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안의 샤나 Takahasi Yasichiro [타카하시 야시치로] 제 4권 1. 안개 속의 이세계 2. ‘린네’의 꽃 3. 홍련의 선서 4. 애염의 끝 에필로그 1. 안개 속의 이세계 “너한텐 절대 지지 않아!” 큰 소리로 울려 퍼진 포효에 깜짝 놀란 사카이 유지는 미사키 고등학교 옥상에서 뒷마당을 돌아보여 외쳤다. “샤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딱딱한 벽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녀가 옥상으로 뛰어올라왔다. 허공에 뜨는 시간도 아까운 것일까, 소녀는 철조망을 잡고 한 바퀴 회전하여 유지의 눈앞에 착지했다. 이미 익숙해진 모습인데도 유지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허공에 불꽃을 흩뿌리는 타오르는 머리카락, 커다랗게 펄럭이는 검은 옷, 날카롭게 빛나는 거대한 검. 홍련의 작안이 장렬한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움이 아닌 강함에 한순간 넋을 잃었던 유지는 곧 눈앞에 착지한 소녀…… ‘염발작안의 토벌자’ 샤나에게 물었다. “뒤, 뒷마당에 ‘무리’가 있는 거야?!” “뭐?”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이세계의 거주자 ‘홍세의 무리’를 토벌하는 능력자 플레임헤이즈인 소녀는 어째서인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유지는 머뭇거리며 뒷마당 쪽의 철조망으로 다가갔다. “아까 지지 않을 거라고 소리 질렀잖아?” “아…….” 그제야 샤나는 유지가 자신의 언동을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큰 기척은 시가지 쪽에서 느껴지지만 뭔가 라미 같은 특수한 녀석이…….” 그렇게 말하며 유지는 뒷마당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별것 아닌 일인데도 샤나는 그것이 몹시 무섭고 싫었다. 이제는 확시맇 알 수 있는 이유가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됐어.” 샤나는 유지의 손을 잡아당겼다. 자신이 그곳에서 외쳤던 말의 의미를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유지가 그곳에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절대 그녀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뭐? 하지만.” “됐다니까!” 샤나는 두려운 나머지 동연히 언성을 높였다. 유지가 깜짝 놀라는 모습에 작은 두려움을 느껴졌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도 겁이 났다. 샤나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더욱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무리’가 아니야. 괜찮아.” “……? 아, 알았어.” 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뺨을 부풀리며 말하는……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샤나의 모습에서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절실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무엇보다 이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유지는 그녀에게 손을 잡힌 채 뒷마당 반대편의 정문 쪽……큰길과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철조망 앞에 섰다. 두 사람 앞으로 이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시립 미사키 고등학교를 포함한 서쪽 주택가. 미사키 시를 이등분하며 유유히 흐르고 있는 마나 강과 양 옆을 둘러싼 높은 제방. 시의 중심에 걸려 있는 대철교 미사키 대교. 그 너머에는 높은 빌딩이 밀집해 있는 동쪽 시가지. 황금색으로 빛나는 안개가 그 익숙한 풍경을 섬뜩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짙게 또는 엷게 때때로 시가지 전체를 가렸다가 드러내며 흔들리는 황금색 안개. 얇은 장막처럼 하늘을 차단하고 있는 황금색 안개 속에서 대낮의 햇살이 신비한 빛을 흩뿌렸다. 무엇보다도 눈 아래 펼쳐진 광경은 모든 움직임과 소리를 잃어버린 채 정지한 상태였다. 유지는 그 안개 속에서 조금씩 다가오는 미지의 기운을 느꼈다. 방금 전 안개에 뒤덮일 때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의 위화감’……, ‘홍세의 무리’의 기척을. “그럼 이 기분 나쁜 안개와 같은 느낌은……. 그쪽 짓이야?” “그래, 저곳에 있는 ‘홍세의 무리’의.” 샤나의 빛나는 작안도 유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시가지 근처에서도 굉장한 거물이 싸우고 있어…….” 유지는 샤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차례 싸움을 겪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매일 밤 단련을 한 덕분일까. ‘홍세의 무리’의 기척을 감지하는 그의 감각은 이제 매우 예민했다. 거대한 기척을 지닌 ‘무리’와 싸우며 자재법을 구사하고 있는 또 하나의 거칠고 사나운 기척이 누구의 것인지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상대는……, 그 사람인가.” 얼마 전 신념의 차이로 격돌했던 샤나와 같은 플레임헤이즈 여성. 전투광이라고도 할 수 잇는 그녀와 ‘왕’이 아직 미사키 시에 머물고 있음은 유지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좀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샤나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강한 플레임헤이즈라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공동전선을 펴기에는 무척이나 듬직한 상대다. “상대는 최소한 두 명……. 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자들을 처리하면 된단 말이군, 아라스톨.” “음.” 샤나가 자신을 취해야 할 행동을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에 걸려 있는, 두 개의 금색 링이 검은 구슬을 교차하는 듯 감싸고 있는 펜던트에서 무겁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우레처럼 낮고 무거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샤나와 계약하여 그녀에게 힘을 부여해준 홍세의 왕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 그(?)의 본체는 샤나의 몸 안에 잠들어 있으며 이 펜던트 모양의 신기 ‘코큐토스’를 통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전장의 환경을 조종하는 자재사 같군. 적 본체뿐 아니라 주위에도 신경을 쓰도록 해라.” “응.” 샤나는 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는 황금색 하늘로 시선을 롬꼈다. “전장……. 이 안개 같은 건 역시 ‘봉절’인가?” 봉절이란 돔 형태의 인과 고립 공간을 뜻한다. 내부를 세계의 흐름과 단절시킴으로써 외부로부터 격리 및 은폐하는 신비한 술법으로 ‘홍세의 무리’가 인간의 ‘존재의 힘’을 먹을 때 실체를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자재법’의 일종이다. “그런 것 같아. 하지만 이렇게 큰 봉절을 펼친 이유를 잘 모르겠어.” 봉절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원칙적으로 ‘홍세의 무리’나 ‘홍세의 왕’과 계약한 능력자 플레임헤이즈뿐이다. 보통 이 공간은 서로가 가까이 있을 경우 결투장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넓게 펼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원동력인 ‘존재의 힘’을 쓸데없이 소모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고생만 할 뿐이다. “단순한 봉절이 아니라 함정 아닐까?” 유지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말했다. 참고로 유지는 ‘무리’도, 플레임헤이즈도 아니다. ‘무리’에게 먹힌 인간의 대체품 ‘토치’이자 몸 안에 ‘홍세’의 보구가 담겨 있는 ‘미스테스’라는 특수한 존재이다. 그의 몸 안에는 시간의 흐름을 조종하는 특별한 보구 ‘영시미아’가 존재한다. 덕분에 그는 봉절 안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보구는 봉절 안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인 전투에는 완전히 무능했다. 샤나는 그런 유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모르겠어, 아라스톨?” “내 기억에는 없는 술법이로군. 가까운 시대에 건너온 자의 특수한 자재법인 모양이야.” 유지가 ‘나는 어쩌면 좋지’라고 물으려던 순간 샤나가 그의 말을 막았다. “유지, 너는 여기 숨어 있어.” “뭐…….” “이번 싸움에는 잔꾀가 통하지 않아. 힘과 힘이 정면으로 격돌하는 싸움이 될 거야.” 샤나에 말에는 ‘너는 짐만 될 뿐이야’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 널 괜히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아!” 샤나는 타오르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유지의 반론을 막았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은 이미 시인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알고 있다. 시간도 없다. 그래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숨어 있기나 해라 이 말이야?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너무 무모해. 이건 싸움이야. 알겠어?” 샤나는 무조건 윽박지르지 않고 조용히 확인하듯 말했다. 그렇기에 유지에게는 더더욱 큰 각오가 필요했다. 아라스톨도 가차없이 사실을 지적했다. “싸우겠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싸움에 임햇을 때 정확하게 표적을 정하고 적절한 수단을 구축할 수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판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필요한 배짱과 운을 지닌 자는 더더욱 드물지.” ‘할 수 있다’는 안일하고 입바른 대답을 허용치 않는 말, 그것은 평소 늘 퉁명스러운 태도로 유지를 대하는 아라스톨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물론 아라스톨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샤나가 슬퍼할 거라는 생각에(지나친 자신감인가?)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만……. 유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샤나는 이글거리는 작안으로 황금색 안개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 곧 시작될 싸움에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며 말했다. “널 싸움에 데려갈 순 없어. 그게 내 결론이야. 우리는 이 ‘무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널 지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만약 ‘아주르’로 막을 수 없는 공격이라면 너라는 존재는 소멸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데려갈 수 없어.” 유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목에 걸고 있는 화염을 막는 반지 ‘아주르’는 화염과 폭발을 막을 수 있는 보구다. 하지만 샤나는 그 비장의 무기로 인한 자신감을 느닷없이 박살내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반론의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아라스톨이 말했다. “나도 샤나와 같은 생각이다. ‘헌터’ 때처럼 말려든 것도 아니고 ‘조사를 읊는 자’처럼 지켜야 할 자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전할 이유가 없다. 전력에 보탬이 되지도 않고, 따라서 전장에 동행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이번에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부정당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은 감정론으로 설득할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혈기와 용기만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싸움도 아니다. 유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샤나와 아라스톨은 그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본인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겠지만 두 사람 모두 난국에 처했을 때 발휘되는 그의 날카로운 판단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아라스톨이 말했다. “너에게는 가르쳐줄 기회가 없었지만……, ‘무리’는 존재의 격에 따라 일으킬 수 있는 현상의 규모가 다르다.” “?”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지는 잠자코 아라스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 거대한 봉절 같은 공간은 내가 현신할 때 이상으로 규모가 크고 현상도 복잡하다. 지금 느껴지는 기운밖에 지니지 못한 ‘무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펼칠 수 없는 수준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나,” 샤나와 아라스톨은 이 물음에 유지가 어떤 대답을 할지 내심 기대했다. 그리고 유지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 안개의 공간은 어떤 보구나 특별한 자재법으로 유지되고 있단 말이야……?” 샤나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았어. 우리가 싸우는 동안 이 주변을 조사해봐. 눈앞의 ‘무리’가 그런 종류의 보구를 갖고 있거나 자재법을 사용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장치가 ‘무리’ 본인이 아닌 이 공간 어딘가에 배치되어 있을 가능성도 그만큼이나 높아.” “그걸 찾으란 말이지.” “있다면 말이야. ‘무리’는 봉절 속에서 움직이는 토치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을 거야. ‘존재의 힘’의 흐름이나 ‘무리’의 접근은 감지할 수 있지?” “……응. 아마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실전에 뛰어들어야 하는 불안감 때문에 유지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샤나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뭔가 하고 싶다는 말은 네가 먼저 꺼냈잖아. 뭔가를 알아낼 경우 단독으로 대처할지 도움을 청할지 그 문제는 알아서 판단하도록 해. 우리에게 연락할 방법도 전부 너한테 맡길게.” 아라스톨이 덧붙였다. “만약을 위해서 말해두지만 너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예방조치에 불과하다. 굳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리’를 토벌하거나 이 봉절을 만든 보구를 없애버리면 사태는 종결될지도 모른다.” “나도 알아.” “물론 위험도 있다. 우리가 잡혀 있는 이 자재법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그것도 아직까지는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린네’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지.” 유지도 언젠가 먹힐 뻔했던 적이 잇는 ‘무리’의 부하 ‘린네’. 그 불길한 말과 자신이 발을 들여놓아야 할 장소의 두려움을 새삼 실감하면서도 유지는 엄숙하고 조용하게 대답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낸 일이야. 책임지겠어.” 그렇게 말하며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어느 샌가 긴장감 때문에 입 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음.” 그러나 아라스톨은 그런 유지에게 드물게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은 자신을 인정한 것일까. 유지는 행동에 돌입하기도 전에 성급한 만족감을 느꼈다. 샤나는 솔직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약을 위해 철조망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그럼 갈게. 최대한 앞으로 나가서 싸울 테니까 그동안 학교에서 나가도록 해.” “응.” 샤나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었지만 그래도 유지는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옥상 출구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문득 철조망 옆에 정지해 있는 친구 이케 하야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지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샤나!” 막 몸을 날리려던 샤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학교를……, 친구들을 지켜줄래?” 그 말에 샤나도 이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샤나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가능한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만은 약속할게.” “고마워. 나도 최선을 다할게.” “알아.” 샤나와 유지는 서로 짧게 확인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유지가 농담조로 가볍게 덧붙였다. “내가 뭔가 도움이 되면 상을 주기다.” “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대꾸하려던 순간 샤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소년은 어째서 이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벌벌 떨며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만 하면 그뿐일 텐데. 얌전히 뒤에 숨어 있으면 될 텐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도 아라스톨도 책망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이 동네를 위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친구들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무리’를 용서할 수 없어서?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신의 존재를 걸면서 행동하는 이유는……. [힘내.] 그렇다. 오늘 아침 푸른 하늘 아래서, 바람 속에서, 자신에게 던진 말을 실행하기 위해서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슴속에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그 뜨거움에 연쇄반응을 일으키기라도 하듯 사카이 치구사에게서 들은 말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자신의 모든 것에 접근해도 좋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도 좋습니다……, 그렇게 맹세하는 행위. 그건 친한 사람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더 강렬하고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을 드러내는 결심의 한 가지 형태랄까. 그러니까 그렇게 결심하기에 합당한 상대가 아니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고 받아서도 안 돼.] 유지와 자신. 유지와 자신. 유지와 자신. 맹세라는 행위는……. “바, 바보!” “?!” 샤나의 느닷없는 외침에 유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샤나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말이 그렇게 거슬리는 농담이었나? “바, 바보라니 너무하네.” “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 하지도 않은 일에 상을 바라지도 마!”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화낼 것까지는 없잖아…….” 샤나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유지는 분노하는 플레임헤이즈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재빨리 출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문을 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 “응.” 두 사람은 서로 그럴듯한 말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다. 잠시 계단을 내려가는 유지의 발소리를 듣고 있던 샤나가 느닷없이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라스톨이 입을 열었다. “갈까.” “응.” 유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대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강한 힘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목소리. 그것은 플레임헤이즈의 목소리였다. 샤나는 소용돌이치며 다가오는 황금색 안개의 중심을 빛나는 작안으로 응시했다. 이미 거리는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안개의 엷은 부분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끈이나 넝쿨 가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전진해서 학교에서 멀어지자.’ 샤나는 ‘니에토노노샤나’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작은 가슴 한가득 숨을 들이마셨다. “하앗!” 힘찬 기합과 함께 발밑에서 홍련의 폭발을 일으키며 ‘염발작안의 토벌자’는 전장으로 도약했다. 미사키 시에 머물고 있는 또 한 명의 플레임헤이즈,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는 자신을 둘러싼 이계가 어느 샌가 무서운 규모로 확장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냥 기척을 숨기기 위한 자재법이 아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눈앞의 문제……자신의 목숨을 좌우하는 싸움이었다. “……얍!” 마죠리는 질주 도중 땅을 힘껏 박차고 그 반동을 이용하여 뒤로 몸을 날렸다. 달려가던 그 움직임을 따라 탁한 보라색 폭발이 일었다. 포석을 튕겨내며 부풀어오른 불꽃 속에서 보라색 불로 이루어진 호랑이 머리가 튀어나와 뒤로 물러서는 마죠리를 뒤쫓았다. 그 목은 부자연스럽게 가느다란 관 같은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목이 긴 호랑이 괴물처럼. 곧 반대편, 즉 뒤로 물러선 마죠리의 등 위에서 똑같은 것이 또 한 마리 나타나서 앞뒤로 거리를 좁혀 왔다. “!” 앞뒤를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마죠리는 그 자리에서 춤을 추듯 빙글 몸을 돌렸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책으로 앞뒤에서 다가오는 호랑이 머리를 화려하게 날려버렸다. “꽥, 크헉?!” 화판 몇 개를 겹쳐놓은 듯한 커다란 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이 책 모양의 신기 ‘글리모어’로 의사를 표출하는 ‘홍세의 왕’, 마죠리와 계약하여 그녀에게 힘을 부여하고 있는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의 비명이었다. 마죠리의 공겨글 받고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호랑이 머리는 또 다시 궤도를 수정하여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마죠리에게 달려들었다. 그 입 안에서 ‘존재의 힘’이 변환하는 것을 발견한 마죠리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한 박자 늦게 호랑이의 입에서 보라색 화염이 두 개의 머리 사이를 연결하듯 뿜어나왔다. 섬뜩한 색채의 화염이 지면을 물들였다. 