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삼차원의 세계 외에도 여러 다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 2020년. 어느 날 부터인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이차원(異次元)의 문'. 그것은 파멸을 불러오는 통로였을까… 이차원의 생물 '몬스터(MONSTER)'들에게 속수 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인류. 하지만 그들에게 대등히 맞서 싸우는 이들이 있었으니… 지구 방위대 'PIECE MAKER'! 인간의 정신 속에 잠재해 있는 오라(AURA)를 사용할 줄 아는 오라 전대! 피스 대원들이여, 자신만이 가진 오라의 색으로 몬스터들을 무찔러라!! 2032년. 인류는 아직 살아있다! =-=-=-=-=-=-=-=-=-=-=-=-=-=-=-=-=-=-=-=-=-=-=-=-=-=-=-=-=-=-=-=-=-=-=-= 오라전대 ＰＩＥＣＥ ＭＡＫＥＲ 弟 1 話 각성, 블루! =-=-=-=-=-=-=-=-=-=-=-=-=-=-=-=-=-=-=-=-=-=-=-=-=-=-=-=-=-=-=-=-=-=-=-= -끼이이이이익- 작년 봄이었다. " 이봐,학생! 괜찮아?! " …아아 " 의식이 없어! 누가 119에 연락해! " …119? " 이,이쪽 사람들… 심장이 뛰지 않아! 죽었나 봐! " " 인공 호흡이라도 해 봐! " " 119는 뭐하고 있는 거야?! " …아퍼. 죽을 것만 같아…. " 빌어먹을!! " …아빠는… 엄마는… 그리고 신이는…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희뿌연 시야에 한 소녀가 보였다. 그 아이도 나 처럼 도로에 몸을 처박고 있었다. …신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머리에 꽂고 있는 저 머리핀은 내게는 하나 뿐인 여동생, 신이의 생일날 내 가 직접 사준 선물이었다. 그래. 뭘 사줘야 되는지 일주일 동안 끙끙 거리며 고민하다가 사준 거였지. 그런데 신아… " 이봐! 정신 차려! " 신아… " 구급차다! 학생, 조금만 참아!! " …왜 그렇게 쓰러져 있는 거야‥? -띠띠띠띠띠띠띠- " …헉?!! " 가인은 눈을 떴다. 거친 자신의 호흡이 귓가로 들려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자치 집의 천정이었다.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가위였나. " 손을 가슴에 가져갔다. 언제나 처럼, 그 꿈을 꾸고 나면 가슴이 짓눌리듯이 아파왔다. 숨을 가다듬자 그 통증도 언제 있었냐는듯 사라져 가기 시작한다. 가인은 이런 꿈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이 싫었다. 이 꿈에 익숙해져 갈 수록 그들에 대한 기억 조차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았기에. " .........학교 가야지. " 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탁상 시 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시침을 보던 가인은 눈을 찌푸렸다. 지각이었다. 弟 1 話 각성, 블루! " 야, 유가인~! " 가인은 헉헉 거리며,교실에서 자신을 반기는 재영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흐 르는 땀을 닦아내며 그의 옆에 있는 자신의 책상에 힘겹게 걸터 앉았다.재영 은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언제나 처럼 피식피식 웃었다. " 오늘도 아슬아슬 세이프. 넌 집도 학교에서 가까운 놈이 맨날 왜 이러냐. " " 몰라. 그 고물 시계 때문에…. " 분명 7시를 맞춰두고 잔 자명종이었는데, 울리기는 8시에 울린 것이다.매번 고쳐야지 고쳐야지 하면서도 귀찮아서 내버려둔게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 왠만하면 하나를 사는게 어때? 그거 고치기도 힘들지 않냐? " " ......내 여동생이 선물로 준거라서…. " 가인의 말에 재영은 순간, 멈칫하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 그의 모 습에 가인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하지만 고물은 고물인데 뭐… 하나 장만하는 것도 괜찮겠지. " " 그,그렇지? 그럼 이번 네 생일 날 선물로 이 몸이 하나 사주마! " " .........내 생일은 아직 6개월은 남은 거 같은데…. " " 하하하하하~ 걱정마! 안 잊어먹고 반드시 사주마! " " …그러니까 시계가 필요한 건 지금이라고‥. " 가인은 투덜거리며 1교시 준비를 위해 책상 위의 컴퓨터를 켰다. " 우리 인류는 2020년, 다른 차원을 연결하는 문, 게이트(Gate)를 발견하게 됩니다. 미지의 존재와의 조우라는 것은 언제나 처럼 신비롭고 두근거리 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참극을 남기게 되었죠. 여 러분도 알다시피 미국의 'LA 사건'이 대표적인 그 예이죠. 다른 차원과의 만남이란 극히 위험하고도 파괴적인 일. 그를 대비하여 만들어진 지구 방 위군과 피스메이커는 이 이(異)차원의 생물들을 침략자로 간주하고 '몬스 터(Monster)'로 명명.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의 평화를 지켜오고 있 는 것입니다. " 과학 선생님의 고리타분한 지구 평화 얘기가 귓가에 들려왔다.옆에 있던 재 영이 가인에게 귓속말로 투덜거렸다. " 또 시작이다. 저 지구 방위 오타쿠… " 가인도 수업 듣기를 포기하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학 선생이 저 얘 기를 떠들기 시작하면 그 날 수업은 종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이트니, 이 차원의 생물이니….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었던 거 같기는 하지만, 민간인 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었다.그리고 그것들이 출현하기 전에는 반 드시 국가에서 피난 신호를 울리기 때문에, 대피소로 피난하느라 실제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가인은 그런 만화같은 설정 자체가 마음 에 들지 않았다. ' 세상이 어떻게 될려고 이러나…. ' 창 밖의 구름들은 푸른 하늘 사이로 흘러 가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에 깔 려있는 건물들과 산, 호수… 언제나와 같은 풍경들. '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 그 사고가 일어났어도… 그 사람들이 내 곁에 없어도… ' 벌써 1년이 지났나…. '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 가고 있었다. " 야, 가인아. 넌 또 수업 땡∼하자 마자 아르바이트냐? " " …어떡하냐. 돈이 필요한데. " 재영은 가인의 말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일지라도 상대방에게는 아픔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재영은 알고 있었다. 재영은 가인 과 초등학교 때 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 세월로 따지자면 8년지기 친구였었 다. 그런 그의 눈에 가인의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달라 보였다. ' 그 일이 있은 후로는…. " 작년, 가인의 가족에게 일어났었던 불의의 사고. 그 사고 이후로 재영은 친구의 웃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잘 웃고, 잘 떠들고, 언제나 자 신과 신나게 놀던 녀석이었는데…. 재영은 가인의 그런 변화된 모습이 이 해는 되었지만 안타까웠다. 재영은 가인의 어깨에 팔을 걸고 씨익 웃어 보 였다. " 자식, 그럼 이 몸이 너의 알바에 함께 동참해 주마∼ " " 괜찮은데. " " 어이∼ 뺄 거 없다니깐∼! 친구가 모처럼 도와주겠다는데 말이야. " " .........그럼 알바 비 나누는 거 없기다. " " 이 녀석이∼∼ " 재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가인의 머리를 눌렀다. 가인은 그런 재영의 모습에 같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영은 가인의 그런 미소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 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 좋아.좋아∼ 신문 배달이든 우유 배달이든 다 덤벼∼! " " 헉헉…. " " 신문 배달이든 우유 배달이든 다 덤비라면서. " 재영의 녹초가 된 모습에 가인은 한숨을 쉬며 재빨리 신문을 돌렸다. 2010년을 기반으로 신문은 인터넷 상으로 볼 수 있게 된지라,종이 신문은 사 실 거의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종이 신문을 선호 하는 독자들이 많은 데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싼 값에 팔 수 있었기에 종이 신문은 2030년이 지난 여지껏 존재할 수 있었다. 재영은 가쁘게 숨을 몰아 쉬며 옆의 벤치에 쓰러졌다. " 헉헉. 내가 정상이고 네가 비정상인 거야. 2시간 내내 뛰어 다니며 적어 도 600부 이상은 돌린 것 같은데 " " 정확히는 642부. " " 그엑- 어떻게 평상시에 혼자서 이걸 다 하냐. " 재영은 감탄 어린 얼굴로 가인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벤치 옆에 같이 앉 아 있는 가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가라 앉아 있었다. " 할 수 밖에 없으니까. " " ......... " 재영은 말문이 막혔다. 녀석, 또 저런 표정이나 짓고…. 재영은 몸을 일으 켜 그런 가인의 볼을 사정없이 잡아 늘렸다. " ......뭐,뭐하는 거야?! " " 흐음∼ " " 야, 박재영! " 그제서야 재영은 가인의 볼을 꼬집던 손을 내리며 씨익 웃었다. " 그래. 웃지는 못할 망정, 차라리 화내는 표정이 낫다. " " …뭐, " " 음. 그래. 화내는 표정보단 지금 같은 얼간이 표정이 더 나을 수도 있지. " " 어이…너…. " " 자식! 그러니까 그 나이 되도록 여자 하고 말 한번 못하는 거다! 이 형 님이 비법을 전수해주마! 여자를 녹일 수 있는 108 표정 관리법! " " ......... " " 여자란 자고로, 멋지게 웃을 줄 아는 남자에게 넘어오는 거다! 그러니 까 짧게 끊듯이, 그러면서 숨을 내뱉듯 '후∼' 이 한 마디! 이것이야 말로 쿨가이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 웃음이라고 할 수 있지! 듣고있 는 거냐,유가인! 이 형님이 전수해주는 이 비법에 귀를 기울이고 있느 냔 말이다! " " ......그러니까 그 쿨가이라는 걸 뭘 의미하는 거냐? " 재영의 자신 만의 세계에 빠진 듯한 말투에 가인이 질린 표정으로 묻자, 재영은 더더욱 기고만장해진 표정으로,이런 것도 모르냐는 듯 가인에게 끌 끌 거리며 혀를 찼다. " 이래서 가인, 너는 안된다는 거야∼! 쿨가이야 말로 남자들이 선호하는 궁극의 완성된 남자로서의 지표! 언제나 냉소적이며, 짧고 강한 말 한 마디로 상대를 휘어잡을 수 있는 남자! 언제나 조용하면서 침착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의 존재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뿜어내는 냉철한 카리스마! 냉철한 이성!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궁극의 목표로 삼아야할 쿨 가이의 면모란 말이다! " " ......왠지 지금의 너 자신을 부정하는듯한 목표 같다…. " " 뭐어야아∼! " 가인의 말에 재영이 또 그의 볼을 잡아 당길려고 하자, 가인은 재빨리 그 손을 피하며 뒤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재영이 그 뒤를 쫓아 달려갔다.재영 은 그런 가인의 뒤를 쫓아가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 그래…. 지금은 이러면 되는 거야,가인아. ' 재영은, 자신이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실 없더라도 이런 웃음을 주 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런 재영의 의도를 알기에, 가인은 그의 이 런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 쿨 가이라메? 냉철한 이성? " " 쌕! 죽었어∼! " 2020년, 미국의 중추 로스 앤젤레스가 지구 상에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 했다. 최초로 이세계의 게이트가 열린 곳. 그리고 최초로 이세계의 침략자 '몬스터(Monster)'가 모습을 드러낸 곳. 대체 무엇 때문에 그곳에서 게이 트가 열렸고,무슨 목적으로 몬스터가 모습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몬스터는 인류의 적이라는 것이다. '피스메이커(Piece Maker)'.몬스터에게 타격을 받은 각국이 국가 간의 이 해를 초월하여 만들어낸 대(對) 몬스터 특무 기관. 모든 것은 비밀리에 쌓 여 있으며, 어떤 활동을 하는지도 민간인들에게는 공개되어 있지 않다. 하 지만 지금, 그 베일의 기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잉비잉비잉비잉… 붉은 사이렌이 울려퍼지며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 있었고, 그 사이로 하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일하는 모습 을 조용히 지켜보며, 마치 방관자인듯한 모습을 보이는 두 남녀가 있었다. 남자는 앞의 하얀 제복을 입은 사람들과는 달리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으 며, 콧수염을 단정히 기른 30대 후반 쯤 되어보이는 중년인이었다. 어딘가 인상이 딱딱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의 옆에 서있는 화사한 미모의 여비서가 그런 그의 인상을 중화시켜 주고 있었다. 남자는 왠만해 서는 열릴 것 같지 않던 자신의 입을 움직여, 메마른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 …나타난 건가. " " 예. 와프(Waff) 입자의 반응이 점점 상승하고 있습니다.게이트가 열릴 와프 수치까지 앞으로 15분 남았습니다. " 남자의 옆에 있던 여 비서가 미소를 지은 부드러운 인상이지만,굳은 눈초 리로 상황을 보고했다. 남자는 두 손으로 턱을 괴며 낮게 명령했다. " 상황은 B-로 설정. 게이트 반경 10Km 내의 인구를 대피시켜라. 피스메 이커(Piece Maker) 출동이다. " " 피스(Piece)! " 여 비서는 구호와 함께 경례를 하고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남자는 자신의 앞에 떠오르는 거대한 스크린을 보며 중얼거렸다. " …얼마든지 와라,괴물 놈들. " << 24구역에 알립니다. 24구역에 알립니다.이 방송을 들으시는 모든 시민 분들은 침착히 가까운 지하의 대피소로 피난해주시길 바랍니다. 정확 히 10분 뒤면 모든 대피소의 문이 잠기오니, 시민 분들은 걸음을 서둘 러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알려드립니다… >> 난데 없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걸맞지 않은 귀여운 여자 목소리의 대피 방송이 울려퍼졌다. 이제 막 신문 돌리기를 끝낸, 가인과 재영은 갑작스런 방송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 …무슨…일이지? " " 무슨 일이기는! 대피 방송이잖아! 몬스터인가봐∼! " 가인의 멍한 말투에 재영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재영의 말투에도 긴 장감이 결여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지금껏 뉴스로만 보아오던 사건이 막 상 자신들의 앞에 벌어진다고 하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시간 에 맞춰 대피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별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더더욱 이 대피 명령은 그들에게 현실감이 없었다. " 가인아, 우리 말이야. 한번 대피소로 들어가지 말고 구경해볼까?! " " 뭐…? " 갑작스런 재영의 제안에 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이 놈의 자식이 또 뭘 생 각하는 거야? " 그치만 궁금하잖냐. 맨날 대피 방송이 울리면 대피소에 들어가고,그러다 해제 방송 나오면 또 나오고. 우리가 대피소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 " 야야. " " 그리고 TV로 방송되는 사건 보도도 왠지 현실감이 없는게, 뭔가 중요한 부분 같은 것은 정부에서 차단하고 껍데기만 우리한테 보여준달까. 오옷. 더더욱 알고 싶어진다∼ 그치? 응? " 재영의 보채는 말투에 가인은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단호히 소리쳤다. " 말도 안되는 소리마! 대피 명령을 듣지 않고 그런 생각을 품고 밖에 있 다가 사고 당한 사람들 모습도 못 봤어?! " " 에이∼ 그것도 다 TV에서 보여준 것 뿐이잖냐. " "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하는게 아냐! " 가인의 그 말에 재영은 순간 입을 닫아버렸다. 가인의 말에서 느껴지는 무 게감을 재영도 느꼈기 때문이다. 재영은 가인의 노려보는 눈초리를 마주하 지 못하고 피했다. ' 녀석, 아직도… ' "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자. " " 아,그‥그래. " 앞장 서는 가인을 따라 재영은 발걸음을 옮겼다. 가인이 녀석. 또 가족 생 각이 난 모양이군. 재영은 가인의 뒷모습을 씁쓸히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로 낮게 깔린 가인의 그림자가 왠지 더더욱 무겁게 보였다. -치직… 그때였다. 가인의 그림자가 이상하게 왜곡되는 것 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비잉비잉비잉비잉… " 진 사령관님! " 피스 메이커의 작전 본부실에서 하얀 제복의 오퍼레이터가 소리쳤다. 그들 의 뒤에 앉아 있던 검은 제복의 남자- 진 사령관이라고 불린 그는 스크린을 노려보며 답했다. " 무슨 일인가? " " 와프 입자의 속도에 이상 반응이! 예상 수치에 훨씬 빨리 도달하고 있습 니다! 이대로 라면 앞으로 게이트가 열리기 까지 1분…아니, 그 보다 더 일찍…!! " -비이이이이이이잉… 오퍼레이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본부실에 울리던 신호음이 그 소리를 달리했다. 그 소리에 한순간 정적에 잠기는 본부실.그 정적을 앞 전의 오퍼 레이터가 힘겹게 끊으며 신음하듯 소리쳤다. " 게이트…열렸‥습니다…! " " .........!! " " 으아아아아악!!! " 앞서가던 가인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재영의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 ......재영아?! " 뒤를 돌아본 가인의 눈 앞에는 알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그러 지고 있었다. 커다란 원형으로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중심이 심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저 안에서 부터 빠 져 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 뭐,뭐야? 도대체 이건?! " -키이이이… 그리고 그것이 모습을 천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 …사자? " 처음에 드러난 것은 사자의 몸뚱아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자라고 부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 나,날개가 달렸어?! " 그 사자의 등에는 거대한 박쥐의 것인듯한 피막의 날개가 달려 있었던 것이 다. 더구나 저렇게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사람의 얼굴을 한 사자란, 듣지 도 보지도 못했다. -크와아아아아앙!! 이 거대한 짐승이 포효를 내지르자, 주위의 나무들이 우수수하며,그 잎사귀 들을 무수히 떨어뜨렸다. 여기가 인적이 드문 공원 근처였기에 망정이지, 인 구가 밀집한 가옥 근처였다면, 떨어지는 것은 나뭇잎이 아니라 날카로운 유 리창 파편이었을 것이다. 가인은 이 엄청난 괴성에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 으악!! " 맙소사. 말도 안돼!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이런 만화같은 일이! 얼마난 큰 소리였는지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고막이 터지지 않은 것 만 해도 다행이라고 가인은 생각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있었더라면 분명 귀에서 피가 터져 나왔 을 것이다. 그런데… ' 가까이 있었더라면…? ' 재영! 분명 나보다 뒤 처져 걷고 있었을텐데!! " 야, 박재영?! " 가인은 황급히 눈을 뜨며 재영을 찾았다. 가인은 금방 재영을 발견할 수 있 었다. 그의 걱정대로, 재영은 앞전의 포효 때문인지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 러져 있었다. 그것도 저 괴물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 재영아, 정신 차려!! " 가인은 괴물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재영에게 소리쳤다. 그와 재영 의 앞을 마치 저 괴물이 막아서듯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어쩔 줄 몰라 식 은 땀만 흘리고 있던 가인의 귀로 쇠를 긁는듯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인간…인간? 크크크크큭… 약해 빠진 인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인은 아찔한 소름을 몸 전신으로 느꼈다.단지 기 분 나쁜 목소리 때문 만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가 흘러나온 곳이 다름 아닌 괴물의… 인간 노인의 모습을 한 괴물의 얼굴 부분에서였기 때문이다. " 마,말을 했어…?! " 가인은 이 그로테스크한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괴물은 그런 가인의 모습이 재밌다는듯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쳐다보다가,곧 뒤에 쓰러져 있 는 재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간…쓰러져 있는 인간. 크크크크크큭… 괴물이 재영에게로 다가갈려는 것을 느낀 가인은 황급히 주위의 돌을 줏어 괴물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 괴,괴물! 재영이에게 손대지 마!! " -인간… 약해 빠진 인간… 괴물은 가인의 계속 대는 돌팔매 짓에 인상을 찌푸리며 가인을 노려 보았다. 가인은 그런 괴물의 기세에 주춤 뒷걸음을 치는 도리 밖에 없었다.괴물은 천 천히 흉악한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가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인간.........먹이다!!! -크왕!! " 으악!!! " 가인은 갑작스레 달려든 괴물의 공격에 몸을 굴리며 몸을 피했다.괴물이 휘 두른 앞발에 뒤에 있던 벤치가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만약, 인간이 맞았다 면 가볍게 두 동각이 났을 것이다. 가인은 이빨이 딱딱 떨리는 것을 느꼈다. " 다,다가오지마, 괴물!! " -크크크크큭… 괴물은 그런 가인의 외침에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죽는다. 분명 죽을 거야. 그런 공포가 가인의 몸 전체에 스며들었다.그때 저 편에 쓰러져 있던 재영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여왔다. 살아있었구나, 재영 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크큭… 인간. 쓰러져 있는 인간… 그때, 괴물이 그런 재영에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날뛰는 인 간보다는 쓰러져 있는 인간이 더 해치우기 편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 재,재영아! 정신차려! 도망가!! " 가인은 다급히 외쳤지만,재영은 앞 전 귀를 다친 것 때문인지 아무 것도 들 리지 않는 것 같았다. 재영은 멍한 눈초리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그러 다 괴물을 보았는듯, 재영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땅바닥에 쓰러졌다. " 으아아악!! 괴물이다! 괴물!!! " -크크크크크큭… 그런 재영에게로 다가가는 괴물. 안돼. 죽는다. 재영이 죽을 거야. 저 괴물에게 발기발기 찢겨진채… 피투성 이가 되어서… 예전… 내 가 족 이 죽 었 을 때 처 럼… " 안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엣!!!!! " 순간, 가인은 느꼈다. 자신의 몸 안에서 휘몰아치는 기운을… 온 몸이 뜨거 워지며 눈 앞에서 불이 치솟는 것 같은 강맹한 기운을. 그리고… 세상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 피스 메이커, 24구역에 도달했습니다. " 오퍼레이터의 외침에 진 사령관은 굳은 인상으로 스크린을 노려본채 답했다. " 옐로우(Yellow)와 핑크(Pink)는 민간인 구출을, 레드(Red)와 그린(Green) 은 몬스터의 섬멸을 우선시 하도록. 속전속결로 끝낸다. " << 피스-! >> 진 사령관의 명령에 스크린 속에서 4명의 인물들이 모니터 되며 답했다. 진 사령관의 뒤에서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앞 전의 여비서가 걱정스런 어투로,그 에게 물었다. "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요? " "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대원들을 믿는 것 뿐.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 " " 하늘… 인가요…. " 여비서는 한숨을 내쉬며 스크린을 올려다 보았다. 진 사령관의 말이 옳았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투입 된 피스 대원들을 믿는 일 뿐이었다. 그 런 그들에게 순간, 예의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진 사령관 님?! " " ......무슨 일인가? " " 몬스터 발생 지점에서 오라 패턴이 발견되었습니다! " 진 사령관은 인상을 굳히며 오퍼레이터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옆의 여 비서가 의아하다는듯 중얼거렸다. " 피스 대원들이 벌써 도착한 걸까요? " " …아니. 그럴리가…. " 이제 막 24구역에 투입된 대원들이 이렇게 빨리 사건 발생지점에 도달할 리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 설마…! " " 오라 패턴은 블루(Blue). 블루입니다! " 오퍼레이터의 말에 진사령관과 여 비서는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몬스터로 보이는 회색 불빛이 보였고, 이제 막 24구역으로 투입되는 4명의 피 스 대원들의 오라 패턴의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몬스터의 불 빛과 동일한 지점에서 폭발적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오라의 불빛. " 블루… 새로운… 오라 능력자의 등장이군요. " 여비서는 놀랍다는듯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하지만 그런 그 들이 놀랄 장면이 다음에 등장했다. 오라 패턴 블루의 불빛이 사라짐과 동시 에 몬스터의 회색 불빛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한순간, 이 놀라운 상황에 침묵하는 작전 본부실. 오퍼레이터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사태를 보고 하기 시작했다. " 패턴 블루 소실. 그와 함께 몬스터 역시 소실되었습니다. " " ...........!! " " 으음…. " 푸른 빛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간 듯한 기분이 들자, 가인은 살며시 눈을 떴다. 가인은 왠지 모르게 상쾌한 기분이 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뭐랄까. 그동안 쌓 아놓았던 무언가가 확 하니 터져 나간 통쾌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 과는 반대로 몸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팔 하나 들어 올릴 힘 조차 없었다. " 뭐였지… 앞 전의 그건…? " 하지만 이런 궁금증은 오래갈 수 없었다. 쓰러져 있던 재영과,그에게로 달려 들던 괴물에게로 생각이 미친 것이다. 가인은 황급히 재영을 바라보았다.재영 은 기절한 듯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가인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괴물을 찾았다. 하지만 앞 전,그 이상한 생김새의 괴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 았다. 단지… " .........?!! " 그 괴물이 있던 자리에 반원 형태의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여져 있을 뿐.어떻 게 된 거지 이건?! 왠지 가인은 주체할 수 없이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슬 며시 손을 바라보았다. 옅은 푸른색의 기운이 보였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 ......서,설마 이걸 내가… " 가인은 가슴이 심하게 쿵쾅 거리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이,이런 만화 같은 일이. 가인은 맘이 다급해져 재빨리 재영에게로 달려가 그를 안아 올렸다. 왠지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다. 두려웠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 어나는지…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려는지… ' 어,어쨋든 재영이를 병원에 보내는 게 먼저야. ' 가인은 애써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재영을 들쳐 업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나 기 시작했다. 다급한 심장의 고동 소리가 가인의 귀를 떠나지 않았다. " 헉… 헉… " " ......여기…인가 보군요. " 녹색 타이즈에 옅은 푸른빛의 강철 전투복을 입은 남자가 거대한 반원 형 크 레이터의 앞에서 중얼거렸다. 강철 마스크와 헬맷으로 그 표정은 보이지 않았 지만 아마도 그는, 흥미진진해 죽겠다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듯했다. 그런 그의 뒤로 각각 붉은 색과 노란 색, 핑크 색의 옷을 입은 3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이들이 바로, 24구역에 출동한 피스 메이커의 피스 대원들이었다. 붉은 타이즈에 전투복을 걸친, 아마도 여성인듯한 대원이 나지막히 말했다. " 강력한 오라의 힘이 느껴지는군요. 하지만 다듬어지지 않았어. " " 하지만 흥미가 생기는군요,피스 레드. 우리 외에도 오라 능력자가 여지껏 존재할 줄이야. " 녹색의 남자는 연신 싱글거리며 중얼거렸다. 붉은 타이즈의 여성-피스 레드 는 그런 남자의 태도가 불만인듯 투덜거렸다. " 좀 더 리더 다운 믿음직한 면모를 보여주시는 건 어떨가요, 피스 그린? " " 아하하하하하. 그러도록 하지요. " 피스 그린은 웃음을 터뜨린 후, 뒤의 핑크색 타이즈의 여성 대원에게 손짓 했다. 다른 대원들 보다 훨씬 작은 키의 이 대원은 조용히 피스 그린의 뒤로 다가왔다. " 피스 핑크. 여기에 어떤 사념이 남아 있나요? 읽을 수 있겠죠? " " ......... " 피스 핑크라 불린 여 대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몸에서 핑크색 오라 를 발했다. 곧이어,핑크색 오라가 가라앉은 그녀는 쪼그려 앉아,땅바닥의 흙 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두려움… 공포… 하지만 죽음에 대항하는 의지 」 " 음. 수고했어요. " 그린은 핑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다시 히죽히죽 미소 지었다. " 죽음에 대항하는 의지…라. 하하하. 더욱 마음에 들어가는 걸. " " 당신 맘에 드는 것도 좋겠지만, 우선 그를 찾아야 할 거 아닌가요? " 레드의 말에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의 뒤로, 피스 옐로우라 불리우는 노란 타이즈의 대원이 다가왔다. " 단서는…이미 찾았군요. " 아름다운 미성의 옐로우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그린에게 넘겨주었다.그 것은 다름 아닌 학생증이었다. 그린은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 유가인… 한성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주운 물건은 주인한테 돌려주는게 도리…겠죠? " <제 1 화 각성, 블루! 完> 豫告 새로운 오라 능력자,블루(BLUE)의 등장! 그의 등장은 피스 메이커와 몬스터, 양 측을 긴장시키는데… 블루를 찾아 동료로 삼으려는 피스 대원들, 블루를 찾아 죽이려는 몬스터의 새로운 괴물. 이 혼란함 속에서 평범한 고교생 유가인의 선택은 과연?! 제 2 화 조우(遭遇) 나온다. 나와! 뭐가? 바로 미소녀가! 기대하시라! 가인: …이런 만화같은…. =-=-=-=-=-=-=-=-=-=-=-=-=-=-=-=-=-=-=-=-=-=-=-=-=-=-=-=-=-=-=-=-=-=-=-= 오라전대 ＰＩＥＣＥ ＭＡＫＥＲ 第 2 話 조우(遭遇) =-=-=-=-=-=-=-=-=-=-=-=-=-=-=-=-=-=-=-=-=-=-=-=-=-=-=-=-=-=-=-=-=-=-=-= " 2032년 4월 2일 17시 35분. 와프 수치의 이상 현상으로,게이트 발생 시간 에 오차가 생겼습니다. 게이트를 통해 등장한 몬스터는 D+급 몬스터'만티 코어(Manticore)' 유형이었지만, 민간인이 대피하지 못했기에 상황 설정 은 B-급, 피스 메이커를 긴급 출동시켰습니다. " 어두운 방 안을 하나의 스크린 만이 비추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만티코어' 라고 명명된 D+급 몬스터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끊어진 여 비 서의 설명에, 진 사령관은 예의 과묵한 목소리로 말했다. " 계속하게, 민 군. " " 아,예…. " '민수정' 이라는 이름을 '민 군' 이라는 단 두 마디로 압축하여 부를 수 있 는 진 사령관의 센스에, 여 비서 민수정 양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설명 을 이었다. " 하지만 피스 대원들이 24구역에 도착하기 전,새로운 오라 패턴이 사건 발 생 지점에 등장하였습니다. 패턴은 블루(Blue)로 명명. 한국에서 발견된 제 5번 째 오라(Aura) 능력자의 등장인 셈입니다. " 스크린에서 이번에는 사건 발생 지점이었던, 24구역의 공원 모습이 표시 되 었다. 그리고 거대한 반원 형으로 파여진 크레이터의 모습이 확대되었다. " 블루의 정확한 오라 능력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단지 오라의 전개에 D+급 몬스터를 섬멸시킨 점과 주변 상황의 현상으로 미루어, 약 50노트(Note) 이상의 오라 수치를 발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수정의 말이 끝나자, 곧 방 안의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그 만큼 50 노트란 수치는 쉽게 볼 수 없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치였던 것이다. 진 사령관의 옆에 앉아 있던, 연구복을 걸친 한 젊은 청년이 안경을 고쳐 쓰며 감탄했다. " 놀랍군요. 첫 오라의 개방에 50N이라는 것은.그것도 A.I 컴플릿트 세트도 장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 정도의 수치라니…. 아마도 저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오라 능력자는 우리 대원 내에서도 피스 그린 정진우 씨 정도 가 아닐까요. " " 하하핫∼ 과찬의 말씀이에요, 닥터. " 닥터라는 과학자의 말에, 그 옆에 앉아 있던 피스 그린,정진우는 주위의 분 위기에 아랑 곳 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예전의 타이즈 복장과는 달 리,평범한 20대 후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건,그 옆에 앉아 있던 나머지 3명의 대원들도 마찬가지 였다. 수정은 그런 정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 현장에서 패턴 블루의 신상에 관한 단서를 찾으셨다면서요,진우 씨? " " 아,예. 블루일 것으로 추정되는 소년의 학생증이었습니다. 한성 고등학교 1학년 3반… 유가인‥ 군 이군요. " 정진우는 학생증을 어둠 속에서 읽느라 인상을 찌푸리며 읽은 후,진 사령관 의 테이블 앞으로 건내주었다. 수정은 의외라는듯 중얼거렸다. " …고등… 학생이라구요? 그 나이에 50N의 오라 능력자라는 것은…. " " 분명 놀라운 일이군요. 정진우 군이 28살이라는 걸 고려해봐도,훈련에 따 라서는 20N 이상의 상승 효과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 닥터는 놀랍다는 듯, 스크린에 떠오르는 블루의 학생증을 유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그런 그의 말에 정진우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아니, 꼭 28살이라서는 아닌데… " " ......... " 어찌되었든, 진 사령관은 다음 작전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 피스 레드. " " 예, 피스-! " 진 사령관의 부름에 피스 레드로 불린, 큰 키의 포니테일 여성이 경례를 붙 였다. 아직 20세를 넘기지 않은 앳된 얼굴이지만,그 안에는 딱딱한 군기가 들 어가 있었다. 진 사령관은 그녀를 아무 말 없이 응시하다가,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 자네...... 여고생이지? " " ......... " " ......대답하게. " " 예,옛! 그렇습니다! " 진 사령관의 영문을 모를 질문에, 그녀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뭔가 머리 벗 겨진 아저씨의 노골적인 질문같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진 사령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 자네는 지금부터 한성 고등학교로 전학이다. " " .........?!?! " 第 2 話 조우(遭遇) -짹잭… 등교 시간. 언제나처럼 가인은 가방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며칠 전 경험했 던 그 무서운 기억이 마치 꿈이었던 것 처럼,오늘은 평온하고도 한산한 날이 었다. 가인은 곰곰히 생각에 잠긴채 골목을 걸었다. ' 그것이… 몬스터‥ 라고 불리우는 것이었을까… " 커다란 사자의 몸체에 사람의 얼굴을 한, 그 등 뒤에는 거대한 박쥐의 날개 가 달린 괴물의 모습.그 굉장한 울부짖음과 벤치를 한 방에 박살내버리는 괴 물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3일이 지난 오늘까지,마치 그 때의 일은 환상이었던 것 처럼 세상은 아무 문 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단지 뉴스에서는 언제나 처럼 몬스터가 나타났으 나, 지구 방위군에게 섬멸됐다는 지극히 간단하고도 거짓된 내용이 보도 될 뿐이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란 건 과연 어디까지일까…. 혹시, 달에 도착했 다는 것도 거짓말 아냐? ' 가인은 애꿎은 NASA까지 들먹이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 놈의 세상은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다. 무엇 하나 믿을 게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걸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어' 라고 생각하는 가인, 그 자신에게도 문 제가 있는 것 같았다. " 알게 뭐냐…. "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모처럼 제 시간에 등교하는 것이 다. 오늘 만큼은 여유 있게 교실에 들어서고 싶었다. 그 때, 그를 부르는 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야- 유가인! " " .........?! " 가인은 재빨리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 보았다. 이 목소리는 친구, 재영 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 재영아! " " 와하하하하- 자식. 이 형님이 불렀다고 잽싸게 돌아보네∼ 귀여운 것! " 재영은 평상시 처럼 장난 끼가 넘치는 모습이었다.그런 재영의 모습에 가인 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재영을 위 아래로 살펴보며 물었다. " 야야. 너… 이제 몸은 괜찮은 거야? " " 응. 귀도 심하게 다친 건 아니고, 뭐‥ 요즘 의료 기술이 워낙 좋아놔야 말이지. 재생력도 30% 씩이나 가속시킬 수 있는 시대인데, 귀 같은 게 대 수겠냐. " " 아,으응. " 가인은 병원에 들릴 일이 없었던지라,2032년의 현대 의학이 어느 수준 까지 발달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단지, 더 이상 암이나 기타 질병으로 죽는 이들 은 없어져,현대의 사람들은 사고만 당하지 않으면 100세 까지 살다가 자연사 한다… 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 이 정도로 발달한 의학도… 교통 사고에 당한 사람은 구하질 못하는 건가 …. ' 가인은 한 순간, 가족의 얼굴들이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으나, 눈 앞에서 시끌벅적 떠들고 있는 재영의 건강한 모습에 기분을 풀고 말했다. " 그래도 다행이다,정말. 난 그때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그런 괴물 한테 공격 당했었는데…. " " 어? 괴물? 무슨 괴물? " 그러나 재영은 가인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인 은 그런 재영의 태도에 한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 재영아… 무슨 괴물이냐니… 너…. " " 참,나∼ 하필이면 어제 우리가 쉬던 데에서 가스 폭발이 일어날 게 뭐냐. 현장 조사하던 경찰들이 병실에도 찾아왔었는데, 우리가 재수 없었데. 마 른 하늘에 벼락맞는 것 하고 비슷한 확률이래나,뭐래나…. " 가스 폭발? 그게 무슨 소리야,재영아? 너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 에휴… 뭐, 나만 재수 없었던 건가? 그래도 넌 이렇게 멀쩡하니까 말야. 하하하하∼ " 웃고 있는 재영의 모습에 가인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재영의 모습에, 오히려 가인,자신이 꿈을 꿨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었다. ' 어떻게 된거지, 이건…. '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인은 언제나 처럼 교실 창가 쪽, 자신의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내다 보고만 있었다. 뭔가 상당히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그 일'을 기억 못하는 재영의 모습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그 사건 당시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기운의 정체도 그랬다. ' 그건… 뭐였지? ' 아마도 그 푸른 기운의 능력으로 그 이상한 괴물을 처치했었던 것 같았다.그 래서 가인은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몇 번이고 그 푸른 기운을 써 보려고 노 력했지만, 마치 그런 일이 있었기라도 하냐는 듯 가인은 전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몸 속에서 무언가가 맴돌고 있는듯한 느낌은 예전 보다 한 층 더 심해져서, 마치 욕구 불만에 가득차 있는 것 같은 불안한 기분이 들 뿐 이었다. " ......그만두자. " 가인은 생각하길 포기했다.더 이상 생각해본들 궁금증에 대한 어떠한 답변도 되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이런 만화같은 상황이 그는 싫었다. " .........어? " 그때, 창 밖 교문 쪽을 응시하던 가인의 눈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 고 가인은 한순간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 아…. " 따뜻한 4월의 봄바람에 휘날리는 긴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 .단정하지만 짧은 스커트가 볼 거리인 한성 고등학교의 여자 교복. 무엇보다 저 늘씬한 키에 상 아 빛 피부와 마치 영화 배우 뺨칠 것 같은 미모의 얼굴! ' 미,미인이다. ' 가인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도취되었다. 현실감 없는 듯한 그 미모는 가 인이 17년 동안 살아오는 동안 접해보지 못한 이색적인 것이었다. ' 외국인… 인가? 저런 에메랄드 색 머리라니…. ' 뭐,한성 고등학교는 미국 자매 학교와 자주 교류하기 때문에 외국인 학생 몇 명이 보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들을 가인이 하고 있 을 무렵,순간 교문을 들어서던 에메랄드 머리빛의 소녀가 고개를 들어 가인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그녀와 눈이 마주친 가인은 깜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었다. ' 나,날… 바라본 건가?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그녀 쪽을 내려다 보았다. 그런데, 앞 전 까지 가인을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는 게 아닌가. 가인 은 눈을 껌뻑이며 멍청하게 창 밖을 한참동안 응시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그런 가인의 어깨를 툭 치며 부르는 이가 있었으니, 재영이었다. " 야, 가인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멍하니 하고 있는 거야? 창 밖에 뭐 볼 거리 라도 있냐? " " 아,아니…. 근데 넌 어딜 그렇게 갔다가 온 거야? 곧 1교시 수업 시작인데. " 가인은 엉겹결에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자신이 창 밖으로 여 자 아이를 보고 있었다는 걸 이 경박스러운 녀석한테 들켰다간 무슨 망신을 당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에서 한 가인의 질문에, 의외로 재영은 득의 만만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 후후후후후훗. 놀라지 마시라∼! 긴급 입수한 따끈따끈한 정보! 바로 다름 아닌∼ " " 다름 아닌? " 가인의 반문에 재영은 순간, 책상을 큰 소리가 나게 손으로 내려치며 외쳤다. " 미소녀의 전학이닷!! " 그 말 한 마디에 순간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런 교실의 반응에 가인은 귀까지 빨개지는 쪽팔림을 느꼈지만,그것을 재영은 자신에게로 이목이 주목 되었다고 판단한듯 더욱 득의 만만하게 소리쳤다. " 이름은 테레이아 민체스터! 캐나다 출신으로서, 아버지의 출장 땜에 한국 에 오게 되었다고 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 " 중요한 것은? " 이번엔 반의 모든 남학생들이 재영의 말에 반문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인은 식은 땀을 흘렸다. 이 놈의 자식들은…. 어찌되었든, 재영은 이 거센 분위기 의 흐름을 타서 곧바로 결정타를 날렸다. " 바로 1학년 3반! 우리 학급으로 전학을 왔다는 것이다!! " " 만세------!! " 재영의 한 마디에 결국,반의 남학생들은 모두 일어나 만세 삼창을 불렀고,가 인은 왠지 모르게 그들과 동떨어진 소외감을 느꼈으나,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 다. 가인은 주위에서 여학생들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 ......전학생… 에메랄드 빛 머리‥인가. "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된 '테레이아 민체스터'라 고 합니다. 한국은 처음이라서, 여러모로 익숙치가 않내요. 여러분의 많 은 도움 부탁 드립니다. 앞으로 잘 지내요∼ " " 오오- " 긴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머리가 창가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더더욱 그 색깔을 투명하고도 선명히 했다. 더군다나 그 미모를 전혀 손색시키지 않는 저 가늘고 고운 목소리! 자신을 테레이아 민체스터 라고 소개한 미소녀 전학 생의 인사에 1학년 3반의 남자들은 열광했다. 가인은 그런 녀석들과 함께 소 리치는 것은 아무래도 쪽팔리는 일이었기에 자제하고 있었지만, 전학생의 미 모에 가슴이 두근 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자자- 조용!조용! 아무리 오랫만에 아리따운 미소녀 전학생의 등장이라지 만, 수업 시간이라는 것을 망각하면 안되지∼!! " 체육 교사이자, 1학년 3반의 담임 '하지연'교사는 입에 담배를 꼬나 문 채 그런 학생들에게 소리쳤다. 올해로 29살이 되는 이 노처녀 교사는, 아무래도 여자로서의 치장과는 관계 없다는 듯한 체육복 차림에, 남자 교사 못지 않은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꽤 미인 축에 속하는 미모 임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노처녀인 까닭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라고 학급의 모든 이들은 추측 하고 있었다. 어쨋든, 지연은 어젯 저녁에도 어김없이 과음을 했던 듯 숙취에 찌든 것 같 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전학생, 테레이아에게 손짓했다. " 자자∼ 테레이아. 저기저기 둘째 줄 셋째 칸에 빈 자리가 보이지? 저기가 오늘부로 니 자리다. " " 예스-! " 지연이 지목한 곳은 바로 다름 아닌 재영의 옆 자리 였던 것이다.졸지에 미 소녀 짝을 두게 된 럭키 가이 박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환호성을 지르다가 지연이 던지 출석부에 머리를 얻어 맞고 쓰러졌다. " 저기… 선생님? " 그때, 자리 배치를 받은 테레이아가 지연에게 입을 열었다.지연은 출석부를 던졌던 손을 가볍게 풀며 그런 테레이아를 바라보았다. " 어, 그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 " 저… 전 저기 창가 쪽 자리로 가면 안될까요? " -쿠쿵 뭔가 딱 잘라 말하는듯한 테레이아의 말에, 키드니 블로를 강타 당한 심정 으로 무너지는 재영이었다. 지연은 전학생의 갑작스런 제안에 얼떨떨해진 표 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뭐, 맘대로 하려무나. 그런데 정확히 어디… ? " 지연의 승락이 떨어지자 마자, 테레이아는 그 긴 에메랄드 빛 머리를 하늘 거리며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 걸이를 반의 모든 남학생들 은 숨을 죽여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걸음이 멈춘 곳은 의외 로 뜻 밖의 곳이었다. 가인은 왠지 떨리는 입꼬리로 천천히 자신을 가리켰다. " .........나? " 미소녀 전학생이 멈춘 곳은 바로 가인의 옆 자리였던 것이다.테레이아는 그 런 가인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 지으며,가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 소근 거 렸다. " 응. 오늘부로 니 짝이 되고 싶어. 잘 부탁해. " 그 한 마디에 1학년 3반에서 유가인을 제외한 모든 남학생들은 가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행운의 주인공이 된 가인을 노려 보았다. 지연은 그런 녀석 들의 반응에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한 여학생에게 귓속 말 로 다음과 같이 물어 보았다. " 저기… 니들 평상시에 남학생들 상대 안 해주고 있니…? 왜 저렇게 굶주 린 거야? " " ......... " -웅성웅성웅성… ' 아, 거 참 되게 신경 거슬리네. ' -웅성웅성웅성… ' 그러니까 난 아무 잘못도 한 거 없다니까…. ' 점심 시간. 가인은 주위의 질투에 불타는 눈초리들을 느끼며 한 숨을 푹푹 내쉬었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가인은 오늘 하루, 벌써 수 백 번도 더 죽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은 모두 오늘 전학 온 유학생 테레이아 민체스터 양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저기, 이름이 어떻게 돼? " " 아… 유가인이라고 해. " " 유가인? 유가 Second Name이고 가인이 First Name이지? " " 아, 그래. 근데 한국 말 잘 하네…. " " 응. 평상시 부터 관심이 많은 나라라서, 어릴 때부터 꾸준히 배워 왔었어∼ " 그래. 바로 이게 문제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 같이 말을 걸 어오는 친근감! 이봐, 테레이아! 너와 난 오늘 처음 본 사이란 거 알고 있는 거야?! " 가인 이라고 불러도 되지? " " 아, 물론…. " " 훗, 고마워. 너도 날 '테이'라고 불러. " " …테이? 애칭 같은 거야? " " 응. 우리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불러오던 이름이야.너도 특별히 부르도록 허락해줄게. " 처음 본 사이는 개뿔이…. 테레이아의 '특별히 부르도록 허락해줄게' 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위에서 느껴지던 질투의 파동이 약 3배 쯤 치솟았다는 것을 가인은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랄까. ' 좀 봐줘라…. ' 가인은 행복한 고민을 잠시 해봤다. " 험.험. 가인아. 나의 베스트 프렌드 가인아∼ " 그때, 가인과 테이의 사이에 재영이 끼어들며 가인에게 어깨동무를 걸쳤다. 재영은 얼굴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가인에게 말했다. " 너의 절친한 죽마고우이자 어릴 적부터 사이좋게 지내던 친구,'박 재 영' 에게 이 아름다운 숙녀 분을 좀 소개시켜주지 않겠니? 응? " " 아, 그‥그래야지. " 재영의 느끼 버젼 말투에 한 순간 속이 이상해져 안색이 창백해지는 가인이 었지만,그는 꿋꿋히 잘 참아내며 테이에게 재영을 소개시키기 시작했다. " 아, 테레… " " 테이. " " 응, 그‥그래. 테이 야. 여긴 내 친한 친구 박재영 이라고 해. " 가인의 소개가 끝나자 마자, 재영은 기다렸다는듯이 이빨을 번쩍이는 상쾌 한 웃음을 지으며 테이의 앞에 나섰다. " 하핫. 가인의 친구 박재영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민체스터 양. " " 어머, 테레이아 민체스터에요.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 테이는 그런 재영의 모습에 살풋 웃으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재영은 그런 그녀의 웃음에 한동안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 처,천사다… 천사의 웃음이야,저건∼! ' 재영이 감동의 눈물과 함께 속으로 수백번 나이스를 외치며 자신 만의 세계 에 빠져 있을 때, 테이는 가인의 손을 잡으며 그애게 소근거렸다. " 가인아, 나 학교 가이드 좀 시켜주지 않을래? " " 아, 그‥저기, 그런 건 반장이… " " 난 니가 해줬으면 해. " " 아,응. 그,그래. 가자. " 뭔가 말리는 느낌이…. 가인은 테이와 함께 교실을 나섰고, 그 뒤를 바라보 던 재영과 1학년 3반의 남학생들은 더더욱 자신들의 몸을 질투로 불사르기 시작했다. " 크으으으윽. 유가인…. 넌 오늘부로 우리 1학년 3반의 적이다! " " 1학년 3반의 적! " " 사형이다! 사형! " " 우오오오오오!! " 그 뜨거운 질투와 광란의 도가니에,1학년 3반의 여학생들은 잠시 교실 밖으 로 몸을 피하며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 …저거, 분명 우리 책임 아니지? " " 저건 전염병의 무리들이야. 우리한테도 옮길라. " " 응.응. " 한편, 여긴 피스 메이커의 기지 내 휴게실. 커피 자판기에서 '블루 마운틴' 을 뽑아낸 민수정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진 사령관에게 그것을 건내주었다. "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 " ......... " 진 사령관은 여전히 과묵한 얼굴로,건내받은 블루 마운틴을 조용히 마실 뿐 이었다. 그런 사령관의 모습에 수정은 살풋이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 잘 하고 있으려나, 마리 양…. 전학생은 여러모로 힘들텐데. " " ......... " 그때, 그런 수정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것 같던 진 사령관은 뭔가가 생 각난듯 블루 마운틴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피스 레드, 성 마리 군…. " " ......예,사령관 님? 마리 양이 왜…? " " 그녀 말이지…. " " 예. " 진 사령관은 잠시 말을 끊고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 열 여덟… 이면… " " 그렇죠. 마리 양, 올해로 열 여덟이지요. " " 그러면… 고 2 아닌가? " " …그렇지요. " 수정은 진 사령관이 뭘 말하려는지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방긋 웃으며 답했 다.하지만 곧 그녀도 진 사령관이 생각하던 뭔가에 생각이 미친듯,벙찐 얼굴 로 중얼거렸다. " .........어머나. " 그렇다. 피스 레드 성마리는 올해로 열 여덟, 고등학교 2년생이었던 것이다! " ......... " 여자 답지 않게 175는 가볍게 넘길듯한 큰 키에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내린 한 여고생은 1학년 3반 교실 앞에 서있었다.그녀의 왼쪽 이름표에는 '2 학년 1반 성 마리'라고 하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 성 마리는 날카로 운 눈초리로 몇 번 주위를 살핀 후 천천히 1학년 3반 교실 후문을 열었다. -드르륵… 마침,저주 대상 1호 '유가인'을 놓고 한 차례 소리를 지르며 광분하다가 지 친 재영과 1학년 3반 남학생 일동의 시선이 후문에 집중되었다. 그곳에는 왠 늘씬한 키에 하얀 피부의 미소녀가 서있었다.재영과 남학생들은 흥분했다.저 미모는 테레이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탁월했던 것이다. " 저… 무슨 일로 오셨나요? " 재영은 애써 두근 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얼핏 이름 표를 보니 2학년인 모양이었다. 선배란 말인가! 성마리! 요 체크다! 어쨋든, 뭔가 재영과 남학생들의 뜨거운 시선에 거북함을 느낀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아,저기… 여기 유가인…이라는 학생이…. " 순간 '유가인', 그의 이름이 그녀에게서 거론되자 교실을 짓누르던 기운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왠지 모르게 위험을 감지한 성마리는 서둘러 교실을 빠 져나가며 말했다. " 아,저… 아무 것도 아니니… 이만. " 성마리가 나가고 후문이 닫히자, 곧 잠시 가라 앉았다 싶던 교실은 다시 질 투의 파동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쉽사리 꺼질 것 같지 않은 분위 기였다. " 용서 못한다, 유가인! " "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 " 사형이다! 사형! " " 크크크크크큭! 넌 오늘 죽는다! 죽는 거다! " " 하아…. " 여기는 가인의 자치 집. 가인은 물기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화장 실에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8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오면 대략 이 정도의 시간이 되어 있었다.가 인은 한 숨을 쉬며 침대에 힘껏 쓰러졌다. " ......피곤한 하루였어…. " 그의 말대로 오늘 하루는 가인에게 여러모로 피곤한 날이었다. 미소녀 전학 생 테레이아 민체스터의 등장으로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 지만, 그런 기분을 가볍게 날려 버릴 정도로 재앙인 일이 더 많았다. " 도대체가 재영이 그 놈의 자식은…. " 오늘 하루 종일 반의 남자들을 선동하여 자신을 들들 볶은 원흉을 생각하자, 치가 떨리는 가인이었다. 그 자식, 언제나 베스트 프렌드니 뭐니 하더니 여 자 앞에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사람이 변할 수가 있는 거냐?! 그 녀석은 뭔 가 뒤틀려 있어! 분명! " 아아…. "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신에게 응징을 가하겠다고 뒤쫓던, 1학년 3반의 남학 생들의 모습도 가관이었다. 물론, 그 선두에 재영이 있었던 것은 두말할 여 지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 내내 뛰어 다니느라 몸이 녹초가 되어 버린 가인이었다. 재영이 그 놈이 내 배달 루트를 알고 있 던 게 화근이었다. 그래도 집에 까지 쫓아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 아, 모르겠다. 자자. " 가인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잠을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지 만,오늘 하루 만에 소비한 정신적 육체적 피곤을 회복하기에는 턱 없이 짧은 시간이라고 가인은 생각했다. 그래. 내일 있을 녀석들의 횡포에 견디기 위해 서라도 지금 자는 게 내 신상에 좋다. -따르르릉… 하지만, 막 잠들려 하는 찰라에 울리기 시작하는 전화 벨 소리.가인은 벨소 리를 무시하고 잘려고 했지만, 전화벨은 마치 그런 가인을 비웃기라도 하려 는듯 끊임 없이 울리며 그를 괴롭혔다. 가인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 켰다. 녀석이다! 분명 재영이 녀석이다! 이 놈의 자식은 이제는 이런 유치 한 방법까지 써가며 나를 괴롭힐 작정인 것이다! " 야, 박재영! 그만 두지 못해?!! " 수화기를 들자마자 버럭 고함을 지른 가인. 하지만 수화기 저편에서는 언제 나 촐싹대는 재영의 목소리가 아닌, 차분하면서도 소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미안… 거기‥ 유가인 씨네 집 아닌가요? >> 이 목소리는?!!! " 테,테레이아? " 바로 오늘 하루 가인을 피곤하게 만든 모든 일들의 원인 제공자, 미소녀 전 학생 '테레이아 민체스터'였던 것이다! 가인은 뜻 밖의 전화에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 아, 가인이구나. 깜짝이야∼ 왠 소리를 그렇게 지르니? 혹시 한국 사람 들은 처음 전화를 받을 때 그렇게 소리지르는 관습이라도 있는 거니? >> " 아,아니…. 그런 관습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 가인은 어설프게 웃으며 답했다. 어쨋든, 이런 시각에 왠 전화람.가인은 머 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 저‥ 근데 무슨 일이야? " << ......용무가 없으면 전화하면 안되는 거니? >> " 아,아니∼!! 무슨 그런 말을…. 단지, 이런 늦은 시간에 여자한테서 전화 가 오니깐…. " << 아, 나 알아. 한국은 동방예의지국. 아녀자는 외간 남자와 말도 해선 안 된다지? >> " 하,하하…. 아니, 그런 건 옛날 옛적 일이지만…. " << 괜찮아. 가인은 나에게 외간 남자가 아닌걸. >> 가인은 테레이아의 말에 '쿨럭'하며 헛기침을 토했다. 이 여자가 정말.오해 할 소지가 다분한 말들만 나열하고 있잖아?! 만약 이런 말들이 재영이들의 귀에 들어 갔다간 괴로워질 테지, 분명…. " 아,혹시 내일 시간표나 과제를 몰라서 전화한거야? 그런 거 라면 인터넷 으로 학교 사이트에 들어가면 다 나와있는데. " << 으응…. 그런 건 아니지만…, 저기 말이야, 가인아…. >> " 어,그래. 말해봐. " 가인은 웃으며 답했다. 그래.오늘 전학왔으니 아직 친한 사람들도 없을테고. 맞아! 분명 모르는 게 있어도 묻기가 그럴거야. 편안히 대해주자.응! 하지 만 가인의 그런 평상심은 테레이아의 다음 말에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 혹시… 지금 학교로 와줄 수 있어? >> " .........?!?! "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수화기를 귀에 더욱 가까이 붙였다. 물론, 그런다고 더 잘들릴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잘못 들은게 아닐까 해서였다. 가 인은 얼떨떨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 아, 저기… 나 뭔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해줄래? " << 훗, 학교로 잠시만 나와달라고 말했어. >> " 엑--- " 태연스러운 테레이아의 목소리에 가인은 할 말을 잊었다. 아니, 이 아가씨. 수화기 저편에서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이런 말을 하는 거야? << 나‥가인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 " 어,어떤 얘기길래…. " 가인은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며 답했다. 그래. 미국에서 전학왔잖아.미국인 들 사이에서는 별 일 아닐지도 몰라.이런 한 밤에 남녀가 만나는 일 같은 건. 그래! 개방적인 사고! 바로 그거다! 하지만 역시나 가인의 평상심은 테레이 아의 다음 말에 여지 없이 박살났다. << 은밀한 얘기. >> " .........?!?! " 가인은 단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한참 동안 가인에게서 대 답이 없자, 수화기 저편에서 다시 테레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응. 그럼 승락해준 걸로 알게. 지금이 8시 20분이니깐… 9시 까지 1학년 3반 교실에서 보자.끊을게∼ >> " 아,저기! 잠깐!! " -뚜뚜… 가인이 뒤늦게 소리쳤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진 뒤였다.가인은 멍청히 수화 기를 든채,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이런 만화같은…. " -부엉.부엉. 한 밤의 학교는 분명 기분 나쁜 곳이다. 낮에 그 많은 학생들이 우글 거리 며 건물 가득한 활기를 보여주던 것과는 정반대로, 사람 하나 없는듯한 어둠 이 깔린 대조적인 모습 땜에 더더욱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조용히 자신의 모교, 한성 고등학교의 교문으로 들어섰다. " 아, 이게 무슨 꼴이람….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한 밤에 여자애의 전화를 받 고서 이런 밤의 학교에 오는 자신이라니. 며칠 전의 나라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정말. " 그런데…. " 밤의 학교라는 곳…. 원래 이렇게 조용한 곳인가? 적어도 수위 아저씨나 경 비 시스템이라든가. 뭐, 이런 게 있어야 정상 아닌가? 이렇게 들어 가기가 수월하다니… 도대체 이 학교의 경비 체제는 어떻게 된 모양이라지? 맘만 먹 으면 도둑들한테 하룻 밤 만에 다 털리겠다. ' 쳇, 내 알바 아니지.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어두운 복도에 텅빈 교실과 책상들이라니…. 이거 좋지 않아. 가인은 괜히 흠칫해져, 걸음 마저 고양이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이런 곳이 낮에 그 학생들이 시끌시끌 모여 공부하는 곳이라니. 괜시리 낮의 모습과 대조되어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1학년 3반」 어찌되었든, 자신의 교실 앞까지 오게 된 가인이었다. 가인은 설마설마 하 는 심정으로 창문을 통해 교실 안을 들여다 보았다.뭔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는 않았지만, 저 창가 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 만큼은 확실히 보였다. ' 진짜 있잖아,저 아가씨….아니 이렇게 어두컴컴한 곳에서 할 얘기라는 게 도대체 뭐가 있다고 불러낸 거야? ' 가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교실의 후문을 열었다. 창가 쪽에 있 던 그녀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창 밖의 달빛만이 이 어두운 교실을 비 춰주고 있었다. " 아, 저기… 테레이아? " " ......... " 가인의 말에 테레이아는 대답 없이 조용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에메랄드 빛 머리가 달 빛에 그 색을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테레이아 가 천천히 가인에게로 다가오자, 당황한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딴 청을 피 웠다. " 무,무슨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여,여기 너무 어둡지 않아? 하하… 어디 보자. 불 켜는 스위치가 어딨더라…. " 가인은 뒤돌아서 스위치를 찾기 위해 벽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그는 한 걸 음도 떼지 못했다. 뒤에서 부터 자신을 끌어 안은 테레이아 때문이었다.가인 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 테,테레이아?! " " 아무데도 가지마…. " 그녀의 소근 거리는 목소리가 가인의 귓 가에 들려왔다. 왜,왜 이러는 거야?! 테레이아? 도대체 왜….가인은 등 뒤로 느껴지는 테레이아의 가슴인 것 같은 감촉에 왠지 다리 힘이 빠져 주저 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가인의 귀로 테레이아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 아무데도 가지 말고 영원히 여기서 함께 살자…. >> " ?! " 뭔가 테레이아의 두번째 말에서 섬 한 느낌을 받은 가인은,화들짝 놀라 그 녀를 뿌리쳤다. 알 수 없는 소름이 몸에서 돋기 시작했다. 이 느낌은 예전에 도 받은 적이 있는 것이었다. 아니, 며칠 전에 받은 그 느낌과 똑같았다. 바 로, 바로… 그 괴상한 몬스터와 마주쳤을 때의 느낌?! << 날… 거부했어…. 왜… >> " 으,으아… " 가인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테레이아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녀 는 마치 뭔가에 홀린듯한 표정으로 가인을 바라본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곧 그녀는 가인에게로 천천히 걸어오며 그 모습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 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 >> 앞 전의 아름답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2m 정도 됨직한 흉측한 핏줄이 늘어선 괴물이 가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가인은 비명을 지 르며 교실 밖으로 도망쳤다. 그 뒤를 이어 교실의 후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 어,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만화같은 일이?!!! " 테레이아가 괴물?! 테레이아가 괴물로 변했어?! 아니면, 테레이아로 변장한 괴물?!! 아니아니! 그런 걸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단지 공포만이 가인의 머리 속을 휘감고 있었다.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저편의 복도를 돌아 달 려 나가다가, 막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부딪혀 쓰러졌다. " 으악! " -쿵 복도에 나뒹굴은 가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자신과 부딪힌 존재를 바라 보았다. 거기에는 에메랄드 빛 머리를 가진 소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복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테레이아였다! " 테,테레이아?! " " 아… 가인아? " 그녀는 꽤 아팠는듯 인상을 찌푸리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뭐,뭐야?! 이 테 레이아는?! 이 쪽이 진짜?! 가인은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뭐야,이 현실감 없는 상황은?! 어쨋든, 가인은 마음을 정하고 그런 테레이아의 손목 을 잡아 이끌었다. 가인은 그녀에게 소리쳤다. " 어,어서 여기서 도망쳐야 해! 얼릉 일어나! " " 무,무슨 일이니? " " 말도 안돼! 괴물이야! 괴물! 지금 설명해봤자 이해 못 할 거야! 그 보다 빨리 도망쳐야… " 가인은 정신 없이 소리치며, 그런 테레이아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그때,가 인이 쥐고 있던 테레이아의 손목이 왠지 모르게 차게 느껴졌다. 그런 가인의 귀로 테레이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혹시 이런 일이니? >> 어느새 가인이 잡고 있던 테레이아의 손목은 시뻘건 혈관으로 덮인 괴물의 손목으로 변해있었다. 가인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괴물의 모습에 다시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쥐고 있던 손목을 뿌리쳤다. " 으,으앗?!! " << 왜 날 피하는 거야? >> 괴물은 그런 가인에게 중얼거리며 다가섰다. 그때, 가인은 괴물의 목소리가 한 곳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편의 복도에서도, 옆 의 교실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설마,설마… << 도망치지마. >> 곧 가인의 앞에 있던 괴물과 똑같은 모습의 괴물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앞전 가인을 쫓던 괴물도, 옆의 교실 문을 열고 나오는 괴물도, 창문 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괴물의 모습도! 그 중에는 테레 이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괴물도 있었으나, 곧 옆의 괴물들과 같은 형태로 모습을 바꿨다. 가인은 이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몸을 떨었다. << 영원히 여기서 함께 살자. >> << 영원히 여기서 함께 살자. >> 괴물들은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것 처럼 같이 중얼거리며 가인에게로 다가 오기 시작했다. 핏줄로 뒤덮힌 수십 개의 손들이 가인을 덮쳐왔다. 가인은 눈을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 시,싫어!! 저리 가!!! 저리 갓-----!!! " -푸칵. 그때, 육중한 뭔가가 베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후두둑' 바닥으로 무거운 액체가 튀는 소리. 가인은 한참을 지나도 자신의 몸에 닿는 어떠한 느낌도 없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 아…. " 가인의 앞에는 한 소녀가 붉은 기류가 서린 검을 들고 서 있었다.복도의 열 린 창문 사이로 스며들어온 밤 바람이 소녀의 긴 포니테일 머리를 휘날려 주 었다. 그녀의 발 아래에는 괴물의 손인듯한 것들이 잘려져 나뒹굴고 있었다. " ......1학년 3반, 유가인.맞나? " 가인,자신 만큼 큰 키의 그녀는 천천히 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인은 이 갑작스런 상황에 떨리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학생증 돌려주러 왔다. " 소녀는 붉은 기류가 검신에 흐르는 검을 가로로 눕히며 몸을 낮췄다.그녀의 앞으로는 온 몸이 붉은 혈관으로 덮힌 괴물 세 마리가 두 손을 벌리며, 그녀 를 덮치고 있었다.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 뭐야, 이대로 당할 생각 이야?! 괴물의 손이 막 그녀의 코 끝으로 닿을려는 시점. 거기서 그녀의 움 직임은 시작되었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츠칵 가인은 그녀의 검이 어떻게 움직였는지,언제 움직였는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단지,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허공에서 곡선을 그리며 치솟는 괴물 의 녹색 체액과 붉은 검광(劍光). 그리고 그런 괴물의 뒤에 가볍게 내려서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 키에에에엑 >> 온 몸이 조각조각 동강난 괴물들은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듯 땅바닥에 쓰러 져 내렸다 그런 괴물들에게 눈길 조차 주지 않고, 다시 검을 들어 자세를 잡 는 의문의 미소녀. 괴,굉장하다. 저 아이!! " 어서 몸을 일으켜.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 " 아… 으,응. " 가인은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인이 몸을 일으킨 걸 확인한 후,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내 뒤로 따라와! " 그녀는 달려나가며 길을 막아서는 괴물들을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베어내었 다. 뒤 따라 달리는 가인의 양 옆으로 괴물들의 녹색 체액이 튀어올라,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그녀는 교복의 치마를 펄럭이며 허벅다리에 숨겨 놓은 단검들을, 앞을 막아서는 괴물에게로 날렸다. -피핏! 핏줄 사이로 드러난 괴물의 노란색 안구에 적중하는 두개의 단검.그런 괴물 이 비명을 지를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붉은 검날은 정확히 괴물의 목을 날려 버렸다. 실로 번개 같은 솜씨였다. " …끝이 없군. "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죽이는 만큼, 그 배로 괴물들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이건 마치, 이 학교 전체가 괴물들로 가득차 있는 것 같은… " 단단히 준비하고들 오셨군. "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달려 나갔다. 우선, 아군의 거점을 확보 한 후, 그 곳을 기점으로 반격을 기해야했다. 이대로는 뒤에 있는 소년이나 자신이나 버티기가 힘들었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이식(二式) " 그녀의 몸이 아래에서 위로 팽이 처럼 돌며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그 앞을 막아서는 괴물들은, 단지 그녀의 검에 희생될 제물들에 불과했다. " 파쇄(波殺) " 앞 전까지의 그녀의 검이 날카로운 한 마리 제비였다면, 지금의 것은 흉폭 한 맹수의 앞 발이었다. 괴물들은 온 몸이 난도질 당하여 바닥에 고꾸라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들의 앞을 막아서는 괴물을 처치하고선 가인을 한 교실로 이끌었다. " 들어가! " " 하,하지만 이대로는 갇혀버리는… " " 문제 없어! " 가인의 걱정을 그녀는 한 마디로 일축하고,그런 그를 교실로 밀어넣었다.그 녀는 교실의 앞 문과 뒷 문을 걸어 잠근 후,창문 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이 곳은 3층이다. 복도 쪽의 창문과는 달리, 이곳은 나무 같은 것도 없었다. 창 문으로의 기습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 저기…. " 그때, 가인이 그런 그녀를 불러 세웠다.그녀가 바라 본 가인의 얼굴은 혼란 스러움으로 가득차 보였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가인은 천천히 떨리는 입술을 벌여 말하기 시작했다. " 저,저 괴물들은 뭐죠? 몬스터?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또 누구에요?! " " ......... " 그녀는 가인의 정신 없는 질문에 무엇부터 답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어 차피 이 소년에게 숨길 것 따위는 없었다. 괴물들의 습격으로 더더욱 확신이 섰다. 그는 오라의 소유자다. " 놈들은 도플갱어(Doppleganger). 하급 몬스터들이지.놈들은 자기가 본 특 정한 인간형 생물의 형태를 그대로 본 따서 변신할 수가 있어. 일단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한 이후에 놈들은 그 사람을 공격하지. " " 그게 무슨… 변신을 한다고? 사람으로? " " 그래.놈들이 가장 즐기는 속임수는 원래의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인 척 해서 사회에 스며드는 것이야. 그리고 차례차례 다른 사람들을 습격해 가 지. " " 그,그런! 그럼…그럼… " 가인의 머리에 에메랄드 빛 머리의 소녀가 떠올랐다. 원래의 사람을 죽인다 고?! 그렇다면 테레이아는?! 테레이아는 어떻게 된 거야?! 그녀는 가인이 무 슨 말을 할려는지 알아챈 듯, 숙연해진 안색으로 답했다. " 아마도….도플갱어는 자신이 변신하는 모습의 사람은 대게 제거해놓고 변 신하니까… " " 아아. " 가인은 그녀의 말에 현기증을 느끼고, 책상에 주저 앉았다. 죽었다? 그녀가? 아직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에 안타까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곧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 도플갱어는 하급이지만 제일 골치 아픈 존재이기도 하지. 다른 몬스터가 출현할 때를 틈타 게이트를 통과하여 사회 속에 숨어들기 때문에, 우리들 로도 놈들을 찾기란 쉽지가 않아. "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한 숨을 쉬었다. 이런 말 해봤자 변명 밖에 되질 않 는 것이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곧 가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 ......미안하다. 우리의 불찰이다. " " ......... " 가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 보다가, 곧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 그것들이… 왜… 왜 날 습격한 거죠? "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가인도,놈들이 왜 자신을 습격했는지 짐작이 가는 구석은 있었다. 단지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자신이 끼 어 들어가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그런 가인의 마음에 쐐기를 박듯 대답했다. " 그건 네가 '오라(AURA)'의 소유자 이기 때문이다. " " ......오‥라? " 가인은 멍청히 그녀가 말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오라? 그것인가. 그때….며 칠 전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그 푸른 기운…? " 삼차원 계의 인간들은 모두 자신 만의 미지의 힘 오라를 내재하고 있지. 삼차원의 근본적인 힘. 우리 인류가 이차원 계의 생물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 그것이 바로 오라다. 하지만 그 오라를 물리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소수로 제한 되어 있지. 그리고… " 그리고… " 제가… 그 소수에 들어가는… 건가요. " " 그래. 넌 우리와 같은 오라 능력자다. 놈들, 몬스터는 특히 삼차원의 힘 오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만약, 몇 일간만 더 방치되었더라면 넌 놈 들에게 제거 당했을 거야. 난 그런 너를 보호하기 위해 대 몬스터 특무기 관 피스메이커(Piece Maker)에서 파견된 요원이다. " " ......... " 꿀꺽. 가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너무 굉장한 것을 마치 아무 것도 아니라 는듯 얘기하는 이 여성의 말에, 가인은 과연 이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 지 심각히 고민했다. 이런 만화 같은 일이! 이런…! ' 하지만… 믿을 수 밖에 없잖아?! ' 그녀가 말하는 진실을 부인하기에는,앞 전에 겪었던 그 경험들의 충격이 너 무나도 컸다. 그러나 의외로 가인의 마음은 담담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순순히 납득하는 것이 가인, 자신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납득 못할 것 도 없었다. 새로운 것을 알았을 뿐, 지금과 달라질 건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 …그건 그렇고 너무 조용하군. " 긴 포니테일의 그녀는 담담히 중얼거리며 왼쪽 손목에 찬,시계 비슷한 것을 만지작 거렸다. 가인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 …뭐 하시는 거에요? " " 지원 요청. 도플갱어의 본체를 찾아내서 공격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지 만,지금의 멤버로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커. " 결국, 가인 자신이 방해라는 말이로구만. 가인은 딱딱한 그녀의 말에 인상 을 살짝 찌푸렸지만, 곧 한 숨을 쉬며 인상을 풀었다. 맞는 말이다. 민간인 인 자신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단지, 그녀 자신도 평범한 여고생으로 보 이는데, 그런 말을 해대는 것에서 약간의 거부감을 느낀 것 뿐이다. 그녀는 곧 지원 요청을 끝낸듯 몸을 일으켰다. " 자, 그럼 우선 여기를 벗어난다. " " 아,예…. 저,그런데… " 그때, 가인이 뭔가를 물을려고 하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 무슨 용무인가? " " 에… 저, 제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 까요? 당신을. " 난데 없는 가인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앞 전 까지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람 답지 않게 너무 의연했다. 보통 민간인 이라면 지금껏 히스테릭하 게 소리치며 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 대부분일 텐데…. 담력이 센 걸까? 아니면 무신경한 건가? 어쨋든, 그런 가인의 모습이 마음에 든듯, 그녀는 처 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이며 답했다. " 성마리. 내 이름이다. " " 아,예…. 마리‥씨 로군요. " " 그리고 2학년이다. " " ......... " " 선배라고 불러라. " " .........예, 선배 님. " -드르륵. 천천히 교실의 문이 열리며, 마리와 가인은 복도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앞 전의 사투가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복도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 붉은 핏줄로 몸이 덮힌 도플 갱어라는 괴물들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고. 어쨋든,놈 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좋은 기회다. 마리는 가인과 함께 어두운 복도 의 저편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왜, 왜 이렇게 조용하죠? " " ......기습할 준비라도 하고 있는지 모르지. " 제,젠장. 이럴 때는 편안한 말로 민간인을 안심시켜 줘야 되는 거 아냐? 가 인은 무책임한 마리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되었든, 말은 그렇게 했지 만 마리,본인 또한 걱정은 되었는듯, 예의 붉은 기류가 서린 검을 뽑아 들었 다. 처음에는 마치 단검 같아 보이던 것이, 마리의 오라에 반응하여 붉은 검 신을 가진 장검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 신기한 모습에 가인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 괴,굉장하군요. 그건 뭐죠? 빛의 칼이라니. " " 오라 소드(Aura Sword). 오라의 힘을 구현화 시켜,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생성해내는 무기. 오라의 위력을 2배 정도 높여줘. " " 그,그렇군요. " 가인은 며칠 전 재영과 함께 극장에서 봤던,'스타워즈 2032'라는 영화를 떠 올렸다. 거기서도 저런 비슷한 게 나왔었지,아마…. 하지만, 그런 가인의 생 각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는 마리의 행동에 끊어졌다. 가인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마리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다. " 저기… 무슨‥일이에요? " " ......역시 기습할려고 숨어있었던 거야. " 마리는 날카롭게 굳은 인상으로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따 라 가인도 역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가인은 숨이 턱 막히 는듯한 충격을 먹었다.천장에는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릴 정도로 수 많은 도플 갱어들이 매달려 마리와 가인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가 얼마나 많 은지, 천장이 온통 시뻘건 놈들의 혈관으로 뒤덮힌 것 같이 보였다. << 쿡쿡쿡쿡쿡… >> " 으,으아아아악?!!! " 가인의 비명을 시작으로 천장에 매달렸던 도플갱어들이 아래로 뛰어 내리기 시작했다. 마리는 이를 악물고, 가인의 목덜미를 잡은 채 복도 쪽 창문으로 달려들었다. 무,무슨 짓을?! 가인은 놀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그 전에 둔탁한 충격이 그의 전신으로 닥쳐왔다. -챙그랑! 유리창의 파편이 허공에 뿌려졌다. 차가운 밤 바람이 폐 속 깊숙히 밀려 들 어왔다. 그리고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하는 기분. 발 밑이 서늘한게 몸 전신 으로 오한이 밀려 들었다. " 우,우와아아아아아앗?!!! " 가인은 비명을 질렀다. 3층이라곤 하지만 한성 고등학교의 건물은 한 층 한 층이 상당히 높은 축에 속했다. 최소한 10M. 그 정도의 높이를 대책 없이 떨 어지는 것이다. 죽는다! 죽을 거야! 그때, 가인의 눈이 같이 떨어지던 성 마 리에게로 고정되었다. 그녀는 앞전의 지원 요청을 하던 시계가 달린 왼손을 반원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 " 변신(變身) 피스 레드(Piece Red)! " 그 명령어를 시작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성 마리의 몸 주위로 여러 전 투복들이 마치, 순식간에 떠오르듯 나타나 장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로 검은색의 타이즈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가슴 부위와 관절 부위로 흰색의 강 철 장갑이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 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의 흰 얼 굴은 강철의 헬맷과 마스크에 감싸여졌다. 이 놀라운 광경에, 가인은 자신이 잠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곧이어, 마리가 걸치고 있던 검은색 의 타이즈가 붉은색의 빛을 띄기 시작했다. 마리의 오라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 하앗----- " 순간, 상식을 벗어나는 움직임으로 전투복 형태의 마리가 학교의 벽을 박차 고 가인에게로 도약했다. 공중에서 한바퀴를 돌며 가인을 낚아챈 마리는 그 대로 밑의 정원에 있던 큰 소나무를 밟고 다시 한번 도약했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가인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이 없었다. 단 지 중력을 무시하는듯한 이 행위 앞에 비명을 지를 뿐. " 으아아아아아악!!! " 가인의 비명을 바탕으로, 마리는 학교의 벽을 박차며 단번에 건물의 옥상으 로 날아올랐다. 이미 인간으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도약력이었다. 학교의 옥 상에 가볍게 내려선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가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 인은 한참을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 헉헉… " 죽는 줄 알았어! 죽는 줄 알았다고! 가인은 눈에 맺힌 눈물을 소매 자락으 로 닦아내었다. 이런 만화같은 일이!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그런 가인의 모습이 걱정되었는듯, 마리가 몸을 숙여 그에게 물었다. " 괜찮아? " " ......괜찮다고…헉…하면…헉헉… 거짓말이 겠죠‥후우‥. " 가인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마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그때 경 직하는 마리의 몸. 그런 그녀의 기색을 알아챈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 다. " 이,이번에는 또 뭐에요? " " ......아무래도 녀석들의 본거지에 들어온 것 같은데…. " 본거지?! 무,무슨 말이야, 그건!! 가인은 천천히 굳은 안색으로 옥상을 살 펴보기 시작했다. 옥상의 빈 풀장을 바탕으로 사방 팔방에 도플 갱어들이 가 인과 마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적게 잡아 스무 마리 이상으로 보였다. 왠지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어진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마리에게 물었다. " ......이제 어떡하죠,마리 선배? " " ......... " 뭔가 긴장감이 결여된 듯한 가인의 질문에,마리는 수중의 오라 소드로 자세 를 잡으며 전투 태세로 돌입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 지원 군이 오 기 전 까지 버텨내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 이 녀석을 지키면서 싸울 수 있을까…. ' 마리는 슬쩍 자신의 뒤에 서있는 가인을 바라보았다. 오라 능력자라고 생각 되어지지만, 그에게서는 어떠한 오라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분명,각 성은 했을 텐데…. 그래.아직 힘을 조절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서 그는 전투에 어떠한 도움도 될 수 없었다. ' 결국, 싸우는 것은 나 혼자‥로군. ' 마리는 마음을 잡으며 자세를 낮췄다. 지원군을 부른지 5분이 넘었다. 적어 도 남은 5분만 견뎌낸다면 승산은 있다. 그때까지 최소한으로 가인을 보호 하며 공격한다.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도 공격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녀의 전투 수칙 때문이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 아‥아앗! 마리 선배, 저기를 봐요! " 그때,뒤에 서 있던 가인이 놀란 목소리로 소리치며, 도플갱어들의 한 곳을 가리켰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지? 마리는 천천히 가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눈으로 쫓았다. " .........?! " 그곳에는 한 에메랄드 빛 머리의 소녀가 옥상의 철창에 정신을 잃은채 매달 려 있었다. 저 소녀는…. " 테,테레이아?! " 가인은 반가움 반, 놀라움 반으로 소리쳤다. 죽은 줄로만 알았었는데…. 다 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 아니지. ' 혹시, 앞 전과 같이 도플 갱어들이 그녀의 모습으로 변한 것일 수도….아니, 하지만. 만약,진짜라면. 그렇다면! 그때, 이런 어지러운 생각들이 교차하는 가인의 어깨를 마리가 잡으며 그의 고민을 해결해줬다. " 걱정마. 저 아이는 진짜다. " " 예? 그,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 "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미세한 오라의 파동이 느껴져. 삼차원의 생물이라 는 결정적인 증거지. " " 그,그렇군요. " 가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테레이아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 인채 기절해 있었다.하지만 다른 어떠한 상처도 없는 것이 단순히 정신만 잃 은 것 같았다. 가인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반면, 마리의 얼굴은 점점 어두 워졌다. 그래. 살아있는 건 다행이야.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인질인 것이다. ' 곤란할지도. ' 전략 상으로도 불리했다. 옥상이라서 도망칠 구석도 더 이상 없는 데 다가 포위당한 상황. 그리고 인질까지. 그때, 저편에서 기절해 있는 테레이아의 곁으로 새로운 도플갱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붉은 색 도플갱어가 아닌 녹색의 도플갱어였다. 마리는 녀석을 보고 눈을 빛냈다.저 놈이다! 저 놈이 바로 본체다! " 찾는 수고를 덜었군. " " 예? " 마리의 중얼거림에 가인 또한, 도플갱어의 본체를 바라보았다.다른 놈들과 는 다른, 녹색 핏줄로 몸이 덮힌 녀석이었다.저 놈이… 저 놈이 테레이아를! 가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가인을 뒤로 하고 마리는 오라 소드를 천천히 내렸다. 분명 본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자신이 절대적 인 우위를 점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그래. 인질도 있단 말이지. 협상 을 걸 생각인가. 마리의 생각대로 도플갱어의 본체는 테레이아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 뒤의 인간을 내놔라. 너에게는 볼 일이 없다. >> 제,젠장! 저 자식, 테레이아의 목소리로 잘도 저딴 소리를! 가인은 식은 담 을 흘리며 놈을 노려보았다. 마리는 예의 무감각한 목소리로 답했다. " 싫다면? " << 이 여자… 죽인다. >> 도플갱어의 손이 테레이아의 목으로 다가갔다. 괴물의 손 끝이 서서히 칼날 의 형태로 변해 그 끝이 테레이아의 흰 목에 닿았다. 그러자 천천히 흘러내 리는 피 한방울. 살짝 닿은 것 같았는데….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 머,멈춰!! 내가 간다! 내가 갈테니 테레이아를 풀어줘!! " << 쿡쿡‥ 그래야지‥. >> 도플갱어의 본체는 승리자의 웃음을 띄었고,가인은 막막한 눈초리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굳은 목소리로 가인에게 말했다. " 가지마. 네가 가면, 너도 죽이고 여자도 죽일 거야. " "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걸요. " 가인은 서글픈 웃음을 띄고선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마리는 잠시 아찔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받은 명령은 분명, 오라 능력자 블루(Blue)를 몬스터들로 부터 보호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질의 목숨도 무시 할 수 없는 노릇. 그렇지만 분명, 이대로 그를 보내면 그도 인질도 모두 죽 게 될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생명을 놓고 그 무 게를 잣대질하는 것은 절대로 옳은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 ......할 수 없지. 원망받게 되더라도…. ' 마리는 오라 소드를 쥐고 있는 오른 손에 힘을 넣었다. 이대로 두 손 놓고 다 죽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구한다.그녀는 결심 했다. 놈이 가인에게 접근하는 순간, 그때가 네 놈의 제삿 날이다. 한편, 가인은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테레이아와 도플갱어의 본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식은 땀으로 젖은 등 뒤가 밤 바람을 맞자 오한이 들 정도로 서늘해졌다. 가인은 지금 자신의 행동에 대해 끊임 없이 후회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잘하는 짓인 걸까?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이대로 죽어 도 상관 없는 거야? 그때, 그런 그의 눈 앞으로 피투성이의 여동생과 부모 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자 이상하게도 가인의 마음 은 다시 담담해졌다. ' 그래…. 이제 가족들의 뒤를 나도 따라 가는 건가. '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사고 속에서 왜 나 자신만 살아 남았던 거 였는지. 특별히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삶에 대한 미련이 있 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따라가는 거다. 다시 내 가족들을 만나게 되는 것 뿐이야. 단지… 단지 이런 만화 같은 일로 죽게 된다는 게 유감일 뿐이지만. 소년은 그런 회의적인 생각을 하며 도플갱어의 본체 앞으로 다가갔다. 주위 의 도플갱어들이 그런 그에게로 길을 열어주듯 비켜섰다. 가인은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놈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제… 테레이아를 풀어줘. " << 쿡쿡쿡쿡… >> 괴물은 테레이아의 웃음 소리를 내며 키득거렸다. 주위의 괴물들도,그런 본 체의 웃음 소리에 동조하여 웃기 시작했다. 제,제길. 테레이아의 목소리로 웃지말란 말이다, 이 괴물 놈! 가인은 이 수상한 분위기에 불안해져 이를 악 물었다. 도플갱어의 본체는 웃음을 멈추고서는 가볍게 손가락으로 부하들에 게 지시했다. << 죽여. >> << 크화확! >> 본체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도플갱어들은 순식간에 가인에게 달려들었다. 제,제길! 그래! 예상했다고! 이런 거!! 하지만… 하지만… ' 개죽음인 걸까…?! ' 그때, 가인의 발 밑으로 작은 알루미늄 통이 날아 들었다.그리고 익숙한 마 리의 음성이 가인에게로 들려왔다. " 몸을 숙여. " " .........?!?! " -파싯! 그 순간, 알루미늄 통으로부터 붉은 섬광이 반원을 그리며 터져나왔다. 그 섬광의 범위에 들어간, 가인을 덮칠려던 도플갱어들은 비명을 지르며 녹아들 어가기 시작했다. 폭발물인가?!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그런 것과는 다른 성 질의 것이었다. 마리가 던진 것은 '오라 필드(Aura Field)'라고 하는 무기로 서, 오라의 기운을 농축시켰다가 전개시켜 반경 10M 사이에 들어있는 몬스터 들에게 마치 수류탄과 같은 위력을 선사하는 오라의 폭발물이었던 것이다.물 론, 그 효과는 삼차원의 생물들에게는 무해한지라 오라 필드의 범위에 들어 가 있던 가인에게는 아무런 위해도 가하질 않았다. << 네놈이…! >> 도플갱어의 본체는 오라의 섬광에 눈이 부신듯 비명을 지르며 주춤거리다가, 빛이 거친 지점에 서있는 가인에게로 달려들었다.괴물의 오른손은 어느새 날 카로운 칼날로 변하여 가인을 노리고 있었다. << 죽어라! >> " .........!!! "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지만! " 개죽음은 나도 사양이얏!! " -우웅. 가인의 외침에 반응하여, 소년의 눈 앞에 푸른 오라의 기류가 휘몰아 쳤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대기의 방패인 것 처럼 도플갱어의 칼 날을 강력하게 쳐내었다. 방어한건가?! 내가?! ' 이것이 오라?! ' " 잘했어! " 그때, 그런 가인과 괴물의 앞으로 한 인영이 날아들며 소리쳤다.바로 성마 리였다. 그녀는 자신과 가인을 막아서던 도플갱어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순식간에 그들에게로 달려온 것이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삼식(三式) " 마리는 오라 소드를 땅에 끌며 도플갱어의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번개 같이 휘둘러지는 그녀의 검. 녹색의 체액이 하늘 높이 직각으로 치솟았다. " 격멸(擊滅). " 그 말을 끝으로, 마리는 뒤돌아서며 오라 소드를 거둬들였다. 그녀의 뒤로 는 도플갱어의 본체가 정확히 이등분 되어 무너지듯 쓰러져 내렸다. 가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감탄하며 주먹을 쥐었다. ' 끝났다! ' -피리리리릭… 그때,이등분 되어진 도플갱어의 양 몸체에서 녹색의 핏줄들이 튀어나와 서 로의 몸에 얽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가는 괴물. 끈 질긴 생명력이었다. 가인과 마리가 이 뜻 밖의 상황에 놀라고 있을 때, 재 생을 끝마친 도플갱어는 철창에 매달린 테레이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일이 틀어진 이상, 인질은 죽여버리겠다는 심보였다. 가인의 비명이 한성 고등학 교의 옥상에 울려퍼졌다. " 아,안돼! 테레이아!! " << 키륵…?! >> 하지만 괴물의 손은 테레이아에게 닿지 않았다. 괴물의 앞에는 어느새 나 타난 건지 모를 녹색 타이즈의 피스 대원이 본체의 손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 이다. " 여어∼ 좀 늦었죠? " 녹색의 피스 대원은, 가인의 옆으로 다가선 마리에게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말을 건냈고, 마리는 약간 뿔이 난 음성으로 답했다. " 많이 늦은 겁니다,피스 그린. " " 자자. 이래뵈도 서둘러 달려온 거니 좀 봐주시지요.대신 뒷 처리는 확실 히 해드릴테니까. " 그 말을 끝으로 피스 그린, 정진우는 고글 사이로 얼핏 비치는 붉은 안광을 도플갱어의 본체에 고정시켰다. " 그런 이유로......넌 사형이다! " -투학!! 순간, 도플갱어의 본체에 수십 개의 충격파가 터져 올랐다. 피스 그린의 주 먹이 괴물을 난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주먹으로 가격하는 것이 아닌, 오라의 힘이 깃들어진 주먹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낼 수 없는 스피드로 괴물을 쉴새 없이 가격했다. " 아타타타타타타타타탓!! " 도플갱어의 본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 오라의 주먹에 핏덩어리가 되어갔 다. 수 십 개의 오라의 충격파가 괴물의 몸을 뚫고 터져 나갔고, 그 등 뒤로 녹색의 체액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쿵. 정확히 백발의 주먹을 끝으로 괴물은 넝마 조각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피 스 그린은 마지막으로 주먹을 뻗은 자세 그대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 .........피스 백열권…쯤으로 해둘까나. " 음속으로 주먹을 수백발 휘둘러 놓고서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이, 엉뚱한 소리나 해대는 정진우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가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뭐 ,뭐냐. 이 무지막지한 남자는. 방금 전의 그 엄청난 광경에 가인은, 경이로 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저,저런 것도 오라의 힘인 건가?! 그런 정진 우에게로 마리가 다가갔다. " 다른 대원들은 어떻게 된 거죠? " " 말했잖아요. 서둘러왔다고. 다른 대원들은 좀 늦을 겁니다. " 정진우는 그렇게 히죽히죽 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본체가 당해선지,옥상 에 남아있던 다른 도플갱어들도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어느 정 도 정리는 된 것 같군…. 그런 그의 시선에 가인의 모습이 보여왔다.정진우 는 그에게로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 여엇- 소년. 몸은 괜찮아? " " 아,예….도와주신 덕분에…. " 가인은 갑작스럽게 말을 거는 그의 태도에 얼떨떨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 였다. 정진우는 웃음을 터뜨리며 가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아하하하하하하∼ 뭐야. 그렇게 정색하기는. 긴장 풀고 편히 대해∼ " " 하하… " 가인은 어설프게 정진우를 따라 웃다가, 곧 테레이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는 이미 마리가 다가가 그녀의 상세를 살펴 보고 있었다. 테레이아… 괜찮은 걸까? 가인은 걱정 된 목소리로 마리에게 물었다. " 어때요,마리 선배? " " …걱정마. 단순히 기절한 것 뿐이야. " 하아, 다행이다. 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테레이아의 볼을 살짝 몇 번 두드렸다. " 테레이아? 테레이아, 정신 차려봐. " " 으응…. " 그녀의 눈꺼풀이 살며시 떨리며, 곧 푸른색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눈 동자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듯 하다가 곧 가인에게로 그 모습을 향했다. " ......가인? " " 그래,나야! 테레이아! 다행이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 " 여,여기는 어디…. 나… 집으로 향하다가… 아… 그때부터 기억이… " 테레이아는 머리가 아픈듯 살짝 그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가인은 그런 그녀 를 말리며 웃었다. " 무리하게 생각하지마. 이제 다 끝났으니까. " " 응…. " 테레이아는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궁금할텐데도, 아무 말 없이 그런 가인 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가인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정진우가 마리에게 말했다. " 어느 정도 일단락… 된 걸까요? " " 그렇군요. " 마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정말 잘 해내줬군…. 한성 고등학교의 옥상으로 곧 여러 대의 헬기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피스 메이커의 뒷 처리 반이었다. 이걸로, 도플갱어의 암살 사건은 그럭저럭 마무 리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 ......... "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테레이아 민체스터의 얼굴에서 한 줄기 싸늘 한 미소가 보였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제 2 화 조우 完> 豫告 피스 메이커(Piece Maker)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가인. 그리고… 성마리: 매달 국가에서 지원하는 250만원의 연금. 24평의 전용 빌라. 전 교육 과정 무료.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피스 카드. 성 마리의 설득으로 가인은 피스 메이커의 피스 대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뭔가 순탄하지 못한 일만 벌어지는데… 유가인: 그러니까 난! 당신들의 그런 '우리들이 정의다∼' 식의 제 멋대 로인 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진 사령관: ......... 그리고 어김 없는 몬스터의 습격. 이런 상황 속에서 선택하는 유가인의 행동은! 제 3 화 피스 메이커(Piece Maker) 소년이여, 전사가 되어라!! 유가인: …누구 맘대로.(-_-+) -=-=-=-=-=-=-=-=-=-=-=-=-=-=-=-=-=-=-=-=-=-=-=-=-=-=-=-=-=-=-=-=-=-=-= 오라전대 ＰＩＥＣＥ ＭＡＫＥＲ 제 3 화 피스 메이커(Piece Maker) =-=-=-=-=-=-=-=-=-=-=-=-=-=-=-=-=-=-=-=-=-=-=-=-=-=-=-=-=-=-=-=-=-=-=-= " 2032년, 4월 5일. 21시 15분.저희의 예상대로 몬스터는 패턴 블루에게 접 근을 시도했습니다. 장소는 블루가 재학 중인 한성 고등학교. 밤 늦은 시 각이라 다행스럽게도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테레이아 민체스터'라고 하 는 블루의 클래스 메이트가 인질로 잡히는 사태가 벌어졌었습니다. " " ......몬스터가 인질극을 벌였단 말입니까? " 민수정의 보고에, 닥터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손으로 밀어 올리며 중얼거렸 다. 단순히 파괴만을 일삼아온 놈들의 태도라고 보기 힘들었다. 녀석들, 진 화한 건가… 그렇지 않다면…. " 몬스터의 유형은? " " 블루를 암살하려고 했던 몬스터는 C급 몬스터 '도플갱어(Doppleganger)'. 아마도, 4월 2일 만티코어가 차원 이동을 할 때,같이 게이트를 타고 넘어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 " C급 몬스터의 소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 닥터는 연신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듯 중얼거림을 되풀이 했고,곧 조용히 침 묵하고만 있던 진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 테레이아 민체스터 라고 하는 민간인의 신원 파악은? " " 예. 2015년 5월 1일 생, 케나다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잦은 출장으로 미국 과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생활을 하다가, 이번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 니다. 서류 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 " .........시기가 너무 절묘하군. " 진 사령관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며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받쳤다. " 혹시 모르니, 감시를 붙여 두도록. " " 예, 이미 붙여 놓았습니다. " 그의 말에, 수정은 기다렸다는듯이 대답했다. 진 사령관은 그녀의 일처리가 마음에 들었는듯, 과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그의 모습에 민수정은 얼굴 가득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커피 드릴까요? " " 음. " 수정은 즉시 커피를 가져와 진 사령관의 앞에 내려놓았다.각설탕은 3개였다. 진 사령관은 어울리지 않게 단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런 둘의 모습에 닥터 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 흠.흠. 그건 그렇고, 오늘인가요? 그의 방문은? " " 음. " 진 사령관은 짧게 답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민수정은 비스켓이 담긴 그릇을 그의 앞에 놓으며 닥터에게 말했다. " 어머,벌써 그런 날짜가…. 청소라도 해놓아야 겠내요. " " 청소도 좋지만… 그가 순순히 납득할까요? " 닥터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나는 순탄치 않다 쪽 에 한 표 던지겠는데…. 그런 그의 눈초리에 진 사령관은 비스켓에 손을 가 져가며 짧게 답했다. " 문제 없다. " 그의 목소리는 무감각했지만,그 속에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섞여 있었다. 그 런 그의 모습에 닥터와 수정은 가볍게 웃었다. " 후, 어쨋든 그가 들어오면 그녀가 상당히 좋아하겠군요.드디어 그것을 움 직일 수 있게 되는 거니까. " " 그녀라면…? " 닥터의 말에 수정은 가볍게 반문했다.닥터는 뒤로 몸을 숙이며 빙긋 웃었다. " 우리 천재 님 말이에요. " " 아∼ " 그때, 닥터와 수정이 하는 얘기들을 들으며 진 사령관은 접시에 담겨 있던 마지막 비스켓에 손을 가져 가고 있었다. 한편, 여기는 피스메이커의 지하 연구실. 여러 잡다한 기기들이 쌓여 있는 좁은 독방에 한 소녀가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원래는 상 당히 넓었을듯한 방이었지만, 정리를 전혀 하지 않는 주인을 만난 탓에 이런 작은 독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 쿠쿠쿠∼ 블루란 말이지. "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는 길게 땋은 갈래 머리를 귀찮다는듯 뒤로 넘기 며, 커다란 돋보기 안경을 고쳐 썼다. 얼마나 크고 두꺼운 안경인지,그것에 가려 그녀의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보고 있던 모니터에는 패턴 블루 라고 명명된, 유가인의 신상 명세가 떠올라 있었다. " 50N 이란 말이야. 자그만치 50N! " 소녀는 신이 난 표정으로, 독방을 나섰다. 독방을 나서자 곧 엄청난 크기의 격납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놀랍게도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강철의 거인이 서 있었다. 저 정도면 18m는 넘길듯한 크기일까. 거 인은 격납고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아, 광택이 흐르는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그 거인의 앞에 선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 …조금만 기다려. 맘껏 날뛰도록 해줄테니까. " 제 3 화 피스 메이커(Piece Maker) -딩동댕동… " 얏호∼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점심시간∼ " " ......... " 도대체 이런 구닥다리 개그를 하는 이 놈은…. 가인은, 종이 울리자마자 소 리치며 날뛰는 재영의 모습에 한 숨을 쉬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틀 전에 벌어졌던 일들이 모두 신기루였던 것 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으 려나. 몬스터, 게이트, 오라, 도플갱어… 이렇게 갭이 크다니…. " 가인아! 달리자! 우리의 카레 빵을 고수할려면 달리는 수 밖에 없는 거다! " " ......아아. " 그러니까 시끄럽다고. 가인은 투덜거리며 재영과 함께 교실 밖으로 달릴 준 비를 하였다. 재영의 말은 시끄러웠지만, 그 내용은 절실한 것이었다. 카레 빵! 한성 고등학교에서 주문 판매하는 한정 갯수의 음식! 그 맛은 여타의 다 른 빵들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 인기는 학생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매점에 늦게 갔다간 카레 빵은 구경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 렀다. 카레빵! 당연히 놓쳐서는 안된다! " 잠깐, 가인아‥. " 그때, 막 후문을 나서려는 가인을 부르는 한 목소리. 이 목소리는…. 가인 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재영이 즉각 90도로 목을 꺽으며 목소리에 화답했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이 녀석의 반응 속도는 때때로 짐승의 것을 상회한다. " 민체스터 양∼! " 1학년 3반 교실의 분위기를 한번에 쇄신해주는 저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머 릿결. 상아색 피부와 하늘하늘한 몸 맵시. 그리고 신비스러운 푸른 빛 눈동 자의 여운. 그녀의 이름은 테레이아 민체스터 라고 했다. 테레이아는 살풋이 웃으며 그런 재영에게 말했다. " 재영 씨는 언제나 건강하네요. " " 그러믄요! 박재영 17살! 오늘도 팔팔하게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습 니다! " 재영은 테레이아의 인사에 마음 속으로 행복의 눈물을 머금으며 소리쳤다. 가인은 그런 재영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 저은 후, 테레이아를 바라보았다. " 아,테이. 무슨 일로…. " " 응. 도시락 같이 먹자. 가인이 것도 싸 왔어. " 주저 없이 가인의 앞으로 쑥 내밀어지는 예쁜 도시락 통. 헤에, 테레이아는 이런 도시락 통을 가지고 다니는 구나. 근데… 뭐…? " 내, 내 것도 싸 왔다구?! "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이건‥그러니까 흔히 남들이 말하는 그,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를 위해 새벽부터 정성 껏 만들어 주는‥그,그 도시락!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 저,정말 받아도 되는 거야,이거? " " 물론. " " 그‥ 처,처음이야. 이런 것 받는 거. " " 훗, 나도 남에게 도시락 주는 건 네가 처음이야. " 테레이아는 방긋 웃으며 가인의 손에 도시락을 쥐어 주었다. 아,찡하다. 이 런 손수 만든 도시락이라니. 이건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먹어 보는 도시락인 것이다. 가인은 그런 테레이아의 정성에 감동했다. 테레이아는 가 인에게만 들릴 정도로 살짝 소근거렸다. " 날 구해준 보답이에요, '기사' 님. " " 하,하하…. " 테,테레이아는 대담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구나,정말…. 외국인들은 다 이렇게 적극적인 걸까. 가인은 그런 테레이아의 태도에 어설픈 웃음을 지 어 보였다. 그때, 가인의 뒤에서 재영이 억지 미소를 짓는 기색이 만연한 얼 굴로 말을 걸어 왔다. " 하,하하하∼ 조,좋겠구나. 마이 프렌드 가인아! 저,저기∼민체스터 양.가 인의 베스트 프렌드인 저한테는 뭐… " " 아, 그렇지. 재영 씨. " " 예,옛! " 재영은 기대에 찬 얼굴로 테레이아를 바라보았다. 테레이아는 방긋 웃으며 그런 재영에게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재영 씨의 베스트 프렌드, 잠시만 빌려가도 될까요? " " 예,예에∼? 아, 뭐 그야 당연히…! " " 어머, 친절하시네요,재영 씨는. …신사에요. " " 그,그런∼ 아하하하하하∼ " 재영은 테레이아의 칭찬에 단숨에 기분이 업 되어 웃음을 터뜨렸다.저 아름 다운 미소녀가 날 보고 친절하대! 신사래! 이,이런 게 바로 하늘로 떠오르는 기분?! 물론, 그가 그렇게 자신 만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테레이아와 가인 이 교실을 빠져나간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 ......... " 그 날, 재영은 카레 빵을 놓쳤다. " 어때? 맛 괜찮아? " " 어? 으응…. 맛있어. 요리 잘한다,테이. " " 그래? 훗, 그래뵈도 그거 꽤 자신작이야. " 학교의 옥상. 테레이아와 가인은 따뜻한 4월의 햇살을 맞으며, 점심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옥상에는 몇몇의 학생들이 점심 식사를 할려고 올라와 있었 지만, 그들의 이목은 모두 가인들에게 주시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테 레이아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 역시 눈에 띈다. 테레이아는…. ' 가인은 힐끗 테레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에메랄드 빛 머리가 봄 햇살을 맞아 그 광채를 더더욱 신비스럽게 뿌리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가인 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면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테레이아 가 가인을 돌아보며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테레이아는 살풋이 웃으며 가인 에게 말했다. "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 " 아,그… 저,그러니까 괘,괜찮은가 싶어서‥. ' " 뭐가? " " 그때, 그 일‥ 말이야. 어디 다친데는 없나 싶어서. " 가인은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하다가, 그때 도플갱어에게 그녀가 사로잡혔 었던 얘기를 꺼내버렸다. 아차, 이거… 잘못 얘기한 건가? 가인은 걱정스런 눈초리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테레이아는 그런 가인의 눈빛에 미소로 답했다. " 훗. 가인이는 자상하구나. " " 아,아니… 자,자상하다니…. " 또 저런 대담스러운 말을…. 가인은 어설프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테레이 아는 주위의 옥상을 둘러보며 예의 소근 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그러고 보니… 여기였지. 그 일을 겪었던 곳…. " " 아,그래. " 가인은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인질로 잡힌 그녀를 두고 괴물들과 싸웠었지. 가인은 그때의 그 핏줄로 온 몸이 덮힌 괴물들의 모습을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죽을 뻔 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정말. ' 잠깐. 남자인 내가 이런데… 테레이아는 더 두렵지 않을까? 여기…. " 가인은 조심스럽게 테레이아에게 말을 건냈다. " 저, 여기… 기분 나쁘지? 그런 일을 겪었으니 무리도 아니지. 자,나 도시 락 다 먹었으니까 얼른 내려가자. " " …아니.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가자. 봄 햇살이 너무 따뜻해. " 가인의 말에 테레이아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가인을 주시했다. 푸른빛의 눈 동자가 가인의 모습을 그 안에 새길려는듯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너하고 함께 있으니까 별로 무섭지 않은 걸. " " ......... " 가인은 그런 그녀의 미소에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킬려고 노력했다. 봄 이라서 그런가? 하하…. 어쨋든, 미인한테서 좋은 소리를 들으니 싫은 기분 은 아니네. 가인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옥상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때, 옥상의 입구로 상당히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인,자신만 큼 큰 키의 포니테일 여성. 그리고 저 날카로운 눈빛. 가인은 금새 그녀를 알아보고선 소리쳤다. " 마리 선배?! " " 응…. " 그녀는 가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곧 성큼성큼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한성 고등학교 2학년 1반 성마리.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정체는 피스 메이커의 오 라 능력자,레드(Red). 가인은 그 날 밤, 그녀의 뛰어난 검술 실력을 떠올리 며 새삼 그녀를 우러러 보았다. 정말 대단했었지,마리 선배…. 어쨋든, 마리 는 가인들의 앞에 서서 약간 어색해 하는 태도로 가인과 테레이아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 아,저기… " " 예? " " ......지금 데이트 중? " 엑?! 데,데이트라니! 그 무슨! 마리의 갑작스러운 말에 가인은 허겁지겁 고 개를 흔들며 손을 내저었다. 테레이아가 들어서 기분이라도 나쁘면 어쩔려구!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 아,아니에요! 절대! 제가 무슨 재주로 데이트를! 그,그렇지,테레이아? " " ......... " 아무 대답 없이 그런 가인을 멀뚱히 쳐다보는 테레이아. 뭐,뭐지 저 시선은? 무슨 의미야,테레이아?!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지? 오해 받아도 좋아?! 그 런 가인을 바라보던 마리는 잠시 옅게 미소짓다가, 곧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입을 열었다. " 그럼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 " 예? 무슨…. " " 아,그게 여기서 얘기하긴 그렇고…. " 마리는 어색하게 테레이아를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렸고,가인은 고개를 끄덕 였다. 뭔가, 중대한 얘기인가 보구나. 몬스터에 대한 얘기? 아니면 그‥오라 에 대한 얘기일까. 가인은 웃으며 테레이아에게 말했다. " 테이야. 나 그럼 마리 선배하고 얘기하고 갈테니까 먼저 교실로 가.아,그 리고 도시락 정말 맛있었어. " " 응…. 그래. " 테레이아는 살풋이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고,가인도 그런 테레이아에게 손 을 흔들며 마리와 옥상에서 내려갔다. 그 둘이 옥상에서 완전히 내려가 모습 이 보이지 않게 되자, 테레이아는 흔들던 손을 살며시 내리며 조용히 중얼거 렸다. " ......바보. " " 에엣----?!! " 여기는 한성 고등학교의 한적한 뒷뜰 정원. 그곳에서 마리와 얘기를 나누던 가인은 갑작스레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잘못 들은 것은 아닐테지? " 그, 그 피스 메이커에 가입하라구요?! " " 응. 그 말 그대로다. " 마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니…그렇게 쉽게 말할 얘기 가 아니잖아요, 그거?! 피스메이커라고 하면… " 그러니까 저 보고 그,그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기관으로 들어 가란 말?! " " 그렇지. " " 말도 안돼요! 그 괴물들과 싸우는 일이라니!! 제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 아요! " " 훈련을 받으면 돼. " " 하,하지만…!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 겪었던 몬스터들과의 전투. 그런 건 한번으로 족했다. 두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마리는 그런 가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다는듯 차분한 안색으로 일관했다. " 우리가 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 " 그,그래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에요! 그런 일을 어떻게 저 같은 민 간인한테… " " 보통 민간인은 아니지. " 마리는 가인의 말을 자르며 단호히 말했다. 보통 민간인이 아니라고. 왠지 그 말에 가인은 숨이 턱 막혔다. 그,그래. 그런 건가. " …제가 오라 능력자…라는 것이기 때문‥인가요? " " 응. 오라 능력자.그건… 하늘이 내려준 인류의 마지막 보루 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닌 존재다. 사람들이 그 마음 속에 저 마다 간직하고 있는 오라를 증폭해서 구현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서도 채 몇이 안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 " …그 오라 능력자라는 건 몇이나 되는 거죠? " " 피스 메이커 한국 지부에는 현재 나까지 포함해 넷. 그리고 미국 지부에 둘. 중국 지부에 셋. 일본 지부에 하나. 이상이 현재 발견된 오라 능력자 의 전부다. 한국은 유일하게 오라 능력자들이 많이 발견된 지역이지. " " 그,그런…. " 그런 말도 안되는 능력이 나한테. 왜 하필…. 마리는 고민에 빠진 가인에게 재차 말하기 시작했다. " 너의 그 오라 능력은 우리 인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피스 메이커의 대원이 되기에는 훈련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오라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우리는 한 명의 오라 능력자라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 " 하,하지만! 지금까지 저 같은 것 없이도 잘 해왔잖아요! 이제와서 절 받 아봤자….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렸다. 예전,아버지 한테 들었던 '군 입대'라고 하는 것 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한국은 현재 통일 국가지만,2009년 까지만 해도 남 북으로 갈라진 분단 국가였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한국에서는 강제로 자국의 청소년들을 2년 몇 개월간 군에 강제 복무시키는 국방의 의무를 지게 했는데, 군대에 입대하게 되면 사회와 격리된 채 부대 안에서 장장 26개월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으며, 하고 있던 일들을 모조리 그만 둔채 집을 떠나야만 하는 그 기분. 물론,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은 가인이 그 군입 대의 심정을 어떻게 알겠냐 만은, 만약 군입대를 통보 받는다면 지금의 심정 과 비슷하리라. 더군다나 그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일이라고! " 피스 메이커를 한다고 해서 특별히 지금까지의 생활이 달라지는 것은 아 니야. " 마리는 담담히 말을 꺼냈다. 그런 가인의 걱정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것이 었다. 그녀 역시 처음 피스 메이커에 들어올 때는 그랬으니까. " 학교도 다닐 수 있고, 자신의 생활도 가질 수 있어. 단지, 게이트가 열릴 시점에 맞춰 출격해, 몬스터를 격파만 하면 되는 거다.그 뿐인 일인 거야. " " 그,그런…. "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때 그런 가인의 귀에 마리의 날카로운 말이 들 려왔다. " 그럼,며칠 전과 같이 너의 주변 사람들이 위험을 겪는 것 같은 일들이 벌 어져도 좋은 거냐? " " .........!! " " 아니. 만약,몬스터들을 막지 못하게 되면 우리 인류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너의 친구는 물론이고, 너 자신도. 그리고 너의 앞에 있는 나 조차도 다 죽게 되는 거야. 그런 걸 원하는 거냐,너는? " " 나,나는…. " 가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거…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그런 걸 나 에게 얘기해봤자… 그런 뜬 구름 잡는 얘길 해봤자… " ......... " 그런 가인의 침묵하는 모습에 마리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갑자기 이렇게 얘기하기에는 너무 당황스러운 얘기였나? 하지만, 그녀가 속한 피스 메이커는 유가인 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했다. 아니. 그는 꼭 피스 메이커에 들어와야만 한다. 마리는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 매달 국가에서 지원하는 250만원의 연금…. " " ......? " " 피스 대원에게 무료로 지급되는 24평의 전용 빌라. 만약, 학생이라면 전 교육 과정은 무료. " " ......그,그게 무슨…. " " 피스 메이커의 피스 대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다. 그리고 언제든 공권력 을 행사할 수 있는 피스 카드까지 주어지지. " " 그런?! " 가인은 이 엄청난 얘기들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귀가 솔깃하지 않다 면 거짓말이다! 매달 250만원이라고? 그리고 24평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크기라는 말이야? 그리고 교육비를 내지 않고도 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가 인은 지금껏 가족들 없이 혼자서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내야만 했던 교육비를 생각해 보았다. 집세야,가족들의 보험과 부모님의 통장에 있 던 돈을 상속받아 내는 거였으니 별 문제는 없었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파격적인 혜택이라니. 성마리는 가인의 표정 이 바뀐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냥, 단지 대우가 좋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 " .........그,그렇내요. " 가인은 뭔가 허탈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크, 어쩔 수 있 냐.난 돈이 필요한 걸.젠장…. 나란 녀석, 이렇게 돈에 약해지다니. 그런 가 인의 모습에 마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럼 승락한 것으로 알겠다. " …돈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웅성웅성… 방과 후의 지하철 역은 역시 사람들로 붐빈다.가인은 마리의 뒤를 따라가며 이 복잡한 사람들을 헤쳐나갔다. 아,진짜 인간들 많네. 가인은 학교 근처에 서 자치하기 때문에 최근 1 년 간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아선지, 지하철의 이 런 분위기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 지,지하철로 가야되나 보죠? " 가인은 마리의 옆으로 서며 그녀에게 물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 철의 플랫폼에 섰다. " 지하로 밖에 갈 수 없지. " " 예? 그게 무슨…. " 뜻 모를 그녀의 말에 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리는 자신의 왼손에 달 린 시계 모양의 물건을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아, 저거. 저 번의 그 지원 요 청을 할 때도 썼던…. 무전기 같은 건가? 근데 저걸 왜 여기서…. " 자, 이제 기다리면 돼. " " 예? " 마리는 손을 내리며 가인에게 말했고, 여전히 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기 다려? 뭘? 혹시, 피스 메이커 전용 지하철이라도 있는 건가? ' 하하… 그런 말도 안되는…. ' 하지만 가인의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 일이 다음에 벌어졌다. -빠아아아앙… 지하철의 소리가 저 터널 사이로 들리기 시작했다. 엇,벌써 오네. 다음 지 하철이 오려면 5분은 더 남았을 텐데…. 가인은 형광판에 떠오르는 자막들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했다.그리고 다음에 모습을 드러내는 지하철의 모습을 보 며 더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끼이이이익… 지하철은 분명 지하철인데….가인은 자신과 마리의 앞으로 멈춰서는 지하철 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뭐,뭐야. 이건? 이런 지하철이 있을 수 있는 건가? ' 한 칸 밖에 없잖아?! ' 도착한 지하철은 단지 한 칸 밖에 없는 짧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증기 기관 열차 같은 모양새는 또 뭐야?! 요즘 시대에는 전혀 볼 수 없는,예 전 책에서 밖에 보아오지 못했던 먼 옛날의 구 시대 유물?! 그런 전차의 모 습에 플랫폼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것을 주시하기 시작했다.어 쨋든, 그런 당황한 가인을 이끌며 기차에 오르는 마리였다. " 자, 어서 타. " " 아,예에. " 이런 만화같은 일이…. 