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안의 샤나 Takahasi Yasichiro [타카하시 야시치로] 제 1권 프롤로그 1. 벗어난 세상 2. 저녁, 비 내리는 밤, 그리고 아침 3. 샤나 4. 유지 5. 플레임헤이즈 에필로그 에필로그 그 날, 그 날도 사카이 유지는 늘 상 그래왔듯이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1년의 4월 말. 새로운 환경에도 그럭저럭 익숙해졌지만, 입시나 장래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타인과 충돌할 만큼 모가 난 성격도 아니었기에 친구도 몇 명 생겼다. 가정은 중산층. 외아들에 부모님은 두 분 다 건재. 단 아버지인 칸타로는 해외에 단신 부임 중이다. 시원시원한 성격의 자존심 강한 전업 주부인 어머니 치구사와 학교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의 단독 주택에서 둘이서 산다. 성적은 중학교 때부터 중간 정도를 오르락내리락 했다. 스스로를 갈고 닦으려는 기개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늘어져 살만한 뱃심도 없어서 적당히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중학교 때부터의 친구이며 현재 같은 반인 안경맨 이케 하야토의 평에 따르자면 은근히 요령이 좋다나. 여자친구는 없다. 옆자리의 히라이 유카리에게 이래저래 말을 걸고는 있지만, 그건 그 애한테서 숙제나 기타 여러 가지 도움을 받기 위해서일 뿐, 그 이상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물론 몸이 달아올라서 찾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고민 중인 것은 가지고 있는 용돈을 다가오는 골든 위크에 어떻게 쓸까 하는 문제. 죽이 맞는 친구들과 어디 놀러나 갈까 싶기도 하고, 사고 싶은 게임과 만화책도 좀 있었다. 그 날 방과 후, 학교가 있는 주택가의 강 건너, 큰 다리로 이어진 번화가로 발걸음을 향한 것도 게임 가게와 서점에 들러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자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그때까지, 유지는 그런 일상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 그런 자각조차도 없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근거 없는 확신 속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날, 그때. 피처럼 붉은 석양 속에서 그의 일상은, 확신은 너무도 어이없게 불타 스러지고 말았다. 아니, 불타올랐다. 1. 벗어난 세상 사카이 유지는 괴물에서 잡아먹히고 있었다. 그것은 일상에서 불과 5분 거리. 돌연 불길이 시야를 뒤덮었다. 레스토랑이나 카페들이 즐비한 번화가, 길 위를 흘러가는 인파, 그 안에 함께 있던 유지, 이 모든 것을 물들이던 저녁노을이 강하게 일렁이는 듯한…. 선명하면서도 불가사의하게 짙은 빨간 불꽃이. 그 최초의 순간, 유지는 단 한 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어?” 당황하는 사이 유지는 기이한 광경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주변을 벽처럼 둘러싸고 그 맞은편을 뿌옇게 만들며 너울거리는 아지랑이. 발아래 불타는 선이 그려내는 문자인지 도형인지 모를 기묘한 문장. 걷다가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눈도 깜박 못하고 우뚝 정지한 사람들. “……?” 유지는 반쯤 넋이 나간 모습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본다. 평범한 사람이 응당 보일 반응처럼 이것은 고약한 꿈이라고 믿으려 했다. 그러나 그 현실 도피는 군중 한가운데로 뛰어내린 것들에 의해 무참히 박살나고 말았다. “헉?!” 그 뭔가가 착지하는 충격으로 유지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보았다. 내려온 무언가가 인파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었다. 기묘한 것……, 그 형태나 근원이 된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를 알 수 없는 그런 것. 하나는 마요네즈의 마스코트 캐릭터를 꼭 닮은 3등신의 인형. 또 하나는 마네킹의 머리를 엮은 구슬. 둘 다 사람 키의 갑절은 되었다. ‘…….이건 꿈이야.’ 그것이 유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미 악몽의 수준을 넘어선 터무니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로 눈앞에 있었다. 괴물들, 거대한 몸뚱이를 뒤흔들며 난동을 피우던 인경의 귀밑까지 찢어진 얼굴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몇 번이나 거듭 내던 머리구슬의 가로로 쭉 째진 틈새가, 입을 벌렸다. 그 순간 정지해 있던 사람들이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에게 둘러싸인 유지에게는 불이 붙지 않는, 열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상하리만큼 밝은 불꽃이었다. 그 안에서 유지는 마비된 듯 우뚝 서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반쯤 넋이 나간 눈동자에 비친다. 타오르는 인간의 불꽃 끄트머리가 가는 실처럼 허공으로 뻗어나가 괴물들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옷도 타지 않고 피부도 문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괴물들에게 빨려 들어감에 따라 불길이 일렁이는 형체가 점점 윤곽이 희미해지며 옅어져……. 사라진다. 타오르는 불꽃도, 안에 있는 사람도. 처음엔 캠프파이어 정도의 크기였던 것이 이내 모닥불 정도가 되어, 마침내는 횃불에서 촛불 정도로 작게, 작게……. 유지는 그 불꽃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보는 동안, 드문드문 밝혀진 등불 속에 한 사람이 덩그러니 남녀 지듯 서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괴물둘이 비로소 눈치 챘다. 인형이 목만 빙그르르 돌리더니 갸웃거렸다. “응? 얘는 뭐야?” 유지가 그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 데엔 몇 초가 걸렸다. “……아.” 얼빠진 소리를 내는 유지를 귀여운 마스코트 캐릭터의 거대한 눈동자가 노려보고 있다. 어느 새 머리구슬도 정면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구슬의 한가운데에 쩍 벌어진 입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글쎄? 우리 ‘무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봉절 안에서 움직이고 있어.” “‘미스테스’, 그것도 월등한 돌연변이종 아닐까. 오랜만에 근사한 선물이네. 주인님도 기뻐하실 거야.” “신난다. 우리들, 공을 세우겠는걸.” 인형이 쿵 하고 조잡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발을 한 걸음 내밀었다. 원래의 형태만 유머러스할 뿐, 거대한 몸체를 요동치며 귀 밑까지 찢어진 입으로 히죽 웃는 모습은 섬뜩했다. “그럼 어서…….” 거대한 인형이 유지를 향해 땅을 울리며 달려온다. 토관 정도 되는 팔을 휙 뻗었다. “……아, 아……?” 패닉을 일으키며 발버둥치기에는 눈앞에 닥쳐오는 것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며 너무도 압도적이기에 유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뒷걸음질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그 한 걸음 물러날 틈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유지는 시야를 뒤덮어오는 손바닥에 배를 난폭하게 낚아채어졌다. 그 폭력의 충격이 도화선이 된 것처럼 비로소 전신에 공포의 전율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우! 우왓…….” 이미 무엇을 하기엔 늦었다. 공중으로 떠올라 한 번 휘둘린 그 끝은 자신을 가볍게 한 입에 털어 넣을 수 있는……, 머리 한가운데를 째놓은 듯한 거대한 입. 절규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저 이 상황을 희롱당하고 있을 뿐. “잘 먹겠습니다~!!” 이렇게 유지는 먹히는 운명이 되었다. 그것은 일상에서 불과 5분의 거리.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난 긴 길의 시작. 엄청난 무게와 기세를 지닌 작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려왔다. 그 낙하하는 발끝이 머리구슬의 정점에 내리꽂혔다. “윽, 크억?!” 머리구슬이 가진 입, 전신의 작은 것, 한가운데의 큰 것, 그것들이 타격을 입고 일제히 비명을 질러댔다. 내리꽂히는 강한 압력으로 머리구슬은 갈라진 땅바닥에 반 이상 처박혔다. 그 무언가는 착지와 타격을 겸한 일격의 힘을 가늘고 유연한 다리를 구부려 한데 모으고 더 힘차게 도약했다. 이번의 끝은 날카롭게 빛나는 칼날이었다. 유지를 입 안에 넣으려던 인형이 컥 하고 공기만을 삼켰다. “?!” 인형이 흘끔 보니 방금 먹어치우려 했던 먹이가 빙글빙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자신의 팔과 함께. “ㅡ히익.” 팔꿈치부터 아래가 깨끗하게 잘려나간 자신의 팔과 함께.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얼떨결에 한 팔을 잃어버린 인형은 울부짖으며 비틀거렸다. 잘려나간 단면에서는 피가 아닌 희끄무레한 불꽃이 탁탁 튀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절규 속에서 유지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으윽!!” 자신을 붙잡고 있던 거대한 팔이 쿠션이 되어준 덕분인지, 큰 충격은 없었으나 그래도 2, 3미터는 떨어졌다. 유지는 숨을 죽이며 그대로 땅바닥에 와락 엎드렸다. 잘린 팔이 눈앞에서 희뿌연 불꽃이 되어 흩어졌다. 현기증을 달래고, 그 빛이 가라앉은 뒤에 유지는 눈을 들었다. ‘……누구지……?’ 자신과 인형 사이에 뛰어든 작지만 힘찬 등을. 달군 쇠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긴 머리칼이, 망토 같은 낡고 검은 코트가, 착지의 여운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코트의 소매 안쪽으로 들여다보이는 가녀린 손가락이 전율의 미가 흐르는 커다란 칼을 잡고 있었다. 소녀로 보인다. 붉게 타오르는, 그러나 부드러운 질감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진다. 그 움직임이 남기는 것처럼 새빨간 불꽃이 흩어졌다. 유지는 주변의 상황도, 처한 입장도 잊어버린 채 홀린 듯 쳐다보았다. 불꽃을 흩뿌리며 뛰어든, 작열하는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를.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그 맞은편에서 입을 귀밑까지 찢으며 울부짖는 거대한 인형쯤은 그저 그런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어때, 아라스톨?” 등을 보인 채로 불쑥 소녀가 말했다. 늠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앳된 목소리였다. “‘무리’가 아니야. 그냥 ‘린네’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대답을 했다. 이쪽은 우레처럼 무겁고 낮은 울림을 지닌 남자의 목소리. “우아아악! 감히, 감히 내 팔을!” 대화를 가로막듯 인형이 고막을 찢을 듯한 절규를 내질렀다. 남은 팔을 허공에 번쩍 쳐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녀는 그 광경을 가볍게 올려다봄과 동시에 오른손을 흔들고는 칼끝을 날카롭게 뒤로 보냈다. 그 등 뒤의 땅바닥에 주저앉은 유지의 머리 옆 아슬아슬한 곳에서 칼등이 멈췄다. “ㅡ힉!!” 유지가 숨을 멈춘 그때에는 이미 소녀의 몸은 휘두른 방향으로 한껏 돌아가 왼손이 칼자루 끝을 잡고 있었다. 칼을 오른쪽 안쪽부터 크게 휘두르기 위한 준비 자세였다. 인형의 머리통이 낮아진 만큼 거대한 주먹이 손을 짓뭉개기 위해 내려온다. “죽어랏ㅡ!!” 그러나 주먹의 궤도가 예정의 반도 내려오지 못한 사이에, 소녀는 인형의 무릎 위를 밟고 있었다. 이미 칼은 휘두른 뒤였다. 소녀는 그 휘두른 서슬에 몸을 90도 회전하여 인형의 바로 옆으로 뛰어내린다. “?!” 인형의 주먹의 궤도가 갑자기 흐트러졌다. 팔은 허공을 휘젓고 인형은 그 서슬에 완전히 뒤집어졌다. 자신의 무게에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는다. 인형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케엑, 억?” 진동에 흔들리는, 그 둥글게 그려진 거대한 눈이 어떤 물체를 포착하고 놀라움으로 크게 뜨인다. 땅 위에 자신의 다리 하나가 무릎 아래만 남은 채 서 있었다. 소녀가 무릎을 침범했을 때 지탱하고 있던 다리 한쪽을 찰나의 속도로 베어버린 것이다. 다리는 이미 희뿌연 불꽃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 불꽃의 너머로 소녀가 땅에 쓰러진 그(?)를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꽃을 흩뿌리는 듯한 긴 머리와 진홍빛 불길이 이는 두 눈동자로. “여, 여, 염발과 작안……!” 경악에 떨리는 목소리가 인형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자신이 최악의 적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모양이었다. 소녀는 자신의 키만 한 칼이 전혀 무겁지 않다는 듯 오른손만으로 높이 쳐들었다. 쓰러진 인형을 향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머리카락에서 불꽃이 뿌려진다. 이 아름답지만 차가운 광경ㅡ살벌함이 넘치는 이 광경ㅡ에, 유지는 움직이는 것조차 잊고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 끝은 허망했다. “우, 우아아……. 악.” 뭔가를 말하려고 발버둥 치던 인형의 머리를 소녀는 거침없이 한 팔로 내리쳐 두 쪽을 내버렸다. 인형이 희뿌연 불꽃을 튀기며 소멸한 뒤 몇 초, 이윽고 소녀는 유지 쪽을 보았다. 칼을 든 오른손을 내리고 천천히 걸어온다. 아직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유지는 그제야 비로소 소녀를 관찰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엄청난 상황과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지만 소녀의 키는 140센티미터 전후, 자신과 나란히 서면 가슴밖에 오지 않을 것이었다. 나이도 고작해야 11, 12세쯤 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생김새에서 천진난만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경직된 표정이 아니라 강한 의지에 의해 꽉 조여져 있는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늠름하다고 표현할 만한 얼굴을 유지는 난생 처음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위아애로 이어진 가죽 상하의와 낡고 바란 검은 코트. 빼든 칼은 지극히 위험해 보이지만 그조차 그녀에게는 어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달아오른 쇠처럼 붉게 타는 듯한 눈동자와 머리카락. 환상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모습이 유지의 눈앞에 우뚝 서 있다. “……아, 저……, 고마워.” 유지는 스스로도 참 시시하다고 생각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사실 폼을 재봤자 먹히지도 않을 상황이긴 했다. 그러나 소녀는 유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며 말했다. “흐음, 이건 ‘미스테스’네?” “……?” 대답으로 들리지 않는 말의 의미를 유지가 묻기 전에, 소녀의 가슴에서 아까도 들렸던 남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음.” 소녀의 가슴엔 펜던트가 늘어뜨려져 있었다. 은사슬에 연결된 손가락 길이만한 검고 탁한 구슬. 그 주변을 두 개의 금색 링이 교차하는 형태로 감싸고 있다. 우아한 미술품 같기도 하고 정교한 기계 같기도 했다. 어떻게 된 구조인지, 남자의 목소리는 그 펜던트 속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봉절 안에서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꽤 특이한 물건을 갖고 있다는 말이겠지…….” 느닷없이 유지의 등 뒤에서 굉음이 터졌다. 소녀의 발차기를 맞고 지면에 처박혀 있던 머리구슬이 포탄처럼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앗.” “윽?!” 돌아보려 한 유지의 코끝을 스칠 듯 말 듯하며 소녀의 강렬한 앞차기가 나갔다. 정반대에서 강한 충격을 받은 머리구슬은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나가버렸다. 옆에 있는 레스토랑을 부수며 또 처박힌다. 소녀는 발차기의 반동으로 땅에 파묻힌 발을 빼더니 자욱하게 흙먼지를 피워 올리는 레스토랑을 향해 걸어갔다. 불안한 유지는 남겨진다는 공포심에 무심코 소녀의 코트 소맷자락을 붙들었지만 소녀는 냉정하게 뿌리쳤다. 남겨진 유지를 향해 소녀의 정반대에서 그림자가 날아온다. 그림자는 유지의 등을 노리고 손을 뻗는다. 소녀가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칼날이 번뜩였다. 유지의 머리 위, 아슬아슬한 곳을 칼날이 옆으로 가른다. 이 모든 것이 4분의 1초도 안 되는 흐름 동안 이루어져, 유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의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크억!” 등 뒤에서 누군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돌아본 유지의 눈앞에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잘려나간 팔이 뒹굴고 있었다. “뭐, 으악……?!”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유지의 눈앞에서 그 팔은 아까의 거대한 인형과 마찬가지로 희뿌연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그 불꽃 건너편에는 잘려나간 팔을 누르며 신음하는 여성이 웅크리고 있었다. 매끈한 금발 사이로, 아름답지만 묘하게 무생물 같은 느낌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소녀는 한 걸음 나아가 유지의 옆에 서서 칼끝을 미녀에게 겨누었다. “흥, ‘도망가긴 도망가되 적어도 ‘미스테스’의 알맹이만은 가져가겠다.’는 심산이냐? 이렇게 간단히 낚이면 오히려 김이 빠지잖아. 소녀는 미소를 머금고 오만하게 내뱉었다. 미녀가 가지런한 입을 억지로 벌려 증오의 소리를 토해낸다. “염발과 작안…….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인가. 토벌의 도구 주제에……!” “맞아, 그래서?” “주인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진부한 협박 문구에 소녀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네 것을 먼저 듣도록 하지.” 소녀가 너무나 쉽사리 취하는 그 행동의 의미를 유지는 뒤늦게 깨달았다. 죽이려 하고 있다. 자신이 처한 입장이나 상황 따위는 모른다. 눈앞의 소녀가 살인을 저지르려 한다는 사실에만 반응했다. 감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단지 당연하다는 감각으로 제지에 들어갔다. “그만둬.” 내려치는 칼과 미녀 사이로. 너무나 의외의 행동에, 소녀는 놀랐고 미녀는 웃었다. 미녀의 팔이 자신을 감싼 유지의 등을 뚫고 내부로 침입했다. “?!” 유지는 느꼈다. ‘뭐지?’ 자신이란 존재가, 핵과 같은 뭔가가 뒤흔들려 사라지려 하고 있는 것을. ‘내 안……, 뭔가, 뭔가를……!’ 그리고 공포에 휩싸였다. ‘안 돼……!’ 그 1초도 될까 말까 한 사이의 감촉과 공포는, “꺄악!” 미녀의 절규에 가로 막혔다. 머리 위, 양 손에 칼을 똑바로 쥔 소녀가 미녀를 베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던 유지도 함께. 일말의 주저도 없이 어깻죽지부터 배까지 깊이 그어 내렸다. “……흐억?!” 유지가 뒤로 몸을 젖히며 쓰러지려는 찰나에 자신과 같은 각도로 베여 불꽃이 튀기는 미녀의 갈라진 몸속에서 작은 인형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쳇!” 혀를 차는 그 인형은 갈색 털실 머리, 파란 단추 눈, 빨간 실로 꿰맨 조잡한 입을 하고 있었다. 신발도 발가락도 없는 살색 펠트 다리가 땅을 차고 낮게 뒤로 물러났다. 이것을 뒤쫓으려 한 소녀는 가슴에 있던 펜던트의 외침을 들었다. “뒤에!” 레스토랑에 처박혀 있었던 머리구슬이 다시 소녀를 노리고 잔재 속에서 포탄처럼 튀어나왔다. 소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고, 칼에 베여 신음하는 유지를 땅 위를 미끄러지는 발로 떨쳐버렸다. 그 도약에 힘입어, 머리위로 쳐든 칼이 한 번 번뜩이더니 머리구슬을 정면에서 베었다. 머리구슬은 깨끗하게 두 개의 반구가 되어 튕겨나가고 이내 대량의 불꽃이 되어 폭발하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인형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의 작은 불씨와 파괴의 상흔을 남긴 거리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을 깬 것은 역시나 소녀였다. “저 ‘린네’의 말을 듣자니 의외로 큰 놈이 뒤에 있는 것 같아.” 대답하는 것도 역시 펜던트. “오랜만에 ‘왕’을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응. 하지만.” “우우우, 우윽…….” ‘칼, 칼에…….’ 소녀는 자신의 발치에, 땅바닥에 벌렁 나뒹굴며 신음하는 유지를 본다. “아까는 깜짝 놀랐어. 이게 움직인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으으…….” ‘어깨서부터 단칼에……’ “그렇지. 나도 순간 ‘천목일개’를 생각해내고 당황했다.” “으으.” ‘죽는다!’ “뭐, 그땐 처음부터 날아왔고…….” “윽, 으헉?!” ‘죽는 거야?!’ 꽤나 짜증이 났는지 소녀는 유지를 발로 뻥 찼다. “아, 진짜,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이제 와서 베인 정도로 호들갑 떨지 말라구.” 펜던트도 가차 없이 뒤를 이었다. “생전의 됨됨이를 알기 쉽게 미련한 녀석이군. 인간이라면 중상을 입은 시점부터 즉사였다.” “……그, 그렇지만 칼에……, 으응?” 유지는 비로소 깨달았다. 베이는 느낌을, 그야말로 자신의 내부를 통과해 빠져나간 칼날의 선뜩함까지 똑똑히 느꼈다. 그러니까 당연히 무서운 고통이 있을 거란 생각에 신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프지 않아……?’ 치명상이란 것은 고통도 마비시키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이런 부차적인 생각까지 할 여유를 지금의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에 비로소 의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스스로도 참 태평하다 생각하면서 고개를 살짝 드니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없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좌측 어깨 쪽 몸통’과 눈앞에 일직선으로 무시무시하게 베인 자리가 비스듬하게 벌어져 있는 ‘목이 붙은 우측 어깨 쪽 몸통’ 두 동강이 나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으나, 과연 펜던트의 말처럼 이렇게 까지 베이면 보통은 치명상이다(그 밖에도 뭔가 말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그 정도로 냉정할 수는 없었다.) 한데 어찌된 셈인지 출혈도 없고 고통도 없다. 혐오스러운 ‘자신의 내용물’이 보이지만 그 단면은 희미한 빛으로 덮여있다. “어떻게 된…….” 물어보려 한 유지는 말을 잃었다. 소녀가 자신의 몸 위를 뒤덮은 것이다. 그 작열하는 듯한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느닷없이 덮쳐와 유지의 시야를 불태웠다. “무, 무, 무슨……?” 뺨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 코에 와 닿는 뜨거운 불의 향기와 포근하고 부드러운 냄새, 유지는 그 전부에 마비됐다. 어깨가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닿는다·……. 이렇게 생각한 순간 소녀는 둘로 갈라진 유지의 몸을 난폭하게 붙였다. “헉!” 몸의 단면이 맞물리는 섬뜩한 감각이 유지의 정신을 깨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는 이미 몸을 뗀 후였다. 작은 입술을 오므려 유지에게 가늘고 날카로운 한 줄기 숨을 불어넣는다. 갑자기 유지의 전신이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으악!!” 놀란 유지는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서 깨달았다. 칼에 베인 몸이 원래대로 붙었다는 것을. 어느 새 불은 꺼져 있었다. 머뭇거리며 베인 자리를 만져보니 상처는 물론, 옷까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본 자신의 가슴속에 뭔가가 보였다. ‘……뭐지?’ 등불이었다. 오도카니 켜진 작은 등불. 몸은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 있는 이 불도 겹쳐져 느껴지는 듯 보인다……. 아니면 보이는 듯 느껴지는 것일까. 아까부터 납득하기 힘든 일 뿐이었지만, 이 가슴속의 등불은 왠지 더욱 마음에 걸렸다. 두근거림을 느껴지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 아까 그 여자가 만진 것은 이거였어.’ 직감을 뛰어 넘는 확신. 눈앞에 서 있는, 자신을 치료한 소녀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한 거야?” 그러나 유지의 그 당연한 질문을 소녀는 또 무시했다. 돌아보지도 않고 서서 칼을 코트 속 왼쪽 허리춤에 집어넣는다. 뒤로 찔러 넣는 기세로 넣은 칼은 그대로 코트 속으로 사라진다. 칼 길이가 소녀의 키만큼 되었는데. 마치 마술 같네. 빈손이 된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거 봤어? 저 ‘린네’는 약삭빠르게 수하가 모은 걸 전부 가져가버렸어. 작은 인형이 도망갈 때, 커다란 빛의 결정 두 개를 수중에 끌어당겨 가져가버렸다. 그것은 수하의 괴물들이 모은 어떤 힘. 펜던트에서 들리는 대답에는 탄식이 섞여 있었다. “음, 용의주도한 놈이지만, ……뭐, 이 ‘미스테스’의 안에 든 것이 더 위험성이 더 높으니, 이걸 넘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봐야지. 토벌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소녀는 끄덕이며 오른쪽 검지로 하늘 쪽을 찔렀다. 빛이 사방에서 터지자 유지는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 버렸다. 땅바닥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던, 마치 사람들의 잔영 같았던 작은 등불이 신기루처럼 피어올라 사람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일순 안심한 유지였지만, 막대기처럼 선 그들의 가슴속에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과 같은 등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는 것을 보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 등불은 처음 괴물에게 습격당했을 때 타오르던 불길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 때는 몸 전체를 감쌌는데 지금은 저렇게 작다니……. 마치 괴물에게 빨려 들어간 만큼 줄어버린 것 같아……?’ 돌연 유지의 몸을 오한이 꿰뚫고 지나갔다. ‘……뭐지?’ 자신의 상상이 왠지 터무니없는 파국의 끝에 닿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그런 유지는 안중에도 없는 듯 펜던트와 대화를 했다. “‘토치’ 는 이걸로 됐어. 고치는 데 몇 개 쓸게.” “음……, 그나저나 어지간히 먹어치웠군.” “놈들의 주인이 꽤나 대식가인가본데.” 말하는 사이에 몇 명인가가 다시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었다. 꺼지기 직전의 반딧불처럼 된 그 등불은 허공을 유영하다 소녀가 내민 손끝에 머물렀다. 순간 등불은 일제히 터져 무수한 불꽃이 되었다. 그 불꽃은 아지랑이의 벽에 둘러싸인 이 공간 안에 떠올라 산산이 흩어졌다. 괴물과 소녀에 의해 파괴된 곳에 이르자, 불꽃은 갖고 있던 온기를 불어넣듯 옅은 광채를 띠며 퍼져갔다. “아…….” 유지의 눈앞에서, 옅은 광채가 머물렀던 장소가 소리 없이 비디오가 되감기듯 천천히 부서지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깨진 보도블록의 균열이 희미해지고, 부서진 쇼윈도가 저절로 붙고, 무너진 아케이드가 들려올라가고, 꺾인 가로등이 쭉 뻗었다. 검게 그을린 흔적과 뿌옇게 낀 연기조차 사라져간다. 복구가 끝나자 광채가 사라지고 점점 원래대로 돌아간다. 이 공간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가슴에 등불이 켜져 있다는 것 외에는. 소녀의 손끝에서 불꽃으로 변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 외에는. 이윽고 복구가 완전히 끝났다. 그것은 불과 10초 정도. 소녀가 천천히 말했다. “끝.” 엄청난 빛과 충격이 일어났다. “으악……?!” 유지는 갑자기 혼잡한 인파 속에 휘말렸다. 무심코 감고 있던 눈을 떠보니, 그것엔 피처럼 붉은 석양에 물든 번화가와 소란스러운 인파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아지랑이의 벽도, 발치에 그려졌던 불길의 문장도 전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이변이 일어나기 전으로 완전히 돌아간 것일까. ‘…….아냐.’ 유지는 그 차이를 또렷이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그 기묘한 장소에 둘러싸였던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약한 등불이 켜져 있었다. 소녀의 손끝에서 불꽃이 된 사람들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가슴속에 등불이 보인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인 양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냐, 모르는 거야……. 아까 일어났던 일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도 전부.’ 이윽고 가슴에 등불이 켠 사람들은 어딘가 기운이 없는 발걸음으로 인파 속에 흩어져갔다. 불러 세우지도 못하고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유지는 자신의 앞에 아직 소녀가 서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 확인이나 경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소녀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달아올랐던 철이 식은 것처럼 어느 새 윤기 흐르는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함이 있지만 일단은 보통 인간으로 보였다. 그렇게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던 유지는 그때에야 자신만이 주변의 인파들로부터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차……!” 당황해서 일어서자, 시야엔 번화가를 메운 인파의 전경이 들어왔다. 그 안에는 약한 등불을 품은 인간이 몇 명 섞여 있었다. 등불의 크기나 거리는 상관없다. 그냥 느껴진다. 그중 한 사람, 머리가 하얀 샐러리맨 같은 남자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까 습격당한 사람이 아니야……. 안에 등불이 있지만 본인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 분명한 이 세상에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가 넘치고 있어 유지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해답을 알고 있는 소녀가 눈앞에 있다. 있지만. “……저, 저기 아까의, 아니, 지금도 그렇지만.” 유지는 눈앞에 서 있는, 자신의 가슴팍 정도밖에 오지 않는 소녀에게 횡설수설하며 말을 건넸다. 그리고 몇 번이나 그랬듯 또 다시 무시당했다. 소녀는 눈앞에 있는데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쯤 되니 유지도 발끈한 데다 불안한 마음도 가세하여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다. “야, 잠깐. 윽?!” 어깨에 닿기 전에 손목을 붙잡혔다. 가볍게 쥐었을 뿐인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은 뜻밖에 바이스 같은 힘으로 유지의 팔을 눌러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소녀가 마침내 유지와 얼굴을 맞대고 말했다. “시끄러워 죽겠군.” 마치 고장 난 라디오를 보는 듯한 차가운 얼굴이었다. 상대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 아니 그런 것 따윈 처음부터 없다고 인식하는 것처럼, “이거 없애버릴까.” “무슨……?!” 유지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소녀가 진심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주 조금 전, 인형에게 자신의 내부를 낚아채였을 때처럼 이상한 공포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기다려.” 펜던트로부터 제지의 소리가 날아왔다. “함부로 ‘미스테스’를 열어서는 안 돼. ‘천목일개’ 때 있었던 소동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소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유지의 손을 놓았다. “그야 알고는 있지만 이게 아까부터 좀 시끄러워야지.” “사실을 가르쳐주면 되지 않는가. 그럼 이것도 잠잠해질 것이다.” “너, 너희들 아까부터 사람을 이것, 이것 하고, 물건처럼……!!” 함부로 말하는 그들의 말투에 발끈한 유지는 빨개진 손의 흔적을 문지르며 덤볐다. 소녀는 갑자기 냉담하게 말했다. “넌 사람이 아니야. 물건이야.” “뭐……?” 말을 잃은 유지에게 소녀는 잘 들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진짜 ‘인간이었던 너’는 ‘홍세의 무리’에게 존재를 먹히고 이미 사라졌어. 너는 그 존재의 소멸이 세상에 미치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남겨진 대체품인 ‘토치’란 말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유지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식 한구석에서 그 말의 의미를 냉정하게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뭔가 기분 나쁜 실감이 엄습해온다. 머릿속에서 말들이 빙빙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홍세의 무리, 괴물, 사라졌다, 무엇이, 존재, 무엇의, 진짜, 누구의, 대체품, 내가……?’ 이번엔 펜던트가 말했다. “우리들은 가호에 의해 복구된 지금이라면, 그 가짜 몸을 만든 ‘존재의 힘’이 가슴속에 등불로 보일 것이다. 그거야말로 네가 인간의 몸이 아닌, 존재의 남은 찌꺼기라는 가장 큰 증거다.” 펜던트(?)가 말한 대로였다. 보인다. 자신의 가슴속에서 깜박깜박 흔들리는 등불이. ‘……등불……, 존재의 힘……?’ 뱃속 깊숙이 차가운 감촉이 끓어오른다. 그들이 말하는 의미가 서서히 이해가 가려고 한다. ‘내가 사라졌다고? 아까 그 괴물들한테 먹혀, 나는 찌꺼기, 대체품……, 물건……?’ 이상한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없었던 일로 치기엔 너무나 생생한 체험이었기에 그들의 말 또한 너무나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쐐기를 박으려는 듯 소녀가 말을 이었다. “주변에 줄지어 걷고 있는 것들이 보이지? 그들도 모두 먹힌 뒤의 찌꺼기들이야. 이 주변에 아까처럼 ‘존재의 힘’을 모아 먹어치우는 ‘홍세의 무리’ 중 한 명이 있는 거야. ‘진짜 너’ 역시 그 희생자란 소리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야. 전 세계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 유지는 소녀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하고 말았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가 그를 남겨두고 걷기 시작했다. “기, 기다려!” 그 정도의 일에 허둥대고 만다. 마치 자기만 남겨두고 앞서가는 엄마를 뒤쫓는 어린애처럼 유지는 뒤를 쫓아갔다. “하, 하지만 그 홍세인지 뭔지 하는 괴물이 날뛴단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자그마한 몸집이지만 큰 보폭으로 걷기 때문에 소녀의 걸음은 빨랐다. 유지는 당혹감 때문에 꼬이려 하는 발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쫓아갔다. “당연하지. 너도 봉절이라는 테두리를 봤겠지?” “그, 그 주변에 있었던 빨간 아지랑이의 벽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정확히는 그 벽 안의 공간을 말해. 그 곳은 세상의 흐름, 인과에서 일시적으로 풀려나기 때문에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 없어. 더욱이 ‘존재 그 자체’를 먹으니까 먹힌 인간은 없었던 것이 돼. 자취 따윈 남지 않아.” “그런…….” 소녀가 걸음을 멈췄다. 유지가 무겁게 고개를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드니 그 곳은 붕어빵 가게 앞이었다. 소녀는 점원에게 핫플레이트 위에 있는 분량을 전부 달라고 했다. 봉지에 담아주는 것을 기다리면서 세상사를 이야기하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냥 먹어치우면 느닷없이 존재의 공백이 생겨버린 세계는 뒤틀리게 돼. 그러니까 먹힌 인간의 대체품인 토치를 배치하여 공백을 메워지는 충격을 완화하는 거야.” 소녀는 붕어빵으로 가득한 봉지를 받아 든다. 점원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돈을 치르고 거스름돈을 받는다. 묘하게 익숙해 보여, 붙임성은 없어 보여도 건방져 보이진 않는다. “봐.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 토치가 보이지? 저렇게 해서 먹힌 자 대신 주변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을 한동안 유지하다 마침내는 그 존재감을 조금씩 잃어가는 거야. 내부의 등불이 완전히 연소되면 모두에게 잊혀져……. 아아, 마침 딱 좋다.” 소녀가 비어 있는 손으로 가리켰다. “지금 정면에서 걸어오는 토치, 너한테는 보이지?” 인파 속에 섞여 힘없이 걷고 있는 인상이 희미한 중년 남자. 그 가슴속에는 작은 등불이 있다. “저 약한 등불의 사람……, 아…….” 불현듯 등불이 꺼져버렸다. 다 타버린 것이다. 남자도 어느 새 사라져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남자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주변을 걷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 신경 쓰지 않았다. 유지도 듣지 않았다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남자의 존재감은 옅었다. 그래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인간이 지금 확실히 사라졌다. “저, 저것이 다 타버린다는 거야……?” “응.” 소녀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또 걷기 시작했다. 봉지에서 붕어빵을 꺼낸다. 그 옆을 잰걸음으로 나란히 가던 유지는 소녀가 말한, 토치가 된 사람을 찾는다. 서른 명에 한 명 정도일까……. 군중 속에서 약한 등불을 안에 담근 그 ‘인간의 대체품’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눈에 띄었다. “!” 바라보는 가운데 또 한 사람의 등불이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누군가가 사라졌다. 인파는 변함없이 흘러간다. 이것이 자신이 살고 있던, 자신이 모르고 지내오던 세계의 진짜 모습……? 인파는 변함없이 흘러간다. 잡아먹힌 사람들의 남은 찌꺼기가 부표처럼 떠다니다 언젠가 사라지는 세계……? 인파는 변함없이 흘러간다. 유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닥쳐오는 실감과 공포, 그리고 진실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는 듯. “저 사람들이 전부 잡아먹힌 거란 말이야……? 아까 그 괴물들에게……. 이건 너무해.” 붕어빵을 볼이 불룩해질 정도로 입에 넣은 소녀 대신 펜던트가 대답했다. “그렇지도 않네. 우리들 ‘홍세의 무리’ 중에도, 이 세상의 존재를 마구 먹어치워 세상의 조화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우리들의 세계 ‘홍세’에도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위기감을 느끼는 자들이 다수 있네.” “우리들 당신들도 그 홍센지 뭔지 하는…… 괴물과 동족이란 말이야?” 유지는 그제야 펜던트 그 자체가 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납득할 수는 없었다). “네가 만난 것은 ‘린네’라는, 우리들 ‘무리’의 부하에 불과한 존재지만. 