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안의 샤나

Takahasi Yasichiro [타카하시 야시치로]

제 3권

프롤로그
1. 어두운 밤의 불길
2. 빗속의 결투
3. 천 갈래의 행로
4. 격돌의 날

 프롤로그
 ‘홍세의 무리’가 ‘존재의 힘’을 마구 먹어치워 이 세상에 균열이 생긴다.
 아라스톨이 그렇게 말했고 내가 인식한 바로도 그의 말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기 전부터 그(?)와 빌헬미나에게 그렇게 배워온 나의 눈에는 그런 상태야말로 정상적인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이 내 눈앞에 있는 현실이고 그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걸어서 갈 수 없는 이웃의 거주자 ‘홍세의 무리’들이 오래전부터 이 세상에 침입해왔다는 것. 본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또한 이 세상의 일을‘자재’로 조종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한 원동력인 ‘존재의 힘’을 인간으로부터 빼앗는다는 것.
 그 힘을 빼앗긴 인간은 존재 그 자체……, 즉 살아왔던 흔적, 주위 사람들의 기억, 그 모든 것을 잃고 이 세상의 흐름에서 탈락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본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자가 나타나는 것 때문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그 탓으로 비정상이나 모순이 생겨 세상의 균열이 생겨난다는 것.
 ‘홍세’의 강대한 존재인 ‘왕’들 중에는, 이 균열이 언젠가는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두 세계에 일으킬 것이라며 걱정하는 자 들이 있었다는 것. 그 재난을 방지하고자 이 세상에서 ‘존재의 힘’을 남획하는 동족들을 토멸한다는 뼈아픈 결단을 내려야 했던 것.
 자신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의 힘’을 소비해야 한다는 모순을 피하고자 한 ‘왕’들은 ‘무리’에게 복수를 하려 드는 인간에게 힘을 부여하는 대신 그들의 존재를 ‘왕’의 그릇으로서 삼는다는 해결책을 내놓았다는 것(나처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자’는 예외라고 한다).
 그 ‘홍세의 무리’를 뒤쫓는 신비한 능력의 토벌자들이 ‘플레임헤이즈’라고 한다는 것.
 보통의 인간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이 나의 현실 세계다.
 그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무리’를 토멸하는 사명.
 그것이 나의 모든 것, 존재 그 자체였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한 가지 더해졌다.
 아라스톨이나 빌헬미나도 ‘자신들이 부를 단 한 사람’인 나에게 그런 것을 더해주려 하지 않았다. 다른 ‘플레임헤이즈’나 ‘무리’들도 단지 칼 이름으로 구별할 뿐이었다.
 그렇다. ‘니에토노노샤나’의 플레임헤이즈라고.
 플레임헤이즈가 나의 전부이고 존재 그 자체,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그 아이는 내게 한 가지를 더해주었다.
 샤나라는 이름.
 그리고 그 뒤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가 변해간다.

