려둔 채 베로시는 신발도 벗었다. 그녀의 맨발이 모 래가 잘 깔려있는 땅바닥을 밟았다. 망고 군단의 충성스러운 병사들 이 정성껏 쓸고 정돈해 놓은 바닥이다. 하지만 그런 정성은 맨발로 땅을 밟아야 하는 베로시를 위한 것은 아니다. 베로시는 그런 정성어 린 환대의 대상을 바라보았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말 위에서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보 고 있었다. 시모그라쥬공 측에서 사전에 알리지 않았기에 엘시와 그 의 뒤쪽에 있는 장병들은 페로그라쥬의 대로 한복판에서 그들을 기다 리고 있던 이 장면에 대해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파악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베로시는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로 했다. 베로시는 맨발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녀가 접근하자 흑사자군의 장병들은 약간 긴장했지만 엘시는 그녀에게 제지의 명령을 내리지 않 았다. 베로시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두억시니 장군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곧 그녀의 두 손이 땅을 짚었다. 베로시는 머리를 크게 수그렸다. "죄인 베로시 토프탈, 대장군 엘시 에더리 각하에게 부복합니다. 원 하시는 대로 처결하소서." 그 의견을 내놓은 것은 베로시 자신이었다. 팔디곤 토프탈과 얼마 남지 않은 토프탈 가문의 사람들은 대호왕 사모 페이를 황제에게 바 치는 것만으로는 가문의 존속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에 동의했다. 왜냐 하면 시모그라쥬로 오는 것이 바로 대장군 엘시 에더리이기 때 문이다. 대장군을 마른 우물에 가두고 참혹한 모욕을 가했던 베로시 는 다른 이들이 차마 꺼내지 못하는 요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혈족들이 그녀에게 요구하기 전에 그녀 스스로 자신에게 요구하기로 했다. 목숨을 내놓아 엘시의 분노를 가라앉힐 것. 다른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차라리 자존심을 지킨 채 멸문을 받아들이자거나 대장군 엘시 에더리와 싸워 다시 한 번 그를 인질로 삼아보자는 의견, 심지어 시련으로 망명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 만 모두 현실성이 없었다. 가문은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시련이 돌 아온 황제의 비위를 건드릴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중 대장군을 다시 한 번 붙잡아보자는 의견은 꽤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베로시 토 프탈이 이미 한 번 그를 붙잡았다는 것이 그 주장의 근거였다. 하지 만 다른 사람도 아닌 베로시 자신이 그 주장을 일소에 부쳤다. 그녀 는 먼젓번에 대장군을 손에 넣은 것이 전투가 아니라 납치에 가까운 것임을, 그리고 욱일승천의 기세였던 시모그라쥬군을 비나간에서 엔 거까지 단숨에 밀어버린 대장군과 전투로 겨룬다는 것은 광언임을 지 적했다. 그리고 그녀는 형식적으로 만류하는 혈족들을 뿌리치고 그들 의 눈물과 탄식을 뒤로 한 채 대장군의 앞으로 나왔다. 땅바닥에 엎드린 베로시를 바라보던 엘시는 투구를 벗었다. 언제 다 가왔는지 모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와 투구를 받은 것은 당번병이 아 니라 이레였다. 엘시는 이레에게 투구를 건네주고는 이마를 쓸어넘겼 다. 대로 좌우의 골목과 건물의 창문 등에는 대로에서 일어나는 이 놀라 운 일을 훔쳐보는 많은 시선들이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꽃을 뿌리고 노래를 부르 는 등 해방군을 환영하는 다채로운 방식들을 시연해 보였겠지만 아침 부터 대로로 나와 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두억시니 장군과 그녀의 부하들 때문에 그들은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거기에 덧붙여 어 쩌면 시가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오전 내내 페로그라쥬의 공기를 불안하게 뒤흔들었다. 숨어서 그 광경을 보던 페로그라쥬 사 람들은 베로시의 부복을 보고는 겨우 안도하는 듯했다. 엘시는 페로 그라쥬 자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고 생 각했다. 엘시는 베로시에게 말했다. "일어나라. 상장군 베로시 토프탈. 제국군의 상장군이 취해야 할 자 세 중에 그런 자세는 없다." 베로시는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대장군님. 각하의 고귀한 동정심은 이 어리석은 것 대신 불쌍한 제 혈족들에게 보여주십시오. 이 사악한 년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습 니다." 엘시는 슬픔을 느꼈다. 엘시는 우물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를 비웃던 베로시의 모습을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가서 폭군의 죽음을 지키라고 외치던 그녀의 목소 리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녀에게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엘시는 지금의 비굴한 모습보다는 만물의 움직임을 자시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듯 당당하던 베로시 의 모습이 좋았다. 베로시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엘시가 갑자기 갈했다. "황제의 대장군이 명령한다! 일어나라!" 베로시는 두려움에 빠진 눈으로 엘시를 보다가 흐느적흐느적 일어났 다. "너와 너의 혈족들의 방자함과 사악함을 어떻게 처벌하실지는 고귀 하신 폐하께서 결정하실 문제다. 거기에 대해 나는 내가 받은 권리를 쓸 생각이 없다. 때가 되면 주어질 벌을 네멋대로 요구하지 마라! 지 은 죄를 후회한다면 무릎을 꿇고 죽은 자의 흉내를 내는 대신 일어나 스스로 과오를 시정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노력하라!" 베로시는 당혹했다. 엘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짐작할 수 있었 다. 그 병력 배치가 파탄 비슷한 상태로 바뀐 바뀐 남부의 제국군을 재편하는 일에 남부의 유력한 군단장인 그녀의 조력은 큰 도움이 된 다. 제국군 상장군의 계급이 내기로 따낼 수 있는 상품 같은 것은 아 니며 엘시는 그 계급에 걸맞는 베로시의 능력을 그냥 사장시킬 생각 은 없었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베로시는 엘시가 자신 이 받은 모욕을 그냥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각하. 폐하께 저지른 저의 불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저는 각하 에게도 형언키 어려운 죄를 범했습니다." "알려줄 필요 없다. 잊지 않았으니까." "그런 저의 죄를……" "그것은 내가 황제의 대장군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칼리도의 백작이나 엘시 에더리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아니다. 따라서 황제의 대장군에게 저지른 너의 죄 또한 황제께서 벌하실 것이다." 엘시의 말은 정확했다. 엘시가 황제의 대장군이 아니라면 베로시는 그를 우물에 집어넣고 모욕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 금 전까지도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던 베로시는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조금 어려웠다. 엘시는 그런 베로시에게 시모그라쥬공에게 안내 하라고 명령했다. 베로시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그의 명령을 수 행했다. 구경하던 페로그라쥬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조직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흑사 자군은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과 그녀의 부하들의 안내를 받아 타오민 성으로 걸어가버렸다. 마지막 흑사자군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페로그라쥬 사람들은 밖으 로 나와 이웃들과 정신없는 토의에 빠져들었다. 대장군의 자비를 칭 송해야 하는 거야? 어, 하지만 두억시니 장군은 벌을 면한 것이 아니 잖아. 벌을 받기는 받는 모양인데? 그러면 뭐야, 대장군의 공정함을 칭송해야 하는 거야? 이런, 젠장. 우리 같은 것들이 좀 쉽게 칭송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게 높은 사람들의 의무잖아. 타오민성에 도달한 엘시는 페로그라쥬의 대로에서 경험했던 것과 비 슷한 상황을 또 경험해야 했다. 타오민성에서는 시모그라쥬공과 토프 탈 가문의 혈족들이 땅에 이마를 댄 채 대장군을 맞이했다. 엘시는 그들 모두를 일으켜 세우고 황제의 처벌을 기다리라고 말한 다음 감 옥에 가두었다. 타오민성의 모든 창고와 서류보관소 등이 재빨리 봉 인되었고 그와 동시에 성 옆에는 주둔지가 건설되었다. 한계선 남쪽 에는 공성전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타오민성 또한 북부의 전투성 과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만들어진 건물이었고 따라서 그 내부에는 대규모의 병력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그 모든 지시를 끝낸 후 엘 시는 겨우 사모 페이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사모 페이는 시모그라쥬공에게 억류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조금 기묘 한 억류였다. 시모그라쥬군의 병사들에게 자신들의 용맹과 두억시니 들의 그것을 비교하라는 요구는 가혹한 것이었다. 자칫하면 상당한 사상자가 생길 수도 있었지만 대호왕은 공작의 명령을 따르며 얌전히 있을 것을 약속했다. 공작은 그 정도의 양보에 만족하기로 했고 그래 서 그녀는 가택 연금과 비슷한 형태로 붙잡혀 있었다. 신분은 죄수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상태였 다. 엘시를 안내한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송구스러워 하며 말했다. "저희들의 부족함을 꾸짖어주십시오. 저 간악한 자에겐 지하감옥과 돌침대보다 더 적합한 숙소가 없을 테지만 그 흉악한 두억시니들 때 문에 그녀는 오만하게도 아직까지도 왕처럼 굴고 있습니다." 엘시는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았다. 베로시는 죄수를 죄수답게 포장 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지만 엘시가 아무 반 응도 보이지 않자 스스로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베로시는 침 묵한 채 대호왕의 방으로 엘시와 장교들, 그리고 호위병들을 안내했 다. 대호왕 사모 페이는 엘시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시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방 한가운데서 문을 향해 서있었다. 그녀의 주위 에 두억시니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쪽으로 몇 걸음 걸어들어간 곳에 멈춰선 엘시는 가만히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 또한 그 시선을 피하 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말없는 상호 응시에 다른 이들이 불편함을 느낄 무렵, 엘 시가 입을 열었다. "모두 밖으로 나가라." 수행장교들은 깜짝 놀랐다. 비록 두억시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지만 대호왕 자신은 고명한 무예가였다. 엘시가 한 번 더 명령한 후 에야 그들은 대호왕이 비무장이며 엘시 또한 탁월한 검사라는 사실로 자신을 위안하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힌 후 엘시는 다시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사모는 관찰하 는 눈으로 걸어오는 엘시를 바라보다가 엘시가 멈춰서자 말했다.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로군." 엘시는 가볍게 목례했다. "일전에 주신 도움에 대해 감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엘시는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왼손이었고, 엘시는 칼을 거꾸로 쥐고 있었다. 상당히 어색 해질 수 있는 동작이지만 숙련가의 솜씨를 증명하듯 엘시의 제국검은 맵시있게 빠져나왔다. 칼이 칼집 밖으로 빠져나오자 엘시는 거꾸로 든 칼을 높이 들어올리고 있게 되었다. 엘시는 팔을 뿌렸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칼이 나무로 된 바닥에 꽂혔다. 꼬리 치듯 낭 창낭창 흔들리는 칼자루를 바라보던 사모는 빙긋 웃고는 손을 내밀었 다. 사모의 손 움직임은 부축해줄 손을 기다리는 병자의 몸짓 같기도 하 고 진격의 북을 울리기 위해 뻗어가는 고수의 그것 같기도 했다. 엘 시는 대호왕이 훌륭한 무용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손을 들어올리는 그녀의 동작은 단순하면서도 기품 있었다. 엘시는 칼자루 를 움켜쥐는 그녀의 동작을 다른 관점을 배제한 채 심미적인 관점에 서만 보았다. 칼이 뽑혀나왔다. 대호왕은 오른손으로 쥔 칼을 왼손에 얹은 채 그 것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안에서 칼을 두어 바퀴 굴린 대호왕은 갑 자기 뒤로 돌았다. 대호왕을 따라 길다란 한삼 자락처럼 크게 회전한 칼이 엘시의 목 옆에 멈춰섰다. 엘시는 솔직히 박수를 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엘시가 그러지 않은 것은 그것이 좀 조야할뿐만 아니라 나가에겐 화로에 물방울을 튕기는 것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대호왕은 엘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칼을 아래로 내렸다. 그 칼은 엘시의 어깨와 가슴, 허리 근처를 지나 쳐 칼집 끝에 턱 걸쳐졌다. 대호왕은 꽃을 던지듯 가벼운 손놀림으로 칼을 허공에 살짝 밀었다. 칼은 칼집 안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 다. "저리로." 대호왕은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녀가 엘시를 안내한 곳은 조그마한 중정이라 부를 만한 정원이었다. 그녀의 방에서부터 중정 가운데 있 는 정자까지는 지붕과 기둥만으로 만들어진 연결 통로가 있어 직사광 선을 피한 채 정자로 갈 수 있었다. 대호왕의 두억시니들은 그곳에 있었다. 엘시는 정자 주위에 흩어져 있는 두억시니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낯설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망고 군단에서 탈출할 때 두억시니들은 그를 도왔고 시모그라쥬 외곽까지 동행했었다.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시는 낯선 기분을 느꼈다. 두억시니들의 모 습에서는 아무리 봐도 볼 때마다 놀라게 만드는 이질성이 있었다. 엘 시는 그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가 경계 태세인지 그렇잖으면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것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상식적으 로 생각한다면 경계 태세일 것이다. 아무래도 경비병처럼 보였으니 까. 하지만 엘시는 그들이 하늘에서 기인하는 것만을 즐기며 지상에 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은 채 한가로워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두억시니들 중 단 하나만이 사모를 보고 자세를 바꿨다는 것은 '두억시니들의 오수' 가설을 뒷받침했다. 움직인 것은 저 유명한 갈 바마리였다. 갈바마리는 기우뚱거리며 정자로 다가와 바깥에 섰다. 정자 안으로 들어선 사모는 난간을 따라 놓인 의자에 앉아서 맞은편 을 가리켰다. 엘시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 앉았다. 정자 바깥의 갈 바마리는 마치 난간에 앞발을 올려놓은 충견처럼 사모의 뒤편에서 난 간에 두 팔을 걸친 채 엘시를 바라보았다. 갈바마리의 두 얼굴은 '아 는 사람인 것 같은데'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갈 바마리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라." 사모는 빙긋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난간에 얹혀져 있는 갈바 마리의 팔을 살짝 두드렸다. 갈바마리의 두 머리가 모두 사모에게 돌 아갔다. "고마워. 갈바마리. 가서 쉬도록 해." 갈바마리는 주저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 역시 엘시의 추측처럼 두억 시니들은 그냥 정자 주변에서 쉬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들이 인사 불성이 될 정도로 취해 곯아떨어진 것과 같은 상태라도 그들은 여전 히 무서운 경비병이다. 아무도 그들의 상태를 어떤지 확신하지 못할 테니까. 대호왕이 다시 자신을 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엘시가 말했다. "폐하." "나는 왕이 아니다. 왕위에서는 오래 전에 떠났지. 사모 페이라고 불러라." "사모 페이. 왜 전쟁을 일으키셨습니까?" 적의 총지휘관이 자신의 부하들과 고립된 상태에서 칼까지 넘겨주었 는데 그를 공격하거나 억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복 군주의 처신이 아니다. 엘시는 조금 전 오갔던 무언의 문답에서 배제된 이유 외에 무엇이 전쟁의 진짜 이유냐고 묻고 있었다. 사모는 그 질문에 질문으 로 대답했다. "너는 왜 황제가 되려는 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느냐? 흑사자 군을 결집시킨 너의 명분은 그것이었지. 왜냐?"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바르지 않느냐?" "힘으로 획득한 황위에는 정당성이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일종의 기만이나 자기최면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엄존하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에는 정당성이 있어야 합니다. 반 세기 전, 북부에서 고 아라짓 왕국이 사라지게 만들었던 자들의 후손 인 어떤 여자가 북부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에게 고 아 라짓 왕국을 잇는다는 정당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 자신을 언급하는 엘시의 말에 대해 사모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 다. 엘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의 생애에 대해 생각했다. 하텐그라쥬의 나가들은 사모의 동생인 륜 페이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판단했고 그 처벌을 그녀에게 맡겼다. 죄를 저지른 자의 처 벌을 그 혈족에게 부과하는 쇼자인-테-쉬크톨의 전통이었다. 쉬크톨 을 받은 사모는 키보렌을 가로질러 동생을 추적했다. 그녀의 기나긴 추적행은 결국에는 나가들의 절대적인 장벽까지도 뛰어넘었다. 한계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륜에겐 그의 체온을 유지시켜주는 도깨비 친 구가 있었고 사모에게는 추적행 도중 획득한 흑사자 모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집념이 그 초자연적인 추적행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하인샤 대사원에서 륜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사모는 륜의 칼에 몸을 던졌다. 쇼자인-테-쉬크톨은 결국 가문에 부과된 핏값이다. 도망자든 추적자 든 한 명만 죽으면 쇼자인-테-쉬크톨은 충족된다. 그녀는 동생의 손 에 죽기 위해 나가에겐 불가능한 추적을 감행했고, 기어코 성공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죽지는 않았다. 하인샤 대사원에서 그녀는 륜의 도피가 나가들의 북부 침공 계획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동생인 륜 페이는 수호자, 즉 나가들의 사제 중 한 명이 되 려다가 그만둔 자였다. 하지만 그는 수호자의 자격인 신명은 가지고 있었다. 신명은 나가들을 가호하는 발자국 없는 여신이 자신의 신랑 인 수호자들에게 주는 이름이다.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것을 모르는 채 륜 페이가 북부의 하인샤 대사원에서 자신의 신명으로 발자국 없 는 여신을 부르자 여신은 그곳으로 임했다. 발자국 없는 여신이 북부 에 신경을 쓰는 동안 남쪽에서는 나가들이 여신의 힘을 훔쳤다. 그리 고 그들은 훔친 여신의 힘으로 기후를 조작하여 북부 침공을 개시했 다. 그것이 제2차 대확장 전쟁의 발발이었다. 하지만 사모는 물론이거니와 음모를 꾸민 나가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잃어버린 왕이 언젠가는 되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가 지고 있었던 북부의 사람들은 사모를 돌아온 왕으로 추대했다. 북부 로 돌아온다면 왕은 북부의 사람이 아니며, 따라서 남부에서 온 사람 인 사모가 바로 왕이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사모는 여신의 힘 을 훔쳐 정복 전쟁에 이용하는 동포들의 죄를 스스로 막겠다는 이유 에서 그 추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신도 그녀의 뜻에 동참했다. 하텐그라쥬를 향한 자살에 가까운 돌격으로 사모는 북부인들에게 제 2차 대확장 전쟁의 승리를 넘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모는 돌아갈 고향도 잃었고 목숨을 내주어서 지키고 싶었던 동생도 잃었다. 하텐 그라쥬는 파괴되었고 전쟁의 마지막 순간 뜻하지 않은 피습을 당한 륜 페이는 그의 친구였던 용 아스화리탈과 함께 나무로 변하고 말았 다. 쓸쓸히 북부로 돌아온 사모는 그 후 잠시 북부를 지배하다가 고금에 다시 없을 천재인 그리미 마케로우에게 북부를 넘겨주고는 폐허가 된 하텐그라쥬로, 나무로 변한 동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리미 마케로우가 제국을 만들고 치천제가 그 뒤를 잇는 32년 동안 하 텐그라쥬에서 은자로 살아왔다. 그것이 사모 페이의 생애였다. 사모 페이가 말했다. "네가 말하는 그녀의 정당성에 대해선 알려진 것과 다른 이야기가 많이 있다. 하지만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 것 같군. 하지만 내가 듣기로 너는 전쟁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를 했는데. 전 쟁의 진리가 무엇이지?" "힘입니다." "그래. 강한 자가 승리하는 거지. 그런데 힘이 지배의 정당성을 줄 수 없다는 거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려던 엘시는 그 동작을 이상하게 끝냈다. 지배자에게 영구적인 무기를 주어도 될까? 갑작스러운 고민의 재래를 느낀 엘시는 자신 없는 태도로 말했다. "지배는 투쟁이 아닙니다." "투쟁의 고약한 점은 관련자들 중 한쪽만 그걸 투쟁이라고 생각하면 투쟁이 된다는 점이지. 합의가 필요없어. 지배자는 한 명이지만 피지 배자는 다수지. 그 다수들 중엔 지배자를 투쟁 대상으로 생각하는 자 들이 반드시 등장하지. 지배자는 투쟁을 피할 수 없어."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 말씀을 믿습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 다고 해서 처음부터 투쟁에 대비해야 합니까? 그 말씀은 어차피 죽을 테니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을 거 라는 것은 부정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 때문에 삶의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사모와의 이야기를 통해 엘시는 자신의 입장이 정리되는 것을 느꼈 다. 안타깝게도 지배자는 언제나 피지배자와의 투쟁을 각오해야 한 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배자에게 영원불멸의 강력한 무기를 줄 필요는 없다. 엘시는 황제에게 말리와 아라짓 전사들의 포기를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 에게 그것이 주어진다면 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엘시는 보다 평온해 진 마음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동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정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영원히 이어지는 혼란과 살육의 제국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인가?" "만족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좌절과 노화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모는 폐부가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30만 년 동안?" 엘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황한 빛을 드러내는 대장군을 보며 사 모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완전한 환상이다. 그녀의 심장은 병에 담겨 하텐그라쥬의 심장탑에 보관되어 있다. 그 녀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는 아마도 평생 동안 쌓아놓은 슬픔이 그득 히 고여있을 것이다. "네 말이 옳다. 엘시. 비록 받는 것 없이 뺏기기만 하는 것 같은 삶 이라도, 기를 쓰고 얻어낸 것들에게 언제나 실망만을 느끼게 되는 삶 이라도 살아야 한다. 개인의 단위에서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이다." "개인 없이는 집단도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기준을 집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너는 세상의 모 든 사람들이 네가 원하는 이상형과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겠 지. 개인에게는 더없이 옳은 네 말이라도 집단의 입장에서는 끊임없 이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훼손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30만 년이라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사모는 비늘을 부딪쳤다. 그 갑작스럽고도 격렬한 동작에 엘시는 충 격을 느꼈다. 사모는 고통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 그거?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고상해질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지. 엘시. 그대에게 미래를 알려주지. 나 자신의 이해가 얕기 때문에 약간 조악한 표현을 쓰게 될 거라는 것을 미리 사과하마. 사 람들은 앞으로 30만 년 동안 서로를 가장 가치 있는 사냥감으로 대하 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자각을 얻게 되지. 그런 자각을 느낄 때까 지 걸리는 시간이 30만 년이다." 엘시는 파랗게 질렸다. '나 자신의 이해가 얕기 때문에'라는 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말을 전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다. 그 리고 엘시는 그것이 누구의 말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리미 마케로우, 원시제의 계산이다. 그녀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 자면 29만년에서 33만년 사이라고 하더군. 그 기간 동안 사람에 의해 죽는 사람의 숫자에 대해서는 그녀도 상당히 큰 편차로밖에 계산할 수 없었어. 살해 기술이 30만 년 동안 얼마나 발전할지에 대해서는 그녀도 정확하게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야. 하지만 최선의 경우에도 146억 명의 남녀는 반드시 다른 남녀에 의해 살해당하지." 엘시는 무의식적으로 질문했다. "최악의 경우는 얼마입니까?" "597조." 엘시는 말문이 막혔다. 전율할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사모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그 최악의 경우에 사람은 고상해질 준비가 된 상태에서 멸망하게 될 것이다. 물론 최악의 경우는 최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현 확률 이 낮으니 아마 실제 숫자는 146억과 597조 사이의 얼마 쯤 되겠지. 멸망하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인상적인 숫자지?" "그럴 리가…… 원시제 폐하께서 미래를 '계산'하셨다는 말씀입니 까? 그 분이 아무리 범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분이라 하더라도 30만 년에 걸친 미래를 어떻게 예측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자신의 목숨과, 상상한 것은 모두 이루어지는 계산 도구를 통해. 물론 그것은 상상한 본인에게만 작용하지만 계산이야 본인에게만 작 용해도 되지." "환상계단으로?"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는 무릎을 움켜쥐었다. "원시제는 자신이 읽어낸 그런 미래를 견딜 수 없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의 것이지. 명백히 우리들에게는 우리 후손 들의 시대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죽어야 할 그 많은 자들의 목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보다 통시적인 도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 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죽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모욕에 대해서 그 들이 이미 죽었다는 이유로 좌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직 태어 나지 않은 자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원시제의 생각이었다." 사모는 신들의 힘이 지상을 질주하던 시대에 너무 거대해서 불행이 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소녀에 대해 생각했다. 륜이 나무가 된 후 로 사모의 차가운 나날에 잠깐 동안의 따스한 열이 되었던 소녀였다. 그 소녀가 그 혼란의 시대에서는 손에 넣기 어려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하지만 사모는 그녀의 요청에 못이겨 그 녀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원시제는 미래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 중 누구도 살아갈 리가 없는 세상을 보살피기로 결심한 거지. 그대들 은 그리미가 아라짓 제국을 만들어낸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겠지. 하 지만 사실 그리미는 아라짓 제국뿐만 아니라 넘을 수 없는 시간의 장 벽 때문에 그녀는 손을 댈 수 없는 세계까지도 보듬으려 했다." "그래서…… 제국을……"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을 보살피려면 후손들의 모든 선조들을 손에 넣을 수밖에 없지. 그렇잖아? 그래서 그토록 넓은 제국이 필요했지." "그렇다면 시련은 왜 배제되었습니까?" "배제는 아니야. 제국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외부의 적은 필요했지. 그리고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역할은 주어져 있어. 원시제의 계획 속에서 제국과 시련은 하나야." 엘시는 기가 막힌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대수호자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겁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대수호자는 다른 수호자들과 마찬가지로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랑이야. 원시제에게 복 종할 이유가 없지. 그리고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편이 제국에 긴 장을 주기 좋겠지." "선황 폐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굳건한 제국을 통해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30만 년을 1만 6천 년으 로 줄이는 것." 엘시는 차가운 것이 전신을 훑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 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구성인가?"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엘시는 자신이 추리했던 아라짓 전사의 반 영구성에 대해 띄엄띄엄 말했다. 조용히 엘시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사모가 동의했다. "네 추리가 맞는 것 같군." 엘시는 사모가 가정형으로 말했다는 사실에 의구심의 눈빛을 띄었 다. 사모가 말했다. "나도 원시제의 계획 전부를 알지는 못해. 아마 그녀는 내가 알아야 할 정도만 알려줬겠지." "그러면 시모그라쥬공과 함께 전쟁을 일으킨 것도 선황 폐하의 지시 였습니까?" "엘시. 너는 원시제가 만육천 년 동안의 계획표를 남겨놓았다는 식 으로 상상하는 모양이군. 그렇지는 않아. 혹 그런 것이 있다 해도 나 는 보지 못했어. 원시제는 나에게 어느 때 무슨 일을 하라는 식의 지 시는 남기지 않았어." "그렇다면?"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내가 판단하게 했지. 물론 정보의 제약을 통해 내가 특정한 판단을 내리게끔 유도했다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방식은 어느 때 무슨 일을 하라는 식의 명료한 지시보다 더 불안하지 않겠어? 나는 그녀의 방식이 그런 것은 아니라 고 생각해. 하지만 어떤 방식이냐고 묻지는 말아줬으면 좋겠군." "그렇다면 왜 그런 판단을 내리셨습니까?" "레콘은……" 사모는 말을 멈추고는 엘시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조금 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 엘시. 나는 말하지 않겠다고 판단했어." 엘시는 굶주린 눈으로 사모를 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바닥을 보며 말했다. "판단이라는 말씀을 계속 반복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짐작하는 것 같은데?" "들려주십시오." "너와 너의 후손들 모두가 이미 죽은 어떤 천재가 정해놓은 길을 따 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 원시제의 방식은 그것이 아니니까. 우리와 우리의 후손 모두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자 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어." "그 선황 폐하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군요." 사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엘시. 너는 이 시대 최강의 기사라고 하더군." 엘시는 고개를 약간 들어 사모를 올려다보았다. 사모가 말했다. "입신은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지. 하지만 신의 경지에 든 자 들 중에서도 최강의 기사 엘시 에더리라고 해도 첫돌이 놓이는 순간 마지막 돌이 놓일 자리까지 깨달아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너 는 모든 돌의 위치를 미리 알 수는 없겠지. 그렇겠지?"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너는 최강이야. 왜냐 하면 너는 바둑을 알기 때문이 지. 수백 수 뒤의 돌이 어떻게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바둑을 알기 때 문에 너는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갈 수 있지. 바둑돌의 모양은 모두 똑같잖아? 그건 기사가 어떤 바둑돌과 다른 바둑돌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지. 돌들은 모두 동등하고 기사의 더 큰 총애나 증오를 받지는 않아. 다만 바둑의 형세에 따라 다른 삶을 살뿐이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치천제는 돌이 아닌 바둑판을 본 거라고 생각해. 제대로 된 비유인지 모르겠군. 이해할 수 있겠어?" "알듯 말듯 합니다." 엘시는 허리를 폈다. 그는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는 같은 말 을 반복했다. "알듯 말듯 합니다. 제 앞길은 제가 판단하고 거기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말이야." "하지만 저는 제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엘시는 괴롭게 말하고는 조언을 기다리는 얼굴로 사모를 바라보았 다. 원시제가 그의 황위 등극을 원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 것은 아니다. 사모의 말에 따르면 원시제의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엘시는 반 세기 전 자신이 살 수 없는 땅에 가서 니름으로만 들었을 뿐 생전 처음 보는 종족들의 왕이 된 여인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사모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동정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 의아해 하던 엘시는 문득 어떤 의심을 느꼈다. "제가 아닙니까?" "아니. 네가 맞아." 그렇게 말하는 사모의 동정심은 더욱 깊어졌다. 엘시는 불안감을 느 꼈다. 사모가 말했다. "너에게 알려주는 것은 내 몫인 것 같군." "무엇을 알려주신다는 겁니까?" 사모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는 거기에 턱을 얹었다. 조금 후 그녀는 다시 머리를 들어 정자 기둥에 기대었다. 그녀는 약간 비스듬 한 눈으로 엘시를 보다가 말했다. "엘시. 그대가 차기 황제야. 그리고 만육천 년 동안 계속될 에더리 황조의 개조지." 그 장구한 시간은 엘시를 현기증 나게 만들었다. 기쁨을 느껴야 한 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들었지만 그런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게 다가 사모의 표정은 그를 기뻐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안정적인 제국을 위한 안정적인 세습…… 세습 황조에 가장 잘 어 울리는 종족은 인간이지. 나가에게는 한계선의 제약이 있고 도깨비들 은 즈믄누리보다 더 큰 정치 체제에 관심이 없어. 레콘들은 세습이라 는 개념 자체에 낯설어 하고. 따라서 인간이어야 하지." 엘시의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것은 제국 정치의 전 망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공공연한 말이 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모의 어조는 특이 했다. 그녀는 그것이 아주 허튼 소리인 것처럼 말했다. 엘시는 남자 가 황가의 개조가 된다는 것에 대한 나가의 거부감일까 생각해 보았 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사모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에서 거 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엘시. 세습도 제국 보존을 위한 괜찮은 방법이지. 하지만 세습에도 문제점은 있어. 그 부모의 재능이 뛰어나다 해서 그 자식도 출중한 인물일 거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 "그렇긴 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그게 뭡니까?" "출중한 인물 한 명이 죽지 않고 계속 다스리는 것." 엘시는 농담을 들었다는 반응을 보여야 되나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의 뇌리 속에 영원히 죽지 않는 황가의 수호자들이 떠올랐다. 그런 초자연적인 영생은 그들이 나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치천제 또한 나가다. 엘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자들의 수호를 받을 만한 대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어쩌면 대가 끊어 질지도 모르는 가문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자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냉동되어……" "맞아. 그것이 일만육천 년 동안 제국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지." "하지만 제가 황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잠깐만요! 그렇다 면 그 분께서는 왜 차기 황제의 예비 반대자들을 제거하신 겁니까? 그 분께서 직접 다스릴 거라면 그런 일은 필요 없지 않습니까?" "치천제가 반대자들을 제거하긴 했지. 하지만 그 반대자들은 차기 황제의 반대자는 아니야." "그러면 누구의 반대자란 말씀입니까?" "내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했다면 치천제가 필요한 시점에 행동하기 위해 많은 시간 동안 잠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 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를 대신할 자가 필요하지. 엘시. 네가 잠 들어 있는 동안 너의 집을 돌보는 것은 누구지?" 엘시는 입을 벌렸다. 그것은 충성스러운 몸종 이레 달비다. "너를 구출하기 위해 망고 군단에도 뛰어들었다는 네 몸종이겠지. 네가 대단히 바쁘다면 네 몸종은 주인 노릇도 할 수 있을 테고, 어쩌 면 장난 삼아 네 몸종을 주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혹은 황제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집안일에 대해서는 진짜 주인보다 낫고, 주인 부재중엔 주 인처럼 행동하며, 심지어 주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몸종은 몸종이야." 엘시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의 눈에 사모의 얼굴이 마치 치천제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그에게 익숙한 치천제의 명령처럼 들렸다. "엘시. 너는 에더리 황조의 개조야. 사람들은 너와 네 후손들을 황 제라고 부르겠지. 하지만 사실 에더리 황조는 진짜 황제의 몸종 가문 이 될 것이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사소한 일들을 관리하다가 필요할 때 진짜 황제를 깨우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겠지. 사람들은 지 상의 지배자인 에더리 황조를 존경할 것이다. 너와 네 후손들이 제국 을 잘 다스리면 경애와 칭송도 보내겠지. 하지만 그들의 무의식적인 사랑은 진정한 황제에게 바쳐지겠지. 악독한 황제 사냥꾼에게 무참하 게 살해당해 그들의 곁을 떠났지만, 제국 신민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 불멸의 전사들을 이끌고 그들에게 돌아오는 하늘의 제왕에게. 그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구원의 희망…… 일만육천 년 동안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짐작할 수 있나?" 짐작하기 어려웠다.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는 침대에 누운 채 지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 보았다. 그가 지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밤새도록 잠을 자려 애 썼지만 채 한 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한 사람이라면 눈이 조금 퀭하고 입술이 바짝 말라 있어도 당연하다. 하지만 잠자리가 나빠서 그런 것 은 아니다. 그가 점거하여 머물고 있는 비나간의 후작궁 - 한 때 왕 궁이었지만 스카리는 다시 후작궁으로 부르도록 했다. - 은 그룸성에 비하면 훨씬 안락한 건물이고 지키멜의 방이었던 그의 침소 또한 훌 륭했다. 날씨가 조금 나쁘기는 했다. 가장 훌륭한 겨울밤은 창밖으로 맨손을 내밀었다간 당장 동상에 걸릴 추운 날씨에 몸을 훈훈하게 해 줄 독주를 잔뜩 마시고 화재가 걱정되도록 벽난로의 불을 활활 태운 채 잠드는 것이라 생각하는 발케네 사내 스카리에게 비나간의 온화한 밤은 겨울밤 같지 않은 이상한 기후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 이상한 날씨도 불면의 원인이 될 수는 없었다. 스카리는 이동하는 도시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사람이고 따라서 폭우나 강풍을 제외한 온갖 기온 에 익숙했다. 스카리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침대 밖으로 뛰쳐나온 스카리는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않은 채 책상으로 다가갔다. 의자에 털썩 앉은 스카리는 그의 불면을 야기한 원인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그가 어젯밤 책상 위에 놓아둔 편지 한 장이었다. 하지만 스카리는 그것을 읽기 어려웠다. 기나긴 겨울의 밤도 끝나고 바깥은 어느새 부 옇게 밝아오고 있었지만 편지를 읽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스카 리는 벽에 걸린 줄을 잡아당기려다가 비나간의 후작궁에는 그런 시설 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문쪽을 향해 불을 가져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조금 후 문이 열리고 손에 촛대를 든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경비 병이나 하인이겠거니 생각하던 스카리는 그가 팔리탐 지소어라는 사 실에 조금 놀랐다. 스카리는 팔리탐의 가면을 보다가 말했다. "둘 중 누구지?" "팔리탐입니다." "왜 하인이 아니라 네가 직접 온 거지?" "이곳은 점령지입니다. 각하. 홀로 계시는 침소에 아직 완전히 신뢰 하기 어려운 자들이 들락거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흐음. 촛대는 거기 내려놓고 앉아." 팔리탐은 의자에 앉았다. 스카리는 팔리탐이 가져온 초에 의지하여 편지를 읽었다. 짧은 내용이었기에 오래 읽을 필요는 없었다. 편지를 내려놓는 스카리를 보다가 팔리탐이 말했다. "잠자리가 불편하셨습니까?" "나쁘지 않았어. 부냐가 온다니까 잠이 안 와서." 팔리탐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보낸 편지가 그런 내용이었습니까?" "맞아. 폐하와 부냐가 함께 온다는군. 그것 때문에 잠을 설쳤어." "많이 기쁘신가 보군요." "그렇기도 하고…… 젠장! 거기에 태위도 있으시지요?" "저와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니오. 당신이 듣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젠장. 언제나 당신도 있 다는 걸 생각하면 이야기를 할 수가 없군요." 분노하는 스카리를 보던 레이헬이 뒤로 물러났다. 팔리탐은 자신의 내부에서 레이헬이 취하는 행동을 보다가 말했다. "이젠 듣지 않으십니다. 말씀하시지요." 스카리는 눈을 껌뻑거렸다. "안 듣는다고?" "예. 외부와 거의 단절된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곳에 있으면 바 깥의 일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오래된 영들이 머무는 곳이지요. 그 곳에서 그 영들과 이야기라도 나누시려는 모양입니다." "허! 나를 속이는 거지? 내가 역모 이야기라도 꺼내면 어쩌려고?" 팔리탐은 황제에 대한 역모를 꾸민다면 레이헬보다 자신이 먼저 막 을 것을 알기에 레이헬이 내려갔다고 설명하지는 않았다. 스카리를 더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태위님과 저는 신뢰관계를 깨트리기 어렵습니다. 자기와 자기가 싸 우는 꼴을 겪게 되니까요. 믿으셔도 좋습니다." 스카리는 웃긴다는 표정으로 팔리탐을 바라보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뭐, 좋아. 들어도 상관없어. 그냥 황제의 태위가 듣고 있다는 것이 불편했을 뿐이야. 부냐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밤을 샜 어. 어떻게 하지? 부냐를 데리고 발케네로 도망쳐버릴까? 하지만 황 제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 거야. 부냐만 없으면 나를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렇다면 넘겨주지는 않고 그냥 보여주기만 할까? 그렇다면 항의를 해야겠지. 어떻게 항의하면 좋을까? 그런 생 각들이야. 팔리탐. 황제가 어떻게 할 것 같나? 혹시 태위에게 들은 것 없나?" "모릅니다. 들은 것도 없고요. 폐하의 편지에는 뭐라고 적혀 있습니 까?" "여기엔 쓸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아, 그래. 그러고보니 네가 준비할 일이 있다." 스카리는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팔리탐은 촛불 가까이로 편지를 가 져가 그것을 보았다. 짤막한 내용이었다. 부냐 헨로와 함께 가겠다. 짐이 도착하기 전까지 비나간 인 쉰 명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화형에 처하라. 그것이 비 나간이 받을 벌이다. 팔리탐은 흠칫하여 다시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부냐 헨로에 대한 대 목이 아니라 그 뒤쪽의 내용을 반복해서 읽은 팔리탐은 경악하여 스 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가 말했다. "무작위라니까 제비뽑기를 하면 되겠군. 비나간을 50개 구역으로 나 누고 한 구역에서 한 명씩 선출하라고 하면 되겠지. 네가 준비하도록 해." "이 명령을 따를 생각이십니까?" 팔리탐의 반문에 스카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팔리탐도 자신이 뻔한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카리는 거부할 수 없다. 오히려 만 약 그가 거부하려 하면 팔리탐 자신이 그것을 막아야 한다. 황제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 될 테니까. 하지만 팔리탐은 그 명령의 잔혹함 에 대해 스카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이런 처벌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무작위라니오. 그들에겐 죄가 없 습니다." "죄가 없지는 않아. 대부분 후작의 칭왕에 박수를 보내고 좋아했을 테니까. 역모에 대한 호응도 역모나 다름없는 죄지." 팔리탐은 가면 뒤의 일그러진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는 팔리탐의 가면을 보다가 약간 언성을 높였다. "제기랄, 그러면 어쩌란 거야? 부냐가 도착했을 때 황제에게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고 말하라는 거야? 어차피 반역에 대해선 일벌백계가 필요해. 자신이 없는 동안 난장판이 된 세상을 본 황제라면 더욱 더. 쉰 명이면 많지도 않군." 팔리탐은 시선을 낮추었다. 그 자신도 황제의 실종 기간 동안 발케 네 영토를 확장하고 규리하를 넘보았으면서 반역자에 대한 일벌백계 를 말하는 스카리의 태도에 찬성하긴 어려웠지만, 팔리탐은 그 편지 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스카리와 이야기를 나 누었다간 험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겠다고 생각한 팔리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하겠습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일어나는 것을 허락해주십 시오." 스카리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리탐은 편지를 촛대 옆에 내려놓고는 스카리에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 가는 팔리탐을 보던 스카리는 다시 편지를 집어들었다. 부냐 헨로가 온다는 대목을 한 번 더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리탐이 촛대 가까운 곳에 편지를 놓아두었기 때문에 그가 편지를 홱 집어들었을 때 일어난 바람이 촛불을 덮쳤다. 초의 불꽃은 파르륵 떨리다가 갑자기 한 줌의 연기로 바뀌었다. =============================================================== 33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34. 돌의 질주, 바람의 침묵 - 1 [결국 서약지지파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군요.] [무슨 의미지?] [폐하의 실종 기간 동안 제국령을 다스리는 행정관들은 그 누구도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맡은 바 일을 묵묵히 수행했습니다. 분란을 일으킨 것은 모두 영지를 가지고 있 는 공후들입니다. 그것은 이토록 거대한 체제의 존속을 담 보하는 도구로서 충성서약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알려주 는 좋은 증거입니다.] [무슨 니름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겠지만, 논리가 조악하 다.] [폐하?] [사람은 다 마찬가지야. 공후들이건 행정관들이건 똑같 지. 행정관들이 칭황이나 칭왕에 나서지 않은 것은 단지 그럴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거야 백 번 옳으신 니름입니다. 저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기에 자신에게 충성할 병사도 모을 수 없는 행 정관들의 지위를 지적한 것입니다. 서약을 거부하신 폐하 의 결단이 탁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행정관들이 처음부 터 무력을 가질 수 없는……] [그들에겐 무력이 있었다.] [예?] [데라시. 인정하라. 역사의 일반적인 법칙이 아라짓 제국 의 행정관들에게서 깨어진 것은 제국의 제도가 우수해서가 아니라 엘시 에더리라는 심각하게 놀라운 개성의 소유자 때문이라는 것을. 백작은 내버려두었다면 반드시 행정관들 과 결탁하여 내란의 시대를 열었을 제국군을 자신이 모두 흡수해버렸다. 백작이 없었다면 행정관들은 매수든 회유든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총동원해서 제국군과 결탁했겠지. 행정관들이 얌전히 있었던 것은 충성 서약을 거부한 짐의 결단 때문이 아니라 백작 때문이다.] [백작의 비할 바 없는 탁월함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폐 하. 하지만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도 제국군이 황제군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서약지지파의 논리대 로라면 제국군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황제군이었을 테 고 그렇다면 백작은 무슨 수를 써서든 황제군을 흡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칼리도백은 제국군이 모두 황제군이었다 해도 반드시 무 슨 방법을 찾아내었을 거다.] [저는 그 방법을 짐작할 수 없습니다.] [칼리도백이 모든 제국군을 규합하러 떠날 거라고 짐작한 자도 없었을 거다. 아마 백작이 칼리도로 돌아가 사태를 주시하거나 다른 자들처럼 내란에 동참할 거라는 것이 보 다 일반적인 예측이었겠지.] [폐하. 그렇다면 사람을 구분짓는 서약에 의한 통치건 모 든 사람에게 똑같은 법에 의한 통치건 마찬가지라는 니름 이십니까?] [막상 칼날이 뽑히면 칼집은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 팽 개쳐져, 잊혀지지.] - 아라짓력 32년 겨울, 말리 위에서 이루어진 치천제와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소리 없는 대화 中. 스물두 살 되던 해 심장을 적출하여 병에 담아 비스그라쥬의 심장탑 에 안전하게 보관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자 신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공포가 아닌 짜증과 피로 속에 서. 데라시는 뱀단지에 의한 사어 통신의 가치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벙어리에겐 비효율적인 수단이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 훌륭한 의사 전달 수단이듯 뱀단지도 마찬가지다. 단지 다른 쪽에 뱀부리미 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뱀단지를 중상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갈 길을 찾던 데라시의 분노는 모조리 자신에게 돌아왔다. 데라시는 완벽주의 자처럼 구는 자신에게 분노를 느끼며 닐렀다. [물론 아라짓력 7년 황은에 의해 반포된 비상시의 직무 승계에 관한 원시제 그리미 폐하의 총괄적 칙령 11조 4항에 의거하여 귀하는] 그 런 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면 빨리 참고해 봐라, 이 자식아. [이미 마 모나에 대한 지휘 통제를 시작했을 테니 업무 부담의 증가는 자명하 므로] 마모나다, 마모나. 알았어? 이렇게까지 닐러줬으면 제발 마모 나의 암염을 떠올려라. [인력 충원을 위한 별시를 허락한다.] 네 친 지든 심복이든 아무에게나 적당한 직책 줘서 그 암염 광산을 착복하 게 해. 상관없어. 비나간의 팔지 남작이 암염을 가지고 장난치지 못 하도록 하기만 하면 돼. 데라시로 하여금 죽음의 위기를 느끼게 하는 상황은 대략 이러했다. 거룩한 정치 도의에 입각하여 필요한 사항을 상대방이 잘 알고 있다 는 듯이 닐러야 하지만, 상대방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니르면서도 상대방이 정말 모르는 경우를 대비하여 필요한 정보를 포함시켜야 하 고, 필요한 정보들을 포함시키면서도 책임 소재 논란을 피하기 위해 그 명령문 전체를 진정한 지시 내용과 무관한 것처럼 바꿔야 한다. 왜냐 하면 데라시의 진정한 지시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만 해 도 간단한 명령을 내리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정신적 노동을 소모하 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명령이 상대방이 이미 한 일에 대한 지시일지 도 모른다는 사실은 데라시의 의욕을 심하게 꺾는 일이다. 디네 태수는 이미 자기 육촌 쯤 되는 인물에게 그 유래가 수상한 지 위를 주어 마모나의 암염 광산을 착복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으 로써 그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비나간쪽에서 시구리아트 산맥 의 산사람들을 상대로 소금 가격 상승을 시도하는 것을 원천 방어하 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느닷없이 당주를 잃고 당황하게 된 유료도로당이 시구리아트 산맥에 대한 감찰을 소홀히 할 경우 발생하 게 될지도 모르는 산사람들의 준동을 본의 아니게 막고 있을지도 모 른다…… 디네에 별시를 허락함으로써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시 구리아트 산맥의 통행 안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데라시의 계획 이 비록 정치가적인 감수성을 만족시키는 교활하고 세련된 것이긴 하 지만 그것이 쓸모 없는 명령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 명령을 내리 면서 데라시가 느낄 수도 있었던 즐거움을 대폭 삭감시켰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데라시는 하늘누리와 함께 사라진 제국 정부를 혼자 대행해야 했다. 꼬박 19시간 가까이 진행된 명령의 홍수에도 뱀부리미는 꿈쩍하지 않고 데라시의 니름을 사어로 바꾸었다. 데라시는 뱀들을 다루는 뱀 부리미의 모습을 보며 다음에 내려야 할 지시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 고 데라시는 투덜거리며 자신이 휘갈겨 쓴 비망록을 뒤적거렸다. 자 신이 떠올린 지시가 아직 전달하지 않은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누군가가 닐렀다. [백작님. 이제 그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데라시는 비망록에서 눈을 들어올렸다. 뱀부리미 여자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데라시는 필요한 만큼 기다렸다가 닐렀 다. [힘드세요?] 데라시는 남자보다 약하다는 니름을 듣고 싶지 않은 뱀부리미에게서 앞으로 열 시간은 더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뱀부리미의 대답은 그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백작님이 다시 태어나려 하는군요.] 피로 때문에 이해력이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데라시는 재치 있다는 평을 듣기 어려울 정도로 지체한 후에야 뱀부리미의 니름을 이해했 다. 데라시는 황급히 뱀부리미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뱀부리미의 무관심을 강조한 니름이 전해져왔다. [오른쪽 손등입니다.] 데라시는 몸을 아예 뒤로 돌린 채 오른손을 만져보았다. 뱀부리미의 지적이 맞았다. 데라시는 그 손등을 옷자락 사이에 숨긴 채 일어났 다. 그는 뱀부리미와 전혀 상관 없는 방향을 향해 닐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뱀부리미는 아무 니름도 하지 않았다. 당신 옷 뒤에 피가 묻어있다 고 말한 인간 남자처럼. 그리고 데라시는 그런 지적을 받은 인간 여 자처럼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걸었다. 벽난로 옆에 걸려있던 보온 복을 집어든 데라시는 세 번째 벽난로방의 모든 뱀부리미들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 실제로는 정반대였지만 -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 곳을 빠져나왔다. 달거리와 허물벗기 사이에는 공통점보다는 이질점이 훨씬 더 많다. 후자는 생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남녀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일 어나는 일이며, 중요한 날이나 장거리 여행을 하기 직전이나 최고로 멋진 계획이 있는 날에 반드시 시작되지도 않는다.(그렇게 믿는 나가 는 없다.) 하지만 달거리를 시작한 인간 여자와 허물벗기를 시작한 나가 남자는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지적 당했을 때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비늘이 떨어질 것 같은 당 황 속에서 데라시는 여자의 집에 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가 남자는 모두 방랑자지만 노출된 야외에서 허물을 벗는 나가 남자 는 없다. 허물벗기가 시작된 나가 남자는 여자의 집에 찾아와 '강대 한 여인의 자비로운 보호하'에 그 힘든 일을 마쳐야 한다. 말리는 비 록 황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소유자는 황제다. 그리고 황제는 여자다. 데라시는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에게 목격당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오른발을, 그리고 보온복의 물이 식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합리적인 이유가 그의 왼발을 잡아끌었 다. 데라시는 만족할 만한 속도로 방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의 상태는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문을 닫은 데라시는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닐렀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적절한 의사 표현 방식이 아니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부냐 헨로는 고개를 까딱했다. "각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곳은 그런 일을 하기엔 가장 적절한 장소죠." 데라시는 그가 아는 부냐에게 부합되지 않는 그 말투에 놀랐다. 하 지만 부냐의 앞쪽에 앉아있던 아실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 짓는 모 습은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 얼빠진 얼굴로 두 여자를 바라보던 데라시는 조금 후에야 몸이 무거운 것을 느꼈다. 데라시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벽난로로 다가가 보온복을 벗었다. 그 와중에 데라시의 손 등 비늘이 조금 더 들떴다. 데라시는 손을 뒷짐지듯 뒤로 숨긴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도깨비지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 었다. 부냐 헨로는 그녀의 뒤쪽에 서서 등받이를 붙잡고 서있었다. 사이 좋은 자매의 모습이랄까. 데라시는 글쓰기를 연습 중인 여동생 과 그 모습을 보아주고 있는 언니 같다고 생각했다. 아실은 글쓰기를 연습할 나이는 훨씬 지나 있었고 손만 등받이에 얹었을 뿐 꼿꼿이 서 있는 부냐 헨로의 모습도 그렇게 자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냐가 말 했다. "저희 두 사람은 곧 이곳을 떠나게 될 거예요. 저는 스카리에게, 그 리고 아실은 지멘에게 갈 테죠." "계속 이곳에 있었습니까?" 부냐는 데라시의 질문을 무시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백작님께 조언을 좀 받고 싶군요." "조언이오?" "주인께 사랑 받는 방법에 대해." 데라시는 무의식적으로 비늘을 부딪쳤다. 비스그라쥬백은 분노와 격한 부정의 감정으로 부냐를 바라보았다. 같은 나가였다면 정색하거나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냐가 본 것은 무표정한 나가의 얼굴뿐이다. 그래서 부냐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부냐가 아무런 반응도 돌려주지 않은 것은 비스 그라쥬백의 분노를 싸구려로 만들었다. 또한 갑작스럽게 비늘을 부딪 치느라 데라시는 몸 곳곳에서 허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픔과 분노와 좌절감 때문에 데라시는 그만 주저앉고 싶어졌다. 그 때 아실 이 맹랑하다 싶을 만큼 맑은 소리로 웃었다. 데라시는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을 보듯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이 웃음을 훔쳐내듯 입가를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만둬요. 부냐. 장난이 심해요. 백작님 화나시겠어요." "그럴까?" "백작님은 자기가 제국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 어해요. 그러니 황제의 첩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해주면 화날 거예 요." 데라시는 다시 비늘을 부딪치고 싶은 것을 참느라 정신이 멍해질 지 경이었다. 붓을 내려놓은 아실은 쓰고 있던 것을 옆으로 밀어놓고는 두 손으로 턱을 받쳤다. "거기 서 계시는 것이 편하시겠어요?" "아실, 당신은 이제……" "예. 돌아왔어요." 아실은 손을 내밀어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큰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서있을 자신이 없었던 데라시는 그 손짓을 따르기로 했다. 의자에 앉은 데라시는 생경함과 약간의 두려움 속에서 두 인간을 바 라보았다. 아실은 다시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었고 부냐는 허리를 굽히고는 아실이 쓰던 것을 읽고 있었다. 아실이 말했다. "세 번째 벽난로방에 계셨지요?" 데라시는 아실과 부냐 사이의 어중간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폐하와 제국 정부가 사라진 기간 동안 일어난 문제들 을 누군가는 다루어야 하니까요." 데라시의 말에는 소재를 파악하기 힘든 황제에 대한 불만이 섞여 있 었다. 황제는 그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저쪽에는 뱀부리미가 없으니까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아 닐 텐데요." "그러니 일이 두 배, 세 배로 힘들지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문제를 추측하는 일이 필요하니까요. 게다가 이미 시행했을지도 모르 는 일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이 지시를 내려야 하고요." "힘드시겠어요." "누구나 다 힘든 시기지요." "이 시기를 곧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다행이네요." "곧? 그렇게 빨리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문제들은 향후 몇 년 동안은 애를 먹일 겁니다. 그리고 지하에 있어 보이지 않지만 이 미 뿌리를 내린 문제가 수십년 후에 피어날지도 모르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백작님은 그 문제들을 겪지 않으실 거 예요." 정신적 중노동에 의한 피로와 연속적으로 일어난 당혹스러운 사건들 때문에 집중력이 좀 흐트러져 있었지만 데라시는 아실이 말하고자 하 는 바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냐 헨로와 아실이라니, 암살자로 는 어울리지 않는다. 데라시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았 다. "제가 곧 죽을 거라는 식으로 말하는 이유가 뭡니까?" "죽어요? 천만에요. 지금의 힘든 시기를 벗어날 두 가지 방법이 있 지만 그 중에 죽는 경우는 없어요." "어떤 두 가지 방법입니까?" "첫째, 다음 번에 눈을 뜰 때까지 꽤 긴 시간 동안 잠드는 경우지 요. 얼어붙은 아라짓 전사들의 곁에서." 등뒤에서 벽난로가 불타고 있었지만 데라시는 냉동실의 추위를 느꼈 다. 아실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 데라시는 입을 다문 채 설명하라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기로 했다. 아실은 차분하게 고 개를 끄덕였다. "원시제 폐하께서는 광활한 공간을 통치하셨지요. 치천제 폐하는 장 구한 시간을 통치하실 거예요." 충격이 데라시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는 냉동실과 심장을 적출한 나 가, 그리고 장구한 시간의 통치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순식간에 깨달 았다. 그가 깨달았다는 것을 알게 된 아실은 확인하듯 말했다. "예. 백작님. 폐하께서는 지금 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유해가 모두 흙먼지로 변하고 별들의 휘광조차 낯설게 변할 긴 기간 동안 제 국을 통치하실 거예요. 올바른 진행을 부추기고 어긋난 것을 바로잡 기 위한 짧은 각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얼어붙은 잠 속에서. 백작님 은 황제 폐하와 함께 그 미래로의 기나긴 여행을 떠날 수 있어요. 심 장이 없는 나가니까. 어떤 견지에서는 상당히 부럽다는 것을 인정하 겠어요." 누가 네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느냐? 물론 황제 자신일 것이다. 데라 시가 물어야 하는 것은 왜 황제가 너를 전령으로 삼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데라시가 절대로 물어볼 수 없는 것 또한 그것이었다. 정신의 한 부분으로는 황제가 왜 직접 니르는 대신 아실을 보냈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데라시가 말했다. "다른 방법은?" "폐하와 함께 미래로 떠나지 않을 경우에도, 제국 통치는 백작님의 일이 아니에요. 그것은 칼리도백의 일이지요." 데라시 자신이 의아함을 느낄 만큼 충격은 별로 없었다. 계속된 충 격 때문에 더 이상 놀랄 힘도 없거니와 엘시의 황위 계승은 오래 전 부터 공인된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실의 말은 데 라시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물론 백작님의 능력은 새 황제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만 안타 깝게도 백작님의 존재 자체는 칼리도백이 지녀야 하는 분위기에 맞지 않아요." "분위기?" "상징성이라고 할까요? 엘시 에더리, 황제의 남다른 총애를 받을 만 큼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연약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깊지 못 했던 자, 그래서 황제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고 방황했던 자, 하지만 황제가 살해된 후 비로소 깨달음을 얻고 지상에 그녀의 이상을 널리 퍼뜨리려 애쓰는 자, 하늘로부터 권위를 담보받는 지상의 사제황." 데라시는 자신의 총명함을 저주하고 싶었다. "당신의 말이라면…… 황제 폐하께서는……" "예." "신이 되신다고?" "제국은 두억시니죠." "뭐? 그 말씀은……" "두억시니에겐 신이 없죠. 그게 문제에요. 인간, 레콘, 나가, 도깨 비에겐 각자의 신과 여신이 있지만 그 모두를 포함하는 사람에겐 신 이 없어요. 그래서 사람은 두억시니죠." 원시제와 사도 라수가 남겼던 수수께끼 같은 말이 해석되는 것을 들 으며 데라시는 호흡을 잊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다시 비 늘이 부딪치고 있었다. 아실은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려 탁자 위 에서 깍지 꼈다. 그녀의 용모는 신비한 예언자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그녀의 말투 또한 비범하다기보다는 평범했지만 데라시는 그 말을 들 으며 압박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칼리도백과 달리 믿음이 투철했기에 언제나 황제의 곁에 있 었고 마침내 신이 된 황제와 함께 승천한 데라시. 신의 심부름꾼, 사 자, 대변인. 백작님에겐 그런 역할이 어울리지요. 하지만 그 역할을 거부한다 해도 칼리도백의 곁에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면 마치 각하께서 믿음이 부족했던 칼리도백을 용서하는 것처럼 보일 테 니까요. 하지만 폐하의 곁에 있지 않아서 그녀를 죽게 만들었던 칼리 도백의 죄를 사하는 것은 신의 권리지 각하의 권리가 아니예요. 백작 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다면 하늘로부터 받은 칼리도백의 권위가 약 화되겠지요. 그러니 조용히 비스그라쥬로 돌아가 그곳을 다스리셔야 할 거예요. 죽을 때까지도 새황제를 거부했던 노충신 정도의 역할이 라면 역사책의 한귀퉁이를 멋지게 장식할 수 있겠군요. 비스그라쥬백 은 자신이 한계선을 넘을 수 없음을 핑계 삼아 결코 새 황제를 만나 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 "그만!" [만!] 아실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고 부냐는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 눈만 치켜떠 백작을 바라보았다. 데라시는 몸에 붙은 거미줄을 뜯어내듯 손을 격하게 휘둘렀다. [아냐] "그만해요." [그러지마.] "제발," [믿지 않아.] "잠시만이라 도!" 부냐는 놀랄 정도의 냉담함으로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실은 팔짱을 끼고는 한 손으로 옆이마를 긁적거리며 데라시를 물끄 러미 바라보았다. 데라시는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는 옷 아래에서 커다란 허물이 펄럭거리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고함을 지를 때 몸에서 분 리된 그것이 완전히 떨어지지 못한 채 데라시의 몸 움직임에 따라 꿈 틀거렸다.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신의 것이 아닌 이물질이 옷 아래에 서 퍼덕거리는 느낌은 끔찍했다. 데라시는 밖으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채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추위에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황제는 그를 들어올려 냉동실에 집어넣을까? 그리고 눈을 뜨 면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후일까? 데라시는 머리를 떼어내고 싶었 다. 필사적으로 부정의 증거를 찾던 데라시가 무엇인가를 포착했다. 데 라시는 두 손을 내리며 말했다. "거짓말이야." 아실은 고개를 갸웃했다. 데라시는 목 주위의 비늘을 조금씩 부딪치 며 말했다. "아실. 황제사냥꾼. 당신은 저를 기만하려는 겁니다. 폐하의 계획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럼으로써 칼리도백에게 해방자의 지위를 주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도 찬성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원 래 폐하의 계획은 그것입니다. 당신의 거짓말이 비록 교활했지만 사 실과 반대입니다! 사람의 신이 되실 작정이라면 폐하께서 왜 모든 사 람의 미움을 받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행동하신단 말씀입니까?" 아실이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먼저 들려온 것은 부냐 헨로의 목소리였다. "아, 그 역할은 스카리가 맡게 될 거에요." "뭐라고요?" 부냐는 그저 스카리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데라시가 불만에 찬 노성을 지르려 할 때 아실 이 말했다. "백작님. 역사는 언제나 사실의 모사품에 가까워요." "그건 무슨 뜻이죠?" "사람들의 기억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거죠. 신이 있고 사제 황도 있지만 좋은 신화가 되려면 악역도 필요해요. 물론 황제를 직접 살해하는 역할은 지멘의 것이 되겠지만 레콘은 악역이 되기 힘들어 요. 개인주의자의 문제지요. 지멘은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겐 관심 이 없어요. 따라서 진짜 나쁜 놈,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지고 의 악은 따로 만들어야 해요. 그 악당이 지멘을 부추킨 자이며 저질 러진 모든 악의 배후자지요." 데라시는 입을 벌린 채 아실을 노려보았다. 그는 아실의 입에서 나 올 말을 막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불과 몇십 년도 지나기 전에 사람들은 치천제가 저지른 모든 악행 을 스카리 빌파가 저질렀다고 말하게 될 거예요. 스카리는 언제나 감 투로 모습을 감추는 놈이지요. 그 본질이 불분명하기에 신뢰할 수 없 는 자예요. 그는 하늘치 앞에서 도망친 놈이죠. 지고의 권위 앞에서 두려워 몸을 피하는 자예요. 그리고 제 아비를 죽인 놈이죠. 천륜을 어긴 자예요." 이것은 부냐 헨로와 아실이 아니다. 불쌍할 정도로 위축되어 당장이 라도 무의식의 동굴로 도망칠 것 같은 의식으로 데라시는 힘겹게 생 각했다. 이들은 이들이 아니다. 데라시는 황제가 왜 직접 니르는 대 신 그녀들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 의 통제력을 데라시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니름이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물론 그녀의 통제 대상은 사람만이 아니다. 역사가 짐의 손에 들어있도다. 짐을 따르라. 즐겁거나 우스운 기분은 조금도 없었지만 데라시는 웃고 싶었다. 왜 현재를 보살피려 애썼단 말인가. 현재부터 시작되는 모든 미래에 대 한 통제를 이미 시작한 누군가가 있는데. 그가 심장을 적출한 이래 나가에게 허락되지 않은 기온에서 방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며 열중한 일은, 자긍심과 사명감 속에서 매진해온 일은 사실상 도깨비에게 부 싯돌을 팔려 한 것이나 다름없다. 허무가 파도라면 데라시는 침몰했다. 비스그라쥬백은 넋빠진 사람처 럼 말했다. "칼리도백의 인질은 누굽니까?" 아실은 입을 조금 벌린 채 데라시를 주시했다. 그것은 질문 같기도 하고 부정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데라시는 아실의 안대에 시선 을 집중한 채 말했다. "칼리도백이 그 거대한 날조에 가담하게끔 강요하는 것은 무엇입니 까?" 아실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날조요?" "그러면 아닙니까?" "아, 저는 그 표현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백작님이 내비치려 하는 혐오감이 흥미롭게 느껴지는군요. 작은 날조는 날조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데라시의 몸 어딘가에서 또 허물이 떨어졌다. 고통스러운 박리감만 있을뿐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데라시는 눈을 감고 싶다고 생각하면 서도 아실의 안대를 계속 주시했다. 그 검은 안대가 그를 노려보는 듯했다. "거짓말과 정보조작, 그릇된 암시. 즐기지 않으세요?" 부정할 수 없었다. 팔리탐 지소어는 갑작스러운 메스꺼움을 느꼈다. 얼굴에 가면을 쓰 고 있는 사람에겐 굉장한 곤경을 야기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는 황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레이헬 라보 태위가 '앞' 으로 나왔다. 라보 태위가 그의 몸을 맡게 되자 토악질은 사라졌다. 태위는 한 손 으로 허리를 짚은 채 자신에게 속삭였다. "팔리탐. 무슨 일인가?" 조금 후 팔리탐이 그의 입을 이용해서 말했다. 다른 사람에겐 자문 자답처럼 보일 것이다. "저 꼴을 보고 있으니 구토가 느껴졌습니다." 태위는 팔리탐이 보고 있던 것을 보았다. 사형의 진정한 대상은 사실상 범죄나 범죄자가 아니다. 왜냐 하면 사형에는 이미 저질러진 범죄를 원상복구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살인자를 수백, 수천 번 매달아도 피해자가 부활하지는 않는다. 따라 서 사형을 집행한다 해도 법리학자들의 호사스러운 말처럼 '정의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피해자가 죽은 상태에서 정의가 회복되었다고 부르짖어봐야 무의미하다. 사형의 진정한 대상은 범죄나 범죄자가 아 니라 아무 관계가 없는 군중이다. 다른 이들에게 살인을 저지르지 말 라는 강력한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살인자를 교수대에 매다는 것이 다. 그 때문에 사형은 전시성을 가진다. 교수대가 높은 것은 전시성 을 높이기 위해서다. 따라서 논리상 화형대 또한 높게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 이헬은 높이 쌓은 땔감과 그 가운데 서있는 기둥 같은 것은 볼 수 없 었다. 쉰 명을 불태우기 위해 쉰 개의 화형대를 만드는 것은 비경제 적인 일이다. 쉰 명을 하나의 불로 태우는 편이 낫다. 그 때문에 비 나간 외곽에는 좀 특이한 형태의 화형대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커다란 구덩이였다. 화형대라기보다는 화형구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레콘이 아니라면 반드시 사다리를 요구할 깊은 바닥 에는 나무와 지푸라기, 그리고 불에 잘 타는 온갖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구덩이 옆의 조금 떨어진 곳에는 기름통이 여럿 담겨 있는 수레가 놓여 있었다. 현재 스카리 빌파의 지휘를 받고 있는 비나간의 병사들이 사흘에 걸 쳐 그 구덩이를 팠다. 땔감을 깔고 기름통을 가져온 것도 그들이다. 그리고 쉰 명의 불운한 이웃들을 구덩이에 집어넣은 다음 구덩이를 기어오르려 애쓰는 그들에게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는 것 또한 그 들의 일이다. 지금 구덩이 곁에 서있는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술이 지 급된 적은 없지만 그들 모두는 잔뜩 취한 것이 분명한 모습으로 비틀 거리고 있었다. 탓할 일도 아니다. 땀구멍으로 술을 흘릴 정도로 과 음하고도 취하지 않아서 창백한 얼굴을 떨구고 있는 병사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태위는 그들이 감시하고 있는 쉰 명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 자들 중엔 노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 중에는 이웃 사람들에게 평소 인덕을 쌓아두 지 못했기 때문에 끌려나온 불량배나 건달, 수전노가 있었다. 제비를 뽑은 자에게 가족의 부양을 맡기고 나온 가난한 가장이, 연인을 대신 해서 나온 청년이 있었다. 사지가 온전치 못한 장애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태위는 황급히 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은 가면을 때 렸다. 팔리탐이 다시 입을 가져가서 말했다. "제비뽑기를 엄중히 집행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그렇다고 주장하더군요." "……믿지 않나?"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가족도 없어서 이웃들에게 걸식하며 살아온 바보가 있습니다.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데도 걸핏하면 임신을 했 답니다. 살아남은 아이가 셋이고 사산하거나 낙태한 아이는 얼마인지 셀 수도 없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런 여인이 제비를 뽑았답니다. 제비뽑기가 뭔지도 몰라서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뽑았다 지요.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태위는 무슨 생각이 드는지 말하지 않았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아이를 둘이나 키워봤으니까요. 이제는 능숙한 어미입니다." "저 애는 어떻게 되나?" "이웃 사람들이 젖을 뗄 때까지는 보살펴줄 거라고 하더군요. 그 이 후에는 이전의 두 명과 마찬가지로 절에 가게 될 겁니다. 어머니 대 신 어디에도 없는 신을 부르며 자라게 되겠지요." "그들을 증오하는군. 하지만 자기나 자기 가족들 중 누군가가 죽게 되는 상황에 처해서 바보를 구하자고 말할 자는 없겠지. 그런 말은 먹히지도 않을 거야." 팔리탐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헬은 시내로 이어지는 길을 보며 말 했다. "그게 사람이야. 어쩔 수 없잖아." 팔리탐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제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제비뽑기에서 부정이 저질러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자네를 화나게 만드는 건가?" "그들 중 누구도 저 여인에게 선사받은 목숨을 귀하게 쓰겠다고 다 짐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입니다. 그들 중 난폭한 이들은 자기가 운 이 좋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그 치들보다 더 구역질 나는 것은 선량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보나마나 잠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죄 의식이 싫어서 아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겁니다. 고의적 으로 잊어버리겠지요. 어미 잃은 어린 것을 절에 보내는 것은 어디에 도 없는 신의 품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꾸 죄의식이 떠오르게 만드 는 요인을 치워버리는 겁니다. 그게 그 언필칭 선량한 자들이 선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잊어버리는 거죠." 자네가 잊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질문이 입밖으로 나오기 전 레이헬은 그것을 도로 끌어내렸다. 그 입과 그 목은 팔리탐의 것이기도 하며 대화를 위해 그곳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팔리탐은 뭔가 어색한 것을 느꼈다. "왜 그러십니까?" 태위는 팔리탐이 눈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며 말했다. "저기 병사가 오는군. 그런데 혼자야." 팔리탐은 레이헬의 암시에 격분하여 길을 바라보았다. 레이헬의 말처럼 말에 탄 병사가 달려오고 있었다. 팔리탐은 한껏 눈을 찌푸렸지만 병사가 일으키는 먼지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팔리 탐은 앞으로 나서려 했고 레이헬은 뒤로 물러났다. 다시 전면으로 나 선 팔리탐은 다가오는 병사에게 걸어갔다. 병사는 날렵한 솜씨로 말에서 내렸다. 하지만 병사의 표정은 유쾌하 지도, 기민해보이지도 않았다. 익숙하지 못한 자에게 위압감을 주는 가면은 그를 더욱 당황시켰다. 병사는 팔리탐이 말하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태도는 비명을 지르는 것과 비슷 했다. "발케네공께서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팔리탐은 병사가 스카리 빌파인 것처럼 노려보았다. 물론 가면은 더 험악한 표정을 짓거나 할 수는 없지만 병사는 진땀을 흘렸다. 팔리탐 이 말했다. "안 오신다고? 왜지?" "그게, 예. 하늘치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두어 시간 후 도 착할 예정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 빨리 집행해야 하잖아. 하늘치가 오 기 전에 해야 하니까. 그런데 왜 각하께서 안 오신다는 거지?" "아, 예. 아시고 계셨습니까? 각하께서는 헨로 아가씨를 맞이할 준 비를 감독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을음이 묻거나 냄새가 배면 곤란 하니까 처형장에는 오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팔리탐은 전령의 뺨을 후려칠 뻔했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그 훌 륭한 전령을 때렸다면 아마 엄청나게 후회할 테지만 사태를 직감한 레이헬이 팔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면 팔리탐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레이헬은 흥분한 팔리탐을 대신하여 입에도 간섭했다. "알았다. 가서 쉬도록." 전령은 자기 임무가 완료된 것에 기뻐하며 말고삐를 붙잡고 물러갔 다. 레이헬은 표정을 감추는 가면에 감사하며 자신에게 속삭였다. "팔리탐. 시작하세." 팔리탐은 의외라 할 만큼 차분하게 말했다. "안됩니다. 그 개자식은 나와서 봐야 합니다." "팔리탐." "이 형벌은 그 놈이 주관하는 겁니다. 이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헛 소리일망정 그 화형이, 이 대규모 통구이가 정당하다고 주장해야 합 니다. 공작님의 곁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 놈은 저 자들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끝까지 봐야 합니다." 태위는 잠깐 동안 고민했다. 사실상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 가 팔리탐을 설득하는 방법은 언제나 한 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심사 숙고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태위는 조금 후에야 말했다. "자네가 발케네공을 설득하러 간다고 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자네가 그 고집스러운 공작을 설득한다고 치지. 그리고 자네는 공작을 이곳으로 데려와서 처형을 집행하겠지. 얼마만에 그럴 수 있나?" "예?" "말리는 곧 도착할 거야. 폐하께서는 말리가 도착하기 전에 처형하 라고 하셨지. 많은 땔감과 기름이 있다 해도 쉰 명을 불태우고 뒤처 리까지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지는 않아. 자, 시간 낭비를 시작해 볼 텐가? 공작으로 하여금 폐하의 명령을 불이행하게 해볼 텐가?" 태위는 기다렸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리탐의 무서운 고민 을 그는 잘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팔리탐의 기진맥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위님. 부탁합니다……" "알았어. 걱정 말게." 팔리탐은 뒤로 물러났다. 도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몸을 맡은 태위는 병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자문자답하듯 웅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병사들을 심하게 동요시킨 듯했다. 그들은 모두 불안한 얼굴 을 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가장 심하게 취했던 자들조차 술이 깨버 린 것 같았다. 태위는 그들에게 확신을, 혹은 확신의 착각을 주기 위 해 분명한 손짓을 곁들여 말했다. 그는 쉰 명의 사람들을 가리킨 다 음 구덩이를 가리켰다. "안으로 집어넣어라." 쉰 명의 사형수들이 있었지만 비명을 지르는 자는 드물었다. 그럴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곧 타들어갈 그들의 몸을 부축하여 일으켜세워야 했다. 첫 번째 사람이 그렇게 일으켜 세워졌다. 비틀거 리는 병사들이 비틀거리는 사형수를 부축하여 구덩이 쪽으로 걸어갔 다.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주정뱅이들처럼. 그리고 병사들은 사형수를 구덩이 안에 밀어넣었다. =============================================================== 34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4. 돌의 질주, 바람의 침묵 (2) 2004/10/20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4-2 관련자료:없음 [49365]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20 06:18 조회:56 피를 마시는 새 34. 돌의 질주, 바람의 침묵 - 2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혼자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 자신이 혼자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었다. 부냐와 아실이 떠나는 것을 본 기억은 없었지만 작별 인사를 나누었 던 기억 같은 것은 있다. 하지만 그 인사의 대상이 누군지는 기억나 지 않는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연회장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그 사람과 인사했던가? 아니면 그 사람이 아니 라 그 사람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데라시가 작별 인사를 나눈 대상은 아실과 부냐일 것이다. 연회장과 달리 그 방에 있다가 없어진 것은 그 두 사람뿐이니까. 하지만 데라시는 그 합리적인 추측에 위로 를 받을 수 없었다. '그건 아실과 부냐 헨로가 아니었어.' 그녀들이 아실과 부냐 헨로가 아니라면 데라시의 경험은 신비체험이 되어버린다. 하긴 그의 전생애도 신비체험과 마찬가지인 무엇이 되었 다. 경험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증명할 수는 없는 것. 비스그라 쥬백 데라시라는 나가를 그 외의 누가 증명해줄까? 데라시는 자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심장을 적출한 이래로 그에게 가족은 없다. 비스그라쥬의 백작이지만 비스그라쥬 사람들은 그를 몰라볼 것이다. 데라시는 경애할 만한 여인에게 아이를 준 적도 없다. 적극적으로 인 정하지는 않지만 많은 나가들이 남자의 유일한 가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 사명마저 그는 방기했다. 보다 침착할 수 있는 때라면 데라시는 남자의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그런 지적을 유연하게 회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팠다. 데라시는 자신의 몸을 부둥켜안았다.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서 몸에서 떨어지는 것이 허물인데 왜 이다지도 아픈 것인지 알 수 없다. 제2차 대확장 전쟁이 끝나고 수백 년만에 인간들이 그들의 악 습과 함께 한계선을 넘어 내려갔을 때 나가들 중엔 인간의 술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인 자들이 있었다. 나가들이 주목한 것은 환락이나 흥분이 아니라 혹 있을지도 모르는 술의 약리적 효용이었다. 괴로움 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자의적 혼수 상태에 빠지는 인간 술꾼을 면밀히 관찰한 나가들은 허물벗기를 하는 나가에게 술을 진탕 먹일 경우 어떻게 될까 고민했다. '술을 깨고보니 허물이 다 벗겨지고 없 더라.' 허물벗기를 특히 힘들어하는 몇몇 나가들에게 그것은 퍽 매혹 적인 가정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술은 심장을 적출한 나가들에게 작 용하지 않았다. 나가들은 그것이 외부의 어떤 위협에도 강력한 저항 력을 주는 심장 적출의 탁월함과 그 구성원들이 의식을 잃고 난동을 부릴 필요가 없는 나가 문화의 고상함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으스대며 선언했다. 하지만 데라시는 그들 중 몇 명은 내심 실망했으리라 믿었 다. 다행히 데라시에게도 자의적인 의식상실 수단은 있었다. 악전고투라 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데라시는 간신히 아픈 몸을 침대 에 눕혔다. 외로운 잠자리는 아니었다. 통증과 수치심과 서러움 등 와글와글한 잠동무 때문에 침대 밖으로 굴러떨어질 지경이었으니까. 지멘은 말리의 꼬리지느러미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말리의 등은 분명 정물화보다는 풍경화의 대상이었다. 그 광활한 면 적은 지멘으로 하여금 말리의 온갖 구조물들과 건물들이 먼 도시인 것처럼, 그리고 지멘 자신은 호젓한 교외에 나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물론 심리적 거리는 시각적 거리보다 훨씬 더 멀다. 지 멘은 말리와 아무런 관련도 맺고 싶지 않았다. 지멘이 서있는 곳은 꼬리지느러미로 이어지기 직전, 하늘치의 몸통 이 가장 가늘어지는 지점이지만 그래도 추락을 걱정하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지멘은 발 아래에 대한 아무런 걱정 없이 비나간 주변의 평 탄한 지형을 내려다보았다. 비나간을 향해 움직이는 말리의 속도는 그 즈음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체감할 수 있는 정도 는 아니었다. 가속도, 감속도 충분히 느리게 하지 않으면 하늘치 위 의 구조물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말리는 비나간에서 대략 20킬 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감속을 시작했지만 아직도 인간이 빠르게 걷는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고통으로 창작욕을 살찌우는 괴짜 창작가들에게 비나간의 풍경은 저 주스러운 것이었다. 월동을 대비한 체질개선을 끝내었기에 이곳저곳 이 앙상하고 까칠까칠했지만 그래도 비나간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평 화는 물론 무미건조의 동의의다. 단지 지상의 풍경만 보고 있었다면 지멘은 오래 전에 흥미를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리의 그림자가 무 겁게 떨어지는 지상에는 시선을 끄는 볼거리들이 있었다. 질주하는 마차와 말, 혹은 자신의 두 발로 힘껏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치천제의 하늘치가 비나간에 나타날 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달려오는 자들이었다. 단지 황제의 귀환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 다는 희망 때문에 오는 자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보다 훨 씬 진지한 이유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정부 실종 동안 자신이 얻은 것들을 지키려는 자들, 혹은 반대로 그 기간 동안 잃은 것들을 되찾 으려 하는 자들, 혹은 그런 자들의 황제 접견을 막기 위해 오는 자 들, 혹은 그런 자들의 황제 접견을 막기 위해 오는 자들을 방해하기 위해 오는 자들…… 음모, 욕망, 협박, 미혹, 기망, 강탈, 설득. 황 제 귀환이라는 대사건에 붙일 장엄한 서사시를 궁리하는 시인과 자기 에게 상속권을 빼앗긴 조카가 황제를 만나기 전에 제거하려는 토호 삼촌이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누며 달린다. 황제가 재구성할 정부에서 입신양명하려는 야심에 찬 시골 청년과 하늘누리와 함께 사라진 아버 지의 생사를 알고 싶어하는 귀족 처녀가 진부한 연애담을 예고하는 눈빛을 몰래몰래 교환하며 달린다. 동서남북의 지평선에서 나타나 황 제에게 달려오는 조그마한 점들이 어떤 자기만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지 지멘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에 관심도 없었다. 곧 비나간에 도착할 듯한 말리의 모습을 보고 뒤에 불이라도 붙은 양 정신없는 질 주를 시작한 그들의 모습에서 익살스러운 느낌을 받을 관찰자도 있겠 지만 지멘은 그런 관찰자가 아니었다. 지멘은 그저 시선을 둘 곳이 필요했고 말리나 굴곡 없는 비나간의 땅을 보는 것보다는 그들을 보 는 것이 편했으므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시커멓고, 건드리면 무지무지 심술궂은 짓을 해주겠다는 듯 한 쌀쌀맞은 표정이라. 그렇다면 지멘이 확실하군." 지멘은 늘어뜨리고 있던 망치를 꽉 움켜쥐었다. 일어서려는 벼슬을 억누르며 지멘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스물한 살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지만 작은 몸집 때문에 대부분 몇 살 정도 낮춰보게 될 것이다. 삐뚤삐뚤한 코와 뭉개진 귀는 불난 집 에서 뛰쳐나온 것 같다. 왼쪽 눈이 있어야 할 곳을 덮고 있는 시커먼 얼룩은 마치 불티와 함께 날리다가 얼굴에 내려앉은 재처럼 보여서 화재 피난민의 인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어깨는 앞으로 조금 굽 어 있지만 그것은 노쇠의 증거가 아닌 정반대의 인상을 자아낸다. 그 것은 어느 골목에든 있는, 단지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 정리 정돈을 사랑하는 어른들의 비위를 박박 긁을 줄 아는 꼬마 폭군의 위험스러 운 구부림에 가까웠다. 그들은 그 낮은 시야에서 어른들은 거기 있다 는 것도 잊어버린 세계를 본다. 돌을 걷어차서 놀래켜줄 고양이, 개 밥그릇을 노리고 깡총거리는 새, 입에 넣어 질겅거리기 딱 좋은 풀잎 들. 기타등등. 아실은 그런 식으로 몸을 약간 굽힌 채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지멘 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멘은 성큼 달려갈 수 있었다. 보다 아실을 가까운 곳에서 보기 위 해. 어쩌면 두 손으로 아실을 붙잡아 위로 들어올렸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낮지만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멘은 크게 웃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3미터가 넘는 키 에 대(對)군단용으로의 사용도 가능한 망치를 가지고 있는 레콘이라 면 웃을 수도 있다. 그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멘은 제자리에 선 채 아실의 뒤편에 서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치천제는 아실의 뒤편에 서있었다. 지멘은 알지 못했지만 아무런 수 행인도, 심지어 금군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치천제가 모습을 드러내 는 일은 그녀의 즉위 이후 처음이었다. 그토록 파격적인 등장이지만 황제의 옷차림은 언제나의 예법과 같았다. 바꿔 말하면 도무지 품위 가 없었다. 그녀는 흑사자 모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왼손은 쉬크 톨 자루에 얹어두었는지 모피의 그 부분이 불룩 솟아있었다. 아실의 뒤편에 서있는 그녀의 그런 모습은 '몸값은 가져왔겠지?'라고 말하면 어울릴 것 같았다. 크게 잘못된 인상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아실은 인질이었으니까. 지멘은 망치를 다시 움켜쥐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왜 받아주는 걸까. 레이헬 라보는 불안한 표정으로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서로 박자까지 맞추고 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위쪽에서 뛰어내리면 먼저 구덩이 아래에 내려가 있던 자들이 일제히 팔을 들어올린다. 꽤 나 위험한 일이다. 받아주는 사람들이 많다 해도 그런 추락이라면 아 래쪽에 있는 자의 목이 부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조금 익숙해진 듯하다. 처음 몇 명은 병사들이 미는대로 그냥 떨어져야 했다. 병사들은 아 래쪽에 쌓아둔 연료들이 충격을 흡수해줄 테고, 어차피 불에 타죽을 텐데 팔다리가 조금 부러지는 것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에 사다리 같은 것은 준비하지 않았다. 어쩌면 추락으로 즉사하면 산 채로 불타는 꼴은 겪지 않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자비심 때문에 그랬 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병사들은 거칠게 사형수들을 밀어넣었다. 하 지만 아홉번째인지 열한번째인지, 어쨌든 사형수가 떨어지게 되었을 때 바닥에서 어떤 청년이 일어나는 일이 발생했다. 주위에 좋은 일이 라곤 해본 적이 없고 언제나 가게 주인들에게 구걸과 협박을 뒤섞어 타낸 용돈으로 인생을 오염시키며 살아온 청년은 침을 탁 뱉고는 말 했다. "씨발놈들아, 그 할망구 밀지마. 팔을 잡고 내려보내." 막 늙은 노파를 밀려던 병사들은 동작을 멈추고는 찌푸린 표정으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사들은 노파의 두 팔을 붙 잡았다. 늙은 여인은 가볍게 들어올려졌다. 병사들은 노파를 구덩이 아래쪽으로 늘어뜨렸다. 바닥에 있는 청년이 두 팔을 들어올렸지만, 그래도 거리는 멀었다. 그 때 다른 노인 두 명이 청년의 곁에 가세했 다. 그들이 모두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본 병사들은 노파의 팔을 놓 았다. 아래쪽에 있던 자들은 노파를 받았다. 물론 모두 쓰러져야 했지만 어쨌든 노파는 다치지 않았다. 땅에 엎어져서 한참 동안 씩씩거리다 가 가까스로 호흡을 되찾은 노파는 쭈글쭈글한 살 속에 묻혀 있는 눈 을 슬쩍 훔치고 말했다. "고맙다." "퉤! 입에 뭐가 들어온 거야. 안 걸리적거리는 데로 가서 찌그러지 쇼. 할망구. 어차피 타죽을 텐데 할망구 치사가 뭔 소용이람. 퉤퉤!" 노파는 뒤늦게 다가온 다른 노파들의 부축을 받으며 구덩이 저편으 로 걸어갔다. 다시 일어선 청년은 찌푸린 표정으로 위를 노려보았다. 병사들은 그 눈을 마주보다가 조용히 몸을 돌려 다음 사형수를 데려 왔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아래쪽에 내려간 자들이 많아지자 받아내는 일도 조금 쉬워졌다. 병 사들도 훨씬 안전하게, 구덩이 벽에 걸리지 않고 아래에 있는 손들에 정확히 온몸이 떨어질 수 있도록 사형수들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구령까지 맞추면서. 하나, 둘, 셋. 그 소리만 듣자면 힘을 합쳐 이삿 짐이라도 나르는 것 같다. 물론 즐거워 보이는 자들은 없었다. 새파 랗게 질려 있는 어떤 병사는 망아 상태에 빠진 것처럼 딱딱하게 움직 였다. 자꾸만 눈을 문지르고 있는 어떤 병사의 경우엔 이제 자기 눈 이 이물질을 끌어모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야 할 판이다. 같은 견지에서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달려간 병사는 자신의 소화부진 에 관한 변명을 만들어내야 할 테고. 구덩이 아래쪽에서도 위쪽에서 는 들리지 않았던 흐느낌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그러나 구령은 계 속되었다. 하나, 둘, 셋. 레이헬은 그들이 왜 타죽을 동료들의 팔다리를 걱정하는지 알 것 같 았다. 안다기보다는 느꼈다. 하지만 레이헬은 내면을 향한 질문을 그 만둘 수 없었다. 왜 받아주는 거지? 궁금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궁금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그랬다. 비명과 함께 흐름이 갑자기 끊어졌다. 태위는 누군가가 결국 목이 부러졌나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명 이 들려온 곳은 구덩이 안쪽이 아닌 바깥쪽이었다. 한 여자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 곁에는 일그러진 얼굴의 병사들과 울 고 있는 여인네들이 보였다. 그들은 여자에게서 아이를 뺏으려 애쓰 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온몸으로 아이를 덮은 채 엎드려 악을 쓰 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저항했다. 팔리탐 지소어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던 바보였다. 지금껏 숨죽인 흐느낌 소리만 들려오던 구덩이 안쪽에서 비명들이 터져나왔다. 바보의 비명에 놀라고 또 자신의 비명에 놀란 사형수들 이 일제히 기함했다. 한쪽으로는 음울함과 서글픔이 미친 듯이 도망 쳤고 다른쪽으로는 공포와 절규가 처형장을 엄습했다. "살려줘! 꺼내줘!" 사형수들의 외침에 병사들은 당혹했다. 바보의 곁에 있던 병사들은 허둥대며 아이를 뺏으려 했지만 바보는 병사들의 손을 물어뜯었다. 전우들마저 비명을 지르자 병사들의 당혹감은 더욱 짙어졌다. 인간의 귀를 가장 심하게 괴롭히는 아기 울음소리 또한 그들을 혼란시켰다. 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레이헬은 칼자루를 움켜쥐며 성큼 걸어 갔다. 하지만 채 세 걸음도 걷지 않았을 때 갑자기 그의 발이 움직이지 않 았다. 레이헬은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간신히 똑바로 선 레이헬은 가면 안쪽에서 다급히 속삭였다. "놔, 팔리탐!" "뭐 하시려는 겁니까?" "몰라서 묻나? 어차피 사형수다." "안됩니다!" "팔리탐. 나는 지금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하는데. 원래대로 산 채로 타죽게 하라는 건가?" 그 질문은 팔리탐을 위축시켰다. 다리에 대한 봉쇄가 풀리자마자 레 이헬은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팔리탐이 다리의 움직임에 다시 간섭 했다. 다리의 통제를 두고 다투려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 경우 뒤로 나자빠져 다리를 흉하게 버둥거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팔리탐의 요 구대로 멈춰선 레이헬은 혀를 찼다. "팔리탐." "원래대로 타죽게 하십시오. 이미 품위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화형을 집행하게 하십시오. 발광하는 미친 개를 베듯 그렇게 베는 것은 안됩니다." "정식으로?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어. 제대로 화형이 집행될 것 같 나? 황급히 서류 태우는 것과 비슷한 꼴이 되겠지. 더 꼴사나워질 거 란 말이야. 팔리탐. 어쩌면 아기도 위험해질걸?" 팔리탐은 어떻게 태위는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한가 생각했다. 그의 지적이 옳았다. 당황한 병사들은 황급히 사형수들을 구덩이에 밀어넣 고 불을 질러버릴 것이다. 어떤 위엄도, 사형수에 대한 존중도 없이 쓰레기를 후다닥 치우듯이. "하지만, 태위님……" "내려가! 바깥이 안 보이는 곳으로!" 팔리탐은 내려갔다. 그러자마자 레이헬은 다시 움직였다. 멈칫거리 며 걷는 그의 모습이 병사에게 주었을 불안감에 대해 화를 내며. 그 러했다. 병사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레이헬의 가면을 바라보고 있 었다. 설명이 쓸모 없는 상황이었다. 레이헬은 칼을 재빨리 뽑아들었 다. 칼을 들어올리며 레이헬은 자신이 검술을 연마할 때의 몸이 아니 라는 것, 그리고 거칠게 난동하고 있는 목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 려 애썼다. 세차게 내리꽂힌 칼날은 바보의 목을 정확하게 베었다. 아기를 받기 위해 와있던 아낙네들이 질겁하여 주저앉았다. 병사들 은 얼굴을 몹시 일그러뜨렸다. 레이헬은 쓰러진 여자를 밀어내고는 재빨리 깔려 있던 아기를 들어올렸다. 아기는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 레이헬은 여인들에게 아기를 내밀려 했지만 아무도 피에 흠 뻑 젖은 채 울고 있는 아기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레이헬은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있던 병사에게 아기를 강제로 맡겼다. 병사가 서툰 손길 로 아기를 받아들자 레이헬은 감정을 재빨리 추슬렀다. "밀어넣어!" 괴물을 보듯 레이헬을 바라보던 병사들이 어설프게 움직였다. 그들 은 목이 채 끊어지지 않아 머리가 덜렁거리는 여자를 들어올렸다. 하 나, 둘, 셋은 없었다. 그들은 여자의 시체를 집어던졌다. 구덩이 안 쪽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레이헬은 곧 비명이 들려올 거라 생각했지 만 잦아든 소음은 그대로 침묵이 되었다. 구덩이 안쪽에서는 어떤 소 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레이헬은 그 안쪽을 내려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는 빼들고 있던 칼을 칼집에 넣지 않은 채 말했다. "계속해."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레이헬을 바라보다가 사형수들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지금까지는 한 명씩 부축해서 걸어왔지만 병사들은 이제 여러 명을 한꺼번에 데려왔다. 병사들의 다급한 손길에 사형수 들이 쓰러지자 그들은 쓰러진 사람을 그대로 질질 끌었다. 버둥거리 는 사형수들을 끌고 구덩이로 다가온 병사들은 그대로 그를 아래쪽으 로 밀었다. 그 모습을 보던 레이헬은 자신이 죽인 것이 바보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 둘, 셋 또한 죽였다. 곧 마지막 사형수가 구덩이 안쪽으로 떨어졌다. 레이헬은 손을 부들 부들 떨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직접 수레로 다가갔다. 기름통 을 내려다보던 레이헬은 그것을 들어올리는 대신 수레 앞으로 돌아갔 다. 레이헬은 칼을 땅에 꽂고는 두 손으로 수레 손잡이를 붙잡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수레가 곧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레이헬은 계속 힘을 가했다. 수레는 구덩이를 향해 점점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 리고 충분한 속도가 주어졌을 때 레이헬은 수레를 놓았다. 관성에 의해 굴러간 수레는 구덩이 가장자리에서 홱 뒤집히며 떨어 졌다. 수레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기름통이 박살나는 소리와 촤아 아악! 하는 기름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때도 비명은 없었 다. 병사들 또한 아무 말 없이 레이헬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이헬 은 손바닥을 털고는 땅에 꽂아두었던 칼을 뽑아들었다. "불을 던져라." 치천제가 아실의 등을 부추기듯 살짝 밀었다. 아실이 앞으로 걸었다. 지멘은 망치를 쥐고 있던 손가락이 뜨거워지 는 것을 느끼며 다가오는 아실을 바라보았다. 거침없는 발놀림으로 걸어온 아실은 단숨에 지멘의 앞에 도달하여 멈춰섰다. 다시 한 번 지멘은 아실을 붙잡아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에서다. 지멘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치천제의 시 선으로부터 아실을 보호하고 싶었다. 한 손으로 아실을 붙잡고 다른 손에 쥔 망치로 치천제를 겨냥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실을 구해낸 자 는 또한 아실을 도로 망가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멘은 치천제의 비위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듯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아실은 두 손을 뒷짐진 채 지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멘. 잘 있었어요?" "아실." 아실은 오른쪽 눈을 크게 떴다. "철의 대화가?" "끝났어." 아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끝났어요? 정신을 잃었을 때 제가 당신을 공격했어요? 아냐, 그렇 다면 저는 죽었을 텐데. 그럴 리는 없고. 그러면 어떻게 끝난 거죠?" 지멘은 수염볏을 잡아당기고 싶은 것을 참기 어려웠다. 그는 간신히 말했다. "끝났어." 아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멘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망치 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지멘은 긍지의 상징이자 존재의 근거인 그 망치가 대단히 외설스러운 무엇이나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을 뒤로 숨기고 싶은 기분 속에서 지멘은 황급하게 말했다. "끝났어. 아실. 철의 대화는 없어." 아실이 다시 지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듯 입술을 꿈 틀거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실은 곤혹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알았어요. 어, 이건 예상 못한 상황이네요. 저는 당신을 만나면 혼 잣말로 한참 동안 떠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젠장. 저는 그런 상황을 대비했다고요. 그런데 당신이 제게 말을 하니까, 어, 씨. 하 려고 했던 말이 하나도 생각 안나네." 아실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지멘은 자신 또한 마찬 가지라고 생각했다. 철의 대화에 더 이상 구애되지 않기로 한 이후 지멘은 아실에게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실 이 그의 앞에 선 지금 지멘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알 수 없는 의문 과 무슨 말을 하든 적절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좀 어처 구니 없는 일이지만 지멘은 차라리 치천제에게 말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황제에게 물어볼 말도 있었다. "아실은 완전히 나은 건가?" 아실도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던 황제 는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나가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지멘." "뭐가 적절하지 않다는 거지?" "네 느낌은 어떤가. 그녀는 아실인가?" 아실은 피식 웃었다. 지멘은 아실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아실이다." 황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지멘은 초조감 속에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 나는 너를 죽이기로 맹세했다.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면 너도 그것을 원하는 것 같다. 엘시에게 황위를 물려줄 준비가 끝났나? 아냐. 아직 끝나지 않았겠군. 미움을 사기 위해 규리 하 사람들을 학살해야 하고 유료도로당을 왕국으로 만드는 일도 끝내 야 하니까. 그걸 다 끝내고 죽고 싶을 테지? 원한다면 내 숙원의 성 취를 네가 원하는 시점까지 미뤄줄 수 있다. 아실을 치료해줬으니까 그 정도의 양보는 할 수도 있어. 그걸 원하나?" 말을 끝낸 지멘이 받은 것은 치천제의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아실 의 폭소에 놀랐다. 아실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이 설명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아실은 웃음을 거둘 수 없었다. 그녀는 미안하 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황한 지멘은 황제를 쳐다보았 다. 황제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가장 먼저 할 일을 알려주지." "뭔데?" "짐에게 감사해라." 지멘은 부리를 단단히 붙인 채 몸을 부풀렸다. 말 대신 망치가 날아 올 것 같은 위협적인 모습이었지만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만 대답을 촉구하는 눈으로 지멘을 응시했다. 정신없이 웃던 아실은 지 멘의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지멘은 깃털을 가라앉혔다. 그는 벼슬을 꿈틀하고는 말했다. "고맙다." 치천제는 미소로 대답하고는 말했다. "아실. 네가 설명해라. 그 편이 낫겠지. 짐은 물러가겠다." 여전히 대답할 상태가 아니었던 아실은 눈으로 황제에게 인사했다. 황제는 몸을 돌렸고, 지멘을 깜짝 놀라게 했다. 황제는 다리를 움직 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마치 도망치는 사냥 감을 본 맹수처럼 지멘은 무의식적으로 망치를 약간 들어올렸다. 그 때 아실이 겨우 말을 시작했다. "환상계단이군. 흥. 제법이란 말이야." 지멘은 황제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게 되었다. 아실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가 지멘의 무릎을 두드렸다. "앉아요. 지멘.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지멘은 엉거주춤하게 몸을 구부렸지만 그가 완전히 앉은 것은 황제 의 모습이 사라진 후였다. 아실은 바닥에 앉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 을 끼고는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으로 왔다갔다 했다. 지멘은 차분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은 듣지 않아도 상 관없었다. 그저 옛날처럼 자신만의 계획을 궁리하는 아실을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아실이 멈춰섰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지멘을 보다가 갑 자기 내뱉듯이 말했다. "지멘. 숙원을 포기해야겠어요." 약속 장소는 비나간의 후작궁이었다. 그리고 스카리 빌파는 다른 사 람이 정한 약속 같은 것에 구애될 생각은 없었다. 부냐와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자신이 정할 문제였다. 그래 서 스카리는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성장한 직후 도깨비 감투를 썼다. 경악하여 허둥거리는 하인들을 무시한 채 스카리는 보이지 않는 상 태에서 계단과 복도를 지나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는 황제의 모습 을 보기 위해 달려온 자들이 모여서서 하늘을 가리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말리가 거대한 구름처럼 하늘을 가린 채 떠있었다. 꾸준히 속도를 늦추던 그것은 조금 전 멈춰섰다. 군중들은 황제의 모 습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자신이 알고 있는 헛소문을 다른 이의 헛소 문과 정신없이 교환했다. 공평한 거래였다. 스카리는 그들 모두를 비 웃으며 말리로 이어지는 환상계단을 만들었다. 물론 그의 환상계단은 감투를 쓴 스카리처럼 다른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황제 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들 중 누군가가 갑자기 하늘로 걸어올라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며 스카리는 다시 한 번 발 아래에 있는 자 들을 비웃었다. 나타나는 것은 황제가 아니다. 부냐다. 황제는 자신 이 내려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냐 헨로를 내려보내겠 다고 약속했다. 그 자신이 약속에 구애되지 않으면서도 타인은 약속 을 지킬 거라고 믿는 모순을 자각하는 것은, 스카리 빌파라는 사내에 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스카리는 부냐가 나타나지 않으면 화를 낼 거라 다짐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가 결정한 재회 장소는 하늘이었 다. 스카리 빌파와 부냐 헨로는 운집한 군중들이 우러러 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재회해야 한다. 그것이 스카리의 결정이었고, 따라서 황제 가 약속을 어길 경우 그녀는 스카리의 '합당한' 분노를 받게 될 것이 다. 계단을 오르던 스카리는 황제가 약속을 지켰음을 알게 되었다. 말리의 옆구리에도 하늘누리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나루터가 있었 다. 하늘누리의 그것보다는 훨씬 짤막한 것이었다. 스카리는 그곳에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인간이나 나가와 비슷한 크기. 그러 나 황제일 리는 없다. 검은 빛이 아니라 흰 빛이었으니까. 그것은 부 냐 헨로였다. 부냐는 백색으로 몸을 감싼 채 걸어내려왔다. 스카리는 심장이 다급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아무 색깔도 없이 백색 일색이었지만 부냐가 입고 있는 옷은 화려했다. 스 카리가 만약 복식의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것이 나가들의 전통 복장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나가들은 체온이 변하며 또 상 처 입은 몸을 쉽게 재생시킨다. 따라서 과거 그들은 보온이나 피부 보호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옷으로서의 아름다움 에만 주안점을 두고 의복을 만들었다. 대호왕의 시대 이후 한계선 남 북이 교류하게 된 후로는 나가들도 북부의 것에 가까운 옷을 입었기 에 스카리는 그 옷이 나가들의 전통 복장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아름다움은 스카리를 꽤 놀라게 했다. 아래쪽에 있는 군중들 또한 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 웅성거림을 멈췄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의 모습이 조금 더 커졌다. 스카리는 이제 부냐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몸에 두른 것은 새하 얀 옷뿐이지만 그녀의 이마와 목은 월장석과 진주 등 백색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색깔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입술과 쌀쌀한 공기 때문에 발그레해진 볼뿐이었다. 그것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스 카리는 쿵쾅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내 여인이 저렇게 아름다웠던가?' 정신없이 부냐를 관찰하던 스카리는 문득 그들의 계단을 비교했다. 부냐의 계단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으로 보건대 계단은 약 간 떨어져 있었고 각도도 맞지 않았다. 스카리는 계단에 집중하여 내 려오는 부냐의 앞쪽으로 이어지는 또다른 계단을 상상했다. 곧 그것 이 나타났다. 스카리는 소리 없이 움직여 부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스카리는 속삭였다. "부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면 부냐는 깜짝 놀랄 것이다. 자신의 상상력 만으로 하늘에 떠있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 서 스카리는 먼저 속삭임으로 부냐를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소리 도 부냐를 꽤 놀라게 한 것 같았다. 걸음을 멈춘 부냐는 왼손으로 옷 자락을 움켜쥐고는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스카리는 그 놀란 얼굴을 만지고 싶은 것을 힘들게 참았다. 부냐가 말했다. "누구?" "나야, 부냐." "공작님? 공작님의 목소리인데. 여기 계세요? 어디죠?" "그대의 앞에." 부냐는 입술에 오른손을 얹은 채 앞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부냐 는 그 손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뻗었다. 허공을 향해 천천히 뻗어오는 손가락을 보던 스카리는 그 손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끝이 닿았다. 부냐는 움찔하며 손을 끌어당겼다. 스카리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조금 후 부냐의 손이 다시 뻗어왔다. 그녀는 스카리의 손을 찾아냈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스카리의 손등과 손바닥 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스카리는 그녀가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부냐가 계단을 하나 내려왔다. 보이지 않는 스카리의 팔을 따라 움 직이던 부냐의 오른손이 그 어깨와 가슴, 그리고 목을 따라 움직였 다. 턱을 따라 올라온 그녀의 손이 입 주위로 다가왔을 때 스카리는 그 손끝에 입을 맞추며 감투를 벗었다. 부냐가 작게 외쳤다. "공작님!" 군중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스카리의 모습에 놀라 탄성을 질렀다. 감 투를 치운 스카리는 자신의 입술 끝에서 멀어지던 부냐의 손을 붙잡 아 다시 입으로 가져왔다. 스카리는 고개를 숙여 그 손등에 입을 맞 추었다. 그녀의 손을 놓아준 스카리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레이헬 라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횃불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공 중에서 나꿔챘다. 불티가 날렸지만 가면을 쓰고 있는 그에겐 별로 문 제가 되지 않았다. 레이헬은 팔을 두어 번 흔들어 횃불을 다시 구덩 이 안쪽으로 집어던졌다. 물론 얼마 있지 않아 그 횃불은 다시 뛰어올랐다. 레이헬은 초조해 하지 않았다. 안쪽에 있는 자들이 불리한 대결이다. 그리고 집어던진 횃불이 자꾸만 도로 튀어나오는 것에 약이 오른 병사들이 슬픔이나 죄의식 대신 흥분을 느끼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처음 몇 번은 그렇지 않았다. 자포자기하는 표정으로 횃불을 집어던 졌던 병사는 안쪽의 사형수들이 그것을 붙잡아 황급히 밖으로 던지자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당혹했다. 그는 레이헬의 표정 없는 주시를 한참 받은 후에야 발앞에 떨어져 있는 횃불을 들어 다시 안으 로 던졌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도 홰에 불을 붙여 그 병사에게 합류 했다. 물론 사형수들은 그것을 붙잡아 도로 밖으로 던졌다. 그 일이 계속되는 동안 병사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제 병사들은 마치 놀이 에 심취한 악동들처럼 괴성을 지르며 날아오는 횃불을 피하고는 그것 을 붙잡아 안으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개자식들이 쓸데없는 저항을!" "받아봐라!" 어떤 병사가 위험할 정도로 구덩이 가장자리에 가까이 달려갔다. 그 는 아래를 살피고는 세심하게 노려서 횃불을 집어던졌다. 레이헬은 그가 무엇을 명중시켰는지 알게 되었다. 그 자신이 흥분하여 알려주 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맞았다!" 구덩이 안쪽에서 들려온 처절한 비명은 병사들을 더욱 자극했다. 지 금껏 안쪽을 보지 않은 채 횃불을 던지던 자들이 구덩이 가까이로 다 가갔다. 그들은 사형수들을 직접 겨냥하여 횃불을 집어던졌다. 횃불 은 던지기 좋은 물건은 아니었지만 위치가 좋았고 또 병사들의 숫자 가 많았다. 곧 많은 비명들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그러다가 누군가 가 뜻모를 소리를 빽 질렀다. 레이헬은 그 말이 '불이 붙었다!'라는 외침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의 추측이 옳았다. 구덩이 안쪽에서 화염의 불티가 확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뒤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화염이 솟아올랐다. 위험하 다고 생각한 레이헬은 뒤로 물러나라고 외쳤다. 하지만 병사들은 끝 까지 구경하고 싶다는 듯이 머뭇거렸다. 그 때문에 폭발하듯 화염이 솟구쳤을 때 병사들 중 몇 명의 눈썹과 앞머리가 불타버렸다. 기겁한 병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한 번 자리를 잡은 불은 미리 뿌려 둔 기름을 빨아들이며 삽시간에 부풀어올랐다. 반쯤은 연기고 반쯤은 불인 덩어리가 구덩이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구덩이 주위의 병 사들은 더욱 멀리 떨어졌다. 레이헬도 손등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뒷걸음질쳤다. 위로 피어오른 덩어리는 곧 연기로 바뀌어 흩어졌다. 검붉은 폭발의 기세가 사그라들면서 대신 심홍색의 불꽃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그 불꽃들 사이에서 기묘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레이헬은 그것이 미리 던져둔 땔감들이 고온에서 부서지는 소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허파 로 불꽃을 호흡하게 된 자들이 외치는 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 저리쳐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소망을 깨부수며 그 기묘한 소리 들 중 하나가 분명한 말소리로 바뀌었다. "살려줘! 나는-" 레이헬은 그 뒷말을 듣지 못했다. 기름이 꽉 들어찬 기름통 하나가 터진 것인지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다시 검붉은 화염 연기들이 솟 아올랐다. 불티와 철매, 재가 무수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레이 헬과 병사들은 다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실은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폭음 비슷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 했다. "스카리가 좀 과격한 환영식을 준비했나 보네요. 부냐는 기쁘겠어 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멘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시 선은 아실의 턱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내려왔다. 지멘은 바닥을 보며 말했다. "영원히 산다고?" "일만육천 년은 진짜 영원에 비하면 찰라나 다름없죠. 물론 한 사람 의 생애에 비하면 영원처럼 느껴지겠지만." 지멘은 그 시간을 짐작할 수 없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600대 후손이 태어날 수 있는 기간이라고 바꿔봐도 짐작할 수 없는 것은 마 찬가지였다. 영웅왕 시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장구한 역사가 여덟 번 가량 반복될 수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하자 비로소 전율 비슷한 것이 조금 느껴졌다. 영웅왕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은 보통 아득 히 먼 옛날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나는 그녀를 죽이기로 맹세했다. 그런데 그녀는 일만육천 년이나 살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그게 삶일까요?" "그러면?" 아실은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위협을 주는 행동 이지만 지멘의 앞에서 그럴 땐 그런 의미가 없다. 그녀는 그저 무의 식적으로 안대를 만지며 말했다. "생각해 봐요. 지멘. 일만육천 년 후에도 살아있으려면 그녀는 일 년에 하루 정도만 깨어날 수 있어요. 그러면 일만육천 일, 대략 44년 쯤 되니까요. 그건……" "일 년에 하루?" 아실은 지멘의 질문에 조금 놀랐다. "어, 이런. 아직은 당신이 대답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네요. 계속 혼 자 말하던 것이 버릇이 되어서 잠깐씩 멈추는 것이 잘 안되네요. 뭐 익숙해지겠지요. 예. 일 년에 하루에요.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사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일 년을 살 때 하루밖에 못사 는 거죠. 사는 것은 시대와의 공명이니까." 지멘은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것 같군." "우리가 아는 죽음과는 좀 다르지만, 그것도 일종의 죽음이에요. 그 건…… 아, 말할 것 있어요?" 아실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지멘의 말을 기다렸다. 지멘은 단어 하 나하나를 고심하듯 말했다. "그건 일만육천 년 동안 타이모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 군." 아실은 고개를 떨구었다. 지멘은 그녀의 움켜쥔 주먹이 미세하게 떨 리는 것을 보았다. 조금 후 아실은 목이 메어 말했다. "그건 타이모의 소망이 아니에요. 지멘." 지멘은 어깨 부근의 깃털을 조금 부풀렸다. 그는 다그치듯 말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무슨 말이지?" "분리주의는 제 소망이었어요. 아, 물론 타이모의 기여가 전혀 없었 다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뭐랄까, 사상가와 혁명가의 차이라고 할까 요. 타이모는 학자였어요. 그녀가 한 것은 제국의 정체(政體) 속에서 정체(停滯)될지도 모르는 레콘의 정체(正體)에 대해 학술적인 분석이 지요. 그것을 레콘의 지상과제로 바꿔버린 것은…… 타이모를 지극히 사랑해서 그녀의 모든 것을 미화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모두 그녀에게 서 얻고 싶었던 어떤 계집애였어요. 아, 젠장. 간단히 말할게요. 저 는 타이모의 이론 몇 가지로 분리주의를 만든 다음 무의식중에 타이 모를 분리주의의 사조로 만들어버렸어요." "타이모가 만들지 않았다고? 하지만 8년 전 쥐딤에서 타이모는 살아 있었어. 타이모가 분리주의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들은 왜 그곳에 모 인 거지?" "당신은 왜 그곳에 갔죠?" 지멘은 부리를 닫았다. 아실은 고통스럽게 말했다. "분리주의에 동조해서 간 것은 아니죠?" "모두들 분리주의가 아니라 타이모 때문에 거기 모였다고? 하지만 타이모를 아내로 얻고 싶어했던 것은 나뿐이었어." "타이모는 대단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죠. 꼭 아내로 얻지 않아도 만 나고 싶은 사람이에요. 게다가 마지막 대장장이의 따님이고. 젠장, 지멘. 무기를 받으러 거기 갔던 레콘들은 모두 그녀를 기억할 거라고 요. 한 번 만나고 싶겠지요. 그리고 다른 레콘들을 따라 그냥 거기 간 자들도 있을 테고. 레콘이 꼭 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주장에 뭔가 해서 온 자들도…… 지멘. 거기서 레콘들이 분리주의에 대해 진심으 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지멘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타이모가 죽었던 그 때의 일을 떠올리 는 것은 고통스러웠기에 지멘은 주의 깊게 타이모의 기억을 피해 당 시 쥐딤에 있던 레콘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지멘은 그들이 분리주의 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혼자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한 아실은 지멘의 대답을 기다리 지 않고 말했다. "저였어요. 지멘. 제가 학자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선언문을 발표 하면서 분리주의를 만들었고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타이모 가 주장했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죠. 사람의 기억이란 얼마나 부 정확한 것인지. 황제도 어렵잖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지요. 아, 미안 해요. 이 이야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어쨌든 분리주의는 제가 만든 거예요." 지멘은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황제를 증오하게 된 것은 타이모의 죽음 때문이지 타이모의 사상 때문은 아니다. 또한 그는 원 래 아실의 분석을 '말없이' 따르는 것에 익숙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만육천 년 동안 네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군." "그래요." "그래도 괜찮아?" 아실은 어깨를 움츠렸다. 고개를 숙인 아실은 턱으로 가슴을 찌르며 말했다. "그 소망은 버렸어요."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4. 돌의 질주, 바람의 침묵 (3) 2004/10/21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4-3 관련자료:없음 [4936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21 06:23 조회:41 피를 마시는 새 34. 돌의 질주, 바람의 침묵 - 3 지멘은 겨울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고도에 있었지만 비나간의 하늘이 특별히 더 가깝게 느껴 지지는 않는다. 승천한 티나한이 정말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면 그는 꽤 오랫동안 걸어야 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일방적인 대화 끝에 지멘은 아실의 설명을 촉구하는 방 법들을 터득했다. 상대방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그런 방법 중 하나다.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지멘에겐, 그리고 아실에겐 그런 방식이 편리 했다. 아실은 지멘이 바라는 것을 주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확실히 아실다운 것이었다. "그 세 여자, 괴물들이에요." 지멘은 눈으로 물었다. '어떤 세 여자?'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은 여자,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든 여자,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려는 여자요." 아무래도 옛방식이 편리했다. '대호왕, 원시제, 치천제로군.' "그래요. 그 세 여자들이오. 셋이 하나를 상대하지요. 그리고 이미 셋이에요. 그들이 와서, 만들고, 지키는 것을 쪼개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요.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포기한 것은 아니에요. 저는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실은 몸을 돌려 말리의 옆구리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텅 빈 하 늘을 보며 걸어가는 아실을 보던 지멘은 자리에서 일어나 망치를 집 어들었다. 그는 아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실은 걸어가며 말했다. "원시제가 정말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하지만 그녀의 예측이 맞다면 30만 년 동안 최대 600조 가까운 사람이 죽은 다음 우리는 서 로를 죽이는 짓을 그만두고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게 되지요. 그 런데 이 전망은 분리주의의 궁극적 목표 달성에 대한 대답이기도 해 요." 지멘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표정을 지었다. 아실의 뒤에 있었기에 무의미한 동작이었지만 지멘은 깨닫지 못했다. "분리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뭐지요? 오해를 부르는 이름 때문에 헷갈려 하는 작자들이 많지만 분리주의의 목표는 사람들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에요. 분리는 결합을 위한 수단이지요. 어떤 특정 종족이 다른 종족을 무조건 인도하는 대신 모든 자들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자격을 획득하자는 거죠. 그런데 분리주의에는 숨은 전제가 하나 있 어요." 아실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정말 자신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 지멘은 수염볏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실은 축 늘어진 모습으로 걸었 다. "레콘들이 제국과 분리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제국의 일원이 될 자격을 스스로 함양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동등 해진 제국과 레콘이 하나로 합쳐지려면? 그러려면 사람이 자신과 대 등한 존재를 자신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사람은 자신 과 대등한 사람을 자신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자신과 대 등한 상대를 죽여요." 아실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하얀 입김을 뿜어내었다. "그 짓을 그만둘 때까지 30만 년과 600조 명의 희생이 필요한 거죠. 결국 분리주의는 30만 년과 600조 명의 희생이 있은 후에야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되죠." 아실은 말리의 구조물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분리주의를 위해선 차라리 그 기간을 줄여달라고 요구해야겠지요. 그런데 원시제는 그 기간을 줄이려면 분리주의를 배격하고 한 명의 지배자가 계속해서 사람들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어요. 키탈저 사냥꾼 의 저주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분리주의를 포기하 고 분리주의의 기반을 빠른 시간 내에 성취하느냐, 아니면 분리주의 의 기반이 마련될 때까지 가혹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느냐. 그런데 저 는 도저히 사람들에게 그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라고 요구할 수 없어 요." 지멘은 오랜만에 부리를 열었다. "만약 원시제의 예측이 잘못된 것이라면?" "하!" 아실은 웃음인지 탄식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질문에는 언제나 사이 나쁜 쌍둥이 형제가 있어요. 만약 선황의 예측이 정확한 것이라면 어 쩌죠? 예. 지멘. 그런 질문은 도움이 안돼요. 어떤 전망에 대항하고 싶다면 그게 확실하냐고 묻는 대신 더 확실한 전망을 내세워야겠지 요. 그런데 원시제의 전망에 대항할 전망을, 저는 가지고 있지 않아 요." "……원시제가 자신의 전망에 자신이 있었다면, 왜 사람들에게 밝히 고 도움을 구하지 않은 거지? 그녀가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 예 측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뇨.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왜? 그건 모든 사람에게 관련된 일이잖아." "관련? 천만에요. 아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만약 자기 자식이나 손자가 살아갈 세상이라면 모르죠. 아니, 사람들은 사실상 자기 손자의 세계에 대해서도 별로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자식이 아 마 관심권의 한계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1만 6천 년 후의 세상에 대 한 이야기에요. 누가 관심을 가지겠어요? 선황은 아무도 자기 이야기 에 관심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선황은 미래를 알지만, 어 느 누구와도 그것을 공유할 수 없어요. 언제나 미래에 관심이 많은 척하지만, 사실상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주위 사람들과는. 그녀가 요절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좌절감일지도 몰라 요." 아실은 지멘을 돌아보았다. "누가 미래에 대해 생각해요? 그들이 생각하는 건 언제나 희망이지 미래가 아니에요. 내일은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내일은 엄청난 나쁜 일이 있을 거라는 말과 똑같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미래는 일어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날 날이에요. 미래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을 날이지요. 미래는 자신이 죽을 날이에요. 하지만 그건 생각하지 않죠. 가이너 카쉬냅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 들고 싶을 땐 언젠가 죽을 여러분이라는 말로 인사했죠. 그것은 그 어떤 예언보다 확실한 예언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요. 사람들은 결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요. 미래와 단단히 결부되어 있지 않으니 희망은 언제나 허무하죠. 공상이죠. 고통이죠." 아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선황은 하지 않았어요. 진실은 통한다는 말의 비극적 반례랄까요." 매너링 이젤사는 자신이 엘시 에더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하나하 나 되짚어 보았다. 이미 수십 번 이상 해보았던 일이지만 그 때마다 매너링이 규정한 엘시는 그 이전에 규정한 엘시와 달랐다. 매너링은 아라짓 제국의 대장군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문제로 만나는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존귀한 아르키스 대수호자의 대리인으로서 대장군 엘시 에더리를 만나야 하는 처지라면 심각한 문 제다. 어떻게 대한다는 확고한 결정이 없이 엘시 에더리를 만난다는 것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다. 시련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장군의 최근 행적들은 그녀를 혼란 스럽게 했다.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의 칭왕을 무시한 사건만 해도 그 러하다. 만약 그것이 목전에 있는 더 큰 적인 시모그라쥬군을 상대하 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는 유연한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칭왕의 문제 에 대해 자신이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것이라면 그 는 지독한 원칙주의자다. 하나의 사건이 완전히 다른 두 결론의 근거 가 된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지만 엘시의 행적은 대부분 그러했다. 황제 실종 후 제국군을 규합한 것은 그가 야심가라는 증거일까, 제국 에 대한 충정에 불타는 의사라는 증거일까? 황제 복귀 직후 황제의 곁을 떠나 남쪽으로 온 것은 또 어떤가? 상식적으로는 황제의 지근거 리에 있어야 한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서도 그러하고 황제가 없는 동 안의 자기 행적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하다못해 돌아온 황 제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황제의 곁에 있는 편이 좋다. 황제의 입장에 서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엘시가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위 험이 있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이 없는 동안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 수를 멀리 내보내서는 안된다. 하지만 황제는 엘시에게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시모그라쥬공을 공격하는 시시한 일을 맡겼고 엘시는 주저 없이 남쪽으로 왔다. 매너링은 도저히 엘시를 규정할 수 없었다. 회 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상대방에 대해 기가 죽는 것은 큰 금기였지만 매너링은 자기 능력을 과신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매너링은 약간의 상황 연출로 엘시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로 했다. 왕독수리를 타고 날 아온 것은, 물론 악타그라쥬에 빨리 도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파악하기 힘든 상대와 대화하기에 앞서 일단 기를 죽여놓자 는 의도였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마스킨성을 향해 왕독수리를 무 서운 속도로 급강하시킬 이유가 없다. 정신억압자는 매너링의 요구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녀는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독수리를 강하시켰다. 재생되는 몸을 가진 나가가 위 험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왕독수리는 벼락 같은 속 도로 땅에 내려꽂혔다. 지상의 악타그라쥬가 눈깜짝할 사이에 확대되 고 곧 마스킨성으로 바뀌는 것을 보던 매너링은 눈을 감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 왕독수리는 날개를 확 펼쳤다. 매너링은 속이 다 뒤집 히는 것을 느꼈다. 왕독수리가 뒤로 향하던 발을 아래로 뻗고 날개를 거칠게 펄럭이는 비행의 마지막 순간은 매너링에겐 고문이었다. 가까 스로 왕독수리가 날개를 접었을 때 매너링은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 한 자신의 모험적인 시도가 성공했음을 알게 되었다. 솔직하게 니른다면 지나친 성공이었다. 주변은 대수호자의 사절을 맞이하는 환영식장이라기보다는 태풍 맞 은 들판 같았다. 여기저기에 부러진 깃대가 나뒹굴고 있었고 원래 땅 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천막은 높은 나무에 걸려 있었다. 세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주저앉거나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중엔 벌렁 쓰러진 자와 그 옆에서 당혹해하며 상대의 볼을 두드리는 자도 있었다. "정신차리세요! 괜찮으세요?" 투구를 제대로 쓴 병사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옷자락이 풀어헤쳐져 있었다. 그들 모두가 매너링에게 보내어오는 것은 어처구 니가 없다는 시선이었다. 으스대기에 앞서 사과의 말을 해야 할 판국 이다. 매너링은 정신억압자의 복종심과 용기를 원망하며 황망하게 주 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왕독수리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왕독수리는 두 명의 나가를 태우고도 마음껏 하늘을 날 수 있을 만큼 거대하며 그 생김새도 호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다가오는 인간은 왕 독수리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그 남자가 찌푸린 시선 을 보내는 것은 왕독수리가 아닌 매너링이었다. 그의 태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정신억압자의 억압을 받고 있으므로 왕독수리는 절대적 으로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면 나가 정신억압자에 대해 잘 알 고 있는 인간일 것이다. 매너링은 그 인간을 자세히 관찰했다. 2미터 가까운 키에 두 사람분의 근육을 한 사람에게 우겨넣은 것 같은 장대 한 체구였다. 매너링은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 때 상대방이 겸손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매너링은 그 손의 도움을 받아 왕독수리에서 품위있게 내려섰다. 나 란히 서게 되자 매너링은 상대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남자는 곤혹스 럽다는 듯이 말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내려오십니까?" "좀 급할 때는." 매너링은 자기 목소리가 제발 침착하게 들리기를 바랐다. 한계선 너 머에서 자란 인간이라면 나가의 목소리 자체에 매혹되기 때문에 애써 침착을 꾸밀 필요가 없었지만 시모그라쥬 출신으로 나가들에게 굉장 히 익숙하다고 알려져 있는 대장군의 몸종이라면 매너링의 당혹을 읽 어낼지도 모른다. "아라짓 제국 대장군이며 칼리도의 백작이신 엘시 에더리 각하를 모 시고 있는 몸종 이레 달비라고 합니다." "대수호자 아르키스의 대리인 매너링 이젤사다." "가주님께 안내하겠습니다. 이젤사." 이레는 우아하게 가주라고 말해버린 자기 실수를 깨닫지 못했고 주 인님보다 가주님에 익숙한 문화에서 온 매너링 이젤사 또한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의전 행사에 어울리지 않는 황당한 실 수는 그들의 품위를 해치지 못했다. 주저앉거나 쓰러진 사람들도 황 급히 일어났고 도통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황급히 치워졌다. 그래 서 그럭저럭 대수호자의 대리인을 맞이하는 행사다운 엄숙함이 살아 났다. 앞쪽에는 여러 명의 장수들이 있었지만 매너링은 누가 엘시 에더리 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장군의 몸종이 그 풍문에 어울리는 모습이듯 대장군 또한 들려오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자서전을 전사학자의 필독서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위대한 무장은 생사를 가르 는 전장을 누벼온 자의 당당한 어깨와 승리만을 직시하는 날카로운 눈, 그리고 패배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위엄 있는 자세 등을 모 조리 빼놓아도 남은 것만으로 충분히 야전 지휘관의 표상이 될 수 있 을 것처럼 보였다. 인간인데다가 남자인 사람에게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매너링 이젤사는 참으로 인상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볍게 목례했다. "반갑습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 각하. 아르키스 대수호자의 명을 받고 온 매너링 이젤사라고 합니다." 인간 남자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옆에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장수에게 말했다. "대장군님. 매너링 이젤사께서는 대장군님을 만나뵙게 되어 반갑다 고 하셨습니다." 매너링은 오늘이 생애 최악의 날이길 바랐다. 앞으로 더 끔찍한 날 이 온다면 살맛이 안날 테니까. 비늘이 일어서려는 것을 참으며 매너 링은 엘시가 아닌 무장을 용서했다. 어쨌든 도시연합과 아라짓 제국 은 가상적국이었고 따라서 제국의 무장이 도시연합의 멍청이 사절을 놀릴 기회를 포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엘시 에더리임이 확인된 장수는 장난을 친 장수를 꾸짖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일을 더 크게 만 들지 말자고 결심한 듯 매너링에게 말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이젤사." "실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각하." 엘시는 점잖게 사과를 물리치고는 곁에 있는 장수들을 소개했다. 매 너링은 자신의 실수를 비꼰 장수가 시허릭 마지오라는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렸다. 용서는 했지만, 한 번쯤 이쪽에서 놀려줄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건성으로 엘시의 소개를 들으며 매 너링은 그를 관찰했다. 솔직한 감상은 의문문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게 제국의 대 장군인가? 천박하거나 유약해보이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군인답 지 못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아라짓 제국의 승리 공식 : 1. 엘시 에더리가 참전한다. 2. 2번 이하는 없다.'라고 말할 만한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매너링이 접한 엘시 에 더리에 대한 평에 따르면 엘시는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매너링은 이 사실을 풍문의 과장벽으로 해석해야 할지 외모와 능력 사이의 무관함 으로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매너링은 엘시가 또 자신 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에 놀랐다. 소개가 끝나고 그들은 마스킨성의 안쪽으로 옮겼다. 악타그라쥬는 과거 하텐그라쥬를 향해 남진하던 대호왕이 여섯 개나 되는 나가 군단과 싸웠던 유서 깊은 장소다. 여섯 군단은 북부군의 거침없는 남진을 저지하고는 보름 가까이 그들을 한 장소에 묶어두었 다. 하지만 대호왕의 참모였던 라수 규리하는 대호왕을 가호하는 신 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태양이라 할 만한 거대한 불을 만들어내었다. 나가를 제압하는 것은 추위라는 상식을 뒤집은 라수의 전략은 적중했 다. 체온을 조절할 수 없는 나가들은 추위뿐만 아니라 지나친 열기 또한 견디지 못했다. 또한 열을 보는 그들의 시야는 라수가 만들어낸 불에 현혹되었다. 결국 여섯 군단은 자멸했고 악타그라쥬는 무서운 파괴를 겪게 되었다. 나가에겐 뼈아픈 패전의 장소지만 눈으로 보이는 흔적은 없었다. 제 국은 악타그라쥬의 폐허 위에 훌륭한 새 악타그라쥬를 건설했다. 물 론 도시의 모습에는 북부의 흔적이 많이 보였지만 나가들의 전통 또 한 훌륭하게 적용되어 있었다. 마스킨성 또한 나가들이 좋아하는 방 식대로 외부를 향해 많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회담장은 매너링에 대 한 배려를 드러내고 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잘 들어오고 있 었고 또한 매너링의 좌석은 직사광선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매너링은 왕독수리를 급강하시킨 것을 다시 후회했다. 상대의 기를 꺾으려는 행동이 오히려 매너링에게 도덕적 부채만 남기게 되었다. 가벼운 화제가 몇 가지 거론되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도시연합의 나가와 제국의 사람이 만나면 화제가 제한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들 이 처한 시국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었다. 매너링은 황제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했고 엘시의 업적을 치하했다. 엘시는 감사 와 겸양을 예의바르게 표시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나와도 될만 한 시점에 도달했을 때 엘시는 시모그라쥬 공작 팔디곤 토프탈과 도 시연합 사이에 체결된 불가침 조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금 민감해질 수 있는 주제였다. 남부의 제국군을 규합하기에 앞서 베로시 토프탈은 바로 매너링 이젤사를 만나서 불가침 조약을 요구했 다. 도시연합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런 행동은 도시연합이 시모그 라쥬를 지지한다는 의사 표시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매너링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대답을 준비해두었다. 상당히 화려한 화법을 이용하여 매너링이 주장한 것은 대략 이러하다. 도시 연합은 침략 전쟁을 부정하며 좋은 이웃인 제국의 내정에도 개입할 의사가 없다. 제국이 불운한 내란에 시달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제국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 서 내란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약속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제국의 내란은 바로 그 약속을 받아줄 황제가 실종되었 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그런 약속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우리에게 접근해온 것이 시모그라쥬공 한 사람뿐 이기에 우리는 그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만약 대장군 당신이 와 서 요구했다 해도 우리는 당신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을 것이다. 왜 냐 하면 우리는 침략 전쟁을 부정하는 평화로운 사람들이므로.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콧방귀를 뀌고 싶은 표정이었다. 견실한 제 국의 무장으로서 도시연합의 나가를 싫어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엘시는 여전히 매너링의 규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엘 시는 속마음을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시모그라쥬공으로부터 당혹스러우면서도 주의를 요구하는 정 보를 입수했습니다. 내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귀측은 불가침 조약 체결의 대가로 특정한 제국 신민들을 요구했다더군요." 매너링은 탁자 아래의 다리에 힘을 조금 주었다. 반드시 거론될 거 라 예상했던, 하지만 피하고 싶었던 주제다. "공작이 무슨 말을 하던가요?" "도시연합이 군령자들을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점령지에서 군 령자들을 색출하여 도시연합으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 주장을 뒷받 침하는 증거들도 입수되었습니다." 매너링은 속으로 셋을 셌다. 그리고 다시 거꾸로 셋을 센 다음 말했 다. "공작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제국 내의 혼란스 러운 정세를 피해 도시연합으로 몰래 넘어온 유민들을 말하는 거라 면, 그런 자들은 몇 명 있습니다. 그런 일이야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 잖습니까. 우리들 쪽에서도 그런 자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알지 못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자율권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도시의 연합이지 하나의 제국이 아닙니다. 그리고 대수호자께서도 제국에서 황제 폐하가 받으시는 것에 부족하지 않는 존경을 저희들로부터 받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연합 전체의 통치자는 아니십니다." 매너링이 갑자기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도시연합에 대한 설명을 시작 하자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장수들은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매너링이 말을 돌리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너링의 계 획은 그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얼마나 되는 제국의 유민이 도시연합의 품으로 넘어 온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으 키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들도 우려를 느끼고 있습니다." 말을 끝낸 매너링은 엘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보던 엘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시다면 조금 더 편안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기다리고 있던 제안이기에 매너링은 비밀 회담 요구를 수락했다. 제 국군의 장수들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엘시가 매너링과 함께 부속실로 가는 것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속실 문앞에 서 엘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이레.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이레는 눈치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엘시가 비밀 회담 을 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엘시와 매너 링 두 사람만 방안으로 들어가게 할 생각도 없었다.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던 이레는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가주님. 그러시다면 이젤사의 신변 검색을 하도록 허락해주십시 오." 이레는 무례를 꾸짖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러라는 듯이 험악한 얼굴 로 매너링을 노려보았다. '단검이나 소드락을 가지고 저 안에 절대로 못 들어간다. 알겠냐?' 하지만 매너링은 이레를 꾸짖는 대신 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소드락 주머니를 꺼낸 그녀는 당황한 이레에게 그 것을 턱 넘겼다. "잘 보관해."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이레는 긴장을 풀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레는 엘시에게 이것은 건네주기 위해 준비한 여벌 주머니 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엘시가 먼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레." "하지만, 가주님. 가주님은 제국의 대장군입니다." "주인님이다." "……예. 주인님." 이레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엘시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하지만 매너링에겐 충분히 들릴 수 있도록 속삭였다. "이젤사는 절대로 나를 해치지 못한다. 그러면 대수호자 아르키스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으니." 침착하려 했지만 매너링은 비늘을 부딪치고 말았다. 이레 또한 그 말에 놀랐지만 매너링의 당황한 모습은 이레를 신나게 했다. 이레는 심술궂은 즐거움을 느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엘시는 문을 열고 는 매너링을 바라보았다. 엘시를 노려보던 매너링은 방안으로 들어갔 고 엘시 또한 그 뒤를 따라 들어간 다음 문을 닫았다. 매너링은 그 조그마한 방이 꽤 안락하게 꾸며져 있으며 회담장만큼 이나 많은 햇빛이 들어온다는 것에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의 자로 다가가 앉아서는 엘시가 다가오는 모습을 노려보았다. 나가 여 자가 남자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권위있고 무서운 시선이었지만 나 가가 아닌 엘시는 그 문화적 신호에 반응하지 않았다. 매너링은 '남 자 주제에!'라는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녀가 보호해야 하는 아 르키스 대수호자 또한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랑이므로 당연히 남자였 다. 매너링의 맞은편에 앉은 엘시는 점잖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너링 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레콘들은 민들레 여단입니까?" 어느샌가 사라진 민들레 여단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던 제국군 장수 들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귀를 꿈틀했을지도 모른다. 엘시는 아무 반응 없이 매너링을 계속 바라보았다. "더 쉽게 말할까요? 갑자기 도시 연합에 나타나서 나무들을 마구 베 고 있는 그 레콘 집단은 당신이 보낸 민들레 여단입니까?" "내가 그것을 긍정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연히 침략행위입니다. 남부의 그 어떤 무도한 장수도 감히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제국군 유격대를 도시연합에 파견한단 말입니까!" "당신이 말하는 것은 도시연합을 구성하는 도시들 사이의 무주지에 나타나 오직 나무만을 베고 있는 다수의 레콘들에 대한 이야기일 겁 니다. 맞습니까?" 매너링은 사나운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수목애호가라는 별칭 으로 불리는 나가에게 나무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그리고 대장군 은 그런 나가들의 태도를 잘 알면서 그런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한 편 사람에게는 그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단지 나무만 베는 것을 침 략이라거나 유격활동, 혹은 군사활동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 이다. "그들이 민들레 여단이 아니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도시연합의 모든 나가들을 대표하여 나는 즉각 그들이 도시연합의 영토에서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무에 입힌 피해 또한 보상해주어야 할 겁니다." 엘시는 물끄러미 매너링을 바라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아르키스 대수호자에 대해 말해보지요." 매너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좋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지요. 당신이 제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군사력이 상당수 사라진 제국 남부를 지키기 위해 민 들레 여단을 도시연합 내부에 파견하여 그런 협박을 가하는 것도, 불 쾌하긴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사실상 민들레 여단의 벌목 시위에는 위법의 소지라고는 없다. 시련 은 도시들의 연합체고 따라서 각 도시 사이에는 주인이 없는 무주지 또한 조금씩 존재한다. 민들레 여단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모두 무주 지였다. 도시 연합 내부의 땅이긴 하지만 주인이 없는 땅이므로 그것 을 가리켜 침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매너링이 이성적으로 그것을 이 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뿐만 아니라 아르키스 대수호자도 벨 수 있다는 농담은 좀 과합니다. 우리는 제국을 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내가 왜 그 말을 믿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제국을 상대하겠습니까?" "대장군 갈로텍의 영을 찾아내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정확 하게 말하면 주퀘도 사르마크의 영이지만." 매너링은 입을 다물었다. 엘시는 허리를 뒤로 젖혔다. "제국을 방위해야 하는 것이 내 입장이지만, 솔직히 그런 일이 없었 다면 나도 시련이 제국을 공격할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고금을 통틀어 가장 탁월한 무장으로 꼽혀도 무방한 자의 영을 찾고 있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당신들의 평화주의를 의심 하게 하는군요." "그들은 제국 침략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군령자들을 데려간 것을 인정하는군요." "인정합니다. 밖으로 나간 후에는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좋습니다. 당신들의 그 침략과 상관없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 지만, 그들은 제국의 신민입니다. 나는 그들을 돌려받길 바랍니다." 매너링은 지체하기 위해 옷자락을 바로잡았다. 충분히 지체한 다음 매너링은 엘시를 똑바로 보며 차갑게 말했다. "민들레 여단을 당장 복귀시키십시오. 그리고 군령자들은 돌려줄 수 없습니다." '전쟁을 원하나?' 가장 쓸모없는 말이 될 것이다. 엘시는 매너링이 말하길 기다렸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타협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대가를 바란다면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백성의 안위는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군령자가 백성이라고요? 당신들은 수십 세대 전에 죽은 자도 백성 이라고 부릅니까? 그들 대부분은 아라짓 제국이 생기기 훨씬 전에 죽 은 자들입니다." "현재의 아라짓 제국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는 이 세대를 뛰어넘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겠지요. 군령자들은 모든 시대로부터의 도피자이고 따라서 어떤 시대와도 결 부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나라의 백성도 아닙니다." 말을 끝낸 매너링은 엘시가 보여준 뜻밖의 반응에 놀랐다. 엘시는 고뇌에 빠진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시는 황제와 일만육천 년 동안 이어질 제국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 다. '지금까지는 그랬지. 군령자들은 언제나 현재를 살고 있는 과거의 사람들이었어.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아. 그들이 아무리 전령을 계속한다 해도 언제나 아라짓 제국에 살게 될 거야. 일만육천 년 동 안. 그들 모두는 아라짓 제국의 군령이 되겠지. 제정신을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영도 치천제 폐하의 지배를 기억할 테고 가장 최근의 영 또한 그렇겠지. 어떤 나라의 백성도 아닌 군령자마저 아라짓 제국의 백성이 되겠군.' 엘시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군령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건 우리는 그 속에 있는 아라짓 제국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엘시는 매너링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군령자들은 아라짓 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내가 그 말을 왜 믿어야 합니까?" "그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니까요." "바르지 않은 해결책입니다." 매너링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지만 엘시는 부연 하지 않았다. 매너링은 두 손을 깍지껴 그 손가락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대장군님.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군요. 그들을 원한다면 와서 데려가십시오. 도시연합은 제국을 침략하지 않지만 제국의 침략 에는 결단코 맞서 싸울 겁니다." 기묘한 일이지만 데라시는 자신이 혼수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 체적으로 주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어떤 것들은 민감하게 느 낄 수 있었다. 허물이 떨어지는 통증은 이제 압박감 같은 것으로 바 뀌었다. 데라시는 그저 무겁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 디가 어떻게 무거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몸 전체가 커다란 바위 에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바위에 깔려 있는 것 은 몸 일부분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그 모호한 감각이 갑자기 뚜렷해졌다. 데라시는 누군가가 자신을 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데라시는 그곳이 어디인지 생각했 다. 손…… 아마도 손이다. 누군가가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었 다. [새끼돼지 한 마리를 준비해두었다.] '무슨 니름…… 폐하?' 데라시는 눈을 떴다. 당혹스럽게도 데라시는 자신의 손등을 만지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황제는 벽난로 옆에 서서 땔감을 집어넣고 있었다. 황제는 조금 전 데라시를 부른 사람 같지 않은 모 습이었다. 데라시는 자신의 시간 감각이 조금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한참 전에 그의 손등을 만지다가 벽난로의 불 이 꺼져가는 것을 보고는 그곳으로 간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신 경쓰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가 한참 후에 일깨워졌다. 다시 황제를 본 데라시는 자신의 시각적 기억 또한 좀 이상하게 바뀌었음을 깨달았 다. 황제는 벽난로에 땔감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탁자 옆에 서서 손에 든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황제가 벽난로에 땔감을 집어넣 는 모습을 데라시가 본 것은 한참 전의 일인 듯하다. 데라시는 자신 이 보고 있는 것이 현재가 맞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닐렀다. [폐하.] [데라시? 일어났느냐?] 갑자기 현재가 다가왔다. 황제는 탁자 옆이 아니라 그의 침대 옆에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손에는 탁자 옆에 있을 때 들고 있던 종이를 들고 있었다. 황제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닐렀다. [두어 시간 후에는 끝날 것 같다.] [폐하. 어찌 이곳에……] [새끼돼지 한 마리를 준비해두었다.] 아까 들었던 니름이 다시 들려왔다. 이제 데라시는 그것이 무슨 뜻 인지 알았다. 허물벗기가 끝나면 나가는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데라시는 감사의 인사를 하려다가 조금 당황했다. 황제는 벽난로쪽으 로 걸어가고 있었다. 꺼지는 불을 보고는 땔감을 집어넣기 위해서. 하지만 그녀의 손은 데라시의 침대 옆에서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 고 그녀의 다리는 탁자 옆에 서있었다. 기억이 마구 뒤섞이고 있었 다. 혼란 때문에 데라시는 눈을 감기로 했다. [데라시? 일어났느냐?] 데라시는 눈을 감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니름을 들었던 기억 이 뒤섞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데라시는 아무 니름도 하지 않았 다. [짐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다.] '이건 또 무슨 니름이실까. 내가 간호를 사양한 걸까? 그래서 그 대 답이 지금 들리는 건가?' [새끼돼지 한 마리를 준비해두었다.] '이 기억은 자주 반복될 모양이군. 내가 배가 고픈 모양이지.' [그렇다. 짐은 신이 될 것이다.] '뭐?' [아니다. 아실과 부냐는 아실과 부냐다.] '그게 무슨 니름이십……' [새끼돼지 한 마리를 준비해두었다.] '젠장!' [역사는 흔히 강물에 비유된다. 물이라는 것은 재미있지. 그것은 형 태가 없다. 두억시니라고나 할까. 하지만 급류와 폭포는 물에 기대어 사는 자에겐 어떤 것일까. 아무도 역사를 구르는 돌에 비유하지는 않 았다. 단단한 돌. 그것은 물처럼 제멋대로 변하지 않는다. 돌을 질주 시킨다. 물처럼. 하지만 안정되게. 모순이지만 가능하다. 그런 모순 을 일만육천 년 동안 가능하게 하려면 그만한 노고는 필요하다. 희생 이라고? 아니, 노고라고 표현하고 싶다.] '폐하?' [짐은 그런 식으로 정신억압하지 않는다.] '정신억압?' [두어 시간 후에는 끝날 것 같다.] '지금은 도대체 몇 시간 남은 걸까?' [약속의 그 날은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자신을 보지 못하 는 신의 선민종족들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하늘치는 너무 빨리 사람을 만났다. 하늘치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하늘에 떠서 거대한 희구를 이끌어내는 존재 가 아니다. 그들이 아직도 약속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조우가 너무 빨랐다는 증거다. 조우가 이루어졌는데도 그들은 약속을 기다리고 있 고, 그래서 그들은 짐이 하늘치를 조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때 데라시, 너에게 조종을 부탁했던 것이다.] 데라시는 그 때가 어느 때인지 알 수 있다. [폐하. 그렇다면 제가 하늘누리를 움직일 수도 있습니까?] [뭐? 그래. 할 수 있다! 해라! 이것을 멈춰라!] 암살성의 상공, 하늘누리가 폭주할 때였다. 황제는 하늘치를 움직이 는 방법을 데라시에게 알려주고는 그에게 하늘치를 움직이라고 명령 했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어서 그 때는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 다. 하지만 데라시는 황제가 직접 하늘치를 움직이는 대신 그 방법을 막 이해한 데라시에게 움직이라고 명령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임을 깨달았다. 당연히 그 방법을 이미 숙지하고 있는 황제 자신이 시도했 어야 한다. 황제가 환상 계단의 사용에 미숙했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다. 데라시는 그것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데라시. 짐과 함께 가겠느냐?] 갑작스럽게 슬픔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 감정도 지금이 아닌 시간대 에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데라시는 대답도 이미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 대답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데라시는 확신을 담아서 대답했다. [폐하와 함께 가겠습니다.] 황제는 침대 곁에서 웃었다. 황제는 벽난로 옆에서 웃었다. 황제는 탁자 옆에서 웃었다. 그리고 탁자 옆에서, 벽난로 옆에서, 침대 옆에 서 황제가 닐렀다. [새끼돼지 한 마리를 준비해두었다.] 데라시는 웃었다. 조용히, 평화롭게.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4. 돌의 질주, 바람의 침묵 (4) 2004/10/22 http://readingfantasy.pe.kr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4-4 관련자료:없음 [4937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22 07:42 조회:21 피를 마시는 새 34. 돌의 질주, 바람의 침묵 - 4 데라시의 침대 곁에 있던 치천제 이라세오날, 라세는 데라시가 자면 서 웃는 것을 보았다. 데라시가 '지금' 들었다고 생각한 대화는 모두 한참 전에 있었던 일 이고 따라서 라세는 데라시의 웃음과 한참 전에 있었던 대화를 연결 할 수 없었다. 데라시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지만 치천제는 그 웃음 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 웃음은 그녀에게 익숙했다. 하지만 데 라시가 황제의 앞에서 자주 웃었던 것은 아니다. 라세는 데라시가 아 닌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그 웃음을 여러 번 보았다. 라세는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의 복잡할 것 없는 가족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는 한 때 하텐그라쥬에 살았던 카린돌 마케 로우의 딸이다. 카린돌에게는 두 명의 언니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하텐그라쥬 파괴 당시 그곳을 탈출했던 소메로 마케로우다. 소메로 마케로우는 비스그라쥬로 넘어가 소메로 투나가 되었고 데라시 투나 는 바로 소메로 투나의 아들이다. 심장을 적출한 이후로 데라시는 투 나라는 성과 무관해졌고 마케로우였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굳이 따 진다면 데라시는 그리미 마케로우의 사촌이 된다. 따라서 데라시는 원시제의 모습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그 모습 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남녀라는 차이가 있고 또한 나가이기 때문에 서로 닮을 가능성은 사 실상 떨어진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나가와 레콘의 형제자매들은 각 자 다른 아버지나 어머니를 가지므로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인간 과 도깨비의 형제자매보다는 공유하는 혈통이 적다. 혈통만 놓고 따 지면 나가와 레콘의 사촌은 완전한 타인보다 그리 가깝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미 마케로우와 데라시는 닮은 점이 별로 없다. 하지만 라세에겐 그렇지 않았다. 라세는 두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데라시의 웃음은 그녀에게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의 웃음 을 떠오르게 했다. 그녀는 그 두 사람을 사랑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를 싫어했다. '그리미. 당신을 원망합니다. 그렇게 일찍 죽어야 했던 당신을 원망 합니다. 왜 그렇게 떠났습니까. 당신 때문에 나는 데라시를 사랑하는 것도 두렵습니다. 나는 데라시를 당신의 대리물로 보고 있는 것이 아 닌가 항상 의심합니다. 왜 나에게 그를 의심하도록 만들었습니까. 그 가 나와 함께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기뻐하기에 앞서 일만육천 년 동안 내 곁에 남아줄 당신의 대리물을 얻었다고 생각할까봐 무서웠습 니다. 그리미. 왜 내가 당신을 원망하게 만들었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라세는 갑작스러운 충동에 의해 데라시의 방에 원시 제를 불러냈다. 황제가 만든 것은 환상벽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상상하는 것을 모 두 이루어주는 하늘치의 능력은 말리 위에서도 똑같이 작용했다. 황 제는 그 능력을 이용하여 그리미 마케로우의 모습을 만들어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모습은 생전의 원시제와 완 벽하게 똑같았다. 그리미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은 라세였지만 라세는 다음 순간 그리 미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환상벽의 특징은 라세에게 진짜 살아있는 원시제를 대하는 듯한 만족감을 주었다. 물론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한시도 잊지 않는 그녀의 냉철한 이성 때문에 그 만족 감은 크지 않았다. 라세는 원시제가 무슨 니름을 할지 기대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범한 정신능력 때문에 그리미 마케로우는 정신적으로는 유년기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성인이 되었다. 가장 밝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도 항상 지워지지 않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녀의 조소는 그런 유년기의 상실이 남긴 흔적이다.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겪기도 전에 삶에 대한 정의를 내렸고, 자라면서 수집한 증거들이 스스로는 잘못된 것이기를 바랐던 그 정의에 남김 없이 부합하는 것을 겪은 소녀의 쓸쓸한 조소 였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16년 후도 생각하기 힘든 사람들과 달리 1 만 6천 년의 시위를 잡아당길 수 있었던 구제가 불가능한 낙관주의자 의 미소도 있었다. 라세는 그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그리미.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란 말입니다. 만일 저들이……' 문득 라세는 그리미가 아무 니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시제의 미소 띤 침묵을 바라보던 라세는 먼저 니르기로 했다. [그리미. 대답해봐요. 나는 내 륜 페이를 만든 겁니까? 뇌룡공을 나 무로 만들어 자신의 곁에 두었던 아스화리탈처럼 나는 데라시를 꽁꽁 얼려서 미래로의 동반자로 삼은 겁니까? 당신에 대한 그리움 때문 에?] 원시제의 모습이 닐렀다. [라세. 데라시가 그것을 바랐어.] [허물벗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리미. 그가 내 질문을 제대 로 이해했는지조차 불확실합니다.] [너는 그게 데라시의 진심이라는 것을 잘 알아. 알 수밖에 없지. 그 런데 왜 내게 묻는 거지?] [내가 왜 묻는지 당신은 알지 않습니까. 알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왜 내게 묻는 겁니까?] 원시제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조금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 다. [아스화리탈이 뿌린 포자 중에서 두 그루의 용화가 피어났다. 그 중 하나는 너도 잘 알다시피 즈믄누리의 바우 성주에게 갔지.] 라세는 정신적 신음을 흘렸다. 원시제의 영상은 원시제가 아니다. 그것은 라세가 만든 것이었고 라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니르 고 있었다. 스스로 잘 아는 것이지만, 라세는 생각을 정리해둘 겸 그 니름을 계속 듣기로 했다. 어쩌면 그녀가 알고 있지만 의식하지 못한 정보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것 또한 환상벽의 특징이다. [라세. 즈믄누리의 성주는 즈믄누리에 있을 때 올바른 결정을 내린 다. '즈믄누리에서'라는 단서가 붙어있지? 그런데 규리하성에는 흥미 로운 특징이 있다. 거기엔 원래 즈믄누리의 일부분이었던 것이 있지. 라수의 방. 그것은 즈믄누리의 일부분이기에 마치 즈믄누리처럼 작용 한다. 그렇다면 즈믄누리의 성주는 규리하성에서도 올바른 결정을 내 릴까?] 그것은 라세가 예전에 고려했던 문제였다. 그리고 라세는 거기에 대 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규리하성과 즈믄누리의 유사성은 둘째치더라도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린다는 '올바른 결정'에서 그 올 바르다는 것의 정의조차 제대로 내리기 어려웠다. 만약 원시제 자신 이라면 해답을 제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라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원시제의 영상이었다. 라세는 그 환상이 자신에게 해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리미의 환상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가설을 닐렀다. 그런데 그것은 라세가 생각해보지 못한 가 설이었다. [그 가설에 대한 답이 긍정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우리는 그 올바르다는 것을 정의할 수 없지. 한 사람에게 올바른 것이 다른 사 람에게 잘못된 일일 가능성은 언제나 있으니까. 하지만 도깨비들이 성주의 결정을 무조건 따른다는 것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어쩌면 성 주가 내리는 결정은 자신이 통치하는 자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결 정일지도 모르지. 자신이 책임지고 싶은 자들에게 이로운 결정 말이 야. 자, 라세. 우리는 두 개의 가설을 받아들이기로 했지. 첫째, 즈 믄누리의 성주는 규리하성에서도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 둘째, 그 올 바른 결정은 성주가 책임지는 자들에게 이로운 결정이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이 나오지?] 라세는 대답했다. [즈믄누리의 성주는 규리하성에서 규리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렇지. 모조리 가설이지만 한 번 끝까지 가보자. 라세. 바우 성주 는 어르신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도깨비들의 곁을 떠날 수 없지. 그는 아마 즈믄누리에서 나오려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지금 즈믄누리에 는 살아있는 탈해 머리돌 무사장이 있다. 만약 바우 머리돌이 무사장 에게 자신의 성주 지위를 넘겨준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즈믄누 리의 12대 성주 탈해 머리돌은 규리하성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 을까?] 라세는 유의할 만한 가설이라고 생각했다. [탈해가 규리하성에서 즈믄누리의 성주 지위를 승계할 경우, 그는 그곳에서 비셀스 규리하에게 도움이 되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 다…… 바우 성주가 그럴 가능성이 있나요?] [그래야 한다고 결정하면 그렇게 하겠지.] [생각해봐야겠군요. 그 가설들 모두가 지나치게 비약적이긴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규리하를 공격하기 전에 그곳에서 도깨비부터 몰아 내야겠군요. 그런데 당신은 바우 성주에게 넘어간 용화를 지적하면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원시제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세가 닐렀다. [즈믄누리의 12대 성주 탈해 머리돌은 규리하를 위해 지금껏 숨겨져 있던 그 용을 나에게 쓰겠다고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위험한 가능성이지.] [그리미. 용은 키우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자라나죠. 도깨비가 용을 어떻게 키웠을까요? 나는 바우 성주가 폭력적인 용을 키워냈다는 생 각을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을 키워냈을 수는 있겠지. 피를 보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용으로 키워냈을 수도 있고.] [날카로운 지적이군요. 유념해두죠.] 원시제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쉬움을 느낀 라세는 다시 그녀의 모습 을 불러내려다가 불현듯 원시제의 영상이 자신을 도왔음을 깨달았다. 통제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로 라세의 주의를 돌려놓음으로써 그리미 의 환상은 그녀를 진정시켰다. 치천제는 데라시를 돌아보았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황제는 이불을 살짝 들어 그의 허물벗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우수수 떨어지는 허물조각들 아래로 데라시의 새 비늘들 이 보였다. 허물벗기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황제는 일어나서 벽난로로 다가갔다. 땔감을 집어넣으려던 황제는 문득 자신의 손에 종이가 들려 있음을 깨달았다. 라세는 다른 손으로 땔감을 들어 벽난로에 집어넣고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바라보았 다. 그것은 그녀가 데라시의 방 탁자에서 발견한 종이였다. 거기에는 치 천제에 대한 험악한 욕설들이 적혀 있었다. 교양 있는 인물로 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진흙탕에 구르는 개로 보여져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해서 써댄 욕설 들이었다. 데라시가 보았다면 있지도 않은 심장이 마비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아실이 치천제에게 보내는 욕설이었다. 아실은 데라시에게 원시제와 치천제의 계획을 설명하며 손으로는 그녀에게 보내는 욕설 을 썼을 것이다. 라세는 피식 웃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정신억압하지 않지.' 지적 자극이 될 만한 욕설들도 상당히 섞여 있었기에 그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 라세는 꽤나 즐겁게 그것을 읽었다. 다시 그 욕설 편지 를 읽던 라세는 문득 시선을 끄는 대목을 발견했다. 라세는 그 부분 을 음미하듯 읽었다. '잡년아! 나는 내 아기를 가질 거야. 너는 그럴 수 없겠지?' 그것은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욕설은 아닌 것 같았다. 힘있게 쓰여 지지도 않았고 다른 글씨보다 크지도 않았다. 더 괜찮은 다른 욕설을 생각하면서 그냥 써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세는 그 부분이 마음 에 들었다. '그래. 아실. 아기를 가지렴.' 라세는 편지를 살짝 접어 벽난로 속에 집어넣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종이를 불살랐다. 황제는 검은 재로 변하는 종이를 보며 생각했다. '꼭 그렇게 해.' 황제는 몸을 돌렸다. 문을 연 황제는 마지막으로 데라시를 한 번 돌 아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문밖에는 두 명의 레콘이 있었다. 절망도에서 구출된 그들은 라세에 게 대단한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위대하신 이라세오날이여. 어디로 모실까요?" "세 번째 벽난로방으로 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황제는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두 레콘은 황제의 뒤편에서 공손하게 걸었다. 하늘누리였다면 아마 100미터를 걷는 동안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말리에서는 복도를 걷는 황제에게 황급히 예를 - 존 경심의 표현인 경우도 있지만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본심을 적나라하 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 -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말리에는 상주 인 원은 많지만 활동하는 자는 거의 없다. 