글쎄, 그렇다면 그렇겠지.” “어쨌든 그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존재의 ‘난획자’를 찾아내 죽이는 사명을 지닌 것이 우리들 ‘플레임헤이즈’란 거야. 알겠어?” 그 플레임헤이즈 소녀는 가볍게 확인하더니 또 붕어빵을 입 안 가득 물었다. 맛있는지, 살짝 미소를 머금으니 보이는 대로의 앳된 얼굴이 된다. 유지는 소녀가 말한, 거의 황당무계하다고 해도 좋을 설명을 억지로라도 이해했다고 치고 핵심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핵심으로. 어느 새 뱃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차가운 것……, 공포가 말을 가로막는다. “……너, 너희들, 날……, 나를 ‘미스테스’라고 불렀지?” 잘도 기억하네 하고 조금 감탄한 소녀는 가볍게 대답한다. “‘홍세의 무리’가 이 세상에서 만든 보구나, 힘 그 자체를 안에 넣은 토치를 말하는 거야.” 토치를 말한다고……? 유지는 파국을 느낀다. “그 토치가 완전히 타버리면 속에 든 보구는 다른 토치 속으로 랜덤하게 이동해. 말하자면 ‘움직이는 보물 창고’라고나 할까. 너는 운 나쁘게 발각되어 그 알맹이가 공격의 표적이 된 거야.” 토치. 이 소녀는 그것을 뭐라고 설명했던가. 고동 소리가 높아져간다. <너는 사람이 아니야. 물건이야.> 톱니가 맞물려가듯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입장이, 존재가 형태를 이루어간다. 그들의 설명이 비로소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진짜 ‘인간이었던 너’는 ‘홍세의 무리’에게 존재를 먹히고 이미 죽었어.> 가슴이 아프다. <너는 존재의 소멸이 세상에 미치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놓인 대체품.> 숨이 막혔다. <잡아먹힌 자 대신 주변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을 유지하면서 그 존재감이 조금씩 잃어간다. 안의 등불이 꺼질 때에는 모든 이에게 잊혀져…….> 목소리가 떨린다. “그럼, 그, 그럼 나는…….” 유지는 얼어붙은 듯 우뚝 섰다. 소녀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고 유지를 본다.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너는 그냥 본인의 찌꺼기, 타들어가는 존재일 뿐이야.” 충격. 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아득하고 큰 공포와 외로움. 그것은 세상 전부가 뿌리째 흔들리는 듯한, 혹은 세상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듯한 압도적인 상실감이었다. “다 타서 꺼져버리면 보구도 다음 토치로 이동해. 너에 대해 갖고 있던 타인의 기억도, 네가 해온 일도, 관여한 흔적도 전부 없어져. 존재가 없어지니까.” 그 ‘진실’은 그에게는 사형 선고, 아니 ‘지금 자신이 있다는 사실’. 그 모든 근간의 붕괴였다. “설마.” 말이 끊기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이곳으로부터,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도망갈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자신들이 있는 장소가 번화가를 포함한 시가지와, 그 건너편의 주택가를 잇는 대철교의 보도라는 것도 지금에야 깨달았다. 두 사람이 우뚝 서 있어도 정체하는 일 없이 인파는 보도 위를 지나갔고, 사람들은 엇갈려 지나간다. “하지만.” 토치가 그중에 있었다. 가슴속에 등불을 품은 인간의 대체품이 있다. 남자였다, 여자였다, 노인이었다, 어린아이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무거운 고개를 돌려 야경을 보자, 거리의 불빛이 섞여 그들에게만 보이는 무수한 등불이 조그맣게, 그러나 왠지 또렷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펼쳐지고 있다. 언젠가 전부 타버릴 등불이, 자신과 같은 자들이 배회하고 있는 세상이. “하지만!” 유지는 그 모든 것에 반발했다. 소녀의 짜증스러운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알고도 남는, 의미 없는 반발. 그래도 반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니, 사카이 유지라는 인간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내가 ‘아 그렇군요.’이렇게 대답을 할 리가 없잖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단지 그것뿐. “하지만 아까 내 몸은 다쳤어!” “살아 있는 몸이라면 치명상이었겠지.” 소녀가 즉각 대답했다. 유지는 말문이 막혔지만 그래도 또 반발했다. “기억도 있어!” “본인의 찌꺼기니까 당연해.” 유지는 필사적으로 찾았다. 자신을 증명할 것, 아니 자신이 ‘살아 있는 사카이 유지’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 그게 뭐지? 어디에 있는 거지? 어떻게 보여주지? “…….” 눈앞의 소녀는 기다리고 있다. “……···.” 자신이 그것을 보여주기를. “………….” 혹은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납득하기를. “…………···.” 없다 없었다.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다. 토치라는 엄연한 진실이 바로 옆을 스쳐간다. 무력감이 전신을 감싼다. 다시 물어본다. “내가……, 사카이 유지가 이미 죽었다고?” “그래” 한 번 더 확인한다. “다 타버리면 사라져? ……내가?” “그래.” 최후의 저항은 미약했다. “꿈이 아닌 거야?” “현실일 뿐이야.” 소녀는 가차 없이 대답했다. “…….” “단, 너는 아직 등불이 밝으니까 의식이나 존재감이 한동안은 보통 인간과 다름없을 거야.” 소녀의 말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은, 아니 사카이 유지는 이미 죽은 것이다. 고작 그 정도의 보장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지금의 자신에게, 사카이 유지에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무력감에 휩싸인 유지는 다리 난간에 힘없이 기댔다. 야경에 섞인 토치의 등불. 자신의 가슴에도 똑같은 것이 있다. “이게 현실이라고?” 괴물이 침투하고, 사람이 먹히고,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세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릴 자신. “그건…… 너무 지독해.” 유지의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비탄에, 소녀는 역시나 가차 없이 대답했다. “원래 그런 거야.” 다음 날, 기분 나쁠 정도로 밝은 아침 햇살 속에서 유지는 눈을 떴다. 먼저 몽롱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잠옷 대용의 트레이닝복을 입은 자신. ‘이것이 꿈이길……’ 하고 빌면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주저주저하며 가슴을 본다. 안에 켜져 있는 등불이 보였다.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는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하아.” 끝내는 깊은 한숨을 쉰다. 등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제 소녀가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그러나 확실히 떠오르는 강한 목소리 <현실일 뿐이야.> “……현실…….” 본인의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렇다. 이것은 현실이다. 유지는 어제 일을 돌이켜보았다. 망연히 서 있는 사이에 소녀는 사라져버렸다. 유지는 조마조마한 마음과 괴물에 대한 공포심에 허둥지둥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왔지만, 그러고 나서 본 자신의 가슴에 등불이 안 보이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당황했던 것도 웃기는 일이야.’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그건 ‘자신이 사카이 유지의 찌꺼기라는 증거’니까. 어쩌면 일단 실감하게 되면, 아무리 비참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지탱하는 요소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어쨌든 현실은 금세 실망과 함께 돌아왔다. 시선에 힘을 준 순간, 가슴의 등불이 보인 것이다. 유지는 그 때 느꼈다. 추측이 아닌 확실한 느낌이었다. 등불은 언제나 자신의 가슴속에서 타고 있다. 단지 주시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이다. 새로운 눈이 하나 생긴 것처럼, 보려고 생각하자 비로소 이 등불은 눈에 비쳤다. ‘아아, 그래. 어제 그렇게 확인했었지.’ 유지는 스스로 이 감각을 어제 밤새 몇 번이나 시험해서 대략 파악한 요점을 잠에서 막 깬 몽롱한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소녀가 말한,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믿어지지 않는 현실. 고민이나 곤경 따위로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자신은 사카이 유지의 찌꺼기로서 절망에 빠져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인가?’ 어제는 분명히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희미해져서 아무 생각도 안 난다. 한숨 잔 것만으로도 어제 일은 어제 일이라고 마음이 멋대로 정리해버린 것인가.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 자포자기해버린 걸까. 다른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존재에 관한 문제인데 너무 속 편하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 말도 이케가 했었지. 은근히 요령이 좋은 자신의 정신 구조가 그렇게 만드는 걸까. ‘……잠깐?’ 불현듯 더 근본적인 위화감이 있음을 깨달았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진짜 사카이 유지’로서 괴로워했어.’ 예전의 살아 있던, 괴물에게 먹히기 전의 ‘진짜 사카이 유지’라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그 존재가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 ‘지금의 나’는 뭐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지?’ 남은 찌꺼기인 자신은. “…….” 문득 유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자신이 몹시 메마른 인간(이라고? 아냐, 잠깐, 잠깐)처럼 느껴져 착잡해졌다. “……그만두자.” 이런 상황에 처해서도 긍정적으로 살아갈 만큼 강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자학하는 취미도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면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런 유지의 생각에 대답하듯 아래층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지, 일어나야지?!” 유지는 시계를 본다. 평소라면 거실에 내려가 있을 시간을 10분은 넘기고 있었다. “우왓,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그때까지의 사안은 어디론가 팽개쳐버리고 계단을 황급히 뛰어 내려간다. 아침 시간은 여유가 없다. 침대 위에서 꼼지락대는 시간, 아침밥을 먹는 시간, 편의점에서 계산을 기다리는 시간, 학교 앞 큰길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유지의 머릿속에는 수업 시작의 종을 제한 시간으로 삼은 치밀한 스케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스케줄의 정체는 곧 지각으로 이어진다. 달려 내려간 거실에는 텔레비전을 보니, 언제나 아침을 먹으며 보았던 스포츠 뉴스도 이미 끝난 뒤였다. 여유가 없다. 보름 전까지 탁상난로였던 거실 식탁 위에 밥과 된장국, 김과 달걀 프라이라는 소박한 정통파 아침 식사가 2인분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니와 자신의 몫이다. 사카이 유지네 집은 3인 가족이지만 아버지인 칸타로는 해외에 파견근무중이기 때문에 엄마인 치구사가 긍지 높은 전업 주부로서 가정을 지키고 있다. 유지가 슬라이딩하듯 식탁에 앉아 밥을 퍼먹자, 치구사가 거실에 들어왔다. 조간신문과 우유를 가지러 나갔던 모양이다. “웬일이니, 우리 유지가 늦잠을 다 자고.” “응, 그러게요.” 유지는 조간과 우유를 식탁에 내려놓는 어머니 치구사의 선량한 미소 띤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어제도 확인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한다. 토치가 아니다. 엄마는 인간이었다. 안심과 더불어,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슴을 옥죄는 듯한 서글픔이 밀려든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부모님은 어떻게 되실까. 갑자기 아이가 없던 것이 되어버리는 두 사람은. 자신을 키워온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대한 서글픔과 죄송함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죽음’보다는 슬픔을 뒤에 남기지 않는 만큼 ‘사라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것을 슬프게 여기는 건 결국 나 자신뿐이니까. ‘역시 나는 메마른 사람인가.’ 아니, 그래도 두 사람을 위해서는, 두 사람의 재출발을 위해서는 쓸데없는 슬픔 따윈 없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행복한 두 사람은 학창 시절 결혼했으니 아직 젊다 자신이 사라지면 홀가분해진 엄마는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니? 학교 갈 시간이야.” “네? ……아?!” 몹시도 비관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던 유지는 치구사의 말에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치구사의 말대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아니었다. “잘 먹었습니다!” 유지는 반도 채 못 먹은 아침 식사를 남기고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할 수 없다. 오늘은 늘 점심을 사는 편의점에서 아침밥을 조달해야겠다고 아침 스케줄을 살짝 조정하며, 유지는 교복 재킷을 받쳐 입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젯밤 자기 전에 다음 날의 채비를 해둔 자신의 꼼꼼함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감사한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렴.”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집을 나섰다. 이 정도의 일이, 별것도 아닌 일이 왜 이렇게 슬픈 것일까. “…….” 유지는 완전히 메마르지 못한 스스로를 느끼며 조금 마음을 놓았다. 부질없는 안도였다. 그런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유지가 사는 미사키 시는 현 내에서도 제법 큰 도시로 꽤 전형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시의 중앙을 가르며 남북으로 흐르는 마나 강의 동쪽은 도시기능이 집중된 시가지, 서쪽은 주택가로, 그 사이를 철로 만들어진 미사키 대교가 연결하고 있는 형태이다. 개학을 한 지 막 한 달이 지난 시립 미사키 고교는 그 서쪽 주택가 안에 있다. 집에서 도보로 20분쯤 걸리는 가까운 거리지만, 혼잡한 주택가 안에 세워진 탓에 부지에 여유가 없어서 자전거 통학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유지도 일단은 그 규칙은 지키는 터라 도보로 통학하고 있다. 늘 다니던 통학로도 오늘만큼은 다르게 보인다. 정확히는 달라져버린 자신에게 그 실체가 보이게 된 것이지만. 자신과 같은, 언젠가 다 타버려서 잊혀져버릴 운명의 사람들, 토치가 가슴속에 등불을 품고 각각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걸어가면서 주의 깊게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를 공통된 분위기가 토치들에게서 느껴졌다. 등불의 명암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했다. 그런 가운데, 불꽃의 색이 옅어져 꺼져버릴 듯한 ‘특히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언젠가 문득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잊혀져…… 없어지는 것이다. 어제 본 것처럼,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 지금 가방을 멘 초등학생 네 명이 유지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제각각 떠들며 텔레비전 주인공의 이야기로 열을 올린다. “근데 변신할 때 이것저것 달라서 곤경에 빠졌지?” “맞아. 가면이나 물고기.” “응.” “적 쪽도 재미있었어.” 그 안에 맞장구만 치고 마는, 약한 등불을 품은 소년 토치가 한 명 섞여 있다. 역시나 존재감이 희박한 얌전한 아이다. 그것이…… 다 타올라 휙 꺼져버렸다. “……앗!”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주변을 걷는 사람들은 물론 다른 세 명조차 모르고 있다. 여전히 즐거운 듯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는 토치라는 것을 알고 있던 유지조차 극히 미미한 위화감밖에 느끼지 못했다. 소년은 무심결에 완전히 없어져버린 것이다. 존재감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이 이러한 것일까. 그래도 세상은 흘러가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저렇게 덧없이 사라졌을까. 나도 언젠가 저렇게 사라져 버릴까. 생각하는 유지의 몸속으로 시린 한기가 달렸다. ‘그렇지만…….’ 어제 소녀의 말로는, 그 괴물들은 이 거리에서 많은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했다. 어제도 한 명ㅡ아니, 한 개라고 해야 할까ㅡ놓쳤단다. 그 괴물이나 그 주인……, 요컨대 그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괴물이 지금도 어디에선가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세계 각지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섬뜩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유지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어젯밤도, 오늘 아침도 엄마가 무시해서 안도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그것은 지금부터 확인하러갈 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습격당해서 자신 같은 토치 신세가 될지 모르는 것이다. 위기감이 가슴을 옥죄어오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사실이 일깨워졌을 뿐, 자신은 무력한 일반인이다. 어제의 소녀와 같은 놀라운 힘 따윈 갖고 있지 않다. ‘나 역시 괴물의 표적이 된 것 같지만 딱히 손을 쓸 수 있는 것도 없고……, 내 몸 역시…….’ 어제의 사건을 기억해본다. 지혜나 용기로 저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지킬 수 없을 거야……. 그 애가 놈들을 얼른 퇴치해주길 비는 수밖에 없는 건가.’ 너무나 한심한 이야기지만 소녀를 말한 대로였다. <원래 그런 거야.> 결국 그런 건가. 절망이나 공포보다 무력감이 앞선다. ‘그러고 보니 그 애는 지금 어디선가 싸우고 있을까?’ 걸어가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려보지만 눈에 비치는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통학 및 통근하는 인파. 다면 토치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그 군중 속을 걸어가며, 고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1개월간 붙은 습관으로, 유지는 도로변에 다닥다닥 늘어선 여행사 간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델이 쓰고 있는 밀짚모자, 나도 새 모자를 사자. 여행, 골든 위크에 어딘가 가자. 그러고 보니 조만간 시험이 잇댔지. 이케한테 범위를 묻고, 아아, 녀석이 빌려달라던 CD 까먹었다……. 덧없이 흘러가는 대수롭지 않은 생각. 흡사 도피처럼, 아주 잠깐 동안 일상에 잠겨 있던 유지였다. 그런 유지의 안식은 포스터 앞을 지나가던 정장 차림의 여성, 그 가슴속의 등불에 의해 가차 없이 박살나버렸다. “!” 유지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떠올리고 망연히 멈춰 섰다. “……어떻게 하지?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돼……?” 2. 저녁, 비 내리는 밤, 그리고 아침 유지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기 반인 미사키 고교 1학년 2반 교실에 들어갔다. 수업 시작 직전의 정신 사납고 왁자지껄하지만 명랑함과 즐거움이 넘치는 아침의 교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의 풍경 유지는 교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중학교 때부터의 친구이자 두뇌 명석한 인격자인 ‘안경맨’ 이케 하야토의 모습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학급 임원을 맡고 있다 보니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일쑤여서 어디 나가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매일 아침의 습관일 뿐, 그에게 상담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다. 제대로 된 머리를 가진 인간이 지금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차라리 누군가가 ’네게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전부가 망상이고, 이상한 건 네 쪽이야‘라고 말해준다면 쓸데없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도 편하련만.’ 유지는 비관적인 생각에 잠겨 교실 한 가운데에 있는 자기 자리로 느릿느릿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자리에 앉아, ‘그러고 보니 1교시 일본사, 쪽지 시험이 있다고 했는데……. 범위가 어디까지였더라.’ 일상을 보내기 위한 필요성에 의해 이런 생각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늘 그렇듯 옆자리에 앉아 있는 히라이 유카리에게 출제 범위를 가르쳐달라고 하기 위해 돌아본다. 그리고 발견했다. “헉……!” 자신이 제정신이란 완벽한 증명을. 일상의 파괴자를. 히라이 유카리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늦었네.” 플레임헤이즈 소녀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늠름한 얼굴,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진 길고 윤기 있는 머리칼, 당당하게 편 가슴에 교복인 세일러복 차림의……, 그 플레임헤이즈 소녀가 앉아 있었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아라스톨과 얘기해보니까, 널 노리는 놈들을 낚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 주변에 있는 편이 좋겠더라고 뭐, 나도 이런 장소에는 좀처럼 온 적 없으니까 구경도 겸해서.” 소녀가 치마 속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아주 당연하다는 듯 점거하고 있는 그 곳은 어제까지 히라이 유카리라는 친구가 앉았던 자리. “히, 히라이 유카리는 어떻게 한 거야?” “여기 있던 토치라면 이젠 없어. 네 옆자리라 마침 잘됐기도 하고.” “……토치……, 히라이가··?” 예상하고 있던 최악의 사태는 너무나 어이없이 다가왔다. 자신의 일상이 부서지는……, 아니 이미 부서졌음을 일깨워준다. 그것을 일깨운 소녀는 어제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태연한 얼굴로 비정한 말을 내뱉는다. “그래, 본인은 이미 예전에 죽었어. 그 남은 찌꺼기에 나라는 존재가 들어와 ‘히라이 유카리’가 된 거야.” “하지만 얼굴도 완전히 다르다고!” 유지의 목소리는 어느 새 거칠어져 있었다. 놀란 반 아이들이 주시하자 당황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 있는 거야.” “존재에 들어간다는 건 원래의 인간을 흉내 낸다든가 하는 게 아니야. 남들이 인식하고 있던 히라이 유카리라는 존재를 나로 교체하는 것이지. 너는 우리들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 히라이는 어떻게 된 거냐고!” 정말이지 하고 소녀는 고개를 긁적이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아까부터 누누이 말하잖아. 히라이 유카리는 나라고.” 소녀가 말하는 대로 반 아이들은 아무도 이단자가 잠입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깨닫기는커녕 그녀가 원래 여기 있던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유지의 설명의 상세한 내용까진 모른다 해도, 그녀가 한 일들의 의미는 대체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런 말이 아니야!! 원래의 히라이, 정말로 어제까지 여기 앉아 있던 ‘히라이 유카리’는 어떻게 됐느냐고?!” 또 큰 소리를 질러버린 유지를……, 교체된 히라이 유카리가 아닌 유지 쪽을 아이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유지는 그들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이상한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알고 있던 그녀는, 그녀의 존재는……. “어제 설명했잖아. 여기 앉아 있던 히라이 유카리는 원래부터 없었다고. 어차피 등불도 얼마 안 가 꺼질 거였고 그 때는 너도 잊어버렸을 거야. 괴로워할 필요 없어.” “…….” 특별히 친한 것은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고 얌전했다. 4월부터 한 달간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던, 그냥 그뿐인 반 친구였다. 기억에 남는 추억도 없다. ‘하지만 그 애는, 히라이 유카리는 분명히 있었어.’ 그 사실을 본인이 기억해주길 바랬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럴 생각을 할 만큼의 사정도 알지 못한 채 다른 토치가 사라지듯,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고 그런 종말을 맞았던 것이다. 그래도 유지는 그녀를 기억해주고 싶었다. 지금 같은 자리에 히라이 유카리로서 앉아 있는 소녀. 그것은 그녀가 아니다. 그것을 자신은 알고 있다. 그것이 두렵게도 그녀가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라니. “……네 이름이 뭐야?” “이름?” “‘플레임헤이즈’란 건 괴물을 퇴치하는 자의 통칭이잖아. 너 개인의 이름은 뭐야?” “……어.” 뜻밖의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소녀의 얼굴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늠름하게 보이던 얼굴에,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착각처럼 얼핏 비친다. 가슴에 늘어뜨린 소리 나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작은 소리로 대답한다. “난 이 아라스톨과 계약한 플레임헤이즈, 그뿐이야. 달리 이름은 없어.” 표정에서 쓸쓸함은 사라졌지만 지금까지의 의연함과는 조금 다르다. 표정을 없앤 얼굴이었다. “다른 플레임헤이즈와 구별하기 위해 ‘니에토노노샤나의 것’이라고 부르게 하고는 있지만.” “니에토노노샤나……?” “‘니에토노노샤나’. 내가 갖고 있는 칼의 이름이야.” “그래. 그럼…… 좋아 난 너를 ‘샤나’라고 부를게.” 히라이 유카리는 그녀와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 그것은 유지에게 있어서 중요한 행위였지만, 당연하다고 할까, 이제 막 샤나라는 이름이 붙은 소녀에게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알아서 해.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고, 나는 내 역할만 다 하면 되니까.” “그건 나를 지키는 것?” “지켜……?” 샤나는 노골적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널 먹어치우려는 녀석이 있는 동안은 그렇게 될 수도 있겠네.” 소녀의 말은 언제나 인정사정없었다. 유지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 자신의 어둡고 무거운 고민이 씻겨나가는 듯한 불합리한 후련함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객기라고도 봐야 할 심정으로 유지는 지금 당장 떠오른 불안을 입에 담는다. “그나저나 샤나, 넌 수업 같은 거 받아도 괜찮은 거야?” 샤나는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이마를 찌푸렸다. “멋대로 이름을 붙이더니 이젠 다짜고짜 부르는구나? 하긴 별 상관은 없지···. 그리고 수업이란 것도 놀이에 불과한 걸?”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고 펄럭펄럭 흔들어 보였다. 겉보기엔 중학생도 될까 말까 해 보이는 소녀의 비웃는 듯한 모습에 유지는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예비종이 불길한 음색을 울렸다. 4교시 째 영어 수업도 막판에 접어들고 있었다. 교실은 정적과 긴장 속에 있었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세워 그 안에 얼굴을 묻고 있다. 영어 교사도 처음에만 평소대로 진도를 나갔을 뿐, 지금은 무작정 칠판에 필기만 계속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박력과 존재감으로 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작은 몸집의 소녀가 교실의 한가운데 자리에 진을 치고 있다. 실제로는 앉아 있는 것뿐이지만. 소녀는 교과서를 덮고 필기도 무시한 채 그냥 팔짱을 끼고 교사를 보고 있었다. 일견 별것 아니어 보이는 이 태도는 교사를 동요시키고 있었다. 마치 야생 동물이라도 관찰하는 듯한 노골적인 그녀의 시선에 경의감이나 존경심 따위는 털끝만큼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업 태도를 아침부터 4시간 내내 취하고 있다. 덧붙여 소동은 이미 3시간째 계속 일어나고 있다. 특별히 시비를 걸고 나서는 것도 아니기에 내버려두었으면 좋았으련만, 무릇 교사란 이들은 권위나 체면에 얽매여 무조건적인 신임을 받고자 하는 생물이기에, 그런 자신을 일개 인간으로 재는 듯한 태도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끝내는 이 영어 교사도 앞서의 세 사람과 같이 소녀의 무례한 태도가 참을 수 없어졌다. 불행하게도. 필기를 마치고 영어 교사는 뒤돌아봤다. 서툰 수업과 엄청난 숙제로 인기 없는 이 중년 남자는 입을 두 번 정도 뻐끔거리더니 이윽고 목청이 뒤집힌 새된 소리를 냈다. “히, 히라이, 너 요즘 태도가 불량해. 필기는 안 하냐?” 히라이 유카리……. 유지가 이름 붙인 소녀 샤나는 대답 없이 그냥 말한다. “당신.” 다짜고짜 튀어나온 말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앳된 모습에 맞지 않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늠름한 표정이 조용한 기백을 발하며 영어 교사를 반쯤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괄호 채우는 문제는 완전히 무의미한 장소에 비어 있어. 퀴즈도 아닌데 앞뒤의 문맥으로 추리할 수 있는 자리를 비워놔야지.” 샤나는 팔짱조차 풀지 않았다. “뭐라고……?” “정답은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지만, 원문을 외우지 않았다면 맞힐 수 없어.” 완벽한 발음. 정답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그런 대답이었다. 더욱이 사정없는 일침이 가해졌다. “그 칠판 필기 내용도 단락으로 보면 뒷부분이 두 문장이나 부족해. 당신이 갖고 있는 참고서를 페이지 단위로 베껴 쓰니까 그런 꼴이 되는 거야.” 반론의 여지가 없는 통렬하고 정확한 지적에 영어 교사는 무심코 한 발 물러났다. 평소대로라면 사회적 신분이나 입장이라는, 자신의 능력과는 하등 관계없는 허식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겠지만, 최근 들어 왠지 건방져진 이 소녀 앞에서는 그런 것들이 털끝만큼의 위력도 갖지 못함을 자각하고 만다. 약자에게 약자임을 자각시키는 강자의 관록. 게다가 이 강자는 일단 말문을 열자 가차 없이 상대를 짓뭉개버린다. “당신, 명색이 교사인데 학식이 딸려서 참고서 이외엔 손도 안대고, 설명도 서툴러서 요점 없는 소리만 늘어놓을 뿐……. 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영어 교사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날 가르칠 생각이 있다면 제대로 공부하고 다시 와.” 학생들은 일말의 연민과 함께 영어 교사가 네 명 째의 희생양이 됐음을 깨달았다. 그런 일이 장장 네 시간이나 계속되었기에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숨을 돌리기ㅡ보다는 막힌 숨통을 틔우기ㅡ 위해 한 사람 또 한 사람 교실을 나가 결국 유지와 샤나 둘이서만 도시락을 먹는 신세가 되었다. 유지가 예상했던 소동은 폭력적인 면으로는 마이너스 방면으로 완벽하게 배신당했으나, 정신적은 면으로는 플러스 방면으로 완벽하게 배신당했다. 폭력에 반대하는 것보다 아이덴티티를 분석당하는 쪽이 더 실질적인 데미지는 큰 법이기에, 어쩌면 이것은 참극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하고 유지는 생각했다. ‘몇 명이나 재기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작금의 교사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권위나 신뢰를 ‘대부분 스스로의 행위로’ 잃어버리고 있는데··· 등, 사회적 문제를 개탄해보면서 편의점 주먹밥을 먹는 유지였다. 옆자리를 보니 참극을 일으킨 당사자도 멜론 빵을 우물거리고 있다. 몹시 맛있는지, 자연스레 떠오르는 무방비한 표정에는 겉으로 보이는 연령에 걸맞은 귀여움이 엿보였다. 책상 위에 있는 슈퍼 봉지의 엄청난 크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기.” “왜?” 바깥은 소란스러운데 교실 안에는 두 사람뿐, 그런 미묘하게 위화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유지는 말한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었잖아.” 샤나는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 “……아냐. 됐어.” 샤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멜론 빵을 입에 가져갔다. 어제 괴물을 압도하던 모습이 거짓말 같은,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 유지는 의욕이나 심각함이 푹 주저앉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도 붕어빵을 먹더니……, 너도 배는 고픈가보네?” “응, 당연하지.” 불룩한 뺨을 하고 샤나는 대답한다. 유지는 내친김에 어제부터 마음에 걸리던 점을 물어봤다. “그런데 말이야……, 그 소리 나는 펜던트는 통신기야?” “비슷하지만 다른 거지.” 세일러복의 가슴팍에 늘어뜨려진 펜던트에서 오전 중엔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대답했다. 여기는 두 사람밖에 없으니까 틀림없을 것이다. “이건 이 아이의 몸 안에 머무르는 ‘홍세의 무리’인 내가 의사만을 이 세상에 표현하는 ‘코큐토스’라는 신기이다.” “……몸 안에 머무르는? 표현?” 샤나가 곁눈질로 힐끔 보고 설명을 덧붙인다. “아라스톨 본인은 계약자인 내 안에 있고, 이 펜던트는 그 의사를 겉으로 드러내는 장치야.” 유지는 불가사의한 일에 이치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묻고 싶은 것을 묻는다. “계약자……,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이 사람(?)과 계약해서 플레임헤이즈가 됐다고 했지? 너도 원래는 인간이었던 거야?” “그래.” 샤나는 대답했다. “어쩌다 플레임헤이즈가 된 거야?” “네가 알 바 아냐.” 그것은 이름을 물었을 때와는 다른 단호하고 명쾌한 거부 의사였다. 유지는 그런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오히려 개운함을 느꼈다. 그래도 거부당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럼.” 문득 교실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어서 아라스톨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으니 잘됐다. “다른 얘기라도 괜찮으니까···, 자세한 얘기를 물어봐도 될까?” 유지로서는 특별히 깊은 뜻을 갖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단지 산더미 같은 의문을 하나씩 풀어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샤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까부터 묻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 뭔데?” 우선 유지는 근본적인 것부터 물어본다. “홍세라는 게 뭐야?” 겨우 그거? 라는 듯한 표정으로 샤나는 멜론 빵의 마지막 한입을 입에 넣었다. “음, ‘홍세’…… ‘붉은 세계’를 말하는 거야. 이 세상에선 걸어서 갈수 없는 이웃. 아주 먼 옛날 어떤 시인이 ‘소용돌이치는 가람’에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였어. 거기 사는 사람을 ‘홍세의 무리’라고 불러.” “이차원의 사람 같은 건가?” 이 의문에는 아라스톨이 대답했다. “너희 세상의 개념으로 표현하면 그런 셈이지. 널 습격한 것은 ‘무리’ 본인이 아니라 그 녀석이 이쪽에 만든 ‘린네’라는 부하라네.” “이쪽 세계를 약탈하러 온 침략자라고 봐야 하나?” “글쎄, 목적은 각각 다르지. 딱 부러지게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 다만 우리들 ‘홍세의 무리’는 이 세상에 있는 ‘존재의 힘’을 ‘자유자재’로 조종함으로써 모습을 나타내고, 또 그것을 변질시켜 그것의 상태를 좌우할 수 있네. 그 사실 때문에 이 세상에 침입하는 ‘무리’는 점점 빠져들고 마는 거지.” “……뭐라고?” 아라스톨의 말은 너무 어렵다. 유지는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샤나는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엔 한숨을 쉬면서. “이 세상에는 ‘존재의 힘’이라는 근원적인 에너지 같은 게 있어. 그게 있어야 비로소 어떤 것이든 존재할 수 있는 거야. 다른 세계인 ‘홍세’로부터 온,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 ‘무리’들은 그 힘을 빼앗아야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야. 이해가 가?” “어, 대, 대충은.” 관자돌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필사적으로 이해하려는 유지를 보고 끄덕이더니 샤나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존재의 힘’을 끊임없이 사용해야만 해. 그래서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그 힘을 모으는 거야.” “‘존재의 힘’을 모은다는 건 어제 있었던 그런 일 같은……?” 어제의 괴물이 사람들을 불꽃으로 만들어 먹어치우는 광경이 떠올라 유지는 소름이 돋았다. 샤나는 태연하게 끄덕인다. “응. 그래서 각각의 목적이나 목표를 위해 그 힘을 자유자재로 조종해서 불가사의한 사건을 일으키거나 부하를 만들거나 하는 것이지.” “이 세상의 이치로부터 벗어난, 일어날 수 없는 현상, 있을 수 없는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들을 일기 위한 힘의 난획이 세상과 ‘홍세’, 양계 전체의 조화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고 했거늘……. 실로 어리석은 유희일 뿐이야.” 아라스톨이 예상 밖의 위험하고 무거운 이야기로 말을 맺었다. 그러나 샤나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봉지 안에서 꺼낸 한 팩 3개들이 경단을 우물거리고 있다.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맛있는 듯 했다. “그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난획자를 해치우는 것이 플레임헤이즈인가…….” 유지는 말하면서 주먹밥을 한 개 더 입에 가져간다. 