 1. 어두운 밤의 불꽃
 붉은 석양이 지평선 너머로 스러져가는 초저녁의 어스름 아래, 일본의 한 국제공항에 인접한 건물의 뒷골목에서 모종의 폭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마구 널린 쓰레기 속에서 한 소년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 주위를 에워싸고 다섯 소년들이 거세게 발길질을 헤대고 있었다.
 “더럽게시리, 어디다 쓰레기를 던져!” 맞고 있는 소년은 십대 중반의 외국인으로, 물결치는 금발도 여윈 몸도 온통 쓰레기 뒤범벅이다.
 때리고 있는 것은 십대로 보이는, 소위 노는 애들 같은 차림을 한 일본인 소년들, 그들은 공항에 있다가 간혹 지리에 어두운 외국인, 여의치 않을 때는 일본인을 데려와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갈취하는 일종의 노상 강도였다.
 “이 자식, 일본어 하나도 못하나봐!”
 “일본어도 못하면서 뭐 하러 온 거야!”
 그 폭행 현장의 바깥쪽에는 소년에게서 벗겨낸 암적색 재킷이 떨어져 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킷은 주인과 마찬가지로 쓰레기범벅이 되어 포켓 안감이 전부 빠져나와 있었다. 주변엔 매끄러운 실크 손수건과 휴대용 티슈, 짓밟혀 망가진 만년필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물론 지폐가 두둑한 지갑만은 폭행하는 무리 중 한 명이 쥐고 있다.
 “야, 이제 지겨운데 밥이나 먹으러 안 갈래?”
 한 명이 금발 소년을 쓰레기 속으로 처박듯 짓밟으며 말한다.
 다른 한 사람이 대답한다.
 “이 녀석 지갑 속 봤냐? 엄청 부잣집 아들인가 봐. 실은 친구들도 다 불라고 해서 아주 거덜을 내버리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이 캔트 스피크 제패니스냐? 이 바보 자식!”
 다들 조롱 섞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폭행이란 어두운 파괴 충동이나 불분명한 고뇌의 표현이 아니었다. 남을 학대하며 즐기는 오락의 일종이었다. 남의 물건을 빼앗는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본인이 강도라는 자각은 없다. ‘용돈벌이’라는 가벼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죄의식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다.
 “우리 기대를 배신한 거니까 적어도 분풀이 대상 정도는 돼줘야지, 안 그럼 모처럼 고생한 낙이 없잖냐!”
 “오, 좋아, 좋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금발 소년은 몸을 웅크리고 끙끙댈 뿐 변변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웠던 얼굴을 오물로 더럽히고 어린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처량한 모습은 폭행자들의 가학 심리를 더욱 부추겼다.
 “뭐, 배 꺼지는 운동 정도는 되겠지!”
 “바로 그거야, 앗싸!”
 악의에 취해 신이 난 그들 사이를 가르는 난데없는 음성.
 “그만두지 못해, 이 기생충들?!” 높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엥?” 소년들은 의아해하며 소리가 들린 뒷골목의 출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 한 송이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운 소녀가 어두컴컴한 뒷골목을 등지고 서 있었다.
 금발 소년을 꼭 빼다 박았지만 강한 의지가 드러나 보이는 얼굴은 물결치는 화려한 금발에 감싸여 있었다. 리본으로 장식한 드레스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은 마치 사람의 크기의 프랑스 인형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소년들의 반응은 최고의 먹이를 발견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의 감탄과 욕망은 직결되어 있었다.
 “휘유, 이거 진짜야?!” “끝내주는 덤이 따라붙었는걸?!” “우리들은 운도 좋다니까!”
 미소녀의 말을 되새겨보지도 않는다. 애당초 원초적인 힘의 상하관계 외에는 전혀 엄두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 유일한 방법을 시행하기 위해, 웅크리고 흐느끼는 금발 소년을 내버려두고 미소녀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갔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소녀는 그들의 행동을 일절 무시한 채 금발 소년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녹아들게 하는 애정으로 가득 찬 푸른 눈동자로. 그리고 꽃잎처럼 붉은 입술에서는 아까 내지른 제지의 말과는 정반대인 달콤한 말이 이어진다.
 “정말 못쓰겠네요, 오라버니. 내가 기다려달라고 했으면 얌전히 기다리고 계셨어야죠. 나의 ‘크레들 가든’의 위력권에서 벗어나버리면 어쩔 뻔했나요?”
 “……헤, 헤헤, 오라버니?”
 역시 소년들은 말 속에서 흥미 있는 부분만 골라 듣는다.
 “남매로군. 야아, 우리들도 끼워ㅡ.”
 또 한 사람이 천박한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말했지만, 이번엔 금발 소년의 목소리가 그 말을 가로막았다.
 “하, 하지만 나 배고팠는걸.”
 웅크린 자세로 쥐어짜듯이 하는 말을 소년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는 나라의 말이라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 만큼 이질적인 것이었다.
 미소녀는 그 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전히 애교가 가득한 말투로 대답한다.
 “글쎄? 내가 없으면 식욕을 절제할 수 없을 텐데요?” 후후후, 입가에 손을 올리고 귀엽게 웃는다.
 소년들에게는 이 티 없이 명랑한 웃음이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졌다.
 ‘뭐야? 이 녀석들?’
 미소녀 쪽은 처음 등장했을 때 이후로 계속 소년들을 무시하고 있다. 지금 오빠에게서 거둔 시선 또한 그들을 지나쳐 막다른 골목 안으로 향했다.
 “슈드나이! 넌 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거지?!” 오빠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매서운 목소리.
 이번에 들린 그 대답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끙끙대지 마.”
 소년들은 흠칫 놀라 뒤돌아보았다.
 그 반대편, 막다른 골목 안에 거기 있을 리가 없는 남자가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짙은색 정장을 걸친 호리호리한 장신, 뒤로 전부 넘긴 백금발 밑의 선글라스가 눈을 가리고 있다.
 “아직은 너의 ‘크레들 가든’의 위력 범위 안이고, 이건 계약 조항이 아니잖아? 내가 받아들인 의뢰는 어디까지나 ‘플레임헤이즈로부터의 보호’뿐이다. 더구나 소라토가 이 정도로 어떻게 될 리도 없고.”
 슈드나이라고 불린 남자는 조각 같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안 돼. 이런 기생충 같은 녀석들이 오빠에게 손을 대다니……. 아아, 더럽기 짝이 없어! 내가 골라준 양복까지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기생충들이 감히 분수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소년들은 이 미소녀가 말한 ‘분수를 모른다’는 말의 의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아마 그들에게 이 말을 이해시키려면 아주 자상하게 일일이 설명해줘야 할 것이다) 경멸하는 위앙스만은 노골적으로 전해졌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사적으로 분노부터 내보이는 것이 습성인 그들은 다시 미소녀를 쳐다본다.
 “기생충이라고, 엉?” “다시 말해봐!” 그러나 그들은 이 상황에서 결정적인, 혹은 치명적인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등 뒤에 있던 소라토라는 이름의 금발 소년이 살짝 몸을 일으키며,
 “저, 저기, 티리엘, 이 애들 먹어도 돼?”
 라고, 역시나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티리엘이라 불린 미소녀는 명랑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한다.
 “네, 마음껏 드세요, 오라버니.”
 “알아듣기 어렵게 말해서 미안하군.”
 슈드나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뭐?”
 “응?”
 그 시점에서 이미 소년들은 전원,
 “흐에?”
 “오.”
 혈풍에 휘말려 날아가고 있었다.
 “어…… 라?” 나란히 서 있던 자신들이 비스듬한 선을 그리며 덮쳐오는 칼날을 등 뒤에서 맞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회전해서 날아가는 도중에 겨우 깨달았다.
 그 죽음의 찰나, 소년들의 흘러가는 시야 속에서 화려한 서양풍의 갑옷으로 몸을 감싼 소라토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대검을 뽑아들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투구 틈으로 비어져나온 화려한 금발에 냉엄하고 긴장된 표정의 그 용맹한 자태는 마치 전형적인 판타지 게임의 주인공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구하지 않았다.
 베는 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입을 오므려 그들을 먹었다.
 하늘로 날아가는 몸의 반쪽, 땅에 남아 있는 또 다른 반쪽 각각이 맹렬한 기세로 불타올랐다. 그 불길의 끄트머리가 가는 실처럼 뻗어나가더니 소라토의 입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활활 타오르고는 있지만 그들이 입은 옷은 타지 않고 피부도 문드러지지 않았다. 그저 불길 속에서 너울거리는 형상이 되어 불 자체와 함께 희미하게 오그라들기 시작한다.
 “이 소라토는 ‘능통의 언어’도 제대로 못 다루는 어린애 같은 존재라서 말이야. 아니, 자신들에게 다가온 비극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죽은 건 오히려 행운인지도 모르지.”
 위로도 못 되고, 들려주기에도 너무 늦은 슈드나이의 음성이 부질없게 뒷골목 안을 울렸다.
 소라토는 불길이 촛불 정도로 작아지고 나서야 먹는 것을 멈췄다. 불길의 끝에서 뻗어나온 실이 뚝 끊기자, 뒷골목 안에는 사람 수만큼 남은 불이 타닥타닥 타며 일렁거린다.
 “아, 대단해요, 오라버니! 이젠 토치의 분량을 제대로 남길 수 있게 되었군요?!” 티리엘이 손을 모으며 기뻐했다.
 갑옷 차림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소라토도 누이동생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으, 응, 티리엘이, 여기서는 가급적이면 그렇게 하도록 습관을 들이라고, 안 그러면 들킨다고 말했으니까.”
 “네에, 그래요, 오라버니……. 정말 장하세요.”
 뺨을 붉히며 티리엘은 오빠를 껴안는다.
 품에 안긴 소라토는 갑자기 어두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안 돼. 갖고 싶은걸. 이런 무딘 칼말고, 굉장한 걸로.”
 손에 든 핏빛 광채가 일렁이는 서양풍의 대검을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들어올린다.
 티리엘은 그의 머리를 상냥하게 어루만지면서 대답한다.
 “네, 네, 알고 있어요, 오라버니.”
 소라토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아주 훌륭한 검이야! 그게 있으면 토치라 해도 플레임헤이즈나 무리까지 죽일 수 있을 정도야! 그 괴물 토치……, 그~, 그~,”
 “최악의 ‘미스테스’인 ‘천목일개’ 말이지?”
 슈드나이가 불쑥 대답했다. ‘홍세의 무리’와 플레임헤이즈를 막론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이므로 특별히 그가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직접 대답해줄 생각이었던 티리엘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애써 새것을 찾아야만 할 정도로 그 ‘흡혈귀’가 무디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이 정도면 베는 맛도 일품이지 않나.”
 눈앞에 있는 것을 들어올려 선혈을 뚝뚝 흘리는 매끈한 단면을 바라본다.
 대답하려다 만 티리엘은,
 “ㅡ?!” 대답 대신 경악의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슈드나이가 칼에 베인 소년 한 명을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언제 오빠가 휘두른 살육의 손아귀에서 빼앗았던 것일까,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 흐윽…….”
 목을 움켜잡힌 소년은 변변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맨 끝에 서 있었기 때문에 소라토의 칼날을 왼쪽 무릎에서 오른쪽 허벅지에 걸쳐 비스듬히 맞아 즉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슈드나이에게 붙잡혀, 동료들이 먹히는 모습을 고스란히 본 모양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와 피할 수 없는 죽음, 양쪽 모두에 대한 공포가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봉절을 펼쳤다면 너희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먹어줄 수 있었겠지만……. 가능한 한 불필요한 자재법은 쓰지 않기로 했고, 여긴 보는 눈도 없는 곳이라 절약 차원에서 이렇게 한 거니까 이런 장소를 고른 너희들의 불운을 탓해라.”
 슈드나이는 일방적으로 내뱉더니, 단면을 보기 위해 옷과 함께 늘였던 팔을 원래 길이로 되돌렸다. 그리고 소년을 다시 티리엘 쪽으로 보여주더니,
 “이거 갖는다.”
 고 마치 건배하는 것처럼 내민다.
 “도움도 못 되는 주제에 보수만은 확실히 챙기는군.”
 있는 대로 비꼬는 티리엘의 말에도 그는 씩 웃으며 대꾸한다.
 “내가 맡은 역할은 확실히 할 거야. ‘의뢰는 반드시 수행한다’를 신조로 삼는 내가 받는 보수는 이것뿐이야. 받을 수 있을 때는 받아두는 것도 좋잖아?”
 말을 끝내더니, 팔을 또 흐느적거리며 U자형으로 뻗어 소년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의식도 몽롱해진 듯 소년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이젠 반응도 없는 거냐? 마지막까지 재미없는 녀석이로군.”
 조소를 내뱉더니 슈드나이는 소년을 진짜로 먹었다 입을 쩍 벌려 소년의 몸을 통째로 삼킨 것이다. 잠시 후 소년은 그 입 속에서 불덩이로 변해 목구멍 속으로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뒤처리를 위한 불을 한 점 훅 토해낸다.
 그 모습에 티리엘이 얼굴을 찌푸린다.
 “먹는 방법도 참 악취미군, ‘천변’ 슈드나이.”
 “사람마다 다르지, ‘애염타’ 티리엘. 너희들 같은 식사도 있고.”
 티리엘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대답을 피했다.
 그러자 그 품 안에 꼭 껴안긴 소라토가 어린애처럼 칭얼대기 시작했다.
 “있지, 있지, 티리엘. 빨리 찾으러 가자!”
 “네, 네, 그것 때문에 이런 변두리 땅까지 왔는걸요.”
 “응, 나도 알아. 이어져 있는 거야, 내 것이 될 것이랑!” 소라토가 확신에 찬 외침을 내뱉자 슈드나이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과연 ‘애염자’ 소라토의 ‘욕망의 후각’인 건가? 좀 더 ‘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여러 가지 비보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고작 한 사람이 휘두르는 장난감에 불과한 것을 노리느냐며 안타까워하자 그런 그의 단순한 생각을 이번엔 티리엘이 비웃는다.
 “오라버니의 순수한 간원이, 원하는 것과 오라버니를 이어주는 거야.”
 “오빠의 그런 간원에 휘둘려 위험한 플레임헤이즈를 이런 벽지까지 일부러 뒤쫓아왔다고? 과연 너희들을 보고 ‘익애의 포옹’이라고 표현한 건 딱 맞는 말이군.”
 “응, 그 말대로야. 그게 나야.”
 최근 저 ‘천목일개’를 쓰러뜨리고 그 본체였던 검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차지한 플레임헤이즈가 동아시아 일대에서 설치고 다닌다고 한다. 그것이 누구의 계약자인지에 대해서는 직접 대면한 ‘홍세의 무리’중에 생존자가 없기 때문에 애매한 소문만이 떠다닐 뿐이었지만, 아무튼 귀찮은 적임에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천목일개’가 사라진 덕분에 이 지역에는 다시 플레임헤이즈들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만조의 사수’가 재등장하거나 ‘조사를 읊는 자’가 목격되는 등, 근래의 동아시아는 ‘홍세의 무리’에게 있어서 아주 위험한 지역이 되었다.
 사실 이 일본인가 뭔가 하는, ‘천목일개’를 배출한 벽지에 건너오기 직전 그들을 홍콩 땅에서 ‘만조의 사수’와 마주치고 말았다. 때마침 호위로 고용하고 있던 슈드나이가 잘 따돌려서 쓸데없는 격돌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위험한 장소에 온 것도 ‘애염타’인 나의, 오라버니를 향한 애정 때문…….’
 티리엘은 사랑스러운 오빠의 양 뺨에 손을 갖다댄다.
 “그럼 오라버니. 추적을 시작하기 전에 제게 그 힘을 나누어주세요.”
 “응, 티리엘. ‘니에토노노샤나’를 얼른 찾아!!”
 소라토는 생긋 웃더니 눈앞에 봉긋 벌어진 누이동생의 입술에 주저 없이 자신의 입술을 겹친다. 언제나 그렇게 하듯, 옅은 복숭앗빛 꽃잎을 촉촉이 적시고 혀를 밀어넣는다. 난폭하게 허리를 끌어당겨 하나가 되도록 껴안는다.
 이윽고 얽힌 혀와 혀를 물들이며 황금색의 불길……, 인간을 먹고 얻은 ‘존재의 힘’이 소라토의 입에서 티리엘의 입을 통해 흘러들어간다.
 “으응~.”
 소라토는 힘을 건네주는 대가인 양 사랑스러운 동생을 열렬하게 탐한다.
 “후, 으읍…….”
 난폭한 애무에 빠져 들어가는 티리엘. 그 입술 끝에서 한 떨기 숨결 같은 황금색 불꽃의 가루가 하늘하늘 새어나온다.
 기사와 공주의 입맞춤이라고 하기엔 도를 넘긴 그 모습에 체념어린 한숨을 내쉬며 슈드나이는 다시 등을 벽에 기댔다. 이 두 사람은 한번 시작하면 한동안은 이대로다. 의사를 언어로 변환하는 자재법인 ‘능통의 언어’를 살짝 구사해본다.
 ‘이 나라에서는 ‘불이 붙는다’고 하는군.’
 쿡 웃는다.
 ‘좋은 비유군.’
 웃으며 슈드나이는 서비스의 일환으로 선글라스 안에서 힘을 보낸다.
 순간 허공과 땅에 떠돌던 소년들의 타고 남은 잔재가 생전의 모습을 찾아가며 희미하게 부풀어올랐다. 희미한 존재감을 띤 본래의 형체를 되찾은 소년들은 마치 세 사람이 보이지 않는 양 멍한 표정에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뒷골목을 빠져나간다.
 앞으로 꺼져갈 날만이 남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다섯 개의 모조품.
 도시의 불빛을 희미하게 반사하는 흐린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진 빌딩 사이의 뒷골목.
 계속해서 입맞춤을 나누는 아름답고도 음탕한 ‘애염의 남매’.
 이런 기이한 광경을 안주삼아 ‘천변’ 슈나이드는 한 모금의 담배로 기분을 내보았다. 가슴 주머니에서 꺼낸 상자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탁 쳐서 한 개비 꺼내 물자 끄트머리에 저절로 불이 화르륵 붙었다.
 불은 음침하고 탁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달도 숨은 캄캄한 밤.
 샤나의 작은 손이 옆에 앉은 사카이 유지의 커다란 손끝에 닿는다.
 “봉절.”
 조그만 입술 밖으로 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미사키 시의 한구석에 홍련의 불길이 솟구쳤다.
 불길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사카이가의 지붕을 중심으로 돔 모양을 한 아지랑이의 벽이 형성되더니, 그 내부의 지면에 기괴한 문자열로 이루어진 문장이 불길의 선을 따라 그려진다.
 벽 안쪽을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차단시켜 외부로부터 격리, 은폐한 인과 고립 공간 ‘봉절’이 나타난 것이다.
 홍련의 빛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아지랑이의 벽 안쪽, 잠옷 대용인 운동복을 입은 유지는 옆에 있는 소녀……, 평범한 고교생이었던 그의 앞에 나타나, 철저하고도 확실하게 지금까지와 앞으로 남은 그의 시간을 박살내고 또한 바꿔버린 소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불과 11세 혹은 12세 정도로 보이는 앳된 겉모습이지만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늠름한 생김새에 작은 몸집임에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코트 같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유지와 지붕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비록 검은 망토 안에는 헐렁한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해도).
 소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길고 곧은 머리카락이 홍련의 광채를 번쩍이며 주변에 불꽃의 가루를 흩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긴 두 눈이 천천히 열린다.
 모습을 드러내는 눈동자도 홍련의 색.
 ‘……보고 있는 사람까지 불타버릴 것 같아…….’
 유지는 매일 밤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황홀경에 잠긴다.
 소녀는 이 세상 사람들의 ‘존재의 힘’을 먹는 이세계의 거주자 ‘홍세의 무리’를 토멸하는 사명을 가진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 즉 ‘플레임헤이즈’의 한 사람이었다. 마신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과 계약을 맺어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버린 ‘염발작안의 토벌자’.
 유지가 붙여준 이름은 샤나.
 “……?” 유지는 샤나가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잇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소 추궁하는 어조로 샤나는 말한다.
 “유지, 지금 네 ‘존재의 힘’이 보통 때보다 많이 흘러들어왔어.”
 “아, 어떻게 알았어?”
 샤나가 홍련의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냥 느꼈어. 봉절도 보통 때보다 크잖아.”
 “아아, 그렇구나……. 실은 요즘 들어 ‘존재의 힘’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게 됐거든. 그래서 내 의지로 보내는 힘을 조절할 수 있을지 시험해본 거야.”
 유지의 말에 샤나는 조금 험악한 얼굴을 했다.
 “섣불리 ‘존재의 힘’을 다뤄선 안 돼. 조절에 실패해서 전부 흘려넣게 되면 너라는 존재는 소멸한단 말이야.”
 “미, 미안.”
 바로 사과하고 난 유지는 불현듯,
 ‘지금 날 걱정해준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유치하게 기뻐했다. 만난 지 1개월 남짓, 여러 가지 문제도 있었지만 어렵고 무뚝뚝하기만 한 그녀와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유지의 그런 긍정적인 관점에 아니나다를까 찬물이 퍼부어졌다.
 “거기까지 감각이 발달하고 예민해졌다면 앞으로 할 야간 훈련에는 네 힘을 제어라는 항목을 추가하마.”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처럼 무겁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라는 형태의 찬물. 그것은 샤나의 가슴에 드리워진 펜던트에서 나온 소리였다. 은사슬에 꿰인 검은 구슬을 교차된 금색 고리로 감싼 모양이다.
 목소리의 주인은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
 샤나에게 플레임헤이즈의 힘을 부여하는 ‘홍세의 왕’이다. 그는 본체를 샤나의 몸 안에 잠재우고 이 펜던트 형태의 신기 ‘코큐토스’를 통해 자신의 의사만을 드러내고 있다.
 샤나는 아버지나 오빠, 혹은 스승이나 친구라고도 여겨지는 다른 세계의 마신에게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렇군. 좋은 제안이야.”
 “우왓, 긁어 부스럼이잖아?” 머리 위, 아지랑이 너머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지에게 샤나는 씩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야간 훈련할 땐 멀거니 구경만 했었는데 잘됐잖아. 이걸로 아침저녁 골고루 복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보내게 됐네.”
 “후우ㅡ. 뭐, 함부로 설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보단 나으려나.”
 “그럼 오늘은 내 힘이 어떻게 짜여지는지 느껴봐.”
 가슴을 펴고 으스대는 샤나에게 이번엔 유지가 짖궂게 웃어보인다.
 “어젠 잘 안 된다고 하더니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잔말 말고 느끼기나 해.”
 샤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붉게 타오르는 머리칼과 검은 망토가 나부낀다. 유지와 이어진 손은 그대로인 채.
 최근 한 달간 밤이 이슥해지면 샤나는 사카이가의 지붕 위에 봉절을 펼치고 유지와 함께 플레임헤이즈로서의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 달 전의 전투에서 눈뜬 새로운 힘에 적응하고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발달시키기 위해서였다.
 새롭게 눈뜬 힘이 유지의 앞에서 불타오른다.
 “ㅡ하앗!”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샤나의 등에서 분출된 홍련의 불꽃이 한 쌍의 날개가 되어 펼쳐졌다. 천사라 하기에는 너무나 처절하고 악마라 하기엔 너무나 화려한 그것은 전사의 모습이었다.
 유지는 자신의 ‘존재의 힘’이 이어진 손끝을 통해 그녀의 몸으로 흘러들어가 새로운 형태로 변환되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단지 육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깎아내는 듯한 옅고 싸늘한 상실감, 그리고 깎여나간 자신이 그녀의 날개가 되는, 평온함과도 같은 일체감이었다.
 ‘존재의 힘’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이런 행위를 인간은 할 수 없다. 만일 한다면 그 인간은 소멸되어버린다.
 ‘나만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어.’
 그런 기묘한 만족감을 품고 있는 이 사카이 유지는 인간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인간으로 살았던 사카이 유지의 잔재였다. 한 달 전쯤 ‘진짜 사카이 유지’는 ‘홍세의 무리’에게 ‘존재의 힘’을 먹히고 죽었다. 그리고 ‘무리’가 그 잔재로 만든 죽은 자의 대체품인 ‘토치’……, ‘지금의 사카이 유지’가 남겨진 것이다.
 플레임헤이즈는 존재의 소멸에 의해 야기되는 세계의 급격한 균열을 감지해내고 그것을 ‘무리’를 뒤쫓는 단서로 삼고 있다. 토치는 플레임헤이즈가 느끼는 그런 균열을 완화시킴으로써 추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인 것이다.
 생전의 기억이나 인격을 그대로 갖고 있는 토치는 몸에 남겨진 소량의 ‘존재의 힘’을 천천히 불살라간다. 먹히기 전과 다름없이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서서히 자신의 기력이나 존재감, 주위와의 관계나 거처를 잃어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에 익숙해지면 홀연히 사라진다. 주변 사람들의 기억, 자신이 있었다는 흔적,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 사라진 것에 대한 위화감조차 느낄 수 없다.
 어쩌면 죽음보다도 더 두려운 완벽한 소멸……, 그것이 ‘홍세의 무리’에게 먹힌 자의 최후, 토치가 다다를 종착점이었다.
 지금 여기 있는 유지도 그런 토치 중의 하나.
 그러나 다행히(본인 생각은 그렇다) 그는 ‘홍세의 무리’의 보구를 몸 속에 갖고 있어 ‘미스테스’라고 불리는 특별한 토치였다. 더욱이 그가 갖고 있는 보구는 시간의 사상에 간섭하는 ‘영시미아’라는 것으로 ‘홍세의 무리’의 비보 중의 비보였다.
 이것은 먼 옛날, 이 세상에서 한 인간과 사랑에 빠진 ‘홍세의 왕’이 그 인간을 ‘영원한 연인’으로 만들기 위해 만든 영구기관으로, 하루하루 소모되어가는 토치의 ‘존재의 힘’을 매일 0시에 회복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몸 안에 갖고 있기엔 지나치게 큰 위력을 가진 이 보구 덕에 유지는 기력이나 인격을 그대로 보존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
 지금처럼…… 한밤중 0시 전, 회복을 코앞에 둔 자신의 ‘존재의 힘’을 사용해 샤나의 훈련을 도울 수 있는 것도 그 덕이었다.
 “흠, 이제 날개는 순간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되었군.”
 아라스톨이 합격점을 주었다.
 샤나는 아주 잠시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 표정을 거두고는 날개를 불꽃의 가루로 흩뿌렸다. 그리고 다시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한다.
 “날개는 실전에서 사용해서 싸웠기 때문에 몸이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야. 아라스톨의 전신을 펼치는 걸 체득하려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서두를 필요는 없어. 얼마나 숙련되느냐가 중요하다.”
 “응.”
 다른 이의 ‘존재의 힘’을 빼앗아 사용하는 ‘홍세의 무리’와 달리, 샤나와 같은 플레임헤이즈는 ‘왕’의 그릇인 계약자의 몸에 깃든 힘을 소비하여 활동한다. 이를테면 체력 같은 것으로, 쉬면 회복도 가능했다. 하지만 늘 전장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그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힘을 헛되이 써버리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는 유지를 이용해서 샤나와 아라스톨은 그의 힘이 회복되기 직전까지 남은 힘을 이용해서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닳지 않는 연료 탱크 취급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샤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뭐, 이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인데, 실컷 사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현재 유지는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어진 손에서 다시 소량의 힘이 흘러나간다. 그 힘이 샤나의 몸 속에서 재구성되어 짜여진다.
 유지는 그 변화의 감각을 잡으려고 애썼다.
 “……응…….”
 샤나가 조금 신음하며 빈 손을 앞으로 내민다.
 그 손 주변에 날개를 구성하고 있던 것과 같은 홍련의 불꽃이 가루처럼 뿌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불길의 소용돌이처럼 팔 주위를 감싼 불꽃 가루는 한 줄기 흐름을 따라 허공을 헤엄쳐 앞으로 앞으로 부풀어오른다. 부풀어오름에 따라 불꽃 가루의 밀도가 옅어지면서 팔 주면에 이루어진 형태의 윤곽을 따라 입체적으로 흐르는 것이 마치 홍련의 세공품처럼 보였다.
 그렇게 어두운 밤에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낸 것은 전체 길이 10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팔이었다. 어찌 보면 갈퀴 같은 손톱을 세운 갑옷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맨손 같기도 한 형태였다.
 유지는 이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존재를 본 기억이 있다.
 전에 딱 한 번 보았던 ‘홍세’의 마신,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이 이 세계에 나타났을 때의 모습……. 단 유지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것은 훨씬 컸고 불의 밀도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지금 샤나가 하고 있는 것은 홍련의 날개와 마찬가지로 아라스톨의 힘을 제대로 구사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지금까지 샤나는 단순히 신체적 능력만으로 싸우다시피 해왔기 때문에 이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면 전투의 폭이 한결 넓어질 것은 틀림없었다.
 계약한 ‘홍세의 왕’이 가진 월등한 힘을 한정적으로밖에 쓸 수 없었던 것은 사실 샤나의 남모를 콤플렉스였던 모양이었다. 한 달 전 있었던 전투의 다음날부터, 그녀는 이 힘을 습득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 성과로 순간적으로 날개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지금은 그 다음 단계로 아라스톨의 일부를 구현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때보다 작다.”
 유지의 솔직한 평에 샤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구현의 규모를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야. 진짜 모습과 힘을 구현해내면 팔 하나로도 너 같은 건 순식간에 소멸돼버리고 말걸.”
 “그, 그치.”
 유지의 뺨이 실룩인다.
 그 모습을 속으로 고소해하던 샤나는 크게 팔을 휘둘렀다. 표정이 휙 바뀌고, 눈썹이 모이면서 입이 일그러진다.
 “……역시나 멀었군.”
 거대한 팔은 정점에서 휘두른 샤나의 팔 동작을 따라가지 못하고 무수한 불꽃의 가루를 흩뿌리며 크게 휘어졌다. 이 광경을 본 아라스톨이,
 “구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아직 덜 훈련됐군.
 라며 이번엔 가차없는 평가를 내린다.
 “응……. 노력해야지.”
 조금 풀죽은 샤나는 팔을 쭉 뻗더니 주먹을 쥐었다. 그와 함께 불꽃의 세공품도 주먹을 쥔다.
 “그러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오늘은 ‘니에토노노샤나’에 의한 구성을 시험해봐라. 칼에 나의 힘을 싣는 거라면 금방 익숙해지겠지.”
 “응.”
 샤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쥐고 있던 손을 활짝 폈다. 그 동작에 맞춰 거대한 불꽃의 세공품도 일제히 캄캄한 밤 공기 속에서 흩어졌다.
 그야말로 꽃을 피우는 듯이 난무하는 불꽃에 유지가 눈길을 빼앗긴 동안, 옆에 있던 샤나는 검은 망토의 왼쪽 허리춤에서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 칼을 뽑아냈다.
 그녀가 목숨을 받기고 있는 보구인 ‘니에토노노샤나’.
 유지가 붙인 ‘샤나’라는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주인의 키 만한 검의 날렵하고 도톰한 칼날이 살벌한 광채를 번뜩이며 앞으로 휙 겨눠진다.
 “ㅡ하앗!”
 샤나의 기합 소리에 맞춰 한 번 더 유지의 손에서 힘이 흘러나간다. 그것은 아까 팔을 구현할 때와는 달리 날카롭게 흐르는 감각.
 그 감각을 실제 형태로 구현하자 앞으로 겨눈 ‘니에토노노샤나’의 끝에서 불꽃의 가루가 단숨에 피어올라 칼날을 늘였다.
 “역시 무기가 힘을 집중시키기 쉬운 것 같아.”
샤나는 만족스럽다는 듯 그렇게 말하자 검 끝에서 뻗어나온 불꽃의 칼날을 휘두르며 위로 찔러보았다. 공기를 태우는 굉장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칼도 똑같은 움직임을 그리며 하늘을 찌른다. 칼날이 살짝 휘어지면서 칼의 움직임이 조금 처졌지만, 팔을 구현했을 때에 비해 한결 틀이 잡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라스톨은 검 같은 거 들었었어?”
 유지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전에 봤을 당시에는 자신도 거의 초주검 상태라 찬찬히 뜯어볼 여유가 없었지만 말이다.
 “이것도 나의 존재에 포함되는 성질의 하나다.”
 “……?” 아라스톨은 늘 그렇듯 유지에게는 좀 어려운 말로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그는 ‘천양의 겁화’라는 무시무시한 본명이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인격자였다 단 어떤 사정에 의해 유지에게만 유난히 엄격해질 때가 있긴 하지만.
 “우리들 ‘홍세의 무리’는 자신을 구현할 때, 자신의 존재가 갖는 성질을 이 세계에 적합한 형태로 구현한다. 네가 본 ‘유린의 조아’도 ‘홍세’로부터 늑대의 모습을 갖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갖는 성질을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그 모습을 택한 것뿐이다.”
 복잡하게 돌려 말했지만 ‘즉, ‘홍세의 무리’가 본성을 이 세상에 나타낼 때는 자신의 특징을 살린 형태를 취한다는 소리(그럼 프리아그네가 마지막에 새의 모습으로 사라진 이유는 그의 본성이 새였기 때문인가?)’라고 대강 납득하면서, 유지는 하늘을 향해 겨눈 화염의 검을 우러러 보았다.
 “그럼 이 검도 마신 ‘천양의 겁화’의 이미지 중 하나야?” “정확하게는 내가 아라스톨에게 갖고 있는 이미지의 하나라고 봐야겠지.”
 샤나가 말했다.
 “내 존재의 안에는 검 같은 공격적인 성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다. 그 범주 안에 있으면 형태도 ‘자재’로 나타날 수 있다.”
 “흐~응. 확실히 불의 마신이니 검 같은 건 늘 갖고 있을 것 같아.”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는 유지였지만, 그가 ‘마신’에 대해 갖는 이미지라고 해봤자 고작 방송에서 보여주는 부동명왕이나 아주 옛날에 해줬던 유명한 특촬 영화에 나오는 토용 비슷한 것 정도였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자명종이 울렸다 안에 넣어둔 휴대용 자명종 시계(이 훈련을 위해 구입한 품목)를 주머니 바깥에서 한 대 때려 잠재운다.
 “음……, 벌써 시간이 다 됐다.”
 자정 0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샤나는 유지의 손끝에서 손을 떼고, 하늘을 떠받친 기둥 같은 불꽃의 검을 무수한 가루로 만들어 흩뜨렸다. 검 끝을 반대로 휙 돌려 잡은 ‘니에토노노샤나’를 검은 망토의 왼쪽 허리춤에 집어넣어 그 안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 우아한 칼 솜씨에 유지는 눈길을 빼앗겼다.
 동시에 떨어져나가는 손끝이 밤마다 되풀이되는 작별의 쓸쓸함을 남긴다.
 요 한 달간 유지는 단지 구경꾼 역할에 불과한 이 훈련을 즐기고 있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선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거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그런 취미도 아니고, 아니 뭐 물론 샤나가 예쁜 건 사실이고 결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ㅡ.
 “ㅡ으앗?!” 어느 새 도로 앉았는지 샤나가 유지의 코앞에서 타오르는 듯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심쩍은 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놀라는 유지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린다.
 “뭐야, 완전 넋이 나간 표정이네. ‘존재의 힘’을 너무 써버린 건 아니야?” “그럴 리는 없지만……, 음, 너 설마.”
 아라스톨이 샤나의 보호자로서의 감을 번뜩였다.
 우와앗, 무슨 말을 물어보려는 거지? 어떻게 피해야 되나 하고 허둥대는 유지의 몸 안에 갑자기 힘이 넘쳐흘렀다.
 “아! ㅡ앗, 자, 자정이다.”
 오늘 하루 소모한 ‘존재의 힘’이 몸 안에 있는 비보 ‘영시미아’에 의해 회복된 것이다. 원래는 아무 느낌도 없었던 회복의 감각도 샤나의 훈련에 맞추느라 ‘존재의 힘’을 끊임없이 운용하다 보니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
 그 모습에 김이 샜는지 아라스톨은 추궁을 그만두었다.
 유지는 얼렁뚱땅 넘어간 김에 한 마디 더하자 싶어서 입을 열었다.
 “저기, 이 ‘영시미아’ 말인데.”
 “그게 왜?” 샤나의 반응은 무뚝뚝하다.
 그녀의 그런 대꾸에 이골이 난 유지는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한다.
 “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
 즉각 대답하기엔 너무 중대한 화제였으므로 샤나는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요 한 달간 나 자신을 관찰해왔어. ‘존재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그 탓……, 아니 덕분이야.”
 가볍게 질문할 생각이었던 유지의 말에는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내 안의 ‘영시미아’는 매일 ‘존재의 힘’을 회복시키잖아. 하지만 어제까지의 일을 완전히 뒤엎고 전날 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건 아니야. 나는 학교에서 공부한 건 확실히 기억하고, 아침 훈련에서도 나름대로 나아지고 있어.”
 샤나가 지금처럼 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지도 매일 아침 일찍 마당에서 그녀에게 ‘근본적인 전투법’ 같은 것을 배우고 있다. 최근엔 그녀가 말한 ‘살기’의 타이밍을 느낄 수 있을 정도까지 진보한 상태였다. 단지 느끼기만 할 뿐 대처하는 건 무리였지만.
 “방금 전에도 ‘존재의 힘’의 흐름을 느끼거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어. 즉 조금이나마 성장했다는 뜻 아닐까? 이 내가.”
 유지는 소리만 지르지 않았을 뿐 절실한 외침을 목소리에 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 속 깊이 가라앉아서 오직 자신에게만 질문했던 것을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서서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예전에 받아들인 ‘자신이 다다를 종말에 대한 공포’였다.
 떠밀린 것처럼 유지는 몸을 내밀고 묻는다.
 “영구기관 ‘영시미아’를 몸 속에 가진 ‘미스테스’도 몸이 자라거나 나이를 먹을까?”
 그를 코앞에 두고 샤나는 미동도 않은 채 평소처럼 명확하게 대답했다.
 “몰라.”
 하지만 하며 알고 있는 사실을 확실히 이야기해준다.
 “너보다 전에 그걸 몸 안에 갖고 있었던 ‘영원한 연인’은 행방불명이 될 때까지 3백 년간 ‘왕’과 함께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어.”
 “그…… 런가…….”
 두려움과 직면할 날이 다소 멀어진 느낌에 유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소리를 낮춰 묻는다.
 “그 사람과 직접 만난 적은 없어?” 샤나는 발끈했다.
 “만났을 리가 없잖아. 행방불명된 뒤로도 백 년은 지났다고!”
 내 나이를 몇 살로 보는 거냐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그럼 몇 살인데 라고 물으려다 참았다.
 뾰로통해진 샤나를 대신해, 아라스톨이 대답한다.
 “그 ‘약속의 두 사람’은 그들 사이에서만 ‘존재의 힘’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균형에 해를 미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둘 다 가공할 힘을 가진 강한 자들이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를 알겠나?”
 물으려다 말고 잠시 생각한 다음 유지는 깨달았다.
 “아, 사람을 먹지 않으니까 플레임헤이즈는 토멸할 필요성을 못 느꼈고, 엄청 강하니까 ‘무리’도 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들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주목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상세한 정보도 없다 이 말이지?”
 ‘……거 참, 녀석, 바보인지 영리한 건지…….’
 그 완벽한 대답에도 도무지 칭찬할 마음이 들지 않은 아라스톨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대신 샤나가 말한다.
 “우리들 플레임헤이즈처럼 늙지 않는 건 확실한 것 같아.”
 “그럼 나도 안 늙는 거야?”
 “3백 년 정도 걸려서 대답을 찾아보지 그래?”
 유지는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농담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다,
 “3백ㅡ.”
 그 안에서 무서우리만큼의 시간을 느끼고는 얼어붙었다.
 듣기야 좋지만 사실 겉모습도 지금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면.
 3백 년이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단위가 아니라 10년, 아니 5년이라도 자신이 지금 모습 그대로라면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아버지, 어머니, 이케, 사토, 타나카, 요시다, 학교 친구들, 이웃 사람들, 모두 날 어떻게 볼 것이나.
 나 자신은 지금 여기 있는 ‘토치가 된 사카이 유지’라는 존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도 나처럼 받아들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새삼스레 깨우치게 되었다……. 아니면 거기까지 깨우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고 봐야 할까, 어느 쪽이든 간에 자신은 절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억지를 부릴 단계는 지났다.
 그러나 막상 살아가려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 방금 전 느낀 ‘자신이 다다를 종말에 대한 공포’는 이미 납득하고 받아들인 자신의 생명과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더 멀고 길고 불확실한 것, 지금 살고 잇는 자신이 앞으로 맞닥뜨릴 것……, 즉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런 지금의 자신에게 길잡이가 되어줄지도 모르는, 혹은 더 먼 길을 함께 걸어가줄지도 모르는 소녀가 눈앞에 있다. 있어주고 있다.
 ‘……아.’
 유지는 불쑥 깨달았다.
 자신이 느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이 샤나라는 소녀의 존재와 표리일체였다는 것을.
 샤나와 함께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두려움은 일시적이나마 자신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선택조차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에게 의지하고 매달리고 싶어하는 마음에 대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를 자신의 앞날을 가르쳐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야.’
 그런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그것뿐이었다.
 방금 전의 대화에서 나온, 한 소년으로서의 동경하지 않을 수 없는 말ㅡ‘약속의 두 사람’ㅡ‘영원한 연인’ㅡ이 뇌리를 스치며 철없는 망상이 넘쳐흐른다.
 그 안에 뒤섞인 것 중 하나가 동련 강렬한 충동을 일으키며 유지의 말문을 열게 했다.
 “샤나.”
 나와 함께. 영원히.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부분까지 전부 완벽한 울림으로 전해졌다.
 “ㅡ웃!!”
 샤나는 이 울림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유지가 초조해한 의미를 깨달아다. 놀란 얼굴로 유지의 눈을 마주 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그런 진지하고 중대한 바람을 밀어붙여온다 해도 서로의 준비, 각오, 조건, 확신, 그 밖의 수많은 것들, 그 모든 것이 전혀 따라주질 못했다.
 “…….”
 “……!”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떠돌고 이내 그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진 샤나가 시선을 피했다. 샤나는 냉큼 일어나더니 유지의 옷깃을 움켜쥐고 훌쩍 뛰어 그의 밤 밖에 있는 베란다에 내려선다.
 “우와앗!” 샤나는 일부러 유지를 힘껏 내동댕이치고 자신은 베란다의 난간에 앉는다. 바깥쪽으로 발을 돌려 유지에게 등을 보이고.
 “윽, 으…….”
 요란하게 엉덩방아를 찧고 끙끙대던 유지는 사카이가를 둘러싼 봉절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지랑이의 벽과 땅의 문자열이 희미하게 지워지고 인과의 흐름이 외부와 이어지며 움직임을 시작한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조금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리의 움직임이나 소음이 먼발치에서 되돌아온다.
 그 소리에 섞인 조그만 음성.
 “있지.”
 샤나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어느 새 붉은 머리는 검게 식었고 그녀의 작은 뒷모습은 검은 망토에 싸여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그 얘기는 관두자.”
 짧은 거절.
 유지는 머리에서부터 찬물을 뒤집어쓴 듯 덧없고 깨지기 쉬운 망상에서 벗어났다.
 “ㅡ아……. 미, 미안…….”
 “아냐. 내일 보자.”
 샤나는 지금까지의 무거운 대화를 깨끗이 흘려보내고 가볍게 작별 인사를 했다.
 유지도 짧게 대답한다.
 “……응, 잘 자.”
 샤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쓱 쓸어올리고 그 나부낌이 미처 잦아들기도 전에 밤의 어둠 속으로 뛰어내려 사라졌다.
 유지는 물결치던 머리카락 사이로 움직이던 그녀의 입술을 본 것 같았다.
 ‘잘 자…… 라고 말해준 거니?’
 엉덩방아를 찧은 볼썽사나운 모습 그대로, 샤나가 사라진 캄캄한 밤의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히라이 유카리라는 유지의 반 친구로 위장하여 이 동네에 살고 있다. 히라이가는 전 가족이 ‘무리’에게 먹혀 토치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 집안 무남독녀의 존재에 스며들어 일시적인 거처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남짓 머문 지금은 양친의 토치도 소멸하여 거처인 맨션에는 그녀밖에 살고 있지 않다. 친척들은 히라이 부부의 존재를 잊어버렸고 그녀도 ‘먼 친척 소녀’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고등학생이 홀로 맨션에 사는 부자연스러움과 어색함도 어떤 계기로 인해 들키지 않는 한 계속 방치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린 상황에 사람들은 전혀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다.
 과거 한 명의 ‘홍세의 왕’에게 수많은 인간을 먹힌 이 미사키 시에 이 정도의 일은 그리 희귀한 경우가 아니었다.
 이 밖에도 부모가 있었지만 사라져버린 아이, 아이가 있었지만 사라져버린 부모, 남편이 있었지만 사라져버린 임산부, 봉양해줄 자식이 있었지만 사라져버린 노인, 상사나 부하나 동료가 있었지만 사라져버린 직원 등이 이 도시에는 넘쳐흐르고 있었다.
 제 아무리 토치가 세계에 미칠 영향을 완화시키며 사라진다고는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사라진 수가 너무 많으면 사회 활동에도 자연스레 지장이 생긴다. 사실 거리의 여기저기에서는 크고 작은 무수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중에 남은 것은 원인과 경과가 불분명한 이상한 사실뿐.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부자연스럽고 곤란한 사태에 자연스럽게 직면하게 된다. 그 누구도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사라진 사람의 수나 혼란의 규모에만 차이가 있을 뿐, 이것은 미사키 시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먼 옛날부터 세상은 이처럼 ‘홍세의 무리’가 일으키고 다니는 균열을 내포하고 삐걱거리며 움직여왔다. 플레임헤이즈의 사명은 온 힘을 다해 그 균열을 막고 ‘무리’를 몰아내는 것에 있다.
 그런 사명을 가진 샤나가 이곳에 머무는 이유는 유지라는 ‘미스테스’의 실태를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허나 그것은 명목상의 이유이고 사실은 그녀의 의지ㅡ호의라고 생각하고픈ㅡ에 의한 것임을, 유지는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었다.
 ‘……그토록 강하게 결심했는데, 난 그것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구나…….’
 한 달 전의 사건으로 인해 자신은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거나 곤란하게 만들지 않도록 강해지겠다고 결심했다.
 그랬는데…… 왜 그랬을까. 자신이 그 자리에서의 충동과 조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보여준 무모하고 생각 없고 막무가내인 요청이야말로 부담과 곤혹 그 자체였다.
 알고 있었는데.
 ‘왜 그런 짓을.’
 유지는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공포와도 가까운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튀어오르기 일보 직전의 용수철이 가슴속에 들어 있는 듯 제어할 수 없는 욱신거림이 자리잡고  있다. 설마 ‘영시미아’ 때문은 아니겠지.
 ‘아니면…….’
 아니면 자신의 치기ㅡ라고 어떤 인물에게 지적당했다ㅡ에서 비롯된 것일까.
 충동적으로 등 뒤의 벽에 머리를 힘껏 부딪쳤다.
 “……미치겠다, 정말…….”
 평범한 소년에게 이 세상은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2. 빗속의 결투
 날이 밝았어도 미사키 시의 하늘을 뒤덮은 구름은 두꺼웠다.
 사카이가의 마당에서 늘 하는 아침 훈련을 마친 뒤, 습관처럼 탕에 몸을 푹 담근 샤나는 막 목욕을 마친 달아오른 얼굴로 거실에 돌아왔다. 늘 그렇듯 만신창이가 된 유지는 샤나의 뒤이어 목욕탕에 들어가 재빨리 샤워를 하는 중이었다.
 좀 전의 훈련에서 어젯밤 일 때문에 여전히 침울함에 잠겨 있던 유지를 나뭇가지로 힘껏 때려 정신이 번쩍 나게 한 끝에 마침내는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샤나는 그것이 흡족해서 서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그녀는 이젠 ‘사카이가에서 반 하숙’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거의 눌러앉다시피 하며 아침은 매일, 밤에도 대부분 이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명색이 자기 집일 뿐 그녀 한 사람만이 있는 히라이가는 거의 잠만 자는 곳 수준이었다.
 유지의 어머니인 사카이 치구사도 그렇게 하도록 허락…… 정도가 아니라 발벗고 나서서 장려하고 있었다. 뜻밖의 구석에서 순진한 면모를 보이는 샤나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던 그녀는 샤나가 혼자 살게 됐을 무렵,
 “마침 방도 비어 있단다.”
 라며 사카이가에 하숙할 것을 끈질기게 권했다(치구사는 아들이 사고를 칠 만한 주변머리도 없다고 여기는 듯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만은 알지 못할 어떤 이유 때문에 완전한 사실이었다). 원래 사카이가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라는 3인 가족이었지만, 집안의 가장인 칸타로는 해외에 단신 부임 중이라 치구사와 유지 둘만 산다. 그러므로 샤나를 받아들일 여유는 충분했다.
 샤나도 넉넉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성격에 격의 없고 현명한(마지막 평가는 아라스톨에 의한 것) 치구사가 싫지 않았지만 유지와 너무 딱 붙어 있게 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 그 제안을 거절했다.
 치구사는 몹시 아쉬워했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말을 꺼내볼 생각인 것 같았다.
 “샤나, 그릇 좀 놔주련?” 치구사가 주방에서 커튼 너머로 소리친다. 그녀는 샤나의 정체나 사정을 전혀 모르지만 유지에게서 “별명이니까 앞으로 그렇게 불러”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샤나라고 부른다.
 “응.”
 샤나는 가볍게 대꾸하고, 식탁 위에 햄에그 3인분을 수북이 쌓아놓은 큰 접시, 빈 공기나 대접 등을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마지막으로 치구사의 하얀 젓가락, 유지의 파란 젓가락, 자신의 빨간 젓가락을 받침 위에 놓고 끝. 식기들이 가지런히 놓인 모습을 보며 ‘음’ 하고 만족스러운 듯 끄덕인다.
 “고맙구나.”
 치구사가 냄비를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식탁 한가운데 놓인 냄비 받침에 냄비를 내려놓자 가슴이 훈훈해지면서 허기를 일깨우는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거실에 퍼진다.
 치구사는 샤나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와, 잘 어울리는구나. 샤나.”
 “그래?” 무심한 대답이었지만 샤나의 뺨이 홍조를 띠는 것은 방금 목욕을 마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부터 교복을 하복으로 바꿔 입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준비해둔 사람은 치구사였고 샤나는 목욕하러 들어가기 전에 그것을 건네받았을 뿐이다.
 치구사는 샤나가 혼자 산다는 것을 구실 삼아 주로 옷과 관련된 이모저모를ㅡ본인의 취미도 십분 발휘하고 있다고 보인다ㅡ보살펴주고 있다. 아마 이 옷도 쾌재를 부르며 사러 갔을 것이다.
 샤나는 이렇게 자신이 잘 아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구입 경비를 미리 치구사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 두툼한 봉투는 전혀 손대지 않은 채로 찬장 안에 방치되어 있었고 결국은 전날 간식을 찾아 쑤시고 다니던 유지가 발견했다.
 그런 치구사가 마련해준 자신의 새 교복을 샤나는 조금 어색한 듯 내려다보았다.
 세일러복 깃과 소매 끝만이 차분한 짙은 녹색이고 그 이외에는 눈부신 흰색. 치마도 디자인은 같지만 얇은 원단이었다.
 그 가벼운 차림(샤나가 지난 표현력의 한계였다)에 몸도 날아갈 것 같아서 기분이 상쾌해진다. 옷의 기능적인 측면 말고는 달리 관심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사카이가에 온 뒤로 또 다른 측면의 즐거움이나 즐기는 법을 치구사에게 배웠다.
 딱히 옷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치구사는 그녀가 모르는 신비로운 지식의 보고였다.
 ‘플레임헤이즈가 된 뒤로 지금까지 모든 걸 내 힘으로 해왔어. ……그런데.’
 그것은 뭐든 알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할 일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자신이 그야말로 단순한 생활을 해왔음을 샤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사명이나 전투를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일, 자기 그 자체라는 확신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것이 있다는 신선한 놀라움을 느끼는 것도 싫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틈틈이 조사하고 있던 것에 대해 치구사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젯밤에 유지의 말을 듣고 느낀 혼란이나 충돌도 한몫했는지 모른다.
 “치구사.”
 그녀는 치구사를 대등한 친구로 보고 있기 때문에 반말을 썼다. 치구사도 못마땅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고 있다.
 “왜 그러니?”
 커튼이 걷히고 아침 디저트용으로 보이는 복숭아 통조림을 손에 든 치구사가 들어온다.
 그 모습에 힐끔 눈길을 주며 샤나는 다시 입을 연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여태껏 찾아봤는데 아무래도 잘 모르겠거든.”
 “어머, 그게 뭘까? 어려운 거라면 나도 잘 모를 텐데.”
 그렇지 않아, 이렇게 마음속으로 치구사의 명예를 지켜준 뒤 샤나는 간단하게 물었다.
 “키스란 건 어떤 의미야?”
 ‘ㅡ억?!’
 하복의 가슴 위에 변함없이 걸려 있던 신기 ‘코큐토스’를 통해 매사 평온하고 균형 잡힌 의사랄 표시하는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은 갑작스러운 이 놀라운 사태에도 강한 자제심을 발휘해서 바깥으로 터져나올 뻔한 소리를 간신히 억눌렀다.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물론 그 뒤로는 완전히 자제력을 잃어버렸지만.
 치구사는 즉각 대답하지 않고 뺨에 손을 대며 되물었다.
 “……왜 그런 걸 묻니?”
 다소 곤혹스런 모습으로 눈썹이 일그러진 것은, 행여 아들이 이상한 바람이라도 넣은 게 아닌가 하는 염려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억울한 누명이었다.
 샤나가 명쾌하게 대답한다.
 “불안해지만 나한테 키스하라고 일전에 유지에게 말한 녀석이 있었어. ‘그럼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고.”
 ‘그, 그건가?! ‘나선의 풍금’, 이 몹쓸 녀석 같으니, 쓸데없는 소릴 늘어놓다니!!’
 아라스톨이 뿜어내는 강렬한 저주의 파동을 받고, 세상 어딘가에서 한 세련된 노신사가 한기를 느꼈…… 을지 어떨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 유지가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한 건 아니지?” “……? 응.”
 ‘이상한 소리’가 뜻하는 바가 뭔지도 모르면서 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유지가 한 말은 아니니까.
 치구사는 꾸밈없는 소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딱히 고민에 빠진 기색은 아니다. 보아하니 심각한 걱정거리는 아닌 것 같고 흥미나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 같다.
 “으~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어렵네.”
 손에 든 통조림을 식탁에 놓고 치구사는 자신의 젓가락이 놓은 자리에 앉는다.
 샤나도 자신의 젓가락을 놓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부인! 모쪼록 양식에 마는 대답을 부탁드리오!’
 아라스톨의 은밀한 압박을 받으며 치구사는 입을 열었다.
 “조사했다는 게……, 그러고 보니 한동안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것 같더니 그것 때문이었니?”
 “응. 근데 뭘 읽어도 이미 알고 있는 정도만 나오더라고. 어떤 건지는, 알고 본 적도 있어. 하지만 그게 유지의 불안에 어떻게 대답을 줄 수 있는지 그걸 모르겠어. 나도 관련된 것 같으니까 그 행위의 의미를 알아두고 싶어.”
 “소설이나 문학 작품은 안 읽었니?” “아라스톨 말로는, 개인의 주관이 들어간 건 적절한 분석과 논리적인 사색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중요 문헌을 통째로 암기했을 뿐이야. 고찰 대상으로 삼은 적은 없어.”
 치구사는 외국인으로 역지는 그 인물의 이름을 샤나가 몇 번인가 자랑스레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라스톨 씨는 먼 데 계시다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그분이니? 훌륭한 식견을 갖고 계시구나.”
 “응.”
 샤나는 소중한 사람을 치켜세우는 말을 듣고 조금 우쭐해졌다.
 그러나 치구사는,
 “하지만.”
 이라고 말을 이었다.
 “?”
 ‘?’
 “이런 경우엔 그것만으론 모를 수도 있어.”
 “무슨 뜻이야?” 치구사는 말을 신중하게 골라 계속한다.
 “음~, 그러니까…… 자료 같은 데 실린 것은 확실한 사실이나 이론이긴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없어. 하지만 지금 샤나가 생각하는 건 그 이상의 것……, 그러니까 딱 부러지는 정답이 없는 마음이나 감정의 이야기란다.”
 샤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치구사의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이었던 것 같다.
 치구사는 그런 지나치리만큼 순수한 소녀에게 하나하나 알기 쉽게 이야기한다.
 “몸을 서로 맞대는 것이 친밀한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란 건 알고 있지?” “응, 키스도 그런 동작의 하나지? 악수나 껴안는 것도 전부 그렇게 하잖아.”
 “음~.”
 요점에서 미묘하게 벗어나고 있음을 느낀 치구사는 난폭하지만 확실하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예를 들어, 좋아하는 아라스톨 씨한테 그렇게 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
 그런 장면이 바로 상상되지 않지만, 그래도 샤나는 당연하다는 듯 끄덕인다.
 “응.”
 ‘…….’
 그럼 말이야.
 너무 나서는 감도 없지는 않지만, 유지를 위해서가 아닌 샤나를 위해서 치구사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우리 유지하고는 간단하게 할 수 있니?”
 “ㅡ응?! 으, 그, 그게…….”
 샤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서서히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 이건 부인답지 않게 양식에 어긋나는 발언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니 무지 부끄럽지? 그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란다. 게다가 똑같은 키스라도, 뺨에 하는 거랑 입과 입으로 하는 거랑은 꽤 의미가 다르거든. 우리 유지한테 그 말을 한 사람은 아마 입과 입으로 하는 걸 말했을 거야.”
 ‘우ㅡ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이야기가 몹시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아라스톨은 입술을 깨물지언정 참견할 수 없었다.
 “……이, 입과…… 입……?” 샤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모깃소리만큼 잦아든 목소리를 가까스로 짜낸다. 새빨개진 귀만 보인다.
 “……그, 그런 거, 싫어. 하고 싶지 않아…….”
 더듬더듬 말하는 샤나를 보며 치구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어. 하게 놔두면 안 된단다. 그건 아라스톨 씨라도 마찬가지인 거 알지?”
 “응?” ‘뭐?’
 무심코 고개를 쳐든 샤나의 눈에 치구사의 깊고 상냥한 미소가 비쳤다.
 “샤나. 난 말이지, 입과 입의 키스는 ‘맹세’와 같은 거라고 생각한단다.”
 “맹세……?” “응. 자신의 모든 것에 접근해도 좋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도 좋습니다……, 그렇게 맹세하는 행위. 그건 친한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달리 더 강렬하고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을 드러내는 결심의 한 가지 형태랄까. 그러니까 그렇게 결심하기에 합당한 상대가 아니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고 받아서도 안 돼. 물론 사람에 따라 맹세를 하는 빈도나 지키는 힘도 다르겠지만.”
 “…….” ‘…….’
 치구사는 얌전하게 듣고 있는 소녀(와 마신)에게 곤란한 말투로 말한다.
 “유지가 느끼는 불안함이란, 너한테 그렇게까지 인정받고 있는지 어떤지 몰라 두렵다는 거른 거야.”
 치구사는 불현듯 장난기가 발동했다.
 “……하지만 말이야, 불안하도 그런 짓을 하려는 남자 따위는 뻥 차버려도 된단다. 우리 샤나도 유지가 그런 맹세를 나눌 남자라고 인정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혼내주렴. 우리 유지는 덜 자란데다 멋대가리 없는 애지만, 혹시 분위기를 타게 된다면 절대로 덮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거든.”
 “……응, 알았어.”
 어젯밤 일을 생각하면서 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으면 패버려, 그거라면 이야기는 간단했다. 치구사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뭐든 간단하게 생각되니 참 신기하다.
 치구사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으로 샤나를 위해 당부한다.
 “우리 유~지를 너무 대단하게 보면 안 돼. 자신을 소중히 하고 함부로 여기지 않도록 하렴. 너는 정말 귀한 존재란다. 내가 보장할게. 그러니까 맹세를 나누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한껏 콧대를 세우고, 유지가 그 장애물을 넘어올 때까지 기다리든가 그 다음 장애물을 마련해두든가 하렴. 만일 그래서 포기하거나 주저앉는다면 유지의 마음은 고작 그 정도뿐이었던 거니까.”
 “으, 응.”
 유지에 관해서도, 자신에 관해서도 전부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치구사의 말에 샤나는 다시 뺨을 붉게 물들였다.
 ‘으음……, 이걸로 정리된 건가? 이러면 된 건가?’
 한편 아라스톨은 미묘하게 떨떠름한 결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바람에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살이 겨눠진 것은 치구사가 아니었다.
 ‘사카이 유지가 원흉이다.’
 그는 신사적이었고 사카이 유지에게는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내가 뭘 어쨌다고?”
 문제의 유지가 수건으로 머리를 북북 문지르며 거실에 들어왔다. 그도 오늘부터 하복ㅡ그래봤자 남자들의 경우엔 깃을 뗀 반소매 셔츠로 바뀌었을 뿐이지만ㅡ을 입고 있었다.
 샤나는 이야기의 여운으로 조금 긴장한 탓인지 얼결에 외면했다.
 치구사는 언제 그런 얘기를 했었냐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완벽하게 시치미를 뗐다.
 “그보다 할 말 없니?” 오히려 유지에게 묻는다.
 “응? 뭘?” “우리 샤~나. 모르겠니?” 치구사가 하복으로 갈아입은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주었을 때의 뿌듯함을 떠올리며, 샤나는 유지에게서도 같은 말을 기대했다. 곁눈질로 몰래 유지를 살핀다.
 유지는 미심쩍게 샤나를 쳐다보다가, 정답으로 여겨지는 것을 한 점 의심 없이 외친다.
 “……아아! 하얘졌네?!” 마치 틀린 그림 찾기를 맞힌 것 같은 탄성에 샤나는 몹시 불쾌해서 삐쳤고 치구사는 아들의 구제할 길 없는 둔감함에 한숨을 쉬었다.
 “두, 둘 다 왜 그래? 맞은 거 아냐?”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하는 유지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음 역시 사카이 유지가 원흉이야.’
 아라스톨은 홀로 납득하고 또 납득했다.