상당수를 차지하는 오천여 명 의 아라짓 전사들은 대부분 냉동실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세 번째 벽 난로방의 뱀부리미들 또한 그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말리도 분명히 사람이 사는 구조물이고 그것을 관리하는 사 람이 있어야 한다. 냉동실에 있는 아라짓 전사들은 먹거나 마실 필요 가 없고 땔감도 필요없지만 그들이 누워있는 냉동실은 냉기를 유지하 기 위해 정기적으로 약품을 보충해주어야 하고 유지 보수 또한 해주 어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 벽난로방의 뱀부리미들에게는 아라짓 전 사들에게 필요 없는 것들이 모두 필요하다. 그들의 뱀 또한 마찬가지 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라짓 전사들처럼 가사상태에 빠져 있 어서는 곤란하다. 분명히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한다. 물론 평상시 말리 위에서 깨어있는 사람은 뱀부리미들뿐이다. 그리 고 말리를 관리하는 일 또한 뱀부리미들의 일이다. 그 일은 보통 말 리가 한계선 남쪽으로 이동했을 때, 즉 뱀부리미들이 세 번째 벽난로 방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말리가 비밀스럽게 한계 선 남쪽으로 이동하면 뱀부리미들은 세 번째 벽난로방에서 나와 지상 으로 내려가서 감금 상태의 답답함도 해소하고 필요한 물품도 구입한 다. 말리는 그 정도의 상주 인원이 있는 것치곤 놀랍도록 적은 보급 만을 필요로 하기에 뱀부리미들만으로도 충분히 보급을 수행할 수 있 다. 그리고 하늘치를 조종하는 것 또한 세 번째 벽난로방에 있는 뱀부리 미들이다. 그들 모두는 유수부 통제국원들과 달리 무의미한 도구 없 이도 하늘치를 조종할 수 있다. 세 번째 벽난로방은 단순히 뱀단지를 통해 황제의 뜻을 제국으로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말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말리의 핵심시설이다. 세 번째 벽난로방과 그곳의 뱀 부리미들이 없다면 말리는 유지될 수 없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일만육천 년 후로 데려갈 수는 없다. 그들의 수 명이 그렇게 길 수는 없으므로. 황제는 지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해 뱀부리미들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세 번째 벽난로방의 뱀부리미들은 그들다운 무뚝뚝함으로 황제를 맞 이했다. 레콘들을 밖에 두고 홀로 세 번째 벽난로방으로 들어간 황제는 흑사 자 모피를 벗었다. 그녀는 그것을 팔에 끼고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뱀부리미들을 둘러보았다. [결론부터 니르겠다. 너희들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뱀부리미들은 그들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모두들 충격을 드러내며 황제를 바라본 것이다. 두 번째 벽난로방에 감금된 것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선택한 비스그 라쥬백 데리사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뜻을 제국에 전달하기 위해 수형 생활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감히 선택한 그 뱀부리미들은 모두 아라짓 제국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 지독한 희생을 감수한 이들 에게 떠나라는 황제의 니름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니름은 없 었지만 뱀부리미들은 공포와 좌절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황제를 바라 보았다. [아라짓 전사들과 달리 그대들은 짐과 함께 미래로 갈 수 없다.] 뱀부리미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닐렀다. [폐하. 저희들도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저 희들이 교대로 냉동실에 들어간다면 저희들은 계속해서 말리를 관리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자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한 사람이 깨어있으 면 됩니다.] [아라짓 전사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예?] [너희들의 수는 적다. 하지만 아라짓 전사들은 오천 명이지. 두 사 람이 1년씩 깨어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이 방을 사용하게 되겠 지. 그들은 말리를 관리하고 지상을 관찰하며 1년 동안 활동한 후 다 음 두 사람과 교대하여 냉동실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대략 이천오백 년 동안 잠들게 되겠지. 물론 가끔 그들 모두가 깨어나야 할 일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 정도의 숫자라면 일만육천 년을 버틸 수 있다.] [아라짓 전사들도 전부 하늘치를 조종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 그들 중 몇 명만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몇 명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 됩니까?] [말리는 다른 하늘치처럼 조종 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게 될 것이 다. 물론 말리를 조종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들부터 깨워야겠지. 너희들은 뱀단지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가라. 제국의 황제에겐 뱀단지 가 필요하다. 차기 황제는 지상에 새로운 벽난로방을 만들고 너희들 을 보호할 것이다. 만약 황제가 한계선 남쪽에 수도를 정한다면 새로 운 벽난로방에는 아마 벽난로가 없어도 되겠지. 너희들에게는 그 편 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수도를 결정하는 것은 차기 황제의 일이고 짐은 그것에 관여하지 않겠다.] 뱀부리미들은 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아라짓 제국은 이동수도를 잃는 겁니까?] [하늘누리를 얹고 있던 하늘치는 지금 다른 하늘치처럼 자유롭게 하 늘을 날아다니고 있지만 그 등 위에는 더이상 하늘누리가 없다. 그것 은 빙해에 빠졌을 때 파괴되었으니까. 그것을 이용할 수는 없다.] [새로운 하늘누리를 만들면……] [만들지 않는다. 하늘의 지배자는 치천제 한 사람이니까.] 뱀부리미들은 모두들 그 니름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황제와 대화하 던 뱀부리미가 닐렀다. [그러면 저희들은 다시는 폐하를 뵐 수 없군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으로 내려간 뱀부리미들은, 심장을 적 출한 나가이니만큼 사고로 죽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늙어갈 것이다. 몇십 년 후에는 아마 이곳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여생을 다 하게 될 것이다. 황제와 아라짓 전사들이 살아갈 나날에 비하면 순간 이라 할 만큼 짧다. 자신이 죽고 그 시신조차 흔적없이 사라진 후에 도 계속 살아있을 황제에 대해 생각한 뱀부리미는 니름으로도 표현하 기 힘든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언제 떠나게 됩니까?] [당장은 아니다. 차기 황제가 너희들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하니까. 그러니 당장 떠날 준비를 할 필요는 없다. 짐은 그대들이 마음의 준 비를 해두길 바라는 것이다. 그대들 대부분은 반평생에 가까운 기간 동안 이곳에 있었다. 이곳은 그대들에겐 감옥이나 다름없었겠지만 이 곳을 떠나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지상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려면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미리 닐러주는 것이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곳에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뱀부리미들은 황제의 니름을 이해했다. 그 니름이 옳았다. 그들 대 부분은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비늘이 빠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당장 이곳을 떠날 필요는 없다는 황제의 니름은 그들을 기쁘 게 했다. 즐거워 하던 그들 중 한 명이 닐렀다. [폐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만.] [무엇이냐.] [절망도에서 데려오신 레콘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들은 어차피 냉동시킬 수도 없습니다. 폐하의 여행에 동참할 수 없지요. 그들을 왜 데려오신 겁니까? 시모그라쥬군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까?] 황제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짐과 함께 갈 아라짓 전사나 차기 황제를 보필할 그 대들처럼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사명이 따로 있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엘시 에더리 대장군의 오른쪽 어깨에 떨어지 는 햇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사람을 그렇게 직시하는 것은 군대 예절이 권장하는 태도가 아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무례다. 하지만 주시당하는 쪽이 졸고 있다면 문제가 좀 다르다. 니어엘은 자신이 무례를 저지르 고 있다는 아무런 가책 없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엘시를 바라보았 다. 엘시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왼쪽 어깨에 턱을 묻은 채 졸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고 일어나면 목이 아플 테지만 그 자세를 교 정해주려 하면 엘시를 깨우게 될 것이다. 니어엘은 엘시가 좀 더 자 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시모그라쥬공은 완전히 항복했고 저항 세력은 없었다. 흑사자군에게 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휴식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엘시의 일은 더 많아졌다. 시모그라쥬공에게 동조했던 귀족들과 행정관, 그리고 제국군 장수들을 조사하고 처벌하는 일, 시모그라쥬공이 뺏은 것을 피해자들에게 돌려주는 일, 훼손된 통치기구들을 복구하는 일, 새로 운 통치자들을 선별하는 일. 끝이 없었다. 엘시 혼자서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흑사자군의 장수들 중엔 뛰어난 행정가들도 많았다. 하 지만 결정은 엘시에게 맡겨져 있었고 결정을 내리려면 당연히 해당사 항을 어느 정도는 숙지해야 한다. 이레는 이미 자신의 주인을 찾아오 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싶은 마음과 그들을 공손히 맞이해야 하 는 자신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니어엘은 이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엘시에게 보고하기 위해 찾아온 니어엘은 깜빡 잠 들어 있는 그를 도저히 깨울 수 없었다. 하지만 엘시의 오른쪽 어깨에 떨어지고 있는 햇살은 왼쪽으로 서서 히 움직이고 있었고 머지않아 엘시의 눈 주위를 비추게 될 것 같다. 그러면 엘시는 잠에서 깰 것이다. 그리고 창문에는 햇빛을 가릴 만한 것이 없었다. 고심하던 니어엘은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일어났다. 살그머 니 걸어간 니어엘은 엘시의 오른쪽에 서서 자신의 그림자가 엘시에게 떨어지도록 했다. 하지만 책상 모퉁이가 니어엘을 방해했다. 자세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보던 니어엘은 한손을 책상에 짚고 허리를 조금 굽힌 후에야 적절한 그림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엘시의 얼굴은 그 녀의 그림자 속에 완벽하게 들어왔다. 그 때 엘시의 입술이 움직였 다. "하지만 향기는?" 니어엘은 움찔했다. 눈을 감은 채 말했던 엘시가 천천히 고개를 돌 렸다. 계속 움직인 그의 얼굴은 구부리고 있는 니어엘을 향하게 되었 을 때 정확히 멈춰섰다. 엘시가 눈을 떴다. 허리를 편 다음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니 어엘은 어쩐지 움직일 수 없었고 또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니어엘은 엘시를 향해 허리를 굽힌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엘 시 또한 그런 니어엘에게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 기만 했다. 그래서, 엘시가 눈을 떴다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었다. 니어엘은 엘시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시 또한 그러했다. 햇살이 뜨겁다. 방안의 공기는 가볍게 데워져 흔들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희미한 숨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엘시는 투명한 눈으 로 니어엘을 보며 말했다. "사랑하지 않았다." 니어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꼬대에 대답할 필요는 없다. 엘시는 아직 잠들어 있으니까. "부냐를 사랑하지 않았다. 제국을 사랑하지 않았다." 엘시는 정우를 생각했다. '대장군님도 제국인데요.' 엘시는 말을 덧 붙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니어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정과는 좀 다른 의미의 몸짓이다. "시련이 왜 군령자를 원하는 것인지 알 것 같다. 매너링 이젤사는 군령자를 지키기 위해선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고 했어.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대수호자를 대리할 만한 노련한 정치가로서가 아니 라, 한 명의 나가로서." 니어엘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나를 돌아보게 해. 니어엘. 나는 어떤 사람이지?" 니어엘은 입을 조금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엘시가 재촉하듯 말했 다. "너는 나를 알아. 그리고 이제는 나도 알아. 나는 아무 것과도 결합 할 수 없어. 물에 뜬 기름이지. 결합하기 위해 거세게 흔들지만 끝내 분리되어 위로 떠올라. 배우자를 찾고, 충성할 주군을 찾고, 목숨 바 쳐 지킬 나라를 찾지만, 사실 그 어느 것과도 결부될 생각이 없어. 그래서 언제나 거꾸로지. 사랑하니까 약혼한 것이 아니라 약혼했으니 까 사랑하지. 존경하니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니까 존경하 지. 내 나라니까 되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되찾으려 하니까 내 나 라야. 너는 그런 나를 안다. 확신하고 있지는 않다 해도 내가 의심을 느끼기 훨씬 전에 의심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왜 내가 부냐와 약혼하 는 것을 용인했지?" 니어엘은 눈을 감았다. "저도 그러니까요." 잠꼬대를 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니어엘은 잠들어 있었고, 따라서 그녀의 말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 엘시는 그렇게 니어엘의 말을 들었 다. 니어엘이 말했다.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세요. 교위님. 교위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 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저는 그런 건 문제가 안된 다고 생각합니다." "바르지 않아." "상관 없습니다." 엘시는 물기 없는 눈으로 니어엘을 바라보았다. 니어엘은 고개를 살 짝 끄덕였다. "아무 상관 없습니다." 엘시는 입을 모아 휘파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똑바로 앉는 것을 본 니어엘은 뒤로 물러났다. 잠꼬대는 끝났고 두 사람은 모두 깨어났다. 니어엘이 책상 앞으로 돌아가자 엘시가 차분하게 말했다. "떠날 준비가 끝났나, 헨로 수교위?" "그렇습니다. 대장군님." "나나본까지 돌아가려면 먼 길이 되겠군." 남부에서 더 이상 전투행위가 기대되지 않자 엘시는 독립중대부터 우선적으로 원래 근무지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대부분의 독립중대는 지역 치안을 책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남부의 병력 배치와 상관 없이 돌려보내는 일이 필요했다. 9014독립중대 또한 나나본으로 돌아 가기로 되어 있었다. "떠나기 전에 여쭐 것이 있습니다. 대장군님." "말하라." "제 가족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습니다."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니어엘은 덧붙여 말했다. "아니오. 부냐가 비나간에게 있고 제 양친께서는 발케네에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 가족들의 현재 신분에 대해 알고 싶은 것입니다.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는 폐하께 용서받은 것처럼 보 입니다. 그렇다면 제 가족들도 그러합니까?" "귀관의 양친은 처음부터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들은 하늘누리에서 긴급히 탈출했고 가장 가까이 있는 대귀족의 보호를 받은 것이므로." "부냐는 여전히 탈옥수입니까?" 엘시는 부냐의 현재 지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황 제가 사용한 표현은 인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냐의 가치이지 부 냐의 지위가 아니다. 황제는 인질을 이용해서라도 스카리 빌파의 협 조를 바라고 있었고 따라서 과거 발케네 전쟁을 야기시켰던 부냐 헨 로의 탈옥을 문제삼지는 않을 것이다. 엘시는 자신이 아는 바대로 솔 직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폐하의 충성스러운 군인인 그대의 여동생이자 강대한 발케네공의 연인인 여인이 받아야 할 경의로 그녀를 대할 거라 생각 한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한 확언을 하신 적은 없다." "알겠습니다. 대장군님. 감사합니다." 니어엘은 그것이 엘시의 대답 전부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하지만 엘 시의 말은 남아있었다. "폐하께 그녀의 사면을 요청하겠다.." 큰 충격을 받은 니어엘은 반문조차 못한 채 엘시를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엘시는 약간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 아니다." 경악에 빠져 있었지만 또한 니어엘의 정신은 예민하게 바뀌어 있었 다. 니어엘은 엘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엘시가 미처 완 성하지 못한 말을 완성할 수도 있었다. 내가 귀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서 미안하다. 엘시는 약혼자였던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니어엘의 동생이 기에 부냐의 사면을 요청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니어엘은 그 뜻 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또한 해석하기조차 두려워 졌다. 엘시 또한 자신의 말에 좀 놀란 것 같았고, 그래서 두 사람은 신병이라도 하지 않을 실수를 남발해가며 겨우 신고를 완료할 수 있 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니어엘이 밖으로 나가자 엘시는 심호흡 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며 목깃을 조금 잡아당겼다. 하지만 심호흡 대신 나온 것은 이레를 부르는 소리였다. 존경하는 주 인의 대단히 이상한 목소리에 놀라 방으로 뛰어든 이레는 물 한 잔 가져다 달라고 말하는 주인의 얼굴에 다시 놀랐다. 트리어는 자신의 의도를 치천제에게 납득시키려 애썼다. 그것은 트 리어라는 레콘에겐 특이한 일이었다. 트리어는 언제나 상대방의 납득 보다는 수용에 관심이 있었다. 상대로 하여금 자기 뜻을 수용하게 할 수 있다면 이성적 설득이든 무자비한 폭력이든 상관 없었고, 트리어 는 둘 중 항상 뒤쪽의 효과가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자신의 애용 수단을 고집할 수 없는 상대는 항상 존재한다. 트리어에겐 그런 사람이 둘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필요하면 물에도 뛰어드는 정신나간 레콘이다. 트리어는 될 수 있으면 다시는 그 레콘 을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치천제였다. 트 리어는 치천제를 지극히 존경했다. 만약 치천제가 원했다면 트리어는 자기 벼슬이라도 잘라 요리해서 진상했을 것이다. 트리어는 자신이 반드시 그럴 거라고 믿었다. 산 것만 먹는 나가가 그런 것을 요구할 리가 없으니까. 황제에 대한 한없는 경애 때문에 트리어는 '내 말대로 해! 황제!'하 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트리어는 가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대한 이라세오날이여. 저 자는 식인 레콘입니다." 뭄토는 벼슬을 쥐어뜯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트리어는 센시엣 특수 수용소 관리사무소에서 뭄토가 한 농담이 뭄토라는 레콘을 완벽히 설 명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트리어에게 항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뭄토는 저런 황당한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느냐는 표정 으로 치천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말리 위에는 황제의 몸단장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얼어붙어있거나 벽난로방에 있었고, 레콘들은 그런 일을 하기에 부적합하다. 하지만 하늘누리에 있을 때도 스스로 몸단장을 했던 황제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트리어의 분노와 뭄토의 애원섞인 시선에도 황제는 숙련된 손놀림으로 그 일을 계속했다. 쉬크톨이 제자리를 잡은 후에야 황제는 두 사람에게 몸을 돌렸다. "그래서?" "저 놈을 말리 아래로 던지도록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만 그 청은 이미 거부하셨습니다. 부디 저 사악한 놈과 함께 걸으라는 명령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치천제는 트리어를 바라보다가 뭄토에게 말했다. "뭄토. 사람 먹나?" "절대로 아닙니다!" 치천제는 다시 트리어를 보았다. "이라세오날이 그 말을 보증한다." 트리어는 벼슬을 꿈틀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돌아서자 뭄토는 깃털 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트리어는 뭄토가 채 피하기도 전에 손을 뻗었다. 뭄토의 어깨를 쥔 트리어가 말했다. "이런, 세상에. 나는 자네가 사람을 먹는 줄 알았어! 내 오해를 용 서하게." 뭄토는 정중한 용서의 말도, 복수심에 불타는 비아냥도 할 수 없었 다. 갑자기 자신에게 사근사근하게 구는 트리어에게 뭄토가 줄 수 있 었던 것은 얼빠진 침묵뿐이었다. 뭄토는 지멘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바닷물에 발을 담궈야 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트리어 가 물러난 것은 지멘의 진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모 습을 눈 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트리어가 황제의 말 한 마디에 뭄토에 대한 중상을 거두었다. 뭄토가 보기에 그 일은 말 한 마디로 낮과 밤을 바꿔놓은 기적처럼 보였다. 황제는 자신이 일으킨 기적에 별 감흥을 얻지 못한 듯 보였다. 사태 가 해결되자마자 황제는 노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가자." 트리어는 두 손으로 뭄토의 어깨를 힘있게 쥐어주고는 그의 등을 토 닥였다. 함께 황제를 수행하자는 뜻이 담긴 그 친밀한 행동은 뭄토를 다시 혼란스럽게 했다. 트리어가 한 번 더 재촉한 후에야 뭄토는 그 와 함께 황제의 뒤를 따라 걸었다. 두 레콘의 수행을 받으며 황제는 노대로 나왔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쪽, 말리의 등 위에는 이미 레콘들이 도열한 채 황제를 기다리 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절망도에서 말리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 자들 이었다. 뭄토는 그들 대부분이 트리어만큼이나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 었지만 정연하게 줄을 맞춰 서있는 그들의 모습은 정상 이상으로 정 상적이었다. 트리어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는 아래쪽을 향해 외쳤다. "위대한 이라세오날께서 말씀하신다!" 지금까지도 대단히 절도있는 자세로 서있었지만 트리어의 외침을 듣 자 레콘들은 마루젤의 작품 전시회를 연상시키는 모습이 되었다. 온 몸을 빳빳하게 굳힌 채 그들은 굶주림에 가까운 열망으로 치천제를 응시했다. 치천제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짐의 사자들이여, 들어라." 나비의 날개짓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침묵이 되돌아왔다. 그런 고도 에 나비가 날아오르진 않겠지만. "선조해, 황금해, 쟁룡해의 세 바다는 모두 제국의 바다가 되었다. 언제나 뒤쫓는 눈길로부터 도망치던 산맥들도 모두 제국의 고삐에 단 단히 고정되었다. 세상의 경계는 확립되었고 그것은 모두 짐의 손에 있다. 절망도는 너희들의 종지부였고, 또한 종지부만큼이나 협소한 장소였다. 하지만 이제 너희들에겐 세상이 주어지리라. 이 넓은 땅 어디라도 너희들이 못 갈 곳은 없다. 그곳이 어디든 짐의 제국이며 너희들은 어디에 있건 짐의 권능과 함께 있을 것이다." 치천제는 레콘들을 축복하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듣지 않으려는 자에게 말하고 받지 않으려는 자에게 주어라, 절망 이라는 이름의 섬에서 너희들을 구한 것을. 보지 않으려는 자에게 보 여주고 믿지 않으려 하는 자에게 들려주라. 절망을 빠져나오는 유일 한 길을."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뭄토는 트리어의 광기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 자신이 광기와 비슷한 집중력으로 치천제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트리어 또한 거침 숨을 몰아쉬며 황제의 미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 칫 잘못하면 깨져서 날카로운 파편을 떨어뜨릴 것 같은 긴장된 침묵 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황제가 선언했다. "가서, 이라세오날의 복음을 전하라." 지멘은 위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목적한 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 았다. 하늘 어디로 시선을 보내든 말리의 거대한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므로. 지멘이 말리를 보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서 아 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죠?" 비나간의 교외에 서서 말리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 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레콘의 밝은 눈으로 는 충분히 볼 수 있는 곳에 많은 인간들이 서있었다. 지멘은 그들이 병사들이며 그 중 한 명은 가면을 쓴 팔리탐 지소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팔리탐 또한 지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지멘처럼 눈 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크고 검은 레콘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팔리탐은 지멘의 배낭 속에 있는 아실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실 또한 먼 곳에 사람들이 서있다는 것 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실은 그 사람들의 뒤편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화전도 아닌 것 같고, 뭘 저렇게 태우는 거죠?" "저건 팔리탐 지소어와 병사들이다." "팔리탐? 가면?" "그래. 땅을 깊이 파고 무엇인가를 태우고 있군. 내가 볼 수 있는 것도 구덩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뿐이야. 가볼까?" 아실은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아뇨. 팔리탐이라면 만나보고 싶지 않군요. 저기엔 태위도 있을 테 고. 황제와 관련된 사람들은 이제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저쪽에서도 다가오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그냥 떠나도록 해요." 지멘은 몸을 돌렸다. 광활한 비나간의 지평선이 그들을 두르고 있었 고 목표로 삼을 것이 보이지 않았다. 지멘은 특별한 생각 없이 걸음 을 옮겼다. "이렇게 그냥 떠나도 될까?" "상관없어요.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황제는 당신을 부를 거예요. 당신에게 살해당한 척해야 하니까." 지멘은 몇 걸음 더 걸은 후에 말했다. "진짜 살해당할 수도 있지." 그것은 아직 종식되지 않은 논란이었다. 아실은 황제 살해를 포기하 라고 말했지만 지멘은 그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실은 다시 토론을 시작할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그 문제에 대해 말할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있을 것이다. 지금은 단지 익숙한 배낭과 익 숙한 흔들림만으로 충분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그 때까지 황제의 곁에 붙어있고 싶지 는 않아요. 저는 이제 황제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황제를 죽이 러 갈 때가 되면 당신 혼자 가세요." 지멘은 다시 몇 걸음 걸은 후 말했다. "우리가 떠난다는 것은 알려야 할 것 같은데." "황제는 알 거예요." "어떻게?" "환상벽으로 알겠지요, 아마.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걱정 말아 요. 그냥 떠나요." "그럼 좋아. 그런데 어디로 가지?" "아무 곳이나." "달릴까?" "좋아요." 지멘은 달렸다. 검은 레콘과 애꾸눈 소녀는 도망치는 지평선을 추적했다. 지평선은 영원히라도 도망칠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물러났지만 두 사람은 괘념치 않았다. 길다란 하늘이 그들에게 흘러왔고 흘러갔다. =============================================================== 34챕터 끝났습니다. 두드리는 도중에 왕창 날려먹는 사고로 많이 늦 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35. 불가능을 희망하는 태도 - 1 "반짝거리기, 흩어지기, 흐르기, 녹기, 줄어들기, 쪼개지 기, 납작해지기, 끓기 등의 무수히 많은 것들을 뺀 나머지 것들은 제 뜻대로 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들의 참견을 배제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참견을 배제할 수 있다면 반짝거리기, 흩 어지기, 흐르기, 녹기, 줄어들기, 쪼개지기, 납작해지기, 끓기 등의 무수히 많은 것들을 뺀 나머지 것들은 제 뜻대 로 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들이 네 참견을 배제하지 않으면." - 사르마크 가에서 있었던 할머니와 손자의 대화 中. 달은 보이지 않았다. 키보렌의 밀림에는 레콘마저 조그마한 생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목 들이 땅에서 탈출하려는 것처럼 자라나 있었다. 체온 없는 나무들이 공간을 잔뜩 점유한 채 어둠을 복잡한 것으로 바꾸고 있다. 밤을 감 침질하는 바람은 게으르고 풀려나온 밤의 올은 사람에게 스며든다. 사모 페이의 주변에도 스며들어온 밤이 곳곳에 새카만 손자국을 남 겼다. 하지만 사모의 밤은 어둡지 않았다. 넓은 방 가운데 피워둔 화 로는 밤의 냉기와 조응하고 반발하며 화려한 열류의 흐름을 만들어내 었다. 꿈틀거리는 먹구름과 회오리바람, 산릉을 따라 꿈틀거리는 안 개, 모든 낙엽들이 그리는 궤적. 그런 것들의 열류적 모사물들이 끊 임없이 주변에서 춤을 추었다. 그 밤은 조용하고 어두웠지만 사모에 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사모가 화려한 볼거리를 위해 화로를 피워둔 것은 아니다. 그녀가 화로를 피워둔 것은 다른 종족들이 화로를 쓸 때와 같은 이 유, 즉 열기를 얻기 위해서였다. 밤의 냉기 속에 둔화되는 의식을 좀 더 예민하게 바꾸기 위해 사모는 열이 필요했다. 예민해진 정신 속에서 사모는 예리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모는 그 곳에 없는, 그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닐렀다. [너를 찾지 못했다.] 사모의 목 주위 비늘이 꿈틀거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갈 바마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모는 갈바마리의 불안을 깨닫지 못했다. [둘은 거의 확실하다. 너는 도대체 어디 있느냐. 셋이 하나를 상대 한다. 네가 없다면 다른 둘도 쓸모가 없다.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 른 둘도 그냥 사라질 것이다. 다른 때에 다른 셋이 나타날 때까지 기 다려야 하느냐? 이제 나는 무력하다. 더 이상 너를 찾으려 시도할 수 없다.] 좌절감 때문에 사모는 기진맥진했다. 화로에서 꿈틀거리며 피어오르 는 열류는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사모는 눈을 감았다. [엘시가 조금만 덜 유능했다면 너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치천제가 찾아낸 후계자는 지나치게 유능하다. 물론 그의 유능함 때문에 유혈 은 줄어들었지. 나는 그것에 감사해야 할까? 그래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이 상환기간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면, 복리로 계산되는 것이라면…… 그리미. 차라리 예언서를 남겨주었다면 좋으련만.] 사모는 자신의 사고에 좌절했다. 그리미 마케로우라면 예언자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 할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예지 능력이 있건 없건 모든 예언자는 사기꾼이라 닐렀다. '예지 능력이 없다면 니를 것도 없거니와, 실제로 그런 우스꽝스러 운 능력이 있다 해도 예언자는 여전히 사기꾼이죠. 사모. 예지 능력 을 가진 자는 다른 자들과 다른 시간을 살아요. 사람과 다른 존재죠. 그런 것이 사람에 대해 니르는 것은 새에게 간섭하는 물고기의 행동 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짓이에요.' 사모가 신뢰하는 유일한 예언자는 그래서 예언을 부정했고 예언서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미는 그녀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모에 대해서는 약간의 조롱 이외엔 아무 것도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편할 거예요. 모두가 예언자를 미래 대처 설 명서 쯤으로 생각하는데 사모 당신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나는 절대로……' '물고기가 되실 거예요?' 사모는 예언자가 아니면서 예언자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것을 그만두 기로 했다. 미래를 알고 그것 때문에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그리미 마케 로우는 조금도 예언자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원시제는 예언서도, 수수께끼도, 땅속에 수천 년 동안 묻혀 있다가 선택받은 누군가가 꺼 내게 될 비밀 문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것은 지배자가 남 길 만한 상식적인 것뿐이다. 그녀는 후계자를 결정했고 믿을 만한 원 로에게 몇 가지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것이 전부다. 그 때문에 사모 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 괴로워해야 했다. "사모." "친구." 사모는 어째서 갈바마리의 목소리는 이렇듯 똑똑하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두 개의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탄원하는 사람처럼 두 팔을 내밀었지만 갈바마리의 팔 끝에는 손 대신 덥수룩한 털 사이에 서 튀어나온 뿔이 있어 그 동작은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모는 그 뿔에 대해 아무런 불편한 마음을 느끼지 않았다. 사모는 팔 대신 머리 사이와 다리 사이에 붙어있는 갈바마리의 오른손과 왼 손을 바라보았다. 그런 위치에 있었기에 갈바마리의 손은 사물을 조 작하는 것보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손짓에 더 자주 쓰인다. 사모는 그 손가락의 움직임들을 보며 갈바마리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양쪽 어깨에 붙어있는 두 개의 얼굴 또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 다. "사모." "친구." 사모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 말이 아니었다. "갈바마리. 어떤 나가가 자신이 세상이라는 이름의 무정한 짐승이 끊임없이 계속해온 되새김질에 붙잡혀 으깨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을 때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지?" 갈바마리는 두 개의 얼굴로 곤혹스러워 했다. 사모는 냉정하리만큼 침착하게 말했다. "동생에게 내 생명을 주려 했지만, 실패했어. 내 동생은 대화할 수 없는 나무가 되었지. 북부인들에게 나를 주어 그들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했어. 나는 그 피해를 나가들에게까지 확장시켰을 뿐이야. 분노 한 신에게 나를 바쳐 동포들을 구원하려 했지만, 실패했어. 파괴된 심장탑을 감싸고 있는 대선풍은 내 실패의 업적비지. 내 전력에 비춰 보면 이 마지막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군." 갈바마리는 사모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사모에게 조건 없는 애정을 보내는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갈바마리는 사모의 평온한 어조에 안심했다. 즐거운 이야기를 듣는 듯 미소짓는 갈바마리를 보 며 사모는 내면의 무엇인가가 부서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사모는 실제로 무엇인가가 부서진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벽이 부서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모는 일어나 그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어느새 갈바마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 모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 때문에 사모는 벽을 때려부수고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침입자 또한 갈바마리 때문에 사모를 보지 못했다. "갈바마리! 반갑다. 대호왕은 어디 있지? 뭐, 네가 있다면 대호왕도 여기 있겠지!" 사모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왔나.' 사모는 갈마마리의 옆으로 돌아 벽을 바라보았다. 벽에는 그녀의 몸통이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구멍이 있었고 그 뒤편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쾅쾅쾅 하는 소리가 나며 구멍이 확장되었다. 바깥에서 놀라운 힘을 가진 자가 무 지막지한 도구를 가지고 벽을 때려부수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모는 벽을 쑥쑥 뚫고 드러오는 쇠붙이의 열을 보았다. 벽과 마찰되어 뜨거 워진 금속날은 아무래도 도끼처럼 보였다. 잠깐 동안 사모는 죽은 즈 라더가 살아나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다시 도 낏날이 벽을 파고들었을 때 사모는 그것이 즈라더의 도끼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 도낏날은 즈라더의 그것보다 훨씬 작았고 반대로 자루 는 훨씬 긴 듯했다. 잠시 후 벽이 찢어지듯 파괴되어 갈바마리가 쉽 게 통과할 수 있을 듯한 구멍이 만들어졌을 때 사모는 그것이 도끼창 임을 확인했다. 사모는 흥분한 갈바마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왼손을 그의 무릎에 얹 고는 구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도끼창을 불쑥 내밀며 안으로 들 어온 것은 시커먼 레콘이었다. 사모를 발견한 검은 레콘이 뭐라 말하 려 했을 때 사모가 말했다. "네 숙원은 무엇이지?" 너는 누구냐는 질문이 있을 거라 확신하던 레콘은 꽤나 당황했다. 하지만 검은 레콘은 그 내용보다 형식에 주의를 뺏겼다. 사모의 거침 없는 하대는 레콘으로 하여금 그의 검은 깃털을 세우게 만들었다. 그 는 공손한 태도를 요구하는 눈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 뜻을 파악 하지 못할 사모가 아니었지만, 그런 배려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 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네 숙원은 무엇이지?" 레콘은 참기로 했다. 어쨌든 한 때 왕이었던 자였으니까. "나는 론솔피고, 내 숙원은 황제의 금군이 되는 것이다. 너는 대호 왕이냐?" 사모는 눈을 깜빡거리며 론솔피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떨구었다. "하긴 그런 말도 안되는 행운이 있을 리 없지." 론솔피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잘못 알고 있나 본데, 네가 대호왕이라면 행운이라고 말해야 해. 내가 바로 대호왕의 구출자니까. 자, 빨리 대답해. 네가 대호왕 이냐?" "나는 사모 페이다. 엘시가 보냈군." "어? 너도 구출 계획 알고 있었어?" 사모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론솔피는 의아해했지만 사모는 설명하지 않았다. 작금의 상황에서 사모 페이의 존재는 시련의 회고 주의자, 제국의 보수주의자, 치천제, 아르키스 대수호자, 시모그라쥬 공, 엘시 에더리 등 많은 이들에게 부담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생존 과 그녀의 죽음이 똑같이 특정 인물들에게 강력한 정치적 부담을 안 기게 되는 상황에서 그녀의 실종은 소극적이지만 편리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는 설명하기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미묘한 부 분이 지나치게 많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다면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하는 거야?" 사모는 서두르지 않았다. 강력하지만 도저히 세련되다고 할 수 없는 론솔피가 대호왕 구출을 담당한 것에서 사모는 엘시가 무엇을 원하는 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탈출한 것이나 다름없었 다. 그녀의 신병을 책임져야 하는 자들은 현재 '불가피한 상황'에 빠 져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론솔피의 임 무는 그의 강력한 힘으로 인상적인 흔적들 - 때려부순 벽 같은 - 을 남겨두는 것이고 따라서 론솔피의 임무도 이미 끝났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던 론솔피가 안달할 만큼 느리게 움직인 것은 그런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마침내 다가온 이 퇴장의 시간을 사모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 자신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다. 스스 로에 대해 말한다면 사모는 이 퇴장을 반가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에겐 달성하지 못한 목표가 있었다. '끝내 너를 찾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군.' 그 아쉬움은 사모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추슬 러야 하는 것은 그녀 자신과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들을 집어넣은 조 그마한 행랑 뿐이기에 시간이 많이 소모되지는 않았다. 조바심을 내 며 사모를 바라보던 론솔피는 문득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 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도 안 오네?" 사모는 행랑을 갈바마리에게 넘기고는 론솔피를 바라보았다. 론솔피 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멍청하지도 않았다. 사모는 힘없이 말했다. "엘시가 손을 다 써뒀겠지." "어? 그러면 왜 내가 온 거야? 그냥 여기 있는 자들에게 널 보내라 고 말하면 되잖아." "벽은 아무나 못 부숴. 사람들은 티나한이 돌아와서 대호왕을 구해 갔다고 말하겠지." "아하. 그러면 좀 더 부술까?" "복구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만두지. 가자." "어, 네 두억시니들은 안 데려가?" "뒤를 봐." 뒤를 돌아본 론솔피는, 소화차가 아닌 것에 대해 그런 기분을 느낀 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지만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두억시니들의 일탈적인 모습은 육체적 두려움과는 좀 다른 정신적 불안감을 준다. 바깥에는 그런 두억시니들이 모여서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론솔피의 다음 대응은 완전히 레콘다운 것이었다. 그는 벼슬 을 세웠다. "거슬리게들 생겼군." 그는 도끼창을 당장이라도 휘두를 수 있는 자세를 취한 채 구멍을 불쑥 빠져나갔다. 두억시니들은 대응 자세를 취했고 그 중에는 변신 이라고 해야 할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사모는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두억시니들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두억시니들이 침착을 되찾은 것을 확인한 사모는 날카로운 눈으로 론 솔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론솔피는 두억시니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난 저것들이 정확히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겠어. 그러니 그냥 악 수하자는 몸짓도 공격으로 해석해버릴지도 몰라. 얌전하게 움직이라 고 해." 대답이 없었다. 론솔피는 아래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사모는 이채롭 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아무 것도 아냐. 가지." 사모는 갈바마리에게 짧은 명령을 내렸다. 갈바마리가 그 명령을 다 시 두억시니들에게 전달하자 두억시니들이 움직였다. 그 중 몇몇은 어둠 속으로 흩어졌고 나머지는 그들의 사방을 에워쌌다. 론솔피는 정찰과 호위로 구분되나 보다고 생각했다. 사모가 말했다. "목적지는?" "엘시는 네가 하텐그라쥬로 돌아가길 바라. 그리고 네가 원하면 하 텐그라쥬까지 호위해주라고 했어." 사모는 다시 특이한 표정으로 론솔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페로그라쥬 바깥까지 함께 가지. 서로 보호해줄 수 있을 테니까. 그 다음엔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그들은 걷기 시작했다. 타오민성은 페로그라쥬 점령군이 주둔하고 있는 장소였지만 그들을 가로막거나 하다 못해 그들을 목격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모에게 그 이유를 들은 론솔피는 어쩐지 사모의 처소까지 찾아가는 것이 쉬웠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타오민성의 외곽에 도달했다. 론솔피는 자신이 뛰어넘어온 성벽 앞에서 사모에게 손을 내밀려 했지 만 사모는 대신 기묘하게 생긴 두억시니에게 다가갔다. 그 두억시니 는 사모를 어떻겐가 붙잡은 다음 성을 넘어갔다. 하지만 론솔피는 그 동작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론솔피가 받은 인상은 대강 이러하다. 그 것은 팔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부속지를 길게 늘여 성벽 위를 붙 잡은 다음 아무래도 다리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부속지로 땅을 디뎠 다. 그리고는 두 부속지의 길이를 바꿨다. 위쪽 부속지는 줄어들고 아래쪽 부속지는 늘어났다. 실제로는 훨씬 복잡한 움직임이었지만 대 강 그런 식으로 설명해야 할 동작을 통해 두억시니는 사모를 바깥으 로 인도했다. 론솔피는 소리 없이 낄낄거리고는 성벽을 뛰어넘었다. 성 바깥도 안쪽과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그들은 언덕으로 들어섰다. 시가지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언덕이지만 그곳에도 키보렌의 분 견대 같은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론솔피는 자신들이 그 언덕 을 통해 시모그라쥬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 론솔피는 그들의 곁에 있는 두억시니가 갈바마리를 포함하여 모두 아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자꾸 바뀌는 것 같았 다. 그들의 움직임을 관찰해본 론솔피는 정찰에 나갔던 자와 호위를 담당했던 자가 서로 위치를 교대한다고 생각했다. 앞쪽을 둘러보고 온 자가 되돌아와 일행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은 아무 도 만나지 않은 채 어둠 속을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질주, 추적 자들, 그리고 기습과 역습 등을 예상하고 있던 론솔피는 조용한 밤산 책이라 해야 할 사모의 탈출에 맥이 풀려버렸다. 어느 새 어깨에 도 끼창을 걸친 론솔피는 사모를 향해 투덜거렸다. "벽 부순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아? 몇 놈 때려줘야 좀 더 박력 있 는 탈출로 보일 텐데." 사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두억시니들은 계속 자리를 바꿨지만 갈바마리는 사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론솔피는 도끼창을 다른 손 으로 바꿔쥐었다. 그들이 언덕 사면에 있는 폐허로 들어섰을 때 사모가 갑작스럽게 멈 춰섰다. 론솔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래된 도시의 얼굴에 검버섯처럼 생 기는 폐허와는 조금 달랐다. 강의 흐름이 어떤 이유에서 변경되면 메 마른 강바닥은 그 낮은 위치 때문에 지저분한 것들을 불러모으게 된 다. 도시에 나타나는 폐허는 그것과 비슷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 들이 더 이상 찾지 않게 된 골목이나 거리, 폐가 등에는 사람들이 자 신들의 곁에 두고 싶어하지 않는 것들이 모여 쌓이게 된다.(그것들 중엔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도 포함된다.) 하지만 원래 사람들 의 흐름에 기여했던 곳이기에 도시의 폐허는 어떤 통일성의 자취를 간직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정체감도. 하지만 그들이 서있는 폐허에는 그런 통일성이 없었다. 폐허답지 않 은 역동성마저 느끼게 하는 혼란뿐이었다. 폐허를 장식하고 있는 잔 해들은 원래의 규모에 비하면 10분의 1도 되지 않을 듯한 크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끼와 넝쿨로 뒤덮혀 있는 부서진 벽, 기둥, 석 재들은 론솔피가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거대한 것들 투성이었다. 론 솔피는 그 폐허가 상당한 재난에 의해 생성되었고 복구는 엄두도 낼 수 없어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었음을 깨달았다. 문득 론솔피는 페로 그라쥬가 오십여년 전 대호왕의 진격로에 있었던 도시였음을 깨달았 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전쟁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초자연적인 힘이 현현했던 전쟁…… "페로그라쥬의 옛 심장탑이 있던 곳이다." "심장탑?" "그래. 뇌룡공과 아스화리탈이 파괴했지." 론솔피는 그 폐허가 왜 그렇게 엄청난 규모인지 이해했다. 도시 어 느 곳에서도 눈에 들어올 만큼 커다란 나가들의 심장탑이 통채로 파 괴되었다면 그런 자취가 남는 것도 당연하다. 사모는 조사를 읊듯 말 했다. "아스화리탈의 공격으로 심장탑이 파괴되었을 때 이곳에 자기 심장 을 보관하고 있던 페로그라쥬의 나가들은 즉각적으로 사망했다. 페로 그라쥬를 복구할 때 사람들은 옛도시의 파편들을 대부분 가져다 썼지 만 이곳은 차마 건드릴 수 없었다. 지나친 슬픔이 얽매인 곳이기 때 문에. 그래서 이 폐허가 남은 것이다." 사모는 폐허 곳곳에 자라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론솔피는 그 나무 들의 수령이 오십여 년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그 동안 키보렌이 이곳을 돌려받았군. 조만간 이 모든 것들이 숲 아래로 사라질 테지." "흠." 사모는 가까이 있는 나무로 다가갔다. 나무의 뿌리 중 일부는 거대 한 돌을 칭칭 감고 있었다. 사모는 그 돌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한 손으로 나무를 짚은 사모는 폐허를 주시했다. 이 열대의 땅에서 서리와 얼음이 바위를 부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다. 식물의 뿌리와 줄기들이 그 일을 대신하고 있긴 하지만 폐허의 어떤 부분들은 오십여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스화리탈이 토한 불길에 그을린 자취도 찾아낼 수 있을 듯하다. 사모는 가장 큰 그을음 같은 론솔피를 돌아보았다. 론솔피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억시니들은 주변으 로 흩어졌고 갈바마리만이 남아 론솔피와 사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개의 머리가 있기 때문에 갈바마리는 두 사람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었다. 사모가 말했다. "아까 내가 네 숙원을 물었지? 너는 금군이 되겠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엘시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거지?" 론솔피는 의심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말해도 돼." "정말 안 돌아올 거야? 시모그라쥬공을 위해 돌아왔잖아." "발자국 없는 여신에 걸고 맹세하지. 네가 하는 어떤 말도 다른 사 람에게 전하지 않겠다." 사모는 발자국 없는 여신을 감금했던 나가의 일족인 자신의 맹세를 론솔피가 비웃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론솔피는 그것을 진지한 맹세로 받아들였다. "내가 엘시를 따르는 것은 그가 황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야." "대장군이 황제를 몰아낼 거란 말이냐?" "지금 당장은 좀 그렇지. 황제가 돌아오자마자 싸우는 건 아무래도 보기가 안 좋아. 시모그라쥬공과 시련 문제도 있고. 그 문제들 다 처 리하고나면 황제 자리를 차지하는 거지." "그가 그렇게 말했나?" "그런 말을 어떻게 하냐?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거야. 나는 엘시가 하는 말을 들었어. 라세가 훔친 황위는 받을 수 없다고 했지. 라세가 황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도둑질이라는 거야. 나는 그 말에 동의해. 아마 엘시가 직접 황제를 죽일 필요는 없을 거야. 지멘이 황제 곁에 붙어있잖아. 곧 지멘이 황제를 죽일 거야." "지멘이 황제를 죽이기 위해 그 곁에 붙어있다고?" "물론이지." "지멘이 황제에게 동조한 거라 생각하지는 않나?" "무슨 농담이야? 지멘의 숙원이 황제 제거잖아. 그거 작전이야, 작 전." 론솔피는 그토록 명쾌한 사실을 왜 못 알아차리냐는 투로 사모를 바 라보았다. 사모는 그것이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싶은 욕구의 발현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또한 사모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론솔피가 그녀의 바람을 성취할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두 번째로, 그리고 완 전히 떠날 그녀에게 남은 기회는 없었다.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사 람에게 유연을 남기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사모에게는 자신의 소망을 실행해줄 사람이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사모는 결심했다. "네가 치천제의 금군이 될 생각이 없다면 내 부탁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군." "부탁?" "나는 자식을 가지지 않았다. 나가 여자들에겐 특이한 일이지." "어, 알아." 사모는 갈바마리 쪽을 돌아보았다. "내겐 소중한 친구들이 아직 남아있지만 그들은 내 뜻을 이해할 수 없다. 부탁할 사람이 없으니 네게 부탁하겠다. 이건 레콘에게 부탁해 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네 자유다. 그냥 내 말을 들은 다음 네가 결정해. 들어주겠나?" "말해봐." "중요한 레콘이 세 명 있다." 론솔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몸을 더 돌 려 등을 나무에 기댔다. "다른 레콘보다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네가 굶어죽을 처지라 면 수레 가득한 금편보다는 한 그릇의 죽이 네게 더 중요하겠지. 그 런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거다." "그러면 그 세 명은 너한테 중요하다는 거야?" "그리고 많은 자들에게도. 우선 지멘이라는 자가 있다." "아, 그래. 황제사냥꾼." "그리고 그을린발이라고 알려진 자가 있다." "코끼리에 미친 친구. 나도 알아. 두 명이군. 나머지는?" "나머지 한 명은 나도 누군지 모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옛날 이야기?" 론솔피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 노쇠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지만 사모 역시 옛날 이야기만 중얼거리는 노인이라 고 생각하고 있음이 그의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났다. 사모는 그것을 반박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멘이 길잡이일 것이다. 그을린발은 대적자일 테고. 하지 만 나는 세 번째 레콘을 찾지 못했다. 세 번째는 요술쟁이다. 그 여 자, 아니, 남자일지도 모르지.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만 내겐 더 이 상 시간이 없다." 론솔피는 멍한 얼굴로 사모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왜 그 셋을 찾아야 하는데? 셋이 하나를 상대 한다고 했지. 뭘 상대하려고?" "치천제." 론솔피는 갑작스럽게 관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엘시가 황제가 되 려면 치천제는 사라져야 한다. "계속 말해봐." 사모는 론솔피가 상대한다는 말을 제거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음을 알 았다. 하지만 그 해석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내가 왜 시모그라쥬공을 지지했다고 생각하나?" "왜 그랬는데?" "불은 부나방을 부른다. 레콘을 부르려면 분란이 필요하지. 그들이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분란. 그럴 때 레콘은 깃털을 부풀린 채 자신을 드러낸다." 론솔피는 수염볏을 잡아당기며 그 말에 집중했다. "그 세 명의 레콘을 찾아내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거야?"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렇다. 그을린발을 보아라. 그을린발은 자신 을 귀찮게 한다는 이유에서 그 끔찍한 무기를 꺼냈다." "그 무기 이름은 무차별학살이야." "그래. 그 분쟁을 통해 나는 대적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 술쟁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엘시는 소란을 종결시켰지. 그리고 황제는 돌아왔어." "잠깐. 너는 황제가 없어졌을 때 분란을 일으켰어. 황제가 없는데 왜 황제를 상대할 셋을 찾으려 한 거야?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사모는 또다시 론솔피가 세련되지는 않지만 멍청하지도 않다고 생각 했다. 그녀는 론솔피의 눈을 피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황제가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그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돌아올 것이다. 엔거 평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언제든 다시 돌아와 자신을 증거할 거다. 앞으로 일만 육천 년 동안." 론솔피는 부리를 쩍 벌렸다. 규리하성에는 며칠째 폭설이 내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설편들은 마치 커다란 나비 같았다. 해가 제대로 나지 않아 녹지 않은 폭설은 규리하성의 1층을 간단히 지하로 만들어 버렸고 그래서 그런 날씨에 바깥 출입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2층 창 문을 통해 드나들었다. 다행히도 규리하성의 하인들은 여염집에서처 럼 얼어붙은 개울과 우물 때문에 고통을 겪지는 않았다. 규리하 변경 백의 성답게 규리하성 지하에는 독자적인 우물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는다. 하지만 물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겪는 곤란도 있었다. 흘린 물이 눈과 결합된 곳에서는 골치 아픈 얼음덩이들이 나타나 움직여야 하는 것들을 고정시켰다. 성안에 서는 얼음창이나 송곳, 망치 따위를 든 자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판사이 남작 발리츠 굴도하는 사랑하는 아내가 그런 날씨를 완전히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의기소침한 남편을 격려하기 위해 아이넬 굴도하 남작부인은 달래듯 말했다. "각하. 이런 폭설이 겨울 내내 계속되지는 않아요. 이렇게 쏟아지는 건 겨우 열흘 정도일까." 남작은 신음했다. "그러면 아직 며칠 남았다는 겁니까?" 남작부인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발리츠는 두 손 을 들어보였다. "뭐, 춥지는 않군요." "함박눈이 내리는 날은 포근한 편이지요. 바람도 없고." 그 때문에 창문은 열려 있었다. 발리츠는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 다. "예. 나는 저 모양 자체가 마음에 안드는군요. 모든 걸 다 파묻어버 릴 것 같아요. 답답합니다." 남작부인은 창가를 떠났다.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는 위엄있는 걸음 걸이로 방을 가로지른 아이넬은 발리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 비운 찻잔 바닥에는 미세한 찻가루가 가라앉 아 있었다. "판사이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발리츠는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처럼 대답하려던 발리츠는 생각을 바꿔 진지하게 말했다.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돌아온 황제는 통째로 잃 어버린 제국 정부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고 있습 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시는 오고 있습니다." "그건 틀림없이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노고일 겁니다. 어떻게든 현 상 유지를 하려는 눈물 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더군요. 대단한 일이 긴 하지만 쓸데없는 곡예지요. 폐하께서는 당연히 친황제파 귀족들을 결집시키고 고위 행정관들을 진급시켜 임시 정부라고 구성해야 합니 다.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황제 에게 호의적인 귀족들도 불안해하게 될 겁니다. 칼리도백이 장악한 제국군이 그대로 황제에게 넘어가서 군이 황제를 지지하고 있고 때마 침 겨울도 찾아왔기 때문에 아직 조용한 겁니다. 하지만 봄이 오면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 일이 무엇일지 짐작도 할 수 없 다는 것이 화가 나는군요." "우리는 비셀스가 칼리도백과 결합하여 신황조를 열게 될지도 모른 다는 가설을 검토한 적이 있지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지금 황제께서 하고 있는 일은 칼리도백을 부각시키기 위한 작업일지도 모 른다고. 북부에서 군사 활동이 불가능해지는 겨울 동안 남쪽에서 칼 리도백이 풍비박산난 방비체계를 재정비하도록 해서 그를 자연스럽게 후계자로……" 발리츠는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럴 듯한 지적입니다. 부인. 만약 지금 남부의 방비 체계를 재건 하고 있는 사람이 칼리도백이 아니라면 나는 그 추리에 찬성했을 겁 니다." 아이넬은 발리츠의 말을 이해했다. "맞습니다. 칼리도백은 부각시킬 필요가 없지요." "명성을 덧붙이려 해도 붙일 자리가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역시 엘시 에더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 일은 그냥 병력을 재편하는 것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어요. 실제로 그건 전통적으로 북부군을 우습게 보는 남부군의 근거지로 직접 들어가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고 동시에 시련 과의 복잡한 정치적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우리 는 황제가 후계자를 떼놓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남부로 보냈다 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나는 지난번에 칼리도백이 남쪽으로 갔을 때 일어난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지난번?" "발케네가 파괴될 뻔했지요. 발케네가 범죄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입 니다." 아이넬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경악한 것은 아니다. 지키멜 퍼스 와 시오크 지울비가 규리하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 순간부터 규 리하의 조신들은 스카리 빌파와 부냐 헨로의 재현을 걱정했다. 하지 만 아이넬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규리하는 이미 공격을 당했습니다. 황제께선 직접 규리하의 지배자 를 결정했고요. 그런데 왜 황제께서 다시 규리하를 공격한단 말입니 까?" "나는 대귀족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대귀족들?" "제일 처음 규리하가 무너졌습니다. 부인의 오라버니는 수치스럽게 도망가야 했지요. 그 다음은 발케네였습니다. 락토 빌파는 죽었고 그 후계자 스카리 빌파는 현재 황제에게 협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 나간. 영원히 그 땅을 통치할 것 같던 노후작은 죽었고 그 뒤를 이은 증손녀는 비나간에서 쫓겨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모그라쥬. 시모그 라쥬는 가장 강대한 위세를 떨쳤지만 결국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치밀하게 계획한 것처럼 지난 3년 동안 내로라 하는 제국의 대귀족들이 거세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 만큼은 대귀족 들과 맞먹거나 그 이상인 유료도로당 또한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아이넬은 눈을 번득였다. "계승 준비예요!" 발리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단순한 황제의 세력 강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지요. 그 런 목적이라면 무향을 거꾸러뜨려 서약지지파를 위협한 것만으로 충 분했을 테니까. 이건 계승 준비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칼리도백이……" 발리츠는 창밖에서 수천만 마리의 하얀 요괴처럼 떨어지는 함박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는 불안감은 아이넬을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발리츠가 말했다. "나는 조금 전에 규리하도 다른 대귀족들처럼 거세당했다고 말했습 니다. 하지만 규리하는 그 장구한 역사의 힘을 자랑하듯 현재 제국의 유일무이한 대귀족으로 다시 부활했습니다. 황제는 즈믄누리에서 자 라난 인간 처녀가 규리하를 부흥시킬 거라고는 생각못했겠지요. 사실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귀여운 처조카님은, 물론 무능하 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놀랄 정도로 탁월한 분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을 힘이 있었지요." "하늘치……" 발리츠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황제 폐하께서는 칼리도백과 결합할 규리하공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기실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럴 거예요!" "하지만 만약 폐하께서 규리하 황조가 아닌 에더리 황조를 원하신다 면 지나치게 강력한 아내는 오히려 내켜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황제가 그렇게 판단하면 우리의 규리하공 또한 차기 황제의 반려에서 차기 황제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거세당한 다른 대귀족처럼. 그 경우 비셀스 규리하의 목숨은 명재경각입니다." 아이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발리츠는 머리를 긁적였다. "모든 경우에 대해 예상해두는 것이 좋지요. 부인. 만약 황제께서 칼리도백과 규리하공의 결합을 포기하셨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계명성 들은 어르신처럼 규리하공의 곁 을 떠나는 것입니다. 근처에 머물렀다간 함께 벼락을 맞을지도 모르 니까. 그리고 둘째는……" 아이넬 규리하는 둘째 방도가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발리츠는 아내가 이미 둘째 방 도를 알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확인하듯 말했다. "비셀스의 곁에 잔류해 있다가 가장 적절한 순간에 그녀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 35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5. 불가능을 희망하는 태도 (2) | 2004·10·29 07:54 | HIT : 261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5-2 관련자료:없음 [4937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29 05:51 조회:33 피를 마시는 새 35. 불가능을 희망하는 태도 - 2 아이넬은 입술을 입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남편을 향해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 처지를 설명한 겁니다." "배신자는 절대로 배신할 거라고 말하지 않지요. 배신도 일종의 깜 짝선물이니까. 그런데도 각하께서 배신을 거론했다면 그럴 의도가 없 다는 뜻일 겁니다." 발리츠는 아내의 분석에 저항하지 않았다. "부인. 당신은 당신의 조카를 배신할 수 있습니까?" 아이넬의 커다란 덩치가 갑자기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남작부인 은 탁자 위에 얹어둔 두 손을 마주잡았다. "각하. 저는 오라버니도 배신했어요." 아이넬은 머리를 떨구었다. 그녀의 손과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발 리츠는 당혹감을 느꼈다. "미안합니다. 부인. 상심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말을 잘못 했군요. 비셀스와 아이저는 다릅니다. 아이저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 정확하게 아는 상태에서 황제의 분노를 샀습니다. 전쟁의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도 공공연히 서약지지파임을 드러내었고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항복은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는 명백하게 황제를 적대했습니 다. 하지만 비셀스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제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으 며 황제에 대한 반감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비셀스는 단지 위협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데 그 능력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그런 비셀스가 해로운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도깨비들도 자 기 종족이 아닌 그녀를 잘 보살펴주었는데 그녀와 같은 인간들이 끝 없이 그녀를 버리고 괴롭히고 배신한다는 것은…… 비셀스는 그 사실 에 대해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킴은 원래 그런가 보지요'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것도 비난이 아니라 해는 서쪽으로 진 다고 말하는 투입니다." 발리츠는 자신이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말을 멈췄다. 아 이넬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어깨의 떨림 또한 여전했다. 안 절부절 못하게 된 발리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넬에게 다가가려 했 다. 하지만 몸을 반쯤 일으켰던 발리츠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 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발리츠는 어깨를 떨고 있는 아이넬을 조금 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의심이 부풀었을 때 아이넬은 커다란 얼굴을 들어 발리츠를 바라보았다. 남작부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작님." "이런, 부인!" "미안해요. 각하. 각하께서 지나치게 진지하셔서. 하지만 그렇게까 지 당황하실 줄은 몰랐어요. 화내시지 마세요." 남작부인은 술통 같은 허리를 힘있게 비틀어 몸을 꼬았다. 그 모습 을 보던 발리츠는 노기를 잊었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울 수가!' 진 심이었다. 남작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본 남작부인은 함께 웃으며 말했다. "그 애가 어린애라고 말한 것은 저였지요. 하지만 각하께서 그것을 더 강하게 느끼고 계셨군요. 어린애에게 무도하게 굴기 싫으신 거 죠?" 발리츠는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가 아이저 규리하를 돕지 않아서 비셀스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물론 우리가 도왔다 하더라도 아 이저 규리하의 패망은 막을 수 없었을 테니 이건 말도 안되는 생각입 니다만." "그렇게나 비셀스를 동정하셨어요?" 아이넬은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발리츠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판사이와 바꿀 정도는 아닙니다." "……예. 아무리 가엾다 해도 어린애 한 명과 판사이를 바꿀 수는 없지요." 발리츠는 두 팔을 옆으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리고 발리츠는 의자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대었다. "나는 비셀스를 배신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모두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황제께서 규리하공이야말로 칼리도백의 가장 강력한 원 군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규리하공은 칼 리도백과 결혼할 테고, 에더리 황조가 열릴 테고, 여황이 될지 황비 가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황실 최고위층 인사가 된 비셀스의 고모 와 고모부가 된 우리는 판사이의 그 망할 놈들을 벌벌 기게 만들 수 있겠지요. 그 녀석들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이군요." 아이넬은 빙그레 웃었다. "각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들이 판사이의 진정한 주인을 섬기게 되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게 만들겠습니다." 발리츠는 자신의 아내가 그럴 수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런데 아이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비나간후를 튼튼한 밧줄로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황 제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군요.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른다는 표 시가 될 수 있겠지요." 발리츠는 입술 사이로 쯧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게 상쾌한 해결책이지요. 그런데 규리하공은 그들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황제의 지시가 오길 기다리는 걸까요? 하지만 두 사람은 딱정벌레를 타고 왔으니 황제는 그들이 어디 있는 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시를 내릴 수 없을 테니 이쪽에 서 먼저 그들을 보내야 합니다." "제가 비셀스에게 이야기해보지요." "글쎄요. 두 사람이 도착한 후로 규리하의 조신들이 말하다 질식할 정도로 되풀이해온 말이 그들을 쫓아내라는 말이었을 텐데요."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하늘치를 자유롭게 다루는 사람을 황제가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이야기하지 않았겠지요. 각하의 지적이 옳 아요. 두 사람을 데리고 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황제의 의심은 커질 테지요. 황제는 비셀스가 두 사람을 보호하려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늘치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즈믄누리의 친구인 여자가 황제로부터 도망친 자를 공공연히 보호한다면, 예.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겁니 다. 가서 말해야겠어요." 아이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리츠는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함께 갈까요?" "아니오. 고모 대 조카로, 그리고 여자끼리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어 요. 각하께서는 쉬세요. 설경을 감상하는 법이라도 익히시면 좋겠군 요." 발리츠는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넬은 미소를 짓 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 다. 밖을 내다본 아이넬은 성안 가득히 쌓여있는 눈 위를 걸어가는 인간 을 발견했다. 큼직한 눈신을 신고 있는 그 사람은 인간의 키보다 더 높이 쌓여있는 눈 위에서도 불편함 없이 걷고 있었다. 보나마나 규리 하 사람일 거라 생각했던 아이넬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 었다. 아이넬은 창밖을 가리키며 남편을 돌아보았다. "각하! 보세요. 규리하 출신도 아닌데 저렇게 눈 위에서도 편안해 하는 사람도 있군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창가로 다가온 발리츠는 아내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두툼한 옷으로 몸을 두르고 눈신을 멋지게 내딛으며 걸어가는 인간을 관찰한 발리츠 는 잠시 후 미심쩍은 얼굴로 아내를 돌아보았다. "부인, 저건 사라말 아이솔이잖습니까?" 남작부인은 그 항의가 상당히 타당하게 들린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남작과 남작부인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조금 후 폭소를 터뜨렸다. 사라말 아이솔은 그를 일반인으로 취급될 수 없다는 암시를 담은 판 사이 남작 부부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거리가 멀었고 두툼한 모자가 그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으며 게다가 눈신이 눈을 짓누르는 소리가 요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다 해도 사라말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얀 눈밭 위를 걸어간 사라말은 곧 건물 이층의 창문 앞에 도달했 다. 사라말은 덧창을 두드렸다. 덧창이 약간 열렸다. 그 사이로 병사 의 얼굴이 나타났다. "율형부사님이시군요." 덧창이 열렸다. 안쪽에 있던 병사는 눈신을 신은 사라말이 창문을 넘어들어오도록 도와주었다. 안으로 들어간 사라말은 눈신을 벗으며 병사를 바라보았다. 병사는 방 저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사라말은 눈이 잔뜩 묻은 방한복을 벗어 병사에게 건네고는 그 문으로 들어섰 다. 방안 공기는 따스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포근한 날씨이긴 하지만 바 깥에 있다가 들어온 사라말은 가려움을 느꼈다. 그곳은 소응접실이었 다. 방은 조그마한 크기였지만 규리하성의 모든 부분이 그렇듯 장중 하면서도 검박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발란카 도자기임이 분명한 물건들이 놓여있는 벽난로 가까운 곳에는 조그마한 탁자가 있 었고 그 주위에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말했다. "어서 오세요. 부사님." 정우가 그에게 인사했다. 굴도하 남작부인은 사라말을 보고 웃기보 다는 그를 따라오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사라말은 정우에게 목례하 고는 탁자 주위에 있던 두 사람에게도 목례했다. 정우의 맞은편에 앉 아있던 지키멜 퍼스와 시오크 지울비가 인사를 받았다. 정우는 자신 의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세요. 머리가 젖어있군요. 바깥에 계셨어요?" "예. 산책중이었습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법률적 조언을 좀 얻고 싶어서요." "괜찮습니다. 뭡니까?" 사라말은 의자에 앉아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의 앞쪽에는 도깨 비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 정우는 그것을 손으로 누른 채 말했다. "뱀단지가 움직였어요." 사라말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는 계속 말하라는 몸짓을 했다. 정우 는 도깨비지를 사라말에게 밀면서 말했다. "사어는 짧았어요. 이것이 황제 폐하로부터 온 사어에요. 읽어보세 요." 그것을 받은 사라말은 시오크 지울비와 지키멜 퍼스의 안색을 살폈 다. 지키멜은 긴장하고 있었고 시오크는 우울해 보였다. 사라말은 도 깨비지를 들여다보았다. 정우의 말처럼 사어는 짧았다. 아라짓 제국 황제 치천제가 시오크 지울비에게 고한다. 그대를 유료도로당의 모든 도로를 통치하는 왕에 봉한다. 이 지시를 받는 즉시 유료도로당으로 돌아가 왕의 의무를 수행할 준비를 하라. 사라말은 두 번 세 번 읽지는 않았다. 곧 종이를 정우에게 미는 사 라말을 보며 지키멜과 시오크는 약간 당황했다. 사라말이 말했다. "가능합니다." "정말 법적으로 이런 왕위 하사가……" "아니오. 아라짓 제국의 황제는 법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탁자 주위의 사람들은 허무한 기분을 느꼈다. 특히나 전문적인 법률 용어로 점철된 설명을과 치열한 법리학적 토론을 기대하던 법학도 지 키멜은 예상과 완전히 다른 설명에 황당한 기분마저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보려 시도했다. "그래도 좀 황당하군. 도로가 영토라니. 도로에는 배타성이 없어. 간단히 말해서 국경을 만들 수가 없다는 거야. 선 위에 선을 만드는 꼴이 되니까." "상관 없습니다. 국경선 대신 국경점이 있으니까." "뭐? 국경점?" "선 위에 선을 겹치는 것은 무의미해도 점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유료도로당의 징수소는 유료도로국의 국경점이 되고 출입국 관리사무 소가 되겠군요." "……유료도로국?" 지키멜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 말 에 대해 반론하려 할 때 침울하게 앉아있던 시오크 지울비가 말했다. "아버님이 아니고 왜 저인지 짐작되십니까, 부사님?" "자네 춘부장은 이미 체포되셨을 거야. 이런 일을 받아들일 분이 아 니니까." "인질이군요." 사라말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과격하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방법이군요. 이것은 교통망을 제국 정 부가 직접 통제하겠다는 뜻입니다. 국경점이니 하는 말을 했지만 사 실상 선으로 이루어진 영토를 완전히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유료도 로국의 영토는 다른 봉토들 가운데로도 지나니까요. 따라서 유료도로 국의 국왕은 왕이라는 지극히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귀족 보다도 중앙정부에 협조적인 제후가 될 겁니다. 제2의 하늘누리는 만 들어지지 않을 모양이군요." 사라말의 말은 평온했지만 듣고 있던 사람들은 숨가쁜 기분을 느꼈 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결론이 나오느냐고 묻는 눈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설명했다. "그 동안 제국의 기간시설인 도로가 민영기관에 의해 운영될 수 있 었던 것은 유료도로당의 오랜 전통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제국 수도가 이동할 수 있고 뱀단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이 없 다면 제국 정부는 교통수단일뿐만 아니라 통신수단이며 군사시설이기 도 한 도로망을 오래 전에 장악했을 겁니다. 바꿔 말해서 제국 정부 가 도로망을 장악하러 나섰다면 제국 수도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다는 뜻이 될 겁니다. 두 번째 하늘누리가 건설될 때까지 임시로 도 로망을 장악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왕위까지 는 필요없지요. 더군다나 비나간후께서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두 번째 하늘누리로 전용할 수 있는 하늘치를 보유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황제 폐하께서 유료도로당을 유료도로국으 로 만들어서라도 도로망을 장악하려 하신다면 제2의 하늘누리는 없다 는 뜻이 됩니다. 제국의 수도는 지상에 건설될 모양입니다." 정우가 손을 조금 들어올렸다. "폐하께서는 하늘누리에 발생한 사고 때문에 하늘치 위의 수도는 위 험하다고 생각하게 되신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엔거 평원에 나타난 하늘치 말리는 무기였다 고 하니 폐하께서는 하늘치가 도시 부지보다는 공격 무기로 적절하다 고 생각하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알리셨습니까, 정우?" 지키멜과 시오크는 정우가 절대로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거라 생 각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정우의 모습은 그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알리지 않았어요. 모든 곳으로 보낸 것 아닐까요?" "그게 타당한 설명이군요. 어떻게 할 건가, 시오크?" 갑자기 지적당한 시오크는 당황하다가 비틀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는 규리하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는 규리하공께 비나간후와 자네가 규리하에 있다는 것을 황제 폐 하께 알렸느냐고 질문했고 규리하공은 알리지 않으셨다고 대답하셨 어. 그리고 규리하공은 제국 전역으로 자네에게 보내는 이 사어를 보 낸 것이 아닐까 추측하셨고 나는 그것이 타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해. 자네는 이 지시를 따를 건가, 무시할 건가?" "감사합니다. 율형부사님. 제 생각엔 이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지키멜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시오크가 재빨리 말했다. "제가 가지 않으면 황제는 고위당원 중 한 명을 골라 왕위를 내릴 겁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지요. 그러면 아버님의 안전을 확 보하기 힘들어집니다. 혹은 그 문제 때문에 당이 황제와 마찰을 일으 킬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미 많은 타격을 입은 당은 회복불가능 의 상처를 입을 테지요. 제가 왕위를 받아야 아버지를 구하는 일과 당을 수습하는 일 모두 시도할 수 있습니다." 지키멜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며 시오크를 노려보았다. 정우와 사 라말은 그녀가 고함을 지르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하 지만 지키멜은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돌려 시오크를 외면했다. 시오 크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규리하공. 의지할 곳 없이 도망쳐온 저를 받아주신 것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베풀어주신 은혜는 반드시……" "도망쳐온 것은 나였어." 지키멜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규리하 변경백에 대한 예의 때문에 언 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지키멜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황제를 피해 도망친 것은 나였어. 너는 그냥 나를 따라왔을 뿐이 지. 나와 동료였다는 식으로 말하지마. 비겁한 놈." 시오크는 상처 입은 표정으로 지키멜을 바라보았다. "독행왕 폐하. 저는 폐하를 내팽개치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의 제안 을 받아들이면 폐하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네 도움은 필요없어." 정우는 낮은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다툼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지 키멜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시오크를 노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 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정우." '아, 예. 그러세요. 지키멜.'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을 끝내자마자 떠나는 지키멜을 본 정우는 입을 다물었다. 지키멜이 문을 빠져나가 자마자 시오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하. 제가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요." 시오크는 지키멜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정우는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가 등받이에 몸을 던지듯 허리를 젖혔다. 다리를 앞으로 내 뻗은 정우는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옆에 있는 사라말을 올려다보 았다. "지키멜이 화가 많이 난 것 같죠?" 사라말은 팔짱을 꼈다. "비나간후는 시오크가 자신과 함께 황제와 싸우기를 바랐나 봅니다. 이 경우에는 시오크를 지지하고 싶습니다. 시오크는 비나간후에게 도 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료도로당은 시모그라쥬군과 달리 하늘을 나는 말리에는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습니다. 시오크는 자신이 말한 것처 럼 유료도로당과 아버지를 보살피는 편이 낫습니다. 시오크가 떠나고 나면 당신에 대한 비나간후의 공세가 더 심해지겠군요." 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키멜은 제국이 쪼개져야 한다고 믿고 있지요. 뱀단지와 이동수도 가 없어도 사람들이 다스릴 수 있는 크기로. 사라말. 제2의 하늘누리 는 없을 거라고 말했지요? 폐하께서는 이동수도도 없이 이 커다란 제 국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이동수도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지고 계신가 봅니다." "그게 뭘까요?" 사라말은 팔짱을 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몸을 접다시피 움츠린 사 라말은 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우. 혹시 즈믄누리에 임시 성주나 성주 대리 같은 제도가 있습니 까?" 정우는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금시초문인데요. 그런 제도가 있었다면 바우 성주님은 자주 이용했 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본 적이 없어요. 왜 그 런 것을 물어보시는 거죠?" "탈해 머리돌이 임시 성주가 되면 즈믄누리의 일부가 묻혀 있는 이 규리하성에서도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우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와!" 정우는 두 손을 펼쳤다가 다시 붙였다. "와!" 정우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정말 재미있는 생각이네요. 라수의 방은 원래 즈믄누리의 일부였으 니까…… 즈믄누리의 성주는 즈믄누리에 있을 때 올바른 결정을 내리 고…… 그런데 왜 즈믄누리의 성주가 내리는 올바른 결정이 필요한 거죠?" "자기가 이해하기 힘든 문제를 즈믄누리의 성주에게 가져가는 도깨 비들처럼 저 또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전대미문의 강력한 무기를 가진 채 하늘에 떠서 사람의 정신을 마 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존재라면 신이라고 생각해도 되냐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걸 어떻 게 대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아트밀이 구구단 7단을 외울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우는 방긋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시기 어려운 일이라면 재촉하진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시오크는 문이 지키멜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 는 것보다는 그런 착각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지키멜. 유료도로당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를 제지할 수 없어." 지키멜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지키멜이 지키멜에 뭔가를 집어던 진 모양이다. 시오크는 무의식중에 복도 좌우를 둘러보고는 다시 지 키멜에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여기에는 하늘치를 다루는 자도 있고 즈믄누리의 무사장도 있다는 거지. 규리하공이 결심만 하면 황제와 겨뤄볼 수 있다는 거지.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이야기를 들었어. 그녀 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이곳 사람들이 워낙 쉬쉬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도망친 아이저 규리하가 자기 땅을 되찾기 위해 뭔 가 대단한 일을 준비하는 모양이야. 그런 상황이라면 비셀스 규리하 는 황제와 대립하느니 차라리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어? 두 명의 적과 싸울 수는 없으니까." 이번에는 조금 먼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키멜이 뭔가를 걷어찼 다고 생각한 시오크는 그녀의 발이 다치지 않았기를 바라며 말했다. "너도 그런 분위기를 대강 눈치챘지?" 대답이 없었다. 시오크는 지키멜에 이마를 기댔다. 갑작스럽게 피로 가 느껴졌다. 시오크는 힘겹게 말했다. "지키멜. 우리는 실패했어." 괴괴하기까지 한 침묵이 되돌아왔다. 시오크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제국은 필요해.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 아. 왜냐 하면 사람들이 제멋대로 상대방을 판단해버리는 일을 막아 주니까. 너는 왕국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정말 그것을 확신할 수 있어? 나는 모르겠어. 확신이 없어. 왕국이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나는 저 레콘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 "레콘들은 자기만 알아! 자기를 귀찮게 하지 않는 상대는 귀찮게 하 지 않아!" 갑작스러운 외침에 시오크는 놀라서 문에 이마를 문질렀다. 쓰린 이 마를 붙잡고 물러났던 시오크는 다시 문에 바짝 붙어서서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레콘들을 귀찮게 해. 그들의 힘을 탐내니까. 두억 시니 장군을 봐. 그녀는 자기 목적 때문에 그을린발을 귀찮게 했고 그 결과로 끔찍한 보복을 당했어. 지키멜. 레콘들 자신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사람들이 레콘을 가만두지 않을 거란 말이야. 사람들에게 자극받은 레콘들이 날뛰게 될 때 왕국이 과연 그들을 통 제할 수 있을까?" "고작 레콘들을 통제하기 위해 사람들을 계속 피 흘리게 만드는 제 국이 존재해야 한다는 거야? 너는 그렇게 말하는 거야?" 시오크는 자신의 호흡 소리를 들으며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부드럽 게 말했다. "지키멜. 그 질문에 네가 대답해보겠어?" 대답이 없었다. 시오크는 다시 문에 이마를 기댔다. 하지만 그 때 문이 벌컥 열렸고 앞으로 몸을 기울이던 시오크는 중심을 잃고 다급 하게 발을 내밀었다. 휘청거리며 방안으로 뛰어들어간 시오크는 방 가운데에 도달해서야 겨우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문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 동작의 도중에서 시오크는 문이 쾅 닫히는 모습, 그리고 지키멜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지키멜을 향해 완전히 돌아섰을 때 지키멜이 그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지키멜은 시오크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을 모두 그녀에게 맡긴 채 시오크는 가만히 서있었다. 지키멜은 헐떡이듯 말했다. "나쁜 놈." 시오크는 흐트러진 지키멜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지키멜의 넓 은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뾰족했다. 시오크는 자신의 가슴을 문지르는 그녀의 코를 느꼈다.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미안해." "사과하지마! 나쁜 놈이 아닌 척하지마. 너는 나쁜 놈이니까!" "미안해." "사랑한다고 말해." "사랑해." 지키멜은 그의 가슴을 확 밀쳐냈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시오크는 지키멜을 바라보았다. 지키멜은 문을 향해 척척 걸어갔다. 그리고 그를 보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지키멜 은 아무 말 없이 손을 옆으로 뻗어 문 바깥을 가리켰다. 시오크는 잠시 머뭇거렸다. 지키멜은 더 거친 동작으로 문 바깥을 가리켰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시오크를 외면하고 있었다. 잠시 후 시오크가 걸음을 뗐다. 그가 문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지키 멜은 한 번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시오크가 복도에 섰을 때 문이 닫혔다. 시오크는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문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 지 않았다. 론솔피는 커다란 돌무더기에 걸터앉은 채 사모를 바라보았다. 주위 를 경계하는 두억시니들이 계속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기 때문에 주변 은 고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모와 론솔피 사이에 놓여있는 공간 은 침묵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심장탑의 폐허를 스친 바람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스칠 때와는 다른 소리를 냈다. 론솔피는 일만육천 년 뒤에는 이곳에 서 어떤 폐허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페로그 라쥬 자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론솔피라는 레콘이 있었다 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은 론솔피를 약간 언짢게 했다. 론솔피는 그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깃털을 가볍게 부풀렸다가 가라앉혔다. "대호왕. 그을린발, 지멘, 그리고 세 번째도 레콘이라고 했지. 왜 모두 레콘이지?" "그야 레콘들을 위한 셋이니까." "무슨 말이지?" 사모는 잠시 말을 정리하기 위해 침묵했다. "분리주의에 대해 알아?" "많이 알지는 못해." "오해의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내 바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분리주의에 비교하는 것이 괜찮을 듯하군. 분리주의는 레콘들에게 자 신의 정치구조를 만들 기회를 주자는 것이지. 그와 비슷하게 나는 레 콘들이 사람의 신을 상대할 자신의 방법을 찾아내기를 바라." "사람의 신을 상대해?" "나가나 인간, 도깨비들은 신을 상대할 자신들의 셋을 찾아낼 수 있 다. 그들은 서로 협조하는 것에 익숙하니까. 하지만 너희 레콘들은 개인주의자들이지. 너희들은 셋은커녕 둘이서 어울리기도 힘들다. 철 의 침묵을 약속한 티나한과 즈라더가 전설이 된 것을 생각해봐." 사모의 말에 대해 생각하며 론솔피는 뇌가 쭈그러들 것 같다고 생각 했다. 잠시 후 론솔피가 부리를 열었다. "그러면 그 길잡이, 대적자, 요술쟁이가 인간, 나가, 도깨비들에서 도 모두 나타난다는 거야?" "그럴 거라 생각한다." "왜?" "사람이라는 이름을 공유하지만 네 선민종족은 삶도, 죽음도 모두 다르다. 심장 없는 나가, 두 번 죽는 도깨비, 무기를 놓았을 때 늙는 레콘, 죽음을 피할 줄 아는 인간을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 당연히 사람의 신을 대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 모두에게 는 신을 상대할 셋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레콘들은 자기들의 셋을 찾아내지 못한다?" "어렵다고 표현하겠어." "그러면 너는 레콘이 그 셋을 찾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왜 도와 주는 거지?" "스스로는 찾아내기 힘들 테니까." "나는 그런 뜻으로 질문한 것이 아닌데. 레콘을 돕는 것이 네게 무 슨 이득이 되지? 너는 레콘도 아니잖아." 사모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치천제는 분리주의를 거부한다. 그녀는 네 선민종족을 똑같은 사람 으로 규정하여 똑같이 보살피려 할 것이다. 그녀의 태도를 공정하다 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에 비하면 내 바람은 무책임한 것일 지도 모른다. 너희들이 찾아낸 셋은 너희 레콘을 저주받은 종족으로 이끌 수도 있으니까." "뭐라고?" 사모는 손을 뻗어 론솔피를 가리켰다. "나는 상대한다고 했지 상대하는 방식은 말하지 않았다. 레콘들은 신을 경배할 수도 있다. 혹은 무시할 수도 있다. 물론 투쟁할 수도 있다. 만약 레콘 길잡이와 대적자, 요술쟁이가 사람의 신과 싸우기로 한다면 레콘은 마족이 되겠지." 론솔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면 너는 우리가 마귀 종족이 될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그래." 그 단호한 태도는 론솔피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했다. 론솔피는 사모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했다. "혹은 신의 금군 종족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사모는 팔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나 인간, 나가도 그렇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 결국 다른 종족들은 신을 어떻게 대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럴 기회가 없다는 거지. 셋이 모 이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치천제가 신이 되려는 것을 알고 있던 너 는 우리가 그녀를 상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고. 하지만 아직 도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는데." "뭐지?" 론솔피는 팔짱을 끼었다. "우리는 레콘이야. 레콘은 개인주의자라고? 동의해. 그렇다면 왜 모 든 레콘이 똑같은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거야? 각자 그 사람의 신이 라는 것을 따를지, 무시할지, 아니면 싸울지 결정해도 되는 거잖아." "무의미해.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어." "왜?" "셋이 하나를 상대하니까." 론솔피는 부리를 탁 부딪혔다. 그리고 그 동작이 자신의 불쾌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고 생각하고는 더 세게 부딪혔다. 턱이 좀 얼 얼해서 론솔피는 잠시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모는 잘게 부서진 듯한 웃음을 흩뿌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내가 무엇에든 적용될 수 있기 때 문에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옛속담을 근거로 삼아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행세하는 노인이라고 생각하겠지." "네 말이 좀 갑갑하다는 것은 너도 인정해야 할걸." "하지만 내가 요술쟁이를 찾으려 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내겐 더 이상 그럴 여유가 남아있지 않아. 그러니 네게 부탁하겠다." "나더러 요술을 부리는 레콘을 찾으라고? 그 레콘을 찾아서 지멘과 그을린발에게 소개시켜줘야 하나?" 론솔피는 비꼬는 태도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사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길잡이와 대적자와 함께 거론되는 요술쟁이는 요술을 부리는 사람 이 아니야.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면 특이한 숙원을 가진 자 를 찾아야 해." "숙원? 그러고보니 아까 나 봤을 때 숙원이 뭐냐고 물었지." "그래." "요술쟁이가 되려는 숙원을 가진 레콘은 설마 아니겠지? 어떻게 특 이한 거야?" 사모는 다시 침묵했다. 니름을 듣지 못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뜻을 최대한 명징하게 전달하기 위해 말을 가다듬던 사모는 문득 자신이 다시는 니름을 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의 두억시니 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의 곁에 남아있겠지만 그들은 니름을 들을 수 없다. 사모는 나가이면서도 니르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려는 것은 니를 수 없는 자들의 왕이 되었던 자에게 어울리는 최후라고 생 각했다. 사모는 저릿한 슬픔을 옆으로 밀어내려 애쓰며 말했다. "숙원의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아. 그 숙원이 누구와 관련있는지 가 중요하지." "잘 모르겠는데." "론솔피. 지멘과 그을린발을 생각해봐." "그 녀석들의 숙원이 그렇게 희한한 건가? 난 그보다 더 괴상한 숙 원을 가진 레콘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봤는데." "레콘의 숙원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이지. 하지 만 그 둘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다른 많은 자들의 힘을 한 곳으로 집 중시키고 있어." 론솔피는 다시 뇌가 쥐어짜지는 느낌을 받으며 애처롭게 말했다. "젠장.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을린발의 숙원은 코끼리 가축화야. 그것은 사실 굉장히 특이한 숙원이야. 내가 듣기로 그는 이미 코끼리들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던 데." "맞아. 괴상한 말로 코끼리들을 부리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사모는 다시 말을 정리했다. "좋아. 론솔피. 그을린발이 코끼리를 가축으로 만들면 그는 세상의 모든 코끼리의 주인이 될까?" "응? 그렇지는 않겠지. 가축이라면 각자 주인이 따로……" 론솔피는 어떤 개념을 포착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표 현하기 어려웠다. 고민하던 론솔피는 어디서 도움을 얻어야 할지 깨 닫고는 사모를 바라보았다. 론솔피의 얼굴을 본 사모는 고개를 끄덕 였다. "길들여진 몇 마리 동물과 가축은 달라. 길들여진 동물은 길들인 자 의 것이지만 가축은 인류의 것이지. 그을린발은 모든 사람에게 코끼 리를 주려 하고 있어. 자신이 아니라." "허?" "지멘이 황제를 죽이면 누가 황제를 잃게 되지?" "모든 사람." 론솔피는 자신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론솔피는 부릅뜬 눈으로 사모 를 노려보았고 사모는 그 눈길을 차분하게 맞받았다. 론솔피는 손을 들어 수염볏을 살짝 튕겼다. "이거 재미있는데." "알겠어?" "알 것 같아. 그 두 녀석들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녀석들이 하는 일은 모든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군." "사람의 신을 대하는 모든 레콘들의 태도를 결정해야 할 자들이 가 질 만한 숙원이지. 혹은 거꾸로 그런 숙원을 가질 수 있으니까 모든 레콘들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전후관계는 그 렇게 중요하지 않아." 사모는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론솔피가 걸터앉아있는 바위 무더기로 걸어가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설명과 내가 줄 수 있는 조언은 이게 전부야. 나 는 네가 그런 레콘을 찾기를 바라. 물론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네 게 강요할 방법은 없겠지. 하지만 이 점을 생각해봐. 내 말이 사실일 경우 이 일에는 모든 레콘들이 관련되어 있어. 아니, 그 이상이야. 사람의 신이 나타났는데 레콘만이 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 어 혼란에 빠진다면 그것은 다른 선민종족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거 야. 그렇다면 이 일에는 모든 사람이……" 론솔피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사모는 말을 멈췄다. 그녀는 론솔피를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론솔피는 여전히 딴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말했다. "대호왕. 뭐 좀 물어보자." "뭐지?" "내가 아는 레콘이 하나 있는데, 흐음. 이봐. 정의는 모든 사람의 것이지?" 사모는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5. 불가능을 희망하는 태도 (3) | 2004·10·30 08:15 | HIT : 320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5-3 관련자료:없음 [4937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30 06:04 조회:52 피를 마시는 새 35. 불가능을 희망하는 태도 - 3 지키멜 퍼스는 규리하성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그 리고 가장 슬픈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규리하성에 서 가장 분노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억제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지키멜은 벽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그 녀가 등과 어깨를 사정없이 부딪혔지만 규리하성을 이루고 있는 단단 한 뼈대는 진동음조차 내지 않았다. 턱, 턱 하는 무디고 볼품없는 소 리가 날뿐이다. 이미 그녀의 팔뚝에는 멍이 생긴 듯하고 등 또한 불 타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지키멜은 계속 벽에 몸을 부딪쳤다. 명 백한 자해였다. 한 번 더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가 튕겨나왔을 때 지키멜은 중심을 잃었다. 그녀는 내팽개쳐지는 물건처럼 쓰러졌다. 뒤통수가 바닥에 부딪히며 눈앞에 불꽃이 폭발했다. 지키멜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 다. 어깨와 팔, 등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도 잊어먹었다. 지키멜은 머리에 구멍이 났을 거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지키멜은 두려움에 빠져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자신의 머리가 징그 럽지만 어쩔 수 없이 만져야만 하는 물건인 것처럼 흠칫흠칫하며 손 을 뻗언 지키멜은 머리 뒤편을 만져보았다. 별다른 것은 느껴지지 않 았다. 조금 자신감을 얻은 지키멜은 세심하게 머리를 만져보았다. 진 득진득한 피도 깨진 머리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도하려 했을 때 그녀의 손이 혹을 건드렸다. 지키멜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비틀었다. 세게 뒤틀렸던 몸이 다시 튕기듯 반대로 휘어졌다. 지키멜은 머리를 감싸쥔 채 새우잠이라고 말하는 그 자세로 바닥에 모로 누웠다. 뱃속의 태아 같은 자세로 누운 채 지키멜은 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처지가 웃겨도 너무 웃겼다. 하지만 독행왕의 입술에서 흘러 나온 건 도무지 웃음이라 할 수 없는, 그렇다고 해서 울음이라고 말 하기도 힘든 탁한 신음뿐이었다. 지키멜은 입술에 닿는 무엇인가를 느끼고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자 신음 은 더 들리지 않았다. 연초 한 대를 피울 시간이 지났을 때 꼼짝도 하지 않던 지키멜이 스 르르 일어났다. 지키멜은 두 다리를 뻗고 등을 벽에 기대어 꼿꼿하게 앉았다. 시들 한 손길로 입에 들어와 있는 것을 꺼낸 지키멜은 그것이 머리 장식의 일부임을 확인하고는 옆의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키멜은 차분 하게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던 지키멜은 바닥에 떨어진 귀고리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것을 주워 머리 장 식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고는 자신의 귀를 더듬었다. 귀에 매달려 있 던 귀고리를 찾은 지키멜은 그것을 떼어 역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키멜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는 그것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 았다. 그리고 지키멜은 한숨을 내쉬기로 했다. "한숨." 한 번으로는 좀 부족한 것 같다. "한숨, 한숨, 한숨." 지키멜은 자신의 장난에 피식 웃었다. 의도적인 웃음이었다. 물론 장난도 의도적인 것이다.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지키멜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화를 내 는 것은 쓸데없다. 냉철하게 굴어야 한다. 미친 듯이 화를 내면서 동 시에 나를 이 꼴로 만든 녀석들을 부술 수는 없다. 입을 꽉 다물어! 뺨이라도 때려! 아냐, 그건 안돼. 평온한 것처럼 보여야 해. 상처가 난 뺨을 하고 돌아다닐 수는 없어. 위로라는 이름의 공격을 또 받게 돼. 그런 공격을 받고 싶지는 않아. 그러면 정말 정신을 잃을 만큼 화가 날 거야. 나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겠어. 차갑게, 차갑게, 차갑 게. "차갑게." 지키멜은 일어났다. 가능성은 없지만 혹시 누군가 허락도 구하지 않 고 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 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지키멜은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턱을 도도하게 세운 지키멜은 문을 비웃듯 바라보고는 천천히 걸어 의자로 다가갔 다. 그녀는 깐깐한 초상화가도 아무런 교정 없이 곧장 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자세로 앉았다. 그녀의 입에서 무의식적인 말 이 흘러나왔다. "세 왕국이야." 지키멜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자신에 기특함을 느꼈다. 그녀는 세 왕국을 모두 지킬 것이다. 비나간, 시오크, 그리고 분노의 왕국. 지 키멜은 날카로운 눈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시오크.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는데. 너는 절대로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미안해할 수 없게 만들 테니까!' 지키멜은 입술을 잔뜩 뒤틀어올렸다. 미소의 가장 먼 친척 쯤 되는 표정이었다. '제국을 갈기갈기 찢어놓겠어. 그리고 아무나 가져가게 할 거야. 비 나간만 빼고. 거긴 내 왕국이니까. 미안하다고? 천만에. 절대로 미안 하지 않아.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된 후에 네가 왜 미안해하겠어?' 지키멜의 표정이 가까스로 유지되던 미소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녀 는 모든 맹수류의 표독한 점을 집대성한 듯한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빨리 행동해야 해.' 그래야 한다. '정우는 황제에게 떠나는 시오크의 짐 속에 꽁꽁 묶어놓은 지키멜 퍼스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겠지. 규리하를 보존하고 황제의 호의를 얻어 아버지와 싸우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어쩌면 당장이 라도 병사들이 올지도 몰라! 이런 바보 같으니. 그런데 벽에 몸을 부 딪치고 있었어? 빨리, 빨리! 생각을 하자. 당장 해야 하는 일은?' 규리하를 장악하는 일이다. 아무도 그런 일을 지키멜처럼, 즉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정하거나 차를 마셔야겠다고 결정하는 것처럼 결정하 지는 않겠지만 지키멜은 그렇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없어. 정우와 도깨비 무사장, 그리고 규리하가 필요해. 그 것들이 나를 잡기 전에 내가 먼저 그것들을 잡아야 해. 그리고 황제 와 맞서야 해. 어떻게 하지?' 내키지 않았지만 지키멜은 이것이 책 읽기나 차 마시기와는 다른 종 류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 혼자서 규리하와 싸울 수는 없 다. '정우를 잡아야 해. 그래야 그녀뿐만 아니라 도깨비 무사장과 규리 하도 움직일 수 있어.' 어떻게? 무향의 지배자는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만큼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혼자서 시카트와 지키멜이 있는 방에 들 어섰다. 지키멜이 들었던 풍문에 따르면 정우는 이미 한 번 가까운 거리에서 저격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키멜은 다른 곳에 서도 정우가 아무런 호위 없이 홀로 다니는 모습을 몇 번 목격했다. '만약 그녀를 초대하면 혼자 방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 정우가 들어왔을 때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내 인질로 삼으면…… 아냐! 이건 말도 안돼. 혹 성공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며칠 동안 깨어있을 수 있겠어? 나는 잠들 테고 그들은 간단히 정우를 되찾아가겠지. 그 리고 그들은 내 목을 매달겠지. 이건 안돼. 멍청이. 좀 더 상식적인 생각을 할 수 없어?' 하지만 지키멜에겐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어떤 상 식적인 계책들도 그녀에겐 지나치게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들뿐이 다. 빠르고 단순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지키멜은 다시 정우 납치 에 대해 생각했다. 정우를 육체적으로 감당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지키멜은 시오크가 홀딱 반한 넓은 어깨에 어울리는 장신을 가지고 있었고 정우는 조그마했다. 문제는 정우를 붙잡은 다음 그녀 를 감시하면서 자신의 안전도 지키는 일을 그녀 혼자서 감당해야 한 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마저 사치스러운 고민인지도 모른다. 지키멜은 정우를 납치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경우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무 방비한 상태를 즐겨 취한다 해도 그녀는 무향의 지배자다. 지키멜은 정우를 납치하려 시도하자마자 성난 규리하 병사에 의해 살해당할지 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지키멜은 머리를 와락 움켜쥐었다. 초상화가를 침묵시킬 만한 완벽 한 자세가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지키멜은 허리를 숙여 소리 없는 비 명을 질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정우 를 붙잡을 수도 없고 탈해 머리돌 무사장이 자신의 뜻을 따르게…… 소리 없는 비명이 멈췄다. 지키멜은 자신의 무릎을 보며 생각했다. '그럴 수 있을까?' 탈해 머 리돌 무사장에게는 정우만큼 강력한 호위가 붙어있진 않을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즈믄누리의 무사장에게 호위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 기 어려울 것이다.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정우보다 탈해가 훨씬 더 무방비한 상태다. 지키멜은 머릿속에 두서없이 계획이, 아니 계획의 파편들이 떠오르 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똑바로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연결짓기 시작했다. 차츰 얼개를 갖추는 계획을 조망 하며 지키멜은 몸을 떨었다. 갑작스럽게 지키멜은 눈을 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소지품이 있는 곳을 뒤졌다. 곧 그녀는 작은 단검 하나를 찾아냈다. 무기라기보다 도구로 쓰이는 조그마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키멜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팔뚝을 자를 만한 커다란 단검이든 편지칼이든 그녀에겐 마찬가지다. 좋은 칼솜씨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칼이든 제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 다. 조그마한 칼이 오히려 숨기기 좋다. 지키멜은 그것이 충분히 날 카로운지 확인한 다음 그것을 소매속에 감췄다. 그리고 지키멜은 소 지품을 더 뒤졌다. 지키멜이 두 번째로 집어든 것은 초라한 단검보다 는 훨씬 음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조그마한 약병이었다. 지키 멜은 그것을 가슴 속에 밀어넣었다. 전무후무한 암살자라도 된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지키멜은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손 수건을 꺼내어 손바닥과 손가락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닦으며 지키멜 은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너무 없다. 모닥불가로 돌아온 자유무역당 제22상단장 사이케라 호미스는 얼굴 을 덮고 있던 목도리를 끌어내렸다. 땀과 입김이 배었다가 얼어붙어 구덕구덕해진 목도리를 접으며 호미 스는 얼굴에 닿는 따가운 온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사이케라는 허리 를 굽혀 지리적으로 따지면 주갈 북서쪽 200킬로미터 지점, 정치적으 로 따지면 제국 행정관들이 하인샤 대사원의 입김을 무시할 수 있는 곳, 역사적으로 따지면 지긋지긋한 혼란인 곳,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는 모닥불가인 곳에 앉았다. 먼저 앉아있던 자들이 알은 체를 했다. 여러 종류의 인사가 있었지 만 살가운 인사는 없었다. 오랜 세월 함께 상단을 꾸려온 동료들은 격식을 갖추려 하지 않았고 최근 상단에 들어온 자들은 아직 어색한 티를 벗지 못해 뻣뻣한 인사를 보내왔다. 사이케라는 특히 신참자들 을 주의깊게 살폈다. 그의 눈에는 신참자 모두가 부주의함 때문에 얼 어죽을 녀석이나 밤중에 불침번을 찌르고 돈주머니를 챙겨 도망칠 녀 석으로 보였다. 사이케라는 자신이 좀 날카로운 상태라는 것을 인정 했지만 신참자들의 태도는 확실히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짜증나는 시기다. 독립중대들이 돌아오고 있긴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제국군은 남쪽에 있어 치안은 불안했다. 게다가 냉혹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혹한기 였다. 상단 활동은 상단장이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위험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에겐 다른 시절이었다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단에서 충분히 경험을 쌓은 후에 위험한 상단에 배속되었을 신참자들이 떠맡겨져 있었다. 경험 많은 상단원들이 다양한 재난에 의해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재난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뿐이다. 재화의 강탈. 자 유무역당의 상단에는 언제나 상품이나 판매 대금이 있다. 언제 덮치 더라도 좋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목표인 셈이다. 그리고 제국이 사라진 이후로 갑자기 자신의 가병들로 하여금 상단을 공격하게 하면 전투 훈련과 재원 확충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 게 된 귀족들이 늘어났다. 그런 자들은 예외없이 소귀족들이었다. 소 귀족들이 더 탐욕스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소박해서라 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자유무역당이 즐기는 보복은 경제 보복인데 그것은 상대방의 경제 규모가 클수록 효과가 높아진다. 소귀족들의 조그마한 영지에는 자유무역당의 경제 보복도 쉽게 먹혀들지 않았다. 당은 어쩔 수 없이 보복 방식을 변경했다. 그리하여 자유무역당의 상 단을 공격한 소귀족들이 호위대장이나 혈육, 측근들에게 목을 잃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것이 자유무역당의 매수에 의한 일임을 증명해내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증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자유무역당은 그것이 더 큰 손실을 부르는 방식임을 누구보다 잘 알 고 있었다. 당장 자유무역당을 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험악하게 바뀌 었다. 공공연하게 자유무역당의 출입을 금하는 귀족도 나타났다. 하 지만 다른 방식으로 상단을 보호하기는 힘들었다. 그럭저럭 상단이 공격당하는 일이 줄어들게 되자 자유무역당은 다시 막대한 자금을 풀 어 자신들을 백안시하는 권력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썼다. 한 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는 어렵다. 자유무역당이 그들의 돈을 살인무 기로 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권력자들은 마음을 쉽게 돌리지 않았 다. 그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유무역당은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 야 했다. 사이케라 호미스는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당이 필사적인 검 약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고 그 때문에 상단의 질적 수준이 떨어지는 것 또한 이해했다. 하지만 밥만 먹여주면 좋다는 저급인력 들을 임시 당원으로 삼아 상단의 결원을 메꾸는 것은 역시 불안한 일 이었다. 그들에겐 당원으로의 자부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만약 상단 이 위험에 빠지면 그들이 목숨을 걸고 상단을 지키는 대신 줄행랑을 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은 노련하고 수완 좋 은 상단장들에게 그런 신참자들을 보내었다. 유능한 상단장들이 상단 원의 능력 부족을 스스로 메꾸고 또한 신참자들에게 당원으로서의 자 부심을 불어넣는 정신교육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케 라는 유능하다는 평을 받았다는 사실을 저주했다. 그리고 당의 기대 를 심술궂게 충족시키기로 했다. 사이케라는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그들의 여행에 합류 한 여행자들이었다. 든든한 상단과 합류하기를 바라는 여행자들은 많지만 보안상의 이유 에서 상단은 길동무를 받아들이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이케라는 두 사람이 요청하자마자 즉석에서 상단의 규칙을 어기며 그들을 받아 들였다. 사이케라는 만약 당에서 그 일로 그를 문책하면 어떤 대답을 할지도 결정해두었다. '나한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는 잘 알지만 나도 전능하지는 않다. 당신들은 내가 멍청이들을 교육시키며 동시에 상단을 지휘할 것을 요구했고, 나는 그 지시를 따를 테지만, 그래도 내겐 조력이 필 요하다. 내가 그들을 받아들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내 판단이 마 음에 들지 않는다면 멍청이들을 모두 데려가고 제대로 된 당원들을 보내줘.' 물론 그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가?' 그러면 사이케라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 상단에 반 톤은 됨직한 망치를 들고 있는 레콘이 포함되어 있다 면 누구라도 공격하기 전에 재고하게 될 테니까. 그건 상당한 도움이 되지.' 사이케라는 그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망치는 정말 위풍당당 했다. 그리고 망치의 소유자 또한 철판 몇 장과 쇠사슬을 건네주면 그걸로 바느질을 해서 옷이라도 한 벌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해 보였다. 어디를 봐도 안전을 위해 상단에 합류 부탁을 할 필요가 없 는 레콘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사이케라는 술주머니 하나를 집어들고는 다시 일어났다. 레콘에게 다가간 사이케라는 어머니에게 안겨있는 아기처럼 그의 품 속에 앉아 있는 인간 소녀에게 말했다. "제미니. 왜 이렇게 먼 곳에 앉아있지? 불 가까이 오지 않고." 제미니라 불린 소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도 꽤 따스해요. 상단장님." "그래도 감기 나으려면 몸을 따스하게 해야지." "모닥불 근처에 있으면 앞은 따뜻하고 뒤는 추워서 정신이 없어요." 레콘이 사이케라에게 합류를 부탁한 이유는 그의 동행자가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다. 사이케라는 그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또 제미니가 낮 동안 수레에 누워 여행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제미니의 독감은 쉬 낫지 않았다. 사이케라는 레콘에게 술주머니를 건넸다. "좀 드시지요. 몸이 훈훈해질 겁니다. 후치." 후치라 불린 검은 레콘은 말없이 술주머니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한 쪽 팔로 제미니를 감싸안고 있었기 때문에 후치는 술주머니를 열기 어려웠다. 사이케라는 손을 뻗어 술주머니를 열어주고는 그 앞에 앉 았다. "상당한 추위죠?" 부리 안쪽에 술을 부어넣은 후치는 대화하기 싫다는 기색을 역력하 게 드러내며 말했다. "괜찮아." "제미니는 그렇지 않군요. 이 계절에 왜 여행을 하시는 겁니까? 목 적지가 어딥니까?" "앞쪽." 퉁명스럽게 대답한 후치는 술주머니를 사이케라에게 돌려주었다. 사 이케라는 그것을 들이마시고는 입 주위를 닦았다. 목구멍이 따스해졌 다. 그 때 제미니가 손을 내밀었다. "아플 때 술 마시면 안돼. 제미니." "잘 수 있도록 한 모금만 하죠." 사이케라는 제미니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제미니는 입만 조금 적시 는 정도로 술을 마시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술주머니를 사 이케라에게 돌려주었다. "좋은 술인 것 같은데 영 입맛에 안 맞군요. 확실히 몸이 안 좋은가 봐요." 제미니는 몇 번 콜록거리다가 괴롭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후치는 부리를 단단히 붙인 채 제미니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제미니의 숨 소리가 평온해졌다. 그녀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치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사이케라가 다시 술주머니를 건넸다. 말없이 받아든 후치 는 단숨에 주머니를 비웠다. 사이케라가 말했다. "겨울 여행은 정말 힘들지요. 이 짓거리 하느라 집구석에 엉덩이 붙 이고 있는 시간보다 밖에 싸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데, 겨울만큼 사람이 잘 죽어나가는 때도 없어요. 밤 동안 얼어죽는 놈, 빙판에 미 끄러져 죽는 놈, 폭설에 낙오해서 죽는 놈, 굶어서 눈 뒤집힌 늑대들 에게 물려죽는 놈. 끔찍하지. 내년엔 기필코 남쪽의 상단으로 옮겨달 라고 세퀴라도에 요청할 작정입니다. 안 들어주면 관두는 거지." 자유무역당원답지 않은 장광설을 늘어놓은 사이케라는 한 마디 거들 어보라는 듯이 후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후치의 부리는 요지부동이 었다. 사이케라는 두터운 옷 속에서 몸을 움츠렸다. 추위에 대해 계 속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야영지는 후미진 곳이 었고 또 상단의 짐수레들이 그들 주위를 막고 있어 그들을 괴롭히는 바람은 없었다. 사이케라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신 숙원은 어떻게 된 겁니까, 지멘?" 검은 레콘은 놀란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이케라는 그의 품속에 누워 잠든 애꾸눈 소녀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 정보에 의하면 당신은 그 말리라는 하늘치에서 황제와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지 요. 약점을 잡혔습니까? 아니면 그건 황제가 아니었습니까?" 지멘은 눈동자만 움직여 사이케라를 보았다. 늙은 자유무역당원은 코를 킁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우리 쪽에서는 그런 가설도 나왔습니다. 당신이 황제를 죽였지만 제국에 혼란을 주고 싶지는 없기 때문에 황제를 닮은 나가를 데려와 황제로 내세웠다는 거죠. 나는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 은 사람을 속이거나 너무 많은 사람을 음모자로 만들어야 가능한 이 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진짜 치천제일 겁니다. 맞습니까?" "내게 뭘 원하나." "정보입니다. 물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서." 지멘은 그 대가라는 말에서 사이케라가 아픈 아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지멘은 사이케라가 처음부터 두 사람의 정체를 짐작 하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 다고 해서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진짜 황제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알 바 아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해서 황제 곁에 있었던 겁니까? 황제가 당신의 접근을 허락했을 리가 없는데." "황제에게 물어봐." "당신은 숙원을 포기했습니까?" "나는 황제를 죽일 거다." 사이케라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해가 안되는군요. 그녀가 진짜 황제라면 당신을 접근시킬 리가 없죠. 그런데 접근시켰습니다. 그녀에게 접근했다면 당신은 그녀를 죽일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그녀에게서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죽이겠다고 말하는군요. 앞뒤가 하나도 안맞잖습니까?" "유감이군." 사이케라는 지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약점을 잡혀있는 겁니까?" 지멘은 침묵했다. 사이케라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사태를 설명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황제는 자신이 쥐고 있는 지멘의 약 점을 이용하여 지멘을 마음대로 이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멘이 황제를 죽일 거라는 말은 그 약점을 되찾았을 때 그러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지멘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이케라를 바라보았다. "왜?" "아, 우리와 황제는 사이가 나쁜 편입니다. 황제는 유료도로당을 좋 아하지요. 어쩌면 그녀는 제국 정부를 재건하면서 자유무역당을 고사 시킬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재건사업에서 배제시키고 우리 경쟁자를 육성해서 우리 숨통을 조이겠지요. 제국 실종 기간 동안 우리는 약화 되었기 때문에 그런 공격도 우리에겐 치명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습군. 황제가 없는 동안 너희들이 힘들어졌다고 말해놓고는 황제 를 없앨 암살자를 원한다고 말하다니." 사이케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황제가 우리 곁을 다시 떠난다 해도 자유무역당의 가치를 더 잘 이 해하는 후계자가 그 뒤를 바로 이으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겪은 문제들은 사실 계승이 곧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 어난 일이었지요." "지테를 시야니의 딸이 규리하 변경백의 어머니지?" "저희 당주님의 외손녀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그녀는 황위 계승자 가 될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유서 깊은 규리하 가문의 주 인이니까요." "치천제를 죽이고 규리하공을 황제로 옹위한다는 것이군." 사이케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미소 띤 얼굴로 지멘을 바 라보았다. 지멘은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대화라면 아실이 더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실은 감기와 술 몇 방울 때문에 발 갛게 변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지멘은 있지도 않은 바람이 아실에 게 닿는 것을 막으려는 듯 몸을 웅크렸다. "어려울걸." "왜지요?" "엘시 에더리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더 높지 않나?" "아, 예.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다행히도 칼리도백과 규리하공 은 성별이 서로 다릅니다." "둘이 결혼한다는 것이군." 사이케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 정도면 우리가 왜 당신을 도울 수 있는지 이해했을 겁니다. 그 러니 말해보십시오. 황제에게 어떤 약점을 잡혀있는 겁니까?" "안 도와줘도 돼."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겁니까?"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이케라는 다시 그를 설득해보려 했다. 그 때 저편에서 누군가가 상단장을 불렀다. 사이케라는 조금 기다리 라고 말하려다가 지멘의 무뚝뚝한 모습을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그 는 지멘이 생각해볼 시간을 주기로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지멘은 사이케라의 친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잠든 아실만 내려다보았다. 아실이 감기에 걸린다는 것이 지멘에겐 너무도 이상한 일처럼 느껴 졌다. 물론 아실이 한 번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실도 때 론 잔병치레를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작 감기 때문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듯이 행동한 적은 없었다. 아실의 태도는 오히려 그 반대쪽이었다. 니어엘 헨로에게 쫓겼을 때처럼 지쳐 쓰러질 정도로 힘들 때도 아실은 지멘을 끌고 다닐 수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병에 걸려 몸이 아플 때도 아실은 자기 몸을 혹사시키듯 움직이곤 했다. 그런 아실이 고작 가벼운 감기 때문에 여행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피로해한다는 것은 지멘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최후의 대장간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런지 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멘은 가슴이 아팠다. 아실을 제대로 간호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멘은 수염볏이 아실의 얼굴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실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 려왔다. 지멘은 그 숨소리에 집중했다. 황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멘은 고개를 들었다. 떠났던 사이케라가 벌써 돌아오고 있었다. 지멘은 그를 쫓아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사이케라가 말했다. "지멘. 당신 일입니다." "뭐?" "누가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지멘은 의아해했다. 치천제가 자신을 부르는 것일까? "누군데?" "그건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전하라더군요." 사이케라는 말을 끊고 잠시 머뭇거렸다.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케라를 보며 지멘은 눈을 찌푸렸다. 사이케라가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흐음. 그 사람은 황제사냥꾼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식기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말을 가지고 왔다고." 정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오기 전 성을 순찰하다시피 돌아다녔기 때문에 정우는 숨이 약간 가 빴다. 시중 들 사람을 모두 물러가게 한 정우는 혼자 방안에 남았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정우는 탈해가 어디 있는지 잘 안다고 생각했다. 두 번의 방화 사건 이후로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아는 탈해는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을 위치를 정해놓고 그곳에만 머물곤 했다. 그런 탈해를 불쌍하게 생각한 정우는 잠깐이라도 시간이 나면 그를 찾곤 했다. 정우는 성루나 규리하성 꼭대기, 번뜩이가 있는 마구간, 그리고 탈해의 방 중 한 곳에서 틀림없이 탈해를 찾아낼 수 있을 거 라 생각했다. 하지만 탈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면 정우는 탈해를 찾아낼 때까지 규리하성 안을 돌아다녔을 - 아마도 숨바꼭질을 하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 테지만 그 날 저녁에는 만찬회 약속이 있었다. 정우는 그 만찬회가 결국 농한기를 맞아 시간 이 난 유력자들을 불러 모아 변경백과 그들간의 결속을 재확인하는 단합 행사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그 만찬회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아 마도 규리하시 노인 위로 잔치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진짜 목적 때 문에 규리하공이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고 그래서 정우는 수색을 중단하고 참석 준비를 위해 돌아왔다. 탈해가 어디로 갔는지 안다 해도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 은 정우는 한숨을 쉬고는 사람들을 부르려 했다. 그 때 그녀의 아쉬 운 눈길이 문득 창가를 스쳤다. 정우는 탄성을 지르듯 입을 조금 벌 렸다가 재빨리 창가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인조새가 들어있는 새장이 있었다. 며칠째 계속된 눈 때문에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인조새는 졸고 있었다. 정우는 새장을 들어 벽난로가로 가져갔다. 활활 타오르 는 불 가까이로 새장을 가져가자 인조새가 눈을 떴다. "이야-옹!" "어머? 양친 중에 어느 분이 고양이……" 인조새의 혈통에 관한 흥미진진한 생각을 하던 정우는 인조새에겐 부모가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인조새에게 질 문했다. "새님, 탈해는 어디 있죠?" "일찍 일어나는 새는 일찍 일어나는 벌레밖에 못 잡지." "라수의 방? 아. 거기도 조용하겠군요. 고마워요." 어느새 새장 자체도 뜨거워졌기 때문에 정우는 재빨리 새장을 끌어 당겼다. 황급히 창가로 달려가 새장을 내려놓은 정우는 두 손을 후후 불었다. 정우는 탈해에게 라수의 방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없지만 도깨비니까 그것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라수의 방에 탈해가 있 다면 그것은 옆방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생각한 정우는 잠 깐 탈해를 만나보자고 결정했다. 그녀는 문으로 다가가 라수의 방에 들어가기 위한 조처를 취하고는 문을 열었다. 문 뒤편에는 어두운 방이 있었다. 정우는 의아해하며 라수의 방 안 으로 들어섰다. "탈해. 나 왔어. 왜 불도 안 만들어두고……" 무엇인가가 그녀를 나꿔챘다. 정우는 사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이 거칠게 이리저리 끌 려다녔고 쾅 하는 문 닫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찾아 든 어둠은 모든 것을 감추었다. 시야를 상실하고 당황해 하던 정우는 조금 후에야 누군가가 등 뒤에서 팔뚝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질식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나 거칠게 조르고 있 었다. 정우가 그 팔을 붙잡았을 때 그녀의 귓가에서 억누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목 옆에 칼이 있어. 꼼짝하지마." "지키멜?"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 "당신이 그렇게 저를 흔들면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요." 정우의 지적처럼 지키멜은 그녀를 붙잡은 채 자꾸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어딘가로 그녀를 데려가는 것 같았지만 지키멜 또한 어둠 때 문에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지키멜은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정우를 팽개쳤다. 정우는 바닥에 쓰러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녀의 동작이 중단되었다. 정우는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채 의자에 앉게 되자 그런 일 상적인 자세도 정우를 꽤 놀라게 했다. 놀람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을 때 무엇인가가 그녀의 가슴을 확 붙잡았다. 정우는 기겁하여 허리를 튕겼다. "움직이지마!" '처지를 바꿔 생각해봐요. 지키멜.' 그렇게 말하려던 정우는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붙잡은 것이 무엇인 지 깨달았다. 그것은 밧줄이었다. 지키멜은 정우를 의자에 묶고 있었 다. 정우는 보이지 않는 지키멜에게 의문의 표정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지키멜의 헉헉거리는 숨소리뿐이었다. 볼 수 없는 상태 에서 누군가를 의자에 묶는 일의 어려움과 흥분 때문에 지키멜의 숨 소리는 듣기 싫을 정도로 거칠었다. 정우가 의자에 단단히 결박되자 비로소 지키멜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우는 그녀의 숨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를 더듬더듬 찾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조금 후 갑자기 정우의 앞쪽에 괴물이 나타 났다. 깜짝 놀랐던 정우는 그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아마도 촛불인 듯한 빛이 나타났고 그 때문에 정우의 앞쪽에 는 묶여있는 그녀의 그림자가 라수의 방을 메우고 있는 여러 물건들 때문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정우는 안도하며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이 부셔서 정우는 다시 앞쪽을 쳐다보았다. 그 때 지키멜이 말했다. "무사장. 허튼 짓을 하면 정우는 죽어요. 알겠죠?" "아, 아무 짓도 않겠습니다." 탈해의 목소리였다. 정우는 반가운 얼굴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 았다. 그녀가 묶여있는 의자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또다른 의자가 있었고 그곳에는 탈해가 정우와 같은 모습으로 묶여 있었다. 탈해의 모습을 살펴본 정우는 아무런 이상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탈해. 이건 납치놀이는 아니겠지?" "그랬다면 참 좋을 텐데." 탈해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우의 뒤에 있던 지키멜이 말했 다. "미안해요. 정우. 이해해달라고 하진 않겠어요. 나는 이런 극단적인 방법밖에 쓸 수가 없어요. 나는 나라도 잃었고 병사도 없어요. 연인 마저 내 바람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했어요. 하늘치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당신과 달리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건 내 몸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한 거예요. 내 행동에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이해할 수는 있죠?" 정우는 머뭇머뭇 말했다. "저, 이해하길 바라세요, 이해하지 않길 바라세요?" "네?" 어리둥절해하던 지키멜은 자신이 앞뒤가 안맞는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키멜은 맥빠진 한숨을 내쉬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미치겠어." "괜찮아요, 지키멜? 앞쪽으로 와주세요." 침묵이 조금 이어지다가 지키멜이 말했다. "아뇨. 당신 얼굴을 보지는 않겠어요." 지키멜의 목소리는 차분해져 있었다. 정우는 자신의 어깨를 짚는 손 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정우는 지키멜의 손을 보았다. 그 손은 미세 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키멜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무사장을 인질로 당신을 움직일 수는 없었어요. 무사장은 두 번 죽 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당신을 인질로 삼기로 했어요. 무사장에게 라 수의 방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아냐고 물어봤어요. 자해하겠다고 협박 했더니 내가 놀랄 정도로 열심히 시도해서 결국 알아내더군요." "미안해. 정우." 탈해는 신음처럼 말했다. 정우는 그를 돌아보았다. "아냐, 아냐.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네가……" 지키멜이 정우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정우는 입을 닫았고 그러자 탈해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우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지키멜이 말 했다. 설명하는 듯한 그녀의 어투는 스스로 침착을 되찾으려는 시도 같앗다. "이곳에 들어온 다음 무사장과 함께 당신을 기다렸어요. 어두워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어요. 바깥은 밤인가요?" "아뇨. 아직은." "그래요. 알겠어요. 당신이 들어온 다음의 일은 당신도 알겠지요. 이제 당신은 제 인질이에요." "어떻게 할 거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정우가 다시 질문하려 했을 때 갑자기 그녀 의 의자가 기우뚱 움직였다. 정우는 의자가 옆으로 돌아 탈해에게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우는 탈해와 등을 마주하게 되었다. 다시 밧줄이 나타나서 두 사람 을 서로 묶기 시작했다. 그 때 정우는 그들을 묶고 있는 지키멜을 보 게 되었다. 지키멜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그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 다. 지키멜의 눈은 계속 보고 있기 힘든 기이한 빛을 뿜고 있었다. 밧줄로 정우와 탈해를 묶으며 지키멜은 중얼거렸다. "대단하지 않아요? 여긴 완벽한 감옥이에요. 당신들 두 사람이 이곳 에 있으면 규리하성에서 이곳을 드나드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 지요. 그러니까 내가 계속 당신들을 감시하고 있을 필요가 없죠. 그 리고 나는 성 안 어디에서든 여기로 올 수 있고…… 정말 멋지죠." 지키멜은 히죽히죽 웃었다. 정우는 그만 고개를 돌려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그 때 무엇인가 차가운 액체가 그녀에게 뿌려졌다. 냄새를 맡은 정우는 그것이 기름임을 깨달았다. 지키멜은 탈해와 정 우에게 기름을 흠뻑 뿌리고 있었다. "무사장. 내가 나간 다음에 불로 밧줄을 끊어보려는 시도는 안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당신은 어르신이 되고 규리하공은 숯덩이가 될 테 니까." 탈해는 지키멜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정우가 말했다. "당신은 나갈 건가요?" "예. 나가야지요. 물론 가끔 돌아올 거예요. 당신들에게 음식도 가 져다줘야 할 테고 기름도 다시 뿌려야 할 테니까요. 계속 앉아있으려 면 힘들겠지만 좀 참아줘요. 다행히 두 사람이잖아요. 이야기 상대가 있으니 괜찮겠지요." "나가서 뭘 어쩔 생각이죠?" 촤악! 지키멜은 마지막 기름을 쏟아부었다. 정우는 어깨를 움찔했 다. "당신은 알 것 없어요." 정우는 눈으로 들어오는 기름 때문에 눈을 꼭 감았다. 눈꺼풀 저편 으로 불빛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발소리도. 지키멜이 촛 불을 들고 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정우는 눈에 기름이 들어오는 것을 감수하고 눈을 떴다. 그 때 지키멜이 촛불을 불어 껐다. 정우가 본 것은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각형의 빛과 그 속을 움직이는 그림자 뿐이었다. 곧 문이 닫혔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5. 불가능을 희망하는 태도 (4) | 2004·10·31 11:06 | HIT : 30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5-4 관련자료:없음 [4938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0-31 06:42 조회:143 피를 마시는 새 35. 불가능을 희망하는 태도 - 4 밖으로 나온 지키멜은 문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했어.' 지키멜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엔 기름이 묻어있었지만 단검은 아직도 단단하게 쥐어져 있었다. 지키멜은 움찔 하며 손을 폈고 그러자 기름 묻은 단검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갔다. 지키멜은 발등을 찔릴까봐 황급히 발을 끌어당겼지만 단검은 이미 땅에 떨어진 후였다. 지키멜은 이상하다는 듯이 바닥에 떨어진 칼을 바라보았다. '했어. 저질러버렸어.' 정신을 헝클어놓는 취기 같은 흥분이 빠져나가며 지키멜은 추위를 느꼈다. 그녀는 근육이 뒤틀릴 정도로 몸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비틀 거리며 걸어간 지키멜은 가까이 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곧 지키멜은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우를 만나러 온 사람이……' 들어올 리는 없었다. 그곳은 탈해의 방이었다. 지키멜은 탈해의 방 문을 통과하여 라수의 방으로 들어갔고 따라서 그녀가 나온 곳 또한 탈해의 방이었다. 하지만 지키멜은 정우의 방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굉장히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머리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지 키멜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생각하지 말자. 냉정해야 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그냥 밀고 가 는 수밖에 없어. 세상에, 내가 규리하 변경백과 즈믄누리의 무사장을 납치했어!' 계획의 첫 번째 단계는 끝났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가 뭐더라?' 떠오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두 번째 단계는 없으니까. 지키멜은 자기 목을 조르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녀가 아무런 목표도 없이 행동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지휘 하려는 곡은 대강 이러하다. 서장에서는 규리하 변경백과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억류된다. 그리고 그들의 부재 기간 동안 황제와 규리하 사 이의 관계가 악화된다. 고조되는 긴장. 마침내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 되었을 때 변경백과 무사장은 억류에서 풀려난다. 결국 그 두 사람이 야말로 규리하에 있는 진정한 힘이니만큼 그들을 가둬둔 채 황제와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풀려난 두 사람은 전쟁이 불가피한 상 황임을 깨닫고는 후시지탄 속에서도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 그 다음 은 아마도 화려한 전투 묘사로 이루어진 절정 부분. 그리고 황제의 장엄한 최후와 제국의 사분오열을 노래하는 비장한 종장. 박수. 실로 아름다운 곡이지만, 지키멜에겐 '규리하 변경백과 즈믄누리의 무사장 을 억류' 부분을 작곡할 시간밖에 없었다. 탈진한 듯한 기분 속에서 지키멜은 어떻게 황제와 규리하의 관계를 악화시킬지 고민했다. 하지만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그녀의 눈길은 계속해서 문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자신 의 교수형이 집행될 것임을 아는 상태에서 지키멜은 라수의 방에 대 해 무관심하기 어려웠다. 지키멜은 라수의 방으로 돌아가 두 사람의 결박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자신의 몸을 부여잡았다. 그 때 무엇인가가 가슴에 배기는 것을 느꼈다. 지키멜은 의아하여 가슴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서 약병을 꺼내든 지키멜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두 번째 단계가 떠올랐다. 지키멜은 다시 벽에 몸을 부딪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무 의식 중에 두 번째 단계를 결정해두었다. 아니, 두 번째 단계의 일부 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그 약병 하나로 규리하와 황제 사이의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관계에 흠집은 낼 수 있을 것 이다. 지키멜은 희열 속에서 약병을 바라보았다. 약병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녀의 희열이 빠르게 사라졌다. 지키멜은 입술을 떨며 약병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녀 는 독물학에 대해 밝은 편은 아니었다. 귀족들이 일상적으로 익히는 정도, 즉 독살 시도를 당했을 때의 응급 처치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지식을 시험해볼 기회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없었기에 지키멜은 독에 대한 자신의 저항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키멜의 손에 있는 것은 그녀의 눈 앞에서 홀빈 퍼스 노후 작을 절명시킨 것과 같은 것이었다.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키멜은 그녀 혼자 목격했던 노후작의 최후를 떠올렸다. 노후작은 괴로움에 몸을 뒤틀거나 먹은 것을 토하 거나 하지는 않았다. 독배를 비운 홀빈 퍼스는 몇 번 빠르게 호흡한 다음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격렬한 반응이 없기에 더 소름끼치는 죽 음이었다. 지키멜은 진저리를 쳤다. '밀고 나갈 수밖에 없어.' 지키멜의 두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약병을 놓칠까봐 두려워진 지키 멜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손은 무릎 위에서도 덜 덜 떨렸고 그러자 약병이 손 안에서 꿈틀거렸다. 지키멜의 눈에서 눈 물이 흘러나왔다. '돌이킬 수 없단 말이야.' 이렇게 떨려서는 제대로 할 수 없다. 지키멜은 심호흡을 하다가 작 은 비명처럼 말했다. "세 왕국!" 떨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지키멜은 화를 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 다. 그녀는 황제를 저주했다. 사라티본 부대를 이끌고 온 스카리 빌 파도 저주했다. 황제에게 돌아가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추겠다는 시 오크 지울비도 저주했다. 정우와 탈해도 그녀의 저주를 피하지 못했 다. 그녀가 정말 가지고 싶은 능력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 서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밀고 와버린 자기 자신까지 저주한 다음부 터 지키멜은 별 이유도 없이 아무나 저주했다. 떠오르는 이름들을 닥 치는대로 저주하다보니 어느새 떨림이 가라앉았다. 지키멜은 다시 약 병을 바라보았다. 변경백과 무사장이 사라지고 독행왕이 음독한 모습으로 발견된다면, 사람들은 독행왕이 두 사람을 납치한 다음 자살시도를 했다고 생각하 기보다는 누군가가 규리하공과 무사장을 납치하고 독행왕에겐 독을 먹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납치한 다음 자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니 까. 그러면 지키멜은 자연스럽게 납치 혐의를 벗게 될 것이다. 그리 고 규리하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격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운이 좋아서 규리하 사람들이 자신들이 황제에게 공격당한 거라고 생 각하게 된다면 완벽한 일석이조다. 물론 인사불성을 헤매는 지키멜의 모습을 보고 시오크가 그녀 곁에 남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행운은 그녀가 죽을 정도로 괴로워한 다음 가까스로 살아났을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한 잔의 독은 홀빈 퍼 스를 절명시켰다. 반드시 극소량이어야 한다. 지키멜은 갑자기 약병을 열었다. 지키멜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약병을 입에 가져갔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병을 기울였다. 딱 한 방울이 그녀의 입에 떨어졌다. 지키멜 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재빨리 약병 뚜껑을 닫았다. 지키멜은 창가로 다가가 덧창을 열고는 밖으로 약병을 힘껏 집어던 졌다. 창가를 떠났을 때 지키멜은 뱃속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반응은 지키멜을 정말 두렵게 했다. 지키멜은 황급히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탈해의 방안에 쓰러져 있는 것보다는 복도가 나을 것이다. 복도를 따라 두어 걸음 걸었을 때 지키멜은 갑자기 눈이 밝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눈앞이 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이는 것은 점점 줄어들었다. 지키멜은 무릎에서 둔한 충격을 느꼈다. '내가 무릎을 꿇은 건가?' 그런 듯하다. 지키멜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머리부터 바닥에 부딪쳤 지만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키멜은 자신이 아마 복도에 엎드려 있을 거 라고 생각했다. 환해졌다고 생각한 시야가 다시 어두워졌다. 지키멜 은 자신의 속눈썹인 듯한 그림자를 보았다. 위아래의 속눈썹이 서로 얽히고 있었다. 곧 눈이 감길 것이다. 눈이 감기는 시간은 너무도 길 고 또한 너무도 짧다. 지키멜은 공포가 자신의 정신을 으드득으드득 씹어먹는 것을 느꼈다. 얼음물 속에 빠진 듯한 추위가…… 갑작스럽 게 의심이 불꽃처럼 떠올랐다. 만약 눈을 뜨지 못하면? 지키멜은 대답하지 못했다. 죽음이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눈을 뜬 아실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늦은 아침이라는 것과,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 머리가 아팠고 몸은 밤새도록 수천 마리의 고양이가 핥고 지나간 것 같았다. 감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아실은 뭐가 이상한지 궁금해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 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실은 뭐가 이상한 것인지 깨달았 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머무는 야영지의 아침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소음들이 없었다. 아실은 허물을 벗듯 몸을 둘둘 만 담요 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녀 곁 에는 조그마한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아실은 무닥불 옆에 앉아 상 한 고기처럼 느껴지는 얼굴을 주무르고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위에 상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잠든 동안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밤 동 안 머물렀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곳은 아실이 잠든 야영지 였다. 상단은 새벽 무렵에 떠났고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만 남은 모양 이다. '나만?' 아실은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멘이 보이지 않았다. 아 실은 당황하여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지멘이 나를 버리고 상단과 함께 떠난 건가?' 그 생각을 비웃으려 했지만 아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약간 떨렸고, 그래서 아실은 무릎을 바닥에 댄 채 몸을 세웠다. 밤새 눈이 살짝 내렸는지 메뿌리들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그녀 주위 의 그늘진 곳에도 싸락눈이 마른버짐처럼 쌓여 있었다. 메마른 풀잎 과 울퉁불퉁한 바위들, 낙옆 무더기 속에 서있는 앙상한 나무들은 있 었지만 지멘은 보이지 않았다. 비명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아실은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손으로는 바닥을 짚으며 아실은 옆으로 앉았 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입술에서부터 목구멍 깊은 곳까지 바싹 말 라버린 것 같았다. 침을 삼키려 했던 아실은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격렬한 기침이 터져나왔다. 아실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허파가 불타는 기분을 느낄 때까지 기침했다. 아실은 눈 주위를 닦았다. 손에 묻은 흙이 얼굴을 찔렀다. 아실은 처량한 기분을 느끼며 손등으로 다시 눈 주위를 문질렀다. 얼굴을 대 강 정리한 아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다리 사이에 손을 파묻었다. 모닥불 한 군데가 흐트러져 있었다. 기침을 하면서 그녀가 찬 모양인 지 재가 흩어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아실은 멍하니 발끝으로 흩어진 나뭇조각들을 모닥불 안으로 밀어넣었다. 모 닥불을 정돈한 아실은 무릎을 세웠다. 아실은 세상이 진력난다는 듯 이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허벅지를 감싸안았다. 그러자마자 소리가 들려왔다. 아실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 소리에 집중했다. 바람 소리? 나무 에서 눈이 떨어지는 소리? 그것은 규칙적으로 들렸다. 쿵, 쿵, 쿵. 아실은 그것이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아주 큰 사람이 땅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실은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았다. 쿵, 쿵, 쿵. 아실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두 무릎과 얼굴 사 이에 갇혀 방황하는 호흡 소리를 들었고 앞머리카락과 바지가 비벼지 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곧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그 소리들을 모두 집어삼켰다. '가까이 왔어. 가까이…… 옆이야.' 쿵! 그리고 어색한 고요가 있었다. 아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아실은 침을 삼켰다. 이번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시 목소리 가 들려왔다. "아실?" 아실은 적당한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시다는 표정으로 옆을 바라본 아실은 지멘의 가슴 근처에서 시선을 멈추었 다. 아실은 두 팔을 펼쳤다. 기지개의 동작을 약간 과장되게 취한 아 실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 음, 앉아있다가 졸았나 보네. 푹 잔 것 같은데. 음. 어디 갔었 어요? 일어났을 땐 안 보이던데." "상단이 떠나는 것 확인하고 왔어." "그래요? 음, 그런데 왜 우리는 함께 안 간 거죠?" 그렇게 말한 다음 아실은 시선을 더 올렸다. 지멘의 얼굴이 보였다. 지멘은 아실을 마주보며 바닥에 앉았다. 아실은 계속 미소를 지었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차다. 지멘은 팔짱을 꼈다. "네가 자는 동안 누가 우리를 찾아왔어." "누가?" "아이저 규리하가 보낸 사람." 아실은 휘파람을 불듯 입술을 오므렸다. 지멘은 수염볏을 긁었다. "와달라고 하더군." "어디 있는데요?" "하인샤 대사원." 아실은 두 손을 모아 손장난을 했다. 손가락을 잡아당기다가 얽어서 꼬고 비틀었다. 그러다가 아실은 뺨을 받친 채 말했다. "갈 거예요?" "약속했어." "그 때…… 즈라더의 도끼를 납병하러 마지막 대장간에 갈 때?" "응. 그 때도 함께 황제와 싸우자고 했어. 즈라더의 도끼를 최후의 대장간으로 가져가야 했기 때문에 거절했지. 다음에 다시 부르겠다고 했어." 아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과 이가 떨릴 것 같았 다. 그녀는 그저 심심해서 그러는 것처럼 입술을 질겅거리며 모닥불 을 바라보았다. 아실의 시선을 따라간 지멘은 모닥불을 보고는 그것 이 조만간 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땔감이 없었다. 지멘은 몸을 옆으로 기울여 담요를 집어들어서는 아실의 등을 덮었다. 지멘 이 담요를 여밀 때 아실이 말했다. "황제와 관련된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지멘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담요를 세심하게 여민 지멘은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풍경을 이곳저곳 바라보았다. 아실은 밥상머리에서 꾸지람을 들은 아이처럼 시들한 표 정으로 말했다. "당신을 부른 것을 보니 전 변경백께서는 황제와 싸울 결심을 했나 보군요. 스님들만 있는 하인샤 대사원에서 무슨 싸움 준비를 했는지 는 모르지만." "아실." "예?" "나도 황제와 관련된 사람이야." 아실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군요." "우리 둘 다 그랬지." "예." "가기 싫어?" 아실은 고개를 떨구었다. "갈 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죠." "가고 싶지 않아?" "괜찮아요. 하인샤 대사원으로 가요. 음. 먼저 뭐 좀 먹고." 부리를 열던 지멘은 아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부리를 도로 닫았 다. 아실은 배낭으로 다가가 그것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 실이 움찔했다. 지멘은 무슨 일인가 했지만 아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손을 움직였다. 아실은 자신이 왜 배낭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지멘의 배낭이 이곳에 있다면 지멘은 떠난 것이 아니다. 아실은 어처구니 없다기보다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낭 안쪽에 머리를 묻고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아실은 조금도 먹고 싶 지 않은 것들을 열심히 찾았다. 불행한 소식만 가져오는 자들에게 지친 나머지, 규리하의 총리대부 리시오 느베라이는 불운한 소식을 가져온 다음 전령의 목을 부러뜨려 놓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진짜로 전령의 목을 부러뜨렸을 리는 없지 만 복도를 황급히 지나던 그를 붙잡은 사람이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 솔이라는 것은 리시오에게 일종의 정당성 같은 것을 부여했다. 율형 부사니까 참는 거라고. 다른 녀석이었다면 정말 목을 부러뜨렸을걸. 사라말은 자신의 목을 자꾸 바라보는 리시오를 의아하게 여기며 용 건을 말했다. "조금 전 어떤 병사가 지나가던 나를 붙잡고 규리하공을 보지 못했 느냐고 쾌활하게 묻더군요." "그래서?" "혹 병사가 되기 전에 연기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면 포기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얼굴은 어떤가?" "유언장은 어디 두셨냐고 묻고 싶어지는군요." 총리대부는 이를 악물었다. 사라말 아이솔은 규리하 정부에 정식으 로 소속된 인물은 아니지만 규리하공은 그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리 시오는 주군의 모범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복도 옆의 기둥으로 사라 말을 끌고 갔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긴 리시오는 듣는 귀가 없는지 살펴보고는 재빨리 속삭였다. "간단히 말하지. 각하께서 실종되었네." 사라말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즈믄누리의 무사장 탈해 머리돌 또한 종적을 감췄어. 자네 라면 두 사람이 딱정벌레를 타고 즈믄누리로 도망친 거라고 생각하겠 지?" "제가 왜요?" '그야 당신은 비정상이니까'라고 말할 뻔한 리시오는 가까스로 제때 입을 단속했다. "아, 그건 내가 그렇게 믿고 싶다는 의미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 긴 어렵군. 가장 나쁜 소식이 있어.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가 독극물 에 중독되어 인사불성이 된 채 발견되었어. 무사장의 방 바깥 복도에 서." "인사불성이라고요?" "그래. 후작을 진찰한 의사는 그녀의 목숨에 대해 아무 것도 보장할 수 없다고 하더군. 지금 후작은 자기 방에 누워있어. 나는 도무지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군. 자네는 뭐 떠오르는 것 없 나?" 겉으로 보기에 사라말의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리시오는 율형부사가 되기 전에 연기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면 참 아까운 포 기라고 생각했다. 완벽하다 할 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사라말이 말했 다. "물론 성문을 지키는 병사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무사장의 번뜩이도 그대로 있겠군요." "어, 어떻게 알았나? 설마 자네?" "그야 그럴 경우엔 추적대가 출발하지 병사들이 당황하여 돌아다니 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리시오는 자신이 세상에서, 아니, 최소한 규리하에서는 가장 멍청한 인물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사라말이 말했다. "라수의 방은 조사해보셨습니까?" "라수의 방? 거긴 들어갈 수 없어. 거기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은 규리하공뿐이야." "그리고 즈믄누리에 익숙한 탈해 머리돌 무사장이 알지도 모르는군 요. 흐음. 이거 재미있군요. 이 성에서 라수의 방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종적을 감췄단 말이군요. 라수의 방이 수상하지 않습니 까?" "하지만 들어갈 수가 없는데? 비나간후를 데려왔던 도깨비들도 벌써 떠났고 이 성에는 즈믄누리를 방문이라도 해봤던 사람이…… 자네 혹 시 거길 방문한 적이 있나?" 사라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시오는 실망하여 어깨를 늘어뜨렸 다. 그 때 사라말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따라오십시오." 사라말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걸어갔다. 리시오는 허둥지둥 그 뒤 를 따랐다. "어디로 가는 건가?" "규리하공의 방." "왜? 라수의 방에 들어가려면 성 안 어디에서든……" "방법을 모르잖습니까." "규리하공의 방에 그런 방법이 있나?" 리시오는 반색했다. 하지만 사라말은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 대답도 없이 걸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정우의 방에 들어섰다. 혹 규리하공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리시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바람은 성취되지 못했다. 한편 사라말은 한 번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창가로 다가갔 다. 조금 늦게 그에게 다가간 리시오는 사라말이 새장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고 당황했다. 사라말은 새장을 들어올려 벽난로가로 가져갔다. 하지만 불이 꺼져 있었기에 사람을 불러 벽난로에 불을 붙이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하인이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나가자 사라말은 새장을 벽난로 앞에 내려놓았다. 곧 잠들어 있던 새가 눈을 떴다. 리시오는 혹여나 하는 기대감과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창피함을 동시에 느끼며 새장과 사라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새장을 향해 허리를 굽힌 사라말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규리하공은 어디 계신가?" "미나리아재비의 조카는 미나리."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폈다. "역시……" 리시오는 숨을 멈춘 채 율형부사를 바라보았다. 율형부사는 날카로 운 표정으로 총리대부에게 말했다. "사람은 새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군요." 리시오는 불운한 소식을 가져온 전령에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던 짓을 율형부사에게 저지를 뻔했다. 만약 사라말이 즉각 몸을 돌려 그를 떠 나지 않았다면 리시오는 그의 목을 붙잡고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모른 다. 문으로 다가간 사라말은 곧 문을 노려보고 고민에 빠졌다. 이젠 기 대감이 많이 희석된 리시오는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 다. "뭐 짐작가는 거라도 있나?" "노력해 보지요. 이 문은 당분간 한가할 테지요?" "그럴 거야."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리시오는 깜짝 놀라 바깥을 바라보았고,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는 자신을 원망했다. 사라 말은 밖으로 나가라는 뜻으로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그럼 이 문을 조수로 쓰겠습니다." 대답도 하기 싫었던 리시오는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문이 닫혔다. 뒤로 돌아선 리시오는 문쪽을 향해 매우 무례한 손짓을 해보였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사라말과 눈이 마주친 리시오는 손을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굳어버 리고 말았다. "뭐, 어, 어떻게? 어?" "실험 중입니다." 사라말은 리시오의 손짓에 아무런 비평도 보내지 않은 채 문을 도로 닫았다. 리시오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때 다시 문이 벌컥 열렸 다. 사라말은 바깥을 한 번 내다보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리시오는 이 짓이 계속될 거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해보였던 손짓을 떠올리고 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스무 걸음도 가기 전에 총리대부는 연기자의 꿈을 품었다면 포기하 는 것이 다행인 듯한 병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병사는 아무렇지도 않 다는 표정으로 대단한 일이 발생했음을 알려주는 재주를 부리며 말했 다. "대부님. 황제 폐하로부터 규리하공에게 내리는 사어가 왔습니다." "뭐? 아, 그래. 알았다. 빨리 가자." "예? 하지만 규리하공께 직접……" "내가 책임진다!" 리시오는 병사를 앞질러 달음박질 치듯 달려갔다. 병사는 곤혹스러 운 모습으로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뱀단지가 보관된 방으로 달려가며 리시오는 더욱 커지는 불안감을 느꼈다. 단지 사어를 받아야 할 규리하공이 없다는 것 때문에 느끼는 불안이 아니었다. 리시오는 미신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흉흉 한 때에 온 황제의 사어가 좋은 내용일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좋은 내용이기는커녕 지독한 소식일 것 같다는 예감만이 자꾸 만 그를 괴롭혔다. 빽빽히 들어선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용케 파고든 햇살이 방울 방울 떨어졌다. 암흑의 키보렌이 갈매빛으로 깨어났다. 햇빛의 침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키보렌의 아침은 밤과 낮이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숲이 두꺼운지 성긴지에 따라 그 아래쪽의 밝기는 극 명하게 달랐다. 몇 걸음 걸으면 낮이고 다시 몇 걸음 더 걸으면 아직 밤이다. 혹은 좌우에 밤과 낮을 둔 채 걸을 수도 있다. 어떤 곳은 위 아래로 낮과 밤이 쌓여있다. 낮 속에 떠있는 거미줄에서 새벽녘에 맺힌 이슬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이슬은 다시 밤으로 들어가 땅 위를 기어다니는 딱 딱한 나무뿌리에 부딪혀 부서졌다. 여상히 볼 수 있는 그 모습을 뚫 어지게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레콘 론솔피는 아침의 이곳저곳에 많은 이슬이 매달려 있음을 깨달 았다. 론솔피는 근처에 큰 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무룬강에 가까이 왔나 보군. 이젠 정말 돌아가야겠어. 론솔피." 론솔피는 아래쪽을 보았다. 사모 페이가 경사진 햇살 속에 서서 그 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론솔피는 투덜거렸다. "그렇군." 론솔피는 부리를 살짝 부딪혔다. 몇십 미터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든 키보렌에서 하텐그라쥬까지 가려면 무룬강을 따라 움직이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다. 론솔피는 도끼창을 어깨에 걸어 양손을 얹었 다. "알았어." 그렇게 대답했지만 론솔피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사모가 떠나 는 모습을 보고 움직이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사모는 론솔피를 향해 미소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대로 떠나는 대신 그녀는 팔을 들어 햇살 속에 내밀었다. 키보렌의 좁은 틈을 통해 새어들어온 햇살 은 가늘었다. 사모는 팔 전체에 햇빛이 닿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천 천히 움직이며 말했다. "고마워." "뭐가?" "여러 가지. 우선 밤새도록 함께 온 것도 그렇고." "길이 같잖아. 어차피 나도 악타그라쥬로 가야 하니까." "속도는 다르지." 론솔피는 부리를 부딪쳤다. 사모는 부드럽게 몸을 돌려 반대쪽 팔 또한 데웠다. 밤새 식은 체온을 다시 데우는 그 행동은 인간의 세수 처럼 나가들의 아침 일과다. 보통은 햇빛이 잘 비치는 곳을 찾아 가 만히 서있는 편이지만 가느다란 빛만 이용할 수 있었던 사모는 느린 춤을 추듯 움직였다. 햇빛을 찬미하는 무용수 같았다. "그리고 그 레콘 이야기 해준 것도 고마워." "주테카 말이야?" "그래. 내 말 황당하게 들렸을 텐데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줘서 고 마워. 네 말처럼 그 레콘이 요술쟁이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에게 말할 땐 조심스럽게 말해줘." "왜?" "그 숙원 때문에. 정의 실현이라. 참 난감한 숙원이군." "흐음." 론솔피는 도끼창을 어깨에서 내려 나무에 기대놓고는 나무 뿌리에 걸터앉았다. 사모는 눈을 감고는 팔을 뒷짐진 채 빛 속에서 천천히 돌며 몸을 데웠다. 생각에 잠겼던 론솔피가 말했다. "뭐가 문제야? 정의는 사람마다 다른 거라서? 그래서 주테카가 추구 하는 정의는 모든 사람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야?" 사모는 빙그레 웃었다. "거기에 대해 생각 많이 해봤군. 고마워." "뭐 걷다 보면 잡생각 많이 하게 되니까. 어쨌든 그게 문제인 거 야?" "그렇지 않아." "아니라고?" "론솔피. 사람마다 다른 모습인 사랑은 부정되지 않는데 정의는 왜 사람마다 다르다는 이유로 그렇게 자주 천시되는 것일까? 심지어 그 런 것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말이야. 사랑은 쉽지만 정의를 지 키는 것은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사랑도 결 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론솔피는 멋쩍은 얼굴로 수염볏을 주물럭거렸다. 사모가 말했다. "네 말처럼 정의는 사람마다 달라. 때론 두 사람의 정의가 대립하기 도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의가 부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 가 치가 깎이는 것도 아니야. 정의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해. 주테카가 추구하는 정의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판단은 유보하 겠지만,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이유로 주테카가 모든 사람과 상 관없는 숙원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짓지는 않겠어." "그럼 뭐가 난감한 거지?" "정의와 요술은 반대되거든." "응?" 느리게 움직이는 햇빛을 따라 사모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우아한 발놀림으로 허리와 다리를 차례로 데웠다. "정의(正義)를 가장 간단히 정의(定義)하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거지. 내 목숨과 네 목숨은 같다. 따라서 내 목 숨과 네 목숨은 똑같이 대해야 한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런데 요 술은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을 같게 만드는 것이지. 주테카가 세 번째 레콘이라면 그는 요술쟁이여야 하는데 정의를 사랑한다면 그 역 할을 수행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굉장히 머리 아픈 이야기군." 론솔피는 성이 난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성이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사모도 잘 아는 일이었다. 론솔피는 주무르던 수염볏을 한 번 튕기고 말했다. "나는 그런 골 복잡한 이야기 별로 안 좋아해. 그런데 네가 하는 이 야기는 그럭저럭 들을 만하군.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지? 주테 카에게 말할까, 말까?" "네가 결정해." "이봐. 나는……" "너를 믿는다. 넌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 전부를 들었고 그것을 다 이해했어. 그렇다면 넌 나와 같아. 나라고 해도 네가 내리는 결정 보다 더 현명하게 결정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네가 관찰해서 결 정하도록 해." 론솔피는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난 네 이야기 이해 못했어." "이해했어." "그런 척한 거야. 젠장. 난 네가……" 론솔피는 말끝을 삼켰다. 두 다리를 데운 사모가 춤 아닌 춤을 끝내 고는 론솔피를 향해 섰다. "내가, 뭐?" 론솔피는 벼슬을 뒤로 쓸어넘겼다. 하지만 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그것은 빳빳하게 섰다. 론솔피는 한숨을 토하듯 말했다. "제기랄, 너는 시모그라쥬군에게 가서 싸우라고 했겠지. 분쟁으로 레콘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 세 명의 레콘을 찾으려고 도대체 몇 명이나 죽은 거야?" "많이 죽었지. 하지만 그건 세 명의 레콘을 찾는다는 목적만으로 일 어난 전쟁은 아니야. 나는 다른 이유도 있다고 말했어." 론솔피는 답답하다는 듯이 목 주위의 깃털을 움켜쥐었다. "그게 무슨 이유인데?" "그건 너와는 별 상관이 없어." "말해줘." "……차기 황제의 계승 절차는 아마도 이런 식이었을 거다. 나를 포 함하여 차기 황제의 경쟁자가 다 제거된 다음 마지막 경쟁자인 그녀 가 지멘의 의해 죽는 것." "그 이야기는 들었어. 지멘이 말해줬어." "그래.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내가 죽지 않았고 시모그라쥬공 이 죽지 않았고 지멘이 황제를 죽이지도 않았는데 황제가 실종되었 어. 난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세상 으로 나왔어. 그리고 내게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기회? 무슨 기회?" "레콘들을 도울 기회." 론솔피는 부릅뜬 눈으로 설명을 촉구했다. 사모는 설명했다. "나는 황제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황제가 무슨 사고를 겪었든 말리에 있 는 세 번째 벽난로방의 나가들이 그녀를 구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는 당장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그녀가 그대로 신이 된 거라고 추 리했지. 엘시가 발케네공을 물리쳐 황제의 복수를 한 다음 제위에 오 르면, 원래 계획과는 좀 다르지만 그럭저럭 결과는 비슷하게 되니까. 그런데 엘시는 황제의 복수를 하지도 않았고 제위에 오르지도 않았 다. 대신 사람들에게 귀족원 회의 개최를 요구했지." "그랬어." "엘시가 경쟁자 제거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하게 해야겠 지. 그는 혼란을 종식시킨 영웅이 되어야 해. 누군가 그 역할을 맡아 야 되고, 나는 나 스스로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시모그라쥬 공에게 나를 팔아서 그가 당장 전쟁을 시작할 수 있게끔 해주었지. 그건 약간 어긋난 황제의 계획이 바로잡아지도록 돕는 일이었어. 그 리고 또한 나 자신에겐 세 명의 레콘을 찾을 기회였어." 론솔피는 수염볏을 움켜쥐었다. "그것이 네 바람이라면…… 원시제나 치천제의 계획에는 신을 상대 할 레콘 세 명을 찾아낸다는 이야기가 없었군." "없었다. 이미 말했듯이 치천제는 분리주의를 거부해. 그녀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할 생각이었어. 레콘들을 위해 특별히 셋을 찾아준 다는 것은 그녀에겐 맞지 않는 생각이지. 하지만 나는 레콘의 약점 때문에 레콘에겐 세 명을 찾아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일조 한 분란을 통해 그 셋을 찾아내면 난 그들에게 신을 상대할 방법을 결정하라고 말해줄 생각이었어. 끝내 실패할 뻔했지만, 내가 하텐그 라쥬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 다름 아닌 레콘이 기에 나는 이 희망을 너에게 넘기기로 했다." "바로 그거야!"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론솔피는 자기 깃털을 모두 뽑고 싶은 사 람처럼 보였다. "바로 그거야. 왜 너만 그렇지?" "내가 뭐?" "아무도 레콘을 걱정하지 않아. 레콘도 다른 사람에게 걱정해달라고 말하지 않아. 그런데 넌 왜, 삼십만 년 후의 미래를 계산한다느니, 일만육천 년 동안 살아남겠다느니 하는 그 잘난 두 황제도 안 그랬는 데 너는 왜 우리를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갈바마리가 두 얼굴 모두에 의심을 담은 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론솔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도 너에게 신경을 쓰고 싶어졌어. 네 말을 이해한 척 하고 싶어졌어! 좌절한 채로 하텐그라쥬로 돌아지 않도록 해주고 싶 어졌어! 젠장, 기분이 이상해. 썅!" 론솔피는 두 손으로 머리 양쪽을 짓누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 함을 지를 것처럼 부리를 쩍 벌렸지만 론솔피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 았다. 사모는 마치 정신적 비명을 지르는 나가처럼 보인다고 생각했 다. 그렇게 한참 동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론솔피는 두 팔을 양 쪽으로 뿌렸다. 그는 기운이 죽 빠진 사람처럼 사모를 보며 말했다. "왜 우리가 신을 상대할 수 있도록 돕는 거야?" "너희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니까." "누가 도와달랬어? 누가 감히 레콘을 제멋대로 돕는다는 거야?" 힐난하는 내용이었지만 론솔피의 어조에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사 모가 대답했다.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나는 너희들의 강력한 겉모습 때문에 아무도 너희들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들도 다른 선민종족들의 나약한 겉모습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 받을 생각은 하지 않지.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해. 모두 함께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으니까." 론솔피는 부리를 조금 벌렸다가 말했다. "무슨 목표?" 사모는 대답하는 대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론솔피는 그녀를 붙잡으려는 듯 몸을 조금 일으켰다. 하지만 사모가 팔을 뻗어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였다. 론솔피는 반쯤 일어난 자세에 서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머리를 옆으로 약간 기울이며 말했다. "론솔피. 나와 함께 스러졌을 내 희망을 받아줘서 고마워." 론솔피는 누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대호왕의 앞으로 뻗은 손은 그의 몸뿐만 아니라 그의 부 리까지 결박했다.