허공으로 몸을 날린 마죠리는 안경 속에서 불길과 연기로 가득 찬 전장을 내려다보며 호랑이의 목과 연결된 본체우 위치를 간파했다. “저기다!” 커다랗게 휘두른 팔 끝에서 군청색 화염탄이 몇 발이나 발사되었다. 화염탄은 한 발도 남김없이 본체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호랑이가 뿜은 불꽃에 뒤지지 않는 위력적인 폭발이 일었다. 호랑이의 머리는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지면에 착지한 마죠리는 그 중 하나를 짓밟았다. 군청색 불빛이 재킷과 배기팬츠 차림의 모델처럼 늘씬하고 훤칠한 미녀를 비췄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전투의 피로 때문만은 아닌 어딘가 나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죠리는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를 귀찮은 듯이 목 뒤로 넘기며 말했다. “아~, 좀 튼튼한 구두를 신고 올걸.” “남의 집을 난폭하게 휘둘러놓고 입을 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냐, 나의 매정한 동지 마죠리 도?” 마르코시어스가 커다란 가죽구두 앞굽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마죠리에게 원망스럽게 말했다. 물론 마죠리는 그 말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달리 방법이 없잖아. 맨손으로 싸우면 뜨거울 것 아니야.” “아, 그러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두 사람은 빈틈없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적은 방금 전의 화염탄 정도로 해치울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니뭐니해도 적은 강대한 ‘홍세의 왕’, 어째서인지 다른 사람의 의뢰를 수행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특이한 남자(?)이니 말이다. 문득 불꽃가루가 흩날리는 연기 너머에서 여유 있는 웃음을 머금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도 이 정도 전투력을 보이다니……. 과연 플레임헤이즈 최고의 살인청부업자. 웬만한 ‘무리’들은 너의 머리카락 한 올도 태우지 못하겠지.” 부서진 포석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짙은 색 양복으로 몸을 감싼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끔하게 넘긴 플래티나 블론드. 윤곽이 뚜렷한 얼굴. 눈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양 팔은 어깨 아래로 힘없이 늘어져서 마죠리의 발치와 길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호랑이의 목과 각각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아직 팔이 남아 있었다. “쳇.” 마죠리와 마르코시어스는 동시에 혀를 찼다. 남자의 오른쪽 어깨에는 두 번째 오른팔이 돋아 있었다. 그 팔은 호랑이의 목과 마찬가지로 양복 소매에서 뻗어 나와 있었으며 손목 앞쪽은 방패 모양으로 부풀어 있었다. 방금 전 마죠리의 공격은 그 방패의 표면을 검게 그을리는 데 그쳤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천변’ 슈드나이를 쓰러뜨리기에는 너무나 약해.” 왼쪽 어깨에서 두 번째 왼팔이 뻗어 나와 가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남자는 박력 있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담뱃갑을 가볍게 두드려서 밖으로 튀어나온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담배 끝에 탁한 보라색 불이 붙었다. 남자는 가슴 깊이 담배연기를 들이마신 후 그 가슴에 뚫린 날카로운 이빨이 돋은 입을 벌리고 여봐란 듯이 담배연기를 뱉었다. 그리고 머리에 있는 입에 담배를 물며 말했다. “전력으로 싸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흥미가 생기긴 하지만……, 어쨌든 죽어줘야겠다. 넌 나의 많은 맹우들을 토벌했으니 말이야.” 마죠리에게 밟은 호랑이 머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또 하나의 머리와 함께 보라색 불꽃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슈드나이의 어깨에서도 보라색 불꽃가루가 허공에 흩어졌다. 어느새 그의 팔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개로 되돌아와 있었다. 동시에 후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그 몸의 윤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뿜어 나온 담배연기 속에서 그의 머리 양쪽에 휘어진 뿔이 돋아났다. “취미가 고약한 엄포로군, ‘천변’.” 마죠리가 말했다. 슈드나이는 담배를 위아래로 흔들며 그녀의 빈정거림이 아닌 솔직한 감상에 대답했다. “늘 솔직한 자신을 드러낸다고 해줬으면 좋겠군.” 보통 ‘홍세의 무리’는 일단 모습을 정하면 절대 바꾸지 않지만, 슈드나이는 ‘천변’ 이라는 본명에 걸맞게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특이한 자였다. “요즘 젊은 ‘무리’들은 대부분 인간과 그들의 문화양식을 지나치게 사랑해서 이형을 혐오하거나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봉절이 보급되기 이전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왕’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씁쓸한 일이야.” 그가 말하는 동안 방패는 차츰 작아져서 평범한 손목으로 되돌아왔다. 동시에 두 어깨가 양복을 뚫고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팔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해져, 보라색으로 타오르는 호랑이 무늬의 팔로 변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위화감이 차츰 커졌다. [……여어, 마죠리.] 매저리가 옆구리의 끼고 있던 ‘글리모어’에서 마르코시어스가 두 사람에게만 통하는 자재법을 이용하여 말을 걸었다. [왜.] [지금은 일단 물러나는 게 좋겠어. ‘천변’과는 도저히 상대가 안 돼. 여긴 ‘애염의 남매’가 펼친, 묘한 자재법의 안이기도 하고.] […….] 오랜 전력을 자랑하는 플레임헤이즈인 이들에게 이런 선택을 한 경험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중에서도 더욱 특별한 예외에 속했다. [……그렇군.] 마죠리가 순순히 찬성을 한 것이다. 그녀는 나른한 기분으로 한숨을 쉬었다. 싸울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아니, 털끝만큼도 느낄 수 없었다. 싸우기 전부터 그렇게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있었다. 동시에 실제로 싸우다보면 다시 불타오르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싸우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면 사명감만으로는 결정적인 힘이 솟구치지 않는다. 불타오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본래의 힘이자 ‘유린의 조아’와 계약한 자의 증거인 화염의 옷 ‘토가’를 입을 수 없는 것도, 자재법을 종횡무진 휘두르는 ‘도살의 즉흥시’를 읊을 수 없는 것도 자신을 움직이던 거대하고 뜨거운 증오의 불꽃이 지난번의 싸움으로 인해 마음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망쳐도……, 별 상관없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홍세의 무리’에게는 공포의 대명사이자 죽음의 동의어로 일컬어지는 ‘조사를 읊는 자’. 스스로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마음조차,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한마디로 일축해버릴 정도였다. 도망친다는 것에 죄책감마저 들지 않았다. ‘이거 중증이로군.’ 마르코시어스는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애초에 비난할 마음은 없었다. 그녀를 믿는다는 빤한 감정도 없었다. 그녀와의 관계가 그렇게 얄팍하지도 않거니와 함께 한 시간도 짧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비가 오는 날도 있는 법이지.’ 그가 생각한 것은 그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법. 될 대로 될 일은 될 대로 되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법이다. {여기는 왜 이렇게 비꼬는 거야.} “휴우…….” 마죠리는 천천히 다가오는 이형의 슈드나이를 바라보며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 산숨에 섞인 군청색 불꽃가루가 느닷없이 그녀를 감싸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음?” 자재법의 발생을 감지한 슈드나이는 재빨리 양 팔을 교차시켜 얼굴을 감쌌다. 순간 불꽃가루가 플래시처럼 섬광을 발하며 일제히 터졌다. 그러나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는 슈드나이는 그 빛에 섞여 상공으로 날아오르는 불덩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사를 읊는 자’가 도망을?!’ 슈드나이는 예상 밖의 사태에 깜짝 놀라며 등에 박쥐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날아올라 호랑이 무늬가 새겨진 팔로 옆에 주차되어 있던 소형 밴을 움켜잡았다. “하앗!” 밴은 장난감처럼 날아가서 불덩이에 부딪쳤다. 순간, “걸렸군, 한심하긴.” 마르코시어스의 목소리와 동시에 불덩이는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욱……!” 슈드나이는 한쪽 날개로 불길을 막으며 육중한 소리와 함께 지면에 착지했다. 검은 연기가 걷힌 후 주위를 둘러보자 그녀가 몸을 날린 곳의 맨홀 뚜껑이 부서져있었다. 섬광도 불덩이도 미끼였을 뿐 도망치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슈드나이는 날개와 거대한 팔을 몸 안으로 거둬들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 참, 정말 빈틈없군.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 뜻밖에 도망을 친 ‘조사를 읊는 자’를 뒤쫓기 위해 맨홀 가장 자리에 선 순간, [기다려요, 슈드나이.] 별안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년 남자의 음성에 우아한 여자의 어조가 결합된 기묘한 목소리였다. “?” 뒤를 돌아보자 구겨진 양복 차림에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그의 의뢰인이 며칠 전 준비한, 이계를 발생시키기 위해 만든 장치 중 하나였다. [그런 자들은 내버려둬도 되니까 ‘오르골’을 경호를 해요.] 아무래도 이것은 의뢰인과의 통신기 역할을 겸한 ‘린네’의 일종인 모양이었다. ‘이런 걸 사용하는 주제에 나보고 악취미라니.’ 슈드나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다. 전투력뿐만이 아니야. 머리도 비상한 존재다.” 실제로 지금도 도주한 후 그녀의 기척은 완전히 끊긴 참이었다. 빨리 뒤쫓지 않으면 흔적을 더듬는 것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고용주는 중년 남자의 얼굴과 목소리를 빌어 그런 슈드나이의 우려를 부드럽게 웃어넘겼다. [어머나, ‘홍세의 왕’인 당신이 토벌의 도구 따위를 그렇게나 높이 평가한다니.] “상대가 어떤 자이든 현실적으로 위협이 된다면 당연히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친 플레임헤이즈가요? 이것으로 보고 있었지만 대단한 자재법도 사용하지 않던데. 어쨌든 의뢰인이 상관없다고 한 이상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줬으면 좋겠군요. 그런 하찮은 적은 오라버니의 볼일이 끝난 다음에 처리하면 그만이야……. 우리를 모욕한 대가는 치러줘야 하니까.] 우아한 어조와는 달리 무서운 집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녀를 우습게 보는 건 어떤 의미로도 위험한 일인 것 같은데.” 슈드나이가 생각하기에는 타당한 평가였지만 티리엘은 밝은 목소리로 그 말을 웃어넘겼다. [우습게 봐? 이 ‘크레들 가든’안에 있는 한 우리들은 무적이야. 유일한 약점은 ‘오르골’뿐. 그러니까 그걸 지켜달라는 거야. 이게 그렇게 이상한 명령인가?] “…….” [괜찮아,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자재사라고 해도 나의 ‘크레들 가든’안에서 도망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해. 오히려 당신이 ‘오르골’을 지키다 보면 그 여자 쪽에서 나타날지도 몰라. 그때 ‘우리를 플레임헤이즈로부터 지켜달라’는 의뢰를 마음껏 수행해도 좋아.] “……좋다. 의뢰인의 의사를 존중하도록 하지.” 슈드나이는 겨우 고집을 꺾었다. [좋아. 당신이 지킬 곳은…….] 의뢰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경호대상이 있는 곳을 알려준 후 통신을 끊었다. 중년 남자의 모습을 한 ‘린네’는 그 직후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즉석에서 만들어낸 일회성 소모품이기 때문일까,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만큼 완성도가 높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움직임을 멈춰버린 ‘린네’는 덕분에 다른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다. 제법 머리를 쓴 위장이다. 슈드나이는 마지막으로 맨홀을 흘낏 바라본 후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적에게 말했다. “기대했던 만큼의 불안감, 낙담했던 만큼의 안도감……. 너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결과를 줄까, 아름다운 살육자 마죠리 도?” 그 아름다운 적은 ‘홍세의 왕’의 헛소리에 장단을 맞춰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우욱~. 냄새~. 축축해~. 기분 나빠~.” “히힛, 참아. 그 두 사람과 만나기 전에 정화해줄 테니까.” ‘조사를 읊는 자’는 ‘글리모어’를 타고 하수도 안을 날아서 비명을 지르며 부랴부랴 도망을 치고 있었다. 샤나는 큰길에 늘어서 있는 높은 가로등 위에 내려섰다. 타오르는 머리카락을 홍련의 불꽃으로 장식하고 검은 옷을 나부끼며 서 있는 플레임헤이즈 앞에 ‘홍세의 무리’가 만들어낸 거대한 안개의 소용돌이가 큰길을 지나 해일처럼 밀려왔다. 여기저기 그 끝을 가늘게 꿈틀거리며 지면을 둔중하게 기어서 벽을 휘감고 인간과 사물을 쓰러뜨리며 밀려오는 무시무시한 압력과 질량의 노도. 그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존재의 힘’으로 이루어진 넝쿨덩어리였다. 샤나는 대검 ‘니에토노노샤나’를 쥔 손으로 적당한 긴장감을 담고서 불의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불의의 공격을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적은 자신들의 힘에 절대적으로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불의의 공격을 할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뿐인가, 적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넝쿨을 멈추고 그 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황금색 안개가 적의 몸을 감싸고 넝쿨에서 떨어진 나뭇잎이 소용돌이치며 그 주위를 장식했다. 넝쿨 위에 서 있는 것은 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사람이었다. 소년과 소녀가 화려한 금발을 맞대고 작은 산처럼 뒤엉킨 넝쿨 꼭대기에 서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소녀는 소년을 끌어안고 뺨을 맞댄 채 우아하게 시선을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려한 금발에 감싸인 아름다운 얼굴과 꼿꼿한 등, 가냘픈 몸매, 리본이 달린 챙 넓은 모자와 드레스……. 마치 사람과 똑같은 크기의 프랑스 인형 같았다. “이분은 나의 오라버니 ‘애염자’ 소라토.” 아름다운 소녀는 자신이 끌어안고 있던 그녀와 꼭 닮은 미소년을 소개했다. 소년은 화려한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손에는 서양식 대검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에는 생기가 없었고 동생을 끌어안고 있다기보다는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애염타’ 티리엘. 당신은 누구의 계약자인가요?” 누구의 계약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은 샤나가 플레임헤이즈가 된 후로 처음이었다. ‘홍세’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마신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과 그 계약자를 모르는 ‘무리’가 있을 줄이야. 솔직히 놀라웠다. 샤나는 가슴에 걸려 있는 ‘코큐토스’에게 말했다. “아라스톨의 말대로……, 상당히 젊은 ‘무리’ 같은데.” “내가 ‘천도궁’에 있을 때 건너온 모양이군.” 샤나는 끈적끈적하게 엉겨붙어 있는 남매를 올려다보며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 ‘염발작안의 토벌자’ 샤나.” 그러나 티리엘은 그 이름을 듣고도 딱히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라스톨의 추측대로 이들 남매는 아라스톨이 이 세계로 건너온 후에 ‘홍세’에서 태어났으며, 또 그가 이 세계에서 격리되어 있는 동안 건너온 젊은 ‘무리’인 듯했다. “어머나, 고풍스러운 이름이군요.”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감상도 고작 그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오라버니, 그리고 스승이자 친구로 여기고 있는 마신이 바보 취급을 당한 듯한 기분에 샤나는 내심 불쾌감을 느꼈다. 게다가 이 ‘애염의 남매’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례하고 안하무인이었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당신에게는 딱히 볼일이 없으니까요. 기껏해야 잠시 놀 상대 정도?” “…….” 샤나는 몹시 불쾌감을 느꼈다. 다른 플레임헤이즈와 ‘무리’들은 형식적이긴 해도 일단 예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리’는 대체 뭘까. 무엇보다도 어째서 저렇게 여봐란 듯이 찰싹 붙어 있는 것일까. ‘뭐야, 이 녀석들. 아까부터…….’ 샤나에게 고압적으로 말하면서도 오빠에게 뺨을 비비는 여동생, 겁에 질려 숨어 있으면서도 여동생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오빠. 사카이 치구사가 ‘서로 몸을 맞대는 것은 친밀한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두 사람은 도가 지나치다 못해 납득을 할 수 없는 위화감마저 풍기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질 정도였다. 그런 샤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리엘은 온화하면서도 오만하게 말했다. “용건은 간단해요. 당신의 검을 우리 오라버니에게 넘기세요.” “……뭐라고?” “머리가 나쁜 건가요? 아니면 청각이 형편없는 건가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죠…….” “필요 없어!” 샤나는 발밑에서 폭발을 일으켜 가로등을 쓰러뜨리며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탄환 같은 기세로 안하무인인 ‘무리’에게 검을 휘둘렀다. “어머나.” 순간 티리엘과 그녀의 오빠를 태운 황금색 넝쿨이 일제히 뻗어나와 샤나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 샤나의 눈앞에 넝쿨이 그물처럼 펼쳐졌다. 샤나는 재빨리 팔을 거둬들인 후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넝쿨은 쉽게 잘려나갔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잘려나간 넝쿨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사방에서 뻗어와 그녀를 휘감은 것이다. “큭?!” 목에 감긴 넝쿨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조여들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단숨에 목이 잘려나갈 정도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 오라버니.” “응!” ‘애염의 남매’가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쾌활한 권유와 밝은 대답. 이윽고 소라토가 온몸에 넝쿨이 감겨 있는 샤나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리고 차츰 빠르게. 완전히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얼굴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냉철한 전투술사로 변모한 상태였다. 오직 눈동자만이 순수한 욕망으로 빛나고 있을 뿐. 화려한 갑옷을 두른 소년은 거대한 검으로 핏빛 파문을 그리며 꼼짝 못하는 샤나의 앞에 착지했다. “……헉, 헉…….” 유지의 용기는 계단을 끝까지 내려온 시점에서 이미 바닥나 있었다. 고작 계단을 뛰어내려온 것뿐인데도 몹시 숨이 찼다. ‘왜 겨우 이 정도로 지치는 거지.’ 아니, 이유는 알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극한상태에서 심신이 얼마나 소모되는지를 유지는 지금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으으~. 괜히 폼 잡았다가 이게 뭐냐.’ 무릎 아래가 쥐가 난 것처럼 뻣뻣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꿈치 아래도 허탈감 때문에 기분 나쁠 만큼 떨리고 있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뻐근했다. ‘샤나 앞이라고 괜히 폼이나 잡고.’ 등은 마치 등뼈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주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반대로 배는 무거운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찌를 듯이 아팠다. ‘아라스톨에게도 내가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걸 인정받고 싶었어.’ 눈시울이 괜히 뜨거워졌다. 코가 꽉 막힌 것처럼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 안이 바싹 혀가 따끔거리고 이까지 욱신욱신했다. ‘이 무식하고 생각 없고 무모하고 멍청한 자식.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건만 후회가 밀려왔다.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도망치든 숨는 별 상관없지 않을까.’ 샤나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은 아니다. 아라스톨이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뭔가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 샤나는 적과 싸우고 있다. 이대로 이길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달리는 자신 앞에 사뿐히 착지해서 ‘끝났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약해. 약하단 말이야.’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비보 ‘영시미아’는 본래 전투용 보구가 아니다. ‘홍세의 무리’뿐 아니라 ‘린네’의 공격을 받아도 쉽게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유지는 1층 복도와 창 밖의 광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무리’가 풍기는 기척……, 이른바 세계의 위화감은 없었지만 만약을 위해서였다. ‘결심했잖아. 한다고 결심했잖아.’ 단순히 용기만으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냉정함, 정확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판단력. 그리고 아주 약간의 행운. ‘어쩌지, 어쩌면 좋지. 생각해, 생각해 봐.’ 유지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몸을 의지력으로 움직여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샤나를 위해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안 돼……. 괜히 폼 잡지 마. 폼 잡으면 안 돼.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모든 것은 2초 남짓한 시간 안에 이루어 졌다. 