아까 돋은 소름에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지만 눈앞에 샤나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방긋방긋 웃으며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진지하지 못한 태도에 화가 치민 건지 단순한 저항심인지, 이쪽도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이런 게 살아가는 건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깊이 잠기며 다시 묻는다. “쩝, 근데 그 ‘존재의 힘’을 빨아들이는 것은……, 듣자하니 다른 거였어도 곤란하긴 하겠지만, 꼭 인간이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아라스톨은 뭔가를 먹으며 이야기해도 거슬리지 않는 모양이다. 변함없이 무겁고 낮은 음성으로 대답한다. “당연하다. 우리들과 가까운, 깊고 강한 의지가 있는 존재여야만 힘을 얻는 의미가 있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면 오히려 존재가 희미해질 뿐이다.” “가깝다고? ‘홍세의 무리’란 우리들 같은 인간이란 말이야?” “너희들의 개념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워. 만약 표현한다면 논리보다는 감수성이 필요하겠지. 유지는 스포츠 음료의 마개를 따며 한숨을 쉰다. “흐음……. 하지만 어제오늘 본 바로는 전부 먹어치우는 날도 머지않은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아. 우리들은 옛날부터 끊임없이 이 세상에 침입해 왔지만 인간은 불어나고 있어.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은 그렇게 움직여왔다네. 많은 변화는 없을 거야. ‘무리’의 폭주를 막기 위해 우리들 플레임헤이즈라는 존재가 있으니까.” “그게 도움이 될까?” 유지의 눈앞에서 마지막 한 꼬치를 깨끗하게 먹어치운 샤나가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빨고 있다 “음, 그러니까 말했잖아. 보구가 들어있는 너라는 ‘미스테스’가 완전히 연소하든가, 그걸 노리는 이곳의 ‘무리’를 해치우든가 할 때까지는 지켜주겠다고.” 정말로 이 소녀는 인정사정없다. 악의 없는 오로지 사실만으로 부딪쳐오는 그 솔직함에 유지는 왠지 익숙해져가는 스스로를 느낀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씁쓸함이 밀려온다. “믿음직스럽긴 한데……, 그렇다고 하루 종일 같이 있을 거야?” “일단은 저녁을 경계할 거야.” 주위 세계와의 연결을 일시적으로 끊는 인과 고립 공간 ‘봉절’은 통상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낮과 어둠속에서 또 다른 자신에 눈떠 연기하는 밤, 그 경계인 저녁과 새벽……, 요컨대 변하려 하는 불안정함을 틈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습격도 대략 이 시간대에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홍세의 무리’는 불의의 습격 같은 교활한 짓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봉절……, 어제 들었었지. 게임에 흔히 나오는 결계 같은 건가? 근데 저녁?!” 유지는 설명을 이해하던 중, 어떤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늘은 수업이 늦게까지 있어! 자칫하면 학교로 올 수도 있잖아!” 샤나가 불룩해진 뺨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야 당연하지. 내가 뭣 때문에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일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문득 그녀의 성격에 생각이 미쳤다. “다 지켜주는…… 거야?” “뭐?” 유지는 일어섰다. “어디 가?” “화장실!” 쏘아붙이듯 대답하고 교실을 나선다. 걸어가면서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먹기만’ 하는 걸까. 다소 음흉한 상상을 하던 유지는 화장실 앞에서 누군가에게 불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야, 사카이…….” 그 ‘소리 죽인 외침’ 이라는 재주 좋은 부름에 뒤돌아보니 친한 반 친구 세 명이 그를 손짓하며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샤나와 옥신각신하는 통에 그들과는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다. 유지는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다들 오늘은 식당에서 먹었어?” 그중 한 사람인, 중학교 때부터의 친구로 머리도 성격도 좋은 안경맨 이케 하야토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나저나 사카이, 너 그런 소동이 있었는데도 잘도 그 장본인이랑 밥을 먹는구나.” 그 옆에서 미라는 접두사가 붙어도 손색이 없을 용모를 가졌으면서도 묘하게 경박한 소년 사토 케이사쿠가 말을 이었다. “진짜 겁 없는 놈이야. 까딱하면 너까지 선생님들한테 찍한다고.” “니들이 그렇게 사이가 좋았었냐? 추월하는 건 용서 못해. 용서 못 한다고~.” 하고 죄어오는 것은 타나카 에이타. 덩치는 크지만 애교 만점이라 난폭해 보이진 않는다. “아니, 사이좋고 뭐 그런 게 아니고…….” 유지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털어놓는 건 죽어도 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크윽.’ 유지는 문득 이 친한 친구들을ㅡ눈앞에 있는 일상의 광경이 진짜인지 아닌지를ㅡ아침엔 한 번 확인했는데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그런 자신이 싫어진다. 친구들에게 변화는 없다. 오히려 변한 것은 자신이고, 그들은 그것을 묻는다. “둘이서 도시락 까먹고 이야기했으면 충분히 ‘그런 거’잖아.” “히라이도 귀엽다면 귀엽지만, 뭐랄까. 마니악한 취향이긴 해.” “실은 로리타 취향이었던 거 아니야? 이 음흉한 자식.” 슬슬 혈압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봐…….” 받아치려다 문득 말이 끊겼다. 저녁. ‘홍세의 무리’. 습격. 어제부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온 탓일까, 아니면 토치의 확인을 할 때마다 습관이 된 것일까. 고립된 세상의 일을 떠올린다. 조퇴를 해야 하나. 그러면 적어도 여기가 싸움터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 미묘한 공백이 친구들의 오해를 부추겼다. “역시 찔리는 게 있어.” 이케가 안경알을 번뜩이며 다그친다. 이제 와 비로소 눈뜬 소중한 것. “저런 애한테 대시할 수 있는 신경을 보건대 나 부탁할 것이 있어. 부탁이니까 다른 여자들한테 다리 좀 놔주라.” 사토가 진지한 얼굴로 낯 두꺼운 간청을 한다. 아무 의미 없는 바보 같은 대화. 일상.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 잃고 싶지 않은, 변하지 않길 바라는 것. ‘괴물 역시 어제오늘 연속으로 오진 않겠지?’ 유지는 미련에서 오는 희망적 관측에 매달렸다. ‘그래. 앞당기는 수고도 있는데 오늘 꼭 올 거란 보장이 어디 있어. 오늘 하루 정도는…….’ 그런 것은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하고 싶었다. “이 자식이! 얌전한 얼굴로 대체 어떤 수법을 쓴 거야?! 가르쳐줘!!” 우선은 꽁꽁 얽혀오는 타나카에게 한 방 먹였다. 그러나 적은 왔다. 드문드문한 안개 저편으로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이 모든 것을 적막한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학급 회의를 마치고 삼삼오오 교실을 나서던 하생들까지 물들이는 그 붉은 빛. 그 빛이 홍수처럼 넘쳐 올라 공간을 채워간다. “헉?!” 수업이 끝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다고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유지는 경악하고 말았다.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아지랑이의 벽이 창밖과 복도 일부를 포함하여 주변 일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닥에 불붙은 선이 달리며 문장 같은 기괴한 문자열을 그렸다. 학생들은 움직이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은 듯 정지했다. 유지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봉절……. 세상이 바뀐다…….’ 전신을 뒤흔드는 세계의 위화감, 혹은 고요한 흐름의 이탈과도 같은 감각에 소름이 끼쳤다. 역시 자신은 다른 학생들처럼 정지하지 않는다. 이 세계 안에 서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무언가’ 때문에. 옆자리에서 샤나가 천천히 일어나 말했다. “왔어.” 강한 선을 그리는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저, 정말로, 지금 여기에?!” 미련이 불러일으키고 만 최악의 사태. 유지의 가슴에 공포와 후회가 밀러왔다. “정말로, 지금, 여기에 왔어.” 샤나는 그런 유지의 무자각을 단죄하고 흡사 쐐기를 박듯 강하게 선고한다. “자, 간다.” 샤나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 창과 유지 사이에 있는 책상 위로 뛰어올랐다. 발을 어깨 폭 정도로 벌리고 당당히 창을 마주보며 선다. 허리 아래까지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가 살짝 나부꼈다. 그리고 불꽃을 흩뿌리며 새빨갛게 타올랐다. 그 흐드러지게 흩뿌려지는 불꽃 너머에 어느새 낡고 검은 코트를 걸치고 오른손에 전율의 미가 흐르는 대검 ‘니에토노노사냐’를 쥔 플레임헤이즈의 모습이 있었다. 순간 그 뒷모습에 멍해진 유지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외웠다. “아, 아직 아이들이 있어! 다른 장소에서 하면 안 될까?!” 봉절 안에서 정지한 학생들 중에 이케도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교과서가 아닌 문제집을 가방에 넣고 있는 모습으로 정지해 있다. “봉절을 만든 것은 적이야. 그놈들한테 얘기해보시지?” “샤나의 말은 언제나 가차 없다. 그러나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정확함을 담고 있다. “크윽!!” 이미 그런 그녀에게 익숙해진 유지는 어차피 헛수고로 끝날 반항 따윈 접어둔 채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마네킹처럼 굳어진 친구들을 샤나의 예상 행동반경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내 탓이야! 내가 해야만 해!’ 학급 회의가 끝난 행복한 시간이어서 그런지(내친김에 샤나로부터 한시바삐 도망치고자 하는 이유도 있고), 교실 안에 남아있는 사람은 유지와 샤나 외에 네 명 정도, 샤나가 마주하고 있는 창가에는 나카무라인가 했던 여학생 한 사람밖에 없었다. 유지는 창가에서 화장 도중에 멈춰버린 나카무라에게 다가갔다. “시, 실례할게.” 입술을 쭉 내민 꽤 민망한 모습으로 정지한 그녀의 허리를 재빨리 끌어안는다. 바닥에 발이 붙어있으면 어떡하지 하고 잠시 걱정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무게는 본인의 체중만큼 실리고 있었다. 물론 보통의 체력밖에 없는 유지는 들어 올렸다가 업었다가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영차, 으, 무거워!” 본인이 들으면 두세 번은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 감상을 쏟아내며 복도 쪽 벽의 그늘 아래 내려놓는다. 다실 교실로 돌아와 보니 샤나는 아직 책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대검을 양 손으로 꼭 쥐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었다. 불꽃은 붉은 머리에서 흩뿌려지고 있을 뿐. 그 뼈가 시릴 정도의 정적 속에서 샤나가 마주한 정면, 창밖으로 점 하나 정도의 무언가가 조그맣게 떠올랐다. 유지는 그 기묘한 것에 시선을 모으며 멈춰 서 있었다. 일렁이며 붉게 타오르는 아지랑이의 빛을 받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번쩍이는 그것은 장방형의 물체. 빙그르르 돌자 눈에 들어오는 무늬는 스페이드의 에이스. ‘……트럼프?’ 허공에 뜬 한 장의 얇은 카드에서 있을 수 없는 두 장 째가 팔랑 떨어졌다. 뒤이어 석 장, 넉 장……. 붉은 빛 속에서 카드가 차례차례 떨어져 내렸다가 다시 떠올라 점점 불어난다. 무질서하게 허공을 휘젓는 그것은 이윽고 속도를 올려 창밖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돌연 그 카드의 궤도가 한 방향으로 달려들었다. 유지에게로. 구름처럼 몰린 카드가 노도와 같이 밀어닥쳐 창틀과 유리, 벽까지 부수고 교실로 쏟아져 들어온다. “헉.” 비명과 함께 터져 나와야 할 공기가 채 기도를 통과하기 전에, 그것은 유지의 눈앞까지 덮쳐왔다. 그러나 저지되었다. “아악……?!” 낡은 검은 색의 벽에. 샤나가 왼팔을 휘둘러 펼친 코트 자락이 유지를 지키는 방패가 된 것이다. 그 표면에 꽂힌 카드의 물결은 코트 자락에 닿자마자 타올라 안에는 한 점의 흠집도 남기지 않는다. 그 사이 이미 샤나의 왼팔은 다시 칼자루로 돌아가, 칼자루 장식을 왼쪽 옆구리의 안으로 넣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를 조금 앞으로 내민 돌격 준비 자세. 불꽃처럼 타오르는 새빨간 두 눈동자가 카드의 물결, 그 힘의 근원을 꿰뚫어보았다. 순간, 상판이 산산이 쪼개지고, 파이프 다리가 부러져 튕겨나갈 정도로 책상을 힘껏 박찬 샤나는 그 반동으로 도약한다. 카드가 휘몰아치는 한 지점에 대검의 칼끝이 박힌다. “키익, 크아아아아악!” 찢어지는 절규가 허공을 가르며 카드의 흐름이 크게 흔들렸다. 손아귀로 전해지는 반동과 칼이 박히는 감각을 느낀 샤나는 대검을 비틀어 뽑는다. 다시 날카롭게 머리 위로 쳐들어 일각의 틈도 두지 않고 정면에서 베어 내렸다. 칼의 궤적을 따라 화염이 달리더니 순식간에 카드에 옮겨 붙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교실이 순간 부풀어오르는 듯 하더니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샤나는 그 폭발을 정면에서 받아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코트의 벽에 가려진 유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염이 넘쳐 유지는 무심결에 벌떡 일어났다. “으으, 악!” 폭풍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코트 자락의 벽이 거두어졌다. 이윽고 유지의 시야에 교실의 전경이 들어왔다. 바닥은 까맣게 그을렸고 마루도 반쯤 벗겨져 콘크리트 바닥에 드러나 있었다. 유리창은 전부 깨지고 날아갔으며 책상과 의자의 파편이 무참히 흩어져 있었다. 유지는 이곳이 자신이 잘 아는 장소인 것만으로도 어제 번화가에서 광경을 보았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광경의 저편에 샤나가 있다. 그 정도의 폭발이 있었음에도 상처 하나 없는데다 여전히 가냘픈 몸으로 거만하게 우뚝 서 있다. 앞으로 살짝 내민 대검의 끝에는 어떤 물건, 혹은 어떤 자가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어제 샤나가 칼로 내리칠 때 도망가던 조잡한 인형이었다. ‘분명 ‘린네’던가 뭔가 하는 ‘홍세의 무리’의 부하……?’ 어깻죽지부터 가슴까지 깊은 칼자국이 생긴 그 인형은 꼬챙이에 꿰인 개구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배에는 처음 질렀던 절규의 원인과 결과로 보이는 다른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안의 솜도 들여다보이는 벌어진 상처 입구에서는 희뿌옇게 튀는 불꽃이 분출하는 피를 연상시킨다. “크, 으…….” 빨간 실로 꿰매놓은 입이 기이하게도 낮은 신음 소리를 낸다. 샤나가 그 인형에게 뭔가 말하려다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아까까지 탁탁 튀던 희뿌연 불꽃이 지면에 떨어져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불꽃은 쏟아지는 동안 점점 그 양이 많아져 그녀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한다. “으, 크, 크크……!” 어느 새 신음이 웃음소리로 바뀐 인형의 상처 입구에서 느닷없이 대량의 불꽃이 분출되었다. 입자 하나하나가 셀룰로이드 인형의 머리로 변해 인형의 전신에 붙는다. 그 머리들이 모여 일그러진 거구를 순식간에 만들어간다. 주변에 튀고 있던 불꽃도 마찬가지로 셀룰로이드 인형의 머리로 변해 쿡쿡 웃고 있다. 으스스한 포위망이 점점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이상한 광경에 뒷걸음질 치며 벽에 붙은 유지는 눈길을 돌리다 교실 구석에 내동댕이쳐있는 친구들을 발견하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남학생 세 명이 아까의 폭풍에 휩쓸려 날아가 교실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 군데군데 검게 탄 몸은 전신이 유리 파편 투성으로 의자나 책상의 잔해에 맞거나 찔려 있었다. 그 참혹한 모습에 유지는 충격을 입었다. 샤나에게 보호받고 있지만, 그 상태만으로도 무력한 자신의 몸에는 여유가 없어서 다른 데까지 눈을 돌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안일했어! 내 생각이, 전부, 내가!’ 후회가, 죄책감이 그를 밀어붙여 움직이게 했다. “이케!” 쓰러져 있는 아이들 중 하나인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쿠, 키키키…….” 셀룰로이드 인형의 머리로 만들어진 거구의 중심에서 인형이 웃었다. 그 두꺼운 양 팔이 샤나의 대검을 꽉 붙잡고 꼼짝 못하게 한다. “내가 접수하지, 플레임헤이즈!” 그 외침이 터지자, 포위망을 만들고 잇던 인형의 머리가 순식간에 거대한 팔을 형성하여 이케에게 달려가는 유지에게로 향한다. “무엇을?” 샤나는 태연하게 대답하고 양 발끝을 축으로 빙글 돌아 다리를 편다. 붉은 두 눈이 빛을 발하며 흐르고, 붉은 머리가 불꽃을 날리며 나부낀다. 몸을 한껏 틀어 인형에게 등을 돌린다. 동시에 엄청난 기세의 도약이 흉하게 드러나 콘크리트 바닥에 파괴 직전의 충격과 화염의 파문을 펼친다. “하?” 인형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돌연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샤나가 인형의 거구를 통째로 안아 올려 도약하고 있었다. “야압!!” 샤나가 우렁차게 외치며 칼을 붙잡고 있던 인형의 거구로 유지를 덮치려던 팔을 때려 부쉈다. 일격으로 거대한 팔이, 거구가 폭발해 흩어졌다. “?” 영문도 모르고 쓰러져 있는 이케의 몸 위를 ‘보호하려던 것이 아니라 위치상 어떡하다보니’ 덮어 감싼 유지의 등을 폭풍이 때렸다. 마비와 통증이 희미해지고 시야가 흔들리는 듯한 아득한 감각이 몇 초인가, 몇 십초 인가……. 이윽고 의식이 선명해져 돌아본 유지의 눈앞에는 누더기로 변한 인형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으아아!!” 유지는 이케를 등 뒤에 숨기며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인형은 털실 머리카락이 두피부터 숯덩이가 되었고 단추 눈도 한쪽이 깨져 있었다. 옷은 고사하고 몸 안의 솜까지 거의 밖으로 비어져 나와 피부색 펠트로 된 사지를 겨우 늘어뜨리고 있을 뿐. “처, 처참하군…….” 참혹한 인형의 모습을 보고 유지는 무심코 감상을 내 뱉었다. “구해줬더니 무슨 소리야.” 간단히 대답한 샤나는 검을 가볍게 흔들어 그 참혹한 모습의 인형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싸늘하게 묻는다. “네 주인의 이름은?” 인형은 실밥이 터진 빨간 입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이 아니라, 음이 튀는 CD처럼 뚝뚝 끊어지는 소리로 대답했다. “내, 가 대답, 할, 줄 아느, 냐, 플, 레임, 헤이, 즈.” “그냥 확인해봤어. 하지만 쓸모없는 패를 내놓기 아까워할 정도니까 아무래도 바보가 틀림없어.” “……으, 윽.” 인형은 노골적인 조롱에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 때. “우후후, 유익한 세력 정찰이라고 해주면 안 될까?” 라고 기묘한 울림을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나가 말한 순간, 유지는 그 의미하는 바를 알아채고 몸을 돌려 그곳을 본다. 그 끝, 파괴되어 뻥 뚫린 창밖에 키가 큰 남자 한 사람이 단정하게 떠 있었다. 등지고 선 붉은 석양에 조금도 물들지 않는 새하얀 정장과 그 위에 걸친 역시 새하얀 장의가 마치 시트로 된 괴물 같은 흐릿한 인상을 준다. 샤나의 압도적인 존재감과는 정반대인, 마치 환상 속에 사는 사람처럼. “안녕, 꼬마. 황혼에 어울리는 만남이로군.” 만지면 윤곽이 흐트러질 듯한 선이 고운 미남.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조율이 잘못된 현악기처럼 묘한 운율을 띠고 있었다. 유지는 직감했다. ‘이 녀석이 ‘홍세의 무리’ 다.’ 여기 존재하는 자체가 이상한, 그런 위화감의 결정체. 샤나가 그 남자의 음성과는 정반대로 씩씩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당신이 주인?” “그렇다. ‘프리아그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아라스톨이 소리를 낮춰 말한다. “프리아그네……? 그렇군. 플레임헤이즈를 죽이는 ‘헌터’인가.” 자신을 프리아그네라고 밝힌 남자는 얇은 절단면 같은 입술을 웃는 형태로 구부렸다. “죽인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본래는 이 세상에 흩어진 ‘홍세의 무리’의 보물을 모으기 때문에 ‘헌터’라는 이름이 붙었으니까.” 그 시선이 샤나의 가슴에 걸린 펜던트 ‘코큐토스’를 꿰뚫는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우리들이, ‘홍세의 무리’에 명성을 떨치는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이군.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인가. 이쪽 세계에 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당신의 ‘플레임헤이즈’도 처음 만나는군.” 뒤이어 샤나에게 눈길을 돌린다. “이것이 당신의 계약자 ‘염발작안의 토벌자’인가. 과연 명불허전의 아름다움이군. 하지만 지나치게 눈부신걸.” 제멋대로인 감상을 늘어놓는 프리아그네를 내버려두고 아라스톨은 소리 죽여 샤나의 주의를 환기 시켰다. “나긋나긋해 보이는 외모나 언동에 넘어가지 마라. 다수의 보구를 구사하고, 플레임헤이즈를 몇 사람이나 도륙한 강력한 ‘왕’이다.” “응. 느껴져.” 샤나는 발을 살짝 끌면서 파고들 태세를 갖춘다. “후후, 그렇게 인상 쓸 필요는 없을 텐데…….” 프리아그네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쳐진 인형을 바라본다. 그 순간. “마리안느!!” 갑자기 표정이 비통함으로 물들이며 목청이 뒤집힌 듯한 새된 외침이 메아리쳤다. “아아, 미안하구나, 나의 마리안느! 이런 무서운 아이와 싸우게 만들었다니.” 연기하는 듯한 동작으로 흔드는 손에 끼워진 새하얀 장갑 끝에 한 장의 카드가 끼어 있었다. 핑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카드가 떠올랐다. “응?” “앗?!” 샤나와 유지의 주변에 널려 있던 검게 탄 카드가 일제히 공중에 떠올랐다. 그 그을린 카드가 바람을 일으키며 프리아그네의 손끝에 떠오른 카드로 모여 들어간다. 전부 다 들어가고 나니 한 장이 된 카드는 4 분의 3 정도가 불에 타 소실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프리아그네는 또 감탄하는 표정이 되었다. “호오, 나의 자랑인 ‘레귤러샤프’를 완력만으로 이렇게까지 줄이다니.” 다시 손끝으로 소실된 카드를 잡더니, 능숙한 마술사와 같은 유려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소매 안쪽으로 미끄러뜨리며 집어넣었다. 다른 한 손에는 너덜너덜해진 인형 마리안느가 어느 새 다정하게 안겨 있었다. 프리아그네는 금세 또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사랑하는 인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아, 이런, 이런, 플레임헤이즈는 언제나 무자비한 짓을 하는구나.” 마리안느가 실밥이 터진 입가를 달싹이며 사과한다. “죄, 죄송합, 니다, 주, 인, 님.” “사과하지 마렴, 마리안느. 너를 보낸 내가 나빠. 설마 검 한 자루로 이렇게나 참혹한 일에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단다.” 프리아그네는 이번엔 과도하게 상냥한 웃음을 띠더니 후 하고 마리안느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어제의 유지처럼 마리안느도 순간 희뿌연 빛 속에서 타올랐다. 그리고 원래의 낡아빠진 인형의 모습을 되찾았다. “자아, 이걸로 원상 복귀. 익숙지 않은 보구 따위를 쓰게 해서 미안해.” 프리아그네는 마리안느를 껴안고 고양이를 달래는 듯한 쇳소리 섞인 목소리를 내며 뺨을 비빈다. 뺨이 맞닿은 채 마리안느가 살풋 촉촉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과분하신 말씀이세요. 주인님……. 하지만 지금은.” 프리아그네는 마리안느에게 응 하고 달콤하게 대답하더니, 그제야 비로소 샤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번엔 표정이 편하지 않는다. 웃음 띤 얼굴. “우후후, 어제와 오늘 일로 알았다. 너는 플레임헤이즈 주제에 불꽃을 제대로 방출할 수 없는 모양이더군. 싸우는 모양새가 너무 조잡스러워.” 샤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뭐라고?” “그래도 ‘천양의 겁화’와의 계약자라고 해서 어떤 힘이 있을까 경계했었는데……. 제법 명검으로 보이는 그 검의 힘을 빌어서 겨우 내부의 불꽃을 불러내는 정도라니. 내 말이 틀린가? 보구를 보는 내 안목은 꽤나 확실하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 샤나가 묵묵부답으로 내키지 않는 듯 긍정하자 프리아그네의 웃음은 더욱 깊어졌다. 아라스톨이 다시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과연, ‘린네’를 먼저 보내 상대하게 한 것은 우리들의 힘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는가? 소문대로 지겨운 방식으로 사냥을 하는군.” 이 빈정거림에도 프리아그네의 미소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아니, 어제 한 싸움의 전말을 듣고 더 이상의 위험은 없다고 판단했는데? 오늘 상황을 보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노파심에서일 뿐이야. 나의 마리안느가 원한 바이기도 했고 말야.” “어제의 치욕을 씻고자 했는데……, 도리어 추태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후후후, 그러니까 이제 괜찮다고 말했잖니?” 고개를 떨군 인형의 머리에 가볍게 키스를 해 보인다. “과연 검 한 자루로 이렇게까지 해낼 줄은 몰랐지만, 그래봤자 여기까지가 한계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의 내부에 들어가 답답하기 그지없을 텐데 계약자까지 빈약하다니, 너의 ‘왕’으로서의 힘도 실로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가 아닌가. 후, 후후후” “……빈약한지 아닌지 보여주도록 하지.” 샤나가 붉은 눈을 이글거리며 자세를 취했지만 프리아그네는 난데없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떼쓰는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억지로 싸움을 걸겠다는 건가? 뭘 모르는 아이군……. 나는 그렇게 발끈한 플레임헤이즈가 자신의 힘을 폭주 시키다 폭사하는 것을 몇 번이나 봐왔어. 그렇게 돼서 저기 있는 ‘미스테스’가 보구째 부서져버린다면 나의 본업인 ‘헌터’로써도 본말전도가 아닌가.” 프리아그네는 또 표정을 바꿔 옅은 웃음을 지으며 유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고……, 조금 더 손쉬운 상황을 만든 뒤에 기회를 엿보기로 하지.” 유지라는 존재가 아닌, 유지라는 보구를 감춘 ‘미스테스’를, 유지의 안에 든 보구를 구멍이 뚫어져라 강렬한 욕망을 담아 본다. 유지는 그 비정한 시선에 오싹해졌다. “그 안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후후, 기대되는 걸…….” 그 희뿌연 모습과 묘하게 들뜬 목소리가 등 뒤에 펼쳐진 아지랑이 벽의 일렁거림에 섞여 녹아 들어간다. 그 일렁거림에 눈동자를 물들이고 있는 동안, 정신을 차려보니 프리아그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보통 ‘무리’가 아니었어. ‘왕’, 그것도 ‘헌터’ 프리아그네라니.” “흥.” 묵직한 음성으로 말하는 아라스톨에게 샤나는 짧은 코웃음으로 대답한다. 유지가 상처투성이인 이케를 안아 일으키며 물었다. “그놈이 ‘무리’야……?” 이 말엔 뾰로통해진 샤나 대신 아라스톨이 대답했다. “음 ‘홍세의 무리’ 중에서도 특히 강한 힘을 지닌 ‘왕’의 한 사람이다. 나처럼 인간의 내부에 존재를 봉하지 않고, 그 때문에 이 세상의 ‘존재의 힘’을 끊임없이 먹어치우며 양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난획자. 우리 플레임헤이즈의 적이다.” “‘왕’, ……괴물의 우두머리니까, 더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놈일 줄 알았는데.” “겉모양으로 판단해선 안 되네. 우리들은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에 샤나가 끼어들었다. “봉절 안을 고쳐야겠어. 그 녀석을 쓸게.” “응?” 샤나가 턱짓을 만신창이가 되어 유지의 팔에 안긴 이케를 가리키고 있었다. “쓴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녀석의 ‘존재의 힘’을 써서 봉절 안의 파괴된 곳을 고친다고.” “!” 유지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샤나가 몇 사람분의 토치를 불꽃으로 만들어 봉절 내부를 복구했던 것을. 그리고 그 사람들이 봉절이 풀린 뒤의 세상에서 사라졌던 것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유지는 당황하며 이케를 끌어안았다. “어, 어제, 토치가 된 사람들을 없애버린 것처럼 이케를 써먹겠다는 거야?!” 샤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 이곳엔 어제처럼 놈들이 먹다 남긴 토치가 없어. 그러니까 죽어가는 그 녀석을 써야 돼. 토치가 되기 전의 인간이라면 한 명으로 전부 고칠 수 있어. 내친김에 다른 인간의 상처도 낫게 하고, 그 녀석의 찌꺼기도 토치로 만들어 배치할 거야. 아무 문제없잖아.” “문제 아주 많아!! 이케가 나처럼 죽는다는 거잖아?!” “당연하지. 장작이 없으면 불은 타지 않아. 복구할 힘이 없으면 물건을 고칠 수 없어. 사람도 낫게 할 수 없어.” “크윽…….” 샤나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한다. 유지에게는 그 사실을 반박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알았어? 그 애가 친구라서 싫다면 다른 녀석을 써도 돼.” “그,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어쩌라는 거야? 부서진 채로, 상처투성인 채로 봉절을 풀란 말이야? 말해두는데, 지금의 인과 고립 상태를 풀어서 이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기 뒹굴고 있는 이 아이들은 100퍼센트 죽어.” 샤나는 역시 사실만을 말한다. 유지도 그녀의 논리가 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품에 안긴 이케의, 파편에 찢기고 불에 탄 상처는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심각했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중상일 것임에 틀림없다. 아니, 샤나의 말대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유지는 쓰러진 아이들 중에서 토치로 만들 인간을 도저히 고를 수가 없었다. 애당초 그들을 휘말려들게 한 것은 자신이다. 샤나의 말이 옳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옳고, 또한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 입을 꼭 다문 채 해결책을 찾고 있는 유지에게 어지간히 짜증이 난 샤나는, “그럼 말야.” 라고 놀리듯 말한다. “너 자신이라도 쓸래?” “뭐?” 샤나는 더욱 짓궂은 어조로 제안한다. “너의 남은 등불을 어느 정도 꺼뜨리면 물건도 사람도 고칠 수 있어. 물론 그만큼 너의 ‘존재의 힘’, ‘완전 연소할 때까지의 남은 시간’은 줄어들겠지만.” 유지는 그제안의 의미를 이해했지만 단번의 결정을 내렸다. “알겠어. 그렇게 하자.” “?!” 샤나는 놀랐다. 그리고 왠지 모를 분노를 느끼며 말했다. “아까는 막무가내로 억지를 쓰더니 의외로 간단히 결정하네.” 이 말엔 유지도 곧바로 대답했다. “간단할 리가 없잖아.” “그럼 왜 남은 존재와 시간을 일부러 버리는 거야?” 무심결에 다그치는 어조로 물었지만, 조용하면서도 강한 대답이 돌아온다. “이렇게 된 것은 내 책임이야. 그리고.” 샤나는 유지가 미소 짓는 것에 놀라며 그의 대답을 들었다. “버리는 게 아니야. 살리는 거야.” 그날 밤. 한밤중을 넘어 하늘에 소리 없이 밀려든 구름이 거리에 비의 장막을 드리우고 드문드문 켜진 등불을 흐릿하게 만든다. 그 한 구석, 사카이라는 문패를 단 지극히 평범한 주택의 지붕에 커다란 검은 우산이 하나 펴져 있다. “뭐야, 뭐야, 대체 뭐야. 저 ‘미스테스’는?!” 우산 밑에서 잔뜩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 때문에 흐릿해진 가로등 등불에 비쳐 어렴풋하게 떠오른 그 모습은 샤나였다. 세일러복 차림에 우산을 쓰고 얌전치 못한 책상다리 자세로 지붕 위에 앉아 있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샤나를 적시지 않고 전부 튀겨나가 서서히 말라간다. 그리고 그녀의 분노와 이 현상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타고 남은 잿불 주제에 건방지기는!” 봉절 안의 복구는 결국 유지의 희망에 따라 그 남은 불을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교실의 파손, 더불어 반 아이들의 상처와 옷은 일단 무사히 복원되었다. 일단이라 함은 최소한도로 빠듯한 양의 힘을 갖다 썼기 때문에 교실을 날림 공사한 것처럼 군데군데 흠이 남았고, 친구들에게도 얻어맞은 정도의 후유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본 유지는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유지의 그 미소가 지금 샤나의 심사를 꼬이게 만드는 것이다. “아, 정말, 진짜 웃긴, 아니 이상한, 아냐, 짜증나는, 그래, 짜증나는 녀석!” 화내는 음성에는 그녀답지 않게 푸념이나 투덜거림 같은 뒤틀린 울림이 섞여 있었다. 샤나는 돌아오는 길에도 유지를 따라왔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유지도 몇 번이나 말을 걸었지만, 그때마다 째려보는 샤나의 눈초리만 되돌아올 뿐이라 마침내는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집 앞에서 헤어질 때도 안녕 하고 인사하는 유지에게 음 하고 짧게 대답한 것은 아라스톨이었다. 그러고 나서 샤나는 곧장 지붕 위로 뛰어 올라와 프리아그네 일당의 습격을 대비해 망을 보고 있었다. 상황이나 상대의 성격으로 볼 때 거의 의미 없는 행위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그저 만일을 위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샤나는 지붕 위에 자리를 잡자마자, 그때까지 쌓고 있던 침묵의 벽이 무너진 것처럼 아라스톨에게 연신 불만을 터뜨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분통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 혹은 이성을 잃은 모습에 아라스톨은 마침내 불쌍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결국 그것은 네가 오랜만에 제대로 접한 인간이라는 말이지.” 예상치도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샤나는 속으로 놀라며 심히 당황했다. 그것을 감추려 더욱 냉정하게, 하지만 평소처럼 사실만을 똑바로 말한다. “그건 ‘미스테스’, 본인의 찌꺼기야.” 그 명확한 대답에 아라스톨은 음 하고 만족한 표시를 보였지만 그녀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건 인간으로서, 자기라는 존재로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찌꺼기라고. 그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아무것도 어떻게도, 무엇도 되지 않아. 그래, 되지 않는다고.” 아라스톨은 샤나의 완고한 대답에 어렴풋이 분노와 안타까움이 배어 있음을 알아챘다. 얼핏 듣기엔 냉혹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대답을 건넨다. “그 말이 맞아. 그러나 현실에는 다양한 면이 존재하지. 하나의 일에 하나의 현상만이 있다고 볼 수는 없어. 예외나 사고, 상상을 뛰어넘는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그렇지만 그것이 지금 생생하게 버티는 것도 아직은 ‘존재의 힘’에 여력이 있기 때문일 뿐이야. 언젠가는 그 사고 능력도, 의욕도, 존재감도 옅어져 다 타버릴 것이다.” 무겁고 깊은 아라스톨의 음성은 예상 밖에 타격이었으므로, 샤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흥, 그래봤자 프리아그네를 해치울 때까지만 버티면 돼.” 그때, 땡그랑 하고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샤나가 보니 지붕 끝자락에 철제로 된 뭔가가 삐죽 튀어나와있다. 사다리 끝이었다. 거기서 우산이 불쑥 나오더니 뒤이어 유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역시 있었구나.” 샤나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쏘아붙였다. “있음 안 돼?” 그 쌀쌀맞은 말투에 의외로 집념이 강하다고 느끼며 유지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거기 있으니까 마음이 영 편치 않아서.” “흥, 그거야 네 문제.” 잖아, 라고 말하려다 샤나는 깨달았다. “……너,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머리만 불쑥 내민 유지는 고개를 기울여 골똘히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글쎄, 뭐랄까……, 흐름 같은 거랄까. 오늘 있었던 봉절 같은 작은……, 그런 걸 느꼈어.” 아라스톨이 납득이 간다는 듯 말했다. “그런가. 그렇군. 그만한 힘이 발현되는 장소에 서 있었으니 알 수도 있겠지.” 대개는 그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힘을 소모하고 또 소비되어 가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이번엔 목만 내민 유지가 말한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히라이 유카리’잖아. 히라이 네 집은 내버려두고 이런 데 있어도 괜찮아?” 샤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 ‘히라이 유카리’ 행세를 하는 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고, 가족이 전부 먹혔던 모양인지 부모도 다 토치였어. 얼버무리는 것쯤 일도 아니야.” 괜한 참견을 했다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소식이었다. 더욱이 말하는 당사자는 자각도 없다. “그나저나 난 바쁘니까 볼일 다 봤으면 그만 가줘.” “바빠?” 보기엔 그냥 앉아 있을 뿐인데. “……그래?” 유지는 샤나의 목에 걸린 아라스톨에게 물어본다. ‘천양의 겁화’라는 위험천만한 이름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이세계의 ‘왕’은 말투나 태도가 차분해서 말하기가 편하다. “어려운 질문이로군.” 예스라는 거짓말도, 노라는 배신행위도 할 수 없다는 대답. 유지는 샤나를 배려하면서도, 유지에게 은밀히 대답을 하는 ‘왕’이 왠지 좋아질 것만 같았다. 그런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질문을 바꾼다(필연적으로 샤나의 항의는 기각된 꼴이 됐지만 역시 아라스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빗속에서 밤새도록 망을 본다고?” 샤나는 자신 이상으로 ‘틀릴 리가 없는’ 아라스톨에게 불만을 터뜨리지도 못하고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래. 놈들이 널 노리고 있으니까.” “흐음. 하지만 꼭 이런 데서……. 영차.” 유지는 위태로워 보이는 동작으로 지붕 위에 올라왔다. 무엇 때문인지 배낭을 메고 있다. 한 손엔 우산을 든 채, 젖은 기와 위를 기듯이 하며 신중하게 나아간다. 샤나의 앞까지 도착하자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털썩 앉았다. 그러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샤나도 다리를 포개어 바로 앉았다. 샤나의 가슴 위에서 아라스톨이 말한다.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응 하고 유지가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 유지는 말하면서 등에 멘 배낭을 내려 보온병을 꺼냈다. “……?” 샤나는 말없이 유지를 째려본다. 유지는 그 시선 속에서, 우산을 쓴 채로 재주 좋게 컵 겸용 뚜껑을 벗겨 내용물을 따랐다. 뜨거운 커피였다. 신경 써서 크림도 넣은. “자.” 온기가 스며 나오는 컵을 내민다.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어서 샤나는 하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따뜻하다. 단지 컵만이 아니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힘을 휘두를 때와는 달리 손과 손의 교차가 느껴지는, 진짜 오랜만에 포근한 온기였다. 샤나는 컵을 가까이 가져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그림자 밑에서 말한다. “그래서 뭐야? 