가인은 당황하며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의외로 꽤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저 푹신할 것 같은 쇼파와, 창가에 묶 여있는 커텐이라던지, 바닥의 카페트 같은 것은…. " 앉아. 안전 벨트를 메는 게 좋을 거야. " " 아,예.옛. " 가인은 서둘러 쇼파 같은 좌석에 앉아,안전 벨트로 보이는 것을 자신의 몸 에 둘렀다. 뭐,뭐냐.이건. 무슨 놀이 공원의 제트 코스터냐. 어쨋든,가인이 안전 벨트를 메자, 곧 여성의 목소리 같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 그럼, 발진합니다. >> 출발도 아니고 왠 발진…? 그러나 가인은 그 다음부터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를 잃었다. 순간, 온 몸에서 느껴지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으그그그극.뭐,뭐 냐 이건!? 이 엄청난 속도감이란!! 말 소리도 입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다. -큐우우우우웅… 얼핏 보이는 창가에는 알 수 없는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선,이 기차 가 달리는 곳은 전규 노선이 아닌 것 만은 분명했다.일반적인 지하철들이 다 니는 노선을 벗어나면서 부터 내기 시작하는 이 속도. 분명,평범한 가드레일 위에서 달렸다간 튕겨나가기 쉽상일 터였다. 더군다나… ' 여,여기가 어디야? " 어느새 기차는 반투명의 막 안을 달리고 있었다. 그 반투명의 막 사이로 보 이는 밖의 세계는 가인을 더더욱 납득시키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 바다? 산에다가 들판까지 있어? 그리고 빛까지… 분명… ' 분명 여기는 지하 5층은 더 되는 깊이 일텐데?! 올라가는 느낌도 나지 않았 다. 분명 여기는 지하인 것이다.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을 수가…! 그때,그 런 기차의 옆으로 한 갈매기가 날다가 '끼룩'하면서 한 번 울부 짖었다. ' 이,이런 만화같은-------?!! ' 기차는 본 궤도에 들어선듯, 앞전 보다 안정된 속도로 가기 시작했다. 으아, 이제야 숨이 트이네. 가인은 숨을 몰아쉬며 창 밖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그런 가인의 모습에 마리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놀랍지? 언더 그라운드(Under Ground)라고 불리우는 곳이야. 지상에서 출 몰하는 게이트에 대비하여 안전한 지하의 요새를 만들자는 취지 하에 설 계되었는데… 그 규모가 생각보다 꽤 커져버렸지. 지금 지나가는 곳은 그 린 벨트 지역이야. " " .........그런. " 가인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밖을 구경하는데 정신 없었다. 도대 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은 얼마나 더 있을까? 살다보니 이런 놀라운 경 험도 하게 되는 구나. 땅 밑의 세계라니…. 놀랍다,정말. " 아,저길 봐. " 마리는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앞 쪽을 가리켰다. 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 가 휘날렸다. 가인은 바람에 눈을 찡그리면서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 우와. " 저편의 바다에 위치한 한 도시가 보여왔다.지상의 건물들과는 그 느낌 조차 틀린 형태의 폐곡선 건물들이 모여있는 도시의 풍경. 그 진귀하고도 신비한 모습에 가인은 압도되었다. 그런 가인과 함께 도시를 바라보던 마리는 조용 히 중얼거렸다. " 언더 시티 유레카(Yureka)에 온 것을 환영해. " 언더 시티 '유레카'의 안은 상당한 미로였다.더군다나 넓기는 또 얼마나 넓 은지 도보로는 하루 왠 종일 돌아다녀도 반의 반도 다 못 돌아 볼 규모였다. 그렇기에, 유레카의 입구 쪽에 대기하고 있던 무인 렌트카를 타게 된 마리와 가인. 렌트카가 알아서 피스 메이커의 사령부로 이동하기 때문에,가인은 맘 놓고 마리의 설명을 들으며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 여기에도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이 있나요? " " 응. 피스 관계자들은 대부분 여기서 살지. 하지만 그래도 얼마 되지 않아. 한 50여 명 정도 될까. " " …그럼 마리 선배도? " " 아니. 우리 집은 지상에 있어.아버님이 도장을 운영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 " 도장요? " 아, 하긴. 그러니 그런 검술로 몬스터를 격퇴할 수 있었던 거겠지. 가인은 그 당시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도플갱어를 베던 그녀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그때, 가인은 뭔가 궁금증이 생긴듯 마리에게 물었다. " 그럼, 지상으로 올라갈 때는 어떤 방법으로 올라가죠? 앞전과 같이 그 취 미 고약한 기차로 가는 건가요? " " …훗.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그 기차…. " 마리는 그녀 답지 않게 살짝 웃음을 터뜨렸고,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웃었다. 마리 선배는 저렇게 웃는 구나…. 마리는 가인의 질문을 뒤 늦게 설 명해주었다. " 피스 대원들이나 고위 관직 분들이 이용하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위치가 한정되어 있어서 그리 많이 쓰이진 않아. 그리고 그것도 나갈 때 밖에 이용 안 하지. " " 예? 왜요? " " 로켓이 발사되서 대기권을 뚫고 나가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것도 올라갈 때가 그런 기분이지… 내려올 때는…. " 그녀는 직접 타본 적이 있었던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가인은 쓴 웃음을 머 금으며 중얼거렸다. " …그냥 기차가 낫겠내요. 풍취도 있고…. " 풍취는 개뿔이…. 어쨋든,그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그들은 곧 한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빌딩이었다. 우와, 저거 몇 층이야. 도대체…. 하나 둘 셋 넷…, 가인은 세는 것을 포기했다.올 려다 보기도 힘든 것이다. 빌딩의 중간에는 여러 관들이 다른 건물들과 붙어 있었다. 아마도, 저 관이 다른 건물들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인 것 같았다. " 괴,굉장하군요. 무지 높다…. " " 본부실은 60층이다. 제일 상층부지. " 마리는 곧 출입 카드인 듯한 것을 꺼내 체크 인하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건물의 내부는 상당히 간략하면서도 넓었다. 깨끗하면서도 청결한 분위기.하 지만 가인은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 사람이… 없군요…. " 가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그의 말대로 건물의 1층에는 아무도 보 이질 않고 있었다. 1층이라서 그런건가?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마리는 간단 히 설명해 주었다. " 이 건물 뿐 아니라, 이 도시의 대부분은 무인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어. 하층부는 서류들과 자료 보관소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마, 30층 이상 부 터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거야. " " 예에…. " 가인은 마리의 설명이 마냥 신기한듯 고개를 끄덕였다.한 층도 무지 넓은데 이런 층이 60개나 된단 말이지. 참, 대단하다. 가인은 순수하게 건물의 넓이 에 감탄했다. 이런 거에도 이렇게 입이 안 다물어지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신기한 것들을 보게 될려나. 가인은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들었다. -위잉… 마리와 가인은 고속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 어 상당히 살 떨리는 광경들이 가인의 주위로 펼쳐지고 있었다. 우,우와…순 식간에 1층에서 30층을 넘어섰어. 이,이런 게 바로 고속 엘리베이터?! 그래. 속도가 빠른 건 좋다구. 그치만 이,이 유리창 좀 어떻게 안되나?! 아니, 이 런 고속 엘리베이터의 사방팔방을 유리창으로 도배해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것도 건물의 외곽에 엘리베이터가 붙어 있어서 아래의 배경이 다 보였다. 으아,현기증 난다! -핑… 어쨋든, 드디어 도착한 60층. 과연 아래의 1층과는 딴 판으로,이 층은 사람 들로 북적되고 있었다. 뭔가 대게 어수선한 게,이제야 사람 사는 곳에 온 느 낌이었다. 하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서류들을 들고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마리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듯, 능숙하게 사람들을 피해 곧 한산한 복도에 접어 들었다. 그녀는 차분히 걸으며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 가인을 향해 말했 다. " 잘 따라오도록. 이 층은 길이 꽤 복잡해서 잘못하다간 미아가 될 수도 있 으니…. " 마리는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생각했다. 그녀도 가이드를 놓쳐, 장 장 3시간동안 이 층을 헤맸었지. 정말,그 때 이 괴물같은 건물의 규모에 질 려버렸던 그녀였다. " .........? " 근데 왜 이렇게 대답이 없어? 마리는 뒤에서 대답이 없는 가인의 반응에 왠 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런!! " …유가인?! " 없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어야 할 소년이 없었다. 서,설마…. 길… 잃 어버린 건가? 말하기도 전에?! 마리의 머리 속으로 예전의 악몽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안돼…. 이 층의 지도가 있다고 한들 반나절 내에 그를 찾아내는 건 무리야. 이 건물은 그런 곳이라고.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 ......미아 방송이라도 해야하는 건가. " 진지하게 그 안건에 대해 고민해보는 그녀였다. 한편,마리를 놓친 유가인은 그녀가 있는 곳과는 정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 었다. 그 정신 없는 인파들을 벗어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건 분명히… " 길… 잃어버린 거겠지. " 가인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창피람.입대 첫날 부터 지각이 될려나. 아니, 지각해도 좋으니 길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는데…. " 어떻게 된 곳이 안내판도 하나 없는 거야? " 이런 무지막지한 크기이면서 가이드가 이렇게 허술한 게 이상했다.안내판이 나 화살표 같은 것 정도는 표시라도 해둘 것이지. …아니. 그렇게 해놓는 게 더 이상하려나. 화살표가 그려진 회사 건물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 하아… 난 몰라. " 가인은 왠지 자포자기가 된 심정으로 발길 닿는데로 거닐기 시작했다. 차라 리 그 자리에 멈춰서 있더라면 더 일찍이라도 발견될 것을. 가인은 자기 스 스로가 더 일을 크게 만든다는 것도 모른채 무작정 복도를 걸었다. " ......... " 얼마나 걸었을까나. 그때, 가인의 귀로 살며시 울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단지 건반을 두드려 서 나는 피아노 소리일테지만, 그 소리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달콤하게 가인 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음악에 문외한인 가인이었지만, 그것이 뭔가 굉장히 아름다운 소리라는 것 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저기인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 가인은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방으로 다가갔다. 살며시 열려있는 문 사이로 조용히 방 안을 살펴보는 가인. 왠지 자신이 소리를 내서, 저 피아노 소리가 멈추게 되면,굉장히 큰 잘못을 저지르는 심정이 될 것 같았다. 방 안 을 살펴보던 가인의 동공이 놀라운 것을 바라본듯 천천히 크게 확대 되었다. " 아…. " 방 안에는 단지 피아노가 한 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피아노의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는 이의 모습이 가인의 넋을 빼놓게 만들었다.어깨 까지 내려오는 금발이 창가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방 안을 눈부시게 만들고 있 었다. 그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와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가늘지 만 아름다운 손가락. 그리고 살짝 감긴듯한 눈꺼풀과 조용히 뭔가를 흥얼거 리는 작은 분홍빛 입술. 그리고 단정한 스웨터와 스커트의 여인. 가인은 가 슴이 두근 거리는 것을 느꼈다. 뭔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 소리가 귓 가에 울려퍼졌다. ' 아름답다…. ' 가인은 처음 본 그녀의 모습에 한순간 푹 빠져버렸다.테레이아와 마리 선배 를 만났을 때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가인은 저 금발의 여인에게 한 눈에 반 해버린 것이다. 그때, 가인의 귓가에 들리던 피아노의 소리가 멈췄다.그리고 피아노의 그녀가 천천히 가인을 돌아보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누구…? " " ......... " 가인은 그녀의 질문에 아무 말도 못했다. 그녀의 음성을 듣자마자, 입이 꼼 짝달싹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왜,왜 이러는 거야,유가인? 침착해라.응?! 그 때, 그런 그녀가 '아'하는 탄성을 터뜨리며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 아, 혹시 오늘 부로 피스 대원이 되시는 유가인 씨? " " 예, 그,그렇습니다! " 가인은 그제서야 떨어지는 입으로 어색하게 소리쳤다. 날 알고 있다? 어떻 게? 그런 가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방긋 웃으면서 피아노에서 몸을 일 으켰다. " 맞군요. 사진으로 봤을 뿐이라 자신은 없었는데. " " 아,그,그러시군요. " 그렇구나. 사진으로 날 본 거였나? 가인은 뭔가 당황스러운 기분이 되어 얼 굴이 붉어졌다.그녀가 자신을 알고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가슴이 두근 거 린다니! 야,유가인! 정신차려! 평상시 너 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거야! 가인은 애써 여러 잡생각들을 떨치며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다른 생각을 하자! " 아,저기… 근데 어떻게 저에 대해서…? " 소년의 질문에 그녀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저 웃는 모습만 봐도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거야?! " 오늘부로 동료가 되는 분에 대해서 알아 놓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 " 아,예에.........엣? " 가인은 그녀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고개를 번쩍 들 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료? 지금 동료라고 했지? 그,그렇다면 그녀는…! " 피스 옐로우(Piece Yellow), 한시민 이라고 해요. 오늘부터 우리, 동료가 되는 거네요. 잘 부탁해요. " 그렇게 말하며 가인에게로 손을 뻗는 그녀. 이,이건 악수하자는 표시? 가인 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뭐,뭐야. 겨우 악수일 뿐인 거잖아. 그래. 겨우 악수일 뿐이야. 진정해라,유가인! " ......... " 하지만 그녀와 악수하는 순간, 다리가 풀리며 몸이 붕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가인. 이,이런게 하늘을 나는 기분?! 소년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피스 메이커에 들어가기로 한 거… 정말 잘한 일인거 같아…. ' 그래,정말…. ' 여기는 피스 메이커의 본부실. 마리는 왠지 다급한 기색으로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서는, 진 사령관을 바라보고 경례를 붙였다. " 피스-! " " 음. " 진 사령관은 예의 과묵한 얼굴로 간단히 그녀의 경례를 받아들였고,그의 옆 에 있던 비서, 민수정이 그런 마리에게 물었다. " 마리 양, 어째서 혼자서…? 그 같이 오기로 한 유가인 군은? " " 아,예. 그게… " 마리는 순간, 당황하며 말꼬리를 흐렸다.유가인 군은 미아가 되었으니 방송 을 해서 찾아야합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왠지 모르게 한심 해졌다. 그래도 어떡하랴. 다 자신의 실수인 것을. 그래.빨리 그를 찾아 낼 려면 이 수 밖에 없어. 마리는 마음을 다시 잡으며 현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때, 출입구로 부터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 마리 선배! " " ......유가인? " 마리는 화들작 놀라며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유가인과 금 발의 여인, 피스 옐로우 한시민이 본부실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모 습에 마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절묘했어. " " 예? " " …아니.그보다 어떻게 찾아 온 거야? " " 아,예에. 여기 한시민 씨가 안내해 줬어요. " 가인은 자신의 옆에 있는 한시민을 가리키며 쑥스럽게 얘기했고, 마리는 진 정으로 마음 깊이 감사의 눈빛을 시민에게 보냈다. 어쨋든, 마리의 걱정이 막 해결될 무렵.본부실의 모든 직원 들의 시선이 가인에게로 쏠렸다.진 사령 관과 비서 민수정. 그리고 피스 대원들과 10여명의 오퍼레이터들. 그들의 시 선을 한 몸에 받은 가인은 왠지 모를 부담감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구리빛 피부의 덩치 큰 남자, 피스 그린(Piece Green) 정진우는 자 신의 옆에 앉아 있던 어린 소녀에게 말을 건냈다. " 어때요,이유리 양? 저 소년, 꽤 긴장한 거 같은데…. " " ......... " 이제 막 초등학교 6학년 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 이유리는 살며시 가인을 바라만 볼 뿐,진우의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이 작은 소녀가 바로 피스 메 이커의 4번째 대원,피스 핑크(Piece Pink) 였던 것이다. 한참동안 소녀에게 서 반응이 없자, 이유리에게서 대답 듣기를 포기한 정진우는 다시 가인에게 로 고개를 돌렸다. 어쨋든,이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민수정이 가인에게 말 을 건냈다. " 유가인 군 되시죠? 어때요? 결정은 내렸어요? " 그녀의 말에 가인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소년의 눈에서는 이 곳 에 오기 전에 그가 보였던 어떠한 망설임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다. 소 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예. 전… " 가인은 살짝 시선을 시민에게 돌렸다가, 다시 수정에게로 고정시키며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피스 메이커가 되겠어요. " ......사랑의 힘일려나,이건. " 아하하하핫∼ 피스메이커에 들어온 걸 축하해,소년. " 가인의 승락이 떨어지자, 정진우는 웃음을 터뜨리며 가인의 어깨에 팔을 둘 렀다. 가인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이 사람은 그때, 그 녹색 타이즈의 남자? " 자자∼ 우선, 자기 소개부터 먼저 해야겠지? " 진우는 가인을 이끌고, 모두의 앞에 그를 세웠다. 단번에 가인을 향해 집중 되는 수 많은 시선들. 아, 뭐냐. 이 분위기는…. 가인은 왠지 모르게 긴장된 안색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런 딱딱해진 가인의 옆구리를 진우가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아,그렇지. 자기 소개를 하랬지.자 기 소개. " 아,예. 안녕하세요. 저‥ 한성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유가인'이라 고 합니다. 나이는 열 일곱이고‥ 아‥ 예, 어쨋든, 앞으로 잘 부탁드립 니다. " " 오오. " 가인의 어설픈 소개에 본부실 안의 모든 이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특히, 여자 오퍼레이터들 쪽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 꺄아∼ 고교생이야. " " 드디어 피스 메이커에도 영계가 들어오는 구나∼ " " 사진 보다 더 귀여워 보인다. 그지? " " 훗. 언니가 귀여워 해줄게∼ " 피스 메이커의 여자 오퍼레이터들.언제나 게이트의 위치 파악과 몬스터의 등 장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그녀들로서는,언더 시티 유레카의 밖으로 나가기란 힘 든 일이었다. 당연히 스물 중반이 다 되어가도록 연애는 고사하고 남자들을 한 번 보는 것 조차 힘든 그녀들. 그렇기에, 그녀들은 오랫만에 보는 어린 고 교생 소년의 등장에 더더욱 열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굶주려 있었다. " 좋아.좋아∼ 그럼 우리 식구들 소개를 해야겠지. " 진우는 본부실 안의 모두를 돌아가며 소개하기 시작했다. " 여기 이렇게 과묵하신 분은 우리의 사령관 님. 그냥 진 사령관 님∼ 하고 부르면 돼. " " 음. " 진 사령관은 여전히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그러 나 진 사령관의 미세한 심경의 변화를 알아챈 민수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 얼거렸다. ' 토라지셨구나…. 진우 씨도 참, 조금만 더 성의있게 소개시켜주시지. ' 어쨋든, 진우는 다음 소개로 넘어갔다. " 여기 이 예쁘신 누님이 진 사령관을 옆에서 보좌해주시는 '민수정'누님이 야. 말이 보좌지 사실 하시는 일은 부사령관 급이라고 생각하면 돼. 우리 피스 대원들의 일상 생활도 꼼꼼히 챙겨주시는 고마우신 분이지. " " 어머,참. 진우 씨도… 너무 거창하게 소개하네요. " 수정은 방긋 웃으며 기쁜듯이 중얼거렸지만, 그녀의 신경은 모두 진 사령관 에게로 곤두세워져 있었다. 진 사령관의 낮은 한숨 소리를 그녀 만은 알아들 었던 것이다. 진 사령관 님, 서운해 하시는 거야. 분명…. " 자, 그리고 여기는 오퍼레이터 아가씨들.우리의 뒤를 서포트 해주시는 믿 음직한 분들이지. 하지만 조심하라구,소년. 저 아줌마들 굶주려 있으니까∼ " " 꺄아! 진우 씨, 누가 아줌마들이에욧! " " 스물 여덟 살 주제에! " " 소개가 너무 성의 없어! " 진우의 소개에 오퍼레이터들에게서 단번에 항의가 터져 나왔다. 오퍼레이터 들 중, 갈색의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오퍼레이터가 나와 가인의 앞에 섰다.그 녀는 가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제가 피스 오퍼레이터들의 치프, '윤채영'이라고 해요.앞으로 서로 잘 해 보자구요. " " 아,예…. " 가인은 쑥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손에 악수했다.그러자, 그들의 뒤에서 오퍼 레이터들의 항의가 다시 터져나왔다. " 아아∼ 치프,비겁해! 자기 혼자 어필하고 있어! " " 저 은근슬쩍 손까지 잡은 것 좀 봐! " " 저희도 소개시켜 달라구요! " 치프 윤채영은 그녀들의 말에 얼굴이 시뻘개져 벼락같이 소리쳤다. " 시,시끄러워! 이 바보들!! " 어쨋든, 꺅꺅 거리는 그녀들을 무시하고 진우는 다음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 작했다. " 자자, 그리고 여기 이쪽 부터가 중요한 사람들이야. 앞으로 너와 같이 몬 스터들과 싸워나갈 피스 대원들이지. 아, 그럼 나부터 소개해야 하나? 저 번에 나 만났던 거 기억하지? 피스 메이커의 리더, 피스 그린 '정진우'다. 잘 부탁한다∼ " " 아,예…. 저도 잘 부탁드려요…. " 진우는 가인과 악수를 나눈 후, 그의 옆에 서있던 성마리를 가리켰다. " 이쪽은 너도 잘 알고 있지? 피스 레드, '성마리'양. " " 잘 부탁해,가인. " 성마리는 그녀 답게 짧게 답하며 가인에게 가볍게 목례했다.그런 그녀의 모 습에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는 것 없는 사람 이라니까,마리 선배는…. 그런 가인의 눈에 곧 다음에 소개될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소년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긴 금발 머리의 그녀가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자, 여기 이 사람은 피스 옐로우, '한시민' 씨. " " 훗. 가인 씨, 인사는 아까 했었죠? " " 예,옛…. " 시민은 진우의 소개에 가볍게 웃으며 가인에게 말했고, 가인은 다시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목소리만 들어도 왜 이러는 거야? 정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우는 자신의 옆에 있던 작은 초등 학생 정도로 보이는 한 소녀를 소개했다. " 자, 이쪽은 우리 피스 대원의 막내둥이, 피스 핑크 '이유리'양. " " ......... " 이유리는 아무 말 없이 멀뚱히 가인을 올려다 보고만 있었고, 그런 소녀의 모습에 가인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냈다. " 아,저기… 안녕? " " ......... " 여전히 아무 말이 없는 소녀. 가인은 식은 땀을 흘렸다. 이,이거… 지금 무 시당한 건가? 어쨋든, 모든 이들의 소개가 끝나자 진우는 가인을 진 사령 관에게로 데리고 갔다. 진 사령관은 여전히 앞전의 자세를 고수하며 진우에 게 말을 건냈다. " …인사는 다 나눈건가. " " 옛∼ 뭐‥ 지금 당장 모두를 기억하는 건 무리겠지만, 앞으로 계속 보고 지낼 사이니까. " 진우는 가인의 등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고, 가인은 그런 그를 따라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그때, 그런 가인에게 진 사령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럼, 이제부터 유가인, 자네의 주거지를 정해주겠다. 마침, 자네의 학교 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지. " " 아,예‥. " 가인은 뭔가 강압적인 진 사령관의 목소리에 위축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진 사령관은 말을 덧붙였다. " 그리고 너의 짐은 이미 옮겨놓았다. 몸만 가면 되니 편하겠군. " " .........! " 가인은 그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짐 을 옮겼다니. 내 짐을 말하는 건가? " 저, 그게 무슨‥. 제 짐을 옮겨 놓았다구요? 제 자치 방에 있던 짐‥ 말 인가요? " " 그렇다. " 진 사령관은 무표정히 답했고, 왠지 그런 그의 태도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 하는 가인이었다. 뭐,뭐야. 이건? 분명 신속한 것 같기는 하지만, 주인한테 묻지도 않고 멋대로 남의 방에 들어가 물건들을 빼내다니…. 뭔가 상당히 제 멋대로인 것 같은 이 방식들에 가인은 불쾌함을 느꼈다. 가인은 진 사령관을 살며시 노려보며 말했다. " 저기… 적어도 남의 집 물건을 옮길 때는,최소한 그 주인에게 허락이라도 받아야 되는 것…아닌가요? " " ......... " 순간, 가인의 그 한마디에 본부실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정진우와 성마리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선 가인을 바라보았다.어라,열 받았네…. 가인과 진 사령관은 서로를 뚫어지게 응시 하다가, 곧 그 침묵을 깨뜨리며 진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 자네는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군. " " .........! " " 여기는 학교나 회사가 아니다. 더군다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은 더더욱 아니지. 여기는 엄연히 군대이며, 계급 제도가 확립되어 있다. 자네가 아 무리 철이 없다지만 상관에게 그런 버르장 머리 없는 말을 쓰는 것은 그 교양이 의심되는군. " " .........! " 진 사령관의 말에, 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저런 말투는?! 기분 나쁘 게! 내가 들어온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말단 부하 취급이야?! 가인과 진 사령관의 사이에서 마치 방전이라도 되는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느껴지자, 민수정은 긴장된 웃음을 지으며 진우에게 말했다. " 아,저기. 진우 씨. 유가인 군을 새로운 숙소로 안내 좀 해주세요.전 조금 있다가 따라갈테니…. " " 아,옛∼! 그,그러도록 하죠,뭐∼ 자자. 소년, 어서 가자구! " 진우는 민수정의 의도를 눈치 채고 가인을 문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어 쨋든, 이런 무서운 분위기는 피하고 보자고,정말∼ 가인은 그런 진우에게 이 끌려 진 사령관을 몇 번 노려보다가 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그런 가 인을 진 사령관이 불러세웠다. " 아,잠깐. " " ......... " 다시 긴장되기 시작하는 본부실의 공기. 가인은 진 사령관을 노려보았고,그 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에게 말했다. " 혹시라도 여기를 돈 많이 버는 아르바이트 자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면 그 생각은 버리는게 좋을 거다. 그리고 혹시라도 가입한 다른 의도가 있더라도 잊어버려라. 단지, 몬스터 격퇴만이 우리의 최우선 목표라는 것 을 명심하도록. 자네가 '고아'라서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지 만 말이지. " " .........!!!! " 순간, 가인에게서 푸른 기운의 오라가 폭사되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고 아? 고아라고! 가인은 소리쳤다. " 다시 한번 말해봐-----!!! " 가인의 오라가 그 푸른 기류를 머금고 진 사령관에게 날아들었다.그 굉장한 기세에 놀라 민수정이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라면 진 사령관에게 직격한다! " 진 사령관 님?! " -파싯. 그때, 그런 진 사령관의 앞으로 어느새 나타난 성마리가 수중의 오라 소드 를 번개 같이 휘둘러 가인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마리는 그 충격에 인상을 찌푸렸다. 단지, 감정의 변화로 나타낸 오라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오라 소 드를 잡은 그녀의 두 손이 충격으로 희미하게 떨렸다. 마리는 애써 충격을 이겨내며 고개를 들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가인이 그녀를 노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앞 전까지 그녀를 대하던 그의 표정이 아니었다. 가인의 눈 길에는 그녀에 대한 배신과 원망의 빛이 비춰지고 있었다. " ........쳇! "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본부실의 입구로 발걸음을 돌려 걸어나가기 시작했 다. 마리는 당황하며 그런 가인을 쫓아가 그의 손을 잡으며 소리쳤다. " 유가인, 잠깐만! " -팟. 그때, 그런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는 가인. 가인은 잠시 걸음을 멈춘채,뒤돌 아 보지도 않고 마리에게 낮게 말했다. " ......그때, 저에게 피스 메이커의 혜택을 얘기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 였 어요? 내가 고아‥라서 돈으로 꼬셔 볼려고 했던 거였어요? " " …아니,난! " 아니, 난 그런게! 마리는 반박할려고 했지만 목으로 그 이상의 말이 넘어오 지 않았다. 아니야,가인아! 난 네가 고아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 나,그럴 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어! 하지만 마리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질 못하고 안 타까운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마리를 바라 보았다. " ......그런 거였어요…? " " ........! " 그때, 마리는 볼 수 있었다. 가인의 한쪽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천천히 그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가인은 고개를 돌려 곧 서둘러 복도로 나가버렸 고, 마리는 멍하니 그가 사라진 출입구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지…? " …왜 그러셨죠? " 민수정은 약간 꾸짖는듯한 어조로, 진 사령관에게 물었다. 본부실에서 뛰쳐 나간 가인을 피스 대원들이 쫓아나갔고,남겨진 사람들은 잠자코 진 사령관과 민수정의 눈치를 살펴볼 뿐이었다. 진 사령관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낮게 말하기 시작했다. " 말했던 그대로다. 그런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앞으로의 싸움에서 위험할 뿐이다. " "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 민수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 사령관은 잠자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 용히 중얼거렸다. " 분명 후회할테지, 그 소년은. " " .........? " " 자신이 오라 능력자 임을 후회하게 될테고,그 때문에 피스 메이커로 들어 오게 된 자신을 후회하게 될 거다. 몬스터들과의 싸움은 그의 마음을 피 폐하게 만들 뿐이겠지. 그만큼 이곳의 일들은 평범하게 살아온 그가 이겨 내기에는 가혹할 정도로 힘들 거다. " " …그렇…겠죠. " " 어차피 우린 원망받게 되어있는 거야.그에게서. 몬스터와의 힘든 전투를 겪게될 수록 그는 자신을 이런 평범하지 못한 세계로 끌어들인 오라 능력 도 탓하게 될거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오라 능력을 가지게 된 자신 까지 탓하게 되겠지. " 진 사령관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굳은 얼굴이었지만, 그 눈은 왠지 슬퍼보였다. " 이왕 원망 받을 거…오라 능력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원망하게 하는 것 보 다는, 총 책임자인 나 하나를 원망하게 하는 것이 낳지 않을까. " " .........아. " 그제서야 진 사령관의 의도를 눈치 챈 민수정은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그는 가인이 진 사령관,자신을 미워하게 만듦으로서,오라 능력자로서의 자신을 미 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대부분, 피스 대원들은 자신의 오라 능력으로 괴로워 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케이스가 많이 있다. 왜냐하면, 오라 능력을 가지게 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이차원의 생물, '몬스터'들에게 노려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몬스터들을 피해 피스 메이커에 가입하게 되고, 마치 의무인 것 처럼 몬스터와의 전장에 내보내지는 그들. 그런 오라 능력자들 중에서는 자신의 오라 능력을 탓하며 원망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 나게 되어, 심할 경우 자폐증으로 까지 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진 사령관은 이를 염려하여, 가인을 심하게 대했던 것이다. " 결국, 그를 걱정하신 거군요. " 수정은 살풋 웃으며 진 사령관에게 말했고, 그는 조용히 등을 돌리며 낮게 답했다. " …아니. 버르장 머리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 " 민수정은 그런 진 사령관을 보며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조금만 더 솔직해지 시면 좋을 것을…. 한편, 유가인은 본부실에서 한참 떨어진 복도에 서서, 창 밖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60층의 높이라서 그런지 현기증이 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가 인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 …또. ' 또 생각나버렸다. 그때의 기억들. 한 동안,여러 일들이 있어서 이젠 잊어버 린 줄로만 알았던 그때의 기억. 고속 도로에 몸을 눕히고 있던 가인,그 자신.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몸으로, 간신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볼려고 애썼다. 메마른 눈동자로, 흐릿해져가는 눈동자로 가인은 필사적으로 그들을 찾았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신이. 내 동생. 신이에게 선물로 사줬던 머리핀이 까맣게 그을려 가인,자신의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으로 손을 뻗을려고 했지만, 손은 움직이질 않았다. 메마른 눈 동자에서 눈물이 한방울 두방울 떨어졌었다. 왜 이런 일이… 어째서 이런 일이…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 ......다시는… 못 보는 거야? ' 그 날 아침에 식사를 하던 가족들의 대화가 떠올랐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여 덟 시간 전의 그 대화들이 똑똑히 머리 속에 울려퍼졌다. -와이∼와이∼ 여행이다,여행∼ -그렇게 좋니? 우리 신이. -응. 우리 가족이 이렇게 함께 떠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잖아! -하하하∼ 신아, 그렇게 아빠와 떠나는 게 좋으니? -아니. 오빠와 같이 가서 좋아. 아빠한테는 엄마가 있잖아! -에엥?! 시,신아! 어,어째서…! 이 아빠를 버리는 것이냐! -여보, 당신한테는 제가 있잖아요. -.........쳇. -아니∼ 그 쳇은 뭐에요! 당신! -아,아냐아냐! 누,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잘못들었겠지! 설마 사랑스런 당신에게 이 내가 그런 말을 했겠어? -흐응∼ 웃음이 터지는 가족들.그런 와중에 내 손을 꼬옥 붙잡는 작은 손이 하나 있 었다. 작고 하얀 신이의 손. 신이와 얼굴이 마주치는 나.신이는 쑥스럽게 날 보며 웃었다.나도 환하게 웃으며 그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랬는데… 그 랬는데… " 아…. " 분명 예전 같았다면 이런 걸 회상할 때 눈물이라도 흘렸겠지. 하지만, 이젠 눈물도 잘 나오지 않았다. 분명 가슴 속으로는 울고 있을텐데도 눈물은 나오 지 않는다. 마치, 눈물이 말라붙은 것 처럼. 그런데 왜 앞전,마리 선배의 앞 에서는 눈물이 나왔던 걸까. " ........ " 가인은 천천히 소매를 걷어 자신의 오른손에 찍혀 있는 바코드를 내려다 보 았다. 작지만 뚜렷하게 2035489라는 번호가 찍혀있었다. 고아원에서 찍힌 바 코드인 것이다. 이 번호가 찍힌 채 한동안 고아원의 구석에서 멍하니 앉아있 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고가 난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절친한 친구 재영이 외에는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었다. 분명,내게는 친척들이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 중 아무도 병원에 모습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결국, 퇴원한 후 내가 가게 된 곳은 고아원이었다. 그 이후, 몇 명의 친척들이 날 찾아왔고,그들의 집을 전전하는 생활을 했지 만 견디다 못해, 부모님의 보험금과 유산으로 자치 집을 잡아 고등학교에 입 학하게 되었다. " ......쳇. " 가인은 창문에서 눈을 돌렸다. 왜 그런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들이 다시 떠 오른 건지.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거기서 뛰쳐 나온 것 까지는 좋았어. 좋았는데… ' 나가는 곳을 모르겠잖아. 아니… 또 어떻게 여기서 지상으로 올라간다냐. '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지는 가인이었다.그렇 다고 다시 찾아가서, 나 돌려보내줘요∼ 하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등 뒤로 시선을 돌리던 가인은 흠칫 놀랐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피스 그린 이라고 자신을 칭하던 정진우란 남자가 가인의 뒤에 서있었던 것이다.진우는 넉살 좋게 웃어보이며 손을 들었다. " 여어∼ 여기 있었구만.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다가와도 눈치도 못 채고. " " 아…. " 가인은 주춤 거리며 그에게서 뒷 걸음질 쳤다.그런 가인에게로 다가오며 진 우가 앞 전과 같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 자자∼ 꿀꿀한 기분은 풀어버리고 나가자고. 새 집에 가서 짐도 정리하고 집뜰이도 해야지! 응? " " 읏…! " 순간, 가인은 진우의 팔을 뿌리치며 그를 노려보았다.그리고 낮게 말했다. " 친절하게 굴 필요 없어요.어차피 제 오라 능력 때문에 댁도 그러는 거 아 닌가요? " " ......... " " 후, 아니면 다시 돈으로 라도 꼬셔볼 생각이에요? 제가 고아라서? " 가인은 삐뚤어지게 웃으며 진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도 다 똑같아. 다 똑같은 사람들이야. 결국, 나에게 볼 일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오라 라는 게 목적이란 말이지. 젠장! 그때, 그런 가인에게로 날아드는 진우의 주먹.가 인은 무방비 상태로 진우의 주먹에 얼굴을 가격당했다. -퍽! " 큭! " 갑작스런 진우의 펀치에 복도에 나뒹굴은 가인. 으윽. 뭐,뭐야?! 난데 없이! 아,젠장! 더럽게 아프네! 입술이 찢어진 건가…. 가인은 진우에게 맞은 부위 를 감싸며 그를 노려보았다. " 왜,왜 때리는 거에요?! " " 아,왠지 열 받아서 때려버렸다…. " 가인의 독 오른 질문에 진우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뭐,뭐야? 이 사람은! 그 런 가인에게로 진우가 몸을 낮추며 말했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 " .........? " " 남의 선의가 다 너에 대한 동정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리고 돈으로 꼬 신다고 했는데… 너,돈 준다고 하면 꼬리 살랑살랑 거리며 애교 떠는 그 런 가난뱅이 꼬마냐? 그리고 고아라고 해서 우리가 돈 주는 거 같냐? 응? 대답해봐. 너 정말 그런 속물 근성이 몸에 베인 썩어빠진 녀석이냐? " " 누,누가----!!! " 가인은 진우의 말에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싱글 벙글인 진우의 얼굴에 왠지 맥이 빠져 한숨을 쉬었다. " …그럴리가 없잖아요. 그딴 생각할리가…. " " 그럼 된 거 아냐? 안 그래? " 진우는 맘에 든다는듯 가인의 어깨를 두들겼고, 가인은 그런 그를 노려보다 가 곧 그에게서 다시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 ......당신이 뭘 알아.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고아가 되는 게 어떤 심정 인 줄이나 알아…! " 그런 가인의 투덜거림을 듣던, 진우는 갑자기 가인의 볼을 쭉 잡아 당겨 그 에게 시선을 맞추며 인상을 찌푸렸다. " 자꾸 고아고아 하지마라. 듣는 고아 기분 나쁘다∼ " " 뭐,뭐하는 거에요?! 이거 못 놔요?! " 진우의 손에서 간신히 벗어난 가인은, 얼얼해진 볼을 감싸며 그를 노려보았 다. 뭐야? 이 사람은 정말! 뭐, 그리고 듣는 고아 기분 나쁘다고?! 그게 무 슨 소리야? " 그게 대체…! " 그러나 가인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자신의 눈 앞으로 보이는 진우의 팔 뚝 때문이었다. 진우는 소매를 걷어 올려 자신의 팔을 가인의 앞에 갔다 대 었다. 그 팔뚝에 새겨져 있는 검은색의 선명한 바코드. 가인은 눈을 크게 뜨 며 진우의 팔뚝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이건… 이건 분명…! 그렇다면!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진우는 여전히 웃음짓는, 하지만 어딘가 씁쓸해 보이 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 잘 알고 있다고. 그런 기분 같은 건…. " " ......... " 결국, 진우를 따라 자신의 새 숙소를 찾아가게 된 가인.진우는 여전히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떠들었지만, 앞전 그 바코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고, 가인 또한 그 얘기를 궂이 꺼내지 않았다. 그런 진우에게 가인은 더 이상 투덜거리거나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 …숙소는 지상인가 보내요. " 가인은 예의 기차를 타고 가며 진우에게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뭐, 유레카 안에서 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그 안은 여러모로 불편하 거든. 문화 생활과는 단절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매번 지상과 지하를 왔 다갔다 하는 것도 불편한 노릇이고∼ " " 아,예. " "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만나는 게 힘들어져서 말이야∼ 봤지? 아까 그 오 퍼레이터 아줌마들? 꽤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많이 받게 된다고. " " 그,그런가요….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그,그거 그냥 장난 삼아 그러던 거 아니였나…. 어쨋든,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가인과 진우는 지하철 역에 도착해, 지상 으로 나왔다. 가인은 그들이 나온 곳을 의아하다는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26구역? " 정말 학교에서 두 정거장 거리구나. 그래. 두 정거장 거리이기는 한데,여기 는… 여기는…. " 그 말로만 듣던 26구역! " 가인은 놀라 소리쳤다. 이,이런 부자 동네를! 연예인들과 상류층 사람들이 주를 이루어 산다고 하는 그 물 좋은 동네! 가인은 새삼 주위를 두리번 거리 며 둘러 보았다. 여,역시 뭔가가 틀리다! 자신이 살던 24구역과는 보도 블럭 부터 그 청결함과 디자인이 틀린 것이다! 길가에 심어져 있는 벗꽃 나무들과 단아하면서도 깨끗한 건물들. 그리고 길가를 걸어다니는 사람들 조차, 뭔가 삐까번쩍하게 입고 다니지 않는가! " 여,여기서 산다는 말인가요? 이런 곳에서?! " " 응. 피스 관계자들은 대부분 여기서 살아. 아, 그리고 네 집은 바로 우리 옆집이다. 우린 이웃 사촌도 되는 것이지∼ " 가인은 이미, 진우의 뒷 말은 듣지 않고 도시의 풍경에 빠져 있었다. 이런 굉장한 곳에서 살게 된단 말이지? 무,물론 앞 전의 일들을 잊은 것은 아니지 만 새삼 기분이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그래. 나 돈에 약하다니깐. 하지만 가인은 자신이 살 집의 앞에 오게 되어서는 더더욱 벌린 입을 다물 지 못했다. " 헉…. " 가인은 숨 막히는 신음을 내지르며 자신의 눈 앞에 놓여진 집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2층 양옥 집이었지만,굉장히 단아하면서도 깔끔한 건물이었던 것이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그런 집 같은 분위기. 가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옆의 진우에게 물었다. " 저,정말 여기서 살게 되는 건가요? 제가? 진짜로? " " 물론∼ " 진우는 그런 가인의 반응이 재밌다는듯 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가인은 다시 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이 건물이 앞으로 내가 살 집….1년 동안 자 치를 해오던 자신의 단칸 방과 비교를 해보자 더더욱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 는 가인이었다. " 이,이것이 나의 집…. " 그런 가인의 중얼거림을 듣던 진우는, 곧 고개를 긁적이며 그에게 말했다. " 아,저기…. 이 집이 완전히 네 것이 되는 건 아니고 말이야… 저기 집 주 인은 있거든? 에, 또 그렇다고 네 집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고… 뭐라고 해야하나… 하숙? 아니다. 그것 하고는 또 틀린데. " " ........예? " 아니, 이게 뭔 소리야? 가인은 진우의 횡설수설에 인상을 구기며 반문했다. 뭐야, 이거 내 집이 되는 거 아니였어? 언제는 24평 전용 빌라가 내 꺼가 된 다고 해놓구서는…. 아니, 그러니까 물론 그 피스 메이커의 혜택이라는 것에 신경쓰고 싶지는 않지만, 앞전과 말이 틀려지니까 그러는 것 뿐이야! 그러니 까… 에, 그래! 사기를 당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바로 그거다! " 이거 내 집이 되는 거 아니였어요? " " 하하∼ 아니,뭐… 전용 주택을 원한다면 지급할 수도 있기는 한데…. " " 그럼 당연히 그래야죠! 왜 앞에서 한 얘기하고 틀려지는 거에요! 이런 건 분명히 하자구요! 꼭 사기 당하는 기분이잖아요! " 가인의 딱 부러지는 소리에 진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에휴…. 그런가? 그렇겠지? 뭐, 그럼 할 수 없겠네. 집 주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짐을 옮기는 수 밖에. " 진우는 어깨를 으쓱인 후, 집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가인이 그 뒤를 볼멘 얼굴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게 진작에 일 처리를 빠릿빠릿 제대로 할 것이지. 다시 짐을 빼야한다니… 이게 왠 수고람. 그때, 가옥의 출입구가 열리며 한 여성이 밖으로 나왔다. " 어머…? 진우 씨,벌써 왔어요? " 이 목소리는! 가인은 순간, 온 몸이 경직되며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금발의 그녀… 한시민이었던 것이다! 그녀 가 어째서 여기에?! 어째서? 그때,가인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한 가지 예감! ' 집 주인이라는 게 설마… ' 그런 가인의 예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진우가 시민에게 말을 건냈다. " 아아, 시민 씨. 가인 군이 아무래도 혼자 살고 싶은 모양이네요. 그동안 자치 생활하느라 혼자서 힘들었던 거 같아서, 시민 씨와 같이 살게 하면 어떨까 싶었는데… 뭐, 본인이 저렇게 싫어하니…. " " 음… 그래요? 그거 아쉽네요. 막 가인 씨가 쓸 방도 청소해 놓았는데…. " 시민은 아쉬운 표정으로 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가인이 두 손을 휘 저으며 소리쳤다. " 아,아니! 저기! 전 단지 집 주인한테 폐를 끼칠까봐,그럴까 봐 그랬던 거 지! 혼자 살고 싶다거나 그래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 " 어머? 폐라니 당치 않아요. 저도 혼자 살기 적적했는데, 가인 씨 같은 동 거인이 생긴다고 해서 기뻤던 걸요. " " 예,옛! 그,그럼…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시민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건! 이것은! 가인 은 떨리는 가슴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소리쳤다. " 아‥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이,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연상녀와의 동거 생활?! 그것도 저 아름다운 시민 씨와! 가인의 가슴은 방망이 질 치듯 두근 거렸다. 왠지 내일부터는 지금까 지와는 다른 하루가 시작될 거 같은 예감! 그때, 그런 가인과 시민을 바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 호오라∼ 그런 거였군. ' 그는 정진우였다. 한편, 이곳은 한성 고등학교의 옥상.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든 옥상에 한 에메랄드 빛 머리의 소녀가 철창 위에 서 있었다. 마치, 평범한 땅에 서 있는 것 처럼 비정상적으로 옥상의 높은 철창 위를 다소곳이 서 있 는 소녀. 그녀는 다름 아닌 가인의 클래스 메이트 테레이아 민체스터였다.테 레이아는 저물어가는 노을을 주시하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 태양이 붉게 물드니… " 테레이아의 푸른 눈은 노을을 받아선지, 옅은 초록 빛을 띄고 있었다. 너무 나도 창백한 그녀의 얼굴. 그것은 마치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다른 이질 적인 기운을 띄고 있었다. " 이 세상 또한 피빛이어라…." 그녀의 말대로 노을에 비친 이 세계의 모습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앞 으로 닥쳐올 미래의 모습인 것 처럼….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제 3 화 피스 메이커 完> 豫告 소녀는 검을 휘두른다.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존재를 그리워하며. 소녀는 검을 휘두른다. 다시는 소중한 이를 잃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지금! 소녀는 목숨을 걸었다. 제 4 화 검과 소녀. 성마리: 가인, 너 만은 내가…. 유가인: 마리 선배-------!!! -=-=-=-=-=-=-=-=-=-=-=-=-=-=-=-=-=-=-=-=-=-=-=-=-=-=-=-=-=-=-=-=-=-=-= 오라전대 ＰＩＥＣＥ ＭＡＫＥＲ 제 4 화 검과 소녀 =-=-=-=-=-=-=-=-=-=-=-=-=-=-=-=-=-=-=-=-=-=-=-=-=-=-=-=-=-=-=-=-=-=-=-= -짹짹… 26구역에 위치한 고풍스런 기와집.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이곳은, 피스 메이커의 피스 레드 '성마리'의 집이자, 100명 이상의 단 원들이 검을 배우고 있는 명문 검도장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이라 단원들이 없는 도장은 고요했지만,그 고요함을 깨뜨리며 마리는 묵묵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휙! 휙! 목검으로 휘두르는 것인데도,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 리는 자신의 앞에 세워 놓은 밀짚으로 감싼 목표물을 향해 자세를 바로 잡았 다. 순간, 도장 안에 흐르던 공기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짧은 마리의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의 몸이 목표물을 번개 같이 스쳐지나갔 다. 그와 동시에 휘날리는 밀짚들. 목도를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마리는 멍하니 자세를 유지하다가, 곧 고개를 돌려 자신이 벨려고 했 던 목표물을 바라보았다. -콰직. 짧고 굵은 파쇄음과 함께 밀짚들이 풀어헤쳐지며 목표물은 서서히 도장 바 닥으로 부서져 내렸다. 목검으로 이런 위력을 내는 것도 놀랍지만, 목표물을 그렇게 만든 것이 단지 힘의 기교가 아닌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마리 는 순전히 검의 풍압만으로 대상을 부셔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목표를 이룬 것이 아니었는듯 침울한 안색을 띄고 있었다. " …검기에 잡념이 들어가 있구나. "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마리는 흠칫 놀라며, 뒤 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어느새 다가온 건지, 긴 한복을 입고 있는 50대의 건장한 중년인이 서있었다. 마리는 그에게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인사를 했다. " 일어나셨습니까,아버님. " " 그래. 언제나처럼 열심히 구나. " 마리의 아버지, 성비영은 그런 딸의 모습에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하지만 곧 그는 웃음을 거두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아무리 진검이 아니었더라도 섬광의 날카로운 검 기를 하나도 살리지 못하다니, 너 답지 않구나. " " 예…. " 마리는 그런 비영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목검을 힘껏 움켜쥘 뿐이었다.비영 은 그런 마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 몸을 돌리며 도장을 나서기 시작했다. " 검기는 그 검객의 마음을 표현한다. 정진하거라. " " 예,아버님. " 비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마리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지 않았다.비영 이 도장을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자신도 모 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 후우…. " 마리는 도장의 창문으로 스며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새벽이 가고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마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학교에… 가야지. " 제 4 화 검과 소녀 -딩동댕동… 언제나 처럼 종은 울리고, 언제나 처럼 점심 시간은 찾아왔다. 하지만,가인 에게 있어서 오늘은 언제나의 점심 시간이 아니었다. 가인의 얼굴은 왠지 모 를 행복한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가인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 며 연신 싱글 거리고 있었다. …4월 8일 AM 8시 00분. 가인은 어제부터 자신이 살게된 26구역의 2층 양옥집에서 서둘러 나오고 있 었다. 아무래도 잠자리가 바뀌다 보니 늦잠을 자게 된 것이었다. ' 아,젠장.큰일났네. 어제까지 내가 자치하던 집이었다면, 학교까지 뛰어서 5분도 안 걸리는데…. ' 하지만 이곳은 무려 두 정거장이나 떨어진 곳이란 말이다! 몇 분이나 걸릴 려나 10분? 20분? 아, 그것도 지하철을 놓치면 끝장이다. 으씨… 부자 동네 에서 살게 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지하철을 타야한다니… 귀찮다,귀찮아.어 쨋든, 허겁지겁 신발을 신으며 대문을 열려는 가인. 그때, 그를 불러 세우는 한 여인의 목소리. " 아,저기… 가인 씨! 잠깐만 기다려요! " " 아… 시,시민 씨? " 가인은 자신을 쫓아 나오는 한 금발의 여인을 행복한 얼굴로 바라 보았다. 그래. 학교에서 멀어진 것 따윈 아무 것도 아니라구. 이런 미인과 함께 살게 되다니. 으아, 아직도 꿈인 것 같네…. 아, 그래도 계속 이렇게 헤벌쭉 하면 이상한 놈으로 보겠지? 가인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시민에게 물었다. " 왜 그러세요? " " 가인 씨, 맨날 점심시간에 매점에 가서 사먹고 다녔었죠? " " 예? 아,예… 뭐, 어쩔 수 있나요. 도시락 싸서 다닐 형편이 안되던지라….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설프게 웃었다. 아,그래도 어제는 테레이아의 도 시락을 먹었었지. 맛있더라∼ 손수 만든 도시락이라는 건…. 그 때,가인의 눈 앞으로 살짝 들어 올려지는 도시락 통 하나. 가인은 눈을 껌뻑이며 그것 을 바라 보았다. 뭐,뭐야 이건? 그런 가인에게로 시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오랫만에 도시락 한 번 싸봤어요. 그리 맛은 없겠지만 사먹는 것 보단 좋 을 거라고 생각해서. " " .........예엣? " 가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민에게서 도시락을 받아들었다. 아,아니! 그 럼 이걸 시민 씨가! 그것도 아침 일찍! 그것도 날 위해서?! 가인은 얼굴이 화악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기,기쁘다‥. 이런 아름다운 사람이 싸주는 도 시락이라니… 그것도 시민 씨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힘드셨을텐데…. " 그,그래도 이렇게 수고스럽게…. " " 뭘요. 가인 씨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니까 저도 좋구, 그리고 무엇보다 모처럼만에 남에게 만들어주는 도시락인 걸요. 먹고 나서 감상 들려 줘야 해요. " " 예,예에‥. " 처,천사야. 저 분은 분명‥! 가인이 마음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 을 무렵 시민은 뒷 말을 덧붙였다. " 아,그리고 이제부터는 도시락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가 매일 싸드릴테니 까요. " " 예,옛? " 아,아니 그건! 가인은 기뻤지만 왠지 모를 부담감이 느껴져 손을 흔들며 사 양했다. " 아, 아니 감사합니다만‥ 저 괜찮아요.그렇게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진 않 아요. " " 훗. 번거롭긴요. 가인 씨는 이제부터 제 가족인 걸요. " 아주 당연하다는듯이 말하는 시민의 말에 가인은 한순간 말을 잊었다. 가족? 가족이라고? 가인은 도시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꾸욱 넣으며 말했다. " 가족‥이요? " " 그래요,가인 씨. 그러니 정성껏 싼 도시락 맛있게 먹어줘야 해요. " 가인은 품 안의 도시락을 더욱 소중히 끌어안으며 시민을 바라보았다. 그녀 는 환한 웃음을 띄운채 가인을 마주 보고 있었다.가인은 그녀의 미소에 이끌 리듯 꾸밈없이 웃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 …4월 8일 PM 1시 00분. 어쨋든, 오랫만에 그런 기분 좋은 마음으로 등교하게 된 가인. 그런 가인의 옆에 앉아있던 에메랄드 빛 머리의 소녀, 테레이아는 살며시 웃으며 가인에 게 말을 건냈다. " 가인아, 무슨 좋은 일 있어? " " 아,테이야. 아,아니∼ 무슨 좋은 일은∼ 아무 것도 아냐∼ " 좋은 일이 있구만,뭐….테레이아는 연신 싱글벙글인 가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천천히 그의 앞에 도시락 통을 내밀었다. " 자, 가인아. 오늘도 네 것 싸왔어. " " ......어? " 가인은 테레이아가 내민 도시락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어라? 테 레이아, 또 내 것 싸온거야? 가인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테레이아에 게 손을 저었다. " 아,저기…. 테이야. 나 오늘 부터 도시락 싸오게 됐어. 그러니까 이제 괜 찮아. " -쿠궁‥. 그렇게 말하며 테레이아에게 도시락 통을 다시 돌려 보내주는 가인.그런 가 인의 태도에 순간, 시끌벅적하던 1학년 3반의 교실이 조용해졌다. …뭐,뭐야? 이 분위기는…. 이 기분 나쁜 정적에 심히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가인이었다. 그리고 벼락 같이 이 정적을 단번에 깨버리는 한 목소리. " 네,네 놈, 유가인-----!!! " 순간, 가인의 앞으로 불쑥 등장하는 일동의 남학생들.재영을 선두로 한 1학 년 3반 남학생 일동이었다.여,역시 이 기분 나쁜 파동의 정체는 이 녀석들이 었어! 재영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재영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 네 놈이 배가 불렀구나! 배가 불렀어! 어떻게 민체스터 양의 도시락을 거 절할 수가 있단 말이냐! 저 도시락을 싸기 위해 그녀는 꼭두 새벽부터 피 곤한 몸을 일으켜 손수 장을 봐온 재료들로 요리를 했겠지! 심신이 힘들 었겠지만,도시락을 맛있게 먹어줄 네 놈을 생각하며 힘을 내서 꿋꿋히 정 성껏 도시락을 싸는 그녀를 생각해보아라,네 놈! 그런 그녀의 정성을 그 렇게 거절하는 네 녀석이, 과연 그녀의 도시락을 먹을 자격이 있을 것 같 으냐!! 네 놈의 오만방자한 행위! 용서할 수 없다! 사형이다! " " 우오오오오오오!! " 가인에게로 뻗어오는 수 십개의 손들! 으아! 놔! 이거 놔! 가인은 자신을 둘러싼 수 십명의 남정네들의 눈에 켜진 질투의 불꽃에 몸서리를 떨었다. 이 녀석들, 제 정신이 아니다! 주,죽을 지도 몰라. -탕! 그때, 책상을 세게 내려치는 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테레이아였다. 그런 그 녀의 반응에 가인에게서 물러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재영들.가인도 덩달 아 긴장하며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 ......테,테레이아? " " 누구니? " 가인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얼굴로 묻는 그녀.하지만 가인은 그런 그녀의 얼 굴에서 지독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위,위험하다. 이건! 가인은 어떻게 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 아,아니 그게 저기… 내가 사는 집 주인이… " " 집 주인? " " 으,으응. 그래! 맘씨가 아주아주 좋으신 분이거든! 내가 밥 못 먹고 다니 는 걸 보시더니 안되겠다 싶으셔서‥ 그,그래서 싸주시겠다고 그랬던 거 야! 그래! 응! " " ......흐응. " 테레이아는 그런 가인의 설명에 뭔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납득했고, 가인은 마음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잘 넘어간 건가.후우…. 그때, 그런 가인에게로 재영이 의아하다는듯 물었다. " 어? 가인아, 너 자치하잖아. 왠 집 주인? " -쿠쿵! 크아아아악! 재영, 이 웬수! 이 바보 멍청이가!! 가인은 순간, 자신의 옆자 리에서 느껴지는 잔인한 파동에 뻣뻣히 몸을 경직시켰다. 테레이아의 에메랄 드 빛 머리가 왠지 휘날리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 만의 착각인 것일까! 안된다,이대로는! 가인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쳤다. " 아,아니∼그게! 어,어제부로 이사했거든! 나 하숙하게 됐어! 그래! 하숙! 하하,하하하하!! " 그런 가인의 어깨를 짚는 가는 손 하나. 테,테레이아의 손인가. 그,근데 왜 이렇게 차가운 거야?! 테레이아가 짚은 어깨가 싸늘해져 가는 가인이었다.그 런 가인의 귓 가로 저 깊은 나락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테레이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 …그럼 집뜰이 해야지,가인아. " " ......으,으응‥. " 가인은 그 거역할 수 없는 공포에 힘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무,무섭다, 테레 이아…. 무서워‥. 어쨋든, 예정에도 없던 집뜰이를 하게 된 가인이었다. 가인은 앞장 서 걸으 면서 뒤 따라 오는 재영과 테레이아를 힐끔 바라보았다.그들은 연신 웃는 얼 굴로 가인의 불안한 눈초리를 몇 번이고 맞 받아 치고 있었다. 가인은 어설 프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 아아∼ 난 몰라. 어쩌다 이렇게 된 거람. 시민 씨에게 전화하기는 했는데 …. ' 전화 통화로 들리던 시민 씨의 목소리는 왠지 흥분해 있었던 거 같았다. -어머? 친구 분들이 오신다구요? 그러면 장 보러 갔다 와야겠네…. 가인 씨, 수업 4시 반에 마치죠? 집에 오면 5시 조금 넘을 테니깐 그 때까지 준비해 놓고 있을게요. 그럼 이따가 집에서 봐요. -아,저기… -뚜우뚜우… -......... 가인은 머리를 긁적였다.그런데 민간인을 데려가도 되는 건가? 에,그러니까 시민 씨와 내가 같이 살게 된 것도 그‥ 피스 메이커…가 되었기 때문이잖아. 어쨋든, 여러가지 군사 기밀 같은 게 있을 텐데, 자신의 행동이 너무 경솔한 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가인이었다. 아,뭐… 군사 기밀… 그딴 거 신경 쓰고 싶지는 않지만 시민 씨에게 피해라도 가면 큰 일이니까…. 아니 사실은 그런 걱정보다는… ' 테레이아와 재영이 녀석이 괜히 이상한 오해하면 안될텐데…. ' 어쨋든, 연상녀와 자신은 동거를 하고 있는 게 되는 것이다.아무리 시민 씨 가 집 주인이라지만 오해할 소지는 충분히 널려 있었다. 가인은 다시 한 숨 을 내쉬었다. 아,이렇게 자주 한 숨 쉬면 빨리 늙는 다던데…. ' 에라이…. ' 결국, 26구역의 자신의 집에 다다른 가인들. 재영은 연신 탄성을 지르며 주 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 우와∼ 야,가인아! 어떻게 된 거야! 네가 26구역에서 살게 되다니! 이런 부자 동네를 도대체 무슨 돈으로∼ " " 응.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 어쩌다 보다는 무슨…. 팔자에도 없던 지구 방위대에 입대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초인종을 눌렀다. 곧 시민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 가인 씨에요? >> " 에, 예에…. 저 왔어요. "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재영과 테레이아의 시선이 가인에게 날카롭 게 꽂혔다.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출입구를 가리켰다. " 자,자아∼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어서 들어가자! 어서∼ " " 지하철 타고 왔는데 뭐가 힘드니. " 가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속삭이는 테레이아의 목소리. 하지만 그 속삭임 에서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는 가인이었다. 그때,빨리 들어가지 않고 가방에 서 주섬 주섬 카메라를 꺼내드는 재영. 가인은 그런 재영이 하는 행동거지를 가만히 살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너 뭐하는 거냐? " " 훗. 나에게는 이 카메라로 너의 동거인을 찍어, 1학년 3반 급우들에게 알 려줘야 할 사명이… " " ......... " 재영에게서 뺏은 카메라를, 그대로 놈의 머리에 집어 던지는 가인이었다. " 안녕하세요. 한시민 이라고 합니다. "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금발의 미인,한시민. 그녀의 앞에 앉아있 던 테레이아와 재영은 그런 그녀의 인사에 같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 가인의 베스트 프렌드 '박재영'이라고 합니닷!! " " ......테레이아·민체스터 라고 해요. " 하지만 그들은 웃고 있는 겉 모습과는 달리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 가,가인이 녀석∼ 이런 아름다운 분과 한 집에서∼!! ' ' ......미인… 강적이다. ' 어쨋든, 이런 생각들을 하는 그들에게로 시민이 방긋 웃으며 부엌에서 먹을 것을 가져와 각자의 테이블 앞에 놓았다. " 갑작스럽게 친구 분들이 찾아오셔서 대접할 준비를 잘 못했네요.급한대로 만든 것이지만 맛있게 드셔주세요. " 갓 구운듯한 애플 파이와 따뜻한 원두 커피.더구나,애플 파이는 그 향이 기 가 막혔기에 재영은 군침을 흘리며 말했다. " 아,아니요∼ 사실 저희들이 미리 가인이 한테 얘기하고 왔어야 하는 건데 … 그나저나 직접 만드신 거에요? " " 예. 뭘 만들어서 손님한테 대접하는게 취미라서…. " 시민은 그런 재영에게 미소 지으며 답했고, 재영은 감동의 눈물을 머금었다. 으아, 저 고상한 마음씨! 더군다나 저 요리 솜씨와 미모! 저런 분을 가리켜 바로 팔방 미인이라고 하는 것인가! ' …그나저나…. ' 재영은 슬며시 가인을 노려보았다. 이놈… 이런 미인과 살게 된 것을 이 형 님에게도 입 꼭 닫고 있었겠다∼ 어서 이실 직고 하여라! 어서! 가인은 재영 의 시선을 받자 애써 외면하며 고민에 빠졌다. 재영이 놈의 저 시선은 이 상 황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눈! 시민 씨와 나의 관계를 뭐라고 설명해야 한 다지? ' 지구 방위대 피스 메이커에 입대하면서 같은 집을 쓰게 된 전우야. ' 이것이 진실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왜 이렇게 웃기게 들린다 냐…. ' 아니면 우연찮게 26구역을 떠돌다 만나게 된 맘씨 좋은 집 주인… ' 안돼. 무협지냐? 기연이잖아. ' 그렇다! 그녀는 평상 시에 알고 지내던 사촌 누이! 우연찮게 집에 남는 방이 생겨서, 혼자 살고 있던 나를 안타깝게 여긴 그녀가 나와 같이 살자 는 권유를 해서… ' …논외. 나 자신도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변명은 개뿔이…. 어쨋든, 이런 저런 이유로 고뇌하고 있는 가인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펴보 던 테레이아는, 금새 방긋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며 시민에게 대뜸 물었다. " 저기, 언니‥. 가인이와 무슨 사이세요? " -쿠쿵! 헉! 이것은 테레이아의 기습?! 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 아,아하하하하∼저기 테레이아! 내 방 구경하고 싶지 않니? 구경하자! " " 훗. 가인아, 좀 있다가 차근차근 구경하자. " 테레이아는 가볍게 웃으며,가인의 권유를 냉철히 거절하고서는 다시 시민에 게 고개를 돌렸다. 저,저건 반드시 지금 대답을 듣겠다는 단호한 의지! 가인 은 식은 땀을 흘리며 시민을 바라보았다. 어,어쩌실 거에요, 시민 씨?! 시민 은 그런 가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치 걱정말라는듯 살며시 웃어 보였다. 시, 시민 씨! 역시 뭔가 대책을 강구해 두셨군요! 시민은 그런 가인의 기대를 업 고서 테레이아에게 답하기 시작했다. " 예. 전 가인 씨를 아침에 깨워 학교에 보내주고,가인 씨에게 도시락을 싸 드리고, 식사를 만들어 드려요. " " 푸훗--- " 가인은 마시고 있던 원두 커피가 목에 걸렸던듯 켁켁 거리며 뱉어냈다. 아,아니… 시민 씨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은 안했지만, 그렇다고 그렇 게 그냥 사실 그대로 말할 줄이야! 봐.봐. 저, 오해하는 시선들! 테레이아 는 입꼬리를 가늘게 떨며 시민에게 물었다. " 그러니까 깨워주고 도시락 싸주고 식사를 만들고? " " 아, 그리고 방 청소도 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려요. " " ......... " " 음… 또…. 아,맞아. 가인 씨는 2층에서 살고 저는 1층에서 사는 군요. " ......끝이다. 전혀 도움이 되고 있지 않은 시민의 대답들이었다. 테레이아 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가인을 노려보았고, 재영은 내일 학교에서 이 사실들을 어떻게 퍼뜨리는 것이 극도의 효과를 낳을까를 구상이라도 하는 듯 히죽 입 꼬리를 치켜 올렸다. 으아,내가 미쳐! 어떻게 일이 이렇게 계속 꼬여만 가 는 거냐?! 그때 밖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딩동 " 어머, 이제야 왔나 보네요. " 시민이 가인을 바라보며 말했고, 가인은 왠지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 으로 대꾸했다. " 누구… 부르셨어요? " " 예. 오늘 가인 씨 집뜰이한다고 하니까 다들 오겠다고 해서요. " " .........? " 누구지? 혹시 피스메이커 관계자들 아냐? 아,몰라. 이제는 더 이상 꼬일 것 도 없겠다. 신경 끌거야! 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시민이 문을 열자 가인에게도 낯익은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 여어∼ 소년, 집뜰이 왔어! " " 가인 씨,시민 씨, 저희 왔어요∼ " 역시나. 먼저 집으로 들어오는 이는 정진우와 민수정이었다. 그들의 뒤로는 이유리 라고 불리던 작은 초등학생 소녀가 뒤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민수정 은 손에 큰 케이크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시민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 자, 시민 씨. 여기 부탁했던 케이크에요.이건 가인 군 집뜰이 선물 겸 해 서 제가 사는 거에요∼ " " 어머나… 고마워요,수정 언니. 가인 씨,수정 언니가 가인 씨한테 주는 선 물이래요. " 가인은 자신의 앞으로 케이크를 들어보이며 웃는 시민의 말에, 얼떨결에 수 정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 아,예‥. 감사합니다,민‥수정 씨. " " 후훗.가인 군, 편하게 그냥 누나 라고 불러요. 멋 없게 수정 씨가 뭐에요? 애 늙은이 같이. " " .........애 늙은이. " 가인은 딱딱한 표정으로 수정의 뒷 말을 중얼거렸다. 어쨋든, 이 사람은 그 때 그 진 사령관이라고 하던 사람과 가까운 신분으로 보였던 사람이다.겉 보 기에는 맘씨 좋은 누나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가인은 왠지 그녀에게 마 음을 터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 가인의 반응을 알아챈 건지 민수정은 쓴 미 소를 지었다. 그때 민수정의 뒤에 있던 정진우가 가인에게 자신이 가지고 온 선물을 내밀었다. " 자, 소년. 받아∼ 부침개다.부침개하고 이것저것 먹을 거 사왔어.원래 이 런 건 이사 온 사람이 이웃들에게 돌려야 되는 건데… 이거 뭔가 주객이 전도된 거 같지 않아? " " 나,참… 어제 막 이사온 고교생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네요. " 가인은 투덜거리며 진우에게서 부침개와 먹을 것이 든 비닐 봉지를 받아들 었다. 수정에게와는 확연히 다른 가인의 반응이었다. 가인은 어제,자신에게 로 팔뚝에 찍힌 바코드를 내밀어 보이며 씁쓸히 웃던 진우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 경계심이 들진 않아…. 그런 가인의 태도에 민수정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생각했다. ' 단단히 미움 받은 모양이네…. 정작 심한 소리를 한 건 진 사령관 님이신 데…. ' 뭔가 좀 손해보는 기분이잖아. 뭐… 그래도 내가 진 사령관 님과 가까워 보 였었나 보지? 왠지 그렇게 생각하니 꼭 기분이 나쁜 것만은 아닌 그녀였다. 그래. 신뢰는 만드는 게 아니라 생겨나는 거니까.수정은 언젠가 가인이 마음 을 터놓기를 바랬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어쨋든,가인은 부침개를 미 심쩍은 눈으로 바라 보며 진우에게 물었다. " …이거 진우 씨가 만든 거에요? 그렇다면… " 그렇다면 왠지 먹기가 불안한데…. 그런 가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진 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 아니. 내가 뭔 재주가 있다고 만들겠냐. " " 그럼? " " 내 아내가 만들어 줬지. " " …예에. " 그럼 그렇지. 저런 남자가 이런 요리를 할 수 있을리가… 어,아니? 저기… 뭐? 아내? 누구의 아내? 설마 진우 씨의 아내 라는 소리는… 가인은 이 놀라 운 사실에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 에엑-----?!! 아내라고요?! 진우 씨,유부남이었어요?! " " ......유부남이라고 하지 마라. 마음 아프다. 그나저나 그렇게 놀랄 일이 냐? 그게. " 으아∼당연히 놀랄 일이지,이게! 우… 쇼킹하다! 가인은 여전히 신비한 물 건 보듯 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 저기…올해로 나이가…. " " 실례로군,소년. 숙남의 나이를 함부로 묻다니…. " " ......... " " ......아아∼ 스물 여덟이야.스물 여덟. 대답했으니 그런 눈으로 보진 마 라. " 스물 여덟이라구? 음, 그럼 결혼해도 이상할 나이인 건 아니지만… 아니,그 래도… 이대로 납득하기에는 뭔가…. 가인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 이런 경박한 남자가 한 가정의 가장이라니…. " " ......중얼거림이라면 좀 더 조용한 소리로 하는 게 어떠냐,소년∼ " " 으앗! " 진우는 가인의 목에 자신의 팔을 두르며 조았고,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 둥쳤다. 그래! 이런 행동이 가장으로서 할 행동이냔 말이야! 어쨋든, 한 가 정의 가장으로서의 품위나 체통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 없는 듯한 진우의 헤 드락이었다. 한참을 발버둥치다가 용케 진우에게서 벗어난 가인은 켁켁 거리 며 숨을 토해냈다. " 아,진짜… 저런 사람도 아빠가 될 수 있는 거구나. " " 뭣이∼∼?! " " 아,아니.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시라고. " 가인은 진우의 째려보는 눈초리를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그런 그의 눈에 멍 하니 출입구에 서서 자신을 올려다 보는 한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그 래. 이유리…라고 했던가? 이런 초등학생 여자 아이도 피스 메이커…오라 능 력자란 말이지? 그럼 이 아이도… 몬스터와 싸우는 걸까? 가인은 왠지 씁쓸 한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아,그래. 어쨋든 인사라도 해야… " 아,저기… 안녕…? " " ......... " 그런 가인을 무심하게 한번 쳐다본 후 지나쳐 버리는 유리. 가인은 왠지 식 은 땀을 흘리며 애뢻은 머리만 계속 긁적였다. 또… 무시 당한 건가? 하하…. 그때, 그런 가인에게로 진우가 소리쳤다. " 어이,소년∼ 이 애들 네 친구냐? 소개해 줘야지∼ " " 예? " 가인은 진우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진우가 재영과 테레이아의 앞에 앉아서 그들을 가리키며 손짓하고 있었다.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로 다 시 돌아갔다. 아아… 정신 없다. 정신 없어. 하지만 가인은 이런 시끌 벅적한 분위기에 마음이 들뜨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왠지 반가우면서도 어렴풋 한 향수 같은 이 기분은… ' 오랫‥만이다…. 이런 기분…. ' 그래. 나쁘진 않아‥. 가인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가인은 천천히 모두가 모여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 나쁘지 않기는… 이건 최악이다…! ' 가인은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의 앞으로는 어느새 죽이 맞은 재영과 진우가 시끄럽게 다음과 같이 떠들고 있었다. " 에이∼ 가인이 녀석, 저 녀석 어렸을 때 부터 왕따였잖아요. 그치? 야,유 가인! 왜 고개 돌리고 있어?! 하여간 저 녀석이 애들하고 어울리지를 못 하니깐 이 베스트 프렌드,재영 님이 일일히 신경을 써주며 챙겨줘야 했었 지요! 아, 진짜 내가 보모도 아니고 말이야∼ 남성에게도 모성 본능은 있 는 거라니깐! " " 아니아니. 그런데 왜 왕따였는데? " " 뭐, 난 혼자가 더 좋아‥ 귀찮게 하지마‥ 이딴 소리가 입에 발린 녀석이 었으니 눈에 날만도 하죠∼ 더구나, 혼자서 폼 잡기나 좋아하고 웃을 줄 도 모르는 녀석이었던지라, 같이 놀아줄려고 했던 제가 여러모로 맘 고생 을 했답니다. " " 에이∼ 그거 단순히 튀는 걸 좋아했을 뿐이잖아? " " 그렇죠! 어설픈 아웃 사이더 흉내나 내고 말이야∼ " 가인은 이를 갈며 재영을 노려보았다.아,재영이 저 놈의 자식! 내 오장육부 를 뒤집어 놓을려고 오늘 작정을 하고 온 거였구나! 저 자식,저거 아까부터 왜 저런 말도 되도 않는 소리만 하고 난리인 거야?! 더구나 그걸 맞장구 치 며 덩달아 날뛰는 진우, 저 인간은 또 왜 저런데?! 가인은 이를 갈며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음료수를 들이킬려고 했다. 그때, 그런 가인의 행동을 저지하 는 손 하나. 테레이아였다. 그녀는 여전히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로 가인에게 말했다. " 이 음료수… 수상쩍어. " " 뭐? " 가인은 그런 그녀의 말에 음료수를 다시 바라보았다. 음료수가 수상하다니? 가인은 살짝 음료수를 한모금 마셔 보았다.앞전 까지는 시끄러운 분위기에 신 경을 쓰지 못했는데, 주의 깊게 맛을 보니, 코를 팍 쏘는 탄산의 느낌 사이로 미묘한 이질적인 맛이 하나 숨어 있었다. 가인은 굳은 안색으로 테레이아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 이것은…? " " .........알콜이야.분명. " -쿠쿵! 가인은 경직된 안색으로 새삼 음료수를 노려보았다. 알콜? 알콜이라고?! 어 째서 그런 성분이 음료수에! 설마, 아니야. 그럴리가 없지만. 하지만! 그 방 법 밖에는! 가인은 자신의 추리가 틀렸기를 바라며 중얼거렸다. " ......누군가 음료수에 술을 섞은 것? " " 맞았어. " 테레이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아니, 도대체 누가? 어째서? 왜 그딴 짓을?! 가인은 음료수에 술을 넣은 주범을 추론하기 시작했다. 음료수 에 술을 넣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런 짓을 할 시간은 없었다. ' 그렇다면 범인은 미리 술을 넣은 음료수를 가져왔다는 것이 되는군…. ' 이 음료수는 이 집에 있던 것이 아니다. 외부인이 사온 것이지. 그렇다면…. 테레이아와 가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범인은 한 사람 뿐! 앞 전 부침개와 함께 먹을 것을 사온 사람! ' 정진우! ' 아니, 도대체 왜 멀쩡한 음료수에다가 술을 섞어서 가져온 거지?! 도대체 왜?! 동기가 뭐야?! " 흑흑∼ 도대체 왜 가인이 녀석에게만 여자가 생기는 건지… 녀석을 보살펴 온 건 나인데… 한 명 쯤은 소개시켜줘도 되지 않느냔 말이야∼ " " 에이, 여자가 다 뭐냐! 옆구리가 시린 아픔도 즐길 줄 알며, 혼자서 고독 한 나날들을 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남자다! " " .........아니. 그래도 여자가 있는 게…. " " 남자! " " 나,남잣!!! 여자가 다 뭐냐! 필요 없어. 그런 건! " " 좋아! 재영 이라고 했지?! 널 오늘부로 우리의 사나이 클럽에 초대하겠다! 넌 자격이 있어! 자긍심을 가져도 좋아! 자, 외쳐라! 사나이! " " 우오! 사나잇!! " ' 혼돈......이 목적이었군.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광란의 도가니가 되어가는 재영과 진우의 행동거 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몇 병을 마셔댄 거야? 어째, 아까부터 음료수를 너 무 자주 마신다 했지…. 저 얼굴까지 벌써 붉어진 걸 보아하니 거 하게 취하 셨구만,다들. " 딸꾹. "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딸꾹질 소리. 가인은 굳은 안색으로 재빨리 고 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테레이아가 홍조를 띈 얼굴로 딸꾹질을 해대고 있었 다. 테,테레이아…너 마셨었던 거니? " ......... " 그리고 저편에서는 시민과 민수정이 빨개진 안색으로 재영과 진우의 바보 짓 에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이럴수가… 이미 늦은 거란 말인 가?! " ......전멸…이로군. "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때, 저편에서 들려오는 벨소리. -딩동. " 아,저기… 누가 왔나 본데…. " 가인은 좌중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 여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사나이의 세계를 이해 못하는 거지! 남자 의 로망, 그것은 바로 여자 도라에몽이다! 신기한 힘 같은 것이 있고! 만 능 소녀에다 같이 사는 놈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는 얘기!(재영) " " 그래! 만화에서 봤다고! 만능 메이드 소녀!(진우) " " 그 발언 무시하고 넘길 수가 없군요,재영 씨!진우 씨! 그건 엄연히 성 차 별이에요! 여자도 남성 메이드를 가질 권리를 줘야 한단 말이에요!(테이) " " 어머? 가정부 말씀이세요?(시민) " " 아니! 메이드와 가정부는 틀리죠∼ 스페셜리스트와 아마의 차이랄까.(수정) " " .........(유리) " 가인은 자신의 말이 이 엄청난 분위기에 씹혀 들어갔다는 것을 깨닫고,한숨 을 내쉬며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직접 문을 열러 나간 것이다. 아아∼ 밖 으로 나오니 좀 살 것 같군. " ......집뜰이고 나발이고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네. " 가인은 투덜거리며 대문으로 다가갔다. 뭐,하지만… 괜찮을려나. 가끔은 이 런 것도…. 단지 시끄러울 뿐이었지만,바보같이 웃어댈 뿐이었지만, 왠지 그 런 것에 흐뭇한 기분을 느끼는 가인이었다. ' 그래. 이런 기분… 분명 오랫만이야. ' 가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문을 열었다.하지만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만나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버렸다. " ......마리‥선배? " " ......음. " 그 곳에는 성마리가 긴장한 안색으로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인은 딱딱 히 굳은 안색으로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 " …무슨… 볼일 이시죠? " " 아… 집뜰이‥한다고 연락 받아서‥. " 마리는 그녀 답지 않게, 등 뒤에 작은 선물을 숨긴채 그것을 꼼지락 거리며 불안한 표정으로 땅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어제 그녀에게 한 행동은… 잘한 일이었을까…? 그녀 는 내가 고아라는 것을 몰랐었던 표정이었던 거 같았는데… 단지…단지… ' 단지 내가 화풀이했던 것 뿐이었을지도…. '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가인이었다. 가인은 더욱 딱딱해진 얼굴로 그녀에게 비아냥 거렸다. " 저, 피스 메이커에 가입했어요…. 그러니 더 이상 저 같은 고아한테 무리 해서 신경쓰실 필요 없어요. " " ......... " 마리는 가인의 말에 뒤에 감추고 있던 작은 선물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녀 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 집뜰이… 축하해…. " " ......... " " …그럼 이만. " 마리는 몸을 돌려 천천히 골목 저편으로 걸어갔고,가인은 그녀의 모습이 사 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가인의 뒤로 진우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 너에 대한 신상명세를 알고 있던 건 진 사령관 뿐이었어.그녀는 몰랐었어. " " ......... " 가인은 그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그 런 그의 태도에 진우는 한숨을 살짝 내쉰 후,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기 시 작했다. 진우가 집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나서야 가인은 메마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다구요. " 그렇지만…. 그렇지만…. 4월 10일. 언더 시티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 가인은 가벼운 속옷 차림으로 20분 내내 여러 가지 신체 검사를 받고 있었다.이쯤 되면 짜증이 날 법도 하 지만, 방송으로 들리는 남자의 여유있는 목소리와 말솜씨에 가인은 지루하지 않게 신체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 자자∼ 이제 마지막이에요,가인 군.전신 스캔을 할 거니까 가만히 그 기 계에 누워만 있으세요. >> " 여기요? " 가인이 몸을 눕히자,기계의 침대 부위는 둥그런 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 다. 곧이어, 스크린으로 가인의 전신이 스캔 된 모습이 표시되었다. 유리관 밖에서 그것을 바라보던 메디컬 센터의 총책임자, '닥터'는 가만히 중얼거렸 다. " 뭐, 건장한 10대 소년이로군요. 특별히 문제되는 곳도 없고,이 정도면 평 균 이상이네요. 1급입니다. " " 그럼 단련시키는 일만 남았으려나…. " 닥터의 말을 들으며 진우는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피스 그린, 정진우. 그는 최전방에서 뛰는 피스 대원이자, 피스 대원들의 훈련 교관이기도 했다. 그것도 격투기 전문이란 말씀이지∼ << 자,끝났습니다. 가인 군, 옷 입고 나오세요. >> " 아,예…. " 가인은 기지개를 펴며 기계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편의 유리창 너머로 닥터 라고 하는 하얀 연구복 복장의 남자와 정진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인은 옷을 챙겨 입으며 밖으로 나갔다. 닥터는 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자, 신검 결과는 지극히 양호해요. 하지만 약간의 영양 보충이 필요할 거 같군요. 고루고루 음식물들을 섭취해야겠어요. " " 예에…. " 하긴, 먹는 게 부실하긴 했지. 혼자 살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빵을 사먹는 게 빈번했으니까.그동안 위염에라도 걸리지 않은 게 기적이라면 기적 이랄까. 그때, 그런 가인에게로 진우가 히죽 웃어보이며 닥터에게 말했다. " 아아∼ 음식 문제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닥터. 최고의 전속 요리사를 붙여 놓았으니까. " " ......전속 요리사‥라구요? " 닥터는 진우가 말한 의미를 잠시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때마침 신체 검사실의 자동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들어왔다. 긴 금발 머리의 여인, 한시민이었다. 진우가 그녀를 가리키자,닥터는 그제서야 이해 를 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 음‥. 시민 씨의 요리라면 가인 군의 식단 문제는 해결되었군요. 그런데‥ 그럼 두 사람이 같이 산다는 소리입니까? " " 하하∼ 예에.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네요. " 진우는 닥터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시민에게로 달려가는 가인을 바라보았 다. 닥터도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넌지시 진우에게 물었다. " ......그럼, 가인 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겁니까? " " 아,그게∼ 왠지 얘기할 타이밍을 놓쳐 버려서… 그리고 시민,본인이 직접 소년에게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 " 음…. " 닥터는 걱정 반, 장난 반인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과연 가인 군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 지 상 당히 궁금하군요. " " …전 소년이 대성통곡을 하며 운다 쪽에 걸겠습니다∼ " " ......진우 군, 난 때로는 자네가 악마 같아 보일 때가 있어요. " 닥터와 진우는 서로를 마주보며 씨익 공모자의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전혀 듣지 못한 가인은 즐거운 표정으로 시민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민은 가인에게,자신이 들고 왔던 검은색의 옷가지를 건내주었다. " 자, 가인 씨. 지금 입고 있던 옷 모두 벗으시고,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 " ......예? 아,예에. " 가인은 시민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서 옷가지를 받아 들었다. 아,깜 짝이야. 뭐가 깜짝이냐구? 옷 벗으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는 거지.그나저나 이 옷은 또 뭐야? 가인은 옷을 펴서 들어 보았다. 뭐,뭐지… 이 디자인은….뭔 가 상당히 수상쩍은 생김새였다. 품이 넓어 보이지도 않았으며 마치, 잠수복 같은 느낌의 옷이었다. 가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민을 바라보았다. " 저… 시민 씨, 이건…? " " 피스 메이커의 전투복이에요. A.I 슈츠(Aura Increse suits)라고 하죠. 오 라 능력자의 힘을 3배 이상으로 끌어내주는 오라 증폭용 전투복이에요. " " 아,예에…. " 하지만 이 디자인은…. 가인은 시민의 말을 들으면서 암담한 표정으로 자신 의 손에 들린 A.I 슈츠를 바라보았다. 그래. 오라를 증폭해주는 것 까지는 좋 다구… 그런데, 그런데 이 옷은 다름아닌… ' 타이즈란 말이지! ' 온 몸에 찰싹 달라붙는 타이즈라니! 그것도 여자가 입으면 그나마 섹시하기 라고 하지… 남자가 입으면 그 무슨 꼴불견이냐?! 아니, 상체는 그나마 넘어 간다고 하더라도 그 하체 부위는 용납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엉덩이가 그대 로 드러나는 건 그렇다 쳐! 하지만,하지만 남성의 중요한 부위(?)가 튀어나 오는 것이다!! …헉, 상상해 버렸다…. 어,어쨋든 이딴 거 난 죽어도 못 입어! 가인은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저기… 시민 씨,이,이걸 정말… 입어야 하나요? " " 그럼요. …왜요,가인 씨? 입기 싫으세요? " " 아,아니 그건 아니고…. 그 디자인이… " " 디자인 참 맘에 들죠? 그죠? 전 이 옷 한번 보고 그대로 반해버렸다니까 요. 가인 씨도 어서 입어보세요. 잘 어울릴 거에요. " " .........예. " 가인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그래. 타이즈이긴 해도, 관절 부위에 이 상한 철판 같은 것이 붙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중요한 부위도 이제보니 철판으로 가려지는 형세였다. 조,좋아. 이 정도라면야… 시민 씨의 얼굴을 봐서라도…. 가인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옷을 입었다. 그런 가인에게 시 민이 나머지 옷 가지도 건내주었다. " 자, 여기 A.I 글러브하고 A.I 부츠도 신으세요. A.I 글러브는 오라 파워 를 물리력으로 바꿔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A.I 부츠는 오라를 응축 시켜 도약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줘요. " " ........한… 세트… 인가 보죠? " "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통칭 A.I 컴플릿(Complete) 세트라고 부르죠. " " ......... " " 아, 그리고 여기 헬맷도. 오라 능력자의 집중도를 높여서, 오라 사용을 원활히 해주는 장비죠. " 그 뒤로 시민이 뭐라고 더 말했지만, 이미 가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쨋든, 가인은 그날 A.I 컴플릿 세트를 장착했다. 훗날, 가인이 말하길 그 것은 사랑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시민은 A.I 컴플릿 세트를 완 전 장착한 가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어머, 역시나 잘 어울려요,가인 씨. " " 아,그런…가요. " 왠지 자괴감이 드는 가인이었다. 난… 여자의 말이라면 이런 꼴사나운 몰골 도 할 수 있는 놈이었구나…. 그런 가인의 뒤로 정진우와 닥터가 다가왔다. 진우는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지었다. " 키가 커선지 뽀대나는 걸,소년∼ " " 저기… 진우 씨도… 전투 때에는 이런 복장을 하죠? " " 응. 저번에 보지 않았어? 내가 그 옷 입고 몬스터와 싸우는 거. " " .........훗. " " …뭐냐. 그 동질감과 동정심이 묘하게 섞인 웃음은? 어쨋든, 오라를 발동 시켜봐. 그러면 너의 오라 패턴에 맞춰 전투복의 색이 바뀔 거야. " " 예? 색이… 바뀐다구요? " " 그래. 어서 오라를 써봐. " 진우의 지시에 맞춰, 가인은 심호흡을 한 후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래. 대충 이런 느낌이었던가? 가인은 자신이 오라를 썼을 때의 상황들을 떠 올려 보았다. 재영이 쓰러졌을 때, 그리고 유가인,자신의 몸을 괴물의 공격 에서 보호하려고 했었을 때. 가장 최근에 오라를 사용했던 것은 그 진 사령 관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열 뻗치게 만들었을 때였다. 처음에는 오라를 쓴다 는 개념이 막막했었지만,점점 오라를 쓰면 쓸수록 요령이 생기는 것 같았다. 막혀 있는 수도꼭지를 연다는 심정으로 천천히… " 엇?! " 가인은 나지막히 탄성을 터뜨렸다. 천천히 자신의 A.I슈츠가 검은색에서 푸 른 빛을 띄기 시작하는 것이었다.예전처럼 푸른 오라의 기운이 몸 주위를 떠 돌지는 않았지만,오히려 이 옷을 통해 오라가 안정되게 정착하는 것 처럼 느 껴졌다.그런 가인의 모습에 닥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가인 군, 자네의 오라 패턴이에요. 그 색이. " " 이 색이요? " 푸른 빛을 띈 A.I 슈츠. 시민은 방긋 웃으며 가인에게 말을 건냈다. " 오늘 부로 가인 씨는 피스 블루(Piece Blue)가 된 거에요. 축하해요. " " 아…. " 이것이 나의 오라 패턴. 블루…. 가인은 담담히 자신의 푸른 빛이 나는 A.I 슈츠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게 나의 오라 패턴이란 말이지. 그런 가인의 모 습에 진우와 시민, 닥터는 흐뭇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오라의 실체를 알게 된 감명 깊은 순간인 것이다. 마음껏 감동하게 놔두자.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가인은 한숨을 내쉰 후, 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 그럼 이제 이거 벗어도 돼죠? " " 응? " " …이런 걸 입고 싸웠다간 몬스터에게 맞아죽는게 아니라 수치심에 죽을지 도…. " 그런 가인의 중얼거림에 세 사람은 침묵했다. 별로 감동적이지 않은 모양인 데…. 뭐, 사람마다 개인의 차는 있는거니까…. 어쨋든, 진우는 서둘러 옷을 벗을려는 가인의 행동을 제지했다. " 아,그거 벗을 필요 없어. 손목에 시계같은 게 달려있지? 그걸 OFF로 돌려. " " 예? " 벗을 필요가 없다니. 그게 뭔 소리야? 가인은 머리를 갸우뚱 거리며, 진우 의 말대로 시계를 조작했다. 그러자 순간, 가인이 입고 있던 A.I 컴플릿 세 트가 거짓말 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마치, 공기 중에 녹아들듯 A.I 컴플 릿 세트는 사라지고 가인은 속옷차림이 되어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화 들짝 놀란 가인이 몸을 가리며 소리질렀다. " 으악?! 이게 뭐야?! " 진우는 그런 가인의 외침이 질문으로 들렸는듯, 자신만만하게 이 알 수 없 는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후후, A.I 컴플릿 세트는 오리하르콘의 기능으로 미세 분자 입자 상태로 착용자의 몸 주변에 흩어져 대기 중에 숨어있지만, 일정 주파의 신호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이것으로 비상 시,재빠른 착용이 가능하며 미 세 분자 상태로 존재 시 착용자에게 어떠한 불편도 끼치지 않는다구. " " 그,그런 건 미리미리 설명하란 말이에요! 어쨋든, 제 옷이나 줘요!! " " 어,그래. "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진우가 건내주는 자신의 옷을 챙겨 입었다.슬 쩍 시선을 들어 시민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가인과 시선이 마주 치자 평상시 처럼 방긋 웃을 뿐이었다. 아,죽고 싶다… 이게 왠 망신이냐. 가인은 이 상 황에 치를 떨며 진우를 노려 보았다. " …일부러 늦게 말했죠? " " 훗. 한 번 겪어봐야 다시는 실수를 안하지. " " 그러니까 결국 일부러 말 안했단 소리잖아∼!! " 가인은 그런 능청스러운 진우의 태도에 이를 갈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때, 모든 형광등이 꺼지며 붉은 색의 비상 경보등이 켜졌다. 그와 동시에 울 리기 시작하는 사이렌 소리. -비잉비잉비잉비잉… " …뭐,뭐죠? 이 소리는? " 가인은 자신이 달려들었는데, 어느새 인지 진우의 헤드락에 걸린 상태에서 이와 같은 주변의 변화에 질문을 던졌다. 그의 말에 진우는 굳은 안색으로 가인에게서 헤드락을 풀며 답했다. " …습격이지. 이계의 침략자들의. " " 4월 10일, 19시 45분. 15구역에서 와프 입자 수치의 변동이 일어났다. " 다섯 명의 피스 대원들은 진 사령관의 무감각한 목소리를 들으며, 눈 앞에 펼쳐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유가인은 굳은 안색으로 주위의 긴박한 분위기 를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또 다시…그 괴물들이 나타났다는 건가? 예전 에 몬스터들에게 겪었던 상황들을 떠올리자, 가슴이 쿵쾅거리며 떨리기 시작 하는 가인이었다. 그런 가인의 귀로 진 사령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앞으로 게이트가 열리기 까지 20분. 상황은 D+로 설정. 15구역에 위치한 반경 10Km 이내에 대피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철수하지 못한 민간인이 있을 지도 모르니, 각별히 주의하길 바란다. " " 예,피스-! " 대답과 함께 구호를 부치며 경례하는 피스 대원들.가인도 엉겹결에 같이 경 례를 붙였다. 하지만 그의 인상은 딱딱해져 있었다. 저런 남자가 나의 상사 라니. 진 사령관에게 경례를 붙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가인이었다. 후우‥ 하지만 여기는 군대라지? 좋아. 그 높으신 자리에 걸맞게 대졉해주지. 그나 저나‥ ' 나는 오늘은 구경만 하는 걸까? ' 가인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아직 제대로 된 훈련 조차 받지 못한 내가 실 전에 투입될리는 만무할테고. 그리고 무엇보다,앞전 시민이나 정진우 조차도 오늘은 견학 한다는 심정으로 편하게 있으라고 자신에게 말했으니까. 어쨋든 뭔가 느긋해진 기분이 된 가인에게 진 사령관이 말을 걸었다. " 피스 블루. " " …예? 아, 피스-! " 가인은 갑작스런 그의 부름에 뒤늦게야 경례를 부쳤다. 그런 가인을 무표정 히 바라보던 진 사령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자네도 출동하는 거니 정신 바짝 차리도록. " " .........예? " 가인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반문했다. 아니, 지금 뭐라고? 나,나도 출동 하는 거라니… 잠깐! 아직 훈련도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한 내가 출동한다고?! 가인이 기가 막혀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진우가 놀란 목 소리로 진사령관에게 말했다. " 사령관 님? 가인 군은 아직 제대로 된 훈련 조차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A.I 컴플릿 세트 적응 훈련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오라 능력도 파 악하지 못한 상태…. 실전 투입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 " 피스 그린. " " 예, 피스! " 진 사령관은 그런 정진우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출동이라고 했다. " " 그,그런! " 진 사령관의 명령에 가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길, 저 사람! 도대체 무 슨 생각으로! 가인은 진 사령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 도대체 이유가 뭐죠?!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날 실전에 보내려는 이유 가!! 죽으러 가란 소리에요?! 예!! " " ......피스 블루. 지금 이유라고 했나? " 진 사령관이 가인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런 그의 시선을 받자, 한순간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받은 가인이었지만, 이를 악물며 그의 시선을 맞 받아쳤 다.진 사령관은 두 손으로 깍지를 껴 자신의 턱을 받치며 낮게 말했다. " 내가 출동하라면 출동하는 거다. 명령에 이유란 불필요하다. " " .........!!! " " 알겠나? 내가 전에도 말했겠지.이곳은 아르바이트 하는 곳이 아니라고. " " ......... " 가인은 그런 진 사령관의 말에,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래. 기억하지! 날 고아라고 말했던 것도! 이 자식은 어떻게든 나를 사지에 밀어 넣을려는 속 셈이다. 아무리 얘기하고 소리쳐도 날 실전에 투입시킬 생각이라고! 그런 가 인의 귀로 진 사령관의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면 겁이라도 먹은 건가? " " .........!!!!! " 그의 말 한마디에 가인은 참고 있던 분노가 완전히 폭발해버렸다.가인은 진 사령관에게 소리쳤다. " 좋아! 출동해주지! 넌 그 자리에서 그렇게 멋대로 지껄이고나 있으라고!! " 그의 외침에 본부실에 모여 있던 모두의 시선이 가인에게로 모아졌다.진 사 령관과 가인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머리 속으로는 다음과 같 은 공통된 생각이 떠올르고 있었다. ' 완전히 콩가루다…. ' 어린애들 감정 싸움도 아니고…. 진 사령관의 옆에 서 있던 민수정은 쓴 웃 음을 지으며 진 사령관과 가인을 바라보았다. 어쨋든,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출동하게 된 피스 대원들. 그때, 막 문을 나설려는 가인을 진 사령관 이 다시 불러 세웠다. " 아, 한가지 말을 안해준 것이 있는데…. " " ......또 뭐죠? 이번에는. "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그런 가 인의 태도에 진 사령관은 무표정히 말했다. " 도망치지 못한 민간인이 있다면 확실히 보호하는 게 좋을 거야.저번에 자 네와 자네 친구가 몬스터를 조우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 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 " " ......명심해두죠. " 쳇, 그렇게 지시만 하느라 아주아주 편하시겠어. 가인은 그런 진 사령관의 말을 흘겨 들으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진 사령관의 말은 아직 끝 나지 않았었다. " 자네 친구, 박재영… 이라고 했던가? " " .........?!?! " " 몬스터의 정확한 존재를 알고 있는 민간인들이 왜 없는 줄 아나? 우리 쪽 에서 재빨리 손을 쓰기 때문이지. " 가인은 천천히 뒤를 돌아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재영과 자신이 나누었던 대화가 귓가로 울려퍼지듯 웅웅 거렸다. - 그래도 다행이다,정말. 난 그때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그런 괴물 한테 공격 당했었는데…. - 어? 괴물? 무슨 괴물? 설마… 설마… 가인은 떨리는 눈초리로 진 사령관을 노려보았다. - 재영아… 무슨 괴물이냐니… 너…. - 참,나∼ 하필이면 어제 우리가 쉬던 데에서 가스 폭발이 일어날 게 뭐냐. 현장 조사하던 경찰들이 병실에도 찾아왔었는데, 우리가 재수 없었데. 마 른 하늘에 벼락맞는 것 하고 비슷한 확률이래나,뭐래나….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재영의 모습. 그때는 단순히 사고의 휴우증으로, 정신 없던 와중이라서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었는데. 그것이 사실은… 피 스 메이커 쪽에서 손을 썼던 거란 말인가?!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런 가 인에게로 진 사령관이 조용히 말했다. " 민간인이 몬스터의 존재를 알아봤자 사회적 혼란만 일으킬 뿐이다. 몬스 터를 목격한 민간인들에게는 간단한 정신 조작을 취하지. 최면 같은… 그 런 것 말이다. " 가인은 이미 진 사령관의 뒷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내 친구, 재 영에게 손을 댔단 말이지! 그렇게 함부로 남의 기억을 조작하다니! 환하게 웃던 재영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 에휴… 뭐, 나만 재수 없었던 건가? 그래도 넌 이렇게 멀쩡하니까 말야. 하하하하∼ 가인의 가슴 속에서 분노가 폭발했다. " 그러니까 난! 당신들의 그런 '우리들이 정의다∼' 식의 제 멋대로인 방식 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 -큐우우우우웅… 피스메이커의 광속 기차 안.다섯 명의 피스 대원들은 A.I 컴플릿 세트를 장 착한 채 각자, 자신들의 장비를 정비하고 있었다. A.I 헬멧을 뒤로 넘긴 채 맨 얼굴로 가인은 창 밖을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가인을 바라보 던 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 이 상태로는 힘든데…. ' 동료 간의 신뢰는 조성조차 되지도 않았고,피스 메이커 자체에 대한 불신감. 훈련도 없는 실전 투입이라니.도대체 진 사령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일까. " ......... " 진우는 가인과 마리를 살펴보았다. 가인은 마리에게서 고개를 돌린채 창 밖 을 보고 있었고, 마리는 묵묵히 자신의 오라 소드를 정비하고 있었다. 아,분 위기 한번 싸∼하네. 좋아∼ 우선은 팀 동료 간의 단합이다! 진우는 마리와 가인에게 말했다. " 피스 레드, A.I 컴플릿 세트 사용법을 간단히 피스 블루에게 가르쳐 주도 록 하세요. 그리고 소년. 피스 레드의 설명을 자세히 듣도록 해. 발목 잡 고 싶지 않다면∼ " " .........예. " 마리와 가인은 서로를 힐끗 바라보다가 나지막히 답했다. 마리는 가인을 바 라보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사용법은 간단하다. 오라를 몸 주위에 천천히 돌리다가,사용 부위에 집중 을 시키면 되는 거야. " " ......... " " A.I 슈츠는 오라를 증폭시켜주는 '오리하르콘'이라는 정신 감응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여러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예를 들 어, 오라를 물리력으로 발산시켜 주는 A.I 글러브의 경우에는 맨 손으로 바위나 시멘트 같은 것은 간단히 박살 낼 수 있지. 그리고 A.I 부츠의 경 우에는 오라를 도약력으로 바꿔주기 때문에 5M 정도의 높이로 뛸 수 있어. 익숙해지기만 하면 10M 까지도 점프하는 게 가능할 거다. " " ......그 정도 높이까지 뛴다해도‥ 떨어질 때는 어떡하죠? " 마리의 말에 가인이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마리는 가인이 자신의 말에 반 응이라도 하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 오리하르콘은 오라의 영향으로 미세한 중력 조절까지 가능해. 그리고 A.I 컴플릿 세트 자체가 육체의 강도를 높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뼈와 근육 자 체가 강화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별 문제 없이 착지할 수 있지. " " ......... " " 그 밖에 궁금한 것은‥ 없나? " " ......... " 다시 대답이 없는 가인. 가인은 여전히 창 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고,마리는 그런 가인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런 둘의 모 습을 바라보던 진우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고, 옆의 시민이 웃음 지으며 그 에게 말했다. " …의도 실패‥ 인가요? " " 눈치 채셨으면 좀 도와주지 그랬어요? " 진우는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기차는 목적지인 15구역의 지하철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이트의 발생 예상 지점은 15구역의 외곽에 위치한 한적한 공사장 주변이 었다. 대피 명령이 떨어져서 인가? 공사장 주변에는 어떠한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거운 적막감. 그런 적막을 뚫으며 피스 대원들은 천 천히 공사장의 안으로 들어섰다. " …이쯤 되는 건가? " 진우는 자신의 시계에 표시되어 있는 장소에 도달한듯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 거렸다. 앞으로 게이트가 열리기 까지 5분 남았다. 슬슬 놈들을 반겨줄 준비 를 해야겠지. 진우는 손목의 무전기로 피스 메이커의 본부에 연락했다. " 오라 배틀 필드(Aura Battle Field) 전개 준비 완료. " << 피스. 10초 후에 전개됩니다. >> 오라 배틀 필드? 가인은 진우의 말에 시민에게 물었다. " 뭐죠? 오라 배틀 필드라니…. " " 주위에 몬스터에 의한 피해가 최대한 가지 않게끔 하는 장치에요. 일종의 감옥…이라고나 할까요? " " ......감옥? " 왠지 시민의 말에 더 알 수 없어지는 가인이었다. 그때, 시민이 하늘을 가 리켰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 껴 있던 구름들이 휘몰아치며 퍼지기 시작했다. 뭐,뭐지? 저 광경은?! 가인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뜰 때, 구름이 퍼진 그 하 늘 위에서 거대한 기류가 지표로 떨어져 내렸다. -부우우우우우웅… 번쩍. 거대한 섬광이 가인들과 공사장 주변을 순식간에 뒤덮었다.그리고 그 빛은 나타날 때 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가인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 주위를 돌아 보았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주위를 둘러싸고 있 는 공기의 느낌이 틀려졌다고나 할까. " 이,이건…. " " 위성으로부터 오라 필드를 떨어뜨린 거에요.이제부터 약 1시간 가량 동안 반경 5Km 이내까지 오라의 막이 퍼져 있어요. 몬스터는 이 방어막을 벗어 날 수 없죠. 게이트의 예상 위치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방법이죠. 이 안에서 몬스터와 결판을 내야 해요. " 시민의 말에 가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이제야 그녀의 감 옥 이라는 말이 이해가 갔다. 이렇게 하면 놈들은 도망을 못가겠구나. 그때 그런 가인의 귀로 진우의 장난끼 섞인, 하지만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들 준비해요∼ 손님이 오십니다! " -키이이이이… 그와 동시에 공간이 찢겨지는 소음이 공사장에 울려퍼졌다. 가인은 떨리는 가슴으로 앞을 주시했다. 그곳에서는 며칠 전 보았던 광경처럼, 커다란 원형 으로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중심이 심하게 일렁거리 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저 안에서 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 발버둥 을 치는 것 처럼. ' 나온다…! '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몬스터의 모습. 3M는 넘을듯한 거대한 거구의 짐승이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놈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날개를 펼쳐들자 그 크기는 5M를 간단히 넘겨버렸다. 저 괴물의 모습은 가인도 익히 알고 있는 동물의 것이었다.그것은 바로… " 박쥐?! " 어두운 밤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난 몬스터는 거대한 박쥐의 모습을 하고 있 었던 것이다. " 박쥐?! " 가인은 그 비상식적인 박쥐의 크기에 압도되어버렸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런 만화 같은 일이…!! -키에에에엑!!! 거대한 괴물 박쥐는 괴성을 지르며 날개짓을 했다. 거대한 광풍이 공사장에 휘몰아쳤다. 박쥐는 마치 거짓말 처럼, 그 거대한 몸을 가볍게 공중으로 띄 워 올렸다. " 그레이트 배트(Great Bat)! C-급 몬스터다! " 진우는 가인에게 주의를 주는듯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오라를 발동시켰다.그 의 몸에서 연녹색의 광채가 피어 올랐다. 가인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그레 이트 배트의 모습에 진우에게 소리쳤다. " 저대로 도망치면 어쩌죠?! " " 아니, 놈은 도망칠 수 없어…. " 진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 높이 솟아오르던 박쥐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 처럼 비틀 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아마도 앞 전 에 펼쳐두었던 오라 배틀 필드가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 듯 했다. -키에에엑! 그레이트 배트는 하늘이 막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재빨리 지표로 하강 하기 시작했다. 놈도 지상에 있는 피스 대원들이 자신의 적이라는 것을 인식 한듯 거친 몸놀림이었다. " 우,우와아앗! " 가인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그레이트 배트의 몸체가 가인을 스쳐지나갔다. 가인의 등 뒤로 싸늘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런 그에게로 마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 A.I 부츠를 써! 오라를 다리로 모아! " 마리는 가인에게로 재빨리 달려가기 시작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이 를 실전에 내보내다니! 저러다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인 것이 다! 마리는 자신의 오라 소드에 오라를 불어넣었다. 그녀의 오라 색은 레드. 붉은 기류의 검신이 오라 소드에 맺혀 올랐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마리의 몸이 가인에게로 하강하는 그레이트 배트에게로 수십 미터 뛰어 올 랐다. 마치 총구에서 튀어나오는 탄 같은 움직임.절묘한 타이밍! 이건 못 피 한다! 그때, 마리는 자신의 몸으로 밀려드는 충격파를 느꼈다. -위이이이잉!! " 캇! " 마리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반대로 튕겨 날아올랐다. 반사적으로 오라 를 모아 방어막을 펼쳐냈지만, 그 충격을 모두 완화시킬 수는 없었다. 거대 한 쇠망치로 복부를 얻어맞은듯 한 충격! 뭐였지?! 이건?! 이 충격은!! " 마리 선배!! " 그렇게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마리를 받기 위해 가인이 몸을 움직였다.그 녀의 말대로 오라를 발에 집중시키자, 순간 거짓말처럼 3M 이상을 도약할 수 있는 가인이었다. 아랫 도리가 서늘해지는 느낌! 가인은 이를 악물며 공중 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내었다. " 큭!! " 하지만 떨어질 때 지표를 헛디딘 가인은 신음을 내지르며 마리와 뒤엉켜 굴 렀다. 땅에 부딪힐 때 등부터 부딪혔는지 입으로 울컥 무언가를 쏟아낼 뻔했 다. 하지만 3M에 떨어진 것 치고는 거짓말 처럼 가벼운 충격이었다. 이 A.I 슈츠라는 것은 오라를 축적시켜 몸을 보호해주는 기능도 있는 것 같았다. 그 렇게 먼지를 일으키며 구른 가인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옆에서도 마 리가 오라 소드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괘,괜찮아요?! " " ......음. " 마리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듯 이를 악물며 그레이트 배트를 노려보았다. 앞 전 자신이 당했던 것은 아마도 놈의 초음파 공격 때문인듯 했다.박쥐가 어두 운 밤 하늘을 날아 다닐 수 있는 이유가 초음파를 퍼뜨려서 사물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고는 한다지만, 그런 초음파를 이런 식으로 물리적으로 행 사할 수 있다니….역시 놈은 3차원 계의 생물이 아닌 것이다! 그때,그런 둘 의 앞을 진우와 시민, 유리가 막아섰다. 진우는 흥미롭다는듯 그레이트 배트 를 노려보며 말했다. " 굉장한 초음파 공격이군요. 하지만 음파 공격이라면 우리도 질 수 없잖아 요, 피스 옐로우? " " …그렇내요. " 피스 옐로우,시민은 짧게 웃으며 그레이트 배트의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 다. 가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 시,시민 씨?!! " " 자자∼ 소년, 걱정 말고 구경만 하고 있으라고. 선배들의 전투 방법을. " 진우는 가인을 제지하며 여유롭게 말했다. 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분 명 시민 씨도 오라 능력자이지만!! 저런 거대한 괴물에게로 정면으로 다가가 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때, 앞으로 나섰던 시민이 천천히 두 손을 벌리며 입을 열었고 곧 아름다운 목소리가 공사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 이건‥ " 가인은 시민의 행동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 시민 씨가 하고 있는 것은‥ " 노래? " 그녀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가인은 한순간 주위가 조용해지고 그녀의 목소리만이 이 공간에 퍼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아름다운 노래 소 리. 그것이 정확히 노래인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사도 없이, 단지 아련 하게 들려오는 수백명의 합창같은 소리였다. 그런 시민에게로 그레이트 배트 가 날개짓을 하며 입을 벌렸다. 그레이트 배트도 초음파 공격을 시도한 것이 다. 예의 초음파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위이이이잉!! " 시민 씨?!! " 위험하다! 안돼! 가인은 시민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박쥐의 앞에 선 그녀의 뒷모습은 왠지 금새 부서질 것 같게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가인의 걱정과 는 달리 뜻 밖의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그레이트 배트의 초음파 공격은 순식간에 시민의 노랫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게 된 것이다. 시민의 목소리 는 분명 높았지만, 그렇다고 듣기 싫은 괴성이 아니었으며 귀에 거슬리는 소 음도 아니었다. 잔잔한듯 하면서도 뚜렷한 그 목소리가 가인의 귀에도 들려 왔다. ' 이것이 시민 씨의 오라 능력인가? 이것이‥. ' 가인은 왠지 모르게 시민의 오라 능력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그녀의 능력. 그것은 다름 아닌 그레이트 배트의 초음파에도 지지 않을 정도의 굉장 한 음파 공격이었던 것이다. 진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갓 보이스(God Voice). 지상의 목소리가 천상의 목소리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거겠지. " -키이이잇!!! 그와 동시에 그레이트 배트의 몸에서 충격파가 터져올랐다. 시민의 음파공 격이 그레이트 배트의 초음파를 뚫고, 괴물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사방 으로 터져오르는 녹색의 체액. 그리고 이 때를 노려 진우가 돌진할 준비를 하며 유리에게 말했다. " 피스 핑크, 놈의 사념에 노이즈를 일으켜주세요. 10초면 충분해요. " " ......... " 피스 핑크, 이유리가 진우의 부탁을 받아 오라 능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레이트 배트는 심하게 몸을 뒤틀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피스핑 크의 오라 능력 때문인듯 했다. 가인은 이 상황에 어리둥절해져 멍하니 앞 의 전황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큐우우우웅… 그때, 녹색의 잔상이 그레이트 배트에게로 날아들었다. 피스 그린, 정진우 였던 것이다. 가인의 앞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새에 50M 저편에 위치하고 있던 괴물에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녹색의 오라 기류가 그레이트 배트를 뚫 고 들어갔다. -퍼엉! 그리고 그 여파로 공사판의 모래들이 휘날려 올랐다. 가인은 마른 침을 꿀 꺽 삼키며 모래 먼지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곧이어 모래 먼지가 걷히고, 드 러난 그레이트 배트의 모습은 처참했다. 괴물의 배로는 커다란 원형의 구멍 이 뚫려 있었고, 마치 그 구멍을 뚫고 뒤로 나온듯한 형세로 정진우가 서있 었던 것이다.그 엄청난 광경에 가인은 할 말을 잊었다. -쿠웅‥ 천천히 바닥으로 그 육중한 몸을 쓰러뜨리는 그레이트 배트. 가인은 그 숨 이 끊어진 몬스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이것이 피스 메이커의 전 투 방법. 순식간에 협공으로 적을 쳐부수는 속전속결의 전투. 그런 가인을 바라보던 진우는 가볍게 웃으며 무전기에 입을 가져갔다. " 목표 제거 완료. 귀환하겠다. 피스. " << C-급 '그레이트 배트'의 생명 반응이 사라졌습니다. >> " .........음. " 짧은 갈색 쇼트 머리의 오퍼레이터,윤채영의 보고에 진 사령관은 조용히 고 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있던 민수정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진 사령관에게 말했다. "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요. " " 음. " 진 사령관은 묵묵히 응답할 뿐.그런 진 사령관의 태도에 민수정은 조심스런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 저… 하지만 왜 가인 군을 그렇게 무리해서 전투에 투입시킨 거죠? 사령 관 님 답지 않으신 태도였어요. 무사히 넘어갔으니 망정이지,만약 다치기 라도 했더라면…. " " ......... " 진 사령관은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 거렸다. " 실전에서 이 정도로 해냈으니, 훈련 받았을 때는 더더욱 자신감이 생기겠 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오라의 원천은 급격한 감정의 변화에서 나오 는 것 같으니…. " " 하지만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구요. " 민수정은 그런 진 사령관의 말에 살짝 꾸짖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조 금만 상황이 악화되었더라면 소년은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게 분명하다.분명 진 사령관의 이번 태도는 너무도 경솔했다. 하지만, 그런 민수정에게 진 사 령관은 나지막히 답했다. "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많지 않네. 알고 있겠지? " " ........ " 그의 마지막 말에 민수정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렇다.그들에게는 시간이 너무도 촉박했다. 재앙을 막아내기에는.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그 날을 대비 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려서는 안되었다. " …그렇군요. " 민수정은 어두운 안색으로 진 사령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끝으 로 본부실은 침묵에 접어 들었다.미션을 클리어한 오퍼레이터들이 뒷 정리를 하는 소리들이 두런 두런 본부실에 울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 때 아무도 예 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비잉비잉비잉비잉비잉… " .........?! " 진 사령관과 민수정은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스크린을 돌아보았다. 왜 다 시 비상 경보가 울리는 것이지?! 분명 적은 섬멸되었다. 그런데 왜…?! 그때 그런 둘에게로 오퍼레이터 윤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15구역에서 몬스터의 생체 반응 확인!! 새로운 개체입니다! >> " 그,그럴리가!! 몬스터는 섬멸되었잖아요?! 와프 입자의 수치도 변하지 않 았는데…!! " 민수정은 당황한 목소리로 진 사령관에게 소리쳤다. 진 사령관은 스크린을 쏘아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양동 작전… 인 건가…. " " …몸은 괜찮아요? " 가인은 어색하게 마리에게 물었다. 그녀는 앞전 그레이트 배트의 초음파 공 격에 직격당해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했지만, 지금은 언제 다쳤느냐는듯 태 연하게 서 있었다. " 음. A.I 슈츠 덕분에…. " 마리는 가인의 걱정이 고마웠는듯 살짝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가인은 그녀 의 시선을 다시 피해버렸다. 마리 선배가 다쳤던 건 자신 때문이었다. 괴물 의 공격에 당황하여 피하지도 못하고 있던 자신을 그녀가 대신 막아준 것이 다. 가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지만…. ' 나… 이렇게 치졸한 놈이었나…. ' 마리에 대한 감정이 쉽사리 풀리지 않는 가인이었다.분명,그녀가 잘못한 것 은 아무 것도 없는데…. 단지 다 나의 오해와 착각일 뿐인데. 가인은 이렇게 삐뚤게 감정을 표현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런 가인을 잠시 바라보던 마리는 그의 모습에서 한 소년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소중한 동생이었던… 하 지만 지금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는… ' 많이 닮았어…. ' 왜 이렇게 그와 가인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걸까. 자신에게 불평을 하며 화 를 내는 가인의 태도에서 그의 모습이 떠오른 것일까. 뭔가 다 받아주고 싶 고, 지켜주고 싶은… 그런 그리움의 감정…. -누나…. 소년의 음성이 마리의 귓가에 은은히 울려퍼졌다. 마리는 자신의 A.I 헬맷 을 뒤로 넘겼다. 그녀의 긴 포니테일 머리가 흘러내렸다. 마리는 조용한 시 선으로 가인의 뒷모습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얼마든지 화내도 좋아. 얼마든 지 투정부려도 좋아. 하지만… 하지만 이번만큼은… ' 지켜줄게. '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하는 마리였다. 그때, 그런 가인과 마리에게 진우가 다가오며 소리쳤다. " 자자∼ 상황 종료. 뒷 처리반이 올 때가 되었으니 슬슬 돌아가자구. " " 아,예…. " 그의 말에 대답하며 가인과 마리는 몸을 움직였다.진우는 그런 둘을 바라보 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럭저럭 잘 넘긴걸까…. 무엇보다 가인이 첫 실전 에서 무사했던 게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다. 실전을 먼저 경험했으니, 훈련을 받으면 그 만큼 자신감이 생길거야.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도 크게 없었던 거 같고…. 그때, 진우의 손목시계로 본부의 무전이 들려왔다. << 피스 그린! 피스 그린! 응답하라! >> " 아,피스! 무슨 일입니까? " 왜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를…. 진우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을 감지했다. 그런 그의 귀로 오퍼레이터의 다음 말이 천둥 처럼 떨어졌다. << 몬스터의 생체 반응 확인! 주의하길 바란다! >> " .........!! " 진우는 오퍼레이터의 무전에 황급히 앞전에 쓰러뜨렸던 그레이트 배트의 사 체로 시선을 돌렸다. 녹색의 체액을 바닥에 질펀히 흘리고 쓰러져 있는 그레 이트 배트. 움직일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놈은 아니 라는 소리인데… 설마…!! -키아아아악!! 순간, 가인과 마리의 뒤로 새로운 그레이트 배트가 괴성과 함께 모습을 드 러냈다. 진우는 이를 악물며 가인과 마리에게로 달려갔다. 이 자식! 앞전 놈 과 한 쌍으로 게이트를 통과해 온 건가?! 아니야! 분명 게이트는 하나였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해서!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레이트 배트는 가인에게로 입을 벌리며 공격을 준비 하고 있었다. 저 것은…! -위이이이잉!! " 초음파다! 피해!! " 진우의 외침과 동시에 그레이트 배트의 초음파가 가인을 향해 쏘아져 나왔다. 가인의 동공이 커졌다. 가인은 이를 악물며 오라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하 지만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해서 인지 티끌 만큼도 오라가 모이지를 않았 다. 피할 수 없어! 이대로는 죽는다!!! " 으아아아아앗!!! " -퍼어어엉----!!!! 초음파의 충격으로 가인의 주변에 있던 지표가 터져 올랐다. " 가인------!!! " 진우가 휘날리는 모래 먼지 속에서 소년을 찾으며 부르짖었다. 하지만,유가 인의 모습은 지표가 움푹 내려앉아 붕괴를 일으킨 저 밑바닥으로 사라져있었 다. 끊임 없이 피어오르는 먼지로 그 밑의 광경은 아무 것도 보이질 않고 있 었다. 그것이 진우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쿠르르르르… 다시 무너져 내리는 지표면. 개자식!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나 보군! 진우 는 이를 갈며 마치 조소하는듯한 표정의 그레이트 배트를 노려보았다. 놈은 그런 진우의 반응이 즐겁기라도 한듯 기분나쁜 웃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망할 짐승 놈이! " 피스 옐로우, 놈의 초음파를 견제해주세요! 피스 핑크는 앞 전과 같이 놈 에게 마인드 브레이크(Mind Break)를 걸어주고요! " " 피스-! " 시민과 유리가 재빨리 그레이트 배트를 포위하는듯한 포메이션으로 놈을 둘 러쌌다. 도망칠 곳은 없어! 죽는 거다! 진우는 앞전과 같이 놈에게로 대쉬할 준비 자세를 취했다. 시민의 음파 공격과 유리의 마인드 브레이크가 터지는 순간, 내가 네 놈의 몸체를 꿰뚫는다. 그때가 네 놈의 최후다! -후우우우웅… 하지만 그레이트 배트는 피스 대원들의 전법을 눈치라도 챈 듯 재빨리 상공 으로 날아올랐다. 진우는 인상을 굳혔다.그래봤자 그 위로도 네 놈이 도망갈 곳은 없어! 네 놈 같은 이차원 생물에게는 쥐약인 오라 배틀 필드가 쫙 깔려 있단 말이다! 그렇지만 그레이트 배트의 목표는 진우의 생각처럼 단순한 도망이 아니었다. 녀석은 앞 전의 동족보다 배는 영리한 녀석이었다. 놈이 노렸던 것은 다름아 닌… -위이이이잉! 그레이트 배트는 다름 아닌 자신의 바로 밑으로 초음파를 발사한 것이다.그 무지막지한 초음파에 지표가 터져 오르며, 또다시 모래 먼지가 피스 대원들 의 시야를 가렸다. 이 자식! 이걸 노린 건가!! ' 놈… 앞 전, 자신의 동족이 우리의 손에 당할 때 잠자코 구경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냐! 이런 식으로 우리의 전법에 대응하다니…! ' 완전히 놈에게 허점을 찔려버린 진우는 쓴 맛을 느끼며 몸을 낮췄다.이자식! 어디냐!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그때, 유리의 뒤로 떠오르는 거대한 그림자! 