순간적인 판단이 샤나의 몸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샤나는 온힘의 힘을 집중하여 대검 ‘니에토노노샤나’를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소라토의 검이 자신을 묶고 있는 넝쿨을 베도록 유도한 것이다. 소라토는 최종 목표인 샤나를 공격하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묶고 있는 넝쿨을 베었다. 이윽고 샤나는 자신을 포박할 만한 힘을 잃어버린 넝쿨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덕분에 샤나는 소라토가 휘두른 검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소라토가 깜짝 놀라는 틈에 샤나는 검을 휘둘러서 나머지 넝쿨을 베어버린 후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까지 걸린 시간은 2초 남짓.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한 샤나는 검은 옷을 펄럭이며 뒤로 몸을 날렸다. ‘애염의 남매’와 마주 보는 상태로 가볍게 땅을 박차서 뒤통수에 눈이 붙어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신호등 위로 올라갔다. “전력을 잘못 생각했던 것 같군.” “제법인데.” 아라스톨과 샤나는 질책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적의 첫 공격에 대해 솔직한 평가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큰길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넝쿨 더미 꼭대기에서 티리엘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후후,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어요. 이 ‘크레들 가든’ 안에 있는 한 우리는 무적이니까요.” 소라토가 넝쿨을 타고 또다시 그 옆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오라버니도 즐길 수 없을 테니…….” 티리엘은 녹아내릴 듯이 달콤한 눈빛으로 사랑하는 오빠를 바라보며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 그녀의 발 밑에서 수백, 수천의 넝쿨이 직선으로 뻗어올랐다. 아스팔트와 포석이 산산조각 나고, 유리창이 깨지고, 지붕을 뚫린 자동차가 폭발했다. 정지해 있던 사람 몇 명도 갈기갈기 찢겨버렸다. 샤나가 올라서 있던 신호등도 그 공격을 받고 한가운데가 꺾여서 힘없이 부러졌다. 샤나는 가로등이 쓰러지기 직전에 몸을 날려서 빌딩 벽에 착지했다. 그리고 보았다. 거미줄 혹은 그물처럼 큰길을 뒤덮고 있는 황금색 넝쿨을. 그리고 곡예사처럼 넝쿨 위를 질주하는 소라토를. “전 끼어들지 않을 테니 최선을 다해 싸워보시기를.” “쳇.” 샤나는 혀를 차며 몸을 날려서 넝쿨 위로 착지했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 “?!” 넝쿨이 샤나의 발을 피한 것이다. “우훗.” 유쾌한 듯이 비웃는 티리엘에게 분노를 느낀 것은 잠시,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 샤나의 귀에 욕망 그 자체인 듯한 소라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에토노노샤나’.” 샤나는 마치 본능처럼 목소리와 함께 육박해오는 기척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뺨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무시무시한 충격이 느껴졌다. “웃!” 허공에서는 반동을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불가능한 법, 반동에 의해 허공으로 날아간 샤나는 티리엘의 공격이 날아오기 전에 칼등으로 옆의 넝쿨을 쳐서 몸의 방향을 바꾼 후 지면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재빨리 엎드렸다. 그 직후 등 뒤에서 채찍처럼 날아온 굵은 넝쿨이 머리 위를 통과했다.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에토노노샤나’!” 샤나는 고개를 숙인 채 다리를 굽히고 힘을 모은 후 앞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그림자가 지면에서 사라진 직후 소라토의 체중이 실린 검의 포석을 산산조각 냈다. “기다려, ‘니에토노노샤나’!” 마치 도망친 나비를 뒤쫓는 것처럼 환희에 찬 목소리였다. 샤나는 달리는 도중 느닷없이 방향을 바꾸며 발밑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뒤로 공중제비를 돌아서 몸을 반쯤 비틀며 자신을 뒤쫓아 온 소라토의 머리 위에 필살의 공격을 날렸다. “아하…….” 하지만 소라토는 이미 천진난만한 웃음을 감추듯 얼굴 위로 검을 들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고 원칙적으로 생각해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일격을 간단히 막아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러 검을 쥔 손에 힘을 늦춰서 샤나를 자신의 공격권 안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하앗!” 소년 검사는 밝게 웃으며 자신의 검에 ‘존재의 힘’을 쏟아부었다. 검에서 일렁이는 핏빛 파문이 그 속도를 높였다. 순간. “큭?!” 소라토의 검이 샤나의 오른쪽 목덜미를 베었다. 칼의 궤도상 도저히 베는 것이 불가능한 위치를. 느긋하게 아픔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샤나는 피를 흩뿌리며 지면에 착지하여 또다시 소라토와 검을 맞부딪쳤다. “굉장하지? 내 ‘흡혈귀’!” 소라토는 샤나와 칼을 맞댄 채 밝은 목소리로 자랑스러운 듯 자신의 장난감을 과시했다. “‘존재의 힘’을 쏟아 부으면 검을 맞대고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푸른 눈동자 속에서 황금의 힘이 타올랐다. “바로 이렇게!” “웃!”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소라토는 교묘하게 앞으로 나서며 막무가내로 샤나의 검을 밀어냈다. 거대한 검에서 핏빛 파문이 일렁였다. “아웃!” 샤나의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목도 그렇고 허벅지도 그렇고 상처 자체는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양쪽의 실력이 막상막하일 경우 사소한 차이가 승패를 가르는 법이다. 소라토의 검 ‘흡혈귀’는 그 운을 일방적으로 주인 쪽으로 기울게 하는 보구이다. 샤나의 검 ‘니에토노노샤나’는 자신에게 가해진 힘이나 적의의 간섭을 완전히 무효로 만드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즉 절대로 파괴되지 않으며 어떠한 공격도 튕겨내는, 하나의 무기로서는 최고의 존재다. 하지만 ‘흡혈귀’처럼 ‘적과 닿기만 해도 몸에 상처를 입히는’ 능력을 지닌, 발동조건이 본인과는 상관없는 변칙적인 보구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이 녀석과는 섣불리 검을 맞댈 수 없겠어……!’ 게다가 지금 샤나를 위협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처의 아픔을 참으며 소라토의 검을 튕겨낸 순간 주위에서 끝이 뾰족한 넝쿨들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샤나는 재빨리 피한 후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도약했다. 그때 등 뒤에서 기묘하리만큼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기다리세요. 우후후.” 방패 역할을 해주던 지하철 입구가 무너지고 지붕이 날아갔다. 재빨리 바닥을 굴러서 몸을 피한 순간 그 옆의 가드레일이 종잇장처럼 뚫리고 발치의 포석이 과자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렇게 3초 가량 몸을 숨기지도 못하고 공격을 피하고 있을 때 앞쪽에서 또다시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니에토노노샤나’는 정말 굉장하다면서? 기대되는군.” 트럭의 잔해에서 피어오르는 불길과 연기를 배경으로 소라토가 밝게 웃으며, 그러나 빈틈없는 발놀림으로 다가왔다. “그걸로 뭘 할 수 있지? 보여줘……. 응?” 천천히 옥죄어오는 위기감 속에서 샤나는 아무 말 없이 검을 겨눴다. 2. ‘린네’의 꽃 미사키 시 동쪽 시가지, 대철교 미사키 대교 옆에 솟아 있는 구 요다 백화점. 이미 모든 점포가 철수하고 출입이 금지된 이 빌딩은 현재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와 그 부하들의 비밀기지로 둔갑한 상태였다. 정확하게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홍세의 무리’를 토벌한 후 멋대로 눌러앉은 것뿐이지만. 그 백화점 위층의 어느 매장. 굳게 닫힌 창문 안에 깔린 어둠 속에서 희미한 군청색 빛이 기묘한 광경을 그리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장난감 안에 펼쳐진 미사키 시 모형. 예전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던 ‘무리’가 남긴 보구 ‘파리단’이었다. “마죠리 씨는 괜찮을까…….” 그 안에서 마죠리의 첫 번째 부하 사토 케이사쿠가 말했다. 소년 앞에 ‘미’ 라는 글자를 붙여도 좋을 만큼 단정한 얼굴에는 희미한 두려움이 감돌고 있었다. “그 말, 벌써 다섯 번째다, 너.” 역시 마죠리의 첫 번째 부하인 타나카 에이타가 대답했다(서로 양보하지 않는 바람에 둘 다 ‘첫 번째 부하’라고 자칭하고 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애교 있는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그보다 이 훌라후프 같은 고리는 뭘까.” “타나카, 그 말도 다섯 번……, 아니 네 번은 했을 걸? 어쨌든 나한테 묻지 마.” 두 사람의 몸 주위에는 각각 군청색 빛의 고리가 떠 있었다. 호리호리한 사토 주위에는 작은 고리가, 덩치 큰 타나카 주위에는 커다란 고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그 고리는 빛을 발하는 문자나 기호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른바 자재법으로 이루어진 고리인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플레임헤이즈도, ‘무리’도 아니다. 우연히 마죠리와 만나서 자발적이자 일방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따라서 그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마죠리 씨가 오면 물어봐……. 아아, 괜찮을까.” “여섯 번째. 누님이라면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참고로 사토는 마죠리를 ‘마죠리 씨.’ 타나카는 ‘누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뭐야, 그 말투는. 내가 미덥지 못하다 이거야?” 입구에서 시큰둥하고 짜증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마죠리 씨!” “누님, 다친 데는 없으세요?” 뒤를 돌아보자 군청색 불을 뿜는 ‘글리모어’에 걸터앉은 마죠리가 허공을 천천히 날아왔다. “다쳤을 리 없잖아. 날 뭘로 보는 거야?” “아~주 위험하긴 했지만. 히히.” “닥쳐, 바보 마르코.” 마죠리는 마르코시어스와 말다툼을 하며 플로어 기둥 사이를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한 모형의 중앙……지금 그들이 있는 백화점을 본떠서 만든 모형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리곤 ‘글리모어’를 겨드랑이에 끼고 잡다한 부품들로 구성된, 그러나 기묘하리만큼 정교한 모형을 시큰둥하게 둘러보았다. 사토와 타나카는 지난번 싸움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가운데 끼고 조금 낮은 빌딩 모형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마죠리 씨, 아까 이런 고리가 갑자기 생겼는데 이건 대체 뭐죠?” “혹시 아까 이마를 찔렀을 때 뭔가 자재법을 걸었던 건가요?” 마죠리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만약을 위해서 너희한테 부적을 붙여준 거야. ‘무리’에 의한 ‘존재의 힘’에 대한 간섭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도록.” 마죠리는 조금 전 ‘무리’의 습격을 감시하자마자 그들에게 이 비밀기지로 피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헤어질 때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찔러 자재법을 건 것이다. “간섭?” “그럼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너희는 밖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지금 이 동네는 통째로 특대 봉절에 뒤덮여 있어.” “보, 봉절?!” “그럼 이 고리는?!” 사토와 타나카는 겨우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래. 그 고리는 방어진도 겸하고 있어. 너희가 다른 인간들처럼 정지하지 않도록 말이야.” “맙소사, 동네를 통째로 뒤덮는 봉절이라니……. 이번 적은 지난번의 ‘시체줍기’라는 녀석보다 강한가요……?” 사토가 걱정스럽게 물은 이유는 마죠리가 ‘시체줍기’에게(실은 다른 플레임헤이즈에게 당한 것 같지만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했다) 패배했던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쓸데없는 걱정과 한편으로는 모욕으로 들리기조차 하는 물음에도 마죠리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낼 만한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간단하게 긍정했다. “글쎄, 실질적인 피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가신 녀석들이 셋이나 되니까.” “셋이나!!” 타나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중 두 명은 작안의 꼬마와 싸우러 갔고 나머지 한 명의 추적도 뿌리쳤어. 기척도 없앴고. 기척을 알아내는 자재법이라도 사용하지 않는 한 당분간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그렇고 기척을 없애는 건 유달리 힘이 들뿐더러 정신력을 소모시키는 군…….” 목소리에도, 싸우는 자세 자체에도 패기가 없었다. 사토와 타나카는 지난번 싸움 전에 회복한 것처럼 보였던 그녀의 기백이 어째서인지 다시 쇠퇴한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여기서 적의 동향을 살피면서 대책을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일단 싸움에서 발을 뺀 지금 마죠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권태감의 존재를 자각했다. 자신이 전력으로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전장에서 확인하고 만 것이다. 그야말로 플레임헤이즈로서의 존재의의가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비상사태……. 그런데도 위기감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중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누님……?” “…….” 타나카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고, 사토는 입을 꾹 다문 채 이 무기력한 상태를 지켜보았다. 식객으로 눌러앉아 있는 사토의 집에서 빈둥거릴 때라면 몰라도 전장에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두 사람 다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인물이 불 같은 투쟁심과 이글거리는 증오를 흩뿌리던 ‘조사를 읊는 자’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매저리라면 길길이 날뛰며 ‘무리’를 토벌하겠다며 외쳤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충격을 던져줬던, 동경하고 또 동경했던 마죠리 도가 이토록 존재감이 희미한 사람이었던가……. 사토는 그 불만을 그녀 본인이 불식시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반쯤 부추기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저쪽의 속셈을 알아내면 해치우러 갈 거죠?!” 물어본 사토도, 귀를 기울이고 있는 타나카도 강하고 사납고 자신들의 한심한 근성을 박살내줄 만한 ‘멋진’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죠리는 안경 속의 흐릿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맥 빠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마르코시어스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사토와 타나카는 시선을 살짝 움직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실망과 분노와 분함, 그리고 작은 슬픔이 뒤섞인 듯한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자, 그럼.” 이윽고 마죠리가 간신히 남아 있는 습관과도 같은 플레임헤이즈로서의 사명감에 의해 작게 말했다.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발 밑에 있는 구 요다 백화점 모형 안의 보구가 미량의 ‘존재의 힘’을 공급받아 조용히 맥박 치기 시작했다. “먼저 ‘파리단’ 가동.” 그들의 눈 아래 펼쳐져 있는 미사키 시의 정교한 미니어처 위에 서서히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수만큼 존재하는 단순한 형태를 지닌 반투명한 그림자, 그것이 모형으로 만든 지역 내에 있는 모든 인간을 비추는 광역감시용 보구 ‘파리단’의 기능이었다. 본래 이 보구는 인간의 움직임까지 재현할 수 있지만 미사키 시는 지금 봉절과 흡사한 자재법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탓에 모든 그림자가 정지된 상태였다. “토치만 표시할 것.” 그 말에 그림자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등불만이 남았다. 힘없고 불길하게 흔들리며 미니어처에 흩어져 있는 등불은 모두 토치……‘홍세의 무리’에 먹힌 인간들의 찌꺼기로 만든 대체품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예전에 ‘헌터’라는 이름의 ‘홍세의 왕’이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먹어치운 미사키 시는 피해를 입은 다른 지역보다 토치가 월등히 많다고 한다. 사토와 타나카는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았을 때와 변함없는 전율을 느끼며 그 섬뜩한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이렇게 많은 토치가 남아 있다니…….’ ‘아니면 이번에 온 녀석들이 또 마구 먹어치운 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두 사람은 뒤이어 나타난 영상에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잠자코 서 있던 마죠리도 눈썹을 찡그렸다. 모형 상자에 떠오른 것은 토치뿐만이 아니었다. 모형 상자의 지면과 벽, 의식을 집중하면 볼 수 있는 건물의 내부 등 ‘파리단’의 미니치어 곳곳에 문자인지 기호인지 알 수 없는 문양이 곰팡이라도 핀 것처럼 섬뜩하게 얼룩져 있었다. 주로 시가지를 대량으로 잠식하고 있는 그 얼룩 사이에는 뿌리나 넝쿨 같은 문양이 얽혀 있었다. 마치 무성한 넝쿨이 미사키 시를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 미사키 시는 분명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광경은 그 사실을 여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죠리는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흐응……. 이게 그 변칙적인 거대한 봉절을 유지하는 자재식인가보군. 생각보다 성가실 것 같은데.” 마르코시어스가 자재법을 종횡무진으로 구사하는 ‘홍세의 왕’의 한 사람으로서 대답했다. “뭐랄까, 이 자재식은 배열이 엉망진창이군. 왜 이렇게 장식문이 많은 걸까? 색칠공부라도 하냐. 아주 떡칠을 해놨군그래.” 그의 말대로 ‘파리단’에 의해 축소되었음을 고려하더라도 문양은 거의 떡칠에 가까운 밀도로 그려져 있었다. 마죠리는 자재사의 입장에서 대충 살펴보며 말했다. “아마 대부분 식의 본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일 거야. 본체가 어떤 효과를 갖고 있으며 놈들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이 식이 펼쳐져 있는 곳을 직접 확인해보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그러게. 그건 그렇고 이런 기묘한 자재식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나의 시든 꽃 마죠리 도, 네가 축 쳐져 있으니까 나까지 이 모양이잖아.” “괜히 남 탓하지 마, 바보 마르코. 그 변태 남매가 위장과 은폐에 도가 튼 좀도둑인 것뿐이야.” 인정사정없이 쏘아대던 독설도 지금은 좀처럼 박력이 없었다. 사토는 그런 그녀에게 짜증을 느끼며 애써 싸움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마죠리 씨, 그 ‘무리’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의……, 뭐였더라, 그 기척을 탐지하는 자재법으로 찾지 않으실 건가요?” 마죠리는 의아한 심정으로 묘하게 성급한 사토를 바라보았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는 곧 눈치챌 수 있었다. 불현듯 음울한 분노가 치밀었다. 마죠리는 그 분노를 목소리에 담아 대답했다. “멍청하긴. 기척을 탐지했다가는 오히려 적이 우리가 있는 곳을 알아차릴 걸. 이번엔 우리가 사냥당하는 입장이야. 조용히 숨어서 이 봉절을 깨뜨릴 방법을 생각하는 게 나아.” ‘사냥당해……? 숨어……?’ 사토는 별것 아닌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알고 있는 마죠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왠지 패기가 없군요, 누님.” 타나카는 사토보다 솔직하고 단순했다. 사토가 숨기려 했던 실망감과 울고 싶은 심정을 전부 입 밖에 낸 것이다. “패기가 없다고……? 누구한테 한 말이지?” 마죠리는 언성을 높였다. 두 사람의 실망하는 모습에 의외의 충격이 느껴지는 한편 그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기대가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기대해놓고 사정도 모르면서 실망하는 어린애 같은 억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기 직전, 날카로운 목소리가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됐어,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얘기나 계속하시지.” “난 잘못한 거 없어.” 마죠리가 불만스러운 듯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마르코시어스가 그런 그녀를 가볍게 달랬다.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어.” 마르코시어스는 ‘어쨌든’ 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엄청나게 큰 봉절을 간파하거나 무효화해야 돼. ‘무리’를 해치울지 말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뭐니뭐니해도 지금은 나의 연약한 미인 마죠리 도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니까. 크헉?!” 마죠리가 보복이라도 하듯 손바닥으로 ‘글리모어’를 내리치며 말했다. “닥쳐, 바보 마르코. 어쨌든 난 밖에 나가서 조사를 해볼 테니까 너희는 여기서 상황을 감시하도록 해.” “……이 ‘파리단’에 ‘무리’는 비치지 않습니까?” 타나카는 마죠리의와 자신 양쪽에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마죠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리야. 이건 인간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구니까. 인간과 토치, ‘존재의 힘’과 그것을 흘리는 자재식밖에 표시되지 않아. 뭐 대강 위치 정도는 기척으로 알 수 있지만……. 그중 한 명은 특히 기척이 크니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상대하던 ‘천변’ 슈드나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죠리는 불쾌감을 느꼈다. 한순간 그것이 투쟁심의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지만 역시 불타오르지 않았다. 타나카가 또다시 물었다. “어느 근처에서 싸웠는데요?” “나와 싸웠던 ‘천변’ 슈드나이는……, 시의 중심지에 있어.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셈이지.” “아주 가까운 곳에…….” 또다시 등줄기에 오한이 느껴졌다. 