이거 값어치만큼은 대답해주지.” 고맙다는 한 마디도 없었지만 유지는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강요라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응.” 유지는 의미 없는 대답을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마침내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똑똑히 들릴 정도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사라지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다고 했지?” “그래.” 샤나는 무정하게 단언했다. 유지는 언뜻 냉혹하게까지 보이는 샤나의 이런 솔직함을 자신이 후련하게 느끼는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이 소녀는 쓸데없이 위로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가식으로 본질을 감추거나 하지 않는다. 알고 싶은 것을 물으면 그 대답을 정화하게, 얼버무리지 않고 가르쳐준다. 자신은 그것을 후련하게, 또 기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배려가 아니란 말인가.’ 유지는ㅡ뭔가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ㅡ샤나와 나누는 대화에 의해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계속 비장함에 젖어있을 수 있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다. 물론 샤나의 그런 말투가 유지를 위한 것은 아니다(유지도 단언할 수 있다.). 단지 그녀는 배려 따위에 의미를 두지 않을 뿐. 하지만 유지는 결과적으로 부합되는 이 상황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신기한 느낌에 미소 지으며 유지는 다시 물었다. 솔직한 대답이 필요한 물음을. “그럼 샤나, 아라스톨, 너희들은 어때? 너희들도 날 점점 잊어가거나 느낄 수 없게 되는 거야?” 샤나의 입장에서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간단한 질문이었다. 이것도 다른 질문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대답해주면 되는 일이지만, 왠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아라스톨이 대답해주었다. “아니, 우리들은 너란 존재의 있는 그대로를, 사라져가는 과정을 전부 인식한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이기에 ‘존재의 힘’의 진폭이나 일어난 사건 그 자체를 감지할 수 있으니까.” “……그렇구나.” 샤나가 우산 그림자 밑에서 말한다. “그래. 하지만 결국엔 보통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 아래 묻혀갈 따름인 거야.” “나를 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샤나는 유지의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묘하게 찜찜한 그 확신을 얼버무리기 위해 말없이 커피를 입에 가져간다. “…….” 따뜻했다. 그러나, “설탕!” “분명히 넣었는데.” 유지는 이번엔 소리 내어 웃었다. 배낭 안에서 만일을 위해서 가져온 슈거 스틱을 꺼내며 묻는다. “근데, 밤새도록 이러고 있을 셈이야?” 샤나는 스틱을 세 개 집어 전부 넣는다. “그래. 앉아서 자는 건 이골이 났고,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아라스톨이 깨워…….” 휘저을 것이 없었다. 샤나는 서슴없이 요구했다. “숟가락.” “아.” 잊어버렸다. 요령이 좋긴 하지만 어딘가 빠진 구석이 있다. 이것이 ‘미묘하게’라는 말이 붙는 이유일까. 유지는 순간 가지러 돌아갈까 어쩔까 생각하다 왠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그러고 보니 왜 꼭 지붕 위에서 망을 봐야 되는 거야? 나한테 숨길 필요도 없는데.” “……안으로 들어오란 뜻이야?” 샤나는 우산을 쳐들고 유지를 째려본다. 익숙해질듯 하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밤새도록 비를 맞고 앉아 있는 여자애를 위에 두고 자는 건 확실히 숙면에 방해돼.” “내가 알 게 뭐야. 하지만…… 아라스톨?” “흠 확실히 뭔가를 지키는 그런 케이스는 지금까지 없었지.” “저기 ‘뭔가를’ 이 아니고 ‘누군가를’ 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유지도 헛된 저항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일단 말해본다. 물론 둘 다에게서, “아무렴 어때.” “그래 아무렴 어때.”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나저나 안에 들어가는 건 좋은데.” 샤나가 우산 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유지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 “이상한 짓 하면 죽을 줄 알아.” “그렇게까지 별난 취미 없, 악?!” 땡ㅡ하고 내용물이 든 컵이 얼굴에 명중하여 유지는 까딱하면 지붕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자, 잠깐!” 실제로 기다리라는 외침을 들은 쪽은 유지였지만, 일단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재 쓰는 사람 없이 비어 있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자려고 방을 나서려는 찰나 샤나와 아라스톨에게 제지당했다……, 아니 제지 명령을 받았다. 1층에 계신 어머니께 들키지 않도록 소리를 죽이며 최선을 다해 반항한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 한 방에서 같이 잔다고는 안 했잖아?!” 샤나가 침대 위에서 통통 튀며 말한다. “널 지키려고 안에 들어온 건데 뭣 때문에 굳이 다른 방에서 자야 한다는 거야?” “단념하고 여기서 자게.” 완전히 명령하는 자의 위치에서 내리는 아라스톨의 지시. 그의 의사를 나타내는 펜던트를 샤나가 목에서 벗겨내더니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뭐 해?” “보면 몰라?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안 보이는 데 갖다놓는 거잖아.” 베개 밑에서 웅얼웅얼 희미한 소리가 이어진다. “이렇게 정해져 있다. 알았으면 너도 얼른 어디에 숨어라. 난감한 심정으로 둘러보니 마침 알맞은 곳(?)에 벽장이 있다. “…….” 샤나를 쳐다보자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보통 이런 덴 굴러온 돌이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궁시렁궁시렁 투덜대면서도 벽장으로 향하는 유지였다. 그 등에 대고 “엿보면 죽어” 라고 절대 농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투의 협박이 들어온다. 유지는 한숨을 쉬면서 벽장의 장지문을 열었다. 아랫단은 오래된 만화나 안 쓰는 이불 등으로 꽉 차서 윗 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단 여기도 낡은 장난감과 기타 등등이 들어차 있어서 그 사이로 웅크리고 앉아 몸을 억지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먼지가 코를 찌른다. 눈앞에 있는 커다란 로봇ㅡ왠지 버릴 수 없었다.ㅡ과 눈이 마주쳤다. “좀 들어가게 해줘, 아야야.” 조립하다 말고 버려둔 프라모델 상자를 엉덩이로 찌그러뜨리고 말았다. “뭐 하는 거야? 얼른 문 닫아.”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잖아. 누가 본다고 곤란한 몸매도 아니니……, 욱!!” 탱 하고 이번엔 자명종 시계가 후두부를 강타했다. 플라스틱제라 다행이라는 처량한 안도를 하며 유지는 안에서 장지문을 닫았다. “…….” 장지문 한 장으로 가로막힌 맞은편의 침대 쪽에서 샤나가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옷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옷을 벗고 있는 모양이다. “…….” 아까는 놀리긴 했지만 역시나 이런 상황은 머쓱했다. 에헴, 하고 일부러 헛기침을 하고 유지는 얼버무리고 싶은 생각에서 물어보았다. “잠옷은 가지고……, 악!” 또 뭔가 단단한 것이 장지문에 부딪쳤다. “엿보지 말랬지!!” “안 봤어! 문짝 보면 알 거 아냐!”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 새 변명을 하는 말투가 된다. 이런 경우 남자는 한없이 입장이 약해진다. 벽장의 어둠 속에서 겪기 힘든 인생 역정을 쓰고 힘들게 맛보는 유지였다. “자, 잠옷 갖고 있냐고 물어본 거야.” “없어. 있는 건 갈아입을 속옷뿐이야. 몸의 더러움은 아라스톨이 정화해주니까 갈아입는 건 그냥 기분상 하는 것뿐이야.” 속옷 차림으로 그냥 자는 경우가 생기면 언제 어느 때(자신이) 위험에 빠질지 모르는 거잖아……. 라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의문이 일어났다. “응? 그런데 짐 같은 게 있었나?” “대충은 갖고 있어.” “어디에?” 펄럭 하고 이불이나 뭔가가 펼쳐지는 소리가 났다. “플레임헤이즈가 두르는 검은 옷 속에.” 유지는 생각해냈다. “이 소리는 분명 교실에서 습격당했을 때 자신을 벽처럼 막아주던 검은···. “아아, 그 코트? 그러고 보니 칼도 넣었었지.” 뭐든지 튀어나오는 마법의 주머니 같은 건가보다 하고 유지는 제멋대로 납득했다. 그 사이에 침대 쪽에서는 또 조용히 옷 스치는 소리가 났다. “……갈아입는 속, 옷……?” 문득 방금 전의 대화 속에서 떠오른 그 단어에 유지는 무심코 꿀꺽 하고 숨을 삼켰다. 지금 장지문 한 짝 너머에서 벌어질 광경을 일순 상상하고 이내 격렬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상상의 진행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일단 말을 해봤다. “그런데 말야,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돼?” 매몰찬 소리가 돌아온다. “당연히 밤새도록이지.” “말도 안 돼.” 유지는 기운이 빠졌다. 그 바람에 아래에 깔려 있던 프라모델 상자에 체중이 실리고 말았다. 종이 상자에서 부러진 달리기 선수가 튀어나와 엉덩이를 찔렀다. “아얏!” 반사적으로 번쩍 튀어 올랐다. “아.” 사태를 파악했을 땐 이미 늦었다. 장지문을 쓰러뜨리고 벽장 밖으로 머리부터 굴러 떨어진 것이다. 거꾸로 된 시야의 한 가운데에 옷을 전부 벗은 샤나가 유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의 작은 천 조각을 손에 들고 있었다. “…….” 샤나도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에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 되어 거꾸로 처박힌 유지를 보고 있다. “…….”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 가운데에 자리 잡은 조그맣고 티 한 점 없는 도자기 같은 몸.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두드러진 굴곡은 없지만, 흐르는 듯한 곡선으로 그려진 청순한 자태. 자신이라는 존재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는 사실도 잊고서 넋을 잃고 쳐다볼 만큼. “예쁘…….” 한밤중,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만으로 사태가 수습되는 기적을 경험한 유지는 아파서 잠에서 깼다. “…….” 커튼을 뚫고 비쳐드는 가로등불빛만이 옅은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인 가운데, 여전히 거꾸로 처박혀 있는 시선을 침대 쪽으로 돌린다. 모포에 감싸인 작은 뭉치가 보였다. 그런데, 침대 앞에 칼집에서 빠져 나온 대감 ‘니에토노노샤나’가 꽂혀있었다. 이 명백한 의사 표시를 굴러 떨어진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며 유지는 중얼거렸다. “……이번엔 베여도 고쳐주지 않겠지?” “당연하지.” 어디선가 아라스톨이 웅얼웅얼 대답했다. 다음 날, 날이 밝으니 하늘이 맑았다. 방에도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어쩌면 새벽녘에 습격이 있지 않을까 해서 아라스톨은 베개 밑에서 경계하고 있었지만, 결국 아무 일 없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샤나의 숙면은 방해받지 않았다. 한편, 중간에 ‘니에토노노샤나’를 둔 반대쪽 벽 가. 그 바닥 위엔 밤이 깊어서야 잠든 유지가 번데기처럼 담요를 둘둘 말고 자고 있었다. 타월 이불을 돌돌 만 베갯머리에서 돌연 자명종 시계의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과 반 초 만에 유지는 음원을 캐치하고, 눈도 안 뜬 채 알람의 스위치를 눌러 껐다. “……으응…….” 무거운 눈꺼풀을 들자 맨 처음 보인 것은 금속 야구방망이. 평소 이런 물건을 놓고 자는 버릇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조심성, 혹은 부질없는 방어 수단의 일환이다. 물론 경계하고 있는 상대는 침대 위에 소녀가 아니다. 유지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려고 하자 몸의 마디마디가 쑤신다. “아, 아야야…….” 방바닥 위에서 잤기 때문인지 아무래도 몸이 은근히 뻐근하다. 그 대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두들겨 맞은 곳은 이제 아프지 않았다. 샤나가 사정을 봐준 덕분일까,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젊은 회복력 덕분일까……. 일단은 후자로 보인다. 유지는 침대의 작은 뭉치에 시선을 준다. 자명종 소리가 반 초 만에 꺼진 탓인지, 일어날 기미도 없이 희미한 숨소리만을 내고 있다. 그 앞에 박힌 위험천만한 대검이 없었다면 평화로운 광경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칼을 보고 생각났다는 듯이 유지는 자신의 가슴을 본다. 단지 그냥 본다. 등불이 보인다. “……하아.” 어제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 한숨이었다. 절망과 공포가 거의 실감하지 못할 만큼 옅어져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기에 나오는 한숨이었다. ‘인간은 간사한 동물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렇다니 왠지 대단해……. 그게 아니면 여태껏 지내왔던 나날을 앞으로도 계속 보내고 싶다는 집착일까.’ 샤나를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을 연다. 좁은 베란다에 나가 바깥을 바라본다. 아침의 청량한 공기가 가슴을 가득 채운다. 집 앞 거리를 출근길, 등굣길의 자전거가 지나간다. 그 길의 끄트머리가 어제 내린 비의 흔적으로 검게 젖어 있었다. 하늘은 넓고 푸르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는 상쾌한 아침이었다. ‘……변한 것은 나……. 여기 있고, 이렇게 느끼는 나…….’ 지금 이렇게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 ‘존재의 소멸’이라는, 말이나 이치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마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이 얼마나 간사한지. 뒤에 있는 침대 속에서 지금 느껴지는 것 중의 하나, 즉 통증의 원흉이 뭔가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낸다. 발치를 보니 어젯밤 지붕위로 올라가는 데 쓴 사다리가 접혀 놓여 있었다. 유지는 어젯밤 샤나와 아라스톨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다소 불순한 영상도 섞여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 일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합리화해본다. ‘저렇게 조금 이야기를 하고, 조금 웃고, 조금 소란을 피우고……, 그러면서…….’ 나는 소멸한다는 절망과 공포를 잊어버릴 수 있을까. 나라는 존재를 그 자체의 문제를. ‘……잊어?’ 그 말에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다. 다시 조금 더 생각해봤지만 그 위화감의 의미가 잘 와 닿지 않았다. ‘뭐, 그렇게 간단히 대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지.’ 라고 생각하며 유지는 웃었다. 그리고 웃는 자신을 자각하고 놀랐다. 무거운지 가벼운지 분명치 않은 그런 기분으로 침대 쪽에서 말을 건넸다……, 조심조심 “어이……, 샤나, 슬슬 학교 갈 시간이라고…….” 퍽 하고 이불을 차는 소리가 나더니 샤나가 몸을 일으켰다. 어제 일이 생각나 허둥지둥 눈을 가리려 했던 유지는 샤나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인즉슨 똑똑히 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대로 따라준 모양이다. 헐렁헐렁해서 거의 목부터 푹 파묻힌 듯한 모습이었다. 안도 반, 아쉬움 반인 유지에게 샤나가 얼굴을 보인다. 잠이 덜 깬 얼굴은 겉으로 보이는 제 나이대로 보여 귀여웠다. 긴 머리도 뒤에서 하나로 간단히 묶고 있었다. “……응~, 말 안 해도 알고 있……?!” 졸린 목소리로 대답하다 유지의 얼굴을 본 샤나가 돌연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그래?” 유지는 당황하며 자기 몸을 훑어보지만 가슴속의 등불을 포함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샤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조금 기다렸지만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방금 전 모습이라면 어제 일을 화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그럼 알아서 준비하고 나올래?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나와.” 유지는 주의를 주고 방을 나갔다. 이불 속에서 샤나는 드물게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봐, 아라스톨, 저거 어떻게 된 걸까?” 베개 밑에서 아라스톨이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음, 알아챘군.” “어떻게 된 거지? 말도 안 돼.” “안에 든 보구의 힘이겠지.” 실은 아라스톨은 지금의 유지의 모습을 보고 어떤 보구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었다. 봉절 안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기묘한 ‘미스테스’ 사카이 유지. 만약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그것이라면 이 신기한 현상도, 아까의 모습도 납득이 간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있을 리가 없는 물건이었다. ‘홍세의 무리’의 보물 중의 보물. ‘영시미아’ 만약 그것이라면 절대로 프리아그네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리고 샤나도 지금 유지의 모습을 보며 하나의 감정을 싹틔우고 있었다. 어쩌면 하고 생각했던 찰나, 가슴을 스쳐 지나간 자각하지 못한 작은 감정. 어제 건네받은 커피처럼 아주 미미한 온기. 3. 샤나 샤나의 이틀째 수업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반항 교사 장렬한 자폭’이라는, 일종의 골계미마저 띠는 잔혹 쇼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교사는 겁에 질리고 학생은 벌벌 떠는 상황이 3교시까지 이어졌으나, 4교시 째에 일방적인 대역전이 일어났다. 4교시 수업은 체육이었다. 수업을 담당한 체육 선생(남자 · 33세 · 독신)은 최근 히라이 유카리라는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정보를 동료에게서 들은 모양이었다. 수업을 맡은 지는 고작 한 달 남짓이지만 음험하고 거만한 성격, 더욱이 여학생들을 훑어보는 음흉한 눈길 때문에 벌써 악평이 자자한 이 체육 선생은 건방진 학생을 용납하지 못하는 타입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수업에서 그 히라인가 뭔가 하는 녀석의 기를 죽여 놓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체육 선생은 반 아이들 전원에게 다짜고짜 무제한 달리기를 하도록 명령했다. 최근 한 달 사이의 기록을 보니, 히라이 유카리는 눈에 띄게 우수한 성적도 아니었으므로 금세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지쳐 쓰러지든 말든 분이 풀릴 때까지 운동장을 돌게 하겠다는 가학적인 희열을 느끼며, 체육 선생은 부루퉁한 표정의 학생들을 계속 달리게 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히라이 유카리는 쌩쌩한 얼굴로 달리고 있었다. 겨우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작은 체격 때문에 마치 체육복에 파묻힌 듯 보이는 소녀는, 수업 시간 절반이 지나도록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속도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체육 선생은 내심 속이 탔지만 애당초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그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는 달리기를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플레임헤이즈와 지구력 경쟁을 하게 된 유지와 반 아이들이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었다. 그리 건강하지 못한 여학생 한 명이 급기야 트랙 위에 주저앉았다. 속이 끓던 체육 선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요시다! 농땡이 피우지 마라!!” “요시다!” “카즈미!”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가슴을 누르는 요시다 카즈미라는 여학생에게 아이들이 달려갔다. 평소에도 곧잘 빈혈을 일으키는 아이인데 이럴 줄 알았다는 학생들의 비난하는 눈초리를 체육 선생은 전혀 느끼질 못하고 있었다. “누가 너희들 맘대로 모이라고 했나?!” “선생님, 카즈미를 좀 쉬게 해주세요.” 요시다의 등을 문지르며 한 여학생이 애원했지만 체육 선생은 표적인 히라이 유카리가 요시다의 상태가 안 좋든 말든 여봐란 듯(그는 그렇게 느꼈다) 계속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화가 치민 상태였다. “시끄러워! 그런 핑계나 대면서 농땡이를 피우니 언제까지나 체력이 붙질 않는 거다! 일어나!” 그 때 문득 누군가의 불평이 새어나왔다. “도대체 느닷없이 웬 지구력이야.” 무능한 소인배는 자신의 약점이 찔리면 반발하는 법이다. 체육 선생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다짜고짜 요시다의 손을 낚아채 강제로 일으켰다. “네가 농땡이를 피우는 바람에 다들 발이 묶였잖아! 일어나!” “……으윽.” 목구멍만을 깔딱거리며 간신히 숨을 쉬던 요시다가 모깃소리만한 비명을 질렀다. 놀란 학생들이 항의하고, 그 김에 유지가 ‘달려오는 다리’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체육 선생이 엉덩이를 뻥 차여 저만치 날아갔다. 뜻밖의 사건에 일순간 멍해진 학생들이 제정신을 찾았을 때에는, 히라이 유카리인 샤나가 작은 운동화 바닥을 보이며 서 있었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땀이라곤 고작 한 줄기 흐르는 게 전부인 군더더기 없이 날렵한 체구. 뒤에서 하나로 묶은 길고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발차기의 여운으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런, 저질렀구나……!’ 미처 제지하지 못한 유지는 머리를 틀어쥐었다. 샤나가 체육 선생을 뻥 차버린 이유는 십중팔구 자신이 달리던 라인 위를 체육 선생이 가로막았다는 것 때문이겠지만, 요시다도 한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아까부터 내내 달리기만 하고 있잖아. 이건 대체 무슨 ‘수업’이야?” 일단은 어떤 내용인지 시험 삼아 해본 모양이다. 자신의 어깨에 몸을 걸치고 간신히 숨을 이어가고 있는 요시다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불쌍해서가 아니라 비효율적이란 생각 때문이겠지.’ 유지는 샤나의 생각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샤나가 말했다. “이딴 것도 훈련이라고 하나. 무작정 쓸데없이 몸을 움직여봤자 지치기만 할 뿐, 무슨 의미가 있지?” “너, 너……!!” 흙투성이 얼굴을 훔치며 체육 선생이 일어났다. 더러워진 얼굴은 분노로 새빨개져 있었다. 물론 샤나는 그의 분노에 눈곱만큼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너, 이 수업의 의미를 설명해봐” 라고 질문할 뿐이었다. ‘아이쿠,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샤나.” 일이 커질 것을 확신한 유지가 소리 죽여 말을 걸자 샤나는 어깨를 걸치고 있던 요시다를 넘겨주었다. 유지는 받아든 소녀의 가냘픈 몸과 꺼져 들어가는 숨소리에 놀라 무심코 얼굴을 들여다본다. “괘, 괜찮아?” 요시다는 창백해진 얼굴로나마 살짝 끄덕여 보인다.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라고 안도한 유지는 곧 다른 여학생에게 요시다를 맡겼다. 그들의 등 뒤에서 체육 선생이 격앙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너 이 자식, 교사를 발로 찼겠다!” 체육 선생은 샤나의 말 따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다가가, ‘하라이 유카리한테는 통하지 않아’라고 동료로부터 무수한 충고를 받았던, 권위에 의한 공격을 시작한다. “건방진 녀석 같으니! 교사에게 폭력을 휘둘러?! 정학, 아니 퇴학시켜버릴 테다!!” 분노로 펄펄 뛰는 거구의 체육 선생 앞에서 팔짱을 끼고 태연히 서 있던 작은 몸집의 샤나가 한마디 했다. “설명조차 못하겠어?” “문제야, 이건 문제 행위라고!! 알아?!” 완전히 동문서답이었다. 체육 선생이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하니까 당연하긴 했다. 이 사람은 자기감정의 발산 말고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에 학생들은 흡사 미친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질려버렸다. 그리고 급기야는 ‘눈에 거슬리는 녀석’ 샤나의 눈썹이 스르르 내려갔다. 그녀의 전투 개시를 알리는 표정임을 한눈에 알아챈 유지는 스스로도 최고였다고 느껴지는 타이밍으로 크게 외쳤다. “발!” 샤나가 막 움직이려는 찰나 내려진 괴상한 지시. “?” 그만두라고 말했다면, 샤나는 무시하고 눈앞에서 미쳐 날뛰는 무능력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유지의 지시대로 기분 좋게 무능력자를 뻥 차버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가볍게 발을 내민 정도였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위력의 발길질이 마치 개그 만화에서처럼 체육 선생을 날려버렸다. 체육 선생은 시원한 포물선을 그리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크헉 하는 이상한 비명이 들렸다. “아~아…….” 유지는 자신의 지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발차기의 엄청난 위력에 한숨이 나왔다. 반 아이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머리를 한번 긁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짐짓 큰 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트랙 위에 불쑥 뛰어드시면 위험하잖아요!” 샤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안경맨 이케가 오래된 친구답게 가장 먼저 유지의 의도를 파악했다. 유지처럼 큰 소리로 주변에 들리도록 외친다. “차이셨어도 어쩔 수 없네요!” 사토가 방긋 웃으며 주변 아이들을 부추기는 손짓으로 양 손을 치켜들고 뒤이어 말한다. “맞아! 히라이는 발이 빨라서!!” 사토와 얼굴을 마주한 타나카가 처음으로 소리를 지른다. “하긴, 빨리 달리다보면 멈출 수 없더라고!!” 마침내 눈치 챈 아이들이 일제히 외치기 시작했다. 유지나 이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토며 타나카와 합창을 하면서 흡사 환성 같은 대소동을 트랙 위에 일으켰다. “저 봤어요. 선생님이 히라이 앞에 뛰어드시는 거!” “저도요!” “아하하, 선생님, 불쌍해요!” “나도 눈이 흐릿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어!” “교통사고 같은 거잖아!” 체육 선생에게는 이미 패색이 짙은 소란스런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이 자식, 들이……”하고 납작 엎드린 자세의 그림자 밑에서 저주 같은 소리가 새어나온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묻어가며 유지는 옆에 있는 샤나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협박 같은 거 할 줄 알아?” 나도 어느 새 샤나에게 물들어 성격 참 좋아졌구나 하며 유지는 책임을 전가해본다. 마찬가지로 소란한 분위기를 틈타 체육복 안에 숨겨진 아라스톨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지, 돈이 필요할 때 곧잘 쓰는 방법이 어때?” “그래, 확실히 위협하면 입을 닥칠 것 같은 면상이긴 하네.” 왠지 그 간의 생활이 짐작되는 대화를 마치고 샤나는 다시 걸어갔다. 그 정도의 동작으로도 반 아이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체육 선생은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발자국 소리를 깨닫고 창백해졌다. “마침 트랙 위에 있네.” 전율의 대사. “히, 히익…….” 체육 선생은 도망치려다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쿵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발이 코앞에 떨어졌다. 땅바닥에 붙은 배까지 진동이 울려오는 가운데 발이 다시 올라간다. 눈앞의 딱딱하게 굳어진 트랙에 발자국 모양의 구덩이가 5센티미터 정도 깊이로 파여 있었다. 경악과 공포로 눈을 질끈 감은 체육 선생에게 유지가 최후의 쐐기를 박는다. “선생님, 앞으로도 조심하시지 않으면 위험해요.” “……알았어?” 샤나가 최고로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체육 선생은 몇 번이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는 덧붙이듯 상냥하게 묻는다. “이제 해산해도 되죠?” 체육 선생은 더욱 힘주어 끄덕였다. “나, 남은 시간은 자, 자, 자습이다!” 라는 말만을 간신히 남기고는 엉덩방아를 찧다 달리다 하며 도망 가버렸다. 이번에야말로 학생들 사이에 완전무결한 환성이 폭발했다. 그 가운데 옆을 본 유지는, “빠르네……. 어, 잠깐, 잠깐! 쫓아가지 않아도 돼!” 뒤쫓으려 하는 샤나를 황급히 만류했다. “왜 그래? 적은 해치울 수 있을 때 해치……?!” 반 아이들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의미 없이 두들기거나, 흥분한 목소리로 격찬하거나, 악의 없는 야유를 하며 다 같이 비비적거렸다. 함께 지낸 것이 불과 한 달인 아이들은 이 때 처음으로 한마음이 되어 법석을 피웠다. 유지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더불어 샤나의 반응에 흠칫하기도 하면서 온몸을 때려대는 손바닥 때문에 비명을 지른다. 샤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에워싼 환성과 호의의 손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케가 유지의 머리를 한 번 가볍게 치더니 곧 아이들 무리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유지의 등을ㅡ실은 거의 패다시피 하는 타나카를 불러낸다. “야, 타나카, 요시다를 부축해줘.” “어, 왔다.” 다른 여학생이 내민 무릎베개를 베고 있던 요시다(사토가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며 요시다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덮어주고 있다.)를 튼튼한 팔로 가볍게 부축해 양호실로 데려간다. 이런저런 소동의 뒤. 유지와 아이들은 느긋하게 봄날의 잔디 위에서 뒹굴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이유로 히라이 유카리인 샤나는 본의 아니가 반 아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 하면 옷 갈아입을 때 모두들 모여, 잔디 위에서 뒹구느라 풀 투성이가 된 그녀의 머리카락에 빗질을 해줄 정도였다.(그녀의 칠칠하지 못하게 여자답지 못한 모습을 보아 넘길 수 없었던 모양) ……아쉽게도 유지는 그 훈훈하면서도 조마조마한 광경을 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샤나도 성질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순식간에 완전한 마음을 터놓을 만큼 다가가기 쉬운 샤나가 아니었다. 우선은 ‘무법자’에서 ‘든든한 보호자’로 신분 상승한 정도였다. 그래도 오늘은 체육 수업 후 점심시간이 되었어도 어제만큼 노골적으로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반 아이들은 반쯤 교실에 남아 있었다. 유지로서는ㅡ본의든 본의가 아니든ㅡ그녀를 반 아이들과 친숙하게 만든 행위에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제 그제의 일로 똥배짱이 생겼다는 것,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거대 인형과 머리구슬, 카드의 폭풍과 폭발 등을 겪고 난 뒤이고 보니, 기껏 해봤자 강짜부리는 체육 선생쯤이야 개미 한 마리 정도의 공포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이건 너무 위험한 생각이야.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고 될 대로 되란 듯 살면 안 돼.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해.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금 허무한 생각을 하고 다시 교실 안을 슥 훑어본다. ‘하긴 외롭게 남겨지는 것보단 나을지도.’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은 집어치우고, 유지는 지금 주어진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편의점 주먹밥을 덥석 문다. 참고로 왜 노상 편의점 주먹밥만 먹냐 하면, 엄마가 만들어주시는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것이 꼴사납다는 어린애다운 허세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저녁때까지 남아 있을 생각이야? 오늘 수업은 그때까지 있진 않으니까 괜찮은데.” 바삭바삭한 김을 뜯으며 옆자리에 말을 건넨다. “응. 저녁 전에 여길 나갈 거야. 상대가 좀 세니까 웬만하면 우리 쪽에 유리한 장소에서 싸워야지.” 샤나도 여전히 메론 빵을 맛있다는 듯 먹고 있다. 역시나 봉투 안은 가득 차 있다. 이 몸의 어디에 다 들어가는 거야, 유지는 한 손에 잡힐 듯한 가는 허리를 보며 생각한다. “……어딜 봐?” 샤나의 매서운 눈초리에 유지는 황급히 눈을 돌렸다. “아, 아니, 그냥……, 그럼 유리한 장소가 따로 있어?” “아무튼 사람이 없는 데가 좋아. 너란 녀석은 내버려두면 금세 쓸데없는 짓을 해서 훼방을 놓으니까.” “그러냐? 고마워.” 유지는 순순히 고마워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것뿐이야.” 샤나는 메론 빵의 마지막 한 조각을 거칠게 입에 쑤셔 넣는다. 계속해서 이번엔 어린이용 달콤한 커피 맛 음료 팩을 봉지에서 꺼낸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입구를 비틀어대며 말한다. “적어도 네 속에 있는 물건이 뭔지 안다면 할 만할 텐데.” “그렇게 이상한 게 내 몸 속에 있다고?” 유지는 이렇게 일상 속에 있으면 벗어난 세상의 일을 잊어버릴 뻔 한다. 자신이 고인의 대체품 ‘토치’이고, 동시에 ‘홍세의 무리’의 보구를 몸 안에 갖고 있는 창고 ‘미스테스’라는 것을.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허용치 않겠다는 듯 벗어난 세상의 증거, 즉 샤나가 확고한 존재감을 갖고 눈앞에 있다. “응. 왠지 아주 성가신 물건 같아 보이지. 아라스톨?” 평소답지 않게 아라스톨은 대답을 늦췄다. “……음, 그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선 먼저 너를 없애지 않으면 안 돼.” 팩 입구와 씨름하는 샤나는 그런 아라스톨을 눈치 채지 못하고 그냥 내용을 덧붙여 설명한다. “보구의 성질을 모르는데 열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전에 그랬다가 아주 큰일이 난 적도 있고.” “쳇, 내 안전은 그 정도인 거야?” “응, 그 정도야.” 샤나는 일부러 심술궂게 사실을 깨우쳐주듯 말했다 그러나 유지는 이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이제는 대답할 수 있었다. “흐음, 그래?” “……너, 처음엔 죽었느니 살았느니 꼬치꼬치 말이 많더니 요샌 안 그러네.” “응? 아냐, 지금도 내가 조금씩 소멸에 가까워져가고 있다는 건 무서워. 하지만 그런 소리 해봤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 샤나는 유지의 지나치게 차분해진 태도가 왠지 거슬렸다. 이 ‘미스테스’는 도구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왜 어긋나는 게 싫은 걸까. 불현듯 치솟는 생각들과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짜증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쳐서, 샤나는 무심코 다그치는 투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자포자기야?” 이 말에도 조용한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 실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나 아라스톨이 있어주는건 정말 고맙고 기뻐……. 그것만큼은 확실해.” “……?”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샤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눈빛으로 유지를 봤다. 유지의 얼굴에는 다시 잔잔한 미소가 떠오른다. “모든 것을 알아주는 상대가 있다는 건 큰 의지가 되거든.” “우리들이 의지가 된다고?” 샤나는 비웃으며 되물었다. 어떤 기대를 받고 있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방금 생각한 것과 어딘가 비슷한, 서로 정도를 넘어선 분위기를 풍기고 있음을 깨닫고 갑자기 내팽개치고 싶어진 것이다. “네게 죽음을 안긴 우리들이 의지가 된다고 말하는 거야?” “사실을 가르쳐준 것뿐이잖아. 네가 날 죽인 게 아니야.” 유지는 이것만큼은 진지하게 부정했다. “흥, 어차피 같은 소리야.” “아냐, 달라.” “같다니까.” “다르다니까.” “같아.” “달라.” 입씨름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 보며 째려보고 있었다. “…….” “…….” 조용한, 그러나 불꽃 튀는 대결 속에 머뭇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있지…….” 두 사람이 돌아보니 소극적인 인상의 소녀가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서 있었다. 조금 전 트랙 위에서 쓰러져 샤나가 (결과적으로) 구해낸 반 친구 요시다 카즈미였다. 양호실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안색도 이젠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요시다?”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는 바람에 유지는 조금 놀란다. 샤나는 존재의 잔재로부터 그 소녀의 기억을 끌어낸다. 히라이 유카리의 친구였던 모양이다. 아주 친하진 않았던 것 같지만. “저, 유, 유카리. 아까 체육 시간엔……, 고, 고마웠어.” 요시다의 목소리는 너무 작은 데다 툭툭 끊어지기까지 해서 몹시 알아듣기 어려웠다. 샤나는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한창 유지와 다투고 있는데 느닷없이 방해당한 짜증도 한몫해서 더욱 쌀쌀맞아졌다. “무슨 일이야?” “바보야. 고맙다고 말하는 거니까 괜찮다는 말쯤은 하라고.” “내가 왜 바보야?” 샤나는 다름 아닌 유지의 가세의 발끈해서, 요시다와는 정반대인 강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나한테 방해되는 녀석을 손봐준 것뿐이야.” “뭐, 그야 그렇긴 하지만.” 이 소녀의 매정함을 유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말투는 평소보다 훨씬 괴팍해진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요시다는 마음이 여리다. 지금도 샤나의 말투에 기가 죽어있다. 자기와 한 말싸움의 불똥을 죄다 뒤집어쓴 꼴이 된 요시다가 불쌍해졌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생각하며 그녀를 보니, 앞으로 가지런히 뻗은 손에는 한 손으로도 가려질 정도의 작은 도시락 통이 들려있었다. “도시락……, 같이 먹을래?” “아, 그, 그러자……!” 