모래 먼지를 헤치며 튀어나오는 그레이트 배트였다! " 위험해!! " 진우는 유리에게 고함을 치며 순간, 무서운 속도로 대쉬했다.유리의 몸으로 몸통 박치기를 시도하려는 그레이트 배트. 저런 녀석과 정면으로 부딪혔다간 인간의 몸은 산산 조각이 나버릴 것이다! " .........!! " -후우우웅… 유리를 감싸안으며 땅바닥으로 쓰러지는 진우. 그의 등 뒤로 그레이트 배트 의 발톱이 스치며 지나갔다.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A.I 슈츠의 보호 덕분 에 등이 갈라지는 사태는 막아냈지만, 뼛 속 까지 파고드는 충격을 맛본 진 우였다. 진우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대로 계속 누워있다간 놈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군. " 진우는 모래 먼지로 둘러쌓인 주변의 상황에 낮게 중얼거렸다. 놈은 초음파 로 주변의 대상을 파악한다.시야가 가린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승산이란 없는 것이다! -위이이이이잉! 소름끼치는 초음파의 소리! 진우는 이를 악물며 유리를 껴안은채 번개 같이 녹색의 잔상을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있던 지표면이 음 푹 파여서 터져 나갔다. 이런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초음파 공격이라니! 최악의 상황이다! 그때, 또다시 터져나오는 초음파 공격. 마치 도망치는 진 우와 유리를 쫓아오기라도 하는듯 연속으로 그레이트 배트의 초음파 공세가 펼쳐졌다. 진우는 이런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도 다음과 같이 투덜거렸다. " 숨이라도 고르면서 쏴라, 이 망할 놈‥! " 한편, 초음파로 인해 무너진 지표면 아래. 가인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 렸다. 몸이 무거웠다.이제보니 주변의 흙 속에 몸이 반 쯤 파묻혀 있는 상태 였다. 가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 ......어떻게 된 거지‥? " 가인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분명, 그레이트 배트의 초음파를 정면으로 맞았 던 것 같은데…. 하지만 자신의 몸 상태는 그럭저럭 양호했다.흙투성이가 된 것을 빼면 별 다른 문제가 없었다. 가인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가 곧 자신 의 몸 위로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누구지? " .........?! " 긴 포니테일의 머리가 가인의 코 끝을 간지럽혔다. 가인의 동공이 점점 커 져갔다. 마치 자신을 감싸듯이 쓰러져 있는 그녀. 가인은 그녀의 이름을 떨 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 …마,마리 선배? " 어떻게 된 거야? 선배의 이런 모습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가인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덮혀 있던 흙 부스러기가 우수수 밑으로 떨어 져 내렸다. 가인은 재빨리 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가인 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읏…!?! " 그녀의 두 팔은 마치 찢겨져 나간 것 처럼 너털너털 해져 있었다. 붉게 물 들어 있는 손. 뼈가 산산 조각이라도 난 것 처럼 그녀의 손가락은 손바닥에 간신히 붙은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런 마리 선배 의 모습은?!! 그녀의 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서진 오라 소드의 파편으 로 보이는 조각들이 그녀의 A.I 슈츠 사이에 군데 군데 박혀 있었다. 그 모 습에 가인은 전신의 힘이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앞전의 상황이 주 마등 처럼 가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우와아아앗!! 그레이트 배트의 초음파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이는 가인 자신. 하지만 순간, 그의 앞으로 난입하며 오라 소드를 휘두르는 마리의 모습. 붉은 오라 의 막이 그녀의 앞으로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배리어의 생성은 너무 늦었 던 것이다. 초음파의 공세는 사정없이 오라의 막을 뚫고 그녀의 몸을 찢어 발겼다. " ......... " 왜…. 도대체 왜…. " ......마리…선배. " 어째서 날 보호한 거에요? 왜 나같은 녀석을 막아준다고 이,이런 몸이 되어 서…. 가인의 눈에서 눈물이 맺혀 올랐다. 마리의 새빨갛게 물든 두 팔에 다 시 시선이 가자 가인은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 난 선배에게 심하게 되하기만 했는데… 그렇게 못되게 굴기만 했는데… 그런데 선배가 왜 이런 모습이 되 어야 하는 거지? 왜 나같은 녀석 땜에…. -뚝… 가인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흙투성이가 된 마리의 얼굴로 떨어졌다. 마리 의 눈꺼풀이 힘겹게 떨리며 올라갔다. 희미한 그녀의 시야에 가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사‥했던 거야? 가인은 별다른 상처가 없는 모습인 것 같았다. 마리는 메마른 입술로 살며시 미소지었다. 다행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 도대체 왜 그랬던 거에요‥ 마리 선배‥ 도대체 왜‥. " 가인의 울음끼 섞인 목소리에 마리는 힘겹게 손을 올려 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 주려고 했다. 하지만 뼈가 으스러진 그녀의 손은 애뢻이 가인 의 엉뚱한 얼굴 부분만 건드릴 뿐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가 인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가인은 그런 마리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소리쳤 다. " 도대체 왜 나같은 녀석 땜에‥ 왜‥ 왜‥! " 왜 이런 상처투성이의 모습이 되어서‥! 가인은 다시 한번 뜨거운 눈물을 토해내며 흐느꼈다. " 미안해요.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요. " 미안해요. 선배한테 화내고 소리쳐서 미안해요. 괴롭혀서 미안해요. 도대체 난 왜 그녀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던 걸까? 왜? ' 편했어‥. ' 말 없이 조용한 마리였지만,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에는 나를 배려해주는 그 녀의 따뜻한 마음씨가 있었다. 가인은 그런 그녀에게서 누나와 같은 향수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화내고 소리쳤다. 마치 부모에게 반항하는 꼬마 같이‥. 난 그녀에게 투정을 부렸던 것이다. 가인은 굵은 눈물 줄기를 연신 흘렸다. 그런 가인에게 금새라도 끊어질듯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인‥ " " .........? " 가인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식이 희미한 듯 점점 가라앉는 눈동자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넌‥ 내가‥ 지켜줄게…. " " 마리 선배…. " 그 말을 끝으로 마리는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잠자기라도 하는듯 편안해진 그녀의 표정에, 가인은 다급히 마리에게 소리쳤다. 왠지 이대로 잠 들어 버리면 두번 다시 그녀가 깰 거 같지 않았다. " 마리 선배?! 마리 선배!! " 안돼. 이대로는 마리 선배가 죽겠어! 어떻게든 해야…! 상처를 지혈시켜야! 당황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가인.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반드시 살 려야 한다. 그녀에게 용서를 빌 것들이 많았다. 제대로 된 사과라도 해야 한 다! 그러니 눈을 뜨란 말이에요, 마리 선배!! " 가인 씨? " 그때, 가인의 뒤로 피스 옐로우 한시민이 내려서며 그를 불렀다. 가인은 반 가운 마음과 다급한 마음에 그녀에게 소리쳤다. " 시,시민 씨…! 마리 선배가‥마리 선배가! 이대로는 마리선배가 죽겠어요! " " 진정해요,가인 씨. 그녀는 죽지 않아요. 저에게 맡기세요. " 시민은 그런 가인을 달래듯이 말하며,천천히 그의 품에 쓰러져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의 상태는 마치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심각 했다. 시민은 가인에게서 마리의 몸을 건내받았다. 시민은 자신의 A.I 슈츠 속에서 작은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주사기의 마개를 빼내고, 바늘을 마리의 팔에 살며시 찔러 넣는 그녀. 가인은 그런 시민의 행동을 말 없이 주시했다. 시민은 천천히 그런 가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포션(Potion)이라고 불리우는 피스 메이커 용 비상 구급약이에요. 재생력 을 30%이상 높여주고, 상처 부위를 응고시켜주죠.피를 많이 흘린 게 걱정 이지만, 치사량까지는 아닌 것 같으니까 안심해도 될 거에요. " " 그,그럼‥ 마리 선배는 죽지 않는 거죠? 그렇죠?! " 가인은 눈물을 흘리느라 빨갛게 부어오른 얼굴로 걱정스럽게 시민에게 소리 쳤다. 시민은 살며시 웃으며 그런 가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래요. 그러니 이젠 그만 울어요. " " 아,예‥옛. " 가인은 그제서야 얼굴을 붉히며 눈물을 훔쳤다.하지만 그는 연신 마음 속으 로 소리쳤다. 다행이다. 마리 선배, 정말 다행이야. 가인은 시민과 함께 정 신을 잃은 마리를 부축하며 흙투성이 인 구덩이 속에서 빠져 나왔다. 하지만 그때, 그런 그들에게로 거칠게 환호하며 달려드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키에에에엑!! 바로 그레이트 배트였던 것이다. 모래 먼지가 걷히고 거세게 하강하며 달려 드는 그레이트 배트. 녀석의 목표는 상처 땜에 피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마 리였다. 시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모래 먼지 속에서 진우 들이 녀석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몸통 박치기라도 할려 는 걸까?! 거세게 하강하는 그레이트 배트를 보며 시민은 부축하고 있던 마 리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때, 그런 시민과 마리의 앞을 막아서는 한 소년. " ........가,가인 씨?! " 가인이었던 것이다. 가인은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점점 지상으로 하강하 는 그레이트 배트를 노려보았다. ' 저 놈이 바로 마리 선배에게 상처를 입힌 녀석‥. ' 용서할 수 없어… 용서할 수 없어… 용서할 수 없어!! 가인의 A.I 슈츠가 푸른 오라 빛을 더더욱 진하게 뿌렸다.가인은 천천히 오 른 손을 들어올렸다. 거센 오라의 기류가 그의 팔에 집중되어 모여들기 시작 했다. 마치 주위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이며 회오리치는 오라의 기류. 가인의 무의식이 그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이대로 이 주먹을 휘둘러라. 네 눈 앞에 있는 저 괴물을 향해 있는 힘껏 휘둘러 버려! " 으아아아아아앗!!! " 가인은 기합을 내지르며,달려드는 그레이트 배트의 몸으로 주먹을 내찔렀다. 그와 동시에 가인의 손에 맺혀있던 푸른 오라의 기류가 휘몰아치며 그레이트 배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키아아아아악!! -퍼엉! 그레이트 배트의 단발마 비명과 함께 가인의 주먹에서 쏘아져 나간 오라의 회오리는 괴물의 배에 커다란 구멍을 내며 관통했다. 하늘 높이 뿌려지는 녹 색의 체액들.그레이트 배트는 중심을 잃으며 가인의 옆을 스쳐 지상에 그 몸 을 처박았다. '쿠웅' 하며 울리는 육중한 소리. 그리고 그레이트 배트는 두 번 다시 그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 하아… 하아… 하아… " 가인은 여전히 주먹을 내찌른 자세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온 몸이 식 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어떻게 한 거지? 내가? 괴물을 쓰러뜨린 건가? 가인 은 앞전의 상황들을 떠올렸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거 지? 무슨 배짱으로… 만약 조금만 잘못되었더라면…. 가인은 몸을 부르르 떨 었다. 그런 가인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그를 안심시키는 정진우. 가인은 화 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다가 안도하고서는 천천히 뻗고 있던 주먹을 내렸다. 진우는 담담히 본부에 무전을 치기 시작했다. " 여기는 피스 그린. 상황 종료. 귀환하겠다. " 그렇게 소년의 첫번째 실전은 무사히 그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삼 일이 지났다. -똑똑… 언더 시티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가인은 조심스럽게 한 병실의 문을 두드렸 다. 곧 방 안에서 한 여성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십시오. " 아무리 들어봐도 여자가 쓸만한 말투가 아니란 말이야.가인은 쓴 웃음을 지 으며 병실의 문을 열었다.병실의 침대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이 가인을 바라보 며 약간 놀란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유가인? " " 예에. " 가인은 천천히 그녀가 앉아 있던 침대로 걸어갔다.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저지하며 가인은 침대 곁에 있는 한 의자에 앉았다.가인은 마리의 상태를 살 펴보았다.얼굴이 좀 수척해진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상처도 볼 수 없었다.가 인은 그녀에게 천천히 말을 건냈다. " 많이 좋아지셨네요. " " ......음. 수술 받고 연이틀 동안 포션 신세를 지고 있었다. " 포션이라고 하면… 그때, 그 시민 씨가 사용했던 비상 의료약 말인가? 가인 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 그 약… 효과가 정말 좋내요. 이렇게 상처 하나도 없이… " " B-급 몬스터 '트롤(Troll)'의 재생 성분을 채취하여 만든 것이지.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도 이어 붙일 정도로 그 효과가 탁월하다. " 트롤? 그건 또 뭐야? 그리고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라고…. 뭔가 상당히 등 골이 써늘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가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마리의 손을 바 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손은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가인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여 낮게 중얼거렸다. " 다행이에요. 정말…. " " .........응. " 한동안 가인과 마리는 아무 말 없이 다른 곳을 쳐다 보았다.그런 정적 속에 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가인이었다. " 미안‥했어요,선배. " " .........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채 그녀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대답이 없 는 그녀. 하긴… 화가 많이 났겠지. 이렇게 사과하는 것 자체가 뻔뻔한 거지.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마리는 잔잔 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인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화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할 말을 잊은 가인. 다시 병실은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마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아,저기… 이거 받아. " " ......... ? " 마리는 천천히 침대 곁에 있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인에게 내밀었다. 가인은 영문을 모른채 그것을 받아들었다. 목걸이었다. 작은 검은색의 수정 이 박혀 있는 목걸이. 하지만 가인이 그것을 받아들자, 수정의 색깔이 푸른 빛을 띄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는 가인. 그런 가인에게 마리가 설명하기 시 작했다. " 오라에 따라 빛깔이 변하는 목걸이야. " " ......... " " 걸고 있는 사람을 지켜준데…그거. " " .........예에‥.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근데 갑자기 이걸 왜…. 그때 가인의 머리로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며칠 전 집뜰이를 할 때 찾아왔던 그녀. 그리고 뒤에 뭔가를 숨긴채 우물쭈물하던 선배의 모습이 떠 올랐다. 그럼 이거…. 그런 가인에게 마리가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 집뜰이 선물‥. " " ......... " 가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말 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목걸이를 목에 걸 었다. 수정이 푸른빛을 발하며 빛나기 시작했다. 가인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 고마워요,선배. " 병실의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마리와 가인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제 4 화 검과 소녀 完> 豫告 - 저 아이, 마음을 읽는다지? - 기분 나빠. - 재수 없어. 침묵하는 소녀. 아이는 말을 자꾸만 잊어 간다. - 이,이제 오는 구나‥. 자신을 겁내는 엄마. - ........... 기분 나쁜 동물 마냥 보듯 하는 아빠. 아이는 말을 자꾸만 잊어 간다. 제 5 화 마음 속으로 우는 아이. 지금, 아이가 가인에게 마음을 열려고 한다. 이유리: 오빠‥ 고마워‥. -=-=-=-=-=-=-=-=-=-=-=-=-=-=-=-=-=-=-=-=-=-=-=-=-=-=-=-=-=-=-=-=-=-=-= 오라전대 ＰＩＥＣＥ ＭＡＫＥＲ 第 5 話 마음으로 우는 아이 =-=-=-=-=-=-=-=-=-=-=-=-=-=-=-=-=-=-=-=-=-=-=-=-=-=-=-=-=-=-=-=-=-=-=-= " 4월 10일 20시 5분. 15구역에서 C-급 몬스터 '그레이트 배트(Great Bat)' 타입이 등장. 첫번째 개체는 전투 개시 10분만에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뒤이어 나타난 두번째 개체에 고전…20시 55분에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 민수정의 보고에, 진 사령관은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받치며 스크린을 주 시하고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그레이트 배트라 명명된 몬스터의 자료 그림들 이 올라오고 있었다. 진 사령관의 옆에 앉아 있던 닥터는 안경을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 새로운 케이스군요. 분명 게이트의 반응은 하나였고, 그 게이트를 통해 들어온 몬스터 또한 한 마리. 그럼 나머지 한 놈은 어디서 등장한 걸까요? " " ......... " 진 사령관은 그런 닥터의 말에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그런 사령관을 바라보 던 닥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는 있습니다. " 그의 말에 민수정 역시 굳은 표정으로 닥터를 주시했다.닥터는 말을 이었다. " 두번째 개체 또한 게이트로 들어온 것. 하지만 녀석이 들어왔던 게이트는 첫번째 개체가 들어왔던 게이트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 "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닥터의 말에 민수정은 이해를 못하겠다는듯 반문했다. 그런 수정의 말에 닥 터는 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 와프 수치의 변화는 한 번 뿐. 그렇지만 게이트는 두 개였다. 이 말은 무 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두 개의 게이트는 동시에 열렸다는 것입니다. " " .........!! " 닥터의 놀라운 가설에 본부실의 모든 이들은 침묵을 지켰다.지금껏 수 없이 몬스터들과 싸워왔지만,게이트가 동시에 두 개가 열린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 다. 그 말에 민수정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 드디어 다중으로 게이트를 여는 방법을 찾아낸 걸까요? " " …모르죠.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로부터 2주가 지난 지금까지 몬스 터의 습격이 없었던 걸로 미루어, 게이트를 동시에 여러 개를 여는 것은 놈들에게도 상당한 무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놈들은 실험을 해본 것이겠죠. " 실험…. 닥터의 그 표현은 이차원의 생물, 몬스터들을 지적 능력을 가진 고 등 생물체로 인정한다는 또다른 표현이었다. 무거워지는 분위기. 닥터는 침 중한 목소리로 진 사령관에게 말했다. " 이제 인정할 때가 온 것 같군요. 놈들은 진화하고 있습니다. 서서히 경험 을 쌓아가면서 말이죠. " " ......그렇군. " 마침내 진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그는 스크린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말을 꺼 냈다. " 아니면 놈들의 우두머리들이 조금씩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던지…. " 第 5 話 마음으로 우는 아이 어느덧 4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4월 25일, 한성 고등학교 1학년 3반의 교실. 가인은 자신의 책상에 업드려 졸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완 연했다. 따뜻한 봄 햇살과 함께 즐기는 낮잠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지금은 수업 시간이고, 그것도 체육 시 간이라는 것이었다. -따악! " 으앗!! " 정확히 가인의 머리를 후려치는 충격 하나! 가인은 난데 없는 통증에 비명 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누,누구야? 잠자고 있는 사람의 머리를 후려 패다 니! 누가 이렇게 몰상식한 짓을?!! " 어떤 놈이얏?!! 어떤 자식이…! " 가인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1학년 3반의 교실에 울려퍼졌다. 가인은 씩 씩 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가득히나 피곤해 죽겠는데,그것도 머리를 맞고 깨 어나서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어떤 자식인지,잡히면 죽여주마! 하지만 그 때, 가인은 자신의 등 뒤로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가 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잘 돌아가지 않는 목을 돌렸다. 아, 난 이럴 때 돌아 봐야만 한다는 게 서글프더라…. " 나다. " 가인의 등 뒤에서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그를 쏘아보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1학년 3반,가인의 담임이자 체육 교사인 '하지연'이었다.그녀는 상당히 열받았는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껌 씹듯 질겅질겅 거리며 씹고 있었다.지 연의 저런 태도는 그녀가 '노처녀, 시집 안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즉, 최고로 열이 받았다는 얘기. 가인은 그런 그녀의 험악한 표 정에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 끄아아아아아아아악-------!! " 1학년 3반 교실에서 한 불쌍한 소년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 아야야…. " 쉬는 시간. 가인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 진짜 너무하네…. 학생 이 낮잠 잘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그렇게 무식하게 목을 졸라대냐. 가인 은 정확히 10분 동안 지연의 '고릴라 목조르기'에 걸려 무산소 호흡을 해야 만 했었다. 그런 가인을 연민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재영이 말했다. " 그러게 왜 저 노처녀 수업 시간에 낮잠을 자는 자살 행위를 하냐? " " 아아… 너무 피곤해서‥. " 가인은 여전히 퀭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앞전, 지연에게 당한 가혹 행위 땜 에 낮잠으로 풀던 피로가 더 가중되었다. 그런 가인의 안색을 살펴보던 테레 이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 가인아, 너 혹시 어디라도 아픈 거니? 하루 종일 잠만 잤잖아. " 가인은 앞전 시간 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 내내 수업이란 수업은 잠으로 시 간을 보냈다. 쉬는 시간에도 움직이지 않고 자고,점심 시간에도 밥만 억지로 먹듯 먹고 자고. 문제는 이런 현상이 벌써 며칠 째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지연이 화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 응? 아냐. 그런 거.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하지만 그의 속 마음은 이랬다. ' 차라리 아팠으면 좋겠다,진짜‥. ' 그런 가인의 모습이 더더욱 안스러워 보였는지, 테레이아는 가인의 손을 마 주 잡았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놀라는 가인과 1학년 3반의 남학생 일동. 테레이아는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로 가인에게 말했다. " 무리하지마.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 " .........!!! " 그런 테레이아의 대담한 말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가인. 그에 비례하여 남학 생들의 질투 파동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 저 자식,우리의 테레이아에게 저런 말까지 하게 하다니‥! ' ' 금발의 미인하고도 동거한다던데‥! ' ' 저 자식은 남자의 적이다! ' ' 우리들의 천적! ' ' 놈이 있는 한 우리에게 미래란 없다! ' 가인은 그런 녀석들의 반응에 한 숨을 내쉬었다.아아, 제발 여기서 더 피곤 한 상황은 생기지 말았으면 하는데…. 이봐, 테레이아! 난 너의 그 말 한 마 디 한 마디에 이렇게 떨면서 살아야 한다구….왠지 모르게 자신의 신세가 한 심해지는 가인이었다. 가인은 재영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분명,이 녀석도 눈 에서 불을 켠 채… 어,어라‥? " 박재영? " 가인은 재영을 바라보았다.재영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가인의 어깨를 짚으며 천천히 말했다. " 가인아, 너 혹시‥ " 그런 재영의 태도에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역시, 너 밖에 없구나.날 걱 정해주는건. 분명 내가 이것 저것 아르바이트 하는 줄 알고 걱정하는 거지? 재영은 유일하게 가인이 힘들어 하는 사정을 이해해주는 고마운 친구 이기도 했다. 가인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 아냐‥. 나 별로 그런‥ " " 시민 씨와 밤에 무슨 짓이라도 하는 거냐?! " 재영의 난데 없는 외침. 가인은 정확히 그 시간 부로 박재영이란 인간에게 배신감에 가까운 실망감을 느꼈다. 제,제길‥! 고마운 친구는 커녕 개뿔이‥! 그때, 그런 재영의 말에 남학생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시민? 누구야, 그거? " " 누구긴! 가인이와 동거한다는 금발의 미인! " " 아,아닛! 그럼 밤에 그녀와 무슨 짓을‥! 서,설마‥!! " " 남녀가 한 집에 살면 모르겠냐?! " " 쿠오오오오오!! 부,부럽다‥아니! 용서할 수 없다!! " " 유가인, 넌 역시 우리와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운명이다! " " 이 배신자!! " 그러니까 왜 이렇게 되는 거냐고‥.가인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노 려보는 녀석들의 반응에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그때,가인은 자신의 손 을 붙잡고 있던 테레이아의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들리는 테 레이아의 음산한 속삭임. " …밤에 무슨 짓을 하는 건데? 응? " " ......... " 피로 120% 가중. 가인은 그대로 쓰러져 영원히 잠들고만 싶었다. 사실, 가인이 피곤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모든 학교의 수업을 마치고 도, 또 다시 수업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잠시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으랴아아아앗! " 가인의 보호구를 낀 발차기가 진우에게 날아들었다. 진우는 가볍게 뒤로 스 텝을 뛰며 그 공격을 피해버렸다. 진우는 순간, 번개 같이 주먹을 가인에게 내찔렀다. " 가드가 내려갔잖냐,소년∼! " -퍼억! 가인은 정확히 진우의 스트레이트에 얼굴을 얻어맞고 바닥에 뻗어버렸다.눈 앞에서 별이 돌아가고 있었다.카시오페이아,세페우스,안드로메다,페가수스… 참, 많기도 하지. "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냐, 가드를 눈까지 올리라고. " " 하,하지만… 허억… 허억‥ 지치다 보니‥. " " 실전에서도 죽으면, '저 지쳐서 죽었어요∼' 하고 변명할 거냐? " 진우는 쓰러진 가인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가인은 몸을 숙이며 숨을 몰아쉬 었다. 입고 있던 도복은 땀으로 질펀히 젖은지 오래였다. 그런 소년을 바라 보며 진우는 씩 웃음을 지었다. " 그래도 요 2주일간 많이 늘었어. 반응 속도도 꽤 좋아지고 말이야. " " …스무 번 이상 땅바닥에 때려 눕혀놓고 그런 말해봤자 소용 없다구요. " 가인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벌써 2시간째였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 는데…. 가인은 땀범벅으로 녹초가 된 몸을 일으키며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언더 시티 유레카의 안에 위치한 연무장. 대충 상황 을 보면 알겠지만 격투기 훈련 시간이었다.피스 대원들 중 공격계 계열인 대 원들은 매일 의무적으로 2시간 씩 몸을 단련시켜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보 조계인 시민과 유리는 그 모습을 보이질 않고 었었다. 마리 또한 공격계였지 만 그녀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도장에서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 자, 그럼 이상으로 오늘의 격투기 훈련은 끝∼ " 진우는 그런 가인의 눈치에 씩 웃으며 훈련을 끝냈다.그제서야 연무장의 바 닥에 드러 눕는 가인. 으아∼ 죽을 것만 같다…. ' 매일 이 짓을 하니 학교에서 안 자고 어떻게 버텨…. ' 가인이 최근 들어 자주 조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피스 메이커의 훈련에 들어가자, 가인은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처음 며칠 간은 이 강도 높은 훈련 때문에 하루 세 번 씩 코피를 쏟기도 했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다. 그런데 겨우 2시간 훈련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지칠 수 가 있는 거냐고? " 자, 그럼 다음은 오라 훈련 시간이다. 10분간 휴식 시간 줄테니까 샤워하 고나서 A.I 슈츠를 착용하도록∼ " 훈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오라 훈련. 지금은 단순히 초보 단계이기 때문에 A.I 슈츠의 사용법 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진우와 가인은 각각 녹색과 푸른색의 전투복을 입고 대치해 있었다. 진우는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자, 어제까지 A.I슈츠에 대한 건 거의 다 가르쳐줬다고 해도 무방해.그러 니 오늘은 실전으로 총 연습을 해보자. " " ......실전. " 가인은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또 일방적으로 얻어 맞으라는 소 리 아냐? 그런 가인에게 진우가 씨익 웃으며 소리쳤다. " 자∼ 정확히는 도망치는 연습! 열심히 도망쳐봐! " " 너,너무해!! " 순간, 진우가 가인에게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예전,그레이트 배 트와 싸울 때 같은 그런 초인적인 빠르기는 아니었지만 가인에게는 충분히 빠 르게 보이는 진우의 움직임이었다. -퍼컹! 진우의 오라가 실린 펀치가 연무장의 충격 흡수 벽에 꽂혔다.가인을 노린 편 치가 헛 맞은 것이다. 가인은 A.I 부츠를 이용한 점프로 공격을 피해 진우의 뒤로 내려섰다. 진우는 씨익 웃으며 소리쳤다. " 제법인데, 소년∼ " -푸확! 그러면서 동시에 뒤로 발차기를 날리는 진우. 가인은 다시 점프로 공격을 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우가 노린 것이다. 진우는 어느새 가인보다 더 위로 날아올라 가인의 헬맷에 드롭킥을 먹였다. -퍼컹! " .........?! " 하지만 두 주먹으로 가드를 하면서 막아내는 가인. 진우는 감탄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 휘우- 좋아.가르친 보람이 있다! " 그러면서 공중에서 몸을 틀어 섬머 솔트 킥을 가인에게 먹이는 진우였다.결국, 가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지상에 처박혔다.조,조금도 봐주는 게 없잖아.앞 전 먹었던 음식물이 입으로 쏠리는 것을 참아내며 가인은 이를 갈았다. 그런 가인에게 다시 달려드는 진우의 공격. " 자자! 더 막아봐! 더 피해봐! " 신이 난 진우의 외침과 함께 가인은 다섯 발의 주먹을 더 맞았다. 만약, A.I 슈츠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맞았다면 갈비뼈는 서너대 부러질 정도의 충격 이었다. 제,젠장! 이런 게 인간 샌드백이구나…! 가인은 잠시 진우의 공세가 멈칫한다 싶을 때, 몸을 돌리며 진우의 얼굴 쪽으로 돌려차기를 넣었다.하지만 채 발이 진우에게 닿기도 전에 가인은 등에 타격을 느끼며 땅바닥에 다시 쓰러 졌다. 미연에 돌려차기를 저지해버리는 진우였다. 진우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 했다. " 기회가 올 때는 빠르고 공격 거리가 제일 짧은 기술을 넣으라고. 그렇게 동 작이 큰 돌려 차기나 하니까 계속 자빠지는 거잖아. " " 제,젠장!! " 가인은 소리를 지르며 진우에게 달려 들었다. 진우는 쯧쯧 거리며 그런 가인 에게 소리쳤다. " 전투 중에 흥분은 금물! " 진우는 가인의 주먹을 옆으로 피하며,그대로 가인의 몸을 잡아 연무장의 벽으 로 집어 던졌다.'쿠웅'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힌 가인은 천천히 바 닥으로 미끄러져 쓰러졌다. " 자자∼ 그렇게 무턱대고 달려드니깐 그렇게 되는 거야.좀 더 신중하고 좀 더 냉정하게, 하지만 과감하게∼! 그것이 내 격투 모토다. 알겠나,소년∼? " " ......... " " 소년? " " ......... " 대답이 없는 가인. 진우가 가인의 헬맺을 열어 젖히니, 가인은 거품을 문 채 눈을 뒤집고 있었다. 피스 메이커의 가혹한 훈련은 오늘도 그렇게 소년의 기 절로 그 끝을 맺어야만 했다. -웅성웅성‥ 현재 시각 10시. 가인은 사람들로 가득 찬 26구역의 지하철 매표소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 사람 진짜 징그럽게 많네. 원래 이런 시각에는 한산해 야 하는 거 아냐? 가인은 투덜거리며 북적북적 모여드는 사람들을 피해,가게 문을 닫은 지하 롯데리아 부근으로 걸어갔다. 가인은 표를 넣고 지하철 안으 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이 사람들은 이 늦은 시각 까지 집에 안 들어가고 뭘 하는 걸까‥. ' 평상시,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들어와 지쳐 자기 바빴던 가인은 이런 시간 에 돌아다니는 수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26구역에 사람이 많은 이유는 이 곳이 물이 좋기 때문이었다.여러 유흥가와 나이트가 있는 이 곳은 삐까번쩍한 도시도 한 몫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밤에 불러들이는 것이 다. 가인은 자신의 앞으로 걸어가는 여자들의 야한 차림에 얼굴을 붉히며 시 선을 돌렸다. ' 낮에는 저런 사람들 없던데…. ' 이 밤을 불태우기 위해 쌔끈하게 입고 놀러나온 그녀들이었지만, 가인이 그 런 걸 알 턱이 없었다. 그는 의외로 집 학교 아르바이트 밖에 모르던 모범생 (?)이었던 것이다. 물론,지금이야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대신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드려 맞는 훈련들을 받아야만 했다. 앞 전까지만해도 진 우에게 내던져지고 실신했었던 가인이었다. 그 아픈 경험을 떠올리자 가인은 머리가 지끈 거리며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 아아… 그나저나 늦으시네‥. "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쪼그려 앉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집주인이자 동거 인인 시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인이 훈련을 끝마치는 시각이, 시민이 일을 끝내는 시각과 엇비슷하기에 같이 집으로 들어가자고 시민이 부탁한 것이다. 물론, 가인이야 그 부탁을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최근 요 며 칠간 지하철에서 그녀를 만나 집으로 같이 들어가는 가인이었다. ' 헤헤‥ 시민 씨와 밤거리를‥. ' 꼭 데이트 같잖아, 이거?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실실 웃었다. 에‥ 그런데 시민 씨가 하는 일이 뭐냐구? 가인은 시민이 하고 있는 일이, 그녀 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은 다름 아닌 바로 피아노 강사! 그 고운 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노래까지 가르치신다고 한 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자 가인은 괜스레 흐뭇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진짜 어울린다. 시민 씨의 피아노 강사 모습도 꼭 보고 싶다‥. 그때, 그런 가인의 눈에 막 지하철 상가를 걷고 있는 한 낯익은 얼굴의 소 녀가 보였다. 어,저 아이는? 가인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그 아이의 이름을 떠올릴려고 애썼다. ' 에,또‥ 이유리‥ 라고 했지? ' 소녀는 바로 피스 메이커의 피스 핑크 '이유리'였던 것이다.벌써 같은 팀이 된지 2주가 넘어섰지만,가인은 아직도 유리와 말 한 번 제대로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뭐, 인사를 해도 무시하지. 봐도 모른 척하지. 무엇보다 그 아이는 자신에게 입 한 번 제대로 연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유리가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것 조차 보지 못했던 가인이었다. ' 어쨋든, 이런 늦은 시각에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지? ' 가인은 시간을 바라보았다. 10시 15분.아무리 봐도 초등학생이 혼자서 돌아 다닐 시간은 아니었다. 집에서 걱정할텐데‥. 분명 저 아이가 이 지하철 역 에 있는 걸로 보아, 저 아이의 집도 26구역인 것 같았다. 가인은 머리를 긁 적였다. ' 모른척 할 수도 없고… 우선 인사나 해볼까나…. ' 뭐, 또 무시당할려나‥. 가인은 유리에게로 걸어가며 소리쳤다. " 유리야, 안녕? " " ......... " 그런 가인의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는 유리. 가인은 유리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낮추며 그녀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 여기야. 여기. " " ........ " 무심한 눈초리로 빤히 가인을 바라보는 유리. 역시나 말이 없다. 아,또‥이 거‥ 무시 당한 거지?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런 가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리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자신의 길로 가 기 시작했다. 그런 유리의 뒷 모습에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역시나. " 뭔가 나 미움 받을 짓이라도 한 건가? 가인은 유리와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뭐, 별 다른 일은 없었는데‥ 아니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무시 당했었다. 가인은 피스 메이커의 본부에서 처음으 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냈을 때도 무시당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아무 표정 변 화도 없고 말도 없는 인형 같은 아이. " ......... " 가인이 멍하니 있는 사이, 유리의 모습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리의 자취를 쫓았다. 괜찮을려나.혹시 길이라도 잃어버린 건 아닐까? 뭐, 26구역에 자신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그런 건 아닐테지만…. 그래도 초등학생인 것이다. 6학년이라고 했던가? ' ......신이 하고… 같은 나이…구나.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여동생 신이의 얼굴을 떠올려 버렸다.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니 좀… 닮았구나….키 도 작고 얼굴도 하얀게 비슷했다. 하지만 신이는 저렇게 까지 무뚝뚝하지 않 았는데…. 언제나 웃으며 자신을 부르던 신이였었다. -와이∼ 오빠∼! ' .......그만두자. ' 가인은 고개를 흔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또 이딴 생각을. 그만두자. 그 만둬. 가인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며 다시 유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 다. 왠지 걱정이 되었다. 아, 그대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그런 가인의 등을 두드리며 부르는 이 하나. " 가인 씨, 뭐해요? " " ......엣?! 아, 시민 씨! "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옅은 회색빛 여성용 정장을 입은 한시민이 웃으며 그의 뒤에 서있었다. 시민은 자신의 시계를 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가인에게 말했다. " 많이 기다렸죠? 좀 늦어버렸내요. " " 아,아니요. 괜찮아요.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고. " 가인은 손을 저으며 웃었다. 와, 역시 예쁘다. 시민 씨는…. 가인은 주위의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는 것을 느꼈다. 가인은 그런 그들의 시선에 뿌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왠지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 버리네. 이런 아름다운 사람과 한 집에 사는 사이란 말이지. 나는! ' 비록 집주인과 하숙생 사이지만…. '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가인에게 시민이 물었다. " 그런데 가인 씨, 아까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으셨어요? " " 예? 아, 그… 유리‥를 잠시 만나서‥. " " 유리? 이유리 양 말이에요? " 시민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고,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 예. 늦은 시간인데도 이런 데를 돌아다니고 있더라구요. " " ‥그랬군요. " 고심하는 표정의 시민. 그런 시민을 잠시 바라보던 가인은 곧 자신이 궁금해 하던 생각을 그녀에게 물었다. " 저, 그런데 시민 씨‥ 그 아이,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 " 예? " " 아니, 저‥ 맨날 인사를 해도 무시하고 가고 그래서‥ 하하…. " 가인은 어설프게 웃었다. 에구, 결국 나 씹히고 있소∼하고 말하는 것 같아 서 무진장 찝찝하네. 그런 가인을 잠시 바라보던 시민은 조용한 목소리로 답 했다. " …못해요. " " ......예? " 가인은 너무나도 작은 시민의 목소리에 반문했다. 뭘 못한다뇨? 시민은 다 시 한번 또렷하지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유리 양‥ 말을 못한다구요. " 유리는 종종 걸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가정 집 앞에 멈춰 섰다.어두운 밤 거리를 근처의 가로등 하나 만이 비춰주고 있었다. 유리는 집을 바라보았다.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안 주무시는 구나. " ......... " 유리는 벨을 누르려다가 곧 포기하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러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는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 갔다. 두런 두런 TV에서 들려오는 쇼 프로그램 소리. 그리고 부엌에서 나는 접시 소리. 곧, 부엌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는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엄마. 언제나 처럼 집으로 들어오는 유 리를 반겨주는 엄마였다. 하지만‥. " 이,이제 오는 구나‥. " 유리의 엄마는 웃으며 유리에게 말을 건냈다. 묘하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 그랬다. 그녀의 엄마는 언제나 유리에게 말할때는 목소리를 떨었다. 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쳐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 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불안한듯한 그녀의 눈빛. 유리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무서워하고 있다. - 내일 날씨는 먹구름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겠습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 유리는 잠시 그곳을 바라보았다. 말 없이 유리 에게서 등을 돌려 쇼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아빠가 보였다. 그는 자신의 어 린 딸이 이렇게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자 신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유리는 알고 있었다. 아빠는 나를 싫어하고 있다. " ......... " 유리는 무표정히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글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어차피 아빠와 엄마는 내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 유리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 입었다. 벗은 옷을 곱게 개어 문 주변에 놔두 었다. 이렇게 해놓으면 엄마는 내 방에 들어오지 않고도 빨래감을 가져갈 수 있다. -풀썩 유리는 천천히 침대에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의 느낌. 별과 달이 그려져 있 는 그녀의 이불은 편했다. 하지만 너무도 추웠다. 편하지만 춥다‥. 마치‥ 그녀의 부모님들 처럼. " ......... " 유리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째깍째깍... 다음 날, 이유리가 다니는 청송 초등학교. 6학년 3반.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 분명, 저 앞에서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유리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메마른 정적 속에서 시계 소리 만이 유별나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 따위‥ 유리는 개의치 않았 다.별 상관 없는 일이었다. 단지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는 것 같아서 따분할 뿐이었다. " ......... " 수업을 마치면, 언더 시티에 들렸다가, 집으로‥.언제나 변함 없이 반복되 는 일상이었다.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얘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친구도 없 는‥ 그런 반복되는 하루. 유리의 주위에는 같이 수업을 듣는 클래스메이트 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시선 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한 일이었다. " ......... " 유리는 살며시 그 큰 눈을 감고 고개를 책상에 파묻었다. 잠을 자면 시간 이 빨리 지나갈려나‥. 어차피, 이렇게 수업 시간에 잠을 청해도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도,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이 아이들도‥. 그들은 자신을 꺼려했다.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는 그 런 그들을 비웃었다. 이런 조그마한 여자 아이 하나가 무섭다는 거지? 하하 유리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그녀의 세상이 하얀색으로 물들어 갔다.귓 가로 울리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더더욱 명확히 들릴 뿐이었다. 그 소리가 유리의 정신을 귀찮게 긁어대고 있었다. 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시끄러워‥. 세상이 하얀색으로 물들어 갔다. - 나아∼ 최근들어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됐다? 뽐내듯이 자신의 단짝 친구에게 말하는 유리 자신. 소녀의 말에 주위의 친 구들은 야유를 하며 소리쳤다. - 그런게 어딨냐? 말도 안돼∼ - 니가 초능력자야? 모자를 뒤집어 쓴 개구장이 남자 아이와 짧은 단발 머리의 여자 아이가 소리 쳤다. 그래도 한때는 친했던 아이들이었지…. 유리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어 린 시절의 자신은 그런 친구들의 말에 화를 내며 소리쳤다. - 진짜라니깐! 나 알 수 있다니깐∼ - 헤헹! 거짓말! - 거짓말 아냐! - 그럼 증명을 해봐∼ 유리는 분개하며 그런 남자아이에게 소리쳤다. - 좋아. 그럼 내일 시험 문제가 뭔지 선생님 마음을 읽어서 가르쳐 줄게! - 어어∼ 진짜? - 진짜! 유리는 빽 소리를 치며,아이들에게 자신이 마음을 읽고 알아낸 시험 문제를 가르쳐 주었다. 유리는 그 뒤로 집으로 달려왔다.소녀는 이불을 뒤집어 쓰며 어서 내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마음을 읽 을 수 있다는 것을.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음 날, 역시나 시험은 그녀가 선생님의 마음을 읽었던 그대로 출제되었다. 자신과 아이들은 모두 100점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감탄을 하며 유리 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 이야∼ 대단하다! 어떻게 한거야? - 진짜 마음을 읽는 거야? 그런 아이들의 반응에 으쓱해지는 유리. 소녀는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습에 동정을 금치 못했다. 바보. 넌 상처를 입을 거야‥.분명히. 그때, 유리에게 한 아이가 다가와 소리쳤다. 아, 저 아이 이름이 뭐였더라‥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분명,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던 여자 아이였다.그 아 이는 언제나 100점을 맞았었는데, 이번에는 반 아이들 모두가 100점을 맞자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아이는 유리에게 소리쳤다. - 너어∼ 거짓말 하지마! 선생님 몰래 답안지를 몰래 본 거지? 그렇지?! - 아냐! 나 답안지 같은 거 보지 않았어! - 바보야! 사람 마음을 읽는다니, 그게 말이나 돼! 이 거짓말쟁이야! - 아냐! 나 거짓말쟁이 아냐! 유리는 화가 나서 그 아이에게 소리쳤다. 유리의 마음 속으로 아이의 사념 이 밀려들어왔다. 아이는 질투하고 있었다. 유리를 미워하고 있었다.가슴이 막혀 왔다. - 나 선생님 한테 일러 바칠 거야! 아이는 그대로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을 불러왔고, 선생님은 화난 얼굴로 유 리를 다그쳤다. - 애들이 다 100점을 받았길래 이상하다 했더니, 유리 네 짓이었구나! 어떻 게 답안지를 훔친 거니?! - 아,아니에요… 저 답안지 같은 거 훔치지 않았어요. 마음을 읽었을 뿐이 라구요. - 그게 말이나 되니?! 선생님한테 계속 거짓말 할거야! 유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치는 선생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저편에서 자 신을 비웃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오기가 치밀었다. 반드시 믿게 만들어주겠어. 난 마음을 읽을 수 있다구! 유리는 선생님의 마음을 읽기 시 작했다. 어지러운 사념. 선생님의 마음 속은 어두운 회색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약 혼자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한테로 가버렸다.그래서 홧김에 다른 남자와 사귀어버렸는데, 그 남자 또한 결국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를 택했다. 나 란 여자…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걸까… 싫증나는 여자인 거야? 혼란한 기억 과 감정들이 유리에게 밀려 들어왔다.유리는 그 난폭하고도 어지러운 생각들 에 현기증이 났지만 꾸욱 눌러 참았다. - 싫증… 나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걸까… 조용히 중얼거리는 유리의 목소리에 소리치던 선생님이 흠칫 몸을 떨며 소 녀를 노려보았다. - 뭐,뭣…?! - 상태 씨… 왜 날 버리는 거야? 그 계집이 그렇게 좋았어? 난 자기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는데 날 이렇게 헌 걸레짝 취급을 해도 되는 거야?! - 무,무슨…! - 윤철 씨도 똑같아. 결국은 날 버렸어. 그렇게 내가 좋다고 해놓고서는 지 겹다고 말하다니… 그래. 남자들은 다 똑같아. 금방 한 여자에게 싫증을 내고 다른 여자를 찾지…. - 그,그만! - 아니면 내가 잘못된 걸까? 내가 성적인 매력이 그렇게 없어? 내가 그렇게 재미 없는 거야? 내가 그렇게 지겨워? - 그만해에에에엣!! '철썩' 유리의 뺨을 내려치는 선생님의 손바닥. 그녀는 실성한 눈빛으로 연신 유리 의 뺨을 내리쳤다.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의 비명이 청송 초등학교 에 울려퍼졌다. 그래. 그것이 시작이었어…. 그렇게 최초로 한 사람의 마음을 헤집으며 그 속까지 뒤져보았던 이후로, 유리는 점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능력에게 고통을 받았다. 자신의 그 마음을 읽는 능력. 그것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 다.마음을 읽기 싫은 데도, 다른 사람의 사념이 멋대로 읽혀졌다. 수 없이 많은 사념의 덩어리. 그것들은 한 치의 쉴 틈도 없이 유리의 생각을 어지럽 혔다. 유리는 자신이 경험하지도 못했던 세상의 더러움과 사람의 추악함을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수 십 번 토하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능력을 뽐내며 소리치던 그 시절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저주스러웠다. 자신의 이 능력이 저주스러웠다. 미치도 록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그 사건이 발생했다. - 유리야,엄마 다녀올게∼ 유리의 엄마는 최근들어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야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 다.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빠와 싸우는 엄마의 모습도 자 주 볼 수 있었다. - 매일 그렇게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 도대체 그 꼴을 해가지고선! - 전 맘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나요?! 옷도 맘대로 못 입어요?! - 매일, 유리 혼자 집에 놔두고서 뭐 하는 거야?! 바람이라도 피는 거야! - 누,누가…! 그리고 유리 문제라면 당신도 할 말이 없어요! 집을 비우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 잖아요! - 난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일하고 있어! 유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빠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 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 아닐거야. 아닐 거야. 나… 최근에는 능력을 잘 조절하게 되었잖아. 이제 사람의 마음 같은거 읽지 않을 수 있어! 유리는 아빠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빌었다. 하지만 의심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 었다. 엄마는 정말 바람을 피는 걸까? 살짝 마음을 읽어보면 안될까? - 안돼! 안돼! 읽으면은. 유리는 절대로 다시는 사람의 마음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 했었다. 더구나 가족의, 엄마의 마음은 더더욱 읽어서는 안된다. 유리는 사 람의 마음 속에 감춰진 추악한 면모를 몇 번 씩이나 보았는지 모른다. 그리 고 몇 번 씩이나 실망을 했는지도 모른다. 또 다시 그런 실망을… 그것도 가족에게서 느낄 수는 없어! - 좋아. 유리는 그런 마음을 읽는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외출하는 엄마의 뒤를 밟 기로 결심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거야. 그래서 사실을 확인하면 더 이 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엄마는 분명 바람 같은 거 피는 게 아닐 거야! 유리의 엄마는 한 찻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뒤이어 들어오는 남 자 하나. 하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유리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아빠의 절친 한 친구이자 사업 동료. 유리는 의심의 기색을 풀며 안도했다. 그래….엄마 는 바람을 피는 게 아니었어. 다행이다. 다행이야…. …하지만 그것은 단지 유리의 순진한 착각이었을 뿐. - 아아… 더, 더… 강민 씨! 음탕한 신음 소리. 끈적끈적한 감정의 소용돌이. 유리는 엄마와 아빠의 친 구가 들어간 호텔 방 앞에서 그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문을 열지 않아도 엄 마의 사념과 남자의 사념이 유리의 머리를 한껏 헤집고 있었다. 유리는 비 틀거리다가 옆의 벽을 짚고 바닥에 토하기 시작했다.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 이 떨어졌다. 유리의 머리 속으로는 엄마의 쾌락과 욕망이 정신 없이 밀려 들어 오고 있었다. 이딴 거 알고 싶지 않은데!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만 마음을 읽을려고 해도 멈춰지지 않았다. 제발! 그만해! 이딴 거 알고 싶지 않아!! 그만해!! - 우웩…웩… 한참을 토했다. 방에서 들려오던 신음 소리도 차츰 가라 앉았다. 하지만 유 리의 마음은 한 없이 차가워졌다. 슬픔이 가시자 차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엄마에게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다. 용서할 수 없어. 나와 아빠를 놔두고… - 용서할 수 없어. 유리는 근처의 공중 전화에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지친듯한 메 마른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 아빠. - 아… 유리 구나. 무슨 일…. - 14구역 사거리 밀러 모텔 103호실. - ..........뭐? 유리의 갑작스런 말에 당황하는 아빠의 목소리. 아빠의 어지러운 사념이 유 리의 머리로 밀려든다. 유리는 현기증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 아빠 친구 이강민… 엄마… 같이 있어. - 유,유리야? 무슨 소리니?! 거기 어디야?! 유리는 아빠의 외침을 뒤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유리는 천천히 전화 박스의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스르륵. 소녀는 땅바닥 에 주저앉았다. 가슴 한 곳에 구멍이 뚫려 버린 것 같았다. - ......... 그 후, 모텔로 찾아온 아빠와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단지, 유 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예전의 가족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 이었다. 그 사건으로 아빠와 엄마는 유리의 이런 능력을 알게 되었고,그리고 그녀를 점점 멀리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무서워하기 시작했고, 아빠는 나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어떡하다가 이렇게 되버린 걸까? 왜 이렇게 되버린 거야? 유리는 수 없이 자신에게 질문해 보았다. 다 자신의 저주받은 능력 때문이었 다.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 왜 이런 게 자신에게 있는 걸까? 도대체 왜! - ........ 학교에서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 ........ 집에서도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아빠도, 엄마도. - ........ 소녀는 점점 말을 잃어갔다. 병원의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에도 유리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무표정한 얼 굴. 절대로 열리지 않는 입술. 창백한 얼굴. 유리의 부모는 아이가 말도 하지 않고, 마음을 읽는다는 것을 알자 결국,유리를 정신 병원으로 보낸 것이다.유 리는 촛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 신을 이런 곳에 보낸 부모에 대한 분노도, 원망도… 그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소녀는 자신을 찾아온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 이유리 양이죠? …피스 메이커에서 왔어요. 대 몬스터 특무 기관, 피스 메이커. 그곳에서 왔다고 하는 한 여자. 그녀의 이름은 민수정 이라고 했다. 수정은 유리에게,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은 오라 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몬스터들과 싸울 수 있다 고 얘기했다. - 피스 메이커에… 들어오겠어요? 유리는 수정의 물음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변할 것은 없었다. 몬스터니 피스 메이커니… 그런 것도 상관없었다. 단지, 이 저주받은 능력이 쓰일 때가 있다니… 그것이 궁금했을 뿐이다. 유리는 마음 속으로 자신의 오라 능력을 비웃었다. - 자, 원대로 마음껏 써줄게. 어디 한번 멋대로 해봐…. 유리는 그 날 부로 피스 대원의 피스 핑크가 되었다. -웅성웅성… 26구역의 지하철 역. 유리는 학교를 마치고 줄곧 이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사념이 휘몰아치고 있다. 유리는 이제,이 정도의 사념들 쯤에는 패닉을 일으키지 않고,각각 갈무리를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 다. 더 이상 오라 능력에 휘둘리지 않는 유리였다. 더 이상,녀석은 나를 괴 롭힐 수 없어. -쏴아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독한 폭우였다.일기 예보 대로 비는 사정없이 이 도 시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폭우 속에서 밀려드는 한기에 유리는 몸을 부들부 들 떨었다. 추웠다. " ........ " 역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온 몸이 흠뻑 젖기 시 작했다. 우산을 안 가져온 것에 후회를 하는 유리였지만, 곧 그런 감정도 사 라져 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흠뻑 젖어도, 그래서 감기가 걸리더라도 걱정 같은 거 해줄 사람은 없어. 그래… 아무도… 없구나…. " ......... " 그렇게 생각하니 집으로도 들어가기 싫어지는 유리였다. 이대로 집에 들어 가봤자… 반겨주는 사람 따위는 없다. 걱정해줄 사람도 없다. 그런 집에 들 어가봤자 기분만 우울할 뿐이다.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유리는 흠뻑 젖은채 부들부들 떨 며 근처의 상가에 쪼그려 앉았다.지나가는 사람들 중 그런 유리의 모습에 신 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리는 생각했다. 난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왜 이렇게 젖어서 추위에 떨면서도 집에 들어가지 않는 거야? 이런다 고 부모님이 날 걱정이라도 할 거 같아? 날 찾을 거 같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 ......... " 난 뭘… 기대하는 걸까…. 기대해봤자 실망만 할 뿐. 더 이상 실망할 마음 도 없는데….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도 않은데…. -투둑…. 그때, 자신에게로 내리던 비가 멈춘 것 같이 느껴지는 유리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서서 우산을 받쳐주고 있었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 을 올려다 보았다. 그곳에는 낯이 익은 얼굴의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 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름이… " 괘,괜찮니, 유리야? " 아, 그래… 유가인‥ 이라고 했지. " ......... " 가인은 말 없이 자신의 곁에서 우산을 쓰며 걷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머리 부터 발 끝 까지 젖어있는 유리의 모습에 가인은 안스러움을 느꼈다.어서 옷 갈아입고 씻지 않으면 감기 들 거다,분명. 때마침 시민이 언더 시티에서 신 체 검사를 하는 날이라서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가인이었다. 아마도 내일 저 녁 때 쯤에야 시민을 볼 수 있으리라. 가인도 해봐서 알지만,전신 스캔과 이 것 저것을 검사하면 지루할 정도로 오래 시간이 걸리는 것이 피스 대원의 신 체 검사였다.이런 신체 검사를 피스 대원들은 한 달에 한번 의무적으로 해야 만 했다. 이것도 일이로군…. 그나저나 만약 자신이 유리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유리는 어쩔 뻔 했나?아 마도 계속 그 자리에서 비를 맞고 있었을 거라고 가인은 생각했다.자신이 이 아이를 발견한 게 천만 다행이었다. 이런 폭우, 아침까지 계속 맞고 있었다 간 폐병으로 죽었을지도…. -투둑투둑… 우산을 빗방울이 때리는 소리 만이 들려오고 있었다.너무도 조용한 밤 거리. 가인과 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가인은 난처한 표정 으로 중얼거렸다. 거,참… 어떻게 해야하지? 집으로 데려다 줘야 하나? 하지 만… " 저기, 유리야. 너희 집까지 데려다 줄테니 약도 좀 가르쳐줄래? " " ......... " 뭐, 반응이 있어야지…. 하긴,시민에게서 유리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을 들은 가인이었지만 이건 그 이전의 문제였다. 상대는 자신과 의사 소통을 할 마음 이 전혀 없는 것이다. 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리 집으로 데려가야 하나? " 좋아.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 " " ......... " 역시나 아무 대답이 없는 유리. 아,이거 동의를 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가인은 묵묵히 앞으로 걷고만 있는 유리를 내려다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그 인형 같은 모습에 가인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비는 그칠 기색을 보 이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 자,어서 들어와. " 가인은 문을 열고 유리를 집 안으로 들여다 보냈다. 우선, 젖은 몸 부터 말 리는 게 우선이다. 가인은 보일러를 켜고 분주히 목욕탕으로 들어가 물을 받 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유리는 멍하니 지켜 보고만 있었다. 가인은 목욕탕에서 나오며 그런 유리에게 말했다. " 목욕 해. 젖은 옷은 내가 건조 시켜줄테니까 걱정말고. 아… " 가인은 말하다가 무엇이 생각난 듯 2층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그 리고 곧이어 자신의 티셔츠 하나를 꺼내왔다. " 목욕하고 나서는 이것으로 갈아입고 있어. " " ......... " 멍하니 가인에게서 옷가지를 받아드는 유리. 가인은 그런 유리를 목욕탕으 로 떠밀었다. " 얼른 따뜻한 물에 몸을 녹여.안 그러면 감기 들린다∼ " - 타앙. 문이 닫히며 유리는 덩그러니 목욕탕에 서 있었다. 뭔가 순식간에 일어난 느낌. 정신이 어리벙벙했다. 유리는 한참을 더 그 상태로 서있다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잔뜩 젖은 옷은 무거워져, 목욕탕의 바닥에 무거운 소 리를 내며 떨어졌다. 유리는 따뜻한 물로 반쯤 찬 욕조에 천천히 발을 담그 기 시작했다. 물은 너무 뜨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였다.유리는 몸을 욕 조에 푹 담갔다. " ......... " 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앞전까지는 제대로 쳐다 본 적도 없는 얼굴이었는 데 처음으로 자세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자상한 얼굴…. 아니다. 믿 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배신당했는데…. 몇 번이나 속았는데…. " ......... " 하지만 욕조에 담그고 있는 몸 만은 분명히 따뜻했다. 유리는 살며시 눈을 감은채 그 온기에 몸을 맡겼다. 포근한 느낌이 그녀를 감싸안았다. " 어, 나왔구나. " 가인은 자신의 큰 티셔츠를 입고 나오는 유리를 보며 씩 웃었다. 티셔츠가 너무 커선지 유리의 무릎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가인은 목욕탕에 들어가 유 리가 마음대로 팽개쳐둔 옷을 줏어 들었다. 건조기에 40분만 돌리면 이정도 쯤은 깨끗히 마른다. 가인은 옷을 집어 넣고 건조기를 돌린 후,유리에게 돌 아왔다. 유리는 무심한 눈으로 가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런 유리의 눈 빛을 마주 하자 가인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이제는 뭘 한다냐…. ' 가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목욕도 시켰고, 옷도 갈아입혔고… 에,또… - 꼬르르륵 그때, 유리의 배 속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울음소리. 유리는 그녀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가인은 그런 유리의 머리를 토닥였다. " 밥 못 먹었구나. 잠시만 기다려∼ " 가인은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딨더라? 내가 좋아하던 3분 하이라이스가…. 저번에 시민 씨가 장볼 때 부탁해서 몇 개 사 두었는데…. " 아,있다. " 가인은 냉장고 구석에서 3분 하이라이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에,또…더 필 요한 것이 감자와 당근, 그리고 버섯,양파. 냉장고의 야채 칸에는 왠만한 야 채가 다 들어 있었다. 으음‥ 설마 이거 쓴다고 시민 씨가 뭐라고 그러지는 않겠지? 유리한테 먹이는 건데. -탁탁탁탁‥ 가인은 식칼로 능숙하게 야채들을 자르기 시작했다.이래뵈도 1년 간 자취한 이 몸이시다. 어느 정도 요리에는 이골이 난 몸이라고! ' 단지 시간 없고, 귀찮아서 안 해 먹었을 뿐이지‥. ' 아무리 요리를 잘해도 해 먹지 않으면 그 의미가 없다는 것이라는 것을 깨 닫지 못하는 가인이었다. 적당하게 썰은 야채를 접시에 담아넣는 가인. 어느 새 그의 옆으로 유리가 다가와 가인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인은 웃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 어때? 이 정도면 꽤 능숙한 칼질이지? " " ......... " 아,썰렁해라. 아무리 내가 열심히 떠들어도 상대방이 반응이 없으면 우스워 지는 거라고. 하지만 가인은 그런 생각을 지워버리며 하이라이스의 다음 단 계로 넘어갔다. " 밥은 지어 놓은게 있으니 됐고‥ 뭐,하이라이스와 야채만 끓이면 되는 건 가? " 가인은 중얼거리며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하이라이스는 카레라이스와 비슷 하지만, 덜 매콤하고 담백한 맛의 소스를 밥에 얹은 것이다. 두 음식의 공통 점은 물 조절을 잘해야만 한다는 것. 물 조절을 실패하면 싱거워진다. 가인 은 주의해서 요리를 계속했다. " 유리야. 식탁에 앉아 있어. 다 되어 가니까. " " ......... " 유리는 조용히 식탁에 몸을 앉혔다. 그 모습에 가인은 미소지었다. 그래도 배는 고팠던 모양이네. 말하자 마자 바로 앉다니. 그런 유리의 모습이 귀여 운 가인이었다. 가인은 예전에도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셨을 때, 동생 신이에 게 하이라이스를 만들어 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 오빠아∼ 빨리! 빨리이∼! - 재촉하면 음식 맛 없어져. 신이는 맛있는게 먹고 싶어? 맛 없는 게 먹고 싶어? - 우응… 맛 있는 거‥. - 그럼 기다려. 다 되어가니깐. - 헤헤, 나 오빠가 만들어주는 하이라이스가 젤루 좋아. 가인은 숟가락을 들며 웃던 신이의 모습이 떠오르자, 눈 앞이 시큰거렸다. 아, 이거‥ 양파 때문이야. 양파 때문이라고. 젠장, 더럽게 맵네. 칼질 할 때는 괜찮았는데 지금와서 왜 이러는 거야? 가인은 인상을 굳히고선 끓고있 는 하이라이스를 바라보았다.하이라이스의 군침 도는 냄새가 부엌을 천천히 채우고 있었다. " 자, 다 됐다∼ 가인 표 특제 하이 라이스 등장! " 가인은 밥 위에 덮힌 흑빛의 소스와 그 위에 감자와 당근 등이 적당히 썰 려 익혀진 음식을 유리의 앞에 내려 놓았다. 이것이 바로 하이 라이스! 가 인이 만들 수 있는 몇 안되는 음식들 중 하나였지만, 맛은 보증할 수 있다! 허기진 배를 유혹하는듯한 이 냄새. 가인은 유리에게 숟가락을 쥐어주며 먹 으라고 손짓했다. 유리는 멍하니 음식을 보다가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 어때? 맛 있어? " " ........ " 가인의 말에 유리는 아무런 대꾸 없이 숟가락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천천히 움직이던 숟가락이었지만, 갈수록 빨리 움직였다. 아마도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가인은 그런 유리의 모습을 싱글벙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유리는 그런 가인의 눈초리에 잠시 그를 힐끗 보다가 다시 음식 먹는 것에 열중했다. " ......... " 유리는 눈 앞의 이 따뜻한 음식을 새삼 바라보았다.가인이 만든 음식이었다. 카레와 비슷하지만 틀린 음식. 하이라이스 라고 했던가? 처음 먹어보는 음식 이었지만 썩 맛이 괜찮았다. 가인은 요리를 잘하는 구나. 유리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음식을 먹었다.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굶었더니, 너무나도 배가 고팠다. 앞전까지는 참을만 했었는데, 음식이 입에 들어가자 그 동안 참았던 허기가 확 풀어지듯 밀려들었다. 유리는 정신 없이 하이 라이스를 먹었다. " 콜록… " 기침을 하며 가슴을 치는 유리. 가인은 화들짝 놀라, 물을 컵에 따라 유리 에게 건내 주었다. 그래. 너무 급하게 먹더라! 유리는 가인에게서 컵을 받 아 꿀꺽꿀꺽 거리며 물을 마셨다. 간신히 소화가 되었다. 아아, 살았다…. " 천천히 먹어. 누가 안 뺏어 먹으니까. " " ......... " 가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유리에게 말했고, 여전히 유리는 대꾸 없이 숟 가락만 움직일 뿐이었다. 하지만 유리의 귀가 빨개져 있는 것을 가인은 눈치 챌 수 있었다. - 달그락.달그락.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나는 부엌.하지만 앞전 처럼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 다. 유리는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 놓았다. 그녀의 앞에는 깨끗히 비워진 접 시가 놓여 있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먹었구나. " ......... " 흡족해진 기분으로 접시를 설겆이 하는 가인.그런 가인의 등 뒤를 유리는 말 없이 바라보았다. 밥을 먹었기 때문인지 몸이 따뜻했다. 그래… 따뜻하다…. 유리는 말 없이 가인을 바라보았다. -뚜르르르르르… 가인은 유리를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 재워두고,1층의 거실에서 전화를 걸 고 있었다. 바로 유리의 집이었다. 유리의 집 전화 번호는 자신의 손목에 있 는 시계 형 무전기에 입력되어 있었기에 찾는데 별 다른 어려움이 없었다.시 각은 밤 11시가 좀 넘어서고 있었다. 으음. 벌써 자나? 가인은 고개를 갸우 뚱 거리며 기다렸다. 잠시 후,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네, 여보세요? >> " 아,예…. 저기, 이유리 부모님 되십니까? " << ......그런데요. >> " 예에, 피스 메이커‥ 거든요. 오늘 비가 오고 너무 늦어서, 유리를 저희 집에서 재울까 하는데… " 으아, 진땀 나네. 이거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말이 되는 건가? 어떤 부모가 갑자기 남자가 전화해서 '따님을 재우겠으니 못 보내겠습니다'하면 이해해줄 까나?! 가인은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 심히 긴장하며 상대방 이 얘기하기를 기다렸다. << ......그러세요. 그럼 이만. >> - 뚜뚜뚜뚜… 엥? 가인은 너무 간단히 승락하는 유리 부모(여자 목소리였으니,어머니일려 나)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뭐,뭐야? 부모님 맞는 거였나? 어떻게 들으면 무심할 정도로 간단한 반응이었다. 왠지 어이가 없어지는게… 일이 어려워지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건 또 아닌데…. - 꽈르르릉… 주위가 잠시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창 밖을 보니 지독한 폭우 사이 로 구름 속이 부들부들 떨리며 우르르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젠 천둥까지 치는 구만. 날씨 한 번 끝내주네. " 엿차‥! 나도 모르겠다. " 가인은 쇼파에 이불을 깔고 누우며 생각했다. 유리를 시민 씨 방에 재우고 내가 방에서 자도 되었지만‥, 시민 씨 허락도 안 받고 그러는 건 잘못된 거 같았다. 그래. 나는 어디까지나 이 집의 하숙생이란 말이지.집 주인 말도 없 이 멋대로 그래서는 안되는 거야. 더구나 시민 씨 방에는 나도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그래. 이게 가장 큰 이유다. 시민 씨 방을 구경하고 싶지만 으으으‥ 안된다. 유가인, 참아라.참아. - 꽈르르릉… 다시 울리는 천둥 소리. 주위가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천둥이라…신 이가 꽤나 무서워 했던 게 천둥이었지. 가인은 생각에 빠졌다. - 으아아앙∼ 오빠! 오빠! - 괘,괜찮아‥. 그냥 번쩍이기만 할 뿐이지 아무런 피해도 없는 거야. - 그래도 무서워! 으앙! 부모님이 맞벌이 부부셨길래, 늦게 까지 집에는 나와 신이만 있어야 했다.천 둥 소리에 신이는 질겁을 하며 혼자서는 못 자겠다고 울며 불며 난리를 쳤었 지.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 미소를 그렸다. 왠지 모르게 그리운데‥. " 아,혹시‥. " 유리도 번개를 무서워하지는 않을까? 가인은 몸을 일으켜 2층 계단 쪽을 바 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유리가 생각났다. 아냐.설마 걔가 이런 번개 따위 무서워할 거 같냐. 괜한 걱정이다. 괜한 걱정. " 에휴. " 그래도 결국,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게 되는 가인이었다. 가인은 살짝 문을 열고 방 안을 살펴보았다. 저편의 침대에 유리가 누워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쓰고 있었는데, 그 이불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가인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나‥. " 유리야, 아직 안 자니? " 가인은 침대 가에 살짝 앉으며 유리를 불렀다.그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는 유 리. 살짝 덮고 있던 이불을 내리고 가인을 올려다 본다. 가인은 걱정스런 눈 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무서워? " " ......... " 가인의 물음에 유리는 생각해 보았다. 무서워? 뭐가? 번개가? 유리는 번개를 생각해 보았다. 끔찍하다. 싫다. 싫어. 무서워.번개를 생각하자 다시 몸이 부 들부들 떨리는 유리였다. 가인은 그런 유리의 이마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 다. " 잘 때 까지 옆에 있어 줄테니까, 안심하고 어서 자. 자면 번개 같은 거 하 나도 안 무서워져. " " ........ " 유리는 그런 가인을 보다가 천천히 그 큰 눈을 감았다.가인이 이마에서 손을 내리려고 하자, 얼른 그의 손을 자신의 작은 손으로 붙잡았다. 크고 따뜻했다. 왠지 그 따스함에 유리는 안도감을 느꼈다. 가인은 그런 유리의 행동에 멋쩍 은 미소를 지으며 유리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 ......... " 그렇게 유리의 손을 잡아주고 한 15분 쯤 지났을까.유리의 고른 숨소리와 편 안한 얼굴에 가인은 슬그머니 손을 유리에게서 빼며 몸을 일으켰다. 좋아. 잔 다. 자. 이제 나도 내려가서 자야‥ - 덥썩 채 몸을 돌리기도 전에, 유리가 벌떡 일어나 가인의 손을 끌어당겼다.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유리를 내려다 보았다. 아직 안 자고 있었던 거냐‥. " ......... "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유리. 가인은 한 숨을 쉬며 유리에게 말 했다. " 유리야, 같이 잘래? " - 끄덕끄덕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 가인은 그런 유리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 게 헛 웃음을 터뜨렸다. - 오빠.오빠. 아빠, 엄마는 언제 와? - 10시. - 에에∼ 너무 늦어. - 새삼 스럽긴. 매일 그 정도 쯤에 오시잖아. - 그,그래두…. 이른 아침, 학교로 가는 길목. 신이는 뒷 말을 흐리며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내밀었다. 맞벌이 부부이신 아 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저녁 늦게 들어 오셨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 것을… 하지만 가인은 내심 짐작되는 바가 있어 속으로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오 늘은 다름 아닌 신이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2월 28일. 어떻게 내가 네 생일을 잊을 수 있겠니? 하지만 부모님은 딸의 생일 땜에 하시던 일을 그만두고 집 으로 오실 수는 없으신가 보다. 가인은 그런 신이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고 말 했다. - 자자∼ 투정 그만 부리고 얼른 학교 가야지. 늦겠다. - 으응….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학교로 힘 없이 걸어가는 신이. 가인은 그런 동생의 뒷 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너무했나? 하지만 방 과 후에 동생의 생일 파티를 반드시 해주리라 다짐하는 가인이었다. 좋아, 신 아! 너의 생일, 이 오빠 한테 맡겨라! 가인은 신이에게 무슨 선물을 해줄까 고민하며 학교로 발걸음을 향했다. 유리는 그런 가인과 신이의 뒷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유리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분명 앞전까지 자신은 가인의 집에서 그의 옆에 누워 잠을 청하던 중 이었다. 그렇군…. 꿈이구나…. 유리는 생각했다. 다이브(DIVE) 현상이었다. 수면 중에 곁에 있는 누군가의 꿈을 읽어드리는 무의식적 행위. 이 현상 때문에 유리는 한동안 누군가와 같 이 잠자리에 드는 것을 피해왔었다. 바보같이… 난 어째서…. 유리는 가인의 옆에서 잠든 것을 후회했다. 이러면 결국, 그의 맘을 읽어버 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난 더 이상 그 누구의 마음도 읽고 싶지 않았는데… 상처 입고 싶지 않았는데…. 난 분명 이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게 될 거야‥. 가인, 그는 친절했었다.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을 아는 것이 두려워지는 유리였다. 유리는 당장에라도 이 꿈 속에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다이 브 현상은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만큼, 유리의 컨트롤을 벗어난 행위였다. 할 수 없어‥. 유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꿈 속의 가인을 뒤 쫓았다.이렇게 된 이상 싫든 좋 든 꿈을 공유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난 그에게서도 실망을 하게 될까? 상처를 입게 될까? 불안과 의혹이 유리의 마음을 괴롭혔다. - 다녀왔습니다‥. 평상시와는 달리 힘 없는 목소리의 신이였다. 가인은 능청스럽게 그런 신이 에게 말했다. - 어서 와. - 어, 왠 일로 일찍 온 거야, 오빠? 신이는 평상시와는 달리 자신 보다 일찍 집에 와 있는 오빠의 모습에 의아 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기대감. 혹시, 오빠가 내 생일을 알고서? - 응. 오늘 시험이 있는 날이라서 4교시만 했었어. 사실은 사실이지만‥.가인은 슬쩍 신이의 눈치를 살폈다. 신이는 실망한 표 정으로 부루퉁해져 있었다. 그 모습이 가인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하 지만 더 이상 놀렸다가는 신이가 정말 울어버릴 것 같았기에, 가인은 준비하 고 있던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 자, 어서 씻고 부엌에 가서 밥 먹어. 밥 만들어 났으니까. - 으응‥. 신이는 힘 없이 화장실로 걸어갔다. 가인은 그 뒷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만 약, 다른 집 아이라면 자기 생일도 잊어 먹었냐며 화내고 떼 썼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 신이의 모습에 가인은 대견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좀 더 잘 해 주고 싶은데‥ 좀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데‥. 가인은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맞벌이 일을 하시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기 도 했다.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얼마나 우리를 위해 주시는 분들인데. 가인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난‥. 가인이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무렵,화장실을 나온 신이가 부엌으로 들어 갔다. 가인은 조심스럽게 부엌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신이가 어떤 반응을 보 일까나∼ 가인은 걱정 반 기대 반 심정으로 반응을 기다렸다. - 오,오빠아아아아∼ 역시나 집이 떠나갈듯 흥분한 신이의 외침.가인이 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커 다란(사실 커다랗지는 않았지만,신이에게는 커보였을) 케익을 앞에 두고 신 이가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가인은 그런 신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 다. - 왜? 왜 불렀어? 능청스럽게 신이에게 묻는 가인. 신이는 그런 가인을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 로 보다가 와락 가인을 끌어 안았다. - 오빠아∼ 정말 좋아! 그런 신이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는 가인. 신이의 그런 반응에 가인은 1달 간 모아왔던 비상금을 다 털어 쓴 것도 아깝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가인은 신 이를 테이블에 앉히며 케익에 촛불을 꽂기 시작했다. - 자아∼ 우리 신이 오늘로 몇 살? - 우웅… 하나, 둘, 셋… …에,또‥열‥ 한 살! 열 한 살,오빠! - 자아, 큰 촛불 하나, 작은 촛불 하나! 가인은 케익에 꽂은 촛불에 불을 붙였다. 아직 오후 4시 밖에 되지 않아선지 주위는 밝았지만, 촛불의 광채는 그 빛을 찬란히 뽐내고 있었다. 가인은 손 뼉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신이∼ 생일 축하 합니다∼ - 와아아아∼ 신이는 가인을 따라 박수를 치며 촛불을 불려고 몸을 일으켰다.가인은 그런 신이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 촛불 끄기 전에 소원부터 빌어야지. - 에? 소원? - 그래. 어서 생각해봐. 뭐, 시험을 잘 치고 싶다든지… 갖고 싶은 것이 있 으면 소원으로 빌어. - 으으응∼ 신이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곧 소원을 말했다. - 우리 오빠가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 ......... 소원을 빌고 촛불을 '후' 하며 불어 끄는 신이. 가인은 신이가 빈 소원을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좀 더 도움이 되는 소원을 빌지….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라니…. 나 뭔가 소원을 빌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자주 다쳤던가? 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런 가인을 올려다 보며 신이가 물었다. - 오빠, 어디 아퍼? - 아,아니∼! 신이가 소원도 빌어줬는데 아프긴! 자,봐! 오빠가 얼마나 건 강한데! 자, 알통! - 왓∼ 징그러워∼! 신이는 눈을 가리며 웃었고, 가인도 따라 웃었다. 아,그래. 이것도 건내줘 야지. 잊어 먹을 뻔 했네. 가인은 신이에게 작은 선물 봉지를 내밀었다. - 신이야, 생일 축하해. 이건 오빠 선물! - 에엣? 신이는 가인에게서 받은 선물을 들고선,뜯을 생각도 않고 선물과 가인을 번 갈아 보고만 있었다.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얼른 열어보라는 손짓을 했다.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는 신이.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선물은, 작은 머리핀 이었다. - 우,우와∼ - 미안. 사실은 인형을 사줄려고 했었는데… 케익을 사니 돈이 남아돌지 않았던 가인이었다. 중학생의 용돈으로는 별 수 가 없는 노릇이지만.하지만 신이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 벙글 웃으며 가 인에게 머리핀을 들어보였다 - 오빠.오빠. 이거 나 달아줘. 응? 응? - 그래. 가인은 멋쩍게 웃으며 신이에게 머리핀을 달아주었다. 신이는 얼른 거울 앞 으로 달려가 머리핀을 살펴보며 가인에게 말했다. - 오빠, 예뻐? 응? - 그래. 너무 예쁘다. 가인은 그런 신이의 모습에 왠지 가슴이 찡해져 중얼거렸다. 겨우 머리핀으로 저렇게 좋아해주다니… 신이의 그런 행동 하나 하나가 고마 운 가인이었다. 신이는 웃으며 가인에게 달려와 허리를 껴안았다. 가인은 그 런 신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고마워,신아… 고마워…. 정말 좋아해,오빠…. - 어엇? 왠 케이크냐?! 뒤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가인은 놀란 얼굴로 부모님에게 말했다. - 아버지,어머니… 왠 일로 이렇게 일찍…. - 우리 하나 뿐인 딸 신이 생일인데 당연히 일찍 들어와야지! 당연하다는듯이 소리치며 신이를 들어올리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뒤에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살며시 웃어 보이는 어머니. 가인은 그런 가족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따뜻한 공기가 집 안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 아빠, 나 오빠한테서 머리핀 선물 받았다∼ 신이는 그 날 이후로 그 머리핀을 매일 머리에 달고 다녔다‥. 유리는 그런 가인의 행복에 겨운 모습을 우울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이 감정은 뭘까‥. 부러움? 질투? 시기? 분노? 슬픔? 유리는 한 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고 있어‥. 가인의 저런 모습은 당연한 거야. 내가 불행하다고 남도 불행해야 한다는 건 말도 안돼. 그래.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하지만‥ 하지만 이 서운한 감 정은 뭘까‥. 가슴이 아파‥. 유리는 자신의 가슴 팍을 움켜쥐었다. 유리의 눈은 계속 가인의 모습을 뒤쫓 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곧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해가며 새로운 광경이 유리 의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가인은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끈적끈적한 액체의 감촉이 온 전신에 서 느껴지고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와 쇠가 타는 냄새, 독한 매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가인은 고개를 들려고 노력했다.하 지만 몸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 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사고가 일어났다. 매번 바쁘시던 부모님의 휴가에 맞춰 떠나던 1박 2일의 여행이었다. 즐거운 온천 여행. 처음 가는 가족 여행에 전 날부터 들떴던 신이와 나.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미소짓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래…. 그런 거였는데…. - 아버‥지, 엄‥마‥? 가인은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간신히 머리의 방향을 틀자, 희미한 시야 사이로 가족의 모습이 보여왔다. 자신이 타고 왔던 차가 전복된 채,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안에서 불 길과 함께 타 오르고 있었다. 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그 모습에 가인은 멍할 뿐이었다. 그 때 그런 가인의 앞에 드러누워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여왔다.작은 체구에 창백한 피부. - 신‥아‥? 신이인가? 어,얼굴이 보이질 않아. 그 아이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 서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없었다. 하하‥ 그래. 아닐거야. 신이가 아닐 거야. 저기 타오르고 있는 사람들도 아버지 어머니가 아닐거야. 아, 이거 꿈인가? 거,참. 묘하게 박진감이 넘치는 꿈이로구만.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네. 으으‥ - 으으으‥.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괴로웠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이딴 꿈 얼 른 깨버려야지! 젠장! 젠장! 아,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야? - ......... 그런 가인의 눈에 들어온 저편에서 빛나는 물건 하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머리핀이었다. 어? 저거 내가 신이에게 사줬던 머리핀 하고 똑같네? 하하,누 구야? 저런 거 떨어뜨린 사람은? 내가 신이에게 준 것은 그 아이 머리에 곱 게 잘 달려있다구‥ 후후‥후‥ - 흐‥ 가인의 입가가 잔뜩 일그러졌다. 가인의 두 눈에서 핏발이 잔뜩 서며 빨갛 게 부어올랐다. 아,안돼. 이딴 거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가인 은 힘겹게 손을 뻗어 머리핀으로 손을 가져갈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도 움직 일 생각을 하지 않는 손. 야,움직여. 왜 그러는 거야? 왜 안 움직이는 거야?! 가인은 지독한 절망감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밀려드는 공포감. 그리고 슬픔. 아스팔트 바닥으로 뜨거운 액체가 한 방울 두 방울 천천히 흘 러내리기 시작했다. - ......... 가인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단지 몸을 웅크려 들썩이며 이를 악물 뿐.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인정할 수 없어. 이런 거. 왜, 왜 이런 일이‥. 어째서 이런 일이‥. - 크,크흐‥흐흐, 흐흐흑‥ 크흐흐흐흐흐흑‥! 한번 터지기 시작한 가인의 울음 소리가 차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타고 사 고 현장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서글프게, 비통하게, 끊임 없이‥. 유리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몸 을 업드린채 흐느끼고 있는 가인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온 몸이 상처 투 성이고 그 아스팔트 바닥으로 피의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수 십명의 남자들 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앰뷸런스 소리가 귀청이 떠나갈듯 울리고 있었다. 유리는 가인의 마음에 동조하고 있었다. 가인의 마음은 수 백개의 바늘이 되 어 유리의 몸을 찌르고 있었다. 유리는 몸을 비틀며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지독한 고통에 정신이 마비될 거 같았다. 아,아아아아아‥ 유리는 힘겹게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어느새 주위의 환경은 바껴 있었 다. 수십명의 아이들이 한 방에서 떠들며 놀고 있었다. 장난감을 하나 두고 치고 박는 아이들이 있는가하면 서로 블록을 쌓아가며 노는 아이들, 책을 읽 는 아이들도 있었다. 유리는 생각했다. 이곳은 고아원이구나. 아…. 저편의 창가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가인이었다. 그는 온 몸에 붕대를 감 은 모습으로 멍하니 창가 구석에 앉아 있었다.그의 얼굴 표정에는 어떠한 감 정의 표현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다시 가슴이 아파지기 시 작하는 유리였다. 가인은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메말라 갈라터진 입술 사이로는 어떠한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의 손은 마치 바닥에 아무렇게라도 던져놓은듯 흐느적 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왼손에는 작은 머리핀 하나가 움켜져 있었다. 그 머리핀 만은 놓칠 수 없다는듯 꼬옥 쥐고 있었다. - 촛불 끄기 전에 소원부터 빌어야지…. 유리의 머리로 가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유리는 흠칫 놀라며 창가에 앉 아 있는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행동과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그 런 유리의 귀로 이번에는 가인의 동생,신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우리 오빠가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유리는 멍하니 가인을 바라보았다. 건조한 표정의 그.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유리는 천천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 했다.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녀의 눈에는 가인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눈물이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유리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꼈다. 가인이 자신에 게 요리를 해주며 웃던 모습을 떠올렸다. 번개를 무서워하는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던 것이 떠올랐다. 웃는 얼굴. 자상한 얼굴.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자신에게 웃어보일 수 있었던 거 지? 어떻게 그렇게 환하게… 그렇구나… 유리는 눈물을 흘리며 창가 구석에 앉아 있는 가인의 앞으로 다가갔다.멍한 그의 얼굴을 가슴 가득 끌어 안았다. 뜨거운 눈물 줄기가 유리의 볼을 타고 다시 흘러내렸다. 이 사람도… 나처럼 마음으로 울고 있었구나… 유리는 그런 가인을 끌어안고 오열했다.꿈은 끝나가고 있었다. " ......아? " 가인은 눈을 떴다. 밝은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옆의 탁상 시계를 보니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시계도 안 맞춰두고 잤었는데 일찍 일어나서. " 읏차. " 가인은 몸을 일으켰다. 뭔가 가슴이 시원했다. 언제나 처럼 그 꿈을 꿨었던 거 같았는데… 가슴이 답답하기는 커녕 속 시원하게 뚫린 느낌이었다. 그 때, 가인은 자신의 허리로 묵직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내려다 보니, 유리가 자신에게 꼬옥 붙어 자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모습에 가인은 미소를 지었다. 유리의 눈가는 왠지 모 르게 빨갛게 부어있었다. 가인은 살짝 소녀의 눈가를 쓰다듬어 주며 중얼 거 렸다. " 슬픈 꿈이라도 꾼 건가…? " 하지만 그런 유리의 표정은 무표정했던 평상시의 표정 보다 훨씬 더 그녀를 13살 소녀 답게 보이게 했다. 가인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킬 려고 했다. 으차. 학교 갈 준비도 얼른 하자고! 그때, 가인의 방 문을 누군 가가 노크하며 문을 열었다. " 가인 씨, 어서 일어나세요∼ "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한시민. 그녀는 앞치마를 입고 요리를 하다가 온 것 같은 차림새였는데, 신체 검사는 무사히 끝마친 것 같았다. 가인은 그런 그 녀에게 반갑게 인사할려고 손을 들었다. 그런데… " ......... " 방긋 웃는 얼굴로 가인과 유리를 바라보는 시민. " ......... " 방긋 웃는 얼굴로 가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는 시민. " ......... " 방긋 웃는 얼굴로 커다란 T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는 시민. " ......어머나. " 시민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여전히 웃는 얼굴로 천천히 문 밖으로 이동 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가인은 왠지 모를 식은 땀을 흘렸다. " 천천히 내려오세요. " 시민은 방긋 웃는 얼굴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고, 가인은 그런 그녀의 자치 를 불길한 눈으로 쫓으며 생각했다. ' 지금 뭔가 말도 안되는 오해를 하신 건 아닐까,시민 씨…. ' 부디 자신의 상상이 틀렸기를 바랄 뿐이다. " 자자∼ 침착히! 침착히! " 진우의 외침을 들으며 A.I 슈츠 차림의 가인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오른 손으로 푸른 기류의 회오리가 휘몰아 치며 모여 들고 있었다. 가인의 오라 기운으로 연무장은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진우는 그런 가인에게 외쳤다. " 자! 그 정도면 충분해! 이제 발산해 버려! " 가인은 그런 진우를 한 번 보고서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몬스터의 홀로그램을 노려 보았다. 좋아. 이 손에 있는 회오리를 저 녀석에 게 날린다. 있는 힘껏 주먹을 뻗어라! " 천공권(天空卷)--------!! " 가인은 외치며 괴물에게 주먹을 내뻗었다.그와 동시에 가인의 손에 맺혀 있 던 회오리는 날카로운 토네이도가 되어 괴물을 관통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괴물은 홀로그램이었기에,토네이도는 그런 괴물의 잔상을 통과하며 연무장의 보호 벽에 내리 꽂혔다. 거센 기운으로 연무장의 벽을 파고 들던 푸른 빛의 토네이도는 곧 그 힘을 다하고 대기 중으로 분산되었다. 진우는 박수를 치며 가인에게 말했다. " 거 봐. 연습하니까 다 되잖아∼ " " ......그래도 기술 이름을 외치는 건….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가인은 지금, 저번 몬스터 '그레이트 배 트'와의 싸움에서 무의식 중에 썼던 오라 공격을 연습하고 있던 중이었다.그 래. 연습하는 건 좋다고. 하지만 기술명을 외친다든지… 아니. 무엇보다 천 공권이 뭐냐고… 천공권이…. 무협지냐. 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진우는 가 인의 기술에 '천공권'이라는 요상한 작명 센스로 지은 기술명을 붙여 주고서 는 이름을 외치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해서 따라한 나도 문제는 문 제지만…. " 하지만, 오라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잘 떠올려야해. 이미지가 뚜렷하면 할 수록, 기술 사용이 원활하다고.기술 명을 외치는 건 그런 연 상 작용을 도와주게 하기 위해서란 말이야. " " ......아,네…. " 네네. 가인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굴이 팔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만화같은…. 그리고 이 '천공권'(이 대목에서 가인은 다시 한번 한 숨을 내쉬었다)은 몸 안에 있는 오라를 많이 소모시켰다. 단지 연습 을 한답시고 살짝 두 번을 쓴 것인데도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간 것 처럼 지치는 것이었다. 자주 쓸 건 못되는군.가인은 천공권을 썼던 오른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며 피로를 풀었다. 그때, 진우가 그런 가인에게 희죽 웃으 며 말했다. " 어이,소년. 오늘 훈련은 이걸로 끝이다.꼬마 아가씨를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되지∼ " " ......뭐,뭐에요? 그런 기분 나쁜 아저씨 말투. " 가인은 진우의 말에 의아해 하며 진우가 가리키는 문 쪽을 살펴 보았다.그곳 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인을 기다리고 있는 유리의 모습이 보였다.가인은 머 리를 긁적이며 그런 유리를 바라보았다. ' 오늘로 3일 째인가…. ' 유리가 가인의 집에 머물며 자신을 따라다니기 시작한지.유리는 학교를 마치 자 마자, 이곳으로 와 자신의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훈련이 끝나면 집 까 지 같이 가서 같은 침대에 잤던 것이다. 아, 끝부분의 늬앙스는 좀 이상한가? 어쨋든, 가인은 그런 유리가 걱정 되었다. 귀찮거나 성가신 건 절대 아니었다. 단지… ' 유리가 집을 나온지 벌써 삼 일. ' 그동안 유리의 집에서는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으음…분명 이건 문제야. 금지옥엽 같은 딸이 집에 며칠 씩 들어오지도 않는데 전화 한 번 없는 부모라. 유리가 저런 태도와 성격을 보이는 것도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 거 겠지…? " 유리야, 많이 기다렸지? " 가인은 A.I 슈츠 차림을 풀고 유리에게 다가갔다. 유리는 그런 가인을 그 큰 눈으로 올려다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귀,귀엽다∼ 가인은 그런 유리의 모 습에 왠지 감개가 무량해져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 줬다. " 자, 집에 가자. 오빠가 유리 기다리게 했으니깐 가다가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줄게. " - 끄덕끄덕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인의 손을 잡는 유리. 가인은 그런 유리의 행동 에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가인은 여전히 걱정이 앞섰다. 분명 유리와 이렇게 지내는 건 즐거웠지만, 계속 이대로 놔두어서는 안된다. ' 유리의 부모님을 만나봐야할지도…. ' 가인은 유리를 데리고 나가며 생각에 빠졌다. 한편, 마리와 시민은 본부실에 볼 일이 있어서 연무장 근처를 지나가고 있 었다.시민은 현재 자신의 집에 와 있는 유리와 가인에 대해서 마리에게 얘기 하고 있었다. " 글쎄∼ 가인 씨와 유리,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마치 오누이 같다니깐요. " " 음…. " 살풋 웃으며 말하는 시민의 말에 마리는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믿기 힘 들었다. 그 무표정하고 인형같은 애가 누군가를 따른다니…. 마리,자신도 몇 번 씩이나 유리와 얘기를 해볼려고 했었지만, 그 싸늘하고 냉담한 반응에 거 의 포기를 한 상태였다. 그런 유리가 가인을 따른다고? 그때,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마리에게 시민이 소리쳤다. " 봐요,마리 씨. 저기! 저기요! 같이 걸어가죠? " " 으음…. " 시민이 가리킨 곳에는 손을 잡고 가고 있는 가인과 유리의 모습이 보이고 있 었다.마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 와 시민은 재빨리 건물의 외벽으로 몸을 숨겨, 가인들의 눈을 피해 그들을 살 펴 보았다. 아, 그런데 우리… 왜 숨어야 하는 거지? " 후후… 유리 좀 봐요. 가인 씨와 있는 게 즐거운가 봐요. " " 으으음…. " 시민이 말한 대로,유리는 무표정하지만 예전처럼 차갑게 보이지는 않았다.마 리는 더더욱 알 수 없어져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된 걸까? 저 모습은? 가인 이 무슨 마술이라도 쓴 걸까? 시민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그 유리가 저렇게 가인 씨를 따르다니…. 가인 씨 대단하죠? " " 으음. " " 자상한걸지도. " " 으음. " 시민의 말에 마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남자라면 저 정도는 자상 해야 할지도. 마리는 왠지 모르게 납득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새삼 스러운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로 유리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건내고 있는 가인.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가인의 그런 모습은 충분히 자상해 보였다. 왠지 그런 그의 모습에 뿌듯해지는 마 리. 그때,그런 그녀들의 뒤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꼭 그런 이유만이 아닐지도 모르죠∼ " " .........?!?! " 시민과 마리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나타난 건지 그 특유의 넉살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진우가 서있었다. 언제 우리의 뒤로… 하지만 뭐, 그가 이렇게 갑작스레 나타나는 건 한 두번의 일이 아니었는지라 그녀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쨋든, 진우의 그런 말에 시민은 눈을 크 게 뜨며 그에게 물었다. "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뇨? 진우 씨, 그게 무슨 소리에요? " " 유리가 가인을 따르는 진정한 이유…! " 진우는 진지한 얼굴로 마리와 시민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진우의 태도에 마리와 시민은 긴장했다. 그,그래. 저 유리가 그렇게 쉽게 사 람을 따른다니… 분명 무슨 굉장한 이유가 있을지도! 그런 그녀들의 기대 반 불안 반의 심정을 충족시켜줄려는 듯 진우는 소리쳤다. " 바로 가인은…! " " ..........! " 그래 뭐냐?! " 특출난 로리 헌터일지도! " - 쿠쿵 그런 진우의 말에 아무 반응이 없는 마리와 시민. 그런 그녀들의 반응에 진 우는 잠시 고민한 뒤, 중얼거렸다. " 아니면 유리 양, 파더 콤플렉스…라던가? " " ......... " 시민과 마리는 한숨을 쉬며 진우에게서 몸을 돌려, 다시 본부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우, 저 인간에게서 진지한 무언가를 기대한 자신들이 바보 같았 다. 어쨋든, 그런 그녀들이 사라질 때까지도 진우는 연신 고민하고 있었다. " …아, 둘 다 미성년자니까 원조 교제는 아닐테고…. " ..........이 자식은…. - 딩동댕동 다음 날. 수업을 마치는 7교시의 종이 울렸다. 오늘은 담임 하지연이 급한 일이 있어 서 부재 중인지라 종례가 없는 날이었다. 청소 당번들에게 지시하는 반장과 집으로 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교실은 금새 소란스러워 졌다. 가인은 책가방 을 매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인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바 라보았다. [대원 그룹, 과장 이준혁] 유리의 아버지 명함이었다. 피스 메이커의 민수정 씨에게 부탁하여 얻은 이 명함. 가인은 명함 아래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주소와 전화 번호를 바라보 았다. 전화는 걸어봤지만 막상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유리 부모들의 태도 를 보아서는 진전도 없을 것 같았기에, 가인은 직접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 다. " 좋아. 부딪혀 보는 거야∼ " 아,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으니….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어 쨋든, 유리에게는 학교를 마치고 4시 반까지 가인의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라 고 얘기해두었다. 어,벌써 약속 시간이 넘었네?! 유리 기다리겠다.서둘러 교 실을 나서는 가인. 그때, 그런 가인을 불러 세우는 이들이 있었으니…. " 어이, 유가인∼ 어딜 또 그렇게 바쁘게 가시나? " 재영의 목소리였다. 가인의 뒤에는 재영과 테레이아가 그런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인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아아… 잠깐 약속이 있어서…. " " 약속? 누구? " " 아,그게… 말해도 모를 거야. 우리 학교 사람이 아니거든. " 가인은 대충 얼버무리며 얼른 유리를 만나러 갈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가인 의 말에 재영과 테레이아는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 …여자? " 낮게 속삭이며 가인을 주시하는 테레이아. 그런 그녀의 눈초리에 가인은 식 은 땀을 흘리며 답했다. " 아,그게 여자는 여잔데… 아는 초등학생 아이야. " 좋아. 이렇게 말하면 쓸데없는 오해는 안하겠지. 가인은 내심 안도하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가인은 너무 순진했다.그의 말에 대한 여파는 꽤 충격 적이었다. 재영은 가인의 목을 조르며 외쳤다. " 이,이 녀석! 이제는 초등학생 아이에게 까지 그 시커먼 마수를 뻗치는 거냐! 어느새 그렇게 나를 앞질러 버리다니?! " " …그렇게 생각하는 네 정신 상태가 더 시커매. " 가인은 한심한 표정으로 재영을 보며 말했다. 도대체 이 자식의 머리 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이때 만큼은 자신의 장래 진로를 뇌 해부학 쪽으로 돌리고 픈 가인이었다. 그런 가인에게 테레이아가 물었다. " 그럼 그 초등학생과 무엇을 할 생각? " 테레이아는 여전히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가인은 왠지 테레이아와 자신의 주위 공기가 빠직 빠직 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 이것이 바로 방전 현상… 이라는 걸까?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테레이아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답했다. " 아,그게… 대원 그룹… 이라는 곳에 가 볼 생각인데…. " " 대원 그룹? 거긴 왜? " " 아, 그 아이 부모님을 만날 일이 있어서. " 좋아. 이거다! 이렇게 말하면 쓸데 없는 오해는 안하겠지. 가인은 내심 안도 하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가인은 너무 순진했다. 그의 말에 대한 여파 는 꽤 충격적이었다. 재영은 다시 가인의 목을 조르며 외쳤다. " 그,그 아이의 부모에게 정식으로 교제 허락을 받을 생각이냐! 안돼! 불손 해! 그건 범죄닷! " "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네 정신 상태가 더 불손해. " 가인은 한심한 표정으로 재영을 보며 말했다. 그때, 그런 가인의 어깨를 짚 으며 테레이아가 다정하게 말했다. " 따라 가도 되지? " 절대로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테레이아의 미소띈 얼굴.가인은 주위의 대기 가 섬영하게 방전되는 것을 느끼고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인 은 예전 책에서 읽었던 한 명언이 생각났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공포는 종종 허깨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고통을 초래한다.- 실러 "피콜로미니" ' 그러니까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거냐고…. '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재영,테레이아와 함께 교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교 문에서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멍하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유리였다.가 인은 손을 흔들며 크게 그녀를 불렀다. " 유리야∼ " " ......... " 유리는 가인의 말에 즉각 반응하여, 가인에게로 달려왔다.그런 유리의 모습 에 가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런 그의 뒤로 재 영과 테레이아는 유심히 유리를 살펴 보고 있었다. 큰 눈에 하얀 얼굴. 마치 인형 같은 아이였다. 재영과 테레이아는 중얼거렸다. ' 가인, 또 물었구나…. ' ' ......강적 예감. ' 어쨋든,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가인은 친구들에게 유리를 소개시켜 주었다. " 자, 얘 이름은 이유리라고 하고, 초등학교 6학년 생이야. 같은 동네에 사 는 이웃이지. 유리야, 여기는 내 친구들. 저기 얼빵한 얼굴을 한 녀석이 '박재영'이고,여기 에메랄드 머리의 아름다운 누나는 '테레이아 민체스터' 라고 해. " " 야, 누구 얼굴이 얼빵한 얼굴이야! " 가인의 소개에 재영이 항의했지만, 가인은 철저히 무시했다. 사실, 얼굴 보 다는 성격에 문제가 더 있지,네 놈은…. 한편, 가인에게서 좋은 멘트로 소개 받은 테레이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유리에게 몸을 숙였다. " 안녕? 가인의 친한 친구, 테레이아 라고 해. " 테레이아는 유리가 귀엽다는듯 머리를 쓰다듬어 줄려고 했다. 하지만 유리는 그런 그녀의 손길을 피해 잽싸게 가인의 뒤로 숨어 버렸다. 가인은 당황하며 테레이아에게 말했다. " 유,유리가 낯을 많이 가려서… 이해해,테레이아. " " 훗…, 그런가 보네. " 테레이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언제나처럼 살풋 웃었다. 하지만 가인은 테 레이아의 이마로 살며시 떠오르는 실 핏줄을 볼 수 있었다. 아아,위험해.위험! 그때,그런 테레이아를 올려다 보던 유리는 조용히 가인의 손을 잡으며 테레이 아에게 코 웃음을 쳤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 …이,이 꼬맹이가…. ' 해보자는 말이지.테레이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눌러 삼키며 냉정한 눈으로 유리를 노려보았다. 지지 않고 노려보는 유리. 유리 또한 본능적으로 테레이아에게서 가인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 둘의 사이로 스파크가 일어나는 느낌이 들자 가인과 재영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 하아…. " 그때, 저편에서 가인에게도 재영에게도 낯익은 얼굴의 사람이 보였다.가인만 큼 큰 키에 긴 포니테일의 여성, 성마리였다. 가인은 반가운 미소를 띄며 소 리쳤다. " 마리 선배∼! " " 음. " 마리는 그런 가인을 알아보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마리는 여전히 눈싸움을 하고 있는 테레이아와 유리를 의아한 눈으로 살펴보며 가인에게 물었다. " 무슨 일이지? " " ......얼음 마녀 대결전이라고나 할까. "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답했다. 아아, 빨리 그 대원 그룹이라는 곳에 가서 유리 아버지를 만나봐야 하는데…. 거기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생각 해 봐야하고….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지. 정말 의지할 만한 사람들이 없군…. ' …의지할 만한 사람? ' 가만.가만.가인은 힐끗 마리를 바라보았다. 이,있구나∼ 의지할 만한 사람! 마리 선배라면 아무래도 연장자고 무게감도 있고, 피스 메이커의 사정도 더 잘 알고 있으니 의지가 될 게 분명했다. 가인은 구세주를 만난 표정으로 마 리의 손을 덥썩 잡으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 아, 저∼ 마리 선배, 지금부터 시간 되세요? 잠시 같이 가주셨으면 하는 데가 있는데…! " " …아? 으응. " 가인의 그런 갑작스런 권유와 행동에 마리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 덕였고 가인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마리 선배! 승락도 시원 시원하다! " ......... " 한편, 테레이아와 유리는 눈싸움을 그만둔채 마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의외 로 적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마리는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 여기인가? " 가인은 자신의 앞에 높게 솟아 있는 50층 짜리 빌딩을 바라보았다. 빌딩의 측면에는 대원 그룹이라는 글자가 전광판으로 크게 붙어 있었다. 가인의 옆 에 있던 재영이 말했다. " 휘우∼ 우리 나라의 3대 산맥 중 하나라 불리는 대원 그룹‥역시 건물 부 터 삐까하구만. " 하긴, 회사 건물이 50층을 넘는 건물은 대한 민국에서 단 3곳 뿐이었다. 재 영이 말했듯이 그 3대 산맥이라고 불리는 대원 그룹과 유진 그룹, 하나 그룹 이었다. 하지만 가인은 그런 50층 건물을 봐도 그리 큰 감흥이 돌지 않았다. 이미 자신은 언더 시티 유레카에서 60층 짜리 건물도 봐왔던 것이다.놀랄 일 이 아니었다. 가인은 웃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 그나저나 유리의 아버님이 이렇게 굉장한 곳에서 일하실 줄이야…. " " ......... " 하지만 유리는 무언가 불안한듯 가인의 손을 연신 꼬옥 잡고 있었다. 그래. 불안한 거겠지. 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까. 그때, 테레이아가 가인에게 말했다. " 가인, 만날 약속은 잡아 둔 거야? " " 어? 그냥 들어가면 안 되는 거였어? " 가인의 그 말 한 마디에 모두는 한 숨을 푹 내쉬었다.재영이 한심하다는 어 조로 말했다. " 야,유가인∼아무리 이런 곳에 사람 만나러 온 게 처음이라지만 머리가 있 다면 다 생각해 볼 수 있잖아. 이런 큰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것도 과장이라는 분이 쉽게도 우릴 만나 주시겠다. 최소한 전화 연락 정도는 해보고서 찾아왔어야지∼! " " ......그래. 나 머리 없다. " 가인은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래. 하긴 내가 대책 없이 오긴 왔지. 먼저 전화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가인은 유리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려고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때, 재영이 그런 가인의 핸드폰을 가리키며 의아 한 목소리로 물었다. " 어? 그게 왠 핸드폰이냐? 가인이 너 핸드폰 같은 거 없었잖아? " " 아,그게… 어쩌다 보니 하나 장만하게 됐어. " 가인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사실, 피스 메이커에서 무료로 지급된 것이지. 왠만한 연락은 손목의 무전기로 다 되지만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가 있는 것이다.그 때를 대비하여 지급된 화상 핸드폰. 하이 컬러에 고 해상도의 32화음 최신예 핸드폰인 것이다. 재영과 테레이아는 그런 가인의 핸드폰을 감 탄하며 구경하다가 재빨리 자신들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 자식! 핸드폰을 장만했으면 신고식을 해야지! 전화 번호 몇 번이야?! " " 후후… 이제 매일 만날 수 있어‥. " 그런 그들의 반응에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말하기 시작했다. 유리 아버님 한테도 전화해야 하는데… 아아, 그러니까 이럴 때가 아니라고∼! - 우우우우우‥ 대원 그룹 빌딩의 환기통 구석. 그 어두운 통로로 기분 나쁜 신음 소리가 울 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구룩구룩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기분나쁜 느낌이 흘러 넘쳤다. 어두웠지만 마치 아메바와 같은 움 직임. 그리고 그것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 우우우우우‥ 맞은 편 환기통 통로에서도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서로 응답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한…. - 우우우우우‥ 다시 한번 울리는 신음 소리. 불길한 기운이 환기통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대원 그룹 빌딩의 28층. 가인들은 자판기가 있는 휴게실에 앉아 유리의 아버 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5시가 되어가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회사는 한산 했다. 휴게실에 오던 직원들은 회사에서 교복을 입고 있는 가인들을 힐끔 힐 금 쳐다보며 지나가곤 했다. 재영은 음료수를 뽑아 가인들에게 하나 씩 건내 주었다. 음료수를 건내 받은 마리는 재영에게 감사를 표했다. " 아, 고맙다. " " 훗, 영광입니다. " 재영은 느끼 버젼으로 이빨을 빛내며 웃었고, 가인은 그 모습에 인상을 구겼 다. 하여간 재영이 자식, 여자 앞에서라면 헬렐레 해가지고선…. 그때, 음료 수를 한 모금 마신 마리가 가인에게 말했다. " 그래. 유리 아버님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할 생각이지? " " ......... " 가인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에 들린 음료수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왜 유리를 안 데려오셨어요? 이렇게 말해야 하나? 아니면,딸이 며칠 씩 이나 집에 안들어왔는데 전화 한 번 안하세요? ‥라고 물어 볼 까? 가인,자신 이 어떻게 말하든 상당히 주제 넘는 행동 밖에는 안될 거 같았다. 하지만‥. " 모르겠어요. 하지만‥이대로 유리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 가인은 자신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얼굴. 가 인은 그런 유리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 노력은 해봐야죠. 이대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테니까. " " ......... " 가인의 말에 유리는 흠칫 놀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가인은 그런 유리에게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래. 저 웃음이다.가인의 웃음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 이다.유리는 벌써 몇 번을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하 지만 이렇게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웃어주는 가인의 모습에 유리는 마음을 굳 혔다. 가인의 말이 맞았다. 이대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 그렇군. " 가인의 말에 마리는 눈을 살며시 감으며 미소지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해주려는 가인의 모습이 대견스러운 그녀였다. 그래. 노력은 해봐야지! 그때, 그런 가인들에게 한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유가인‥ 군입니까? " " ......? " 가인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른 체 구에 무표정한 얼굴. 어딘가 신경질 적인 모습의 남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인들을 바라보는 그 눈길은 무미건조했다.가인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그 에게 인사했다. " 아,예. 안녕하세요. 유가인이라고 합니다. " " 그래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 " 아,그게‥ 유리가 걱정이 되서 따라온 애들이에요. " 정확히는 유리가 아니라 이곳 물정을 모르는 자신을 걱정해서 온 애들이지만. 어쨋든, 알아들었다는 건지 유리의 아버지는 인사를 했다. " 이준혁이라고 합니다. " 하지만 가인은 앞전 부터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준혁 이라는 이 남자는 유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까지 유리 에 대한 언급을 단 한번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며칠 동안 보지 못한 딸은 안중에도 없다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가인은 인상을 굳히며 말을 꺼냈다. " 저희가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유리 때문에… " " 잠깐 얘기 좀 할까요,유가인 군? 단 둘이서 하고 싶군요. " " 아,예. " 준혁은 단호하게 말하고서는 휴게실의 구석에 있는 창가로 걸어갔다. 가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들에게 걱정 말라고 손을 흔들어 주며 준혁을 따라갔다. 마리 선배의 도움을 원했는데, 이래서는 영….가인은 초조한 안색으로 준혁의 옆에 섰다. 준혁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 …피스 메이커‥분이신가요? " " 예? 예…. " 가인은 깜짝 놀랐다. 아,그래. 내가 저번에 전화 걸 때 피스 메이커라고 밝 혔었지. 아마도, 유리는 보호자가 있는 신분이니,보호자에게 통보가 된 모양 이었다. 유리의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피스 메이커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어쨋든 준혁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가인에게 무표정하게 말했다. " 딸은 당신들에게 맡긴 걸로 압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 " .........! " 가인은 순간, 준혁을 노려보았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가인은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준혁에게 물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 애초에 모든 권한은 그 쪽에 맡겼습니다.제 쪽에서 책임질 일은 없을 거 라고 예전에 말씀하셨잖습니까? " " 아,아니 권한이니 책임이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유리의 아 버님이시잖아요? " " ......... " 준혁은 잠시 말을 끊고 가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 놈은 뭐하는 놈이냐는 듯이 살펴보는 시선이어서 가인은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가인은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 유리가 집을 나와서 저희 집에 있은지 벌써 삼 일이에요. 그 동안 전화도 안하시고 피스 메이커 쪽에 연락도 한 번 없으시다니… 유리가 걱정도 안 되셨어요? 딸이 잖아요? " " …그럼 뭔가 문제가 있으셔서 찾아오신 건 아니군요? " " .........! " 아니, 그러니까 문제가 있다니깐! 바로 당신이!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준 혁을 바라보았다.준혁은 그런 가인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다시 창가로 시선 을 돌렸다. " 유리는 그 능력을 깨달은 후,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 건조한 준혁의 말. 능력이란 아마도, 유리의 오라 능력을 말하는 거겠지? " 학교에서 선생님의 마음을 읽고 친구의 마음을 읽어서 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저희들의 마음까지 읽어, 하마터면 이혼할 뻔 하게 만들기도 했죠. " 가인은 할 말을 잊었다. 유리의 오라 능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 했지만,대충 사람의 마음을 읽는 힘 이라는 것은 진우가 훈련 도중 가르쳐 주 어서 알고 있었다. 준혁의 말은 계속됐다. " …더 이상 연관되기 싫습니다. " " 예? " 아니 그게 무슨…. 연관되기 싫다니?! " 솔직히 말해서 전 녀석이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싫습니다. 남의 마음 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그 아이가 기분 나쁩니다.언제 내 마음을 읽을 지 모를 그 아이가 혐오스럽습니다. " " .........!! " 가인은 그런 준혁의 말에 속에서 울컥 하던 뭔가가 터졌다. 저편에서 불안 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의 모습이 보였다. 눈 앞에 있는 이 준혁이라는 남자…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가인은 분 노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그게 도대체 할 소립니까?! 어떻게 자신의 딸을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는 거에요! " 있을 수 없어. 