마죠리는 그런 타나카를 무시하고 멀리서 격돌하는 기척을 느끼며 말했다. “그리고 이 봉절을 핀 두 사람은……, 지금 그 작안의 꼬맹이와 한창 싸우는 중이야. 놈들도 상당히 큰 위화감을 뿌려대고 있지. 상당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모양이야.” “2대 1……. 그 작안의 꼬맹이라는 사람을 도와주러 가지 않아도 될까요?” 사람 좋은 타나카의 물음에 마죠리는 코웃음을 쳤다. “하, 농담이겠지. 그렇게 의리를 지켜야 할 사이도 아니고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어.” 기력이 감퇴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협조성이 없는 것일까,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저쪽이 성가신 적들을 붙잡고 있으면 이쪽은 그만큼 움직이기 쉬워지지.” 문득 잠자코 있던 사토가 입을 열었다. “마죠리 씨.” “왜.” 좀 전의 일을 떠올린 마죠리는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나 사토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파리단’이 어느 한 점……주택가의 강변 근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사토가 자신의 눈에 비친 현상을 확인하며 보고했다. “토치 하나가 움직이고 있어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는 몇 초 가량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르코시어스와 마죠리는 동시에 깜짝 놀라며 외쳤다. “뭐?” “뭐라고?” 샤나는 10층 가량 되는 빌딩의 벽면을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넝쿨이 벽과 창문을 부수며 차례차례 그 뒤를 쫓아왔다. 빌딩 자체를 무너뜨릴 기세로 벽에 꽂히던 무수한 넝쿨이 일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둥실…….” 우아한 춤이라도 추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큰길을 점령하고 있던 넝쿨 더미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직경 20미터는 될 듯한 순수한 ‘존재의 힘’의 무게가 옥상에 착지한 샤나의 머리 위로 해일처럼 쏟아졌다. “큭!” 샤나는 발 밑에 폭발을 일으켜 옆 빌딩으로 몸을 날렸다. 그 등 뒤에서 벌집이 된 빌딩이 육중한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단숨에 무너졌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물체가 무너진 빌딩을 대신하듯 꿈틀거렸다.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다니!’ 샤나는 내심 놀라면서도 냉정하게 빌딩 옥상에서 옥상으로 몇 번이나 몸을 날렸다. 파괴를 일삼는 ‘홍세의 무리’는 드물지 않지만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힘을 휘두르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애염타’ 티리엘은 단순한 파괴력으로 따지자면 샤나가 플레임헤이즈가 된 이후 만났던 ‘무리’ 중 가장 강력한 상대였다. 샤나가 알고 있는 한 그녀 이상의 힘을 지닌 자는 현신한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현신한 후의 활동 시간은 짧았다. 한 달 전에 만난 ‘유린의 조아’의 현신도 일시적인 힘의 폭주에 불과했다. 그러나 티리엘은 힘이 약해질 기색도 없었고 그 때문에 승부를 서두르는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난폭하고 미숙한 ‘무리’라면 제멋에 겨워 날뛰다가 힘을 다 소모했을 때 해치우는 것이 정석이지만 이 소녀는 아무래도 그런 부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인 듯했다. ‘열쇠는 이 봉절 같은 자재법……!’ 그 정도는 알겠지만 샤나는 그쪽 방면으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주위에 펼쳐진 ‘존재의 힘’의 맥박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에 간섭하여 자재법의 구성을 깨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였다. “?!” 넝쿨 다발이 샤나가 서 있는 옥상 바닥을 박살내며 드릴처럼 솟구쳤다. 재빨리 피하여 지면으로 뛰어내리려던 순간. “이얍!”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 넝쿨에 탄 소라토가 튀어나왔다. 샤나는 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또다시 옥상으로 돌아갔다. “받아라, 이얍, 이얍!” 그 뒤를 쫓아 천진난만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인 거대한 검 ‘흡혈귀’의 물 흐르는 듯한 연속 공격이 차례차례 샤나를 덮쳤다. 샤나는 ‘니에토노노샤나’로 그 공격을 남김없이 튕겨냈다. 그러나 또다시 검과 검을 맞대는 사태를 경계하여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게 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두세 구획쯤 뒤쪽으로 엷은 황금색 안개에 감싸인 미사키 고등학교가 보였다. ……‘학교를……, 친구들을 지켜줄래?’ 긍지와도 같은 사명감과 자신의 존재의미가 어째서인지 그 단 한마디 말과 줄다리기 하고 있었다. 물론 전자의 두 개가 아무 망설임 없이 수월하게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래도 그 한마디는 같은 마음의 지평선 상에 서서 승부를 하고 있었다. ‘안 돼, 정신 차리자.’ 망설이고 있는 동안 소라토가 샤나와의 거리를 반 걸음 좁혔다. 바로 아래에서 천진난만하고 무자비한 일격이 날아왔다. “하앗!” “웃!” 샤나는 간신히 그 공격을 피했다. 상의 아랫부분이 반쯤 세로로 찢어졌다. 몸이 3센티미터만 앞에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샤나의 내장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의 여름 교복 상의가, 치구사가 모처럼 선물해준 새 옷이 찢어지고 말았다. ‘……잘도 이런 짓을!’ 겨우 그것뿐인데도 이상하게 분노가 솟구쳤다. 작안이 더욱 빛을 발했다. ‘집중해.’ 샤나는 자신의 몸 안에 필살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허를 찔러라. 마음을 비우고 ‘필살’의 길을 걸어라.’ 샤나는 싸움의 흐름을 무시하고 소라토와 거리를 두었다. 빌딩 간판을 박차고 빌딩에서 뛰어내려 나는 듯이 큰길을 달렸다.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가볍고 날카롭게 질주하며 추격해오는 소라토의 발소리와 그 뒤에서 지금은 엄호에 충실하고 있는 티리엘의 큰길을 뒤덮으며 밀려오는 육중한 기척. “기다려!” “어디 가는 거죠?” 마치 놀이에서 빠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곧 양 옆에서 넝쿨이 샤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공격을 해오지 않는 것은 추격을 즐기는 소라토를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샤나는 그것을 경계하며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성공해다오.’ 힘을 쏟아붓는 감각, 그것을 구성함으로써 닿을 수 있는 거리, 위력과 ‘필살’의 감. 모든 것이 일치했다. “!” 샤나는 검을 쥔 오른팔을 고정시킨 채 몸을 왼쪽으로 돌렸다. “?” 소라토는 얼빠진 표정으로 놀라면서도 확실하게 검을 피할 수 있는 거리를 취했다. ‘일격으로 성공해다오!’ 땅을 힘껏 박차며 등 뒤로 숨긴 형태가 되어버린 오른팔에 ‘존재의 힘’을 쏟아부었다. 매일 밤 단련한 끝에 얻은 감각과 감촉이 실전에 연결되었다. 샤나는 ‘니에토노노샤나’에 아라스톨의 이미지를 겹치며 힘껏 힘을 해방시켰다. “하앗!” 거대한 검 끝에서 무시무시한 밀도와 확실한 존재감을 지닌 홍련의 불꽃이 뿜어나왔다. 샤나는 뒤로 몸을 튼 채 모든 것을 담아 오른팔을 수평으로 휘둘러서 정면의 표적을 베었다. “아…….” 소라토의 놀라움에 찬 목소리가 도중에 끊겼다. 이미 ‘니에토노노샤나’에서 뻗어나온 홍련의 거대한 검이 그의 몸을 수평으로 가르고 있었다. 남은 것은 그의 가슴 위와 정강이 아랫부분뿐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전부 증발한 상태였다. 재빨리 들어올렸던 ‘흡혈귀’가 그 움직임 도중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팔을 잃고 불길에 감싸인 손목과 함께 날아갔다. “꺄아아아아악……!” 거대한 검이 빌딩 벽에 꽂혀 흔들리는 그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소라토를 본 티리엘의 찢어질 듯한 절규가 황금색 안개 속에 울려 퍼졌다. ‘다음 공격으로.’ 거대한 홍련의 검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샤나는 검을 휘둘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좌우의 넝쿨을 모조리 증발시켰다.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충격에 빠진 소녀와 샤나 사이에 더 이상 장애물은 없었다. 모든 것이 계산대로였다. ‘끝내겠어!’ 발 밑에서 폭발이 일었다. 소라토의 잔해를 뛰어넘은 샤나는 거대한 홍련의 검을 든 불꽃의 화살이 되어 티리엘을 향해 도약했다. 그러나. “굉장해!” 순간 느닷없이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양 손목을 잡았다. “웃?!” 경악하는 샤나의 바로 아래, 코가 맞닿을 거리에 천진난만하게 웃는 금발의 미소년의 얼굴이 있었다. “‘니에토노노샤나’!” 샤나의 양 손목을 잡은 것은 재로 변한 가슴의 단면에서 뻗어 나온 황금색 넝쿨이었다. 그것이 남아 있는 발목과 연결되고 뒤얽혀서 임시로 몸을 만들고 있었다. “떨어져!” “큭?!” 아라스톨의 외침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샤나는 몸을 움츠리고 소라토의 얼굴을 밟으며 또다시 발 밑에 폭발을 일으켰다. 손목을 잡고 있던 넝쿨을 우격다짐으로 뜯어낸 후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동요한 탓에 집중력이 사라진 탓일까, 그와 동시에 거대한 홍련의 검이 허공에 흩어졌다. “굉장해, 굉장해…….” 그 불꽃 너머 황홀해하는 소라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폭발의 여파 탓에 투구가 벗겨져 있었다. 중간부터 재로 변해버린 금발, 화상을 입은 얼굴……. 그리고 증발한 몸이 급속도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니에토노노샤나’의 힘? 불의 검이다!” “재생……?” “이럴 수가. 너무 빨라.” 샤나와 아라스톨이 깜짝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홍세의 무리’는 일반적인 생물처럼 상처를 입지는 않지만 몸의 대부분을 잃을 경우 일단은 치명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재생하다니. 주위의 인간들에게서 ‘존재의 힘’을 빼앗아 자신의 몸을 재구성하는 귀찮은 치료를 실행한 기척은 없었다. ‘아니, 지금 인간을 먹은 게 아니야……. 어디선가 힘이 흘러들어와 몸을 복구한 거야.’ 그러고 보니 자신이 티리엘을 향해 몸을 날리려던 순간 어느 곳에서 지면을 통해 무시무시한 양의 ‘존재의 힘’이 소라토에게 흘러들어간 듯한 파동을 느껴졌다. “그렇군……." “음.” 두 사람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짧게 말했다. 쓸데없이 크다고 여겼던 이 이계는 그들 남매에게 ‘존재의 힘’을 공급하기 위한 거대한 정제공장이었던 것이다. 티리엘이 그토록 엄청난 힘을 계속하여 구사했던 것도 이제야 납득이 갔다. 출현 직전까지 기척을 숨기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확실히 큰소리를 칠만큼 교묘한 자재사였다. “하지만 이렇게 큰 공간을 유지하면서 넝쿨의 구성과 공격, 그리고 오빠의 재생까지 전부 동시에, 그것도 수월하게 해치우다니…….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런 복잡한 자재법을 제어하는 데 정신을 쏟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그저 공급된 힘을 마음껏 쓰고 있는 것 같다만.” “응. 역시 힘을 공급해주는 뭔가가 있어. 아까 느꼈던 그건가……. 응? 그러고 보니.” 이토록 엄청난 재생력을 자랑하는 주제에 어째서 티리엘은 방금 전 절규했던 걸까. 거기에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의문은 티리엘 본인이 명쾌하게 풀어주었다. 어두운 증오와 원념이 담긴 목소리로. “용서 못해……. 오라버니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게다가, 게다가 하필이면 오라버니의 얼굴을 짓밟다니……!” 뭐야,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조금 낙담하긴 했지만 그 격분의 정도는 심상치 않았다. 샤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적과 대치했다. “굉장해, 티리엘!” 그 사이에 완전히 재생한 소라토가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불의 검! 난 이런 게 갖고 싶었어!” 소라토는 다음 전투에 대비하여 방어 자세를 치하는 샤나를 무시하고 넝쿨덩어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몸을 살짝 덮고 있는 갑옷의 잔해를 흔들며 호들갑을 떠는 그 모습은 마치 흙장난을 한 다음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티리엘, 이거 벗겨줘! 잘린 곳이 휘어서 아파!” 그 말만으로도 티리엘은 좀 전의 분노를 잊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4. 애염의 끝 티리엘은 몸통을 절단당한 충격과 허탈감 속에서 한 줄기 빛의 잔영을 끌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홍련의 비상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시야 끝에서 넓은 챙 모자가 우아하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중상을……. 고쳐야 하는데…….’ 치명상에 가까운 손상을 입은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사랑하는 오빠를 지켜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피니온’의 수가 부족해.’ 사랑하는 오빠를 단숨에 재생시키기 위한 힘을 모을 수가 없었다. 뿌리 곳곳에 묘한 장애가 있어서 아직 무사히 남아 있는 시가지 외각 부근의 ‘피니온’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에 있는 뿌리, 자신들에게 ‘존재의 힘’을 흘려보내는 자재식,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힘으로 응급처치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아, 저 소녀를 막아야 하는데…….’ 이제야 겨우 사랑하는 오빠가 아닌 샤나에게 생각이 미쳤다. 오빠를 다치게 하고 지금도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하고 있는 증오스러운 토벌의 도구……, 아니 무시무시한 ‘플레임헤이즈’. ‘재생과 방어 양쪽을…….’ 자신의 힘이 미치는 ‘피니온’은 방출구인 거대한 꽃을 포함하여 주택가 쪽에 남은 세 개뿐. 이것들의 구성을 전부 풀어서 ‘존재의 힘’으로 변환시켜야 한다. ‘‘크레들 가든’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이제는 수단을 가릴 수 없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머리 위에서 자신들을 토벌하려 하고 있는 플레임헤이즈의 공격을 피하며 오빠를 재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 슈드나이와 연락하려고 만든 ‘피니온’도 이제는 필요없……?!’ 그쪽으로 슬쩍 의식을 향한 순간 티리엘은 경악하고 말았다. 소년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다리 위를, ‘오르골’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슈드나이는 조아의 노예와 전투 중이다. 따라서 그곳은 텅 비어 있는 셈이다. ‘존재의 힘을 전부 모아 저지해야…….’ 지금은 ‘린네’를 조종할 만한 여유가 없다. 저 감시역을 포함하여 힘이 미치는 네 개의 ‘피니온’에서 ‘존재의 힘’을 회수하여 오빠를 지켜야 한다. ‘이제 이 플레임헤이즈를 내버려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아직 오라버니를 위해서…….’ ‘흡혈귀’에 가슴을 꿰뚫린 후부터 새로운 결의를 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수초에 불과했다. 넓은 챙 모자가 허공에서 불타올랐다. 바로 위에서 홍련의 격류가 쏟아져내렸다. 슈드나이가 박쥐 날개를 펼치고 지면에 닿을락 말락 한 높이를 활공하여 정면의 마죠리를 향해 돌진해왔다. 마죠리는 ‘글리모어’ 위에 서서 투우사처럼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을 피했다. “에잇!” 날개가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쳤다. 마죠리는 슈드나이의 등으로 군청색 화염탄 몇 발을 날렸다. 연달아 화염탄을 맞으면서도 슈드나이는 웃었다. “하하하핫! 약해!” 오만한 외침과 함께 매의 발톱이 지면에 박혔다. 슈드나이는 그것을 기점으로 무릎 위를 빙글 돌려서 호랑이의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불이라면!” 입 안의 탁한 보라색 빛이 번뜩이며 같은 색의 화염탄이 뿜어나왔다. 슈드나이는 그 옆의 다른 입을 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화염탄을 맞은 고가도로와 상점이 산산조각 나고 구부러진 가로등과 전화박스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무너져내린 고가도로의 흙먼지 속에서 마죠리가 서퍼 같은 포즈로 ‘글리모어’를 타고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그리고 마치 창을 던지듯 전봇대만한 도로표지판을 집어던졌다. “이얍!” 플레임헤이즈의 괴력 덕분에 표지판의 뒤에서 군청색 불꽃을 뿜으며 미사일처럼 날아갔다. 그러나 슈드나이는 그것을 한 손으로 가볍게 막아냈다. “‘존재의 힘’이 부족하군. 이래서야 간단히 자재의 간섭을 받겠는걸.” 그렇게 말하며 슈드나이는 표지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표지판 뒤쪽에서 타오르던 군청색 불꽃이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그뿐인가, 앞쪽에서도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견본을 보여주지!” 아무렇게나 던진 표지판이 불꽃의 수레바퀴가 되어 마죠리를 덮쳤다. “쳇!” 마죠리는 ‘글리모어’를 상승시켜 도로에 깊은 흔적을 남기며 낮게 날아온 그것을 피했다. 순간 탁한 보라색 괴물이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조심성도 부족하군.” “!!” 괴물의 손이 양 옆에서 마죠리를 감쌌다. “얌전한 척하는 것도 도가 지나치면 꼴불견인 법. 다시 싸움을 걸어온 것도 결국 무모함의 산물이었던 모양이지.” “……큭!” 대답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거대한 팔은 바이스처럼 그녀의 몸을 조였다. 호랑이의 입을 벌어지고 그 안에서 선글라스를 쓴 슈드나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은 ‘조사를 읊는 자’를 향한 심술궂은 빈정거림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봐란 듯이 슬픈 빛이 감돌았다. “이별은 늘 슬픈 법이지.” 문득 그 얼굴이 멀어졌다. 아니, 마죠리를 움켜잡고 있는 양 팔이 길게 뻗은 것이다. 슈드나이는 그녀를 움켜잡은 채 빙글빙글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눈이라도 편안히 감을 수 있도록 힘껏 끌어안아주지.” 무시무시한 회전 속에서 슈드나이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팔만으로.” 그 양 손목으로 느닷없이 팔에서 떨어져나갔다. 마죠리의 몸은 입체주차장 1층에 격돌하여 셔터를 뚫고 그 안에 정차되어 있던 차를 산산조각 냈다. 슈드나이는 그 위로 날아올라서 입을 벌리고 지금까지 쏜 것 중 최대급의 화염탄을 발사했다. 그것은 포탄처럼 주차장을 옥상부터 1층까지 단숨에 꿰뚫고 모은 것을 폭발시켰다. 이번에는 1층 셔터를 안에서 밀어내듯 뿜어나온 보라색 폭염 속에서 누군가의 상반신이 한순간 바닥에 쓰러졌다가 곧 군청색 불꽃이 되어 밀려갔다. 살짝 튀어나온 팔도, 그 손에 들고 있던 ‘글리모어’도 곧 불길에 휩싸여 사라져갔다. “…….” 슈드나이는 오랜 세월 자신의 호적수였던 그녀의 허무한 소멸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삶과 싸움에 지친 플레임헤이즈의 전형적인 최후이기도 했다. 어쩌면 플레임헤이즈의 죽음으로 인해 마르코시어스가 일시적으로 현신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긴장을 늦추지 않고 기다렸지만 보라색 불길이 뿜어오르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기력이 다한 플레임헤이즈에게 ‘왕’이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다 이건가.’ 문득 그의 윤곽이 흔들리며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묘비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한 잔해를 내려다보며 슈드나이는 호의와 연민을 담아 짧은 조문을 읊조렸다. “하다못해 멋진 지옥에 가기를, 마죠리 도.” 샤나가 겨눈 ‘니에토노노샤나’ 끝에서 또다시 맨션 중앙을 향해 필살의 불꽃이 뿜어나왔다. 그러나 홍련의 격류가 쏟아진 순간 샤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 그녀의 아래로 고밀도의 ‘존재의 힘’이 거대한 꽃의 빈자리를 매울 때처럼, 그러나 그보다 더욱 빠르게 회로 같기도 하고 혈관 같기도 한 곡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그 힘의 흐름은 자재식으로 변화하지 않고 오직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티리엘이 ‘크레들 가든’ 안에 있는 뿌리를 최대한 끌어당기고 닿지 않는 부위는 잘라버리며 남은 ‘피니온’을 흡수하여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홍련의 작렬이 맨션을 뒤흔들었다. 이번에는 지면이 검게 그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중앙정원 측 벽이 폭압으로 산산조각 났다. 불길과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웠다. 샤나는 조금 전 자재법에 붙잡혔던 경험과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힘의 응축을 경계하며 온 힘을 쥐어짜서 재빨리 몸을 피했다. 바로 그 순간. “!” 방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위치에 황금색 자재식이 역방향의 파문처럼 모여들었다. 표적을 놓친 자재식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그 때 바로 아래에서 그림자……아니, 황금색 빛덩어리가 샤나가 몸을 피한 곳으로 날아왔다. 샤나는 깜짝 놀라며 그 공격을 피했다. 빛덩어리는 짧은 거리를 두고 허공에서 정지하여 느닷없이 꽃을 피우듯 무수한 빛을 흩뿌렸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흡혈귀’를 든 ‘애염자’ 소라토와 그의 등에 매달려 목에 팔을 감고 있는 ‘애염타’ 티리엘이었다. 흩어진 빛은 꽃잎으로 변하여 두 사람을 감싸는 케이프처럼 펼쳐진 채 허공에 머물렀다. 그 꽃잎 한 장 한 장은 엄청난 양의 힘이 응축된 ‘존재의 힘’ 덩어리였다. 최후의 일격으로 날렸던 홍련의 격류를 완벽하게 막아냈을뿐더러 아직도 이 정도의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니……. 티리엘과 소라토의 생각지도 못했던 저력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샤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니에토노노샤나’를 겨눴다. 그 모습을 본 소라토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외쳤다. “내 꺼야! 내 ‘니에토노노샤나’를 돌려줘!” “……아직도 그런 소리를.” 기가 막혔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어린애처럼 떼를 쓸 줄이야. 오빠의 어깨를 끌어안듯 잡고 있던 티리엘이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순순히 건네……주시……죠.” 미묘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본 순간. “……!” 샤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모자를 잃어버린 티리엘의 금발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였던 얼굴의 절반이 황금색으로 불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빠의 목을 감고 있는 팔과 그의 등에 힘없이 기대고 있는 몸도 윤곽이 흐린 상태로 흔들리고 있었다. 때때로 황금색 불꽃이 몸의 윤곽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은 그녀가 이 세상에 현신할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너……, 설마 그 주위의 힘은……!” 