유지의 대답에 요시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구름 사이의 햇빛이 들판에 핀 꽃을 비추듯, 뭔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한 듯한 흐뭇한 기분을 안겨주는 그런 미소였다 유지는 이 미소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샤나랑은 천지차이로군.’ 플레임헤이즈인 샤나의 웃음(비웃을 때 빼고)은 실로 불꽃같은, 강렬하게 빛나는 힘 그 자체……. ‘나도 참, 뭘 비교하는 거야.’ 괜히 혼자 새빨개진 유지는 얼버무릴 요량으로 요시다를 위해 빈 의자를 가져온다. “샤, 으흠, 히라이. 딱히 안 될 것도 없는데,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하는 거 괜찮지?” 사실 유지는 같은 반이 되고도 한 달이 지났지만 요시다와는 거의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아까의 소동까지 쳐도 두 번인가 세 번 정도이다. 언제나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아이, 그 정도의 인상밖에 없다. 하지만 여자아이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요시다 찬찬히 보니 예쁜걸.’ 유지는 소년다운 건전하면서도 음흉한 생각으로 헤벌쭉 웃는다. 샤나 쪽은 ‘‘존재의 힘’이 희미해져 멀어졌던 히라이 유카리와 아까 일을 계기로 다시 사이좋게 지내려는 건가’라고 속으로 냉정하게 판단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한다. “맘대로 해.” 좀 다르게 말해도 되지 않느냐고 투덜거리는 유지의 말에 요시다가 작게 대답했다. “고마워…….” 그 때, “여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시다의 뒤쪽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인 이케를 비롯해 사토와 다나카가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있다. 지금까지의 사태를 지켜본 듯하다. 유지는 멋쩍게 웃으며 손짓을 해 불렀다. 이 세 명이 가세하여 책상을 붙이자 별안간 점심 식사 모임이 시작되었다. 다나카가 큰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사토가 끼어들고 이케가 정리하자 유지가 덧붙인다. 요시다는 이따금 작은 소리로 웃었지만 대화엔 끼지 않은 채 밥을 먹었다. 샤나는 그들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 간식 봉투에서 호빵, 만두, 초콜릿 등을 꺼내 말없이 먹어치우고 있었다. 잠시 후 유지가 대화에서 빠져나오자 소매를 잡아당겨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더니 불평을 한다. “아라스톨과 얘기하기 힘들잖아.” “좀 어떠냐? 가끔은 보통 인간과 접하는 것도 좋잖아.”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뭐 어때. 아까 둘러싸여 있었을 때도 별로 싫어하진 않았잖아.” “그 땐 상황 파악이 안 됐었다고.” “그런 점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역시 접촉해야 돼.” “고쳐? 무슨 뜻이야?” 얼굴을 맞대고 소곤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요시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둘이 사이가 좋네.” “그, 그렇지 않아!” 의심에 찬 시선과 질문에 유지는 손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이케와 그 일당은 미묘한 선망을 담아 제각기 말했다. “아냐, 좋아.” “응, 응, 좋구나.” “좋잖아 정말!” 어제보다 빨리 찾아온 방과 후. 유지는 이케와 그 일당들에게 놀자는 유혹을 받기 전, 샤나와 함께 탈주를 방불케 하는 기세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교실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타나카와 사토가 도망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으음, 갑자기 둘이서 도망을 치다니. 그렇다면 데이트인가? 용서할 수 없어.” “용서하고 말고는 둘째 치고 히라이라니, 역시나 독특한 취향이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에게 놀자고 할 생각인 이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데 그 앞에서 요시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요시다, 히라이는 사카이랑 먼저 갔어.” “아……, 유카리하고……?” 이케는 대화의 주어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잠깐 허공을 올려다보고 요시다에게 제안한다. “있잖아. 요시다…….” 그 무렵, 학교에서 멀어진 유지와 샤나는 학교 앞부터 미사키 대교로 쭉 이어진 큰길의 인파에 묻혀 있었다. 해는 아직 높고 저녁때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이래서야 이케가 틀림없이 오해할 거야.” 유지는 옆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는 샤나에게 맞추다보니 꽤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뭘?” “아, 내 얘기야.” “?” 사람이 없는 장소로 가자고 했으면서, 웬일인지 샤나의 발길은 시가지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학교가 있는 주택가와 강 건너편의 빌딩 숲 시가지를 잇는 미사키 대교로 접어들었다. 유지는 첫날처럼 토치가 있나 없나 둘러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양쪽 가장자리로 넓은 보도가 쭉 뻗은 대 철교 위에는 가슴에 등불을 품은 토치가 몇 사람이나 있다. 처음 의식했던 때보다 간단하고 또렷이 보였다.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요령이 붙은 것일까. 등불 자체는 작은데도 먼 거리에서도 금세 알 수 있다. 그런 맥 풀리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유지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뭔데?” “이쪽에서 ‘존재의 힘’을 먹어치우는 놈들은 세상에 뒤틀림 같은 게 생긴다 해도 상관없는 난폭한 놈들이잖아. 그런데 왜 먹히고 남은 찌꺼기를 일일이 토치로 만드는 거야?” 걷고 있는 두 사람의 곁을 자신들과 같은 또래의 여자애가 또 한 사람이 지나간다. 거의 희미해져 꺼질락 말락 한 등불을 가슴 속에 담고. “……토치는 세계의 공백이 메워지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거라고 했었지? 꼭 그런 귀찮은 짓 할 것 없이, 그냥 잔뜩 먹어치우고 힘을 비축해두면 플레임헤이즈 정도야 무서울 게 없잖아?” 샤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 플레임헤이즈는 세상의 뒤틀림이나 힘을 ‘자재’로 휘두르는 것을 느끼고 ‘무리’를 쫓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서 세상의 균형을 마구 무너뜨리는 녀석이 나타나면 전 세계의 플레임헤이즈들이 모여들어 그놈을 잡아낼 거다.” 가슴 위에 아라스톨이 이어서 말했다. 혼잡한 인파 속이라 사람의 주의를 끌 염려는 없었다. “프리아그네 정도의 ‘왕’이라면 물론 평범한 ‘무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비롯해 플레임헤이즈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무리’는 전부 ‘왕’이라네. 싸우면 무사하지 못할 걸세. 단순히 힘의 세기로는 가늠할 수 없는 자도 있으니.” 다시 샤나가 말했다. “그래서 난획자들은 대개 그런 귀찮고 아무 이득도 없는 플레임헤이즈들과 되도록 싸우지 않으려 하지. 그래서 토치를 만드는 배려 정도는 하는 거야.” “흐음, 그렇군……. 그래서 그 프리아그네를 해치운다고 치고, 어떻게 찾아낼 거야? 그놈이 유명하다면 다른 플레임헤이즈와 정보를 교환해서 세력범위나 목표를 알아내거나 하면…….” “아, 그건 힘들어.” 샤나는 유지의 제안을 간단히 기각하더니 철교의 난간 위로 폴짝 뛰어오른다. “위! 위험! ……하지 않구나……. 그래서 뭐라고?” 주변으로부터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서, 샤나는 한손에는 가방을 들고 양 팔을 옆으로 한껏 펼쳐 곡예를 하듯 걸음을 옮긴다. “힘들다고 했어. 우연히 만나는 것 말고는 연락 따윈 주고받은 적이 없는걸.” “뭐?” 좁은 난간 위에서 밟는 스텝은 마치 춤추는 것 같은 율동감이 있다. 한 번 뛸 때마다 당황하는 유지의 모습이 왠지 재미있어서 샤나는 일부러 펄쩍 뛰거나 해본다. “플레임헤이즈는 각각의 사정과 이유가 있어서 싸우고 있고,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는 그런 녀석들뿐이기 때문에 협력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 폴짝폴짝 뛰는 모습에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 때문에 얼굴이 달아오른 유지는 응 하고 끄덕였다. “그건 잘 알겠어.”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어쨌든 세상을 돌아다니다보면 ‘무리’가 먹어치운 찌꺼기인 토치는 자연히 눈에 들어와. 등불이 타는 상태를 보면 신참인지 좀 지난 녀석인지 알 수 있으니까. 그 뒤엔 그 부근을 눈여겨보고 있으면 돼.” “대략적인 감각으로 있을 것 같다는 감이 느껴지고, 가까이 오거나 봉절을 만들면 꽤 상세한 장소를 잡아낼 수 있어. 널 처음 발견했을 때도 그랬지. 냅다 뛰어 들어갔더니 얼빠진 표정의 토치가 뭐라고 웅얼거리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더라.” 은근히 조롱하는 샤나에게 유지는 끈질기게 반항한다. “……치마.” 아슬아슬한 눈높이, 위아래로 펄럭이는 치마 속에서 발차기가 날아와 유지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코를 누르며 정신을 차려 보니 샤나는 어느 새 난간에서 내려와 옆에 서 있었다. “놈들이 먹어치우기 위해 봉절을 만들면 거기 들어가면 돼. 상대가 덤벼들면 쓰러뜨리지. 간단해.” “요컨대 플레임헤이즈는 제각기 닥치는 대로 싸우는 거야?” “맞아. ‘홍세의 무리’의 이치로 따진다면 이 세상에 숨어 들어와 먹는 것이 자유라면, 그들을 쫓아 처단하는 것도 자유지.” 아라스톨이 화난 목소리로 말한다. “자유라느니 함부로 말하지 마라. 우리가 이 세상에 건너와, 비록 어리석다고는 하나 동족인 그들을 죽이는 건 양계의 균형을 우려하는 대의가 있어서다.” “네, 네, 잘 알고 있다니까요?” 샤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라스톨을 대할 때는 이런 귀여운 모습도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에 유지는 코를 문지르며 억울해했다. “하지만 처음 왔을 때부터 느낀 건데……, 이 동네는 좀 이상해.” 샤나는 내리누르듯 우뚝 솟아 있는 눈앞의 빌딩 숲을 올려다본다. 여러 개의 노선을 연결하고, 큰 버스 터미널도 있는 미사키 건물을 중심으로 시청과 비즈니스 거리, 백화점, 지하를 포함한 번화가 등이 두 사람의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유지도 올려다보며 묻는다. “뭐가 이상해?” 듣고 보니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려고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신경 써본 적 없던 지극히 당연한 광경 그러나 그 얇은 껍데기 밑에는 끝없이 깊고 넓게 펼쳐져 있는 또 다른, 벗어난 세상이 있지 않은가. “프리아그네 한 명이 먹었다고 하기엔 토치가 너무 많아.” 유지가 자신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의견을 내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샤나가 말했다. 자신의 사명에 관한 일인 만큼, 이번 기대에는 학교에서 느꼈던 짜증은 생기지 않았다. “타는 모양도 그래. 어제 먹힌 것처럼 새로운 것부터 꺼지기 일보 직전의 오래된 것까지, 확실히 너무 많아. 이 동네에 아주 눌러 살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는 안 될 거야.” “……그래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대답에 샤나는 낙담했다. “머리 회전이 느리군.” 역시나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고……. 자신답지 않게 타인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샤나는 새삼스러 화가 치밀었다. 그것이 자신의 억지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투에 배어나오는 짜증을 숨길 수는 없었다. “힘을 먹고, 사용하고, 노는 거라면 싸돌아다니면 될 것이고, 보통 ‘무리’는 그렇게 해. 이 정도로 많은 수의 토치가 조금씩이라고 해도 한 곳에 사라져버리면 세상의 뒤틀림도 커지게 되거든. 프리아그네는 플레임헤이즈에게 발견될 위험을 일부러 감수하고 있어. 그 말은 이 거리에 뭔가 있거나, 이 동네에서 뭔가를 하려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란 얘기지.” “뭔가가 뭐야?” 좀 더 다른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묻는다. “그거야 알 리가 없잖아. 그 프리아그네란 놈은 보구를 잔뜩 가지고 있는 모양이니 그거랑 관계가 있겠지.” 무엇 때문인지 샤나가 언짢은 기색을 보였기에 최소한의 질문만 했다. “……그럼 결국 어쩔 생각이야?” “해가 저물기 전까진 여기서 돌아다니다, 그 다음엔 너희 집에서 준비하며 기다려야지. “뭐야. 역시 상대방이 행동을 개시하기를 기다리는 거야?” 유지도 저도 모르는 새 예리한 지적을 한다. 샤나는 더욱 발끈해서 입을 다물었다. 유지는 또 빌딩가를 바라본다. 사람도 물건도 찾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를, 당연한 광경, 그 얇은 껍데기 저편의 벗어난 세상을 상상한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누군가가 먹히거나 사라져 잊혀지는 건가?” 새삼스런 화제에 샤나는 간단히 긍정한다. “그래, 전 세계에서, 옛날부터.” 괜히 보복심에 속을 긁어볼 양으로 말해본다. “이게 네가 알게 된 ‘진실’이야. 무서워?” 또 꺼져가는 등불을 품은 여자가 두 사람의 옆을 지나갔다. 스무 살 남짓 돼 보이는 빨간 정장을 입은 미인. 가장 빛나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야 할 사람. 하지만 머지않아 사라진다. 이것이 진실. 피해갈 수 없는 나의 미래. 유지는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대답한다. “말했잖아. 물론 무서워. 하지만 그래……. 왠지 모르게 후련해.” 그 묘한 대답에 샤나는 저도 모르게 지금까지 언짢았던 기분을 날려버리고 유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유지가 샤나의 시선을 느끼고 마주 보며 살짝 웃는다. 자연스럽지만 맥빠진 웃음. 샤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 “어디로?” “낸들 알 게 뭐야?” 유지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기, 아까부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화 안 났어!” 말할 수 없었다. 그 얼굴이 조금 좋았다고는, 그런 생각을 해버린 스스로가 곤혹스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무작정 화를 내본다. 그렇게 말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역시 화난 거 맞잖아……. 이상한 애네……?” “화 안 났다면 안 난 줄 알아!” “알았어, 알았어…….” 고개를 갸웃 거리는 유지를 데리고, 샤나는 혼잡한 거리를 성큼성큼 뚫고 지나갔다. 인파로 들끓는 미사키 대교. 유지와 샤나가 있는 다리의 옆에서 좀 떨어진 기둥 그림자 밑에 소년 소녀 네 명이 한데 모여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다. “앗, 이제 걷는다.” 선두에 있는 것은 안경을 마치 총의 스코프처럼 번뜩이고 있는 이케였다. 그 뒤에서 요시다가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있다. “하, 하지만 뒤를 밟아도 괜찮을까……?”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사토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 녀석은 전혀 숨지 않았다. “신경 쓸 거 없다니까, 요시다.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뭐.” “하, 하아…….” “쟤네는 즐겁고, 우리는 손해 볼 거 없고, 아무 문제없잖아?” 능글맞은 말투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싫지 않은 것이 이 아름다운 소년의 특징이다. 그런 사토와 요시다의 뒤에 불쑥 튀어나온 모습으로 서 있던 다나카가 커다란 얼굴에 호기심을 잔뜩 드러내며 외친다. “그렇고 말고! 우리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사카이와 히라이의 훈훈한 교류를 지켜봐주지 않으면 안 돼! 가자, 요시다!” “그, 그래.” 주먹을 불끈 쥐며 역설하는 다나카를 보며 요시다는 힘차게 끄덕였다. “야, 그렇게 소란피우다 들킬라. 사카이는 둘째 치고 히라이가 무서……, 앗, 죄, 죄송합니다.” 이케가 다나카에게 주의를 주느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빨간 정장을 입은 젊은 여성과 어깨를 부딪쳤다. 그렇게 느꼈다. “응, 왜 그래, 이케?” 사토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케는 휙 뒤돌아본다. 분명 뭔가 어깨를 부딪쳤던 것 같은데……, 뭐였지? “응? 아니.” 이케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 이케의 등 뒤에서 요시다가 애가 타는 듯 조그맣게 말한다. “저, 두 사람 가버리겠어…….” “엇, 서둘러, 서둘러! 결정적 순간을 놓치겠다.” “뭘 기대하는 거야?” 소리 지르는 다나카에게 기가 막힌다는 말투로 대답하면서 이케는 두 사람의 뒤를 좇는다. 요시다도 뒤를 따른다. 사라진 토치에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거기에서 끊어진 한 여성의 존재에, 그 누구도.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세상을 내려다보는 희끄무레한 형체가 한 고층 빌딩의 옥상 가장자리에 있다. ‘헌터’ 프리아그네. 아름다운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빛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간만의 ‘미스테스’가 설마 플레임헤이즈와 함께 나타날 줄이야……. 그로 인해 나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인과의 실이란 이렇게나 복잡하단 말인가.” 발 아래에는 조잡한 인형 마리안느가 바람에 털실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딱 붙어 있다. “주인님, 저 플레임헤이즈는 저래 뵈도 ‘천양의 겁화’의 계약자입니다. 뜻밖의 저력으로 파란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프리아그네는 인형에게 시선만을 돌리며 돌연 온화한 표정을 짓더니 음정이 비틀린 기묘한 음성으로 부드럽게 말한다. “괜찮단다, 마리안느. 나는 플레임헤이즈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아……. 그렇지?” “네. 하지만 모처럼 손 안에 날아든 ‘미스테스’이니 싸우기 전에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습니다. 주인을 닮아 마리안느도 보구의 집착이 강했다. 프리아그네의 얼굴이 흐려진다. “그래……. 놈들은 이쪽에서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테니까 아직은 시간이 있단다. 계획을 방해받지 않도록 사냥할 준비를 하자꾸나.” 스르르 손을 뻗는다. “암, 이제 와 새삼 방해하도록 내버려둘 줄 아느냐……? 너를, 너란 존재를 나는 만들어 보이겠어. 나의 마리안느.” “주인님…….” 마리안느도 둥실 떠올라 손을 잡는다. 수없이 거듭해온 무도와 같은 몸짓. 프리아그네는 이 세상에서 만들어내어 사랑에 빠진 인형을 가슴에 안는다. “너를 ‘린네’같은 도구가 아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 보이겠어.” “이미 충분한 ‘의사’는 받았습니다……. 아직 부족하세요?” 이것도 몇 번이고 반복해왔던 질문과 대답. “아아, 부족하고말고. 지금의 넌……, ‘린네’란 존재는 너무나 불안정하단다. ‘존재의 힘’을 모을 순 있어도 자신에게 쓰지 못하는 탓에, 우리들 ‘무리’에게서 힘을 공급받지 못하면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너무나도 덧없는 존재다. 그 속내를 드러내듯 목소리의 음률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다. 마리안느는 거꾸로 확신에 찬 말을 한다. “저는 그것이 주인님과의 강한 인연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기쁘구나, 마리안느. 하지만 나는 널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할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이유란다.” 맹세하면서 프리아그네는 마리안느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드디어 너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데, 이제 와서 방해하게 내버려둘 줄 아느냐……? 해치울 것이다. 지금까지의 플레임헤이즈들과 마찬가지로 죽여 버릴 것이다.” 어느 새 얼굴에 활짝 웃음이 떠올랐지만, 갑자기 간청하는 듯한 표정과 어조가 된다. “그렇게 하자꾸나, 마리안느. 그래야겠지?” 안겨 있는 인형 마리안느의 얼굴은 변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극한 충정을 담은 목소리만이 흘러나온다. “네, 주인님 말씀이 옳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안색이 확 밝아진 프리아그네는 비틀린 새된 음색으로 목청을 높여 노래부른다. “환영 준비를 하자, 마리안느! 귀여운 아이들을 모아 성대하게!!” “네, 주인님!” 프리아그네는 빈손을 크게 휘두르며 사랑하는 인형과 함께 희뿌연 불꽃이 되어 흩어졌다. 그 불꽃도 이내 햇빛에 녹아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졌다. 해질 무렵까지 조금 남은 한낮. 노곤한 공기 속에서, 이윽고 유지와 샤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피곤해……. 내내 걸어 다녔더니…….” 유지는 거의 발을 질질 끌면서 걷고 있었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애당초 실마리도 없고, 있는 것은 목적뿐이라 상대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게 전부인 탐색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처음에 말했잖아. 나중에 토 달지 말라고.” 말하는 샤나의 발걸음은ㅡ당연하다고 해야 할까ㅡ 전혀 변화가 없다. 일단은 기분이 좀 풀린 것만도 훨씬 나아졌다고 봐야하나 하며 유지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도 한다. “후우……, 뭐, 돌아가면 쉴 수 있으니 그걸로 된 건가.” “뭐~야, 태평한 소리 하고 있네. 저녁엔 또 한바탕 치러야 할지도 모르니까 경계를 늦추면 안 돼.” 샤나는 유지의 희망을 빨리도 무너뜨렸지만, 이것은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성격이기 때문이다. 유지는 거기까지 그녀를 이해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네에, 네……. 응?” 신호를 기다리느라 걸음을 멈춘 유지는 건너편의 인파 속의 군데군데에서 다섯 명 가량의 토치를 발견했다. “뭐야?” “아……, 아까 낮에 토치가 오래됐다느니 새 거라느니 하는 말을 했었잖아. 그래서 오늘은 다니는 김에 주의해서 봤는데, 확실히 잘 보니까 알 수 있구나 해서.” 유지의 눈에는 그 다섯 명의 토치의 가슴에 켜진 등불의 색이나 짙기의 차이가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등불은 아직 새 것이다. 엄마와 손을 잡고 있는 남자아이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너무나 불합리한 세상이다. “뭐야, 그런 거.” 샤나도 웃어넘겼다. 유지도 이 벗어난 세상에 휘말려든 기분을 털어버리려고 오히려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그런 거……. 하지만 역시 기분이 좋진 않아. 사람들마다 제각기 고동치는 게, 마치 심전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왠지 초조해져.” “……고동? 무슨 소리야?” 샤나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응? 등불이 흔들리거나 커지거나 하잖아. 봐, 오래돼 보이는 건 느리고 새 걸로 보이는 건 빠르고……, 보이지 않아?” “응, 안 보여. 아라스톨, 너는?” “나도 안 보이는군.” 샤나는 유지를 뚫어져라 본다. “넌 정말 이상한 ‘미스테스’야. 뭐가 들어 있기에 그런 힘이 나오지?” “나야말로 묻고 싶어. 보이는 건 보이는 거니까 할 수 없잖아.” 신호가 녹색으로 변하고 사람들이 걷기 시작한다. 두 사람도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아라스톨한테도 안 보이는데……, 그거 정말이야?” 샤나의 미심쩍어 보이는 모습에 유지는 조금 상처가 되었다. “똑똑히 보인다니까. 저거, 앞에 가는 새로운 토치 속을 봐. 빠르게 움직이고 있잖아.” “난 안 보인다니까? 새로운 거란 건 알겠지만.” 아라스톨이 불쑥 말한다. “전부라고 말했나?” 이 ‘홍세의 왕’에게는 정확한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감을 갖게 만드는 관록이 있다. 유지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고 확인한다. 큰길을 따라 이어지는 보도 위엔 한 번 죽 훑어본 것만으로도 2, 30명의 토치가 보인다. 각각 가슴속에 품고 잇는 등불의 밝기와 타는 상태에 따라 강하거나 약하다. 자신은 어떤지 확인해보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규칙적인 고동이 깊고 조용히 뛰고 있다. 유지는 자신이 가진 신비한 능력에 책임을 지고 아라스톨의 질문에 대답했다. “응, 전부 고동치고 있어.” “토치의 수와 관계가 있나?” 샤나의 질문에 평소라면 금방 돌아왔을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아라스톨?” 역시 대답이 없다. 샤나도 유지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말없이 걷는다. 다음 신호에 걸렸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라스톨은 입을 열었다. “아주 먼 옛날, 서쪽의 끝에서 자신이 먹은 토치에게 어떤 농간을 부려 막대한 세상의 균열을 만들어낸 ‘왕’이 있었지.” 갑작스런 옛날 얘기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본명은 ‘관을 짜는 자’라고 하는 그 ‘왕’은 우리들이 플레임헤이즈를 대대적으로 배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사건을 일으켰다네.” 샤나가 묻는다. “……어떤 사건?” “‘도시 삼키기’.” 그 단 한마디가 갖는 오싹하고 불길한 울림에 유지는 소름이 끼쳤다. 눈앞에서 신호가 빨갛게 변했다. 슈퍼에 들어가도 눈앞의 찬거리에는 눈길 한 번 안 준 샤나는 전통적인 장보기의 순서를 무시하기 그 중심에 있는 과자 코너로 향한다. “…….”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유지는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빨간 신호로 바뀐 보도 옆이 마침 슈퍼 입구였기 때문에 샤나는 겸사겸사 야식을 사러 들렀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슈퍼에서 적의 음모가 어쩌구 하는 얘기를 아무나 하던가……?” 흥분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유지였다. 아라스톨은 이런 샤나의 행동을 진지하지 못하다고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여전히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관을 짜는 자’는 자신이 먹은 토치에게 ‘열쇠의 실’이라는 장치를 짜 넣었지. 놈의 지시 하나로, 대체품이라는 빈껍데기를 잃고 분해되어 본래의 모습인 ‘존재의 힘’으로 돌아간다는 그 장치를.” “그게 어떻게 됐다는 거야?” 장바구니를 내린 샤나도 딱히 진지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랄까, 우선 그녀는 이런 일로 장난칠 성격도 아니다. “그는 잠입한 도시의 인구 10%를 먹어치우고 장치를 발동시켰네. 대체품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토치가 일제히 본래의 힘으로 돌아가자, 위장되어 있던 연결 고리를 갑자기 대량으로 잃은 그 도시는 사람과 물거니 휘말려 세계의 거대한 흔들림을 낳고 말았지.” 샤나는 진열대에서 과자를 집으며 유지를 본다. “……알아듣겠어?” “뭐, 대충. 그러니까 사람 하나 없어지는 것을, 천천히 존재감을 잃게 해서 파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토치고.” 유지는 확인하는 듯이 샤나를 보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그게 갑자기 한꺼번에 없어지니까 세상이 모순투성이로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뭐 이런 건가?” “맞아.” 샤나는 한 번 더 끄덕이더니 다음 진열대로 향했다. 지금 이거 칭찬인가? 하는 생각에 유지는 슬며시 만족감에 빠졌다. “아라스톨, 그래서?” “음, 그 뒤는 간단하다. 그 거대한 흔들림은 토치의 분해의 촉발되어 눈사태에 휩쓸리듯 도시 하나를 통째로 어마어마한 양의 순도 높은 ‘존재의 힘’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관을 짜는 자’는 본래 우리들이 먹기 적합하지 않은 것까지 전부 힘으로 바꾸는 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샤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화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냉장고에서 어린이용 커피 음료를 꺼내며 말한다. “그것이 ‘도시 삼키기’……. 그런데 그 ‘관을 짜는 자’는 없앴겠지?” “수많은 ‘왕’과 플레임헤이즈들과의 기나긴 전쟁을 거쳐 마침내는. 어쨌거나 ‘관을 짜는 자’는 도시 하나 분량의 힘을 먹었고, 그것을 ‘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만큼, 당시의 난획자 중에서는 최강의 ‘왕’이었다. 유지는 조금씩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먼 옛날의 어처구니없는 비법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야?” “한 곳에 있을 수 있는 토치의 수가 이상하게 많고 그 속의 불가사의한 장치……, 상황이 그때와 아주 흡사하네. 프리아그네가 ‘관을 짜는 자’의 비법을 그리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플레임헤이즈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처단하지 않으면 안 될 걸세.” 가능성이라고 말하면서도 아라스톨은 거의 확신하는 듯 했다. “그런가, 그렇군…….” 실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는 유지는 프리아그네 일당을 ‘고약한 악당’ 정도로만 생각했다. 밀접한 듯 하지만 사실 실제로 습격당한 것은 자신뿐, 자신이 떠맡기만 하면 주변에 그 위협은 미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샤나가 해치워줄 것이다. 그런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놈들이 정말로 ‘도시 삼키기’를 꾀하고 있다면 자칫하면 조만간 모든 사람이 토치의 일제 붕괴에 휘말려 이 미사키 시와 함께 통째로 삼켜지고 만다. 나는 둘째 치고, 엄마와 친구가 살고 있는 이 동네까지 소멸해 버린다. 유지는 처음으로 프리아그네 일당을 향한 적의를 불태웠다. 공포가 아닌 적의를. 샤나는 그런 유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태평하게 말한다. “하지만 토치의 수도 아직 10%라고 하기엔 많이 모자라. 없애버릴 거면 빨리 해야겠지만, 찾는 것도 어렵고.” “정말로 상대방이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거야?” 갑자기 투지를 불태우며 묻는 유지에게 샤나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응~, 일단 이쪽에도 미끼가 있긴 한데.” “미끼?” “너는 미스테스, 그리고 녀석은 ‘헌터’인걸. 모처럼 눈앞에 늘어뜨려진 보물인데, 제 손으로 ‘도시 삼키기’에 휘말리게 하진 않을 거 아냐?” “그렇군.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도움이 되는 거네.” 미끼 취급에도 불구하고 별나게 의욕을 불태우는 유지를 샤나는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뭐, 나야 상관없으니.’ 어느 새 장바구니를 가득 채운 샤나는 마지막으로 계산대 근처의 진열대에서 빵을 고른다. 역시나 시선이 가서 꽂힌 것은 메론 빵이었다. 방금 전까지 했던 얘기는 머릿속에서 나라간 것처럼 몇 종류나 되는 메론 빵을 신중하게 바라본다. 유지는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다가 가격이 비싼 한 개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 어때? 진짜 메론 과즙이 들어갔다고 적혀 있는데?” “안 돼.” 일언지하에 기각 당했다. “왜? 가격 따윈 별로 상관 안 하잖아.” 샤나는 장바구니와 가방을 든 양 손으로 재주 좋게 허리를 짚고 가슴을 내밀었다. “자고로 메론 빵이라 하면 그물 무늬가 제대로 잘 박혀 있어야 비로소 메론 빵이다 이 말씀이야! 진짜 메론 맛 따위는 난센스, 아니 사이비야!” 갑작스런 큰 소리와 주장에 주변의 손님들에게서 오호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유지도 그 당당한 의사 표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엄선된 작업에 그 후 10분이라는 시간을 잡아먹었다. 두 사람은 슈퍼를 나온 뒤에도 토치 속의 고동을 관찰하기 위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황혼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습격을 받을 것 같은 미묘한 긴박감 속에서 유지는 집 앞에 서 있었다. “…….” 그러나 유지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문 옆구리에서 좁은 정원으로 돌아 울타리 가장자리의 덤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샤나가 의아한 듯 묻는다. “뭐 하는 거야?” 유지는 떨떠름한 시선을 샤나에게 보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런 경우를 걱정할 타입이 아니다. “엄마가 계실지도 모를 시간에 어제처럼 소동이 일어난다면 곤란하잖아. 적어도 해가 저물 때까진 여기 숨어 있을래.” “흥, 가족 되게 생각하네.” “다들 그럴걸.” 유지는 말하고 나서 무심코 생각한다. 샤나는 본래 이 세상의 인간이었다지만, 플레임헤이즈가 되기 전에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살았을까.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샤나는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이윽고 짧게 대답한다. “……글쎄.” 샤나도 유지 옆에 웅크리고 앉아 슈퍼 봉투에서 사탕 봉지를 꺼낸다. 그것을 본 유지는 딱히 할 일도 없는 터라 손을 내밀었다. “하나 줘.” “싫어, 내 거야.” 특유의 인정사정없는 대답. 뺨이 뾰루퉁해지면서도 유지는 한 번 더 요구한다. “많이 있잖아. 하나만 줘. 피곤할 때는 단것이 좋대.” “싫어. 알 게 뭐람.” “줘. 오늘은 ‘도시 삼키기’인가 뭔가 하는 데서도 도움이 됐잖아.” “싫어. 어쩌다 공 좀 세웠다고 잘난 척하지 마.” 점점 둘 다 오기가 생겨난다. ‘……쯔쯧…….’ 아라스톨이 한숨을 쉬는 것도 모르고 마냥 다투고 있다. “좀 주라.” “싫어.” “좀 줘.” “싫어.” “줘.” “싫어.” “좀생이.” 유지가 전법을 바꿨다. 이번엔 샤나가 뾰루퉁해졌다. “……뭐라고? 잘 안 들렸어.” “왕 좀생이.” 샤나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툭 불거졌다. “왕까지 붙였겠다……?” “듣고 있었네? 줘.” “죽어도 싫어!” 두 사람은 정원의 덤불 속에서 이마가 닿을 정도로 서로 노려본다. “죽어도를 붙였겠다?!” “붙였으면 어쩔 건데?” “그게 바로 왕 좀생이라는 증거야!” “어, 또 그랬어?” “말했으면 어쩔 건데?”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웬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우리 유~지, 그런 데서 뭐 하고 있니?” 두 사람이 위를 보자 시원스러운 얼굴의 여성…… 유지의 어머니인 사카이 치구사가 창에서 얼굴을 내밀고 이쪽을 의아한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켜서 어쩌니, 우리 유~지?” 푸풋 하고 샤나가 입가를 누르며 웃는다. “…….” 입가를 슬쩍 굳힌 유지는 굳이 샤나가 아닌 또 한사람, 냉정하고 의지가 되고 도리를 알아 말이 통하고 어른스러운 대응을 할 줄 아는 ‘왕’ 아라스톨에게 묻는다. “……아라스톨?” “왜 그러느냐, 우리 유~지?” “………………벌써 해질녘은 지났어.” 어느 새 머리 위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난 몰라.” “나도 모르겠네.” 샤나는 사카이 집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발견하고 현관 앞까지 달려 나온 치구사의 온화한 용모에서 뿜어 나오는 알 수 없는 압박에 떨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 앉아 있었다. “우리 유~지가 집에 여자친구를 데려온 것은 처음이네.” 라고 말하며 만면에 기쁨을 드러내는 치구사는 지금 부엌에서 진수성찬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이미 식탁에는 샐러드와 찌개 외에 반찬이 두 가지나 올라와 있는데도 아직 뭔가를 굽는 소리가 요란하다. 샤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맞은편의 유지를 째려보았다. “너희 엄만, 왜, 아들하고, 마당에서, 핏대 올리며 싸우고 있던 상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거야?” 한 마디 한 마디를 강조하는 항의는 눈앞에 접시에 수북하게 쌓인 완두콩 두부말이 튀김의 구수한 냄새가 방해하는 바람에 다소 박력이 떨어졌다. 유지 쪽도 턱을 괴고 있는 건지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건지 모를 기묘한 자세로 투덜거린다. “아니, 왜 이런 땅꼬마를 보고 그런 해석이 나오느냐고.” 좋아하는 생선찜이 올라와 있어도 오늘만큼은 몰래 집어먹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젯밤 일도 그렇고, 자네 실은 정말로 그런 취미를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이봐요!” 아라스톨의 진지한 염려에 화를 내는 유지를 치구사가 부른다. “유~지, 이것 좀 날라다줄래?” “아, 네.” 마지못해 유지가 느릿느릿 일어난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자마자 절규가 터져 나왔다. “여, 여기다가 오므라이스까지?! 너무 많잖아요!” “뭐 어떠니. 비장의 양념 덕분에 맛있단다. 게다가 히라이한테도 우리 집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면 우리 유~지도 곤란하잖니.” “내가 왜 곤란해!” “또, 또~ 후후, 아빠하고 사귀던 때가 떠오르는구나.” “이젠 그 얘긴 됐다니까!” 안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샤나는 문득 눈을 감는다. “…….” 눈을 뜨면 가족을 위해 준비한 따뜻한 식사가 있다. 눈길을 돌리면 주렴 너머에서 돌아보는 어머니의 포근한 미소가 있다. “…….” 다시 눈을 감는다. 이윽고 치구사가 커다란 접시를 든 유지를 데리고 들어왔다. 접시 위에는 무진장 큰 오므라이스가 하나 얹혀 있었다. 사카이 집안의 전통에 의한 오므라이스는 전원이ㅡ라고 해도 대개는 두 명뿐이지만ㅡ나누어먹는 것이었다. 오늘은 3인분이라 평소보다 더욱 컸다. 치구사가 착해 보이는…… 아니, 착할 것이 틀림없는 미소를 띠며 말한다. “자, 들어요. 사양 말고 많이 먹고 가요. 디저트도 준비해두었으니.” 그런 치구사의 미소에 말려들어 샤나는 자연스레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유지는 처음으로 그녀의 자연스런 웃음을 보았다. 저녁 식사 후에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달라 재촉하며 만류하는 치구사를 뜯어말리다시피 하며 유지는 샤나를 탈출시켰다. 치구사가 ‘우리 유~지의 여자친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큰길까지 나와주었기 때문에, 샤나는 모퉁이를 돈 다음에 다른 집 지붕을 뛰어넘어 사카이네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김에, “어두워졌으니까 바래다주렴.” 이라는 치구사의 명령을 받은 유지는 바래다줄 당사자가 웬일인지 먼저 가버렸기 때문에, “지켜준다느니 하더니만 습격당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나 원…….” 등의 엄청난 한심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근처의 편의점에서 시간을 죽이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 샤나는 지붕 위에 외로운 모습으로 앉아 있다. 유지가 방 창문을 열어놓았을 테지만, 샤나는 어쩐지 지금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지붕 위 경사면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오른쪽에는 치구사가 들려준 과자 봉지, 왼쪽에는 자신이 산 슈퍼 봉투를 각각 놓고 있었다.