자신의 자식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부모 따위… 있을 수 없 다고! 가인은 연신 소리쳤다. " 유리를 봐요! 초등학교 6학년이에요! 저 작은 몸을 보라구요! 아직 부모 의 사랑을 받고 자라도 모자랄 아이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부모로서… 아버지로서 부끄럽지 않아요?! " " ......... " " 유리는 다름아닌… 바로 당신의 딸이잖아요! 저렇게 귀엽고 착한 아이를 왜 사랑해줄 생각은 못하는 거에요?! 아니, 딸을 사랑하지는 못 할 망정 왜 싫다고 부터 말하는 거에요?! " 가인은 잠시 소리치는 것을 멈춘채 흥분한 호흡을 조절했다. 아,결국 해버 렸다. 이런 건방진 소리. 이런 주제 넘는 말을 해버리다니….하지만 유리가 싫다느니 두렵다느니 하면서 자신과 관계 없다는 듯이 말하는 준혁의 말이 생각나자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가인이었다. 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거 지?! 바로 옆에 있으면서! 바로 저렇게 눈 앞에 있는데도! ' 죽으면 소중하게 여겨줄 수도 없다고! ' 가인은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또 가족의 생각이 나버렸다. 아,그 만두자. 그만둬.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가인은 준혁을 노려보았다. 준 혁은 무표정하게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준혁은 입가에 자조적 인 웃음을 띄우며 중얼거렸다. " 내 딸? 내 딸이라고 했소? " " ......... " 준혁은 미소를 거짓말 처럼 지우며 메마른 안색으로 말했다. " 내 아내는 여러 남자를 만나고 다녔지…. 못 말릴 정도로…. " " ......... " " 아마, 유리도 내 아이가 아닐거요. " 그 말 한마디에 가인은 애써 눌러 참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가인 은 저편에 서있던 마리들이 놀랄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는 소리야?!!!!! " 그때, 그런 가인의 외침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50층의 대원 그룹이 흔들렸다. - 쿠구구궁! 갑작스런 이 흔들림은 나타날 때와 같이 순식간에 멎어버렸다. 가인은 자신 이 소리치던 것도 놀라 잊어버린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 …지,지진인가? " - 투웅! 그와 동시에 환기통이 터져나가며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검고 투명한 젤라틴(Gelatin). 거대한 무언가가 소리 없이 빠르게 이 빌딩을 잠식 해 들어가고 있었다. - 우우우우!!! -비잉비잉비잉비잉… 피스 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정신 없이 비상 경보음이 울리는 와중에 오퍼레 이터 윤채영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13구역에서 몬스터의 생체 반응 확인. 정확한 위치 탐색 중입니다! >> " ......... " 허공에 뜨는 대형 스크린.그곳에는 몬스터를 표시하는 회색의 불빛이 명확히 표시되고 있었다. 진 사령관은 깍지를 낀채 턱에 받치며 그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민수정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 중얼거렸다. " …와프 입자 수치의 반응은 있었지만, 게이트가 열릴 정도의 수치 상승은 아니었어요‥. 어떻게‥ " " ......녀석들, 머리를 썼군. " 진 사령관은 짧게 한 마디 중얼거렸다. 민수정은 대답을 바라는 눈초리로 그 를 바라보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을 한 것은 수정의 옆에 있던 닥터였다. " 와프 수치의 반응은 있었지만, 게이트가 열릴 정도의 수치 상승은 없었다 라… 녀석들, 분열(分列)을 한 것이군요. " " 분열…이라뇨? " " 저희들이 게이트 수치의 변화를 계산하는 것은,녀석들이 '한 개채'만이 게 이트를 넘어온다는 가정 하에서 입니다.이차원 계의 생물은 삼차원으로 넘 어올 때 언제나 일정한 수치의 변화를 보이죠. 그것을 통합하여 정한 것이 게이트 발생 수치 라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알고 계시죠? " 닥터의 말에 수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는 자신의 안경을 손으로 올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만약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는 녀석이 한 개체 미만의 단위로 게이 트를 통과한다면 어떻겠습니까? " " .........! " 그제서야 민수정은 상황을 이해한듯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한 개체를 여러 개로 분열해서 게이트를 통과했다는 말씀인가요? 아,아니… 무엇보다 그런 것이 가능할리가…! " " 사례는 중국에서도 발견된 바 있습니다. 물론, 놈들이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니기에 이런 짓이 가능한 거겠죠. 자신의 몸을 여러 개로 쪼갤 수 있는 몬스터 라니…. " 닥터의 말에 모두는 침묵을 지켰다. 그때, 윤채영이 소리쳤다. << 위치 탐색 완료 했습니다! 13구역의 대원 그룹 빌딩입니다! >> " .........!!! " 최악이었다. 분명 대피 경보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민간인이 밀집되어 있는 회사 빌딩이라니! 진 사령관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 상황 설정은 A-로 지정!피스 대원들에 대한 소집 명령은 어떻게 된 건가? " << 지금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린(Green) 응답 왔습니다.옐로우(Yellow) 응 답왔습니다… 그리고… >> 잠시 뒷 말을 흐리는 윤채영.곧 그녀는 왠지 자신 없어진 말투로 간신히 말 을 이었다. << 나머지… 대원들… 아, 아무래도 몬스터 발생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 " ..........!! " - 우우우우… 대원 그룹의 빌딩은 검은 색의 젤라틴 같은 덩어리들로 절반 쯤 덮여 있었다. 도대체 50층 짜리 빌딩을 반 이상 덮어내는 크기라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 일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젤라틴 덩어리들은 빌딩의 유리창 을 부수며 안으로도 침입을 시작한 것이다. - 우우우우… 모든 통로를 가득 메우며 점점 그 몸을 부풀리는 이 괴물의 모습에, 회사원 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 엘리베이터에 가 득 모여드는 사람들. 비상계단으로 발을 돌리는 사람들. 앞 전까지 차분하고 정돈되어 보였던 회사의 모습은 예전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 꺄아아아악-----!! " 그 때, 한 여성이 검고 투명한 젤라틴 덩어리에 몸이 휩싸여 버렸다.도망치 던 직원들은 모두 볼 수 있었다. 그 젤라틴 덩어리 속에서 근육과 뼈가 거품 을 내며 순식간에 부식해 버리는 여자의 모습을… " 으아아아악!!! " " 사,사람 살려!!! " 그 지독한 광경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상황은 순식간에 패닉 상태에 빠 져 버렸다. 검은 젤라틴 덩어리들은 그런 사람들의 비명에 무척 즐거워진 듯 더더욱 그 몸을 부풀렸다. 다시 몇 명의 직원들이 괴물에게 휩싸였다. - 우우우우… 한편,빌딩의 28층.그렇게 도망치는 사람들의 무리 뒤 편에는 가인들도 행동 을 같이 하고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검은 젤라틴 덩어리에 재영이 비명을 질렀다. " 으,으아아앗!! 저,저게 뭐야?!! " " 뒤 돌아 보지 말고 뛰어! " 가인은 재영의 등을 떠밀며 이를 악물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나타나다니! 도대체 피스 메이커 본부실에서는 뭘 하 고 있는 거야?! 몬스터가 나타날 거면 미리 미리 사전 통보를 해줘야 할 거 아냐?! 가인은 긴장한 목소리로 주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옆의 마리에 게 물었다. " …어떻게 된 거죠,마리 선배? " " 모르겠어. 본부에서 온 연락에 의하면, 와프 입자 수치는 변동이 없었다 고 한다. 지금 그린과 옐로우가 이곳으로 오는 중이다. " " 그런…! " 가인은 달려가는 와중에 슬쩍 뒤를 돌아 보았다. 검은 젤라틴 덩어리에 감 싸인 모든 것들은 그 안에서 흔적도 없이 부식되고 있었다. 맙소사! 이런 만 화같은!! 지원이 오기 전에 모두 죽을 거야!! -탁탁탁탁… 그 때, 달리는 가인의 시야로 밑으로 내려가는 비상 계단이 보여왔다.저 곳 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우선, 사람들을 피신 시키는 것이 먼저 였다. 괴물의 상대는 그 다음이다! 마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가인의 시선 에 고개를 끄덕였다. " 힘내, 테레이아! " 가인이 테레이아에게 소리쳤다.그녀는 긴장한 와중에서도 침착한 얼굴로 상 황에 잘 대처하고 있었다. 좋아.다들 저 비상 계단까지 가서 출입구를 닫으 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그 사이에 모두를 이 건물 밖으로 피신 시킨다! - 털썩! 그때, 비상 계단을 두고, 가인의 뒤로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인이 황급히 돌아보니 바로 유리의 아버지,이준혁이었다. 몇 미터 안되는 곳에서 젤라틴 덩어리들이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안돼! 가인은 이를 악물고 준혁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재영이 비명을 질 렀다. " 가,가인아!! " 제,젠장! 꾸물꾸물 거리며 자신의 앞으로 밀려드는 젤라틴 덩어리에 가인 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에잇! 저딴 우스꽝 스럽게 생긴 것들에게 겁이라도 먹을 것 같냐?! 가인은 쓰러진 준혁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 아저씨! 괜찮아요?! " " 으음…! 고,고맙소‥. " 하지만 준혁은 넘어질 때 다리를 접질렀는지, 연신 절뚝거렸다.가인은 준혁 을 부축하며 서둘러 비상용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젠장! 무겁다! 무거 워! 힘 좀 써보라구요, 아저씨! 가인은 연신 자신에게로 처지는 준혁의 몸에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칠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줄어드는 무게감. 누 군가가 자신의 반대편에서 준혁을 부축하고 있었다. " 유,유리야?! " 가인이 소리쳤다. 준혁을 부축하고 있던 것은 유리였던 것이다. 유리는 가 인의 외침에 그를 살짝 올려다 보았다.그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빛나고 있 었다. 그래,유리야! 같이 아버지를 데리고 나가는 거야! " 빠,빨리 가인아!! " 테레이아의 비명과 함께 비상 계단 쪽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일행의 모습 이 보였다. 마리와 재영이 가인을 도와주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 오려고 했다. 하지만… - 쩌적… 그때, 가인의 귀로 들려오는 시멘트가 갈라지는 소리. 설마…가인은 긴장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가인들과 재영들의 사이에 있던 천장에 균열이 가고 있 었다. 무너질려고 하는 것이다. 가인은 재영들에게 소리쳤다. " 오,오지마! 천장이 무너진다!! " " .........!! " 그런 가인의 외침에 재빨리 마리가 재영과 테레이아를 끌어안고 뒤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천장! - 우르르르… " 으앗?!! " 가인은 준혁과 유리를 보호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무너지면서 땅에 튕긴 작은 콘크리트의 파편들이 가인의 등을 수 차례 때렸다. 콘크리트의 가루들 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시야가 가렸다. " 제,젠장!! " - 우우우우… 가인은 놈들의 신음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콘크리트가 무너진 장소를 살펴 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젤라틴 덩어리가 위층에서 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 다.역시 네놈이었냐, 이런 짓을 한 건…!! 녀석들의 뒤편으로는 비상 계단 이 보여왔다. 가인은 짤막히 신음을 흘렸다. " 아앗…. " 무너져 버렸다.무지막지한 콘크리트의 파편들로 비상 계단 출입구 쪽은 완 전히 막혀 있었던 것이다! 제,젠장! 마리 선배는?! 재영이는?! 테레이아는?! 하지만 그들을 걱정할 틈도 없이 가인들의 앞 뒤로 젤라틴 덩어리들이 그들 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가,갇혔어?! " 가인! 유리! 무사하나?! " 그때, 막혀버린 비상용 출입구 쪽으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가인은 소리쳤다. " 예, 저희 쪽은 괜찮아요! 그 쪽은 다친 사람 없어요?! " " 없어! 그보다… " 마리의 걱정스러운 말투가 들려왔다. 가인들은 괴물에게 갇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민간인 한 명과 같이! 그런 마리의 목소리에서 걱정된 기색을 알아 챈 건지 가인이 소리쳤다. " 마리 선배, 선배가 책임지고 재영이들을 밑으로 보내주세요! 이 쪽은 어 떻게든 해볼테니까! " " 하,하지만…!! " " 믿어요!! " 가인의 외침에 마리는 입을 닫았다.그런 그녀에게 가인의 목소리가 계속 들 려왔다. " 반드시 무사할테니까… 그러니까… 꼭 구하러 와줘요! 믿을 게요!! " 마리는 자신과 가인들을 막고 있는 시멘트 조각들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옆 에 있던 재영과 테레이아는 불안한 얼굴로 그런 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 간인의 구출이 최우선. 무엇보다 지금 이렇게 막혀있는 상태로는 가인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마리는 천천히 고 개를 끄덕인 후,굳은 얼굴로 벽 너머의 가인에게 소리쳤다. " ......무사해라! " 그 말을 끝으로 마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재영과 테레이아 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반드시 무사해! 가인! 유리! 반드시 돌 아올테니까! 구하러 올테니까! 제발… ' 제발 무사해줘…! ' 그렇게 마리들을 보낸 후, 가인은 긴장된 미소를 띄우며 주위를 둘러 보았 다. 점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검은 젤라틴 덩어리들. 크,큰 소리 치기는 했 었는데 버틸 수가 있을려나. 이런 녀석들 한테서…! " 할 수 없지! " 가인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여기는 유리도 있고, 유리 아버지도 있다! 반드시 지켜야 해! 가인은 유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 유리야! " - 끄덕 유리도 고개를 끄덕인 후, 가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가인은 무전기를 찬 왼손을 반원으로 그리며 소리쳤다. " 변신, 피스 블루(Piece Blue)! " 그와 함께 가인의 등 뒤로 마치 수면 위로 떠오르듯 A.I 슈츠가 나타나 그 에게 장착되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타이즈와 관절 부위에 부착된 연푸른빛 장갑들. 헬맷과 마스크까지 장착되자, A.I 슈츠는 가인의 오라에 반응하여 푸른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의 오라 패턴은 블루! 짙은 푸른빛이 넘실대며 A.I 슈츠에 떠올랐다. 가인이 옆을 돌아보니, 유리 또한 피스 핑크로 변신 한 상태였다. 그런 둘의 모습에 준혁은 신음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 뭐,뭡니까‥그건?! " " ......정의의 사자로 변신‥이라고나 할까요. " 아,어쩌자고 이딴 낯뜨거운 대사를‥. 가인은 한숨을 푹 내쉬고서 이런 위 기 상황에 걸맞지 않는 생각을 했다. 역시, 이 타이즈 전투복은 납득할 수 없어. 진짜로‥. - 우우우우‥ 가인과 유리의 A.I 슈츠에서 발산되는 오라에 반응이라도 하는 건지, 괴물 은 괴성을 지르며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가인 은 통로를 다 채우면서 달려드는 젤라틴 괴물의 모습에 가슴이 오그라 드는 것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주먹을 뻗었다. 여기서는 이거 겠지! " 하아아아앗! " 가인의 오른 주먹에 맺혀드는 푸른 빛의 기류. 주위의 공기가 빨려드는 것 처럼 회오리치며 가인의 주먹으로 모여들었다. 가인은 자신의 코 앞까지 밀 려드는 젤라틴 괴물을 노려보았다. 좋아! 이거나 먹어라!! " 천공권---------!! " 가인의 천공권이 괴물의 정면으로 작열했다! " 으랴아아아아앗------!! " 가인의 천공권이 젤라틴 괴물의 몸체에 작열했다. 가인의 오른 주먹에서 시 작된 미니멈 사이즈의 토네이도는 괴물의 젤라틴 덩어리를 사정 없이 갈기갈 기 찢고 들어갔다.가인은 토네이도의 여파로 오른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 로 흔들렸지만, 나머지 왼손으로 오른 주먹을 받치며 견뎌냈다. " 질까 보냐----!! " - 콰앙------!! 대원 그룹 빌딩의 28층에서 수평 방향으로 전개되는 토네이도가 건물을 가 로로 뚫고 치솟았다. 밑에서 그 광경을 올려다 보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건물의 파편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가인은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숨을 헐 떡였다. ' 여,역시… 이 기술… 힘들어‥. ' 온 몸에서 있는 힘껏 오라가 빨려나간 느낌. 아찔한 현기증과 호흡 곤란으 로 가인은 괴로워했다. 요령 없게 있는 힘껏 천공권을 날린 것도 이유가 되 었지만, 천공권은 분명 오라의 소모가 심한 기술이었다. 자주 쓸 것이 못 되 는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연기가 걷혀 가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우며 괴물 을 살펴보았다. 뒤에서 준혁의 감탄 반,놀람 반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 마,맙소사‥. " 가인의 앞으로는 마치 거대한 맹수가 할퀴고 지나간 것 처럼 날카롭게 시멘 트가 원 형태로 찢겨져 나가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원통 형으로 꿰뚫린 젤 라틴 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엄청난 광경에, 가인 자신도 괴물을 저렇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잊은 채 놀라워 했다.가인은 자신의 오른 주먹을 힐끔 쳐다보며 식은 땀이 흐르는 얼굴로 괴물을 주시했다. ' 이, 이 주먹으로‥ 내가 저렇게 만들었단 말이지? ' 이런 만화 같은‥ 왠지 인간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느낌이 드는데‥ 가인 은 솔직히,힘이 생긴 어린아이 처럼 누군가에게 자랑하고픈 으쓱함도 들었지 만 그에 앞서 알 수 없는 소름이 몸에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런 일은 보통 인 간이라면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 같지 않은 낯설음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아니. 내가 내 자신에게 겁을 내고 있는 것이다.하지 만 이런 오싹함은 갑자기 나타났던 것 처럼,눈 깜짝할 새에 가인에게서 잊혀 졌다. 무엇보다 눈 앞에 있는 괴물의 문제가 우선이었다. " …어쨋든, 끝난 건가? " 가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준혁과 유리에게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안일한 생각! 마치 가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듯 괴물은 젤 라틴의 몸체를 수축시키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 " .........?! " 순식간에 복원되는 젤라틴 덩어리들. 가인은 이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이를 악물었다. 효,효과가 없었던 건가?! 앞 전의 그 공격이…!! 뒤에서도 괴물의 습격이 시작되었는지 준혁의 비명이 들려왔다. " 으,으앗! 저리가!! " 가인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괴물과 준혁에게 다가오는 괴물을 번갈아 보며 당황했다. 앞 전의 자신만만함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어,어떻게 해야하 지?!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 우우웅 그때, 옅은 핑크빛이 가인을 감싸안았다. 어느새 가인의 옆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유리였다.유리에게서 흘러나오는 핑크빛의 오라는 가인의 몸 에 스며들어 당황한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가인은 놀란 눈으로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이,이런 능력도 있는 건가‥ 유리의 오라는? " 고,고마워…. " 가인은 왠지 어린 유리의 앞에서 못 보일 것을 보인듯한 심정이 되어 쑥스 럽게 말했다. 유리는 말 없이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아이를 위해서 라도 이런 곳에서 맥 없이 당할 수는 없지! 가인은 앞 전 괴물의 몸체를 천공권으로 뚫었을 때,그 뒤로 비상용 계단이 보였던 것을 기 억해냈다. 그래. 우선, 그 쪽으로 도망치고 보자. 가인은 자신의 뒤에 있는 준혁과 유리에게 소리쳤다. " 모두 내 뒤로 붙어요! 지금부터 괴물을 꿰뚫을 테니까 그 때를 노려서 재 빨리 반대편 비상 계단으로 뛰는 거에요! 알겠어요?! " " 아,알겠소…! " 준혁은 떨리는 음성으로 못 미덥게 대답했다.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정면의 젤라틴 괴물을 노려보았다. 좋아. 이 놈을 뚫고 비상 계단으로…! 우선, 몸 부터 피하고 보자…! " 간다, 천공권…!!! " 다시 한번, 푸른 빛의 토네이도가 대원 그룹의 빌딩을 꿰뚫고 터져 나갔다. " 무,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 재영은 식은 땀을 흘리며 대원 그룹의 빌딩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재영들 은 간신히 대피하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정신 없이 건물 밖으로 탈출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저 건물 안에, 그 괴물들 속에 가인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자 재영은 속이 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괘,괜찮은 거지? 응? 가인아! - 퍼엉-! " 우왓!! " 다시 한 번 건물의 외벽을 뚫고 푸른 기류의 토네이도가 휘몰아쳤다.재영은 생각했다. 저 회오리가 나온 부분은 분명,가인들이 있던 28층 부근이었다.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수 많은 유리 파편과 시멘트 조각들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어느새 온 건 지 소방차와 구급차, 경찰차들이 대원 그룹 빌딩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앰뷸 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재영은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에 마음이 불안해져 옆에 있던 마리에게 물었다. " 마,마리 선배. 괜찮겠죠? 가인이는 무사하겠죠? 그렇죠? " 하지만 대답이 없는 마리. 왜, 왜 대답을 안하는 거죠,마리 선배? 재영은 마리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구경꾼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이 서 있을 뿐. 마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재영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 마리 선배?! 마리 선배! 어,어디로 갔지?! " 재영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옆의 테레이아에게 소리쳤다. " 민체스터 씨, 마리 선배 못 봤어요?! " " …어딘가 인파 속에 떠밀렸나 보죠. " 재영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히 답하는 테레이아. 그녀는 대원 그룹의 빌딩 쪽 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 테레이아의 모습에 재영은 내심 속으로 생각했다. ' 가인이가 저 안에 있으니… 걱정되겠지…. ' 재영은 더 이상 테레이아에게 말을 걸지 않고, 마리를 찾기 위해 인파를 헤 치기 시작했다. 혹시나 떨어지는 시멘트 조각에 다쳤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 각이 들자, 더더욱 마음이 다급해지는 재영이었다. " ......... " 한편,테레이아는 멍하니 무언가에 홀린듯한 시선으로 건물을 올려다 보고있 었다. 분명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누군가를 걱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 였다. 앰뷸런스의 불빛 때문일까. 테레이아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아닌 녹색 빛을 띄고 있었다. " 훗…. " 살며시 그려지는 테레이아의 미소. 그녀의 에메랄드 빛 머리가 바람도 없는 날씨에 천천히 휘날리고 있었다. " 허억‥허억‥ " 가인은 헬맷을 뒤로 젖힌채 식은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금방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태였다. 제,제길‥ 천공권을 너무 많이 썼어. 괴 물들에게 포위된 장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너무 천공권을 남발한 것이 원인이 었다. 최초의 것을 포함하여 정확히 네 번을 썼다. 마치 몸 안의 수분이 증 발한 것 처럼 가인은 지독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수중으로는 어떠한 오라 도 모이지를 않고 있었다. 이럴 때 놈들에게 습격이라도 받으면 끝장인데…! " ......... " 그런 가인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 괜찮아. 잠시 쉬면 나아질 거야. " " ........ " 가인의 손을 잡고 있던 유리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젠장, 나란 녀석. 오빠로서 믿음직하지도 못하고… 이런 아이 한테 걱정이나 끼치다니…. 좋아. 내가 불안해하면 유리나 준혁은 더 불안해 하겠지. 억지로 라도 힘내야 한다. 그래, 힘내라, 유가인! " 그나저나… 이 곳은 그런데로 안전한 것도 같은데…. " 가인은 새삼 자신들이 도망쳐온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빌딩의 최상층 부에 위치하는 보일러 실이었다. 보일러 실이 최상층에 있는 것이 뭔 가 이상해 보였지만, 2020년 부터 실시한 국토 지하 개발로 인해, 지하권 소 유 문제로 지하 중축이 힘들어진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일 이었다. 사실, 밑으로 도망가는 게 최고였지만,꾸역꾸역 밀려드는 젤라틴 덩 어리에 쫓기다 보니 어느새 최상층 까지 와버린 것이다. '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나… 하아…. ' 가인은 속으로 한 숨을 내쉬며 보일러 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밀려드는 젤 라틴 덩어리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수단.보일러 실은 사방이 폐쇄 되어있는 데 다가 폭발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 강화 재질로 보호되어 있기 때문에, 괴물의 공격으로 쉽게 벽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 전,문으로 흘러들어오는 젤라틴 덩어리를 상대로, 억지로 문을 닫아버리 느라 문 주위에는 찢겨진 젤라틴 덩어리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 파 편들은 분명 본체와 떨어져 있는 것인데도 그 생명력을 다하지 않은듯 연신 불쾌하게 꿈틀 거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 작은 덩어리가 덤벼들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진 가인이 몇 번이고 이 덩어리를 짓 밟아보았지만,별 다른 반응 도 없었고, 없애버릴 힘도 방법도 없었기에 다들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 흐음…. " 가인은 생각에 빠졌다.이대로 지원을 기다리는 게 가장 무난했지만 언제 이 곳도 뚫릴지 모른다.더군다나 이곳은 폐쇄되어 있다. 분명 환기통은 있는 것 같았지만 공기가 너무 탁한 것이다. 오래 견디기는 힘든 곳이었다. 무슨 방 법이 없을까…. 놈을 물리칠 방법이…. - 오빠‥ 순간,뇌리에 들려오는 어린 소녀의 음성에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두 리번 거렸다. 뭐,뭐야? 이 느낌은… 머리 속으로 말을 거는 듯한 이 색 다른 느낌이라니?! 화,환청인가? 가인은 당황했다. 그런 가인의 모습에 걱정이 되 었는지, 유리가 살며시 다가와 가인의 손을 잡았다. 가인은 그런 유리를 내 려다 보았다. 날 오빠‥라고 불렀어? 혹시‥혹시‥유리가…? 가인은 설마 하 는 심정으로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 저, 유리야 혹시 말인데‥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마음 속으로 얘기를 거는 것도… 가능하지 않아? " " ......... " 유리는 가인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듯 그 큰 눈을 깜빡였다. 가인은 그런 그 녀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 아,하하… 불가능‥할까나…? " 그,그래. 환청이었겠지. 마음으로 얘기를 한다니…. 무슨 텔레파시냐? 그런 만화같은 일이… - 이렇게‥ 말이야? " .........?! " 순간, 다시 머리 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가인은 황급히 유리를 내려다 보 았다. 유리도 놀라는 얼굴로 가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이거‥분명 유 리가 말을 건 것‥ 맞지?! 그렇지?! 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 드,들렸어, 유리야! 네 목소리가 들렸다고! 대단하다! 마음 속으로 얘기 를 거는 게 가능하다니! " - 나도‥ 놀랐어…. 이런 게 가능할 줄은… " 아니 왜 이런 능력을 연태 깨닫지 못했던 거지?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마음에 개입한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할 만 한데…? " - 그건… 오빠가 나한테 마음을 완전히 열었기 때문…. 다른 사람들 한테는 불가능할지도…. " 그,그런가…? " 그래도 대단하다,정말! 이게 말로만 듣던 텔레파시란 말이지? 가인은 감탄 하며 유리를 새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유리와 대화를 할 수 있었 던 것이다! 그것 만으로도 가인은 상당히 기분이 들떠 버렸다. 유리는 가인 의 시선이 쑥스러운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그런 가인과 유리의 행동에 준혁은 담배를 피다 이상한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그의 눈으로는 가인 혼자서 신나게 소리치는 것 처럼 보였던 것이다. 준혁은 혹시 가인이 앞 전의 상황들로 미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에게 말을 걸었 다. " …지금 뭐하는 겁니까,가인 씨? " 준혁의 말에 가인은 흥분한 기색으로 그에게 소리쳤다. " 유리가 말을 했다구요! 마음 속으로 제게 말을 걸었다구요! " " .........예? " 준혁은 그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 속으로 말을 걸었다고? 유리 가? 분명 놀라운 일이었지만, 마음까지 읽어내는 아이 이니 마음 속으로 얘 기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준혁이었다. 준혁은 담담 한 안색으로 그런 가인에게 물었다. " 놀랍군요. 하지만… 뭐하러 쓸 데 없이 이런 곳에서 그런 능력을 쓰는 겁 니까? 괴물만 상대하기에도 벅찰텐데…. " " 예? 쓸 데 없다뇨? " " 그러니까 제 말은… 서로 말로 해도 될 걸, 왜 쓸데 없이 마음으로 얘기 한다느니 해서 힘을 소비하는 거냔 말입니다. " 준혁은 약간 신경질 적인 말투로 대꾸했다.앞 전의 상황들로 약간의 히스테 리가 일어난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으로 얘기한다느니 하며 그런 걸로 들뜨 는 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고등학생, 어린애란 말이로군. 그런 걸 로 떠들 생각이 있으면 괴물을 처치하는 데 힘을 쓰라고! 가인은 그런 준혁의 외침에 그를 살짝 노려 보았다. 정작 자신은 아무 것도 못하고 있으면서, 마치 싸우는 건 우리 책임이라는듯 얘기하다니… 쳇, 그래 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괴물을 상대할 오라의 능력이 준혁에게는 없고 자신들에게는 있었으니까.하지만 저런 준혁의 태도는 분명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 .........! " 그때, 가인은 준혁의 말에서 뭔가를 느낀듯, 살짝 굳은 안색으로 그에게 말 을 걸었다. " 저기… 혹시‥ 유리가 말을 못한다는 거… 모르십니까? " 가인의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신을 바라보는 준혁. 역시나‥! 준혁 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무심하게 가인에게 반문했다. " 유리가 말을‥ 못하다뇨? 그게 무슨 소립니까? 왜 유리가 말을 못해요? " 그의 말 한 마디에 가인은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가인은 준혁의 멱살 을 잡아 끌어당기며 그에게 소리쳤다. " 다,당신은! 당신이란 사람은! 부모가 되어서 유리가 말을 못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 그런 가인의 기세에 당황하는 준혁. 하지만 그 얼굴이 여상스럽기는 마찬가 지였다. 최악이다. 최악이야! 이 사람은 유리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가 인은 준혁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 유리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럴 수는 없어! 유리가 말을 잊어 버린지가 벌써 몇 개월 째인데‥! 유리에게 한 번이라도 말을 걸어 봤었 더라면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 " 이,이것‥ 놔‥! " 가인에게 멱살이 잡힌 준혁은 괴로운듯 신음을 흘렸다.그때,그런 가인의 허 리를 부둥켜 안으며 그를 말리는 유리. 가인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유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인의 머리 속으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빠, 그러지마‥. " 하지만‥! " - 그래도‥ 내 아빠‥ 란 말이야. 유리의 그 한 마디에 가인은 비통한 심정으로 준혁의 멱살을 놓았다.준혁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그의 입에 물려 있던 담 배가 바닥을 구르며 문 근처에 떨어져 있던 젤라틴 파편들로 굴러갔다. 보일 러 실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 ......미안. " 가인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구보다 힘들고 괴로운 것은 유리일텐데…. 가인은 자신의 주제 넘음을 탓했다. 엉망 진창이 었다. 유리의 부모님을 만나서 유리의 고민을 덜어주러 온 건데… 자신은 더 더욱 일을 힘들게만 만들고 있었다. 유리는 그런 가인의 사념이 느껴지자 가 인의 손을 잡았다. 무표정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 - 괜찮아. 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내 잘못인 걸…. " ......... " 가인은 그런 유리에게 아무런 할 말도 찾지 못했다. 그런 걸까.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워 해야 하는 걸까.정말 이 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 걸까? '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 가인은 유리의 손을 꼬옥 잡으며 그녀에게 입을 열려고 했다.그때, 문 쪽에 서 괴물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 우우우우… 설마 놈들이 벌써?! 가인과 유리는 긴장된 얼굴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보일러 실의 문으로는 괴물의 어떠한 낌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뭐 였지? 그럼 아까의 신음 소리는…? - 우우우우… 다시 들려오는 신음 소리. 이제보니 문 가에 떨어져 있던 젤라틴 파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뭐,뭐야? 다시 살아나는 건가? 이거?! 하지만 그런 가인의 걱정과는 달리 의외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앞 전 준혁이 떨어뜨린 담배 의 불이 젤라틴 덩어리에 옮겨 붙자,젤라틴 덩어리는 괴로워 하며 그 점액질 덩어리를 딱딱하게 굳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치 괴롭다는듯이 몸을 비틀 며 굳어가는 점액질 덩어리를 보며 가인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 녀석들… 설마… 불에 약한 건가? " 불에 닿으면 이 젤라틴 덩어리는 아마도, 고체 처럼 단단히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가인의 머리 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하나의 해결책 이 번개 같이 떠올랐다. 가인은 문을 노려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 좋아‥. 이 괴물 놈. 이번에는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 "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마리에게 달려들던 젤라틴 덩어리들은 붉은 섬광에 사정없이 잘려나갔다.A.I 슈츠 복 차림의 마리는 동요 없는 눈빛으로 눈 앞의 젤라틴 괴물을 노려보았 다. 그녀의 주위로는 수 십개로 잘려나간 젤라틴의 파편들이 시체 처럼 널려 있었다. 그런 마리의 모습에 젤라틴 괴물도 질려버렸는듯,마리가 한 발을 내 딪을 때 마다 그 몸체를 뒤로 물렸다. - 우우우우‥ " ......비켜. " 마리의 낮은 중얼거림.젤라틴 괴물은 그런 그녀에게 반발이라도 하듯 그 몸 을 수축하며 그녀에게 튀어오를 준비를 했다. 마리는 검을 하단으로 내리며 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금 씩 빨라지는 그녀의 걸음. 젤라틴 괴물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 들었다. - 우우우우‥! 괴물이 뛰어듬과 동시에 달리기 시작하는 마리. 괴물은 그녀를 압사 시킬려 는듯 그녀의 전신으로 달려들었다. 마리는 그런 괴물의 움직임에 전혀 거리 낌 없이 몸을 날렸다. 마치, 그런 괴물의 바다에 뛰어드는 것 처럼!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의(奧義) 운요(雲燿) " 마리의 나지막한 중얼거림. 순간, 그녀와 젤라틴 괴물이 있던 이 25층의 대 기가 멈췄다. 검의 움직임도 없었고, 어떠한 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앞 전 까지의 사투가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25층은 무거운 정적으로 휩싸여 있었다. 젤라틴 괴물은 그 움직임을 멈춘 채, 마리를 덮치기 직전에서 멈춰 있었다. - 치지지직‥ 마리의 A.I 슈츠에서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치솟았다. 마리는 신음도 흘 리지 못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감싸안았다. 연신 부들부들 떨리는 그 녀의 어깨. 하지만, 괴물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딱딱히 굳어있던 괴물들의 몸체에서 천천히 그어져 있던 실선들이 나타났다. 그와 함께 실선을 따라 갈 라지며 무너져 내리는 젤라틴 덩어리들. - 스르르륵‥ 마리는 온 몸이 땀으로 젖은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괴물의 최후를 지켜 보 았다. 운요(雲燿). 내려치는 칼의 속도 단위로, 한 호흡에 해당하는 순간을 '분(分)', 그 분의 8분의 1이 '초(炒)'. 그 10분의 1이 '사(乍)', 그 10분의 1이 '홀(忽)', 그 10분의 1이 '호(毫)', 그리고 그 10분의 1이 '운요(雲燿)' 라고 한다. 무영신풍류의 3대 오의 중 하나인 운요는 이름 그대로 번개와 같 은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하지만,인간의 몸이 번개의 움직임을 따 라가기는 힘든 것. 무엇보다 몸의 강도가 그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다. 육체의 강도를 올려주는 A.I 슈츠를 마리가 착용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맨 몸으로 운요를 펼쳐내었다면 그녀의 몸은 갈기갈기 걸레 처럼 찢어 졌을 것이다. 마리는 대기와의 마찰로 연기를 뿜어내는 A.I 슈츠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 ‥아직도 수업이 부족해. " 진정한 운요란 몸을 대기 속에 녹이고, 수중의 검을 번개로 만드는 것. 그 단계란 아직 그녀에게 먼 미래의 것이었다. 하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겠 지. 마리는 오라 소드를 땅에 역수로 꽂고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헤어졌던 가인과 유리가 걱정이었다. 무전을 쳐볼까도 생각했지만, 교전 중에서 무전 을 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마리는 발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 " .........?! " 마리는 귓가로 들리는 괴물의 신음 소리에, 불신의 눈초리로 괴물의 잔해를 살펴보았다. 맙소사‥ 이 녀석들은‥ - 우우우우‥ 잘게 잘려나간 수 십개의 젤라틴 덩어리들은 그 몸을 꿈틀거리며 다시 하나 로 합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정도의 속도라면 금새 본 모습으로 복원될 거다. 마리는 굳은 안색으로 다시 검세를 취했다. 역시‥본체를 쳐야한단 말 이지‥. 그냥 이대로 놈을 놔두고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그랬다간 가인들 까 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은 여기서 내가 해치운다! - 우우우우‥ 하지만 놈이 자신에게로 달려들 거라는 마리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하 나로 합쳐지던 젤라틴 괴물은 곧이어 창 밖을 통해 건물의 외부로 빠져 나가 기 시작한 것이다. 마리는 황급히 창 밖을 통해 녀석의 움직임을 살펴 보았 다. 녀석은 건물의 외벽을 타고 꾸물꾸물 상층부로 향하고 있었다. 저 녀석 이 왜 저러는 거지?! " .........!! " 마리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대원 그룹 빌딩의 상층부에 거대한 오라의 힘 이 생성되고 있는 것을. 마치, 저 괴물들을 불러 드리려고 하는 것처럼‥.설 마 그럴리가‥? 이런 오라의 기운을 발산할 수 있는 이는 마리가 아는 한 이 건물에서 한 명 뿐이었다. " 가인‥!! " 유가인. 바로 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가인은 35층 부근의 비상 계단에서 호흡을 고르며 오라를 모으고 있었다.그 의 몸 전신으로 푸른 빛의 오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의 오라로 인해, 건 물의 유리창들이 가볍게 진동하고 있었다. " …놈들이 올 때가 되었을 텐데…. " 가인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마리의 생각 대로, 가인이 이렇게 오라를 모으고 있었던 것은,오라에 민감한 몬스터를 자신에게로 불러 들이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그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 ......왔다! " 가인은 자신의 오라를 침범하는 기분 나쁜 느낌을 체크하며 창 밖으로 시선 을 돌렸다. 그곳으로는 보기만 해도 질릴 양의 어마어마한 젤라틴 덩어리 들 이 자신을 향해 기어 오르고 있었다. 가인은 긴장된 안색으로 웃음을 띄웠다. " 제,젠장… 나… 잘하는 짓일까‥이거? " 하지만 여기서 되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가인은 계획대로 비상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가인은 45층 부근에 있을 유리에게 소리쳤다. " 유리야? 내 말 들려?! " - 응. 오빠‥. 머리 속으로 들려오는 유리의 음성. 흠… 수신은 깨끗하군. " 지금 녀석들을 끌고 올라가고 있어! 준비는 다 되었겠지?! " - 걱정마. " 좋아! " 가인은 A.I 부츠에 오라를 불어 넣고 도약했다. 간단히 한 계단 층을 뛰어 넘는 가인. 그의 뒤로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젤라틴 괴물이 뒤따르고 있었다. 놈은 어느새 유리창을 부수고 건물의 안으로 밀려들어와 있었다. 한 층이 검 고 투명한 젤라틴으로 가득차 자신을 뒤쫓는 모습에 가인은 오금이 저렸다. " 젠장! 아직 멀었냐?! " 40층, 41층, 42층… 좋아.좋아. 조금 밖에 안 남았다! 뛰어라,유가인! 잡히 면 넌 뼈도 못 추린다! 가인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정신 없이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그의 머리로는 수 십가지의 걱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과연, 계획 대로 잘 될까나? 이거…! 만약 실패라도 한다면… " 그딴 거 걱정할까 보냐!! " 가인은 약해질려는 자신에게 버럭 고함을 치며, 힘차게 계단을 밟았다.가인 의 눈에 보이는 층 수, 45층! 좋아. 도착이다! 가인은 45층의 중앙으로 달려 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악착 같이 쫓는 젤라틴 괴물들. - 우우우우… 복도의 중앙에는 유리가 준비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기름통이 보였다. 보일 러실에 있던 기름이란 기름은 모두 그 곳에 모아두었던 것이다. 가인은 자신 이 지나온 복도의 벽들을 살펴 보았다.그럭저럭 기름들을 잘 뿌려놓은 것 같 았다. 좋아. 이제는 놈이 나에게 다가올 때 까지 기다리는 거다! - 우우우우… 가인은 저편의 복도에서 자신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 오는 젤라틴의 바다를 노려보았다. 통로를 가득 메우며 달려드는 통에, 벽과 천장에 뿌려놓은 기름 으로 놈의 표면은 번들 거리고 있었다. 좋아. 잘 되고 있어! 그리고 괴물은 가인의 바로 앞까지 밀려 닥쳤다. " 지금이다!! " 가인은 재빨리 준혁이 가지고 있던 라이터를 품 안에서 꺼낸 후 기름통들 에게 던졌다.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하는 거대한 불의 벽. 젤라틴 괴물은 사 정 없이 그런 불의 벽에 몸을 부딪혔다. - 우오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기름칠이 잘 된 괴물의 몸체로 불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가인 은 그 뜨거운 열기에 뒷 걸음질 치며 눈을 가렸다. 젤라틴 괴물은 순식간에 불덩어리가 되어 그 몸을 꿈틀대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복도 는 불의 바다였다. 그때, 가인도 생각 못한 일이 벌어졌다. - 치지지직… 앞 전 괴물의 습격으로 가스관이 터져있던 45층이었다.불은 괴물 만을 태울 뿐 아니라, 공기 중에 있던 가스에게 까지 옮겨 붙었던 것이다. - 콰앙-------!! " ......!! " 순간,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가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창 밖으로 튕겨나 갔다. 거칠게 흔들리는 건물.유리와 준혁은 최상층의 보일러 실에서 몸을 피해 있 었다. 그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진동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유리는 불안했다. 이런 폭발 같은 것은 분명, 애당초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어째서 폭발이 일 어난 것일까? 가인의 의도였을까? 하지만 그런 가인에게서 조차 앞 전 부터 마음으로 연락이 되질 않고 있었다. 가인에게 아무리 말을 걸어도, 마치 깊 은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뿐이었다. 마치 지금 가인의 상태는… 정신을 잃은 것만 같은… 가사 상태…. - 안돼! 유리의 머리 속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불타 오르는 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끊임 없이 마음 속으로 대답이 없는 가인을 불렀 다. 제발 대답해,오빠! 대답해 줘! 유리의 눈으로 한 줄기의 눈물이 맺혀 올 랐다. 모두에게 외면 받을 때… 유일하게 나를 위해주던 사람이다. 내가 오라 능력자라고… 내가 마음을 읽는다고 해도 나를 두려워 하지 않고 대해 준 사람이다. 외면 받던 나를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기던 것이 아닌… 나를 단지, '이유리'라는 한 아이로서 대해주었던 사람이었다. 절대로 죽게 할 수 없어! 절대 죽게하지 않을 거야! - 오빠…!! 유리의 핑크 빛 오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오빠…!! " .........!! " 가인은 눈을 번쩍 떴다. 분명 앞 전까지 의식을 잃고 있던 자신이, 거짓말 같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가인의 몸은 유리창을 깨며 빌딩의 밖으로 떨어지 려고 하고 있었다. 가인은 이를 악물며 급하게 주먹에 오라의 기류를 모았다. 지금은 이 방법 밖에 없어! " 천공권------!! " 떨어지려는 방향으로 내쏘아지는 가인의 천공권. 그 토네이도의 여파에, 가 인의 몸은 반대로 건물의 안으로 밀려들 수 있었다. 가인은 간신히 유리창이 깨진 창가를 붙잡을 수 있었다. 이거…놓치면 난 죽는다!! " 으,으으으읏!! " 가인은 있는 힘을 다해 창 턱을 넘어 건물의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지나친 긴장감과 안도감으로 전신의 힘이 다 빠져버렸다. 가인은 숨을 몰아 쉬며 지 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앉은 채 45 층의 상태를 살펴 보았다. 폭발의 여파로 온통 벽이고 천장이고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아아… 정말 살아 남은 게 기적 이다…. ' A.I 슈츠 덕분일려나…. ' 오리하르콘‥ 이라는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만들었다던데, 정말 단단하긴 엄 청 단단한 모양이었다. 그런 엄청난 폭발로도 몸을 보호해주다니. 대신,전신 이 멍이 든 것 처럼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살아 남았으면 된 거 지 뭘 더 바래…? ' 하지만 그건 뭐였지…. ' 분명 정신을 잊고 떨어지려던 자신의 의식을 깨워준 한 목소리. 그래… 유 리의 목소리였나…. 아마도 그 아이가 그대로 의식을 잊고 지상으로 떨어지 려던 자신을 깨워 준 것 같았다. 하아아∼ 고마워,유리야. 정말 고맙다…. " 하,하하‥ " 가인은 곧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유쾌해져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앞으 로는 거대한 젤라틴 괴물이 불꽃을 흡수하여 딱딱하게 고체 상태로 굳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인은 비틀 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마무 리를 해줘야 겠지…. " 이걸로 끝이다…! 징그러운 자식! " - 퍼엉! 가인의 천공권으로 고체 상태의 괴물은 유리잔이 깨지듯 산산조각 나버렸다. 토네이도의 영향으로 휘날리며 허공에 빛나는 수를 놓는 파편들. 가인은 왠 지 모르게 아름다워 보이는 그 광경에 몸을 쓰러뜨리며 웃음 지었다. " ......끝났다…. " - 오빠…. 가인은 편안한 얼굴로 무의식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 껴졌다. 누군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 오빠…. 가인은 살며시 눈을 떴다.자신의 머리를 무릎에 받쳐주며 울고 있는 유리의 모습이 보였다. 가인은 그런 유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며 중얼거렸다. " 왜 울어? 바보같이…. " - 바보는 오빠야! 바보! 바보! 하지만 그런 유리의 외침과는 달리 유리는 가인의 몸을 끌어 안았다.가인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앞 전의 천공권으로 몸 안의 오라는 모조리 고갈되어 버렸다. 다시 기절하래도 기절할 수 있겠는걸 …. 가인은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비틀 거리는 몸으로 유리의 부축 을 받았다. 그들의 뒤로는 준혁이 창백한 안색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신 음을 흘리고 있었다. 준혁은 유리 파편처럼 깨져 있는 젤라틴 덩어리들에 인 상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쳤다. " 마,말도 안되는 일의 연속이로군… 이런 일이…. " 그의 눈에는 저기에 서있는 가인과 유리도 사람 같이 보이질 않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되는 짓이나 저지르다니‥. 저들은 나와 같은 인간이 아 닌 것이다. 준혁은 공포심에 젖은 눈을 그들에게서 돌려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젤라틴의 파편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 우우… 부서져 있던 젤라틴 덩어리들이, 점점 고체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꿈틀거리며 준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준혁은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으아아앗!! " 가인과 유리는 자신들의 뒤로 들린 준혁의 비명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그 곳에는 몸을 비틀며 소리치는 준혁과 그의 등 뒤에 붙어있는 젤라틴 덩어리 가 있었다. 설마‥ 아직도 살아 있을 수 있다니…!! 가인은 창백해진 안색으 로 부서진 젤라틴의 잔해들을 살펴보았다. 녀석들은 무서운 속도로 다시 뭉 쳐지고 있었다. 곧이어, 원 상태로 몸을 돌리기 시작하는 젤라틴 괴물. 괴물 은 가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 우우우우우!! 끝이다----!! 가인은 유리를 감싸안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 그런 젤라틴 괴물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붉은 섬광 하나. 젤라틴은 그 일격이 치명적이었 는듯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곧 땅바닥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 라지는 괴물의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여성. 가인은 반가운 목소리로 그녀 를 불렀다. " 마리 선배! " 마리는 오라 소드를 앞으로 찌른 자세에서, 몇 번 오라 소드를 휘둘러 품에 넣은 후, 나지막히 가인에게 말했다. " 약속… 지켰다. " " 하핫! " 가인은 그런 그녀의 변함 없는 태도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여전히 등에 붙은 젤라틴에게 공격을 받고 있던 준혁. 젤라틴이 붙은 어깨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준혁은 비명을 질렀다. 떠,떨어져! 떨 어져 버려! 떨어지란 말이야!! - 퍼엉! 그때, 준혁의 뒤에 붙어있던 젤라틴이 급격히 부풀어 올라 터져버렸다.유리 의 거센 마인드 브레이크(Mind Break)로 사념 채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유리 는 황급히 쓰러져 있는 준혁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할려고 했다. 하지만 준혁 은 고통으로 제정신이 아닌듯, 그런 그녀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 으앗! 저리가! 이 괴물!! " " ......... " 그런 그의 손에 떠밀려 쓰러지는 유리.유리는 자신의 아빠를 바라보았다.준 혁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유리를 보며 떨고 있었다.그의 눈은 자신을 사람 이 아닌 마치 괴물이라도 되는 양 보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래… 괴물‥인가…. 유리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 아빠 탓이 아니야…. 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내 잘못인 걸…. 이제는 억울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체념이었다. 이런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내가 무서운 거야…. 내가 잘못인 거야…. 마치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한 허전함…. 그때, 그런 유리의 손을 잡는 이가 있었으니, 가인이었다.그는 살며시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 아마도 유리의 마음 속 외침이 가인에게도 들렸던 모양이었다. 유리는 그런 가인을 올려다 보았다. 가인은 천천히 유리에게 말했다. " 나… 아까 정신을 잃고 하마터면 건물에서 떨어질 뻔 했었어. 위험했지…. 하지만 그런 나를 깨우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 " 유리는 아무 말 없이 가인이 잡고 있던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마리가 담 담한 눈초리로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만약, 네가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면… 유리가 오라 능력으로 나를 깨워 주 지 않았다면 난 그대로 떨어져 죽었을 거야….그치? " 가인은 여전히 멍한 눈초리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리에게 미소지었다. " 유리야, 네가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날 살려줘서. " 고마워? 고마워? 내가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유리는 가인의 따뜻한 미소 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이 사람은… 어째서… 어째서 내가 이렇게 듣기 원 했던 말을 해줄 수 있는 걸까….내가 알아주길 바랬던 걸… 어떻게‥ 이렇게… " ......오빠‥ " 유리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인은 유리가 처 음으로 입을 열자 놀라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유리는 눈물을 흘리며 가인 에게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 고마워‥. " <제 5 화 마음으로 우는 아이 完> 豫告 자자자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 바로 이 천재 미소녀 과학자 님의 등장이시지!! 천공권으로 위기에 빠지는 가인! 자, 너를 위해 이 몸이 친히 만들어 주었어!! 헤븐 스매쉬(Heven Smash)! 이것을 장착하는 순간, 넌 무적이 되는 거야!! 가인: 이거...... 믿을 수 있는 거… 시끄러-------!! 감히 이 천재 과학자 님의 메카니즘을 의심하는 것이냐!! 제 6 화 싸우는 이유 가인: 위 내용과 전혀 관계없는 제목이잖아... -=-=-=-=-=-=-=-=-=-=-=-=-=-=-=-=-=-=-=-=-=-=-=-=-=-=-=-=-=-=-=-=-=-=-= 오라전대 ＰＩＥＣＥ ＭＡＫＥＲ 第 6 話 싸우는 이유 =-=-=-=-=-=-=-=-=-=-=-=-=-=-=-=-=-=-=-=-=-=-=-=-=-=-=-=-=-=-=-=-=-=-=-= " 후우… 후우… " 가인은 최대한 낮은 소리로 숨을 쉴려고 노력했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고, 가인의 A.I 슈츠로 그 빗 줄기들이 부딪혔다. 유일하게 노출되어있는 눈으로는 찬 공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방열이 잘 되는 A.I슈츠 가 아니었더라면, 가인은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5월의 비는 아직 차가웠다. << 목표와의 거리 100m, 슬슬 준비하도록 하세요,피스 블루. >> " 피스. " 가인은 무전기로 들리는 오퍼레이터 윤채영의 목소리에 짧게 답하며 다시 숨을 죽였다. 최대한 놈이 접근하는 순간, 공격 해야 했다. 그때까지 녀석에 게 발각되어서는 안된다. - 쿵. 쿵. 저 멀리서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야 행차 이신가…. 가인은 8m 정도 되는 양옥집의 옥상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가인의 천공권으로 몬스터를 습격.그리고 그 잠시간의 딜레이를 이용하여 나 머지 대원들이 협공한다. 어찌보면 단순하지만, 가인에게는 가장 막중한 책 임이 뒤따르는 임무였다. 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자신의 처지에 회의 감이 느껴지는 그였다. ' 이대로 좋은 걸까…. ' 그의 시야를 연신 흐린 하늘과 비가 가렸다. 대피 명령이 떨어졌기에, 반경 10km 부근의 사람들은 모두 피신한 뒤였다. 쥐새끼 한 마리 없는듯한 고요함 이 가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 내가 피스 메이커에 들어온지 어느덧 1달… 이 넘었구나‥. ' 오늘이 5월 25일이니까‥ 한 달 반‥정도로군. 짧다면 짧다고도 말할 수 있 는 기간이었지만, 가인은 지쳐있었다.대원 그룹 빌딩에서 몬스터와의 싸움이 있은 뒤에도 몬스터는 질리지도 않고 그 모습을 계속 드러냈다. 물론, 처음 에는 낯설은 이 일에 적응하느라 정신도 없었고 어느 정도의 의욕도 있었다. 하지만… 가슴 속으로 밀려드는 무기력증만은 어쩔 수 없었다. ' 이런게 5월 병이라는 걸까…. ' 거,참… 회사원들이나 걸리는 이런 걸 도대체 왜 내가…! 그 때, 긴급히 들 려오는 무전 소리. 앞전부터 무전은 계속 울리고 있었으나, 딴 생각을 하던 가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 몬스터와의 거리 50,40! 응답해요, 피스 블루! >> " 아,예,옛! " 가인은 당황하며 무전을 받았다. 가인의 앞으로는 어느새 6m 크기의 거인이 지축을 울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거인의 외눈 박이 눈이 이리 저리 움직이다 가 가인을 포착했다. 가인은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 …젠장!! " 작전이고 나발이고 다 틀렸다! 거인이 사정권 안에 들어왔을 때, 천공권으 로 저 괴물의 외눈을 공격한다는 계획은 이미 수포로 돌아간지 오래였다. 가 인은 재빨리 A.I 부츠에 오라를 모으며 뛰어올랐다. - 키랴앗!! - 콰직!! 거인의 포효와 함께, 외눈박이 괴물이 들고 있던 쇠 곤봉이 앞 전까지 가인 이 서있던 자리를 내리쳤다. 단번에 부서져 내리는 콘크리트 파편들. 가인은 지상으로 착지하며 다급히 오른손으로 푸른 기류를 모았다. 어쨋든, 기습은 실패했지만 놈의 눈에 천공권을 먹이는 것 만이라도! " 천공권!! " 가인의 오른 손에서 뻗어나오는 푸른빛의 토네이도. 천공권은 외눈박이 거 인의 눈으로 곧장 날아들었다. 하지만 급하게 오라를 모으느라 천공권은 그 위력도 감소되어 있었고, 가인이 침착하게 목표를 노렸던 것도 아니었기에 천공권은 괴물의 눈을 빗껴 그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인은 이를 악물었 다. ' 빗나갔다…! ' - 퍼억! 그와 동시에 가인은 거인의 발길질에 채여 허공을 날았다.입으로 선혈이 오 르는 것을 느꼈다. 그 위력이 얼마나 센지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단번에 의식이 희미해져 간다. " 커,커억…! " 다행히도 가인이 지상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를 받아내는 이가 있었다. 가물 가물해지는 시선 사이로 얼핏 노란빛의 A.I 슈츠가 보였다. 시,시민 씨인가…. " 가인 씨, 정신 차려요! " 맞구나,시민 씨. 하지만 그 뒷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단지 이 땅에 쏟아내 리는 빗소리만이 거세게 들릴 뿐이었다.희미한 시야 저편으로는 거인에게 달 려드는 녹색 빛과 적색 빛의 광채가 흐릿하게 보여 왔다. 아마도 진우 씨와 마리 선배겠지…. 하지만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눈꺼풀이 쇠 추라 도 매달린 것 처럼 무거웠다. ' 이젠… 아무래도 좋아…. ' 만사가 귀찮고 짜증났다. 가인은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센 빗 소리만이 그 암흑 속으로 들려 올 뿐이었다. 第 6 話 싸우는 이유 " ......... " 가인은 고개를 숙인 채 진 사령관의 앞에 서있었다.피스 메이커의 본부실은 침묵으로 휩싸여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자신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진 사령관. 그의 시선에 가인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뭐야. 욕을 할 거면 욕을 하고 비웃을려면 얼른 비웃으라고. 이윽고, 긴 침묵을 깨고 진 사령관 이 입을 열었다. " 유가인,도대체 자네는 뭘 생각하고 있는 건가. " " ......... " 그의 말에 가인은 아무런 말도 답할 수 없었다. 가인은 고개를 숙인채 뒤로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왠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내 실수는 인정한다. 하지만…자신이 이런 곳에서 저런 사람에게 꾸지람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맘에 들지 않는 가인이었다. 매번 자신에게 심한 소리만 하는 진 사 령관이었다. 당연히 그는 가인의 맘에 들지 않았고, 가인은 그를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쥐꼬리 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 게서 받은 비웃음 만큼, 지독한 모욕은 없는 것이다. " 꽤나 둔하군. 이쯤이면 이제 이 일에도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 " ......... " 둔해서 미안하군요! 가인은 이렇게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신이 잘 못한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잘 참고 있던 가인에게 진 사령 관은 결정타를 날렸다. " 작전 중에 여자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 아무리 혈기 왕성한 나이 라지만 못 말리겠군…. " " ......무,무슨! 내가 당신 같은 줄 알아?!! " 결국 또 터지는군. 가인의 뒤에 있던 피스 대원들은 중얼거렸다. 진 사령관 과 가인. 이 둘이 대면할 때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분명 둘 다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거라니깐.언제나 처럼 민수정이 웃음을 띄우며 그 험 악한 분위기를 가라 앉혔다. " 진 사령관 님, 말씀이 지나치세요. 가인 군도 진정하고. " " 젠장!! " 가인은 진 사령관에 대한 모욕과 자기 자신에 대한 한심함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본부실을 나가버렸다. 그런 그를 뒤쫓아 나가는 피스 대원들. 여느때 와 같은 썰렁한 분위기가 본부실을 감싸 안았다. 민수정은 식은 땀을 흘리며 진 사령관에게 웃음 지었다. " 저기… 좋은 말로 하셔도 됐을텐데… " "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게 맞는 방법이 있지. " 진 사령관은 짤막히 말하며 이번 몬스터와의 자료 화면들을 살피기 시작했 다. 하지만 수정은 그가 흐뭇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 었다. 민수정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분명 사령관 님… 즐기고 계시는 거 야…. 그리고 저런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 가인 군도 참…. ' 둘 다 똑같다니깐…. ' 민수정은 한 숨을 내쉬었다. " ......... " 가인은 언더 시티 유레카의 인조 공원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언 더 시티에서 이 장소를 가인이 발견한 것은 최근 들어서 였지만, 가인은 그 후로 틈틈히 이곳을 찾아 왔다. 조용하고… 무엇보다 언더 시티의 인공 햇빛 을 받으며 잔디밭에 눕는 느낌이 일품이었다. 그 느낌이라는 게 얼마나 포근 한 것인지, 한 번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반나절을 이곳에서 자버린 적도 있었다. " 하아…. " 뛰쳐 나오기는 뛰쳐나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잘한 행동은 아 무 것도 없었다. 전투 중에 딴 생각이나 하고,괜한 자존심으로 화만 내고,자 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엉망진창이고 형편 없었다. 가인은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정말… 형편 없어…. " " 이런 곳에서 땡땡이나 치고…그래. 정말 형편 없지∼ " 그때 가인의 옆으로 들려오는 넉살 좋은 목소리.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잔디 밭에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옆으로는 어느새 다가온 건지 모를 진 우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마리와 시민, 유리도 함께 서 있었 다. 가인은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진우를 쏘아 보며 투덜거렸다. " 뭐,뭐에요. 남의 말을 엿듣기나 하고. " " 허어∼ 훈련을 땡땡이 친 녀석이 오히려 나에게 큰 소리냐? " 아,맞다. 훈련‥! 몬스터와의 전투는 오후 4시로 종료했기에, 가인은 언제 나와 같이 훈련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몬스터에게 얻어 맞고 실신한 데다가,진 사령관과의 다툼으로 가인은 도저히 훈련할 기분이 못 되었다. 그 런 가인의 기분을 알아준 건지, 유리가 가인의 옆에 와 앉으며 진우에게 말 했다. " 오빠‥ 힘들어‥. 오늘 훈련, 시키지마. " 유리는 대원 그룹의 그 사건이 있은 후로 꽤 말을 잘 할 수 있게 되었다.단 지 문제는, 한동안 말을 안하던 유리는 그 새 높임법을 잊어먹기라도 한건지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이들에게 반 말로 일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유리의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 진우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힘들다고 안하면 그게 훈련입니까, 이유리 양∼ " " …그래서 시킬 거야? " " 당연하죠∼ " " ......답답해. 바보 아저씨. " - 쿠웅! 유리는 무표정하게 중얼거렸고, 진우는 상처를 입었다. 가인은 그런 유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말을 하게 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화법에 근본 적인 문제가 있었다. 유리는 현재, 집을 나와 시민 씨의 집에서 자신과 같이 사는 중이었다. 같이 살게 된 이상, 책임지고 말을 잘 가르쳐 줘야 하는데…. 어쨋든 그런 유리의 보모 같은 고민을 하는 가인에게로 마리가 말을 걸었다. " 가인,몸은 괜찮은가? " " ......아,예. 그럭저럭. " 가인은 자신의 가슴팍을 쓸어보며 중얼거렸다. 그 무지막지한 외눈박이 괴 물(피스 메이커는 그 괴물을 D+급 몬스터 '사이클롭스(Cyclops)'로 명명했다) 에게 걷어차인 것 치고는 거짓말 같이 멀쩡했다. 단지 약간의 타박상만 입었 을 뿐. 그것도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에서 치료하자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해 졌다. 무엇보다… " A.I 슈츠 덕에 별 다른 상처도 없었어요. " 가인은 새삼 A.I 슈츠의 대단함을 느꼈다. 만약, 이 슈츠가 없었더라면 몬 스터와의 전투에서 수 십번 죽어도 더 죽었을 것이다. 오라의 막을 자체적 으로 생성해 내어 사용자의 몸을 보호해주고,오리하르콘이라는 그 금속 또한 이 세상의 것 답지 않게 경도에 비해 그 내구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더군 다나 오라를 물리력으로 바꿔주는 A.I 글러브라던지 도약력을 상승시켜주는 A.I 부츠라던지… 모두 놀라운 것들 뿐이었다. 이 A.I 컴플릿 세트라는 것은. 가인은 그렇게 A.I 슈츠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뭔가 궁금함이 생겼는듯 모 두에게 물었다. " 이 A.I 슈츠를 만든 사람은… 도대체 누구죠? " 그래. 바로 이게 궁금했다. 얼마나 대단한 과학자 이길래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런 가인의 질문에 대답한 이는 시민이었다. " A.I 컴플릿 세트의 개발은 피스메이커의 기술부에서 이루어졌어요. 그리 고 그 모든 것을 발명한 이는 그 기술부의 치프구요. 사실, 피스메이커의 모든 메카니즘은 그 사람에게서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 " 하아… 대단한 사람인가 보죠? 굉장히 머리가 똑똑하다던가…. " 가인은 왠지 다른 세상의 사람 얘기를 듣는듯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굉장한 과학자라니. 사는 세계가 틀릴지도.시민은 그런 가인의 말에 방긋 웃 으며 말했다. " 더 대단한 건 그 과학자가 가인 씨와 동갑이라는 거에요. I.Q 200의 천재 소녀. 놀랍죠? " " ......아,그,그렇네요. " I.Q 200? 뭐야, 실제로 그런 게 존재하는 거였나?! 거기다 나하고 동갑이라 고? 가인은 자신의 빈곤한 상상력으로 기술부의 치프라는 그 천재 소녀의 모 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괴하게 늙어서 얼굴의 한 부분에 기계가 부착된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습 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가인이었다. ' …한계다.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과연 어떤 사람일려나. 그 I.Q 200 의 천재 소녀란 분은…. 다시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습이 떠오르자 고개를 흔 드는 가인이었다. 가인, 그 빈곤한 상상력이여…. " 푸엣취…! " 한편, 여기는 피스메이커의 지하 연구실. 여러 잡다한 기기들이 쌓여 있는 좁은 독방에 그 I.Q 200의 천재 소녀는 연신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자신의 커다란 돋보기를 손으로 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 아,뭐야.뭐야. 공기 청정기가 고장이라도 난 건가. " 그녀는 애꿋은 공기 청정기를 들먹이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뒤로는 메디컬 센터의 총책임자 닥터가 가볍게 웃으며 그런 소녀에게 말했다. " 누가 시더 양의 험담이라도 하고 있는지 모르죠. " " 쿠쿠쿠∼ 아저씨도 참. 재채기와 험담의 필연적 연관성은, 지나가는 달팽 이가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 French Style Snail with Herb Butter 로 요리될 확률이라고요. " " 뭡니까,그런 다분히 자기 취향이 들어간 확률 계산은? " 왠지 벙찐 표정이 된 닥터는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말에, 시더라 불린 이 천재 소녀는 길게 땋은 갈래 머리를 귀찮다는듯 뒤로 넘기며 말했다. " 그나저나 제가 부탁한 데이터는 가져오신 거에요? " " 그럼요. 시더 양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패턴 블루의 데이터. " 닥터는 그런 시더에게 윙크를 하며 작은 CD를 넘겨주었고,시더는 잽싸게 그 CD를 낚아채어 자신의 볼에 부비며 소리쳤다. " 우후후후∼ 기다리다 못해 쓰러질 뻔했다구요.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이라고 제가 누누히 말했었죠,닥터? " " 하하…. " 뭔가 주객이 전도된 듯한 기분이 드는데. 닥터는 시더의 그런 행동에 아직 도 적응이 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더는 당장에, CD를 컴퓨터 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무수히 뜨는 테이터와 동영상. 그 동영 상 중에는 앞전 사이클롭스와 싸울 때 가인이 천공권을 쓰는 장면도 포함 되 어 있었다. 시더는 유심히 그 장면을 돌려보다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 쿠쿠쿠∼ 좋아.좋아. 특별히 이 몸이 서비스를 해주지.영광으로 알라고. " - 딩동댕동‥ 다음 날 아침 조회 시간. 가인은 창 밖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주위의 시끄러운 학우들의 소리도 그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5월의 무기 력증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 오늘도 학교를 마치고, 언더 시티에 가서 훈련을 받겠지‥. ' 운이 없으면 또 몬스터와 한 바탕 일을 치룰테고.그렇게 생각하자 한 숨 밖 에 나오지 않았다. '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반복되는 걸까‥. ' 가인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하지만 아무 것도 떠 오르질 않았다. 아, 난 이렇게 꿈도 없는 무미 건조한 녀석이었단 말인가.남 들은 중학교 때 부터, 빠르면 초등학교 때부터 자신의 장래를 생각한다는데 난 이게 뭐람. 그렇게 생각하니 가인은 조급함 밖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 얼떨결에 피스 메이커에 들어와서, 얼떨결에 오라라는 것을 가지게 되어,얼 떨결에 몬스터와 싸우게 되고…. 그 어디에도 자신이 결정한 선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성실이고 의욕 같은 게 생길리도 만무한 거고…. ' 아무 생각도 없이 이대로 피스 메이커에서 일하면 그걸로 만족하는 건가, 난? ' 분명 봉급은 많이 나온다. 아마, 이대로 몬스터가 계속 나와 피스 대원으로 활약하게 된다면 왠만한 부호들 만큼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가인 자 신이 어떤 진로를 선택하더라도 이렇게 까지 돈을 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그걸로 된 것이 아닐까? ' 하지만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 아무리 돈을 잘 벌면 뭘해? 아무리 생활이 편해지면 뭘해? 내 자신이 무감 각해지고 의욕이 없어진 삶을 산다면… 그걸로 불행이었다. 배 부른 고민 아 니냐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 달 전만 해도 가난에 허덕이던 녀석 이 시건방져 진 거 겠지. 그래…. 이대로 된 거야. 이대로…. 이대로 된 걸까? 정말? 정말 그걸로 만족하는 거냐,유가인? ' 아니야. 내가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은…. ' 그래. 이유다. 나에게는 이유가 결여 되어 있었다. 무엇 때문에 피스 메이 커에 들어와 무엇 때문에 몬스터와 싸우는지. 왜 싸워야만 하는 건지. 나에 게는 싸우는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 이대로는 안돼…. ' 평화로운 5월의 풍경과는 달리, 가인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져만 갔다. " 자자∼ 조용! 조용! " 교탁을 치는 소리와 함께 여느 때 처럼, 1학년 3반의 담임 하지연은 조회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느 때와 같이 그녀는 담배를 피고 있지 않았고, 여느 때 와 같이 고래고래 고함도 치지를 않았다. 1학년 3반의 학생 모두는 그런 지 연의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들의 눈을 한 번 씩 부벼대곤 했다. 지 연은 뭔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런…. " " .........? " 뭔가 더더욱 알 수 없어지는 학생들.그런 학생들의 시선을 그제서야 알아챈 건지 지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에,또… 우리 학급으로 제 2의 전학생이 편입되었다. " 그때, 재영이 기세 좋게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 여,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남자라면 사양하겠습니다!! " - 퍼억! 지연은 사정 봐주지 않고 출석부를 재영의 얼굴에 명중시켰고,재영은 그 일 격으로 잠잠해졌다. 지연은 여전히 떨떠름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 그게‥ 여자는 여잔데.........판단은 너희들이 알아서 하길 바란다. " 지연은 전학생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교실 밖에서 서있을 전학생을 불렀다. 1학년 3반 학생들의 시선이 교실의 앞 문으로 집중되었다.도대체 어 떤 전학생이길래 저 무신경하기로 유명한 하지연 선생이 저런 반응을‥! 그 런 아이들의 기대 속에서 전학생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 드르륵‥ 문이 열리며 한성 고등학교의 여자 교복을 입고 나타나는 전학생.그 전학생 을 바라보는 순간, 1학년 3반 학생들의 동공은 정확히 1.5배로 확대 되었다. 무심결에 전학생을 바라보던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전학생의 이름을 소리쳤다. " 유,유리야?!! " 바로 1학년 3반으로 전학온 제 2의 전학생은 다름 아닌 피스 메이커의 피스 핑크이자 시민 씨의 집에서 자신과 같이 더부살이를 하는 이 유 리 였던 것 이다! 가인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주목되자,가인은 얼굴을 붉히 며 헛기침을 했다. 어,어떻게 유리가 여기에?! 하지만 그 전에 가인과 1학년 3반 일동은 공통된 의문점을 가질 수 있었다. 분명 저 아이… ' 초,초등학생?! ' 그렇다. 전학생 이유리. 그녀는 아무리 잘 봐줘도 중학생 1학년 정도로 밖 에 보이질 않는 어린 소녀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유리는 초등학교 6 학년 생이었다. 어쨋든, 그런 모두의 경악 속에서 교단에 서는 이유리. 그녀 의 옆에 있던 하지연은 여전히 덜떠름한 표정으로 전학생을 소개하기 시작했 다. " 오늘 부터 우리와 같이 공부하게될 '이유리' 양이다. 너희들에게 보이는 대로 유리 양은 초등학교 6학년 생(이 대목에서 지연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표정은 말을 잊어버린 사람의 그것이었다)…이었지만, 아주- 똑똑 한 관계로(이 대목에서도 지연은 역시 말을 멈췄다. 유리를 보는 그녀의 표정은 막 외계에서 내려온 미지의 생물과 접촉한 지구인의 그것이었다) …고등학교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여러모로 생소한 것이 많을 테 니 모두 유리 양을 잘 도와주도록. " 하지연의 소개가 끝나자, 1학년 3반의 교실은 대번에 시끄러워졌다. 고등학 교로 편입해온 초등학생이라니…이건 아마도 한성 고등학교가 설립된 이래로 발생한 전대미문의 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교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지 연은 언제나 처럼 교탁을 치며 소리쳤다. " 자자∼ 놀라는 건 거기까지 하고! 유리 양,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 지연의 말에 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1학년 3반 학우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 펴보기 시작했다. 저편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하는 남학생은, 분명 가인의 친구라고 하던 '박재영'이라는 사람.1학년 3반의 여학생들은 고 등학교로 온 이 초등학생이 매우 신기해 보였는듯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유 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남학생들은 볼을 붉히며 주먹을 쥐고 있었다.(왜?) " 아…. " 어쨋든, 그런 학생들을 지나서 유리는 곧 자신이 찾던 사람을 발견할 수 있 었다. 창가 제일 우측에 앉아서 자신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 '유가인'. 유리의 머리 속으로 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유,유리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권력의 힘. 그,그렇군. 피스 메이커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었나? 가인은 유리의 답변에 식은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이 사태가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 그,그래도 분명 입시 시험을 통과해야 했을 텐데‥ 어떻게? - ......능력이란 써먹으라고 있는 거지‥. 유리의 말에 가인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느,능력이라면 분명 그 마음을 읽는 능력‥.설마 그 능력으로 출제자의 마음을 읽어 답을 쓴 것은‥! 가인은 왠지 허탈해져 중얼거렸다. 부, 부정 시험이잖아.그건…. " ......... " 유리는 그런 가인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그를 놀래켜 주려던 유리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리의 웃음은 오래 가 질 못했다. " .........!! " 바로 가인의 옆자리에 테레이아가 앉아 있던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지 연은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 저기, 할 말은 없는 거… " " 저 자리 배치… 눈에 거슬려‥. " 낮게 중얼거리는 유리의 말에 지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뭐라고 했지, 금방 이 애? 하지만 그런 지연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유리는 그녀에게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나‥ 저기 앉을래. " " 어,어디? " 유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으로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1학년 3반에 대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유가인이 쓴 웃음을 지 으며 힘 없이 앉아 있었다. 어째서 또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냐….그런 가 인에게로 유리가 걸어오자 그 앞을 에메랄드 빛 머리의 소녀, 테레이아가 단 호히 막아섰다. 주위의 기압이 내려간다고 느껴지는 것은 가인 만의 착각이 었을까. 테레이아는 유리를 노려보며 싸늘히 미소지었다. " 훗… 장해가 많을 수록 불타 오르는 성격이야…. 난." " …나이를 생각하시죠." -쿠쿵! 역시나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듯한 유리의 말이었다. 말을 하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녀는 이미 수준급의 어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었다.물론 그 수준이라는 게 절대로 올바르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테레이아는 태연스 럽게 행동할려고 했지만 꽤나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었는듯 이마에 실 핏줄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인은 주위의 기압이 더더욱 내려간다고 느꼈다. " 넌 늦었어. 이 자리는 내 꺼야. " " …그건 학급의 소유. 소유권은 학급의 모두에게 있는 거야. "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대치.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누,누가 이 상황을 중재해줄 사람은 없는 것인가?! 그런 가인의 눈 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박재영이었다. 그래,재영아! 하지만 재영은 1학년 3반의 남자들과 원탁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 그,그러니까 저번에 저 아이가 교문에서 가인을 기다렸단 말이지? " " 그렇다니깐∼ 그리고 가인이 놈, 그 아이 부모까지 만나러 가더라고! " " 서,설마! 유가인…! 역시 1학년 3반에 대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 " 하지만 이대로는 테레이아 사수대와 이유리 사수대로 우리의 세력이 나뉠 위험이 있다.가인이란 지옥 대원수를 놔두고 우리의 힘을 둘로 나누는 것 은 바보 짓이다! " " 그,그래! 지금은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할 때! " " 우리의 공통된 목표만을 생각해라! 타도 유가인! " " 타도 유가인! " 그래… 난 매번 재영이 저 놈에게서 뭘 기대하는 거였지…. 가인은 자각해 야만 했다. 박재영. 저 놈은 그의 인생에 암적인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스파크를 내뿜으며 서로를 노려보는 테레이아와 유리. 그리고 가인을 힐끔 거리며 노려보다가 다시 자기들끼리 쑥덕 거리며 모의를 하는 재영 패거리들. 이 사이에 끼어 가인은 지독한 허무감을 맛 봐 야만 했다. 잊고 있던 무기력증이 다시 밀려들고 있었다. ' 나…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 다시 번뇌에 빠지기 시작하는 가인이었다. 그리고 결국 보다 못해 이 사태 를 수습한 사람은, 역시나 1학년 3반의 담임 하지연 교사였다고 하는데…. 그 날 이후로, 1학년 3반 교실에는 한 곳 만 특이하게도 책상이 3개가 붙어 있는 묘한 자리 배치가 결성되었다고 한다. " 아아… " 가인은 피곤한 얼굴로 언더 시티 내를 걷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학교를 끝 마치고 훈련을 해야 했다. 오늘은 여러모로 피곤한 날이었다. 유리의 고등학 교 입학을 시작으로, 자신의 양 옆에서 연신 투쟁심을 불태우는 유리와 테레 이아의 시선에 수업 내내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던 가인이었다.거기다,신 발장에 들어 있던 그 수많은 저주의 글귀들…. 분명, 재영 패거리들의 짓들 임이 분명했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짓들이나 하고 말이야….나오는 건 한숨 뿐이었다. ' 이대로는 나… 분명 단명할 운명일지도…. ' 가인은 머리를 흔들며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훈련 시간에 늦었다간 진우의 벌칙으로, 손가락 수를 점점 줄이며 팔 굽혀 펴기를 해야만 한다. 세 개 까지는 가능했지만 그 이상은…. 가인은 저번에 손가락 두 개로 팔 굽혀 펴기를 하려다가 손가락이 부러질 뻔 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생각하기 싫은 악몽이었다. 늦지 말아야 할텐데… 가인은 마음이 조급해져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서두르면 뭔가 더 꼬이는 법이다, 가인은 막 코너를 돌려다가, 마주 오는 상대와 그만 부딪혀 버렸다. " 으앗∼! " 여자의 비명 소리와 함께 허공에 휘날리기 시작하는 무수한 페이퍼들. 얼마 나 그 페이퍼들이 많은지 가인은 한순간 시야가 온통 백지로 가려지는 것 만 같았다. 그 엄청난 수의 페이퍼들을 바라보며 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훈련 … 지각이다…. " 아, 저기‥ 죄,죄송합니다. " 가인은 당황하며 쓰러진 여자를 바라보았다.나이는 가인,자신의 또래 쯤 되 어보이나? 한 17,8세 정도 되어 보였다. 양쪽으로 길게 갈래 머리를 땋고 있 었으며, 그 밑으로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커다란 돋보기 안경을 쓰고 있었 다.옷 차림을 보아하니 연구원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가인이 그렇게 그녀 를 살펴보고 있을 때, 이 돋보기 안경의 소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 치명적인 숄더 어택이야. 몸무게의 차이를 극복 못하는군…. " " ......에? " 가인은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짓자, 안경의 소녀는 한 숨을 내쉬며 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 ‥일으켜 달라는 소리였어. " " 아,미,미안! " 가인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 힘차게 일으켜주었다. 안경의 소녀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주위에 흩어진 페이퍼들을 바라보았다. " 다 떨어져 버렸네‥. "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가인은 재빨리 몸을 굽혀 페이퍼들을 줍기 시작 했다. 소녀가 어찌 손을 써 볼 틈도 없이 페이퍼의 뭉치를 모아 들은 가인은 그녀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 자, 여기. 부딪혀서 미안했어. " " ......아, 나 허리도 아픈 거 같은‥ " 소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의 허리를 두드렸다. 그런 그녀를 가인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소녀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 미안하지? " " 아‥ 으응‥. " " 그럼 가자. " 그러면서 앞장 서서 걷기 시작하는 소녀.가인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하 며 자신의 손에 들린 페이퍼 뭉치를 들어보였다. " 아,저기‥ 이건 어떡하고! " " ‥들고 따라와. " 간단히 대답하는 안경 소녀.가인은 다시 벙찐 표정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 다. 들고 따라오라고? 이걸? 그렇게 가인이 뒤처지자, 소녀는 이번에는 절뚝 거리며 가인에게 말했다. " 어라라? 넘어질 때 다리도 접질렀나봐. " " .........앞장 서시죠. "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페이퍼 뭉치를 들어올렸다. 시계를 바라보았다.10분 경과‥. 훈련… 늦었다‥. 오늘은 아마도 손가락 하나로 팔굽혀 펴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아,아직 멀은 거야? " " 겨우 그걸로 힘들다고 엄살부리는 거야? " " 아니… 그것보단 계속 지하로 들어가니깐‥. " 가인은 뒷 말을 흐렸다. 훈련에 늦은 건 고사하고 이러다 갈 수나 있을지 모 르겠다. 벌서 20분 째. 가인은 이 정체 불명의 안경 소녀를 따라 페이퍼 뭉치 를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한게,이 소녀는 계속 지하로 내려가고 만 있었던 것이다. 가득히나 이 언더 시티 유레카 자체가 지하에 만들어진 곳 인데 그보다 더 깊은 지하라니…. 이 아이‥, 도대체 날 어디까지 끌고 갈 작 정인 거야? 그런 가인의 불안한 기색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이 소녀는 에 스컬레이터를 타고 밑으로 향했다. " 자, 드디어 도착∼ " 안경 소녀가 소리치며 소개한 곳은 다름 아닌 어둠침침하고, 잡다한 기기가 잔뜩 널려 있는 좁은 골방이었다. 아니, 원래는 넓은 방이었겠지만, 워낙 정 리며 정돈을 안했기에, 물건들이 싸여 방이 좁아 보이는 것이었다. 도,도대 체 이게 사람이 사는 방이냐?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 다. 그런 가인에게 안경 소녀가 손 짓을 했다. " 자자, 저기에다가 그거 놔둬. " " 아,그래. " 가인은 한껏 들고 있던 페이퍼 뭉치를 안경 소녀가 가리킨 곳에 놓아두었다. 아,이제 좀 살겠네. 저 페이퍼 뭉치라는게 말이 페이퍼지 왠만한 전자 제품 보다도 무거운 것이었다. 가인은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안경 소녀는 그 런 가인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 아,미안미안∼ 나 땜에 볼 일도 못 보고 힘들었지? " 알긴 아는 거냐…. 가인은 뚱한 눈으로 그런 안경 소녀를 한번 노려 보았다. 얼굴의 절반을 가릴 정도로 큰 두꺼운 돋보기 안경 땜에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뻔뻔스런 표정을 짓고 있겠지…. " 어? " 그때, 그런 가인을 마주 보던 안경 소녀가 놀랍다는듯 그를 손가락으로 가 리키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설마∼ 설마∼ " 혹시, Mr 블루? " " ......에? " 미,미스터 블루? 뭐,뭐냐 그건? 가인은 난데 없이 자신을 칭하는 것 같은 안경 소녀의 칭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블루? 내 오라 패턴을 얘기하는 건 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가인이 엉겹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안경 소녀는 흥분 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 맞구나,Mr 블루!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만나서 반가워! " " 어,그‥그래. " 뜻 밖에 자신을 반기는 그녀의 태도에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뭐냐, 이 애는? 이런 지하에 개인 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 이상한 태도도 그렇고‥ 도대체 뭐하는 애지? 가인은 안경 소녀에게 물었다. " 난‥유가인이라고 해. 그런데 넌 누구? " " 오옷! 그래그래! 통성명도 안했구나! 난 시더 웰리스! 피스 메이커 기술 부의 치프야∼ " 가인과 악수하며 손을 열렬히 흔드는 안경 소녀. 시더? 외국인인가? 머리 는 검은색인데… 하지만 자세히 보니 어딘가 이목 구비나, 목소리가 외국인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뭐? 기술부 치프? 아아∼ 그랬구나. 어쩐지 그래서 연구원 복장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 그런데… " 에엣?! 기술부 치프라고?! " 가인은 놀라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민이 얘기하던게 생각났다. A.I 컴플 릿 세트를 만든 I.Q 200의 천재 소녀…! 피스 메이커의 기술부 치프! 바로 그녀가 소문의 그 과학자였던 것이다. 가인은 자신이 상상하고 있던 매드 사 이언티스트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져 나가는 걸 느꼈다. 가인은 여전히 당황 한 목소리로 시더에게 말했다. " 마,만나서 반가워. " " 헤에… 네가 그 유명한 피스 블루였단 말이지?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를 않는데∼ " " ‥무슨 말? 유명하다니? 뭐가? " 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가인의 물음에 시더는 헤헹 콧방귀를 뀌며 가다듬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 아무런 전투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최초로 몬스터와 조우. 50N이라 는 가공할 수치의 오라로 몬스터를 분자 소멸 시킨 오라 능력자. 그리고 요 한 달간 물리친 몬스터의 갯수만 해도 넷. 이렇게 빠른 성장은 피스메 이커를 통틀어서 미스터 블루! 네가 처음이라고. " " 그런… " " 뭐, 하지만 요즘은 좀 부진을 보이고 있지만∼ " 시더의 뒷 말에 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아픈 곳을 찌르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시더는 그런 가인의 기분 따위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 지 신이 난 목소리로 그에게 소리쳤다. " 어쨋든, 손님 대접을 해야겠지! 뭐를 해주는 게 좋을까나∼ " 시더는 굉장히 고심하기 시작했고,가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 었다. …그렇게 정색하면서 고민할 것 까지야…. 시더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오른듯 옆에 널려있는 기기들을 뒤져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 가인에게 넘겨 주었다. " 자자∼ 최근에 내가 취미 삼아 만든 발명품이야. 한번 착용해봐∼ " " 에,으응. " 가인은 받아든 물건들을 살펴보았다.평범해 보이는 안경과 만년필이었다.그 런데 이게 왜…. 이것의 어디가 발명품이라는 거지? 그런 가인의 궁금증을 알아챘는지 시더가 설명을 해주었다. " 최근 본 007영화를 참고로 해서 만든 첩보 무기야. 두개가 한 세트지. " " 아하∼ " 가인은 그제서야 감탄을 터뜨리며 안경을 쓰고 만년필을 들었다. 가인은 웃 으며 만년필을 만지작 거렸다. " 알 것 같아. 만년필이 사실은 소형 권총이었다든지,안경이 사실은 적외선 감지 안경이라던가, 투명 안경이라던가‥. " " 아,잠깐잠깐 그거 그렇게 막 만지면‥! " 시더가 당황하며 가인을 말렸지만,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만년필의 시동 장 치를 눌러버린 상태였다. 순간,가인이 쓰고 있던 안경으로 녹색의 입자가 모 여 번개같이 옆의 벽으로 발사 되었다. -파싯! " 으핫?!! "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안경을 벗었다. 뭐,뭐야 이거? 레이저가 발사됐어?! 그 레이저의 여파로 자신의 눈썹이 지글지글 거리는게,하마터면 눈썹을 홀라 당 태워먹을 뻔했다. 가인은 당황하며 시더에게 소리쳤다. " 레,레이저가‥ 레이저가 나갔어?! " " 그럼. 요즘은 광학 병기의 시대니깐. " 당연하다는듯이 말하는 시더의 태연스러운 모습에 가인은 현기증이 일었다. 가인은 떨리는 손으로 안경과 만년필을 시더에게 건내 주었다. 시더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인에게 물었다. " 재미 없었나 보네∼ " " 그,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어쨋든,시더는 그 물건들을 뒤의 기기 에다 던져 놓고, 이번에는 다른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가인은 불안한 눈으로 그런 시더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위험한 걸…. 가인의 머리 속으로는 무의식 중에 시더의 발명품=Danger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 같았다.하 지만 이번에 시더가 내민 물건은 좀 색다른 것이었다. " 이건…? " 가인은 시더에게서 그 물건을 건내 받았다. 그것은 장갑이었다. 아니,장갑이 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고, 마치 중세 유럽 기사의 컨틀릿(Gauntlet) 같아 보 이는 물건이었다. A.I 슈츠와 연관이 있는듯한 스타일로 만들어진 그 모습에 가인은 시더를 돌아보았다. " 이거 혹시… " 그런 가인에게 시더는 씨익 웃어보이며, 그 거대한 글러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헤븐 스매쉬(Heaven Smash)! 오라의 증폭과 압축을 돕는 글러브야.Mr 블루 의 천공권 대응 용 A.I 글러브지! 이것만 있으면 아무리 천공권을 많이 써 도,오라의 소모 때문에 허덕이는 일은 없게 될거야! " 가인은 그녀의 말에 놀란 눈으로 헤븐 스매쉬라는 이 글러브를 살펴보았다. 천공권을 많이 써도 오라의 소모가 없다구? 그리고 증폭과 압축이라니! 최근 들어 전투에서 가인이 필요로 하는 주문 만을 모아 만든 것 같은 물건이었다. 가인은 신기한 눈으로 헤븐 스매쉬를 살펴 보다가, 곧 의아한 눈으로 시더에 게 물었다. " …어떻게 안 거야? " " 뭘? " " 내가 천공권을 쓸 때 느꼈던 문제점… 알아본 거야? " 그런 가인의 말에 시더는 씨익 웃으며 브이 마크를 지어 보였다. " 당연하지! 착용자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 만을 만들어 준다! 그것이 바 로 프로페셔널 스피리트라구∼ " " ......프,프로페셔널‥스피리트? "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더를 살 펴보았다. 대단하다. 이런 어린 소녀가 이걸 만들었단 말이지?(물론 I.Q 200 인 천재 소녀라지만) 그것도 사용자의 고민을 자세히 조사한 다음에 그에 걸 맞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성도 대단했다. 확실히 자신의 일에 신념을 가지고 있는 거구나. ' 그에 비해 난…. '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또 기분이 가라앉는 가인이었다. 가인은 잠시 헤븐 스매쉬를 만지작 거리다가 시더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시더, 넌… 왜 이 일을 하는 거야? " 물론 바보 같은 질문이겠지만…. 가인은 헤븐 스매쉬를 바라본채 고개를 숙 였다. 시더는 그런 가인의 질문에,그가 우울해하던 침울해하던 상관하지 않 고 히죽 히죽 웃으며 답했다. " 나? 난 단순히 기계를 만드는 게 좋을 뿐이야. 오라에 대한 연구는 흥미 진진하고 오리하르콘을 제조해서 오라의 쓰임새에 맞는 물건을 만드는 것 도 재밌는 일이지. " 거기까지 말하고 시더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곧 말을 이었다. " …하지만 결국은 내가 만든 기계들이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게… 내 일에 대한 보람이 아닐까나∼ " " ......... " 그런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일에 대한 보람‥ 이라고. 시더는 그런 질문을 한 가인을 이상하다는듯 쳐다보다가 가인에게 다가와 그의 오른 손에 헤븐 스매 쉬를 채워주며 이것저것 조절을 하기 시작했다. 묵묵히 그 작업을 바라 보기 만 하는 가인. 그런 가인에게 시더가 말했다. " 자,이거 하나만 있으면 이제 맘 놓아도 될거야! Mr.블루! 오라 걱정 없이 천공권을 맘껏 써도 된다고∼ 그러니까 말이야∼ " 시더가 헤븐 스매쉬의 상태를 체크하고, 가인의 왼손에 있던 무전기를 누르 자, 헤븐 스매쉬는 대기 중으로 녹듯이 그 몸을 감추었다. A.I 컴플릿 세트 와 마찬가지로, 헤븐 스매쉬는 미세 분자 입자 상태로 착용자의 몸 주변에 흩 어져 대기 중에 숨어든 것이다. 이제 헤븐 스매쉬는 전투 중, 가인이 무전기 를 통해 보내는 일정 주파의 신호에 의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시 더는 그런 가인의 오른손을 툭툭 치며 뒷 말을 이었다. " 내가 만든 무기를 믿어줘. " 시더의 그 음성이 너무나도 진지했기에,가인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하 지만 그녀는 언제 진지했냐는듯 예의 그 히죽 웃는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저기,혹시 이것도 광학 병기인 거야? " " 쿠쿠쿠쿠∼ 그럴리가 없잖아∼ " 둘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인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오른손에 감춰져 있을 헤븐 스매쉬를 바라보았다. 좋아. 뭔가 힘이 된 거 같은데…! 가인은 왠지 시더에게 위로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녀에게 고마움이 일었다.그때, 그들의 귀로 비상 경보음 소리가 들려왔다. -비잉비잉비잉… " .........! " 가인과 시더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뭐야?! 몬스터인가? 어째서! 분 명 어제도 쓰러뜨렸는데… 이렇게 빨리 또 나타날 줄이야.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런 가인에게 시더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 이며 히죽 웃었다. " 내 헤븐 스매쉬로 한 방에 박살 내고 와! 알았지,미스터 블루?! " " ......노력해보지. " 가인은 그런 시더에게 씨익 웃어보이며 몸을 돌렸다. 시더에게 격려의 말 을 들어서인지 가인에게서는 알게 모르게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 자, 와라!! ' " 너무 빠르군요‥ 이번 몬스터의 출현은…. " 닥터는 눈 앞의 대형 스크린에 나타나는 게이트 발생 수치를 보며 나지막히 한탄했다. 그의 옆에 있던 민수정은 닥터에게 물었다. " 이것도 그들의 실험 중 하나일까요? " " …하지만 실험 치고서는 아직 불분명한 부분이 너무 많아요. 무엇보다도 그들이 이렇게 무리해서 까지 게이트를 열어 일을 추진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 닥터는 고개를 흔들며 고민에 빠졌다.몬스터의 실험이라고 하기에는 일관성 이 부족했다. 어디까지나 실험이라고 하는 것은 유추되는 여러 가지의 사례 들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리는 행위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나타나는 몬스터의 행위들은 각각의 일들이 서로 연관성도 없었고, 그 목적 또한 불분명했다. 사실 녀석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닥터는 괜히 자신들 이 일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때, 조용히 앉아 있 던 진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 눈치를 챈 건지도 모르지…. 가이아의 비밀을…. " " .........!! " 그의 말에 닥터와 민수정의 눈빛이 흔들렸다. 닥터는 딱딱히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 억측입니다. 놈들은 가이아의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 " …하지만 분명, 눈치를 챈 것만은 분명해. 그 증거로 녀석들은 최근 들어 서울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중국과 일본에서의 몬스터 출현은 현재 10% 미만이라고 하더군. " " .......... " 닥터와 수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진 사령관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 개를 돌려 오퍼레이터 윤채영에게 물었다. " 피스 대원들은 어떤가? " << 현재, 게이트 발생 지점에서 오라 배틀 필드를 펼치고 있는 중입니다. >> 그래…. 진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스크린을 다시 주시했다.그의 표정 은 담담했지만, 그 눈빛만은 화산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진 사령관은 스크린 너머에 있을 몬스터를 향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 ......네 놈들이 넘볼 것이 아니다. 그것은…. " " 오라 배틀 필드 전개 완료. " 진우는 무전기에 보고를 한 후, 주위를 살펴보았다. 언제나 이 시간대면 차 들로 붐빌 한강 대교는, 대피 방송으로 인해 반경 10km이내까지 어떠한 인기 척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은 한강의 그 물결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진우는 가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 앞전부터 궁금했는 데 말이야‥ 그 오른 손에 있는 건 뭐야, 소년? " 진우가 가리킨 것은 가인의 오른 손에 부착되어 있는 엄청난 크기의 A.I 글 러브였다. 앞 전 시더가 가인에게 장착시켜준 '헤븐 스매쉬'라는 물건. 헤븐 스매쉬는 그 엄청난 중량감으로, 가인의 왼손에 끼워진 A.I 글러브의 3배 크 기 정도로 가인의 오른손에 달려 있었다.가인은 헤븐 스매쉬를 낀 오른 손을 들어보이며 진우에게 설명했다. " 천공권 대응 용으로 특별히 개발된 A.I 글러브래요. 이것만 있으면 천공 권으로 소모되는 오라 걱정은 이제 할 필요 없어요. " " 호오… 왠지 자신만만한 걸∼ " 진우의 말에, 가인은 피식 웃었다.그래. 우선은 그렇게라도 보여야 했다.가 인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 그래‥. 가인, 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 그러니까 뭐? 뭐냔 말이야? 무슨 말을 할려는 셈이야? 가인은 자기 자신에 게 따지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그렇게 각오해서 몬스터를 쓰러뜨린다 고 해도‥ 난 뭘 얻을 수 있는 거지? 난 왜 싸우는 걸까? 난 뭘 위해서… 아 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 끝은 허무 만이 남을 뿐이었다. 아, 싫다,정말…. 나란 녀석, 결국 아무 것도 바뀐 게 없는 거였잖아. 그때, 가 인의 마음 속으로 유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오빠‥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 아,아니야. 아무 것도‥. 가인은 유리를 돌아보며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그래. 이런 모습을 유리 에게 보여줄 수는 없지. 가인,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고 전투 만을 생각해! 싸우는 이유 같은 건 몬스터를 없앤 다음 생각해도 된다고.가인은 몇 번이고 다짐하며 자신의 정신을 추스렸다. 그런 가인의 뒷 모습을 유리는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치직… 그때, 피스 대원들의 앞으로 열리기 시작하는 게이트. 공간이 둥글게 일그 러지고 있었다. 진우가 소리쳤다. " 온다! 모두들 주의하세요! " " 피스! " 가인은 굳은 안색으로 헤븐 스매쉬를 들어올렸다. 좋아. 반드시, 이 주먹으 로 녀석에게 천공권을 먹인다. 어떤 괴물이든 나타나 보라고! 그리고 그런 가인들의 앞으로 몬스터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인의 옆에 서 있던 시민은 그 괴물의 모습을 잠시 감상하는듯 하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 ......애벌레 씨… 입니까? " - 꾸에에에엣! 그런 시민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 처럼 포효하는 몬스터. 놈은 녹색의 거대한 애벌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대략 6m를 넘는 크기였다.그것도 높 이가 6m라는 거지 그 길이는 끔찍할 정도로 길었다. 그리고 그 마디 마디 관 절 사이로 붙어있는 솜 털 같은 다리. 놈은 저 털 같은 걸로 이동을 하는 모 양이었다. 진우는 냉정히 피스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 피스 옐로우, 공명음(共鳴音)으로 녀석의 움직임을 봉쇄해 주세요. 피스 핑크, 놈의 사념에 재핑을 부탁드립니다. 피스 레드는 저와 같이 녀석의 시야를 교란합니다. 그리고 피스 블루! " 가인은 진우가 자신을 부르자,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그런 가인에게 씨익 웃어보이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이번에야 말로 완벽히 마무리 해보라고. 천공권 한 방, 부탁한다! " " 옛! " 가인은 약해질려는 자신의 마음에게 소리지르는 것 처럼 크게 답했다. 좋아. 성공시켜 보일테다! 그리고 피스 대원들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우선은 피 스 옐로우, 한시민이었다. 그녀는 입으로 음파를 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번 에는 노래 같은 것이 아닌 그냥 알 수 없는 화음을 띈 음이었다. 모든 물건은 스스로 진동하고 있기 때문에 음으로 주파수를 맞추어 생물체 를 진동시켜 피해를 주는 고등의 음파 공격. 그것이 바로 '공명음(共鳴音)'! 시민은 지금 공명음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과연,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 키아아아앗!! 괴성을 지르며 고통스러운듯 몸을 꿈틀거리는 애벌레. 뭐야∼ 덩치만 컸다 뿐이지 별 거 아니잖아. 진우는 연신 괴물의 사념에 재핑을 뿌리는 이유리를 뒤로 하며 마리와 함께 괴물에게로 뛰어들었다. " 슈팅 스타(SHOOTING STAR)‥! " 진우의 나지막한 외침과 함께, 그의 몸은 녹색의 빛을 띄는 작은 유성탄으 로 변해 괴물에게로 내쏘아졌다.애벌레 괴물의 하단 부분을 꿰뚫고 지나가는 진우의 슈팅 스타.그 뒤를 쫓듯이 마리의 오라 소드가 붉은 검광을 번쩍였다. - 키앗! 괴물의 다리 털 부분을 닥치는 데로 잘라버리며 통과하는 마리.애벌레 괴물 은 포효를 내지르며 입으로 흰 실을 그녀에게 내뿜었다. 마리는 재빨리 도약 하며 그 공격을 피해냈다. 흰 실에 닿은 대교의 강철은 '치이익' 연기를 내 뿜으며 녹아들기 시작했다. 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 저 실은 지독한 산성을 띄고 있나 보군. 모두 주의하도록! " 제길…. 진우는 나지막히 이를 갈았다.저런 거대 몬스터와의 배틀에서는 진 우나 마리의 공격은 놈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가 없었다.그 둘이 약 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오라 능력은 인간형 생물과의 전 투에서 그 위력을 100% 발휘할 수 있도록 발달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인 전 용이라고나 할까. 저런 괴수 타입의 몬스터에게 그들이 육박전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저런 거대 괴수 타입의 몬스터 만이 속속 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가인의 천공 권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우는 가인에게 소리쳤다. " 준비하고 있어! 신호 할테니까! " " 알았어요! " 가인은 심호흡을 하며 오른손으로 오라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 도 별 달리 힘을 쓰지 않은 상태였는데, 평상시 정도의 오라 기류가 모이는 것이었다. 가인은 감탄했다.바로 이게 헤븐 스매쉬의 오라 증폭이란 말이지. ' 좋아. 최대 파워로 한 번에 끝내주마…! ' 가인은 더더욱 오른 손으로 오라의 토네이도를 생성해 냈다.광풍이 일며 모 여드는 오라의 기류. 그 여파에 가인의 오른손이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으 읏, 아직 준비 단계인데도 이 정도라니…! 가인은 왼손으로 오른 손을 억누 르며 주먹을 괴물에게로 향했다. ' 좋아…! ' 가인은 진우의 신호를 기다렸다. " 좋아.좋아∼ 얼른 천공의 주먹을 써보라고,Mr.블루! " 시더는 자신의 어두운 연구실에서 스크린에 떠오른 가인들의 행동에 흥분하 며, 두 손을 휘둘러 소리쳤다. 자자! 어서 내가 만들어준 헤븐 스매쉬를 써 서 저 larva(유충)幼蟲를 없애 버리라고! " ......어라? " 그런데, 막 오라를 모으기 시작하는 가인을 보자 의아함이 드는 시더였다. 왜 저렇게 손을 떠는 거야? 마치 천공권을 쓰기 위해 모은 오라의 기류를 버 티지 못하는 것 같은 움직임?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왜… " 아차! " 시더는 순간, 무언가가 생각난듯 당황하기 시작했다. 앞전, 가인에게 헤븐 스매쉬를 장착 시켜주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정작 헤븐 스매쉬의 컨트롤은 하나도 해주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 안돼! 저대로 천공권을 썼다간 그 반작용으로 날아가 버릴 거야! 지금 그 건 중력장 조절이 안되어 있다구!! " 시더는 그녀 답지 않게 비명을 지르며 모니터를 부여 잡았다. 지금 저 상태 에서 기술을 썼다간, 천공권의 위력 만큼 가인이 날아가 버린다. 당장 멈춰 야 해!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전투 상황에 처한 가인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질리 만무했다. 그리고 모니터에서 가인이 천공권을 쓰기 시작했다. - 푸확! 그리고 가인은 시더의 예상대로,천공권을 쓴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날아올랐다. " 오, 갓!! " 어두운 연구실로 시더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가,가인?!!! " 마리는 이 난데 없이 벌어진 상황에 놀라, 가인을 부르며 한강 대교의 난관 으로 뛰어갔다. 가인이 헤븐 스매쉬로 쓰자,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의 천 공권이 애벌레 괴물에게로 날아갔다. 거기 까지는 좋았다. 그래.거기 까지는 좋았는데… " 떠,떨어졌어…?! " 진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가인은 천공권을 쓰자, 그 반작용에 튕겨 저 한 강 대교 밑으로 날아가 떨어진 것이다. 진우의 말이 재차 이 상황을 확인 시 켜주자, 그제서야 멍하니 있던 유리는 황급히 마리의 옆으로 달려가 한강대 교의 밑을 내려다 보았다. 노을에 붉게 물든 한강의 잔잔한 물결 사이로, 막 누군가가 떨어진듯 거품이 새어나오는 곳이 보였다. " 아…. " 그 순간, 유리는 다리에 힘이 빠져 그만 털썩 주저 앉았다.족히 70m는 넘어 보이는 높이였다. 이런 곳에서 떨어져도…살 수 있는 거야? 만약 머리 부터 거꾸로 떨어졌다면 목이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유리는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오빠… 무사한거야…? 응? - 휙! 순간, 난관을 넘어 누군가가 대교의 밑으로 뛰어내렸다. 마리였다. 그녀는 수십 미터를 떨어져 내려 한강으로 다이빙한 것이다. '풍덩'. 마리가 한강 에 들어간듯 거센 물 소리가 들려왔다. 시민은 그런 마리의 행동에 놀라,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 어머나… " 저러다간 둘 다 위험할지도! 무엇보다도 가인의 상태가 걱정되었다.그는 떨 어져서 아직도 물 밖으로 떠오르질 않고 있는 것이다. A.I 슈츠를 입고 있 다지만, 외상은 피할 수 있어도 내상은 피하기 힘들었다. 가인의 A.I 슈츠 의 오리하르콘 중력 작용이 잘 발동되었기를 비는 수 밖에 없었다. " 젠장…! " 진우는 이를 갈며, 애벌레 괴물의 상태를 살펴보았다.증폭된 천공권의 영향 으로 몸의 절반이 날아간 괴물이었지만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하,할 수 없 어…. 떨어진 가인은 마리에게 맡겨두고, 난 이 괴물을 처리하는 수 밖에…! 진우는 다시 한번 슈팅 스타를 쓰기 위해 오라를 모으기 시작했다. - 휘리릭! 그 때, 입에서 실을 공중으로 뿜어내기 시작하는 애벌레 괴물. 진우는 대쉬 할려던 기세를 멈추는 수 밖에 없었다. 저 녀석… 뭘 하는 거지?! 괴물은 자 신의 몸 주위로 쉴 새 없이 실을 뿜어 돌리고 있었다. 왜 자신에게 실을…? " 설마… " 시민은 그런 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모습은 마치 그것 같았다. 완전변 태(完全變態)를 하는 곤충류에서 나타나는 유충기(幼蟲期)와 성충기(成蟲期) 사이의 정지적 발육단계. 시민은 그 괴물의 모습을 잠시 감상하는듯 하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 .........번데기 씨… 입니까? " 거대한 번데기가 되어버린 몬스터. 그런 한강 대교를 비추는 노을은 마치 핏 빛 처럼 붉었다. " D+타입 몬스터 '모스맨(Mothman)'은 5월 26일 18시 20분 이후로 larva(유 충)幼蟲 상태에서 pupa(번데기) 상태로 돌입했습니다. 메디컬 센터의 분 석 결과에 따르면, imago(성충)成蟲 상태가 되기 까지는 앞으로 48시간이 남았다고 합니다. " 민수정의 보고에, 진 사령관은 한강대교에 붙어있는 거대한 번데기의 모습 이 보이는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 저 상태에서의 공격은 불가능한가? " " …3차례의 공격을 시도해보았지만, 불가능 했습니다. 폭격이라도 하지 않 는 이상…. " " ......결국, 성충이 되기까지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로군. " 진 사령관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했다. 장소가 한강 대교인 만큼 폭격 같은 짓은 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간 서울 일대의 식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2010년을 시작으로 20년에 걸친 한강 정화 계 획은,한강을 서울의 모든 식수를 담당하는 중요한 물적 자원이 되게 끔 만들 었다. 골치 아프군….민수정은 쓴 웃음을 지으며 진 사령관에게 다음 사항을 보고했다. " 만약, 48시간 이내에 저희가 몬스터를 제거하지 못할 시에는 지구 방위군 은 한강 일대를 폭격하겠다고 하더군요. " " ......무식한 짓이로군. " 진 사령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지구 방위군 놈들. 어디까지나 그들의 행동은 과격의 과격을 달리고 있었다. 현재, 대 몬스터 특무 기관 '피스메이 커'의 활약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그들은 꽤나 욕구 불만에 쌓여 있 었다. 만약 피스메이커가 몬스터를 처치하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다간,지구 방위군은 옳다구나 하며 단번에 뛰쳐나와 무슨 대형 참사를 저지를지 모른다. 어디 까지나 그들이 피스메이커를 대접하고 있는 것은, 피스메이커의 몬스터 퇴치 유무에 따른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이유도 없었다. " imago 상태가 될 예측 시간을 좀 더 정확히 조사하도록. 지구 방위군 놈 들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는 없다. " " 피스- " 민수정은 단호한 어조로 구호를 부치며, 메디컬 센터로 발걸음을 옮길려고 했다. 그 때, 진 사령관이 그런 수정을 불러 세웠다. " …피스 블루의 상태는 어떤가? " 그의 말에 수정은 방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 걱정되시나 보죠? 평상시 그렇게 티격태격하시면서. " " ......... " 아무 대꾸 없이 무뚝뚝하게 수정을 바라만 보는 진 사령관. 그런 그의 모습 에 민수정은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 네네∼ 가인 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내요. A.I 슈츠의 오리하르콘 중력 조절 장치가 발동되어 간신히 목숨은 건졌나 봐요. 대신, 늑골 2대 와 오른 팔 골절, 다수의 내장 기관이 상했지만 전신 포션 치료로 호전 되고 있는 중입니다. " " 그렇군…. " 진 사령관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래….아직 그 정도로 쓰러져서는 안되 지‥. 그의 눈은 가인이 입원해 있는 메디컬 센터 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 신이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될거야? 나는 물었다. 신이는 내 질문이 어려웠는듯 머리를 싸잡으며 고민했다. - 우웅∼ 에,또∼ 나는‥ 그러니까‥ 화가! 나는 웃었다. - 그래. 신이는 그림도 좋아하고, 또 그리기도 잘 하니까. - 으응! 기분 좋게 웃는 신이. 며칠 전, 그 아이에게서 받은 그림이 생각났다. 크레 파스로 정성들여 그린 우리 가족의 그림이었다. 내 동생 이라서가 아니라,신 이는 정말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 - 오빠! 오빠도 대답해야지! 갑자기 다그치는 신이의 목소리. 난 영문을 알 수 없어 물었다. - 뭘? - 에잉‥ 나 대답했잖아. 오빠도 커서 뭐가 될건지 대답해야 쌤쌤이자나∼ - 아,하하‥ 그건 또 무슨 논리야. 가인은 그런 신이의 물음에 대답해주기 위해 고민을 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생각나질 않는 가인. 아,그래. 난 이 때부터 이렇 게 내 장래에 대해 생각 한 번 안하고 살던 놈이었구나. 왠지 한심해지는데‥.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신이에게 물었다. - 신아. 신이는 오빠가 뭘 했으면 좋겠어? - 에? - 신이가 말하는대로 오빠가 해주지. 아, 말해놓고도 민망스러운데. 내 장래 조차 제대로 정하질 못하는 나라니. 신이가 이런 나보다 몇 배는 나은 걸. 신이는 나를 바라보다가,뭔가 생각해 두었던게 있었던듯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 언제나 오빠가 오빠면 돼! 나중에 커서도 내 오빠해줘! " - 뭐,뭐야∼ 난 신이의 엉뚱한 대답에 웃음을 터뜨리며 신이의 머리를 토닥였다. 신이는 내가 웃자, 자신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저 천진난만한 신이의 웃음. 그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네 곁에서 널 지켜줄게…. 신이…. 내 소중한… " 아… " 가인은 눈을 껌뻑이며 정신을 차렸다. 제일 처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새하 얀 병실의 천장이었다. 내,내가 왜 여길 누워 있는 거지? 가인은 황급히 몸 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인,자신의 몸에는 수 십개 의 링겔이 꽂혀 있었고, 이상한 검은색 액체 속에 자신의 몸이 담겨져 있었 던 것이다. " 으음‥ " 몸을 뒤척이자, 아련한 통증이 밀려들어왔다. 어째서 내가 여기에‥ 몬스터 와 싸우고 있질 않았던가? 나… 천공권을 쓰다가… 아,그래. ' 다리에서 떨어졌었지…. ' 헤븐 스매쉬의 여파를 못 이겨 날아가 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하,하하…그 런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용케 살아 남았구나.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건가, 나…. " ......깨어났어? " 그때, 그런 가인에게 들려오는 한 목소리.가인의 곁에는 한 여성이 서서 가 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가인은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저 두꺼운 돋보기 안 경에 양쪽으로 땋은 긴 갈래 머리. 기술부의 치프 시더 웰리스 였다. 가인은 그녀를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 시더…? " " 응. 그래… 어때, 몸은 괜찮아? " 그녀 답지 않게 침울한 목소리로 시더는 물었다.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 신의 몸을 돌아 보았다. " 좀… 힘이 없다는 걸 제외하면 그럭저럭…. 근데, 이 링겔 같은 거 너무 불편하다. 빼 버리면 안되나? " " 포션 투여 시간이 초과했으니 빼도 될 거야. 내가 해줄게. " " 아,응…. " 가인의 몸에서 링겔들을 빼는 시더. 가인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더가 링 겔을 뽑기 편하게 몸을 뒤척여 주었다. 가인은 지금 치료를 위해 팬티만 입 고 있던 상태라서 그 부끄러움이 더했다. 이 검은 액체에 몸이 가려져 있지 않았다면 꽤나 민망스런 상황이었으리라. " 자, 다 됐어. 여기 옷. " " 아,고마워. " 가인에게 환자 복을 건내 주며 뒤돌아 서는 시더. 가인은 엉거주춤 그 옷을 건내 받아 껴 입었다. 가인은 서둘러 옷을 입고나서 시더에게 말했다. " 다 입었… " 하지만 가인은 뒷 말을 잇지 못했다. 뒤 돌아서 있는 시더가 어깨를 들썩이 고 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왜,왜 저러지? 우는 건가?! 가인은 왠지 당황 스런 기분이 되어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 시더…? " " 미안…. " 시더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약간의 흐느낌이 섞여 있다는 걸 가 인은 알 수 있었다. 시더는 천천히 뒤돌아서서 가인에게 고개를 숙인채,말했 다. " 나 잘난 척은 있는 데로 다 해놓고...... 믿어 달라고 얘기해 놓고...... 그래놓고 널 이렇게 다치게 만들다니… 나, 최저야‥. " 그런 시더의 말에, 가인은 머리를 긁적였다.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였나? 가 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시더는 아무래도 자신이 다친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는 것 같았다. " ......... " 시더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는 모습에,가인은 그제서야 그녀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그래‥ 저 아이도 힘들었겠구나‥. 17세 소 녀라면 응당 하는 것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좁은 골방에서 연구만 하 고 지냈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인은 무슨 생각이 든건지 시더에 게 대뜸 말을 건냈다. " 오늘이 토요일이었던가? " " 응? 으응…. " 갑작스럽게 요일을 묻는 가인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시더. 가인은 씩 웃으며 다음 말을 꺼냈다. " 일요일에 시간 있어? " " 어, 있지만… 왜? " " 그럼, 우리 데이트 하자! " " ........!! " 이 난데없는 가인의 권유에 시더는 멍하니 있다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목 소리로 더듬 거리며 말했다. " 데,데이트? 나하고? " " 여기 너 밖에 누가 더 있어? " 뚱하니 묻는 가인의 모습에,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 된 그녀. 시더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 답지 않게 횡설수설 거렸다. " 하,하지만 몬스터가 언제 게이트를 넘어 올지도 모르고…아니! 그게 무엇 보다 나하고 데이트를 하자니… " " 왜? 나하고 데이트 하는 게 싫어? " " 그,그게 아니라… 아니 그런 거 아냐! " 가인의 물음에 강하게 부정하는 시더. 그런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안심하며 말했다. " 좋아.좋아. 그럼 데이트 약속 한 거야? 바로 내일! " " 으,으응‥ 하지만… "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시더.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 혹시… 내일 비라도 오면‥ 어쩌지? " 그런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웃음이 나올려는 것을 참았다.역시 나하고 동갑 이었어. 지금 시더의 모습은 기술부의 치프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왠지 가인의 마음에 들었다. 가인은 시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걱정마. 분명 일요일은 맑을 거야. 그것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 " 근거는 감정론적만으로 말해서는 안돼.근거가 없는 이론은 원숭이도 말하 니까. " " ......... " 가인은 할 말을 잊었다. 한편, 가인의 병실 밖에서 살짝 열려진 문 틈 사이로 이 얘기를 듣고 있던 일단의 한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가인의 동료 진우와 시민, 그리고 마 리와 유리였다.진우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 역시 소년∼ 꽤 하잖아. 다친 상태에서도 아랑곳 없이∼ " " ......시끄러워. " 낮게 중얼거리며 진우를 쏘아보는 유리. 그런 유리의 반응에 진우는 더더욱 히죽 거리며 말했다. " 저런 저런∼ 질투는 안 좋아요, 이유리 양∼그러다간 좋아하는 오빠를 빼 앗긴다구. " - 퍽! 당장에 진우에게 조인트를 까는 유리.진우는 비명도 못 지른채 정강이를 부 여잡고 쓰러졌다. 그런 유리의 모습에 마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 …어쨋든, 지금 병문안을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겠군. " " ......... " 아무 말 없이 병실을 노려보는 유리. 그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결정 한듯, 낮게 중얼거렸다. " 내일… 미행이야. " " 엑-! " 유리의 제안에, 모두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진우는 그런 유리의 제안이 무척 마음에 든듯, 유리가 자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는 사실도 잊은 채 유리 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 난 동참! 이런 재밌는 상황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 " ......나머지는? " 유리는 무척이나 저기압이 서린 표정으로 시민과 마리를 돌아 보았다. 마리 는 그녀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 그,그래도 남의 데이트에 그러는 것은…! 시,실례라구‥. " " 갈거야 말거야? " 무표정하게 되묻는 유리. 그런 유리를 바라보던 마리는 자신의 자존심이 허 락하지 않는다는듯 강하게 도리질 쳤다. " 안돼. " 하지만 유리는 그런 마리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 의미심장한 내용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좋아. 하지만 내일 와도 상관 없어. " " .........!! " 그런 유리의 말에 마리는 얼굴을 붉혔지만,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 를 떨구었다. 유리는 마지막으로 시민을 돌아보았다. 시민은 언제나 처럼 방 긋 웃으며 말했다. " 내일 도시락도 싸갈까요? " " ......... " 어쨋든 이렇게 가인의 데이트 미행 조는 가인의 병실 밖에서 신속히 결성되 고 있었다. 다음 일요일. 가인의 예상 대로 날씨는 화창 그 자체였다. 따스하면서도 푸 근한 5월의 햇살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일요일이라서 사람이 많을 걸로 예 상했었는데,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가인은 약속 장소인 찻집 '테이스트(Tas te)'의 한 자리에 앉아 시계를 보며 시더를 기다리고 있었다. " …아침 10시로 약속 잡았었는데…. " 가인은 손목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나? 