티리엘은 흐릿하게 타오르는 뺨을 오빠에게 기대며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힘없이 끊기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이 케이프……나 자신……나의 오라버니……지키는 ‘애염타’, 존재……본질……모습.” 그렇게 말하며 티리엘은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둘러싸고 빛나는 화려한 황금색 꽃잎을 바라보았다 “당신……엄청난 일격……막는 것……오라버니……치유……양쪽 다 하기에는……‘존재의 힘’……부족했어요……그래서…….” 티리엘은 끝까지 말하는 것이 귀찮다는 듯 말을 끊었다. ‘홍세의 무리’가 자신의 본질을 ‘존재의 힘’으로 변환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현신’이라고 한다. 그들의 행동은 모두 현신과 더불어 축적한 힘을 소비함으로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소비가 본질을 현신시키는 영역에 이르게 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한마디로 ‘죽음’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전력을 다해 싸우다 자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아무렇지도 안게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소멸하다니……. 이 ‘애염타’ 티리엘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홍세의 무리’ 중에서는 특별한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샤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심각한 의문을 느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나라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자재법이 무너지면 적 같은 건 팽개치고 주저 없이 도망칠 텐데.”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으면서도 티리엘은 마치 승자처럼……샤나가 내심 충격을 받을 만큼 강하게……미소를 지었다. “몇 번이나……말씀드렸……을텐데요……? 나는 오라버니가 원하는 것을……이루어주고……지켜줄 거라고. 그것이 나의……전부라고.” 티리엘은 얼굴이 뒤섞일 만큼 소라토에게 뺨을 비비며 오빠와 같은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직 한 곳, 샤나가 들고 있는 ‘니에토노노샤나’에게로. 무시무시한 집념이 불꽃보다 뜨겁게 눈동자를 태우고 있었다. “오라버니가……원하는 것……아직……이루어지지 않았어요……그러니까……내가……이루어줄 거예요……방해하는 자로부터……오라버니를……지켜줄 거예요.” 미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억지나 타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리나 선악에 얽매이지 않고, 꾸밈없이 솔직하고 확고한……, 그녀의 존재의미 그 자체였다. “그것이 너의……?” 티리엘은 황금색 불꽃 속에서 처음으로 샤나에게 호의적인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힘없이 흔들리는 입술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요, 사랑.” 불가사의한, 그러나 불쾌하지 않은 침묵이 허공에 떠 있는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소라토의 천진난만한 동시에 흉악한 목소리였다. “티리엘, 빨리 갖고 싶어!” “네, 네……알……겠어요, 오라버니.” 동생을 걱정해주기는커녕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을 좇는 오빠에게 그녀는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미소로 대답했다. 샤냐의 입에서 바보 같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째서 그런 녀석을.” 티리엘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은 이미 했으니까. 티리엘은 대답 대신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당신에게도……이 어쩔 수 없는 감정을……느끼게 해……줄까요?” “……뭐?” 당황하는 샤나를 바라보며 티리엘은 강렬하고 잔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다리엔……지금 한 소년이……있답니다.” “!”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숨에 창백해진 샤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티리엘은 만족스러운 듯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오라버니……다리로…….” “응!” 소라토는 ‘니에토노노샤나’를 흘낏 바라보며 티리엘의 지시를 따랐다. 화려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케이프가 ‘애염의 남매’를 감싸고 비상하기 시작했다. 샤나에게서 소중한 것을, 사카이 유지라는 존재를 빼앗기 위해서. “기다려……!” 샤나는 홍련의 날개를 불태우며 그 뒤를 쫓았다. 미사키 대교에, 저들이 향하는 곳에 유지가 있다. ‘어쩔 수 없는 감정.’ 뜨겁게 끓어오르는 머릿속, 아플 만큼 뛰는 심장, 상실의 공포에 떠는 마음 밑바닥……. 샤나는 느닷없이 일어난 그런 이상한 감정 깊은 곳에서 왠지 막대한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이 무서운 기세로 몸과 마음을 움직였다. ‘어쩔 수 없는 감정.’ 문득 샤나는 앞에서 조금 낮게 날고 있는 ‘애염의 남매’……소라토의 등에 매달려 있는 티리엘이 자신을 보고 살짝 미소 짓는 것을 느꼈다. 비웃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왠지 당연하리만큼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미소를 띤 입술에서 흔들리는 불꽃에 섞여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 힘내세요.” 오빠와 샤나 중 어느 쪽에게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런 생각만이 강하게 샤나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난 지지 않아. 죽게 만들지 않을 거야……!’ 황금색 빛과 홍련의 불꽃은 서로 뒤엉키며 앞다투어 미사키 대교를 향해 날았다. 티리엘의 생명이 꽃잎이 되어 뒤로 흩어지며 사라져갔다. 유지는 현실의 업격함과 무정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영웅인 척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뭔가 작지만 샤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간까지는 잘 되어갔다. 미사키 대교 도로 위에 당연한 듯이 서 있던 ‘린네’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에는 하늘은 자신의 편이라며 태평하게 기뻐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엄청난 한심함과 무력감을 맛보는 것으로 끝났다. ‘하긴 그렇지…….’ ‘홍세의 무리’가 자신의 자재법의 핵심을 간단히 손이 닿을 곳에 놓아둘 리가 없지 않은가. 인간의 손이 닿는 것은 애초에 논외로 치더라도 플레임헤이즈의 공격을 포착하고 방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위치는 당연한 셈이다. 유지는 약간의 탐색 끝에 ‘린네’와 똑같은, 그러나 좀더 복잡한 힘의 진폭이 머리 위에서 연주되고 있는(‘오르골’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런 것이 연상되었다) 것을 발견했다. 미사키 대교는 이른바 사장교라고 불리는 거대한 규모의 다리다. 도로를 가운데 끼고 서 있는 ‘A’자 형태를 지닌 두 개의 주탑 위 부분에서 앞뒤로 굵은 케이블을 늘어뜨려 그것으로 다리의 양 끝을 매단 형태의 다리. 보구 ‘오르골’은 그 주탑 꼭대기에 놓여 있었다. 인간은 날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샤나와 함께 있으면 종종 잊어버리고 마는 상식의 벽. 그것이 지금 유지의 앞을 굳게 가로막고 있었다. 관리용 사다리는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올라갈 수 없다. 작업용 차량이 있는 곳은 모른다. 안다 한들 운전도 조종도 할 수 없다. 보구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평범한 인간 수준의 힘밖에 없는 유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힘’도 다른 사람에 비해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제일 괴로웠다. 그것만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뭔가 지금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서성거리는 사이에……. ‘…….’ 마죠리가 깨끗하게 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를 이긴 ‘홍세의 왕’……, 주위에 소름끼치는 위화감을 풍기는 짙은 양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 ‘천변’ 슈드나이가……. ‘……어…….’ 눈앞에 나타났다. 도망칠 틈도 없었다. 황금색 옅은 안개에 감싸여, 인간도 사물도 움직이지 않는 정적 속에 슈드나이와 단둘뿐. ‘……어쩌면 좋지?’ 슈드나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자신들이 장치한 봉절의 중추에서 느닷없이 수상한 토치와 마주쳤으니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나와 샤나를 위해 뭘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내가 지닌 비장의 카드는 뭐가 있을까? 이 상황에서 무든 카드를 어떻게 꺼내면 좋을까? 냉정해지자. 기지를 발휘해봐. 배짱 있게 나가는 거야. ‘……샤나.’ 도움을 청해봤자 소용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자신은 주제를 모르는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움을 청해봤자 전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밖에 없다. ‘……샤나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해.’ 싸움은 논외. 그렇다면 대화를 해야 할까, 어려운 일이다. 몸으로든 말로든 머리로든사태를 움직여서는 안 된다. 시간을 벌려면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착상태로 만드는 거야.’ 허세를 부리자. 공격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자신은 봉절 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점을 경계하게 만들면 된다. 뭔가 쓸 만한 카드는 없을까. ‘……있다!’ 그 녀석의 이름, 두려움, 특성, 모두 샤나에게서 들었다. 세 사람의 ‘무리’가 무엇 때문에 미사키 시에 왔는지는 마죠리에게서 들었다. 슈드나이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더더욱 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그 허세를 믿고 경계심을 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유지는 애써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실제로는 슈드나이와 마주쳤을 때의 자세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 가벼운 운동을 마친 슈드나이는 아무래도 고전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도우러 가던 도중 단순히 확인을 위해 미사키 대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뭐지, 이 녀석은?’ 생각지도 못한 침입자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슈드나이는 선글라스 너머로 침입자를 관찰했다. 플레임헤이즈도 ‘무리’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미스테스’뿐이다. ‘……‘미스테스’라……. 설마……?’ 애초에 자신과 ‘애염의 남매’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던가. 그 의미를 생각하자 전율이 일었다. 슈드나이는 변신을 위해 온 몸에 힘을 모으며 엄숙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됐다!’ 긴장 때문에 복통과 두통과 현기증과 이명에 시달리면서도 유지는 천천히 대답했다. “……내 이름은.” 그리고 낮고 억제된 목소리로 결정타를 날렸다. “‘천목일개’.” 그것은 과거에 ‘니에토노노샤나’를 휘두르며 플레임헤이즈와 ‘홍세의 무리’를 불문하고 무자비한 피바람을 일으켰던 무시무시한 괴물의 이름. 그 본체인 대검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자재법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그저 ‘홍세’의 냄새를 따라 검을 휘둘렀던 사상 최악의 ‘미스테스’의 이름. 이곳에 있는 이상 유지라는 존재가 ‘천목일개’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슈드나이는 선글라스 안의 눈을 크게 떴다. ‘……걸려들었다!’ 작전이 성공했음을 눈치챈 유지는 애써 회심의 미소를 감췄다. 과연 자신의 연기력으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유지는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처럼 최대한 버텨보자고 결심했다. “크아아!” 슈드나이가 느닷없이 포효하며 양 팔을 호랑이 머리로 변신시킨 후 총을 쏘듯 화염탄을 연달아 발사했다. 화염탄은 보도를 부수며 차례차례 수상한 ‘미스테스’에게 명중하여 탁한 보라색 폭발과 불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니?!” 연기와 불길이 수그러든 후에도 그곳에는 역시 ‘미스테스’가 상처하나 없는 모습으로 태연하게 서 있었다. 슈드나이는 이 확인 결과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양 팔의 호랑이를 앞으로 내민 채 경계 자세를 취했다. 소문대로라면 언제 어떤 무서운 공격이 날아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윽고 ‘천목일개’는 고개를 숙이며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왼쪽 허리 부근에 양 팔을 단단히 고정시킨 채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것은 마치 힘을 발산하기 직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손 끝에 ‘존재의 힘’이 미미하게 집중되어 있을 분 실제로 칼은 보이지 않았고 자세 자체도 미묘하게 어설퍼 보였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검의 궤도와 타이밍을 예측하기 어려워서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쳇.” 슈드나이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생각지도 모한 때에 나타난 강적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결국 그는 긴장된 상태로 이 무시무시한 ‘미스테스’의 일격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미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설마 ‘니에토노노샤나’만 있으면 자유자재로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얻은 플레임헤이즈가 강해지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슈드나이는 의아한 나머지 엉뚱한 추측을 하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 주! 주! 주! 죽는, 줄 알았네……!’ 한편 유지는 두근거림과 떨림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충격 때문에 맺힌 눈물을 어떻게든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슈드나이의 화염탄을 맞았을 때에도 물론 태연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반응조차 못하고 굳어 있던 것뿐이었다. 화염탄을 막은 것도 가슴에 건 보구……불을 막아주는 ‘아주르’ 덕분이다. 내심 여기에 오기 전에 화장살에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발도 자세도 샤나가 매일 아침 봉을 들고 단련하는 모습을 조잡하게 모방해낸 것뿐이었다. 실은 욕실에서 그 멋진 포즈를 몰래 흉내내보곤 했던 부끄러운 행동의 산물일 것이다. ‘……하, 하지만 배부른 소린 할 수 없지……. 인간만사 새, 새옹이니까.’ 참고로 새옹지마다. 어쨌든 유지에게는 이것이 허세의 한계였다. 슈드나이는 기적적으로 그의 허세의 감쪽같이 걸려들고 말았다. 남은 것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겨, 결국……, 마지막에는 샤나에게 의지하게 되는 구나…….’ 하지만 조금은 칭찬해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죠리 도는 살아 있었다. “……아, 그렇지…….”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떠올리며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무너진 건물의 좁은 공간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었다. 마죠리는 옷을 털며 좁은 공간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녀의 겨드랑이에 끼어 있던 ‘글리모어’에서 군청색 빛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마르코시어스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히히힛! 정말이지 네 끈질긴 목숨에는 감동마저 느껴지는군, 나의 강인한 생명, 마죠리 도.” 상황, 목소리, 내용, 그 모든 것에 마죠리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 “거짓말도 잘하셔. 놈의 일격을 맞기 전에 가짜를 내보내고 기척을 없애는 술수까지 부린 주제에.” 마르코시어스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희미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마죠리는 불쾌감을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글쎄, 눈앞의 문제를 외면하고 도망치는 사이에 후회의 씨앗은 점점 자라는 법이지.” 그의 말은 뭔가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면서도 마죠리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말했다. “흥, 후회고 자시고……. 빈 껍데기에게 그런 게 있기나 하겠어. 더 이상 딱히 할 일도 없고…….” “‘은’은 어떻게 할 건데. 이대로 팽개쳐둘 거냐.” 순간 마죠리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지만 그 활력도 곧 사라지고 말았다. “……어차피 기다리든 말든 멋대로 나타난다면서……? 그럼 내가 움직일 필요는 없잖아.” “…….” 대답은 없었다. 마죠리는 이때다 싶은 심정으로 불쾌한 이야기를 끊고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계속 이런 곳에 묻혀 있을 수는 없지. 밖은 어떻게 됐을까……. 케이사쿠, 에이타, 지금 어떻게 봤지?” “…….” 마르코시어스가 아무 말 없이 불빛을 약하게 조절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대답은 없었다. “……뭐야, 지금은 전투 중이 아니니까 말해도 돼.” 역시 대답은 없었다. “왜 그래, 케이사쿠, 에이타. 뭐라고 말 좀 해봐! 마르코시어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통신 자재법도 끊기지 않았는데?!” “…….” 마죠리의 다그침에 마르코시어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불을 꺼버렸다. “잠깐, 뭐야?” 마르코시어스가 어둠 속에서 작게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아무 대답도 없어. 소음도 안 들리고.” “……뭐?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소리야? 케이사쿠! 에이타!” 마죠리는 정적 속에서 계속 외쳤다. “설마 ‘천변’에게 들켜서 당했나? 아니면 그 남매에게? 잠깐! 마르코시어스, 왜 날 깨우지 않은 거야!” 대답은 없었다. 어디에서도. 그저 어둠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단 몇 초도 견딜 수 없었다. “마르코시어스!” 마죠리는 절규하며 눈앞의 어둠을 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저 그뿐이었다. 이윽고 마르코시어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바란 결과야. 나의 나태하고 어리석은 마죠리 도.” “뭐……?!” 그 노골적인 경멸의 말에 마죠리는 할 말을 잃었다. “후회도 느끼지 못하는 빈 껍데기라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사이에 이 꼴이 됐어. 넌 뭔가를 할 수 있었어. 그런데 하지 않았어.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무슨 낯으로 누구에게 불평을 하겠어?” 그녀는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수백 년이나 함께 지내온 이 시끄럽지만 다정한 늑대에게서 지금까지 이토록 악의에 찬 비난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망연자실해 있는 그녀에게 마르코시어스는 가차없이 결정타를 날렸다. “에이타에게서 사명이 느끼지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뭐라고 대답했지?” [지금까지 내 멋대로 행동해왔어. 사명은 무슨.] “케이사쿠에게서 지켜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뭐라고 대답했지?” [지켜? 이제 와서 그런 거참한 소리를 해봤자 실감이 나지 않는데.] “이건 전부 네가 초래한 결과야……. 어쩔 수 없다며 투덜대던 네가 초래한 결과.” “…….” 마죠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충격을 받고 마르코시어스의 무거운 지적에 짓눌려 깊은 후회가 잠기…… 지는 않았다. “……아직 포기하긴 일러!”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눈앞의 어둠을 힘껏 때렸다. 먼지가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고작 대답이 없는 것뿐이잖아!” “너나 내 지시가 없는 한 그 두 사람이 그곳을 떠날 리 없잖아.” 평소와는 달리 조용한 마르코시어스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발버둥을 치는 것은 오로지 감정 때문이었다. 마죠리는 또다시 어둠을 때렸다. 그 충격에 돌더미가 흔들렸다. “‘무리’의 습격을 받고 도망쳤는지도 모르잖아!” “‘파리단’에는 무리가 비치지 않아. 습격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죽은 목숨이야.” 상대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명백한 사실을 눈앞에 들이대도,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마죠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발버둥 쳤다. 그리고 또다시 어둠을 때렸다. 쾅. 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봤어? 들었어?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잖아!” “가봤자 이미 전부 끝났을 거야. 토치를 만들 수 있을 만한 찌꺼기가 남아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마죠리가 또다시 어둠을 때렸다. 육중한 돌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럼 토치만이라도 건져서 그들이 원하던 대로 데리고 다니면 돼!” “존재가 사라진 후에 그래봤자 너무 늦어. 게다가 의미도 없고. 이렇게 후회할거면 왜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던 거냐.” 마죠리는 두 주먹으로 매달리듯 돌더미를 두드렸다. “그렇지만……! 좀 쉬게 해줘도 되잖아. 어리광을 부리게 해줘도 되잖아! 몇백 년 동안 해왔던 일을 별안간 전부 빼앗겼어. 갑자기 자신을 바꿀 수는 없는 거잖아!” 마르코시어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겠지. 우리도 필요 없을 테고. 하지만 세상은 뜻대로 안 되는 법이야. 싸우는 것도, 지키는 것도 자기 마음이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상관없지만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해. 아무도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어……. 다 그런 법이지.” 