 미사키 시는 몹시 알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남북으로 흐르는 1급 하천 마나 강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도시 기능이 집중된 시가지, 서쪽엔 주택가, 그리고 시의 중심이 되는 한복판에 미사키 대교가 놓여있는 구조이다.
 유지가 다니는 시립 미사키 고교는 주택가 중간쯤의 큰길과 붙어 있다. 주변에는 온통 주택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어 부지는 매우 좁은 편이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흐린 하늘 아래, 그 좁은 부지에 걸맞는 좁은 운동장 트랙을 유지네 1학년 2반 학생들이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달리고 있었다.
 점심시간 전인 4교시에 체육이란 체력적인 의미로 하루의 고비에 해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장마가 시작되려는 이 무렵의 바람은 마치 더운물 속을 헤엄치는 듯한 습기를 머금고 있어 학생들의 온몸을 끈적끈적한 땀투성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유일한, 그리고 학생들에게 최대의 행운은 수업이 쓸데없는 삽질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후, 하, 하, 후, 하, 하.”
 안경맨 이케 하야토가 규칙적으로 호흡하며 트랙을 느긋하게 뛰고 있으려니 뒤에서 쏜살같이 따라온 타나카 에이타가 말을 걸었다.
 “하앗, 핫, 하, 한 바퀴, 늦었어.”
 타나카는 나란히 뛰면서 속도를 늦춘다. 덩치는 크지만 잘 빠진 체구는 탄력이 넘치고 호흡도 거의 흐트러지지 않는다. 상쾌한 달리기였다. 평소엔 애교 있는 생김새도 운동할 때는 굉장히 듬직하게 보인다.
 이케는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습기 때문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치며 대답한다.
 “시간제, 는 달리기만 하면 되니까 빨리 달릴 필요, 없어.”
 “정말, 요새, 팔팔하네, 사토까지.”
 이케의 옆에서 묵묵히 달리고 있던 유지는, 타나카의 뒤를 따르곤 있지만 그 페이스에 맞추느라 몹시 힘들어 보이는 사토 케이사쿠를 힐끔 쳐다보았다.
 “운동, 이라고, 운, 동…….”
 ‘미’라는 접두사를 붙여도 좋을 생김새의 소년이 헉헉대며 최근 두 사람의 입버릇이 된 말을 내뱉는다.
 반에서도 활발한 분위기 메이커인 이 두 사람은 학교 부 활동에 별로 끌리지 않는다면서, 그런 쪽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유지나 이케와 함께 수업 후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헌데 무슨 이유로 갑자기 운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지나 이케도 그 이유를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이따금 둘이서 함께 결석을 하기도 했지만, 특별히 곤란한 것 같진 않았다. 정말로 곤란한 일이 있다면 자기들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낼 거라고 이케는 생각했다. 유지도 동감이었다.
 그들의 앞에서 경보 수준의 속도를 달리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타나카가 소리질렀다.
 “야, 요시다ㅡ, 괜찮냐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 다가간다.
 타나카의 체력에 혀를 내두르던 세 사람도 유지와 이케에게는 한 바퀴, 타나카와 사토에게는 두 바퀴나 처진 소녀를 따라붙었다.
 “괘, 괜찮, 아.”
 그 소녀ㅡ소극적인 인상이지만 꽤 귀여운 용모의 요시다 카즈미는 얼굴에 지친 기색을 띠면서도 성의 있게 대답한다. 달리기가 느린 것은 게으름을 피워서가 아니다. 운동이 서툰 그녀에게는 이것이 최대한의 페이스였다.
 이케는 이젠 마치 의무인 것처럼 그녀를 걱정해주었다.
 “힘들면 걸으라고 했으니까 괜히 서두를 필요는 없어.”
 그가 말한 대로 지금 하는 이 달리기는 준비 체조와 이어지는 시간제 워밍업이었으므로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실제로 다른 학생들을 보아도 대놓고 헉헉대는 것은 무리하게 타나카의 페이스에 맞춘 사토뿐이었다.
 “어, 어, 거흐면, 돼ㅡ.”
 거의 파김치 상태인 사토가 말했다.
 예전에 요시다는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하다 쓰러진 적이 있다. 가벼운 워밍업이라곤 하지만 체육 수업이 있을 때마다 모두들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와 함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괜, 찮아.”
 그러나 안색은 ‘무리하고 있다’가 아니라 ‘노력하고 있다’의 범주에 속해 보였다.
 ‘뭐 괜찮아 보이, 욱.’
 “윽?!”
 생각만 하고 말려고 했던 유지의 옆구리를 이케가 팔꿈치로 쿡 찔렀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옆을 째려보니 그에 지지 않을 만큼 험악한 얼굴을 한 이케가 턱으로 앞을 가리킨다.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이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 된 사토와 타나카를 무시하고, 두세 발짝 앞을 달리는 요시다에게 말을 건다.
 “……요, 요시다. 정말 힘들면, 꼭 말을 해야 해.”
 그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요시다는 굉장한 기세로 뒤돌아보더니 정상적이었던 호흡이 흐트러질 만큼 동요하며 띄엄띄엄 대답했다.
 “엇, 아, 알았, 어. 괜, 찬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호감을 대놓고 드러내는 그 모습을 보며 유지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유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케는 투철한 봉사 정신으로 그런 그녀를 돕고 있었다. 유지에게 일생일대의 고백을 한(요시다 본인은 생각은 그렇다) 한 달여 전부터 이 두 사람은 협동해서 유지가 아닌 강적 히라이 유카리와 대결하고 있었다.
 이에 히라이 유카리인 샤나도 요시다에 대해 강렬한 대항 의식을 불태우고 있다. 있지만,
 ‘질투를 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하기에는 아무래도 샤나의 마음을 잘 모르겠……, 아니 뭐 음음…….’
 어쨌든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시소의 가운데 추처럼 부담을 갖게 된 유지는 사실 몹시 난감했다.
 물론 요시다가 좋다. 고즈넉이 핀 들꽃 같은 청초함, 마음이 포근해지는 미소나 상냥함까지 갖춘 데다 맛있는 도시락까지 싸다준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아니야……. 본체는 이미 죽었어……. 여기 있는 나는 그저 잔재일 뿐인데……, 이런 내가 그녀의 호의에 응해도 될까.’
 거기서 유지의 사고는 정지해버렸다.
 그런 한편.
 샤나(왜 자기가 뒤에 가는 거냐며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도……, 뭐 물론 좋다(그 애매한 침묵과 표현은 또 뭐냐고 호통치는 소리가 이하 생략). 존경과 동경을 동시에 품게 만드는 엄청난 힘과 압도적인 카리스마, 그리고 이따금 엿보이는 연약함과 애처로움.
 그러나,
 ‘앞으로의 나는……, 언제쯤 그럴 자격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다는 그런 계산적인 생각으로 그녀에게 매달려도 되는 걸까.’
 역시 유지의 사고는 또 멈춰버렸다.
 결국은 어느 쪽에도 확실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이유일까. 아니다. 그런 거라면 샤나에게는 사선을 넘나들 때마다 크고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애정일까. 요시다에게 느끼는 호의도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미련일지도 모른다.
 생각은 꼬리를 물며 헛돌고 있었다.
 상대방의 호감에 어리광을 부리는, 자의식 과잉의 어정쩡한 고민…… 이란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고민하면 안 되나? 라고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대답이 안 나오니 고민할 수밖에 없잖아.’
 등등, 논리보다는 변명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유지는 옆구리를 문지른다.
 ‘그러고 보니 요시다가 날 좋아하게 된 건 이 체육 수업에서 샤나가 소동을 일으킨 때문이었지.’
 체육 선생이 다짜고짜 시킨(그 이유가 다름 아닌 샤나에게 있다는 건 유지도 샤나도 모른다) 무제한 달리기를 하다 쓰러진 요시다를 어쩌다 보니 샤나가 구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체육 선생도 혼내주고……. 헌데 덤처럼 붙어 있던 유지가 뜻밖에 요시다의 호감을 사게 된 것이다.
 ‘샤나가 없었다면 요시다가 날 좋아할 일은 없었단 건가? 좀 얄궂은 얘기네…….’
 그런 소동을 거쳐 예전엔 툭하면 쓸데없는 훈련을 시키곤 했던 이 수업도 이제는 눈부신 개선이 이루어졌다. 크게 봉변을 당한 체육 선생에게서는 개념 없는 권위 의식이 사라졌고 아울러 음흉한 눈빛으로 여학생들을 쳐다보는 일도 없어졌다.
 학생 측도 그 소동 이후 이 체육 선생을 무시하거나 수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물론 선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히라이 유카리 앞에서 괜한 짓을 했다간 되레 자신들에게 해가 미칠 거라는 공포도 조금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체육 선생이 적절하고 효율적인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수업을 평가할 때도, 학생들의 태반은 교사의 인격 따위가 아닌 바로 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긴다. 교사라는 인간의 본질이 어떠하든, 개선 이유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이든 공포에서 비롯된 타협이든, 쾌적한 수업만 이루어진다면 웬만한 불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슬슬 시간 다 됐다.”
 그 무의식의 개혁자인 샤나가 뭉쳐서 뛰고 있던 유지 일행의 뒤로 따라붙었다. 타나카처럼 무작정 뛰어대지 않고 자신의 몸을 데울 적절한 속도로 뛰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엔 헐렁헐렁했던 체육복도 치구사의 솜씨로 지금은 딱 맞게 고쳐져 있다. 머리는 양 갈래로 묶고 있었다.
 최근 들어 체육 시간이 되면 샤나는 반 아이들에게서 헤어스타일의 코디를 받게 되었다. 길고 예뻐서 만져줄 보람이 있는 머리라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 그녀도 딱히 싫지만은 않은 듯, 별 반응은 보이지 않지만 그 놀이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 사토의 말에 따르면 남학생들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좋은, 일이야…… 응…….’
 샤나가 다른 아이들과 점점 친해지는 모습에 유지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체육 선생의 호루라기가 워밍업 시간의 종료를 알렸다.

 결국ㅡ유지가 방금 전 사진의 생각 속에서 확인한 것처럼ㅡ인간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인가보다.
 토치가 되어버린 유지의 친구 히라이 유카리의 존재를 빌린 샤나가 이 학교에 나타난 이래 한 달 정도가 지났다.
 ‘교사에게 무조건적인 경의를 품지 않은 학생에 대한 제재’ 및 ‘되로 줬다 가마니로 받기’로 표현될 대소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던가 싶게 조용했다.
 샤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교사 쪽이었다. 그들은 각각 히라이 유카리를 다룰 효과적인 대책을 짜내어 그녀를 일상화한 것이다.
 원한다면 수업의 잘못된 점을 가차없이 지적해주는 그녀였지만 괜한 간섭만 안 한다면 무해한 존재였다. 무시하고 있으면 쓸데없는 풍파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의 태반은 그저 ‘직장인’일 뿐 누군가가 우상으로 여겨주길 바라는 ‘성직자’ 같은 허구의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활이나 주체성을 걸면서까지 학생 하나의 수업 태도에 연연할 기운도 시간도 의욕도 없었다.
 다만 개중에는 자신이 ‘교육자’라는 정확한 인식을 갖고 그녀와 대대적으로 의견을 나눠(라고 말하기엔 너무 일방적이지만) 그 기능 향상을 불태우는 예외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일부의 예외이긴 했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런 현상의 여파라 해야 할지 혜택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효율적이고 의욕 넘치는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따금 일으키는 소동을 제외한다면 샤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아주 고마운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아무리 호되게 당한 교사라도 그녀의 행동이 이유없는 중상모략이나 젠체하는 반항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당초엔 무시하기로 결심했던 교사들 중 몇몇도 아주 조금씩 그녀의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교사들 사이에 교육의 이상을 추구하고픈 사기가 충천해졌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분한 수업이 조금 줄었다는 정도일까.

