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안의 샤나 Takahasi Yasichiro [타카하시 야시치로] 제 2권 프롤로그 1. 엉클어진 현재 2. 발걸음은 모두 격돌로 3. 해후명암 4. 생각에 잠긴 밤 5. 오늘이라는 날은 싸운다 6. 유린의 조아 에필로그 프롤로그 나는 알게 되었다. 한 소녀에 의해.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장소에서 사람이 먹히고 그로 인해 이 세상이 뒤틀린다는 것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한, 그 원천이 되는 힘을 이세계로부터 온 자들이 먹어치운다는 것을. 이세계에 사는 자 ‘홍세의 무리’는 사람의 ‘존재의 힘’을 빼앗아 그 힘으로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케 한다. 그 힘으로 만사를 ‘자재’로 조종한다. 사람의 눈을 속이며 이 세상을 멋대로 활보한다. 먹힌 인간은 사라진다. 죽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고 만다. 존재 그 자체를 빼앗기는 것이기에. 존재가 사라진 장소에는 공백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존재들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세상에는 위화감과 모순이 엄청나게 많이 생긴다. 존재의 난획과 공백은 이 세상과 ‘홍세’ 두 곳 모두에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한다. ‘무리’중에서도 특히 강한 존재인 ‘왕’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 세상에서 닥치는 대로 ‘존재의 힘’을 먹어치우며 ‘자재’로 만사를 왜곡해대는 동족들을 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강대한 그들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싸우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존재의 힘’이 필요했다. 허나 그 때문에 많은 인간을 먹어야 한다면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격이다. 그래서 그들은 차선책을 취했다. 이 세상 사람의 과거 · 현재 · 미래, 그 모든 것을 그릇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 채워진 존재를 헌납받아 그 빈 공간에 ‘왕’인 자신을 받아들이게 한다·…… 는 것이다. 그리고 ‘왕’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존재를 공물로 바치고, 대신 그릇을 채울 힘을 얻는 계약을 맺었다. 이 세상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그들은 ‘홍세의 무리’에게 소중한 것을 빼앗긴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싸움을, 복수를, 토벌을 바라며 ‘왕’의 힘을 휘둘러 ‘홍세의 무리’를 어디까지고, 언제까지고 뒤쫓는다. 이 세상 사람도 아닌, 또한 ‘홍세의 무리’도 아닌 신비한 능력을 지닌 토벌자들. 그 이름은 ‘플레임헤이즈’. 벗어난 세상과 함께 내 앞에 나타난 플레임헤이즈는 ‘홍세’의 마신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과 계약한 ‘염발작안의 토벌자’.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홍련의 불꽃으로 태우고 검은 옷자락을 나부끼며 대검을 휘두르는 소녀. 이름은 샤나. 내가 붙인 이름. 1. 엉클어진 현재 사카이가의 좁은 마당에 가득한 이른 아침의 평온한 공기. 그것을 찢는 바람.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을 남기는 재빠른 공격이 사카이 유지를 향해 달린다. 땅을 휩쓸며 위로 올라오는 검풍에서 느낀 것은 필살의 위력. 유지는 그 위력에 맞설 배짱이 없다. 두려움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다. “윽!” 검풍이 감은 눈꺼풀을 스칠 듯 말 듯 지나갔다. 두 눈을 강제로 잡아뜨게 하는 듯한 충격에 유지가 다시 쳐다보니, 공격은 벌써 방향을 바꿔 머리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육중함을 상상한 몸이 전율하며 뒤로 젖혀진다. 그 경사를 따라 공격은 땅으로 빨려 들어가…… 는 줄 알았건만 갑자기 튀어올라 허둥대는 유지의 정강이를 엄청난 무게를 싣고서, 후려쳤다. “아얏!” 유지는 저도 모르게 얻어맞은 정강이의 중심부, 이른바 벤케이도 차이면 운다는 그곳을 감싸쥐고 펄쩍 뛰어올랐다. 그렇게 한 발로 폴짝폴짝 뛰는 와중에 방금 정강이를 때린 나뭇가지가 휙 들어와 발바닥을 낚아챈다. “우, 아앗?!” 절묘한 타이밍으로 발이 걸린 유지는 등 전체로 땅바닥에 부딪혔다. “큭!” “서른두 번째.” 숨을 헐떡이며 반쯤 기절한 유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 앳된 모습이 열한두 살쯤 돼 보이지만, 카리스마 있는 늠름한 생김새나 전신에 넘쳐흐르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이상하리만큼 관록을 느끼게끔 한다. 그 관록은 한 손에 가볍게 쥔 나뭇가지에는 칼날 이상의 박력을, 입고 있는 헐렁헐렁한 체육복에는 갑옷 이상의 중후함을 부여한다. “오늘 아침만 해도 삼십하고도 두 번째.” 유지를 가지고 놀다시피 한 공격이나 이상한 관록도 당연하다.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 세상 사람의 ‘존재의 힘’을 먹는 이세계의 거주인, ‘홍세의 무리’를 토벌하는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 ‘플레임헤이즈’의 한 사람이었다. 유지가 붙인 그녀의 이름은 ‘샤나’. 본명은 모른다. 있을지도 모르지만 모른다. 그 샤나가 쓰러진 유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쩔 셈이야?” 옅지만 쏘는 듯한 아침 햇살이 검고 긴 생머리 사이로 비쳐들어 유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부신, 너무나도 눈부신 모습. 샤나의 가슴팍에서 무겁고 낮은 남자의 음성이 불쑥 들려왔다. “쯧쯧. 해이한 것도 정도가 있거늘.” 소리가 들려온 곳은 은 사슬에 꿰인 검은 구슬을 금빛 링으로 교차시켜 엮은 형태의 펜던트. 소리의 주인은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 동족의 의한 ‘존재의 힘’이 난획되어 빚어내는 세계의 균형 붕괴를 우려해, 계약자인 샤나에게 힘을 부여해주는 ‘홍세의 왕’의 한 명이다. 그(?)는 본체의 샤나의 내부에 잠재우고, 그 의식만이 이 펜던트 형태의 신기 ‘코큐토스’를 통해 표출되는 것이었다. “요즘 들어 얻어맞는 횟수가 첫날보다 늘어났지 않나. 이 단련을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너다.” “그건 그렇지만…….” 유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옷 겸용 운동복의 등을 털고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다. 어딘가 패기 없는 그 모습에 샤나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아라스톨의 말대로 이 단련은 유지가 희망한 것이었다. 열흘 전 쯤, 유지는 샤나와 아라스톨을 만났고, 이 도시에서 인간의 ‘존재의 힘’을 먹어대는 ‘홍세의 무리’와 그녀가 벌이는 싸움에 휘말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휘말려든 자신의 처지와 자신이 보호받아야 하는 사정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세 사람은 우여곡절을 거쳐 간신히 그 ‘무리’를 쓰러뜨렸지만, 이 싸움에서 바라본 유지의 입장은 그야말로 짐덩이 그 자체였다. 물론 두뇌 노동과 기타 면에서 도움이 된 적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줄곧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입장은 괴로웠다. 결국 그 결과 샤나의 심신을 지독하게 상처 입히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전투가 끝나고 당분간 이 동네에 머물기로 하자 적어도 발목을 잡는 존재는 면할 정도로만 자신을 단련시켜주지 않겠냐고 말을 꺼내게 된 것도 유지로서는 당연한 사고의 귀결이었다. 이 부탁에 샤나는 마뜩찮은 태도를 취하면서도 거절하지 않고, 골든 위크를 포함한 1주일가량 매일 아침 훈련을 시켜주었다(워낙 ‘홍세의 무리’의 토벌말고는 사생활이란 게 없는 그녀인 터라 달리 할 일도 없긴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을 보낸 지금도 유지에게는 발전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요령을 익히는 정도의 진보는 고사하고 이제는 아까 같은 태만의 빛조차 띠어가고 있었다. 샤나의 가르치는 방법이 틀렸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당초 샤나가 유지에게 준 과제는 ‘눈을 감지 말 것’ 이 한 가지뿐이었다. 단련 첫날, 즉 ‘무리’를 토벌한 다음날. 전날 밤 힘을 모두 소진한 탓에 서 있는 것이 고작일 정도인(샤나가 본인이 아닌 아라스톨이 한 말) 샤나는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전장에서 잘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냐. 단 한 가지, ‘살기’를 느끼는 거야.” 너무나도 솔직하고도 살벌하며 그녀다운 말이었다. “뭘 하든, 이게 불가능하다면 볼장 다 본거야. 거꾸로 이것이 가능하다면 상대의 ‘살기’를 피하는 것도, 그 틈에 자신의 ‘살기’를 펼치는 것도 ‘자재’가 돼. 그러니까 우선은 ‘내가 있다’, 그 전체에서 ‘살기’가 생겨나는 것을 느끼는 것부터 시작하겠어.” “말은 쉽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질문하는 유지에게 샤나는 즐거운 듯, 그러나 매정하게 웃어보였다. “보고 익숙해지는 것, 그게 다야. 지금부터 내가 여러 가지 ‘살기’를 네게 보여줄 거야. 너는 그걸 보고 감각을 연마해 그 감각에 익숙해져가는 거야. 간단하지?” 부르르 떠는 유지에게 샤나가 붙인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로 눈을 감으면 안 돼. 만일 감으면 가차 없이 내려칠 거야.” ‘……처음엔 잘 따라왔는데…….’ 초조한 표정 아래 어둡고 묵직한 마음을 숨기며 샤나는 떠올려본다. 훈련을 시작했을 때의 유지에게는 열의가 있었다. 그것이 반드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동작 하나하나에서 의욕이 엿보였다. 샤나도 그 모습이 즐겁고 기뻐서, 싸움에서 체력을 소모해 지친 몸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몸을 움직였다. 헌데 언제부턴가, 유지의 의욕에 찬 모습은 묘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점을 지적당하면 유지는 변명을 했지만 어쨌든 하루도 빼먹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 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샤나도 딱히 의무가 아니기에, 본인이 할 마음이 없다면 내버려두면 그만이었다. 사실 아라스톨은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무리’가 또 나타났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둘 필요가 있어!” 라고 샤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반항했고 아라스톨은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미안하다, 상관하지 않겠다며 곧 화해하긴 했지만. ‘……모르겠어…….’ 유지의 태도도, 자신의 마음도. 간접적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고 생각하니 화가 난다거나 곤혹스럽다고도 할 수 없는, 무겁고 씁쓸한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끓어올라온다. ‘나는 그때, 플레임헤이즈인 나 자신을 확신하고, 각오하고, 그리고 싸웠어……. 유지도 그것을……, 그러니까……, 그런데.’ 그때의 전투에서 유지가 외쳤던 것을, 마지막 미소를 샤나는 기억했다. 기억하자 또 괴로워진다. 이렇게 되기 전엔 그 외침은, 그 미소는 더……. 느릿느릿 일어나 그녀의 앞에 서는 유지의 모습. ‘아냐, 이런 게 아냐.’ 그것을 느낀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틀린지 모르겠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할 말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갖고 있는 것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뭇가지밖에 없다. 그렇다고 후련해질 리는 없건만 그럴 수밖에 없다. 생각의 막다른 골목에서 발버둥치듯 샤나는 유지에게 재차 공격을 퍼부으려 한다. 그런 두 사람의 빈틈없는 대치에, “우리 샤나, 슬슬 마무리 지으렴. 오늘부터 학교에 가야 하잖아?” 느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 들어왔다. 사카이가의 툇마루(라고 해봤자 단순히 정원에 면한 창이지만)에 유지의 어머니인 사카이 치구사가 쟁반을 놓고 앉아 있다. 쟁반에는 차가운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 두 개와 과자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접시가 놓여 있다. 이 자리에 미묘하게 안 어울리는 이 과자는 유지를 훈련시켜주는 초절정 단것 마니아 소녀 샤나를 위한 치구사의 감사 표시다. 당연히 유지에게는 이것을 먹을 권리가 없다. “오늘 아침도 영 아니니?” 서글서글한 웃는 얼굴에 난처하지만 싫은 기색은 아닌 표정을 띠며 치구사는 말한다. 사카이가는 본래 3인 가족이지만 아버지 칸타로는 해외에 단신 부임 중이라 집에는 유지와 치구사밖에 없다. 샤나는 미사키 시에 온 뒤 대부분의 시간을 이 사카이가에서 보내고 있다. 어쩌다보니 지켜주게 된 유지의 집이라는 점도 있지만, 치구사가 뭐든 순순히 받아들이고 괜한 호기심을 보이거나 하는 사람이 아닌 이유도 있었다. 그녀는 샤나가 거침없이 눌러앉아도 싫은 기색 한 번 없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설령 치가사가 어떤 반응을 보였어도 아랑곳 하지 않았겠지만). 그러기는커녕 매일 아침 이렇게 자식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만 보이는 단련도 거의 흐뭇해하며 바라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샤나는 나뭇가지를 내던지고 치구사의 옆에 털썩 앉아, 뚱한 표정으로 대답하면서 과자에 손을 뻗는다. “오늘 아침도 영 틀렸어. 하나도 좋아지질 않아. 아니, 그러기는커녕 더 나빠지고 있다고.” 벌레 씹은 표정으로 벌레 대신 과자를 와삭 깨문다. 치구사는 중학생으로도 보이지 않는 샤나의 그런 말버릇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식의 변변치 못함에 한숨을 쉬며 뺨에 손을 갖다댄다. “그래. 우리 샤나가 매일 아침 힘들게 와주는데 보람이 없어서 어쩌니.” 샤나는 이 동네에선 표면상 유지의 반 친구 ‘히라이 유카리’로 위장하고 있다. 치구사도 처음엔 그녀를 당연히 그 이름으로 불렀지만, 어차피 눌러앉은 바에 두 개의 이름을 번갈아 쓰는 것이 불편해진 유지가 엄마에게도 그녀를 ‘샤나’라고 부르도록 했다. “별명이야.” 라는 아들의 한 마디는 치구사를 완전히 납득시켰다. 샤나는 거리감을 두지 않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 이번엔 과자를 움켜쥐며 말한다. “치구사가 신경 쓸 것 없어. 나쁜 건 유지니까.” “아빠랑 나 중 어느 쪽을 닮았어도 운동 신경은 좋을 텐데.” “소질은 있어도 본인한테 의욕이 없으면 헛일인걸.” 가차 없이 말하더니 샤나는 작은 손바닥에 한 움큼 쥔 과자를 입에 가져갔다. 바삭바삭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히 가루를 낸다. 치구사는 어머머 라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 표정은 흐뭇해 보이기까지 했다. 유지와 만날 때까지 타인과 하는 접촉의 거의 대부분을 힘과 매매의 형태로만 가졌던 샤나에게 이런 치구사의 태도는 신선함 놀라움과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치구사도 샤나의 무뚝뚝함을 귀엽게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요 열흘 사이에 그녀에게 있어서 샤나의 존재는 ‘아들의 여자친구’라는, 유지를 가운데 둔 서먹서먹한 관계에서 ‘내 친구’, 혹은 ‘딸’정도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샤나가 과자를 전부 먹어치우길 기다렸다가 말한다. “어서 목욕해야지. 체육복은 늘 있는 바구니에 잊지 말고 넣어두렴.” “응.” 샤나는 순순히 대답하고 쟁반에서 컵을 집었다. 꽂혀 있는 빨대를 무시한 채 주스를 단숨에 들이켜더니 큰 소리를 내며 쟁반에 내려놓는다. 냉큼 일어나 툇마루로 올라가 욕실로 향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샤나는 치구사의 반 강요에 의해 매일 아침 단련을 마친 뒤엔 습관처럼 목욕을 하고 있었다. 치구사도 유순한 것 같아도 이런 식의 압박에는 강하다. 단, 권유받은 본인은 결과적으로 이 목욕이라는 행위가 꽤 마음에 들어 아침부터 긴 목욕을 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사람다운 생활이란 것을 겪어보지 않은 샤나에게는 원래 목욕하는 습관이 없었다. 딱히 불결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아라스톨에 의한 정화의 불꽃의 힘으로 몸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을 따름이다. 유지는 딱 한 번 그 정화의 불꽃을 보았다. 순식간에 불꽃이 몸의 표면을 뒤덮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더러움이 씻겨나간다는 아주 간단하고 편리한 힘이었다. “열탕 소독 같다.” 라고 입을 놀렸다가 한 방 걷어차인 것은 여담. 어쨌든 목욕은 실용적인 면만을 위주로 생각했던 샤나에게 있어서 식사와 함께 몇 안 되는 즐거움이 되어 있었다. 샤나가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지도 않고 유지도 툇마루에 힘없이 앉는다. 문득 옆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느꼈지만 무시해버리는 그에게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가 날아온다. “우리 유~지가 여자를 괴롭히다니 엄마는 못마땅해.” 유지는 눈썹을 찌푸렸다. “……괴롭혀? 그 반대겠지.” 아들의 진지한 대답에 치구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후우……, 진짜 둔한 것만은 아빠를 쏙 빼닮았구나.” “무슨 소리야.” “안 가르쳐줘. 스스로 생각하렴.” 치구사는 유지가 잡으려던 컵을 선수쳐서 집어들고 빨대에 입을 댔다. 유지는 뭔가 불만을 터뜨리려다 그만뒀다. “…….” 탈의실에서 샤나는 묵묵히 옷을 바구니 안에 넣는다. 순식간에 끝나는 정화의 불꽃의 상쾌함과는 대조적인 행위. 따뜻한 안식을 주는 목욕과 그 준비인 옷을 벗는 과정……. 처음엔 서툰 콧노래까지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무거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바구니 안, 이럴 때에는 옷의 가장 아래 묻혀 있다고 봐야 할 펜던트에서 아라스톨이 웅얼웅얼하는 소리로 말을 건넨다. “앞으로도 계속 이럴 생각이냐?” “……미안.” “그 말이 아니다.” 샤나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나 오빠, 혹은 스승이자 친구인 이세계의 마신은 ‘천양의 겁화’라는 무시무시한 본명답지 않게 상당히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런 그로서도, 최근 들어 보이는 유지의 태도에는 담아두기 어려운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담담한 음성으로 결정적인 질문을 한다. “여기서 계속 이렇게 지낼 거냐고 묻는 것이다.” “!!” 샤나가 벗다 만 속옷 안에서 몸을 굳혔다. “‘히라이 유카리’로 지내는 것도, 학교나 이런저런 곳에 관여 하는 것도……, 여기 있는 것조차도 ‘헌터’ 프리아그네와의 싸움 이후의 타성에 지나지 않아. 사카이 유지를 없애고 ‘영시미아’를 회수, 혹은 파괴한다는 방법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웃…….” 목이 메인 듯 샤나는 그저 입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아라스톨은 상관없이 말을 잇는다. “우리는 그의 존재와 이곳의 삶을 허용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네 의사에 따른 것이다. 어떠냐? 아직도 계속할 생각인가?” “나, 난…….” 사명 이외의 면에서는 너무나 어린 소녀. 그러나 아라스톨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단지 할 말을 할 뿐. “아직 모르겠다면 대답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아라스톨, 나, 하지만…….” “불분명한 것을 무리하게 말하려 하지 마라. 속이려는 마음이 생긴다.” 아라스톨은 변명을 허용치 않았다. 샤나는 가까스로 한마디만을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알았다. 어서 들어가라. 지각하겠구나.” “응.” 샤나는 남은 속옷을 전부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 타박타박 밟는 타일마저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왜 이런 일로 이렇게나 씁쓸해지는 걸까.’ 실은 간단하다. 유지가 의욕을 잃었다. 그것뿐이다. ‘왜 이런 일로.’ 샤나는 샤워기를 틀어 머리부터 물을 뒤집어쓴다. 싸늘한 욕실에 따뜻한 김이 자욱해졌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생각에 잠긴다. ‘유지가 너무 약해서 싫어진 걸까? 아니면 말로만 한다 한다 하는 그 불성실함에 화가 난 걸까?’ 만일 그렇다 해도 왜 이렇게 무겁고 착잡한 느낌이 끓어오르는 걸까. ‘모르겠어.’ 자신의 일인데도 정말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ㅡ!!’ 샤나는 불현듯 충동에 휩싸여 완만하게 부푼 작은 가슴을 주먹으로 힘껏 때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마음이 부서져 없어지길 바라는 듯이. 그러나 남은 것은 역시나 둔한 통증과 온수의 물보라뿐. 이제껏 그래왔듯 완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완, 력…….’ 안과 밖에서 밀려오는 가슴의 통증에 얼굴을 묻으며 문득 생각했다. ‘……차라리 ‘무리’가 왔으면 좋겠어…….’ 그러자 순간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그래.’ 그것은 여느 때처럼 투쟁심이 끓어올랐기 때문만이 아니다. 자각하지 못한, 마치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기대감이 담긴 뜨겁고 절실한 갈망이었다. ‘싸움……, 싸울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때처럼…… 후련해질 수 있을지도 몰라.’ 이전에도 지금의 이런 마음과 어딘가 닮은 찜찜한 기분일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전투가 그런 마음을 깨끗이 날려버렸다. 그래주었다. 그래, 싸울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 그리고, 마치 기적처럼, 혹은 거짓말처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샤나는 느꼈다. ‘……있다…….’ 이 세계의 위화감 본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가 존재하고 있는 위화감. 그것은 ‘존재의 힘’을 부려 이 세상에 간섭하는 자의 기운. ‘……‘홍세의 무리’가 이 근처에 있다……!!’ 흘러 떨어지는 온수 속에서 샤나는 비통함마저 배어나오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의 도래는 샤나의 기대와 희망 전부를 배신했다. 여자는 검은 펌프스를 신은 채 늘씬하고 긴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었다. 외양은 스무 살 남짓. 유럽계 특유의 쭉 뻗은 콧날을 지닌 미모를 옅지만 흠잡을 데 없는 화장으로 꾸미고 있었다. 포니테일로 묶은 풍성한 밤색 생머리나 늘씬한 몸매를 감싼 짧은 드레스차림, 그 하나하나가 마치 촬영을 기다리는 톱 모델 같았다. 단, 그 ‘웃으면 절세’일 미모가 어찌 된 셈인지 몹시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테 안경을 뚫고 쏘아져 나오는 눈빛도 강렬한 예리함을 지니고 있다. 그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은 미사키 역 버스 터미널의 벤치가 줄지어 놓여 있는 대합실. 샐러리맨과 학생들의 인파로 혼잡한 그곳은 역 건물과 큰길의 중간에 낀 미사키 시의 중심부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상한 초조감을 얼굴에 드러내는 미녀와 그 앞에 쌓여있는 모종의 물건을 반경 10미터 거리에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라도 쳐져 있는 양 피해서 지나가고 있다. 표정에서 드러나듯 험악 그 자체인 목소리로 여성은 말했다. “……그나저나 이 동네 대체 왜 이래? 토치 투성이잖아.” 그녀는 5인용 벤치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지만 그 주변엔 아무도 없다. 다만 등받이에 걸친 손 밑, 즉 오른쪽 옆자리에 유일한 소지품으로 보이는 희한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별스럽게 크고 몹시 두꺼운 책. 마치 화판을 몇 개나 겹쳐놓은 듯한 투박한 물건. 그것은 가방처럼 끈이 달린 북홀더 같은 물건으로 매여 있었다. 여성은 그 책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내뱉듯 말한다. “라미 녀석은 이리로 온 걸까? 분명 그 망할 자식한테는 절호의 사냥터이긴 해.” 그 말에 대답한다. 책이. “아아, ‘시체줍기’의 습성으로? 이렇게 엄청난 양이라면 그 겁쟁이도 다소의 무리쯤은 각오하고 주우러 돌아다닐 테지. 겨~우 미쳐 날뛰는 입맞춤을 선사할 수 있게 됐도다, 히, 하!!” 책에서 튀어나오는 천박하고 거슬리는 쇳소리에 여성은 수려한 눈썹을 찌푸린다. “아아, 그래. 하지만 우선 이 동네에 토치가 많은 원인을 찾아 봐야겠어. 다른 ‘무리’가 있어서 괜한 방해라도 당하면 참을 수 없잖아.” “뭐 좋아, 좋아. 나의 아름다운 고블릿, 마죠리 도! 전부, 전부 물어뜯어 태워버리라구!” 마죠리라고 불린 여성은 책을 퍽 때렸다. “마르코시어스! 네가 그렇게 될 대로 돼라 주의니까 라미처럼 하찮은 송사리를 언제까지고 쫓아다니고만 있잖아!” 마르코시어스라는 이름인 듯한 그 책은 지지 않고 대답했다. “네게 그런 소릴 들을 이유는 없지! 쫓아다니다 우연히 부딪치는 놈들까지 일일이 죽이고 있으니까 언제까지나 진짜 표적을 해치우지 못하는 거잖아?” “당연하지! ‘홍세의 무리’를 해치우는 것이 우리들 ‘플레임헤이즈’니까!!” 적은 죽인다는 그 방침 자체에 이의는 없는 듯하다. 마르코시어스는 미심쩍은 듯 묻는다. “……? 그럼 뭐가 불만이지?” “언제까지나 똑같은 사냥감의 꽁무니만 쫓고 있는 상태가 답답해 죽겠다고! 착착 해치워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 마냥 기분 나빠서 견딜 수 없단 말이야!” 마르코시어스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과~연, 그럼 이번엔 제~대로 해볼까?” “그래. 제대로 해보자고.” 마죠리는 초조한 표정 그대로 대답하고 이번엔 책을 가볍게 툭 때렸다. “어쨌든 이 동네의 토치는 이상하게 너무 많아. 분명 뭔가가 있어. 탐색해야 하니 안내자를 찾아봐.” “좋아, 좋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책을 고정시킨 북 홀더 고리ㅡ마치 일기에 붙어 있는 자물쇠 같은ㅡ가 저절로 벗겨져, 바람도 없는데 페이지가 펄럭펄럭 넘어가기 시작했다. 오래된 양피지 같은 그 책장은 옛 문자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마죠리의 오른쪽 두 자리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계속 페이지를 넘기던 책은 이윽고 갈피가 끼워진 페이지에서 멈췄다. “근데 선정 기준은?” 날아온 질문에 마죠리는 대답한다. 못마땅한 목소리로 태연자약하게. “그래. 우선 젊고, 날 보고 ‘미인’이라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녀석.” “켁, 밝히긴!” 놀리듯 대답하면서도, 책은 고문자의 일부를 군청색 빛을 밝히며 띄운다. 그것은 ‘존재의 힘’을 구사해 신비를 일으키는 ‘자재식’의 하나. “시끄러워, 바보 마르코. 나이를 처먹은 녀석들은 상태도, 외모도, 요령도 뭐 하나 변변한 게 없다고. 그리고 나한테 호의적인 쪽이 아무래도 편하잖아?” “아아~, 그런 뜻으로 받아주지.” 소리가 끊김과 동시에 떠오른 고문자가 왼쪽부터 강렬한 빛을 물 흐르듯 차례차례 띠더니 곧 사라졌다. 마죠리의 머릿속에 자신들 주위로 스쳐 가는, 혹은 멈춰 서서보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곧 희미해져 마지막엔 군청색 빛에 싸인 해당자만이 남는다. 꿈틀 하고 미간이 모인다. “두 사람 있어.” “애들이로군, 너무 어린 거 아냐?” “리드하기 좋잖아. 얼굴도 뭐 한쪽은 합격점이로군.” “히힛, 역시 밝히긴…….” “닥쳐.” 마죠리는 난폭하게 책을 덮었다. 북 홀더 끈을 잡고 어깨에 멘 뒤, 벤치에서 벌떡 일어난다. 미사키 시는 시 중앙을 흐르는 마나 강을 끼고 동쪽의 시가지와 서쪽의 주택가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를 미사키 대교가 잇는 형태다. 사립 미사키 고교 1학년 2반의 반 친구인 사토 케이사쿠와 타나카 에이타는 같은 반인 사카이 유자와 이케 하야토가 다른 중학교에서 그랬듯 중학교 때부터 친구이다. “휘유, 죽이는 미인. 친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응, 진짜 미인이다. 아니, 미녀라고 해야 맞나.” 두 사람은 시가지의 외곽에 있는 ‘구 주택가’라 불리는 지역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강 건너 주택가에 잇는 학교에도 당연히 같이 등교한다. 역 앞으로 나와서 큰길을 따라가 미사키 대교를 건너 그대로 일직선으로 난 길을 걸어가면 학교에 닿는다. 주택가 쪽에 살고 있는 유지나 이케에 비해 거리는 멀지만 대신 귀갓길에 번화한 시내에 들르기 쉽다는 이점도 있었다. “근데 타나카, 저 미녀 앞에 있는 게 뭐 같아?” 사람들 사이로 바라보는 사토 케이사쿠는 일단 ‘미’자를 붙여도 좋을 외모를 한 호리호리한 소년. “내 눈엔…… 묵사발 난 양아치들을 쌓아놓은 걸로 보이는데.” 사람 머리 위로 보고 있는 타나카 에이타는 귀염성 있어 보이는 생김새를 한 덩치 큰 소년이다. 이 두 사람은 등교 중에 역 앞에 줄지어 선 군중을 발견하고 끼어든 것이다. 골든 위크 동안 끝내 만나지 못한 사카이 유지나 이케 하야토, 히라이 유카리나 요시다 카즈미 등 친한 반 친구들과 간만에 나눌 잡담거리로는 꽤 솔깃한 소재일 듯싶었다. 어쨌든 빼어난 스타일에 안경을 쓰고 역 대합실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외국인 미녀…… 두 사람이 동경하는 ‘여성의 완성형’ 그 자체가 난폭해 보이는 남자 일고 여덟명 가량을 눈앞에 쌓아놓고 당당히 앉아 있다. 이야말로 상식 밖의 광경이었다. 그 미녀에게는 아무래도 가시 돋친 분위기가 감돌았기 때문에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다들 시간이 허용하는 한 먼발치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혼자서 중얼거리는 거랑 저 산더미는 관계가 있을까?” 아까부터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책을 펄럭펄럭 넘기곤 하는 그 미녀가 지금 책을 덮어 두고 두 사람이 보는 앞에 서 있었다. “글쎄, 전화를 거는 걸로 보이진 않았는데……, 어라?” 날카롭지만 우아하게 걷기 시작한 미녀의 뒤에서 통근객의 신고를 받고 왔는지 경관 두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합실 한가운데에 있는 건달들의 산을 보고 일순간 흠칫하더니 황급히 소리를 지른다. “이봐요, 당신!” 그러나 미녀는 그 말을 무시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사토와 타나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뭔가 거슬리는 게 있는 걸까, 그 아름다운 얼굴은 못마땅한 듯 찌푸려져 있다. “기다리시오!” 뒤쫓아온 경관이 어깨에 손을 대려는, 것으로 보인 순간, 미녀는 오로지 팔꿈치 아래만을 움직여 그를 마치 나뭇가지라도 팽개치듯 2, 3미터 밖으로 내던졌다. 닿은 것은 손가락 끄트머리 정도로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경관에게 무게란 것이 없는 듯한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 불가사의한 시간은, “ㅡ크헉!” 경관의 추락과 비명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 카즈 씨!” 다른 한 경관이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동료에게 외치더니 허리의 경찰봉에 손을 뻗는다. 사토와 타나카는 봤다. 그들 쪽을 보고 있는 험악한 얼굴의 미녀가 그 동작을 보지도 않았건만 분명히 짜증 섞인 한숨을 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아아, 정말이지.” 미녀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북 홀더에 손끝을 댄다. 그러자 그 커다란 책이 마치 손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떠올라 느닷없이 펼쳐졌다. 적의와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의 경관에게 그 열린 페이지가 빛을 내비쳤다. 순간 마치 스트로보 같은 강하고 푸른빛이 보였…… 던 것 같았다. 제정신을 차린 관중들 앞에, 미녀가 앞으로 내민 손바닥에 화판을 겹쳐놓은 듯한 책이 달라붙은 채 펼쳐져 있다. 이것만으로도 있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더욱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이러면 불만 없겠지? 저것들은 어떤 할머니한테 시비걸던 놈들을 좀 손봐준 것뿐이야. 이제 치워도 좋아.” 미녀가 턱짓으로 건달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경관은 허둥지둥 인사했다. “넵! 치안 활동에 협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녀는 그 인사를 무시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책은 어느 새 다시 덮여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다. 사토와 타나카는 얼굴을 마주 보고 다시금 불가사의한 광경을 보았다. 경관이 어딘가 얼빠진 얼굴로 신음하는 동료를 부축해 일으키고 있다. 미녀는 등 뒤의 그런 광경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처럼 우뚝 서있는 구경꾼, 즉 그 안에 잇는 그들을 향해 똑바로 걸어온다. 이윽고 미녀는 군중의 끝, 즉 두 사람의 바로 앞에 섰다. 짧은 드레스를 걸친 늘씬하고 긴 몸. 15세의 평균 신장인 사토는 제쳐두더라도 덩치 큰 타나카와 눈높이가 거의 비슷하다. 물론 그 카리스마는 비교할 것도 없다. 어느 새 두 사람을 남겨두고 군중은 사라져 있었다. 그들만이 움직이지 않고, 아니 움직이는 것을 허용받지 못한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 미녀는 화가 난 표정 그대로인 채 무뚝뚝한 말투로 그 두 사람에게 물었다. 애교를 떨지도 않고, 그렇다고 교태를 부리지도 않고 다만 우아하게 몸을 돌려 머리를 쓸어올리며, “내가 그렇게 예뻐?” “넵!!”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사토 케이사쿠와 타나카 에이타는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의 플레임헤이즈인 마죠리 도의 미사키 시 안내자가 되었던 것이다. 사카이 유지는 실은 인간이 아니다. ‘그건 문제가 아니야.’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여기에 있 그는 고 사카이 유지의 잔재인 ‘토치’다. ‘그런 건 이미 옛날에 마음의 정리를 했는데.’ 그 옛날 이 세상에 나타난 ‘홍세의 무리’들은 사람의 ‘존재의 힘’을 마냥 먹어치울 뿐이었다. 먹힌 사람들의 소멸이 일으키는 이 세상의 비틀림과 ‘홍세’와의 균형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구에 따라 힘을 휘둘러 이 세상을 황폐하고 어지럽게 만들어갔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무리’들은 깨달았다. 분노한 동족의 살육자, 그들의 ‘자재’를 방해하는 토벌자 플레임헤이즈가 그들이 ‘존재의 힘’을 난획함으로써 생기는 이 세상의 균열……, 즉 존재의 급속한 상실에 의한 위화감을 포착하여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그 균열의 충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하나의 방법을 고안해냈다. 사람의 ‘존재의 힘’을 깡그리 먹어치우지 않고 남긴 찌꺼기로 대체품을 만들어 배치하는 것을. ‘토치’라는 이름의 그 대체품은 주변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한동안 유지시켜준다. 본인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억도 인격도 생전 그대로이고 생명 활동까지 유지된다. 단 아주 조금 남아 있는 ‘존재의 힘’이 소모됨에 따라 무기력 및 무개성화 되어 문자 그대로 존재감을 잃어간다. 이런 방법으로 그 상실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갖지 않도록 한다. 아무리 커다란 존재감을 지니고 눈에 띄었던 인물이라도 점차 주변에 관여하지 않게 되어 잊혀져간다. 조금씩 그 역할을, 있던 자리를 타인에게 내어주고 마침내는 그 사람이 없는 풍경, 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에 사람들이 익숙해질 무렵……, 정말로 사라진다. 그 누구도 알아채는 일 없이. 이 토치의 출현에 의해, 플레임헤이즈가 느낄 만한 범위의 급격한 비틀림은 사라졌다. 플레임헤이즈들은 자신의 발로 걸어 다니며 토치가 있는 장소를 발견해 ‘무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이 ‘무리’들의 눈속임 도구가 결과적으로는 존재의 급속한 상실이 일으키는 이 세상의 균열을 완화시킨 것이다. 플레임헤이즈의 목적인 세상의 균형 유지를 그 적인 ‘무리’가 도와준 격이다. 그렇다 해도 ‘무리’가 난획을 그만둘 리는 없다. 그래서 플레임헤이즈에 의한 토벌도 계속된다. 토치가 출현한 후에도 양자의 악순환에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여기 있는 유지도 본인의 잔재인 토치다. 즉 ‘진짜 사카이 유지’는 예전에 이 동네를 습격한 ‘홍세의 무리’에게 먹혀서 이미 죽은 것이다. ‘그래, 그 전투 속에서 나는 생각했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지금 있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단 유지의 경우는 다소 사정이 복잡했다. 그는 ‘미스테스’라 불리는, 토치 중에서도 특수한 종류의 존재였다. 간단히 말하면 몸 안에 보물을 지니고 있다. ‘그 전투 속에서 그녀와 지금을……, 그래, 생각했어……. 아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일명 ‘돌아다니는 보물 창고’라 불리는 이것은, ‘홍세의 무리’가 만든 보구나 신비로운 현상을 일으키는 힘 그 자체를 몸 안에 감추고 있다. 가슴속의 토치가 꺼지면 그 안에 든 것은 또 다른 토치에게 옮겨가 영원히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유지의 가슴속에 있는 것은 보구, 그것도 ‘영시미아’라고 하는, 시간의 사상에 간섭하는 ‘홍세의 무리’의 비보 중의 비보였다. 먼 옛날 이 세상에서 한 인간과 사랑에 빠진 ‘홍세의 왕’이 그 인간을 ‘영원한 연인’으로 삼기 위해 만든 영구 기관이라고 한다. 이 보구는 본래 하루하루 소모되어가는 토치의 ‘존재의 힘’을 하루라는 단위로 되돌려, 매일 0시에 그 전날 소모했던 힘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보구 자체나 이전의 경위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아무튼 은혜롭게도 유지는 기력이나 인격을 유지한 채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원칙적으로는 영원히. 본인은 지금 생각하는 대로, 거의 태도가 돌변한 것처럼 모든 것을 납득하고 지금의 자신을 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있는 그 기력과 인격이야말로 하루하루 살아가며 생기는 고민을 그에게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지금도 왜 나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 걸까…….’ 유지는 늘 걷는 등굣길을 샤나와 함께 걷는다. 작은 몸집을 잊게 만드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바로 옆에서 걷는 샤나는 아침 목욕과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도 습관처럼 사카이가에서 했다. 그녀가 이름을 빌리고 있는 ‘진짜 히라이 유카리’도 유지처럼 일가족 세 명이 ‘홍세의 무리’에게 먹혔다. 전원이 토치가 되어 언젠가 사라질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샤나가 자신의 존재를 집어넣어 그녀라 칭하고 다녔는데 최근 그 양친이 ‘존재의 힘’을 잃고 마침내 소멸했다. 결국 샤나가 위장하고 있는 ‘히라이 유카리’만이 남아 그녀는 홀로 생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카이 치구사가 그녀에게 잘 대해주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샤나는 일단은 집으로 되어 있는 히라이가를 생활용품 창고, 혹은 매일 밤 잠잘 곳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사카이가에 눌러 살다시피 하는 이유 중의 하나. 