그것은 무자비한 선고였다. 마죠리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칠던 호흡이 진정된 후에도 잠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마죠리가 겨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죄일까……?” 마르코시어스가 즉각 대답했다.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도 네 맘이지.” “…….” 이번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마죠리가 말했다. “……이번에는 부수고 싶은 게 아니라 지키고 싶은 거였는데.” 군청색 불꽃가루가 어둠 속에서 깜빡였다. “또 이렇게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돌더미 속에서 죄에 짓눌려 바닥을 기며 다시 시작하게 되는군.” 이윽고 불꽃가루가 모여 촛불만한 크기의 작은 불꽃을 이루었다. “다 그런 거야. 넌 이미 선택했잖아? 모든 것을 잃고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어쩔 수 없는 곳에서 또다시 일어서는……, 그런 길을. 이제 됐어, 다 이런 거야 하며 모든 걸 내팽개치지 않고 말이야. 난 그런 너한테 반해서 내 불을 맡긴 거야.” 불은 차츰 그녀를 비추며 몸의 표면을 타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일어선다라……. 하지만 의외로 굉장히……, 괴롭군.” “그 두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군……. 아무튼 어쩔 거야. 싸움이 끝날 때까지 계속 여기 숨어 있을 거냐?” 강렬한 분노와 결의가 담긴 아름다운 얼굴이 이미 치솟아오를 정도로 거세진 불길에 감싸였다. “그럴 리가. 귀여운 부하들이 죽었어. 내 실수라고는 해도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히힛……. 그럼 갈까.” 마죠리는 가볍게 뛰어오른 후 포탄처럼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돌더미를 가볍게 돌파하여 단숨에 밖으로 나왔다. 철골을 튕겨내고 콘크리트를 헤치며 돌더미 꼭대기에 오만하게 우뚝 선 그것은……. 군청색 불꽃으로 이루어진 땅딸막한 짐승. 귀를 쫑긋 세우고 검게 뚫린 콧구멍에 톱날 같은 이를 드러내며 커다랗게 웃는 그것은 ‘유린의 조아’의 플레임헤이즈, ‘조사를 읊는 자’가 두른 불꽃의 옷 ‘토가’였다. 그 때였다. “응?!” “으악!” 아래쪽에서 깜짝 놀라며 외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응?” 마죠리는 돌더미 꼭대기에 서서 그 두 사람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케, 케이사쿠, 에이타……?” 모습을 감췄던 두 사람이,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두 사람이 분명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콘크리트 가루와 재로 온몸이 새까맸다. 둘이서 이 돌더미를 파헤치려고 했던 모양이다. 큭큭큭.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마죠리는 엄청난 분노에 목소리를 떨었다. “히히힛, 뭐 이 세상도 가끔 친절할 때가 있는 법이지.” “나, 날 속였군……. 바보 마르코.” 토가가 격렬한 소리로 울리며 불타올랐다. “응~? 난 ‘아까부터 계속 아무 대답이 없어. 소음도 안 들려’ 라고만 했지 두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둘 다 내가 ‘우린 여기에 묻혀 있어’ 라고 해서 온 것뿐이야. 전부 네가 지레짐작한 거지. 으하핫!” “……너, 너……!” 투둑, 마죠리는 뇌의 혈관이 끊기는 것을 실감했다. “마, 마죠리 씨!” “누님!” 아래에서 두 사람이 돌더미를 기어올랐다. 무사했던 두 사람이. “…….” 마죠리는. “…….” 흙먼지와 재를 뒤집어쓴 그들의 온몸을, 피투성이 손바닥을,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바라보며, “……웃.” 문득 격정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우, 우왓, 자, 잠깐?’ 아까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토가 속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마죠리는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 입을 열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것이 분명했다. 자각은 없었지만 토가의 짐승도 어깨를 격렬하게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돌더미 위를 기어올라 왔다. 마르코시어스가 두 사람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오, 얘들아. 마죠리는 아까 철저하게 당하는 바람에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나 있단다. 건드리면 진짜로 화상을 입을지도 몰라요.” “아, 그건 그렇고 다친 곳은?” 사토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마르코시어스가 가볍게 대답했다. “히히힛, 나의 강인한 불사신 마죠리 도가 이 정도로 다칠 리 없잖아? 오히려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은데.” “이 정도라니…….” 타나카가 폭격을 당한 듯한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둘러보며 말했다. “빨리 ‘파리단’으로 돌아가. 지금 히스테리 상태니까.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저 커다란 손에 사정없이 얻어맞을 걸?” 입을 열 수 없는 처지인 마죠리는 그저 부르르 떨며 토가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토가 그런 마죠리를 바라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알겠어요, 이제 괜찮은 거죠?” 마죠리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우린 돌아갈게요.” 사토는 지금까지의 필사적인 태도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물러섰다. 그리고 타나카를 재촉해서 돌더미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타나카도 그 뒤를 쫓으며 피범벅이 된 팔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무리’ 따윈 확 날려버려주세요!” 마죠리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르코시어스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히히히, 이걸로 아까 그 일은 없었던 걸로 해주지그래.’ ‘전부 네가 뿌린 씨잖아……. 뭐야, 정말……. 내가 꼭 바보 같잖아.’ ‘그럼 그만 둘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겐 지킬 것이 있는걸.’ 마죠리가 토가 안에서 토라진 듯이 울음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비정한 세상을 노래해볼까, 나의 꼴사나운 여행자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 그 가볍고도 깊이 있는 권유에 마죠리는 또다시 조용하고 강한 결의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좋아, 아주 처참한 노래를 들려주지, 나의 밉살맞은 파트나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 문득 돌더미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부하들이 보였다. 마죠리는 그에 답하듯 토가의 가슴을 내밀고 굵은 팔을 날개처럼 펼쳤다. 그리고 최대한 멋지게 보이도록 힘차게 도약했다. 전장으로. ‘이제 곧 샤나가 올 거야.’ 유지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고 있다. 무서운 속도로. 기쁘기도 하고 듬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절대로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 법인 모양이었다. ‘……어, 어쩌지…….’ 그들이 다가옴에 따라 슈드나이는 완전히 싸울 마음을 굳힌 듯했다. 그의 몸 안에 ‘살기’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불 종류가 아닌……, 예를 들어 지금 눈앞에 있는 ‘양 팔의 호랑이 머리’로 공격해오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틀림없이 갈기갈기 찢겨서 죽고 말 것이다. 갑자기 뱃속에 얼음 덩어리가 가득 찬 것처럼 몸이 무겁고 차가워졌다. 몇 초 후 자신은 소멸될지도 모른다. 지금 적은 그야말로 그럴 심산이다. 거부하고 있던 이해와 실감이 점점 마음에 스며들었다. 딱. 느닷없이 딱딱하고 가벼운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딱딱. 곧 그 소리가 또다시 연속해서 들려왔다. ‘…….’ 딱딱딱딱딱. 그 소리는 더욱 빠르고 격렬해졌다. ‘……아아.’ 겨우 깨달았다. 자신의 이가 부들부들 떨리며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멈춰, 멈춰, 멈춰!’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쳐봐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설프게 발도 흉내를 내고 있던 자세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무너져갔다. 관절에서 힘이 빠지고 부들부들 떨렸다. 어느새 유지는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슈드나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네놈은!” 의아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크.’ 유지는 당황하고 말았다. ‘큰일났다……!’ 순간 슈드나이의 팔이 유지의 가슴에 꽂혔다. 팔 전체를 태우던 불꽃은 결계에 막혀 경계선에서 끊겨버렸지만 팔 자체는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 나를 속였단 말인가?” 유지의 가슴에 꽂힌 팔은 반대편으로 튀어나가지 않고 체내에 머물러 있었다. 육체적인 타격은 없었다. 그러나 슈드나이의 손은 ‘미스테스’의 본체인 비보 ‘영시미아’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존재 자체의 소멸이 걸린 위기였다. “아…….” 봉절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고작인 ‘미스테스’, 불을 막는 것 외에는 전투 따위에 대해서는 생판 모르는 녀석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슈드나이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쳇, 기가 막히군. 그나마 안에 든 보구정도는 쓸 만한 것이었으면 좋겠군.” 허세를 부리며 자신을 속였던 ‘미스테스’ 안에 든 보구는 과연 낭비한 시간을 보상해줄 만큼 괜찮은 물건일까. ‘미스테스’의 무능력함에 내심 회의를 느끼면서도 슈드나이느는 더욱 깊숙이 손을 뻗었다. 공포에 질린 유지의 뇌리에 언젠가 ‘린네’에게 똑같은 일을 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때는 샤나가 도와줬지만(‘린네’와 함께 칼에 베인 것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임종 직전의 회상처럼 아름다운 추억만 남기고 싶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곳에 없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하려면 아직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 강해진 감각으로 그것을 느끼며 유지는 절망에 빠졌다. 그녀와 줄곧 함께 있었기에 그녀와의 거리가, 그녀와의 이별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지독한 얄궂음에 분노마저 치밀었다. 슈드나이의 손이 유지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고동치는 보구에 닿았다. ‘있다.’ 슈드나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샤나, 미안해!’ 유지는 ‘린네’에게 당했을 때에도 느끼지못햇던, 자신이 곧 분해되어 소멸될 거라는 강렬한 실감에 몸을 움츠렸다. 핑. 문득 기묘한 감각이 유지의 전신을 꿰뚫었다.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와 그 감각. “응?” 처음에는 자신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크윽.” 그러나 시각은 그 인식을 배반하고 있었다. “쿠오오.” 청각에 포착된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유지는 겨우 극한의 긴장에서 벗어났다. 슈드나이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유지의 가슴속으로 뻗었던 팔을 움켜쥐고……, 아니 가슴속으로 뻗었던 부분이 절단된 팔을 움켜쥐고. “쿠오오오오오오……!” 맹수의 단말마 같은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가 움켜쥐고 있는 팔의 절단 부위는 잘린 것이 아니라 마치 부러진 석고상처럼 기묘했다. 탁한 보라색 불꽃이 그곳에서 피처럼 뿜어나오고 있었다. 슈드나이는 몸을 살짝 굽힌 채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계, ‘계금’ ?! 이럴 수가. 나를, 이 ‘천변’을 물리칠 정도의 ‘계금’이?!” “우우…….” 유지에게는 그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여유 따윈 없었다. 부러진 슈드나이의 팔이 자신의 몸 안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 마치 자신의 몸 안에 팔 하나가 더 생겨난 듯한 소름끼치는 감각에 괴로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너……, 대체 그 몸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거냐……. 잠깐, 봉절 속에서 움직여……?” 신음하며 비틀거리던 슈드나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오한으로 휘청거리며 물러서던 유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눈치챘구나. “설마 네놈이……. 그랬구나.” 슈드나이의 얼굴에 고통을 능가하는 크나큰 환희가 감돌았다. “우, 아…….” 유지는 그 표정에서 뭔가를 감지했다. ‘홍세의 무리’의 강력한 비보를 얻었다는 그런, 뻔한 기쁨의 표출은 결코 아니었다. 슈드나이가 그 생각을 확인시켜주듯 말했다. “설마, 설마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이야……. 큭, 큭큭, 큭큭큭…….” 슈드나이는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소리와 함께 유지를 향해……, 그 안의 보구 ‘영시미아’를 향해 무사한 다른 팔을 뻗었다. 그 모습은 방금 전 존재가 소멸될 각오를 했을 때보다 더 큰 공포를 유지에게 안겨주었다. 자신이 소멸된 각오를 했을 때보다 더 큰 공포를 유지에게 안겨주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자신의 결정적인 무언가를 좌우하고 있는 듯한 그런 직감이 들었다. “아, 아……!” 슈드나이의 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유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한 그 손을 그저 떨면서 바라보았다. 순간. “쾅……!” 옆에서 들려온 쾌활한 목소리가 그것을 날려버렸다. “?!” 그 목소리와 함께 군청색 불덩어리가 화산탄처럼 엄청난 속도와 중량을 자랑하며 날아왔다. 짜리몽땅한 몸통 밑에 달린 짧은 다리가 슈드나이의 본체를 후려갈겼다. 슈드나이는 도로에 서 있던 자동차 너댓 대를 부수며 날아가서 함께 폭발했다. “……아, 사, 살아 있…….” 겨우 놀라움을 느낄 정도의 여유를 되찾은 유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눈앞에 또다시 죽은 줄 알았던 플레임헤이즈가 서 있었다. 이번에는 샤나와 싸웠을 때처럼 투지 그 자체인 듯한 토가를 두르고. “흐응, 나이스 타이밍.” “싸움도 무르익었겠다. 딱 좋군그래. 히힛……!” 목소리도 예전처럼 대담하고 쾌활했다. 유지에게도 이상하리만큼 쾌활한 그 모습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컨디션은 회복됐, 끄아아악……?!” 별안간 군청색 짐승은 유지를 아무렇게나 움켜잡고 힘껏 집어던졌다. 슈드나이를 향해서. “……빌어먹을!” ‘이 내가 ‘영시미아’를 앞에 두고 이성을 잃……아니?!’ 불길에 휩싸인 자동차의 잔해에서 몸을 일으킨 슈드나이는 고개를 든 순간 정면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자신의 표적을 보고 뛸 듯이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들려온 노랫소리에 전율했다. “험프티 덤프티, 굴러떨어져서…….” 도살의 즉흥시! “산산조각 나라!” 유지가 산산조각 났다. “으악! 어라?”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린 유지는 어째서인지 자신이 마죠리의 발 밑에서 산산조각 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오오?!” 산산조각 난 가짜 유지를 바라보며 슈드나이는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몇 초 후 그 파편이 새장으로 변하여 슈드나이를 가뒀다. “이야아아아아압……!” 곧 커다랗게 부풀어오른 군청색 주먹이 슈드나이를 묶어놓는 자재법인 새장과 함께 그의 몸을 날려버렸다. “크으으윽!” “페니!” 곧이어 손끝에서 발사된 화염탄이 허공으로 날아간 그의 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페니! 페니!” 잇달아 작렬한 화염탄은 마죠리가 무기력한 상태였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페니도 모으면 부자!” “우하하, 으라차.” 결정타인 거대한 화염탄이 작렬했다. 슈드나이는 연기를 끌며 미사키 대교 아래에 흐르는 마나 강으로 추락했다. 자신의 힘을 나타내는 불꽃의 밝기와 매끄럽게 흘러가는 즉흥의 주문에 군청색 짐승은 입술 끝을 치켜올리며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뭐야, 증오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제법 싸울만 하잖아.” “그런 것 같군. 히힛!” 그 발 밑에서 유지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 무슨 짓이야! 너무하잖아!” 물론 마죠리는 태연하다 못해 짐승의 얼굴에 웃음조차 지우지 않았다. “고작 교란 작전에 이용한 것 가지고 시끄럽게 굴지 마.” 다시 뭔가를 말하려던 유지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 그렇지. ‘오르골’! 이 곳 위에 오르골이!” 그 말에 마죠리가 토가 안에서 얼굴을 내밀고 다리의 주탑을 올려다보았다. “흐응, 그렇네. 하지만.” “응?” “저건 꼬맹이한테 맡겨야겠는걸. 우린 저 느글느글한 녀석을 막아야 되거든.” “뭐? 하지만 아까……, 욱!” 말이 끝내기 무섭게 강물 속에서 힘이 부풀어 올랐다. 유지는 두려움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녀석이 그 정도로 죽었으면 고생을 왜 하겠어.” 마죠리가 또다시 토가 안으로 얼굴을 감췄다. 짐승의 얼굴이 이빨을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꼬마아가씨에게 가르쳐줘라.” 마르코시어스가 놀리듯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토가의 짐승은 땅을 박차고 다리 아래로 몸을 날렸다. 곧 다리 아래로 몸을 날렸다. 곧 다리 아래에서 엄청난 폭발과 불기둥이 잇달아 치솟았다. 유지는 미사키 대교에서 주택가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있는 큰길의 상공을 바라봤다. ‘……왔다!’ ‘애염의 남매’인 듯한 황금색 빛과 엎치락뒤치락하며 그녀가 이쪽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빛나는 홍련의 날개를 지닌 플레임헤이즈 소녀가. 유지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런 유지의 행동에 대한 샤나의 평가는. ‘……저 바보!’ 였다. ‘자기를 노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러나 그 행동의 의미는 알 수 있었다. 미사키 시 중심부인 그곳, 다리의 차도를 가운데 끼고 서 있는 A자형의 주탑 꼭대기에 ‘피니온’을 제어하는 보구 ‘오르골’이 있는 것이다.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상황을 파악한 후 샤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역시 함께 있어줬구나.’ 자꾸 가슴이 뜨거워졌다. 지금은 자신이 조금 앞서 있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지만 소라토의 등에 매달려 있는 티리엘에게 자신들의 관계는 이런 형태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샤나는 그 마음을 원동력 삼아 더욱 빠르고 힘차게 미사키 대교로 향했다. 다리 바로 옆의 마나 강 수면이 잇달아 폭발했다. 티리엘이 말했던 경호원……, 그 유명한 ‘천변’ 슈드나이와 마죠리가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투 시에 그녀의 판단력에 믿음을 갖고 있는 샤나는 그 싸움이 자신을 엄호하기 위한 것임을 정확히 파악했다. 남은 것은 표적이 되어버린 유지를 지키고 ‘애염의 남매’에게서 ‘오르골’을 탈취 또는 파괴하려는 것뿐이다. “아라스톨, 내 행동을 지켜봐줘.” 그 말의 의미를 즉각 이해한 아라스톨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해봐라.” 샤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홍련의 날개에 힘을 쏟아부었다. 그 기백을 느낀 티리엘이 꽃잎의 케이프에서 황금색 불꽃을 피워올렸다. “자……, 시작해……볼까요……그에게……인사를……!” 허공에 흩어진 불꽃은 화염탄으로 변하여 샤나가 아닌 다리 중앙에 서 있는 유지에게로 날아갔다. “쳇!” 샤나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려서 팔을 휘둘렀다. 그 끝에 홍련의 불꽃이 넘실거렸다. ‘안 돼, 너무 작아!’ 그 불꽃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힘이 소모된 탓도 있지만 형태가 분명한 검이나 일직선으로 흐르는 격류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달리 형태가 애매한 불꽃을 만들기에는 아직 숙련도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몇 발 놓치기는 했지만 불꽃은 티리엘의 화염탄을 유도하여 그녀의 정면에서 폭발시켰다. 화염탄은 자신이 발사한 것인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앞을 가로막는 형태로 폭발했다. “!” ‘지금이다!’ 티리엘과 소라토가 깜짝 놀라며 그 공격을 피하는 사이에 샤나는 재빨리 미사키 대교에 서 있는 소년에게로 날아갔다. 티리엘의 화염탄을 뒤쫓는 형태로. “유지, 피해!” 그 외침을 들을 것까지도 없이 유지는 재빨리 가까운 자동차 뒤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이로 그 주위에서 황금색 폭발이 일었다. “으악……?!” 압력을 동반한 불길의 파도가 날아가버린 자동차와 함께 유지를 무참하게 희롱했다. 문득 가느다란 손가락이 유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동시에 계속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늠름하게 울려 퍼졌다. “이리 와.” 뺨을 태우는 열기 속에서 유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샤나의 손을 꼬옥 잡았다. 새로운 충격이 도약에서 비상으로 변했다. 불길을 뚫고 연기를 넘는 감촉이 바람을 가르는 감촉으로 변한 후에야 유지는 겨우 눈을 떴다. “우와.” A자 형태를 지닌 주탑의 철벽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문득 유지의 머릿속에 이 소동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샤나가 옥상으로 올라왔던 동작이 떠올랐다. 예상했던 대로 샤나는 주탑 꼭대기 바로 밑에 검 끝을 가볍게 꽂아서 급브레이크를 건 후 화려하게 회전하여 꼭대기 가장자리에 착지했다. 이 일련의 동작에 마구 휘둘리던 유지는 자칫하면 벽에 충돌할 뻔했다. 하지만 샤나의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몸을 단단히 잡아주었다. “꾸엑!” 샤나가 비명을 지르는 유지를 난폭하게 집어던졌다. “아야야……. 응……?” 충격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유지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금속적임에도 투명하고 섬세한 음색. 박자는 느리나 왠지 긴박감이 느껴지는 멜로디. 애절하게 심금을 울리는 청아하고 고고한 악기. “……‘오르골’……?” 유지는 멍하니 서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보구를, 미사키 시를 뒤덮은 이계의 중추를 바라봤다. 아래에서 올려다봤을 때보다 의외로 넓은 A자 형태의 주탑 꼭대기. 그것은 장방형의 공간 한가운데에 쓸쓸한 음색을 자아내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조잡하고 나뭇결이 갈라진 작은 나무상자. 