분명, 시더도 여자애니까 남자 보다 이것 저것 준비할 게 많겠지. 분명…. 가인은 냉수 한 잔을 마시며 슬쩍 카운터를 바라보았다.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종업원들의 눈 빛이 날카로웠다. 으음‥ 하긴, 아무 것도 주문하지 않고 앉아 있는 자신을 좋게 볼리 없겠지…. 아, 저 눈빛 좀 봐라…. -딸랑‥ 그때, 찻집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테이스트로 들어왔다.가인은 재빨리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더, 왔구나! " 어? " 그러나 문으로 들어온 이는 옅은 하늘색 원피스를 곱게 입은 긴 검은 머리 의 소녀였다. 눈동자가 푸른빛이었던 걸로 보아 혼혈인 모양이었다.우와‥미 소녀다. 가인은 감탄하며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너 무 오랫동안 멍 하니 보고 있다가 그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망신일테니까. 가인은 최근 들어 미소녀를 한 두번 본 것도 아닌데,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 시더는 빨리 안 올려나∼ ' 가인은 애꿋은 시더를 탓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런 가인의 어깨 를 누군가가 톡톡 두드렸다. " 누,누구? " 가인이 돌아본 곳에는, 앞 전의 그 미소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쭈삣 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나야‥ 시더 웰리스. " " 에엣----?! "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자신을 시더라 밝힌 눈 앞의 미소녀를 바라보았다.마, 맙소사.이 애가 그 두꺼운 안경을 끼고 연구복을 입은채 부시시한 모습을 하 던 시더였단 말인가?! 가인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연신 시더만 쳐다 보자,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을 바라보며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아아‥ 역시 이런 옷 같은 거 입고 오는 거 아니였는데‥. " 시더는 아침에 자신을 찾아와 코디네이터를 해줬던 민수정을 떠올렸다.도대 체 어떻게 자신이 가인과 데이트를 한다는 걸 알고서는 나를 찾아왔던 것일까. 두꺼운 안경을 낀채 연구복 차림으로 나서려던 시더에게 민수정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를 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 그 모습으로 데이트를 나갈 생각은 아니겠죠? - ......그,그럴려구 했는데‥. - 말도 안돼! 여자 아이의 생명은 스타일이라구요! 그게 뭐에요? 그 돋보기 안경하며 그 기름 때 묻은 연구복이라니∼! - 에에‥ 이렇게 나가면 안되는 건가요? - 당연하죠! 데이트에 나가는 여자 아이의 모습이 아니에요! 시더 양은 전 쟁하러 나갈때 총 놓고 나가는 병사 봤어요?! 데이트는 여자 아이에게는 전장이에요! 치열하게 준비해서 나가서 사랑을 겟-해야 하는 거라구요! - 그,그런∼ 겟이라니∼! - 자, 이리 와요! 내가 코디해주는 옷을 입고 나가는 거라구요! 아아∼ 제 발 그 안경은 벗어요! 벗고 콘택트 렌즈로 껴요! - 후에에∼ 어쨋든,그렇게 치열하게 2시간을 민수정에게 손봐져서 나온 것이 지금의 시 더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시더는 침울한 표정으로 손을 뒤로 돌려 깍지 꼈다. 아아∼ 나 같은 애가 꾸며 봤자 그게 그거지. 아니, 오히려 이상한가 봐. 그 러니까 가인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거 아냐? 고민 고민을 하는 그녀. 그때, 가 인이 그런 시더를 바라보며 웃었다. " 우와∼ 시더 굉장해! 네가 이렇게 예쁜 줄 미쳐 몰랐어! 왜 평상시에 이 렇게 하고 다니질 않은 거야?! " " 에,에에∼? 그,그런 예쁘다니…. 그리고 평상시에는 그 복장이 더 편하기 땜에 에, 또‥ " 가인의 말에 시더는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했다.하지만 그녀는 마음 한 구 석으로 안도했다. 다행이다. 이상하지 않다니∼ 더군다나 가인이 날 보고 예 쁘다고 해줬어! 어릴 때부터 좁은 골방에서 연구에만 치중하던 시더로서는 예쁘다고 하는 말 같은 건 가인에게서 처음 들었던 것이다.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있는 시더에게 가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 나 땜에 그렇게 예쁘게 꾸미고 나온 거야? " " 아,아니∼ 그런∼!! 아침에 민수정 언니가 찾아오셔서‥ 이것 저것 입혀 보고 하느라 난리도 아니였다니까∼! …아니, 그렇다고 가인 때문이 아니 라는 것도 아니지만‥그러니까 그게! " 가인은 그런 시더의 태도에 미소 지으며 자신의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10 시 15분. 가인은 10시 반 영화 표를 끊어놓았기에 시간이 얼마 없었다. 가인 은 시더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자, 어서 가자. 영화 시간 늦겠어! " " 무,무슨 영화? " 엉겹결에 가인의 손을 잡으며 묻는 시더. 그녀의 손을 잡아 끌며 시더에게 가인은 여전히 미소 띈 얼굴로 답했다. " 네가 재밌어 할 영화! " 두 사람이 나가고 나자, 출입문의 방울이 '딸랑'거리며 찻집에 울려 퍼졌다. - 딸랑 딸랑‥ " 호오오∼ 즐거워 보이는군요∼ " 검은 코트에 검은 선글라스,검은 중절모를 쓴 수상하게 보이는 남자가 저 멀 리서 시더와 걷고 있는 가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뒤에는 그와 똑같은 차림의 여인 셋이 서 있었다. 물론, 이들이 피스 메이커의 대원들이라 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피스 그린, 정진우의 중얼거림에 피스 핑크, 이유리는 아무 말 없이 가인의 뒷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이 맹렬히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이 자리의 모 두는 절실히 알고 있었다. 피스 레드 성마리.결국 미행단의 일원으로 이 자리 에 오게 된 그녀는,얼굴을 붉히며 자신들의 옷을 둘러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 미,미행이라고 한다지만… 왜 이런 복장을…. " " ......미행자들의 유니폼. 이건. " 단호히 답하는 유리. 뭔가… 그거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이지 않나….마리는 이런 옷에다가,여기에 와버린 자신의 알 수 없는 행동 등에 그만 현기증이 나 버렸다. 아아… 나 왜 도대체 여기에…. 그때,그런 가인들의 뒤를 쫓던 중 미 행단원 중 하나인 진우가 소리쳤다. " 앗, 어디론가 들어가고 있어! " " .........!! " 재빨리, 진우가 가리킨 손길을 뒤쫓는 유리들의 시선. 가인과 시더는 도시의 한 영화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가인의 뒤를 쫓아, 영화관의 입구에 섰다. 마리가 중얼거렸다. " 도대체 무슨 영화를 보려고… " 하지만 마리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붙어있는 영화의 포스터 제목이 그녀의 말을 빼앗아간 것이다. 영화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용자전기 엑스카이저 -인베이더의 역습」 " 이건… " 마리의 뒤를 이어 따라온 유리도 극장의 포스터에 할 말을 잊었다. << 타앗!! 인베이더 놈들, 이거나 먹어라! 에엑스 부우메에라앙----!! >> 거대한 강철 장갑의 거인 '엑스 카이저'의 가슴판에 붙어있던 엑스 부메랑 이 기형의 생물 '인베이더'에게 작열했다.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트는 괴물. 그때, 엑스 1호의 조종사 '유찬'이 2호,3호의 조종사인 '진'과 '이순신'에게 소리쳤다. << 진, 순신! 마무리다! 엑스 빔이다! >> << 좋아,간다-----!! >> 엑스 빔을 전개하기 위해 자세를 잡는 엑스 카이저. 그때, 한 여성의 목소 리가 객석에서 울려퍼졌다. " 좋아좋아∼!! 가라, 엑스 비이이임-------!! " 그녀의 목소리에 맞추기라도 한듯 엑스 빔을 발사하는 엑스 카이저. 인베이 더는 이 엑스 빔에게 속수 무책으로 그 몸을 녹아내렸다. 또 다시 여성의 목 소리가 객석에 울려퍼졌다. " 엑스 빔을 버틸 수 있는 적 따윈 없어! 인베이더 놈들, 얼마든지 덤벼라! " " 하아아‥ "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래. 이 엑스카이저‥ 라는 애니. 최근들어 열혈 로봇 붐을 다시 일으킨 희대의 명작이라고 하는 유명한 만화이기에 왠지 시더가 좋아할 줄 알았어. 그래. 좋아하니 다행이다만… 하 지만‥ 하지만‥ " 아앗! 말도 안돼! 엑스 빔을 맞고도 죽지 않다니! 엑스 선은 인베이더들 의 세포 입자를 파괴시키는 놈들의 천적 중의 천적일텐데! " 이,이렇게 까지 좋아할 줄이야‥. 시더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지도 않았다. 가인의 옆에 서서 두 주먹을 휘두르며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외치고 있는 그녀. 그래. 그렇게 기뻐하는 건 좋다고. 하지만 여기는 극장인데‥ 다,다른 사람들도 생각을 해야지,시더∼!! 가인은 불안한 눈초리로 객석의 주위를 둘 러보며 관객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런 가인의 걱정은 기우였나 보다. " 오오, 아가씨. 뭔가를 아는데! 하지만 인베이더들은 그에 대비하여 엑스 선 방어 코팅 장치를 만들었다구! " 가인들의 옆자리로 다가오며 흥분하는 한 무리의 남자들. 뭐,뭐야? 이 남자 들은? 그것도 다들 나이가 지긋이 드신 중년분들이…! 그 무리들 중 턱수염 이 난 안경의 남자가 소리쳤다. " 아가씨는 어디 소속이야? 포에버 소속인가 아니면 브레이브 소속인가?! " " 전 소속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엑스 카이저를 좋아하는 팬일뿐! " 아마도 이 남자들은 엑스 카이저의 팬 클럽 회원들인 것 같았다.뭐,뭔가 굉 장한데…. 이런 로봇 만화를 어른들도 보는 구나.(편견) 그때, 뭔가를 더 얘 기하려던 시더와 팬클럽들은 다시 스크린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아앗! 인베이더들의 대왕 '켈카이스'다! " << 크하하하하- 너희들의 엑스 선 따위는 이미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다! 엑스 선이 없는 엑스 카이저는 무용지물! 더 이상 발버둥치지 말고 죽어 라,지구의 기생충들! >> << 으아아아앗!! >> 공격을 당하는 엑스 팀.시더와 남자들은 손에 땀을 쥐며 스크린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엑스 1호의 유찬은 진과 순신에게 소리쳤다. << 진! 순신! 녀석들을 이길 방법은 '버닝 크래쉬' 밖에 없다! >> << 하지만 그것은 엑스 선의 폭주를 발생시키는 기술! 실패하면 죽을 지도 모른다! >> << 방법이 없어! 이대로 이 아름다운 지구를 저 외계인 놈들에게 뺏길 수는 없다! >> 고민하는 엑스 팀들. 하지만 2호의 진은 시니컬하게 웃으며 유찬의 말에 답 했다. << 좋아. 이 목숨…너에게 맡긴다. >> << 알아주는 거냐, 진! >> 그리고 3호의 순신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나도 좋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우리 셋 모두다! >> << 좋아. 간다----!! >> 연푸른빛의 입자로 휩싸이는 엑스 카이저. 엑스 선의 융합로를 폭주시키는 것이었다. 이 수십 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무사히 발산시키지 못하면 인베이 더 뿐만이 아니라 엑스 카이저도 대파한다! 시더와 팬클럽의 남자들은 하나 가 되어 소리쳤다. << 버어니이잉----- 크래쉬! >> << 끄아아아아아아아앗!! >> 버닝 크래쉬에 적중당한 인베이더 대왕 켈카이스. 그는 온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 크으으, 이대로 끝날 거라고는 생각마라, 지구인들! 네놈들의 그 오만한 태도와 지구의 독점욕을 나는 결코 용서치 않을 테다! >> 결국,전장에서 모습을 감추는 켈카이스.극장 안의 모두는 환호하며 소리쳤다. << 셋의 힘이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우리의 적수는 없다! >> 유찬의 외침과 함께 떠오르는 스탭롤들. 하지만 관객들 중 어느 누구도 자 리를 뜨지 않았다. 관객들은 모두가 하나 되어, 어깨 동무를 하며 엔딩 송을 따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 지구를 침략하는∼ 악의 무리들에게는∼ 언제나 우리가 간다∼ " 가인은 이 떠들썩한 분위기에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둘러 보았다. 대,대단 하군. 이것이 만화의 힘인가?! 그때, 그런 그에게로 시더가 어깨 동무를 하 며 소리쳤다. " 자, 너도 따라불러! 엑스 선의 용사들아∼ 혼과 열혈을 불태워라∼ " " 하지만… " " 혼과 열혈을 불태워라! " " 호,혼과 열혈을 불태워라‥ "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 눈물을 머금고 엔딩 송을 따라부르기 시작하는 가인. 그렇게 영화관의 분위기는 무르 익어 가고 있었다. 단지, 객석의 뒤쪽에서 멍하니 장내를 주시하던 한 검은 옷 무리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 ......광기의 집합체‥. " 유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 으음∼ 우,우왓! 이 계란 말이 장난 아닌데! 맛있군요, 시민 씨! " " 아,그거 자신작이에요.후후‥ 우유를 조금 붓는 게 포인트에요. " 진우는 시민이 싸온 도시락을 정신 없이 맛보며 감탄하고 있었고,시민은 자 신의 요리가 좋은 평을 듣자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리는 쌍심지를 키며 그런 그들에게 소리쳤다. " 소풍 온 거 아냐! 집중해.집중! " " 에이∼ 유리 양,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어∼ 아무리 저쪽 분위기가 좋다 지만 그렇게 화만 내면 성질 버리지∼ "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앞 전 영화관에서 조금 떨어진 공원. 저편의 벤치 에 앉아 있는 가인들을 감시하며 유리들은 수풀에 몸을 숨긴 채 도시락을 까 먹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 도시락을 먹고 있는 이는 진우 뿐이었지만.진 우의 그런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순간 열이 뻗친 유리는 잔인하게도 보온 물 통에 들어있던 뜨거운 차를 진우의 손등에 뿌려 버렸다. " 으하핫----!! " " 쉿! 쉿! " 비명을 지르는 진우의 입을 막는 시민과 유리.저편에서 가인이 갑작스레 들 려온 비명 소리에 놀란듯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유리들은 몸을 낮추며 수풀 속에서 숨을 죽였다. 유리는 진우를 흘겨 보며 중얼거렸다. " 도움 안되는 남자…. " " ......하,하하‥ " 진우는 뭔가 항의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유리의 냉정한 눈초리에 쓴웃 음을 머금고 말을 삼켰다. 그때, 마리가 그런 유리들에게 말했다. " 조용히들 좀 해요. 잘 안들리니까. " 마리는 현재 왠 헤드폰을 귀에 꽂고 있었는데,그것으로 가인과 시더의 대화 내용을 도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도청 장치로 말할 것 같으면, 피스 메이 커에서 특별 개발된 음질 1등급의 마이크로 칩이 내장된 소형 도청 장치였다. 이런 부대 물품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쓰다니… 마리는 지금 자신의 처지 에 회의감을 느끼며 낙담했다. ' 이건 범죄야. 분명히…. 하아‥ ' 어쨋든, 마리가 낙담을 하든 한숨을 쉬든, 유리는 개의치 않고 냉정한 목소 리로 물었다. " 별 다른 내용은 없어? " " 음…. " 마리는 낮게 고개를 끄덕이며 헤드폰에 들리는 말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낙 담을 한다느니 후회를 한다느니 해도, 미행에 제일 열심히 임하고 있었던 것 은 마리, 자신이었다.(…) " 쿠쿠쿠쿠∼ 재밌었어! " 앞 전, 영화관 근처의 공원. 시더는 속이 개운한듯 예의 그 히죽 웃는 표정 으로 돌아가 소리치고 있었다. 가인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 다행이구나. 재밌었다니. " " 그럼그럼! 나 이런 거 처음이야! 영화도 보고 피규어 전문점에도 가보고! 식당에서 밥도 먹고! " 시더는 들뜬 목소리로 홍조를 띄며 소리쳤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데 이트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영화를 본 후,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시더의 강한 주장으로 액션 피규어 전문점도 몇 군데를 돌아다닌 후였다. 그 때마다 감탄하며, 어린 아이 같이 이곳 저곳을 달려가며 구경하던 시더의 모 습이 떠오르자 가인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 그래. 어쨋든 이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 같내,시더. " " 에? 아,아아∼ " 가인의 말에 시더는 들떴던 기색을 가라앉히며 얼굴을 붉혔다. 역시,가인은 자신이 풀이 죽어있자 기운을 돋게 해주려고 데이트를 하자고 했던 것 같았 다. 사실, 누구보다 기운이 없던 것은 가인 자신일텐데…. 시더는 그런 가인 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중얼거렸다. " 고,고마워…. 신경 써줘서. " " 아니야∼ 나도 재밌고 즐거웠는데. " 가인은 손을 휘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가인의 옆 모습을 살짝 쳐다 보 던 시더는 괜히 의미 없는 손 장난을 하며 그에게 말을 꺼냈다. " 저기‥ 몸은 이제 완전히 괜찮은 거지? " " 응. 그 포션이라는 거 정말 신기하더라.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그것 한 방 이면 이렇게 깨끗히 나아버리니‥. " " 그래. 다행이네‥. " 안도하는 목소리의 시더.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시 죄책감이 묻 어있었다. 그것을 느낀 가인은 머리를 긁적인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사실‥ 그때 그 일 말이야‥. " " .........? " " 그건 시더의 책임 만이 아니야. 다 내가 정신을 못차려서 생긴 일이지." " .....그게 무슨‥ " 가인의 영문 모를 소리에 시더는 그를 돌아 보았다. 가인은 벤치에 몸을 기 댄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허무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 나 최근 고민하고 있었어. 얼떨결에 들어온 피스 메이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오라를 사용해서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었지. " 가인은 아직 2달도 안 지났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재영과 신문을 돌리던 중 만난 몬스터. 그 후에 갑작스럽게 학교에서 괴물들의 습격을 받았고. 마 리의 권유로 피스메이커에 가입을 하게 되었지‥. " 왠지 허무함이 들었어. 나 뭘하고 있는 걸까. 다른 이들은 각자 자신 만 의 목적이 있는데… 시더 만 해도 그래. 자신이 만든 발명품이 남에게 도 움되는 것이 자신의 보람이라고 얘기했을 때, 나 그런 말을 하는 시더가 너무 부러웠어. 나만 어쩡쩡한 마음가짐으로… 아무 생각 없이 끌려 다니 는 것 같고…. " 가인은 말을 끊고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가인을 조용히 바라보던 시 더는 낮은 목소리로 가인에게 물었다. " …그럼 가인은 뭘 하고 싶은 거야? " " 그,그걸 모르니까…! " " 피스 메이커에 들어와서 괴로웠어? 힘들었어? " 시더의 물음에 가인은 다시 침묵했다. 어떤 의미로 물은 걸까? 물론 몬스터 들과의 싸움은 괴롭고 힘들었지…. 하지만 시더가 묻는 괴로움과 힘듦의 의 미를 가인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가인은 살며시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 다. " 그렇지는.......않았어. "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진우,마리,시민,유리,수정,시더… 그 꼴보기 싫은 진 사령관과 언제나 친절해 보이던 닥터. 전투 때 언제나 자신들을 서포트 해주 는 윤채영 씨… 다시 시더가 물었다. " 가인의 가장 소중한 것은 뭐야? " " ........ " 소중한 것? 나에게 소중한 것이란 뭐가 있었을까… 친구 재영과 테레이아…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신이. " 아…. " 가인은 떨리는 눈으로 시더를 바라보았다.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싸워야 했는 지를…. 그 이유를…. 그런 가인의 모습에 시더는 활짝 웃으며 엄지를 들어보였다. " 찾았어? 그 이유라는 거? " " 으,으응‥. " " 좋았어! 가인! 이제 더 이상 고민 같은 건 안하는거지? " 어느새 가인의 이름을 부르는 시더. 가인은 그런 그녀의 말에 미소 지었다. 가인의 마음을 짓누르던 고민 같은 것은 어느새 날아가 버린지 오래였다. 가 인도 시더에게 엄지 손가락을 내보이며 소리쳤다. " 물론! 시더야 말로 고민 하지마! 시더가 만든 헤븐 스매쉬로 반드시 몬스 터 따위 깨끗히 날려 버릴테니까! " " 좋아좋아! 바로 그 자세야! " 시더는 언제나 처럼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웃음을 터뜨렸고 가인도 마주 웃 었다. 가인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고 투명한 5월의 하늘. 기분이 유쾌해졌 다. ' 그래. 내 싸우는 이유. 그건 바로… ' 한편, 가인들의 대화를 도청기로 듣고 있던 진우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역시…. 싸우는 이유를 모르면 강해질 수 없지. " 시민은 마리의 말에 가인을 바라보며 살풋 웃었다. " 후후… 한동안 고민했던 이유가 그거였군요. " " 기특하기도 한 소년 같으니라구∼ 혼자서 끙끙 대느라 고생 좀 했겠구만∼ " 진우는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눈빛 만큼은 진지하게 가인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래. 육체적인 강함은 얼마든지 훈련으로 이루어낼 수 있지 만, 정신적인 강함은 스스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가인은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피스 메이커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리는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을 풀며 안도 반, 원망 반의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 하지만… 그런 거‥ 얘기해줘도 상관 없는 걸…. " 그런 유리의 말에 모두는 미소 지었다. 하긴 섭섭하기는 한가…. 혼자서 그 런 걸로 고민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모두의 얼굴은 밝았다. 진우가 유리와 마리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 어쨋든, 가인의 마음을 알았으니 여성 분들도 이제는 안심입니까? " " 바보! " " 멍청이…. " 마리와 유리는 그런 진우를 외면했지만, 진우는 연신 웃고 있었다. << 모스맨, imago 상태로 돌입합니다. 앞으로 20초 남았어요,가인 군. >> " 피스- " 가인은 짧게 답하며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거대한 누에 고치를 바라보았다. 예정 시간 보다 빠르게 깨어나기 시작하는 몬스터였다. A.I 슈츠 복 차림의 가인은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에 끼워진 헤븐 스매쉬를 괴물에게로 향했다. 윤채영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 20, 19, 18, 17‥ >> 가인은 살며시 눈을 감고 오라를 느꼈다. 거대한 파동이 자신의 오른 손을 감싸안기 시작했다. 휘몰아 치는 오라의 기류. 하지만 예전과 같은 격심한 떨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더가 헤븐 스매쉬의 컨트롤을 다시 재조정 해준 덕분이었다. 이번에는 앞전과 같이 날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좋아‥! ' 가인은 시더를 믿으며 마음 놓고 오라를 모았다. 거대한 토네이도가 가인 의 오른 손으로 생성되었다. 가인은 중얼거렸다. " 난… 지킨다. " << 5, 4, 3‥ >> "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 << 2, 1… >> 카운트가 끝나고 번데기가 갈라지며 모스맨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가 인은 그런 몬스터를 노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 그게 바로 내 싸우는 이유야-----!! " 가인의 천공권이 몬스터에게 작열했다! <제 6 화 싸우는 이유 完> 豫告 5월이 끝나고 6월이 되었다. 그리고 한성 고등학교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는 운동회의 붐! 유가인: 뭐? 우승 상품이 하와이 해외 여행?! 그것도 학급의 모두를?! 제갈영: 아하하하하하∼ 대원 그룹의 차기 후계자이자 학생회의 회장인 이 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자, 다들! 동참하라! 학생 회장 제갈영이 주최한 무한 학급 배틀! 제갈영: 무슨 종목이든 상관없다. 이기면 되는 것이다! 2박 3일간의 운동회 를 마음 껏 즐기시길 바란다! 지금 모두는 열광하고 있다. <제 7 화 반장을 위해 달려라! > 하지연: 최종 엔트리 넘버를 발표한다! -=-=-=-=-=-=-=-=-=-=-=-=-=-=-=-=-=-=-=-=-=-=-=-=-=-=-=-=-=-=-=-=-=-=-= 오라전대 ＰＩＥＣＥ ＭＡＫＥＲ 第 7 話 반장을 위해 달려라! =-=-=-=-=-=-=-=-=-=-=-=-=-=-=-=-=-=-=-=-=-=-=-=-=-=-=-=-=-=-=-=-=-=-=-= 「H.F.P」. 일명, Hurrah for the Prince(직역:왕자님 만세)…. 그것은 한성 고등학교에 존재하는 학생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소수의 선택 된 인간들로만 구성되어졌다는 이 집단이 한성 고등학교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활약 내용은, 「명실 공히 학교의 주인은 바로 우리!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이다. 이사장과 교장,교감들도 손을 못대는 그들은 한성 고등학교의 설립 당 시부터, 학교의 모든 것을 주관해 왔다. 이렇게 학생회의 힘이 강할 수 밖에 없는 데에는 크나 큰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학생 회장의 지위가, 한성 고등학교를 후원해 주는 대원 그룹의 후계자에 게만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2대 학생회장인 '제갈 영' 또한 어김 없 이 대원 그룹의 차기 후계자이자, 전대의 회장들과 마찬가지로 못말리는 독재 자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한성 고등학교의 모든 이들은 그를 가리켜 통 칭 '네로'라고 칭했다. " 자자∼ 오늘의 안건은 운동회다. " 어두운 학생회 실에서 울려퍼지는 오만한 남자의 목소리. 22대 학생회장 제 갈영은 자신의 안경을 빛내며 방 안의 임원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 의 옆에 서 있는 부 학생 회장이자, 자신의 충실한 신하 겸 비서인 '호일준' 에게 손짓했다. 호일준은 한숨을 내쉬며 못 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 " …정말 그 말도 안되는 계획을 추진하실 겁니까? " " 당연하지! 나는 이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사랑과 즐거움과 용기를 주어야할 의무가 있다!! " 기세 좋게 외치며 몸을 일으키는 제갈영. 하지만 호일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절대로 그런 이유 때문일리가 없다고….모든 학생회의 임원들은 제갈영을 바 라보았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시되는 시선들을 느끼자, 제갈영은 자신의 등 뒤로 환희의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제갈영, 그는 심각한 나르시즘 환 자이자 과시욕의 황태자로도 그 소문이 자자했다. 제갈영은 기세좋게 외쳤다. " 이번 운동회의 규칙을 정하겠다! " 그가 나르시스 환자이건 단순한 멍청이이건, 제갈 영에게는 사람의 이목을 끄는 폭풍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모두는 숨 죽이며 제갈영의 다음 말을 기다 렸다. " 이번 체육 대회는 모든 학급의 배틀제로 2박 3일간 실시한다! 그리고 대 회의 우승 학급에게 주어지는 상품은,학급의 학생 모두와 담당 교사의 하 와이 여행 티켓! " - 쿠쿵! 벙찐 표정으로 제갈영을 돌아보는 학생회의 임원들. 호일준은 손으로 얼굴 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 결국, 저질러 버렸어… 저 인간. ' 호일준의 낙담을 뒤로 하고,제갈영이 발표한 '학급 배틀제'란 것은 그 우승 상품과 더불어 빠른 속도로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 들 사이로 퍼져 나가기 시 작했다. 바야흐로 체육 대회의 계절, 6월이 찾아온 것이다! 第 7 話 반장을 위해 달려라! " 뭐? 우승 상품이 하와이 해외 여행?! 그것도 학급의 모두를?! " 가인은 놀란 목소리로 낮게 재영에게 소리쳤다.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니깐.더군다나 어떤 종목이든 무차별적으로 전 학급이 겨룬다고 하 던걸? 또 대대적으로 기간도 늘어나서 무려 2박 3일! 놀랍지 않냐? " " 헤에‥ " 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주시했다. 앞에서는 1학년 3반의 반장 '안지 혜'가 운동회 준비 담당들을 조사하느라 칠판에 아이들의 이름을 적고 있었 다.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녀는 평범하지만, 근면하기로 유명한 아이였다.그 덕에 별로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반장으로 적극 추천될 수 있었지만…. " 얘,얘들아∼ 조금만 조용히 하고 집중 좀 해줘‥! " 학급은 제갈영의 파격적인 체육 대회로 시끌벅적했다.이 상황에서는 체육대 회의 조사고 나발이고 힘든 분위기였다. 가인이 그런 지혜를 잠시 주시하고 있을 때, 그런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에메랄드 머리 빛의 소녀,테 레이아 민체스터였다. " 가인은 무슨 종목에 출전할 거야? " " 에‥? 그,글쎄.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무슨 종목이 있댔지? 축구, 농구, 달리 기…그 외에도 줄다리기, 씨름 등이 있었지만, 앞의 세 종목들이 주를 이루 고 있었다. 거기다 이 세 경기가 제일 승점이 높다. 다른 기타 경기에서 아 무리 이겨 봤자, 앞의 세 경기에서 져버리면 소용 없는 것이다. 만약 체육대 회의 우승을 노린다면 축구,농구,달리기에서 1등을 노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하지만 가인에게는 그다지 관심 없는 것들이었다. 체육 대회날 운 동이라니…. 몸이 약하다거나 운동을 못하는 가인은 아니었지만,그렇다고 일 부러 뛰고 솟고 하며 땀을 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그였다. 평상시에도 가 인은 체육 시간에 땡땡이를 치기 일 쑤였다. " 난 그다지 나가고 싶지 않은데…. " 가인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젓자 테레이아는 살풋 웃으며 말했다. " 그래도 가인의 뛰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 " " 그,그래?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어설프게 웃었다. 그,그런…. 쑥스럽게 그런 거 봐서 뭘 할려구‥. 그때, 그런 가인의 손을 반대쪽에서 누군가가 잡았다. 도저히 고등학생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고등학생 임이 분명한 13살의 소녀, 이유리가 가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유리는 테레이아를 힐끔 쳐다보며 가인에게 말 했다. "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할 필요 없어. 강요 같은 거 당하지마‥. " 그 말에 테레이아는 이마에 실핏줄을 띄우며 방긋 웃어 보였다. " 그렇게 말히니 꼭 내가 가인에게 억지로 하라고 떠밀었다는 소리로 들리 는데? " " 그랬잖아. " " 내가 언제! 그리고… 뭐,좋아. 강요 좀 했다고 쳐.하지만 난 그렇게 해서 라도 가인의 활기 찬 모습을 보고 싶은 걸? 운동은 몸에 좋아. " " 그럼 혼자서 많이 해. " 서로를 노려보며 한치의 양보도 없는 테레이아와 유리의 신경전. 가인은 중 얼거렸다. 아,또 기압이 내려가는 군. 예의 방전 현상인가. 가인은 지친 얼 굴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반장 안지혜가 시끄러운 와중에 도 식은 땀을 흘리며 운동회 조사를 하고 있었다. ' 하나도 진척이 없잖아…. ' 칠판에 써놓은 내용이 앞전과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을 보고,가인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반장도 힘들겠구만.에휴…. 결국, 그 날 H.R 시간으로는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 1학년 3반의 반장, 안지혜는 한 숨을 쉬며 프린트 뭉치를 들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반장으로서의 할 일도 태산 같은 데에다가, 더구나 체육 대회 임원 까지 맡은 그녀였다. 운동회 날이 다가오는 체육 대회 임원의 일 분량이란 살인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왜 자신이 이 일을 맡았는지 잠시 회의감을 느껴 야만 했다. ' 그래도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걸…. ' 지혜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검은 뿔테 안경 사이로 그녀 의 눈빛은 어딘가 침울해 보였다. 지혜는 다시 마음을 잡으며 힘차게 발걸음 을 놀렸다. 하지만 순간, 프린트 뭉치의 무게에 다리가 풀려 그만 복도에 쓰 러져 버렸다. " 아얏… " 복도에 뿌려지는 프린트들. 체육 대회 공문인데 큰일났네! 딱 반 학생들의 수 만큼 가져온 거라서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된다구! 지혜는 허둥지둥 프 린트를 주우며 한 숨을 쉬었다. 아,나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나.침착하지 못 하게…. 그때, 지혜의 앞으로 누군가가 쪼그리고 앉아 프린트를 줍고 있었다. 지혜는 눈을 멀뚱히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 자, 어서 주워. 좀 있으면 수업 시작하잖아. " 자신의 클래스 메이트인 유가인이었다. 지혜는 그런 그의 말에 그제서야 정 신을 차리고 서둘러 프린트를 줍기 시작했다. 둘이 하자, 금새 프린트를 다 모을 수 있었다. 지혜는 웃으며 가인에게 말했다. " 고마워,가인아. " " 뭘∼ 반장이야 말로 수고한다. 반장 일하랴 임원 일 하랴 힘들지? 애들도 잘 안 따라주고…. 아, 그거 무겁지 않아? 내가 들어줄게. " " 아,아냐. 괜찮아. " " 그러지 말고 줘. 이런 거 들 힘 있으면 아껴두었다가, 임원 일에 써야지. " " 아, 으응‥. " 가인은 지혜에게서 프린트 뭉치를 뺏어 자신이 들고 갔다.그런 가인의 등을 잠시 바라보던 지혜는 살며시 웃으며 곧 가인의 옆으로 따라 걸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20cm는 더 클 가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예전에도, 이렇게 도와줬었지? 가인이 너. " " 에? 그랬나…. " 가인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혜를 내려다 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난 기억 안나는데…. 그런 가인을 보던 지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있었어. 그런 일이…. " 지혜는 가인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그래…. 학기 초 였었어. 막 내가 반장으로 임명받았을 때…. - 아야야… 지혜는 프린트를 바닥에 떨구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이었다. 그래. 그 때부터 나 잘 넘어지는 아이였구나. 칠칠맞게…. 넘어졌던 지혜는 괜히 기분이 울적해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소심한 자신 의 성격을 고쳐 보려고 반장을 지원했던 거였는데…. 아버지의 잦은 출장으 로 변변찮은 친구 하나 사귀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 만은 많은 친구를 만들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런 때에 도와줄 친구 하나 아직 없 다니…. 그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자,어서 주워. 수업 시작하잖아. 지혜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프린트를 주워주는 한 남자 아이. 지혜는 그가 자신과 같은 반의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름표를 보니 1-3 유가인이 라고 적혀 있었다. - 어디 많이 다치진 않았지? 내가 들어줄테니까 어서 가자. - 그렇지만… 지혜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교실로 향하는 가인. 지혜는 그런 가인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자인 자신 과는 달리 넓은 등…. ' 그래…. 그랬었어. ' 지혜는 상념에서 깨어나 살며시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변함 없는 가인 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그런 지혜를 이상한 표정 으로 쳐다보던 가인은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 저기… 반장. " " 어, 왜? " " 왜 이런 일 도맡아서 한 거야? 귀찮지 않아? " " 체육 대회 임원 일… 말하는 거야? " " 응. 그렇잖아. 꼭 반장이 할 필요도 없는데. 반장 일도 많을 거 아냐. " " 으응. " 지혜는 그런 가인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앞을 보며 걷다가 가인에게 말했다. "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 " …엥? " 뭔 소리야 이게? 가인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지혜를 바라보았다. 아니,겨 우 그런 이유로 이 산더미 같은 일들을 도맡아서 했단 말이야?! 추억을 만들 고 싶어서?! 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지혜가 뒷 말을 이었다. " …나 이번 운동회가 끝나면 전학 가거든. " " 아…. " 가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지혜를 바라보았다. 지혜는 그런 가인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가인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전 학을 간다니…. 그런… 입학한지 몇 개월이나 됐다고. " 하,하지만 왜 이렇게 일찍? 아직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 " 우리 아빠 전근을 자주 가시거든. 옛날 부터 그랬어. 한 8번 정도 전학했 었나‥ 뭐, 이젠 익숙하지만…. " 살짝 웃으며 말하는 지혜. 하지만 그런 그녀의 웃음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 다. 가인은 그제서야 그녀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그렇게 자주 전학을 가니까… 이 학교를 잊지 않을 추억을 만들고 싶어하는 거였구나…. 8번이나 전학했다는 그녀의 말. 분명 그 정도로 전학을 다녔다면, 친구들과 어울릴 틈도 추억거리를 만들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쓸쓸하고‥ 외로웠겠지. 분명‥. " 아, 다 왔내. 고마워,가인아. " 어느새 1학년 3반 교실로 온 지혜와 가인. 가인은 자신에게서 프린트 뭉치 를 건내 받는 그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 추억‥ 이라고. ' 지혜의 말을 되씹어 보는 가인이었다. " 후후‥ 내 생각대로 되어가는군. " 운동회 날이 다가오는 어느날. 제갈영은 제1 운동장과 제 2 운동장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한성 고등학교의 언덕에 서서 미소짓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호일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하지만 모든 학급의 수업이 현재 자율 학습을 가장한 체육 수업이 되어 정상 운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 " 아아∼ 그럼 어때? 체력은 국력이란 말도 모르는 거냐?! 공부 따위 조금 하지 않는게 뭐가 대수라고 그러는 거야. " 아아‥ 저 무책임하면서도 성의없는 태도.호일준은 이마에 실핏줄을 띄웠다. 만약, 한성 고등학교의 모의 고사 평점이 낮아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또 호일 준,자신만 죽어라 고생해야 했다. 모든 선생님들을 찾아 뵈며 상담해야 하는 건 물론.긴급 교무 회의에도 불려나가야 했다.원래는 다 제갈영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가 '안 한 다' 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실, 제갈영이 벌여둔 일 같은 것 그가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둬도 되었지만 호일준의 그 꼼꼼하다 못해 편집증 적인 성격은 그런 일들을 그냥 두고 넘기지를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가 말이야 당신은 학생 회장으로서의 마음 가짐이 안되어있다고! 물론, 마음 속으로 들이삼킨 호일준의 피 맺힌 외침이었다. " 몇몇 선생님들의 반발도 거셉니다. 특히,학생 주임 김학도 선생님이‥. " " 에에잇∼! 그런 건 교장,교감 선생들에게 맡겨 버려! 정 뭐하면 이사장을 구워 삶든지! " " ......... " 어째서 이 사람은 저런 과격한 방법 밖에 생각을 못하는 걸까. 호일준은 다 시 한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가 한숨을 내쉬든 고뇌를 하든 제 갈영은 개의치 않고 다시 운동장을 내려다 보았다. " 어쨋든, 저것을 보아라! 학교의 모두가 운동회를 위해 필사적으로 준비하 고 있지 않느냐! " " ......단지 대회 상품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 " 에에잇! 하지만 그 관심도 없던 운동회에 학생들이 저렇게 열광하고 있단 말이다! " 제갈영의 그 말을 듣는 순간, 호일준은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서,설 마 학생 회장님은 이것을 노리고 그런 말도 안되는 대회를 연 것은‥?! ' 그래. 맞아! 요즘의 학생들은 운동회니 소풍이니 학교의 행사에 너무나 도 무관심하다! 회장님은 그런 학생들의 관심을 학교 행사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이셨던 거야! 무엇보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모교에 애정 을 쏟게 하기 위해! ' 아아‥ 제갈영 님. 역시 당신은 제가 선택한 주군이셨습니다. 호일준은 감 동의 눈초리로 제갈영을 우러러 보았다. 하지만 감격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이 아닐까. 제갈영은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안경을 빛냈다. " 모든 학생들의 이목이 운동회에 집중되었을 때! " 예, 그렇습니다. 회장 님∼!! 호일준은 희망찬 학교의 내일을 생각하며 환 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호일준의 그 미소는 제갈영의 다음 말이 튀어나옴 과 동시에 산산히 찢겨져 공중 분해 되어 버렸다. " 이 내가 운동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우승한다! " " .........에‥. " 굳어버리는 호일준. 하지만 제갈영은 이미 자신 만의 세계로 돌입하고 있었 다. " 우승을 한 나,제갈영에게 학교의 모두는 흠모의 눈빛을 보낼테지! 인기절 정! 기품 상승! 난 진정한 학교의 황태자로 거듭 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 ......... " 틀렸어. 이 자식은‥. 호일준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 앉아 버렸다. - 삑삑‥! 한성 고등학교의 제 4 운동장. 현재, 제갈영의 운동회 방침으로 인해 한성 고등학교의 전 학급은 거의 모든 수업을 체육 시간으로 돌린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더구나, 1학년 3반의 담임 하지연은 이 좋은 기회를 십분 활용 하고 있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체육 대회의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지연은 그 날카로운 눈으로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모든 선수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 22번, 정수한. 각력이 좋군. 하지만 볼 감각이 없어.저기 31번은 슈팅 감 각은 부족하지만 패스가 좋군. 게임 메이커로서의 자질이 보이는데‥. ' 그녀는 머리 속으로는 최종 엔트리를 구성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학급의 모 든 남학생들의 기량을 조사하는 그녀의 관찰력은 남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무 엇보다 하와이를 향한 지연의 집념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 알로하∼ 열대성 기후에 속하지만 북동 무역품의 영향으로 서늘하고 쾌적한 날씨. 하 와이 주민들의 환호와 와이키키 해변의 그 푸른빛이 넘실대는 '태평양의 낙 원'. ' …신혼 여행은 반드시 하와이로…. ' 하지연이 남몰래 간직한 그녀 만의 꿈이었다. 비록, 같이 그곳으로 갈 반려 자는 여지껏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번 체육 대회에서 우승만 하면 하 와이에 간다는 그녀의 꿈은 실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좋은 기회를 지 연은 놓칠 수 없었다. " 자자자∼ 거기 12번! 안 뛰고 뭐하는 거야?! 전 후반 40분은 마음껏 뛸 수 있을 정도의 심폐 기능이 없는 이상 우승은 힘들어! " " 서,선생님‥! 그건 국가 대표들도 힘든‥! " " ......10분 추가. " 지연은 담배를 피며 냉정히 학생들의 항의를 끊었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땡볕 아래서 뛰어야만 했다. 그들이 이 훈련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그들 의 가슴 속에도 하와이 여행으로의 열망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지 연의 훈련 메뉴를 모두 소화해 낸다면 체육 대회의 우승도 꿈은 아니었다. " 우오오오오오!! " 찬란한 태양 아래 푸른 바다와 이국의 미녀가 우리를 부른다! 사실,전자보 단 후자의 이유에 학생들은 더더욱 자신들의 몸을 불태웠다. 그런 그들을 바 라보며 지연은 씨익 미소 지었다. " 나.가.자! 이.기.자! 정정당당 코리아! " 한편,운동장에서 남학생들이 뒹굴고 있을 때 1학년 3반의 여학생들 또한 이 에 질세라 열심히 훈련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번 체육 대회에서 종목 우승도 승점에 보탬이 되지만 응원 점수도 무시 못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컸던 것이다. 여학생들 또한 하와이에 대한 갈망은 남학생들 못지 않았다. 운동을 하던 남 학생들은,움직임을 멈춘채 멍하니 그런 여학생들의 응원 모습을 구경하고 있 었다. 치어 리더 복까지 맞춰 입은 그녀들의 짧은 스커트와 약동적인 움직임 은 남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 조,좋구나‥. " 1학년 3반의 남학생들은 볼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들을 향해 재영이 말했다. " 무엇보다 우리 반에는 테레이아와 유리가 있으니까 말이야∼ " " 오오‥ " 재영의 말에 남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1학년 3반에는 한성 고 등학교의 미소녀가 두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테레이아 민체스터와 이유리! 과연, 응원 연습을 하는 여학생들 중에서도 테레이아와 유리는 가장 눈에 띄 고 있었다. " 우왓! 테레이아 좀 봐! 고난이도의 점프와 리프팅이다! " " 과연 외국인 유학생! " " 하지만 유리도 만만치 않은데! 저 웨이브와 라킹은 범상치 않아! " " 테레이아가 기본 치어동작에 충실하게 절도와 질서를 강조하는 반면,유리 는 웨이브, 라킹등을 가미한 힙합특유의 자유롭고 즉흥적인 안무를 강조 하는군. 좋은 승부다! " 재영들은 한 마디씩 하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저런 미소녀들 의 응원 모습, 딴 반 녀석들이라면 꿈도 못 꾸겠지. 나‥1학년 3반이어서 정 말 다행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테레이아와 유리의 응원 소리에 재영들 의 기분은 저 하늘에서 지하의 유황불 속으로 쳐박혀야만 했다. " 플레이∼ 플레이∼ 유가인! V.I.C.T.O.R.Y! " 즉각, 가인을 분노의 눈초리로 노려보는 재영들.어째서‥ 어째서 저 자식만! " 역시 유가인, 네 녀석이 있는 한 우리에게 미래란 없다! " " 숙청 대상 1호! " " 멸해주마! 사라져라!! " -퍼억! 하지만, 다음 순간 재영들은 바닥에 질펀히 드러누워 있어야 했다. 재영은 얻어맞은 뒷통수를 손으로 감싸며 분노로 몸을 일으켰다.우리의 대업을 방해 하다니! 누구냐?! 도대체 누가‥!! " 에‥. " 그렇지만,쓰러져있는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한 사람의 시선에 얼어버리는 재 영들이었다. 하지연 교사가 입에 문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자신들을 노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연의 저 제스처는 인간 하나는 충분히 병신으로 만 들어 줄 수 있다는 살인멸구의 예고. " ......전력 질주 운동장 10바퀴. 실시. " " 실시! " 재영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고,그 모습을 조용히 지 켜보던 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바보들‥. " ......... " 하지만 조용히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지연의 시선에,가인은 힘 없이 손가락 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 ......저,저도요? " " ......... " 냉정히 고개를 끄덕이는 지연.결국,가인도 재영들의 뒤를 따라 운동장을 달 려야만 했다. 도대체 왜 내가‥?! 어쨋든, 그렇게 축구 연습을 끝내고 이번에는 농구 연습으로 돌입하는 1 학 년 3반이었다. 재영과 가인은 운동장 10바퀴로 파 김치가 된 몸을 바닥에 눕 힌채 중얼거렸다. " 헉헉‥ 더는 못 뛰어‥. " " 차라리 죽여라‥. 죽여‥. " 하지만 그들에게로 낮게 드리워지는 한 그림자. 하지연이 어느새 새 담배를 꼬나문채 자신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과 재영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농구 코트로 뛰어들었다. " 도내 넘버원 가드의 실력을 보여주마! " " 덤벼라! " 왠지 자신들의 처지가 불쌍해지는 재영과 가인이었다. 결국, 그렇게 그들은 농구 연습도 풀로 뛰어야만 했다. 가인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 아,젠장‥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나‥. ' 평상시라면, 벌써 그늘 한 구석에 숨어서 낮잠이나 즐기고 있어야 할 자신 이었다. 체육 시간에 이렇게 땀흘리며 운동하는 자신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다고. 가인은 투덜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런 그의 머리 속으로 예전 지혜 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 추억‥ 이라고. ' 운동회가 끝나면 전학을 간다는 그녀.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하지연 선 생에게서 지시를 받고 있는 지혜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뭔 가를 해주고 싶었다. 한성 고등학교에서 추억을 만들고 싶어하는 그녀. '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그 추억을 만든다는 거‥. ' 가인은 중얼거렸다.비록 운동회에 참여하는 정도로 밖에 도와줄 수 없는 자 신이었지만, 지혜가 멋진 추억을 가지기를 바랬다. 저렇게 노력하고 있는 그 녀의 모습에 가인은 다짐했다. 좋아. 나도 질 수야 없지‥! " 야, 유가인! 공 받아! " 그때, 가인에게 들려오는 재영의 목소리. 가인은 흠칫 놀라 공중을 바라보 았다. 골대 근처에 있는 자신에게로 높게 날아오는 농구공이 하나 보였다.아 마도 재영이 패스한 모양이었다. " 바보‥! 너무 높잖아?! "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공을 받기 위해 도약했다. 아,안돼! 너무 높다! 놓 치겠어! 잘 좀 패스하지,재영이 녀석! - 탁! 하지만 가인의 손에 잡혀 있는 농구 공. 가인은 멍하니 농구 공을 바라보다 가 자신의 옆에 있는 농구 골대를 바라보았다. 어? 왜 골대가 내 가슴 근처 에 있는 거지? 분명 내 머리 한참 위에 있었을 텐데…. 저 밑으로 재영과 친 구들이 놀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것이 보여왔다. 어,어떻게 된 거지 이거? - 터엉! 엉겹결에 골대에 공을 집어넣는 가인이었다. 흔들리는 농구 골대. - 탁… 가인은 지상에 착지했다.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농구 골대를 황급히 올려 다 보았다. 분명 자신의 머리 한참 위로 농구 골대는 위치하고 있었다.그,금 방 뭐였지? 응? 가인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 이 손으로 저 골대에 공을 집어 넣었던 것 같은데…. ' 아… 혹시 이거‥ ' 덩크? 180cm의 가인이 2.9m 이상의 농구 골대에 덩크를 한 것이었다. 모두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가인을 바라 보고 있었다. - 탕! 공포탄 소리와 함께 가인은 레일을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 는 배경들과 귓 가로 들리는 친구들의 숨소리.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금새 가인의 뒤로 소리들은 처져 버린다. " 하아‥하아‥ " 가인은 자연스럽게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놀렸다.자신의 몸 같지 않게 다리 는 경쾌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몸이 이렇게 가벼웠었나? 얼마나 가벼운 지 움직이는 것 자체가 유쾌할 정도다. 어느새 100m 란 거리도 그 끝이 보이 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골인점이다. - 파앗! 가슴을 활짝 피며 골인점을 통과하는 가인. 100m를 달린 것 치고는 숨도 흐 트러지지 않았다. 가인은 가볍게 뜀박질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는 기록을 재고 있던 하지연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 9,9초 02‥ " " 에엣-----?! " 뒤늦게 골인점을 통과하던 재영과 남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지연이 쥐고있 던 타임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정확하게 09,02라고 찍힌 액정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재영은 가인과 타임수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 미,믿을 수 없어‥. " 나야 말로 이런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다…. 가인도 재영의 중얼거림에 어 처구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뭔가 잘못된 걸 거야. 내가 이렇게 뛸 수 있을리가 없잖아? 9초 02라니. 그거 분명… 세계 신기록이지, 아마…? " 유,유가인…. " 그때, 멍하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가인에게로 하지연이 천천 히 걸어왔다. 그녀는 가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 거렸다. " 너, 너 왜 이제서야… " " ......예? " 왜,왜 이러시지 선생님? 순간, 지연이 가인을 덥썩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 이 귀여운 것! 여지껏 어디 숨어있다가 내 앞에 나타난 거냐! " " 우,우왁-----?! " " 너만 있으면 우승은 확실하다! 확실해! 귀여운 것! 예쁜 것! " " 으엑------!! " 지연의 가슴에 파묻혀 비명을 지르는 가인.훗날 가인이 회상하며 말하길,지 연 선생님의 가슴은 D컵의 초 글래머 급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가인의 운동회 출전은 이 날을 계기로 두 말할 것 없이 확정되었다. " 아아… 어떻게 된 거지, 이건…. " 점심 시간. 가인은 옥상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는 테레이아와 재영, 유리가 같이 앉아 있었다.재영은 여전히 가 인을 외계인 쳐다 보듯 하며 말했다. " 가인이, 너‥ 혹시 오늘 아침에‥ " " ......오늘 아침에? " " 약물 복용이라도 한 거 아냐? 도핑이다! " - 퍼억!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레이아와 유리의 이문정주가 재영의 복부를 파 고 들었다. 재영은 신음도 흘리지 못하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테레이아는 방 긋 웃으며 가인을 뒤돌아 보았다. " 하지만 정말 놀랐어. 가인이가 그렇게 운동을 잘할 줄은‥후후‥ " " 아니, 그건… "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가인은 뒷 말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다.도대체 자신 의 몸이 어떻게 된 건지 가인,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2.9m의 농구 골대에 덩크를 할 정도로 점프력이 높아지질 않았나… 100m 를 9초대로 돌파하질 않 았나. 나… 분명 100m 최고 기록이래 봐야 14초가 아니었던가? 이건 마치… ' 마치 A.I 슈츠를 착용했을 때 같은… ' 그래. 맞다. 그 점프나 각력은 A.I 슈츠를 착용했을 때의 움직임이었다. 하 지만 아까는 A.I 슈츠도 착용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 가인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분명 덩크를 한다느니 달 리기가 빨라진다느니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상이 아 닌 것이다. 갑자기 이렇게 몸의 기능이 향상되다니…. 가인은 자신의 몸에게 서 자신의 것이 아닌듯한 낯설음을 받았다. - ‥오빠? 그때, 마음 속으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인은 테레이아와 재영의 눈치를 살피며 유리에게 마음으로 답했다. - 유,유리야. 나… 어떻게 된 거지? 내 몸이 내 거가 아닌 거 같아…. - 진정해,오빠.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어. - 응?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다니? 불안해 하는 가인의 손을 유리가 살며시 잡으 며 말했다. -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A.I 슈츠를 착용한 후에 생기는 부작용일 수도 있어. 나도 처음에 겪었던 적이 있었던 거 같아. - 부작용? - 으응…오라에 공명하여 분자 입자 상태의 A.I 슈츠가 가동하는 것일 수도 있어. 오빠 처럼 확연히 표시가 나진 않았지만, 나도 경험했었으니까‥그 러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 그,그래? 유리도 경험했었다니. 왠지 유리의 그 말에 안심이 되는 가인이었다. 아,한 심하군. 초등학생 아이가 동정해주니 마음이 놓이냐,유가인? -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을지도… 기술부나 메디컬 센터에 한 번 가보는게 좋을거야. - 응. 알았어. 그래. 기술부의 시더에게 물어보면 뭔가 확연해질지도. 가인은 유리의 머리 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동생에게서 위로를 받다니‥ 나도 나이 값을 못하는 녀석이군. 유리의 마음씀씀이에 괜히 멋쩍어지는 가인이었 다. 그런 가인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유리가 가인을 올려다 보며 살며시 미 소지었다. " 어쨋든, 유가인 체육 대회 출전 확정이로군. " 어느새 부활(?)한 건지 재영이 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인은 머리를 긁 적이며 중얼거렸다. " 뭐‥ 일단은 나갈 생각이었고‥ " " 헤에∼ 가인이 너 체육 하는 거 싫어하지 않았냐? " 재영이 의외라는듯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알았다는듯 소리쳤다. " 역시 가인이 너도 노리고 있었군! " " …뭐,뭘? 뭘 노려? " 가인은 겁 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영이 자식, 매일 시덥잖은 소리만 하니까 이번엔 무슨 말을 할지 괜히 불안해지잖아. 그런 가인의 불안함을 뒤 로 하며 재영이 소리쳤다. " 하와이 여행 티켓 말이야! 우승만 한다면 와이키키 해변과 훌라 댄서들을 구경하는게 꼭 꿈은 아니라고! 무엇보다 우리 1학년 3반은 우승 후보로 손 꼽히는 강 팀이니까 승산은 충분히 있어∼ " 아,그러냐…. 가인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런 가인의 손을 테레이아가 살며시 잡아올리며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후훗‥ 이번 체육 대회‥ 가인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겠내‥. " " 에? " 테,테레이아? 가인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얼굴을 붉히며 테레이아를 바라 보았다. 테레이아는 한층 더 자신의 얼굴을 가인에게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 날 위해 우승해줄거지? " " 아‥ 우,우승? 그,그래! 우승 해야지! 그럼! " " 후훗‥ 그래. 우리 하와이에 가서‥ 행복해지자. " 자,잠깐 테레이아! 더 이상 얼굴을 가까이 했다간‥! 테레이아의 숨결이 코 끝에서 느껴지자 견디기 힘들어지는 가인이었다. 그때, 가인의 손을 잡고 있 던 테레이아의 팔을 쳐내는 손길 하나. 누구겠는가. 도끼 눈을 뜨고 있던 유 리 뿐이지. 그녀는 가인의 무릎에 척 하니 앉아 테레이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 하지마. 오빠가 곤란해 하잖아. " 테레이아는 유리가 친 자신의 손목을 살짝 어루만지며 짧게 코 웃음쳤다. " 훗‥ 어린 아이가 보기에는 좀 자극적이었나 보지? 뭘 모르나 본데‥가인 은 이런 어른의 세계를 좋아한다고. " " 아,테레이아 양. 나도 어른의 세계를 좋아하는데‥. " 눈치 없이 끼어드는 재영. 그런 재영에게 테레이아와 유리의 이문정주가 다 시 작열했다. 재영은 옥상의 바닥으로 다시 그 몸을 가라 앉혔다. 가인은 식 은땀을 흘리며 테레이아에게 말했다. " 그,그런‥. 테레이아, 이상한 소리마! " " 가인,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난 이해하니까. ‥아,그래.어린아 이가 곁에 있어서 표현을 못하는 거구나. " 테레이아는 '어린 아이'라는 대목에서 유리를 힐끗 바라보며 미소지었다.유 리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가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 었다. 유리는 분노가 실린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 ......그만해둬. 느끼하니까. " " 훗. 인정하기 싫은가 보지, 어린 아이? " " 아줌마 보단 어린 아이가 나아. " " .........! " 어김 없이 돌입하는 평상시의 방전 모드. 정상 기압의 3분의 1로 떨어지는 저기압에 가인은 순수 산소로만 숨쉬어야 했다.아,이러다간 또 언제 내게 불 똥이 튈지 몰라‥. 피하고 보자. 가인은 슬그머니 테레이아와 유리에게서 몸 을 돌려 옥상을 내려갈려고 했다. 그때,가인의 발치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 재영이었다. " 으,으으‥ 가,가인아? 어디 갈려‥ " - 퍽! 가인은 막 소리 낼려는 재영을 소점프 다운 공격으로 가볍게 잠재우며 재빨 리 옥상에서 벗어났다. 테레이아와 유리의 말 싸움 속에서 홀로 쓰러져 있는 재영. 그의 부활은 아마도, 이번에는 조금 늦어질듯 싶었다. " 에휴…. " 가인은 휴게실의 자판기 앞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든채 한 숨을 쉬었다.모 처럼의 점심 시간도 맘 놓고 푹 쉬지 못하다니….이래 가지고서야 오후의 체 육 수업을 버틸 수나 있으려나. 이제는 지연의 눈에 띄여서, 더 이상 땡땡이 니 농땡이는 글러버린 가인이었다. 아, 이거 괜히 후회되내…. 그런 시덥 잖 은 걱정을 가인이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들겼다. 가인 이 뒤돌아 보니, 검은 뿔테 안경을 쓴 1학년 3반의 반장 '안지혜'가 가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 안녕, 가인아? " " 아,반장! " 가인은 씩 웃으며 지혜에게 말을 건냈다. " 점심은 했어? " " 응. 구내 식당에서 사먹으니까,뭐…. 가인은 매일 도시락 싸오지? 그것도 우리 학교의 소문 난 미소녀들하고 같이 먹잖아. " " 윽…. " 지혜의 말에 가인은 살짝 쓴 웃음을 지었다.그래.네 말대로 지금 그 미소녀 들하고 밥 먹다가 도망쳐 나온 중이다. 정말…. 그런 가인의 쓴 웃음을 다른 의미로 이해한 건지 지혜는 당황하며 말했다. " 아,미안. 나 비꼰다던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고… 단지 그렇게 친 구들하고 밥 먹는 가인이 부러워서…. " " 아,아니야. 무슨∼! 왜 사과하고 그래? " 가인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하지만 지혜의 말에 가인은 생각했다.친구들 하고 밥 먹는 게 부럽다고? 그럼, 지혜는 친구들하고 같이 밥을 안 먹나? " 저기‥ 그 동안 혼자 밥 먹었던 거야? " " 으,으응‥. 뭐… 성격이 이렇다 보니까. " 지혜는 어설프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가인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뚱 하 니 말했다. " 뭐, 나하고는 잘만 얘기하는 구만. " " 아,아니 그건… 가인이는 왠지 얘기하기 편하니까. " " 하아? …그거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냐? 내 귀로는,아무렇게 대 해도 부담없는 녀석이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 " 아,아니야! 그런 거! 참∼ 가인이는 짖궂게 말하는 구나. " 당황해하며 항의하는 지혜의 모습에 가인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이 렇게 재밌는 아이인데 왜 그동안 친구를 못 만든건지…. 가인은 잠시 생각하 다가 지혜에게 말했다. " 그럼, 이번 체육 대회 때 같이 점심 먹을까? " " 에…. " 난데없는 가인의 권유에 멍 하니 그를 바라보는 지혜.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 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 아, 싫어? " " 아,아니야! 그런 건! 으,으응! 좋아. 그러자! " " 좋아좋아. 약속한 거다! " 가인과 지혜는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인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더 뽑아 지혜에게 건내주었다. " 자, 이거 내가 살게. 임원 일 잘 부탁드려요,반장 님. " " 에헴,고마워요. "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가인에게서 받은 음료수를 조심스럽게 마시는 지혜.그 런 지혜의 모습을 뒤로 하며 가인은 창 밖의 운동장을 바라보았다.점심 시간 인데도 불구하고,아이들은 땡 볕 속에서도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가인 은 조용히 창 밖을 주시하다가 지혜에게 입을 열었다. " 반장. " " 응? " " …이번 체육 대회 때 말이야. " " 응. " " 좋은 추억 많이 만들자. " " ......으응. " 잠시 가인을 바라보던 지혜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예상대로 가인의 오라에 A.I 슈츠의 오리하르콘이 반응하는 것일 뿐이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몸에 이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 " 아,그래‥. " 언더 시티 유레카의 인조 공원.시더에게서 A.I 슈츠를 체크 받던 가인은,그 녀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다행이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 니어서. 그런 가인의 모습에 시더가 키득 거리며 말했다. " 뭐야∼ 무서웠던 거야? " " 아,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갑자기 2m를 뛰어오르게 되거나 100m를 9초 대로 돌파하게 되면 일반 사람들은 놀란다고.분명. " " 흐음∼ 하긴. 연태까지 A.I 슈츠를 착용한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 강하게 동화 작용이 일어난 사람은 가인이 처음이니까. 연구 대상인 걸∼ 가인, 내가 원인 규명을 확실하게 밝혀줄테니 실험에 협조해 줄래? " 마치 재밌는 실험 재료가 나타난 듯 바라보는 시더의 시선에 가인은 쓴 웃 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 …사,사양해 둘게. " " 헤헹. 농담이야. 농담. " 시더는 그런 가인의 태도에 코 웃음을 치며 키득 거렸다. 하지만 가인은 식 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아니…. 반 쯤은 진담이었을지도. 분명 뭔가 아쉬 워하고 있는 태도야.저건. " …그나저나 시더, 오늘은 평상시의 모습이네. " 가인은 시더의 옷차림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녀는 예전,가인과 데이트 했을 때의 모습이 아닌 평상시의 뱅뱅이 안경에 연구복을 입고 있었다. 가인의 말 에 시더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뭐‥ 이,이 차림이 가장 편하니까…. 하지만 예고도 없이 날 찾아온 가인 이 나쁘단 말이야∼! " " 헤에‥ 그럼 내가 연락하고 왔으면 예전 처럼 예쁘게 하고 있었을 거야? " " 몰라, 바보‥. 메롱! " 시더는 가인의 장난끼 어린 태도에 얼굴을 붉히며 혀를 삐쭉 내밀었다. 그런 시더의 화내는 모습이 귀여워 가인은 웃음을 터뜨렸다.시더는 가인이 웃는 것 이 마음에 안 드는듯 인상을 썼다. " 아아∼ 그나저나 내일이 운동회지? " 시더의 말에 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디밭에 몸을 눕혔다.지하 도시이기에, 지상 처럼 맑은 하늘은 보이지 않았지만 강렬한 태양 빛 만은 지상과 같았다. 뭐,물론 저것도 인공 태양이지만 말이지. 시더는 그런 가인을 잠시 바라보다 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 재밌어? 운동회란 거? " " ......시더는 운동회 같은 거 해본 적 없어? " 시더의 말에 의아해 하는 가인. 시더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 글쎄‥ 남들처럼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으니까.13살 때 우주 개발 본부의 팀원으로 바로 현장에 나갔었거든. " " ......으응. " 상상이 안가는데‥. 시더가 I.Q 200의 천재라는 것을 새삼 상기시켜보는 가 인이었다.그럼 계속 또래의 친구들도 없이 혼자서 연구만 해왔다는 건가? 우 리 나이에 당연히 하는 놀이 같은 것도 하지 못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 치자 가인은 왠지 시더의 모습에 반장 안지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시더 는 그런 가인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뭐야∼ 그 동정하는 것 같은 눈초리는! 이래뵈도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길 이라고. 후회한 적은 단 한번도 없내요. "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시더는 대단하다 싶어서.그 어린 나이에 자신 이 원하는 일을 선택해서 노력해오다니. 나라면 상상도 못할 거 같아. " " ......그래? " 그런 가인의 말에 시더는 어깨를 으쓱인 후, 머쓱한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바보. 뭐가 상상도 못할 거 같아 야? 내심 가인의 말에 섭섭한 마음이 드는 시더였다. ' 나도 사실은‥ 사실은…. ' 그때 시더에게 가인이 조용히 말했다. "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자주 같이 놀러다니자. " " 응? " 가인의 말에 시더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인은 언제나 처럼 얼굴에 미소를 띄 며 뒷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 아,뭐∼ 시더는 나하고 달리 바쁘니까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 " ......바보. 시간은 많아. " 시더는 투덜거리며 붉어진 얼굴을 숙였고, 가인은 그런 시더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인은 손목의 시계를 돌아보며 시더에게 말했다. " 아, 벌써 훈련 시간이내. 늦으면 또 그 팔굽혀 펴기야! 그럼 시더,다음에 보자∼ " " 아… 그래. " 가인은 순식간에 저편으로 달려가며 시더에게 손을 흔들었고, 시더는 가인이 사라질 때까지 어설프게 손을 흔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A.I 슈츠의 동화 작용이 강해진듯, 금새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가인이었다. 시더는 들었던 손 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 ‥운동회… 구경가고 싶었는데…. " 사실, 운동회에 참여하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가인이 뛰는 모습을 보고 싶 었던 시더였다. 아, 그냥 구경가도 돼? 하고 물으면 되는 건데 왜 그 말을 못 했던 거지? 에휴∼ 시더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려고 몸 을 일으켰다. 그때, 그런 시더의 뒤로 어느새인가 다가온 한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호오라∼ 운동회… 말입니까? " " 으앗?! " 갑자기 들리는 남자의 말소리에 시더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언제나 기척없이 이곳 저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남자, 정진우가 서 있 었다. 시더는 진우를 확인하고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 노,놀랐잖아∼?! Mr.그린! 최소한 헛기침이라도 하라구요! " " 아하하하핫∼ 죄송.죄송. " 진우는 히죽히죽 웃으며 시더에게 사과를 하다가 장난스럽게 그녀를 바라보 았다. " 그나저나‥ 방금 운동회를 구경가고 싶다고 하셨죠? " " 에,엣?! M,Mr.그린! 남의 말을 엿듣다니 안 좋아요! 안 좋아! 이 에티켓 제로의 남자 같으니라구! " " 에이∼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 진우는 시더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쳐도 신경 하나 쓰지 않고 자기 말을 계속했다. 시더는 이 남자의 얼굴을 소재로 합금을 만들면,그 강도는 초합금 Z에도 비견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진우는 눈을 빛내며 시더에게 말했다. " 갑시다! " " ......예? 뭐,뭘? " " 내일 한성 고등학교의 운동회 말이에요,시더 웰리스 양. 마침 저도 갈 일 이 있었는데 동행하자구요. " " 에,아니‥ 나는… " " ‥보고 싶은 거죠, 가인의 운동회 모습? " 낮게 속삭이며 음흉하게 웃는 진우.시더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 그,그런! 아니 나는 꼭 가고 싶다기 보다는, 단지 구경하고 싶어서, 그러 니까 가인의 운동회 모습을 본다기 보다는 그냥 단지… " 거기까지 말하다 시더는 고개를 푹 숙인채 두 손을 들었다. 언제나 스스로 무덤을 파헤치는 자신의 입이 문제였다. " …갈게요…. " " 좋습니다∼! 이것으로 한성 고등학교 운동회 파견팀 결성! " 뭐냐…그 파견팀 이란 건. 시더는 의심의 눈초리로 진우를 살펴보며 중얼거 렸다. 괜찮을까나‥ 이런 경박한 남자와 같이 가도‥.그렇게 잠시 고민을 하 던 시더는 곧 무언가가 생각이 난듯 진우에게 물었다. " 어,그런데 Mr.그린은 무슨 일로 한성 고등학교에? " 단지 운동회 구경이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시더의 의문에 충실히 부합이라도 하려는듯. 진우는 앞전부터 손에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를 스 윽 들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 …윗 사람의 명령 때문에 말이죠∼ "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진우였다. 어쨋든, 그렇게 시간은 흘러 드디어 대망의 운동회 첫 날.아침부터 가인과 유리는 집 밖으로 서둘러 나오고 있었다. 아,젠장! 늦잠을 자버리다니! 가 인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좋아. 20분 지하철을 놓치지 않으면 지각은 면할 수 있다! 그때, 그렇게 허둥지둥 거리는 가인들을 향해 시민이 소리쳤 다. " 가인 씨! 유리 양! 도시락 가져가야죠! " " 아,그렇지‥! " 이런, 하마터면 운동회 날 굶을 뻔 했잖아.가인은 시민에게서 도시락을 받 으며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아침부터 정신이 없는 거냐,유가인. 시민은 그런 가인과 유리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 모처럼 운동회고 해서, 김밥으로 만들어 봤어요. 입 맛에 맞을까 모르겠 내요. " " 그,그런‥! 맞고 말고요! 맛있게 먹겠습니다∼ " 가인은 황송해진 얼굴로 시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인은 수중 의 도시락을 꼬옥 끌어안았다. 이, 이 도시락 통에 시민 씨의 정성이 가득 담긴 김밥들이‥. 아,지금 여기서 잠시 하나만 먹고 가면 안될까? 잠시 말 도 안되는 생각을 해보는 가인이었다. 그렇게 가인이 헤롱되고 있자,가인의 옆에 있던 유리는 약간 뿔이 난 표정으로 가인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 늦었어,오빠. " " 아,으응. 그럼 다녀오겠습니다,시민 씨. " 황급히 유리에게 끌려 집을 나서는 가인.그런 둘을 시민은 손을 흔들며 전 송해주었다. 가인과 유리의 모습이 곧 사라지자, 시민은 웃는 얼굴로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그녀의 옆 집에서 거세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 탕! " 이런! 늦잠 잤다! " 이렇게 외치며 가인들이 사라진 골목을 향해 불이 나게 달려가는 한 남자는 바로 자신들의 이웃이자 피스 대원들의 리더인 피스 그린 정진우. 시민은 그 런 진우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 ......어머나. " - 펑! 펑! 한성 고등학교의 상공에는 축포가 쏘아지며 수 십개의 플랜 기구들이 떠 있 었다. 이렇게 요란스럽게 운동회를 하는 학교가 있을까나…. 가인과 유리는 한 숨을 쉬며 교문을 들어섰다. 학교의 운동장은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 득 차 있었다. 가인은 기분 좋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거,참… 이렇게 일찍부터 다들 기운도 좋내. " " ......하와이의 힘이야. " 유리의 중얼거림에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가인은 유리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가로 질러 갔다. 다들, 축구 니 농구니 달리기 연습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가인은 이렇게 의욕적인 운동회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게 물욕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 엇?! 가인아! " 그때, 그런 가인을 누군가가 불렀다. 재영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체육복을 갈아입은채 가인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가인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바 라보았다. " 왜 그렇게 허둥대는 거야? 아침부터. " " 농구 코트에 있는 3학년 8반 좀 구경해봐. 기가 막힌다,정말! " 재영은 뭣 때문에 그렇게 흥분을 한 건지 다짜고짜 가인을 농구 코트로 잡 아 끌었다. 뭐,뭐야?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거야? 가인은 재영에게 끌려 가며 생각했다. 3학년 8반? 3학년 8반이 뭐가 어쨋다고 이러는 거지? - 웅성웅성‥ 그리고 재영이 끌고 간 농구 코트는 수많은 학생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 - 투웅! 투웅! 현란하게 튕겨지는 농구공. 하지만 그 보다도 더욱 현란하게 그들은 움직이 고 있었다. " 우왓! " 농구 코트에 모여있던 학생들은 감탄을 터뜨렸다. 자로 잰듯이 정확하게 이 어지는 패스. 세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은 마치 짜고 하는 것 처럼 정 확한 호흡으로 코트를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 어지는 어시스트. 그 곳에는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 회장 제갈영이 있었다. - 출렁‥ 한치의 주춤 거림도 없이, 스피디하게 3점슛을 쏘는 제갈영. 그가 쏜 슛은 깨끗한 반원을 그리며 골대에 골인했다. 나무랄데 없는 3점 슛이었다.얼마나 완벽한 폼이었는지 보고 있는 학생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 Exellent,Young! " 그런 제갈영에게 타올을 주며 영어로 말을 건내는 흑인 하나. 구경꾼들 중 한 학생이 옆의 학생들에게 귓속말로 수근거렸다. " 저, 저 외국인‥ NBA의 검은 표범 '패닉스·하트레버'아냐? " " 마이클 조단의 뒤를 잇는 시카고 불스의 대스타?! " 보고 있는 모두는 기가 막혔다. 저 패닉스가 대한민국에, 그것도 한성 고등 학교에 와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제갈영에게 농구공을 들고 상세하게 어드바 이스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학생들은 다시 수근 거렸다. " 뭐,뭐야?! 설마 패닉스를 전속 코치로 불러들인 거냐?! " " 그런 말도 안되는…?! " 그런 학생들의 수근 거림을 들은 건지, 제갈영은 만면의 미소를 띄우며 주 위의 구경꾼들에게 손을 들며 소리쳤다. " 제군들! 자네들의 궁금증을 이 몸이 친히 풀어주겠다! 여기 이 분은 나의 농구 코치인 '패닉스 하트레버'. 제자인 내가 시합을 한다니 몸소 걱정이 되어 따라와주셨지. " " 여,역시 패닉스 였어! " 웅성거리는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들. 그런 학생들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제갈영은 자신의 옆에 서있는 세 명의 검은 옷을 입은 선수들 또한 관중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 이쪽은 우리 대원 그룹 소속의 기업 팀 예비생들인 '검은 삼연성'! 오늘 부로 우리 학교, 우리 반으로 우연찮게 전학을 와서 이렇게 한 팀이 되었 다. 아직 학교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을 테니 여러분의 많은 협조와 관심 을 부탁 드린다! " ' 절대로 우연일리가 없잖냐…. ' 제갈영의 말에 기가 막혀 중얼거리는 학생 일동. 제갈영은 더더욱 기고만장 해져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농구 코트의 반대편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치 어리더들. 하나 같이 절세의 미모에 검은 가죽옷을 입은 이 늘씬한 팔등신 미녀들은 제갈 가문 소속의 전속 치어리더 팀인 'Crown Prince'들이었다. 그 녀들은 총채처럼 생긴 치어리더들의 응원도구인 '폼폼(Pom Pom)'을 휘두르며 외쳤다. " Pain is my pleasure! My load, My prince! " 미녀들의 현란한 움직임에 넋을 잃는 학생들. 그런 학생들을 바라보며 제갈 영은 오만한 웃음을 터뜨렸다. " 아하하하하하∼ 모두 환호하라! 모두 소리쳐라! 마음껏 운동회를 즐기시 길 바란다,제군들! 아,물론 우승은 나의 것이지만 말이지.아하하하하∼ " 그렇게 끊임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보디가드들에게 둘러 싸여 퇴장하는 제갈영. 학생들 사이에 끼어 이 상황을 구경하던 가인은 재영 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 …저,저런 어처구니 없는 녀석이…. " " 뭐, 저 쪽도 나름대로 필사적이라는 거겠지. " 재영은 한 숨을 쉬며 팔짱을 끼었다. 어쨋든, 그렇게 한성 고등학교 운동회 의 서막은 정신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 본 교의 학생들에게 공부 뿐 아니라 정신도 몸도 마음도 단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제 64회 운동회를 개최한다! 최선을 다하도록! " " 와아아아아--- " 교장 선생의 개최사를 끝으로, 축포가 터져 올랐다.드디어 운동회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의 환호를 뒤로 하며, 경기 운영은 신속히 진행되었다.제1 운 동장과 제 2운동장에서는 전 학급의 축구 시합이 적절히 분배되어 개시 되었 고, 제 3 운동장과 제 4 운동장은 15개의 농구 코트가 설치되어 시합이 시작 되었다. 모든 것은 다 대원 그룹의 후계자 제갈영의 힘이었다. 이 부분 만큼 은 그를 칭찬해주어야 했다. " 1학년 3반과 3학년 2반의 시합을 개최하겠습니다. 선수들은 신속히 입장 해 주십시오. " 심판을 맡은 학생회의 임원이 소리치자, 10명의 선수들은 코트로 들어섰다. 그런 학생들을 바라보며 1학년 3반의 담임 하지연과 3학년 2반의 담임 '김학 도'는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 허허‥ 하 선생, 자네 반 아이들은 오늘 아침에 밥도 못 먹고 나왔는가? 왜 저렇게 하나 같이 비리비리해 보이는 거야? " " 후후‥ 주임 선생님 애들도 만만치 않은데 그러세요. " 서로 웃으며 말을 나누는 그들.하지만 한성 고등학교의 알만한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의 사이가 절대 최악의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하지연 선생에게 '노처녀,시집 안가?'라는 말을 한 장본인이 바로 이 학생 주임이자 3학년 2반의 담임 선생인 '김학도'였던 것이다. 물론, 그때 그 말을 한 김학 도 선생은 하지연의 분노가 서린 무릎 차기에 남성의 상징을 위협받아야 했 었다. " 그래. 올해는 국수 먹여 줄텐가? " " 무릎 차기라면 언제든지 먹여 줄 용의가 있습니다만. " 여전히 웃음을 띄고 있지만, 서로를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는 김학도와 하지 연. 분명, 이 1학년 3반과 3학년 2반의 농구 시합은 두 선생의 자존심이 걸 린 대결의 연장선일런지도 몰랐다. 심판을 보는 학생은 겁 먹은 목소리로 두 선생들에게 물었다. " 저기‥ 시합 시작 할까요? " " 속행! " 김학도와 하지연의 외침을 시작으로 시합은 진행되었다. 유가인, 파워 포워 드. 박재영, 포인트 가드. 평상시 농구를 즐겨 하던 재영은 드리블 부터 범 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그는 농구공을 재빨리 몰고 나가며 소리쳤다. " 자자자∼ 비켜라.비켜! 도내 넘버원 가드의 실력을 보여주마! " 하지만 그런 자신있는 외침과는 다르게, 재영은 3학년 2반의 선수진들에게 고전을 면치 했다. 분명, 재영의 실력 또한 녹녹치 않았지만 상대 팀의 선수 들은 그 이상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 앗! 인터 셉트다! " 궁지에 몰린 재영이 옆으로 패스하다가, 상대 팀에게 커트 당해버렸다.재영 은 당황한 눈으로 새삼 상대 팀 선수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그런 그들을 바 라보다가가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듯 재영은 소리쳤다. 이 녀석들은?! " 네,네 녀석들은 농구부의 베스트 파이브?! " " 뒤에 선배 님이라고 붙여야 될 거 아냐, 애송아! " 재영의 외침에 가볍게 반박하며, 3학년 2반의 선수들은 순식간에 1학년 3반 의 골대로 달려갔다.눈부신 속공이 돋보이는 3학년 2반의 건 앤 런이었다.시 합을 바라보던 하지연은 김학도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 반칙 아닙니까?! 농구 부 소속의 아이들을 끌어들이다니! " " 허허‥ 하 선생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단지 우승을 향한 집념이라고 얘기해주게. " " 젠장…. " 하지연은 이를 갈며 분을 삼켰다. 저런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분명 학생 주 임의 권위를 맘껏 이용했겠지.그렇게 하와이에 가고 싶은 거냐,늙은이?! 어 쨋든,지연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1학년 3반은 한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 철렁! " 와아아아! 선방이다! " 객석에서 환호하는 3학년 2반의 학생들. 그런 그들을 노려보며 1학년 3반의 학생들 사이로 테레이아와 유리가 걸어나왔다. 그녀들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 다가 한숨을 쉰 후 말했다. " …잠시만 휴전할까? " " 할 수 없지. " 유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수중의 폼폼을 들어올렸다. 그녀를 중심으로 1학 년 3반의 치어 리더들이 포메이션을 전개했다. 어느새 갈아입은 건지, 짧은 스커트가 돋보이는 치어 리더 복이 그녀들을 한층 빛나게 했다. " 플레이∼플레이∼ 파! 이! 팅! 3반 힘내라! 3반 이겨라! " " 우오오오오! " 순식간에 치솟는 1학년 3반의 사기.이에 질세라 3학년 2반도 응원을 시작했 지만, 한성 고등학교의 꽃, 테레이아와 이유리가 있는 1학년의 응원을 상대 로는 역부족이었다. 코트의 재영들은 각오를 새롭게 했다. 그래!우리에겐 우 리를 믿는 그녀들이 있다! 힘을 내라! 이 한 몸 불사를 그 날까지! " 3반의 진면목을 보여주마! " 힘있게 치고들어가는 재영들.3학년 2반의 선수들은 당황하며 서둘러 디펜스 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 앞전과는 움직임이 틀리다! - 팡! 턴을 하며 가볍게 한 명을 제치는 재영. 헤헹. 이래뵈도 어릴적부터 농구에 매달려 온 나다! 베스트 파이브니 농구부니 그게 다 뭐냐! 덤벼라! 바운드로 패스하며 재영은 상대의 디펜스를 재빠르게 넘었다. 다시 패스를 받는 재영. 하지만 상대편은 농구부의 베스트 파이브.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 으읏! 젠장! " 재영은 마크 당한 두 명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인상을 쓰며 몸을 웅 크렸다. 이 찰거머리 같은 자식들! 떨어져라! 떨어져! 그런 재영의 눈에 3학 년 2반의 골대 주변을 서성이는 가인이 들어왔다. 그는 재영에게 마크가 두 명이 붙어있느라 노 마크 상태였다. ' 좋아! 바로 그거다! ' 좋은 생각이 떠오른 재영.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골대 주변의 가인에 게 소리쳤다. " 가인! 못 받으면 죽인다! "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하늘 높이 공을 던지는 재영. 상대 팀의 선수들은 그 런 재영의 행동을 어처구니 없다는듯 바라보았다. 뭐야,이 자식.벌써 시합을 포기한 거냐? 김학도는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옆의 지연에게 말했다. " 거,참∼ 담임을 닮아선지 학생들도 끈기가 없구만. 뭡니까, 저 성의 없는 플레이는∼ " " ......... " 하지만 그런 학도의 도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의 행방을 쫓는 지연.그녀는 긴장된 안색으로 허공의 공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좋아. 가라! - 휙! 그리고 그런 지연의 기대에 부흥이라도 하듯이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선수 하나. 바로 유가인이었다! 3학년 2반의 모두는 입을 다물지 못하며 그런 가 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맙소사! 저거 몇 m를 뛰어오른거야?! 놀라운 점 프력으로 공중의 볼을 잡아내는 가인이었던 것이다.재영이 주먹을 쥐며 소리 쳤다. " 가라---!! " - 터엉! 수중으로 들어온 공을 사정 없이 골대에 내리 꽂는 가인. 그 광경에 3학년 2반의 선수들 중 하나가 비명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 …앨리후프 덩크?! " - 부르르르‥ 마치 덩크의 여운을 남기듯이 흔들리는 골대.가인은 가볍게 땅으로 몸을 내 려서며 재영에게 브이 마크를 지어 보였다. 그에 답하며 재영이 주먹을 들어 소리쳤다. " 나이스, 유가인! " " 우와아아아아----!!! " 경기장이 떠나갈듯 내질러지는 함성들.3학년 2반의 학생들은 아직도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듯 눈을 비비고 있었다. " 그,금방 뭐였지‥그거?! " " 저 키에 덩크를 해낸 거야?! 진짜로! 그것도 앨리후프를?! " 그리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김학도.그런 김학도를 향해 하지연 이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날렸다. " 절 닮은 기특한 학생들이죠,주임 선생님? 어머,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요. " " ......... "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김학도. 경기는 뜨거워지고 있었다. " 분명 저 움직임은 단순한 A.I 슈츠의 동화작용으로 치부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군요.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스크린에 떠오른 가인의 모습을 보며 닥터는 흥 미롭다는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묵묵히 스크린만 주시하고 있는 진 사령관. 닥터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정신 감응 금속인 오리하르콘은 오라의 순수성이 강할수록 강한 동화 작 용을 일으키는 법…. 아마도 가인 군의 오라는‥ " " 가장 순수한 힘을 가진 대 원소 계의 오라‥ 라고 말하려는 건가? " 닥터의 말을 듣다가, 조용히 답하는 진 사령관.그의 말에 닥터는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 아시다시피, 4원소의 힘을 가진 오라는 절대적인 힘을 자랑합니다. 흙과 물, 그리고 바람과 불. 여지껏 가인 군이 보여준 능력으로 추측해 본다면 그의 힘은 아마도 시베리아의 피스 대원‥ 피스 화이트(White) 의 오라와 같은 성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 ......바람‥이란 말이지. " 진 사령관은 스크린을 주시한채 낮게 중얼거렸다. 스크린에서는 한성 고등 학교의 체육복을 입은 가인이 정신 없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분명, 저 움직 임은 A.I 슈츠의 동화 작용. 그래.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거로군…. 그런 복잡 한 마음으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닥터와 진 사령관. 하지만 모니터에서 들려오는 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에 본부실의 심각한 분위기는 깨지고 말았 다. << Mr.그린! 저기 봐요! 저기! 가인이 한 골 더 넣었다구요! >> << 오오∼ 걱정말아요,시더 양. 하나도 빠짐 없이 찍고 있으니까∼ 나중에 LD로 떠주면 되는 거죠? >> << ......부탁해요. >>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다름아닌 시더와 정진우.본부실에 떠오른 영상들은 현장에 파견된 그들의 솜씨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진 사령관의 명으로 한 성 고등학교 1-3반의 유가인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진 사령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오퍼레이터 실을 바 라보았다. 이쪽도 가관이로군. " 꺄앗∼ 고등학생이야! 고등학생! 저 반바지 체육복 좀 봐∼! " " 왠 일이니, 왠 일이니∼ 다리에 솜털 하나 없어,쟤들∼! " " 가인 군, 제법이다,얘. 아까부터 계속 연속 득점이야∼ " " 과연 피스 메이커. " " ......그건 상관 없지 않나? " 스크린에 나오는 학생들을 주시하며 열광하는 오퍼레이터 아가씨들.이미 오 퍼레이터로서의 임무와는 담을 쌓은 모습들이었다.그런 그녀들에게 발끈하며 오퍼레이터들의 치프 윤채영이 외쳤다. " 다들 조용히 못해∼?! 지금 근무 시간이라는 거 다들 잊었나?! " " 에이∼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치프? 자기도 좋으면서∼ " " 뭐,뭐가?!! " " 알았어요. 알았어. 응원하면 되는 거죠? 가인 군? " 오퍼레이터들은 그녀들의 치프를 바라보며 히죽 히죽 웃었다.치프 윤채영이 피스 블루, 유가인의 열렬한 팬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전산 실의 남자들이 피스 핑크 이유리의 추종자라는 것을 감안해볼때 그다지 특별 한 현상은 아니었지만. " 우리 치프도 참. 맨날 가인 군. 가인 군 노래를 불러요.다 좋은데요,치프. 고등학생 좋아하면 잡혀들어간다구요∼ 꺄하하∼ " 결국, 그런 오퍼레이터들의 조롱에 이를 가는 윤채영. 그녀의 노도가 실린 한 맺힘이 울려퍼졌다. " 시끄러워, 이 자식들----!!! " 이렇게 난장판이 되어가는 작전 본부실을 바라보며 식은 땀을 흘리는 닥터. 이쯤되면 이차원 생물과의 존망을 건 싸움을 하는 피스 메이커들이라고 봐주 기에는 무리가 있는데….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닥터는 진 사령관에게 말했 다. " 사령관, 이러다 몬스터라도 출현하면 어쩌겠습니까? 주의를 주는 것이… " 하지만 채 말을 끝 맺지 못한 닥터.진 사령관은 자신의 앞으로 원두 커피와 비스켓을 놓아주는 수정에게 말을 건내고 있었다. " …수고했다. " " 천만의 말씀요,후후….아무래도 경기 관전에는 먹을 거리가 있어야 겠죠? " 진 사령관의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 수정. 닥터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한편, 여기는 다시 한성 고등학교. 유가인의 1학년 3반은 연전 연승을 거듭 하며 준결승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코트의 상공을 정복한 1학년 3반의 고공 농구 앞에, 모든 학급은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점심 시간을 앞둔 마지막 경 기. 지연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경기에 출전할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 자, 하와이가 눈 앞에 있다! 순식간에 해치우자고들! " " 오오오! " 파이팅을 외치며 코트로 나가는 가인들. 가인은 재영에게 물었다. " 이번에 우리 상대는 누구냐? " " 에,또‥ 2학년 1반‥ 이라고 하던 거 같던데? " 2학년 1반? 가인은 생각에 잠겼다. 2학년 1반이라면 마리 선배의 반일텐데. 가인은 2학년 1반의 응원석을 둘러보며 생각했다.최근 운동회 준비를 하느라 고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마리였다. 그래. 인사라도 할까나? 그때,그렇게 관 중석을 두리번 거리는 가인의 어깨를 재영이 다급히 두들겼다. 그 두들김이 꽤 아팠던지라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재영을 돌아보았다. " 아야야‥ 왜 그러는 거야? " " 가,가인아. 저기를 좀 봐라‥. " 재영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2학년 1반의 선수들이 있는 곳. 가인은 의아 한 눈으로 재영의 손가락을 쫓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거야? 또? " 으헉-?! " 하지만 2학년 1반의 선수진을 바라본 순간, 가인도 신음을 들이켜야만 했다. 2학년 1반의 선수들 중에는 여자가 하나 끼어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꽤 낯익 은 얼굴의 여인이. 가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저 사람은… " 마리 선배?! " 그런 가인의 외침에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올리는 마리.가인은 다급히 그녀에게 물었다. " 어,어째서 마리 선배가 경기에…. " " …그,그게… 어쩌다보니. " 마리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도 당황하고 있었다.가,가 인을 상대로 시합을 해야하는 것인가…. 그래. 물론 시합이니깐 당연한 거겠 지만 그래도 이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복잡해지는 그녀였다. 더구나 1학 년 3반의 응원석에서 마리를 알아본 테레이아와 유리가 소리쳤다. " 배신자 성마리! " - 쿠쿵! 왜 그녀가 배신자가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마리에게 던진 파문은 꽤 컸다. 마리는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냐…. 난 배신자 가 아니야…. 난 배신자가 아니라고…. 어쨋든, 이렇게 복잡한 인간 관계를 뒤로 하며 경기는 시작되었다. 점프볼. 2학년 1반의 볼이었다. 디펜스를 하 며 재영은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 준결승까지 올라오다니… 분명 얕볼 수 없는 상대일지도…. ' 상대에 대한 사전 조사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재영이 었다. 2학년 1반은 1학년 3반의 조사를 어느 정도 끝낸 듯. 빠른 패스와 맨 투맨으로 자신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길, 우리가 공중에 강하다는 것을 알 고 고공 플레이를 하지 못하게 할 속셈인가? - 탕!탕! 그때, 한 순간 1학년 3반의 디펜스의 헛점을 치고 들어오는 2학년 1반. 더 구나 공을 가지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마리였다. 재영과 가인은 이를 악물 며 몸을 움직였다. 아무리 마리 선배지만… 양보할 순 없어! " 엇?! " 하지만 가인과 재영은 신음을 집어 삼켰다.마리는 재영의 가랑이 사이로 볼 을 통과 시키는 일명 '알까기'로 그를 따돌린 후, 가인을 턴으로 제치며 골 대로 향한 것이다. 다,당했다! 허무하기까지 한 간단한 제침이었다. 마리 선 배, 이런 굉장한 실력을?! - 철렁‥ 1학년 3반의 골문을 지키던 센터의 앞으로 치솟으며 가볍게 레이업을 성공 시키는 마리. 그녀 혼자서 3명을 제끼고 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골이 터지자 2학년 1반의 응원석에서 난리가 났다. " 꺄악∼ 성마리, 파이팅! " " 꺅! 꺅! 너무 멋져∼! " 어,어째서 여자들만 저렇게 열광적으로 응원을….압도적인 여성들의 지지를 받는 성마리였다. 마리가 남자였다면 분명 부러워 마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나‥어째서 여자에게 더 인기가 있는 거지? 왠지 마음이 복잡해지는 그녀였 다.마리는 쑥스러운듯 응원석에 힐끗 손을 들어보인 후, 서둘러 자신들의 골 대로 돌아갔다. " …마리 선배가 시합해 나온 이유‥ 확실히 알 것도 같군. " " 으음. " 가인과 재영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 선배, 언제 농구 를 저렇게 잘했지? 분명 발군의 운동실력과 반사 실력을 가진 그녀였지만 저 움직임은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것이었다.분명 제대로 농구를 배 운 선수의 움직임이었다. " 하지만 질 수야 없지! " 재영은 공을 몰며 2학년 1반의 진영으로 달려 들었다.우리에게도 마리 선배 에게 지지 않는 고공 슛터 유가인이 있단 말이다! 일단, 골대 근처로만 간다 면… - 팟! 재영은 반응할 수 없었다.막 마리를 제낄려고 그녀의 앞에서 드리블을 하는 순간, 공은 어느새 그녀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마,말도 안돼! " 가인, 잡아! " 재영의 외침을 뒤로 하고, 가인은 마리의 뒤를 쫓아 골대로 달려갔다.텅 텅 비어있는 1학년 3반의 골대. 갑작스런 상대의 속공으로 디펜스를 할 수 없었 던 것이다. 가인은 무서운 속도로 마리를 따라 잡았다. 역시,100m를 9초대로 통과하는 발군의 스피드! " 아앗?! " 하지만 마리는 제자리에 멈춘채 바로 3점 슛에 들어가 버렸다.그 바람에 그 녀를 지나쳐 버린 가인. 뒤늦게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는 가인에게 보인 것은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날아가는 농구공이었다. - 철렁‥ " 꺄아아아아앗!! 성마리! 성마리!! " " 캬아! 멋져----!! " 환호하는 2학년 1반. 가인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이,이렇 게 대단한 실력이라니‥ 마리 선배‥. 대단하다‥.정말 대단해! 그런 가인의 눈을 피하며 다시 자신의 골대로 향하는 그녀. 가인의 눈초리를 힐책의 눈초 리로 착각한 그녀였다. 그,그래. 이렇게 억척스럽게 운동하는 여자는 역시 싫겠지? 2학년 1반 여자들의 응원 소리도 한 몫해서 더더욱 심란한 마음이 드는 마리였다. 어쨋거나 경기는 2학년 1반의 페이스로 진행. 전반 33-20으 로 2학년 1반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경기는 후반전으로 돌입했다. " 으으으으음∼ " 하지연은 입의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고심의 표정으로 시합을 주시했다.앞 전의 여유있던 표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상대가 너무도 강했다. 아무리 덩 크가 가능한 하이 점퍼의 가인이 있다지만, 그것은 가인 혼자 뿐. 가인을 집 중 마크한채, 화려한 개인기로 승부를 거는 2학년 1반을 상대하기에는 무리 가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안돼‥ 이대로는∼!! - 타탕! 다시 무서운 기세로 공격해 들어오는 2학년 1반.재영은 수비에 급급하며 마 리를 내내 주시하고 있었다.앞전 33점의 득점 중 마리가 차지한 득점은 20점. 점수의 절반 이상이 그녀의 공이었다. 나머지 점수들도 마리의 결정적인 어 시스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점수. 결국,공격의 핵심은 그녀라는 것이다. " 훗‥ " 스프링 같이 탄력있게 몸을 움직이는 마리를 막아서는 재영. 마리는 인상을 굳혔다. 이 남자‥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쉽사리 뚫고 들어가지를 못 하겠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공. 재영은 회심의 미 소를 지었다. " 이 때를 기다렸다! " 재영의 외침과 동시에 마리를 압박하기 시작하는 4명의 디펜스들.가인을 제 외한 1학년 3반의 모든 선수들이 마리를 마크한 것이었다. 이,이런 대담한 작전을! 마리는 당황하며 공을 뺏기지 않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만약,이 상 태에서 뚫린다면 속수무책으로 점수를 빼앗길 수도 있지만 그런 도박을 감행 하면서 까지 자신을 막겠다는 의지가 그들에게서 엿보였다. ' 좋은 각오다‥ 하지만! ' 순간, 4명의 틈 사이를 대담하게 가로지르는 마리. 4대 1의 상황이라 잠시 방심한 재영들의 틈을 노리는 날카로운 마리의 대쉬였다. 도,돌파했어 이 여 자?! " 말도 안돼! " 재영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 속에서 마리는 골대로 몸을 날렸다.딜레이가 없 는 레이업이었다. 이대로 1학년 3반은 또다시 한골을 먹을 것인가?! " 으랏챠챠챠! " 그런 마리의 앞으로 떠오르는 한 인영. 발군의 하이 점퍼,유가인이었다! 마 리의 공을 막아내는 가인. 좋아! 이것으로 형세 역전이다! 파리채 블러킹!! - 휙‥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도 이른 판단. 공이 가인의 손에 막히자 순식간에 옆 으로 어시스트를 하는 마리였다. 이,이런 허무한 일이…?! 그리고 그가 그 런 생각을 하는 사이,가인과 마리는 공중에서 몸이 얽혀 땅에 떨어져 내렸다. 재영은 그 광경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안돼! 저대로는 둘 다 다친다! - 쿠당탕! 코트에서 넘어지는 가인과 마리.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 켰다. 아야야‥ 넘어질 때 팔꿈치를 코트에 긁은 가인이었다.그래도 그 외에 는 별다른 상처가 보이질 않는 거 같은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가인. 그 때 같이 쓰러진 마리에게로 생각이 미쳤다.아, 그럼 마리 선배는?! " 선배?! " " 으음… " 마리는 그런 가인의 외침에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하 지만 다시 주저 앉는 그녀. 이제보니, 그녀의 오른쪽 무릎이 심하게 까져 있 었던 것이다. 어,어째서 이런 상처가?! 가인은 당황하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 다.분명 낙법을 하는 것 같았었는데… ' 아…. ' 가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낙법을 쓰지 않고 그대로 가인을 감싸 안은채 쓰러진 것이다. 덕분에 가인, 자신은 팔꿈 치가 까진 정도의 상처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런 둘에게로 심판과 선수 몇몇 이 다가왔다. " 괜찮아? 많이 다친 거야? " 그런 그들의 물음에 가인은 순간, 번쩍 마리를 안아올렸다. 이런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시합장의 모두.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가인에게 더듬거리 는 목소리로 말했다. " 가,가인? 나,난 괜찮‥ " " 양호실에 데려다 주고 오겠습니다!! 저와 마리 선배 대신 다른 선수들로 시합 해주세요! " 그 말만 하고 재빨리 마리를 안은채 학교 양호실로 달려가는 가인. 뭐,뭐야 ‥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렸어? 모두는 망연자실해진 표정으로,순식간에 모 습을 감춰버린 가인의 자취를 뒤쫓았다. 심판을 맡은 학생 위원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곁에 있던 1학년 3반의 하지연 교사에게 물었다. " 저기‥ 선생님? 어떻게 할까요? " " 후,후후후후‥ 속행. " 수상쩍은 웃음을 띄며 시합을 재개시키는 지연. 과연 그녀가 웃는 의도는? " 어때요? 이제 괜찮아요? " " 으음. " 붕대가 감긴 자신의 오른 무릎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양호실을 두리번 거렸다. " 거,참‥. 아무리 이번 운동회가 볼 거리가 많다지만, 양호 선생님도 자리 를 비우다니. 체육 대회에는 다치는 사람도 많을텐데. " " ‥그렇군. " 여전히 고개만 끄덕이는 그녀.마리의 시선은 줄곧 자신의 오른 무릎에 고정 되어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미안한 감정이 들어 어쩔 줄 몰랐다. 가인은 고개를 숙이며 마리에게 사과했다. " 미,미안해요. 마리 선배! 매번 나 때문에‥ 이번에도 선배를 다치게만 하 고‥그,그리고… " 나,나 때문에 운동회도 참석 못하게 되다니…! 어째서 나 같은 녀석을 감싸 다가…! 그렇게 고개를 숙인 가인의 머리를 살짝 토닥이는 손길 하나. 가인 이 의아해져 고개를 드니, 당황하며 손길을 거두는 마리가 있었다.그녀는 쑥 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 괜찮아. 그것보다… 가인은 얼른 시합장에 돌아가야지. " " 그,그럴 수는 없어요. 선배를 이렇게 하고 제가 무슨 염치로… " " …내 몫까지 열심히 뛰어줘. " 짧게 한 마디를 하며 가인을 바라보는 마리. 그런 그녀의 시선에 가인은 얼 굴을 붉혔다. 마,마리 선배…. 가인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져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 미,미안해요. 나… 마리 선배 몫까지 열심히 뛸게요. " " 그래야지. 그럼 어서 가봐. 난 좀 쉬다가 갈테니…. " " 괜찮겠어요? " " 음. " 가인은 마리가 걱정된 듯 몇 번이나 뒤돌아 보며 주춤거렸고,마리는 웃으며 그에게 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제서야 시합장으로 달려가는 가인. 그렇게 가 인을 보내고 나서야 마리는 다시 자신의 오른 무릎을 바라보았다. 빨간 소독 약이 하얀 붕대 사이로 스며 있었다. 마리는 그런 붕대가 묶인 자리를 쓰다 듬으며 미소 띈 얼굴로 중얼거렸다. " 나… 배신자가 아냐…. " 안도의 한숨까지 섞인 그녀의 목소리. 앞전,테레이아와 유리의 외침을 여지 껏 신경쓰고 있던 그녀였다.(…) " 엇? 어떻게 된 거야? " 시합장으로 돌아온 가인은 놀란 눈으로 스코어를 바라보았다.전반 33대 20 의 큰 스코어는 어느새 역전되어 36-38로 역전 되어 있었다. 아니,양호실에 갔다온 사이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역전한 거야? 그렇게 어리 둥 절해 하는 가인을 발견한 재영이 소리쳤다. " 여∼ 에이스 킬러! " " .........에…. " 그런 재영의 외침에, 가인을 돌아보는 시합장의 모두.특히나 2학년 1반 여 자들의 눈초리는 살인적인 것이었다. 뭐,뭐야… 그 에이스 킬러 란 건? 가 인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상황을 파악 못한채 멍하니 서있었다. " 후…. "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한 모금 빠는 지연.그녀의 예상은 들어맞 았다. 성마리 라고 하는 그 에이스를 뺀 2학년 1반은 순식간에 1학년 3반의 맹렬한 공격에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1학년 3반의 실력에 미치지 못하는 기량이었다. 정신적 지주가 사라진 팀 만큼 허 물기 쉬운 것은 없다고,후후… " 1학년 3반 승! " " 으랏챠---!! 결승이다! " 환호하는 1학년 3반. 그렇게 에이스 킬러(…) 유가인의 덕으로 1학년 3반은 대망의 결승 진출이 확정되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경기가 끝난 후, 가인 은 잠시 2학년 1반의 여자들에게 이끌려 학교의 뒷뜰로 끌려갔다고 한다. " 아하하! 다들 수고했다,정말! " 하지연의 입에서는 웃음이 멈출 줄을 몰랐다.30개의 학급을 뚫고 자신의 반 이 우승에 오른 것이다. 이대로 가면 내일, 모레에 있을 체육 대회에서 모든 종목을 석권하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이렇게 지연이 우승을 갈망하게 된 데 에는 물론 우승 상품이 하와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그녀의 체육 교사 로서의 뜨거운 승부 근성 또한 그 열망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더 군다나 농구 경기를 하고 있는 동안, 축구 종목에 출전한 선수들 또한 분발 해주었기에 예선을 뚫고 내일 있을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 오후에 있을 농구 결승전에서 우승하고 내일 모레에 있을 시합도 모두 우 승한다! 우리의 손으로 하와이를 쟁취하는 것이다!! " " 오오오오----!!! " 지연의 외침에 호응하는 학생들. 그렇다. 우승은 우리의 것이다! 1학년 3반 의 모두는 전의를 불태웠다. 한편, 제 2 운동장과 제 3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학교의 언덕. 6월의 순풍 이 언덕의 푸른 잔디들을 살며시 쓸어 내려갔다. 전망도 좋고,분위기도 좋은 이곳은 한성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주 애용하는 도시락 터였다. 가인과 테레 이아,유리, 재영, 지혜, 마리는 돗 자리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풀고 있었다. " 아아‥ 그러니까 혼났다니깐요. 선배 반의 여 선배들 땜에‥. " 가인은 푸념을 하며, 2학년 1반의 여학생들에게 끌려갔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었다. 마리를 부상입힌 혐의와 에이스 킬러 라는 오명을 뒤집어쓴채 장장 30분을 그녀들에게 붙잡혀 있어야만 했던 가인.그는 처음으로 여자들의 전우 애 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틀리지 않나? 그것과는‥) " 만약, 뒤늦게 마리 선배가 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이지 큰일날 뻔 했어요. " " 아‥ 미안. " 양호실을 나와 뒷뜰을 잠시 거닐던 마리가 가인과 여자들을 발견하지 않았 더라면,아마도 가인은 뒷뜰의 거목에 송충이 처럼 둘둘 묶여 거꾸러 매달려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마리가 눈을 내리깔며 의기소침하게 말하자, 가인이 손 을 저었다. " 아,아뇨‥. 선배가 왜 사과를 하는 거에요? 절 도와줘 놓고서는. 아아… 어쨋든,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어,정말. " " …역시,미안. " 다시 사과를 하는 마리였다. 어쨋든, 그런 그들에게 재영이 소리쳤다. " 자자∼ 그럼 모두들, 각자의 도시락을 열어보자고! " 재영은 기대에 찬 눈으로 모두의 도시락을 구경했다.가인이 녀석은 분명 그 미모의 시민 씨가 사준 것일 테니 기대해도 좋을테고, 저번 테레이아의 도시 락도 엄청 맛있어 보였었지,아마∼ 그리고 소문의 마리 선배도 기대할 만 하 고… 반장 것은… " 꽥-----?! " 재영은 반장 안지혜의 도시락에서 눈길을 멈춘채 신음을 흘렸다. 지혜는 엄 청난 크기의 5단 도시락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개봉된 그 안의 음식들도 놀 라웠다. 국물과 건더기를 비슷한 양으로 하는 찌개(조치), 지지미, 국물을 조금 붓고 볶은 전골, 볶음, 불에 직접 구운 구이, 기름을 두르고 지진 전과 찜통에다 중탕으로 익히는 찜, 선, 바짝 조리는 조림, 알종류로 만드는 수 란·숙란(熟卵), 쇠고기, 생선 등을 날것으로 무친 회(膾), 나물 종류인 생 채, 숙채, 쇠고기, 돼지고기 등을 삶아 눌러서 물기를 빼고 얇게 저민 편육… 그 외에도 놀라운 것 투성이 뿐이었던 것이다. 재영과 모두는 벌린 입을 다 물지 못하고 지혜에게 물었다. " 이,이건…? " " 아, 이건 부식류(副食類)야. 주식류(主食類)와 후식류(後食類)는 따로 준 비해 왔어. " 그렇게 태연하게 말하며, 아마도 후식류로 보이는 다과와 떡 종류를 꺼내는 지혜. 가인은 신기한듯 그런 것을 구경하며 말했다. " 대,대단하다… 아니, 어떻게 이 많은 것을 다 들고 올 생각을 한 거야? " " 아,그게…모두 같이 점심을 먹는다고 하니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버 려서. " 얼굴을 붉히며 검은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올리는 지혜.재영은 이 굉 장한 요리를 눈 앞에 두고 흥분한듯, 떨리는 젓가락 질로 음식을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순간… " 허어어어엇!! 마치 산해 진미가 입 안에서 한 데 어우러져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듯한 이 맛은?!! " " ......뭐냐,그건. " 재영의 발광 아닌 발광에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는 모두.가인들은 각 자 지혜의 요리를 맛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마리는 날카롭게 굳은 안색으로 신중히 음식들을 살펴보며 맛을 본 후,조심스럽게 지혜에게 물었다. " 혹시… 이 맛은 한국 전통 요리의 대가 '왕준련' 회장 님의…? " " 아? 우리 외할머님을 아세요,선배 님? " 지혜는 눈을 깜빡이며 마리의 말에 되물었다. 순간, 마리는 벌떡 몸을 일으 켜 자세를 바로하며 지혜에게 정좌해 인사를 올렸다. " 고 왕준련 회장 님의 손녀를 뵈옵니다. " " 아,아니… 선배님?! 왜 이러시는…! " " 평상시부터 한국의 맛을 지키는 회장 님을 흠모해왔습니다. 그 분의 손녀 를 여기서 뵙다니…. " 모두는 멍한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았다.뭐,뭐야 마리 선배의 저 반응은? 그 보다 한국 전통 요리의 대가가 지혜의 할머님이라니? 가인은 감탄하며 지혜 에게 말했다. " 대단하구나, 지혜의 외할머님∼ " " 아니 그런‥. 그냥 나에게 요리를 가르쳐주시던 할머님 이셨을 뿐인데‥.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셔. " " 흐음. " 어쨋든, 모두는 감탄하며 지혜의 음식을 칭찬했다.재영은 그런 지혜의 음식 을 먹으며 다른 이들의 도시락도 구경했다. " 오오, 역시 민체스터 양의 도시락은 훌륭하군요. " " 별 말씀을‥. " 테레이아의 도시락은 저번 가인에게 싸줬을 때에 약간의 업그레이드를 겸한 것이었다. 고기를 잘 다져 튀긴 함박 스테이크와 맛있는 냄새를 흘리는 소스. 그리고 파인애플과 바나나가 곁들여진 샐러드가 눈에 척 하니 들어오는 도시 락이었다. 하지만 재영들의 칭찬에도 왠지 의기소침하게 답할 뿐인 그녀. 테 레이아는 살짝 지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 밀렸어…. ' 유리와 가인의 도시락은 시민이 싸준 김밥!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재영은 날카롭게도 그 평범함 속에 숨어있는 비범함을 놓치지 않았다. " 허엇. 무려 이 김밥 속에 12가지나 재료가 들어가 있어! 더구나 재료들을 한번 씩 볶아 그 맛을 더더욱 잘 살렸다! 그리고 참기름과 들깨를 섞어 전혀 느끼하지 않게 밥 맛을 살려낸 솜씨라니!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모 든 것이 하나의 조화 속에서 그 맛을 색색이 빛내고 있다는 것이다!! " " …하아? " 어쨋든, 굉장히 맛있다고 말하는 것은 알겠다.가인은 연신 감탄하며 김밥을 먹었다. 시, 시민 씨의 맛이 느껴진다…! - 가인 씨를 위해 만들었어요…. 시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지는 것 같아 더더욱 황송해지는 가인이었다. (이런 말 안했다,바보야) 그런 가인을 힐끔 올려다보며 유리는 시민의 김밥 을 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시민의 방긋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 스승으로 삼아야 할지도… ' 각오를 새롭게 하는 유리였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마리의 도시락! 모두는 유심히 마리가 도시락 뚜껑을 여는 것을 주시했다. " ......에…. " 그리고 할 말을 잊은 가인들. 공개된 마리의 도시락은, 맨 밥에 달랑 하나 올려진 메실 짱아찌가 전부였던 것이다! 가인은 멍한 얼굴로 마리에게 물었다. " 이,이건…? " " 청빈은 무사의 기본. 이것으로 충분하다. " " ......... " " ......... " " ......개그? " 결국, 잠시간의 패닉을 수습하고 도시락을 먹기 시작하는 가인들.역시나 도 시락들 중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것은 지혜의 도시락이었다. 재영은 연신 감탄하며 입 속에 반찬을 집어 넣었다. " 바,반장! 왜… 왜 이제서야 나타난 거냐∼!!! 앞으로도 같이 먹자!! 부디!! " " 아,으응…. " 재영이 보내는 동경의 눈초리(?)에 식은 땀을 흘리며 웃음을 짓는 지혜. 그 런 그녀에게 테레이아가 말했다. " 이게 한국인의 맛? 너무 매워. " " 으응. 테레이아 같은 외국인 한테는 너무 매울 수도 있겠다. 한국 요리는 고춧가루를 많이 쓰거든. " " 으음. 난 한국 음식은 김치 만 매운 줄 알았는데. " " 후후훗, 그럴리가 있겠니. " 웃으며 답하는 지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테레이아가 마주 웃었다. " 나중에 시간이 되면 차근차근 가르쳐 주지 않을래? 이 한국 음식들…. " " 어? 으,으응. 그러지,뭐…. " 당황하며 대답하는 지혜. 나중에 시간이 되면…이라고? 지혜는 씁쓸하게 웃 었다. 좀 더 일찍만 만났어도…. 나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럴 수 있을 텐데. 모두가 웃으며 즐기는 분위기 속에서 잠시 생각에 빠지는 지 혜였다. 이런 점심 시간… 언제나 꿈꿔왔던 건데…. 이렇게 재밌고 즐거운데 … 왜 나는 계속 공유할 수 없는 거지. - 툭…. 그런 지혜의 어깨를 누군가가 살며시 두드렸다. 지혜가 돌아보니,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가인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힘내라는 제스처를 살짝 보내 주고 있었다. 가인이 며칠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좋은 추억 많이 만들자…. 그래. 그랬지. 지혜는 고개를 끄덕인 후, 가인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환하게 웃었다.그래!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거야! 아직 체육 대회는 끝나지 않았잖 아,안지혜! ' 추억을 만드는 거야…. ' 지혜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때 그렇게 식사를 하는 가인들에게로 익숙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이∼ 소년∼!! " 이, 이 목소리는?!! 가인과 재영,테레이아와 유리,마리는 이 목소리의 주인 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있는 언덕으로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었 다. 야구 모자에 면T와 가벼운 청바지 차림의 남자. 바로 피스 그린 정진우 였던 것이다. 가인이 놀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진우 씨?! 어떻게 여기에…! " " 그야, 소년의 멋진 모습을 추억으로 남겨둘까 해서. " 히죽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디지털 카메라를 들어올리는 진우.가인은 떨 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서,설마… 거기에 다 찍은 것은…. " " 왜 아니겠어? " " …그거 스토킹 아니에요? " 가인은 기가 막혀 되물었다. 아니,이 사람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피스 메 이커의 리더로서 할 일도 많을텐데 왜 맨날 이런 쓸데 없는 일만 찾아서 하 고 있는 거야? 도대체 왜?! 그런 가인의 말에 진우는 섭섭하다는듯 투덜거렸 다. " 아,진짜 너무 말을 막 하는구만. 난 단지 가족 같은 소년의 모습을 기록 으로 남겨 두고 싶어서 순수한 의도에서 한 건데 말이야. " " 아… 그,그런‥. 미안해요,진우 씨. " 얼굴을 붉히며 진우에게 사과를 하는 가인. 저런 깊은 뜻이 있었을 줄은 몰 랐는데. 가족‥ 이라고? 왠지 진우의 그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소년이었다.하 지만 그런 진우의 뒤로 한 여인이 나타나며 말했다. " 쿠쿠, 순전히 거짓말. Mr.그린은 단지 진 사령관의 명령으로 가인을 도촬 했을 뿐이라고∼ " 그렇게 말한 소녀는 다름 아닌 시더 웰리스. 그녀는 예전, 가인과 데이트를 했을 때와 같이 하늘색 원피스에 콘택트 렌즈를 끼고 머리를 풀고 있었다.그 런 그녀를 보며 가인이 말했다. " 시더도 와 있었어?!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그 도촬이라는 건 뭐야?! " " 도촬. 도둑 촬영. 몰래 촬영하다‥ 뭐, 그런 거겠지. " 히죽 히죽 웃으며 진우를 바라보는 시더. 가인도 눈꼬리를 부르르 떨며 진 우를 노려보았다. 진우는 어느새 돗 자리에 앉아 일행들에게 인사를 하며 점 심을 얻어 먹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저 인간이 가족이니 순수한 의도니 하는 소리를 할 때부터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어,젠장. " 가인!! 이,이 아가씨는 누구냐?! " 그런 가인에게 황급히 시더를 가리키며 묻는 재영. 가인은 뭔가 또 복잡하 게 일이 꼬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에,그러니까 그게 이쪽은 시더 웰리스 양. 음, 그러니까‥ " 아,뭐라고 소개를 해줘야 한다지? 피스 메이커 기술부 치프야∼ 라고 소개 해버릴까? 아,유가인. 너 문어 대가리냐? 그런 소리 할 수 있을 턱이 없잖냐. 아, 어떡하면∼ 가인은 재영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며 횡설 수설했다. 그런 가인을 대신하여, 진우가 김밥을 우물거리며 재영에게 답했다. " 아,그러니까 그게‥우물‥데이트한‥우물우물‥ 사이지‥우물‥ 둘은∼ " - 파지지지직! 아,이거 그거 맞지? 방전 현상? 가인은 한순간 등 뒤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가인은 진우를 노려 보았다. 이,이 망할 인간!! 어쩌자고 그런 소리를…!!! " 데. 이. 트. " 순간, 가인의 귀로 들려온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어,어떡하면 인간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거냐? 고개를 돌린 가인에게 보인 것은,한창 피어나 는 독꽃과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테레이아였다. 그녀의 무서운 점은 머리 끝으로 피가 치솟아 올라올 정도로 화가 나도,절대로 웃는 얼굴로 상대를 대 한다는 것이다. " 데이트라는 것은 선남선녀가 만나 즐겁게 하루를 보내는‥ 그것을 말하는 거겠지,가인? " 선남선녀. 저렇게 테레이아가 구체적인 단어를 들어가며 유창하게 한국말을 할 때에는 무진장 화가 났을 때라는 것을 경험 상으로 알고 있는 가인이었다. 가인은 이미 사태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구 차하게 변명을 해야만 했다. " 아,그게‥ 그러니까 보고 싶은 영화가 꼭 있었는데‥ 마침 시더가 있어서 같이! 그래! 그래서 같이 갔었던 거야! " " 아,그랬던 거야? " 싱긋 웃음을 짓는 테레이아. 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해해 주는 거구나,테레이아! 너무 쉽게 넘어가는 거 같아서 맥이 빠지지만서도… " 그럼 영화만 봤던 것? 차를 마신다던지, 밥을 같이 먹었다던지,쇼핑을 같 이 했다던지, 공원을 같이 거닐었다든지 하지는 않았던 거야? " " 으헛----!! " 마치 그날 같이 있었던 것 처럼 쪽집게 같이 있었던 일만 예로 제시하는 테 레이아. 가인은 한순간 숨이 멎어버리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 가인의 반응에 한층 더 짙은 미소를 띄워 보이는 테레이아. 테,테레이아.그러지마… 나 무 서워…. 가인은 마치 고양이 앞의 쥐 처럼 얼어버렸다.그때,그런 가인의 앞 을 시더가 막아서며 테레이아에게 말했다. " 이봐요! 당신, 너무 매너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렇게 남의 사 생활을 꼬치꼬치 캐 묻고 그러는 거에요? " " 시,시더…. " 그,그만둬. 넌 또 왜 그러는 거야? 하지만 이미 시더와 테레이아에게는 가 인의 목소리가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더의 말에 테레이아는 이마에 실 핏줄을 띄우며 대꾸했다. " 남의 사생활이라고 했나요? 그렇게 말하는 그쪽은 가인의 애인 이라도 되 는 건가요? " " 그,그런…!! 애인이라니∼!! "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젓는 시더.그런 시더의 태도에 테레이아는 살풋이 웃음지으며 말했다. " 난 가인과 모든 것을 공유한 은밀한 사이. 당신은 내 적수가 될 수 없습 니다. " " 헤에에에엣∼ " 공유? 은밀? 테레이아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가인을 돌아보는 시더. 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 아냐! 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엄청난 전개 같은 것은 절대로 없어!! " 으아…오전 내내 시합을 하느라고 쌓여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느 낌이다. 가인은 비틀 거리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런 그의 귀로 자신의 절 친한 친구 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인아,힘내라. " 그래. 위로라도 해줄려는 거냐,친구야. 가인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재영 을 돌아보았다. 재영은 소박한 웃음을 띄며 가인의 어깨를 두들기고 있었다. 드디어 이 녀석에게서 제대로 된 위로를 듣게 되는 것인가? " 힘들땐 친구에게 기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 " 재,재영아. " 가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재영을 껴안았다. 재,재영아. 나… 나 너무 힘들 었어‥.너무도 힘든 나날이었어.그렇게 울먹이며 재영을 더더욱 껴안는 가인. 그런 가인의 귓 가로 따뜻한 재영의 말이 들려왔다. " 그러니까.........넘겨. " " .........? " " 한 사람만 넘겨라. 아니, 부디 넘겨줘! 가인, 너와 나의 10년지기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 - 우두두두둑! 그럼 그렇지. 죽어라, 이 화상아!대번에 껴안고 있던 재영에게 허리 꺽기를 시도하는 가인이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진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 아,진짜∼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앞에 두고 다들 뭘하는 건지. 아,안지 혜 씨라고 했죠? 정말 대단한 요리 솜씨입니다. 감탄했어요∼!! " " 그런… 감탄이라뇨. 아,여기 후식으로 다과를 깍아왔으니 좀 드세요. " " 오오∼ 감사감사! " 진우는 히죽히죽 웃으며 지혜가 건내주는 다과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 런 그를 바라보며 유리와 마리는 중얼거렸다. " ......역신(疫神) 같은 남자. " 어찌되었든, 소란스럽던 점심 시간은 그렇게 그 막을 내렸다. " 자자! 대망의 결승전이다!! " " 예이…. " 지연의 외침에 창백한 안색으로 중얼거리는 가인.그는 이미 모든 기력을 점 심 시간에 모조리 토해낸 뒤였다. 이래가지고서는 시합에 나간다고 해도 그 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아, 나 그만 쓰러지면 안될 까… 너무‥ 피곤해‥. 가인은 비틀거리며 코트에 다른 선수들과 함께 정열 했다. " 결승전 상대는‥ 역시나 3학년 8반인 건가. " 재영은 보드판에 적힌 상대팀의 이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3학년 8반. 바로 아침에 그 난리를 치며 이목을 모았던 학생 회장 '제갈영'이 이끄는 팀이었 다. 대원 그룹의 실업 청소년 팀의 멤버,'검은 삼연성'을 스카웃한 데에 이 어 NBA의 스타 패닉스 하트레버의 코치까지 받으며 훈련한 팀.지금까지의 상 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력임이 분명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3학 년 8반과 여지껏 시합한 반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트리플 스코어로 패배 했다고 한다. 하지연 또한 그 소식을 전해들었던듯 초조한 얼굴로 담배를 연 신 피워댔다. " 아,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3학년 8반. 아,그래. 강자의 여유란 말이지? 지연은 투덜거리며 인상을 썼다.그렇게 초조하게 상대를 기다리는 1학년 3반 이었다. 그 때 심판석에서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도 뜻 밖의 소 식을 1학년 3반에게 전해주었다. << 이번 농구 대회의 결승전은 1학년 3반과 3학년 8반의 시합으로 예정 되 어 있었지만‥ >> " …있었지만? " 모두는 다음에 나올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 3학년 8반의 실격패로, 1학년 3반의 우승을 알려드립니다. >> - 쿠쿵! 아,아니 이게 무슨 소리래?! 모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중 얼거렸다. 뭐야? 실격패? 3학년 8반이 실격패?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아 니 그것보다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 …우리가 우승한 건가? " 어딘가 맥이 빠진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하지연의 말.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이 찾아온 1학년 3반의 승리였다. 한편 대회 본부장에서는… " 놔! 놔라! 이런 판정 인정할 수 없다!! " 괴성을 지르며 수십 명의 학생 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제갈영.그런 제갈영 에게 냉정한 얼굴로 호일준이 말했다. " …하지만 검은 삼연성의 입학 수속이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로 그들이 참 가한 모든 시합은 무효입니다. 도대체가 오늘 하루 만에 입학 수속이 끝 날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 " 입학 수속! 입학 수속!! 도대체 그게 어쨋단 말이야?! 인정할 수 없어!! 이런 판정!! 난 인정할 수 없어어어어-----!! " " 인정하셔야 합니다!! "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농구 대회의 결말이었다. " 가인아, 괜찮냐? " " 아아…. " 재영의 걱정스런 물음에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의 몸 상태는 좋 지 않았다. 얼굴은 열이 올라 붉은 빛을 띄고 있었고,눈동자는 그 촛점이 잘 맞지 않고 있었다. " 플레이∼ 플레이∼ 3반! 3반! " 귓 가로 친구들의 응원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이제 보니 귓 볼도 뜨겁 게 달아올라 있는 가인이었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정신을 차려야…. " 수비해! 수비! " 선수들에게 소리치는 지연의 외침. 아이들은 공격해 오는 상대편을 맞아 재 빨리 수비 진영을 갖췄다. 가인은 고개를 흔들며 눈을 바로 뜰려고 애 썼다. 저 멀리서 상대편이 축구 공을 발로 차며 달려오고 있었다.그래… 막아야 해 …막아야 하는데‥. " 어엇…? " 하지만 갑자기 눈 앞으로 밀려드는 운동장의 바닥. 어라? 뭐야,이거? - 털썩… " 가인아?!! " 저 멀리서 재영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가인은 움직이지 못했다.