그래서 그녀는 등교하는 오늘도 골든 위크 동안의 습관대로 사카이 가에서 아침을 보내고, 그 행동의 연장선상에서 당연한 것처럼 함께 학교로 향하고 있다. 즉 유지와 함께 등교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함께 걷는 지금. ‘……현재가 전부……. 하지만 그런 현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걸 알 수 없게 되다니…….’ 유지의 가슴속에 묵직한 망설임이 응어리져 있었다. 이것이 그를 예전처럼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그녀와 함께 ‘홍세의 무리’와 싸웠을 때의 그 벅찬 마음이, 그 뜨거운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가 싫어진 걸까. ‘그럴 리가 없잖아.’ 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아무도 없는 데서 라는 조건이 붙긴 하겠지만. 솔직히 유지의 입장에서 연애 운운하기에, 샤나라는 소녀는 여러 의미로 열외였다. 예를 들면(그렇다, 어디까지나 예로서, 이렇게 유지는 스스로를 변호한다) 요시다 카즈미에게 품고 있는 소박한 호의 정도를 느낄 뿐, 그런 쪽의 실감은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전투에서 얻었던 강렬한 느낌은 지금도 자신의 내면에 또렷이 존재한다. ‘그럼 이 부질없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고민에 빠진 눈동자에 아침 햇살이 비쳐든다. 샤나와 만났을 때는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해줬던 이 빛이 이제는 혼란스러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녀를 따라 헐레벌떡 샤워를 마친 젖은 머리는 상쾌한 아침 바람 속에서도 무겁다. 모든 것이 비관적으로 느껴진다. 샤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유지.” 그리고 침묵. 서로 말할 타이밍을 재다가 결국 한 번 더 샤나가 말한다. “이 근처에 ‘무리’나 플레임헤이즈가 있어. 점심 먹으면 바로 알아보러 나가자.” “…….” 사람의 ‘존재의 힘’을 먹는 이세계의 거주인이 다시 나타났다는 충격적인 알림. 그러나 유지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공허함이 무겁고 질척질척하게 마음을 둔화시킨다. 대답은, “……후우, 응.” 이것뿐이었다. 샤나는 유지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일전의 전투처럼 놀라고, 당황하고, 때때로 예리한 지적을 하며 함께하길 바랐다. 그런 유지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자각했다. 자각하고 나니 기대감은 더욱 커지고 강해졌다. 그런데, “무슨 대답이 그래!!” 화난 목소리가 아침 등굣길에 쩌렁쩌렁 울렸다. 샤나는 기대를 배신당해 뻥 뚫린 마음에 분노가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열흘 전이라면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응했을 소년은 지금은 덤덤하게 눈썹을 찌푸릴 뿐. “그렇게 소리치지 마.” “ㅡ욱!! ‘무리’가 왔다고!! 어딘가에서 사람을 먹고 있을지 모른다고!! 왜, 어째서 그렇게 태연한 거지?!” 유지는 샤나의 화난 음성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왜 그런지는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그녀가 화내고 있는데, 알고도 있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자신을 노려보며 강하고 딱딱한 목소리로 따지는 소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공허함의 어디에선가 거품처럼 떠오르는 한마디. “나 같은 거 없어도 별로 곤란하지도 않잖아.” “……!! 웃.” 샤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분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유지와 자신, 애타게 바라던 전투, 기대감과 분노, 이전의 괴로움과 혼란, 나 자신은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 유지도 자신의 말에 놀랐다. 내가 한 말은 사실일까. 자신이 한 말은 진심일까.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왜 그녀의 표정이 얼어붙은 걸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낼 수 없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 “…….” 마침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선을 돌리고 학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큰길에 접어들어서도, 혼잡한 인파 속에서도 둘 사이의 무거운 침묵이 공백처럼 확연히 느껴졌다. 두 사람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또 한 사람……, 그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이 공백을 채워주길 바라고 있었다. 걸음을 늦추며 바라고 있었다. 샤나의 가슴에 걸린 펜던트.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에게. 두 사람이 그에게 매달리고 있음을 느끼면서, 그러나 그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립 미사키 고교 현관 로비의 1학년용 신발장 그늘에서 요시다 카즈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유다. 그렇지만 본인의 의식면에서 보면 아주 정확한 표현이기도 했다. 열흘 전쯤 무제한으로 달리기를 하다가 쓰러졌을 때보다, 그 다음날 반 친구인 사카이 유지에게 마음을 고백했던(그녀의 마음속에선 기정사실로 되어 있다) 때보다, 더욱이 그 다음날 히라이 유카리에게 연적으로서 선전포고를 했던(이것도 마찬가지) 때보다 더 강하고 격렬한 고동이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눈앞은 안개가 낀 듯 뿌옇고, 다리는 부들부들 떨고 있으며, 어쩌면 얼굴도 빨개졌을 것이다. 마음속에서는 빠른 고동 소리에 맞추어 똑같은 단어가 반복되고 있다. ‘……할 수 있어, 괜찮아, 말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괜찮아, 말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괜찮아, 말할 수 있어…….’ 극도의 긴장감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냐고 지금의 그녀에게 묻는다면, ‘네, 지금 죽을 거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 손에는 종잇조각 두 장이 있었다. 틀어쥔 양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마치 괴물을 봉하는 부족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힘껏 누르고 있다. 옆을 지나가는 동급생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럴 여유가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일생일대의 결심이니까. “헤에, 그걸로 사카이 녀석한테 데이트라도 하자고 할 참이야?” “꺄아악?!” 요시다는 움츠렸다 펄쩍 뛰는 훌륭한 기술을 선보였다. 쳐다보니 같은 반인 안경맨 이케 하야토가 옆에 서 있다. 늘 그렇듯 차분한 표정으로 밉지 않은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이, 이케. 이거 아, 아빠가 준 건데, 영화도, 조, 좋겠지만, 이, 이런 것도 좋지 않을까 하고, 나, 근데.” 마치 결백 증명서처럼 요시다가 앞으로 내민 티켓에는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 미술관 주최 유리 미술 공예전’이라고 적혀 있다. 이케는 ‘역시 요시다답군, 어른스럽고 고상한 취미구나’라고 생각하며 장소와 내용까지 찬찬히 확인한 후 손을 밀어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나한테 변명하지 않아도 돼. 뭐, 사카이가 오면 말은 꺼내줄게.” “아, 고, 고마워.” 이케는 그 감사의 말에 손을 내저어 만류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그나저나 사토랑 타나카는 아직 안 왔어?” “으, 응. 못 봤는데.” 이케는 빌어먹을 하면서 머리를 긁적인다. “숙제를 빌렸으면 빨리 와야 할 거 아니야, 진짜…….” 요시다에게 있어서, 이런 친절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푸는 이케는 자기 자신도 이렇게 되고 싶다고 동경하는 존재였다. 나서서 눈에 띄려고 하진 않지만 머리도 좋고 다른 일도 대부분 평균 이상은 해낸다. 그렇다고 우쭐대는 적도 없다. 사교성도 좋고(현재 그나마 격의 없이 말할 수 있는 건 이케 정도였다) 곤란할 때도 몇 번인가 도와주었다. 특히 지금처럼 사카이 유지와 관련된 일로 몇 번이나. 요시다는 큰맘 먹고 이 믿음직한 친구에게 물어봤다. “이, 이케.” “응, 왜?” “사카이는…… 이런 거 싫어할까?” 티켓을 손에 들고 선 요시다 카즈미의 불안감에 떠는 연약한 모습ㅡ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이 나쁜 놈이 될 것 같은 모습.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녀의 외모를 뜯어보면 화려하진 않아도 꽤 귀여운 부류에 들었다. ‘으음, 사카이. 난 네가 지~인짜 밉다.’ 마음속으로 사카이를 대여섯 대쯤 패준 뒤 이케는 친절하게 대답한다. “데이트란 건 무얼 보느냐가 아니라 누구랑 함께 가느냐에 따라 즐거움이 결정된다고 봐.” “그치…….” 요시다는 그 ‘함께 가는 자신’에 가장 자신이 없다. 어른스럽게 보이고픈 마음에 이런 전시회를 골라봤지만 헛일이었나……. 요시다의 주눅든 모습에 이케는 당황하며 덧붙였다. “괘, 괜찮아. 요시다가 가자고 하면 사카이는 틀림없이 기뻐할 거야.” “……그럴까?” “그럼. 만일 안 간다거나 하는 소리를 하면.” 호기롭게 장담하려다 문득 유지의 옆에 선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녀가 내비칠 반응을 눈썹을 치켜뜨고 눈알을 부라릴 공포스러운 모습을 떠올린다. 우선은 그런 점도 감안해서. “……뭐, 어떻게든 설득해볼게.” 정도의 선에서 타협했다. 물론 요시다로서는 그것만도 감지덕지였다. “고마워, 이케.” “그러니까 고맙단 말은 필요 없다니까……. 응, 소문을 듣자하니.” 이케의 안경이 현관 로비에 들어온 사카이 유지의 모습을 포착했다. 흠칫 하고 요시다의 몸이 직립부동 자세로 굳어졌다. ‘……이래서야 원.’ 이케는 그녀의 자력 행동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1주일 만에 만난 친구에게 말을 건네려 했다. 헌데 그 옆에 조그만 소녀의 모습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히라이도 함께?’ 최근 저 두 사람은 특별히 뭘 하는 것도 아니건만 줄곧 붙어 다닌다. 유지한테만 이야기를 하려면 이렇게 아침 등교 때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일단은 말이나 붙여보자는 생각에 요시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유지 쪽으로 향한다. 요시다도 마비에서 풀려난 것처럼, 하지만 여전히 뻣뻣한 자세로 뒤를 따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몇 발짝 걷다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히라이 유카리와 사카이 유지의 주위에 무겁고 침통한 침묵이 드리워져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두 사람을 먼발치에서 둘러싸고서 조용하지만 위협적인 그 분위기에 떨고 있다. 히라이 유카리는 평소의 의연한 존재감과 달리 피부를 쿡쿡 찌르는 듯한 압박감을 거침없이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사카이 유지는 그런 분위기에 별 느낌 없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옆에 있다. 불안한 광경이었다. 두 사람 다 무표정. 그러나 그것은 온화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격렬하고 너무나도 복잡하게 회오리치는 혼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혼돈이 전해져온다. 손댔다간 폭발하고 말 그런 위기감이 주변에 가득 차 있었다. 그 두 사람이 실내화를 갈아 신고 이케와 요시다의 앞으로 다가온다. 히라이 유카리는 얼굴만 살짝 돌아보고, 유지는 안녕 하고 짧게 인사를 던지고 간다. 대답은커녕 꼼짝도 못하고 이케와 요시다는 교실로 향하는 두 사람을 멀거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케 하야토가 1교시 수업을 원한을 토해내며 숙제를 잊어버린 벌을 받고 있을 무렵. 미사키 역에서 수상한 미녀에게 붙잡힌 사토 케이사쿠와 타나카 에이타는 큰길을 끼고 역 대합실의 반대쪽에 자리 잡은 찻집에 있었다. ‘오늘 학교는 땡땡이로군……. 뭐, 미녀랑 차를 마시는 것만도 어디냐.’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인걸……, 이케한텐 미안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따위를 생각하며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마죠리 도라는 이름의 미녀와 마르소키어스라는 이름의…… 책. 아침 러시아워 특유의 조용하지만 바쁜 분위기 속에서 마죠리는 마치 이 가게의 주인인 양 종업원을 거만하게 불러다놓고, “제일 비싼 홍차, 뜨거운 걸로 셋, 빨리 가져와.” 라고 멋대로 주문했다. 두 사람을 다그쳐 자리에 앉히더니 그녀는 큰 소리로 불쑥 핵심부터 들이댔다. “이 돟네에 사람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왔다. 우리들은 그걸 뒤쫓고 있어. 그러니 협력해.” “…….” “…….” 이거 봐 하며 마르코시어스ㅡ두 사람의 눈과 머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면, 마죠리의 옆자리에 놓인 커다란 책ㅡ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다짜고짜도 정도가 있지. 나의 성미 급한 추격자 마죠리 도. 좀 더 믿기 쉽게 찬찬히 얘기해야 할 것 아냐.” “…….” “…….”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믿기 쉽게 말하라니. 두 사람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 한들 이해할 거란 보장도 없는데, 차라리 처음부터 사실을 설명해두는 편이 번거롭지 않잖아.” 이 만사 험악한 기색의 미녀는 아무래도 귀찮은 것이 질색인 모양이다. “…….” “…….” 사토와 타나카는 당황이라고 말할 정도의 반응조차 내비치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의 다음 말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마죠리는 더욱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좀 더 자세히 말하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의 정체는 걸어서 갈 수 없는 이웃인, ‘붉은 세계’에서 온 ‘홍세의 무리’중 한 명인 ‘시체줍기’ 라미라는 놈이야.”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는 말을 하면 방금 전의 경관처럼 작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두 사람은 일단 말없이 생각한다. ‘……맛이 좀 갔나?’ ‘……그렇다고 보기엔 아까의 경찰 아저씨나, 이 책이나…….’ 보통 인간은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벌어진다고 해도 순순히 인정하질 못하는 법이다. 자신의 정신을 의심하거나, 눈앞의 사실을 오히려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정신을 의심할 만큼 비관적인 성격도 아니고, 눈앞의 일을 부정할 만큼 강한 의지력(완고하다고도 한다)도 없었다. 물론 불가사의한 일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만큼 트이지도 않았다. 결국, 만사 좋은 게 좋다는 타입인 두 사람은 제 4의 방법을 선택했다. 태도 보류. 불가사의한 일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서두르지 않고 굴러가는 대로 따르자는 것이다. 심각한 탐색이나 하느니, 조건은 붙어도 미녀와 동행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두 사람은 정직한 타입이었다. “어, 그럼…… 구체적으로 뭘 하면 돼요?” “설마 그 괴물과 싸우라는 것은 아니겠죠?” 마죠리는 푸핫 하고 웃었다. “바보, 누가 그런 걸 부탁한대? ‘무리’를 해치우는 건 플레임헤이즈인 나와 마르코시어스의 역할이야.” 겉보기와는 반대로 속은 꽤 사나운……, 즉 근본이 과격한 사람 같다고 두 사람은 생각한다. 생각하면서, “플레임?” 사토가 또 등장한,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묻는다. 이번엔 마죠리 대신 옆자리의 책이 대답했다. “우리들처럼 ‘홍세의 무리’를 해치우는 자들을 말하는 거야, 히힛.” 뭐가 우스운지 카랑카랑한 웃음소리를 내며 책, 아니 마르코시어스는 말을 계속한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금 뒤쫓고 있는 라미란 놈, 송사리 주제에 기척을 숨기는 재주만은 좋단 말이야. 이런 토치 투성이인데다 다른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는 동네에 뛰어들었으니까, 우선 이곳을 조사하기 위한 안내인, 즉 너희들이 필요하단 얘기라고.” “토치 투성이?” 이번엔 타나카가 묻는다. “아ㅡ, 젠장.” 마죠리는 모처럼 가지런히 묶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사실을 설명한다는니 해놓곤 어떻게 설명할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과격한데다 제멋대로……, 근본적으로 통이 큰 사람 같다고 두 사람은 각각 험악 미녀의 분석 페이지에 항목을 추가했다. “난 역시 통과할래. 마르코시어스, 부탁해.” 그 분석대로 마죠리는 앞서 한 말을 깨끗하게 취소했다. “에엥? 그건 책임 유기라고. 나의.” 퍽 하고 한 대 얻어맞은 책에서 소리가 끊겼다. “잔말 말고 설명이나 해.” 마죠리는 파트너에게 반론할 여지를 주지 않고 일어나 두 사람에게 말한다. “우선 이 동네의 대략적인 구조를 돌아다니면서 직접 가르쳐줘. 그리고 최근 일어난 이상한 사건이나 소문이 났던 장소를 돌 거야.” 아무래도 거부는 애초부터 선택 사항에 포함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보다…… 라는 생각에 사토는 마죠리를 불러 세운다. “아, 마죠리 씨.” “뭐야?” “음, 저기.”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에는 일어난 마죠리의 옆에 홍차를 날라 온 종업원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멈춰 서 있었다. “…….” 안경 너머로 그 죄 없는 종업원을 노려본 마죠리는 말없이 쟁반에서 컵을 집어 올린다. 그리고 김이 피어오르는 열탕 일보 직전의 내용물을 마치 출정 전의 건배라도 하듯 느닷없이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컵을 쟁반위에 올려놓더니 엄청난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굳어있는 사토와 타나카에게, “이봐, 뭘 멍하니 앉아 있어?” 라고 턱짓으로 재촉한다. “네?” “어?” 두 사람은 놀란 종업원과 눈을 마주친 뒤 턱으로 가리킨 것을 본다. 열탕 일보 직전의 홍차가 담긴 컵이 두 개. “가야하니까 서둘러.” 두 사람은 혀를 데었다. 2. 발걸음은 모두 격돌로 그날의 미사키 고교 1학년 2반의 수업은 누구에게나 고행이었다. 히라이 유카리인 샤나가 몸이 오그라들 것 같은 압박감을 교실 전체에 방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혈액 속에서 응고되어 있던 틴 제 1물질이…….” 반 아이들에겐 무해한 강자였던 그녀는, 그들이 믿음직하다고 평가하는 교사들의 만행에 대해서 만큼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본래의 그녀 역시 결코 싹싹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무뚝뚝함은 누구에게도 아양 떨지 않는 태도로, 어쨌든 시원시원해 보이는 것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중압감을 뿜어내는 종류가 아니었다.(교사들도 그렇게 느꼈을 거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지방분에 의해 분해되어 타이로민과 디지타민으로 나뉘고…….” 이 무시무시한 공기의 원인이 사카이 유지와 싸운 것에 있다는 것쯤은 두 사람 사이에 떠도는 분위기에서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정을 캐묻거나, 나아가 관계 회복을 꾀하거나 하는 일은 그녀를 아는 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자신을 도화선으로 하는 기폭 스위치 따위를 누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의 싸움이라는 뜻밖의 사건에 당황한데다 지금의 분위기에 기가 죽어버린 요시다 카즈미는 둘째치고, 심지어는 사카이 유지의 친구로 누구에게나 믿음직한 안경맨 이케 하야토조차 그 지독한 험악함에 접근을 꺼리고 있으니 다른 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숨이 막히고 위가 꼬일 듯한 이 고문 같은 상황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데타민은 림프액과 결합하여 카틸다산과 노바 점액과 살마돈과…….” 지금 교단에 서 있는 생물 선생을 비롯해, 그녀에게 한껏 몰아붙여진 뒤 무시로 일관하게 된 자, 대결을 위해 맹렬하게 공부해왔던 자 등 가르치는 쪽도 이날만큼은 태도가 죄다 한결같았다. 가능한 한 그녀를 자극 하지 않도록 소리를 죽이고 움직임도 최소한으로 줄여 조용하게 수업을 진행한다. “이때 노바 점액은 체온에 의해 분해되어 소멸하지만 이 잔재가 카틸다산에…….” 귓속말 같은 생물 선생의 웅얼거림이 안 들릴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교실 안은 서로의 눈 깜박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핵 카틸타산과 살마돈에 의해 생성된 카사노단백질에 의해…….” 그런 교실 분위기를 완전히 무시하고 샤나와 유지는 말없이 안자 있기만 했다. 험악 미녀 마죠리 도와, 북 홀더에 고정되어 그녀의 어깨에 메인 마르코시어스는 안내자인 사토 케이사쿠와 타나카 에이타를 데리고 동네의 주요 장소를 몇 시간이나 걸려 뒤지고 다녔다. 그동안 마르코시어스에 의해 이 세상에 일어나는 ‘진실’의 설명이 이루어졌다. “사람을 먹는다고 해도 뼈나 고기를 씹어 먹는 그런 게 아니야.” 이 책은 ‘글리모어’라는 이름으로 마죠리의 몸 안에 살며 그녀에게 힘을 부여하는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의 의사를 표출시키는 신기라고 했다. 물론 설명을 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존재의 힘’이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한 근원적인 에너지 같은 것을 빨아들이는 거지.” “흐음.” 이 책과 대화한다는 위화감은 사라진 사토였다. 익숙해진 것이다. “‘홍세’에서 건너온 ‘무리’는 그렇게 빼앗은 ‘존재의 힘’을 사용해, 이 세상에 존재하거나 ‘자재’로 현상을 조종한다는 거와 같은 방식이야.” “헤에.” 이번엔 타나카였다. 불가사의한 것은 설명을 들어봤자 불가사의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본래 이 세상에 없어야 할 놈들이 나타나서 본래 있어야 할 자들을 없애거나 일어날 리 없는 일들을 일으키면 언젠가 세상이 뒤틀려 일그러지고 말거든.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 우리들 같은 강력한 ‘무리’인 ‘왕’이 이쪽 인간 안에 들어가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죽이게 됐지.” 사토가 끄덕였다. “하아, 그것이 플레임헤이즈……고, 토치는 또 뭐야?” “‘무리’가 먹은 인간의 잔재. 사라진 인간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플레임헤이즈의 추적을 따돌리는 도구지.” 타나카의 생각이 어처구니없는 곳까지 미쳤다. “응? 그게 미사키에 있다는 말은……, 여기에는 예전부터 ‘무리’가 있었다는……?” “그렇지. 지금도 있을지 몰라. 그러니까 너희들과 조사하며 돌아다니는 거야. 히힛!” 　히히히 웃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마음속에 의외로 동요는 없었다. 아직 위기감이 덮쳐올 만큼 실감이 나지 않은 것이다. 사카이 유지의 경우에는, 다짜고짜 자신은 토치이며 본인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억지로 접하게 되는 등, 속수무책인 상황에 느닷없이 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눈앞에 보이는 비정상은 이 과격한 미녀와 말하는 책 두 가지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비정상을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상징인 토치를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마죠리는 신비한 존재인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요컨대 그것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행동에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동네 한복판에서 마르코시어스와 대화하는 것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미심쩍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아, 휴대전화야, 휴대전화. 신경 쓰지 마.” 라고 변명조차 되지 않을 말을 하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야 하고 이해하며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다소 의문을 가진 사람도 마죠리의 너무나 당당한 태도를 보는 동안 흥미를 잃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존재인 그들은 고작 찰나의 의문을 끝까지 추궁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란 건, 비록 시제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상식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공해서 납득하곤 해. 다소의 미스터리는 내버려두면 사라지지.” 마죠리가 말한 대로 불가사의란 것은 상대가 인정하고 설명해주지 않는 한 상식의 벽 안에 묻혀버리는 것 같았다. “너희들의 경우만 해도, 우리들이 하는 일을 인간들에게 증명할 수 없을 테니, 굳이 우리가 비밀을 지키라고 강요하거나 입을 막을 필요도 없단 말이야. 증명할 수 없으면 믿지 않고 믿어주지 않는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 길게 얘기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야.” 그런 이유로 사토와 타나카는 다짜고짜 ‘린네’에게 먹힐 뻔하거나, ‘무리’의 표적이 되어 목숨을 위협받은 유지에 비해(유지가 불쌍할 정도로)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순조롭게 비일상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설 수 있었다. 실제로, “지금 우리들 자신이 어떻게 된다는 두려움도 없고요.” 라고 말한 사토가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씁쓸하게 웃자, “요컨대 누님은 우리들에게 나쁜 짓을 할 놈들을 해치우는 거죠?” 타나카도 어느 새 그녀를 묘한 존칭으로 부르면서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한다. 둘 다 거절도 거부도 고뇌도 보이지 않는다. 그 너무나도 태평한 모습에, ‘요새 애들은 이상하게 겁이란 게 없달지, 진짜 만사태평이라니까……. 아니면 이 녀석들이 특히 낙천적인 건가.’ 조금 기가 막힌 마죠리였지만, 사실 그녀도 쓸데없이 깊은 생각을 안 하는 느긋한 성격이라 거기서 거기였다. ‘뭐, 부려먹기 좋으니 아무렴 어때.’ 그렇게 해서 그녀는 미사키 시의 지리를 대충 머리에 쑤셔 넣고,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 이 동네에서 최근 일어났던 이변에 관해 두 사람에게 묻기 시작했다. 사방팔방 돌아다니느라 지친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우리들도 알 만큼 큰 사건이라면…….” “그거밖에 없겠지?” 라고 냉큼 대답하더니 어떤 사건의 현장으로 마죠리를 안내했다. 그곳은 번화가의 바로 안쪽에 있는 빌딩의 해체 공사 현장. 통행도 적은 골목을 가로막고 둘러쳐놓은 파란 장막의 저편으로 커다란 굴착기가 보이고 엔진 소리와 건축재 부수는 소리가 묵직하기 울리고 있었다. 1주일 전쯤 오후 4시를 지난 시각, 이 번화가 안에 있는 빌딩의 뒤쪽에서 돌연 수수께끼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에 의해 빌딩은 반파되고 부상자도 삼십여 명 나왔다고 하는, 미사키 시 역대 최고의 대참사였다. 그 원인은 아직도 판명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큰 사건이니 뭔가 있을 게 틀림없다. 마죠리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일찌감치 꽃피운 졸병 근성을 지친 몸 안에 북돋워보며 안내했지만, 현장을 본 그녀는 그다지 흥미 있어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장막의 이음매를 가볍게 젖히고 안경 너머로 심드렁한 눈빛을 한 채 안쪽의 해체 현장을 들여다본다. “부수는 것쯤이야 다른 수단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홍세의 무리’는 대개 자신이 파괴한 자리를 복구하거든.” 뒤에서 안을 들여다보면서 타나카가 묻는다. “누님 같은 플레임헤이즈한테 들키니까?” “그래. 어지간히 미친 녀석이 아닌 이상 ‘무리’는 그저 부수거나 날뛰거나 하지……, 응?” 말을 하다 마죠리는 문득 깨달았다. “만일 여기 있었던 게, ‘무리’만이 아니었다면……, 이건 혹시 다른 플레임헤이즈와 싸운 흔적인지도……. 마르코시어스.” 아아 하고 ‘글리모어’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듣고 보니 옅은 기운이 느껴지는걸. 라미 녀석은 기척을 지우고 다니니까 동업자, 아니면 다른 먹이다.” 그 목소리에 문득 기쁨의 빛이 배어나온다. “하지만 이게 만약 싸움의 흔적이라면 어지간한 난장판인걸. 복구할 힘도 아껴야 할 만큼 격전이었단 말인가……. 우리들하고 궁합이 맞겠는 걸? 히힛!” 마치 폭격의 흔적 같은 빌딩 붕괴 현장을 눈앞에 두고 마르코시어스의 새된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자신들의 동네에서, 자신들의 인식이 미치지 못한 장소에서 이런 결과를 빚어낸 전투가 벌어졌었다……. 사토와 타나카는 ‘진실’의 무서운 일각을 본 듯했다. 전율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무심결에 침을 삼켰다. 마죠리는 그런 두 사람을 본 척 만 척하며 마르코시어스에게 묻는다. “그 녀석이 있는 곳은 추정할 수 없어?” “어려워. 그놈이 자재법을 쓰거나 사람을 마구 먹어치운다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야 모르겠지만.” “아, 진짜 기분 더럽네!” 마죠리는 또 머리를 북북 헝클어뜨렸다. “괜찮아, 괜찮아. 누가 됐든 방해되면 죽여버리면 돼.” “그건 그렇지만.” 마죠리와 마르코시어스의 대화에 사토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플레임헤이즈끼리도 싸워요?” 마죠리는 냉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방해가 되면.” 그보다는 하고 화제를 되돌린다. “케이사쿠, 에아티, 만일 이곳이 전장이었다면 이 밖에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거야, 뭐 아는 거 없어?” “어, 글쎄……, 이거말고는……. 요다 백화점 상공의 소란 정도일까나.” 사토는 타나카에게 이야기를 넘긴다. “응? 아, 그 장난 전화 소동?? 그건 관계없지 않아?” “무슨 일이야?” 마죠리는 타나카를 노려본다. “웃기는 얘긴데요?” “상관없어.” 그녀는 타인이 멋대로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판단은 스스로 하고, 단지 그 소재를 제공하는 것은 타인, 이것이 그녀의 사고 원칙이었다. 시퍼런 서슬에 눌린 타나카가 말했다. “이 폭파 사건이 있었던 날 밤, 안 그래도 신경이 곤두서 있던 경찰에게 요다 백화점이라는 폐빌딩 옥상에서 또 폭발이 있었다는 장난 전화가 걸려왔대요. 그래서 경찰은 진짜인줄 알고 총출동을 했는데 아무 일도 없어서 큰 망신을 샀다, 그런…….” “그거야.” 마죠리는 갑자기 단정했다. 얼이 빠져 있는 두 사람에게 답답해 죽겠다는 듯한 말투로 말한다. “아까도 말했잖아. ‘무리’든 플레임헤이즈든, 싸운 뒤에 우리들은 그 장소를 원래대로 복구하는 게 보통이야.” “아.”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했다. “무언가가 일어났을 텐데 아무 일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우리들이 뭔가를 했다는 증거지! 안내해!” “아, 그렇다면.” “벌써 보이는걸요, 누님.” 두 사람이 돌아본 저편, 뒷골목의 좁은 하늘에도 그것은 보였다. 미사키 대교 옆에 세워진, 시가에서 가장 높은 빌딩. 구 요다 백화점. 그곳은 예전 이 미사키 시 전역을 휩쓸어버릴 대이변을 꾀하다 샤나와 유지에 의해 토벌된 ‘홍세의 왕’…… ‘헌터’ 프리아그네의 소굴이었던 곳. 오전 시간만 해도 사카이 유지는, “어떻게 좀 해줘.” 라는 식의 부탁을 다섯 번이나 들었다. 그중에는 학생이 아니라 그가 샤나와 함께 혼쭐을내주엇던 체육 선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유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그 애 하인이 아니야.” 거의 오기를 부려 주장한 결과, 반 아이들 사이에는 ‘사카이 유지랑 싸워서 히라이 유카리의 심기가 엄청 불편하다’는 것이 공식 견해로 확정되었다. 그 말을 주워들은 유지는 우거지상이 되었다. ‘남의 말이라고 정말……. 싸움이라고? 내가 어떻게 샤나랑…….’ 유지는 자신과 샤나의 관계를, 그녀가 자신에게 항상 부딪쳐 오는 일방통행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샤나라는 강력한 존재, 사카이 유지라는 보잘 것 없는 존재, 그 어찌할 수 없는 실감이 그렇게 믿게 했다. ‘샤나를 괴롭힌다’는 치구사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샤나,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 ‘니에토노노샤나’를 휘두르는 ‘염발작안의 토벌자’, 무적, 압도적, 절대적, 강하고, 강하고, 강한……. 유지는 샤나를 우상화하고 있었다. 덜컹 하며 일부러 의자 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샤나가 일어났다. 점심시간의 교실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머뭇머뭇 움직이고 있던 반 아이들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유지는 여전히 자기 책상을 바라본 채. 입술을 꼭 깨문 샤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딱 1초를 기다렸다. “…….” “…….” 그리고 헛된 시간을 보냈음을 깨닫고 가방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갔다. 그 작은 몸으로, 가는 길목에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아이들을 밀쳐내고, 책상을 닥치는 대로 넘어뜨리고, 여닫이문의 유리가 부서져라 쾅 닫고 사라졌다. 마치 폭풍처럼. 문이 닫히는 충격이 고막에서 가실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지를 제외한 전원은 어깨에서 힘을 빼고 의자나 책상에 체중을 실었다. 교실 안에 허탈하기까지 한 한숨이 차오른다. 유지는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기대하는 공기가 이 한숨 속에 섞여 있음을 희미하게 느낀다. 느끼면서도 무시한다. 그들이 바라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끓어오르지 않는다. 이윽고, 극한의 긴장감 끝에 찾아온 이완이 평소 이상의 시끌벅적함이 되어 교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다들 두 사람에 대한 화제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느릿느릿 가방 안을 뒤적이다, ‘주먹밥 사는 걸 깜박했네…….’ 라는 생각과 함께 오늘의 등교 때 일을 떠올리고 다시 침울해지는 유지에게, “오늘은 인원도 절반이네.” 라고 이케 하야토가 말을 건다. 결국 사토 케이사쿠와 타나카 에이타가 나란히 결석했기 때문에 오늘은 책상도 하나만 붙이면 된다. “그러네.” 심드렁한 대답을 하는 유지 앞에 작은 도시락 통이 놓였다. “머…… 먹어.” 요시다 카즈미가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서 받는 도시락은 아직 습관이 될 정도로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유지는 놀라며 고마워했다.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 요시다. 덕분에 살았어.” “아, 아냐. 내가 멋대로 하는 건데.” 요시다는 새빨개전 얼굴로 맞은편에 앉는다. 그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케가 말을 잇는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기회를 엿보는 재주도 있었다. “또 하나 줄게 있잖아, 요시다.” “앗! 아, 이, 이케. 하지만 오늘은…….” 요시다는 머뭇머뭇 말꼬리를 흐리고 고개를 숙여버린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유지에게 이케가 재차 말한다. “있지, 뭐더라, 역 건너편에 새로 생긴 커다란 건물 있잖아, 거기서 미술전이 열리는데 보러 가지 않겠냐는, 이런…… 거였지?” 확인해보니 요시다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괴롭히는 건 아니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이케는 자신의 도시락을 연다. “요컨대 데이트야, 데이트. 오늘은 이제 한 시간만 더 하면 수업도 끝나니까 갔다와.” 요시다는 급기야 얼굴을 양 손에 묻어버렸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백 년이 가도 진척이 없다. 그녀를 위한 충격 요법이다, 이 지나치게 잘난 소년은 이렇게 결론지어버렸다. “……넌 중매쟁이냐?” 그답지 않은 험악한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말하는 유지에게 이케는 산뜻한 표정으로 냉큼 대답했다. “그런 셈이지. 어차피 오늘은 놀잖아.” 이케의 이 말이 유지에게는 히라이 유카리를 뒤쫓지 않은 것을 돌려서 비난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말에 반발하듯 대답이 입을 뚫고 나왔다. “……래?” “응?” 요시다는 순간 그 소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유지가 한 번 더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한다. “갈래, 요시다?” “뭐?” 요시다는 긴장 때문이 아니더라도 죽을 수 있는 정신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 갑자기 퍽 하는 거센 타격이 덮치더니 군청색 빛이 사각형으로 비쳐들었다. 타격으로 순식간에 날아간 어둠은 철문과 가닥가닥 끊어진 사슬 모양을 그리며 바닥을 묵직하게 때리고 먼지를 일으킨다. 그 군청의 빛 속에서 떠오른 것은 세 개의 그림자. “우훕…….” 오른쪽에 선 사토 케이사쿠는 자욱이 피어오르는 먼지에 무심코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한가운데에 서서 철문을 일격에 부숴버린 마죠리 도는 펌프스를 신은 다리를 내리고 매혹적인 각선미를 다시 드레스 안으로 감춘다. 왼쪽에 서서 그 모습을 아쉬운 듯 곁눈질로 좇던 타나카 에이타가 말한다. “누님, 폭발이 목격된 것은 옥상인데요.” “그런 건 알고 있어. 여기서 좀 냄새가 나서 그래. 너희들도 뭔가 이상한 물건이 없나 살펴봐.” 마죠리는 귀찮다는 듯 대답하고 발소리를 크게 내며 어둠 속을 걷는다. 바깥은 점심나절인데, 이 폐쇄된 요다 백화점 상층 플로어는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양 넓고 깊은 어둠을 자신의 내부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 어둠을 희미한 군청색 빛이 걷어낸다. 빛은 마죠리가 옆구리에 낀 커다란 책 ‘글리모어’의 덮인 양피지 틈새에서 불길처럼 새어나오고 있었다. 사토는 그 불빛을 길잡이 삼아 나아간다. 먼지의 장막이 시야를 뿌옇게 뒤덮어 뭔가 기분이 찜찜했다. “이런 상태에서 찾으라고 한들…….” “대체 이상한 게 뭔데요?” 타나카도 불빛에 처지지 않도록 쫓아간다. 넓은 백화점 플로어에는 드문드문 서 있는 기둥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평면의 천지에 가로막힌 어둠의 세계였다. “모르니까 찾는 거지.” 지당한 듯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마죠리의 대답에 마르코시어스가 ‘글리모어’를 요동치며 킬킬 웃었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눈앞의 어둠 속에 두두룩하게 쌓여 있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게 뭘까? 