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작은 턱을 괴고 야경을 바라본다. 오늘의 하늘은 구름이 없다. 달이 밝았다. “아라스톨.” 문득 대화가 시작된다. 유지와 만나고 난 뒤 왠지 이런 버릇이 생겼다. 그때까지는 시끄러울 때, 조용히 있을 때, 멈춰 있을 때, 움직일 때… 같은 경우에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의무인 양 말없이 지내왔는데. “네 명성에는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별로 격정적으로 불타오르거나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알아. 너의 계약문은 여러 가지 의미로 걸작이었지.” 눈앞, 손으로 엮은 펜던트 ‘코큐토스’ 속에서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이 우레처럼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다.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에 비하면 꽤 인격자에 남 돌보기를 좋아하는 ‘홍세의 왕’은 대답해준다. 자신만이 멋대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뿐, 그는 언제나 대답해주었다. 헌데 누구 때문에 이렇게…… 라고 생각하다 왠지 화가 나서 생각을 멈추었다. 그런 마음의 움직임과 관계 잇는 것인지, 맥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후후, 고마워.” “너는 다른 플레임헤이즈들이 자신을 불태워 얻는, 그 시간이나 과정을 전부 뛰어넘어 계약했고 어린 나이에 ‘토벌자’가 되었다. 단지 ‘무리’를 처단하기 위한 존재니까.” “제대로 불을 내뿜을 수 없는 건 그 탓인가……? 만약 ‘천목일개’로부터 ‘니에토노노샤나’를 빼앗지 못했다면 여전히 때리고 차면서 싸울 수밖에 없었을 거야.” 목소리는 희미하게 잠겨 있었다. 아라스톨의 음성엔 쓴웃음이 배어 있었다. “프리아그네가 한 말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가? 신경 쓸 것 없다. 네가 진심으로 맞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들게 할 만한 적을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결과에 지나지 않아. “응. 그냥 계약대로 냉정하고 확실하게 ‘홍세의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서 싸워왔을 뿐이야.” “나만을 따라와라.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지 말고.” “터놓지 않아도 곤란할 건 없었어.” 이것이 샤나의 진심이었다. 아라스톨도 진심으로 대답한다. “그렇지. 마음을 터놓으면 오히려 곤란한 일이 많아진다. 단.” “?” “나쁘진 않겠지.” 문득 유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위를 둘러싼 반 아이들의 모습이, 치구사의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처럼 딱 부러진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런가.” 샤나는 무릎에 얼굴을 얹었다. 스르르 눈꺼풀이 감긴다. ‘오늘은 올라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어느 새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유지도 오늘은 탐색과 감시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저녁 식사 뒤의 신경전이라는 결정타를 먹었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다. 돌아가자마자 목욕을 하고 침대로 직행해서 취침했다. 한 사람, 작은 손에 얽혀 있던 코큐토스의 안에서 아라스톨만이 조용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4. 유지 다음 날도 쾌청한 아침이었다. 아침햇살 속에서, 유지는 자신의 현실을 착각하는 법 없이 몽롱한 머리로 침대를 더듬는다. ‘……야구방망이, 야구방망이…….’ 그러고 보니 어제 잘 챙기고 잤나? 어라, 내가 왜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걸까? 아아, 돌아와 보니 샤나가 안 들어와 있었지. 뭐 어때, 없으면 나나 자야지. 원래 내 방이었으니까…… 등등의 생각을 희미하게 하며 품에 든 것을 다시 끌어안는다. 음냐. 그런데 왠지 부드럽고 따뜻하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좋은 냄새도 난다. ‘……이상한 야구방망이……. 뭐 어때……. 기분…… 좋다…….’ “……스…….” 뺨에 희미한 숨결이 불어왔다. “?!”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떠보니 눈앞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라기보다는 자신이 부둥켜안은 모습으로, 샤나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평소의 늠름함이나 강인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섬세하고 애처로운, 편안해 보이는 얼굴. “…….” 에로틱한 감정조차 저만치 날아가도록 만드는 순수함에 넋이 나가 있기를 수 초. “……헉?” 유지는 자신이 어젯밤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전속력으로 후퇴했다. “우왓! 우와아, 아, 윽!” 최후의 비명은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뒤통수를 강타 당했기 때문이다. “뭐, 뭐…… 뭐야?” 머리를 누르고 끙끙대는 유지에게, 이불 속에 있는 샤나의 가슴 위에서(확인해볼 만큼 목숨을 함부로 여기진 않는다.) 더할 나위 없이 심기가 언짢은 듯한 ‘홍세의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잠을 깼나.” “우와아악! 이이, 이건 불가항력이야! 이상한 짓은 절대, 아니 아마도 하지 않았을 거야!” “당연하지. 했다면 넌 오늘 아침 해를 못 봤을 것이다.” 영 뒤숭숭한 대꾸임에도 조금은 마음이 놓인 유지였다. 하지만 이내. “그래도 아까는 위험했어.” 라는 결정타가 날아왔기 때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왜,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더구나.” 유지의 뇌리에는 방금 본 샤나의 자는 모습이 떠오른다. “……속옷 차림으로.” 유지의 음흉한 상상을 아라스톨의 언짢은 목소리가 와장창 깨버렸다. “내가 아래로 내려가라고 말했다. 이 아이도 반쯤 잠든 상태라 옷을 벗어 던지자마자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버리더군. 본의가 아니긴 했지만 굳이 깨우는 것도 꺼려져서, 그뿐이다.” 유지의 옆으로 기어 들어올 때의 샤나는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긴장을 푼 상태였다, 잠든 얼굴이 너무나 평화로웠다, 그래서 방해하기 어려웠다……는 말까진 하지 않는다. “으응……. 뭐야, 벌써 아침이야?” 두 사람의 대화 때문인지 샤나가 눈을 떴다. 묶지 않고 잠들었기 때문에 흐트러진 머리가 맨 어깨에 드리워진다. “일어났나.” “잘 잤어? 아라스톨……. 으으~~~~~!” 샤나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전신에 강한 힘을 퍼뜨리려는 듯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마침내 시선을 떨어뜨려 자신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 내가 왜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거지?” “내가 그러라고 했다.” “흐음, 그랬구나……. 어……?” 샤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등을 돌리고 정좌해 있는 유지와 현재 자신의 모습을 알아챘다. 방을 둘러보니, 어제처럼 유지가 벽 가장자리에서 잤던 흔적은 없고 그때 말고 자던 담요도 지금 침대 위에 있으니, 요컨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 “…….” “…….” 각각의 의미를 담은 세 명의 침묵. 드디어 압도적으로 불리한 그 분위기 속에서ㅡ예를 든다면 형장의 담벼락에서 사전 통지 없이 집행을 기다리는 죄인 같은 심정으로ㅡ정좌해 있던 유지가 샤나에게 등을 보인 채 조심조심 말을 걸었다. “저기……, 샤나 님?”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힘줄이 툭툭 불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시퍼런 서슬과 분노로 가득 찬 소리가 낮게 깔려왔다. “아, 아니 그러니까 이건 쌍방에게 있어서 행운, 아니 불행한 사고이고 나는 수상한 짓은 안 했고, 그리고 어제만큼은 아니었……, 아니 기분이야 좋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기뻤다거나,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 어떤 의미냐 하면 그것이,”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은 유지의 등 뒤에서 촤악 하고 플레임헤이즈의 검은 옷이 펼쳐지는 소리가 났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유지가 깨닫기 전에. “칼등이로군.” 아라스톨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정수리에 일격. 유지는 공중제비를 돌며 혼절했다. 중상 일보 직전의 일격을 당한 유지가 평소의 기상 시간에 일어났…… 다기보다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습관의 승리였다. 머리 위로 불쑥 솟아 나온, 지난 평생을 통틀어 최대 크기로 여겨지는 혹을 손바닥 아래로 느끼면서, 유지는 의식을 치르듯 아침 햇빛 속에서 고뇌하고 있다. 참고로, 정신을 차린 뒤에도 반성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해 자세는 정좌를 유지하고 있다. 조금이라고 말하기엔 심하게 얼빠져 보이는 모습인 유지의 머리 위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침은 변함없이 찾아왔다. 내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몸에도 변함없이. 오늘이라는 형태로. 그렇지만, ‘……응, 여기까지 왔나?’ 유지는 정수리를 문지르면서 잠시 기다린다. 그러나 이젠 한숨이 나오지 않는다. 절망과 공포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잊은 것도, 없어진 것도 아니다. 분명히 있다고 느끼지만, 더 이상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어졌다. ‘이상하다……. 언젠가 다가올 소멸의 시기를 두려워하면서 매일 벌벌 떨며 살아가게 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실제론 그 반대였다. 거의 평정을 되찾아 지금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처음엔 거의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고,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며 겁에 질려 있던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유가 지금의 자신에게는 생겼다. 익숙해지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된단 말인가. 아니면 샤나가 말한 대로 포기한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점점 타들어가면서 나타나는 무기력의 증상일까. ‘……아니야, 달라……. 뭔가 알 것도 같은……. 뭐지……?’ “잠깐, 듣고 있어?” 정좌해 있는 유지의 정면, 열린 유리창 너머에는 샤나가 가시 돋친 소리로 말한다. “어? 아, 응.”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때린 놈이 할 말이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샤나가 부릅뜬 눈으로 한 번 쏘아보자 유지는 반론을 즉각 철회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묻는다. “……근데 뭐라고?” 이미 세일러복을 입고 있는 샤나는 베란다 난간에 작은 새처럼 걸터앉아 있었다. 미간에 잡힌 주름으로 불편한 심기를 명백히 드러내며 한숨을 쉰다. “후우……. 이런 게 하는 말을 믿어야 해, 아라스톨?” “지금은.” 가슴의 펜던트에서 아라스톨이 대답한다. 그의 목소리도 아직 꽤 위험하다. “현 단계로는, 프리아그네가 ‘도시 삼키기’를 발동시킬 만큼 토치의 수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서둘러 손을 써야함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들에게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 그저께 이후로 봉절과 난획을 삼가고 있다.” “그러니까 양쪽 다 손이 묶인 상태로군.” 정좌한 채 팔짱을 끼고 말하는 유지에게 샤나가 말했다. “일단은 너란 미끼를 데리고 어슬렁거리며 다닐 생각이야. 이렇게 서로 대치하고 있는 동안에 토치는 점점 사라져가니까 그 안에 놈들도 초조해져서 나올 게 틀림없어.” 그러나 이 말엔 생각지도 못한 대꾸가 들어왔다. “아니, 그래선 안 돼.” “뭐라고?” 유지가 샤나를 보고 있었다. 역시 차분한 표정으로. 샤나는 이 반박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되물을 뿐이다. “무슨 뜻이야?” 유지도 알고 있다. 샤나는 납득할 수 잇는 이야기라면 순순히 받아들일 소녀라는 것을.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면 안 돼.” 유지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냉정했다. 방금 전 자기 분석의 부산물일까, 자신들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명확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이쪽이 기다린다는 건 결국 상대한테 문가를 준비할 여유를 주거나 다음 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받아들이고 움직이는 거잖아. 그래서야 스스로 덫 안에 뛰어드는 꼴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상대방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잖아.” “불러낼 방법은 있어.” 유지는 뼈아픈 선택이 될 것이 분명한 제안인데도 왠지 선뜻 말할 수 있었다. “놈들이 ‘도시 삼키기’를 획책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아마 물 거라고 봐.” “……?”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는 샤나의 가슴에서 아라스톨이 묻는다. 그의 목소리엔 방금 전까지의 언짢았던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놈들의 계획이 어떤 내용인지는 대충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 방해를 하면 되는 거야.” “너, 설마.” 유지의 의도를 파악하고 아라스톨은 놀랐다. 유지는 응 하고 끄덕이더니 말을 계속했다. “이젠 수단을 고를 여유는 없다고 생각해. 기다리면 이쪽이 불리해질 뿐이야. 아직 무사히 남은 사람부터 확실하게 지켜 나가야 해.” 흐응 하고 똑같이 파악한 샤나가 재미있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한 대 맞더니 머리에 스위치라도 들어왔나 봐?” 아라스톨도 유쾌하게 말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엉뚱하긴 하지만 확실히 효과적이긴 하다. “그럼……,” 샤나는 유지에게 끄덕여 보였다. 최고로 밝고 강한 웃음이……, 유지의 명안에 대한 감탄만이 아니라 유지라는 존재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 웃음이 떠올라 있다. “응, 협력할게. 점심 먹으면 곧 학교를 나오자. 바빠지겠는걸.” “어머, 히라이 아니니?” 베란다 밑에서 들려오는 느긋한 목소리에 유지는 지금까지의 냉정함이 모두 날아갔다. 엄마 치구사다. 절망이었다. 유지 방의 창문은 현관 바로 위에 있다. 신문과 우유를 가지러 나간 치구사가 위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아들의 동급생(으로는 보이지 않지만)인 소녀가 방 베란다에 걸터앉아 있으니 터무니 없는 오해를 받…, “안녕? 웬일이니, 아침부터?” …지 않았다. 치구사의 순진함이 이런 때는 고맙다. “왜 그런 곳에?” “아, 그러니까, 한번 뛰어보느라고요.” 라고 샤나도 근본적으로 어긋난 대꾸를 했다. “어머, 말괄량이 아가씨로구나?” 치구사도 지지 않는다. 유지는 저도 모르게 힘이 빠져서 정좌 상태에서 무너져 버렸다. 결국 샤나는 아침 식사도 유지네 집에서 얻어먹었다. 사흘째의 수업은 세 종류로 갈렸다. 처음으로 샤나와 수업을 한 선생은 예의 장렬한 자폭, 자존심과 권위를 갈가리 찢겼다. 이것은 전날, 전전날과 같다. 현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두 번째 이후의 교사로 이번에는 정 반대의 양상을 보였다. 완벽한 무시 대결이다. 전자는 ‘긁어 부스럼’이라는 태도로 그녀를 철두철미하게 무시하는, 아주 알기 쉬운 것. 후자는 끓어오르는 분함과 열의에서, 자기 나름의 연구와 공부를 거쳐 샤나에게 그 잘잘못을 묻는, 왠지 주객이 전도된 것. 교사 쪽은 그렇다 치고 학생들 쪽은 사흘째나 되니 그녀의 태도에도 이골이 나서(전날 체육 수업의 영향도 있다) 나름대로 수업을 즐기는 여유도 생겨나 있었다. 교사 된 자로서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이런 일에 적합한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교사가 의외로 많지 않은, 이른바 아이들이 어른을 관찰하는 장소로서 수업이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상황은 일개 직업으로서 교사를 선택한 자에게는 재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고 교사로서의 이념과 정렬을 가진 자(소수파로 보이지만)는 마치 진검 승부라도 하는 양 불타올랐다. 샤나는 여전했다. 교사의 요구엔 냉혹하게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을 들이댔다. 마치 수업에 심판이 나타난 것 같았다. 결국 사흘째 오전 4교시까지 자폭 1, 무시 2, 대결 1의 성적을 냈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이젠 괜히 나가는 아이는 없어졌다. 이케네 세 명과 요시다도 유지랑 샤나와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책상을 붙였다. 주위의 아이들도 각각 점심 식사와 수다를 즐겨, 이제 샤나가 나타나기 전의 광경과 다를 바 없이 돌아갔다. ‘역시 길이 든 건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여느 때와 같이 김을 와삭와삭 씹으면서 편의점 주먹밥을 먹는 유지였다. “근데 히라이.” 이케가 도시락을 열며 불쑥 말을 꺼냈다. “왜?” 샤나도 늘 그렇듯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아라스톨과 드러내놓고 대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타인과 동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완전히 문자 그대로 ‘함께 먹는’ 것뿐이라, 옆에서 말을 걸건 말건 봉투에서 꺼낸 점심 식사를 볼이 터져라 먹고 있다. 이미 그녀의 그런 점에 익숙해졌는지 이케도 개의치 않고 유지를 젓가락으로 가리킨다. “대체 이 녀석의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든 거야?” “푸앗!!” 젓가락질 당한 유지는 마치 찔린 것처럼 펄쩍 뛰었다. 사토나 타나카도 흥미진진하게 주시하고 있었지만, 샤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맘에 들다니? 무슨 소리야?” “왜 이러셔. 어제도 방과 후에 쭉 데이트 했잖아.” “데이트?” “……니들 미행했었냐?” 위험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유지는 이케를 노려본다. 그러나 대답은 뜻밖의 곳에서 날아왔다. “미, 미, 미안해……. 내가 두 사람 어디로 간 걸까 하고, 그러니까, 이케한테, 물어봤더니…….” “요시다?” 유지는 ‘원래 히라이 유카리’가 요시다와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가 하고 (생각하기 싫지만) 점점 희미해지려는 그녀의 정경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거의 떠오르지 않지만, 그런 것치곤 그녀의 모습은 몹시 심각했다. 아니면 그녀들의 사이에서밖에 말할 수 없는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요시다를 이케가 옆에서 편들어주었다. “쫓아간 건 나중에 돼서야. 처음부터 뒤를 밟으려 했던 게 아니고, 미사키 대교에서 마침 따라 붙었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관찰 했었어.” 샤나 쪽을 보고는, 현명하게도 이쪽은 젓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으며 말한다. “너희들이 어딘가 들르면 말을 걸려고 했는데 냅다 걷기만 하잖아. 그러다보니 요시다가 먼저 지치는 바람에 다들 주스를 마시고 먼저 돌아갔어. 그뿐이야.” “모처럼 하는 데이트인데, 그렇게 할 일이 없든?” “못난 녀석 같으니. 쫓아간 발품이 아깝더라. 서비스 좀 해라.” 사토와 다나카가 이어서 말한다. “너희들도……?” 유지가 머리를 싸쥐었다. 반대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 못하고 있는 샤나는 태평한 얼굴로 요시다에게 묻는다. “나한테 뭐 볼일 있었어?” “으, 으응, 그런 게 아니라…….” 요시다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여기에 볼일이 있었나?” 샤나는 두 사람 빼기 나 라는 뺄셈에서 나온 대답으로 유지를 엄지손가락으로 휙 가리켰다. 갑자기 푹 수그리고 있던 요시다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진다. 내용물이 거의 줄지 않은 조그만 도시락 통에 젓가락이 박힌 채 멈췄다. 이케가 요시다와 유지를 거쳐 마침내 샤나 쪽을 힐끔 보더니 상황을 살핀다. 사토는 동네 구경났다는 듯, 다나카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요시다를 지켜본다. 이 세 사람은 어제의 동행으로 인해 대략적인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점심시간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이상하게도 이들 가운데에서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응? 설마…….’ 유지는 요시다의 모습에 몹시 흐뭇한 상상, 혹은 망상을 품었다. ‘아니지, 설마.’ 하하하, 이런 일은 대개 쪽팔리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 끝나던 걸 하며 유지는 (실은 기대하고 있으면서) 심리적 방어선을 폈다. 그러나 요시다는 그런 유지의 예상을 뒤엎듯, 푹 숙인 새빨간 얼굴 밑으로 뭔가 말을 쥐어짜내려 애쓰고 있다. 그 사이에도 샤나 혼자 메론 빵을 우물우물 먹으며, 시선만으로 왠지 얼어붙은 애들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결국 요시다가, “아.” 라는 말을 쥐어 짜내기까지 5초는 걸렸다. “저기, 어제, 그……, 멋있었어.” 필사적으로 쥐어짜낸 말을 끊고, 마치 잊어버린 것처럼 참았던 숨을 내쉰다. “아, 하지만 실제로 행동한 건 히라이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유지는 말하면서도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소리라며 좌절했지만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 요시다가 새빨간 얼굴을 쳐들고 한참 들이마셨던 숨을 전부 뱉어내듯 말했다. 외쳤다고 말해도 될 만한 성량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실에 있던 전원이 놀라며 그녀를 봤다. “멋있었어, 정말!” 반 아이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유지는 그 말에 얻어맞은 듯 멍하니 있었다. 이런 장면은 드라마나 만화 속에서만 있는 줄로만 알았다. 당연히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15년이라는 인생 경험밖에 없는 유지로서는 실제로 맞닥뜨리기까진 어쨌거나 소설 속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작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니 경험 부족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 날 구해줬고, 서, 선생님한테도 똑바로 할 말을 하고, 굉장히 멋있었어. 정말이야.” “……하아, 고… 고마워.” 또 쓰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될 만큼 조마조마한 요시다의 기백에 눌려 유지는 얼빠진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창피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요시다도 실은 진짜 하고 싶은 말까지 다 하지는 못했지만, 워낙 내성적인 그녀로서는 이 정도가 용기의 한계였다. 또 얼굴을 푹 숙이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유지도 몹시 놀란 탓에, 기분이 좋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뭔가 말은 해야겠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이런 생각만이 열기 속에서 메아리친다. 교실 안을 침묵이 지배한다. 그중 한 사람, 이런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메론 빵을 먹고 있던 샤나가 옆에서 새빨개져 있는 유지를 봤다. 그 다음엔 마찬가지로 새빨개져서 얼굴을 푹 숙인 요시다를 본다. 방금 전 대화의 의미를, 교실이 조용해진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제의 일, 멋있었다, 고마워……. 이상한 대화였나? “…….” 한 번 더 유지에게 눈을 돌린다. “………….” 새빨간, 웃음보가 터지기 직전 같은, 곤란해 죽을 것 같은 이상한 얼굴. 왠지 샤나는 이런 유지의 얼굴에 갑자기 기분이 팍 상했다. 분노? 하지만…… ‘무리가’ 미끼를 보고도 반응이 없었을 때, 다른 플레임헤이즈가 싸움을 걸어왔을 때, 거리에서 어리석은 인간을 봤을 때, 단것만 먹지 말고 다른 것도 먹으라고 아라스톨한테 야단맞았을 때……, 지금까지 느껴왓던 각각의 크고 작은 그것들과는 뭔가, 어딘가 달랐다. 그렇다, ‘유지가 자신의 성질을 돋워서 화가 치민다’는 게 맞을, 억울한 기분. 저도 모르게 입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마치 용납할 수 없는 생물을 보는 눈초리로 유지를 휙 째려보더니 묻는다. “다 먹은 거야?” 불쑥 날아든 질문에 유지가 돌아본다. 그것도 뭔가 당황한 표정으로. “어? 으, 어.” 대답인지 뭔지도 알 수 없는 유지의 말을 억지로 긍정이라고 결론짓고 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자.” 둘 다 원래 점심 식사 후에 나갈 예정이었으므로 돌아갈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샤나는 가방과 먹을 것 봉지를 잽싸게 주워들고, 머뭇거리는 유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뭘 우물쭈물하고 있어.” “자, 잠깐만 기다려.” “싫어.” “싫다니…….” 완전히 예상 밖인 샤나의 대답에 유지는 허둥지둥 가방을 들면서 요시다 쪽을 본다. 그녀는 샤나의 살기등등한 기세의 놀라 또 겁을 먹고 있었다. 그 얼굴이, 광경이 옆으로 휙 지나간다. 샤나에게 손을 잡혀, 아니 거의 짐짝처럼 유지는 교실에서 끌려나갔다. 두 사람이 교실을 나가고 십여 초가 지나서야 이케가 침묵을 깼다. “……이거 진짜인거 같은데?” 이번엔 요시다가 발끈해서 두 사람이 나간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두 사람은 교실을 박차고 나간 그 기세로 복도를 달리고 있다. 샤나는 이미 손을 놓았지만 유지가 쫓아가는 상태인 것은 여전하다. “왜,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모처럼 좋은 분위기였다느니 투덜거릴 만큼 유지도 멍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불만이 말투에 배어나오고 말았다. 옆에서 달리는 샤나가 여전히 입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한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예정대로의 행동일 뿐이라고.” “그건 그렇지만…….” 유지는 말도 제대로 못했던 주제에 그런 건 싹 잊어버리고, 좀 아깝단 생각을 하며 요시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다 엉덩이에 돌연 샤나의 발길질이 날아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우왓!! 무, 무슨 짓이야!” “뭘 실실 쪼개고 있는 거야, 지금부터 한판 치러야 되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그렇다고 발로 차냐?!” “그럼! 발로 차야지!” 무시무시한 박력으로 칼같이 말했기 때문에 유지는 입을 다물고 달리기로 했다. 끝없이 펼쳐진 듯한 어둠 속에 수십 개는 됨직한 흐릿한 도깨비불 같은 것이 떠돌고 있었다. 그 희끄무레한 불 가운데 하나가 갑자기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불은 가느다란 윤곽에 하얀 광채를 띤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긴 옷자락 속으로 등불이, 거꾸로 비춰진 검은 거울 같은 바닥을 가볍게 밟는다. ‘헌터’ 프리아그네였다. 혼란스러운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마리안느, 이건 대체 무슨 일일까?” 살짝 비틀린 음색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심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 앞쪽 바닥에 거대한 모형 상자가 불이 켜진 듯 휙 떠올랐다. 장난감 블록이나 모형을 서로 이어 만들어진 그것은 미사키 시를 정교하게 축소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도깨비불 같은 등불이 수없이 흩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토치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주, 주인님!” ‘린네’ 마리안느가 동요를 목소리에 드러내며 말한다. 모형 상자의 가장 높은 빌딩을 모방한 플라스틱 상자 위에 조잡한 인형의 몸이 놓여 있었다. “나의 ‘도시 삼키기’의 표석이 무너져 있지 않느냐?” 프리아그네는 차분한 모습으로 바뀌어 그 모형 상자를 훑어본다. 마리안느가 손가락도 안 달린 펠트 손으로 시가의 한 점을 가리킨다. “플레임헤이즈입니다! 저 애송이가 봉절에서 토치를 마구 소비해서……, 앗?!” 말하는 사이에, 미사키 시 전역을 모니터하는 도구인 모형 상자의 한 곳에 봉절을 나타내는 빛의 반구가 번쩍 나타났다. 이 봉절의 표식은 발생하자마자 곧 옅어져 이내 사라졌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토치를 나타내는 등불도 동시에. 봉절 발생의 에너지원으로 소비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프리아그네는 눈썹을 찌푸렸다. 플레임헤이즈가 토치를 소비하다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이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으니 그도 당연하다. 마리안느가 짧은 손발을 파닥거리며 말한다. “설마 토치들을 소비해서 고의적인 균열을 일으켜 다른 플레임헤이즈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려는 건 아닐까요?” “설마……, 아니……. 하긴 그럴 수도 있다.” 프리아그네는 마리안느의 말에서 상대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것이 그의 아름다운 용모에 칼날 같은 옅은 웃음을 짓게 했다. “그렇군. 그 꼬마 아가씨와 무시무시한 마신의 ‘왕’은 위기상황을 만들어 나를 불러내려는 것이다.” “불러낸다고요?” “그래. 네가 말한 대로 저 두 사람은 다른 플레임헤이즈를 불러내는 수작을 부리면서 내 계획의 근간이 되는 토치를 여봐란 듯 없애……, 음.” 말하는 사이에 또 하나의 봉절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토치도 하나 꺼졌다. 절망적인 표정이 되었지만 프리아그네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은 거의 꺼져가는 토치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없어지면 이번엔 보다 강한 걸 쓰겠지. 내가 나가지 않으면 토치는 점점 소비되어 계획은……, 나의 바람은 무너지고 만다. 그것은 또한 플레임헤이즈의 집결과 나의 토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그런.” 프리아그네는 나부끼는 긴 옷자락에 얼굴을 감추고 모형 박스 위로 날아올랐다. 마리안느를 그 안에서 부드럽게 주워 올린다. 그리고 떠올린 것은 부드러운 미소였다. “마리안느, 그렇게 겁먹은 얼굴 하지 마렴.” 표정조차 실로 꿰매진 인형. 그 표정은 그만이 알 수 있다. 그는 자상하게 웃으면서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심각해질 것 없어. 이것은 곧 도전장이다. ‘헌터’ 앞에 사냥감이 남긴 흔적이지.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자아, 어떡할래?’ 라고 말이지.” 그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무수한 등불이 꿈틀거리는 모형 상자 안에 또 하나의 봉절이. 프리아그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입가가 당겨졌다. 그리고 승부욕에 타오르는 얼굴로 말한다. “사냥감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헌터’로서 택할 길은 하나, 그렇지?” 마리안느는 기쁜 듯 외쳤다. “네, 주인님!” 프리아그네는 아이를 어르듯 마리안느는 공중으로 휙 치켜 올렸다. 그리고 둘이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천천히 돈다. 그렇게 도는 동안, 프리아그네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하나 나타났다. 그 은색의 반지에는 중심에 선을 그은 것처럼 기괴한 문자열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자 하나하나에 광채가 달려 어둠 속을 희뿌옇게 비추고, 빛을 발한 문자는 어둠 속에 넘쳐흐르듯 남겨져간다. 어느 새 남겨진 문자는 별이 뜬 밤하늘처럼 어둠 속을 가득 채웠다. “멀지 않았다.” 프리아그네가 황홀한 표정으로 말하자 문자는 한 곳으로 모여들어 하나의 거대한 구체를 이루었다. 동시에 매달려 있는 마리안느의 가슴속에도 같은 문자로 이루어진 조그만 구체가 빛을 밝혔다. 마치 토치의 등불처럼 보이는 그것은 ‘존재의 힘’의 결정. ‘린네’가 먹을 수 없는 힘을 안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네게 곧 자재식을 작동시킬 수 있단다……. 그 때문에 필요했던 막대한 ‘존재의 힘’이 이제 곧 내 손에 들어온다.” 이 구체의 문자열이야말로, 먼 옛날 봉절이라는 인과 고립의 자재법을 만들어내 이 세상의 인간이 ‘홍세의 무리’를 전혀 볼 수 없게 만드는 데 성공한 천재적인 자재서 ‘나선의 풍금’의 유산. 안에 든 물건의 상태를 다시 짜 맞춰, 타인의 ‘존재의 힘’에 의존하는 일 없이 이 세상에 정착할 수 있게 만드는 ‘전생의 자재식’이었다. “이 자재식이 작동했을 때, 너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는 다름 아닌 하나의 존재로서.” 섬세한 미모가 황홀감에 젖는다. 그에게는 비법 ‘도시 삼키기’조차도, 작동시키는 데 막대한 ‘존재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자재식을 위한 에너지 조달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장치를 필요로 하는 작은 소망. 그것만이 프리아그네의 목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프리아그네가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 작지만 근본적인 의심이 검게 스쳐 지나갔다. 세상의 균형과 자신을 향한 도발을 저울에 올려놓은 듯한 이런 대담한 행동은, 우선 이 계획의 근간이 수없이 배치된 토치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수였다. 우선 이 계획은 다른 ‘무리’에게 간파당하지 않았을 터였다. ‘후, 괜찮아, 계획의 준비 자체는 거의 완료되어 있으니까……. 이제 와서 멈추게 내버려둘 순 없지.’ 또 표정이 자상한 미소로 바뀐다. “마리안느, 너는 여기서 전체의 균형을 잘 살펴보고 있으렴. 상황에 따라서는 곧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은?” 마리안느의 말은 질문이 아닌 확인. 어둠 속,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그들의 주위로 희뿌연 불꽃이 수십 개 떠오른다. “물론 ‘헌터’의 본분을 다해야지.” 불꽃에 비춰진 프리아그네의 미소가 깊어져 거무스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한편 시내의 일각, 사람의 통행이 드문 뒷골목에서 한 쌍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리고 떠졌다. 이글거리는 눈에 광채가 돌며 실로 눈을 태워버릴 듯한 홍련의 불꽃이 일어났다. 우뚝 서 있는 샤나를 중심으로, 뒷골목을 꽉 메운 불길이 머리 위를 뚫고 지나간다. 그 뒤에는 기괴한 문장이 땅바닥에 새겨지고 어지럽게 엉킨 폭포 같은 아지랑이의 벽에 둘러싸인 직경 30미터 가량의 돔형 공간이 남았다. 이 내부에 갇힌 것들은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듯 정지한다. 주변의 세계로부터 일시적으로 인과의 흐름을 차단하는 고립 공간 ‘봉절’이었다. ‘……이것만큼은 몇 번을 체험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유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꿔버린 이 광경을 한기를 느끼며 보고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불안정한 저녁’이나 ‘공허한 새벽’의 힘을 빌지 않은 플레임헤이즈 자신, 즉 샤나의 힘으로 발생시킨 것이다. 이미 두 번이나 본 석양의 빛과는 달리 불꽃의 문장도, 아지랑이의 벽도 실로 역동적으로 불타오르는 진홍빛이었다. 이 봉절에 갇힌 자는 본래 세상으로부터 인과의 흐름이 차단되어 다음 존재로 이동할 수 없다. 즉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몸 안에 미지의 보구를 감춘 ‘미스테스’인 자신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래봤자 평상시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것뿐이지만. ‘하지만 그 덕분에……, 아, 그 탓이라고 해야 할라나?’ 샤나와 만났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괴물에게 습격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진실도 알게 되었다. 진짜 자신은 이미 죽어버렸다는 진실이었지만 좋다 나쁘다를 갈라야 한다면 명백히 나쁜 쪽이 우위를 차지하겠지만, 그래도 지금 유지는 샤나에게 말했듯 후련했다. 그 마음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꺼져버리기 전에 알고 싶은 것이 유지에게 남겨진 자그마한, 그러나 두렵고 무서운 희망이었다. ‘남겨졌다고……. 실제로 어느 정도 시간이 있을까.’ 새 것인지 오래된 것인지의 판별 정도는 그럭저럭 하게 됐지만 앞으로 얼마나 남았나 하는 건 모른다. 익숙해지기에 달린 일이지만 그 익숙해질 만한 시간은 아마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 타서 꺼져버릴 운명의 것이 지금 봉절 안에 한 사람, 혹은 한 개가 우뚝 멈춰 있다. 습격할 때 주변이 휘말려들지 않도록 사람들이 멀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던 그것. ‘존재의 힘’을 먹힌 인간의 남은 불씨에서 만들어진 대체품. 존재의 상실로 인한 공백이 부드럽게 메워지도록, 그래서 세상의 비틀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도구. 토치. 자신과의 차이라 한다면 ‘홍세’의 보구가 들어 있지 않다는……, 단지 그것뿐. 이제 심지 끄트머리의 불씨 정도밖에 남지 않은 희미한 등불의 토치는 손에 배달용 가방을 든 젊은 남자. 유지는 생각한다. ‘가게 사람이었을까? 아르바이트생이었을까?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까? 갖고 싶은 게 있었을까? 가족은, 애인은, 친구는…….’ 그러나 이미 ‘존재의 힘’이 없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교만한 슬픔인지, 단순한 동정인지 유지는 끝내 속마음을 소리로 흘리고 말았다. “……이젠 존재가 너무 희미해져서 타인과의 접촉에도 실감을 가지 못하는 소멸 직전의 것…….” 남자의 토치가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응축한다. 점이 된 그것은 죽음을 앞둔 반딧불처럼 허공을 떠돌다 유지의 앞에 선 샤나의 높이 쳐든 검지 끝에서 멈췄다. “흠, 맞아.” 두 눈을 이글거리며 말하는 샤나. 칼은 있던 자리에 두었으며, 타오르는 붉은 머리도 보이지 않고 검은 망토도 두르지 않는다. 봉절의 제어 정도는 눈동자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아도 의욕도 거의 사라졌어. 그저 임무를 다하기 위해 남은 나날을 보냈을 뿐인 찌꺼기야.” 