마치 머 리에 무거운 추라도 매달린 것 처럼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가인이었다.심한 현 기증과 밀려드는 피로함이 그를 괴롭혔다. " 야,남자들! 어서 가인이 데리고 양호실로 가! 어서!! " 운동회의 둘째 날, 1학년 3반과 1학년 6반의 8강 축구 경기. 하지만 1학년 3반, 백 넘버 10번 유가인. 심한 감기 몸살로 그 몸을 운동장에 눕히다…. - 삑! 삑! 심판의 호각 소리를 뒤로 하며 본의 아니게 잠시 중단되는 축구 시합이었다. " 으음…. " 가인이 흐릿한 눈을 떠 제일 처음 바라본 것은 양호실의 하얀 커튼이었다. 그렇게 가인이 정신을 차리자, 그를 반긴 것은 반장 안지혜의 놀란 목소리와 얼굴이었다. " 가인아? 정신이 들어? " " …반장? 여긴 어디…? " " 양호실이야. 가인이 너, 경기 도중에 쓰러졌다구! " 지혜는 걱정된 얼굴로 가인에게 말했다.그랬었나….나‥시합 도중에 쓰러졌 다고. 가인은 상체를 일으키며 아직도 열이 올라 있는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 그런 가인을 지혜가 만류했다. " 안돼. 좀 더 누워 있어야 해. 단순히 감기지만, 열이 39도나 된다구! " " 감기? " 멍하니 중얼거리는 가인.열로 인해 입술이 말라 붙어 침을 삼키기가 힘들었 다. 가인은 애써 몸을 다시 눕히며 지혜에게 물었다. " 다른 애들은? 시합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 " 으응. 시합은 가인이 쓰러진 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했어. 유리 하고 테레이아는 아까까지 계속 여기에 있었는데,갑자기 서둘러 나가더라. " " 그래…. " 가인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지혜가 해주는 물수건을 이마에 얹었다. 아,한심 하군. 감기 땜에 쓰러졌던 거냐,유가인? 겨우 어제 운동 좀 무리하게 했다 고 감기를 앓다니. 에잇, 나가 죽어라! 그렇게 한숨을 푹 푹 내쉬는 가인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듯 지혜가 책망하는 말투로 말했다. " 왜 그렇게 무리했던 거야?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쉬었어야지. " " 으응…. " 가인은 그런 지혜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입을 닫았다. 잠시 대화의 흐름이 끊어지는 둘. 양호실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단지 운동장에 있는 학생들의 소리만이 아련하게 양호실로 들려오고 있었다.그런 침묵을 깨고 지 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혹시… 가인이 너, 그거 때문이야…? " " .........? " 무슨 얘길하려는 거지? 지혜의 물음에 그녀를 돌아보는 가인.지혜는 어두운 안색으로 뒷 말을 이었다. " 그‥ 내가 말한‥ 추억을 만들자고 한‥그것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무리 하게 뛰었던 거야? 응? 그런 거야? " " 아니‥ 그건…. " 가인은 잠시 지혜의 말에 대꾸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그런 가인의 모습 에 지혜는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 역시 그랬구나…. 미안‥. 어쩐지 체육을 싫어하는 가인이 운동을 하겠다 고 했을 때 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어. 나… 가인이에게 부담 을 줘버린 거네‥. " 나 때문에‥. 내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괜히 추억을 만들 고 싶다느니 어쨋다느니 말해서 가인이를 무리하게 만든 거 구나.정말 끝 까 지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다니는 아이라니까‥ 나는 정말. 그렇게 자신 을 자책하는 지혜를 잠시 살펴보던 가인은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아아∼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반장은? " " 으응? " 가인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지혜. 그런 그녀에게 가인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 부담을 줬다느니, 미안하다느니‥도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 " ......그건…. " " 잘 기억해둬! " 가인은 지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미소를 띄웠다. " 이 운동회는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걸 말이야. 난 단지 모두가 함께 즐거 워 했으면 할 뿐이야.그리고… 추억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너 뿐 만이 아니라구. 저기, 나도…반장하고 마지막으로 추억을 만들고 싶었고…. " " 아…. " 뒷 말을 흐리며 쑥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가인. 그런 그의 말에 지혜는 그제 서야 어두웠던 안색을 풀었다. 그랬구나. 가인이도… 가인이도 추억을 만들 고 싶었던 거야. 내가 부탁했기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니였어. 나 혼자만 그렇 게 생각한 게 아니었어…. " 으응. 그랬지. 응. 그랬어. "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지혜였다.그녀가 그렇게 훌쩍거릴려고 하자 가인은 당황하며 말했다. " 우,우는 거야? 왜‥왜 그래?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응? " " 아냐‥. 그런 거 아니구‥ 단지 기뻐서‥. " 고개를 흔들며 눈물이 맺힌 눈으로 환하게 웃는 지혜.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한 숨 놓은 표정으로 씨익 미소지었다. " 좋아. 그러니까 이제 맘 놓고 우리 반을 응원하러 가자구! " " 에? 괜찮겠어? " " 물론! 이딴 감기 땜에 계속 누워 있을까 보냐! " 힘차게 몸을 일으키는 가인. 지혜하고 얘기하다 보니 열이라도 내려간 건가? 왠지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그였다. 그런 가인의 모습에 지혜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응원하러 가자. " " 그래! " 침대를 일어나 입구로 나갈려는 가인. 하지만, 감기라는 건 그렇게 쉽게 낫 고 자시고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순간, 비틀 거리며 술 주정뱅이 같은 보법을 밟는 가인. 그렇게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그를 지혜가 서둘러 부축해 주었다. 괘,괜찮다고 그렇게 큰 소리를 쳤는데 대번에 이런 꼴을 보이다니…. 왠지 부끄러워진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지혜에게 말했다. " ‥조금 부축해줄래? " " 후훗‥ 그럴게. " 쿡쿡 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지혜였다. 한편,축구 경기가 한창인 운동장에서는 뜻 밖의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화 려한 에메랄드 빛 머리를 휘날리며 축구공을 모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그 여인은 다름아닌 1학년 3반의 테레이아 민체스터 라고 했다. " 마,막아!! " 1학년 3반과 맞붙게 된 1학년 6반의 한 학생이 동료들에게 소리쳤다.테레이 아를 향해 거침 없이 태클을 거는 남학생. 여학생에게,그것도 한성 고등학교 의 꽃 테레이아를 상대로는 너무나도 과격한 플레이였다. 하지만 이미 그들 의 머리 속에는 여자 아이니 봐줘야겠다 라는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 눈 앞의 미소녀는 엄청난 강적이었던 것이다! - 촤악! 온 몸을 날려 땅바닥을 미끄러지며 들어오는 파워 태클. 하지만 테레이아는 가볍게 볼을 무릎으로 트래핑 하며 태클을 뛰어 넘었다. " 제,젠장! 더 이상 날뛰게 해줄 수는 없다!! " 연신 테레이아에게 달려드는 1학년 6반의 남학생들.하지만 테레이아는 화려 한 개인기로 벌써 5명을 제쳐 버렸다.더구나 마지막으로 상대를 제친 기술은 놀랍게도 축구 황제 펠레의 특기였던 '사포'였다. " 우,우와∼!! " 감탄을 터뜨리는 1학년 3반의 응원석. 하지연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담 배를 무는 것도 잊은채 두 손을 쥐며 열광하고 있었다. " 테,테레이아! 살다온 나라 중에 잉글랜드가 껴 있었기에 설마 설마 했었지 만… 진짜로 프레스턴의 그 유명한 여자 축구 팀 '디커스 클럽'의 멤버 였 었다니! " 테레이아 민체스터. 그녀는 가인이 쓰러지자, 곧 바로 자신을 디커스 클럽의 멤버라고 밝히며 시합에 출장하게 해달라고 지연에게 부탁했었다.처음에는 반 신반의했던 지연과 모두였지만,저렇게 그녀가 실력을 과시하니 더 이상 할 말 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유명한 최초의 여자 축구팀 '디커스 클럽'의 선수 라니! " 교사 생활 5년. 드디어 내게도…! " 가인에 이어 테레이아까지! 이런 행운이! 왠지 모르게 감명을 받는 지연이었 다. 그렇게 지연이 감명을 받던지 어쨋던지, 테레이아는 연신 1학년 6반의 진 영을 누비며 골대로 향하고 있었다. " 테레이아, 패스!! " 테레이아에게서 공을 건내받는 재영. 그는 테레이아의 실력에 감탄하면서도 신중히 6반 수비수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공격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의 헛 점을 찔러 들어가는 것! 녀석들의 수비의 허술함을 노려야 한다! " 앗?! " 순간, 재영은 감탄했다. 정확히 상대 수비진의 취약 지점에 자리를 잡고있는 3반의 선수 하나. 만약, 저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우연이 아니라면, 저 선수는 매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유리야, 받앗!! " 재영은 그 선수에게 길게 롱 패스를 했다.공이 날아가는 위치에 서있던 이는 다름아닌 1학년 3반의 이유리. 놀랍게도 그녀까지 게임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 이다. - 톡‥! 패스를 건내 받자,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다음 패스를 건내는 이유리. 공은 골문으로 향하던 테레이아에게 건내졌다. 실로, 기계와도 같은 정확한 패스였 다. 더구나 그 타이밍은 마치 서로 짜고 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완벽한 그것. 구경하던 모두는 유리의 어시스트에 감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실상을 알게 된다면 더더욱 놀라게 될지도. ' 생각대로군‥. ' 유리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유리의 무섭도록 정확하고 빠른 패스. 그것의 비밀은 다름아닌 유리의 오라 능력이었다.사람의 마음을 읽는 그녀로서는 이 경기장의 모든 선수의 마음을 읽고 분석하여 헛점을 찌르고 패스를 하는 것 이 가능했던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놀랍고도 무서운 능력이란 말인가! 만약 유리 같은 선수가 실제로 축구 계에 존재했었더라면, 그는 전지 전능한 게임 메이커로 세계에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것이다. - 뻐엉! 유리의 어시스트를 그대로 논스톱으로 슛하는 테레이아. 그것은 디커스 클 럽의 이름에 걸맞는 그야말로 최고의 슛팅이었다. 6반의 골키퍼는 채 테레이 아의 슛팅에 반응도 하지 못하고 한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 출렁‥! " 와아아아아!! " 환호하는 3반. 벌써 스코어는 5-1. 테레이아와 유리가 들어온 이후로, 벌써 이 정도로 점수차가 나버린 것이다. 이미 상대는 의욕 상실,3반의 승리가 더 더욱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환호 속에서도 유리와 테 레이아는 묵묵히 3반의 진영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단지 그녀들의 머리 속에 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쓰러진 가인(오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우승을…! ' 그것이 그녀들의 필승의 각오였던 것이다.분명 이 상태로 나가면 축구부 우 승도 3반의 손에 떨어질 것이 확실했다. " 대,대단하다…. 테이와 유리…. " 그리고 그것을 응원석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가인과 지혜. 가인은 혀를 내두르며 그녀들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저렇게 대단할 줄이야.엄청나다. 왜 진작에 나오지 않았던 거야,저 둘은? 어쨋든, 가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던 테이와 유리의 의도는 어느 정도 빛을 본 셈이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엄청난 재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 아아‥ 가인도 없는데 이거 계속 찍어야 되요,Mr.그린∼? " 시더는 디지털 카메라에 시합을 담으며 한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양 호실에 실려간 가인이 걱정되 죽겠는데 왜 이런 걸 나한테 시키는 거야? 가 인, 어떻게 됐을까? 열이 나는 것 같던데… 많이 아픈 건 아닐런지. 감기일 까? 그래. 감기 몸살일거야. 어제 하루종일 무리했잖아. 그래. 괜찮을 거야. 괜찮… " 으아∼ 나 양호실로 갈래! Mr. 그린이 이거 찍어요!! " 시더는 짜증을 내며 옆에 있는 진우에게 디지털 카메라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일? 자신의 옆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정진우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어,어디로 간거지? 이 남자? " 얼레…. " 그렇게 시더가 진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사이, 시합장에서는 아무 도 생각 못한 새로운 전개가 시작되고 있었다. - 파앗!! 순간, 운동장의 한복판으로 무섭게 달려나오는 한 인영.경기장의 모두는 이 사람의 등장에 숨을 죽여야 했다. 너울거리는 저 하얀 망토는 한성 고등학교 교실에 붙어있는 커텐 임이 분명했고, 그가 쓰고 있는 마스크는 한국 레슬링 계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호랑이 가면 '타이거 마스크'였다. 어쨋든, 이 정 체 불명의 남자(이후 타이거 마스크로 지칭)는 공을 몰고가던 6반의 한 선수 에게로 달려들었다. " 우,우왁!! 뭐,뭐야?!! " 비명을 지르며 기겁을 하는 남학생. 어느새 공은 타이거 마스크에게로 넘어 가 있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운동장의 하프 웨이 라인을 막 넘어 선 시점에서 타이거 마스크는 슛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 크랴아아아앗!! 타이거 슛------!! " - 퍼엉!! 폭발하는 타이거 슛. 6반 골대와의 거리가 40여 미터나 떨어진,그야말로 장 거리 중의 장거리 슛팅이었다. 황당한 것은 타이거 마스크의 각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축구공은 마치 포환처럼 6반의 골대로 무섭게 날아 들었 다. " 히,히이이이익!! " 미처 막을 생각도 못하고 몸을 피해버리는 6반의 골키퍼. 공은 골대를 꿰뚫 고 네트에 걸린 채에서도 한참동안 스핀을 먹은 후, 간신히 멈추었다. 모두 는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순간,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재영은 황당한 얼굴 로 중얼거렸다. " 뭐,뭐냐… 이 말도 안되는 슛은… " 재영은 이 말도 안되는 슛팅을 성공시킨 인물을 바라보았다. 아니, 재영 뿐 만 아니라 시합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슛팅의 장본인에게로 향했다. 슛팅 의 장본인 타이거 마스크는 자신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자신만만 하 게 웃음을 터뜨렸다. " 아하하하하핫∼나는야 쓰러진 유가인을 대신해,위기에 빠진 3반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타이거 마스크!! " - 띠잉!! 타,타이거 마스크…?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그 이름을 내까리는 모두. 그런 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타이거 마스크는 더더욱 기고 만장해져 외쳤다. " 지금부터 이 시합은 내가 접수한다!! 유가인을 위해서!! 6반이여, 나의 분노가 서린 타이거 슛을 받아 보아라---!! " 저,저 목소리는 설마…. 가인과 재영, 유리, 테레이아, 심지어는 지혜에게 까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서,설마 저 복면 남자는… ' 지,진우 씨?!!! ' 타이거 마스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정진우였던 것이다. 그가 벌인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들. 멀리서 디지털 카메라로 진우 를 바라보며 시더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어, 해버렸어‥ 저 인간‥. " 그때, 공황 상태에 빠진 시합장으로 등장하는 일련의 학생 위원들. 그들은 신속히 운동장의 중앙에 서있던 타이거 마스크, 아니 정진우를 원으로 포위 했다.그런 학생 위원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는 바로 학생회의 부 회장 호일준. 그는 냉정한 얼굴로 타이거 마스크에게 입을 열었다. " 당신을 시합 방해 및, 본 학교의 학생 사칭 혐의로 퇴장시킵니다. " " 나,나는 친우 유가인을 위해…!! " 거칠게 항의를 하는 진우.하지만 그는 항의할 자격조차 없는 파렴치한 외부 인이었다. " 퇴장입니다. " 호일준의 냉정한 말과 함께 학생 위원들에게 붙잡혀 시합장 밖으로 끌려 나 가는 진우. 진우는 처량한 목소리로 연신 외쳤다. " 어,어이!! 재영 군, 상황을 설명해 줘!! 유리 양?!! 이쪽을 좀 봐요!! 야, 소년!! 유가인 너 말이야! 너!! 왜 응원석에서 잠자코 있는 거야?! 난 너 때문에 이렇게 나온 거란 말이야∼!!! " " ......... " 창백해진 얼굴로 그런 진우를 하나 같이 외면하는 가인들. 그때, 대회 본부 장에서 예의 방송이 울려퍼졌다. << 지금 제 2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을 하고 있던 1학년 3반과 1학년 6반에 게 알려드립니다. 한성 고등학교에 들어온 한 외부인이 일으킨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해, 유감스럽지만 1학년 3반의 반칙패를 발표하는 바 입니다. 학생회에서 잡아들인 이 외부인은 강력히 1학년 3반과의 관계를 표명 하 고 있었기에 차후, 1학년 3반에게는 따로 문책이 있을 예정이오니‥ >> 멍한 표정으로 방송이 끝맺을 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1학년 3반.지혜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그,그럼 우리 실격‥이 되는 건가? " - 풀썩! 지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그만 홧병으로 열이 도져 정신을 잃고 쓰러지 는 가인이었다. 이렇게 무성의하게 체육 대회의 둘째 날도 지나가고 있었다. - 탕! 한성 고등학교 운동회의 마지막 날. 이 날은 육상 경기의 날이었다.육상 경 기래봐야 달리기 뿐이었고, 달리기도 100m달리기와 800m 릴레이 뿐이었지만 그만큼 종목이 적었던지라 경쟁은 치열했다. - 탁탁탁탁‥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가는 가인. 이미 그와 같이 달리던 주자들은 저 뒤로 처진지 오래였다. 과연, 100m를 9초대로 돌파하는 스피드! 더구나 오늘은 감 기도 다 나았다고!! 가인은 어렵지 않게 라스트 스퍼트도 필요 없이 골라인 을 통과했다. 당연히 1등이었다. " 우와아아아∼!! " 환호하며 가인을 반기는 3반의 동급생들. 그런 가인을 한참 뒤에야 뒤 따라 들어오는 주자들은 숨을 몰아쉬며 말도 안된다는 눈빛으로 가인을 바라 보았 다. 분명 자신들도 100m를 12초대로 통과하는 실력인데, 가인과는 약 20m 차 이나 나며 들어온 것이다.그럼 저 자식은 몇 초대로 100m를 뛴다는 소리야?! 만약 가인이 9초대를 기록한 것을 안다면 더더욱 놀랄게 분명한 그들이었다. " 이번 달리기는 순조롭네요, 선생님∼ " 재영은 그런 가인의 시합을 바라보며 옆의 하지연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 런 대꾸가 없는 그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지연을 돌아보던 재영은 흠칫 놀 라며 다시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지연은 입 안의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핏 줄이 오른 얼굴로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다. ' 여,역시… 어제 축구 경기 탈락이 원인이신 걸까… 하,하하‥ ' 식은 땀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재영. 당연할지도. 사실,어제의 3반이라면 충 분히 우승도 노릴 수 있는 실력이었는데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반칙패를 당 한 것이다. 그런 재영의 예상대로 지연은 어제의 축구 실격을 생각하고 있었 다. 아니 정확히는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바로 그… 복면 을 한 정신 나간 외부인을…! ' 크으으으… 도대체 그 자식은 뭐였던 거야?!! 다 이긴 경기를! 우승할 수 있었던 경기를 훼방 놓다니∼!! ' 어제의 그 일로 지연이 얼마나 열받았었는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 외부인 놈을 때려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는 지연을 뜯어 말렸던게 바로 3반의 학생들이었다. 물론,그 파렴치한 외부인은 이미 학교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지만 말이지…. 어쨋든 덕분에 체육 대회 기간 동안 외부인 절대 출입 금지 교칙까지 내려진 한성 고등학교였다.그런 이유로 진우는 물론이고 덩달아 시더까지 학교에 오지 못했다. " 어쨋든, 오늘은 반드시 우승할테다…! " 두눈에 불을 켜며 필사의 각오를 다짐하는 지연이었다. 그런 지연을 조심스 럽게 살펴보며 재영은 생각했다. ' 흐음∼ 우승이라…. ' 현재, 대회의 우승 후보로 점쳐지는 반은 다음과 같았다. 하이 점퍼 유가인 과 여인천하(아마도 테레이아와 유리를 칭하는 말 같았다)를 위시한 1 학년 3반. 그리고 우승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학생회장 제갈영 이 이끄는 3학년 8반. 이렇게 두 반이었다.물론,오늘 육상 종목에서 다른 반 이 우승하게 된다면 그 승리는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지만 이변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현재 1학년 3반과 3학년 8반의 전적을 나열해보자면… 농구 경기 1학년 3반 우승. 축구 경기 3학년 8반 우승. 줄다리기 및 씨름…은 논외. 우습게도 앞의 두 경기에 치중하느라 두 반은 이 종목들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당연히 출전 자체를 안했으므로 탈락. 이 종목들의 우승은 2학년과 3학년의 한 반이 각각 나눠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응원 점수는 1학년 3반과 3학년 8반의 막상막하.한성 고등학교의 꽃 테레이아와 유리를 위시한 1학년 3반의 응원은 가히 압도적이었지만, 제갈영 의 Crown Prince들의 응원도 그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Crown Prince들 은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응원 점수에 포함 되었는지 는 미지수다.혹자에 의하면 학생회장 제갈영이 호일준을 협박했다고 한다.수 완 좋게도 그 협박 수단은 학생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쨋든, 총점을 합하자면 1학년 3반 100점. 3학년 8반 100점으로 현재 두반 이 공동 1위를 달리고 있었다. 2위인 반과의 점수 차가 50점 이상인 걸 감안 한다면 역시 축구와 농구 종목의 배점이 컸다. 결국 오늘의 육상 종목에서 모든 것은 판가름 날 것이다. " 뭐, 이 상태로라면 무리는 없겠지만…. " " 그렇내요. " 지연과 재영은 중얼거렸다. 그래. 이 상태로라면 무리는 없다. 이변만 일어 나지 않는다면…. 그래…. 이변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 ......이변…. ' 순간, 어제의 그 타이거 마스크를 떠올려버린 지연과 재영이었다.그들은 창 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건 재앙이었어…. 재앙…두 번 다시 오지 않을…. " 1학년 3반….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 족속들이군. " 제갈영은 1학년 3반 소속의 유가인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 서있던 호일준은 예의 냉정한 표정으로 제갈영에게 말했다. " Crown Prince들 건은 사유재산 권리를 주장하여 어떻게든 넘겨볼 수 있었 지만 이 이상은 힘듭니다.더 이상 선수를 기용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저 희의 우승은 힘들다고 생각되는데요…. " 여기서 밝혀지는 Crown Prince들의 문제. 제갈영은 어처구니 없게도 그녀들 이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했고,곧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라는 궤변을 펼쳤 던 것이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 Crown Prince들 본인들이… - 저희는 제갈영 님의 것. 몸도 마음도 바쳤습니다. …라는 엄청난 소리들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제갈 가문∼ 이라고 칭찬해줘야 하는 대목일까.이 부분은…. 그런 호일준의 냉정한 상황 분석에 제갈영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 뭐가 힘들다고 생각되는데요 야!! 그런 흐리멍텅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너는 안된다는 거다!! " 아니. 흐리멍텅한 생각은 그쪽인 거 같은데….호일준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 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제갈영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나는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 보일테다!! 다른 누구의 힘도 아닌 바로 내 자신 만의 힘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겠다는 건 그만두기로 했어! " 이런 제갈영의 말에 흠칫 놀라는 호일준. 회,회장 님! 드디어…드디어 깨달 으신 겁니까?!! 다른 이의 힘을 빌리지 않은 승리야 말로 진정으로 값지다는 것을!! 제가… 제가 이상으로 여겨왔던 군주의 모습을 이제야 보여주시다니!! 마음 껏 감동하는 호일준.하지만 제갈영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 줄 잘 알 면서도 그는 왜 매번 이런 헛된 기대를 하는 것일까…. " 자자∼ 그렇게 되었으니 이 음료수들을 1학년 3반에게 갔다 주도록. " 자신을 감명 깊게 바라는 호일준에게, 옆의 음료수 박스를 가리키며 지시하 는 제갈영. 호일준은 의아해진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 예? 아니 왠 음료수…. 그것도 왜 1학년 3반에게만? " " 괜찮아. 걱정하지마. 이건 내 스스로의 힘이니까. " 알 수 없는 소리를 나열하는 제갈영.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호일준은,평 상시의 제갈영의 행동 패턴에 따른 결과를 산출해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제 갈영에게 되묻는 호일준. " ......타셨지요? " " 흠? " " 약을…. " " 아아∼ 단순히 설사약일 뿐이야. 증거가 남지 않도록 약물 성분이 발견되 지 않도록 제조했지. " …역시나. 역시나 이 자식은 안돼….호일준은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냉정히 소리쳤다. " 안됩니다------!! " 그렇게 제갈영의 1학년 3반에 대한 설사약 유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 으차…. " 한편, 1학년 3반의 반장 안지혜는 선수들에게 제공할 식수를 받기 위해 한 성 고등학교에 위치한 강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성 고등학교는 강가의 바 로 옆에 설립되어 있었는데, 초목이 우거져 있는 이곳은 낚시터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이 강을 '메리 호(…)'라고 부르며 여 름철의 도시락 터로 자주 애용해 왔었다. 그리고 지혜는 이 메리 호에 있는 약수터로 물을 뜨러 온 것이다. 물론,그 큰 물통의 물을 혼자 들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므로 테레이아가 그녀를 같이 따라왔다. 테레이아는 불어오는 바람에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지혜에게 말했다. " 이런 힘 쓰는 일을 왜 우리 같은 여자가 해야하는 거지…. " " 남자애들은 다 경기에 참여하느라고 정신 없잖아. 그리고 체육 임원은 나 혼자 뿐인데 다른 사람한테 손 벌리기도 뭐하고‥. " " 그러니까 왜 체육 임원을 지혜 혼자 하고 있는 거냔 말이야! 내 말은! " " 아… 미안,테레이아. 이런 일에 불러서…. " 살짝 얼굴을 붉히며 사과하는 지혜. 테레이아는 그런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안된다는듯 물었다. " 왜 미안해? 난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건데. " " 아, 그렇내. 미안‥. " " 또 미안해 라고 하고 있어. 이상한 아이야,지혜‥. " 고개를 젓는 테레이아의 모습에 지혜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테레이아‥ 가인과 비슷한 말을 하는 구나. 내용은 틀렸지만, 자신이 원하기 에 하고 있다는 그 말투가 비슷했다. 어제 양호실에서 가인과 한 얘기들을 떠올리며 잠시 미소지어 보는 지혜였다. 지혜는 환성이 들려오는 학교 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 오늘이‥ 마지막이네…. "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지혜.그녀의 말에는 섭섭한 기운이 묻혀 있었다. ' 조금만 더 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농구 대회에 우승하는 자신의 반을 소리 높여 응원하 고… 같이 즐겁게 점심도 먹고… 축구 시합 때 쓰러졌던 가인을 양호실에 데 려다 주기도 하고…. 그래.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 ' 가인이‥ 어제 그렇게 아팠는데 오늘은 괜찮은 걸까? ' 감기에 걸린채 무리하게 운동을 한 가인에게 생각이 미치자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지혜였다. 가인이… 오늘은 아프지 않은 것 같던데‥그래.다 행이다‥. ' 내일이면 이 학교와도 끝인가…. ' 자신은 언제나 처럼 아버지의 전근을 따라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겠지.그러 니 여기에서의 생활도 모두 끝일테고…. 선생님도 만나지 못하게 될테고, 친 구들도 만나지 못하게 될테지… ' 친구…. ' 친구. 그 중에서도 갑자기 가인이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지혜였다.그렇구나 ….가인이도 못 보게 되는 거구나…. 어쩔 수 없지.전학을 가게되면 다른 지 역, 다른 학교를 다니게 되는 거잖아.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어쩔 수 없 는 거…. ' 그래도‥ 그건 싫은데‥ ' 그건 싫은데….갑자기 울적해지는 지혜였다.이유도 모르게 슬퍼졌다.전학가 는 것도 싫었고,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인이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나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자상하게 대해주던 친구였 는데…. 그렇게 잘 웃어주던 친구였는데… '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 였는데‥. ' 가는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지혜는 화들짝 놀라며 소매로 눈 가를 문질렀다. 뭐,뭐니. 지혜 이 바보. 툭하면 울기나 하고. 이런 모습 테 레이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 헤어지기 싫지? " 그때, 그런 지혜에게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 테레이아였다. 그녀는 바람 에 에메랄드 머리를 하늘하늘 휘날리며 지혜를 정면으로 주시하고 있었다.지 혜는 테레이아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뭐? …테레이아? 무슨‥ " " 내가 헤어지지 않게 해줄까? " 그제서야 지혜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 앞에 있는 테레이 아의 모습은 평상시에 지혜가 알고 있던 테레이아가 아닌 것 같은‥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어딘가 이질적인‥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 닌 것 같은… 그런 느낌. 테레이아의 푸른 눈동자가 얼핏 녹색 눈동자로 보 이는 것은 지혜의 착각이었을까? << 헤어지지 않고 있을 수 있어…. >> 마치 머리 속으로 들려오는 것 같은 테레이아의 음성. 지혜는 순간, 눈동자 가 풀린 얼굴로 테레이아를 멍하니 주시한채 홀린듯 중얼거렸다. " 헤어지지… 않을 수…있다고‥? " << 그래.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거야. >> 달콤하게 들리는 테레이아의 음성. 지혜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녀 를 따르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바로 그와…. " 가인이와… 헤어지지 았을 수… " 지혜의 작은 중얼거림이 강가의 수풀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 아, 거 참…. 얘들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 가인은 한 숨을 쉬며 메리 호로 걸어가고 있었다. 약수물을 뜨러간 지혜와 테레이아가 점심 시간이 되어도 소식이 없자, 자신을 보낸 지연이었다.아,그 러니까.선생님.100m 우승까지 한 수고스러운 사람을 너무 많이 부려먹는 거 아니에요? 오전에 있은 100m 결승을 무사히 우승으로 이끈 가인이었다.이따 가 오후에 있을 800m 릴레이도 나를 내보낼 거면서 너무 하잖아∼ " 에휴…. " 가인은 가볍게 한 숨을 쉬며 나무로 만든 계단을 내려갔다. 강가 근처에 위 치한 수풀이 보여왔다. 좋아∼ 저 수풀만 돌아가면 약수터다. " ......어라? " 그런 가인의 눈에 보이는 한 인영. 뒤돌아서서 수풀을 바라보고 있는 이가 하나 있었는데, 다름 아닌 지헤였다. 아니, 반장.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 얼른 물 떠가지고 오지 않고! 가인은 그런 그녀를 힘 차게 불렀다. " 어이, 반장!! " 가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지혜. 가인은 재빨리 지혜 에게 달려가 그녀의 옆에 섰다. " 정말∼ 뭘 이렇게 늦장 부리는 거야?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어라? 테 레이아하고 같이 온 거 아니었어? 다른 애들이 반장하고 같이 갔다고 그 러던데. " 주위를 둘러보며 테레이아를 찾는 가인. 이상하네. 같이 안 온 건가? 그때 가인의 눈에 저 멀리 땅바닥에 떨어져있는 빈 물통이 보여왔다.가인은 그 물 통을 줏으며 지혜에게 말했다. " 물도 안 뜨고 지금까지 뭐하고 있었어? 흐음… 알았다! 혼자서 들고 오기 힘들어서 그랬던 거구나? 나,참∼ 남자애들에게 부탁하면 될 걸 가지고. " << 헤어지고 싶지 않아‥. >> 그때,그런 가인의 귀로 들려오는 지혜의 목소리. 뭐?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무슨 소리야 그게? 가인은 의아해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 반장? 그게 무슨‥ " << 영원히‥ 함께‥!! >> 격한 지혜의 목소리. 그리고 가인은 볼 수 있었다. 지혜의 몸에서 솟아오르 는 나무 줄기들을! 그 줄기들은 지혜의 몸을 덮고 그 몸을 거대하게 부풀리 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우우우우-----!! >> 포효하는 나무 줄기.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 괴물로 변한 지혜는 소리지르고 있었다. 그런 거대한 나무의 모습을 한 지혜를 멍 하니 올려다 보는 가인.어, 어떻게 된 거야? 이건? 모,몬스터? 몬스터인 거야? 지혜가 몬스터로 변했어? ' 어째서‥?! '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꿈틀 거리는 나무 줄기. 5m는 됨직한 크기로 자라난 나무는 그 굵은 몸체를 흔들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우우우----!! >> 거센 나무 줄기들이 가인을 덮쳐왔다! " …이상하네. 가인이 녀석 어딜 간 거야? 반장 찾으러 간다고 해놓구선 자 기까지 소식이 없다니∼ " 재영은 투덜거리며 예의 점심 먹었던 한성 고등학교의 언덕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서는 깔아두었던 돗자리를 정리하며 유리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지혜와 가인이 갔다는 메리 호 쪽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유리의 얼굴이었다.재영도 역시 유리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한 숨을 쉬었다. " 하아… 점심 시간도 다 끝나가는데…. 릴레이도 나갈 녀석이 정말….저기, 민체스터 양? 지혜와 가인이 정말 못 봤어요? 민체스터 양, 아까 반장하 고 같이 물 뜨러 갔다면서요? " 그런 재영의 뒤에서 차분히 앉아 있던 테레이아. 그녀는 바람에 산들 산들 휘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글쎄요‥. 지혜를 도와줄려고 했는데, 그녀가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앞 전에 헤어졌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갈걸 그랬나‥. " " 흐으으음∼ " 재영은 고개를 흔들며 씨익 웃었다. " 에이, 뭐‥ 걔네들이 어린애들이에요? 이렇게 우리가 걱정하는 거 자체가 웃기는 일이네, 나 참∼ "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이 난듯 심각한 표정으로 테레이아와 유리를 바라보 는 재영. 그의 목소리는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 혹시 가인과 반장…! 설마…!! " " .........?! " 그런 재영을 주시하는 유리와 테레이아. 혹시 그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인과 지혜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거야? 어서 얘기해 봐요!!그 런 그녀들의 긴장된 시선을 받으며 재영은 말을 이었다. " ......은밀한 장소에서 둘 만의 모종의 섬씽을 가지고 있는 것은…? " " ......... " 무표정하게 그런 재영을 바라보는 유리와 테레이아. 그녀들은 눈으로 짧게 서로 신호를 주고 받았다. " 간다. " " 음. " 그리고 순간 날카롭게 신형을 움직이는 그녀들. 재영은 반응조자 하지 못했 다.그리고 작열하는 유리와 테레이아의 쌍장. 이것이 바로 절초(絶草) 맹호 경파산(猛虎鯨波酸)!! 재영은 절초의 위력 앞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가격 당한 배를 움켜진채 쓰러졌다. 테레이아와 유리는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 언제나 손이 많이 가는 남자로군요,재영 씨는. " " …아니. 단지 시행착오 능력이 없는 것일지도. " 그녀들은 그렇게 쓰러진 재영을 뒤로 하고 무심히 언덕을 내려갔다. 유리는 다시 한번 메리호를 바라보았다. 앞전 재영이 했던 말이 괜스레 신경 쓰였다. 반장과 오빠가 모종의 섬씽이라고… ' 그럴리가 없잖아‥! 정말 바보같이…. ' 유리는 인상을 쓰며 머리 속에서 재영의 말을 털어내려고 애썼다.하지만 누 가 그랬던가. 한번 들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가 없이 불어나는게 사람의 의심 이라고.유리는 평점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생각했다. 그래.오빠가 그럴리 가 없어. 난 오빠를 믿는 걸. 그러니까 오빠를 의심하면 안돼,이유리. 그렇 지? 그래. 이대로 오빠를 믿고 기다리는 거야. 음, 그래… 그런데… " .......... " 유리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고, 가인의 마음을 읽기 위해 오라 능력을 전 개했다. 미안, 오빠…. 함부로 마음을 읽어 버려서. 나중에 꼭 사과할게. 유 리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가인의 사념이 읽히기 시작했다. - 으으으윽… 유리의 머리 속으로 울려퍼지는 가인의 신음 소리. 유리는 흠칫 놀라며 메 리 호 쪽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역시 메리 호 쪽에 있었다.그것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는… ' 몬스터의 공격을 받고 있어?! ' 메리 호 쪽에서 희미하게 숲이 움직이며 새들이 푸드득 날아가는 것을 유리 는 목격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오빠?! " 으으윽!! 지‥지혜…!! " 가인은 신음을 흘리며 공중에서 발버둥 쳤다.그의 몸은 지혜가 변한 거대한 나무 괴물의 줄기에 묶여 있었다.사정 없이 조여대는 두꺼운 나무의 줄기.가 인은 목에 묶여진 줄기를 두 손으로 잡으며 몸을 비틀었다. 으윽, 숨 쉬기가 힘들어! 괴롭다…! 이대로는 질식하고 말거야!! " 으,으으으으읏!! " 가인은 이를 악물며, 오라를 전개했다.가인의 몸에서 폭사되는 푸른 오라의 빛. 나무 괴물은 갑자기 오라의 빛을 접하자 고통스러운듯 비명을 질렀다.순 간, 헐거워지는 나무 줄기들. 가인은 필사적으로 줄기를 뿌리치며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 우오오오오오!! >> " 크으‥하아‥하악‥! " 땅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괴물에게서 벗어난 가인.그는 목을 두 손으로 감싸 며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놈이 세게 죄던지 줄기에 묶여던 목 부위가 퉁 퉁 부어 올라 있었다.가인은 눈에 맺힌 눈물을 떨구며 괴물에게서 간격을 벌 렸다. " 지혜가‥ 지혜가… 어째서? " 가인은 망연자실하게 나무 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어떻게 된 일일까? 지혜가‥ 그 반장이 왜! 무슨 이유로 이런 괴물로 변한 거지?! 너무나 갑작 스러운 상황에 가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쨋든,명확한 사실은 그녀가 몬스터가 되었다는 것 뿐!! 가인은 다시 나무 줄기들이 자신을 덥칠려고 하 자,서둘러 약수터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학교 쪽에는 수 많은 학생들이 있다. 그곳으로 몬스터를 끌어들였다간 끔찍한 대형 참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 허억‥ 허억‥ " 가인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약수터가 있는 나무 판자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귓 가로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정신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가인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생각했다. 어,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지혜가 몬스터로 변 하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이런 만화 같은 일이!! ' 본부에 연락하면… ' 그래. 본부에 연락하는 거야! 그러면 대처 방안을 강구해 주겠지.그래! 그 러면 지원도 올테고 상황에 맞는 작전도 지시해줄거야! 그래.연락하자! 그래 서 저 괴물을 없애는 방법을… ' 아,안돼-----!! ' 가인은 순간 소름이 끼쳐 비명을 흘릴 뻔한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저 건 괴물이 아니야! 지혜야! 지혜가 몬스터로 변한 거란 말이야! 본부에 연락 하면 분명 몬스터의 모습을 한 지혜는 죽을 거다! 그 진 사령관이 뭐라고 했 는가?! 몬스터의 섬멸이 우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안돼! 절대 연락을 해선 안돼! 내 손에서 해결을 해야해! 본부에서 개입 을 하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한다구…! ' 가인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지만… 하지만… 내 손에서 해결을 한 다고 해도 어떻게 해야… - 퍼거걱!! " 으앗?!! "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이 등 뒤로 대고 있던 판자 가 부서지며 몬스터의 나무 줄기가 습격한 것이다. 그 공격이 얼마나 날카로 웠는지 가인의 어깨죽지가 찢어지며 핏줄이 그어졌다. 하지만 가인은 아픔도 느낄 새가 없이 땅을 구르며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래. 우선 A.I 슈츠부터 장착하자! 가인은 무전기를 찬 자신의 왼손을 반원으로 그리며 소리쳤다. " 변신, 피스 블루! " - 파앗! 가인의 등 뒤로 그림자 처럼 떠오르는 검은 오라의 전투복. 그것은 마치 원 래 가인이 입고 있기라도 했던 것 처럼 정확한 사이즈로 가인의 몸에 장착되 었다. A.I 글러브와 A.I 부츠, 그리고 A.I 헬맷까지.더구나 자신의 손의 3배 는 됨직한 크기의 헤븐 스매쉬가 가인의 오른손에 장착되었다. 가인은 장착 된 A.I 컴플릿 세트에 오라를 불어 넣었다. << 우우우우우우…!! >> 검은색의 A.I 슈츠가 가인의 오라로 푸른빛을 띄자, 나무 괴물은 신음을 내 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거칠게 가인을 향해 나무 줄기를 날리는 몬 스터. 가인은 A.I 슈츠에 오라를 불어 넣고 몸을 날렸다. - 콰직! 무서운 속도로 가인이 서있던 위치에 날아와 박히는 나무줄기들. 그러나 가 인의 몸은 이미 그곳으로부터 3m의 공중에 떠있었다. 과연 A.I 부츠. 평상시 와는 차원이 다른 도약이었다. 더구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움직 임. 가인은 가볍게 공중에서 몸을 돌려 지상에 착지했다. 좋아. A.I 슈츠만 있으면 어느 정도 내게도 승산은 있어.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내자 자신감이 붙는 가인이었다. ' 좋아! 내 손에서 해결을 본다!! 지혜, 조금만 기다려!! ' 그 괴물을 몸에서 떼어내 줄테니까!! 가인은 이를 악물며 나무 괴물에게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무 줄기 몇 개가 가인을 공격했지만,가인은 가볍게 피 해내며 계속 괴물의 안쪽으로 달려들어갔다. 좋아. 네 놈의 중심부에 천공권 을 먹여주마!! 가인의 헤븐 스매쉬로 오라의 기류가 모여 들었다. " 으랴아아아앗!! " 천공권을 휘두르려는 가인. 하지만 몬스터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수십개 의 나무 줄기로 도저히 가인에게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가인은 할 수 없이 천공권의 조준을 괴물의 몸체에서 나무의 줄기로 수정했다. 우선 이 귀찮은 잔가지들 부터 쳐내 주마!! " 천공권-----!! " 나무의 줄기들로 휘둘러지는 가인의 주먹. 천공권의 회오리 줄기가 사정 없 이 줄기들에게 날아들었다. 갈기 갈기 찢어지는 나무 줄기들. 역시, 헤븐 스 매쉬로 증폭된 천공권의 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 었다. 좋아! 우선, 놈의 공격 수단은 제거되었고…! - 푸확!! 하지만 부러진 줄기들 사이로 터져나오는 선혈. 그것은 너무나도 붉게 가인 에게 쏟아져 내렸다. 피? 몬스터의 피인가?! 마치 인간의 피 같이 붉은…! ' 혹시, 지혜의…?! ' 가인은 흠칫 몸을 떨며 괴물을 바라보았다.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피가 흐르 는 나무 줄기를 너울거렸다. 그 덕에 마치, 괴물과 가인의 주위로는 피의 비 가 내리는 것 같았다. 가인은 자신의 몸에 흘러내리는 괴물의 혈액에 기겁하 며 몸을 뒤로 물렸다. " 으,으아아아앗!!! " 피! 붉은 피다! 마치 사람의 것 같이 붉은 피!! 끔찍해!! 가인은 마스크 사 이로 스며 들어오는 피 비린내에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어떡하지? 지혜에 게 상처를 입힌 건가?! 지혜가 다친 거야? 이 정도 출혈이라면 일반 사람은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아아…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은 거야?!! - 퍼억-----!!!! " .........?!!!! " 순간, 가인의 옆구리를 가격하는 괴물의 나무 줄기. 이 갑작스런 기습에 가 인은 반응도 하지 못하고 숲의 저편으로 나가 떨어졌다. 숲의 한 고목에 등 을 부딪히며 땅바닥에 떨어지는 가인. 지독한 고통이 전신으로 밀어 닥쳤다. " 으,으아… 크학! " 가인은 마스크도 열지 못하고 피를 토해냈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 다. 코 속으로 피가 엉켜 들어가 숨 쉬기도 힘들었다.하지만 으스러진 것 같 은 갈비뼈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A.I 슈츠의 방어력으로 뼈가 부러지지는 않 았겠지만, 이 고통은 장난이 아닌 것이다. 아니, 정말 갈비뼈가 부러졌을지 도 모르지…. 가인은 지독한 통증에 바닥을 할퀴며 몸을 뒤틀었다. 숨 쉬기 가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다시 피를 토할 것 같다. 우선, 이 마스크를 벗어 야… " 제,젠장…! 쿨럭! " 가인은 A.I 헬맷을 뒤로 젖히며 다시 땅바닥에 피를 토해냈다. 허억… 허억 … 한바탕 피를 토해내고 나니 다시 제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가인은 부들 부들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일어나,유가인! 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 우우우우우…! >> 수풀을 헤치며 나무 괴물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거대한 모습을 가인에게 드러내는 몬스터.앞전 가인의 천공권에 당한 상처는 어느새인가 재생되어 있 었다. 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다,다행이다…. 지혜에게는 피해가 없는 모양인데… ' 제 코가 석자인데, 그것도 자기를 죽일려는 상대를 걱정하는 가인이었다.가 인은 얻어맞은 옆구리를 감싸며 뒤쪽의 수풀로 달리기 시작했다.이곳은 너무 협소했다. 더구나 군데 군데 자라난 나무들 때문에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기 에는 힘들겠지만 가인,자신도 몬스터를 공격하기에는 더더욱 힘든 장소였다. 좋아. 우선, 뒤쪽의 강가로 가고 보자. 그곳에서 결판을 내는 거다. << 우우우우우…! >> 가인이 도망치자 그 뒤를 무섭게 뒤따르는 나무 괴물. 걸음을, 그것도 마치 달리듯이 걸어오는 나무라니….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가인은 치를 떨며 숲 을 벗어나 강으로 뛰어 들었다. 수심이 얕은지라 자신의 무릎까지 물은 차올 랐다. " 일단 강으로 끌고 나오기는 했는데… " 이 다음은 어쩐다지? 가인은 혀를 차며 괴물이 나올 수풀을 노려보았다. 천 공권을 쓰다간 괴물의 몸 속에 있는 지혜가 다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떡한 다지? 천공권 외에 내게는 놈을 공격할 어떠한 수단도 없는데…. << 우오오오오!! >> 괴성을 지르며 수풀을 헤쳐나오는 나무 괴물. 나왔냐, 이 자식아?! 가인은 이를 악물며 오라를 끌어 모았다. 어떻게든 해야 했다. 방법은 없지만 어떻 게든 해야…! 가인에게 다시 나무 줄기들을 날리려는듯 괴물은 그 몸을 꿈 틀거렸다. ' 어떻게든 지혜 만은…!!! ' - 푸확!! 그때, 날카로운 파육음과 함께 강물로 첨벙 첨벙 떨어지는 나무 줄기들. 붉 은 선혈을 흘리며 몬스터는 비명을 질렀다. 가인은 놀란 눈으로 몬스터를 바 라보았다. 어,어떻게 된 거지?! 왜 갑자기 나무 줄기들이…! 하지만 가인은 볼 수 있었다. 허공을 수 놓으며 자신의 앞으로 착지하는 한 인영의 모습을. 붉은 A.I 슈츠를 입은 오라 소드의 검사. 피스 레드였다. 가인은 기사회생한 기분으로 그녀를 불렀다. " 마리 선배?! 어,어떻게 여기를…!! " " 유리가 알려줬다. 다행히도 늦지는 않았군. " 마리는 자신의 옆에 어느새인가 서있는 피스 핑크, 이유리를 가리켰다.가인 은 그제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알 수 있었다. 유리가 내 사념을 읽고 마 리 선배와 달려와 준 거구나! 가인은 마리와 유리가 옆에 있어주는 것 만으 로도 새삼 힘이 솟아 나는 것을 느꼈다. 마리는 눈 앞의 거대한 나무 괴물을 노려보며 말했다. " D-급 몬스터 트린트(Treant)로군.나무 줄기를 이용한 공격이 매섭지만,그 리 위협적인 것은 아닐텐데… 어째서 고전을 하고 있었던 거지? " 마리는 책망하듯이 가인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 괴물은 가인의 천공권이면 충분히 섬멸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가인은 그녀가 묻는 의 도를 잘 알고 있었기에,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하,하지만…! 저 괴물 속에는 지혜가! 우리 반의 반장이!! " " ......뭐? " 가인의 말에 마리는 당황한 안색으로 괴물과 가인을 번갈아 보았다.무슨 소 리지,그게? 괴물 속에 누군가가 들어있다는 건가? 지혜? 반장이라고? 마리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이틀 전 점심을 먹었을 때 보았던 가인의 반 반장이라 는 검은 뿔테 안경의 소녀가 마리의 뇌리에 떠올랐다. 혹시… 그녀인가? 그 때 그런 둘에게로 유리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오빠 말대로야…. 괴물의 몸 안에 사람이 있어.어째서…? 어떻게 이런 일 이? " 가인은 그런 그녀의 말에 긴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 지혜의 사념이 읽혀지는 거니,유리야?! 어떻게 된 거야? 지혜는 어떻게 된 거야?! " " 몰라…. 살아있기는 한 것 같지만 이건‥. " 유리는 연신 자신의 머리 속에 울려퍼지는 지혜의 사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에게서는 지독한 욕망과 바람의 사념이 읽혀지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증폭된 감정의 회오리였다. - 헤어지고 싶지 않아.헤어지고 싶지 않아.헤어지고 싶지 않아.헤어지고 싶 지 않아‥!! - 뭘? 뭐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거야? - 방해하지마! 영원히 그의 옆에 있겠어! 방해하는 것은 모조리 없애버릴거 야!! 헤어지고 싶지 않아----!! " .........!! " 유리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그런 유리를 가인이 놀라며 부축해주었 다. " 유리야? 왜 그러는 거야?! " " 대화를‥ 시도해 볼려고 했지만… 안돼‥. 너무 흥분하고 있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 감정의 충격이 컸는듯, 유리는 연신 가인의 품에서 몸을 떨었다. 가인은 그 런 유리를 끌어안으며 트린트라고 하는 나무 괴물을 노려보았다.어째서… 어 째서 지혜의 몸에 나타난 거지,네 녀석은?!! 어째서!! 그런 가인과 유리의 앞을 막아서는 마리. 그녀는 수중의 오라 소드를 옆으로 늘어뜨리며 괴물에 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가인은 마리에게 소리쳤다. " 마,마리 선배?! 뭘 하려는 거죠?! 설마‥ " 설마 지혜를 죽일려는 것은?!! 그런 가인의 외침에 마리는 뒤 돌아보지 않 으며 나직히 답했다. " ...... 어쩔 수 없어. 여기서 몬스터를 섬멸하지 못하면 학교의 학생들이 위험하다. " " 그런!! 안돼요!! 마리 선배!! 그것만은 절대 안돼----!! " 가인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마리는 이미 괴물에게로 오라 소드를 들 어올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가인은 이 몬스터를 절대 로 해치울 수 없을 것이다. 이대로는 학교의 학생들 뿐 아니라,이 자리의 모 두가 다 위험할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라도!! ' 너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한이 있더라도----!! ' - 스칵!! 붉은 섬광이 허공에 번쩍이며 트린트의 가지들을 잘라 나갔다. 붉은 선혈이 하늘을 수 놓으며 강으로 떨어져 내렸다. 괴성을 지르는 트린트. 그 소리는 마치 가인에게 지혜가 비명을 지르는 것 처럼 느껴졌다. 가인은 몸을 부들 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그만둬‥ 그만둬요‥ 그만둬요, 마리 선배!! 그러다 간…정말‥. 정말 지혜가 죽는다구요-------!!!! << 우우우우우-----!!! >> 괴성을 지르는 트린트를 보며 마리는 아랫 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녀 또한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마리는 수중의 검을 추스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래. 이 일격으로 끝내는 거야. 고통 없이 편하게 보내 주겠어‥!! 그러니까!! " .........!! " 휘둘러진 마리의 오라 소드. 순간,마리의 눈 앞으로 검은 뿔테의 안경을 쓰 며 쑥스럽게 웃어보이는 지혜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리는 흠칫 놀라며 자신 도 모르게 출수를 멈추었다. ' 이런 바보 같은‥!! ' 아차 하는 심정으로 재차 검을 휘두르려는 마리. 하지만 때는 늦었다.그 잠 깐의 틈을 놓칠 몬스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트린트의 나무 줄 기들이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마리는 이를 악무며 괴물의 공격을 노려보았다. - 퍼억!! 하지만 그 순간, 그녀와 트린트의 사이로 끼어드는 한 남자. 유가인이었다! 트린트의 줄기에 가격당한 가인은 피를 토하며 허공을 날아 강가에 처박혔다. 마리는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 유가인?!!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을‥!! 정신 차려!! " " 쿨럭‥! 마,마리 선배‥! " " 말하지마! 상처가 벌어진다!! " " 지혜를 다치게 하면‥ 쿨럭!! ‥안돼! 절대! 절대로‥!! " 마리의 손목을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외치는 가인. 마리는 비통한 표정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하지만‥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저 녀석에게 두 손 놓고 당할 수도 없는 노릇. 마리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 우, 우우‥ 으으‥ >> 그때, 신음을 내지르기 시작하는 트린트. 가인과 마리, 유리는 갑작스런 괴 물의 변화에 트린트를 주시했다.트린트는 몸을 뒤틀며 가운데의 몸체를 벌리 고 있었다. 굵은 나무 줄기들이 헤쳐지며 모습을 드러내는 트린트의 내부.그 곳에는 나무 줄기에 몸이 기생당한 지혜가 매달려 있었다. 가인은 마리의 부 축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 지,지혜?!! " << 가인아‥ 미안‥ 미안해… 나‥ 어째서‥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여는 지혜. 가인은 다시 각혈이 나올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 걱정마!! 걱정마, 지혜야!! 구해줄테니까! 우리가 구해줄테니까…!!! " << 가인아… >> 하염 없이 울면서 가인을 바라보는 지혜.입가에 피를 흘리며 절실한 표정으 로 자신에게 소리치는 그가 보였다. 앞 전의 일들도 서서히 기억이 났다. ' 내가… 내가 가인이를 저렇게 만든 거구나…. 내가…. '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가인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 고마워. 언제나…언제나 난 너한테 신세만 지는 구나. 이제 충분해. 이제 괜찮으니까,가인아. 그러니까… ' 그러니까… 지혜는 눈물 섞인 웃음을 지으며 가인에게 말했다. << 가인아‥ 날… 죽여줘…. >> " .........!!!! " " 안돼… 이건… 이런 건 인정할 수 없어!! " 가인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창백해진 얼굴로 지혜를 바라보며 소리쳤다.지 혜는 온 몸이 나무에게 기생당한 채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 다. 지혜… 반장… -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 …나 이번 운동회가 끝나면 전학 가거든…. 그래. 전학을 가기 전에 뭔가를 해주고 싶었어. 네 말대로 추억을 만들어주 고 싶었어. - 그건… 가인이는 왠지 얘기하기 편하니까. 언제나 숫기 없이 반 아이들 앞에서 제대로 얘기 조차 못하는 반장이었지만 나와 있을 때는 여느 다른 아이들 처럼 재밌게 웃으며 얘기를 했었지.그래… 나도 너와 얘기하는 게 편했어. 분명, 전학 때문에 자주 학교를 옮기지 않았 더라면 친구도 많이 만들었을 거야, 지혜 넌‥.난 그런 네 모습이 너무 안타 까웠어. 그래서 나만은 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싶었는데…. 그랬었는 데… - 좋은 추억… 많이 만들자. 그런 소리까지 해놓구선.바보 같이 있는 잘난척 없는 잘난척은 다 해놓구선. 그래 놓구선…!! << 가인아… >>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가인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지혜의 모습. 가인은 주먹 을 있는 힘껏 쥐었다. 안돼. 반드시 구해내겠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슬픈 얼굴 하지마. 그런 슬픈 말은 하지마,지혜야. 제발… 제발 울지마!! << 우,우으으으‥ >> 그때, 몸을 뒤틀기 시작하는 지혜. 지혜는 괴로운듯 격하게 몸을 흔들며 입 에 개거품을 물었다. 그런 그녀의 변화에 섬뜩한 느낌을 받으며 주시하는 가 인들. 뭐,뭐야? 왜 저러는 거지? 지혜가 왜 저러는 거야? 그때 지혜의 뒤쪽 으로 나무 줄기들이 일어나며 그 몸을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곧 하나 의 얼굴을 형성해 내었다. " 뭐,뭐야 저건?! " 가인은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얼굴? 얼굴이 만들어졌어? 더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얼굴 형상을 띄고 있는 것이 커다란 두 개의 붉은 눈을 뜨며 입술을 달싹인다는 것이었다. << 이, 이 여자‥ 내 먹이‥ 크힉‥ 내 먹이‥ >> 앞전 지혜의 목소리와는 비교도 안되게 거칠고 듣기 싫은 목소리가 트린트 에게서 흘러나왔다. 괴물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놈은 붉은 눈을 굴리며, 지 혜의 뒤쪽에서 그 얼굴을 드러낸채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가인은 치솟는 분 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 네 놈이‥ 네 놈이 지혜를!! " << 크힉‥ 크히힉‥ 먹이. 먹이야. 맛있어… >> 지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트린트의 얼굴. 순간, 그의 앞에 있던 지 혜가 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뒤로 몸을 꺾는 그녀. - 파파팍!! 그런 지혜의 몸 속에서 수 많은 나무 가지들이 돋아났다. 그 바람에 그녀가 걸치고 있던 체육복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녀의 알몸이 드러나자 가인은 더욱 끔찍한 현실을 목격하고 말았다. 지혜의 온 몸에서는 나무에 기생 당한 듯 수 많은 가지들과 줄기들이 돋아나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망연자실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혜는 연신 괴로운듯 식은 땀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몸을 떨고 있었다. 작은 소녀의 몸에서는 쉴 새 없이 새로운 가지들이 그 몸 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 지혜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며 즐거운듯 트린 트의 얼굴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 그만해에에에에엣--------!!! " 가인은 발작을 일으키며 괴물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개 자식!! 죽여 버리겠 어!! 죽여 버리겠어!!! 그때, 그런 가인의 몸을 눌러 말리는 마리.가인은 이 를 갈며 마리를 돌아보았다. 이거 놔요, 선배!! 저 개자식을 죽여버리겠어!! 말리지 마라구요!! 마리는 그런 가인의 분노한 표정을 마주하면서도 묵묵히 그의 A.I 슈츠 속에 주사 바늘을 찔러넣었다. 갑작스런 주사 바늘의 아픔에 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 윽?! 마리 선배‥ 무슨!! " 가인은 뒷 말을 흐렸다. 마리는 자신의 몸에 휴대용 포션을 주사한 것이다. 주사한 부위로 부터 몸 전체로 퍼져가는 알싸함. 가인은 자신의 코에서 흘러 내리던 코피가 어느새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에게 마리가 나지막 히 입을 열었다. " 참아…. 방법이 생겼으니. " " ......예?! " 방법? 무슨 방법? 가인은 의아해진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가인의 마음 속으로 유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오빠. 진정해. 반장의 몸에서 저 괴물을 떼어낼 방법을 찾아냈으니까. - 무,무슨? 저 괴물을 지혜에게서 떼어낼 수 있다고? …저,정말? 정말이야?! - 그래. 유리의 목소리에 가인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유리는 핑크 빛의 오라를 진하 게 발하며 능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유리의 오라 능력 중 하나인 마인드 디 텍트(Mind Detect)였다. 대상의 정신 자체를 스캔하여 분석해내는 능력.그녀 는 이 능력으로 적 몬스터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 저 괴물과 반장은 완전히 동화된 게 아니야.단지 숙주로서 기생당해 있는 것일 뿐. 기생수를 죽여버리면 모든 건 해결돼. 그리고… 유리는 가인에게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 기생수는 반장의 뒤쪽에 있는 저 얼굴. 저 얼굴이 괴물의 핵이야. 저것만 없애버리면 반장을 구할 수 있어…! 가인은 주먹을 쥐었다. 저 얼굴만 없애버리면 된다고!! 그렇단 말이지!! 가 인은 암흑 속에서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저 녀석만 날려버리면 반장을 구 해낼 수 있다는 건가! 다행이다! 방법이 있었어!! 하지만 그런 가인에게 유 리는 주의를 주듯 말했다. - 그러나 조심해야돼. 저 얼굴 외의 부분을 공격했다간 반장까지 위험해질 지도 몰라. 얼굴 근처의 조직은 이미 그녀와 상당히 동화되어 있는 상태 이니까. - 으음… 그런…. 가인은 자신의 헤븐 스매쉬를 내려다 보았다. 분명 천공권 한 방이 면 저 기생수를 없애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그 충격은 지혜에게 까지 미칠 게 분명했다. 내가 공격하는 것은 무리란 말인가? 이렇게 되면 모처럼 놈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한들 방법이 없잖아? ' 아니… 방법은 있다! ' 가인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마리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이었 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인의 부축을 풀은채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의 오 라 소드가 붉은 빛을 발했다. 마리는 가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 걱정마. 반드시 구해낼테니까. "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으니 반드시 구한다.마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인은 그런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부탁해요,마리 선배… 제발‥ 제발‥ ' 제발 지혜를 구해줘요!! ' - 파앗! 가인의 마음 속 외침과 동시에 몸을 날리는 마리. 그녀의 공세를 막기 위해 트린트는 수십개의 나무 줄기를 날렸지만, 그런 공격으로 마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 파파팟!! 붉은 피를 터뜨리며 강물에 떨어지는 수십개의 나무 줄기들.가히 기술의 명 칭에 부끄럽지 않는 섬광과도 같은 공격이었다. 검이라면 녀석의 얼굴 외 부 분에 닿지 않고 놈만을 공격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가능한 공격은 바 로‥ ' 찌르기…! ' 마리는 날아드는 줄기를 뛰어 넘으며 줄기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재빠르게 줄기 위를 달리기 시작하는 그녀. 마치 무게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 이었다. 그렇게 마리는 트린트의 얼굴 부분으로 다다르고 있었다. 마리는 오 라 소드는 뒤로 길게 빼 올리며 중얼거렸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사식(四式) 단월(斷月) " 무영신풍류의 찌르기. 모든 것을 가른다는 이 기술은 물에 비친 달을 반으 로 가를 정도의 쾌속을 자랑한다. 마리의 오라 소드는 붉은 검신을 일직선 으로 흘리며 트린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이대로 네 녀석의 얼굴에 이 검을 박아주마!! - 스스스스‥ 하지만 그런 마리의 공세 앞으로 숙주인 지혜의 몸을 들어올리는 트린트.마 리는 당황하며 검을 거둘려고 노력했다. 이런 약은 자식!! 설마 숙주의 몸을 방패로 삼을 줄이야!! 이미 단월의 위력이 깃든 오라 소드를 멈추기에는 무 리가 있었다. 마리는 이를 악물며 기술을 거두기 위해 노력했다. ' 제,제기랄‥!! ' - 파파파팍!! 그런 마리의 몸으로 순식간에 휘감겨 오르는 트린트의 줄기들. 수십 가닥의 줄기들이 마리의 전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비명 을 질렀다. " 으‥ 아아아아아악---!!! " " 마리 선배!! " 가인은 놀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마리의 몸을 휘감은 나무 줄기들 은 무서운 악력으로 그녀를 조이고 있었다. 마리의 몸 전체에서 우드드득 거 리는 근육과 뼈의 마찰음이 소름끼치도록 울려퍼졌다. 마리는 힘 없이 수중 의 오라 소드를 강물에 떨어뜨렸다. " 으아아아아아-----!! " 가인은 앞전의 상처로 욱씬 거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트린트에게 달려 들었다. 헤븐 스매쉬를 끼지 않은 왼손으로 오라를 끌어 모았다.마리 선배를 빨리 저 놈의 수중에서 풀어내야해! 저대로는 마리 선배가 죽는다!! - 파앗!! 마리 선배를 조이고 있는 나무 줄기로 뛰어오른 가인. A.I 슈츠의 도약력으 로 충분히 3M 높이에 있는 줄기 뭉치들에게 뛰어오른 그였다. 가인은 서둘러 마리를 조이고 있는 줄기 뭉치들을 오라가 모인 손으로 힘 있게 잡아 당겼다. " 으‥ 으랴아아압!! " - 푸확!! 가인의 손에 의해 잡아 뜯어지는 줄기들. 오라가 닿은 부위가 즉시 말라 비 틀어지는 트린트의 줄기였다. 가인은 정신 없이 줄기 뭉치를 뜯어내며 그 안 에서 압사당할 뻔한 마리를 끌어올렸다. 그녀는 용케도 기절하지는 않은 듯 신음을 흘리며 가인의 품에 고개를 떨구었다. 가인은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 마리 선배?! 괜찮아요? 정신 차려요!! " " 으윽‥ " 뼈가 으스러진 아픔을 참으며 신음을 삼키는 마리.가인은 그런 그녀의 상태 를 살피며 당황했다. 안돼! 마리 선배!! 이대로 그녀를 두면 위험하다. 그래! 빨리 포션을 놔줘야‥ - 퍼억!! " 으앗-!! " 나무 줄기의 휘두름에 등짝을 얻어 맞고 강으로 떨어진 가인과 마리.마리의 상태에 당황한 나머지,자신들이 괴물의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을 까 맣게 잊고 있던 가인이었다.가인은 재차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나무 줄기들을 향해 오라를 집중했다. - 파팡!! 가인의 앞으로 휘몰아치는 푸른 오라의 회오리. 트린트의 공격은 그렇게 가 인이 형성한 오라의 막에 의해 튕겨나갔다. 가인은 오라의 막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자신의 품 안에서 휴대용 포션을 꺼내 신음을 흘리는 마리에게 주사 했다. 그런 그들의 뒤로 유리가 다가오며 소리쳤다. " 오빠? 마리‥ 괜찮은 거야?! " 마리의 상세를 걱정하며 묻는 유리.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포션의 효과는 탁월했기에 마리는 고통이 차츰 가시는듯 숨을 고르게 쉬었다.마리는 가인을 올려다 보며 힘겹게 말했다. " 안돼‥ 이대로는… 지원을 기다려야… " " ......... " 그런 마리를 잠시 바라보던 가인은 자신의 뒤쪽으로 서 있는 유리에게 마리 의 몸을 건냈다. " 유리야,마리 선배를 잠시 부탁해. " " 오빠? 어떻게 할려고… " 마리를 엉겹결에 건내받으며 묻는 유리. 가인은 인상을 굳히며 근처에 떨어 져 있던 마리의 오라 소드를 주워 올렸다. 오라의 막에 연신 부딪히는 나무 줄기들의 소리 만이 주위에 울려퍼졌다.가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유리에게 말 했다. " 내가 이 오라 소드로 저 녀석을 없애 버리겠어‥! 오라의 막을 풀테니까 어서 뒤쪽으로 몸을 피해! " " 오빠!! " 그런 가인에게 소리치는 유리. 그녀의 품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마리도 소리쳤다. " 안돼…가인! 그 오라 소드는 오라 패턴 레드(RED)의 능력에 맞춰져 있는 무기야. 절단의 힘이 없는 너에게는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없어…! " 오라 패턴 레드(RED)는 모든 것을 베어내는 능력. 당연히 그녀 외의 사람이 오라 소드를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가인이 들고 있는 오라 소드에 게서는 마리가 평상시에 사용할 때와 같은 긴 붉은 검신을 볼 수 없었다. 단 지 평범한 단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오라 소드. 가인, 오라 패턴 레드가 없 는 이상은 오라 소드에서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생성해낼 수 없다고! - 휘오오오오…!! " …아? " 하지만 마리는 눈 앞에 벌어진 현상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인이 들 고 있던 오라 소드에서 긴 검신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그것은 마리가 사 용할 때의 붉은 검신이 아닌, 푸른 회오리가 뭉쳐서 생성된 칼날이었다.마리 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바람의… 검날‥? " 그런 마리의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 가인은 바람의 검날이 생성된 오라 소 드를 들어올렸다. 천공권 때와는 다른 이미지를 가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회 오리를 내뻗는 것이 아닌, 다듬어 올린다는 느낌. 상대를 베어낼 수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을 가지며 오라 소드에 오라를 전개했더니 이런 현상이 나타 난 것이다. 좋아. 어떻게 해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거라면 저 괴물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어! 가인은 자신의 뒤에 서있는 유리와 마리에게 소리쳤다. " 오라의 막을 풀테니 어서 뒤로 피해요!! 어서요!! " " 아,응‥. "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괴물의 공격 범위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가인은 오라 의 막을 풀며 심호흡을 했다. 좋아! 간다! - 츄확!! 오라의 배리어가 사라지자 마자 기다렸다는듯이 공격하는 트린트의 나무 줄 기 공격. 가인은 A.I 부츠에 있는 힘껏 오라를 불어 넣으며 도약했다. 나무 줄기들을 뛰어 넘으며 가인은 5M 가까이 도약했다. 가인은 눈 앞에 펼쳐진 높이에 한순간 오금이 저렸지만, 그것도 잠시 뿐. A.I 슈츠의 오리하르콘이 가진 중력 조절에 의해 가볍게 트린트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다. << 우우우우우‥! >> 갑자기 자신의 머리 위를 정복한 인간에게 위협을 받은 트린트.트린트의 얼 굴이 일그러지며 다급한 비명성을 내질렀다. 가인은 이를 갈았다. 위에서 공 격하면 지혜를 방패막이로 사용하지는 못할테지!! 다시는 그 따위 치사한 짓 거리는 못하게 해주마!! 가인은 트린트의 얼굴에게 오라 소드를 앞세우며 달 려들었다. " 으아아아아아아아!!! " 압축된 회오리의 집합체에서 웅웅 거리는 진공음이 울려퍼졌다.그리고 바람 의 칼날은 정확히 괴물의 미간을 파고들었다. 푸확! 괴성을 내지르는 트린트. << 우오오오오오!! >> " 죽어!! 죽어 버려----!! " 가인은 발버둥을 치는 트린트의 머리 위를 두 발로 조이며 박혀 있는 오라 소드를 있는 힘껏 비틀었다. 헤집어지는 트린트의 얼굴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와 가인의 몸을 적셨다. 거칠게 몸을 뒤흔드는 트린트.하지만 가인은 끈질 기게도 달라붙어 오라 소드를 더더욱 깊이 괴물의 머리 속으로 밀어넣었다. " 죽어어어어어어!!! " << 우,우우‥ 우우우--- >> 천천히 넘어가는 트린트의 육중한 몸체. 그것은 마치, 나무꾼에게 도끼질을 당해 기우뚱 거리며 넘어가는 거목의 모습이었다. 가인은 비틀거리며 미처 괴물에게서 떨어지지 못한채 트린트와 같이 강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 투우우웅---!!!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마리와 유리는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 보다가 순간, 비명을 질렀다. " 가인!! " " 오빠!! " 가인과 트린트는 강물에 잠긴채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융합(融合) 형이로군요. 이번 것은…. " 시민은 강물에 떠있는 몬스터의 잔해를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앞전의 나 무 괴물 트린트는 가인의 일격에 핵을 손상 받고 온 몸이 산산조각나 버렸었 다. 트린트의 사체는 일반 목재와 전혀 다름 없는 구성 물질로 변해 강가의 이곳저곳에 떠 있었다.시민의 말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진우는 한숨을 내쉬 었다. " 와프 입자 수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 군요.이런 융합형은 지금 까지와 는 다른 경로로 3차원에 나타난듯 합니다. 에휴∼ 그나저나 사람의 몸에 기생하는 몬스터라니…. " 진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두 사람이 지원 요청을 받고 사건 현장으 로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전말은 정말이지 최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우는 피스메이커의 뒷 처 리반들이 메리 호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곧 응급 처치를 받고 숲 속에 누워있는 이 사건의 피해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름 안지혜. 가인 이 속한 한성 고등학교 1학년 3반의 반장.그녀는 D-급 몬스터 트린트에게 기 생당한채 몬스터로 그 모습을 변화시켰으나, 현재는 간신히 괴물에게서 벗어 나 자유의 몸이 되어 있었다. 뒷 처리반이 어디선가 가져온 한성 고등학교의 여자 체육복이 알몸이었던 지혜의 몸에 입혀져 있었다. 그녀는 괴물과의 동 화 작용에 대한 쇼크 때문인지 여지껏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민은 진우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탄식했다. " 앞으로도 번번히 이런 일이 생기겠군요. 다행히 이번에는 피해자를 구해 낼 수 있었다지만 다음 번은 장담할 수 없으니… " " ......... " 시민의 말에 진우는 안타까운 눈으로 지혜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이번 에는 그녀의 주변에 멍하니 앉아 있는 가인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앞전의 전 투에 지친듯 허탈한 표정으로 강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 한, 창백한 안색이었다. 그런 가인에게로 진우는 천천히 다가가 언제나 처럼 넉살 좋게 입을 열었다. " 여∼ 수고했어,소년. 소년이 노력한 덕에 피해자는 아무 이상 없이 무사 하게 구출되었어. 하하∼ 이제는 신참이라고 깔보지도 못하겠는 걸∼ 정 말 수고 많았다. 정말정말∼ 정말이야. " " ......... " 아무 대답이 없는 가인. 진우는 그런 가인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가인의 주변으로는 어느새 A.I 슈츠를 모두 해제한 마리와 유리, 그리고 시민이 다 가와 있었다. 마리가 가인에게 말했다. " 가인, 넌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까…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 어. 몬스터가 그녀에게 기생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 " ......... " 여전히 말이 없는 가인. 그러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반장은… 괜찮을까요‥? " 무슨 의미에서 하는 말이었을까. 그 말에 대답한 건 시민이었다. " 걱정말아요, 가인 씨. 그녀의 몸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어요. 완전히 몬스터에게서 벗어난 거죠. 앞으로 생활하는 데에는 지 장이 없을 테니까 안심해요. " 시민은 따뜻하게 웃으며 가인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곧 시민은 입 가의 미소를 풀며 걱정스런 얼굴로 가인을 불렀다. " ‥가인씨? " 가인의 어깨는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시민의 손에 닿아있는 가인의 어깨는 차가웠다. 단순히 강물에 빠져서 체온이 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시민이 의아 해 하며 가인을 재차 부르자,그제서야 소년은 옅은 떨림이 섞인 목소리로 말 했다. " 정말‥ 괜찮을 까요‥? 이렇게 떨리는데‥ 아직까지도 아까의 공포가 떠 나질 않는데… " 트린트의 공격에 망신창이가 되어 싸운 가인.온 몸에서 지독한 고통을 느끼 며 정신 없이 싸웠었다,정말이지…. 기생당했던 지혜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 고, 그런 그녀의 뒤로 나타난 붉은 눈의 기생수도 떠올랐다. 그 괴물의 웃음 소리가 귓가를 떠나질 않았다. 무서웠다. 두려웠다.당시에는 괴물에 대한 분 노로 느끼질 못했는데 전투가 끝난 뒤에야 실감이 오는 것이다. 죽을 뻔했던 상황도 한 두번이 아니었고, 잘못했으면 지혜까지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 각하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리는 가인이었다. " 나도…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두려움 때문에 몸의 떨림이 멈추지를 않 는데… 그런데 정말… 정말 지혜는 괜찮을까요? " 가인은 망연자실하게 눈을 들어 모두를 돌아보았다. 진우와 마리,유리와 시 민은 어두운 안색으로 그런 가인을 마주 보았다. " 그렇게 무서운 경험을 당했는데… 그녀는 그런 기억을 가진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괴물이 되어버린 기억이라니…. " 자신이 무서워서 가인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 쓰러져 있 는 지혜가 그는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들은 진우는 한 숨을 쉬며 가인에게 말했다. " 전에도 한번 얘기가 나왔었지? 몬스터를 접한 민간인에게 최면을 걸어 기 억을 지워버린다는 얘기 말이야…. " " ......그런. " 가인은 진우를 돌아보았다. 소년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 자신도 기억하고 있었다. 초반에 피스 메이커에 들어와 자신과 진 사령관이 말다툼을 하게 된 원인이었지 않은가,그건…. 자신의 친구 재영의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말에 불 같이 화를 냈었던 가인. 그때 당시, 그는 남의 기억을 함부로 지워버리는 피스 메이커의 제 멋대로인 방식을 비판했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의 가 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왜 그런 방법을 써야만 했던 것인지 지금은 절실히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우는 혼란스러 워 하는 가인에게 말을 이었다. " 지금 당장에라도 그녀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어. " " 어, 어떻게요? " 가인의 물음에 진우는 유리를 가리켰다. " 유리 양의 오라 능력은 마인드 디텍터(Mind Detector). 타인의 마음에 영 향을 줄 수도 있지. 더구나 가사 상태에 빠져 있는 상대라면 더더욱 손쉽 고 말이야.그 덕에 지금껏 우리는 왠만한 목격자들의 기억을 손쉽게 지워 올 수 있었어. " " 그런…! " 가인은 놀란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그런 가인의 눈빛에 우울한 얼굴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맞아,오빠. 하지만‥ 하지만 억지로 행한 것은 아니야.그 사람이 눈 앞에 닥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몬스터를 목격한 현실을 부정할 때만‥ 그 럴때만 그랬던 거야‥. 나도… 사실은… 정말이지 그렇게 사람의 기억을 함부로 지우는 짓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러니까… " 유리는 가인이 자신을 책망할까봐 끝에 가서 목소리를 떨었다. 가인에게 미 움받기는 싫었다. 그에게서 경멸의 눈초리를 받으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하 지만 그런 유리의 걱정과는 반대로 가인은 그녀를 책망할 생각이 전혀 없었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몬스터와 조우했던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혼란을 일으킨다. 그것은 곧 여러 사람들에게 퍼져, 나중에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의혹과 불안을 증가시키겠지.가인은 쉬어버 린 목소리로 유리에게 물었다. " …그 기억을 지운다는 거‥ 가능한 거야? 지혜에게… " " 응. 그렇지만… " 유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 반장 같은 경우에는 몬스터와 직접 동화되었던 것이기에, 동화된 기억을 완전히 지우려면 평상시의 사람보다 기억을 더 많이 지워야 해…. " " 무슨… 뜻이야? " " 그러니까‥ 최소한 1주일 이전의 기억은 모두 지워질 거야‥. " 그 말에 가인은 크게 눈을 떴다. 1주일? 1주일이라고? 1주일 동안의 기억이 모두 지워진다는 건가? ' 1주일이면‥ 체육 대회 연습을 하던 날들… 그리고 반장과 처음으로 얘기 했던 날의 기억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건가? ' 반장이 나와 약속했던 기억도 잊어버릴테고, 나와 친했던 기억마저도 모두 잊어버린다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가인의 떨리는 눈초리를 담담히 마주하 며 유리는 말했다. " 오빠가‥ 결정해. " " 뭐? " " 반장의 기억‥어떻게 할거야? 난 오빠의 결정에 따르겠어. " 유리의 말에 가인은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나 보고‥ 결정하라고? 지 혜의 기억을 지울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놔둘 것인지‥를 말이지…. 가인은 왠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허탈한 웃음. 난 어 떻게 해야하지? 반장과 공유했던 기억들을 지우기는 싫었다. 하지만… - 가인아… 날‥ 죽여줘‥. 몬스터에게 기생당한채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말했던 지혜의 모습.그녀는 그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로웠 을까? 그런데도… 넌…. 가인은 왠지 눈 앞이 흐려질려고 하길래 두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코 끝이 자꾸 시큰거렸다. - 가인이는 왠지 얘기하기 편하니까‥ - 에헴, 고마워요. 쑥스러운듯이 자신에게 말하던 지혜.장난스런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던 그녀 의 모습. - 아냐‥. 그런 거 아니구‥ 단지 기뻐서‥. 양호실에서 눈에 눈물이 맺힌채 활짝 웃던 그녀의 모습. 가인의 턱 밑으로 작은 물방울이 살며시 떨어져 내렸다. 소년은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간신 히 목소리를 흘려 유리에게 말했다. " ‥지워줘…. 부탁이야. " - 와아아아아!! 한성 고등학교로 돌아올수록 운동장을 메운 아이들의 소리는 더더욱 커져갔 다. 그 바람에 지혜는 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 아… " 그녀는 멍한 눈초리로 몇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가인의 등 에 업혀 있었다. 가인은 지혜가 깨어난 것을 느끼자, 등 너머로 말했다. " 엇? 반장,깨어났구나∼ 몸은 괜찮아? " " 응? 아아‥ 여긴‥ " " 정말이지. 너 빈혈끼 있었던 거야? 갑자기 쓰러지면 어떡해? 같이 물뜨러 갔다가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 " 어? 아아‥ 미안‥ " 멍하니 중얼거리며 사과하는 지혜. 가인은 그녀에게 건낸 밝은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에게서 돌린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이미 800m 릴레이 달리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결승전이었다. 가인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2시 10분‥.앞 전의 전투가 벌어졌던 게 12시였으니까 이제 겨우 2시간 지났 던 건가. 한 서너 시간은 흐른 줄 알았는데…. 가인은 짧게 한 숨을 쉬었다. 그때, 그런 그에게로 누군가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 야, 유가인------!!! " 가인이 돌아보니,자신에게 무서운 얼굴(?)로 폭주 기관차 처럼 달려드는 재 영이었다. 재영은 가인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 야 이 자식아!! 너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온 거야? 응?! 너 없어져서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 줄 알아!! " " 아, 미‥ 미안∼ " 재영에게 붙잡힌 멱살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간신히 대꾸하는 가인. 재 영은 연신 씩씩 거리며 말했다. " 으아∼ 내가 너 땜에 지연 선생님한테 깨졌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치가 떨려! 넌 이제 선생님 한테 죽은 목숨이야,임마! " " 저기‥ 흥분하지 말고… " " 흥분 안하게 생겼냐?!! 어서 빨리 시합장으로 가자! 담임이 눈에 불을 켜 며 널 찾고 있다고! 간신히 결승전에는 올라왔으니까 여기서 우승하면 살 려주실지도 몰라! " " 그런∼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도대체 뭘 어쩌셨기에 재영이 녀석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거야? 그때, 가인이 등 뒤에 반장을 업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재영. 재영은 놀란 눈을 뜨며 가인에게 물었다. " 어,어어? 야, 유가인. 너 왜 반장을 업고 있는 거냐? 반장한테 무슨 일있 었어? 반장 문제 땜에 이렇게 늦었던 거야? " " 아니 그게 반장이 빈혈을 일으켜서 좀…. " 가인은 뒷 말을 흐렸다. 거짓말도 거짓말이지만,앞전 실제로 있었던 상황들 이 다시 떠오르자 기분이 우울해졌던 것이다. 가인은 솔직히 대회에 나가고 싶은 맘 같은 건 이미 없었다. 여기서 우승을 한다고 해도… 이미 지혜는 아 무 것도 기억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같이 추억을 만들자고 했던 자신과의 약 속도 당연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가인이 어두운 표정을 짓자,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그런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대회장에서 다시 함성 소리가 울려퍼지며 방송이 들려왔다. << 잠시 후 800m 릴레이 결승전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선수 여러분은 어서 운동장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 " 아… " 가인과 재영은 황급히 대회장을 바라보았다. 각 반에서 나온 선수들이 몸을 풀며 레일에 서 있었다. 어떡하지? 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재영과 선생님 에게 대회에 안 나가겠다고 하면 그들은 무슨 말을 할까나…. 비명을 지를까 나 아니면 날 반쯤 두드려 팰까나‥ 하하, 궁금한데 그냥 이대로 나가지 말 아봐? " .......... " 그러다 가인은 자신의 등에 업혀 있는 지혜를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 녀는 대회장을 바라보기 위해 목을 있는 힘껏 빼고 운동장을 살피고 있었다. 지혜야…. 가인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음을 굳혔는듯 그녀를 내려주었 다.가인을 멍하니 바라보는 지혜. 가인은 재영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어서 대회장으로 가자! " - 탁탁탁탁… 레일을 돌며 달리는 아이들. 총 결승전까지 올라온 반은 다섯 반이었다. 그 다섯 반 중에는 1학년 3반과 3학년 8반도 끼어있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3 학년 8반. 벌써 주자는 돌고 돌아 마지막 주자의 차례까지 와 있었고, 3학년 8반은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참고로 주자의 맨 뒤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1 학년 3반의 학생이었다.그런 경기의 흐름을 바라보며 지연은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질겅질겅 씹었다. " 으으으으…!! 이럴 때 가인이 녀석만 있었으면 단숨에 역전시킬 수 있을텐 데… 이 놈의 자식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 지연은 한 숨을 내쉬었다.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 주자들을 살펴보았다.역시 결승까지 올라온 상대들 답게 다들 빠른 발들을 가지고 있었다. 가인이 없이 어떻게든 결승까지 올라온 1학년 3반이었지만, 이 우승 후보들에게는 역부족 이었던 것이다.점점 다른 반의 선수들에게 추월당해 1학년 3반의 세 번째 주 자는 꼴찌. 다른 반의 네 번째 주자가 막 바톤 터치를 받고 있을 때까지 1 학년 3반의 세번째 주자는 네번째 주자에게 한참 달려오는 중이었다. 지연은 두통이 오는듯 앞 이마를 손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아아‥이걸로 우승은 날아간 거로군,젠장‥! " 선생님!! " 그때, 지연에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세명의 학생들. 재영과 지혜. 그리고 그 토록 애타게 찾아헤맸던 가인이 녀석이었다! 지연은 반가움 보다는 분노가 컸던지라 가인에게 노도와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 야, 이 자식아----!!! 어딜 그렇게 쏘다닌 거야?!! " " 죄,죄송합니다‥!! " 지연의 외침에 기겁을 하는 가인.그런 가인을 뿔이 받은 표정으로 노려보다 가, 지연은 한 숨을 푸욱 내쉰 후 가인의 어깨를 세차게 내리쳤다. " 어서 들어가!! 1등 못하면 이 몸이 친히 죽여 주마!! " " 그,그런∼!! " 지연에게 떠밀려 달릴 준비를 하던 1학년 3반의 네 번째 주자와 교체하는 가인. 바톤 터치를 받기 위해 뒤로 손을 내밀며 가인은 잠시 객석을 바라보 았다. 자신에게 소리치는 1학년 3반의 학생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는 지혜도 끼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꽉쥔 채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래…. 지혜야.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대신, 1등 해보일테니까… 반 드시 우승할테니까… 그러니까 그것만이라도 추억으로 삼아줘. 이게 내가 … ' 가인은 세번째 주자에게서 바톤을 건내 받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 내가 너에게 해줄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니까…!! ' - 탁탁탁탁탁…!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가인.100m를 9초대로 통과하는 발군의 스피드가 전개 된 것이다. 순식간에 가인은 자신의 앞을 달리고 있던 주자 한 명을 따라 잡 았다. 그 광경에 1학년 3반의 모두는 고함을 질렀다. " 가라, 유가인----!! " 하나. 둘. 셋. 가인은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세 명의 주자를 제끼며 2 위로 등극했다. 어느새 와있었는지 1학년 3반의 응원석에 앉아 있는 진우와 시민, 마리와 유리. 그들은 가인의 달리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시민이 방긋 웃 으며 진우에게 말했다. " 어머, 잘 달리네요, 가인 군. " " 후후후‥ 과연 나의 제자 답구나!! 이 잘난 스승은 기쁘다!! " 근거도 없는 소리를 하며 기고만장해 하는 진우.그런 진우를 째려보며 마리 는 중얼거렸다. " …그 잘난 스승이란 작자 덕에 이번 체육 대회 기간 동안 외부인 출입금 지 령이 내려진 거…. 기억 못하십니까? " 마리는 전혀 자신의 말을 귀 담아 듣지 않은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응원하 는 진우의 모습에 혀를 내두른 후, 자신도 가인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분명 가인, 포션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몬스터에게 당한 데미지가 몸에 남아 있을 텐데…. 마리는 내심 걱정되었지만,가인은 벌써 세 명을 제끼고 선두주 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쥐는 마리. 좋아. 가인! 가라!! 역전해 버려! " ......... " 한편,앞의 세 사람과는 상반되게 조용히 가인의 달리는 모습을 주시하고 있 는 유리.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응원석에 서 있는 지혜의 모습을 바라보았 다. 그녀를 바라보는 유리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 탁탁탁탁…!! 가인은 이를 악물며 달리고 있었다. 1위와의 차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가인이 늦게 출발한지라,그가 1위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을 때는 이미 결승선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지연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집 어던지며 소리쳤다. " 제껴버려랏----!! " " 으랴아아아아아!! " 있는 힘을 다해 라스트 스퍼트를 전개하는 가인. 이길테다! 반드시…!! 난 지혜를 위해서라도 질 수 없다고!! 그리고 끊어지는 결승 테입. 릴레이의 우 승자가 가려지는 순간이었다! " 우와아아아!! " 학생들의 함성이 한성 고등학교의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 타닥‥ 타닥‥ 불타오르는 캠프 파이어. 주위는 어둑해지고 있었다.체육 대회는 무사히 그 2박 3일의 행사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 단계인 캠프 파이어를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캠프 파이어의 주위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서있는 각 반의 학생들. 음악이 울려퍼지며 학생들은 포크 댄스를 추고 있었다. 안 쪽의 원에서는 남 학생들이. 밖의 원에서는 여학생들이 서로 짝을 이뤄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 고 있었다. 그렇게 춤을 춘 후, 다음 짝을 찾아 이동하는 여학생들의 원. ' 하아‥ ' 가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자신의 앞에 있는 여학생과 맞춰 춤을 추었다. 그는 연신 마음 속으로 자신을 향해,'바보 같은 놈! 멍청한 놈!'이라는 소리 를 끊임 없이 해대고 있었다. 그렇게 큰 소리를 쳤건만, 약속을 지킨다느니 어쩐다느니 했지만 자신은‥ ' 져버렸다‥ ' 져버린 것이다. 1등으로 달리던 3학년 8반의 주자를 역전하지 못하고 2위로 골인한 가인. 그렇게 있는 힘껏 달렸건만 기적의 역전은 일어나지 않으며 릴 레이는 끝나버렸다. 결국, 3학년 8반의 우승. 그 덕에 영애로운 체육 대회의 우승은 3학년 8반에게로 돌아가버렸다. " 하아아아‥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걸까… "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가인. 그때, 그런 가인의 앞에서 포크 댄스를 추던 한 여학생이 짧게 웃으며 가인에게 반문했다. " 후후… 뭐가 그렇게 안 풀리는데? " 흠칫 놀라며 자신의 앞을 바라보는 가인. 그의 앞에서 춤을 추고 있던 여학 생은 다름 아닌 안지혜. 바로 그녀였다. 가인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비록 그녀가 기억을 못한다고 하더라도,그녀와의 약 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었다.가인은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마음으로 소리쳤다. 유가인 이 바보! 멍청이! 등신! 이 말뿐인 자식아, 나가 죽어라! 하아아아아… " ......고마워. " 그렇게 자괴감에 빠진 가인의 귀로 들려오는 짤막한 지혜의 말. 가인은 숙 였던 고개를 번쩍 들며 지혜를 바라보았다. 뭐,뭐라고 했지? 야, 안지혜. 너 지금 나에게 뭐라고 했던 거야? " 고,고맙다니… 뭐가? " " 추억…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었잖아…. " 쑥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지혜. 가인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 며 생각에 빠졌다. 어,어떻게 된 거지? 분명 지혜의 기억은 유리가 지워버렸 을텐데… 유리가 그러지 않았던가! 기억을 지우게 되면 1주일 이전의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약속 얘기를 알고 있는 거지?! 그때 가인의 머리 속으로 유리가 보내는 마음 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놀랐어, 오빠? - 유,유리야! 어떻게 된 거야? 지혜의 기억을 지웠을 텐데…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나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또… - 오빠. 유리는 정색하며 가인에게 말했다. - 반장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어. -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니? - 있는 그대로를 다 받아들였다는 말이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가인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가로 자꾸 웃음이 터 질려고 했지만 참았다. 참아, 유가인! 여기서 갑자기 있는 대로 소리내서 웃 으면 미친 놈으로 찍힌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 기억… 지우지 않은 거구나…! " 하지만 유리에게서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대신, 가인의 앞에 있던 지혜 가 환하게 웃음지으며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응…. 가인아, 고마워…. " 가인의 귓 가로 조용히 들려오는 지혜의 목소리에 가인은 더 이상 참지못하 고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가인은 주위의 다른 학생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 든 말든 지혜를 껴안고 연신 빙글 빙글 돌았다. " 다행이다,지혜야!! 정말 다행이야, 하하하하하하핫!! " " 가,가인아‥ 어,어지러워∼!! " 지혜는 비명을 지르며 가인의 품 안에서 자신도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체 육 대회의 마지막 밤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는 잊지 못할 체육 대회의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학생회 실에서는… " 좋아! 다음 번은 이것으로 승부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 정복!! 이번 소 풍의 장소는 에베레스트다!! " " .........기각. " 제갈영의 터무니 없는 요구 조건을 냉정히 자르는 호일준. 그렇게 학생회는 다가오는 소풍 계획에 대해 열띈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그들 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제 7 화 반장을 위해 달려라! 完> 豫告 한시민: 어머… 이거‥ 시작 된 건가요? ......... 한시민: 후후‥ 안녕하세요? 피스 옐로우 한시민이라고 해요. 언제나 처럼 저는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가인 씨와 유리 양의 도시락을 싸고, 7시에 둘을 깨워 학교에 보낸답니다.그리고 집 안 청소도 하고 빨 래도 하고 하면 12시가 넘는데… 아차! 피아노 교습 시간이네요. 얼른 학원에 가지 않으면∼ ......... 한시민: 후후…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중, 저에게 날아온 편지 하나. 어머, 동창회?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로군요. 흐음∼어떡하나. 저는 좀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 못 나 갈 거 같은데… 유가인: 그래도 동창회 잖아요,시민 씨. 오랫만에 옛 친구들 만나면 반가울 텐데… 한시민: 그런가요…. 하지만… 유가인: 에이∼ 그러지 말고 나가봐요. 자, 힘내세요. 시민 씨! 한시민: 후후‥ 그래요. 그럼 가인 씨‥ 저와 같이 나가실래요? 第 8 話 동창회 유가인: 에엣------!!! 이거 설마 시민 씨와의 데이트?!! 유가인! 세상을 다 가져라∼! -=-=-=-=-=-=-=-=-=-=-=-=-=-=-=-=-=-=-=-=-=-=-=-=-=-=-=-=-=-=-=-=-=-=-= 오라전대 ＰＩＥＣＥ ＭＡＫＥＲ 第 8 話 동 창 회 =-=-=-=-=-=-=-=-=-=-=-=-=-=-=-=-=-=-=-=-=-=-=-=-=-=-=-=-=-=-=-=-=-=-=-= - 너의 목소리는 신이 주신 선물이야‥ 자신을 향해 환히 웃는 그의 얼굴.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와 나의 얼굴은 똑 같았다. 단지 틀린 것은, 그는 칠흙과 같은 검은 머리이고 나는 금발의 머리라는 것이다. - 우리 형제는 축복 받았어. 그러니까‥ 서로를 소중히 해야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히 말하는 그. 난 그런 그가 좋았다. 그리고 난 그를 사랑했다. 그렇게 따뜻하고 그렇게 자상한 마음씨를 가진 그는 나의 형 제이자 우상이자 연인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다. 그래‥. 인상의 동반자…. 그 런 그였는데‥ 언제부터 그와 나 사이의 톱니 바퀴는 틀어진 것일까…. - 그런데 시민아…. 나를 향해 매혹적인 웃음을 짓는 그. 그래. 이 때부터 였을 것이다.이 다음 말을 나에게 했을 때부터… 이 다음 행동을 나에게 했을 때부터…. - 더욱 큰 힘을 가지고 싶지 않아? 그는 악마와 같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第 8 話 동 창 회 << 자, 시민 양. 일어나요. 검사가 끝났습니다. >> 귓가로 들리는 닥터의 방송에 시민은 깊은 수면에서 깨어났다. 이곳은 언더 시티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 오늘은 1달에 한 번 있는 시민의 신체 검사 날 이었다. 시민은 누워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긴 황금빛 머리카 락이 옅게 물결을 쳤다. " 수고하셨어요, 닥터. " 시민은 방긋 웃으며, 검사실로 들어오는 닥터에게 인사했다. 닥터는 안경을 쓸어올리며 한 손에 모닝 커피를 쥔 채 마주 인사했다. " 수고는 시민 양이 더 한 겁니다.매 달마다 15시간 가량의 신체 검사를 받 으려니 힘들죠? 가인 군과 유리 양은 검사 시간 내내 죽을 상을 짓던데… " " 어머, 그래요? " 짧게 웃음을 터뜨리는 시민. 그런 시민에게 닥터는 여느 때 처럼 신체 검사 의 결과를 얘기해 주었다. " 검사 결과는 지극히 양호합니다,시민 양. 하지만 좀 마르셨더군요? 혹시 나 다이어트라도 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그 몸무게에서 2Kg이나 더 줄어 들다니‥. 시민 씨에게는 다이어트가 필요한 지방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으니까‥ 절대로! 행여나! 다이어트 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아 시겠습니까? " " 후후‥ 닥터. 그렇게 말하시니 꼭 영양사 같잖아요. " " 하하하… 잔소리가 심했군요. " 닥터는 시민의 말에 쓴 웃음을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 그건 그렇고 말이에요, 시민 양…. " " 예,닥터? " 방긋 웃으며 답하는 시민. 그런 시민을 잠시 바라보던 닥터는 앞전 까지의 미소를 지우며 딱딱히 굳은 안색으로 물었다. " 요즘 몸에서 이상한 점은 없습니까? " " ......... " 닥터의 말에 시민은 안색을 가볍게 굳혔다. 역시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던 건가‥. 닥터는 나직히 탄식을 하며 손에 쥐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시민은 그런 닥터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가슴이‥ 좀 커진 거 같기도…. " " 쿨럭-! " 마시던 커피에 사례가 걸린 닥터.그는 연신 쿨럭이며 벙찐 표정으로 시민을 바라보았다.그런 닥터의 표정에 시민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훗‥ 미안해요,닥터. …하지만 농담은 아니에요. " " 아,하하‥ 아니 그러면 그 외에 다른 이상은? " " 글쎄요…. 닥터 말대로 몸무게가 조금 줄었나? 뭐, 그 외에는 별 다른 이 상은 없는 거 같은데‥. " " 다행이군요. " 닥터는 쓴 웃음을 지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시민은 가볍게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으로 주위를 가리고 환자복을 평상복으로 갈아 입기 시작했다.백색의 커 튼 너머로 시민은 닥터에게 물었다. " 그런데… 수치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요? " " 아,예. 그렇게 걱정할 만한 수치는 아니지만… 저번 달 보다 약간 상승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군요. " 커튼으로 비치는 시민의 모습. 시원한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그림자에 닥터 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닥터는 창 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살짝 들이킨 후,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 그런데… 언제까지 감출 생각입니까,시민 양? " " ......... " 커튼으로 비치던 시민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지만, 그녀는 다시 몸을 움직이 며 답했다. " 특별히 감출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후후‥ 잘 모르겠내요.말하기가 쉽 지 않아서요. " " …그렇습니까. " 닥터는 한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3개월 전 피스메이커에 가입해 현재,시 민의 집에서 그녀와 동거 중인 소년. 그 소년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 정을 지을까나? 어쨋든 뭔가 상당히 볼만 할 상황일텐데 말이야….닥터는 이 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상당히 짓궂다고 생각했다. 아아, 이런 걸로 즐거워 하는 건 정진우, 그 친구 하나로 족하다고. 난 빠지겠어. " 그런데 닥터? "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닥터에게 말을 건내는 시민. 닥터는 왠지 찔리는 구석이 있던지라 묵묵히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 ‥왜 그러나요,시민 양? " " ......가슴 둘레‥ 잠깐 잴 수 없을까요? 정말 커져서 말이에요. " " ......... " 목으로 들이키던 커피가 닥터의 코로 한 모금 흘러 나왔다. " 저 왔어요, 가인 씨∼ 유리 양∼ " 시민은 유레카에서 가인,유리와 함께 살고 있는 26구역에 위치한 자신의 집 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피스 메이커의 신체 검사가 끝마쳐진 시각 은 아침 7시가 다 되어서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8시.평일이라면 가인 과 유리의 등교 시간인지라,서둘러 둘을 깨워야 했지만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시민은 느긋한 기분으로 출입구를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 ‥어머? 편지가 왔내‥. " 출입구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는 2개의 우편물들.전기세나 수도세 같은 경우 에는 피스 메이커 측에서 해결을 해주기에, 시민의 집으로 오는 우편물은 편 지가 대부분이었다. 시민은 편지 봉투 2개를 들고 하나 씩 살펴 보기 시작했 다. " 흐음‥ 이건 가인 씨한테 온 거구‥. 어머나,안지혜? 이 편지… 여자 분 한테서 온 거잖아∼? " 가인에게 온 편지는 안지혜라는 이름의 여성에게서 온 것이었다. 더구나 그 것도 발신지가 부산이었다. 부산이라고? 시민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 가인 씨도 참…. 이제보니 전국구(…)였구나∼ 능력도 좋지. " 뜻 모를 소리를 하는 그녀.시민은 방긋 거리는 얼굴로 다음 편지에 눈을 돌 렸다. " ......... " 두번째 편지를 보는 순간, 시민의 안색은 그녀 답지 않게 굳어 버렸다. 그 편지는 자신에게 온 편지였다. 그리고 편지 봉투의 겉면에는「오페라의 유령 을 알고있는 그대에게」라는 글귀가 써져 있었다. - 찌익‥ 시민은 봉투의 겉면을 찢고 안의 편지지를 읽기 시작했다.내용은 다음과 같 았다. - 친애하는 시민에게. 안녕,시민아? 나 유정이야. 기억하지? 이게 얼마만에 쓰는 편지인지 모르겠내‥ 이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구. 연락도 한 번 안하고 말이야. 다들 얼마나 애타게 너를 찾았는 줄 아니?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리고서는… 다들 얼마나 화냈었는데‥ 아∼ 아니다. 이런 얘기할려고 한게 아닌데‥ 에, 또 그러니까‥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The PHANTOM of the Opera,알지? 우리 혜운 고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뮤지컬 동아리 말이야. 그 동아리 애들이랑 이번에 서로 연락이 닿아서 어쩌다 보니까 모일 약속까지 하게 되었거든. 동창회… 라고 해야할까나? 그래. 동창회네. 어쨋든, 다들 모일 생각이야. 으음‥ 다들 만나고 싶지만, 난 왠지 시민이가 제일 보고 싶내?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치? 날짜와 장소는 다음과 같아. 6월 26일 화요일. 32구역 근처에 있는 'Treasuer'라는 Bar. 약도도 그려서 보내니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시민아. 그 날 꼭 볼 수 있기를 바랄게. 알았지? 꼭 보는 거야∼! 그럼 이만 줄인다! - 너의 절친한 친구 하유정 씀. " ......... " 씁쓸한 미소를 띄는 시민.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달력을 바라보았다. 26 일‥ 이라고? 이틀 밖에 안 남았구나. 그럼 화요일인 건가? " 나도 참….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만날 수 있을리가 없잖아.시민은 고개를 가볍게 좌 우로 흔든 후, 편지를 부엌 식탁에 올려 놓았다. 만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니,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봤자 씁쓸한 기분만 들 뿐이겠지…. 시민은 부엌을 나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가인과 유리를 깨우고 아침 식사나 만들어 야겠다. 그녀는 편지에 대한 일들을 머리 속에서 애써 지워버리며 가인의 방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 똑.똑. " 저 들어가요, 가인 씨∼ "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 침대를 살펴보았다. 어라? 시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원래대로라면 가인과 유리가 같이 누워서 쥐죽은듯이 자 고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유리만 홀로 누워서 자고 있었 던 것이다. 가인 씨‥ 어딜 간 거지? 시민은 의아해 하며 유리를 살며시 흔 들었다. " 유리 양, 유리 양, 일어나요∼ 아침이에요. " " 으응‥ 싫어어‥ " 베개 속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칭얼거리는 유리. 평상시에 무표정한 얼굴로 쿨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 답지 않게, 13살이라는 그녀의 나이에 걸맞는 반 응이었다. 이유리,그녀는 저혈압이라서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을 매우 힘들어 했다. 평상시에는 그래도 가인이 있었는지라, 그가 깨우면 제 때 제 때에 일 어나는 그녀였지만…. 시민은 미소를 지으며 유리를 계속 흔들었다. " 유리 양∼ 착한 아이는 일찍 일어나는 거에요. " " ‥으응‥ 착한 아이‥ 안할래. " 시민의 끈질긴 깨우기에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유리.유리는 시민을 그 작은 체구로 껴안으며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시민은 방긋 웃음지으며,그런 유리 를 끌어 안아 방을 빠져 나왔다.원체 가벼운 유리였는지라,시민 혼자서도 별 무리 없이 그녀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시민은 유리의 등을 토닥이며 1층의 화장실로 걸어갔다. " 자자∼ 유리 양, 이제 정신 차려요. 아‥ 그나저나 가인 씨, 어디로 갔는 지 알아요? " " ‥오빠‥ 마리네‥ 도장에 갔어. 아침 연습‥ 하아아암‥. " 작게 하품을 하며 뒷 말을 흐리는 유리.그녀는 다시 시민의 품 안에서 꾸벅 꾸벅 졸기를 반복했다. 시민은 잠에 취해 비틀 비틀 거리는 유리를 화장실에 간신히 세워 놓고 밖으로 나왔다. 시민은 부엌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 주말에도 가인 씨 훈련 나가는 건가? 후후‥ 열심히네. " 좋아. 나도 질수는 없다구요. 시민은 의욕적인 표정을 지으며 아침 밥을 차 리기 위해 에이프런을 걸쳤다. 흐음‥ 오늘 아침은 뭐가 좋을 까나? 운동도 하고 올테니 무척 배 고플텐데, 가인 씨∼ - 타앙! 그때, 세차게 열리는 화장실의 문. 갑작스런 문 소리에 시민은 화장실을 돌 아보았다. 그 곳에는 세수로 잠이 깬 유리가 평상시의 무표정 모드로 돌아와 시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민을 주시하던 유리는 곧, 신속히 2 층으로 올라가 파자마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내려왔다. 여기 까지 걸 린 시간은 정확히 1분. 정말 감탄할 만한 빠르기였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 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유리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 저기‥ 유리 양? " 시민은 막 현관문으로 나갈려는 유리를 불러세웠다. 유리는 그런 시민의 부 름에 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앞 전에 잠에서 깨기 전과는 너무도 다 른 반응인지라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 아침 밥 안 먹고 어디갈려고 그러는 거에요? " " ..........마리 네 도장. " 시민의 물음에 짧게 대꾸하는 유리.도장? 마리 양의 도장에 간다는 건가,지 금? 뭐‥마리 씨네 도장도 이 26구역에 위치하니까 가는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겠지만… 도대체 왜? 시민은 재차 물었다. " 뭣 때문에 거기에 갈려고‥? " " .........안심이 안되서. " 뭔가 함축성이 짙은 대답을 하며 몸을 돌려 나가는 유리. 그렇게 재빠르게 집을 나서는 유리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민은 짧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 흐음…. 그럼 두 사람이 오기 전까지 장이나 보러 갈까나‥. " 시민은 예전에 봐두던 생선 가게에서 전갱이가 싱싱해 보였던 것을 기억해 내었다. 그래. 오늘 아침은 전갱이 소금 구이로 하자. 시민은 기분 좋게 휘 파람을 불며 지갑을 챙겨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 아, 정갱이 소금 구이에는 두릅 된장무침도 좋은데…. " 한시민. 26세. 너무 이른 나이에 주부가 된 그녀였다…. " 하아아앗!! " 가인은 죽도를 들어, 마리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그런 가인의 공격을 가 볍게 받아서 흘리는 마리. 가인은 자신의 공격이 실패한 것을 깨닫기가 무섭 게 어깨죽지를 마리의 죽도에 얻어 맞았다. - 타앙! 보호구를 착용했기에 망정이지…. 가인은 욱씬 거리는 어깨의 통증을 참아 내며 그녀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런 가인의 귀로 마리의 호통이 천 둥같이 울려퍼졌다. " 뒤로 물러나지마!! " - 투타탁!! 마리는 그런 가인의 뒤를 쫓으며 재빠르게 죽도를 세 번 내리쳤다. 가인은 그 중에 단 한 개의 죽도를 막아냈을 뿐, 두 개에게는 정통으로 머리를 내주 고 말았다. 보호구를 착용한 가인의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앞전에 막아낸 공격도 사실은 마리의 페인트였었기에 제대로 방어한 것은 하나도 없는 가인 이었다. ' 다,당연하잖아?! 마리 선배의 공격을 내가 막아낼 수 있을리가…! ' 가인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마리의 죽도를 엉겹결에 막아냈다. 어,어라? 막아냈어? 나…? 하지만 그것은 소년의 착각. 마리는 일부러 검을 맞대 힘겨 루기를 시도하였던 것 뿐이다. 힘 겨루기에 들어가는 둘. 가인은 뒤로 밀리 지 않도록 죽도를 쥔 왼손에 있는 힘껏 힘을 주며 버텼다. 죽도 너머로 보이 는 마리의 눈초리는 너무도 살벌했기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저, 저 눈빛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어린 핏덩이를 노려보는 맹수의 그것!! 잘못했다간 마리 선배의 손에 죽을지도‥ 정신차려라, 유가인!! " 중단이 비었다! " 상단으로 죽도를 막아내느라, 가인의 중단이 비어 있음을 가르쳐주는 마리. 그렇게 친절히 가르쳐주기 까지 하고 공격하는 그녀이건만,가인은 또다시 마 리에게 옆구리를 죽도로 얻어맞았다. 말 보다도 빠른 것이 마리의 검이었다. 가인은 이를 악 다물었다. 옆구리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아까부터 인간 샌드 백이 된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한심스러운 가인이었다. 아,진짜 마리 선배! 연습이지만 너무하잖아,이건…!! 제,젠장∼ 이대로 얻어맞고만 있을쏘냐!! ' 반격해준다! 반드시 한 대 먹일테다!! ' 하도 얻어 맞다 보니, 악 밖에 남은 것이 없는 가인이었다. 가인은 마리의 공격을 침착히 받아 넘기며 기회를 기다렸다. 물론, 그 침착히 라는 것이 옆 구리를 다섯 대 얻어맞고, 머리 치기를 일곱 번 허용한 것이었을 지라도…. " 타앗---!! " 도장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마리의 기합과 함께, 그녀의 죽도가 날아들었다. 그녀는 이 일격으로 이 일방적인 대련을 끝낼 생각이었는지, 가인의 머리를 노리며 있는 힘껏 도약했다. 마치 비호와 같은 움직임! …훗! 하지만 마리 선배‥ 저는 이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작이 너무 크다구요!! " 츠랴아아앗!! " 가인은 마리의 공격 타이밍에 맞춰 앞으로 몸을 숙이며 수중의 죽도를 횡으 로 휘둘렀다. 그의 죽도는 절묘한 타이밍으로 마리의 배를 노리고 있었다.좋 아! 이건 못 피할 거다,마리 선배!! 지금껏 얻어 맞은 것 까지 합해 따따블 로 갚아주마!! 가인의 죽도는 그렇게 마리의 배를 공략 가능한 거 같이 보 였었다. …그래. 보였었다‥. 과거형이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이식(二式) 파쇄(波殺) " - 파직!! 마,말도 안돼,이건∼∼!!! 가인은 마리의 공격에 부러져 나가는 자신의 죽 도를 허망하게 쳐다보았다.공격의 충격으로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죽도를 놓아버렸다. '탱그랑!'죽도가 마루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만이 유별 나게 크게 도장에 울려 퍼졌다. " 아야야야‥ " 가인은 자신의 두 손을 부여 잡으며 몸을 숙였다. 으아, 손톱이. 내 손가락 이‥!! 가인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신의 손을 겨드랑이에 낀채 몸을 비비 꼬았다. 마리의 공격은 가인의 죽도를 부서뜨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그 충격 을 가인의 손에 남긴 것이다. 손톱과 손가락이 연신 후들후들 거리며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가인의 목으로 마리의 죽도가 서늘하게 닿았다. " …실전이면 수백번 죽은 목숨이다,가인. " 마리의 냉정한 목소리.가인은 연신 아픈 자신의 손을 부여잡으며 그런 그녀 에게 불만에 찬 목소리로 항의했다. " 마리 선배, 비겁해요‥. 연습 때에는 비기를 쓰지 않기로 해놓구서는…. " " 연습은 실전 같이. 실전은 연습 같이. " " .........가훈입니까? " " 아니. 나의 모토. 우리 집 가훈은 여기에 써져 있잖아. " 마리는 짧게 답하며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그곳의 벽에는 커다란 액자에 다 음과 같은 한자가 시원한 필체로 써져 있었다. 劍生劍死…. 검에 살고 검에 죽는다는 소리야? 아니면 검으로 죽이고 검으로 살린다는 소리야? 가인은 애 꿋은 마리 네 도장의 가훈에 불만을 토로하며 한 숨을 내쉬었다. ' 도대체 이게 몇 일째냐…. ' 체육 대회가 끝난 이후로 매일 마리의 도장에서 검법을 수련하게된 가인이 었다. 그때, 트린트 라는 나무 괴물과의 싸움에서 가인도 오라 소드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정되기가 무섭게 마리는 그를 끌고 검법을 가르치기 시작 한 것이다. 덕분에 진우의 격투 훈련에 이어, 마리의 검법 훈련까지 받게 된 소년. 가인은 아주 녹초가 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도 훈련 시간 내내 제대로 된 반격 조차 하지 못한 채. 두 사람에게 두드려 맞기만 해선지 가인은 자신이 진우와 마리의 스트레스 해소 용 인간 샌드백이 된 것은 아닐 까…라는 피해 의식 아닌 피해 의식 까지 가지고 있었다. 가인은 땀이 뚝 뚝 흐르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마루에 떨어진 자신의 부러진 죽도를 줏었다.마 리는 그런 가인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왼손으로 죽도를 잡는 그. 처 음에 그가 왼손으로 검을 잡는 것을 보았을 때 흠칫 놀랐던 그녀였다. - 왜… 어째서… 좌수검(左手劍)을…. - 아니‥ 그냥 오른손은 헤븐 스매쉬를 끼고 천공권을 날려야 할테니‥ 왼 손이 편할 거 같아서‥. 왜요? 왼손으로 검을 쥐면 안되는 거에요? -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뒷 말을 얼버무린 마리였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눈에는 가인의 모 습에서 다른 한 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그 소년도 가인과 같이 좌수검을 사용했었었다. - 바보 녀석. 좌수검은 그 성질 상 위력이 강하고 괴이악랄하지만 검도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제약이 뒤따르기 때문에 상승검도(上乘劍道) 를 익히기에는 부적당하다. 검도의 정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좌수검을 익혀서는 안돼! 그런 자신의 꾸짖음에 소년은 언제나 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로 수중의 검을 들어보였다. - 헤헷, 걱정마,누나. 난 좌수검으로 검도의 일인자가 될테니까!! 그렇게 큰 소리를 치며 자신에게 웃어보이던 소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 나의‥ 동생…. 마리는 잠시 슬픈 기분이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그 생 각을 떨쳐내었다. 그녀의 눈 앞에서는 가인이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 도대체가 검술의 기본형만 대충 익혀주고서는 매일 이렇게 대련이라니… 그러면서 비기까지 써대는 선배의 공격을 저 보고 어떻게 막으란 소리에 요? " " 대련만 계속 하고 있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빨리 너에게 실전의 감각을 익혀주기 위해서다. 네가 실력을 쌓을 때까지 기다려줄 몬스터라고 생각 하나? " " 하지만 매일 이렇게 두드려 맞기만 하니 내 실력이 정말 늘기는 하는 건 지 의심스럽다고요! " 가인의 항의에 마리는 쓴 웃음을 지었다. 결국 불만은 그거였었군….마리는 그런 가인에게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걱정하지마. 분명 차근차근 그 실력이 늘고 있으니. 적어도 이제 반격할 틈을 찾아 노리기 까지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 " ......그 틈이라는 게 다 마리 선배가 일부러 유도한 거라는 게 문제라는 거죠…. " 가인은 한 숨을 푹 내쉬며 자신이 쓰고 있던 보호구를 다 풀어헤쳤다. 마리 는 보호구 같은 것을 애초에 착용하고 있지 않았기에, 가인이 보호구를 푸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리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가인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마리의 훈련은 이제 막 3주를 넘기고 있었지만,가인의 성장은 빠른 편이었다. 벌써 마리가 휘두르는 검을 눈으로 읽고 반응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더구 나 자신이 공격하는 검들 중 허수를 읽어내는 게 탁월해지고 있었다.이건 모 두 실전과도 같은 대련을 통한 수련의 결과였다. 걱정마,가인. 넌 강해지고 있으니까. - 찰랑… 머리 보호구를 풀어내는 가인의 목에서 푸른 빛이 반짝였다.그것은 예전,마 리가 가인에게 선물로 준 오라의 빛을 내는 목걸이였다. 그것을 본 마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아직… 걸고 있었구나‥ 그거…. " " 예? 아, 이 목걸이요? 그럼 당연히 걸고 있어야죠. 선배가 준 목걸인데∼ " 가인이 씨익 웃으며 말하자,마리는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헛기침을 했 다. 그런 마리의 반응에 가인은 새삼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착용자 의 오라에 반응하여 빛을 내는 목걸이라고…. 목걸이는 현재 가인의 오라 패 턴인 블루의 색깔을 발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굉장히 귀한 목걸이로 보였 다. 가인은 이 목걸이의 출처가 궁금해져 마리에게 물었다. " 마리 선배, 그런데 이 목걸이… 어디서 구하신 거에요? 이 목걸이… 흔치 않아 보이는데…. " " ......동생의 목걸이다. 그건. " 마리의 대답에 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생? 마리 선배에게 동생이 있 었다는 얘기는 금시 초문인데…. 아니 그것 보다… " 예? 동생 거라구요? 그런데 왜 그걸 제게 준 거에요? " 가인은 놀라 물었다. 주인이 있는 목걸이였잖아? 그런데 왜 이 목걸이를 동 생에게서 나에게 준 거지? 그런 가인의 질문에 마리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 히 답했다. " ......동생은 이미 없으니까. " " 예? 아니 그게 무슨 소리… " " 2년 전에 죽었어. 내 동생…. " 조용히 답하는 마리. 그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에서는 웃음이 사라져 있었 다. 가인은 당황했다. 우… 그런…! 유가인, 이 바보 같은 자식아! 눈치 코 치도 없는 둔탱이 같으니라구! 가인은 어쩔 줄을 모르며 마리에게 사과했다. " 미,미안해요…,선배…. 저‥ 몰라서,몰라서 그랬던 거니까‥ " " 훗. 괜찮아. 신경 쓸 거 없어. "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마리. 자신을 민망해지지 않게 하려는 그녀의 배려가 가인의 눈에는 보였다. 으, 유가인. 이 바보 멍청이 구제불능….나가 죽어라! 이 바보야!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발 걸음을 옮겼다. 훈련도 끝마쳤겠다.왠 지 분위기가 어색해져 빨리 도장을 나갈려는 생각이었다. 그때, 너무 서두르 는 바람에 가인은 마루에 놓아두었던 죽도를 밟고 그만 발을 헛디뎌 버렸다. " 으앗!! " " 아‥ 조심…! " 가인과 마리가 짧은 비명을 흘림과 동시에 도장 마루에 '쿵'하는 소리가 울 려 퍼졌다. 아야야‥ 바보같이… 조심하지는 않고…. 가인은 쓰러졌던 몸을 일으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꼴이냐. 괜히 허둥대다가 선배 앞에서 이런 모습이나 보이고….그런데 넘어진 거 치고서는 별로 아프지 않잖아? 가 인은 의아함을 느끼며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잠시 고심해야만 했다. " …가인‥ 괜찮아‥? " 가인의 밑에서 들려오는 마리의 목소리. 가인은 천천히 딱딱해진 시선을 억 지로 밑으로 내렸다. 그곳에는 마리가 자신의 밑에 깔려 가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얘기해, 가인이 마리를 말 처럼 올라타고 있는 상황이란 말씀. 아, 말이라니…. 노골적인 표현이다. 가인의 머리 속이 백지 처럼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 마,마리 선배‥ " 딱딱해진 말투로 더듬거리는 가인.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는 빨리 마리에 게서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 조차 할 수 없었다. 마리는 얼굴에 홍조를 띈 채 가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도장의 마루 바닥으로 마리의 긴 검은 머 리가 폭포처럼 흩어져 있어서 묘한 어른의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가인의 심 장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쳤다. " 하아… " 자신도 모르게 한 숨을 내쉬는 마리. 그녀의 입김이 가인의 입술 근처에 와 닿았다.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가인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는 진중한 표정으 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사실,가인의 표정은 얼빠진 표정이었지만 마 리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 보였다는 것이다) 마리의 귀로는 자신의 심장 뛰 는 소리만이 시끄럽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마리는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 끼며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 이게 바로 그… 그 '키스'라 는 것을 하는 분위기…인가? 마리는 두 주먹을 있는 힘껏 쥐며 작게 몸을 떨 었다. - 두근‥두근‥두근‥두근‥ 긴장되는 순간! 과연 가인과 마리가 전개할 앞으로의 행보는?!! - 오빠아아아아아----!!!!! 그때 가인의 머리 속으로 벼락 같이 울려퍼지는 한 소녀의 목소리. 가인은 시베리아의 한복판에 알몸으로 던져진 것 같은 오싹함을 느끼며 열려 있는 도장의 문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곳에는 햇빛을 배경으로 얼굴에 짙은 그늘이 새겨져 있는 이유리가 가인과 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늘이 서려 있어서 그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유리의 그 활화산 같은 눈동자만은 번쩍 이며 가인을 꿰뚫고 있었다. - 아,저기‥ 유리야 이건‥! 가인은 마리와 유리를 번갈아 보며 손을 휘저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가인이었다. 