마르코시어스.” “알았다고~.” 마죠리가 요청하자 옆구리의 ‘글리모어’에서 새어 나온 군청 색 불길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것은 바닥에 닿기 전에 핑 떠올라 앞으로 향했다. 괴담에 나오는 도깨비불 같은 불덩어리는 전방에 있는 뭔가의 위에 도달하자 돌연 크게 빛을 밝혔다. 천장에 거대한 전구가 커진 듯 모든 것이 빛 아래에 드러났다.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뜬 사토는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원래 백화점이여서…… 그런가?” 타나카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다. 경계 끝에 나타난 그 무언가는 플로어 면적의 절반가량을 점령하다시피 퍼져 있는, 산더미 같은 인형이었다. 샤나는 무작정 걷는다. ‘…….’ 그 걸음은 빠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발이 무거울까. ‘맛없어.’ 뿜어내는 압박감은 혼잡한 인파 속에 공백을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치적거릴까. ‘이상해’ 사명을 향한 욕구는 용광로처럼 뜨겁다. 그런데 어째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걸까. ‘전과 맛이 달라.’ 고르고 고른 그물망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맛없어.’ 사실은 간단하다. 유지가 의욕을 잃어버렸다. 유지가 자신을 거부했다. 유지가 함께 와주지 않았다. 그뿐인데. 유지. 유지. 유지. 왜. 난 이렇게, 유지 일로. ‘하나도 맛있지 않아.’ 샤나는 무작정 우울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메론 빵을 원수처럼 물어뜯으면서. “누님~! 이거, 으악!” 와그르르 소리를 내며 타나카가 장난감 더미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응? 뭐야?” 멀리서 마죠리의 변함없이 험악한 소리가 날아든다. 이 험악한 기색은 자신의 탐색이 방해받았기 때문인가, 그녀의 성격에 점점 적응해가는 타나카는 생각한다. 플로어를 가득 메운 장난감 더미 위에서 사토가 머리를 내민다. “야, 괜찮아? 타나카……, 어어?!” 사토가 바라본 곳, 즉 타나카가 굴러 떨어져 움푹 패인 곳에 플로어의 몇 분의 일은 됨직한 크기의 모형 상자가 있었다. 하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면적을, 드문드문한 기둥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점령하고 펼쳐져 있다. “……이거, 미사키 시 맞지?” 군청색 빛에 비춰진 광대한 모형 상자는 미사키 시 전역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축소해놓은 것이었다. 소재만 블록이나 모형, 장난감 부품으로서 그것은 오히려 뀌어난 재현 기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와, 진짜 자세하다. 가로등이나 신호등도, 폭파된 뒷골목까지 만들어놨어……. 대체 누구지?” 타나카는 일어나지 않은 채 낮은 눈높이로 대 파노라마를 관찰한다.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지점이 시외로 나가는 큰길의 끝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크기나 재료의 차이가 있는데도 기시감마저 든다. 그런 타나카의 몸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응? ……우와.” 눈길을 들자 공중에 뜬 ‘글리모어’의 위에 마죠리가 앉아 모형 상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응력이 뛰어난 두 사람은 이미 이정도의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지금 그 모습을 밑에서 올려다보는 타나카에게는 드레스 속으로 보이는 매혹적인 각선미를 관찰할 여유마저 있었다. 우와하는 소리는 마죠리가 떠 있다는 신기한 현상에 대한 경악이 아니라 각선미에 대한 감탄이었다. “앗, 이 자식 타나카! 너 뭘 보는, 우와아아아!” “훗훗훗, 공로를 치하하는 상품이랄까.” 데굴데굴 굴러 떨어진 사토와 조그맣게 웃는 타나카를 무시하고 마죠리는 모형 상자의 중앙으로 ‘글리모어’를 이동시켰다. 동쪽의 시가지와 서쪽의 주택가를 가르며 흐르는 마나 강과 미사키 대교. 그 옆에 세워진 것은 지금 자신들이 있는 구 요다 백화점. 그야말로 미사키 시의 중심. 시가지의 빌딩 숲 속에서도 단연 높다. 그 꼭대기에 마죠리는 발끝을 세우고 내려섰다. 모형은 잡다한 부품을 긁어 맞춘 외양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견고함으로 그녀를 떠받쳤다. 그녀의 발 아래에 뭔가가 있다. 그것은 모형 상자 전체에 잎맥처럼 뻗어나간 힘의 근원. 마죠리는 그것을, 이런 모형 상자를 만들 수 있는 ‘홍세’의 보구를 알고 있었다. “이거 ‘파리단’이로군.” 그 옆에 둥둥 떠 있는 ‘글리모어’에서 마르코시어스의 신음 소리가 새어나온다. “아아……. 분명 이걸 마지막으로 가로챈 놈이…….” 주위를 둘러싼 무수한 장난감 더미. 틀림없다. 그것은 그런 녀석이었다. 근대 이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지극히 위험한 ‘홍세의 왕’. 일그러진 물욕과 애정으로 마음을 채운, 보구의 콜렉터이자 교활한 플레임헤이즈 살육자. “‘헌터’! ‘헌터’ 프리아그네!!” 마르코시어스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으핫, 하하, 하! 이 도시에 그 편집광 녀석이 둥지를 틀었단 말이야?!” 그 포효에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마죠리의 머리카락과 드레스의 끝자락에서 군청색 불꽃 가루가 반짝거렸다 공중에 떠 있는 ‘글리모어’에서 새어나오던 불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힘차게 분출되었다가 또 빨려 들어갔다가 또 분출된다. 마치 맹수의 거친 숨결 같았다. 그 군청색의명멸을 마죠리는 한 대 때려서 잠재웠다. “바보, 마르코, 흥분하지 마.” “뭐야, 뭐야, 파리 쫓다가 사슴을 발견한 격이잖아? 오랜만의 ‘왕’! 물어뜯을 맛이 나겠는걸! 좀 더 기뻐하라고, 나의 사나운 이빨 마죠리 도!!” “저 무너진 빌딩을 잊었어? ‘헌터’는 이 도시에서 싸움을 했다고.” “그래서 뭐?” 흥분으로 날뛰는 마르코시어스는 깨닫지 못한다. 마죠리는 흥분으로 들뜬 ‘글리모어’를 꽉 붙들고 강제로 옆구리에 끼웠다. “모르겠어? 그 변태 콜렉터가 이겨서 살아 있다면 이런 굉장한 보구가 있는 곳까지 순순히 통과시켜줄 리가 없잖아.” 옆구리에 끼어서 들썩거리던 ‘글리모어’가 멈췄다. “응? 그러고 보니 분명히……. 하지만 설마 토벌됐단 말이야? 그 플레임헤이즈 살육자가? 보구를 쓰는 ‘린네’인 ‘사랑스러운 마리안느’도 붙어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없잖아. 그렇다면 아까 네가 느낀 기척은 녀석을 토벌한 플레임헤이즈의 것이란 소리네.” “켁, 뭐야, 동업자야? 맥빠지는구만.” 마르코시어스의 낙담을 드러내듯 마죠리를 에워싸며 휘몰아치던 군청색 불꽃이 잠잠해졌다. “우선은 애초의 예정대로 라미 녀석을 죽이도록 하자. 이 ‘파리단’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조사한 보람이 있었어. 덕분에 녀석을 찾아 죽이는 것도 한결 손쉬워질 거야.” 사토와 타나카가 큰길을 걸어와 그녀의 발 밑에 도착했다. “이 미니어처가 그렇게 굉장한 도구예요?” “꽤 정교하긴 하지만.” 마죠리는 턱에 손을 짚고 잠시 생각한다. 이윽고 머리가 나쁜 학생에게 보충 학습을 시키는 교사와 같은, 상대의 무지를 구원해주마 하는 표정을 했다. “……흠, 그래. 지금 사용해보는 것도 좋겠지. 마르코시어스, 할 수 있지?” “음, 이놈을 움직이는 것쯤이야 다른 데에서 ‘존재의 힘’을 빌려오지 않아도 식은 죽 먹기지. 둘 다 적당한 데 올라가 있어.” 마르코시어스의 말에 따라 두 사람은 각각 가까이 있는 빌딩 위로 올라갔다. 그것을 확인하자 마죠리는 발밑에 있는 구 요다 백화점 건물의 모형을 펌프스로 꽉 짓이겼다. 그 속에 감춰진 보구 ‘파리단’이 힘을 공급받아 조용한 맥동을 개시한다.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는 미사키 시 역의 바로 뒤에 있다. 아주 최근 준공된 이 고층 빌딩은 그 이름대로 내부에 모든 층의 천장이 뚫린 반 실외 공간(아트리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뚫린 천장의 상층부에 마찬가지로 이름 그대로의 아치(건축 용어로는 브리지라고 하지만), 즉 건너는 복도가 네 개 걸려 있었다. 이 네 개의 아치야말로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 미술관’이었다. 그 구조는 통상의 미술관에서 보이는 진행로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의 것으로 전시장 겸 아치를 아래부터 위로 천천히 따라간다. 그 진행로의 종착점, 즉 최상층에 도착하면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있어서 지친 손님의 지갑을 아름다운 경관으로 느슨하게 한다는 속셈인 것이다. 그 입구인 가장 아래쪽 아치, 즉 미술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제 1층의 끝에 사카이 유지와 요시다 카즈미의 모습이 있었다. 품위를 깎아먹곤 하는 장식물도 없는 아치의 입구에는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 미술관 주재 유리 미술 공예전’이라고 적힌 간결한 간판과 카운터 담당 직원만이 있었다. 둘 다 가방만 든 교복 차림이었지만, 주로 남의 품행에 신경 쓰는 어른이라는 족속은 젊은이가 이런 장소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걸 용서한다. 아직 날이 밝은 탓도 있어서인지 담당자도 특별한 주의 사항 없이 간단히 두 사람을 입관시켰다. 얼핏 본 바로는 그리 붐비는 것 같진 않다. 혼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유지는 마음을 놓았다. 아치에 들어서자 들어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이 미술관의 구조에 탄성을 지른다. “와아, 예쁘다.” 아래층의 채광 효율을 고려한 최소한의 두께로 놓인 아치는 위쪽 반이 유리였다. 1층을 제외하고 45도씩 비껴서 걸쳐진 위쪽 3층의 아치와, 그 위에 하나 더 쳐진 강화 유리의 대천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입체적으로 교차하는 아치의 조형미와 천장이 뚫려 탁 트인 느낌이 위화감 없이 공간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런 경관을 보는 건지 마는 건지, 옆에서 걷고 있는 요시다 카즈미는, “그, 그러네. 정말 예쁘다.” 하고 애매한 말투로 대답했다. 유지는 벌벌 떨며 굳어 있는 소녀의 모습에 무심코 웃고 말았다. ‘나 같은 놈이랑 같이 잇는 것 같고 뭘 그렇게 긴장하는 걸까.’ 이렇게 흐뭇하게 생각하는 것도 한순간, 다시 담담한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런 나 같은 놈이랑 같이.” 진짜 사카이 유지의 잔재. 다행히 자신은 ‘미스테스’이고, 몸 안에 영구 기관 ‘영시미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소모를 면해서 하루하루 보낼 수 있게 된 몸. 이제 와 그 사실을 서글퍼하지는 않는다. 그런 거라고 받아들이며 지금을 살고 있다. 다만 가끔씩, 지금처럼 처연한 마음이 되어버리는, 그런 것이 화가 났다. ‘이건 나한테 첫 데이트인데, 조금 더 조마조마하거나 두근거리는 게 정상 아닌가.’ ‘유지는 열다섯 살 난 소년으로서 더욱 거리낌 없이, 더 한껏 느끼고 싶었다.’ 그런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어떤 모습을 강제로 마음속에서 몰아냈다. 아니, 더 안쪽으로 감추어버렸다. 그가 바라는 대로, 극한의 감정까지 느끼게 만드는 그 모습을. ‘……즐기자. 그래, 즐기는 거야.’ 데이트가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 데이트를 즐겨야 한다고 마음먹는, 그 의욕의 부자연스러움을 자각하지 못하며 유지는 소극적인 인상의 귀여운 소녀를 재촉한다. “가자, 요시다.” “응, 가, 가자.” 두 사람의 앞에 뻗은 아치 위에는 유리 공예품이 놓인 전시대가 관람객들끼리 부딪치지 않도록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색상도 형태도 제각각인 유리들이 아트리움의 자연광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 미술관의 특징을 살린 전시물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제 1층에 전시된 것은 주로 공예품 종류로,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원주, 젖빛을 띤 여자의 나체상, 얼기설기 엮인 덩굴을 본뜬 녹색 부조 등, 유리의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은 여러 색상과 형태가 수없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지에게는ㅡ평범한 고교생으로서는 당연하겠지만ㅡ이런 예술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눈앞의 공예품에 담겨 있는 기술의 정수를 설령 느끼고는 있다 하더라도 잘 표현할 수 없었다. 손가락 끝을 바닥에 대고 춤추는 손목을 봐도, “예쁘다.” 안에 거품이 춤추고 있는 입방체를 봐도, “예쁘다.” 말재주가 없다는 것은 실로 이런 상태를 일컫는 듯했다. 기껏 즐기자고 의기 충전했지만, 이런 장소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알지 못했다. 마음만 앞서서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함께 보고 있는 요시다조차 과도한 긴장으로 인해 제대로 말을 못하고, “그러네.” 라는 대답밖에 못하고 있으니 둘 다 오십보백보였다. 그런 대화라고도 할 수 없는 대화로 어물어물 상황을 넘기면서 두 사람은 천천히 아치를 걸어간다. 사토와 타나카는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신기한 광경에 압도되어 있었다. “우와.” “죽인다.” 어둠속에 떠오른 모형 상자에 무수한 반투명의 작은 사람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미사키 시의 미니어처를 만든 ‘파리단’은 그 안에 움직이는 인간을 투영하는 보구였다. 꼼지락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는 모두 간략화된 것 같은 형태로, 도구의 종류도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지만 대신 움직임만은 굉장히 실감났다. “뭐랄까, 화장실 표시가 움직이는 것 같아.” “바보, 숙녀 앞이라고. 적어도 비상구라고 말해라.” 타나카의 맥빠지는 헛소리와 사토의 멍청한 태클에 마죠리는 무심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마르코시어스는 늘 그렇듯 유쾌하게 웃는다. 어쨌든 그들의 눈앞에서 화장실 표시든 비상구 표시든, 단순한 모양을 한 인간의 군집이 각각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모형 상자 안에서 표현되고 있다. 보도를 걷는 이, 건물에 들어가는 자, 나오는 자, 역에서 뛰는 자, 손을 잡는 자, 짐을 부리는 자, 도로 위에 앉은 모습으로 흘러가는 것은 자동차에 탄 자, 뭉쳐서 서 있는 것은 버스에 탄 자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좀 더 집중해서 보면 건물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무수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는 미니어처의 중앙, 즉 안에 ‘파리단’을 감춘 요다 백화점의꼭대기에 선 마죠리가 마치 이계의 여왕처럼 드레스에 감싸인 몸을 한껏 세우며 말한다. “아주 옛날, 지배라는 행위에 흥미를 가진 ‘제례의 뱀’이라는 ‘홍세의 왕’이 있었지. 그 녀석이 자기가 만든 도시 ‘대박쇄’를 지켜보기 위해 만든 게 이거야.” “하늘을 가르고 땅을 삼킨다는 괴물이었지만 도시를 만든 순간 플레임헤이즈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들겨 맞고 그 길로 승천했다지, 히힛!” 옆구리에 끼인 마르코시어스가 웃는다. “그 뒤 이건 여러 놈들의 손을 거쳤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빼앗은 놈이.” “‘헌터’ 프리…… 어쩌구 하는 놈인가요?” “하지만 누님, 그놈은 여기서 뭘 지켜본 거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샤토와 타나카에게 마죠리는 한마디로 대답한다. “아마도 이것 때문이겠지.” 군청색 빛을 흘리며 손이 옆으로 획을 긋는다. 그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눈 아래 광경이 확 변했다. 미니어처 위의 사람 그림자가 전부 사라지고 대신 드문드문한……, 그래도 꽤 많은 등불이 남겨졌다. 그것은 환상적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섬뜩한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역시 많아. 이렇게나 많다니……. 이걸로 뭔가 이상한 수작을 꾸미다 그 냄새를 맡은 플레임헤이즈에게 당했다, 뭐 이런 거겠지.” 사토와 타나카는 이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단 불안하게 꿈틀거리는 그 빛의 색깔은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을 가져다주었다. “왠지 기분 나…….” “누님, 이건요?” 마죠리는 아주 덤덤하게 일상을 파괴하는 대답을 내뱉었다. “설명했잖아. 토치야.” “머, 먹힌 사람들……!” “이, 이렇게……?!” 넋이 나간 두 사람은 다음 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와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보았다. 하지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토치인가 하는 것을……, 자신들이 그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없는 것이다. 초조감과 공포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궁지에 몰려 안달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마죠리는 비웃는다. “바보, 너희들은 아니야. 만일 토치였다면 처음부터 말을 걸지도 않았어. 하지만 이렇게나 먹어치웠으니까 너희들의 가족이나 아는 사람들 중엔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오싹했다. 자신들의 주변을 이상한 세계가 잠식해간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오한이 온몸을 뚫고 지나갔다. “그래. 눈에 띄지 않고 얌전해서 있어도 없어도 별 차이는 없는 녀석들.”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이미 먹힌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진짜로 사라지려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슬퍼하는 과정도 없이 떠나가 잊혀져버린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토 케이사쿠와 타나카 에이타는 자신들이 그런 무서운 장소에 발을 들여놓고 만 것을……, 아니 세상은 원래부터 무서운 곳이었고 지금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실감했을 뿐임일 알았다. 그것은 좋고 나쁨과는 관계가 없다. 그저 ‘진실’일 뿐. 사카이 유지는 재미있어하고 있을까. 요시다 카즈미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히라이 유카리와 싸운 것을 틈타듯 데이트를 청해버렸다. 비록 그것이 이케 하야토의 협조에 의한 결과라고 해도 어쨌든 사실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런 자신과 함께 있어서 그는 재미있어하고 있을까. 데이트의 즐거움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나름이라고 이케 하야토의 말은(늘 그랬던 것처럼) 옳다고 생각한다. 지금 자신은 즐겁다. 실은 꽤 어른스러운 척하며 알지도 못하는 미술전 따위에 와 있지만, 함께 있고, 함께 걷고, 함께 보는, 그런 행동들이 즐거웠다. 뚜렷한 이유도 없다. 사카이 유지라는 소년과 함께하는 모든 것이 가슴이 저릴 정도로 즐겁다. 그래서 그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을지가 더욱 신경 쓰인다. 자신만 이렇게 즐거운 건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로는 특별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지만. 이따금 웃어준다. 전시물을 보고서는 예쁘네 하고 말해준다. 뭔가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봐도 마냥 똑같은 감상밖에 말하지 않지만, 자기도 마찬가지니까 잘난 척 말할 순 없다. 지금 자신들이 걷고 있는 곳은 미술관의 제 2층, 옛 유리 공예의 전시장으로, 아래층에 비해 꽤 엄중한 전시 케이스 안에 도기와 거의 구별이 안 가는 거무칙칙한 갈색 항아리나 이음매가 들어간 엿 세공품 같은 접시 따위가 놓여 있다. 현대의 깔끔하고 세련된 제품과 달리 어떤 것은 노골적으로, 어떤 것은 미묘하게 이지러져 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하나하나 독특한 애교를 빚어낸다.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을 느끼게 한달까. 문득 생각한다.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이 흙색의 탁한 부분, 발굴 됐을 때 달라붙은 게 아닐까?” 라든가, “잡는 데가 삐죽삐죽한 유리라니 신기하다.” 처럼 말로 할 수 있다면 조금은 대화도 활기를 띠어서 그의 마음, 그 일부분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둔한 몸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사카이 유지와 함께 있다, 다름 아닌 그 기쁨에 그만 경직되고 만다. 데이트를 여러 번 해서 함께 있는 데 익숙해지면 조금은 느긋해져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오히려 몸이 더 굳어버릴 것 같지만, 그래도 목표도 삼고자 했다. 도대체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이상형은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아이(‘작은’은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가 아닐까. 저 히라이 유카리와 대결하는 게 가능할까. 힘들고 어려우리란 건 안 봐도 뻔하다. 그래도 해보자고 생각한다. 있는 힘을 다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자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단계로는 정말이지, “예쁘다.” “그렇네.” 라는 대화만으로도 버겁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긴 하지만. 요시다 카즈미가 미소 짓고 있다. 유지는 그 모습에 안도감 같은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미술관의 3층인 현대 공예 전시장(이라고 안내용 팸플릿에 적혀 있었다)을 조용히, 그러나 조금 활기찬 걸음으로 걷고 있다. 흡사 박물관 같았던 2층의 엄중함과는 달리, 꽤 개방된 전시 공간에 놓인 유리 공예품을 보고는 눈을 빛내고 있다. 시원한 물처럼 투명한 유리의 색조에 한숨을 쉬며, 명확한 개성과 기교로 넘치는 레이스 문양 항아리의 기술에 놀라는……, 그런 감정의 기복이 소극적인 몸짓 여기저기에 비치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 고개를 살짝 돌려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를 보이고, 이내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처럼 다시 황급히 돌려버린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자신까지 부끄러워진다. ‘정말 다르다.’ 그녀에게 대답하듯, 부드러운 미소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귀여운 소녀. 그 조심스러운, 그러나 뚜렷한 호의의 표시에 간지러운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의 보답으로 뭔가 그럴싸한 말이라도 해서 그녀를 기쁘게 해줬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재주는 없었다. ‘실용성 위주인 건 서로 마찬가지로군.’ 이번엔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예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의 표현은 젬병이라, 미술인지 공예인지 하는 유리 앞에서 앵무새가 반복하는 듯한 감상을 이어가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장소에 올 기회는 좀처럼 없는데다 순수한 흥미도 있었기 때문에 청해준 것이 고맙기도 하다. 나쁜 데이트는 아니라고 솔직하게 생각한다. 본 적도 없는 것을 보는 건 즐겁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또한 귀여운 여자애와 함께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절대 보러 올 리가 없겠지.’ 다시금 쓴웃음을 짓는다. 문득 쳐다보니 요시다 카즈미가 벌써 몇 번째인지 자신에게 뭔가 말하려다 좌절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눈앞에 있는 유리 세공품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 데이트 자체에 관한 이야기일까. 그녀 자신이나 나에 관한 질문이라면 어떤 식으로 대답하면 좋을까. 실제론 무슨 말을 들을 것도 아닌데 벌써 곤란해진다. 적어도 나도 즐겁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이런 거 그 애라면 절대로 생각도 안 할 거야, 하하…….’ 속으로 웃을 뻔한 마음과, 눈앞에 푸른 술잔 너머로 발견한 그것. 두 가지가 겹쳐, “?!” 소스라치게 놀랐다. 꿈에서 깬 것처럼 즐거움도 산산조각 났다. ‘그 애라고?’ 어처구니없는 위화감이 습격해왔다. 아까부터 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대체 누구와 다르다는 거야?’ 물론 샤나와, ‘서로라니, 누구 얘길 하고 있는 거지?’ 물론 샤나의, ‘보러 오지 않을 거라니, 누가?’ 물론 샤나가, ‘그 애?’ 생각할 것도 없다. 당연히 그 모습은 마음에 있었다. 샤나. 자신이 발견한 그것.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등불을 가슴속에 품은, 사람으로 살아가다 꺼져가는 대체품……, 토치. 그것이 사는, 벗어난 세상에 서있는 소녀……, 샤나. 샤나. 샤나. 샤나. 나는 줄곧, 샤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몰아내고, 숨기고,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런 맥빠진 단련을 하게 만들었고, 그런 심한 말을 해버렸고, 그런 묵살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버린……, 그런 빚진 듯한 기분 때문인가. 아니면, ‘……그럼 왜 그런 말을 내뱉은 거지? 그런 말을 하게 한 내 마음속은 어떻게 된 거지? 그때의 힘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지……?’ 그녀는 바보 같은 나를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걸까. 두렵다. 그녀는 바보 같은 날 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두렵다. ‘그럼 쫓아갔으면 됐잖아. 같이 같으면 좋았잖아……. 예전의 나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텐데……, 왜?’ 푸르고 투명한 술잔에 반사된 햇빛이 어둡게 가라앉은 유지의 눈을 날카롭게 찌른다. ‘지금의 엉망진창에 흐리멍텅한 나랑 정반대야…….’ 눈앞에 있는 사람 키만 한 술잔에 비친 지금의 웃음은 쓰디쓴 자조였다. 그 푸른빛의 저편에 뜻밖에도 자신을 때려눕힌 것이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꺼져버릴 듯 약하게 깜박이는 등불. 노인 단체 손님 중 한 사람. 부드럽게 처진 눈매를 하고 온화해 보이는 노부인 토치. 실은 발견했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쭉 보고 느끼고 있었다. 단지 이젠 그런 광경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게 되고 만 것이다. 그녀가 헤쳐온, 켜켜이 쌓인 수십 년의 세월을 느끼게 하는 조용한 노부인의 모습, 그러나 그녀는 이제 곧 그 모든 것을 존재와 함께 잃어버린다. 파멸이란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종말. 그런 것을 상상하고 생각해도 둔한 통증, 무거운 슬픔, 모든 것이 너무나 멀었다. 느끼고는 있지만 그런 감정으로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토치가 존재하는 이 벗어난 세상이야말로 자신에게 일상이 되어 있었다. 샤나가, 플레임헤이즈가, ‘홍세의 무리’가 있는 이 세상이야말로. ‘ㅡ?’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노부인 토치의 모습이 단체 손님 중에 없었다. 아니, 사라졌다. 순식간에. 전부 타들어가 존재를 잃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노인들이 느린 걸음으로 나가는 3층 아치의 출구. 4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그 옆 휴게실에, ‘!!’ 앉아 있다. 홀쭉한 몸에 고전적인 양복을 걸친 노인이. 그 모습을 취하고 있는 ‘홍세의 무리’가. 별안간 긴박감이 짙어진 모형 상자 안을 보며 사토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걸 지켜보면 ‘시체줍기’ 라미가 어디 있는지 알겠군요.” 군청색 불길을 숨결처럼 토해내며 마르코시어스가 대답한다. “대충은 그렇지만……, 우선 찾아내야 하는 건 시간이 별로 안 남아서 약해진 토치가 갑자기 꺼지는 결정적인 순간이야. 그걸 이 커다란 모형과 이렇게나 많은 토치 속에서 찾아낸다니 모래 속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지. 우선은 자재법으로 범위를 좁혀봐야겠어. 그 놈은 금세 장소를 바꾸곤 하니까.” “자재법?” “‘존재의 힘’을 구사해서 ‘마음먹은 대로 일으키는 불가사의’야.” “마법 같은 건가요?” “뭐, 그런 거지.” 거리를 배회하는 식인 괴물에 대한 공포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타나카가 묻는다. “그래서 누님, 그 라미란 놈은 어떤 놈이에요?” 마죠리는 사냥감에 대한 불쾌감을 콧방귀로 드러냈다. “흥,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을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녀석이야. 다른 ‘무리’가 만든 토치를 주워 모아 슬금슬금 ‘존재의 힘’을 축적하고 있지. 자기 자신도 토치 속에 기생하면서 최소한의 ‘존재의 힘’만을 사용하는데, 덕분에 기척이 아주 희미해!”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그 토치는 이자가 무슨 짓을 했기 때문에 사라진 게 틀림없었다. 샤나가 느낀 기운의 정체는 이 녀석인가? 그런데, ‘왜, 왜 알아채지 못한 거지?’ 이렇게, 그야말로 눈에 들어올 때까지 ‘홍세의 무리’의 존재를 깨닫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방심한 것일까. 프리아그네와 싸웠을 때는 이 세상의 위화감이 다가오는 감촉을 그렇게나 뚜렷하게 느꼈는데. 샤나에게 물으면 그 이유를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라스톨에게 물으면 이 녀석이 어떤 ‘무리’인지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유지는 가슴속으로 괴로워하며 자신의 연약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미스테스’라는, 보구를 안에 감춘 특별한 존재였지만 그 보구 ‘영시미아’는 싸움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분해……. 이렇게 한심하다니!’ “……사카이?” 요시다가 갑자기 우뚝 선 유지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 유지에게는 그 물음에 대답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분노와 초조감으로 동요하는 유지의 눈앞에서 어느 새 ‘무리’는 일어나 있었다. 고전적인 양복을 걸친 꼬챙이처럼 마른 몸.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다. 딱딱하고 예민하게 보이는 용모, 쭉 뻗은 등줄기에 걸맞게 온몸에서는 노신사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기품이 느껴진다. 그러나 유지에게는 그 모습도 맹수를 안에 감춘 허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존재의 힘’을 먹혀…… 끝나는 건가.’ 나라는 존재의 소멸. 샤나 덕분에 한동안은 생각지도 않았던 가능성. 싸늘한 공포가 온몸을 찌릿찌릿 저며들어온다. 그러나 유지는 힘껏 억누르며 필사적으로 상황을 타개할 길을 찾는다. 지금 사라진다면 나라는 토치 하나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요시다만이라도 도망치게 해야……!’ 요시다를 손으로 밀어 등 뒤로 숨긴 뒤 재빨리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둘러본다. 누구를 위한 행운인지, 지금 이 아치 안에는 자신들밖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눈이 우연히 ‘무리’의 눈과 마주쳤다. 팽팽한 긴장의 실에 목숨을 건 장렬한 눈싸움…… 이라고 유지는 생각했지만, 겉보기에는 선량한 표정의 노신사를 노려보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요시다는 영문을 모른 채 당황하며 유지와 노신사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 팽팽한 긴장감을 깬 것은 노신사 쪽이었다. “호오……, 알아보는 건가. 보통 인간이 아니로군.” 겉모습의 분위기에 걸맞게, 듣는 이로 하여금 연륜의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차분하고 완숙한 음성. 물론 유지에게는 이 음성도 위압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홍세의 무리’가 꾸며낸 행동거지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프리아그네의 일로 뼛속 깊이 알고 있다. ‘무리’의 눈에 자신이 토치라는 것은 한눈에 보일 것이고, 어쩌면 ‘미스테스’라는 것까지 들켜버릴지도 모른다. 자기 몸 안의 보물을 노리던 ‘헌터’의 집착 어린 시선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이 노신사는 턱을 휙 들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안심해라.” 날카로운 용모가 곡선을 그리며 웃음을 띤다. “아직 네 등불은 강하니까 꺼뜨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균형이 무너져버리니까.” “……?” 마치 플레임헤이즈와 같은 소리를 한다. 미심쩍어하는 유지에게 노신사는 더욱 뜻밖에 말을 꺼냈다. “그보다 함께 걷지 않겠나?” “그럼……, 마르코시어스!” “으, 영차.” 마죠리가 다시 ‘글리모어’를 허공에 띄우고 그 위에 앉았다. “누님, 어디로요?” 타나카가 놀라서 물었다. “아까 마르코시어스가 말했잖아. 자재법으로 라미 녀석을 찾아야지. 토치를 쓰는 것도 옥상이 아니면 여러 가지로 번거롭고.” “토치를 쓴다고?” “그~으래.”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마죠리는 대답했다. 정확히 이해시키지 않으면 이쪽 얘기가 통하지 않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보구 하나 정도라면 몰라도.” 라고 턱짓으로 ‘파리단’이 담긴 건물을 가리킨다. “번거로운 자재법을 자신이 갖고 있는 ‘존재의 힘’으로 구사하려면 지치고 말아. 타인의 힘을 먹고 소비해대는 ‘무리’와 달리 우리들 플레임헤이즈한테 그것은 생명력 그 자체거든. 지친다기보다는 부상당한 거랑 같은 느낌이랄까. 일단 회복은 되지만 마구 써버렸다간 유사시 적이 나타났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거든. 그래서 가능한 한 자기 몫의 힘은 쓰지 않도록 하고 있어.” 미니어처의 꿈틀거리는 등불을 내려다본다. “그래서 이런 때는 주변에 있는 ‘존재의 힘’의 잔재인 토치를 쓰는 거야. 이 동네에는 무식할 정도로 토치가 많으니까 어떤 의미에선 꽤 도움이 되지.” “하지만 그 토치란 건…….” 사토가 머뭇머뭇 묻는다. “우린 어떤 게 토치인지 구별할 수 없지만, 멀쩡히 살아 있는…… 인간이잖아요?” “그 잔재. 본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야. 단지 그 대역을 하고 있을 뿐인 도구라고 말했잖아. 일일이 신경 썼다간 머리가 돌아버릴 거야.” “하, 하아…….” 사토도, 말이 없는 타나카도 토치란 것에 대해 이야기로 듣긴 했지만 실제로 어떤 것인지 눈으로 확인해보진 못했다. 본인은 이미 죽은 거라는 결정적인 말에 하는 수 없다고 타협하고 만다. “그리고 쓴다고 해봤자 이렇게 많은 속에서 대여섯 개, 라미 자식이 가져가는 수에 비교하면 댈 것도 아냐.” “…….”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닐 터이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 사실은 아무래도 남의 일 같아 덮어버리게 된다. 몰아붙이는 상대에게 대항할 수 있을 만한 힘은 없었다. 더욱이 실감을 가지려 해도, 마죠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도저히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해했지? 그럼 우리들은 갈 거야.” “우, 우리들은……?” 소심해진 사토를 마죠리는 말로 때렸다. “바보 같으니. 왜 그런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은 여기서 할 일이 있어. 똑바로 해.” 그녀는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그 꼭대기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어둠을 가르며 예리하게 펼쳐지는 음을 타고 손끝에서 군청색 불꽃이 무수히 흩어졌다. 플로어의 어둠이 마치 별들이 수놓인 밤하늘처럼 보이길 몇 초, 그 화려함에 숨을 들이키는 사토와 타나카의 한가운데에 불꽃이 모여들어 횃불 정도의 크기의 불덩이를 이루었다. “그걸 통해서 나하고 얘기할 수 있어. 우리가 기척 감지 자재법을 펼치면 다시 지시를 내릴 거야. 장소를 보는 법이나 부르는 법은 알고 있지? 그것 때문에 안내를 시킨 거니까, 잘 봐!” 말을 던지고 마죠리와 마르코시어스는 날아올라 사라졌다. 군청색 횃불과 함께 모형 상자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발 아래 펼쳐진 벗어난 세상을 바라본다. 이윽고 사토가 작은 소리로 은근히 마음에 담아둔 양 얼굴을 어루만지며 묻는다. “……내가 그렇게 얼빠진 표정을 지었었냐?” “글쎄.” 타나카가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채광용 들창도 막아버린 백화점 계단. 그 어둠 속을 마죠리는 군청색 불길을 뿜어내면서 계단을 휩쓸어가듯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 기분도 마치 상승 기류에 올라탄 듯 드높아진다. 군청색 불길을 활활 태우는 ‘글리모어’에서 마르코시어스가 놀리는 소리로 말한다. “으히히! 나를 앞에 두고 잘도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나의 아름다운 공주님 마죠리 도!” 안경 속에 눈빛을 감추고 마죠리는 대답한다. “무슨 소리야?” “자재법 따위는 그 방에서도 할 수 있잖아. 라미 자식이나 동업자가 달려들었을 때 저 애들이 휘말릴까봐 그런 거지?” “바보, 마르코, 그 반대야.” “잉?” 안경 속에서 살의로 가득 찬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직성이 풀리게 한판 벌이려면 재들이 방해가 돼.” 잠깐 침묵한 후에 마르코시어스는 폭소를 터뜨렸다. “큭, 크하하하하하하하! 좋~아, 좋~아. 근래 들어 가장 멋진 위협 문구였어. 나의 사랑스러운 플레임헤이즈.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 “쌩큐, 내 사랑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 미간을 모으며 웃는, 흉폭하다는 표현이 안성맞춤일 형상의 마죠리는 어느 새 ‘글리모어’ 위에 서 있었다. 마치 뿌리내린 듯 발바닥을 붙이고 그 밑의 추진력에 몸을 싣고서 나아가는 모습은 마치 사람 모양을 한 화살 같았다. 마침내 눈앞에 희미한 불빛이. “노크, 노크!!” 새된 외침에 아름다운 화살이 돌진의 끝에 손가락을 내민다. 순간 군청색 불꽃이 소용돌이치며 그녀의 손가락을 무겁고 강하게 감싸 날카로운 갈퀴 발톱을 갖춘 불덩이로 변한다. 그 군청색 불길로 이루어진 발톱 끝은 옥상으로 난 문을 뚫고 종잇조각처럼 찢었다. 두 사람은 두 쪽이 난 문을 매달고 한낮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히이, 핫!! 시작하자고!” 마죠리의 발밑에서 ‘글리모어’가 떨어지더니 마치 마르코시어스가 외치는 것처럼 양피지 책장이 펄럭이며 펼쳐졌다. “케이사쿠, 에이타!” 마죠리의 외침에 횃불을 통한 아래층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 네!] [잘 보고 있어요, 누님!] “좋아!” 마죠리는 오른손에 펼쳐진 글리모어를 잡고 그 페이지의 고문자가 군청색으로 빛나는 것에 맞추어 손을 아래로 흔든다. 옥상의 낡은 돌바닥에 군청색 불꽃으로 만들어진 기괴한 문장이 화르륵 타올랐다. ‘존재의 힘’을 구사해 이 세상을 뜻대로 움직이는 ‘자재법’. 이 문장은 힘의 흐름의 상징이고, 또한 효과를 증폭시키는 장치이기도 한 ‘자재식’이었다. 마죠리는 포니테일의 생머리와 드레스를 펄럭이며 그 자재식의 중앙에 착지하여 즉흥적이고 제멋대로인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마타이 마르코 루카 요하네를 사방에 배치하여 침상의 꿈을 깨는 괴물을 혼내주어라.” 