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을 희 망하는 이 태도를 끝내 버릴 수 없군. 그러니 이렇게 네게 넘기고야 마는 것이지. 단지 그뿐이야. 네가 그것을 어떻게 하건 상관없어. 그 러니 부담은 갖지마." 사모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갈바마리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뒤를 이어 지금까지 어디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던 두억시니들이 나타나 그녀의 주위로 다가섰다. 론솔피는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하 지만 두억시니의 거대한 모습이 사모를 감추고 있었다. 론솔피는 사 모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이 시대와 관련을 끊는다. 그리고 나무의 꿈을 꾸는 동생에게 돌아갈 것이다." 두억시니들의 모습이 사모를 감췄다. 그리고 나무와 풀이 다가왔다. 론솔피는 눈을 부릅떴다. 잎사귀가 무성한 나뭇가지와 덤불이 사방에 서 다가와 대호왕과 그녀의 두억시니들을 가렸다. 넋을 잃고 그 모습 을 바라보던 론솔피는 가까스로 나무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무 사이로 멀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론솔피는 휘청하듯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안녕." 그들이 사라졌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두억시니들 때문에 두려 워 움직이지 못한 새들인 것 같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듣지 못했던 바람소리와 물소리도 들려왔다. 무룬강이 꽤 가까운 곳에 있 는 모양이다. 론솔피는 흠칫하며 물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그 소 리는 대호왕이 떠난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감정의 기묘한 손길 이 정신의 현을 긁었다. 론솔피는 대호왕이 들어올린 손이 무슨 뜻인 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걸어갈 수 없는 론솔피는 대신 자 신의 목소리를 앞으로 보냈다. "대호왕." 새들의 지저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나뭇잎이 바 람에 쓸리는 소리와 무룬강의 물소리가 들려왔다. 론솔피는 똑바로 서서 고개를 떨구었다. 대호왕의 말처럼 론솔피는 불가능을 희망해보았다. "50년만 빨리 태어났다면 네 금군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론솔피는 몸을 돌렸다. 그는 나무에 기대둔 도끼창을 집어들고는 지 금까지 걸어왔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질주 앞에서 덤불 이 부서지고 가지가 부러졌다. 노래하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놀란 동물들이 달음질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론솔피의 발길에 채여 폭발하듯 튀어 오른 나뭇잎들은 키보렌의 늙은 나무들 아래에 조그마한 회오리 같은 것을 만들었다. 론솔피는 도끼창과 대호왕의 희망을 가진 채 악타그라쥬를 향해 달 렸다. =============================================================== 챕터 끝났습니다. 만성절 전야 특집 다음 챕터 예고 : "그의 과거."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갑작스러운 추위를 느꼈다. 그 추위가 무엇 때문인지 고민하다가 가까스로 밤에 문을 열면 추운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문 뒤편에 서있던 입에 문 막대사탕을 끊임없이 굴리고 있는 회색 신사의 존재도 깨달았다. 신사가 말했다. "저는 당분 저축 은행에서 나온 영업사원 404ERROR입니다. R이 세 개지요. 우리 은행에 구좌를 개설하시기로 하셨지요?" 나는 당황했다. "당분 저축 은행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고객 여러분의 낭비되는 당분을 저축합니 다." 회색 신사는 명함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긴 했지만 나는 회색 신사의 이상한 모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회색 신사가 말했다. "이 모자를 보고 계시는군요. 호박엿을 상징하는 겁니다. 저희 은행 의 마스코트지요."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박을 머리에 쓰고 다니는 것이 영 업활동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 호박에서 눈을 떼고 말 했다. "그런데 당분 저축 은행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서 말을 계속해도 될까요?" 한밤중에 머리에 호박을 쓰고 나타난 영업사원을 집안으로 들여도 될지 의문스러웠다. 정중히 거절할 방법들 - 진정한 이름을 말하고 들어오라거나, 친구에 해당하는 엘프어를 말하라거나, 아니면 9와 3/4문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 을 떠올리다가 가장 복잡한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독일 기술은 언제나 신뢰할 만하다. "이 문은 겉으로 보기엔 하나지만 사실은 세 개입니다. 두 번째 문 은 첫 번째 문을 통과한 다음에 존재하고, 세 번째 문은 두 번째 문 을 통과한 다음에 존재하게 되지요. 그러면 잘 들어와보십시오." 당황한 영업사원의 면전에서 문을 닫는 것은 통쾌했다. 거실로 물러 난 나는 문득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명함 이 아니었다. 명함보다 훨씬 작고 딱딱했다. 그리고 겉면에 있는 것 은 검은색 산의 실루엣과 보름달…… 이건 화투패잖아. 그런데 내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보름달에 주름이 지기 시작 했다. 차츰 그것은 내가 문전박대한 영업사원의 얼굴, 그러니까 호박 으로 바뀌었다. 조금 후 영업사원은 내 곁에 서있었다. 영업사원은 씩 웃더니 소퍼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거나 앞을 가로막는 적수의 두개골을 깨부수는 것 모두에 적 합할 듯한 큼직한 손으로 탁자 위에 놓여있던 담배를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의 진정한 정체를 떠올렸다. 나는 라이터를 집어들었 다. "오케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내가 착각하지 않았다면 자네 는 파워 중 하나로군. 랜턴의 빛이 반짝이는 곳에서 이름을 말하면 반드시 듣게 되는 자." 그는 세련된 긍정의 몸짓을 취해보였다. 나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기 로 결정했다. "잭 오 랜턴." 그는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의 호박머리 꼭대기에서 연기가 뭉 게뭉게 새어나왔다. "그래서," 내 안정을 위해 담배를 피워물었다. "자네의 계획은?" "단기적으로는 귀향이지. 장기적으로는 여의 것이어야 하는 자리를 되찾는 것이고." 왜 말투가 이렇게 바뀐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위기를 맞추기로 했다. "그래서, 단기 계획의 목표는?" "존재했거나 존재할 모든 도시들의 원형인 궁극의 도시." 아아, 그 호박이 그 호박이었나. "내게 온 목적은? 어, 왕위 획득에 관한 커리큘럼이라도?" "자네가 그걸 제공해줄 수 있다고 예상하긴 힘들군." "그럼 내가 뭘 제공할 수 있지?" "삼촌에게 받은 그 호박을 가져오게." 어리둥절해하다가 가까스로 그런 물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는 삼촌에게 받은 속 빈 호박을 들고 돌아왔다. 그것을 건네주려 했 지만 잭은 내가 그것을 들고 있게 했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라이터 를 집어든 잭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 보게." 잭은 라이터를 켜서 호박 속에 쑥 집어넣었다. 안된다고 외치려 할 때 나는 호박 겉면에 나타나는 형상에 놀라 말을 멈추고 말았다. "보게나! 겉면에 나타난 무서운 얼굴 형상을 보았는가? 바로 이 호 박이 모든 호박을 찾아내는 호박, 모든 호박을 지배하는 절대 호박일 세. 놀라운 권능을 지닌 이 호박을 머리에 뒤집어쓰면 모든 사람이 자네에게서 눈을 못 떼게 된다네!" 나는 머리에 호박을 쓰고 돌아다니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의 놀란 시 선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러고보니 말투가 또 바뀌었다.) "그게 사실인가요? 회색의 잭. 그 말을 믿을 수 없군요!" 회색의 잭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를 이해하네. 하지만 믿어야 해. 둥글넓적하다고 모두 호박은 아니고 모든 호박엿이 울릉도산인 것은 아니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잭의 말투에 담긴 권위는 나를 압도했 다. 또한 잭은 사악한 농업 다국적기업 (주)사우론이 어떻게 엘프 농 부들을 속여넘겼는지 설명했고 친환경 농법을 선호하는 엘프 농부들 과 기계화 농법을 추구하는 인간 농부들이 결성한 최후의 협동조합과 아르노르에서 개최된 슈퍼호박 선발대회의 숨막히는 심사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실두르가 아버지의 부러진 전지가위 나르실로 호박꼭 지를 잘라버리는 대목에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호박꼭지가 남아 있어야 한다는 대회규정 때문에 (주)사우론은 자격박탈을 당했다. 놀 라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슈퍼호박 선발대회의 패배로 위기에 빠졌던 (주)사우론은 강력한 유상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확충하여 모르도르의 사옥을 되찾 았지. 그리고 스톡옵션을 가진 아홉 대주주가 절대 호박을 찾기 위해 이미 출동했다네. 나는 즉각 (주)사우론의 주식을 손절매하고 여기로 온 걸세." 영웅들이 그들이 등장할 전쟁과 전쟁 사이의 지루한 기간에 어떻게 흥분되는 도락을 찾아내는지 항상 궁금했다. 하긴 증권거래소도 전쟁 터지. "그 호박은 내 장단기 계획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네. 따라서 모르 도르에 그 호박을 넘겨줄 수는 없어." 잭은 절대 호박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다. 그 눈초리에 나도 모 르게 절대 호박을 보게 되었다. 주의깊게 바라보자 그것이 정말 놀라 운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호박이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끌어당겼다. 잭의 눈이 꿈틀했다. "자, 그걸 내게 주겠나?" "이건 내 거야. 삼촌에게 받은 생일 선물이라고." "하지만 내겐 그것이 꼭 필요해." "이건 내 보물이야!" "내놓지 않는다면 강제로 가져갈 수밖에 없군." "하! 강제로?"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날개를 크게 펼쳤다. 응접실을 뒤덮는 내 날 개에 잭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게 외쳤다. "네가! 어떻게 강제로 뺏어가겠다는 거냐!" 잭은 차분하게 말했다. "물론 네 이름으로. 조나단." 나는 굳어버렸다. 잭은 겸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승기가 자신에게 넘 어온 상황을 십분 즐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 했다. "그것이 자네의 진정한 이름이지." 가까이 다가온 잭은 충격으로 굳어버린 내 손에서 절대 호박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것을 제지할 수 없었다. 잭은 옆구리에 호박을 끼고 는 정중하게 목례했다.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후에야 나는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었 다. 나는 재빨리 창가로 다가갔다. 그 때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무 시무시한 외침이 들려왔다.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헝클어진 정신을 추슬렀다. 그러자 오늘이 무 슨 날인지 깨달았다. 오늘은 고대의 것들이 다시 지상을 지배할 날을 꿈꾸는 어둠의 사제들이 가면으로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횡행하는 소름끼치는 날이다. 그들의 저 음울한 주문 "트릭 오어 트릿"을 번역 하면 "트리에에 있는 그의 처소에서 풀이 죽은 트툴루는 그를 위로할 캔디를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라는 무시무시한 뜻이 된다. 번역하면 놀랍도록 길어지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고대 언어의 효율성은 기막힌 수준……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충격이 컸나 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주)사우론의 아홉 대주주가 오고 있을 것이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지금이야말로 떨어지는 돌처럼 빠르게 날아야 할 시간이다. 지금부터 내 이름은 다이빙스톤이다. 조나단 다이빙스 톤. 나는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 1 단순화해서 생각해보자. 살인자와 피살자 중 누가 살아남 는가? 살인자다. 후손을 남기는 것은 생존자와 사망자 중 누구인가? 생존자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살인자의 후손이 다. 당신의 삶이 행복하다면 당신의 살인자 조상들에게 감 사해라. 당신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태초부터 당신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시간 동안 당신의 조상들이 죽느냐 죽이 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죽이는 쪽을 선택했기 때 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선택을 잘못했다면 당신은 태어날 수 없다.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허다한 살육의 증거다. - 라수 규 리하. "오래간만입니다. 지멘." 지멘은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룩 한 점 찾아 볼 수 없는 새하얀 옷은 그 빛깔 때문에 차가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따스한 모양이다. 제이어 솔한의 모습에는 추위를 타는 기색이 없었 다. 깃털을 잔뜩 부풀린 채 앉아있던 새들이 나뭇가지를 박찰 때마다 잔 설이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눈이 떨어지며 드러나는 상록수의 푸 른빛은 검게 보일 지경이다. 하인샤 대사원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완 만한 경사로와 낮은 계단들 뿐인 걷기 좋은 길이지만 어지러운 세상 사는 올라오지 못하는 듯 정순하다. 하지만 사람들 중엔 세상의 어느 곳에 있어도 그곳과 분리된 채 자신인 인물들이 있는데 제이어 솔한 또한 그런 인물이었다. 어떤 천부적 척력 같은 것을 타고났다고 할 까. 그에게서는 사찰의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곳의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다. 살인기사를 짧게 관찰한 지멘은 시선을 돌려 일주문 앞에 서있는 무 리를 바라보았다. 지멘은 그 무리를 인솔하고 있는 청년이 규리하 가 문의 일원일 거라 생각했고, 한 번 보았던 이이타 규리하가 아니므로 시카트 규리하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멘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시카트는 갑자기 나타나 지멘을 가로막은 살인기사에 놀라고 화가 나 서 아직 대응책을 결정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지멘은 그 소년이 환영의 주체 노릇을 뺏겨서 그러나 보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제이어. 네게 물어볼 것이 세 개 있다." 제이어는 씩 웃더니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황제의 심장병은 어디에 있나." 제이어는 손가락을 하나 굽혔다. 거리가 멀어 지멘의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대화가 시작된 것을 본 시카트는 잠시 상황을 관망하자고 결정한 것 같았다. "아실의 편지는 어디에 있나." 제이어는 다시 손가락을 굽혔다. 지멘은 하나 남아있는 손가락을 내 려다보며 말했다. "요즘은 어떤 실패를 추구하고 있나." 제이어의 손이 주먹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던 살인기 사는 그것을 좌우로 두어 번 장난스럽게 비틀다가 아래로 떨어뜨렸 다. "황제의 심장은 용의 탑에 있습니다." 지멘은 가늘게 뜬 눈으로 살인기사를 보다가 어깨 너머를 슬쩍 돌아 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지멘은 가늘고 규칙적인 아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배낭 속에서 잠들어 있었 다. 지멘은 다시 제이어를 돌아보았다. "용의 탑? 그런 탑은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그렇겠지요. 누군가가 신의 심장병을 깨트리거나 하면 곤란하 니까요. 그래서 용이 그 탑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텐그라쥬의 심장탑? 지금 지상에 있는 용은 아스화리탈……" 지멘은 말을 멈추고는 두 그루의 용화가 피어났으며 하나는 황제에 게, 하나는 즈믄누리로 갔다는 사모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세상에 는 아스화리탈 외에 두 마리의 용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지멘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놓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멘은 의심 속에서 제이어를 노려보았다. 제이어는 어슴푸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 지멘은 자신이 지나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신의 심장병? 너도 그 계획에 대해 알고 있나?" "재미있는 계획이지요? 신수황권을 누리는 황가가 바람잡이 노릇을 하는 동안 야바위꾼 신이 사람들을 일만육천 년 동안 등쳐먹는 겁니 다. 자, 거기 가는 아저씨. 행운에 관심이 있으신가? 맞추면 열 배! 아무 것도 필요없어. 눈만 똑바로 뜨고 있으면 되니까. 이보다 쉽게 돈 버는 길은 없지." 지멘은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네가 암살공과 규리하공을 돕는 줄로 알았는데." "그렇습니다. 그러라는 명령을 황제에게 받았고, 그 명령을 따르기 로 결정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황제가 제게 두 사람을 도우라고 명령했고 그것 이 제 뜻과 맞기 때문에 그 명령을 따랐습니다. 당신을 하텐그라쥬로 보내는 것 같은 경우가 그렇지요. 발케네공은 황제의 전력 약화를 위 해 대장군이 황제의 곁에 없기를 바랐고, 황제 또한 후계자가 질 도 덕적 채무를 피하기 위해 대장군이 자기 곁에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 래서 따르기로 했지요." 자기 뜻과 맞지 않았다면 무시했을 거라는 투였다. 지멘은 혼란스럽 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너는 황제의 부하냐?" 제이어는 몸을 돌렸다. 제이어는 일주문에 있는 시카트 일행들을 향 해 움직였고 지멘은 대답을 듣기 위해 따라 움직였다. 지멘이 걸음을 떼자 제이어는 곧 대답했다. "부하이고 싶을 땐 그렇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을 때는?" "적도 됩니다." "황제도 네가 그렇다는 것을 아나?" "저만큼 잘 압니다." "그게 부하냐?" "황제는 서약을 거부했습니다." 다가오는 지멘과 제이어를 보며 시카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는 자기가 보고 있는 광경을 무시하고 싶다는 듯 수행원과 잡담을 나 누기 시작했다. 시카트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지멘은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야바위꾼이라고 했지. 그 계획에 반대하나?" "그 계획이 여자라면 저는 청혼했을 겁니다." 제이어의 대답은 지멘을 피로하게 했다. 하지만 반문하기엔 시카트 와의 거리가 가까웠다. 걸음을 멈추고 아는 체를 해야 할 거리였다. 지멘이 걸음을 멈추자 제이어는 따라 멈췄다. 지멘의 곁에 바짝 붙 어선 채로. 그리고 제이어는 지멘과 시카트 중 누가 말하기 전에 재 빨리 말했다. "지멘. 이쪽은 시카트 규리하 공자입니다. 시카트 공자님. 이쪽은 춘부장의 명망 높은 친우이신 지멘입니다." 지멘은 시카트가 왜 허를 찔렸다는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알 수 없었 다. 애써 귀족다운 태도를 유지하며 지멘에게 인사하는 동안에도 시 카트는 제이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제이어는 그 눈길을 못 본 척했 다. 의아해하던 지멘은 시카트가 순순히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이 말 했을 때 비로소 정황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제이어 솔한. 각하의 친구분과 함께 은근슬쩍 우리 곁으로 돌아오 려는 졸렬한 시도는 그만둬." 제이어는 창피해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넉살 좋게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지멘? 저는 규리하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당신이 뭐라 말 좀 해주십시오." 시카트가 재빨리 말했다. "상관없는 분을 끌어들이지마라. 이건 우리와 너 사이의 일이다. 죄 송합니다. 지멘. 저희들이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서 이런 불쾌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이 자는 저희들에게 맡기고 아버님께 가시지요." 아직 지멘과 제이어의 관계가 불확정적이었기 때문에 시카트는 행동 으로 돌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멘이 제이어에게 짤막한 작별 인 사 한 마디만 하면 시카트와 그 수행인들은 제이어를 붙잡아 파름산 아래까지 집어던질 것이다. 제이어는 어쩔 거냐는 투로 지멘을 느긋 하게 바라보았다. 지멘은 제이어가 자신을 동행으로 받아들일 만큼만 정보를 노출시켰 음을 깨달았다. 틀림없이 걸음 하나하나를 계산했을 것이다. 그가 던 진 질문 중 두 가지는 아직 대답을 받지 못했다. "내가 제이어를 단속하지." 시카트는 낭패감을 필요 이상으로 드러내었다. 그 과장된 반응을 본 지멘은 제이어를 미워하는 것은 시카트가 아니라 아이저나 이이타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쪽이 제이어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도록 하겠다." 시카트는 불만스러워 했지만 책임이 지멘에게 넘어간 것을 안도하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청년은 제이어를 무시하며 정중하게 지멘을 안내했다. 제이어 또한 그들을 자극하는 짓은 하지 않으려는 듯 지멘 의 소지품이나 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들의 모습은 곧 하인샤 대사원의 복잡한 경내 속으로 사라졌다. 볼을 찌르는 햇살을 느낀 시오크 지울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정오로 치닫는 시간이겠지만 겨울의 낮은 태양은 창턱에 턱 을 기댄 채 방안을 훔쳐보고 있다. 규리하성의 높은 곳에서는 고드름 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후두둑, 후둑. 눈 치우는 소리와 규리하성에 서 자신이 제일 분주하다고 믿는 자들이 오가는 소리가 쿵쿵 들려온 다. 어떤 여름이 한없이 음울하듯 어떤 겨울은 꽤나 자발머리 없다. 시오크가 바라보고 있는 겨울이 그러했다. 시오크는 눈 주위를 비비고는 다시 침대를 돌아보았다. 침대에는 지키멜 퍼스가 누워있었다. 지키멜은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독행왕의 몸 전체에서는 차가운 생선이나 비 맞은 땔감에서 느낄 수 있는 냉기가 흘러나왔다. 지키멜을 본 의사는 꽤나 장황한 단어와 복잡한 문장들로 자신이 아 무 것도 모른다는 뜻을 전달하는 재주를 펼쳐보였다. 혼란 때문에 의 사에게 홀려버린 시오크는 몸을 따스하게 해주고 환자를 안정시키라 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신비의 치료법 정도로 오해하고 말았다. 뭔가 속았다는 느낌을 시오크가 받은 것은 의사가 떠나고 한참 후의 일이 었다. 분노로 이를 가는 것은 지키멜에게도, 그리고 치아에도 별 도 움될 것이 없었기에 시오크는 여름이 되돌아온 것으로 착각할 만큼 난방에 힘쓰는 것으로 분풀이를 대신했다. 하지만 지키멜의 몸은 여 전히 차가웠고 그 호흡은 깃털 한 조각 날릴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미약했다. 시오크는 몸을 수그려 팔꿈치를 허벅지에 얹었다. 지키멜의 생기 없 는 얼굴은 밀랍과 지푸라기를 섞어 만들어 놓은 모조품처럼 보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오크는 재빨리 허리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옷자락을 거머쥘 뿐이었다. 초자연적인 공포에 빠질 뻔한 시오크는 가까스로 자신이 칼을 풀어두었음을 떠올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칼집이 이 곳저곳에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지키멜의 숙면을 방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오크는 침착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이 그 빌어먹을 칼을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오크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 는 지키멜을 보호하려는 듯 두 팔을 좌우로 펼치며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시오크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파라말 아이솔과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파라말은 헐떡거리는 시오크를 보다가 두 손을 들었다. "진정하시지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시오크는 천천히 두 팔을 내렸다. 파라말은 시오크를 안정시키기 위해 뒤로 손을 돌려 문을 확실히 닫았다. 방안 으로 들어선 것이 파라말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시오크 는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파라말은 두 손을 배 아래에 깍지껴 시오크가 잘 볼 수 있게 해주었 다. 시오크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파라말 은 목례하고는 시오크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산공부사는 병자에 대해 의례적인 관심만 보였다. 지키멜의 상황에 변화가 있다면 당장 알려졌을 것이므로 파라말은 지키멜에게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시오크에게 주의했다. 파라말은 시오 크의 상태가 걱정스럽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안 좋습니다. 지울비." "저는 괜찮습니다. 어, 형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파라말은 갑자기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피로한 목소리로 말 했다. "형님이오? 문을 사랑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 시오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묘한 생각들을 떨쳐내려 애써야 했 다. 파라말 또한 형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고는 말했다. "아직 그 방에 들어갈 방도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혼자 계십니까? 도와줄 사람들을 부탁하시지요." 시오크는 끈적끈적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제가 불안해서 안되겠습니다.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낫습니다." "규리하 사람들도 선뜻 후작을 폐하께 보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후 작은 변경백 각하의 소재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르 니까요." "무향인들은 황제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키멜 퍼스가 혼수상태로 발견된 직후 규리하성으로 온 황제의 사 어는 규리하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황제는 칭왕자 지키멜 퍼스를 즉 각 비나간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을 통해 황제가 시오 크와 지키멜의 소재를 정확히 알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사실 은 규리하인들을 불안하게 했다. 시오크는 그들이 황제의 명령을 해석할 시간을 주지 않기로 했다. 그는 즉각 지키멜의 방으로 쳐들어왔고 병간호를 자신이 책임지겠다 는 핑계 하에 다른 사람들이 지키멜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결 과적으로 시오크는 정신적 압박감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두통을 호소하는 머리를 짚던 시오크는 파라말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그러십니까?" "지울비. 규리하 사람들이 우려하는 사람은 후작이 아니라 당신입니 다." "저요?" "당신도 폐하께 명령을 받았습니다. 유료도로당으로 돌아가 왕위를 받아야 하지요. 그리고 후작과 달리 당신은 아파서 못간다는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시오크는 당혹했다. 파라말은 지키멜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박한 말이지만 당신은 후작을 구할 수 없습니다. 후작이 아직까 지 이곳에 누워있는 것은 규리하인들이 그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말 후작을 돌려보내기로 작정했다면 당신 혼자서 그들을 막 을 수나 있겠습니까? 그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후작 을 데려갈 수도 있을 겁니다." 시오크는 머리를 떨구었다. 입안에 쓴맛이 가득 느껴졌다. 파라말은 여전히 지키멜에게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규리하 정부쪽에서는 대강 결정이 난 것 같습니다. 그들은 후작의 혼수 상태를 핑계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 작정인 것 같습니다. 후작 이 깨어나야 규리하공의 소재에 대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요. 당신이 이렇게 지키고 있어서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더 곤혹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지울비." "그들의 부탁을 받고 왔군요." 파라말은 시오크를 돌아보았다. 시오크는 자신의 몸이 하나라는 사 실에 분노하며 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폐하께 억류되어 있을 테고 자 칫하면 유료도로당은 수습하기 힘든 혼란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여기 이렇게 있어봐야 지키멜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 차라리 당으로 돌아가 왕위를 받는 것이 아버님과 지키멜에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안다면 왜……" "당연하다는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파라말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시오크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세게 문질렀다. 눈주위가 벌겋게 변한 채 시오크는 빠르게 말했다. "모든 것이 계획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사님. 부사님 의 형님께서는 황제 폐하께서 도로를 직접 통제하기 위해 허울뿐인 왕위를 내리는 거라고 설명하셨지요. 스스로는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왕이라니, 대단합니다. 기막히다고 할 수 있군요. 그런데 그 시점에 서 왕이 되지 않는 왕자들의 마지막 후손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렇다 면 그게 누구 소행인 것 같습니까?" "누구 소행이란 말입니까?" "이것은 폐하가 한 일입니다." "뭐라고요?" "이건 오래된 계획입니다. 충성 서약을 거부했을 때부터 황제는 대 귀족들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했던 겁니다. 충성 서약을 받으면 보호할 의무도 지지 않습니까?" "맙소사, 지울비……" "그겁니다. 대귀족들을 파멸시킬 생각이었던 황제는 그래서 충성 서 약을 거부한 겁니다. 규리하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지요. 아이저 규리하가 서약지지파의 거두라는 점, 그리고 규리하가 가진 전통 때 문에 최우선 공격대상으로 결정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대귀족들 을 모두 제거할 때까지는 규리하를 남겨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 이 대귀족 사냥이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되니까. 그래서 꼭두각시 변 경백을 잠시 규리하공의 보좌에 앉혀둔 겁니다." 파라말은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오크는 주의를 촉구하는 눈빛으로 계속 말했다. "이제 모든 대귀족들이 사라지거나 그 세력이 극도로 축소되었습니 다. 차기 황제와 유료도로왕을 등극시키기에 앞서 필요가 없어진 변 경백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황제는 그렇게 했지요. 어쩌면 동정 심 때문에 무사장과 함께 즈믄누리로 돌려보냈을지도 모르지요." 파라말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사장의 딱정벌레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면 죽였나 보지요." "지울비. 도무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정우는 죽는 것보다 칼리도 백과 결혼하는 편이 훨씬……" 파라말은 자신도 모르게 꺼낸 말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계속 말하 는 것보다 못한 중단이다. 파라말은 자신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아 무리 어처구니 없는 추리에 화가 났다지만 이런 멍청함이라니.' 파라 말은 끝까지 말했다. "훨씬은 잘못 표현한 말이군요. 절대적으로 낫습니다." 시오크는 둔한 칼로 고기를 썰어야 되는 사람처럼 파라말을 노려보 았다. 파라말은 그 눈빛을 침착하게 받으며 말했다. "저도 이게 어떤 그림인지는 대강 짐작합니다. 예. 대귀족들은 약화 되었고 차기 황제로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 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처럼 이 모든 일이 단 한 사람의 의도에 의 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형님처럼 황제 폐하나 그 주변의 누군가가 희대의 정신억압자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말이야.' 파라말은 그렇게 생각했다. 파라말 은 그 이론을 오래 전에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지나친 논리적 도약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진실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신 억압자가 황제 주변에 있다면 황제는 스스로 위험에 빠질 필요가 조 금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정신억압자가 있다면 황제는 발케네공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 빌파 가문 내의 중요 인사 한 사람만, 예를 들어 스카리 빌파 를 정신억압 한다면 그 강력한 가문을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게 할 수 있다. 그것이 훨씬 효율적으로 발케네공을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특 히 스카리는 하늘누리에, 즉 황제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를 정신억 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황제가 발케네를 공격 했고 그 과정에서 실종될 뻔한 큰 타격을 입었다면 그 사실 자체가 그런 초인적인 정신억압자가 부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그보다 훨씬 이성적인 설명을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목도 하고 있는 상황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추구한 끝에 나타난 우 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발케네공은 황제 폐하를 싫어했고 칼리도백을 두려워했습니다. 시모그라쥬공은 자기 피지배자들에게 받는 무시 때 문에 생긴 자격지심 때문에 토프탈 가문을 황가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게 되었겠지요. 여기 누워계신 후작님은 제국의 영속성을 믿지 않 으셨고, 칼리도백은 제국군이 제국을 난자하는 칼날이 되어선 안된다 고 믿었습니다. 지울비. 당신은 황제 때문에 아버지와 적대하게 되었 다고 설명할 겁니까? 유료도로당의 변화는 당신 자신의 바람 아니었 습니까?" 그 질문은 시오크로 하여금 허리를 뒤로 조금 젖히게 만들었다. 자 신에 대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시오크는 파라말의 질문을 모든 사람 에 대한 질문으로 바꿨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바람을 추구했을 뿐이라고요?" "그랬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황제가 가장 바랄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우는…… 음, 자꾸 이렇게 부르게 되는군 요. 규리하공은 칼리도백과 맺어지는 편이 절대적으로 낫습니다. 따 라서 규리하공의 실종은 절대로 황제 폐하의 바람이 아닐 겁니다. 저 는 차라리 아이저 규리하가 훨씬 의심스럽습니다." "전 변경백이오?" "예.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아이저 규리하에겐 도깨비 감투를 가진 조력자가 있습니다. 규리하의 변경백과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이렇게 깜쪽같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납치자가 아이저 규리하였다면 그는 오래 전에 나타났어야 합니다. 규리하 정부가 충격에 빠졌을 때 지체없이 규리하를 탈환해야 하니까 요. 왜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나름의 사정이 있나 봅니다." 시오크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또한 증거가 없는 가설이군요. 저는 아직도 황제가 의 심스럽습니다. 새로운 황제와 새로운 왕에게 공공연히 반대할 수 있 는 실력자들을 제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규리하공이 있는데 신왕을 만든다면 그 꼴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지울비. 사실을 자기 편리한대로 끼워맞추면 곤란합니다. 규리하 변경백은 락토가와 토프탈가의 봉작에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원시제의 시대였고 공작이었습니다. 부사님. 지금은 치천제의 시대이며 왕입니다." 파라말은 말 나누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폐하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실과 당신이 당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사이에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왕위에 오르는 순간 아버지 는 인질의 가치를 잃게 됩니다. 쓸모없어진 아버지는 제거당할 겁니 다." 파라말은 시오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대방이 불편해하거나 화를 낼 만큼. 시오크가 입을 열 때까지 그렇게 바라보던 파라말은 시오크 가 말하려 할 때 재빨리 말했다. "지울비. 당신은 후작님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파라말의 말은 단검처럼 시오크의 가슴을 찔렀다. 시오크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는 황급히 지키멜에게 고개를 돌렸다. 파라말은 시오크의 떨리는 턱을 보며 측은함을 느꼈다. "당신이 후작님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후작님이 저런 꼴이 되자 남자들의 고질병이 도진 겁니다. 여자들이 항상 자기 때문 에 상처 입는다고 믿는 그 측은한 과대망상 말입니다." "부사님……" "후작님이 지금 겪고 있는 일은 당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후 작님을 이렇게 만든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량 의 독물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당신을 생각해서 하 는 말이 아닙니다. 인질이 된 춘부장 때문에 하는 말도 아닙니다. 당 신 때문에 난처해하는 규리하 사람들과 지도자를 잃고 당황하고 있을 유료도로당원들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울비. 당신은 정말 당원들에게 아무런 책임감을 못느낍니까?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위해 수천년 동안 지켜온 당의 이상을 버리고 시모그라쥬군과 싸웠던 그 자들에게? 하르체 도빈이 당신을 보았다면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마치 유료도로당원이나 되는 듯한 파라말의 말은 시오크를 화나게 했지만 시오크는 분노를 표현할 수 없었다. 파라말의 지적은 정확했 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당시 소멸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유 료도로당을 다시 부활시킨 당의 영웅 하르체 도빈이라면 시오크를 상 대로 나가의 식습관을 시험하려 할 것이다. 시오크는 어금니를 깨물 며 지키멜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우리를 떼어놓으려 할까.' 시오크는 가지 말라고 말하는 지키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도도하던 모습, 그 용감한 모습을 모두 잃고 이렇게 무 력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그녀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시오크는 심장 이 서늘해지는 것 같은 추위를 느꼈다. '너는 제국을 조롱했다. 너는 암살공과 무서운 레콘들을 거침없이 야유했다. 너는 죽을 나를 거리낌 없이 사랑했다. 그런 네가 왜 이렇 게? 왜 이래야 하는 거지?' "지울비." 시오크는 고개를 홱 돌려 무서운 분노로 파라말을 노려보았다. 파라 말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규리하 사람들은 내 방문을 일종의 최종 경고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시오크는 가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최종 경고입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이곳에 있는다고 해서 후작님에 게 도움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으로 돌아가면 아버지 와 당원들, 그리고 당신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는 규리하 사람들을 도 울 수 있습니다." 시오크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오크는 물밖 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소리 없이 입을 꿈틀거렸다. 파라말은 그의 어 깨를 붙잡아 흔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오크가 간신히 말을 짜냈다. "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파라말은 기쁨을 말하려는 입을 단속한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에게 제가 떠날 거라고 말해주십시오. 겨울 여행이니 준 비할 것이 많을 테고, 그래서 언제 떠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 지만 준비가 끝나는대로 떠나겠습니다." "후작님은 이쪽에서 잘 돌볼 겁니다." 시오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파라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향인들은 지키멜이 깨어나면 필요한 것을 물어본 다음 황제에게 보낼 테지요. 황제는 지키멜의 목을 벨 겁니다." "지울비. 그렇게까지는……" "아마도 칭왕자의 최후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비나간의 대 로에 효시되겠지요. 자신의 후계자를 보호하기 위해…… 엘시 에더리 에게 주어질 제국을 탐내면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시오크의 말꼬리가 젖기 시작했다. 파라말은 말할 수 없는 거북함과 동정심을 동시에 느끼며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시오크는 뜨거운 눈물 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겠지요." 파라말은 입을 다물었다. 창밖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어떤 여름이 한없이 음울하듯 어떤 겨울은 꽤나 자발머리 없다. 시오크가 우는 겨 울이 그러했다. 레콘 힌치오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비나간의 꽤나 번화한 대로였고 사람들이 드문 시간도 아니었지만 그의 근처에는 오가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행인들은 거의 백 미터 저편에서 갑자기 더 좋 은 지름길을 떠올렸다는 듯 황급히 방향을 바꾸었고 무심히 건물 바 깥으로 나오던 자들은 힌치오의 모습을 보자마자 갑자기 잊은 물건을 떠올린 듯 황급히 집안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들은 다시 나오지 않았 다. 힌치오는 그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바 꿔 말하면 많은 자들이 숨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많은 목격자들은 그만큼 많은 윤색을 가하겠지만 어쨌거나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오늘 밤이 오기 전 비나간 전체에 전달할 것이다. 그 러는 편이 좋았다. 힌치오는 다시 앞쪽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은 커다란 창고 에 달린 출입문이었다. 창고에는 그 문 외에도 화물이 드나드는 큰 문이 있었지만 사라티본 부대 3대대장 야키보로가 대대원들과 함께 그곳을 지키고 있었기에 힌치오는 그 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 다. 힌치오는 자신의 앞쪽에 있는 문을 향해 최후의 경고 삼아 말했 다. "이봐, 그냥 문 열고 나오지 그래?" 문 안쪽에서 무시무시하게 들리려 애쓰는 외침이 들려왔다. "이 안에 있는 자들 모두는 물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안으로 들 어왔다간 물벼락을 맞게 될 겁니다!" 힌치오는 그 경고를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힌치오는 문 안에 있는 자들이 원하는 것과는 좀 다른 의미로 그 경고를 해석했다. "흠. 그렇다면 그 안에 비밀 통로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군." 문 저편에서 당혹감이 잔뜩 묻어나는 침묵이 되돌아왔다. 힌치오는 피식 웃었다. "멍청한 녀석들.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곳에 모여 작당을 했었어야 지. 그러니 꼼짝 못하고 잡히게 되었잖아." 다시 문 뒤편에서 악쓰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그래요? 그러면 들어와서 잡아보시죠!" "시간 낭비는 그만두고 투항해라. 팩스벗 졸다비." 팩스벗도 이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듯했다. 문 뒤편에서 쿵쿵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힌치오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다가 어쩐지 사다리를 움직이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후 누군가가 사다리를 오르고 있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려왔다. 힌치오는 위쪽을 올 려다보았다. 창고의 지붕 가까운 곳에 환기구 삼아 뚫어놓은 듯한 조그마한 창이 보였다. 그곳에서 아래로 물을 끼얹는다면 창고를 포위한 레콘들을 기함하게 할 수 있겠지만 힌치오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다. 힌치오의 예상대로 창문에서 나온 것은 물통이 아니라 팩스벗의 머리 였다. 팩스벗은 아래쪽의 레콘들을 잠깐 살펴보고는 고함을 빽 질렀 다. "들으시오! 비나간인들이여!" 힌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짓이 어울리겠지.' 팩스벗 은 비장하게 외쳤다. "우리는 드라카의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열여섯 명의 사람 이 있습니다! 열여섯 명입니다! 우리 드라카의 열여섯 아이들은 오늘 죽습니다. 우리가 왜 이곳에서 죽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들어주십시 오!" 힌치오는 몇 군데서 오는 눈짓을 느꼈다. 창고를 에워싸고 있던 레 콘들이 팩스벗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눈으로 묻고 있었다. 힌치오는 기다리라는 손짓을 돌려주고는 팔짱을 꼈다. "당신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은, 비나 간의 여러분들은 우리가 선택한 드라카의 아이들이라는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겁니다. 우리는 용의 아이들인 키탈저 사냥꾼의 후 예입니다! 그들이 어떤 자들이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고아라짓 왕국 을 멸망시킨 자들이 나가입니까? 천만에, 바로 키탈저 사냥꾼들이었 습니다! 키탈저 사냥꾼들이 오만한 권능왕을 저주했을 때 고아라짓은 왕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거칠고 용감하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 았던 자들의 후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을 보십시오! 레콘들이 여러분들의 대로를 빼앗아 저렇게 서있는데도 여러분들은 두려움에 빠져 집안에 숨어있습니다!" 팩스벗은 자기 말에 점점 분노하게 된 것 같았다. 그는 아래쪽에 있 는 레콘들에게 험악한 시선을 보내며 외쳤다. "여러분들이 모두 집 밖으로 물만 쏟아도 도망갈 자들을 무서워하고 있는 겁니다. 키탈저 사냥꾼들의 후손인 여러분들이!" 팩스벗이 시사하는 상황은 레콘들을 격분시키고 또한 안절부절 못하 게 했다. 많은 사라티본 부대원들이 두렵다는 듯이 주위의 높은 곳을 훔쳐보는 광경을 보자 팩스벗은 기가 오른 듯했다. "예! 우리는 용감무쌍했던 조상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키탈저 사냥꾼들의 후예라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분을 타향인들에게 으스댈 때만 썼습니다. 우리 자신을 단속하는 데는 쓰지 않았습니다! 키탈저 사냥꾼답게 생각하고 키탈저 사냥꾼답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들 중 진정한 키탈저 사냥꾼은 한 명뿐입니다!" 힌치오는 수염볏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팩스벗이 누구의 이름을 말 할지 알 수 있었다. "그 분은 바로 독행왕 폐하이십니다!" 팩스벗은 아래로 떨어질 듯 위태롭게 몸을 내밀었다. "생각해보십시오! 황제는 발케네를 불의하게 공격하다가 실종되었습 니다. 힘을 보여주고 싶은 야망 때문에 자신의 제후를 공격하다가 제 국을 보호해야 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황제가 실종되자 시모그라쥬공은 당장 자신의 검은 야망을 드러내었습니다. 황제가 우리를 보호하지 못할 때 우리를 보호해준 것이 누굽니까? 독 행왕 폐하이십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 의 진정한 신분을 일깨워주시고 키탈저 사냥꾼의 후예답게 적에 맞서 는 법을 알려주신 분은 바로 독행왕 폐하이십니다!" 힌치오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의 창가에서 황 급히 물러나는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골목길 속으로 숨어드 는 그림자도 보였다. 충분히 많은 자들이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다. 힌치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옆에 꽂아두었던 이쑤시개를 붙잡 았다. "그런데 뻔뻔한 황제가 우리의 키탈저 사냥꾼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황제는 제국 수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기는커녕 우리의 유일한 키탈저 사냥꾼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독행왕 폐하께 서는 그 분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백성들의 곁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 습니다. 이같이 어이없는 일을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 럴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뭔데, 제까짓 것이 뭔데 우리의 왕을 우 리 곁에서 도망치게 만든단 말입니까? 우리의 키탈저 사냥꾼을! 제까 짓 것이 뭔데!" 점점 고조되던 팩스벗의 목소리는 마침내 심하게 갈라지기 시작했 다. 팩스벗은 말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음처럼 외쳤다. "우리의 왕을 되찾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누굽니까? 키탈저 사냥 꾼의 후예입니다! 자기 것을 빼앗아간 자를 키탈저 사냥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그 자식이 죽으면 손자가 보복에 나서는 것이 키탈저 사냥꾼입니다! 끝까지 추적하여 원수를 죽이고 그 생간을 꺼내어 씹는 것이 키탈저 사냥꾼입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우리의 왕을 빼앗기고……" 거대한 것이 그의 앞을 스쳐지나가는 느낌 때문에 팩스벗은 입을 다 물었다. 제대로 관찰하지는 못했지만 팩스벗은 그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는 희미한 인상을 받았다. 그 인상을 증명하듯 위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고 주변에 있던 레콘들과 숨어서 그 광경을 보던 비나간인들은 무 슨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보았다. 땅에 꽂아두었던 이쑤시개를 슬 쩍 뽑아낸 힌치오는 그것을 어깨에 걸친 채 다리를 굽혔다. 그리고 힌치오는 발을 굴러 위로 뛰어올랐다. 그 강력한 도약은 힌치오를 높 은 창고 지붕까지 이끌었다. 이곳저곳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나왔을 때 지붕에 선 힌치오는 다시 위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힌치오는 이 쑤시개를 거꾸로 쥐었다. 힌치오는 이쑤시개와 함께 창고 지붕을 강타했다. 힌치오가 지붕을 꿰뚫었음을 알려주는 것은 위로 치솟아오르는 파편 과 굉음뿐이었다. 힌치오의 모습 자체는 마치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그대로 지붕 아래로 사라졌다. 묘하게도, 지붕이 뚫리는 소리 가 사라진 직후의 짧은 순간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숨소리조차 들리 지 않는 침묵. 그리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울부짖음, 단말마, 절규, 애원, 저주의 외침, 아니, 애원이다. 애 원, 애원, 살려줘. 제발 살려줘요. 죽고 싶지 않아. 아냐, 이건 안 돼.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살려만 줘요. 눈 감고 싶지 않아. 이 세 상을 떠나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다시는 깨 어나지 않는 잠이라니, 말도 안돼! 비나간인들은 강제로 심장 적출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창고 주변의 레콘들 중에는 웃기는커녕 미소짓는 자도 없었다. 애원이 울음으로 바뀌고 울음은 다시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침묵으로 바뀌었다. 문이 열렸다. 인간이 걸어나왔다. 비틀거리며, 눈이 부시다는 듯이. 그리고 또 인 간이 걸어나왔다. 서로를 부축한 채 걸어나오는 자들도 있었다. 레콘 들이 그 인간들 곁으로 다가갔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숫자를 헤아렸다. 셋…… 일곱…… 열하나…… 열넷, 열다섯. 열다섯 명이었다. 팽윤하는 정적이 폭발음을 낼 듯한 시점에 힌치오가 걸어나왔다. 힌치오는 한 손에는 이쑤시개를 들고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은 인간 한 명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있었다. 힌치오는 이미 나와있던 열다섯 명 옆에 마지막 사람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열여섯 번째 인간은 신음 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기절했던 모양이다. 힌치오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레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레콘들 은 반항하지 않는 인간들을 하나씩 주워들었다. 힌치오는 그들을 인 솔하여 후작궁으로 돌아갔다. 발소리 외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듯한 기분 속에서 비나간인들은 대로를 바 라보았다. 대로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레콘들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던 바람이 살짝 불어와 열린 창고문을 한 번 흔들었다. 그 마저도 곧 멈췄다. 햇빛과 먼지, 그리고 정적이 대로에 떨어졌다. 그날 오후, 전세계의 뱀단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름의 제국과 겨울의 제국에서 사람들은 뱀단지를 꺼냈다. 일출의 제국과 일몰의 제국에서 사람들은 뱀들을 쏟아부었다. 귀를 기울인다 는 표현은 부적합하다. 사어는 소리가 아니므로. 제국 전체에서 이십 명 쯤 되는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다. 쓰고 읽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왜 사문(蛇文)이 아니라 사어(蛇語)일까. 그들 중 일부는 사어가 실 시간으로 움직이며 고정된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문자가 아닌 말이라 는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일부는 입 닥치고 보기나 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대부분은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질문하는 대신 다른 자들처럼 입을 다문 채 뱀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이들의 침묵 속에서 뱀들은 자신의 몸을 뒤틀어 황제의 뜻 을 표현했다. 황제의 사어는 별다른 수식 없이 명료했다. "아라짓 제국의 황제이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주관자인 치천제가 제국에 고한다. 최근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짐은 짐의 합당한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이 내포한 위험을 알게 되었노라. 심장을 적출한 황제에 게조차 이런 위험이 있다는 사실은 제국의 신민 모두에게 크나큰 불 행인 바, 제국 신민의 진정한 보호자인 짐은 이를 간과할 수 없노라. 이에 짐은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에게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의 이름 을 하사하여 짐의 양자로 삼는다. 이 시간 이후로 칼리도백은 엘시 에더리 마케로우가 될 것이다. 제국의 신민들은 짐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사랑과 경의를 짐의 아들에게 바치도록 하라." 뱀들을 바라보고 있던 자들은 그 사어에 충격을 받고 제각기 그 의 미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어떤 자들은 이것을 반겼고 어떤 자들은 분 통을 터뜨렸다. 어떤 자들은 황태자라는 말 대신 양자라는 표현이 쓰 인 것에 주의했고 어떤 자들은 황제가 자신의 이름 대신 원시제의 이 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 추측했다. 뱀들을 직 접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만 따져도 수만 명이, 그리고 조금 후에는 그 사어를 알게 된 수십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하던 일을 모 두 멈춘 채 황제의 말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국 사람들 중 유일하게 규리하 사람들만은 생각하는 것을 뒤로 미룬 채 뱀들의 움직임을 계속 바라보았다. 규리하에는 황제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다. "규리하 변경백 비셀스 규리하에게 고한다. 짐의 아들을 대신하여 그대에게 청혼한다. 그대가 엘시 에더리 마케로우의 아내가 되어줄 것을 바란다. 이에 대한 대답은 짐이 직접 들으리라. 짐이 곧 그곳에 갈 것이다. 규리하의 신민들은 그대들의 지배자인 규리하 변경백을 지금보다 더 귀히 여기고 존중하라. 짐의 자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 이 합당한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 짐은 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 다." 규리하에 도달한 황제의 사어는 규리하 사람들과 그곳에 머물고 있 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다. 규리하의 총리대부 리시오 느베라이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는 황제에게 '이걸 어쩌나, 폐하의 며느리감을 잃어버렸는데요?' 라고 말하는 것과 레이헬 라보 태위를 본받아 집무실 벽에 사직서를 휘갈겨놓고 - 사표를 수리해줄 사람이 없으므로 - 야반도주를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을지 궁금해하게 되 었다. =============================================================== 36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2) | 2004·11·07 09:11 | HIT : 53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6-2 관련자료:없음 [49386]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07 05:21 조회:68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 2 황제의 사어는 하인샤 대사원에도 전달되었다. 사어 전달이 끝나고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 때 대사원의 모처에서는 겉으로 보아 그 연관 성을 짐작하기 힘든 고위 승려들이 회동을 가지게 되었다. 그곳의 이름은 연행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사원의 일반적 방문객 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승려들도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다. 연행원은 상설기구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임시기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대선사를 자문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지만 많은 경우 의결 사항을 집행하기도 한다. 연행원은 사찰의 삼대 목표인 포교, 교육, 수양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따라서 종단 내부에서 보면 불필요한 조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종단 바깥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가 장 진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은 대부분 연행원에서 나온다. 연행원에 출석한 고승들 중 어떤 자들은 황제의 후계자 발표에 관한 예상 대응책이 이미 수립되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연행원이 종단 대 외 업무를 자주 다룬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런 것이 준비되어 있다 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반 응을 탓하기는 어렵다. 비록 상당히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만 승 려들은 완전한 정치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또 그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심장을 적출한 황제가 오랫동안 제국을 다스릴 거라 믿고 있었다. 적어도 삼사십 년 후에 고민해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했 던 고승들은 그 소속이 불명확한 학승 한 명이 낭독하는 예상 대응책 을 들으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것이 주로 엘시 에더리에 대한 것임을 알고는 더욱 큰 만족감을 느꼈다. 엘시 에더리에게 유념할 만한 부적합 사유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 음 승려들의 토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칼리도백이 탈법의 소지까지도 엿보이는 제국만병장이라는 권한을 받았을 때부터 후계자 지명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황 제와 백작이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놓고 본다면 양자 입양이라는 방 식은 확실히 파격적인 일이지만 이 또한 후계자에게 지고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승려들의 토의가 난항을 겪게 된 것은 황제의 선언 시점에 대한 해 석이었다. 많은 승려들이 왜 지금 그런 선언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 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의 기대수명을 고려할 때 황제는 앞으로 삼사십 년은 제위에 머물 수 있다. 그 정도의 시간 이 지난 후라면 칼리도백은 독서왕의 고령 즉위 기록 갱신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나가보다 쉽게 죽고 백작이 전장을 누비는 장수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은 계 승을 안정화시킨다는 목적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설은 두 가지였다. 황제가 진짜 바라는 후계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엘시의 자손이라는 가설과 황제 가 조만간 퇴위할 거라는 가설. 하지만 승려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존재를 포함하는 전자가 나가답지 않다고 느꼈다. 역시 황제는 조만간 퇴위하리라는 관측이 보다 사실적이었다. 승려들은 황제가 그 런 결심을 한 이유를 고민하다가 동포들의 곁에서 떨어져 혹독한 날 씨를 매일 겪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제위를 포기하고 싶은 사유로는 충분하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또한 그들은 황제가 후계자를 지명한 것은 분란의 시기가 끝났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천명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어쩌면 칼리도백은 갈등의 종식과 화합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상징이 되어줄지도 모른 다. 그들은 그 시점에서 바로 자신들의 가람에 머물고 있는 한 망명 군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우리들의 믿음을 비웃듯 규리하공은 하늘 치를 통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이 손에 넣으면 곤란한 힘이지요." "그 하늘치로 황제를 공격할까요?"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입니다만 어쩔 수 없이 생각해봐야겠군요. 스님의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늘치 자체는 군사가 아닙니다. 규리하공은 아마도 최대한 빨리 규리하를 되찾은 다음 자 신의 근거지에서 황제와 맞서 싸우려 하겠지요. 그곳에서라면 군사도 물자도 쉽게 조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변경백을 설득할 수 없을까요?" "하늘치를 움직인 원념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를 설득한다 해서 황제가 그를 용서할지도 의문입니다. 그런 상황에 손에 쥔 무기를 놓는 것은 강대한 군주였던 자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 다." "그렇다면 우리가 황제와 변경백의 화해를 주선하는 것은 어떨까 요?" "쥬타기 대선사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제국의 정치에 간섭 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우리도 제국의 정치에 간섭당하게 됩니다. 일 방적인 관계라는 것은 불가능해요." "옳은 말씀이지요. 종단의 역사에서 가장 정치 편력이 화려했던 분 의 말씀만 아니라면 받아들이기도 쉬울 텐데." 고승들은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대호왕 사모 페이가 북부의 왕이 된 곳이 바로 하인샤 대사원이었고 당시 종단의 우두머리는 쥬타기 대선사였다. 물론 실제로 사모 페이를 왕으로 추대한 것은 대사원에 집결한 북부의 군웅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쥬타기 대선사가 장소 제공만 담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황제는 하인샤 대사원으로부터 어떤 것도, 사실상 지상으로부터의 어떤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격을 가 지고 있습니다. 조금 전 일방적인 관계란 없다고 말해놓고 이렇게 말 하려니 좀 뭣합니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 일방적인 관계에 가 장 가까운 것이 있다면 황제와 제국의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황 제가 우리의 설득을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노력은 해 봐야겠지요. 무수한 피가 흐를 것이 뻔한데 못 본 척할 수는 없으니 까요." "그렇다면 일단 황제와의 화해에 대해 변경백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도록 합시다." 하지만 연행원의 승려들은 아이저 규리하의 의견을 구할 수 없었다. 변경백과 그의 무리들을 찾아갔던 수좌는 그곳이 이미 텅 비어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 수좌는 눈치가 제법 빠른 인물이었고 그래서 하 늘치의 소재 또한 확인한 후에 돌아왔다. 승려들은 변경백이 작별 인 사도 생략한 채 하늘치를 타고 떠났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이 씁쓸한 기분 속에서 승려들은 규리하에 소식을 전달하 기로 결정했다. 황제에게도 보내고 싶었지만 그들은 황제의 소재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즈믄누리는 딱정벌레들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좋은 딱정벌레들을 공급한다. 하지만 도깨비의 사육술을 따를 수 없는 다른 자들은 딱정 벌레를 왜소하게 길러낼 수밖에 없다. 아이저 규리하가 하늘치를 손 에 넣은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규리하로 날기 시작 한 딱정벌레도 즈믄누리 출신의 동족보다는 왜소했다. 그 조그마한 딱정벌레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승려들은 그것이 겨울의 모진 날씨를 무사히 이겨내길 기원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중에 딱정벌레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하 지만 그 때 규리하 방향을 향해 날고 있는 비행체 중에서 딱정벌레는 결코 크기로는 수위를 다툴 수 없었다. 두 번째나 세 번째와의 비교 가 무의미할 정도로 거대한 물체가 규리하를 향해 날고 있었기 때문 이다. 말이나 니름을 할 줄 아는 이들은 모두 그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이 바다나 땅이 아닌 하늘에 있다는 모순 을 가능하게 하는 그 생물은 하늘치였다. 하지만 그 하늘치는 극소수 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 하늘치의 등에 있는 일 군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태우고 있는 하늘치를 소리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이타 규리하는 소리에 앉아 소리를 껴안고 있는 셈이었다. 이이타는 그 상황에서 희극적인 분위기를 느끼려 애썼다. "온세상이 소리로군. 최고야." 소리는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빙긋 웃으며 이이타를 끌어안았다. 그것은 애정표현이라기보다는 생존활동이다. 그들은 하늘치의 등 위에 천막이나 피난처 같은 것을 만들 수 없었 다. 환상 계단은 그것을 상상한 자에게만 영향을 끼치며 그것을 상상 한 자가 타고 있는 말이나 끌고 있는 수레 같은 것에는 아무런 영향 도 끼치지 않았다. 하늘누리처럼 승강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휴대할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소리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 다. 숲도, 동굴도, 모닥불도 없는 하늘치의 등 위에서 고공을 치닫는 겨울 바람을 고스란히 받으며 앉아있었다간 기껏 손에 넣은 하늘치를 무덤으로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멘은 휴대의 개념이 인간들과 많이 달랐다. 지멘은 하인샤 대사원의 공방에서 수리하기 위해 놓여있던 옷장 몇 개를 구한 다음 그것을 한데 묶어 소리 위로 들고 올라갔다. 그들은 소리의 등 위 우 묵한 곳을 찾아 옷장들을 눕혔다. 그리고 그 안에 소지품들을 집어넣 고는 하늘치를 규리하 방향으로 출발시켰다. 얼마 후 이이타는 자신 이 계속 조종하지 않아도 하늘치가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거라 확신하게 되었다. 밤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옷장 문을 열고 그 속에 드 러누웠다. 초소형 오두막인 셈이다. 물론 지멘은 옷장 안에 누울 수 없었지만 설원에 드러누워 자도 동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상관 없었다. 지멘은 옷장 옆에 앉아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물론 습격이 있을까봐 불침번을 서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치가 계속 같은 방향을 유지하는지 관찰하고 혹 비나 눈이 와서 옷장 속에 있는 자들이 굉장 한 봉변을 당하게 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옷장 덕분에 동사는 피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속에 누워있는 것은 굉장히 답답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보온을 위해 모포를 두툼하게 깔 아두었지만 어느 틈에선가 자꾸 새어들어오는 바람 또한 신경을 거슬 리게 했다. 이이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옆에 누워있는 소리 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옷장 속의 어둠 때문에 공자를 볼 수 없었 지만 이이타의 불안한 숨소리를 들은 소리는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뺨은 싸늘했다. 소리는 그 뺨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파지트 스님에게 인사도 못했네요. 공자님. 왜 이렇게 황급히 규리하로 돌아가는 거죠? 봄이라면 이렇게 힘들게 여행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이타는 소리가 그저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질문하는 것임을 알 고 있었다. 그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황제가 돌아왔기 때문이야. 규리하를 되찾기 위해서든 복수를 위해 서든 황제와의 대결은 불가피해.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규리하를 되찾아야지. 하늘치만 가지고서는 황제와 싸울 수 없어. 지상군도 필 요하고 보급도 필요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옷장 속에 누워 여행해야 하는 우리가 규리하를 되 찾을 수 있을까요? 밖에 있는 황제사냥꾼은 굉장히 무서워 보이지만 그래도 혼자잖아요. 공자님의 누님 곁에는 무서운 레콘이 둘이나 있 고 또 도깨비 무사장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겐 더 이상 헤어릿 언 니도 없잖아요." 이이타는 그 지적을 모두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래. 상황이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어. 하지만 기다리면 기다릴 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거야. 도리가 없는 거지……" "공자님?" 이이타는 속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 그냥 말하지. 나는 너를 사지로 끌고가는 걸지도 몰라." "제가 따라오겠다고 한 거잖아요. 공자님." "그냥 대사원에 남았어야 했어." 소리의 손가락이 이이타의 입 주위를 스쳤다. 이이타는 입을 다물었 다. 소리는 이이타의 차가운 입술을 어루만지다가 말했다. "안 졸리시면 잠깐만 문 열어볼까요?" "응?" "우리는 지금 하늘치의 등 위에 누운 채 밤하늘을 날고 있어요. 공 자님. 밖에는 별들이 반짝일 거예요." "추울 거야." "공자님. 우리는 두꺼운 옷 입고 있잖아요. 잠깐 문 여는 것 때문에 얼어죽지는 않아요." 소리는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누웠다. 그리고 문을 힘껏 밀었다. 문 이 활짝 열리는 순간 이이타는 냉기 때문에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별빛은 찌푸린 눈속으로도 가득 쏟아져들어왔다. 별들이 어찌나 많은지 어떤 별들은 다른 별의 빛 때문에 감춰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밤을 추방하기 위해 피워놓는 지상의 그 어 떤 빛도 닿지 않는 이 높은 곳은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어 두웠고 그 암흑 속에서 빛을 뿜어내는 것은 별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별들은 한 됫박의 쌀을 바닥에 쏟은 것마냥 무수히 번쩍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평선이 한참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별은 위쪽뿐만 아니 라 전후좌우에 가득했다. 마치 별들 속을 나는 것 같았다. 이이타는 태어나서 처음 별을 보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의 머리쪽 어딘가에서 지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지멘이 안부를 묻고 있었다. 소리가 재빨리 외쳤다. "잠깐 별 좀 보는 거예요. 황제사냥꾼님! 곧 닫을 거예요." 지멘은 침묵했다. 이이타는 별이 저토록 많은 것을 보니 지멘을 괴 롭힐 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 았다. 이이타의 생각처럼 지멘은 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이타나 소리가 그러는 것처럼 경외감 속에서 별들을 바라보지도 않 았다. 하늘치의 비행 방향에 대해 보내는 주의를 제외한 그의 주의력 은 모두 배낭 속에 누워있는 아실을 향해 있었다. 아실은 옷장 안에 들어가는 것을 사양했다. 혹독한 야외생활에 익숙 한 그녀는 옷장보다 배낭이 훨씬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고공 의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하늘치의 등 위에서도 아실은 배낭을 선 택했다. 지멘은 그것이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하늘치 의 등은 산꼭대기나 다름없었고 아무리 야외 생활에 익숙한 자라고 해도 산꼭대기에서 불기운도 없이 밤을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지멘 은 배낭 옆에 모로 누워 그 위에 팔뚝을 살짝 얹어두고 있었다. 아실 이 들어있는 배낭은 현재 지멘의 깃털 속에 반쯤 파묻힌 듯한 모습으 로 누워있었다. 누군가가 일어나 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옷장 문이 닫혔다. 그 소리를 듣던 지멘은 배낭을 살짝 들어 옷장 속에 집어넣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실은 잠이 얕게 드는 편이다. 배낭을 건드 리면 바로 깨어날 것이다. 지멘은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배낭을 건 드렸다. "예? 뭐죠, 지멘?" 지멘은 예상이 맞았다는 것에 실망하며 말했다. "아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빛밖에 없지만 눈이 밝은 지멘은 아 실이 배낭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희미한 모습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요?" "몇 명은 아직 못자는 것 같군." "조용히 이야기 좀 해요." "그래." "아이저 규리하를 따라 규리하로 간 다음엔 어쩔 거죠? 정말 그의 규리하 탈환을 도울 건가요?" "황제가 거기로 갈 거야. 살육을 위해. 그리고 나에게 죽으려 하겠 지." "그건 대강 짐작해요. 하지만 당신은 황제를 가짜로 죽일 거죠?"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실은 약간 큰 숨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진짜로 죽일 거예요?" "내 숙원이야." 지멘은 어쩐지 자기 말이 거짓말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아실도 그 렇게 느꼈다. "지멘. 당신도 계획을 알잖아요. 황제가 정말로 죽으면 앞으로 수많 은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그게 내 책임이 될 거라는 거야?" "즈라더는 황제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아실은 지멘을 잘 알고 있었다. 즈라더의 이름은 지멘을 침묵하게 했다. "즈라더가 그 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즈라더는 항상 황제의 곁에 있었으니까 뭔 가를 느꼈겠지요. 황제가 죽음이나 다름없는 생을 선택하려 한다는 것을…… 지멘. 당신이 죽이지 않아도 황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 요. 죽은 자를 또 죽일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철의 대화도 포기했잖 아요. 숙원은 왜 포기할 수 없죠?"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뚜렷이 설명할 수가 없었다. 숙 원을 성취한다 해도 말리 위에서 아실이 그를 불렀을 때만큼의 만족 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실의 치료를 위해 황제를 도 울 때부터 지멘은 숙원에 대한 절실한 욕구를 잃었다. 공정하게 평가 한다면 이제 숙원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원인에서 부담스러운 짐으로 전락했다. 지멘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숙 원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나면 홀가분해질 것 같은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다층적인 정신 속에서 의식보다 낮은 곳, 꿈과 대화하길 즐기는 부분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레콘들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감이 든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성의 영역에서 지멘은 압도적인 반대 증거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 황제의 계획이 실패할 경우 죽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 물 론 그들은 자신들의 우행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백 년 뒤의 누군 가가 다른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것을 가리켜 백 년 전에 죽은 어떤 황제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건 변명 도 될 수 없다. 하지만 지멘이 죽이지 않는다면 황제는 백 년 후에도 살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백 년 뒤에 일어날 어떤 살인을 막을 수 있 을지도 모른다. 천 년 뒤의 어떤 살육도, 만 년 뒤의 어떤 전쟁도 막 을 것이다. 그녀의 목표가 바로 그것이니까. '그런데 왜 나는 숙원을 포기할 수 없는 걸까? 이 절실한 느낌은 타 이모가 죽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아득한 곳에서부터 느껴 지는 이 미약하지만 분명한 절실함……' 지멘은 아실의 숨소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은 다시 배 낭 속에 들어가 잠들어 있었다. 지멘을 잘 아는 그녀는 지금이 그를 설득할 수 없는 시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멘은 그녀가 좌절감 속에서 잠들지 않았나 걱정했다. 지멘은 분노했다. '빌어먹을. 포기해도 그만이잖아. 타이모는 쟁룡해의 바닥으로 가라 앉으면서도 내가 복수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야. 나를 멍 청한 신부탐색자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가 그곳에 있던 다른 레콘들보다 나를 더 특별하게 생각하기나 했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짓은 도대체 무엇이지?' 그 생각은 지멘을 부풀어오르게 했다. 자신도 모르게 배낭을 뒤덮어 버릴까 걱정된 지멘은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해 누웠다. 지멘은 벅차오 르는 호흡을 애써 억눌러 조심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당장 쏟아져내릴 것 같은 별 속에서 지멘은 자신의 호흡을 세었다. 그는 황제를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만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단지 자 신의 숙원이기 때문에 황제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할 보편타 당한 이유가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멘은 그런 것을 떠올릴 수 없 었다. '제이어 솔한.' 지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늘치의 등에 앉은 지멘은 칠흑 같 은 어둠 속을 바라보며 제이어가 누워있는 옷장을 찾았다. 아이저 규 리하는 하인샤 대사원을 떠날 채비를 하느라 바빠 제이어의 존재를 따지지 못했고 그 틈을 타 제이어는 소리의 위까지 따라올라왔다. 물 론 조심스럽게 행동하긴 했지만 꽤나 뻔뻔한 사내였다. 그리고 지금 소리 위에 있는 자들 중 아마도 황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물일 것 이다. 제이어가 누워있는 옷장을 찾아낸 지멘은 거기로 다가갔다. 옷장 문 을 열자 조금 후 안쪽에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제이어 의 것이었다. 지멘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어둠을 붙잡아 올렸다. "뭐야? 어? 지멘?" "조용히 해라." 제이어는 입을 닫았다. 지멘은 제이어를 든 채 하늘치의 등 저편으 로 걸어갔다. 지나치게 멀어지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기 에 지멘은 가장 가까운 둔덕 위에서 멈춰섰다. 뒤를 돌아본 지멘은 별빛만으로도 옷장들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이 어를 내려놓았다. 자다가 깨어나 갑자기 추위에 노출된 제이어는 몸을 와들와들 떨었 다. 지멘만큼 밤눈이 좋지 못한 제이어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지멘 의 위치를 찾았다. 지멘이 말했다. "너는 황제의 계획이 실패할 거라 믿기 때문에 따르는 거지?" "예예예예? 아아아, 지지지멘." "떨지 말고 말해." "제제제젠장. 추, 추추춥단 말입니다." 제이어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지멘은 그런 그를 내려보다가 제이어에게 불어가는 바람을 막는 방향으로 움 직였다. 조금 후 제이어는 보다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했습니까? 실패할 거라서 따른다고요?" "넌 그렇잖아. 황제의 계획은 실패하는 거지?" "젠장. 지멘. 제가 살아오면서 많은 실패를 겪었다는 것은 인정합니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인생사를 그렇게 비웃는 것은 너무하잖습니 까. 실패주의자 제이어는 실패할 일이라서 찬성한다고요? 쳇. 그러면 황제는 왜 실패할 일에 매달리는 겁니까? 황제도 실패주의자입니까?" 지멘은 그 지적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리를 닫고는 팔짱 을 꼈다. 그런데 제이어가 갑자기 그에게 다가왔다. 더듬거리며 지멘 을 찾은 제이어는 지멘에게 닿자 태연히 그에게 안겼다. "실례 좀 합시다. 너무 추워서." 지멘은 이 기막힐 정도로 낯두꺼운 행동에 그만 할말을 잃었다. 제 지어는 지멘의 깃털 속으로 파고들 듯 몸을 밀어대며 말했다. "황제는 성공할 겁니다. 내버려두면 서로를 죽일 사람들을 살릴 겁 니다. 뜻 깊은 일이지 않습니까?" "그 일을 하느라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나는 파르바리 계곡을 보았 다." "그거요? 그거야 레콘들이 한 일이지요." "황제가 명령했어." "황제는 그런 명령 안내렸습니다. 그 명령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 이 내린 거죠." "황제가 발케네 공격을 명령했기 때문이야." "그거요? 발케네공이 황제에게 적대했기 때문이죠. 그 아들은 황제 의 죄수를 훔쳤고. 그런데 이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질 거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황제에겐 아무 죄도 없다는 거냐?" "죄를 싫어하는군요. 예비살인자가 그렇게 말하니 안 어울리는군 요." 지멘은 부리를 닫았다. 제이어는 쿡쿡 웃었다. 조금 후 그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제이어는 지멘을 꼭 끌어안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지멘. 고민이 뭡니까?" 지멘은 그 말을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부리를 열었다. "내가 왜 황제를 죽여야 되는지 모르겠다." "그건 당신 숙원 아닙니까." "그래. 옛날에는 그걸로 설명이 되었어. 그런데 이젠 안돼. 모르겠 어. 황제가 아실을 치료해줬기 때문인지, 아니면 황제가 미래에 많은 사람을 구할 인물이라서 그런 건지…… 어쨌든 난 황제를 죽여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하지만 그래야 된다고 느낀다. 모르겠어. 혹시 황 제가 나를 정신억압한 걸까? 아실을 치료했으니 분명히 황제는 다른 사람의 정신을 조작할 수 있어. 그 능력으로 나를 어떻게 한 걸지도 몰라. 대호왕도 내가 준비된 암살자라고 했어. 황제는 안 그랬다고 말했지만, 그러면 도대체 왜 내 생각이 이렇게 꼬이는 거야?" "황제의 정신억압에 대해 고민하지 마십시오. 지멘." "고민하지 말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더군요." 지멘은 몸을 조금 부풀렸다. 지멘에게 밀착해있던 제이어는 그 반응 을 곧장 깨달았다. 제이어는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 했다. "예. 저는 황제에게 정신억압당했습니다. 지멘." 눈길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며 걷던 세레지 파림은 갑자기 뛰어올랐 다.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린 세레지는 맹렬한 뒤후려차기로 그곳에 서있던 나무를 걷어찼다. 이 경쾌한 일격에 나무는 비장해두었던 눈 을 듬뿍 뿌려주는 것으로 반격했다. 세레지의 상반신은 단숨에 눈사 람과의 근연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세레지는 목 으로부터 풀죽은 소리를 내며 허리를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열심히 인사하는 것 같은 동작으로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떨어뜨린 세레 지는 남은 눈을 손으로 털어내며 말했다. "웃어요." 세레지의 말은 함께 걷고 있던 야리키를 향한 것이었다. 야리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웃기려고 한 거냐?" "그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 보면 보통 웃거나 조롱하거나 하잖아요." 야리키는 그 말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곤 반응을 결정했다. 그는 세 레지를 내버려둔 채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세레지는 작게 으르 릉거리고는 재빨리 야리키의 뒤를 쫓았다. 다시 야리키의 옆으로 돌 아온 세레지는 잔뜩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라수의 방이 맞는 모양이에요. 어디에도 두 사람의 흔적 이 없어요. 각하처럼 조그마한 사람이라면 혹 몰라도 무사장처럼 커 다란 사람이 눈에 뜨이지 않게 규리하성을 빠져나갈 수는 없어요. 두 사람은 틀림없이 라수의 방에 있을 거예요." 세레지는 어제부터 시작되어 조금 전에 끝난 규리하성 수색 결과를 그렇게 정리했다. 야리키는 그 말에 동의했다. 사실상 세레지와 함께 수색에 나서기 전부터 야리키는 그럴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라수 의 방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그쪽으로는 손을 쓸 수 없 었던 야리키는 답답한 마음에 세레지를 따라나선 것이다.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 규리하성의 출입구 전부와 성벽 바깥까지 샅샅이 뒤져본 수색은 무위로 돌아갔고 이제 그는 성안에서 라수의 방으로 들어갈 방도를 찾아낸 사라말 아이솔을 볼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랐다. 세레지 는 걷어찰 만한 또다른 나무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돼요. 라수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왜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는 거죠? 그 안에 음식 물 잔뜩 싸들고 들어가서 농성이라도 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왜 농성 을? 알았다. 각하께서는 시집 가기 싫은 거예요. 황제의 청혼은 규리 하공이 사라진 후에 오지 않았느냐고요? 그건 문제가 안돼죠. 틀림없 이 그 신비한 기계새가 미래를 예언한 거예요.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죠. 제가 각하로 변장하고 칼리도백이 기다리는 신방에 들어가는 거예요……" 세레지가 고질병의 재발에 시달리고 있는 거라 판단한 야리키는 보 나마나 세레지 에더리 마케로우 황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세레지의 말은 그의 예상과 다른 것 이었다. "그래야 백작님도 덜 놀라겠지요." 세레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지만 야리키는 그 말에 부리를 열 수밖에 없었다. "더 놀란다고?" "덜 놀라는 거죠." "왜?" "그야 제 옷 아래에는 여자의 몸뿐이니까." 야리키는 '그렇다면 정우의 옷 아래에는 남자의 몸이라도 있다는 거 냐?'고 되물으려다가 자신이 세레지의 병에 전염되었나 보다고 생각 했다. 부리 밖으로 나오려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도로 삼킨 야리키 는 그것을 좀 더 상식적인 질문으로 바꿨다. "그러면 정우의 옷 아래에는 뭐가 있는데?" "아마 그래서 시집 가기 싫으신 걸 거예요. 그걸 보이기 싫어서." "그게 뭔데?" 세레지의 얼굴을 본 야리키는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 었다. 세레지는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없이 걸었다. 야리키 는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있던 낚시대를 왼쪽 어깨로 옮겼다.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지만 야리키는 규리하공의 몸에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의 몸에 목숨에 관련된 큰 문제가 있나?" "목숨? 글쎄요. 그건 아니에요." 야리키는 충분한 대답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리를 닫았다. 그러자 세레지가 입을 열었다. "안 궁금해요?" "목숨과 관련 없는 문제라고 했잖아. 어디가 기형인지 모르지만 ……" "기형? 야리키. 당신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진실은 그 이상이에요." 야리키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그렇게 입이 간지러우면 말해. 이야기 하는 거 좋아하잖아. 비밀이 면 지켜주지." 세레지는 완강히 입을 닫고는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듯 두 손으로 입 을 틀어막았다. 야리키는 벼슬을 꿈틀하고는 다시 걷는 것에 열중했 다. 세레지는 목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그 뒤를 따라걸었다. 조금 후 어느 정도 진정하게 된 세레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제가 이 정도나마 이야기한 것도 당신 입이 무겁기 때문이에요. 안 그러면 제가 미칠 것 같으니까. 야리키. 절대로……" "알아." "알아요?" "정우에게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식의 암시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는다." "고마워요. 이건 정말 비밀이에요. 비밀? 이런, 젠장! 비밀은 무슨! 결혼하면 다 알게 될 텐데!" 세레지는 다시 도약했다. 이번 목표는 근처에 놓여있던 나무통이었 다. 세레지의 호된 발길질은 나무통을 날려버리는 대신 그것을 박살 냈다. 통 바닥이 땅에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세레지는 발을 움켜쥔 채 통의 잔해 속을 깡총깡총 뛰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야 리키는 세레지의 걱정이 자신과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레 지는 정우의 행방불명보다 그녀가 청혼을 받았다는 것에 더 신경 쓰 고 있었다. 그 이유는 틀림없이 세레지가 감히 말할 수 없는 정우의 몸에 있는 이상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야리키는 정말 정우가 남자의 몸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의심했다. 발의 통증에서 회복된 세레지는 쩔뚝거리며 야리키의 곁으로 돌아왔 다.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눈주위를 세 게 문질렀다. "불쌍하신 규리하공. 기계새의 예언을 듣고는 그만 어쩔 줄 모르게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성에서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라수 의 방으로 도망쳤겠지요. 무사장은 각하를 위로하러 그 안에 들어갔 을 테고……" 자신의 추리가 정확한 사실인 것처럼 중얼거리던 세레지가 갑자기 어조를 바꿔 말했다. "저 사람, 시오크 지울비죠?" 야리키는 세레지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의 본관 계단에서 시오크가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먼 여행을 떠나 는 차림새였다. 주위를 조금 둘러본 야리키는 역시 먼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말들과 병사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제자리에 서서 시오크가 말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안장 에 오른 시오크는 본관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까이 있던 규리 하 병사가 재촉한 후에야 시오크는 말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규리하의 병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성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보던 세레지는 설명하듯 말했다. "당으로 돌아가는 모양이군요. 저 병사들은 유료도로가 있는 곳까지 바래다주러 가는 것일 테고. 저 사람도 참 불쌍해요. 당을 바꾸고 싶 어했는데 이제야말로 그럴 기회가 왔잖아요. 왕이 될 테니까. 그런데 그게 하나도 기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도 위험하고 애인도 위험하 고." 야리키는 별 감흥을 못느꼈다. 그런 야리키를 보던 세레지는 짜증스 럽게 말했다. "야리키. 당신이 하늘낚시터를 얻어도 그게 하나도 즐거운 일이 아 니라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즐거울 거야." "안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 없어." 세레지는 세 번째 타격대상으로 레콘의 다리를 선택하면 어떨까 생 각했다.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것은 아니지만 야리키는 세레지를 놔 둔 채 본관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세레지 는 머리를 가로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정우의 방에서는 아트밀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레지와 야리키의 모습을 본 아트밀은 그들이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아트밀은 몸을 돌려 방안을 보았다. 잠깐이지만 아트 밀은 꽤 놀랐다. 정우의 방으로 통하는 문 앞에 사라말이 드러누워 있었다. 아트밀은 사라말이 기절했다고 생각하고는 황급히 걸음을 옮 겼다. 그러나 사라말에게 다가가던 아트밀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라말은 바닥에 누운 채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며 자벌레처럼 기 어가고 있었다. 기가 막힌 아트밀은 걷는 속도를 늦추며 사라말의 행 동을 보다 자세하게 관찰했다. 사라말은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발바닥을 문으로 향한 채 문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문에 도달한 사라 말은 발로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며 복도가 나타났다. 머리를 들어 문밖의 광경을 보던 사 라말은 담담히 몸을 일으켰다. 등과 엉덩이를 툭툭 터는 그를 보다가 아트밀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뭐였냐?" "라수의 방으로 떨어지려고 해봤습니다." 혼란스러워 하던 아트밀은 문을 바닥으로 생각한 후에야 사라말의 말을 이해했다. 기발하다는 생각보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이 먼저 들었다. 문을 닫는 사라말을 향해 아트밀은 단호하게 말했 다. "너 좀 쉬어야 해. 미친 짓을 하는 걸 보니 상태가 안 좋아…… 뭐 냐?" "짐작할 텐데요?" "라수의 방으로 기어올라가려는 거야? 그만둬!" 하지만 사라말은 바닥에 엎드린 채 문으로 기어가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문에 도달한 사라말은 손으로 문을 밀었다. 조금 전의 제지 에도 불구하고 아트밀은 문 뒤에 뭐가 나타나는지 바라보았다. 나타 난 것은 복도였다. 사라말은 일어나서 가슴을 툭툭 털고는 문을 닫았 다. "하긴 정우나 도깨비들이 이렇게 다녔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만두고 쉬어. 사라말!" "정우가 라수의 방에 있다면 아직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자기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일 겁니다. 묶 여있거나 어쩌면 혼수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아트밀은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라말에게 다가가며 의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사라말 뒤편에 의자를 내려놓고 는 그를 툭 밀었다. 사라말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아트밀을 빤 히 바라보았다. "아트밀. 고맙지만……" "시끄러워!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해볼 테니까." "당신이오?" "그래. 젠장. 네가 하는 미친 짓들은 많이 봤으니 그거 빼놓고 다른 방법으로 해보지. 어디 보자. 빌어먹을. 문이야, 문. 이건 문이라고. 드나드는 거지 기어오르거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야." 사라말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맙습니다만 저를 도와주고 싶다면 다른 문으로 가서 시도하시지 요. 어느 문이든 상관없을 테니까." "사라말. 말 좀 들어." "저를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화를 내려던 아트밀은 갑자기 부리를 닫았다. 아트밀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사라말을 노려보았다. 사라말은 그 눈을 피해 문을 바라보았 다. 아트밀이 말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예." "내가 정신억압 당했으니까?"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거야. 네 말투는 그런 걱정은 잘못된 거라는 투였어. 그래. 내가 널 보호하도록 정신억압되어 있어서, 그래서 너를 말리는 거다, 이 말이지? 이건 가짜 걱정이라는 거지?" 변명은 악효과만 가져올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에 사라말은 입을 닫 았다. 아트밀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다. "사라말 아이솔을 따라다니며 보호하도록 정신억압되어 있다고 했 지. 그래서 얼음바다도 건넜고 시냇물도 건넜다고. 그래. 그거였군. 그래서 내가 네 미친 짓을 계속 보고 있었던 것이군.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문 여는 법만 연구하는 네 꼴이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 니라…… 그냥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는 거지? 누가 내 정신을 비 틀어 놓아서? 젠장. 그 말이 맞아. 진작 깨달았어야 하는 건데." "아트밀. 당신의 배려를 무시하는 듯이 말한 것 사과하겠습니다. 저 는……" "부리 닫아." 부리가 아니라 입이었지만 사라말은 그것을 닫았다. 아트밀은 사라 말에게서 눈을 돌려 문을 열었다.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그러자 문이 열리며 복도가 나타났다. 아트밀은 밖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그 리고 역시 평범한 방법으로 문을 닫았다. 방안에 홀로 남게 된 사라말은 뒤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트밀이 놓 아준 의자에 앉은 사라말은 두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3) | 2004·11·08 07:52 | HIT : 345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6-3 관련자료:없음 [4938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08 06:50 조회:31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 3 소리 로베자는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껌뻑였다. 하늘치 소리는 서 쪽을 향해 날고 있었지만 소리는 하늘치의 꼬리쪽을 향해 서있었다. 그 때문에 소리는 가장자리가 발갛게 변한 보랏빛 구름들 사이로 얼 굴을 반만 내민 해를 마주보고 있었다. 햇빛의 무게가 얼마인지는 모 르지만 그것이 눈꺼풀 위에 내려앉자 소리는 눈꺼풀이 더욱 무거워지 는 것을 느꼈다. 소리는 눈꺼풀에 묻은 햇살을 문질러 떼내듯 눈을 문질렀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서는 지멘이 걷고 있었다. 지멘은 주위를 두리 번거리며 어떤 장소를 찾듯 움직이고 있었고 그 곁에는 아실이 무심 한 표정으로 나란히 걷고 있었다. 밤새 불침번을 섰던 그 레콘은 소 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햇빛 잘 드는 곳을 찾아 뭘 먹은 다음 잠 들겠다고 말하고는 그들이 있던 우묵한 곳을 떠났다. 소리가 바라보 는 동안 두 사람은 적당한 장소를 찾은 것 같았다. 그들은 하늘치의 융기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잤지만 춥고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소리는 휴 식을 취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몸은 얼기설기 엮어놓은 막치 라도 되는 것 같았고 파리떼가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머리는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소리는 되도록 빠르게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옷장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하늘치의 등 위에 버린 쓰레기처럼 널려있는 옷장들을 보던 소리는 갑자기 당혹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일찍 일어났지만 할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늘치 소리의 휑한 등에는 당연히 아침식사를 준비할 수 있 는 부뚜막이나 이이타 공자의 세숫물을 퍼올릴 우물 등은 없었다. 그 들이 지참한 먹거리는 모두 물이나 불 없이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이기 에 따로 준비할 일도 없었다.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은 소리를 느긋하게 만들기보다는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소리는 자신을 끌 어안은 채 정처없이 눈길을 보냈다. 그 때 소리의 눈에 기이한 것이 들어왔다. 소리는 어리둥절해 하며 걸어갔다. 하늘치의 등에 밤새 반점이라도 생긴 걸까? 소리는 발을 멈추고 바닥에 있는 이상한 얼룩을 보았다. 곧 소리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비바람을 제외하면 하늘치의 등을 청소하는 손길은 없었다. 하늘치 의 등에는 기나긴 시간 동안 먼지가 쌓여 굳어있었다. 그 먼지층에 누군가가 글을 써놓았다. 옆에서 비치는 햇살 때문에 그 글에는 짙은 명암차가 생겼고 그 때문에 소리가 그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글자 들 옆에 있는 큼직한 자국을 본 소리는 그곳이 지멘의 배낭이 놓여있 던 곳이라고 생각했다. 글씨를 쓴 것은 아마도 아실일 것이다. 지멘 의 손가락으로는 그렇게 가느다란 글을 쓰기 어려울 테니까. 소리는 쭈그리고 앉아서 바닥에 있는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소리는 흥미를 느꼈다. 오래된 먼지 위에 쓰여져 있는 그 글은 또박또박한 글씨로 곱게 쓰여져 있었다. 소리는 보존성이 없는 글을 그렇게 정성껏 쓴 것은 기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는 두 손으로 뺨을 받쳤다. '내용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소리가 글씨부터 살핀 것은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소리는 글씨를 이루는 선과 선이 꺾이고 만나고 구부러지는 모습을 살피다보면 갑자 기 그 뜻을 알 수 있게 될 거라 믿는 사람처럼 그 글을 바라보았다. 바람만 불면 사라질 글을 그렇게 정성껏 쓴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아실의 필체가 그렇기 때문일까? 소리는 그 이상한 글의 내용을 이리 저리 상상해보았다. 우리는 하늘치를 타고 여행 중이다. 규리하로 가 고 있다. 소리와 이이타 공자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인 다…… 소리가 히죽 웃었을 때 옆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왜?" 소리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서 옆을 돌 아보았다. 이이타 규리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소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실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왜? 누가 너에게……" 공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소리는 눈을 크게 뜬 채 이이타를 바 라보았다. 소리의 표정을 살피던 이이타는 문득 그녀가 문맹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이이타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네가 쓴 것이 아니지? 미안해. 네가 이 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 어서 난 네가 썼다고 생각했어." "제가 안 썼어요. 그런데 왜 아실과 안 좋은 일이 있냐고 물으신 거 죠?" 이이타는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턱을 만지작거렸다. "네가 안 썼다면 누가 쓴 거지?" "아실이 잔 곳이 여기니까 아마 아실이 썼을 거예요." 그 대답은 이이타로 하여금 눈을 찌푸리게 했다. 이이타는 낮은 목 소리로 말했다. "아실은 어디 있지?" "황제 사냥꾼님과 함께 떠났어요. 그 레콘은 볕 좋은 데로 가서 한 숨 자겠다고 했어요. 공자님. 이 글이 뭐 잘못되었나요?" 이이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바라보다 가 차분하게 말했다. "지독한 욕설이야." "욕설이오?" "그래. 어떤 여자를 무시무시하게 저주하고 있어. 이렇게 험악한 이 야기는 처음 보는 것 같군. 이곳에 여자는 너와 아실뿐이라서 난 네 가 아실을 욕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렇게 물었고. 그런데 이 글을 쓴 것이 아실이라면 아실이 어떤 여자를 욕했다는 건데." 소리는 그 설명에 당황과 분노를 느꼈다. 이이타가 말한 것처럼 그 곳에 여자는 소리와 아실뿐이었다. "아실이 저를 욕한 거라고요?" "잠깐만 기다려봐. 좀 더 자세히 읽어보지." 소리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이이타가 허리를 굽히고 글을 읽는 동안 소리는 분노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꼽다는 거지? 천한 신분인 주제에 감히 무향의 공자님과 사귄 다는 거지? 그래서 나 보라고 이렇게 또박또박 써둔 거지?' 소리는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보라는 듯이 욕설을 써뒀는 데도 읽을 수 없어서 이이타에게 대신 읽어달라고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화가 났다. 그리고 이이타가 그 글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네 인생이 다 망가진 것이 나 때문이야? 황제랑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을…… 왜 공연한 사람을 이렇게 화나고 슬프게…… 너무해!' "네가 아냐. 소리." 이이타가 허리를 펴며 말했을 때 소리는 그를 부여잡고는 천한 신분 이라서 미안하다고 외치며 울 뻔했다. 이이타를 향해 몸을 내밀던 소 리는 문득 이이타의 말을 이해했다. "제가 아니라고요?" "그래. 아실이 욕한 것은 다른 여자야." "공자님. 혹시 제가 상처 입을까봐 괜히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여 기에 여자라곤 아실과 저밖에 없잖아요." "여기 있는 여자가 아냐. 황제야." 소리는 안도감과 허탈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실이 황제를 욕했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고조되었던 분노가 사라지면서 감정의 혼란을 느낀 소리는 좀 기묘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황제요?" "응. 이거 지독하군. 읽는 나까지 기분이 이상해지는데. 누가 나한 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 당장 칼을 뽑을 것 같아. 아실은 황제를 정말 증오하는군. 하긴 그러니 그 긴 세월 동안 지멘과 단 둘이서 황 제와 싸울 수 있었겠지. 어? 왜 그래?" 이이타는 소리에게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문득 소리 는 자신의 눈 주위가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는 황급히 눈물 을 훔쳤다. "아, 아뇨. 공자님." "왜 우는 거야?" "안심이 되어서…… 아실이 저를 욕한 줄 알았어요. 자기는 인생이 망가진 거나 다름없는데 저랑 공자님이랑 맺어진 것을 보니 질투 나 고 화가 나서, 어, 그래서 제가 얄미워서 저를 욕했다고…… 안심도 되고 아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요." 이이타는 빙긋 웃고는 발을 옆으로 뻗었다. 그는 바닥에 있는 흉악 한 욕설들을 발로 문질러 지우고는 소리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위로 의 말은 없었지만 소리에겐 그 손길로 충분했다. 배낭에서 꺼낸 건량으로 아침 식사를 끝낸 지멘은 아침 햇살이 내리 쬐는 곳에 드러누웠다. 그의 허리 곁에 앉아 지멘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아실은 식사하는 동안 들었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제이어 솔한이 정신억압을 당했다고요?" 아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가 그것을 알고 있으며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 다는 것이군요. 다른 말은 없었어요?" 그건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었다. 지멘은 말했다. "그 말뿐이었어." 아실은 두 손으로 뒤통수를 받쳤다. 지멘이 호흡할 때마다 그녀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면 이젠 확실히 포기했겠군요. 지멘." "포기?" "황제를 죽이는 것 말이에요. 당신이 그러려 해도 그럴 수가 없어 요. 그녀에게 다가가면 정신억압을 당해서 못 죽이게 될 테니까." 지멘은 벼슬을 꿈틀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밤새 도록 생각했던 것은 제이어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하인샤 대사원의 일주문 앞에서 제이어는 자신이 황제의 적도 될 수 있고 동료도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어젯밤 제이어는 자신이 황제에게 정신억압을 당했음을 고백했다. 지멘은 정신적으로 지배받는 자가 어떻게 지배자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멘은 과거 말리에서 있었던 황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을 정 신억압했느냐는 지멘의 질문에 대해 황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짐은 그런 식으로 정신억압하지 않는다.' 지멘이 생각하는 방식과 다른 형태의 정신억압이 있다는 말투였다. 지멘은 제이어의 그토록 모순된 모습은 황제가 암시한 '다른 방식'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멘이 느끼기에 그 다른 방식이라는 것은 '정신억업하지 않음'과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지멘은 그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를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보다 현 실적인 문제도 많이 있었다. "아이저에게 말해야 해." "예?" "황제에게 정신억압을 받고 있는 자가 이 하늘치에 타고 있다는 것 을 알려야 해. 이건 함정이야. 엘시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전 황제가 마지막으로 노리는 대상이 바로 규리하야. 이미 지키멜 퍼스와 시오 크 지울비가 규리하로 갔지." "부냐 헨로와 스카리 빌파." "그래. 지금 아이저도 규리하로 향하고 있어. 이건 모든 문제를 규 리하에 모아서 한꺼번에 처리하려는 거야." "그리고 당신도 규리하로 가고 있고요." "맞아. 규리하 정벌이 끝난 다음에 나한테 가짜로 죽어서 신이 되어 야 하니까. 그게 황제의 계획이지. 제이어가 따라온 건 우리가 제대 로 규리하로 가는지 감시하려는 거야." "알리지 말아요." "황제를 도우라고?" "알려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규리하공은 규리하로 갈 수밖에 없어 요. 그러지 않으면 황제와 싸울 수 없으니까. 함정은 사실상 사냥감 에게도 기회에요. 사냥꾼은 사냥감이 다니는 길에 덫을 놓지요. 그런 데 거꾸로 사냥꾼을 공격하고 싶은 사냥감이라면 어디로 가야겠어요? 사냥꾼이 반드시 찾아오는 곳에서 기다려야겠지요. 바로 함정이죠. 이게 함정이라도 규리하공은 규리하로 갈 거예요." 아실의 말이 옳았다. 아이저 규리하는 규리하 외엔 돌아갈 곳이 없 다. "그 모든 이야기를 꺼내면 규리하공은 오히려 당신을 의심하게 될 거예요. 황제의 계획에 따르면 당신도 황제를 돕게 되어 있잖아요. 칼리도백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황제를 위장살해하는 것이 당 신 역할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진짜로 황제를 죽일 거라고 말해봐야 설득력이 없을 거예요." 지멘은 촘촘한 거미줄에 붙잡힌 파리가 된 것 같았다. 모르고 들어 가는 덫이라면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덫이라는 것을 잘 알 면서도 그 안으로 걸어들어가야 하는 이 상황은 도대체 무엇인가. 지 멘은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부리를 꽉 붙여야 했다. 지키멜 퍼스는 새카만 별들이 반짝이는 새하얀 밤하늘을 날았다. 시 작은 도통 끝나지 않았지만 끝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의 운동 방향은 그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 하지 만 그녀는 답답했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지키멜은 쥐어짜지는 압박감을 느꼈다. 지키멜은 떨어지는 천장 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키멜은 겁에 질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 지키멜은 눈을 깜빡였다. 천장이 있었다.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자 천장과 이어진 벽들도 보였다. 꾸물거리고 있는 것은 공기 속을 떠다 니는 먼지인지 그녀의 눈 속에서 떠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냉 기 때문에 지키멜은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지키멜은 이불을 느꼈다. 지키멜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마 잠에서 깬 모양이다. 입안이 견딜 수 없이 건조했다. 지키멜은 억지로 침을 삼켰다. 이 아침은 좀 기묘하다. 왜 이렇게…… 문득 지키멜은 그것이 매일 겪는 기상과 다른 무엇임을 깨달았다. 조각조각 부서진 기억들이 그녀에게 쇄도했다. 지키멜은 눈을 감고는 안간힘을 다해 뒤죽박죽이 된 기억 들을 정리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그녀를 방해했다. "후작님! 깨어나셨군요!" 지키멜은 흠칫하며 눈을 떴다. 누군지 모를 여자가 겁을 주려는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녀를 마주보던 지키멜은 갑자기 그녀가 반가운 표정을 짓 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여자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은 놀람 때문이다. 혈색이 좋아 보이는 여자는 어디에도 없는 신께 감사한다느니,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느니 하는 말을 빠르게 쏟아내고 는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질려있던 지키멜은 그녀가 사 라진 것에 안도했다. 지키멜은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는 아마도 길지 않을 듯한 고요 속에서 재빨리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차츰 기억 들이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혈색 좋은 여자 - 지키멜은 이제 그녀 가 규리하성의 하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가 의사로 짐작되 는 사람과 함께 돌아왔을 때 지키멜은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완전 히 떠올렸다. 그래서 지키멜은 의사가 도달하자마자 질문했다. "내가 며칠만에 깨어난 거지?" 의사는 그 질문을 무시했다. "자신이 누군지 말씀해보십시오. 각하." 지키멜은 그런 질문을 하는 의사를 이해했지만 그 질문에는 짜증을 느꼈다. 그녀는 메마른 입을 힘겹게 움직였다. "나는 지키멜 퍼스다. 내가 제정신을 되찾았는지 확인할 질문들이 더 있다면 잊어버려. 나는 제정신이니까. 그러니 내 질문에 대답해. 내가 며칠만에 깨어난 거지?"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입니다. 후작님. 정말 위험하셨습니다." 지키멜은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사흘 동안 정신을 잃 었다면 정우와 탈해는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묶여있 었을 것이다. 그녀의 맥박을 재고 이마를 짚는 등 부산을 떠는 의사 에게 지키멜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변경백은? 변경백과 무사장은 어떻게 되었지?" 지키멜이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지시하던 의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키멜을 돌아보았다. "저, 두 분은 사라졌습니다. 저희들은 후작님께 두 분의 소재를 여 쭙고…… 그런데 지금 괜찮으십니까? 대화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키멜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난 괜찮아." 그 말은 곧 거짓말이 되었다. 사흘 동안 혼절했던 사람답게 지키멜 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쓰러졌다. 의사는 황급히 그 녀의 상태를 검사했다. 지키멜은 주먹을 꼭 움켜쥐어 손톱으로 손바 닥을 찔렀다. 잠들고 싶은 유혹이 너무도 강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 두 사람이 굶어죽을지도 모르니까. 지키멜은 되도록 정확히 발음하려 애쓰며 말했다. "조금 어지러운 것 뿐이야. 난 괜찮아." 두 사람의 실종과 자신의 음독을 어떻게 설명하려고 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지키멜은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짜내며 동시에 말했 다. "침입자들이 있었어…… 자객처럼 보이는 자들. 얼굴은 기억이 안 나…… 복면으로 가렸던가? 그 놈들이…… 나를 인질로 삼아서…… 아니, 길잡이야. 인질이면서 길잡이야. 무사장에게 안내하도록 했어. 그 놈들은 규리하공이 어디 있는지 알지만…… 무사장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어. 그래. 그래서 나를 데려갔던 거야. 무사장의 방 앞에서…… 그 놈들이 내게 뭘…… 약 같은 것을 먹였어." 지키멜은 안도했다. 급조한 것치곤 앞뒤가 그럭저럭 맞는 설명이었 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 남아있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지키멜은 눈을 떠 의사의 반응을 살폈다. 의사는 상당한 집중력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키멜은 마른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무사장은 어떻게 되었지? 규리하공은? 사라졌다고?" "아, 예.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후 작님의 말씀대로라면 두 분은…… 아니, 이건 군인들이 신경 쓸 일이 겠지요. 제가 할 일은 후작님의 회복을 돕는 것일 테고요. 혹시 드셨 던 약의 냄새나 색깔, 맛 같은 것이 기억나십니까?" 의사의 치료를 돕기 위해선 약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좋겠지 만 지키멜은 억지로 먹은 약에 대해 지나치게 잘 기억하고 있다는 인 상을 주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약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다. 의사는 애석해하다가 의식을 회복했으니 더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조금 후 소식을 들은 자들이 몰려왔다. 오니샤 퓨덴 병무대부와 경 비대장, 그리고 그 외 온갖 사람들이 지키멜을 닦달했다. 그들은 형 식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자신들이 지키멜 의 안위보다는 규리하공과 무사장의 소재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침입자에 대한 끝없는 추궁과 질문을 피하 기 위해 지키멜은 신음을 토하고 몸을 뒤틀어 의사의 사명감을 자극 했다. 의사는 자신의 첫 번째 소임이 환자를 돕는 것이며 지키멜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녀가 빨리 회복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며 그들 모두를 쫓아냈다. 이윽고 음식이 왔다. "조용히 혼자 먹고 싶어. 시중 들 사람은 필요없어. 사람들을 더 견 딜 수 없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후작님." "제발 나가줘. 사람 냄새만 맡아도 비위가 뒤틀리는 것 같아." 지키멜은 발광이라도 할 듯한 태도로 그들을 쫓아냈다. 방안에 홀로 남은 지키멜은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 다. 눈앞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지키멜은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한 참 동안 자신을 다그친 후에야 지키멜은 겨우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독려해가며 탁자로 다가간 지키멜은 힘겹게 초에 불을 붙였 다. 한 손으로 촛대를 든 지키멜은 다른 손으로 가까이 있는 가구들 을 짚으며 문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기 전 지키멜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정우와 탈해를 통제할 수 있을까?' 하지만 두 사람도 사흘 동안 묶여있었을 테니 팔팔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더 지체하다간 두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지키멜은 그 시각 성의 다른쪽에서 사라말 아이솔 이 알아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방법을 통해 문을 열었다. 라수의 방이 나타났다. 지키멜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벌름거렸다. 시 체 썩는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방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촛불빛 속에서 라수의 방을 채우고 있는 골동품들이 떠올랐다. 지키 멜은 촛대를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곧 방 저편에 있는 두 사람 의 모습이 보였다. 지키멜이 묶어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의자에 묶 인 채 서로 등을 마주대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머리를 떨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촛불빛을 보았다면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이 다. 지키멜은 몸이 싸늘해지는 불안감을 느꼈다. 벌써 죽은 걸까? 그 녀는 당장 쓰러질 듯한 불안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지키멜은 정우의 앞쪽에 섰다. 정우는 턱을 가슴에 묻고 있었다. 지 키멜은 촛대를 옆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코 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때 갑자기 정우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날개. 그래. 날개가 좋아." 지키멜은 기절할 뻔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닌 사실 그대로. 잠깐 동안 선 채로 의식을 잃었던 지키멜은 쓰러지기 직전에 의식을 회복 했다. 그녀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정우의 얼 굴을 보다 자세히 관찰했다. 정우는 잠들어 있었다. 조금 전 지키멜을 기겁하게 한 것은 잠꼬대 였다. 지키멜은 무릎 걸음으로 움직여 탈해쪽으로 돌아갔다. 탈해 역 시 머리를 떨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두 사람 은 잠이 든 모양이다. 잠에 관해서라면 도깨비들은 모두 전문가다. 지키멜은 촛대를 내려놓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 음식이 놓인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깨어난 정우가 들려준 설명은 지키멜의 예상과 일치 했다. 지키멜은 정우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한 손만 풀어주었다. 정 우는 그 손으로 힘들게 음식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중간중간에 몇 시간씩 깨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잤어요. 사흘이라고 요? 그렇게 오래되었을 줄은 몰랐어요." "춥고 자세도 불편했을 텐데 참 대단하군요. 도깨비들이 잠 잘 자는 것을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혹시 자는 것을 따로 연습하기도 하는 거예요?" 입에 음식이 든 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키멜은 그녀를 만류하 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많이 먹지는 말아요. 계속 묶여 있어야 하는데 볼일이 급해지면 곤란하니까." 정우는 자유로운 손으로 입 주위를 대강 훔치고는 지키멜을 빤히 바 라보았다. 그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 지키멜은 쟁반을 들고 탈해에게 돌아갔다. 그녀가 잠든 탈해를 깨우려 할 때 정우가 말했다. "지키멜. 아무 짓도 안 하고 얌전히 있을 테니 풀어달라고 말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내가 왜 그 약속을 믿어야 하지요?" "약속이니까요." "미안해요. 정우. 나는 도깨비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 찬가지죠." "인질이나 약점, 담보물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겠죠?" "그런 것이 필요해요." "당신이 그래야 편하겠다면 그런 걸 주고 싶어요. 하지만 뭘 주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지키멜은 입을 닫고 탈해를 깨웠다. 탈해의 팔을 풀어 식사할 수 있 도록 해준 지키멜은 정우에게 돌아와 그녀의 팔을 묶었다. 정우는 반 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에 힘이 없었던 지키멜은 정우를 도로 묶느 라 기진맥진해야 했다. "지키멜. 너무 안 좋아 보여요." "당신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요. 아무리 계속 잤다지만 사흘 동 안 굶은 사람 같지 않아요. 무사장님도 그렇고." "우리를 여기 붙잡아두고 뭘 어떻게 할 생각이죠?" 지키멜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물건에 걸터앉았다. 아직은 계획을 알려줄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침묵하자 정우 또한 입을 다물었다. 지키멜은 정우와 마찬가지로 탈해 또한 아사하지 않을 정도만 먹게 한 다음 그의 식사를 중단시켰다. "내가 깨어났으니 이젠 자주 올 수 있을 거예요. 밤에 다시 돌아오 지요." 지키멜은 촛대를 쟁반 위에 놓고 힘겹게 그것을 들어올렸다. 밖으로 나가는 짧은 길이 들어올 때보다 훨씬 길어진 것 같았다. 그녀가 문 에 도달했을 때 정우가 말했다. "지키멜, 몸조심해요." 지키멜은 잠깐 멈춰섰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 와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았을 때 지키멜은 자신이 정신을 잃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무의식 상태에서 움직이던 지키멜은 자신이 제발 잠 자리에 제대로 들어와 있길 바라며 잠들었다. 깊은 밤, 규리하성의 대부분 구역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밤늦게까지 불이 밝혀진 몇 군데에서는 규리하가 직면하고 있는 복잡한 문제를 보다 단순한 것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 해 결이 아니라 단순화라는 것은 규리하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 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의기소침해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 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세레지는 기 나긴 정신노동 끝에 바깥 공기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주저없이 외투를 꺼내어 어깨에 걸치고는 밖으로 나왔다. 설핏 부풀어오른 달이 파르스름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별다른 목적 없이 정원과 연병장, 계단과 축대를 거닐던 세레지는 우연히 바라본 성벽 위에서 거대한 형체를 발견했다. 세레지는 멈춰서서 그 모습을 보다가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다. 가장 가까운 계단으로 걸 어간 세레지는 그대로 주랑 위까지 걸어올라갔다.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다가왔다가 세레지임을 확인하고는 물러 갔다. 세레지는 주랑 저편에 있는 커다란 형체 쪽으로 다가갔다. 대 화가 가능해지는 거리에 도달하자 세레지는 곧장 말했다. "밤낚시?" 야리키는 성 안쪽을 향해 흉벽에 걸터앉아있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 고 세레지에게 대답하지도 않았다. 세레지는 그의 곁에 섰다. 야리키 는 성 안쪽을 향해 자신의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줄은 풀지 않았다. 세레지는 성 안쪽을 순찰하던 경비병의 머리를 때리게 될까봐 줄을 감아둔 거라고 판단했다. "당신에게 전할 기쁜 소식이 있어요." 그런 말이 보통 받게 되는 관심을, 세레지는 받지 못했다. 야리키는 세레지가 또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거라 믿었다. 세레지는 볼을 조금 부풀렸다가 되도록 담담하게 말했다. "아까 저녁 무렵에 온 딱정벌레는 하인샤 대사원에서 온 거였어요. 아이저 규리하가 온대요. 그는 하늘치를 다룰 수 있게 되었어요." 야리키는 벼슬을 꿈틀했다. 그제서야 세레지에게 얼굴을 돌린 야리 키는 둔하게 말했다. "성공했군." "하늘낚시터를 만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늘어난 거죠. 어때요?" "아냐." "아니에요?" "나는 정우에게 걸었다." 세레지는 자신의 코에서 새어나오는 하얀 김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야리키가 아이저의 호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이타 규리하의 습 격 당시 야리키는 지금 생각해도 오싹해지는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그 들을 물리쳤다. 야리키가 정우에게 희망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 만 세레지는 정우에게 걸었다는 그 말에서 어떤 각별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규리하공은 아직도 못돌아왔어요. 도대체 비나간후가 말하는 그 침 입자들은 어떻게 성으로 들어왔다가 나간 거죠?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무도 그런 침입자를 보지 못했어요. 어쩌면 그 침입자들은 성 안의 배반자들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봐도 혐의를 둘 만한 사람이 없어요." "돌아올 거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지만…… 돌아오실 거라면 빨리 돌아와야 해요. 황제가 며느리감 만나겠다고 오고 있다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픈 노 릇인데 이젠 아이저 규리하까지 오고 있어요. 여기 바깥은 고요해서 알 수 없겠지만 지금 저 안쪽은 벌집 쑤셔 놓은 것 같아요. 자칫하면 규리하의 하늘에서 황제와 전 변경백이 맞닥뜨리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둘이 동시에 도착하나?"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전 변경백이 손에 넣은 하늘치는 아무런 부 대 시설이 없는 야생 하늘치니까 빨리 오기는 어려울 거예요." "아무런 시설이 없으면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요." "아아." "자주 하늘치를 멈춰세우고 아래로 내려와서 보급을 해결해야 할 거 예요. 그러니 빨리 오기는 어렵겠지요. 아무래도 황제가 먼저 도착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결정된 것은 황제가 먼저 도착하면 아이저 규리 하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황제에게 대응책을 요청하자는 것이에 요. 하지만 그러면 규리하는 아무런 주도권을 가질 수 없어요. 최악 의 경우 황제가 아이저 규리하에게 규리하를 다시 넘겨줄 수도 있어 요. 싸움을 일으키기도 싫고 규리하의 현지배자도 없어졌으니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되면 우린 정말 골치아파지는 거 죠. 우리는 아무래도 아이저파가 아니라 정우파니까." "아이저 규리하가 황제의 그런 주선을 받아들일까." "모르겠어요. 규리하를 되찾는 것이 복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다면 그럴 수도 있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걸 은근히 바라는 것 같아 요. 만약 일이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야리키는 규리하성의 본관을 바라보았다. 이 늦은 밤에도 불을 밝혀 둔 곳 중 하나는 정우의 방이었다. 그곳에서는 사라말이 라수의 방으 로 통하는 길을 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정우에게 걸었어." "만약 규리하가 다시 아이저에게 넘어가면 당신 여기서 못 버텨요. 당장 도망쳐야 하지요." "너 도망치는 거 도와주길 바라는 거냐?" 세레지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상체를 똑바로 세우며 말했 다. "저와 아버지요." "난 정우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을 거다." 세레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알았어요. 나도 도망치는 건 싫어요. 일이 꼭 그렇게 풀려 갈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아버지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해둬야 ……" "내가 어떻게 네가 하려는 말을 짐작했겠냐." 세레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야리키는 어둠 속에 드리운 자신의 낚싯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당신한테……?" "딸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해둬야겠다고 말하더군." 세레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꽤 명랑한 웃음이었지만 마냥 유쾌한 웃 음은 아니었다. "알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당신하고 헤어질 때 뭐라고 말씀하셨지 요?" "생각 바뀌면 말해달라더군." "제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저도 그걸로 작별 인사 삼지요. 그럼 잘 자요!" "잘 자." 잠에서 깬 사라말 아이솔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 빠졌다. 그는 자신 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핀 후에야 사라말은 자신의 현재 상 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 의자는 앞쪽의 다리들을 허공에 띄우고 등받이는 벽에 기댄 비스듬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고 그 때문에 사라말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비스듬하게 보였다. 사라말은 자신이 왜 그런 기묘한 자세로 잠든 것인지 추리해 보았다. 하지만 잠든 시점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잠깐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그렇게 앉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던 모양이 다. 사라말은 그 불안한 수면 자세에서도 의자가 미끄러지거나 자신 이 굴러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보다 다 른 걱정이 머리를 꽉 채웠기 때문이다. 몸을 살짝 흔들어 의자를 똑바로 세운 사라말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낮이었다. 그의 계산이 맞다면 정우와 탈해가 사라진 후 열이틀째 되 는 날이었다. 사라말은 팔꿈치로 무릎을 짚은 채 머리를 떨구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정우와 탈해가 라수의 방에 있지 않기를 바라 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아직도 그 방 안에 있다면 이미 굶어죽었을 테니까. 그 때문에 사람들은 라수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사라말의 계 속된 시도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그에 대해 화를 내었다. 하지만 사라 말은 포기할 수 없었다. '어르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탈해 머리돌이 사망했다면 그는 어르신 이 되었을 테고 즈믄누리로 돌아가기 전에 짤막한 말 정도는 남겼을 것이다. 탈해 머리돌은 아직까지 무사하다. 그렇다면 정우도 무사히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레지가 그토록 고생했지만 바깥에서는 두 사 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딱정벌레 번뜩이도 여전히 규리하성에 있고. 두 사람은 라수의 방에 있다.' 하지만 열이틀 동안 온갖 해괴한 문열기를 시도해본 끝에 사라말은 더이상 아무런 발상도 할 수 없었다. 사라말은 무뚝뚝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에게 끊임없이 시험당한 그 문은 경첩이 느슨해져 서 잘 닫히지도 않았다. 아직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문열기를 떠올리려 애쓰던 사라말 의 귀에 소음이 들려왔다. 사라말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을 내다본 사라말은 많은 사람들이 바깥에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을 찡그린 채 그들이 나와있는 이유를 추측해본 사라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재빨리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늘 저편에는 사라말이 예상했던 것이 있었다. 하늘치가 규리하성 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파라말 아이솔은 황제를 환영하기 위해 규리하의 고관들과 함께 바 깥에 서있었다. 환영식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지상 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그들이 황제를 직접 맞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황제의 대리인이 지상으로 내려와 황제가 왔음을 알리고 규리하의 대표가 황제를 환영한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환영식장에 모여있는 자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많지 않은 자들은 한결같이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잇었다. 자신들의 지배자가 없는 상황에서 황제를 맞이해야 하면 누 구나 자신이 불행해진 듯한 기분을 느끼겠지만 규리하 사람들의 불행 은 그 이상이었다. 그들의 지배자는 황제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황제 는 규리하공의 실종을 불쾌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파라말은 체념한 표정으로 서있는 총리대부 리시오 느베라이를 보았 다. 그는 규리하공의 대행자이고 이 환영식의 주체지만 리시오는 이 자리를 자신의 은퇴식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황제의 대리 인이 내려오면 그는 유려한 환영사를 말하는 대신 주군을 제대로 모 시지 못한 죄를 인정하고 벌을 요청할 것이다. 파라말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직 은퇴를 생각할 나이는 아니니 다시 제국 정부로 돌아가 제국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비 록 황제의 실종으로 제국에 크나큰 위기가 있었지만 황제는 다시 돌 아왔고 혼란을 틈타 할거했던 야심가들도 모두 패퇴되었다. 그 동안 일어났던 혼란을 전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 수는 없을 테지 만 웃으면서 그 혼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는 만들 수 있 을 것이다. 파라말은 자신의 실질적인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데라 시를 생각했다. 황제가 돌아왔다면 비스그라쥬백 또한 돌아왔을 것이 다. 다시 그를 보좌하며 제국을…… 파라말은 입을 벌렸다. 속도를 점점 줄이며 규리하성을 향해 다가오는 하늘치는 하늘누리가 아니었다. 위쪽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보안판을 수납하는 장치들 의 형태가 달랐고 나루터가 너무 짧았다. 파라말은 발케네에서 일어 났던 폭주와 빙해에 충돌한 것 때문에 일어난 변화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의 직감은 그것이 하늘누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 었다. 그 위에서 무수히 많은 나날을 보낸 파라말이었다. 그것은 결 코 하늘누리가 아니다. 파라말은 문득 소름끼치는 생각을 떠올렸다. '아이저 규리하의 하늘치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아이저 규리하라면 하늘치에 보안판을 장 착하고 나루터를 만드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제국, 그러니까 황제뿐이다. 그것은 분명히 황제 의 하늘치였다. 하지만 하늘누리는 아니다.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파라말의 상념이 멈췄다. 사람들은 당혹하여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성의 본관 모퉁 이에서 한 명의 레콘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트밀이었다. 아트밀 은 한 손에 기름통과 철극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방금 뽑아낸 듯한 8미터짜리 소나무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놀라게 했던 굉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트밀은 사람들을 향해 주저없이 걸어왔다. 사람들은 황급히 좌우 로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트 밀과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소나무를 보며 파라말은 저것이 레콘 식의 화환일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해보았다. 도대체 왜 소나무를 뽑 아들고 온 거지? 아트밀은 성벽 위로 걸어올라갔다. 주랑 위에 도달한 아트밀은 하늘 치를 흘깃 올려다고는 소나무를 주랑에 내려놓았다. 아트밀은 기름통 윗부분을 주먹으로 때려부수고는 소나무의 수관 부분에 기름을 뿌렸 다. 그 모습을 보던 파라말은 갑자기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 다. 아트밀은 점화통을 꺼내어 수관에 불을 붙였다. 기름을 부어놓은 소나무의 수관은 당장 화르르 타올랐다. 아트밀은 점화통을 집어던지고는 불타는 소나무의 줄기 아랫부분을 붙잡았다. 그는 불티를 흩날리며 소나무를 집어들었다. 아트밀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누리가 아닌 하늘치는 멈춰 있었다. 아트밀은 뿌리를 쥔 오른팔을 뒤로 끌어당기며 줄기를 부여잡은 왼 팔은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소나무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새빨간 불티를 깃발처럼 흩날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소나무가 수직에 접근함에 따라 아트밀의 오른팔이 부풀었다. 긴장한 근육 때문에 깃 털이 곤두서 아트밀의 오른팔은 왼팔보다 두 배는 더 굵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무에서 떨어진 불티들이 아트밀의 깃털을 불살랐고 그 때 문에 아트밀의 몸 여기저기서도 연기 줄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 자체 를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뭔가가 완전히 꼬여버렸다는 느낌, 멈출 수 없는 비탈길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트밀은 규리하성 전체가 토해놓는 듯한 비명과 절규를 무시했다. 그는 도저히 말이라고 할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소나무를 집어던 졌다. 거꾸로 떨어지는 유성처럼 불타는 소나무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처음 느낀 감정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도발적인 시위에 대한 우려를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리는 사람이 던진 물 건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었고 따라서 아트밀의 행동은 공 격이라기보다는 시위다. 사람들은 곧 불타는 소나무가 포물선을 그리 며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나무는 마치 무엇인가가 위에서 세차게 잡아당기는 것처럼 굽힘 없이 날아올랐다. 그 나무에 얼마만한 힘이 실렸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나무는 똑바로, 똑바로 날며 점점 작아졌다. 그것은 곧 하늘치의 거체가 던지는 그림자 속에 서 까불거리는 광점이 되었다. 이른 저녁에 너무 빨리 나타난 반딧불 이 한 마리. 혹은 모래알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 한없이 움츠러든 빛 은 마침내 사라졌다. 그리고…… 하늘치의 배, 그 광활한 어둠의 한 부분에서 갑자기 작은 폭발이 나 타났다. 폭발이 일어난 지점에서 불티들이 떨어져 내렸다. 대부분의 불티들 은 낙하하면서 사라졌지만 그 중 거대한 것들은 바라보는 자들의 망 막에 광선으로 맺히는 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하늘치가 빛나는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바람에 따라 구불구불하게 떨어지는 광선 사이에서 소나무가 떨어졌 다. 하늘치와 충돌할 때 많은 가지와 뿌리들을 잃은 소나무는 화염에 휩싸인 통나무 같은 모습으로 낙하했다. 규리하성 근처의 황야에 충 돌한 그것은 팽그르르 돌며 위로 뛰어올라 다시 불티를 흩뿌렸다. 몇 번을 그렇게 되튀어오르던 소나무는 마침내 땅에 쓰러져 검게 사그라 들었다. 소리의 부재로 나타나는 침묵이 아니라 소리를 다 죽여버린 것 같은 침묵이 규리하성을 점령했다. 정적 속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움직였 다. 사람들은 느리게 그곳을 돌아보았다. 철극을 꼬나쥔 아트밀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발 아래엔 아 무 것도 없었고 그 진행 방향도 수평이 아니었다. 아트밀은 말리로 이어지는 사면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아트밀이 규리하성과 하늘치 사이의 중간 쯤 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불타는 나무의 일격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말리에서 갑자기 반응이 나타났다. 말리를 쏘아보고 있던 아트밀은 거목이 쓰 러진 숲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거대한 새떼를 떠올렸다. 하늘치의 옆에서 갑자기 출현한 검은 점들의 모습은 꼭 그와 같았다. 폭포의 수많은 물방울처럼 하늘에서 오천 명의 나가들이 뛰어내렸 다. 아무런 함성도, 고함도 지르지 않는 그 조용한 무리들은 보이지 않 는 사면을 따라 아래로 급격하게 쇄도했다. 아트밀은 철극을 뒤로 잡 아당겼다.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누군가의 절규가 들려왔다. "아트밀!" 사람들은 그것이 규리하성의 본관쪽에서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고개 를 돌린 몇몇 사람들은 정우의 방에서 몸을 내민 채 하늘을 향해 손 을 휘두르는 사라말 아이솔의 모습을 목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 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기우는 햇빛에 비늘을 반짝이는 나가 들과 깃털을 빳빳하게 세운 채 달려올라가는 아트밀 모두 놀랄 정도 로 빠른 속도로 움직였지만 바라보는 자들의 눈에 그 광경은 멈춘 그 림 같았다. 다시 한 번 사라말의 갈라지는 비명이 들려왔을 때 길 잃 은 천둥 같은 아트밀의 계명성이 들려왔다. "나-는-내-가-된-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4) | 2004·11·09 08:10 | HIT : 286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6-4 관련자료:없음 [4938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09 06:35 조회:61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 4 대략 한 시간 전부터 독행왕 지키멜 퍼스는 창가의 어둑한 자리에서 하늘치의 접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워지는 공포와 고조되는 희망 사이에서 부침하며. 지키멜의 목적은 정우의 부재 기간 동안 규리하와 황제 사이에 회복 불가능한 반목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키멜이 그 세부 계획의 담당자로 선택한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니었다. 퍽이나 역설적인 사실 이지만 그 시점에서 지키멜이 가장 신뢰하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치 천제였다. 지키멜은 황제가 기필코 규리하를 공격할 것이라고 믿었 다. 그 믿음이 지극히 확고했기에 지키멜은 정우가 엘시로부터 청혼 을 받았다는 소식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규리하에 오기 위 한, 그리고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지키멜은 그토록 분명한 사실을 왜 규리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지 이상하게 여겼 다. 황제의 도착 시점에 어떤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보는 사람 모두가 단번에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인 형태로 황 제와 규리하 사이에 갈등이 출현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고도 일어나 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키멜의 추리에 대한 결정적 반증이 되겠지만 지키멜은 그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분명히 일어나리라 확신했던 일이 일어났지만 그 형태는 기대하고 있던 지키멜도 놀라게 만들었다. 아트밀이 불타는 소나무를 들어올릴 땐 지키멜도 다른 규리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눈을 믿을 수 없 었다. 그것은 염치없다 할 만큼 직설적이고 단순한, 도저히 변명이나 다른 해석이 불가능한 적대적 상징이었다. 그러면서도 황제 자신에겐 아무 피해가 없는 공격이었다. 지키멜은 규리하 사람이 된 듯한 공포 와 황제가 느낄 법한 만족감을 동시에 느끼며 창틀을 부여잡았다. "그래, 이거였군!" 레콘 아트밀이 바로 황제가 준비해둔 미끼였다. 황제는 이 적대 행위에 '당연한' 분노를 표시할 수 있고 또한 그렇 게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내려오는 나가들의 모습은 모 든 것이 예정된 일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황제가 준비한 다음 단 계는 나가들에 의한 규리하성 함락일 것이다. 성채매장자의 성이 황 제의 분노 앞에서 매장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지키멜은 그녀 자신의 만족을 느꼈다. 지키멜은 취한 사람처럼 뒤로 물러나 가장 가까운 문으로 달려갔다. 그 계획의 결정적 변수를 목격할 시간이야, 황제! 지키멜은 라수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쏟아져내려오는 나가들을 향해 달리며 아트밀은 몸 속의 혈관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신억압은 나가의 능력이다. 하늘치 위에 있는 어떤 나가가 그를 정신억압했을 거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따라서 아트밀 은 하늘치 위의 나가를 다 죽일 작정이었다. 그것이 세 번째 벽난로 방의 어떤 나가든,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든, 혹은 치천제든. 비늘 덮 인 것을 모조리 제거하면 정신억압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 앞에서 상대방의 다른 것들, 성별이나 나이나 신분 같은 것에 대한 고려는 피어날 틈도 없었다. 오직 종족만이 중요하다. 나가를 전부 죽인다. 그런 결심으로 비상한 아트밀을 향해 쏟아져 내려온 것이 다름 아닌 나가들이라는 사실은 아트밀을 주춤하게 하기는커녕 그의 분노를 오 천 배로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은 분노 속에서 아트밀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그 순 간 한 명의 레콘 남자가, 아트밀이라는 이름이, 10년 근속 휘장을 가 지고 있으며 수교위 진급에 관심이 없는 듯이 행동하지만 마음 속으 로는 구구단 7단을 만든 녀석을 불구대천의 원수라 생각하는 한 교위 가 사라졌다. 격노는 그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아트밀은 살인의 등가물이 되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맹목적 본능에 의해 아트밀은 평상시라면 꿈 도 꿀 수 없는 일을 성공시켰다. 그는 거의 깨닫지 못했지만 어느 순 간 아트밀이 달리고 있던 환상계단의 폭이 500여 미터로 늘어났다. 그가 살인을 위해 새로 마련해야 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머지는 모 두 그의 몸과 그의 철극에 준비되어 있었다. 아트밀은 무지막지한 기세로 나가들에게 격돌했다. 지상에서 정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바라보던 규리하인들이 동 시에 숨을 들이쉬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쾌속으로 움직이는 배의 이물에서 일어나는 일이 규리하성의 상공에서 일어났 다. 아트밀과 격돌한 쏟아져내려오던 나가들의 대열이 쫘악 찢어지며 뱃머리에서 갈라지는 물처럼 세차게 튀어올랐다. "나-는-내-가-된-다-!" 폭포를 반으로 갈라놓듯 나가들의 대열을 찢어놓은 아트밀이 멈춰섰 다. 완전무결한 살인이 된 아트밀이 철극을 휘둘렀다. 온전한 나가들 이, 반토막난 나가들이, 나가의 파편들이 가을숲에 불어닥친 돌풍에 휘날리는 낙엽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날아올랐다. 소드락을 복용했 지만 이곳은 겨울의 규리하였고 나가들은 한계선 남쪽에서 움직이는 정도의 속도밖에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런 나가들을 상대로 아트밀은 계속해서 나가의 회오리를 만들어내었다. "내-가-된-다-!" 사라말은 아트밀이 내뿜는 계명성의 여운 속에서 고개를 가로저었 다. 열린 그의 입에서는 사라말을 아는 사람들이 잘 기억하는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냐." 뒤로 물러난 사라말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창턱에 얹은 사라말은 두 팔 사이로 머리를 떨구었다. 마치 형벌을 기다리는 사람 같은 모습이 된 사라말은 아트밀의 계명성이 들려올 때마다 정신의 일부가 뜯겨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흠칫했다. "내-가-된-다-!" "유감이지만 사실에 부합하는 발언이라고 할 수 없군요." 사라말은 갑자기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아트밀이 사 라말을 따라온 것이 아니다. 사라말이 아트밀을 안내한 것이다. 형식 적으로는 같지만 그 내적 논리는 완전히 다르다. 왜 정신억압이라는 방식을 썼는가? 수교위 진급이 가장 큰 야망인 평범한 교위가 사라말을 보호할 것을 황제가 바랐다면 황제는 짤막한 명령만으로도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라말이 바다를 가로지 를 것을 예견하고 강력한 정신억압이 아니면 그런 여행을 따를 수 없 다고 판단하여 명령 대신 정신억압을 선택했다는 것은 지나치게 복잡 한 설명이다. 훨씬 간단한 설명이 있다. 명령 대신 정신억압을 쓴 이유는, 그래야만 필요할 경우 억압당사자 의 분노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억압된 아트밀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아트밀을 규 리하로 이끌어줄 사람, 그리고 그에게 '너는 사실 정신억압되어 있 다'고 알려줄 사람. 그런데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은 그 두 가지 일 을 모두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아트밀의 길잡이로 사라말이 선택된 것이다. "그곳에서, 하늘누리가 파멸을 향해 날고 있는 그 때 폐하께서는 이 미 귀환과 발케네 다음 목표를 모두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 복 잡한 계획을 아트밀의 머리 속에 '사라말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관 념을 밀어넣는 단순한 행동으로 해치우셨군요. 존경스럽습니다. 폐 하. 그리고 저는 자신도 모르는 새 폐하의 바람을 모두 성취시켜 드 렸고요. 흐음. 그렇다면 저는 황제의 으뜸가는 신료라고 주장할 수 있겠군요. 마음대로 행동해도 황제의 뜻을 따르게 되니 이보다 더 충 성스러운 신하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의식적 충신이라고 할 수 있군 요." "내-가-된-다-!" 사라말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단어들은 사라말의 차분한 말을 형성했다. "아니오. 정반대입니다. 당신은 황제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차분한 말투도, 무표정한 얼굴도 그대로다. 하지만 사라말의 눈에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사라말은 표정도 소리도 없이 오직 눈물 만으로 울었다. 갑자기 사라말이 일어났다. 그는 하늘에 있는 아트밀을 뚫어지게 바 라보다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창턱을 탕 내리쳤다. "사라말이 친구에게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로 결정한 창턱이다." 율형부사는 발을 들어 창턱을 밟았다. 아마도 아트밀에게 접근하기 도 전에 죽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사라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트 밀에게 다가가 자신이 되려는 그 시도가 바로 황제의 뜻에 놀아나는 것임을 알려야 한다. 그가 정신억압에 대해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것 은 그의 책임이었다. 사라말은 환상계단을 상상했다. 아트밀은 자신이 죽이고 있는 나가들에게 대해 그들이 나가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나가라는 것만으로도 아트밀 에겐 충분한 투쟁의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 나가들에게도 자신들 모두를 가리키는 이름은 있었다. 가없는 미래로 떠날 치천제를 끝까 지 따르기로 맹세한 그 나가들의 이름은 아라짓 전사였다. 그들의 종족 특성 때문에 아라짓 전사들은 아트밀에 대해 냉철한 계 획을 가지고 있었다. 강대한 적을 상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무 용을 펼치는 일은 아라짓 전사들에게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 들은 그저 자신들 전체의 무게로 아트밀을 '그의 환상계단' 밖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만족할 작정이었다. 그 다음에는 중력이 아트밀을 죽일 것이다. 오천여 명이라는 그들의 숫자는 그런 작전에 필요한 무 게를 간단히 만들어낼 수 있었고 또 그들은 쉽게 재생하는 몸을 지니 고 있었다. 피해를 무시한 채 그저 달려가서 몸통으로 부딪치기만 해 도 된다. 그 때문에 아라짓 전사들은 아트밀에 대해 별다른 고려를 하지 않았 다. 격돌 직후의 짧은 시간 동안 아트밀이 놀랄 만한 전과를 올린 것 은, 위로 달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줄어든 것 같지 않은 레 콘의 돌파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라짓 전사들의 그런 판단 때문이기 도 하다. 아라짓 전사들은 아트밀이 자신을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 는다는 태도로 계속 접근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아라짓 전사들은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 함을 느꼈다. 아트밀은 근처의 모든 나가들을 때려눕히고는 다른 나 가들을 따라 종횡무진으로 달렸다. 그 모습을 본 나가들은 아트밀이 상상한 환상계단이 예상외로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라짓 전사들은 초조함을 느꼈다. 소드락의 약효는 17분. 그 동안 규리하성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고 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 런데 뜻하지 않게 아트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니름들이 재빨 리 교환되었다. 그들은 몇 개의 무리로 자연스럽게 흩어지기 시작했 다. 대략 이천여 명의 나가들이 온갖 궤도의 환상계단을 만들어 전후좌 우에서뿐만 아니라 위아래에서도 아트밀에게 달려들었다. 위에서의 공격도 위험했지만 아래쪽으로부터의 공격은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트밀이 만든 넓은 환상계단은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 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그 자신에겐 잘 보였다. 따라서 아트밀은 자신 이 딛고 있는 계단 때문에 아래쪽에서 치솟아오르는 나가들을 볼 수 없었다. 아트밀에게 달려들던 아라짓 전사들은 곧 그가 아래쪽의 공 격에 대해 대처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아래쪽으로부터 의 공격이 늘어났다. 그에 대한 아트밀의 대처는 계속 달리고 도약하 는 것뿐이었다. 그 시점에서 그를 돕는 것은 레콘의 힘이나 속도가 아닌 야수적인 감각이었다. 아트밀에게 공격당하는 나가들의 숫자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 다른 아라짓 전사들은 더 중요한 목표인 규리하성을 향해 쇄도했다. 넋을 잃은 채 허공을 바라보던 규리하인들은 비명을 지르 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정우 규리하는 자신의 몸이 거칠게 다루어지는 것을 느 끼고는 눈을 떴다. 그러자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깜짝 놀란 정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 었다. "일어났어요? 눈을 떠요!" 정우는 실눈을 떠서 앞을 보았다. 지키멜 퍼스가 창백한 얼굴로 그 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우가 눈을 뜬 것을 본 지키멜은 안도하며 몸을 움직였다. 지키멜은 탈해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 을 단검으로 끊었다. 그녀가 탈해의 몸을 흔들자 곧 탈해도 정신을 차렸다. 결박이 풀린 것을 알게 된 정우는 오랫동안 묶여있었던 팔다리를 움 직여보았다. 열이틀 동안 계속 묶여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나흘만 에 돌아온 후로 지키멜은 간혹 그들을 찾아와 음식을 주었고 또 눈을 가린 채 그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다. 만약 그런 배 려가 없었다면 정우는 풀리자마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팔다리에서 자신의 수족이 아닌 것 같은 생경함이 느껴졌지만 정우는 의자를 붙잡고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 때 지키멜이 부축하듯 정우를 붙잡았다. "나가야 해요, 정우!" 나간다는 말은 고마웠지만 정우는 지키멜의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지키멜이 이끄는대로 비틀비틀 걸으며 말했 다. "왜죠? 무슨 일인데요?" "규리하성이 공격받고 있어요." "뭐라고요?" 정우를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던 지키멜은 헐떡이며 말 했다. "지금 황제가 규리하를 공격하고 있어요! 내가 그랬잖아요. 황제는 규리하도 공격할 거라고! 당신은 그것을 막아야 해요!" 정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발을 내디뎠다. 그 때 등 뒤에서 탈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격받고 있다고요?" 문을 나서려던 지키멜은 탈해의 목소리에 놀랐다. "따라오면 안돼요! 밖은 유혈인데 당신은-" 지키멜의 목소리와 정우를 부축하던 그녀의 손이 한꺼번에 사라졌 다. 정우는 휘청하며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쓰러지지 않기 위 해 몇 발자국 걷는 동안 정우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게 되었 다. 라수의 방은 들어간 곳으로만 나올 수 있다. 열이틀 전 자신의 방에서 라수의 방으로 들어갔던 정우는 그곳에서 나오자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정우를 부축하던 지키멜은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해 또한 탈해의 방으로 갔을 것이다. 똑바로 서게 된 정우는 탈해가 뒤따라 나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재 빨리 방안을 둘러보았다. 창쪽을 보았을 때 정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키멜에게 습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정우는 창턱에 발을 올린 남자가 자살하려 한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의 발소리를 들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정우를 본 그는 황급히 방안으로 돌아왔다. "정우?" "좋은 꿈 꾸셨어요, 사라말? 성이 공격받고 있다고요?" 정우는 조금 멈췄다가 말했다. "우신 거예요, 사라말?" "지금까지 어디에…… 아니, 됐습니다. 지금 급한 일은 그것이 아니 니까." 사라말은 눈 주위를 빠르게 훔쳤다. 팔뚝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사라 말의 엄격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정우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 다. 하지만 정우는 빨리 걷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정우의 상태를 깨 달은 사라말은 그녀를 부축해서 창가로 인도했다. 창밖을 보자마자 정우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받은 최 초의 인상은 하늘에서 나가눈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우는 자신의 당혹을 달래가며 좀 더 자세히 관찰했고 조금 후에는 창밖의 광경을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허공에 서 수천 명의 나가와 한 명의 레콘이 싸우고 있는 광경이 그렇게 상 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때 아래쪽에서 다급한 외침들이 들 려왔다. 정우는 아트밀에 대한 걱정을 억지로 뿌리치며 아래쪽을 살 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나가들을 피해 미친 듯이 도망치고 있었 다. 제대로 된 지시를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달려나온 병사들이 하늘 을 향해 창칼을 들어올리는 모습도 보였다. 도망치려는 자와 싸우려 는 자들이 뒤엉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그 상황을 통제해보려 애 쓰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러기엔 숫자가 너무 적었고 혼란의 요 인이 지나치게 공포스러웠다. 규리하에 나타난 나가도, 하늘에서 내 려오는 적도 모두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규리하인들이 맞닥뜨린 것은 그 두 가지가 복합된 것이었다. 그들을 도와야 했지만 정우는 도대체 무슨 말을 외쳐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사라 말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정우! 저 하늘치를 움직이십시오! 규리하성에서 멀어지게 해요!" 정우는 황급히 말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다음 행동은 사라말을 낙담하게 했다. 평범하다 못해 좀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 행동이기 때 문이다. 정우는 두 손을 입 앞에 모아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가! 제발 가! 부탁이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사 라말은 그 정도의 일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을 꾹 눌러 참았다. 사라말은 희망을 담아 말리를 올려다보았다.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그 형식의 기품이야 그리 중요할 것이 없 다. 말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라말은 일그러진 얼굴로 정우를 돌아보았다. 정우는 좌절을 담아 말했다. "안돼요. 제 말을 안 들어요. 저 하늘치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부탁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저 하늘치를 부리는 사람들 일…… 고모부님?" 사라말은 황급히 아래쪽을 보았다. 단구의 무사가 장창을 꼬나든 채 하늘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판사이 남작 발리츠 굴도하는 말이 환상계단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말 아래에서도 탁월한 무사인 그였지만 그의 기량이 십분 발휘될 수 있는 곳은 역시 마상이었다. 말을 통제 하면서 동시에 무기를 다루는 어려움은 발리츠와는 관련 없는 말이었 다. 발리츠 굴도하가 갑주로 몸을 두르고 손에 장창을 들고 명마 위 에 앉았을 때 남작과 장창과 말은 하나의 무기, 발톱과 이빨 대신 창 이 달려있는 한 마리의 맹수였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말도 환상계단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는 발리츠 굴도하도 환상계단의 사용에 그리 능숙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트밀의 움직임과 아라짓 전사들의 움직임은 그에 게 좋은 시범이 되어주었다. 발리츠는 자신이 환상계단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발리츠는 더 생각할 필요 없이 창을 꼬나쥐고 허공에 비스듬한 싸움터를 만들었 다. 바라던 것이 나타나자 발리츠는 그 위를 따라 달려올라갔다. 아라짓 전사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는 발리츠를 보고는 당 혹했다. 발리츠는 자신의 무술을 신뢰했지만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 수천 명 의 적을 향해 용감하게 쇄도하는 것은 레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 니다. 수천 명은커녕 적이 세 명만 넘으면 발리츠는 좁은 통로에 서 거나 벽을 등지지 않는 이상 주저없이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허공 에는 통로나 벽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발리츠는 뛰어내려오는 나 가들의 머리 위로 뻗어 있는 환상계단을 만들었다. 그의 목표는 하늘 치 말리였다. 말리를 통제하는 자들을 장악하거나 황제 자신을 장악 할 수 있다면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발리츠는 아트밀의 실수를 사과하고 황제를 설득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아 트밀의 돌출 행동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 져내려오는 나가들의 모습으로 보건대 분명히 황제는 규리하를 칠 의 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가들에게 소드락을 먹이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는 이미 황제를 적으로 규정했다. 발리츠의 의도를 눈치 챈 아라짓 전사들은 황급히 니름을 교환했다. 다시 몇 무리의 나가들이 딛고 있던 환상계단의 형태를 바꾸며 발리 츠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발리츠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나가들을 뒤돌아보고는 자신의 단신을 원망했다. 키가 작으면 당연히 다리도 짧은 법이고 다리가 짧으면 빨리 뛰기 어렵다. 그리고 말리는 너무 높은 곳에 떠있다. 발리츠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나가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말리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고 호흡이 힘든 상태에서 불사에 가까운 적과 싸우는 것은 무모하다. 발리츠는 차라리 지금 싸 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는 창을 휘두르며 뒤로 돌아섰다. 곧 첫 번째 나가가 사이커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발리츠는 짧게 속삭였 다. "아이넬." 남작에게 돌격한 아라짓 전사는 눈 앞에 있는 인간이 혹 인간 전용 소드락을 먹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순식간에 목과 배, 그리고 무 릎을 찔려 자신이 만든 환상계단 위를 우당탕 구르면서. 쓰러진 나가 에서 눈을 돌린 남작은 다음 상대의 접근을 기다렸다. 그 때 커다란 계명성이 들려왔다. 발리츠는 그 말이 익숙한 말의 변형된 형태임을 깨달았다. "공-기-반-고-기-반-이-군-!" 발리츠는 왼쪽 눈 아래의 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계명성이 들 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지상에서는 열성적인 조사를 연상시키는 모습 으로 야리키가 낚싯대를 휘두르고 있었다. 야리키는 자신의 괴기스러운 농담을 즐기지는 않았다. 필요할 땐 상 당히 괴기스러운 행동도 하지만 그런 행동을 즐기지 않는 것과 마찬 가지다. 그의 외침은 아라짓 전사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한 전술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아라짓 전사들 은 모두 적출식 직후에 곧장 냉동되어 육성을 쓸 기회도 적었고 낚시 취미를 가져본 적도 없었다. 야리키의 협박을 이해할 만한 소질을 결 여한 자들인 것이다.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라짓 전사들을 본 야리키는 그의 평소 성 격대로 그냥 입을 닫고 행동에 돌입했다. 그는 조간을 채찍처럼 회둘 렀다. 인간이 쓰는 조간이라면 그런 짓은 불가능하겠지만 야리키의 낚싯줄은 쇠사슬이었고 그 자체로도 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곧 운 나쁜 나가들이 별철 낚싯대와 쇠사슬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했 다. 아라짓 전사들은 곧 그 웃기게 생긴 도구가 무기로 사용될 수 있 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형태는 격투에 적합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 무게는 어느 무기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이는 오히려 여느 무기 이상이었다. 길다란 낚싯대에 낚싯줄까지 더해지자 야리키 의 조간은 거의 투사 병기에 가까운 공격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격투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명백했다. 그 커다란 물 건을 휘두르느라 야리키는 많은 틈을 보이게 되었다. 재생하는 몸을 가진 나가들이 그 틈을 파고 들었다. 곧 아라짓 전사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간과했음을 깨달았다. 조간을 무기로 보지 않는다면 야리키에게는 무기가 없다. 따라서 야 리키는 손발과 부리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했다. 야리키의 빈틈을 파 고든 나가들은 곧 한두 군데씩 부러지거나 몸 어딘가에 구멍이 난 채 로 쓰러지게 되었다. 가까이 접근하기도 어렵고 워낙 긴 조간 때문에 거리를 두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아라짓 전사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나가들이 뒤로 물러나자 야리키는 태연히 아트밀을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아트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아직도 기운차게 허공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철극이 닿는 거리에 나가가 들어오면 반드시 중상을 입히고 있었지만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야리키 는 지상으로 내려오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지상에서라면 발 아 래에서 오는 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트-밀-! 내-려-와-! 땅-에-서-싸-워-!" 아라짓 전사들이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야리키의 계명성은 고공에 있는 아트밀에게 확실히 전달되었다. 아트밀은 야리키의 지시 가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지시를 따를 수 없었다. 아라짓 전사들이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추락한 벌집에서 뛰쳐나온 벌들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아라짓 전사들이 날아들자 아트밀은 화를 내며 다시 더 높은 곳으로 움직였다. 야리키는 벼슬을 빳빳하게 세웠다. 사라말은 정우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항복하십시오." "예? 예?" "당신은 환상계단을 능숙하게 다룹니다. 저기에서 싸우는 자들을 피 해 하늘치 위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겁니다. 황제에게 찾아가 항복하 십시오." 정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항복을 거부한다고 생각한 사라말 은 재빨리 설명했다. "정우. 규리하 병사들이 아무리 용맹하다 해도 죽지 않는 적을 상대 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설령 소드락의 약효가 떨어져서 돌아간다 해 도 저 나가들은 충분히 쉰 다음 말끔히 나아서 다시 돌아올 수 있습 니다. 당신이 저 하늘치를 움직일 수 없다면 규리하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이길 수 없다면 개죽음이라도 막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아트밀과 남작은 당장이라도 죽을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정우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정우는 약간 코막힌 소리로 말했다. "항복을 받아주실까요?" "예?" 정우는 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코를 들이마셨다. "지키멜은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유혈이라고 말했어요. 자꾸 만 쪼개지려는 제국을 지금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계속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니까……" 정우는 자신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사라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조금 후 낯선 것에 당황한 시선으로 바뀌었 다. 사라말은 그녀가 자신이 아닌 '킴'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밖에 못 사는…… 그래서 그 한 번을 오래오래 살아야 하고 그 때문에 피를 마셔야 하고……" 정우는 움찔하고는 아랫입술을 붙잡았다. 조금 후 그녀는 다시 사라 말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유혈이라면, 폐하께서는 항 복을 받아주시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시도요?" "예." 정우는 잡아당기던 아랫입술을 놓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마치 자신 의 발끝을 보듯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우가 말했다. "예. 시도해봐야지요. 사람들이 죽으면 안되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정우의 몸이 부웅 떠올랐다. 정우는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려는 커다란 새처럼 날렵하게 창문을 빠져나갔다. 오래 전 하 늘누리에서 한 번 일어났던 일이지만 사라말은 발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날아가는 정우의 모습을 보고는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때 정우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렸다. 사라말은 혹 라수의 방에서 탈해가 나타난 건가 생각했지만 열린 문 뒤편은 복도였다. 문 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옷차림이 흐트러지고 숨이 턱에 닿아있 는 파라말이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파라말은 손에 칼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그는 문을 잠그고는 탁자와 의자를 문 앞에 쌓기 시작 했다. "형님. 이제 폐하께서 정신억압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셨죠? 폐하께 서 정신억압자셨다면 아트밀을 정신억압해서 그 광태를 멈추셨을 겁 니다. 소드락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 여기서 버티다가 저 위로 올라가 도록 하지요. 그리고 폐하를 뵙고……" "아트밀은 정신억압 당했다." 의자를 밀던 파라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사라말을 돌아보고는 자 신이 밀어놓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형의 말에 반박하려던 파라말은 잠시 생각해 보고는 미심쩍게 말했다. "공격 빌미란 말씀입니까? 하지만 왜 며느리의 영토를 공격합니까?" "결혼도 빌미다." 파라말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가 말했다. "방심시켜놓고 기습하기 위한? 형님. 그러면 왜 폐하께서 폐하의 부 재 기간에도 아무런 역심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황제의 대장군을 돕기까지 했던 규리하를 공격하시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규리하 공격은 그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 뭐 하시는 거야?" 사라말은 창밖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파라말은 의자 에서 일어나 형의 곁으로 다가갔다. 형과 같은 방향을 보게 된 파라 말은 형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뭐 하시는 거죠? 설마……?" 파라말은 말을 멈췄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말이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 없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규리하성을 빠져나온 정우는 날개를 접고 활강하는 새처럼 위로 치 솟아올랐다. 그녀가 상상하여 자신을 떠받치게 한 환상계단은 계단이 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정우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우는 시야를 가리 는 형태와 빛깔, 질감 등을 구태여 상상하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것 에는 불필요한 것이니까. 따라서 정우가 상상하는 것은 그녀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우를 안전하고 빠르게 날아다닐 수 있게 해주었다. 규리하성과 허공의 전쟁터, 그리고 말리가 모두 잘 보이지만 그 모 든 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치솟아오른 정우는 그곳에서 멈춰섰 다. 허공에 똑바로 선 정우는 잠시 쓸쓸한 표정으로 먼 지평선 쪽을 보았다. 조각구름들이 뚜렷한 목표를 가진 양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음지마다 남아있는 잔설과 곳곳에 형성된 빙판, 그리고 그 사이사이 에 노출된 검은 흙 때문에 규리하의 평야는 차가운 무채색으로 물들 어 있었다. 초록빛이나 붉은 빛은 보이지 않았다. '바보. 한 번밖에 못 사는 사람들이 죽고 있어.' 정우는 하늘치와 규리하성 사이에서 싸우고 있는 아트밀과 아라짓 전사들을 보았다. 그들 각자가 딛고 있는 환상계단이 보이지 않기 때 문에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커다란 파리떼와 그 속에 뛰 어든 한 마리 잠자리처럼 보였다. 발리츠 굴도하는 장창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도망쳐다니고 있었다. 규리하성에서는 야리키와 규리하의 병사들이 땅에 내려선 아라짓 전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한 번밖에 못 살면서. 그렇게 빨리들 사라지면서.' 정우는 합장하듯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 이 몇 번 미끄러지다가 손목을 조이고 있는 소매의 여밈끈을 풀었다. 소맷자락이 풀리자 바람이 그것을 파르르 흔들었다. 양쪽 소매를 푼 정우는 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정우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머뭇거림 때문에 정우의 동작은 옷 입는 법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렀다. 간신히 윗옷을 벗자 세찬 바람이 정우의 손에서 그것을 나 꿔챘다. 정우는 무의식적으로 움찔하며 두 팔로 앞을 가렸다. 고개를 숙인 채 가늘게 떨던 정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팔을 들어 속옷을 벗었 다. 추웠다. 노출된 팔은 순식간에 얼어버린 것 같았다. 정우의 코와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위아랫니가 덜덜 부딪쳤다. 입을 꼭 붙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정우는 입을 조금 벌렸다. 입 안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윗옷을 뺏어가고 그녀에게 혹독한 추위를 선사하던 바람이 정우의 속옷을 내리눌렀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만류하는 것처럼 바람은 얇은 속옷을 정우의 몸에 대고 눌렀다. 정우는 바람의 제지를 살짝살짝 피 하며 속옷들도 벗었다. 바람은 체념하듯 그녀의 속옷을 받아들었다. 작고 얇은 천들이 깃털처럼 정우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정우는 알몸으로 허공에 섰다. 옷을 벗는 동안 풀려버린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두 팔로 가슴과 아랫배를 가리고 있던 정우는 그 팔들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정우는 눈을 감았다. 그것으로 부족하다 는 듯 정우는 들어올린 두 팔을 얼굴 앞에서 엇걸었다. 가리고 덮어 줄 것 없는 허공에서 그녀의 작은 몸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말리의 나라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 규리하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 고 있었다. 많은 규리하의 병사들과 규리하인들이 아라짓 전사들의 공격으로 사망했지만 아트밀과 야리키, 두 명의 레콘은 아직까지도 하늘과 땅에서 아라짓 전사들을 거침없이 때려눕히고 있었다. 그리고 발리츠 굴도하는 허공을 뛰어다니며 나가들을 이리저리 흩어놓고 있 었다. 허공에는 몸을 감출 곳이 하나도 없었지만 바꿔 말하면 뛰어다 니는 것에 방해가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도 영원히 그렇게 싸 울 수는 없겠지만 아라짓 전사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들보다 더 짧 다. 소드락의 약효가 끝나서 물러나기 전 최대한 타격을 입혀야 한다 고 결정한 황제는 강력한 니름을 보냈다. [두 레콘과 장창 든 인간의 곁에서 물러나라.] 황제의 니름에 따라 아트밀과 야리키, 그리고 발리츠의 주위에서 나 가들이 물러났다. 발리츠는 헐떡이며 환상계단에 주저앉았고 야리키 는 의아해하며 물러나는 나가들을 따라 움직였다. 