이윽고 애절한 음색을 자아내는 작은 상자 너머에서 ‘애염의 남매’가 황금색 꽃잎의 케이프를 화려하게 휘날리며 반대편 가장자리에 내려섰다. “겨우 멈췄군! 빨리 내놔, 내 ‘니에토노노샤나’!” 혼자서만 기운이 넘치는 ‘애염자’ 소라토가 끈질기게 ‘흡혈귀’를 휘두르며 말했다. 그의 등에 매달려 있는 ‘애염타’ 티리엘 역시 끈질기게 말했다. “……자아……. 오라버니께……넘겨주세요.” 비장의 도구 ‘오르골’이 앞에 있기 때문일까, 그 목소리에는 여유마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유지는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뭐, 뭐야……?!” 티리엘은 이미 얼굴의 절반 이외에는 모든 윤곽이 무너진 상태였다. 소라토의 가슴 위로 늘어져 있는 손은 중간부터 끊겨 있었고 다리는 드레스와 뒤섞여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오빠의 몸 위에서 타오르는 한 덩이의 불꽃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선명한 황금색 꽃잎의 케이프와 함께 소라토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케이프의 꽃잎 수도 지금은 처음 봤을 때의 4분의 1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애염타’ 본질의 모습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녀가 ‘니에토노노샤나’를 원하는 오빠를 계속 돕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지금 샤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아냐, 하나 더 있어.’ 샤나와 티리엘 사이에 놓여 있는 ‘오르골’. 용법도 특성도 알 수 없는 이 거대한 이계의 중추. 소라토와 티리엘은 좀처럼 그것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직접 손을 대지 않아도 발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조금 골치 아픈데.’ 황금색 불꽃 속에서 절반밖에 남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이 생각에 잠겨있는 샤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조금은……놀랐……어요.” 그 목소리가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플레임헤……이즈의 긍지를……그렇게 역설해놓고…….” 절반밖에 남지 않은 불꽃 속의 아름다운 얼굴이 차츰 뚜렷한 모습을 되찾아간다. 샤나는 겨우 깨달았다. 티리엘은 마지막 승부를 위해 자신에게 남은 힘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꺼지기 직전에 가장 밝게 차오르는 촛불처럼 그녀는 강하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 ‘오르골’을 파괴하기 전에 먼저 그 소년을 구하다니.” 티리엘은 비장의 카드인 보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절반밖에 남지 않은 선명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샤나와 뒤에 서 있는 유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샤나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복잡한 심정을 느끼며 분명하게 대답했다. “이 봉절은 이미 너희들을 엄호해줄 기능을 잃었어. 봉절을 유지해주는 보구의 중요성도 낮은 셈이지. 굳이 먼저 파괴할 필요가 없잖아. 중요한 건 너희와 싸우는 것뿐……. 그래서 먼저 이 녀석을 구한 거야.” 유지는 샤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내심 한심함과 기쁨을 곱씹고 있었다. 샤나의 말은 언뜻 듣기엔 논리적이고 살벌했지만 실은 ‘유지를 지키며 싸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티리엘은 불꽃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내가 당신을 동요시켜 빈틈을 만들기 위해서 제일 먼저 저 소년을 잡거나 죽이려고 한 것은 사실이에요…….” 티리엘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태연했다. “하지만…….” “!” 샤나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오르골’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네요.” “읏?” 유지도 깨달았다. 어느 샌가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음색이 변해 있었다. “우리 ‘오르골’은 굉장해! 어려운 자재법을 한꺼번에 산더미처럼 쓸 수 있거든!” 소라토의 의기양양한 옆얼굴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며 티리엘은 말을 이었다. “……네, 그래요, 오라버니. ‘피니온’을 가동시키기 위한 복잡한 자재식도 일단 이 안에 넣으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처리해주죠…….” 그렇게 말하며 티리엘은 눈을 감고 ‘오르골’의 음색에 귀를 기울였다. 그 동안에도 케이프에서는 꽃잎이 차례차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음색을 자아내서……계속…….” 그것은 그녀가 새로 ‘오르골’에 입력한 자재식을 몇 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생명이 확실하게 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단점은 음색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놓아둬야 한다는 것과 한 가지 자재식밖에 연주할 수 없다는 것……. 하긴 ‘오르골’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티리엘은 마지막 웅변을 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하나뿐인 눈을 떴다. 그 눈에는 힘이 소모되었음을 조금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들어있었다. 샤나는 그녀가 ‘오르골’에 어떤 자재식을 입력했을지 생각하며 작별의 말을 건넸다. “정말 바보 같군.” 이기든 지든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 말을 들은 티리엘은 죽음의 공포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후후……고마워요……오라버니 이외의 사람에게서 찬사를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아니, 그 누구에게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는 ‘애염타’였다. “자, 갈까요……오라버니…….” 동생의 허가를 얻은 ‘애염자’도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대답했다. “응, 티리엘! 내 ‘니에토노노샤나’!” 샤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언했다. “괜찮아.” “응.” 유지와의 짧은 대화. 그것만으로도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몸에 또다시 힘이 솟구쳤다. 그런 네 사람 사이에서 ‘오르골’이 울리고 있었다. 마죠리는 토가를 두른 채 수면 아래를 고속으로 이동하는 그림자를 따라 하늘을 날았다. 그녀의 팔에서 화염탄이 차례차례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물기둥이 요란하게 솟구쳤다. 문득 물기둥 하나를 뚫고 ‘천변’ 슈드나이의 화신은 물뱀 같은 괴물이 튀어나왔다. “흥!” 마죠리는 눈앞으로 다가오는 괴물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곰 같은 양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군청색 폭발을 일으켜 괴물을 산산조각 냈다. 순간. “아래다!” 마르코시어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바로 아래에서 똑같은 괴물이 또 한 마리 튀어나왔다. 마죠리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팔을 휘둘러서 괴물의 목을 감았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낚시를 하듯 힘껏 잡아당겼다. 수면이 부풀어오르며 양 팔에 불과했던 괴물의 본체……호랑이 같은 괴물이 수면을 가르고 튀어나왔다. “쿠오오오오!” 마죠리가 재빨리 물뱀을 잘라버리자 호랑이 괴물로 변한 ‘천변’ 슈드나이는 새로운 팔을 뻗어 그녀를 덮쳤다. 갈퀴 같은 손톱이 마죠리의 몸을 갈랐다. 순간 그녀의 몸이 분열하여 그를 원형으로 둘러쌌다. “장미 화관을 만들자!” 마죠리가 즉흥시를 읊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꽃이 한가득!” 마르코시어스의 대답과 동시에 주위가 일제히 폭발했다. “커억?!” ‘빌어먹을, 이렇게나 일방적으로……!’ 슈드나이는 평소의 그로 생각할 수도 없는 사태에 몹시 초조해하고 있었다. ‘영시미아’를 간직한 ‘미스테스’에게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을 어느정도 빼앗기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고전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마죠리의 강함은 이상할 정도였다. 겨우 발견한 ‘영시미아’를 눈앞에 두고……. 이가 갈린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게다가. ‘이대로는 ‘애염의 남매’도…….’ 물론 슈드나이는 그들에게 애착도 우정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신조인 의뢰를 완수하지 못한 것에 크나큰 굴욕감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그 남매와 혼자 싸우고 있는 플레임헤이즈도 상당한 실력자라는 얘긴데……. 대체 어떤…….’ “……크윽?!” 재빨리 몸을 피한 순간 눈앞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돋은 토가의 입이 허공을 물었다. “으하하! 미녀의 키스를 피하다니 너무한데?!” 귀에 거슬리는 마르코시어스의 웃음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슈드나이는 재빨리 박쥐 날개를 펼치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단숨에 넓어진 시야에 미사키 대교의 주탑이 비쳤다. ‘설마?’ 순간 눈을 찌르는 눈부신 빛에 슈드나이는 경악하고 말았다. ‘홍련!’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저 색을 지닌 플레임헤이즈는 이 넓은 세상에 단 한 명뿐. “……‘염발작안’?!” “하앗……!” “명 · 중!” 어이없게 빈틈을 보이고 만 슈드나이의 등으로 깍지를 낀 두 주먹이 망치처럼 날아왔다. “크윽!” 슈드나이는 또다시 마나 강으로 추락했다. ‘최악이다! ‘천양의 겁화’가! ‘영시미아’와 함께라니!’ 데미지의 전황, 그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후회가 그를 지배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영시미아’를 발견한 기쁨이 한 플레임헤이즈의 출현에 의해 지금은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변하고 말았다. ‘섣불리 끼어들면 위험해! 우리와의 관계를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끝장이다!’ 다른 사람을 경호하는 일에 기쁨을 느낀 이후 그는 처음으로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 긍지도 신조도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것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빌어먹을, 이곳에 ‘조사를 읊는 자’만 없었더라면……!’ 슈드나이는 모든 상황을 저주하며 행동에 나섰다. “응?!” “아니?” 이번에는 마죠리와 마르코시어스가 놀랄 차례였다. 마나 강 수면에 비치는 그림자가 차츰 옅어지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천변’ 슈드나이가 도망을 친 것이다. 쓸쓸한 음색에 이끌리듯 이별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소라토가 날카롭고 빠르게 발을 내디뎠다. 그의 목에 감겨 있는 티리엘이 케이프와 함께 엷어져갔다. “……하앗!” 샤나는 모든 힘을 쥐어짜 홍련의 대검을 정면으로 휘덜렀다. 불덩이는 주탑 표면을 태우며 앞으로 날아갔다. 불덩이는 소라토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하지만 소라토는 아무렇지도 않게 불길을 돌파했다. ‘오르골’에 의한 자재법이 샤나의 불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도록 몇 겹으로 그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보호 대상이 티리엘 자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의……오라버니.” 황금색 케이프가 오빠를 지키기 위해 모두 흩어져버린 후. “뭐든지……하세요……제가 허락하…….” 티리엘의 모습도 홍련 속으로 사라졌다. 질주하는 소라토의 발 밑에서 ‘오르골’도 자신의 음색을 사랑했던 주인을 뒤쫓듯 최후의 자재법을 연주하며 사라져갔다. 소라토는 그 어느 것도 안중에 없는 듯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이 열어준 활로 끝에 있는 욕망의 표적을. 그것을 쥐고 있는 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욕망에 눈이 먼 자의 맹목적인 돌진을 바라보며 샤나는 들고 있던 물건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소라토는 당연히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아……, 커헉?!” 순간 그의 배에 샤나의 주먹이 꽂혔다. 발 밑에서 폭발을 일으킨 후 온몸의 반동과 동작의 흐름, 그 모든 것을 조화시킨 끝에 탄생한 포탄 같은 주먹이. 소라토가 몸을 굽힌 순간 샤나는 재빨리 그의 양 어깨를 짚고 가볍게 회전한 후 그의 등을 밟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허공으로 도약한 그녀가 손에 잡은 것은……. “니에토노…….”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샤나는 홍련의 날개로 하강하며 허공을 올려다보려던 소라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두 동강냈다. 그리고 곧 두 번째 공격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미안.” 이제는 없는 자를 향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샤나는 소라토의 몸 안에서 힘을 폭발시켰다. 그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폭발했다. 황금색 불꽃가루가 흩어지는 가운데 하늘에서 떨어진 ‘흡혈귀’가 지면에 꽂혀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그것은 주인에게 남겨진 것으로 보이기도 했고 주인의 묘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샤나는 아무 말 없이 ‘흡혈귀’앞에 서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유지의 어깨를 두드렸다. “으악?!” “그쪽도 전부 처리한 것 같군.”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마죠리가 서 있었다. 이미 토가는 풀어버린 후였다. “히히, 그쪽도? 하긴 놓친 것도 처리한 거면 처리한 거지.” “닥쳐, 바보 마르코.” 마죠리가 마르코시어스의 ‘글리모어’를 퍽 때리며 말했다. 유지는 또다시 깜짝 놀랐다. “놓쳐?! 그럼 그 녀석 또 나타나지 않을까……? 왠지 내 몸 속의 보구에 묘하게 흥미를 갖고 있는 것 같던데…….” 자신을 뭔가 엄청난 일에 휘말리게 할 것 같았던 ‘홍세의 왕’의 모습이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섬뜩한 팔의 감촉도 남아 있었다. 마죠리와 마르코시어스가 태평하게 말했다. “뭐 어때. 놓칠 때도 있고 다시 나타날 때도 있는 법이지.” “놓친 장본인이 그렇게 말해봤자 변명밖에 더 되나. 히히……, 컥!” 마죠리가 또다시 ‘글리모어’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게 어떨까? 상대는 그 세 사람이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운이 아닌가.” “그게 위안이 될까…….” “위안이 아니야. 어차피 다시 나타난다. 한들 네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 마르코시어스가 또다시 말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다음에 ‘무리’가 나타났을 때에는 이곳을 지킬 수 없겠지. 어쨌든 별 수 없어. 세상일이란 뜻대로 안 되는 법이니까.” “…….” 유지는 마죠리와 마르코시어스가 가볍게 던진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언젠가 샤나와 함께 떠날 수 있다면……. 막연히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와 친구들을 무방비한 상태로 남겨두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곳에 머물며 다른 ‘무리’가 오기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이 동네를 방치해두고 떠날 것인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쉽게 결론을 내릴 만한 문제도 아니었다. 유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끝없는 고뇌의 길에 서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겨우 ‘무리’를 물리쳤다는 달성감도 어느 샌가 사라진 뒤였다. “유지, 괜찮아?” 샤나가 유지 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검은 옷 왼쪽 허리춤에 ‘니에토노노샤나’를 넣은 그 모습에는 어딘가 비통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남매의 죽음에 뭔가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아한 마음에서 그 이유를 물어보려던 순간 유지는 깜짝 놀라 버렸다. “응, 괜찮……, 어어?! 샤, 샤나! 그거 네 피야?!” 목덜미부터 가슴 언저리까지 여름 교복에 검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양말에도. 모든 것이 해결된 후에야 겨우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아, 이거? 괜찮아. 상처는 아물었으니까……. 아라스톨.” “음.” 정화의 불이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몸에 묻은 얼룩과 핏자국이 홍련 속에서 물이 증발하듯 사라져갔다. “…….” “봐, 역시 아물었지.” “…….” “……유지?” 샤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유지를 의아하게 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 유지는 눈을 크게 뜬 채 두 조각으로 잘린 샤나의 상의 사이……깨끗하게 정화된 하얀 가슴 한가운데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 옷 안에서 검이 번개같이 튀어나왔다. 아라스톨이 말했다. “칼등으로 치거라.” 쿵! 오랜만에 ‘니에토노노샤나’로 머리를 얻어맞은 유지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 곧 머리를 감싸쥐며 무모한 저항에 나섰다. “나, 난 그냥 걱정이 돼서!” “더 맞고 싶은가 보네.” “그런 것 같군.” “컥!” “……즐거워 보이는 구나, 너희들.” 또다시 칼을 휘두르는 샤나와 거기에 맞고 날아가는 유지를 바라보며 마죠리가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이제 그만 봉절을 풀고 싶은데.” “그러고 놀 시간이 있으면 꼬마 아가씨도 안을 복원하는 거나 돕지그래.” 마르코시어스의 말에 샤나는……검은 옷을 그러모아서 가슴을 가린 후 자칫하면 주탑에서 떨어질 뻔한 유지를 꾹꾹 밟아주며……작안으로 미사키 시 전역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애염의 남매’를 토벌했는데 왜 아직 풀리지 않았지?” “시가지에 흩어져 있는 가짜 ‘린네’에 기능을 방해하는 자재식을 심어뒀어. 그 ‘존재의 힘’으로 봉절 전체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지. 엄청난 힘이 모여 있으니까 복원하기에는 충분할 거야.” “아, ‘린네’를 찾아서 그런 장치를 하자고 했던 건 그 때문, 꾸에엑.” “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 샤나는 유지를 꾹꾹 짓밟으며 마죠리를 돌아보았다. “‘애염타’의 힘이 약해진 것은 ‘너……, 아니 당신 덕분이었군. 고마워.” 마죠리는 샤나의 솔직한 감사에 겸연쩍은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그녀의 발 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애써 무시했다). “흥, 됐어. 내가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것뿐이야. 게다가 ‘린네’를 찾아낸 건 네 소중한 사람이고. 제법 쓸 만하던걸.” “소, 소중하기는!!” “물건 취급한 걸 부정하꾸우엑!” “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 마죠리는 샤나에게 그만하라는 듯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어, 이제 그만 해. 그럼 복원을 시작한다. 놈들의 간섭이 사라진 이상 이건 그냥 무식하게 큰 봉절일 뿐이야. 요령은 똑같아.” “알았어.” 두 사람의 플레임헤이즈는 ‘피니온’에 남아 있는 ‘존재의 힘’을 봉절 안을 복원할 힘으로 전환시켰다. 만약 티리엘의 죽음과 동시에 ‘크레들 가든’이 풀렸더라면 이 공간은 전투 중에 발생한 인적 및 물적 손실이 전부 남겨진 채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봉절을 유지한 것은 마죠리의 커다란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것만 해도 미사키 시가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빌딩과 도로, 차, 사람, 모두가 엉망진창으로 불타고 부서져 있었다. 인간의 경우 그냥 전투에 말려든 것뿐이라면 원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지만 ‘존재의 힘’을 빼앗긴 자는 토치로 만들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복원을 한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 그래도 샤나는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며, 마죠리는 인을 맺은 후 손을 앞으로 내밀며 각각 복원에 착수했다. 봉절이 너무 거대해서 좀처럼 복원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라스톨이 마르코시어스에게 물었다. “결국 ‘천변’은 ‘크레들 가든’이 평범한 봉절로 변하는 바람에 도망칠 수 있었던 건가.” “음, 아마도. 아군이 전멸하는 바람에 퇴로가 생기다니 웃기지도 않은 결말이야. 히힛!” 아라스톨은 잠시 침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품위 없는 웃음은 거두게나. ‘유린의 조아’. 귀에 거슬리는군.” “내 감정표현이 풍부한 것뿐이야~. 참견하지 말게나. 고지식한 대마신……. 아, 그보다 ‘천변’ 하니 생각난 건데.” “뭔가.” “저 소년은 평범한 ‘미스테스’가 아니라 ‘계금’을 지닌 자야. 슈드나이 자식, 안색이 싹 변하던데.” “!” 아라스톨이 깜짝 놀라는 것을 감지한 유지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 무슨 소리하꾸에엑. 이, 이제 그만 해도 되잖아?!” “…….” 끈질긴 발길질에 투덜거리며 항의하자 샤나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 채 발을 치웠다. 용서한 것이 아니라 ‘계금’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경계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라스톨은 대답을 회피했다. “……흐음, 그 문제는 나중에 자세하게 듣기로 하지. 당분간 이 동네에 머물 것인가?” “응? 뭐 나으 아름다운 고블릿 마죠리 도는 그럴 생각인 것 같다만.” “음~, 글쎄.” 마죠리는 애매하게 대답하며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손가락을 튕겼다. 복원의 길은 만들었다. 이제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수복과 치유가 시작되고 봉절도 풀릴 것이다. 곧 샤나도 손을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서 시작된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 그곳에 있던 모두가 감탄하듯 탄성을 내뱉었다. 주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동네 전역에 선명한 황금색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시가지에 무수하게 뻗어올라 꽃을 피웠던 ‘피니온’들이 황금색 불꽃이 되어 흩어져갔다. 그 화려한 빛은 인간을 치유하고 사물을 복원하는 힘이었다. 