그 말이 일으키는 요청의 흐름을 타고 자재식이 가동했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의 힘을 받아 군청색 파문이 문장의 테두리에서 희미하게 평면을 따라 퍼져간다. 그 빛은 멀어질수록 옅어져서 옥상을 넘어갈 무렵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하게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도중에 있는 토치를 필요한 만큼 빨아들여 지워버리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위화감에 부딪혀 불협화음을 퍼뜨리기 위해. 벌써 몇 개째인지도 모를 메론 빵을 물어뜯던 입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라스톨.” 가슴 위에 펜던트 ‘코큐토스’에게 건네는 말은 조용했다. 번화가의 인파 속에 구멍을 뻥 뚫고 홀로 걷던 샤나는 거대한 자재법의 파도가 지나가는 감촉을 온몸으로 느꼈다. 마치 피부가 불붙은 것처럼 찌릿거리며 힘이 넘쳐오른다. 사명. 자신의 사명에 불타오른다. 펜던트 속에서 아라스톨이 대답한다. “광범위를 수색하는 자재법인가. 자재사로군. 조심해라.” “응, 가자.” “음.” 무심히 옆길로 빠졌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먹던 메론 빵과 슈퍼 봉지, 가방을 내팽개치고 뛰어오른다. 전봇대 꼭대기를 차고, 지붕을 넘어 자재법이 퍼져오는 역방, 즉 그 진원을 향한다. 도약하면서 가야 할 곳을 비로소 찾은 샤나는, 반 초 동안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생각을 했다. ‘ㅡ도대체!’ 무시무시하게 이글거리는 분노가 바람을 가르는 몸에 검은 옷자락을 두른다. ‘ㅡ왜 그런 곳에!’ 그다음 뛰어올랐을 때에는, 살벌한 은빛으로 빛나는 ‘니에토노노샤나’가 쥐어져 있었다. ‘ㅡ있는 거야!!’ 목적지를 꿰뚫는 눈동자가 작열하는 빛으로 이글거리고, 뒤따라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불꽃을 흩뿌리며 불길의 색채로 물들어간다. ‘ㅡ토벌! 토벌한다!!’ 샤나는 자신의 이상한 분노의 의미를 자각하지 못했다. 3. 해후명암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 미술관의 마지막 아치인 제 4층을 노신사가 앞서간다. 사카이 유지는 ‘홍세의 무리’인 그 노신사를 자극하지 않도록 표면적으로는 순순히 그 요구에 따라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의아하게 여기던 요시다 카즈미도 지금은 노신사의 해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 모양이네.” 이 4층에는 전시물이 없었다. 넓은 아치의 양쪽 가장자리에는 일직선의 긴 의자가 각각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벽의 위쪽의 반이 유리로 되어 있던 아래층에 비해 이곳은 검은 차광판으로 덮여있다. 그러나 그곳을 걸어가는 세 사람은 빛에 감싸여 있었다. “정의에 의하면, 이런 형식의 것은 십자군이 전리품으로 유리를 유럽에서 들여온 후, 9세기경부터 있었다고 하더군.” 빛은 천장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예쁘다…….” 처음으로 요시다에게서 숨 막히는 듯한 탄성이 자발적으로 흘러나왔다. “…….”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걷고 있는 유지는 이 이상한 상황이 즐거울 리 없었다. 이 ‘홍세의 무리’인 노신사가 어떤 속셈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는 말했지만 그 말을 순진하게 믿는다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자신 같은 미약한 존재가 무슨 일을 한들 헛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적어도 요시다를 도망치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자신이 ‘미스테스’라는 것을 알아챘다면 그 내용물에 흥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녀를 놓아주는 거래쯤은 가능하지 않을까. 위기감과 초조함에 애를 태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는 유지였지만, 그래도 요시다가 말한 대로 역시 예쁜 건 예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전시물은 없었다. 머리 위에 걸려 있다. 벽과 마찬가지로 차광판으로 뒤덮인 천장의 뚫린 곳. 거기에서 빛이 꽃피고 있었다. 현기증을 일으킬 듯 환상적인, 그러나 창작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나타낸 색채로 햇빛을 변모시키는 그것을 납으로 된 테로 결합된 유리 조각의 집합체.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했다. “그렇네, 아름답지.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보았을 때 모두들 자연스럽게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다.” 4층은 스테인드글라스만을 천장에 장식한 전시장이었다. 양 옆에 놓인 긴 의자는 그것을 느긋하게 감상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머리 위에 설치된 전시 양식이 부담을 주지 않도록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엔 아주 얇은 강화 유리가 깔려 있었고 또 전부를 한눈에 볼 수 없도록 천장에는 완만한 칸막이가 하나하나 구역을 나누듯 설치되어 있었다. 노신사는 바로 위에 있는 성인화 같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 본질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게 돼버렸네. 가령 이런 것들은 성서를 읽지 않는 자들도 한눈에 ‘신은 고귀하다’는 걸 알 수 있게 만드는 시각적인 무대 장치로 쓰였지.” 그 성인이 보내는, 투명도가 낮은 짙은 빛 속에서 요시다가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노신사는 마치 그 표정을 본 듯(보였을지도 모른다고 유지는 생각한다) 돌아서서 딱딱한 선을 휘며 웃는다. “아름다운 것에는 가치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은 이용되네. 그리고 이용할 필요성에 의해 기법도 표현도 발달했지. 좋고 나쁨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네. 알겠나, 아가씨?” “네, 네에…….” 요시다는 그 말에 주눅이 들면서도 존경심을 담아 조그맣게 대답한다. “좋아.” 노신사는 끄덕이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천장의 구역 너머로 또 하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나타난다. 전시 양식상 더 큰 물건을 설치할 수 없지만, 그래도 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그 그림은 그 어떤 것도 모두가 충분히 인상 깊은 것이었다. “하지만 또 그 가치와 이용과 필요성이 그것 때문에 태어난 ‘아름다움’을 죽일 수도 있지. 이것이 복제품인데…….” 지금 머리 위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천사가 아기에게 손을 뻗는 도판이 그려져 있다. “교회에 장식된 이것의 원판은 종교 개혁 시기에 어린이가 던진 돌팔매에 의해 깨져버렸다네. 구교의 상징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지. 신교도가 된 사람들은 아이를 벌하지 않았다네.” 요시다는 이해한 듯 끄덕였다. 유지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가 하는 정도. “아름다움 그 자체는 변치 않는다네. 그러나 아름다움을 키워냈던 것, 아름다움 자체와는 관계없는 것이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가치 없다고 판정하지……. 이 한 장을 봐도 세상의 복잡함이 전해지지 않나.” 노신사는 다시 걸어간다. “지금 시대는 단순해서 좋아. 아름답다는 것은 단지 그것만으로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 말에는 마치 모든 것을 옛날부터 지켜보아 온 듯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무리’라면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유지에게 노신사는 등을 돌린 채 말한다. “자네 같은 젊은이에겐 어려운 얘기였을지도 모르겠군. 아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 말일세.” “사람…….” 그 말에 의표를 찔린 나머지 유지의 입에서 무심결에 말이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본다. 눈부시다. 눈부신 모습. 올려다보는 눈부신 모습. 한 명의 소녀를, 고통조차 불러일으키는 그 모습을 그래도 유지는 강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요시다도, 아주 조금, 자신에게 그러한 존재ㅡ옆에 선 소년을 보았다. “ㅡ!!” 알 수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보는 소년은 그려내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강하게, 강하게. 기척 탐지의 자재법은 갑자기 거대한 불협화음에 부딪혔다. “응? 마르코시어스!” “크다! 뭐지?” 고함 소리가 교차하는 동안에도 그 불협화음의 원천인 기운은 다가오고 있었다. 폭발적인 적의와 함께. “식을 되돌려!” “알았어!” 왼손의 ‘글리모어’를 거칠게 덮고 왼손을 아래로 뿌린다. 가동된 자재식이 구조를 바꿔 전개 중이었던 기척 탐지의 파문이 수축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 서슬로 오그라드는 파문은 몇 개의 토치를 삼키고 싸우기 위한 ‘존재의 힘’을 흡수해간다. “이거 이 동네에 있었잖아…….” “플레임헤이즈지?” [네, 뭐라고요?] [누님?] “아까 덤이었던 플레임헤이즈 쪽이 낚였어. 너희들, 잠시 대기해.” “좋아, 이 적의 정말 끝내주는데! 얼른 덤비라고!!” [하, 하지만 플레임헤이즈라면……] [동료끼리 싸우겠다고요?!] “그리 드문 일도 아니야.” 이야기하는 동안 군청색 파도가 평면을 따라 돌아왔다. 그 파도가 도중에 흡수한 ‘존재의 힘’을 지니고 다시 자재식 안으로 돌아간다. 마죠리는 조용히 말한다. “봉절.” 모여든 ‘존재의 힘’에 의해 발밑의 자재식이 새로 짜인다. 폐빌딩의 옥상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원형의 문장. 거기에서 끓어오르는 군청색 불길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위로 뻗어 올라가 빌딩 위를 구형으로 뒤덮는 아지랑이의 벽이 형성된다. 내부를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차단하여 정지시키는, 동시에 외부에서 은폐된 인과 고립 공간. 만들어진 근세 이후로, ‘홍세의 무리’의 존재를 인간의 눈에서 완전히 숨겨주었던 자재법. ‘봉절’의 발현이었다. [우왓?] [아, 누님들이 비쳐요……. 이 이상한 마크는 뭐죠?] 마죠리는 봉절을 친 김에, 아래층의 두 사람의 눈앞에 떠 있는 횃불이 옥상을 비춰내도록 바꿨다. 지금 그들의 앞에는 옥상에선 그녀와 그 바닥을 점유한 기괴한 문장이 비춰질 것이다. “봉절의 자재식. 밖에서 안을 안 보이게 하는 자재법을 일으키는 문장이야.” “이걸 치면 아무리 날뛰어도 바깥에 있는 놈들은 아무것도 몰라.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무리’와 플레임헤이즈뿐. 즉 우리들을 위한 결투장이란 말이지. 힛히하하하!!” 그리고 결투 상대가 날아들었다. 머리와 눈동자에 홍련의 불꽃을 이글거리고 바람을 가르는 검은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리며 날카로운 칼날을 번뜩이는. 두 사람은 놀라고 말았다. “염발……!” 마죠리는 전해 들어서, “작안!” 마르코시어스는 동족으로서 그것이 누구의 플레임헤이즈인지 알고 있었다. 이세계 ‘홍세’에 위명을 떨치던 마신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 그리고 그의 플레임헤이즈 ‘염발작안의 토벌자’. 지금은 샤나라는 이름이었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옥상에 내려선 샤나는 명백히 시비조로 말을 꺼냈다. 오른손에 쥔 대검 ‘니에토노노샤나’를 앞으로 내민다. 소녀의 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키만 한 칼이 미동조차 없이 앞을 가리키고 있다. 아니, 겨누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절할 만큼 강렬한 샤나의 눈빛을 받고도 마죠리는 완벽한 미모에 비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훗, 예의를 모르는 꼬맹이로군. 인사도 할 줄 모르나.” “히히히, 오랜만이로군, ‘천양의 겁화’. 그것이 ‘염발작안의 토벌자’냐?” 오만하게 서 있는 그녀의 옆구리에 늘어진 ‘글리모어’에서 마르코시어스가 군청색 불길을 뿜어내며 인사한다. 샤나의 가슴에 달린 펜던트에서 아라스톨이 무겁고 낮은 음성으로 대답한다.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 그리고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 ……너희들 이런 곳까지 흘러 들어온 건가?” “훗하하하, 그거야 피차일반인걸!” 마르코시어스의 쇳소리에 샤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라스톨, 이 녀석들은 뭐야?” “최악이다. 이놈들에게 대화는 통하지 않아. 벌써 싸울 기세다.” 흥 하고 마죠리는 가냘픈 몸의 플레임헤이즈를 비웃는다. 변함없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기 때문에 흉악하게만 보인다. 나오는 말도 당연히 험악했다. “그렇게나 살기등등해서 날아 와놓고 싸움을 안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웃음을 꾸며주듯 포니테일의 생머리 끝과 드레스 자락에서 군청색 불꽃이 반짝거리며 뿌려지기 시작했다. 플레임헤이즈가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아, 그래, 그래……. 일단 묻는 말에 대답 해볼까. 이 동네에 ‘시체줍기’ 라미가 숨어들었어. 원래 우리들이 찾던 건 그쪽이고 너희들은 그 덤이지.” “맞아, 맞아. 여긴 그 재수 없는 하이에나 자식을 찢어 죽이러 온 거야.” 지금 군청색 불꽃은 한낮의 눈보라처럼 마죠리의 장신을 둘러싸고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라스톨은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눈앞의 전투광들에게 말한다. “라미라고? 어이가 없군. 왜 그자를 토벌할 필요가 있다는 건가? 녀석은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힘쓰는 예외적인 ‘무리’이거늘. 녀석을 뒤쫓으면 오히려 헛된 희생과 소동을 일으킬 뿐이다.” 돌연 마죠리의 조소가 사라지고 군청색 불꽃이 더욱 거세졌다. “예외?! ‘홍세의 무리’에게 예외란 것이 있을 리가!” 아름다운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마죠리는 으르렁거린다. “지금은 마침 녀석의 상황 때문에 다른 이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움직일 뿐이지만, 언제 비축한 ‘존재의 힘’을 써서 재난을 일으킬지 누가 안다는 거지?” 거무스름하게 물결치는 그것은 무섭도록 증오에 찬 음성이었다. “‘무리’는 전부 죽여, 죽여, 죽여,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씨를 말려버리는 수밖에 없어!!” 그와는 대조적인 경박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하, 하! 미리미리 재난의 불씨를 제거한다니. 우리들은 정말로 모범적인 플레임헤이즈이지 뭐야.” “타인의 증오에 편승해서 헛소리를 지껄이지 마. 이 전투광!” “호, 말도 하네!” “…….” 샤나는 대화에 끼지 않고 오로지 앞을 보며 칼을 겨누고 있었다. 아라스톨이 말한 대로 이 녀석들은 말귀를 알아들을 상대가 아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을 웃도는 전의와 적의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극히 한순간에 타올랐다. 전투욕의 화신 같은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아라스톨은 설득 하려 하고 있다. 플레임헤이즈끼리의 싸우는 것은 확실히 쓸데없는 짓이다. 말리고 싶은 심정도, 이유도 안다. 그러나 샤나는, ‘……답답해 못 봐주겠군…….’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투에 임하면 언제 냉정 침착한 평소의 그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즉 지금의 그녀는 평소와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야말로 전투를 갈구하는 전투광이 된 것처럼 싸움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 우울한 감정을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온 힘을 다해 부딪치고 싶었다. 그녀 스스로 그렇게 되자고 했던 플레임헤이즈로서, 있을 수 없게도. “저 ‘헌터’도 너희들이 죽인 거 아냐? 어디 그 솜씨 좀 보러 왔수다.” “흐하핫! 뭐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도 돼. 어때, 아가씨?” 명백한 도발이었다. 보통 때의 샤나였다면 이 정도의 도발은 가볍게 넘겼을 것이다. 지금 역시 그 검 끝은 흔들림이 없다. 그러나 한마디. “……아라스톨, 아직도 싸우면 안 돼?” “?!” 두 사람의 전투광은 잘됐다며 웃는다. “후웃, 음……, 말이 통하는 녀석이 있었잖아.” “아아, 겁쟁이 대마신의 계약자론 생각되지 않는걸. 히히!” “크윽!!”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을 받은 샤나는 총알처럼 뛰어올랐다.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의 맨 위층에 있는 찻집 ‘아크로폴’ 창가 자리에 유지와 요시다, 노신사가 테이블 한 면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남은 한 면은 강화 유리벽으로 그 너머로는 미사키 역을 끼고 반대쪽에 잇는 버스 터미널과 큰길, 거기서 이어지는 미사키 대교와 번화가 등이 평소 볼 수 없었던 각도에서 새롭게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목재를 주로 쓴 찻집의 인테리어는 내내 근대 건축물 안에 있었기에 생긴 ㅁ의식적인 피로를 편안하게 씻어내 준다. 지나치게 밝지 않은 황갈색의 조명이나 광택 없는 세간들도 충분히 널찍한 공간에 알맞게 배치되어 있다. 물건도 사람도 밀도가 낮아 편안하다. 유지와 요시다만 들어갔다면 어른인 척 보이려 애쓰는 커플로 보였겠지만 다행(?)히 지금 그들은 노신사와 함께였다. ‘어른인 척하는 커플’과 ‘할아버지와 손주 둘’, 남들의 눈에 어느 쪽이 더 우스워 보일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선은 노신사의 품격이 덮어주는 덕분에 튀는 손님으로 보이진 않았다. 노신사는 미술관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이 플로어에서 그들에게 차를 권했다. 물론 찻값은 본이니 내는 것을 분명히 하고. 그래도 요시다는 얼핏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주눅들어 있었다. 노신사의 박식함과 품격에 존경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바로 그 이유 대문에 주눅든 점이 자못 그녀답다. 그런 그녀에게 노신사가 손을 들어 말한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단다. 오랜만에 젊은이와 대화할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데 대한 답례니까.” 강압성을 띤 치하가 소녀를 경직시키는 쓸데없는 걱정을 날려버린다. “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어서 들게나, 아가씨.” 요시다는 앞에 놓인 에스프레소 컵에 살짝 입을 갖다 댔다. 아주 무리했을 것이다. 감추려고 해도 쓴맛에 불편해하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난다. 그 맞은편 자리에서 상대가 ‘홍세의 무리’라는 것에 반쯤 경계하고 있던 유지 쪽은 노신사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부리나케 자신의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쓸모없는 허세 때문에 요시다에게 맞춰서 시켰지만 정말 엄청나게 진하다. 얼굴에 드러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요시다를 동정한다. ‘그치만.’ 어떻게 된 거지? 유지는 요시다의 모습을 보고 생각한다. 그녀의 얼굴엔 노신사에 대한 낯가림이나 긴장 말고도 우울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침울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꾹 참는, 그런 괴로운 빛. 유지가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미술관을 나온 뒤였지만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었다. ‘이 ‘무리’의 이야기에도 그런 표정을 지을 만한 내용은 없었는데…….’ 그리고 어머니가 말한 대로 둔감한 이 소년은 그 원인이 다름 아닌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노신사는 느닷없이, 그러나 자연스런 동작으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 때렸다. “실례, 아가씨.” “!!” 유지는 그 손끝에서 ‘존재의 힘’의 방출을 느꼈다. 경악에 전율하며 그가 그때까지의 느긋한 고민도 잊어버리고 벌떡 일어나려 하자 노신사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진정해. 그녀를 잠시 재웠을 뿐이다.” 쳐다보니 정말로 요시다는 앉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다. 살펴보니 호흡도 고르고…… 아무 위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유지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날 이제야 해치울 생각이로군,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이제야 둘이 대화를 할 수 있겠군.” “무슨 얘기?” 유지는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노신사도 둔하지 않다. “우선 통성명이나 할까, 소년. 나는 ‘시체줍기’ 라미. 네가 눈치챈 대로 ‘홍세의 무리’다.” ‘시체줍기’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노신사 라미는 경계심을 풀지 않는 유지를 보고 씁쓸해했다. “자네에게는 예의범절이 갖춰져 있지 않군.” “?” “나는 이름을 밝혔는데 자네도 밝히는 게 어떤가?” 이것이 ‘홍세의 무리’가 토치에게 대하는 태도인가. 유지는 여우에게 홀린 심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해를 입힐 작정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겠지…….” 라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신이 대답할 차례다. “난 사카이 유지. 토치고…… 아마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미스테스’다.” “그렇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각하고서도 제정신을 유지할만한 토치는 없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군. 짐작 가는 보구가 몇 가지 있네만.” 유지는 상대가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 제안을 했다. “……내 안의 보구가 목적이라면 적어도 요시다는.” 유지가 말하는 동안 라미는 요시다 쪽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불쌍하게도.” “!” ‘역시 거래 따위는 불가능했던 걸까. 그럼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적어도 요시다만이라도.’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유지를 라미가 다시 손으로 제지했다. “사카이 유지, 머리 회전이 빠른 것은 좋지만, 속단이라는 말도 있네. 경솔함은 오히려 상황을 불리하게 만들 뿐이야. 한 번 더 말하지. 진정해.” “……?” “내가 ‘불쌍하게도’라고 말한 건 오로지 그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라네. 자네는 모를 테지만.”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뭐, 그건 본론이 아니야. 본론은 자네 가까이에 있을 플레임헤이즈에 대해서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어?” “미리부터 기척을 느꼈고 당연한 추측이기도 하지.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은 우선 플레임헤이즈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어쨌거나 그 플레임헤이즈에게 내가 무해한 존재란 걸 알려주길 바라네.” “무해? ‘홍세의 무리’가?” 놀란 유지였지만, 말도 안 된다고 소리지를 수 없게 만드는 절실한 무언가가 노신사의 요청에는 담겨 있었다. “나는 사람을 먹지 않네. 본명대로 시체……, 즉 토치밖에 먹지 않아. 그것도 자네가 본 바대로 거의 약해져 꺼져가는 것만을, 이 몸도 보통의 ‘무리’와 달리, ‘존재의 힘’을 거의 소비하지 않도록 토치의 것을 빌리고 있네.” “……사람에게는 해를 입히지 않을 테니 봐달라는 얘기?” “그렇네. 아마 자네도 관계자겠지만……, 이 동네에는 토치가 이상하리만큼 많아. 나에게는 더 없는 최적의 장소지.” “왜 그런 답답한 짓을 하지? ‘무리’라면 다른 녀석들이 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먹고 날뛰고 돌아다니면 되잖아.” 라미는 조금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대답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많은 ‘존재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유지에게 라미는 말을 계속한다. “나는 막대한 ‘존재의 힘’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업을 수행 중이라네. 그러나 드러내놓고 이 세상의 사람을 먹어치워 그 힘을 모으려 한다면, ‘제례의 뱀’이나 ‘관을 짜는 자’처럼 아무리 강한 자라도 몰려드는 플레임헤이즈들에 의해 토벌되고 말 걸세.” 예시에 조금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유지는 라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약해진 토치만을 모아서 세상의 균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거야?” “그렇네. 무해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플레임헤이즈는 토벌하러 오지 않아. 그릇이 ‘무리’에 대한 복수를 바란다 해도, 거기에 힘을 부여하는 ‘왕’은 그렇게까지 해서 동족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지. 조금은 안심이 됐나?” “…….” 과연, 확실히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유지는 그 이야기의 전제에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하나 발견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해서 많은 ‘존재의 힘’을 모아야 하는 사업이란 게 대체 뭐야?” 유지는 프리아그네의 ‘도시 삼키기’라는 전례를 체험한 적이 있다. 엄청난 계획이니 사업이니 하는 술수에 당연히 경계심이 생긴다. 그러나 그 질문에 라미는 너무나도 뜻밖의 한마디로 대답했다. “미련이다.” “?” “옛날 한 인간이 오직 나를 위해 하나의 물건을 만들어주었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기도 전에 부서져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네.” “…….” 유지는 아까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 보았던 노신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쓸쓸함과 회한이 새겨진,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 “나는 그가 보내려 했던 물건을 이 눈으로 보고 싶네. 이 손으로 만지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하네. 많은 세월을 들여 그것을 위한 자재식을 만들어냈지. 단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존재를 잃어버린 유실물을 복원하는 것이다. 당연히 식의 가동에는 막대한 ‘존재의 힘’이 필요하겠지.” “토치를 모은다니…… 어느 정도? 그, 보통으로 먹어치우는 거에…… 비하면.” 주저하면서 묻는 유지에게 라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감각으로 친다면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 정도랄까.” “천, 만……!” 유지는 일순, 이 ‘홍세의 무리’에게 존경심이 들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동네만큼 토치가 많은 장소는 내게는 보구 따위 보다 훨씬 귀중한 보물로 가득 찬 거나 마찬가지일세.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도이면서도 가능한 많은 토치가 필요해.” “…….” “다만 오래 머물 생각은 없네. 귀찮은 녀석들에게 쫓기는 몸이니.” “귀찮은 녀석?” “플레임헤이즈이다. 어떤 장소에서 맞닥뜨린 이래로 끈질기게 뒤를 쫓아오고 있지. 보통 플레임헤이즈라면 나처럼 세상의 균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존재는 내버려두건만.” 아라스톨과 샤나라면 무해한 ‘무리’를 내버려둘 수도 있겠다고 유지는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 ‘무리’를 토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안도하는 자신을 유지는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특히 ‘무리’를 토벌하는 일에 집착하는 전투광이다.” 이어지는 라미의 말에 이번에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오늘 아침 샤나가 느꼈다는 기운. 그건 어쩌면 자신도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이 라미가 아니라…… ‘귀찮은 녀석들’? ‘전투광’? ‘플레임헤이즈’?! 그리고 라미는 말했다. “지금 자네가 아는 사람과 싸우고 있네.” 돌진하는 샤나의 눈앞에서 거칠게 몰아치던 군청색 불꽃가루가 마죠리에게 모여들었다. “!” 그녀를 감싼 불길의 덩어리는 귀를 쫑긋 세우고 눈과 코가 검게 뚫린 뜻밖의 모습을 취했다. 그것은 마치 서 있는 쿠션처럼 조악한 절구통 모양의 짐승이었다. 몸통의 양 옆에서 느닷없이 곰처럼 두꺼운 팔이 뻗어 나왔다. 본체는 우뚝 선 채 채찍처럼 뻗어 나온 그 두 팔은 샤나를 손아귀에 뭉개버리려고 양쪽에서 공격해온다. “읏!” 기합과 함께 혀를 차며 샤나는 바닥을 박차고 오른쪽으로 도약했다. 대검 ‘니에토노노샤나’가 앞에서 덮쳐오는 짐승의 왼팔을 꼭대기에서부터 둘로 베어 불꽃으로 만들어 없애 버리고, 그 휘두른 기세로 반전하여 뒤에서 덮쳐오는 오른팔을 밑에서부터 사선으로 일격에 베어냈다. “앞!” 아라스톨이 외친다. 양 팔을 자르는 짧은 시간에 마죠리가 들어있는 본체의 배가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 위에 있는 것은 잔뜩 뒤로 젖힌 자루 같은 목. “피해!” “윽!!” 샤나는 반사적으로 피한다. “으하하!!” 포효인지 호흡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군청색 불길이 괴수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발꿈치를 태울 뻔한 위기일발의 순간에 샤나는 이 화염의 해일을 피했다. 연기와 수증기가 불길의 파도에 밀어닥치며 끓어올라 고열이 통과한 돌바닥이 끽끽 소리를 내며 신음한다. 군청색 불길로 이루어진 짐승은 검게 그을린 그 길의 원점에 서서 절구통 몸체의 위쪽, 정확히 마죠리의 머리 부위에 선을 그리며 입을 쩍 벌렸다. 마치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전체를 U자로 구부린다. 웃는 형태다. 이빨 사이로 텅 빈 공간만이 들여다보일 뿐 그 안에 있어야할 마죠리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선 또렷한 마죠리의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흐응, 꽤…….” 마르코시어스가 말을 잇는다. “움직임이 나쁘진 않군, 히힛.” 샤나는 자세를 낮춰서 그 두 사람에게 다시 맞선다. “아라스톨, 저건?” “저놈들은 ‘유린의 조아’ 현현의 증거, 화염의 옷 ‘토가’다. 전투에 숙련된 무서운 자재사이니 현혹당하지 않도록 조심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반쯤 폭발하듯 싸움을 걸고만 것을 질책하듯 아라스톨은 말한다. 샤나는 살짝 끄덕이고 칼자루를 품안 깊숙이 밀어 넣는다. 오른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고, 칼을 허리에 받치고 눕혀 몸을 옆에 둔 돌격 자세. 상대하는 마죠리 쪽은 변함없이 우뚝 선 상태. 토가가 만들어낸 짐승은 가랑이가 땅에 붙을 만큼 다리가 짧아 걸어 다닐 수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어느 새 다시 생겨난 굵은 양 팔은 축 늘어져 있고 군청색 불길에 검게 뚫린 눈과 코도 사이가 넓다. 삼각형의 양 귀만이 쫑긋 서서 묘한 애교마저 풍긴다. 커다란 입에 맞춰, 그 전체는 사나운 짐승이라기보다는 조악한 인형 탈 같았다. 실제로 마죠리가 입고 있기도 하지만. “그럼 다음은…….” 마죠리가 느릿느릿 말하고, “이거다앗!!” 뒤이어 마르코시어스가 외친다. 굵고 긴 양 팔이 크게 뿌려지더니 그 손가락 끝에서 무수한 화염탄이 발사되어 나왔다. “ㅡ크악!” 샤나는 돌바닥에 홍련의 파문을 남기고 정면으로 도약한다.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내민 검 끝이 그 돌격의 움직임과 함께 자신의 진로를 막는 화염탄만을 뚫고 쳐낸다. 그 움직임의 종착점은 화염탄의 장막 저편에 서 있는 짐승의 몸. 도약하는가 싶더니 찰나의 일격이 짐승의 배를 깊숙이 찔렀다. “응?” “오옷!” 마죠리의 경악과 마르코시어스의 탄식이 울릴 틈도 아깝다는 듯, “하앗!” 어떤 전법도 기술도 간섭할 수 없는 필살의 대검 ‘니에토노노샤나’가 꿰뚫린 구멍에서 토가를 단숨에 걷어내버렸다. “?!” 그러나 걷어낸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하하하! 틀렸어!” “다음엔 맞힐 수 있을까? 으하하.” 샤나는 소리가 난 뒤쪽을 경계하면서 발을 돌렸다. 그리고 잡은 칼 저편으로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보았다. 방금 발사된 화염탄의 수만큼 토가의 짐승이 땅 위에 서 있었다. 그 전원이 소리를 모아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자아, 귀신아, 여기야.” “이히히히히!” 일제히 소리를 질러대며 짧은 다리로 통통 뛴다. 환상인지 악몽인지 모를 광경 속에서 그것들은 갑자기 높이 뛰었다. 샤나는 포착했다. 눈에 띄지 않는 그늘에 단 한 마리 뛰지 않는 짐승이 있다. “저거냐!” 수많은 짐승이 붕 떠 있는 아래를 다시 샤나가 질주한다. 눈부신 속도의 2보, 3보의 동작에 공격을 실어 3초가 채 못 될 시간에 옆베기로 짐승을 단칼에 두 동강. 그러나, “틀 · 렸 · 어!” 둘로 찢겨나가던 짐승이 마죠리의 목소리로 비웃는다. “덤이야!” 마르코시어스의 외침에 폭발했다. “우, 컥!!” 샤나는 반사적으로 흑의 자락을 벽처럼 두고 그 충격을 받아낸다. 튕겨나가 굴러간 장소는 허공에 뜬 짐승들의 바로 발밑. 짐승의 무리가 폭음을 배경 삼아 일제히 노래를 부른다. “여우가 장가들면 비가 내린다.” “3초 후며 타불이라네!”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짐승들은 세찬 화염 줄기로 변해 바로 아래에 있는 샤나에게로 쏟아졌다. “우왓?!” “굉장하다!” 장난감 더미와 중앙에 있는 ‘파리단’의 모형 상자에서 사토와 타나카가 환성을 질렀다. 두 사람 사이에 떠 있는 횃불이 변형된 접시 모양의 것에 옥상의 전황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 군청색 불꽃에 의한 영상은 지금 세찬 화염 줄기에 의한 공격이 옥상에 쏟아져 폭발하는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폭발이 옥상에서 일어나고 있음에도 몇 층 차이도 안 나는 이곳엔 전혀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죠리가 설명한 것처럼, 내부의 움직임을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자재법 ‘봉절’의 효과인가, 하고 두 사람은 플레임헤이즈들의 무시무시한 싸움을 체감 아닌 체감을 하고 있었다. 소리는 마죠리와 마르코시어스의 것밖에 들리지 않는다. 영상은 인상이 파악될 정도로 선명하지 않다. 그들은 마죠리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모른다. 옥상에 군청색 불길이 부풀어올라 터진다. 불의 비를 쏟아부은 뒤에도 외로운 그림자를 허공에 남긴 진짜 토가ㅡ마죠리의 본체를, “?!” “우휴!” 검 끝이 스쳤다. 샤나가 그들의 눈앞까지 날았다. 폭발을 일제히 받은 바닥 위에 가만히 있지 않고 화염 줄기 속을 스스로 뛰어올라 빠져나오는 것으로 받은 공격을 최소화했던 것이다. 뛰어오르는 도중에 공격을 몇 방 맞았지만 바닥 위에 있는 것보다는 데미지가 훨씬 덜했다. 그러나 그 천재일우의 기회에 휘두른 일격, 지금까지 겨눠서 한 번도 빗나간 적 없던 공격이, ‘빗나갔어?!’ 샤나의 머리 위에서, “이!!” “망할 녀석!!” 길게 뻗은 토가의 깍지 낀 양 손이, 바위도 부숴버릴 일격이 거세게 떨어져 내려왔다. “크어억!!” 샤나는 군데군데 남은 불이 타오르는 옥상에 내동댕이쳐졌다. 돌바닥이 날아가고 콘크리트가 불똥을 튀기며 산산조각 났다. “싸우다니……, 널 쫓아온 건 플레임헤이즈잖아?!” 유지는 무심코 버럭 소리지르며 일어났다. 손님이 적었기 때문에 특별히 남의 이목을 끌진 않았지만, 그래도 라미는 유지에게 앉으라고 지시했다. “플레임헤이즈끼리 싸우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뭐라고?” “너희들 인간과 마찬가지다. 원한이나 방침이 다르고, 오해를 한다거나 기분상의 이유까지, ‘무리’가 아니더라도 싸울 이유는 아주 많지.” “그런……, 지금 어떻게 되고 있지?” “흠, 내가 느낀 것은 봉절이 발생한 것, 거기에 터무니없는 적의의 덩어리가 날아든 것뿐이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네도 알다시피 알 방도가 없네.” “…….”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누군가가 크게 당하면 끝나는 게 이쪽 싸움의 통념이니까 우선 목숨을 잃을 일은 없어. 저 두 사람이 상대인 것이 자네가 아는 자에게 불행…….” 유지는 라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괜찮아.” 그 음성은 확신조차 넘어선 신봉. “샤나는 틀림없이 괜찮아.” 탕 하고 기세 좋게 의자를 쓰러뜨리고 일어난다. 샤나,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 ‘니에토노노샤나’를 휘두르는 ‘염발작안의 토벌자’, 무적, 압도적, 절대적, 강하고, 강하고, 강한……. 샤나는 자기가 동행을 거절한 뒤에도 역시나 변함없이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다. 제멋대로인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유지는 쓸쓸하고 분했다. 그런 유지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면서도 라미는 자신의 의문을 드러낸다. “샤, 나…….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군.” “이름이 없다고 해서 내가 붙여줬어.” “이름이 없다고? 이상한 플레임헤이즈로군. 누구의 계약자인가?” 유지는 라미의 말이 이해가 안 갔지만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자신이 올려다본 거대한 불꽃, 이세계의 마신의 이름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 라미는 유지의 예상을 웃도는 놀라움을 드러냈다. “뭐? 그럼 플레임헤이즈는 ‘염발작안의 토벌자’인가!” 이토록 놀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유지는 거꾸로 당황해버렸다. “아, 아아…….” “과연 네가 자신만만해하는 이유도 알 것 같군……. 그런가, 설마 ‘천양의 겁화’가 있었다니.” 유지는 혼자서 끄덕이고 납득하는 라미에게 물어본다. “아는 사이야?” “그와 비슷하지. 흠, 그렇다면 결과에 대한 걱정은 필요 없겠군. 나도 의외로 운이 좋은걸. ‘염발작안의 토벌자’의 비호 아래 토치를 모을 수 있다니.” 자신이 모르는 연결 고리는 느끼고 유지는 왠지 소외감을 느꼈다. 라미는 이제 안심 그 자체인 표정을 지었다. “그럼 사카이 유지, ‘천양의 겁화’와 ‘염발작안의 토벌자’에게 틀림없이 전해라. 내가 잠시 이 거리에……, 음……?” 라미는 말을 끊었다. 유지가 자신의 요청을 듣자마자 아까와는 전혀 다른 소심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표정대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한다. “……된다면 전할게. 정나미가 떨어진 게 아니라면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뭐라고? 무슨 소리지? 보통 플레임헤이즈는 ‘미스테스’를 내 버려둔 채 떠나버리진 않는데.” “…….” 