 1학년 2반 학생들이 트랙 중앙에 모였다.
 전엔 완벽하게 정렬할 때까지는 한 마디도 안 했던 체육 선생이었건만 지금은 잡담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좋아, 잘 들어. 오늘은 자유 경기로 하겠다.”
 실은 그가 담당한 반의 체력 측정은 같은 학년에 한 명 더 있는 체육 선생 쪽에 비해 꽤 빨리 끝나버렸다. 이것은 그 진도를 맞추기 위한 차원의 시간 죽이기였다. 물론 그렇게 된 사연이 나오면 여러모로 기분이 나빠지니까 말하지 않기로 하자.
 “우선은 이 트랙 안의 코트에서 할 수 있는 걸로 한다. 다들 의견을 내봐.”
 “자유 시간은 안 됩니까?”
 학생 한 명이 말하자 주변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다른 반이 코앞에서 측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안 된다.”
 의견을 모으려 해도 결국엔 잡담이 되고 마는지라 체육 선생은 재빨리 진행시킬 방법을 채택했다.
 “그럼 끝에서부터 한 사람씩 하고 싶은 경기를 말해.”
 학생들은 각자 생각난 것, 하고 싶은 것을 순서대로 말했다. 야구처럼 도구를 갖춰야 해서 귀찮거나 농구처럼 체력 소모가 심한 것은 주변에서 불만이 나왔고, 축구처럼 넓은 장소를 필요로 하는 의견은 체육 선생이 퇴짜를 놓았다. 우선은 그런 여과 작업을 마치고 한 번 더 순서를 돌아 추천받은 경기 중에서 다수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결국은 피구라는 초등학생 같은 결론이 나왔다.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시간 죽이기인데다 손쉬운 점이 좋았다. 모두들 규칙을 알고 있으며 남은 인원이 주변에서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지지도가 높았다.
 단 규칙 건에 관해서는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피구?”
 새로운 경기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랬지만 이번에도 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히라이는 이것도 몰라?”
 “아, 내가 가르쳐줄게.”
 “전에 했던 소프트볼보다 훨씬 간단해.”
 이젠 으레 그렇듯 여학생들이 그녀의 주변에 모여들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체육 선생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야, 떠들지 말고 팀을 짜라. 남녀 섞어서 출석 번호 순으로 해. 이렇게 하면 히라이가 들어간 팀은 나중이 되니까 그 사이에 같은 팀 녀석이 설명해줘.”
 그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고 아마 자각했다면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겠지만, 아이들을 다루는 그의 솜씨는 소동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능숙해져 있었다.
 네에, 하고 어깨너머로 혓바닥을 날름 내밀거나 얌전히 따르거나 하는 사이에 A부터 E까지 다섯 팀이 짜였다. 출석 번호순으로 이케 하야토가 A팀, 사카이 유지와 사토 케이사쿠가 B팀, 타나카 에아타가 C팀, 히라이 유카리이자 샤나가 D팀, 요시다 카즈미가 E팀이 되어 완벽하게 갈라졌다.
 이윽고 간단한 토너먼트 규칙을 정하거나, 운동장에 대강 금을 그어 라인을 만들거나 하는 짧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피구가 시작되었다.
 첫판은 이케가 들어간 A팀과 유지와 사토가 들어간 B팀의 대결이다.
 그동안 다른 팀은 주변에 앉아 관중이 되고, 샤나에게는 같은 D팀의 학생들이 피구의 규칙에 대해 설명한다. 처음엔 샤나라는 특이한 존재를 폭탄 다루듯 조심조심 대했던 반 아이들도 요즘엔 친해져서 그녀를 존중하면서도 쓸데없이 경계하진 않게 되었다.
 어느 새 유지도 비상식적인데다가 뭔가를 결심하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그녀와 따로 떨어졌다고 불안해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 대신 다른 기분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코트 안을 떠돌던 유지의 시선 끝자락에 D팀의 학생들이 샤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모습이 스쳤다. 아까 달리기를 할 때도 느꼈던 기분 나쁜 뭔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쓸쓸함과 불쾌감이 뒤섞인 듯한 찜찜한 감정.
 ‘샤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때 남학생 하나가 분위기를 타고 몸을 내밀며 샤나에게 말을,
 ‘ㅡ이?!’
 “앗, 이 바보야!”
 옆에서 사토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어, 컥?!” 어느 새 멈춰 서서 옆을 바라보고 있던 유지는 뺨에 엄청난 기세로ㅡ심판을 보고 있던 체육 선생이 쾌재를 부르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ㅡ공을 맞고 얼간이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우왓! 사, 사카이. 괜찮아?”
 소리지른 것은 공을 던진 이케였다. 이렇게나 정통으로 맞힐 줄은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렇게나 정통으로 맞힐 줄은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체육 선생도 달려와 응급 조치를 하려 했지만 유지는 요란스레 환자 취급을 받는 것이 부끄러워져서 후다닥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가벼운 뇌진탕이다. 안면 규칙 같은 걸 말할 때가 아니군. 앉아서 쉬어.”
 지금만큼은 체육 선생 말이 옳았다.
 유지는 풀이 죽어 네 라고 대답하고는 터덜터덜 걸어나가 동정 섞인 웃음을 들으며 아웃된 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합류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D팀의 여학생들이,
 “어머, 좀 깬다.”
 “요새 사카이는 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좀 그러네.”
 라고 함부로 지껄여댄다. 샤나의 앞인데도 개의치 않는 것은, 반에서 반쯤은 공인된 사이라고 해도 유지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유난히 매섭고 때론 무관심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샤나는 이때도, 어디다 정신을 판 거야 하고 눈썹을 찌푸린 것이 전부였다. 물론 유지가 보인 추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채.
 이윽고 이케네 A팀이 이겨 타나카가 있는 C팀과 샤나의 D팀이 코트에 들어갔다.
 B팀에서 마지막까지 활약했던 사토가 유지에게 “대체 왜 그랬어” 하고 투덜거리고 있는 뒤로 긴장과 흥분이 피어오른다.
 “힘내, 타나카!”
 “와, 기다렸어, 대장!” “히라이, 힘내!” “힘만 장사인 애한테 지지 마!” 타나카 에이타 VS 히라이 유카리.
 이런 식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되풀이되며 펼쳐지는 학급 규모 일대 이벤트의 시작이었다.
 인간은 그 발끝조차 따라갈 수 없는 신체 능력의 소유자인 플레임헤이즈 샤나는 체육 시간 같은 때에 그 힘을 발휘하면 여러 모로 상황이 불리해진다는 것을 이른바 그 소동 이후 유지에게서 배웠다.
 그 대비책으로 그녀는 엄정한 심사를 거친 끝에, 이 학교에서 ‘최강 고수’(라는 거창한 표현을 썼다)로 인정받은 타나카에게 단순한 완력에서부터 반사 신경, 몸놀림 등 신체 능력의 수준을 맞추기로 했다.
 “아직 1학년인데? 타나카가 그렇게 엄청난 녀석이었구나.”
 라고 유지가 멍청하게 감탄하자 샤나는,
 “그런 눈썰미도 없다니 아직 한참 멀었어.”
 라고 가볍게 무시했다.
 어쨌든 그녀는 제 아무리 불리하거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더라도 그 규범을 벗어나지 말자고 결심했다. 아무래도 ‘적당히’라는 개념이 싫었던 것이다.
 정정당당한 승부가 어떻다느니 하는 차원이 아니라, 불리한 계략에 걸려들거나 부상당했을 때에 대처하는 법을 훈련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모양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두 사람의 승부가 몹시 긴박해지리란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물며 피구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피구는 낮은 연령층도 경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얕잡아 보기 쉽지만, 대등한 힘을 겨루는 실력자가 양 팀에 있으면 서로의 직접 대결이 끝없이 이어져 아주 치열한 스포츠가 된다.
 샤나는 앞서 말한 이유로 인해 늘 진지하다.
 타나카는 유난히 승부욕이 강한 남자다.
 즉 둘 사이에 어설픈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장마의 푹푹 찌는 공기 탓만이 아닌 이상한 열기가 코트에 넘쳤다. 남녀 혼합 경기라, 보통은 다른 여자애들처럼 외야에 자리잡았어야 할 샤나는 아니나 다를까 내야에 있었다.
 가위바위보로 공을 잡은 타나카가 센타 라인을 가운데 두고 장승처럼 대치하고 있는 샤나에게 도발적인 어조로 말한다.
 “후후후, 소프트볼에서 아웃당한 빚은 오늘 이 자리에서 갚아주마. 그렇다고 울지는 마, 히라이. 내가 나쁜 놈이 되니까.”
 붉은 눈에서 당장이라도 홍련의 광채를 내뿜을 듯한 서슬로 샤나가 대답한다.
 “흥, 어차피 지는 쪽은 정해져 있으니까 괜한 기운 빼지 말고 항복하시지그래? 살살 맞혀줄게.”
 높이 차이가 꽤나 나는 두 사람의 시선이 격돌함과 동시에 떨어진다.
 “ㅡ자, 시작!” 체육 선생까지 진지한 목소리로 외치며 호루라기를 분다.
 격투가 시작됐다.
 “타나카! 이런 데서 지면 안 돼!!” 사토가 둘 사이에만 통하는 의미로 분발해야 하는 친구를 응원하기 위해 소리질렀다.
 그를 비롯해 반 아이들 전원이 샤나와 타나카의 격돌에 열중하고 있었다. 시간 죽이기라고는 해도 승부가 걸려 있고, 게다가 이렇게 불꽃 튀기는 게임이라면 재미있기 마련이다.
 대개 남자들은 타나카, 여자들은 샤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딱히 체면을 따지거나 역상을 드느라 그러는 것은 아니다. 대결 구도가 단순한 편이 더욱 흥미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 테두리 밖에 앉아 쉬고 있는 유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저어, 얼굴, 괜찮니?” 요시다였다.
 “아아, 응.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만 멍이 좀 든 것 같아…….”
 요시다는 유지의 옆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여전히 빨갛게 부어있는 뺨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본다.
 “뭐, 이 정돈 매일 아침 질리도록ㅡ, 이크!” “응?” “아, 아니, 아무튼 별 거 아냐.”
 하마터면 입을 잘못 놀릴 뻔한 유지는 대충 얼버무리며 뺨을 누르려 했다.
 그러다 요시다가 뻗은 손과 닿았다.
 “앗! 미, 미안해, 피가 조금, 배어나와서…….”
 허둥지둥 거두는 요시다의 손에는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아, 나, 나야말로, 미안해! 손수건이 더러워질 텐데 됐어.” 행여 이런 장면을 샤나가 본다면 하고 생각하자 식은땀이 흘렀다. 내일 아침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오늘 밤에라도 어떤 구실을 붙여 응징을 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아.”
 유지의 거절을 체면치레라 여기며 말을 계속하려던 요시다의 뺨에 커다란 빗방우리 한 방울 떨어졌다.
 “으앗, 비다.”
 유지는 벌떡 일어났다.
 대낮의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에서 요란한 소음과 함께 무수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은 아니고, 이따금 샤나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엄청난 강속구로 잔챙이들을 일거에 쓸어낼 셈인 타나카가 두 사람을 격파하고, 샤나가 교묘한 페인트로 타나카 다음가는 성가신 적을 한 명 격파해서, 이제 게임에도 두 사람의 직접 대결 무드가 서서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은 팀원들에게 자신의 수비 범위를 가르쳐주고 그 범위 밖으로 날아가는 공만을 잡게 하도록(이미 이 경기의 핵심을 파악한 것이다) 지시를 내리려 하던 샤나의 눈에,
 “!”
 유지와 요시다의 손이 맞닿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ㅡ?!”
 샤나는 놀라서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손수건이 보였지만 샤나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둘의 맞닿은 손, 그것만이 들어왔다. 단지 그뿐인데도 왠지 폭발할 것 같은 노여움과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발길이 멎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그런 속내를 모르는 타나카는 그것을 허점으로 보았다.
 ‘이때다!!’
 괜한 기합 소리로 상대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 타나카였다.
 “ㅡ앗.”
 히라이 하고 팀원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샤나는 공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으앗?!” 몸을 피하기엔 거리가 너무 짧았다. 자세를 바로잡을 틈도 없었다. 타나카의 강속구를 불완전한 자세로 받아내며 저만치 튕겨나간 샤나는 세차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차!”
 하지만 공은 자그마한 몸에 단단히 안겨 있었다.
 “……이건 세이프지?”
 “크아! 뭐 이리 끈질긴 녀석이 다 있냐, 진짜!” 3류 악역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타나카가 발을 굴렀다.
 어쩌면 오늘 하루 중 최대의 구경거리였을 이 장면에 관중들도 열을 올렸지만, 갑자기 쏟아진 폭우가 그들의 머리에 문자 그대로 찬물을 퍼부었다.
 “으앗, 비?!” “앗, 차거, 으앙.”
 “우와, 세다!” 마구 우왕좌왕하는 반 아이들의 한가운데에서 타나카가 엉덩방아를 찧은 모습 그대로 앉아 있는 샤나에게 제안한다.
 “야, 히라이, 있잖아.”
 물론 시합 속행 요청이다. 흐지부지 끝나는 것도 싫었고 회심의 강속구가 먹히지 않은 것도 분했다. 끝을 보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았다.
 “나야 괜찮지.”
 공을 껴안고 앉아 있는 샤나도 타나카를 올려다보며 대담하게 대꾸한다. 답답하게 끓어오르는 기분 나쁜 울분을 이 승부로 한껏 날려버리고 싶었다. 물론 유지에게 날릴 몫은 따로 남겨두었다. 이것은 나중에.
 다른 반은 비가 내리자마자 일찌감치 운동장에서 달아났지만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남자아이들은 좋아하며 환호성을 지른다.
 “좋아ㅡ, 해! 해!”
 “이런 빅 매치에 중단이 웬 말이냐!” 여자아이들은 모두 당장에라도 자리를 뜨고 싶어했지만 한 명의 외침에 정세가 바뀌었다.
 “아앗! 히라이, 엉덩이, 엉덩이!” “응?”
 샤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갑작스런 폭우 덕에 그녀의 작은 엉덩이는 흙탕에 잠기다시피 젖어 있었다. 긴 양 갈래 머리도 땅에 드리워져 진흙범벅이 되어 있었다. 당사자는 별 생각 없이 일어나 흙을 툭툭 털었지만 주위를 둘러싼 여자아이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꺄아, 너무해!”
 “어머, 흙투성이야!” “타나카, 너무한 거 아니니?” 대소동이 일어났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넘어뜨린 건 비가 오기 전이라고!!”
 타나카로서는 드물게 앞뒤가 맞는 변명을 해보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
 “우와, 변명하는 것 좀 봐!”
 “해도 너무한다!”
 순식간에 엄청난 악당으로 등극하고 말았다.
 “괜찮아,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뭐.”
 사토가 거들고 나섰지만,
 “뭐니, 사토? 여자의 적을 감싸는 거야?”
 “아니, 그럼 알아서들 하세요.”
 여자의 한 마디에 얌전히 꼬리를 내린다.
 “야, 이 배신자!” 타나카 비통한 절규를 내지른다.
 그러나 그 절규를 무시하고,
 “아, 맞다!” 여자아이들 중에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소녀 하나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동아리방 샤워실 쓰지 않을래? 그거 히터로 속옷을 말릴 수 있고 사물함에 수건도 잔뜩 쌓여 있어.”
 “아, 우리 마음대로 그래도 될까, 오가타?”
 “괜찮아, 선배들도 이런 때는 졸라서 썼다고 그러던데 뭐.”
 “과연 1학년 정규 멤버 오가타야! 멋져!” “여자 배구부 기대 유망주는 어둠의 팁도 빠삭하구나!” “선생님, 괜찮죠?” “선생님!” 여학생들은 꾸역꾸역 몰려들어 체육 선생을 에워쌌다. 자신들의 차림새에 문제가 생기면 여성의 박력은 급속도로 커진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시간도 넉넉했다. 점심시간까지 족히 30분, 샤워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 하, 하지만~.”
 망설이는 체육 선생에게 어둠의 팁 전파자인 오가타가 말한다.
 “이러다 아이들이 감기에 거리면 선생님도 탐탁지 않으시죠? 벌로 나중에 체육 용구실 청소도 할게요. 부탁드립니다!” 힘껏 머리를 숙였다. 운동부 내에서 비밀리에 전수되는 어둠의 팁에는 이 동작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사에게 학생의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는 대의명분을 제시함으로써 쌍방의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이다(물론 여자 배구부의 전통에 따르며 벌의 집행은 남자에게 넘기게 되어 있다).
 사실상 샤워에 대한 융통성은 체육 선생에게 있어서도 반쯤은 암묵적인 전통이었다. 새파란 1학년이 그런 요구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이 반은 워낙에 별나니까 하고 체념한 체육 선생도 마지못해 승낙했다.
 “으음……, 할 수 없지. 보일러를 틀고 올 테니까 들어갈 놈들은 샤워실 앞에서 기다려. 열쇠를 갖고 가마.”
 자신은 샤워할 수 없음을 잘 아는 체육 선생은 젖어봤자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부리나케 관리실로 달려갔다.
 오가타가 길고 나긋나긋한 손을 흔들며 여자 전원을 불러모았다.
 “야호! 다 같이 들어갈까? 젖은 속옷 금방 말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줄게.”
 “그래, 얼른 가자, 가자.”
 “으으, 벌써 속까지 흠뻑 젖었어.”
 여자들은 발밑을 조심하며 진창이 된 운동장을 떠나려 한다. 남자들도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기다려.”
 폭우 속에서도 똑똑히 들리는 샤나의 한 마디가 전원을 그 자리에 멈추게 했다.
 “1대 1이라도 좋으니까 마지막까지 승부를 겨루자.”
 “ㅡ좋아!! 그래야 히라이지!” 억울하게 뒤집어쓴 오명을 승부로 벗어야겠다는 듯 타나카가 으르렁거렸다. 자신이 이겼을 때……, 특히 그런 상황에서 여자를 대해야 할 경우에는 아직 생각을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타나카의 승부욕은 안중에 없고, 단지 히라이가 그러자니까 따르자는 쪽으로 여자들의 의견도 모였다.
 남자들에겐 애당초 이견이 없었다. 어차피 나중에 말릴 건데 하는 느긋함이 더해져 반 전체가 빗속의 결투에 주목한다.
 그 관중의 중심에서 공을 가진 샤나와 타나카가 대치한다. 이미 라인은 폭우에 잠겼다. 규칙은 둘 중 하나가 공을 받아내지 못하면 끝이라는 단순한 것이 되었다.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 “…….” 마치 시대극의 결투 장면처럼 두 사람은 천천히 작은 동심원을 그린다.
 얼굴을 때리고 눈 안으로 들어오는 빗물. 샤나는 얼굴을 앞으로 살짝 기울여 앞머리로 떨궈내고, 타나카는 요령 없이 두 팔을 이마에 대고 막아낸다.
 “후ㅡ웃.”
 “…….” 타나카는 숨을 뿜어내며 온힘에 힘을 채우는 샤나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진탕 속의 발 끝에 체중을 싣는다. 동시에 한 손으로 공을 받을 자세를 취한다. 날아온 공을 배로 받아내 그대로 두 팔로 껴안는 전법이었다.
 “읍!” 샤나가 갑자기 작은 모션을 취하며 공을 던졌다.
 ‘와라!’
 이마에 대고 있던 팔을 재빨리 내려 받아낼 충격에 대비한다.
 헌데,
 샤나의 공은 엉뚱한 방향으로 던져진 것이다. 발치의 흙탕을 크게 튀기며 공을 동동 튀기고 있었다.
 ‘페…….’
 첫 번째 예측이 빗나갔다. 늘 던지는 궤도보다 조금 아래로 비껴나 있었다.
 두 번째 예측이 빗나갔다. 받아내서 제대로 던질 줄 알았던 모션이 조금 빨랐다.
 ‘……인트?!’
 가까운 거리에서 반사된 공은 마치 어퍼컷처럼 타나카의 턱을 강타했다.
 타나카는 뒤로 나동그라져서 흙탕물 바다에 문자 그대로 녹아웃.
 샤나가 이겼다.

 폭우보다 가벼운 물소리 속, 축축한 반향에 묻힌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시끌벅적했다.
 “굉장했어! 마지막에 슝 날아가는데 꼭 땅에서 솟구쳐나오는 거 같더라!” “팔 좀 흔들지마!” “뭐야, 뜨거운 물 좀 더 틀까?” “뜨거뜨거! 잘했지?” “호들갑 좀 떨지 마. 좁으니까!” “아하하, 타니가와는 지고 나니까 ‘보통 피구 시합에서는 저러면 안 돼’라고 툴툴거리더라. 쫀쫀하긴.”
 그 말을 바깥에 다 들리고 있었다.
 대화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불필요한 소리까지.
 “……저, 이케.”
 “……말하지 말래도.”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없다.
 어떡하면 저렇게 지치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나 싶어서 두 사람은 기가 막혔다.
 “히라이 선생님, 그 점에서 뭔가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빗속이니까 그 방법을 쓴 거야. 맑은 날엔 맑은 날대로 또 수법이 있어.” “꺄아! 들었어? 진짜 멋지다!” “뭐, 타나카도 ‘안면은 무효’ 같은 변명은 안 하더라. 은근히 다시 보이는 거 있지.”
 “덕분에 이렇게 다 같이 샤워할 수 있고.”
 “하지만 히라이 바지에 흙물 밴 거, 대강 빨아가지곤 지워지지 않겠던걸?”
 “흙만 털어내면 돼. 그나저나 저 빨간 테이프 선 이상으로 접근했다간 오그라드니까 조심해들.”
 “네엣, 오가타 교관님. 덕분에 바싹바싹 마르고 있습니다아!”
 “드라이어 써도 돼?”
 “응.”
 그런 떠들썩함을 조금도 걸러주지 못하는 얇은 알루미늄 문짝에 유지와 이케가 등을 대고 앉아 있다. 둘 다 체육복 차림 그대로이다.
 떨떠름하면서도 지겨워 보이는 표정으로 나란히 앉아 동아리방 복도를 멀거니 응시하고 있다. 완전히 닫힌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은 꽤 잦아들었다. 폭우는 지나가는 비였던 모양이다.
 ‘이게 무슨 생난리야……. 딱 한 시간만 늦게 내렸어도 좋았을걸.’
 유지가 그런 별 볼일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가능하다면 듣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 마구 새어나온다. 한숨에 목소리를 실어 다시 살짝 묻는다.
 “……뭐랄까, 이거 고문 같지 않냐?” “어떤 게?” 이케가 되묻는다. 뒤에서 들리는 소란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대화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 제일이었다.
 “어떤 거냐니?” “그러니까 소리만 들리고 보이지 않는 거, 아님 듣고 싶지 않은 걸 강제로 듣는 거?” 유지는 그 바보 같은 선택을 놓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 이윽고 무성의하게 대답한다.
 “둘 다.”
 “아, 그래?”
 이케의 대답도 무성의.
 조금 전, 남녀 구분이 없는 샤워실을 어떻게 써야 하느냐에 대해 다소 말썽이 있었다(운동부의 어둠의 팁도 여기까지 미치지는 못한 모양이다). 남자들도 당연히 들어갈 생각이었다. 완전히 나뒹굴어 온통 흙투성이가 된 타나카도 타나카였지만 워낙에 전원이 폭우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리 교대를 한다고 해도 ‘같은 욕실을 쓴다’는 그 행위 자체에 여자들이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대화는 꼬이기 시작했다. 체육 선생은 문을 열어주자마자,
 “나중에 열쇠 꼭 갖고 와라.”
 이 말만 남기고는 내빼버렸기 때문에 자연히 모두의 시선은 반장이자 공명정대한 안경맨 이케 하야토에게 쏠렸다.
 “나도 흠뻑 젖었으니 샤워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야.”
 이케가 말하자, 그 의견은 타나카보다 갑절은 호소력을 띠었다. 거기에 이어지는 제안도 합리적이었다.
 “우선 우리가 먼저 들어가도록 할게. 우리들은 흙만 털어내면 되니까 사용시간도 짧고, 너희들은 너희들 다음에 우리가 들어가는 게 기분 상 찝찝할 거 아냐?”
 아무도 불만은 없었다.
 “너희들은 씻으려면 어려 가지로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교실에 그거 가지러 가면 되겠다. 우린 너희들이 갔다오는 시간에 여길 쓸게. 체육복은 짜서 갖고 갈 테니 괜찮고……. 오가타, 히터로 속옷 말리는 법 좀 가르쳐줘.”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그 뒤 샤워를 교대하면서 오가타한테 붙들리지만 않았다면.
 그녀가 교실로 돌아가려는 이케를 불러 세웠다.
 “이케, 여기서 망 좀 봐줘.”
 “응?” “너희들 쓸 때 못 느꼈어? 여긴 바깥에서밖에 못 잠가. 특별 활동 때는 여자들끼리 교대로 망을 봤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잖아. 수업 중이니까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것도 반장의 임무야?” “남자니까 부탁하는 거야.”
 오가타는 귀엽다기보다는 멋지다는 표현이 어울릴 윙크를 해보였다.
 “……남자라고 생각해서 샤워실의 망……?”
 뭔가 치명적인 논리상의 모순을 느끼며 이케는 멍해졌다.
 오가타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자아이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이케가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있나.”
 “안경맨은 정의의 편이잖아.”
 아 하고 오가타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친다.
 “옳지! 그럼 사카이랑 같이 해라!”
 “잉, 나?” 화살의 과녁이 된 유지가 어벙하게 소리질렀다.
 “이케랑 친구잖아. 그리고 행여 음흉한 짓을 했다간 패줄 사람, 울어버릴 사람 하나씩 있고.”
 당황하는 유지의 앞에서 맞아, 맞아 하고 몇 명이 끄덕인다. 그 속에 있던 샤나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요시다는 벌벌 떠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강요하듯 오가타가 말한다.
 “됐지? 그럼 된 거지?” 이런 이유에서 되고 말았다.
 ‘여자들이 몰아세우면 이상하게 약자가 된단 말이야. 대체 왜 그럴까.’
 유지는 현실도피성 생각에 잠겼따.
 등 뒤에서 또 대화가 들려온다.
 “어머, 카즈미는 옷 입으면 말라보이는 타입이구나.”
 “어머, 진짜?”
 “아, 너무 보지 마.”
 “뭐 어때, 요시다. 확 만져버릴까보다.”
 “와, 나두우~, 이얏.”
 “꺄아.”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콜록 하고 이케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뭔가 말하려 하는 순간,
 등 뒤에서 귀에 익은 작고 낭랑한 소리가 들려온다.
 “큰 게 좋아?”
 “그야 그렇지. 남자들은 전부 이걸 보는 것 같던데?”
 “그, 그러니까 만지지 마…….”
 “뭐 히라이는 그 나름대로 귀여운걸.”
 “응, 되게 예뻐. 빈말이 아니야.”
 “……잘 모르겠어.”
 “어머머? 사카이도 참 몹쓸 녀석이네.”
 “광역 수비형 인기남 아냐? 얼굴은 순진해 보이는구만.”
 “으하하, 들리면 어쩌려고 그래.”
 ‘들린다고 말해주면 볼 만해지겠군.’
 이윽고 이케가 말했다.
 “저기, 사카이.”
 “응?”
 “히라이가 좋아?” “!!”
 유지는 무심코 알루미늄 문째 뒤로 쓰러질 뻔했다.
 “너, 너, 지금 같은 때ㅡ.”
 반박하려던 유지는 이케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깨닫고 말을 끊었다.
 “어때?”
 추궁이 아닌 화긴.
 유지는 그 물음에 정확한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알루미늄 문 너머로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자신의 현재 상태를 최대한 말로 표현해본다.
 “그, 그건 확실히 이거다 하고 알 수 있는 게 아닌걸.”
 “흐음……, 과연 옳고 그른 건 나중 문제고 재미있는 의견이긴 하네?”
 유지는 그런 의기양양한 얼굴에 대한 보복으로 묻는다.
 “아까 체육 시간에 나 쉬고 있는데 요시다가 왔더라? 네가 사주한 거지?”
 “어? 왜 그렇게 생각해?”
 “요시다가 그런 거 하러 제 발로 올 리가 없잖아, 컥?!” 느닷없이 이케가 유지의 가슴을 퍽 때렸다.
 “요시다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그 애도 있는 힘껏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고.”
 “뭐?” 그럼 요시다가 자발적으로? 당황하는 유지의 질문에 이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꽤 오랜 침묵을 지킨 뒤, 여전히 시끌벅적한 여자들을 등지고 이케는 말했다.
 “확실히 이거다 하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과연…….”
 “…….” 비는 개어 있었다.