셋 중 가장 많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아트밀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리와 지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이것을 지상으로 내려갈 좋 은 기회로 삼아야 할지 말리 위로 뛰어오를 기회로 삼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트밀의 곁에서 물러나던 아라짓 전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주춤했다. 그들은 아트밀이 황제에게 다가갈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내버려둬! 모두들 지상으로 내려가라. 규리하성의 인간들을 죽여 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아라짓 전사들은 황급히 물러났다. 하지만 지상 을 향하던 그들의 움직임이 다시 멎었다. 그 정지에 조금 놀란 황제 가 다시 다그치려 할 때 아라짓 전사들에게서 니름이 들려왔다. [이라세오날이여. 저곳을 보십시오.] 그 니름에는 의아함과 두려움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황제는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들의 유일한 주인에게 바쳐야 하는 헌신과 복종을 놓고 볼 때 아 라짓 전사들은 그런 보고는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아라짓 전사들이 가리킨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치천제는 죽을 뻔했다. 하늘과 땅에서 벌어지던 모든 싸움이 멈췄다. 규리하성과 그 상공에서 나가와 인간, 레콘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 다. 그들의 시선은 정우를 향하고 이었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정우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우의 몸에 있었다. 하지만 거리와 상관없 이 그것은 눈앞에 있는 것마냥 똑똑히 잘 보였다. 원근은 상당히 무 의미한 것이 되었다. 멀지만 잘 보이고 가깝지만 결코 손 뻗어 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아름다웠지만 꿈처럼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무 시무시했지만 악몽처럼 무섭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이 바로 꿈이고 악몽이니까. 정우의 몸은 꿈으로 덮혀 있었다. 눈을 감아도 꿈을 가릴 수 없다. 고개를 돌려 꿈을 외면할 수도 없 다. 사람들은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불필요한 일이 었다. 그들이 뒤로 돌거나 눈을 감는다 해도 그들은 정우의 몸을 뒤 덮고 있는 꿈을 볼 것이다. 꿈은 과거를 예견하고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 공간이 꿈을 제약할 수 없듯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정신을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요새를 무시하며 가장 용감한 자도 두 려움에 빠지게 만들고 가장 무정한 자도 숨 막히도록 울게 만드는 그 것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피할 수 없었다. 규리하성의 본관에서 아이솔 형제 또한 정우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밤의…… 다섯째 따님?" 파라말은 헐떡였다. 사라말은 정우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큰 사고가 났고 그 소녀는 죽을 뻔했지요.' 나야. 내가 그 소녀를 죽일 뻔했어. 왜냐 하면 그녀는 나의 반갑습 니다. 붉은 개구리의 등을 밟고 뛰어올랐을 때 나비는 바람으로. 그 의자에는 분명히 비행하는 정적이었어. 소녀가 죽는 것이 두꺼웠지. '제가 옷을 벗으면 아마 굉장히 놀라실 거예요.' 좋은 돌려줘. 그 책은 뜨거운 얌체. 너의 추적은 미끄러워. 정말이 야? 내가 뭐라고 했어. 그럴 줄 먹었어. 안돼. 살려줍시다? 살려줄까 요! 살려줌! 알아차렸군. 맞아. 살려줌이지. 그런데 껴안고 의자는 왜 이러십니까? "형님, 형님?" 사라말은 자신의 상태를 비몽사몽 속을 헤매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비몽사몽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파라말이 힘겹게, 하지 만 달콤하게 말했다. "이상해, 너무…… 지금 제가 제대로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으 악!" 사라말은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보았지만 그 중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사라말은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사라말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그는 자고 있었다. 어렴 풋이 사라말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 앞 에 미소를 머금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파라말의 얼굴이 보였다. 사라말은 따스한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파라말." 사라말은 동생의 이마에 박치기를 했다. 파라말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사라 말을 올려다보았다. 사라말은 이마를 게으르게 문지르며 말했다. "정신이 좀 드는군." 파라말은 씩씩거리며 꼭 그런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라말은 자신의 팔을 꼬집으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올라가고 있어." "예?" "나가들이 하늘치로 올라가고 있다." 사라말의 말대로였다. 규리하성을 공격하던 나가들이 겁에 질린 채, 도취된 채, 의혹에 빠져서, 혹은 즐거워하며 하늘치로 오르고 있었 다. 파라말은 형을 따라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꼬집으며 말했다. "왜 돌아가는 거죠?" "모른다. 어쩌면 자기 잠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저기가 그들의 잠자 리니까 잠자리로 돌아가니 자고 있어……" 횡설수설하던 사라말은 고개를 툭 떨구었다. 파라말은 형이 서서히 드러누워 잠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만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 지만 파라말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파라말은 안간힘을 다해 창쪽을 보았다. 하늘치가 움직이고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파라말은 곧 바닥에 누워 잠들었다. 그것은 수면이라기보다는 꿈에서 빠져나가는 과정이다. 꿈에서 빠져 나가려면 잠에서 깨야 하는데, 잠에서 깨려면 당연히 잠들어 있어야 한다. 아이솔 형제들뿐만 아니라 정우를 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차례 차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그 시각 하늘치 한 마리가 과텔의 교외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과텔 사람들은 그 하늘치에 특별히 주의하지 않았다. 그 하늘치는 눈이 몇 개 깨어진 것 외엔 보통의 하늘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적어도 아래 에서 보면 그러했다. 하지만 그 하늘치의 등쪽에는 다른 하늘치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 몇 개의 옷장과 초췌한 얼굴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규리하로 향하는 아이저 규리하 일행이었다. 불기나 물기라 곤 찾아볼 수 없는 하늘치의 등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끝에 그들 모두 는 어지간한 전쟁유민도 비교하기 힘든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하 지만 고향으로 다가감에 따라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흥분이 떠오르 고 있었다. 아이저 규리하와 그의 두 아들, 그리고 그 때까지도 그들 을 따르고 있던 규리하가의 옛가신들은 규리하 수복의 계획을 검토하 고 또 검토했다. 세상의 다른 곳에도 그런 자들이 있지만, 하늘치 소리 위의 조그마 한 사회에도 다른 자들의 흥분에 동화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지멘 과 아실, 제이어는 다른 자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소리의 지느러 미 쪽에 앉아있었다. 아이저는 제이어가 자신의 곁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 제이어를 관리하겠다고 약속했기에 지멘 또한 제이 어 곁에 있었다. 아실은 바닥을 짚은 지멘의 손등을 벤 채 누워 있었 다. 지느러미에는 융기가 없기 때문에 풍경을 보기 좋았다. 세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그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드러누운 채 구름의 움직임을 보던 아실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하늘치는 가볍지요." 지멘은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아실이 말했다. "하늘에 떠있으니까." 지멘은 아실이 심심해서 아무렇게나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때 제이어가 말했다. "하늘치는 가엾지요." 지멘은 제이어를 돌아보았다. 아실 또한 머리를 조금 들어 살인기사 를 보았다. "아직까지도 약속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무슨 약속?" 제이어는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다시 침묵 속 에서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약속을 기다리는 하늘치는 규리 하를 향해 조용히 날았다. =============================================================== 36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37. 마지막 불씨 - 1 "활로." - 바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 문을 받은 제이어 솔한이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말한 대 답. 질감을 띄며 부풀던 규리하시의 하늘이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미 겨울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다 지나가고 있었지만 규리하에선 1월이 나 2월에 눈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함박눈이었다. 눈송이 들이 어찌나 크고 풍성한지 손이 재빠른 서예가라면 허공에 글씨를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희미한 한숨들. 앉거나 누운 사람들. 그들 중에는 앉거나 눕기에 부 적합한 장소에서 그러고 있는 자들도 많았다. 뭔가를 마시고 한숨을 쉰다. 연초 연기를 내뿜으며 소리 없이 운다. 눕거나 앉은 사람들. 그들은 슬프다. 남자들이 우울하고 여자들이 우울하다. 휘파람이나 콧노래는 모두 구석에 떨어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규리하성의 계단에 걸터앉아 식은 죽을 먹던 병사가 숟가락을 죽그 릇에 떨어뜨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병사 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었다. 규리하시의 어느 집에서 입김을 하, 하 불며 거울을 닦던 부인이 손가락을 들어 거울에 그림을 그렸다. 거울에 나타난 그녀의 아버지는 추상화된 미소를 지었다. 골목의 눈 무더기에 꽂힌 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도 있다. 그 삽을 뽑아 다른 곳의 눈을 치우러 가야 하지만 남자의 머릿속엔 그 일을 하는 자신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이 뭔지도 잊어먹은 것 같은 표 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규리하성과 그 주위의 규리하시에 서 유별한 표정은 아니었다. "거기?" "그래." "이것." "아." "자." "……" 문장으로 표현해야 할 것은 단어가 되었고 단어로 충분한 의사는 손 짓이나 눈짓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그런 빈약한 의사 교환도 필요 가 없을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살피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 로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일상적인 일들은 일상적으로 계속되었지만 기지나 재치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활기차게 떠들고 농담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일으킨 눈송이 같은 소란은 규 리하시에 만연한 뜨거운 침묵 속으로 속절없이 녹아버렸다. 뜨거운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자들은 간혹 가슴을 차갑게 만드는 광경을 찾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황제의 하늘치가 있었다. 규리하성의 본관 복도를 걷고 있던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도 고개 를 옆으로 돌려 말리를 슬쩍 보았다. 그는 말리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몸통과 지느러미에 매달린 고드름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 다. 쌓이는 눈만으로도 말리 이곳저곳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말리를 바라보던 파라말은 끊어졌던 대화가 재개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탈해를 돌아보았다. 그의 예 감대로 탈해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탈해의 말은 짧았다. "정우는 동무들에게 자신이 도깨비불을 다룰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멀리 숨어서 그녀의 몸에 불의 날개를 달아주기로 약속한 어떤 도깨 비 친구를 믿고." 탈해는 조금 전처럼 다시 입을 다물었다. 파라말은 건너 뛰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침묵한 채 복도를 걸은 파라말은 모퉁이를 돌 면서 조용히 질문했다. "꿈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정우를 살리기 위해 성주님께서 밤의 다섯째 따님께 요청하셨습니 다." "그런데 꿈이 어떻게 화상을 치유한다는 거죠?" 탈해는 해가 어디서 뜨냐는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파라말을 보았다. "꿈속에서는 다쳐도 다치지 않습니다." 파라말은 할말이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규리하공은 불사 신이란 말인가? 하지만 조금 후 파라말은 그 설명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만요. 규리하공은 아스캄에서 저격을 당하셨습니다. 그건 어떻 게 된 거죠?" 탈해는 이번에는 해가 어디로 지느냐는 질문이냐고 묻는 것 같은 표 정으로 말했다. "꿈 꾸고 있는 사람도 때리면 다칩니다."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치려 애쓰며 파라말은 탈해의 말을 정리해보았다. "화상은 꿈속의 일이 되었지만 저격은 꿈 바깥에서 왔다는 말입니 까?" "예. 그러니까 정우는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요. 정우가 전 부 꿈속에 있다면 우리와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꿈속에 들 어가 있는 것은 그 화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공격 때문에 사 람들이 다치게 되자 정우는 다른 많은 것들도 꿈 속으로 끌어들였지 요."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러면, 만약 밤의 다섯째 따님이 규리하공을 떠나면?" 탈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파라말은 그 대답이 무엇일지 알 것 같았 다. 꿈이 떠나면 화상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 때 탈해가 걸음을 멈 췄다. 파라말은 움찔하며 앞쪽을 보았다. 그들은 정우의 방 앞쪽에 서있었 다. 탈해는 손에 든 쟁반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부사님." 파라말은 낭패한 심정으로 탈해를 쳐다보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정 우를 만나고 싶다는 것은 탈해와 동행하며 설명을 들으려는 핑계라는 것, 그리고 규리하공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라는 명령을 듣자 울음을 터뜨려버린 하녀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정우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 등은 사실이다. 탈해는 그것을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런 짐작을 확인시켜주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파라말이 말했다. "아니오. 뵙겠습니다."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독행왕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하고요." 파라말은 쟁반을 들고 있는 탈해를 대신해서 문을 두드렸다. 문 안 쪽에서 작지만 명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정우의 목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파라말은 문득 변경백의 방문을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라말은 그것이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은 할 수 있었지만 위험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가질 수 없었다. 아무리 규리하성 안쪽이라지만 규리하의 지 배자가 아무런 보호도 받지 않은 채 홀로 있는데 위험을 느낄 수 없 다니, 이상한 일이다. 파라말은 혼란스러운 기분 속에서 방안으로 들 어섰다. 정우는 모포로 다리를 덮은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정우는 약간 놀 란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탈해 때문이 아니라 파라말 때문임이 분 명했다. "어머, 좋은 꿈 꾸셨어요, 부사님?" 정우의 말이 도깨비들의 인삿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말에 평범한 인삿말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파 라말은 짧지만 힘든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다행히 그는 예의에 맞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탈해는 들고 온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갑 자기 그 행동에 대해 설명할지 말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는 바라보던 파라말의 동정을 사게 되었다. "하녀가 감기가…… 그러니까 추워서, 겨울이라 감기가 걸려서, 그 래서 내가 여기로 오던 길이라……" 정우는 손을 들어 탈해의 변명을 중단시키고는 탁자로 다가갔다. "두 분은 드셨어요?" 파라말이 당황해버린 탈해를 대신해서 먹었노라고 말했다. 정우는 식욕 없는 몸짓으로 쟁반에 놓인 밤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까 제가 인사를 잘못 드렸지요? 별뜻 없었어요. 부사님." "괜찮습니다." "부사님은 무슨 꿈을 꾸셨어요?" 파라말은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정우는 즉각 사과했다. "죄송해요. 부사님. 찾아와주신 킴은 부사님이 처음이라서 여쭤본 것이에요. 절대로 부사님의 개인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 는 것은 아니에요." "뚜렷하지 않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세요?"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 전부 제가 본 꿈인지, 그렇지 않으면 깨어난 후에 앞뒤를 맞추려고 제가 끼워 넣은 것들이 섞여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파라말은 정말 그 내용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좀 창피하거 나 무서운 것들이 섞여있긴 했지만 어느 밤에든 꿀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본 것도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형님만 빼놓고. 도대체 무슨 꿈을 꿨을지 짐작도 안돼.' 하지만 그 꿈들은 규리하시 전체에 시간이 퇴적되는 소리가 들릴 듯한 침묵을 가져왔다. 파라말이 재확인하듯 말했다. "대단한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시하지 못하시는군요." "좀 놀랐으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해서 각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 는지에 대해서는 무사장께 대강 이야기 들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 고 충격이 사그라들면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각하의 조신들은 비나간후 지키멜 퍼스의 처벌에 대 해 알고 싶어합니다." "무엇을 잃어버리셨지요?" 파라말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차마 정우를 똑바로 볼 수 없었던 파라말은 탈해를 바라보았다. 탈해는 창가에 기대앉아 어두운 표정으 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파라말은 탈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끼긴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탈해가 그 렇다면 정우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와 거부감, 증오, 분란. 파라말의 머릿속에 파국으로 의 연쇄 과정이 눈깜짝할 사이에 펼쳐졌다. 파라말은 그것을 막을 책 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현명함이나 탁월한 이해 력 때문이 아니다. 파라말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내가 가장 먼저 찾아왔으니까.' "저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어버렸습니다." 탈해와 정우는 주의 깊게 파라말을 바라보았다. 파라말은 자신의 말 에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저는 지금의 제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워 익혔습니다. 재능을 갈고 닦았고 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 습니다. 학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옷 입는 법, 머리 다듬는 법, 손톱 깎는 법, 신발 신고 벗는 법, 수저 쓰는 법, 붓 쥐는 법, 먹 가는 법, 고삐 쥐는 법, 의자에 앉고 일어서고 서랍을 여닫고 문 을 여닫고 계단을 오르고…… 여태껏 깨닫지 못했지만 제가 알고 있 는 화법도 엄청나게 많더군요. 듣고 말하는 기술은 세 살 때 완성했 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잘 아는 사 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적대적으로 대해야 할 사람과 친근감을 표시 해야 하는 사람에 따라 말하는 법이 다 달랐습니다. 저는 그 기술들 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실수도 저지르고 그 때문에 피해도 입으면서 정말 많은, 가을 숲의 낙엽보다 많은 기술을 배웠습니다." 파라말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진 온갖 시 시하거나 복잡한 기술들의 목록을 만들면 도서관까지는 몰라도 서재 하나 쯤은 간단히 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배워 익혀서 저는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각하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그것은 꿈 때문이었습니다." "꿈이 부사님을 공격했나요?" "공격이오? 글쎄요. 그걸 공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파라말은 그제서야 정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정우는 심각한 얼굴 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각하께서 꿈을 보여주셨을 때 제가 사라졌습니다." "사라져요? 왜죠?" "제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기술들이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꿈에 대해 저는 아무 것도 자의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눈을 감을 수 도, 귀를 막을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텅 빈 허공에 엄폐물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규리하를 급습한 폭 설은 모순적인 상황을 가능하게 했다. 어떤 각도에서는 하얀 벽처럼 보이는 함박눈은 규리하시의 외곽에서 말리로 올라가는 하얀 옷차림 의 여인을 감춰주었다. 물론 하얀 여인은 눈송이보다야 훨씬 컸고 더 군다나 눈이 내리는 방향을 거슬러 움직이고 있었으니 주의깊게 본다 면 여인을 포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각 규 리하에는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살필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자 는 누구에게도 포착되지 않고 말리의 조그마한 나루터 위에 도달했 다. 여자는 머리를 감싸고 있던 방한모를 벗고는 앞쪽에 서있는 레콘을 보았다. 미리 예고된 방문이었기에 레콘은 별말 없이 여자를 안내했 다. 하지만 조금 후 여자 쪽에서 레콘을 멈춰 세워야 했다. 말리 위 에는 곳곳에 눈밭과 빙판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까마득한 고도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레콘의 뒤를 태연하게 따라가는 것은 여자에게 퍽 힘든 일이었다. "천천히 가죠." 여자의 곤경을 깨달은 레콘은 느린 속도로 걸었다. 하지만 여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계속 긴장을 유지했고 건물 안에 들어선 후에는 새로운 긴장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물론 여자는 그 긴장감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당원이라고 합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에게 인사하는 여자의 말투는 평온했다. 데라시 는 당원이 두툼한 방한복을 벗고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혼자 왔습니까?" "예." 비스그라쥬백의 방은 나가가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온도, 즉 한계 선 남쪽의 온도였다. 여자는 급격한 온도차 때문에 몸 이곳저곳을 긁 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징후를 발견하길 기대하며 그녀의 특 징 없는 얼굴과 몸을 바라보던 데라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데라시는 직접 질문했다. "당신은 자신을 자유무역당의 전권대표로 생각하라고 말했지만 자기 를 그냥 당원이라고만 부르는 사람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도 되는지 잘 모르겠군요. 당신이 규리하의 첩자라고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 를 알려주시겠습니까?" 데라시의 말은 '당신은 큰 권한을 가지고 황제와 협상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도, 자유무역당원으로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나온 여자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인간이라면 상당히 경계했을 행동이지 만 데라시는 놀라지 않았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를 죽이기엔 너무 작 은 칼이다. 또한 데라시는 여자가 무슨 행동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장갑을 벗은 여자는 단검의 칼날에 손가락을 대고는 빠르게 움직였 다. 여자가 단검을 들어올리자 데라시는 단검의 금속 표면에 남아있 는 여자의 체온을 알아보았다. 그 체온은 자유무역당과 그들의 든든 한 후원자인 비스그라쥬백 사이에 약속된 암호를 그리고 있었다. 여 자가 말했다. "저는 볼 수 없군요. 제가 정확하게 그렸습니까?" "거의 정확합니다." 여자는 단검을 집어넣었다. 데라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용건은?" "유료도로당주에게 내려진 왕위를 취소해주시면 규리하를 폐하께 바 치겠습니다. 그 외에 저희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드 리겠습니다." 데라시는 극히 미미하게 남아있던 의심이 다 사라졌음을 느꼈다. 완 벽한 자유무역당 화법이다. 왜 그런 것이 유료도로당주에게 내려졌는 지 호기심을 가질 법도 하지만 당원은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했다. 데라시는 자유무역당 화법은 자유무역당의 신용장이나 다름없다고 생 각하며 말했다. "왜 그것을 원하는 거죠?" 말을 하며 데라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당원을 바라보았다. 유료도 로당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왕위 취소를 원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넌지시 표현하여 분개한 당원으로 하여금 열성적으로 설명하게 하려 는 시도였지만 당원은 나가의 표정에 어두웠다. 그녀는 여전히 단순 하게 딱딱 끊어지는 문장으로 말했다. "저희들은 그 뜻을 유료도로당주가 도로 사용료 징수권 외에 조세권 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로 를 이용해야 하는 저희들의 부담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저희들의 목 표는 소비자가 최소 부담으로 원하는 상품을 얻는 것에 있습니다. 운 송비용의 상승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흥미롭군요. 시오크 지울비는 아직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조세권에 대한 논의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가 현재 징수하고 있는 도로사용료 외의 수입을 바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 까?" 당원은 분개하여 말했다. "각하. 저희들을 희롱하지 마십시오. 당과 국가가 어찌 같겠습니까? 당은 당규로 당원만을 구속할 수 있지만 국가는 법으로 영토 내의 모 든 사람을 구속할 수 있습니다. 지금껏 그들은 법을 가지고 있지 않 았습니다. 아니, 한 가지 법뿐이었습니다. 돈을 내면 길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거죠. 그 때문에 극악무도한 살인자라도 통행료만 내면 그들 은 보호했습니다. 유료도로당이 국가가 되면 그들은 법을 가질 겁니 다." "극악한 살인자가 유료도로 위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는 없게 되겠 군요." "글쎄요. 그들이 어떤 법을 만들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의 강퍅한 성질을 드러내기 위해 살인자를 칭찬하는 법을 만들지 도 모르지요. 그리고 저는 그들이 만들 법에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 어떤 종류의 법이든 돈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 다. 그들이 법을 만들면, 그들은 세금을 거둘 겁니다." 데라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무역당원이 말하니 참 어울리는군요." "예?" "윤리도, 정의도, 선의 실현도 공짜는 아니라는 그 말씀 말입니다. 좋습니다. 당신들의 우려가 합리적이라는 것에 동의하겠습니다. 하지 만 당신들이 어떻게 규리하를 전복시키겠다는 겁니까?" "잘 아시겠지만 두 번의 전쟁을 겪은 후 규리하의 재정은 악화되어 있습니다. 현재 규리하의 재정 중 상당 부분은 자유무역당의 자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병사들의 봉급을 중단하기만 한다면 규리하 는 간단히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겁니다." [거짓말이다.] 갑자기 들려온 니름에 놀란 데라시는 당원을 외면했다. [폐하?] [도깨비를 이용한 연초사업을 구상할 만큼 영리한 비셀스나 그녀의 정부라면 재정 자립도가 그렇게 치명적인 수준까지 이르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이다. 규리하는 하늘치를 다루는 비셀스의 능력을 믿 고 군비를 확충하지 않았으며 대사업도 벌이지 않았다. 분명 쪼들리 긴 하겠지만 그 자가 말하는……] 데라시는 조심스럽게 닐렀다. [폐하. 알고 있습니다.] [……미안해.] 그리고 치천제는 침묵했다. 데라시는 슬픔을 느꼈다. 데라시가 알고 있는 황제는 그가 능히 짐작할 만한 일에 참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데라시는 정우와 그녀의 꿈을 본 후 황제가 느낀 충격이 도대체 얼마 나 큰 것이었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죽을 뻔했다는 니름 만 했을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 꿈이 심상찮은 부작용을 주기는 하지만 목숨을 위협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데라시로서 는 이해하기 어려운 진술이었다. 조금 기다렸지만 황제의 니름은 더 들려오지 않았다. 데라시는 앞쪽 에 있는 거짓말쟁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궁리하며 말했 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무향의 병사들이 그렇게 간단히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물론 당장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특히나 이 하늘치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외부로부터의 공격은 사람들을 단결시킵니다." "말리가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까?" "그러면 저희들의 공작이 더 수월해질 겁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저희들이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할 시간을 얻으시게 될 겁니다. 폐하 께서 저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먼저 물 러나셔서 저희들이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하시고, 유료도로당주에게 내려진 왕위는 그 후에 취소해주시면 됩니다." 당원은 이 정도면 파격적인 제안이 아니냐는 듯이 데라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데라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대신인 율형부사와 산공부사가 이곳에 있는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지진 않았습니까?" 당원의 얼굴에 미세한 흔들림이 나타났다. 그런 것이 나타날 거라 예상하고 있지 않았다면 놓칠 만큼 작은 흔들림이었다. "두 분은 잘 계십니다." '오호라. 사라말이었군. 사라말이 일단 황제를 물러나게 할 생각으 로 이 계획을 짠 거야. 그렇잖아도 왜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규리하공을 선택했나? 왜지? 일단 자유무역당은 확실히 규리하공의 편이라고 생각해둬야겠군…… 좋아.' "흥미로운 계획입니다만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예?" "말리가 물러난다 해도 외부의 적은 곧 올 겁니다. 아이저 규리하가 이곳으로 오고 있지요." 당원의 얼굴엔 이전보다 뚜렷한 흔들림이 나타났다. 데라시는 그를 동정하며 말했다. "그러니 말리가 물러난다 해도 당신들에게 도움은 안 될 겁니다. 그 리고 폐하께서도 반도의 무리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이상 물러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폐하께서는 이곳에서 그를 기다려 폐하의 지엄함 을 보이실 겁니다. 여러분들은 폐하의 도움 없이 규리하에 반역을 일 으켜야 되겠습니다. 어렵겠지만 성공한다면 여러분들은 폐하의 후의 를 받게 될 겁니다." 당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이 좌절이 아닌 단순한 실망처럼 보이길 바라며. 지키멜 퍼스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다 들킨 거야.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은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특별히 침울 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지키멜을 바라보았다. 원래 후작이었고 한 때는 왕으로 자칭했던 사람치곤 그 모습이 험악 하다고 할 것이다. 지키멜은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기도 전에 자신이 규리하공과 무사장을 납치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고 그 때문에 고문 은 받지 않았다. 고문해서 물어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가 주장하는 왕위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후작의 지위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직 사형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 런 고위 귀족을 함부로 사형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넝마 비 슷한 옷을 입고 규리하성에서 가장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는 꼴은 모 면하지 못했다. 초라한 몰골이었지만 지키멜은 감옥으로 그녀를 찾아온 사라말에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상이 염려될 만큼 추운 감방에서 간신 히 나체를 벗어날 정도의 옷만 걸치고 있었지만 지키멜은 기세등등하 게 말했다. "백작의 말은 아이저 규리하부터 손봐주고 너를 잡아주겠다는 뜻이 야. 순순히 물러나서 우리가 아이저 규리하와 협상해볼 시간을 주는 대신에. 다 들킨 거야." 지키멜의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입김을 보던 사라말은 되도록 입을 적게 움직이며 말했다. "우리? 규리하가 규리하공을 납치한 각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건 규리하공이 내 주장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불상사였어. 하지만 상황은 내 주장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황제의 며느 리라고? 허튼 소리. 황제는 규리하를 공격할 생각이었어!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온 그 나가들을 너도 보지 않았나? 누구보다도 먼저 황제 의 진의를 깨달은 사람을 포기할 건가?" 사라말은 고개를 들어 감방의 낮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약간 어울리 지 않는 표현 같았지만 규리하의 감옥은 장엄했다. 규리하성의 건물 전체에 만연한 고풍스러움은 감방에도 나타나 있었다. 윤곽을 알아보 기 어려울 정도로 닳아서 맨들맨들해진 돌을 보석이나 되는 것처럼 바라보는 사라말에게, 지키멜은 초조함이 약간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 다. "일단 황제를 물러나게 하고는 아이저 규리하를 설득해서 공동전선 을 펴보려는 것이었겠지. 아이저 규리하도 도움이 필요하고 이쪽에서 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 영리한 데라시 백작은 다 눈치챘어. 무 력으로 물러나게 할 수밖에 없어. 비셀스가 한 번 더 꿈을 해방시키 면 될 거야. 세상에, 그런 것은 상상도 못했어! 나는 그녀가 말리를 밀어내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라말이 팔을 들어올렸다. 감방 안에 하나뿐이던 촛불이 - 사라말 이 가져온 것이었다. - 흔들리며 벽에 무수히 많은 그림자들이 질주 했다. 지키멜의 말을 그렇게 자른 사라말이 말했다. "각하께서는 어떤 꿈을 보셨습니까?" 지키멜의 말이 뚝 멈췄다. 지키멜은 사라말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 다. "말할 의무가 없다." 사라말은 빙퉁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각하께서는 뭘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지금 드는 이상한 기분이 꿈 의 내용 때문이라고 믿고 계시는 것이겠지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예민한 내용의 꿈을 본 사람들은 그 때문에 자기가 우울해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꿈의 내 용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키멜은 흠칫하여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그 순간 뒤흔들어버린 것은 꿈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흔 히 꿈이 현실과 부딪치면 부서진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일방적 인 관계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규리하공이 보여준 꿈은 현실을 부쉈 습니다." 지키멜은 뺨에 손을 얹었다. 추위 때문에 그녀의 볼에는 각질이 허 옇게 일어나 있었다. 지키멜은 그것을 문질러 떼내듯 손을 움직였다. "나는 노후작을 봤어. 증조부가…… 죽었는데 그 얼굴이 시오크였 어." 사라말은 지키멜이 '내가 준 독을 마시고'라는 부분을 생략한 거라 추측했다. 그리고 말로도 표정으로도 그 추측을 표현하지 않았다. 지 키멜이 상체를 내밀고는 매달리듯 말했다.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고?" "아닙니다." "꿈이 현실을…… 부쉈다고?" "헛된 꿈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들 이야기 못들어보셨습니까? 이것 은 일종의 예일 뿐 꼭 그런 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밤의 다섯째 따님은 이런 단순한 예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성질을 가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은 예를 떠올릴 수가 없군 요." 지키멜은 타오르는 눈으로 사라말을 노려보았다. "헛된 꿈 때문에 신세를 망치느니 하는 말은 나를 겨냥한 건가?" "아니오. 우리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입니 다." 사라말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지키멜은 그 말에 어쩐지 절박함 같 은 것이 묻어난다고 생각했다. "꼭 이해하고 싶은 모양이군?" 사라말은 초를 돌아보았다. 눈이 아플 때까지 촛불의 가장 밝은 부 분을 노려보던 사라말이 말했다. "제 친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친구?" "아트밀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가들에게 많이 다쳤나?" 사라말은 무릎에 얹어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많이 다쳤습니다만 지금 아트밀을 죽이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 꿈이지요." 파라말은 혀를 내밀어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지 비극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트밀은 자신이 되겠다고 외치며 허공의 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런데…… 그 순간 각하께서 꿈을 현실에 병존시킴으로써 그를 부수셨 습니다. 그는 자신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아무래도 현실 속에서 자신이 되어야 하는 건지 꿈 속에서 자신이 되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된 것 같습니 다. 지금 좌절하고 우울해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는 가장 큰 좌절 과 우울을 경험하고 있고, 거기에 나가들에게 입은 상처가 더하여 위 태로운 상태입니다." 정우는 턱으로 가슴을 찌른 채 두 손을 얽었다. 탈해는 그런 정우에 대한 동정심과 파라말에 대한 불만을, 그리고 아트밀에 대한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 정신없는 감정의 뒤엉킴은 도깨비 무사장을 어지 럽게 만들었다. 파라말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각하께서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셨는데 말입니다." 파라말이 안타까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상황이었다. 결코 정우를 질 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우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파라말은 당황했다. "각하. 죄송합니다. 각하를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냥 그 상황이 너무 기막혀서 주절거린 겁니다. 제 허언 때문에…… 아, 각 하." 황급히 다가온 탈해가 무릎을 꿇고는 정우의 눈주위를 닦았다. 의자 에서 일어나던 파라말은 그 모습을 보고는 반쯤 일어선 채 멈췄다. 정우는 탈해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조심스럽게 밀어내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저는 사람들이 민망하거나 화나는 꿈, 무 서운 꿈을 봐서 저를 피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자 기 자신을 잃을 만한 일이었다고요? 왜 킴과 레콘과 나가는 꿈에 그 렇게 당황하는 거죠? 왜 아파하는 거죠? 저는 그 싸움을 꿈속의 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에요. 잠에서 깨어나면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일 로. 그런데 그게 그렇게 끔찍한 폭력이었어요?" 파라말은 황급히 변명했다. "각하. 제가 생각 없이 말했습니다. 분명 각하께서는 많은 사람을 구하셨습니다. 제가 끔찍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유난히 선명한 꿈을 꾸고 일어난 직후 에 느끼는 멍한 느낌을 확대해놓은 것에 불과할 겁니다. 그런 건 곧 잊혀지지요. 현실이 그런 상태로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니까요." "아트밀이 죽어가고 있다면서요." 파라말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정우는 파 라말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 다. "아트밀에게 가겠어요." "각하?" 정우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동작의 끝에서 정우는 잠깐 휘청였 다. 다행히 곁에 있던 탈해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불안한 눈으 로 정우를 바라보던 파라말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았다. 그녀 는 끔찍한 고통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파라말은 기겁하여 일어났다. 꿈은 정우의 화상을 꿈속의 일로 만들었다. 파라말은 그 사실에서 꿈이 정우를 떠나면 화상은 현실이 될 거라 추측했다. "각하! 그 꿈이 밖으로 나왔을 때 화상이 진행된 겁니까?" 탈해가 커다란 어깨를 크게 움직이며 움찔했다. 정우를 부축하고 있 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정우는 그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말했다. "괜찮아. 탈해. 나는 괜찮아." "정우. 정말이야? 부사님의 말대로야?" "응. 하지만 다시 꿈이 되었어. 꿈속의 일이야. 이젠 아무렇지도 않 아." 탈해 머리돌이 인간과 공유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는 불에 타는 느 낌이다. 도깨비는 불에 타지 않으니까. 탈해는 황급히 파라말을 돌아 보았다. 파라말은 규리하의 하늘에서 꿈을 해방시켰던 순간 정우가 느꼈을 '몸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상상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표정은 탈해에게 좋은 설명이 되었다. 탈해는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 로 말했다. "많이 아팠던 거였지?" 정우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열심히 탈해의 손등을 두드리며 탈해 의 부축에서 빠져나왔다. "아트밀에게 가야해." 파라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탈해는 직접적으로 말했다. "안돼." 도리질한 정우가 다시 설명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파라말과 정우, 탈해 는 겁먹은 얼굴로 문을 돌아보았다. "들어와요."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문바깥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 다. 파라말은 사람들이 정우를 만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에 갑작스 럽게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곧 파라말은 그 자신도 온갖 용기를 끌어내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감정의 혼란 속에 서 당황해하던 파라말은 조금 늦게서야 밖에서 들려온 소리를 이해했 다. 파라말은 깜짝 놀라서 탈해와 정우를 보았다. 두 사람의 굳은 얼굴 을 본 파라말은 자신이 들은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문쪽으로 고함을 질렀다. "다시 말해! 뭐라고 했지?" 병사임이 분명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외쳤다. "지평선에 하늘치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이곳으로 곧장 오고 있 습니다!" =============================================================== 37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7-2 | 피를 마시는 새 2004/11/16 07:53 네스토르(rpgtown) http://cafe.naver.com/swallowedbird/5798 37. 마지막 불씨 - 2 니름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데라시는 황제를 직접 만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꿈을 본 이후로 황제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고 데라 시는 그녀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느끼고 있었다. 보온복에 물을 붓는 귀찮은 일을 하는 대신 데라시는 소드락을 먹은 다음 황제의 방으로 달려갔다. 초를 켜두지 않은 방안은 어두웠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융단 위를 거니는 자신의 그림자와 발 맞추어 방안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안 으로 들어서는 데라시를 본 황제는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바라보았 다. [하늘치가 나타났습니다. 폐하. 아이저 규리하의 것 같습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데라시를 조금 놀라게 했다. 데라 시는 당황하여 닐렀다. [전투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폐하. 아라짓 전사들을 깨워 소 드락을 먹일까요?] 황제는 데라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벽난로 가의 큰 의자에 앉았 다. [무사장이 문제일 거라 생각했는데 엉뚱하게 그 여자라니. 바우 성 주는 도대체 왜……] 데라시는 황제가 자신의 보고에 대해 아무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음 을 깨달았다. 황제의 모든 관심은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를 향하고 있었다. 황제가 최우선 순위를 혼동하는 듯한 이런 상황은 데라시에 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처럼 보일 땐 그것이 다른 이들의 판단과 달리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그녀 혼자 알 때뿐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의 모습은 큰 충격으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자의 모습이었다. [폐하. 제가 도와드릴 것이 없겠습니까?] [너희들은 어떻게 그것을 견디는 건지 닐러줘.] 데라시는 황제가 말한 대명사들에 당혹했다. 너희들이라는 것도, 그 것도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솔직하게 당혹감을 내보였다. [폐하?] 황제는 무성의한 동작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동작이었지만 데라시는 주춤했다. 아이저 규리하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의자에 앉는 것은 황제가 빠져 있는 무기력함의 덫에 함께 빠져드는 일처럼 느껴졌다. 현실에 발 딛고 황제를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데라시 가 말했다. [폐하. 아이저 규리하가……] [아이저 규리하는 없다! 거기에 앉아라. 당장!] 데라시는 비늘이 빠질 것 같은 슬픔을 느끼며 공손히 의자에 앉았 다. 황제는 팔걸이에 두 팔을 던진 채 의자에 몸을 눕혔다. [어떻게 그것을 견디는 거냐.] [무엇을 니르시는 겁니까?] [비셀스가 휘두른 그것 니름이다.] 황제가 말하는 것은 꿈이었다. 데라시는 이성적인 황제가 왜 꿈이라 는 니름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꿈을 한 번도 꿔본 적이 없다는 듯이 니르는 황제의 태도도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데라시는 결국 일기를 쓰듯 닐렀다. [폐하. 그 꿈은 당혹스러웠습니다. 현실과 꿈이 함께 존재하게 되자 현실을 다루기 위해 습득해온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의미한 것이 되 었습니다. 팔다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정신마저 흐려진 것 같은 거대 한 허무감을 느꼈습니다. 아마 감상적인 인간들은 더 큰 충격을 느꼈 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그냥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한 후에는 무 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어떻게 무시하지?] [쉽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때가 떠오르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데 오직 저 하나만 사라진 것 같은, 그러니까 죽은 것과 같은 그 상황이 떠오르면 비늘이 일어섭니다. 하지만 다루어야 할 현 실이 다시 돌아왔고……] 데라시는 그 시점에서 황제가 다가오는 아이저를 떠올리길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것을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백작을 마주보 았다. 데라시는 절망감 속에서 말을 이었다. [그것을 다루다보면 꿈은 잊을 수 있습니다. 폐하. 그런 식으로 잊 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꿈을 보셨습니까?] 치천제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꽃을 보았다.] [예?] [처음 보는 꽃이었다. 그런 꽃이 세상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어.] 데라시는 한 송이 꽃이 왜 그렇게 충격적이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꿈속에서는 모든 현실의 규칙이 무의미해진다. 꽃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는 다시 이상한 니름을 했다. [너는 그 꽃의 이름을 아느냐?] [폐하? 저는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만.] 황제는 의자에서 뛰쳐나오려는 사람처럼 팔걸이를 콱 움켜쥐었다. 데라시는 그녀의 몸에서 부딪치는 비늘을 보며 기겁했다. 황제는 니 르며 말했다. "[다른 꿈? 다른 것을 보았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같은 것을 본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 "[전부 다르다고?]" 데라시는 공포를 느꼈다. 황제는 아무래도 충격 때문에 정신이 어떻 게 된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해본 것은 아니지만 데라시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다른 것을 보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 다. 비셀스 규리하에게서 나온 것은 꿈이고 또한 꿈일 뿐이었다. 엉 터리 같은 비유를 허락한다면 붓과 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붓으로 종이에 무엇을 쓰느냐는 것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데 라시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데라시는 다가오는 아이저를 상대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라고 판단했 다. 황제는 쉬어야 한다. 낭비한 시간에 대해 약간 후회하며 - 경애 하는 황제와 함께한 시간이었기에 데라시에게 그 시간은 고귀한 것이 었다. 따라서 후회는 그야말로 약간이었다. - 데라시는 일어서려는 시늉을 해보였다. [폐하. 제 부족한 견식으로 폐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거니와 지금 그 소졸한 재주라도 보태어야 할 다른 일이 있는 바에 야 물러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러난다고?] 데라시는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예. 폐하. 칼리도백이라면 그 위엄만으로도 어떤 적이든 무릎을 꿇 게 하겠지만 저는 직접 상황을 살피고 가진 재주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재주를 모두 동원해야……] [그렇군.] [예?] 황제가 안도하며 닐렀다. [맞아. 엘시가 있었군.] 비록 그 스스로 엘시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지만, 황제가 커다란 안도감으로 엘시의 이름을 니르자 데라시는 질투심과 비슷한 아픔을 느끼게 했다. 하늘누리 위에서 그는 황제와 유일한 동족이었고 하늘 누리가 폭주할 때도 그는 황제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까마득한 미래로의 여행에도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황제는 제국 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엘시에게서 위안을 얻고 있었 다. 데라시는 불현듯 자신의 마음을 닫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손으로 귀를 덮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례였기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황제는 데라시를 보지 않은 채 닐렀다. [엘시라면 꿈을 처리할 수 있겠지.] 데라시는 호기심이 약간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황제의 니름은 전 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백작이 꿈을 처리한다고요?] 황제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 번째 벽난로방에 있 는 뱀부리미들에게 니름을 보냈다. [들어라. 대장군 엘시 에더리에게 사어를 보내라. 황제가 대장군에 게 명령한다. 대장군은 황제의 명령을 받는 즉시 완벽한 전투 준비를 갖춰 규리하로 출동하라.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대한 빨리 도착 해야 한다.] [폐하!] 황제는 데라시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처럼 백작을 돌 아보았다. [뭐지?] 바보가 되셨습니까, 폐하? [폐하. 제 무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백작이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은 규리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커다란 일입니다. 시모그라 쥬공이 일으킨 불을 뒷수습하고 시련의 경거망동을 경계하는 그 중차 대한 일에서 백작을 제외하심은 니름도 안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부디 그 명령을 취소하여 주십시오.] 황제는 데라시를 바라보았다. 데라시가 느끼기엔 그가 방에 들어오 고서 처음으로 보게 된 진지한 눈빛이었다. [데라시.] 황제의 니름은 상처입은 자의 것이었다. 데라시는 그 니름에 슬픔을 느꼈지만 또한 황제가 자신의 외부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음에 기쁨 을 느꼈다. 데라시는 어깨를 움츠리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닐 렀다. [언제까지 그런 헛된 것들에 연연해하며 짐을 괴롭힐 생각인가? 아 이저 규리하는 없다. 시모그라쥬공은 없다. 도시연합은 없다.] [폐하. 폐하의 한량 없는 헤아림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들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불필요한 낭비를 가져올까 두렵습니다.] [데라시. 불필요한 낭비는 없다.] 황제의 니름에는 자신감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데라시가 익히 잘 아 는 불꽃의 자신감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이 아 니라 거부하면 상처를 입게 되는 그런 종류의 자신감이 황제에게 되 돌아온 것을 보며 데라시는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폭설을 뿌리고 있는 구름 중 하나라고 시점에 지멘은 그것이 하늘치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하늘치로 여 기게 되었을 때 지멘은 그것이 말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실과 함 께 그곳을 떠나온 것이 엇그제 같은데 이런 이상한 방법으로 다시 만 나게 된 것을, 지멘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황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 이다. 아실의 말을 따라 숙원을 포기할지, 그렇잖으면 숙원을 성취할 지. 지멘은 자신이 그런 종류의 고민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었다. 레콘의 숙원은 그런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성취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의 문제지 성취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말리는 규리하의 하늘에 얼어붙은 듯한 모습으로 떠있었다. 그 아래 도시는 희다. 전투의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꽃잎처럼 떨어지는 함 박눈 속에 모든 것이 고요하다. "황제의 하늘치죠?" 지멘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눈을 피하고 있던 아실이 확인해줄 필요 가 없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지멘은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주변을 살폈다. 아이저 규리하와 규리하인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위치에서 규 리하시 상공에 떠있는 하늘치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고 그의 곁에 있 는 것은 아실과 제이어 솔한뿐이었다. 소리의 등에도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규리하를 앞두고 이이타는 소 리의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황제와의 조우가 점점 다가온다는 사실 은 지멘에게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 지멘은 툭 던지듯 말했다.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있다." 아실이 고개를 들어 지멘을 흘깃 보고는 다시 앞쪽을 쳐다보며 말했 다. "뭐죠?" "내가 황제를 죽이는 일." "그게 왜?" "사모 페이는 내게 설명했다. 황위 계승자에게는 황제도 경쟁자라 고. 그래서 황제는 온갖 원망을 받은 후에 사망하고 엘시는 사람들의 환영 속에서 제위에 오르게 될 거라고 설명했다. 그 경우 내가 하는 일은 폭군을 죽이는 일이지. 하지만 황제는 신이 될 거라고 했다. 그 렇다면 나는 사후에 아라짓을 가호하는 신이 된 명군을 죽이는 것이 된다. 한 가지 일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정반대로 해석될 수는 없다." 아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멘의 말에 대답한 것은 반대편에 서있던 제이어였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지멘. 오히려 그 편이 좋지요." 지멘은 제이어의 참견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실과 그의 대화였다. 하지만 지멘은 자신이 그런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동안 제이어는 계속 설명했다. "완전히 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일이야말로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요. 게다가 헷갈리기에 좋은 조건도 구비되어 있지요. 나가 황제가 두 명이니까요." "뭐?" 제이어는 씩 웃었다. "사람들은 헷갈릴 거란 말입니다. 온갖 주장과 상이한 해석들, 전통 적인 역사관에 대항하는 도발적인 역사관 등등이 난립하다가 최후에 '합리적인' 결정이 내려지겠지요. 좋은 일은 전부 원시제의 것이고 나쁜 일은 전부 치천제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주름살이 권위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들이 보여준 행적을 통해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다른 해석은 주목받고 싶은 사이비 학자의 소설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다른 사 람의 주름살을 무서워 하는 자들이 박수를 치겠지요." 지멘은 그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묘하게 잘 이해되는 것에 놀랐다. 그 동안 복잡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많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되는 것은 원시제인가? 사람들은 원시제가 신이 되 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건가?" "엘시 에더리에겐 마케로우의 이름이 내려질 겁니다. 신의 축복을 받아야 하니까." "잠깐만! 그렇다면 라세가 일만육천 년 동안 사람들을 잘 이끌어도 그녀에게 돌아가는 건 증오뿐이라는 건가?" 제이어는 기발한 속임수를 자랑하는 재주꾼처럼 말했다. "애정과 존경을 받겠지요. 다만 그리미 마케로우의 이름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다른 사람에게 가는 애정과 존경을 받을 치천제를 생각해 본 지멘은 그녀를 동정하게 될까 두려워졌다. 그런 호감은 증 오보다 더 끔찍하다. 그래서 지멘은 그 상황 자체가 일어날 가능성을 부정하기로 했다. "역사적인 진실이 그렇게 간단히 은폐되고 조작될 수는 없어." "아니오. 얼마든지 그렇게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요. 착시 현상은 전부 그 런 동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역사적 착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멘이 바로 그런 동기 때문에 사람들은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보 이는 사실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마침내 진실을 밝혀낸다고 말하려 한 다는 것을 눈치 챈 제이어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런 현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아실이 잘 알 겁니다. 사람들은 분리주의의 사조가 누구인가의 문제에 대해 사실과 다른 견해를 지지 하고 있지요." 지멘은 부리를 닫았다. 말문이 막히기도 했거니와 아실에게 차가운 대꾸를 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런 일은 언제나 아실이 맡는 편이다. 망치와 주먹에 의한 교정은 지멘의 몫이고. 하지만 아실은 제이어의 말에 미소만 머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아실이 말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지멘은 뒤늦게나마 스스로 제이어의 말을 꾸짖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타이모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에 대해 지멘이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제이어는 화 제를 바꿨다. "사람들은 아마도 합리화할 수 없을 때, 예를 들어 꿈이 형체를 가 지고 현실에 나타난다면 정말 큰 당혹감과 공포를 느끼게 되겠지요. 합리화하려는 내부의 강력한 동기를 충족시킬 수 없으니까요." 지멘은 제이어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정신억압을 당했다고 말했다." "예. 지멘."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네 말이냐?" 지멘에겐 실망스럽게도 제이어는 조금도 기가 죽거나 충격 받지 않 았다. 오히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황제의 꼭두각시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말라는 거죠? 예. 알겠습니 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지멘." 제이어는 보는 사람이 화날 만큼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그 가 걸어가는 모습을 본 지멘은 의아함을 느꼈다. 살인기사는 아이저 규리하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 넓은 하늘치의 등에서 하필이 면 그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걸어가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지멘은 제이어를 관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를 따라가야 하 는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지멘은 사소한 것이나마 감정의 부딪침이 있은 직후에 그를 따라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 때 아실이 말했 다. "불쌍한 사람." 지멘은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아실은 제이어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 다. "많은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정작 관심 둘 곳은 가지지 못했지 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시시한 사람 취급당하지요. 하지만 정작 그런 모습을 가장 참기 힘든 사람은 바로 자신일 거예요. 그런데도 결코 화내지 않네요." 지멘은 아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때 그의 눈이 아실의 발 끝에 머물렀다. 아실의 발 앞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그 눈밭에 어떤 자취가 있었다. 아실이 발끝을 움직여 그려놓은 자취였다. 지멘은 그 것을 더욱 자세히 보았다. 그것은 짧은 단어였다. 천한 단어였고 사람에게 말했다간 싸움을 각 오해야 할 그런 단어였다. 지멘은 소리 로베자가 그에게 지나가는 말 로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실이 써둔 굉장한 욕설이 자신을 향 한 것인 줄 알고 놀랐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지멘은 의심에 찬 표정 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아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것은 제이어에 대한 평가였다. '정말 괜찮은 개새끼예요.' 지멘은 깃털이 조금씩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실." "예." "말리를 떠난 이후로 너는 한 번도 욕을 하지 않았어." "그랬나요?" "아실." "예." 아실은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는 말 대신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지멘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황제가 너를 완전히 되돌려준 것 맞아?" "무슨 말이죠?" 지멘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부리에선 명백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네 증오는 어떻게 된 거지?" 사라말 아이솔은 규리하성의 지하에 가득 고여있던 차가운 공기가 갑자기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벽과 복도가 다급하게 달리는 발소리들을 전달하고 있었다. 미약한 외침들도 들려왔다. 규리하성 전체가 마치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사라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바로 이런 식으로 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는 일이잖은가? 눈을 뜨 고 온힘을 다해 살아가야 할 시간을 마주하게 되면 꿈은 쉽게 잊혀진 다. 지난 밤 꿈속에서 공격했던 누군가를 죄의식에 빠져 마주하는 사 람은 드물다. 지난 밤 꿈속에서 몸을 섞었던 누군가에게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냉랭하게 대할 수 있다. 꿈은 간단히 현실과 분리된다. 비 록 정우가 보여준 것이 현실 그 자체에 무자비하게 덧칠된 꿈이었기 에 그것을 접한 사람들은 깊은 우울감을 느꼈지만 벅찬 현실이 다가 오면 결국 사람들은 눈을 뜨고 일어난다. 규리하에 커다란 위기나 위 기의 전조가 다가오는 것이 분명했지만 사라말은 그 때문에 사람들이 깨어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트밀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의 현실에는 정신억압의 손 자국이 남아있다. 꿈을 무시하고 현실로 돌아온다 해도 그는 자신이 정신억압을 당했을 가능성에 고통스러워 해야 할 것이다. 지키멜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황제가 다시 공격을 시작한 모양이군. 자, 사라말. 가서 규리하공 에게 말해. 겪은 시간은 적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황제에 대해 잘 알 아. 그녀의 본심을 알기 때문이야. 따라서 황제가 어떤 속임수를 쓰 든 나는 알아볼 수 있어. 그녀에겐 내 도움이 필요해." 사라말은 어두운 낯빛으로 지키멜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하 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사라말은 그 곳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지키멜이 당황하여 바라보는 가운데 사라말은 지키멜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튼튼한 사슬로 벽에 이어져 있던 족쇄가 풀리자 지키멜은 환희에 차 서 말했다. "규리하공이 나를 데려오라고 했나?" 사라말은 대답 없이 열쇠를 다시 쑤셔넣었다. 그는 촛대를 들어올리 고는 감옥 문을 열었다. 지키멜은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감방 바깥은 커다란 복도였다. 복도의 좌우벽을 따라 감방 문이 늘 어서 있었다. 그것들은 전부 비어 있었다. 사라말은 촛대를 든 채 앞 장서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던 지키멜은 뭔가가 이상하 다고 생각했다. 규리하공이 그녀를 풀어주라고 명령했다면 밖에는 갈 아입을 옷을 가진 하인이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복도에는 아 무도 없었다. 복도 끝에 도달한 사라말은 지키멜에게 문 옆의 벽을 가리켰다. 그 곳에 서라는 몸짓임이 분명하기에 지키멜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 손을 따랐다. 사라말은 반대편 벽에 선 다음 심호흡을 했다. "후작이 탈출했다! 빨리 좀 와!" 지키멜은 기겁하여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절그럭거리는 소 리가 나더니 황급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칼자루를 움켜쥔 병사가 뛰 어들었다. 문 옆에 서있던 사라말이 딴죽을 걸었다. 병사는 우당탕 하는 소리를 내며 감방 복도에 쓰러졌다. 사라말은 병사의 칼을 집어들고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조 처 없이 다시 허리를 펴고는 칼을 떨어뜨렸다. "기절했군요." 사라말은 태연히 바깥으로 나갔다.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쓰러진 병사를 보던 지키멜이 그 뒤를 따랐다. 사라말은 계단을 따라 오르고 있었다. 그의 뒤로 따라붙은 지키멜은 당혹하여 말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각하를 탈출시키고 있습니다." "잠깐, 잠깐! 네가 나를 탈출시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왜?" 사라말은 입을 다물고는 계단 옆벽에 몸을 붙였다. 영문을 알 수 없 었지만 지키멜 또한 사라말의 동작을 따랐다. 벽에 몸을 붙인 채 계 단을 오른 사라말은 계단 끝에 있는 문에 도달했다. 문에 있는 조그 마한 감시창을 통해 밖을 확인한 사라말은 안도하며 문을 열었다. 지키멜은 밖으로 나가는 사라말을 따라 문을 나왔다. 감옥 위쪽에는 규리하성 경비대 본부가 있었고 그들이 빠져나온 곳은 본부 중앙 통 로였다. 바깥의 심상치 않은 소음 때문에 모든 경비대원이 출동한 것 같았다. 건물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키멜은 빠져나가는 것에 어려움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라말은 더 걸어가는 대신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지키멜의 어깨 너머로 그들이 빠져나온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십시오." 이 황당한 요구에 지키멜은 얼이 빠졌다. 당황해하는 지키멜을 본 사라말은 보다 합리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라수의 방으로 들어가란 말입니다. 이것도 문이니 라수의 방으로 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요?" "아아,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런데 왜 그래야 하지?" "그 방에 들어가 있다가 밤중에 나오십시오. 이 앞으로는 더 이상 잠긴 문은 없습니다. 경비대 본부니까 쉽게 출동할 수 있도록 문은 항상 열어둡니다. 그러니 알아서 성을 탈출하도록 하십시오." 초를 훅 불어 끈 사라말은 품속에서 점화통과 단검을 꺼낸 다음 그 것을 촛대와 함께 지키멜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지 키멜은 의혹에 찬 표정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왜 나를 탈출시키는 거지?" "각하께서 한 번도 하늘누리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키멜은 입을 다문 채 사라말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라말의 약간 피로한 듯한 얼굴에는 광기도, 농담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지키멜은 주의깊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저와 제 동생은 하늘누리에서 살았습니다. 탈해 머리돌 무사장도 한 때 하늘누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셀스 규리하 각하께서도 하 늘누리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 분께서는 하늘누리 주변의 하늘에 서 며칠 동안 떠있기까지 하셨지요. 그리고 아트밀도 발케네 공격 당 시 하늘누리에 올랐습니다. 이 성에 있는 유력인사 중 하늘누리에 오 른 적이 없는 사람은 오직 각하뿐입니다." "그런데?" "따라서 각하께서는 정신억압을 당했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뭐? 정신억압?" 사라말은 단순한 어조로 자신은 치천제가 정신억압자일 거라 믿는다 고 말했다. 그 말에 귀를 기울이던 지키멜은 조금 후 자신이 그 어처 구니 없는 말을 믿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을 제멋대로 조 종하는 악당상은 그녀가 치천제에게 부여하고 싶은 악평에 잘 부합하 는 것이었다. 사라말은 엄격하게 자신에겐 확증적인 증거가 없음을 인정하고는 자신이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사람을 정신억압할 수 있는 정신억압자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아 무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폐하의 의지에 따라 펼쳐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트밀의 공격과 비셀스 각하께서 꿈을 공개한 것까지도." "설마……" "그 무엇도 의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 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각하를 저의 전인으로 삼을까 합니다." 지키멜은 침을 삼켰다. "전인이라고?" "저에게는 폐하의 정신억압 능력을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고 지금도 믿지는 않습니다만 항상 하늘누리에 있었던 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억압을 당했을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성에서 정신억압을 당했을 가능성이 가장 적 은 사람은 각하입니다. 그리고 각하에게는 비나간인들과 시오크 지울 비라는 든든한 동료가 있습니다. 각하. 도망쳐서 살아남으십시오. 그 리고 만약 제가 황제와 싸우다 죽으면 저 대신 그것을 세상에 고발해 주십시오." 지키멜은 사라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황제와 싸우겠다고?" "그럴 겁니다." "왜?" "친구를 위해." 지키멜은 촛대를 꼭 움켜쥐었다. 사라말은 약간 더 설명하기로 했 다.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아트밀도 정신억압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겁 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니 각하께서 라수의 방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제가 보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제가 그 방법을 알게 되면 정신억압 때문 에 말해버릴지도 모르니까. 제가 떠난 다음에 라수의 방으로 들어가 도록 하십시오. 그럼." 사라말은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려 휙휙 걸어갔다. 사라말의 모습 이 복도 모퉁이를 따라 사라지는 것을 본 지키멜은 몸을 돌렸다. 사 라말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라수의 방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 는 일이리라. 혼란에 빠져 있던 지키멜은 그렇게 판단하고는 라수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온 사라말은 성안을 달리는 사람들과 주랑으로 뛰어오르는 병사들을 보았다. 위급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사 라말은 곧 하늘을 보았다. 사라말은 자신이 말리를 찾으리라 생각한 곳에 말리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은 여전히 규리하시 교외에 떠있었다. '말리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면 왜 규리하성이 갑자기 전투 태세에 돌입한 것일까?' 사라말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려 했다. 그 때 위쪽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형님! 어디 계셨습니까?" 사라말은 본관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파라말을 보았다. "무슨 일이지?" "아이저 규리하가 하늘치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혼란, 감금, 매혹, 은닉. 밤의 다른 네 딸이 즈믄누리에 한 기여는 잘 알려져 있지. 하지만 막내딸의 기여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 어. 이제 왜 그런지 알 것 같군. 꿈의 그 파괴적인 힘 때문에 그것은 숨겨져 있었던 거야. 꿈은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신념을 흔들어버릴 수도 있었던 거야. 그런데 그 신념이 없으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야.] 황제는 계속해서 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칼리도백을 부르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이 상황에 대한 모든 대처가 끝났다는 듯이 느긋 하기까지 한 자세였다. 실제로 황제의 정신이 느긋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다급함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데라시는 느긋함 을 느낄 수가 없었다. 황제의 말이 맞다면 엘시는 정우의 꿈을 어떻 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황제에게 가장 큰 위해가 되 고 있는 것은 앞쪽에 있는 규리하가 아니라 뒤쪽에서 다가오는 규리 하였다. 황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고 있는 남자가 하늘치를 다루 며 날아오고 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는가? 데라시는 황제의 니름을 건성으로 들으며 떠나겠다는 니름을 꺼낼 기회를 기다 렸다. 그 때 황제의 니름이 갑자기 멈춰졌다. 데라시가 닐렀다. [폐하. 물러나도록 해주십시오.] 황제는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데라시는 송구스러워 하다가 문득 황제의 마지막 니름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렸다. 황제가 물러가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는 것을 떠올린 데라시는 갑자기 허물벗기가 시작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이저 규리하가 그렇게 걱정되더냐? 그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폐하.] [보여줘야겠구나.] [예?] 황제는 데라시를 무시한 채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곧 방 가운데 환상벽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꽤나 거대한 것이었지만 데라시는 당 연하게도 그녀가 만들어낸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 환상 벽을 데라시에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오직 나가들만이 가능한 방법으 로. 그것은 서로를 상당히 신뢰하는 두 명의 나가만이 가능한 방법이 다. 황제가 닐렀다. [마음을 열어라. 보낼 것이 있으니.] 그리고 황제는 환상벽을 보고 있는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데라시에 게 보냈다. 데라시는 갑자기 자신의 시각이 바뀐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황제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황제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었던 데라시는 그런 급격한 시점의 변화에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 데라시는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황제의 방 한가운데 커다란 벽이 나타나 있었다. 가로세로가 그의 키보다 더 큰 벽에는 어떤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높은 고도 에서 하늘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데라시는 하늘치 아래쪽의 눈 덮힌 산야를 볼 수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눈송이들이 영상 가운데로 몰리고 있었다. 영상은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데라시는 자신이 떨어지는 눈송이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침내 하늘치의 모습이 벽을 가득 채웠다. 데라시는 그것이 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하늘치의 등에는 인공적인 구조물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 후 데라시는 하늘치의 등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데라시는 영상 한쪽에 나타나 있는 검은 레콘과 그 곁에 서있는 작 은 소녀를 보았다. '지멘과 아실이다!' 하지만 영상은 다른 쪽으로 집중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두 사람의 모습은 곧 벽 바깥으로 사라졌 다. 영상의 중심에는 몇 명의 인간들이 서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영상의 각도가 바뀌었다. 데라시는 하늘치의 등에 서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옆쪽에서 보게 되었다. 내리는 눈 사이에서 데라시는 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이저 규리하?' 아이저 규리하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아들로 짐작되는 두 명의 청년과 몇 명의 인간들이 같은 방향 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라시는 그들이 보고 있는 쪽을 보았다. 조금 후 영상 한쪽에서 다른 인간이 나타났다. 그는 내리는 눈과 똑같은 빛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살인기사. 저 자가 아이저를 돕고 있었군.' 문득 데라시는 그것이 그냥 태연하게 바라볼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명백히 늦은 경악을 드러내며 닐렀다. [이, 이게 뭡니까, 폐하?] 황제가 대답했다. [환상벽이다.] [환상벽이오?] [라수 규리하와 원시제가 저것을 즐겨 사용했지. 환상계단과 같은 것이다. 밟는 용도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용도라는 점이 다를뿐.] 데라시는 일어선 비늘을 쓸어내리며 황제가 보내어오는 환상벽의 영 상에 집중했다. 그 영상 속에서 제이어 솔한은 그에게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규리하 가문의 남자들을 향해 넉살 좋은 미소를 보내고 있 었다. 데라시의 생각과 달리 그들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 다. 데라시가 질문했다. [저것은 지금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여기로 다가오고 있는 하늘치의 등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완벽하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환상 계단은 상상한 대로 나타나지 않더냐? 저런 모습이 펼쳐질 거라고 짐 이 상상했기 때문에 저런 모습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까?] [네가 밟을 수 있는 계단은 네게 의미가 있다. 너를 떠받쳐주지. 저 영상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가능성이 대단 히 높다. 세부 사항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저것이 지금 바깥에 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런데 그만 니르면 좋겠구나. 저 영상을 만들어내고 너에게 보내주면서 동시에 너와 니르는 것은 힘들다.] [아, 예. 죄송합니다. 각하. 불편하시다면 제게 보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보도록 해라. 다만 니르지는 말거라.] 데라시는 조용히 황제가 보내어오는 느낌을 바라보았다. 아이저 규 리하는 성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 대해 제이어는 방어적인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저 규리하 주변 사람들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언쟁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데라시는 혹 시나 하는 생각에서 청력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았다. 황제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만을 데라시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 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소리를 제외하고 영상만 만든 모양이다. 아쉬 움을 느끼던 데라시는 곧 이것이 절대로 아쉬운 일이 아님을 떠올렸 다. '폐하는 위대하시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데라시는 황제가 어떻게 그런 놀라운 통찰력을 드러내는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어떻게 아이저 규리하가 하늘치와 함께 다가오고 있음을 그에게 알려줄 수 있었는가? 그녀는 직접 보았기 때 문이다. 하늘치는 그의 생각보다 더 놀라운 존재였다. 데라시는 하늘 치가 제국 어디에도 갈 수 있다는 것을 하늘치의 최대 장점으로 생각 했지만, 하늘치의 환상계단은 그것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 자에겐 엄청난 능력을 주고 있었다. 어쩌면 황제는 어디에도 가지 않은 채 제국 전체를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황제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니르지 않았지만 데라시는 얼마나 멀리까지 보실 수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영상 속의 언쟁은 더 격화되는 것 같았다. 아이저는 손짓까지 섞어 가며 제이어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제이어는 무슨 변명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탄원하듯 손을 내밀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 때 제이어의 발이 하늘치 위에 쌓여있던 눈을 밟고 미끄러졌다. 제이어는 상당히 흉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규리하 사람들은 그 모습 에 아무런 동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때 쓰러진 제이어에 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 여자가 몸을 굽혔다. '저 여자는 누구지?' 여자는 제이어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제이어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일어서는 동작의 마지 막에서 여자가 제이어에게 밀착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제이어의 손이 움직였다. 제이어는 여자의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뺏다. 그 손에는 커다란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제이어는 여자를 뒤에서 붙잡으며 여 자의 목에 비수를 겨누었다. '인질?' 규리하인들이 경악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이어는 여자를 끌어안은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확실히 인질극이었다. 그 때 데 라시는 황제의 니름을 들었다. [저 여자는 소리 로베자다. 아이저 규리하의 아들 이이타의 연인이 지. 그리고 저 하늘치를 조종하는 사람이 바로 이이타다.] 데라시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각은 황제의 것이었기에 데라시는 황제가 보내어오는 정신을 막지 않고서는 고개를 돌려 황제를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쓸데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데라시는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폐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대비해두셨단 말인가? 그래서……' [아이저 규리하는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데라시는 황제가 니름을 허락해도 할 니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이 이이타 규리하의 속눈썹에 묻었다. 이이타 는 황급히 눈을 닦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본 모습도 닦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앞을 보았을 때 이이타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 았음을 발견했다. 제이어는 소리의 몸을 단단히 결박한 채 칼로 그녀 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제이어가 소리의 귀에 대고 말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그들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소리. 수상한 짓 하지마. 나는 너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조금만 이 상한 낌새를 느끼면 당황하여 너를 죽일지도 몰라. 너 자신과 나와 공자님을 위해 제발 얌전히 있어줘." 소리는 제이어의 협박이 조금도 무섭지 않은 것처럼 거칠게 몸을 뒤 틀었다. 보다 못한 이이타가 고함을 빽 질렀다. "소리, 얌전히 있어!" "공자님?" "제발. 제발 가만히 있어. 부탁이야." 소리는 이이타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마자 소리의 얼굴은 울상이 되 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이이타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죄송해요. 공자님, 정말 죄송해요." "아냐.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러니까 절대로 다치지마. 가만히. 알았지? 가만히 있어줘." 소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타는 입술을 깨문 채 그 곁에 있는 제이어를 노려보았다. 아들과 함께 제이어를 바라보면서 아이저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 가를 떠올렸다. 그 무엇에도 한 달 이상 집중할 수 없는 성격, 벼락 을 끌어내릴 수는 있지만 책 한 권을 읽을 만한 불빛은 유지할 수 없 는 능력. 현명한 오세느가 저 남자를 가리켜 화려하고 위험한 남자라 고 평가한 것은 지당하다. 사별한 부인이 제이어의 위험에 대해 경고 했던 것을 떠올린 아이저는 오세느를 볼 낯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 저는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또 마음이 변한 거냐?" 아이저를 돌아본 제이어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만 지었다. 아이저는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제국을 파괴하고 황제를 파멸시키겠다고 날뛰던 놈이 이젠 목숨을 바쳐 제국과 황제를 구하는 우국지사가 되기로 했군. 이 미친 자식. 너를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가슴을 에는 소리를 내며 칼날이 세차게 뽑혀나왔다. 이이타는 사색 이 되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얼굴에 떠오른 충격을 본 아이 저는 칼날을 옆으로 옮겼다. "원하는 것이 뭐냐?" 제이어는 이죽거렸다. "흐음. 딸의 목숨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예비 며느리의 목숨은 귀한 모양이군요." 아이저의 얼굴에 떠올랐던 경멸이 방어적인 분노로 바뀌었다. 시카 트 규리하가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 외쳤다. "입 조심해! 황제를 이롭게 하는 자는 친딸이라도 용서하지 않으시 는 거다! 아버님은 강한 분이시다. 대의를 위해 혈육의 정도 포기하 시는 위대한 분을 너 따위 녀석이 비난할 수는 없다!" 인질범을 앞에 두고 가족끼리 싸우는 흉측하기까지 한 일을 차마 벌 일 수는 없었지만, 아이저는 막내 아들에게 차라리 입 닥치라고 외치 고 싶었다. 제이어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시카트를 바라보았다. "시카트 공자님. 이제 그만하셔도 되잖습니까? 어서 이쪽으로 오세 요. 형님의 연인을 붙잡았으니 이제 형님의 계승권은 공자님의 것입 니다. 폐하께서는 공자님께 기꺼이 규리하를 주실 겁니다." 시카트는 기가 막혀서 제이어를 바라보다가 겁에 질린 얼굴로 아버 지의 굳은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 아, 아버님! 저 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절대로 황 제와 작당하지 않았습니다. 저 자는 사악한 거짓말로 아버님과 저를 이간질하려……" 아이저는 더 참을 수 없었다. "그만둬라, 이 멍청한 놈아! 제이어는 너를 놀리고 있는 거다!" "예?" "너 스스로 바보가 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네 아버지까지 저런 말에 속아넘어갈 바보로 만들지는 마라!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충격받은 얼굴로 아버지를 보던 시카트는 제이어의 킬킬거림이 들려 왔을 때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시카트는 시선으로 제이어를 찢어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제이어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시카트는 분노 때문에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제이어가 말했다. "아드님을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각하. 아버님을 존경하는 아들입 니다." "잡담은 그만두자. 원하는 것이 뭐냐?" 제이어는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오세느가 진짜 사랑했던 사람이 누군지 말해보십시오." "너……!" 제이어의 얼굴에서 비장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다시 유쾌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좋습니다. 좋아요. 장난은 그만두지요. 좀 극적인 말을 해보고 싶 었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무미건조한 것뿐이군 요. 너무 시시하다고 탓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제이어는 자신의 말이 정말 사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색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이타 규리하 공자님. 저 앞에 있는 하늘치는 폐하의 하늘치인 말 리입니다. 소리를 말리에게 가까이 가져가십시오. 그 다음에 저와 소 리, 지멘과 아실은 말리로 넘어갈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곳에 남아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무슨 명령?" "소리는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혹 반항할 경우를 대비한 무기입니 다." "뭐? 무기?" "그렇습니다. 성난 하늘치 같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바로 그겁니다. 탈해 머리돌 무사장이 날뛰면 공자님께서는 소리를 규리하에 충돌시 켜야 합니다. 말리를 그런 용도로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규리하 삼부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바뀌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7. 마지막 불씨 (3) | 2004·11·17 08:01 | HIT : 328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7-3 관련자료:없음 [49403]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17 05:56 조회:62 피를 마시는 새 37. 마지막 불씨 - 3 고전적인 인질극의 장면에서 명백한 관객으로 있을 수 있는 위치는, 여타 사건들에서 관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위치보다 사건의 중심에서 더 먼 편이다. 인질극은 첨예화된 갈등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사건이 기 때문에 제3자의 위치에 있고 싶은 자도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결정을 강요당하게 된다. 그리고 하늘치 소리의 위에서 객관화가 가 능한 거리는 더욱 확장되었다. 지멘과 아실은 지상이라면 아무 상관 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될 만큼 인질극의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만 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같은 방 안에 있는 것과 비 슷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 방이라는 것이 어지간한 중소도시 몇 개는 들어설 만한 넓이이긴 하지만, 여타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공 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방과 같다. 그래서 아이저 규리하와 제이어 솔한은 고함을 지르기에도 애매한 거리에 있는 지멘과 아실의 모습을 곁눈질했다. 그들보다 훨씬 눈이 좋은 지멘은 제이어가 벌이고 있는 짓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에겐 그들에게 보낼 관심이 없었다. 지멘은 그 인 질극을 풍경의 일부로 전락시켰다. 퍼붓듯 떨어지는 눈송이 속에서 지멘은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이 말했다. "증오요?" "그래. 증오." "글쎄요. 말리에서 내려온 후로 화낼 일이나 미워할 사람을 보지 못 했는데요." "그건 상관없잖아." 아실은 두 개의 눈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어리둥절함을 하나의 눈으로 표현했다. 지멘 또한 자신의 말에 의혹을 느꼈다. 아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낼 일도 없는데 화를 내라는 거예요?" "아니…… 아냐. 그래. 맞아." 아실은 손을 들어 지멘의 손등을 짚었다. "지멘. 괜찮아요?" "화낼 일이 없어도 화를 낼 수 있어." 아실은 지멘의 팔뚝에 묻은 눈을 보았다. 지멘이 깃털을 한 번 부풀 리면 모두 날려보낼 수 있겠지만 아실은 그것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지멘은 아실의 손길이 닿는 부분이 근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 다. 아실은 그렇게 지멘의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지멘. 이상한 말이네요. 왜 화낼 일도 없는데 화를 내죠?" 설명할 수 없었던 지멘은 현상을 이용하기로 했다. 지멘은 손을 뻗 어 바닥을 가리켰다. "그러면 너는 왜 그런 욕설들을 써놓은 거지?" 아실이 고개를 숙였을 때 지멘은 공포에 가까운 낭패감을 느꼈다. 지멘이 가리킨 곳엔 그가 보았던 글자가 없었다. 계속 쏟아지는 눈이 글자들을 뒤덮어버렸다는 것을 가까스로 떠올리기 전까지 지멘은 자 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실은 자신의 발로 글씨를 썼던 것 을 떠올렸다. "그냥 심심해서요." "그런데 왜 전부 욕설이지?" "지멘. 그냥 낙서일 뿐이에요. 누가 낙서로 연설문을 쓰나요? 논문 을? 아무 글이나 쓴 것에 불과해요. 그게 다 욕설이었던 모양이네요.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죠?" 아실은 머리를 앞으로 숙였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털었던 지멘의 팔에 이마를 콩 부딪쳤다. 다시 고개를 들어올린 아실은 싱긋 웃었다. "낙서로 아름다운 말만 써야 하나요?" 지멘이 맞이해야 했던 도전은 거대한 것이었다. 그가 아실에게 이야 기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들이 함께해온 시간에 비하면 조금 전이 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아실에게 반박을 해야 했다. 말 없 는 수용에서 갑자기 적극적 반박으로 비약하는 것은 지멘에게 커다란 거부감을 안겨주었다. 지멘은 핏발 선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다가 말 했다. "제이어 솔한은 어떤 사람이지?" "지멘. 당신 정말……" "대답해줘. 아실. 부탁이야." 아실은 안타까워 하는 표정으로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아실은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지멘은 그것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그는 아실이 멍 청한 질문 좀 그만하라고 외치길 바랐다. 분노는 반가울 것이다. 비 아냥은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아실은 분노하지도, 비아냥거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부드럽 게 말했다. "말했잖아요. 제이어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결국 지멘이 논쟁의 기술을, 특히 아실을 상대로 한 논쟁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지멘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는 다른 질문을 꺼내기로 했다. "라세는 어떤 사람이지?" "당신도 저만큼 잘 알 텐데요? 기나긴 죽음을 과감하게 선택한 사람 이지요. 제이어의 말을 들으니 그 희생에 대한 감사도 받을 수 없겠 군요. 사람들은 그리미 마케로우의 이름으로 그녀를 칭송할 테니. 용 감해서 슬픈, 슬퍼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지멘은 자포자기했다. 그는 그저 아실이 대화를 끝내지 않았기에 자 신도 끝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무 말이나 꺼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죠." 지멘은 눈송이 사이로 보이는 아실의 조그마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아실은 지멘의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지멘은 자신의 손바닥에 닿아있는 그 작은 손이 자신이 바라던 모든 대답인 것 같다고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 같다. 그 손의 주인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침 내 지멘은 기나긴 고민이 끝나는 것을 느꼈다. 숙원을 아직 달성하지 않았지만 그는 지멘이었다. 그렇다면 숙원을 달성한 후에도 그는 지 멘일 것이다. 따라서 황제가 죽고 사는 문제는 그가 지멘이 되는 것 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가 지멘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을 바 라보는 하나의 눈이면 그는 언제나…… 하나의 눈? 지멘은 아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쪽 미소가 그를 마주하고 있었 다. 나머지 반은 조그마한 얼굴 때문에 지나치게 크게 보이는 안대로 가려져 있다. 지멘은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아실의 오른쪽 눈에서 시 선을 옮겨 왼쪽 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암흑은 아무 것도 반 사하지 않았다. 그곳에 지멘은 없었다. 지멘은 몸을 낮췄다. 바닥에 앉는 것과 비슷한 정도까지 몸을 낮춘 지멘은 아실의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 긴 세월 동안 보았던 아실의 안대를 지멘은 처음 발견한 것처럼 바라보았다. 아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멘?"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지멘의 손이 움직였다. 지멘은 아실의 왼 쪽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실의 오른쪽 눈이 커졌다. 놀라움. 놀 라움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저 죽인 후에도 안대는 벗기지 마세요.' 지멘의 손가락이 아실의 안대에 닿았다. 아이저와 제이어는 지멘이 당장은 이 인질극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 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아이저는 그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또한 안도감도 느꼈다. 지멘과 제이어는 한통속이 아닌 것이다. 만약 지멘 이 제이어를 편들고 나선다면 그는 사태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 것 이다. 그 때 이이타가 의혹에 찬 어조로 말했다. "무사장을 대비한 무기라고? 이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군?" 제이어는 뒤로 더 물러나며 말했다. "예정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죠." "도대체 무슨 말이냐?" 제이어는 소리의 목을 누르고 있는 칼이 제자리에 잘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는 말했다. "공자님. 포석은 감각입니다." "무슨 헛소리냐?" "입신의 기사라도 포석 단계에서 수십 수 뒤의 선수 끝내기를 구상 하거나 하지는 않는단 말입니다. 공자님. 무사장을 견제할 도구는 소 리가 아닌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사장을 견제할 장 소는 규리하가 아닌 대륙 반대편의 즈믄누리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 지만 무의미한 것처럼 놓였던 돌들이 흉중에 품은 깊은 뜻을 펼쳐내 기 시작하고, 가속되거나 감속되면서 이어진 흐름들이 마침내 하나로 모였을 때, 모든 것을 결정짓는 묘수가 갑자기 원래부터 예정되어 있 던 것처럼 나타납니다. 따라서 그건 예정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지 요." 이이타는 입매를 비틀었다. "네 말은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 같군." "그렇게 여기신다면 할 수 없군요.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공자님의 하늘치를 장악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실 겁니다." 뼈아픈 지적에 이이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소리는 그들이 발케 네로, 규리하로, 다시 하인샤 대사원으로 도망치며 가까스로 손에 넣 은 복수의 무기였다. 그런데 복수를 다짐하며 오른 귀향길이 다름 아 닌 황제의 도구를 가져다주는 길이었다니. 미칠 것 같은 좌절감이 느 껴졌지만 이이타는 그런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제이어에게 붙잡 힌 채 그만 바라보고 있는 소리가 있었다. 그는 소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순간 이이타는 끔찍한 충격을 느꼈다. '하늘치 소리도, 내 사랑 소리도 적의 도구가 되어 있군.' 이이타는 순간 황제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증오를 느꼈다. 그리고 이이타는 오래전 암살성의 노대에서 암살공에게 받은 질문을 떠올렸 다. 암살공은 삶을 어디에 써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때 이이타는 신 념을 위해 써야 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이이타는 그 질문에 대한 다른 답을 떠올렸다. 그의 삶은 황제를 제거하는 데 쓰일 것이다. 아이저 규리하도, 시카 트 규리하도 지금 이이타가 황제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증오는 가 지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소리 위에는 황제 사냥꾼이 두 명이 되었 다. 하지만 이이타에게는 다른 황제사냥꾼이 가지고 있는 강대한 힘은커 녕 미약한 힘조차 없었다. 그는 무력했다. 소리가 제이어에게 붙잡혀 있는 이상 그는 황제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이타는 시선으로 제이어를 난도질하듯 바라보았다. 그 때 시카트 규리하가 외쳤다. "황제의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제이어!" 시카트는 맹렬하게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자마자 그는 앞으로 달리 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호통을 들은 이후로 시카트는 자신의 평가를 재조정하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바보라고 불리는 것을 감수할 수는 없다. 행동으로 자신을 입증해보여야 한다. 그리고 시카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래 전 규리하성에서 홀로 남았을 때 그가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일. 그 실패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는 비 셀스 규리하를 죽였어야 했다. 그의 눈에 소리 로베자는 비셀스 규리하로 보였다. 그는 소리를 죽 여야 한다. 제이어는 천천히 상대해도 된다. 소리를 죽이는 것. 그것 이 자신의 의무다. 차마 자신의 연인을 죽일 수 없는 형을 대신하여. 따라서 그것은 아버지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며 동시에 형을 돕는 일이다. 시카트는 도취감을 느꼈다. 아버지도 형도 그에게 감사할 것 이다. 그의 용감한 행동을…… 그런데 왜 형이 앞에 있는 거지? 시카트는 황급히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달려온 이이타 가 그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시카트는 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 어깨 너머로 뒤쪽에 있는 제이어와 소리를 보았다. 소리가 기겁하여 외쳤다. "공자님! 안돼요!" 이이타는 어깨를 꿈틀했다. 하지만 시카트를 겨누고 있는 칼은 움직 이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 시카트는 기가 막혀 고 함을 질렀다. "형!" 이이타는 시카트의 놀란 얼굴과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가 신들의 당혹한 얼굴을 보고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는 시카트가 들 고 있는 칼끝을 보며 말했다. "물러나라. 시카트. 네가 무슨 짓을 할 작정인지 안다. 용납할 수 없어." 그 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이타는 당장 뒤로 돌아 칼을 집어던 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웃고 있는 것은 제이어 솔한이었다. "폐하의 계획은 완벽합니다. 완벽한 성공을 거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렇잖습니까?" 그리고 제이어는 다시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조금 신경질적이었 다. 제이어를 바라보던 아이저의 눈이 갑자기 번뜩였다. 데라시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낀 후에야 자신이 숨을 멈추 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 의 눈에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황제의 시 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고 황제가 환상벽에서 시선을 돌려 그를 바 라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은 백작을 당황하게 했다. 데라시의 당황을 깨 달은 황제는 자신의 느낌을 데라시에게 전달하는 것을 멈추었다. 데라시는 다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황제가 닐렀다. [제이어를 보호하는 그 청년이 이이타 규리하다.] 데라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다. [폐하. 살인기사가 폐하의 수하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폐하의 깊고 깊은 헤아림에 정녕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진 작 아이저 규리하를 체포하시지 않으신 겁니까? 제이어 솔한은 언제 라도 아이저 규리하를 체포할 수 있었을 텐데요.] [아이저 규리하에겐 별 쓸모가 없다. 하지만 저 하늘치와 하늘치를 다룰 줄 아는 청년은 쓸모가 있지.] [저 하늘치를 무엇에 쓰실 작정입니까?] [도깨비 무사장을 견제하기 위해.] 데라시는 어리둥절해졌다. 하늘치가 불을 제어할 수 있나 하는 어처 구니 없는 생각을 해보던 데라시는 갑자기 비늘이 일어서는 것을 느 꼈다. [규리하에 저것을?] [도깨비 무사장을 협박하기 위한 것이다.] 데라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황급히 폈다. 백작의 거부감을 본 황 제가 차갑게 닐렀다. [짐 또한 저것을 규리하에 충돌시키고 싶지는 않다.]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 니다.] [그래. 그리고 당장은 그런 협박을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무사장 이 문제일 거라 예상했는데 비셀스 규리하가 문제였다. 하늘누리 주 위의 하늘에서 엿새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버텼을 때부터 주의했어야 했는데.] 데라시는 다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그녀를 살폈어야 했는데…… 적대적이지 않은 도깨비의 특성을 은연중에 그녀에게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그녀 가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지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보진 못했습니 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난로 가에 쌓여있는 장작을 들어올린 황제는 벽난로 속에 그것을 밀어넣었다. 장작에서 불티가 탁탁 튀었 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후회한들 무엇하겠나. 엘시가 온다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저 하늘치는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세퀴라도로 보내어야겠구나.] [지테를 당주에게요?] [그래. 자유무역당은 완전히 규리하로 돌아섰다. 그들의 사절이 감 히 짐을 속이려 했지. 그에게 경고를 보내어야겠다. 지테를이 규리하 에서 손을 뗀다면 저들은 엘시에게 저항할 힘을 잃게 되겠지.] [폐하.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칼리도백의 군사적 재능이야 두 번 니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만 백작이 꿈을 상대할 수 있다 하심은 무슨 연유인지요.] 황제는 벽난로를 등진 채 데라시를 바라보았다. [데라시. 너는 백작이 왜 차기 황제로 선택되었다고 생각하느냐?] [백작의 충성심과 뛰어난 자질은 비교할 상대가 없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이유지. 하지만 백작에겐 더 중요한 자격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황제가 대답하기에 앞서 커다란 계명성이 들려왔다. "하-늘-치-가-다-가-온-다-!" 비명에 가까운 계명성은 육성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던 데라시와 황제에게도 똑똑하게 들렸다. 데라시는 깜짝 놀랐다가 곧 짜증을 느 꼈다. [뭄토가 이제서야 소리를 본 모양이군요.]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다시 환상벽을 만들어내고는 자신 의 시야에 비치는 모습을 데라시에게 보냈다. 환상벽에 나타난 모습은 까마득한 고도의 하늘에서 비스듬히 내려다 보는 모습이었다. 지평선이 약간 둥그스름하게 보일 정도로 높은 고 도였기에 말리의 모습과 그것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의 모습이 동시에 보였다. 폭설은 하얀 안개 같았지만 두 생물의 터무니없이 큰 모습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데라시는 처음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후 데라시는 의아함을 느꼈다.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리는 계속 속도를 늦추고 있었고 따라서 지금은 상당히 느린 속도로 움직 이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소리의 속도는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와 똑같은 속도였다. 의아해하며 소리를 보던 데라시는 그것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비늘을 부딪쳤다. 소리는 분명히 빨라지고 있었다. 가속할 만한 충분한 거리가 없으니 위험한 속도에 이르기는 어렵겠지만 그 궤도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소리는 말리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충돌이라는 단어가 데 라시의 머리에 떠올랐고 그 단어는 빠르게 현실성을 획득했다. 데라 시는 겁에 질려 황제를 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각은 황제의 시각 이었고 따라서 데라시는 황제를 볼 수 없었다. 시각의 부자유함은 데 라시에게 꼼짝달싹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주었다. 데라시는 아득한 두려움 속에서 더듬더듬 들려오는 황제의 니름을 들었다. [또…… 관심사가…… 바뀌었나…… 또…… 실패를…… 좇게 되었 나!] 제이어 솔한은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두 팔을 펼친 채 쾌활하게 외 쳤다. "그림 잘 그리면 뭐하나? 끝내기가 승부지!" 풀어서 말한다면 포석 우아하게 해봐야 쓸모 없으며 승부를 결정짓 는 것은 끝내기라는 꽤나 실전적인 바둑 철학의 표현이다. 제이어는 자신의 말에 폭소를 터뜨렸다.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투였 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손을 바닥에 짚은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아이저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실패의 명인이 자신 들을 돕기로 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이어가 갑자기 소리를 놓아주었을 때 이이타와 시카트, 그리고 소 리는 대단히 놀랐다. 하지만 아이저 규리하만은 놀라지 않았다. 아 니, 놀라긴 했지만 그곳에 있던 다른 자들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오 세느의 지적은 정확했다. 제이어는 위험하다. 그 자신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그리고 그 모두에는 황제도 포함된다. 제이어는 얼빠진 표 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이타에게 히죽 웃어보였다. "그건 재미 없죠. 공자님. 소리를 가속시키십시오." "뭐? 뭐라고?" "황제를 상대하기 위해 이 하늘치를 가지지 않았습니까?" 제이어의 말을 듣던 이이타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하늘치의 속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제이어의 기행에 크게 놀 라지 않았던 아이저도 아들이 제이어의 말을 무턱대고 수용하는 것을 보았을 땐 상당히 놀랐다. "이이타!" 이이타는 소리를 보듬어 안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님. 엎드려 자세를 낮추십시오. 충격이 클 겁니다." 아버지였기에, 아이저는 이이타를 절대로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곧 장 깨달았다. 이이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엎드렸다. 아이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낮췄고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제이어는 엎드리지 않았다. 그는 흩날리는 눈발 속에 똑바로 서서 말 리를, 그리고 황제를 조롱했다. 아이저는 어쩐지 제이어가 자신까지 포함하여 조롱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리의 속도가 상승하면서 눈송이들이 점점 거세게 날아들었다. 거 대한 움직임에 휘말린 공기가 진저리를 쳤다. 소리의 몸 곳곳에서 작 은 폭풍들이 일어났다. 그 폭풍들은 서로 부딪치고 휩쓸리며 더욱 큰 폭풍으로 재빨리 병합되었다. 후- 후- 후와아아앙! 바람이 귀신의 울 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며 질주했다. 엎드려 있던 사람들은 얼굴을 난 타하는 눈송이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이저는 지멘과 아실을 살피려 했지만 송곳처럼 날아드는 눈송이와 그의 낮은 자세 때문에 두 사람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는 실눈을 뜬 채 앞쪽을 바라보았다. 아이저는 점점 커지는 말리에서 움직임을 느꼈다. 그는 눈을 막기 위해 한 손을 들어 이마에 붙이고는 더욱 자세히 바라보았다. 소리의 속도 때문에 느낀 착각이 아니었다. 말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다가오는 소리를 피하려는 것이 분명 하다. 제이어는 비웃었지만 이이타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그는 헐떡이며 말했다. "황제가 하늘치를 움직이고 있어! 더 빨리……" 제이어가 고개를 홱 돌렸다. 분노에 휩싸여있던 이이타도 순간적으 로 제이어의 눈길에 움찔했다. 그 눈길은 무서운 광기를 담고 있었 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제이어는 이이타를 비 웃었다. "황제가? 하늘치를? 절대로 그렇게는 안되지요!" 이이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보호하듯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황제는 하늘치를 못 움직입니다!" 이이타는 하늘치를 움직이는 것이 다른 사람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아이저가 질문했다. "그래? 황제는 환상계단을 잘 다루지 못하나 보지?" 제이어는 미쳤냐는 눈으로 아이저를 노려보았다. "천만에요. 이 세상에서 환상계단을 가장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자는 황제일 겁니다. 하지만 환상계단을 아무리 잘 이용한다 한들 황 제는 하늘치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격의 문 제가 있으니까!" 바람과 눈이 제이어를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 그 의 옷자락은 보이지 않는 실로 잡아당긴 것처럼 뒤로 잔뜩 끌어당겨 져 있었다. 그래도 제이어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후- 후- 후와아아 앙! 아이저는 정신없이 얼굴을 때리는 눈송이를 피하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말했다. "자격이라니?" 말리의 모습이 점점 커졌다. 필사적으로 위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그 엄청나게 큰 몸의 대부분은 아직도 소리와의 충돌 궤도 속에 남아있 었다. 제이어는 끝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한 손을 앞으로 뻗어 떠오르는 말리를 손가락질했다. "그것이 약속이니까! 사람이 하늘치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치가 사람에게 내려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치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아이저는 그 약속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치가 사람에게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 같았지만 그들이 왜 그것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제이어의 말에는 아이저가 더 유념하고 싶은 결 론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이저는 다른 것을 모두 뿌리치고 제이어의 마지막 말을 되돌려주었다. "사람뿐이라고? 그렇다면 네 말은 황제가 사람이 아니라는 거냐?" 제이어는 미친 듯이 웃었다. 이미 그의 상체와 얼굴은 달라붙은 눈 으로 하얗게 뒤덮혀 있었다. 마치 생물 아닌 것이 웃고 있는 것 같았 다. 제이어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물론 아니지요. 황제는 나가도 아니고 사람이 아닙니다. 이라세오 날은 아스화리탈의 포자에서 태어난 용입니다!" 9014 독립중대 1소대장 다미갈 카루스 부위는 고개를 돌려 하늘쪽을 보았다. 겨울 하늘은 푸른빛을 인색하게 내보이고 있었고 카루스는 구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카루스는 자신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 천둥 소리라는 가설을 포기해야 했다. 그 소리의 원인을 추측하던 카 루스는 어디선가 소규모 눈사태가 일어난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 지만 카루스 부위는 멈춰선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 정했다. 그는 니어엘 헨로 수교위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혹한에 발목이 잡혀 나나본에 도착하는 것이 지연될까봐 그들은 상 당히 고통스러운 행군을 해야 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겐 육체적 고통 으로 끝났지만 니어엘에겐 모든 정신을 혹사시키는 고통이 추가되었 다. 행군이 끊임없이 지속되려면 숙영지와 보급이 완벽하게 지원되어 야 한다. 하늘누리와 함께 태위청 또한 사라졌기 때문에 니어엘 헨로 는 아무런 상부의 지원 없이 홀로 행군로를 만들어내어야 했다. 게다 가 그 행군로는 제국을 종단하는 것에 가까운 거리이며, 제국 실종 후의 복잡미묘한 정세에 의해 거미줄만큼이나 가늘고 위태로운 것이 되어 있었다. 비록 황제가 제국 전체에 자신의 귀환을 고했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돌아온 황제가 자신 의 부재 기간 동안 일어난 일들을 평가하고 그 중 용납할 수 없는 것 들에 대해서는 교정을 시도하리라는 사람들의 예상은 비난할 수 없을 만큼 합리적이다. 그 때문에 헨로 중대의 본부 귀환은 적지를 가로지 르는 것 같은 인상마저 풍기는 것이 되었다. 가솔들을 다 이끌고 나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비는 자들의 경우엔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황제의 군대가 자신을 징벌하러 온 거라 판단 하고 도망쳐버린 자들은 헨로 중대에게 당혹스러운 일거리를 남겨주 었다. 얼떨결에 자신들의 지배자를 잃은 백성들이 니어엘 헨로에게 모든 뒤처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독립중대의 지휘관일 뿐 그들에게 간섭할 권한이 없었던 니어엘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조언으로 그 들이 지배자 없는 겨울을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가장 곤란한 자들은 죽을 때 죽더라도 맞서 싸우겠다는 자못 비장미 넘치는 결심 을 한 자들이었다. 카루스는 하스테 남작령을 방문했을 때의 불쾌한 기억을 떠올렸다. 하스테 남작은 친절하게 그들을 맞이한 다음 밤중 에 그들의 숙영지에 불을 지르려 했다. 빈틈없는 야간 경계 덕분에 불은 조기에 진화되었고 니어엘 헨로는 엄중한 조사를 통해 그들이 만난 하스테 남작이 사실은 진짜 하스테 남작의 사위였다는 것을 밝 혀내었다. 남작의 딸이 남편과 짜고 아버지를 독살했던 것이다. 빼앗 은 남작령을 토대로 다가온 혼란기를 주름 잡는 패권자 중 한 명이 된다는 자못 웅대한 꿈을 품었던 부부는 결국 니어엘의 명령에 따라 나란히 교수대에 걸리게 되었다. 매달린 두 구의 시체를 보며 카루스 는 그들이 그냥 실패한 영웅들 중 두 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입맛이 꽤나 씁쓸해지는 생각을 떠올렸다. 황제가 끝까지 돌아오지 않고 그 들이 꿈을 실현시켰다면 그들은 어떤 국가의 위대한 개조로 떠받들여 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거나 행군 자체를 빈틈없이 지원한다는 어려운 임무에 그런 짜 증나는 부가 임무들까지 더해졌기에 니어엘이 받아야 했던 압박은 엄 청났다. 하지만 니어엘은 발케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을 나나본 남쪽까지 안전하게 데려왔다. 헨로 중대의 병사들은 이제 니어엘의 묘기를 일상 쯤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니어엘은 감사도 별로 받지 못 했다. 하지만 카루스는 니어엘을 공정하게 평가했다. 그의 상관은 정 말 위대한 행군을 성공시켰다. 따라서 그녀가 나나본을 지척에 둔 장 소에서 파손된 다리를 복구하는 일을 카루스에게 맡겨 놓고 참으로 오래간만의 폭음에 빠진 것은 절대로 비난할 일이 아니다. 카루스는 그녀가 내키는대로 마시고 마음껏 잠들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의 바람대로 니어엘은 내키는대로 마셨다. 하지만 카루스는 지금 그녀의 잠을 방해해야 했다. 한숨을 내쉰 다음 카루스는 니어엘이 잠 든 움막으로 들어섰다. 움막은 사냥꾼의 것이었고 안쪽에서는 오랫동안 배인 악취가 미미하 게 흘러나왔다. 안쪽에 조명은 하나도 없었다. 카루스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길 바라며 니어엘의 숨소리를 찾았다. 숨소리를 따라 허리를 숙인 카루스는 조금 후 작은 콧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상관을 보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카루스가 본 것은 니어엘의 하반신이었다. 니어엘 은 원래 몸에 두르고 있었을 것 같은 모포로 머리와 상체를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 모포 때문에 코고는 소리가 작았던 것임을 알게 된 카루스는 피식 웃고는 모포를 조심스럽게 끌어내렸다. 코고는 소리로 진급이 결정된다면 당장 장군급까지 진급할 수 있을 듯한 소리를 내 며 자고 있는 니어엘의 얼굴이 나타났다. 카루스는 꽤나 파격적으로 흩어져 있는 니어엘의 머리카락을 밟거나 누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수교위님?" 코고는 소리가 멈췄다. 니어엘이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다시 잠들었다. 카루스는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수교위님?" "아웅, 그래. 알았어." 니어엘의 팔이 위로 뻗어져 올라왔다. 카루스의 머리를 붙잡은 그녀 는 그것을 끌어내린 다음 입술을 내밀었다. 카루스는 눈이 빠질 뻔했다. 니어엘이 열렬한 입맞춤을 시도한 곳이 하필이면 부위의 오른쪽 눈이었기 때문이다. 카루스는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들어올렸고 그 소리에 놀란 니어엘이 눈을 번쩍 떴다. 니어엘 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헐떡이고 있는 부위를 발견했다. 니어엘은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귀관과?" "누, 눈에!" "눈?" "예!" 니어엘은 그 대답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맛 없었어." 니어엘은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카루스는 몹시나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다시 깨웠고, 자신의 눈이 맛 없다고 말한 여자는 수교위님이 처음이라는 상당히 쓸데없는 항변 을 한 다음,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서는 그녀가 보아야 할 것이 있 다고 말했다. 니어엘은 두 팔을 들어올리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다음 목을 긁으며 말했다. "눈 감을까? 귀관이 내 손 잡고 인도할 거야?" "그런 것이 아니라서 유감입니다. 좀 곤란한 문제입니다." "알았어. 가자." 니어엘은 부스스 일어나서는 바닥에 뒹굴던 외투를 집어들어 망토처 럼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어딘가로 손을 뻗어 목도리를 집어들고는 목에 감았다. 자다가 일어나 정리하지도 않은 머리카락에 그런 느슨 한 복장이 더해지자 니어엘은 자신을 헨로 산적단의 두목이라고 소개 해도 될 것 같은 풍모가 되었다. 카루스는 그 모습 그대로 움막 밖으 로 나가려는 니어엘을 황급히 만류했다. "좀 정돈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엄을 보이는 편이 좋은 상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데?" "어떤 레콘입니다." "레콘? 그럼 됐어. 내가 완전무장하고 간다 해도 눈도 깜빡하지 않 을 텐데."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카루스는 끝까지 고집을 부려 니어엘이 칼을 차도록 했다. 카루스는 제국검을 통해 장교의 위엄이라도 살려 보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칼은 산적단 운영자의 풍모만을 부각시켰 다. 실패에 좌절한 카루스를 뒤따르게 한 채 니어엘은 숲길을 걸었 다. "그래. 정확하게 무슨 문제야?" 카루스는 자신을 조금 추스르고는 말했다. "자신이 이라세오날의 사자라 말하는 레콘이 공사 현장에 나타났습 니다. 그는 우리 장병들의 황폐화된 영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니어엘은 걸음을 멈추고 카루스를 돌아보았다. "사자? 황폐화된 영?" "예. 그는 지휘관에게, 그러니까 수교위님께 허락을 받아 살육과 증 오로 더럽혀진 장병들의 영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습 니다. 저는 사양했습니다만 그는 지휘관을 데려오라고 강요하더군요. 안타깝게도 제가 만나기 전에 누군가가 그에게 중대 지휘관의 이름을 알려준 모양입니다." "전투 준비는 시켜뒀나?" "제일 잘 쏘는 병사들 몇 명에게 매복하라고 말해뒀습니다. 그리고 힘 좋은 병사들에게 물동이를 들고 적당한 위치에 숨어있으라고 말했 습니다." "우리는 다리 복구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레콘은 물이 있는 공사 현장에 나타났다는 건가?" 니어엘은 지멘을 떠올리고 있었다. 카루스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강에서 몇십 미터는 떨어진 곳입니다. 그리고 강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 하더군요. 그런 주제에 감히 우리에게 다가온 것을 보니 장병 들의 영적 문제에 대해 정말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알았어. 좋아. 그런데 이라세오날이라고? 익숙한 이름인데?" 카루스는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니어엘은 자신이 알게 된 사실에 대해 고민하며 걸어갔다. 그 레콘이 헨로 중대원들의 영적 문제에 대해 깊이 걱정하고 있다는 카루스의 추측은 정확했다. 니어엘이 나타나자마자 레콘은 통탄해 마 지 않는 투로 말했다. "지휘관의 모습으로 보건대 그대들은 이름만 군인인 살육자의 도당 으로 전락한 것이 분명하군! 그것은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다. 죄악으 로 가득찬 이 세상이 그대들을 그렇게 만들었음이니. 하지만 후회와 반성은 그대들의 의무이며 그것을 게을리하는 것은 크나큰 죄다!" 니어엘은 어안이 벙벙하여 레콘을 올려다보았다. 그 레콘은 레콘이 아닌 자들에겐 언제나 위압감을 주는 커다란 덩치에 깃털까지 조금 부풀려 대단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살아온 나날이 평온하지는 않았던 듯 부리엔 잔상처가 많았고 벼슬 또한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 지만 결코 초라해보이지는 않았다. 레콘이 걸치고 있는 옷이 니어엘의 주의를 조금 끌었다. 선민종족들 중 나가와 레콘은 보온과 피부 보호라는 의복의 가장 중요한 기능 두 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가에게는 차가운 피와 재생되는 피부 가 있으며 레콘에게는 깃털과 강력한 근육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원인이 항상 같은 결과를 낳지는 않기에 나가와 레콘은 전혀 다 른 의복관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는 의복의 실질적 기능이 필요없기 에 대신 심미적 기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레콘은 의복을 최대한 간단하고 튼튼하게 만들어버렸다. 격투를 즐기는 성격에 걸핏 하면 부풀어오르는 몸을 가진 자에게 완전한 의복은 오히려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레콘은 다른 종족이라면 나신이나 반나신에 가깝다 할 옷차림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헨로 중대원들의 타락한 영을 질타하고 있는 레콘은 레콘적 기준에서는 좀 우스꽝스럽다 할 만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옷은 착용자가 부풀어도 찢어지지 않을 구 조로 만들어져 있기는 했지만 달리거나 싸우는 것에 도움이 될 것 같 지는 않았다. 니어엘은 그 옷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지 만 어쩐지 승려들이 입는 옷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소 박한 듯하지만 뜻밖에 엄격한, 그런 옷차림이었다. 니어엘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다리 복구 공사는 중단되어 있었 고 병사들은 목재와 수레, 대형톱 옆에서 상당한 집중력을 보이며 그 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어엘은 숨어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찾아보려 했고 자신이 그들을 찾지 못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카루스가 매복시 킨 병사들은 뛰어난 감을 자랑하는 레콘에게 들키지 않도록 철저하게 숨어있었다. "제국군 수교위 니어엘 헨로입니다." "나는 이라세오날의 사자다." 니어엘은 조금 기다렸지만 레콘은 자신의 이름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라세오날의 사자면 충분한 모양이다. 니어엘은 말하기 편하도록 목 도리를 조금 끌어내렸다. "좋습니다. 사자님. 저희 장병들의 영을 정화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셨습니까?" 사자는 혐오감에 가까운 눈으로 니어엘을 훑어보았다. "그대의 지위를 존중하여 허락을 구할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생각이 좀 흔들리는군. 이것은 내 선입관일지 모르겠지만, 그대의 모습으로 보건대 강요된 살육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부하들의 영에 관심을 가지 고 있을 것 같지 않군." "뭐, 제가 부하들의 영적 문제보다는 육체적 문제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저 사람 되기 벅찬 녀석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혀서 사람 꼴을 유지하게 하는 일은 보통이 아니지요. 자식 천 명 키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헨로 중대의 병사들은 품위 있는 미소로 니어엘의 말에 동의했다. 바꿔 말한다면 뻔뻔한 미소라고 할 수 있다. 니어엘은 사자가 그 말 을 잡아채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이어 말했다. "제겐 그래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자님께서는 무슨 자 격으로 제 장병들의 영을 정화하겠다는 겁니까?" "나는 절망에 사로잡힌 자들의 구원자이며 죽음을 이겨낸 부활자이 신 이라세오날의 뜻을 받들어 그 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세 상에 나선 자다." 니어엘은 이라세오날이 황제의 이름이라는 것은 엔거 평원에서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앞에 붙어있는 어쩐지 신비스러운 수식어는 초면이 라고 생각했다. '어디 보자. 센시엣 특수수용소에서 빠져나온 레콘들이 있었지. 절 망에 사로잡힌 자들의 구원자라는 것은 절망도에서 레콘들을 구해낸 자란 말인가? 그렇군. 그러면 죽음을 이겨내었다는 것은 뭐지? 심장 적출을…… 아냐. 폐하께선 실종되었다가 돌아오셨지. 부활하신 것이 로군. 그렇다면 황제께선 절망도의 죄수들을 세상에 풀어 자신의 복 음을 전달하게 했다는 의미인데, 폐하의 복음이 뭐지?' "그 복음이 뭡니까?" 사자는 갑자기 뻣뻣한 자세를 취했다. 방어적인 태도인가 생각하며 바라본 니어엘은 그것이 경건한 태도임을 깨달았다. 사자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만물의 지배자이시며 하늘의 통치자이시며 우리 모두가 믿는 이라 세오날의 거룩한 영광에 의지하여 말한다. 귀하디 귀한 우리들은 사 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삶은 형극이고 시간은 잔인한 강탈 자다. 풍요롭지 못하여 인색한 세상은 타인의 간난을 통해서만 나에 게 행복을 줄 수 있을 뿐 스스로 행복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결핍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증오를 낳으며 증오는 죽음을 낳는다. 죽음의 사 슬을 끊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세상은 우리 에게 줄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은 우리 가 서로에게 주는 것뿐이다. 세상이 주는 증오를 버리고 우리가 만들 어낸 사랑만이 남게 하라. 귀하디 귀한 우리들은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일평생 쉼없이 줄 수 있는 것도 사랑뿐이다." =============================================================== 수능일이군요. 시험장 근처에서 소음 내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7. 마지막 불씨 (4) | 2004·11·18 08:12 | HIT : 122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7-4 관련자료:없음 [49404]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18 07:31 조회:35 피를 마시는 새 37. 마지막 불씨 - 4 지멘은 아실의 안대에 손가락을 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실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마주볼 뿐 그 손가락을 밀어내거나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아무런 제지가 없다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제지보다 더 강하게 지멘의 손가락을 얽어매었다. 지멘은 아실의 안대에 닿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다. 순간 지멘은 소멸의 공포를 느꼈다. 철의 대화는 소멸되었다. 이 상 황에서 아실의 안대를 벗기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아실 은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벗기고 싶다면 마음대로 벗기라는 듯 쳐 다볼 뿐이다. 하지만 지멘은 안대를 벗기면 그 뒤의 금속 의안이 독 의 시선으로 그를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꼼짝할 수 없는 몸을 대신하여 지멘은 부리를 열었다. "아실." 아실이 대답할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때 그녀의 얼굴이 지멘의 손 옆으로 미끄러졌다. 아실은 지멘의 품속으로 달려들 듯 휘청였다. 지멘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실이 당황하여 말했다. "속도가?" 지멘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눈보다 몸으로 느 낄 수 있었다. 하늘치의 속도가 바뀌었다. 지금껏 느려지던 그것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불안을 느낀 지멘은 한 팔로 아실을 안은 채 벌떡 일어났다. 아실이 말했다. "가속하고 있어. 어떻게 된 거죠? 제이어에게 가봐요!" 지멘은 온몸의 피가 잠깐 역류한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대답할 필 요가 없는 말. 행동으로 대답하면 되는 지시. 철의 대화를 끝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멘은 아실이 말하고 그가 행동하는 그 익숙한 형식에 안락함과 비슷한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 으며 불안해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듯한 안도감 속에서 지멘은 아 실을 어깨 너머로 보냈다. 아실이 숙련된 동작으로 배낭끈과 그의 깃 털 등을 붙잡고 움직여 배낭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지멘의 만족 감은 더욱 커졌다. 심상찮은 상황이라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하늘치 위를 달리는 지멘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소리가 가속하고 있었기에 지멘의 진로는 자꾸만 뒤쪽으로 쏠렸다. 그는 도약하며 달리기로 했다. 성큼성큼 뛰던 지멘은 도약의 정점에 서 엎드려 있는 규리하인들과 그 사이에서 홀로 고함을 지르고 있는 제이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가 조금 전에 보았던 인질극의 상황 이 아니었다. 지멘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떨어졌다. 두 손으로 망치를 단단히 쥔 채 그들 사이로 내려섰을 때 지멘은 제이어의 외침을 들었 다. "이라세오날은 아스화리탈의 포자에서 태어난 용입니다!" 충격 때문에 지멘은 쓰러질 뻔했다. 만약 그가 뒤로 쓰러졌다면 배 낭 안의 아실은 무사하기 힘들 것이다. 지멘은 일부러 쇠망치를 크게 휘둘러 몸의 중심을 회복했다. 그 소리를 들은 제이어가 그를 보았 다. 제이어는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렸다. 지멘은 그것이 웃음이 라고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하! 황제사냥꾼이군요. 먼저 겨냥한 자의 권리를 주장하러 오셨 습니까? 미안하지만 황제는 내가 잡아야겠습니다!" 지멘은 묵직한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것을 부여잡았다. "용의 탑이라는 것은……" "나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 용의 탑은 그녀의 몸이지요! 그녀가 남 부로 간 것은 아라짓 전사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지요. 적출? 그런 건 그녀에겐 필요하지 않아요!" "왜 황제를 공격하는 건가? 넌 그 계획에 청혼이라도 하겠다고 했잖 아?" 제이어는 숨 넘어갈 듯이 웃었다. 몸을 때리는 폭설 속에서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제이어는 눈물까지 흘리며 손 을 흔들었다. 그 손길은 아무래도 아이저 규리하를 가리키려는 것 같 았지만 질풍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제이어가 단말마처럼 외쳤 다. "제 청혼은 승낙받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 모르셨습니까!" 아이저의 몸이 꿈틀거렸다. 지멘은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말리를 보 고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충격을 피하려면 충돌하기 직전에 도약해 야 한다. 지멘은 시시각각으로 커지는 말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외쳤다. "너는 황제에게 정신억압을 당했잖아!" "예?" 제이어는 지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엎드려 있던 규리하인들은 그 말에 깜짝 놀라 머리를 들어올렸다. 지멘은 다급하게 말했다. "정신억압! 황제가 너를 정신억압했어. 네 입으로 그렇다고 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황제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거냐?" 제이어는 입을 여닫았다. 정신억압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소리 는 나지 않았다. 말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소리는 말리의 뒤쪽에 서부터 바람을 찢어발기며 돌진하고 있었고 위로 떠오르는 말리는 소 리에게 배를 보이게 되었다. 지멘은 문득 말리 위에 있던 기묘한 병 기를 떠올렸다. '왜 위쪽일까?' 불현듯 지멘은 말리가 위로 떠오르는 이유를 깨달았다. 말리 위쪽에서 쿠르르릉! 하는 우레 소리 같은 것 이 울려퍼진 것은 그 때였다. 말리의 등 위쪽에서 쌓여있던 눈이 폭발하며 무엇인가가 튀어나왔 다. 절벽 아래에서 눈사태를 보는 것 같았다. 새하얀 폭발 속에서 포 물선을 그리며 말리의 등에서부터 뛰쳐나온 것은 둥글게 다듬은 돌들 이었다. 하나하나의 무게가 1톤은 족히 넘을 듯한 거대한 석환들이었 지만 말리와 소리의 비현실적으로 큰 크기 때문에 그것은 조그맣고 가볍게 보였다. 마치 말리가 다가오는 소리에 대한 환영의 표시로 꽃 잎을 뿌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겉보기가 어떠하든 그것은 무서운 질 량을 가진 돌들이었다. 위로 떠오르며 무작정 쏘아보낸 것들이기에 석환들 중 많은 것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석환들의 낙하에 휘말린 눈송이들이 어지러이 나부 꼈다. 그리고 규리하시 외곽의 눈덮힌 평야에 석환이 충돌했다. 쾅, 쾅, 쾅, 콰과광! 부서진 돌이 눈과 흙을 날려보내며 흑백의 폭발을 일으켰다. 눈으로 한 꺼풀 덮혀 있지만 그 아래쪽은 단단한 땅이다. 하지만 폭발이 일어난 순간의 평야는 마치 액체가 출렁이는 것 같았 다. 평야 전체가 뒤집힐 듯했다. 모든 석환들이 빗나간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엔 소리의 크기가 너무 크다. 많은 돌들이 소리에 부딪쳐 부서지고 튕겨올랐다. 석환이 낙하한 거리는 짧았지만 대신 소리가 돌진하고 있었기에 충돌 은 강렬했다. 소리 위에 있던 자들 모두가 그 충격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소리의 분노를 느꼈다. 소리가 포 효를 내뿜거나 전율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소리의 몸에 밀착한 사람 들은 석환이 벼락처럼 날아와 부딪칠 때마다 그 하늘치의 분노가 커 지는 것을 느꼈다. 소리의 가속이 급격해졌다. 소리는 쏟아지는 돌비 속으로 돌진했다. 제이어의 몸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어떤 순 간엔 완전히 쓰러졌지만 제이어는 고집스럽게 바닥을 짚으며 허리를 폈다. 몇 초도 제대로 서있기 힘들지만 그는 계속해서 일어서려고 했 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이어가 외쳤다. "아아, 정신억압? 그거요? 그것 말입니까? 아실이 알려주었지요!" "뭐?" 제이어는 태풍 속의 허수아비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그의 웃음도 정 신없이 흔들렸다. "아실이 암살공에게 남겼던 편지 말입니다! 정신억압을 당했는지 아 닌지 알아낼 방도가 적혀 있더군요. 그 덕분에 제가 정신억압을 당했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그런 빌어먹을 계획에 찬성했겠 습니까? 어떤 저주받을 천재가 사람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낸 신에게 인류를 맡긴다고요? 집어치워! 집어치우라고! 내가 그걸 따른 것은 정신억압을 당했기 때문이야! 그래서였어! 고마워, 고마워! 아실! 그 리고……" 지멘은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말리는 이미 모든 세계였다.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위로 뛰어올랐다. 소리가 말리의 옆구리에 베어들어가듯 충돌했다. 정우 규리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 외에도 비명을 지른 사람은 많았다. 규리하성과 그 주변에서 하늘을 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두 마리의 하늘치가 부딪치며 일어난 충돌음은 세상의 소리를 모두 학살했다. 사람들은 귀를 틀어막고 주 저앉거나 쓰러져야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사라말도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의 몸 전체가 귀가 되어 그 충돌음에 전율하고 있었기에 그 미력한 보호는 큰 도움 이 되지 않았다. 사라말은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머리가 부서질 수 도 있는 위험한 동작이었지만 쌓여있던 눈이 그의 몸을 받아주었다. 사라말은 두 손으로 귀를 부여잡고 다리는 약간 벌린 모습으로 바닥 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리는 잘 맞지 않는 아륜이 억지로 맞물려 돌아가듯 말리의 허리를 따라 끼기기긱 미끄러졌다. 두 하늘치는 서로를 문지르며 묘하게 금 속성을 닮은 굉음을 냈다. 그 소리는 듣는 이의 심장을 쥐어짰고 내 장을 헝클어놓을 것 같았다. 벼락이 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 다. 사라말은 제 아무리 단단한 물체라도 두 하늘치가 맞닿은 부분에 놓이게 되면 가루도 찾기 힘들 정도로 부서질 거라 생각했다. 가혹한 충돌이 시작되었을 때 지멘은 도약을 통해 첫번째 충격은 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리의 등에 다시 내려서면서 지멘은 두 번째 도약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공중에서 배낭을 벗어 가 슴에 안았다. 소리의 등에 내려선 지멘은 배낭을 꼭 끌어안은 채 몸 을 웅크렸다. 도저히 눈을 떠서 주위를 살필 수는 없었다. 바로 곁에 서 두 마리의 하늘치가 비벼지는 것은 바로 곁에서 세상이 찢어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혼을 찢어발기는 굉음 속에서 지멘은 결코 눈 을 뜨지 않았다. 분노한 세상의 손길을 눈꺼풀 안쪽의 어둠에 숨어서 피하려는 사람처럼 지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한 피비린내가 느껴졌을 때 지멘은 눈을 뜰 뻔했다. 하지만 그는 눈꺼풀을 억지로 닫으며 그 냄새를 무시했다. 그는 몸속으로 파고들 어 뼈까지 흔드는 듯한 진동을 무시했고 모든 소리를 죽여버린 충돌 음을 무시했다. 그는 아실을 생각했다. 아실의 얼굴이나 모습, 성격 같은 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아실에 대한 그의 감정이나 생각, 의 문을 정리한 것도 아니었다. 아실과 공유할 수 있는 모든 추억들을 반추한 것도 아니다. 지멘이 생각한 것은 그냥 아실이다. 그도 자신 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지멘은 자신이 중얼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다. 모든 소리가 죽었으니까. 지멘은 자신의 부리와 혀, 그리고 목구멍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 을 하고 있는 느껴보기로 했다. '아실, 증오, 분리주의, 정신억압, 용, 용의 지배, 사람의 신, 아 실, 증오가 없어졌다, 분리주의의 숨은 전제, 사람들이 자신과 대등 한 존재를 정말 자신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 가짜 레콘, 철의 대 화, 아실, 철의 대화는 끝났다, 아실, 타이모, 아실, 아실.' 사라말 아이솔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하늘치는 생물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먹지도 자지도 새 끼치지도 않지만, 생물을 지극히 닮은 무생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든 모습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진짜 생물이라면 그 거대한 몸에도 피가 흐르는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이상해진다. 성 채 만한 크기의 약동하는 심장과 운하 만한 크기의 혈관 등을 상상해 야 하니까. 그 속을 흐르는 폭포수 같은 피라니, 사람은 그 혈관에 빠져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상상하는 것은 신성모독과도 같은…… 말리의 허리에서 피가 용출했다. 소리가 문지르고 지나간 부분의 피부가 쫙 벌어져 있었다. 하늘치의 크기에 비해보면 그것은 살짝 긁힌 상처처럼 보였지만 사라말이 보기 에 그것은 두꺼운 성문이 열린 모습 같았다. 그리고 벌어진 피부 안 쪽에서 커다란 둑이 무너진 것처럼 새빨간 피가 범람하고 있었다. 너 무도 붉어 눈이 부셨다. 피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폭포수처럼 울컥울컥 용출한 피는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빨간 비가 되었다. 폭설 때문에 하얗던 세상이 삽시간에 붉게 변했다. 석 환의 낙하에 난자당했던 땅에 핏물이 떨어지자 마치 땅이 상처입고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로써 겨울이 죽었다. 죽은 겨울의 시 체 위에 모든 소리를 학살한 금속성의 절규가 끊어짐 없이 울려 퍼졌 다. 창가에 있던 파라말은 탈해에게 달려들었다. 꼭 필요한 행동은 아니 었다. 바깥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을 때부터 탈해는 바깥을 쳐다볼 수 없는 위치에 서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따라서 파라말이 달려가 그의 눈을 가려줄 필요는 없었다. 파라말이 그렇게 한 것은 그 자신이 그 광경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탈해의 등 뒤에 매달리듯 한 채 무사장의 눈을 두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 탈해 의 등에 얼굴을 문지르며 울었다. 파라말만이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와 자식이, 연인들이, 그 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서로를 부여잡았다. 손 뻗는 곳에 다 른 이를 두지 못한 자들은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들은 울었 다. 그들이 내지르는 울부짖음은 모두 살해당했기에 그들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저 규리하는 눈을 감은 채 진동하는 소리의 위를 기어갔다. 그 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지만 어디로든 가야 했다. 그곳을 견딜 수 없었고 사람이 필요했다. 충돌의 순간 아이저는 시위를 벗어 난 화살처럼 소리의 등 위를 굴렀고 그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 그리고 주위에 누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 규리하 변경 백은 진동하는 하늘치 위를 눈먼 벌레처럼 꿈틀꿈틀 기어갔다. 하늘 치 바깥으로 떨어질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늘치는 그런 걱정 이 필요없을 만큼 넓었으니까. 그가 두려워한 것은 다른 사람을 만나 지 못하는 것이었다. 두 아들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어디로 굴러 갔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차라리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하늘치 바깥으로 떨어질 것을 걱정하지 않으면서도 아이저는 어디로 기어가든 결국 하 늘치 위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세계는 어둡고 뒤죽박죽이 었다. 결국 아이저는 세상과 사람을 모두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두 주먹 위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꼈다. 영원보다 더 긴 순간이 끝나고, 두 하늘치의 충돌이 끝났다. 말리는 피를 흘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조금 전 말리가 있던 자리로 들어선 소리는 위에서 떨어지는 핏물을 흠씬 뒤집어썼다. 결국 소리 의 커다란 몸에 비하면 그 핏물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다. 충돌 때문에 속도를 상당히 잃었지만 아직도 맹렬한 돌진의 기세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소리는 같은 방향을 유지하며 계속 날았다. 반면 위로 떠오른 말리는 속도를 거의 잃었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그것은 피를 쏟으며 동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라말은 갑자기 모든 세상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기절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것을 안다는 것이 기묘한 일이었지만 사라말은 확신했다. 정신을 잃기 전, 사라말 은 그 충돌 때문에 황제가 죽었을지 의심해보았다. 하늘누리가 빙해 에 충돌한 후에도 살아돌아온 황제가 그런 일로 죽었을 것 같지는 않 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라말은 그 결론에 실망하며 졸도했다. 기절한 사라말은 알지 못했지만 말리가 완전히 방향을 바꿔 움직이 기 시작한 것은 한 시간 후의 일이었다. 피는 어느새 멎었고 그것은 동쪽을 향해 느릿한 속도로 움직였다. 소리가 돌진을 멈춘 것은 그보 다 훨씬 뒤의 일이었다. 넋이 나간 규리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날 아오는 소리를 본 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다. 규리하 사람들에게 소리가 날아온 날로부터 이틀이 더 지났을 때 나 나본 남쪽에서는 한 개의 독립중대가 파손된 다리의 복구를 자축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의 고된 노동 끝에 그들은 다리를 복구했고 다시 행군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노동이 끝났다는 것과 행군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외에 그들이 기뻐할 일은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들은 이라세오날의 사자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 다. 헨로 중대원들의 타락한 영을 구제하길 바라는 이라세오날의 사자에 게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단순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일단 그녀는 다 리 복구를 늦출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모든 중대원을 한 자리에 집 결시켜 자신의 말을 듣게 해달라는 사자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 대신 니어엘은 어차피 자신들은 다리를 복구할 동안 이곳에 머물 것이며 그 기간 동안 이곳에 함께 머무르며 휴식하거나 식사하는 병사들의 곁으로 다가가 그들의 영을 보살피는 것은 사자의 자유라고 선언했 다. 이라세오날의 사자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라세오날의 사자는 헨로 중대와 함께 머무르며 한가해보이는 병사 들을 대상으로 이라세오날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사자가 전하 는 복음에는 건전한 삶의 방식과 추구해야 할 목표, 그리고 타파해야 할 악덕에 대한 교훈적인 내용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병사들은 그 말 이 듣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사자가 말한 내용을 기록하는 열 의를 보인 가리아 릿폴 부위처럼 상당한 관심으로 사자의 말을 대한 장병도 많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났을 때 병사들은 사자가 참 좋은 말을 하지만 곤란한 문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자는 토론을 지양했다. 그리고 레콘이 토론을 지양한다는 것은 토론의 완전금지나 다름없었다. 사자는 듣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 들리는 귀와 열린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믿는 것 같았고 그들의 입이 가진 유일한 기능 은 기쁨의 미소를 머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루가 더 지났을 때 병사들은 사자를 슬금슬금 피하게 되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나본의 본부에 대한 갈급한 애정을 느끼며 공사에 매진했다. 바꿔 말한다면 강변으로 몰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라세오날의 사 자는 청취자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사들은 강을 노려보며 벼슬을 꿈틀거리는 사자의 모습을 못본 척했다. 하지만 사자의 열의는 식지 않았고, 아무리 다리 복구 공사라 해도 모든 인력이 강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목재와 석재를 마련하 고 다듬는 일을 하기 위해 강을 떠난 병사들이 사자의 목표가 되었 다. 점점 병사들은 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침울해하기 시작했다. 그 리고 공사 속도는 빨라졌다. 니어엘은 즐거워 했다. 완공된 다리를 보며 미소짓던 니어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자 를 보았다. 사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본 그녀는 사자가 조금 더 말미를 달라고 요청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아쉽게도 이만 헤어져야겠군요. 사자님." 사자는 속임수에 의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뺏긴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금 후 사자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보아서 알겠지만, 내가 부족하여 병사들의 영에 직접 닿는 복음을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 니어엘." 니어엘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위로하는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어디에서 사자님께서 주신 것 같은 귀한 말씀을 또 듣겠 습니까." "글쎄. 아무래도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 지만 나는 이것이 좋은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대들은 좋은 스 승이었다." "네? 스승이오?" "그렇다. 그대의 장병들은 내가 이라세오날의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 을 연마할 수 있도록 도와준 스승이었다." 니어엘은 약간 놀란 얼굴로 레콘 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공 사 기간 동안 병사들의 곁에서 사자의 태도를 관찰할 수 있었다. 토 론을 허용하지 않는 사자의 태도를 보며 니어엘은 그가 자기 확신에 차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레콘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사자는 그녀로 하여금 그 평가를 조금 수정하게 만들었 다. 물론 사자는 자신이 전달할 복음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 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전달할 자신의 역량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확신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니어엘에게 그것은 꽤 놀라운 일처럼 생각되었다. 정확하게 무엇이 놀라운 것인지는 설명하기 어려 웠지만. 니어엘이 침묵하자 사자는 그것이 지연된 이별에 대한 무언의 항의 라는 판단을 내린 듯했다. 그는 빙긋 웃었다. "그래. 이만 떠나도록 하지. 긴 시간 동안 서툰 말들을 들어준 그대 의 장병들에게 고마움을 전해주길 바란다. 한 가지만 더 말하지. 그 대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장병들에게도 하는 말이다." "뭡니까, 사자님?" "이왕이면 이 살육의 숙명을 가지고 있는 직업을 빨리 벗어나길 바 라네. 니어엘." 니어엘은 레콘이 가지고 있는 투쟁의 숙명에 대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예의가 아니었기에 니어엘은 그것을 간신히 삼켰다. "감사합니다. 사자님. 노력해보지요." "그대와 그대의 장병들에게 항상 이라세오날의 가호가 함께 하길." 니어엘은 이 낯선 인사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자 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경쾌하기까지 한 태도로 몸 을 돌리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니어엘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떠나는 레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지친 카루스 부위가 그녀의 곁으 로 다가왔다. "수교위님. 사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니어엘은 레콘의 뒷모습에 눈을 고정한 채 말했다. "카루스." "예." "우리, 사랑하자." 카루스는 크나큰 당혹 속에서 존경하는 상관을 바라보았다. 니어엘 의 말을 좀 특이한 구애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뭔가를 착각했 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카루스는 숨도 제 대로 쉬지 못했다. 가까스로 카루스가 자신을 진정시켰을 때 니어엘 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랬잖아. 사자가." "아아, 예. 그런 이야기들이더군요." 카루스의 불행한 점은 니어엘이 고개를 돌렸을 때까지도 당혹의 흔 적을 채 수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의 당혹과 그 이유를 대강 짐 작한 니어엘은 카루스가 비명을 지르고 싶어질 때까지 그것을 가지고 놀려댔다. 지러쿼터 산맥의 서사면을 따라 눈사태처럼 떨어지는 점들이 있었 다. 표현하기에 따른 문제이긴 하겠지만, 그 모습을 본 대부분의 사 람들은 그들이 달린다기보다는 떨어진다고 표현하고 싶을 것이다. 뿌 리나 날개를 가지지 않은 그 어떤 생물이라도 곧장 추락할 수밖에 없 는 급경사를 마치 평지처럼 달리고 있으니. 그 점들은 생물이었지만 놀랍게도 뿌리나 날개는 가지고 있지 않았 다. 그 점은 관찰자를 꽤나 당혹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이 좋은 관찰자는 그 초자연적인 움직임을 이해할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 급경사에 대한 새로운 정의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급 경사에서는 뿌리나 날개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레콘이 아닌 생물은 곧장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추락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지러쿼터 산맥을 내려오는 자들은 레콘이었다. 견문이 남달리 넓은 자라도 이와 같은 광경은 보기 힘들 것이다. 바쁜 용건이나 단지 성급한 성격 때문에 대지를 울리며 질풍 처럼 달리는 레콘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렇게 희귀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천이백 명 쯤 되는 레콘들이 한 방향을 향해 그렇게 달리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을 장관이었다. 그들의 발 아래에서 조금 약한 암석들은 박살이 나서 흩어졌고 급경사에 뿌 리를 내린 단단한 나무들은 부드러운 풀잎처럼 흔들렸다. 어떤 곳에 서는 겨우내 쌓여있던 눈이 진동을 이기지 못해 쏟아지며 때이른 눈 사태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들이 산 아래에 도착하고도 한참 후에 떨 어질 눈에 대해 신경 쓰는 레콘은 없었다. 뒤쳐진 눈사태가 내는 굉 음은 자신의 느린 속도에 화가 나서 내뱉는 투덜거림 같았다. 산맥의 사면을 다듬이질 하듯 두드리며 쏟아져내려온 레콘들은 조금 후 평지에 도달했다. 그들은 뒤를 따라오는 눈사태가 도달해도 안전 한 지점까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마침내 충분한 거리 까지 도달하자 레콘들 중 한 명이 계명성을 외쳤다. "멈-춰-!" 남아있는 속도가 그들의 몸을 조금 더 움직이게 했고 속도에 취해버 린 어떤 레콘은 그렇게 해야만 멈출 수 있다는 듯 위로 펄쩍 뛰어올 랐다. 마침내 레콘들이 모두 멈춰섰을 때 비로소 그들이 넘어온 산마 루에서 눈사태가 땅을 강타했다. 꾸르르르릉-! 거리가 대단히 멀었기에 눈사태에 관심을 둔 레콘은 별로 없었다. 대신 레콘들은 하늘 쪽을 보며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조금 후 그들 의 손에 완전무장한 인간이 들려나왔다. 천이백 명 쯤 되는 레콘의 등에서 내려온 천이백 명 쯤 되는 인간들 은 모두 제국군이었다. 튼튼한 갑옷과 투구를 가지고 있으며 날을 잘 세워둔 제국검과 방패도 지니고 있었지만 전사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표정은 두 가지뿐이었다. 죽음과 기꺼 이 악수하고 싶은 얼굴과, 지극히 평화로운 얼굴. 후자는 물론 졸도 한 자들이다. 졸도한 자들은 땅에 내려진 후에도 계속 그 상태를 유 지하는 일관성을 보였다. 불행하게도 제정신을 - 상당히 부적절한 용 어임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유지하고 있던 병사들은 레콘들의 등 에서 해방되자마자 역동적인 구토를 시작했다. 구토할 힘도 없는 병 사들은 땅에 드러누운 채 전우가 자신의 얼굴 바로 옆에 구토를 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병사를 내려놓은 레콘 중에는 커다란 도 끼창을 지닌 검은 레콘도 있었다. 그 레콘은 다른 레콘들처럼 하늘을 관심있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금 후 레콘은 자신이 눕혀놓은 병사 에게 관심을 돌렸다. 비록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누워 있으면 감기가 들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몸을 숙여 병사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어이, 일어나. 도착했다." 얼굴을 찌푸리다가 조금 후 병사가 눈을 떴다. 그는 땅에 누운 채 검은 레콘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전역시켜 주십시오." "틸러. 나는 그럴 권한이 없는데." "탈영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일단 일어나야 할걸." "날카로운 지적이군요. 론솔피." 론솔피는 허리를 더 굽혀 틸러의 몸을 붙잡아 일으켰다. 땅에 앉게 된 틸러는 가슴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에 조심스럽게 호흡했다. 조금 후 그럭저럭 호흡을 안정시킨 틸러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는 비녀 하나를 꺼내어서는 그것을 이마에 댔다. 이곳까지 오면서 몇 번 보았던 광경이기에 론솔피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론솔피는 다 시 하늘을 보려 했다. 하지만 저 멀리서 그를 향해 다가오는 레콘이 있었다. 론솔피는 방어적인 표정으로 웃으며 레콘을 맞이했다. 가까이 다가 온 것은 몸에 무차별학살을 감고 있는 그을린발이었고, 그 조합은 누 구에게나 꽤 두려운 것이었지만, 론솔피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을린발 이나 무차별학살이 아니었다. 론솔피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설명을 해 야 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점잖은 대화가 가능한 거리에 도착한 그을린발은 론솔피를 향해 말 했다. "자, 설명해봐." 세련된 대응이라 하긴 어렵지만 론솔피는 못알아들은 척하기로 했 다. "탈영이라는 것은 농담이야. 걱정하지마. 그렇지, 틸러?" 기겁한 틸러는 왜 나를 끌어들이느냐는 얼굴로 론솔피를 바라보았 다. 그을린발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 너무 중대해서 말하다가 부리가 비뚤어질 것 같은 이유가 뭔지 말해봐. 내가 왜 코끼리를 놔두고 엘시를 따라 여기까지 와야 하는 거지?" 그을린발은 반드시 설명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부리를 불쑥 내밀었 다. 론솔피는 상대가 레콘이 아니라 도깨비였다 해도 무례라 생각할 만큼 끈질기게 부탁하여 그을린발로 하여금 제국을 종단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론솔피는 그에 대한 설명은 미루었다. 그을린발은 그 이 유라는 것을 들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론솔피는 부리를 열어 말하는 대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을린발은 이 행동에 규칙성 같은 것을 발견했다. 지금껏 그가 설명 을 요구할 때마다 론솔피는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을린 발은 론솔피의 시선을 따라가기도 전에 그가 주테카를 바라보고 있음 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짐작을 확인한 그을린발은 약간 지친 어조로 말했다. "이봐. 론솔피." "응? 응?" "주테카가 그 이유와 관련이 있나?" 론솔피는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걸 모르겠어." 그을린발은 약간의 희망을 느꼈다. 모르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 은 지금껏 그를 격퇴한 론솔피의 퇴치법보다는 훨씬 친절한 대응이었 기 때문이다. 그을린발은 무차별학살을 절그렁거리며 론솔피에게 가 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다그치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미 제국을 종단 하여 규리하 지방까지 온 이상 그을린발은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을린발은 다급할 것이 없다는 투로 느긋하게 말했다. "론솔피. 난 지금 슬슬 걱정이 되고 있어. 아무래도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고민거리는 나와 주테카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론솔피는 도끼창을 쥔 손을 초조한 듯이 폈다 오므렸다 했다. 그을 린발은 침착하게 기다렸고 땅에 앉아있던 틸러도 호기심을 드러내며 두 레콘을 올려다보았다. 론솔피가 말했다. "그을린발. 요술에 대해 좀 알아?" 그을린발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진지하게 대했는데 넌 농담을……" "절대로 농담하는 것 아냐." "얼굴이 그렇군. 좋아. 하지만 요술이라니? 손수건에서 비둘기 꺼내 고 지팡이로 뱀 만드는 그런 것 말이야? 나는 그런 것 관심 없는데." 론솔피는 갑자기 말하는 것에 애로를 느끼는 사람처럼 말했다. "어, 저, 그러면 뭘 보면 꼭 요술 같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 응? 그런 말 하잖아. 기차네! 대신에 요술 같다! 라고 말하기도 하잖아? 응? 그런 느낌은, 그러니까 느낄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 그래. 그런데?" "그런 걸 보면 요술쟁이를 알아볼 수 있을까?" "요술쟁이? 글쎄. 요술을 부리면 요술쟁이겠지." "그러면 요술을 안 보여주면 요술쟁이가 아닐까?" 그을린발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말이네. 글쎄.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 나무 찍는 모습 을 안 보여줘도 나뭇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요술을 안 보 여줘도 요술쟁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론솔피. 그렇 게 복잡한 방법보다 더 나은 것이 있잖아." "그게 뭔데?"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주테카에게 너 요술쟁이냐고 물어보면 되잖 아." 론솔피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누, 누, 누가 요술, 주테카가 요술쟁이라고 누가! 누가 그랬어!" 그을린발과 틸러는 맥빠진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론 솔피를 무시한 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주테카가 요술쟁이냐 아니냐가 문제인 것이군요." "그런 것 같군. 주테카가 깃털 속에 비둘기 숨기는 것은 못봤는데." "저는 주테카 앞에 놓여있던 음식이 요술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을 봤습니다." "그거? 그 요술은 나도 부릴 수 있어." "당신은 '코끼리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요술이 전문이잖습니까." 두 사람은 당황한 론솔피를 무시한 채 낄낄거렸다. 하지만 곧 당황 은 두 사람에게 옮겨졌다. 론솔피가 그을린발 격퇴법을 다시 시전했 기 때문이다. "그렇게 웃고 떠들 일이 아니야! 이건 중대한 일이라고. 아주 중요 한 일이야. 정말 중요해! 제기랄. 그런데 왜 나한테? 왜 나한테 이걸 맡긴 거지? 난 이런 것 할 수 없어. 난 할 수 없다고! 내가 모든 것 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거야. 그렇게 될 거라고. 내가, 내가 그녀를 실망시킬 거야. 그녀는 좌절할 거야. 나한테 이런 것을 부탁해선 안 되는 거였어. 내가 다 망칠 거야!" 그을린발과 틸러는 그녀가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사람 잘못 골랐다 고 생각했다. 흥분해서 온갖 이야기를 말해버리는 레콘에게 중요 임 무를 맡기다니. 다행스럽게도 론솔피의 넋두리가 정도 이상으로 진행 되는 일은 없었다. 틸러와 그을린발은 그녀라는 사람이 론솔피에게 무언가 중요한 일을 맡겼고 론솔피는 반드시 그 일을 해내야 하지만 극심한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 정도만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론솔 피가 그렇게 두려움에 빠질 때마다 두 사람이 곤경을 겪는 것은 마찬 가지였다. 결국 두 사람은 정례화된 행동에 들어갔다. 틸러는 론솔피가 똑똑하 고 결단성 있으며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해낼 수 있는 레콘임 을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을린발은 자신이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으니 론 솔피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무한히 기다릴 수 있다고 암시하는 듯 한 말을 했다. 그들의 고군분투는 가까스로 론솔피를 진정시켰고 두 사람에겐 소화불량의 전조를 선사했다. 다그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그을린발이 황급히 떠나자 론솔피는 땅에 앉아 지친 표정 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틸러는 그 곁에서 자신의 팔다리를 움직이 는 방법을 되새기려 애쓰며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하늘치가 떠있었다. 엔거 평원에서 그들이 보았던 말리였 다. 뱀단지를 통해 황제의 소환을 받은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수단방법 을 가리지 말고 빨리 오라'는 황제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민들레 여 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엘시는 민들레 여단만 데리고 가는 것 은 '완벽한 전투 준비를 갖춰서'라는 지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 했다. 병종이 단순하면 약점이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엘시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가시나무 군단의 중대 하나를 데려가기로 했다. 선 택된 것은 노련한 전투지휘관인 쟈마 데시마스 수교위의 31중대였고 그래서 312소대장 틸러 달비 부위도 자신의 소대와 함께 레콘의 등을 이용한 제국 종단에 나서게 되었다. 지러쿼터 산맥을 넘을 때 그들은 말리를 목격했고 마침내 거의 일만 킬로미터에 가까운 그 험악한 여 행도 끝나게 되었다. 틸러는 일생에 두 번 다시 할 만한 일이 아니라 고 생각했지만 한 번 쯤이라면 괜찮은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던 틸러는 말리를 향해 움직이는 대장군과 상 장군을 발견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와 상장군 시허릭 마지오가 말리로 오르고 있었 다. 두 사람에겐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만드는 차이가 있었다. 엘시 는 다리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동계 단을 만든 모양이다. 하지만 상장군은 보이지 않은 계단을 터벅터벅 밟으며 오르고 있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움직이는 환상계단을 만들 만한 기량이 없었다. 다른 때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레 콘의 등에서 방금 내려온 지금이었기에 안쓰러움은 컸다. 보다 못한 엘시가 옆에서 손을 잡아주었지만 시허릭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어 올리느라 꽤 애먹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부하장병들이 올려다보고 있 으니 시허릭의 고통은 더욱 클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틸러는 결심 했다. 자신의 다리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소대원을 살피러 가지 않겠 다고. 그 때 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론솔피가 말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틸러는 찔끔했다. '그을린발도 없는데 나 혼자서 3미터짜리 근심덩 어리를 달래야 하나? 나는 그런 훈련 안 받았는데!' 다시 한 번 전역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틸러는 론솔피를 바라보았다. "론솔피?" 론솔피는 피곤한 눈으로 틸러를 돌아보았다. 문득 틸러는 그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그 당당한 종족의 눈에 담긴 부담감은 보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했다. 하지만 론솔피는 곧 레콘의 의지를 되찾았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담담하게 말했다. "해야 해." 틸러는 목의 통증을 무시하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론솔피. 당신은 반드시 그녀의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을 겁니다." 론솔피의 힘을 북돋아주고 싶었던 틸러의 뜻은 갸륵했지만 방법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론솔 피는 깜짝 놀라서는 네가 그녀를 어떻게 아느냐고 틸러를 다그쳤다. 틸러는 결심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소대원을 살피러 가기로 했다. 말리의 나루터에 오르면서 시허릭은 자신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음 을 고백하기로 결정했다. 그토록 엄격한 장수에게 그것은 쉬운 결정 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루터 위에는 레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던 레콘은 자신을 뭄토라고 소 개했다. 시허릭의 상태를 본 엘시는 뭄토에게 상장군을 안아모실 수 있겠냐 고 물었다. 뭄토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시허릭은 체면을 차리지 않 기로 했다. 뭄토는 시허릭을 아기처럼 가슴에 안은 채 엘시를 따라 걸었다. "위에서 봤어. 레콘들의 등을 이용했더군. 그래서 이렇게 빨리 온 거지? 폐하께서는 대장군이 도착하길 손꼽아 기다리셨어." 엘시는 주위를 살폈다. 하늘누리에 비해서 말리의 위쪽은 휑뎅그렁 하달 정도로 단순했다. 하지만 말리의 등에 있는 구조물들의 크기들 은 모두 인상적이었다. 무기인 듯한 대형구조물도 그렇거니와 거주구 역으로 쓰이는 건물들도 크고 튼튼했다. 하지만 엘시는 이곳저곳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파손의 흔적을 발견했다. 엘시는 그 흔적에 유념 하며 말했다. "규리하를 정벌하는 거요?" "이미 공격했지만 물러나야 했어." "물러났다고? 이곳엔 절망도 출신의 레콘들도 있고 나가 병사들도 있는 걸로 아는데." 뭄토는 생각하니 화가 치민다는 듯이 말했다. "레콘들은 대부분 폐하의 명령을 따라 떠났어. 그들에겐 따로 할 일 이 있거든. 하지만 그들이 있었다 해도 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 군. 아이저 규리하가 하늘치를 끌고 나타나서는 감히 말리에 부딪쳤 어." 뭄토에게 안겨있던 시허릭과 엘시는 깜짝 놀랐다. "하늘치와 하늘치가 부딪쳤다고?" "그래! 그걸 보지 못해서 유감이군. 정말 끔찍했어!" 뭄토는 수다스럽게 그 참극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엘시는 뭄토의 말 에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예삿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두 마리의 하늘치가 하늘에서 부딪쳤으니 그 참상이 오죽할까.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보다 직접적인 파손을 보게 되었다. 쓰 러진 기둥과 넘어진 문 등이 길을 막고 있었고 천장에서 떨어진 파편 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벽에 금이 간 곳도 많았다. 황제가 있 는 건물이 아니라 폐가에 들어선 것 같았다. 시허릭은 그 참상에 신 음했고 엘시 또한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곳을 치우지 않은 거요?" "사람이 부족해.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은 얼어붙어있거든." 엘시는 전투보다 먼저 청소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거처 하는 곳이 이토록 난장판이라는 것은 황제의 대장군을 가슴 아프게 했다. 조금 후 그들은 황제의 벽난로방에 안내되었다. 뭄토는 시허릭을 안 은 채 엘시에게 말했다. "당신만 데려오랬어. 시허릭은 비스그라쥬백에게 데려갈게. 알현이 끝나면 오라고." "알았습니다. 시허릭. 쉬고 있게." 황제 앞에서 꼿꼿한 자세를 취할 자신이 없었던 시허릭은 차라리 잘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안은 뭄토가 멀어지자 엘시는 문을 두드 렸다. 들어오라는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안으로 들어선 엘시는 벽난로가에 서있는 황제를 보았다. 하지만 벽난로에는 불이 없었고 황제는 흑사자 모피를 걸치고 있었다. 엘시 는 경례하면서 방안의 공기가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의자 를 가리켰다. "앉거라." 의자에 앉은 엘시는 벽난로 옆에 땔감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의 시선을 본 황제가 말했다. "땔감은 전부 비스그라쥬백에게 보내도록 했다. 