이유를 물어도 감정에는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아침 햇빛 속에 서 있던, 강인함 그 자체 같던 모습을 생각하는 동안 또 권태감이 엄습해온다. 자신의 모든 것이 탄력을 잃고 늘어져버렸다. “……이젠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할 수 없어. 나는 그녀의 힘이 돼줄 수 없어 아무 도움도 안 돼 그러고 싶어도 이젠 그럴 의욕도 없어.” “그녀? 토벌자는 소녀인가?” 유지는 무언의 긍정으로 대답한다. ‘……여자?’ 라미는 그런 유지의 태도에서 뭔가 짚이는 것을 느꼈다. <샤나는 틀림없이 괜찮아.> 그렇게 단호하게 말했던, 그러나 신뢰의 훈훈함이 없는, 마치 차가운 사실만을 고하는 표정. <내가 붙였어.> 희미하게 자랑스러움이 비치는 표정. <정나미가 떨어진 게 아니라면.> 그 말에 밴 좌절감이나 지침, 슬픔과 괴로움. 이런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그런 쪽의 고민을 안고 있다는 것은 미술관 내에서 만났을 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 그런 것이었다니. 동석한 잠자는 공주가 더욱 불쌍하게 느껴진다. 소년……, 그리고 아마도 토벌자 소녀. 이 미숙한 생물들은 어느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걸 확인했나?” “……에.” 라마가 테이블 위에서 깍지를 끼고 유지를 보고 있었다. 겉모습 이상으로 세월의 깊이를 가득 풍기며 노신사는 다시 묻는다. “가령, 그래……. 아주 미련한 확인법이지만……, 자네는 실제로 그 샤나 양에게 자신은 도움이 되지 않느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봤나?” “그, 그런.” 부끄러운 짓을…… 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유지는 말끝을 흐렸다. 라미는 손을 풀고 테이블을 탕 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거 참, 대단한 벽창호로군! 상대에게 확인도 안 하고 혼자서 지레짐작이라니!” “…….” “그럴 의욕이 이제는 없다고? 확인하지도 않고 나는 안 된다는 위축된 마음으로 그저 상대를 거부한 것뿐 아닌가?” 갑작스레 허를 찔려 유지는 얼떨결에 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샤나가, 샤나가 그럴 리가……. 나 같은 걸…….” 말하면서도 한심한 나머지 말꼬리가 점점 흐려진다. 라미는 그런 유지의, 플레임헤이즈라는 존재에 대한 너무나 경직된 우러름에 한숨이 나왔다. ‘이런, ‘천양의 겁화’녀석……. 어렵게 얻은 계약자라고, 보호자 의식이 끓어올라 이 소년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 건가……?’ “말해두는데, 우리들 ‘홍세의 무리’가 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엣?” “너희들이 과학으로 증명한 바와 같이 우주는 넓지 않나?” 갑작스런 수수께끼 같은 화제에 유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라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별이 있는 ‘이 세상’에서 왜 우리들은 이 지구에 나타났을까? 왜 우리들의 세계 ‘홍세’는 걸어서 갈 수 없는 이웃일까?” “…….” “그것은 우리들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일세. 존재의 형상이 다르지만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을 그 안에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 때문에 우리들은 너희들의 ‘존재의 힘’을 얻을 수 있고, 여기서 무언가를 이루기를 바라는 자도 나온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나?” “……그녀를 특별시하지 말라는 것……?” “훗, 머리는 나쁘지 않은 모양이군. 그래, 그 말대로다. ‘홍세의 무리’도 그렇다. 원래부터 이 세상의 인간인 플레임헤이즈만이 특별하게 터무니없는 강한 힘을 갖고 있을 리가 없지.” 유지는 그래도 자신의 앞에 선 높디높은 소녀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강해.” 그러나 그 최후의 근성 없는 반격은 깨끗하게 뭉개졌다. “너보다는 강하겠지. 그러나 그뿐이다.” “ㅡ!!” 유지의 가슴에 순간 불합리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내 잠잠해졌다. 한숨을 쉬듯 유지는 작은 소리를 낸다. “……음.” “뭐냐?” “뭐랄까, 그…….” “고맙다느니 하는 풋내 나는 말은 하지 말아주게나, 사카이 유지.” 라미는 유지의 말을 선수치고는 가볍게 웃는다. “타인의 이타 행위를 과대평가하지 말게. 나는 자신의 몸을 지키고자 나를 뒤쫓는 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쪽에 가담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말을 마친 그는 그제야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집었다. 완전히 식어 맛이 없을 텐데도 표정에 드러내지 않는다. ‘표정에 드러내지 않아.’ 유지는 문득 떠오른 그 말이 어딘가에서 무언가와 이어진 것을 느꼈다. 샤나의 표정, 그 밑에 가려진 마음. 그것을 나는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강한 그녀라면 동요할 리 없다고 오만하게 단정지어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그녀가 자신에게 거부당했을 때 보인 표정에 당황하고 놀라지 않았던가. 나는 그녀를 전혀 몰랐던 게 아닐까. 스스로 알고자 하는 노력도 내팽개친 건 아닐까. 그 이유는 오로지 나의……. ‘……젠장! 나는 왜 이리 약하고 보잘것없는 거지…….’ 유지의 마음 깊은 곳에서 결코 비관이 아닌 자기혐오감이 넘쳤다. 그 마음을 표정으로 읽은 라미는 만족스런 웃음을 잔 밑에 감췄다. 뜨거워도 역시 맛이 없을 그 내용물을 들이켜고 잔을 받침 위에 내려놓은 뒤 입을 연다. “……자, 이야기는 끝났네. 슬슬 잠자는 공주를 깨워볼까.” “앗.” 유지는 당황해서 제지했다. “뭔가.” “……어째서 그렇게 뭐든지…… 꿰뚫어보는 거지?” 라미는 이번엔 쓴웃음과 조소가 반쯤 섞인 웃음을 지었다. “흠, 그런 것을 일일이 물으니까 풋내기라고 하는 거다.” 대답을 하지 않고 요시다를 깨우기 위해 테이블을 한 번 두들긴다. “윽, 으…….” 샤나는 붕괴 직전의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칼을 지팡이처럼 짚고 의지했다. 수중에 넣은 이래 이런 용도로 쓴 것은 처음이었다. “…….” 가슴 위에서 흔들리는 펜던트 속에서 아라스톨은 샤나의 싸움 방식이 너무 변한 것에 놀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샤나의 전투 방식은 무작정 달려드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항상 이어지는 공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 끊어짐이 없는 공격 동작의 연속이야말로 그녀의 강점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완전히 반대였다. 한 번 공격하고 그 다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일격. 그것만은 강해보여도 뒤가 받쳐지지 않는다. 마치 고꾸라질 줄 모르고 내달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마죠리와 마르코시어스처럼 공격을 피하는 것이 특기인 적을 상대하기엔 실로 최악의 전투 방식이었다. 대검의 일격이나 몸동작 그 하나하나는 정확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반사와 감의 산물에 불과했다. 전투 그 자체의 흐름이 머릿속에 없다. 상대에게 계속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가장 나쁜 것은 본인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라스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싸우는 상대인 마죠리 쪽도 마찬가지로 그런 샤나의 막무가내인 기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네가 정말로 그 ‘염발적안의 토벌자’? 정말로 저 ‘헌터’를 물리쳤다는 거야?” “형편없이 약하잖아. 아니면 ‘헌터’가 소문만큼이 아니었나? 으하하!” 토가의 짐승의 입 속에서 험악한 마죠리의 얼굴만이 불쑥 나타났다. 점점 더 인형 탈처럼 보이지만 광경 그 자체는 꽤 무시무시했다. 군청색을 띤 아지랑이의 벽에 둘러싸인 공간 속에서 굵은 양 팔을 마치 날개처럼 부자연스럽게 크게 펼치고 선 절구통 모양의 짐승. 그 주위에도 군청색 불덩이가 몇 개 떠 있었다. “넌 이제 됐어. 이 이상 방해하지 않는다면 이 다음 일격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그래. 별로 재미있지도 않다. 그럼 큰 놈 한 방으로 결단을 내볼까.” 말을 마치더니 대답을 듣지 않고 마죠리는 얼굴을 집어넣었다. 짐승의 입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자 주위의 불덩이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이윽고 파괴를 부르는 즉흥적인 주문이 보이지 않는 마죠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월화수목금토일, 태어나 결혼하고 병들어 죽는다.” 요일을 읊는 소리에 맞춰 불덩이가 일곱 자루의 검의 형태로 변했다. ‘뭐야……?’ 샤나의 의식은 충돌한 충격으로 혼탁해져 있었다. 뭔가 할 수 없는 것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인가.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소리를 원했다. 소리를 필요로 했다. 전에 여기서 그렇게 생각했을 때 대답해줬던 소리. “솔로몬 그랜디.” 짐승의 배가 다시금 크게 부풀었다. 그쪽을 텅 빈 눈으로 본 소녀는 갑자기 깨어난다. ‘거기는…….’ 지금 짐승이 서 있는 자리. 그 자리는 프리아그네와의 싸움 뒤에 쓰러진 소년의 손을 잡아준 곳. ‘자.’ 거의 무의식중에 그 자리에서 짐승을 몰아내기 위해 앞으로 뛰어나가려던 샤나였지만 그 주위엔 한 치의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듯 일곱 자루의 칼이 창살처럼 꽂혀 있었다. ‘거기에.’ 자신에게 웃어줬던 소년이 있던 자리. 어누 누구에게도 만지게 하고 싶지 않은 자리. “그만둬!!” 검의 창살에 갇힌 샤나를 향해 짐승의 입에서 분출된 불길의 노도가 밀어닥친다. ‘거기 서지 마!!’ 눈앞에 ‘니에토노노샤나’를 세운 것은 단순한 반사 신경. 그것은 순간적으로 불길의 노도를 갈랐지만, 담겨 있어야 할 힘을 얻지 못한 채 패하고 말았다. 고열에 피부가 타고 흑의가 찢기고 염발이 타들어간다. 그리고, 작안을 꼭 감은 채, 샤나는 내던져졌다. 옥상에서. 예전의 싸움에서 프리아그네에 의해 떨어졌던 장소에서, 가슴을 공격당하면서도 웃으며 떨어졌던 장소에서. 지금은 절규조차 나오지 않는다. 얄궂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지독하다. 그녀는 봉절을 빠져나와 최후를 맞이하듯 마나 강에 떨어졌다. 강의 수면은 타오르지 않는다. 노신사와는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의 입구에서 헤어졌다. 몇 번이나 인사를 하는 요시다에게 노신사 ‘시체줍기’ 라미는 역시나 온화한 분위기로 가볍게 인사했다. 유지도 순간 고마워 라고 말하려다 관뒀다. 라미의 딱딱한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을 보며 조금 생각하다 결국 한마디. “잘 먹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라미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공연한 말이로군.” 라고만 대답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바라지 않는 형태로 결론이 난 듯한 기운을 감지했지만 유지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공연한 참견이 뜻밖에도 쓸모가 있는 모양이다, 미소에는 그런 의미도 있었지만 아무리 유지라도 그런 통찰력까지는 갖고 있지 않았다. 이윽고 라미는 두 사람에게 배웅을 받으며 호텔이 있는 중간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정말로 머물고 있는 걸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유지는 요시다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어느 새 저녁이 다가와 있었다. 빌딩 바깥쪽의 정원에 붉은 빛이 비쳐들어 시간의 적막감을 좋든 싫든 느끼게 한다. 그 정원의 맞은편으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역이 귀가하는 인파로 붐비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토치가 섞인 인파와 석양이 유지에게 한 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아직도 싸우고 있을까?’ 샤나의 강함에 대한 과신은 아직도 마음속에 뿌리내려 있지만(지금도 유지는 그녀의 승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도 뭔가 곪았던 것이 터진 듯한 개운함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울해했던 자신의 비관적인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사과하자……. 그래, 내가 나쁜 건 알고 있었어. 적어도 사과를…….’ “저기, 사카이.” 불쑥 들려오는 말에 유지는 깜짝 놀랐다. “앗, 뭐, 뭔데?” 석양 속에서 요시다가 미소를 지으며 유지를 보고 있었다. 근심은 조금 옅어지고 대신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배어있다. 그래도 그녀는 말했다. “오늘은…… 이만 됐어.” “아, 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좀 같이 가도 되잖아.” “응, 가는 길에 좀 들르고 싶은 데가 있어서…….” “그래ㅡ!” 순간 유지는 느꼈다. 그 말이 거짓말임을.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그것이 그녀의 근심의 이유였다면. ‘그렇다면 정말 난 바보야.’ 그런 유지의 마음을 알았는지 요시다는 또 웃으며 말했다. “오, 오늘은 고마워. 나 굉장히 즐거웠어. 진짜야!” 맹세하듯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괴로운 유지였다. 그 누구도 이런 착한 아이한테 이런 상처를 안길 권리는 없다. “……응, 나야말로 고마워.” 유지는 결국 이상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지금의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이 정도였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웃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나마나 형편없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런 얼굴을 보면서 역시나 요시다는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웃음에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 “또 가자고 할 거야!” 그 말은 전투 속행 선언이었다. “그, 그럼, 내일 봐! 안녕!”자신의 의욕이 부끄러웠는지 요시다는 허둥지둥 인사를 하더니 역 쪽으로 종종 달려갔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그녀는 이윽고 인파 속에 섞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정원에 홀로 남겨진 유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난 구제불능이야. 한심해…….’ 언젠가 이런 자신을 어떻게든 할 수 있게 될까. “아~, 복구하느라 무지 지쳤으니까 오늘은 그만! 내일 하자.” 마죠리는 장난감 더미로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아, 누님, 내일……이란 말씀은.” 타나카가 옆을 보았다. 사토가 눈길을 마주친다. “우리들도 함께란 얘긴가요?”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비일상 세계로 온 바캉스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다. “당연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히히히, 둘 다 각오해야 할 걸? 나의 다정한 꽃 마죠리 도는 일단 남자를 붙잡으면 질릴 때까지 놔주지 않, 크악!” 마죠리가 옆구리에 낀 ‘글리모어’를 한 대 때려 조용히 만들었다. “닥쳐. 그나저나 오늘 잠갈 곳을 찾으러 가볼까.” “술이 있는 곳? 고작 그런 액체를 들이붓는 걸로 잘도 기분이 좋아지더군.” “네가 때려 부수는 감각을 좋아하는 거랑 마찬가지야.” “휘유. 오늘은 독기가 있는걸. 나의 현묘한 시인 마죠리 도!” 그들의 대화를 귓등으로 흘리며 사토는 타나카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야, 이봐.” 타나카도 소리 죽여 대답한다. “아니, 난 괜찮은데, 네가.” “괜찮다니까. 나는 별로, 어차피 아무도 상관 으악?!!” 두 사람 앞에 눈썹을 찡그린 마죠리가 얼굴을 들어댔다. “내 앞에서는 속닥거리는 건 금지야. 하고 싶은 말은 똑바로 하고 할 수 없는 말이라면 가만히 있어……. 그래, 뭐야?” 차려 자세로 사토가 말했다. “저, 여러모로 편리한 잠자리가 있는데요.” “어디야?” “……저희 집이요.” 마죠리는 그 묘한 제안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몇 초 생각한 뒤에 말한다. “술은 있겠지?” 4. 생각에 잠긴 밤 석양은 언제나 그날의 일을 사카이 유지의 뇌리에 떠오르게 한다. 벗어난 세상에 한 발을 디뎠던 그날…… 이라고 말하면 그럴싸하겠지만 실제로는 ‘홍세의 무리’의 부하인 괴물 ‘린네’에게 잡아먹힐 뻔한 것을 샤나가 구해준 날이다. 그녀와의 만남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우뚝 솟아 있던 너무나도 강하고 멋졌던 등. 그 뒤로도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실은 열흘 남짓 되는 기간에 불과했다. 고작 그 정도의 시간으로 그녀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교만함에 유지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첫 만남 이후 나흘 동안 ‘헌터’ 프리아그네와 전투를 벌이면서 그녀와 함께 겪은 경험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그런 착각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출발 지점에 지나지 않았는데. 석양의 스산함이 유지의 자책감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박차를 가했다. ‘……돌아와…… 줄까…….’ 그녀가 이런 바보 같은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아무 말 없이 떠나버린 거라면 어떡하지……, 유지는 몇 번이고 거듭되는 무엇보다도 두려운 상상을 서둘러 지웠다. 다시 아까의 결의를 강하게 다져본다. ‘어떤 대답을 듣더라도 사과를 하고 똑똑히 묻자.’ 이윽고 저물어가는 해가 집집마다의 지붕에 숨어들 무렵 유지는 집에 도착했다. 문에 손을 대고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하려 한 그때. “유지.”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 ……아라스톨?” 대체 어디에서 나는 소리일까? 우선 위를 본다. “마당이다.” “마당? ……아, 도, 돌아왔구나, 샤나!” 비로소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기쁨의 환성이 터져나왔다. “무슨 얘기야?” 의아한 듯 묻는 것은 역시나 샤나가 아닌 아라스톨. 그러나 유지에게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었다. 아라스톨이 있다는 것은 샤나도 있다는 말이니까. “샤나! ……?” 좁은 마당에 뛰어들어 몇 초간 찾는다. 울타리 가장자리의 덤불 속에 샤나는 있었다. 완전히 예상 밖의 모습으로. 헝클어진 머리에 뺨을 그을음으로 더럽히고 옷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조그맣게,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진 것처럼. 샤나가 마치 패배자의 모습처럼 그곳에 있었다. “샤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시끄러워!” 다가가려 하던 유지는 샤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샤나?” 샤나는 일어섰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뭐가 어떻게 됐냐야!!” 만신창이가 된 몸을 필사적으로 지탱하고, 작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로 유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이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돼버렸어!!” “ㅡ!!” “싸울 때도! 싸우고 있는데! 너 때문에!!” ‘나…… 때문에?’ 그 책망하는 말에 유지는 후들거릴 것 같은, 마비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니, 실제로 몸이 후들거리고 마음은 굳어져갔다. ‘샤나가 나 때문에 졌다고?’ 유지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샤나에게 걸어갔다. 샤나는 계속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전부 네가 나쁘기 때문이야! 네가 그런, 그런 짓을 하니까!” 유지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혀 자신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소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지금 여기 있는 무언가를 그 팔로,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샤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 가슴 안에서 그저 감정을 마구잡이로 쏟아낼 뿐이었다. “분한 게 아냐! 화내는 것도 아니야! 슬퍼! 왜 난, 전부, 유지, 네가 나빠!” “미안해,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유지는 어린애처럼 사과하고 샤나를 무력한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그 몸은 자신이 생각했던 크기나 강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작고 가냘팠다. 저녁의 어둑어둑함에 검게 물들어가는 머리카락과 옷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이 조금 싸늘했다. 그것이 왠지 몹시 슬펐다. “이런, 이런 기분이 되는 건 싫어!” 샤나도 유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옷깃을 양 손으로 힘껏 붙잡고 몸을 붙여왔다. 유지는 이끌려서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불꽃의 잔향 속에서 언젠가 코를 스친 소녀의 부드러운 냄새, 현기증과 안도감을 부르는 소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느껴졌다. 그것이 지금은 거꾸로 힘을, 가진 것 이상의 힘을 쥐어 짜낸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나 약하다. 약하기 짝이 없다. “미안해, 미안해.” “더 강하게, 더 강하게!” 샤나는 소리 지르며 강하게 잡아당긴다. 숨이 막히고 옷깃의 실밥이 터졌다. 그래도 유지는 혼신의 힘을 담아 소녀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지금 나는 샤나를 만지고 있어. 그렇게 외치고 싶을 만큼 유지는 그녀의 존재를 가깝고 강하게, 마음으로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응.” “더 강하게!!” “응.” 샤나는 자신이 붙잡은, 자신을 안은 소년에게 마음으로부터 갈구했다. “……더 강하게 되어줘……!!” “응.” 나는 약하다. 유지는 그 사실을 이 후회와 환희의 포옹 속에서 깨달았다. 깨닫고, 그 앞을 바라보고, 결정했다. “응, 그럴게.” 그리고 그 말을 하는 동안 확실히 이해했다. 자신이 의욕을 갖지 못했던, 샤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그 이유를. 부끄럽다. 이런, 이런 것 때문에 그녀를. “그러니까 울지 마.” 미사키 시 동쪽에 있는 구 주택가는 이 동네가 도시로 발전하기 훨씬 전에 지주 계급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집을 모아 만든 취락이 모체였다. 모인 이유는 전후의 토지 정리 상황이나 지주들의 회합, 관청을 가까이 두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사토가는 그 취락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에 살았다. 진짜로 오래된 집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래 전에 재건축을 한 집이라 옛 흔적은 그냥 정원 정도에만 남아 있다. 그 정원에 땅거미가 질 무렵 사토가에 있는 네 개의 문 중 하나, 즉 밤마실용으로 사용되는 ‘어승수’라는 작은 문의 자물쇠를 방탕한 아들이 열었다. 뒤이어 들어온 손님들과 함께 딱히 조심스런 기색도 없이 안으로 들어온다. 저택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구조를 가진 사토가의 내부는 밝아도 인기척이 없다. “뭐야, 너 부자잖아. 질투난다.” 방문자이면서도 맨 앞에서 복도를 걷고 있던 마죠리 도는 저택의 내부나 장식에서 돈 좀 들었음직한 모든 물건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 옆에 들려 있던 ‘글리모어’에서 마르코시어스가 유쾌한 듯 크게 웃었다. “크하핫, 부평초 인생의 심술이냐?” “시끄러워.” 뒤를 따르는 사토 케이사쿠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굉장히 편하죠.” “아, 그래? 그럼 앞으로 팍팍 말해주도록 하지……. 근데 부자인건 알겠는데, 오히려 불편하지 않아? 부모님이나 바깥소문 같은 게.” “괜찮아요. 부모님은 신경 안 쓰시고, 평판도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거든요.” “뭐?”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 뭐 그런 얘기죠.” 사토는 어깨를 으쓱하고 상세한 설명을 피했다. 뒤를 따라오는 친구 타나카 에이타도 말이 없었다. 마죠리는 꼬치꼬치 캐묻는 타입은 아니었다. 자신의 요구가 이루어지는지 어떤지 그것에만 흥미가 있었다. 다시 앞을 보고 슬리퍼를 신은 발로 넓고 긴 복도를 성큼성큼 걷는다. “그나저나 술은 질이나 양이나 다 제대로 갖춰져 있겠지?” “그럼 아예 술통 째 드릴게요.” “후우, 응.” 마죠리는 드물게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그다지 우아하지 않은 느낌으로 웃었다. 다행히 앞을 보고 있어서 뒤따르는 두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아, 저 검은 문이에요.” 마죠리의 오른쪽에 간결한 양식의 문이 있었다. 그 중앙에 붙은 놋쇠 현판에는 고풍스런 서체로 ‘BAR’라고 새겨져 있었다. “실내 바? 꽤나 비위에 거슬리는 어감이네.” “사죄할 물품은 잔뜩 있으니까 좀 봐주세요.” 말하며 들어가려는 두 사람에게 타나카가 말을 걸었다. “사토,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고 전화하고 올게.” 그러더니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이 집에 익숙한 모양이다. “또 병이 도졌다고 슬퍼하시면 어떻게 하냐?” 사토의 놀림에 타나카는 돌아보지 않고 손만을 저어 대답했다. “벌써 이골이 났을걸.” “그건 그런가, 미안.” 사토가 앞장서서 들어간 그 방은 넓었다. 정면에는 셰이커를 든 바텐더를 제외한 바의 모든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잡다한 술병이 즐비한 다단 술 장과 소박한 카운터, 딸려 있는 바 툴에는 잘 닦인 술잔이 늘어서서 랜턴형의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조용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우와아!” 마죠리는 마치 자신을 위한 낙원을 발견한 양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 이(이미 자신의 물건으로 규정한) 낙원에 침략자는 없는지 확인한다. “여기에 너희 아버지가 마시러 오곤 하냐?” 오면 죽을 줄 알라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 마죠리에게 사토는 다소 애매모호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 집에서 나랑 타나카 이외의 인간은 낮에 다니는 가정부들밖에 본 적 없어요. 안심하고 마셔도 돼요.” “아, 그래? 그럼 잘됐네.” 사토의 말에 담긴 의미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은 채 마죠리는 방을 둘러보았다. 방의 바로 앞, 소파로 둘러싸인 테이블 위에 예쁘게 쌓인 만화 주간지나 개켜진 담요 등이 눈에 들어왔다. 가정부가 정리해둔 모양이다. 에헴 하고 사토가 헛기침을 하며 그것을 옆으로 치우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이 방을 자신의 오락실로 삼아왔던 모양이다. 그 소년에게 마죠리는 아까부터 슬슬 지겨워지려던 말을 턱 내뱉는다. “이 정도나 되는 물건이 있으면서 부자의 불행을 드러내 보이는 거야?” 줄곧 쓴웃음만을 머금던 사토는 그 씁쓸함과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귀가 아프려고 해요. 뭐 ‘반항하는 자세’의 꼴사나움을 느낄 정도는 됐어요.” 말하는 동안 책 더미 속에서 여성에게는 보이기 힘든 종류의 잡지가 떨어졌다. 당황해서 숨긴다. “여, 여러모로 제 맘을 알아줄 녀석하고 만나기도 했고요, 하하.” “저거?” “음, 저거죠.” “호오, 뭐?” 마죠리가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사토가 끄덕여 보인 그것ㅡ방에 들어온 타나카는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집에 들어온 두 사람을 본 사카이 치구사의 첫마디는, “울렸구나, 유지.” 두 마디 째는, “하지만 의미 있는 눈물 같으니 용서해주지.” 라는 것이었다. 샤나의 괴력으로 뜯어진 유지의 옷깃이나 너덜너덜 그을음 투성이가 된 샤나의 세일러복을 그녀는 질문 따위 소용없다는 기세로 벗겨냈다. 내일 아침에는 깨끗하게 새로 태어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넘어졌어.” 라는 이 이상은 없을 만큼 서툰 샤나의 거짓말에도 말없이 목욕물을 준비해주었다. 결정타는, “샤나, 오늘은 저녁 먹고 가렴. 아님 자고 가도 좋겠구나.” 였다. 샤나는 치구사에게만 보이는 온순한 태도로 묵는 것을 거절했지만, 그래도 치구사의 대응은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로 하여금 “좋은 어머니다. 도저히 네 녀석의 어머니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이라는 감탄의 말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훌륭했다. “거 고맙군.”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유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인사치레를 했다. 판자를 깐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유지의 맞은편 침대위에는 아라스톨의 의사를 표출하는 펜던트형의 신기 ‘코큐토스’가 있었다. 샤나가 목욕하러 들어간 동안 빌려온 것이다. 그 아라스톨이 말한다. “그래서 어떠냐? 조금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눈이 들어오게 됐나?” 이 이세계의 마신은 추호도 친절하지 않다. 곤란할 때는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다. 자기 나름의 대답을 찾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확인시켜주듯 입을 연다. 그러나 유지는 그런 친절하지 않은 아라스톨이 싫지 않았다. “응, 바보라는 건 뼈저리게 알았…… 다고 생각해.” “너로서는 가장 훌륭한 대답이다. 정확해.” 정말로 조금도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솔직히, 샤나가 지다니 생각해본 적도 없어.” 유지의 실감이 담긴 고백을 아라스톨은, “그건 너의 어리광이다.” 라고 딱 잘라 말했다. “어리광……?” “오늘 아침에 네가 샤나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봐라.” 잊을 리가 없다. <나 같은 거 없어도 그렇게 곤란하지도 않잖아.> “……그런가. 나는 모든 걸 전부 샤나에게 미뤘어.” 너무나 한심한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응석이었다. 지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내가 무얼…… 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거야말로 스스로 생각해낼 일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의미로도 너를 속박한 기억은 없어, ‘미스테스’ 사카이 유지.” “응……. 하지만 그 자유라는 게 오히려 어려워.” “움직일 생각만을 해둬.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일어난 상황 속에서 생각하면 된다.” 아라스톨은 프리아그네와 싸울 때 네가 했던 것처럼, 이렇게 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특히 유지에게는, 샤나는 욕조 속에서 몸을 나른하게 풀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사카이가의 욕조는 작은 몸집의 그녀가 몸을 뻗기에 딱 좋았다. 긴 검은머리가 펼쳐져 반짝반짝 빛난다. 손질을 위해 하나로 모아 수건으로 감아두란 소리를 치구사에게 듣긴 했지만 귀찮기도 하고 어차피 곧 정화의 불길로 말릴 테니까 하는 이유로 무시하고 있다. 이것은 치구사의 주의 사항을 듣지 않는 유일한 애였지만 실은 장난을 치는 듯한 유쾌함을 느끼게 했다. 방금 받은 투명한 물에 턱까지 담그고 눈을 감는다. 싸움에서 입은 데미지나 분노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가슴의 답답함이, 묵직함이 전부 사라져버렸다. 사실은 역시나 간단했다. <……미안해…….> 유지가 그렇게 말했을 뿐.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그렇게 말하고 안아주었을 뿐. 미소라고 할 수도 없는 아주 작은 웃음이 김에 가려 떠오른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안긴 순간 슬픔 위에 기쁨이 흘러 들어오더니 갑자기 그 모든 감정이 두둥실 날아가버렸다. 남은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처럼 상쾌한 기분. “…….” 샤나는 물 속에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수면에 작은 물결을 만들며 중얼거린다. “……좀 더 강해져…….” 소년의 약한 힘으로 안긴 곳은 따뜻했다. 그 여운에 잠기듯 샤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 ‘시체줍기’ 라미와 만났다고?” “응.” 유지는 오늘 일어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라스톨에게 말했다. 숨기면 여러 가지 의미로 유익하지 않을 것 같아 요시다와 있었던 일까지 포함해 전부를. 마치 참회하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아라스톨은 요시다와 있었던 일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흥미는 당연하게도 라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가, 이번엔 네 일로 빚을 졌구나. 답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역시 아라스톨은 해가 없는 라미를 토벌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그 점에 안심해서 유지는 묻는다. “다시 싸울 생각이야? 그래, 라미가 말한 전투광이란 어떤 놈들이야?” “으음.” 아라스톨도 ‘유린이 조아’ 마르코시어스의 플레임헤이즈,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와 벌였던 전투의 추이를 유지에게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그 뜻밖의 대패에 유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위험한 녀석들 같다. 분명 언동으로 볼 때, 라미가 무해하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죽여버릴 거야. 그 뒤로 봉절이나 자재법 등은?” “쓰지 않았다. 아마도 전투에서 입은 피로를 회복하고 있겠지.” 유지는 일단 안심했다. 라미가 그 전투광들에 의해 위기에 빠진다면, 더구나 자신이 샤나의 컨디션을 나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꼴이 돼버린다. “내일이 오면 다시 한판 붙을 생각인가……. 하지만 역시 플레임헤이즈끼리 싸우는 건 거부감이 든다.” “우리들의 대의는 하나이지만 그 해석과 수행 수단은 각각 다르다. 자연히, 충돌도 대립도 발생하지.” “정말 라미가 말한 대로 ‘홍세의 무리’도 우리들이랑 똑같네.” “그렇다. 하지만 싸움을 다시 하는 것은 그 대립이나 사적인 원한 때문이 아니야. 더 절실한 이유가 있다.” “응?” “너도 들은 바와 같이 라미가 모으고 있는 ‘존재의 힘’이 문제다. 토치라고는 해도, 녀석이 수백 년의 시간을 들여 모은 것이다. 아마도 그 양은 상당할 터, 그리고 그 제어에는 그의 독자적인 자재법이 쓰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도 했었어. 짜냈다느니 어쨌다느니.” “녀석이 토벌될 경우 제어가 풀린 ‘존재의 힘’만 남게 된다. 토치로 가득 차 크나큰 공백을 가진 이 도세에서 그것이 개방 혹은 분해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유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커다란 폭탄 같은 느낌?” 아라스톨은 대답 없이 대처법을 말한다. “어쨌든 ‘유린의 조아’과 ‘조사를 읊는 자’에게 맹세라도 시키거나, 당분간 뒤쫓을 수 없도록 반죽음을 만들어놓거나 해야만…… 어느 쪽이든 전제는 이기는 것이다. 너, 그것은 갖고 있나?” 그 질문의 의미를 깨닫고 유지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또렷이 대답한다. “물론이지. 쭉 목에 걸고 있어.” “좋아. 녀석들과 싸울 때는 어쩌면 너를 동반하는 쪽이 사태 대처에 용이할지도 몰라. 본의는 아니지만 함께 가줘야겠다. “……역시. 뭐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유지는 지금 자신이 강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샤나의 감정 운운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전투의 필요 인자로서 너는…….” 보호자 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예방선을 치는 아라스톨의 말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가로막았다. “유지~, 저녁 다 됐어. 샤나가 기다리잖니.” “……내려갈까요?” “흥, 들었지? 샤나가 기다린다지 않나.” 큭큭 웃으며 유지는 ‘코큐토스’를 집어들었다. “하하, 아하하하!” 마죠리는 오늘 하루 통틀어 가장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원인은 명백하다. 카운터 테이블 위에 뒹굴고 있는 세 개의 위스키 병……, 정확하게는 그 안에 들어있던 액체 때문이다. “아~, 케이사쿠, 여기 좋다. 브리튼 술이 많아서 마음에 드는 걸~.” 완전히 도를 지나쳐버린 그녀는 드레스를 단정치 못하게 흐트러뜨리고 카운터 좌석에 한쪽 다리마저 올리고 있다. 술이 들어가기 전의 매섭고 당당했던 플레임헤이즈의 모습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은 그저 술 취한 여자일 뿐이다. 그녀의 양쪽 좌우로 자리 하나식을 비우고 앉은 사토와 타나카는 얌전하게 오렌지주스와 진저레일로 덩달아 취해 있다. 있지만, “매, 마죠리 씨! 마시는 건 이제 그만 흐엑!” “사사ㅡ살려줘 라고 오늘은 말할 수 있어서 말하는데 살려줘어어.” “누님, 잠깐, 위험!” 기분 좋게 취한 마죠리가 북 홀더의 끈을 붙잡고 ‘글리모어’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한잔 걸치고 귀가하는 여대생이 핸드백으로 노는 모습과 비슷하긴 하지만, 돌리고 있는 것은 화판을 겹쳐놓은 듯한 ‘글리모어’이다. 파괴력이 비교가 안 된다. 그것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마르코시어스로서는 당연히 참을 리가 없었다. 오늘의 마죠리는 술이든, 사람이든, 싸움이든 모든 게 좋아 죽겠다는 듯 평소의 갑절은 되는 속도로 휘두르고 있다. “앗하하, 이~런 정도를 피하지 못한다면 플레임헤이즈는 못해 먹지~.” 탁 풀린 표정으로 배실배실 웃고는 있어도 여전히 눈썹은 험악하게 모으고 있어서 겉보기에는 거의 심술난 어린애 같다. 사토는 마르코시어스의 절규를 귓등으로 흘리면서 가까스로 대답한다. “우, 우리들은 플레임헤이즈가 아니라고요!!” “어엉, 그럼 내가 플레임헤이즈인가~?” “그야 그렇죠, 누님!” 맞았다가는 즉사를 면할 길 없는 공격의 태풍이 타나카의 코끝을 스쳤다. “헤헷~, 그럼 에이타는 뭐야? 서얼마 서얼마 플레임헤이즈? 아하하하!” 완전히 아수라장이다. 자리를 뜨려고 하면 눈을 치켜 뜨면서, “뭐어야~, 모처럼 고향의 술을 즐기고 있는데 함께 마셔주지 않는 거야?” 라고 주정뱅이의 단골 멘트로 붙잡아 묶어둔다.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가락을 붙여 노래까지 부른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만일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수 있나.” 