 3. 천 갈래의 행로
 미사키 시 시가지의 빌딩 숲은 폭우가 쏟아진 뒤에도 여전히 개지 않는 먹구름 속에 음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아래 그물망처럼 뻗어나간 도로 역시 한 차례 쏟아진 물벼락을 맞고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바야흐로 저녁의 피크를 맞이하려는 인파가 얕은 웅덩이는 뛰어넘고 깊은 웅덩이는 피하면서 분주하게 왔다갔다한다.
 인파가 흐르는 대동맥이라는 비유가 잘 어울리는, 시의 중앙을 관통하는 대로의 넓은 보도 위를 유난히 눈에 띄는 세 명의 외국인이 걷고 있었다.
 비단 이 거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폐쇄적인 기질과 구조를 가진 일본이란 이 나라의 특성상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들은 충분히 눈에 띄었겠지만, 그들의 모습은 그 이상으로 특별했다.
 “정말이지 일본인이라는 것들은 왜 이렇게 남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는 거야? 검소하고 근면하다는 소문은 어두운 곳에 콕 틀어박혀 갑갑하게 사는 걸 듣기 좋게 해석한 것 아니야?” 한 명은 리본으로 장식된 드레스와 챙 넓은 모자로 늘씬하고 가녀린 몸을 꾸민 프랑스 인형 같은 미소녀. 물결치는 금발로 고집 세어 보이는 미모를 감싼 ‘애염타’ 티리엘이었다.
 “다들, 다들 보고 있어, 무서워, 티리엘.”
 또 한 명은 기품 있는 암적색 양복 차림에 ‘도련님’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티리엘과 꼭 빼닮은 금발의 미소년 ‘애염자’ 소라토. 그러나 그는 누이동생과는 대조적인 연약한 모습을 보이며 그녀의 소맷부리에서 꼭 매달려 덜덜 떨고 있었다.
 “너희들 모습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거야. 용모 자체야 본질에 맞는 모습이니까 그렇다 쳐도……, 아무튼 패션이 너무 화려해.”
 마지막 한 명은 짙은색 정장을 입은 훤칠한 장신의 남자. 조각 같은 이목구비에 선글라스를 끼고 백금발을 깨끗하게 뒤로 넘긴 모습. 그는 섬뜩한 기운을 전신에서 풍기는 ‘천변’ 슈드나이로 마치 보디가드처럼 남매의 뒤를 따르고 있다.
 “꽃이 제 아름다움을 뽐내겠다는데 주저할 필요 없잖아?” 말 그대로 티리엘은 꽃처럼 웃는다.
 “이렇게…….”
 매달리는 오빠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푸른 눈동자 속에서 힘을 끌어낸다.
 “나의 ‘크레들 가든’의 비호를 받는 주제에 잘난 척 말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눈동자 속에서 황금색 광채가 일렁인다.
 그 황금색이 광채를 더해감과 동시에 그들 세 명의 몸 표면에서 뭔가가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니, 처음부터 몸을 한 꺼풀 감싸듯하며 날리고 있던 것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황금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무수히 많은 나뭇잎. 겉보기에는 가련한 나뭇잎이지만 강한 힘이 느껴지는 빛의 난무였다. 잎사귀들은 그들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면서 가벼운 바람에라도 휘말린 듯 빙글빙글 돌다가 점차 그 밀도와 속도를 늦추면서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 나뭇잎의 난무는 어느 새 멈춰 선 그들을 중심으로, 꽤 넓은 보도를 전부 가로막을 정도의 돔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정지한다.
 직경은 7, 8미터정도 될까. 이 돔 바깥의 인파는 그 내부를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그곳은 통과할 수 없는 장소가 되며, 이에 맞닥뜨린 사람들은 멀리 돌아가거나 발길을 돌린다.
 봉절과 비슷한 효과를 낳는, 황금빛 나뭇잎에 의한 이 방어진이야말로 ‘애염타’ 티리엘이 자랑하는 자재법 ‘크레들 가든’이었다.
 이 방어진은 통상의 자재법과는 달리 주위에 세상의 위화감, 즉 플레임헤이즈가 ‘홍세의 무리’를 쫓을 때 단서로 삼는 기척을 흘리지 않는다. 평소엔 대상자의 몸만을 뒤덮고 포식할 때는 범위를 넓혀 봉절 대신이 된다. 하지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은폐해서 절대 플레임헤이즈의 눈에 띄지 않는……, 그야말로 티리엘이 갖고 있는 존재의 본질, ‘익애의 포옹’의 구현이었다.
 그 황금색 빛을 선글라스로 반사하며 슈드나이는 입가를 치켜올렸다.
 “후후, 비호라, 덕분에 쓸데없이 플레임헤이즈와 맞닥뜨릴 일은 없지만, 너희들도 나를 호위에 이용하고 있으니 결국은 기브 앤 테이크 아닌가?”
 강력한 ‘왕’이며 다른 ‘홍세의 무리’와 달리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슈드나이는 세상에 흩뿌리는 위화감, 즉 그 기척도 컸다. 하지만 그도 이 ‘크레들 가든’ 안에 있는 한 플레임헤이즈에게 쫓길 위험은 없었다.
 그 점은 고맙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맹목적인 복종은 그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애염의 남매’도 그러하거니와 이 세상에 침입해 있는 ‘무리’들은 조금 덜하다거나 혹은 조금 심하다거나 하는 식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제멋대로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슈드나이의 태도에 티리엘은 콧방귀로 대꾸했다. 대답이 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저, 저기, 티리엘. 이제 먹어도 돼?” 그녀의 소맷자락을 소라토가 잡아끈다.
 “네에, 오라버니.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어요?”
 방긋 웃으며 대답하더니, 그녀는 손가락을 두 개 나란히 입술에 잠시 댔다가 우아하게 떼었다. 뗀 손가락과 입술 사이에 리본 같은 황금의 빛이 한 줄기 뻗는다.
 복잡하게 얽힌 문자열로도, 입체적으로 짜맞춰진 기호로도 보이지 않는 그 리본 형태의 빛은 ‘자재식’. ‘존재의 힘’을 조종하여 신비로움을 일으키는 ‘자재법’, 그 힘의 흐름의 상징이며 또한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무슨 자재식이지?” 슈드나이가 묻는다. 그가 이 남매의 의뢰를 받은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이들이 끌어내는 알맹이가 어떤 것이고, 또한 어느 만큼 있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다.
 이에 어린애 같은 우월감을 느끼며 티리엘은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다.
 “오라버니가 사냥감을 찾고 계시니 슬슬 주변의 준비를 해두는 거야. 애써 몰아넣었는데 도망쳐버리면 전부 물거품이 되잖아? 그렇죠, 오라버니?” “응, 노, 놓치지 않도록, 꼭 가둬버리렴, 우리들의 크레들에.”
 “네에, 이번에도 사냥감을 몰아넣고 실컷 괴롭혀서 약하게 만든 다음 잘라서 드릴게요……, 원하는 만큼요.”
 오빠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티리엘은 자재식을 가동했다.
 리본 같은 자재식은 광채를 내뿜으며 날아가 ‘크레들 가든’ 속에서 정지해 있던 한 사람……, 구깃한 양복차림에다 피로에 찌든 얼굴을 한 평범한 샐러리맨 같은 중년 남자에게로 파고들어갔다.
 자재식이 황금빛의 파문을 남기며 남자와 동화한 순간, 그는 갑자기 토치로, 즉 겉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죽음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최소한의 ‘존재의 힘’만으로 토치인 그 몸을 유지하고 그 밖의 모든 힘은 발동을 위해 몸 안에서 재구성된다.
 “자아, 오라버니. 저것만 빼고 드시면 돼요.”
 “응, 응, 잘 먹을게!”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소라토는 날아들었다. 앙 하고 크게 입을 벌리더니 ‘크레들 가든’ 안에 있던 인간 전부를 불꽃으로 만들어 먹어치운다.
 그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며 티리엘은 슈드나이에게 말했다.
 “오르골이란거 알고 있나 몰라?”
 “오르골?” 어감은 유럽 언어 같은 느낌이었지만 ‘능통의 언어’를 구사해 보니 뜻밖에 일본어였다. 외래어가 그 지방 특유의 발음으로 변해 정착된 말인 듯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껴보니 특별한 물건도 아니다.
 “……뭐야, 뮤직박스 말인가?”
 “응. 보통은 그렇게 말하지만 ‘오르골’ 이란 말의 어감이 운치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줄곧 이것도 그렇게 불러왔어.”
 티리엘의 손바닥 위에는 어느 새 나뭇결도 닳아 ?진 상태인 볼품 없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별반 특이한 구석도 없어 보이는 뮤직박스 같은 물건……, 즉 그녀가 ‘오르골’이라고 이름을 붙인 보구인 모양이다.
 슈드나이는 그녀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이 아까 그 자재법과 함께 울타리를 만들기 위한 보구인가?”
 “응. 아주 멋진 음색으로 노래해.”
 티리엘은 작은 ‘오르골’에 뺨을 대고 살짝 웃는다.
 “설마 이런 일로 그 이름을 붙여준 토지에 오게 되다니. 이 세상에서 노는 것은 이래서 멈출 수가 없다니까.”
 아름다우면서도 음산함을 갖춘 그 미소는 실로 요사스러운 꽃이 활짝 핀 광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그대로 찍어낸 것처럼 유지와 샤나의 표정은 우중충했다.
 괜한 소문이 나면 귀찮으니까 학교에서는 일단 헤어졌다가 나중에 합류한 두 사람은 둘 다 우거지상이었다.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은 채 사카이가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다.
 그 상태로 몇 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길에 인적이 드물어진 것을 넌지시 확인하고 난 샤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옆에서 걷고 있는 유지에게 묻는다. 행여 저 자세로 비칠까 두려운지 어디까지나 퉁명스럽게.
 “……왜 화내는 거야?” “너야말로 왜 화를 내는 거야?”
 유지는 무심하게 되묻는다.
 샤나는 그 뻗대는 태도에 부아가 치밀어 짧게 대답한다.
 “화 안 났어.”
 대답은 역시 쌀쌀맞다.
 “그럼 나도 화 안 났어.”
 “그럼은 또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잖아.”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대화를 끊으려는 유지의 의도를 느끼고, 샤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격렬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에 싸웠을 때 느꼈던 답답함과는 다르다.
 유지가 심술이 나 있으며, 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런 기묘한 연결과 그 연결을 서로 즐기는 듯한 긴장된 마음이 느껴진다.
 왠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뭔가 닭살이 돋는 우스운 기분이었다.
 둘 다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데.
 “그게 무슨 어린애 같은 소리야?!” 유지도 똑같은 감정(통하고 있다, 느끼고 있다)이 되어 발끈하는 바람에 말투가 거칠어진다.
 “누가 할 소리! 노는 데 낚여서 약속도 깬 주제에.”
 아픈 곳을 찔려 샤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그 약속은…… 내가…… 꺼낸 거고…….”
 “자기가 꺼냈으면 깨도 되는 거야?”
 “으…….” 오늘 체육 수업이 끝난 직후 점심시간의 일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샤나가 메론 빵과 과자류를 책상 위에 툭툭 내던지고 있으려니 피구에서 한 팀이었던 여자애가 말을 걸었다.
 “히라이, 괜찮으면 이번 일요일에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그녀를 초대한 것이다. 함께 샤워하다가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유지는 그때 자리에 없었다. 화장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샤워실의 파수꾼으로 뽑혀가서 여자애들과 함께 교실에 돌아오는 바람에 다른 곳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케는 그 옆 칸에서 갈아입고 있었다. 정의의 기사에게는 남모를 고충이 따르는 법인가보다.
 그러고 돌아와보니 샤나를 중심으로 같은 팀이었던 아이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여 있었다. 남학생 한 명이 신나서 드는 영화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샤나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따라나설 것 같은 기세로 보였다.
 그 광경을 본 유지는ㅡ사토의 증언에 의하면 ‘눈을 부라리며’ㅡ그녀의 옆자리인 자기 자리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앉더니 옆자리에 들릴랑 말랑 한 작은 목소리로 들으라는 듯 말했다.
 “아~, 이번 일요일에 바쁜데.”
 순간 샤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녀로서는 보기 드물게 허둥대더니 ‘그러고 보니 중요한 볼일이 있다’면서 그 권유를 거절했다.
 사실 샤나는 일요일에 유지를 데리고 빵집 순례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어제 하굣길에 샤나는 유지 덕에 인생 최대 규모의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빵 전문점의 메론 빵을 맛본 것’이었다.
 계기는 치구사였다. 그녀는 일전에 손수 메론 빵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샤나와 약속했지만 아직은 스스로도 흡족한 맛이 나오질 않는 모양인지 줄곧 대접을 미루고 있었다. 그 가엾은플레임헤이즈의 모습에 연민의 정을 느낀 유지가 이거라도 먹고 마음을 달래라는 뜻으로 사준 것이다.
 지금까지 대량 생산되는 비닐포장 메론 빵말고는 먹어본 일이 없었던 샤나에게 이 맛은 그야말로 미각의 대혁명이었다.
 메론 빵이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와도, 오전 간식에 오후 간식 그리고 야식으로까지 나와도, 주워 먹어도 좋고, 사서 먹어도 좋고, 슈퍼 시식 코너에 줄창 나와도 마냥 흐뭇한 그녀가 이 정도의 상식도 몰랐다는 점에 유지는 경악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녀가 빵 전문점에 들어간 적이 없었던 것은,
 “다른 과자를 팔지 않으니까.”
 라는 너무할 정도로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아라스톨이 단것 말고도 골고루 먹도록 야단친 것에 대한 부작용이기도 한 것 같았다.
 전에 메론 빵에 대해 잘난 척 일장연설을 늘어놓길래 그 방면에는 도사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실은 그 분야의 이론이나 지식은 전에 알던 사람한테서 들은 풍월을 그대로 읊어댄 것뿐이었다(아라스톨의 말에 의하면,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괴상한 지식을 주입당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런고로 돌아오는 일요일에 이 일대에서 아는 빵집은 죄다 돌아다녀보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샤나의 강요에 못 이겨 유지는 마지못해 그러자고 대답을 했었다.
 그런 약속이었는데! 그런데 샤나가 제멋대로 그 약속을 깨버릴 뻔했다.
 유지는 그 사실에 스스로도 놀랄 만큼 격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티를 한껏 내서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요컨대 꼬인 것이다.
 샤나 쪽도, 애당초 자신이 먼저 꺼낸 말인데다 고작해야 빵 문제인데 왜 이렇게까지 주눅이 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눅이 드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며, 그 때문에 평소처럼 강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건 죽어도 싫었다. 그래서 자기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을 지지 않고 보여주려 했다.
 “너 말야.”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보이게끔 애쓰면서 말이다. 그녀는 지금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 게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체육 수업 시간에 요시다 카즈미랑 손잡고 히히덕거리더라?” 예상 밖의 공격에 돌연 형세가 역전되었다.
 “앗?! 여, 역시 봤구나! 아니, 그건 그거고 지금 이 일이랑 관계없는 이야기인데. 하지만 그건 요시다가 손수건으로 상처를 닦아주려고 한 것뿐이지, 그냥. 그나저나 누가 히히덕거렸다는 거야?!” 유지의 허둥대는 모습이 심술에 대한 보복 이상으로 재미있다. 요시다랑 던 광경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도, 좀 전까지 부글부글 끓던 마음도 전부 날아가버렸다. 기세등등해진 샤나는 더욱 유지를 다그치며 구석으로 몰았다. 내친김에 딴 데를 보며 없는 소리까지 지어낸다.
 “분명히 히히덕거렸어.”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거나 손으로 제스처를 취하려고 하는 등 유지는 뭔가 변명을 하려 애써보지만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궁색한 반박이 무의식중에 나왔다.
 “그, 그렇게 말하는 샤나도 다른 녀석하고ㅡ.”
 뭔가 문득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다른…… 녀석ㅡ?”
 이번엔 샤나 쪽이 의표를 찔려 놀란 얼굴로 유지를 본다.
 다른…… 이라면?
 유지말고 다른…… 이란 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요시다와 함께 있는 유지를 보며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정을 유지도 나한테?
 샤나는 당황해서 얼굴을 돌렸다. 그런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빨개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웃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네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 냐.”
 말하면서 얼굴을 찌푸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 어, 미…… 미안.”
 유지도 샤나의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린다. 자신의 얼굴이 바보처럼 헤벌쭉해진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런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한참을 말없이 걸었고 마침내 유지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럼 이번 일요일에 가기로 할까?”
 여전히 반대쪽을 보고 있는 샤나는 희미하게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 그럴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따라가주지 뭐.”
 “……네가 먼저 말 꺼낸 거잖아.”
 “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 간다고 했으니까 그만 해!” 그때 의외의 방해꾼이 입을 열었다.
 “샤나.”
 “우와아앗?! 뭐뭐뭐, 뭐야, 아라스톨?” 샤나는 불장난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둥댔다. 이럴 때 말을 걸어왔던 적이 없었던 그이기에 필요 이상으로 놀란 것이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 일단 시내 쪽으로 돌아가.”
 “아, 아라스톨이…… 필요한 물건?”
 이런 요구는 난생 처음이었다. 샤나는 당황하면서도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요구가 왠지 자신과 관련된 듯한 직감이 들어 유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그럼 난 먼저 돌아갈게.”
 아라스톨은 유지에게도 말했다. 이쪽은 요구가 아닌 명령이었다.
 “너도 오늘 밤에 할 일이 생겼다.”
 “어? 훈련 말고?” “그래.”
 “……?” 유지는 샤나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있어.”
 큰길과 붙어 있는 찻집에서 티리엘이 뜨거운 홍차가 가득 담긴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세계의 거주자 ‘홍세의 무리’가 무리하게 이쪽 세계에 존재하는 데에서 생기는 위화감이 있듯, 플레임헤이즈에게도 강대한 ‘왕’을 몸 안에 담고 있는 데에서 생기는 존재감이 있다. 상호간에 기척이라 불리는 그것은 ‘크레들 가든’에 의해 보호받는 그들은 일방적으로 느낄 수 있다.
 맞은편에서 건방지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슈드나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있군. 이 답답한 기운은 플레임헤이즈가 틀림없어. 과연 ‘욕망의 후ㅡ’.”
 “앗, 어디?!”
 티리엘의 옆에 앉은 소라토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난다. 무릎이 테이블을 들이받는 바람에, 초콜릿 파르페를 비롯해 그가 주문한 많은 과자들이 완전히 엎어질 뻔했다.
 갖고 싶어 죽을 지경인 장난감을 발견한 느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소년의 모습에서는 이미 과자에 대한 관심 따위는 깨끗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입 주면에 크림이나 플레이크 가루를 덕지덕지 묻힌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이 찻집에 들어온 이유는 소라토가 파르페와 케이크를 먹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그는 아이스크림, 인형이 들어간 풍선, 화려한 농구화, 자, 물안경, 빗자루, 라이터 등등 수많은 물건들을 헛되이 모아들이고 있었다. 헛되이라는 단서가 붙은 것은 수중에 넣은 순간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슈드나이를 놀라게 만든 것은, ‘애염자’라는 본명을 가진 이 소년이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그 존재의 본질은 ‘욕망의 후각’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본래의 ‘니에토노노샤나’를 쫓아가야 할 이 힘은 눈앞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런 오빠이기에 더욱 사랑하는 티리엘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상냥하게 말한다.
 “진정해요, 오라버니. 아직 일러요.”
 “하지만, 하지만, 있지? 갖고 싶어!”
 “갖고 싶다면 참으세요, 오라버니. 참은 뒤의 즐거움은 더욱 강해지는 법이거든요.”
 “으~, 으~.”
 소라토는 눈앞의 즐거움과 누이동생의 말을 저울질하다 결국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 태도를 티리엘은 사랑의 증거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남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빠를 껴안고 서로의 금발을 뒤섞으며 뺨을 부빈다. 소라토의 입가에 묻으 ㄴ크림이 그 뺨에 묻었지만 그를 탐닉하고 있는 ‘애염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걸로 됐답니다, 오라버니. 제 말을 잘 들어주셨어요."
 ‘아이고.’
 왜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주목할까? 그것은 우리들의 태도 때문이 아닐까.
 의뢰를 받아들이고 나서 몇백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슈드나이는 자신의 블랙커피를 음미했다. 소라토의 경우만이 아니라, 다채로운 맛의 음식들은 이 세상을 구가하는(무수한 플레임들은 다르게 부르지만) ‘홍세의 무리’들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가게의 커피만큼은 지독하게 맛이 없었다.
 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보면 역시나.
 ‘애염의 남매’는 서로의 뺨과 입가에 묻은 크림을 마치 정화의 의식이라도 치르듯 서로 핥아주고 있었다. 타액의 현적을 남기며 때론 가볍게 쪼듯이 튕기고, 마지막엔 마치 예정된 일처럼 입술과 혀가 뜨겁게 합류한다.
 이 이상한 모습에 가게 안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이윽고 티리엘이 먼저 손을 들고 말았다.
 “푸, 후아……, 하, 아……. 오, 오라버니.”
 흐트러진 옷깃과 매무새를 바로잡으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미소녀는 살육의 개시를 고한다.
 “다…… 다음 준비를 해요, 응?” “응!” 천진한 미소년이 대답을 마치자 돌연 황금색 나뭇잎이 난무하며 부풀어오른다.
 가게 안에 있던 열 명 정도가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이케와 요시다네 집은 서쪽 주택가의 같은 동네 안에 있었다.
 그렇다고 그런 관계도 아닌 남녀 고교생이 같이 귀가하는 건 좀 어색했다. 단지 집이 같은 방향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도 우연히 마주침, 그 이상의 일은 없었다.
 그랬건만 오늘은 어찌 된 셈인지 이케가 요시다를 꾀어서 같이 귀가하고 있다.
 이케는 매사가 완벽한 남자라서 대화를 나눌 때도 요시다가 이야기하기 쉬운 공부나 수업 얘기부터 들어가 거기서부터 학교 얘기로 화제를 넓혀간다.
 요시다도 최근 한 달 동안 유지에 대한 일들을 이케에게 쭉 상담해왔다. 의지가 되는, 때로는 너무 의지가 돼서 곤란하게 느껴지는 그는 머리도 좋은데다 냉정 침착하고 사교성도 좋아 그녀가 닮고 싶다고 생각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그는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대화 자체는 듣고 있노라면 재미있고 또 즐겁다. 그러나 뭔가 묘하게 빙빙 돌리는 듯한,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한……, 하고 싶은 말을 어딘가 숨겨놓고 이야기의 흐름을 빙빙 돌려 그리고 접근해가는 듯한 그런 묘한 느낌이었다.
 논리적으로 솔직하게 기탄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요시다도 그 정도는 알 만큼 그와 (연애 이외의 의미로)사귀었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샤워실 열쇠 같은 것도 그래. 모두들 알고 있는 데 아무도 개선을 요구하려 들지 않거든. 하려고 해도 동아리회도 학생회도 전부 선생님들의 수하처럼 돼버렸으니, 그 창구가…….”
 “저기, 이케……?”
 “아, 나만 떠들었네. 지루했어?” 이런 배려도 이상하다. 원래 그는 요시다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있다가 그에 대한 조언이나 해설 등을 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남학생들 중에서도 그에게만은 격의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나한테 뭐 묻고 싶은 거 있어?” “……어, ……저기.”
 슈퍼 영웅 안경맨이 말끝을 흐렸다. 미간을 모으고 고민하는, 다른 아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볼 표정을 요시다는 보게 되었다.
 “이케?” 이윽고 뭔가 체념한 듯, 이케는 흐린 하늘을 우러러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으, 응.”
 “사카이의 어디가 좋아?”
 “뭐?”
 너무나 갑작스럽지만 잘 생각하면 모든 일의 근원이기도 한 질문이 날아오자 요시다는 깜짝 놀랐다.
 “그, 글쎄, 갑자기 물어본들…….”
 얼굴이 마구 달아올랐다.
 “역시 그 체육 시간?” 사실의 확인이라는, 논리적인 인간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물음.
 “……그건, 응.”
 무응답이라는 선택은 요시다의 머릿속엔 떠오르지 않았다. 이케라는 소년을 믿고 의지해왔다. 그리고 그는 줄곧 그 의지에 부응해주었다.
 “사카이가 멋지다고 그 때 확실히 느꼈어…….”
 여기까지는 이케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요시다는,
 “하지만.”
 하고 말을 이었다.
 “그건 맘먹고 말을 걸게 된 계기고……, 실은 입학하고 나서 바로…….”
 의외의 고백에 이케는 깜짝 놀랐다.
 “어, 뭐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하고 요시다는 고개를 저으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입학식 시작 전이었는데, 들어갈 교실을 못 찾아서 헤매고 있을 때ㅡ.”
 머릿속에 나도 헤매고 있었어 하고 멋쩍게 웃는 친절한 모습의 소년이 떠오른다.
 “같은 반이라고 하면서 안내해주었어. 그것뿐이야.”
 “그것만 갖고 쭉?”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
 요시다는 이케가 지금까지 보여준 성실함에 보답하고자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려 애썼다.
 “얼마나 친절했느냐, 체육 시간에 얼마나 멋졌느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 “처음 봤을 때 그냥 이거다 하고 느꼈을 뿐…….”
 이케는 샤워실 앞에서 들었던 유지의 말을 떠올렸다.
 [그, 그건 확실히 이거다, 하고 알 수 있는 게 아닌걸.]
 “정반대네. 아님 그 녀석이 약은 건가……?”
 “응?”
 “아니야, 혼잣말이야.”
 이케는 싱긋 웃어주고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는 새에 입 박으로 말이 흘러나왔다.
 “이거다, 라고 느꼈을 뿐이라……. 듣고 보니 이번엔 그쪽이 맞는 것처럼 느껴지네……. 어쩌면 둘 다 맞는 건가.”
 “응??” 요시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케는 곧 평소의 냉정한 그로 돌아왔다.
 “미안, 요시다. 이상한 거, 아니 이상한 게 아니라……. 그런 중요한 일을 가볍게 물어봐서 미안해.”
 요시다는 고개를 힘껏 저으며 이케의 사과를 만류한다.
 “아, 아니야. 별거 아닌데 뭐……. 근데 왜?”
 “아니……, 나도 좀 더 냉정해져야 될 것 같아서. 뭐 이건 어쩌다 보니 나온 얘기로 치고, 자 그럼 본론.”
 “응?” 이케가 내민 것은 검은 남자용 우산이었다.
 “사카이 녀석, 기껏 갖고 와서는 비 안 온다고 까먹고 돌아갔나봐. 요령이 좋은 것치고는 어딘가 맹하단 말이야.”
 “이걸……?”
 갖다주라는 말?
 “오늘은 많이 늦었으니까 위험하고, 내일 아침에도 괜찮으니 좀 멀리 돌아서 가보면 어때? 어쩌면 같이 등교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건 사카이네 집 약도야 하고 학생 수첩을 찢어 그린 메모도 함께 건네준다. 엄청난 준비성이다.
 “고, 고마워…….”
 역시 이케는 이케야. 요시다는 기뻐하며 우산과 메모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행복하게 빛나는 그 얼굴을 보며 이케는 복잡한 심경을 맛보았다.
 이 마음은 이거다 하고 확실히 알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슈드나이는 고층 건물이 별로 없는 주택가 위에 펼쳐진 넓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희미하게 덮인 ‘크레들 가든’의 나뭇잎 너머로 보이는 것은 도무지 갤 줄 모르는 우중충한 하늘.
 “티리엘, 이 동네를 어떻게 생각해?” 사이좋게 소라토와 손을 붙잡고 다음 장치를 꾸미고 있던 티리엘이 주변을 둘러본다.
 “글쎄. 도시 쪽하고는 달리 나무도 제법 있고, 보도도 벽돌로 깔려 있어서 꽤 운치가 있는걸?” 목소리의 분위기로 봐서 그냥 되는 대로 나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 팔에 매달린 노인(개를 산책시키는 중으로 보였다)을 먹고있는 소라토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그 손길의 백 분의 일만큼도 진지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 동행, 아마도 손자로 보이는 4, 5세 정도의 남자아이는 티리엘의 자재식에 의해 장치 중 하나로 바뀌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의 존재가 뿌리째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슈드나이는 그런 티리엘의 태도나 희생자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말을 계속한다.
 “플레임헤이즈가 머물고 있는 동네다. 그 녀석이 토멸한 ‘무리’가 만든 토치가 많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균열이 너무 커.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는 토치도 꽤 많지만 전엔 더 많은 토치가 있었고 인간이 먹혔던 것은 아닐까?”
 티리엘은 오빠 쪽으로 향한 얼굴에서 눈길만 살짝 돌려 건성으로 거리를 본다.
 “그런 거 같아. 하지만 ‘오르골’을 울려서 신비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그러져 있는 쪽이 더 좋아. 균열이 가속을 일으켜 더 커질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런 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에엣, 티리엘. 균열, 균열이 심해지면 ‘왕’이, ‘왕’들이 화내니까, 너무 욕심내면 안 된댔어. 헤카테가!” 티리엘이,
 “……누구라고요, 오라버니?”
 라고 말하면서 꼭 껴안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려 소라토의 목을 거머쥐었다. 성어 세공 같은 아름답고 가느다란 그 손가락이 천천히 파고들어간다. 주위에서 춤추고 있는 황금빛 잎사귀들이 그녀의 고조되는 감정에 호응하듯 불타오르며 반짝임을 더해간다.
 “우, 크, 윽.”
 “헤카테? 그런 거만하고 그 별님하고나 논다는 애송이 계집애 따윈 생각해서도 안 돼. 입에 담는 건 말할 것도 없어.”
 밝은 얼굴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오로지 파고드는 손가락에만 더욱 힘이 들어갔다. 황금색의 빛도 점점 강해져간다.
 “디, 에ㅡ, 으ㅡ.”
 소라토가 꿈틀꿈틀 경련을 일으킨다.
 선글라스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슈드나이는 그제야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소리 높여 제지했다.
 “티리엘! 그만 해!!”
 그러나 티리엘은 그 말을 완전히 무시했다. 반쯤 흰자위를 드러내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오빠의 미모를 바라보며 서서히 미소짓는 것처럼 벌어진 입술을 가져가 맹세를 강요하듯 작게 중얼거린다.
 “……오라버니께는 나 이외의 여자는 없어요. 나만의, 나만, 나만의 것이야. 알겠어요……?”
 더 이상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소라토는 남은 힘을 쥐어짜내어 졸린 목을 간신히 끄덕인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티리엘은 손을 확 놓았다. 황금색의 빛도 순간 옅어졌다.
 “그래, 그래, 그래요, 오라버니. 나의 오라버니. 나만을 보고, 내가 하는 일만을 보고, 내가 하는 말만 들어요.”
 “ㅡ헉ㅡ헉ㅡ헉ㅡ. 우어……, 으, 응, 티리, 엘, 미안, 해, 미안해, 미안해!!”
 소라토는 숨쉬는 시간도 아까운 듯 누이동생을 껴안았다. 티리엘은 변함없이 미소지으며 뚝뚝 흘러넘치는 오빠의 눈물을 입술로 핥아올린다.
 “응, 알면 됐어요. 오라버니…….”
 “………….”
 슈드나이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으로 이 남매의 ‘애염’의 행위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웁…… 푸. 아~, 소, 속이 뒤딥어뎌…….”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왜 마시는 건지.”
 미사키 시 동쪽 시가지 외곽에는 옛 지주들이 모여 살던 구 주택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사토 케이사쿠의 집은 그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오래된 건물로, 꽤 큰 저택이다.
 하지만 사토의 가족들은 너무나 변변치 않은 이유로 이 저택에 발길을 끊고 있어 그는 줄곧 혼자 살고 있다. 철이 들고 난 뒤에도 고용된 가정부를 제외하면 거의 사람이 없는 외로운 생활이었다(물론 그는 외롭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부터는 스스로 그 외로움과 타협해서 비교적 쾌적하게 지냈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거, 말고는, 할 일이 없잖, 아, 으으, 으으으으.”
 “아아ㅡ, 토하지 마, 토하지 마. 나한테 토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랬던 생활은 한 달 전쯤에 그와 친구인 타나카 에이타가 함께 어떤 일에 휘말리면서 산산히 부서졌다.
 그들의 일상을 부순 것은 샤나와 같은 플레임헤이즈인 여성.
 “토, 토하면, 조금은 조용히 해줄 거, 야ㅡ.”
 지금 사토네 집 실내 바의 카운터 테이블에 몸을 기댄 주정뱅이였다.
 이름은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
 그녀와 계약한 자는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
 “으악, 멈춰, 멈춰! 나의 타락한 주정뱅이 마죠리 도!!”
 지금 마죠리 옆의 카운터 의자에 놓인 채 당장이라도 토사물을 뒤집어쓸 위기에 처한 커다란 책 모양의 신기 ‘글리모어’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홍세의 왕’의 이름이다.
 그녀는 이 미사키 시에 ‘시체줍기’ 라미라는 ‘홍세의 무리’의 뒤를 쫓아 나타났다.
 ‘무리’를 발견하면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즉시 토멸한다. 증오와 살의의 결정체인 그녀는 사토 및 타나카와 함께 미사키 시를 쑤시고 다녔고, 그러다 보니 ‘라미는 세상의 균형에 해를 입히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샤나와 아라스톨, 아울러 유지와 대결했다.
 그리고 졌다.
 스스로가 믿어왔던 싸움의 이유, 긍지와 자신감, 그 모든 것이 박살나고 말았다.
 “그럼, 그럼 잠자코 지켜……보라고, 우웩.” “잠자코 있으면 또 마시잖아.”
 그 뒤로 빈 껍데기 신세가 된 그녀는 이 실내 바를 근거지로 삼아 지루하고 아무 생각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니, 죽이고 있다.
 참고로 사토와 타나카는 마죠리가 진 것도, 샤나가 플레임헤이즈인 것도, 유지가 ‘미스테스’ 신세가 된 것도 모른다.
 승패에 관해서는 타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길 싫어하는 그녀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샤나나 유지에 관해서는 단순히 그녀가 사토와 타나카의 교우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즉 샤나와 아라스톨과 유지는 마죠리를 알고 있지만, 그녀가 사토와 타나카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마죠리는 샤나를 포함한 세 명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그들이 사토와 타나카와 아는 사이란 것도 역시 모르고 있다.
 실로 복잡한 관계였다.
 “그러니까 네가 당장 정화의 불꽃을 우욱 하고 뿜어내주면 아무 문제 없잖아.”
 “히힛, 그러면 분부대로 말없이 지켜보기로 할까.”
 “우어, 너어…….”
 그리고 오늘도 패배로 갈 길을 잃은 그녀가 있는 곳에 소란스러운 두 사람이 돌아왔다. 실내 바의 문이 탕 하고 힘차게 열렸다.
 “다녀왔습니다ㅡ마죠리 씨!”
 “누님, 오늘은 상태가 어떠십니까?!”
 사토는 그녀를 ‘마죠리 씨’, 타나카는 ‘누님’이라고 각자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고 있었다.
 “아이고~, 시끄러워……. 머리가 징징 울려.”
 마죠리는 카운터 테이블에 몸을 맡긴 채 대답했다. 머리만 벅벅 긁을 뿐 몸을 일으키려고도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찰랑대던 갈색의 긴 생머리 포니테일은 지금은 부스스해져 아무렇게나 뒤로 묶여 있을 뿐이다. 복장도 걷어붙인 와이셔츠에 커다란 배기팬츠라는 후줄근한 차림.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도수 없는 안경 하나뿐, 드레스 자락을 시원스레 펄럭이며 ‘홍세의 무리’의 토멸에 불타오르던 플레임헤이즈의 늠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는 꽤 나아진 수준이었다.
 두 사람은 한 달간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목격했던 것이다.
 처음 1주일은 그야말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다음 1주일은 무기력 상태가 이어져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잠만 잘 뿐이었다. 그 다음 1주일은 그냥 앉아서 한숨만 죽어라 쉬어댔다. 그리고 최근 1주일간은,
 “또 제멋대로의 레서피 개발인가요?”
 사토의 말대로 바 카운터를 잔뜩 어질러놓고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2주째부터 발작적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생활 필수품을 사러 나가는 날도 있었지만(그 때마다 두 사람은 학교를 쉬어야만 했다) 그래도 건강해졌으니 다행…… 이란 말은 거짓으로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가정부가 오는 시간엔 어질러진 자리를 비워줘야지, 안 그러면 언제까지나 더러운 그 상태라고요.”
 “맞아, 맞아. 누님이 피해주지 않으면 다들 들어올 생각도 안 해요.”
 거의 이 집 사람이나 다름없는 타나카가 바 카운터에 널린 각양각색의 술병과 잔, 계량컵, 과일의 잔해 등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가정부라고는 해도 그 구성원은 전부 옛날에 사토가의 고용인이었던 사람들뿐이었다. 가문에 누가 될 만한 말은 절대 외부에 흘리지 않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완벽하게 집안을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죠리처럼 정체를 밝힐 수 없고, 밝혀봤자 밝힌 자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법한 그런 여자가 눌러앉아 있는데도 아무런 불평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사토가에는 그런 불평을 제일 먼저 터뜨릴 사람인 가족이 없었다.
 마죠리도 원래 거만한 성격이라 그렇게 배려해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았고 그런 사정을 참작해주지도 않았다. 손을 휘휘 내젓는 것만으로 그녀는 대답을 대신했다.
 “마침 그때…… 조, 좋은 게 만들어질 것 같았단 말이야. 할아범이 거들어줬으면 더 근사한 맛이 나올 것 같았는데.”
 “바랄 걸 바라셔야죠.”
 말하면서 사토는 가정부 노인에게 속으로 사과했다.
 “이런, 이런, 두 사람한테 신세가 많네.”
 마르코시어스가 새된 목청으로 사과했다.
 이세계의 ‘왕’답지 않게 가볍고 호들갑스러운 성격의 그(?)는 동시에 정감 있는 면모도 갖고 있었다. 자신의 계약자가 어린 무기력한 꼴로 지내도 뭐라 하는 법도 없었다.
 “할아범들이 오기 전에, 잘 거면 적어도 소파에서 자라고 했더니 ‘여기가 좋아ㅡ’라더군 애가 따로 없지 히힛.”
 단지 놀릴 뿐이다.
 그녀를 놀린 것에 대한 대가는 멋지게 수평을 그리며 날아온 뒷발차기로 돌아왔다. 마죠리가 카운터 의자 째로 몸을 회전시켜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취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민첩한 동작이었다.
 “우와앗?!”
 화판을 겹친 것 같은 ‘글리모어’가 뻥 소리와 함께 날아가 방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다.
 “바보 마르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아, 우욱.”
 마죠리는 그 동작으로 더욱 속이 뒤집힌 듯 다시 카운터에 고꾸라졌다.
 이젠 토사물을 뒤집어쓸 위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 한결 높아진 마르코시어스의 웃음소리가 그 등 뒤에 꽂힌다.
 “핫핫핫! 사실인데 뭐ㅡ엇, 미안.”
 “아냐, 아냐.”
 사토가 쓴웃음을 지으며 ‘글리모어’를 안아올려(손에 든다고 하기엔 너무 크다) 방 입구 근처에 있는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 김에 자신들도 그 앞과 옆에 앉아 오늘의 숙제를 가방에서 꺼낸다.
 마르코시어스가 말을 건다.
 “오늘은 뭐야?”
 “응? 비즈니스 관계의 처세술 책.”
 사토가 커버를 벗기고 내용물을 보여준다. [읽으면 완벽! 훌륭한 상사와 훌륭한 부하]란다.
 “나는……, 뭐더라, 여행책자인가?” 타나카도 사토와 마찬가지로 ‘글리모어’ 쪽에 책을 대준다. 이쪽은 [세계의 숨은 절경 데이터 파일].
 이 두 사람은 마죠리라는, 그들이 동경하는 여성의 완성형, 즉 압도적인 힘과 카리스마의 소유자와 만나고 나서 뭔가 유치하고 졸렬한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자칭 맹렬한 공부와 훈련을 시작했다. 말로 드러내지 않았다뿐이지 그녀를 따르고 싶다는 뜻으로 보였다.
 마죠리는 허탈한 상태에서도 그 사실을 눈치챘다. 물론 소년들의 그런 바보 같은 소망은 그녀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대답은커녕 코웃음칠 생각조차 나지 않은 그녀는 어차피 금방 포기하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특별히 꾸중하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핫핫핫! 진심인가, 두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심한데!” 라고 웃어넘기는 태도만 달랐지, 마르코시어스도 동감이었다.
 인간이 플레임헤이즈와 함께 행동한다니, 무모하기 이전에…… 불가능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일단 이 한 달 동안 식지 않는  열의로 가칭 맹렬한 공부와 훈련을 계속했다. 그녀가 허탈 상태로 머물러 있는 시간을 100퍼센트 활용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태도를 마죠리는 여전히 무시했고 마르코시어스도 이젠 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노력하고 있다. 단,
 ‘몸의 훈련은 그렇다 치지만, 공부 방법은 미묘하게 가닥을 잘못 잡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는 마르코시어스였다.
 소년답게, 지금 자신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보통의 공부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다행히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다는 장점을 살려, ‘꼭 뭔가를 익힐 필요가 없다면 일단 책부터 잔뜩 읽어두기’로 결심했다. 교양을 쌓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수법도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플레임헤이즈의 전투에 동행하는 것이 목적일 경우, [훌륭한 상사와 훌륭한 부하]나 [세계의 숨은 비경 데이터 파일]로 얻은 지식이 과연 도움이 될까.
 그 점을 물어보려 하던 마르코시어스는 타나카의 턱에 있는 뭔가를 알아챘다.
 “여, 에이타. 그 턱에 난 상처는 뭐냐?”
 “응? 아아, 이거…….”
 타나카는 세계 시차 지도에서 고개를 들고 턱을 문질렀다.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별거 아니야. 게임을 하다가 공을 좀 맞았어.”
 시체처럼 카운터에 엎어진 마죠리가 갑자기 반응을 보였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사토가 타나카를 놀린다.
 “어머니가 보면 졸도하실 거다. 또냐 하고.”
 “시끄러워. 들어갈 땐 벗길 거야.”
 타나카 역시 옛 주택가의 나름대로 대갓집 자제다.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예전에 그의 악행 삼매경 때문에 골머리를 썩은 경험이 있어서, 자식이 다시 비행의 길로 빠질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최근 한 달간 학교에서 사토가로 직행해서 자칭 맹렬한 공부에 매진했고, 밤 늦게야 귀가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었다. 다소 귀찮다고 느끼면서도, 방이 남아도는 사토가에 하숙할 생각을 하지 않는 이유에는 이 어머니의 존재가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자신은 그렇게 몇 번이나 곤경에 빠질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말해왔다.
 “그럼 지금 벗기지 뭐, 아야얏!”
 반창고에 손을 댄 그에게,
 “……어느 쪽?”
 갑자기 마죠리가 질문을 던졌다.
 “누님?”
 “이겼어? 아니면…… 졌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타나카의 말을 무시하고 마죠리는 카운터에 엎어져서 얼굴을 묻고 재차 묻는다. 숙취로 흔들리는 목소리 속에 어딘가 절박한 기색이 담겨 있다.
 “…….”
 “…….”
 타나ㅋ는 사토와 마주 보고 급기야 ‘글리모어’를 쳐다보았다. 안타깝게도 마르코시어스는 눈빛이나 동작으로 뭔가를 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파에 파묻힌 책의 모습에, 두 사람은 뭔가 감을 잡을 수 있었다ㅡ고 느꼈다.
 두 사람은 한 달에 걸친 마죠리의 허탈 상태를 지켜보며, 그녀가 이 동네를 어지럽힌다는 ‘무리’를 쫓아내기는 했으나 대신 왠지 육체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것만이 아니라 보다 지독한 꼴을 당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마죠리 도라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커다란 존재에게 위로한다느니 어쩌니 하는 무례하고 미련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안타깝기는 해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해온 것이다. 마치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로,
 “어떻게, 됐어?”
 뭔가 의미가 담긴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타나카로서는 정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졌어요.”
 “하, 하지만 규칙으로 보면 거의 반칙이에요.”
 “관둬.”
 사토가 그렇게 두둔해주는 것을 타나카는 거부했다.
 그러나 몇 초간의 침묵을 거친 대답은 단 한 마디.
 “……그래.”
 그리고 완전히 딴 얘기를 한다.
 “내일, 쇼핑…… 하러 간다…….”
 학교를 빠지고 짐꾼 노릇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두 사람이 고민하는 사이에 카운터에서는 조용한 숨소리가 새근새근.
 이윽고 담요가 덮였고, 술병과 잔에 파묻힌 패배한 플레임헤이즈는 진흙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잠들었다.