그토록 많은 죽음과 파괴를 불러왔던 전투의 종막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마치 꽃이 만발한 화원 같았다. 흩어져서 사라지는 찰나의 화원. 그로부터 얼마 후. 봉절이 풀릴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샤나는 느닷없이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앗……!” “어?! 샤나?” 바닥에 앉아서 화원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지는 위기감으로 가득 찬 그 목소리ㅔ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섰다. “빠, 빨리 학교로 돌아가야 돼!” “응??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뭔가 ‘홍세의 무리’와 관련된 큰일이라도 일어났나 하는 생각에 잔뜩 긴장했던 유지는 맥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봉절이 풀릴 때 우리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유지는 검은 옷을 단단히 여민 샤나의 가슴 언저리에 걸려 있는 아라스톨에게 물었다. “토치가 소멸할 때와 같다. 부자연스러움을 억지로 납득시키기 위해서 의식과 기억의 변화가 일어나지.” “원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단 말이야?” “그래.” 유지는 이 이계가 발생했을 때……뭔가 굉장히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자신이 처해 있던 상황을 떠올렸다. ‘아, 그렇지, 분명 옥상에서 이케와……. 차라리 이대로 여기에 있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런 마음 약한 생각을 하고 있는 유지와는 대조적으로 샤나는 몹시 초조해 보였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빨리 돌아가자!” “왜 이렇게 허둥대는 거야?” “그냥 빨리 돌아가자니까!” 샤나는 절대 없었던 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다급히 유지를 안아 올리려던 순간 검은 옷 속의 상태가 떠올랐다. “아, 오, 옷은 어쩌지?!” 몸은 불로 정화했지만 옷에는 핏자국과 찢어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당황하던 샤나의 머릿속에 느닷없이 비장의 카드가 떠올랐다. “……그, 그렇지, 치구사에게!” “엄마는 봉절 속에서 움직일 수 없잖냐! 진정해.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유지의 물음에 샤나는 고개를 홱 돌리며 대답했다. “아, 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보다못해 아라스톨이 한숨을 쉬며 제안했다. “……학교에 비품 판매 부서가 있지 않은가.” “구매부 말이지?” 유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샤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럼 구매부를 습격하자!” “좀 다른 표현은 없냐……. 어쨌든 지금은 그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군. 돈을 놓아두면 되겠지.” 그의 눈앞에서 홍련의 날개가 불타올랐다. “전속력으로 날 테니까 꽉 매달……, 아니 손을 잡아. 뭐야, 불만 있어?” “……아니, 물론 없죠, 없습니다요.” 한편 마죠리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이 일련의 소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샤나가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또 만나!” 유지도 샤나의 손을 잡고 하늘로 끌려가며 말했다. “으악! 오, 오늘 고마웠습니다……!” 두 사람은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남겨진 마죠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또 만나, 고맙습니다……라.” “히히, 너와는 진짜 인연이 없었던 말이군.” 마르코시어스가 웃으며 말했다. 마죠리는 ‘글리모어’를 퍽 때리며 말했다. “휴……. 온갖 험한 꼴을 당하긴 했지만……, 왠지 마음이 후련해졌어.” “그래? 다행이군. 나도 가슴이 아픈 걸 참으며 거짓말한 보람이 있는데. 히힛!” “……그건 아직 용서 안 했는데.” 문득 ‘파리단’에 있는 사토와 타나카가 떠올랐다. 마죠리는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둘 다 듣고 있었어?” [네, 달리 할 일도 없었고……. 어쨌든 잘 해결했나보네요?] 대답이 들려왔다. [누님과 마르코시어스의 목소리밖에 안 들려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거의 모르겠지만……. 좀 분한걸요.] 대답이 들려온 것만으로도 묘하게 기뻤다. “글쎄, 마음이 내키면 얘기해주지. 그보다 오늘은 실컷 마시자!” 오랜만에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이 나서 던진 그 말에 어째서인지 두 부하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샤나는 미사키 고등학교 1층 끝에 위치한 구매부에서 제일 작은 사이즈의 여름 교복이 들어 있는 봉투를 들고 나왔다. 선반을 난폭하게 뒤진 행위를 사죄하는 의미도 포함해서 두둑하게 만 엔짜리 지폐를 놓아두고 왔다. 유지도 얼떨결에 먼지와 진흙으로 더러워진 교복 대신 갈아입을 옷을 집어왔다. 샤나는 옷을 갈아입을 만한 곳을 찾아서 모두가 정지되어 있는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유지가 어차피 모두 멈춰 있으니 아무 데서나 갈아입어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샤나는 그런 그를 노려보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녀의 작안과 염발도 지금은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옷은 여전히 검은색. 덕분에 지금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샤나가 교사 끝의 복도 입구에서 느닷없이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 걷고 있던 유지는 자칫하면 그녀와 부딪힐 뻔했다. “으악. 뭐야, 갈아입을 만한 곳을 찾아냈어?” 샤나는 뒤로 돌아선 채 대답했다. “……이번 싸움에서 너는 ‘피니온’을 간파하고 ‘조사를 읊는 자’를 돕는 등 정말 많은 노력을 했어.” “아…….” 노력했다. 유지는 그 갑작스러운 평가에 할 말을 잃었다. 감동했다고 말해도 좋았다. 그녀에게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그만큼의 무게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샤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약속했던 상을 줄게.” “응? ……아,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헤어지기 전에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그녀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상이라……. 굳이 뭘 원하는 건 아니……지만…….’ 유지는 샤나가 여름교복이 든 봉투를 끌어안은 채 그 위로 눈을 내밀고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뭐야?” “…….” 대답은 없었다. 샤나는 머뭇거리며 어딘가 절박한 눈으로 유지를 바라보았다. 그 새까만 눈동자는 살짝 젖어있었다. 착각인지 얼굴도 홍조를 띤 것처럼 보였다. ‘서, 설마……’ 그걸 하려는 것일까.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종종 등장하는 그것. 하지만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설마……. 하지만.’ 저 포즈는 아무리 봐도……. ‘괜찮……을까……?’ 굉장히 꼴불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봉절이 풀리지 않은 이상 아무도 보고 있을 리 없었지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물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름 교복이 담긴 봉투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입술과 자신의 입술이 맞닿는 광경을 상상하며 유지는 꿀꺽 침을 삼켰다. 뺨뿐 아니라 얼굴 전체가 볼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한심하게도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언젠가 그녀를 끌어안았을 때처럼 부끄러움, 체면, 타산, 전망, 허세, 양식 등을 모조리 날려버리며 치밀어오르는 힘이 또다시 그의 몸을 움직였다. 유지는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눈을 감은 순간. 툭. “응?!” 뭔가가 코 끝에 부딪혔다. “……?” 깜짝 놀라며 눈을 뜨자 뭔가가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메론빵 봉지였다. “아껴뒀던 거야. 맛있어.” 샤나가 무정하게 말했다. 유지는 그것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인가 그제인가 슈퍼마켓에서 ‘메론빵은 어떤 항목을 기준으로 평가를 내려야 하는가’라는 연설을 한바탕 들은 후에 샀던 빵이었다. “아아…….” 그 한탄이 뜻하는 것은 ‘역시나’일까 아니면 ‘뭐야’일까. 극도의 긴장에서 비롯된 실망감과 자신의 일방적인 착각 때문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유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거?” “그거.” 샤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재빨리 몸을 돌려 옆의 교실에 걸려 있는 자물쇠를 고정대와 함께 뽑아버렸다. 그러고는 미닫이문을 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메론빵 봉지를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유지의 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뻤어.” “뭐?” 샤나는 대화를 끊어버리듯 난폭하게 문을 닫았다. “…….” 그 날카로운 소리에도 유지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직 샤나가 남긴 말만이 울리고 있었다. [기뻤어.] 그것은 유지의 행동에 대한 평가도 인사도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 그 한마디만으로도 유지는 모든 고민과 불안감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옷을 갈아 입은 후 각각 자신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유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샤나는 조금 허둥대며. “참.” 헤어질 때 샤나가 갑자기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뒷마당, 절대 보면 안 돼. 만약 본다면…….” “본다면?” “통각을 갖고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해줄 거야.” 너무나도 진심이 담긴 그 말에 유지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색 악몽은 겨우 사라졌다. 안개는 이미 걷혀 있었고 흩어진 꽃잎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저것뿐이군.’ 유지는 옥상 철조망에 기대어 앉아서 미사키 시 전역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아지랑이의 돔을 올려다보았다. 철조망에서 삐거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게 시작인가…….’ 유지는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이케 하야토를. ‘내 물음은 전해졌을까?’ 이 봉절이 발생했을 때 던졌던 중요한 질문이 떠올랐다. 자신은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 원하지 않는 것일까……. 잘 알 수가 없었다. 유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지랑이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케가 입을 열었다. “……글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하게 들긴 해. 하지만 어디부터가 ‘좋아하는’ 것일까? 어디부터가 너나 그녀가 말하는 ‘그런’ 기분일까?” 그것은 대답인 동시에 되물음이기도 했다. 유지에게는 그 말이 자신과 샤나의 관계를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케도 대답을 원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봉절이 풀리고 밖과 인과의 흐름이 이어진 순간 미사키 시의 해는 저물기 시작했다. 샤나는 뒷마당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플레임헤이즈로서의 그녀는 서두르지 않아도 봉절이 풀리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그 이외의 것으로서 그녀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애염의 남매’와 미사키 대교까지 경쟁했을 때만큼이나 몹시 초조했다.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그 안하무인인데다 잔인하고 흉포하고 거만하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애염타’ 티리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어쩔 수 없는……감정.] 단순히 걷고 있는 것뿐인데도 호흡히 거칠어졌다. 이윽고 샤나는 드디어 결투가 중단된 장소로 돌아왔다. 한 소녀가 마치 조각상처럼 그녀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감정……?’ 그것이, 그 감정이 이 마음 약한 소녀로 하여금 무모하기까지 한 자신과의 대결을 하게 만들었고 자신은 그런 그녀에게 압도당했다……. 지금의 샤나는 그것이 막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해할 수도 있었다. 아까 상을 줄 때에도 티리엘과 소라토를 떠올리며 한순간 절대 싫다고 생각했던 행위를…….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소녀와 마주 서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아……. 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유지의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유지의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애초에 자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유지를 재촉해서 이곳으로 돌아왔는데도 막상 이 자리에 서자 의욕은 공허하게 맴돌기만 할 뿐 초조감만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가슴에 가볍게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고동이 느껴졌다. 머릿속까지 두근거림이 전해졌다. ‘어, 어쩌지. 어쩌면 좋지.’ ‘애염의 남매’와의 싸움에서 뭔가를 움켜잡았다고 생각했다. 유지가 함께 있어주었던 것만으로도 뭔가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걸 어떻게 말해야…….’ 혼란에 빠져서 당황하며 고민하는 사이에 봉절이 풀렸다. “아…….” 샤나, 최강의 적. 요시다 카즈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즈미는 샤나를 물끄러미 노려보고 있었다. ‘무서워.’ 유지와 함께 있었던 기쁨이 이 소녀에게 사카이 유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공포로 변했다. 샤나는 보다 강하게 덮쳐오는 그 공포에 또다시 온몸을 떨었다. 그녀가 멈추기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도……, 뭐?” 그 말은 요시다 카즈미의 조용하면서도 강한 한마디에 다시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나, 나도……!> 그 뜨거움과 격렬함도. ‘뭐지,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요시다 카즈미를 막을 수 있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샤나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입에 담았다. “안 돼! 유지는 안 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던 요시다 카즈미가 발끈하며 되받아쳤다. “뭐가 안 돼! 난 사카이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거야. 그러니까 유카리 넌 날 방해할 권리가 없다구! 약아 빠졌으면서!” “난 약아 빠지지 않았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유지는 나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려던 순간 샤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요시다 카즈미는 숨을 삼키며 샤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주먹이 힘없이 내려갔다. ‘……유지는 나의 뭐지……?’ 처음으로 그녀는 그 의문에 부딪혔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감정에 유지를 끼워맞출 수가 없었다. 유지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유지와 많은 것을 함께 나누었고, 많은 것을 함께 했고, 그 사실이 무척이나 무척이나 기뻤고……! 샤나는 또다시 주먹을 가슴언저리로 들어올리며 외쳤다. “유지는 나와 함께 있어야 되니까!” 하지만 요시다 카즈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야! 그걸 걸정하는 건 사카이야!” 유지에 대한 감정을 단언하지 못하는 샤나의 태도가 그녀를 더욱 강해지게 만들었다. 그런 강한 모습이 이번에는 샤나를 초조하고 불쾌하게 했다. 샤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외쳤다. “유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제부터 알면 돼!” “그건 무리야!” “어째서!” “무리라면 무린 줄 알아!” “…….” “…….” 두 사람은 어느 샌가 이마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물어가기 시작한 햇빛 속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난 분명히 말했어.” 요시다 카즈미는 정면으로 당당히 도전했다. 샤나는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지지 않을 거야.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몇 초간 서로를 욕하며 싸우는 것보다 더욱 강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침묵이 샤나와 카즈미는 서로 등을 돌린 채 하교시간을 맞아 부산하게 움직이는 교실로 돌아갔다. 함께 걷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 했다. 에필로그 칠흑의 수정 같은 바닥이 구두소리를 울리며 걸어가는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곳은 기둥과 바닥만이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벽은 없었다. 양 옆에 나란히 줄 지어 선 하얀 원기둥 저편은 영원한 허무. 천장도 없었다. 머리 위에는 끝없이 펼쳐진 명부의 밤하늘. 이윽고, 남자는 원기둥이 줄지어 있는 곳을 지나, 열려있는 공간으로 나왔다. 원형 기둥으로 배치되어 있는 그 공간의 중심에는 순백의 돌로 된 제단이, 어두운 밤의 바다에 떠있는 빙괴처럼 솟아올라 있었다. 감도는 고요함과 손을 댈 수 없는 듯한 분위기는 고대의 신전을 생각하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의 머리 위에서부터, 맑고, 감정의 기복이 없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성여전’에 들리다니, 신기한 일도 다 있군요. ‘천변’ 슈드나이.” 슈드나이는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을 가늘게 뜨며,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비꼬지는 마, 나의 귀여운 ‘정상의 좌’ 헤카테. 나도, 가끔은 할망구나 맹주전에 얼굴을 내밀고 싶을 때가 있으니. 잊혀져서, 갈 곳이 없어진다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머리 위에선 지나치게 밝은 물색의 불꽃이 마치 별과 같이 무수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단의 중앙으로 내려와, 구형의 궤도를 그렸고, 이윽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커다란 망토에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는 작고 가냘픈 소녀였다. 어깨 길이로 가지런히 자른 머리카락과 무생물 같고 섬세한 얼굴은 영하의 추위 속에서 빚어낸 투명한 얼음조각을 생각하게 했다. 소녀……헤카테는 불꽃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밝은 물색 눈동자를 빛내며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이군요, 장군이라는 자의 인식이 겨우 그 정도라니. 우리에게는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사명이 약 서른 가지가 있습니다. 당신에게 분담한 사명은 여덟 가지. 당신은 줄곧 도락에만 빠져 있었을 뿐 완수한 사명은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그 융통성 없는 말투에 슈드나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헤카테가 말을 이었다. “?” “나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쓴웃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물론 헤카테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크큭……. 그런가? 그거 유감이군……. 뭐 사랑의 속삭임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할망구는?” “그렇게 부르는 것을 고치라는, 본인에게서 요구를 받았을 텐데요. 베르페오르라면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나갔습니다. 그녀는 당신과 달리 맹약에 충실하니까요.” 슈드나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빈정거리는 헤카테의 말을 한 귀로 흘려넘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야, 그 녀석한테 아첨 좀 해보려 왔는데. 이러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잖아.” “어째서 베르페오르뿐인지.” 헤카테의 의도를 눈치챈 슈드나이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흥, 맹주에게는 그래봤자 쓸모없으니까. 어차피 변덕이 죽 끓는 듯한 녀석이야. 게다가 어차피 이곳에 없지 않나? 또 인간들을 괴롭히며 즐기러 갔겠지? 정말 악취미……, 아니, 유해하기조차한 존재라니까.” 헤카테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는, 유리가 추대한 맹주니까요.” “너는 놈이 입술을 요구해도 같은 말을 할 것 같군.” “그가 원한다면야. 하지만 그는 원하지 않겠죠. 무엇보다 그에게는 입술이 없으니까요.” 자신이 던진 농담에 진지하게 대답하는 헤카테를 바라보며 슈드나이는 또다시 웃었다. 그는 긴 다리로 제단을 성큼성큼 올라가서 헤카테보다 한 단 낮은 위치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정면에 서 있는 헤카테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 “실은 오늘 당신에게 또 한 가지 멋진 선물을 가져왔어. 내 도락도 완전히 무시할 것은 못 된다는 것을 당신도 알게 될 걸.” 그는 달리 듣는 자도 없는 ‘성여전’ 제단의 방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헤카테는 그의 장난스러운 행동 속에 숨어 있는 진지함을 간파했다. “……뭡니까.” “굉장히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어느 쪽을 듣고 싶지?” 일부러 뜸을 들이는 슈드나이에게 헤카테가 재빨리 못을 박았다. “먼저 담배부터 끊으시죠. 끊지 않으면 앞으로 비밀 얘기는 듣지 않겠습니다.” 슈드나이는, 그 말에 진심으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의 나날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변하기 시작한다. 알 방법도 없고, 멈추는 사람도 없이, 변화의 때는 숨을 죽이고 다가온다. 세계는 그것을 품은 채, 그것을 숨긴 채 그저 움직이기만을 계속한다. 4권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