반주는 ‘글리모어’의 바람 가르는 소리와 마르코시어스의 비명. “할 수 없으면 할 수 없어 할 수 있을까. 너도 할 수 없다면 할 수 없겠지.” 사토와 타나카는 고문을 즐기라고 강요당한 듯한 표정으로 의자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니면 넌 할 수 있냐. 할 수 없으면서 너는 할 수 있냐.” 홀로 목청을 높여 마죠리는 노래를 부른다. 미간을 험악하게 찌푸린 표정에 웃음을 띠며. 유지는 목욕과 숙제를 마치고 침대 시트를 잘 펼친 뒤 그 위에 운동복 한 벌을 놓아두었다. 그리고 벽장에서 담요를 한 장 더 꺼냈다. 결국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완전히 적응이 되버렸나봐.’ 샤나가 만류하는 치구사에게, “괜찮아, 됐어요. 내일 봐.” 라고 말하며 집을 나간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늘 그렇듯 바로 코앞까지 배웅한 유지에게 샤나는. “가방 가지고 올게.” 라고 일러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유지는 그 말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았다. 이윽고 유지의 작업이 끝날 시간을 재기라도 한 듯 베란다의 큰 창이 열렸다. 가방을 들고 연한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샤나가 척척 올라온다. 치구사가 지금 빨고 있는 교복 대신 입으라고 빌려준 그 옷은 새 것이었고 게다가 사이즈도 딱 맞았다. 뭔가 못마땅한 얼굴도 그 빛깔에 물든 것처럼 희미하게 발갛다. “어서 와. 아가씨.”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그만 잘래.” 놀리는 유지에게 샤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 앞을 가로질러서 유지가 준비한 자신의 잠옷인 운동복을 당연한 듯 집어든다. 그 때 유지의 코에 자신도 쓰고 있는 샴푸의 향기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아까와는 다른 냄새. 자신에게도 밴 냄새. 고작 그 정도가 지금 옆에서 운동복을 펼쳐 앞뒤를 확인하는 소녀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느끼도록 해준다. 만질 수 있는, 만질 수 있었던 그 가까움을 느끼며 유지는 불안감과 기쁨이 섞였으면서도 묘하게 포근한 마음이 되었다. 그 마음에 훈훈함을 느끼면서 샤나가 옷을 갈아입도록 방을 나온다. “10분 있다 올게.” “3분이면 돼.” 대화라고도 할 수 없는 대화.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그래……, 아.” 유지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문 앞에서 멈췄다. “뭐야?” “칼은 이제 바닥에 꽂아놓지 말아줘.” “그건 네 태도에 따라서.” “…….” “…….”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죠리는 노래를 그치더니 돌연 요란하게 쓰러졌다. “으악!” “누님!” 빙빙 돌리던 주체로부터 내팽겨쳐져 바닥에 떨어진 ‘글리모어’에서 마르코시어스가 말한다. “걱정 마, 두 사람. 늘 이래. 이렇게 곯아떨어지면 내일 아침 내게 말하겠지. ‘머릿속의 큰 종 좀 멈춰줘~’라고.” “저, 정말요?” 사토가 ‘글리모어’를 바닥에서 줍는…… 다기보다는 들어올린다. 잘도 이런 무거운 물건을 빙빙 휘둘렀군.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마죠리의 괴력에 놀라워한다. “히히, 나의 잠자는 미녀 마죠리 도한테라면 몰라도 내게는 경어를 쓰지 마. 닭살 돋으니까. 반말로 해도 된다고.” “의외…… 다.” 타나카가 쓰러진 마죠리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드레스의 느슨해진 앞섶 사이로 굉장한 물건이 들여다보일 지경이 되었다. 허겁지겁 옷깃을 여며준다. “뭐, 뭐랄까, 굉장히 셀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 거친 숨에서는 라이터를 들이대면 불이라도 붙을 것처럼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했다. “주량은 보통이다. 여러 가지로 무리한 거겠지.” “여러 가지라……. 기합을 넣은 채로 계속 있으면 아무래도 지치긴 할 거야.” 모종의 실감을 담아 타나카가 말했다. 사토가 ‘글리모어’를 안아들며 볼품없이 풀어진 잠든 얼굴을 바라본다. “옥상에서 싸울 때 무섭게 화내더라. ‘홍세의 무리’라는 녀석들, 마죠리 씨한테 굉장히 지독한 짓을 했나봐……. 그런…….” <‘무리’는 전부 죽여, 죽여, 죽여, 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이고죽여서 씨를 말려버리는 수밖에 없어!!> 사토도 그렇고, 타나카도 그렇게나 노골적인 살의를 소리라는 형태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과거 자신들의 일은 장난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진정한 절규?? “플레임헤이즈는 복수자잖아. 가족이나 연인이나, 그런 느낌인가……. 관두자.” 타나카는 마죠리를 부축해 소파로 옮겼다. 자신과 키가 맞먹는 여성은 의외로 가벼운데다 말랐고 부드러웠다. ……술 냄새가 풍기는 건 고역이었지만. 포니테일로 묶은 생머리를 헝클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소파에 눕히자 요염한 음성으로 희미하게 칭얼거렸다. “뭐, 광경으로 보면 최악이었지.” 그 옆에 놓인 ‘글리모어’에서 마르코시어스가 드물게 웃지 않고 말한다. “……볼까?”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글리모어’의 끄트머리에서 희미한 군청색 불꽃이 뿜어 나왔다. 순간, “응?!” “앗?!” 사토와 타나카의 뇌리에 찰나의 광경이 퍼뜩 떠올랐다. 부서진 잔해, 불타 무너진 들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그을음과 피로 얼룩진 자신의 팔이 보였다. 눈앞을, 주변을……, 저 멀리를 가득 메운 것은 그저 붉은 화염뿐. 그 안에, 눈앞에 단 하나. 은색으로 타오르는 광기어린 모습이 우뚝 서 있었다. “ㅡ.” “ㅡ.” 뒤덮을 듯 손발을 크게 벌리고 은색의 불길을 태워올리는 일그러진 서양식 갑옷.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그 갑옷의 틈새로 벌레 다리 같은 것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은색 불길이 갈기처럼 솟구치는 투구의 차양 아래에는 눈이, 눈이, 눈이, 눈이……!! 그것들은 전부 웃고 있었다. 조소하고 있었다. “히익.” “헉.” 절규가 터져나오려는 찰나, “바보, 마르코!!” 위에서 힘껏 내려친 손이 ‘글리모어’를 때려 그 영상은 끊겼다. “너, 너, 쓸데없이 무슨…….” 술기운과 분노로 마죠리의 혀는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어렴풋이 젖어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술로 말하고 싶은 것도 있다’ ……네 말버릇이잖아. 때로는 나도 누군가의 술 냄새 풍기는 숨결로 뭔가를 말하고 싶어졌을 뿐이라고, 나의 성난 숙녀 마죠리 도.” 사토는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너무나 생생한 느낌과 무시무시한 광경, 그 자체에 소름이 돋았다. “지, 지, 지금의, 괴물이 ‘홍세의 무리’. ……저것이 마죠리 씨의 소중한 사람을. “아니야.” 마죠리가 불타는 듯한 숨을 내쉬며 말을 잘랐다. 그리고 한 번 더 팔로 뭔가를 닦듯 얼굴을 감췄다. “아니라고.” “…….” “…….” 두 사람은 갖고 있는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눈짓만을 교환했다. 타나카가 마죠리를 못 본 척하고 마르코시어스에게 묻는다. “……아까 그놈은 아직?” “음. 나는 그 뒤 곧장 건너왔지만 그 녀석과는 접촉할 수 없었어. 찾으려 해도 ‘무리’는 이쪽에서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니까, 저 꼴사나운 모습도 못 믿겠고 말야. 애당초 은색 불길을 가진 ‘무리’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고.” 불현듯 말을 끊고 온화해진다. “뭐, 그래도 찾아야지.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함께.” “……흥, ……바보 마르코가 저런 상냥한 말투로 떠들다니……. 취했어. 정말 취했나봐.” “그런가. 내일 아침은 볼 만하겠군. 으히힛!” 팔 아래로 보이는 입만으로 마죠리는 웃어 보이고 몸에서 힘을 뺐다. 소파에 푹 묻힌다. 사토가 방해라고 생각하면서도 물어본다. “마죠리 씨, 다른 방에 빈 침대가 있는데 옮기실래요? 그 모습 그대로인 것도…….” “이대로 괜찮아. 침대는 안 돼.” “?” “침대란 건 여러 가지로 위험해. 너무 편안해지거나 분위기 등이……. 만약 너희들이 다가온다면 죽여버리고 말걸.” “안 해요, 그런 무서운 짓.” “할 수 없으니까 단념하는 거, 앗!” 사토가 타나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농담이 아니야. 플레임헤이즈는 모든 것이 너무 강해서 있는 힘껏 안을 수도 없어…….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녀석일수록 오래, 몇백 년이나 혼자서……, 그런 거야.” “이봐, 이봐, 그건 아니지, 나의 아름다운 고블릿 마죠리 도. 내가 있잖아.” “네, 네……, 고마, 워, 나의, ‘유린…… 조아’ 마르, 코…….” 숨이 이어지는 동안 툭 하고 마죠리의 고개에서 힘이 빠졌다. 숨소리가 잠잠해질 때가지 모두들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이윽고 사토가 맞은편 소파에 놓여 있는 모포를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글리모어’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방을 나간다. 그 뒤를 따라 발소리를 죽여 방을 나간 타나카가 전등을 끄자 뒤에는 바 카운터의 어스름한 불빛만이 남겨졌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 구석에서 조용히 소리가 들렸다. “편안히 자라, 두 사람.” 불이 꺼진 어둑한 방 안. 샤나는 ‘함께’ 있는 안온함을 오랜만에 가슴이 벅차도록 느끼고 있었다. 머리까지 뒤집어쓴 담요 속에서 유지는 어떡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노라니 그 유지가……, 그 사이에 칼을 꽂기 않은 반대쪽 벽 가에서 담요를 둘둘 만 유지가 주저하며 말을 걸어왔다. “……샤나.” “왜?” 즉시 대답했다. 자신이 유지의 말을 기다렸던 것 같아 공연히 화가 난다. 유지는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또 말한다. “내일부터는 다시 도울게.” “아라스톨한테 이미 들었어.”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거절이 아니라는 건 아마 알아줄 거야…… 라고 생각한다. 유지는 아직 머뭇거리며 뭔가 말하기 힘든 듯 다음 말을 준비하고 있다. “…….” “…….” 좀이 쑤신다. 말하면 바로 대답할 텐데. 아니면 뭔가 안 좋은 일일까. 슬픈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겁쟁이가 된 것 같아 또 화가 났다. 얼른 말해. “……샤나.” 희미한 떨림이 밴 진지한 말에 예상외로 격한 고동이 가슴을 때렸다. “왜.” 자신의 목소리에 동요가 비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유지는 그런 데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몇 초인가, 몇 분인가 지나서야 비로소 유지가 말을 쥐어짜냈다. “나, 도움이 안 되는, 거야?” “…….”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나, 너무나 바보 같아서. 그래서, “바보.” 라고만 대답했다. 유지는 알아주었다. “……고마워. 힘낼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숙면 방해야.” 얼결에 쏘아붙이고 담요 속에서 유지에게 등을 돌렸다. 공연히 몸을 뒤척이며 담요를 둘둘 말아본다. 말인지 행동인지 유지가 조금 웃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그 웃음 끝에 걸린 듯한 말. “응, 미안. 잘 자.” 담요가 부스럭거린다. 정말로 이젠 잠든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도 담요 속에서 입만을 움직였다. 잘 자. 5. 오늘이라는 날은 싸운다. 아침의 등굣길을 샤나는 의기양양하게 걷는다. 깔끔하게 풀을 먹인 세일러복을 기분 좋은 아침 바람에 펄럭이며 그 발걸음도 가볍게. 그 옆에서 걷는 사카이 유지 쪽은 실은 꽤 의기소침해 있었다. 어느 쪽이 힘을 너무 줬는지, 그날 아침의 훈련에서 그는 굉장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샤나로서는 ‘드디어’, 본인으로서는 ‘결국은’, 한껏 맘먹고 해본 결과가, 최악이었던 어제에 비해 별반 달라진 게 없다보니 의기소침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단련 끝에 땅바닥에 쓰러진 유지는 꽤나 미련 많은 대사를 토해냈다. “……오늘 갑자기 진보하면 꽤 멋있었을 텐데.” 그의 대한 샤나의 대답은, “그렇게 간단히 되면 아무도 고생하지 않게?” 라는 지당한 말을 했다. 참고로 그 모습은 늘 구경하고 있던 사카이 치구사에 의해 단적으로 표현되었다. “쯧쯧, 볼품없구나.” 모든 면에서 멋져 보이길 바라고 또 그렇게 되고자 하는 ‘소년이라는 생물’에게 이 말은 좀 참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유지는 어제까지처럼 허탈하지는 않았다.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아니 실은 무지 신경은 쓰고 있지만……. 어쨌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기한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는 자라나 있었다. ‘뭐, 나도 정말 어린애였단 말이지.’ 유지는 어제까지의 자신을 떠올려본다. 싫어하지도 않는데 왜 그녀와 하는 모든 일에 의욕이 사라져버렸을까. 늘 생각하고 있는데 왜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해버렸을까. 둔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수많은 일들을 끼워 맞춘 뒤 간신히 얻은 대답은 너무나 바보 같고 너무나 한심하고 지독한 것이었다. 그렇다. 샤나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난 정말 한심해…….’ 유지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의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것까지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자신감을 갖지 못해서 그 사실과 책임을 전부 그녀에게 돌리고 자신은 무기력한 태만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응석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녀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심사가 꼬여 그녀를 거부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엉뚱한 화풀이를 한 셈이었다. 그 결과는 어제와 같은 사건. 유지는 자신의(주관적으로는 꽤 긴) 인생 속에서 이렇게 자신을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쥐구멍이 없다면 자기 손으로라도 파고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나 보이고 싶은 어린애 같은 자만심, 그리고 어쩌면 강한 그녀에 대한 질투. 이제야 깨닫고 확인한 그 감정의 지독한 허망함. 그러나 그런 감정들을 드디어 넘어서서 비로소 ‘자신의 전망’이 생긴 것, 그 자체는 솔직히 기뻤다. 무엇보다도 샤나 덕분에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기쁘게 느껴졌다. “샤나.” 유지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왜.” 옆에서 걷는 샤나의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이 퉁명스럽다.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옆모습은 웃고 있었다. 유지도 즐거운 게 틀림없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아침 햇살에 지지 않을 만큼 명랑하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유지도 그 명랑함이 전해진 것처럼 자연스레 웃어 보였다. 화제는 아무래도 낭만과는 거리가 먼 실무적인 것이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자신들다워서 좋다. “그러게. 저쪽은 어제와 같은 패턴으로 나오겠지.” “어제……, 아아, 우선 기운을 탐지하는 자재법을 쓴다는 말이지?” “응.” 샤나는 유지의 이해가 빠른 것이 기쁘다. 오늘 아침은 그런 감정이 얼굴에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유지는 지금 다시 그 모습을 보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샤나는 아주 귀여운 소녀라는 것을. 갑작스런 재인식에 유지는 새삼스레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그녀를 바로보고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눈을 떼지 않는다. 넋을 잃은 것처럼 그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본다. 샤나는 그런 유지의 속내도 모르고 계속한다. “그러니까, 그게 시작되고 나서 움직이면 돼. 다행히 그 자재법은 이쪽에도 효과를 보이니까. 라미가 포착된 장소를 알면 거길 향해 먼저 달려가서…….” 유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얼굴을 돌린다. “……뭐야?” 평소의 힐무조가 아닌 웃는 얼굴의 가벼운 질문에 유지는 졸음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 아, 아니야!” 그녀가 한 말을 필사적으로 기억 속에서 떠올려 대답한다. “그, 그, 그 달려가…… 는 도중에서 전투광을 붙잡아 결전을 벌인다 이 말이지?” 샤나는 유지의 모습에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깊이 캐묻지는 않았다. “응. 시작하면 바빠져. 너도 각오해둬.” “아, 알았어.” “좋아.” 샤나는 다시 끄덕이고 걸어간다. 유지는 이번엔 꿈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시 소녀의 옆얼굴을 본다. 눈부시다. 그러나 이젠 허세 부리려 애쓰는 마음은 품지 않았다. 알량한 질투도 끓어오르지 않았다. 단지, ‘이 아이를 위해 강하지자.’ 하는 마음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불붙고 있었다. ‘……좀처럼 진보는 없지만…….’ 유지는 어느 샌가 오늘 아침의 참패조차 자신의 활력이 된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이 걷는 아침 등굣길은 샤나의 웃는 얼굴처럼 상쾌하고 밝았다. 그 무렵, 그들이 맞서야 할 적.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의 플레임헤이즈인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는 바닥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으아~, 미쳐~, 죽을 것 같아~, 차라리 죽여줘~, 마거릿 에자일스에 클레멘트, 모두들 머릿속에서~ 종을 울리고 있어~, 으~, 아우~.” 아침 해가 가차 없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마죠리는 번데기처럼 담요에 둘둘 말려 소파와 테이블 사이를 데굴데굴 왕복한다. ‘조사를 읊는 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힘을 부여하는 ‘홍세의 왕’ 마르코시어스는 ‘글리모어’의 안에서 폭소를 터뜨렸다. “히히힛, 좋은 약, 아니 독인가? 뭐, 어느 쪽이든 정화의 불길은 잠시 맡아두지. 잠시 그러고 있어라 나의 주정뱅이 천사 마죠리 도!” “우우~, 바보 마르코, 죽여버릴 거야~, 근데 내가 죽을 것 같아~, 죽여줘~ 죽을 것 같아~ 죽을래~ 죽~ 아우~.” 끙끙대는 그녀 옆의 소파에는 언제 벗어놓은 것인지 드레스가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요컨대 지금 그녀는 속옷 차림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잠에서 깬 미녀’의 모습을 크게 기대하고 방에 들어온 사토 케이사쿠와 타나카 에이타가 실제로 본 것은,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숨을 토해내며 마루 위를 뒹구는 ‘괴기 번데기녀’였다. 두 사람이 기대한 섹시한 상황과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없이 동떨어진 광경이었다. “……이래서야 한동안은 무리겠어.” 숙취 해소약을 가져온 사토가 이 번데기 트위스트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옆에서는 타나카가 아침밥인 컵 라면을 선 채로 후루룩거리고 있다. “음~, 내버려둘 수도 없고……. 저, 이제 되겠지, 마르코시어스?” “안 돼, 안 돼. 받아주면 오늘 밤도 또 저렇게 된다고. 히히힛!” “그건 좀.” “타나카랑 동감.” 친절은 신변의 안전 앞에서 순간 패배했다. “배신~자아~, 나중에~, 죽을 줄 알아~ 아아~, 나 죽어~.” 등굣길의 러시아워보다 한참 이른 아침의 미사키 고교. 1학년 교실 복도에서 안경맨 이케 하야토가 휴대전화에 대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뭐? 무슨 뜻이야. 그보다는 너희들……, 급한 볼일? 그럼 노트 정돈 보내……. 그러니까 벌충 문제가 아니라, 아, 이봐, 야!” 끊겼다. 굴하지 않고 재발신을 누르자 통화중.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가버린 모양이다. 두 사람은 휴대전화가 없고 저 미련스럽게 큰 집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전화가 한 대밖에 없다. 이걸로 연락 차단. 낡은 집이란 것은 이상한 데서 비효율적이라니까, 젠장 하고 분개한다. “……사토랑 타나카, 오늘도 결석이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요시다 카즈미가 교실에서 나왔다. 그녀도 제법 빨리 등교하는 편이라 아침엔 이야기를 곧잘 나눈다. 태반은 공부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이케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응.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 사실은 먼저 타나카네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사토네 집에서 잤다고 한다. 더구나 되레 그 어머니로부터, ‘에이타를 사토가의 미친개로부터 떨어지도록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이케에게는 미친개라는 친구는 없어서 그 부탁을 무시하고 사토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사토도 알 수없는 급한 볼일 때문에 오늘도 쉰다고 했다. “……오늘 고문 시간에 쪽지시험 있는데 괜찮을까?” 요시다는 이케와는 말하기가 쉬운 듯 사카이 유지를 대할 때와 비교해 어조가 훨씬 매끄럽다. 이것도 이케로서는, 뭐랄까, 공연한 서글픔을 안기곤 한다. “응. 시험 자체는 곤란할 게 없는데 수업을 필기한 노트를 다시 베끼는 게 귀찮아서.” “그럼…… 사토더러 베끼라고 하면?” “안 돼, 안 돼. 녀석 글씨로는 노트가 암호가 돼버려.” 요시다가 킥킥 웃었다. 다른 이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부드러운 웃음을 보고 이케는 생각한다. 어제의 데이트는 잘 되었을까. 저 미소에는 특별히 그늘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저 풋내기가, 그것도 침울한 상태로 그녀에게 신경 써주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우선은 데이트를 하러 가는 기정사실을 만드는 것으로 이제부터 그녀의 마음에 자신감이 붙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어디냐 하는 생각에서 보낸 거지만 등등……. 오지랖을 전개 중인 이케를 어느 새 요시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이케?” “엇, 아, 아무것도……, 아.” 복도 구석에서 어른이 돌아 나오는 것을 보고 이케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감췄다. 교칙상 휴대전화 소지는 금지였다. 아직 아침의 분주함이 시작되지 않은 조용한 복도를 걸어오는 것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중년 남성……. 뭐, 선생님이겠지, 그렇지 않고는 이런 장소를 이런 시간에 지나갈 사람은 없다. ‘별로 본 적 없는 선생님이다.’ 라고 이케는 생각하면서도 놓치지 않고 인사한다. 그 옆에서는 순수한 예의에서 요시다가 깊이 고개 숙여 인사 하고 있다. 이 중년 남성은 느긋하게 안녕 이라고 말하고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대답한 요시다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는 남성의 등을 쳐다보았다. 본 적 없는 인상이었지만(그렇다곤 해도 그녀는 남의 얼굴을 잘 못 쳐다보는 타입이라 힐끔 볼 뿐이다)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느낌이다. 마치 알고 있는 사람이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런 기이한 위화감이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뒤에 히라이 유카리가 사카이 유지와 함께 교실로 들어왔을 때 반 아이들은 모종의ㅡ모종의 예를 들자면 아마도 ‘나쁘다’는 꼴이 되겠지만ㅡ 개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을지 모른다. ‘믿음직한 선생님이 명랑하기까지 하다’면 누구라도 조금은 괴이쩍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제 일이 일이었으니만큼 이것이 필요 이상으로 도드라져 보여, 그 상황만을 봤을 때 그녀가 귀엽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그녀가 교실에서 가장 처음 마주친 반 친구 이케 하야토에게 던진, “안녕.” 이라는 인사는 총구를 들이대고 ‘손들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이케는 냉정하며 침착하고 두뇌 명석한 인격자로서, 얄미울 정도로 훌륭한 남자였지만 그런 그조차도, ‘어쩌면 어제 내가 두 사람의 데이트를 엮어준 걸로 뭔가 보복이라도 하려는 거 아니야?’ 라고 터무니없는 위기감을 품을 만큼 오늘 그녀의 모습은 이상했다. “핫핫핫, 좋아, 좋아. 하지만 때론 순수하게 받아들여봐.” 라고 사카이 유지가 짓궂게 우월감에 빠진 웃음을 띠며 격려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망나니의 칼춤을 바라보는 사형수의 심정을 하루 종일 맞보았을 것이다. 그런 이케를 비롯해, 번지수를 틀린 공포와 혼란으로 동요하는 반 아이들 속에서, 그녀의 변화의 의미와 이유를 오직 홀로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은ㅡ당연하다고나 해야 할까ㅡ요시다 카즈미였다. ‘화해했구나.’ 어제 싸웠던 게 오늘은 이렇다면 상식적으로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것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히라이 유카리의 독특한 개성 때문이지만 요시다만은 어떤 의미에서 그녀의 그런 부분을 포함해 대등한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녀에게 그 점이 반드시 행운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녀는 히라이 유카리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때부터 유지에 관해서만은 강해지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만드는 애틋한 마음이 있었다. 오늘 두 사람의 모습을 봐도. ‘더 노력해야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의자를 다지는 그녀를 보는 둥 마는 둥, 교실 안의 학생들은 양동이 배로 폭포에 도전하는 스릴을 느끼며 수업 시작 종소리를 들었다. 낮인데도 어두운 구 요다 백화점의 꼭대기층. 산더미 같은 장난감이 깔린 모형 상자 ‘파리단’의 중심, 즉 이 백화점 모형의 꼭대기에 사토와 타나카가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둘이서 눈 아래의 미사키 시 전역을 둘러보는 모습이다. [케이사쿠, 에이타, 들리지?] 그들의 옆에 켜진 군청색 횃불에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옥상에 있는 마죠리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결국 한낮까지 번데기 트위스트를 추었기 때문에 그 음성은 몹시 험악했다. [어제는 느닷없이 웬 꼬맹이가 와서 엉망진창이 됐으니까 오늘은 먼저 설명을 해둘게.] 그 보복으로 ‘글리모어’ 연속 백 회전이라는 형벌을 당한 마르코시어스는 조용했다. 사토와 타나카 두 사람도 머리에 꿀밤을 한 대씩 먹었지만 이쪽은 그나마 봐준 모양이었다. 힘껏 때렸다면 머리통이 쪼개졌을 테니 당연한 말이다. “네~에.” “네에~이.” [정신 똑바로 차려!] 갑자기 벽력 같은 호통 소리에 등줄기가 꼿꼿해진다. “넵!” “넷!” [좋아. 먼저 평범하게 ‘무리’를 뒤쫓는 경우에는 어제처럼 기척을 잡아내는 자재법으로 대강의 위치를 파악한다. 보통 수준의 ‘무리’라면 포착된 방향으로 가면 곧 기척이 잡히지만 라미녀석은 토치에 기생하기 때문인지 그게 극단적으로 약해. 아주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모른다고.] 흠흠 하고 대략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마죠리는 꽤 불안해 보이는 사이를 두고 계속한다. [……그리고 녀석은 그렇게 기척이 포착된 순간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해버려.] “36계?” 사토가 묻지만 마죠리는 아니 하고 대답한다. [보통 이동 방법이라면 이쪽이 다가가는 사이에 그 기척을 잡아내지 못할 리가 없거든. 한 번 잡아낸 뒤 기척 포착을 틈을 두지 않고 열 번 연사하면 열이면 열 다 다른 장소에서 반응했어. 믿을 수 없게도.] 허탈감과 분노가 목소리에 배어 있다. [대략적인 장소는 잡아내는데 막상 손을 쓰려고 하면 꼭 놓치는 거야.] “포착되면 텔레포트~, 뭐 이런 건…… 무린가요?” 타나카의 의견에도 부정하듯 대답이 돌아온다. [큰 힘을 사용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세상을 왜곡하는 엄청난 자재법이라면 오히려 그 발동으로 더 쉽게 탐지될 거야. 어쨌든 보통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생각했어.] “우리가 뭘 알아야 뾰족한 수라도 낼 텐데.” “우린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고.” 두 사람의 자조를 마죠리는 날려버렸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뭐니 뭐니 해도 저 ‘제례의 뱀’의 비보 ‘파리단’이 있으니까. 오늘이야말로 그 재수 없는 술수를 깨고 ‘시체줍기’를 사냥해주겠어. 둘 다 잘 봐둬. 마르코시어스도 알았지?] 마침내 마르코시어스도 입을 연다. [좋아~, 나의 첨예한 검 마죠리 도.] [자아, 끝장을 보자고!] 모형 상자에 그들을 중심으로 한 군청색 파문이 퍼져나갔다. 4교시 일본사 수업 중, “왔다.” 갑자기 샤나가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벌떡 일어났다. “좋아.” 옆자리의 유지는 끄덕였다. 기다리고 준비까지 했다. 드디어 왔다. 의욕이 넘친 탓인지 자신도 희미하게 반항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가까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일단은, ‘아~, 저기…….’ 유지는 시선만을 돌려 좌우를 둘러본다. 교단에 서 있던 일본사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난데없이 벌떡 일어선 샤나를 보며 벐서 몇 벉재인지 모를 놀라움과 황망함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배가 아파서 조퇴할게. 사카이 유지더러 바래다달라고 할 거야.” 거만하게 몸을 돌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후우~, 처음부터 연기력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포기의 한숨을 쉬면서 유지는 책상 위의 물건을 가방에 넣는다. 돌아갈 준비는 이미 해둔 터라 10초로 철수 준비 완료. 자리에서 일어나 미안한 기색도 없이 말한다. “그럼 선생님, 가보겠습니다.” 샤나가 일어난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와는 다르다. 유지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기다렸지?” 샤나도 또렷하게 대답했다. “응.” 입을 쩍 벌린 일본사 선생이 그 대화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 이봐, 사카이…….” 샤나가 교사를 쏘아보자 목소리는 끊겼다. 어제의 험악한 분위기가 아닌 늘 있던 당당함만이 있었다. 유지를 대신해서 대답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말을 던진다. “긴 이름은 마구 암기시킬 게 아니라 그 의미나 유래를 해설하는 게 좋아. 다른 건 그럭저럭 흐름을 파악하게 하는 노력이 보여서 좋았어.” “그, 그런가?” 히라이 유카리의 변화……, 즉 샤나가 출현 이래 처음으로 수업 내용을 두고 그녀와 승부를 겨뤄서 학생들의 좋은 평판을 남몰래 얻고 있던 이 청년 교사는 지적당한 바를 꼼꼼히 메모해두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유지와 샤나는 교실에서 자취를 감췄다. ‘……뭐야…….’ 교실 구석에서 유지와 샤나가 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요시다 카즈미는 그들이 이따금씩 보이는 묘한 의기투합에 가슴의 통증을 느낀다. 결국 도움을 요청하듯 이케를 보고 말았지만 그 대단한 안경맨도 이 상황에선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둘이서, 둘이서만.’ 불안과 부러움을 느끼며, 약해진 자신을 자각하고, 혹독함과 불리함을 알면서도 그녀는 생각한 대로 강하게 맹세한다. ‘힘내자. 그래, 힘내자.’ 그녀만의, 그녀 나름대로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된다. 하지만, 이케는 이후 요시다가 싸온 유지의 도시락을 대신 받을 수 있었던 데다가, 그녀와 둘이서만 밥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교실을 나간 두 사람에게 감사하게 된다. 언젠가처럼, 언제나처럼 두 사람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거의 인간이 바뀌다시피 배짱이 늘고 만 것을 한탄하며 유지는 말한다. “변명에도 조금은 기술이 있지 않으면 안 돼. 뭔가 괜찮은 방법을 강구해봐.” 물 찬 제비처럼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던 샤나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할 일에 변화는 없잖아. 신경 쓰는 쪽이 지는 거야.” “그렇다고는 해도 학생한테는 본분이라는 게 있다고. 샤나도 우리 엄마를 화나게 하고 싶진 않지?” “…….”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거야? 라미는 찾은 거지?” “응. 찾는 건 우리가 먼저일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왠지 가까운 느낌이 드는데.” “딩동댕.” 샤나는 숨기지 않고 크게 웃었다. 현관 홀에서 재빨리 신발을 갈아신고 거꾸로 돌아와 그 앞에 있는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미사키 고교는 1학년 1층, 2학년 2층, 3학년 3층이라는 아주 알기 쉬운 구조로 나뉘어 있었다. 밖이 아닌 위로 향하는 그 의미를 유지는 깨달았다. “설마 학교 안에?” “맞아.” 샤나는 늘 처지는 유지에게 최소한으로 속도를 맞춰서 계단을 뛰어오른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눈앞을 가로막는 4층 옥상의 출구 문짝을 발로 힘껏 걷어차 부쉈다. 녹슨 철문이 쩍 갈라진 유리와 함께 뒤틀리며 열린다. “여기야.” 유지는 어두운 계단에 돌연 입구가 뻥 뚫리자 눈부셔하며 샤나의 뒤를 쫓아 옥상에 뛰어들었다. 옥상은 언제나 문이 잠겨 있어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한 광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래된 콘크리트 바닥과 칠이 벗겨진 철조망, 쪼개진 틈에 삐죽 돋아난 잡초, 하늘. 그러나 잠겨 있었을 옥상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옥상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 그러나 유지에게는 그 남자가 가진 위화감의 이미지가 낯설지 않았다. “당신, 라미?” 남자는 유지를 보고 웃었다. 재회를 반기는 웃음이었다. “맞아. 사카이 유지. 화해를 한 것 같아 기쁘군.” 라미는 시선을 샤나에게 돌린다. 샤나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네가 ‘시체줍기’?” “그렇다. 처음 보는군, ‘염발작안의 토벌자’. 아니면 샤나라고 불러야 하나?” “샤나로 하지.” “그럴까.” 라미는 유지를 슬쩍 보고 또 웃었다. 다시 시선을 돌린다. 샤나의 가슴에 있는 펜던트 ‘코큐토스’의 안으로. “오랜만이오, ‘천양의 겁화’. 아무래도 큰 폐를 끼친 것 같군.” “괜찮네. 우리 쪽이야말로 비호하에 있는 ‘미스테스’가 변변찮은 일로 신세를 졌더군.” 떨떠름한 표정의 유지에게 라미는 말한다. “어제 했던 공연한 참견의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봐두고 싶어서 말이야. 토치를 붙잡은 김에 와봤네. 잠자는 공주의 모습도 확인했지. 착한 아이더군. 울리지 말도록.” “무슨 얘기야?” 유지는 흠칫해서 가능한 한 샤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아라스톨에게 말한다. “아, 아라스톨. 그 일은 얘기하지 않았어?” “어떻게 말하라는 거냐?” “그러니까 무슨 얘기야? 둘이서만 속닥속닥?” 라미는 그런 그들의 옥신각신하는 모습에 더욱 깊은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난다. “훗, 이걸로 봐야 할 것은 다 봤군. 슬슬 가도록 하지. 우물쭈물하고 있다간 그 전투광들에게 잡혀버릴 테니.” “괜찮겠어?” 유지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라미는 웃어 보이며 자신 있게 대답한다. “염려 말게. 사카이 유지. 지금까지 잘 피해 다녔고 앞으로도 잘 피해 다닐 것이다. 소원을 이룰 때까지는 그리 간단히 죽을 수 없지.” “그럼, 우리들은 싸움 상대를 붙잡는 데 전념할까.”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라미는 다시 뒤로 물러난다. “그럼 인과의 교차로에서 다시 보세나.” “아…….” 유지가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라미는 그 모습을 불꽃의 가루로 바꿨다. 바람에 실려 사라진 불꽃은 깊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모형 상자에서는 타나카와 사토가 전신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미사키 고교냐.’ ‘이거…… 엄청나게 되겠는걸.’ 자신들의 생활의 일부가 뻔뻔스럽게 ‘홍세의 무리’가 숨어들었다는 증거가 기척 탐지의 자재법에 의해 폭로되었다. 맨 처음 찾아내서 파문을 펼친 장소는 시립 마사키 고교의 옥상이었다. 마죠리의 말에 의하면 ‘시체줍기’는 토치 외엔 먹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만일 사카이 유지나 이케 하야토, 요시다 카즈미, 고바야시, 사사모토, 미야모토, 나카무라, 타니키와……, 다른 아이들이 실은 토치이고 지금 진짜로 먹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미칠 것 같았다(실은 사토가 이케와 하던 전화를 서둘러 끊은 것도 그러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인간이 어느 날 홀연히 세 살에서 그 존재를 상실하는 것……, 자신들이 그 인간이 없어진 것도 깨닫지 못하고 존재 자체도 잊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자신이 있다는 것을 너무 젊다는 형태로 주변에 주장해왔던 그들이기에 그 공포와 위기감은 보다 강했다. 그들이 라미를 미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마죠리가 횃불을 통해 다그쳤다. [아마 그리로 향해도 소용없을 거야. 그 다음 기척이 잡힌 데로 간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잘 봐둬.] “누님, 아까 같은 장소에서 반응했던 거, 어제 누님이 습격한 플레임헤이즈죠?!” “그놈은 내버려둬도 되나요?” 바로 방금 전 기척 탐지의 힘이 파문처럼 미사키 시에 퍼졌을 때 파문을 뒤흔드는 장애물 두 개가 같은 학교에서 반응했다. 조그만 하나는 라미였고 커다란 또 하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어제 ‘무리’쪽에 붙어 마죠리를 훼방 놓은 이상한 플레임헤이즈였다. 그 플레임헤이즈가 ‘헌터’인가 하는 ‘무리’를 쓰러뜨리고 이 동네를 구해준 것 같다는 사실은 머리로는 알고 있다곤 해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잊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에서 지워져 있었다.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마죠리의 거동이야말로 그들의 가치관의 기준점이었다. [내버려둬, 그런 피라미는. 뻔뻔하게 달려오면 요절을 내주면 돼. 그보다는 재수 없는 라미 녀석을 죽여놓는 쪽이 먼저야!] 