아무래도 점심때 이후의 샤나는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평소엔 냉정함에서 비롯되는 그 태도가, 지금은 정반대의 의미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유지에게는 느껴졌다. 하지만 요시다와의 사건으로 들떠있는 나르시시즘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왠지 싱숭생숭한, 얼굴을 마주 보기 괴로운 분위기 속에서 둘은 작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샤나의 손끝에서 응축된 토치가 사라졌다. 뒷골목을 뒤덮은 봉절은 유지하기 위한 힘으로 소비되었던 것이다. 유지가 동족의 최후를 지켜보듯 말한다. “이걸로 또 한 사람 죽었군.” “처음 말을 꺼낸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어차피 예전에 죽은 거야.” 얼굴도 보지 않고 말하는 샤나에게 유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응, 알고 있어.” “어떻게 됐나……. 이걸로 43개째네.” 샤나의 붉은 눈이 한 번 깜박이자 까맣게 식어가며 봉절이 풀렸다. 인과가 다시 바깥세상과 이어져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의 토치가 인파로부터 떨어지기를 기다려 봉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되돌아간 장소는 초라한 뒷골목. 큰 위화감은 없다. 다 벗겨진 아스팔트, 낡은 빌딩과 오래 방치된 공사용 담장 사이에 낀 음지. 한 사람의 존재가 조용히 사라지는 장소로 무섭도록 어울리는 장소. 난 뭐든지 너무 깊이 생각한다니까 하고 유지는 자조 같은 한숨을 쉬었다. “……이쯤 되면 슬슬 상대방도 속이 달아오르겠지.” 샤나의 말대로 자신이 제안한 일련의 행동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지는 어서 그렇게 돼야 될 텐데 하고 생각한다. 아라스톨이 대답했다. “음, 자네가 말한 대로 수나 규모에 의미가 있을 경우 그것을 줄여가면 머지않아 놈도 나올 것이다.” 오늘 아침, 유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 의도나 방법을 모르더라도 사용할 물건을 알고 있으면 방해하는 건 간단해.> 이 말엔 샤나도, 아라스톨도차도 감탄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리고 유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샤나, 아라스톨, 너희들도 날 이용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응> 망설임 없이 끄덕이는 자신을, 샤나는 거의 놀라움과 함께 느끼고 있었다. 아라스톨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샤나는 자문하고 있었다.. 이것은 냉정한 대화인가 하고. 그리고 자답했다.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야.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왠지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에 유지가 그 요시다라는 애를 상대로 웃다가 곤혹스러워하다가 하는 모습을 보자, 왠지 또 그 기쁨이 뒤집혀버렸다. 그 부분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뒤엉켜서 결국은 사라져버린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런 생각인 채로 입을 열면 뭔가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유지와 제대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샤나는 빨리 나타나길 바라고 있었다.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을 전부 쓸어내버릴 싸움이 가장 필요했다. “좋아. 팍팍 나가자고.” 투지를 목소리에 드러내며 샤나는 걸음을 옮겼다. 그 찰나 유지는. 찡 하고 자기 몸 속에서 떨리는 뭔가를 느꼈다. “?!” 그리 깊은 곳은 아니다. 신경처럼 그 감각은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샤나가 내민 한 발짝이 땅을 디디는, 실제로는 그 정도의 시간 안에 느낀 감촉이 소리가 되어 터져나왔다. “샤나!” “! ……아아, 알게 됐잖아!” 샤나는 유지의 반응이 갖는 의미를 간파했다. 복잡했던 생각을 전부 날려버린 기쁨이 힘찬 미소로 바뀐다. 그 웃음 속에서 두 눈이 붉게 타올랐다. 플레임헤이즈로서의 그녀가 불타오른다. “‘헌터’의 등장이로군.” 발밑에서부터 비춰오는 희끄무레한 불꽃이 골목을 꽉 채우며 솟아오른다. 유지가 느낀, 이 세상의 흐름 바깥에 있는 존재의 접근. 그것이 일으키는 인과의 단절. 땅에는 문장, 사방으로는 아지랑이가 남아 둘러싸인 세계가 멈췄다. 희뿌연 불꽃, 즉 ‘헌터’에 의한 봉절이었다. 그 가운데, 샤나의 긴 흑발이 불꽃을 뿌리며 이글거리는 광채를 내뿜었다. 불꽃 너머에서 검은 코트로 몸을 감싸고 대검 ‘니에토노노샤나’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그 플레임헤이즈의 등장을 비웃는 듯 뒤틀린 음성이 내려온다. “거 참, 못 말릴 아이로군.” 샤나와 유지가 동시에 올려다보자, 담 버팀목에 이어진 가로등에 희뿌연 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불에 탄 가로등이 곧 마른 파열음을 내며 터져버렸다. 희미하게 깜박이는 물방울 같은 유리 파편이 땅에 떨어지기 전, 불은 크게 부풀어올라 사람의 형태를 띠어갔다. 새하얀 정장 위에 걸친, 역시나 새하얗고 긴 옷자락이 불길의 여운처럼 크게 너울거렸다. 살짝 눈썹을 찌푸리고 내려다보는 얼굴은 흩어져버릴 듯 공허하다. 그와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충만하고 강한 존재감의 샤나가 말한다. “본명에 비해 배짱이 부족한 거 아니야? ‘헌터’ 프리아그네.” 말하면서 칼을 한 손에 든 채 살짝 자세를 낮춘다. 동작의 의미를 알면서도 ‘헌터’ 프리아그네는 쓴웃음으로 대답한다. “후후, 모처럼 그린 그림이 멋모르는 생쥐 발자국으로 더럽혀져서야, 아무리 온화함을 자랑하는 나라도 화가 날 수밖에……. 최악의 기분이야.” 위협이 깃든 최후의 한 마디에 샤나도 지지 않고 받아친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프리아그네가 대뜸 형상을 흉악하게 바꾼다. “죽” 의 음이 울리는 동안, 샤나는 발밑에서 일어난 폭발로 솟구쳐 올랐다. “인” 의 소리를 내는 프리아그네의 지척을 대검의 한 줄기 섬광이 갈랐지만, 곧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뀐다. “다” 나는 제비처럼 낮게 뛰며 몸을 휙 돌리더니, 공중에 뜬 샤나에게 장갑을 낀 손바닥을 뻗는다. 그 표면에서 새하얀 불꽃이 분출되었다. 샤나는 칼등을 몸에 내리쳐, 그 반동으로 힘차게 칼을 휘두른다. 그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서 자세를 바꿨다. 휘두르는 검풍에 불꽃이 잔잔히 흩어진다. 절기라고 할 만한 샤나의 싸움을 프리아그네는 작은 휘파람으로 칭찬했다. 둘 다 착지. 샤나는 안정감 있는 낮은 자세로 칼을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프리아그네는 우아하게 장신을 뒤로 젖혀 어기에 대치한다. 전투에서는 완전히 제 3자인 유지는 허둥지둥 샤나의 등 뒤로 숨었다. “오늘은 인형 놀이는 안 하나보지?” 샤나는 명백한 도발의 말을 던졌지만, 프리아그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쇼의 개막을 알리듯 양 팔을 넓게 펼쳤다. “물론 준비했고말고.” 수십 개의 희끄무레한 불꽃이 샤나와 유지를 둘러싸고 좁은 뒷골목이 터져나갈 듯 타오른다. 그 안에서 ‘인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통이 크지만 왠지 머리가 둥근 인형들. 흐르는 듯한 곡선의 몸 안에는 관절이 눈에 띄지 않도록 짜여 있다. 샤나는 물론이고 유지도 몰랐지만 이것들은 액션 피겨라는 꽤 독특한 종류였다. 물론 전부 소녀형이다. “흐음, 제법인데.” “으, 은근히 무섭다.” 샤나는 조소하고, 뒤에 선 유지는 겁에 질려있다. 애니메이션 풍으로 채색된 얼굴에, 조잡하게 바느질한 옷을 걸친 등신대의 인형이 무리를 이루고 서 있는 광경은 사실 유지의 말대로 섬뜩한 뭔가가 있었다. 그 모습도 캐주얼이나 고스로리 풍에서부터 펑크 룩, 메이드, 무녀, 수영복(학생용인 게 당연), 간호사, 안경에 블레이저 재킷 등……. 실로 취향의 산물인 그들이 예쁘게 그려진 미소띤 얼굴로 관절을 삐걱삐걱 울려대며 거리를 좁혀온다. 무기 하나 없는 맨손이지만, 그 대신 양 손바닥에서 희끄무레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득의에 찬 프리아그네의 음성이 이 포위망의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우후후, 꼬마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했을까?” “글쎄, 그거야 해봐야 알지 않겠어?” 샤나는 디자인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 자못 낙담한 표정으로 프리아그네가 말한다. “실망스러운 감상이로군. 그럼 해볼까?” 전투 개시. 서른 개는 됨직한 피겨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우선 샤나의 정면에 있던 간호사가 눈앞에 돌연 번뜩인 칼날에 두 동강이 나 폭발했다. 그 폭풍에 나부끼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새빨간 빛을 뿜으며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가 다음 먹이를 찾는다. 포위의 일각을 파고든 샤나에게, 양 옆에 있던 고스로리와 블레이저가 덤벼들었다. 양쪽이 달려드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샤나는 그중 하나인 고스로리의 품으로 파고들어 한발 내디디는 것과 동시에 옆으로 베어버린다. 양 팔을 쳐든 채 상반신이 날아가는 고스로리. 그것을 등지고 샤나는 휙 돌아 나머지 하나인 블레이저에 붙은 칼끝을 찔러넣는다. “야압!!” 기합 소리와 함께 블레이저가 산산이 흩어졌다. “으아아악!!” 그 폭풍에 휘말려 더욱 많은 피겨에게 둘러싸인 유지의 귀에 샤나의 목소리가 꽂혔다. “엎드려” 말이 어쩠느니 말할 틈도 없다. 말할 생각도 없다. 유지는 갈라진 아스팔트 노면에 몸을 찰싹 붙였다. 그 코앞에 불꽃을 떠룩는 샤나의 발이 쿵 하고 박히더니 머리위로 날카로운 검풍이 몰아치며 지나간다. 주위로 쪼개지는 듯한 폭발이 몇 번이나 일어나고, 잠시 후 눈을 뜨니 코앞의 발은 사라졌다. 다음 먹이와의 최단 거리인 유지의 머리 위를 샤나는 크고 낮게 뛰고 있었다. 고개를 틀어 유지가 올려다보니, 샤나는 자기 키만한 칼을 마치 나뭇가지인 양 가볍게 바람처럼 휘두르고 있다. 발목을 잡아채는 자신이라는 존재나 수적 열세 따윈 전혀 거리끼지 않는 압도적인 힘이었다. “하앗!!” 몸통을 대각선으로 그으며 빠져나가는 칼날에 란제리와 차이나 드레스의 상반신이 한꺼번에 날아가 빌딩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불꽃으로 신화하난 두 개의 하반신을 발로 차버린 맞은편에, 드디어 희끄무레한 진짜 그림자가 보인다. 샤나는 다시 칼끝을 오른쪽 후방으로 크게 휘두르고 수비 자세를 취하더니, 필살의 적 프리아그네를 베어 올리려 힘껏 땅을 박찬다. “우후후……!” 그와 동시에 프리아그네는 새하얀 장갑을 낀 오른손 주먹으로 꼭 쥔 엄지손가락을 세차게 위로 튕긴다. 피잉. 장갑 낀 손으로 튕긴 소리라고는 여길 수 없을 만큼 맑은 음색을 울리며 허공에 날아오른 것은 한 개의 금화. 그러나 그 금화는 빙글빙글 돌 때마다 잔상을 남기어 끝없이 올라갔다. 샤나가 땅을 차는 타이밍에 맞춰, 그 금화의 잔상의 근원인 오른쪽 주먹을 프리아그네는 힘껏 끌어당겨 휙 돌렸다. 순간, 그 잔상은 길고 낭창한 금 사슬이 되어 샤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샤나는 머리 위에서 뎦쳐오는 금 사슬을 칼로 쳐냈지만 그 잔사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칼의 몸통을 몇 겹이나 휘감아버렸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 사슬 끝에 달린 금화가 칼의 편평한 부분에 자석처럼 달라붙은 것을 보고서야 샤나는 이것이 바로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보구임을 깨달았다. “쳇!” 두 사람은 근소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무기로 맞선다. “우후후, 어떤가. 나의 ‘버블 루트’는? 그 검이 제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이 녀석을 끊어낼 수는 없어.” 금 사슬의 끝을 당기는 프리아그네가 자신의 보구를 자랑한다. ‘그렇다면 그 주인을 베어야지.’ 샤나도 칼을 세우고 프리아그네를 당기며 서로의 거리를 잰다. 주위에서 피겨들이 점점 다가와 대치하는 두 사람의 사이에 몇 명 들어선다. 유리한지 불리한지 미묘한 상황. 살며시 등 뒤의 분위기를 살펴보니 유지는……, 잠시 동안은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며 보고 있는 샤나의 맞은편에선 프리아그네가 다른 쪽 손으로 소맷자락 속에서 보구로 보이는 또 하나의 물건을 꺼낸다. 손끝에 들려 있는 것은 단순하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작은 종.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라고 생각한 샤나는 순간 더 힘껏 당겼다. 프리아그네도 맞당긴다. 순간 그 힘에 실려 샤나는 뛰어올랐다. 발밑의 폭발도 가세하여 앞으로 돌진. 중간에 서 있는 피겨들 따윈 문제될 것도 없다. 단숨에 쳐내버리고 프리아그네에게 칼날을 꽂는 것뿐. ‘!’ 유지는 느꼈다. ‘공명?’ 앞으로 돌진하는 샤나 · 중간에 있는 피겨 · 그 건너편에서 웃고 있는 프리아그네 · 웃어? 그의 손에서 흔들리는 종 · 거기서 느껴지는 · 선율의 공명 · 피겨들에게 같은 울림이……. “물러나!!”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위기감만을 포착해 유지는 소리쳤다. 종소리 하나를 울린 프리아그네가 경악했다. “헉?!” “!!” 앞으로 돌진하던 샤나는 다음 한 발짝을 땅에 힘껏 박고 폭발시켜 순간적으로 후퇴했다. 그 찰나 칼을 조이고 있던 금 사슬,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버블 루트’가 무슨 이유에선지 스르르 풀렸다. 그것을 위기의 증거로 느낀 샤나의 눈앞에서 전방의 피겨들이 응축하며 파열했다.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 충격으로 녹은 담장이 무너져내려 노면이 뒤집힌다. “으아악!!” 샤나도 폭풍과 화염 속에서 땅바닥을 나동그라졌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고통과 전율이 온몸을 달린다. ‘만일 뚫고 들어갔다가 근거리에서 휘말렸다면……!’ 한편, 손에 든 ‘버블 루트’의 금 사슬을 도로 당겨 동전으로 돌아오게 한 프리아그네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녀석이!!’ 이 종 모양의 보구 ‘댄스 파티’의 공명을 순식간에 알아채는 자는 여태껏 없었다. 자신이 토치에 장치를 했다는 사실이 이 이상한 탐지기 같은 ‘미스테스’, 그 안의 보구에 의해 노출된 것임에 틀림없다. 계획을 방해한 장본인을 향한 분노와 함께, 콜렉터의 피가 끓어올랐다. “하, 하, 하하하!!” 흥분을 겉으로 드러내며 프리아그네는 다시 ‘댄스 파티’를 울렸다. 샤나는 코앞에서 다시 여러 피겨의 대량폭발의 충격을 입었다. “크윽!” 봉절 전체를 뒤흔드는 폭발 속에서 이번엔 지면을 굴러,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 접근한 피겨 한 놈을 일어나는 자세 그대로 베어버렸다. “이, 깔보지 말란……. 아얏!” 그대로 돌진하려 했지만 몸 전체를 달리는 격통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하하, 놀랍지 않느냐? 나의 ‘댄스 파티’의 위력이, ‘린네’를 터뜨려 폭발시키는 보구다!!” 과연 ‘헌터’라는 본명은 허세가 아니었다. 보통 방법으로는 해치우기 힘든, 아니 해치우기는커녕 보구를 구사하는 예상 밖의 공격만을 거듭 펼치고 있다. 그것을 알아챈 샤나의 바로 뒤에서 또 한 놈이 폭발했다. 폭발한 장소의 의미를, 폭발시킨 프리아그네의 의도를 깨닫고 샤나는 초조해졌다. “윽!!” 그곳은 자신과 유지의 한 가운데. 폭발의 건너편에 있는 유지는 맨 첫 번째 피겨가 폭발했을 때, 이미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 뒤엔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땅바닥에 뺨이 쓸릴 정도로 폭풍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읍, 하아……!!” 돌연 유지의 주변에서 숨도 못 쉴 만큼의 충격이 사라졌다. 이상한 생각에 눈을 떠보니 주변에 보이지 않는 작은 돔이 씌워진 것처럼 폭풍과 화염이 자신을 피해가고 있었다. “……?” 그 현상의 이유가 눈앞에 있다. 눈에 익은, 존재감이 땅에 뿌리를 내린 듯한 강력한 발이 아니다. 바람 빠진 풍선이 땅 위를 떠도는 듯한 어슴푸레한 빛을 지닌, 모든 것이 새하얀 발. 호기심을 드러낸 살짝 비틀린 음성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안에 무엇이 있는 걸까?” 탐닉의 희열로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린 ‘헌터’가 유지의 눈앞에 서 있었다. 등 뒤에서 비쳐드는 은빛 광채가 시야를 뒤덮었다. 새빨간 머리를 폭풍에 나부끼며 타오르는 눈으로 먹이를 찾아낸 샤나가 옆으로 힘껏 긋는 필살의 한 획. 그 궤도에, 프리아그네는 유지의 목을 움켜잡고 아무렇게나 휙 들이밀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샤나가 주저했다. 칼을 휘두르는 손이 일순 멈춰버렸다. “?!” 그녀는 놀라고 당황했다. 그 짧은 순간에, 프리아그네는 유지를 데리고 날아올랐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프리아그네는 완벽한 예상 밖의 전개를 일그러진 음정으로 조소한다. 그녀가 베면, 그 사이에 안에 든 보구를 갖고 사라지려 했을 뿐인데. 이 ‘미스테스’의 소멸과 안에 든 보구의 쟁탈을 저울 위에 올려놓은, 비기의 맞대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설마, 설마 플레임헤이즈가 칼을 멈추다니!!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 미스테스는 아무래도 이용 가치가 있는 모양이다. “하하하!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여! 아직도 싸울 생각이 있다면, 이 ‘미스테스’가 아깝다면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장소까지 와야 할 것이다……. 최고의 무대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겠다!!” 프리아그네의 비상과 함께, 목을 매단 것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괴로워하는 유지의 눈동자에 하나의 얼굴이 타오르고 있었다. 순간 주저하던 샤나의, 그 직후의 얼굴이. 처절하게 후회하는 표정. 염발작안의 토벌자인 자신에 대한 분노와 실망의 표정. “크윽ㅡ!!” 어째서인지 유지는 절규하고 있었다. 목덜미를 붙잡힌 괴로움도 잊어버리고. “!!”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공포에 울부짖는 것도 아니다. 샤나를 생각하는, 어떤 의미 없이 단지 감정 그 자체가 절규로 터져 나오는 듯한 외침이었다. 그 모습을 비웃는 프리아그네가 자신의 힘을 소비하며 만든 봉절을 푼다. 그리고 종을 흔들었다. “으윽, 그건!!” 움직이기 시작한 세상 속, 멀어지는 샤나의 작은 모습을 중심으로 남은 피겨들이 일제히 터졌다. 대폭발이 일어나 땅은 화염에 휩싸이고 빌딩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시가를 습격한 굉음에 유지의 절규는 지워져버렸다. 마침내 말라버린 호흡과 함께 의식은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5. 플레임헤이즈 생각하고 말았다.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는.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다고. 잃고 싶지 않다고. 그렇다.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말았다. 그것이 두려움을 낳는다. 문득 칼을 멈춰버릴 정도의 두려움을. 하지만 나는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 내가 그렇데 되길 바란, 그래서 된 존재. 그것이 전부. 그것이 나. 내가 그렇게 되길 바란, 그래서 그 존재가 된 나는 선택한다. 싸우겠다고. 하지만 저 미스테스는 뭐라고 말할까. 도와달라고 말할까? 저 미스테스가 도와달라고 말한다면. 나는 어떻게 하지? 괜찮아. 플레임헤이즈로서 싸워야 해. <샤나, 아라스톨, 너희들도 날 이용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라고 말했다. 그런데 난 그 말에 뭐라고 대답했지 그래.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내가 그렇데 되길 바란, 그래서 그 존재가 된 나는 선택한다. 싸우겠다고. 그래야 했다. 하지만 너무나 두렵다. 두렵다. 이런 내가 두렵다. 하지만 두렵다면 각오해야 한다. 나는 싸울 것을 각오해야 한다. 나는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 내가 그렇게 되길 바란, 그래서 된 존재. ……. 싸울 거야. 무슨 말을 할 생각이지? 난 싸울 거야. 하지만 가슴이 너무 아파. ……유지. 시가지와 주택가를 연결하는 대철교 옆, 주변에서 머리 하나는 삐죽 튀어나온 높이로 우뚝 솟아있는 백화점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에 백화점이었던 건물로, 현재 영엄 중인 곳은 지하층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식품 매장뿐. 지상 부분은 모회사의 사업철수로 버려져 있다. 불황이라 새로운 입점 희망자도 없어 공연히 높기만 한 빌딩은 완전히 빈 건물이었다. 단, 이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이야기. 지하층의 중간 정도부터 위쪽은 프리아그네 일당이 날라다놓은 수많은 장난감고 잡다한 도구류에 의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었다. 대개는 그 사이, 혹은 위를 ‘린네’가 흐느적거리며 떠돌곤 하지만 지금은 완전한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일당은 전원 옥상의 낡은 놀이터에 모여 있었다. 망가진 텐트나 녹슨 레일, 삭아가는 카트, 빗물 고인 아이스박스……. 그 흥겨운 폐허 속에 배경용 벽을 걷어내 버린 놀이동산용 무대가 있다. 옥상 끝에도 잇는 군데군데 부서지고 파인 무대 위에서는 활력을 내뿜는 시가지, 단란함을 띠는 주택가, 오가는 자동차 불빛으로 휘황한 미사키 대교와 그 아래를 힘차게 흐르는 마나 강 등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 미사키 시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밤의 무대 위에 정렬한 것들이 있었다. 마네킹들이었다. 이것들은 물론 프리아그네의 ‘린네’다. 전부 다 요철로만 이루어진 얼굴과 빼어난 몸매를 각양각색의 양식과 색채로 디자인된 웨딩 드레스로 한껏 치장하고 있었다. 눈부신 화려함 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는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의 밤바람 속에서 꼼짝 않고 말ㅇ벗이 늘어서 있는 모습은 마치 악몽 속의 패션 쇼 같았다. 그들에게 희미한 빛을 보내는 야경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람이 불면서 차츰 드문드문해져간다. 조용히 밤이 깊어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방치된 무대 한구석에 유지도 주저앉아 있었다. 벌써 몇 시간이나 인간이 아닌 인파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등불을 멍하니 마주 보고 있다. 묶어놓을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무력한 ‘미스테스’따위에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뜻일 터. 프리아그네는 그를 가볍게 취급하고 있었다. 그라는 존재가 아직 살아 있는, 그것이 바로 증거다. 여기서 의식을 되찾은 유지는 당장이라도 몸 안의 보구를 빼앗겨 소멸될지 모른다고 각오했지만, 그를 무시하는 프리아그네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네 눈앞에서 그 아이를 죽일 거야, 어쩌면 그 반대가 될지도 모르겠군……. 어떻든 간에 그냥 싸우기만 해서야 성이 차질 않거든. 날 방해한 대가로, 단지 싸우는 것 이상의 괴로움을 누군가가 맛보는 걸 보지 않는다면 후련치 않아…….> 희미한 미소의 한 꺼풀 아래에서는 실로 불꽃 같은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유지는 그의 말을 듣고 난 뒤로 지금까지, 구멍이 날까 걱정되는 무대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그 소녀가 마지막에 보인 표정이 끝없이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우선 내리쳐서 프리아그네로부터 안의 보구를 지키고, 그 다음에 치유하면 그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했다. 자신은 한낱 토치에 불과한 존재니까. 다만 몸 안에 보구를 감춘 ‘미스테스’라는 변종이지만. 그렇다 그 정도다. 그 정도에 불과한 존재였을 텐데. 칼이 멈췄다. 멈춰버렸다. 바꿔버린 것이다. 내가 그녀를. ‘내가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거야.’ 유지에게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왔다. 자신이 처한 상황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니, 이것은……, 그녀가 변한 것은 자신의 문제다. 그녀를 변하게 만들어버린, 그녀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어버린 나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아주 순간적인 주저였다고 해도, 칼이 멈춰준 것 자체는 기뻤다. 안아버리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그거야.’ 그때의 그녀의 얼굴. 그것은 자신의 본질이 뿌리째 흔들린 것에 대한 경악, 변해버린 자신에 대한 분노, 그렇게 만든 것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실망, 그 모든 것이 한데 얽힌 표정이었다. ‘이게 뭐야.’ 어떤 가혹한 짓을 해도 참고 견뎌냈다. 그렇게 만들어버린 자신이 그녀에게 지금이라도 해줄 수 있는……,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까. 있다. 그것은 그녀를 그녀로서. 플레임헤이즈인 그녀를 플레임헤이즈인 그녀로서. 그녀가 그런 자신을 헤치고 앞으로도 강하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적어도 나는 그녀의 그런 강인함을 받아들일 각오를 갖고 있다는 걸 전하는 것이다. 괜찮다고. ‘……이런, 이런.’ 유지는 자칫 떠오를 뻔했던 쓴웃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나도 참, 잘난 척하긴.’ 바람이 또 한 점 불어서 오래된 무대가 삐걱거린다. 그 소리에 이끌린 건지, 마네킹들이 늘어선 맞은편, 옥상의 난간 위에 새하얀 자태로 선 프리아그네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오지 않네……?” 그의 가장 가까운 데 서 있던, 새하얀 웨딩 드레스로 꾸며진 마네킹이 마리안느인가 했던 인형의 목소리로 말한다. “주인님, 어쩌면 아까의 폭발로 죽어버린 건 아닐까요……?” 프리아그네는 녹아내릴 듯한 달콤한 표정을 보이며 질문에 대답했다. “쉽게 봐서는 안 돼, 마리안느. 저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이니까. 살아 있는 건 틀림없어. 그보다는 겁에 질려서 도망가지 않았을까 싶구나……. 이것을 내버려두고.” 조롱이었지만 유지는 반응하지 않았다. “……후우, 기백이 없는 녀석이로군. 모처럼 온갖 보구를 갖춰 대접할 준비를 해뒀는데, 아쉽구나.” 돌연 긴 옷자락을 펄럭이며 유지의 앞에 내려왔다. 나쁜 장난을 꾸미려는 악동 같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그 양 손에는 어느 새 보구가 나타나 있었다. “이 두 개가 뭔지 알아?” 프리아그네는 왼손 약지, 장갑 위에 낀 은색 반지를 보여준다. 자신이 모은 귀한 보물을 남에게 과시하며 자랑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다. 수집가에게서 곧잘 보이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소멸되지 않는 이유엔 실은 이러한 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 까 하는 의심이 유지에게 들었다. “이건 ‘아주르’이라고 하는, 불을 막는 반지란다. 아까의 폭발이나, 플레임헤이즈의 불을 막아내지. 물론 그 아이에게는 써먹을 필요도 없겠지만.” 이번엔 오른손에 든 총의 총구를 유지의 이마에 대고 겨눈다. 서부극에나 나올 법한 낡은 리볼버였다. “그리고 이게 바로 오늘의 주인공. 백 년 전쯤 만들어진 아주 훌륭한 보구다. ‘트리커 해피’라고 하지……. 내가 애용하는 총이다.” 말의 의미로 보면 무서운 상황으로, 프리아그네는 으스대며 설명을 계속했다. “보렴. 보이는 대로 총알은 없단다.” 탄창을 옆으로 꺼내어 보여준다. 여섯 개의 구멍 저편으로 프리아그네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이 총의 형태는 단지 쏜다는 행위를 표현하기 위한 양식일 뿐이야. 총알 따위는 필요 없지. 쏠 의사를 가진 자가 사용하면 얼마든지 쏠 수 있단다. 그 효과는……, 어떨 거라고 생각하지?” 섬뜩한 웃음을 흘리며 손목을 돌려 탄창을 제자리에 넣는다. “실은.” 1초의 틈도 두지 않고 사실을 밝히려 한다.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 총은 플레임헤이즈를 상대할 전용 보구란다……. 으하하!” 유지는 속으로 받은 충격을 가까스로 감췄다. 프리아그네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된다. 상대의 반응 따윈 아무 상관없는, 자기만족을 위한 설명. “플레임헤이즈는 계약자가 ‘과거 · 현재 · 미래’에서 자신을 차지했어야 할 존재의 모든 것을 ‘왕’에게 바치고, 대신 ‘왕’이 빈껍데기가 된 계약자라는 그릇에 그 힘을 채우는 것으로 완성된다.” 유지에게 있어서는 뜻밖에 흥미를 돋우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서 ‘왕’의 힘을 이 세상에 끌어낸다. 그리고 그 그릇 안에 들어갈 때 ‘왕’은 자신이 존재를 그 안에 집어넣은 양만큼 잠재우는데, 이 ‘트리거 해피’는 그 잠을 깨울 수가 있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 프리아그네는 갑자기 유지의 눈앞에서 쥐고 있던 왼쪽 주먹을 편다. “그릇은 펑 터지고 계약자는 폭사한단다. 재밌지?” 빙긋 웃더니 프리아그네는 총구를 유지의 이마에서 내리고 하늘을 향해 겨눴다. 유지는 보지 않았지만, 프리아그네는 개의치 않고 계속한다. “그렇게 되면 ‘왕’은 이 세상에 억지로 나와 있는 꼴이 되지.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존재의 힘’을 애초에 갖고 있지 않아. 그러니 양계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들은 곧 ‘홍세’로 돌아가버린다. 요컨대 나의 완승이라는 말이지.” 그리고 문득 득의에 찬 웃음이 쓴웃음으로 바뀐다. “하지만 길 한복판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곤란해. 어쨌거나 저 꼬마 아가씨 안에 있는 건 저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이거든. 시내 한복판에서 함부로 그릇을 깨고 출현시켰다가는, 모처럼 만들어둔 토치가 대거 날아가 버릴 대폭발이 일어날 거야. 그래서 일부러 결투장을 지정한 것이지. 여기라면 폭발이 일어나도 시가지에는 미치는 패해가 최소한으로 끝나고…….” 유지의 턱에 빈손을 받쳐 위를 보게 한다. “불러낼 미끼로 너를 데리고 왔다.” 한밤중의 달이 권총을 손에 들고 눈을 가늘게 뜬 새하얀 남자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그렇게 해서 불꽃 한 번 맞지 않고 일격에 해치운 내가 확실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되는 거야.” 그러더니 갑자기 또 입을 시무룩하게 일그러뜨리며 목소리를 낮춘다. “저 꼬마 아가씨의 성격이라면 당장에라도 쫓아올 줄 알았는데, 솔직히 김빠지는군. 그 뒤론 토치를 소멸시키며 나돌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속셈인 걸까?” 요컨대 그것이 묻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유지가 대답할 리가 없었다. 프리아그네도 그리 기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손을 휙 저으며 유지로부터 떨어진다.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유지의 생각은 프리아그네의 생각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실은 유지는 여기 온 뒤로 계속 느끼고 있었다. 두근 두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격렬한 고동을 줄곧. 가까이에서. 누구의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샤나다.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긴장 하지 마.’ 이번에야 말로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해버리겠지. 그것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서 긴장하는 거야.’ 단지 자신을 냉혹하게 뿌리쳐버릴 생각이라면 이토록 긴장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개의치 않고 싸우기로 결심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싸움 때문에, 그 이유가 아닌 다른 일 때문에 긴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기뻤다. 또 웃음을 억눌렀다. ‘……후후, 나도 진짜 이상해졌나봐…….’ 그녀가 자신을 개의치 않고 전력으로 싸운다.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이 휘말려들어 죽게 된다는 뜻이다. 그녀가 자신을 죽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기로 결의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것이 기쁘다. 유지는 그런 살벌하기 그지없는,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듯 느껴지는 자신의 마음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해마저 하고 있다. ‘그래, 그 애를 변하게 만든 책임…… 응?’ 지금 뭔가에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중한 뭔가에. 유지는 그것을 생각하려는 순간, 그녀의 고동이 더욱 높아졌다. ‘!’ 찾아낸 작은 실마리는 강한 심장 고동에 쓸려가, 또 가슴 깊은 곳에서 사라진다. 프리아그네도 어떤 기색을 알아챈 듯하다.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있다. “후후, 뭘 우물쭈물하고 있는 건가……. 이제야 온 건가?” 희뿌연 옷자락의 너울거림이 점점 커진다. “자, 너희들도.” 프리아그네가 반지를 번쩍이는 왼손을 크게 휘두르자, 옷자락의 그림자에서 양식도 형태도 가지각색인 수십 자루의 검이 튀어나와 무대 바닥에 깊이 박혔다. 웨딩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음산하게 움직여, 각각 검을 쥐거나 전투태세를 잡는다. 그 가운데 마리안느만이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다. 마치 이런 것들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프리아그네는 그 옆으로 나아가 도취된 얼굴로 말을 건넨다. “마리안느, 이제 곧 너를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게 된다……. 너와 나, 영원히, 영원히 함께 살아가자꾸나.” 마리안느는 한 마디만으로 대답한다. “주인님.” 프리아그네는 ‘트리거 해피’를 든 손으로 순백의 신부 마리안느를 안고, 다른 한 팔은 야경을 향해 쭉 뻗는다. 그 손끝에는 저 ‘린네’를 폭발시킬 종이 있다. 전투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다는 뜻이었다. 양 옆으로 검을 든 웨딩 드레스 차림의 마네킹들을 일렬로 세운 다음 신부를 안은 아름다운 장신의 남자가 무대 중앙에서 말한다. “그럼……, 염발의 아기 사자를 사냥해볼까?” 유지는 전투의 시작을 느낀다. 무력한 자신이 말려들 것이 틀림없는 전투의 시작을. ‘아아.’ 그러나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미소였다. 강렬한 기대와 욕구의 미소. 그의 눈앞에 다가온 소녀를 향한 기대와 욕구의 미소. ‘해치워!’ 오로지 그 생각만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소녀와 같은 강한 미소가 유지의 만면에 새겨져 있다. ‘난 괜찮으니까 망설일 것 없어!!’ 느꼈다. 대답하는 것처럼 그녀의 심장 고동이 아프도록 빠르고 커진다. 그리고, ‘왔다!!’ 무대 위, 프리아그네의 정면. 휘황찬란한 야경을 등지고 날아올랐다. 타오르는 두 눈이, 흩뿌려지는 불꽃이 유성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진다. 검은 코트가 나부끼고 칼이 번뜩였다. 그것은 아라스톨의 플레임헤이즈. “샤나!!” 유지의 한마디 “총에 맞으면 안 돼!!” 그 외침은 마네킹의 발길질에 끊어지고 말았다. “…….” 그 소리를 들은 샤나는 웃었다. 눈물이 나올 만큼 강하게, 타오를 것처럼 강하게. “……하하!!” “음, ‘플레임헤이즈 살육’의 보구인가.” 야광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코큐토스’의 아라스톨이 상황을 이해해간다. 옥상에 착지한 샤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지를 구하러 가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되도록 바랬고, 그래서 그렇게 된 존재인 나는 선택했어.’ 유지의 의사도 전부 느꼈다. 결의도, 각오도, 기쁨도……, 그리고 그것들을 낳은 작은 하나의 마음도 느꼈다. ‘싸운다!!’ 이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네킹들의 맞은편에 내려앉은 ‘헌터’ 프리아그네를 뒤쫓는다. 그것뿐이었다. 프리아그네의 총구가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 샤나는 옆으로 뛰어올랐다. 남겨진 불꽃을 뚫고 왼쪽 어깨로 날아오는 탄환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땅을 박차고 발밑을 폭발시킨다. 필살의 일격이 ‘헌터’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그 앞을 마네킹이 가로막았다. “비켜!!” 공격은 그치지 않고 발은 멈춰지지 않는다. 칼을 눕혀 마네킹을 치자 그대로 가르며 칼날이 빠져 나온다. 그늘에서 공격해오는 프리아그네의 두 번째 총탄을 피한다. 옆으로 베는 자세로 그대로 180도 돌아 등 뒤에 있던 한 놈의 목을 쳐낸다. 프리아그네는 그 사이 샤나와 거리를 벌렸다. 이번엔 종을 울린다. “터져라!” 전방에서 샤나에게 달려들던 마네킹 하나가 응축하더니 폭발했다. 샤나는 앞으로 도약해서 비켜났다. 등 뒤를 덮치는 폭풍에 몸을 싣고 동시에 앞으로 가속시킨다. “?!” 놀란 프리아그네는 다른 마니켕의 그늘로 도망간다. 그 마네킹이 부케와 함께 쥐고 있던 검을 휘두르며 샤나를 덮친다. “쳇!!” 혀를 차며 샤나는 마네킹을 동강내고 또 곧장 자세를 낮춰 옆으로 뛴다. 반 초 전에 샤나의 몸이 있던 자리를 탄환이 지나갔다. 둘 다 유지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프리아그네는 무력한 ‘미스테스’ 따위에게서 눈길을 뗀 지 오래다. 샤나는 이미 말려들 각오를 하고 싸우고 있었다. “엇?!” 물론 유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폭발에 휩쓸려 무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콘크리트에 코를 박고 엎어진 한심한 자신의 꼬락서니에 무심코 쓴웃음이 삐져나왔다. 하지만 왠지 두렵지 않았다. ‘하하, 진짜 볼썽사납군.’ 그때, 팅 하고 프리아그네의 종이 울렸다. “!” 유지는 그 벨소리를 느꼈다. 뭔가를 안에 감춘, ‘미스테스’인 자신만이 가진 감각으로. ‘……뭐지?’ 그 소리엔 기묘한 위화감이 섞여 있었다. 또 팅 하고 프리아그네의 종이 울렸다. ‘린네’가 폭발했다. 머리를 낮춰서 폭풍으로부터 도망쳤다. ‘뭔가 달라.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울린 두 음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유지는 지금껏 갈고 닦은 감각으로 그 차이의 의미를 갖는다. ‘울려라!’ 울렸다. ‘린네’가 폭발하고, 화염과 충격이 머리 위를 휩쓸고 지나간다. 어깨가 불에 덴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크윽, 알 게 뭐야……. 울려!!’ 울렸다. 이번엔 폭발하지 않는다. 대신 그 음색은 깊고 멀리 밤의 공간에 퍼져간다. 또 울렸다. 이번에도 폭발하지 않는다. 두근. 유지는 느꼈다. 그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이건……!!’ 유지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토치 안에 켜져 있던 등불, 그 속에서 뛰고 있던 심장 고동. 프리아그네는 마네킹을 폭발시키기 위한 것 말고도, 벨을 계속해서 울린다. 그때마다 맑은 음색이 미사키 시 전역으로, 그 안에 북적거리는 무수히 많은 토치들을 향해 울려 퍼진다. 토치 안에 있는, 약한 것에는 느린, 강한 것에는 빠른 고동이 그 음색을 받아들이고 있다. 유지는 자신의 심장 고동만은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미사키 시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각해야만 했다. ‘어떤 의미가……?’ 또 한 번 벨이 울렸다. ‘!!’