그렇게 가인이 엉거주춤하는 사이, 유리는 천천히 그 눈빛을 번 뜩이며 아주 조용히‥ 아주 아주 조용히 도장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냉막한 여운만을 도장에 남긴채…. 가인은 왠지 몰골이 송연해져 중얼거렸다. " …아, 끝장이다…. " 오해하면 안되는데!! 가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유리를 뒤쫓아 도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오해야! 이건 오해라구, 유리야아아아아∼∼!! 가인의 처연한 외침은 유리에게 닿질 못했다.변명남의 말로란 언제나 이렇듯 비굴한 것이다. " ......... " 그리고 눈을 감은채 계속 몸을 떨며 가인의 다음 행동만을 기다리는 마리. 그렇게 도장에는 그녀만이 홀로 남았다. " 어머, 유리 씨 왔어요? " 부엌에서 막 아침 밥을 요리하던 시민은,거칠게 문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유 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상당히 화가 났는듯, 잔뜩 뿔 이 난 얼굴로 거실의 쇼파에 앉았다. 그 뒤를 힘 없이 뒤 따라 들어오는 가 인. 그런 가인의 힘 없는 모습에 시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가인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 " 아,그게… 저기......아니에요. " 피곤한 표정으로 뒷 말을 흐리는 가인.도장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시민에 게 고한단 말인가? 실수로 마리 선배의 위에 넘어져 있던 참에 유리가 들어 와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고? 그렇게 말할까,유가인? 가인은 고개를 흔들며 무표정하게 쇼파에 앉아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티를 안 낼려고 노 력 중이었지만, 눈꼬리와 입가가 연신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아, 진짜 화 났네…. " 유리야… 저기 잠깐 오빠와 얘기할래? " " ......... " 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유리의 맞은 편 쇼파에 앉았다. 하지만 유리는 싸 늘한 표정으로 가인을 한번 힐끔 쳐다본 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이거… 얘기하기 싫다는 표시인가? 오랫만에 다시 유리가 냉정한 태도를 보이자 가 인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러니까… 앞 전의 그 일은 유리의 오해야. 단지, 내가 죽도를 밟아서… 그만 넘어져 버린건데… " " 그래서 마리 선배에게 키스를 할려고 했다고? " 싸늘히 가인의 뒷 말을 잇는 유리. 가인은 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 그러니까 그게 오해란 말이야! 유리야, 도대체 내가 마리 선배와 키스할 이유가 없잖아! " " 어머, 키스요? " 가인의 외침이 컸는듯, 시민이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며 되물었다.가인은 화 들짝 놀라서 시민에게 소리쳤다. " 키,키스라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 가인은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죄 지은 사람 처 럼 이래야 하는 거야? 가인은 유리의 저 싸늘한 태도에 점점 화가 나기 시작 했다. 솔직히 가인은 유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건 단지, 여동생이 오빠를 좋아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가인은 유리 에게서 자신의 죽은 여동생, 신이의 모습을 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여동생 처럼 귀여워해주고 사랑해 왔다. 여동생 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리의 태도는 단지, 자신의 오빠에게 대하는 태도 치고는 너무 도가 지나쳤다.아무 리 오빠를 빼앗기기 싫어하는 동생의 마음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가인 은 유리에게 한 마디 단단히 하려고 입을 열었다. " 유리야, 난 말이야…! " " ......까득. " 그렇게 가인이 막 한 마디 했는데, 들려오는 살벌한 이 가는 소리. 유리의 이 가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렇게 이를 갈며 가인을 쳐다보는 유리의 눈빛이 너무도 표독스러웠던지라 가인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무,무섭다. 유리 의 저런 태도…. 가인은 그런 유리의 기세에 밀려, 그녀에게 한 마디 하려 던 것이 쏙 들어가 다시 죄 지은 사람 처럼 고개를 숙였다.약한 남자의 이름 이여, 그 이름은 바로 유가인. " ......... " 그렇게 쩔쩔매는 가인을 바라보며 유리는 생각에 잠겼다. 물론, 오해였다는 것은 안다. 단지,가인의 사념을 살짝 읽는 것 만으로도 그 상황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유리였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고…. 하지만 화가 나는 걸 어쩌 란 말이야? 유리는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속 내를 진정시킬려고 노력했다.무 엇 보다 가인이 유리, 자신을 어린애로 취급하는 것이 화가 나고 싫었다. 유 리는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오라 능력에 눈을 뜬 후, 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간접 체험을 한 그녀였기에 이미,유리의 정신 연 령은 가인 보다 높을지도 몰랐다. 그런 자신인데. 이미 한 사람의 어른인 자 신인데도, 가인은 유리를 어리게만 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 날 여동생 이상으로 보질 않고 있어…. ' 그것이 유리가 최고로 싫어하는 점이었다. 유리는 당당하게 가인의 앞에서 한 여자로 비춰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가인의 태도는 언제나 여 동생을 대하는 그것이었다.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주고는 있지만 어디까지 나 내가 오빠의 여동생과 비슷한 나이 대니까.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 을 여동생 이상으로 취급하질 않는 것이었다. 그게 미치도록 화가 났다. ' 물론, 나도 알고 있어. 내 나이는 13살이고 오빠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 고 있지만… 정상적으로는 초등학교 6학년 생일 뿐이라는 걸. ' 냉정하게도 유리는 이 모든 것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다 알고 있다고. 하지만… 하지만… ' 그래도 화가 안풀린단 말이야‥! ' 생각하는 방식은 어른이었지만,감정 표현은 아직 서투른 초등학생인 유리였 다. 그녀는 가인을 째려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아, 완전히 미움 받아 버렸다.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 었다. 그때, 그런 둘에게 시민이 소리쳤다. " 가인 씨, 유리 양, 아침 먹으세요∼ " " 예에‥. " 힘 없이 대답하며 부엌으로 털레 털레 걸어가는 가인.부엌의 테이블에는 시 민이 한껏 솜씨를 자랑한 식단으로 꾸며져 있었다. 전갱이 소금 구이와 두릎 된장 무침이 주를 이룬 아침밥. 간단하지만 조촐하지 않고, 푸짐한 것 같지 만 부담스럽지 않은 식단이었다. 원래 대로라면 감탄을 하며 서둘러 자리에 앉을 가인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의 옆에 앉는 유리의 눈치를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짓던 시민은 아침에 온 우편 물에 생각이 미쳤는듯, 가인에게 편지 봉투를 하나 건내 주었다. " 아,참∼ 가인 씨, 아까 가인 씨 앞으로 편지가 하나 왔었어요. " " 예? 저한테요? " 의아한 눈으로 시민에게서 건내받은 편지를 살펴보는 가인. 어라? 나한테 편지? 도대체 누가? 내가 이사온 주소로,더구나 그것도 내 앞으로 편지를 보 내다니…. 친척일리도 없고, 타 지방에 사는 친구일리는 더더욱 없다. 그렇 게 발신자를 찾던 가인은 편지 봉투에서 이름 석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엇?! 이거 반장한테서 온 거였구나!! " 감탄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가인. 편지는 6월 초에 이사간 반장 '안지혜' 에 게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운동회 날 몬스터에게 기생당해 위험에 빠졌었지 만, 간신히 피스 메이커에게 구조되어 별 탈 없이 부산으로 이사를 갔던 것 이다. 그런 그녀에게서 편지가 오다니. 가인은 서둘러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 내 읽었다. -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준 가인에게. 가인아, 안녕? 이사가고 너한테 처음 쓰는 편지네. 좀 더 일찍 쓰고 싶었지만 전학 온 학 교에 적응하느라 조금 늦어버렸어. 후후, 이해해 줄거지? 가인이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까 이해 해줄거라 믿어. 내가 전학온 곳은 부산의 작은 고등학교야. 서울에서 다니던 한성 고등하교 에 비하면 너무 작고 시설도 안 좋지만, 대신 넓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 해 있어서 전망은 좋아.가끔 공부하다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보면 가 슴이 확 뚫리는 거 있지. 서울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야. 그 덕에 학교는 너 무 마음에 들어. 아, 친구도 많이 많이 사귀었어. 이미 반 친구들과 친해져서 노래방도 가고 같이 공부하고 집에도 놀러가고 해. 후후, 예전의 나라면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말이야. 가인이 너도 이런 내 모습 보면 깜짝 놀랄 걸? 나 말이야. 이제는 사람 사귀는 것에 망설이지 않기로 했어. 예전에는 어차 피 사귀어도 좀 있으면 전학 갈테니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릴 걸…하면서 친 구 만드는 것을 피했었거든,나…. 하지만 가인아. 너 때문에 알게 되었어. 아무리 헤어지고 떨어지게 되더라 도… 그 때, 그 순간, 그 친구들과 만들었던 추억은 절대…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야. 너와 만든 추억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있어. 나 그날의 일들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가인이 너한테는 너무 고맙고,미 안하고…그리고 너무 감사해. 너와 얘기했던 말들이며 행동들이 아직도 기 억 속에서 떠나질 않아.하나 하나 확연히 기억이 나. 이게 바로 추억이라는 거겠지? 이렇게 생각하니까 더 이상 사람 사귀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어.여기서 도 나는 추억을 아주 많이 만들 생각이야. 그래서‥그래서 나중에 가인이 너 를 만나면 얘기할거야. 나 이런 저런 일들로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했노 라고‥ 나는 이렇게 많은 추억들을 만들었다고‥ 말이야. 그러니까 가인이 너도 여러 가지 추억을 간직했다가 나에게 얘기해주길 바 래. 꼭이야. 응? 후후‥ 너무 내 얘기만 해버렸나? 하지만 너한테 보낼 편지가 이번 한 번도 아니고 앞으로도 여러 얘기를 나눌 수 있을테니까 서두르진 않을게. 답장에 는 너의 얘기를 써주길 바래. 모두의 안부를 곁들여서 말이야. 그럼 이만 줄일게. 답장‥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얼른 써서 보내줘 야 해! 알았지? 언제나 몸 건강하고 잘있어,가인아. - 언제나 그 때의 추억을 생각하며 지혜가. 추신: 테레이아와 유리는 여전하니? 후후‥ 처신을 똑바로 하지 못하는 남자 는 피곤해지는 법이에요,유가인 씨. 태도를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거야. 화이팅∼ " ......화이팅‥이라니.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지혜가 덧붙인 추신의 내용이 가인의 마음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래.그래. 네 말대로 처신을 똑바로 못해서 지 금 내가 이런가 보다. ' …그래도 잘 지내고 있나 보구나. ' 다행이다,지혜야. 친구도 많이 만들었다니. 가인은 웃음지으며 편지를 갈무 리 했다. 그때,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유리의 시선을 느낀 가 인. 유리는 편지를 힐끗 보다가 가인에게 물었다. " 반장에게서 온 거야? " " 으응. 반장, 부산에서 잘 지내나 보더라. 유리의 안부도 묻던데? " 유리가 말을 걸자, 가인은 기쁜 마음에 답해주었다. 어, 조금 화가 풀린 걸 까나? 하지만 유리는 다시 팩- 하니 가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역시….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 잘 먹겠습니다. " " 많이 들어요,가인 씨. " 웃으며 가인의 말에 대꾸하는 시민. 시민은 전갱이 구이의 살점을 뜯어 가 인의 밥에 올려주며 물었다. " 안지혜… 양이라면 그때, 그 사건의 피해자‥ 맞죠? " " 예에. 뭐, 하지만 지금은 좋아져서 잘 생활하고 있데요. " " 다행이네요∼그나저나 편지까지 올 정도면 가인 씨와 대단히 친했나 보죠? 그 아가씨. " " 네,그럼요. 친했죠∼ " 씩 웃으며 답하는 가인. 그 때, 옆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쩍'. 바로 유리가 쥐고 있던 나무 젓가락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흠칫 놀라며 유리를 바 라보는 가인과 시민. 유리,그녀도 이런 자신의 행동이 놀랐는듯 당황하며 시 민에게 젓가락을 내밀었다. 시민은 방긋 웃으며 유리의 부서진 젓가락을 새 젓가락으로 바꿔 주었다. 가인은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식은 땀을 흘렸다.안 좋아. 안 좋다구…. 가인은 황급히 화제를 바꿔 시민에게 물었다. " 아, 저기‥ 시민 씨. 제 편지 말고 다른 우편은 안 왔어요? " " 예? 아, 그게‥ 저한테 온 편지가 하나‥. " " 어떤 편지에요? " " 그냥‥ 별거 아니고… 고등학교 동창들에게서 온 편지에요. 동창회에 참 석하라는… 그런 내용이죠,뭐…. " 시민은 쓴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가 인이 물었다. " 동창회요? 헤에… 시민 씨가 동창회…. " 그런 가인의 반응에 시민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 왜요,가인 씨? " " 아니… 시민 씨에게도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구나 해서…. 시민 씨는 어떤 학생이었을까 잠시 생각해 봤어요. " " 후후… 그래요? " 방긋 웃는 시민.하지만 가인이 생각하고 있었던 건 시민의 교복 차림(…)이 었다. 분명 시민 씨, 예뻤을 거야. 분명…. 가인은 헤벌레 해질려는 표정을 애써 참으며, 시민에게 말했다. " 좋겠다,시민 씨∼ 동창회라니. 오랫만에 다들 만나면 되게 반갑겠죠? " " 글쎄요…. 저는 일단 나가지 않을 생각이라서… 잘‥. " 시민은 가인의 말에 낮게 답하며 표정을 굳혔다.그런 시민의 태도에 의아해 하며 가인이 소리쳤다. " 아니, 왜요?! 오랫만에 만나는 친구들일텐데…! 혹시, 별로 안 친했던 거 에요? 동창들하고…. " " 아니요.그건…. 같은 뮤지컬 동아리를 하던 친구들이었는데… 사이는 매 우 좋았었어요. " 그래. 너무 좋았지…. 그래서 만날 수 없는 거야. 시민은 낮게 조소하며 말 을 이었다. " 지금와서 만나봤자…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게 분명해요. 그때와는 틀릴테 니까…. " 정확히 그때와 틀린 것은 나지만…. 어쨋든, 그렇게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 는 시민의 모습에 가인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시민 씨, 오늘 저한테 편지가 왔었어요. " " 예? " 가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모른 시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편지가 가인 씨에게 온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 그런 시민의 의문을 뒤로 하며 가인은 계속 말했다. " 그 친구는 저하고 같은 반이었는데 3주 전에 다른 지방으로 전학을 갔어 요. 친했거든요, 그 친구하고는. 그런데 3주 씩이나 연락이 되지 않다가 이렇게 편지가 온 거에요. " " ......... " 시민은 가인이 무슨 말을 할 생각인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가인은 자신 의 손에 들린 편지를 잠시 내려다 보다가 말을 이었다. " 그 친구는 지금 바뀐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쁜가 봐요. 뭐,잘 적응하고 있 다고 얘기는 하지만…. 음…. 분명 만나기 힘들테죠. 다시 만날 때 까지 몇 년,몇 개월이 걸릴까나…. 그리고 다시 그 아이와 만날 때는… 어떤 모습으로 서로 변해 있을까요? " 환경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분명 그 때의 지혜는 내가 알고 있던 지혜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지혜가 알고 있던 유가인이 아닐테고. 외모든 생각하는 방식이든 많이 많이 바껴있을 것이다. 그래. 바뀐단 말이지…. " 하지만 그렇게 바뀌더라도… 변해있더라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 어요. " " ......뭐죠? " 조용히 묻는 시민. 그런 시민을 보며 가인이 미소를 지었다. " 추억이에요. 그 아이와 제가 보낸 추억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서로의 맘 속에 남아있을 거에요. 그리고 그 추억을 되짚으며 즐겁게 얘기할테죠.그 런 일이 있었구나. 저런 일도 있었어‥ 하며 말이죠. 분명, 시민 씨와 친 구들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 그제서야 가인이 무슨 말을 할려는지 이해한 시민.가인은 시민의 표정이 좀 밝아진 거 같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 시민 씨, 그 친구들 많이 좋아하죠? " " ......예. 그럼요,가인 씨. " " 분명 멋진 추억도 많이 많이 있죠, 그 친구들과? " " ......그래요. " 시민은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추억에 빠졌다. 모두의 얼굴이 떠올 랐다. 그렇게 웃으며 때로는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하던‥ 그 때의 그 추억들 을. 시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가인 씨. 전 그 친구들을 너무 좋아하고‥또 그 친구들과 멋진 추억도 많이 가졌어요. 가인은 그런 시민의 마음을 안듯 웃으며 말했다. " 만나세요,시민 씨. 그 친구 분들‥ 분명 시민 씨를 보고 싶어 할거에요. " " ......그럴‥까요. " " 그럼요! " 두 손을 쥐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 그런 그의 모습에 시민은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가인 씨. 비록 안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외면받 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너무도 보고 싶은 친구들이니까. ' 그리고 이대로는 도망치는 것 밖에는 되지 않을테니까…. ' 시민은 결심했다. 그녀는 가인을 보며 미소를 띈채 말했다. " 그럼 가인 씨, 저와 함께 가실래요? " " ......예? " 시민의 갑작스런 제안에 멍하니 있다가 중얼거린 가인.그의 옆에 있던 유리 의 인상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가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시민을 쳐다 보 았다. 함께 가다니? 어딜요,시민 씨? 동창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렇지만 제가 왜 거길…? 거긴 시민 씨의 친구분들만 나오는 곳일텐데… ' 하지만… ' 하지만 이건 어쩌면 시민 씨와의 데이트일지도 모른다는?! 가인의 눈이 번 쩍 뜨였다. 그래. 더구나 다른 자리도 아닌,시민 씨의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 아닌가?! 호,혹시 시민 씨는… 시민 씨는 날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시켜 줄 생각인 건가?!! ' 서,설마---!! ' 제 멋대로 흥분하기 시작하는 가인. 그런 가인의 태도에 시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싫으세요? " " 저,전혀!! 아니요! 절대로 싫은 게 아니에요!! 에,또… 좋아요!! 아주 아 주 좋아요!! " " 훗, 고마워요,가인 씨…. 아,그리고 약속 날짜는 6월 26일인데… 시간은? " " 괜찮아요!! 아주 좋아요! " 횡설수설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 그의 말에 시민은 안심했다는듯 살풋 웃음 지었다. 그런 둘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유리는, 다음 순간 고 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 ......나도 갈래. " " 에, 유리야? " 가인은 유리를 돌아보았다. 유리는 무뚝뚝한 얼굴로 가인을 올려다보고 있 었다. 가인은 당황하며 그런 소녀에게 말했다. " 하,하지만 유리야…. 굳이 너까지 따라갈 필요가…. " " 싫어. 따라 갈거야. " 고집스럽게 말하는 유리.그런 유리의 태도에 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왜 또 그러는 거야, 유리야!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데,정말….가인은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는 유리에게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왠지 오기까지 생 기는 가인이었다. 그래. 유리, 네가 이렇게 까지 나온다면 나도 반드시 시민 씨와 단 둘이서 데이트를 하고 말테닷!! 가인은 달력을 바라보았다.6월 26일 이라…. 6월 26일이라고? 어, 잠깐! 6월 26일…?! " 유리야, 너 6월 26일 날 신체 검사 날 아니야? " 6월 26일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피스 핑크, 이유리의 신체 검사날. 이 신체 검사는 15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 되기에, 그 날 하루는 꼼짝 없이 언더시 티의 메디컬 센터에 있어야 한다! 그런 가인의 외침에 순간, 굳어버리는 유 리. 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눈꼬리를 떨었다. 피스메이커의 신체 검사는 빠져 서는 안된다. 매번 변하는 오라의 흐름을 관측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이 신체검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가인은 그렇게 아무 말이 없는 유리 를 향해 승자의 기쁨을 내비췄다. " 하하, 유리야. 그 날 신체 검사 잘 받고 오렴.난 시민 씨와 잘 나갔다 올 테니까∼ 알았지? " " .........바보. " 작게 중얼거리는 유리.가인은 그런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 응? 뭐라고? " " 바보--------!!!! " 순간, 유리의 입에 가져다 된 가인의 귀로 있는 힘껏 빼액 소리를 지르는 유 리.가인은 신음을 흘리며 귀를 틀어막아야만 했다.얼마나 큰 목소리였는지 귀 가 얼얼하다 못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으아∼ 유리, 너어어어!!! 가인은 눈물이 찔끔 거리는 눈으로 유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유리는 이미 재빨리 2 층으로 쪼르르 올라가 방으로 사라진 뒤였다. 가인은 그런 유리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투덜거렸다. " 왜, 왜 저러는 거야,유리 녀석∼ " …몰라서 묻는 거냐, 이 둔탱아?! - 딸랑‥ 문에 설치한 방울 소리가 울려퍼지며, 바(Bar) 트레이져(Treasure)에 한 남 자가 들어왔다. 바텐더 근처의 테이블에 앞에 앉아 있던 하유정은 고개를 돌 려, 가게로 들어오는 손님에게 소리쳤다. " 여기야, 주민성~! " " 어엇∼ 유정이냐?! " 주민성이라 불린 남자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유정에게 다가왔다. 유정은 그런 그를 위 아래로 살펴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 어얼∼ 너 잘 나가나 보다∼ 신수가 훤한걸? 마스크도 더 쌔끈해지고. " " 여자애가 말하는 것 하고는. 여전하구나,너. " 민성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때 유정의 옆에 있던 한 쌍의 남 녀가 민성에게 아는 체를 했다. " 야, 민성아. 유정이 밖에 안 보이냐? " " 저희한테도 시선을 좀 주는 게 어때요? " " 엇? 우성아! 수미야! " 민성은 그 남녀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도우성과 이수미. 벌써 7년이 지났건 만 그들에게서는 아직도 그때의 얼굴들이 남아 있었다.그건 유정도 마찬가지 였다. 그때, 그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부터 말이지…. 민성은 왠지 그리운 기 분이 들어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어쨋든, 다들 반갑다. 이게 몇 년 만이야, 도대체? " " 뭐… 우선 앉아서 차근차근 얘기들 하자구! " 유정의 말에 민성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 뭐? 니들 아까부터 왠지 계속 붙어 있다 싶더만 사귀고 있는 거였어?! " 민성은 우성과 수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들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민성의 물음에 대해 무언으로 대답했다.우성과 수미의 손에 끼워진 커플링이 가게의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그런 그에게 유정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 사귀는 것 뿐이 아니라고. 벌써 약혼하셨댄다,얘들. 결혼식은 내년 6월로 정했고. " " 아, 진짜 너무들 하는구만! 일절 얘기도 없이∼ " 민성이 투덜거리자 우성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 진짜루 미안하다,정말. 하지만 꼭 우리 잘못만도 아니라고.연락하기 힘든 네 녀석 탓도 있단 말이야. " " 맞아요. 민성 씨,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넘어가 버리고서는. 그 쪽에서 사업을 한다면서요? " 존칭으로 자신에게 묻는 수미에게 민성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동창끼리 왠 존칭이야. 그냥 말 놔둬 돼. " " …아,그럴까? " 수미는 우성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놓았다. 민성은 그런 두 남녀의 기색에 속으로 웃음 지었다. 우성이 녀석. 고리타분하기는. 아주 꽉 잡고 사시는 구 만. 벌써부터 아내 단속이냐? 그렇게 생각하며 민성은 수미의 질문에 답했다. " 뭐, 그렇게 잘 되는 편은 아니지만‥. 아직 시작한지도 얼마 안되었고 앞 으로는 차츰 나아진다니까. " " 헤에∼ 잘 됐으면 좋겠네. " 유정이 자신의 앞에 놓인 칵테일을 살짝 들이키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 에 웃음 짓는 민성. 그러다 곧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 그런데 우리 밖에 없는 거야? 태수 선배는? 미영 선배도 없고‥ " " 아아, 동창회 잖냐. 우리 동기 밖에 안 불렀어. " 유정의 답변에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그래도 오랫만에 보는 건데 선배들도 봤으면 좋았을려만. 아, 그런데 동기‥라면? " 잠깐, 그럼 그 둘도 오는 거야? " 민성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민성이 칭한 그 둘은 유정들 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유정은 혀를 차며 말했다. " 글쎄‥ 둘 다 연락이 안되기로 유명한 애들이니… 어쨋든, 편지는 부쳤어. " " 흐음… 하긴, 세라야 요즘 한창 바쁠 시기니까… 며칠 전에 TV에서 보니 까 건강은 한 거 같더만. " " 그래. 세라는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TV에서 매번 얼굴을 보니까,만약 오늘 만난다면 낯설지는 않겠더라. " " 그렇네. 만날 수 있다면 말이지. "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나 다른 이들이나 세라라는 동창을 만나 는 건 이미 포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리도 아니지. 그녀는 다름아닌… " 세라는 그렇다고 치고. 그럼 시민이는? " 민성의 물음에 유정은 기운이 빠진다는듯 테이블에 업어쳐 답했다. " 걔는 더 심하잖냐…. 주소도 없고 연락처도 없고 해서 연락하는데 얼마나 애 먹었는 줄 알아∼ 오죽했으면 내가 탐정까지 써가면서 걔를 찾아냈는 데‥ " " 타,탐정? 유정이 너‥ 도대체∼ " 민성이 기가 막힌다는듯 말하자, 유정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뭐, 기자란 직업이 그런거야. 그렇게 이상하게 볼 것도 없다고. " " 아니 내가 말하는 건‥ 아,그래. 됐다고 치고‥ 그래서 연락이 된 거야? " " 아니‥ 탐정까지 쓴 것도 좀 양심이 찔리고 해서… 그냥 편지만 부쳤어. " 더 이상 찔린 양심이나 있는 거냐. 민성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래. 어쨋든 둘 다 왔으면 좋겠는데…. " " 그러게 말이야. 둘 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나. " 유정은 희미한 두 동창의 모습을 기억하려 애쓰며 중얼거렸다.그때,그런 그 들의 뒤에서 말을 거는 한 여인의 목소리. " 저기‥ 여기 Phantom Of OPERA 동창 모임‥ 맞죠? ' 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에 앉아 있던 모두의 시선은 그녀에게 향했다.뒤 돌아 본 그들에게 보인 것은 빨간 원피스를 입고, 썬글라스를 쓰고 있는 한 여인 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던 민성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 혹시… 세라? 정세라?! " " 쉿! 쉿! " 황급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며 소리를 낮추라는 제스처를 보내는 그녀. 다 행히도 가게에는 아직 개점된지 얼마 안되었기에 손님들이 많지 않았다. 혹 시나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귀찮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주의는 소용 없는 짓이었다. 민성의 옆에 있던 유정과 우성, 수 미가 놀란 얼굴로 세라 라는 자신의 동창에게 소리치는 것이다. " 세라구나!! 진짜로 왔어!! " " 반갑다,세라야!! 정말∼!! " 조용히 좀 해달라고 했는데…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세라는 쓴 웃음을 지 으며 자리에 앉았다.그녀 역시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 그래. 다들 건강한 거 같내? 후훗… 유정이도 기가 센 건 여전하고, 우성 이와 수미가 붙어다니는 것도 여전하고… 어머, 민성이는 여전히 핸썸하 네? " " 야야∼ " 세라의 말에 다들 웃으며 손을 저었다. 유정은 세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오늘 귀국한 거야? 우린 네가 못 올 줄 알았는데… " " 당연히 와야지. 우리가 남도 아니고. 오페라의 유령으로 묶인 끈끈한 인 연 아니겠어∼ " 세라의 말에 다들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유정들의 앞에 앉아 있는 이 여인은 다름 아닌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돈나로 데뷔한 주세라였던 것이다. 카라얀으로 부터'100년에 한 두명 나올까 한 목소리의 주인공.', 메타로부터 '신이 주신 목소리' 라는 극찬을 받으며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그녀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유학 2년만에 나폴리 존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제 무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어 여러 콩쿠르를 차례로 석권하면서 경력을 쌓은 그녀는 드디어 2027 년 정식으로 오페라 데뷔를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 5대 극장의 하나인 트리스테 베르디 극장에 <리골레토>의 질다로 출연한것이 그것. 이때 선보인 환상적인 가창으로 거장 카라얀을 감복시킨 그녀는 2년뒤 그의 오디션에 초청되어 함 께 작업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후 라 스칼라(28), 메트(29),코벤트 가든(31), 빈 국립 오페라(31), 파리 오페 라(32) 등 소위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을 차례로 섭렵하며, 유럽과 미국의 음 악 팬을 열광시킨 그녀는 이제 셰릴 스투더,캐슬린 베틀의 뒤를 잇는 세계의 프리마돈나로서 당당히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런 그녀가 바로 유정들의 동창이었던 것이다. " 정말 믿겨지지 않는다. 정세라가 우리와 같은 학교, 그것도 같은 동아리 출신의 친구라니…. " 수미의 말에 세라는 쓰고 있던 선글래스를 벗으며 웃었다. " 글쎄 말이야…. 그때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리 가 있을 수 없었을테니…. 정말 묘하다,얘. " 오페라의 유령.자신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만든 뮤지컬 동아리. 그녀들은 다른 뮤지컬은 하지 않고, 특별히 '오페라의 유령'만을 고집했었다. 전술한 서양의 괴기소설들은 영화나 연극,심지어 디즈니의 만화영화 소재로 도 즐겨 사용돼 왔다.그런데 이들 중 20세기 말 유독 큰 인기와 흥행을 몰고 다니는 작품이 있다. 바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다. 86년, 런던 허 머 제스티스 극장(Her Majesty's Theatre)에서 초연된 이래, 십여 년이 넘는 세 월을 쉬지 않고 공연 중이지만 지금도 구할 수 있는 표는 반년 후의 예약표 뿐, 세기를 뛰어넘어 종영의 날을 예측할 수 없다. 영국 역사상 최초로 뮤지 컬 음반이 판매 1위에 오르는 진기록도 세웠고, 전 세계로 수출돼 13개 국가, 100여 개 도시에서 공연됐다. 「오페라의 유령」의 원작은 1911년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 )의 동명 소설이다. 젊은 시절, 가스통 르루는 신문 기자로도 활동했었는데, 사실적인 묘사보다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거나 감상적인 평을 많이 가미해 많 은 고정 독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그는 특유의 기사체 문장으로, 마치 직접 사건으로 뛰어들어가 문제를 해결하는 구성의 소설을 많이 발표했다. 오페라 하우스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역추적해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내용의 괴기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리고, 세라들이 만든 동아리 'Phantom Of Opera'는 이 오페라의 유령 만 을 공연하는 이색적인 뮤지컬 동아리였던 것이다. 우성은 그 때를 회상하듯 중얼거렸다. " 대단했지,그때. 아마츄어들의 공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 했었어,우리의 공연은. " " 뭐,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그때 우리와 함께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지. " 민성도 옛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유정은 그 때의 기억들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기억나는듯 입을 열었다. " 그래. 오죽했으면 학교 재단에서도 우리를 밀어줬겠냐? 아마 공연인데도 관객들이 장난 아니게 많었었지∼ " " 덕분에, 네가 티켓 값 받는다고 난리쳤었잖아. 정말이지 수전노 아니랄까 봐 그때부터 티를 냈어요. 나,참∼ " " 어이, 민성. 그래도 그때, 티켓 값을 걷으러 손수 관객들 사이를 누볐던 건 너였어. " " 아,그랬나? " 유정과 민성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수미는 두 손을 모으며 황홀 한 표정으로 말했다. " 그 때, 대단했었지. 크리스틴 다에 역의 세라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신이 내린 목소리 같았어. " " 맞아.맞아.세라가 노래할 때 관객들 표정 봤었어? 입 벌리면서 멍하게 세 라만 바라보고 있던 거. " " 그때부터 프리마돈나의 기질을 보였다니까∼ " 친구들의 말에 세라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정작 세라 본인은 그 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세라는 자신의 동창이자 지금 이 자리에는 없 는 그를 떠올리며 말했다. " 그래도… 유령 역의 시민은 더 대단했었어. " " 아‥ " 한 순간, 조용해지는 테이블.유정들은 그런 세라를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 았다. 세라의 말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세라가 세계적인 소프라노로 성 장했다지만 분명 그 때 그 시절, 자신의 동창이었던 시민의 목소리에는 뭔가 접근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매력이 있었다.아니,그건 마력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몰랐다. 조용하던 좌중 가운데 유정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 다. " 시민이 녀석, 뭘 하고 지낼까‥ 요즘…. " 그녀는 시민과 허물 없이 친했던 편이라 더더욱 시민의 안부가 걱정 되었다. 한시민. 그는 자신들의 앞에 나타날을 때도 순식간이었지만, 사라질 때도 순 식간이었다.뭣 때문에 시민이는 그렇게 서둘러 뮤지컬 동아리를 탈퇴하고,연 락도 없이 종적을 감춰버렸던 것일까….유정은 그런 친구의 행동에 한 때 배 신감을 느낄 정도로 속상해 했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수미가 손 뼉을 치며 화제를 바꿨다. " 그나저나 시민이 정말 멋있지 않았었니? 목소리도 그랬지만,생긴 것도 정 말 예술이었잖아∼ " " 맞아.맞아. 아마, 그 관객들 중 여자들은 시민이 보러 온 거였다고∼ 유 령 역이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무대에 섰는데도 워낙 타고난 미모 인 지라 다들 알아채더만. " " 벌써 그 때로부터 9년이나 지났는데… 지금은 얼마나 멋있어 졌을까나…. " 순서대로 수미, 유정, 세라의 말들이었다. 뭔가 황홀한 표정까지 짓고 있는 그녀들의 태도에 남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하지만 그 들도 시민의 아름다움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시민은 정말 아름다웠으니까. 유정은 히죽 히죽 웃으며 세라와 수미를 돌아보며 말했다. " 역시나 다들 노리고 오셨구만∼ 특히 세라 너∼귀국하고 피곤할텐데도 바 로 달려온 걸 보니. " " 누,누가‥! 그러는 유정이 너도 화장이 진하다,얘? " " 지,진하기는∼ 나 원래 이러고 다녔어! " 서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그녀들의 모습에 민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수미 야 애초에 우성의 눈초리에 그 다툼에서 빠진 상태였다. 정작 본인이 오기도 전에 이 모양인데,진짜 시민이 나타났다간 큰일이 나도 단단히 나겠구만. 하 지만… " 벌써 7시‥. 안 올 생각인 걸까. " 민성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약속 시간에서 1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 래. 그렇게 갑작스레 사라진 녀석이 지금와서 다시 우리를 만날 생각이 있을 리가 없지‥.그런 민성의 생각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공통된 것일지도 몰 랐다. - 딸랑‥ 그때 가게의 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종 소리.민성들은 나누던 대화를 뚝 멈추고 가게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민인가?! " ......... " 하지만 들어오는 이는 긴 금발을 늘어뜨린 미모의 여인이었다. 민성들은 내 심 실망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이가 아니었다.그들 과 동창이자 같은 동아리의 친구 한시민은 남자였던 것이다. " 어,잠깐‥. " 그때, 유정은 뭔가 걸리는 게 있었던듯 다시 그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금발이었다. 금발‥. 분명 자신의 동창 한시민도 금발이었지…. 염색한 것이 아닌 영국인 어머니를 둔 백금발에 가까운 금발. 저 여자의 머리는 백금발이 었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 여자의 얼굴을 살펴보던 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한 이름을 입 밖으로 흘렸다. " …한‥시민? " 유정의 중얼거림에, 돌렸던 고개를 다시 여인에게로 향하는 민성들.그런 그 들의 시선을 받으며 금발의 여인,한시민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 …오랫만이야,다들. " " 아아… 지쳐버렸어. " 가인은 핼쓱해진 얼굴로 손목 시계를 바라보았다.7시가 넘어서고 있었다.이 미 시민 씨와의 약속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나 버린 것이다. 더구나 유가인은 아직도 학교. 그것도 자신의 교실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 아, 진짜 왜 하필 오늘 같은 날이 모의 고사인거야?!! ' 1학기에 2번 치는 모의 고사. 오늘은 다름 아닌 모의 고사의 날이었던 것이 다. 덕분에 하루 왠 종일 시험을 치고 현재 답안 점수까지 매기는 짓을 해야 만 했던 가인. 전산 처리를 기다리면 성적표가 알아서 나올 터였지만,그것은 이틀 뒤의 일이었고 그의 담임 하지연은 오늘 당장 성적을 체크해서 자신에 게 제출할 것을 명했었다. 뭐, 어쨋든 이제 다 점수를 매겼으니까…어디보자. 몇 점이냐? " 으윽… 심하다. " 가인은 자신의 성적 체크표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아, 어째서 이런 점수가. 나 잘못 매긴 것 아닐까?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매겨봐도 그대로였다. 420점 만점에 255점. 뭐? 절반은 맞힌 거 아니냐고? 지금 장난하냐? 이 점수라면 잘해야 반에서 중간 정도였다. 아니. 그 이하일지도…. ' 최근 훈련만 받느라고 공부를 소홀히 했다지만… 이건 쇼크다.으…. ' 한때, 모범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 이 모 양이 되었을까나. 가인은 한 숨을 푸욱 내쉬며 자신의 성적 기록이 떠올라있 는 데스크 컴퓨터(Desk Compuer)를 꺼버렸다. 그때 그런 가인의 뒤로 재영이 불쑥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 여∼ 나의 베스트 프렌드 가인아. 몇 점이나 나왔느냐? 어서 이 형님에게 보고를 해보거라∼ " " …시끄러. 최악이다. " 투덜거리며 답하는 가인.그런 그의 태도에 재영은 장난끼 서린 표정을 풀며 말했다. " 뭐야? 왜 이리 반응이 띠꺼워? 망쳤냐? " " 그래. 망쳤다. 그것도 화려하게. " 가인은 가방을 싸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리가 코웃 음을 치며 가인에게 말했다. " 훗, 오늘 있을 데이트 때문에 시험 문제가 머리에나 들어왔겠어? " " …유리 너! " 가인은 가득히나 기분도 울적한데 유리까지 저런 말을 하자, 속이 부글 부글 끓어 올랐다. 유리는 가인이 시민의 동창회에 따라가는 것에 아직도 화가 풀 리지 않았는지, 틈만 나면 그를 갈구고 있었다.가인은 버럭 소리를 지를까 하 다가 간신히 성질을 눌러 삼키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먼저 화내는 사 람이 지는 거다,유가인. 가인은 일부러 어린애 취급을 하듯 유리의 머리를 쓰 다듬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 그래.그래. 오빠는 오늘 있을 데이트가 너무 너무 기다려줘서 시험 문제같 은 거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오더라∼ 그러니까 오빠는 이만 데이트하러 가 볼테니까 우리 착하고 귀여운 동생은 신체 검사 받으러 잘 갔다와∼ " " ......우…! " 가인의 도발 성공. 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고 가인은 승리 의 미소를 지었다. 내심 어린 유리와 자존심 대결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스럽 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있을 시민과의 데이트를 생각하니 그런 찝찝한 기 분도 모조리 사라져 버리는 가인이었다. 가인은 발걸음도 가볍게 교실을 나가 버렸고 유리는 원망스런 눈빛으로 그런 가인의 뒷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그때, 그들의 대화를 뒤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재영과 테레이아가 순간 무서운 기 색으로 유리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추궁했다. " 자,잠깐!! 데이트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 질투에 눈이 돌아가 추하게 소리치는 재영. " 상대는? 전력은? 전술은?!! " 구체적인 정보를 원하는 테레이아. 그런 그들을 힐끗 바라본 유리는 우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가버 리는 그녀. 그런 유리의 태도에 재영과 테레이아는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이유리가 저렇게 맥 빠지는 반응을 보이다니…. 그 만큼 대단한 상대라는 것인가?!! 테레이아는 조급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 ‥아,안돼. 대책을 세워야…. " 테레이아 역시 재빨리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가버렸고, 재영은 그런 그녀들 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재영의 뒤로 모여있는 1학년 3반의 남학생들. 오랫만의 질투단 결성이었다.재영은 이를 갈며 그들에게 소 리쳤다. " 봤느냐?! 저것이 바로 우리의 적, 유가인의 실태다! 저 놈이 저대로 활개 를 치게 놔두었다가는 우리 남자들이 이 땅에 설 수 있는 기회란 영영 사 라질지도 모른다!! 세상의 여자들을 위해!! 더 나아가서 우리 남자들의 안정된 미래를 위해서라도 유가인,저 놈은 우리가 척살해야만 할 악의 원 흉이란 말이다!! " " 오오----!! " 간만에 질투의 파동을 발하는 남학생들. 특히나 그 중에서도 테레이아와 유 리의 추종자들은 가인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는 그녀들을 보자 더더욱 광분 하고 있었다. 가인이 먼저 가버렸기에 망정이지, 아마 계속 이 자리에 있었 더라면 내일의 태양은 그를 반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드르륵 거리며 열 리는 1학년 3반의 뒷문. 그곳에는 저번 운동회 때 두각을 나타내어 일약 한 성 고등학교의 스타 덤에 오른 2학년 1반의 성마리가 교실 안을 조심스레 살 피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알아보고 재영이 소리쳤다. " 엇! 마리 선배님, 무슨 일이십니까?! " " 음. 저기… 그러니까 유가인을 찾아온 건데…. " 물론, 이 자리의 모두는 그녀가 유가인 때문에 왔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 었다.단지 형식 상.절차 상 물어본 것 뿐이다. 재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마리 에게 말했다. " 가인이 벌써 갔어요. 데이트가 있대나 뭐래나…. " " ......데이트…. " 나직히 중얼거리는 마리. 그녀는 저번 일요일 날,아침 훈련 때 가인과 있었 던 일로 인해 한동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몇 번이고 가인을 찾아올려 고 했지만,그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뛰어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만큼은‥ 오늘이야 말로… 훈련을 명분으로 세워 그를 찾아온 것이었는데. 그렇게 단단히 마음 먹고 찾아온 것이었는데…. 그런데 데이트라니 이건 또 왠 말이란 말인가? " 하아…. " 마리는 한 숨을 쉬며 교실을 나갔고, 그런 그녀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 보 며 재영들은 다시 한번 질투의 파동을 내뿜을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그들의 옆에서 치솟아오르는 새빨간 살기의 파동들! 재영들은 흠칫 놀라며 살기의 주인공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여학생들! 1학년 3반의 여학생 들 이었던 것이다. " 가,감히 마리 선배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다니… 유가인∼∼∼!! " " 용서 못해!! " 성마리. 그녀는 인기가 많았다. 벌써 그녀의 팬 클럽만 해도 이 한성 고등 학교 내에 다섯 개나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팬 클럽의 대 부분이 여자라는 것은 의문스러운 점이지만…. 강한 여자에 대한 동경인 걸 까나? 어쨋든, 중요한 것은 여학생들 조차 가인을 척살 대상 1호로 삼기 시 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들의 활화산 같은 기세에 기가 죽은 재영들은 겁 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무,무섭다‥. " " 우리도 평상시에 저랬단 말이지…. " 유가인. 언제나 1학년 3반에 대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하지만 여학생 들까지 적으로 돌려 버린 지금. 과연 그에게 평화로운 내일이란 존재하는 것 일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런 희망은 버리는 게 좋다고 권하고 싶 었다. 한편, 이곳은 바(BAR) 트레이져. 유정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 앉아 있는 이 금발의 여인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자기들의 동창 한시민이라 고 밝힌 그녀. 하지만 여자…인데? " …어,어떻게 된 거야? " 민성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시민에게 물었다.그녀의 이목구비나 목소리는 분명 자신이 알고 있던 동창 한시민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저 남자로서는 절 대 생각할 수 없는 가슴이라던지, 저 옷차림은 뭐란 말인가?! 결국, 모두가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세라가 말했다. " 수술‥받은 거니? 성 전환? " 시민의 저 모습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 성 전환 수술이었다. 수술을 받고 여성이 된 것.트렌스젠더(trans-gender)가 되었다면 이 모든 것 이 설명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세라의 말을 유정이 부인하며 말했다. "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우선 얼굴이나 체형이 그대로야. 성전환 수술이라 는 게 단순히 남성의 성기를 제거하고 여성의 성기를 만드는 작업 만은 아니거든.성전환자들은 정신적인 성 만큼 겉모습도 여성스럽게 보이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첫 인상은 대부분 얼굴에 의해서 결정되잖아? 그렇기에 안면 여성화 수술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이마 성형술, 광대뼈 수술,코 성 형술, 앞턱 수술, 각진 턱 성형술, 목연골 제거술, 쌍꺼풀 수술, 가슴 성 형술, 체형 교정술, 질 재건 성형술‥ 이 모든 과정을 다 포함한 것이 성 전환 수술이라고 하는 거야. " 그런 유정의 설명에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하는 좌중들. 우성이 어처구 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 …너무 빠삭하다,너? " " 아아∼ 예전, 트렌스 젠더에 관한 기사를 적었던 적이 있어서 말이야. " 어쨋든,유정의 말대로 시민의 모습은 그샔 그 시절,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그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단지 그때는 없던 가슴이 달려있고 여성복을 입고 있 다는 것. 그렇다고 그게 어색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만약, 이 눈 앞의 여자가 자신들의 동창이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여성으로 보였을 것이 다. 수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시민에게 물었다. " 시민아. 혹시 너‥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인 거야? "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 즉 '이성복장자'를 편안하게 부르는 말이다. 크로스드레서는 다른 말로는 '트렌스베스타잇(Transvestite)' 이라고도 하는 데, 이성의 복장을 즐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말에 우성 이 수미에게 물었다. " 트렌스 젠더나 크로스 드레서나 마찬가지 아냐? " 그런 우성의 질문에 답변을 한 것은 역시나 유정이었다. " 물론, 어느 정도 크로스드레서와 트렌스젠더 사이에 개념 적으로 혼합되 는 부분들이 있고, 당사자들도 개념을 섞어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크로 스드레서가 트렌스젠더다, 혹은 트렌스젠더가 크로스드레서다, 라는 개념 파악은 사과와 토마토를 놓고, 생긴 것이 비슷하니 어차피 똑같은 과일이 다, 라고 치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거야. 트렌스젠더는 정신적으로 는 분명 여성이지. 그렇기에, 여자 옷을 입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겠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아. 우성이 네 주위의 여성 중에도 화려 하게 화장을 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여성들이 있는 반면,수수하게 청 바지에 티 하나만 걸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여성들이 있는 것처럼 말 이야. " " …여,역시 너무 빠삭해. " "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어쨋든 주위에서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가 없 는 거잖아? 당사자가 직접 얘기하면 될 걸 가지고. " 유정은 그렇게 말하며 시민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이는 한시민, 본인 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 을 받으며 시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냥… " " 응? " " 그냥 지금 내 모습 그대로를 봐줄 수 없을까? 난 그때, 그 시절에 너희들 과 같이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했던 한시민이야. 너희들과 즐겁게 웃으며 연극하고 노래부르던… 그때의 한시민. " 시민의 얼굴에 낮게 그림자가 깔렸다.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지만 이 친구들 이 납득할리가 없었다. 갑작스레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 이해해 달라고 하면 이해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나? "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와 변함 없는 너희의 친구…야. 너희와 같은 추억을 가지고 공유했던… 그때의 한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러니까… " 그러니까… " 지금의 내 모습을… 날… 이해해 줄 수‥ 없을까? " " ......... " 조용한 그들. 시민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럴 줄 알 았기에 나오기를 꺼려했던 것인데…. 여기에 오기 전까지 몇 번이나 망설였 는지 모른다. 그러다 간신히. 간신히 용기를 내어 온 것이었는데. ' 가인 씨. 아무래도 안되려나 봐요…. '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미안. 오랫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되어버려서…. 하지만 나… 그래도 너희 들을 만나서 반가웠고… " 그 뒷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는 시민이었다. 시민은 왠지 눈시울 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잘‥ 있어‥. " " 바보! 뭐가 잘 있어야?! " 그런 시민의 귀에 들려오는 유정의 화난 목소리. 시민은 유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 동안 연락도 한번도 안하다가 간신히 이렇게 만났는데‥ 그런데 그래 놓구서는 멋대로 안녕이라고 말하면 누가 같이 안녕해줄거 같냐?!! " " 그래. 너무한 거 아냐,한시민? " 민성 또한 한 숨을 쉬며 시민에게 말했다. 시민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 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세라가 시민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 했다. "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너는…. 그 때 우리와 같이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했 던 한시민 맞지? " " ......응. " " 같은 추억을 가지고 공유했던 한시민 맞지? " " …그래. " 왠지 목이 매여왔다. 시민은 떨리는 눈길로 모두를 바라보았다.그런 그녀에 게 우성과 수미가 웃으며 말했다. " 만나서 반갑다,시민아. " " 으응. " 시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분명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도… 자신을 외면해도 할 말이 없을텐데도 그들은 자신을 바라봐주고 있 었다. 외면하지 않았다. - 시민 씨, 그 친구들 많이 좋아하죠? - ......예. 그럼요,가인 씨. 너무 너무 좋아해요. 고마워,얘들아…. 시민은 세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세라의 손길. 그것은 너무 도 따뜻하고 그리운 것이었다. ' 고마워…. ' " 헤에∼ 그럼 피아노 강사를 하고 있단 말이야? " " 응. 애들 가르치는 것도 재밌고… 틈틈히 노래도 가르치니까. " 유정의 말에 시민이 답했다.어느 정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 앉고,모두는 편안한 분위기로 얘기하고 있었다. 이제야 동창회 같아진 모임 속에서 모두 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는 이는 당연히 시민이었다.시민의 대답에 세라는 안 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 그래도 아깝다,얘. 너라면 분명 굉장한 소프라노가 될 수 있었을텐데…. " " 후후‥ 농담도. 세라,네 모습은 매번 TV로 잘 보고 있어. " 시민의 말에 세라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모두는 세라의 말을 농 담으로 듣지 않았다. 시민은 그런 소리를 들을 당연한 자격이 있었다. 그때 유령 역을 하던 시민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세라의 말을 부 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창 여러 얘기를 나누던 중, 시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시민은 발신자 번호를 확인하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아, 가인 씨? " 순간, 얘기 나누던 것을 중단하고 시민의 전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모두. 가인 씨? 가인이라면 남자 이름 아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의 깊게 시민 의 모습을 살피는 유정들. 시민은 연신 웃는 모습으로 전화를 다정스레 받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유정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한 가지 가설을 더더 욱 확신하게 만들고 있었다. " 예.예. 맞아요. 거기에요. 그대로 들어오시면 돼요.그럼 기다릴테니까 어 서 와야 해요. " 그렇게 말하며 전화 통화를 끝낸 시민. 그녀는 핸드폰을 핸드백에 집어넣다 가 자신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을 알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다들‥ 왜 그래? " " 누,누구야? 가인 씨랬나?! 애인이야? 그리고 어서 오라니?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 거니, 그 남자?!! " " …하나 씩 물어 봐,유정아. " 유정의 폭발적인 질문 공세에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유정 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시민을 추궁했다. " 어서 실토나 해, 이것아∼!! " " 그,그러니까… 같은 집에 사는 남자인데…. " 시민은 언제나 처럼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대답이 좌중에 준 여파는 상당한 것이었다. 민성과 세라, 우성과 수미, 유정은 모두 얼굴을 맞대며 시민에게 들리지 않게 쑥덕거렸다. " 가,같이 산다니…! " " 그럼 동거잖아 그거?! " " 대단하다.대단해! 도대체 어떤 남자이길래? " " 평범한 녀석은 아닐거야,분명! " " 그래도 같이 산다는 건 시민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겠지? " " 야야. 모든 것이라니…. 그렇게 얘기하니까 너무 노골적이잖아∼ " " 어쨋든, 대단하다 정말. 얼마나 시민을 사랑하기에… " 이미 가인을 '시민의 모든 것을 감싸주는 대범한 남자'로 결론 지어버린 그 들이었다. 시민은 그런 그들의 쑥덕거림에 눈만 깜빡이며 의아해 할 뿐.그리 고 그 때, 가게 문이 열리며 구설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 가인 씨, 여기에요∼ " 시민이 소리 높여 그를 부르자,유정들은 쑥덕거림을 뚝 멈추고 마치 연습이 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가인에게 돌렸다. 그리고 가인을 보게된 그들 은 다시 한번 깊은 미궁 속에 빠져들어야 했다. " 미안해요,시민 씨. 많이 늦었죠? " " 후후‥ 아니에요. 가게 찾느라고 힘들었죠? "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가인과 시민. 하지만 유정들은 그런 그들의 대화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었다.그들의 시선은 가인이 입고 있는 옷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 저,저건 고등학교 교복 같은데…! ' 시민과 동거한다는 가인이라는 남자는…아니 소년은 고교생이었던 것이다!! - 쪼르르르‥ 자신의 유리컵에 콜라를 따르는 가인. 그는 그 콜라를 살짝 한 모금을 마시 며 주위의 분위기를 살폈다. 뭔가‥ 굉장한 분위기의 사람들이로군. 가인,자 신을 바라보는 시민의 동창들의 눈빛은 왠지 가인의 모든 것을 벗겨 낼려고 하는듯한 노골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노골적인… ' 뭐,뭐냐… 동물원의 원숭이냐,내가…? ' 가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민이 소개한 그녀의 동창들은 앞전부터 내내 가인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선 자기들 끼리 수근수근. 뭔가 점 점 기분이 나빠질려고 하는데…. 그때, 그런 가인에게 유정이라고 시민이 소 개한 여자가 말했다. " 저기… 유가인 씨? " " 예? 예에‥. " " 실례지만… 나이가? " 갑자기 왠 나이? 가인은 왠지 조심스러운 기분이 들어 조용히 답했다. " 열‥ 일곱인데요. " 순간, 다시 자기들 끼리 수근덕 거리는 유정들. 뭐,뭐야? 이 사람들? 아까 부터 계속 사람을 앞에 두고 왜 저렇게 자기들끼리만 속닥이는 건데? 그렇게 가인이 약간의 불쾌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유정들이 나누는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 여,열 일곱이래∼∼!! " " …그럼… 고등학교 1학년생? " " 시민이하고 나이 차가 도대체 몇이야?! 하나,둘… 무,무려 아홉 살…. " " 말도 안돼! 혹시 애인이 아니라 사촌이라던지… 뭐,그런 관계 아냐? " " …하긴 동거한다고만 했었지 애인이라는 소리는 전혀 없었으니까…. " 그들은 잠시 대화를 끊고 슬쩍 고개를 들어 가인과 시민을 살펴보았다.시민 은 가인의 옆에 앉아 메뉴 판을 보여주며 다정스럽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 가인 씨, 이런데 처음이죠? " " 예에. 일단은 학생이니까‥. " " 으음. 저도 많이 와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안주하고 이 안주가 괜찮더 라구요. " " 그래요? 헤에. 그래도 시민 씨가 해주는 음식보단 별로일 거 같은데‥. " " 어머, 가인 씨도 참…. " 흘러내리는 긴 금발 머리를 살짝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웃어 보이는 시민.그 런 그녀의 모습에 유정들은 현기증을 느꼈다. ' 아,아무리 봐도 저건 너무 다정스러운데? ' 모두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공통된 의문이었다.그때 민성,세라,우성,수미의 시선이 유정에게로 주목되었다.그런 그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다가 결국 쓴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정. 아,그래∼ 나보고 물어보란 말이지? ' 둘이 애인 사이인지 아닌지를 말이야…. ' 잔인한 것들. 심장이 약한 나를 이런 중책에 임명 시키다니…. 자신의 여린 심성을 스스로 애도해 보는 유정이었다. 물론 이 자리의 어떠한 누구도 그녀 가 심장이 약하다고는 절대 생각치 않았지만…. 하지만 결국,기자로서의 호 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는 시민과 가인의 화목한 분위기에 끼어들었다. " 저기 말이야∼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인데∼ " 그녀의 말에 자연스럽게 유정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시민과 가인. 그런 둘을 바라보며 유정은 애꿋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혹시 둘, 애인 사이? " - 덜컥. 순간, 자연스럽게 돌아가던 가인의 고개가 세차게 굳으며 제동이 걸렸다.가 인은 금방 유정이 무슨 말을 했나 생각해보았다. 애인? 애인 사이? 누가? 누 구와? 그녀가 묻는 방향에 있는 것은 자신과 시민 뿐이었다. 그,그렇다면…! ' 시민 씨와 내가 애인 사이 라고 물으셨단 말입니까∼∼∼∼?!!! ' 결론에 도달하자 새차게 얼굴이 붉어지는 유가인.호프 집에서 그와 같이 얼 굴이 붉어지는 것은 알콜의 힘이 없더라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였다. 아,아니아니! 시민 씨와 내가 애인 사이냐고?! 그,그런∼!! '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나…. ' 잠시 황홀한 생각에 빠져보는 가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떻게 나 같은 녀석이 시민 씨와!! 가인은 세차게 손을 흔들며 부인을 하려고 했다.시 민이 그 말을 듣고 오해해 지금의 관계 마저 무너질까봐 두려운 가인이었다. 정말이지 그런 사람 간 떨어지는 소리를! 가인은 재빨리 시민 쪽을 돌아 보 았다.시민 씨. 시민 씨가 해명을 해주시라고요! 하지만… " 어머나…. " 가인이 시선을 돌린 곳에는 한시민이 살짝 얼굴을 붉힌채 한 손으로 볼을 감싸고 있었다. 쑥스러운 미소마저 머금고 있는 그녀. 아,시민 씨의 저 미소. 녹는다. 녹아.........가 아니잖아!! 잠깐! 시민 씨! 그런 표정을 지으며 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 저,정말이었어? " 그리고 놀란 목소리로 소리치는 좌중. 아, 오해했다…. 그때 세라와 유정, 수미가 시민에게 달려들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 대,대단하다∼ 시민아?! 어떻게 이런 영계를!! " " 어디야? 도대체 이 애의 어디에 그렇게 빠져 버린거야?! " " 남고생과의 러브러브라니…. 이,이건 20대 여성들의 로망…. " " 그런데… 이거 범죄 아닌가? " " 무슨 소리!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법!! 그렇기에 아름다운 거 란 말이야∼ " " …그래도 범죄인 건 변함 없다고…. " 그런 그녀들의 반응에 방긋방긋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는 시민. 한 편 민성과 우성은 남자인 가인 쪽에 붙어 진지한 대화의 장을 펴고 있었다. " 남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네에게 감탄했네. " " …예? " " 그래. 자네의 그 포용력과 이해. 그리고 모든 것을 바친 사랑…. 자네의 앞에 서니 나 같은 이는 부끄러울 뿐이군. 부디 본 받게 해주게! " " ……예에? " " 자네는 사나이다!! 진정한 사나이!! " " .........하아. " 연신 그들과 악수를 하며 점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가인.뭐야? 이 사람 들은 정말…. 그렇게 정신 없는 와중에 가인은 슬쩍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있 는 시민을 바라보았다. ' 시민 씨, 괜찮은 건가… 나 같은 녀석의 애인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 하지만 그런 가인의 걱정과는 달리 시민은 웃고 있었다. 거리낌 없이 웃음 을 터뜨리며 친구들과 즐거워하는 시민의 모습. 가인은 그녀가 즐거워 보인 다고 생각했다. " 후훗…. " 시민은 화장실의 세면대에 서서 앞전의 일들을 생각하며 혼자 웃음 짓고 있 었다. 그 뒤로 좋은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 연신 웃으며 회포를 풀었던 그들 이었다. 시민은 잠시 화장도 고칠 겸,정신 없이 웃느라 들뜬 가슴도 가라 앉 힐 겸 해서 화장실에 와 있었다. 얼마나 웃었던지 눈 가에 눈물이 맺혀있을 정도였다. " ......... " 잠시 거울을 들여다 보는 그녀. 그곳에는 긴 금발을 곱게 기른 노란 원피스 의 자신이 서 있었다. 시민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 다행이야…. 나‥ 오길 잘했구나‥. ' 만약,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동창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계속 도 망만 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 정말‥ 다행이야…. ' 다시 한번 안도하는 그녀. 그때, 화장실의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들어왔다. 입고 있는 빨간 원피스가 천박하지 않게 잘 어울리는 그녀. 정세라였다.세라 는 화장실에 시민이 있자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에 섰다. " 얼른 안 나오고 뭐해? 다들 기다리는데… 화장 고치고 있었던 거야? " " 응? 으응. " " 아, 그럼 나도∼ " 그렇게 말하며 핸드백에서 화장도구를 꺼내는 세라. 그녀는 시민의 옆에서 거울을 마주보며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화장을 고치는 데 몰두하는 그녀들. 그때, 세라가 립스틱을 바르다가 조용히 시민에게 말했다. " …후훗. 뭔가 이상하다,얘. " " 응? 뭐가? " " 아니. 이렇게 화장실에서 나란히 화장을 고치고 있으니깐‥. " " 아…. " 시민은 쓴 웃음을 지었다.하긴 아직 이런 내 모습이 익숙할리가 없지. 더구 나 세라 라면…. 시민은 서둘러 화장을 끝내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눈치챈 세라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 아이, 참! 그런 의미로 말했던 거 아냐,시민아∼ 기다렸다가 나 화장 끝 내고 같이 나가자. " " 아,으응. " 시민은 어색하게 화장도구를 챙기며 세라를 바라보았다.세라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하긴… 그때 당시도 시민이 너는 남자 답지 않게 세심한 점이 있었지. 요 리나 뜨개질도 잘 하고 말이야. " " 그랬던가? " 세라의 미소에 짧은 웃음으로 답하는 시민. 세라는 화장을 끝낸 듯 천천히 화장도구를 챙기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 그거 알고 있었니? 나 너 되게 좋아했었는데…. " " ......그랬‥어? " 그런 세라의 말에서 풍기는 쓸쓸함을 느낀 시민.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잠자코 세라가 다음 말을 하기만 기다렸다.세라는 시민을 돌아 보며 미소지었다. " 편지도 썼었다? 수 십 번을 쓰고 또 썼었는데‥번번히 주지도 못하고 집 에 가져 오고 말았어. 너에게 편지를 주려고 했지만, 네가 노래를 부르는 걸 듣고 있다보면 바보같이 다 잊어먹어서‥ 내가 편지를 가져왔던 것도 잊어 먹어서‥ 결국은 하나도 주질 못했어. " " ......... " " 아, 그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결국은 직접 너에게 고백을 할려고 했었어. 기억나? 우리가 했던 마지막 오페라의 유령 공연. " " …응. 기억나. " " 그때 공연이 끝나면‥ 그러면 너에게 고백을 할려고 했었는데…. 공연이 끝난 후 아무리 찾아봐도 네가 안 보이더라…. " " ......... " " 훗. 미안. 꽤나 옛날 얘기를 해버렸네…. 어서 가자. 애들이 기다리겠다. " 세라는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화장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민은 그 자리에 발을 뗄 줄 모른채 그런 세라의 뒷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딘가를 상실한 허전함과 공허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 자아∼자∼ 유가인? 어머, 가인이라 불러도 돼지? " " 그,그러세요. " 혀가 꼬부러진 목소리로 자신에게 묻는 유정에게 쓴 웃음을 짓는 유가인.자 신들의 테이블에는 벌써 빈 맥주병이 15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술에 취할수 록 분위기는 좋아지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가인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왜냐 하면… " 정말 맘에 든다∼착하기도 하지∼ 얼굴도 귀여운 게 딱 내 스타일이고∼ " 유정은 가인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가인은 얼굴이 빨개진 채 어쩔 줄을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가인의 모습이 내내 귀여 웠는듯 유정은 자신의 500cc 컵을 내밀며 그에게 말했다. " 자아∼ 누나가 술 한잔 따라줄테니 마셔봐∼ 원 샷이야. 알았지? " " ......나‥ 미성년자인데… " 팔에 느껴지는 유정의 가슴 감촉에 마른 침을 삼키며 중얼거리는 가인.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구원의 손길을 찾았다. 하지만 민성과 우성,수미는 유정과 가인의 반응이 퍽이나 재밌었는듯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었다. 으아,정말 너 무들 하잖아∼! 유정은 가인이 자신이 따라준 술을 안 마시고 어영부영 하고 만 있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 에이∼ 스타일 안좋아지기 시작하네∼ 누나가 마시라면 마실 것이지! " " 그,그런∼ " " 아‥! 혹시 그냥 컵으로 마시기 싫었던 거야? 에이∼ 그런 거라면 진작 얘기를 하지∼ 알았어.알았어. 이 누나가 특별히 입으로 마시게 해줄게. 마우스 앤 마우스. 오케이? " 뭐? 입? 마우스 앤 마우스? 그런 알 수 없는 말들을 나열하더니, 유정은 정 말 술을 자기 입으로 마신 후 삼키지도 않고 가인의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헉, 이것이 바로 마우스 앤 마우스!! 사면초가에 몰린 가인!! 다 가오는 유정의 입술에 가인은 구석에 몰린 쥐 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그때‥ " 삼켜. " 냉혹한 목소리와 함께 유정의 목젖을 튕기는 손길 하나.바로 화장실에서 돌 아온 시민이었다.유정은 그런 시민의 행동에 그만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술을 삼켜버렸다.꿀꺽∼ " 뭐,뭐하는 짓이야∼ 한시민?! " " 어머,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유정아? 가인 씨는 미성년자야. 술은 절대 안돼. " 언제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냐는듯이 방긋 미소짓는 시민. 그런 시민의 모습 에 유정은 코 웃음을 치며 그녀와 가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헤헹∼ 그래! 벌써부터 애인을 감싸고 돈단 말이지∼! 아,진짜 눈꼴 셔라. 솔로인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 " " …술을 좀 과하게 했구나, 유정아. "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답하지만 살짝 이마에 실핏줄이 돋은 시민.그때 그녀와 같이 화장실에서 오던 세라가 가인의 옆에 앉으며 시민에게 말했다. " 시민이 너도 참 고리타분하기는∼요즘은 고등학생들도 술 정도는 다들 마 실줄 안다구∼ 그쵸, 가인 씨? 자아∼ 이 누나가 한잔 따라줄테니 마셔봐 요. " " 세라,너까지…. " 배신을 때린 세라를 노려보는 시민. 그때, 바(BAR)의 사장으로 보이는 중 년의 남자가 가인들의 테이블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 저기… 손님. 저희 업소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술 판매를 금지하고 있는데 요…. " 그런 사장의 말에 시민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가인의 팔을 잡아 당겼다. " 그것 보렴.쌤통이다. 자, 가인 씨, 이리와요. 저런 늙은 아줌마들 상대할 필요 없어요. " " 누,누가 늙은 아줌마야∼!! " 항의하는 유정. 그때, 세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사장을 불렀다. " 저기‥ 사장 님? " " 예? " 은은한 세라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는 사장. 사장은 잠시 세라를 살펴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 " 아,저기‥ 혹시…!! " ． ． ． " 정·세·라 라고 합니다. 본의 아니게 가게에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만 사장 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요. " 사장은 이 눈 앞의 여성을 완전히 알아본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경악 했다. 정세라. 한국의 프리 마돈나!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세계 5대 오페 라 극장을 섭렵한 세계가 인정한 소프라노!! 사장은 흥분한 목소리로 세라에 게 소리쳤다. " 바,반갑습니다. 정세라 씨!! 저,저희 업소를 찾아주셔서 황송‥아니 영광, 영광입니다!! 벌써 4년째 정세라 씨의 팬입니다!! " " 아,고맙습니다, 사장 님. 그런데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 " 마,말씀만 하십시오!! " 완전히 횡성수설하며 세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장. 세라는 옆의 가인 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 여기 이 학생과 꼭 술을 마시고 싶은데‥ 저기‥ 어떻게 안될까요? " " 그,그런!! 당연히 해드려야죠!! 얘들아,문 닫아라!! 오늘 손님 안 받는다! " 대번에 가게 문을 닫고, 가인들 외의 손님들을 내보내는 사장. 순식간에 바 에는 가인들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민성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 며 사장이 서비스라며 가져온 맥주 한 박스를 바라본채 중얼거렸다. " 이,이게‥ 프리마돈나의 힘…. " " 정확히는 매스미디어의 힘이라고나 할까. 자자∼ 이제 거리낄 것도 없겠 다. 가인 씨, 한 잔 받아요∼ " " 그래.그래. 마시라고∼ " 기세등등하게 가인에게 술을 권하는 세라와 유정.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500cc잔을 들었다. 더 이상 피할 구석이 없군…. 마셔야 되는 건가. 그렇게 컵을 입으로 가져가는 가인. 황금빛 액체가 넘실대며 그의 입술로 향했다. - 탁! 그때, 그런 가인의 손에서 컵을 낚아채는 손길 하나. 바로 시민이었다.그녀 는 가인에게서 뺏은 맥주 500cc 한 잔을 그대로 원 샷해버렸다. - 꿀꺽.꿀꺽.꿀꺽,꿀꺽,꿀꺽‥ " ......... " 시민이 원 샷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가인들. 500cc를 눈깜짝할 새에 비 워낸 그녀는 테이블에 '탕' 소리가 나게 컵을 내려놓으며 유정들을 노려보았 다. 가인은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중얼거렸다. 시,시민 씨‥ 괘,괜찮을려나‥ 그런 가인의 걱정과는 다르게 시민은 단지 살짝 얼굴만 붉어졌을 뿐. 그녀는 엄포하듯 유정들에게 말했다. " 가인 씨에게 술을 마시게 하려거든 나를 먼저 통과해야 할 거야. " " 재밌는데∼!! 좋아!! 보내주마, 한시민!! " 세라와 유정은 시민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노려보며 자신의 앞에 놓 인 맥주 병을 원샷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죽음의 원샷 전쟁에 돌입한 것이 다!! 민성은 가인과 우성,수미를 돌아보며 차근차근 역할 분담을 하기 시작 했다. " …시민이야 가인 군이 데려가면 될테고‥ 문제는 세라와 유정인데….우성 이,네가 유정이를 책임지는 게 어때? " " 아, 난 유정이 싫어. 걔 술 취하면 아무데서나 드러눕는단 말이야. " 냉정하게 민성의 말을 거절하는 우성이었다. 그렇게 테이블의 한 곳에서 뒷 처리 반이 결성되고 있는 와중에도 시민과 세라,유정의 앞에 놓이는 술병들 은 착실히 그 수를 늘려 가고 있었다. 가인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시민을 바 라보며 중얼거렸다. ' 그,그만마셔요,시민 씨∼ ' 물론 시민은 계속 마셨다. " 으음…. " " 괜찮아요, 시민 씨? " 결국, 모두가 헤어지게 된 것은 유정과 세라가 술에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은 후였다. 승자는 시민. 그녀는 강했다. 단지, 테이블 밑에 나뒹굴던 수 십개의 맥주 병들은 생각해내기 싫지만…. 어쨋든, 그런 사투를 벌여놓고서 시민도 무사할리는 만무했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못 잡는 시민. 그런 그녀를 부축해서 가인은 간신히 26구역에 위치한 자신들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2시. 어두 컴컴한 밤 하늘을 보자, 잊고있 던 피곤이 몰려오는 가인이었다. - 철컹‥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선 가인. 그때, 가인에게 부축받고 있던 시민이 살 짝 어깨를 흔들며 웃음을 흘렸다. " 후,후후‥ 가인 씨∼ " " 예? 왜 그러세요,시민 씨? " " 후후‥ 그냥요. 그냥 이름 부르면 안되요? "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어 가인을 바라본채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시민. 귓가로 시민의 입김이 스치고 지나가자 얼굴이 시민 못지 않게 빨개지는 가 인이었다. 평상시와는 다른 그녀의 모습에 가인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두 근 거리고 있었다. 시,시민 씨‥ 술을 드셔서 그런가? 왠지 모를 색기가…. " 자, 신발 벗으세요. " 가인은 애써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며 시민의 신발을 벗겼다.그런 가인의 모 습을 바라보며 시민이 방긋 웃었다. " 어머, 친절도 해라‥. " " 예? 무,무슨‥ 친절이라뇨‥. "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 가인. 그런 가인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시민은 순간, 가인의 목을 껴안았다. 으앗?! 시민 씨?!! 경직되는 가인의 몸. 그런 소년의 귀로 시민이 속삭였다. " 나‥ 안고 들어가 줄래요? 다리에 힘이 빠져서 못 걷겠어요. " " 예? 예,옛! 그럴게요!! " 떨리는 손길로 시민의 몸을 들어올리는 가인.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는데 번 쩍 그녀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시민은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마치 몸무 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로‥. 그렇게 가인이 시민을 안고 그녀의 방으로 걷자, 시민이 가인을 올려다 보며 물었다. " 나… 무거워요? " " 아,아뇨! 깃털 처럼 가볍네요!! " " 후훗, 가인 씨도 참…. " 가인은 차마 자신을 올려다 보는 시민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며 뻣뻣하게 굳은 발걸음으로 시민의 방에 들어갔다. 알싸한 향기가 감도는 그녀의 방.이, 이 곳이 시민 씨의 방인가!! 처음으로 들어와본 그녀의 방에 가인은 감동 어 린 눈초리로 방 안을 구경했다. 수수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방 안이 었다. 그리고 방 중앙에 놓여있는 침대. 이,이곳에서 시민 씨가…! 아,뒷 생 각은 그만. 뭘 생각할려는 거냐,유가인?!! 가인은 헛된 망상이 떠오르려는 자신의 머리를 꾸짖으며 시민을 침대에 내려주었다. '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 가인은 멍하니 방 안에서 풍겨나오는 향기를 맡다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 다. 으아, 유가인!! 안돼! 어서 이 방을 나가라!! 더 있다간 이 방의 정신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다!! 가인은 서둘러 시민에게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다. " 그럼, 시민 씨‥ 내일‥ " 하지만 채 말을 끝맺지 못하는 가인. 시민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 이다. 왜,왜 그러시는 거지,시민 씨?! 그렇게 가인이 당황하는 사이에 시민 이 가인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가인은 엉겹결에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침대에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의 감촉. 그렇지만 가인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는 시민의 손길에 더 긴장해야만 했다. " 시,시민 씨‥? " " ......오늘‥고마웠어요. " 나직히 들려오는 시민의 목소리. 가인은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 민은 촉촉히 젖은 눈길로 가인을 바라본채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 나‥ 가인 씨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그랬다면‥다시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뻔 했어요. " " 그,그런‥! 제가 무슨…. " 쓴 웃음을 지으며 부인하려는 가인.하지만 자신의 품 속을 파고드는 시민의 행동에 뒷 말을 잊어버렸다. " 고마워요….고마워요‥. "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어깨를 떠는 시민.가인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 라보았다. 우,우시는 건가? 시민 씨?! 가인은 왠지 안스러운 마음이 들어 몇 번 손을 주춤 거리다가 시민의 어깨를 살짝 안아주었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뭔가를 해주고픈 가인이었다. ' 시민 씨,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 가인은 그녀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며 시민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주 었다. 자신의 품 안에 들어와 있는 시민 씨의 몸은 너무도 작고‥ 그리고 따 뜻했다. 가인은 그 따스함에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철컹‥ 다음 날 아침. 유리는 신체 검사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는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다음과 같이 다짐하고 있었다. ' 오빠한테 사과해야지‥. ' 신체 검사 내내 생각하고 생각했었다. 좋아하는 오빠와 이렇게 냉전 상태를 유지하는 건 정말이지 더 이상 싫었다. 그리고 유리, 자신이 혼자 오해해서 가인에게 화냈던 것 아닌가? ' 그래. 사과하고 다시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 ' 그래! 유리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아침의 상쾌한 날씨가 그녀의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든 것 같았다. 유리는 재빨리 2층, 가인 의 방으로 다가갔다. 훗. 그래. 늦잠 자고 있을 오빠를 기분 좋게 깨워 주는 거야,이유리. 그리고 사과의 한 마디를 건내는 거지. 유리는 그녀 답지 않게 방긋 웃는 얼굴로 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 오빠‥? " 없다. 방 안의 침대에는 가인이 없었다.유리는 내심 실망한 기분이 들어 중 얼거렸다. 벌써 학교를 간 걸까? 하지만 아직 7시 밖에 안됐는 걸.유리는 이 상함을 느끼며 아랫 층으로 내려갔다. 시민의 방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그녀 라면 오빠가 어딨는지 알지도… - 철컥. " ......... " 시민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유리. 하지만 그녀는 곧 발걸음을 멈춘채 뚫어 지게 한 곳을 응시해야만 했다. 시민의 방 중앙에 있는 침대.그 침대에는 시 민 외에도 한 사람이 더 누워 있었다. 바로 이유리,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 던 유가인이…!! 그것도 둘이서 사이좋게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유리는 자 신의 머리털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 …으응. " 그때 몸을 뒤척이며 눈을 뜨기 시작하는 가인. 참으로 신의 악취미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가인은 상체를 일으키며 잠이 덜 깬 눈으로 주 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문 가에 서있는 유리를 발견했다. " 어,유리야…? " " ......... " …묵념(默念). 뒷 일은 상상에 맡기겠다. 세라가 시민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1학기가 끝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 안녕하세요, 한시민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세라가 속해 있는 동아리 Phantom of Opera는 여름 공연을 준비하 느라고 한창 바쁜 시기였다. 무엇보다도 유령 역을 소화해낼 인재를 찾기 위 해 선배들은 혈안이 되어 있었다. 크리스틴 다에 역은 낮은 G에서 고음 E 까 지 간단히 통과하는 소프라노 주세라가 있었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하이 바 리톤에 적어도 2옥타브를 넘기는 성량을 지닌 유령 역을 맡을 이를 찾아내기 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선화 예고라 고 한다지만 그런 음색을 가진 남자를 발견하기란 힘들었다. 그래서 유령 역 을 따낼 오디션을 열고 있었는데… - 퀼티에르 말데 그리운 그의 이름‥ 방 안의 모두는 한 목소리의 마력에 사로 잡혀 있었다.그들의 눈 앞에 있는 이 금발 머리의 소년은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예술이 되어 모두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주기 시작했다. - 사랑에 빠진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여! 처음으로 내 가슴 그 이름 사랑의 기쁨 언제나 잊을 수가 없구나! 이 모든 생각, 나의 소망, 그대와 함께 언제나 간직하리 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리운 그대의 이름이여 세라는 숨도 쉬지 못하며 소년의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아리아 가 끝난 뒤에도, 그녀는 그 여운을 쫓았다. 소년은 너무도 간단히,너무도 자 연스럽게 베르디 리골레토 질다의 아리아 "그리운 이름이여(Caro nome)"를 소화해낸 것이다. 이 아리아를 남자로서 소화해낼 수 있는 이가 있었다니.모 두는 감탄보다 경악을 하고 있었다. 금발의 머리 카락 사이로 감겨 있던 소 년의 눈이 살며시 열렸다. 옅은 감홍빛의 눈동자 한쌍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 내었다. - 합격‥인가요? 좌중의 반응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묻는 그. 당연히 합격이었다. 그 날부로 그는 당당히 Phantom of Opera의 유령 역에 지정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동 아리의 주역이 되었다.모두에게 둘러 싸여 웃음 짓고 있는 소년을 멀리서 지 켜보는 세라. 그녀는 소년의 이름을 나직히 되내여 보았다. - 한시민‥. 그것은 세라의 첫 사랑이자… 그리고 첫 질투의 이름이었다. " 세라, 난 아직도 이해가 잘 안돼‥. " " 왜요, 언니? " 세라는 자신의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매니저 언니에게 되물었다. 사실,세라 는 매니저가 왜 저렇게 고심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 그걸 몰라서 묻는 거니,너? 이번에 트리스테 베르디 극장에 <리골레토>의 질다로 출연 요청이 있었잖아! 그런데 그런 좋은 기회도 마다하고 한국으 로 온다 싶더니‥ 난데 없이 뮤지컬이라니? 그것도 오페라의 유령? " 남들이 이 말을 들었더라면, 기가 막혀 펄쩍 뛸 일이었다. 트리스테 베르디 극장 이라고 하면 이탈리아의 5대 극장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런 극장에서, 그것도 요청 제의까지 들어온 것을 거절하다니. 매니저로서는 이 눈 앞의 소 프라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라는 쓴 웃 음을 지으며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 언니. 언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 " 너? 한국의 프리마돈나! 세계가 인정하는 소프라노 주세라!! " 매니저의 목소리에는 이제 노여움까지 섞여 있었다. 그런 매니저를 바라보 며 세라는 얼굴을 굳혔다. " …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야. 그 사람에 비하면 나 같은 건 아 무 것도 아니었거든…. " " 뭐?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얘는? 아까부터…? 매니저는 의아한 얼굴로 세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밝은 태양 빛이 한순간 세라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세라의 얼굴에는 긴 음영이 드리워져 있 었다. " 이번 공연은 내 자신에게 당당해지기 위해서야.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끌려다니는 건 사양하겠어. 그것을 그 사람에게 보여주겠어. 내가 그 때 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 " 세라야…. " 알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매니저. 그런 그녀에게 세라는 언제 심각했 냐는듯 미소를 지었다. " 난 이제 당당해. " - 수고했어, 시민아. 세라는 두근 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눈 앞의 소년에게 말했다. 짧은 금발 머리에 여자라고 해도 믿을 미모의 소년. 그는 감홍빛 눈동자를 들어 세라를 바라보며 웃었다. - 수고는 무슨. 세라야 말로 수고했지. 무엇보다 무대의 에뜨와르(별)였잖 아. - 얘는∼ 비행기 태우는 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세라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시민이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그가 말 하는 한마디 한 마디가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그 는 알고 있을까‥. 그런 그녀의 귀로 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야. 크리스틴이 유령의 협박에 못 이겨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부분의 세라는 정말 대단했어. 시시각각 재앙의 도래를 온 몸으로 감지하며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크리스틴. 하지만 너무도 노래를 사랑 하고, 부르는 것을 사랑하던 그녀는 노래 이외의 모든 것을 마음 속으로 부터 지워가기 시작하지. 그래. 딱 한번만 더, 마지막으로 멋지게 해내리 라! 시민은 마치 자신이 크리스틴인 것 처럼, 앞전 세라가 연극했던 크리스틴의 아리아 부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 순수한 천사들이여! 눈부신 천사들이여! 순수한 천사들이여! 눈부신 천사들이여! 자리에서 일어나 세라의 앞에서 노래부르는 시민. 세라는 심장이 관통 당하 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세라가 지금까지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기가 막힌 목소리였다.넉넉하면서도 웅장한 부드러움과 당당하면서도 섬세한 뉘앙스,강 렬하면서도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여운을 단 한번 발성 속에서 그토록 한꺼 번에 발휘하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 나의 영혼을 저 하늘나라로 데려가다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인가.자신이 부르던 그 아리아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아리아였다. 같은 노래인데,같은 아리 아인데 어떻게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시민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세라의 볼로 한 줄기 눈물이 주루륵 흘러내렸다. 순수한 감동이었다. 그것 은 마치 신비롭고 황홀한 다른 세상을 구경한 감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 게 세라가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릴 때 시민이 언제나 처럼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 이번 마지막 공연도… 우리 열심히 하자. 그때, 세라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눈 앞의 이 소년은 여지껏 제 실력으 로 자신들의 앞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 런 그를 자신은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몇 번의 편지를 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만큼 편지들은 세라의 손에 구 겨진 채 휴지통으로 향했다. 자신의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세라는 머리를 감싸며 한 숨을 쉬었다. - 하아… 세라는 멍한 눈으로 책상에 엎드린채 생각했다.그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 었다. 그의 목소리에 한 없이 빠져들고 싶었다.그렇지만 너무도 막막했다.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불안하기도 했다. 뭐가 불안한 것일까,나는…. - 시민…. 한시민. 그의 목소리는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의 소리였다. 처음에는 그 의 목소리에 세라는 가슴 깊이 절망했다. 목소리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는. 그의 목소리는 자신에게서 도전할 용기 나 기회마저도 뺏어가버렸다. 엄두도 못내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이 너무도 분하고 서글펐던 그녀였다. - 아니야…. 세라는 작게 부정했다. 그녀는 그를 좋아했다. 그를 좋아하는 감정이 깊어 질수록 그런 시기와 질투의 감정들은 사라져 갔다. 그를 좋아하게 되니,부인 하고 싶던 그의 목소리도 좋아져 버렸다. 더 이상 시민에게 질투를 느낄 필 요는 없어져 버렸다. 그의 연인이 되어, 그의 옆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낼수는 없었지만, 그 목소리를 나만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 아니야…. 세라는 자신의 생각들을 부인하며 침대에 쓰러져 베개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그런 복잡한 감정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나는 단지‥ 나는 단지… - 사랑해…. 그것 뿐이었다. - 거,거짓말…. 세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마지막 공연을 앞둔 전 날…그녀 는 더 이상 시민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그는 더 이상 동아리에 나오지 않았 고,학교에도 나오지 않았다.세라의 그런 망연자실한 모습에 유정은 안타까움 을 느끼며 말했다. - 자퇴했데…. 집 주소로도 찾아가 봤는데 이사했나 보더라‥. - 그런…. 말도 안돼. 세라는 왠지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 앉을 뻔했다. 유정이 그런 세라를 간신 히 부축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 세,세라야‥. - 아니야‥. 아니야, 유정아‥. 그렇게 갑자기 떠나버릴 애가 아니잖아? 하 다 못해 우리에게 작별 인사라도 해야 하잖아? 응? 그래… - 이렇게 말도 없이 떠날 애가 아니야‥. 세라는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유정의 부축을 뿌리치고 동아리 실을 달려 나 갔다.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유정의 외침이 들려왔지만,곧 한 없이 멀어져만 갔다. 세라는 숨이 차올랐지만 쉴 새 없이 뛰었다. 달리는 세라의 뒤로는 그 녀의 눈물 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 - 거짓말이야‥ 그치, 시민아? 응? 다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는 거야? - 응? 그런 거야? 하지만 그녀의 말에 대답해 줄 시민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간신히‥ 다시 만났어. " 세라는 미소 지었다. 엊그제에 만났던 시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민은 그 때와는 많이 변해 있었다. 아마도,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그가 아닐 지도 몰랐다.하지만 상관 없었다. 주세라, 자신도 이미 그 때의 자신이 아닌 것이다. " 이번에는 보여주고 말겠어. " 그때는 그에게,그의 목소리에게 끌려만 다녔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의 목소 리에게 마음을 뺏겼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내 목소리로 그의 마음을 얻어 보이겠어. 지금의 내가 어느 정도인지 그에게 보여주고 말겠어. " 그게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목표이니까. " 세라는 유정이 가르쳐준 시민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 유리야, 같이 가자∼ " 수업이 끝난 방과 후. 가인은 웃으며 교실을 나가려는 유리에게 말했다. 일 주일 전에 있었던 시민의 동창회에 갔다온 다음 날,시민의 방에서 깜빡 잠이 들어버렸던 가인.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장면을 유리에게 목격당해 가인은 한 동안 유리의 앞에서 얼굴도 들고 다니질 못했다.그리고 그가 유리에게 말 을 걸 때마다‥ - 팩! 세차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유리였다. 아, 진짜 울고 싶네….가인은 애써 얼 굴에서 웃음을 잃지 않으며 유리에게 다시 말했다. " 오페라의 유령 공연이래. 그것도 한국의 프리마돈나 주세라 씨의 공연.이 표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니? 반 년 전에 다 예매 되어서 지금 구할려면 원가의 다섯 배 이상의 가격으로 사야한데∼ " " ......... " 여전히 가인의 말을 무시하는 유리. 며칠 전에 주세라가 그들의 집으로 직 접 전화를 걸어 자신의 공연에 가인과 시민을 초청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 지만 그 공연은 보고 싶어도 표가 없어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대 인기의 뮤지 컬 이라고 한다. 그런 공연에 자신들이 초청받다니! 그것도 주세라, 본인에 게서 직접!! " 가자, 유리야∼ 응? " 그리고 가인은 세라에게 한 표를 더 구할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었다. 며칠 째 냉담 상태인 유리의 기분도 풀어줄 겸, 그녀도 데려갈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세라야 혼쾌히 가인의 부탁을 들어줬지만 정작, 유리 본인이 이런 태도 를 취하고 있었으니 가인으로서는 속이 답답할 뿐이었다.그때 유리가 여전히 가인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 됐어. 둘이서 같이 공연 가면 되겠네. 내가 거기에 왜 끼어서 가? " " 끼,끼어서 가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 " 사실이지 않아? 오빠도 사실은 시민하고 둘이서만 가고 싶은 거 아냐? 나 같은 거 방해만 될 뿐이잖아. " " 유리야!! " 가인은 한 숨을 쉬며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이 녀석이 정말∼!! " 방해는 무슨 방해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난 그냥 오랫만에 다 같이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서 얘기를 했던 건데! 그리 고 최근에는 유리하고도 같이 놀러 가지 못했잖아? 도대체 왜 그렇게 차 갑게 구는 거야? 유리는 그렇게 오빠하고 같이 있는 게 싫으니? 얘기도 하기 싫어? " " …오빠‥. " 그제서야 떨리는 눈길로 가인에게 고개를 돌리는 유리.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힌 채 가인을 올려다 보았다.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 어. 왠지 가슴이 뛰는 유리였다. 그래‥ 오빠도 나하고 같이 있고 싶었던 거 구나…. 사실, 지금껏 오기로 가인에게 냉담하게 굴었던 유리였다. 좋아하는 오빠에게, 그것도 일부러 안 좋은 소리를 하며 무시하는 태도를 취해서 유리 자신도 하루 하루가 가시 방석에 앉은 것 같고 우울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렇게 가인이 속 마음을 얘기해주니 가슴의 앙금이 풀리는 느낌이었다.가인은 유리의 태도가 풀어진 것 같아 웃으며 말했다. " 같이 가줄거지? " 자신도 모르게 가인의 손을 잡는 유리였다.자신보다 훨씬 큰 따뜻한 가인의 손길. 이 느낌‥ 상당히 오랫만이다…. 항상 가인의 손을 잡고 다니던 그녀 였지만, 요 며칠간 가인과 냉담 상태이느라 그러질 못했었다. 덕분에 이렇게 다시 그의 손을 잡게 되니, 마치 일 년 간은 못 잡았던 것 같은 그리움 마저 드는 유리였다. 그런 유리의 태도에 가인은 그녀의 기분이 완전히 풀어진 것 같아서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그래.그래. 같이 가자. 그리고 시민 씨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면 어떻게 하니? 그래도 우리 보호자이신데∼ "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단지 유리가 아무한테나 반 말을 하는 것 같아 고쳐주고 싶어서 그런 말을 꺼냈던 것 뿐인데… 그런데 그것이 다시 모 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릴 줄이야…. 유리는 가인의 그 말에 다시 눈썹을 씰 룩거리며 잡고 있던 가인의 손을 놓아버렸다. 언제나 시민 시민 시민.가인의 머리 속에는 그녀에 대한 생각 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 시 화가 부글 부글 끓어올라 유리는 가인에게서 팩 고개를 돌려버렸다. " 됐어. 그 보호자 분하고 같이 가 버려. " " 유리야!! " " ......... " 왜 또 이러는 거야,정말? 화가 풀린 것 같더니만 다시 화를 내는 유리의 태 도에 가인은 힘이 다 빠져 버리는 것 같았다.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화난 목소리로 유리에게 소리쳤다. " 그래. 알았어! 네 맘대로 해. 이제 오빠도 몰라, 정말! " 그러면서 그대로 교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가인.유리는 그런 가인의 말에 흠 칫 놀라며 그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버 리고 있었다.사라져 가는 가인의 뒷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 못한 유리는 결국 그를 부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때는 이미 가인이 모습을 감춘 뒤였다.유 리는 뻗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힘 없이 중얼거렸다. " ......바보‥. " 그 말은 가인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그렇 게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는 유리.그리고 아까부터 그런 가인과 유리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가 하나 있었으니‥ " .........훗. "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그녀. 바로 테레이아 민체스터였다. 주세라의 출연으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The Phantom of the Opera'는 41구역에 위치한 LG아트 센터에서 공연되었다.LG아트센터 상남홀은 음악, 무 용, 연극, 뮤지컬 등 공연 예술의 모든 장르를 최적의 조건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첨단 장비가 결집되어 건설된 다목적 공연장이었다. " 괴,굉장하군요‥. " 가인은 공연장의 웅장한 모습에 압도되어 중얼거렸다. 홀 자체만 해도 감당 이 안될 정도로 컸는데, 그 안에 배치된 좌석으로 빽빽히 들어차 있는 수 많 은 관객들의 모습까지 합세하자 보기 힘든 장관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검은 여성 정장 차림의 시민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 '오페라의 유령'은 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 공연이 아니니까요.원작사인 R UG는 팬텀을 공연할 수 있는 시장 규모와 공연 환경이 완벽하게 보장될 때만 외부 제작자에게 라이센스를 부여하고 제작에 참여하거든요.수 차례 의 현장 답사와 시장 분석을 통해 공연 가능 여부를 결정하고, 공연이 결 정되면 최고의 기술 스탭과 제작진을 투여하여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내 죠. " " 그,그렇군요. " 가인은 감탄하며 한 숨을 돌렸다. 가인과 시민이 앉아 있는 좌석은, 홀의 2 층에 위치한 VIP석이었다. 좌석은 VIP,R,S,A,B의 순으로 등급이 매겨지는데 당연히 전자일수록 전망이나, 서비스, 가격이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VIP석이라니‥.그들이 이 좌석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공연 의 주인공인 주세라의 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20,0000만원 상당의 티켓을 무료로 건내주다니… " 그런데 유리 양은 결국 안 왔나 보내요? " 갑작스레 건내는 시민의 말에 가인은 학교에서 있었던 유리와의 일을 떠올 리며 한 숨을 내쉬었다. " 예…. 저하고 오기가 싫은가 봐요. " " 그럴리가요. 유리 양이 얼마나 가인 씨를 좋아하는데…. " " 글쎄요‥.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유리의 냉담한 표정이 떠오르자 다시 기분이 우울해졌다.마치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의 유리로 돌아가 버린 것 같 았다. 간신히 친해졌다 싶었는데‥.다시 그때의 관계로 돌아가버린 걸까.유 리에 대한 생각으로 공연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가인의 모습 에 시민은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시,시민 씨? 가인은 화들짝 놀라 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민은 언제나 처럼 미소를 지은채 가인에게 말했다. " 너무 걱정 말아요. 유리 양은 가인 씨를 너무 너무 좋아하니까… 그래서 그런 것 뿐이니까‥ "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공연이 그 시작을 알 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인의 귀에는 시민의 목소리가 그 어떤 악기의 소리 보다도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 반드시 가인 씨에게 다시 웃어줄 거에요.유리 양. " " …그,그럴까요? " 시민의 말을 믿고 싶은 가인이었다. 가인이 안색을 조금 누그러뜨리자 시민 은 무대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 그럼요. 그러니까 편하게 마음가지고 공연 구경해요. 뮤지컬 공연이라는 건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거든요.세라가 직접 초 청까지 해줬잖아요. " " 예‥. " 그래. 우선은 공연에 집중하자,유가인. 처음으로 시민 씨와 단 둘이서 보러 온 공연이지 않은가. 가인은 유리와의 일을 애써 머리 속에서 지우려고 노력 하며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 곳에서는 화려한 조명 빛을 받으며 드레 스 차림의 주세라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홀 안을 가득히 메우기 시작했다.그녀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오페라의 유령은 본 막을 올린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프랑스의 추리작가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가 1910년 에 발표한 소설을 영국의 작곡가 앤드루 L.웨버(Andrew L. Webber)가 뮤지컬 로 만든 작품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고전적 선율에 의지하여 극 전체의 구성 을 오페라의 형태로 끌어가는 오페레타(Operetta)형식이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을 무대로, 천사의 목소리를 타고 났지만 사고로 흉측하게 변한 기형적인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괴신사가 아름답고 젊은 프리 마돈나를 짝사랑하는 이야기는 1861년 파리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인 '오페라의 유령'은 언제나 오페라 극장의 5번 박스 석에 자리하는 괴신사이다. 리허설 도중에 연속적으로 사고가 일어나자 주역 여가수가 출연 을 거부한다. 합창단원들의 추천으로 무명인 크리스틴이 대역으로 나서서 노 래를 완벽하게 부르고 공연은 성공을 거둔다. '오페라의 유령'은 오페라 '한니발' 의 리허설을 끝내고 분장실로 돌아온 크 리스틴을 납치하여 분장실의 거울을 통해 지하 호수에 있는 마궁으로 사라진 다.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면서 자기가 작곡한 오페라에서 노래해줄 것을 간청한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괴신사의 얼굴을 본 크리스틴은 경악하고 오페라 극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 한다.두려움에 떠는 그녀에게 연인 라울은 자신을 믿으라며 사랑을 고백한다. 6개월 후 공연 날 '오페라의 유령'은 등장인물로 변신해 크리스틴을 납치한 다. 마궁에 뒤따라온 라울이 함정에 빠져 위험에 처하자 그녀는 그를 구하려 고 '오페라의 유령'에게 키스를 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유령은 그들을 풀어 주었고 경찰이 마궁을 덮쳤을 때 '오페라의 유령'의 흰 가면만이 그들을 맞 이 하고 있었다. 이상이 대략적인 오페라의 유령의 줄거리였고, 이 공연을 찾는 모든 관객들 은 이 이야기의 내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이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오페라의 유령' 이 크리스틴을 납치하여 마궁으로 노를 저어가는 신비스런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타이틀 곡 <오페라 유령>, 수십 개의 촛불 속에서 '오페라의 유령'이 부르는 <밤의 노 래>와 크리스틴과 라울의 러브송 <그대에게서 바라는 것은 오직 사랑뿐> 등 감미로운 멜로디와 복고풍의 환상적인 무대장치 때문이었다.그리고 무엇보다 도 크리스틴 역을 맡고 있는 '주세라'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관객들의 정 신을 휘어 잡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1막 1장은 오페라 '한니발'의 장면으로 시작되었다.오페라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카를롯타가 "Think of me" 를 노래하는 중간에 갑자기 무대 배경이 무 너져 내렸다. 사람들은 팬텀의 장난이라고 수근거리지만, 무대감독은 카를롯 타에게 있을수 있는 사고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카를롯타는 화를 내며 떠나 버리고, 여주인공이 없는 오페라를 공연할수 없으니 스탭들은 난감해한다.더 우기 그 역을 배우고 있던 보조 가수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 때부터 크리스틴 역을 맡고 있는 주세라가 등장한다. 무용수이자 코러스 가수인 멕 지리가 크리스틴이 그 역을 해낼수 있을거라고 얘기를 했 다. 역시 코러스 컬이었던 크리스틴에 대해 모두들 의심하지만, 마담 지리의 추천으로 일단 기회는 크리스틴에게 주어진다. think of me think of me fondly When we've said good bye Remenber me once in a while please promise me you'll try.... 맑고 투명하게 울려퍼지는 세라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마치 구경하고 있던 관객들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모두는 시선을 세라에게서 떼 지 못하며 공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 세라야‥ ' 시민은 무대에서 1장의 노래 'Think of me'를 부르는 세라를 바라보았다.그 녀의 음색은 자신과 같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 루고 있었다. 마치 혼을 어루만져주는 목소리. 시민은 미소를 지었다. ' 멋지구나‥. ' 멋지다.정말…. 세라가 지난 7년 동안을 얼마나 노래에 모든 것을 던져 왔 는지 시민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열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세라는… 세라 는 더 이상 시민이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고등학교 때를 떠올 리며 낮게 조소하는 시민.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단지,변하지 않은 것이 있 다면… ' 그건 바로 나…. ' 마치 자신만 홀로 동 떨어져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 채 지내온 것 같은 외로움. 그 외로움이 시민의 어깨를 쓸쓸하게 했다. 무대는 계속 되어 2장을 넘어서 3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3장은 크리스틴의 분장실에서 이루어졌다.관객들은 크리스틴의 분장실과 밖 을 동시에 자세히 들여다 볼수 있었다. 방을 톱질해서 반동강 낸거 같은 배 경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의 분장실에는 거대한 거울이 있었고, 크리스틴 역을 맡고 있는 세라는 그 거울을 들여다 보며 노래하고 있었다. 3장의 두번 째 노래 였다. 팬텀의 목소리를 들은 크리스틴이 애타게 그를 찾는 대목이었다. 음악의 천사여 더 이상 숨지 말고 모습을 나타내어 주오 마치 진정 크리스틴인 것 같이 반가움과 그리움,애가 타는 목소리로 팬텀을 찾아 노래를 부르는 세라.하지만 시민의 귀에는 그녀가 팬텀이 아닌 다른 이 를 찾는 것 같이 들려 오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자신을‥ 그녀의 앞에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던 자신을 애타게 찾아 헤매는 것 같은‥ 그런 세라의 목소리에 시민은 차마 그녀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너 무나 눈부신 그녀. 그런 세라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부러움의 감정이 시 민의 머리 속을 맴돌며 그녀를 괴롭혔다. " ......... " 그때 고개를 돌린 시민의 눈에 들어온 한 사람의 그림자. 2층 출입구 쪽이 었다. 객석의 모두는 무대에 눈을 빼앗겨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민 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아, 아아‥ "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검은 양복의 남자가 출입구에 기대어 시민을 직시하고 있었다.썬글래스를 끼고 있느라 그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시민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시민을 바라보던 남자는 천천히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가기 시작 했고,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 기,기다려‥! " 나는 그대의 천사요. 나에게 오오 무대에서는 거울에서 나타난 팬텀이 크리스틴을 지하의 통로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시민이 나간 홀 2층의 출입구도 천천히 닫혀지고 있었 다. 마치 언제 열렸느냐는듯이‥. 조용하게… 아트센터의 옥상.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이 곳. 그 곳에 그는 서 있었다.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긴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리며 붉은 하늘에 은빛의 수를 놓고 있었다. - 쾅! 그리고 그런 정적을 깨며 큰 소리로 열리는 옥상의 문. 뒤를 이어 옥상으로 올라 온 이는 한시민이었다. 그녀는 황망한 눈길로 옥상을 두리번 거리다가 그 남자의 존재를 발견하자 창백해진 안색으로 망연히 그를 주시했다. 남자 는 시민에게서 등을 돌린 채 지상의 전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 때도 이렇게 붉게 물든 노을이었지,아마‥. " 그리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시민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불어 오는 밤 바람으로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사정 없이 휘날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시민이었다. 그녀의 모든 관심은 이 눈 앞의 남자에게로 집 중되어 있었다. 남자는 시민을 향해 고개를 여유있게 돌리며 웃어 보였다.유 독스레 하얀 그의 치아가 빛을 발했다. " 그래. 이런 핏빛 노을 아래에서 너는 힘을 얻은 거야. " " ......... " 남자는 쓰고 있던 자신의 선글래스를 천천히 벗었다. 한 쌍의 감홍빛 눈동 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얼굴은 그의 앞에 있는 시민의 그것과 빼 다 박은 것 같이 똑같았기에,어느 누가 보더라도 둘이 일란성 쌍둥이라는 것 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사실, 진실도 그러했다. 떨리는 눈길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민에게 남자는 눈 웃음을 치며 타락 한 미소를 지었다. " 오랫만이다, 동생아. " 그 말 한 마디가 시민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동생. 동생. 동생‥동생이라고? 시민은 마치 수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자신 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한‥시영‥. " 자신의… 쌍둥이 형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혈육‥. 오페라의 유령 전편을 통해 공간적 제약이 없다던가, 환상적이고 현란한 장 면들이 연출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현란한 장면을 꼽으라면 이 4막을 꼽 을 수 있었다. 팬텀과 크리스틴은 보트를 타고 있었다.안개가 자욱한 호수를 떠가는 보트 위에서 팬텀은 노를 저으며, 팬텀과 크리스틴은 이 뮤지컬의 주 제가 를 신이 들린듯 부르고 있었다. 보트는 마치 보 기에 나뭇잎 같기도 한 뭔가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보통 연극을 보면 보트라 든가, 배는 좌우로만 이동을 하는데 여기에서는 보트가 좌우는 물론 전후진 도 하고 있었다.그 움직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정말로 팬텀과 크리스틴이 배를 타고 무대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여기에서는 무대의 바닥으로 부터 촛불들이 서서히 무대위로 올 라오고 있었다. 무려 142개의 촛불과 촛대가 무대 여기 저기서 서서히 올라 오는 것이었다. 아마도 무대에 엄청 많은 구멍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관객들 은 이렇게 자욱히 안개낀 호수 위로 촛불의 이동과 보트의 이동으로 실제 보 트가 먼 여행을 떠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잠이 들면 그는 나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지. 꿈에서 그는 나의 이름을 부르곤 했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내 맘속에 있던 오페라의 유령을 나는 보네‥ 크리스틴 역의 주세라의 목소리가 홀에 울려퍼졌다. 유리는 1층의 R 좌석에, 그것도 2층의 VIP석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다. 물론, 가인과 시민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있었다는 소리다. 학교에서 가인의 권유를 거절했었지만 결 국 이렇게 뒤 쫓아오게 된 자신이었다.이럴 바에는 차라리 가인들과 함께 오 는게 나았을 텐데… '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 유리는 13세의 어린 소녀 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처지는 한심했다. 좋아하는 오빠에게서 어린애 취급이 나 받고 있지. 그래서 그에게 짜증을 내며 화를 내지를 않았나. 결국 이렇게 따라올 거면서 굳이 고집을 부리지를 않았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심한 것 투 성이었다. 우리의 듀엣곡을 나와 같이 노래하오. 나의 힘은 그대를 더욱 강하게 하리니. 오페라의 유령은 그대의 마음속에 있으니.. 팬텀 역의 남자가 세라의 목소리에 맞쳐 노래를 불렀다.수 백개의 촛불들이 아른 거리며 무대를 더욱 환상적이게 만들고 있었지만, 유리의 눈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질 않았다.뮤지컬을 구경하러 왔으면서 엉뚱한 데에만 신경을 쓰 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이것도 한심해‥. ' 오빠‥. ' 유리는 슬쩍 고개를 돌려 2층의 가인이 앉아 있는 VIP석을 바라보았다.그는 뮤지컬에 듬뿍 빠져 들었는듯 멍하니 무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민은 잠 시 화장실에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 오빠의 옆에서 봤더라면 더 재밌게 볼 수 있었을텐데‥ ' 유리는 자신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생각해보 아도 결국은 자신이 어리기 때문이라는 결론 밖에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가 인에게서 어린애 취급을 받기 싫어 억지로 어른스럽게 굴어도, 정신 연령이 높다고 주장해도 그녀의 마음은 아직 어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인의 옆에 다른 이가 있는 것이 싫었고, 그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게 싫었다. 자신만 을 바라봐주기를 바랬다. 이게‥ 큰 욕심이었을까‥ ' 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겠다는 것이‥ 그렇게도 큰 욕심인 거야? ' 정말 그런 것일까‥? 어둠의 밤, 미궁에서도, 오페라의 유령은 그대의 나의 마음속 거기 여기 에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유리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는 팬텀을 동정이 섞인 눈초리 로 바라보았다. 저 오페라의 유령도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는 자신의 추악한 외모 때문에 좋아하는 이에게 버림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었고,유 리 자신은 좋아하는 오빠에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여자 취급을 못 받는 다는 것이었지만, 좋아하는 이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이 똑 같았다. 외면 받기 싫기에‥ 사랑하는 이를 독점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은 같 은 것이었다. ' …이런 거‥ 왠지 서글프네. ' 유리는 그렇게 점점 공연에 빠져들고 있었다. 4장도 점점 클라이맥스에 치 닫고 있었다. 나의 음악의 천사여 노래를 하오 In sleep he sang to me in dream he came.. that voice which calls to me and speaks my name..... sing once again with me our strage duet my power over you grows stronger....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선율. 모든 것을 모아뒀다가 한꺼번에 폭발시키듯 토 해내는 세라의 목소리. 마치 그것은 천상의 목소리 같았다. 신들린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유리는 순간 눈을 깜빡였다. " ......? " 어라? 금방 세라의 몸에서 빛이 났던 것 같은데? 유리는 살며시 눈을 비빈 후 다시 세라를 바라보았다. ' 잘못‥ 본 걸까…? ' 별 다른 이상은 보이질 않았다. 유리는 한 숨을 쉬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 적으로도 피곤하니까 헛 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으며 세라 의 노래 소리를 경청했다. - 라아아아아‥ 선율 속에 섞여 오는 묘한 음파 소리.그와 동시에 세라의 등 뒤에서 황금빛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관객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그녀의 변화 를 알아챈 이는 없었다. " 그 모습도 이제는 꽤나 잘 어울리는 구나.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 " ......... " 전혀 낯설음이 없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 한시영. 하지만 시민은 친근하게 그의 말을 받아줄 수 없었다. 시민은 평상시의 그녀 답지 않게 감 홍빛 눈동자를 날카롭게 치켜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 뭣 때문에 여기에 나타난 거지? " 전혀 혈육의 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민의 목소리. 시영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섭섭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 이거 너무한 걸? 모처럼 만의 재회인데 말이야‥ 적어도 형에게 하는 첫 인사 치고는 너무 쌀쌀 맞은 거 아냐? " " 시끄러워-----!! " 순간 격하게 시영에게 소리치는 시민. 시민은 증오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 으로 시영을 노려보았다.사람을 보는 것 만으로도 꿰뚫어 죽일 수 있다면 지 금의 시민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초리에도 시영은 담담히 웃고만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이 더더욱 시민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 형?! 형이라고?! 누가 도대체 내 형이라는 거야?! " 옥상으로 불어오던 밤 바람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그러나 시민의 머리는 폭 풍 속에 있는 것 처럼 사납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옅은 노란 빛의 오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시민은 소리쳤다. " 그는 죽었어! 그 날 이후로!! 날 이렇게 만든 후에!! " 그 동안 얼마나 그를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이 눈 앞의 남자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수 십번 수 백번 고민했었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만나게 되 니‥ 정작 눈 앞에 그가 있으니‥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시민은 몸을 떨게 되는 것이었다. 분노, 배신, 절망, 슬픔, 격한 감정의 회오리가 시민의 목소 리에 실려 터져나왔다. " 내 모습을 봐!! 네가 나한테 해놓은 꼴을 보라고!! "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도‥ 어째서‥! " 어째서…!! " 너는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있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시민은 절망했다. 그때 그런 시민의 귀로 시영의 웃 음 소리가 들려왔다. " 하하‥ 녀석, 지금 이 형한테 투정부리고 있는 거냐? " " .........!! " 순간,시민의 감홍 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갈라지며 그녀의 일갈이 공간을 뒤 흔들었다. 그리고 터져오르는 폭발음. - 퍼엉!! 콘크리트가 음푹 파여 들어가며 남자가 있던 자리가 산산히 부서져 올랐다. 시민의 공명음(共鳴音) 공격이었다.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우르르 떨어져 내 리는 콘크리트의 파편들. 물체의 진동수에 음으로 그 주파수를 맞추어 진동 을 증폭시키는 시민의 파괴적인 음파 공격! 하지만 그런 공명음의 폐허 속에 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시민의 귓 가로 낮게 속삭여 오는 시영의 목소리. " 많이 거칠어졌구나, 동생아. 예전에는 좀 더 부드러웠던 것 같은데‥ " " …윽!! " 흠칫 몸을 떨며 식은 땀을 흘리는 시민. 그녀의 뒤로는 어느새 이동했던 것 인지 시영이 미소를 지은채 바싹 시민에게 붙어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동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민.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시영은 웃고 있 었지만, 공기 중으로 느껴지는 그의 기운은 시민을 숨 조차 쉴 수 없게 압박 하고 있었다. 시영은 천천히 그 손으로 시민의 목줄기를 쓰다듬었다.차가운 전율이 시민의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 지금의 네 모습은 네가 원했기에 될 수 있는 거였어. 잊어 버린 것은 아 니겠지? 응? 난 베풀어 준 거란 말이야. " " 으아아아!! " 순간, 시민의 목에 닿아 있던 시영의 손길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되짚었 다. 시민은 폭풍 처럼 밑으로 가라 앉았다가, 손으로 땅을 짚으며 시영의 턱 에 발차기를 날렸다. 여유 있게 시민의 공격을 피해내는 시영. 