마죠리의 기합과 함께 다시 군청색 파문이 모형 상자 위로 퍼져갔다. 그것은 빌딩의 요철을 누비고 달려가 이윽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시가지 외곽에서 반응을 나타냈다. 방금 전의 플레임헤이즈는 그대로 있는데. [흥.] [역시 묘한 방향이로군.] “이게 무슨 조화야?” 예상했지만 역시나 기묘한 결과에 매절와 마르코시어스, 타나카가 신음한다. 그 순간 타나카와 등을 맞대고 있는 사토가 깨달았다. “? 타나카……, 아니 마죠리 씨.” [뭐야?] “저기……, 이 ‘파리단’이란 거, 토치를 비추는 거죠?” [그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토치란 것은 인간의 ‘존재의 힘’의 잔재죠.” 답답한 말투에 마죠리는 좀이 쑤셔 뒤를 재촉한다. [그래. 질질 끌지 말고 무슨 소리인지 확실히 말해.] “지금 ‘파리단’에 새가 비치고 있어요.” [새?] 비칠 리가 없다. 지금 ‘파리단’은 인간의 ‘존재의 힘’만을 비추고 있으니까. “그것도 아주 많아요……. 학교 주변에.” “진짜……. 어떻게 된 거지?” 타나카도 봤다. 미사키 고교의 주변에서 새가 한 마리, 두 마리, 점점 불어나 몇 마리나, 간격을 두고 드문드문하게, 그러나 일정한 움직임을 보이며 날고 있었다. [……음, ……후, 후후후.] 횃불 속에서 마죠리의 깊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왔다. [후, 후후, 과연……. 그래서 새는 어디로 향하고 있지?] 두 사람은 그 새 떼가 가는 방향을 본다. 그곳은……. 샤나는 자재법의 파문이 한 번 더 자신을 뚫고 지나가는 감촉에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저 전투광, 한 번 더 쓰잖아?” “……?” 유지는 문득 의문을 가졌다. 아라스톨이 아득한 저편에 다시 나타난 라미의 기척에 경탄한다. “엄청난 속도로군, 라미 녀석. 벌서 시가지의 맞은편까지 이동했다니. 특수한 자재법인가?” 마찬가지로, 그 속도를 느낀 샤나가 옥상에서 저 멀리 보이는 시가지를 보며 말한다. “과연, 이렇게 발이 빠르면 붙잡힐 리가 없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줄곧 휘둘린다면 전투광도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야 할 텐데, 쫓아다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겠어.” “자재법을 너무 쓰거나, 돌아다니다 지치거나 하겠지. 어느 쪽이든 라미에게 유리하군. 본래대로라면 그 피로를 없애는 것이 정석이겠지.” “그렇다면 곤란해. 어설프게 너무 기다리다 토치를 마구 써버린다면 참을 수 없지.”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작은 중얼거림이 더해졌다. “……이상해.” 순간 샤나와 아라스톨은 중얼거림의 주인공인 유지에게 주목했다. 유사시에 유지의 머리는 진가를 발휘한다. 이제 이 사실은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본인에게는 결코 말하지 않지만. 샤나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가능한 한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아까의 라미, 거기 있는 위화감……, 기척이라고 했었지? 그것을 조금 느꼈어. 1층과 옥상은 꽤 떨어져 있었는데.” “응……? 장소를 추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느껴지는게 당연하잖아.” 샤나는 열흘 전쯤 유지가 프리아그네의 접근을 감지했던 것을 보았다. 그러나 유지는 실제로 그랬기에 더욱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난 어제 처음으로 라미와 만났잖아. 그때는 실제로 눈으로 볼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 두 눈으로 보고서야 비로소 ‘홍세의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그래서?” 샤나는 뒷말을 재촉했다. “라미는 어제 샤나가 진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럼 오늘 전투광들의 기척 탐지가 올 것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어제보다 기척이 커졌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상대를 피로하게 만들려는 작전이라 해도, 기척을 지워버리면 그럴 필요조차 없이. 아라스톨, 아까 라미가 도시 반대쪽으로 갑자기 이동했다고 말했지?” “음.” 대답하는 아라스톨. “그 녀석이 방금 본 라미와 같은 크기의 기척으로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기척 탐지에 걸리고 있어……. 한 번 더 하면 또 다른 장소에서 걸리지 않을까?” “기척 탐지에 걸리는 것은 연막이라고 말하는 거냐?” 아라스톨은 이 소년의 착안점에 역시나 남몰래 경탄했다. 그러고 보면 라미는 토치 안에 기생하는 특수한 ‘무리’다. 우수한 자재사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특수한 자재법이라는 것이 실은 이동 따위가 아니라 연막을 쓰는 것이라면. “아마 라미는 전투광을 줄곧 그런 식으로 따돌렸다고 생각해. 라미는 여태껏 끈질기게 쫓겨다녔다고 말했어. 재빨리 움직일 수 있다면 왜 아주 도망치지 못했을까? 그건 라미가 전체로서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아라스톨이 납득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음……, 과연. 분명히 재빠른 이동보다 조리에 맞는군.” “녀석들은 두 번째 기척으로 향했을까?” 샤나가 점점 심중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저멀리 스모그로 흐려진 시가지 쪽을 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유지를 데리고. 유지는 고개를 흔든다. 스스로 낸 결론에 초조감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그토록 휘둘렸을 텐데 오늘은 두 번밖에 기척 탐지를 쓰지 않은 것은 이상해.” “그럼 뭔가 상황에 변화가……?” “응, 아마도.” 유지는 끄덕이면서 생각한다. 자신이 어제 만났던 라미. 주변에 기척을 완전히 끊었던 존재.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라미.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짐작 가는 곳은…… 있다. “탐색은 나중 일이야. 시가로 향하자, 샤나. 자칫하면 당장이라도 전투가 시작될지 몰라. 아라스톨, 라미 본인의 전투력은?” “자신의 존재인 기척을 느끼지 못하게 하며, 가질 수 있는 ‘존재의 힘’도 토치에 기생하는 몸의 것이 전부이다.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역시. 빨리 가자!” “ㅡ응.” “샤나?” 유지는 의아한 표정을 샤나에게 보였다. 샤나의 일이니까 열심히 달리자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지금 그 표정에는 망설이는 빛이 비친다. “응, 서두르자.”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샤나는 유지에게 등을 돌렸다. 그녀가 향한 방향은 출구가 아닌 시가지 쪽의 철망. 가방을 내던지고 말한다. “날 거니까 잡아.” “뭐?” “네 속도에 맞춰서 달렸다가는 늦을지도 몰라!” 유지는 등을 보이고 있는 소녀의 귀가 새빨개진 것을 깨달았다. 이치로 따지면 그녀가 말한 대로였지만. “……아, 그, 그래도 돼?” 순진한 소년으로서는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잔소리 말고 얼른!” “응, 그럼…… 미안.” 유지는 가방을 샤나의 것과 포개어놓고 등 뒤에서 머뭇머뭇 업히는 요령으로 팔을 둘렀다. 자신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소녀를 구부정하니 껴안는 몹시 꼴사나운 모습이 된다. 긴 마리와 부드러운 몸, 소녀의 향기에 묻혀 주책없는 두근거림을 누를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몸 앞으로 두른 양 팔이 미묘한 장소에 닿아서 부끄럽다. 그렇다고 위치를 바꾸면 그건 그 나름대로 뭔가가 민망한 느낌이……. “더 강하게 잡아. 떨어질지도 몰라.” 아주 가까워서 뺨도…… 맞닿을 거리에서 샤나가 말한다. “으, 응, 더 강하게……!” 유지는 무심결에 말한 그 말로 문득 기분이 고취되는 것을 느꼈다. 샤나도 대답한다. 마찬가지로 목청을 높여서. “그래, 더 강하게!” “응, 더 강하게?!” “그래, 더 강하게!!” 두 사람은 마치 마법 주문처럼 크게 소리를 지르고 단단히 몸을 밀착시켰다. 샤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 작은 가슴 가득히 힘이 채우지는 것을 유지는 팔 안에서 느꼈다. 그리고 샤나는 그 전부를 바깥에 토해내듯 외친다. “간다!!” 말하자마자 샤나의 발 밑에서 홍련의 폭발이 일어나, 두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의 점이 되었다. 역시 ‘라미는 토치에 기생한다’, 그것이 답이었다. 극히 미량인 ‘존재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약한 조각으로 자신을 쪼개고 수많은 토치 안에 심어 다른 토치의 회수를 담당하게 한다. 그리고 본체(아마도 거의 기척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즉 자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그 근원에 회수용의 토치를 잘 위장한 운반 수단ㅡ지금 경우라면 새를 이용해 조금씩 모아 비축해둔다. 실로 기교의 정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조차 마음대로 구사하는 탁월한 ‘자재’사 보통의 경우라면 절대 간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보통이 아니었다. ‘제례의 뱀’에 의한 광역 감시용 보구 ‘파리단’이 그 기교를 간파한 것이다. ‘갈 때가 됐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로군.’ 구 요다 백화점 옥상에 선 늘씬하고 아름다운 모습에서 군청색 불꽃의 가루가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한다. “둘 다 보고 있지?” [네, 잘 보고 있어요.] [‘전부 목적지에 들어가면’이랬죠? 알고 있어요, 누님.] “좋아.” 라미 본체의 기척이 너무 작아 알 수 없어도, 있는 범위가 어느 정도 한정되면 그 약점을 찌른 싸움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마르코시어스, 단숨에 결판을 내자!!” “아아, 드디어 시작으로군, 나의 자랑스런 마죠리 도!” 그녀의 발밑에서 군청색 불길이 화르륵 타올라 몸을 감싼다.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의 플레임헤이즈라는 증거인 화염의 옷 ‘토가’. 그 땅딸막한 짐승의 머리에 선 하나가 그려지더니 날카로운 이빨투성이 입이 쩍 벌어졌다. [누님, 지금 전부 마나 강을 건넜어요!] [앞으로 1분 정도인 것 같아요.] 텅 빈 입 속에서 마죠리의 음성만이 울린다. “그래. 고맙다.” 갑작스런 인사. [네?] [마죠리 씨?] “녀석을 죽이면 작별이야. 이제 ‘파리단’은 볼일 끝났고, 거기에서 나가는 법은 알고 있지?” 짧은 침묵. [……누님!] [그런, 너무해요! 이런 때에!] “시끄러워. 아까 말은 술에 대한 답례야! 꼬맹이를 상대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이, 이렇게까지 가르쳐줘놓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는 거예요?!] [맞아요! 마죠리 씨, 우리들도.] “닥쳐!! ‘무리’는 그렇게 자주 나타나지 않아. 평생 만나지 않는 게 보통이다. 너희들은 이미 한 번 만났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말을 잃은 모양이다. 소리의 공백에 어딘가 기이한 적막감을 느끼며 마죠리는 가압적인 말투로 덧붙였다. “또 언젠가 마시고 싶어지면 들리마. 술 준비해놓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 […….] […….] 마죠리는 계속 침묵을 깨듯 고함쳤다. “자, 새는 어떻게 됐어! 그 정도도 못하는 거야?!” [지금, 마지막 새…….] 타나카의 목소리가 젖어들어 끊어졌다. 그리고 사토가 받는다. [하나…… 전부.] “그럼. 나로서는 드물게…… 즐거웠다.” “둘 다 큰일 없는 생이 되길. 히앗!” 옥상이 무시무시한 도약의 반동으로 출렁거렸다. 봉절이 없기 때문에 전해진 진동이 장난감 더미를 둔하게 덮쳐 횃불을 꺼뜨렸다. 포탄 같은 궤도를 그리며 군청색 불길이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를 향해 날아갔다. 6. 유린의 조아 “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 ‘홍세의, 무리’이!!” “히앗, 핫핫핫핫! 죽여라, 부숴라, 먹어치워라!!” 비상하는 마죠리 도와 마르코시어스의 외침을 타고 그 목적지인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로 자재법이 발동한다. 그 주변에 있는 외부 정원에, 텅 빈 원형의 자재식이 불타올라 건물 전체를 원주상의 벽이 덮어간다. 벽이 닫히자 안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차단되어 내부의 인간을 정지시키고 동시에 외부의 눈으로부터 가려주는 ‘홍세의 무리’와 플레임헤이즈만의 무대, 인과 고립 공간 ‘봉절’의 출현이었다. 그 봉절로 날아들어, 나아가 건물 상층부의 벽면을 뚫고 아트리움으로 춤추며 나온 그것은, 네 개의 아치, 그 천장에 걸린 스테인드글라스를 발밑에 깔고 전의를 불태우는 그것은, 군청색을 띤 살기의 결정체. 마죠리 특유의 이 거대한 봉절은 내부에 군청색 불꽃을 눈보라처럼 휘날리고 있다. 그것을 구성하는 ‘존재의 힘’은 건물 안에 있는 토치로 공급하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토치는 이리저리 튀며 군청의 불꽃이 되어 봉절 안을 메워간다. ‘이 안에 있다.’ ‘망할 자식, 어디야?’ 기척이 적든 말든 이제 상관 없다. 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라미다.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토치와 마찬가지로 이 봉절을 유지하는 에너지로서…… 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찾았ㅡ다.” 마죠리가 보는 그 시각이 마치 어떤 형태를 만들 듯, 한 장소에 가득 차 있는 불꽃의 입자가 굳어졌다. 그것은 마죠리의 눈을 상징하는, 군청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눈동자이다. 또 그 밑에 있던 불꽃의 입자가 굳어져 군청색으로 이글거리는 송곳니를 드러낸 거대한 입이 된다. 그 입은 마르코시어스의 음성으로 크게 울부짖는다. “만나고 싶었다아~, ‘시체줍기’!!” 이 눈과 입이 떠오른 것은 아트리움을 내려다보는 옥상 기하학의 파도 같은 유리의 대천개. 그 위에 노신사의 모습을 한 토치가 비둘기 떼에 둘러싸여 서 있었다. 봉절의 간섭에 꼼짝도 않는 그 토치는 단지 지팡이를 앞으로 찌르는 자세로 서 있었다. 지팡이를 잡고 있는 마른 가지 같은 손에 순간 강한 힘이 들어간다. ‘……써버릴까, 아니야…….’ 생각 끝에 단념하는 노신사. 그 몇 미터 앞에 떠 있던 눈동자와 입이 밑에서부터 솟구쳐 올라 대천개를 깨부순 불길과 직결 됐다. 그 군청색 불기둥은 이윽고 응축되어 하나의 형태를 띤다. 뭉뚝한 인형 탈 같은 화염의 괴수. 자그락자그락 짓이기는 소리를 내며 강화 유리 바닥을 밟는다. “안녕, ‘시체줍기’ 라미. 너의 최후가 왔다.” 날카로운 이빨이 줄줄이 박힌 입에는 웃는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히히, 뜨거운 키스를 받아들이시지.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격렬함이다.” “…….” 노신사 라미는 말없이 지팡이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웠다. 막대기처럼 가는 왼팔을 앞으로 들어 손가락 끝까지 수평으로 뻗는다. “어머……, 싸울 셈이야? 그런 연약한 존재로?” 살의에 취해 황홀경에 빠진 목소리로 마죠리가 말한다. “좋~아, 좋~아, 싸우는 건 마음대로지. 하지만 결과는 변함없어.” 조롱하는 마르코시어스의 소리를 무시하고 라미는 손가락을 펴 무겁게 고한다. “……황해라.” 마치 오르간의 건반을 치듯 라미는 손가락을 허공에 미끄러뜨리며 튕겼다. 순간 그를 에워싸고 있던 비둘기 떼가, 그 형상을 의태하고 있던 ‘존재의 힘’이 일제히 터졌다. “응?!” “어엇?” 돌연 마죠리의 시야에 이상이 일어났다. 한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라미의 모습이 멀어졌던 것이다. 대천개의 강화 유리가 주위 광경과 함께 너울너울 물결치며 일그러진다. 터진 비둘기는 새하얀 깃털이 되어 무수히 휘날리며 푸른 불꽃의 가루를 없애간다. 삽시간에 그 깃털들은 라미는 물론 마죠리까지 둘러싸 일대의 공간을 점거할 지경이 되었다. “하아…….” “멋져, 굉장해, 히, 하!” 두 사람은 그 아름답기까지 한 광경을 연출한 라미에게 찬사를 던졌다. “그래서 이걸로 뭘?” 말하는 동안 짐승은 몸을 뒤로 젖히고 배를 부풀렸다. “어쩌겠다는 거냐, 하ㅡ!!” 짐승은 자기 발밑으로 화염을 뿜어냈다. 군청색 불길이 작열하며 깃털을 태워간다. 그 수가 줄어드는 것에 따라 라미의 모습이 다가와 주위 공간의 비틀림도 원래대로 돌아간다. 너무나 허망하게 그는 공격 타이밍으로 돌아왔다. “끝이.” “닷!!” 연속되는 고함과 함께 ‘무리’를 내리쳐 뭉개버릴 두껍고 긴 팔이 떨어져내렸다. 결국 처음부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던 라미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 일격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찢어졌다. 두 갈래로. 짐승의 긴 팔이. “ㅡ!” “ㅡ?” 짐승이 내리친 긴 팔이 가로로 길게 찢어져 날아가버렸다. 그들의 앞에는 군청색 불길에 지지 않는 은색 획 하나가 천지를 가리키며 빛나고 있었다. 그 은빛 광채는 칼등을 보이며 머리 위로 높이 들린 대검. 라미의 앞에 내려선 무언가가 내려치는 팔을 베어올려 두 쪽을 내버린 것이다. 마죠리와 마르코시어스는 그제야 비로소 이해했다. 불꽃이 화려하게 춤춘다. 도약과 공격의 여운으로 긴 머리가 나부낀다. 대검의 저편에서 두 눈이 그들을 쏘아보고 있다. 모두 같은 색. 홍련의 광채. 한 명의 플레임헤이즈가 라미의 앞에 서 있었다. 샤나가 대검 ‘니에토노노샤나’를 옆으로 휙 뿌리자 그 칼날에서 군청색 불꽃이 마치 피보라처럼 흩어진다. “안녕,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 그리고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 말하면서 칼을 바로 하고 다시 자세를 잡는다. “다시 이름을 밝히지. 나는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 동작에 따라 검은 옷자락이 펄럭펄럭 나부낀다. “‘염발작안의 토벌자’, ……이름은 샤나.” 그야말로 자랑스럽다는 듯, 샤나는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플레임헤이즈로서 당당하게 말한다. “자, 선택해라. 이 ‘시체줍기’ 라미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든가, 아니면.” 칼날을 끝으로 짐승의 코끝을 겨눈다. “큰코다치고 반성을 하던가.” “흥, 웬 잘난 척ㅡ, 윽?!” 코웃음을 치려던 마죠리 도는 할 말을 잃었다. 샤나의 뒤, 즉 라미의 앞에 본 적도 없는 토치가 서 있었다. 소년의 모습을 한 그 토치는 라미의 등 뒤에 숨기고 물러나고 있다. 평범한 토치가 봉절 안에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대답은 하나. “‘미스테스’인가?” 마르코시어스도 뒤늦게 나타난 알 수 없는 침입자에 놀랐다. 구조된 라미도 그녀들에 못지않은 경악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다. 그가 사용한, 주위에 깃털을 뿌리는 자재법은 자신이 도망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봉절의 발동을 느끼고 뛰어들 자인 ‘염발작안의 토벌자’의 접근을 마죠리에게 숨기기 위함 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설마 사카이 유지까지 나타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봉절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아무리 ‘미스테스’라도 그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매일을 살아가며 봉절 안에서 움직이는……. 그런가, 너는……!” “보, 보, 복잡한 이야기는 나, 나중에. 어쨌든 지금은.” 도약으로 인해 아직도 시야가 어질어질한 유지는 라미를 등 뒤에 숨기고 슬슬 물러난다. 그들을 뒤쫓으려 한 발짝 나선 마죠리는 이내 가로막혔다. 샤나가 그녀들을 노려보며 작은 입으로 다시 말한다. “손댈 수 없어.” 샤나에게 대답해야 하는 마죠리가 토가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무섭도록 험악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와서 너 같은 피라미가 우리들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잘려나간 팔이 불타올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재생한다. “이번엔 데는 것쯤으로 끝나지 않을 걸? 하하.” 그들은 조롱했다. 그러나 지금의 샤나는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아까의 날카로운 일격도, 여기까지 날아온 도약의 힘도 어제와는 달랐다. ‘뭐든지 할 수 있어. 뭐든지 할 수 있어.’ 가슴 속, 몸의 중심, 발밑에서 힘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칼 빛에 작안이 빛나고 웃음이 두 뺨에 깊이 새겨진다. “깐죽깐죽 말장난 하지 말고 어서 대답해. 라미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든가, 큰코다치고 반성하든가.” 마죠리의 눈썹이 더욱 불쾌한 선을 그린다. “……어제 같은 꼴을 당하고도 또 ‘무리’를 비호하는 거냐?” 샤나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래 그는 무해하니까.” “흥, 너도 동족이랍시고 역성드는 ‘왕’들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군. ‘‘무리’중에도 좋은 녀석이 있다’느니 하는 웃기는 소리를.” 이번엔 샤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말싸움할 생각은 없다. 너를 교육시켜줄 의무도 없어.” 칼끝 너머로 말을 던진다. “네가 내 사명의 수행을 방해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뿐이다.” “……콩알만한 게 까부는구나!!” 마죠리의 분노를 나타내듯 토가가 끓어오른다. 그녀의 성난 얼굴이 불길 속에서 삼켜져 쭉 찢어진 입 밖으로 그 소리만이 울려나온다. “결정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아.” “죽여버리겠어!!” 샤나는 그 사형 선고에도 정면에서 웃으며 대답했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짐승이 톱니 같은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크, 크크……. 이거, 아~주 죽일 재미가 있게 바뀌었는걸…….” “맞는 말이야……. 히힛……, 해치워, 해치워……, 해치워버려!!” 포효와 함께 토가의 두꺼운 양 팔이 앞이 아니라 양 옆으로 뻗었다. 샤나는 전에 했던 싸움처럼 돌진하지 않고 상대의 움직임에 맡긴다. 불과 몇 초 만에 뻗어나온 팔은 그녀를 크게 에워싸고 타오르는 군청색 원을 그렸다. 작안으로 그것을 가볍게 훑어본다. “……흥.” 후방의 유지와 라미는 그 원 밖에 있었다. 마죠리의 적의는 오로지 샤나에게만 쏟아지고 있다……. 도발에 의해 의도한 대로 상황을 만든 샤나는 만족감을 얼굴에 가볍게 드러낸다. 그러자 정면에 서 있던 짐승의 윤곽선이 흔들리며 분열한다. 찢어진 형체가 다시 나뉘어 원에 겹쳐 선 짐승의 수는 점점 불어난다. 샤나는 열 마리도 넘는 짐승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짐승들이 제각기 큰 입을 벌리고 노래 부르며 웃는다. “셀리, 해님의 주변을 돌아라! 앗하하!” “셀리, 달님의 주변을 돌아라! 앗하하!” 귀를 찢을 듯 합창하는 소리에도 샤나의 마음은 동요하지 않는다. “…….” 광채를 더해가는 작안이 그 소리의 근원을 간파한다. 그러나 알았어도 바로 공세를 취하지 않는다. 마죠리의 의도와, 거기서 일어나는 싸움의 흐름을 어디로 향하는 가를 이성과 본능으로 느낀다. 이제는 전처럼 무모하게 덤벼들어 스스로 여유를 잃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 반 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섬광 같은 판단력으로 결정해 마침내 움직인다. “……그럼.” 별안간 샤나의 발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자신을 둘러싼 짐승 한 마리에게 눈부신 속도로 달려들어 머리끝까지 쳐든 칼을 힘껏 내리친다. 그 짐승은 양 팔을 교차시켜 이 일격을 받아냈다. “맞 · 았 · 다?!” 상대가 말하는 사이에 샤나는 다시 발밑을 폭발시켰다. 상대의 팔과 칼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마치 곡예를 하듯 허공을 난다. 마죠리의 머리 위를 뛰어넘는 사이에 등 뒤에서 불길이 그녀를 중심으로 원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어디를 공격해도, 이 닫힌 원에 의한 공격을 전면에서 받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샤나가 있는 곳은 원 밖, 즉 마죠리의, “뒤다!” “윽?!” 마르코시어스의 고함 소리에 마죠리는 즉시 몸을 굽혔다. 그 머리 위를 칼날이 가르고 지나간다. 잘려나간 짐승의 귀가 허공에 남아 불꽃이 되어 흩어졌다. ‘빠르다!!’ 마죠리는 다음 공격을 경계하며 옆으로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휘두른 팔 끝에서 수십 개의 화염탄을 날린다. 샤나는 그 일격의 기세에 몸을 싣고 옆으로 회전한다. 그 움직임 속에서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싸 날아오는 화염탄을 튕겨낸다. 탄환이 전부 통과한 순간 몸을 드러낸다. 옆으로 도는 회전력은 그대로였다. “하앗!” 그 기세에 힘껏 땅을 차 더욱 속력을 낸 샤나는 다시 낮게 뛴다. 옆으로 도는 회전력을 칼날에 실어 바싹 매달린다. ‘자재법을 펼칠 시간이 없어, 제길!!’ 마르코시어스는 참지 못하고 불을 뿜었다. 주위를 열기로 가득 채우며 샤나의 접근을 거부한다. 대천개의 강화 유리가 군청색 불길에 달아올라 끓어오르는 거품을 내며 검게 그을렸다. 샤나는 눈앞에 펼쳐진 불길을 피하기 위해 디딘 발로 바닥을 차고 뛰어내렸다. 이윽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흰 연기와 지독한 냄새가 옅어졌고, 두 사람은 제법 시간을 벌었다. 다시 대치 상태로 돌아간다. 마죠리는 얼굴을 보이지 않고 말한다. “넌 대체 뭐냐?” 지금의 샤나에게는 일전에 싸움에서 보였던 치졸함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샤나는 칼을 똑바로 잡고 조용히 대답한다. “그냥 플레임헤이즈다.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그냥 플레임헤이즈.” 마치 너희들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는 듯한 말투에 마죠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그 분노를 실어 불을 뿜어내듯 말한다. “우리들의 사명은 ‘무리’를 토벌하는 것이다.” 샤나는 역시나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야, 이 세상과 ‘홍세’의 균형을 지키는 일이야. ‘무리’를 토벌하는 것은, 그 중 한 가지 수단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표정에 냉소가 더해진다. “나는 이 세상에 해가 되는 ‘무리’를 토벌하고 있다. 너는 죽이는 게 좋아서 죽이는 것뿐이다.” 정곡을 찔린 마죠리는 격앙했다. “!! ……꼬맹이 주제에 뭘 안다고!” 증오와 원한이 담긴 노성에 샤나는 즉각 대답한다. “그래. 네 사정 따위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냉소는 변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건 네가 주변에 피해를 입힌다는 거야.” “ㅡ웃!!” 이번에야말로 마죠리는 할 말을 봉쇄당했다. 이치로 따져서 패했어도, 아니 그렇게 패했기에 더욱 감정의 불길은 크게 타올랐다. ‘마죠리.’ ‘……괜찮아.’ 마죠리 도가 싸울 때에 무서운 점은, 증오와 파괴 충동으로 불타오르고 있어도 막상 취하는 행동은 단속적인 맹공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작전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생각을 굴린다. 꼬맹이가 변한 이유는 뭘까. 전과 뭔가가 다르다. 녀석 본인의 외견이나 전투 양식에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압도적으로 강해진 원인은 내적인 것일까. 지금 이 전장에서 그 변화를 일으킨 것은 무언가, 그것에 관련된 무언가를 흔들어놓을 수단은 없을까. ‘있다.’ 토가 속에서 마죠리는 웃는다. 그렇다. 함께 날아올 정도다, 퍽이나 의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봐야 토치. 보아하니 ‘존재의 힘’도 보통 사람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라미를 지키는 정도다. 그렇다, 저 자식과 함께 처지하면 동요할 게 틀림없다……. 자재법을 흐름에 싣는 즉흥적인 주문이 찢어진 입에서 흘러나온다. “……푸른 잔디에 비여, 내려라.” 지금의 샤나는 공격의 기세를 쉽사리 탈 수 없었다. 지금 그것은 마죠리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나무에도 지붕에도 비여, 내려라.” 짤막한 틈을 두고 외친다. “내 머리 위에만 내리지 마라!!” 돌연 그들이 선 옥상 주변에서 군청색 불길이 팽창했다. 그 폭발과도 같은 팽창은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의 상층부를 끝에서부터 조각조각 부숴간다. 봉절 내부에 흩어져 있던 군청색 불꽃의 가루를 남몰래 옥상 부근에 집결시켜둔 마죠리가 지금 그것을 일거에 파괴의 힘으로 변환시킨 것이었다. 거칠게 날뛰는 군청색 불길에 의한 거대한 압력이 건축재를 우그러뜨리고, 부수고, 휘어간다. 대파열이라 할 만한 파괴의 노도가 옥상에 있는 것을 전부 집어삼키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변에서 밀려오고 있다. 유지와 라미는 싸움을 피해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 대파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주문에 따라 작은 안전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몸을 숨긴 마죠리가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본다. ‘자, 저 토치를 구하든지, 그 소멸에 동요하던지 하려무나, 그러면…….’ 그러지 않았다. ‘ㅡ무슨?!’ 군청색 대파열이 유지와 라미의 주변만을 피해갔다. 마죠리는 봤다. 유지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듯한 강한 미소를 그녀에게 보내는 것을. “마죠리!!” “핫?!” 마르코시어스의 고함 소리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마죠리. 그 눈앞에 칼로 찔러오는 샤나의 모습이. 마죠리가 경악한 틈을 뚫기 위해 샤나는 공격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유지가 무사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었다. 칼이 짐승의 배를 깊이 파고들어 꿰뚫었다. 긴 칼날이 등까지 단숨에 파고들었다. “!!” 마죠리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목도한 눈으로 바로 아래에서 빛나는 작안을 내려다보았다. 강렬한 전의로 이글거리는 작안의 소유자의 얼굴을. “흐아앗!” 날카로운 외마디로 샤나가 기합을 지르자, 굉음과 함께 토가의 반신이 날아갔다. 그 안에 있던 마죠리의 몸도 반이 노출되어 칼을 가까스로 피하고 있던 오른쪽 복부가 충격으로 ㅉ지어졌다. “큭, 우악!” 마죠리는 필사적으로 뛰어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 앞과 주위에 닥쳤던 파괴의 파도가 힘의 제어를 무너뜨린 그녀의 주변으로 거세게 밀려들고 있었다. “헉?!” 마죠리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샤나는 이미 검은 옷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 “칫!!” 마르코시어스가 필사적으로 토가를 복구한다. 그러나 그들을 휩쓴 군청색 대파열은 옥상을, 유리 대천개를, 건물 상층부를 쓸어내듯 때렸다. 그 화염의 폭풍 속에서 유지는 전혀 해를 입지 않은 주변의 공간과 함께 붕괴에 휩쓸렸다. “와아악!!” 그들을 떠받치는 바닥이었던 대천개의 강화 유리가 그 밑의 들보 째로 무너져내린다. “자네에게는 항상 놀라기만 하는군.” 옆에 선 라미가 느긋하게 말하는 동안 순간적인 부유감, 그리고 낙하하는 감각이 덮쳐온다. “그럴 만한 게 있었, 와아악!” 유리 대천개가 두 사람과 함께 아트리움 안을 빛의 호우가 되어 부서져내린다. 곧이어 그들을 실은 강화 유리판이 바로 아래에서 교차하는 4층의 아치와 격돌한다. 그 충격으로 두 사람은 허공에 튕겨나갔다. “으아악!!” “욱?!” 라미는 유지에게 손을 뻗지만 닿지 않는다. 떨어지는 유지의 공포는 일순간이었다. 그 눈은 보고 있었다. 강화 유리의 호우 속에서 어딘가를 박차고 날아오른 듯한 샤나가 라미를 튕겨내 아치 위로 떨어뜨렸다. 그대로 유지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손을 뻗으려고 한다. 그러나, “위험해!!” 유지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았다. 그의 가슴에 늘어뜨려진 보구를 중심으로 불을 막아내는 결계를 발생한다. 몇 초 늦게 발사된 수십 개의 화염탄이 결계에 터져 흩날려간다. “유지, 떨어진다! ‘아주르’의 결계를 풀어!!” 그렇다, 이것이 그들의 숨은 보물. 유지는 ‘헌터’ 프리아그네를 토벌한 뒤에 그가 남긴 불을 막는 반지 ‘아주르’를 끈에 꿰어 목에 걸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이야, 샤나!” 아라스톨이 제지했다. 머리 위, 유리의 호우 너머로 보였다. 아치 아래로 철근에 손톱을 박은 토가의 짐승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 결계를 풀면 당한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마죠리가 자신들을 노릴 수 없는 위치로 이동하는 것, 그것은 곧 그녀가 라미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결계를 풀면 낙하 중에 받은 충격을 없앨 시간을 벌지 못한 채 그녀의 공격을 받아내야 한다. 낙하와 공격이란 쌍방에 대처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는 유지의 몸이 버티질 못한다. 그렇다면 기다리자고 샤나는 결정했다.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을 타파할 감이 전투의 흐름 속에서 번뜩이기를 기다린다. 초조해하지 말고 조용히,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기다린다. 1초가 지났을까 말까, 난감한 상황은 가차 없이 상황을 전개했다. 마죠리가 부대자루 같은 몸을 흔들며 라미가 있는 아치 위로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것이 흘러나온다. 샤나는 이어진 손을 자기 쪽에서 다시 잡고, 함께 떨어지는 소년에게 외쳤다. “유지, 결계를 풀어!” “알았어!” 불을 막는 힘이 사라진다. 샤나는 발바닥에 폭발을 일으켜 낙하로 인한 충격을 줄이면서 착지를 해야 할까 생각한다. 결론은 아니었다. 그러면 라미의 위기를 구하는 데 늦는다. 그런 생각을 하는 극히 짧은 순간에도 아트리움의 바닥, 검은 대리석에 물이 얕게 채워진 분수가 가까워져온다. 먼저 떨어진 강화 유리와 건축재로 메워진 그것은 빛의 나락. 그러나 궁지에 몰린 긴장감이, 불타오르는 전의가, 사명감이, 그리고 유지가 소녀의 마음속에, ‘뭐든지 할 수 있어.’ 라는 확신을 채워준다. 그 확신을 기반으로 힘이 솟구친다. 솟구쳐오르는 엄청난 힘을 받아 펼치는……, 언젠가 어디선가 느꼈던 ‘거대한 자신’의 이미지가 소녀의 존재에 변화를 가져다준다. ‘뭐든지 할 수 있어!’ 때리는 듯한 낙하의 폭풍 속, 염발에서 뿌려지는 불꽃의 가루가 그녀의 등에서 회오리친다. 손을 붙잡고 같이 떨어지던 유지는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뭐든지 할 수 있어!!’ 그 홍련의 소용돌이에서 순식간에 불길이 퍼져 양 날개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언젠가 아라스톨이 현신했던 모습을 연상시키는 화염의 날개였다. 넋을 잃은 유지를 내버려두고 그 날개는 홍련으로 빛나며 샤나에게 하늘을 나는 힘을 부여한다. 그러나 유지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큰 소리로 외친다. “가, 가속, 가속하고 있어! 아래로!” 유리나 건축재가 날카로운 조각으로 흩뜨려진 빛의 나락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기세로 덮쳐오고 있었다. “가만있어! 아직 제어가 잘…….” “그치마아아아아아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앗!” 유지의 시야가 고속으로 일그러지고 뒤틀려 흘러갔다. 그것이 회전하는 광경이라는 것을 오른팔이 거의 빠질 것 같은 격통과 함께 체감한다. 빛의 나락이 수증기 폭발을 일으키며 터졌다. 그 팽창 속에서 홍련의 빛을 남기며 샤나와 유지는 상공으로 솟아올랐다. “유지! 나한테 매달려!” 빙빙 돌아가는 광경과 충격으로 반쯤 정신을 잃은 유지를 샤나의 목소리가 깨운다. “엇?!” “‘니에토노노샤나’를 휘두를 수 없잖아!!” “아, 아앗!!” 아픈 오른팔을 낚아채여 눈앞의 작은 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뭔가를 느낄 겨를도 없다. 눈앞에 아치의 꼭대기층이 바로 지나가 순식간에 최상층으로. 두 사람의 갑작스런 출현에, 이제야말로 라미에게 덤벼들려하던 마죠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돌아본다. 상승하는 기세에 몸을 맡기며 샤나는 칼을 위로 뽑는다. 이미 베고 있었다. “ㅡ웃?!” 홍련과 군청색 불꽃이 뒤섞인 칼날의 흔적을 몸에 일직선으로 새기며, “뭐라고오?!” 베인 마죠리는, 마르코시어스는 견디지 못하고 뒤로 몸을 젖히며 올려다보았다. 부서져 뻥 뚫린 천장으로 홍련의 양 날개를 활짝 펼치고 비상하는 ‘염발작안의 토벌자’를. 그 휘어진 시야에 별안간 가속이 붙어 흐르기 시작한다. 거꾸로. 이번엔 토가의 짐승이 군청색 불꽃을 뿌리며 떨어졌다. 사토 케이사쿠와 타나카 에이타는 달린다. 평온함이라는 얇은 꺼풀로 덮은 세계를, 그러나 이젠 그 너머를 들여다볼 수 없는 두 사람은 달린다. 두 사람은 마죠리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가버렸다. 그곳은 역 근처,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장소. 그런데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왜 알 수 없는 것인지, 그 이유만은 알고 있다. 봉절 탓이다. 그 자재법이 둘러싼 장소와 외부 세계 사이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그 때문에, 바깥에 있는 자의 인식 속에 그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게 돼버린 것이다. 찾는다고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는 장소이건만, 그래도 두 사람은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나서 어쩔 작정인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뭘 할 수 있을지, 그런 건 모른다. 그저 만나고 싶을 뿐.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이유조차 모른다. 그 마음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필사적인 모습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의아한, 혹은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지으며 피한다. 물론 두 사람의 눈에는 그런 것이 비치지 않는다. 찾고 있는 것은 오로지 마죠리의 모습뿐. 그러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달리고 있었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엉키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달린다. 그런 반쯤 몽롱한 의식을 안고 역 구내를 빠져나가려던 두 사람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인파가 급격히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다. 멈춰 서서 보니 눈앞에 무리를 이룬 모든 사람들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문득 누군가가 외쳤다. 무의미한 고함 소리였다. 그 소리에 따라서일까 외침은 파도처럼 사람들 사이에 퍼져간다. 안에서 파열한 감정을 바깥으로 쏟아내는 듯한 무서운 절규가 역 구내를 뒤흔들며 퍼져나간다. 사토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 그 기분 나쁜 광경을 바라본다. “하아, 하아, 뭐, 뭐야……?” “저걸 봐!” 그에 비해 아직 여유가 있는 타나카가 어깨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사토도 봤다. 그토록 찾던 것의 편린을. 군청색 불꽃이 역 건너편에서 반짝반짝 꽃보라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어, 어디야?”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 근처야. 가자!” 절규가 터져나오는 역 구내를 두 사람은 다시 달린다. 그 외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렇게 된 건지, 자신들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마죠리를 찾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도 군청색 불꽃이. 