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유지는 결론에 도착했다. 토치 안의 고동이 종소리의 영향으로 빨라지고 있었다. ‘……그, 그거야.’ 유지는 전율과 함께 깨달았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발과 본질을 안다. 심장 고동이 빨라진 끝에, 모든 것이 동시에 지향하는 하나의 붕괴점이 있는 것이다. ‘일제히 폭발시키기 위한 수작이야!!’ 아라스톨의 음성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관을 짜는 자’는 자신이 먹은 토치에게 ‘열쇠의 실’이라는 장치를 짜 넣었지. 놈의 지시 하나로, 대체품이라는 빈 껍데기를 잃고 분해되어 본래의 모습인 ‘존재의 힘’으로 돌아간다는 장치를.> ‘단순한 분해 정도가 아냐, 폭발이다.’ <그는 잠입한 도시의 인구 10%를 먹어치우고 장치를 발동시켰네. 대체품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토치가 일제히 본래의 힘으로 돌아가자, 위장되어 있던 연결 고리를 갑자기 대량으로 잃은 그 도시는 사람과 물건이 휘말려 세계의 거대한 흔들림을 낳고 말았지.> ‘느껴진다, 그 크기가, 10%를 채우진 못했지만 이 위력이라면…….’ <그 거대한 흔들림은 토치의 분해에 촉발되어 눈사태에 휩쓸리듯 도시 하나를 통째로 어마어마한 양의 순도 높은 ‘존재의 힘’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충분히 ‘도시 삼키기’를 할 수 있어.’ 저 종. 저 종이야말로 프리아그네의 비장의 카드인 것이다. ‘제길, 교활하다는 건 바로 이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잖아!’ 언뜻 보기에 놈들은 스스로 위력을 감소시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자폭 작전을 계속 취하고 있었다. 샤나가 보기에 프리아그네의 종은 마네킹을 폭발시키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종을 울리는 진의를 감추기 위한 위장 공작이었다. 프리아그네는 자폭 전법의 그늘에 숨어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는 토치의 일제 폭발……, ‘도시 삼키기’의 성취를 위한 계단을 착실히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교활한 ‘헌터’에게는 앞서 있었던 자폭 전투조차 최후의 싸움을 위한 복선이었던 것이다. 프리아그네는 샤나와 싸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드러내놓고 종을 사용해 ‘도시 삼키기’를 발동시켰다면 샤나는 있는 힘을 다해 저지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자신이 제안했던 대로 선수를 쳐서 토치를 마구 소비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프리아그네는 ‘도시 삼키기’의 준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척, 지금은 싸움에 집중하는 척하기 위한 연막용 전투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전의에 넘치는 플레임헤이즈라면 눈앞의 싸움을 우선시한다는 점을 꿰뚫어본, 빗나갈리 없는 계략이었다. ‘내가 아니면 이 고동도, 그 의미도 느끼지 못했을 거야……!’ 샤나는 눈앞의 전투에 집중하고 있다. 필살 무기가 자신을 노리고 있으니 당연하다. 어쩌면 유지에게 그것들을 자랑한 것도 계산속이었을까. ‘하지만……, 역전할 수 있어.’ 유지는 눈앞의 야경을 본다. 지금까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프리아그네가 하지 않고, 샤나가 완전히 잊고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어쨌든 종소리를 거리에 울려 퍼지지 않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알려야 해!’ 그러나 소리지르려 한 순간 가까운 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외침은 묻혀버리고 유지는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윽……, 우……!!” 수초간의 암흑. 유지는 몽롱해지는 의식에 어떻게든 힘을 넣으려 발버둥 친다. ‘적어도, 한 마디만이라도, 힘을.’ 살려달라는 말이 아닌, 살리기 위한 말을. ‘……샤, 나…….’ 그 얼굴을 보고 말았으니까. 그녀를 변하게 만든 자신의……. ‘…….’ 그녀를 변하게……? ‘……아아, 그래…….’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내가 샤나를 변하게 했어.’ 유지는 마침내 보았다. 그리고 붙잡았다.. ‘여기에 있는 내가.’ 그렇다. 사라질 운명인 그것이 말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 내가 움직이면 그녀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단지 그뿐이다.. 내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움직이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 단지 그뿐이다. 죽은 것도, 죽은 뒤도, 움직일 수 있는 지금이 있다면 중요치 않다. ‘살린다, 였나……. 뭐야, 알고 있었잖아…….’ 쓰러지는 그 위로 다시 폭풍이 덮쳐와 가차없이 쓰러뜨렸다. ‘움직여야 해……. 아아, 그래, 움직일 수 있어.’ 연기를 들이마시고, 모래를 씹으면서도 사카이 유지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단 한 마디를 외치기 위한 힘을 끌어모은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녀를 살리기 위해. 남은 마네킹은 이제 네 개로 줄어 있었다. 프리아그네를 지킬 벽도 얇아졌다. 사실 프리아그네 쪽은 유지에게 허풍을 떤 만큼 유리하지는 않았다. 유리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예상을 넘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원래 그들은 자폭 전법을 구사하는 사이에, ‘도시 삼키기’가 발동되면 그 혼란을 틈타 달아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마리안느의 안에 있는 ‘전생의 자재식’의 작동이었을 뿐, 플레임헤이즈와의 싸움 따윈 딸려오는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거꾸로 말하자면,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한 도망갈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라고 있는 그 시간이 자신들의 목숨을 지킬 전력을 축내고 마는 것이다. 이 고전의 원인은 간단히 말하면 ‘오산’이었다. 플레임헤이즈 필살의 보구인 ‘트리커 해피’가 명중하기만 하면 다 끝난다는 낙관적인 전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불꽃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다른 강력한 플레임헤이즈가 상대였다면 이미 승부는 가려졌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힘차게 날아오르며 그들에게 덤벼드는 이 소녀는 달랐다. 궁합이라는게 있다곤 하지만, 이것은 최악의 전개였다. 다른 플레임헤이즈라면 일단 불을 주력으로 사용한다. 그러니까 불을 막는 반지 ‘아주르’로 막아내는 동안, 분명히 허점이 생긴다. 그러니 이 소녀, 불도 제대로 못 다루는 플레임헤이즈는 오로지 칼만 쓰고 있다. 아니, 쓸 수밖에 없다. 그러니 허점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리고 검술만큼은 압도적이리만큼 강하다. 별 볼일 없는 적이라는 인식 때문에, 자신들의 우위가 본래 어디에 기인하고 있었는지를, 프리아그네 쪽은 풍부한 경험이라는 이름의 습관으로 인해 놓쳐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고전하고 있는 동안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물러나기엔 늦었다. 지금 ‘도시 삼키기’의 발동과 프리아그네의 목숨은 아슬아슬한 사선 위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책략이 어느 새 자신들을 속박하고 만 것이다. 샤나 쪽은 지극히 단순하다. 어떤 간계를 부렸든 프리아그네를 쓰러뜨리면 그만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눈앞의 전투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단순함이 결과적으로 전투 상황을 유리하게 전개시키고 있었다. “……주인님.” 순백의 신부가 얼굴에 희미한 초조감을 띤 주인에게 말을 건다. “이젠 틀렸어, 마리안느.” 샤나가 뛰어오른 앞을 드레스 차림의 마네킹이 또 막아선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떠오른다. 이놈도 저놈도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검술로 보나 힘으로 보나, 고작 프리아그네의 사격을 엄호하는 용도로밖에 쓸 수 없는 조무래기들뿐이라 싸울 맛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는 주인님의 목숨까지……. 이젠 도망가는 것도 어렵겠어.’ 프리아그네가 마치 떼쓰는 것처럼 고개를 젓는다. ‘안 돼. 마리안느!’ 마네킹이 휘두르는 칼에 샤나는 가볍게 칼로 맞서며 그 끝을 휘감아 칼날을 돌린다. 그 사이를 파고들어가 어깨에서부터 온몸을 부딪쳤다. “끄악!” 날아가는 마네킹을 돌아오는 칼날로 두 동강을 내버린다. ‘주인님이 돌아가시면 저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는 가능합니다.’ 순백의 신부, 그 안에 있는 사랑스러운 봉제 인형에게 애원하는 듯 얼굴을 돌린다. ‘안 돼. 마리안느!!’ 마네킹들의 칼에도 각각의 내력이나 특별한 효과가 있었겠지만, 샤나가 가진 신비한 ‘니에토노노샤나’는 그것들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강의 무기였다. 저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보구가 아닌 한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 “세 개 남았어!!” 어둠 속에서 마구 덤벼들 뿐, 거동도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모습의 인형들에게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마리안느,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두 사람이 꿈꾸던 모습의 마리안느의 신부 의상. 그 흰 실크장갑에 감싸인 왼손이 프리아그네의 울먹이는 얼굴에 닿고, 오른손이 종에 닿는다. 종을 흔든다. ‘네, 주인님……, 저도 같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샤나의 눈앞에 보이는 남은 세 구의 마네킹, 그중 앞을 막아선 두 구가 응축한다. 그러나 이제 그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욱!” 샤나는 폭발에 대비하기 위해 검은 코트 자락으로 몇 겹이나 몸을 감쌌다. 프리아그네의 총격의 목표가 되지 않도록 옆으로 달린다. 무시무시한 폭발의 충격에 새까만 통나무처럼 나뒹굴고 말았지만, 부상이라고 부를 만한 상처는 입지 않은 채 재빨리 자세를 취한다. ‘주인님이 가진 진짜 자재식만 있다면 괜찮습니다. 같은 의식으로 만들어진 저의 복원도 가능할 겁니다.’ 가능할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리안느는 달려가야 했다. ‘마리안느!!’ 검은 코트의 방어를 푼 샤나의 정면, 폭발의 한가운데에서 순백색 웨딩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이 갑자기 돌진해왔다. 그러나, ‘터져버려!!’ 라고 샤나는 판단했다. 남은 건 없다. 이 한 개뿐. 더구나 이 마네킹은 맨손이다. 폭발할 예정이겠지만 그 전에 베어버릴 것이다. 베어버리면 불꽃이 되어 흩어진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복원시켜주세요. 약속이에요, 주인님……. 저도, 당신과…….’ 그렇게 맹세하는 것으로 마리안느는 사랑하는 주인님을 지키기 위한 행동은 허락받는다. 맹세의 이행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주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 바로 지금이야말로 그 모든 것. ‘마리안느!!’ 샤나의 칼이 정면에서 순백색 신부를 두 쪽 내버렸다. 이제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은……!” 프리아그네뿐. 샤나는 두 동강 난 마네킹 사이를 빠져나오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불과 한 걸음의 방심. ‘주인님을 위해……, 그것이 필요했어!!’ 두 쪽으로 갈라진 마네킹의 몸속에서 뻗어 나왔다. 금빛 사슬이. “응?!” 샤나가 얼떨결에 치켜올린 칼에 그것은 촤르륵 감겨왔다. 흩어지는 희뿌연 불꽃 속에서, 조잡한 인형인 ‘린네’ 마리안느가 나타났다. 그 손 안에서 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보구 ‘버블 루트’가 뻗어나와 있었다. 샤나는 그녀가 처음 봤을 때처럼 몸을 이중으로 싸고 있었음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당했다!!” “프리아그네 님!!” 혼백의 절규가 사랑하는 이를 움직이게 했다. “마리안느!!” 종이 울린다. ‘안 돼!!’ 샤나는 순간 인형에게 끌려 들어가는 칼을 놓았다. 마리안느가 응축하더니 샤나를 눈앞에 폭발로 날려버렸다. 파열의 여운을 남긴 밤 공기 속. “……으, 흐…….” 금사슬도 날아간 옥상 끝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무릎을 꿇은 샤나는 오열 소리를 듣는다. “……으흐흐, 흐으……. 나의 마리안느……. 나의 마리안느!!” 오열은 총구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마에 겨눠진 총구 건너편에 하얀 유령처럼 선 프리아그네가 울고 있었다. “되고 말고, 하고 말고, 마리안느!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힘 전부를 써서라도 너를 되살려 보일 테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플레임헤이즈를 죽이는 ‘트리커 해피’가 쥐어져 있었다. “이 세상에서 어엿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 보이겠다!!” 왼손에는 ‘도시 삼키기’를 일으킨 종 ‘댄스 파티’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영원히 둘이서 살자꾸나, 둘이서…….” 슬픔을 토해내다 미친 사람처럼 기뻐하는 등 혼란스러운 프리아그네였다. 들이댄 총구 앞에는 누더기가 된 채 무릎을 꿇은 증오스러운 플레임헤이즈가 있다. 비법 ‘도시 삼키기’는 최후의 완성까지 한 두 단계만을 남겨놓고 있다. 오른손, 그리고 왼손. 플레임헤이즈 죽이기와 ‘도시 삼키기’의 성취. 프리아그네는 방해자를 없애고 사랑하는 이의 부활을 꿈꾼다. “……그런 이유로 먼저 죽어라.” 만면에 찬 슬픔과 희열에 더해서 분노가 섞인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플레임헤이즈……, 이 토벌의 도구!!” “……웃!!” 방금 전 ‘린네’의 폭발을 지척에서 받아낸 탓에 몸은 만신창이였다. 이제 뛰기는커녕 일어날 수조차 없다. 고작해야 일격에 필요한 힘이 남아 있는 정도. 그나마 칼도 손에 없다. 이마에는 무기가 맞닿아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분노와 안타까움이 끓어오른다. 하지만 지금은 무얼 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봉절이야!!” 잔해 더미 속에서 기어나온 유지의 외침이 솟구쳤다. “헉?!” 갑작스런 외침에, 프리아그네는 그 의중을 간파당한 듯한 목소리로 경악했다. 살짝 돌아가는 시선이 유지에게로 향한다. 그 아주 짧은 순간에, 샤나는 유지의 지시를 실행하고 있었다. “……!!” 이글거리는 두 눈이 힘을 쥐어 짜낸다. 홍련의 맹렬한 불길이 시야를 뒤덮고, 그들을 이 세계의 인과로부터 고립시킨다. 미사키 시를 뒤흔들던 종 ‘댄스 파티’의 소리는 이제 바깥으로 퍼져나가지 않는다. ‘녀석의 계획. 봉절, 왜 아직 벨을 들고. 토치의 고동. ‘린네’의 폭발. 노리는 것은!!’ 샤나는 봉절의 의미를, 프리아그네의 의도를 흘러가는 생각 끝에 깨달았다. “멈……!!” 프리아그네가 제지의 말을 다 하지 못하고 트리거에 힘을 준다. 찰나, “으아앗!!” 샤나는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힘으로,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을 들어 한 줄기로 내리치고 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두 개. 자신의 목숨을 확실히 빼앗아갈, 총을 든 오른손. 유지의 외침이 가리키는 의미, 종을 든 왼손. “그래, 나는 플레임헤이즈야.” 샤나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하며 베어갔다. 하늘 높이 흩어지는 손가락과 함께 종이 두 쪽으로 나뉘었다. “크.” 프리아그네는 사방으로 날아가는 자신의 손가락과 비보 ‘댄스 파티’를 본다. “윽.” 이 광경의 의미를 이해해간다. 이제 봉절이 풀려도 의미가 없다. 계획을, ‘도시 삼키기’를 실행할 수 없다. 마리안느도 돌아오지 못한다. 자신과 마리안느의 영원한 미래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프리아그네는 모든 감정을 실은 절규를 내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유지는 샤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샤나도 유지를 보고, 웃으며 총을 맞았다. 두 사람은 유지의 절규의 의미를, 샤나의 행동의 의미를 전부 서로 이해하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 한가운데에 탄환을 맞은 샤나의 몸이 옥상 끝에서 떨어져내렸다. 그녀가 펼친 봉진이 풀렸다. 그녀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세상으로. 전원을 잃은, 고동이 뛰기 시작하는 거리로. 백화점 뒤로 흐르는 마나 강으로. 붉은 머리에서 불꽃을 흩뿌리며 떨어져간다. “부서져버려!! 폭발해버려!! 전부!! 전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해 프리아그네는 광기어린 비명을 지른다. 미사키 시의 중심인 마나 강.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 찰나의 출현에 의한 대폭발이 얼마나 큰 파괴를 거리에, 사람들에게, 토치에게 가져오든……. 이젠 아무 상관없었다. 그 광란 속에서, “……?” 프리아그네는 예상 밖의 광경을 보았다. 그녀가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득한 아래쪽, 마나 강의 수면. 거기엔 붉은 붉꽃에서 이루어진 파문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이 넓게 퍼져간다. 하천 부지를 넘어 제방을 타고, 철교를 감싸고 시가로 뻗어, 주택가를 뒤덮고 길 위를 달려, 멀리, 아주 멀리까지 붉은 파문이 퍼져나가, 그것이 지평선에 도달한 순간, 한꺼번에 타올랐다. 미사키 시 전역을 휩쓸며 타올랐다. 화염의 빛깔은 홍련. 유지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봉절……?” 야경 저 멀리에서, 밤 하늘에 너울거리며 굉장한 아지랑이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지면 위로 넓게, 모든 것을 사로잡으며 기괴한 문장이 타오르는 선으로 그려지고 있다. 거대한, 너무나 거대한 봉절이 미사키 시 전역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이것만큼은 진짜로 타오르고 있던 마나 강의 넓은 수면에서, 천천히 그것이 몸을 일으켰다. 옥상을 내려다볼 정도로 거대한 그것. “……‘헌터’ 프리아그네여…….” 이름을 불린 프리아그네는 그 우렛소리와도 같은 울림에 얼어붙은 것처엄 우뚝 서 있었다. 잔해 속에 주저앉아 있던 유지는 그 울림의 근원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아, 아라스…… 톨?” 칠흑의 덩어리를 안에 감춘 거대한 불꽃이 뭔가의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다. 너무나 커서 전체의 형태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몸을 구부려 옥상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시야의 한 면을 넓게 뒤덮고 있는 것은 날개인가. 지나치게 압도적인 ‘홍세의 왕’……, ‘천양의 겁화’ 아라스톨, 그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이 가진 보구를 함부로 놀렸기에 제 무덤을 판 어리석은 ‘왕’이여…….” 다시금, 뱃속 깊숙한 곳을 뒤흔드는 듯한 낮고 무거운 소리가 울린다. “……그 보구……, 이 몸을 눈뜨게 하는 것으로, 계약자의 그릇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니……, 두려워하며 피했던 것도 이제는 웃어야 하는가……. 아니…….” 희미한 쓴웃음 같은 울림을 말 끝에 남기더니, 아라스톨은 가까스로 팔이란 것을 알 수 있는 화염 덩어리를 옥상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프리아그네에게 뻗어갔다. 그 움직임을 따라 무시무시한 열기의 파도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기세로 덮쳐왔다. “……네놈은 나의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눈을 뜨고도 이렇게 여기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아느냐……? 그 보구에 의한 잔재주는 다른 플레임헤이즈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이 아이에겐 듣지 않거늘…….” 아라스톨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소녀를 거만하게 자랑한다. “이 아이, 본래의 생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예술가일지, 만민을 움직일 정치가일지,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칠 무인일지, 악명을 떨칠 죄인일지……, 아니면 그들의 어머니일지……. 아 아이는, 이 아이야말로 이 ‘천양의 겁화’인 ‘왕의 존재’를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릇을 시공에 펼칠 ‘위대한 자’다.” 프리아그네에게는 이미 그 설명을 이해하고 있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자신을 이글이글 태우는 열기의 파도 속에서, 우뚝 서있는 그것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다. “……이 ‘천양의 겁화’가 계약자를 아무렇게나 고를 거라고 생각했나……?” 이 세상에 나타난 진정한 붉은 눈이 어리석은 ‘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게 내버려둘 만큼,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내버려둘 만큼 그 위압감은 약하지 않았다. “받아라……. 인과응보의 불길을.” 단지 그것만으로도 백화점 옥상이 통째로 쓸려나갔다. 유지는 순간적으로 프리아그네의 가는 윤곽이 흐트러진 것을, 희뿌연 불꽃이 새의 모양을 띠며 홍련의 불길에 짓눌려 떠내려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에게서 새어나오는 작은 단말마는 하나의 이름이었지만, 그것을 들은 이는 없었다. 복구가 끝나고 봉절이 풀린 백화점 옥상에서 유지는 정말로 다 타들어가고 있었다. 약해지고 군데군데 윤곽도 희미한 몸을 눕힌 채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쳐들고 있다. ‘……아라스톨, 굉장한 걸……. 프리아그네 자식, 플레임헤이즈의 불은 막을 수 있다고 하더니.’ “이게 그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자신이 아직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유지는 칼에 베여 날아간 프리아그네의 손가락 ㅡ 정확하게는 불꽃이 되어 흩어진 뒤 남겨진, 불을 막아내는 반지 ‘아주르’을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유지의 앞으로 그것이 날아온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샤나의 집념이 남긴 산물일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흔들거리다 툭 떨어질 것 같은 그 손으로 누군가를 잡았다. 유지는 시선만을 돌려 그 누군가를 본다. “……여어.” 검은 코트의 옷깃을 반듯하게 맞추고, 상처도 다 나은 듯 보이는 샤나가 옆에 앉아 있었다. 어깨 너머에는 언제 회수했는지 대검이 꽂혀 있었다. 몸을 살짝 굽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표정은 험악함이 없이 온화했다. 무엇의 여운일까, 검은 머리 몇 가닥이 뺨에 드리워져 있었다. ‘……예쁘구나…….’ 유지는 솔직하게 생각하며 도취된 기분으로 말했다. “……어때? 나, 낫게 할 수 있겠어?” 샤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간 아라스톨이 가슴에 매달린 ‘코큐토스’를 통해 말한다. “이젠 남은 불씨라고도 할 수 없겠군. 수그러드는 아지랑이이다. 우리들과 의식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네가 우리들과 길게 접촉했기 때문일 뿐.” “그런가.” 뜻밖에 마음은 차분했다. 하긴 싸움에 뛰어들었을 때 이미 결심은 서 있었다. 그런 것보다는. “샤나.” “왜?” “여태껏 줄곧 생각해왔던 것의 대답이…… 겨우 나왔어……. 사라져버릴 언젠가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거야……. 대답은 ‘지금 있는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였어.” “…….” 툭툭 끊어지며 흘러나오는 말을 샤나는 조용히 기다린다. “……나 자신이 무엇이든, 어떻게 되든, 그저 해야 하는, 그거였던 거야…….” 말을 마치고 올려다봤다. “바보 같은 고민.” 샤나는 평소 그대로의 말투로 잘라 말했다. “그래……. 한 일도 그다지 멋지지 않았어.” 유지는 웃었다. 하지만 자조는 아니었다. “응, 꼴사나웠어.” 샤나도 킥 웃었다. 그러나 조소는 아니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어줬지?” 상냥한 얼굴로 말한다. “고마워.” “……응. 심장 고동이 들렸으니까…….” 샤나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빨개진 얼굴로 끄덕였다. 웃고 있었다. 그때처럼. 이 분위기를 타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유지는 생각한다. “샤나.” “왜?” “부탁이 있는데…….” “뭔데?” “샤나라는 이름.” “……?” “앞으로도 계속 쭉 사용해…… 주지 않을래?” 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웃으며 끄덕였다. 고맙다고 유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럴 힘이 이젠 없다. 샤나의 웃음 띤 얼굴이 흐려져간다. 자신도 웃고 있는 것을 느끼며, 그 훈훈함 속에서 유지는 눈을 감았다. ……이것이 죽는 건가……. ……뭔가…… 나쁘지 않은 기분…… 이야……. ……. ……. ……여긴 어디지? 죽은 건가? 하지만 난 사카이 유지가 아니야. 인간이 아니야. 죽어버리면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죽으면. 그냥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었나? 사라진 뒤의 시간이 있다니. 신기한 느낌이다. 하지만 들린다. 뭘까. 움직이고 있다. 고동? 아아, 쭉 듣고 있었던 소리다. 어딘가에서 줄곧, 아냐,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규칙적으로,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뭘까, 이것은. 움직이고 있다. ……. ……. “……큭큭.” 억지로 참는 듯한 웃음소리. “으하하하하하!!” 천진난만하고 밝은 웃음소리가 밤바람을 가르며 달밤에 울려 퍼진다. 들린다. “…………?” 유지는 눈을 떴다. “…………어?” 보인다. “으하하, 으하하하하하!!” “후, 후, 후.” 아라스톨까지 숨죽여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반쯤 몽롱한 상태인 유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손을 본다. 손이 있다. 희미하지 않다. 가슴을 보니 등불도 원래의 밝기를 되찾고 있었다. “몰랐어? 우리들이 왜 습격을 기다렸다고 생각해?” “후, 후, 만일의 경우를 생각한 조치였지만, 이렇게나 장면과 시간이 겹치니 안도보다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군……. 후, 후, 후.” “봐, 완전히 원래대로야!” 샤나가, 평상시의 강함을 되찾은 샤나가 유지의 등을 힘껏 두드렸다. “으악?! 뭐, 뭐가 어떻게 된 거……?” “너 뭐 하나 잊어버렸지? 중요한 거 말야.” “?” “너의 ‘미스테스’로서의 알맹이 말이다.” 아라스톨이 웃음기가 밴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그러고 보니……, 그게, 이거랑……?” 미심쩍은 듯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가슴속의 등불은 변함없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뭔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불현듯 방금 전, 어딘가에서 느꼈던 고동을 기억해냈다. “그것이 ‘영시미아’의 힘이다. 봉절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고동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물론이다. 시간의 모든 사상을 간섭하는 ‘홍세의 무리’의 보구 중의 보구니까.” “영시미아.” 먼 옛날, 한 사람의 ‘왕’이 사랑에 빠진 인간을 ‘영원한 연인’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제작했다고 일컬어지는 영구 기관이었다. 이것을 토치 안에 심으면, 그 토치는 ‘존재의 힘’은 하루라는 단위에 의거해 시간 속에 묶인다. 그날 하루 아무리 힘을 소비한다 해도, 다음 날 0시가 되면 다시금 다음의 하루로 존재가 옮겨가서 처음의 힘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왕’은 꽤 오래 전에 소식이 끊어졌지. 네게 그것이 옮겨 온 걸 보면 ‘영원한 연인’과 함께 무슨 이변이 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은 별 상관없는 얘기다.” “너한텐 아직 우리들이 지켜봐줄 만큼의 미래가 있다는 말이야. 유지.”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 지금…….” 후후후 하고 샤나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네 안에 있는 그것은 ‘홍세의 무리’가 가지면 ‘존재의 힘’이 소모될 것을 걱정 않고도 얼마든지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엄청난 물건이야.” “음, 샤나가 말한 대로 ‘영시미아’는 난획자들에게는 최고의 물건이다. 그리고 우리들 플레임헤이즈에게는 무용지물, 그러나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물건이지.” 유지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겨우 깨달았다. “……아, 그럼…….” “음, 한동안은 너라는 위험물을 이 동네에서 지켜보기로 하지.” “그래. 뭐야, 불만 있어?” 유지는 확신과 함께 말한다. “없어.” “좋아.” 딱 부러지는 대답에 만족한 샤나는 일어나 유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지는 그 손을 꼭 잡고 일어선다. 문득 그녀의 가슴이 눈에 들어와 깨달았다. 아까부터 검은 코트를 마구 칭칭 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발도 맨발이다. “……갈아입을 속옷, 갖고 있어?” 새빨개진 얼굴의 샤나가 날리는 어퍼컷이 밑에서부터 꽂혀 유지는 다시 넘어갔다. 에필로그 다음 날도 하늘은 맑았다. 샤나, 오늘의 점수, 무시 3, 대결 1이라는 오전 네 시간을 거쳐 점심시간. 오늘은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어제 일어난 요시다 카즈미의 고백 미수 사건, 사카이 유지의 도주, 히라이 유카리의 강제 연행이라는 3대 사건에 의해 교실은 아침부터 미묘한 긴박감에 휩싸여 있었다. 나름대로 대화도 나누고 있지만 소리의 크기가 왠지 줄어든 기미가 보인다. 그 분위기 속에서도, 유지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가방에서 주먹밥을 꺼낸다. ‘내 안에 ‘영시미아’가 옮겨온 것은 우연이야.’ 유지는 이 분위기를 억지로 무시하고 있었다. 실은 어젯밤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내가 스스로의 인격을 잃어버릴 만큼 약해지기 전에 옮겨온 것도 우연이야.’ 그런 유지 대신, 안경맨 이케가 책상을 붙이는 둥 의자를 옮겨 오는 둥 바쁘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함께 점심을 먹게 할 모양인가보다. 구경꾼 근성이든, 쇼크 요법이든 간에 큰 민폐긴 하다. ‘그런 내 곁에 샤나가 온 것도, 그래서 프리아그네의 계획을 파헤쳐 무너뜨린 것도 전부 우연이야.’ 샤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모여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메론 빵을 입에 쑤셔 넣고는 신나는 표정으로 우물거리고 있다. 어제 같은 일이 있었어도 호칭 외엔 취급이 달라지지 않은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인가, 슬퍼해야 할 일인가. ‘하지만 그런 일에 감사하거나 운이 좋았다고 말해봤자 의미가 없어……. 지금 내가 이렇게,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갖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그것만 알고 있으면 충분해. 그래,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샤나가 유지의 시선을 알아채고 되쏘아본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 싸움에서 깨달은 건.’ 옆에서 보면 ‘서로 마주보는 두 사람’으로 보였는지, 앞의 의자에 앉은 이케가 에헴 하며 헛기침을 했지만 무시한다. ‘……지금 있는 일이 전부라는 건가. 말로 하니 진부하지만, 뭐 ‘진실’이란 그런 건지도 몰라.’ 이젠 사토까지 짐짓 휘파람을 불면서 옆자리에 앉거나 그 맞은편에 앉은 다나카가 다리로 쿡쿡 찌르지만 무시한다. 그러나, “……저, 저기……, 유카리.” 유일하게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유지를 깊은 상념에서 되돌려놓았다. 요시다 카즈미였다. 쳐다보니 그녀는 왠지 유지가 아닌 샤나의 앞에서 가느다란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서 있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고 필사적인 기백을 쥐어짜내 샤나를 노려보고 있다. 물론 그런 시선을 개미 콧김만큼도 여기지 않는 샤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짧게 묻는다. “왜?” “……나, 나, 나…….” “?” 더듬거리는 목소리는 마지막만이 확실하게 들렸다. “지지 않을 거야.” 교실 안이 술렁댔다. 저 요시다 카즈미가 저 히라이 유카리에게. 요시다의 선전 포고와, 그로 인해 일어날지도 모르는 소동에 온 교실 안이 전율했다. 그러나 선전 포고를 받은 샤나는 그 말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며 유지에게 묻는다. “무슨 얘기야?” 유지는 왜 하필 나한테 물어…… 라고 말하려다, 잘 생각해보니 자신이 장본인일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능란하게 헤쳐 나갈 만한 경험도 없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요시다는 샤나의 정면에 앉았다. 샤나도 유지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미심쩍은 눈으로 요시다를 관찰하고 있다. 불온한 국면이 일단 지나가자 유지는 안도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할 수 없는걸. 이런 건 나도 여러모로 처음이고…….’ 속으로 자기변호를 하는 유지의 앞으로 가느다란 손가락에 밀려 조그만 꾸러미 하나가 책상 위를 미끄러져 다가왔다. 덜덜 떨리는 가는 손가락은 요시다의 것이고, 밀려온 꾸러미는 도시락이었다. “……으음, 저기…….” 유지가 고개를 들자 요시다는 반대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이라도 책상에 머리를 처박을 것 같은 긴장된 목소리로 말한다. “……늘, 그, 주먹밥만, 먹기에…….” “고, 고마워.” 요시다처럼 쭈뼛거리며 유지도 고마움을 표시한다. 요시다와 세트처럼 보이는 작은 도시락 통. 귀여운 젓가락 통까지 붙어 있다. 이 소박한 호의에 무심코 찡해진 유지였지만, 동시에 비관적인 생각도 맹렬하게 덮쳐왔다. 주춤주춤 옆을 보니 샤나가 이쪽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도시락 통을 따라 이쪽으로 시선이 옮겨온 모양이다. “어떻게 된 거야, 유지?” “아.” 지나치게 강한 울림을 띤 목소리는 교실 안에 불온한 술렁임을 일으켰다. 유지의 전신에 식은땀인지 비지땀인지 모를 것이 줄줄 흘렀다. 샤나는 단순히 요시다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호칭이야 말로 유지가 그녀에게 하나의 인격으로 인정받은 증거(추측)……겠지만, 슬프게도 지금의 상황을 보고 그렇게 받아들일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생각대로 전황의 복잡한 추이를 조용히 관찰하고 있던 이케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카이, 너 그래?” “아니, 이건 그런 의미가…….” 라고 부정하려다 문득 생각난다. 어제 일, 그 때의 일, 나는 샤나를 어떻게 생각했었지? 그런 감정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더 깊은, 더 강한, 하지만 원래 나는 그런 감정을 모른다. 그것이 이것인가? ……등을 이것저것 생각하는 동안 얼굴이 달아올랐다. 스스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몹시 뜨거웠다. “과아~연, 응, 응, 그럼 그렇지. 여러 가지로 파이팅이다.” 옆자리에서 사토가 싱글싱글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에겐 말도 없이 그런 거시기를 머시기 하다니……, 배짱 좋은걸.” “타나카는 분노로 뺨을 실룩거린다. 주변에서도, “어머, 들었어요, 아주머니?” (남자) “이게 웬 일이래요!” (이것도 남자) 지금까지의 숨 막혔던 침묵의 반동과도 같은 수군거림이 그들을 무시하고 끓어오르고 있었다. 휘파람 다중주까지 흘러나온다. 거의 점심 식사 반찬이나 다름없다. 그 소란 속에서도 요시다는 유지를 보며 선언했다. “……지지 않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정면으로 유지를 보고 있었다. (발끈한 것 같긴 했지만) “그, 그, 그래.” 유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샤나의 혈압이 또 오른다. 유지가 또 그 표정을 요시다에게 보이고 있다. 웃기 직전 같기도 하고, 난처해 보이기도 하는 이상한 얼굴. 손은 받은 도시락 통 위에 놓여 있다. “…….” 왠지 기분이 아주 좋지 않다. 어제처럼 유지를 데리고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럴 핑계도 없다. 어떻게 할까 냉정을 가장한 얼굴 밑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반 초 후, 자신 앞에 놓인 것이 눈에 들어와, 해야 할 일이 번쩍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안이었다. “…….” 샤나는 음식 봉투에서 초코 스틱 상자를 꺼내더니 유지의 앞에 던졌다. “……···?” 이 갑작스럽고 예상 밖인, 마치 비둘기에게 모이라도 주는 듯한 행동을 유지는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만은 평소처럼 간결한 대답이 들려온다. “줄게.” “응?” 유지가 쳐다보자 샤나는 시치미를 뗀 얼굴로 메론 빵의 남은 조각을 먹고 있었다. 어딘지 흐뭇해 보이는, 아니 득의만면해 보이는 모습인 것은 아마 기분 탓이 아니……었다. 건너편에 앉은 요시다의 얼굴에 점점 화가 난 기색이 짙어지는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도시락 통을 연다. “자, 잘 먹을게.” 그러자 이번엔 샤나가 가자미눈을 하며 위험한 시선을 보내온(것을 느꼈)다. ‘대,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유지는 이 사면초가의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고자 일부러 반찬도 많고 맛있는 도시락을 음미하는 데 전념했다. 맛은 최고···인데 왠지 죽을 맛이었다. 이윽고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 유지라는 반찬에 질린 아이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화제로 돌아가 있었다. 아침부터의 긴장은 떨쳐내고 평소대로 점심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 웅성거림 속에서 유지는 자신이 놓인 입장에 다시금 탄식한다. 어제까지와는 다른, 지금의 생각을 담은 한숨이었다. ‘……요컨대, ‘진실’이든 뭐든 간에 깨달았다고 해서 편안해지는 건 아닌가봐…….’ 하지만 편한 게 즐거운 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건 변명일까.’ 유지는 아주 잠깐 웃음을 머금는다. 경단 꼬치를 문 샤나가 그런 유지의 표정을 보며 그런 유지의 표정을 보며 아주 잠깐 부드러운 얼굴을 한다. 이야기 소리로 들끓는 교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은 오늘도 맑음. 세상은 변함없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움직이고 있다. 1권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