짐에겐 이것이 있으 니까." "폐하. 폐하를 모실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은 황제 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말리에 다른 사람은 필요없다. 대호왕에게 설명을 듣지 않았느냐?" 엘시는 침을 삼켰다. 그 이야기를 하긴 해야 했지만 엘시는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목이 메어 말했다. "폐하께서 신이 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는 무엇이 된다더냐?" "신의 몸종 황가의 개조가 될 거라 들었습니다."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신의 몸종이라니. 재미있는 표현이구나. 적절하기도 하고. 그렇 다." 엘시는 가슴이 옥죄이는 기분을 느꼈다. 황제가 자신의 의향을 질문 했을 때 무슨 대답을 해야 할 것인지 그는 결정해두지 못했다. 하지 만 황제는 그의 의향을 묻지 않았다. "너에게 줄 삼고 중 두 명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아직 효용성을 얻지 못했다." 뜻밖의 말에 놀란 엘시는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제가 부연했 다. "유수로 삼으려던 아실은 쓸모가 없어졌다. 사도가 되었어야 할 제 이어는 또다른 실패를 추구하러 달려가버렸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름은 엘시를 놀라게 했다. 그는 삼고라는 말과 그 두 사람의 이름이 어울리기나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폐하. 저의 삼고라고 하셨습니까? 제이어 솔한이 사도라고요?" "그렇다." "죄송합니다만, 폐하. 그에겐 그런 소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엘시는 자신에게도 황제의 지위가 어울리는지 모르겠다고 말 하려 했다. 하지만 황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했느냐? 왜지?" "그가 여러 분야에 걸쳐 상당한 수준에 이른 수완 좋은 인물임은 분 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변덕이 심하고 한 가지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실패할 것이 두려워 한 가지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와 실패는……" "짐은 꿈과 제이어 솔한이 두렵다! 진정으로 두렵다. 너희들은 어찌 감히 제이어를 우습게 여길 수 있는가!" 황제는 벽력처럼 외쳤다. 엘시는 입을 꾹 다문 채 황제를 바라보았 다. 그의 얼굴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명백하게 떠올랐지만 황제 는 그의 말을 기다리듯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엘시는 화제를 바꾸 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효용성을 얻지 못한 나머지 한 명은 누구입니까?" 황제는 제이어에 대해 더 말하고 싶었던 듯 약간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조금 고민하던 황제는 곧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아직 효용성을 얻지 못했지만 너는 알 자격이 있는 것 같군. 레이헬 라보 태위다." "예? 그 분은 군령자이지 않습니까." 제국법은 군령자의 공무 담당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무지 속마음을 알 수 없다는 대단히 합리적인 이유에서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것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았다. "그래. 가장 완벽한 군사지도자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킬 수 없다.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엘시는 황제의 말을 이해했다. 대장군은 군령자가 황제와 태위 사이 에 언제든 야기될 수 있는 갈등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 될 수도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군령자는 반심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그만큼 떨어져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주퀘도 사르마크의 경우처럼 과거의 해묵은 원한에 사로잡힐 수는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주퀘도는 현재를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군령자가 태위라면 황제는 제국군의 우두머리가 자신을 공격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한 황제는 반역자들이 태위를 죽일 경우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군령자는 전령할 수 있으니까. "그는 아직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팔리탐 지소어와 함께 죽을 생 각을 가지고 있지. 죽음의 시험을 통과하고 전령을 받아들여야 할 것 이다." 엘시는 '죽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 가 생각했다. 전령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은 태위도 준비되지 않았다." 엘시는 황제가 주려 했던 삼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분리하는 유수, 실패하는 사도, 죽은 태위. 그렇다면 나는 어떤 황제로 예정되 어 있는 건가. 엘시는 무릎에 얹은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 를 떨군 채 말했다. "폐하. 무엇 때문에 저를 입양하시어 차기 황제로 삼으신 겁니까?" 황제는 발을 움직였다. 벽난로 곁을 떠난 황제는 방을 가로질렀다가 다시 몸을 돌려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며 말했다. "너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생각은 없었다. 아이저 규리하나 제이어 솔한이 짐을 놀라게 했지만 그 문제는 짐이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짐이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비셀스 규리하에게 짐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능력이 있었다. 그 마지막 불씨를 짓밟는 일은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다." 엘시는 비셀스의 능력이 하늘치를 다루거나 허공에서 엿새를 버티는 등의 그가 알고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 았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폐하. 왜 저입니까?" 황제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엘시의 옆에 서있었고 그래서 엘시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엘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던 황제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대가 짐이 아는 가장 부도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37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38. 돌의 추락, 바람의 복상 - 1 나가의 육성 언어는 언제나 좋은 사색거리를 제공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는 우리의 것과 같고 그 문자가 우리 의 말을 기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가들은 니름을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성 언어 또한 습득한다. 육성 언 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문자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가의 육성 언어는 문자 습득을 위한 보조 수단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사고 과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우리의 사고는 언어로 이루어진다고 믿 어진다. 하지만 나가의 경우에도 언어로 사고할까? 전술했 듯이 그들에게 언어는 문자 습득의 보조수단이다. 따라서 그들은 굳이 언어로 사고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와 우리의 사고 사이에서 현격한 차이를 - 생태와 문 화, 성장 환경의 차이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것 이상의 차이를 발견한 자는 없다. 과연 사고는 언어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 가이너 카쉬냅의 <생각하는 동물들> 中. 아라짓력 33년 1월, 비나간의 막막한 평야에서는 봄과 겨울의 싸움 이 진행중이다. 겨울이 해소할 길 없는 시름처럼 쌓아둔 얼음들은 봄의 따스함 속에 녹았지만 비나간의 평평한 땅은 그것을 거센 물줄기로 바꾸는 대신 많은 실개천으로 바꾸었다. 이에 비나간의 들판은 공작이 꼬리를 펴 듯 일시에 변모했다. 통통한 떡잎들이 땅을 뚫고나오나 싶더니 어느 새 초록이 대지를 탐욕스럽게 적셨다. 처음부터 승부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패배를 인정하면 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겨울의 태도가 비장하다. 아직 자신에게 호 의적인 밤에 기대어 겨울은 유격전에 들어갔다. 아침마다 패퇴되면서 도 저녁이 되면 다시 살아나는 겨울이 여명과 석양에 으르릉거리는 시기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은 겨울이 저녁이 되어도 살아나지 않는 아침이 다가올 것이다. 팔리탐 지소어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아침이 바로 그 아침이 아닐 까 생각했다. 기복 없는 땅 때문에 광활하게 보이는 비나간의 새벽 하늘은 물빛으 로 깨끗하다. 한낮은 풍성한 햇빛의 향연장이 될 듯하다. 그리고 밤 이 다가오면, 아마도 33년 최초의 봄밤을 보게 될 것이다. 봄밤은 아 름답다. 동물들은 수치심 없이, 사람들은 머뭇거리며, 하지만 둘 모 두 화분이 농밀하게 떠다니는 공기에 취한 채 짝짓기의 의식을 시작 할 것이다. 하지만 팔리탐은 사라지는 겨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에 서 몇 번째 겨울일까? 또 한 번의 봄을 얻었다는 생각 대신 또 하나 의 겨울을 잃었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에 팔리탐은 속으로 고소를 머 금었다. '이젠 더 이상 봄밤과 상관없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겨울을 잃는 것이 아쉬운 까닭은 무엇일까. 육체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 모래가 낀 듯한 오른쪽 어깨나 하루 종일 누군가가 손 을 댄 채 지그시 누르는 것 같은 왼쪽 무릎 외에는 건강한 상태였다. 의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팔리탐은 자신의 몸이 앞으로 열 번의 겨 울은 더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스무 번 도. 하지만 팔리탐은 다시는 겨울을 보지 못할 사람처럼 떠나는 겨울 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마음에 주름이 잡히는 거지?' '시체들 때문이야.' 팔리탐은 결심했다. 시체들을 치워야겠다고. 스카리가 명령할 때까 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스카리가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은 그것들을 더 매달아두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매달려 있다는 것을 잊어버 렸기 때문이다. 팔리탐은 몸을 돌려 창가를 떠났다. 사후 책임을 간 단히 하기 위해선 직접 시체를 끌어내리는 편이 좋겠지만 혼자서 그 시체들을 다룰 수는 없다. 팔리탐은 힌치오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혹 스카리가 그 문제를 떠올리더라도 두 사람이 그랬다고 대답하면 불평 하지는 않을 것이다. 팔리탐은 힌치오에게 한가한 시간을 물어보기 위해 - 아무리 그라도 아침도 먹기 전에 반쯤 썩은 시체를 치우고 싶 진 않을 테니까 -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후작궁의 지리 속에서 지름길을 찾아 걷던 팔리탐 은 오현금 소리를 들었다. 팔리탐은 의아함을 느꼈다. 신새벽에 어울 리지 않는 일에는 죽어서 비나간의 우국지사가 된 자들의 시체를 치 우는 것 외에 오현금을 타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팔리탐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었다. 팔리탐은 정원 한가운데 앉아 오현금을 타고 있는 스카리 빌파를 보 게 되었다. 아랫도리는 그럭저럭 챙겨입고 있었다. 하지만 윗도리는 어깨의 맨 살에 걸쳐놓고 있었고 발에는 아무 것도 신고 있지 않았다. 옆의 땅 에는 장검을 꽂아두었지만 칼집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목 에는 끈을 매단 술병을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데 몸을 흔들 때마다 가 슴 위를 굴러다니는 모양을 봐선 거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입 에는 풀가지 하나를 문 채 스카리는 무릎 위에 얹어둔 오현금을 뜯고 있다. 연주한다기보다는 오현금을 지분거리고 있는 것 같다. 주군이 놀라지 않도록 팔리탐은 발소리를 과장하며 스카리가 잘 볼 수 있는 위치로 걸어갔다. 팔리탐을 확인한 스카리는 빙그레 웃었다. 빛이 희박했지만 스카리의 얼굴은 환했다. "잘 잤나, 팔리탐, 사도, 그리고 여러분." "팔리탐입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각하." "내 팔리탐이군. 자다 깨다 했어. 도저히 잠이 안 와서 이렇게 나왔 지." "침소에 불편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팔리탐. 아냐. 불편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뭐가 불편할 수 있겠어?" 팔리탐은 스카리가 취한 것이 분명하지만 술에 빠졌다기보다는 술이 묻었다 정도라고 생각했다. 스카리는 술이 아닌 다른 것에 취해있었 다. 하지만 휘파람으로 연주해도 충분한 수준의 음악을 흩뿌리는 오 현금이나 비나간의 새벽에 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자네 가면에 미소를 그려넣을 생각은 없나? 미소는 좋은 거잖아. 아니야. 그러면 웃기는 목각인형 같겠지. 내 말 신경쓰지마. 지금이 좋아. 바뀌지 말게. 팔리탐." "기분이 좋으신 것처럼 보이는군요." 스카리는 웃으며 오현금의 현을 차례대로 하나씩 뜯었다. 높은 음에 서 낮은 음 순으로. 그리고 방향을 바꿔 낮은 음에서 높은 음 순으로 다시 현을 뜯었다. 스카리가 작은 비명처럼 말했다. "아름다워." 팔리탐은 두 손을 공손히 모아쥐었다. "새벽까지 마셨는데 묘하게 잠이 안 오더라고." 그 즈음 후작궁에서는 비나간 유지들을 안심시키고 협조를 얻는다는 명분으로 이틀이 멀다하고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누리에서 그 러했듯 스카리는 곧 젊은이들로부터 열광적인 추종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연회장 곳곳에 살벌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라티본 부 대원들 때문에 불편해하던 중장년층도 아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연회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후에는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물론 스카리는 처음부터 연회를 완전하게 즐겼다. 어젯밤에 도 그런 연회가 있었고,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진 스카리는 가장 끈질 기게 대작하던 젊은 추종자를 새벽에 격파해버렸다. 팔리탐은 지금 연회장에는 수면인지 인사불성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자들이 잔뜩 쓰 러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방에 돌아가니 부냐는 이미 잠들어 있더군." 스카리에게 홀딱 반해버렸거나, 정복자와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거나, 혹은 출세를 바라는 부친이나 후견인의 강력한 요 구가 담긴 암시 때문에 스카리에게 몸을 던지려는 여인들은 많았지만 스카리는 술 때문에 피가 묽어질 정도로 퍼마신 후에도 항상 부냐에 게 돌아갔다. 그런 태도는 여인들에겐 질투심을, 스카리 빌파에겐 꽤 호사스러운 도덕적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 잠든 부냐를 바라보았지. 이 아름다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나마 약간 남 아있던 취기도 모두 사라지더군." 그래서 옷을 벗어던지고 부냐의 위로 기어올라갔나? "꼼짝할 수가 없더군. 조금이라도 서툴게 움직이면…… 그…… 아, 이런. 도대체 표현할 수가 없어.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답고 완벽했어. 팔리탐.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니 그런 경험이 있겠지?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충만함이 지나쳐서 가만히 있어도 뻥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때 말이야." 스카리는 팔리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 일을 준비하는 하인들의 소리가 아니었다면 난 돌이 되어버렸 을 거야." "각하께서 큰 행복을 느끼신 모양이군요." 팔리탐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했지만 스카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 다. "행복? 제기랄, 그런 시시한 말로는 표현이 안돼! 당장 죽어도 상관 없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고. 다음 번에 똑같은 상황이 와도 똑 같은 기분을 느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자 화가 나 죽을 것 같았 어. 행복? 행복. 더 나은 말이 없을까!" 스카리는 오현금을 북처럼 탕탕탕 두드렸다. 모든 현들이 전율하며 내는 울부짖음이 한참 이어졌다. 스카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두 손으 로 땅바닥을 짚었다. 뒤통수가 목에 파묻히도록 머리를 젖힌 스카리 는 눈을 감은 채 신음했다. "완벽했어." 스카리는 코와 입으로 숨을 쉬었다.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확 오그라드는 모습을 보다가 팔리탐이 말했다. "주군께서 기쁘시다니 저 또한 즐겁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더욱 커 지는 법이니, 부탁하건대 체포령을 거두시길 바랍니다." 머리를 들어올린 스카리는 의아한 눈으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체포령이라니? 뭐 말이야?" "드라카의 아이들에 대한 긴급체포령 말입니다. 각하." 스카리는 똑바로 앉아서는 두 손을 깍지 끼어 칠현금 위에 얹었다. "제정신인가, 팔리탐? 아무리 기쁘다 해도 범죄자를 체포하지 말자 니, 그게 말이 되나." 팔리탐은 그 동안 암시와 비유로 전달하려 애썼지만 결국 전달하지 못했던 내용을 직설적으로 말했다. "각하. 드라카의 아이들은 그 긴급체포령 때문에 더욱 번성하고 있 습니다." "계속 말이 안 되는 소리군. 잡아들이는데 번성한다고?" "앉아도 되겠습니까, 각하?" 스카리는 손짓으로 허락했다. 팔리탐이 앞에 앉자 스카리는 오현금 을 옆으로 치우고는 그의 가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꽤 성의 있는 그 자세에 팔리탐은 기대감을 느꼈다. "각하. 비나간인들이 왕을 가졌던 기간은 일 년도 되지 않습니다. 비나간후가 키탈저인들에게 구원병을 보내고 용을 부각시킨 것은 꽤 영리한 술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겹도록 오래 계속된 노후작의 통치 에 염증을 내던 젊은이들이 그녀를 도왔습니다. 유료도로당의 젊은 당주가 그녀를 도왔습니다. 제가 비나간의 왕이 되려 한다 해도 그보 다 더 좋은 조건은 만들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녀에겐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왕은 왕 이라 자칭하는 것만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왕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 년 만에 비나간이 비나간 왕국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각하의 연회 에 참여하는 자들도 자신이 비나간을 배신하고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무엇이 드라카의 아이들을 지탱하고 있겠습니까? 저는 조 금 전 왕국 비나간에 대한 의리나 모국애가 비나간인들에게 자리잡기 엔 기간이 너무 짧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걸로 드라카의 아이 들을 설명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들을 지탱하고 번성하게 하는 것은 각하로 대표되는 점령군에 대한 증오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점 령군을 보고 있고, 점령군에게 개 끌려가듯 끌려가는 이웃들을 보며, 교수대에 매달린 자들을 봅니다. 그리고 증오를 키웁니다. 드라카의 아이들이 희박한 전망이나 박약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번성하는 것은 증오 때문입니다." 스카리의 얼굴에 조금씩 지루해하는 표정들이 나타났다. 팔리탐은 다급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명령 때문에 우리는 쉰 명의 비나간인을 태워죽였습니 다. 이미 처음부터 빗나간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드라카의 아이들에 대한 탄압 때문에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위엄 있게 긴급체포령을 거두십시오. 각하. 그들이 모여서 점령군에 대한 악담을 나누든 작당모의를 하든 무시하십시오. 그런 말을 실컷 나눈 후에 자신감이 커지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 욕구불만을 해소한 후에는 오히려 행동력을 잃는 법입니다. 그 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주십시오. 그들은 표현의 노예가 될 겁니다." 스카리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내린 명령을 번복하는 것이 즐겁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한 팔리탐은 위엄 있는 후퇴에 대 한 미사여구를 재빨리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 때 스카리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노려보는 그 시선에 팔 리탐은 입을 다물었다. 스카리가 말했다. "그건 황제의 생각이지?" "각하! 저는 팔리탐 지소어입니다." "사도와 손 잡고 우리 아버지를 배신할 생각을 했던 그 친구 말이 군." 팔리탐은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에 소름이 끼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락토 빌파의 사인이 무엇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스카리 또 한 그 사실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홱 돌려 팔리탐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팔리탐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비나간에 대한 내 장악력을 훼손하려는 거지? 에더 리가 황제가 되었을 때 내가 얌전히 발케네로 돌아가길 바랄 테니 까." 반박하려던 팔리탐은 그것이 쓸모 없으리라는 깨달음에 입을 닫았 다. 스카리는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어깨에 걸려 있던 윗옷이 아 래로 떨어졌다. 스카리는 벗은 상체를 드러낸 채 허리에 손을 얹었 다. "정말 걱정도 많으시군, 우리 폐하께서는. 그런 걱정 하지 않으셔도 돼! 네 마음대로 해. 팔리탐. 나는 부냐 외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녀는 이미 내게 돌아왔어. 긴급체포령을 철회하든 드라카의 아이들 을 인정하든 마음대로 해. 내겐 발케네가 있어. 사나이의 고향이지. 이 따위 똥구덩이 같은 고장엔 아무 관심도 없어!" 팔리탐은 악의 속에서 비나간에 대한 스카리의 표현을 뒤섞었다. 그 러자 아름다운 똥구덩이가 되었다. 할말을 다 한 스카리는 뒤로 홱 돌았다. 몇 걸음인가 걸었을 때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마도 감투 를 바지에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팔리탐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오현금과 칼, 그리고 구겨진 윗옷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 다. 유료도로당원들은 잔하일에 머무르고 있는 시오크 지울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장 유료도로당사로 달려가 아버지 와 아들의 대립 때문에 갈가리 찢어진 유료도로당을 봉합하는 어려운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완벽한 이유라고 할 수 는 없지만 시오크는 잔하일에 머무를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꼭 원했다면 잔하일에서도 유료도로당 전체에 자신의 의사를 보낼 수 도 있다. 하지만 시오크는 어떤 내일이 올지 몰라 불안해하는 당원들 에게 도움 될 만한 것을 내놓지 않았다. 과거를 잊고 미래로 함께 나 아가자고 외친다거나 적대자들의 서류를 보지 않고 불태운다거나 하 는 등의 근사한 행위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잔하일까지 시오 크를 찾아온 측근들은 시오크에게 설명을 요구했고 후자에 대해서는 시오크도 설명을 했다. "덕을 과시하거나 화합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역사를 파괴하 는 짓은 안 한다. 모든 기록은 그대로 남긴다." 하지만 전자, 즉 화합 의지의 공개적 천명은 시오크의 입에서 나오 지 않았다. 시오크의 측근들은 기록을 남긴다면 거기에 구애되지 않 겠다는 선언 또한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오크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아직 그의 명령에 의해, 혹은 소리소문없이 축출당 한 게라임파의 일원은 없었다. 당내 극렬보수파의 영수 쯤으로 받아들여지는 로세이즈 징수소장 마 리번 도빈 같은 경우를 보면 시오크가 자신의 반대파를 어떻게 대접 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시오크에게 불만을 가진 당원들이나 게라임파 로 취급될 수 있는 자들과 공개적으로 접촉하는 것 정도는 마리번에 겐 기행도 아니다. 마리번은 공개적으로 시오크를 패륜아라고 부르는 폭거를 일삼음으로써 평화를 원하는 당원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 었다. 그들은 분란을 일으키는 마리번을 탓하면서도 동시에 잔하일에 머무르고 있는 시오크의 잘못도 크다고 생각했다. 시구리아트의 유료 도로당사에 들어가는 것은 실용적인 의미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지만 바로 그렇기에 전통주의자이기도 한 마리번 도빈 징수소장을 입 다물게 할 수 있다. 시오크가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사에 들어가 자신을 당주로 선언한다면 마리번도 더 이상 투덜거릴 수 없을 것이 다. 하지만 시오크는 잔하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유료도로당 의 평화주의자들은 마리번도, 시오크도 아닌 세 번째 사람을 원망하 기로 했다. 평화주의자들의 원성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은 온갖 고생 끝에 지 러쿼터 산맥을 넘어 잔하일의 징수소에 도착한 지키멜 퍼스였다. 징 수소의 조용한 객실에 누워있던 지키멜은 시오크가 가져온 쓴 약을 단숨에 비우고는 말했다. "왜 당의 결속에 대해 관심이 없는지 알아. 황제가 모든 것을 화합 시킬 거라고 믿는 거지? 그래서 네가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시오크는 빈 약사발을 받아들고는 일어났다. "누워. 지키멜. 푹 자도록 해." "거기 앉아." 시오크는 방바닥에 앉아있는 지키멜의 딱딱한 얼굴을 보다가 곁에 놓여있던 소탁을 끌어당겼다. 그가 이부자리 옆에 정좌하여 앉자 지 키멜은 안도했다. 그녀의 잘 드러나는 안도감이 시오크를 슬프게 했 다. 그가 물구나무 서서 사랑한다고 다섯 번 외치기 위해 필요한 것 은 지키멜의 요구뿐이지만, 지키멜은 이제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태도로는 왕이 될 수 없어. 시오크." 시오크는 생각했다. 그러면 용의 깃발을 만들었던 너처럼 나도 산양 의 깃발을 만들까? 당원들에게 우리는 산양의 아이들이라고 말할까? "그리고 너도 그런 식으로는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따라서 넌 왕이 될 생각이 없어. 황제가 제풀에 무너질 때까지 참고 기다릴 생각인 거지. 그런 거지?" 지키멜은 긍정의 대답을 간구하는 눈으로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시 오크는 방을 데우고 있던 화로를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내 아내가 되어줘. 지키멜." 지키멜은 겁먹은 눈으로 시오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 리고 그런 자신에 분노했다. 무의식 중에 외면해버렸기 때문에 다른 반응을, 그녀가 주도권을 쥐고 평안하게 사태를 다룰 수 있는 반응을 보이기 어려워졌다. 지키멜은 얼떨결에 말했다. "징수소의 볼품없고 냄새나는 객실에서 청혼이라니. 나 왕인데 너무 하잖아."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지키멜은 어느새 투정 부리는 소리를 내 게 되었다. 그런 자신의 목소리가 한심해서 지키멜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키멜은 이불을 거머쥐었다. 다행히 시오크는 허허 웃거나 자신감의 표현일 수밖에 없는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진심 을 말했다. "그게 적합할 거야." "그럴까." 시오크는 수염이 꺼슬꺼슬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명백히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랑을 만들 수 있는 남녀는 아 니겠지. 우리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내 겐 확신이 하나 있어. 지키멜 퍼스와 결혼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을 거야." "왜?" "네가 최고의 여자니까." 내용상 그렇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시오크의 말은 아첨하는 말도 아니 고 열애의 표현도 아니었다. 시오크의 말투는 비가 올 때는 장화가 최고의 신발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비가 그치면 잘 말려서 어디 치워둘 수도 있는 모양이다. 이어지는 시오크의 말은 그런 인상을 더 욱 강조했다. "그리고 네게도 내가 최고의 남자야. 잘 생각해 보면 알 거야." 물론 그녀가 빠져 있는 진구렁텅이를 빠져나오는 것에 있어 시오크 지울비만한 장화는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고의 반려감이고, 게다가 우린 서로 사랑하니 까, 우리가 결혼하는 것이 적합해. 내 생각은 그래. 네 생각은 어 때?" 지키멜은 손끝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그 순간만을 기다려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머릿속에서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시오크의 말만이 남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 만 지키멜은 자신이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고, 그리고 머릿속에서 시오크의 말만이 되풀이되어 메아리친다고 생각하고픈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불현듯 지키멜은 그것을 채색할 물감이 고통밖에 없는 도주 를 떠올렸다. 라수의 방에서 규리하 가문의 보물 몇 가지를 슬쩍해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러쿼터 산맥을 보기도 전에 비명횡사했을지도 모른다. 그것 이 다시 규리하 가문으로 돌아가길 바라며 지키멜은 그 골동품들을 팔았고 그 돈으로 말과 여비를 마련했다. 하지만 전란의 소문은 그녀 의 뒤를 바싹 따라왔다. 며느리감을 보러 갔던 황제가 규리하성에서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 그리고 왜 예비 고부의 상견례가 전쟁으로 비 화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가설들은 더욱 많 았다. 어쨌든 그녀는 규리하 전체가 뒤숭숭해지기 전에 지러쿼터 산 맥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텔 시절에 도전이 곧 죽음으로 해 석되었던 겨울의 지러쿼터 산맥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살인적이었다. 가까스로 산맥을 넘어 먼저 떠났던 시오크를 잔하일에 서 따라잡았을 때 지키멜의 체중은 10킬로그램 이상 줄었고 몸 곳곳 에 심한 동상을 입은 상태였다. 다행히 지러쿼터 산맥에 접한 잔하일 징수소의 당원들은 겨울 여행자들이 자주 걸리는 질환에 대한 좋은 대처법을 가지고 있었다. 지키멜은 발가락 세 개를 잘라내는 것으로 동상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을 기막힌 행운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키멜은 그 끔찍한 도주를 시오크에게 청혼받기 위한 대가로 생각 하고 싶었다. 바꿔 말하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지키멜의 왕국은 셋이다. 그리고 그 셋은 하나다. 시오크의 청혼은 그 셋이자 하나인 왕국을 두 개로 찢어놓는 것이었다. 시오크와 결혼 한다면 그녀는 시오크 지울비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비나간과 분노의 왕국은 그녀의 지배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지 키멜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나간은 지금 내 왕국이 아니야. 스카리 빌파가 그것을 가 지고 있지. 발케네공에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 있을까? 그리고 황제는 내 분노에 상처 입을 존재가 아니야. 사라말 아이솔도 황제에게서 도 망쳐 살아남으라고 말했어. 자기가 황제와 싸울 테니 나에겐 전인이 되어달라고 했지. 시오크를 포기하고 그 두 왕국을 추구한다 해도 그 둘을 얻을 가능성은 희박해. 하지만 두 왕국을 포기하면 나머지 왕국 은 확실히 얻을 수 있어. 나의 왕국 시오크를.' "싫어." 지키멜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무 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추리의 재료를 찾기 위해 지키멜은 시오크 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담담한 편에 가까웠지만 지키멜은 자신 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키멜은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키려 했다. 규리하와 말리가 있는 곳. 하지만 그녀는 어디가 서쪽인지 알 수 없었다. 지키멜의 손이 허 공을 잠시 표류하다가 위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황제가 있어." 얼떨결에 말한 자신의 말을 이해하기에 앞서 지키멜은 그 방향이 정 확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흠칫하여 손을 끌어내린 지키멜은 그 손을 바라보았다. 시오크가 말했다. "그래. 거기에 황제가 있지." 지키멜이 시오크를 보았다. "하늘에 있지." 시오크는 무릎 위에 놓은 두 손을 펼쳐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 은 그곳에 있지 않은 날카로운 발톱, 피에 젖은 발톱을 찾고 있었다. "사람은 잔인한 맹수야. 고통 끝에 그 단순한 사실을 알았어. 어떻 게 표현하든 결국 사람은 생물이고, 그것은 돌이나 바람 같은 것을 먹을 수 없어. 똑같은 생물을 먹을 수밖에 없지. 위로는 다른 생물의 피를 마시고 아래로는 문화니 예술이니 도덕이니 하는 배설물을 내보 내지. 배설물은 먹을 수 없어. 손에 그것을 묻혀 자랑스럽게 주위를 장식한다 해도 그건 먹을 수 없는 배설물이야." 헐떡거리며 사춘기의 비탈을 오르고 있는 어린애도 할 수 있는 말이 지만 그것을 말하는 시오크의 목소리는 노인처럼 쇠약했다. 지키멜은 눈을 깜빡거렸다. 시오크는 창백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그리고 같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피를 얻을 수 있는 사냥감은 역시 같은 사람이지. 사람에 가장 많은 피가 축적되어 있으니까. 따라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사냥이지. 칼로 공격하든 붓으 로 공격하든 마찬가지야.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하니까 붓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군." 시오크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시오크는 오랫동안 달린 사람처럼 힘겹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려 애쓸 필요가 없어. 판단 기준은 하나뿐이 었고, 하나뿐이며, 하나뿐일 테니까. 거대한 굶주림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만 판단해. 우리 모두는 피를 마시는 새지. 그 고약한 냄새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새야. 제국은 강압적 방법이 아니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맞아. 동감해. 서로가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니 합쳐질 수 없는 거지." 지키멜은 힘을 주어 속삭였다. "나는 먹을 수 있어서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 시오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문득 지키멜은 그의 입에서 단검이나 화살이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시오크의 말을 막 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시오크가 말했다. "사랑은 당연히 못 먹지. 그건 배설물이니까. 배설물은 못 먹는다고 했잖아." 지키멜은 분노도,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좌절을 느꼈다. 그 녀의 세 왕국 중 그녀가 살고 싶은 왕국이 처참하도록 황폐화되어 있 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황량함을 치유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은 지키 멜에게 더 큰 좌절을 주었다. 시오크가 침을 뱉듯 말했다. "판단을 맡기면 먹을 수 있느냐와 없느냐로 구분할 줄밖에 모르는 이 맹수에겐 목자가 필요해." 시오크가 팔을 가만히 둔 채 손목만 조금 들어 지키멜이 조금 전에 가리켰던 방향을 가리켰다. "하늘에서 맹수들을 관리할 목자 말이야. 대단한 일이지. 세상에서 그런 일을 감히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일 거야. 그리고 그 유일한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있어. 더 이상 바랄 것도, 참견할 것도 없어." 지키멜은 자신이 시오크에게 나가라고 말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시오 크가 마치 그런 말을 들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처 연한 눈으로 바라보는 지키멜을 외면한 채 시오크가 말했다. "자도록 해. 지키멜." 시오크가 객실 밖으로 나갔다. 그의 모습을 좇던 지키멜은 문이 닫 히고나서도 한참 동안 문쪽을 바라보았다. 지키멜은 누웠다.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린 지키멜은 몸을 옆으 로 오그렸다. 그리고 숨이 막히도록 울었다. 유료도로당주이자 황제에게 왕위를 받은 자가 말을 달려서 사흘이 채 안 걸리는 잔하일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만시지탄에 빠져있던 세퀴라도의 자유무역당원들을 동요시켰다. 그것은 두 번째 후회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조금 더 기다리지 못 했던가 후회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다림이 부족하다고 단정지어 말하 기는 어렵다. 유료도로당에 호의적이고 자신들에게 비호의적인 황제 가 실종되었을 때도 자유무역당은 곧바로 준동하는 대신 침착하게 사 태 추이를 보며 기다리기로 했다. 새 발케네공이 사라티본 부대를 이 끌고 거칠 것 없는 기세로 남하했을 때도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보 살폈을 뿐 발케네공에게 자신을 팔지 않았다. 결국 무적으로 보이던 발케네공이 규리하공의 기적 같은 능력 앞에 쫓겨났을 때 그들은 자 신들의 자제력을 마음껏 자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내력은 시모그라쥬공이 남부의 제국군을 규합하여 북진을 시작했을 때도, 숙 적이랄 수 있는 유료도로당이 비나간후와 결탁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도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모험에 가까운 일을 시도한 대장군이 안정 적으로 제국군을 규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오랜 인내를 청산하고 규리하공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료도로당의 행보에 비하면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엘시가 비나간의 지척까지 이른 시모그라쥬군을 거침없이 몰아 엔거까지 밀어붙였을 때 그들은 지극한 만족감을 느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겠지만 치천제의 귀환은 자유무역당원들에겐 혼절할 만한 충격이었다. 자유무역당이 인내력 부족을 후회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만약 끝까지 침묵했더라면 그들에 대한 치천제 의 악감정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황제의 감정을 호감으로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팔 상대가 없어 서 세상을 사지 않는다는 농담이 따라다니는 자유무역당의 막대한 재 산을 어떤 야심가에게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치천제의 상찬을 받 기에 충분한 일이니까. 몇 달만 더 기다렸다면 받을 수 있는 치하를 날려버리고 대신 황제의 분노를 살 짓을 저질러버렸다는 것은 자유무 역당원들을 한없이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황제의 분노를 기다렸다. 치천제가 엘시 에더리를 자신의 양자로, 비셀스 규리하를 며느리감 으로 선택했다고 공표했을 때 자유무역당원들은 믿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완벽한 실수였다고 판단했던 투자가 기적적인 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투자 대상은 차기 황제 부부였다. 비셀스 규 리하가 실종 상태라는 사실이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그들은 마음껏 기 뻐 날뛰었다. 그리고 당주가 몇 번이나 바뀌는 고통을 겪은 끝에 파 당 이야기까지 흘러나오는 지경이 된 유료도로당을 희롱했다. "투자는 상인의 일이야! 너희들은 땅이나 팠어야지!" 자유무역당이 보기에 유료도로당이 황제 실종 후 할거하기 시작한 주요 세력들 중 가장 약하면서도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칭왕을 감행 할 정도로 어리석은 비나간후와 결탁했다는 것은 확실한 비웃음거리 였다. 망각은 이럴 경우 상당히 도움이 된다. 스스로도 자신들의 투 자가 완벽한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을 간단히 잊어버린 채 자유무역당 은 투자 감각을 자랑했다. 그들은 아트밀이 허공을 달리는 그 순간까지 기뻐할 수 있었다. 그 리고 먼저의 좌절보다 더 큰 두 번째 좌절이 다가왔다. 규리하 사람들도 그것을 불가사의로 여겼지만 자유무역당은 시어머 니와 며느리의 상견례가 어떻게 사소한 말다툼도 아닌 전쟁으로 비화 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의 공격을 격퇴한 규리하공의 능력에 대한 보고는 그들을 완전한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꿈이라니? 꿈이 어쨌다는 거지?" 꿈은 그림이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처럼 글자로도 표현하기 어 려웠다. 게다가 자유무역당 화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유무역당 원들은 수사학에 관심이 없다. 규리하성의 '당원'이 보내온 건조한 보고문에서 그들은 혼란만을 읽어낼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두 번째 만시지탄에 빠지는 것보다 더 나은 반응을 떠올리지 못했다. 어차피 좌절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아이저 규리하가 느닷없이 하늘치를 몰 고 나타나 황제의 하늘치에 충돌을 감행했다느니, 엉뚱한 투자를 했 던 유료도로당주가 큰 낭패를 겪기는커녕 왕위를 받았다느니, 남쪽의 엘시 에더리가 황제의 소환을 받고 북상을 시작했다느니 하는 소식 앞에서 그들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도시 전체가 자유무역당사나 다름없는 세퀴라도에서 시민들은 비탄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시오크의 잔하일 주재에 대한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이 화풀이에 대한 욕구였다 해서 그들을 천 박하다고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억울 함만이 느껴지는 곤경의 끝에서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상대 방은 숙적인 유료도로당의 당주이자 투자를 실패하고도 왕위를 얻어 돌아온 자였다. 소식을 접한 자유무역당원들은 모두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시오크 지울비의 목을 베어 황제에 대한 총력 투쟁의 신호로 삼자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오갔다. 꼭 감상적인 반응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황제에 의해 봉하여진 왕을 살해한다면 자유무역당을 짓누르고 있는 우울감을 단번에 날려버리고 당을 결속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수 진을 치는 셈이다. 마침내 그 이야기는 고위 당원들의 회의장에도 등 장하게 되었다. 말을 꾸미지 않는 그들답게 상당히 직설적인 설명이 이루어졌다. "배수진을 치는 효과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료도로당이 혼란에 빠진다면 황제의 전쟁 운영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말인가?" "황제에겐 말리가 있지만 현재 규리하에는 소리가 있습니다. 두 하 늘치의 힘이 상쇄된다고 보면 규리하를 점령하기 위해 황제에겐 지상 군이 필요합니다. 이미 칼리도백이 지러쿼터 산맥을 넘었지만, 만약 규리하공이 칼리도백을 물리치거나 지구전을 시도할 수 있을 정도만 버텨준다면 황제에겐 더 많은 지상군이 필요할 겁니다. 그 때 도로망 이 전면적인 혼란 상태에 빠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규리하에 대한 제국군의 추가 투입이 어려워진다는 것이군요." "하지만 비나간에 있는 사라티본 부대가 있어." "그렇군요. 그들이라면 도로가 혼란에 빠졌다는 것에 구애되지 않고 규리하로 진격할 수 있겠지요. 발케네공은 현재 황제에게 협조적이지 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건 좀 심하 군. 도대체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가 누구의 적인지 짐작할 수가 없 어." "황제가 사라진 동안 제멋대로 분탕질을 치고 다녔던 발케네공과 유 료도로당은 황제와 화해하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던 규리하공과 우리 는 황제와 적대하게 되다니. 이거 원 어이가 없어서." 세퀴라도를 흠뻑 적시고 있던 우울감이 다시 되살아났다. 회의실은 다시 불평과 한탄, 그리고 좌절감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하지만 그마 저도 오래가진 않았다. 불평도 활력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결국 자유무역당원들은 거북한 고요 속에 각자 자신을 팽개쳤다. 그 때 상석에 앉아있던 지테를 시야니 당주가 오래간만에 몸을 움직 였다.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상당 히 효과적인 동작이었다. 회의 참가자들의 주의가 모두 당주에게 집 중되었다. 지테를은 나직하게 말했다. "시오크 지울비는 내버려두도록 하지." 재빠른 사고 활동을 유도하는 단도직입적인 선언이었다. 당원들은 우울감에서 빠져나와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당주가 말했다. "유료도로당이 혼란에 빠진다 해서 제국군의 발이 묶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곤경에 빠지는 것은 명백하지. 우리 또한 그들 의 도로를 이용하니까."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자유무역당주가 유료도로의 가치를 담담히 인 정한 것은 당원들에게 금기를 깨트린 듯한 충격을 선사했다. "알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도록 하자. 만약 이 시점에서 규리하공에 대한 원조를 끊 는다면……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는 표정은 짓지 말게. 당원도 아닌 외손녀의 안위와 당의 안위 사이에 놓을 저울은 내게 없다." 당원들은 보다 엄숙한 표정으로 당주의 말을 경청했다. "손익을 생각하도록 하자. 만약 원조를 중단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 지? 칼리도백을 지원할까? 그가 차기 황제니까? 하지만 치천제는 며 느리의 나라도 공격했다. 칼리도백에게 지금껏 주어진 것들을 생각해 보면 그의 황위 계승이 낙관적이라 생각되지만 확정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서 여러 번 나왔듯이 우리는 황제의 의중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으니까. 내일이나 모레 쯤 차기 황제는 발케네공이라 고 황제가 말한다면 우리가 놀라야 할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동의의 한숨들이 탁자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지테를은 팔짱을 끼었 다. "그리고 칼리도백에게 우리의 지원이 필요한가? 물론 규리하에 대한 지원을 끊는 것만으로 칼리도백에겐 도움이 되겠지만 직접적인 지원 과 간접적인 지원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칼리도백이나 황제가 그 사실에 대해 얼마나 고마워할지 의문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규리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는 요청이 없으니까." 고위 당원들은 지테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 리고 그 깨달음이 그들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지테를이 선언했다. "비셀스 규리하와 아이저 규리하를 지원한다. 물론 비밀리에." 어떤 당원이 힘겹게 말했다. "그들이 황제를 격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테를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눈 주위의 살을 조금 떨었다. 당원들 은 침착해 보이는 당주가 깊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테를이 말했다. "모르겠다. 비셀스가 가지고 있다는 그 꿈이라든지 하늘치라든지, 모두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문제다. 아무 것도 제대로 예상할 수 가 없다. 따라서 그 지원금은 사태의 추이를 관람하기 위한 요금으로 생각하도록 하자. 계속 지원이 이루어졌을 경우 과연 어떤 일이 벌어 질지…… 지금 규리하에 있는 사람을 초월한 듯한 그 자들이 무슨 일 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돈의 흐름을 조절 하는 우리들의 의무인 것 같다." =============================================================== 38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8. 돌의 추락, 바람의 복상 (2) | 2004·11·25 08:06 | HIT : 123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8-2 관련자료:없음 [49412]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25 06:55 조회:41 피를 마시는 새 38. 돌의 추락, 바람의 복상 - 2 달력을 보며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받는 지역들 중 하나인 규리하에 서 1월은 봄의 시작이 아니다. 물론 제국 어느 곳에서나 그러하듯 규 리하에서도 1월 1일이면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진다. 하지만 계절 은 낮과 밤의 길이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자보로나 듀앙, 칼 리도 등의 지역이 차례로 움트는 꽃 때문에 풍경이 매일 바뀌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무렵인 1월에도 규리하의 기온은 간혹 빙점 아래로 떨어진다. 하지만 빙점을 넘는 때가 더 많기에 눈과 얼음, 고드름 등 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대신 봄바람이 그 자리를 채운다. 당연하지만 이 봄바람은 보다 따스한 지역에서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예를 들어 올렌 사람이 규리하의 봄바람을 정확히 느끼려면 머릿속에서 겨울바 람이라고 바꿔 이해하는 재주를 부려야 한다. 비셀스 규리하는 그런 규리하의 봄바람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두 툼한 옷을 입은 채 규리하성의 본관 계단 아래에 서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러 갈 참이었고 그 자리에 오직 한 사람만을 대동하기 로 결정했다. 지금 그녀는 그 수행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 들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기분을 느꼈지만 정우는 자신의 수행인을 기 다리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기다리는 시간 을 어떻게든 유용하게 쓰고 싶어하는 관료들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짤막한 귀엣말들을 건네었기 때문에 정우는 지루함을 느낄 필요도 없 었다. 아트밀의 방 창가에서 사라말 아이솔은 그 관료들이 무슨 말을 건네 고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 말들은 그저 초조함과 혼란의 표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규리하의 관료들은 자신의 입장 변화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에선 신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고귀한 자에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더 깨끗하거나 더 따 스하지는 않는 법이다. 정우가 노출시킨 꿈과 말리와 소리의 충돌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세계 인식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는 초자연적 인 사건들이었고 따라서 그 앞에서는 평소 남보다 민활하다고 자부하 는 자와 둔하다는 평가를 듣는 자는 하나의 부류, 즉 자연적인 자들 로 묶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 명백히 우수한 점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지위를 얻은 관료들의 정신은 초자연의 폭우 앞에서 다 른 이와 똑같이 흠뻑 젖어 초라한 꼴이 되어 있었다. 그럴 경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 지난 한 달여 기간 동안 일어났다. 관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척하며 자신들이 월등한 통찰력으로 상황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들을 취하 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려 애썼다. 물론 진정코 남다른 통찰력을 가진 자들에게 그 상황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병무대부 오니샤 퓨덴은 규리하군에게 촉발경계 태세를 명령했다. 그들이 하늘치를 격 추시키거나 그에 준하는 타격을 황제측에 입힐 수 없다는 점을 제외 한다면 무향의 군인들다운 퍽이나 훌륭한 자세였다. 또한 군수물자들 의 면밀한 재고 파악과 징발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군수물자들이 정확히 어떤 용도로 쓰여야 할 것인가? 그들이 모아들인 막대한 밧줄 로 어쩌면 하늘치를 낚아낼 그물을 짜거나 전투병들에게 자살용 올가 미를 공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치를 끌어당길 권양기는 없다 거나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항상 적당한 들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소한 문제점만 제외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사용법일 것이다. 어쨌거 나 오니샤 대부는 끝없이 전쟁 관련 명령들을 생각해냈고 할일이 없 다는 느낌을 싫어하는 점에서 상관과 마찬가지인 오니샤의 참모진은 거기에 자신의 발상을 덧붙였다. 덕분에 규리하군은 꽤나 분주한 시 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이 대단히 훌륭했기에 오 니샤 퓨덴이 당당하게 싸울 것인지 말 것인지 물었을 때 아무도 그에 게 황제와 싸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변경백의 외교 담당자들은 군대의 질문에 대답할 능력이 없 었다. 그들은 지러쿼터 산맥 방면으로 물러난 황제보다 갑자기 나타 난 아이저 규리하에 대해 더 집중하고 있었다. 깜짝 놀랄 방법으로 잃어버린 왕국에 돌아온 옛지배자는 규리하의 현지배자를 어떻게 다 루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정우가 하늘치를 다루어 발케네군을 격퇴했기에 아이저 또한 하늘치 를 손에 넣었다. 마침내 규리하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의 측면에서 딸 과 대등한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저는 딸의 무기가 그것뿐 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꿈이라고?' 어처구니없는 기분 속에서 아 이저는 즈믄누리로 가서 남는 꿈이 없냐고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의 하늘치 말리는 지러쿼터 산맥을 넘지 않았 고 따라서 여전히 규리하 안에 - 위에? - 있었다.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이저는 그것을 규리하에 남는 이유로 선택했다. 문득 사라말은 아이저 규리하가 어떤 기분을 느낄지 궁금해졌다. 알 려진 사실에 따르면 소리는 아이저의 하늘치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이이타 규리하가 연인의 이름을 붙인 그의 하늘치다. 비록 이이타가 아이저에게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만약 소유권 분 쟁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자문을 요구받는다면 율형부사는 고민없이 이이타의 소유권을 인정해줄 것이다. '하늘치가 그 사실에 반대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하겠지만. 따라서 규리하를 보호할 실질적인 힘은 아이저가 아닌 그의 딸과 아 들에게 있는 것이다. 사라말은 아이저 규리하가 그 사실을 어떻게 이 해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소리의 위에 오르는 것이 허락된 정우의 사 절들은 자신을 맞이한 자들의 주체가 이이타가 아닌 아이저였다고 보 고했다. 그리고 이이타가 그 사실에 대해 분노하는 기색은 없었다고 도 말했다. 아이저가 아들에게 지위를 넘겨주어 딸과 대립하게 할 생 각은 없는 모양이다. 아이저는 정식 계승 절차를 거치지 않은 딸이 규리하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짤막하게 불평했지만 그 상황이 어 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저는 생 필품들을 요구했다. 정우는 그것을 내주었고 아이저는 규리하성의 상 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수직적인 높이차는 꽤 있지만 수평적으로 볼 때 그들은 한 지점에 있는 셈이다. 실로 짓궂은 상황이다. 그 상황은 타개되어야 했고, 결국 아이저는 딸과 만나고 싶다는 제 안을 보냈다. 한 명의 보호자만을 대동하고 소리 위에 올라오라는 아 이저의 요구는 정우의 조신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받았다. 하지만 정 우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탈해와 틸러가 하늘누리 주변의 하늘에서 저를 잡으려 애썼지만 실 패했던 것을 떠올려보세요. 저는 안전해요." 조신들은 도깨비 무사장을 데리고 간다는 조건으로 그 설명을 받아 들이겠다고 말했고 정우는 주저하다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사라말 은 자신과 정우의 비밀을 생각하며 귓볼을 만지작거렸다. 조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경호원이 정우를 따라간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만, 탈해는 연초에 불을 붙일 정도의 열기도 만들어낼 수 없다. 아이 저 규리하와 그의 무리는 그 비밀을 알지 못하니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라말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만약 정우가 소리 위에서 살해당한다면 탈해는 함께 살해당하더라도 어르신이 되어 자신의 목 격담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말은 탈해에게 그 정도의 기대만 걸고 있었다. 그래서 탈해의 모습을 보았을 때도 사라말은 놀라기보다는 혀를 차 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예의바른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 탈해에게 있어 파격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 파격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탈 해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사라말은 어려운 고민 끝에 불을 못 쓰니 쓸 줄 모르는 칼이라도 차 고 가야겠다고 결정한 탈해를 동정했다. 문맹자가 손에 책을 들고 있 는 광경이나 마찬가지다. 무사장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모습에 꽤나 놀라고 당황한 것 같았다. 사라말은 정우의 반응을 살폈 다. 정우는 다가오는 탈해의 허리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곧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얼굴을 했다. 그녀는 탈해에게 몇 마디 잡담을 건네고 는 대기하고 있던 딱정벌레 번뜩이를 가리켰다. 탈해가 번뜩이에 오 르자 정우는 곧 하늘로 조용히 솟아올랐다. 그녀의 뒤를 따라 번뜩이 도 날아올랐다. 번뜩이의 요란한 날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사라말의 등뒤에 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사라말은 몸을 돌렸다. 방바닥엔 건초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모포가 놓여 있었다. 아트밀 이 그곳에 누워있었다. 사라말은 그에게 다가갔다. 누워있는 레콘의 모습은 장대한 폐허 같았다. 천신만고 끝에 아트밀을 벤 나가는 퍽이나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았 을 것이다. 사이커를 휘감는 깃털들을 뚫고 들어가 돌덩이 같은 근육 을 찌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사람을 찌르는 느낌이 있을까? 사라 말은 에스커 헬토의 명에 따라 연쇄살인자 파델 미호린의 목을 베었 을 때를 떠올렸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끝내기 위해 사라말은 몇 시 간 동안이나 칼날을 갈고 동작을 연습하며 파델을 기다렸고 그 노고 는 보답을 받았다. 사라말은 인간의 목을 베는 짓을 한 번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가들이 느껴야 했던 감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으 리라. 아트밀이 입은 험악한 상처는 그 생경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트밀의 철극에 몸 어딘가가 파괴되기 전까지 나가들은 사람을 찌른 다는 느낌 없이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을 가했다. 칼로 얼어붙은 고 기를 두드려팬 요리사가 남겨둔 것 같은 너덜너덜한 상처들. 흉측하 다. 그러나 거주자에게 성심껏 보호받는 건물들보다 시간의 폭력을 홀로 맞서온 페허가 때론 더 큰 박력으로 관찰자를 압도한다. 아트밀의 상 처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 상처들 때문에 아트밀의 본질 이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 사라말이 이미 고찰했듯이 아트밀은 다른 이유로 죽어가고 있었다. 사라말은 아트밀의 곁에 섰다. 아트밀이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 말했다. "사라말. 내 감각은 날카롭고 내 근육은 튼튼하다. 하지만 내 정신 은 지저분한 것들이 가득찬 구정물 같다." 아트밀이 언급한 물의 비유에 사라말은 흠칫했다. 최악의 혐오를 드 러내기 위해 물을 언급한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편향 된 해석이다. 사라말은 생명에의 의지를 잃었기에 생명의 짝패인 죽 음에 대해서도 무덤덤해진 자와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죽는다. 그 사실엔 화가 나지 않아. 하지만 이런 상태로 죽는 건 싫다. 아트밀인지 아닌지 모를 상태로 죽는 건 정말 화가 나." 아트밀의 몸이 서서히 부풀어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죽음이 내게 어떻게 살았냐고 물을 때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 지?" 당신의 인생은 저기에 있다. 레콘은 그렇잖은가? 사라말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 한쪽 벽에 기대어 세워놓은 철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라말은 아트밀이 그것을 거기에 세워놓은 후 한 번도 건드리지 않 았다는 것을 떠올리곤 입을 다물었다. 사라말의 시선을 본 아트밀이 말했다. "납병도 할 수 없어." 아트밀의 은원을 지우는 것은 아트밀의 권리다. 사라말의 앞에 누워 있는 레콘은 자신이 아트밀이 아니라면 아트밀의 은원을 건드릴 자격 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트밀은 맥이 풀린 어조로 말했다. "네가 있으니 계속 넋두리만 하게 되는군. 거기 왜 있는 거야? 꺼 져. 사라말." "아트밀. 당신은 내 친구입니다." 아트밀은 가느다란 눈으로 사라말을 노려보았다. "친구라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나는 억압되어 있었던 거야. 너를 도와주라고. 그래서 바 다 위를 달리는 미친 짓도 한 거지. 나는 너 같은 인간 녀석에겐 관 심이 없어." "아트밀, 나는……" 아트밀의 손이 갑자기 화살처럼 날아왔다. 아트밀은 누운 채 서있던 사라말의 목을 부여잡았다. 그 무서운 힘에 사라말은 숨이 턱 막혔 다. 아트밀의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 그의 얼굴을 지졌다. "너는 오래 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어!" 사라말은 눈도 감을 수 없었다. 아트밀은 팔을 전율시켰다. "수상하다고 생각하곤 그 개울에서 시험해봤던 거지? 그리곤 내가 훈련 잘된 개새끼나 다름없다는 것을 확인했어. 머릿속에 그런 명령 이 들어있으니까! 너는 마음대로 나를 이용했어. 너는…… 이게 뭐 야!" 아트밀이 비명을 지른 순간 사라말은 호흡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 을 깨달았다. 피부에 닿는 아트밀의 손아귀에서는 그의 목뼈를 으스 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안으로 조여들지는 않았다. 아트밀의 손은 그저 커다란 목걸이인 양 사라말의 목에 닿아 있을 뿐이었다. 아트밀이 분노와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손을 사라말 또한 비슷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공격할 수 없어.' "너를 공격할 수 없어." '나를 보호해야 하니까.' "너를 보호해야 하니까…… 제기랄!" 아트밀은 사라말의 목을 놓고는 바닥을 후려쳤다. 아트밀의 주먹 아 래에서 포석이 부서졌다. 규리하성의 무거운 돌들이 진동했다. 포석 하나를 박살내놓은 아트밀은 옆으로 홱 돌아누워서는 머리를 감싸쥔 채 온몸을 떨었다. 가슴을 향한 그의 부리에서는 툭툭 끊어지는 파열 음이 들려왔다. 사라말은 아트밀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등뒤에서 공격한 나가들 이 남겨놓은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깃털에 말라붙어 있었다. 조 금 전까지 아트밀의 등이 닿아있던 모포에도 검붉은 핏자국이 가득했 다. 무거운 그의 몸이 오랫동안 눌렀기 때문에 모포는 우묵하게 눌린 모습 그대로였다. 사라말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스쉬옴 뉘노리 가탄 생." 사라말이 한 말은 아라짓어다. 아라짓 제국에서 쓰이는 말이라는 뜻 은 아니다. 온세상에 말은 한 가지뿐이고 시련의 나가들도 제국의 신 민들과 같은 말을 쓴다. 하나뿐인 대상에 고유명사를 붙일 필요는 없 기 때문에 해가 해이듯 말은 그냥 말이다. 고유명사인 아라짓어는 고 아라짓 왕국에서 쓰였던 옛날 말을 의미한다. 아트밀은 그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라말은 허리를 굽혔다. 부서진 포석 조각들로 손을 뻗은 사라말은 밤톨보다 조금 더 큰 조각을 집어들었다. 똑바로 선 사라말은 그 돌 을 움켜쥐었다. "저는 용을 기다리다 친구를 놓쳤습니다." 머리를 감싸쥔 아트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제 친구입니다. 당신을 위해 제 용을 죽이겠습니다." 형언하기 힘든 굉음이 울려퍼졌다. 아트밀은 뜻밖의 소리에 놀랐다. 무엇인가가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발소리가 났다. 곧 사라 말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트밀은 몸을 돌렸 다. 조금 전 사라말이 서있던 바닥을 본 아트밀은 잘 이해되지 않는 것 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새빨간 가루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자세 히 본 아트밀은 그것이 피에 젖은 모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왜 모래가 그곳에 있는지 아트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리를 향해 솟아오른 정우는 땅에 내리는 찌르레기처럼 하늘치 위 에 내려섰다. 하늘치 어디 쯤에 아버지의 일행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 한 동작이었고, 그 때문에 소리의 등에 내려선 후에는 약간의 어지러 움을 느꼈다. 정우는 눈을 꼭 감은 채 어지러움이 사라지길 기다렸 다. 딱정벌레의 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재빨리 머리를 감싸쥐었지만 딱정벌레는 꽤 먼 곳에 착륙했다. 눈을 뜬 정우는 먼 곳에 착륙한 탈 해를 보았다. 번뜩이 위에서 내려온 탈해는 그녀에게 똑바로 다가왔 다. 정우는 '봤어?' 하는 눈으로 탈해를 봤고 탈해는 고개를 끄덕였 다. 그들은 동시에 방향을 바꿔 걸어갔고 잠시 후에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번뜩이는 그들의 뒤를 따라 엉금엉금 걸었다. 그들의 앞쪽에 있던 구릉 너머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멈칫한 탈해는 서툰 동작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정우는 재빨리 그의 팔 을 붙잡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탈해는 구릉과 정우를 번갈아 바라 보다가 칼자루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때 구릉 위편에 고함이 들려왔다. "거기 서! 제이어!" 탈해는 다시 불안을 느꼈다. 정우는 그를 가로막듯 앞으로 나섰다. 잠시 후 언덕 위에 회색빛으로 보이는 옷차림의 인간이 나타났다. 정 우와 탈해를 본 그 인간은 뒤를 향해 쉰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있습니다. 공자님!" "그래, 알았어! 거기 서 있어!" 정우가 확인하듯 말했다. "시카트의 목소리야." 시카트 규리하가 나타나 회색 옷의 남자 옆에 섰다. 그리고 아이저 규리하와 이이타 규리하, 그 외 여러 사람이 제이어의 뒤를 따라 구 릉에 올랐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검은 레콘을 보고 불안감을 느낀 탈 해는 아이저 규리하에게 그 레콘을 제외한 다른 누구와 함께 내려오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때 정우가 구릉 위로 태연히 걸어올라 갔다. 탈해는 깜짝 놀라 정우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올라가던 정우는 그대로 스르륵 날아올랐다. 탈해는 황급히 달렸다. 구릉을 따 라 부는 바람처럼 솟아오른 정우는 아이저 앞쪽에 조용히 내려섰다. 아이저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움직임에 신음이나 감탄을 흘렸다. 숨을 약간 헐떡거리는 탈해가 도착하자 정우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표 정을 짓고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좋은 꿈 꾸셨어요, 아버지? 2년만에 뵙는군요." 엄밀하게는 2년이 못되는 기간이다. 두 사람이 소발굽 바위에서 기 묘한 방식으로 헤어진 것은 31년 겨울이었고 지금은 33년 봄이니까. 정우는 두 동생들에게도 인사했다. "좋은 꿈 꿨니, 이이타, 시카트?" 이이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한 번 꾸벅했고 시카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려보였다. 아이저의 주위에 있는 자들 중 모르는 얼굴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정우는 계속 말했다. "저는 정우, 아, 킴 이름으로는 비셀스 규리하고 이 도깨비는 즈믄 누리의 무사장 탈해 머리돌이에요. 모두들 좋은 꿈 꾸셨어요?" 정우가 그들 모두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자 자신이 대화할 거라 믿고 있던 아이저도, 그리고 옆에서 듣기만 할 거라 생각했던 다른 자들도 모두 약간씩 당황했다. 어떤 이는 정우의 인사를 무시했고 어 떤 이는 무의식 중에 화답의 미소를 지었다. 이이타의 곁에 서있는 여자 또한 그런 미소를 지은 사람이었다. 정우는 그 여자가 이이타의 연인이라는 소리 로베자일 거라 추측했다. 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커 다란 검은 레콘은 지멘일 테고 그 곁에 있는 외눈의 여자는 아실일 것이다. 회색 옷의 남자를 본 정우는 그 옷이 때를 타서 그렇게 된 것일뿐 원래는 흰색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 남자가 제이어 솔한일 거라 짐작했다. 그 때 아이저가 말했다. "규리하의 말을 들었느냐?" 소발굽 바위에 있었던 정우와 시카트를 제외한 사람들은 아이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각자의 의문으로 아이저를 바라보는 것을 본 정우는 설명하듯 말했다. "아뇨. 아버지. 규리하가 제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은 듣지 못했어요." "하지만 너는 단 한 사람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규리하를 지켰다. 발케네군을 쫓아낸 것도 너고 황제의 공격을 막은 것도 너였다." "그 일을 한 것은 하늘치와 꿈이었어요. 제가 아니라." "네가 다룰 수 있는 것은 네 것이지." 정우는 아이저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말로 부정하지 는 않았다. 아이저가 계속 말했다. "규리하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왜 그렇게 규리하를 지켰지?" "그만두십시오. 각하." 잘라들어오듯 말한 사람은 제이어였다. 제이어는 투덜거리듯 말했 다. "규리하가 각하께 돌아와서 나를 가지라는 말을 했습니까?" 아이저는 입술을 빨아들인 채 제이어를 노려보았다. 제이어는 파리 를 쫓는 듯한 동작으로 손을 휘저었다. "따님을 유도심문하지 마세요. 각하께 무슨 부끄러움이 있는 건지 궁금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 잘했나, 누가 잘못했나 따질 때도 아닙니다." "내게 무슨 부끄러움이 있다는 거냐?" "죽이려 했던 딸에게 규리하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어려 운 것 아닙니까. 그래서 따님이 규리하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그런 거라는 말씀을 하게 유도하시는 것이고요. 보고 있으면 재미있겠지만 지금은 재미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저를 보세요." 제이어는 정우를 향해 빙글 돌았다. "각하. 아스캄에서 각하를 쏜 것은 저였습니다. 죄송합니다." 탈해는 경악하여 제이어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툰 동작으로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도깨비에겐 어울리지 않는 그 착용물에 주의하던 사 람들은 탈해의 느린 동작을 보고는 그것을 장신구의 수준으로 격하시 켰다. 정우가 다시 탈해의 손을 부여잡아 그를 만류하고는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그 사과는 받지 않겠어요. 미안해서 하는 사과가 아니라 일을 빨리 빨리 진행시키려고 하는 사과니까. 하지만 그 때문에 늑장 부리지도 않겠어요." 제이어는 킥 웃듯이,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고 웃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이건 진짜 감사입니다. 사실 늑장부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신을 죽여야 하거든요." 정우는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신은 스스로 죽으시는데 왜 우리가?" "예? 아, 자신을 죽이는 신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도깨비, 예. 도 깨비들의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인조신입니 다." "인…… 조…… 신이오?" "그렇습니다. 공전절후의 천재가 무한한 가변성을 허용받은 용근을 재료 삼아 감히 만들어낸 신이지요." 아이저는 제이어가 왜 화려하게 말하는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 다. 탈해와 정우를 가리켜 두 명의 도깨비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 만 두 사람은 이야기에 대한 도깨비의 열광을 똑같이 보이며 제이어 의 말에 집중했다. 솟아오른 정우가 소리의 등 위로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들은 재빨리 주위로 흩어졌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만 만약 소리의 위쪽에서 정우의 시체가 떨어진다면 그들은 즉각 보복 공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늘에 떠있는 하늘치를 향해 어떤 공격을 가해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규리하 의 병사들은 지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공격에 대비하는 형태 로 흩어졌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신뢰감 있는 눈으로 북쪽 주랑 위에 서있는 단구 의 무사를 바라보았다. 판사이 남작 발리츠 굴도하는 다른 이보다 훨 씬 선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그는 말리를 향해 뛰 어올랐던 것처럼 소리를 향해 뛰어오를 생각이었다. 미미한 차이나마 소리와 더 가까운 주랑 위에 서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우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관찰한 지금 발리츠는 자신의 도 움이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흉벽에 몸을 기댔다. 그가 본 정우의 비행은 날개를 가진 새를 능가한다 표현해도 무방한 수준 이었다. 그녀가 하늘치 위에서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듯하다. 발리 츠는 장창 또한 흉벽에 기대 세워놓고는 소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그래요. 각하. 안심하셔도 되겠군요." 금슬 좋은 부부는 나가가 아니라도 니름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발리츠는 빙긋 웃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주랑 저편에서 아이넬 굴도 하 남작부인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작의 자세를 본 순간 그의 마음을 읽은 아이넬은 덧붙여 말했다. "독수리라도 정우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남작 부인은 남작의 곁에 서서 흉벽에 등을 기댔다. 멀리서 본다면 어머니와 아들 쯤으로 보일 테고 실제로 하늘을 경계하던 병사들 중 일부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짓는 일도 있었지만 양주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여름 저녁 툇마루에 앉아 마당을 뛰어다니는 병아리들을 보는 노부부와 규리하성의 흉벽에 기대어 하늘치를 올려 다보는 남작부부의 모습이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작부인이 말했다. "오라버니가 정우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요?" "글쎄요. 처남께서 규리하 탈환을 시도하려면 말리를 들이받은 직후 에 그렇게 했어야지요. 압도적인 무력 시위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 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방문했던 자들이 받은 인상도 그렇고 여러 가 지 정황으로 보아 그 공격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 같습니다. 처남께 서는 하늘치만 가지고 황제에 대항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지 상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부녀지간에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질 공산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심 어린 화해는 아니더라도 전략적인 화해는 충분히 가능하지요. 처조카에게도 저런 도움은 필요할 테니까 요." "둘이 화해한다면 황제에 맞서 이길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요즘 지러쿼터 산맥을 기준으로 세상이 둘로 나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러쿼터 산맥 동쪽은 상식이 통하며 예측이 가능한 세상이지만 그 서쪽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 습니다. 이쪽 동네에선 잘 통하지 않는 상식을 억지로 적용해본다면 승산이 높지는 않습니다. 대장군이 민들레 여단과 함께 지러쿼터 산 맥을 넘어왔다고 하니까요." 남작부인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칼리도백은 무적이지요." "상식의 세계에서는 그랬지요." "칼리도백이라면 비상식도 이겨버릴 거예요. 각하." 발리츠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주랑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지요. 우리는 칼리도백과 싸워야 합니다. 황 제와 싸워야 합니다. 말리를 향해 뛰어올랐을 때 내가 갈 길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부인." 아이넬은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조금 후 그녀는 눈물이 그렁해진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이넬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니 름의 작용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해 아래를 보던 발리 츠는 아내의 눈물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아이넬을 올 려다보았다. 아이넬이 목이 메어 말했다. "저와 결혼하시는 것이 아니었어요. 각하." 발리츠는 아이넬의 눈물이 떨어지는 순간 세상이 파괴될 거라 믿는 사람처럼 당황하여 말했다. "부인, 부인. 왜 그런 말을 합니까." "판사이의 통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각하를 사지로 끌고 왔어요." "부인, 그러지 말아요." 발리츠는 황급히 손을 뻗어 아내의 눈물을 닦았다. 발돋움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팔은 꽤 들어올려야 했다. 아내의 눈물을 정성 껏 훔쳐낸 발리츠는 그녀의 손을 부여잡았다. 아이넬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벌어진 발리츠의 입에서 뜨거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발리츠는 떨리는 목소리로 시를 읊조렸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내여……" 아이넬은 갑자기 다리가 없어진 사람마냥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 고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발리츠는 얼빠진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이넬은 자제력을 완 전히 잃은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었다. 조금 후 그럭저럭 평상심을 되찾은 발리츠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부인. 내가 시를 낭송하는 것이 그렇게 웃깁니까?" "시!" 아이넬은 단말마처럼 외치고는 다시 웃었다. 그녀는 질식하려는 사 람처럼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채 아내를 바라보던 발리츠는 못 말리 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조금 후 가까스로 진정하게 된 아이넬이 흥건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다시 해보세요. 각하." "싫어요." "오, 제발. 해보세요. 이런. 다른 여자들이라면 정말 좋아할 텐데 나는 왜 이렇게 웃기지? 아, 아냐. 이 말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각 하. 정말 고마워요. 들을게요. 낭송하세요. 그 시, 시, 컥, 시, 피 힙! 아, 이런. 왜 이러지? 그러니까 시를, 풋! 푸픕!"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넬을 보며 발리츠 는 잔뜩 골이 났다.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알았으니 하지 말아요. 부인. 그리고 낭송은 안 합니다." 아이넬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똑바로 선 남작부인은 우람한 팔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 하고는 턱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작은 포기하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이넬은 발리츠를 꼭 껴안았다. "정말 고마워요. 각하에겐 진짜 어울리지 않아서 웃겼지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지요?" "부인 잘못입니다. 내 앞에서 그렇게 우는 것도 정말 부인답지 않다 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아, 이런. 제 잘못이네요." 아이넬은 큰 손으로 남작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발리츠는 오 싹해질 만큼 기분 좋은 손길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넬이 유쾌하지만 약간 서러움도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어렵겠지요?" "같이 있으니까, 상관없지요." "큰 말에 올라타 장창을 휘두르셔야 하는데. 일개 창병처럼 이렇게 땅에 서있으시면 안 되는데." 발리츠는 그가 말하지도 않은 아쉬움을 아내가 정확히 집어낸 것에 놀라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정우와 함께 황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이미 반론의 여지가 없다. 발리츠 자신의 말처럼 허공에서 나가들과 싸웠을 때 그의 미래 는 결정된 것이다. 그것이 판사이 통일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만, 심지어 판사이를 잃거나 목숨까지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이지만 발리츠는 후회와 원망을 버리기로 했다. 억울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 기 때문은 아니다. 후회나 원망은 아무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남 작은 그럴 시간에 황제에 맞설 방도나 강구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 각했다. 하지만 말을 탈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가슴 아픈 일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말도 환상계단을 만들어낼 수 없다. 발리츠는 지상에서 싸우 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엘시가 이끌고 온 지상군은 민들레 여단의 레콘이었고 발리츠는 레콘을 상대로는 어떤 말에 타더라도 싸 울 생각이 없었다. 서로 합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빌리츠는 자신의 상 대가 나가 병사라고 은연중에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결은 지난번 과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그곳은 말들이 갈 수 없는 장소다. 두 다리를 이용해서 싸운다면, 남작의 짧은 다리는 확실히 약점이다. 남작은 불평을 그만두기로 했다. 역시 도움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 다. 환상계단을 만들 수도 없었다면 그에게 허락된 전장은 하나도 없 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환상계단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두 다리 로 서서 싸워야 한다 해도 나가들과 싸울 수는 있다. 발리츠는 아내 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환상 계단을 만들 수는 있지요." 발리츠를 안고 있던 아이넬의 몸이 움찔했다. 남편에게서 몸을 뗀 아이넬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예? 어, 가능하지 않습니까?" 아이넬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발리츠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 내가 졸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넬은 졸도하는 대 신 발리츠의 두 팔을 꽉 붙잡았다. "정말요?" 아내를 대단히 사랑하는 발리츠는 아내가 어떻게 된 것인가 생각하 기에 앞서 자신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의심해보았다. 하지만 그가 환상계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었다. 발리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지요." "대단하세요! 각하!" 아이넬은 남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허리를 폈고 그러자 발리 츠의 두 발은 당장 땅에서 떨어졌다. 아이넬은 남편을 들어올린 채 빙글빙글 돌았다. 발리츠는 기겁하여 외쳤다. "다, 당장 그만두세요! 부인!" 아이넬은 남편을 내려놓았다. "아, 죄송해요. 각하. 창피하셨지요?" "창피? 아니오. 여긴 높은 곳이란 말입니다. 위험했어요." 그 대답은 아이넬로 하여금 다시 남편을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고 싶 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아이넬은 간신히 자신을 자제하고는 발리츠 의 두 손을 붙잡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각하." 발리츠는 도대체 왜 자신이 이런 칭찬을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있으 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내의 정신 상태에 대해 슬픔 속에서 의 심했다. 아이넬은 그가 칭찬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안 타깝게도 그 설명이 끝나자 발리츠의 슬픔은 더욱 커졌다. 엘시 에더리는 말리의 나루터에 서서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는 규리 하의 땅을 바라보았다. 전통적인 봄의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흰빛 일색이었던 풍경 은 이제 좀 다채로운 색깔로 변해 있었다. 검은 색과 누런 색, 회색, 그리고 다갈색과 암초록 등의 빛깔들이 겨울의 백색이 남겨준 영토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엘시는 나루터 끝까지 가서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민들레 여단의 레콘들이 앉아있거나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 병사들의 모습까지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엘 시는 허리를 숙였다. 그 때 저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엘시는 비명이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이레 달비가 공포에 질린 표 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백작은 주위에 어떤 위험이 있나 살펴보았 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몸종의 도착을 기다렸고 충성스러운 몸종이 그의 어깨를 확 움켜쥐었을 때 조금 놀 랐다. 이레는 자신의 옷으로 불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본 어머니마 냥 두려움과 분노에 빠져 외쳤다. "위험합니다, 가주님!" "위험하다고?" "어쩌려고 이 끄트머리까지…… 갑자기 바람이 불면 어떡합니까?" 엘시는 이레의 걱정을 이해했다. 그는 이레의 손을 밀어내고는 묵묵 히 몸을 돌려서는 나루터 밖으로 걸어갔다. 기절할 뻔했던 이레는 엘 시가 나루터 바깥의 허공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기 시작했다. 이레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계속 환상계단 위에 서계셨던 겁니까?" "이런 위치라면 그것이 안전하지." 엘시는 다시 나루터쪽으로 걸어왔다. 이레의 앞에 선 엘시는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몸종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부르셨습니다." 황제의 방에는 여전히 온기가 없었다. 황제는 흑사자 모피를 몸에 두른 채 방 가운데 서서 엘시가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엘시가 멈춰서서 경례하자 황제는 대답하듯 말했다. "규리하로 진격하라." 황제가 불렀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런 말을 들으리라 예상했기 에 엘시는 그 단도직입적인 명령에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엘시는 명 령을 수행하러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폐하. 왜 규리하를 공격해야 합니까?" 엘시의 말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엘 시의 뜻을 이해했다. 하지만 황제는 규리하가 제국에 끼치는 폐단에 대해서도, 황제를 공격한 딸과 아버지의 무도함에 대해서도, 일만육 천 년간 이어질 위대한 제국의 초석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황제 의 대답은 짧았다. "짐이 명령하니까." 엘시는 목례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대략 반 시간 후, 가시나무 군단 31중대원들을 한 명씩 등에 태운 민들레 여단이 서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 라 하늘치 말리가 서서히 움직였다. 아무도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낙조를 향해 달리는 동반자는 하나 더 있었다. 말리보다 더 높은 곳에서 태양이 그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쪽에 있는 낙조의 땅에는 겨울이 되살아나 고 있었다. 비나간에서 겨울은 더 이상 부활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 곳은 규리하였다. 그들은 겨울을 향해 달렸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8. 돌의 추락, 바람의 복상 (3) | 2004·11·26 08:06 | HIT : 39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8-3 관련자료:없음 [49414]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26 07:24 조회:30 피를 마시는 새 38. 돌의 추락, 바람의 복상 - 3 바람 막을 것 없는 밋밋한 하늘치의 등 위에서 제이어 솔한은 열정 적으로 말했다. "모든 것이 뒤틀린 것은 대호왕이 한계선을 넘어 북부로 왔을 때였 습니다. 사건을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관계자들이 사망하거나 함 구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제신이 대호왕 과 함께 나가들을 징벌하러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남쪽으로 내려갔 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제이어 솔한은 몸을 돌려 아스라하게 보이는 유적들을 가리켰다. "모든 하늘치의 등에 있는 저 유적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아시겠지요? 티나한으로 하여금 올라가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했고 결국 하늘치 발굴대를 조직하게 한 저 유적 말입니다. 저것은 누가 남겨둔 것이겠습니까? 네 선민종족 중 누구도 저것을 건설했다는 기록을 가 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건설하기는커녕 티나한의 하늘치 발굴대가 최 초로 하늘치에 오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하늘치의 등에 올라와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유적은 누가 남겨둔 것이겠습니까? 선민종 족은 넷이 아닙니다. 원래 다섯이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알지 못 하는 첫 번째 종족이 있었습니다. 증거가 불충분한 이야기에 따르면 두억시니는 그 첫 번째 종족의 후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이어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앉거나 서서 제이어를 바 라보고 있었다. 시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억시니가?"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선민 종족에 대한 증 거는 하늘치와 하늘치 유적으로 충분합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지 상을 거닐지 않지만 다른 네 형제, 그러니까 인간과 레콘, 도깨비, 나가에게 어떤 약속을 남겨두었습니다. 그 약속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때가 오면 하늘치는 네 선민 종족의 부름을 받고 지 상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가들을 징벌하기 위해 화신들이 하텐그라쥬로 달려간 사이에 하늘치 발굴대가 하늘치를 오 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다른 동물들도 하늘치에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그것은 엄중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무사 장!" 탈해는 기겁하여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어는 무사장을 향해 한 발을 성큼 내밀며 말했다. "티나한의 하늘치 발굴대가 하늘치에 오르기 전까지 딱정벌레들은 하늘치의 등에 내려서지 않으려 했습니다. 맞습니까?" "아, 예. 맞습니다. 딱정벌레가 하늘치에 다가가는 것을 싫어했지 요. 아무리 다그쳐도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티나한의 발굴대 는 딱정벌레 없이 하늘치에 오르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습니다." "딱정벌레만이 아닙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용들도 하늘치 에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뇌룡공 륜 페이는 아스화리탈을 타고 하늘 을 날 수 있었지만 그가 용을 타고 하늘치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없습 니다. 아마도 다른 생물이 사람을 태우고 하늘치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발굴대원들과 오 레놀 선사가 하늘치에 오른 이후로는 딱정벌레들도 하늘치의 등에 내 려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용도 마찬가지지요." 제이어는 감정을 고조시키며 외쳤다. "하지만 티나한의 발굴대에 의해 약속이 뒤틀려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늘치에 올랐지만 하늘치는 자신이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미 마케로우라 는 희대의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선제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보십시 오. 천재의 지능, 때가 이른데도 주어진 환상유적, 그리고 용의 포자 가 있었습니다. 아스화리탈이 뿌린 포자였지요." 이이타가 눈을 찌푸렸다. "용근에는 잘 알려진 용도가 있는데. 용인이 되는 것." "용인이 되면 초인적인 예민함을 얻게 됩니다만 그것은 사실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 감정도 통제하기 힘든 판국에 타인의 감정까 지 받아들여야 되니까요. 그래서 원시제께서는 용인이 되지 않으셨습 니다. 용인이 되는 것 외에도 용근에는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기 르는 자에 따라 한계 지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습의 용으로 자라 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원시제께서는 용을 재료 삼아 사람을 보 살피는 신을 만들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라세오날, 라 세, 치천제입니다." 그 사실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당연히 놀랐고 그 사실을 이미 들었 던 자들도 호흡을 억누르는 거센 충격에 헐떡였다. 제이어 솔한은 충 혈된 눈으로 사람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왜 그런 것을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내버려두면 서로 끊임없이 죽 여댈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오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싸우는 모습, 형과 아우가 다투는 모습…… 아버지와 딸이 목숨을 노리는 모습을." 제이어는 동작을 숨기려는 노력 없이 아이저와 정우를 번갈아 바라 보았다. 말과 표정으로 저지를 수 있는 폭력으로는 대단히 높은 수준 에 해당하는 것이다. 정우는 검지를 자물쇠처럼 구부려 입술을 눌렀 고 아이저는 창백한 얼굴로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피어 오르는 노기를 무시한 채 제이어가 말했다.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원시제께서는 우리에게 엄한 사육가를 주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엄중히 장악한 채 잘한 행동에 보상을 주 고 잘못한 행동에 벌을 주면서 우리 품종을 개량하는 겁니다. 충실하 고 애정과 인내심이 넘치며 쾌활하면서도 순종적인 후손을 얻으려는 거지요. 낯선 이야기는 아니지요? 우리가 이미 늑대에게 했던 일이니 까요." 정신없이 제이어의 말을 듣던 소리가 입을 열어 자그마하게 말했다. "개." 이이타는 몸을 움찔하고는 팔을 뻗어 소리의 어깨를 부여잡았 다. 소리는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적합한 자리인 것처럼 이이타의 가 슴에 머리를 기댄 채 넋을 잃은 얼굴로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어 가 냉소했다. "맞아. 소리. 늑대를 개로 만드는 거지. 그런데 육종가는 육종 대상 보다 오래 살아야 하거든? 일이 년 내에 쑥쑥 자라서 그 성질을 확인 할 수 있는 짐승들과 사람은 다르지. 사람은 너무 느리게 자라. 그러 니 라세는 일만육천 년 동안의 육종이라는 대담하기 짝이 없는 모험 을 시도하는 거야." 제이어는 심장을 적출한 나가들과 냉동장치, 그리고 징검다리를 건 너듯 자신에게 잠깐잠깐 생존을 허락하며 일만육천 년 동안 살아갈 아라짓 전사에 대해 설명했다. 그 설명은 정우를 숨막히게 했고 탈해 를 졸도할 지경으로 만들었다. 설명을 끝낸 제이어는 늘어뜨린 손을 움켜쥐었다. 탁한 목소리가 흘 러나왔다. "나는 숨이 막힙니다." 움켜쥔 주먹이 위로 떠올랐다. 제이어는 자신의 두 주먹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든 생물이 범할 수 있는 최후의 퇴폐는 현실로부터 박리되는 것 입니다. 흐림 없는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탐욕스러운 손을 뻗어 현 실을 움켜쥐는 대신 그 어떤 이유를 대어서든 뒤로 한 발짝 물러날 때,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이유를 대어 현실을 외면할 때 생명은 죽음보다 참혹한 타락으로 침몰합니 다. 치천제가 우리와 우리의 수십 대 후손들에게까지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삶입니다. 우리의 후손과 현실 사이에 언제나 이라세오날 이라는 질기고 불투명한 막이 끼여들 테니까요." 제이어는 두 주먹을 그대로 앞으로 뻗어 사람들을 겨냥했다. "결코, 결코 그런 일을 묵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찔러죽 이다 멸망한다면 그러라지요! 자기를 통제할 줄 모르고 현실을 통제 할 줄 몰라서 멸종한 생물의 무덤에 나는 어떤 조의도 바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생물이건 현실에 접촉할 기회마저 박탈 당한다면 나는 그것을 반드시 구출할 겁니다. 하물며 그것이 우리의 후손이라면 그들을 구출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 의 후손들을 위해 라세를 죽여야 합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다음 순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거 라고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말도 불편한 것이 되는 시점이 있는데 제이어의 말이 끝난 순간이 바로 그러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제이 어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랐다. "반짝거려보세요. 제이어."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사람들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제이어와 다른 이들의 시선이 합류된 곳에서는 아실이 조그마한 바위처럼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지멘이 망치 자루에 두 손을 얹은 채 역시 아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목 속에서 아실이 일어섰다. 아실은 양쪽 팔꿈치를 붙잡은 채 제 이어를 바라보았다. "흩어져보세요. 흘러보세요. 녹아보세요. 줄어들어보세요. 쪼개져보 세요. 납작해져보세요. 끓어보세요." 정우가 입을 움찔거렸다. '우슬라 사르마크'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제이어는 눈빛으로 상대를 화형시킬 듯이 아실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아실?" "짐작한다면 말씀해보세요. 제이어." "아무래도 너는 현실을 인식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모양이군." 아실은 긍정도 부정도 없이 계속 말하라는 표정만 지었다. 제이어는 집게손가락으로 아실을 가리켰다. "하지만 사르마크 부인은 현실을 통제할 수 없다는 뜻으로 그런 말 을 한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린 손자에게 모든 개체는 가능과 불가능의 종합이며 무엇인가 를 할 수 없다는 것,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자신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 소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그렇게 말한 거지. 뭐든 다 할 수 있다 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제한성이나 불가능성은 가능성 만큼이나 중요한 개별성의 요소야." "고마워요. 제이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시는군요." 제이어의 사나운 눈초리 때문에 지멘은 아실을 보호하려는 동작을 취했다. 그는 깃털을 조금 부풀리고 부리를 조금 들어올렸다. 단순하 고 작은 동작이지만 그 동작을 끝내자 지멘의 모습은 훨씬 위압감 있 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멘과 아실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개체는 가능과 불가능의 종합이에요. 무엇인 가를 해내는 것만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는 없어요." 제이어를 바라보는 아실의 하나뿐인 눈은 진한 동정심으로 가득했 다. "바꿔 말한다면, 뭔가를 부정하는 것만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도 없 어요." 아실은 앞으로 걸어갈 듯 몸을 움직였지만 그녀가 선택한 최종방향 은 지멘이었다. 아실은 지멘의 다리에 몸을 붙이며 중얼거리듯 말했 다. "자신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먹기를 중단한 슬픈 짐승은 굶어죽고 말겠지요." 제이어가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정이라니?" "당신은 이라세오날이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잖아요. 왜 그러는지 도 모르면서."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는군.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뭐였는데? 귀를 막고 있었나? 왜 그녀를 제거해야 하는지 설명했잖아!" "미안하지만 지적해야겠군요." 아실은 눈을 내리깔았다. "화려한 말, 감정을 자극하는 말들은 많았어요. 그건 인정해요. 하 지만 내용은 없었어요. 죽은 기사들을 조문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지 만 그런 척하기 위해 입는 당신의 그 하얀 옷과 마찬가지에요. 제이 어. 당신은 황제의 계획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몰라요." 민들레 여단과 가시나무 군단 31중대, 그리고 하늘치 말리는 지러쿼 터 산맥에서 흘러내려와 후사린강의 지류가 되는 문강 중류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식수가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히도큰 하장군은 그 야 영지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여단을 강이 보이지도 않는 위치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31중대의 중대원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강변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그들은 쑤시는 팔다리의 통증을 잊기 위해 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러쿼터 산맥에서 흘러내려온 눈 녹은 차가 운 강물은 쾌활한 소리를 내며 흘렀다. 레콘의 등에 얹혀 이동하는 중대원들의 고통을 알기에 쟈마 데시마 스 수교위는 초병을 세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적지 한복판을 이동 중 인 병력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도 수교위에게 항의하지 않 았고 데시마스 수교위도 자신이 엄청난 파격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 하지는 않았다. 야습의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레 콘 병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레콘 여단에 맞서 유격전이나 회전 을 시도할 만큼 멍청한 장수는 규리하군에 없을 테니 규리하군이 선 택할 수 있는 길은 농성뿐이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도 수교위의 결 정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312소대장 틸러 달비 부위가 잠들지 않은 것은 야간 경계의 의무 때문은 아니다. 틸러는 강변의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검은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1월이지만 규리하의 밤은 겨울이었고 틸러는 가끔 손바닥 안에 입김을 불어넣어야 했다. 군인의 지상과제는 명령이다. 전투 준비를 갖춰 규리하로 이동하라 는 명령을, 틸러는 전투 준비를 갖춰 규리하로 이동하라는 명령으로 만 해석했을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 다. 도무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운 론솔피의 등은 사고 행위를 주 저없이 포기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하지만 틸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대단한 군사적 지식이나 탁월한 사고력이 없어 도 가능한 일이다. 규리하시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틸러는 자기 기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강의 물결 위에 서 보름달이 표류하는 것을 보며 틸러는 코를 한 번 들이마신 다음 자신의 태도를 규정했다. '나는 규리하공 아가씨와 싸우러 가고 있어.' 대단한 충격이나 감정적 동요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동안 심상화하 지 않았을뿐 그것은 악타그라쥬를 떠날 무렵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 었다. 틸러는 차가운 콧망울과 콧등을 만지작거렸다. 제국 정치의 오묘함에 대해 틸러는 환상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틸러는 자신에게 충성하겠다고 고집부리는 변경백을 때려잡은 황제에 대해 놀라워할 정도로 정치 문외한은 아니었다. 그는 그 사실 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이미 한 번 정우를 대상으로 그렇게 했다. '제가 사람으로 대접해줄 테니 만족하면 좋겠군요.' 하지만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 였다. 제국의 권력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직, 간접적 갈등과 분쟁을 보며 틸러는 '이해는 되지만 나라면 다른 방도를 찾아볼 텐데'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물론 틸러에게 의향을 물어본 사람은 아무 도 없었고 틸러도 그들에게 조언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과 무관한 것 이라고 생각했기에 틸러는 제국 정치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하고 가슴 으로는 생경함에 놀라워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뭘 하고 계시죠, 여러분.' 귀뿌리가 조금 아팠다. 틸러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모포를 머리 위 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틸러는 그가 아직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황제가 정우를 공격하는 것에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고 싶 지 않은 것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틸러. 저도 죽는 건 싫어요.' 그와 정우가 처음 만났을 때와 같다. 틸러는 시카트가 자기 누나를 죽이려 한 것을 이해했고 인정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상황도 다를 것 은 없었다. 틸러는 황제가 정우를 공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이고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인정할 수 없는 이유일 테니 굳이 알고 싶지 않다. 틸러는 그렇게 생각하며 모포 자락을 턱 아래 에서 여몄다. '믿고 싶어요.' 모포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렸을 때 틸러는 단단한 막대기가 가슴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틸러는 손바닥으로 그 것을 눌러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틸러는 머리와 어깨를 뒤로 젖혔다. 모포가 그의 등 뒤로 주루룩 흘 러내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틸러 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비녀는 그의 체온으로 미지근했다. 틸러는 그것의 양끝을 붙잡고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틸러는 눈을 감았고, 조금 후에는 이를 악문 채 얼굴 전체를 일그러 뜨렸다. 볼은 위로 한껏 치켜올라갔고 미간 아래엔 굵은 주름이 여러 개 생겼다. 틸러는 소리 없이 울었다. '오니.' 황제는 돌아왔지만 하늘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누리의 시민들 또한 많은 수가 사라졌다. 그런 미귀환자 중에는 하늘누리 수 도국원이자 틸러의 고향친구인 오니 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하늘누리가 폭주했고, 야심가들이 발호했고, 틸러는 제국군을 규합 한다는 엄청난 모험에 나선 엘시를 따라다니느라 분주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숨쉴 새도 없이 시모그라쥬군과의 전투로 이어졌다. 어쩌면 전설이 될 수도 있 었을 그 여정은 엔거 평원에서 일어난 이상한 종말 때문에 아마 전설 의 자격을 잃었을 것이다. 황제의 귀환이 더 극적인 전설감이니까. 그런 바람을 가졌던 적이 없기에 틸러는 전설의 일부가 되지 못해서 섭섭하지는 않았다. 틸러는 아무 불만 없이 남부의 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엘시의 다음 여정을 따라갔다. 규리하를 떠난 이래 그의 나날은 눈, 코, 입을 흘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분주하게 흘러갔 고 제국을 종단하는 최근의 여정은 자칫하면 영을 흘릴 만한 것이었 다. 그리고 그는 규리하로, 떠났던 곳으로 질풍처럼 돌아왔다. '오니.' 오니는 죽었을 것이다. 그렇잖으면 오래 전에 나타났을 테니까. 하 늘누리와 함께 사라진 많은 것들처럼 틸러의 친구 오니 또한 세상에 더 이상 자기 그림자나 발자국을 남길 수 없고 다만 추억 속에서만 그럴 수 있게 된 것이다. 틸러는 추억 속에서 오니를 불렀다. 그러자 오니가 말했다. '너 그 아가씨 지켜야 되냐?' '아니. 그러기는커녕 지금 싸우러 가고 있어. 웃기는 일이지.' '너 그 아가씨 지켜야 되냐?' 틸러는 신음했다. 추억 속의 인물은 새로운 말을 할 수 없다. 그는 무릎을 세워 거기에 얼굴을 파묻고는 목이 메인 소리를 냈다. "거기 누군가?" 틸러는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청회색 달빛 속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멍한 기분 속에서 틸러는 오늘 밤의 군호가 무엇인 지 생각해보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초병을 세우지 않았기에 군호도 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틸러가 떠올린 것은 그 사람이 바위 위로 올라 와서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된 후의 일이었다. "틸러 달비 부위인가?" 틸러는 일어나서 경례했다. 엘시가 말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하늘누리와 함께 사라진 친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장군님." 엘시는 틸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대답 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당황하게 된 틸러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뭣 때문에 주무시지 않고……" "잠이 오지 않더군. 앉게. 달비 부위." 두 사람은 바위 위에 앉았다.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웠던 틸러는 안절 부절 못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자신의 모포를 들어올려 대장군에게 내밀었다. 엘시는 그것을 사양했다. 침묵. 강물이 두 사람을 흘깃거 리며 흘러갔고 보름달 아래로는 북쪽으로 돌아오는 철색의 그림자가 얼비쳤다. 엘시는 병사들의 사기를 점검하려는 장수처럼 말했다. "부하들은 어떤가?" "이동하는 방식이 편안하다고 하기는 어려워서 최적의 상태는 아닙 니다." "그건 나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군. 몸 말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 은?" 틸러는 고민에 빠졌다. "규리하공이 왜 아버지와 손 잡고 황제 폐하를 적대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것이 공식적인 전쟁 이유다.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가 아버지에 게 부화뇌동하여 규리하를 방문한 황제를 죽이려 했다는 것. 그리고 엘시는 틸러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이유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와 틸러가 알고 있는 정우에 대해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것 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황제가 그녀를 차기 황제의 아내로 지명 했는데 정우가 왜 황제를 공격한단 말인가? '시집 가기 싫어서'라고 대답하면 어울릴 듯한 멍청한 질문이다. 많은 전쟁이 그러하듯 이 전 쟁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 엘시는 자신이 왜 싸우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황제의 명령이니 까. 하지만 엘시는 그런 대답이 틸러를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 다고 생각했다. 엘시는 약간 자신없는 태도로 말했다. "우리가 규리하를 떠난 후 이곳이 고요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규 리하공에게 심정의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일이 있었나 보지. 제국군 이 규리하령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항의나 변명 어느쪽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규리하공은 폐하께 대적하려는 결심을 굳힌 것이 분명하다. 그 녀의 이유가 무엇이든 폐하께 적대하는 세력이라면 우리의 적이다." 다른 때였다면 틸러는 엘시의 말을 대화 종료의 의미로 해석했을 것 이다. 하지만 심한 감정 변화와 엘시의 미지근한 어조 때문에 틸러는 그의 아버지가 놀랄 만한 반응을 보였다. "폐하께서 폐하이시기 때문입니까?" "무슨 말인가, 부위?" "대장군님. 황제가 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 황제가 되는 것과 모든 사람과 함께 황제가 되는 것. 그런데 전자의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자신을 황제로 만들 수 는 없습니다. 레콘 부대를 가지고 있으니까, 남부의 제국군을 가지고 있으니까, 황제의 대장군이었으니까 황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 다. 불손한 말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선택했기에 황제 입니다. 만약 황제라 하더라도 천하만민이 모두 부정한다면 황제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장군님이 귀족원 회의를 통한 새 황제의 선출을 주장하시는 것이 기뻤습니다." 엘시는 날카롭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을 조심하도록 하게. 그래서?" "돌아오신 폐하께서…… 거부하는 무리를 제거하는 일에 열중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혼자 황제가 되려는 것처럼." 엘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모든 것을 부드럽게 바꾸는 달빛 때 문에 그의 얼굴이 딱딱해진 것은 드러나지 않았다. 틸러는 자신의 입 이 주인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계속 말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입니다만…… 만약 폐하께서 반대하는 자들을 설득하는 대신 모두 제거하려 하시는 거라면 폐하께서는 발케 네공이나 시모그라쥬공, 비나간후 등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 니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적했던 것처럼 나는 황제 폐하께 대적해야 하 나?" "대장군님!" "그런가?" 명백히 겨울에 속한 밤이었지만 틸러는 진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냉혹한 배신자인 입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고 틸러는 차라리 앞쪽 에 있는 강물에 뛰어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와.' 갑자기 틸러는 입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틸러는 눈으 로 하늘을 가리키고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저 분은 대장군님의 황제입니까?"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엘시가 말했다. "나의 황제이시다." 대답하는 어조는 확고했지만 틸러가 들은 것은 대답에 선행했던 침 묵이었다. 틸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엘시 또한 그러했다. 조금 후 그들은 잠자리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처럼 헤어졌다. 높이 뛰어올랐던 지멘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멘이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던 아실은 피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 다. 그녀의 믿음은 정확했다. 쿵! 지멘은 아실의 옆에 내려섰다. 아 실은 다급하게 질문했다. "찾았어요?" 지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실은 실망한 얼굴을 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저쪽으로 가봐요." 아실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지멘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아실은 짐짓 낙 담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살아있는 생물의 등 위에서 사람을 찾아다니다니, 좀 어이 없는 일 이죠?" 지멘은 긍정의 대답처럼 들리는 말을 웅얼거렸다. 기운이 북돋아지 는 대답은 아니었다. 아실은 입을 다문 채 하늘치의 등에 있는 구릉 하나를 걸어올라갔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밤이 와 어둠이 내려앉는다면 제이어 솔한을 찾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과연 밝기가 문제인 것 일까? 지멘과 아실 모두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문제는 밝기가 아닌 높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도망치기 직전, 제이 어는 하늘치 밖으로 몸을 던질 것 같은 절망감에 찬 표정을 짓고 있 었다. 아실이 기다리지 못하고 지멘과 함께 그를 찾아나선 것도 그 표정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릉 위에 올라선 아실은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손나 팔을 만들어 외쳤다. "제이어-!" 메아리는 없었다. 아실의 말소리는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제이어가 그 소리를 들었다 해도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실의 부 탁으로 지멘이 내지른 계명성에도 제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어 가 하늘치의 등 위가 아니라 규리하의 차가운 땅에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진저리치며 아실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제가 나빴어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아실의 뒤에 선 지멘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실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멘은 아실의 앞쪽으로 걸어가 망치를 바닥에 내려 놓고는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 손으로 아실의 어깨를 살짝 감싸쥐었 다. 아실은 머리를 들지 않았다. 철의 대화가 해소되었다는 것에 감사하 며 지멘이 부리를 열었다. "네 잘못이 아냐."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누른 채 아실이 도리질쳤다. "아뇨. 제 잘못이에요.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빨리 알려주 고 싶어서…… 괜한 참견이었어요.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지만 그런 도움은 주지 않느니만 못한 거였어요." 지멘의 팔이 꿈틀했다. 어깨에 닿은 지멘의 손을 통해 그 전율을 느 낀 아실이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지멘은 두려움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멘?" "비난이 아니었어?" "예? 비난이오?" "자기가 뭘 바라는지도 모르는 그 멍청이의 멍청함을 비난한 것 아 냐?" "지멘. 불쌍한 사람을 왜 비난한다는 거죠?" 긴장 때문에 지멘의 목에서 깃털이 일어났다. "넌 멍청이를 증오하니까." "헤아림이 깊지 못하다는 것은 절대로 증오 받을 일이……" "너는 뭄토를 증오했어!" 아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멘은 무엇인가를 찾듯 아실의 작은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제이어를 뭐라고 불렀지?" "살인기사요?" "나이 처먹을대로 처먹고도 인격이 미성숙한 작자라고 말했어." 아실은 지멘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듯이 몸을 뒤틀었다. 지멘은 거 칠지 않게, 하지만 단단히 아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힘을 느낀 아 실은 저항을 곧 포기하고는 지멘을 응시했다.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네 말을 모두 기억해. 너는 나를 증오 했어." "지멘!" "타이모가 죽고도 6년이 지난 후에야 내가 겨우 분리주의에 대해 이 해했기 때문에 너는 나에게 화를 냈어. 너는 멍청함을 증오해." "타이모가 태어났던 곳에 돌아가서 기분이 좀 들떴던 거예요. 예. 그래서 예민해진 거죠." 지멘은 아실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너는 황제를 증오하고 가짜 레콘을 증오하고 제국을 증오해. 네 증 오는…… 일인일인." 아실은 그 말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아실이 그 말의 출처를 떠올렸 을 때 지멘이 말했다. "그래. 헤치카. 일인일인. 누구에게나 가지고 태어난 한 자루의 칼 이 있어. 네 칼은 날카로워. 네 속에 있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도 없 고 부러지지도 않아. 거기 있기 때문에 항상 무엇인가를 찌르게 돼. 네 칼날. 네 증오. 그게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지멘은 아실의 팽창된 동공, 벌름거리는 콧구멍, 가늘게 떨리는 입 술, 창백해진 볼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아실은 도리질 을 치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그대로 기울였다. 아실은 어깨 에 뺨을 기댄 채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지멘은 기다렸다. "알았어요. 예. 기억나요. 제겐 증오가 있었지요. 황제가 저를 완전 히 되돌려놓은 거냐고 물었죠. 그렇지 않아요. 제 증오는 돌려주지 않았군요." 거의 확신하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지멘은 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 꼈다. 아실이 머리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는 그 사실이 기뻐요." 지멘은 바람이 불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바람이 불면 그의 몸에서 깃털이 다 빠져 날아갈 것 같았다. 기우는 태양의 빛이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있는 소리의 왼쪽 나라미 에 네 사람의 규리하가 서있었다. 그리고 규리하의 이름을 쓰지 않는 사람도 두 명 있었다. 소리 로베자는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이타는 소리 로베자가 소리 규리하가 되는 것은 확고부 동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아직 소리는 로베자였다. 그래서 소 리는 아이저 규리하와 정우 규리하의 작별에 자신이 배석하는 것이 주제넘은 일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다섯 번째로 이이타를 바 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한 이이타는 정우의 뒤 편에 서있는 탈해를 눈으로 가리켰다. '여기엔 무사장도 있잖아.' 하 지만 소리는 무사장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어떻게 다 른 건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걱정은 완전히 불필요한 것이었다. 정우는 규리하 사람 전체 가 그곳에 있었다 해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며 아이저 규리하는 소 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저 는 이이타와 시카트, 탈해의 존재도 지각하지 못했다. 정우만을 직시하던 아이저가 말했다. "우습군. 황제가 너를 내게 겨눌 무기로 쓸 거라 생각했기에 너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지금 너는 황제에 대항하는 규리하의 무기군." 탈해가 얼굴을 약간 일그러뜨렸다. "각하. 각하의 따님이나 꿈을 무기라 부르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무기는 사람을 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꿈은 정우를 살렸고 또한 정 우는 규리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꿈을 썼습니다." 탈해의 존재를 잊어먹었던 아이저는 놀란 표정으로 무사장을 바라보 았다. 탈해는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목을 긴장시켰다. 대부분의 도 깨비들은 완벽한 씨름꾼의 체형을 가지고 있으며 탈해가 목에 힘을 주자 그것은 인상적일 정도로 굵어졌다. 탈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꿈이 다시 쓰일 일은 없을 겁니다." 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탈해." "아냐. 정우. 다시 꿈을 내보이면 안돼. 꿈이 네 화상을 막고 있잖 아. 다시 그 때처럼 하면 넌 다칠 거야.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탈해는 초조한 듯 손을 쥐었다폈다 했지만 눈길만은 정우에게 똑바 로 고정시켰다. 정우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발 근처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사람을 간지럽혔다. 참다 못한 시카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규리하 가문의 사람은 규리하를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해. 태어나 자마자 규리하를 떠난 규리하라도." 탈해는 울컥한 얼굴로 시카트를 바라보았다. 시카트는 아무 것도 없 는 곳을 바라보며 계속 중얼거렸다. "내 칼 앞에 목숨을 내놓지 않았으면 규리하를 위해서라도 내놓아야 해. 그 때 죽지 않았던 것의 빚갚음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아이저마저도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시카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폭 발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둘째 공자님! 그만두세요!" 시카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이이타의 앞 으로 나서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카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공자님의 누님이잖아요. 남매라는 것 은, 피붙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아끼고 지켜주는 거잖아 요. 따뜻한 말은 못할망정 어떻게 그런 표독한 말을. 누님께 사과하 세요!" 시카트는 콧김을 내뿜으며 소리를 노려보았다. 그가 막 폭언을 터뜨 리려 할 때 이이타가 움직였다. 이이타는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 는 동작으로 팔을 들어 소리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소리는 그 동작에 움찔했고 다음 순간 자신이 고함을 질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이 타는 겁에 질린 소리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시카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이타는 고개를 빙글 돌려 정우를 바라보았다. "시카트를 대신해서 사과하겠습니다. 누님." "형!" 시카트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이이타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남매 사이에 대신 사과하느니 하는 것이 좀 우습다고 생각됩니다 만, 받아주면 좋겠습니다." 사라말 아이솔이 만약 지금 아이저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규리하성 과 꿈은 정우에게, 그리고 소리는 이이타에게 속한 상태에 대해 아이 저가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얻었을 것이다. 아 이저는 갑자기 자신이 옆으로 끌려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이 타가 그것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오직 아이저만이 그것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규리하의 이름을 쓰는 세 남자의 무게 중심은 이이타에게 있었다. 아이저는 갑자기 거대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나 괴로운 피로는 아니었다. 정우는 슬픔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편하게 다시 말해볼래, 이이타?" 이이타는 고개를 들어 누나를 보고는 씩 웃었다. "저 녀석 대신 내가 사과해도 될까?" "난 화나지 않았지만 네가 그러고 싶다면 받을게." "고마워, 누나." 그런 다음 이이타는 특별히 상징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아 버지를 바라보는 것으로 무게 중심을 다시 아이저에게 옮겨놓았다. 아이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중심을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잊지는 않았다. "비셀스. 황제와 싸우는 것은 내 일이다. 너는 나설 필요가 없다." "아버지?" "우리가 승리한다면,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패 퇴된다면 네가 유일한 규리하다. 너 스스로 결정하거라…… 규리하 변경백으로서." 정우는 입을 벌린 채 아이저를 바라보았다. 아이저는 그 시간을 더 연장시키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하늘치의 등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 골이 난 표정의 시카트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이타는 정우에게 눈인사를 했고 소리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정우가 당황 하여 마주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올렸을 때 그 네 사람은 모두 등을 보인 채 걸어가고 있었다. 낮아진 태양 때문에 어두운 그림자가 진 하늘치의 등으로.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8-4 | 네크로맨서의 서재 2004/11/27 08:01 네스토르(rpgtown) http://cafe.naver.com/swallowedbird/6457 38. 돌의 추락, 바람의 복상 - 4 넓은 들판을 따라 도열한 병사들은 게으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패 전에 낙담한 병사들처럼 시큰둥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리하지도 않았다.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 다. 소대원들의 준비 상태를 관찰하던 틸러 달비는 시정해야 할 문제점 을 다른 사람의 손가락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발견했고, 그것을 전부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들을 최악의 군인이라 할 수는 없다. 레콘에게 업혀 제국을 종단한 군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도 그들은 전세계를 누비는 대장군의 편력에 동참했다. 그들 모두는 노련하고 인내심 있으며 상당히 성깔 있지만 씩 웃을 줄도 아 는 군인이며, 많은 장기를 가지고 있지만 특히 보급체계의 허술한 틈 을 파고드는 능력에 있어서는 쌍벽을 불허하는 병사들이며, 다른 누 군가의 발목을 잡아챌 염려는 없는 전사들이다. 그들이 피로 때문에 챙기길 포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시정하려고 시도해봐야 정력의 낭비 일 것이다. 틸러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래서 틸러는 앞쪽의 규리하성 을 바라보았다. 기시감은 당연하다. 실제로 과거에 같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30년에 도 틸러 달비는 자신의 소대와 함께 이곳에 서서 대장군의 돌격 명령 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도 같고 목적도 같고 주요 인물들도 같지만 틸러 달비가 서있는 33년의 풍경에는 과거의 그것과 다른 것들도 있 었다. 우선 병사들의 숫자가 과거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 다. 30년에는 가시나무 군단과 참나무 군단의 두 개 군단이 참가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중대 하나와 여단 하나뿐이다. 하지만 틸러 는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그의 중대 앞쪽에 있는 민들 레 여단이 풍기는 압박감은 열 개 군단이 부럽지 않은 것이었다. 아 스캄에서의 경험을 떠올린 틸러는 눈앞에 있는 규리하성의 모습에 골 케 남작의 성이 겹쳐보인다고 생각했다. 민들레 여단은 규리하성도 파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대장군은 규리하공 아가씨처럼 성을 묻으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겠지만. 하늘의 풍경도 다르다. 3년 전에 하늘누리가 떠있던 곳에는 말리가 떠있었다. 하늘누리든 말리든 아래쪽에서 보면 차이점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틸러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과거 하늘누리는 방관 자 같은 태도로 떠있었지만 말리는 전투의 흥분 때문에 신경이 곤두 선 병사처럼 보였다. 틸러는 그 이유를 돌아보았다. 차이점 세 번째. 규리하성의 상공에는 과거에는 없었던 또다른 하늘 치가 떠있다. 이름은 소리. 소리와 말리는 어제 오후부터 지정학적 규모의 신경전 중이었다. 말리가 왼쪽으로 조금 움직이면 소리는 오 른쪽으로 조금 움직였고 말리가 슬쩍 전진하면 소리 또한 슬쩍 전진 했다. 그러니까 대치하는 두 명의 검객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말리가 원하는 것은 규리하의 상공으로 날아가 돌을 퍼붓는 것이었고 소리는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언제든 말리에게 정면으로 충돌할 수 있는 위 치로 움직였다. 코끼리 부리는 사람이나 거함을 다루는 뱃사람의 재 주는 이에 비하면 기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장난으로 보일 것이 다. 움직이는 것 자체로 이미 신비의 범주에 들어가는 물체들이 그렇 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틸러는 우주의 신비를 깨닫게 되거나 기저 귀가 필요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다행히 양쪽 하늘치는 상대의 의 도를 깨달았고 그래서 마주본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의 참모장 역할을 맡고 있던 시허릭 마지오 상장 군은 상황의 타개가 명백하게 민들레 여단의 책임이 되었다고 결정했 지만 소리가 과연 지상에 있는 레콘 여단에게 돌격할 것인가에 대해 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늘누리나 말리 와 달리 소리의 등에는 충격으로 파괴될 구조물 같은 것이 없었다. 초거대 기병돌격과 같은 일을 감행해도 손해볼 것은 없는 셈이다. 지 금은 말리를 견제하느라 하늘의 위치를 지키고 있지만 레콘들의 공격 이 시작되면 막무가내로 지상을 향해 돌진할지도 모른다. 만약 자연 재해의 범주에 포함시킨 다음 그 최고 반열에 놓아도 상관없을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민들레 여단의 난폭한 레콘으로서도 머리를 감싸 쥐고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리가 지상으로 돌진한다 면 말리는 재빨리 규리하성으로 날아가 그 유서 깊은 성의 내구성을 상당히 독특한 방법으로 시험할 수 있다. 심사숙고 끝에 참모진은 민들레 여단의 1/3만 돌격시킨다는 작전안 을 내놓았다. 한 번의 공격으로 민들레 여단을 모조리 퇴치할 수 없 다면 소리도 지상으로 돌격하는 것에 갈등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하 다. 하지만 문제는 최악의 공수증 환자들이라 할 수 있는 민들레 여 단병들이 물을 뿌리거나 흘리거나 쏟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 뻔한 규리하성으로의 돌격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히도큰 하 장군은 그곳에 '그것'이 없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거짓말을 하라는 요구와 마찬가지다. 규리하성은 실제로 그런 준비를 해둔 상태였으니까. 해자에는 차가운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흉벽 뒤에서는 수화차와 물통과 물동이가 창검 등과 동등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참모들의 고심에 찬 말들을 경청한 엘시는 침묵 속에 고민하다가 사 절을 파견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당황하게 했다. 진중의 분위기는 격자무늬 태양이 뜰 가능성과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 중 전자가 월등히 높다는 쪽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황제 가 대장군에게 남부의 관리도 내팽개친 채 어처구니없는 여행을 하라 고 명령했겠는가.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화친 이 가능하다는 듯이 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기만 전술도 될 수 없다. 하지만 대장군은 최후통첩은 일종의 예의에 속한다는 암시를 함으로 써 참모들을 진정시켰다. 그리하여 사절로 선택된 사람은…… "틸러 달비 부위!" 틸러는 점검이 끝난 - 그렇게 믿고 싶은 - 소대를 1분대장에게 넘기 고는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를 부른 것은 이레 달비였 다. 대장군의 몸종일 뿐 원칙적으로는 제국군의 편제에 속하지 않는 이레이니만큼 이것은 상당히 부적절한 일이었지만 틸러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틸러 달비가 외교관의 덕목을 갖추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지만 엘시는 규리하공에게 친숙하다는 좀 수상한 이유를 들 어 그를 사절로 임명했다. 틸러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쟈마 데시마스 수교위를 비롯한 중대원들 모두가 호기심에 찬 표정 으로 두 사촌을 바라보았다. 이레는 데리고 온 말을 주의깊게 움직여 두 사람의 모습을 가렸다. 그는 말안장을 매만지는 시늉을 하며 나지 막하게 속삭였다. "하텐그라쥬." 틸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의상 하는 말로도 세련되다 할 수 없을 만큼 조잡하다. 하지만 엘시로서는 최대한의 극기였을 것이다. 틸러 는 규리하성까지 오면서 징발해온 것들 중 하나인 말을 살펴보며 속 삭였다. "그게 옳을지도 모르겠군. 규리하공 아가씨는 즈믄누리를 나와서는 안되는 거였어." 이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틸러는 말 위에 가볍게 올랐다. 근 심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종제에게 미소를 지어준 틸러는 말을 돌려 규리하성을 향해 위협적이지 않은 속도로 움직였다. 차가운 봄바람이 틸러를 스쳤다. 말은 전투마로 훈련받지 않은 온순 한 놈이었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늙은 것이었다. 그것은 가벼운 산책 을 나선 지주를 태운 승용마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자신을 용감 한 전령으로 생각하길 포기하고 있었기에 틸러는 말의 비호전적인 태 도에 애석해하지 않았다. 그는 불안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 절임이 명백한 한 명의 기수에 소리가 반응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공 포는 귀머거리라서 이성의 설득에 무감각하다. 소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편집광적인 관찰을 통한 결과였기에 틸러 는 자신이 본 것을 믿기로 했다. 부위는 눈을 내려 규리하성을 바라 보았다. '하텐그라쥬. 하텐그라쥬랍니다. 예. 고사가 가장 멋질 때는 재현될 때입니다. 규리하성에 재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레놀 선사가 데 려온 하늘치를 타고 하텐그라쥬를 탈출했던 대호왕의 고사를 재현할 때입니다. 소리에 사람들을 태워 탈출하세요. 춘부장께서는 그런 뜻 으로 온 것이 아니겠지만 결국 따님께 탈출 수단을 제공할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규리하공 아가씨는 무사장과 함께 번뜩이에 타셔도 되고 혹은 소리 곁에서 구름 근처를 나는 종달새처럼 날아도 되겠지만 사 람들과 함께 소리에 오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대호왕께서 그랬으니까 요. 즈믄누리로 가세요. 규리하공 아가씨. 아가씨는 즈믄누리에서 나 오지 마셨어야 했습니다. 아가씨는 누구든 설득할 수 있다고 믿고 싶 으셨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언제나 옳은 성주님이 계시기에 제 삼자라는 것이 없는 즈믄누리와 달리 이 바깥에는 제삼자가 있습니 다. 설득되고 싶어도 제삼자 때문에 설득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 다! 저를 설득하실 수는 없습니다. 저에겐 아가씨를 공격하라고 명령 하는 대장군님과 황제 폐하가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관계와 관계와 관계. 저는 이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만 그 무지에 대해 창피해하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익숙한 일이거든요!' 터덜터덜 걸어가는 말의 목에서 다듬지 않은 갈기가 출렁거렸다. 걸 리적거리지 않도록 바투 잘라두는 전투마의 갈기와 다른 그 한가로운 움직임이 틸러를 자극했다. 밭갈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가 된 기분이었다. 갑자기 틸러는 전역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으 로 돌아가 오니의 소식도 전해야 하고 제국군에 복무했을 때의 이야 기도 과장 잔뜩 섞어 이야기하며…… 늙은 아버지의 농토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며 남아있는 인생의 내리막길을 조용히 걷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제국, 황제, 군웅할거, 충돌하는 하늘치, 레콘 대부대, 규 리하공 아가씨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그래도 비녀 하나는 얻지 않았는가. 손을 들어 눈 언저리를 문지르던 틸러는 말이 멈춘 것을 깨달았다. 틸러는 엄격한 훈련을 모르는 말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라 생각했 다. 순간 한가로운 기분과 전원생활에 대한 어쩐지 애잔한 동경 같은 것은 싹 사라졌다. 틸러는 자신이 제국군과 규리하군, 그리고 두 마 리의 하늘치가 모두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말을 다루지 못해 허둥대 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즉석에서 전역하고 싶 어지는 상황이다. 불명예 제대라도 무방하다…… 말은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그 늙은 말은 멈춰야 하는 충 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앞쪽을 바라본 틸러 또한 그 이유를 보 았다. 고사가 재현되었다. 하지만 그 고사는 틸러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 다. 규리하의 성문 앞쪽 도개교의 자국이 남아있는 곳에서 펼쳐진 고 사는, 엄밀하게는 아직 고사가 아니지만, 고사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그것은 율형부차사 사라말 아이솔에 관한 이야기였다. 틸러는 갑자기 근방의 토지시세에 대해 정통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앞쪽에 서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사라말 아이솔이 허리에 칼 한 자루를 찬 채 무심한 태도로 서있었다. 파라말 아이솔은 달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아무도 나가시는 것을 못봤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젊은 산공부사는 언행의 불일치를 보였다. 그의 말은 대답을 요청하 고 있었지만 그의 발은 대답해줄 사람에게서 계속 멀어졌다. 파라말 은 성벽 위로 오르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질문을 받은 병 사는 대답을 포기한 채 파라말을 따라 달렸다. 헐떡거리며 주랑 위에 도달한 파라말을 맞이한 것은 장창을 들고 물 통 곁에 서있던 발리츠 굴도하였다. 그의 곁에는 완전한 갑옷을 걸쳐 입은 아이넬 굴도하가 서있었다. 발리츠가 그녀의 종자로 보일 지경 이어서 파라말은 하마터면 남작을 무시하는 무례를 범할 뻔했다. 그 때 발리츠가 성 바깥의 한 장소를 가리켰다. 남작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파라말은 숨이 턱 멎는 것을 느꼈다. "남작님. 어떻게……" 남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이오. 부사도 왜 율형부사가 저곳에 있는 건지 모르는 모양이군." 소리 위에서는 아이저 규리하가 눈을 찌푸린 채 아래를 바라보고 있 었다. 거리가 멀어서 사라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던 아이저는 누 군가가 제국군의 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와 있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현듯 아이저는 황제와 비셀스의 극적인 타협에 대한 섬뜩한 예상을 떠올리곤 몸을 경직시켰다. 그러나 아이저는 곧 그 생각을 지웠다. 그렇다면 단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와 사절을 맞이 하는 저런 이상한 모양은 연출되지 않을 것이다. "비셀스가 황제와 손 잡으려는 겁니다! 형! 소리를 돌진시켜!" 아이저는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고 다짐한 후에야 시카트의 성난 얼 굴을 돌아보았다. 이이타가 말했다. "글쎄. 그런 것치곤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타협은 황제쪽에서 거절할 거예요." 아실의 목소리였다. 아실은 지멘의 곁에 서있었고 그 곁에는 넋을 잃은 얼굴의 제이어가 앉아있었다. 지멘과 아실이 그를 찾아낸 후로 제이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자폐증 환자처럼 굴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자폐증 환자의 그것은 아니었다. 아실이 게속 말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규리하의 정복이 아니라 폭군이 되는 거예요. 차기 황제가 큰 환영을 받을 수 있도록. 그러니 전쟁은 반드시 일어 나야 하지요. 안타깝지만 타협의 가능성은 없어요. 공자님." 화를 내려던 시카트는 아실의 곁에 있는 지멘을 고려하여 불평의 수 준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황제의 속마음을 다 아는 건 아니잖아." 아실은 어깨를 으쓱였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래쪽 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틸러 달비는 말에서 내릴까 말까 고민하며 율형부사를 바라보았다.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이었고 예상할 수 없는 마중이기에 틸러는 일단 입보다는 눈으로 말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라말의 얼굴은 무표정했 다. 그의 손이 품속에 들어갔을 때 또한 변함이 없었다. 사라말은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고는 틸러를 향해 뚜벅뚜벅 걸 어왔다. 틸러는 충동적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는 고삐를 쥔 채 사라 말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섰다. "오래간만이군요. 틸러 달비 부위." "예. 오래간만입니다. 부사님." 사라말은 손을 앞으로 내밀어서 받으라는 몸짓을 했다. 틸러의 손에 넘겨진 것은 둥그런 쇠붙이였다. 틸러는 바보가 된 듯한 얼굴로 사라 말을 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다시 사자패주로 임명합니다. 한 번 해봤으니 잘할 수 있겠 지요." 틸러는 얼빠진 눈으로 손에 들고 있는 사자패를 바라보았다. 받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올려지만 사라말의 말은 계속되었다. 틸러는 그 말을 들으려 했지만 충격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또한 사라말의 말은 법률용어의 센범 폭포였다. 고귀한 원시 제 폐하께서 어쩌고저쩌고 해서 반포한 칙령 진짜야그래서에 따라 제 국율형부사에겐 체포권과 재판권이 이러쿵저러쿵 있으며 이런 아찔아 찔짜릿짜릿한 경우 재판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위관리 한 명, 이를 테면 사자패주 같은 자만 있으면 되니 원별말씀을다의 규정과 판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어머나세상에의 과정에 따라 거행된 재판에 서 은근슬쩍얼렁뚱땅 재판관으로 임명된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 은…… 뭐? "누구를 재판한다고요?" "정숙하시오. 재판관 사라말 아이솔은 이라세오날, 라세, 혹은 치천 제라 불리는 인물이 제국의 안위에 심대한 위협을 끼쳤다는 고발을 검토한 바," "잠깐만요, 부사님이 하신 그 고발이오? 그거요?" "고발 사항이 사실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우리 재판부 전원은," "아니, 저, 한 명도 전원이라고 부르겠다면 말릴 수야 없지만……" "피고 이라세오날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틸러는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라말은 무뚝뚝한 얼굴로 재 판 종결 선언과 형집행을 지금 당장 시행한다는 결정과 율형부사 사 라말 아이솔을 집행관으로 임명하는 절차까지 끝냈다. "수고했습니다. 부위. 그 사자패는 기념품으로 삼으십시오." "부, 부, 부사님!" "미안하지만 바빠서 안되겠군요. 사형 집행이 있습니다." 사라말은 틸러의 곁을 쓱 스쳐지나갔다. 틸러는 뒤로 홱 돌아서서 떠나는 율형부사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틸러는 이것이 자 신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재빨리 말에 올 라타서는 떠나왔던 곳으로 달렸다. 그가 사라말을 앞지를 때도 사라 말은 걸음걸이를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틸러 와 눈이 마주쳤을 때도 사라말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틸러가 조그마하게 변하다가 제국군 안으로 뛰어들고나서 얼마 후 먼 곳이지만 명백히 느낄 수 있는 소란이 일어났다. 사라말은 태평하 게 앞으로 걸어갔다. 미풍이 만류하듯 부사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 졌다. 규리하의 흙에서는 관대하게 봄내음이라고 생각해줄 수도 있는 냄새가 미세하게 퍼져나왔다. 사라말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눈 을 감았다. 땅은 평탄했다. 사라말은 눈을 감은 채 걸어갔다. 눈꺼풀을 조심스 럽게 두드리는 햇살과 발 아래 흙이 뽀드득 짓눌리는 미세한 소리. 사라말은 그가 포기한 용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에 흠결이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상사회란 존재할 수 없기에 이상이다. 하지만 서툴 고 어쩌다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손길들을 내밀 때 맞닿 은 손 사이에서 그것이, 도달하지 못해도 추구하는 것만으로 아름다 운 무엇인가가 피어난다.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는 만들 수 있 을지도 모른다. 엘시 에더리의 지휘 아래에서. 그러나 치천제가 그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 황제는 맞닿은 손끝 사 이를 보는 대신 그 너머에 있는 상대의 손을 바라보게 하였다. 그 손 은 누구의 손일까? 너는 누구냐? 나를 어쩌려는 거지? 손을 움츠린 다. 뒷걸음질친다. 네가 낯설다. 네 눈 속에 비치는 내가 낯설다. 나 를 비참하게 만들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비참하게 만들련다. 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너보다 나은 무엇이 될 수는 있을 테니까. 그렇 게만 된다면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거운 발소리에 사라말은 눈을 떴다. 두 명의 레콘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민들레 여단병이 되기 위해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둘 다 사납게들 생겼 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에는 긴장감이나 전의 같은 것은 없었다. 쇠 도리깨를 들고 있는 쪽은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보다 조금 작으며 양손에 철퇴를 들고 있는 쪽은 사라말의 허리쪽을 보고 있었 다. 그 레콘이 칼을 바라보나 생각했던 사라말은 곧 생각을 바꿨다. 레콘은 앞에 있는 미친놈이 물통을 차고 있을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 이었다. 사라말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쇠도리깨와 쌍철퇴는 계속 성큼성 큼 걸어왔다. 갑자기 사라말은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두 레콘 은 대화할 생각이 없었고 물론 조그마한 인간과 싸울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그냥 물건을 주워 돌아가듯 사라말을 집어들고 돌아갈 생각이 었다.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쇠도리깨 쪽이 걸어오면서 팔을 들어 올렸다. 곧 그 커다란 손이 몸 어딘가에 닿을 판국이었다. 강단이 대 단해도 뒷걸음질치고 싶은 광경이었지만 사라말은 묘하게 슬픈 기분 으로 생각했다. '시작이군.' 쇠도리깨의 손바닥이 그의 몸 전체를 덮는 그림자를 만들며 머리 위 까지 다가왔을 때 사라말은 환상계단을 상상했다. 환상계단은 상상한 자에게만 영향을 끼칠 뿐 다른 자에겐 보이지도 않는다. 사라말의 손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환상계단은 사라말의 손 에는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다른 자에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사라말의 손 자체는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다른 사람 을 만지거나 붙잡거나 악수하거나 볼을 살짝 꼬집어준다거나…… 사라말의 왼쪽 손바닥이 쇠도리깨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사라말은 환상계단을 이용하여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날려보냈다. 환 상계단의 적용 대상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지만 그 적용 한계는 얼 마인지 짐작할 수도 없다. 지멘의 하늘누리 침입 사건에서 밝혀졌듯 그것은 물에 가라앉는 레콘의 무거운 몸을 지탱하는 10킬로미터 길이 의 기둥 없는 고공도로를 만들 수도 있다. 상상한 본인에 대한 환상 계단의 영향력은 무한대인 듯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라말은 자신 의 손에 무한대의 힘을 실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팔이 찢어 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사라말은 자신의 상상을 대폭 제한했지 만 순간적으로 실린 힘은…… 철판 위에 철판을 떨어트린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레콘의 비정상적으로 튼튼한 뼈대와 강인한 근육, 그리고 야수들의 그것을 능가하는 반사 능력이 없었다면 배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쇠 도리깨는 가까스로 그런 꼴은 모면했지만 대신 꽤나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사라말이 손에 실은 환상의 힘과 무의식적으로 타 격을 줄이기 위해 몸을 뒤로 던진 레콘의 반사 동작이 더해진 결과는 몸을 반으로 접다시피한 레콘이 땅바닥에 쓰러지지도 못하고 몇십 미 터 이상 뒤로 주루룩 미끄러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운한 레콘이 간 신히 땅에 쓰러졌을 때도 쌍철퇴는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쓰러진 쇠도리깨도 사라말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밀도 높은 침묵의 중심에서 사라말은 왼쪽 손바닥을 내민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환상계단을, 아니, 환상근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을 다루는 사라말의 솜씨는 나쁘지 않았다. 처음치고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분명히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지만 사라말은 자신의 팔이 어깨에서 분리되어 앞으로 날아가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도 그 자체가 일으키는 충격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라말의 왼손에 실린 속도는 레콘의 몸에 부딪쳐 저지당한 순간 그대로 파괴력으로 바뀌어 사라말의 손와 팔, 어깨, 그리고 온몸을 뒤흔들었다. 사라말은 자신 의 왼손에서 낯선 기분을 느꼈다. 손뼈들이 어긋났기 때문에 그의 왼 손은 기이한 모양으로 변형되어 있었다. 혹독한 통증 속에서 사라말은 생각했다. 왼손을 쓰길 잘했군. 이제 땅으로 고꾸라져 전신을 떨며 비명을 지를 차례였다. 대신 사라말은 칼을 뽑아들었다. 쌍철퇴가 무의식적으로 철퇴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사라말의 몸이 위로 2미터 이상 솟아올랐다. 다리를 구부리지도 않은 채 솟아올랐기 에 레콘은 그 상승을 예측하지 못했다. 눈으로 본 것을 머리로 이해 할 때까지 극히 짧은 지체가 있었다. 하지만 사라말은 지체하지 않았 다. 위로 솟아오르면서 그는 환상근육으로 자신의 오른팔이 회전하게 끔 했다. 레콘과 사라말 사이에 철퇴와 그것을 쥐고 있는 레콘의 손이 쿵 떨 어졌다. 레콘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뒤로 날듯이 물러나서 남아있는 손에 쥔 철퇴를 앞으로 내민 후에야 레콘은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쇠도리 깨를 든 레콘이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피가 왈칵왈칵 솟아나는 동료의 잘린 팔목을 보다가 부리로 뒤를 가리켰다. "지혈해." 손목이 잘린 레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철퇴를 겨드랑이에 끼우고는 잘린 팔목을 움켜쥔 채 뒤로 달려갔다. 홀로 남은 레콘은 쇠도리깨를 높이 들어올린 채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여전히 땅에서 2미 터 떨어진 곳에 발을 둔 채 허공에 떠있었다. 레콘이 말했다. "무슨 괴물이냐." 팔목이 잘린 레콘이 도망친 방향에서 민들레 여단병들이 달려나왔 다. 그리고 많은 레콘들이 하늘로 뛰어올랐다. 거대한 쇄파(碎波) 같 았다. 그 육중한 몸들이 만들어내는 쿵쿵쾅쾅 하는 진동에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덜덜 떨었다. 환상에 의해 허공에 떠있는 사라말은 공기의 진동만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땅이 얼마나 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쇠도리깨가 다시 질문했다. "너는 뭐냐?" 사라말은 왼손을 들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모진 통증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비명도 지를 수 없는 아픔 때문에 떨며 사라말은 환 상근육을 이용하여 왼팔을 들어올렸다. 쇠도리깨는 천천히 떠오르는 그 왼손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흉기인 양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바 라보았다. 하지만 그 손은 쇠도리깨가 있는 방향을 지나쳐 하늘로 올 라갔다. 말리를 겨냥하게 되었을 때 팔을 멈춘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말리를 가리켰다. 벼슬을 빳빳하게 세운 쇠도리깨에게선 상당히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라말은 말리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사라말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집행한다." 레콘들의 쇄도가 그를 덮칠듯 다가왔을 때 사라말은 파도 끝을 박차 는 갈매기처럼 솟아올랐다. 그가 없어진 자리에 쏟아진 민들레 여단 의 병사들은 몸을 부풀리며 위를 쏘아보았다. 사라말은 왼쪽 집게손 가락으로 끌어올려지는 사람처럼 말리를 향해 치솟고 있었다. 환상계 단을 만들 줄 아는 레콘들이 곧 말리와 지상 사이에 계단을 만들었 다. 그들은 허공을 짓밟으며 사라말의 뒤를 따랐다. 제이어 솔한은 퀭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환상계단으로, 아니, 환상근육인가? 그걸로 힘을 증폭시켰어! 세상 에. 그럴 수도 있군!" 그 설명 덕분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이저는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제이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움직이는 시체처럼 아무 말도 없었던 제이어가 느닷없이 광기 어린 집중력을 보이는 것에 놀 라고 두려워 하는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시카트조차도 주저하며 말했다. "히, 힘을 증폭시키다니? 어떻, 어떻게?" 제이어가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시카트를 노려보았다. 목소리가 나오 지는 않았지만 그의 입이 '이런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 잘 들어왔다. 시카트는 분통을 터뜨려야 할지 주 눅이 들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이어가 말했다. "공자님의 손과 말 한 마리를 밧줄로 묶고 말을 출발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질질 끌려간다는 대답은 하지 마십시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아주 빠른 속도로 주먹을 뻗을 수 있을 겁니다. 됐습니까? 이제 한심한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하십시오. 저는 할일이 있습니 다!" 제이어는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것을 위아래로 움직였 다. 하지만 그의 손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부딪친 듯 턱턱 멈추 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제이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짐작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사람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 았다. 아실이 다급하게 말했다. "제이어. 당신의 예를 스스로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그럴 경우 팔이 빠질 수도 있어요. 하지 말아요." 제이어가 고개를 홱 돌렸다. 환상근육을 이용하여 목을 돌렸나 의심 할 정도의 속도였다. 제이어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아실을 쏘아보았 다. "모르니까?" "예?"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니까 하지 말라는 거냐?" 지멘은 몸을 부풀렸다. 이 멍청한 놈. 아실은 너를 증오할 수 없어. 증오는 황제가 가져갔으니까. 너를 걱정하는 거야. 지멘은 망치 자루 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아실이 두 손을 내밀었다.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제이어는 지멘을 흘깃 보고는 거만한 표정으로 아실을 외면했다. 그 는 다시 사지를 움직이는 법을 연습하는 사람이 되었다. 걸음마를 익 히느라 열중한 아기와 자기가 제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 포악한 술주정뱅이를 결합하면 제이어와 비슷한 모양이 될 것 같다. 그 기이 한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의 가슴엔 두려움과 거부감이 가득찼다. 아 실은 좀 말려보라는 듯이 지멘의 손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 지만 지멘은 냉담한 시선으로 제이어를 볼 뿐이었다. 아실이 입술을 깨물고 제이어를 돌아보았을 때 갑자기 제이어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실은 그가 환상계단으로 자기 목을 졸라버리지나 않았나 걱정했 다. 그랬다면 참으로 신비로운 자살법이 되었겠지만 다행히 제이어는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뻐끔뻐끔할 수는 없으니까. "알았다." "예? 제이어. 괜찮아요?" "알았다. 알았어." "뭘 알았다는 거죠?" 제이어는 고개를 떨구었다. 체념의 동작이 아니라 아래를 바라보기 위한 동작이었다. 제이어는 발 딛고 있는 하늘치를 내려다보며 말했 다. "네가 무슨 약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알겠어. 그거였어." 제이어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진귀한 보물을 만지듯 제이어는 바닥 을 쓸어만졌다. "알았어." 형에 대한 우정에는 한 점 변함이 없었지만 파라말 아이솔은 형의 모습을 보며 걱정보다는 경악을 느꼈다. 만약 그 순간 누군가가 뻣뻣 하게 굳은 모습으로 규리하성의 주랑 위에 서있던 파라말에게 '저 사 람 당신 형이지?'라고 물었다면 그는 놀란 얼굴로 '저게?'라며 물건 을 지칭하듯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파라말이 서있는 주랑 위에는 레콘을 베개 던지듯 날려버리고 그 단 단한 손목을 단숨에 잘라버리는 사라말의 괴력을 설명해줄 수 있는 제이어 솔한 같은 사람이 없었다. 두려움에 빠져 사라말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는 조금 늦게 주랑으로 올라온 야리키도 있었다. 야리 키는 파라말에게 너희 형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려 했지만 파라말 또한 다른 이들처럼 넋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부 리를 다물었다. 야리키는 벼슬을 주물럭거리며 생각했다. 다른 요인 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명백히 환상계단이 개입된 문제였다. 하 늘치를 타고 돌아다니며 여행하곤 했던 야리키는 환상계단을 꽤 능숙 하게 다루는 편이었다. 하지만 밟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라는 고 정관념 때문에 야리키는 사라말의 괴력과 환상계단을 연결지어 생각 하지 못했다. 고심에 빠진 얼굴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야리키는 덩치 큰 사람 을 보게 되었다. 야리키는 탈해가 밖에 나와있나 하고 놀랐다. 혹 유 혈 사태가 일어날 경우 위험하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탈해가 안전한 성내에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규리하의 변경백이지만 훌륭한 전투지 휘관이라 할 수 없는 정우 또한 차라리 건물 안쪽에 있는 편이 저격 이나 기타등등의 위험을 줄일 수 있어서 좋았다. 결국 사람들은 그 둘이 함께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두 사람은 그것을 받 아들였다. 만약 탈해가 호기심 때문에 밖에 나왔다가 레콘의 손목이 잘리는 모습을 목격하거나 했다면 위험한 노릇이다. 그러나 자세히 바라본 야리키는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본 것은 갑옷을 차려 입고 남편 옆에 서있는 아이넬 굴도하였다. 평 소 보던 옷차림이 아니어서 몰라보았을 뿐이다. 그 때 그의 머릿속에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 환상계단에 대해 생각하다가 아이넬의 갑옷을 보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에서 두 가지 가 뒤섞여버렸다. 만약 갑옷을…… 야리키는 깨달았다. "그거로군." 세레지 파림이 야리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묻는 눈을 보았지만 야 리키는 자신의 생각을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야리키는 아이넬의 갑옷 을 가리키며 엉성하게 말했다. "만약 환상계단으로 갑옷을 만들면?" 환상계단을 만들 줄 모르는 세레지였지만 그녀에겐 파림 가문의 최 대 장기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환상갑옷, 다른 사람에겐 영향 을 줄 수 없으니 칼이나 화살을 막지는 못하겠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영향을 받겠지. 환상갑옷이 움직이면 안에 있는 사람도 움직인다. 환 상 갑옷이 아주 빠르게 팔을 휘두르면 안에 있는 사람의 팔은 어떻게 될까? "그렇군요! 환상으로 자기 몸을 움직이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범위 내에 있던 자들이 모두 세레지를 돌아 보았다. 세레지가 외쳤다. "맞아! 밟을 수 있다면 그걸 쥘 수도 있겠지. 그걸 몸에 두를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그걸 세게 움직이면, 몸도 세게 움직여요! 상상한 사람에겐 영향을 끼친다면서요?" 이해의 표정은 순차적으로 떠올랐고 불운하게도 그 표정을 전혀 떠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파라말은 빨리 이해한 축에 속했다. 그는 머리를 짚었다. "맙소사. 환상근육이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이해의 대열에 동참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환상근육이라는 파라말의 말에서 약간의 영감을 얻게 되었다. 야리키 또한 갑옷 대신 근육이라 고 생각하자 이해가 더 쉬워지는 것을 느꼈다. 파라말은 충혈된 눈으 로 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잘못하면 자기 몸을 찢어버릴 거야. 안돼. 말려야 해. 야리 키! 계명성을 질러주세요. 그만 두고 이쪽으로 돌아오라고!" 야리키는 파라말의 부탁에 따라 가슴을 부풀렸다. 그러나 야리키는 부리를 열지 않았다. 몸을 다시 줄인 야리키는 말리를 미심쩍은 눈으 로 바라보았다. "뭐가 움직이는데." 율형부사의 믿기 어려운 움직임을 바라보던 엘시의 머릿속에서 서서 히 이해의 빛이 깜빡였다. 제이어 솔한이 깨닫고 야리키가 깨달은 바 로 그것이 엘시의 머릿속에서도 떠올랐다. 그리고 엘시는 사라말이 하는 일이 바로 자신이 평소에 하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엘시는 이동계단을 만들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발에 접촉한 환상계 단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발도 - 물론 몸 전체도 - 움직인다. 발을 손으로 바꾸면, 손으로 쥘 수 있거나 손을 감싸는 이 동계단을 만들어 그것을 움직이게 한다면 손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 다. 단순하다. 물론 모든 탁월한 발상은 그것을 이해한 후에는 단순 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엘시는 그 단순함이 사라말의 탁월함에 존경 을 바치지 않아야 할 이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시는 사라말에게 보낼 존경을 보류해야 했다. 틸러 달비가 그에게 전한 내용에 따르면 사라말은 자신을 고발자이자 재판관, 그 리고 처형인으로 삼아 황제를 처벌하려 하고 있다. 엘시는 그것을 좌 시할 수 없었다. 민들레 여단의 레콘들이 사라말의 뒤를 따르고 있었 지만 레콘의 강철 같은 팔뚝을 싹둑 잘라버리는 사라말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엘시 자신이 나을 것이다. 사라말의 방식을 이해한 엘시는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할 수 있었다. 환상으로 자신을 감싸려 했던 엘시는 갑자기 들려오는 쿠르르릉 하 는 소리에 집중력을 잃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재난을 암시하는 소리 였다. 잠시 후 뚫어지게 바라보던 엘시의 눈에 말리를 박차고 튕겨나 오는 거석이 들어왔다. 규리하 사람들은 소리와 말리가 충돌하던 당시 그 낙석 공격을 직접 목격했지만 엘시나 그의 부하들은 말로만 들었을 뿐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두 눈으로 보게 된 낙석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낙석이란 사과나 배 정도의 돌을 의미한다. 하지만 말리 의 등에서 뛰쳐나온 석환은 인간들이 흔히 쓰는 돌절구통만한 크기였 다. 물론 속이 빈 절구통보다는 훨씬 무거울 것이다. 엘시가 다급하 게 외쳤다. "낙석이다! 낙석에 주의하라!" 하늘을 날며 사라말은 양쪽 팔과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하 고 있었다. 기이하게 모양이 변한 왼손은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고 손 목과 팔꿈치, 어깨 모두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왼팔을 영영 잃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회전시켰던 오른팔 역시 근육이 다 뒤틀려버린 것 같았다. 부딪치는 공기의 압력과 중력의 끌어당김은 그의 몸을 걸레 를 쥐어짜듯 비틀었다. 그 고통이 너무 끔찍하여 사라말은 첫 번째 석환이 그의 옆으로 몇십 미터 쯤 떨어진 곳을 지나쳤을 때 겨우 낙 석을 깨달았다. 말리 쪽을 바라본 사라말은 잠깐 동안 통증을 잊었다. 그의 몸통보다, 아니 그보다 더 커보이는 바위들이 화살처럼 날아오 고 있었다. 그런 크기의 물건이라면 아래로 곧장 떨어지는 것이 자연 스럽겠지만 경사로를 따라 가속된 그 석환들은 사라말을 향해 비스듬 한 궤도로 날고 있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커다란 포물선 같은 것을 그리다가 수직으로 떨어지겠지만 그 순간 사라말은 돌들이 의지 를 가지고 그를 향해 날아오는 듯한 비이성적인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사라말은 분노를 느꼈다. 그는 거리 때문에 제각기 다른 크기로 보이는, 하지만 한결같이 빠르게 커지는 돌들을 고도의 집중력으로 바라보았다. 돌과 그는 서로를 향해 날고 있었고 따라서 상대속도는 엄청나다. 사라말은 자신의 목숨이 판돈으로 걸린 위험한 도박에 통증을 잊었다. 저 돌은 괜찮아. 아래쪽이야. 똑바로 날아오는 저 돌도. 위험할까? 아냐. 아래로 떨어질 거야. 조금 높은 곳에 있는 돌. 저기에 집중해. 앞쪽에 있는 돌이 너무 크다! 정말 떨어질까? 제기랄, 피해야겠다! 옆으로 잽싸게 움직였다. 살인적인 기세로 다가오는 돌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순간 계산이 흐트러졌다. 곧 사라말은 모든 돌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듯한 느낌을 맛봐야했다. 그는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움직였다. 환상계단을 만들어 사라말을 쫓아가던 민들레 여단병들 또한 석환들 의 궤도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황급히 뒤로 돌아 달리거나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는 도중에는 레콘도 자유로 이 움직일 수 없다. 그 점을 깨닫고는 타고난 무지막지한 속도와 힘 에 의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몸을 휙휙 움직이며 돌을 피하다가 도저 히 피할 수 없는 돌을 본 그들은 머리를 감싸쥐고 몸을 웅크렸다. 빠 악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돌은 레콘을 허공으로 튕겨내었다. 환상계단을 만들지 못했기에 아래쪽에 있던 자들은 그나마 운이 좋았 다. 그들은 돌이 떨어질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또 어 디로든 달릴 수 있는 넓은 땅이 있었다. 그러나 땅에 부딪쳐 파괴된 돌들이 날려보내는 파편들과 충돌음, 그리고 격렬한 진동은 그들을 비틀거리게 했다. 그러다가 돌에 직격당하는 레콘도 나타났다. 충돌 에 대비했던 위쪽의 레콘들과 달리 그런 레콘은 몸 한 부분이 으스러 지는 봉변을 겪어야 했다. 이곳저곳에서 거대하고 참혹한 비명들이 들려왔다. 사라말은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듣지 못했다. 흙이 패이고 돌 이 부서지고 대지가 진동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우박을 피하 는 날벌레였다. 돌에 약간 스치기만 해도, 아니 돌들이 일으키는 공 기의 흐름에 휘말리기만 해도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다른 감각 은 모두 사라진 채 사라말은 시각만 가진 존재가 되어 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나 급속하게 커지는 돌들. 모두 그를 향해 날 아온다.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돌들.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돌 사라말은 말리의 허리 옆으로 솟아올랐다. 돌은 더 이상 없었다. 사라말은 지느러미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지느러미를 때리게 되 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쪽에는 낙석 장치가 없었다. 사라말은 자신이 연기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 면 단숨에 흩어져 자취를 감추게 될 것 같았다. 다행히 바람은 없었 다. 혹은 바람을 느끼는 그의 감각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말은 지느러미 위에 내려섰다. 사라말은 허수아비처럼 하늘치 위에 섰다. 실제로 허수아비나 마찬 가지다. 그는 자신의 두 다리가 아닌 환상근육에 의해 서있었고 그 환상은 그가 어떤 기묘한 자세를 취해도 그를 안정적으로 지탱했다. 사라말은 당장 쓰러지는 것이 어울리는 자세로 비스듬히 서서 특별히 보고 싶다는 생각 없이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검은 여인이 있었다. 사라말은 눈을 크게 뜨려고 애썼다. 하지만 눈은 거꾸로 자꾸 감겼 다. 무익한 몇 회의 시도 끝에 사라말은 눈꺼풀을 포기했다. 그는 환 상을 이용하여 자신을 앞으로 움직이게 했다. 그는 발을 움직이지도 않고 앞으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여전히 삐딱한 자세로. 검은 여인은 검은 모피를 두른 나가로 바뀌었다. 치천제였다. 그의 신경들은 통증에 난도질당하다 못해 기절한 것에 가까운 상태 였다. 통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사라말은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둔하고 흐리고 희미 하다. 사라말은 어두운 시야 속에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사라말의 몸이 멈췄다. 황제와의 거리를 자신할 수는 없지만 2미터 쯤 되는 것 같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너라. 사라말 아이솔." 사라말은 자신의 입이 움직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말을 한 모 양이다. 사라말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의 미성은 또 렷하게 들렸다. "처형이라. 제국법으로 법 위에 있는 짐을 처벌하겠다는 건가?" 사라말은 그녀가 처벌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어쨌거나 뭐라고 웅얼거린 모양이다. "정신억압? 나는 그런 식으로 정신억압하지 않는다. 사라말. 그런데 정신억압이 왜 문제지?" 사라말은 황제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말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너희들의 정신적 자유 말인가. 자유롭게 관찰하고 자유롭게 결정하고 자유롭게 망가질 그 의지." 긴 침묵이 있었다. 사라말은 황제의 목을 베기로 했다. 사라말은 그녀가 파델 미호린이 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황제는 파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환상을 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환상을 보면서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사라말은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여전히 앞쪽에 있는 것은 연쇄살인마 파델 미호린이었다. 사라말은 환상시각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파델 미호린이 나가의 미성으로 말했다. "너는 용을 기다리고 있었지." 사라말은 고개를 갸웃했다. 목을 잘라야 한다. 사라말은 자신의 오 른팔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사라말은 오른팔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환상근육을 쓰려 해도 팔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면 소용 이 없다. 살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소원은 이루어졌다." 사라말은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른팔을 찾는 것을 포 기하고 자신이 기다리던 용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용을 보게 되었다. 잠시 후 땅에 있던 사람들은 말리의 지느러미 위쪽에서 엄청난 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수백 개의 벼락이 한 장소를 때리는 것 같았 다. 세상에서 모든 색깔이 추방되고 흰 빛과 검은 빛만 남는 듯한 광 경에 사람들은 눈을 감거나 뒤로 돌아섰다.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를 위해 죽은 한 남자의 재가 복상하는 듯한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 38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39. 신을 긍정하는 태도 - 1 결코 자신을 명제로 만들지 마라. - 원시제. 오밀조밀한 잎사귀 사이에 산들바람을 흠뻑 머금은 월귤나무가 없고 뻣뻣한 척하지만 기실 외로움을 잘 견디지 못하는 대나무가 없고 물 안개를 사랑하는 끄레발 뚝버들이 없고 고갱이에 푸른빛 품은 얼룩배 기 물푸레나무가 없고 그 뿌리 근방에서 개구리 왜각대각 우는 오리 나무가 없고, 뭉게구름을 넘을 듯 모둘빼기 뛰는 살판꾼이 없고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곶감 집어 꼬맹이 입에 쏙 집어넣어 주는 주당이 없고 방 시레 웃는 처녀들에게 한 눈 팔고 걷다가 개꼬리 밟는 청년이 없고 깽깽거리며 세상 끝까지 달려갈듯 도망치는 개가 없고 그 개 보고 웃 다가 입에 들어있던 곶감 떨어뜨리는 꼬맹이가 없고, 몇 사람의 경우엔 자기가 없는, 세상이라는 책의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장절에서 파라말 아이솔이 비명을 질렀다. 파라말이 본 것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아서 망막에 회갈색 손자국 을 남기는 잔학한 섬광이 전부였다. 그것들이 사라졌을 때 세상은 다 시 지루한, 마침표 없이 영원히 쉼표만 이어지는 자신의 연대기를 써 내려갔다. 하지만 파라말은 그 쉼표가 찍히면서 무엇인가가 영영 사 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파라말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보이지 않지만 그에게 달려있는 사지 하나가 뜯겨나간 것 같은 고통. 파라말은 두 손으로 얼굴을 쥐 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내버려두면 주랑 아래나 흉벽 너머로 떨어질 지경이었기에 야리키는 비틀거리는 파라말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 손길에 기겁한 파라말이 야리키의 손을 땅땅 두드리다가 그 손을 물어뜯으려 했다. 야리키는 파라말을 슬쩍 밀어 땅에 쓰러지게 했다. 바닥에 엎어진 파라말은 자 신의 비명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형님이 죽었어! 아니오. 부사. 그냥 반짝임일 뿐이에요. 그는 환상을 마음대로 다루 고 있었어. 하늘누리의 추락도, 얼어붙은 바다도, 레콘들의 쇄도와 낙석도 부사를 해치진 못했잖습니까. 돌아올 거야. 그런 말씀 마세 요! 내겐 이제 형이 없어. 대지보다 더 대지 같은 하늘치, 그 그림자 속에서 당황하고 있는 거 인들, 운석의 직격을 당한 듯한 구덩이들. 지나치게 크고 우악스러운 세상 속에는 형을 잃은 동생을 위해 준비된 것이 없다. 형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지?" 황무지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파라말은 계단 끝에 서있는 아트밀을 보았다. 몸 이곳저곳이 불규칙적으로 전율하는 아트 밀의 모습은 바람 부는 보리밭 같았다. 파라말의 감쳐물었던 입술이 떨리며 움직였다. "형님이……" 파라말의 말에서 아트밀은 레콘의 모든 용력을 동원해도 듣지 않은 것으로 하거나 어이 없는 오해로 만들 수 없는 사실의 무게를 느꼈 다. 아트밀은 그 무게에 짓눌려 속삭였다. "따라갈 수 없나?" 목이 메인 파라말이 표정과 몸짓으로 말했다. 결코 얼지 않는, 그래 서 살아있는 몸을 가진 자가 그 위를 걸을 수 없는 잿빛 바다가 있으 며 사라말은 바로 그 바다를 넘어갔다고. 아트밀은 레콘을 모방한 절망이 되었다. 아트밀은 우주 전체가 한 목소리로 그를 꾸짖고 천시하는 것을 느꼈 다. 그 한없는 수치심과 치욕감. 그러나 아트밀은 자신을 불태워버릴 것 같은 그 부정적인 감정을 분석할 수 있었다. 사라말이 이미 말해 주었다. '정신억압을 통해 당신에겐 사라말 아이솔을 따라가 그를 보 호해야 한다는 강력한 욕구가 주어졌습니다.' 아트밀은 사라말을 보 호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한없이 부끄럽고 비참한 것이다. 그것은 거짓된 감정이다. '당신은 정신억압을 당했습니다.' 아트밀 은 자신을 기만하는 그 가짜 감정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바라볼 수 있 었다. 그는 레콘이다.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추구해야 한다고 결 정한 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해서 괴로워하는 것은 레콘인 아트밀에게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일이 다. 사라말의 삶과 죽음이 자신에게 연루되어야 하는 이유를, 아트밀 은 하나도 떠올릴 수 없었다. 이 고통은 가짜다. 이 슬픔은 가짜다. 이 분노는 가짜다. 아트밀은 사라말에게서 완전히 고개를 돌릴 수 있다. 그 대신 무엇을 봐야 할지만 결정하면 된다. 뭔가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있을까? 틸러 달비는 자신이 입을 움직이고 있다는 희미한 자각을 느꼈고, 거기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입은 주인의 제지를 받지 않은 채 사나운 욕설들을 흘려보냈다. 처형은 이루어졌다. 그가 본 빛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는 처형뿐이 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처형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떨어지는 무거운 돌들을 피하며 지상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여정을 답파한 사라말 아이 솔의 모습에서 틸러는 황제의 사망 가능성을 느낄 수 없었다. 