이 바로 맞은편의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를 뒤덮은 봉절에서 넘쳐흐르기 시작한 불꽃의 입자가, 닿았다. 처음부터 소중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살아 있었다. 그래서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거기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죽이고, 빼앗고, 비웃어주려고 했다. 그 때문에 긴 시간을 견디고 이 몸을 바쳐 철저하고 신중하게 준비해왔다. 그리고 거기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죽이고, 빼앗고, 비웃어주려 했다. 이제야 그 때가 왔는데, 은색 불길. 녀석이 나타났다. 녀석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나에게 보여주었다. 녀석이 부수고, 죽이고, 빼앗고, 비웃는 모습을. 녀석은 나에게 말했다. 내가 부수고, 죽이고, 조소해주려 했던 것, 내게 있어 전부인 그것이 ‘존재’째 사라질 것이라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본래는 느껴질 리 없는 그 소멸을 나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 남겨진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로, 아무것도. 죽어가는 내 앞에서 은색 불길이 조롱했다. ‘……적어도…….’ 꼴사나운 나를 내려다보며 은색 불길이 비웃는다. ‘……적어도, 이놈만이라도, 이놈만이라도 좋아…….’ 비참한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며 은색 불길이 조소한다. ‘이놈의 모든 걸 부숴버리게 해줘!! 파멸…… 시키게 해줘어어!!’ 부서져내린 돌덩이, 불타서 무너져내린 기둥,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그을음과 피에 젖은 자신의 팔. 눈앞을, 주변을, 저 멀리를 가득 메운 빨간 불길. 죽음을 바라보는 그 앞에서. ‘ㅡ그렇게 해주지ㅡ.’ 소리가 울렸다. ‘ㅡ그렇게 해주마. 텅 빈 그릇, 군청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그릇ㅡ.’ 깊이 소용돌이치며 널리 퍼져 공간을 채우는 소리, 어딘가에서 들리는, ‘ㅡ살육의 맹세를 부르짖으며 나를 깨운, 나의 바람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고블릿ㅡ.’ 무엇이든 좋았다. 누구라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질렀다. 증오의 외침을, 원한 어린 신음을, 광기의 비명을, 파괴의 울부짖음을. 그 숨이 멎었을 때, 나는 일어나 있었다. 잔해를 밟고 불타 내려앉은 기둥을,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헤치고, 모든 것을 가득 채운 붉은 불길을 밟으며. 나는 변했다. 아름다운 군청색으로 타오르는 거대한……. 이변을 깨달은 샤나는 다시금 유지와 라미의 손을 잡고 아트리움에서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 비상에 이끌려 위로 솟아오르던 유지는 눈 아래의 아트리움을 가득 채우며 군청색 화염이 치솟는 광경을 보았다. 그 불길의 끝에 있는 길고 두꺼운 콧등이 4층의 아치를 단숨에 물어 부수고 그 기세로 아트리움의 종점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탈출해 거리를 둔 뒤쪽,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의 옥상이 마치 화구처럼 불길을 분출햇다. 그것은 팽창하여 이윽고 하나의 형태를 만들었다. 유지의 두려움이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늑대……!” 그것은 군청색 불꽃으로 이루어진 너무나도 거대한 늑대였다. 앞발로 무너져내린 상층부를 짓밟고 좁은 곳에서 기어나오 듯 상반신을 끌며 나오는 거대한 늑대. ‘유린의 조아’ 마르코시어스, 그 본성의 현신이었다. 이윽고 아치조차 가볍게 이빨로 물어 부순 턱이 천천히 허공을 향했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포효가 대기를 진동했다. 고막을 찢을 듯 뒤흔드는 그 포효는 흡사 공기의 노도 같았다.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의 유리가 터지고 정지해 있던 사람들이 쓰러졌다. 그것은 허공에서 거리를 두고 있던 샤나 일행까지 덮쳤다. “우우우, 와, 와앗?!” 샤나에게 손을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유지는 그 충격을 그대로 받았다. 몸이 떨린다기보다는 뒤흔들렸다. 폐도, 배도, 뼛속까지도 이 소리의 폭력에 희롱 당했다. 샤나를 가운데 둔 유지의 반대편에 지금은 자력으로 공중에 떠 있던 라미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큰일이다. 중상을 입은 플레임헤이즈가 폭주하고 있군. 이대로는 봉절이 풀려보리겠어.” 유지가 충격 속에서 눈을 떠보니 건물을 뒤덮은 군청색 아지랑이가 정말로 옅어지고 있었다. “마, 마, 만약 풀리면?” “인과가 바깥과 이어져서 흘러나간다면 그땐 회복은 불가능하다. 녀서의 불길에 맞은 인간들은 모두 죽는다.” 아라스톨이 펜던트 속에서 말한다. “퍼부은 토치의 수에 비해 봉절의 붕괴가 너무 빨라. 라미,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있나?” 흠 하고 라미는 끄덕이더니 노련한 자재사의 힘으로 지팡이 끝에 군청색 불꽃의 가루 하나를 포착했다. 그 표정에는 자신을 뒤쫓던 자에 대한 꺼림칙함이 아닌 연민의 빛이 비쳤다. “제어를 잃은 봉절이 붕괴한다. 그 힘의 방향에 실려 녀석의 증오와 비명이 바깥으로 무질서하게 흘러나가고 있네. 아마도 봉절의 바깥은 아비규환일 거야.” 포효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샤나가 질린 표정으로 말한다. “어린애의 울음소리처럼?” “그렇다.” 군청색 늑대는 그들을 덮치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을 뿐이다. 라미에게서 사정을 듣고 나니 과연 그 소리는 거대한 통곡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버려두면 봉절이 붕괴되어 대참사가 일어난다. 지금 싸우고 있는 무대는 거대한 빌딩이다. 픠아그네와 뒷골목에서 벌였던 전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유지는 흔들리는 가운데 자신의 손을 잡고 허공에 떠 잇는 샤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생각에 잠근 듯한, 생각을 않는 듯한. 하지만 그녀답게 결론은 단순 명쾌했다. “말해서 통하지 않는 상대는 우선 때려서 말을 듣게 해야지.” 마침내 샤나는 말했다. 한 점 망설임도 없는 음성으로.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할 일에 변한 건 없어.” 유지는 처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무심코 쿡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플레임헤이즈로서?” “그래, 플레임헤이즈로서.” 샤나도 힘차게 웃으며 대답하고 자신의 손에 매달린 소년을 본다. 유지는 선수 쳐서 짖궂게 묻는다. “손발은 안 묶어?” “묶어.” 샤나는 한마디로 기대에 응했다. 아라스톨의 쓴웃음이 희미하게 들렸지만 무시한다. “힘껏 뛸 거야. 내가 말하면 최소한의 결계를 펴.” “알았어.” 홍련의 날개가 더욱 크게 타올랐다. 유지는 허공에서 흔들거리며 비상할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샤나는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십 초 정도 침묵을 지키다 급기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유지는 샤나를 올려다본다. “? ……왜 그래?” 쳐다보니 샤나가 웬일인지 반쯤은 화나고 반쯤은 곤란한 표정으로 유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라스톨은 하는 수 없다는 듯한 분위기로 조언했다. “‘니에토노노샤나’다.” “어? ……아아.” 칼을 휘두를 수 없으니까 아까처럼 몸에 매달리라는 말인가. 여심이란 이런 것일까, 샤나도 순간적인 외침이 아니고서야 다시 말하기는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어제부터 끌어안는 운이라도 붙은 게 아닐까?’ 기쁜 듯한, 기쁘지 않은 듯한, 즉 글쎄. “붙잡을 건데 괜찮아?” “…….” 샤나는 이번엔 정말 화난 표정으로 유지를 앞으로 끌어올린다. “그럼…… 영차!” 유지는 쭈뼛쭈뼛 샤나의 몸에 매달렸다. 등에는 날개가 이그거리고 있어서 필연적으로 앞에 달라붙어야 한다. 아까는 뭔가 느낄 겨를이 없었지만 잘 생각해보니 이 자세는, “꺄악?! 잠깐, 어디다 얼굴을 비비는 거야! 더, 더 아래, 배에.” “우왓, 머리 누르지 마! 떠, 떠, 떨어지겠다! 아까는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아까? 아까도 이런 짓을 했단 말이야?! 이 변태!!” “그런 기억 없어!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변명하지 마!” “징벌은 나중에 하자, 샤나.” 아라스톨이 한마디로 마무리를 지었다. 라미가 옆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다 샤나는 발끈하면서도 말없이 칼을 똑바로 잡는다. 유지도 뭔가가 섞인 불안한 말을 억지로 잊어버리고 샤나의 가슴에서 한참 아래쪽에 꽉 매달렸다. “……기억해둬.” “잊어주길 바라우와아앗?!” 샤나는 유지가 대답을 끝맺기도 전에 힘차게 날아올랐다.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의 옥상을 점거한 거대한 군청색 늑대를 향해 홍련의 섬광이 날카로운 선을 뻗는다. 늑대는 자신을 향해 적의를 느꼈는지 포효를 그쳤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작디작은 두 사람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려 힐끔 본다. 순간 그 주변에 화염탄이 무수히 생기더니 일제히 발사되었다. 좀 전의 싸움에서 마죠리가 보여준 화염의 호우에 비해 열 배는 됨직한 숫자였다. “왔다!” “아직이야!” 이제는 호우라기보다 온 하늘을 뒤덮은 유성과도 같은 공격을 바라보며 유지가 외치자 샤나가 버럭 소리지른다. 홍련의 날개는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불길을 뿜어 두 사람을 가속시킨다. 유지는 필사적으로 ‘아주르’의 발동을 억제한다. 조금이라도 이것을 발동시키면 샤나의 날개는 사라지고 반격에는 크게 차질이 생긴다. 절대로 샤나에게 방해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서운 건 무섭다. “샤나!” “시끄러워! 외치는 사이에 때가 오면 어떡할 거야!” 그만큼 타이밍이 중요했다. 유지는 말없이 신경을 곤두세운다. 상대방의 ‘살’의 때를 가늠하는 것은 자신에게 아직 무리임을 알고 있다.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샤나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한다. 군청색 유성우가 제각기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서로 얽히고 쏟아진다. 샤나는 우선 날카로운 나선으로, 다음엔 일직선으로 그것들을 쳐내고 늑대의 사각 지대인 빌딩 벽 쪽으로 향한다. 유지는 스쳐 지나가는 화염탄에 코끝을 그을려 섬뜩해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참는다. 샤나가 명령할 때까지 자신은 그저 참기만 하면 되니까 그녀에 비하면 훨씬 편안 상황이라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격려한다. 두 사람의 속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속도를 더해간다. 유성군은 그 뒤를 쫓아 빌딩의 벽 쪽으로 모인다. 몇 개인가가 벽과 충돌해 폭발하고 파편을 주변에 흩뿌린다. 그 파편에 다른 화염탄이 연쇄 폭발을 일으켜 벽면을 차례차례 파괴해간다. 두 사람에게도 파편들이 튀어 맞았지만 샤나는 아직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칼조차 휘두르지 않는다. 단지 빌딩 벽면을 타고 거의 스치듯 날아오르는 데 전념한다. 치솟아오르는 연기조차 군청색으로 물들고 또 다음 탄막이 앞에서 온다. 지나쳐버린 화염탄도 그녀들을 주변에서 포위하듯 덮쳐온다. 샤나는 눈도 채 깜박하지 못할 짧은 시간에 판단한다. 상승하는 데 충분한 가속은 있다. 주변의 탄막은 거의 틈이 없다. 폭발하니까 받아내는 것은 무리. 피하면 탄과 벽 사이의 폭압으로 궤도가 뒤틀리고 만다. 이것만 피한다면 탄막은 더 이상 없음. 유지의 반응 속도도 고려한 가장 적절한 시간을 계산한다. 그리고, “지금!” 유지에게는 대답할 여유도 없다. 가슴에 걸린 ‘아주르’의 두 사람을 지킬 최소한의 결계를 펼쳐 그들을 방해하는 화염탄만을 지워버리듯 날린다. 동시에 샤나의 날개도 사라졌지만 그녀가 유성군을 피하며 얻은 가속에 의해 그대로 두 사람은 빌딩 상층까지 솟구쳐올랐다. 두 사람은 유성군의 탄막을 너무나도 손쉽게 빠져나왔다. “풀어!” 결계가 풀렸다. 동시에 등 뒤에서 그들을 덮칠 예정이었던 유성군이 한 곳에서 격돌하여 대폭발을 일으킨다. 다시 불붙은 홍련의 날개가 그 폭풍조차 앞으로 보내는 가속으로 이용하여 다시 비상을 시작한다. 그 두 사람의 가는 길에 이쪽을 들여다보는 거대한 늑대의 콧등이 있다. ‘들켰다!’ 유지는 덜컹했지만 샤나는 날개에 더욱 힘을 주어 가속했다. 늑대는 마죠리일 때의 지능을 완벽하게 갖고 있었는지 앞발로 무너진 옥상을 때려부쉈다. 잔해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린다. “바오오오오오오오오!!” 새로운 포효에 힘을 얻어 잔해 하나하나의 뒤쪽에서 군청색 빛이 분사된다. 불만으로는 결계에 막힌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수십, 수백 개의 잔해가 마치 미사일처럼 불길을 뿜으며 두 사람을 노리고 떨어져내린다. 그러나 샤나는 오히려 이 위기에서 승리의 기운을 느꼈다. 유지는 그녀가 힘차게 웃고 있다는 것을 끌려올라가는 와중에 느꼈다. 샤나는 나아간다. 목표는 가장 커다란 잔해. 두 사람을 숨겨주고도 남을 콘크리트 덩어리. 이윽고 대검 ‘니에토노노샤나’의 끝이 바로 위, 돌진하는 가장 앞쪽을 겨눈다. 잔해가 덮쳐오고 샤나의 기합이 울린다. “하앗!!” 쿠웅 하는 둔하고 짧은 소리. 칼날이 중간 정도까지 파고든 돌덩이는 쪼개지지 않은 채 두 사람의 가는 길을 막는다. 유지의 뇌리에 번뜩였다. ‘실패…… 가 아냐!’ 샤나가 이 정도의 파괴에 실수를 할 리 없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 웃음 그대로 상승한다. 이 엄청난 중량을 지고도 전진하는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쪽의 분사를 받아 굉장한 기세로 날아오른다. “뭐든지.” 샤나가 소리를 낸다. “뭐든지 할 수 있어.” 홍련의 날개가 지금이야말로 최대의 화염을 분출한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오오!”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또 뱃속을 뒤흔드는 듯한 포효가 터지고 소름 끼치는 공기의 감촉이 달린다. 유지는 그것을 늑대의 앞발에 의한 일격이라고 저도 모르게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대로 무시무시한 힘과 힘의 충돌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일어났다. 칼날이 박힌 곳을 중심으로 콘크리트 덩어리가 부서지고 늑대의 앞발이 쏟아지듯 내려온다. “뭐든지 할 수 있어!” 샤나는 이 부서지는 잔해 속을 강제로 돌파했다. 꼭 매달린 유지는 ‘살’의 순간을 느꼈다. “유지!” “웃!!” 결계가 펼쳐져 눈앞을 덮쳐오던 화염의 앞발이 날아갔다. 상승 기세 그대로 그들은 거대한 늑대의 중심으로 파고든다. 그 길에서, 군청의 빛 속에서 발견했다. 태아처럼 나신을 웅크리고 ‘글리모어’를 안은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를. ‘니에토노노샤나’, 문답무용의 일격이 날아갔다. 늑대가 최후의 절규를 한다. “오오…….” 홀로 공중에서 방관하고 있던 라미는 미카시 아트리움 아치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던 군청색 분화가 단숨에 팽창해 부드럽게 흩어져가는 광경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 안에서 홍련의 불길이 드문드문 날고 있었다. 아까의 돌진으로 힘을 전부 소모햇는지 힘없이 처진 채 하강선을 그리고 있었다. 홍련의 날개를 불태우는 소녀는 알몸의 여성을 한 명 붙잡고 있었다. 그 여성은 소녀 이상으로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소년이 줄 끝에 늘어뜨리고 있는 것은 신기 ‘글리모어’일 터.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에게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의외로 조용하더라, 유지. 마지막에 베지 말라고 소리지를 줄 알았는데.” “방금 전에 칼등으로 친 거지?” “응.” “……플레임헤이즈의 사명은 뭐랬더라?” “ㅡ후훗.” “ㅡ하핫.” 그 두 사람에게 이끌리듯 라미도 딱딱한 얼굴을 부드럽게 풀며 웃고 양복의 품에 손을 넣었다. 샤나도 마죠리도 거의 전력을 다 써버린 것 같았다. 지금 풀리고 있는 봉절의 내부를 복구할 만큼의 힘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 라미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품에서 뭔가를 꺼내 손바닥 위에 놓는다. 그것은 자그마한 눈알 크기의 털실 뭉치. 그는 잠시 그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다시 미소를 머금는다. 씁쓸함을 희미하게 담아. 그 숨결에 실려서였을까, 털실의 끝이 저절로 풀려 나가다 톡 끊겼다. 허공을 흐르던 그 토막 실은 불현듯 짙은 녹색 불꽃이 되어 흩어졌다. 늑대의 산화보다 훨씬 강한 기세로 짙은 녹색 불꽃이 무수히 일어난다. 그 불꽃의 가루는 봉절 내부에서 춤을 추며 싸움으로 황폐해진 자리 곳곳에 머물러 치유를 시작했다. 마죠리가 눈을 뜨자 시야는 석야으로 덮여 있었다. “여어.”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힘없이 반긴다. “……살아 있구만.” “피차일반.” 마죠리는 일어나려 했지만 그 순간 엄습하는 격통에 무너져내렸다. 옆구리를 찢기거나 가슴에서 어깨에 걸쳐 깊이 베였던 기억을 떠올리고 일어나는 것을 포기했다. 할 수 없이 겨우 고개만 들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다. 머리가 풀려 있는 것이 바람의 감촉으로 느껴졌다. 안경도 없어졌지만 어차피 멋내기용이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다. 몸도 말이 아니었다. 폭주해서 알몸이 된 몸에 큰 천이 말려 있었다.(실은 옥상에 걸려 있던 회사 깃발) 응급 처치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난폭한 처치였지만 플레임헤이즈에게는 이 정도도 충분하다. 실제로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출혈 그 자체는 이미 멈춰 있었다. 전부 소모해버린 힘을 복구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 확인이 끝나자 이번엔 고개를 돌렸다. 회복된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 옥상의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벽면 청소용 곤돌라의 레일이 등 밑에 깔려 있어 누운 자리가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돌린 바로 옆에 유지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표정은 밝아 보였다. 다만 웬일이지 양 볼이 부어 있고 오른쪽 눈에도 파란 멍 자국이 있었다. “샤나, 깬 것 같아.” 유지의 말에 샤나가 마죠리를 내려다보듯 옆에 섰다. 염발과 작안이 검게 변하고 칼도 흑의도 없는 보통 인간의 모습으로. 바람을 탄 풍성한 흑발이 마치 불꽃의 여운처럼 석양의 붉은 빛을 받고 있다. “……잘도 안 죽였군. 그렇게나 지독하게 당했는데.” 마죠리의 얄미운 말에도 샤나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너희들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달라.” “……그건 플레임헤이즈의……” “그래, 플레임헤이즈의 사명.” “…….” 또 자신을 부정당했다. 이젠 그 말에 힘으로 반항할 수도 없다. “당분간은 라미를 뒤쫓을 수 없을 만큼 손봐줬어. 그러니까 내 할 일은 끝.” “……너, 사명, 사명 하는 게 마치 ‘왕’ 같구나……. 아주 재수 없어…….” 마죠리의 솔직한 감상에 샤나도 똑같이 솔직하게 대답한다. “우연이네. 나도 네가 싫어. 어제 같은 꼴이 된 건 처음이었거든.” 유지가 쿡 하고 웃는다. 순간 샤나는 평정을 잃고 발끈한 표정이 되었다. 그 얼굴에 마죠리는 깊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뭐야, 이 녀석.’ 몹시 화가 치밀었다. ‘교활해.’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몹시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 기분에 기시감 같은 것을 느낀다. 마치 그때와 같았다. 가지고 있었던 것을, 매달리고 있었던 것을 전부……. 문득 옆에 홀쭉한 그림자가 새롭게 나타났다. ‘!!’ 다시 드는 가벼운 기시감. 그러나 그것은 저 은색 불길이 아니다. “겨우 멈췄군. ‘조사를 읊는 자.’ 마죠리 도.”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 검고 가늘게 선 그것은 노신사의 모습을 한 ‘시체줍기’ 라미. “안심해. 이제 와 무슨 짓을 할 생각은 없다. 방금 전에도 ‘유린의 조아’에게 협박당했거든. ‘나의 고블릿에 손을 대면 현신해서 네놈을 물어죽이겠다’고.” 마죠리의 머리맡에 놓여진 ‘글리모어’에서 드문드문 불길이 새어나온다. “시끄러워.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 세상의 균형 따위 알 게 뭐야. 주변의 ‘존재의 힘’을 전부 먹어치우고 너희들을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씨를 말려줄 테다.” 자신과 마찬기지로 힘을 전부 써서 만신창이가 됐을 파트너의 말에 마죠리는 몇 십 년 만에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라미는 상처 입은 그 짐승의 협박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숨을 쉴 뿐이었다. “쯧쯧, 명색이 플레임헤이즈에게 힘을 부여하는 ‘왕’이 하는 말이라니 믿어지지 않는군. 너희들에 대한 배려심에서 여기 남아 잇는 나의 심정도 헤아려주길 바라네만.” “……무슨 소리야.” 물기어린 눈을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묻고 소리만 험악하게 내뱉는 마죠리의 눈앞에 라미가 지팡이 끝을 들이밀었다. 그 끝에는 그가 소란의 와중에서 포획한 군청색 불꽃의 가루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보았다.” “…….” “하지만 ‘은’은 뒤쫓지 마라.” “!!” “너, 그놈을 알고 있나?!” 라미는 놀라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노을을 바라본다. “그것은 뒤쫓을수록 헛일이다. 뒤쫓아도 잡히지 않고 찾아도 나오지 않으며 그저 나타날 뿐인, 그런 것이다.” “크윽!!” 마죠리는 별안간 벌떡 일어나 지팡이 끝을 낚아채 불꽃의 가루를 빼앗았다. 몸을 꿰뚫는 격통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 가루를 피투성이가 된 가슴에 안고 외친다. “그런 말만으로! 내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나?!” 토해내듯 계속 말한다. “아무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어!! 이 복수는 내 것, 이 증오는 나의 것이야!!” 헐떡거리며 말하는 그녀에게 호흡할 시간을 주듯 라미는 잠시 침묵하다 이윽고 말한다. “그럼 바꾸어 말하지. 그것은 와야 할 시간이 오면 반드시 만난다. 그런 것이다.” “……뭐라고……?” “나는 그것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행동하든 그것은 너의 몫이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마죠리를 대신해 아라스톨이 묻는다. “그 ‘은’인지 뭔지가 어떤 자인지는 말할 수 없다는 말인가?” 라미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런가, 그럼 묻지 않겠네.” 라미는 옛 지인인 ‘왕’에게 미소 짓고 다시 그 계약자 샤나와 눈을 마주친다. 이별이 저녁 공기에 쓸쓸하게 배어든다. “신세를 졌군, ‘염발작안’……, 아니 샤나.” 샤나의 대답은 그야말로 무뚝뚝했다. “사명에 따랐을 뿐이야.” “과연, 역시 ‘천양의 겁화’의 계약자. 좋은 플레임헤이즈다.” 라미는 웃고 마지막으로 유지를 봤다. 유지는 일어서서 이 기묘한 ‘홍세의 무리’에게 솔직한 사죄의 말만을 건넸다. 악수를 청하기에는 ‘사람됨’의 크기가 너무나도 달랐다. “미안해. 모처럼 모은 ‘존재의 힘’을 복구에 써버려서.” “뭘, 소원을 이룰 시간을 얻은 사례……, 그렇게 생각하면 싼 것이네.” 그가 너무나도 가볍게 말하자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 유지는 물어보았다. “……얼마나 돼?” “무엇이?” “오늘 쓴 분량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걸려서 모았던 거야?” “……후, 자네는 가끔씩 예리할 때가 있군……. 그보다.” 라미는 얼버무렸다. 적은 양이 아니란 것은 명백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해관계를 떠나서 조언 하나를 해주지.” “?” 이번에도 유지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라미는 샤나에게도 눈길을 주면서 가볍게 말한다. “앞으론 불안해지면 말은 필요 없으니까 껴안고 키스나 해줘라. 그러면 모든 것은 금방 알 수 있을 게야.” “뭣! 무무무ㅡ?!” “키스?” 라미는 가볍게 웃으며 저녁노을 이상으로 새빨개진 유지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샤나에게 등을 돌린다. 사라지는 곳은 옥상의 끝. 그 등 너머로 작별 인사가 던져진다. “잘 있게, ‘천양의 겁화’, 나의 오랜 벗이여. 인과의 교차로에서 또 보세.” 아라스톨이 말없는 두 사람을 대신해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 “……언젠가 바라던 바를 꽃피우는 날이 오길, ‘나선의 풍금’.” 색다른 본명으로 불린 라미는 돌아보지 않은 채 어깨너머로 손을 올리고 작게 뿌렸다. 그것을 신호로 한 것처럼. 여윈 모습은 붉은 저녁노을 속에서 희미해져 바람결에 사라졌다. 바람이 몇 번 불고, 이윽고 샤나가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눈을 떴다. 상반신을 일으킨 채 굳어 있던 마죠리와도 시선을 마주치고 아까의 사실을 확인한다. 마죠리도 똑같이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유지는 신기한 듯한 얼굴로 물었다. “‘나선의 풍금’?” 샤나가 그녀답지 않게 희미하게 두려움마저 밴 음성으로 대답했다. “……봉절을 비롯해 수많은 자재법을 짜낸 ‘홍세의 무리’ 최고의 자재사야.” “그럼 ‘시체줍기’라는 본명은……?” 이번엔 모른다. 샤나는 자신의 가슴을 본다. “어떻게 된 거지, 아라스톨?” 아라스톨은 특별히 놀랄 만한 비밀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토치를 줍는 자’라는 말뜻에서 알 수 있지. 보통 본명이란 우리들이 ‘홍세’에서 부르는 이름. 그러나 토치는 이 세상밖에 없다. 즉 ‘시체줍기’라는 본명도, 라미라는 통칭도 이 세상을 헤매기 위한 가짜 이름이지.” 유지는 라미 사라진 저녁노을을 눈부신 듯 바라봤다. “그렇게 굉장한 자재사가 ‘시체줍기’ 따위의 이름을 쓰며 몇 백 년이나 다른 ‘무리’가 만든 토치를 줍다니……. 오로지 하나의 물건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각각 다르다. 너희들과 마찬가지다……, 샤나.” “응.” 샤나는 아라스톨의 뜻에 따라 마죠리를 돌아본다. 그 가슴의 펜던트 ‘코큐토스’에서 ‘천양의 겁화’는 말한다. “‘조사를 읊는 자’여. ‘홍세의 무리’에 대한 복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이유로 계약하는 이상, 플레임헤이즈에게 있어 당연한 권리이기는 하다. 우리들 ‘왕’이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그 감정을 이용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마죠리는 치켜뜬 눈으로 펜던트 속을 노려보며 말했다. “꼬맹이가 잘난 척 운운하는 사명이란 그 이용법을 달리 말하는 거겠지.”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너의 행동이 플레임헤이즈의 사명에서 벗어난 경우 우리들이 너를 저지하는 것도 당연한 도리임을 이해할 터.” 아라스톨은 눌리지 않고 대답했다. 샤나에게도 동요하는 빛이 없다. ‘홍세의 무리’는 사실을 사실로서 말하고 계약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본래는 그러한 경우가 되지 않도록, 힘을 부여하는 ‘왕이 저지하지만.” 아라스톨이 덧붙이자 ‘글리모어’가 흥 하고 불꽃을 뿜었다. 마죠리가 그 위에 손을 얹어 어루만진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갈구에 대답해준 것뿐인 이 위험하고도 친절한 늑대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일어난 일도, 입은 상처도 전부 틀림없이 자신이 바랐던 것의 형태, 그 결과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너를 심판할 생각도, 타이를 생각도 없다. 우리들의 입장과 행동 원리를 표명할 뿐이다. ‘나선의 풍금’은 아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행동할지는 너의 문제다.” 샤나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요컨대 네가 또 이탈하면 내가 다시 멈추게 할 거야. 그것만 알면 돼.” 유지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나 심한 짓을 당했는데도 뒤처리로 하는 말은 그것뿐이야? 플레임헤이즈의 사명이란 건 되게 간단하구나.” 마신과 소녀는 플레임헤이즈로서 입을 모았다. “그런 것이다.” “그런 거야.” 유지는 저녁 햇살을 받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이번에야말로 아무런 격의 없이, ‘……눈부시다…….’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글리모어’를 안은 마죠리는 대천개의 끝을 터벅터벅 걷는다. 할 말을 다 한 샤나 일행이 가버린 뒤 옥상에는 그녀만이 남겨졌다. “덜컹덜컹, 마죠리 도…….” 누더기 같은 몸을 이끌고 갈라진 목소리로 조그맣게 노래부른다. 자신을 움직이게 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는 실로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침대를 팔고 볏짚 위에 누웠네…….” 눈 아래에는 복구된 아치와 아트리움이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전부 부정당한 광경이었다. 저것을 죽이지 마, 이것을 뒤쫓지 마, 아픈 꼴을 당하고, 의욕도 꺾이고……. “……몸가짐이 나쁜 여자라지…….” 그 틈으로 뭔가가 보였다. 무심코 걸음을 멈춘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모른다. 기분은 더욱 알 수 없었다. “……먼지투성이로, 잠을, 자다…… 니…….” 목소리가 떨려 끊겼다. 몸에 두른 피투성이 천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만이 남는다. 아래층 분수대의 난간에 뭔가를, 누군가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두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가증스러운 꿈에서 갑자기 깨어난 사토와 타나카는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의 잔향에 멍해진 사람들의 인파를 가르고, 마찬가지로 갑자기 생각난 미사키 아트리움 아치……, 그들이 지금 있던 역의 바로 뒤쪽에 있는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그 지독한 꿈을, 마죠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기묘한 자부심까지 느끼며, 그러나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올려다본 아트리움은 새 건축물 특유의 광택으로 빛났으며 일어났던 것이 분명한 대사건의 흔적이라고는 한 점도 남겨놓지 않았다. 흔적은커녕 이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방금 전의 가증스러운 꿈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자리엔 오로지 일상의 풍경이 있을 뿐이었다. 봉절이 풀렸으니까 싸움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결과가 이 거리에 무엇을 가져왔을까. 그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검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분수대의 난간에 주저앉았다. 그대로 보이지 않게 된 비정상 세계를, 그것을 상징하는 여성을 기다렸다. 밤이 깊어 담당 직원에게 쫓겨날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자신들을 남겨두고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저택만이 줄지어 적적하고 고요한 구 주택가를 말없이 걸어, 오랜만에 둘이서 실컷 마시자며 사토가 내실 바의 문을 열었을 때까지는, 그곳에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몇 개의 위스키 병과, 소파 끝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는 두 다리를 발견할 때까지는, “여어, 어서 와, 둘 다.” 폭풍 같은 숨소리의 맞은편에서, 너무나 어이없게 다시 찾아온 비정상의 세계가 그들을 맞았다. 에필로그 어제는 정말 지쳤었다. 젖 먹던 힘까지 억지로 끌어내서 간신히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덕분에 오늘은 허리며 다리가 쑤셔서 더없이 죽을 지경이었다. 같이 전장에 있던 유지는 오늘 아침에 단련에서 펄펄 살아 날뛰었다. 비보 ‘영시미아’의 힘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어도 왠지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 단련 자체가 낙승인 것은 변함없지만. 그 점이 문제가 아니라, 몸이 소모된 힘을 회복시키려 하고 있는지, 아침부터 이상할 정도의 공복감이 덮쳐와 견디기 어려웠다. 점심시간을 이토록 오래도록 기다려본 적은 없다. 역시 메론 빵이 최고. 이 바삭바삭 포근포근한 감촉이 참을 수 없이 좋다. 어제 전투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슈퍼에서 유지에게 그 표현과 실제 식감에 관한 타당성과 관련성, 그것이 맛에 주는 영향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뭔가 못마땅했기 때문에 오늘 아침 치구사에게도 똑같은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역시나 치구사는 열심히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마지막에는 ‘다음에는 직접 만든 걸로 먹여줄게.’라고 말해주기까지 했다. 역시 유지 같은 녀석과는 천지차이다. 그녀의 요리 솜씨로 보건대 아주 맛있는 빵이 만들어질 거야. 음, 기대된다. “안녀엉.” 가능한 한 평소와 똑같이 가볍게 인사하고 오랜만에 교실로 들어갔다. 이제 점심시간이지만 뭐 신경 쓰지 말자. 게다가 타나카는, “여러분, 공부하느라 노고가 많으시구만.” 같은 소리나 지껄였다. 저 느긋한 녀석 같으니. 골든 위크까지 포함하니 거의 열흘 만인가. 교실에 친구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기쁘다. 한가운데에 특히 반가운 얼굴들이 모여 있다. 사카이가 요시다에게서 받은 도시락을 옆자리의 눈치를 보며 먹고 있다. 히라이가 주는 오늘의 먹이…… 가 아닌, 요시다에 대항해서 건넨 간식은 만두인가. 변함없는 공처가. 놀리는 보람이 있다. 요시다도 이쪽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어준다. 응~, 흐뭇해진다. 히라이는……, 뭐 기대하는 게 바보지. “뭐가 안녕이냐. 벌써 점심시간이라고.” 다가가자 우리들의 안경맨 이케가 도시락에서 얼굴을 들고 째려봤다. “그런 째째한 소리 말고 웃어, 웃자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러고 보니 한자로는 有り?さ라고 썼던가(우와, 난 너무 똑똑해)……. 정말로 모든 것이 고맙다. 이케에게는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주 공부가 됐어. 응, 고마워, 이케.” 진지한 어조가 오히려 농담으로 들리고 마는 자신의 목소리가 저주스럽다. 이케의 옆에 앉아 양손으로 공손하게 노트를 받치고 돌려줬지만, “고문이라면 오늘은 벌써 끝났는데.” 라고 단칼에 외면당했다. 거듭거듭 미안해. 실은 오늘 오전 내내 사토와 함께 누님의 종 노릇을 하며 옷……, 특히 속옷…… 이나 안경, 잡다한 용품들을 사러 돌아다니느라 지각한 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을 변명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뭐 결과적으로 ‘홍세의 무리’는 떠나버렸다고 하니, 얼씨구나 쾌재를 부를 판이지 않는가. 이 정도는 참도록 하자. 누님은 그 일 말고 싸움에 대해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지쳤으니까 당분간 여기서 잘래.” 라고 말해준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누님은 정말로 쭉 자고만 있다. 그 사이에 나쁜 머리를 총동원해서 생각해야만 해. 여러 가지, 응, 여러 가지로. “근데 어때, 사카이? 우리가 빠진 사이에 연애 전선에 진전은 있었어?” ……사토, 너도 조금은 생각을 좀 하고 살아라. “커헉?! ……웃 ……웃!” 사카이 녀석, 목에 걸렸구나. 요시다제 핸드메이드 도시락을 분출하지 않고 참는 것만도 용하다고 칭찬해줘야 할까. 요시다를 위해. 우선 이 행복한 맘자는 무시하고 지각 콤비에게 물어보기로 하자. “너희들, 정리된 거야?” 놀란 얼굴을 한 사토는 허공을 바라보며, “으응~, 현재 진행형…… 일까나.” 똑같이 타나카도 턱에 손을 대고, “우선은 일단락됐어.” 라고 제각각 의외로 심각하게 대답했다. 이 두 사람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걸 보면 꽤 귀찮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뭐, 괜한 오지랖으로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도 민폐일지 몰라. “필요하면 얘기해.” 정도로 일러두면 될까. 이케는 대단하다. 그런 말을 간단히 할 수 있다니. 그는 말한 이상 실행하고, 실행하면 잘해낼 것이다. 나도 본받고 싶다. 아니, 본받자. 도시락을 만들어서 주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다. 그저께는 마침 두 사람이 싸워서, 그래서…… 데이트…… 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런 기회는 두 번 다시없을 것이다. 어제부터 두 사람은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갔다. 유카리는 무뚝뚝하지만 아마 사카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분위기가 좋은(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을 몇 번이나 방해 당했으니. 솔직히 속이 쓰리지만 내가 유카리처럼 강하고 멋진 여자였다면 똑같이 방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유카리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이케처럼 여러모로 사카이를 돕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할 수 있을까……. 으음, 할 수 있을까…… 가 아니야. 하는 거야 어렵지만. 하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하자. 할 수 있을 거야. 타나카가 또 얼빠진 소리를 했다가 사토와 이케에게 핀잔을 듣는다. 요시다는 쿡 웃고 샤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메론 빵을 먹고……, 오랜만에 예전 풍경으로 돌아간 것 같다. ……예전 풍경? 돌아가? 이상한 이야기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것도 아닌데 어느 샌가 이렇게 여섯 명이 먹는 점심이 일상이라고 느끼고 있다. 샤나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비일상인데. 아냐, 다르다. 여기 지금 존재하는 것에는 일당도 비일상도 없는 거다. 내가 보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일상이고, 그것이 이상한지 아닌지는 관계없다. 샤나가 싸우거나, 프리아그네가 음모를 꾸미거나, 전투광이 날뛰거나, 라마가 방랑을 하는 것도 지금 우리들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일부다. 나는 샤나처럼 강하지 않다. 그녀에게 보호받고 있는 미약한 존재. 하지만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 그런 내가 샤나를 위해 강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나아가야 할까. 뭔가 크고 무거운 문제지만 곰곰이 생각해봐도 조히 않을까. 좋든 나쁘든 내 시간은 영원한 것 같으니까. 이미 그들의 일상은 서로가 모르는 곳에서, 서로가 모르는 형태로 달라져 있다.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지금 한때의 환담을 즐긴다. 세상은 단지 그렇게, 그것을 전부로 해서 움직이고 있다. 2권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