 밤을 더 높은 곳으로 몰아내려는 듯 땅 위에 가드한 도시의 불빛.
 호텔 스위트룸의 벽 한 면을 점령한 큰 창에 펼쳐진 광경.
 이 빛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목표물을 생각하며 트리엘은 살짝 웃었다.
 내일 중에 아무도 모르게 충분한 수의 장치가 갖춰질 것이다. 이 도시에 숨어든 플레임헤이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철장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제 아무리 무서운 적이라 해도 이기는 것은 이쪽이다.
 거기다 만에 하나의 경우에도 대비해 슈드나이라는 전용 호위도 준비했다(그에게는 별실을 배정해주었다……. 오빠와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은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허락할 수 없다).
 “오라버니.”
 대답이 없으리란 것은 알고 있다. 옆에 누운 소라토는 벌써 곤히 잠든 상태였다.
 인간의 ‘존재의 힘’을 에너지로 삼아 존재하는 ‘홍세의 무리’는 원래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인간의 생활 문화’를 사랑하는 그들은 식사나 오락 등 인간의 습관이나 생활을 즐긴다. 이 두 사람처럼 졸음을 느끼고 잠드는 것도 그 일부였다.
 티리엘은 침대 시트에 싸인 하나의 덩어리처럼 오빠를 보듬는다. 서로의 나신을 하나로 꼬아가듯 강하게 얽는다. 그 뜨거움을 느끼면서,
 “괜찮아. 내가, 이 ‘애염타’가 오라버니를 지킬게요.”
 매일 밤 매 시각 하는 맹세를 질리지도 않고 되풀이한다.
 저 ‘오르골’도 그렇고, 이 나라에서 찾아낸 것은 의외로 많다. ‘능통의 언어’를 통해, 지금 자신들을 나타내기 위해 찾아낸 말,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 지금 자신들의 모습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울림이다.
 온몸으로 오빠를 꼭 껴안고 함께 녹아들 것만 같은 착각에 흠뻑 취해서 티리엘은 내일을 꿈꾼다.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오빠가 욕망을 성취하고 환희를 느끼는 내일을.
 그 오빠가 환희가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이 애정의 성과로 인해 떨게 될 내일을.

 평소라면 지붕 위에서 샤나의 훈련에 참가하고 있을 시각에 유지는 자신의 방에서 익숙하지 않은 공작 기구와 씨름하고 있었다.
 “……대체 뭘 할 셈이야?” 책상 위에는 새로 구입한 공구가 즐비하게 놓여 있고 그 중앙에서는 아라스톨이 요구한 물건이 분해당하고 있다.
 휴대전화였다.
 “넌 몰라도 된다. 그냥 시키는 대로 만들어.”
 유지의 책상 위에 놓인 펜던트 ‘코큐토스’에서 아라스톨이 더없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한다.
 그가 샤나에게 요구한 것은 이 휴대전화와 공구 한 세트였다. 그걸로 유지에게 무엇을 시킬 것인지를 묻자,
 “‘코큐토스’가 이 안에 내장될 수 있도록 만들어라. 전화 본래의 기능은 필요 없어.”
 라고 했다.
 유지는 작업의 의미를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아라스톨이 괜한 짓을 할 리는 없었다.
 “이 정도면 될까?”
 드릴이나 실톱으로 기판에 거칠게 뚫은 구멍을 ‘코큐토스’에게 보여준다.
 “흠, 일단 주위를 잘 갈아내도록 해. 막대기형의 물건이 있지? 그걸 딱 맞게 집어넣어서 나의 의식이 쓸데없는 진동에 흔들리지 않도록 해라. 그걸 위해 완충제도 사왔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음, 이 딱딱한 스펀지 같은 거? 갈아낸 다음에 본드로 붙이면 되는 거야?” “음, 그래. 정교한 세공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정성껏 해라. 그 다음엔 한군데 모은 사슬을 안에서 고정시키는 구조도 생각해야 한다.”
 “주문이 많네.”
 “불평하지 마라.”
 “네네.”
 그들의 대화가 오가는 머리 위.
 오늘 샤나는 지붕 위에서 홀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지붕 용마루에 걸터앉아, 양 손을 앞으로 내밀고 가만히 정지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따금 가는 빗방울이 떨어진다.
 샤나는 다소 젖은 건 참을 수 있었고 젖어도 금방 말릴 수 있기 때문에 보슬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무시하고 훈련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래봤자 젖은 앞머리가 조금 답답한 정도다.
 오늘은 유지가 없으므로 큰 힘을 소비할 수 없었다. 화려한 움직임이나 현상을 일으킬 수 없으니 봉절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대신 아라스톨의 일부를 구현하기 위한 구조의 힘을 훈련하려고 했다.
 실제로 그 현상을 일으키지 않고 그 감각을 잡아내려 해보았다.
 자신의 존재를 공간에 펼쳐가며 이미지를 상상한다.
 ‘…….’
 하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밑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신경이 쓰이고, 무엇보다 완벽하게 외톨이라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기력의 집중이 문득 끊어진 순간,
 ‘……혼자 있는 것은 싫어.’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거나 한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치구사랑 같이 있으면 즐거운걸.’
 맛있는 식사와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해주는 상냥한 미소의 여성.
 ‘애들과 노는 것도 재미있어.’
 피구나 샤워를 하며 함께 떠들었던 요란스러운 반 친구들.
 ‘아라스톨이 없으면 쓸쓸해.’
 가슴 위에서 언제나 자신을 지켜봐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세계의 마신.
 ‘유지가 없는 건…… 싫어.’
 그리고 어느 새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 된 소년.
 ‘없는 건…… 정말 싫어.’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라스톨이 말했었다.
 ‘마음을 터놓으면 오히려 곤란한 일이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나쁘진 않겠지.’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단 한 마디로.
 “응.”


 4. 격돌의 날
 다음날 맑게 갠 푸른 하늘에 두꺼운 먹구름이 드문드문 낀 이상한 날씨였다.
 동틀 녘이 가까운 하늘 아래, 사카이가는 비상 사태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어젯밤 내린 비로 질퍽거리는 좁은 마당을 향해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후우…….”
 툇마루 겸한 창에 운동복 차림의 유지가 걸터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오는 것이었다.
 ‘……‘세기의 대결’이란 아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보다.’
 한숨 대신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샤나와 오늘의 주빈……, 정확하게는 주빈을 내장한 휴대전화가 등장하길 기다린다.
 지금부터 사카이가에 일어날 비상 사태……, 양대 보스전이라고 해야 할까?
 한쪽은 ‘홍세의 왕’인 마신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
 한쪽은 ‘사카이 유지의 어머니’ 사카이 치구사.
 후자는 그 직함부터(그 주체가 되는 인물의 변변치 못함 때문에) 약해 보이지만 당사자가 아주 미묘한 의미에서는 강적이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 증거로 어젯밤, 이 대결에 대해 아라스톨에게서 들은 플레임헤이즈인 ‘염발작안의 토벌자’ 샤나도 크게 곤혹스러워했다.
 “으잉? 아라스톨이 치구사랑 대화를ㅡ?”
 요컨대 아라스톨은 간밤에 유지를 시켜서 만든 ‘코큐토스’ 내장 휴대전화를 사용해 치구사와 대결ㅡ회담이라고 할 수도 있다ㅡ하려 하고 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유지는 물론 샤나조차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치구사에게 보이던 평소의 존중심으로 미루어볼때 그에게 악의가 없는 것은 분명했지만, 무엇을 노리고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나를 내장한 휴대전화를 어머니에게 건네면 너희들은 자리를 비켜. 그리고 늘 훈련이 끝나는 시간이 될 때까진 돌아오지 마라.”
 등의 주의까지 듣다 보니 아라스톨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샤나로서는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거부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의도가 무엇이든 명령에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묘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버린 것이다.
 이윽고 집 안에 구식의 느릿한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까지 나가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누른 사람은 곧 마당으로 들어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늘 입는 체육복을 입은 샤나가 현관 옆을 통해 나타났다. 제복을 넣은 백과 책가방을 들고 있는 것도 평소와 똑같다. 그러나,
 “안녕?” 하고 인사하는 표정에는 희미한 긴장감이 엿보인다.
 “어, 안녕.”
 유지는 대답하면서 자신과 같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기분은 학부형 진로 면담을 앞둔 수험생, 아니면 결석 재판을 받는 피고인의 심경이랄까.
 “어서 오렴, 우리 샤~나. 좋은 아침이지?” 느긋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치구사가 안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응. 좋은 아침.”
 샤나는 짧게 대답하고 툇마루에 책가방과 백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조금 머뭇거리면서, 돌아가려는 치구사를 불러세운다.
 “아, 치구사.”
 “응?” 샤나의 부름에 치구사는 다시 툇마루로 얼굴을 내민다. 샤나가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마주 본다. 그녀의 이런 점도 샤나는 좋았다.
 “저기, 아라스톨이 전화로 얘기를 하고 싶대.”
 “응? 아라스톨 씨라면 그 아라스톨 씨?” 어지간한 치구사도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샤나는 백에서 간밤에 유지가 개조한 휴대전화를 꺼냈다.
 새 물건을 사서 알맹이만 손본 것이라, 얼핏 보이게는 특별히 이상한 부분은 없지만 전화 관련 기능은 완전히 고장이 나있었다. 버튼은 모두 장식이었다.
 “나 핸드폰은 처음 만지는데 조작 방법을 알까나 몰라.”
 치구사는 조금 불안한 기색으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벌써 통화 상태라 받기만 하면 돼.”
 “어머, 그럼 안심이네.”
 미심쩍어하는 유지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하고 샤나는 마당으로 나간다.
 “그럼 오늘은 밖에서 훈련하고 올게.”
 “어?”
 “늘 그 시간엔 돌아올 거야.”
 샤나가 말하는 의미와 미묘하게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에서 치구사는 대충 사태를 파악햇다. 캐묻지 않고 순순히 배웅한다.
 “그래. 다녀오거라. 조심하고.”
 “응, 다녀올게. 유지.”
 유지도 툇무라에서 일어나 샤나를 따른다.
 “그럼 다녀올게.”
 “그래, 다녀와.”
 치구사는 대문을 나서는 두 사람을 보내고, 건네받은 휴대전화를 유심히 바라본다. 길에서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여러 번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손에 들고 보니 앞뒤와 상하의 구별 정도밖엔 못할 것 같다.
 일단은 남들의 흉내를 내며 보통 수화기처럼 귀에 대본다. 샤나가 연결되어 있다고 했으니 연결되어 있겠지.
 “여보세요, 많이 기다리셨죠? 사카이 유지의 어머니 치구사라고 합니다. 아라스톨 씨 되십니까?” 치구사는 언제나 그렇듯 부드러운 말씨로 ‘홍세’의 마신에게 말을 건넸다.

 유지와 샤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조금 시간이 남은 이른 아침의 거리에서 마나 강의 하천 부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샤나의 지시였다.
 도심의 큰 하천이라면 예외 없이 제방 위 도로가 근처 주민들의 조깅 코스가 되므로 외려 낮보다 이른 아침에 사람의 통행이 잦다.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샤나가 자발적으로 가자고 한다는 것은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라스톨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글쎄. 돌아가서 물어보지그래?”
 딱 부러지게 말하는 샤나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있었던 불안한 기색은 없다.
 치구사에게 아라스톨을 맡겨서(혹은 그 반대일지도) 마음이 편해진 건지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러고 보니 아라스톨 없이 샤나와 단 둘이서만 있는 건 처음이네.’
 유지는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라스톨의 본체는 샤나의 안에 있고, ‘코큐토스’도 그녀와 아라스톨 둘 중 하나가 원한다면 곧 수중에 돌아온다고 하니 그런 쪽에 과도한 환상을 품는 것은 위험하긴 했지만ㅡ.
 ‘ㅡ거참,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최근에는 뭐든지 그쪽과 연결짓고 만다. 어차피 깊이 생각하기 전에 멈춰버리는 어중간한 마음인데도.
 유지는 그런 속내를 겨우 누그러뜨리고 대화를 계속한다.
 “물어본들 가르쳐줄까?”
 “말해줘도 되는 거라면 아마도.”
 “그러면 묻는 의미가 없잖아……”
 “그럼 안 물으면 되지.”
 “그렇게 되나?” “그런 거야. 무리하게 물어봤자 거짓말이나 얼버무림이 섞일 뿐이니까.”
 샤나는 변함이 없다. 역시나 인정사정없는 명쾌한 말투.
 헌데 그 걸음이 좀 빨랐다.
 “그나저나 서두르자.”
 “뭘 보여주고 싶은 거야?” “가보면 알아.”
 퉁명스런 대답 끝에 즐거움이 배어나온다.
 유지는 기뻐진다.
 그녀가 스스로 가르쳐준다. 그녀의 속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기쁘다.
 그것이 멈춰버릴 마음에 조금씩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느꼈다. 그러면서 두려움과 함께 기대감이 부풀어오른다.
 샤나는 종종걸음으로 서두른다.
 유지 역시 처질세라 따라간다.

 “처음 인사드리오, 부인.”
 “송구스럽습니다.”
 보호자 간의 대화는 이런 고전적인 인사로 시작되었다.
 ‘샤나가 그토록 따르는 분이라 하니 쓸데없이 변죽 울리지 말고…….’
 라고 생각한 치구사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쁘신 중에 이렇게 연락을 주시다니 어쩐 일이시죠? 히라이 유카리 양에 대해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호오, 역시 현명한 부인이군.’
 아라스톨은 내심 감탄하면서도 말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요. 그리고 그 아이는 샤나라고 부르는 게 좋겠소, 부인. 나도 그렇게 부르는 게 익숙합니다.”
 “어머, 아라스톨 씨 공인 별칭이로군요. 뭔가 의미라도 있나요?” “음, 그냥 그런 거요. 그건 그렇고 나의 용무는…….”
 “네.”
 잠시 뜸을 들이고 아라스톨은 말한다.
 “실은 어제 일 말인데.”
 “어제요?”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대답하는 치구사.
 “말하자면, 이른바 부인의 연애관을 부정할 생각은 아니오만……”
 어머, 치구사는 눈치채고 말았다. 뺨에 손을 올리고 조금 부끄러워하며 대답한다.
 “샤나가 말해버렸나보군요. 부끄럽습니다.”
 “아니요, 내가, 그래요, 내가 억지로 물어본 거요.”
 “어떻든 간에, 그런 말씀까지 들으셨다는 것은 샤나에게서 깊은 신뢰를 받고 계시다는 증거네요.”
 “……그렇다니 조금은 자만심이 드는구먼.”
 같이 듣고 있었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자만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샤나가 아라스톨 씨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정말로 자랑스러워 보이더군요.”
 “음…….”
 치구사의 말은 마음에 없는 ‘겉치레’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전해서 기쁘게 해주려는 ‘배려’였다.
 ‘안 돼, 아무래도 이 부인과 얘기하면 이야기의 중심이 흔들리고 말아.’
 아라스톨은 자신이 그녀와의 대화를 유쾌하게 여기고 있음에 위기감을 느꼈다. 보다 강한 말투로 “샤나에게 쓸데없는 소린 하지 마‘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거늘. 지금만 해도 누가 누구한테 맞장구치고 있는 거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자각이 없는 치구사는 아라스톨이 바라고 있던 본론으로 먼저 들어갔다.
 “아주 소중하게 키우신 것 같아요. 굉장히 순수하고 착한 아입니다.
 “물론이오. 소중하게 키운 귀한 아이라오. 긍지 높고 강하고, 사명감에 불타오르ㅡ, 음.”
 “사명……, 뭔가 그 애의 진로에 대해 정하신 방침이라도 있나요?” “으, 음, 맞소.”
 경계가 풀렸는지 그만 함부로 입을 놀린 것에 애가 탄 아라스톨은 성급하게 자신의 요구를 들이댄다.
 “어쨌든 어제처럼, 샤나에게 사카이 유지와의 예기치 않은 접촉을 유발하는 거나 다름없는 조언은 삼가주시기 바라오.”
 아라스톨은 요구의 강도가 예정보다 다소 약해지고 말았다고 느꼈지만,
 ‘부인은 현명하다. 이렇게 말하면 내 생각을 전부 알아들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버린 그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치구사는ㅡ아라스톨이 평가한 그 현명함으로ㅡ그가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까지 보고 있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샤나를 위해 조금 더 말씀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마나 강의 제방을 따라 쭉 이어지는 신호등 없는 차도.
 교통량이 드문 그곳을 적당히 가로지른 샤나와 유지는 높은 제방의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방에 파묻힐 것 같은 낡은 콘크리트 계단을 우덩이를 피해 오르면서 유지가 물었다.
 “보여주고 싶다는 게 설마 해돋이?” 이제 곧 그럴 시각이다. 그러나 나란히 계단을 오르는 샤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뻔한 거 보여줘서 뭐해? 너는 잘 모르나본데 이 하천 부지는 꽤 입지가 좋단 말이야.”
 “?” 입지가 좋으나마나, 이런 장소에 해돋이말고 달리 볼 것이 뭐가 있을까. 설마하니 늘 보는 마나 강도 아닐 테고 등등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샤나의 말투로 인해 뭔가 기대감을 갖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광경이 이렇게 크게 보인다고……, 봐!”
 기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계단을 전부 올라가자 눈앞에 널따란 경치가 펼쳐졌다.
 “아아ㅡ.”
 하천 부지의 대주차장.
 두 배로 펼쳐진 푸른 하늘이 있었다.
 주차장 아스팔트가 간밤에 내린 비로 칠흑의 거울이 되어 동트기 전의 깊고 투명하고 푸른 하늘 전체를 거무스름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비춰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삼켜진 것처럼 우뚝 선 유지를 보며 샤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때?” 그 시선은 유지가 아니라 두 배로 넓어진 푸른 하늘에 고정되어 있다.
 유지도 샤나를 보지 않고 그 경치를 보며 대답한ㄷ.
 “응.”
 그것은 샤나의 말에 대한 완전한 동의.
 유지는 아름다움을 굳지 말로 표현하려는 어리석음을 피하고 단지,
 “이런 광경이 있었구나.”
 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응, 많아.”
 샤나의 간결하지만 명쾌한 대답.
 그 말을 곱씹듯 잠시 침묵을 지킨 유지는 여전히 푸른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미래에 대한 동경과 지금의 마음을 담아서 순수하게 털어놓았다.
 “더…… 알고 싶어.”
 샤나는 그 말을 듣더니 시선을 그대로 고정시킨 채 살짝 웃었다.
 “……아직 멀었어.”
 똑같은 바람.
 그저께 밤과 같은 바람.
 그런데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나란히 선 채로 넓은 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힘내자.”
 “응.”
 샤나느 눈을 가늘게 뜨고 하천 부지에 펼쳐진 광경과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곁에 서 있는 유지에게 만족했다.

 “……? 뭡니까, 부인.”
 “말씀하신 대로 샤나는 긍지 높고, 강하고, 착한 아이입니다. 하지만 그건 한편 아주 앳되고 여린 부분도 갖고 있다고도 보인답니다.”
 치구사는 잠시 말을 끊고 아라스톨에게 좀 더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계속하시오.”
 “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릴게요. 샤나는 자신이 평소 인식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능력……, 요컨대 남의 ‘기분’이나 ‘생각’……, 그런 감정이 어떻게 복잡하고 얼마나 강한지를 거의 체험하지 못한 것 같아요. 어쩌면 상식적인 범위 안의, 그런 감정의 형태조차 모르는 게 아닌가요?” 치구사는 핵심을 찔렀다.
 “제가 본 바로는 샤나는 그런 종류의 힘에 전혀 대처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저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하기만 할 뿐…….”
 치구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휴대전화 안의 마신에게 말했다.
 “가령, 아라스톨 씨가 걱정하고 계시는 저희 유지가 젊은 혈기를 못 이기고 샤나를 다그친다면……, 티없이 순진한 그 아이의 마음은 대체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을까요?” “음……”
 아라스톨은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것은 그가 가장 바라고 있던 쪽의 조언으로 들린다.
 “어제 전 그걸 느꼈어요. 그래서 샤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 겁니다. 그런 감정이나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제대로 가르쳐서 준비시켜둬야겠구나 하고요. 무지와 순수는 다른 거라고 전 생각한답니다.”
 “그건……, 그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으나, 더 긴 세월에 걸쳐 천천히 체험시키며 가르쳐나가고 싶은 것이 내 생각이오……, 아직 너무 이른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저도 동감입니다.”
 아라스톨에게 있어서 ‘너무 이르다’는 건 플레임헤이즈가 되고 난 뒤부터의 세월을 말하는 것으로 치구사가 말하는 외견상의 앳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어쨌거나 이야기는 통하니까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주위의 그런 소망과 본인이 실제로 맞닥뜨리는 시기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랍니다. 여자아이는 보기보다 훨씬 조숙하고요.”
 “그것은 부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입니까?” 조금 무신경한 아라스톨의 물음에 치구사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다.
 “에에, 글쎄……. 어쨌든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데 있어 이른 시기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샤나는 가끔 위험할 정도로 무방비한 구석을 보이기 때문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용당하지 않도록 자신과 상대의 마음을 제어할 수 있도록 가르쳐둬야 해요.”
 “…….” 아라스톨은 맹목적인 보호자 정신에서 깨어나 새삼 깨달았다.
 아무 문제 없는 일이었다. 사카이 치구사도 샤나를 지켜주려 했던 것이다. 그것도 어쩌면 ‘천양의 겁화’의 힘으로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분야에서.
 그는 만약 이 세계에 나타나 있었다면 화염의 폭풍이 되었을 커다란 한숨을 내쉬더니, 미약하지만 속이 깊고 현명한 인간에게 천천히 사과한다.
 “……부인, 나의 무례한 요청을 철회해도 되겠소? 나도 이 세상에서 나이를 꽤 먹었지만 아직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이해가 얕은가보오.”
 치구사는 이 액면 그대로의 말을 재치 있는 유머로 받아들이고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샤나를 조금 곁에서 두고 봐왔다고 해서 분수를 모르고 지나친 실례를 저지른 게 아닌가 싶네요.”
 “아니요, 부인처럼 현명하신 분이 사카이 유지의 어머니란 점은 실로 행운이었소. 부인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샤나를 잘 지켜보며 조언해주시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어요.”
 어느 새 상황은 그렇게 되어 있었다.
 아라스톨은 대화의 진행과 결과에 납득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모종의 불만(치구사를 향한 것이 아닌)으로 인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요컨대 보호자로서의 맹목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러한 자가 나타날 거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실제로 이렇게나 빨리 게다가 고만한 풋내기……, 아니 실언이었오, 부인.”
 치구사도 동정하며 피식 웃는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우리 유지 같은 녀석한테 샤나처럼 훌륭한 아이는 정말 아깝기 그지없죠.”
 본인이 없다고 막말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음, 모쪼록 앞으로도 샤나를 잘 부탁드리오.”
 “저야말로 부탁드려야죠. 샤나를 위해서도, 아라스톨 씨께서 우리 유리즐 엄격하게 꾸짖어주셨으면 한답니다.”
 ‘음, 그 점에 관해서는 걱정할 것 없소, 부인.’
 “그리고 샤나 일이라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그 아이는 확실히 가르치면, 그 안에서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옳은 답을 찾아낼 게 틀림없답니다. 그 점은 믿고 계시죠?” 아라스톨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즉각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이오.”