사라말 의 승천과 황제의 죽음은 별개라는 느낌이 들었다. 손이 아팠다. 틸러는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사자패를 보았다. 그는 사라말이 황제를 처형하려 한다는 것만 보고했고 사자패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않았다.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사자패주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비밀로 지켜야 하는 사자패주의 의무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보고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때문에 사자패는 그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사자패를 들여다보던 틸러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는 주위를 살짝 둘 러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말리를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제국군 부위에 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틸러는 사자패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전에 사자패를 가져본 적은 한 번뿐이지만 평생 구경도 못해본 많 은 자들에게 비하면 틸러는 사자패 전문가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평범한 사자패였다. 치천제수사자패라는 이름과 발행연월일, 그리고 발행처가 기재되어 있었고 뒷면엔 흑사자의 아름다운 모습이 양각되 어 있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아무 것도 없었고, 바로 그 사실이 틸 러에겐 특별하게 느껴졌다. 황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드러내고 싶었다면 하다못해 황제의 이름 을 못이나 송곳으로 긁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틸러는 자신이라 면 치천제라는 이름이 쓰여있는 부분에 먹으로 '틸러 달비'라고 썼을 거라 생각했다. 유치한 행동이랄 수도 있지만 제국군 부위 한 명을 사자패주로 임명하여 즉석 재판을 여는 그 행동도 실용주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기왕 형식주의적으로 행동하려 했다면 왜 이 사자패 에 새겨져 있는 황명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는가? 틸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말 그럴까? 틸러는 잔혹한 연쇄살인마 파델 미호린과 율형 부차사 사라말 아이솔의 야사를 떠올렸다. 그것은 요식행위의 결정판 이라고 할 수 있고 거기에 실용주의의 개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 다. 도로 구입과 즉석 재판. 틸러는 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라말이 야음을 틈타 말리를 기습하 지 않은 이유까지도. '부사님은 제국 수반인 황제의 이름으로 이라세오날을 처형하려 한 겁니까?'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틸러는 서늘한 기분을 느꼈 다. 거기에는 틸러가 표현하기 힘든 중대한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틸러는 진땀이 나도록 그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엉뚱하게도 오래 전 어느 황야에서 이루어졌던 대화였다. 규리하와 아스캄 사이의 어느 평원이다. 위치보다는 속도에 더 신경 썼기 때문에 그 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몹시도 황량한 땅이 었다. 그곳에서 틸러는 정우에게 질문했다. '골케 남작은 오래 살고 싶어서 파노의 피를 마셨습니다. 아가씨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 아닌가요?' '아니죠. 저는 골케 남작이나 파노 영감님 때문에 길을 나선 것이 아니에요.' 규리하공 아가씨가 길을 나선 것은…… 법의 집행을 막기 위해서다. 그 법은 대장군 엘시 에더리의 말로서 나타났다. '공연한 무고인지 명백한 범죄인지 살핀 다음 범죄임이 확실하다면 조속히 사형을 언도할 것입니다.' 규리하공 아가씨는 성을 파묻었다. 틸러는 무의식 중에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조금 후 틸러는 양손 에 비녀와 사자패를 들고 그것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하나는 길고 하 나는 둥글다. 사람이 만든 물건이라는 공통점 외엔 두드러지는 공통 점을 찾기 힘든 두 개의 물건을 보며 틸러는 설명할 수 없는 유사성 을 느꼈다. 틸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그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느닷없는 외침이 틸러의 사유를 방해했다. 틸러는 험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얼굴로 그 외침의 방향을 돌아보 았다. 그러나 조금 후 외침의 내용을 이해한 틸러는 저릿한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었다. 그리고 그 외침의 내용은…… "황제의 은혜가 거부되었다!" 엘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외침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흥 분했을 때 뿜어내는 가공할 말 냄새와 양파 냄새 때문에 결코 매복 작전을 펼 수 없다는 농담의 주인공, 완벽주의자, 그가 신뢰하는 상 장군이 칼을 뻗어 규리하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황제의 은혜를 거부한 자에게 제국군이 줄 것은 징벌뿐이다! 규리 하성으로 돌격하라! 모두 부숴라!" "마지오!" 엘시가 외쳤지만 그 고함은 들리지 않았다. 사라말을 향해 돌격했다 가 목표를 상실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을 주시하느라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던 그들은 시허릭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대응했다. 그들이 내뿜는 함성이 그 외의 모든 소리를 뒤덮었다. 레콘에겐 북이나 나팔 이 필요없다. 그 악기들의 빈약한 소리는 레콘들의 전의를 고취시키 기는커녕 감상적인 기분에 빠져들게 만들 것이다. 그들의 계명성이 가장 훌륭한 진격 나팔이고 대지를 두드리는 그들의 두 발이 가장 훌 륭한 북채다. 굉음과 함께 민들레 여단이 폭풍처럼 뛰쳐나갔다. 땅이 울리는 진동 속에서 엘시는 민들레 여단병들의 돌격에 아무런 제지도 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의도는 충분하지만 능력이 문제다. 제방이 터진 직후에는 수위가 낮아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레콘 병사들의 돌격이 그러했다. 엘시는 격노에 사로잡혀 시허릭을 돌아보 았다. 시허릭은 붉게 변한 얼굴로 레콘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옆 얼굴에서 엘시는 복수감의 성취를 느꼈다. 그가 목도하지는 않았지만 엘시는 사라티본 평야에서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다. 레콘 병사들에 게 무참하게 유린당했던 장수가 스스로 레콘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느 낄 수 있는 만족감이 시허릭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엘시는 칼자루 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시허릭 마지오!" 시허릭이 고개를 돌렸다. 지우지 않은 흥분과 희열 속에서 시허릭은 엘시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대장군의 굳은 어깨나 칼을 쥐고 있는 손 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엘시는 억지로 칼을 놓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연연하면서 시간 을 낭비할 수 없다. 돌격은 이미 취소할 수 없고 그런 상황에서 지휘 부의 분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엘시의 군사적 감수성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시는 목소리로 시허릭을 질타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눈빛들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미 엎지른 물이니 어쩔 수 없다만, 나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가야 합니다! 민들레 여단의 저 미치광이들 이 자기 머리 위로 돌을 떨어뜨린 폐하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를 줘선 안된단 말입니다! 그것은 바르지 않다. 무엇이 바르지 않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민들레 여단병들이 일제히 황제에 대한 분노를 표현해야 한다는 겁니까? 분노한 레콘들이 말리 위에서 황제의 피와 찢어진 육신을 지상에 흩뿌려야 한단 말씀입니 까? 바르지 않아. 대장군님, 황태자님! 지금은 줄타기를 할 시간이 아닙니다. 모두 살 거나 모두 죽는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온다는 것은 아시잖습니까. 행동 에 나서야 합니다! 저들의 분노를 규리하에 돌려야 합니다. 어차피 전투는 일어날 일이었으니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죄를……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죄를 가져가지 마라! 시허릭 마지오가 사라졌다. 그것은 애초부터 시허릭이 아니었다. 대 화는 독백이었다. 엘시는 시허릭이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한 남자를 보았다. 마른 우물에 갇혀 있는 남자였다. 쇠약하고 불결하고 천박한 짐승이 었다. 그 남자의 몸을 비추는 빛은 없었고, 엘시의 눈에는 그 남자가 똑똑하게 보였지만 남자는 자신의 팔다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 하는 듯했다. 마른 우물이라는 표현은 기능성의 면에서는 정확하지만 사실 묘사에 있어서는 하자가 있는 표현이다. 그 우물은 건조하지 않 다. 바닥은 질퍽질퍽하고 공기는 눅눅하다. 생기를 북돋아주는 습기 와는 거리가 아주 먼, 살갗을 문드러지게 할 것 같은 습기다. 그러나 곰팡이나 이끼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코를 찌르고 속을 뒤집는 악취 뿐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 악취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우물 벽에 등 을 기대어 앉은 채 머리를 떨구고 있다. 칡넝쿨 같은 머리카락이 늘 어져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주위에는 인간과 나가, 도깨비, 레콘의 모사물이 있었다. 우 물의 둥근 벽면을 따라 그려져 있기에 모두들 오목한 모습이다. 마치 가슴을 뒤로 빼내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두 팔을 내밀며 다가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해석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것 이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해석은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로 상식적인 해석. 그 상식이 파괴되었다. 남자의 주위에 있던 사람의 그림들 중 하나가 갑자기 움직였다. 그 곳에 그런 그림이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던 작은 여자의 모습이 벽 에서 걸어나와 남자의 곁에 섰다. 작은 여자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이 불쌍한 사람은 누구죠?" "엘시 에더리지요. 시모그라쥬공에게 나포되었을 때의 모습이에요." "대장군님은? 아, 저기 계시네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계시는 것이군요. 그런데 이번엔 정말 안 주무시는 것 같아요." "백일몽이에요." "전쟁터에서요?" "큰 충격을 받았지요. 그는 자기 죄를 가지고 싶어해요." "죄를? 왜죠?" "죄란 무엇일까요, 정우?" 엘시는 그것이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때 누군가가 갑자기 불을 켰다…… 탈해는 금방이라도 졸도할 듯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탈해는 그녀가 백일몽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에 대한 도 깨비들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녀의 옷 아래에 서 얼비치는 꿈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묘한 광경이다. 불빛이나 색깔 등이 얼비치는 것과는 좀 다르며 유사성을 통해 비유할 만한 것도 없 는 광경이었다. 경이감을 가지고 관찰할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 만 탈해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바깥에서 레콘들의 괴성이 들려온 순간 정우가 꿈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탈해에게 한 가지 가능성만을 의미했다. 공격받는 규리하성을 구하기 위해 정우가 다시 꿈을 사용 하려 한다는 것. 탈해는 비명을 질렀다. "정우!" 탈해의 입에서는 외침뿐만 아니라 빛도 튀어나왔다. 자신의 말을 강 조하는 무의식적인 손짓이나 표정과 마찬가지다. 탈해는 무의식적으 로 자신의 외침에 빛을 더했다. 탈해의 외침에 놀라 움찔했던 정우는 그 빛에 눈을 깜빡였다. "탈해?" "안돼. 또 꿈을 써선 안돼!" "아냐. 탈해. 나는……" 정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벌떡 일어난 탈해가 황급히 탁자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갑자기 두려워진 정우는 탈해의 뒤를 따 랐다. 탁자 위에는 칼집과 상자가 놓여있었다. 탈해는 칼집을 집어 허리에 매달고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숟가락보다 더 긴 물건은 들어갈 수 없는 그 조그마한 상자는 기유 구마리가 건네주고 간 것이다. 정우가 말했다. "탈해. 안돼." 레콘들이 내는 괴성이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소화차와 물동이에 관 련된 다급한 명령들도 들려왔다. 탈해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짚었 다. 그 때 정우가 그의 팔 아래로 파고들었다. 스며드는 듯한 동작으 로 탈해와 탁자 사이에 선 정우는 두 손을 옆으로 뻗어 난간을 쥐듯 탈해의 두 팔을 짚어 눌렀다. 그리고 정우는 고개를 위로 젖혀 탈해 를 올려다보았다. "안돼." "네가 꿈을 쓰게 놔둘 수는 없어." "꿈을 쓴 것이 아니야. 꿈을 꿨을 뿐이야. 그…… 사람처럼." "그 사람?" 정우는 혼란에 빠져 말했다. "몰라. 누군지 모르겠어. 하지만 누구와 함께 꿈을 꾼 것 같아. 그 러고 보니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탈해는 속이 타서 말했다. "그것 됐어. 어쨌든 꿈을 쓰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정우는 긍정의 대답을 말하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 녀의 입술 사이에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정우는 애원하 듯이 탈해를 바라보았다. 탈해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사람들이 다치게 될 것 같으 면 쓸 거야. 그들을 도울 방법이 있는데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잖아. 그러나 정우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탈해 또한 같 은 대답을 돌려줄 것이다. 정우의 뒤편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움찔한 정우는 뒤 를 돌아보았다. 상자 뚜껑이 열려 있었다. 정우가 바라보는 가운데 탈해의 손이 그 안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그냥 칼자루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아니, 그것이 정확한 명칭이다. 탈해가 꺼낸 것은 칼자루와 거기에 붙어있는 코등이, 그리고 코등이 위로 약간 튀어나와있는 칼몸테두리로 이루어진 물건이었다. 모종의 사정에 의해 칼날이 슴베째로 빠진 칼을 보는 것 같다. 도깨비도 안 심하고 다룰 수 있도록 칼날을 달지 않은 칼이라 말한다면 괜찮은 농 담이 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도깨비 도 안심하고 다룰 수 있도록 칼날을 달지 않은 칼'이기 때문이다. 탈해는 그것을 허리에 찬 칼집에 꽂아넣었다. 짧은 칼몸테두리에 의 해 고정될 뿐이니 손으로 칼자루를 툭 치기만 해도 빠질 것처럼 위태 하게 보였지만 탈해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즈믄누리의 무사장 이 꽂아넣은 그 무인검(無刃劍)은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뽑기 전에는 결코 칼집에서 빠져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우는 마치 버젓하게 칼날 이 있는 칼인 양 칼집에 꽂혀있는 무인검을 바라보다가 탈해를 보았 다. 탈해는 정우가 꺼내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너를 도울 방법이 있는데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어." "탈해……" 탈해는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나도 개밥바라기를 쓰고 싶지는 않아. 이걸 쓰지 않을 방법이 있 어." "그게 뭔데?" 탈해는 무릎을 꿇었다. 정우와 눈맞춤한 탈해는 그녀의 두 어깨에 손을 얹고는 간절하게 말했다. "즈믄누리로 돌아가자. 정우." 정우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밤을 부르는 별의 이름을 가진 칼 을 안타까움 속에서 바라보았다. 민들레 여단의 레콘들이 규리하성을 향해 쇄도했다. 굉음을 내며 달 려오는 그들의 모습은 벼락 없이 천둥만 치는 구름덩이 같았다. 물론 구름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병무대부 오니샤 퓨덴은 지 체없이 외쳤다. "살수! 살수하라!" 오니샤의 외침을 들은 야리키는 벼슬을 빳빳하게 세웠다. 그는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태도로 몸을 돌린 다음 주랑 아래로 뛰어내렸다. 성벽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후에야 야리키는 주랑을 바라보았다. 곧 그는 근심을 느꼈다. 아트밀이 여전히 파라말과 함께 주랑 위에 서있 었다. 규리하군은 다가오는 레콘들에 주의하느라 그 두 사람에 대해 서는 신경을 쓸 수 없는 것 같았다. 야리키는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다시 올라가서 두 사람을 끌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트밀이 물 때 문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거니와 파라말도 그런 상황에서는 성의 방어 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아트밀이 첫걸음을 떼기도 전에 병사들이 소화차에 달라붙었 다. 아트밀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양수 손잡이를 잡은 병사들과 살수관을 잡은 병사들은 달려오는 레콘을 보느라 두 사람은 쳐다보지 도 않았다. 소화차의 양수 손잡이를 붙잡은 병사들이 용을 쓰자 곧 살수관에서 물이 세차게 뿜어나왔다. 결코 반가워할 수 없는 소리에 야리키는 더 뒤로 물러났다. 벽에 몸이 부딪친 후에야 걸음을 멈춘 야키리는 아트 밀을 노려보았다. 아트밀은 물 뿜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야리키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병사들이 든 살수관은 보다 먼 곳으로 물을 뿜기 위해 모두 비스듬 히 하늘을 겨냥하고 있었다. 폭포의 기세에 비할 수야 없지만 성벽 위에서 튀어나온 수십 가닥의 물줄기는 허공에서 미세한 물방울로 흩 어지며 무지개 어리는 물의 장막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물의 방패인 셈이다. 돌격하던 레콘들은 양수 손잡이를 움직이던 병사들이 만족할 만큼 노성을 질렀다. 하지만 레콘들은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거세게 돌 격하다가 갑자기 멈춘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 문에 레콘들은 멈추는 대신 방향을 바꾸었다. 레콘들의 돌격이 오른 쪽으로 급격히 꺾였다. 레콘들은 그대로 성벽을 따라 달렸다. 성벽의 모든 지점을 방어하기엔 규리하성이 보유한 소화차의 숫자가 부족했고 그래서 전면에 비해 측면에 배치된 소화차의 숫자는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부족한 소화차를 보충하기 위해 물동이를 대기시켜둔 병사들이 있었다. 병사들은 돌이나 화살을 쏘듯 물이 담 긴 바가지를 휘둘러댔다. 방비가 허술한 곳을 찾던 레콘들은 그런 병 사들의 모습에 폭언을 내뱉으며 계속 달렸다.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달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성벽 위의 규리하 병사들은 위아래 턱이 부딪치는 느낌을 맛보았다. 성을 한 바퀴 돌 듯이 무섭게 달렸지만 레콘들의 돌격은 성을 반 바 퀴 정도 돌았을 때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규리하성의 해자에 물을 공 급하는 하천이 레콘들의 앞쪽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뒤에서 밀어붙이 는 힘 때문에 하천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 레콘들은 다시 방향을 바꿨 다. 레콘들의 무리는 규리하성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커다란 호를 그렸다. 뒤로 돌아선 레콘들은 말리를 향해 움직이는 소리의 모습을 목격했 다. 레콘들의 움직임을 보며 인간 병사들의 투입 시기를 가늠하던 시허 릭도 거대한 움직임을 느끼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속도가 빠르 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소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말 리를 겨냥하는 방향이었다. 엘시 에더리가 수립한 규리하성 공격 계획은 레콘들의 선제돌격으로 규리하군이 물에 의한 방어체제로 바꾸도록 한 다음 인간 병사를 돌 격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성은 든든한 방어 체계이지만 그 활동 영역은 넓다고 할 수 없다. 애초에 성의 목적이 스스로 움직이 지 않은 채 움직이는 상대를 막는 것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좁 은 주랑 위에서 물에 의한 방어와 투사, 낙하 병기에 의한 전통적인 방어를 번갈아 시도하다 보면 분명히 혼란이 일어나 방어 효율이 떨 어질 것이다. 알기 쉬운 간단한 계획이지만 섬세한 지휘능력이 필요 한 계획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것은 바로 대장군 엘시 에더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시허릭은 공격이 시작되면 엘시가 바로 그 능력을 발휘해줄 거라 믿 었지만 엘시는 그곳에 연기 많이 나는 등불이라도 있는 양 눈살을 찌 푸린 채 시허릭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허릭이 소리의 움직임을 느낀 것은 엘시를 독촉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였다. 시허릭은 두려워하는 눈 으로 소리를 바라보다가 고함을 질렀다. "대장군님! 적들의 하늘치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그렇게 외친 것 은 엘시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엘시는 고통스러운 표정 으로 시허릭을 바라보다가 소리를 올려다보았다. 소리에 대한 대비책 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무 대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비책이 었다. 그것은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병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상 이었다. 따라서 소리에 대한 대응은 말리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시 허릭의 고함은 소리를 저지하라는 뜻이 아니라 소리가 규리하성의 상 공을 떠났으니 빨리 규리하성을 공격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장군의 입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1 중대에게 돌격 명령을 하달하라. 이레. 그을린발을 데려와라." 엘시의 그림자인 양 서있던 이레가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대장군 의 명령을 받은 쟈마 데시마스 중대장은 휘하의 31중대에게 돌격 명 령을 내렸다. 레콘들의 돌격이 시작되자 규리하성의 성벽 위에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파라말에게 신경을 쓸 수 없게 된 것처럼, 소리 위에 있던 자들 도 레콘의 움직임을 보게 되자 제이어 솔한에게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아이저 규리하가 명령하기도 전에 이이타는 소리를 전진시켰 다. 정지 상태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라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 만 소리의 기세만큼은 말리를 지러쿼터 산맥 동쪽으로 밀어낼 작정인 양 거세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첫 번째보다 예상이 가능한 두 번째의 경험이 사람을 더 잔인하게 짓누른다. 말리와 소리의 첫 번째 충돌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을 침묵 속에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갑작 스럽게 시작된 전투도, 소리의 움직임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제이어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제이 어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에 도취되어 있었다. 바닥을 향해 엎드린 채 제이어는 계속해서 하늘치의 등을 쓰다듬었다. "알았다, 알았어." 하늘치의 등 위에서 아실은 그런 제이어를 바라보는 유일한 사람이 었다. 지멘은 다가오는 말리의 모습이나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레콘들 의 움직임을 보지 않았지만 제이어도 보지 않았다. 그는 아실을 바라 보고 있었다. 아실이 제이어를 향해 움직였을 때 지멘은 지진에 필적 하는 충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에 조금도 구애됨 없이 아실을 따라 움직였다. 아실은 제이어에게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간 다음 한쪽 무 릎을 꿇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제이어. 하지 말아요." 지멘은 제이어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왈칵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이어는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부드럽지는 않지만 사납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이어는 아실을 쳐다보았다. "아실. 너는 뭘 모르고 있어." "아니오. 저도 알아요." 지멘은 바람이 조금씩 거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전까지도 고공의 바람은 난폭했지만 이제 소리의 움직임에 의한 공기의 압력이 느껴지 기 시작했다.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했다. 지멘은 고개를 슬쩍 돌려 말리를 확인했다. 말리는 뒤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상군이 규리하성을 초토화하는 동안 도망쳐다니기만 할 작정인 모양이다. 하 지만 구조물을 가지고 있는 말리의 한계속도와 소리의 속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지멘은 말리가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 다. 그것은 지멘에게 복잡한 고민을 선사했다. 제이어가 말했다. "안다고?" "예. 알아요." "그럼 말해봐." 아실은 제이어에게 손을 뻗고 싶은 것처럼 어깨를 꿈틀거렸다. 하지 만 제이어는 온화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손길도 단호하게 거 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아실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환상계단이 율형부사의 육체에 그런 극적인 힘을 주었다면 다른 것 에도 그럴 수 있겠지요." 제이어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는 가늠할 수 없는 기쁨을 느 끼는 양 벌쭉 웃었다. 아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이 태고의 약속이 이루어졌던 이유인 거죠? 하긴 자신에게만 물리적인 영향을 끼치는 환상이라는 것은 좀 기묘한 선물이지요. 율 형부사처럼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편법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그의 몸은 그 충격으로 상당히 망가진 것 같아요." "그리고 재가 되었지. 용이 그를 불태웠으니까." 아실은 꿈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멘은 새로운 충격에 서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섬광이 황제가 내뿜은 불길이었냐 고 묻고 싶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왕의 고민은 새로운 측면 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오랜 습관이 다시 지멘을 붙잡았다. 말을 하 는 것은 아실의 역할이다. 거센 바람에 아실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아실은 한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 분의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겠어요. 어쨌든 그 분은 말리 에 오르기 전에 이미 몸이 많이 망가졌을 거예요. 예. 자신의 몸을 지렛대로 써서 하늘치가 주는 환상의 힘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은 역시 하늘치 환상의 올바른 이용 방법이 아니에요. 그것은 육체나 육 체가 기대어 있는 바깥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하늘치가 사람에게 내려와야 하는 거야. 사람이 자기 몸을 이끌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건 오 히려 몸에 매이는 짓이지. 몸이 아니야. 바깥 세상이 아니야." 아실은 침착하게, 하지만 약간의 두려움을 담아 말했다. "예. 하늘치 환상은 상상한 자에게만 영향을 끼치지요. 그리고 우리 에겐 바깥과 구분되는 안쪽 세상이 있어요. 하늘치 환상은 우리의 안 쪽 세상을 위한 것이었죠. 제이어. 그것은 우리의 영에 작용할 예정 이었어요." 제이어가 미소를 지었다. 꾸밈없는 투명한 미소였다. =============================================================== 39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9. 신을 긍정하는 태도 (2) | 2004·12·04 08:53 | HIT : 111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9-2 관련자료:없음 [49422]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2-04 05:35 조회:58 피를 마시는 새 39. 신을 긍정하는 태도 - 2 끔찍한 열기가 한 사내를 불살랐던 장소에서 공기가 미쳐 날뛰었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떠밀리지 않기 위해 황제는 환상으로 자신을 감 싸 고정시켰다. 마침내 열기가 흩어지고 바람도 조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바람만으로도 사라말 아이솔의 재를 흩날리기엔 충 분했다. 치천제는 재를 피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흑사자 모피를 추스르며 황 제는 오히려 재를 향해 상체를 내밀었다. 그럴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 중 아무도 그럴 능력이나 여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 라말의 죽음에 복상하는 것은 무심한 바람뿐이었다. 치천제는 그것을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치천제는 살인자의 조문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치천제는 말이나 니름을 빚어내지는 않았다. 사라말은 이전 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였고 그런 이를 위한 조문의 말이나 니름은 없 었다. 물론 지상에 태어나는 모든 이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 로도 존재하지 않을 유일무이한 존재들이고 그런 관점에서는 사라말 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다. 사라말의 죽음은 다른 죽음들처럼 희귀 하고 독특한 존재의 소멸이다. 그리고 그의 삶 또한 대부분의 영역에 서는 마찬가지다. 귀하고 독특하고 심미적이지만 그것은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삶과 죽음 사이의 짧은 시간 동안, 거리로 따진다면 지상에 서 말리까지 이어지는 그 거리 동안 사라말은 그 자신을 유일한 구성 원으로 하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었다. 사라말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경계를 뛰어넘음으로써 발견했다. 상상한 자에게만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환상계단이나 환상벽, 환 상근육은 모두 동일하다. 사라말이 새로운 환상을 발견한 것은 아니 다. 하지만 밟는 계단이나 보는 벽과 달리 환상근육은 본질을 변화시 킨다. 물론 보잘 것 없는 수준의 변화지만 최초의 것에는 그 규모에 구애되지 않는 크나큰 의미가 있다. 사라말은 개척자다. 그것은 아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라말이 개척한 영역에 들어선 자들은 새로운 획득에 잠시 놀라긴 할 것이다. 하지만 경이가 일상이 되면, 아니, 경이를 일상으로 만들 기 위해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가치있는 사냥감을 향해 획득 한 힘을 쓸 것이다. 자신을 무기로 만들 것이다. 살인자의 후손들은 그런 쪽으로는 비상한 편이다. 그들은 사라말의 위업이 초라해보일 정도로 기발한 자기 무기화를 이루어낼 것이다. 너를 죽여서 나를 살 린다는 논리에 의해 계통을 보존한 살인자의 후손들에게는 너를 제압 하여 나를 확인한다는 논리가 본능으로 틀어박혀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적용되는 환상의 힘으로 자신을 상냥한 이웃으로 만드는 대신 자신의 몸을 무기고로 만들 것이다.' 사라말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철광을 발견한 최초의 광부는 강철 병기가 난무하는 전쟁터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사라말 아이솔 은 무엇이 있는지 모를 어둠 속을 파고내려가 환상광맥을 발견했을 뿐이다. 문제는 그의 발견이 지나치게 빨랐다는 것이다. 최초의 광부, 최초의 대장장이, 최초의 환상잡이. 그는 자신의 행적 과 함께 소멸해야 한다. 그랬기에 치천제는 그를 불살랐다. '그대의 잘못은 없다. 그것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아니라 오 히려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니까. 그것이 약속이니까. 다만 너무 빨랐 다. 아직 떠나간 첫 번째 종족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너희들에겐 없 다. 사라말 아이솔. 그대는 일만육천 년 후에 태어났어야 했다.' 그가 조문받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조문할 말이나 니름이 없기 에 황제는 사라말의 죽음에 시간을 봉헌했다. 치천제는 오직 사라말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치천제는 현실의 문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직 느린 속도 였지만 소리는 가속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치천제는 안타까움과 만족감을 동시에 느꼈다. 안타까움은 소리를 자신에게 넘기지 않은 제이어의 배신에 대한 것 이고 만족감은 그가 배신한 시점에 대한 것이다. 제이어가 더 늦게, 이를 테면 엘시의 사도가 된 후에 배신을 시도했다면 차기 황제는 큰 곤경을 겪게 되었을 것이다. 차기 황제가 겪을 모든 고난의 싹을 잘 라버리려는 그녀에게 제이어의 때이른 배신은 반갑기까지 했다. '너에게 사도가 알아야할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네 선민종족이 걸 어야 할 하나의 가느다란 길. 그리고 너는 그것이 가장 거창하고 화 려한 실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군.' [위로 떠올라라.] 세 번째 벽난로방에서 황제의 니름을 전달받은 데라시가 걱정스러운 니름올 보내어왔다. 말리는 소리처럼 앞뒤없는 가속을 할 수 없으니 도망친다 해도 끝내 따라잡힐 거라는 내용이었다. 데라시는 차라리 아라짓 전사들을 소리 위로 파견하여 소리의 조종자를 제압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보냈다. 합리적인 제안이지만 황제는 그것을 거부했 다. [상관없다. 도망쳐라.] 이윽고 말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말리를 향해 다가가는 소리의 위 쪽에서 시카트가 외쳤다. "황제가 도망치려 하고 있어! 더 빨리 움직여, 형!" 이이타는 동생을 곁눈질로 흘끔 바라보았지만 다른 조처를 취하지는 않았다. 소리를 더 가속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속도로 충 돌한다면 소리의 위쪽에 있는 자들이 무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이 타는 황제가 도망친다면 차라리 아래로 내려가 지상군을 위협하는 것 이 어떨까 생각했다. 그 때 아이저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계속 돌진하거라." 이이타는 움찔하여 아버지를 보았다. 아이저는 차분하게 말했다. "대장군은 살육광이 아니다. 황제의 패퇴나 죽음이 기정사실이 된다 면 무익한 보복에 열을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말리에 치명적인 타격 을 가하는 것이 규리하성을 구하는 길이다." 똑같은 말을 명령처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저의 어투 는 일선에서 물러나 조언을 하는 고문의 그것 같았다. 흥분해 있기로 는 시카트와 마찬가지였지만 이이타는 어렴풋이 그것을 느꼈다. 이이 타는 의혹을 느꼈다. 아이저는 혹 책임 회피를 하려는 것일까? 마지 막 순간이 다가오자 하늘치를 움직인 것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말하 는 것일까? 이이타의 의심은 맞으면서 동시에 틀린 것이었다. 책임 이양과 책임 회피는 외견상으로는 똑같아 보이고 때론 구분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이저의 무의식은 전자에 가까웠다. 아이저는 규리하 변경백 위에 도전할 수 있는 후보자들 중에서 자신이 도태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지켜온 나날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없기에 정우에게 변 경백위를 넘겨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이저는 정우가 물 러난 자리에 오르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일 거라 믿기 시 작했다. 시대의 급류에서 빠져나와 강변에 오른다. 그곳에서 젖은 몸을 말리 는 동안 도통 기다릴 줄 모르는 급류는 그를 내버려두고 멀어진다. 아이저 규리하에게 일어난 일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나이의 문제 가 아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하얀 수염을 흩날리면서도 시대의 급 류를 앞지를 듯이 달려갔고 죽는 순간까지 그러했다.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정신이 어떤 시대에 속하느냐의 문제다. 하늘치, 꿈, 신이 되려는 용, 환상근육.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시 대의 변화는 시간이 그렇듯이 비가역적이다. 바뀌기 전의 시대에 속 해 있었기에 아이저는 사라지는 시대와 함께 물러날 수밖에 없다. 서 약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시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새로운 시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것을 자신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이타는 소리와 함께 그 투쟁에 뛰어들었다. 어느 소리? 질문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무엇이 무엇의 이름을 땄는 가. 아이저는 이이타의 곁에 있는 발케네 여인을 바라보았다. 일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그 말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전체에 해당하는 표현이며, 바로 그 사실이 아이저가 사 라지는 시대에 속한 인물임을 증명한다. 아이저는 이이타에게 하늘치를 줄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하늘치를 손에 넣은 것은 이이타의 역량이지만 그 지점까지 이이타를 인도한 것은 아이저였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이타는 아버지에 대한 의심을 잊기로, 최소한 옆으로 치워두기로 결정했다. 보다 다급하면서 더 큰 문제가 앞쪽에 있었다. 하늘치에게 크다는 말 외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이이타는 말리의 상승 속도를 가늠하다가 충돌을 감행하려면 소리 또한 상승시켜야 한다고 결정했 다.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지상군을 위협한다면 아래로, 말리를 공격하려면 위로 떠올려야 한다. 짧지만 깊은 고민을 한 이이타는 아 버지의 말에 따라 충돌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주위의 사람들 에게 상승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이타는 지멘과 아실, 그리고 제 이어가 있는 쪽을 향해서도 같은 말을 외쳤다. 이이타의 외침을 들은 지멘은 다시 말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실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제이어. 당신이 말한 그 첫 번째 종족은 우리가 좀 더 나 은 존재가 되는데 도움이 되도록 저것을 남겨준 모양이에요. 더 강하 고 더 빠른 존재가 아니에요. 더 사려 깊고 더 지혜롭고…… 표현할 수가 없네요. 아직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해서. 하지만 동물과 사람의 차이만큼이나 큰 어떤 차이가 생기겠지요. 당신은 그걸 시도할 생각 이지요? 하지 말아요." 제이어는 아무 말없이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침을 삼켰다. "율형부사의 두 팔에 일어났던 일이 당신의 정신에 일어날지도 몰라 요. 아니, 그럴 가능성이 지극히 높아요. 그리고 팔과 정신은 비교할 수 없어요. 정신을 가지고 모험을 해선 안돼요. 제이어." 제이어가 헐떡임처럼 말했다. "내가 제정신인가? 내 정신은 이미 억압되어 있어." "제이어." 제이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해볼 것이 없단 말이야. 알겠어, 아실? 내 정신은 이미 내 것이 아니야. 저 저주받을 용의 것이지. 내 것도 아닌 다른 녀석의 것으로 도박을 하는 건데 무서울 것이 어디 있겠어?" 아실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던 지멘의 경우엔 벼슬이 약간 뻣뻣해졌다. 그 두 사람은 사 라진 아실의 증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제이어에겐 독심의 능력 같은 것은 없고, 설령 그런 능력이 있다 해도 그런 상황에선 발휘되 지 않았을 것이다. 분노와 낙천성이 조화된다는 것은 언뜻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제이어는 바로 그런 상태에서 말했다. "고마워, 아실. 위험하다고 말해줘서. 다른 녀석들이라면 실패하려 고 그러는 거라면 집어치우라고 말했을 테지. 나는 실패를 추구한 적 이 없어. 한 번도! 그런데 모두들 내가 실패에 매료된 사람인 것처럼 말한단 말이야. 어떤 바보가 그런 걸 추구한단 말이야?" 아실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싶은 것을 참았다. "당신이 실패를 추구하지 않아도 당신은 실패할 거예요. 너무 위험 하다고요. 당신의 정신이 억압되어 있다 해도 그건 억압이지 변형은 아니에요. 억압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하려는 일은 영 자체를 망가뜨릴 거예요." 제이어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 나는 용이 가지고 있는 영 하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되겠 지. 즐거운 일이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아실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입을 닫았 다. 그 시각 의사 소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아실만은 아니었다. 규리하성의 성벽 위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성 주위를 질 풍처럼 배회하는 레콘들에게 물을 쏟아붓느라 바빴지만 바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은 전장 저편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 고 있었다. "산-크-이-라-리-로-둘-둘-하-나-셋-마-테-하-!" "셋-하-나-셋-리-리-마-란-리-크-하-쿨-!" 발리츠 굴도하 남작은 바쁘지 않은 자들 중 하나였다. 신분에 걸맞 지 않는 일이라 피한 것은 아니다. 흉벽 밖으로 물을 쏟아붇거나 양 수 손잡이를 누르는 것, 그리고 살수관을 휘두르는 것 모두 그의 키 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남작은 장창을 옆구리에 끼우듯 세워 든 채 그 계명성에서 규칙성을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그것이 대장군의 지시를 담은 암호라는 것은 명백했다. 뜻모를 계명 성이 들려올 때마다 성 바깥에 있는 민들레 여단병들의 움직임과 성 을 향해 돌진하는 31중대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었다. 둘 중 더 인상 적인 쪽은 31중대였다. 그들은 돌격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한 기묘한 모습으로 성을 향해 다가왔다. 성을 향해 멈춤없이 쇄도하듯 달리다 가 갑자기 속도를 늦췄고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듯하다가 방향을 바꿔 왼쪽으로 움직였다. 31중대가 달려들 때마다 규리하병은 깜짝 놀라 물통과 살수관을 내려놓고는 활과 투창, 돌 등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무장을 바꿀 때마다 성의 다른쪽으로 움직였다고 생각 하던 레콘들이 그들 앞쪽에 불쑥 나타났다. 그러면 병사들은 기겁하 여 다시 물을 뿌릴 채비를 갖추었다. 그런 혼란이 일어날 때마다 많 은 물이 무의미하게 쏟아졌고 주랑 아래나 성 바깥으로 떨어지는 병 장기들도 많았다. 결국 규리하군 측에서는 둘 중 하나의 적만 선택해야한다고 결정했 다. 주랑 위까지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그들은 물을 아낄 겸 레콘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성 바깥은 이미 젖어있었고 성벽 바로 옆에는 해자도 있었다. 그 습기와 해자가 레콘을 막아주길 기대 하며 규리하군은 어느새 성큼 다가오 31중대에 공격을 집중했다. 무 수한 돌과 화살, 그리고 창이 31중대를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또다시 뜻모를 계명성이 들려왔고 그러자 31중대원들은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올린 채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몇몇 불운한 제국군 병사들이 날아온 무기에 꿰뚫려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대 부분의 무기는 방패에 맞고 튕겨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31중대 곁으 로 민들레 여단의 레콘들이 몰려들었다. 레콘들은 떨어진 병장기를 주워들고는 날아왔을 때의 몇 배나 되는 속도로 성벽 위로 되돌려보 냈다. 창과 돌이 몸을 으스러뜨릴 듯한 속도로 날아오자 주랑 위의 규리하군은 흉벽 뒤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병장기를 던질 엄두 를 낼 수 없게 된 규리하군은 다시 물을 쏟아붓기로 했다. 그러나 날 아온 계명성이 레콘들을 흩어지게 했고 쏟아지는 물 속으로 뛰어든 것은 31중대원들이었다. 자신들의 공격이 별 소득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 겁을 먹은 규리하 병사들은 물과 투사 병기 양쪽을 중구난방을 날려보냈다. 그런 공격 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제국군에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지 만 수비측에는 상당한 혼란을 주었다. 성벽 위에 연못이나 무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곧 물과 병기 모두를 소진한 곳이 나타나기 시 작했다. 그 순간 마치 비수로 찌르는 듯한 명령이 들려왔다. "하-나-셋-둘-레-크-아-리-뛰-어-올-라-라-!" 코끼리는 도약할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을린발이 사용하는 코 끼리 명령에는 뛰어오른다에 해당하는 명령이 없었다. 그래서 그을린 발은 뛰어오르라는 명령만큼은 일상어로 외쳤다. 규리하 병사들도 당 연히 그 말을 알아들었지만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물론 해자는 강이 아니다. 그것은 실개천 정도의 넓이에 불과하고 아무리 레콘이 라도 실개천은 뛰어넘을 수 있다. 하지만 레콘이 그런 도하를 하려면 반대쪽에 충분히 넓은 개활지가 있어야 한다. 해자처럼 물 반대편에 깎아지른 듯한 성벽이 서있는 상황에서는 심리적인 거부감 때문에 뛰 어오를 수 없다. 앞쪽이 막혀 있다는 느낌 때문에 레콘은 물에 빠질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수직적인 장애물 때문에 해자가 강처 럼 넓어지는 셈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레콘들은 아래쪽에 발 딛지 않을 다리라도 있지 않으면 뛰어넘을 수 있는 폭의 강이라도 결코 뛰어넘지 않는다. 하물 며 규리하성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민들레 여단이었다. 그 모든 사항 들을 고려해본 규리하 병사들은 뛰어오른다는 말도 어떤 암호일 거라 생각했다. 불운하게도 뛰어오르라는 명령은 암호가 아니었다. 그리고 민들레 여단의 병사들이 갑자기 그 유별난 공수증을 극복한 것도 아니다. 계 명성의 여운이 사라졌을 때 민들레 여단병 사이에서 폭발하듯 뛰어오 른 레콘은 민들레 여단과 상관 없는 인물이었다. 규리하의 병사들은 넋이 빠진 얼굴로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 보았다. 레콘은 수십 수백 번 연습이라도 해본 사람처럼 완벽한 각도 와 능숙한 자세로 솟아올랐다. 뛰어오른 순간부터 그 레콘이 주랑 위 에 설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뛰어오른 레콘의 머리에선 다 른 레콘보다 월등히 큰 벼슬이 파라락 전율하고 있었고 손에는 검도 아니고 단봉도 아닌 기이한 병기가 쥐어져 있었다. 어찌 보면 날이 세 개인 칼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그 물건은 삼각철봉이었다. 친구들에게 왕벼슬이라 불리는 레콘 쵸지는 침착한 얼굴로 주랑 위 에 내려섰다. 도약의 정점이 성의 높이와 비슷했기 때문에 주랑에 내 려서는 쵸지의 발소리는 별로 크지도 않았다. 비정상적인 광경에 비 정상적으로 작은 소음 때문에 규리하 병사들은 꿈이라도 보는 기분으 로 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다 빨리 이성을 회복한 자들만이 자신에게 닥친 사태를 직감했다. 그것은 비장한 문장으로 쓰여져야 할 역사의 한 장이었다. 과텔 규리하에 의해 부흥했던 규리하 변경백 가문이 두 번째 멸망을 당할 순간인 것이다. 과텔의 업적은 그들의 예상보다는 좀 더 지속될 듯하다. 주랑 위에 선 쵸지는 규리하 병사들의 틈으로 어떤 레콘을 발견하고 는 주춤했다. 물동이와 소화차가 모든 효과를 발휘하던 장소에 레콘 이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다는 것은 퍽 기묘한 일이었다. 쵸지가 그 기묘한 레콘에 주의를 기울였을 때 어디선가 날아온 쇠사슬이 그의 발목에 착 감겼다. 깜짝 놀란 쵸지가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전에 그 쇠사슬은 홱 잡아당 겨졌다. 그 순간에도 쵸지는 설마 자신이 끌려가겠는가 생각했다. 하 지만 쵸지의 예상이 무색하게도 그는 사지를 흔들며 허공으로 팽개쳐 지는 꼴을 당했다. 성 안쪽의 바닥에 등부터 떨어진 쵸지는 고통보다 도 정신적 충격에 신음했다. '이건 레콘이다. 그렇다면……' 쵸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발목을 감고 있는 쇠사슬을 손으로 부여 잡았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를 질질 끌고 갈 예정이던 쇠사슬은 그 저항에 덜컥 멈췄다. 쵸지는 무거운 쇠사슬이 팽팽해지도록 힘있 게 끌어당기며 그 끝을 바라보았다. 공중에서 위아래로 진동하는 쇠사슬의 끝은 길다란 철봉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철봉은 쵸지의 예상처럼 어떤 레콘의 두 손에 쥐 어져 있었다. 쵸지는 쇠사슬을 힘껏 끌어당기고는 발을 흔들며 말했 다. "야리키?" 레콘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아나?" "엘시에게 이야기를 들었지. 낚시를 숙원으로 삼은 레콘이 있다고." 쵸지의 발목에 감겨 있던 쇠사슬이 느슨해졌다. 쵸지는 발목을 세게 흔들어 쇠사슬을 떨쳐내고는 그것을 놓았다. 야리키는 낚시줄을 끌어 당겨 회수하고는 말했다. "내가 그 레콘이다." "쵸지. 왕벼슬이라고 불러도 돼. 그게 더 기억하기 쉬울 테니까." "돌아가. 왕벼슬." 쵸지는 삼각철봉을 앞으로 겨누고는 성문이 있는 쪽을 흘긋 바라보 았다. "저 문을 열려고 들어왔는데." 야리키는 낚시줄을 낚시대에 감고는 그것을 창처럼 움켜쥐었다. 쵸 지는 삼각철봉을 왼손으로 옮겼다 다시 오른손으로 옮기고는 그 팔을 한 바퀴 돌렸다. "좋아. 하자." 두 레콘이 서로를 향해 돌격했다. "즈믄누리로?" 즈믄누리를 말하는 정우의 목소리에는 생경함 같은 것이 담겨 있었 다. 자신이 전혀 가보지도 못했고 관계도 없는 땅을 말하는 듯한 정 우의 어조에 놀라며 탈해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 거기가 네 고향이야." 정우는 탈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나는 비셀스 규리하야." "나는 탈해 머리돌이야. 머리돌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이 내게……" "아냐. 탈해. 나는 정우 규리하가 아니라 비셀스 규리하라고 말했 어." "어? 그거, 킴들이 말하는 그거. 그래. 하지만 그 규리하는 너를 버 렸어." "그래도 내가 비셀스 규리하라는 것은 바뀌지 않아. 내가 아무리 원 해도 도깨비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탈해는 눈을 크게 떴다. 정우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 날……" 탈해는 세상에서 가장 딱딱한 도깨비가 되었다. 정우는 그런 탈해를 보다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차마 탈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정 우는 탈해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난 아프지 않았어. 꿈이 내게 오자마자 그건 꿈속의 일이 되었으니 까. 기억만 남았지 고통은 없었어. 그러니 제발 슬퍼하지마. 정말 아 프지 않았어. 그 날 내게 일어난 다른 일을 설명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냥 들어줘." 정우의 두 팔 속에서 탈해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있잖아. 그 이전까지는 내가 킴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거 든. 어린애가 추억이니 그리움이니 하는 말의 뜻만 아는 것처럼 말이 야. 나는 자기가 킴이라고 말하면서 도깨비처럼 살고 있었지. 하지만 그 날 나는 내가 도깨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어. 나는 말이지, 사라질 사람이었던 거야." 정우의 가냘프면서도 따스한 콧김이 탈해의 목을 쓰다듬었다. 불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도깨비였지만 탈해는 그것이 뜨겁다고 생각 했다. "운이 좋다면 오래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젠가는 죽 을 테고, 그러면 나는 사라질 거야. 내가 알고 좋아했던 다른 도깨비 들이 어르신이 되어 살아있는 도깨비들과 재미나게 이야기할 때 나는 그곳에 없을 거야. 내가 만졌던 것도, 내가 걸었던 길도, 내가 읽었 던 책도 그대로 있겠지만 나는 없을 거야. 처음엔 기억 속에 내가 있 을 테지. 내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이 있을 거야. 하지만 가을이 하나둘 지나면 그 이야기도 점점 뜸해지겠지. 다른 이야기가 계속 생 길 테니까. 그렇잖아? 새로 시작되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에 끝난 내 이야기를 왜 하겠어? 더 이상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될 거야. 그걸 깨달았을 때, 너와 다른 도깨비들과 같이 가을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정말 도깨비가 되고 싶었어." 탈해는 까마득한 과거로의 추락감을 느꼈다. 정우의 말은 바로 그 자신의 생각이었다. 그 날, 도깨비불로 정우에게 치명적인 화상을 입 혔던 날 탈해는 정우가 킴이라는 것을, 언젠가 그의 곁을 떠날 수밖 에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탈해, 탈해야. 정우가 죽을 수도 있었잖니.' '어르신이 된다고요?' '아니, 킴은 어르신이 되지 않아.' '무슨 말씀이죠? 어르신이 안 되면 뭐가 되는데요?' '그냥 사라져.' 탈해는 다른 죽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가까스로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허무감이나 두려움,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만 탈해는 사라지는 것의 소중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소중함의 크기 가 커질수록 자신이 저지를 뻔한 일에 대한 공포도 커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탈해는 자신이 더 이상 뜨거운 불을 만들지 못한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울해하는 것은 안 좋아. 나는 우울해하지 말자고 생각했 지. 고맙게도 도깨비들은 내가 사라질 사람인 것처럼 대해주지 않았 어. 만나고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니까 나도 그것 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더라.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까지도 잊어버렸어. 이곳으로 올 때까지 나는 내 죽음에 대해 생각하 지 않았지. 그리고 나는 쉽게 사라지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는 사람들 을 만났어." 그녀를 죽이려 했던 시카트 규리하와 그녀를 살리려 애썼던 틸러 달 비는 정우가 보기에 똑같았다. 둘 다 그녀의 죽음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삶을 무 시한 채 그녀를 죽이려 하는 것과 그녀의 삶을 무시한 채 그녀의 죽 음을 막으려 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정우는 그들이 쉽게 스러지는 자신들의 삶을 무시하기 때문에 정우의 삶 또한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쉽게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이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어. 그래서 영원히 살 것처럼 시시한 일들을 하는 것 같았어." "시시한 일들……" "그래. 하지만 나는 믿고 싶었어. 그들에겐 뭔가가 있을 거야. 시시 하지 않은 것, 그들의 짧은 생명을 빛나게 하는 것. 나는 비셀스 규 리하로서 그것을 찾아낼 거야. 즈믄누리로 돌아가는 것은 그들을 무 시하는 것 같아." 탈해는 다급하게 말했다. "정우. 킴들에게서 네가 찾는 것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 "킴들? 아냐." "아니라고?" 정우는 탈해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탈해의 두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정우는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후 정우는 머리를 숙여 정수리를 탈해 의 가슴에 댔다. "나는 레콘들에게 신경이 쓰여." "레콘?" "그래. 킴들은 자기들의 시시한 일을 많이 꾸며놓기 때문에 그것이 정말 시시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기 어려워. 나가들은 많이 보지 못했고. 하지만 레콘들은 꾸미지 않아. 그리고 시시해보이는 일은 하 지 않고. 내가 그것을 찾아낸다면, 아마도 레콘에게서 찾아낼 수 있 을 것 같아." 그 순간 가까운 곳에서 무시무시한 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탈해는 얼굴을 떨며 개밥바라기의 칼자루를 붙잡았다. 정우 또한 놀 란 표정으로 굉음이 들려온 쪽을 보다가 말했다. "레콘?" 발딱 일어난 정우는 탈해가 말릴 틈도 없이 창가로 다가갔다. 덧창 을 조금 연 정우는 그 틈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정우는 중얼거 리듯 말했다. "레콘들이 싸우고 있어." 제국군 사령부에서는 엘시가 약간 충혈된 눈으로 규리하성을 바라보 고 있었다. 그을린발을 통해 내린 명령에 의해 31중대와 민들레 여단 은 성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로 물러나서 성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 었다. 하지만 성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보건대 쵸지는 성문을 열 수 없는 난관에 빠진 듯했다. 해자와 성벽을 동시에 뛰어넘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레콘이 또 있 을 리가 없다. 엘시는 쵸지가 그런 일을 하겠다고 제안했을 때도 믿 기 어려웠다. 쵸지가 곤경에 빠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직접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그를 도울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가 없었다. 엘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규리하성을 바라보았다. 초조한 얼굴로 규리하성을 바라보던 주테카가 고함을 빽 지르듯 말 했다. "레콘이야. 레콘에게 걸린 거야. 무슨 수 없나, 엘시! 저기에 있는 녀석들 중 야리키는 네가 잘 아는 녀석이잖아. 그리고 그 아트밀인가 하는 놈은 원래 제국군이라면서. 그러면 네 말을 듣지 않겠어?" 엘시는 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을린발에게 외쳐야 할 말 을 알려주었다. 그을린발이 고함을 질렀다.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가 말합니다! 야리키! 아트밀! 거기 들어간 쵸지와 협력하여 성문을 여십시오!" 대답은 없었다. 그을린발은 같은 내용을 한 번 더 외쳤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쇠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엘시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리와 소리를 본 순간 엘시는 그 둘이 당장 부딪칠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몸을 굳혔 다. 그러나 조금 후 엘시는 그 두 하늘치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간과 했음을 깨달았다. 두 하늘치는 서로의 몸길이의 반 정도, 따라서 얼 핏 보기엔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치의 몸길이 절반은 엄청나게 먼 거리다. 그리고 소리는 그 거리 를 쉽게 줄이지 못하고 있었다. 엘시는 말리가 위로 떠오른 까닭을 이해했다. 하늘치 말리가 위로 떠오르면 그 위에 있는 구조물들은 아래로 눌리는 힘을 느끼며 바닥 에 단단하게 고정된다. 말리가 충분한 가속을 하면서 도망칠 수 있는 방향은 위쪽뿐이었다. 말리는 규리하성이 함락될 때까지 소리와의 충 돌을 피하며 시간을 끌 작정인 것이다. 하지만 말리가 영원히 솟아오 를 수는 없으니 그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엘시는 규리하성 의 문을 열 다른 방도를 떠올리려 애쓰며 성을 바라보았다. 그 때 엘시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규리하 성까지의 거리는 말을 달려도 한참이 걸릴 먼 거리였기 때문에 설령 누군가가 그를 향하고 있다 해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주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엘시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규리하성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의도적으로 눈을 감은 것은 아니다. 그저 늘상 있는 눈 깜빡임일 뿐이다. 빼꼼히 열린 덧창을 통해 아래를 보던 정우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뒤쪽에 있는 탈해인가 생각했지만 곧 정 우는 그 방향이 성 바깥쪽이라고 느꼈다. 정우는 규리하성 바깥을 바 라보았다. 하지만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 안에는 황무지뿐이었 다. 그 너머로 제국군 본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긴 했지만 정우는 그곳에서 사람의 모습도 분간할 수 없었다. 의아해하며 그곳을 보던 정우가 눈을 감았다.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다. 언제나 일어나는 평범 한 눈 깜빡임일 뿐이다. 정우와 엘시가 동시에 눈을 감았을 때, 두 사람이 동시에 어둠 속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그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발견했다. 정우는 어둠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엘시 에더리를 보았다. 그의 모습은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뚜렷했다. 일상의 공간에 서 그렇게 뚜렷하게 보이는 거리라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가까운 거리지만 정우는 엘시가 대단히 멀리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정우가 본 엘시의 모습은 똑바로 서있는 것이었지만 정우는 그가 말에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으로 보이는 모습과 그것에 대한 판단이 불일치 를 이루고 있었지만 정우에겐 그 불일치가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우는 말을 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엘시를 바라보 기만 했다. 엘시는 어둠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정우와 다른 여자를 보았다. 그가 보는 여자는 한 명뿐이지만 그곳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엘시에게 그 불일치는 기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엘시의 마음을 흔 든 것은 기시감이었다. 엘시는 이전에도 그런 모습을 보았다는 느낌 을 받았다. 조금 후 엘시는 자신이 실제로 그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엘시는 잠바이에서, 민들레 요새에서, 엔 거에서, 그리고 조금 전에도 그녀, 혹은 그녀들을 보았다. 엘시는 그 모든 만남을 떠올렸고 그것을 잊었다는 것까지 떠올렸다. 엘시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우이면서 정우가 아닌 여자가 말했다. "죄란 무엇일까요, 정우?" 엘시는 그 여자가 밤의 다섯째 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다시 그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이전의 그 모든 만남 동안 밤의 다섯째 딸은 한 번도 엘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꿈이 말을 거는 상대는 언제나 정우였다. 정우에게 꿈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엘시 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느꼈다. 엘시는 그만이 꿈을 상대할 수 있다고 확언한 황제를 떠올렸다. 꿈, 혹은 정우가 말했다. "죄는 공동체가 발견해낸 사람의 특징이에요." "사람의 특징이오?" "속이기, 훔치기, 빼앗기, 죽이기 같은 것을 금지하는 법은 있지만 반짝거리기나 쪼개지기, 끓기 등을 금지하는 법은 없어요. 앞에서 말 한 것과 달리 그것들은 사람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죄 가 될 수 없어요." "죄는 사람 속에 항상 있다는 것이군요." "사람의 일부죠. 그리고 생명의 일부죠." "생명이오?" "다른 동물들뿐만 아니라 식물조차도 죄를 가지고 있어요. 다만 식 물들이나 동물들의 공동체는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사람의 그것에 비 해 지극히 조악한 것이라서 그들의 죄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식물에게도……?" "그렇죠. 황제는 죄를 가지고 있어요. 식물이니까요." 엘시는 놀란 얼굴로 정우, 혹은 꿈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식물이라 니? 꿈, 혹은 정우가 말했다. "그렇죠. 용이니까. 용은 식물이지요. 불을 토하는 식물." 엘시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정우이자 꿈이며 하나이지만 둘인 것 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혼란 속에서 목 소리가 들려왔다. "죄는 생명의 일부에요. 죄가 없는 자는 살아있지 않아요. 살아있지 않은 자는 꿈과 대화할 수 없지요." 엘시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꿈과 정우와 무엇인지 모를 무 엇인가를 바라보았다. 꿈의 눈인지 정우의 눈인지는 명확히 구분할 수 없지만 어떤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에겐 죄가 없어요. 따라서 도덕도 없지요. 저 사람은 살아 있지 않고, 그래서 내가 손을 댈 수 없어요. 정우. 황제가 저 사람을 부른 것은 그 때문이에요."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9. 신을 긍정하는 태도 (3) | 2004·12·05 10:21 | HIT : 118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9-3 관련자료:없음 [49425]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2-05 05:48 조회:85 피를 마시는 새 39. 신을 긍정하는 태도 - 3 정우는 가깝고도 먼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은 가장 깊은 동굴 속 같았다. 그리고 소 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존재한다면 호흡이나 맥박에서부터 옷자 락 부딪치는 소리까지 온갖 소리가 들릴 테지만 그곳에는 귀 먹은 어 둠밖에 없었다. 정우는 다른 곳으로 시선이나 주의를 돌리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영영 엘시의 모습을 되찾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우는 엘시를 직시했다. 엘시는 꿈과 그녀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서로 말을 할 수 없는 거 리감이 있었지만 엘시가 그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었 다. 그런 불일치는 정우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우는 말했다. "왜 저 분은 죄가 없는 거죠? 그건 생명의 특징이라면서요." 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장애자를 생각해보겠어요? 처음부터 시력이나 청력, 혹은 다른 것 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나는 경우가 있지요. 하지만 이 비유는 좋은 비유라고 할 순 없어요. 엄밀하게 말한다면 사산아를 생각하는 편이 낫지요." 정우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사산아요?" "예. 어떤 사산아가 기막힌 우연에 의해 몸의 구조가 살아있는 것을 모방할 수 있는 형태로 자리잡혀서, 시체임에도 불구하고 기능은 하 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겠어요? 맥박치고 호흡하고 말하고 생각할 수 도 있을 정도로 기능하는 경우요. 그렇다면 그 사산아는 마치 살아있 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여러 가지로 오해의 소지가 많 고 이해의 난점도 많은 예지요. 그런 것을 가리켜 죽었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니까요. 그래서 장애자를 말한 거예요. 정우. 대장군은 시각이 나 청각 대신 죄를 잃은 채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엘시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닫히는 눈꺼풀의 감각을 느꼈음에도 불 구하고 보이는 광경에는 변화가 없었다. 혼란에 빠진 혼란이었다. 정 우가, 꿈이, 어둠이, 아무 것이, 부재가 말했다. "장애자요." "예." "킴으로 태어난 것이 제 장애라고 생각했어요. 한 번밖에 못 사는 삶, 불에 타는 몸, 짧은 이야기." 엘시는 그것이 아마도 정우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만족스러 운 논리는 아니지만 그 이야기에 대답하는 것은 정우가 아닐 것이다. "정우. 당신은 죄를 가지고 있어요." 정우인 듯한 여자가 오른손을 들어 왼팔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정우 가 아닌 듯한 여자에게 말했다. "죄가 도대체 뭐죠? 그건 생물의 어떤 특징이지요?" 영원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봄여름, 가을겨울, 봄여름가을겨울…… 후위 이이익! 후위이이익! 바뀌는 계절들의 빠른 속도 때문에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난다. 밤낮이 어찌나 빠르게 바뀌는지 이제 더 이상 밤과 낮 을 구분할 수 없다. 파르르 떨리는 어슴푸레한 빛이 있을 뿐이다. 후 위이이익! 후위이이익!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다. 나라 가 수면 위의 소금쟁이처럼 대지 위를 정신없이 미끄러진다. 산맥이 무너져 들판이 되고 들판이 사막으로 바뀐다. 후위이이이…… 휘파람 소리가 갈매기 소리로 바뀐다. 검푸른 바다 위에 빛의 파편이 얄랑거린다. 황혼 무렵. 쇠약하게 이 글거리는 태양이 바닷물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해변의 모래 는 적금색. 그러나 거품 많은 물결이 스칠 때마다 모래는 흑갈색으로 변한다. 계속해서 색깔이 변하는 모래가 수다스럽게 보인다. 정우와 엘시는 붉은 모래 위에 검은 그림자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해변에 서있다. 일만 육천 년, 혹은 삼십만 년 후의 해변에 선 두 남 녀는 서로를 바라본다. 가장 큰 인내심을 가진 자도 대답을 듣는 것 을 포기할 만큼 긴 시간이다. 그 때문에 정우와 엘시는 질문을 잊었 고 심지어 자신조차 잊었다. 그들은 그저 상대방만을 바라본다. 바닷 물 속으로 가라앉던 태양이 유언처럼 말한다. "혼란을 퍼뜨리는 파렴치한 힘이지요." 정우와 엘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침묵하는 그들에게 어둠이 찾아든다. 그리고 별빛이 빗줄기처럼 후드득후드득 떨어진다. 밤은 장막이고 별은 미세한 구멍이다. 그 구멍에서 명주실처럼 가느 다란 빛줄기가 길다란 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어두운 해안에 떨어진 빛들이 파사삭파사삭 부서진다. 엘시는 눈을 떴다.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다. 호흡을 자각하는 것보다 더 드물게 자각하 는, 그런 평범한 깜빡임일 뿐이다. 특별히 주의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눈을 깜빡였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없다. 제국 대장군이라고 해서 그런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엘시는 태어난 이래 그 때까지 1억 8천 번 쯤 눈을 깜빡였고 그것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주시당한다는 느낌에 의아해하며 규리 하성을 보았을 때 일어났던 눈 깜빡임 또한 마찬가지다. 엘시는 자신 이 눈을 깜빡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엘시가 느낀 것은 시야를 흐리는 눈물이었다. 엘시는 당혹하여 손을 들어올렸다. 눈물의 양은 많지 않았다. 크게 하품을 한 후에 나오는 정도의 눈물이 눈 아래쪽을 살짝 적시고 있었 다. 엘시는 이토록 긴박한 순간에 눈물이 흘러나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눈을 쓱 비빈 다음 그것을 잊었다. 그리 고 주시당하는 듯한 느낌도 잊었다. 그는 쵸지가 처해있는 곤경을 타 파할 방도에 대해 고민했다. 정우는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이 눈을 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감았다는 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어떤 존재도 발견하지 못한 정우는 다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쵸지와 야리키는 무서운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규리하 병사들은 감히 그 싸움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고 또 야리키의 안위를 걱정하여 물을 뿌리지도 못했다. 정우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레콘들이 싸우고 있어." 말을 끝낸 정우는 그 말을 이미 했던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 만 그것은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정우는 지금의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 대해 그런 말을 했나 보다고 생각하고는 덧창을 닫 고 창가에서 물러났다. 뒤로 돌아선 정우는 그녀를 향해 다가오다가 멈춘 탈해를 보았다. 탈해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창가에 가까이 가면 안돼. 정우. 그런데 레콘들이 싸운다고?" "그래. 왕벼슬이 야리키와 싸우고 있어." 탈해는 움찔했다. "그러면 침입이 일어났다는 말이잖아!" "들어온 건 왕벼슬뿐인 것 같아. 성문을 열려고 들어온 모양이야. 야리키는 그걸 막으려 하고." 탈해에게 그 말은 규리하성이 함락되었으며 점령군이 방문 앞까지 도달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무사장은 다급하게 말했다. "정우. 네가 이 바깥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찾고 싶어하는지 솔직히 나는 이해하기 힘들어. 하지만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 "필요하다고 생각해." "왜지?" 정우는 덧창 틈으로 불어들어온 바람에 싸늘해진 볼을 쓸어만졌다. "탈해. 나는 킴이야. 나도 지금 바깥에서 싸우는 저 사람들처럼 한 번만 사는 사람이야. 그들의 짧은 삶을 의미있게 하는 것이 있다면 나도 그것을 알아야 해. 내게도 그것이 필요할 테니까. 도깨비들에게 선 그것을 찾을 수 없어. 그들의 죄가 나에게도 있다면……" 정우는 말을 멈추고는 깜짝 놀란 듯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 녀는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탈해에게 말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이상한 말을 했어. '그들의 죄가 나에게도 있다면'이라고 했는데." "죄? 무슨 죄 말이야?" 탈해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정우는 혼란스러워 하는 표정 으로 덧창을 돌아보았다. 덧창 바깥에서는 레콘들이 내는 격렬한 소 리가 꽝꽝 들려오고 있었다. 날아오는 조간을 삼각철봉으로 쳐낸 쵸지는 부리로 계명성을 토해내 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상대의 기를 꺽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구름을 날려보내기 위해서였다. 확 날아오는 먼지에 당황한 야리키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낮추며 조간을 두 손으로 들어 위로 올렸다. 그러자 무지막지한 기세로 날아온 삼각철봉이 조간에 작렬했다. 야리키는 팔이 저릿한 것을 무시하며 낚시대를 비틀었다. 쵸지의 손 이 미끄러지는 것을 본 야리키는 재빨리 머리를 내밀었다. 쵸지는 황 급히 손을 끌어당겼지만 야리키의 부리가 그의 손등을 찢어놓는 것을 피하지는 못했다. 손에서 핏방울을 뿌리며 물러나는 쵸지의 다리를 향해 야리키의 조간이 날아갔다. 그러나 쵸지는 풀쩍 뛰어 조간을 피 하면서 동시에 야리키의 아랫부리를 무릎으로 쳐올렸다. 야리키는 머 리가 뒤로 홱 젖혀진 채 뒤로 주루룩 미끄러졌다. 왕벼슬과 야리키가 어울린 시간은 대략 이십여 초 정도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두 레콘의 발과 상대를 놓친 무기가 할퀴고 지나간 그들 주위의 땅은 흉터 투성이였고 피와 깃털 과 돌조각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어 그 참상이 말로 표현하기 어 려울 지경이었다. 이십여 초가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규리하 병사들 은 아무도 그들 주변에 다가가지 않았다. 현명한 태도였다. 두 레콘 이 싸우는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나무토막을 던져넣으면 톱밥 뭉치 가 되어 땅에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규리하 병사들을 더욱 질리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두 레콘이 전력으로 싸운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이었다. 두 레콘은 겁에 질 린 인간들이 그들에게 물을 뿜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정된 장소를 벗어나지 않은 채 싸우려 애썼다. 만약 그들이 걸리적 거리는 것 없는 넓은 장소에서 전력으로 싸웠다면 격투의 규모는 지 금보다 훨씬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규리하 병사들은 그런 격투를 상 상도 하기 싫었다. 뒤로 미끄러지던 야리키는 돌벽에 등을 부딪치고서야 겨우 멈춰섰 다. 야리키는 곧 날아올 삼각철봉에 대비하여 조간으로 앞을 막았다. 하지만 기대하던 공격은 없었다. 무릎으로 야리키를 날려보낸 쵸지는 그 자리에 서서 야리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리키는 부리에서 느껴 지는 저릿한 느낌을 무시하며 말했다. "뭐야?" 쵸지는 삼각철봉을 다른손으로 옮겨 쥐고는 그것을 어깨에 걸쳤다. 그는 야리키에게 쪼인 손등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야리키를 쳐다보았 다. 쵸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야리키는 다시 말했다. "뭐냐고?" 쵸지는 부리를 탁 부딪쳤다. "생각해 보니 씨루러 들어온 건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목 안 말라?" "술병 가지고 있나?" 쵸지는 머리를 좌우로 까딱까딱 움직였다. 야리키는 희한한 녀석 다 보겠다고 생각했다. 쵸지는 수염볏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물은 어때?" 돌벽에 몸을 기대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야리키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 덕분에 야리키는 발로 돌벽을 걷어차게 되었다. 야리키는 아파할 겨를도 없이 쵸지를 노려보았다. 쵸지는 삼각철봉을 허리에 꽂아넣고는 뒤로 훌쩍 뛰었다. 그가 다시 발을 디딘 곳은 주랑 위였다. 그곳에 있던 규리하 병사들은 숨이 턱 막힌 채 쵸지를 바라보았다. 쵸지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쵸지가 움켜쥔 것은 가까이 있던 병사 가 손에 들고 있던 살수관이었다. 레콘의 팔이 그렇게 길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병사는 기겁하며 살수관을 놓았다. 살수관을 받아든 쵸지는 그것을 쥔 채 양수 손잡이 곁으로 다가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양수 손잡이 담당병들은 그것을 내버려둔 채 황급히 물러났다. 소화차 곁에 선 쵸지는 한 손에 살수관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양수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아래쪽에 있는 야리키를 내려다 보았다. 야리키의 몸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부풀어 있었고 그 벼슬은 철판인 양 빳빳하게 서잇었다. 쵸지는 야리키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주고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 는 잔뜩 벌린 부리 사이로 살수관을 꽂아넣었다. 마치 목구멍 안쪽으 로 그것을 집어넣으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쵸지는 다른 손으로 양수 손잡이를 잡아눌렀다. 끼익끼익 소리가 나다가 흐늘흐늘하던 송수관이 내부에 있는 유체의 압력으로 통통해졌다. 곧 살수관을 통해 쵸지의 목구멍 안쪽으로 물 이 분사되었다. 사람들은 시각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느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가장 냉철한 이들만이 그 광경에 내재되어 있는 합리성을 느꼈다. 물 그릇을 부여잡고 그 안에 부리를 집어넣는 레콘들의 통상적인 음수법 과 다를 것이 없다. 쵸지의 경우엔 부리가 그릇을 삼키는 형국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자해하는 광경을 보는 듯한 충격을 느낀 것은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였다. 목을 불룩거리며 물을 꿀꺽꿀꺽 마시던 쵸지가 양수 손잡이를 멈추 었다. 송수관이 다시 흐늘흐늘해졌다. 쵸지는 입에서 살수관을 뽑아 내고는 긴 탄성을 질렀다. "커어!" 긴 한숨까지 뿜어낸 쵸지는 주의깊게 살수관을 몸 바깥으로 휘둘러 관 안쪽에 남아있던 물기를 뿌렸다. 합리적이지만, 역시 충격적인 광 경이다. 쵸지는 흡족한 얼굴로 살수관을 쥔 손을 늘어뜨리고는 야리 키를 보았다. 야리키는 돌벽에 등을 기대 채 주랑 위의 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몸을 기대고 있는 것인 양 불안하게 보였다. 그 의 얼굴은 레콘의 눈으로 보아도 무표정에 가까웠고 위아랫부리는 원 래 하나인 양 단단하게 맞붙어 있었다. 쵸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 화차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살수관이 몸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쥔 쵸 지는 소화차를 질질 끌며 주랑을 걸었다. 소화차를 주랑 위로 끌어올 리기 위해 규리하군이 가설한 경사로에 도달한 쵸지는 소화차를 앞세 우고는 그것을 내려갔다.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과 출렁거리는 물소리 가 불길하게 울려퍼졌다. 쵸지는 바닥에 내려섰다. 그는 살수관을 야리키쪽으로 겨냥하고는 양수 손잡이에 다시 손을 얹었다. "한 모금?" 꽉 다물린 야리키의 부리 사이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비를 맞고 있는 새끼 고양이나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새를 떠올렸다. 그 사실을 반가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나는 지상 최강의 종족은 두려움에 흐느끼고 있 었다. 어떤 자들은 하얗게 질렸고, 어떤 자들은 덩달아 흐느꼈다. 쵸지는 즉시 살수관의 방향을 바꾸었다. 시선을 떨어뜨려 야리키의 눈을 피한 쵸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 따라오지마." 그는 소화차를 끌며 뒷걸음질로 성문 쪽으로 움직였다. 물을 가진 자들도, 그리고 다른 병기를 가진 자들도 쵸지를 저지할 생각을 떠올 리지 못했다. 한 손에는 살수관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소화차 손잡이 를 쥔 채 쵸지는 뒤를 흘깃흘깃 보면서 규리하성 안쪽을 가로질렀다. 뒤로 걸어가지 않아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야리키는 벽에 부조된 레 콘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쵸지가 앞쪽을 보면서 걸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성문 앞에 도달한 뒤의 일이었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모든 것이 새로이 바뀌었다. 쵸지는 느닷없이 엄습하는 불안함을 느꼈다. 야리키를 바라보려던 쵸지는 생각을 바꿔 위를 보았다. 위쪽에서 육중한 무엇이 공기를 가 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그것이었기에 쵸지는 엉 겁결에 살수관을 들어올렸다. 그 때 위에서 떨어진 것이 소화차를 덮 쳤다. 쵸지는 그것이 육중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육중하다는 것 이상으로 무거웠다. 그것은 거대했으며 또한 물에 가라앉는 비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것의 충돌에 직면하자 소화차는 종이로 만든 것 처럼 간단히 산산조각났다. 쵸지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꺼풀이 내리닫히는 그 짧은 시간 동 안 극도로 긴장한 쵸지는 많은 것을 보았다. 쵸지는 소화차가 파편으 로 바뀌며 그 속에 있던 물이 커다란 꽃잎처럼 벌어지는 모습을 보았 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방울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보았다. 쵸지는 소화차를 짓밟아 부순 것이 레콘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그 레콘의 일 그러진 얼굴도 확인했다. 쵸지는 그렇게 분노한 레콘은 처음 보겠다 고 생각했다. 두 눈은 맹렬한 적개심으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고 수 염볏은 분노로 푸들푸들 전율하고 있었다. 그 레콘은 오른팔을 뒤로 끌어당긴 채 굳어 있었다. 그 즈음 쵸지는 자신이 이미 눈을 감았으 며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망막 속에 남아있는 잔영이라는 것을 깨달았 다. 그가 보는 광경 속의 모든 것이 멈춰있는 것처럼 보인 것은 그 때문이다. 소화차가 부서지며 폭발한 물이 쵸지에게 닿았다. 그 소름 끼치는 느낌에 쵸지가 비명을 지르려 했을 때 레콘의 주먹 이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허리가 접혀진 채 뒤로 날아간 쵸지는 성 문에 부딪쳤다. 도개교가 박살나지 않은 것은 그 앞쪽에 있던 창살 때문일 것이다. 창살이 부서지며 파괴력이 줄어들었고, 그래서 도개 교는 부서지지 않은 채 다만 내리떨어졌다. 쵸지는 떨어진 도개교 위 를 데굴데굴 구르며 규리하성 바깥으로 나왔다. 규리하성의 입장에서 보면 드나드는 방식이 모두 특이한 방문자인 셈이다. 규리하성 쪽에서 들려온 충돌음에 놀란 주테카가 본 것은 도개교 위 를 굴러나오는 쵸지의 모습이었다. 주테카는 철저를 쥐고 있던 두 손 을 힘껏 들어올렸다. "열렸다! 그런데 저게 뭐야. 몸으로 부딪쳤……" 주테카는 말끝을 삼켰다. 그의 동공은 팽창되었고 손에서는 힘이 빠 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철저가 어깨를 강타했다. "꽥!" 주 테카는 죽는 소리를 하며 어깨를 움켜쥐었지만 눈은 규리하성의 성문 에 고정시켜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론솔피와 히베리 또한 주테카의 그것에 한 점 부족함 없는 경악으로 성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열린 성문을 통해 걸어나오는 레콘을 보 고 있었다. '목욕하던 중이었어'라고 말하면 어울릴 것이다. 인간일 경우에 그 렇다는 말이다. 물에 흠뻑 젖은 채 뚜벅뚜벅 걸어나온 레콘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세 레콘은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벼슬도 젖 어있었고 부리도 젖어있었고 깃털도 모두 젖어있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몸 곳곳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그의 뒤에 남는 것은 젖 은 발자국이었다. 질주하는 소화차와 정면 충돌한 듯한 모습이었고, 그것은 명백히 사실이었다. 성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민들레 여단병들도 그 모습에 몸을 부풀리 며 뒤로 물러났다. 히도큰 하장군은 부하들을 통제해야 할 임무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얼굴로 아트밀을 바라보았다. '센시엣 특수소용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중 가장 바람직한 것 은?' 민들레 요새에서 거론되는 것 중 가장 한심한 농담이다. 그 답 은 '어떤 수용자가 헤엄을 쳐 탈주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 한 사고인 까닭은 민들레 요새병들이 절망도로 건너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탈주범을 쫓아 땅 위를 뛰어다니는 것은 민들레 요새병들 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에게 행운이란 있을 수 없다는 민들레 요새병들의 자조를 나타내는 농담일 뿐이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어디서 헤엄이라도 치다가 온 것 이 아닌가 싶은 레콘이 눈앞에 나타나자 히도큰 하장군은 그 듣는 사 람 화나게 하는 농담이 사실은 농담이 아니라 예언이 아니었던가 의 심했다. 31중대의 쟈마 데시마스 수교위는 히도큰 하장군보다 빨리 자제력을 회복했다. 용기의 차이가 아니라 연륜의 차이다. 민들레 요새에서 히 도큰 하장군이 겪어야 했던 재난이 다종다양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 에 그가 겪은 재난이 레콘이 저지를 수 있는 재난으로 한정되어 있었 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경험의 폭이 좁은 것이다. 하지만 쟈 마 데시마스 수교위는 야전 전투 지휘관이었고 온갖 전장을 누비며 희한한 경험들을 많이 쌓은 인물이다. 아트밀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수교위는 물에 젖었건 젖지 않았건 레 콘은 위험하다는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고 그 즉시 부하 장병들에게 '신속정숙하게 퇴각'에 해당하는 손짓을 보냈다. 그 명령에 따라 31 중대원들은 빠르게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민들레 여단병들은 동요 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간절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눈으로 히도 큰 하장군을 바라보았다. 기어코 그 중 한 명이 짓눌린 목소리로 말 했다. "어이, 히도큰! 어떻게 해?" 히도큰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트밀의 불타는 눈이 그를 똑 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히도큰의 생각과 달리 아트밀이 보고 있었던 것은 그가 아니다. 아 트밀은 사라말의 죽음을 보고 있었다. 그 외엔 볼 것이 없었다. 사라말의 죽음 때문에 느꼈던 고통과 분노, 수치심에 대해 아트밀은 거짓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른 것을 보려 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을 어디로 돌려도 보이는 것 은 고통과 분노, 수치심뿐이었다. 어렴풋이 아트밀은 자신에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짓은 진실에 대비될 때 거짓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럴 때도 거짓은 거짓인가? 아트밀은 더 이상 그것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트밀에겐 고 통과 분노, 수치심뿐이었다. 아트밀은 철극을 들어올렸다. 쓰러진 채 그 모습을 보던 쵸지가 재 빨리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아트밀은 철극을 앞족으로 내밀며 외쳤 다. "어-느-놈-이-냐-!"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트밀은 그 침묵을 불손으로 여겼다. 사라말 살해자를 감추려는 소행으로 여겼 다. 아트밀은 전신의 모든 기관으로 분노했다. "어-느-놈-이-죽-였-냐-!" 아트밀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철극을 당겨든 채 앞으로 뛰쳐나갔다. 물에 젖은 레콘이 격분하여 돌진하는 곳에 서있을 수 있 는 레콘은 거의 없다. 민들레 여단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던 시허릭 마지오 상 장군은 치를 떨며 외쳤다. "이 바보들, 도망치려면 성 안쪽으로 도망쳐! 문이 열려 있잖아!" 심정적으로 민들레 여단병들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그을린발은 시허릭의 말을 이해했다. 흥분한 아트밀은 열린 성문을 내버려둔 채 뛰쳐나왔고 그 때문에 도개교가 내려온 성문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 다. 도개교를 끌어올리는 장치와 창살 모두가 파괴되어 빠른 시간 안 에는 그것을 다시 봉쇄할 수도 없었다. 그을린발은 몸을 부풀렸다. "성-안-으-로-! 성-안-으-로-들-어-가-라-!" 계명성을 끝낸 후에야 그을린발은 자신이 엘시의 명령이 아닌 시허 릭의 바람을 따랐음을 깨달았다. 히베리는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여 엘시를 돌아보았다. 엘시는 어두운 얼굴로 규리하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베리는 대장 군의 입술이 무슨 말을 하듯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입 술을 읽을 수는 없었다. 고공의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상승하는 말리는 지상에 있는 사람들 을 구분지어 보기 어려운 높이까지 도달해 있었다. 말리의 지느러미 위에 서있던 치천제는 규리하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눈으로 보기 어 렵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환상벽을 상상했다. 그녀는 그 환상벽에 규 리하성의 모습이 떠오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환상벽에는 규리하성의 모습 대신 어떤 인간 남자의 뒷모습 이 나타났다.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황제였지만 황제도 환상벽 위 에 무엇이 떠오를지 정확히 예상할 수는 없다. 치천제는 당황하지 않 은 채 환상벽에 나타난 인간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곧 남자의 새하얀 옷을 확인했다. 환상벽에 나타난 것은 말리를 추적하는 소리 위에 서 있는 제이어 솔한이었다. 거침없이 상승하는 소리 위에서 제이어는 꼿꼿이 선 채 상상한 자에 게 영향을 주는 환상의 힘을 다루기 시작했다. "제이어." 제이어는 자신이 다룰 환상의 모습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자 신에게 물리적인 영향을 주는 환상을 만들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두려워하는 얼굴의 아실이 바라보는 가운데 제이어는 자신의 정 신에 영향을 주는 환상에 대해 상상했다. 형태가 아닌 순수한 기능만을 상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먹는다는 기능은 음식의 심상이나 무엇인가를 씹는 입의 심상 등을 필요로 한다. 그 어떤 심상도 없이 먹는다는 기능만을 상상한다는 것 은 감각으로 현실에 접근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에겐 지난한 일이다. 더군다나 제이어의 경우처럼 그 기능 자체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 지 않는다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늘치 환상으로 영을 변화시켜 더 나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실의 말처럼 아직 그런 존재가 되지 못했는데 그 존재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지멘. 제이어를 좀 말려봐요. 내 말을 듣지도 않아요." "아실." 하지만 제이어에겐 우회로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다. 제이어는 하늘치의 약속을 이용하기로 했다. 도구는 도구의 목적을 내포한다. 하늘치는 사람의 영에 영향을 주기 위한 도구이고, 따라서 그 도구는 사람의 영에 영향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제이 어는 하늘치를 자신의 도구이자 인도자로 삼기로 했다. '네 약속을 떠올려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떠올려라! 나에게 네가 할 일을 해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이어는 불쑥 치밀어오르는 초조감을 애써 억눌렀다. 단번에 성공 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과욕일 것이다. 제이어는 자신의 조급함을 원 망하고는 다시 하늘치에 집중했다. '너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네가 단순히 영의 용해로, 영의 대장 간에 불과하다면 그토록 많은 눈이 달려 있지는 않겠지. 눈이 있다는 것은 바깥의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일 거야. 나를 받아들여라.' "기절이라도 시켜요. 지멘. 제이어는 자기를 망가뜨릴 거예요. 막아 야 해요." "아실! 내 말을 들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느냐? 그저 하늘에 뜬 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약속만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었다. 네가 싫증이나 무료함을 느낄 수 있기나 한 건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네가 견뎌야 하는 것을 누가 나에게 주려 한다면 나는 그를 죽이거나 자살할 것이 다! 그 가없는 세월 동안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을 기다리는 것 뿐이겠지. 그것을 달성하라. 나에게 네 약속을 집행해라!' "무슨 말이오? 제이어를 말릴 방법이 있어요?" "그게 문제가 아냐. 나를 붙잡아! 곧 충돌할 거야!" 아실은 황급히 하늘을 보았다. 소리의 머리 너머로 수면 위로 머리 를 내민 산처럼 말리의 넓은 배가 보였다. 아실은 그것이 그토록 가 깝다는 것에 놀랐다. 거대한 추격이 끝나고 있었다. 위로 상승함으로써 말리는 소리를 다 루는 이이타가 예상한 것보다 더 오랫동안 도주했지만 소리를 떨쳐낼 정도로 빠르지는 못했다. 규리하에서 수직 방향으로 멀어지면서 이이 타는 불안감을 느꼈다. 황제를 패퇴시킨 후 규리하로 돌아갔을 때 이 이타는 완전히 파괴된 규리하를 보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 두려움 때 문에 이이타는 위험할 정도로 소리를 가속시켰다. 소리는 그의 의지 를 정확히 수행했다. 앞으로 몇 분 내에 소리는 말리의 턱 아랫부분 에 충돌하게 될 것이다. 그 지점은 이이타가 흥분과 긴 숙고 끝에 결정한 위치였다. 위로 치 솟아오르는 말리를 따라 상승하면서 이이타는 얼핏 황당하게까지 느 껴지는 착상을 떠올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 계획이었지 만 이이타는 만약 성공한다면 단번에 황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에 매료되었다. 황제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충돌을 감행한다 는 것은 너무도 소모적이다. 그리고 그런 소모적인 공격에 사랑하는 연인을 계속 동참시킨다는 것을 이이타는 참을 수 없었다. 이이타는 소리를 세게 끌어안았고 그러자 소리는 더 열렬한 기세로 그를 포옹 했다. 그 포옹은 이이타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허락이었다. 이이타는 아무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시도를 감행했다. 이이타는 아래쪽에서 말리를 쳐올려 하늘치를 뒤집어버리기로 결심 했다. 말리가 그런 공격에 어떤 타격을 입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온전할 수 없을 것이다. 말리와 소리의 상대적인 위치를 볼 수 있었던 자들은 모두 이이타의 계획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 계획은 그들을 전율하게 했다. 규모의 면에서 그것은 산맥을 뒤집는 것이나 다름없다 할 수 있다. 하늘치 가, 유구한 세월 동안 유유히 하늘을 떠다닌 그 물체가 배를 하늘로 향하고 등을 땅으로 향한 모습으로 뒤집어지는 모습을 그들은 상상하 기도 어려웠다. 커지는 말리의 모습을 본 아실도 이이타의 계획을 짐작했다. 아실은 다급한 표정으로 제이어를 바라보았지만 지멘은 아실을 집어들어 가 슴에 끌어안았다. 검은 깃털 속에 푹 파묻힌 아실은 숨이 막히는 기 분을 느꼈다. 아실을 끌어안은 지멘은 몸을 낮췄다. 이전처럼 뛰어서 충돌의 충격 을 피할 생각이었다. 말리를 바라보며 다리를 긴장시키던 지멘은 제 이어를 흘깃 바라보았다. 제이어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보 지 못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제이어는 모든 마음으로 하늘치에 집중하고 있었다. '약속을 떠올려라! 나를 봐!' 충돌까지는 1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트밀은 미친 듯이 철극을 휘두르며 민들레 여단의 병사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하지만 너무 많은 목표를 한꺼번에 추적하는 아트 밀의 분노는 그의 다리를 갈팡질팡하게 했다. 아트밀은 힘껏 뒤쫓던 상대를 내버려둔 채 갑자기 다른 상대를 향해 달려드는 짓을 반복했 다. 민들레 여단의 병사들이 아트밀을 맞상대했다면 그런 두서없는 공격으로도 효과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물에 흠뻑 젖은 아트밀을 본 레콘들은 오직 도망만 쳤다. 지상 최강의 종족은 도망치는 능력도 발 군이었다. 그렇게 도망다니던 레콘들 중 일부가 마침내 열린 성문 앞에 도달했 다. 규리하 병사들은 다가오는 레콘들을 향해 결사적으로 물을 퍼부 었지만 레콘들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떨어지는 물이 잠깐 뜸해 진 사이 레콘들은 성문 안쪽으로 날듯이 뛰어들었다. 도개교에는 발 이 닿지도 않았다. 성안으로 뛰어든 레콘들은 분노의 계명성을 뿜어내었다. 규리하성의 벽과 기둥, 천장과 바닥이 전율했다. 그 성을 이루는 돌 들은 너무도 오래되었고 그 때문에 반쯤은 대지의 일부나 다름없었 다. 하지만 레콘들의 계명성이 한꺼번에 터져나오자 그 돌들은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이끼가 끼지 않고 먼지도 쌓이지 않는 돌인 양 진 저리를 쳤다. 성 자체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비통해하는 듯한 그 모습에 규리하 병사들은 오한을 느꼈다. 그 소리는 정우와 탈해에게도 뚜렷하게 들렸다. 두 사람은 바깥을 내다볼 필요도 없이 성이 레콘들에게 침입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정우는 창백한 얼굴로 무사장을 보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 던 그녀는 옷 앞섶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탈해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안돼!" 정우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탈해가 말했다. "또 꿈을 써선 안돼." 탈해는 정우가 옷을 벗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탈해의 오해를 깨달은 정우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꿈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바 깥에 엘시 에더리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정우는 자신이 왜 그런 생 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우는 칼리도백과 꿈 사이에 무슨 연관 이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그러나 정우는 엘시가 있다면 꿈은 무의미 하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탈해가 말했다. "네가 한 번 사는 자들을 관찰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 정우는 눈을 깜빡거리며 탈해를 보았다. 탈해는 입만으로 웃으며 말 했다. "내가 도와줄게." 탈해의 눈은 웃지 않았다. 정우는 그 눈 속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보 았다. 뭔지 모를 안타까움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탈해는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그 때 정우는 탈해의 왼손이 개밥바라기의 칼자루에 얹혀 있음을 발견했다. 정우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탈해는 오른손을 들어 집게손가락을 입 앞에 세워보였다. 그 동작이 무색하게도 그 순간 바 깥에서 계명성과 비명이 들려왔다. 그 처절한 비명에 정우와 탈해는 동시에 흠칫했다. 탈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쫓아내겠어." 정우는 두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탈해를 바라보며 고개를 도리 질쳤다. 탈해는 두 손을 모두 들어 정우를 진정시키듯 흔들었다.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기다려. 쫓아버리고 올 테니." 탈해는 더 이상 정우에게도, 자신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도망치듯 문으로 달려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이 닫혔을 때 더 이상 서있을 수 없었던 정우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밖으로 나온 탈해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그의 오른손은 개밥바라기의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본관 정 문을 향해 달려가면서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즈믄누리의 성주에 대해 생각했다. 즈믄누리의 11대 성주 바우 머리돌은 열광적이지만 성공적이지는 못 한 화훼재배가였다. 밤의 다섯 딸의 도움으로 건설된 즈믄누리는 언 제나 어두웠고 그 때문에 바우 성주의 화훼들은 부족한 햇빛이 식물 에 주는 영향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시들어갔다. 재배자의 기술이나 열정과 상관없이 애초부터 여건 자체가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 지만 성주는 자신의 취미를 포기하지 않았고 즈믄누리의 성주가 매진 하는 일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도깨비들은 없었다. 농담의 소 재로 삼거나 무시하기는 했지만, 도깨비들은 그 짓을 그만두라고 성 주에게 진지하게 조언하지는 않았다. 무수한 실패는 바꿔 말하면 무수한 경험이다. 바우 성주의 화훼재배 기술은 비교할 대상이 드문 탁월한 수준에 도달했다. 단지 성공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에 성주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그 사실을 깨 닫지 못했을 뿐이다. 명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여건의 방해 때문 에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 그대로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바우 머리돌 성 주 또한 그런 드러나지 않은 명인 중 한 명이 될 처지였다. 대단히 모순적인 어떤 식물을 입수하지 않았다면 바우 머리돌은 자신이 명인 이라는 것을 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 전 아스화리탈이 뿌린 포자에서 두 그루의 용화가 피어났고 그 중 한 그루가 바우 성주에게 갔다. 바우 성주가 용화를 원한 이유는 오랫동안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긴 세월이 흘러, 뜨거운 불을 사용할 수 없는 희귀한 도깨비를 무사장으로 임명한 바우 성주가 무 사장에게 그 동안 기른 용을 건네주었을 때 비로소 도깨비들은 왜 바 우 성주가 용을 원한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깨비이면서도 불을 능란하게 사용할 수 없는 탈해를 위로하기 위해 무사장의 지위 를 주면서 동시에 무사장의 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도구도 준비한 바 우 성주의 지혜로움이 큰 칭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생각이 깊은 어르신들은 그 이유를 이전부터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도깨비다운 품위 있는 이유가 있었다. 바우 성주는 용을 기 르는 것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리라.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뛰어내린 탈해 머리돌 무사장은 본관 정문에 도달했다. 아직 건물 안쪽으로 들어온 레콘은 없었다. 바깥에 있는 병사들을 학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명이 끊임 없이 들려왔다. 아마도 많은…… 피가 있을 것이다. 전력질주의 후유증과는 다른 이유에서 탈해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 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리가 떨리고 입술이 떨렸다. 마침내 탈해 가 움직였을 때 그것은 돌격이라기보다는 주저앉지 않기 위한 동작이 었다. 비틀거리며 걸어간 탈해는 정문에 부딪치고는 그것을 몸으로, 얼굴로 밀면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탈해는 바깥의 계단 앞에 섰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짙은 피비린내가 탈해를 덮쳤다. 레콘들이 날뛰고 있었다. 인간을 집어던지고 걷어차고 때려부수고 있었다. 공깃돌처럼 날아간 인간이 돌벽에 부딪쳐 포도알이 터지듯 피를 뿜었다. 레콘의 발에 걷어차인 인간이 찢어진 배로 내장을 쏟아 내며 쓰러졌다. 인간 하나를 왼팔로 감싸안고는 오른손으로 사지를 하나씩 뜯어내어 사방으로 집어던지는 레콘도 있었다. 민들레 요새병 의 잔학함이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레콘과 싸우는 레콘도 있었다. 야리키는 조간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레콘들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물이라도 뒤집어쓰지 않는 한 야리 키에게 승기는 없을 듯하다. 탈해는 굴도하 남작부부를 보았다. 남작 부부는 주랑 위에 올려놓은 소화차에 올라서 있었다. 체격 좋은 남작 부인은 정신없이 양수 손잡이를 누르고 있었고 남작은 살수관을 창대 에 연결하여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그들 또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피냄새가 너무 진하다. 숨이 막힐 것 같다. "이봐요…… 이봐요." 탈해는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신음에 불과했 다. 탈해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아무도 도깨비 무사장을 보지 않았 다. 탈해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위험 한 존재였다면 감이 좋은 레콘들은 당장 탈해를 목격했을 것이다. 설 령 탈해가 그들의 뒤통수 쪽에 있다 해도. 탈해는 조금도 위험하지 않았다. 뜨거운 불을 쓸 수 없는 도깨비니 까. 그러나 용은 그렇지 않다. 탈해는 자신이 그런다는 의식도 없이 쥐고 있던 칼자루를 잡아당겼 다. 밤을 부르는 별의 이름을 따 개밥바라기라 불리는 용은 무사장의 손길에 순응했다. 학살에 열중하고 있던 레콘들이 동시에 그 동작을 멈췄다. 모든 레콘들이 본관 계단쪽을 향해 돌아섰다. 아직 살아있던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레콘들도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했다. 그들이 본 광경 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쯤 죽은 것 같은 얼굴을 한 도깨비가 칼날도 없는 칼을 손에 들고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낭자한 피 와 도깨비를 연결지을 수 있다면 상당한 공포를 느꼈을 테지만 그 광 경의 기괴함은 그런 상식적인 생각마저도 불가능하게 마들었다. 레콘 들은 그저 어이없는 기분으로, 그러나 직감이 말하는 위험에 주의하 며 도깨비가 칼날 없는 칼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칼자루를 쥔 손이 하늘로 높이 들어올려졌다. 그 순간 개밥바라기는 더 이상 칼날 없는 칼이 아니게 되었다. 그 비어있는 칼몸테두리에서 도깨비에겐 조금도 위험하지 않지만 도깨비를 제외한 모든 자에겐 치 명적인 칼날이 튀어나왔다. 하늘을 향해 이글거리는 화염이 치솟아올랐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9. 신을 긍정하는 태도 (4) | 2004·12·06 08:08 | HIT : 13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9-4 관련자료:없음 [4942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2-06 07:20 조회:32 피를 마시는 새 39. 신을 긍정하는 태도 - 4 규리하성의 앞쪽 황무지에는 날뛰는 레콘과 도망치는 레콘,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서있는 레콘이 있었다. 날뛰는 레콘은 아트밀이다. 철 극이 휘어져라 휘둘러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뜨리는 상대가 없 으니 싸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은 그의 주변 십여 미터로 축소 되었다. 그 바깥은 보이지도 않았다. 철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귀가 먹을 듯하다. 그 소리에 대항하기 위해 아트밀은 고함을 질렀 다. "칠일은 칠! 칠이 십사! 칠삼 이십일!" 아트밀은 이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변호도 원하지 않았다. 황제가 그의 정신을 억압했건 어쨌건 사라말 아이솔은 그의 친구였 다. 왜냐 하면 그의 죽음 때문에 미치도록 슬프기 때문이다. 그것이 앞뒤가 맞는 논리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아트밀의 관심 대상이 아니 다. "칠사 이십팔! 칠오 삼십오! 칠육 삼십, 아니 사십, 아니…… 제기 랄!" 반가운 좌절도 있는 법이다. 구구단을 외다가 더듬거리는 자신에 대 해 아트밀은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것은 아트밀이다. 정 신억압이나 다른 무엇과 상관없는 아트밀의 특징이다. "칠육이 뭐야! 칠육이 뭐냐고?" "사십이." 아트밀은 대답이 들려온 곳을 향해 맹렬하게 철극을 돌렸다. 그곳에 는 삼각철봉을 손에 든 쵸지가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아트밀을 바라 보는 레콘이었던 쵸지는 아트밀이 충분히 말랐다고 생각하고는 성문 에서 그가 한 일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여담이지만 도 망치는 레콘들이었던 민들레 여단의 병사들은 아직도 아트밀을 건드 리면 부서질 물통 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칠육은 사십이야. 그쪽이야말로 냉수 한 모금 마시고 정신 좀 차려 야겠는데. 괜찮은 건가?"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좀 우스꽝스럽기는 했지만 쵸지는 부리 로 규리하 성문 쪽을 가리켰다. "우리 쪽에서 지금 마음대로 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잖아. 성을 지켜 야 하는 거…… 젠장!" 쵸지는 허리를 뒤로 홱 젖혀 날아온 철극을 피했다. 그 회피는 연속 적인 회피동작의 시발이 되었다. 상당히 어려운 동작으로 아트밀의 공격을 피하던 쵸지는 땅을 짚은 손으로 돌멩이 하나를 쥐어올렸다. 아마도 규리하군이 아래쪽으로 집어던진 돌인 듯하다. 쵸지는 그것을 냅다 아트밀의 머리 쪽으로 집어던졌다. 아트밀은 부리를 벌려 돌을 콱 물었다. 덕분에 계속되던 철극의 공 격이 멈추었고 그 동안 쵸지는 충분히 떨어진 거리까지 물러났다. 아 트밀은 머리를 홱 돌리며 돌을 뱉어냈다. "나늬도 만나기 전에 목에 구멍날 뻔했잖아. 이 친구야." "친구? 누가 네 친구야? 내 친구는 한 명뿐이었고 그는 죽었다!" 쵸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죽였냐고 떠들었지. 친구가 전투 중에 죽었나 보지? 그래서 화가 났나?" "왜? 화가 나면 안 되나? 나 같은 놈은 화도 내면 안 되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 나는 내 것도 아닌 감정 때문에 화를 내고 있어. 그래서, 그 게 어쨌다는 거야? 할일 없으면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 똥구멍 에 낀 똥가루나 털어내라, 개자식아!" 쵸지는 부리를 한 번 들썩 움직이며 미소지었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하는군. 화도 많이 난 것 같고. 하지만 그렇 게 난동을 부려서야 되겠어? 병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갔으니 규리하 성은 곧 함락될 거야. 자네 친구는 자네가 도망치길 더 바라지 않겠 어? 다행히 도망치기 좋은 조건이잖아. 아무도 자넬 건드리려 하지 않으니." 쵸지의 침착한 태도는 아트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아트밀은 분노 때문에 잠시 방기해두었던 슬픔이 되돌아와 자신을 포옹하는 것을 느 꼈다. 그는 비통하게 말했다. "도망쳐서 뭘 하라는 거야?"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지." 아트밀은 수염볏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사막으로 가고 싶었어." "사막?" 아트밀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건 정신억압 때문에 생긴 충동이야. 사라말이 말해줬어. 나는 사라말을 보호하도록 정신억압되어 있었어." 쵸지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트밀의 말을 막지는 않았 다. 아트밀이 계속 말했다. "사라말을 보호하느라 나는 바다도 건너고 시냇물도 건널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나는 레콘이야. 그건 레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나는 사라말에게 사막으로 가자고 했던 거야. 사막으로 가면 사라말도 보호할 수 있고 물도 밟지 않아도 되니까." 아트밀의 목소리가 조금씩 예리해졌다. 쵸지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 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사라말의 곁이 내가 가고 싶은 곳이야. 사라말을 보호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정신억압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런데 사라말이 죽었어. 내겐 아 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기괴한 이야기에 쵸지는 현실감각을 잃을 것 같았다. 그래서 쵸지는 황급하게 말했다. "율형부사가 자네 친구인가?" 아트밀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왕벼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를 위해 용을 죽이러 갔지. 그리고 죽었어…… 그러면 용 이군!" 아트밀은 철극 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쵸지는 긴장했지만 이 어지는 아트밀의 행동을 보곤 배신감과 황당함을 뒤섞어놓은 듯한 감 정을 느꼈다. 아트밀은 철극 자루로 자신의 이마를 땅 때렸다. "이제 알았어! 용이야. 용이 사라말을 죽인 거야! 내가 멍청했어. 용을 찾아야 해. 용이 어디 있지?" 쵸지는 하텐그라쥬에 가면 나무가 되어 있는 아스화리탈을 볼 수 있 다고 말해주는 것이 친절한 일인지 의심했다. 그 때 쵸지는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양 외의 어떤 조명이 갑자기 세상에 더해진 것 같았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린 쵸지는 규리하성에서 솟 아오르는 불기둥을 보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불기둥은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아 있었다. 쵸지는 불이 그런 식으 로 꼿꼿하게 치솟는 것을 처음 보았다. 불길은 높이에 비해선 가느다 란 편이지만 그 열기가 엄청난 듯했다. 쵸지는 불기둥 주위에서 요동 치는 아지랑이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수염볏을 움켜쥐었다. 그 때 아트밀이 비명처럼 외쳤다. "용이다! 용이야!" 쵸지는 자신이 꽤 멍청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트밀의 당연하다 는 듯한 외침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후의 일이었다. 아트밀 은 쵸지를 내버려둔 채 규리하성을 향해 돌격했다. 어쩔까 고민하던 쵸지는 일단 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파라말 아이솔은 흉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반쯤 시 체나 다름없는 꼴로 앉아있었던 그가 성을 침입한 민들레 여단에 난 자당하지 않은 것은 산공부사를 구하기 위해 굴도하 남작이 기지를 발휘한 덕분이다. 남작부인과 함께 소화차로 레콘들에게 대응하던 굴 도하 남작은 체념한 듯한 얼굴로 앉아있는 파라말을 발견하고는 그에 게 물을 쏘아보냈다. 레콘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는 자세로 앉아있는 데다 푹 젖어있는 산공부사를 무시했다. 물벼락을 맞았을 때 정신을 조금 되찾긴 했지만 파라말은 아직도 충 격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슬픔이 너무도 깊어 이제 파라말은 감 정을 느끼는 능력이 둔화되어 있었다. 주변에서 레콘들이 벌이는 참 극에도, 애처롭게 죽어가는 규리하 병사들의 모습에도 파라말은 별다 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탈해가 뽑아든 개밥바라기는 그의 주의를 끌었다. 별다른 이유없이 파라말은 생각했다. '저것은 용이다.' 파라말은 어 째서 그것이 용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대신 파라말은 형 을 생각했다. '쟁룡해에서 용이 빠져나왔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형님. 용은 즈 믄누리에 있었습니다. 쟁룡해에서 온 그 자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파라말은 정신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평범함에도 못미치는 인간일지도 모르지요. 저런 황제를 돕 는 황태자에게 무슨 존경을 바치겠습니까? 황위에 눈이 어두워진 그 는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 염치도 없는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습니 다. 제정신이 박힌 황태자라면 이런 꼴을 말려야 할 겁니다.' 파라말은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악한 황제의 첩은 황 제를 말릴 지위에 있으면서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자들도 가만히 있었는데 형님께서 나서신 겁니까? 형님의 용을 위해서? 하지만 용은 즈믄누리에 있었단 말입니다.' 파라말은 흉벽에 등을 기대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비틀거리며 일어 난 그는 한 손으로 흉벽을 쥐고 똑바로 섰다. 젖은 옷은 철벅철벅하 는 소리를 냈지만 목구멍은 타들어가는 듯 건조했다. 파라말은 입 주 위를 훔치며 엘시와 데라시에 대해 생각했다. '그 자들은 침묵했단 말입니다! 그 자들이 침묵으로 형님을 죽였습 니다.' 본관 계단 위쪽에 서있던 탈해는 산공부사가 일어나는 모습, 그리고 남작부부가 소화차를 끌며 그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바퀴 소리에 레콘들이 고개를 돌렸고, 그래서 탈해는 황급히 개밥바라기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길다란 화염이 흔들리자 레콘들은 몸을 부풀리며 그를 보았다. "규리하성을 나가십시오. 그렇잖으면 다칩니다." 민들레 요새병 하나가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도깨비임을 깨 달았다. 최악의 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도 깨비는 온순한 종족이다. 그 레콘은 후자에만 주의했다. "도깨비 주제에 감히……" 레콘은 말을 맺을 수 없었다. 놀라운 속도로 움직인 개밥바라기의 화염인(火焰刃)이 어느새 그의 머리 위쪽에 와있었기 때문이다. 탈해 가 한 일은 손목을 조금 비튼 것에 불과하지만 그런 작은 움직임도 수십 미터 저편에 있는 칼끝 부분에서는 대단히 큰 움직임으로 바뀐 다. 더군다나 그 칼날의 무게는 불꽃과 같았다. 탈해는 레콘들도 미 처 피할 수 없는 속도로 칼날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민들레 여단병들은 깃털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탈해의 옷소매에 갑자기 불이 붙었다. 칼날에 가까운 그 부분의 온 도는 불길에 닿지 않아도 옷자락이 타들어갈 정도였다. 탈해는 왼손 으로 소매를 탁탁 두드려 불을 끄고는 발을 들어올렸다. 무사장은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그는 개밥바라기를 좌우로 흔들며 계단을 내려갔다. 레콘들은 견딜 수 없는 열기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탈해에게 집어던지기 위해 뭔가를 주우려 시도한 레콘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탈해가 위협적으 로 개밥바라기를 내밀어 그들로 하여금 얼굴을 가린 채 물러나게 했 다. "부탁합니다. 나가십시오." 그 때 성문을 통해 아트밀이 뛰어들어왔다. 성 안으로 들어선 아트 밀은 탈해를 보고는 놀라서 멈추어섰다. 사라말을 죽인 용을 찾기 위 해 왔지만 엉뚱하게도 불을 들고 있는 것은 도깨비였다. 작렬하는 화 염 때문에 탈해의 손에 쥐어진 것을 보지 못한 아트밀은 탈해가 도깨 비불을 다루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용이 아니다. 아트 밀은 당혹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딘가에 사라말을 죽인 용이 있을 텐데…… 아트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 이 들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위쪽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광경에 압도되었다. 말리와 소리의 충돌이 지척에 이른 시점이었지만 치천제는 그 사실 에서 아무런 흥분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예상에 한 점 어긋남 없 이 움직이는 소리의 모습에 황제는 경멸과 비슷한 차가운 흥미만을 느꼈다. 이이타는 말리를 전복시키는 것이 자신의 계획이라고 믿었고 그것은 황제가 바라는 것이었다. 말리가 위로 솟아오름으로써 배를 보여주었 을 때, 그것이 지상에 거주하는 자가 항상 보는 하늘치의 부위임에도 불구하고 이이타에게는 어떤 발상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광경으로 느 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이타는 황제의 하늘치를 전복시키겠다는 야 욕으로 앞뒤를 돌보지 않고 돌진했다. 이이타는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도 벅찬 광경을 목격하게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그 거대한 추격전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황제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충돌 직전 황제는 낙석 투하를 명령할 것이다. 소리는 그 거대한 크 기 때문에 사라말이 부렸던 것 같은 묘기는 부릴 수 없다. 낙석은 반 드시 소리에 명중할 것이다. 물론 하늘치에 그 정도 크기의 돌을 던 지는 것은 인간에게 쌀알을 던지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지만 쌀알 도 충분히 빠른 속도로 충돌한다면 달리는 인간의 방향을 바꿀 수 있 다. 그것이 황제가 원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소리를 격추시킬 의도 같은 것은 없었다. 이이타가 황제에게 해주려 하는 일, 바로 그것을 이이타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황제의 목적이다. 말리를 전복시키려던 소리는 그 힘으로 자신을 뒤집을 것이다. 흥분해도 무방한 시점이다. 하지만 황제는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황제는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인간이라면 으스스하다고 표현할 것에 해당하는 나가판의 감정을 느 끼며 황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상승의 속도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될 만한 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평선은 뒤로 후퇴하는 것 에 지쳐 자신을 지우기 시작했고 하늘 또한 무거운 빛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땅보다 하늘이 훨씬 단단해 보였다. 짓누르는 바람 속에 나 부끼는 흑사자 모피를 단단히 움켜쥔 채 황제는 그리미 마케로우를 생각했다. '597조라고 했습니까?' 라세는 손을 쉬크톨에 얹어 그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당신의 계산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 아닌가요? 597조 명이 죽는다 는 것은 597조 명의 후손을 생산해낸다는 뜻이기도 하잖습니까. 저 사람들이 과연 그렇게 많은 후손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 버티기나 하 겠습니까? 그보다 훨씬 빨리 멸망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니군요. 그 최대치라는 것은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 오히려 최선의 경우 중 하 나로 이해해야 되는 것이군요. 저들의 그 대단한 능력으로 생존기술 과 살인기술을 동시에 발달시켜…… 그 많은 숫자를 생산하고 또 제 거한다는 것일 겁니다. 그렇지요?' 황제는 무서운 미소를 지으며 소리를 보았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지느러미였고 소리는 말리의 턱쪽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황제는 세 상의 그쪽 방면을 완전히 가려버린 거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규리하의 공자여, 사람이여. 너에겐 모든 것이 네 손 안에서 뒤집 어지고 까불거리는 장난감이다. 그것은 아름답고 귀한 능력이지만 네 사냥감은 언제나 네 이웃이다! 지금 나에게 돌진하는 네 모습을 보아 라. 네가 저지르는 일의 목록을 늘이는 것은 타인이 네게 저지를 일 의 목록을 늘이는 짓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황제는 자신의 감상주의를 비웃었다. 곧 엘시에게 지상을 맡기고 이 시대를 떠날 것이기에 상실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 제는 자신이 떠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리는 그녀가 직접 처리할 것이다. 다루는 자들이 사라지면 소리는 다시 이름없는 하늘 치로 돌아갈 것이다. 꿈을 다루는 묘한 여인은 엘시에게 제거될 것이 다. 그런 여인이 또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가들의 대담한 계획 은 이라세오날의 사제들에 의해 분쇄될 것이다. 레콘의 힘이 아니라 그들의 설득에 의해. 황제는 그 사실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몇 가 지 소박한 것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일만육천 년의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그녀가 직접 챙겨야 할 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녀가 처리 하지 못한 사소한 것들은 엘시가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기는 하다. 황제는 그리미 마케로우의 영상이 경고했던 다른 용에 대해 생각했다. 바우 머리돌 성주에게 건 너간 그녀의 자매에 대해서 황제는 아무런 예상도 할 수 없었다. 용 은 기르는 자에 따라 무엇으로든 자라나니까. 그 용은…… 아래쪽을 바라보던 황제의 눈에 섬광이 들어왔다. 치천제는 온몸의 비늘을 부딪쳤다. 나가의 반응이지만 용의 경악이 다. 그 때문에 흑사자 모피는 그 안쪽에 새떼가 들어온 양 파라락 떨 렸다. 용암의 분출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규리하성이 제국군의 공격으로 불타고 있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다른 추리로 그것이 다른 용의 화염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순간 황제는 바우 머 리돌 성주가 그 용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누가 그것을 다루고 있는 지 깨달았다. 황제는 무의식적으로 환상벽을 만들어 탈해의 모습을 빚어내었다. 환상벽 속에는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도깨비가 손에 화 염검을 들고 서있었다. 열을 보는 눈으로 그 화염검을 본 황제는 그 것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살이 익어버릴 듯한 지독한 열기를 내 뿜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화염검이라면 굳이 휘두르지 않고 들고 만 있어도 상대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칠 것이다. 피화의 능력을 가지 고 있는 도깨비만이 그런 검을 손에 들 수 있다. '그런 모습이냐, 나의 자매여? 바우 성주의 기술이 놀랍구나. 그 작 은 몸으로 그런 화염을 빚어낼 수 있느냐?' 규리하성을 침입한 레콘들은 두려움에 차서 탈해를 바라보고 있었 다. 탈해는 입을 억지로 움직이며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 지만 황제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어차피 황제는 탈해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황제는 흑사자 모피 아래에서 비늘을 부딪쳤다. '처음에는 군령자를 끌어모으던 나가였어. 두 번째는 하늘치의 환상 으로 자기를 증폭시키는 인간이었고, 이젠 손에 용을 들고 휘두르는 도깨비로군. 셋이 설쳐댔으니 다음엔 하나가 오겠군. 다음 번엔 레콘 일 테지? 레콘은 도대체 뭘 가지고 덤벼들 거지? 상상할 수도 없군.' 격노와 슬픔. 하지만 황제가 느낀 감정은 그것만은 아니었다. 황제 는 자신에게 기쁨 또한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말이나 니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기에 황제는 격노와 슬픔으 로 닐렀다. [내려가!] 그것은 황제가 외칠 니름이 아니었다. 황제는 낙석을 명령했어야 했 다. 하지만 세 번째 벽난로방의 나가들은 충성스럽게 황제의 니름을 따랐다. 말리가 상승을 멈추었다. 살인기사 제이어 솔한은 자신의 반복된 요구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대신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감각으로는 표현 할 수 없는 느낌이었지만 확실히 존재했다. 제이어는 그 희미한 반응 이 사라질까봐 - 혹은 더 나쁘게도 그의 착각일까봐 두려워 고함을 질렀다. "약속을 지켜라!" 의심할 수 없는 반응이 되돌아왔다. 그의 영을 누르는 듯한 반응에 제이어는 취기를 느꼈다. 제이어는 어둠 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종유 석과 석순이 가득한 거대한 동굴을 날아가는 한 마리 나방이었다. 동 굴의 끝에서 들어오는 빛을 향해 서슴없이 날아가는 나방. 바깥의 바 람이 느껴지고 바깥의 냄새가 느껴진다. 빛이 더욱 커진다. 그것은 동굴 입구의 모양을 드러내듯 둥그렇지는 않다. 그보다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제이어는 그 빛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 다. 나방보다 더 작은 먼지가 되어. 날개는 없어졌지만, 그것은 필요 하지 않다. 그 순간 이이타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소리가 말리의 아래턱에 충돌 했다. 이이타 규리하는 자신의 머리 위로 하늘치가 떨어진 듯한 충격을 느 꼈다. 폐가 짓눌리고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충격 속에서 이이타 규리하는 바닥과의 접점을 잃었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던 이이타는 자신이 공 중에 떠있음을 깨닫고는 공포를 느꼈다. 이이타는 무엇인가를 보려 애썼다. 잠시 후 눈을 뒤덮은 백색 장막이 사라지며 무엇인가가 보였 다. 그러나 이이타는 자신이 왜 눈을 감지 않았는가 후회했다. 그는 어이 없는 각도로 있는 하늘치의 등과 자신의 위쪽에 있는 것이 아닌 가 싶은 지면, 그리고 빙글빙글 도는 온갖 빛깔의 하늘을 보았다. 이이타는 자신이 지상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 떠있는지도 알 수 없었 다. 위로 치솟는 것인지 아래로 추락하는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 면 옆으로 날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때 하늘치가 위에서 엄습하며 그의 왼쪽 어깨를 때렸다. 세상이 빠르게 회전했다. 이이타 는 자신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다는 것을 간신히 깨달았지만 그 상황 에 대처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방향감각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고 그는 온갖 방향으로 굴렀다. 옆으로 구르다가 어깨로 구르고, 발바닥으로 뭔가를 디뎠다 싶으면 다시 머리가 무엇 인가에 부딪쳤다. 모든 곳에 바닥이 있었고 동시에 바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이타는 허공에서 익사할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무엇인가가 그의 왼팔을 움켜쥐었다. 이이타는 그 사실에 눈물이 나 도록 고마움을 느끼며 자신의 팔을 보았다.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 는 것은 가느다란 팔이었고 그 뒤편에는 소리 로베자가 절벽에 매달 린 것인지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누 워 있었다. "공자님!" "소, 소리!" "공자님! 두 손으로 저를 잡으세요!" 이이타는 그렇게 했다. 일단 자신의 오른손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하긴 했지만 어떻겐가 이이타는 소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이타는 소리가 하늘치의 등에 비수를 꽂은 채 그 칼자루에 매달려 있 는 것을 발견했다. 소리는 비어있는 손과 두 다리로 공자를 붙잡으려 애썼다. 공자는 자신이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소리를 끌어안았 다. 그러나 바닥은 두 사람을 집어던지려 하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진동하는 바닥 때문에 두 사람의 하반신은 위로 둥실 떠올랐다 아래 에 부딪치는 것을 반복했다. 턱을 바닥에 사정없이 부딪친 이이타는 피맛을 느끼고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이이타는 소리의 등에 팔을 두른 채 주위를 살폈다. 몸이 키질을 당 하는 콩처럼 위아래로 까불거렸지만 이이타는 어떻겐가 자신의 다리 방향에서 말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한 이이타 는 자신이 소리의 꼬리쪽을 향해 엎드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어디 있지? 시카트는?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야?' 엎드려 있어 시야가 좁은데다 계속되는 진동 때문에 그 좁은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이이타는 팔다리나 머리 같은 사람의 일부를 여기저 기서 보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시야 한 구석을 얼핏 스쳐지나갈 뿐 이었다. 이이타는 사람들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진동하는 소리의 허 리를 끌어안았다. "공자님, 공자님!" "소리!" 산사태와 함께 굴러떨어지는 것 같다. 해일에 희롱당하는 판자 조각 이 된 것 같다.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날개가 뜯기는 나비가 된 것 같 다. 이이타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나 흩어질 거라 확신 했다. 의식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자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이이타 였지만 그의 무의식은 한결 치열한 의지로 소리에 대한 조종을 계속 하고 있었다. '밀어올려! 밀어올리라고! 뒤집어버려!'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불가사의한 화염에 놀라 다른 이들과 함께 규 리하성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 때 머리 위편에서 하늘이 무 너져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기겁하여 발길질을 하는 말을 가까스로 달래고서 위를 올려다본 엘시는 전대미문의 광경을 보게 되 었다. 흥분하여 빙글빙글 도는 말 때문에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엘시는 두 하늘치가 서로의 입을 물어뜯는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두 하늘치 는 머리를 붙인 채 공중에서 전율하고 있었다. 말에서 뛰어내려 땅에 선 엘시는 보다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는 사태를 대강 짐작하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소리는 돌 아래에 들어간 지렛대처럼 아래쪽에서 말리 를 밀어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리가 갑자기 아래쪽으로 움 직이려 했기에 두 하늘치는 서로 회전방향이 다른 톱니바퀴처럼 부딪 치게 되었다. 말리는 아래쪽으로, 그리고 소리는 위쪽으로 밀어올렸 고 두 하늘치의 주둥이가 맞닿은 곳에서는 붉은 구름 같은 것이 피어 났다. 엘시는 그것이 피임을 깨닫고는 아연함을 느꼈다. 그것은 사방 으로 튀는 핏방울이었지만 거리가 아득하게 멀어 엘시에겐 빨간 구름 처럼 보였다. 자욱한 피구름 속에서 두 하늘치의 머리가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했 다. 아래로 향하려던 말리는 소리의 방해를 받아 측면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소리는 반대편으로 미끄러졌다. 엘시는 두 하늘치가 서로를 자연재해적 규모로 스친 다음 서로 떨어지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하 지만 너무나도 거대한 하늘치들의 크기 때문에 그 마찰이 끝나려면 스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엘시가 받 은 인상만 놓고 말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일에 가까웠다. 물론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았다. 말리와 소리는 서로 어긋나면서 갑자기 서로에게서 해방되었다. 소 리는 붉은 연기처럼 보이는 피를 뿌리며 옆으로 돌면서 상승했다. 그 리고 소리에게서 벗어난 말리는 반대방향으로 돌면서 하강했다. 말리 는 규리하성에 곁눈질을 하는 듯한 각도로 떨어졌다. 소리의 위쪽에 있던 지멘은 엘시가 본 것처럼 명확하게 사태를 이해 하진 못했다. 그는 그저 끔찍한 충격과 그 뒤를 잇는 진동만을 느꼈 고 하늘치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아실을 보호하 는 일에 신경을 집중했다. 진동이 계속되는 동안 지멘은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바닥에 드러누 워 있었다. 아실은 그의 가슴 위에 엎드려 두 손으로 깃털을 꼭 움켜 쥐었다. 소리의 전율은 레콘의 무거운 몸도 야생마 위에 오른 기수처 럼 이리저리 나부끼게 했고 지멘은 뒤통수와 등, 다리를 계속 바닥에 부딪쳤다. 그가 가까스로 뒤집어지지 않은 것에는 행운의 도움도 컸 다. 아실은 몇 번이나 지멘을 놓치고 어딘가로 날아갈 뻔했지만 진동 에 대한 오래된 적응 때문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소리가 말리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한참 동안 지멘과 아실은 그 사실 을 깨닫지 못했다. 통증 때문에 몸이 마비 상태에 가까웠고 평형감각 도 정상이 아니었다. "끝났나?" 결코 빠르다 할 수 없는 시점에 아실이 머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지멘은 흐릿한 눈으로 아실을 보았다. 아실은 지멘의 가슴에서 미끄 러져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대로 잠들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하 며 지멘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 앉았다. 지멘은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꾹 감았다. 그걸 로 모자라 지멘은 두 손으로 머리 양쪽을 짓눌렀다. 구토감을 참던 지멘은 누군가가 무릎 걸음으로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지멘은 눈 을 가늘게 떴다. 아실이 두 손바닥과 무릎을 이용하여 어딘가로 기어가고 있었다. 지 멘은 그 모습을 보다가 한쪽 다리를 옆으로 뻗고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앉은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묵직한 소리에 뒤를 돌아본 아 실은 지멘을 확인하고는 다시 기어갔다. 지멘은 아실이 어디로 기어가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아실의 앞쪽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지멘은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을 뻔했지만 지멘은 망치로 땅을 짚고 버텼다. 그는 망치 를 지팡이처럼 써서 아실에게 걸어갔다. 아실은 쓰러진 사람 옆에 앉았다. 퍽이나 기이한 모습으로 엎어져 있었지만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 았다. 그 사람은 여기저기 얼룩이 많이 있었지만 원래는 흰색인 옷을 입고 있었다. 제이어 솔한이었다. 아실은 제이어의 팔을 붙잡고 그를 똑바로 눕히 기 위해 애썼다. 지멘이 그녀의 곁에 앉아서 제이어를 뒤집었다. 제 이어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입도 약간 벌어져 있었다. 확인할 필 요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아실은 손을 뻗어 제이어의 목을 짚었다. 지멘은 다른 사람들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선가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작은 속삭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멘이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아실이 말했다. "죽었어요." 아실은 자신의 말을 씹듯이 입을 오물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 는 제이어의 눈을 감겨주었다. 가부좌를 한 아실은 몸을 웅크려 두 팔꿈치로 허벅지를 짚고는 주먹으로 이마를 받쳤다. 그녀는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지멘은 아실의 뒤편에 앉은 채 제이어의 시체와 그녀의 뒷모습을 번 갈아 바라보았다. 피로감 외에 다른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충돌조 차도 의심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충돌이 사실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 는 일이 너무 많기에 지멘은 충돌을 믿었다. 말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멘은 벼슬을 쓸어넘겼다. 상처가 난 듯 벼슬이 쓰라렸다. 손도 부 들부들 떨렸다. 지멘은 벼슬을 반도 쓸어넘기지 않아서 손을 도로 내 렸다. 지멘은 일어나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이어가 죽었다면 다른 인간들에게도 불상사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만 약 소리를 조종할 줄 아는 이이타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그들은 큰 곤 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마치 그의 염려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이타의 외침이 들려왔다. 지멘은 안도했다. 그러나 지멘은 그 외침의 내용을 곱씹어보고는 깃 털을 조금 부풀렸다. 이이타가 같은 말을 반복하여 외쳤다. "내려가고 있어! 말리가 내려가고 있어!" 깨진 항아리 조각과 부러진 목재들, 그리고 먼지와 뱀 사이에 드러 누운 채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생각했다. 꽤나 익숙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건 발케네 북부에서 있었던 일이지요. 그 때 저는 황제의 잘나가는 측근이었고 제국의 영광스러운 내일을 믿어 의 심치 않았던 청년 관리였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쳤는지 도 모르지요……' 문득 데라시는 그것이 수십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은 비스그 라쥬의 온화한 햇빛을 즐기는 노백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혼 란 속에서 데라시는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가 있는 곳은 캄캄했지만 어둠을 잘 보는 나가의 눈은 그가 처해있는 참상을 어렵잖게 확인해 주었다. 세 번째 벽난로방은 반파되어 있었다. 구조물 자체는 꽤나 튼튼한 듯 벽이나 지붕이 부서진 곳은 없었지만 뱀단지들이나 그것들이 놓여 있는 선반은 그렇지 못했다.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반들이 부서져 있었고 선반에서 뛰쳐나와 깨진 뱀단 지의 조각들이 바닥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데라시는 죽은 뱀들 위로 힘없이 기어다니는 뱀을 보았다. 뱀부리미들의 안위를 확인하려던 데 라시는 갑작스러운 추위를 느꼈다. 데라시는 겁에 질려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꺼져 있는 벽난로를 보 았고 쓰러진 뱀부리미들을 보았다. 벽난로의 파괴는 심각했다. 굴뚝 안쪽에서 무엇이 무너져 내렸는지 내부엔 잡석들이 꽉 들어차 있었 다. 뱀부리미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대부분 튀어나온 항아리에 머 리를 맞거나 뒤집어진 탁자에 깔려 비참한 꼴들을 하고 있었다. 다행 히 심장을 적출한 나가들이기에 죽지는 않겠지만 벽난로가 꺼졌으므 로 그들은 곧 꽁꽁 얼어붙게 될 것이다. 데라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데라시는 몸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곤 빨리 소드락을 가져와 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어붙은 그의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두려움에 빠져 있던 그에게 갑자기 황제의 니름이 들려왔다. [하강 속도를 줄여라! 이제 낙석을 퍼부어야 한다! 규리하성을 지상 에서 완전히 소멸시켜야 한다!] [폐하?] 데라시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황제는 노여워하며 닐렀다. [하강 속도를 줄여라!] 데라시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 지만 시야가 이미 흐려져 데라시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데 라시가 닐렀다. [폐하. 뱀부리미들이 다쳤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나가는 죽지 않아!] [벽난로가 꺼졌습니다. 폐하. 그걸 고쳐야만 이들이 의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벽난로?] 데라시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의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희들에게…… 저희들에게 소드락을 가져다주 십시오. 저희들은 얼어붙고…… 있습니다. 곧 정신을 잃을 듯합 니……] 데라시는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그의 몸이 뒤로 스르륵 쓰러졌다. 치천제는 비늘을 타다닥 부딪치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말리는 규리하성을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그녀의 명령처럼 하강 속 도를 늦추지 않는다면 조만간 땅에 부딪칠 것이다. 그러나 말리를 조 작해야 할 뱀부리미들이 모두 의식불명 상태였다. '벽난로라고!' 나가의 불사성만을 염두에 두었다. 약간 다치는 것은 나가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뭄토나 다른 레콘들도 심하게 다치지는 않을 것 이다. 그 때문에 황제는 거친 공격으로 소리를 밀쳐냈다. 하지만 벽 난로가 꺼진다는 것은 그녀의 예상 밖의 일이었다. 지금 말리 위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녀를 제외하면 모두 레콘들뿐이다. 그리 고 그들 중 하늘치를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황제는 절망감 속에서 환상을 조작했다. 하늘치 환상을 의식적으로 조작하는 능력에 있어 그녀는 최고다. 그녀는 동시에 수십 마리의 하 늘치라도 다룰 수 있다. 하늘치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말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래된 약속을 기다리는 그 하늘치는 황제 의 조작을 거부했다. 그것은 거침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황제는 시시 각각 커지는 규리하를 노려보았다. 충돌도 끔찍한 일이다. 두 번째 말리 같은 것은 없으며 따라서 아라 짓 전사들을 수용할 냉동 시설도 없다. 만약 말리가 땅에 충돌한다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말리가 땅에 충돌 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규리하에는 하늘치를 다루는 여자가 있 다. 만약 말리의 추락이 계속된다면 정우가 말리를 통제할 것이다. 그리고 통제자를 잃은 말리는 정우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 것 또한 패배가 될 것이다. 황제는 꿈을 가지고 있는 그녀를 감당할 수 없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분노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 └┼┘└┐ ┌┐┌┘ ┘ └┼┼┐ └┼┘ └┐┌┐ ┌┐ ┌┐ “┌┐┌┼┼┘ ┌┼┘ ┌┼┘ !!!” └┼┼┼┼┐┌┼┼┐┌┼┼┐┌┐ └┘└┘└┼┼┼┼┘└┘└┼┘ └┼┼┼┐ └┐ ┌┐┌┼┘└┘ ┌┘ └┼┼┼┐ └┘ └┘└┘ 격분과 비통함으로 외친 황제가 두 팔을 좌우로 던졌다. 흑사자 모 피가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꼿꼿하게 서서 두 팔을 벌린 채 몸을 떨 었다. 갑자기 그녀의 일부가 변화했다. 만약 비스그라쥬백 데라시가 의식을 가지고 그녀 곁에 있었다면 황 제가 허물벗기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황제의 피부 이곳저곳이 윤기를 잃고 박리되는 모습은 허물벗기와 똑같았다. 하지만 관찰을 계속한 데라시는 좀 이상한 허물벗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안쪽에 있는 것이 부풀며 겉이 찢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탈해는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하늘치가 규리하성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고 있음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민들레 여단의 레콘들 또한 그 사실을 확신했다. 하늘이 떨어지는 것 같은 광경에 기겁한 그들은 성벽 바깥으로 도망쳤다. 레콘들이 단숨에 성벽을 뛰 어넘어 도망치는 것을 본 탈해는 자신 또한 정우를 데리고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우렁찬 계명성이 들려왔다. "정-우-!" 탈해는 계명성이 들려온 곳을 보았다. 왕벼슬 쵸지가 그를 향해 달 려오고 있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외쳤다. "정우! 하늘치를 막아!" 탈해는 엉겁결에 쵸지를 향해 개밥바라기를 내밀었다. 쵸지는 벼슬 을 탁 부딪쳤다. "이거 치워. 도깨비. 정우 어디 있어? 정우! 말리가 떨어지고 있다! 조종자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 거야! 그러니 네가 조종해! 말리를 막아!" 탈해는 그 말에 놀라며 엉겁결에 정우가 있는 방의 덧창을 바라보았 다. 그가 올려다보자마자 덧창이 왈칵 열리며 정우의 모습이 나타났 다.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민 정우는 말리를 바라보곤 깜짝 놀랐다. 그 때 탈해는 다급한 발소리와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린 탈해는 성문을 통해 쏟아져들어오는 제국군을 보았다. 31중대 전체가 규리하성 안으로 뛰어들어오고 있었고 그 선두에는 말 을 달리는 엘시와 그를 호위하듯 달리는 론솔피, 주테카, 그리고 이 름 모를 레콘이 있었다. 엘시는 성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고함을 질렀 다. "정우! 정우!" 정우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을 때 엘시 또한 그녀를 발견했다. 엘시 가 헐떡이며 말했다. "말리를 막아주십시오. 정우." 탈해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민들레 여단과 달리 지금 성안으로 뛰어든 제국군들은 바로 정우가 불러준 하늘치를 타고 지러 쿼터 산맥을 넘어갔던 자들이다. 레콘들처럼 빨리 도망칠 수 없었던 그들은 정우에게 희망을 걸고 성으로 달려온 것이다. 탈해는 개밥바 라기를 다시 칼집에 꽂아넣고는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굴도하 남작부 부도, 형을 잃은 파라말 아이솔 산공부사도, 그리고 규리하의 병사들 도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대답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다. 그녀는 위를 향해 외쳤 다. "멈춰! 오지마.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마!" 정우를 향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말리를 향했다. 처음에 말리 의 속도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공포와 절망에 빠져들던 사람들은 정우의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 착하지, 착하지!" 사람들은 다시 하늘치를 보았다. 말리는 여전히 추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말리의 하강 속도가 느려졌다. 그것은 자신의 등에 태우고 있는 자들이 다치지 않도록 속도를 천천 히 줄이고 있었다. 규리하성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분명히 느려졌 음을 확인했다. 그들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함성을 지 를 준비를 하고는 말리가 완전히 멈추기를 기다렸다. 말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환희가 아니었 다.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말리를 뒤따라 내려가던 소리 위에서 시카트 규리하는 규리하성에 있던 자들보다 먼저 그 광경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기에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 사실을 확인해 주지 않는다면 시카트는 자신이 본 것을 무시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시카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게 뭐야?" 시카트는 자신이 본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말리의 지느러미 위에서 무엇인가 혹 같은 것이 부풀어올랐다. 그것 은 폭발하는 황금처럼 보였다. 번뜩이는 누런 빛을 뿜어내며 부풀어 오른 그것은 곧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식물이 뿌리를 뻗는 광경을 아주 빠르게 재현하는 것 같았다. 굵은 뿌리와 가느다란 잔뿌리 같은 것들이 방사상으로 서서히 뻗어가며 하늘치의 지느러미를 순식간에 잠식했다. 하늘치의 지느러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떠올린 시카트는 거리가 멀어서 조그맣게 보이는 그 황금빛 물체의 진정한 크기에 현 기증을 느낄 것 같았다. 그 퍼지는 속도 또한 충격적이었다. 망치로 빙판을 내리쳤을 때 빙판 위에 금이 가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황 금 뿌리가 뻗어나갔다. 지느러미를 벗어난 뿌리들이 하늘치의 몸 위로 뻗어나갔다. 거대한 황금빛 담쟁이 덩굴이 하늘치의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시카트는 공 황 상태에 빠질 것 같은 기분 속에서도 그 황금빛의 굵기를 가늠해 보았다. 가장 가느다란 것도 수 미터. 그리고 굵은 것들은…… 하늘 치의 크기에 비해볼 때…… 틀림없이 수백 미터에 달한다. 시카트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아이저 규리하도, 소리 곁에 서있는 이이타 규리하도 그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가족들을 둘러보던 시카트의 눈에 지멘이 들어왔다. 한 손으 로 아실을 안아든 채 걸어오던 지멘은 아래쪽의 광경을 보고는 몸을 확 부풀렸다. 시카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 것 같은 얼굴로 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금빛 물체는 이제 말리의 대부분을 뒤덮은 채 폭발적인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굵은 뿌리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가느다른 잔 뿌리들만이 느리게 생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건 이성으로는 절 대로 긍정할 수 없는 물체였다. 그러나 아실은 차분하게 그 존재를 긍정했다. "우리의 신이군요." =============================================================== 39챕터 끝났습니다. 특수문자로 드래곤 커브 그리느라 생고생… 으윽. 챕터 끝났으니 타 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40. 나는 것과 노는 것 - 1 문 : 나가와 도깨비, 인간, 레콘이 살고 있는 집에서 누 군가가 바닥에 바늘을 떨어뜨렸다. 잘 보이지 않는 바늘을 찾아내는 방법은? 답 : 도깨비가 바늘이 뜨거워질 정도의 도깨비불을 퍼뜨 리고 나가가 뜨겁게 달아오른 바늘을 눈으로 확인하여 집 어올린다. 그리고 인간은 온힘을 다해 레콘을 말려야 한 다. 설득력이 충분하다면 레콘이 집을 들어올려 흔드는 것 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칼리도 지방에 전해지는 수수 께끼. 형성…… 변화, 내재된 것의 발현, 혹은 내재화, 실재는 임의적이지 만 단속적이지는 않다. 한 자리에 서서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부피를 늘이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나무는 아래로부터 흡수한 땅과 물, 그리고 위로부터 흡수한 바람과 불로 자신을 빚어낸다. 그 런 경이적인 능력으로 한 톨의 도토리는 거대한 참나무로 자라난다. 한 그루의 장려한 참나무는, 무시하고 싶을 정도로 작은 도토리 부분 을 제외하면 결국 모습을 바꾼 땅과 물, 바람, 불인 셈이다. 그러나 도토리와 참나무의 크기 차이를 신비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 성적인 자라 해도 아라짓 제국의 황제 앞에서는 신비주의로 도망치고 픈 욕구를 느낄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허공에서 치천제는 햇빛이라는 불과 머무름 없는 바람, 그리고 바람 속을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물과 먼지만을 이용하여 자신을 폭발시켰다. 자연이 자신의 일부를 바꾸고 싶을 때, 산을 돋우고 강줄기를 바꾸고 땅을 갈라 협곡을 만들고 싶을 때 노출 시키곤 하는 그런 변성의 힘과 맞먹는 힘의 현현에 바라보던 사람들 은 넋을 잃었다. 하늘치를 하나의 섬으로 본다면 그것은 지형을 변화 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굴곡이 있긴 하지만 밋밋한 편인 하늘치의 모 습은, 식물의 일부인 듯하지만 정확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뒤엉켜 키보렌의 심장부를 뜯어내어 하늘에 띄운 듯한 모습으로 바뀌 었다. 그것은 하늘에 뜬 숲이었다. 그러나 단 한 그루의 나무로 이루어진 밀림이다. 경사지고 휘고 비틀린 선들이 규칙없이 흩어져 있다. 안개가 배어나 올 수도 있을 것 같은…… 배어나온다. 과도하게 집중되었던 습기가 희푸른 안개가 되어 넝쿨과 뿌리 사이로 휘감아돈다. 폭발적인 성장 의 후유증으로 맥동하는 가지들이 우서석, 우서석 소리를 내며 안개 속에 많은 그림자를 떨어뜨린다. 그 때문에 숲속엔 갖은 동물들이 뛰 노는 듯하다. 바깥에서 보는 사람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한 레콘이 그 숲속을 헐 떡이며 달리고 있었다. 숲속에서 방향을 가늠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 다. 자신만의 방향 체계를 따로 가지고 있는 듯한 숲은 앞과 뒤, 왼 쪽과 오른쪽을 뒤섞어버린다. 밤의 어둠과 극도의 혼란이 개입하면 때론 위아래마저도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다. 그 숲에는 밤의 어둠이 없었지만 어차피 까마득한 고공에 떠있으니 위나 아래에 대한 정상적 인 감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숲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하며 무작정 달렸다간 무시무시한 허공에 몸을 던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중심에 있었기에 혼란에 빠져 있던 레콘도 그 사실은 잊 지 않았기에 질주하려는 자신의 다리를 애써 단속했다. 레콘의 걸음 이 느린 이유 중엔 다른 것도 있었다. 그 숲은 지나치게 빽빽했다. 가장 형편없는 나무타기꾼도 바닥에 발을 딛지 않고 수 킬로미터씩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어차피 뒤엉킨 뿌리들과 덩굴 때문에 바닥이 잘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햇빛과 그림자, 그리고 더 짙은 그림자 사이를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레콘의 이름은 뭄토였다. 하지만 혼란과 두려움과 긴장 때문에 자신 이 뭄토라는 사실도 그에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뭄토지만 그 사실을 반쯤 잊은 채 레콘은 탁 트인 곳, 하늘을 볼 수 있고 세상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 숲속을 정신없이 헤매었다. 자신이 폐소공포증으로 광기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있었지 만 뭄토는 멈출 수 없었다. 숲이 그를 다져 으스러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숲이 아니다. 숲속의 그림자와 어둠은 모두 검은색 레콘이었다. 벼 슬을 빳빳이 세우고 깃털을 부풀린 채 대호를 닮은 망치를 휘두르며 달려오는 레콘.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생장의 과정에서 우연히 어 긋나게 된 뿌리들이 비비적거리고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레콘의 계 명성이다. 그의 얼굴을 때리는 것들은 나뭇잎이나 늘어진 넝쿨이 아 니라 분노한 레콘의 몸에서 튕겨져나온 깃털들이다. 뭄토는 눈을 반 쯤 감은 채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며 걸었다. 숲은 진득진득했다. 잠시라도 멈추면 끈적끈적한 숲이 부리를 틀어 막고 깃털 사이에 배어들어 거미줄에 얽힌 날벌레마냥 그를 휘어감을 것 같았다. 숲은 그의 귀로 파고들어…… '뭄토!' 뭄토는 진저리를 쳤다. 그는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숲 속에서 숲 의 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뭄토! 비스그라쥬백에게 가라! 백작을 냉동실로 데려가라! 뭄토! 비스그라쥬백에게 가라! 백작을 냉동실로 데려가라! 뭄토!' 붙잡혔다는 느낌에 뭄토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었다. 뭄토는 쓰러 지듯 주저앉았다. 넝쿨들이 그의 몸에 걸려 끊어졌다. 작은 언덕 만 한 굵기의 뿌리 아래쪽에 주저앉은 뭄토는 머리를 뿌리에 대고 짓눌 렀다. "뭐야, 넌 뭐야?" '뭄토! 비스그라쥬백에게 가라!' "안팎에서 말하지마! 이 숲은 도대체 뭐야? 하늘치가 왜 숲이 된 거 야?" 쓸모 없는 짓임을 깨달은 뭄토는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어 두 주먹 으로 바닥을 짚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눈알이 자꾸 뒤집히는 것 같았 다. 뭄토는 눈을 꼭 감은 채 헐떡였다. "이라세오날, 이라세오날! 저를 살려주세요. 구해주세요!" 숲의 격분이 사라졌다. 몸을 웅크리고 있었지만 뭄토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뭄토는 긴장한 채 머리를 들어올렸다. 숲이 미풍과 방향 으로 말을 걸어왔다. '뭄토. 내가 이라세오날이다.' "네? 어디 계시죠?" '네가 보는 모든 곳에 있다.' 뭄토는 한 마리 땅강아지나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거대 한 뿌리들을 둘러보았다. 무의식이 해답을 찾았고, 거부하는 의식에 게 강제로 그것을 넘겨주었다. 뭄토는 질겁하며 두 눈을 가렸다. 숲 이 안팎에서 말했다. '그래. 나다.' 뭄토는 눈을 가렸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 "이라세오날…… 이 숲이?" '그렇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손질하는 방법 중 가장 간단하면서도 강력 한 방법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뭄토는 그렇게 했다. "위대한 분이여. 당신은 이 숲이 되셨습니까?" '그렇다.' 뭄토는 자신의 질문과 숲의, 아니 황제의 대답을 제삼자처럼 들었고 그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엉겁결에 뿌리를 짚으려 했던 뭄토는 깜 짝 놀라 손을 끌어당겼다. 그는 되도록 숲의 어느 부분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일어났다. 몇 번이나 부리를 열었다 닫은 후에 뭄토 는 힘겹게 말했다.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겁니까?" '실로 그러하다.' 뭄토는 전신이 짜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시덤불에 빠진 것 같지만 결코 아프지는 않다. 그 느낌을 즐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비스그라쥬백에게 가라. 뭄토. 그를 냉동실로 데려가 관에 넣어 라.' 뭄토는 깨달았다. 황제이자 숲이며 그 이상의 모든 것인 자의 지시 를 따르는 것은 곧 그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임을. 뭄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행동해야 되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없이 뭄토는 움직였다. 그는 어디에 비스그라쥬백이 있는지 몰랐고 자신이 어떻게 거기로 갈지도 몰랐지만 이미 무지는 아무 상 관이 없는 문제가 되었다. 정맥을 흐르는 피는 심장의 위치를 몰라도 상관없다. 피와 정맥과 심장은 하나니까. 뭄토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 비켜나는 것처 럼 보이는 뿌리와 줄기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도 인지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젊은 숲을 거니는 동안 뭄토의 몸에서는 기묘한 변화 가 일어났다. 그의 깃털들이 그 때까지와 다른 모습으로 서서히 바뀌 었다. 처마에 형성되는 고드름처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명백한 변화 가 일어나면서 그의 깃털들은 은은한 초록빛을 띠었다. 잠시 후 그것 은 더 이상 깃털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닌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어쩐지 잎사귀처럼 보였다. 틸러 달비는 두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짓누른 채 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그의 모습은 할 수만 있다면 자기 머리를 떼어 어딘가에 숨겨 두고 싶은 사람 같았다. 하늘치와 키보렌을 뒤섞으라는 황당한 요구에 대한 대답 같은 것이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보며 틸러는 자신의 의식을 의심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의 심리는 체념한 사형수가 느끼는 그것과 닮아 있었다. 오로지 자신에게 반대하기 위해 존재하 는 세상의 냉막한 무시 앞에서 위엄도 잃고 오기도 잃고 자기 긍정조 차 잃어버린 채 시시각각 비천한 미물로 바뀌어가는 자신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 자신을 주체로 하는 어떤 목적도 남김 없이 사라지는 것. 산문적으로 틸러 달비라는 인간은 살아있었지만 시적인 측면에서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죽음은 적어도 규리 하성에 뛰어들어온 제국군 가운데서는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규리하성에 있었던 자들의 경우는 제국군과 달랐 다. 레콘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에 물을 끼얹어 축축하게 젖어있 던 세레지 파림은 하늘을 보며 순수한 공포만을 느꼈다. 공포와 웃음 은 모두 자기 보존의 욕구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세레지는 지켜야 할 자신마저 잃어버린 듯한 제국군과 달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려워 했다. 아마도 그녀는 그곳에서 가장 이성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사 람이었을 것이다. 정우가 피습당한 후로 세레지는 그녀의 상처를 돌보느라 몇 번이나 꿈을 보았다. 그 때문에 세레지에겐 자아가 미소해지다가 무의미해지 는 감각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못지않게 두려워하고 있 었지만 세레지는 그 두려움을 두려움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원동력으 로 삼을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 볼 때 하늘에 나타난 그것은 나무였 고 그래서 세레지는 탈해의 허리를 보았다. 무사장의 화염검은 저것 을 불살라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공포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세레지는 탈해에게 달려가 그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창문으로 몸을 내민 정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잡혔어." 탈해는 즉각적으로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아마도 탈해는 지평선 위 에 흙손을 든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가 누가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황급히 사라지는 광경을 보았다 해도 정우의 목소리에 반응했을 것이다. 탈해는 주저없이 말리의 모습에서 눈을 떼어 정우를 돌아보 았다. 정우는 두 손으로 귀를 덮은 채 말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본 탈해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정우?" 정우는 무사장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산을 대지에 묶어두는데 쓰임 직한 뿌리들에게 휘감긴 말리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규리하성을 잠 식하고 있는 고요 때문에 그녀의 가느다란 목소리는 명징하게 들렸 다. "억지로, 힘으로? 하늘치를 조종할 수 없는 저것이 너를 억지로 ……? 살인기사는 그녀가 용이라고 말했어. 저것이 용이야? 용이 너 를?"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규리하성의 마당에 있던 자들 중 한 레콘이 갑자기 부풀었다. 감이 좋은 사람들, 즉 론솔피와 주테카, 쵸지, 그 을린발, 야리키 등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서는 아트밀이 숨막힐듯 거대한 모습으로 부풀어 있었다. 아트밀 은 정우와 하늘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쇠가 긁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 그 목소리에 담긴 살기는 레콘들보다 감이 떨어지는 자들도 움찔하 여 아트밀을 돌아보게 했다. 깃털을 고슴도치처럼 세워 레콘을 그린 낙서 비슷한 모양으로 바뀐 아트밀은 나가의 눈으로 파라말을 돌아보 았다. 파라말은 뱀의 주시를 당한 쥐처럼 얼어붙었다. 아트밀이 말했 다. "사라말이 어떻게 죽었지?" 파라말은 자신이 그 대답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트밀의 목 소리는 파라말의 입을 벌리고 그 안에서 대답을 끄집어내는 것 같았 다. "말리에 올라갔다가 불타서……" 대답한 후에야 파라말은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의 형은 용에게 불타 죽었다. 파라말은 튀어나올듯한 눈으로 말리를 쏘아보았다. "저것이 형을……" 아트밀이 모골이 송연해지는 계명성을 질렀다. 인간들은 물론이거니와 레콘들도 충격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트밀 은 말이 아닌 소리를 길게 토해내었다. 발리츠 굴도하 남작은 아트밀 의 부리에서 핏줄기가 뿜어져나오는 것을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기나 긴 포효 끝에 아트밀은 피에 젖은 부리로 외쳤다. "저것이 사라말을 죽이고! 하늘치를 장악해서! 우리를 깔아뭉갤 거 라고?" 아트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얼굴을 가린 채 주저앉거나 기절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규리하공이 있는 창문을 황급히 돌아보았다. 그 러나 그곳에는 열린 덧창뿐 정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부재에 초현실적인 공포를 느꼈을 때 무사장 탈해 머리돌은 탈해 는 본관 안쪽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건물 안쪽에서 숨가쁘게 달려와 그의 곁을 지나치는 것은 정우였다. 탈해는 얼떨결에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지만 정우는 잽싸게 계단 을 뛰어내려 사람들 사이에 섰다. 탈해가 그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 했을 때 정우는 떨어지는 하늘치를 막으려는 듯 가느다란 두 팔을 하 늘로 들어올린 채 외쳤다. "안돼! 말리야, 하지마!" 하늘치가 전율했다. 그에 비하면 폭발하는 활화산은 고즈넉한 전원 풍경에 해당한다. 그에 비하면 질주하는 폭풍은 뜨거운 차에 후후 불어넣는 입김이다. 하늘치가 전율했다. 하늘이 출렁이거나 산산조각 나거나 부글부글 끓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구제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화가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어렵겠지만 그 순간 하늘은 자신의 상궤 를 일탈해버렸다. 하늘은 태풍에 유린당하는 바다처럼 출렁였고 충격 을 받은 살얼음처럼 수십 만 조각으로 갈라졌고 가열한 아교처럼 역 겹게 들끓었다. 전율하는 하늘치는 우레의 가장 끔찍한 친척 쯤 될 듯한 굉음으로 공기를 움켜쥐어 흔들었다. 눈 먼 광풍들이 하늘의 빛 깔마저 바꿀 듯이 사방으로 치달았다. 그 충격음은 규리하성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규리하성은 학질에 걸 린 것마냥 부르르 떨며 신음했다. 성 안쪽에서는 물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와장창 울려퍼졌고 진동에 쓰러진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흙먼 지와 파편, 돌가루들이 비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광분하는 말에서 낙마했다. 재빨리 몸을 웅크 리긴 했지만 땅에 충돌하면서 엘시는 숨이 턱 막히는 충격을 받았다. 엘시는 충격으로 휘저어진 듯한 머리를 들어 멍한 눈으로 말을 바라 보았다. 말은 사방으로 발길질을 하다가 열린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던 엘시는 힘겹게 일어났다. 비명을 지르며 다가온 이레 달비가 비틀거리는 상전을 부축했다. 이레는 뭐 라 다급하게 떠들었지만 엘시는 그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엘 시는 괜찮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이레의 흥분이 조금 잦 아들었다. 엘시는 이레의 굵은 팔뚝에 몸을 의지한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치의 머리를 둘러싼 뿌리와 넝쿨 사이에서 말리의 눈들이 불타 고 있었다. 말리는 더 이상 전율하지 않았지만 대신 분노로 눈을 불태우고 있었 다. 엘시는 그것의 입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말리의 입 주위에 붙 어있던 뿌리들이 끊어진 쇠사슬처럼 모질게 튕겨나갔다. 가까이서 본 다면 그것은 수백 미터에 달하는 채찍들이 광란하는 끔찍한 광경이었 을 것이다. 그 순간 하늘치를 뒤덮고 있던 뿌리들이 다시 자라기 시 작했다. 선상지를 급습하는 급류처럼 수십만 가닥으로 갈라진 새 뿌 리들이 하늘치의 몸 위로 빠르게 뻗어나갔다. 이레가 헐떡이며 말했 다. "가, 가주님. 얽어매고 있습니다!" 머리 속에 날뛰는 쥐가 들어온 것 같았지만 엘시는 억지로 정신을 수습했다. 이레의 말은 정확했다. 더 많은 뿌리들이 자라나 하늘치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악의를 가진 것처럼 자라나는 뿌리들에 붙잡 혀 하늘치는 그물에 걸린 고기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정우의 울먹이 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지 말아요!" 엘시는 거듭된 충격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던 정우의 말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하늘치는 정우의 부탁에 따라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 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여잡고 있는 어떤 전승에도 기록되지 않은 기 괴한 모습의 용이 하늘치를 강제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용은…… "폐하! 그러지 마세요! 제발!" 엘시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무너져내렸다. 이레가 황급 히 그를 붙잡았지만 엘시는 취한 사람처럼 몸종의 품속에서 힘없이 휘청거렸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부침하며 엘시는 어떤 문답을 떠올렸다. 엘시. 그대는 확언받고 싶은 것이 없는가? 확언이라 하셨습니까? 그대의 인질에 대해서. 인식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던 엘시는 보지 못했지만 말리를 뚫어 져라 바라보고 있던 정우는 말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말리의 몸 여기저기서 붉은 기운이 배어나왔다. 소리와 말리 가 충돌했을 때 일어났던 피보라와 비슷한 것이 말리를 둘러싸고 있 는 뿌리들의 틈 사이로 번져나왔다. 그 광경이 의미하는 바를 차마 해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우의 몸은 이미 탈해를 향해 돌아서고 있 었다. 정우는 쓰러질 듯 달리며 외쳤다. "탈해! 보지마!" 탈해 머리돌은 이성의 흔적을 찾기 힘든 눈길을 떨어뜨려 다가오는 정우를 보았다. 당장이라도 탈해의 품에 뛰어들 것처럼 달려오던 정 우는 그 눈길을 보고는 깜짝 놀라 속도를 늦추었다. 정우는 한 걸음 씩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탈해를 바라보았다. "탈해?" 탈해는 넋이 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뿌리가…… 자신을 죽이는 신이여! 용의 뿌리들이 말리의 몸으로 파고들고 있어." 정우는 그 말에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의문 때문에 정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규리하성을 덮쳤던 파괴적인 진동에도 불 구하고 민들레 여단이 저지른 살육의 흔적들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탈해는 그 광경을 뚜렷이 볼 수 있는 위치에 서있었 다. 정우는 탈해의 옆으로 다가가 그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탈해?" 탈해는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 정말?" 탈해는 단어들을 얼기설기 얽어놓은 것처럼 말했다. "너를 도와주겠다고 했어. 저 피에 정신을 잃을 수는 없어." 정우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탈해를 올려다보았다. 탈해는 구슬픈 미 소를 짓고는 다시 말리를 올려다보았다. 무사장의 말대로였다. 말리의 몸을 뒤덮은 뿌리들은 바위를 깨부수 는 나무 뿌리의 힘으로 하늘치의 견고한 몸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 상처들에서 피안개가 시뻘겋게 뿜어져나왔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 었다. 인간에 비유한다면 피부를 가는 철사로 꿰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하늘치의 몸을 파고든 그 뿌리들이 하늘치의 의지를 장악하리 라는 것은 명백했다…… 내려가지 않으려는 의지를. 탈해가 개밥바라기의 칼자루를 움켜쥐며 가냘프게 말했다. "다시 내려올 거야. 물러나." 정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탈해를 보았다. 탈해는 칼자루를 쥐지 않은 손으로 정우를 밀어내는 시늉을 해보였지만 실제로 움직인 것은 탈해 자신이었다. 탈해는 정우에게 몇 걸음 물러나서는 개밥바 라기를 뽑아들었다. 지멘과 아실, 그리고 규리하 사람들을 태운 소리는 말리를 향해 쇄 도하고 있었다. 거센 바람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있 었다. 시카트 규리하 또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외쳤다. "규리하가 납작해지겠어! 형! 빨리!" "그렇게 되진 않아!" 역시 엎드려 있던 이이타는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대답했 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그의 말에 담겼던 것의 반에 반 만큼도 자신감이 있지 않았다. 위치가 나빴다. 소리는 말리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무작정 가속 하여 말리에 부딪친다면 그것은 오히려 말리의 규리하 공격을 돕는 꼴이 될 것이다. 옆이나 아래에서 충돌하지 않는 한 말리의 규리하성 공격은 막을 수 없다. 그리고 필요한 시간 내에 소리는 결코 말리의 옆이나 아래쪽에 있을 수 없었다. 말리를 함부로 앞지르려 하다간 말 리보다 소리가 먼저 규리하성을 덮치게 될 것이다. 아실이 그 사실을 지적했다. "공자님, 멈춰요! 이 각도로 부딪치면 말리를 규리하성에 밀어붙이 는 꼴이 될 거예요!" 이이타는 이를 악문 채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지멘의 몸에 기대어 엎드려 있었다. 이이타는 표정으로 그 녀에게 말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야? 아실은 빠른 말투로 그 표정 에 대답했다. "공자님껜 규리하를 구할 방도가 없어요. 차라리 이 틈을 타서 도망 치세요. 이곳에 있는 가족들과 정인을 구하세요. 공자님이 아니면 누 가 이 분들을 구할 수 있지요? 이 분들을 책임지셔야 해요." "저건 규리하성이야!" "그리고 규리하성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신이죠." "저따위 신을 누가 원한다는 거야! 제이어 솔한의 말이 맞아. 원시 제는 영원히 저주받아야 해! 저런 괴물신을 만들어 우리와 우리의 후 손 모두를 구속한다고?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이이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갑자기 깨달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입밖으로 내뱉었다. "규리하를 저것에게서 구할 수 없다면 저것을 규리하와 함께 묻어버 려야 해!" 아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이이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옆 으로 뻗었다. 그녀는 집게 손가락으로 이이타의 곁에 엎드려 있는 소 리 로베자를 가리키며 이이타를 노려보았다. 그 손가락은 몇백 마디 의 말을 함축한 것이었다. 이이타는 두려움에 빠진 눈으로 소리를 바 라보았다. 아실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도 함께 규리하에 묻을 건가요? 그러려고 발케네에서 이곳까지 데려왔어요?" 아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레콘의 주먹처럼 이이타를 후려쳤다. 소리는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을 못했고 이이타 또한 침묵한 채 그녀 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그곳으로 보낼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이이타와 소리를 바라보 았지만 지멘만은 그러지 않았다. 지멘은 어떤 기대감에 사로잡힌 눈 으로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실이 증오를 드러내길 기원했다. 그 증오가 올바르냐 그렇지 않느냐는 상관없었다. 그는 소리를 죽음 으로 이끄는 이이타를 향해 아실이 베일 듯이 날카로운 증오를 쏟아 내기를 애타게 바랐다. 그러나 아실은 간곡하게 말했다. "소리를 똑바로 보세요. 공자님. 분노 때문에 모든 것을 망가뜨려서 는 안돼요. 공자님껜 지켜야 할 너무나 소중한 것이 있잖아요." 지멘은 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부리 를 부여잡았다. 그는 위아랫부리를 으스러지도록 단단히 붙인 채 이 이타가 "크흑!" 하며 신음하는 것을, 그가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을, 그리고 그가 소리를 보듬어 안는 것을 보았다. 두 남녀가 자신의 팔 로 부서질 듯 떨리는 상대방의 몸을 고정시키는 것을 보았고 하늘치 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 이 하나둘 일어났다. 시카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두 주먹으로 하늘치의 등을 탕탕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둘째 아들에게 다가간 아 이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카트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 모든 것을 본 다음 지멘은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지멘의 시선을 느낀 아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 나 지멘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지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처 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낯설어하는 것 같기도 한 눈으로 지멘을 쳐 다보던 아실은 머뭇머뭇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이이타에게 말했다. "공자님." 이이타는 소리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실 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공자님.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해요. 어서 이곳을……" "움직이지마." 지하에서 들려오는 듯한 음산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소름이 돋는 것 을 느꼈다. 이이타와 소리도 질겁하여 고개를 돌렸다. 아실은 두려움 에 빠져 뒤를 돌아보았다. 지멘이 일어섰다. 그는 망치를 들어올려 어깨에 걸치고는 몸을 조금 부풀렸다. 다시 오므라든 지멘은 똑바로 서서 말했다. "이 하늘치는 아래로 내려간다." "지멘!" 아실이 비명을 질렀지만 지멘은 그녀를 본체만체 했다. 그는 의심스 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이타에게 말했다. "우리를 말리 위나, 아니면 땅에 내려놓고 떠나라." "예? 내려놓고?" 아실은 두 손으로 지멘의 다리를 붙잡고는 머리를 한껏 젖혀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그 찌르는 듯한 시선을 아프도록 느꼈지만 지멘은 아 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지멘은 고개를 조금 돌려 부리로 어깨 에 있는 망치를 가리켜보였다. 그 의미심장한 동작에 아이저가 숨을 들이켰다. 지멘의 다리를 붙잡은 아실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아실은 주르륵 미 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아이저가 아실을 흘깃 보고는 지멘에게 말했 다. "지멘. 나도 당신만큼이나 황제와 싸우고 싶지만, 저런 것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의 숙원이야 알지만……" "숙원이 아니야." "뭐라고요?" "황제에게 받을 것이 있어." "받을 것? 무엇 말입니까?" 아이저의 질문에 지멘은 부리를 다물었다. 그 때 아실이 지멘의 다 리에 이마를 부딪치며 말했다. "지멘. 필요 없어요." 지멘은 머리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던 아이저는 지멘이 혹 눈물을 숨기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실 은 지멘의 다리에 이마를 댄 채 속삭였다. "증오가 무엇에 필요하지요? 증오는 사람을 망가뜨리기만 해요. 마 음을 갉아먹고 의식을 흐트러뜨리고 비뚤어진 눈으로 사람을 보게 만 들어요.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누가 준다 해도 사양해야 할 그 사 악한 감정을 왜 목숨을 걸고 되찾는다는 거죠? 말이 안되잖아요." 지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실 또한 지친 듯 입을 다물고는 지멘의 다리에 댄 이마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때 시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뭐가 좀 이상한데?" 시카트는 어느새 똑바로 일어나 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이타 와 아이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개밥바라기의 화염인을 꺼내려던 탈해는 갑자기 나타나 그것을 뒤덮 는 손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정우!" 