 정각, 샤나아 유지가 쭈뼛거리며 사카이가에 돌아와보니 치구사는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이미 부엌으로 돌아간 뒤였다.
 툇마루에 놓인 쟁반에는 차갑게 식힌 보리차 병과 엎어놓은 두 개의 컵, 산처럼 쌓아놓은 쿠키 접시가 놓여 있었다.
 샤나는 쿠키의 유혹을(일단) 뿌리치고 먼저 주변을 둘러본다.
 휴대전화는 샤나의 백 옆에 놓여 있었다.
 흠칫흠칫 떨면서 그것을 집어들더니 샤나는 치구사가 보이지 않는 마당 구석으로 이동한다. 옆에 있는 유지와 얼굴을 마주보고 나서 조심스레 묻는다.
 “……아라스톨?” “샤나, 앞으로도 부인의 말씀을 잘 듣도록 해라.”
 “어?” “사카이 유지, 더 노력해라. 어머니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된다.”
 “뭐?” 두 사람은 다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날도 이케 하야토는 평소처럼 꽤 빨리 등교했다.
 교실에 들어간 그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우산꽂이.
 입구 옆에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제 사카이 유지가 잊어버리고 간 우산.
 자신이 빼내서 누군가에게 건네줬던 우산.
 그 의미를 깨달은 그는 교실을 두리번거린다.
 한 소녀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푸른 하늘에 뜬 해는 아침부터 낮에 걸쳐 시시각각 그 빛과 색을 바꾸고 있었다.
 상점가나 역 앞 백화점 등이 개점하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마죠리와 졸병 두 사람은 사토가를 나섰다.
 당연하다는 듯이 선두에서 걷는 마죠리는 모델 뺨치는 미모와 장신, 뛰어난 스타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플레임헤이즈가 된 순간 ‘왕’의 그릇이 된 인간은 육체적인 성장을 멈춘다고 하니 최강이자 절묘한 타이밍이었다고 사토와 타나카는 생각했다.
 지금 옛 주택가에서 시가지로 이어지는 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는 그녀는 어제 입은 와이셔츠와 배기팬츠 차림위에 재킷만 덜렁 걸친 모습이었지만 그 미모와 존재감으로 ‘단순한 후줄근’을 ‘러프한 패션’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참이었다.
 다만, ‘글리모어’를 옆구리에 낀 자세는 축 늘어져 있고, 조금 큰 신발을 질질 끄는 걸음걸이도 칠칠치 못해 보인다. 모델은 모델이지만 밤새워 고스톱이라도 치다 나온 모델 같다고 할까. 그런 그녀의 뒤를, 다소 멋부린 평상복 차림의 사토와 타나카가 따른다. 고등학교 1학년 표준 체격인 사토는 그렇다 쳐도 체격이 큰 타나카는 거의 대학생으로 보였다. 쓸데없는 것들한테 붙잡힐 뻔해도 마죠리가 ‘납득’의 자재법으로 상대를 격퇴해주니 큰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교복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죠리 씨, 그래, 오늘은 어디로 가는 거죠?” “오늘은 저기, 여자들만 바글바글한 데는 좀…….”
 사토는 가볍게, 타나카는 주춤거리며 말한다.
 일전에 쇼핑하러 갔던 곳은 속옷 가게로 마죠리는 두 시간이나 들러붙어 있었다. 사토는 태연한 표정으로 점원과 잡담을 나누거나 했지만 타나카는 안절부절못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마죠리는 맥빠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 내키는 대로 대충 들어갈 거야.”
 “그 내킬 때까지 시간이 장난이 아니잖아.”
 “쇼윈도 앞에서만 10분 단위라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ㅡ여자의 쇼핑에 따라나선 남자의 대표적인ㅡ투덜거림을 소머즈에 버금가는 그녀의 귀가 포착했다. 도수 없는 안경 너머에서 전엔 날카로웠지만 지금은 흐릿하게 노기가 떠도는 눈빛이 발사된다.
 “닥쳐, 굶고 다니고 싶어?” “으악, 그것만은 제발.”
 “우린 그것만이 유일한 낙이라고요.”
 두 사람은 그녀를 중심으로 하는 이런 대화에 완전히 이골이 나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에, 마르코시어스 ‘글리모어’를 통해 요란한 웃음 소리를 냈다.
 “히히힛, 그렇다면 오늘도 힘차게 가볼까?” 그 형체 없는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이 움찔 놀랐지만, 상식의 견고함을 아는 세 사람은 그런걸, 별일 아니야 하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분주해진 교실에서 학교 식당파가 교실을 나섰다.
 그중엔 이케, 유지, 샤나, 요시다라는 도시락파 정규 맴버 네 명의 모습도 섞여 있었다. 사토와 타나카는 최근 들어 잦아진 합동 결석, 즉 이 네 명은 언제나 책상을 붙이고 도시락을 먹는 여섯 명 중 나머지라는 의미다.
 각자의 손에는 봉투나 도시락 등이 있으니 학교 식당을 이용할 필요는 없었다. 학교 식당을 이용하는 친구들과 함께 먹기 위해 도시락을 가져가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가끔은 다른 데서 먹자.”
 이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 다른 장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유지와 샤나는 웬일인지 아침부터 풀이 죽어 있는 요시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간만에 화창한 푸른 하늘 아래에서 밥을 먹게 하려는 이케다운 배려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요시다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유지는 이른 아침의 일로 기분이 좋아졌다.
 ‘모처럼 샤나가 다른 놈과 함께 있다 해도ㅡ조금은ㅡ용납할 마음이 생겼는데 말이지.’
 비록 독점욕에서 비롯된 관용이나마 약간은 으스대면서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던 유지였지만 아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감정을 시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케가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던 세 명은 의아한 표저을 지었다.
 시립 미사키 고교는 교실 구분을 1학년 1층, 2학년 2층, 3학년 3층으로 나누고 있기에 유지네 1학년은 대개 위층에 갈 일이 없다.
 그러나 이케는 3층을 지나쳐 더욱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여, 여긴……?’
 유지는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일전에 이 동네를 흉악한 플레임헤이즈가 습격했을 때(앞서 마죠리와의 싸움이 유지에게 남긴 인상은 이랬다) 전투를 앞둔 샤나가 이 옥상 출구의 문을 발로 차……,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이케가 한가운데부터 바깥쪽으로 휘어진 철문을 열었다.
 “전에 누가 부쉈나본데 아직 수리를 못했대. 여긴 전망이 되게 좋아.”
 선생님이 수리업자를 부르는 것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부순 당사자는 태연한 얼굴로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네 명이 발을 들인 곳은 딱히 내세울 것 없는 그냥 콘크리트 바닥이었다. 낡은 철조망 장벽이나 깨진 틈 사이로 자라난 잡초를 장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정도의 장식만이 있는 곳이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아직도 바닥 전체가 거무스름하게 젖어 있었다.
 다만 정말로 전망은 좋았다. 미사키 고교가 자리잡은 주택가에는 고층 건물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높은 장소에 오르면 탁 트인 하늘이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마나 강과 옆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제방이 보이고, 미사키 대교 너머의 맞은편부터 빌딩 숲이 시작된다.
 “여기가 열려 있는 걸 애들은 거의 모르고 선생님들도 순시할 땐 안 오셔. 그러니까 느긋하게 노닥거려도 될 거야. 입구 안쪽에 전망 좋은 장소도 있더라.”
 아무래도 예비 점검까지 마친 듯하다. ‘주도면밀한 녀석’이라고 유지가 이케에게 내린 평가는 그가 젖은 자리에 깔기 위해 비닐 돗자리를 꺼내는 시점에서는 ‘지나칠 정도’라는 단서까지 붙게 되었다.
 “자, 밥 먹자.”
 무의미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 친구의 뭔가 꾸미는 듯한 이 말투에 유지는 왠지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은 것 같군.”
 시가지의 큰길, 그 한쪽에 펼쳐진 ‘크레들 가든’속에서 티리엘은 한 번 숨을 내쉬었다. 자재식을 짜넣은ㅡ대학생 혹은 고등학생으로 보였다ㅡ소녀를 향해 겨누고 있던 손가락을 내린다.
 그 소녀는 순식간에 토치로 변해 죽었다.
 주변에 있던 동행, 소녀와 동년배로 보이는 소년들도 모두 소라토에게 먹혔다. 토치를 만들 몫만을 남기고 전부 먹어치우자 곧장 뒤돌아보며 그가 말했다.
 “조금만 있으면 되지? 조금만 있으면 ‘니에토노노샤나’를 찾으러 가도 되는 거지?!” “네에, 그렇고말고요, 오라버니. 오늘 중에 모든 장치를 마치니까 내일요.”
 “신난다!” 순진하게 기뻐하는 소라토를 내버려 두고 슈드나이는 거리를 재빨리 훑어본다. 어제부터 멈춰 설 때마다 되풀이하는 행동이다.
 “신난다…… 는 그렇다 치고……, 티리엘, 이 동네에 떠도는 플레임헤이즈의기척,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어제부터 쭉 느끼ㅡ.”
 “앗!!” 소라토가 크게 외치며 슈드나이의 말을 가로막는다.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크레들 가든’ 너머의 도로 맞은편을 보고 있다.
 시선의 끝에는 애드벌룬을 몇 개나 띄운 백화점 건물이 있었다.
 “갖고 싶어, 갖고 싶어, 티리엘! 새거, 반짝반짝한 장난감!”
 티리엘은 방긋 웃는다.
 “네에, 가볼까요, 오라버니?” 슈드나이는 한숨을 내쉰다.
 “쯧, 또야.”
 그들은 소라토의 ‘욕망의 후각’이 포착한 먹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시락을 다 먹은 이케가 짐짓 시치미를 떼며 유지에게 강렬한 일격을 날렸다.
 “그러고 보니 사카이, 고등학교 들어온 뒤로 너희 집엔 통 놀러가질 않았네.”
 유지는 요시다가 평소보다 더욱 망설이며 건넨 도시락을 하마터면 뿜어버릴 뻔했다.
 “응?! 콜록, 응, 아, 아아……, 그랬나? 그랬구나.”
 “사토네 집처럼 넓고 사람도 없는 데가 있으니까 그런가봐. 너희 어머니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어린애 취급받는 덴 그다지 가고 싶어지진 않잖아.”
 “아, 그렇지.”
 뭔가 포위망을 좁혀오는 듯한……, 아니 이미 포위된 상태로 머리 위에서 콘크리트 세례를 받는 듯한, 그런 도망칠 수 없는 압박감이 말끝에서 배어나왔다.
 이케 하야토라는 소년이 이렇게 빙빙 돌려 말을 할 때는 대개 뭔가가 있다는 것을 유지는 지금까지 사귀어온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시선을 돌린 유지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요시다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시다……?’
 거의 파묻힐 듯 수그린 얼굴은 납처럼 하얘졌고 젓가락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입을 빠끔거리는 것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숨을 쉬느라 그런 걸까.
 이케는 말을 계속한다.
 “그래서 오늘 아침 말인데…….”
 “!!” 유지는 몸 속의 ‘영시미아’가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어제 네가 잊어버리고 간 우산을 돌려줄까 생각했어.”
 ‘이케?!’
 요시다는 이케가 일부러 주어를 생략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지금부터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가슴에 둔중하고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샤나는 이 대화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유지랑 그걸 보러갔을 때?’
 사실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메론 빵을 입 안 가득 베어물었다.
 빵 전문점의 맛은 물론 최고였지만 이미 혀에 익숙해진 판매점 빵의 다소 촉촉한 느낌도 싫진 않다. 이것도 이것대로 좋았다.
 이런저런 한가한 생각 중인 샤나를 본체만체하며 이케는 빙빙 돌린 추궁을 계속했다.
 “근데 마나 강 쪽에서…… 오는 게 보이더라.”
 ‘……그만 해…….’
 요시다는 새까만 시야가 빙글빙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 광경을 보고 괴롭고 슬픈 나머지, 그의 물음에 결국 평소처럼 모든 걸 털어놓고 만 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후회했다.
 “언제부터야? 지금까지 요시다의 호의를 계속 받아주었잖아.”
 이케의 가슴속에는 본인도 전혀 예상치 못한 분노가 숨어 있었다.
 거만하게도 그녀를 대신해 화를 내주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설마,
 “……그건, 그러니까.”
 유지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답답하기만 했다.
 상대방의 호감에 기대어 들뜨기만 했던 자신에게, 결국은 예상도 못했던 친구의 비난이 돌아왔다. 그 점에 동요한 나머지, 샤나와는 그런 관계가 아니고 단지 체력 훈련을 시켜주고 있을 뿐이라는 변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그것이 변명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 해.’
 요시다는 어둠 속에 갇혀서 분노를 껴안고 있었다.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게 다그치는 소년이, 정확하게는 자신을 대변해주고 있는 소년이, 지금까지 쭉 도움을 받아왔던 동경하는 소년이. ……그 모든 신뢰와 호의가 거꾸로 분노를 더욱 부채질한다.
 “그런 어중간한 짓을 하면 결국 상처를 입는 건ㅡ.”
 “그만 해!!”
 절규와 함께 자신의 도시락을 내동댕이치며 요시다가 벌떡 일어났다.
 경악해서 그 모습을 올려다본 이케는 말을 잃었다.
 “부, 부탁하지 않았어, 이케! 그런 거!”
 이케를 노려보는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넘쳐 뚝뚝 떨어졌다.
 “요, 요시ㅡ.”
 “나, 그런 거 아니야! 다르단 말야!!” 의미불명의 말을 다다다 쏘아내더니 요시다는 등을 홱 돌리고 달아나버렸다. 격정으로 굳어진 작은 등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남겨진 세 명은 뒤를 쫓는 것은 고사하고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그녀의 모습이 옥상에서 사라지고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앉아 있었다.
 한참 있다가 유지는 그녀의 분노 대상이었던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케는 미동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지는 이런 표정을 짓는 친구에게 뭔가 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샤나에게 말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주지 않을래?” “어? ……응.”
 이성을 잃은 요시다의 모습에 놀라 멍하지 앉아 있던 샤나는 순순히 유지의 말에 따랐다. 과자 봉투를 챙기는 것도 잊어버리고 옥상에서 나간다. 한 번 뒤돌아 유지를 봤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설명을 피했다.
 이윽고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유지는 다시 이케를 바라보았다.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워낙에 눈길을 끄는 ‘애염’의 남매는 백화점 장난감 매장이라는, 손님이 꽤 한정된 장소에서 완벽하게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슈드나이의 어두운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라는 모습 역시 그들 못지않게 눈에 띄는 건 마찬가지였다.
 번쩍거리는 각양각색의 새 물건과 들뜬 분위기로 가득한 수많은 진열대 중에 소라토는 한 진열대로 주저 없이 직행했다. 눈에 들어온 장난감 세트를 발견하더니 눈을 빛낸다.
 ‘……이번엔 뭐야?’
 슈드나이가 궁금해하며 쳐다보니 각각 오토바이나 비행기나 대포 등으로 변형하는 신호등 색깔의 로봇 3종 세트였다. 역시 별것 아닌 장난감이었다.
 소라토는 진열대에 놓인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쭈그리고 앉아 마치 태양을 우러러보듯 밑에서 올려다보는 자세까지 취한다.
 이번 흥미는 몇 분이나 갈까 하고 생각하는 슈드나이에게 티리엘이 말한다.
 “슈드나이,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야? 플레임헤이즈의 기척이 어쩌고 했었잖아.”
 오빠를 지키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느라 그랬던 걸까. 슈드나이 역시 호위라는 자신의 역할 때문인지 대답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으음. 우리들 어제부터 꽤 넓은 범위에 걸쳐 덫을 놓고 다녔잖아?” “그게 뭐?” “그동안 줄곧 거의 변하지 않는 커다란 기척을 느꼈어.”
 가까운 곳에서 늘 감시당하는 것처럼 느껴진 티리엘은 조금 불쾌한 듯 말한다.
 “……내 ‘크레들 가든’이 간파되기라도 했단 말이야?” 소라토는 그런 이야기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지금 ‘애염자’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오로지 저 진열대 위에 있는 로봇들뿐이었다.
 이걸 티리엘이 사주면, 놀고, 놀고, 실컷 또 실컷 놀고……, 그리고 그 다음은 모르겠다.
 “설마, 만일 그랬다면 공격을 해오든가 도망가든가 했겠지. 우리들은 줄곧 덫을 놓는 데 전념했잖아.”
 “아, 알아……. 그래서 당신의 의견은?” “으음, 이건 극히 희귀한 경우인데 말이야, 이 동네는ㅡ.”
 그런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바깥쪽.
 옆에서 어린아이가 달려와 소라토가 보고 있던 로봇 세트를 눈앞에서 집어들었다. 뒤에서 따라온 엄마로 보이는 여성에게 들고 가서 보여준다.
 “엄마, 이거야, 이거!” 깜짝 놀란 소라토는 빼앗긴 로봇 세트를 따라 일어선다.
 엄마로 보이는 여성은 장난감 매장에 금발 미소년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지만, 그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다가 무엇보다도 로봇 세트를 잡아먹을 듯 응시하는 모습에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빛을 띠었다. 소라토를 모자란 아이로 여긴 듯 아이를 데리고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뜨려고 한다.
 소라토는 그런 건 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지려 하는 그 위기감만을 느끼고 있었다.
 “저기, 티리엘, 괜찮아?” 대화 도중이었던 데다, 티리엘은 그 말을 장난감을 사도되느냐는 애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가볍게 동의했다.
 “네에, 그러세요, 오라버니.”
 어린아이가 두 동강이 났다.
 배에 가로로 직선이 그어지며 상하 각각의 몸 반쪽이 날아갔다.
 아이 엄마는 아직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안개처럼 흩뿌려지는 아들의 피보라, 그 건너편에서 눈부신 갑옷을 걸친 소년이 자신을 향해 검을 내리치는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의 엄마도 두 동강이 났다.
 정수리에서 다리 사이까지, 일말의 저항조차 느껴지지 않는 속도로 소라토는 검 ‘흡혈귀’를 내리쳤다. 얼굴이 드러나는 투구 바깥으로 금발이 나부끼고, 검은 단죄의 여운으로 인해 핏빛 광채를 번뜩였다.
 동화에 나올 법한 정의의 기사 같은 미소년. 그 엄청난 살육이 벌어진 몇 초 뒤 잇단 절규가 터져나왔다.
 “꺄아아악!!”
 “사! 사, 살인자!!” “겨, 경찰, 경찰!!”
 그들의 모습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소라토는 날아간 어린아이와 떨어진 모친을 불꽃으로 바꿔 단숨에 빨아들였다. 역시 토치 몫만큼 불을 남겨놓고 남겨진 로봇 세트를 줍는다. 그러나 내던져진 충격으로 상자가 크게 찌그러지고 안에 든 로봇도 흐트러져 아까 보았던 가지런함은 사라져버렸다.
 “……이런 건 싫어.”
 소라토는 그 순간 흥미를 잃고 상자를 내던졌다.
 그런 오빠의 모습을 본 티리엘은 양 손을 허리에 짚고 곤란하다는 투로 웃었다.
 “아아, 오라버니는 정말 못 말린다니까! 이런 일을 할 때는 우선 봉절부터 하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큰 소동이 일어나버리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매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먹고 남은 불도 토치를 형성할 때까지, 그 갑작스런 이변은 인간에게 계속 인식된 상태인 것이다(토치가 형성된 후엔 이유 없는 공황ㅡ착란이 된다). 미친 듯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공포가 주변에 전이되어 매장 안은 절규와 혼란이 일으킨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소동의 장본인인 소라토는 천진하게 고개를 휙휙 젓는다.
 “하지만 난 봉절을 할 수 없는걸.”
 “그러니까 저에게……, 아니 관두죠.”
 자신의 착각(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을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흘려보낸 뒤 옆에 선 호위에게 말한다.
 “슈드나이, 지금 일로 들킨 것 같아?”
 소라토가 ‘크레들 가든’이 펼쳐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을 먹어버린 것이다. 이 식사가 일으킬 위화감 자체는 매우 작지만 같은 동네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다면 감지당할 위험도 있다.
 슈드나이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군. 예민한 플레임헤이즈라면 틀림없겠지. 기척도 여전히 큰 걸 보니 거리도 그리 멀진 않을 거야. ‘천목일개’를 쓰러뜨릴 정도의 녀석인데 이 변화를 놓치지는 않겠지. 분명 이 ‘크레들 가든’은 기척을 새어나가지 않게 하지만…….”
 “응. 상대가 탐지를 위해 자재법을 쓰면 간단하게 반응하지. 이젠 숨바꼭질도 끝난 것 같아.”
 티리엘은 오빠를 위해 아쉬워했다. 물론 오빠 탓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덫을 더 놔서 만전을 기하고 싶었는데……, 그럼 시작할까, 슈드나이. 기분 좀 돋우게 여기 소동을 전부 불태워줘. 커다란 진짜 불을 보고 싶어.”
 슈드나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서비스로 하라고?” “그래주면 마음대로 보수를 챙겨가도 상관 안 할게.”
 “오빠가 식사한 김에 지불까지, 게다가 셀프 서비스로? 시작하기도 전인데 사람을 너무 혹사하…… 지만!” 그 말과 함께 짙은색의 정장에서 양 팔이 쑥 뻗어나왔다. 뻗어나오면서 두꺼워져 그 끝의 손바닥이 탁한 보라색으로 활활 타오른다. 우왕좌왕 도망치는 사람들의 등을 바짝 뒤쫓은 그 불덩이는 어느 새 호랑이의 머리 형태로 변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을 쩍 벌렸다. 그 입에서 단말마의 절규도 녹여버릴 엄청난 불꽃이 분출되었다.
 “뭐, 때론 마음껏 날뛰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슈드나이가 그 호랑이들 대신 크고 흉포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 사이에도 호랑이 머리를 한 양 팔은 내부를 온통 휩쓸며 가는 곳마다 탁한 보라색의 불꽃을 뿜어내 사람을 통째로 삼키고 있었다.
 “후후, 개전의 봉화치고는 제법 아름다운걸…….”
 그 참상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던 티리엘은 품에 안은 오빠에게 속삭인다.
 “자, 가볼까요, 오라버니. 우선은 인사를 하죠.”
 “응, 빨리 가자. 어서!” 세 개의 그림자가 업화와 검은 연기 속에 수많은 죽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물론 그 플레임헤이즈는 예리했기 때문에, 백화점에 일어난 작은 이변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 자는 그들의 표적인 ‘니에토노노샤나’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이 도시에 있던 또 하나의 플레임헤이즈인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였다.
 그녀는 같은 시가지, 그것도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고작 머리카락 하나만이 살랑 움직일 정도인 이 위화감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감지하고 나서 잠시 경악했다. 지척에서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 때의 전투가 있고 나서 사토와 타나카가 그 경과를 끈질기게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이렇게 장담했던 것이다.
 “이제 이 동네에는 더 이상 ‘무리’가 오지 않을 거야. 전에도 말했지만 연속해서 한 장소가 피해를 입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 더욱이 이 도시는 벌써 ‘헌터’의 습격을 받았고 이번엔 ‘시체줍기’에게 습격당했어.”
 자기가 그 ‘시체줍기’를 공격하는 바람에 대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러니까 벌써 이 정도로 소동이 일어난 이 도시에 두 번 다시 ‘무리’가 올 리 없단 말이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그리고 그 말은 일반적으로 볼 때 옳았다. 그러나 모든 이에는 항상 예외가 있는 법, 그것도 대개는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마죠리.”
 같은 감각을 느낀 마르코시어스가 옆에 있는 스피커에 세워둔 ‘글리모어’에서 오랜만에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ㅡ알고 있다고! 뭐야, 진짜?!” 마죠리는 들고 있는 색소폰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버럭 소리질렀다.
 “왜, 왜 그래요, 마죠리 씨?”
 가까이에서 전자 기타를 안고서 놀고 있던 사토가 깜짝 놀라 물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드럼을 만지작거리던 타나카도 얼른 쫓아왔다.
 “누님?” 이따금 눈길이 머물던 악기점에서 그들은 시간을 죽이고 있던 참이었다. 세 명 다 즐길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소에서 이것저것 주무르며 놀고 있던 차에 난데없는 노성이 튀어나온 것이다. 점원이나 다른 손님들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들을 무시하고 마죠리는 색소폰을 난폭하게 진열대 위에 돌려놓았다.
 ‘이놈의 세상은 느긋하게 추억에 잠길 정도의 여유도 없는 거냐고?!’
 그녀는 맛없는 테킬라로 뱃속을 다 태워버린 듯한 표정을 짓고, 눈앞에서 경계 자세를 펼치고 있는 사토와 타나카에게 간결한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 당장 ‘파리단’에 가봐.”
 그것은 그들이 한 달 전 ‘시체줍기’와 싸웠을 때 발견한 보구의 이름인 동시에 그것이 놓인 그들의 비밀 기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 그 전부를 아우르는 말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즉……!
 “거, 거짓말이죠?!” “‘무리’인가요?!”
 두 사람은 펄쩍 뛸 만큼 놀랐다. 마죠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두 사람은 이제 이 동네에는 ‘무리’가 오지 않는다고 완전히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갑자기 뒤집히게 되자 동요가 얼굴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 한심한 표정을 보고 마죠리는 다시 윽박지른다.
 “나도 가끔은 틀릴 때가 있어! 자, 얼른 가보기나 해!”
 “하, 하지만.”
 “우리들, 저기, 그러니까.”
 “ㅡ응?”
 그들은 ‘이 한 달간 거듭해온 준비라고도 할 수 없는 준비, 그 성과를 지금 여기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미련할 만큼 무모하고 부질없는ㅡ스스로도 알고 있는ㅡ결심으로 인해 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우면서도 기를 쓰고 버티고 있었다.
 마죠리는 이 두 사람의 필사적인 모습을 보고 문득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이 바보들!”
 하며 밝고 가볍게 웃어주고 싶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버린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가벼운 웃음 대신 멋쩍은 웃음을 지어주며 어안이 벙벙해진 두 사람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싸움에서 무슨 도움이 되겠냐. 지금은 모처럼 너희들이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으니까 잔말 말고 지시에 따라! 알겠지?!”
 그리고 마죠리는 두 사람의 이마를 각각 검지로 쿡쿡 찔렀다.
 “!”
 “?”
 찔린 이마에 군청색의 빛이 떠올랐다.
 마치 반론을 봉하는 자재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사토와 타나카는 말이 없어졌다.
 그 두 사람에게 마죠리는 한 마디 했다.
 “굼뱅이는 질색이야.”
 “아, 알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누님!” 두 사람은 총알처럼 가게를 뛰쳐나갔다.
 ‘……건투를 빌어? 조심하라고?’
 마죠리는 무심코 피식 웃어버렸다. 저 두 사람의 졸병 노릇도 어지간한 것이었다. 뭔가 유쾌해진 마죠리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멀찍이 둘러서서 보고 있는 점원이나 다른 손님에게 손을 저으며 말한다.
 “아아,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럼.”
 옆에 있는 ‘글리모어’를 들고 가게를 나선다.
 가게 바깥은 어쩐지 어수선했다.
 마죠리는 방금 전의 감각이 느껴진 쪽으로 걸음을 돌린다.
 그 앞에는 소동의 근원으로 보이는, 불길이 솟구치는 백화점이 있었다. 몇 대나 되는 소방차가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며 눈앞의 정체 상황을 느릿느릿 뚫고 지나간다.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싸우는 이유도, 싸울 의욕도 잃어버린 플레임헤이즈가 무거운 어조로 묻는다.
 그녀와 계약한 ‘홍세의 왕’은 끝까지 가볍게 대답했다.
 “글쎄, 어쨌든 네가 마냥 늘어져 있으니까 못 참고 싸움 쪽에서 먼저 찾아왔나보지.”
 히힛 하고 웃더니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는 오히려 되물었다.
 “그나저나 노래는 할 수 있겠나? 나의 아름다운 고블릿, 사랑하는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
 물론 이 두 사람은 ‘염발작안의 토벌자’에게 도움을 부탁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낙엽 한 장.
 마죠리의 앞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힘의 결정이 떨어져내려왔다.
 내려와 땅에 살랑 닿는다.
 “!” 그 직전에 마죠리는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장소에 탁한 보라색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 주목하고, 혹은 그 여파에 휩쓸려 쓰러지다가 우뚝 정지한다.
 “……이건?!” 착지한 마죠리를 에워싸고 황금색 나뭇잎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폭발을 중심으로 하여 넓은 보도에서 도로 일부까지 포함하고는 돔 같은 모양을 형성하고 있었다.
 “봉절…… 이 아니야?” 뛰어난 자재사인 마죠리는 이 자재법이 기척을 은폐한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채고 곧바로 이해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 폭발의 여운으로 보라색 불꽃이 튀는 중심에서 세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와 더불어 주변 사람들이 불꽃으로 변하면서 한 사람에게로 빨려 들어간다.
 한가운데에 선 미소녀가 밝게 웃으며 말한다.
 “어느 분의 계약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인사를 드려야 하겠기에.”
 프랑스 인형처럼 화려한 용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 몸 안에는 거대한 ‘존재의 힘’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마죠리는 그녀가 아닌 다른 한 사람ㅡ미소녀의 그늘에 숨어 불꽃을 빨아들인 갑옷 차림의 미소년말고ㅡ인 짙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를 보고 마치 활시위를 당기듯 미소짓는다.
 “흐응……, 이런 데서 뭐 하는 거지? 비실비실 호색한.”
 그 남자ㅡ슈드나이도 그녀를 보고 조금 놀랐다.
 “호오……, 오랜만이로군, 요란하고 아름다운 살육자.”
 사람은 전부 사라지고 남겨진 불꽃만이 떠도는 이계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 노려보았다.
 “어머, 아는 사이?” “으음, 소개하지, 티리엘. 우리 ‘홍세의 무리’의 천적인 토멸의 도구 플레임헤이즈,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살육자……,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다.”
 “어머, 그럼 ‘유린의 조아’의?!” 말만큼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는 두 사람을 향해 마죠리가 아닌 다른 자의 음성이 옆구리의 신기 ‘글리모어’를 통해 말한다.
 “티리엘……? 네놈들, ‘애염’인가?!”
 그것은 애욕을 탐닉하며 자재법으로 사로잡은 먹이를 실컷 괴롭힌 뒤 죽인다는 음습한 자재사 남매의 본명.
 “네. 소문이 그렇게 퍼졌나요……? 동포를 죽이고 쾌재를 부르는 미친 ‘왕’님……. 우후훗.”
 티리엘은 비웃으며 오빠를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소개해드리죠. 이쪽은 내 오라버니 ‘애염자’ 소라토, 나는 ‘애염타’ 티리엘. ‘천변’ 슈드나이는 이미 아시는 것 같고.”
 마죠리는 부아가 치밀어오르는지 상대방을 도발했다.
 “그 소문값도 못하고 생쥐처럼 숨어다니는 게 고작인 변태 남매가 이런 데서 뭐 하는 거야?”
 노골적인 모욕에 티리엘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당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당신의 소유물을 나의 오라버니께 넘겨줘야겠ㅇ요. 당신은 거절할 자격이 없답니다. 나의 오라버니가 바라는 것이니까.”
 라고 요구한다.
 마죠리는 그 의미불명의 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속이 끓는 것을 느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만 이 ‘조사를 읊는 자’에게 잘도 주둥이를 나불거리는군……. 너희들 제법 배짱이 두둑한걸?”
 “서로의 실력 차이를 고려한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라고 생각하는데요? 자, 딴청 피우지 말고 넘기세요.”
 “그러니까 뭘?” “물론 ‘니에토노노샤나’죠.”
 ‘엥? ……하하, 그렇게 된 건가?’
 마죠리는 순간 사태를 파악했다.
 작안의 소녀가 휘두르는 검이 그 유명한 괴물칼이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 엄청난 힘을 직접 맛보기도 했다. ‘애염자’가 눈독을 들일 만한 물건이기도 하다.
 ‘그럼 이건 그 꼬맹이의 문제인데.’
 악감정에서가 아니라, 단지 현상을 그대로 인식하려고 했다. 놈들의 목적이 이 전투에 어떤 영향을 줄지,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면 유리해질지 냉정하게 계산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무시.
 쓸데없이 대화로 상대에게 필요 없는 정보를 건네는 미련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티리엘은 마죠리가 잠자코 있을 뿐, 자신들이 기대하는 보구를 내놓지 않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성질 급한 플레임헤이즈는 도발하면 바로 검을 뽑을 줄 알았는데……. ’조사를 읊는 자‘의 이름은 허세가 아니다 이 말인가?’
 하지만 평가는 속에 감춰두고 조롱과 도발의 말을 계속해서 마죠리에게 던졌다.
 “3대 1인데 아직도 비장의 솜씨를 발휘하지 않는 건가요? 이러면 조금 혼내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티리엘은 마죠리의 강렬한 눈빛에 겁먹은 소라토의 투구에서 흘러나온 금발을 어루만진다. 어루만지면서 가장 사랑하는 오빠에게 살육 허가를 내린다.
 “자아, 이제 하세요, 오라버니.”
 가장 사랑하는 누이의 말을 듣고 소라토의 눈동자에 불이 붙는다.
 “응!” 머리를 위아래로 힘껏 끄덕인다. 그리고 뒤돌아보는 동작의 흐름을 타고 휘두른 ‘흡혈귀’가 마죠리의 눈앞까지 덮쳐왔다.
 “!!” 직감적으로 마죠리는 방어의 자재법을 쓰지 않고 뒤로 몸을 젖혔다.
 칼날에 붉은 파문을 흘리고 있는 검이 피부에 그 존재의 감촉을 남길 만큼 아슬아슬한 간격을 남기고 스쳐 지나간다.
 뒤로 젖힌 동작에서 돌아오는 몸의 움직임에 맞춰 그녀는 노성을 질렀다.
 “깔보지 마!” 그 입에서 군청색 화염이 솟구쳐나왔다.
 그러나 소라토는 ‘흡혈귀’의 검 끝을 원을 그리듯 회전시켜 이 불길을 손쉽게 떨쳐냈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겁먹은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냉철한 전사가 된 미소년의 다음 공격이 회전 운동에 이어 덮쳐온다.
 “대체 깔보는 게 누구지?!” 설상가상으로, 상공에서 슈드나이의 일갈이 내리꽂힌다. 마죠리의 공격을 허점으로 보고 크게 도약한 그는 양 팔 모두를 보라색 화염의 호랑이 머리로 만들고 있었다. 그 호랑이 입이 그녀의 퇴로를 막기 위해 불덩어리를 토해낸다.
 “ㅡ크윽?!”
 마죠리는 찰나의 판단에 따라 회피를 포기하고 세 명이 놀랄만한 공격을 감행한다.
 발밑에 군청의 폭발을 일으켜 앞으로 쓰러지듯 회전, 마치 춤추는 듯 화려한 동작으로 ‘흡혈귀’의 칼날을 피해 소라토의 등 뒤에 내려선다. 엄청난 동체 시력과 신체 제어 기술이었다. 소라토를 방패삼아 슈드나이가 폭발시킨 화염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뒤,
 “이.”
 그 등을 ‘글리모어’로 힘껏 후려갈겼다.
 “이 자식들이!!”
 화판을 몇 개나 겹쳐놓은 듯한 책이 플레임헤이즈의 괴력을 싣고 그의 등과 격돌했다.
 “?!” 소라토는 예상치 못한 충격에 푹 고꾸라졌지만 곧 한 손을 땅에 짚고 회전하여 그 기세로 눈앞에 있는 다리를 ‘흡혈귀’로 갈랐다.
 마죠리는 곡예 같은 도약으로 칼을 피하며 기합 소리를 낸다.
 “하앗!!” 주위에 군청색의 폭발을 일으켜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티리엘이 펼친 ‘크레들 가든’이 내부에서 일어난 대폭발에 위태롭게 요동친다. 자욱한 연기가 그 내부를 가득 채웠다.
 마죠리는 바보가 아니므로 고작 이 정도로 세 명을 해치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곧장 다음 자재법을 연이어 펼친다.
 ‘제길……, 대체 뭐야?!’
 초조감을 천천히 곱씹을 틈도 없다. 마죠리는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 머리 위를 보라색 화염으로 이루어진 호랑이 머리가 통과하고 송곳니가 바람을 가른다.
 “제법이군, ‘조사를 읊는 자’! 그러나…….”
 채찍처럼 뻗어온 정장의 팔에 이어진 본체……, ‘천변’ 슈드나이가 연기 너머에서 말했다. 목소리에 여유가 묻어나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마죠리는 고통스러운 와중에 생각했다.
 “닥치는 대로 죽이는 야수의 본성인 ‘토가’를 왜 두르지 않는 거지? 나의 동지들을 수없이 토멸한 도살의 즉흥시를 왜 읊지 않는 거냐?” “쳇.”
 마르코시어스가 조그맣게 혀를 찼다.
 그렇다. 어찌된 셈인지 마죠리는 그녀가 플레임헤이즈라는 증거인 화염의 옷 ‘토가’를 두르지 않고 있었다. 자재법을 원하는 대로 구사하기 위한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그녀가 아까부터 초조해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너나 잘하는 게 어때? 본인이 그걸 쓸 정도의 상대라고 생각하나보군?” “네가 날 우습게 볼 수는 없을 텐데?” 사투를 거친 확신에 이길 수 있는 논리는 없다. 눈속임도 억지도 ‘천변’에게 통하지 않는다.
 마죠리는 분함에 치를 떨면서, 그의 양 팔에서 연이어 튀어나오는 화염탄의 폭발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순간 전장의 한편에서 긴장감 없는 외침이 터졌다.
 “틀려! 이 녀석이 아니야, 이 녀석은 안 가지고 있어!!”
 소라토였다.
 “뭐라고요, 오라버니?” 꽤 놀란 모습으로 티리엘이 묻는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그녀의 옆에 내려선 슈드나이였다.
 “그래, 역시 아니었군. 그녀가 검을 잡다니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된 거야?” 어린애처럼 타박타박 뛰어온 소라토를 가슴에 안으며 티리엘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마죠리를 바라보았다.
 슈드나이가 다시 말했다.
 “계속해서 커다란 기척이 느껴진다고 말했었지, 티리엘? 아마도 이 동네엔 플레임헤이즈가 한 명 더 있는 것 같아.”
 ‘들켰나.’
 마죠리는 코웃음을 친다. 상대방의 착각이든 아니든 자신이 그런 걸 알 필요는 없다. 말없이 전투에 들어갈 허점을 노린다.
 “뭐라고요?! 왜 더 빨리 말하지 않은 거야.”
 티리엘의 힐문에, 호랑이 머리에서 원 상태로 돌아온 손바닥을 보이며 슈드나이가 말했다.
 “막 말하려던 참인데 소라토가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았고, 그녀가 본성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서 일단은 시험해본 것뿐이야.”
 “이게 웬 헛수고람.”
 티리엘은 노골적으로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인사하자마자 사람을 잘못 보다니……. 이 자가 그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어서 ‘오르골’을 가동시켜야 해.”
 “요청은 무슨!” 맹렬하게 분노하는 마죠리를 무시하며 티리엘이 지시를 내렸다.
 “최악이야. 위력권 내에서 도망가버리겠어……. 슈드나이, 네게 필요한 만큼 ‘크레들 가든’을 여기 남겨두고 갈 테니까 이쪽의 발을 묶어줘. ‘오르골’이 가동되면 다시 지시를 내리지.”
 “알았다.”
 짧은 동의를 얻고 난 다음 티리엘은 자신과 오빠의 발밑에 황금색 나뭇잎의 회오리를 둘렀다. 그 회오리가 점차 거세지면서 남매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죠리는 쫓아가지 않았다. 적의 전력 분산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듣자하니 묘한 자재법이나 보구를 쓰는 것 같았지만, 그들과 상대하는 것은 어차피 그 작안의 꼬맹이 몫이다.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자신은 눈앞의 적을 해치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때, 사라지려던 티리엘이 어두운 원한을 감춘 얼굴 웃는 얼굴로 내뱉듯 말한다.
 “조아의 노예여, 아까 한 말은 잊지 않았어요……. 모욕은 보복으로만 씻어낼 수 있으니……, 내 오라버니의 바람을 이루고 나면 그 뒤엔 당신도 가능한 한 잔인하고 비참하게 죽여드리지요…….”
 조롱은 회오리에 휘말리며 토막토막 끊겨 어느덧 소리의 주인과 함께 사라졌다.
 마죠리는 한 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딴 장난보다 중요한 문제가 눈앞에 있다. 앞에서 다가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가볍게 말을 던진다.
 “저런 게 이번 의뢰인이라니 고생이 많겠군, ‘천변’. 이젠 슬슬 일에서 해방되어보지 않겠어?” 상대 남자의 조용한 거동은 총구가 목표물을 노리는 것과 흡사했다.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감춘 위장된 겉모습에 으스스한 미소를 띠며 물음에 대답했다.
 “너야말로 컨디션도 안 좋아 보이는데 그렇게 기를 쓰고 일해서 뭐 하나. 영원한 휴가라도 내지 그래?” 대담한 웃음을 나눈 것은 순간.
 그리고 격돌은 시작된다.

 옥상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속.
 낡은 철조망에 힘없이 등을 기대고 선 이케는 긴 침묵에 질린 듯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 아침 너희들이 본 건 요시다였어.”
 “그…… 래.”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철조망에 기대선 유지가 짤막하게 대답한다.
 요시다가 자신들을 봤을 때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가슴속을 꽉 채운다.
 이 어중간한 동정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계속 상대의 호의에 어리광만 피울 뿐 스스로의 감정은 전혀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난 대체 누구를 얼마만큼…….
 멍하니 생각하는 유지에게 이케는 공허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요시다에게 우산을 건네준 게 나야.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너무 나섰나봐…….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무기력한 음성에는 낙담한 빛이 가득했다.
 그 기척을 느낀 유지는 기분을 돋워줄 셈으로 물어보았다.
 “……너도 실수할 때가 있구나.”
 그의 대답엔 기대한 만큼의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실수…… 같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까도 느닷없이 화가 나는데 진정이 안 되더라……. 미안.”
 유지는 이케를 보지 않고 시선을 허공으로 향했다. 철망에 체중이 실리는 바람에 끼익 하고 신음소리가 난다.
 “됐어. 네가 한 말 자체는……, 진짜 왜 그랬나 싶지만……, 아주 틀린 건 아니야. 단지 나한테만 말하는 거였으면 몰라도 요시다까지 있는데, 조금 방법이 지나쳤던 것 같다.”
 “으음.”
 후회가 소리로 밀려나온 듯한 동의.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유지는 이케가 왜 화난 표정이 되었다 울상이 되었다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이 안경맨이 이성을 잃어버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케가 요시다에게 갖는 그 감정’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며 느끼고 있는지,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비가 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 있기라도 한 건지 확 와닿지 않는다.
 ‘샤나가 다른 녀석이랑 있을 땐 그렇게 화가 치밀더니……. 이케가 불쌍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이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실은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데 대한 단순한 기쁨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연모한다는 감정을 동경하고 있는 어린애라서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랑이나 연모의 감정, 호의나 기쁨은 어떻게 분간하면 되는 걸까……?’
 차례차례 떠오르는 의문에 유지는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이케에게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케.”
 “응ㅡ.”
 툭 던지는 듯한 대답에 유지는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요시다를…… 좋아해?” 5초가 지났다. 대답은 없다. 고민하는 걸까?
 10초가 지났다. 대답은 없다. 아직도 고민하는 걸까?
 15초가 지났다. 대답은 없다. 어쩌면 대답할 수 없는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케에게 재차 물으려 한 유지는 눈에 들어온 광경에 위화감을 느꼈다.
 처음엔 햇빛의 반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 온몸으로 깨달았다.
 ‘자, 자재법!!’
 거대한 자재법이 발동되고 있었다.
 옥상에서 보이는 광경 전체에 음침하고 흐릿하게 빛나는 황금색 안개가 깔려 있었다.
 그 안개가 미사키 시를 안에 몰아넣고 모든 것을 정지시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ㅡ너무나 갑작스러운 전투의 시작이었다.

 분노의 혼란에서 눈을 뜬 요시다 카즈미는 맹렬한 자기혐오감에 빠져 있었다.
 ‘……난…… 바보야……. 정말 바보…….’
 자신이 저지른 짓을 떠올려 보았다. 도저히 들 수 없는 얼굴이, 힘없이 축 늘어진 양 어깨가,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이 곧 쓰러질 것처럼 무겁다.
 ‘……그래. ……난 이케한테 화난 게 아니야. ……이케는 잘못한 게 없어.’
 잘못한 것은 자신. 늘 도움만 받고, 신세만 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이케 하야토의 말에 격분한 것은 자신의 입으로 해야만 했던 말을 자신 아닌 남이, 그것도 자신보다 더 확실하고 딱 부러지게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너무나 분해서 그에게 화를 내고 만 것이다.
 ‘슬프다면, 괴롭다면 내 힘으로 사카이에게 똑똑히 말해야 했는데……. 그렇게 낙담하기만 하고, 침울해하기만 하고, 아무것도하지 않았어……. 으음.’
 할 수 없다고 단정짓고 줄곧 도망만 다녔다. 나는 소심하니까 아무것도 못한다고 변명하면서 친절한 이케 하야토한테 응석부리고 의지하고……. 결과적으로는 그의 당당함을 지투하며 그런 꼴사나운 짓을 저지른 것이다.
 ‘나란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이야……. 하지만.’
 무서웠던 것이다. 오늘 아침 목격한 사카이 유지와 히라이 유카리의 사이좋은 모습이. 두 사람이 연인처럼 붙어서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두 사람이 뭔가 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그랬다가 그나마 조금 이어져 있는 관계까지 끊어져버린다면…….’
 그러나 두려워하며 몸을 사린 결과는 이것이었다.
 이케 하야토는 화가 났겠지. 사카이 유지는 질렸을 거야.
 전부 자신의 소심한 마음, 어정쩡한 각오 탓이었다.
 언젠가 맹세하지 않았던가, 스스로 해내자고, 노력하자고.
 사카이 유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고작 두려운 게 하나 생겼다고 물러날 만큼 보잘것없었던 건가.
 ‘아니야.’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럼 왜 직접 말할 수 없었을까.
 ‘그건 내 각오와 결심이 부족했던 탓이야.’
 지금 이상으로 발전하고 싶다면 보다 더 확실한 마음가짐으로 사카이 유지에게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된다. 두렵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할 수밖에 없어.’
 마음을 다잡으며 억지로 쳐든 시선이 마치 방금 한 결심을 시험하듯 한 소녀의 모습을 포착했다.
 ‘지지 않아. 지지 않아. 지지 않아.’
 그 소녀……, 자각하지 못하는 마음과 티없는 강인함으로 사카이 유지를 사로잡고 있는 그 소녀에 대한 뜨거운 대항 의식이 끓어올랐다.
 ‘유카리한테 지지 않을 거야.’
 요시다 카즈미는 한 걸음 내디뎠다.

 점심시간, 샤나는 교내를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아니, 실은 요시다를 찾고 있었다.
 찾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찾고 있었다.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과자까지 두고 왔네…….’
 요시다 카즈미가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 그 자체로는 좋아하는 부류에 속한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나 때때로 그녀가 유지와 함께 있거나 유지에게 접근하면 기분이 나빠지곤 한다. 그런 이유로 요 한 달간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줄곧 싫은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유지를 마구 혼내주고 나면 그런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 이상 그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 그 모습,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그 표정이 마음 어딘가에 걸려 따끔따끔한 통증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아냐, 아픔 같은 게 아냐.’
 그것은 불쾌감이었다.
 뭔가 그녀가 결정적으로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나쁜 징조를 그 표정 속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오늘 일로 언제나 소극적인 그녀의 본심, 그 일말의 끝자락을 엿본 것 같았다. 왠지 그것이 자신에게는 몹시 기분 나쁜…….
 그녀를 만나 그것이 뭔지 묻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물어봐야 좋을지는잘 모르겠지만.
 ‘!’
 있다.
 학생들 사이에 뒷마당이라 불리는, 잔디를 심어놓은 교사 뒤편 길을 따라 요시다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낮에는 볕이 잘 안 들고, 또 어제 내린 비로 잔디까지 젖어 있는 이 장소에 다른 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위해, 자신을 위해 비워놓은 것 같았다.
 ‘…….’
 샤나는 초조감인지 분노인지 모를 불쾌한 감정을 가슴에 담고 뒷마당을 가로질러갔다.
 요시다도 늘 떨구고 있던 시선을 똑바로 샤나에게 맞추며 천천히 걸어온다.
 이윽고 두 사람은 몇 발짝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요시다의 얼굴에는 아까 이성을 잃었던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자신의 의사를 똑똑히 전하는 듯 보였다. 그러면서 똑바로 샤나를 응시한다.
 샤나는 이것이 결의에 찬 얼굴이라는 것을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경험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뭐라고 딱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두려워.’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녀가 이런 얼굴을 했던 적이 있었다.
 [지지 않을 거야.]
 자신을 향해 그 한 마디를 했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 때는 아무느낌도 없었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유지에게 물어봤지만 그도 잘 몰랐는지 대답해주지 않았다.
 ‘……유지에게……?’
 샤나는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두려움에 그라는 존재가 결부되어 있다는, 아니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요시다가 입을 열었다.
 “유카리는 약았어.”
 그 담담한 어조에 샤나는 압도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모욕으로 여겨지지만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바보처럼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뭐가.”
 불쑥 요시다가 말한다.
 결정적인 말.
 “사카이를 좋아하지?”
 “ㅡ!!”
 샤나는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좋아해? 내가 유지를……?’
 요시다의 말을 되새기며 확인하는 동안 가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왔다. 몸이 오그라드는 듯, 무서운 뭔가에 강하게 짓눌리는 듯한 아픔. 그 말 속엔 그런 강한 힘이 있었다.
 요시다는 결의로 굳어진 얼굴로 더 힘차게 말한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모르는 척하고, 그러면서 나보다 훨씬 가까이 있고……, 약았어.”
 “……웃…….”
 샤나는 한심한 신음소리를 냈지만 반격을 위해 힘을 그러모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더욱 한심했다.
 “……내,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해?” 평소의 요시다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히 겁먹고 입 다물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말할 자격 있어.”
 요시다의 목소리엔 더욱 힘이 넘쳐난다.
 샤나는 그 힘에 명백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을 위협하는 힘이었다.
 “나도 사카이를 좋아하니까.”
 “!!”
 그만하라고 소리지를 뻔했다.
 ‘그건, 나만의, 나의ㅡ!!’
 플레임헤이즈가, ‘염발작안의 토벌자’가 보통 인간 소녀의, 그것도 고작 말 몇 마디에 다리를 떨고 있다. 그리고 가슴에 문득 떠오른 말, 그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 나, 뭐지ㅡ?’
 소중한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 하염없이 오그라드는 마음,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상실감,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된 가슴속의 외침. 그것은 흡사 분노와도 같은, 불타오르는 듯한 마음의 실체를 바깥으로 끌어낸다.
 ‘ㅡ내가…… 유지를ㅡ, 나는…… 유지를ㅡ.’
 요시다는 더욱 샤나를 도발한다.
 “나…… 나는 결심했어. 이제 애매한 태도는 보이지 않을래. 다른 사람이 도와주길 기다리거나 부탁하지 않을 거야……. 스스로 노력해서 내 힘으로 할거야.”
 “……아.”
 샤나의 심장이 커다랗게 뛰었다.
 두려운 것이 다가온다.
 “나 사카이한테 한 번 더,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내 입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거야.”
 “안 돼!!” 지금 비로소 샤나는 알았다.
 이 소녀가 유지와 함께 있는 것을, 두 사람이 접촉하는 것을 자신이 왜 불쾌하게 여겼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유지가 나빠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지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유지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게 싫었던 것이다. 다른 여자와 사이좋은 게 싫었던 것이다.
 원인은 유지에 대한 자신이 감정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느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 의문이나 혼란, 알 수 없는 편안함이나 유쾌함, 그 반대의 것……, 그것이 모든 것의 근원이었다.
 유지에 대한 자신의 감정.
 그것이 지금 혼신의 외침이 되어 터져나왔다.
 “그러면 안 돼!! 말하면 안 돼!!” 그러나 지금의 요시다는 멈출 수 없었다. 젖은 눈동자를 결연히 빛내며 그녀는 샤나에게 재차 선언한다.
 “싫어. 말할 거야.”
 이 자리에서 그녀는 샤나와 완전히 대등한 존재였다.
 “결정하는 건 사카이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 유카리한테는 질 수 없어ㅡ!”
 샤나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아픈 가슴을 누르며 뿌옇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곳에 모으고,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듯한 강렬한 마음을 품고, 똑바로 섰다.
 필사적인 외침을 쥐어짜낸다.
 “나, 나도ㅡ!!”
 그 외침은 도중에 끊겼다.
 눈앞의 요시다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샤나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는 동시에 뭔가를 느끼고 나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확인했다.
 으스스한 빛을 뿜는 황금빛 안개가 주변의 광경을 흐릿하게 뒤덮으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자재법?!’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홍세의 무리’의 습격.
 “…….” 그러나 지금의 샤나는 그보다도 훨씬 큰 충격을 몸과 마음에 입었다.
 “…….” 자신의 마음의 ‘최강의 적’에 부딪치려다 차단된 것에 대한 충격.
 “ㅡ.”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휘저어놓았다.
 “무슨, 짓, 이야!!” 그 마음은 성난 외침이 되어 터져나왔다.
 “왜 방해하는 거야!!” 그 마음에 천양을 불태워버릴 듯한 자신의 사명감을 더해,
 작안이 불타오른다.
 염발이 불꽃의 가루를 흩뿌린다.
 검은 망토가 몸을 감싼다.
 그리고 ‘니에토노노샤나’를 뽑아 있는 힘껏 지면에 박아넣었다.
 눈앞에서 정지한 요시다 카즈미를 향해 샤나는 진심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제 곧 듣게 될 거야! 내 마음을, 너 같은 건, 전혀, 유지는, 나하고, 쭉, 더, 많이 있으니까!!” 아라스톨이 끼어들 틈도 없는 장절하기까지 한 감정의 폭발이었다.
 불을 토해내듯 그녀는 포효했다.
 “너한테는 지지 않을 거야!!”
 미사키 시를 황금색 안개가 잠식한다.
 모든 것을 에워싸고, 모든 것을 채우며, 모든 것을 정지시킨다.
 그 중심에 빛을 내뿜으며 소용돌이치는 나뭇잎 속에 꼭 껴안은 모습으로 공중에 떠있는 남매의 모습이 있다.
 뽑혀나온 물건, 그토록 원하던 물건을 느낀 ‘애염자’ 소라토가 외친다.
 “있어, 크레들 안에 있어! 있어, 저기에 있어! 나의 ‘니에토노노샤나’가!!” 소용돌이치는 흐름 속에서 나뭇잎은 제각기 끝에서 덩굴을 뻗어 남매처럼 하나로 얽어매고 있었다.
 “그래, 그럼 가볍게 해치워버리죠, 오라버니. 이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세요. 내가 오라버니를 지켜드릴 테니까요.”
 두 사람을 정점으로 하여 빛나는 덩굴은 뻗어나가는 끄트머리부터 점점 엉켜 한 덩이로 부풀어간다.
 그리고 쏟아진다.
 빛나는 덩굴의 파도에 실려 ‘애염’의 남매는 공격을 개시했다.

 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멋대로 활개치는 ‘홍세의 무리’가 덮쳐온다.
 그 기도를 막아내고 토멸하기 위해 플레임헤이즈가 포효한다.
 그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전부인 세상은 그렇게 움직여갔다.

3권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