정우가 개밥바라기의 칼몸테두리를 두 손으로 덮고 있었다. 탈해는 질겁하여 개밥바라기를 등 뒤로 숨겼다. 정우가 그의 옷자락에 매달 리며 고개를 도리질쳤다. "아냐, 잘못 생각했어!" "무슨 소리야? 쫓아버려야 해! 저것이 내려오면 규리하성은 흔적도 없이……" "내려오지 않아!" 탈해는 숨막힌 소리를 내었다. 정우는 탈해의 옷자락을 쥔 손을 마 구 흔들었다. "내려오지 않아, 내려오지 않아! 내려오려는 것이 아니야!" 정우의 말뜻을 깨달은 자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정우는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말리에게 멈추라고 했어.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억지로 하늘 치를 움직이려고 저런 일을 하시는 거야." "그, 그래. 화, 황제가 억지로 하늘치를 규리하에 충돌시키려고 ……" "뭐? 그게 아냐, 폐하는 도망치려는 거야!" 사람들은 경악에 빠졌다. 탈해는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나치게 커다란 소리가 텅! 하고 울렸다. 탈해는 자신이 그렇게 세게 주저앉았나 하고 놀랐 지만 저편에 있는 아트밀을 보고는 그 소리의 원인을 깨달았다. 그것 은 주랑에서 뛰어내린 아트밀이 낸 소리였다. 아트밀은 철극을 꼬나든 채 정우와 탈해가 있는 본관 계단을 향해 돌진했다. 그가 계단 바로 앞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쇠막대기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트밀은 몸을 부풀리며 멈춰섰다. 쇠막대기의 뒤 를 이어 나타난 것은 야리키였다. 야리키는 두 손으로 조간을 쥐어 앞으로 내밀었다. 자신을 막는 그 동작에 아트밀은 격분하여 말했다. "비켜!" 야리키는 냉정하게 말했다. "뭐 하려는 거야?" 아트밀은 잠깐 동안 야리키를 때려눕히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 만 반대로 자신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있었다. 자신이 원 하는 것은 한 마디 질문이라는 것을 떠올린 아트밀은 야리키를 내버 려둔 채 고함을 질렀다. "규리하공! 그게 무슨 말이야!" 야리키는 아트밀을 주시한 채 뒤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폐, 폐하께서는 도망치려고 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떠나시려는 거 예요. 하지만 제가, 제가 말리에게 멈추라고 했기 때문에 말리는 저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어요. 폐하께서는 용이기 때문에 말리 를 움직일 수 없어요. 그래서 강제로 말리를 움직이려고 저렇게……" 황제가 용이라고 정우가 말한 순간 아트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러나 아트밀은 정우가 말한 다른 내용에 집중했다. "용이 도망친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왜지? 지금껏 저 용이 하던 짓이 그것이잖아!" 정우의 눈길이 갈팡질팡했다. 그 모습을 본 아트밀은 불신에 사로잡 혔다. 그러나 그가 고함을 지르려 할 때 정우가 한 곳을 바라보며 외 쳤다. "저기요!" 아트밀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정우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자들 모두가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레 달비가 꼿꼿하게 서서 다가오는 시선들을 똑바로 받 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충성스러운 팔은 이미 필요 없어진 부축 을 자신의 주인에게 바치고 있었다. 엘시는 숨을 멈춘 채 정우를 마주보았다. 정우가 말했다. "대장군님 때문이에요. 대장군님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규리하를 공격하실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저에게 말리를 뺏기거나 소리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말리를 끌고 도망치려 하시는 거예요." 아트밀은 말리를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엘시를 바라보았다. 그의 살 벌한 눈길을 받은 이레는 이를 악물며 물통이나 소화차가 어디 있는 지 살폈다. 다행히도 물통이나 소화차만큼이나 든든한 것이 있었다. 쵸지와 론솔피, 주테카, 그리고 그을린발이 하나둘 엘시에게 모여들 었다. 그 모습을 본 아트밀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을 때 정우 가 낭랑하게 외쳤다. "말리야! 반항하지마. 폐하의 뜻을 따라!" 아트밀이 기겁했다. "저 용을 보내면 안돼!" 아트밀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단숨에 야리키를 뛰어넘어 정우에 게 다가가려는 속셈이었지만 야리키는 침착하게 조간을 휘둘렀다. 길 다란 조간은 아트밀의 다리를 후려쳤고 저항할 수 없는 공중에서 그 런 공격을 당하자 아트밀은 균형을 잃고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떨어졌 다. 어깨부터 떨어진 아트밀이 벼슬을 세우며 일어났을 때는 탈해가 정우의 앞을 가로막은 후였다. 탈해는 개밥바라기를 앞으로 내밀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탈해의 등 뒤에서 정우가 말했다. "그래, 가!" 아트밀은 절망에 찬 눈으로 말리를 올려다보았다. 말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위도, 아래도 아닌 방향이었다. 말리는 남 빛으로 변하고 있는 동쪽 하늘을 향해 피를 뿌리며 서서히 움직였다. "안돼! 돌아와! 돌아오라고!" 아트밀은 격분하여 달려갔다. 동쪽 성벽을 향해 달려간 아트밀은 단 숨에 주랑 위로 뛰어올라서는 흉벽에 한쪽 발을 올렸다. 그는 몸을 세 배로 부풀려 하늘을 향해 외쳤다. "멈-춰-라-!" 아트밀의 필사적인 계명성에도 불구하고 말리의 움직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니, 점점 그 속도가 빨라졌다. 그 터무니없이 큰 몸 때문 에 긴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말리는 빠른 속도에 도달하여 지러쿼터 산맥이 있는 곳, 규리하를 제외한 제국의 다른 모든 것이 있는 방향 을 향해 날아갔다. 동쪽 하늘에서 피어오른 어둠이 말리를 삼키는 모 습을 바라보던 아트밀은 찔러죽일 듯한 눈으로 탈해의 뒤에 있는 정 우를 노려보았다. "돌아오게 해." 정우는 탈해의 뒤편에서 옆으로 걸어나와 아트밀을 바라보았다. "안돼요. 아트밀." 아트밀은 철극을 내리쳤다. 그 아래에서 흉벽이 박살나며 파편이 아 래로 쏟아졌다. 야리키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아트밀은 아랑 곳하지 않고 외쳤다. "돌아오게 해! 나는 저 용에게 받을 것이 있다!" "저도 그래요." 아트밀은 부리를 벌렸고 탈해는 숨을 들이쉬며 정우를 내려다보았 다. 하지만 정우는 아트밀도, 탈해도 보지 않았다. 정우는 엘시를 바 라보며 말했다. "저도 폐하께 받을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와 함께 가요." 엘시는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트밀은 고민하 지 않았다. "함께 가자고? 어떻게! 어떻게 하늘치를 따라간다는 거냐!" "그야 하늘치로." 정우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을 본 아트밀은 또 하나의 하늘치 소리가 규리하성을 향해 서서히 내려오는 것을 보았 다. 아트밀은 손을 들어 소리를 가리키며 정우에게 말했다. "저걸 타고? 저걸 타고 용을 추적한다는 거야?"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40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40. 나는 것과 노는 것 (2) | 2004·12·13 07:53 | HIT : 278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40-2 관련자료:없음 [4943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2-13 06:55 조회:30 피를 마시는 새 40. 나는 것과 노는 것 - 2 탈해는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그것으로 써 아트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끝냈다고 생각한 듯 생각에 잠긴 표 정으로 소리가 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트밀은 정우의 동행 요청에 대한 생각에 빠져 야리키나 탈해를 긴장시킬 만한 행동은 하 지 않았다. 가시나무 군단 31중대원들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명령에 따라 한 곳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규리하의 병사들은 오니샤 퓨덴의 지휘에 따라 그들 맞은 편에 집결했다. 그 자체는 전투를 대비한 듯 한 움직임이긴 하지만 그 다음 명령에서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다. 시 허릭 마지오와 오니샤 퓨덴은 병사들을 바닥에 앉게 했다. 그들이 원 하는 것은 우발적인 충돌을 막는 것이었다. 통제할 수 없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상식적으로 최선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양군의 지휘관들이 상식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발리츠 굴도하 남작과 남작부인은 세리지 파림과 위체 파림, 그리고 파라말 아이솔과 함께 규리하의 조신들과 합류하고 있었다. 탈해나 야리키의 모습에 주눅이 든 그들은 무리를 이룬 후에 변경백에게 다 가올 심산인 듯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엘시가 몸종과 네 명의 레콘들과 함께 정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퍽이나 시 사적이었다. 엘시는 제국군과 규리하군 사이를 걸어오고 있었다. 물 론 그것이 체격 좋은 레콘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긴 하지만 탈해는 양군 사이를 가로지르는 대장군을 보며 이제 제국군과 규리하군의 전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을 느꼈 다. 엘시는 정우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규리하의 조신들 이 그녀에게 도착한 다음 도달하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 람들이 다가올 시점을 가늠하던 탈해는 그 전에 정우에게 말을 걸어 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을 들어 정우의 어깨에 얹었다. "정우." 정우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어깨에 놓인 도깨비의 두툼한 손을 보 다가 탈해를 바라보았다. "응?" 탈해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제를 추격하겠다고? 왜지?" "폐하께선 하늘치와 하나가 되셨으니까 그 분을 따라가려면 역시 하 늘치가 필요해. 다행히 저기에 하나 있으니까 필요한 건 하늘치를 이 끌 사람이겠지. 나나 이이타 중 한 명이 가야 해. 그런데 이이타는 여기 있는 편이 좋겠어. 올케 될 사람도 있고." "너는 규리하 변경백이야." "탈해. 내가 왜 변경백일 수 있었지?" "그거야 킴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잖아.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을 가장 큰 권리가 그 장녀인 네게 있기 때문에……" "아냐. 내가 하늘치를 다루기 때문이야. 오직 나만이." 정우는 머리를 기울여 탈해의 손등에 뺨을 대고 눌렀다. "즈믄누리에서 자란 공녀는 이야깃거리의 소재로는 괜찮을 것 같지 만 킴들을 다스리는 일에도 적합할 것 같지는 않아. 너도 알잖아. 왜 발케네공이 물러났는지, 왜 규리하의 킴들이 나라를 망가뜨릴지도 모 르는 공녀에게서 규리하를 뺏으려 하지 않았는지, 왜 아버지가 나를 두고 하인샤 대사원으로 떠났는지. 그건 내가 하늘치에게 부탁할 수 있기 때문이야." 정우는 손을 살짝 들어 다가오는 소리를 가리켰다. "이제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그러니 난 규리하 변경백이 아니 어도 돼." 정우는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규리하를 위해선 그것이 옳은 결정인 것 같아." 탈해는 정색하여 정우를 바라보았다. 즈믄누리의 성주는 즈믄누리에서 언제나 옳은 결정만을 내린다. 어 쨌든 도깨비들은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도깨비와 논쟁하고 싶어하는 비도깨비는 별로 없다. 그런데 규리하성에도 라수의 방이라 는 형태로 즈믄누리의 일부가 있다. 탈해는 규리하성의 성주가 누군지 생각해보았다. 탈해는 날카로운 물건이 등을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몸 이 경직되는 것을 느낀 정우는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응? 왜?" 탈해는 반쯤 벌렸던 입을 도로 닫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나친 확대 해석임이 분명하다. '정우가 인조새의 말을 언제나 정확하게 해 석했다 한들 그것이 무류성의 증거가 된단 말인가?' 아이저 규리하도 규리하성의 성주였지만 황제와 싸운다는 판단을 내린 덕분에 도망쳐 야 했다. '그 덕분에 아이저 규리하가 아들에게 하늘치를 줄 수 있었 다는 것이 중요한가?' 규리하성에서 옳은 판단을 내린다면 정우는 성 안에서 안전해야 하지만 그녀는 바로 규리하성 안에서 지키멜 퍼스에 게 납치당했다. '정우가 직접적인 목숨의 위협을 당한 것은 규리하성 이 아닌 아스캄이긴 하지만.' 탈해는 혼란스러워졌다. 그 가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반대논리도 떠올릴 수 없었던 탈해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 다. 탈해는 정우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끌어당겨 팔짱을 끼었다. "좋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그건 네가 더 이상 변경백이 아 니어도 되는 이유야. 네가 폐하를 따라가야 할 이유는 뭐지?"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대답은 탈해로 하여금 규리하성의 성주 는 즈믄누리의 성주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 들 것이다. 하지만 정우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살인기사가 말했지. 선황께서는 내버려두면 서로 끊임없이 죽여댈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신을 만드셨다고. 바꿔 말하면 선황께서는 우 리의 죄를 빼앗아갈 신을 만드신 거야. 그걸 뺏겨서는 안돼." "왜? 죄는 나쁜 거잖아." 정우는 말없이 탈해를 보다가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우는 파괴적인 불을 쓰지 못하는 도깨비를 끌어안았다. 양자의 체구 차이 때문에 안는다기보다는 붙는다에 가까웠지만 그들에게 다가가던 사람 들이 정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정도는 되었다. 탈해 또한 알았다. 그래서 탈해는 조심스럽게 정우를 마주 끌어안았 다. "나는 너를 돕겠다고 약속했어." 정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조금 후 정우는 탈해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규리하성 안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다가오던 자들은 야리키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 채 서있었고 그 뒤로는 바닥에 앉은 채 주의 깊은 눈 으로 그녀를 보는 병사들이 있었다. 정우는 그들 모두를 바라보고, 그리고 신음하는 부상병들과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부상 병들은 오니샤 퓨덴의 명령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시체들은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정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여러분. 이이타가 제게 소리를 넘겨주면 저는 소리를 타고 황제 폐 하를 따라갈 거예요. 규리하는 아버지와 동생들이 다스리면 좋을 거 라고 생각해요. 이이타가 하늘치를 다룰 줄 아니까 규리하를 지키는 일에 큰 도움이 되겠지요." 명백히 비셀스파라 말할 수 있는 규리하의 조신들은 그 선언에 질겁 했다. 다친 팔을 천으로 고정시켜둔 리시오 느베라이 총리대부가 외 쳤다. "무슨 말씀입니까, 각하! 이 땅은 각하의 것입니다!" "아버지도 이 땅을 잘 다스릴 거예요. 총리대부."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것은……" 그 때 누군가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뛰쳐나왔다. 야리키가 매서운 표정으로 노려보았지만 그 자는 계단을 뛰어오르는 대신 방향을 바꿔 야리키를 향해 똑바로 달려왔다. 야리키는 상대가 판사이 남작 발리 츠 굴도하라는 것을 알고는 긴장을 조금 늦추었다. 발리츠가 말했다. "날 좀 높이 들어올려 주십시오. 야리키. 부탁합니다." 야리키는 남작을 바라보다가 묵묵히 그를 들어올렸다. 남작은 그에 게 감사했고 야리키는 필요할 경우 누군가에게 집어던지기 좋을 것 같아서 들어올린 거라고 고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야리키의 왼쪽 어깨 위에 서서 그의 머리에 한 손을 얹고 균형을 잡은 발리츠 는 크게 외쳤다. "비록 이곳 무향에서는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인 나지만, 몇 마디 서툰 조언을 할 만한 자격은 있을 거라 자부하오! 그러니 잠시 만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오!" 그들과 함께 싸운 고명한 무장이자 그들과 마찬가지로 비셀스파인 남작의 외침에 조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남작은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대들에게 묻겠소. 지금 아라짓 제국에 황제가 있소?" 느닷없는 질문에 대답하려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 를 깨닫고는 흠칫했다. 발리츠는 급격한 심적 동요를 일으킨 그들을 억세게 휘어잡았다. "그렇소! 변경백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치천제는 용이었소! 우리는, 제국인들은 용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었소! 그것이 서약을 거부 한 것은 당연한 일이오. 용이니까 사람의 서약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었소!" 정우는 황제의 정체와 서약은 별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 작의 말에 끼여들 수가 없었다. 남작은 그 자신이 용이나 된 것처럼 불길 같은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변경백께서 그것의 정체를 밝혀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람이 아닌 것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오. 용이 얼마나 사는 지 누가 안단 말이오? 그 기간은 어쩌면 영원이었을지도 모르오!" 엘시는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영원은 아니야. 일만육천 년 이지.' 한 사람의 생애에 비한다면 그게 그거지만. 통찰이 무의미해지는 상황을 겪은 직후이기 때문에 통찰 능력에 관 해서는 마비 상태나 다름없었던 처지의 사람들은 발리츠 굴도하의 말 에 의심이나 이견을 떠올리지 못한 채 집중했다. 또한 발리츠 굴도하 의 말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남작은 자신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 다. 그래서 남작은 진심 그 자체가 가지는 신뢰감이 묻어나고 있었 다. 발리츠는 쥐딤과 규리하, 발케네에서 일어난 일들의 용의 조종 하에 사람들이 서로 다툰 일로 만들었다. 머리로 피가 솟구치는 일이었다. 발리츠는 하늘누리가 사라졌던 시기를 사람에 의한 사람의 지배가 되 돌아올 수 있었던 시대로 묘사했고 황권에 눈이 멀어 이전투구하느라 용이 되돌아올 시간을 벌어준 자들을 사람에 대한 범죄자로 고발했 다. 규리하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비셀스 규리하와 권력자 들에게 이용되었을지도 모르는 제국군을 수습한 엘시 에더리는 당연 히 그런 고발에서 제외되었다. 제국과 인류가 처한 무시무시한 위기 에 대한 발리츠의 묘사는 사람들을 숨막히게 만들었다. 심지어 발리 츠가 말한 것 중에는 원시제가 용에 의해 살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심장을 적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왜 아라짓 제국의 황제가 그토록 젊은 나이에 죽었단 말인 가? 우리는 인간을 지배하기로 작정한 용이 황제를 암살했을 경우에 대해 의심해보아야 한다. 발리츠 스스로도 그 의심에 대해서는 물음 표를 붙이긴 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용을 만악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특별히 치천제의 죄가 경감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발리츠는 용의 손아귀에 거의 들어갔던 인류를 구원한 자로 비셀스 규리하를 소개했다. "변경백께서는 용의 정체를 밝혀내셨을뿐만 아니라 그 용을 처단하 는 중책도 스스로 걸머지려 하시는 거요!" 발리츠는 비셀스의 규리하 잔류를 원하는 자들에게 직격을 날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아버지와 딸의 권력 다툼을 말할 상태가 아니게 되었기에 직격을 날린 거나 다름없었다. 비셀스 규리하가 용을 추적 하여 거꾸러뜨리는 것만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임을 사람들이 공감하 게 되었을 때 남작은 몸을 돌려 야리키에게 속삭였다. "저를 내려주십시오." 아래로 내려온 남작은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라 변경백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혹한 정우가 말할 틈도 없이 발리츠가 속삭 였다. "각하의 결단에 찬성합니다. 규리하는 아버지에게 돌려주시고 각하 께서는 황제가 되십시오." 정우는 입을 벌린 채 남작을 바라보았다. 남작이 빠르게 말했다. "제 말이 탐욕스럽게 들렸습니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떳떳합니다. 목숨을 걸고 괴수를 물리쳐 세상을 구한 자가 세상을 다 스리는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된 일인 것 같지는 않군요. 그리고 각하 의 목숨만 걸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남작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규리하공 비셀스 규리하여! 가시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자고 말하겠습니다! 저와 제 창이 각하를 모실 겁니다!" 정우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극도로 흥분한 사람들이 용을 처 단하기 위한 변경백의 추적에 동참하겠다고 우레 같은 소리로 외쳐대 었기 때문이다. 발리츠 굴도하가 설득한 것은 규리하성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정우가 한 손에는 인조새가 든 새장을 들고 허리춤에는 대금을 꽂은 채 많은 무리와 함께 소리 위에 나타났을 때 시카트 규리하는 그것을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격퇴된 지금 비셀스의 규리하 변경백위 를 위협할 수 있는 자들은 소리 위에 있는 자들이고 따라서 그녀가 즉각 아버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은 상당히 합리적인 의심이 었다. 하지만 정우의 뒤를 따라 소리 위에 오르는 자들을 본 시카트 는 정우의 무장만 특이한 것이 아니라 그 공격군의 구성 또한 기괴하 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와 함께 소리 위로 올라온 자들은 탈해 머리돌과 야리키, 아트 밀, 파라말, 그리고 발리츠 굴도하와 아이넬 굴도하를 제외하면 전부 제국군이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와 그의 몸종, 그리고 그를 따르고 있는 레콘들과 제국군 31중대원들이 나머지 구성원이었다. 시카트는 정우가 황제를 쫓아낸 직후에 제국군을 이끌고 아버지를 공격한다는 상황을 합리적으로 만들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 일을 맡을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아이저와 이이타, 그리고 다른 자들도 당 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발리츠가 상황을 설명했다. 발리츠의 설명은 아래쪽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소리 위쪽에서도 설득 력을 발휘했다. 사람들을 제멋대로 다루고 제국을 농단했던 용을 처 단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정우는 규리하를 아버지에게 돌려주고는 위험한 추적행을 떠나는 것이다.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대이 기에 그 위험은 나눌 수도 없는 것이며 그 때문에 정우는 함께 가겠 다는 규리하인들을 물리쳤다. 그녀의 곁에는 규리하와 특별한 관계가 없으며 그녀의 충실한 친구인 탈해와 야리키, 그리고 굴도하 남작부 부만이 있을 것이다. 아트밀과 파라말은 형이자 친구인 자의 보복을 위해 규리하공을 따르는 것이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와 제국군은? 그 들의 본분은 제국을 지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저 용은 이미 제국의 가장 큰 적이다. 그들이 변경백을 따르는 이유야 분명하지 않은가. 발리츠는 그 마지막 설명이 사실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엘시 에더리나 다른 누구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발리츠는 속으로 엘시를 인질, 혹은 호부로 여기고 있었다. 황제는 엘시 에더리가 있는 규리 하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우는 그 마지막 설명이 사실과 심 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정우가 규리하인들의 동행을 거절하면서 제 국군과 함께 올라온 것은, 그들이 하늘치를 뒤덮은 용과 싸울 수 있 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규리하성에 남게 된다면 꽤 불편하 고 어색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우는 지러쿼터 산맥 너 머에 도달한 다음 그들을 지상에 내려줄 작정이었다. 발리츠는 차분하게 말을 맺었다. "변경백께서는 자신을 따르던 자들에게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는다 는 조건으로 규리하를 돌려드리는 겁니다. 규리하는 이미 많은 상처 를 입었습니다. 봄은 무향인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와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아이저는 피로와 감정의 탁류 때문에 붉게 변한 눈으로 매제를 바라 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그랬군. 그 작은 몸을 보면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자네의 포부는 훨 씬 더 큰 것이었군. 자네는 매무자지만, 그 고명한 무예를 살 수 있 는 것은 최소한 황제가 될 만한 자여야 했던 거야." 발리츠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나와 황제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은 것은 내가 변경백에 불과하기 때문이었어. 자네가 판사이를 박차고 나온 것은 황제가 사라진 후의 일이었지. 자네는 비셀스에게 자네 운을 건 것이군." 아이넬 굴도하가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아이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과할 일은 없어. 판사이와 두 사람의 운명을 정정당당하게 걸고 서 임한 도박이었으니까. 게다가 부도덕하거나 꺼림칙한 속임수도 없 이 그 도박에 성공했군. 축하해." 발리츠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거나 아이저에게 걸지 않아서 미안하 다는 등의 말을 하려다가 포기했다. 그런 말이 어울리는 시점이 아니 다. 그래서 발리츠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규리하를 맡으시겠습니까?" 아이저는 발리츠나 아이넬이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 "이이타?" 이이타는 당혹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발리츠와 아이넬은 곧 아이저의 태도를 이해했다. 처음부터 명백한 사실이었다. 비셀스에게 서 규리하를 건네받는 사람은 그녀에 필적하는 능력을 가진 자, 즉 이이타여야 한다. 비셀스는 아버지가 아니라 이이타에게 규리하를 돌 려주는 것이다. 자신의 시선에도 아이저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이이타는 머뭇 거리다가 정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우는 그 손을 맞잡았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이타를 향해 정우가 웃으며 말했다. "좀 바빠서 결혼식엔 참석 못할지도 모르겠네. 급하면 누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해." 이이타의 곁에 서있던 소리 로베자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이이타는 괜스레 제국군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사람들이 꽤 많은데 식량 같은 것은 안보이는군. 누나가 가지고 있 는 것도 그 새장뿐이고. 추적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 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처리해놓고 올라온 거야." "그럼, 알았어. 몸조심해." 정우는 미소로 대답하고는 시카트 규리하에게 몸을 돌렸다. 시카트는 규리하가 마침내 올바른 주인을 되찾았다는 내용의 말을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정우는 그저 웃 기만 했다. 시카트는 다시 기세를 끌어모아서 정우가 황제를 추적하 는 것은 가문에 대한 배신의 죗값을 치르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말끝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시카트의 기세는 사라졌다. 시카트는 자 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자를 수가 없어 애먹는 사람처럼 보였다. 눈을 깜빡거리며 시카트를 보던 정우가 말했다. "거짓말." "……전에도 말했어. 누나. 거짓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거짓말은 지적하지 않는 거라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 시카트는 입을 닫았다. 정우는 마지막으로 아이저를 돌아보았다. 아 버지의 늙고 피로한 얼굴을 본 정우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올게요." 이이타에게도, 시카트에게도, 그리고 아이저에게도 정우는 용과 싸 우러 떠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지않아 돌아올 사람 처럼 이야기했다. 아이저는 그것이 자신감이 아니며 귀환의 의지는 더더욱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아이저는 곧 돌아올 사람에게 말하듯 말했다. "잘 다녀와라." 아이저 규리하 일행이 아래로 내려갔다. 말리를 삼켰던 밤은 서쪽 하늘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탈해의 칼이 그 이름을 빌린 별이 반짝였다. 그리고 소리 위에는 검은 레콘이 먼저 도달한 밤처럼 서있었다. 정우는 지멘과 아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말을 걸려면 고함을 질러야 될 거리에 서서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목소리가 퇴거를 종용해도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게 서있는 지 멘 때문에 그 곁에 있는 아실의 모습은 바위와 땅의 틈에서 자라난 가냘픈 잡초처럼 보였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정우가 발을 옮겼다. 제국군에 속한 자들은 제자리를 지켰고 그 외의 사람들은 정우를 따 라 움직였다. 지멘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 지 않았다. 정우는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야리키가 불편한 헛기침 을 했을 때 걸음을 멈췄다. 이야기하기 편한 거리는 아니었기에 정우 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길벗인가요?" 지멘은 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겁게 말했다. "이 하늘치가 황제에게 간다면, 우리도 함께 간다." "예. 황제에게 가요. 그런데 여기 있는 누구와 싸울 건가요?" "먼저 덤빈다면."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요. 편한 곳에 계세요. 소리가 동의하면 지금 출발할 거 예요." 정우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리의 등엔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 다. 정우는 그 어둠을 향해 말했다. "말리와 부딪쳐서 아플 텐데, 음. 움직여도 괜찮다면 동쪽으로 가줄 래?" 발리츠는 그것이 용을 잡고 세상을 구원할 자들의 적절한 출정식이 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출정식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 고 또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던 소리는 정우의 말에 즉각 반응 했다. 소리는 미끄러지듯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이 소리의 움직 임을 감추었기에 규리하성에 있는 자들은 그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 했다. 서쪽 방향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한 지러쿼터 산맥이 태양의 마지막 여정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유료도로당 잔하일 징수소에는 밤이 빨리 찾아오는 편이다. 원칙적으로 유료도로당 징수소는 밤낮없이 징수 업 무를 본다. 하지만 1월이라 해도 북부 지방인 잔하일의 밤날씨는 싸 늘한 편이었고 게다가 정세가 뒤숭숭했기 때문에 그 즈음 잔하일에는 야간 여행자가 없었다. 그 때문에 징수소의 당원들은 어둠이 찾아오 면 휴식 시간이 찾아온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시오크 지울비는 그들이 특별히 피로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서 시오크는 문을 벌컥 열지도 않았고 정신없이 달리지도 않았고 수색조를 편성하라고 외치 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들고 있던 촛대를 차분하게 서랍장 위에 놓 고는 지키멜의 빈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침대 위에는 곱게 접힌 도깨비지가 놓여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시 오크는 그 종이를 집어들어 펼쳤다. 쓰여있는 글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짧았다. '잘 있어.' 그 아래로 공백이 있었고 아래쪽엔 지키멜 퍼스의 서명이 있었다. 시오크는 짧은 인삿말과 서명 사이의 공백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 었다. 작별의 입맞춤일 것이다. 그는 종이를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 다. 시오크는 그것의 냄새를 맡았다. 별다른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시오크는 종이를 쥔 두 손을 무릎에 떨어뜨렸다. 웃음이나 울음, 그 어느 쪽도 나오지 않았다. 속 시원히 어떤 감정 표현을 할 수 있기를 애타게 바랐지만 시오크는 도대체 어떻게 반응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화를 내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지만 시 오크는 무엇에 대해 화를 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럭저럭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초조감과 무력감뿐이었다. 추적해야 하나? 시오크는 지키멜이 어디로 가고 있을지 눈으로 본 것처럼 알고 있었다. 지키멜은 비나간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그 외 의 다른 장소를 생각할 수가 없다. 그녀는 비나간의 왕이니까. 따라 서 추적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키멜은 누군가에게 붙잡혀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떠났다. 추적에 나서서 그녀를 붙잡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나에게 어떤 쓸모가 있지 않을까? 내 연인이니까……' 시오크는 그 생각에 역겨움을 느꼈다. 그에게 지키멜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다. 시오크는 지 키멜을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지키멜 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못 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리고 시오크는 지키멜 또한 자신을 사랑 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오크는 지키멜이 자신의 연 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연인은 함께 사랑을 만들어내는 두 사람 을 의미한다.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두 사람이 있을 때만 만들 수 있는 특정한 사랑이 있다. 그 사랑에 대해서는 입맞춤이 아마도 가장 간편한 비유가 될 것이다. 입맞춤은 절대로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시 오크는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과거에 지키멜과 그가 이루곤 했던 사랑이었으니까. 서로에 대한 두 사람의 사랑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지만 이 제 두 사람은 그런 사랑을 만들 수가 없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사랑 속에 함께 있지는 않다는 것이군.' 시오크는 몸을 뒤로 눕혔다. 침대에 가로누운 시오크는 촛불빛으로 검붉게 변한 천장을 응시했다. 그가 왕이 아니고 그녀가 왕이 아닐 때, 그들은 한 쌍의 잘 어울리 는 악당 연인이었다. 세상엔 그들이 뺏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고 그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계책을 짜며 그들은 웃고 울고 서로를 열렬히 끌어안았다. 이제 그녀는 작별의 말 한 마디 할 수 없어서 시시한 편지를 남겨두 고 떠났고 빈 침대에 누운 그는 그녀를 따라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시오크는 자신의 앞날을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잔하일에 머물 이 유가 없으니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곳에 서 예정에 따라 즉위한 다음 국경선도 없는 나라를 다스리다가 함께 할 짝도 없이 외로이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중 그가 기뻐하거나 만족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시오크는 불빛에 물든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몸을 뒤집어 침대에 엎드렸다. 시오크는 알지 못했지만 그 순간 잔하일의 하늘에는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기괴한 물체가 지나가고 있었다. 유료도로당원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각 잔하일의 다른 시민들도 일찌 감치 집안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거나 혹은 이른 잠자리에 들고 있 었다. 그 때문에 하늘을 보는 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잔하 일의 상공을 지나는 순간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잔하 일에 살지만 사람은 아닌 것들이 그것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다. 개들은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짖거나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으로 파 고들어 낑얼거렸다. 그 중에는 집안으로 뛰어들기 위해 문을 긁어대 는 것들도 있었다. 무시무시한 구애의 노래를 부를 때도 발소리는 내 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고양이들은 자신들의 명성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지붕 위를 요란하게 뛰어다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자들을 놀라 게 했다. 그런 고양이들의 위쪽에서는 이미 둥지로 찾아들어 잠들었 어야 하는 새들이 박쥐들과 함께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사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야생동물인 쥐들이었다. 밝은 곳을 피하는 천성은 어디다 팽개쳤는지 쥐들은 불 빛이 훤한 집안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쥐들은 서까래 위에서 떨어 지고 기둥을 타고 미끄러지고 사람들이 잔뜩 있는 방안을 가로질러 달렸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란 사람들 가운데 그럭저럭 상황을 살 필 여유를 가진 자들은 쥐들이 낮은 곳으로 도망치려 애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진이나 화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잔 하일에서는 낯선 재난이었다. 그래서 잔하일 사람들은 화재를 떠올렸 다. 그러나 황급히 바깥으로 나와 주위를 살핀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화재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들 중에는 하늘을 올려다본 자도 있었 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잔하일의 동물들을 기겁하게 한 그 기괴한 물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잔하일의 상공을 지나치는 그것은 지나치게 컸고, 어떤 물체라기보다는 자연 경관에 가까웠다. 그런 물체는 시선 을 집중할 것을 찾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차 라리 잔하일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잔하일의 상공을 본 사람 은 밤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잔하 일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유 모를 불안 감과 두려움만을 느꼈다. 시오크 지울비는 그런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외부의 자극을 느끼기엔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쯤은 시오크에게도 들렸지만 시오크는 그 소 리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지키멜에 대한 생기 없는 생 각들의 단편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퇴폐적인 전망의 조각들과 함 께 침대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잔하일을 뒤덮은 불길함을 느끼 지 못했기에 시오크는 그것이 사라졌을 때도 사라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잔하일 사람들이 해방감과 안도감 비슷한 것을 느꼈을 때 시 오크는 잿빛 감정을 느리게 호흡했다. 누가 그의 어깨를 황급히 흔들었다. 시오크는 움찔하며 일어났다.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당원이 악 을 쓸 듯한 얼굴로 속삭였다. "당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왜?" "세상에, 당주님!" 당원은 비난과 공포가 뒤범벅된 얼굴로 시오크의 위아래를 살폈다. 시오크가 재차 질문하자 당원은 숨막힌 어조로 말했다. "문을 두드려도, 들어와서 당주님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깊이 주무셨던 겁니까?" 시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게 설명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를 찾아온 거지?" "당주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시오크는 지키멜이 되돌아왔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서 흥 분을 느껴야겠지만 시오크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시오크의 감정은 돌아와도 그만, 그렇잖아도 그만이라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 래서 시오크는 당원에겐 꽤 침착한 태도로 보였지만 사실은 맥빠진 태도로 말했다. "누군데?" "아버님이십니다." 시오크는 당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를 밀어젖히고 밖으 로 뛰쳐나갔다. 징수소 안을 성난 황소처럼 달리던 시오크를 향해 당원들은 외침이 나 손짓으로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징수소 건물 바깥에 도착한 시오 크는 무장한 당원들과 대치하고 있는 기수를 발견하고서는 멈춰섰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기수를 바라보았다. 당원들 중 몇 명이 횃불을 들고 있었기에 기수의 모습은 똑똑히 보 였다. 잠깐이지만 시오크는 자신이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기수의 모습은 지러쿼터 산맥을 넘어 잔하일 징수 소에 도달했을 때의 지키멜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당황을 억누른 시 오크는 그 기수가 지키멜이 겪어야 했던 것과 같은 고초를 겪은 게라 임 지울비임을 확인했다. "아버지?" 게라임은 갈가리 찢기고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서 구깃구깃해진 망 토로 몸을 감싼 채 말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드러난 얼굴이나 머리 카락 또한 피난민에게 동정심을 살 만한 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움푹 들어간 눈은 침착함을 담은 채 아들을 마주했다. "시오크. 여기 있다고 하더니 사실이구나." "어떻게…… 아버님, 어떻게?" 게라임은 짤막짤막한 어조로 말리가 엘시 에더리와 함께 규리하성을 공격하러 떠날 때 자신을 내려주었다고 설명했다. "황제는 네가 지금쯤 유료도로당사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을 거라 생 각하고는 나를 놔줬다.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했고." 시오크는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아버지의 말을 반복했다. "마찬가지로 생각하셨다고요?" "그래. 그래서 네가 어쩌나 보며 유람이나 다닐까 생각하고 있었 다." "유람이오?" "명목상으론 그렇고 실질적으로는 반역 준비지. 왕을 쫓아내고 나라 를 뺏는 건 반역이라고 불러야할 테니까." "반역이오?" "물론 내 입장에선 그건 반역이 아니지만." "반역이 아니라고요?" "……머리에 구멍이 났으면 제때제때 기우고 다녀라. 골 흘리지 말 고." 시오크는 입만 뻐끔거렸다. 퉁명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던 게 라임은 느슨하게 쥐고 있던 말고삐를 당겨쥐었다. "그럼 나 간다." 머리 수선법에 대한 조언을 다시 들을 것 같았지만 시오크는 아버지 의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가신다고요? 어디로요?" "어디긴. 유료도로당사지." 게라임의 말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시오크가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 보는 가운데 게라임은 말을 가속시켰다. 곧 말은 빠른 속력으로 사라 졌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던 시오크는 갑작스레 자신에 대한 당원들의 불만을 떠올렸다. 당원들은 시오크 지울비가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불만을 토 로하는 부분은 시오크가 유료도로당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었 다. 유료도로당은 시구리아트 산맥을 넘는 유료도로 하나로 시작하여 지금의 규모로 자라났다. 따라서 시구리아트 유료도로당사는 그곳에 당사가 있다는 것 이상으로 유료도로당에겐 중요한 장소다. 시구리아 트의 유료도로당사에 들어가는 것은 실용적인 의미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오크 지울비를 탐탁찮아 하 는 당내 불만 세력에 대해 상징적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일이다. 간단 히 말해 왕이든 당주든 간에 유료도로당을 지배하려면 유료도로당사 에 있어야 한다. 생각이 그 지점에 이르렀을 때 시오크는 비명을 빽 질렀다. "아버지!" 게라임은 이미 말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기에 시오크의 외침은 당원들만 놀라게 했다.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 는 당원들에게 시오크는 황급히 말했다. "말! 말을 가져와!" 당원들은 황망히 떠났다. 그리고 떠나지 않은 자들은 무슨 일이 일 어났는지 깨달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경주가 시작된 것이다. 먼저 당 사에 도달하는 자가 유료도로당을 지배하게 된다. 그들은 그 사실에 대해 시오크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다. '당사로 가실 겁니까?' 하지만 시오크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이미 달려간 후였다.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문을 열려 했을 때 시오크는 자신의 손에 무 엇인가가 쥐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떨결에 그것을 집어던질 뻔했던 시오크는 그것이 지키멜의 편지라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손 을 멈췄다. 그는 손으로 구겨진 편지를 펴며 발로 문을 걷어찼다. 방 안에 우뚝 선 시오크는 몇 글자 적혀 있지 않은 편지를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시오크는 그것을 얼굴로 가져왔다. 그리고 인삿말과 서명 사이의 공 백에 입을 맞췄다. '작별이 아니야.' 시오크는 입에서 편지를 떼고는 그것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 서 말이 흘러나왔다. "작별이 아니야." 잠시 후 시오크는 황급히 챙겨입은 티가 나는 옷차림으로 징수소 건 물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힘센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시오크는 재빨리 말 위에 올랐다.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당원들 중 인내심 이 조금 부족했던 이가 외쳤다. "당주님! 당사로 가십니까?" 시오크의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란 말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시오크 는 말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말했다. "아냐." 당원들은 뜻하지 않은 대답에 놀라 입을 벌렸다. 질문을 꺼냈던 당 원이 다시 기대감을 되살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사에 가지 않아. 나는 비나간으로 간다." "예? 하, 하지만 폐하께서 당주님에게 왕위에 오르라고……" 말이 시오크의 뜻에 순응하게 되었다. 시오크는 말고삐를 바싹 당겨 쥐고는 질문을 한 당원을 돌아보았다. "나는 지키멜에게 간다! 이랴!" 말이 재빨리 뛰쳐나갔다. 당원들은 질주에 휘말릴까봐 황급히 몸을 뺐다. 그 사이에 말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원들은 어이 없는 얼 굴로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그 밤 잔하일 징수소의 당원들에게 일어난 일은 최소한 몇 년, 그리 고 그들 중 몇 명이 되풀이하길 좋아하는 노인이 된다면 몇십 년 동 안 이야기될 만한 것이었다. 그 밤으로 한정지어 본다면 당원들은 그 동안 좀 느슨해졌던 야간 업무 태도를 일신하기라도 한 것처럼 새벽 이 가까워질 때까지 자신들이 목격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 다. 징수소장은 가까운 징수소로 이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명의 말 잘 타는 당원들이 출발하느라 다시 소란이 일어났고 결국 당원들은 잠이 다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 새벽 무렵 잔하일 징수소 를 통과한 여행자가 있었다면 여행자는 당원들의 기묘하게 지친 얼굴 에 놀랐을 것이다. 사실 잔하일 징수소를 지나간 여행자가 있긴 했다. 하지만 유로도로 위를 걸어간 것은 아니었다. 잔하일 징수소의 당원들 전부가 예기치 않은 숙직으로 피곤해하고 있을 때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친 여행자 가 있었다. 그것은 잔하일에 살지만 사람이 아닌 것들만이 그 존재를 깨달았던 먼젓번의 물체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통과에서는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개도, 고양이도, 쥐도 날뛰지 않았다. 징수소의 당원들과 새벽 일찍 일어난 잔하일 시민들은 그것 을 보기까지 했지만 그들도 놀라진 않았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늘치 였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그리고 잠시 멈춰서서 바 라볼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놀라자빠질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하늘치 위쪽을 본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잔하일의 그 누구도 하늘치를 관통하여 그 위를 볼 수는 없었다. 그 하늘치는 하 늘치가 받을 만한 관심만 받으며 조용히 잔하일의 하늘을 지나쳤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40. 나는 것과 노는 것 (3) | 2004·12·14 08:19 | HIT : 267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40-3 관련자료:없음 [49432]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2-14 06:46 조회:33 피를 마시는 새 40. 나는 것과 노는 것 - 3 하늘치가 멈춰선 것은 잔하일과 세퀴라도 중간의 이름없는 분지였 다. 엘시 에더리는 분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우마차, 그리고 짐 더미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소리를 하강시켜서 그 배가 땅바닥에 닿 을까 말까한 높이에 멈춰세웠다. 소리가 움직임을 멈추자 아래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지게를 이용하여 하늘치 위로 물건을 나르기 시작 했다. 대장군의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쵸지가 부리를 탁 부딪치고는 말했다. "좀 도와줄까?"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쵸지와 론솔피, 주테카, 그리고 그을린발 이 아래로 내려갔다. 조금 후 아트밀과 지멘도 그들에게 합류했다. 여섯 명의 레콘들이 나서자 물건을 실어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시 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31중대에게 그 탑재 작업을 도우라고 명령하고 는 엘시에게 다가왔다. 엘시의 곁에 있던 이레가 상장군에게 목례하며 아는 척했다. 엘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시허릭은 투구를 벗어 이마를 닦고는 씩 씩한 동작으로 투구를 썼다. "자유무역당이 확실히 도와주는군요. 이런 식이라면 보급에 문제될 것은 없을 겁니다. 전세계에 자유무역당 사무소가 있으니까요. 세상 끝까지라도 용을 추적할 수 있을 겁니다." 시허릭의 장쾌한 전망을 들으며 엘시는 비좁은 바위틈에 끼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옴짝달싹하려 해도 팔다리가 몸에 달라붙어 손 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그런 느낌이었다. 엘시는 입안에 있기에 마 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혀로 어떤 말을 굴려보았다. '나는 황제의 대장군이다.' "힘든 싸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하늘치 위에 뛰어올라 불을 지른다 면 그것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겁니다. 어쨌든 그건 나무처럼 보이니까 요. 또 모습을 바꿀 가능성이 염려되긴 하지만." '나는 황제의……' 시허릭은 조금 더 엘시에게 접근하고는 은밀한 표정으로 말했다. "굴도하 남작은 규리하공 비셀스를 부각시키려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상 이 하늘치를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규리하공이고 자유무역당 이 전력으로 지원하는 것 또한 규리하공이니 그녀가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남작은, 뭐, 어떤 방해가 있지 않다면 용을 물리친 업 적을 그녀에게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잖습니까?" '나는……' 엘시의 무반응에 시허릭은 실망감을 조금 내비쳤다. 시허릭은 불분 명한 말을 웅얼거리다가 다시 자신감 있게 말했다. "하지만, 규리하공도 말했듯이 그 용이 규리하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대장군님 덕분이지요.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 무리를 지키 고 있는 사람은 대장군님이신 겁니다." 엘시는 암시와 비유로 대화를 나눌 기력이 없었다. "내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 이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상장군은 그런 이레 를 흘깃 바라보고는 엘시에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으시다면,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작과 다릅니다. 남작이 바라는 것은 처조카를 제위에 올려 판 사이 공작이나 그 이상의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야심가이긴 하지만 그 손놀림이 깨끗하고,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공사는 구분해야 합니다. 경이적이긴 하지만 통치력이라 할 수는 없는 것들 만 가지고 있는 규리하공에게 어울리는 것은 제위가 아니라 황제의 배필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황제를 보좌할 때 규리하공의 재능은 가장 잘 쓰이는 것이 될 겁니다." "그러면 제위에 어울리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제국을 통치하는 힘은 군대입니다. 군대는 대장군님을 지지할 겁니 다. 대장군님이 제위에 오르셔야만 불필요한 자질 시비나 소모적인 분쟁을 피할 수 있습니다. 굴도하 남작은 이성적인 사람이니 황비 자 리에도 만족할 겁니다. 규리하공과 굴도하 남작에게 그것을 명확히 해두셔야 합니다." 거절을 말하고픈 욕구가 너무 컸지만 엘시는 즉답을 피하기로 했다. '엘시가 황위를 고사한다면 그 다음으로 적격인 사람은 자기 자신'이 라는 판단을 시허릭에게 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차 기 황제가 되건 제국군은 안정적으로 차기 황제에게 넘겨져야 하고 그러려면 엘시는 제국군을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진부한 대답밖에 할 수 없다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며 엘시는 그 제안에 대해 생각해보 긴 하겠지만 당장은 우리 앞에 있을 고난에 더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상장군은 썩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더 다그치지는 않은 채 떠났다. 이레는 엘시의 건조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이나 콧등, 이마는 물론이거니와 그 눈도 건조했다. 모래와 흙먼지로 만들어져 소나기가 쏟아지면 그대로 무너져내릴 것처럼 보이는 주인을 보며 이레는 가슴 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이레의 눈빛을 깨달은 엘시는 몸종을 돌아보았다. 그는 차가운 목소 리로 말했다. "내가 황제가 된다면 넌 시종장이 되겠구나. 백작위 쯤은 가질 수 있겠지." 이레 달비는 상심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 다. "너도 떡고물을 바라냐고 묻지 그러십니까?" 엘시의 건조한 얼굴에 약간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레는 머리를 조아 려 엘시의 발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황제 가주님보다는 행복한 가주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미안하다. 이레."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가주님." "내 불만을 제멋대로 네게 투영하여 스스로를 꾸짖는 대신 너를 꾸 짖었으니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너의 주인이면서도 네 소망을 이루 어줄 자신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가주…… 주인님?" 엘시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다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뭔지 모르겠다." 이레는 얼어붙은 얼굴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헨로 수교위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면 그냥 사는 척해도 상관 없다고 말하더군. 그건 큰 문제가 안 된다면서. 그래. 그런 대답이 속편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이레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허공을 바라보던 엘 시는 조금 후 눈동자를 옮겼다. 그가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된 이레는 엘시의 시선을 좇았다. 손에 새장을 든 정우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다가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우는 발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스르륵 미끄 러져 왔다. 이레는 그녀 곁에 탈해나 발리츠 남작 등이 없는 것을 보 고는 정우가 엘시와 단둘이 대화할 작정인가 여기고는 물러나려 했 다. 하지만 엘시의 앞에 선 정우는 새장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두 사 람 모두에게 인사했다. "좋은 꿈 꾸셨어요, 대장군님? 이레?" 엘시와 이레는 정우에게 목례했다. 정우는 아래쪽에서 올라온 짐들 이 쌓이는 곳을 보면서 말했다. "자유무역당에서는 음식과 물 외에 담요나 화로, 조리기구 같은 것 도 많이 올려보냈어요. 이 위에서 취사를 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 만." "도시를 얹어두어도 끄떡없는 하늘치니 화로의 온도 정도는 문제가 안 될 겁니다." "그렇겠네요. 예. 알았어요. 그런데,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제국군과 함께 땅으로 내려가세요. 대장군님." 이레는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엘시는 정우를 가만히 바라보며 설명 을 기다렸다. 정우는 규리하에 남아있으면 불편할까봐 그들을 지러쿼 터 산맥 동쪽으로 데려왔다는 것을 간단히 설명했다. "저는 폐하께 받을 것이 있어요. 아트밀도 그렇고 지멘도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대장군님께서는 꼭 가셔야할 이유가 없어요. 용과 싸 우겠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그리고 고모부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저는 솔직히 왜 여러분이 용과 싸워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모습이 바 뀌긴 했지만 여전히 황제 폐하시잖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엘시의 대답은 이레를 질겁하게 했다. 하지만 정우는 눈을 빛내며 엘시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거죠?" "그렇습니다. 이상합니다." 정우는 살풋 웃었다. "제가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란 킴이라 잘못 이해한 건가 생각했어 요. 음. 꼭 싸워야 할 이유도 없다면, 위험하니까 같이 갈 필요는 없 을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대장군님과 제국군 병사들은 내려가는 것이 좋겠어요." "폐하께 뭘 받을 생각이십니까?" 정우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죄요." "죄?" "예. 폐하는 신이 되셔서 우리가 서로에게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 하시죠. 저는 그것을 받아야겠어요." "왜 죄를 원하십니까?" "글쎄요. 죄가 아닌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죄예요." 정우는 새장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엘시는 그녀가 설명할 때까지 말 없이 기다렸다. 정우가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시작했다. "즈믄누리에서 나와서 제가 본 것은 서로를 끝없이 공격하는 사람들 이었어요. 그건 이상한 일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일 대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거예요." 이레는 꽤나 소박한 도덕이라고 생각했다. 이레는 알지 못했지만 그 는 그의 종형과 똑같은 실수를 마음 속으로 범하고 있었다. "대장군님은 잘 아시겠지만 전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 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시간의 문 제에요.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아픈 건 싫으니까 그 일을 방해할 거에요. 한 번밖에 못 사는 생에서 뭔가를 하려면 최소한 방해는 받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러지 를 않더라고요." 엘시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가치 있는 것들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미 선점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니 그것을 가지려면 다른 사람을 공격해야 합니다." 이레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이레는 다른 사람에게 뺏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가치 있는 것들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 우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맞아요. 대장군님. 제가 알아야 했던 것은 그것이었어요. 도깨비이 기 때문에, 아니,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란 킴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 을 알지 못했어요. 도깨비들도 죄를 짓겠지요. 하지만 전 도깨비가 아니기 때문에 도깨비식의 죄는 저지를 수 없어요. 킴으로서 살려면 제겐 킴의 죄가 필요해요.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하시지요." 엘시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정우의 머리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규리하공. 그러면 죄를 저질러서 무엇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어떤 가치를 발견하셨습니까?" "글쎄요. 그건 아직 찾지 못했는데요." "만약 그런 것을 끝내 찾지 못한다면? 그러면 죄도 필요없을 텐데 요." "그렇겠네요. 하지만 찾을 수도 있잖아요. 암담한 전망을 가질 필요 는 없겠지요." 엘시의 입술 사이에서 미약한 한숨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렇지요. 그건 정말 암담한 일이지요." 정우는 동그래진 눈으로 엘시의 딱딱하게 굳어있는 턱을 바라보았 다. "대장군님? 괜찮으세요?"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걱정이 된 정우가 그에게 다가가려 할 때 엘시가 말했다. "나와 제국군은 이곳에 계속 남겠습니다. 규리하성이 공격받지 않은 이유가 나때문이라면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규리하공의 안전에 도움 이 되겠지요. 그리고 제국군 병사들도 당분간 이곳에 있는 편이 좋습 니다." 엘시는 그 편이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을 안심시키게 될 거라고 덧붙 이지는 않았다. 정우는 엘시가 걱정된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이곳에 계셔야 할 이유가 없지만 계시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런데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염려 고맙습니다." 대화를 끝내자는 말이었다. 정우는 왼손으로 귓볼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정우는 허리를 숙여 다시 새장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엘시와 목례를 나누고는 몸을 돌려 스르륵 미끄러져갔다. 지멘은 묵직한 밀가루 푸대 몇 개를 짐더미 옆에 내려놓았다. 기다 리던 인간 병사들이 지멘이 내려놓은 것들을 가져가 정리했다. 그가 올라왔을 때 땅에는 짐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그래서 지멘은 내려 가지 않기로 했다. 그가 구태여 묻지는 않았지만 짐을 나르는 동안 사람들의 말을 들은 지멘은 그것들이 어떻게 준비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규리하성에 있 던 '당원'이 규리하공의 부탁을 받고 자유무역당에 소리의 보급망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보낸 것이다. 소리보다 먼저 소식이 도달한 것으 로 보아 비둘기 같은 것이 이용된 모양이다. 당원의 지시를 받은 자 유무역당은 괴물이 된 황제와 대적하기로 한 규리하공을 총력 지원하 기로 결정하고 이곳에 보급품을 쌓아두고 소리를 기다린 것이다. 자 유무역당의 목적이 발리츠 굴도하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짐 작하는 것은 지멘에게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물론 당주의 외손녀가 황위에 오를 경우 자유무역당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지 멘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지멘은 안정적인 보급을 받으며 황제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짐더미 근처에 내려놓았던 망치를 집어들었다. 몸을 가볍게 부풀려 짐을 나르는 동안 쌓인 먼지 들을 털어낸 지멘은 아실이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갔다. 달려가던 지멘은 아실 곁에 두 명의 레콘이 있는 것을 보고는 벼슬 을 꿈틀했다. 하지만 아실은 별다른 위협을 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두 레콘은 아실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외면한 채 바닥에 앉아있었다. 아실 또한 지멘의 배낭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두 레콘이 지멘이 다가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멘을 향해 다가왔다. 지멘은 그들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아실 근처 에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되도록 아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레콘을 만나야겠다고 판단한 지멘 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다가 아예 멈춰섰다. 그는 망치를 두 손으로 쥔 채 다가오는 레콘을 보았다. 그들은 론솔피와 그을린발이었다. 그을린발은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론솔피는 약간 성급하달 정도의 걸 음으로 다가왔다. 지멘 앞에 도달한 론솔피는 밑도 끝도 없이 외쳤 다. "난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더 이상 못 견디겠어!" 지멘은 고개를 갸웃한 채 론솔피를 바라보았다. 론솔피는 깃털을 부 풀렸다 움츠렸다를 반복하고 그 부리를 여기저기로 돌리고 있어 상당 히 불안해 보였다. 그리고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그을린발은 자 신이 기필코 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라 믿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멘은 아실을 흘깃 바라보고는 다시 론솔피를 노려보았다. 론솔피가 집어던지듯 말했다. "네가 길잡이야." 그리고 론솔피는 지멘의 반응도 확인하지 않은 채 그을린발을 돌아 보았다. "네가 대적자고." 론솔피는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두 사람의 경악을 기대했다. 하지 만 놀랍지 않느냐는 얼굴로 바라보는 론솔피에게 지멘은 무관심을, 그리고 그을린발은 슬픔만을 돌려보냈다. 론솔피는 곧 흥분해버렸다. "네가 길잡이고 네가 대적자란 말이야. 아직 요술쟁이가 없긴 하지 만, 어쨌든 그래." 지멘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지멘이다." 론솔피의 뒤편에서 그을린발은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리고 나는 히 베리야.'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론솔피가 폭주해버릴 것을 알기 때문 이다. 그가 보기에 그 순간은 자신이 이곳까지 와야 했던 이유가 마 침내 밝혀지는 순간이었고, 그을린발은 론솔피를 놀리는 것보다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멘을 바라보던 론솔피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그래. 넌 지멘이야. 그리고 길잡이지. 이쪽에 있는 친구는 히베리 지만 동시에 대적자야. 요술쟁이만 찾으면 셋이 돼. 그러면 너희 셋 은 레콘이 사람의 신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어. 그 이 야기를 하러 온 거야. 내 말 잘 들어. 일단 사람의 신에 대해 이야기 하자. 너희들도 봤지? 황제 말이야. 그건 사람의 신이야." 그을린발과 지멘은 그제서야 조금 관심 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을린 발의 경우엔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에 놀랐고 지멘은 제이어에게 들었 던 이야기가 론솔피의 부리에서 나오는 것에 놀랐다. 두 사람의 관심 을 느낀 론솔피는 도끼창을 쥐었다 폈다 하며 숨막히도록 말했다. "원시제가 용근으로 그걸 만들었어. 그 신은 네 종족을 모두 다스릴 거야. 레콘의 신, 도깨비의 신, 나가의 신, 인간의 신은 있지만 사람 의 신은 없잖아? 원시제가 만든 것은 그것이지. 그 신은 앞으로 일만 육천 년 동안 사람들을 다스릴 거야." 당황해하는 그을린발에게 론솔피는 사모 페이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자, 그 신이 나타났어. 도깨비나 인간, 나가들은 자기네들이 그 신 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겠지. 그 자들은 합의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 레콘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따로따로 다니잖아? 사실 이 위에 여섯 명이나 되는 레콘이 모여있다 는 것은 꽤 신기한 일이라고. 그렇지? 이런,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 는군. 어쨌거나 우리는 레콘이 사람의 신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할 대 행자들을 모아야 돼. 하나를 상대하려면 셋이 있어야 되니까 세 명의 레콘이 필요해. 길잡이, 대적자, 요술쟁이 말이야." 음미할 시간이 꽤 필요한 이야기였고 론솔피는 능숙한 이야깃꾼이라 할 수 없었기에 그을린발의 질문은 조금 후에 나왔다. "그건 네 생각이야?" "뭐? 어, 아냐. 내가 말 안했나? 이런. 안했군! 이건 대호왕의 생각 이야. 난 대호왕의 사자지." "대호왕이라고?" "그래. 대호왕은 사람의 신이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레콘들이 사람의 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당황할 것을 걱정했어. 그래서 대호왕은 레콘들을 대표할 세 사람을 찾아내기로 결심했어. 분쟁으로 레콘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대호왕은 시모그라쥬공 과 연합해서 전쟁을 벌인 거야. 그리고 대호왕은 그을린발 너를 찾아 내었지. 생각해봐. 시모그라쥬공이 그 난리를 치지 않았다면 넌 켄테 롭 코끼리 똥이나 밟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흐으음. 계속해봐." "대호왕은 요술쟁이를 찾아내지 못했어. 그래서 나한테 그 일을 부 탁하고 떠난 거야. 젠장. 우스운 일이지.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런 일 을 맡긴 거야? 난 어쩌면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지도 모른다고. 그래. 식상한 부분은 건너뛰고." "뭐? 어, 그래. 알았어. 어쨌거나 난 대호왕의 부탁을 받았으니까 요술쟁이를 찾아야 해. 하지만 난 도대체 누가 요술쟁이인지 모르겠 어. 주테카일 것 같다고 생각되지만 확신이 서지 않아. 그래서 너희 들에게 말하고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야기하는 거 야." "그런데 내가 왜 대적자야?" "젠장, 그걸 알면 누가 요술쟁이인지도 단박에 알았을걸? 지멘이 왜 길잡이인지, 그을린발 네가 왜 대적자인지는 나도 모르겠어. 대호왕 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하지마 아마 네가 거 치적거리는 것들 치우는 능력이 탁월하니까 대적자인 모양이야. 지멘 은, 어, 이 세상의 레콘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황제에게 도달하려고 애썼던 것은 지멘이잖아." "말 되는 것 같네." "그렇지? 자, 좀 생각해봐. 누가 요술쟁이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지만, 지멘이 처음으로 부리를 열었다. "늙은 나가의 헛소리야." 론솔피는 자신과 같은 깃털 빛깔을 가진 레콘을 물끄러미 노려보았 다. 지멘은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었다. 다음 순간 론솔피는 도끼창을 위로 높이 들어올렸고 지멘은 두 손으 로 쥔 망치를 허리 뒤로 보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그렇게 움직 일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동작을 멈출 생각도 없었지만, 그들은 동작을 멈춰야 했다.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었던 그을린발이 두 사람 사이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을린 발을 존중해서라기보다는 그를 잘못 공격할 경우 무차별학살이 작동 할 것을 염려한 두 레콘은 그을린발의 제지를 받아들였다. 그 모든 동작이 완료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론솔피가 도끼창을 높이 들어올린 채 말했다. "부리 조심해라. 확 뽑아버리기 전에." 지멘 역시 언제라도 망치를 휘두를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한 채 말했 다. "너야말로 아무 말이나 옮기는 그 부리 조심해." "그을린발. 비켜." 두 사람 사이에 선 그을린발은 뒷짐을 진 채 허공을 조용히 바라보 고 있었다. 지멘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키탈저 사냥꾼의 저주잖아." "뭐라고?" "세 명을 모아야 되는 이유가 뭐야? 레콘들이 합의할 수 없기 때문 이라고 했지. 그런데 레콘들이 합의할 수 없다면 레콘들은 그 세 명 의 결정에도 동의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러면 셋을 모을 필요가 없 지. 앞뒤가 안 맞아." "이런 멍청이. 그 셋은 특별해. 하나를 상대하는 셋이니까. 너 따위 가 대호왕의 생각을 가리켜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자기 깃털 로 불쏘시개 삼는 꼴이지." "넌 길잡이의 말을 무시하는군." 지멘의 지적은 론솔피를 조금도 위축시키지 않았다. 론솔피는 기세 좋게 대꾸했다. "하! 아직은 셋이 아니거든. 그러니 무시할 수 있어. 나를 납득시키 고 싶으면 셋이 된 다음에 말하라고." 지멘은 부리를 탁 부딪치고는 망치를 몸 앞쪽으로 가져왔다. 망치를 어깨에 걸친 지멘은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친 다음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난 관심 없으니까. 다른 길잡이 찾아봐." 지멘이 몸을 돌렸다. 론솔피는 도끼창을 비틀어쥐며 말했다. "다른 길잡이는 없어, 이 바보 녀석아. 대호왕이 너를 지명했어. 네 가 길잡이야." 지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론솔피는 홧김에 도끼창으로 바닥을 내리찍으려 했다. 그을린발이 짤막하게 말 했다. "하늘치다." 론솔피는 수염볏을 부르르 떨다가 바닥 대신 자신의 이마를 창자루 로 후려쳤다. 어지러움을 느낀 론솔피는 비틀거리다가 창자루로 바닥 을 짚고 섰다. 그는 이마를 짚은 채 그을린발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쩔 거냐?" 그을린발은 손가락으로 수염볏을 슬슬 긁적거렸다. "좀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서 실망했다." "엉터리라는 거냐!" "깃털 눕혀라. 그렇게는 말 안했다." 론솔피는 그러면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따져물었다. 그을린발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혼잣말처럼 말했다. "뭐, 덕분에 내가 코끼리들과 조용히 살 수 없게 된 것이 정확히 누 구 때문인지는 알게 되었군. 대호왕이었다는 거지." 론솔피는 눈꺼풀을 껌뻑껌뻑 하다가 갑자기 벼슬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뒤로 두 걸음 미끄러지며 도끼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자기 일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시모그라쥬군을 전멸시켜버린 레콘을 겨냥했다. 그을린발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뭐냐?" "대호왕을 죽일 거냐?" "뭣하러? 너한테 세 레콘을 찾는 일을 맡겼다는 건 대호왕이 이젠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뜻 아냐? 그럼 대호왕이 나를 방해할 일도 없 다는 거잖아. 죽일 필요가 없지." 론솔피는 안도하며 도끼창을 내렸다. 그러나 그 동작을 채 마무리하 지도 못한 채 론솔피는 황급히 도끼창을 들어올려 다시 그을린발을 겨냥했다. "나를 죽일 거냐?" 도끼창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을린발은 씩 웃 었다. "내가 시모그라쥬군을 치운 것 때문에 그러나 보군." "방해된다고 없앴잖아." "앞으로도 계속 방해될 것이 분명해서 처리한 거야. 그러니까 세 번 째와 첫 번째를 내포하는 두 번째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두 번 한 놈은 세 번, 네 번도 한단 말이야. 베로시는 나를 두 번 방해했어. 난 두 번 방해받았다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나를 세 번, 네 번 방해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시모그라쥬군을 쓸어버린 거야. 같 은 맥락에서 대호왕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 건 그 여자가 앞으로 나를 방해할 일이 없기 때문이고. 이해했어?" 론솔피는 생각해보았다. "음…… 대강. 그럼 나는?" "너는 나를 한 번만 방해했지. 앞으로 나를 또 방해할 것인지 알 수 없어. 그러니 너를 죽일 필요는 없지." 론솔피는 안도했다. 하지만 그 날 론솔피는 안도감을 즐길 수 없는 운세임이 분명했다. 그을린발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널 놔두고 떠나면 그만이지." 론솔피의 벼슬이 뻣뻣하게 섰다. 그는 두려움에 빠진 눈으로 그을린 발을 바라보았다. 대호왕에게서 세 레콘의 수탐을 명령받은 후로 한 시도 그를 떠나지 않았던 두려움,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대호왕의 유 지를 망가뜨리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요술쟁이는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 길잡이는 그의 말을 무시했고 대적자는 떠나려 하고 있었다. 폭력적 해결책을 무의식적으로 선호하는 레콘답게 론솔 피는 그을린발의 다리라도 부러뜨리면 어떨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무차별학살이 아니었다면 론솔피는 그을린발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다리를 향해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긴장하여 몸을 꿈틀거리는 론솔피를 향해 그을린발이 말했다. "하지만 남겠어." 론솔피는 대답도 못한 채 그을린발을 바라보았다. 그을린발은 손가 락을 가볍게 꺾었다. "대호왕 쯤 되는 사람이 허튼 소리를 했을 것 같지는 않군. 그 말이 사실이라면 꽤나 중요한 일인가 보지. 솔직히 신을 어떻게 대할지 결 정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렵긴 해. 그냥 각자 자기가 상대하고 싶은 대로 신을 상대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자신이 대호왕에게 질문했던 말이 그을린발의 부리에서 나오는 것을 듣게 되자 론솔피의 부리가 갑작스럽게 열렸다. 하지만 그가 말 하기도 전에 그을린발이 말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자들이 그 신인지 용인지 헷갈리는 것을 없애버 리면 레콘이 그것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할 필요도 없는 거지. 안 그 래?" "아, 그 때문에 내가 초조해진 거야. 만약 세 레콘이 모여서 내린 결론이 신을 해치우자는 것이라면 상관없어. 하지만 그들이 내린 결 론이 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거라면? 그러면 레콘은 다른 자들이 신을 어쩌지 못하도록 막아야 해." "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그을린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말했다. "좋아.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도 좀 뭣하고, 게다가 네가 나를 곱게 돌려보낼 것 같지도 않군. 그렇지? 그러니 이게 어떻게 끝 나는지는 보고 돌아가지. 그럼 됐지?" 감격한 론솔피는 도끼창을 땅에 떨어뜨리고는 그을린발을 와락 끌어 안으려 했다. 그을린발은 난처한 표정으로 물러나 자신의 몸에 주렁 주렁 매달린 무차별학살을 가리켰다. "큰일난다. 참아라." "고마워! 대호왕도 너에게 감사할 거야! 그리고 모든 레콘도! 이 세 상 전체가 너의 그 결심에……" 그을린발은 끔찍스럽다는 표정으로 론솔피의 찬사를 중단시켰다. 그 리고 그 때 론솔피도 자신이 목표의 3분의 1밖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대적자의 승낙은 받아내었지만 길잡이는 그의 말을 광언으로 취급했고 요술쟁이는 찾아내지도 못했 다. 론솔피는 지금 지멘을 설득하러 갔다간 그 머리통을 향해 도끼창 을 날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는 요술쟁이를 찾는 문제에 먼저 매진하기로 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그을린발에게 요술쟁이를 찾을 괜찮은 방법이 없겠냐고 질문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을린발도 적절할 해결책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을린발은 수염볏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자기가 알아서 나타날지도 모르지." "젠장. 행운 따위를 바라라는 거야?" "글쎄.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고 했지? 그런데 이런 말도 있어. 하나 는 셋을 부른다더군." "그런 말도 있어?" "그래. 그러니 어쩌면 자연스럽게 셋이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론솔피는 그 말에서 희망을 느끼길 바라며 히베리의 말에 대해 생각 해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불안감으로 회귀하는 익숙한 선택을 했다. "운을 바라서는 안돼. 짐 다 실었으니까 소리는 곧 출발할 거야. 그 눈에 잘 뜨이는 것은 어디서든 목격될 테니까 목격자를 찾는 것은 어 렵지 않아. 소리가 말리를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하지만 론솔피의 예측은 틀렸다. 소리는 말리를 따라잡지 않았으니 까. 소리와 말리의 조우는 말리가 거꾸로 소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보급을 끝낸 소리는 말리의 목격자를 찾아 동쪽으로 무작정 날았다. 이름 없는 고원을 떠난 후 이틀째 되던 날, 소리는 세퀴라도와 상고 토 지역 사이에 펼쳐진 느위텝 산지에 도달했다. 상고토의 북서쪽을 두르고 있는 그 척박한 땅에서 말리는 야음을 틈타 소리를 습격했다. 습격은 강렬하다기보다는 섬세했다. 야음과 짙은 구름을 이용하여 말리는 소리의 위쪽으로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그곳에서 말리는 소리 의 등 위로 약 백여 명의 아라짓 전사들을 뿌려놓았다. 아라짓 전사들은 환상계단을 이용하여 소리의 등 위에 내려섰다. 그 것은 소리의 탑승자들의 입장에서는 꽤나 난처한 상황이었다. 밤의 어둠 때문에 소리의 탑승자들은 피아 구분은커녕 자기 주위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가들은 어둠을 잘 볼 수 있었고 또 양자의 뚜렷한 체온차 덕분에 피아 구분 또한 간단히 해냈다. 아라짓 전사들 이 보기에 몸이 차가운 자들은 아군이고 뜨거운 자들은 모두 적이었 다. 그런 아라짓 전사들에 비해볼 때 소리의 탑승자들은 눈을 가리고 있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소리의 탑승자들이 눈깜빡할 사이에 전멸 당했다 해도 이살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은 것은 소리 위에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허릭이 그런 공격이 있을 것을 예상한 것은 아니다. 시허릭이 31중대원들에게 매일 갱신되는 군호를 전달한 것은 그것이 제국군의 위엄을 지키는 것에 도움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군호는 아라짓 전사들의 습격에서 상당한 위력 을 발휘했다. 아라짓 전사들은 31중대원들의 군호에 대답할 수 없었 다. 그들은 군호를 몰랐고, 또 소리에 관심이 없었기에 군호를 묻는 질문을 듣지 못했다. 그들이 군호를 알고 그 질문을 들을 수 있었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가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목소리 는 어둠 속에서도 나가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식별 기호다. 물론 밤의 시야는 나가들 쪽이 월등히 낫고 제국군 병사들은 질문한 후에야 공격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할 수 있었기에 여전히 상황은 나가들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나가들은 제국군을 공격하는 것에 관심 이 없었다. 그들의 공격은 전부 정우에게 집중되었다. 상황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야리키였다. 야리키는 정우와 탈해에 게 바닥에 엎드리라고 명령한 다음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고 외쳤 다. 그리고 야리키는 조간을 세차게 돌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몸이 으스러질 기세인지라 정우에게 쇄도하던 나가들은 걸음을 멈출 수밖 에 없었다. 그러느라 그들은 소드락의 지속 시간을 태반이나 소모하 고 말았다. 더 이상 지체하다간 꽁꽁 얼어붙은 채 소리 위에 쓰러질 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아라짓 전사들은 환상계단을 만들어 위쪽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공격에 동원된 것은 백여 명이었고 말리 위에는 오천여 명의 아라짓 전사들이 있었다. 첫 번째 무리가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또다 른 백여 명의 아라짓 전사들이 소드락을 복용하고 아래로 뛰어내렸 다. 교대는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그래서 소리의 탑승자들은 아라짓 전사들이 교대했음을 파악하지 못했다. 17분만 버티면 그들이 물러날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라짓 전사들의 공격이 끊임없이 계속되자 몹시 당황했다. 정우에게 다가가는 것을 포기한 아라짓 전사들은 31 중대를 향해 쇄도했다. 군호를 묻는 병사들의 얼굴을 향해 사이커가 날아들었고 31중대의 병사들이 단말마를 외치며 쓰러져갔다. 그러나 조금 후 아라짓 전사들은 비늘이 빠질 것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정우에 대한 공격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낀 야리키가 조간을 멈추었 다. 그러자 탈해가 일어섰다. 탈해는 어둠 속을 향해 외쳤다. "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테카의 계명성이 들려왔다. "위쪽! 위쪽이다!" 탈해는 거침없이 개밥바라기를 뽑아들어 위쪽을 겨냥했다. 개밥바라 기에서 화염인이 솟구쳐올랐다. 거대한 불길 때문에 소리 위쪽이 삽 시간에 밝아졌다. 제국군 병사들은 서로의 모습과 나가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위를 바라본 자들은 위아래가 뒤바뀐 것 같은 느낌 을 받았다. 그곳에는 굵은 뿌리가 뒤엉켜 있는 말리의 배가 있었다. 불길에 의해 밝혀진 영역은 모두 말리의 배로 가득했고 밤하늘은 보 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곳을 향해 치솟는 불길 또한 아래로 떨어지는 유성처럼 보였다. 수백 미터 쯤 치솟아오른 개밥바라기의 화염인이 말리의 배를 강타 했다. 말리의 배를 휘감고 있던 뿌리들은 개밥바라기의 칼날이 내뿜는 지 독한 열기에 당장 불타올랐다. 탈해는 명필이 일필휘지하듯 개밥바라 기의 불길을 말리의 배에 대고 휘둘렀다. 화염인이 스칠 때마다 채찍 자국처럼 불길의 선이 좍좍 그어졌다. 불타는 것은 뿌리들이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말리의 배가 타는 것처럼 보였다. 제국군도, 아라짓 전사들도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싸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개밥바라기의 칼날이 워낙 길기 때문에 탈해는 손목의 가벼운 움직 임만으로 수십, 수백 미터의 불의 직선을 그릴 수 있었다. 탈해는 불 과 2, 3초만에 말리의 배에 거대한 화인을 찍었다. 하지만 워낙 거대 한 규모 때문에 사람들에겐 많은 시간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치천 제가 탈해의 공격에 반응했을 때 사람들이 꽤나 느리게 반응한다고 느낀 것은 그 때문이다. 말리에서 무시무시한 괴성이 들려왔다. 나무가 벽력에 쪼개지며 내는 소리 같았다. 숲 하나를 채운 나무들 이 동시에 쪼개져야 그 비슷한 소리가 나겠지만. 터무니없이 거대했 지만, 고통이나 분노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식물의 소리였고 동물들인 인간과 도깨비, 레콘들은 그 소리에 감정을 이입할 수 없었 다. 그들이 느낀 고통은 그 소리에 대해 느끼는 자신의 고통이었고 그들이 느낀 분노는 그 소리에 대한 자신의 분노였다. 그리고 그들이 느낀 두려움 또한 그들의 것이었다. 처절한 굉음에 소리의 탑승자들은 얼어붙었다. 탈해는 부들부들 떨 며 화염인을 거두었다. 밝기가 줄어들자 말리의 배에 난 불길 자취들 은 밤하늘 그 자체에 난 상처 자국처럼 보였다. 점이 아닌 직선 형태 의 별들이 뜬 밤이라고나 할까. 그 기괴한 밤을 향해 아라짓 전사들이 뛰어올랐다. 직선의 별들이 뜬 밤하늘을 향해 비늘 덮힌 전사들이 날아오르는 모 습은 소리의 탑승자들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했다. 얼어붙어 있다가 소드락에 의해 방금 깨어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가들의 움직임은 우아했다. 그 냉혈의 종족들은 온혈의 종족들과는 조금 다 른 움직임의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계단을 뛰어오 르는 단순한 동작일 뿐이지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아라짓 전사들 의 모습은 비현실적인 하늘을 향해 춤을 추며 날아오르는 비현실적 생명체처럼 보였다. 소리의 탑승자들이 아라짓 전사들의 뒤를 따라 말리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이미 그것이 불가능해진 후의 일이었다. 아라짓 전사를 태운 말리는 그 아래쪽으로 불을 떨어뜨리며 도주하는 밤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불빛 때문에 다른 밤과는 완벽 히 구분되는 밤이기도 했다. 소리는 말리의 모습을 똑똑히 보며 그 뒤를 추적했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40. 나는 것과 노는 것 (4) | 2004·12·15 08:03 | HIT : 60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40-4 관련자료:없음 [49435]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2-15 05:07 조회:51 피를 마시는 새 40. 나는 것과 노는 것 - 4 나나본에 주재하고 있는 9014 독립중대의 중대장 니어엘 헨로 수교 위는 자신을 꼼짝못하게 하는 약점을 수십 가지라도 댈 수 있었지만, 현명한 지휘관답게 다른 이들도 그런 지적을 할 수 있게끔 내버려두 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니어엘과 다 른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약점이 있었다. "어, 죄송합니다. 하장군님. 어젯밤은 너무 멋졌습니다. 하늘 색깔 도 딱 알맞게 새까맸고 별들도 딱 알맞게 떠있었고. 혹시 술이 마셔 달라고 징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밤 아십니까?" "몰라." 니어엘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영창에 들어가기 전에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해장으로." "같이 마시고 함께 들어가지." 니어엘은 정신을 차리려 애쓴 다음 다시 히도큰 하장군의 모습을 살 폈다. 꽤나 험악한 길을 달려온 것이 분명하다는 첫인상은 바뀌지 않 았지만 한 가지 첨부할 것이 생겼다. '머리에 이고 있는 고민 때문 에' 그 길이 더욱 험악했던 모양이다. 니어엘은 두통을 참아내며 사소한 잡담들로 히도큰의 부리를 좀 풀 어주었다. 처음부터 말할 작정을 하고 온 것이기 때문에 히도큰 하장 군은 어렵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규리하성 앞에서 갑자기 괴물로 변 한 말리를 보고 놀라서 도망쳤음. 민들레 여단의 현재 구성원은 본관 외 16명. 나는 부대를 잃은 지휘관임. 정신을 차린 후 알아보니 가장 가까운 제국군 주둔지가 나나본의 9014 독립중대였기에 이곳으로 출 두했음. 민들레 여단의 소멸을 보고하고 죄인 히도큰을 귀관에게 인 도함. 어쩌실 텐가? "한 잔 합시다." 히도큰은 근무태만죄가 덧붙여지는 것 쯤은 아무 상관 없다는 표정 을 지었다. 니어엘은 술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고는 콧잔등을 주물럭거 리며 히도큰이 목격한 것에 대해 질문했다. "괴물이라고 하셨습니까?" "담쟁이넝쿨에 붙잡힌 하늘치를 귀관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괴상망 측한 모습으로 상상한 다음 그것보다 더 괴상할 거라 생각해 보면, 그게 내가 본 거야." "상상을 포기하죠. 그러면 황제 폐하께선 안녕하신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시는 겁니까?" "내게 정신질환의 혐의를 추가해." "네?" "내 생각엔 내가 본 그것이 황제였던 것 같아." 니어엘은 히도큰에게 당신은 미쳤다고 말해주는 대신 입을 다물고 이라세오날의 사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 레콘은 황제가 한 명의 훌륭한 지배자 이상의 존재인 것처럼 말 했다. 그가 암시한 것에 의하면 생의 본질적 의미는 이라세오날로부 터 시작되며 사람은 자신의 삶 전체를 그녀에게 바치는 찬미가로 만 들어야 하는 듯하다. 그리고 지금 부대를 잃어버린 지휘관이 그녀에 게 와서 황제가 초현실적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니어엘은 내리기 거북한 결론이 의식의 뒤편에서 문을 똑똑 두드리고 있는 것 을 느꼈다. 조심성 없이 들어와도 좋다고 말하면 그것은…… 문이 벌컥 열렸다. 히도큰과 니어엘은 문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은 다 미갈 카루스 부위가 헐떡거리며 상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일났습니다!" "술이 없나?" "그것보다 더 큽니다." 자신의 의식 구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판정을 내릴 수 없는 처지였 지만 히도큰 하장군은 이런 대화를 태연하게 나누는 작자들의 의식 구조가 매우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카루스가 외쳤다. "뭐라 설명을 못드리겠습니다. 나와서 보십시오!" 니어엘은 심각한 얼굴로 문쪽을 향해 달렸다. 술이 없는 것보다 더 큰일이라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냐고 묻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히 도큰 하장군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건물 바깥 연병장으로 나 섰을 때 히도큰 하장군은 모처럼 느낀 명랑한 기분이 싹 사라지며 대 신 공포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히도큰 하장군의 악몽이 남쪽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말리는 히도큰이 비명을 질렀을 거리 바로 바깥, 그러니까 나나본에 서 30킬로미터는 떨어진 거리에서 날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 외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 먼 거리지만 충격을 전달하기엔 부족함 없는 거리였다. 두통이 심화되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은 채 그 모습을 바 라보던 니어엘은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안심스럽게도 그것 이 남동쪽을 향해 멀어지는 듯하다는 것, 자신은 그것과 절대로 조우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히도큰 하장군의 불성실한 설명 과 일치한다는 것. 니어엘은 히도큰을 바라보았다. 잔뜩 부풀어 있던 히도큰이 말했다. "맞아. 저거야." 니어엘은 깊은 근심에 빠진 얼굴로 말리의 이동을 관찰했다. 아마도 말리를 볼 수 있는 반경 수백 킬로미터 내의 사람들 모두가 그랬을 테지만 니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말리 뒤편에서 추적중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의 소리가 나타났을 때, 자신들의 경악을 더 연장시키기 시작한 사람들과 달리 니어엘 헨로는 재빨리 몸을 돌 렸다. 그녀는 히도큰 하장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민들레 여단을 수배하십시오." 말리와 소리를 바라보느라 넋이 빠져있던 히도큰은 니어엘이 다시 말했을 때 비로소 고개를 떨어뜨렸다. "뭐?"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귀 여단에는 사회에 그냥 내보내기 곤란한 장병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책임 문제는 나중 이고 일단 그들이 사고 치기 전에 다시 끌어모으는 것이 더 중요합니 다. 이곳을 집결지로 삼아 민들레 여단을 재결집시키십시오. 저희 중 대가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히도큰은 어정쩡하게 그 말에 동의해지만 니어엘은 그런 대답을 기 다리지도 않은 듯이 행동했다. 니어엘은 곧 휘하의 행보관과 소대장 들을 불러들였다. 제각기 살벌한 별호들을 가지고 있었고 외부인들에 게는 한 곳에 모인 영웅들 쯤으로 취급되지만 그들 자신은 서로를 보 통의 직장 동료 쯤으로 생각하는 헨로 중대의 지휘관들이 - 사실 모 든 영웅 집단의 실상이란 그런 것이지만 - 한 자리에 모이자 온갖 일 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었다. 레콘 일개 여단을 수용할 수 있는 부지를 나나본 태수에게 지원받는 일, 수용 시설을 건설하고 보급망 을 증설하는 일, 그리고 민들레 여단을 집결시키기 위해 나나본를 중 심으로 반경 300킬로미터 내의 모든 중요 도시에 포고문을 게시하는 일 등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까라면 깐다는 헨로 중대의 금 과옥조를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있는 헨로 중대원들은 그들의 지휘관 이 센범 폭포처럼 쏟아내는 엄청난 명령들을 가늠하거나 해석하는 대 신 그냥 시작해버렸다. 해야 하는 일일 테고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시켰을 거라는 믿음은 말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그들의 얼굴이나 행동 에 분명히 드러났다. 그 명령들이 독립 중대의 중대장이 가진 권한을 벗어난 명령이 될 소지들이 다분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헨로 중대와 무관 한 히도큰 하장군뿐이었지만 의심이나 반대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행동하는 헨로 중대원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아버린 히도큰은 그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당연한 일들이 당연히 시행되고 있다는 안 도감 속에서 소리와 말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리와 말리의 두 번째 충돌은 러크 남서쪽 지역, 상고토의 동쪽 경 계 지점에서 일어났다. 러크와 호라이체를 잇는 용재 숙박소의 유료 도로당원들은 그들이 위치한 높은 고도 덕분에 두 하늘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관찰 대상과의 먼 거리는 그들을 오도했다. 그 들 중 상당수가 하늘치가 짝짓기를 하는 생물임이 마침내 밝혀졌다는 낭패스러운 착각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말리의 몸을 휘감고 있는 기 이한 식물도 확인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그들은 두 하늘치가 접촉하 고 있다는 것밖에 깨닫지 못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다. 소리는 무서운 가속을 통해 말리 의 꼬리까지 다가섰다. 황제에게 원하는 것들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 에 최종적인 결말은 약간 불분명한 상태였지만 작전은 명확했다. 탈 해가 개밥바라기로 황제의 몸을 불태워 무력화시키면 정우가 말리를 달래어 멈추게 한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마침내 소리가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가 탈해가 개밥바라기를 움켜쥐 었을 때 그들은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말리의 몸을 휘감고 있는 숲의 일부가 갑자기 허공으로 뛰쳐올라 소리의 몸으로 다가왔다. 사 람들은 숲에서 거대한 새떼가 일시에 날아오르는 것을 보는 듯한 인 상을 받았다. 하지만 말리의 몸에서 뛰어오른 것은 새가 아니라 줄기 와 넝쿨, 뿌리들이었다. 탈해는 황급히 개밥바라기를 휘둘러 그것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허공을 가로질러 소리의 등에 오른 용의 일부들 은 몸에 불을 붙인 채 그 모습을 보던 병사들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산불이 난 숲속에 있는 것 같았다. 불붙은 뿌리와 줄기가 무너지듯 쓰러져 짓누르자 인간의 몸은 속절없이 부서졌다. 탈해는 황급히 개 밥바라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병사들은 칼로 불붙은 용의 일부들을 후려쳤다. 하지만 도끼질로도 절단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 듯 한 그 뿌리들을 칼로 벤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병사들은 다가오는 뿌 리들을 피해 반대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다가오는 뿌 리들 앞에 남은 것은 일곱 명의 레콘들 뿐이었다. 압도적인 속력 덕분에 그들은 뿌리에 깔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극 을 가진 아트밀과 도끼창을 가진 론솔피를 제외하면 레콘들은 식물을 자르기에 적당한 무기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만히 서있는 나무 라면 그들도 힘으로 부러뜨릴 수 있겠지만 자의를 가진 채 꿈틀거리 는 뿌리는 붙잡아 부러뜨리기도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망치와 철저, 삼각철봉으로 뿌리를 후려쳤지만 나무를 상대로 거의 쓸모가 없는 무차별학살을 가진 그을린발과 낚싯대를 가진 야리키의 경우엔 맨손으로 싸워야 했다. 쵸지가 비교적 가느다란 뿌리 하나를 삼각철봉으로 자르는 묘기를 부리고는 외쳤다. "탈해! 몸통을 태워, 몸통을 태우라고!" 탈해는 개밥바라기를 움켜쥐었지만 그것을 뽑지는 않았다. 몸통 그 자체에 불을 지르라는 쵸지의 요청은 합리적이었지만 탈해는 레콘들 과 소리를 향해 뻗어오는 숲을 건너뛰어 그 너머의 말리를 겨냥할 수 가 없었다. 그러려면 높이 솟아올라야겠지만 딱정벌레를 이용하는 탈 해는 환상계단의 사용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리고 번뜩이에 탄 채 개 밥바라기를 쓰면 피해를 입힐까봐 탈해는 자신의 딱정벌레를 데려오 지 않았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탈해에게 정우가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 끌어올려줄게!" 탈해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우의 몸이 위로 둥실 떠올 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정우의 손이 탈해의 손을 놓치고 튕겨졌다. 정우의 환상계단은 그녀에게만 작용할뿐 탈해의 몸을 끌어올리는 것 은 그녀 자신의 힘이었고 정우는 도깨비를 끌어올릴 완력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정우가 다시 탈해를 붙잡으려 할 때 탈해는 황급히 손 을 끌어당겼다. "안돼. 개밥바라기를 쓸 때 가까이 있으면 너도 다칠……" 탈해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탈해는 누군가가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채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당황하여 고개를 돌린 탈해는 야리키의 엄한 얼굴을 보았다. 야리키는 환상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탈해가 황급히 말했다. "안됩니다! 개밥바라기를 쓰면 제 주위는 뜨거워집니다! 당신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어요!" 야리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높이 솟아올랐다. 뻗어오는 뿌리 들과 싸우는 레콘들의 모습이 발 아래로 내려오고 그 너머로 말리의 숲이 보이는 고도까지 솟아오르자 야리키는 재빨리 낚싯줄을 탈해의 허리와 가슴에 감았다. 탈해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야리키는 탈해를 매단 낚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두 손으로 조간 을 콱 움켜쥐었다. 공중에 매달리게 된 탈해는 개밥바라기를 뽑아 아 래쪽으로 멀리 보이는 공중의 숲을 향해 휘둘렀다. 개밥바라기의 화 염이 부채꼴을 그리며 기괴한 숲을 베었다. 화염의 칼날이 벤 자리에서 피가 용출하듯 불길이 화르륵 치솟았다. 숲이 포효했다. 소리로 뻗어오는 뿌리들과 싸우던 레콘들은 그 뿌리 들이 주춤하며 물러나는 것을 느끼고는 쾌재를 올렸다. 그러나 하늘 에 떠있던 야리키는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고는 개밥바라기가 벤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꿈틀거리던 그 불길이 갑자기 용권처럼 솟아올랐다. 그것은 허공에 떠있는 야리키와 탈해를 향해 똑바로 날 아왔다. "제길!" 야리키는 추락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들이 있던 자리로 불의 강이 황급히 스쳐지나갔다. 소리 위에 있던 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비명을 올렸다. 개밥바라기의 화염인이 바늘이라면 그 불길은 무룬강 쯤은 될 것 같 다. 그런 불길이 위를 스쳐지나가자 소리 위에서는 삽시간에 모든 그 림자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새하얀 세상 속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 았다. 아트밀은 마침내 사라말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되었다. 불길의 직격은 피했지만 가혹한 열기는 환상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야 리키를 덮쳤다. 등뒤를 덮치는 열기에 통구이가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야리키는 환상계단을 없애곤 나머지 거리를 그냥 추락했다. 가 까스로 깃털만 좀 그을린 채 소리 위에 내려선 야리키는 조간을 튕겨 그 끝에 매달려 있던 탈해를 가슴으로 받아내었다. 그는 탈해를 내려 놓고는 깃털에 붙은 불을 털며 말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용이지. 그래. 저 용이 불을 뿜었어." "그, 그럼 왜 지금까지는 안 뿜었던……" 탈해는 말을 마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무사장은 제국군이 모 여있는 곳을 보았다. 함께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야리키는 탈해가 누구를 보는지 깨달았다. 굉음과 함께 말리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말리는 소리로 뻗었던 뿌리들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남쪽으로 도망 치기 시작했다. 소리 역시 지체없이 그 뒤를 따랐다. 말리를 추적하는 소리의 등에서는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사 체들을 수습했다. 그 때까지 죽은 병사들의 사체들은 사실상 유기된 것에 가까웠다. 하늘치의 등에서는 매장이나 화장 모두 불가능했기에 그들은 이 추적이 끝난 다음 매장한다는 조건으로 느위텝 산지에서 아라짓 전사들에게 죽은 병사들의 사체들을 한 곳에 쌓아두었다. 하 늘치의 등은 광활했기에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목격되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 시체들을 쌓아둘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일어난 싸움에서 그들은 화장을 가능하게 하는 부산물을 얻었다. 레콘들이 잘라놓은 뿌리들이 그것이었다. 병사들은 그것을 쪼개어 땔감을 만들고는 그것으로 화장단을 만들었 다. 소리는 그 위에서 불붙은 나무 뿌리가 날뛰어도 괘념치 않았지만 병사들은 혹 화장의 열기가 소리를 불편하게 할 경우를 대비하여 화 장단을 굉장히 높이, 그리고 불이 붙어도 잘 무너지지 않도록 만들었 다. 그 위에 전우들의 시체를 얹은 병사들은 만약 소리가 불편해 하 는 기색이 있을 경우 당장 불을 끄기 위해 물통도 잔뜩 쌓아둔 다음 화장단 위에 불을 붙였다. 화장단에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애쓴 후에야 겨우 사체들을 불태울 만한 불길을 만들 수 있었다. 다행히도 불길이 사체를 재로 바꾸는 동안 소리는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리는 화장 연기를 뒤로 흘려보내며 말리를 추적했다. 말리를 장악한 용이 불을 토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황제가 대장 군이 해를 입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엘시는 그들을 지켜주는 존재였고 정우는 소리를 움직여 그들을 이끄는 존재 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달았다. 밤이 찾아왔을 때, 누구 한 사람 그런 명령을 내리거나 한 적이 없었지만 소리의 탑승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대장군과 정우를 향해 움직였다. 엘시와 정우는 자신들이 어 느새 사람들이 이루는 동심원의 중심에 함께 놓여있음을 깨달았다. 동심원 가장 바깥쪽에는 탈해와 레콘들, 즉 내습에 대비하여 최일선 에서 싸워야 하는 자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거나 누웠다. 소리의 다른 탑승자들과 따로 행동하듯 움직이던 지멘 역시 그 동심원의 바 깥에 앉아 있었다. 동심원 바깥을 향해 앉아있는 그의 어깨에는 아실 이 반대쪽으로 걸터앉아서 동심원 안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엘시와 정우를 보던 아실은 몸을 돌렸다. 등 을 지멘의 머리로 향한 아실은 지멘의 옆머리에 등을 기대고는 밤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쪽으로 가는군요. 아마도 시구리아트 산맥을 따라 비나간으로 갈 모양이에요. 그곳에는 사라티본 부대도 있고 도깨비 감투를 가진 발 케네공도 있지요." 지멘은 고약하겠다고 생각했다. 스카리 빌파가 도깨비 감투를 쓰고 소리 위에 잠입하여 대장군을 납치하는 것도, 사라티본 부대가 소리 위로 뛰어올라 그들을 공격하는 것도 모두 추적자들에겐 치명적인 일 일 것이다. 어떻게든 비나간에 도착하기 전에 황제를 붙잡아야 한다. 혹은…… "엘시를 황제에게 데려가면 황제는 네 증오를 돌려줄까?" "지멘?" "황제는 엘시를 지극히 원하는 것 같으니까." 아실은 지멘의 어깨에서 재빨리 뛰어내렸다. 그녀는 지멘에게서 몇 걸음 멀어져서는 지멘에게 등을 보인 채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지멘은 앞에 놓아둔 자신의 망치를 바라보았다. 긴 시간이 지난 다음 아실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지멘에게 다가가 지는 않은 채 아실이 말했다. "왜 제게 증오가 필요하지요?" "그게 너니까." "그럼 전 지금 제가 아닌가요?" 지멘은 납병례를 치르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냐." "그래서 증오가 필요없다는 제 말을 안 듣는군요." "그래." "저 스스로 증오를 포기할 수도 있잖아요. 이 차가운 세상에서 우리 가 나눠야 할 것은 사랑이지 증오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잖아요. 제가 증오를 돌려받은 다음 그것을 포기한다면, 그러면 처음부터 돌려받을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헛수고가 되잖아요." 지멘은 긴 침묵 후에 말했다. "증오를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확신하나요?" "확신해." "어째서? 그런 나쁜 감정을 제가 왜?" 지멘은 다시 침묵했다. 별빛의 소근거림이 길게 이어진 후, 지멘이 부리를 열었다. "증오가 있어야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뭐? 시련이라니. 왜 시련으로 만든단 말이냐? 사람이 피하려 하는 것이 그것 아니냐?'는 논조의 말을 하려던 아실은 갑작스러운 깨달음 으로 입을 다물었다. 충분한 난폭함이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 어라. 지멘이 말한 것은 타이모의 말이었다. 아실은 입술을 핥았고, 한 번 더 핥은 다음 어렵게 말했다. "글쎄요. 제가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겪은 시련이면 이미 충 분하지 않나요?" 지멘은 아실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벌어졌던 지멘의 부리는 조금 후 다시 닫혔다. 지멘은 아실을 외면하며 말했다. "엘시를 데려가는 것은 관두기로 하자.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다. 이곳에 있는 자들도 필사적이니." 아실은 지멘이 대화를 중단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멘이 조금 후 다시 말해을 때 아실은 조금 놀랐다. "아실." "예?" "내 생각에, 우리가 일평생 나눠야 할 것은 증오다." 아실은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잘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실은 입을 닫기로 했다. 그 순간 황제의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소리에 타고 있던 자들은 느위텝 산지에서 벌어진 첫 번째 공격도, 러크 남서쪽에서 일어났던 두 번째 공격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대단한 긴장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여전히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황제의 공격이 대장군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 를 때도, 그리고 대장군에게 도달했을 때도, 그것이 대장군에게 허리 를 숙였을 때도 사람들은 그것이 황제의 공격이라고 생각하지 못했 다. 잠이 오지 않아 앉아있던 대장군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에게 말 했다. "무슨 일인가?" "급히 보셔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나라미 쪽으로 갔으면 좋겠습니 다." 엘시는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있던 정우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 다. 엘시는 사람들의 동심원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사람들은 엘 시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에서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긴 했지 만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함께 걸어가는 자를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빠져나온 그들은 나라미가 있는 곳까지 말없이 걸었 다. 긴 시간이었다. 구릉을 몇 개나 넘은 후에 두 사람은 비로소 나 라미에 도달했다. 두 사람은 넓은 지느러미를 가로질러 그 끝 가까운 곳에 도달했다. 엘시는 칠흑 같은 아래쪽을 살펴보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그를 데려온 자는 머뭇거리며 귓속말을 하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엘시는 의아해하며 귀를 상대방의 입가로 가져갔다. 상대방은 엘시의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빠르지 않기에 흠칫할 수도 없고 느리지 않기에 제지할 수도 없는, 심리적으로 완벽히 어정 쩡한 속도였다. 게다가 그는 엘시가 자신의 칼을 넘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엘시는 자신의 칼이 상대방의 손에 넘 어가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칼을 쥔 상대방은 빙긋 웃었다. 차분한 웃음이었다. 엘시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이제 오래된 계획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오래된 계획?" 엘시의 머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 전 시모그라쥬에 허수아비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전문가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의 장기는 절도였지만 취급하는 품목이 대단히 한 정적이었습니다. 사실 취급하는 품목이 한 종류뿐이었지요. 그는 다 른 이들의 방해를 피하며 어떤 사람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 는 일에 능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납치 전문가, 혹은 구조 전문가 로 대접받았습니다. 보통은 납치쪽에 무게중심이 놓이는 편입니다만, 그거야 시모그라쥬의 풍토가 험해서지 그 자가 납치를 더 좋아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 자에겐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웃음소리. 엘시는 자신이 잘 아는 그 이야기에서 새로움을 느 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곧 엘시가 전혀 알지 못하는 형태 로 바뀌었다. "그 허수아비는 어느 날 최고의 절도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자 신의 영역에서 신기원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 는 최고의 납치를 하기로 했습니다. 누구를 납치하면 최고라고 불릴 수 있을까요. 황제?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황제 같은 것은 시시한 겁니다. 그는 최고였지요. 그는 모든 사람을 납치하기로 결심했습니 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그야 모든 사람의 미래를 훔치면 됩니 다. 그러면 모든 사람을 납치하는 것이 되지요. 그는 다음 시대의 주 인이 될 자가 누군지 따져보았습니다. 곧 한 사람이 보이더군요. 칼 리도의 백작으로 쥐딤에서 큰 공훈을 세운 장수였습니다. 그가 다음 시대의 주인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허수아비는 그 백작에 게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허수아비는 의도적으로 체포된 다음 백작의 몸종이 되었습니다." "이레……" 엘시의 신음을 들으며 이레는 무력한 사냥감의 단말마를 듣는 야수 같은 표정을 지었다. 느긋한 듯하지만 빈틈없는 자세로 선 채 이레는 담담하게 말했다. "허수아비는 자신이 납치할 대상을 보호하며 기다렸습니다. 그의 판 단은 정확했습니다. 그 백작은 황제의 대장군이자 제국만병장이 되었 습니다. 하지만 허수아비는 전문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완벽한 순 간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 백작은 황태자가 되었지요.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모든 것을 엉 망으로 만들 뻔했지요. 허수아비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오판했던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허수아비는 대관식 직전까지 기다리자고 작 정했지요. 그리고 더 훌륭한 순간이 왔습니다. 보십시오. 황제가 용 임이 밝혀지고 황태자는 그 용을 물리치기 위해 날아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최고입니다. 황태자를 납치해서 황제에게 넘기는 겁 니다. 그러면 다음 시대를 완벽하게 납치하는 것이 됩니다. 어떻습니 까, 멋지지 않습니까?" "이레. 도대체 무슨……" 이레는 아무런 예고 없이 엘시의 복부를 걷어찼다. 엘시는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미끄러지듯 다가간 이레는 재빨리 칼을 뻗어 쓰러진 엘시의 목에 대고 눌렀다.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지요?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록 제가 당신을 가주라고 부르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제가 마음 속으로 당신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합니다." 엘시는 신음 한 마디 내지 않은 채 이레를 올려다보았다. 이레가 우 아하게 웃었다. "당신이 베로시 토프탈에게 잡혀갔을 땐 정말 돌아버리는 것 같았습 니다. 다음 시대의 납치자라는 이름을 그 얼빠진 시모그라쥬공에게 넘겨주게 될 판국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허수아비지 요. 나가들이 득시글거리는 망고 군단으로 잠입해서 마침내 당신을 구출해내었습니다. 저는 제 솜씨를 너무 보였다고 걱정했습니다. 그 런데 당신은 단신으로 제국군 군단에 도전할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자 라면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그 단순한 의심도 못하더군요. 당신의 멍 청함에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도 못했습 니까?" "그건 네가 각하를 사랑한다는 것을 각하께서 아시기 때문이야." 이레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놀란 엘시는 고개를 조금 천천히 돌렸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장벽 때문에 그것 은 절대로 들려올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엘시는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제이어 솔한을 발견했다. 어둠 속이었지만 제이어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똑똑히 보였다. 어 둠 속이니 회색 비슷하게 보여야겠지만 그 옷은 얼룩이나 그림자 하 나 찾아볼 수 없이 새하얗다. 마치 혼자서 낮의 햇빛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레는 재빨리 다른 손으로 단검을 뽑아들어 던질 태세를 갖 추었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죽어? 흐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내 시간으로는 죽은 것이 아니지만." "무슨 말입니까?" 제이어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갑자기 이레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당신은 유령입니까?" 제이어는 피식 웃었다. "아니. 유령은 아냐. 이 시간에선 유령이나 마찬가지지만." "무슨 소립니까?" "내 시간을 멈춰놨지." "멈춰놨다고요?" "조금 전,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조금 전에 소리는 말리의 턱에 충 돌하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죽기 직전이었고. 그 순간을 멈춰놓고 여기로, 그러니까 내게는 미래이자 대장군님과 네겐 현재인 이 시간 으로 잠시 온 거야. 책을 읽는 것을 잠시 멈춰놓고 몇 장 뒤를 훔쳐 보고 있다고 할까? 그래. 그런 비유면 적당하겠군. 다시 앞으로 돌아 가 책읽기를 재개하면 그 순간 나는 죽겠지. 하지만 난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까 유령은 아니지." 이레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응. 하늘치 환상을 내 영 자체에 적용시켜버렸거든. 환상으로 자기 근육을 삼았던 율형부사처럼 나는 환상을 내 정신적 근육으로 만들었 어. 내가 죽는 것도 그 때문이지." "그런 말을 믿으라고요? 그렇군요. 죽었다는 것이 거짓말이었군요." 제이어는 히죽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그런데 지금 자네가 믿기 힘 든 건 내가 아니라 자네 자신 아닐까? 이제 자신을 속이는 짓은 그만 하는 것이 어떤가?" "예? 자신을 속이다니오?" "대장군을 납치하기 싫으면 그만두라고." 이레는 경계심을 드러내었다. 단검을 쥔 손을 더 뒤로 끌어당기며 이레가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그런 헛소리로 뭘 어쩌려는 겁니까? 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저 외엔 아무도 이 긴 시간을 버틸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 그래. 전문가라 이거지?" 이레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갑자기 무시무시한 의심을 떠올린 듯이 보였다. 이레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어 는 깔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레. 왜 전문가답게 대장군의 뒤통수에 한 방 먹인 다음 조용히 소리를 떠나지 않은 건가? 붙잡은 주인공에게 모든 상황을 설 명해주는 그 멍청한 악당 역할은 전문가 허수아비에게 안 어울리잖 나?" 이레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비명을 참는 사람처럼 입술을 악물 었다. 제이어의 히죽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자네 마음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 그 단단한 몸에도 불구하고 이레는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처럼 흐 물흐물해 보였다. 이레는 자신이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억지로 말 을 꺼냈다. "내가……" "납치는 해야겠는데 속마음은 하기 싫고, 그래서 넋두리로 시간을 지연하는 꼴 보고 있으니 아주 가관이었어." "이게…… 하기 싫은 일이면……" "응? 아, 하기 싫은 일이면 왜 하는 거냐고? 그거야 자네가 정신억 압되어있기 때문이지." 엘시는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을 바닥에 탕 때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제이어는 히죽거림을 멈추고는 조금 진지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비웃음은 태어날 때부터 붙어있는 코처럼 그의 얼굴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황제는 범죄자를 원하는 대장군에게 붙여주기 위해 자네를 골랐지. 차기 황제감을 능히 보호할 만큼 능력자니까. 그리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자네를 정신억압한 다음 대장군에게 보냈어. 자네야말로 자 네 같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범죄자가 그런 충성스럽고 성실한 몸종이 되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어. 물론 그걸 합리화하 기 위해 모든 것이 자기 계획이었다는 식으로 꾸며대긴 했지만." 이레는 눈이 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레는 세레지의 질문을 떠올 렸다. 어떻게 하면 납치 전문가가 될 수 있지? '인생 포기하면 돼.' 제이어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 짓을 계속할 텐가?" 엘시는 칼날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망고 군단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 정도로 사랑하는 주인을 납치할 건가?" 옆으로 움직인 이레의 손에서 장검과 단검이 떨어졌다. "몸종보다는 가족이고 싶어서 가주님이라고 부르곤 했던 주인님을?" 이레는 뒤로 발을 옮겼다. 두세 걸음 물러난 이레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엘시를 보았다. 엘시 는 그 얼굴에 떠오른 고통스러운 미소를 보았다. 엘시는 갑자기 가슴 이 옭죄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레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엘시는 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을 긁는 그 손을 보던 이레가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구겨진 미소가 굴절되었다. 이레가 몸을 돌렸다. 이레는 어둠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엘시는 일어났다. 곧 그 이레의 발소리가 사라졌다. 그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것일 수도 있다. 혼란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 몸을 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시 돌아와 웃으며 가주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레가 떠난 방향은 나라미 끝부분이었다. 엘시는 덜덜 떨리는 얼굴을 제이어에게 돌렸다. 제이어는 한숨을 내 쉬었다. "밖으로 몸을 던졌군요." 엘시는 중풍이 든 노인처럼 무릎을 떨었다. 제이어는 이레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긴 그것이 가주님을 가장 확실히 보호하는 방법이겠지. 너를 존 경한다. 이레 달비." 제이어는 이레에게 보내는 묵도처럼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침묵 했다. 엘시는 산 채로 난자당하는 고통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흘 러내린 눈물이 뺨을 적시고 아롱져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제이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대장군을 향해 말했다. "유감입니다." 엘시는 말하지 않았다. 제이어는 그 상황을 좀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인간관계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신이 불청객 같다는 느낌을 받는, 그렇지만 모른 체할 수도 없어서 서툴게 행동하게 되는 바로 그 상황이 제이어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 다. "정말 유감입니다. 조금 더 빠른 시간에 와서 알려드렸어야 하는 건 데, 늦었군요. 저도 뒷 장을 펼쳐보기 전엔 뒤쪽 이야기가 어떻게 되 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시간에 왔습니다. 뭐 그래도 아주 늦 지는 않아서 각하는 구할 수 있었군요. 아, 이런 말씀 드려도 지금은 기쁘지 않으시겠지만." 엘시는 계속 침묵했다. 제이어는 주눅이 든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야기를 듣자니 황제가 용이라는 것이 밝혀져 지금 소리를 타고 그것을 퇴치하러 가시는 중인 모양이군요." 엘시는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과거의 어느 시간이 제이어처럼 갑자기 현재로 뛰어들어오는 것 같았다. 엘시는 이레의 말을 떠올렸 다. '어딘가에 퇴치해야 할 용이 나타났습니까?' "예. 황제는 용이자 정신억압자이며 우리 미래의 강탈자입니다. 저, 그것을 꼭 퇴치하시길 바랍니다." 제이어는 결국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문득 엘시는 제이 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었고, 그 자신의 고통 때문에 그 이유를 추리할 기력도 없었지만. 갑자기 엘시의 입이 열렸다. "환상으로 자네가 그렇게 되었다고?" 엘시는 자신의 심리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겪은 상실을 직시할 수 없어 억지로 다른 일에 관심을 갖는 척하고 있었다. 실제로 엘시는 제이어가 겪은 일이 무엇인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이 어도 엘시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엘시가 정말 궁금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늘치의 환상 유적은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주어지도록 남겨져 있던 선물이었습니다. 지상에서 사라진 첫 번 째 종족이 우리가 다음 단계로 올라서는데 도움이 되도록 안배해둔 것이지요." 제이어는 언젠가 소리 위에서 다른 청자들을 상대로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 때 그랬던 것보다는 훨씬 침착한 태도로. 엘시는 지대 한 관심이 있다는 투로 들었다. 양자 모두 말하거나 듣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말하고 들었다. 하지만 제이어의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되었다. 제이어가 어렵게 말했 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기운내시길 바랍니다." "죽으러 돌아간단 말인가?" "예?" "다시 자네 이야기로 돌아가면 자네는 죽는다고 들었는데." "아아, 예. 글쎄요. 그렇습니다. 죽은 걸로 되어있는 사람이 자꾸 나타나는 것은 안 좋겠지요. 하지만 자신할 수는 없군요. 그 순간으 로 돌아갔다가 다시 책을 몇 장 더 건너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가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서 요. 아,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죽기 싫은 이유군요. 이 하늘치가 하 늘을 나는 동안 저는 계속해서 이 놀음을……" 문득 제이어는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다시는 뒷이야 기를 알 수 없게 된 몸종을 떠올린 엘시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 다. 제이어는 자신을 질책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여기시겠지만 대장군님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장군님을 더 화나게 할 가능성이 높군요." 제이어가 아니라도 그럴 것이다. 유가족들이 조문객들에게 바라는 것은 제발 자기를 좀 내버려두라는 것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조문객 은 더욱 유가족을 찾는 것이기도 하지만. 엘시는 침묵한 채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어는 작별의 말 대신 목례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사 라졌다. 홀로 남은 엘시는 이레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발이 움직였다. 어둠 속을 향해 엘시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엘시 는 소리 없이 입으로 말했다. '이레.' 다시 한 걸음, 또 한 걸음. 엘시는 이레가 떠나간 방향으로 걸었다. '이레.' 그의 무릎이 갑자기 구부러졌다. 엘시는 무릎을 꿇었다. 상체가 앞 으로 기울어지고, 엘시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대장군은 하늘치의 나라미 위에 엎드려 통곡했다. =============================================================== 40챕터 끝났습니다. 챕터 끝났으니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41. 장생 - 1 "모든 승부가 그렇듯이 결국 바둑도 이기기 위해 두는 것 입니다. 저는 승리가 최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승 부에 임하다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만 승리도, 패배도 이기려고 노력한 후에 얻는 것이 가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한 패배자에게도 승리 자에게 보내는 것과 똑같은 찬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승리 나 패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기기 위해 바둑을 둔다고 말씀드린 겁니 다." "그래서?" "그렇다면 비기는 것이 왜 칭송받아야 하는 겁니까? 비기 는 것도 이기거나 지는 것과 똑같은 승부의 결과 중 하나 일 뿐입니다. 따라서 빅은 승이나 패와 똑같은 대접만 받 으면 충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기는 것을 화국(和局) 이라 부르며 승리나 패배보다 더 귀한 무엇인 양 대하는 태도의 이면에는 이기고자 하는 마음을 짐짓 깔보는 천박 한 엄숙주의, 순수주의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언짢습니 다. 이기려는 마음을 깔본다면 그것은 이기기 위해 두는 바둑 그 자체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빅이 승이나 패와 마찬가지로 승부의 결과 중 하나일 뿐 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묻자꾸나. 이기 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 "이기기 위해서요? 갈고 닦은 기술, 투지와 집중력, 자제 력……" "이기기 위해서는 이길 상대가 필요하다." 제자가 침묵했다. 스승이 담담하게 말했다. "상대가 있어야 계속 이기려 할 수 있지 않느냐. 화국이 칭송 받는 것은, 우리가 이기려는 마음을 마음껏 펼쳐 보 여도 바둑판 너머에 있는 또다른 우리를 멸종시키지는 않 을 거라는 확신을 그것이 주기 때문이다. 화국은 바둑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을 보장한다." - 화국에 대한 어느 스승과 제자의 대화 中. 두어 번 성의 없는 태도로 말고삐를 건드렸다가,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는 말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봄의 태양에게 자신을 넘겨주고 는 눈을 감았다. 그 자세로 그는 세상에 자신과 햇살만이 존재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말로 다가가는 스카리를 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던 구경꾼들은 당혹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그 중에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옷자락을 가다듬으며 스카리의 지연을 못본 체하는 이들도 많았다. 스카리와 구경꾼들 모두를 보고, 그리고 바닥을 보며 잠시 기다린 다음, 팔리 탐 지소어는 가만히 몸을 틀어 스카리의 얼굴에 그림자가 떨어지게 했다. 스카리는 입술로 쯧 하는 소리를 내고는 눈을 떠 팔리탐과 그 외의 다른 세상을 인정했다. 하지만 팔리탐이 원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림자를 흘리고 다니는군. 잘 챙겨." 팔리탐은 출발하자는 말이 아니라는 것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면 스카리는 틀림없이 감투를 쓰고 사라질 것이다. 아무리 사라티 본 부대의 레콘들이 자기 지휘관에게서 용기를 얻지 않는다 해도 출 정 직전에 총지휘관이 그렇게 모습을 감추는 것은 적절한 일이라 할 수 없다. 팔리탐은 차분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참관인 여러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환호나 박수만으로 인생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놈들은 좀 기다려도 돼." 스카리 빌파가 심술을 부리는 것은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찾아와 아첨의 말을 건네려 하는 자들이 얄미워서가 아니라 숨막히도 록 나부끼는 벚꽃 속에서 부냐 헨로와 단둘이 석별의 정을 나누지 못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팔리탐은 그 말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도 참관인들의 존재가 내키지 않았기 때 문이다. 그는 가면 뒤에 못마땅한 심정을 숨긴 채 참관인들을 바라보 았다. 감상적인 이유에서 그들을 싫어하는 아니다. 드라카의 아이들에 대 한 긴급체포령은 철회되었지만 이미 그들은 스스로 수그러들 수 있는 어떤 한계를 넘어버렸다. 그들은 온갖 자질구레한 방법으로 비나간 점령군의 인내심을 시험하면서 자신의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드라카의 아이들은 정복자가 사라진 직후에 대구모 봉기를 일으킬 가 능성이 지극히 높다. 더 늦어질 수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정복자와 반란자는 사실상 상호 의존적이고 점령군의 모습이 사라지면 반란군 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자기 이웃들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할 수밖 에 없다. 그리고 그런 투쟁은 언제나 인기가 없다. 정복자의 기억이 뚜렷한 순간에 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스카리와 사라티 본 부대가 비나간을 떠난 직후를 노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비나간 의 유력자들이 전부 이곳에 나와있는 것은 팔리탐을 불안하게 했다. 팔리탐은 부냐 헨로를 보았다. 스카리가 자신의 출발을 치장하고 그것을 의미 깊게 만들 단 하나의 장식으로 선택한 여인은 지금 도저히 그 의무에 임할 처지가 아니었 다. 완전 무장을 하고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과 함께 서있는 스카리 빌파에게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한 구경꾼들은 장수 대신 말을 노리 라는 옛말을 따라 부냐에게 접근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자들을 상 대로 부냐는 완벽히 정치적인 대응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완전히 비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다. 부냐는 아무런 고려 없이 내키는 대로 말하 고 있었고 그 때문에 교묘한 암시나 내락, 언질 같은 것을 기대했던 비나간인들은 꽤나 당혹하게 되었다. 그들은 부냐의 말만으로는 자신 이 비나간의 새로운 권력층으로 이동하게 되었는지 스카리의 호의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위치로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바라 는 것은…… "들어라, 비나간의 벗들아!" 팔리탐은 조금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스카리는 어느새 말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약간 지루해하던 구경꾼들은 화들짝 놀라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나 스카리 빌파는 오늘 멋진 용기를 보았다. 무도한 반역자들은 그 대들을 배신자로 지목할 테지. 어리석은 범죄자들은 그대들을 비겁자 로 지목할 테지. 하지만 용감한 그대들은 그런 사악한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이곳에 나와 내 앞에 섰다. 한 사람도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해도 나는 오히려 기꺼워했을 것이다. 그대들이 자신들의 소 중함을 잘 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내 단견 이었다." 구경꾼들은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을 보면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 을 정도의 거리에 서있었다. 스카리는 그들을 향해 말을 몇 걸음 몰 아가서는 당당하게 외쳤다. "그대들은 자신의 생명과 일신의 평안함을 뛰어넘는 것이 있음을 말 없이 보여주어 어리석은 나를 깨우쳐주었다. 진정한 벗들이여! 나는 이 귀한 우정과 헌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 비록 폐하의 소 환을 받아 잠시 떠나지만 나는 떠나는 순간부터 그대들의 곁으로 돌 아올 시간만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발케네 바깥에서 만난 가장 용감 한 자들인 그대들에게!" 이국에서 온 젊은 전쟁군주에게 심취한 젊은이들이 먼저 함성을 질 렀다. 그 함성은 곧 뒤쳐지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옮겨졌다. 커다란 함성, 내두르는 손, 마침내 눈물을 펑펑 흘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흥분이 소용돌이쳤다. 내버려두면 구경꾼들이 앞으로 뛰쳐나와 스카 리와 그가 탄 말을 둘러쌀 지경이었다. 팔리탐은 재빨리 힌치오에게 간단한 손짓을 보냈다. 약속된 손짓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 의미를 직감한 힌치오는 이쑤시개를 높이 들어올리며 크게 외쳤다. "사-라-티-본-부-대-! 출-발-준-비-!" 두 시간 전에 끝난 출발 준비를 다시 외치는 힌치오에게 의아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냥 그 커다란 음량에 깊은 인상을 받았 다. 구경꾼들의 흥분은 고조된 외침에서 보다 경의 어린 침묵으로 바 뀌었다. 어울리게도 스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말을 돌려 부냐 헨로에게 다가갔다. 부냐의 곁에 있던 자들이 그 위 엄에 눌려 자기도 모르게 물러났다. 홀로 남은 부냐는 빛나는 눈으로 스카리를 마주보았다. 부냐의 곁에 선 스카리는 말 옆으로 허리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던 부냐는 그 목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길고, 고요 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순간이 완성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떨어졌다. 스카리는 말을 서서히 물러나게 하고는 부냐에게 목례했다. 허리를 낮추는 부냐에게 미소를 보낸 스카리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올렸 다. 팔리탐이 재빨리 말에 올랐다. 스카리의 손은 올라갔을 때처럼 소리없이 앞으로 뻗었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어울리는 자가 있는 법. "출-발-!" 힌치오의 계명성과 함께 스카리의 말이 앞으로 뛰쳐나 갔다. 그 뒤를 따라 팔리탐이, 그리고 제국군 낙오병을 규합하여 현 재 전세계에서 가장 큰 레콘 집단이 된 사라티본 부대가 달렸다. 그것은 사납지만 쉽게 흩어지는 격류의 기세와 느리지만 저지 불가 능한 빙하의 힘이 묘하게 결합된 질주였다. 보통의 물체는 움직이면 당연히 최초의 힘이 줄어든다. 하지만 레콘들의 질주는 그 힘이 영원 히 계속될 것 같은, 커지면 커졌지 절대로 줄어들지는 않을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수평으로 진행되는 산사태랄까. 세차게 움직이는 그 들의 발이 땅을 때리는 소리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물론 비틀 거리거나 쓰러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사람들은 내장이 속에서 뒤흔들리고 뼈가 몸 속에서 덜그럭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 았다. 마지막 레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 지 못했다. 등 바로 뒤쪽에서 그런 적나라한 힘이 따라오자 역전의 무사라 할 수 있는 팔리탐도 뒤통수가 선뜩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나간의 교외가 다가오는 것을 본 팔리탐은 앞서 달리는 주군의 옆 으로 따라붙으려 애썼다. 하지만 스카리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고 팔리탐이 그의 곁에서 고함이라도 지를 수 있게 된 것은 비나간의 중 심이 이미 멀어진 후의 일이었다. "각하!" 스카리는 팔리탐을 곁눈질하고는 씩 웃었다. 팔리탐은 갑자기 그 웃 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저 간사한 녀석들을 안심시키고 혹 미친 짓 할지 모르는 녀석들에겐 내가 반드시 돌아온다고 위협하는 것이 되었겠지? 팔리탐은 자신의 뜻도 전해지길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각하. 감사합니다. 당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게 해주 셔서. 팔리탐의 뜻이 정확하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스카리는 이를 드러내는 큰 미소로 화답했고 팔리탐은 그 미소를 해석할 수 없었다. 스카리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재촉했다. 말은 스카리의 재촉을 받아들인 것인지 뒤쪽에서 따라오는 레콘들에게 깔려죽는 것 이 두려워진 것인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는 기세로 달음박질쳤다. 뱀단지를 통해 온 황제의 명령은 단지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 그곳에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황제가 지정한 장소는 좋은 말이 좋은 길로 달 려 세 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전원 레콘으로 이루어진 사 라티본 부대의 이동력을 고려한다면 옆집이나 다름없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비나간을 떠나온 것은 사흘치 식량을 지참하라는 조건 때문이다. 스카리와 팔리탐은 황제가 지정한 장소에 서 말리와 만난 다음 진정한 원정 목표를 전달받게 될 것이라 판단했 다. 말리에 오른 후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그것 은 상관없었다. 자신이 통치할 땅은 비나간이 아닌 발케네라 믿고 있 는 스카리도, 치안 활동과 전투 활동을 도무지 동일시할 수 없는 사 라티본 부대의 레콘들도 비나간에 체류하는 것에 지겨움을 느끼고 있 었다. 팔리탐의 임기응변과 힌치오의 통제력으로는 상황을 악화시키 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무슨 전투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전 장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확실히 기분 전환의 효과가 있었다. 흐벅진 봄들이 꿈틀거리는 2월. 미풍에도 자지러지곤 하는 벚나무들 은 레콘들의 돌진에 온몸을 전율시켰다. 연분홍 꽃잎들이 함박눈처럼 푸지게 쏟아졌다. 레콘들은 아지랑이로 몸을 휘감은 채 피할 수 없는 재앙처럼 달렸다. 베일 것 같은 햇발들. 세상엔 빛이 가득하다. 태양은 사라졌다. 세상이 너무도 밝아서. 위와 아래도 사라졌다. 앞 과 뒤가 있을 뿐이다. 앞은 계속 다가온다. 소실점은 소실점이 아니 다. 그곳에서부터 만물이 피어나는 소실점은 점이지만 우주다. 창조 의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다. 앞으로 달려가는 것으로서 점을 우주로 만들 수 있다. 창조는 완결된 사건이 아니라 진행되는 몸짓이다. 그들은 우주를 만들었다. 만든다. 만들 것이다. 썩 괜찮은, 그들의 우주다. 틸러 달비 부위는 하늘치를 바라보았다. 말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제 그것이 멈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이 확실해졌다. 틸러 달비는 눈을 조금 찌푸렸다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소대를 바라보았다. 소대원들은 고요했다. 그들이 상관에 대 한 경애심으로 가득찬 투철한 군인이라서 침착을 유지하고 있다 말해 도 되고, 터무니없는 실족사로 종제를 잃고 실의에 빠진 소대장에 대 한 동정심 때문에 정숙하고 있다 말해도 될 것이다. 틸러는 어느 것 이 사실에 부합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 현상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었다. 틸러는 그들이 조용하다는 것에 만 족했다. 틸러는 말없이 손짓으로만 최선임 수전사에게 지휘권을 넘기고는 작 전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아직 소대장 들의 참석이 완료되지도 않았는데 말을 시작한 발리츠 굴도하 남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틀림없이 발케네공을 불렀을 겁니다. 지금 저기 저렇게 서 있는 것은 발케네공이 곧 도착할 거라는 증거입니다. 지금 당장 공격 을 시작해야 합니다." 틸러는 걷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남작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마주앉아 있었고 그 뒤편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정우와 아이넬 굴 도하, 탈해, 야리키 등이 모여앉아 있었다. 아트밀과 파라말은 조금 어정쩡한 거리에 앉아 있었고 지멘과 아실은 꽤 떨어진 곳에 서서 관 련 없는 사람처럼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허릭의 뒤편에는 엘시 가 레콘들과 함께 있었다. 틸러는 다른 소대장들과 함께 엘시의 근처 에 앉았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을 서두르는 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보십시 오. 황제가 저런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발케네공 또한 우리 에게 협조할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크나큰 힘이 될 공작의 병력을 우 리가 포기해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발리츠 남작은 공작이 황제의 편을 들면 어쩔 거냐고 반박했다. 시 허릭은 그 반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공작이 황제 의 충복이라면 황제와 싸우다가 만신창이가 된 자신들에게 보복하려 고 들 것이라고 대꾸했다. 또 상장군은 발케네공이 황제의 충복이 아 니라도 야심가인 것은 명백하니 귀찮은 황제를 없애준 것에 고맙다고 말한 다음 자신들까지 쓸어버리려 할 거라고 암시했다. 남작은 그 암 시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일어날 일들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황제 부 재 기간 동안 저지른 죄(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가 밝혀질까 두려 워진 배덕한 자들이 돌아오신 황제를 감히 죽이다. 진상을 알게 된 정의로운 발케네공은 그 배신자들을 제거하고 황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신황제가 되다. 빌파 황조의 깔끔하고 근사한 개조 신화가 될 것이다. 남작의 동요를 본 시허릭은 자신의 논리를 계속 밀어붙였다. 시허릭 은 정의는 만인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역설했다. 물론 시허릭 이 진짜 말하고 있는 것은 발케네공에게 뒤통수 맞는 일을 피하려면 일단 그를 포섭한 다음 이쪽에서 그의 뒤통수를 칠 수 있게끔 안배해 야 한다는 논리였다. 다른 소대장들과 나란히 바닥에 앉은 채 틸러 달비는 남작과 상장군 사이에서 장차 세상을 좌지우지할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물론 두 사람이 갑자기 손을 맞잡고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거나 하는 직설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은 아니다. 모호한 눈빛과 간단한 몸동작 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몇 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를 타고 규리 하성을 떠난 이래 그 합의는 차근차근 구체화되고 있었고 그래서 그 런 애매한 태도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이 확고해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합의는 이러하다. 칼리도백과 규리하공은 연합한다. 그 연합은 사실은 두 사람만의 연합이지만 겉으로는 참가하고픈 모든 자 들에게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를 취하도록 한다. 그런 구조를 통해 적으로 돌릴 자들을 모두 내부에 포함시킨 다음 하나씩 축출하 여 제거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두 사람만이 남게 되면, 둘의 성별 이 다르고 둘 다 미혼이라는 행운에 감사한 다음 둘이 결합하여 모든 것을 가진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그렇잖습니까, 차기 대장군? 동감합니다. 비나간공. 좋습니다. 발케네공을 끌어들입시다. 그 모습을 보며 틸러는 자신이 이 시간에 이 곳에 있다는 것은 놀라 운 행운임을 깨달았다. 요령있게 군다면 그들이 피운 꽃에 걸터앉아 꿀을 핥을 수도 있을 것이다. 틸러는 그 행운을 주의깊게 관찰한 다음 뻥 걷어찼다. 수의로 쓰기 위해 고상함을 잘 보존하려는 것은 아니다. 틸러는 자신의 묘비에 '방탕자, 잘 놀다 감.' 외에 다른 문구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꿀을 핥기 위해선 꽃잎 위에 앉아있어야 한다. 바람만 불어도 흔 들리는 꽃잎은 튼튼한 지지대가 아니다. '미안하지만, 이레. 꽃잎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네몫만큼 화끈하게 사는 것은 내게 무리야. 나는 내려갈 거야.' 틸러는 정우를 보았다. 정우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관심만 회의에 남겨두고 있었 다. 그녀의 나머지 관심은 탈해와 간혹 눈짓을 교환하는 것 외에는 전부 엘시에게 쏠려 있었다. 엘시를 본 틸러는 정우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엘시는 확실히 관심 받을 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틸러는 만취한 인간 주정뱅이가 얼떨결에 적출식에 휘말려들어갔다 가 술김에 적출을 당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이야기에서 주정뱅이 는 심장 적출이 아닌 퍽 외설적인 적출을 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농담이나 우화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틸러는 그 이야기가 엘시의 모습을 설명하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엘시는 심리적으로 심장에 해당하는 무엇인가를 적출당한 사람처럼 보였다. 틸러는 종제를 잃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엘시 같다고 생각했다. 바꿔 말한다면 틸러는 종제를 잃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고 할 수도 있다. 틸러는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 큰 후에 우 연히 만난 친척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니다. 명백히 전투 중인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죽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 다. '우리 모두가 죽음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야.' 문득 떠올린 생각에 틸러는 소름끼치도록 공감했다. 틸러는 다시 사 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모습 이 보였다. 그의 눈에 남작과 상장군은 내일 있을 사형집행을 잊기 위해 모레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사형수들처럼 보였다. 정우의 모습은 체념한 것처럼 보였고 엘시는…… '대장군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황제는 우리를 다 죽일 수도 있지.' 틸러는 알고 있던 사실이 다른 의미로 되새겨지는 그 충격적인 느낌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엘시의 존재 때문에 황제가 무차별적인 공격 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틸러는 지금껏 다른 사람들처럼 엘시 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의미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그 들 모두가 황제에게 방해물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틸러는 이 레의 죽음이 어떤 전조라는 느낌에 진저리쳤다. 그는 몸을 뒤로 돌려 더욱 커진 말리의 기괴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엘시와 함께 있기 때문 에 그들은 황제에게 있어 죽어야 하는 존재가…… 더욱 커진? 틸러는 튕기듯 일어나 말리를 바라보았다. 한 소대장의 돌발 행동에 놀란 다른 사람들도 틸러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말리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틸러가 깨달은 것을 깨달았다. 말리가 계속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와 말리의 거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발리츠 남작이 당황하여 말했 다. "각하. 소리를 멈추지 않으셨습니까?" 남작의 질문에는 이것이 어처구니 없는 실수이며 늦지 않게 깨달았 기에 웃으며 교정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의미가 잔뜩 담겨 있었다. 정우는 말없이 고모부를 바라보기만 했다. 남작의 얼굴에 불안이 스 쳐지나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군인들도 그 뒤를 따라 일어났 다. "각하?" 소리와 말리의 거리는 계속 줄어들었다. 정우는 남작의 말에 고개를 들긴 했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니, 무엇인가 할말은 있는 것 같 았다. 하지만 정우는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 같 았다. "각하! 소리를 멈추십시오!" 정우가 말했다. "죄송해요. 여러분. 대장군님이 멈추지 말고 계속 가라고 눈짓하셨 어요." 틸러와 마찬가지로 엘시를 송장 비슷하게 취급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다시 입을 다문 정우는 탈해의 손 목을 부여잡으며 엘시를 바라보았다. 핏기 없는 얼굴의 대장군이 서 서히 일어났다. 대장군은 말리를 흘깃 바라보고는 사람들을 둘러보았 다. "우리는 발케네공이 도착하기 전에 이 일을 끝내야 한다." "대장군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발케네공이 도착하면 우리를……" "발케네공을 설득할 수는 없다. 설득한다 해도 의미가 없다. 그가 설득되든 되지않든 상관없이 폐하께서는 발케네공에게 우리를 공격하 라고 명령할 수 있으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는 사람을 정신억압하실 수 있다." 충격적인 말에 사람들은 입을 크게 벌렸다. 엘시는 몇 번이나 꺼내 려던 말을 되삼킨 후에 간신히 말했다. "모두들 내 몸종 이레 달비가 어둠 속에서 실족했다고 알고 있겠지.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환상계단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레는 정신억압을 당했다. 그는 나를 납치해 서 황제에게 데려가려고 했지. 하지만 자신이 정신억압을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자신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하늘치 밖으로 몸 을 던진 것이다." 흔들림 없는 꼿꼿한 자세로 서있었지만 엘시의 모습은 껍데기만 남 은 사람 같았다. 더 견디지 못한 엘시는 두 손을 깍지껴 입술을 눌렀 다. 그는 어깨를 들먹이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왜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겠지. 정신억압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신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정신억압을 인정하면 누가 적인지 누가 친구인지, 누가 행동으 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지 누가 행동으로 허위를 구축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세상이 함 정으로 바뀌고 삶은 추락으로 변한다." "그만!" 노호하며 일어난 것은 아트밀이었다. 그 곁에는 산공부사 파라말이 증오에 찬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아트밀이 말했다. "그만해!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말하고 있어. 그걸 직접 당 한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해선 안돼!"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엘시는 쉰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더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래. 나는 정신억압을 당했다. 아이솔 형제의 보호자가 되도록 억 압당했지. 레콘들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액체도 두 사람을 보호하 려는 나를 막을 수는 없어.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나 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그게 어떤 건지 짐작이 나 할 수 있어? 맹세컨대 너희들은 그것을 꿈에서도 짐작할 수 없어. 나는 이레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아트밀의 벼슬이 부자연스럽게 꿈틀거렸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밧줄을 잡듯 자신의 철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내가 목숨을 걸고 사라말을 보호하게 해놓고서, 황제는 내 게서 사라말을 빼앗아갔다. 울컥한 파라말이 고개를 홱 돌려 사람들을 외면했다. 산공부사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트밀이 말했다. "나는 황제를 죽일 것이다. 사라말의 핏값을 받고 나를 해방시킬 것 이다." 엘시는 움푹 들어간 눈으로 아트밀을 바라보았다. 그 때 지멘이 앞 으로 한 걸음 걸어나왔다. "황제는 아실을 정신억압했다." 아트밀이 허기에 가까운 눈으로 지멘을 보다가 아실을 쏘아보았다. 지멘이 말했다. "황제는 아실의 증오를 가져갔다. 아실은 이제 손으로 쓰는 글씨로 만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다. 말이나 표정, 행동으로 누군가를 증오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황제는 내게 아실을 돌려준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아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아실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아실은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조금 비틀거리다가 지멘의 다리를 붙잡았 다. 지멘은 자꾸만 아실에게 향하려는 시선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말 했다. "나는 황제를 죽일 것이다. 아실이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자기 자 신을 증오할 수 있도록." 론솔피는 낭패스러운 심정으로 그을린발을 바라보았다. 아랫부리를 만지작거리던 그을린발은 론솔피의 시선을 느끼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론솔피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만약 세 레콘 의 결정이 황제를 보호하는 것이라면 황제가 죽는 것은 결코 피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론솔피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을린발은 그런 설명이 아트밀이나 지멘을 납득시킬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자신이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을 레콘이 어떻게 대하는지는 그을린발이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을린발은 심정적으로 아트밀과 지멘에게 동 의했다. 사람을 정신억압할 수 있는 존재라니, 그건 너무 위험하다. 엘시가 말했다. "이곳엔 정신억압을 당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있을지 도 모른다. 여러분들도 짐작하겠지만 이런 의심은 끝이 날 수가 없 다. 나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 까. 그래서 나는 의미 없는 의심을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의미있는 단 한 가지의 행동은 폐하를 공격하는 것이다." 거듭된 충격 때문에 틸러는 약간 멍한 상태였지만 그의 분석력은 엘 시의 말을 재빨리 이해했다. 엘시는 황제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 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세상의 만물 중에서 정신억압의 결과일 가능성 이 없는 것은 황제에 대한 공격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힘은 분노나 정의에 대한 의지도 아니고 심지어 저열한 욕망도 아니다. 이 우주에서 그 내면의 의도를 의심할 수 없는 일이 그것뿐이라고 말하는 엘시의 모습을 보며 틸러는 바닥이 없는 절망의 낭떠러지를 흘깃 훔쳐본 것 같은 오싹함을 느꼈다. 오직 한 가지밖에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당장 황제를 공격해야 한다. 지금은 무위조차도 의심 스럽다." 멈춰서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조작당한 결과 일지도 모른다. 틸러는 그 무서운 말에 소름이 좍 돋는 것을 느끼며 말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이 딛고 있는 소리도, 하늘 도, 땅도 사라졌다. 봄이나 태양, 바람도 그 존재를 믿기 어렵다. 세 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점뿐이다. 아니, 그 점만이 세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는 말리가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다급한 외치이 들려왔다. 틸러는 그 외침에 귀를 기울였다. "레콘들이 다가옵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스카리는 자신이 뭘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 고는 다시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조금 후 다시 고개를 들었 을 때 스카리는 여전히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의아해하던 스카리 는 뒤쪽의 레콘들이 내는 웅성거림을 듣고는 그것을 본 사람이 자신 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스카리는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다. 나늬인지 보늬인지 알기 위해서 는 두 사람만 있어도 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이곳이 산인지 평야인지 구분지어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좀 지나치게 길 게 이어지긴 했지만 산의 발치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듯한 곳이었 다. 그 때문에 시야는 괜찮은 편이었고 그 시야 내에 위험해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약속 장소였다. 모든 조건을 고찰하여 부대를 멈춰도 상관없다고 판단한 스카리는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 었다. 조금 후 사라티본 부대는 기나긴 질주를 끝내고 멈춰섰다. 하지만 소동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달리느라 그것을 보지 않았던 레 콘들도 스카리가 본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대단히 놀랐다.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놀라서 하늘을 보던 스카리는 조금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팔리탐이 가면을 하늘로 향한 채 굳어 있었다. 스 카리가 말했다. "저게 뭐야? 여기는 말리와 만나기로 한 곳인데, 저건 말리가 아니 잖아." "저도 저것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태위를 앞으로 보내." 스카리나 팔리탐, 그리고 레이헬 라보 태위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 때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레콘들 중 한 사람이 흠칫하여 그들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하늘을 손가락질하며 소란을 피우던 다른 레콘들과 달리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지 않았다. 뚫어지게 스카리와 팔리 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엉겅퀴 여단 1대대장이었던 팡탄 하장군이 었다. 의식의 겉면으로 떠오른 태위는 팔리탐이 보던 것을 보고는 숨을 들 이마셨다. 스카리가 참을성 없는 태도로 말했다. "태위. 저게 도대체 뭡니까?" "저건 말리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말리를 휘감고 있는 저건 도대체 뭡니까?" 레이헬 라보 태위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저것은 말리의 비밀이며 황 제의 허락 없이는 말할 수 없다는 암시를 담은 말을 중얼거렸다. 스 카리는 그 대답을 받아들였다. 말리 그 자체나 아라짓 전사들의 존재 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기에 스카리는 그보다 더 기이한 것이라도 말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쨌든 저것이 말리가 맞다면 우리는 저기에 타야 하는 것이군요. 다시 팔리탐을 앞으로 내보내십시오. 힌치오! 올라갈 준비를 해라!" 약간 뜨악해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느 쪽에?" 스카리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힌치오를 돌아보았다. 스카리의 시선을 느낀 힌치오는 무지막지한 이쑤시개를 지휘봉이나 되는 양 가볍게 들 어올려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에, 아니면 저쪽에 있는 하늘치에?" "뭐? 하늘치가 또 있어?" 스카리는 등자를 밟고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힌치오가 이쑤시 개로 가리킨 방향을 본 스카리는 곧 말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다른 하늘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고맙게도 그것은 대단히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스카리는 다른 하늘치나 말리의 기괴한 모습도 단번에 잊어버리게 할 제 삼의 물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하늘이 아니라 스카리의 앞쪽에 있었다. 못보고 놓칠 만큼 작은 물체가 아니었지만 스카리는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스카리는 그것을 유념하지도 않았다. 만약 약간 유념했다면 스카리는 그것을 수풀이나 좀 이상하게 생긴 나무 쯤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다리로 일어나 걷는 관목이나 나무는 없다. 풍경의 일부였다가 다음 순간 도저히 풍경에 포함시킬 수 없는 존재 가 된 그것은 스카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얼추 레콘 정도의 크기였고 걸음걸이도 레콘의 그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것을 뒤덮고 있는 것은 깃털이 아니라 나뭇잎 비슷한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 인상 이 나뭇잎과 닮았을 뿐 나뭇잎과 같은 것은 아니다. 제멋대로 나있어 도 그 모양이 똑같기에 통일적인 느낌을 주는 나뭇잎들과 달리 그것 을 뒤덮고 있는 것들은 그 모양이 천차만별이었다. 댓잎과 비슷한 무 엇, 솔잎과 비슷한 무엇, 버들잎과 비슷한 무엇, 고사리와 비슷한 무 엇 등등이 뒤섞여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 라보던 스카리가 황급히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두억시니?" 그것은 그럴 듯한 설명으로 들렸기에 당황하던 레콘들은 안도했다. 레콘들은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고는 그 두억시니로 여기고 싶은 물체 를 노려보았다. 그 물체는 멈춰서더니 갑자기 부리를 벌렸다. 사람들 은 그것이 열린 후에야 거기에 부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부리라기보다는 엉뚱하게 생긴 나뭇가지 같았다. "제 시간에 도착했군." 그 목소리를 들은 스카리는 생각을 바꾼 듯 품속에서 손을 뺐다. "말을 하는군. 좋아. 너는 누구냐? 그리고 제 시간에 도착했다는 것 은 무슨 뜻이냐?" "짐은 이라세오날이다." 스카리는 깜짝 놀라서 레이헬 태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가면으로 덮힌 그 얼굴에서는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스카리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라세오날이라 주장하는 물체를 바라보았다. "잠깐. 내가 아는 이라세오날이 한 명 있기는 하지만 그 분은 아라 짓 제국을 다스리시는 어떤 나가이시지 레콘과 나무 몇 그루를 절구 에 넣고 빻은 다음 바닥에 쏟아놓은 것 같은 물건은 아닌데." 그 괴상함을 표현하기엔 스카리의 묘사로도 오히려 부족할 것 같은 물체가 다시 부리를 열었다. "말에서 내려라, 발케네공 스카리 빌파. 짐은 너의 황제다." 스카리는 혼란과 의혹 속에서 말에서 내렸다. 그 때 힌치오가 갑자 기 말했다. "뭄토?" 스카리는 움찔하여 힌치오를 보았다. 힌치오는 자신의 외침에 놀란 사람처럼 더듬거렸다. "어, 비슷하게 생긴 부분은 없지만, 목소리는 뭄토 같은데. 느낌도 그렇고." "네 느낌은 정확하다. 네가 보고 있는 이 부분은 한 때 뭄토였지. 하지만 짐과 같은 것이 되려 간절히 소망해왔던 그는 이제 짐의 일부 다. 너는 짐을 이라세오날이라 불러야 한다." 그 설명은 듣는 이들을 질겁하게 했다. 스카리는 다시 품속으로 손 을 뻗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황제의 일부가 되었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그 때 레이헬 라보 태위가 사람들이 자신의 당황을 무차별적 으로 드러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한 자세로 재빨리 말했다. "위대하신 치천제 폐하 만세.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저희들이 이곳 에 왔습니다. 폐하의 영광과 저희들의 명예를 살지울 명령을 내려주 소서. 제 소견으로는 저희들이 받을 명령이 지금 말리를 향해 돌진하 고 있는 저 하늘치와 관련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태도를 정할 수 없어 난처해하던 이들에게 태위의 확고한 태도는 그 대로 지침이 되었다. 그들은 태위가 건넨 질문의 대답이 정말 궁금하 다는 듯이 이라세오날의 일부인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말했다. "그렇다. 저 하늘치에는 반역자들이 있다. 너희들이 할 일은 그들을 물리치는 것이다." 태위가 약간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바라보았다. 이라세오날은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이 말했다. "저 하늘치는 움직이고 있으므로 너희들이 오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너희들은 말리로 올라와라. 그리고 말리가 하늘치와 충돌한 직후에 저곳으로 옮겨타라." "위험한 계획이군요." 인간 병사들이 듣는 곳이라면 삼갔을 '위험'이라는 말을 태위가 굳 이 꺼낸 이유야 분명하다. 그는 레콘들을 자극할 작정이었다. 그의 의도대로 레콘들은 반드시 그 일을 하겠다는 눈빛을 띄었다. 이라세 오날이 말했다. "짐을 따르라." 그것이 위로 쑥 솟아올랐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가만히 있고 세상 이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 물체는 움직임의 느낌이 없이 치솟아올랐다. 기막힌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던 스카리에게 태위가 말했다. "힌치오에게 올라가라고 명령하십시오." 스카리는 묻는 눈으로 가면을 바라보았다. 가면 뒤쪽의 남자가 말했 다. "태위입니다. 당분간은 그 편이 낫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힌치오! 말리 위로 올라간다! 빨리! 제국군이 만들었 던 레콘 계단 기억나지?" 물론 힌치오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스카리는 그것을 전해들었 을 뿐이지만 힌치오는 직접 목격했으니까. 그는 곧 환상계단을 만들 줄 아는 레콘들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레콘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태위는 자신도 말리에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는 말을 근처의 나무에 묶어두려 했다. 그 때 그의 곁으로 레콘 한 명이 쓱 다가왔다. 고개를 든 태위는 팡탄 하장군을 보게 되었다. 팡 탄이 말했다. "군령자였어?" "그렇다. 왜?" "아, 그냥 내가 제대로 들었나 확인해보려고." 팡탄은 그렇게만 말하고 환상계단을 만들어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태위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나무에 말고삐를 매었다. 조금 후 그 와 스카리도 환상계단을 따라 말리 위로 솟아올랐다. 말리를 향해 돌진하던 소리의 등에서는 레콘들이 말리로 솟아오르는 모습이 똑똑하게 보였다. 시허릭은 자신이 창안한 고속탑승법이 사라 티본 부대에 의해 재현되는 것을 보며 복잡한 심회를 느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침묵하고 있을 때 파라 말 아이솔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도망치실 겁니까?"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산공부사를 돌아보았다. 산공부사는 엘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초리에 담긴 증오를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 려웠고 그 중 상상력이 남달랐던 이들은 혹 파라말이 정신억압된 것 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떠올렸다. 엘시는 다시 말리를 바라보다가 혼 잣말처럼 말했다. "도망은 무의미하다." 틸러 달비는 자신도 모르게 엘시의 말에 주석을 붙였다. '그것은 다 른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정신억압에 의한 것일 수 있으므로.' 그 해석의 끔찍함이 다시 틸러를 진감케 했다. 정신억압은 세상을 사라 지게 한다. 황제를 공격해야 한다. 그것이 옳거나 바르거나 필요해서 가 아니라,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심 지어 아무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라말은 그 말이 충분히 용감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는 따지듯 말했다. "각하께서 정말 황제를 공격할 수 있습니까? 황제의 대장군인 각하 께서 그녀를 불살라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른 일입니 까?" 틸러는 화가 났다. 엘시는 바르거나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을 하 려는 것이 아니다. 무위조차 의심스럽다! 그토록 분명한 사실을 모르 는 척하며 엘시의 말버릇으로 엘시를 공격하는 파라말의 모습을 틸러 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엘시는 무거운 눈길로 산공부사를 바라보았다. "그대에게 대답하는 것도 도망처럼 무의미하지만," 무의미, 무의미, 무의미. 틸러는 숨이 막혔다. 엘시가 옳다. 틸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공허, 훨씬 더 끔찍한 절망이다. "대답하겠다. 나는 황제를 공격할 것이다." 파라말은 사나운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다시 파라말 의 정신억압을 의심하게 되었을 때 파라말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 는 눈물 맺힌 눈으로 엘시를 보다가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목소리에는 낙심과 기대감이 함께 있었다. 사람들은 파라말이 제 국이 낳은 최고의 장수에게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 은 자신들에게 그런 존재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말리는 불을 토하는 용이고 아라짓 전사들을 데리고 있다. 정신억압의 문제도 있거니와 이젠 레콘이라는 물질적 힘까지 갖추고 있다. 탈해의 개밥바라기 이 상의 무엇이 필요했다. 파라말이 말했다. "아뇨, 질문하지 않겠습니다. 명령을 받겠습니다. 저에게도 시키실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엘시는 목이 굳어있던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소리 위에 있는 무력을 점검하는 것처럼 보였다. 틸러도 그렇게 해보았다. 천 명에 채 못미치는 인간 병사들, 일곱 명의 레콘, 탈해 머리돌 무 사장, 발리츠 굴도하 남작 외엔 실질적인 병력이 보이지 않았다. 물 론 소리 그 자체도 훌륭한 병기이고 규리하성에서 말리를 물러나게 했다는 정우의 꿈도 있지만 소리는 말리에게 부딪치는 용도로밖에 쓸 수 없으므로 말리와 상쇄된다. 그리고 탈해 머리돌 무사장은 정우의 꿈을 쓰는 일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어차피 정우에게는 소 리를 조종하는 일이 있다. 용과 탈해 머리돌 무사장 또한 상쇄된다고 보면 그 나머지 병력으로 사라티본 부대를 상대해야 한다. 틸러는 말 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엘시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명령은, 그 것이 비록 무의미하더라도, 도망치라는 명령이다. 틸러는 그렇게 생 각했다. 그 순간 틸러는 자신이 아직도 엘시가 본 공포스러운 공허를 제대로 보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것을 직시할 수도 없음을 깨달았다. 도망치 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틸러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 감정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생에 진짜로 의미있는 일은 또 무엇인가? 죽 지 않기 위해 행하는 사소한 일들을 제외한다면 이것이 우주로부터 그 유의미함을 보증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틸러는 뒤로 물러나고 싶었다. 의미는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 이 설령 가짜이고 주입받은 것이라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 것은 이미 자신에겐…… "저게 좋겠군." 엘시의 말에 틸러는 따스한 잠자리에서 갑자기 끌려나온 것 같은 느 낌을 받았다. 그는 떨떠름한 눈으로 엘시의 시선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는 그 시선 끝에서 신통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엘시가 보고 있 는 것은 31중대도, 레콘들도, 도깨비 무사장도 아니었다. 대장군은 허공을 보고 있었다. 부위는 보지 못해도 상장군은 보았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말했 다. "구름 말씀입니까?" 시허릭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엘시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엘시 가 무엇을 본 것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꽤 멀리 있는 것이지만 평평 한 비나간의 지형 덕분에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거리를 쉽게 가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먼 곳에 먹구름처럼 보이는 얼룩이 있었다. 어쩌 면 비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레콘들은 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 지만 사람들은 기쁜 표정으로 엘시를 보았다. 엘시가 정우에게 말했 다. "정우. 소리의 방향을 바꿔 저기 보이는 구름쪽으로 데려가 주시겠 습니까? 말리가 우리 뒤를 따라오도록."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참으 로 전투적이지 못한 말을 꺼냈다. "소리. 목욕 시간이야." 소리가 그 거대한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 41챕터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41. 장생 (2) | 2004·12·22 08:00 | HIT : 432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41-2 관련자료:없음 [49445]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2-22 06:18 조회:28 피를 마시는 새 41. 장생 - 2 자신의 죽음에 도달한 제이어 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벌리고 숨을 길게 내쉬는 그런 한숨은 아니다. 그런 한숨을 내 쉬면 제이어는 죽을 것이다. 죽음의 그 순간에서 제이어는 사실상 아 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보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도 명백히 시간적인 활동이다. 시간이 흐르면 죽는다. 제이어는 자신의 죽음을 고정시켜 놓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 순간에 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이어는 그 순간에서 말 그대로 순간적으로 도피했다. 사고 가 불가능하기에 그것은 사고의 작용이 아니라 반사적인 행동이다. 도망친 후에야 제이어는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쌓았던 온갖 결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순간에서 튕겨져나왔음을 깨달았다. 그 렇다면 한숨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이어가 한숨을 내쉰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그것은 이미 수십 번도 넘게 해 본 일이었다. 제이어는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 질지는 뻔했다. 장소는 보나마나 소리의 등, 그리고 아무도 없을 것 이다. 하늘을 보며 이리저리 산책하다가, 소리의 등을 떠날 수 없다 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고, 그리고 다시 죽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물 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그곳에서 도망칠 것이다. 그가 갇힌 시 간의 미궁에 출구는 하나뿐이고 그것은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 다. 제이어는 자신이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생 각했다. 비관적인 전망을 곱씹던 제이어는 멀찌감치 서있는 사람들을 보았 다. 제이어는 기쁜 나머지 환호도 지르지 못했다. 엘시와 이레를 본 후 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산책보다는 훨씬 나은 일 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이어는 바삐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제이어는 다른 것들도 관찰했다. 해가 기울어 있었다. 그것이 일몰인 지 일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리의 방향을 알 수 없으므로. 약간 쌀쌀한 것이 가을이나 초봄인 듯하다. 물론 그런 것들이야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어느 시대일까? 제이어는 지난번처럼 아는 얼굴이 있기 를 바라며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이 제이어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과 얼 굴이 마주친 제이어는 걸음을 멈췄다.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이 있었다. 제이어는 그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제이어는 그들이 많은 수의 인간 들과 레콘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제이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낯설다는 것 이상의 생경함을 느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의 어떤 점 이 그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는지 묻는다면 제이어는 대답할 수 없었 을 것이다. 제이어와 사람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은 이것에******대해 항의할 수**도로가 아니다. 하늘치 ******겠나? ***위해****되는 도로사용료를*******로 막을 수 없다. 동편 한 닢도****보라. 도로*****가증스러**연합은****짐의 군대가 지상에 내려서*****복하라. 그렇게***하면 그 유명한 편지**번째 글 자만 따서 읽****어먹을 숙취는 기어코 찾아**게 뭐야?" 제이어는 불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인간 여자인 듯하 지만 도무지 인간 여자의 인상을 받을 수 없는 존재가 그녀의 말을 받아적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를 옆에 둔 채 제이어를 바라보고 있 었다. 제이어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여자 아닌 여자는 제이어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말했다. "말**이상하군. 사람들*****그 유령**왕이다." "당신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제이어 솔한입니다." "**마찬가****짐은**" 제이어는 입을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저쪽에 들리 는 자신의 말 또한 불분명한 것 같다. 제이어는 다시 사람들을 둘러 보고는 그들에게서 사람의 인상을 받을 수 없었던 것 또한 불분명한 말과 같은 이유에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들 사이에 서로를 인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 듯하다. 타개책 을 찾던 제이어는 같은 질문을 반복해보았다. "지금이 몇 년입니까? 지금이 몇 년입니까? 지금이 몇 년입니까? 지 금이 몇 년입니까?" 인간 여자는 제이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반복되 는 것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년, 아라짓력*3년, ***63년. 아라짓***년." 제이어는 아라짓력 63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163년이나 1063년 같 은 비관적인 경우도 가능하기야 하다. 제이어는 답답한 시선으로 여 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말했다. 건성으로 그 말을 듣던 제이어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을 들었다. "잠깐만요. 지금 제이어 솔한이라고 했습니까? 저를 아십니까? 예. 제가 제이어 솔한입니다. 제이어 솔한입니다. 제이어 솔한입니다." 그의 말이 전달된 듯하다. 여자는 자기를 가리켰다. "짐은******헨로. 왕이*******통치하는***로." "헨로? 헨로가의 사람입니까? 짐이라고요? 왕이란 말입니까? 왕입니 까? 헨로, 왕입니까?"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긍정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 이지는 않았지만. 제이어는 재빨리 레콘 같지 않은 레콘들과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을 둘러보고는 다시 여자 아닌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들이 사라티본 부 대이고 이 여자는 왕이 된 부냐 헨로인 것일까? 혹은 확실히 능력자 로 분류되는 그녀의 언니 니어엘 헨로인 걸까? 163년이라면 그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 하지만 130년이 지났는데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 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문득 제이어는 자신이 정말 중요한 것을 들었음을 깨달았다. 상대는 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치천제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미래는, 최소한 일만육천 년 동안의 미래는 황제의 시대일 것이다. 황제의 계 획이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황제가 존재하고 그 휘하에 왕 또한 있 는 것일까? 제이어는 진상을 밝혀내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을 알아낸다 한들 그 에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은 제이어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 피 제이어가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지식이란 없다. 그의 죽음은 과 거에 단단히 고정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적 충족감은 유일하 면서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제이어는 파편화된 대화를 계속하 기로 했다. 하지만 상대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 몇 번 알아듣기 어려운 대화가 오간 후 여자가 말했다. "**오는 전투*******야 한다. ***하늘치*****짐은****유령과****가 야**전투가*****" 그리고 여자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부서진 말보다는 동작으로 뜻을 전달하려는 것 같았다. 제이어는 그녀가 전투를 앞두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떠나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다른 자들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서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바빠 보이는 일 을 하고 있었다. 왕의 곁에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서있는 것처럼 보 이는 사람들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제이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가의 도로사용 료로 그녀를 막으려는 세력이 있으며(유료도로당일까?) 그 방해를 물 리치기 위해 그녀가 하늘치를 이용하여 이동하고 있음도 짐작했다. 뭔가 소란스러운 시대인 듯하다. 그들이 과거의 유령보다는 현재를 다루느라 바쁜 것이 분명했다. 제이어는 왕의 뜻을 받들기로 했다. 왕에게 인사를 보낸 살인기사는 좀 더 대화하기 쉬운 존재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다른 시대로 움직였다. 세계가 이루어진 후에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고 다시 보기도 힘 든 일이 비나간 북쪽의 이름 없는 황무지에서 펼쳐졌다. 안타깝게도 그곳은 상당히 황량한 지대였기에 그 장관을 보는 자들은 그것에 참 여하고 있는 자들뿐이었다. 소리와 말리는 약 1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한 채 신경을 혹사 시키는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소리는 말리를 먹구름 안쪽으로 끌어 들이려 했다. 말리는 그에 응하지 않았다. 소리가 비구름 속으로 들 어갈 지경이 되자 말리는 허공에 멈춰서버렸다. 상대가 멈춰선 것을 본 소리는 폭우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비가 내리는 영역 바깥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자 말리는 소리와의 거리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나란 히 움직였다. 폭포 바로 곁에서 두 마리 새가 추격전을 벌이는 것 같 았다. 소리는 상대의 실수를 끌어내기 위한 교묘한 이동을 감행했다. 모든 역사에서 위대한 장수로 기록될 엘시 에더리는 설령 부하가 사람이 아니라도 능숙하게 지휘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대장군은 정우의 곁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말리를 바라보며 정우에게 짤막짤막하게 말했 고 그 때마다 소리는 오랫동안 훈련받은 군인의 기민함을 보여주듯 정묘하게 움직였다. 하늘치 소리가 단 하나의 생물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전술가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조련사의 능력에 해당하는 것인지 도 모른다. 하지만 하늘치는 하나의 생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세계였 다. 그것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능력은 수백만의 군대를 다루는 전 술가의 그것이 분명했다. 엘시의 시도는 몇 번인나 성공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말 리의, 혹은 황제의 자제력이나 통찰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관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비구름 속에 빠져들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말리는 여지없이 방향을 바꿔 비구름에서 멀어졌다. 그러면 소리는 다시 처음부터 같은 움직임을 반복했다. 하지만 시간은 명백히 말리의 편이었다. 비록 가까이서 본 비구름이 대단한 양의 봄비를 뿌리고 있긴 했지만 말리는 비가 그치고 구름이 사라질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 근방의 기후에 해박한 이는 없었지만 그 비가 여름 장마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분명했다. 머지 않아 비는 그칠 것이다. 소리 위의 사람들은 말못할 조바심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들은 대장군에게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묻고 싶었지만 또한 감히 대장군을 방해하지 도 못했다. 그런 대장군의 모습을 보던 사람들 중엔 지멘의 곁에 있던 아실도 있었다. 아실은 고통스러운 눈으로 말리와 대장군을 번갈아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아실은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먼 옛날부터 그녀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지멘의 눈이 거기에 있었다. "지멘. 황제를 죽이고 제 증오를 되찾겠다고 했죠." "죽이는 것이 해결책이라면, 그렇게 한다." "제 증오를 되찾을 수 있다면 세상이 망해도 된다는 건가요? 600조 가까운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사랑도 아니고 동정심도 아니고…… 증 오를?" 검은 레콘은 먹구름을 등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미래는 죽은 사람이 정해놓았고, 내 과거는 내가 죽일 사람에 의해 되새겨지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아실은 숨소리를 낮추었다. 지멘이 말했다. "기원이 없는 나날이었다. 기원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원할 시 간이 없어서. 움직임뿐이었지. 매일 제국군에게 쫓기고 한달에 대여 섯 도시를 떠돌고 반년에 한 번씩 황제의 세금수송대를 습격하고 3년 에 한 번 꼴로 지붕 밑에서 자곤 하던 어느 때, 나는 물구덩이와 어 둠에 붙잡혀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아실은 그 밤을 기억했다. 얼어붙은 거대한 레콘과 비틀거리는 작은 인간이 밧줄로 서로를 묶은 채 신음하며 어둠을 가로지르는 밤이었 다. "너는 물구덩이를 증오하고 붙잡힌 자신의 상황을 증오하고 무기력 한 나를 증오했다. 그 증오로 너는 나를 이끌고 거기를 벗어났다." "증오가…… 그건 증오가……" "증오였어. 너였어." "내 소망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황제와 제국을 증오했지." 아실은 신음하며 죽어가던 즈라더를 떠올렸다. 즈라더는 그녀에게 자신과 황제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질문했고 아실은 즈라더에게 싫어 하는 것과 증오하는 것의 차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황제를 증오했 다. 지멘이 말했다. "너는 분리주의의 숨은 전제가 사람들이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정말 자신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러려면 사람들 은 서로를 증오해야 할 것 같아. 왜 그러냐고 묻지는 마. 내가 느끼 는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냥 레콘의 감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속편할지도 모르겠다." 지멘은 자신에게 짓눌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망치를 힘있게 부 여잡았다. "나는 네 증오를 되찾을 거야. 반드시." "반드시?" "그래." 아실은 지멘을 바라보았다. 지멘이 그녀에게 되찾아주고 싶어하는 증오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실은 지멘을 보며 생각했다. '도와주고 싶어요.' 먹구름 사이에서 우르르릉 하는 천둥이 들려왔다. 방향성 없는 벼락 의 번득임도 보이는 것 같다. 그들은 폭풍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비구 름 옆을 지나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구름의 포효가 멀리 서 들려왔을 때 아실이 몸을 돌렸다. 그녀는 말리를 흘끔 바라보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지멘이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아실은 뒤도 돌아보 지 않은 채 손을 들어 흔들었다. 따라오지 말라는 손짓이었다. 지멘 은 걸음을 멈추고 아실의 모습을 보았다. 아실은 어떤 레콘에게 다가 가고 있었다. 거대한 조간을 들고 불편한 표정으로 먹구름을 곁눈질 하는 그 레콘은 야리키였다. 야리키에게 다가간 아실은 무엇인가를 빠르게 말했다. 조금 후 야리 키의 몸이 확 부푸는 것을 보았을 때 지멘은 망치를 집어들고 달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야리키의 반응이 분노가 아니라 경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은 두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열성적으로 말했다. 그녀 를 내려다보던 야리키의 몸에서 깃털이 수그러들었다. 야리키는 좀 더 가까이서 듣고 싶다는 듯 무릎을 굽히고 아실에게 집중했다. 먼 거리였지만 지멘은 야리키의 눈이 황홀함을 닮은 빛으로 반짝이는 것 을 보았다. 조금 후 야리키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실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실은 그 모습을 보며 지 멘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왔다. 지멘은 아실을 향해 마주 걸어갔다. 그래서 지멘은 야리키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지 못했다. 사실 눈을 그쪽으로 향했다 해도 그것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야리키는 정우와 엘시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숙 원을 이루어줄지도 모르는 규리하공을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따라온 레콘에게 별다른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다. 엘시는 말리를 주시하며 빠르게 말하고 있었고 정우는 그 말을 소리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야리키가 말했다. "잠깐 쉬어, 정우. 엘시." 정우와 엘시는 모두 의아함을 담은 얼굴로 야리키를 보았다. 야리키 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들 옆을 지나가 말리가 잘 보이는 곳에 섰다. 정우가 말했다. "야리키?" "레콘의 감인가 보지." "예?" "너를 따라다니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됐 군." 정우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야리키는 설명해주지 않 았다. 말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는 아실에게 들은 말을 한 마디씩 속으로 되뇌었다. '환상은 상상한 자와, 그리고 하늘치 자체에 영향을 준다.' 야리키, 불가능한 숙원에 도전하는 레콘, 그것이 자기 숙원이기에 도전하는 레콘, 그리고 이미 불가능과 가능의 구분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게 된 레콘. 그래서, 놀랍도록 희열은 없다. 야리키는 그저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상황을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야리키는 눈을 감았고, 그 안쪽에서 누군가를 찾았다. 곧 그녀가 나 타났다. 여러 가지 의미로 굉장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입매를 살짝 꿈틀거리며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건 하늘낚시터라는 거죠?' '세레지. 나는 멍청했다. 하늘낚시터는 이미 있었다.' 눈꺼풀 속의 세레지 파림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악의 세력을 물리친 것 같군요?' 야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그래요?' '이제 내 세상은 참 재미있어질 것 같으니까.' 세레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보다 더 굉장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야리키는 그것이 세레지를 약오르게 하지 않을 까 잠깐 걱정했다. 완전한 기우다. 남성적인 우둔함이라고나 할까. 세레지는 씩 웃었다. 상쾌한 웃음이다. '보여줘요!' 야리키는 눈을 떴다. 언젠가 정우는 야리키가 이리저리 가늠해보기에 앞서 무턱대고 시작 부터 하는 성격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 의심은 정확했다. 자신이 하 려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깃털 반 조각만큼도 하지 않은 채, 야리키는 낚싯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빈 손으로 선 야리키는 말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필요한 것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자신과, 하늘치 말리에게 영향을 줄 환상조간을. 그것의 자세한 모양은 그것을 상상한 야리키도 설명할 수 없었다. 양자의 무게 차이는 명백했고 그래서 야리키는 무의식적으로 그 낚싯 대를 소리의 일부로 만들었다. 대강 준비가 끝나자마자 야리키는 무 턱대고 낚시를 던졌다. "물-어-라-!" 계명성에 놀란 이들이 야리키를 보다가 말리를 보았다. 말리의 모습 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어이없어 하던 사람들이 야리키에게 질문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까지는. 먼저 말리가, 그리고 소리가 크게 전율했다. 제이어는 으르릉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헨로가의 어떤 왕을 만 난 이래로 그가 방문한 수십 번의 시대에서 제이어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소리의 등은 텅텅 비어있었다. 제이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름 모를 헨로가 사용했던 것처럼 하늘치는 훌륭한 도구다. 분명히 그것을 다루는 방법이 많이 전파되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불 구하고 소리의 등은 언제나 황무지였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제이어는 다시 반사적으로 다음 시기로 떠났다. 비어있었다. 또 떠났다. 비어있었다. 제이어는 시간 위를 질 주했다. 밤일 때도 있고 낮일 때도 있다. 혹독한 추위가 덮칠 때도 있고 무서운 더위가 덮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저게 뭐지?' 제이어는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려 했다. 하늘치의 텅 빈 등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도약하던 중이었기에 제이 어는 자기도 모르게 그 시대에서 그냥 뛰쳐나왔다. 다음 시대에 도착 했을 때야 비로소 제이어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고는 화가 나서 고함을 빽 질렀다. "너는 누구기에 그****가?" 제이어는 충격 속에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한낮이었고 계절 은 가을 쯤 되는 것 같았으며, 어떤 레콘이 홀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어는 반가움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헨로가의 어떤 왕처럼 그 레콘도 기묘한 생경함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덜했다. 자신이 좀 취한 채 어떤 레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의 느낌이었다. 제이어는 다급하게 말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이해해주십시오. 지금이 몇 년입니 까?" "네 말이 이상하게 들리***금은 아라짓력 46년이다만." 말의 불분명함도 이전보다 덜했다. 헨로가의 왕을 만난 것이 63년이 나 163년일지도 모르는 시기였음을, 그리고 엘시와 이레를 만나서 아 무 어려움 없이 대화했을 때는 33년이었음을 떠올린 제이어는 당장 어떤 가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더 먼 미래로 가면 불분명함이 더 심 화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은 제이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미 래 어느 때로도 갈 수 있지만 그가 도착한 미래를 그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제이어가 당황해할 때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레콘이 부리 를 열었다. "잠깐. 그 하얀 옷차림********는 제이어 솔한인가? 아아, 그래. 네 ***들었다." "예? 제 이야기를 들었단 말입니까?" "너는 대장군 엘시 에더리를 만났***고정시켜둔 살인기사에 대한 이 야기를*****다. 흐음. 네 말의 불분명함은 추억에**이끼 같은 건가?" "저는 살인기사 제이어가 맞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레콘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점잖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을***의 대화에 끼여드는 불분명함을 보건대 네가******은 네가 미래를 아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너는 과 거에 고정된******" 제이어는 멍한 눈으로 레콘을 바라보았다. 그 레콘은 제이어가 미래 를 만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사실인 것 같다는 점이다. "말씀하신 것이 맞는 것 같군요." 그 레콘은 동정심처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만난 레콘 중에 이토록 점잖은 레콘이 있었는지 궁 금해질 정도였다. 레콘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자신에게 금지된 미래에 대해 제이어는 다시 호기심을 느꼈다. "요즘 세상이 어떤지 정도는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레콘은 품위있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당신이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주는 식은 어떻습 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니 내게 어떤 정보 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요하다면 중요하니까. 그것은 의미가***" 불분명함은 덜했지만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제이어는 목마름을 담은 시선으로 레콘을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목소리 가 들려왔다. "폐하! 역시 여기 계셨**" 레콘이 당혹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제이어는 깜짝 놀라서 레콘을 바 라보았다. 폐하로 불린다면 이 레콘이 왕이란 말인가? 제이어는 고함 을 지른 사람을 보려 했지만 레콘의 큰 체구 때문에 그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체격 좋은 도깨비 남자가 등 뒤에 딱정벌레를 놓아둔 채 걸어오고 있었다. 표정이나 인상이 불분명하긴 했지만 그 도깨비는 못마땅한 심정인 것 같았다. 그는 따지듯이 말했다. "*****들이 이 사실을 알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무도 하늘치에 올 라올 수 없다고******긴 저도 올라오긴 왔습니다만 폐하께서**누구십 니까?" 마지막 질문은 제이어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이어는 그 남자의 말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제이어는 왜 자 신이 소리 위에서 사람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인지 깨달았다. 어떤 자 들이 하늘치에 사람이 오르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63년이 나 163년에는 그 금지가 사라지는 걸까? 제이어는 그렇지 않다고 생 각했다. 그 헨로의 적들은 도로사용료로 헨로를 막으려 했다. 그렇다 면 그 왕의 적들은 헨로가 하늘치를 이용할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는 뜻이 된다. 그 왕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사용하리라 생각할 수 없었 던 도구를 과감하게 사용하여 적들을 물리치려 시도한 것이다. 그러 고보니 그의 앞에 있는 레콘 왕도 금지를 어기고 하늘치에 올라와 있 었다. 제이어는 그 자들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왕들은 그들과 알 력을 벌일 만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재빠른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 레콘 왕에게 포착된 모양이다. 레콘은 안타깝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새로 나타난 남자에게 조용하라 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레콘은 제이어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영민한 사람이****많은 것을 깨달은 것 같군." "제가 보고 있는 분이 왕이십니까?" 레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침착하게 명령했다. "떠나라. 제이어. 조용한 곳에서***하고 그대의 죽음으로******다." 제이어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쉬운 눈 으로 레콘을 바라보았지만 그 레콘이 절대로 부리를 열지 않을 것임 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목례하고는 도깨비에게도 인사를 건넨 다음 다른 시대로 떠났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제이어는 새벽이나 해가 진 직후인 듯하다고 생 각했다. 계절은 여름인 듯. 그리고 얼마 전에 하늘치에 비가 온 모양 이다. 바닥이 여기저기 젖어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 인한 제이어는 그 박명 속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곤란한 상황이다. 미래로 가면 갈수록 인지하는 것이 불분명해진다. 또 사람들의 하늘치 등정을 막고 있는 어떤 금지가 있다. 그 말은 그 런 금지를 어길 수 있는 몇몇 대범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제이어가 만 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 된다. 먼 미래에는 그런 금지가 사라 질지도 모르지만 그 시대에서 제이어는 아무 것도 제대로 보고 듣지 못할 것이다. 제이어는 레콘 왕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대의 죽음으로 돌아 가는 것이 좋겠다.' 다른 의미일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제이어는 쉽게 그 말을 따를 수 없었다. 좀 덜 젖은 자리를 찾은 제이어는 바닥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어둠은 옅었지만 별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도착한 곳이 어느 시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별들은 낯설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시대에 홀로 앉아 제이어는 익숙한 별들을 바라보았다. 격렬한 진동으로 사람들이 우당탕탕 쓰러졌다. 몸이 공중에 떠올랐 던 정우는 누군가의 품안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몸이 뒤엉키며 쓰러 졌다. 정우는 정신을 수습하여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보았다. 그녀는 엘시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엘시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정우를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논리적 으로 가장 안전한 자세이긴 했지만 정우는 그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 았다. 그녀는 환상으로 자신을 감싸고는 그 환상을 움직였다. 조금 후 정우는 똑바로 선 자세가 되었다. 하늘치의 진동에 따라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안정적인 자세였다. 정우는 멀미가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우의 모습을 본 엘시는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태풍에 휘말린 배 에 탑승한 느낌 속에서 엘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두 사람만 큼 환상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호된 꼴을 당하고 있었다. 소리는 그저 소박한 경련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 때마다 탑승자들은 수십 미터씩 떨어졌다가 다시 수십 미터씩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지상에서 그런 높이를 추락한다면 당연히 죽을 테지 만 소리의 진동 속도는 추락하는 것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그 커다란 몸이 그렇게 빠르게 진동한다면 찢어질지도 모른다. 목이 부러지거나 깨진 흉골이 가슴을 뚫고 뛰쳐나오는 사람은 확실히 없었다. 하지만 모두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환상 으로 자신을 고정시켜둔 엘시나 정우도 진동에 따라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엘시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때 야리키의 외 침이 들려왔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정-우-!" 정우가 야리키를 보았다. 두 사람처럼 바닥에 몸을 고정시켜둔 야리 키가 외쳤다. "정-우-! 내-가-말-리-를-잡-고-있-다-! 뒤-로-잡-아-당-겨-! 그-래 -야-진-동-이-줄-어-든-다-! 이-대-로-놔-두-면-우-리-가-뒤-집-혀 -!" 정우는 부지불식간에 외쳤다. "소리야! 끌어당겨!" 엘시는 이번에야말로 흉골이 피부 밖으로 노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소리는 갑자기 뒤로 홱 움직였다. 몸 속의 피가 한쪽으 로 쏠리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엘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모양이 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한 엘시는 소리가 부르르 떨며 먹구름쪽으로 움 직이고 있음을, 그리고 저편에 있는 말리가 질질 끌려오는 것처럼 움 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야리키를 다시 보았고 그 레콘 조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자 받아들이는 것은 미친 후로 미루고 싶은 가설이 떠올랐다. 엘시는 감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정우 는 명쾌하리만큼 간단한 문장으로 그 질문을 꺼냈다. "낚았어요?" 엘시는 이보다 더 완벽한 질문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야리키 또한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하늘을 향해 크게 웃고는 역시 간단 한 말로 대답했다. "낚았다!" 정우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엘시를 돌아보았다. 엘시는 그냥 고 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자신의 몸짓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정우는 그 뜻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 곤 다시 야리키를 보았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는 모진 진동. 정신 나간 바람들이 웅웅 소리를 내며 모든 방향을 향해 치달았다. 소리는 온힘을 다해 날으려 했다. 그 몸 위에 서있는 자들은 발 아래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 에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산을 무너뜨리고 계곡을 메워버릴 힘을 퍼붓고 있었지만 환상 낚싯줄로 연결된 또 하나의 하늘치가 소 리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은 느렸다. 때론 둘의 힘이 완전히 상쇄되어 소리가 멈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야리키가 무슨 짓을 했고 그러면 말리가 진저리를 치며 뒤로 튕겨졌다. 잠깐 동안 말리는 통제를 잃은 것처럼 흐느적거렸고 소리 는 그 틈을 타 다시 물러났다. 도저히 취미활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는 규모이긴 하지만 야리키는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는 낚시 기 술로 말리의 저항을 분쇄하고 있었다. 소리와 말리의 힘에 어느 정도 의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하늘치가 먹구름 쪽을 향해 느 릿느릿 움직이는 것은 전적으로 야리키의 기술 덕분인 것 같았다. 그렇다. 두 하늘치는 구름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천둥소리가 더 가깝게 들려왔고 벽력이 내뿜는 섬광도 더 예리해졌다. 뒤를 돌아본 사람들은 어슴푸레하게 변한 풍경을 보았다. 아직 빗줄기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비의 장막 때문에 그 뒤의 풍경은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대지에 대한 잔학한 증오처럼 퍼부어지는 벼락들. 그러 나 어떤 벼락들은 구름을 향해 땅에서 치솟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폭풍 아래에 있는 땅이 과연 무사할지 의심스러웠다. 각 각이 세계라 할 수 있는 하늘치들이 이토록 얼토당토하지 않은 줄다 리기를 하는 모습에 하늘이 격분한 것 같았다. '세계를 부수는 장난 질은 다른 곳에 가서 하라!' 어쩌면 하늘은 그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 고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자기 보존의 감각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 다. 그들이 보고 있고 참여하고 있는 상황은 사람이 보고 겪어야 하 는 일의 한계를 오래 전에 넘어버린 것이었다. 한계 너머에 있는 것 은 광기와 몰이성, 그리고 자기 소멸. 많은 병사들이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하얗게 변한 얼굴로 졸도한 자들도 많았다. 찌푸린 눈으로 탑승자의 면면을 확인하던 엘시는 레콘들에 주의했다. 몇몇 특이한 레콘들이 보였다. 아트밀은 뒤쪽에 있는 폭우의 장막에 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타오르는 눈으로 말리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멘은 침착하게 뒤를 흘끔거리긴 했지만 그것은 기대하는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나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쵸지 또 한 두려움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그가 느끼는 것은 야리키의 위업에 대한 순수한 놀라움인 듯했다. 주테카와 그을린발은 정상적인 레콘의 반응으로 취급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즉 완전히 비정상 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펄쩍펄쩍 뛰고 모든 곳을 보려 하고 그와 동시에 소리의 등을 파헤칠 것처럼 굴며 광기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 는 주테카와 달리 그을린발은 론솔피의 참견 때문에 아직 이성을 유 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론솔피는 무슨 말을 자꾸 반복하며 야리키를 가리켰다. 그에 대해 그을린발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애써 돌려주 는 것 같았다. 그 때 갑자기 야리키의 비명이 들려왔다. "망할 녀석이!" 동시에 맹렬한 진동이 소리의 탑승자들을 휩쓸었다. 탈것이 급출발 할 때의 충격이었다. 질식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엘시는 얼굴이 터 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어루만진 엘시는 입가에서 진득진득 한 피를 느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에 귀를 먹을 것 같다. 하지 만 그 둔한 소음 속에서도 야리키의 날카로운 외침은 들려왔다. "돌진한다! 물러나! 물-러-나-!" 엘시는 흐릿한 눈으로 말리 쪽을 보았다. 말리와 황제는 더 이상 야 리키의 기술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했다. 혹은 폭풍우 속에 들어가기 전에 소리를 붙잡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리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을 넘어선 압박감 이 열풍처럼 몸을 휩쓸었다. 엘시는 정우에게 빨리 도망치라는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정우는 이미 외치고 있었다. 엘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에겐 뜻모를 새울음소리 비슷하게 들렸다. 하지만 소리는 정우의 말을 이해했고 그대로 행동했다. 소리는 지금 까지 얽매여있던 것이 분하다는 듯 무서운 속도로 비구름을 향해 물 러났다. 엘시는 피냄새와 물냄새를 맡았다. 습기 어린 공기의 습격. 그리고 갑자기 세상이 캄캄하게 변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몸을 때 리는 것 같았다. 엘시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물에 젖어 있었 다. 엘시는 그제서야 소리의 등을 때리는 빗소리를, 그 다급한 소리 를 들었다. 그들은 폭우 속에 들어와 있었다. 하늘은 번개가 일렁거리는 구름으 로 가려졌고 검은 빗줄기 때문에 땅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사라진 곳에 벼락과 천둥, 그리고 억수 같은 빗줄기만 남아 광란하고 있었 다. 엘시는 물에 젖은 눈 주위를 닦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말리가 있 던 곳에는 시커먼 빗줄기만이 보였다. 시간이 멎은 것 같은 순간 속 에서 엘시는 검은 세상을 바라보았다. 엘시는 혹 말리가 되돌아간 것 이 아닐까 의심했다. 누군가가 외쳤다. "온다!" 폭우의 검은 장막을 꿰뚫고 말리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났다. 무도하기까지 한 출현이다. 엘시는 숨을 멈춘 채 그 모습을 바라보 았다. 빗줄기뿐이던 세상의 한 부분이 통째로 사라지며 그곳에 나타 난 하늘치는 그 무게로 이성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비명이 들려왔을 때 엘시는 그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비명을 지른 것은 아트밀이었다. 하지만 아트밀은 말리의 모습에 위 축되어 비명을 지른 것은 아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기쁨 때문에 포 효했다. 엘시나 다른 인간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눈이 좋은 아트밀은 사 라티본 부대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쏟아지는 빗속에 서 우왕좌왕의 고조 할아버지뻘쯤 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엘시의 계획대로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완전한 혼란에 빠져 있었 다. 그 경우 많은 수의 레콘은 더 큰 재난을 의미할 뿐이다. 레콘들 은 사방팔방으로 달리고 서로 부딪쳤고 가지고 있는 무기로 용의 뿌 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어떤 레콘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망각 한 채 달리다가 빗줄기뿐인 허공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사라티본 부 대는 와해되기 직전이었다. 아트밀이 무엇을 보고 기뻐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엘시에겐 뚜렷한 계획이 있었다. 엘시는 정우를 돌아보았다. "소리를 멈추십시오." 정우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낭패한 얼굴로 엘시를 바라보았 다. 지금 소리가 정지하면 쇄도하는 말리는 그대로 소리를 들이받게 될 것이다. 엘시는 다시 말했다. "부탁합니다. 이제 끝을 내야 합니다. 천천히 속도를 늦추십시오." 정우는 잠시 후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소리. 마지막 부탁이야. 이제 다시는 부탁하지 않을게. 천천히 멈 춰." 문득 엘시는 하늘치에게 감정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있다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 휘해볼 시간은 없었다. 감정이 없는 것인지 그렇잖으면 결단이 빠른 것인지 모르지만 소리는 정우의 부탁이 끝나자마자 속도를 낮추었다. 말리가 불쑥 다가오는 것을 본 소리의 탑승자들은 충돌을 기다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잠시 후 말리 또한 속도를 늦추었다. 그들은 서로를 쫓고 쫓기며 빗속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여나갔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깨달은 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빠르디빠른 빗소리만이 들려 왔다. 조금 후 두 하늘치가 충돌했다. 하지만 하늘치의 규모에서 그것은 충돌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저 접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느낀 것은 몸이 한 번 비틀하는 정도의 충격이었다. 두 하늘치는 서로 몸을 맞댄 채 비 내리는 하늘에 정지했다. 쏴아아아…… 야리키는 뿌리들이 마치 두 하늘치 사이에 길을 놓듯 뻗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뒤로 성큼성큼 달렸다. 물이 철벅거렸지만 야리키는 그 것을 깨닫지 못했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진부한 표현은 야리키를 위 해 오래 전에 개발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 순간 야리 키가 약간 돌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야리키는 이제 완벽한 낚시꾼이다. 그리고 그 어떤 조 사도 그 앞에서 대물을 자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야리키는 씩 웃으 며 다른 자들과 합류하기 위해 달렸다. 그의 등 뒤에서 사나운 계명 성이 들려왔을 때도 야리키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저-들-을-죽-여-라-! 그-러-면-너-희-들-을-구-해-주-겠-다-!" 소리에 있던 다른 탑승자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 지멘은 아실을 바 라보았다. 아실은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으로 얼굴을 적신 채 속삭였다. "저기군요." 아트밀은 철극을 매만지다가 파라말을 돌아보았다. 아무 말 없이 파 라말을 보던 아트밀은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파라말은 그 손바닥 을 보다가 얼굴을 훔치고는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거기에 댔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에 사로잡혀 있던 론솔피는 비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마침내 황제에게 도달했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요술쟁이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절망적으로 그을린발에게 말했다. "야리키일까? 하늘치를 낚은 야리키가 요술쟁이일까?" 그을리발은 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몸이 부푸는 것을 억누르느라 정 신이 없었다. 그는 신음하듯 말했다. "몰라. 하지만 저기엔 지금 정신나간 레콘들이 많아. 싸워서 살아남 는 것이 중요하다." "어, 혹시 저기에 요술쟁이가 있다면?" "그만둬. 도리가 없어." 그을린발은 몸을 돌려 발광하는 주테카를 부여잡았다. 주테카는 그 의 손을 뿌리치고 허공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을린발이 비틀거릴 때 그를 돕는 손길이 나타났다. 반대쪽에서 주테카를 부여잡은 쵸지 는 주테카의 머리에 대고 계명성을 내질렀다. "주-테-카-! 안-싸-우-면-죽-는-다-!" 주테카의 난동이 멈췄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짓누른 채 쵸지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쵸지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주테카의 팔 하나를 붙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니 싸우자고." "싸워? 왜?" 쵸지는 자신이 잘못된 이유를 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이유를 댔다. "정의를 위해." 주테카의 눈에 불꽃이 피어났다. 그 모습을 보자 그을린발과 론솔피 도 조금 침착하게 되었다. 쵸지의 말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어이가 좀 없었기 때문이지만. 주테카는 물에 젖은 주먹을 들어올리곤 그것을 바라보았다. "정의를 위해?" "그래." 주테카는 철저를 움켜쥐었다. 엘시는 말리에서 계명성이 들려온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탈해 는 개밥바라기를 꽉 움켜쥔 채 정우의 뒤에 바싹 붙어섰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굴도하 남작 부부, 그리고 31 중대의 병사들이 몰려서 있었다. 상식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은 분명 엘시의 주위다. 조금 후 엘시가 고개를 돌려 정우를 바라보았다.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군요." "그렇군요." "그 곳을 목표로 삼아야겠습니다." 엘시는 검을 뽑아들었다. =============================================================== 바둑에 관심 없는 분들께 : 바둑용어로 장생은 패의 일종을 말합니 다. 자살패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장생이 나타날 경우 한쪽이 양보하 지 않으면 영원히 판이 끝나지 않기에 무승부 처리합니다. 장생 외에 만년패나 삼패, 순환패 등도 그러합니다.(중국식 규칙이나 대만식 규 칙에서는 좀 다릅니다.)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41. 장생 (3) | 2004·12·23 07:57 | HIT : 382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41-3 관련자료:없음 [4944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2-23 06:50 조회:29 피를 마시는 새 41. 장생 - 3 말리의 등 위에서 힌치오는 떨리는 눈으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레 콘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가 아닐까. 하늘치의 등이므로 주위 는 모두 낭떠러지, 도망칠 곳이 없다. 물론 바닥을 파헤칠 수도 없 다. 그런 상황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사라티본 부대가 한 무리 의 정신 나간 난동꾼들로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힌치오는 한 때 뭄 토였지만 지금은 이라세오날인 초록빛 물체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잎사귀 비슷한 무엇인가를 흔들며 그것은 위압적으로 말했 다. "팔리탐. 레콘들이 엘시를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라. 그 외에는 재량 껏 처리하라." 팔리탐 지소어의 겉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레이헬 라보인 자가 몸으 로 난처함을 드러냈다. 힌치오는 참을 수 없는 기분으로 말했다. "잠깐! 이라세오날. 우리는……" 그 물체는 힌치오의 말을 끊었다. "엘시만 데려오면 폭우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스카리. 따라오라." 그 물건은 말리를 뒤덮고 있는 숲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스카리 빌 파는 정신나간 레콘들보다는 차라리 두억시니 비슷한 물체가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역력히 드러나는 얼굴로 황제의 뒤를 따랐다. 크고 작 고, 해괴하고 정상적인 두 존재가 물을 철벅거리며 멀어지자 곧 숲이 그들의 모습을 삼켰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힌 치오는 바닥을 뒤덮고 주변에 정신분열적인 숲을 만들고 있던 뿌리들 이 조금씩 움직이며 그들이 걸어간 자리를 감추는 것을 보았다. 소름 끼친다고 생각해야겠지만 이미 그에겐 놀랄 기운도 없었다. 힌치오는 팔리탐을 돌아보았다. 레이헬 라보 태위는 고민하다가 지금 같은 순간이라면 팔리탐이 레 콘들을 통솔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태위와 팔리탐이 자리를 바꿨다. 팔리탐은 목도한 상황에 놀라 몸이 굳었다. 태위가 그의 입 을 장악하여 상황을 빠르게 속삭여주었다. "하늘치 위이고 비가 오고 있네. 레콘들이 날뛰고 있어. 그리고 적 이 오고 있어. 레콘들을 통솔하여 그들을 막게. 단 적들 중 대장군 엘시 에더리는 안전하게 보호해야해." 힌치오가 보기에 팔리탐은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을 웅얼거리는 것 같았다. 팔리탐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힘겨운 의무에 대해 암담해하 며 힌치오와 레콘들을 둘러보았다. 그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레콘들은 자기파괴적인 광태를 보이고 있 었다. 힌치오와 그 주변의 몇몇 레콘들만이 정상적인 - 폭우라는 환 경적인 측면을 놓고 본다면 오히려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 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팔리탐은 왜 힌치오가 모든 깃털이 흠뻑 젖어드는 이 빗속에서 폭주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팔리탐 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구새먹은 힌치오일 가능성에 유의하며 조 심스럽게 말했다. "힌치오. 나와 레콘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도울 준비가 되었소?" 힌치오는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비에 젖은 그 레콘은 조금 전 시력을 얻은 사람처럼 눈을 껌뻑거리며 사물을 주시했다. 힌치오의 시야에서 팔리탐은 다른 것들과 평등한 하나의 물체였다. 기괴한 용 의 숲도, 죽죽 내리긋는 빗물도, 자신의 검도, 꿈틀거리는 하늘도 힌 치오에겐 똑같았다. 하지만 레콘들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 힌치오는 그것에 집중했다. 눈앞에 있는 물건에 초점을 맞추려 애쓰는 신생아 처럼, 복잡한 욕구도 없고 의심이나 기쁨도 없이 그저 똑바로 집중하 는 눈길. "내-말-을-들-어-라-!" 바위도 고개를 들어 관심을 보일 것 같은 계명성이 숲을 관통했다. 힌치오 곁에 있던 비정상적인 레콘들과 정상적으로 광란하던 레콘들 일부가 힌치오를 돌아보았다. 힌치오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가슴을 쾅 쾅 두드렸다. "여-기-는-대-피-소-다-!" 비를 만난 레콘들이 명백히 관심을 둘 이야기였다. 그래서 레콘들은 그렇게 했다. 힌치오는 설명했다. "빠져 죽지 않아! 제기랄, 우리는 떨어져 죽을 것을 걱정할 높이에 있다. 여기는 대피소야! 하늘에서 누가 익사하냐? 하늘에서 익사할 수가 있냐? 여기서는 절대로 빠져 죽지 않는단 말이다! 여기는 완벽 한 대피소라고!" 팔리탐은 깜짝 놀라면서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대피소는 사실 상 비를 피하는 것이 목적이지 물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은 아 니다. '하늘이니까 침몰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대피소다'는 논 리는 모순이다. 하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힌치오의 말을 반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피소다, 대피소. 빠져 죽지 않는다. 여 기는 안전하다! 레콘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는 것을 듣던 힌치오는 그 제서야 팔리탐에게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되어 있길 바라." 팔리탐은 왜 힌치오가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져들지 않은 것인지 깨 달았다. 힌치오에겐 돌봐주고 싶은 빌어먹을 레콘들이 있었다. 그들 의 본성을 억압하고 뒤틀어서라도. 그래서 힌치오는 자신의 본성까지 도 뒤틀었다. 팔리탐은 가슴을 에는 온갖 말들을 그곳에 내버려두었 다. 대신 그는 검을 뽑아들었다. "적은 어느 쪽에?" 힌치오는 부리를 탁 부딪치고는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는 이쑤시개 를 어깨에 건 채 달렸다. 팔리탐이 그 뒤를 따랐고 뒤이어 비정상적 인 레콘들이 따랐다. 그 즈음 비정상적인 레콘은 상당히 증가해 있었 다. 하나둘 움직이던 흐름이 곧 열 명, 스무 명으로 늘어났다. 물론 그 중에는 도피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저 다른 사람들을 따라 움직 이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보조를 맞추어 달리며 그런 자들도 공포를 조금씩 잊을 수 있었다. 물론 행복한 광경은 어디에도 없다. 공기가 차갑고 축축하다. 작은 언덕 같은 거대한 뿌리가 비에 젖어 검게 번들거렸다. 뿌리가 서로 얽혀 웅덩이 같은 것을 이룬 곳에는 물구덩이가 나타나 빗물에 후드득 들끓었다. 조그마한 폭포 같은 것 이 나타난 곳도 있었다. 복잡한 용의 구조를 따라 흐르다 어쩌다가 모인 물줄기들이 콸콸 흘러내렸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끊임없이 떨 어지는 회색 빗줄기.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숲의 상부 구조는 빗 물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쪽에서는 물 안개가 자욱이 피어날 지경이었다. 그 안개의 일부는 흥분한 레콘들 이 내뿜는 날숨이다. 레콘들을 이끌고 달리면서 힌치오는 만일 달리 기를 멈추면 다시는 달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들 은 모두 멈춰서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혼란 속에 빠질 것이다. 떨어지고 흐르고 튀어오르는 물의 악몽 속에서. 하지만 힌치오는 멈춰야 했다. 앞쪽에 거대한 뿌리가 있었다. 절벽을 보는 듯한 크기였고 레콘의 힘으로도 뛰어오르기 쉽지 않은 높이였다. 수많은 레콘이 동시에 도 약한다면 사고가 생길 거라 생각한 힌치오는 방향을 바꾸려 했다. 그 런데 그 순간 젖은 암흑이 그 뿌리 위에 나타나 도전의 외침을 내뿜 었다. 계명성이 나무를 뒤흔들어 고여있던 물들을 비산시켰다. 빗속을 달 려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은 힌치오 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의 뒤편에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지르는 레콘도 있었다. 부하들에게 공황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힌 치오는 그 암흑을 향해 냅다 고함을 질렀다. "뭐냐!" 그것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검은 레콘으로 바뀌었 다. 힌치오는 그것이 황제사냥꾼 지멘임을 알아보았다. 퍼붓는 빗속에서 지멘의 검은 깃털은 몸에 달라붙어 아래로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벼슬과 부리, 팔뚝, 그리고 비스듬히 든 망치에서 물 을 뚝뚝 떨어뜨리며 황제사냥꾼은 힌치오를 노려보았다. 힌치오는 손 바닥으로 젖은 부리를 훑어 내리고는 옆으로 물을 홱 뿌렸다. "나늬는 잘 있냐?" 지멘은 무슨 말인가 하다가 쥐딤에서 불리던 아실의 별명을 떠올렸 다. 힌치오는 쥐딤에 있었다. 지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실을 위해 왔다." "무슨 말이지?" "황제는 어디 있나? 말을 하는 황제 말이다." 힌치오는 부하들을 의식하여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줏대없는 자식." 지멘은 고개를 갸웃했다. 힌치오가 설명했다. "황제를 죽이는 것이 숙원이니 설치더니 어느 순간 마음을 바꿔 황 제를 도왔어. 그런데 이젠 또 저쪽에 붙었군. 도대체 뭐 하는 물건이 냐, 너는?" 지멘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황제는 어디 있나?" "알아서 뭐하려고? 죽을 텐데." 지멘은 힌치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힌치오 또한 시원 한 미소를 지었다. 물보라를 폭발시키며 두 레콘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도약했다. 앉아서 별들을 바라보던 제이어가 일어났다. 그는 걸으면서 시간을 바꾸었다. 다른 시간, 같은 장소, 겨울, 밤이 다. 제이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시간, 같은 장소, 초 봄, 오전인 듯하다. 제이어는 계속 걸으며 시간을 바꾸었다. 일출, 일몰, 낮, 밤이 규칙없이 지나갔고 사계절이 뒤죽박죽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몇백 세기인지도 모를 시기를 걸어다니던 제이어는 걸음을 멈췄다. 정면에서 붉은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일출인지도 모르지만 제이 어는 그것이 일몰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리의 왼쪽 나라미를 바라 보는 방향에 서있었다. 그렇다면 소리는 북쪽을 향해 날고 있는 모양 이다. 제이어는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하늘치를 동정했다. 그가 경험한 시 간들은 소리가 경험할 시간에 비하면 찰라에 불과할 것이다. 제이어 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소리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치의 등은 피빛처 럼 붉었다. "너는 고독을 느낄 수 있나?"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제이어는 하늘치를 남긴 첫 번째 선 민종족이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독한 눈 으로 바라보자 하늘치는 고독하게 보였다. 알지도 못하는 시대에 홀 로 서있는 사람처럼 고독한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제이어는 희미하게 웃었다. "죽음은 이런 느낌으로 찾아오는 모양이군. 죽음을 고정시켜둔 자에 게도." "너는 *구냐?" 제이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 인간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얼핏 보아도 스무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제이어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말을 건 인간 남자는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이어는 그가 상당히 인간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을린 몸을 보건대 출생지가 열대 가까운 곳이며 나이는 서른 전후, 큼직한 손이나 떡버 러진 어깨 등을 보니 육체노동자임이 분명하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 다. 그런데 옷차림이 특이했다. 최소한 제이어가 아는 인간의 복식 중에 그런 옷은 없었다. 제이어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 복식이 변화되 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뚜렷이 인간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건대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제이어는 그것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미안합니다만 지금이 몇 년입니까?" 인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어는 아마 질문 내용도, 그리고 말투 도 이상하게 느껴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말했다. "아라짓력 38년**왜 그러지?" 제이어가 죽음을 고정시켜둔 시기로부터 5년 뒤였다. 복식이 그렇게 심각하게 바뀔 시간이 아니었다. 제이어는 태연히 하대를 하는 남자 의 모습을 다시 관찰했다. 귀족인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목수 나 대장장이처럼 보이는 젊은이였다. 퍽이나 가까운 미래지만 그 어 느 때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제이어가 침묵하자 남자는 얼 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하늘치에 언***거지? 여기에 있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제이어는 그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저는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너 나이가 몇이나 되기에 말투가 그 모양이냐?" 남자가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나온 말 은 제이어를 놀라게 했다. "그럼 남자에게 공대라도 하라는***도 남자지. 그렇군. 네겐 그렇게 보이겠군." 제이어는 앞에 있는 인간이 사실은 인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제이어 는 이상하게 보였던 의복이 왜 그렇게 보인 건지도 깨달았다. 그것은 시련의 나가들이 입는 나가의 고풍스러운 옷이었다. "군령자, 그리고 나가 여성이시군요." "네 실수를 용서하****는 나가다." 그리고 아마도 최근에 군령자가 된 모양이고. 제이어는 그렇게 판단 했다. 아직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군령자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그런데 네 말이 왜 그렇**리는 거지? 말을 더듬는 것 같지도 않은 데?" "설명하자면 깁니다. 그리고 사실 설명할 자신도 없고요. 그냥 제 말이 당신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는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 니다." 남자는 미심쩍은 얼굴로 손을 허리쪽으로 가져갔다. 그제서야 제이 어는 남자가 허리에 사이커를 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춤하는 제이어에게 남자가 날카롭게 말했다. "네 정체를 신뢰할 수 없군. 우***제 폐하께 가는 중이다. 잡인을 이곳에 둘 수 없다." "황제? 치천제?" 그 질문은 어쩐지 남자의 의심을 더욱 커지게 만든 모양이다. 남자 는 이제 명백한 불신을 드러내었다. "너는 누구냐? 산 사람***냐? 언젯적 이야기를…… 제이어 솔한! 유 령이?" 남자는 반사적으로 사이커를 뽑아들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제이어는 두 손을 내밀며 설명하려 했지만 남 자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곧장 사이커를 휘둘렀다. 제이어는 속 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다른 시간으로 옮겨갔다. 오래 전 지멘을 추적하기로 했을 때 엘시는 무작위로 한가한 레콘을 모은 것은 아니다. 대장군은 그 어려운 임무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춘 자들을 선별했다. 땅에 발을 딛지 않는 생명체의 등 위에, 세상에 둘 도 없는 식물뿌리들이 미궁을 만들고 있고 차가운 빗줄기가 쏟아붓듯 떨어지는 그 전장에서 그 레콘들은 엘시가 왜 그들을 선택했는지를 증명해보였다.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준 것은 대장군만이 그 자질을 알아본 왕벼슬 쵸지였다. 그가 가장 무시무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가장 의외 였다 할 것이다. 신부탐색자이면서도 그 존재가 의심스러운 나늬를 찾느라 투쟁의 경험이 적은 쵸지였지만,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을 상대하며 기세를 올리는 쵸지의 모습은 그런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쵸지는 세계 최강의 레콘이 되는 것을 숙원으로 삼기라 도 한 사람처럼 사납게 삼각철봉을 휘둘렀다.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 다. 싸워서 신부를 얻는 레콘의 관습을 놓고 본다면 나늬를 얻기 위 해서도, 그리고 나늬를 지키기 위해서도 가장 강력한 레콘이 되어야 하니까. 쵸지는 이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젖은 벼슬을 펄럭이며 폭 우에 발광하여 날뛰는 레콘들을 거꾸러뜨리는 쵸지의 모습에는 경쾌 함마저 있었다. "나늬는 있어! 가자, 주테카!" 주테카가 두 팔을 좌우로 던지며 울부짖었다. 쵸지에 비하면 주테카의 나날은 확실히 투쟁의 연속이다. 정의 구현 의 사명으로 가슴을 불태우며 먼지투성이 바람을 벗삼아 온세상을 누 벼온 세월의 끝에서, 그는 이제 가장 큰 정의의 완성에 도전하고 있 었다. 사람에게 통치받을 사람의 권리는 지켜져야 한다. 사람 아닌 것에 의해 사람이 죽는 판국이라면 정의는 한낱 광언에 불과하다. 그 런 일은 결코 좌시할 수 없다. 센범 폭포에 던져져도 수면을 부글부 글 끓이며 타오를 그 일편단심을 일개 폭우가 꺼트릴 수는 없다. 젖 은 깃털을 꼿꼿하게 세워 뭐라 말할 수 없이 흉흉한 모습이 된 주테 카는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레콘을 보며 철저를 집어던졌다. "이것이 정의다!" 핑핑 돌며 날아간 정의가 돌진하던 레콘의 다리를 강타했다. 우지끈 소리가 나며 레콘은 공중제비를 넘었다. 부러진 다리로 경험하는 추 락은 끔찍했다. 레콘은 살벌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주테카는 그쪽 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떨어진 철저를 집어들고는 성큼성큼 걸 어갔다. 주테카가 보기에 사악한 용의 농간에 놀아난 죄밖에 없는 자들의 목 숨을 앗는 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그는 다가오는 모든 레콘을 옆으로 치워놓았고 어떤 레콘의 목숨도 끊지 않았다. 하지만 앞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때려부수겠다는 듯이 물구덩이를 철벅철벅 걸어가는 주테카 의 모습은 사라티본 부대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세상에 정의 가 사라졌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샘솟는 생의 의 지에 전율할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을린발 히베리는 전투의 열기에 자신 을 집어던질 수 없었다. 그가 흥분하면 주변은 죽음의 각축장이 된 다. 물론 무차별학살은 쇄도하는 레콘을 일격에 저지할 정도로 강력 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독특한 전장에는 그을린발의 동료들도 있었 고 그 중에는 연약한 인간들도 있었다. 그을린발은 자신을 최대한 억 제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런 자기 통제는 그을린발에게 새로운 이점 을 제공하기도 했다. 통찰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그을린발은 몸을 어딘가에 세게 부딪치면 그것이 안쪽에서 압력을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을린발은 그것을 시험해보았다. 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곧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레콘 한 명이 철퇴를 엉망진창으로 휘두르며 달려들었 다. 내버려두면 철퇴로 자기 머리를 때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면밀히 관찰한 그을린발은 아무래도 그 머리가 자기 것이 될 것 같다고 생각 했다. 판단을 내린 그을린발은 날아오는 레콘의 철퇴를 요령있게 피 하며 상대방의 몸에 오른쪽 어깨와 팔로 부딪쳤다. 철퇴를 휘두르던 레콘은 숨이 끊어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충돌 부분에서 철침이 뛰쳐나가 그의 몸에 잔뜩 박혔기 때문이 다. 선혈로 젖어드는 자신의 가슴과 복부를 내려다보며 비틀거리는 레콘에게 그을린발은 정성껏 준비한 선물처럼 주먹을 내찔렀다. 레콘 은 통렬한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몸을 펴는 그을린발에게 익숙한 소 리가 들려왔다. "마-다-라-크-리-라-리-!" 그을린발은 맞고함을 질렀다. "히-베-리-테-하-!" 대답이 곧 돌아왔다. 그을린발은 그 대답을 해석해보고는 방향을 결 정했다. 곧 그의 몸이 신속하게 숲 사이로 움직였다. 아트밀은 숲속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대장군이 숲속에서 레콘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지시를 내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트밀은 그 이상한 말을 알지 못했기에 대장군의 지시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그는 혼자서도 용을 찾아내어 사라말의 복수를 끝낼 자신이 있었다. 그가 찾는 것은 대장군이 찾는 것과 마 찬가지로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숲 전체가 용이긴 하지만 아 트밀은 말을 할 수 있는 부분, 숲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따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논리적인 이유는 없지만. 하지만 광대한 용의 숲을 헤맨지 얼마 후 아트밀의 자신감은, 퇴색 하지는 않았지만 인내심과 결합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용의 숲은 광활했다. 물론 지상에는 그보다 더 광대한 영역에 걸쳐 뻗어있는 숲 도 많이 있었지만 수종의 특이함 때문에 용의 숲은 내부의 추적자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것 전체가 단 하나의 생물이기 때문에 숲을 이루고 있는 구조 사이에는 단락이 없었다. 물론 첨단은 많이 있었 다. 여기저기서 가늘어지며 뒤엉키는 뿌리의 끝들이 보였다. 하지만 나무의 가지들이 뿌리쪽으로 향하면 결국엔 다 이어지듯 그 숲의 구 조물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하나하나의 사물을 구분하여 볼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크기의 차이가 심각했다. 가느다 란 것은 그야말로 실뿌리처럼 가늘었다. 하지만 굵은 부분들은 지형 의 일부로 취급될 크기였다. 게다가 그런 복잡함이 바닥에서부터 이 백 미터 이상 되는 높이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평면이 아닌 입 체적인 복잡함을 지니고 있었고 같은 지점이라도 방향이나 높이를 바 꿔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였다. 게다가 힌치오를 곤혹스럽게 했던 물 줄기들이 있었다. 아트밀은 그 물에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함부로 뛰 다가 미끄러지는 문제는 역시 곤혹스러웠다. 참지 못한 아트밀은 고 함을 내질렀다. "이-라-세-오-날-! 어-디-있-나-!" 그 외침은 용을 부르는 대신 레콘들을 불러들였다. 그를 향해 다가 오는 빠르고 무거운 발소리를 들은 아트밀은 벼슬을 부르르 떨고는 그들을 피하려 했다. 그의 목표는 용의 제거였지 레콘들의 학살이 아 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자신이 다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가 까이 다가온 레콘을 본 아트밀은 주춤하며 멈춰섰다. 가까이 온 것은 레콘이 아니라 레콘들이었다. 아트밀은 지멘이 망치 를 휘두르며 양손검을 든 어떤 레콘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양 자는 꽤나 잘 어울리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무기의 차이 때문에 지멘 이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망치는 칼을 상대로 좋은 무기라 하기 어 렵다. 물론 아트밀의 칼은 4미터에 달하는, 칼이라기보다 창에 가까 웠지만 창이라도 해도 망치에게 부담스러운 병기인 것은 마찬가지다. 지멘이 아직 잘 버티고 있는 것은 지독하게 많은 전투경험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주위에는 다른 레콘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레콘들은 싸움에 뛰어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트밀은 고민을 느꼈다. 지멘은 지금까지는 복잡한 지형과 특출한 기민성을 이용하여 다른 레콘들이 싸움에 끼여들지 못하도록 잘 싸우 고 있지만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초조함에 수염볏을 비틀 던 아트밀은 문득 그 양손검이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아 트밀은 그 레콘의 이름을 떠올리고는 철극을 움켜쥐었다. 그는 지형 을 살폈다. 지멘과 그 사이에는 거대한 뿌리들이 양쪽에 있어 병의 입구 같은 지형이 있었다. 마음을 결정한 아트밀은 고함을 냅다 질렀 다. "힌-치-오-!" 힌치오는 이쑤시개를 거칠게 휘둘렀지만 지멘은 그 자리를 벗어나서 다른 레콘들이 없는 방향으로, 즉 아트밀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가려다가 힌치오는 생각을 바꿔 고함이 들려온 쪽을 보았 다. 저편에 철극을 든 체격 좋은 레콘이 보였다. 힌치오는 그가 누군 가 생각하다가 파르바리 계곡을 떠올렸다. "아하, 곡차?" "고추냉이 여단의 아트밀 교위다." "오래간만이군. 교위." 아트밀은 지멘을 슬쩍 보고는 부리를 딱 부딪쳤다. "어울리는 걸로 싸워야지. 못박는 망치는 물러나." 지멘은 레콘들과 힌치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뭐 하는 거냐?" "네가 막고 내가 찾는 것보다 내가 막고 네가 찾는 것이 낫겠다. 용 을 찾아." 아트밀은 철극을 머리 위로 붕붕 돌리며 힌치오를 향해 걸어갔다. 지형을 살핀 지멘은 아트밀의 의도를 깨달았다. 지멘은 오래 생각하 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뛰었다. 힌치오와 레콘들은 그를 뒤쫓아 달려왔다. 곧 아트밀과 지멘이 서로 엇갈렸다. 지멘이 속삭였다. "왼쪽 팔꿈치 아래. 빨리 찔러봐. 내 걸론 못하겠더군." 지멘은 숲 저편으로 뛰어갔다. 아트밀은 부리를 딱 부딪치고는 달려 오는 힌치오의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좁은 골목 같은 곳이었고 긴 철 극을 든 레콘이 막기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지멘은 아트밀이 내지르는 괴성을 뒤로 하며 달려갔다. 그을린발, 쵸지, 주테카 등이 내지르는 괴상한 계명성, 그리고 정신 나간 레콘 들이 지르는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두서없이 들려왔다. 지멘은 의도 적으로 그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 방향을 피하는 쪽으로 달렸다. 아트밀의 말처럼 그는 용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어딘가 이 말도 안 되는 숲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없다 는 것이라도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이 숲을 다 불태워버릴 수 있으 니까. 철벅거리고 미끄러졌다. 풍덩풍덩 달리고 철썩 뛰어올랐다. 지멘이 달리는 숲의 좋은 점이 한 가지 있다면 흙덩이가 달라붙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말리 위에는 해묵은 먼지는 있을지언정 진구렁탕이 될 흙 은 없었다. 하지만 빗속을 달린 경험이 많지 않은 지멘은 그것도 깨 닫지 못했다. 그는 달리면서 익사할 것 같은 습기만을 고통스럽게 느 꼈다. 다시 한 번 계명성에 방향을 바꿨을 때, 지멘은 갑자기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다. 지멘은 부리를 조금 벌린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가느다란 뿌리로 칭칭 감겨있는 건축물의 벽이었다. 뜻밖의 광경에 놀랐던 지 멘은 곧 말리 위에는 원래 건축물과 기괴한 병기들이 있었음을 떠올 렸다. 지멘은 그 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안에…… 무엇인가가 빠르게 달려왔다. 지멘은 깃털을 부풀리며 망치를 들어 올렸다. 숲의 틈에서 레콘 한 명이 뛰어들어왔다. 지멘은 그가 쵸지 라는 것을 깨닫고는 안심했다. "지멘? 어라, 건물이군." 쵸지는 성큼 다가와 지멘이 보고 있던 벽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그 가 의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 안에 있을까?" 지멘은 대답 대신 망치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내리치지 못했다. 건물을 감싸고 있던 뿌리들이 갑자기 모양이 변했다.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쵸지가 갑작스럽게 외쳤다. "피해!" 지멘은 그 말을 따랐다. 두 사람은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고 그래서 뿌리들의 모양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 떤 일을 저지르는지는 똑똑히 보았다. 그들의 뒤를 따라 거대한 화염이 화르륵 뿜어져나왔다. 숲은 폭우에 젖어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이 붙어 확 타올랐다. 쵸지는 물 구덩이에 몸을 던지듯 하며 가까스로 그 불길을 피했다. 깃털들이 그 을린 듯했다. 쵸지는 물구덩이에서 상체를 들어 목청껏 외쳤다. "찾-았-다-! 이-라-리-!" 론솔피는 엘시의 금군이 되기로 한 사람답게 엘시의 곁에 있었다. 계명성으로 엘시의 지시를 전달하던 론솔피는 먼 곳에서 들려온 계명 성이 흠칫하여 엘시를 돌아보았다. 엘시는 지체없이 말했다. "히베리. 라리, 하쿨, 리, 리. 주테카, 도리, 하쿨, 리, 지크, 리." 론솔피는 그 말을 계명성으로 바꿔 외쳤다. 그 곁에서는 시허릭 마 지오 상장군이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말리 위에 있었 지만 그곳은 숲의 외곽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용을 찾기 위해 숲의 내부로 들어간 것은 다섯 명의 레콘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현재 다 섯 명의 레콘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엘시는 그 중 세 명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바둑의 명인이 필연 의 수순을 모조리 기억하듯 엘시는 그을린발과 주테카, 그리고 쵸지 의 위치를 머릿속에 완전히 그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릿속의 그 림을 참조하여 지금 엘시는 그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후 엘시가 움직이라고 명령했을 때, 시허릭은 반대하고 싶어도 어떻게 반대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반대할 생각은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31중대의 중대원 천여 명은 엘시와 정우, 그리고 아실과 남작 부부 등을 가운데 둔 밀집 대형으로 용의 숲 안으로 들어섰다. 엘시는 정 우와 아실이 소리 위에 남기를 바랐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거절했다. 탈해는 일행의 가장 앞쪽에서 개밥바라기를 뽑아든 채 론솔피와 함께 섰다. 정우의 곁에는 탈해 대신 야리키가 있었다. 기괴한 숲을 가로지른지 얼마 후 그들은 그을린발을 만나게 되었다. 그을린발은 다가오는 중대원들을 보고는 잠자코 후미에 붙어섰다. 조 금 후에는 주테카가 피범벅이 된 모습으로 나타나 그을리발의 곁에 섰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에 만나는 것은 쵸지일 거라 생각했다. 하 지만 중대가 맞닥뜨린 것은 힌치오와 대적하고 있는 아트밀이었다. 아트밀은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지만 아직도 씩씩하게 철극을 휘두 르며 힌치오를 막아서고 있었다. 힌치오 또한 험악한 꼴을 하고 있었 다. 문제는 31중대원들이 아트밀의 뒤쪽이 아니라 힌치오의 뒤편, 즉 싸움에 끼여들지 못해 안달하고 있던 힌치오의 부하들이 있는 쪽으로 들어섰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팔리탐도 있었 다. 팔리탐은 중대를 보자마자 공격을 명령했다. "붙잡아라!" 힌치오의 부하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탈해는 기다렸다는 듯 이 개밥바라기를 뽑아 맹렬하게 휘둘렀다. 하지만 거기엔 미리 약속 된 속임수가 있었다. 탈해가 뽑아든 개밥바라기의 칼날은 용의 화염 이 아니라 탈해가 만든 도깨비불이었다. 즉 거기에는 열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사라티본 부대를 학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중대원들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개밥바라기의 화염인을 휘두르는 것 은 위험하다는 이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중대원들은 진짜와 흡사한 화염인에 속으로 감탄했고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기겁했다. 엘시 가 외쳤다. "들어올리시오!" 론솔피가 탈해를 높이 들어올렸다. 탈해는 론솔피의 어깨에 무등을 탄 채 가짜 화염인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레콘들은 그것이 진짜인지 확인할 생각도 못한 채 도망치거나 뿌리 뒤로 몸을 숨겼다. 그 틈을 타 31중대원들은 론솔피의 곁을 지나쳐 달렸다. 제일 뒤쪽에 있던 그 을린발과 주테카도 지나치자 론솔피는 탈해를 내려놓고는 그 뒤를 따 라 달렸다. 완벽한 기만전술이 완성되려는 찰라였다. 그런데 한 명의 레콘이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멈-춰-!" 론솔피와 그을린발, 탈해, 그을린발은 당황하여 뒤를 보았다. 머리 를 감싸쥐고 도망치기 바쁜 레콘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용감하게 달려오는 레콘이 있었다. 놀란 탈해가 다시 가짜 화염인을 만들어서 는 레콘의 머리 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하 지만 그 레콘은 화염인에 불타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달려왔다. 가 짜라는 것이 발각되었다고 생각한 탈해는 경악했다. 주테카가 외쳤 다. "내가 맡지! 계속 가!" 그는 철저를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채 두 걸음도 걷기 전에 주테카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날아온다는 느낌을 받 았다. 주테카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는 적을 무시하고 위험을 느낀 방향으로 철저를 내밀었다. 그 행동이 주테카의 안면이 으깨어 지는 것을 막았다. 빗속을 가로지르며 날아온 유성추가 철저에 부딪 쳤다. 얼굴이 으깨어지진 않았지만 유성추와 부딪친 철저가 얼굴을 강타하 는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머리가 띵해진 주테카는 몇 번 비틀거렸 다. 그 틈을 타 유성추를 든 레콘은 주테카의 곁을 지나쳤다. 그을린 발과 론솔피가 다급하게 막아섰지만 레콘은 그들을 무시하며 위로 뛰 어올랐다. 탈해는 당황하여 개밥바라기를 들어올렸다. 극히 짧은 순간, 탈해는 의아함을 느꼈다. 레콘은 마치 찔러보라는 듯이 가슴을 내민 채 내려오고 있었고 개밥바라기의 칼날이 다가오자 눈을 꾹 감긴 했지만 그 얼굴은 오히려 만족하는 것 같았다. 탈해는 개밥바라기로 레콘을 찔렀다. 하지만 거기엔 열이 없었다. 레콘은 아 무 이상 없이 바닥에 내려섰다. 유성추를 든 레콘은 중대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눈을 뜬 그는 자신 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탈해를 돌아보았다. 탈해 는 그 얼굴이 분명히 당황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레콘의 곁에 누가 있는지 목격한 탈해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거기엔 새장을 안아들고 있는 정우가 있었다. 정우의 곁에 있던 야리키가 벼슬을 빳빳하게 세우며 낚싯대를 휘둘 렀다. 레콘은 반사적으로 유성추의 사슬을 두 손으로 쥐어 낚싯대를 막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 았다. 레콘은 야리키를 보고, 다시 정우를 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정우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팡탄 하장군님? 좋은 꿈 꾸셨어요?" 팡탄 하장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정우를 보았다. 그 때 물 러났던 야리키의 낚싯대가 다시 돌아왔다. 움찔하며 그것을 막으려던 하장군은 갑자기 손을 주춤했다. 제때 쇠사슬을 들어올리지 못한 팡 탄은 낚싯대에 옆머리를 강타당했다. 정우가 외쳤다. "하지 말아요! 야리키!" 아실은 입을 다물며 하나뿐인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찢어진 옆머리에 서 피를 흘리며 팡탄은 비틀비틀 물러났다. 하지만 야리키의 낚싯대 가 굵직한 철봉이긴 하지만 레콘을 한 방에 때려죽일 능력은 없었다. 팡탄은 몇 걸음만에 다시 중심을 바로잡았다. 팡탄은 얼굴을 찡그리 며 말했다. "그걸론 안되겠는데?" 팡탄은 어느새 짧게 잡은 유성추를 철퇴처럼 휘둘렀다. 그것은 야리 키의 복부를 강타하여 뒤로 날려보냈다. 중대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팡탄은 정우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 때 정우의 곁에 있던 엘시와 발리츠 굴도하, 그리고 아이넬 굴도하가 동시에 정우의 앞을 막아섰다. 엘시가 말했다. "팡탄 하장군." 팡탄은 우울하게 느껴지는 눈으로 대장군을 보다가 옆을 돌아보았 다. 그을린발과 주테카, 론솔피, 그리고 탈해가 황급히 다가서고 있 었다. 그 모습을 본 팡탄은 그 쪽이 더 마음에 든다는 듯 엘시와 정 우 등을 깨끗이 무시한 채 터벅터벅 걸어갔다. 하지만 정우는 그가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새장을 안아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미 처 말릴 틈도 없이 달려가서는 걸어가는 팡탄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장군님! 멈추세요! 당신은……" 팡탄은 부리를 탁 부딪치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마치 귀찮은 파리를 쫓아버리려는 몸짓이었다. 정우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팡탄이 손 을 휘둘렀다. 그 손이 무엇인가에 맞았다. 하지만 정우는 아무 이상 없는 모습으 로 서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정우를 막아선 아이넬 굴도하가 팡탄 의 손바닥에 맞아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뿌리에 부딪쳐 컥 하는 소리를 내는 아이넬을 보며 발리츠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넬!" 그 순간 발리츠 굴도하의 몸 아래쪽의 허공에서 무엇인가가 소용돌 이치며 나타났다. 그것은 말과 폭풍이 교접하여 태어난 것 같았다. 말이라면 당연히 그러해야 되는 것과 달리 그것은 치렁치렁 늘어지는 털을 가지고 있 었다. 아니, 그것은 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바람의 머리카락이라고 나 할까. 몸 앞쪽에는 근사한 머리가 있었지만 눈 같은 것은 달려 있 지 않다. 열풍이 들락거리는 흉폭한 입은 상대편 말의 머리를 물어 두개골을 부숴놓을 것 같다. 우람한 몸통 아래에 있는 다리들은 얼핏 보기에 네 개인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 다리들은 몸을 지탱 하는 다리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몸 을 전진시키는 능력만 괴이하리만큼 강조되어 남아있었다. 어쩌면 그 것은 다리처럼 보이는 여러 장의 날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오직 발리츠 굴도하의 눈에만 보였고 발리츠는 그것을 내려다보지 않았기 때문이 다. 발리츠는 아내를 공격한 레콘을 향해 돌진했다. 말 위에 있을 때 판사이 남작 발리츠 굴도하는 그 어떤 인간 무사에 게도 자제력의 발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말 같지도 않은 괴수를 타고 있었다. 발리츠가 창을 내찔렀을 때, 그것은 시간이 되 어 팡탄을 관통했다, 저지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창이 부러진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렇잖으면 발리츠의 팔도 무사하 기 어려웠을 테니까. 팡탄 하장군은 부러진 창대에 꿰인 채 우당탕 날아갔다. 팡탄은 숲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는 극적인 모습을 보여주 었지만 발리츠는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지 않았다. 팔이 박살난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말 아닌 말을 멈춰세운 남작은 아내 의 무사를 바라며 아이넬을 보았다. 뿌리에 몸을 기댄 채 반쯤 누운 모습으로 있던 아이넬은 경악한 얼굴로 남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넬의 눈에, 남편은 허공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몸에 익은 기수의 감각으로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버린 그 환상괴수는 아이넬에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넬에겐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설명할 가설이 있었다. 그녀는 쿨럭거리다가 말했다. "성공……하셨군요. 각하. 환상마를 만들어내셨어요." "예? 뭘 만들었다고요?" 발리츠는 그 대답에 타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본 발리츠는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괴수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당황하기에 앞서 발리츠는 언젠가 규리하성의 주랑에서 아내가 들려주었던 이야 기를 떠올렸다. 말을 탈 수 없는 것이 문제라면 환상계단으로 그에게 걸맞는 환상마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발리츠는 아내의 사랑스러움을 강조하는 흥미로운 상상력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지 금 그는 그것에 타고 있었다. "내가 만들었군요." 아이넬은 몸을 떨면서도 웃었다. "성공하실 줄 알았어요." 발리츠는 말에서 내려섰다. 그는 아내의 상태를 살폈고 다행히 갑옷 덕분에 치명상은 입지 않은 것을 알고는 안도했다. 하지만 다리가 부 러진 아이넬은 일어나지 못했다. 아이넬이 움직이기 힘들다는 것을 확인한 발리츠는 빠르게 생각했다. 그리고 남작은 일행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가시오! 내가 막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도 발리츠가 무엇을 만들어내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하 지만 그들은 그 작은 무사가 건장한 레콘을 조약돌처럼 날려보낸 것 은 확실히 보았다. 그리고 시허릭은 그 점을 중시하기로 했다. "가야 합니다, 대장군님!" 엘시는 결정했다. 그는 남작에게 가까이 있던 병사들에게 창을 주라 고 외쳤다. 그리고 멍하니 서있는 정우를 발견하고는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정신을 차린 정우는 의아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엘시를 보며 말했다. "일부러 죽으려 했어요." "예?" "팡탄 하장군님…… 일부러…… 왜?" 아실이 눈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엘시는 그 의미에 충격을 받았지 만 그것을 다룰 시간은 없었다. "천천히 생각해봐야겠군요. 지금은 가야 합니다, 정우." 정우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은 팡탄의 습격으로 흩 어졌던 일행을 다시 불러모아 전진시켰다. 그들은 쵸지가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힌치오와 싸우던 아트밀도 중대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 몸을 빼내야겠다고 판단한 아트밀은 철극을 고의로 흔 들어 빈틈을 노출시켰다. 힌치오가 세찬 기세로 이쑤시개를 휘두를 때, 아트밀은 오래 전부터 머릿속으로 그려두었던 공격을 시도했다. 그는 힌치오의 왼쪽 팔꿈치 아래를 세차게 찔렀다. 그 공격은 적중했다. 힌치오는 옆구리가 크게 찢어진 채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힌치오는 벼슬을 빳빳하게 세운 채 비스듬한 자세로 이쑤 시개를 들어올렸다. 투지는 한결같았지만 힌치오는 환상을 품지는 않 았다. 치명상은 아니다. 하지만 호각의 싸움 중이니 치명상이나 다름 없다. "이제야말로 곡차 한 잔 부탁해야겠군. 아트밀 교위." 아트밀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철극을 바짝 쥔 채 뒤로 물러났다. "그 부탁 이번에도 사절이야." "뭐?" "그 때도 그랬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 치료 잘해." 아트밀은 힌치오를 내버려둔 채 숲 사이로 사라졌다. 의아한 눈으로 아트밀을 보던 힌치오는 그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서 야 한 손으로 옆구리를 짚었다. 힌치오는 정말 곡차 한 잔 생각이 간 절하다고 생각하며 부하들을 향해 움직였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비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다. 힌 치오는 옆구리가 찢어진 사람치곤 퍽 건강한 목소리로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앞에는 아트밀 못지않게 당혹스러운 남작이 버티고 있 었다. 힌치오는 정말 운수 사나운 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사나운 운수에도 폭우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팔리탐 지소어도 아트밀의 외침을 들었다. 남작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팔리탐은 힌치오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그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 달려가는 그 의 발 앞에 갑자기 어떤 손이 나타났다. 멈춰선 팔리탐은 손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가슴에 부러진 창대를 꽂 고 있는 팡탄 하장군이 뿌리에 몸을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팔리탐은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팡탄?" 그는 부러진 창대의 끄트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것 을 뽑으려 하자 팡탄이 부리 사이로 피거품을 뿜으며 격하게 말했다. "내버려둬. 가망없다." 팔리탐은 입을 다물었다. 팡탄은 그의 가면에 초점을 맞추려 애썼 다. 그의 부리에서 빗줄기가 부서졌다. "부탁이야. 전령(傳靈)시켜줘." 팔리탐은 흠칫했다. 팡탄은 자신의 영을 군령자의 일부로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팔리탐은 침착하려 애쓰며 말했다. "팡탄. 내가 군령자인 것은 맞지만 나는 전령 없는 죽음을 맞을 생 각이오. 내게 들어와봐야 영생을 할 수는 없소. 그것은 내 속에 있는 영들도 모두 아는 일이오." "빌어먹을. 누가 영생에 관심이 있다고. 내가 원하는 것은 복수야. 잠깐만, 아주 짧은 시간만 있으면 돼." 팔리탐은 처음에 그렇게 말하는 자도 많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속에 있는 영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냥 죽는 것이 아쉬 워서, 잠깐만 더 세상을 보기 위해 전령하는 거라 말한 자들은 많았 다. 하지만 군령자가 사라지지 않고 팔리탐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팔리탐은 자신도 막상 죽을 때가 되면 다른 자의 육을 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떠올렸다. 팔리탐은 그 생각을 떨쳐내며 팡탄을 바라보았다. 부질없 는 짓이라고, 멋진 생의 마지막에 사족을 붙이는 짓이라고, 즐길 만 했던 생의 추억만 간직한 채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께 가라고 말하기 위해서. 하지만 팔리탐은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가슴에 부러진 창이 박 힌 채 폭우 속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팡탄의 모습은 비참했다. 팔리탐 은 그것이 즐길 만한 생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주 저하는 그에게 팡탄이 피를 토하며 말했다. "제발." "지금 전령하더라도 당장 복수할 수는 없습니다. 내 몸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볼 수만 있으면 돼. 그것도 안 되나?" 그렇지는 않다. 팔리탐은 고개를 내젓고는 마지막 조건을 붙이듯 말 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입니다." 팡탄은 동의의 표정을 지었다. 팔리탐은 한 손으로 팡탄의 눈을 덮 었다. "나를 믿고 내게 마음을 여십시오." 팡탄은 그렇게 했다. 팔리탐은 아직도 불안과 의문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전령이 실패할지도 모른다. 팔리탐은 조심 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내게 오십시오. 팡탄." 전령이 이루어졌다. 팡탄의 육에 있던 영이 어느 순간 팔리탐의 육으로 옮겨졌다. 팡탄 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어둠뿐이었다. 팔리탐은 그에게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그리고 정신 속에서 길을 잃지 않 도록 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며 그를 앞에 내세웠다. 팡탄은 팔리탐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팡탄은 시력이 조금 나빠진 것을 느꼈지만 곧 거기에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그의 눈앞에는 그 자신이 창에 꽂혀 죽어 있었다. 당연하지 만 그 모습은 팡탄에게 충격을 주었다. 팡탄은 깃털을 부풀리려 했 다. 하지만 팔리탐의 몸에는 그것이 없었다. 팔리탐은 입을 움직여 설명했다. "내 몸엔 깃털이 없습니다. 팡탄. 입을 움직여보겠습니까?" 팔리탐은 입을 내버려둔 채 물러났다. 팡탄은 그것을 움직여 대답하 려 했다. 하지만 부리에 익숙한 그는 아직 인간의 입을 마음대로 다 룰 수 없었다. 그는 이어, 우우 하는 소리만 내었다. 조금 기다리던 팔리탐은 다시 입을 가져가서 말했다. "처음이니 어려울 겁니다. 잠시 동안 뒤로 물러나십시오. 당신에게 연습할 시간을 주는 것은 뒤로 미루어야겠습니다." 팡탄은 뒤로 물러났다. 보이는 것은 암흑뿐이었다. 하지만 곧 그곳 에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레이헬 라보 태위였다. 제국군 하장군이었던 팡탄은 당연히 태위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놀란 팡탄에게 태위가 말했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를 따라오게. 사람의 의식 가 장 밑바닥에는 헤어나올 수 없는 미궁이 있어. 일단 나를 따라와서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지." "어, 말을 할 수…… 있군." "그래. 이것은 말이나 다름없지. 따라오게." 태위는 앞장서서 움직였다. 팡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어둠 속에 완전한 모습으로 있는 자신의 몸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존재하기 를 바라기에 있는 모습에 불과하지만 팡탄은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 다. 그는 몸이 있다면 웃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팡탄은 태위의 뒤를 따라가며 웃었다. 사실, 웃을 만한 상황이었다. 팡탄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께 걸고 한 맹세를 완벽하게 지켰다. 그의 죽음은 자살적인 공격에 의한 것이 지 자살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죽은 그는 맹세에서 자유롭다. 팡탄 은 그 사실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 생각하며 태위의 뒤를 따랐다. 커다란 뿌리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쵸지는 31중대원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곤 황급히 외쳤다. "멈춰! 불이 날아온다!" 중대원들은 재빨리 멈춰서서 몸을 낮추었다. 쵸지는 건물이 있는 방 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중대원들 사이에서 엘시가 걸어나왔 다. 엘시는 쵸지가 가리킨 방향을 보고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쵸지가 그 뒤를 따랐고 다른 자들도 시허릭의 명령에 따라 조심스럽 게 엘시의 뒤에 섰다. 엘시는 곧 건물을 발견했다. 그 때 그의 곁으 로 지멘이 다가왔다. 지멘을 본 아실이 그에게 다가갔다. 지멘은 눈 을 찌푸렸다. "아실. 소리 위에……" 아실이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고 지멘은 말을 맺지 않았다. 그 때 뒤편에서 아트밀이 달려왔다. 뿌리에 뒤덮힌 건물을 본 아트밀이 고 개를 끄덕였다. "이거야?" 그 질문에 사람들은 쵸지를 보았다. 쵸지가 말했다. "벽을 부수려 하니까 불을 내뿜었어." 사람들은 벽을 뒤덮고 있는 뿌리들을 보며 흠칫했다. 지멘이 망치를 들어올리고는 엘시를 보았다.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피하시오. 지멘, 하겠습니까?" 지멘은 망치를 한 번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쵸지는 경험 했던 것에 따라 사람들을 안전한 거리까지 데리고 물러났다. 엘시와 지멘만이 건물 앞에 남았다. 지멘은 뒤를 흘끔 바라보고는 망치를 높 이 들어올렸다. 파편에 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엘시가 뒤로 돌아선 후, 지멘은 있는 힘을 다해 벽을 후려쳤다. 단 일격에 벽이 깨졌다. 굵은 금들이 사방으로 확 뻗어나갔다. 무너 져야 마땅하지만 벽을 뒤덮고 있는 뿌리들이 붙잡고 있어서 그것은 무너지지 않았다. 지멘은 한 번 더 망치를 휘두르려 했다. 그 때 뒤 로 돌아선 엘시가 말했다. "부수지 말고 밀도록 하시오. 되도록 파괴되지 않도록." 지멘은 그 말을 따랐다. 그는 파편을 힘껏 밀었다. 뿌리들의 저항은 별로 크지 않았다. 곧 넓은 석판 조각들이 뒤로 쓰러지며 벽에는 커 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레콘이 똑바로 서서 걸어들어갈 수 있을 크기 의 구멍이었다. 안쪽은 어두웠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엘시가 중얼거렸다. "퇴로를 확보해두는 건 무의미하겠지." 안쪽에 있을 또다른 적을 염려한 엘시는 뒤에 사람들을 남겨두지 않 기로 했다. 그는 탈해를 불러들였다. 탈해가 앞장을 서서 구멍 안으 로 들어섰고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엘시는 뒤편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화염이 뿜어질 것을 대비하여 계속 구멍 곁에 남아있다가 마지막에 들어갔다. 곧 바깥에는 폭우만이 남아서 용의 숲을 두드렸 다. 어둠 속에서 탈해가 빛의 공 같은 것을 몇 개 만들어냈다. 그가 만 들어낸 도깨비불들이 각 소대장들에게 전달되었다. 소대장들은 탈해 의 지시에 따라 그것을 투구에 붙였다. 안쪽에는 커다란 복도가 가로놓여 있었다. 왼쪽으로 커다란 공간 같 은 것이 보였기에 그들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곧 그들은 별다른 장식 이 없는 대단히 넓은 홀처럼 보이는 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천여 명 이나 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지만 아직도 충분한 공간이 남아있었 다. 그리고 사면 중 세 군데의 벽에는 커다란 복도들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사람들은 건물 안쪽의 벽에는 뿌리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도망칠 곳도 없는 건물 내부에서 불을 뿜 는 뿌리들을 만나게 된다면 굉장히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이전에 말리의 건물 안으로 들어와본 적이 있지만 엘시는 이곳이 어 디인지 알기 어려웠다. 역시 들어온 적이 있었던 지멘도 지리를 알 수 없었다. 엘시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5소대는 뒤로 돌아가서 레콘들이 올 경우를 대비하여 구멍을 막아 라. 쓰러진 석재들을 세워 짜맞추면 위장이 가능할 것이다. 나머지 소대들은……" 그 때 부드러운 발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왔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민첩하게 움직이는 소리였다. 엘시는 얼굴을 찡그렸다. 또다른 적이 벌써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발소리 에 당황한 병사들을 향해 엘시가 말했다. "5소대 명령 취소한다. 모두 전투준비! 아라짓 전사들이 온다!" =============================================================== 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41. 장생 (4) | 2004·12·24 08:10 | HIT : 125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41-4 관련자료:없음 [4945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2-24 08:09 조회:1 피를 마시는 새 41. 장생 - 4 보병이 기병을 제압하려면 말을 노리는 편이 간단하다. 하지만 발리 츠 굴도하 남작의 말은 보이지도 않았고, 그것이 있을 만한 곳에 무 기를 휘둘러봐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남작에게만 존재하는 말이었으니까. 레콘은 보기(步騎) 어느쪽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이 그 냥 레콘이지만 어쨌거나 사라티본 부대원들도 남작의 말을 공격 대상 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눈에 잘 보이는 남작 자신을 노렸다. 하지만 남작의 체구는 작았고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실제의 말 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할 방향 전환을 간단히 해치우며 환상마는 남작 을 사라티본 부대원들이 가장 싫어할 위치로 데려갔다. 팔리탐과 힌치오는 당분간 남작을 잡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 다. 그들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얼마 되지 않은 레콘들을 둘로 나눴다. 상처 입은 힌치오가 뒤에 남고 팔리탐이 열댓 명 남짓한 레 콘들을 데리고 남작을 우회하여 제국군을 쫓았다. 천여 명이 뛰어갔 지만 흙이 없는 말리에 발자국은 남지 않는다. 팔리탐과 레콘들은 자 취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그 와중에 그들은 광란을 부리는 레콘들을 만나 더 지체하기도 했다. 의지를 소모시키는 추적이 한참 계속된 후 에야 그들은 숲의 한가운데 난 구멍 같은 것을 발견했다. 팔리탐은 그것이 구멍 뚫린 건물의 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건물 안쪽은 어두웠다. 팔리탐은 지끈거리는 머리로 창문이 모두 뿌 리로 뒤덮혀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편에서 신음이 들려 왔다. 그 소리를 따라간 팔리탐은 넓은 광장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곳엔 빛이 있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부러진 창대나 칼집 등으 로 급조한 듯한 횃불을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팔리탐은 그들 중 어 떤 인간 여자의 머리에 불이 붙어있는 것을 보곤 놀라서 걸음을 멈췄 다. 그녀는 투구에 도깨비불을 붙이고 있는 제국군 장교였다. 팔리탐과 레콘들을 본 그녀는 당혹했지만 곧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시나무 군단 315소대장 젠야 스리그 부위입니다. 우리는 부상병 입니다." 그제서야 팔리탐은 그녀가 다른 몇몇 병사들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엔 쓰러진 사람들 때문에 발디딜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인간이 아닌 자들도 보였다. 그들은 나가였다. 모진 부상을 입은 자들이 대부분이 었다. 팔리탐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제국군과 아라짓 전사들이 전투를 벌였고, 천 대 오천이라는 압도적인 숫자 차이에도 불구하고 레콘들의 분전과 대장군의 지휘로 소드락의 효과가 떨어지 는 시기까지 버틴 것이다. 얼어붙어서 무력해질 것을 걱정한 아라짓 전사들은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을 내버려둔 채 물러났고 엘시는 부상 병을 수습할 인력만 남겨두고 떠났다. 그곳에 쓰러져 있는 제국군과 그들을 수습하는 자들의 숫자를 대강 가늠해본 팔리탐은 엘시가 완전 한 상태의 2개 소대를 데리고 떠났다고 판단했다. "대장군은 어디로 갔소?" "알아도 대답하지 않겠지만, 모릅니다. 이 안쪽이 어떻게 생겨먹었 는지 모르니까요. 어쩌시겠습니까?" 젠야 부위는 피로에 지친 미소를 지었다. 팔리탐은 잠깐 생각한 다 음 젠야 부위에게 말했다. "칼을 주시오." 부위를 도와 부상병들을 다루던 병사들이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하 지만 머뭇거리던 부위는 탐탁찮은 표정으로 칼을 건넸다. 팔리탐은 그것을 받아든 다음 자신의 칼을 부위에게 주었다. 놀란 젠야에게 팔 리탐이 말했다. "부상병들을 데리고 이곳을 빨리 떠나 소리로 가시오. 막는 사람이 있으면 그 칼을 보여주고 상황을 설명하시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니 라서 그걸 못알아볼 레콘들이 더 많을 테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 요." 젠야 부위는 팔리탐의 생각을 이해했다. 어차피 이것은 모든 것이 결판나는 싸움이다. 포로를 잡아두거나 할 필요도 없다. 그저 걸리적 거리지 않도록 물러나주면 그만이다. 젠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팔리탐은 젠야에게 횃불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레콘들을 데리 고 피에 젖은 발자국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복도로 움직였다. 그 때 태위가 입을 가져갔다. "대전으로 가세. 아무래도 거기일 것 같군." "대전이 있습니까? 어디지요?" "내가 맡지." 팔리탐이 뒤로 물러났다. 그 몸을 획득한 태위는 주위를 둘러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된 태위는 곧 자신있는 걸음으 로 레콘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태위가 말한 것처럼 말리에도 하늘누리와 마찬가지로 대전이 있었 다. 하지만 양자의 구조는 비슷하면서도 그 취지가 다르기 때문에 약 간 달랐다. 말리의 대전은 많은 알현자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신을 만날 자격을 획득한 몇몇 사람을 위한 곳이었다. 복층이었던 하늘누 리의 대전과 달리 그곳은 단층이었고 방의 폭은 하늘누리의 대전보다 조금 좁은 편이지만 길이는 신께 걸어가는 기쁨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도록 더 길었다. 커다란 창문들이 한쪽에 있었고 그곳은 뿌리들이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빛을 대전에 부어넣고 있었다. 물론 폭우 때문에 환하지는 않았지만 불이 없어도 사물을 분간할만했다. 대전 끝에는 하늘누리에 있던 것과 비슷한 단이 있고 그 위에 화려한 옥좌가 있었다. 용은 그곳에 있었다. 용의 역사는 반복될 수 없다. 계보는 있으되 전례는 무의미한 셈이 다. 용은 언제나 새로 시작한다. 그리고 각기 다른 끝을 맞이한다. 이라세오날은 자신의 끝이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긴 끝이 다. 일만육천 년이나 걸리는 끝이니까. 이라세오날은 그 끝이 어떻게 시작될지 궁금했다. 끝의 발소리가 들렸다. 용은 옥좌에 앉은 채 대전으로 들어서는 누군가를 보았다. 인간 남 자였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놀란 듯 멈칫하다가 뒤를 돌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조금 후 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용은 그들이 마 음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었다. 잠시 후 침입자들이 대전 끝에 도열했다. 제일 앞쪽에는 대장군과 정우가 서있었다. 그 뒤에는 탈해와 론솔피, 야리키, 그리고 쉰 명 정도의 병사들이 있었다. 아라짓 전사들과의 전투가 끝난 후 엘시는 사백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출발했다. 하지만 수색 때문에 병사들이 흩어져서 대전에 도착한 것은 그 정도였다. 물론 병사들은 계속 모여 들고 있었고 기다리면 나머지 병사들이 모두 도착하겠지만 엘시는 그 들 모두의 도착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용도 더 기다리지 않았다. 초록빛-불가사의-레콘-비현실-용은 옥좌에 비스듬 이 앉은 채 말했다. "어서 오너라. 황태자여." 그 호칭은 엘시의 뒤편에 있던 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엘시는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느낄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폐하시군요." "그렇다." "폐하를 죽이겠습니다." "반역인가?" "아닙니다. 저는 만병장입니다. 만명 이하의 단위에서 제가 하는 모 든 일은 위법성이 조각됩니다. 이들 모두 반역자가 아닙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폐하께서 사람을 정신억압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억압에 의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일은 정신억압자 자신을 공격하는 일뿐입 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도, 자살도 자의에 의한 것이라 믿을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기에 저는 그렇 게 합니다." "자살에 원하는 정신억압자라가 너를 억압하는 경우는 어떤가? 그러 면 너는 자살의 도구지. 혹은 다른 사람을 그 정신억압자로 믿게 된 경우는 어떤가? 그러면 너는 살인의 도구지. 네가 보는 것이 나라고 확신할 수도 없잖나." 황제가 제기한 의심은 잔혹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급히 숨을 들이 마셨다. 하지만 엘시는 슬퍼 보이는 눈빛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저는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의심도 할 수 없습니다." 엘시의 무뚝뚝한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것에게 머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후 치천제는 다시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군. 의심조차도……"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다. 엘시의 뒤편에 있던 자들은 아실을 안아들 고 있는 지멘이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옥좌에 있는 황제를 본 지멘 은 멈칫했다. "뭄토?" 아실은 눈을 크게 떠 황제를 바라보았다. 치천 제는 엘시에게 말했다. "짐은 너를 정신억압하지 않았다." 아실이 숨을 들이마셨다. 지멘은 그녀를 놓칠까 두렵다는 듯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황제를 노려보았다.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쵸지와 주 테카가 몇 명의 병사들과 함께 도착했다. 엘시가 대답했다. "신뢰도 불가능합니다."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여진 통렬한 절망이다. 황제가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폐하. 모두 무의미합니다. 저는 폐하를 공격……" "짐은 그런 식으로 정신억압하지 않는다!"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런 말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 새장을 끌어안고 있던 정우가 말했다. "어떤 식인가요, 폐하?" 황제는 그제서야 정우가 거기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테카가 난폭하게 외쳤다. "그래! 어떤 식으로 사람을 주물럭거렸냐, 이 괴물아!" 지멘이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정우 곁에 선 그는 아 실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두 손으로 망치를 쥐었다. "어떤 식인가? 어떤 식으로 아실의 증오를 가져간 건가?" 황제의 눈이 아실을 향했다. 아실은 그것에게 눈이 있다는 것을 깨 닫고는 하나의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실의 눈은 모든 것을 하 나로 만든다. 황제가 부지불식간에 부리를 열었다. "짐은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정신억압했다." 어둠 속을 무작정 달리던 아트밀은 자신이 뭔가를 놓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뒤로 몇 걸음 되돌아갔다. 그러자 옆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보이며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제국 군이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아트밀은 가까이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여기야?" "예." 아트밀은 복도에 면한 문에 사람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리고 문 너머로는 대전이 보였다. 옥좌에 있는 괴상한 물체를 본 아 트밀은 의아해하며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하지만 병사들이 많아 서 앞으로 다가가는 것은 어려웠다. 아트밀은 억지로 그 커다란 몸을 사람들 틈 사이로 밀어넣으며 방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 때 주테 카의 당황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은 것을 안 하 면…… 그건 정신억압 안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치천제는 주테카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이 짐의 정신억압이다. 짐은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했다." "미-친-소-리-!" 지멘이 비명 비슷한 계명성을 질렀다. 그는 아실을 가리키며 말했 다. "너는 아실의 증오를 빼앗아갔어!" 아실은 휘청이다가 지멘의 다리에 몸을 기댔다. 황급히 아실을 부축 했지만 지멘의 사나운 눈은 황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치천제가 말 했다. "증오에 지친 여자가 있었다. 차마 그것을 버릴 수는 없었지만, 사 실 그 증오는 그녀에게 짐이 되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를 빙해 아래 로 침몰시켰을 때 이미 증오의 성취를 느꼈기 때문이지. 짐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 그러자 그녀는 증오를 버렸다." "글씨로 표현했어!" "옛추억을 뒤적거렸나 보군." 지멘은 몸을 부풀리며 부리를 다물었다. 아실은 지멘의 다리에 기댄 채 어깨로 숨을 쉬며 말했다. "제이어 솔한은?" "짐은 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짐이 아는 가장 두려운 자 들 중 하나다. 짐은 성공을 원한다는 그의 말을 믿고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오판이었다. 그는 가장 화려한 실패의 무대를 만들어내더군. 감히 신의 의지에 대항하다가 장엄하게 실패하 는 비극적 영웅." 엘시가 동굴 속에서 울려퍼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몸종은 어떻게 된 겁니까?" "포기한 인생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스스로 너무 망가뜨렸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그것을 구할 수 없다고도 믿고 있었 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자 그는 의지할 주인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이레는 저를 납치하려다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막기 위해 자결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원한 일입니까?" "그랬나? 왜 그랬는지 알 것 같군. 위험에 처한 주인을 구하고 싶었 던 거지. 주인은 황제의 대장군이며 황제에게 돌아가야 하니까. 하지 만 현재의 그는 주인을 거부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과거의 난폭 한 자신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분리된 자신이 서로 싸우는 거야 짐보 다 너희들이 더 잘 아는 일 아닌가. 심지어 자신을 비비꼬기까지 하 지. 그렇잖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 시허릭은 깜짝 놀라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를 직시했다. "장제황제여. 짐은 그대가 황제가 되길 바라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대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싸울 것을 기대하고 그대가 하고 싶은 대 로 하게 했다. 그대는 짐의 생각처럼 행동하는 것 같더군. 그런데 어 느 순간 그대는 황제가 되는 사람을 시허릭에서 엘시로 바꿨지. 너 자신이든 누구든 황제로 만들면 된다는 건가? 아니면 그대가 원한 것 은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국에 훌륭한 황제가 있어야 한 다는 것이었나? 짐은 모른다. 하지만 그 꼬장꼬장한 군인이 노련한 정치가처럼 굴었어. 정말 놀랍다. 짐은 너희들이 무슨 일을 할지 모 른다. 다만 너희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었을 뿐이다! 그것이 짐의 정신억압이다!" "거짓말!" 아트밀이 놀란 사람들을 밀어젖히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고? 하지만 내가 어떻게 빙해를 건넜다는 거냐! 내가 그것을 원했을 리가 없잖아!" 황제는 아트밀을 살펴보고는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표정 도 지을 수 있었다. "아아. 짐의 드문 성공작이로군." "뭐라고?" "하늘누리가 추락할 때 환상벽으로 너희들이 잘 도망치는지 보았다. 그 때 사라말을 데리고 가며 폭소하던 레콘을 봤지." 아트밀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추락하던 하늘누리에 서 도망칠 때 사라말이 중얼거렸던 농담을 떠올렸다. 무등과 삼촌과 머리냄새에 관한, 그런 상황에서 태연히 꺼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농담. 치천제는 아트밀의 생각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사라말에 호의를 가진 것 같더군. 퍽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생 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었다. 고맙게도 너만은 짐의 예상대로 행동했다. 사라말을 보호했어." "하지만,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빙해는 어떻게!" "그야 간단하지. 너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아. 그 두려움에 대한 종 족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무슨 소리! 나는 레콘이야!" "여기엔 젖은 레콘이 가득하다!" 그을린발과 주테카, 론솔피, 쵸지, 지멘, 야리키, 그리고 아트밀. 내려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일곱 레콘은 새삼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내려다보면 그 습기가, 몸을 뒤덮고 있는 물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그들의 깃털은 젖 어 번들거리고 있었고 거대한 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너희들은 변화한다." 그 말은 사람들을 후벼팠다. 황제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나가들이 왜 군령자를 모으는 건지 말해보라. 엘시." 뜻밖의 질문에 엘시는 반사적으로 책을 읽듯 말했다. "나가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한계선을 넘을 수 없다는 점입니 다. 다른 세 종족은 그들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만 그들은 올 수 없습 니다. 비단 군사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서 그것 은 심각한 불이익을 낳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갈로텍이나 주퀘도 사르마크를 찾는다느니 하 는 것은 비밀유지를 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정말 관심 을 두고 있었던 것은 군령자의 영이 아니라 그 육이었습니다." 엘시가 내리려는 결론을 짐작한 사람들은 깃털을 세우거나 동공을 팽창시켰다. 하지만 엘시는 자신의 결론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들은 군령자를 보온복으로 이용할 작정입니다." 무거운 침묵이 신의 대전을 뒤덮었다. 치천제는 말했다. "그들은 원래 자기들의 목숨을 거는 일에 익숙하지. 감히 심장을 빼 낼 수 있는 생물이니. 하지만 이 사건은 좀 다른 관점으로 보아야 한 다. 나가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육을 감히 포기하고 다른 자의 육으로 들어간다는 식으로. 그들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연합 이라는 엉성한 형태에서 국가로 발전할지도 모르지. 다른 이들을 위 해 자기 육을 포기하는 자들이 나타났으니." 새장을 안은 정우가 조용히 말했다. "탈해도 변화한 건가요?" 탈해는 흠칫하다가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정우를 똑바로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유혈로 몸을 물들인 채 태연히 서있는 도깨비에게 다른 설명이 필 요할까." 그러했다. 거듭된 전투를 뚫고 이곳에 도달한 탈해는 피범벅이었다. 탈해의 곁에서 그를 바라보며 수염볏을 비틀던 야리키가 갑작스럽게 무엇인가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잠깐. 우리가 뭘 할지 모르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도와 줬다면, 그렇다면 너는 은인이라는 건가?" "은인이자 원수지요." 엘시가 건조하게 말했다. 정우는 엘시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저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고, 폐하께서는 저희가 해도 되는 일의 한계를 저희와 상의 없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발을 딛 지 않은 채 하늘에서 저희를 보시다가 폐하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가차없이 처단하셨습니다. 분리주의자와 서약지지파를 분쇄하셨습니 다. 발케네와 규리하를 파괴하려 하셨습니다. 신에게 도전한 율형부 사를 불태웠습니다." 치천제는 옥좌에 뒷머리를 - 어쨌든 그렇게 보이는 것을 - 가져다댔 다. 황제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한계…… 한계다. 그것이 짐이지." 갑자기 황제가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방과 바깥의 복도를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단 위에 똑바로 선 황제가 외쳤 다. "짐은 절대적 한계다! 네가 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짐을 어쩔 텐 가!" 엘시는 가늘어진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다가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곳에는 정우가 있었다. 순간 황제는 깨달았다. 황제가 본 것은 새장을 안고 있는 정우에게 엘시가 몸을 숙인 것뿐이었다. 하지만 용의 눈에 그것은 앞날에 대한 완벽한 예고나 다름없었다. 그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이라세오날은 엘시가 정우에게 꿈의 노출을 부탁할 거라는 것을, 그 꿈이 치천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무력화시킬 거라는 것을, 그러나 엘시는 그 꿈에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무력한 자신에게 공격을 가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엘시는 옥 좌에 있는 치천제를 죽이고 말리를 뒤덮은 숲을 불태울 것이다. 엘시 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라세오날이 외쳤다. "죽여라!" 그 자신이 공격 대상이라 생각했던 엘시는 주춤하며 황제를 보았다. 그 때 보이지 않는 힘이 갑자기 날아와 새장을 날려보냈다. 그녀는 새장을 놓치고 비틀거렸다. 인조새의 안위를 걱정한 정우는 얼떨결에 그것을 보았고 그녀가 왜 새장을 집어던졌는지 알 수 없었던 다른 사 람들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오직 한 사람만 빼고. 틸러 달비는 사람들이 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죽어라가 아닌 죽여라였다. 거기엔 누군가가 있다. 새장을 날려보낸 자. 도깨비 감투를 가진 자. 언젠가 그의 손에서 달아났던 자. 틸러 는 그 자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민하던 틸러는, 그러나 자신이 이미 정우의 앞을 가 로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먼저 움직여버린 몸에 틸러는 탄 식했다. 아버지, 제가 이 모양이라니까요. '아직 내려가지 못했는데 벌써 꽃잎이 흔들리나.' 무엇인가가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섬세하지 못한 소리 다. 정우는 하얗게 질린 눈으로 틸러의 등을 보았다. 찰라의 순간 정우 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그리고 틸러가 보이지 않는 칼 날에 가슴을 내밀었음도. 정우는 겁에 질려 틸러의 팔을 붙잡았다. "틸러…… 틸러!"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리하공 아가씨?"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보이지 않는 한 사람도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틸러는 살아있었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믿을 수 없었던 틸러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보았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금속성 빛이 보였다. 그의 가슴을 베던 칼날을 막아 그것이 굴러 미 끄러지게 한 것. 틸러의 앞쪽 허공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녀?" 틸러는 이해했다. 뭘 이해했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이해했다. 그는 씩 웃었다. "사자패주……" 앞쪽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공기의 흔들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틸러는 지체없이 팔을 휘둘렀다. 그 손에는 어느새 사자패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어떤 남자의 유품이고, 하늘치도 놀 라 진동할 권위의 상징이지만, 또한 꽤나 딱딱한 쇠붙이기도 하다. "출또야!" 허공에서 빡!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손가락 하나가 부러진 것 같았지만 틸러는 히죽 웃었다. 위대한 권위에 명중당한 스카리 빌파 가 코피를 쏟으며 시각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스카리는 옆으로 허물어졌다. 틸러는 그의 머리를 벗어나 떨어지는 감투를 공중에서 나꿔챘다. 쓰러진 스카리의 몸을 밟은 틸러는 조금 고민하다가 감투를 찢었다. 몇몇 사람들은 당혹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해의 눈빛을 보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감투를 망가뜨 린 틸러는 스카리의 칼을 집어 그의 목을 겨냥했다. 스카리는 피에 젖은 입술을 떨며 신음했다. "네놈이……" "햇수로 4년째군요." 스카리는 입을 뻐끔거렸다. 틸러는 싱긋 웃고는 정우를 보았다. 웃 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규리하공 아가씨 에게 가볍게 목례한 틸러는 스카리에게 말했다. "각하를 체포합니다." "잘했어!" 쵸지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조금 후 충격에서 벗어난 다른 사람 들도 그 함성에 동참했다. 틸러는 퍽 부끄럽다고 생각하며 다시 정우 를 보았다. 정우는 발을 동동 구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눈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 나 틸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사람들의 환호를 뒤덮은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각하!" 주테카와 쵸지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뒤쪽에는 아무 도 없었다. 고함을 지른 자는 대전으로 통하는 다른 문을 통해 들어 왔기 때문이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본 틸러는 가면을 쓴 팔리탐 지 소어와 레콘들을 보았다. 팔리탐의 가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지만 그 흔들리는 몸과 헐떡이 는 숨소리는 듣기 고통스러웠다. 틸러는 빈손으로 스카리를 가리키며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주군을 살리고 싶다면!" 팔리탐을 따라온 레콘들은 흠칫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앞으로 걸어가는 팔리탐을 보며 당황했다. 틸러가 다시 외쳤다. "오지 마시오!" 팔리탐은 멈칫하더니 다시 움직였다. 틸러는 그 가면을 보았지만 그 곳에서는 아무 표정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다리는 생물의 것이 아 닌 것처럼 기묘하게 움직였다. 두 다리가 각자 다른 각도로 움직이려 는 것 같았다. 틸러는 공포마저도 느꼈다. 가면 뒤에서 짓눌린 목소 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이게 무슨 짓…… 죽여봐! 그 녀석을…… 다리를 멈…… 왜? 겁나 나? 입을……!" 틸러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가면을 보았다. 그러나 계속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팔리탐은 상당히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고 게다가 더 곤란한 것은 그의 손이 칼을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틸러 는 갈등을 느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스카리의 다리를 베는 것을 시도하려 마음먹었다. 그 때 엘시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너는 누구냐? 누구의 영이지?" 틸러의 입이 꿈틀거렸다. '군령자?' 틸러는 상황을 이해했지만, 실 리적인 측면에서는 차라리 이해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그가 생각하 느라 지체한 짧은 시간 동안 팔리탐은 칼을 뽑아들었다. 스카리의 다 리를 베려다간 자기 목이 날아갈 판국임을 깨달은 틸러는 황급히 칼 을 들어올렸다. 그대로 팔리탐을 찌르려던 틸러는, 그러나 이상한 것 을 느끼고 팔을 멈췄다. 칼을 쥔 팔리탐의 손이 이상했다. 그는 칼을 거꾸로 들고 있었다. 역수로 베는 것도 가능하기야 하지만 그러려면 뽑자마자 베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팔리탐은 칼을 거꾸로 든 채 움 직이지 않았다. 그의 가면 뒤에서 노성이 들려왔다. "놔라, 팔리탐! 그 팔을, 팡탄! 네가 말하던 복수가 이거, 그렇다. 너는 각하께 충성을 맹세했, 죽을 때까지다! 이젠 맹세에서 자유롭, 그래서 전령을 원했군. 스카리를 죽일 테다!" 영들이 싸우고 있다. 틸러는 입술을 떨었다. 군령자의 영들이 싸우 고 있었다. 스카리를 죽이려는 팡탄의 영과 그것을 막으려는 팔리탐 의 영. 정신분열의 광기도 이보다는 보기 덜 끔찍할 것이다. 칼을 쥔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던 틸러는 어느쪽 영이 승리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진저리쳤다. 제국검처럼 보이는 그 칼은 팔리탐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팔리탐!" 팔리탐의 칼은 자신의 목을 겨눈 채 부들부들 떨렸다. 팡탄의 영은 그 팔을 제어하려 애썼고 그 때문에 팔리탐의 영은 입을 되찾았다. 그는 온몸을 그렇게 떠는 사람답지 않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이 일이 지금 일어난 것이 다행입니다. 이 자는 아직 이 몸 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독한 의지 로 제 몸을 빼앗아가는군요. 앞으로 제가 이 자를 제어하지 못할 날 이 올 겁니다. 다행히 그걸 막을 방법이 있군요." 잠깐 멈췄던 팔리탐은 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패륜아야. 제발 좀 잘해봐라!" 틸러는 팔리탐이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달았다. 팔리탐은 팔 대신 다 리를 움직였다. 칼을 목에 겨눈 채 그의 몸이 쓰러졌다. 가면 뒤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땅에 부딪친 칼은 무자비하게 그 목 을 관통하며 비명의 뒷부분도 잘라내었다. 틸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스카리가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틸러는 뒤로 우당탕 쓰러졌 다. 똑바로 일어선 스카리는 증오에 찬 눈으로 사람들을 쏘아보다가 엘시에 그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스카리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빌파가에 내려오는 감투는 세 개다. 그 중 하나는 헤어릿에게 넘어 갔지만 스카리에겐 두 개가 남아있었다. 스카리는 두 번째 감투를 꺼 내어 썼고 그러자 그 모습이 사라졌다. 론솔피와 야리키, 탈해 등이 재빨리 엘시와 정우를 에워쌌다. 하지만 사람들은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팔리탐이 들어온 문을 통해 스카리가 떠났음을 깨 달았다. 팔리탐을 따라왔던 사라티본 병사들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스 카리의 발소리를 따라갔다. 목뒤로 칼날이 삐죽 튀어나온 팔리탐의 시체만이 남게 되었다. 섣불리 입을 열 수 없는 침묵을 끝낸 것은 이라세오날이었다. 치천 제는 팔리탐의 시체를 보며 짙은 비탄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주려했던 삼고가 다 사라졌군." 엘시는 전령 없는 죽음을 맞이한 군령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하나 의 죽음이지만 동시에 지연되었던 수십, 수백 개의 죽음이다. 엘시는 그 영들이 죽음을 미루며 보려 했던 것들을 과연 보았을지 궁금했다. 그런 것이 있을까? "다른 삼고를 찾을 수 있겠지. 너만 있으면 된다. 엘시. 다시 시작 할 수 있어. 조금 지체되는 것뿐이야. 짐에게 오라. 황태자여." 엘시는 이라세오날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황제가 전율했다. 하 지만 그녀가 제지를 말할 기회는 없었다. 정신억압도 불가능했다. 그 녀의 정신억압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이라세 오날은 정우는 옷자락을 살짝 벌려 꿈을 노출시키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사람과 용의 눈앞에 꿈이 나타났다. 정우는 꿈을 조금만 노출시켰다. 그곳에 있는 사백여 명의 사람들에 게 그것은 백일몽, 취기, 혹은 비몽사몽과 같은 가벼운 꿈이었다. 하 지만 용에게는 끔찍한 타격이었다. 이라세오날은 눈을 감았다. 눈을 뽑아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꿈에 대해서는 외면할 수도, 눈을 감 을 수도 없으므로. 꿈은 다룰 수 없는 것들을 제공한다. 다룰 수 없 는 현상들은 악몽의 소재도, 길몽의 소재도 될 수 있다. 이라세오날 에겐 견딜 수 없다는 점에서 어느쪽이든 마찬가지다. 꿈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엘시는 똑바로 서있었다. 그 는 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엘시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에 슬픔과 같은 것을 느꼈지만 그 슬픔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옥좌에는 정신억압자가 있었다. 이라세오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만드는 정신억압자라 해도 그녀는 여전히 정신억압자다. 그리고 정신 억압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것을 공격하는 것만이 유의 미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엘시는 검을 움켜쥐었다. 엘시는 단을 올라갔다. 이라세오날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꿈을 꾸고 있는 자가 깨어있는 자에게 반응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엘시는 깨어있었다. 그가 다가오는 것에 대해 이라세오날은 잎 사귀도 아니고 깃털도 아닌 것을 떠는 것 외엔 아무 대응도 하지 못 했다. 엘시는 옥좌 앞에 섰다. 가까이서 이라세오날을 보자 엘시는 자신이 나무를 찔러죽이려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엘시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것이 레콘이라고 생각했다. 레콘의 심장이 있을 만한 부분을 고른 엘시는 그 위로 몸을 숙였다. 칼을 쥔 그의 팔이 뒤로 한껏 당겨졌 다. 엘시는 황제의 눈을 보았다. 이라세오날은 악몽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엘시는 그것은 무의 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그의 팔이 내리찌르는 것을 막았다. 엘시는 그것이 어디 있는지 살폈다. 온갖 기이한 것들, 이치 에 닿지 않는 것들을 보고 있는 다른 자들과 달리 엘시의 눈에 주변 풍경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 엘시는 정우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꿈이 해방되자 정우는 다시 화상의 통증을 느꼈 다. 엘시는 자신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 한다. 빨리 끝내야해.' 엘시는 다시 칼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이라세오날의 심장을 겨냥했 다. 하지만 그의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엘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분 으로 자기 팔을 보다가 다시 정우를 보았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녀가 아파하는데.' 정우를 보던 엘시의 눈이 갑자기 그 옆으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탈 해가 있었다. 그런데 탈해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그것은 탈해가 아니었다. 엘시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을 들이마셨다. "바우 성주?" 엘시가 보고 있는 도깨비는 탈해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바우 머리돌 성주였다. 질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엘시에게 바우의 얼굴이 웃었다. 바우 성주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말했다. "결코 신념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신념이 부 족할 때가 아니라 신념으로 충만하다고 생각할 때야." 엘시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 았다. 엘시는 바우 성주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생각했다. 내 신념이 어쨌다는 건가?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엘시는 이라세오날을 죽여야 한다는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대장군은 흠칫하며 탈해를 보았다. 그런데 탈해는 다시 탈해의 얼굴 을 하고 있었다. 엘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이라세오날 을 보았다. 그리고 엘시는 다시 깜짝 놀랐다. 레콘이고 용이고 나무인 그것이 아니었다. 엘시를 마주보고 있는 것 은 나가의 얼굴이었다. 엘시는 이라세오날이 다시 나가의 모습으로 돌아왔나 생각했지만 그 얼굴은 황제의 그것이 아니었다. 엘시는 신 음했다. "대호왕?" 그의 칼날 앞에 침착한 얼굴로 앉아있는 것은 대호왕 사모 페이였 다. 충격으로 굳은 엘시에게 대호왕은 그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엄 으로 말했다. "용기를 가지고 패배하라." 대호왕은 다시 이라세오날로 바뀌었다. 엘시는 자신의 심장이 쿵쾅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몸이 끈적끈적하면서도 영문 모를 상쾌함이 입안에 느껴졌다. 너무도 길어서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 오 후를 홀로 거닐고 있는 느낌. 엘시는 그것이 꿈 같다고 생각했고, 그 것이 꿈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꿈을 보고 있어.' 엘시는 다시 사람들을 보았다. 가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사 장 탈해 머리돌은 개밥바라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뻐끔뻐끔 뿜어내며 야리키의 낚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야리키는 낚싯대로 야리키를 낚아 올리고 있었고, 야리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쩔쩔매고 있었다. 야리 키는 한 명뿐이지만 어쨌거나 그런 식이었다. 엘시는 아실이 안대 밑 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 손은 방금 뽑아낸 듯한 눈 알 하나를 꺼냈지만 엘시는 끔찍하다거나 혐오스럽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아실은 그 눈알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한 잔?" 엘시는 나쁘 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레콘 하객들과 함께 지멘과 결혼하 러 가야했다. 그것이 정우와의 약속이었다. 지멘의 신랑이 되는 것. 그러자 파라말 아이솔이 분통을 터뜨리며 사라말의 목소리로 말했다. "축복받은 위법이다!" 주테카는 정의의 이름으로 이 결혼식은 하늘치 에서 개최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어머니,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엘 시는 정우를 보았다. 정우의 얼굴은 정우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엘시 는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겨울이 찾아오면 불씨를 지켜라." 창에 드리운 뿌리 사이로 햇살이 미끄러졌다. 넓은 대전의 어둠을 미끄러지는 광선들. 비가 그쳤나 보다. 엘시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꿈 속에서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꿈이라는 것을 아는 꿈이니까. 꿈이란, 그렇다. 엘시는 이라세오날을 보았다. 고통스러워 하는 신이 그곳에 있었다. 엘시는 칼을 내려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칼을 다시 꽂아넣은 엘시는 정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정우의 옷자락 을 붙잡아 여며주었다. 정우가 신음을 토하며 주저앉으려 했다. 엘시 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가 다시 옥좌를 보았을 때 이라세오날이 뒤늦 은 비명을 질렀다. "그만둬…… 그만둬!" 말리가 거세게 진동했다. 말리를 뒤덮은 용 전체가 꿈틀거렸기 때문 이다. 그 충격은 힌치오와 대적하던 발리츠 굴도하 남작에게 작은 틈 을 주었고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남작은 창을 집어던지 고는 아내를 들어올렸다. 아이넬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리고 남작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했지만, 남작은 거구의 아내를 두 팔로 안아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작은 환상마를 조종하여 비틀거리는 레콘들을 뚫고 소리로 도망췄다. 기겁했지만 또한 환희를 느낀 아이넬은 발리 츠를 사족 못 쓰게 만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훠훠훠!" 그 진동은 또한 환상계단을 만들어 땅으로 도망치던 스카리 빌파를 덮쳤다. 스 카리는 계단에서 튕겨져나갔지만 다행히도 땅 가까운 곳이었다. 스카 리가 입은 피해는 발목이 접질린 것뿐이었다. 일어선 스카리는 자신 의 머리를 만져보곤 감투가 그대로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는 하늘 을 향해 불경스러운 손짓을 하고는 절뚝거리며 도망쳤다. 그 진동은 신의 대전에 있던 자들을 쓰러지게 했다. 레콘들조차도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엘시와 정우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들은 바닥 에 주저앉았다. 비명을 지르던 이라세오날도 진동 때문에 옥좌에서 미끄러졌다. 그녀는 쿵 소리와 함께 옥좌 아래에 주저앉았고, 갑자기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진동이 끝났다. 이라세오날은 멍한 눈으로 사방을 보다가 엘시를 보 았다. 황태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이라 세오날이 말했다. "너마저도…… 죄를……" 정우가 일어났다. 고통은 이미 꿈속의 일이 되었다. 그녀는 아픔 없 이 죄를 말하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탄식했다. "너도 잃었군." 엘시가 말했다. "폐하." 그리고 대장군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황제는 기다리지 않았다. 하나둘 일어나는 사람들 을 보던 이라세오날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단 위에 똑바로 서는 순간 그녀는 보다 나가에 가까운, 엘시가 알고 다른 사람들이 아는 치천제의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바뀌었다. 사람 들은 왜 그녀가 옥좌에 앉아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똑바로 선 그녀는 훨씬 위대해보였다. 그녀는 불길 같은 눈으로 사람들을 바 라보며 말했다. "이라세오날이 축복한다. 너희들은 한없이 서로를 증오하라. 아낌없 이 서로에게 죄를 지어라. 대담하게 서로를 죽여라." 뜻밖의 말에 놀란 사람들 가운데서 파라말 아이솔이 헐떡였다. "역겨운……" 이라세오날이 노호했다. "너로써 너를 저주한다! 어디서 역겹다고 말하느냐, 파라말 아이 솔!" 파라말은 증오에 찬 눈으로 이라세오날을 바라보았다. 이라세오날이 말했다. "규범보다 무의미한 것은 없다. 엄밀히 말해서 규칙은, 규범은, 윤 리는 한계짓는 능력밖에 없다. 반짝거리기나 흐르기, 끓기를 금지하 는 도덕이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규칙과 규범과 윤리는 할 수 없 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밖으로 나아가는 대신 안으로 한계짓는다. 죄를 저질러라! 증오하라! 죽여라! 규범을 무시하고 죄를 저지를 때 생은 장절한 날개를 펼치고 미답의 하늘로 날아간다! 그 하늘에서 너희들은 반짝거리고 흐르고 끓을 수 있다!" 파라말의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그 하늘에서…… 사람이…… 사라질 수도 있어." 이라세오날은 베일 것 같은 냉소를 머금었다. "그렇다. 그리고 최대 600조가 죽을 수도 있다. 그게 어쨌다는 거 냐? 나는 그것을 막으려 했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 게 해주는 대신 너희들이 서로 죽이는 것만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너희들이 원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들을 더 견딜 수 없다. 꿈을 견딜 수 없다. 나의 아들을 오염시킨 너희들을 견딜 수 없다. 자유롭게 생 을 누리고 모두 멸망해버려라!" 준렬한 저주에 사람들은 할말을 잃었다. 그러나 우거진 침묵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 대신 다른 것이 조용히, 퍽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꿔 말하면, 너희 사람들은 600조의 개체가 죽을 때까지도 존재할 수 있다." 정우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놓쳤던 새장을 바 라보았다. 그 안에서 인조새는 기이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창문 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것에 닿고 있었고, 인조새는 그 햇빛에 의지 하여 말을 하고 있었다. 정우가 말했다. "새님?" 용과 사람이 침묵한 가운데 인조새가 끽끽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사람의 힘이다. 너희들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멸망 을, 후손에게 저지르는 죄를,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낭비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라. 무엇이 그리 급하고, 무엇이 그리 두렵고, 무엇이 그리 슬픈가? 너희들은 강하다. 600조의 개체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찬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들의 힘에 바치는." 인조새가 부리를 닫았다. 그 겉모습에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 지만 사람들은, 그리고 정우는 그것이 완전히 부서졌음을 깨달았다. 정우는 어느새 흐른 눈물을 닦으며 이라세오날을 보았다. 이라세오날은 무거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건물 바깥으로 부터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벽이 부서지며 뿌리가 안으로 침투해들어왔다. 건물을 뒤덮고 있는 뿌리들이 벽을 부수고 있었다. 산산조각난 석재들이 아래로 떨어지고 흙먼지가 떨어져내렸다. 얼굴 을 가리며 몸을 피했던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들어 보았을 때 그곳에 는 더 이상 벽도, 뿌리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뒤이어 바깥의 숲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말리를 뒤덮고 있 던 뿌리들이 좌우로 움직였다. 세상이 재조립되는 듯한 굉음이 우르 릉, 우르릉 들려왔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 앞에서 말리 의 등이 햇빛 아래에 노출되었다. 숲이 갈라지며 길이 나는 것 같았 다. 아니, 실제로 길이 나고 있었다. 숲을 가로지르며 나타난 길이 말리의 끝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은 갈라진 숲 사이로 소리의 모습을 보았다. 젖어있는 소리는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숲 여기저기서 혼란스러운 얼굴의 레콘들이 나타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 길이 정말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멘은 얼굴을 들어 이라세오날을 보았다. 이제 그것은 초록빛 나가 처럼 보였다. "가라. 증오와 죄와 죽음은 너희들의 것이다. 나는 그것에 손대지 않겠다. 믿고 싶다면 그 도깨비 장난감의 희언을 믿어라. 빨리 가는 것이 좋다." 마지막 말은 분명히 경고였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던 사람 들에게 이라세오날은 대답을 보여주었다. 숲 여기저기에서 불줄기들이 치솟아올랐다. 일견 나가들의 심장탑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밀림 한가운데서 곧고 높이 뻗어오르는 모습이 심장탑과 비슷했다. 하지만 돌로 이루 어진 심장탑과 달리 그것은 이글거리는 불꽃이었다. 하나둘 솟아오른 불줄기들이 곧 여러 개로 바뀌었다. 숲 곳곳에서 불의 나무들이 자라 나는 것 같았다. 곧 하늘에서 불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우가 놀 란 얼굴로 외쳤다. "폐하!" 이라세오날은 정우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묵묵히 손을 들어 숲에 난 길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 었다. 이곳에 있으면 모두 불타죽는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에 누구보다도 겁을 먹은 것이 탈해라는 것은, 꼭 의외라고 할 수는 없다. 도깨비인 그가 불에 타죽을 리는 없지만 탈해는 정우 에게 또다시 화재가 다가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정 우를 안아들었다. 놀란 정우가 발버둥을 칠 때 탈해는 이미 숲 사이 로 난 길로 뛰어들었다. 작은 불꽃도 정우에 닿지 않도록 그는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달렸다. 그 모습을 보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구멍을 통 해 뛰쳐나갔다. 불줄기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용의 숲은 불 의 숲이라고 바꿔 불러야할 것 같았다. 길 양쪽의 숲에서 열풍이 훅 훅 뿜어져나왔고 머리 위에서는 재와 불티가 떨어져내렸다. 길이 넓 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잖으면 사람들은 열기에 쓰러졌을 것이다. 이라세오날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곤 비늘을 살짝 부딪쳤다. 그녀 에겐 이미 비늘까지 있었다. 그 어디에도 레콘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 았고, 나무의 특징도 비늘에 약간 남아있는 초록빛 외엔 보이지 않았 다. 그녀는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를 생각했다. 이 불꽃의 열기 속이라 면 데라시도 제대로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더 늦으면 불타버릴 테고. 이라세오날은 데라시가 죄와 증오와 죽음의 나날을 보낼 수 있 도록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내주려 했다. 그러나 돌아서던 황제는 대 전을 보곤 멈춰섰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아직 남아있었다.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달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쵸지가 멈춰섰다. 쵸지는 불길이 치솟는 숲 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며 외쳤다. "사-라-티-본-레-콘-들-! 이-리-와-! 타-죽-기-싫-으-면-이-리-와 -!" 숲 사이에서 레콘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주테카가 멈 춰섰다. 주테카는 숲을 향해 외쳤다. 이리 오라고, 빨리 오라고. 뒤 이어 야리키와 론솔피, 지멘, 아트밀, 그을린발 히베리도 그 외침에 동참했다. 그들은 길을 따라 띄엄띄엄 간격을 둔 채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을 불러모았다. 비가 그치는 대신 불길이 치솟아오른 숲에서 레콘들이 뛰쳐나왔다. 조금 전까지의 폭우가 오히려 그들에겐 도움이 되었다. 몸을 흠뻑 적 신 물기가 열기를 상당히 막아주고 있었다. 숲 사이에서 그들이 나타 날 때마다 일곱 레콘은 소리의 방향을 가리켰다. "저리로! 저리로 가!"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주저없이 소리를 향해 달려갔다. 방향을 지시하다가 문득 위를 올려다본 야리키는 경악했다. 한껏 치솟아올랐 던 불길이 이제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온갖 방향으로 쓰러지는 불길을 본 야리키가 계명성을 질렀다. 그 외침에 하늘을 본 레콘들도 벼슬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도-망-쳐-!" 산불과 지진이 동시에 일어난 숲의 모습을 수십 배 확대한 것 같았 다. 곳곳에서 쓰러지는 불의 기둥들은, 너무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한 동안은 그것의 접근을 눈치채기 어려웠다. 머리 가까이 왔 을 때 비로소 알게 되고 피할 시간은 언제나 빠듯했다. 하지만 레콘 들은 머리 위쪽에만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산불과 지진에 덧붙여 끔찍한 재난 몇 개가 더 일어난 숲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 말리 위 에서는 나타났기 때문이다. 불 붙은 뿌리들이 그 굵은 동체를 비틀었다. 길 양쪽에서 그것은 불 타는 뱀처럼 파동을 그렸고 그 중 어떤 곳은 고통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난폭하게 꿈틀거렸다. 길 가운데를 달려가는 레콘들에게 채찍처럼 날아오는 것들도 있었다. 화형의 고통 때문에 뿌리들은 더 이상 길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양쪽을 둘러본 주테카는 그 의심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길이 점 점 좁아지고 있었다. 양쪽에서 불타는 덩굴과 뿌리, 그리고 줄기들이 물거품 대신 불꽃을 피워올리며 느린 파도처럼 다가왔다. 깃털이 그 을리는 것을 느낀 주테카는 악을 쓰며 달렸다. 다른 레콘들도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마지막 순간 그들의 속도는 사냥감을 노리고 떨어 지는 매의 속도 이상이었다. 소리가 지척에 나타났다. 소리의 등 위에서는 이미 그곳에 타고 있 던 자들이 빨리 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레콘들이 차례로 소리에 오르 고 맨마지막으로 론솔피가 소리에 뛰어오르자 먼저 와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뒤로! 뒤로!" 소리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무섭도록 증가된 속도를 줄일 수 없었던 론솔피는 한참 동안 달려가다가 그냥 바닥에 굴러버렸다. 그 리고 그 외 다양한 방법으로 멈춰선 다른 레콘들의 곁에 누웠다. 그 는 하늘을 보며 가슴을 크게 벌렁거렸다. 하지만 레콘은 어지간해선 달리기로 지치지 않는다. 그들을 지치게 만든 것은 산채로 통구이가 될 뻔한 공포와 거기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다. 곧 론솔피의 호흡이 안정되었다. 론솔피는 일어나 앉아서는 띵한 머리를 움켜쥐었다. 인간들은 대부분 땅에 쓰러진 채 일어날 줄 몰랐지만 레콘들은 론솔 피와 마찬가지로 앉거나 서 있었다. 사라티본 부대의 레콘들은 제정 신이 아닌 모습이었지만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라 불안해 하는 표정도 조금씩 보였다. 론솔피는 사실상 그런 문제는 아 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살아났으니 그런 문제를 생각해볼 시간 도 있을 것이다. 론솔피는 다시 눕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정우가 그에게 다가왔다. "론솔피, 대장군님은 어디 있죠?" 론솔피는 그 말에 경악했다. 인간이었다면 그 검은 몸이 하얗게 변 했을지도 모르지만 대신 그는 깃털을 부풀리며 말했다. "여기 없어?" 정우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론솔피 또한 그곳을 보았다. 그 위쪽 전체에 폭염이 꿈틀거리는 말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소리가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말리도 멀어졌기에 둘 사이의 걸 는 꽤 멀었다. 론솔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는 소 리의 등을 향해 외쳤다. "엘-시-!" 깜짝 놀라는 사람들의 얼굴들 사이에는 엘시의 얼굴이 없었다. 대답 하는 소리가 있나 귀기울이던 론솔피는 그것이 없다는 것에 사색이 되었다. 정우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날아오르려 했다. 하지만 야 리키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안아쥐었다. "안돼! 이미 늦었다. 일부러 남았어!" 발버둥치던 정우는 놀라서 야리키를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내가 봤다. 대전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엘시의 금군이 되길 바라던 론솔피가 비통한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 다. 야리키의 품에 안긴 채 정우는 아연실색하여 말리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서는 불붙은 용의 일부들이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들판의 풀 잎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말리가 꿈틀거렸다. 사람들은 말리를 바라보았다. 이라세오날은 바깥에서 작렬하는 불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불타고 있는 것은 곧 그녀 자신이었다. 이라세오날은 그 고통의 감각을 옆으 로 치워놓고는 엘시에게 말했다. "뭘 하는 거지?" 엘시는 대전 아래에 가만히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 굴은 뭔가 대단히 어려운 정신적 노동에 빠진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 었다. 말리가 다시 꿈틀했을 때 이라세오날이 말했다. "뭘 하는 건가, 엘시?" 엘시가 고개를 들어 이라세오날을 보았다. "폐하를 죽이려 했을 때, 저는 꿈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의 일부가 불타는 화르르륵 소리가 사방에서 엄습해왔다. 불타는 덩쿨과 뿌리들은 서로 부딪치고 바닥을 때리며 천둥 같은 소리를 내 뿜었다. 건물 어딘가가 무너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라세오날은 아 무 말 없이 엘시를 보았다. "예. 저희들은 파렴치하게 죄를 저지를 겁니다. 혼란을 퍼뜨려 생전 보도 듣도 못한 것들이 나타나게 하고, 그 중 아름다운 것들을 게걸 스럽게 취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규범에 묶어 치워둘 겁니다. 그리고 규범이 뭔지도 모르는 양 다시 혼란을 퍼뜨릴 겁니다. 한계인 규범은 길잡이가 아니라 그냥 불필요한 것들을 치워두는 곳이지요. 우리는 혼란을 퍼뜨릴 겁니다." 이라세오날은 비늘을 부딪쳤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모두 죽을 거다." 엘시는 슬픈 눈으로 이라세오날을 보다가 말했다. "그러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닥쳐! 너희들이 그것을 거부했어! 이 파렴치한……" 이라세오날은 말을 삼켰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엘시를 바 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나에게 죄를 지으려는 거냐?" 엘시는 물끄러미 이라세오날을 보다가 말했다. "이 하늘치를 고공으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저는 하늘치를 움직이는 법을 잘 모릅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라세오날은 무서운 것을 보듯 뒤로 주춤 물러났다. 엘시는 그 모 습을 보다가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단을 오르는 모습을 본 이라세오 날은 더 물러났다. 하지만 벽이 그녀를 막았다. 엘시가 단 위로 올라 오는 것을 본 이라세오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은 하늘치를 움직일 수 없다. 억지로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지금 나는 불에 타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다른 나와 잠시 끊어져 있 다. 연결이 다시 이루어지면 고통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 다.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없다." 엘시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그러면 불을 내뿜는 것이라도 멈춰주십시오." "그건 이미 멈췄어! 지금은 내가 타고 있다." 엘시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하늘치 를 움직여보려 애썼다. 이라세오날은 비늘을 조금씩 부딪치며 그 모 습을 바라보았다. 소리에 있던 자들은 하늘치가 다시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어떤 자들은 하늘치가 불의 고통 때문에 경련하는 거라 말했고 어떤 자들 은 황제의 경련이 하늘치에 전달되는 거라 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신하지 못했다. 론솔피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신경쓰지 않은 채 비통함을 곱씹으며 앉아있었다. 엘시의 금군이 되어야 하는데, 그 엘시가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론솔피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론솔피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한동안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계속 반복되어 마침내 론솔피의 주의를 끌었다. 론솔피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는 그을린발이 서있었다. "뭐?" "요술쟁이를 못 찾았다고 말했어." 론솔피는 한참 동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그것을 이 해하게 되었을 때 론솔피는 그을린발이 미치지 않았나 의심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신은 자살하고 있어." 자신의 말을 들은 후에야 론솔피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신이 되려 했던 용은 자신의 화염으로 스스로를 불태우 고 있었다. 사람들이 죄와 증오와 죽음을 마음대로 다루도록 내버려 둔 채. 론솔피는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량없는 슬 픔과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그가 다시 망아 상태로 빠져들려 할 때 히베리가 참을성 있게 말했다. "그걸 막아야 하는 것이 세 레콘의 결정일지도 모르잖아." "막는다고?" "그래. 신의 자살을 막는 것." 론솔피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히베리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히베리는 다그치듯 말했다. "생각해봐. 요술쟁이가 누구지? 응? 대호왕이 너를 믿고 그것을 맡 겼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대호왕의 이름은 론솔피로 하여금 정신이 번 쩍 들게 만들었다. 론솔피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 은 고무적인 것이 못되었다. "누굴까? 응? 히베리! 그래. 내가 그 임무를 맡았어. 시간이 없는 데. 누가 요술쟁이지?" 히베리는 자신을 억눌렀다. 그을린발은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무차 별학살을 착용한 나날은 그에게 큰 참을성을 기르게 해주었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대호왕이 뭐 말해준 것 없어? 요술쟁이를 찾을 단서 같은 것." "몰라. 대호왕은 그 레콘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숙원을 가지 고 있을 거라고 했어. 네가 코끼리를 가축으로 만들면 모든 사람이 코끼리를 가지게 되잖아? 그런 것처럼 숙원 자체가 모든 사람과 관련 이 있어. 그리고 요술쟁이는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을 같게 만드 는 거라고……" 빠르게 대답하던 론솔피는 그을린발이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았다. 그을린발은 몸을 부풀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다시 통제하 여 소리 위의 생존자 상당수를 학살해버릴 고비를 넘긴 그을린발은 몸을 돌려 고함을 질렀다. "쵸지! 쵸지 어디 있어? 서로 다른 종족에게 똑같이 예쁘게 보이는 말도 안 되는 미녀를 찾는 정신나간 놈 어디 있냐고!" 그리고 숙원에 성공한다면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그의 아내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낄 테고. 론솔피는 납병례를 치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 다. 난 너를 쥘 자격이 없어. 쵸지가 달려오자 그을린발은 그를 이끌고 지멘에게 달려갔다. 론솔 피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지멘에게 도착한 그을린발은 신속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근처에 있던 정우와 아실, 탈해, 그리고 다른 사람 들도 놀란 눈으로 그을린발의 설명을 들었다. 빠르게 설명을 끝낸 그 을린발이 말했다. "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람들은 말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직도 간헐적인 진동을 하고 있었다. 어떤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쵸지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길잡이가 결정하는 사람이지? 지멘. 네가 결정해." 지멘은 뜻밖의 말에 당황하여 말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늘치의 등 에서 불타고 있는 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을린발 이 조급하게 말했다.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영영 결정하지 못하게 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저 불부터 끄고……" 지멘은 말을 삼켰다. 그런 대화재를 진화하려면 폭풍우가 몇 묶음씩 필요할 것이다. 다른 자들도 같은 판단에 입을 다물었다. 그 때 아실 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당황한 사람들에게 아실이 외쳤다. "불을 끄려는 거야! 규리하공!" 정우는 아! 하듯 입을 벌렸다. 그녀는 말리를 향해 외쳤다. "말리야, 올라가! 올라가!" 아실은 그녀의 곁에서 자신의 방법으로 말리를 움직였다. 말리를 통 째로 감싸는 환상을 만든 아실은 그것이 위로 솟아오르게 했다. 곧 사람들은 말리가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황한 사람들 이 돌아보자 정우가 설명했다. "높이 올라가서, 추운 곳에 가서 불을 끌 생각이에요. 그래서 저렇 게 꿈틀거리는 거예요." 쵸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저렇게 큰 불이 좀 추워진다고 꺼질까?"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러려고 하고 있어요. 다른 방법도 떠오르지 않고요." 정우는 소리 또한 말리를 뒤따라 상승하게 했다. 그들은 속도를 점 점 높였다. 소리와 말리는 폭우를 뿌렸다가 흩어지기 시작한 구름들 사이로 치 솟았다. 가까이서 본 구름은 안개 비슷하게 보였고, 그들이 구름 위 로 올라온 후에는 찢어서 던져놓은 도깨비지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 틈으로 대지를 내려다본 사람들은 봄으로 물든 대지의 흐릿한 음영들 을 보았다. 명백히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지형은 거의 없었다. 소리와 말리가 계속 상승했다. 지평선이 희미해지고 낮아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틸러 달비는 걱정 스러운 눈으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톱니 같은 지형이 보였다. 불편한 기분으로 틸러는 그것이 시구 리아트 산맥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산맥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이 까마득 한 고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틸러는 귀가 멍멍해지는 것을 느끼곤 침을 삼켰다. 으슬으슬한 추위를 느꼈고 또한 호흡이 조금 힘들어지 는 것을 느꼈다.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속시원한 느낌보다는 구토감과 현기증을 주었다. 목이 말랐 다. 그리고 추위가 머리를 띵하게 했다. 인간들의 얼굴은 검푸르게 변했다. 그 때 소리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틸러는 일어나려다가 혹심한 추위를 느끼며 몸을 움켜쥐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정우와 아실에게 다가갔다. 아실은 지멘에게 안겨 바들 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야리키에게 비슷한 모습으로 안겨있는 정 우에게 말했다. "더는 못하겠어요. 땅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바닥이 제대로 안 보 여서 상상할 수가 없어요." 정우 또한 말리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당혹했다. 무 엇보다도 소리가 더 상승하면 그 위에 있는 자들이 얼어죽을지도 모 른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말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소리보다 5, 600미터 쯤 더 높은 고도에 있었다. 그 불길은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아직도 쉽사리 꺼질 것 같지 않았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 는 정우에게 야리키가 말했다. "이젠 됐다. 레콘들은 괜찮지만 인간들은 얼어죽는다. 내려가자." 정우는 떨리는 얼굴로 지멘을 돌아보았다. "결정했어요?" 지멘은 끌어안고 있는 아실을 바라보았다. 새들도 쉽사리 날아오르 지 않는 수천 미터 가까운 상승 끝에 마침내 지멘은 결정을 내렸다. 그가 말했다. "나는 저것을 살려야 된다고 생각해." 정우가 물었다. "왜죠?" 이라세오날은 바닥에 쓰러진 엘시를 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엘시 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미 지상의 사람은 호흡을 힘들어하는 높 이에 도달해 있었다. 엘시는 기이한 숨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호 흡을 갈구하는 몸은 그를 격한 피로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라세오날은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엘시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 녀는 엘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다. "왜지?" 엘시는 무슨 말인가를 웅얼거렸다. 알아듣기 힘든 소리였지만 이라 세오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할 수 없다. 저 바깥의 사람들도……" 그 때 하늘치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라세오날은 놀라서 바깥 을 바라보았다.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소리 위에 있는 레콘들이 계명성을 질렀다. 말리를 공격했던 일곱 명의 레콘은 물론이거니와 사라티본 부대의 모든 레콘들이 똑같은 외 침을 토했다. 인간들은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그들로서는 천둥이 만 들어지는 구름 속에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귀를 막은 그들은 놀란 눈으로 말리를 바라보았다.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그들의 외침 그 자체가 말리를 밀어올리는 것 같았다. 말리는 지금 까지 그러했던 것처 게시판이 이번 화의 타자 님 글을 감당하기에는 용량이 조금 딸리는군요. :) 뒷편이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04·12·24 08:36 피를 마시는 새 41. 장생 (4-2) - 終結 | 2004·12·24 08:30 | HIT : 101 | VOTE : 0 | (꼐속) 이라세오날은 바닥에 쓰러진 엘시를 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엘시 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미 지상의 사람은 호흡을 힘들어하는 높 이에 도달해 있었다. 엘시는 기이한 숨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호 흡을 갈구하는 몸은 그를 격한 피로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라세오날은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엘시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 녀는 엘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다. "왜지?" 엘시는 무슨 말인가를 웅얼거렸다. 알아듣기 힘든 소리였지만 이라 세오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할 수 없다. 저 바깥의 사람들도……" 그 때 하늘치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라세오날은 놀라서 바깥 을 바라보았다.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소리 위에 있는 레콘들이 계명성을 질렀다. 말리를 공격했던 일곱 명의 레콘은 물론이거니와 사라티본 부대의 모든 레콘들이 똑같은 외 침을 토했다. 인간들은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그들로서는 천둥이 만 들어지는 구름 속에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귀를 막은 그들은 놀란 눈으로 말리를 바라보았다.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그들의 외침 그 자체가 말리를 밀어올리는 것 같았다. 말리는 지금 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하늘로 치솟아올랐다. 다른 레콘들과 함께 계 명성을 지르면서도 론솔피는 말리에 일어나는 일을 경악으로 바라보 았다. 그는 요술쟁이 쵸지를 보았다. 쵸지는 아실과 정우에게 어떻게 하늘치를 움직이냐고 물어본 다음, 아실의 방법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정우의 방법을 따른다고 결 정했다. 지멘과 히베리는 어처구니 없는 기분을 느꼈지만 더 그럴 듯 한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쵸지의 방법을 따랐다. 잠시 후 다른 레콘들이 그들을 돕듯 참여했고, 그러자 말리가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모든 레콘들이 계명성에 동참했다.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 말리는 이제 가속하고 있었다. 상승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을 본 레콘은 더욱 커다랗게 계명성을 질렀다. 그들은 하늘치를 별들에게 보낼 듯 펄쩍펄쩍 뛰며 외쳤다. 그리고 하늘치는 그들의 바람처럼 별 들에게까지 날아갈 듯 솟아올랐다. 이라세오날은 솟아오르는 하늘치의 가속을 느꼈다. 그것은 점점 빨 라지고 있었다. 황제는 목 근처의 비늘을 조금 일으켜 세웠다가 엘시 를 내려다보았다. 엘시의 볼에 물방울 같은 것이 떨어졌다. 그것은 은빛이면서 은은한 초록빛을 머금고 있었다. 볼을 훔친 이라세오날은 손바닥에 묻어나는 눈물을 보았다. 그것은 은초록으로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엘시를 들어올렸다. 두 팔로 건장한 그의 몸을 받친 이라세 오날은 밖으로 걸어나갔다. 숲을 집어삼키던 불길은 사그라들고 있었 다. 그녀는 사그라드는 화염 사이를 걸어갔다. 하늘이 기묘하게 어두 웠다. 말리가 어느 정도의 속도를 갖추자 그을린발은 주저없이 정우에게 내려가라고 말했다. 소리는 아래쪽으로, 보다 따스한 쪽으로 내려가 기 시작했다. 하지만 흥분한 레콘들은 소리가 내려가는 도중에도 계 속해서 말리에게 계명성을 질렀다. 말리가 손바닥만한 크기로 줄어들 었을 때야 비로소 그들도 계명성을 멈추었다. 소리 주변의 공기도 다시 따스해졌다. 하지만 고공에서 인간들이 얻 은 피해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귀가 간질간질하다느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느니 하는 여러 가지 증상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런 불평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들은 방금 사람들의 함성만으로 하늘치를 움직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땅이 점점 분명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던 그을린발이 갑작스럽 게 말했다. "우리가 제대로 결정한 건가? 불이 꺼진 다음 다시 내려와 우리를 장악하려고 하면 어쩌지?" 지멘은 그 말에 아실을 보았다. 아실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러나 쵸지는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다시 올려보내지." 지멘과 히베리는 기막힌 표정으로 쵸지를 보다가 헛 소리를 냈다. 아실도 미간을 조금 펴고는 그 미소에 동참했다. 문득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곤 말했다. "규리하공이 어디 있죠?" 쵸지가 손을 들었다. 그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둔덕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정우를 발견했다. 그 곁에는 탈해와 야리키가 서있 었다. 세 사람은 레콘들이 내지르는 계명성을 피하기 위해 그곳으로 옮겨 와 있었다. 탈해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라티본 부대와 제국군 사이에 는 이제 경계심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더 아래로 내려가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른다. 그들은 죄와 증오와 죽음의 권리를 지켰으 니까. 탈해는 그것이 사람들 사이를 횡행하게 둔 것이 과연 잘한 일 인지 알 수 없었다. 불을 쓰지 못하는 도깨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우를 내려다보았다. 탈해의 눈길을 느낀 정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갸웃한 채 탈 해를 보던 정우는 싱긋 웃었다. "다 괜찮을 거야." 탈해는 엉거주춤한 표정을 짓다가 그냥 따라 웃었다. 그 말에 화답 하려던 탈해는, 갑자기 정우의 뒤편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질겁했 다. 두려움에 정우를 와락 끌어안으며 그를 자세히 본 탈해는 조금 후에야 그 사람이 자신의 두려움처럼 스카리 빌파가 아님을 깨달았 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타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야리키 또한 어 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어 솔한?" 정우는 탈해에게 안긴 채 놀란 눈으로 하얀 옷차림의 사내를 바라보 았다. 그것은 분명히 죽은 살인기사였다. 제이어는 빙그레 웃으며 정 우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규리하공." "좋은 꿈 꾸셨…… 어르신이세요?" 제이어는 껄껄 웃었다. "저는 킴입니다." 세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그 때 세 사람 앞에 나타난 이방인을 본 소리의 탑승자들이 의아해 하며 달 려왔다. 제이어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규리하공. 하늘에서 신랑감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습니 까?" 당황한 정우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아뇨. 아직 찾지 못했는데요." "그런데, 정말 하늘에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정우는 입을 조금 벌린 채 제이어를 보다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녀가 다시 고개를 숙여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제이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지금 가야 됩니다." 정우는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탈해의 품에서 빠져나오더니 위로 쑥 솟아올랐다. 탈해는 어, 어? 하며 위로 손을 휘저었지만 이 미 정우는 높은 고도로 치솟아오른 후였다. 탈해는 어이 없는 눈으로 그 모습을 좇다가 제이어를 보았다. 야리키가 말했다. "무슨 짓이냐?" 제이어는 배부른 표정으로 달려오는 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갑자기 솟아오른 규리하공에게 놀라 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제이어는 빠르게 말했다. "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두 번째 영웅왕이나 제국의 분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 겠지요. 이런, 제가 다 말했나요? 큰일이군요. 더 떠들기 전에 작별 을 고해야겠습니다. 걱정마십시오. 규리하공은 안전하게 돌아올 겁니 다." 제이어는 정중하게 목례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로 사라졌다. 야리키와 탈해는 서로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별로 신통찮 았기에 그들은 정우가 사라진 하늘을 보았다. 어둠과 암흑 속을 헤매던 엘시는 무시무시한 속도감과 몸을 짓누르 는 압력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직시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눈을 뜨 게 되었다. 잠깐 동안 엘시는 자신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번 쩍이며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 도, 심지어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엘시는 몸 을 움직여보려 했다. 하지만 팔다리는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숙고를 거듭한 끝에, 그리고 빙글빙글 도는 대지를 발견한 후에 엘 시는 자신이 추락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엘시는 팔다리를 움직여 대지에 대해 안정된 자세를 취하게 하려 노 력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는 몸을 아래로 향한 채 엎드린 자 세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것에 만족하려던 엘시는 문득 쓴웃음을 지 었다. '안정된 자세로 죽게 되었군.' 엘시는 자신의 노력을 비웃지 않았다. 남은 순간을 조금 고상하게 보낸다 해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엘시는 그 자세를 유지하며 희미한 구름이 파문처럼 퍼져있는 하늘과 대지의 풍경을 감상했다. 그러다가 엘시는 말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비로소 엘시는 자신이 왜 추락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게 되었다. '누가…… 폐하께서 나를 던졌나?' 엘시는 말리가 어디 있는지 보기 위해 몸을 뒤집으려 했다. 다시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고, 어쩌다가 엘시는 위쪽인 것 같은 방향을 보 게 되었다. 하지만 말리는 보이지 않았다. 바람의 영향 때문에 그는 똑바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엘시 는 다시 땅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머릿속으로 말리에 대해 상상했다. 그는 그것이 어떤 모습이 될지 알고 있었다. 말리는 공기도 없고 무섭도록 추운 곳. 사람이 가진 어떤 능력으로 도 가닿을 수 없는 캄캄한 별들의 공간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는 불이 탈 수 없다. 불은 모두 꺼졌을 것이고 황제와 아라짓 전사들 은 그 추위 속에서 냉동장치의 도움 없이 얼어붙을 것이다. 그 영원 한 겨울 속에 얼어붙은 불씨는 일만육천 년 동안 잠들 것이다. 사람 들이 지나치게 어리석다면 그보다 훨씬 짧은 기간 동안. 그러나 그 깨어남은 에더리 황조의 한두 사람이 좌우할 수는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 기에 도달하게 한 것과 같은 힘만이 그것을 아래로 끌어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엘시는 그 힘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감정 대부 분은 자신의 죄를 끌어낸 이라세오날에게 돌려져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우리에게 허락된 죄와 증오와 죽음은 너무도 강력합 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을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때가 언제인지는 폐하도 아니고 우리 중 한두 사람도 아닌, 우리 모 두가 결정하고 싶습니다. 그런 능력조차 없다면 우리는 멸망해 마땅 합니다.' 엘시 에더리, 신의 아들, 하지만 신에게 죄를 저지른 자가 유성처럼 떨어져내렸다. 신이 그를 땅에 던졌고, 그는 영원을 느꼈다. 눈을 감으려 했을 때 엘시는 이질적인 것을 보았다. 엘시는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보았다. 무엇인가가 낮은 하늘에서 나 비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엘시는 그것에 더 집중했고, 조금 후 웃 음을 터뜨렸다. 놀라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기에 그 웃음은 좀 이상 했다. 엘시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 또한 엘시를 사랑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엘시는 살아있지 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엘시는 살아있었다. 그는 신에게 죄를 지었고 그것으로 자신의 도덕을 창조할 수 있었다. 사랑도? 엘시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 때 엘시는 니어엘을 떠올렸다.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런가.'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확실히 살아있었지만, 지금 추세대로 라면 오랫동안 그러지는 못할 것 같았다. 엘시는 방향을 바꾸려는 서 툰 시도를 해보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는 목적한 방향에 도 달할 수 있었다. 엘시는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그 때 그녀 또한 엘 시를 발견했다. 그녀는 나비 같은 움직임을 멈추고 엘시를 향해 똑바 로 날아왔다. 엘시는 두 팔을 벌렸다. 약간 쑥스럽게. 정우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향해 날아왔다. 바람을 자아낼 공기도 없고 기온은 무섭도록 추운 곳, 지상의 모든 지형은 무의미하게 뭉개지고 지평선은 세상의 모양을 나타내는 곡선 을 그리는 곳, 반짝임 없는 별들이 작은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는 곳. 그곳에 얼어붙은 신과 얼어붙은 신의 전사들을 태운 하늘치가 있었 다. 하늘치는 그런 궤도에 오르지 않는다. 지상의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 여 그들이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하늘치의 목적이므로. 그리하 여 마침내 사람들이 그것을 불러내리게 될 때 약속은 이루어진다. 그 렇기에 하늘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높이에서, 그를 보고 약속을 깨달을 수 있는 높이에서 날아다닌다. 하늘치에게 그 궤도는 낯설었 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올려보냈다. 약속의 방향과 반대 방향이긴 하지만 하늘치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얼어붙은 신과 얼어붙은 신의 전사들을 태운 채 공기도 없고 열기도 없는 별의 바다를 헤엄치 는 것에 동의했다. 어쩌면 그것도 약속이 이루어지는 한 가지 방법일 지도 모른다. 하늘치는 고독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세상의 둥근 지평선을 따라 별의 바다 속을 고요히 헤엄쳤다. =============================================================== 피를 마시는 새 끝났습니다. 이 초라한 글 읽어주신 여러분들의 인내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즐거운 성탄 되시고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만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