하지만 시민 의 발은 시영의 턱을 놓쳤다고 생각되기가 무섭게 불가사의 하게 방향을 꺾 으며 시영의 얼굴로 쇄도했다. - 퍽! 결국 오른손으로 시민의 공격을 방어하며 뒤로 물러서는 시영. 시민은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시영의 여유로운 눈빛과 시민의 타오르는 눈빛이 허공 에서 얽혀 들어갔다. 붉은 노을은 마치 지상의 모든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듯 일렁 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감이 고조되는 중, 시영은 짧게 웃으며 손 을 저었다. " 훗‥ 그만하자, 동생아. 난 이럴려고 온 게 아니란다. 이 뒤는 다음으로 미뤄주지 않겠니? " " 웃기는 소리! 여기서 결판을 지어 보이겠어!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 지긋지긋한 악연에 종지부를 찍어주마!! "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시민. 시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그래. 그렇게 까지 형제 상봉을 원한다면 계속 상대해 줄 용의는 있 다.하지만 괜찮겠어? " " 무슨‥. " 시민은 시영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뭐가 괜찮다 는 거야? 하지만 곧 시민은 LG 아트 센터의 밑에서 느껴지기 시작하는 한 기 운의 정체로 하여금 시영이 말한 괜찮겠어 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시 민의 오라가 미세하게 떨리며 반응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느껴왔던 낯 익은 느낌. 그 기운의 정체는 다름아닌‥ " 설마 몬스터가?! " 그럴리가! 와프 입자의 반응이 있었더라면 벌써 본부에서 무전이 왔을 것이 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은… ' 융합 형…! ' 예전, 가인의 운동회 때 발생했었던 융합 형 몬스터의 출현! 그것인가?! 그 렇지만 어째서 여기에?!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그렇게 당황해 하는 시민을 향해 시영은 가볍게 손가락을 밑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 소중하지? 같이 온 소년? " " ......!! 가인 씨에게 무슨 짓을?! " 시민은 싸늘한 살기가 실린 얼굴로 시영을 노려보았다.하지만 그는 그런 시 민의 기세에 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 어서 가보는게 좋을 거야. 늦었다가는 망가질 테니까…. 너 처럼 말이지. 훗‥ 크큭‥ 카하하하하핫! " " 네 놈의 자식은…!! " 시민은 이를 갈며 그에게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곧 힘 없이 자세 를 풀며 옥상의 문으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시민은 시영을 돌아보지도 않 은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반드시 다음에는 결판을 지어 주겠어‥. 그러니까‥ 지금은 보내주마. " " 고맙구나. " 마치 자신은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는 듯한 태연스러운 말투. 그 말투 에 시민은 다시 분노가 치솟았지만, 곧 들끓는 마음을 억누르며 재빨리 옥상 의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민이 자신의 앞에서 사라지 자 시영은 자신의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이제 만족하십니까? "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하지만 곧 시영의 말을 받을 상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검은 박쥐의 날개를 퍼덕이며 시영의 뒤로 그림자 처럼 내려서는 한 여인. 탐스러운 에메랄드 빛 머리가 붉은 노을에 비춰져 핏빛을 띄고 있 었다. 그녀는 녹색빛이 흘러나오는 눈을 시영에게 고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 글쎄…. 이왕이면 죽여버리지 그랬어? 성가시게 말이야…. " " 그럴 순 없죠. 그랬다가는 재미가 줄어들잖습니까. " 벗었던 선글래스를 다시 쓰며 시니컬하게 미소짓는 시영. 그런 그의 모습에 여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인간 남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삼 차원의 존재인 주제에 이차원의 존재인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것 자체 부터가 최대의 의문이었던 것이다.여인은 그런 그에게 경멸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배덕자의 유흥인가? 참으로 인상 깊군 그래. " " 아름다운 형제애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여인은 이 남자 와 말 다툼하는 건 자신의 기력만 낭비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혀를 내 둘렀다. "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어쨋든 우리에게 이득을 주는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당신이라는 남자는…. " " 너무 계산적이시군요. " 시영은 쓴 웃음을 짓다가 시민이 사라진 옥상의 문을 돌아보며 여인에게 물 었다. " 그런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뭣 때문에 그렇게 그 소년에게 집착하 시는 겁니까? " " 이미 물어보고 있잖아…. " 여인은 시영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듯 투덜거리다가 곧 시영이 말한 '소년'이란 존재에게로 생각이 미쳤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그 애는 내 장난감이야. 아주 아주 재미있어.그리고 흥미도 있고 말이야…. " " 흥미… 입니까? 하,하하하… 대단하군요. 5대 간부 중 한 분이신 릴리스 (Lilith) 님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니‥. 후훗‥대단한 소년이군 요. 저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는 데요? " 릴리스 라고 불린 그녀. 그녀는 시영의 말이 심기에 거슬린듯 거칠게 자신 의 에메랄드 빛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를 노려보았다. " 그는 내 꺼야. 가로 챌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인간. " " 예.예. 그러도록 하지요. 설마 밤의 여왕 님이 찍어 놓은 사냥감을 저 같 은 미천한 인간이 가로채기야 하겠습니까? 어쨋든, 저는 가보도록 하지요. 이래뵈도 인기가 있는 편이라서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간 귀찮은 일들 이 생기거든요? " " 아아, 그래. 어서 가버려. " 릴리스는 잘 됐다는듯 그에게 손을 저으며 고개를 돌렸고, 그런 그녀의 반 응에 시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근처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 져 갔다. 그렇게 시영이 사라지자 릴리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 ......기분 나쁜 자식. " " 시민 씨‥ 어딜 가신 거지? " 가인은 2층 밖에 있는 화장실에서 간단히 손을 닦으며 나오고 있었다. 공연 을 보던 도중, 시민이 자리에 없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찾아 밖으로 나온 가 인이었다. 화장실에 가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거 같고…. 어쨋든, 너 무 늦는 시민이었다.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갔다.자신 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새에 시민이 다시 돌아왔을지도 모르니까. " 어? " 그런데 다시 돌아온 홀 안의 분위기는 무언가 이상했다.한창 들려오고 있어 야할 오케스트라의 연주도,팬텀과 주세라의 노래 소리도 들려오질 않고 있었 던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가인은 재빨리 자신의 좌석으로 걸어 가며 무대를 살펴보았다. 그다지 별다른 문제도 생긴 것 같지 않은데… 그리 고 하다 못해 만약 문제가 생겼더라도 관객들의 웅성거림은 들려와야했다.하 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침묵. 거짓말 같이 조용한 정적. 가인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 …저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 가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좌석 옆에 앉아 있던 한 남자에게 물었다.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 가인은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 로 느꼈다. 그리고 앉아 있던 관객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 척! 척! 척!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 처럼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관객들. 그들의 눈 이 천천히 가인을 향하기 시작했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한꺼번에 자신을 주 시하는 경우라니!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뒷 걸음질을 쳐 2층의 난관에 등을 붙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관객들. " 자,잠깐만요! 다들 왜 이러는 거에요?! " 가인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연은 중 지되어 있었고, 무언가에 홀려 버린듯한 관객들이라니!! 도대체 이건…?! - 오빠‥! 그때, 가인의 마음 속으로 울려퍼지는 유리의 목소리! 가인은 갑작스런 그 녀의 외침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어째서 유리의 목소리가?! - 유리‥? 유리니?!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 나‥ 홀 1층에‥ 지금 사람들이…!!! 순간,유리의 말이 끊겼고 가인은 당황하며 2층 난관에서 1층의 전경을 내려 다 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핑크 색 A.I 슈츠를 장착한 채 수 백명의 관객들의 손을 뿌리치고 있는 유리의 모습을! 그녀는 격렬히 반항하고 있었 지만 곧 관객들의 손에 붙잡혀 공중으로 들려지고 있었다. " 유리야-----------!!! " 비명 처럼 그녀를 부르짖는 가인. 그리고 그런 가인의 뒤로 수 십 개의 손 들이 그의 전신을 붙들기 시작했다.가인은 이를 악물며 손들을 뿌리쳤다! 이, 이거 놔! 유리가 저기 있단 말이야!! 방해하지 마!! " 으윽…!! 변신, 피스 블루!! " 왼손에 찬 무전기를 들어올리며 소리치는 가인.그와 동시에 그림자 처럼 검 은 A.I 슈츠가 가인의 등 뒤로 떠올라 가인에게 장착되었다. 그리고 가인의 오라에 반응하여 푸른 빛을 발하는 A.I슈츠! 그의 오른 손에 장착된 헤븐 스 매쉬가 빛을 발했다! " 하앗…!! " 가인은 전신에 오라를 폭사시켰다. 그러자 두려운 눈길로 가인에게서 떨어 지기 시작하는 관객들. 오라에 반응하는 것으로 보아 몬스터의 장난 질이 분 명했다. 도대체 왜 몬스터가?! 그것도 하필 이런 곳에서?! " 아앗---!! " 그때 1층에서 미약하게 울려퍼지는 유리의 비명. 가인은 더 이상 다른 생각 을 하지 않고 2층의 난관에서 1층으로 뛰어내렸다. 10M의 높이였지만 A.I 슈 츠를 장착한 가인에게는 별 다른 위험이 없는 높이였다. " 유리야아아아앗!! " 유리를 들어올려 무대로 끌고 가려는 관객들에게로 날아드는 가인. 그들의 앞에 내려선 가인은 유리를 들고 있는 관객들을 향해 오른 주먹을 내뻗었다. 가인의 헤븐 스매쉬로 오라의 회오리가 모여들었다. " 비켜!! 천공권 산(散)!! " 천공권을 쓸 때 처럼 회오리를 내뻗지 않고, 그대로 헤븐 스매쉬 안에서 압 축시켜 터뜨리는 가인. 하지만 그 위력은 충분했다. 직접적으로 토네이도의 공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압축 폭파의 영향으로 가인에게 다가오던 관중들은 허공으로 튕겨 올랐던 것이다. 천공권의 본래 위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 만 민간인을 상대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렇게 다섯 명의 관객들을 날 려보내자 그들이 들고 있던 유리 또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 악! " 가볍게 비명을 지르는 유리. 하지만 가인은 날쌔게 도약하여 공중에서 유리 를 받아내었다. 가볍게 지상에 착지한 가인은 유리에게 소리쳤다. " 유리야, 괜찮니?! " " 으,으응. 고마워,오빠‥. "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리는 유리. 그런 그녀에게 가인이 걱정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네가 여기에 와 있는 거지?! 학교에서는 안 오겠 다고 했었잖아! " 자신들과 떨어져 위험에 빠질 뻔한 유리를 탓하는 가인.하지만 유리는 가인 이 왜 자신들을 따라왔냐고 야단치는 것 같아서 그만 심통이 나버렸다. " ......난‥ 여기 오면 안돼? " " …뭐? " 가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멈칫했다. 단순히 걱 정이 되어서 그만 화를 냈던 것 뿐인데 그만 추궁하는 것 처럼 되어 버린 것 이다. 유리는 가인의 품에서 벗어나며 중얼거렸다. " …난‥ 단지 오빠와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인데‥ 오빠는 싫은가 보네…. " " 아니, 나는…. " 아,이게 아닌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유리에게 말을 걸려는 가인. 하 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수백명의 관객들에게 신 경이 미친 것이다. " 우, 우우…! "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 처럼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신음 만을 흘리며 다 가오는 그들의 모습은 가인들의 마음을 섬짓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가인은 유리의 허리를 붙잡고 A.I 부츠에 오라를 불어넣어 있는 힘껏 도약했다. " 우우! " 가인들을 붙잡을려고 하다가 헛손질을 해버리는 관객들. 가인과 유리는 6M 가까이 날아올라 홀의 벽에 붙어 있던 테라스를 붙잡았다.가인은 한 숨을 쉬 며 자신들의 밑으로 모여드는 관객들을 내려다본채 중얼거렸다. "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 " 저기를 봐. " 그런 가인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유리가 무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황금 빛 광채를 은은히 뿜어내는 존재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색의 비 늘이 온 몸에 솟아있었고 하반신이 거대한 해조(海鳥)의 모습을 이루고 있 는 몬스터였다.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유리에게 물었다. " 하지만 어째서 저런 몬스터가 여기에 나타난 거지? " " …노래를 부르던 도중 변했어‥. " " 뭐?! " 유리의 말에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가인. 유리는 그런 가인을 힐끔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 여주인공 역을 맡고 있던 뮤지컬 배우가 갑작스레 변했단 말이야.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뭔가에 홀린듯 공격해 왔어. " " 그런…!! " 가인은 다시 한번 무대 위의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분명 흉측하게 변해 있 었지만 그녀에게서는 몬스터로 변하기 전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몬스터로 변 한 여배우는 다름 아닌 주세라였던 것이다! 며칠 전에 만났던 시민의 동창!! " 어째서 이런 일이!! 또 다시 사람의 몸에 기생했단 말이야?! " 가인은 체육 대회 때 지혜에게 기생했던 몬스터를 생각해내며 몸서리를 쳤 다.간신히 잊어 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때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는 것 이었다.그런 가인들에게로 주세라의 몸에 기생한 몬스터가 입을 벌리기 시작 했다. - 라아아아아아아… " 으앗!! " 몬스터의 음파 공격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테라스. 저 몬스터의 노래 소리는 물리적인 힘을 행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가인은 재빨리 벽을 박차며 유리를 끌어 안은채 무대 위로 뛰어내렸다. 민간인들이 없는 곳을 찾아 뛰어 내린 결과가 그것이었다. 몬스터 보다도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것이 민간인들 이었다. 저들은 단지 몬스터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 뿐이라서 함부로 공격 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우우우… " 신음을 흘리며 무대로 걸어오기 시작하는 관객들. 이대로는 또 다시 저들에 게 둘러싸이는 건 시간 문제였다. 더구나 눈 앞에 있는 몬스터까지 상대해야 한다니….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이럴 때‥ 시민 씨만 있었더라도…. " 그 말을 듣고 있던 유리는 기분이 우울해졌다.정작 그의 옆에 있는 건 자신 이었는 데도 시민 만을 찾고 있는 가인이었다. 난 안중에도 없는 걸까, 오빠 는…. 유리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몬스터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 런 유리의 행동에 깜짝 놀란 가인이 그녀를 제지했다. " 유리야, 무슨 생각이야?! 시민 씨를 기다리자! 시민 씨라면 이 상황을 해 결할 방법을 알고 있을 지도 몰라! " " …그만 둬. " 가인의 손을 뿌리치며 화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유리. 응? 유리야? 그만두 라니… 뭘…? 뭘 그만두라는 거야? 그런 유리의 태도에 망연자실해진 가인. 유리는 결국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는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 맨날 시민 시민 시민!! 이제 그쯤에서 그만해둬!! 뭐가 시민 씨를 기다리 자 야?! 왜 그렇게 시민 만 찾고 있는 건데?!! " 나도… 나도 오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어째서 난 바라봐주지도 않고 시민 만을 찾는 거야? 응?! 도대체 왜!! " 시민이 올 필요도 없어!! 왜냐하면 그녀가 오기 전에 내가 해결해 버릴테 니까!! " " 유리야‥?! " 크게 눈을 뜨며 유리를 제지할 생각도 못하는 가인.그런 그를 뒤로 하며 유 리는 거칠게 몬스터에게로 발걸음을 향했다. 해내 보이겠어! 그녀의 도움 같 은 것 없이 해결해 보이겠어! 그래서 더 이상 오빠가 시민을 찾지 않게 할거 야!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 제발‥ 나만 바라봐줘‥! ' 유리의 A.I 슈츠에서 핑크 빛 오라가 피어 올랐다.유리의 능력은 마인드 디 텍터(Mind Detector). 사람의 마음을 읽고 영향을 주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종이 한장의 차이. 그녀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사람의 정신을 공격하는 마인드 브레이커(Mind Breaker)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는 유리 자신이 이성적으로 자제해 왔었지만, 시민에 대한 질투로 사리를 판 단하기가 힘들어진 지금의 그녀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 그만둬, 유리야‥!! " 뒤에서 들려오는 가인의 외침. 하지만 유리는 무시하며 오라 능력을 전개했 다. 잘 보고 있어, 오빠. 더 이상 시민을 찾지 않게 해줄테니까!! 그런 유리 의 기세를 눈치 챈 것인지 몬스터도 입을 벌리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유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금와서 그래봐야…! - 키이익‥ 그때, 유리의 머리 위로 들려오는 쇠 마찰음 소리. 거대한 무언가가 기우뚱 거리는 느낌이 천정에서 느껴졌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들 어올렸다. 뭐지? 저건?! - 콰직! 순간,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의 머리로 떨어져내리는 거대한 물체.그것 은 다름 아닌 샹들리에였다! 오페라의 유령 1막 10장에서 팬텀이 크리스틴에 게 경고하기 위해 그녀의 발 앞으로 떨어뜨리는 샹들리에. 그것이 지금 크리 스틴이 아닌 유리에게, 그것도 발 앞이 아닌 머리 위로 유성(流星) 처럼 떨 어지는 것이었다. " 아‥. "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유리는 멍하니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샹 들리에를 바라보았다. 샹들리에에 매달린 수백개의 유리들이 조명을 받아 빛 을 발하는 것이 꼭 유성우 같았다. 보기에는 아름다울지라도 실제로는 치명 적이게 지상을 파괴하는 유성우. 그리고 뒤로 떠밀리는 유리의 몸. 그와 동 시에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지며 샹들리에는 무대를 박살내었다. - 콰앙!! 샹들리에가 떨어진 여파는 꽤 컸다. 아무리 연극 도구로 만들어졌다지만 그 무게만 해도 상당했기에,무대로 부딪히면서 홀 전체를 진동시켰고 무대로 다 가오던 관객들도 그 충격을 못 이겨 땅 바닥에 쓰러졌다. " 아,아아‥ " 유리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떨리는 눈길로 자신의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그 녀의 앞에는 아슬아슬하게 거대한 샹들리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만약 자 신이 몇 센티미터만 더 앞에 있었더라도 유리는 전신이 샹들리에에 박살난채 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가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유리의 앞에는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 오,오빠‥? " 유리는 믿을 수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앞에 쓰러져 있던 이는 유가 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떠밀었기에 유리는 샹들리에에 부딪히지 않고 살 수 있었다.그렇지만 그 대신에 유가인의 다리 한쪽은 샹들리에의 육중한 몸체 밑에 깔려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멀쩡할리가 없는 모습이었다.아마도 가인의 다리는 처참하게 박살나 있었을 것이다. " 유,유리‥ "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부르는 가인.유리는 황급히 가인에게 다가가 그의 A. I 헬맷을 뒤로 넘겼다. 드러난 가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다리가 박살난 쇼크로 가인은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아마도 과다한 출혈로 인 한 오한이었을 것이다. 유리는 자신의 A.I 헬맷을 뒤로 넘기며 비명 섞인 목 소리로 가인에게 소리쳤다. " 오,오빠! 어,어째서! " " 괘‥ 괜찮… 으으으윽…. " 애써 웃음을 지을려고 했지만 지독한 통증에 치를 떨며 신음을 흘리는 가인. 유리는 비명이 나올려는 입을 손으로 막으며 몸을 떨었다. 나, 나 무슨 짓을 한 거지? 어째서‥ 어째서 오빠가 이런 모습으로‥!! 가인은 전신으로 식은 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지독한 통증으로 눈의 모세혈관이 터져버렸 는듯 가인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 리는 그런 가인의 머리를 끌어 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아,안돼!!! 오빠? 오빠!! 나, 나 잘못했어! 지금까지 오빠한테 나쁜 짓만 해서! 오빠 속만 썩여서!!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아아‥ 나,난‥!! " 유리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서 포션을 꺼내 가인 에게 응급 처방을 해야 했지만, 너무도 처참한 가인의 모습에 유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오빠가!! 견딜 수 없는 죄 책감과 가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유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외의 생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 난 도대체 오빠한테 무슨 짓을 해버린 거야? ' - 바보! - 가버려!! 가인에게 소리치던 자신. 그때마다 가인은 상처 입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왠지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그의 얼굴을 외면 해버렸 던 자신이었다. ' 난‥ 난 왜 그때 더 오빠한테 잘 해주지 못했지? 왜 혼자 화만 내며 소리 치고‥ 쓸데없이 고집만 부리고‥ ' 미안해. 미안해,오빠.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 이,이런 모습하지마‥. 나‥나 이제부터 오빠한테 잘 할테니까‥응? 제발 ‥ 제발 정신 차려줘‥.오빠, 제발‥ 흑, 흐흑‥ " 눈물 범벅이 된 채 유리는 몸을 떨며 가인의 머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가인 은 흐릿한 눈길을 떨며 온 몸을 늘어뜨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로 점점 다가오기 시작하는 수 많은 그림자들. 몬스터의 조종을 받고 있는 관객 들이었다.그들은 예의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손을 뻗어 유리들에게로 다가오 고 있었다. 망연자실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유리. " 우우우‥ " 유리는 품 안의 가인을 더더욱 힘 있게 껴안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연신 흐르는 눈물 사이로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마치 그들에게서 가인 만은 보호 하겠다는듯이. 하지만 수 십개의 손들은 이미 가인과 유리를 뒤덮고 있었다. - Ｎinna-Ｎanna‥Ｎinna-Ｎanna‥Ｎinna-Ｎanna‥ 차분히 홀 안에 울려퍼지는 한 목소리. 그것은 똑같은 음절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떻게 들으면 태고의 원시적 주술 같기도 한 그 노래는 홀안에 있 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으로 스며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들을 잠의 세 계로 이끌고 있었다. " 이건‥ Lullaby‥? " 유리는 가인을 끌어안고 있다가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분명 시민 의 오라 능력 중 하나인 Lullaby. 잠재우는 노래, 자장가였던 것이다. 그리 고 그 효과는 즉석으로 나타났다. - 털썩‥ 털썩‥ 유리와 가인의 지척까지 다가오던 관객들은 노래에 맞춰 눈을 감은채 스르르 그 몸을 쓰러뜨렸다.마치 짜기라도 한 것 처럼 동시에 쓰러지는 수 백명의 관 객들. 쓰러진 그들의 얼굴에서는 평온한 기색마저 감돌고 있었다. 유리는 울 음끼 섞인 목소리로 노래의 주인을 불렀다. " 시민!! " - 탁! 그리고 그런 유리의 부름에 응하기라도 한 것 처럼 2층의 홀에서 1층의 무대 로 우아하게 내려서는 한 인영.노란색의 A.I 슈츠를 입고 있는 시민이었던 것 이다. 그녀는 유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 유리 양? 어떻게 된 거죠, 이건? " " 그것 보다‥ 오빠가! 오빠가!! " 유리는 다급하게 품 안의 가인을 끌어안으며 시민에게 소리쳤다. 그제서야 샹들리에에 한 쪽 다리가 깔린 가인을 발견한 시민.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 가인 씨?!! 어,어쩌다가 이렇게!! " " 나,나 때문에‥ 나 때문에 오빠가‥! "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유리. 시민은 자신이 당황하면 유리까지 당황한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차분히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혔다.시민은 애써 냉정을 유지 하며 유리를 달랬다. " 침착해요, 유리 양. 차근 차근 설명을 해봐요. " " 공연 도중‥흑‥ 여배우가 몬스터로‥흐흑… 사람들이 조종 당해 달려들 었어‥. " 울먹이며 간신히 설명을 하는 유리.그녀는 가인의 머리를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마치 가인을 끌어안고 있는 팔을 풀면 그가 죽기라도 한다는듯 꼬옥 가인을 껴안고만 있었다. 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편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몬스터를 노려보았다. " 세라‥. " 아마도 몬스터는 자신의 동창 주세라인 듯 싶었다.시민은 이를 악물었다.여 유있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모든 일의 주범 한시영! 시민의 몸에서 은은한 노란빛의 오라가 피어 올랐다. 이게 네 놈이 한 작품이란 말이지!! 잘도 이런 짓을!! - 퍼엉! 가볍게 가인의 다리를 깔고 있던 샹들리에를 한 손으로 쳐올리는 시민.놀랍 게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샹들리에가 너무나도 간단히 무대의 저편으 로 날아가 버렸다. 뒤이어 샹들리에가 다시 무대 위로 떨어지는 소리. 쿠웅! 그 바람에 무대가 흔들렸지만 유리는 갑작스런 시민의 모습에 놀라 아무 말 도 할 수 없었다. 시민은 그런 유리를 향해 낮게 말했다. " 유리 양,어서 가인 씨에게 포션을 주사하세요. 더 늦기 전에. " " 아, 으응‥! " 유리는 다급히 품 안에서 포션을 꺼내 가인에게 투여했다.가인이 다친 것에 너무 놀라, 제일 먼저 했어야 할 응급 처치 조차 그에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리는 이런 바보 같은 자신을 탓하며 굵은 눈물 방울을 흘렸다. 만약 응급 처치가 늦어져 행여나 가인이 다리를 못 쓰게라도 된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가인은 백지장 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그의 볼 사이로 흘러내렸던 피 눈물의 흔적이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더더욱 유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오빠, 제발 살아줘‥! 제발…!! ' 그리고 그런 가인과 유리를 뒤로 하며 몬스터에게로 다가가는 시민. 시민은 천천히 자신의 A.I 헬맷을 뒤로 넘겼다. 흘러내리는 금빛의 머리카락 사이로 시민의 감홍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 세라…. " 시민은 몬스터로 변한 세라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온 몸에 황금빛 비늘이 돋아난채 하반신이 거대한 해조로 변한 그녀의 모습. 단지 몬스터의 얼굴에 서 그녀가 세라였다는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그때 세라의 눈빛이 자 신에게로 다가오는 시민에게 고정되었다. - 시,시민‥ 그리고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하는 몬스터의 입. 놀랍게도 몬스터는 시민을 알아보고 있었다. 시민과 접촉하자 세라의 의식이 깨어난 것 같았다.시민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 그래 나야,세라야‥. " - 어,어째서 나 이런 모습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세라.시민은 마음이 아팠지만 미소를 잃지 않 고 말했다. " …잠시 꿈꾸고 있는 것 뿐이야. 자고 일어나면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날 꿈‥ 말이야‥. " - 꿈…? " 그래. 그러니까 안심하고… 그만 쉬어. " 시민은 세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중얼거렸다. 자신의 음파를 세라의 심장 박 동 소리에 맞추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이성을 잃은 상대를 안정 시켜주는 효과가 나타난다.세라는 시민의 의도 대로 안정을 하는 것 같아 보 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음 순간,너무도 손 쉽게 세라의 평온은 깨져 버 렸다. - 아니야, 한시민!! 이건 꿈이 아니야!! " .........!! " 거센 음파의 파동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뒷 걸음질 친 시민. 세라는 악귀같 이 얼굴을 일그러 뜨리며 살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세라는 실성한듯 웃음을 터뜨리며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꽈리를 틀고 있던 해수의 하반신이 펴지자, 순식간에 5m를 넘는 몸체를 넘실거리는 세라였다.그녀는 거대한 위압감이 서 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이건 기회야!! 나는 쭉 이 순간을 기다려 왔어!! " …기회?! " - 그래, 기회!! 너와 이렇게 같이 무대에 서는 이 순간을 말이야!! 너가 내 앞에서 사라진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기다려 왔어!! 세라의 두 눈이 붉은 기운을 띄며 또 다시 수 많은 황금빛 비늘들이 그녀의 몸에서 돋아났다. 완전히 몬스터에게 잠식되어 들어간다는 표시였다. 시민은 마음이 다급해지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응?! 우린 친구 잖아?! " - 친구? 하…! 그랬었지! 하지만 먼저 배신을 한 건 너야!!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으면서!! 그렇게 날 버렸으면서!! 그래놓고서 친구라고?!! 친구라 는 말을 입에 담지마!! - 퍼엉!! 시민의 앞으로 거세게 터져오르는 무대의 바닥. 세라는 연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너와 있으면서 즐거웠지. 하루 하루가 노래를 부르는 기쁨으로 넘쳐 흘렀 어! 내 인생의 가장 즐거운 나날들이었어!! " 그런데 왜…?! " -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그랬을 뿐!! 속으로 나는 언제나 눈물을 흘리고 있 었지!! 그건 바로 너 때문이야, 한시민!!! 나 때문? 나 때문이라고? - 넌 누구에게도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어. 너의 진실된 목소리를 들 려주질 않았어!! 너하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조차!! 넌 네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 나,난 그런 적 없어! " - 그럼 그 마지막 공연이 있기 전 날 들려줬던 너의 목소리는 뭐였지?!! 그 날,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네가 불렀던 크리스틴의 아리아는! - 네 목소리는 나 같은 것은 우습게 능가해버렸지!! 똑같은 아리아였는데도! 그래! 마치 천상의 목소리 같았어!! 그렇게 날 마음껏 비웃었겠지,넌?!! 아아‥ 넌 모두를 비웃은 거야!! " 아니야!! 난 그러지 않았어!! " 시민은 애절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부인했다. 단지‥ 단지 그 순간을 소 중히 하고 싶었을 뿐인데. 모두와 즐기고 싶었을 뿐인데‥ - 이제는 더 이상 네 그림자에 묻혀 있지 않겠어!! 네 목소리를 능가해 보 이겠어!! 난 최고가 될 거야!! 시기. 질투. 원망. 애정. 동경. 증오… 모든 것이 한데 섞여있는 세라의 외 침이었다. 너무나도 동경했었다. 너무나도 흠모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견 딜수가 없었다. 너와 대등한 입장에서 마주 보고 싶었다. 너의 목소리에 걸 맞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런 주세라가 되고 싶었다! 진정한 너의 친구 로서… 진정한 너의 연인으로서… 두 번 다 시 네 가 내 곁 을 떠 나 지 않 게 하 고 싶 었 어 - 콰아아앙!! 세라의 음파 공격으로 시민이 서있던 자리가 터져 올랐다.거센 폭발의 영향 으로 유리는 날아가지 않게 가인을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 시민?!! " 하지만 그런 유리의 걱정 섞인 외침과는 달리 시민은 멀쩡했다.그녀는 고개 를 숙인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을 뿐이다. 세라의 음파 공격은 시민에 게 도달하지 못한듯 그녀의 반경 1m부근은 멀쩡히 원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 다.시민은 금새라도 끊어질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 …그게‥ 네가 원한 거였니, 세라야‥? "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시민. " 나와 결판을 짓는 것이‥ 진정 네가 원한 거였어? " 여유있게 자신에게 웃어보이던 검은 장발의 남자,한시영의 모습이 다시 떠 올랐다. 그래. 이게 네가 원한 거였단 말이지?! 이런 것이‥! 단지 이런 걸 보기 위해 네 놈은…!! 시민은 세라를 향한 것인지 시영을 향한 것인지 모를 분노를 내뿜었다. " 원하는 데로 해주겠어!!! " 시민은 입을 벌리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부르기 시작 한 노래는 여지껏 그녀가 불러오던 노래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너무도 붉은 목소리였다. 흑성가(黑聖歌) 32장 「흉마재림(兇魔再臨)」 - 퍼퍼퍼퍼퍼퍽!! - 키아아아아아앗!! 시민의 흑성가가 영창되자, 세라의 몸에서는 무수한 검은 피들이 터져 올랐 다. 어느새 그 황금빛 몸체는 검붉은 핏덩이들로 뒤덮히게 되었다.뒤에서 보 고 있던 유리는 토악질이 나올려는 입을 손으로 막으며 처참한 피 안개의 전 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끔찍한 비명을 소리 높여 지르는 세라.그녀의 전신에 서는 마치 거대한 대못을 박는 듯한 자국이 생김과 동시에 피분수가 터져 올 랐다. 하지만 시민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 카,카아아아앗‥!! - 털썩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은채 몸을 꿈틀대는 세라.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피의 폭발은 끝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유리가 시민을 뜯어 말렸다. " 그만해‥!! 그만해,시민!! " " .........!! " 그제서야 흑성가를 멈추는 시민. 그녀는 한 동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유리 를 돌아보다가 다시 피 바다가 된 무대를 둘러 보았다. 자욱히 깔린 붉은 안 개가 아직 무대에서 가시지 않고 있었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그녀의 코 끝을 찌르고 있었다. " ......아‥. " 짧은 신음을 흘리며 털썩 무대에 무릎을 꿇는 시민.몬스터로 변했던 세라는 점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지만 시민은 아무 것도 느끼지를 못했 다. 단지 멍하니 주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전투는 막을 내렸다. " 7월 3일 18시 20분. 41구역에 위치한 LG아트 센터에서 C-급 몬스터 '세이 렌(SIRENE)' 타입이 등장. 피스 블루의 중상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피해 없이 몬스터를 섬멸…19시 10분에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오퍼레이터 윤채영의 보고를 잠자코 듣고만 있 던 닥터가 옆의 진 사령관에게 물었다. " …또 다시 융합 형‥입니까. 아무래도 와프 수치를 이용한 게이트 레이더 의 사용은 더 이상 무의미할 것 같군요. " " 하지만 그나마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에 위안을 해야겠지. " 진 사령관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어쨋든,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상황이 변화하면 거기에 맞춰서 대응법을 찾아내면 그만이니까. 이 런 것 쯤이야 피스 메이커의 모두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닥터 의 다음 말은 좀 더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었다. " 시민 양의 보고에 의하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군요‥. " " .........피스 블랙. " 진 사령관은 두 눈을 빛내며 나지막히 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진 사령관의 뒤에 서있던 수정은 흠칫 몸을 떨며 그에게 물었다. " ‥어째서 그가? 왜 하필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거죠? " " 후원자를 찾아낸 모양이지‥. " 낮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진 사령관. 하지만 그가 웃는 것은 절대로 즐겁기 때문이 아니었다. 닥터는 한숨을 내쉬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결국… 몬스터 쪽에 가담했다는 말씀이십니까‥. " " 훗, 인류를 저버린건가….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 그 답지 않게 연신 웃고 있는 진 사령관.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어느 누구 도 이 상황이 재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민수정은 한 숨을 쉬며 안타까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피스 블랙‥ 한시영‥. " 최초의 오라 능력자이자 최초의 피스 메이커…. LG아트 센터 홀의 사건은 언제나 처럼 재빨리 마무리 되었다. 현장에 있던 민간인들에게는 배기관으로 가스가 새어 나와 폭발을 했다는 허위 정보가 보 도되었고, 주세라에게는 기억 조작이 행해졌다. 그리고 그 일은 언제나 처럼 피스 핑크 이유리가 해야만 했다. - 그녀의 머리 속에서… 날 완전히 지워줘…. 자신에게 초췌해진 얼굴로 부탁을 하던 시민. 유리는 그녀의 말대로 세라의 기억 속에 있는 시민의 기억이란 기억은 모조리 말소시켜 버렸다. 세라의 기 억 속에서 시민이 차지한 부분은 상당히 많았기에 유리는 조금 애를 먹었지 만 별 무리 없이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유리가 기억을 지 우는 과정을 담담히 지켜 보고만 있던 시민. 그샔의 그녀는 너무도 무표정했 었다. " 자요. 가인 씨, 여기 사과. " 방긋 웃으며 잘 깎은 사과를 가인에게 건내는 시민. 가인은 쑥스러워진 얼 굴로 병실 침대에 누운채 그것을 건내 받았다. 이곳은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 가인은 처참하게 박살났던 오른발에 깁스를 한채 3일째 병실에 입원해 있는 중이었다.닥터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2주간은 꼼짝도 하지 말고 병실에서 요 양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맙소사, 2주 씩이나….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한숨 밖에 나오질 않던 가인이었다. - 와삭.와삭. 하지만 이렇게 매일 병실에 찾아와 간호해주는 시민을 보니 그리 나쁜 것만 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였다.이,이건 어쩌면 신이 주신 선물일지도…!! 가 인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맛있게 먹었다. " 아…. " 그때, 그의 옆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한 쌍의 시선. 바로 유리였다.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유리의 행동을 노심초사 살폈다. 분명 그냥은 넘어가지 않 을텐데…. 또 한 소리 듣겠구나.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가인. 하지만 유 리는 그런 가인의 예상을 뒤엎으며 시민에게 말했다. " 시민… 언니‥, 나도 사과. " " 훗‥ 여기 있어요, 유리 양∼ " 시민은 사과를 포크로 찍어 유리에게 건내주었다. 고분 고분하게 시민에게 서 받은 사과를 먹기 시작하는 유리. 어,어라? 어라라? 저, 저 유리가 아무 말도 없이 넘어갔어? 더구나 시민 씨에게 언니라고?! 가인은 그런 유리의 변 화에 어리 둥절해져 두 눈을 크게 뜰 뿐이었다. 그런 가인과 유리를 바라보 며 시민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오후 한국의 프리 마돈나 주세라 양이 한국에서 의 공연을 모두 마치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잠시 항 공기에 탑승하기 전에 주세라 양과의 인터뷰를 가지겠습니다.박진섭 기자! >> << 예, 박진섭 기자입니다. >> 병실의 TV에서는 뉴스가 한창이었다. 그때,TV에서 가인들이 익히 알고 있던 주세라의 모습이 나오자 모두의 시선은 그곳으로 향했다.가인은 착잡해진 얼 굴로 시민의 표정을 살폈다. 시민 씨… 주세라 씨의 기억 속에서 자신과 관 련된 부분을 모조리 지워버렸다고 하던데….대충 유리에게서 사정을 들어 알 고 있던 가인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TV의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 이번에 이탈리아로 가시면 리스테 베르디 극장에서 <리골레토>의 질다로 출연하실 예정이라면서요? >> << 예. 다행히 극장 측에서 제가 돌아가는 날짜까지 기간을 연기해주셨기에 …고마운 일이죠. >> 웃음 짓는 세라. 그런 그녀에게 기자가 다시 질문했다. << 모처럼 돌아온 고국이었는데 다시 떠나게 되셨잖습니까? 지금 머리에 떠 오르시는 그리운 사람이나 친구 분들은 있으신가요? 만약 있으시다면 그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기자의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하는 세라.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뭔가를 기억해내려고 하다가 결국, 살며시 미소지으며 답했다. << 글쎄요‥. 누군가가 굉장히 그리운데… 그런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 분명 이번에 와서 만났던 것 같기도 한데… 후훗, 저도 나이를 먹기는 먹었나 봐요? …하지만 굉장히 보고 싶네요. 다음에 다시 한국에 오면‥ 꼭…. 꼭 다시 만나고 싶은‥. >> 그렇게 TV에 나오는 주세라를 하염 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 시민. 왠지 그런 시민의 어깨가 작아보인다고 느끼며 가인은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 다.시민은 그런 가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으며 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민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 툭‥ 하지만 그녀의 두 눈에서는 한 줄기 긴 눈물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제 8 화 동창회 完> 豫告 과거에서 되살아난 자. 복수를 위해 되살아난 자. 붉은 만월의 앞에서 나는 복수를 맹세했었다! 진우를 노리는 늑대 인간 라트의 집요한 마수! 그리고 라트에게 노출되어버린 진우의 가족! 第 9 話 만월인랑(滿月人狼) 이번에는 초 로리에 도전이다,유가인~~!!! 유가인: …위의 예고와 전혀 상관 없잖아?!!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Ｖolume.1 " 윤채영, 사랑에 눈뜬 그 날! " =-=-=-=-=-=-=-=-=-=-=-=-=-=-=-=-=-=-=-=-=-=-=-=-=-=-=-=-=-=-=-=-=-=-=-= 윤채영. 방년 25세. 피스메이커에 입사한지 어언 5년이 넘어가는 베테랑 오 퍼레이터이다. 현재,오퍼레이터 팀의 치프를 맡고 있으며, 혼자서 대 몬스터 전 시뮬레이션 D-4를 수행할 수 있는 고속 처리 능력을 가진 여인이기도 하 다. 일을 사랑하는 캐리어 우먼으로서,휴가 때에는 그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프로 레슬링 관람과 사격으로 푸는 뜻 밖의 면도 있다. " …엄마? 왜 전화하셨어요? " 하지만 현재 그녀는… " 아,진짜 됐다니까요! 왠 선이야 선은?!! 저 시간도 없고,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다구요! " << 이것아! 철 없는 소리 할래?! 니 나이 벌써 스물 다섯이다! 스물 다섯!! 내년이면 노처녀 소리 듣는단 말이야! >> " …저 바쁘거든요? 이만…! 끊! 을! 게! 요! " - 쾅! 애써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 삼키며 전화기를 난폭하게 끊어버리는 그녀. 그 런 채영의 모습에 오퍼레이터 3인방은 히죽 거리는 얼굴로 수근 거린다. " 우리 치프, 이번 해에도 안되겠지? " " 내년에도 안된다에 걸지. " " 일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니깐∼ 우리 치프는. 로망스가 없다구. 로망스가 없어∼ " 이 자식들이…! 채영은 이마에 핏줄이 일어난채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3인방 을 노려보았다. 그제서야 제각각 자리로 돌아가 잽싸게 바쁜 척을 하는 3인 방. 채영은 그런 3인방에게 한 소리를 할려다가 곧 멍하니 한숨을 내쉬며 어 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 어차피 소리쳐 봤자 나만 우스워지지…. ' 윤채영,25살.현재 25년 인생 동안 연애 한번 못해본 무미 건조한 나날을 보 내고 있는 여인이다. ' 강조하지 말라고, 스물 다섯! ' Ｖolume.1 " 윤채영, 사랑에 눈뜬 그 날! " 2032년 4월 7일. 그 날 채영은 처음으로 가인을 만났다. " 아,예. 안녕하세요. 저‥ 한성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유가인'이라 고 합니다. 나이는 열 일곱이고‥ 아‥ 예, 어쨋든, 앞으로 잘 부탁드립 니다. " " 오오. " 가인의 어설픈 소개에 본부실 안의 모든 이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특히, 여자 오퍼레이터들 쪽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 꺄아∼ 고교생이야. " " 드디어 피스 메이커에도 영계가 들어오는 구나∼ " " 사진 보다 더 귀여워 보인다. 그지? " " 훗. 언니가 귀여워 해줄게∼ " 저 자식들… 굶주려 있어. 채영은 떠들썩한 3인방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피 스 메이커의 여자 오퍼레이터들. 언제나 게이트의 위치 파악과 몬스터의 등장 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그녀들로서는,언더 시티 유레카의 밖으로 나가기란 힘든 일이었다. 당연히 스물 중반이 다 되어가도록 연애는 고사하고 남자들을 한 번 보는 것 조차 힘든 그녀들. 그렇기에, 그녀들은 오랫만에 보는 어린 고교 생 소년의 등장에 더더욱 열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스 그린 정진우에 의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씩 가인에게 소개되기 시작했고, 오퍼레이터 팀의 차 례가 다가왔다. " 자, 그리고 여기는 오퍼레이터 아가씨들.우리의 뒤를 서포트 해주시는 믿 음직한 분들이지. 하지만 조심하라구,소년. 저 아줌마들 굶주려 있으니까∼ " " 꺄아! 진우 씨, 누가 아줌마들이에욧! " " 스물 여덟 살 주제에! " " 소개가 너무 성의 없어! " …네 녀석들은 충분히 아줌마들이야…. 채영은 살짝 한 숨을 내쉰 후, 자세 를 바로하며 가인에게 다가갔다.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부하들이 깍아먹은 오 퍼레이터에 대한 위신을 세우기 위해 분위기를 쇄신할 필요가 있었다.채영은 진지하게 가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제가 피스 오퍼레이터들의 치프, '윤채영'이라고 해요.앞으로 서로 잘 해 보자구요. " " 아,예…. " 가인은 쑥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손에 악수했다.그러자, 그들의 뒤에서 오퍼 레이터들의 항의가 다시 터져나왔다. " 아아∼ 치프,비겁해! 자기 혼자 어필하고 있어! " " 저 은근슬쩍 손까지 잡은 것 좀 봐! " " 저희도 소개시켜 달라구요! " 치프 윤채영은 그녀들의 말에 얼굴이 시뻘개져 벼락같이 소리쳤다. " 시,시끄러워! 이 바보들!! " 어쨋든,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채영은 이 어린 고교 1학년 생을 조 용히 바라 보았다. 피스 핑크 이유리도 그랬지만, 이 어린 소년이 오라 능력 자 라니… 믿기지가 않는 노릇이다.과연 저 어린 아이가 그 무시무시한 몬스 터들을 상대로 잘 싸워 나갈 수 있을 것인가? ' 흐음…. ' 채영의 가인에 대한 첫 인상은 '못미더움'이었다. 2032년 4월 10일 -비잉비잉비잉비잉비잉… 작전 본부실은 붉은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고, 귓 가로는 비상 경보음이 시 끄럽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채영은 식은 땀을 흘리며 모니터의 레이더 반응 을 체크했다. 일 번 스크린으로 현 상황을 링크시키며 채영은 다급하게 소리 쳤다. << 15구역에서 몬스터의 생체 반응 확인!! 새로운 개체입니다! >> " 그,그럴리가!! 몬스터는 섬멸되었잖아요?! 와프 입자의 수치도 변하지 않 았는데…!! " 민수정은 당황한 목소리로 진 사령관에게 소리쳤다. 진 사령관은 스크린을 쏘아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양동 작전… 인 건가…. " 그런 상관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며 채영은 굳은 얼굴로 스크린에 떠오르는 현지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피스 대원들의 A.I 헬맷에 부착된 소형 카메라로 찍혀오는 영상들이 대형 스크린의 구석 구석에 모니터 화 되고 있었다.그 중 'PEACE BLUE'에게서 보내오는 영상에 채영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맙소사! 저러다 죽겠어…! ' 영상에서는 거대한 그레이트 배트가 가인에게로 입을 벌리며 초음파 공격을 내쏘고 있었다. 가인은 속수 무책으로 방어도 하지 못한채 그 공격을 받아들 이고 있었다. 채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영상을 피했다. " 으아아아아앗!!! " -퍼어어엉----!!!! 초음파의 충격음과 함께 가인의 비명이 채영의 헤드폰에서 울려퍼졌다. - 쾅! " 도대체 진 사령관 님은 무슨 생각이신 거야?!! " 채영은 본부실 밖에 위치한 휴게실에서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는 3인방이 자동 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 모르죠. 아마도 즐기고 계시는 것 같던데 말이야∼ " " 가인 군, 꽤나 사령관 님 맘에 들었나 보던데?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데에 열중하는 사령관 님의 모습은 일찌기 본적이 없어∼ " " 아! 그거 좋은 소재야! 이번 동인지의 소재는 바로 그거다! " 왠 동인지‥? 어쨋거나 긴장감이라고는 티끌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평한 자세들이었다. 그런 부하들의 태도에 채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소리쳤다. " 농담할 꺼리가 아니잖아! 잘못하면 그 아이 죽을 뻔 했다고! 도대체가 이 제 막 피스 메이커에 가입한 아이를 무작정 실전에 내보내다니! 도저히 제 정신이 아니야, 사령관 님은! " 채영은 씩씩 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전투는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그리 고 뜻 밖에도 그레이트 배트를 끝장낸 것은 처음 투입된 피스 대원 유가인이 었다. 그는 오라의 토네이도를 손에 생성시켜 몬스터를 분쇄시킨 것이다. 하 지만 칭찬해주기에는 그 소년은 너무도 위태위태하게 전투를 이끌었다. 그가 죽을 뻔한 건 둘째치더라도 피스 레드 성마리가 양 팔이 부숴지는 중상을 입 었던 것이다. 채영은 소리를 치자 목이 말랐는지 3인방이 넘겨주는 커피를 순식간에 원샷 해버렸다. " 크으∼! 뜨,뜨거워‥! " 당연히 자판기 커피가 냉커피일리가 있겠냐? 채영은 갓 뽑아낸 커피의 뜨거 움에 치를 떨며 목을 움켜쥐었다. 3인방은 생각했다. 우리 치프,어지간히 열 받으셨구만‥. " 어쨋든, 난 인정할 수 없어!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고서 실전에 그런 아 이를 투입시킨다니! 그 애가 위험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피스 대원 들도 위험해진단 말이야! " " 에이, 그래도 가인 군 잘해줬잖아요∼ 무엇보다도 첫 실전에서 몬스터를 없앤 장본인인 걸∼ " " 아,혹시 그거 아닐까? 위기에 처하자 그는 자신의 몸 속에 잠재된 힘을 깨달은 거야! 그리고 동료의 부상에 분노로 파워 업! " " 그거 왠지 열혈인 걸∼ " 그런 3인방의 말에 채영의 표정은 더더욱 험상 궂어졌다.이 자식들은 지금 이게 장난인 줄 아나…. 이 긴장감이라고는 없는 것들이. 채영은 수중의 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지며 단호히 말했다. " 어쨋든,난 인정 못해‥! " 2032년 4월 30일 -비잉비잉비잉비잉… 피스 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정신 없이 비상 경보음이 울리는 와중에 오퍼레 이터 윤채영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13구역에서 몬스터의 생체 반응 확인. 정확한 위치 탐색 중입니다! >> 허공에 뜨는 대형 스크린.그곳에는 몬스터를 표시하는 회색의 불빛이 명확히 표시되고 있었다. 채영은 몬스터의 신호 반응을 분석하며 생각했다. ' 와프 수치의 반응은 있었지만, 게이트가 열릴 정도의 수치 상승은 없었는 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 진 사령관들도 그 건에 관해서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다.얼핏 그녀의 귀에 들 리기로는 몬스터가 분열을 했다느니 한 개체 미만으로 게이트를 통과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채영은 살며시 인상을 찡그렸다.만약 그렇다면 더 이 상의 와프 입자를 이용한 게이트 탐지기는 무용지물이라는 거 아냐? 도대체 이 몬스터라는 것들은 나날이 골치 아파지고만 있었다. 그때, 위치 파악이 완 료되었고 채영은 소리쳤다. << 위치 탐색 완료 했습니다! 13구역의 대원 그룹 빌딩입니다! >> " .........!!! " 최악도 이런 최악일 수는 없는 거로군. 게이트를 예측 못했기에 대피 경보도 하지 못했고,더구나 몬스터는 한술 더 떠 민간인이 밀집되어 있는 회사 빌딩 에서 나타난 것이다! 진 사령관의 지시가 들려왔다. " 상황 설정은 A-로 지정!피스 대원들에 대한 소집 명령은 어떻게 된 건가? " << 지금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린(Green) 응답 왔습니다.옐로우(Yellow) 응 답왔습니다… 그리고… >> 어라? 채영은 뒷 말을 흐릴 수 밖에 없었다.나머지 대원들의 신호가 발견된 장소가 너무도 뜻 밖이었기 때문이다.곧 그녀는 왠지 자신 없어진 말투로 간 신히 말을 이었다. << 나머지… 대원들… 아, 아무래도 몬스터 발생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 " ..........!! " 가인들이 A.I 슈츠를 착용했는지 그들의 A.I 헬맷의 카메라 영상들이 스크 린에 모니터화 되기 시작했다. " 아아∼ 만약 매일 매일이 오늘과 같다면 정말이지 죽어버릴 거야∼ " " 그랬다간 때려친다! 때려쳐! " " 뭔가 최근 들어 바빠진 건 사실이야…. " 3인방은 휴게실에서 늘어진채 힘 없이 중얼거렸다. 윤채영은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하긴 오늘은 정말이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였다. 예정에도 없던 전투가 발생하는 바람에 본부실은 초비상 상태였던 것이다. 현장에서 죽을 고생을 한 피스 대원들도 피스 대원들이지만, 죽어나 갔던 것은 오퍼레이터 팀도 만만치 않았다. 그 무지막지한 상황 분석과 쉴새 없이 떠들어야 했던 그녀들은 머리 속과 뱃 속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 기 분이었다. " 불평들 하지마. 그래도 무사히 마무리 됐잖아. " 채영은 예의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3인방에게 말했다. 뭔가, 예전과는 입 장이 반대로 바뀐 것 같은데…. 그때, 쓰러져 있던 3인방이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 그나저나 가인 군, 너무 무모한 거 아냐? " 에…? "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그 젤라틴 큐브가 불에 약하다고는 하지만 층 하나 에 불을 일으킬 생각을 하다니 말야! 덕분에 연달아 가스 폭발까지 쾅∼! " 에에…? " 용케도 안 죽었단 말야, 가인 군. 끈질긴 생명력인 걸? 경의를 표하지. " 채영은 3인방의 대화에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와 관자놀이를 손으로 눌렀다. 정말이지 이 자식들은 말이야…. 3인방은 더더욱 죽이 맞아 떠들어 댔다. " 그리고 보니까 요즘들어서 가인 군, 점점 멋대로이지 않아? " " 그러게. 사령관 명령은 죽어라고 듣지도 않고 마음껏 활개치잖아? 누가 상 관인지 모르겠다고. " " 그게 반항 심리인 거야. 일종의 애증의 관계라는 거지. 우후후∼ 동인지 2 탄의 주제는 바로 이거야. " 결국 그 동인지는 만들었나 보다. 어쨋든, 그런 3인방의 대화를 듣다가 듣다 가 참지 못한 채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도대체 그게 현장에서 고생한 피스 대원에게 할 소리냐?! 뭐가 무모하고 제멋대로라는 거야?! 단지 네 녀석들이 힘드니까 애꿎은 가인 씨에게 화 풀이 하고 있는 거 아냐! " 그렇게 고생을 한 사람을 칭찬은 못해줄 망정, 오히려 뒤에서 씹기나 하다니! 채영은 아까 전, 조마조마해진 가슴으로 모니터의 가인을 지켜보고 있었다.사 람들을 대피시키며, 어린 유리를 잘 타일러 전투에 임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이지 대견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몬스터를 쳐부쉈을 때 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환호까지 하지 않았던가! 채영은 고개를 끄덕 이며 생각했다. 그래.가인 씨가 그렇게 활약해줬기에 이 정도 피해에서 사건 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고…! " 응…? " 근데 이것들 시선이 왜 이래? 채영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3 인방의 눈 초리에 주춤 뒤로 몸을 뺐다. 3인방의 저 표정은 괴롭힐 재미있는 껀수를 발 견했을 때의 그 표정이었다!(…) " 치프, 금방 가인 '씨'라고 했죠? 가인 '씨'? " " 어얼∼ 그 전까지는 어린애라고 불렀으면서 말이야∼ 갑자기 왠 심경의 변 화이실까? " " 그러게 말이야∼ 치프, 그럼 이제 가인 군을 인정하겠다는 소리세요? " 그런 3인방의 말에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 달아오르는 채영. 그녀는 두 손을 휘저으며 고집스럽게 소리쳤다. " 누,누가!! 나,나는 아직도 인정 못해! 단지 이번에는 쬐금 칭찬해 줄 만하 다 싶어서…! 그래! 단지 그것 뿐이야! 아직 멀었다고! " " 흐응∼∼∼ " 3인방들은 허둥되는 채영의 태도에 서로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그런 그녀들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채영은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아직 인정 한 게 아니라고…. 인정한 게 아냐! 머리 속에 떠오르는 가인의 모습을 채영 은 애써 지워냈다. 2032년 5월 19일 << 퍼플 웜(Pupple Worm), 피스 블루와 조우했습니다! >> 채영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다급히 외쳤다. 피스 블루의 영상에는 거대한 점 성질로 뒤덮힌 보라 벌레가 가인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이미 퍼플 웜이 날 뛴 12구역은 반쯤 폐허로 변해 있었다.다행히 진작에 대피 명령을 내려 사람 들을 피신 시켰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대형 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길이 30 m에 지름 3m의 몬스터가 2m도 안되는 가인에게 달려드는 모습은 너무나도 불 공평해 보였다. 그렇다고 불평을 해댈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만‥. - 으앗! - 쿠웅‥! 짤막한 가인의 비명과 함께 퍼플 웜이 땅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퍼플 웜이 자신을 덮치기 직전,가인이 A.I부츠로 뛰어올라 괴물의 공격을 피한 것 이었다. 채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 조,조심해요‥ 가인 씨‥! ' 땅을 파헤치며 연신 가인을 공격해대는 퍼플 웜. 이리 저리 뛰면서 공격을 피해내는 가인의 모습은 너무도 안스러워 보였다. 저러다 자칫 실수로 한 대 라도 저 괴물에게 얻어맞았다간 인간의 몸은 사정 없이 박살날 것이다. 채영 은 식은 땀이 흐르는 주먹을 움켜쥐며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힘내요, 가인 씨! 제발! - 투학! " .........!! " 하지만 그런 채영의 기원과는 달리, 가인은 퍼플 웜의 꼬리에 얻어 맞은 채 근처의 양옥 벽을 부수며 처박혀 버렸다. 채영은 너무 놀라,상황을 보고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모니터를 주시하고만 있었다. 결국 그런 그녀를 대 신하여 3인방들이 가인의 상태를 보고했다. << 피스 블루, 심박 수치가 20 떨어졌습니다. A.I 슈츠의 오리하르콘 감응 반응 발생! 다행히도 피스 블루의 피해는 경미합니다! >> 그 보고에 제 정신을 차리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는 채영. 다,다행이다, 가 인 씨‥. 무사했구나! 퍼플 웜 역시 자신이 상대를 완전히 끝장내지 못했다 는 것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가인이 처박힌 벽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채 영은 이를 갈며 속으로 소리쳤다. ' 아니! 도대체 다른 대원들은 다들 뭘 하고 있는 거야?! 저러다간 가인 씨 죽겠어!! ' 물론, 다른 피스 대원들은 퍼플 웜의 또 다른 본체들을 상대하느라 가인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채영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상황이 너무 위 급하여 자신도 모르게 불평한 것 뿐이었다. 채영은 피스 블루를 향해 무전을 치며 소리쳤다. " 일어나요, 가인 씨! 정신 차려요! " 그대로 있다간 죽는다구요! 채영은 울쌍이 된채 모니터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 때‥ - 투카카카카칵!! 무너진 벽돌 안에서 터져나오는 푸른 오라의 토네이도. 바로 가인의 천공권 이었다. 그 토네이도는 사정없이 다가오던 퍼플 웜의 머리로 날아들었고, 이 갑작스런 기습에 퍼플 웜은 제대로 방어조차 못하며 그대로 꿰뚫려 버렸다. - 쿠르르르‥!! 박살 난 머리에서 짙은 녹색 체액을 뿜어내며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퍼플웜. 얼마나 육중한 거구였는지, 퍼플웜이 쓰러지자 주위의 집들이 '쿠웅'하고 흔 들거렸다. 채영은 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환호성을 내 질렀다. " 꺄앗∼∼ 이,이겼어!! 가인 씨, 파이팅-----!! " " ......... " 그리고 뒤이어 본부실을 찾아오는 정적. 본부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 선이 채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채영은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닫고서 안색이 창백해져 버렸다. " 아…. " " 하아아아아…. " 채영은 홀로 휴게실에서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 도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 거지…. 왜 거기서 환호를 내지른 거야.채영은 도저히 자신이 한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부하 들과 상관들의 시선이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있을까 싶 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 주,죽고 싶다…. " 이제 창피해서 어떻게 부하들의 얼굴을 본다냐…. 채영은 울쌍을 지으며 테 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아, 혼란스러워. 이게 다 카페인이 부족하기 때문 이야. 커피를 마시면 좀 나아질려나. 그녀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기 위해 동 전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동전을 막 자판기의 투입구에 집어넣을려고 하는데‥ - 툭…! 채영과 동시에 동전을 집어 넣는 사람이 있었는지라, 그녀의 동전이 그만 땅 에 떨어져 버렸다. 유난히도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채영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윤채영, 정신을 어디다 갔다 팔아 먹은 거야. 정신 차리라고 정신…! 그녀는 떨어진 동전을 줍기 위 해 몸을 숙였다.하지만 그녀 보다 먼저 동전을 주워 주는 이가 있었다.채영은 그에게서 동전을 받아들며 인사했다. " 아, 고맙습니다… 어라? " 어라라? 채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자신에게 동전을 주워준 이는 다름아 닌 금방까지 모니터로 지켜보던 피스 블루 유가인이었던 것이다. 채영은 얼굴 을 붉히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 가,가인 씨?! " " 아,예. 안녕하세요. 채영 씨… 맞죠? 매번 무전으로만 대화하다가 이렇게 직접 얘기하는 건 처음이네요. " 가인은 웃으며 말을 건냈고, 채영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가슴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두근 거리고 있었다. 왜,왜 이러는 거야?! 윤채영! 뭐 냐, 이 반응은?!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거야! 채영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 어,어째서 여기에…? 집에 간 거 아니였어요? " " 예에…. 그 전에 잠시 메디컬 센터에 들렸다가 오느라고…. " 메디컬 센터? 그 말에 채영은 가인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었다는 것을 떠올 릴 수 있었다. 채영은 걱정스런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 상처는‥ 괜찮으세요? 많이 다치셨던 거 같던데‥. " " 괜찮아요. 뭐,언제나 그렇듯이 포션 한 방이면 깨끗히 완치되는 걸요,뭘∼ " 히죽 웃으며 힘있게 손을 휘젓는 가인.그 모습을 채영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 다. 정확히는 가인의 환한 미소가 채영의 넋을 빼놓고 있었다. '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걸까…? ' 그 목숨을 건 전투 후에도, 몇 번이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도… 어떻 게 이 소년은 이렇듯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무서 웠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그는…. " …무섭지 않아요? " 채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질문을 가인에게 던졌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끼가 사라지고 담담한 눈초리가 채영을 바라본다. 그런 가인의 시선을 대 하자 그제서야 채영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나… 무슨 말을 해버린 거지? 왜 그런 소릴…. 아까부터 계속 왜 이러는 거야,윤채영! 채영은 자신이 한 말 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 아니‥ 그러니까 제가 물은 건 그런 뜻이 아니라… " " 무서워요…. " 작게 중얼거리는 가인의 목소리. 채영은 그런 가인의 중얼거림에 말을 멈추 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인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옆 모습이 왠지 모르게 소년 답지 않은 쓸쓸함을 채영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채영은 감수성 이 그다지 예민하도 않았는데 그런 가인의 모습에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 았다. 그러나 가인은 곧 채영을 돌아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걱정해주시는 거에요,채영 씨? " " 예? 예,예에…. " " …고마워요. " 그러면서 예의 환한 미소를 짓는 가인.그 미소는 창 밖으로 흘러들어오는 유 레카의 인공 빛에 더해져서 더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채영은 멍하니 그런 가인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가인은 곧 시계를 내려다 보며 채영에게 말했다. " 아, 벌써 8시네요. 저 그만 가볼게요. 그럼 내일 봐요,채영 씨! " " 에… 내일‥ 예. 내일 뵈요‥. " 재빨리 저편의 복도로 뛰어가는 가인을 보며 멍하니 손을 들어올렸다 내리는 채영.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가슴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뛰고 있었다. 뭘까, 이 두근 거림은‥? 가인의 그 미소를 대하고 부터 이 두근 거림은 멈추지를 않고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중얼거렸다. 설마… 혹 시 이게 바로‥ " .........사랑…? " 윤채영, 스물 다섯의 인생사. 그녀에게도 드디어 따뜻한 사랑의 감정이 찾아 오다! " …흐음∼ 그건 아무래도 모성애가 아닐까나? " " 가인 군, 전투 때마다 많이 얻어 맞고 다녔으니까요. " 후에 모든 진상을 알고서 채영의 감정을 분석한 3인방들의 말이었다. Ｖolume.1 完 -=-=-=-=-=-=-=-=-=-=-=-=-=-=-=-=-=-=-=-=-=-=-=-=-=-=-=-=-=-=-=-=-=-=-= 오라전대 ＰＩＥＣＥ ＭＡＫＥＲ 第 9 話 만월인랑(滿月人狼) =-=-=-=-=-=-=-=-=-=-=-=-=-=-=-=-=-=-=-=-=-=-=-=-=-=-=-=-=-=-=-=-=-=-=-= " 정 대위 님, 여기입니다! " 정진우는 자신을 부르는 한 대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건의 현장 으로 향했다.지금 진우와 함께 있는 이들은 피스 메이커의 특별 부대 '팔라 딘(PALADIN)'의 일원들이었다. 사건의 조사와 더불어 피스 대원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포트 해주는 그들은 언제나 처럼 몬스터에 대한 사전 조사를 행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런 그들을 이끄는 이는 다름 아닌 피스 메이커의 피 스 그린이자 전술작전부 작전국 제 1과 소속 정진우 대위였다. " …처참하군. " 진우가 사건 현장을 둘러본 후 말한 소감은 이것이었다.자신들보다 앞 전에 출발했던 팔라딘의 멤버들은 모두 머리가 박살난채 뇌수를 흘리며 쓰러져 있 었다.한 눈에 보아도 인간 이상의 존재가 말도 안되는 괴력으로 날뛴 결과물 들이었다. 언제나 여유만만했던 진우도 이 때만큼은 인상을 굳히며 이를 갈 수 밖에 없었다. " 생존자는 없는가? " " …없습니다. 아무도… " 진우의 물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맺은 한 대원.진우는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발걸음을 놀렸다. 이 곳은 내년이면 완공될 50층 짜리 빌라의 공사 현장이었다. 이미 뼈대도 다 세워져 있었고, 시멘트까지 발라진 상태였다. 놈은 아마도 이런 인적이 없는 장소로 팔라딘들을 유인해, 마음껏 그들을 유린한 모양이었다.마치 장난감을 부서뜨리고 웃는 어린 아이같이…. " 대위 님!! 잠깐 이리로 와 보십시오!! " " .........? " 다급히 진우를 부르는 대원의 외침. 진우는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진우가 걸치고 있던 검은 프록 코트가 거칠게 휘날렸다. 모서리를 돌 아서 나오는 진우.그곳은 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막다른 곳이었다.그리고… Ｉ ｃａｍｅ ｂａｃｋ ｔｏ ｙｏｕ ｆｒｏｍ ＨＥＬＬ！ 붉은 피로 적혀 있는 벽의 문구. 아마도 놈의 짓인듯 싶었다.살해한 희생자 의 머리가 펜이라도 되는 양, 희생자의 피가 잉크라도 되는 양 써놓은 것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 …죽지‥않았던 건가…. " 나지막히 중얼거리는 진우.너무도 작은 목소리였기에 주위의 팔라딘들은 아 무도 그의 중얼거림을 알아듣지 못했다. 진우는 차가운 밤 바람이 스며드는 창가로 걸어갔다. 이런 참극과는 전혀 관계 없다는듯 휘황찬란한 네온 사인 이 번쩍이는 도시.그 지독한 이면성에 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 지옥에서 돌아왔구나, 라트…. " 진우의 중얼거림은 바람을 타고 어두운 밤 하늘로 높이 높이 날아 올랐다.마 치 하늘에 떠 있는 저 둥근 만월에게 도달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리고 만월은 앞으로의 일을 예고하려는듯 진한 노란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래‥ 피라도 섞여있는 것 같은 진한 노란빛‥ 第 9 話 만월인랑(滿月人狼) 5일간의 요양을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에서 보낸 후, 가인은 피스 메이커 재 단이 뒤를 봐주고 있는 지상에 위치한 인근 병원으로 병실을 옮겼다. 의료진 을 보나 의료 시설을 보나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를 뒤따라올 치료 기관은 없 었지만,아무래도 주위의 눈을 염두해야만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가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민간인들의 병문안 같은 것 말이다. " 요잇∼ 며칠 쉬었더니 안색이 좋아보이는데, 유가인∼ " " 그렇게 보이냐? " 가인은 병상에 누운채 자신을 병문안 온 재영에게 활짝 웃으며 답했다.가인 의 앞으로는 그를 병문안 온 일곱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순서대로 소개 를 하자면 왼쪽부터 테레이아, 재영, 지연, 유리, 시민, 마리,그리고 마지막 으로 시더였다. 테레이아와 재영은 가인의 담임 하지연을 따라 병문안을 오 게 된 것이고 유리와 시민은 같은 집에서 사는 동거인으로서, 마리는 전우이 자 스승의 자격으로서, 그리고 시더는 가인의 주치의로서였다. 시더가 왜 주 치의 인지는 좀 더 상황을 지켜본 후 설명하겠다. 담임 하지연 선생이 담배 를 입에 문채 가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 얘기는 들었다,녀석아. 유리가 차에 치일 뻔한 걸 구해주다가 그렇게 됐 다면서? (이 대목에서 유리와 가인은 서로를 쳐다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기특한 자식∼! 남자라면 자고로 그래야지! " " …그것보다 병실 안에서는 금연인데요,선생님‥. "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 뜨리는 지연의 손에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가 인. 물론 지연은 담배를 피지 않고 물고만 있었을 뿐이었지만 주위의 눈총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쓴다면 그녀는 하지연이 아닌 것이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가지고 온 디스크를 가인에게 넘겨주었다. " …며칠동안 결석한 과목들 수업 내용이다. 그리고 출석 일수는 병가로 처 리해 놨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해라. " " 아, 고맙습니다. " 이런 지연의 세심함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 가인.아까까지는 연신 투 덜거리더니 금새 고마워하는 거냐? 밸이 없는 건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지 연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슬슬 앞전부터 마음에 걸 리고 있던 화제를 가인에게 꺼내야만 했다. " …그런데… 유가인. 네 놈, 혼자서 살고 있던 것 아니냐? " " 허걱- " 순간, 자신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선 가인.지연은 시민과 유리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학교의 아는 사람들이야 가인이 아리따운 금발의 미녀 와 한성 고등학교의 꽃 이유리와 동거를 한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 만, 그것을 알고 있던 선생님은 아직까지 없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가인을 담당하고 있던 의사와 얘기하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지연. 가인은 식은 땀 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변명할 거리를 찾았다. 하지만 지연의 눈은 이미 가인 을 떠나 시민에게 향하고 있었다. " 저기‥ 실례지만 가인이와는 어떤 관계가…? " " 아, 가인 씨의 담임 선생님이 되시는 군요. 진작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 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 차분히 미소지으며 지연에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시민. 지연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왠지 의심이 풀려버려 안도하며 생각했다. 뭐야‥역시 그냥 가인이의 보호자 분 되시는 건가? 하긴‥ 난 또 가인과 무슨 그렇고 그런 관계인 줄로 만 알았지 뭐야∼ 하,하하핫 제자를 스승이 못 믿다니 그러면 안되지∼ 그래. 그럴리가 없잖아. 그렇고 그런 관계라니. 도대체가......... 헉!! 하지연,무 슨 생각을 하는 거냐!! 교육자로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도대체 무슨 생각 이길래) 어쨋든 의심의 눈초리를 누그러뜨리는 지연. 그런 그녀에게 시민이 사심 없이 웃으며 말했다. " 그런데 우리 가인 씨가 학교 생활은 잘 하고 있나요? " - 쿠쿵!! 우,우리 가인 씨?!! 뭐,뭐야? 마치 저 연인을 부르는 듯한 부드러운 말투는?! 야,유가인!! 어떻게 된 거야, 이 놈의 자식아?!! 주먹을 쥐어 올리며 가인을 돌아보는 지연.하지만 가인은 이미 눈을 감은채 깊은 잠에 빠져든 척을 하고 있었다. 저, 저 죽일놈이!! 하지만 시민은 그런 지연의 기색을 눈치 채지 못 하며 자고 있는(자는 척하는) 가인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 하긴 가인 씨, 피곤할 만도 하지. 어제 밤에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 " 바,밤에 무리를?!!! " 이번에는 지연 뿐만 아니라 병실의 다른 이들까지 입을 모아 소리쳤다.자는 척하던 가인은 하마터면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뻔 했다. 으아, 시민 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시민은 다른 이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보 고있자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 어제 밤에 가인 씨, 재활 훈련을 무리하게 했거든요. 어떻게든 빨리 낳고 싶다고 그래서…. " " …재,재활 훈련‥. " 하아아- 하며 한 숨을 내쉬는 좌중. 가인은 시민이 더 이상 무슨 소리를 할 지 걱정이 되어 자는 척도 못하고 눈을 뜨고 있었다. 시민은 정말 모르는 건 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가인에게 물었다. " 어머, 가인 씨? 왜 더 안 주무시고…? " " ......... " 어쨋든,그렇게 가인의 문란한(?) 동거 문제를 어물쩡 넘겨버리고 다른 이들 은 가인에게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스타트를 끊은 것은 테레이아였다. " 가인, 많이 아픈 거야? " " 아,아니‥ 뭐, 별로.우선은 이렇게 깁스를 하고 있으니까… 상세를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지. " " 뼈가 부러진 거야? 아니면‥ " " 그,글쎄… " 테레이아의 말을 얼버무리는 가인이었다. 가인 자신도 자신의 다리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엄청난 대수술이 행해졌다는 것 외에 는 아는 바가 없음. 그런 가인과 테레이아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유리 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인이 저렇게 된 것은 자신 때문이 아 닌가? 가인의 깁스한 발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드는 유리였다.그렇게 유리가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때 그녀의 작은 손을 살며시 잡아주는 손길 하나. 시 민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유리의 마음 속으로 울려퍼졌다. - 괴로워하지 말아요, 유리양…. 가인 군은 자신이 다치는 것 보다 유리 양 이 다치는 것에 더 괴로워 했을 거에요‥. - ......하지만… - 그러니까 우리, 가인 군이 빨리 나을 수 있도록 열심히 간호해 주자구요. 알았죠, 유리 양? - ......으응.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 시민은 방긋 웃으며 그런 유리의 머리를 쓰 다듬어 주었다. 그때, 한창 가인의 발에 대해 얘기하고 있던 그들에게 시더 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 에헴, 가인의 발에 대해서는 그의 주치의인 저, 시더 웰리스가 설명을 해 드리겠어요∼ " 그런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돌아보는 좌중. 가인들이야 그녀가 피스 메이 커의 기술 부 치프까지 맡고 있는 천재 소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테레이 아와 재영, 지연은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가인의 또래로 밖에 보이 지 않는 그녀가 주치의라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게 들릴리가 없는 그들. 솔 직히 가인도 의심쩍기는 마찬가지였다. 기계에 대해서는 천재라는 것은 알겠 는데… 하지만 그거‥ 의학하고는 관계 없는 거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 보아 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과학과 의학은 엄연히 다른 계통이니까. 어쨋든,그 런 좌중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시더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 뭐,뭐에요∼ 그 미심쩍다는 눈초리는?! 아, 정말 실례되는 사람들이네!! " " 아, 죄송 죄송. 하시던 말씀 계속 하시죠. "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젓는 지연. 시더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 었지만 짧게 코 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 가인의 발에는 현재 인공 근육을 사용한 최신 의학 기법이 도입되었어요. 끊어진 근육들이 괴사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었거든요? " " ......그,그게 무슨‥? " 가인은 시더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 중얼거렸다. 무,무슨 말을 하는 거지, 시더는? 인공 근육이 어쨋다느니 근육들이 괴사가 되었다느니 하던데….그럼 내 본래의 근육 대신에 인공으로 만든 근육을 집어 넣었다는 소리야? 그런게 가능한 건가? 왠지 낯빛이 창백해지는 가인. 하지만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하고 시더는 설명을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 어쨋든,그런 괴사된 근육들을 제거하고 저희 의료진은 오리하르콘으로 제 작된 인공 근육을 사용했죠.특수 고무로 제작된 인공피부 속으로 전자 신 경이 흐르고 있어 촉감을 느낄 수도 있고 또한 이것이 가인의 본디 근육 과 인공 근육을 연결해 주고 있어서 릴렉스하고도 소프트한 움직임을 보 여줄 수 있단 말씀∼ " " ......그,그거 결국 내 발에 기계를 달았다는 말? "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 가인. 시더는 손가락을 흔들며 다시 설명했다. " 노∼노∼ 기계가 아니라 이런 건 생체 공학이라고 하는 거야. 어쨋든, 의 족은 아니니까 안심해. 오히려 예전 발보다 더 섬세하고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을테니까. " " ......그,그런‥ 안심하라니…. " 맥이 빠진 말투로 고개를 흔드는 가인. 그는 그제서야 시더가 왜 자신의 주 치의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생체 공학이니 뭐니 해도 그거… 기계 아닌 가? 기계는 시더의 주 전공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의 걱정은 없 어진 가인이었다. 결국 최신 기술로 내 발을 고쳤다는 소리잖아. 더구나 전 문가 중의 전문가인 시더가 한 말이기에 더더욱 안심이 갔다. 어련히 알아서 잘 안해줬을까나,시더가. 가인은 웃으며 시더에게 말했다. "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시더 선생님. " " 맡겨만 달란 말씀∼ " 시더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그때 좌중의 뒤에 조용히 서있던 마리가 주춤 거리며 가인에게 다가왔다. " 어, 마리 선배? " " 음. 그게‥ 이,이거 받아‥. " 마리는 쑥스러운 얼굴로 가인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하얀 꽃망울이 어찌보 면 가련해 보이기 까지하는 꽃송이였다.가인은 의아한 눈으로 마리에게서 꽃 다발을 받아 살펴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 이거‥ 무슨 꽃이죠? " " 히야신스(Hyacinth). " 짤막히 답하는 마리. 그런 그녀의 말에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 렇게 꽃 이름만 말할게 아니라 좀 더 설명을 해주는게…. 마리 선배는 말이 너무 없다니까. 어쨋든, 척 보기에도 희귀한 꽃 같은데‥ 마리 선배가 이 꽃 을 준 의도는 뭘까‥? 그런 가인의 의문을 풀어준 것은 시민이었다. 시민은 방긋 웃으며 마리에게 말했다. " 흰색의 히야신스의 꽃말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어요'라죠? 후훗‥마리 씨는 자상하네요. " " 아,아니! 그런‥! " 얼굴을 붉히며 손을 휘두르는 마리. 그제서야 마리가 히야신스를 준 의도를 깨달은 가인은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 고마워요, 선배. 마리 선배가 기도해준 만큼 빨리 나을게요. " " 으,으음. " 쑥스러움 때문에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 하지만 가인이 자신이 준 선물을 좋아해주자 안도감이 드는 그녀였다. 다행이다. 받아줬어‥.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그녀를 기쁘게 하는 것은‥. ' 히야신스의 본디 꽃말은 차분한 사랑‥. ' 아무도 모르게 자신만이 간직한 마리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남 몰래 기뻐하는 마리에게 찬 물을 끼얹듯 충고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테레이아와 유리였다. " 훗‥향기가 강한 꽃은 행동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 좋 지 않다는 것도 모르나 보군요? 문병땐 가급적이면 향기가 없는 꽃을 권 한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을. " " …치명적이지. 이건…. " " 그,그런…. " 비틀거리며 뒷 걸음질을 치는 마리. 아,아냐…. 난 그럴려고 그랬던 게 아 냐…. 그럴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고…. 마리는 울적해진 목소리로 병실 한 구석에서 중얼거렸고 가인은 다시 쓴 웃음을 지었다. 마리 선배,난 괜찮은데 …. 어쨋든, 그렇게 가인의 문병은 무사히 끝날려는듯 싶었다. 그러나 다음 과 같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들의 방문은 가인의 문병을 치명적인 결말로 이끌고 말았다. - 벌컥. " 가,가인 군∼ 병 문안 왔어요∼ " " 어쩜.어쩜. 개인 병실이잖아! 그것도 VIP 룸이야!! " " 역시 피스 메이커! …가 아니잖아! 이상한데 감탄하지마! " " 짠짜란∼ 가인 씨 깁스에다가 몇 마디 적어줄려고 준비한 매직! " " 앗! 나도 나도! " 정신 없이 몰려든 다섯 명의 여성들.다름 아닌 윤채영을 비롯한 피스메이커 의 오퍼레이터들이었다. 뭔가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가인에게 인사를 건내는 윤채영.가인은 뜻 밖의 방문객들에게 반가워하며 그녀들을 반 겼다. " 엇? 안녕하세요, 윤채영 씨. 다른 분들도 안녕하시고. " " 아,예‥옛. 가인 씨도 건강하셨지요? " 이유를 알 수 없게 잔뜩 긴장한 윤채영. 하지만 뒤에 있던 오퍼레이터들은 그런 치프의 반응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피스메이커 피스 블루의 팬이라는 것은 이미 자대에 널리 알려진 사실. 그리고 피스 블루 본인과 오 퍼레이터로서의 접촉이 아닌 실제로 대면하여 만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채영의 마음이 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쨋든, 자신들의 치 프가 그렇게 수상쩍은 반응을 보이자 신바람이 난 오퍼레이터들은 휘파람을 불었다. " 자자∼ 좀 더 감미롭게! 좀 더 속삭이듯이 말하라고요, 치프! " " 허리를 좀 더 뒤로 빼고, 마치 유혹하듯이!! " " 안돼.안돼. 몸이 영 굳어버린 게야∼ " 그런 그녀들의 응원 아닌 응원에 윤채영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 렀다. " 다,닥치지 못해, 이 자식들!! " " 어머어머∼ 정숙이 필요한 병실에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 " 감점 20점. " 이, 이 자식들…. 채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 는 가인의 눈초리에 화급히 일그러진 얼굴을 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두,두 고 보자. 나중에 본부에 돌아가서 긴급 레벨 4 시뮬레이션 지옥 특훈을 맛보 게 해주마! 어쨋든, 채영은 가인을 돌아보며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이 가지고 온 문병 선물을 건내 주었다. " 여,여기 선물…! 입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 " …어? 케이크?! 고마워요,채영 씨! 병원 밥은 영 맛이 없어서 뭔가 맛있 는게 먹고 싶었는데∼! " " 아…. " 나,나이스!의외로 반응이 좋은 가인의 모습에 채영은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그러다 핫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채영. 역시나 그녀의 뒤에서는 오퍼레이터 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서로 수근 거리고 있었다. " 어얼∼ 대번에 호감도 30 상승. 오늘 뭔가 되려나 본데. " " 치프도 단단히 준비하고 오셨나봐∼ 저 봐.저 신경쓴듯한 옷 차림하고 어 리게 보일려고 옅게 한 화장이라니∼ " " 이거 비밀인데∼ 어제 가인 군 사진을 앞에 놓고 말하는 것 연습하더라, 우리 치프? " " 꺄아, 진짜? 진짜? " 망할 것들. 다 들린다. 다 들려.채영은 잔뜩 스팀이 오른 표정으로 두 주먹 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그때, 그런 그녀들을 향해 지연이 굳은 표정으로 물 었다. " 저기… 실례지만 그쪽 분들은 가인이와 어떤 관계가‥되십니까? " 아까부터 계속 사람들 신상 명세나 묻게 되는 지연이었다.하지만 그것도 그 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병문안을 온다는 사람들이 재영이 빼고는 하나같이 다 여자들 뿐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몇 명이야? 하나, 둘, 셋, 넷‥ 여, 열 명. 무려 열 명 씩이나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연령도 가지가지 인 것이 뭔가 심 히 수상쩍었다. …가인이 이 자식, 도대체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이 수 많 은 여자들이 다 찾아 오는 거야? 어쨋든,그런 지연의 물음에 당황해 하는 윤 채영. 솔직히 피스메이커의 오퍼레이터라고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피스 관계자들은 정해진 가족 외에는 자신의 신분을 발설해서는 안된다. 잘 못했다간 피스 대원들이 몬스터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채영은 식 은 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 아,저,저기… 그러니까 저희들은…!! " 자신의 동료들을 돌아보며 도움을 청하는 채영.하지만 치프가 알아서 하라 는듯 그녀들은 다들 딴 짓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채영은 울쌍을 지었다.뭐, 뭐라고 말해야 한다지?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가인을 찾아올 이유가!! 도대 체 어떤 관계일 때 이런 상황이 성립될 수 있단 말인가?! 자기 혼자서 가인 의 병문안을 왔더라면 사촌이니 뭐니 하면서 둘러대기라도 했겠지만… 이렇 게 여럿이서 몰려왔으니… ' 잠깐, 여럿?! ' 순간, 채영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 하나. 맞다! 그게 있었구나!!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는 방법 하나! 그건 바로…!! 채영은 콧 소리 가 섞인 목소리로 가인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아,아잉∼가인 씨∼ 외상 안 갚으면 어떡해∼가인 씨가 아무리 우리 <여 인천하>의 단골 손님이라지만 그러면 안되지∼ 그렇게 신나게 놀다 가고 나서는 이런 법이 어딨어∼? " 그래! 바로 이거야!! 수 많은 여자들이 남자를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이 유!! 채영은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해낸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평상시에는 어 색하기만 하던 자신의 거짓말이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그것도 어색하지 않 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채영은 이런 자신이 뿌듯해져 자신만 만하게 주위의 반응들을 살폈다. 그런데… " ......... "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단지 알 수 없는 기류만이 병실 안을 맴돌고 있었 다. 채영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간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천천히 자신의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저기… 얘들아‥ 나 잘못 말한 거였니? " 유,유가인…. " 그리고 음산하게 울려퍼지는 하지연의 목소리. 넋이 빠진 표정으로 채영을 바라보던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지연을 돌아보았다.그곳에는 과연 저게 사람 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일까 의심이 드는 흉신악살의 모습을 한 지연이 가인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그녀의 입에 물린 담배는 껌 처럼 질겅 질겅 씹히고 있었다. " 고, 고등학생 주제에 룸에 간 것이란 말이냐, 네 녀석은∼∼∼∼∼!!!! " " 으아아악!!! 오해에요,선생님!! 오해라구요!!! " 그 날, 가인과 같은 병동을 쓰던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한 남자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외침은 끊임 없이 울려퍼졌다. 끊임없이…. 어두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나는 서 있었다. 마치 모든 것 을 삼켜버릴듯한 어둠. 숨이 막힐 정도로 호흡이 가빠온다. - 하아‥하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호흡을 조절했다. 이런 행동만으로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 떨려온다.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러는 거지? 수 십 가지의 의문 이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금새 금새 사라져 간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나는 왠지 모르게 당연하다고 받아 들이고 있었다. - 아‥. 그리고 나는 다음 순간 하얀 병실에 누워 있었다. 삐삐 거리는 의료 기구의 소리가 환청 처럼 들리고 있었고,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코 끝을 찌르고 있 었다. 뭘까, 이건? 나는 몸을 일으킬려고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내 몸 에는 거동도 할 수 없을 대량의 붕대가 감겨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양 팔 과 양 다리에는 두터운 깁스가 되어 있었다. - 어,어떻게 된 거지? 나 한 쪽 다리만 다쳤던 게…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다시 금새 잊어 버리고 만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담 담할 것 같은 게 지금의 내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낯설지가‥않다. - 환자의 상태는‥? - 고비는 넘겼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한 의사와 간호사의 목소리. 분명 바로 곁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데도 아득 히 멀리서 얘기하듯 희미하게만 들려온다. 잠깐, 이봐요. 고비는 넘겼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가족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 가족…? 신음처럼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순간 내 귀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날‥ 잊은‥ 거야? 어느새 주위는 암흑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나는 언제 다쳤냐는듯이 멀쩡하 게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 앞 에 서있는 한 소녀의 모습 때문에. 그 작고 여린 아이의 모습 때문에. 난 그 아이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 시,신아‥ 그렇다. 내 동생 신이. 유신. 하나 뿐인 나의 동생.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처럼 웃지 않고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내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 우릴‥ 잊어 버린 거야? 신이의 뒤로 나타나는 한 쌍의 남녀. 아버지‥! 어머니‥!! 두 눈이 충혈되 고 심장은 터질듯이 뛰어올랐다. 그들은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치 타 인이기라도 한 것 처럼. 내가 이방인이기라도 한 것 처럼. 나는 그런 그들의 시선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 왜,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에요,아버지? 어머니‥?!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날 남보듯이…!! 마치 날 잊어버렸다는듯이!! - 오빠가 먼저 그랬잖아? 차갑게 들려오는 신이의 목소리.나는 신이의 말에 흠칫 놀라 그들을 바라보 았다. 언제나 자상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즐거운 생활에 둘러 싸여… 언제나 웃음 짓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웃고 소리치고 즐거워하며… 언제나 내 허리를 껴안으며 어리광 부리던 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렇게 우리를 잊어 버렸잖아?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나에게 자상하게 웃음지어주고 감싸안아주지 않았다. 내 전신을 꿰뚫기라도 하는듯한 차가운 시선들. 하지만 나는 그만 떨리는 다 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무섭도록 소름끼치는 죄책감 이 온 몸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먹어 삼킬려는듯한 그 느낌에 몸부림을 치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 아,아니야!! 난 잊어 버리지 않았어!! 잊어 버리지 않았다고!! 단지!! 단 지…!! 그때, 다시 주위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건조한 하늘로 피어오르는 짙은 검 은 연기.부서진 자동차의 부품들이 흩어져 있는 고속 도로.붉은 불꽃이 날름 거리는 자동차들… - 여,여긴…!! 잊고 싶었다. 잊어야만 했다. 나의 모든 것을 바꿔버린 장소. 나의 모든 것 을 앗아가 버린 장소. 나의 가족들을 빼앗아 버린 바로 그… 장소….나는 비 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킬려고 했다. 하지만 난 움직이지 않는 오른 발 때문 에 그만 다시 넘어져야만 했다. 누군가가 내 오른 발목을 잡고 있었다. 놔, 놔줘!! 여기서 벗어날 거야!! 누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거야?!! 놔!! 놓으 라고!! - 날… 버릴 거야? 나의 발목을 잡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온 몸이 피투성이인 내 동생이었다. 신이였다. 그 아이는 나의 발목을 움켜쥔채 피가 흐르는 얼굴을 들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한자 한자 뚜렷하게… - 거 짓 말 쟁 이 그 한마디에 나는 꿈에서 깰 수 있었다. " 으아아아아아아…!!! " 새벽 녘에 들려온 갑작스런 비명 소리. 편안한 꿈 속에 빠져있던 시더는 화 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무,무슨 소리지?! 이건?!! " 가인의‥ 비명…? " 시더는 비명의 근원지를 파악하기가 무섭게 옆 방에 있는 가인의 병실로 달 려갔다.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비명은 가인의 병실에서 들려온 것이었다.그 는 연신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 가,가인?!! 무슨 일이야!! 왜 그래?!! " " 아,아아아‥ 아아아아‥!! " 눈물을 흘리며 정신 없이 울부짖는 가인. 시더는 그런 그의 상태에 너무 놀 라 가인을 끌어안았다.왜, 왜 이러는 거지? 어제 검사를 할 때도 별 이상은 없었는데‥!! 하지만‥ 하지만 이 쇼크 상태에 가까운 발작은 도대체 뭐냐고 ?!! 그렇게 당황하며 머리를 굴리는 시더를 가인은 끌어안은채 울고 있었다. 격하게 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 나,나는‥ 나는 잊어 버리고 있었어‥! 나는 잊어 버릴려고 했던 거야‥! " " 뭐,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가인? " " 아,아버지‥ 어머니‥ 신이‥!! 난 일부러 잊어버릴려고 했던 거야! 더 이상 괴롭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 난 내가 편할려고 가족 들을 잊어버렸던 거야!! " 가인은 시더의 품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더가 그런 가인을 말리기 위해 소리쳤다. " 아,안돼, 가인!! 지금 그렇게 일어서면! " " 주위에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금새 그들을 잊어버렸어!! 절 대로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리더라도 나 만은 그들을 잊어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어째서!! 어째서 나는…!! " - 털썩! 순간, 땅바닥에 주저 앉아 버리는 가인. 깁스를 한 그의 오른 발이 심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시더는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안 좋아 저건! 대 체한 인공 근육이 본래의 근육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현상이었다.부작용인 건 가?!! 가인은 엄청난 고통이 몰려온듯 발을 감싸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 아,으아아아‥아아아아악!! " 결국, 시더의 연락으로 달려온 간호사들에 의해 진정제를 맞고 정신을 잃는 가인. 그의 흐릿해져가는 눈동자에서는 끊임 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리 고 있었다. - 거짓말쟁이‥ 꿈에서 들려왔던 신이의 목소리. 가인은 인정했다. 나는 거짓말쟁이였다고. 아버지와 어머니‥그리고 신이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노라고‥ ' 미안해‥ 미안해‥ ' 그렇게 쉼 없이 중얼거리며 가인은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에엣, 그랬어요? " 다음 날 면회 시간. 가인은 자신을 병문안 온 시민과 유리에게 웃으며 물었 다. 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 유리 양이 가인 씨 퇴원하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저한테서 얼 마나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요. 하루 하루 놀랄 정도로 빨리 배운다니깐요, 유리 양. " " 헤에‥. " 감탄을 하며 유리를 돌아보는 가인.유리는 그런 그의 시선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그게‥ 시민‥언니가 잘 가르쳐주니까‥. " " 그래도 시민 씨가 칭찬할 정도라니. 기대되는데? 유리가 해주는 음식! 빨 리 먹고 싶다∼ " " ......그러니까 빨리 나아‥. "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리는 유리.그런 유리의 모습에 가인은 미소를 지 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리는 그런 가인의 손길이 기분 좋았 는듯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시민이 병실 한 쪽에 조용히 서 있는 시 더에게 몸을 돌리며 물었다. " 시더 양, 가인 씨의 상태는 어때요? 빨리 퇴원할 수 있겠죠? " " 예?! 아, 예에‥ 그,그럼요! 금새 나아서 퇴원할 거에요,가인이는∼!! "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답하는 시더. 그런 그녀의 반응은 어딘지 모르게 이 상했지만 시민은 눈치 채지 못한듯 방긋 웃음지으며 다시 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즐겁게 그들과 얘기를 하는 가인. 시더는 잠자코 그런 그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마치 어제의 발작은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시더에게는 가인이 억지로 쾌활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였 다.그런 그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오는 시더였다. " 그럼 저는 이만 재활 훈련하러 갈테니까 시민 씨하고 유리도 어서 집으로 돌아 가세요. " " 혼자 괜찮겠어요, 가인 씨? " 가인의 말에 걱정스레 묻는 시민.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가인은 씩 웃 으며 목발을 짚고 일어났다. " 그럼요! 재활 훈련 열심히 해서 빨리 퇴원해야죠! 그래야 유리가 만들어 주는 음식도 빨리 먹을 수 있을테고∼ " " …각오. " 짧게 다짐하는 유리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짓는 시민.그럼 오 늘부터 특훈인 걸까, 유리 양. 즐거워 지겠는 걸. 시민은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병실을 나섰다. "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가인 씨. 저희는 계속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 럼 내일 봐요. " " …잘 있어,오빠. " 인사를 하며 떠나는 시민과 유리.가인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의 뒤에 서있던 시더 가 가인에게 말을 걸었다. " …저기‥ 괜찮은 거니, 가인아? " " 으응. " 가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재활 훈련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미소를 잃어버린 무표정한 얼굴의 가인. 그런 그의 뒷모습을 시더는 안 타까운 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목 발을 짚고 쩔뚝거리는 가인의 뒷모 습은 왠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다. " 으윽‥! " 재활 훈련실. 가인은 몇 발도 내딪지 못하고 주저 앉아 버렸다.그는 자신의 오른 발을 바라보았다. 깁스를 하고 있어서 안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 수 없 었지만, 쉼 없이 경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 제,젠장‥! "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고정 봉을 잡았다. 그리고 또 한 발. 왼발 을 내딪자, 축으로 고정시키던 오른발이 다시 가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꺽 여버렸다. '쿵!' 다시 넘어진다. " 말도 안돼‥ 이런 건‥! 말도 안된다구. " 가인은 중얼거렸다. 분명 조급해 하며 무리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뭐야, 이거?! 수술 받은 거 맞는 거야?! 낫고 있는 게 맞냔 말이야! ' 오른 발… 아무런 감각이 없어…. ' 그랬다. 붙어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오른발의 발가락을 움직여 볼려 고 했지만 아무런 감각도 들지 않았다.마치 오른발을 잘라놓고 그 위에 깁스 를 껍데기 처럼 입혀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을 수는 없는 거였다. " 움직여. 움직이라고…! "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가인. 하지만 오른 발이 땅에 닫기가 무섭게 다 시 넘어져 버렸다. 다시 '쿵!'. 이번에는 넘어져도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 가인이었다. " 하,하하… "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뭐냐. 이 꼴사나운 모습은? 응, 유가인? 네 꼴을 잘 보라고. 한 번 흘러나온 웃음은 멈추지를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가인은 뭐 가 그렇게 우스운지 계속 키득 거렸다. " 하하하‥하하‥ 하......욱‥ " 그리고 결국에는 흐느끼는 그.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입을 막 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뭐야‥ 왜 우 는 거야? 왜 우는 거냐고? ' 무서워… ' 가인은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남들 앞에서는 안 그런 척 하고 있 었지만 혹시나 이대로 다리를 못 쓰게 될까봐 두려운 가인이었다. 아니,그보 다도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 난‥ 혼자…야. ' 그것이었다. 재활 훈련실은 오호 7시가 넘는 늦은 시각이었기에 아무도 없 었다. 단지, 그 안에 덩그러니 가인 혼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주위를 둘 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시더. 시민. 유리. 마리 선배‥ ' 좋은 사람들이지만… 결국은 남이다…. ' 그들은 내 가족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친절하고 아무리 다정스러워도 그들 은 타인이었다. 피도 섞이지 않은 남이다. 아무리 괴롭고 슬퍼도 그들 앞에 서는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었던 가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전신으로 무섭 도록 외로움이 스며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힘들어 해도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 아아‥ " 한기가 밀려와 몸을 끌어안았다. 자신의 이런 감정이 어리광일지도 모른다 고 가인은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태연한 척 하려고 했다. 나는 어른이니까. 혼자서도 잘해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행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지만… " 보고 싶어… 아버지‥ 어머니… 신아… " 왜 나만 내버려두고.왜 나만 혼자 내버려두고 다들 떠나버린 거야? 도대체 왜! 다리를 못 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떠나간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을 떠는 가인이었다. 한동안 시민 씨들과 살면서 괜찮다 싶었더니 또 이렇 다. 난 아직도 그 때의 악몽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보고 싶어…. " 가인은 고개를 무릎에 파 묻은채 흐느꼈다. 몇 시간 동안 그렇게 있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가인은 곧 이상한 소리를 들 을 수 있었다. 그것은 흐느낌이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흐느낌. 그 흐느낌은 재활 훈련소 바로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흑‥ 흑‥ 흐응‥ " 뭐지? 가인은 눈가가 붉어진채 고개를 들었다. 이거 누가 우는 소리 맞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가인은 서둘러 고정 봉을 잡고 몸을 일으켜 목발을 들 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데에서 울고 있는 거야?! 자기도 금방까지 울고 있 었던 주제에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가인이었다. " 흑‥ 엄마‥ 으엥∼ " 문가로 갈 수록 더욱 뚜렷하게 들려오는 여자 아이의 울음 소리. 가인은 슬 쩍 밖으로 나오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대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꼬마 아이가 재활 훈련실 문가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을. ' …얘도 환자인가? ' 여자 아이는 가인과 같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더구나 오른 손에 깁스를 하고 있는 모습. 가인은 자신의 반도 안되는 키의 꼬마 아이가 깁스를 한채 울고 있는 것이 너무도 안스러워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 저기… 여기서 왜 울고 있어? " 그렇게 가인이 말을 걸어 오자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드는 아이.그 커다란 눈 망울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자, 가인은 몸을 숙여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눈물 을 닦아 주었다. " 다 큰 여자애가 이렇게 울면 안되지. 자, 뚝∼ 코도 풀고. " " 우,우응‥. " 훌쩍이며 가인이 해주는데로 앉아 있는 아이. 가인은 아이가 어느 정도 눈 물을 그친 것 같자 활짝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 그래. 왜 이런데서 울고 있었던 거야? " " 엄마‥ 엄마가‥ 없어어‥. " 그러면서 다시 울먹이려고 하는 아이. 아마도 같이 온 부모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거,참‥ 이런데에서 애가 혼자 울고 있는데 간호사들은 뭘 하고 있 는 거야? 가인은 투덜거리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번쩍 들어올려지는 여자 아이. 아이는 깜짝 놀라 그 큰 눈을 깜빡이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아이가 겁먹지 않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오빠가 엄마 찾아줄게. 그러니까 이제 울지마. 알았지? " " 후우웅‥ 그래도‥ " 눈물이 부옇게 솟아나는 여자 아이. 어, 울면 안되는데. 가인은 당황하며 아이를 달래기 위해 이것 저것 생각해 보았다. 어릴적에 집에 없는 부모님 을 찾으며 울고 있던 신이를 달래던 것은 언제나 가인의 몫이었다. 마치 세 상이 다 무너질 것 처럼 서럽게 울고 있던 신이. 그럴 때마다 가인이 자주 써먹던 방법은… "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먹고 싶지? 오빠가 사줄게. " " 에… 지,진짜아? " 언제 울었냐는듯이 미소가 피어나는 아이의 얼굴. 역시나…. 가인은 쓴 웃 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 어딜가나 애들은 똑같군…. ' 이제는 자신에게 매달리기 까지 하는 아이를 다독거리며 가인은 병원 매점 으로 발 걸음을 향했다. " 맛있어? " " 으응! 맛있저! " 아이스크림을 든채 활짝 웃는 아이의 모습에 가인은 아이스크림의 위대함을 새삼 찬양해 보았다. 가인과 아이는 휴게실의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 고 있었다.가인은 자신의 무릎에 앉아 있는 아이의 이름을 물어 보았다. " 너, 이름은 뭐야? " " 정하나. " " 하나? 예쁜 이름이네∼ " " 진짜아? 에헤, 오빠 조아♥ " 덥썩 가인을 끌어 안는 하나.그 바람에 그의 환자복으로 아이스크림이 묻어 버렸지만 가인은 별 신경쓰지 않으며 다시 물었다. " 엄마는 어디서 잊어 버렸어? " " 으응∼ 그게‥ 엄마… 업서…. " 모르나 보군…. 가인은 다시 울먹이려는 하나를 토닥여 주며 생각에 빠졌다. 아이를 잊어버렸다면 분명 부모가 간호원들에게 통보를 했을 것이다. 어차피 하나에게 물어봤자 엄마 얘기만 나오면 우니 간호원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 이 나을지도…. 가인은 다시 하나를 안아올리고 근처의 접수처로 걸어갔다. 목발에 의지한채 걷는 것도 불편한데 아이까지 안아들고 가야한다니… ' 지금 내가 이럴 때가 아닌 거 같은데… ' 왠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또 남의 일 에나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었다. ' 그래도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 가인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하나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연신 웃으며 아이 스크림을 먹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이런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에 가 인은 생각했다. 자자, 유가인! 우울해도 이 아이의 부모를 찾아준 후에나 우 울해 하라고. 반드시 하나에게 엄마를 찾아주는 거야! " 저기… 미아 신고를 하러 왔는데요…. " 접수처의 간호원에게 말을 건 가인.간호원은 어리 둥절한 얼굴로 가인과 하 나를 바라 보다가 잠시 후, 손뼉을 치며 말했다. " 아! 마침 미아 신고가 하나 접수 되어있었는데…! 잘 됐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 " 아,예…. " 곧이어 방송을 하는 간호사. 가인은 병원에 울려퍼지는 방송을 들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1층 중앙 접수처에 아이가 있으니 어서 내려오라는 내용이었다. 저 정도면 부모가 하나를 찾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 가인은 하나를 돌아 보며 말했다. " 하나야. 잘 됐다. 엄마가 하나 찾으러 온데. " " 진짜아?! 와!! " " 그러니까 여기 간호사 언니하고 잘 붙어 있어야 돼. 알았지? 오빠는 이만 갈테니까. " 가인은 웃으며 접수처의 간호원에게 하나의 손을 쥐어 주었다. 간호원은 하 나가 귀여웠는듯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 그래,하나야. 간호원 언니하고 같이 있자. 이리와. " " 에… 오빠‥ 가는 거야? " 큰 눈망울로 가인을 올려다보는 하나. 가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벌써 8시였다. 더 늦었다가는 시더가 화를 낼지도 몰랐다. 얼른 들어가서 자는 척 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슨 설교를 듣게 될런지…. 하지만 가인은 자신의 병실 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의 발을 껴안는 하나 때문이었다. " 시러어∼!! 오빠 가는 거 시러∼!! " " 하,하나야?! " " 나 놔두고 가지 마,으앙∼!! "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하나. 앞전에 그렇게 울어놓고서는 또 울 수 있다니‥ 정말 눈물이 많은 아이라고 가인은 생각했다.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하나 를 들어올렸다. 훌쩍이며 가인을 바라보는 하나. 가인은 그런 하나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 하나야, 오빠하고 같이 엄마 기다릴까? " " 으응∼!! " 시더, 미안‥. 나 좀 더 늦을 거 같아…. 숲에는 기분 나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더구나 밤이 되어서 그런지 산을 타고 불어 내리는 밤 바람은 한층 더 이곳을 음습하게 만들고 있었다. 28구 역에 위치한 이곳은 '요령(妖靈)'이라는 이름의 인적 없는 산이었다. 이름 그대로 유령이라도 있을 듯한 요사한 기운을 내뿜는 어둠의 산. 하지만 진 우는 이 기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 …B3. 응답하라. B3. " << 여기는 B3. >> " 절벽 쪽으로 포위망을 돌려라. 뒤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 << 라져. >> 무전을 치며 팔라딘들과 숲을 이동하는 진우. 그는 며칠 전 일방적인 살육 을 벌였던 범인의 뒤를 계속 쫓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놈을 놓친듯이 보였 으나 2시간 전에 이곳 요령산에서 놈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제보를 들은 후, 진우는 곧바로 팔라딘을 이끌고 수색에 나섰다. 피스 대원이 진우 자신 뿐이 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허위 정보일 수도 있고 이런 일 하나 하나에 피스 대원들이 출동하는 것은 전력 상의 낭비였다. 어디까지나 피스 메이커의 출 동은 게이트의 탐색을 시작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 '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 진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이렇게 쉽게 흔적을 남길 놈이 아닐 텐데…. 녀석은 또 한번 요란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요령산을 찾은 관 광객 10명을 몰살시켜버린 것이다.놈은 살육에 미친 괴물이었지만 그만큼 용 의주도하고 소름끼치도록 잔혹하기도 했다. 그렇다는 것은… ' 내가 자신을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건가? '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녀석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 래도 그 때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거 겠지…. ' 어찌되었든 한 번은 나에게 목숨을 뺏앗겼던 녀석이니까. ' 1년도 더 지난 일이었었다. 그 때 자신은 분명 놈의 시신을 확인 까지 했었 다. 그렇다는 것은 이번 일은 그 녀석과 관련 있는 다른 이의 동일 범죄라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 하지만 계속해서 꺼림칙 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정 대위 님! " 그때, 상념에 빠진 진우를 부르는 낮은 외침 하나.바로 팔라딘의 부대장'유 한진'이었다. 벌써 2년 가까이 진우와 호흡을 맞춰오던 그는, 이미 진우에게 는 최고의 파트너이자 부관이었다. 한진은 긴장된 안색으로 진우에게 말했다. " 반응이 잡혔습니다. 이 부근입니다. " " 절벽 쪽은 속임수라는 건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뭔가 이상한데…. " 인상을 찡그리는 진우. 꺼림칙한 느낌은 한층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 느낌 은 의혹을 넘어서 불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뭘까. 왜 이렇게 불안해지는 거지? 뭣 때문에? - 푸칵! 그때 옆에서 걷고 있던 팔라딘의 한 대원을 나무 위로 끌어올리는 손길 하 나!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반응할 수 없었다. " 끄,끄아아아아악!! " - 퍽! 몇 번 비명도 못 지르다가 가볍게 머리가 터져나가는 대원. 그의 머리를 쥐 고있던 거친 짐승의 손길이 행한 짓이었다. 그 악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비,빌어먹을!! " 팔라딘의 부대장 한진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수중의 산탄 총을 들어 올렸다. 당겨지는 방아쇠. 거친 폭음과 함께 제조된 은탄알이 발사되었다. 하지만 그 탄알에 격중되어야 할 대상은 이미 나무에서 밑으로 뛰어내린 후였다. - 크앙!! 그것은 거대한 늑대였다.사람의 두 배는 됨직한 덩치에 잿빛에 가까운 갈색 털이 온 몸에 나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늑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놈은 사 람 처럼 이족보행(二足步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나타났나, 웨어울프(Werewolf)?! " - 퍼억!! 진우가 소리치기 무섭게 웨어울프의 곁에 있던 한 대원이 괴물의 손에 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마치 자신의 정체를 밝혀 준 것에 대한 댓가라는 듯이 행 한 공격이었다. 대원은 그대로 목이 꺽인채 피를 흩뿌리며 저편의 숲으로 떨 어졌다. " 이 개자식!! " 순간, 괴물의 주위에 있던 팔라딘 대원들의 일체 사격. 수십 발의 은탈알이 웨어울프에게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웨어울프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탄알들은 다시 애꿎은 나무들에게로 박혀야 했다. - 탕! 탕! 탕! 탕! 나무들을 보호막으로 삼아 이동하는 웨어울프.괴물은 그렇게 총알을 피하며 다시 한 대원에게로 날아들었다. 이번에 웨어울프가 노린 대상은 부대장 유 한진이었다. 반응도 못한 한진. 거대한 늑대의 발톱이 그의 몸을 찢기 위해 날아들었다. - 퍼엉! 거센 둔탁음. 그렇지만 날아가는 이는 한진이 아닌 웨어울프였다! 한진의 앞으로는 어느새 녹색의 A.I 슈츠를 장착한 피스 그린 정진우가 주먹을 들어 올린채 서 있었던 것이다. 진우는 분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 덤벼! 네가 노리고 있는 것은 분명 나일테지!! " - 크아아앙!! 괴성을 올리며 무섭게 진우에게 달려드는 웨어울프. 하지만 진우는 그런 괴 물의 기세에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웨어울프를 노려보고만 있었다.그리고 뒤 로 당겨지는 진우의 주먹. 진우의 심호흡이 한 순간 터져나가듯 폭사되었다. " 칠성권(七星卷) 무곡(武曲)…! " - 투웅! 웨어울프의 주먹을 피하며 놈의 흉부를 가격하는 진우의 크로스 카운터. 하 지만 단순한 가격이 아닌 발경(發經)의 일종, 더구나 진우의 능력인 가속 까 지 작용된 발경이었다. 눈과 코, 그리고 귀와 입에서 피를 토하며 허공으로 떠오른 웨어울프. 그렇지만 무게가 무게였는지라 곧 다시 지상으로 내려서는 괴물이었다. 더구나 웨어울프는 특유의 재생력으로 금새 발경의 위력을 무마 시키며 진우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런 괴물의 가슴을 다시 무섭게 파고드 는 진우의 권(卷)! " …파군(破軍)! " - 콰앙! 초기의 발경이 스피드를 중시한 것이었다면 두번째 발경은 무거움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거기다 같은 곳을 교차하며 찔렀기에 그 충격은 배가 되 었다. 웨어울프는 가슴에 깊숙한 주먹 자국을 남기며 뒤로 미끄러졌다. - 끼기기기기긱…! 웨어울프의 발톱이 지면을 긁는 소리. 분명 오장육부가 박살났을텐데도 쓰 러지지 않는 괴물이었다.역시 재생력이 강한 라이컨슬로프(Lycanthrope)! 웨 어울프는 금새 원기를 되찾으며 진우에게 달려들기 위해 포효를 내지르려고 했다. - 철컥…. 하지만 포효는 울리지 않았다. 웨어울프의 벌린 입으로는 어느새 산탄 총의 총구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싸늘한 금속의 느낌이 웨어울프의 이빨을 스 쳐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산탄총을 겨누고 있는 이는 바로 유한진! " 지옥에나 떨어져라, 늑대. " - 퍼엉! 당겨진 방아쇠.산탄 총에서 터져나온 은 탄알은 사정 없이 웨어울프의 머리 통을 박살내버렸다. 아래턱의 윗 부분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모습이었다. 괴 물은 그렇게 피분수를 뿜어내며 그 몸을 쓰러뜨렸다. '쿠웅!' " …끝난 건가? " 진우는 A.I 슈츠를 해제하며 괴물의 시신으로 다가왔다. 역시 은에 약한 늑 대인간이었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끄떡 않던 녀석이 은 탄알 한 방에 그 명 을 다한 것이다. 웨어울프는 그 죽은 몸뚱이를 경련시키며 연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진우의 옆으로 다가온 한진은 산탄 총 대신에 권총을 꺼내 경련하는 괴물에게 확인 사살을 가했다. 탕! 탕! 탕! 탕! 단발의 총소리가 고요한 산 속의 정적을 깨뜨린다. 진우는 괴물이 쓰러졌는데도 굳은 인상을 풀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 이상해. 이렇게 쉽게 당할 녀석이 아니었는데…. " 가슴 속에서 계속 커져만 가는 의문. 이 녀석은 그 녀석이 아니다. 단지 동 일 범죄를 저지른 몬스터의 또 다른 하수인일 뿐이라고. 그래. 녀석은 결국 그때 죽은 것인가. 이를 갈며 나에게 저주의 소리를 내뱉던 그 녀석은…. - 기억해둬라! 지옥에서 돌아와 네놈을 찢어 죽일테다!! 진우는 놈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 …망령‥이로군. " 지금 죽어있는 이 괴물이 망령이라는 건지,아직까지 그런 과거에 신경을 쓰 는 진우 자신이 망령이라는 건지. 그렇게 한 숨을 내쉬며 무전기를 드는 진 우. 상황은 종료되었다. 철수 명령을 내려야 했다. " …B3. 응답하라. B3. " << 치지지지직… >> 거친 전파 소리만을 내며 응답을 하지 않는 B3.응? 왜 응답을 안 하는 거지? 진우는 의아해 하며 다시 한번 무전을 쳤다.가슴 속으로 기분 나쁜 불안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 B3! 응답하라,B3! " << 치지지직‥ 크,크크크크크‥ >> 그때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거친 웃음 소리. 그 소리를 듣는 순간,진우는 머 리털이 곤두서 버렸다. 이 웃음 소리는! 이 웃음 소리는!! " 라트?!! " << 내가 말했었지‥ 지옥에서 돌아온다고 말이야‥ 난 약속을 반드시 지키 는 남자거든‥ 크캇캇캇캇캇‥!! >> 놈이다! 저 끓어오르는 광기의 목소리! 진우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음성이 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에 있는 이 죽은 웨어울프는 그럼 뭐냔 말이다! 그 의문은 한진이 해결해 주었다. " 대위 님! 이 웨어울프는‥ 며칠 전 실종되었던 팔라딘의 대원입니다! " 죽어버린 웨어울프는 점점 인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죽은 시신의 목 에 걸려있는 군번.그것은 이 시신이 팔라딘 대원 임을 증명하는 표시였다.제 기랄! 역병에 당한 건가!! 여기가 함정이었군!! 진우는 낮은 목소리로 놈에 게 물었다. " 절벽 쪽의 대원들은 어떻게 한 거냐? " << 아, 이 허벌나게 약해빠진 존재들을 말하는 거냐? 오오‥ 그렇군. 너의 부하들이었던 모양이지? 기뻐해. 가져가기 편하게 조각조각 내주었으니 까‥ >> " 이 자식이-------!!! " 분노하는 진우의 목소리.그의 반응에 옆에 있던 한진과 팔라딘들은 이를 악 물었다. 놈은 진우가 분노하자 더더욱 기분이 유쾌해진듯 웃음을 터뜨렸다. << 카카카카캇! 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지? 유감이야‥ >> " 계속 웃어라. 다시 한번 지옥으로 보내줄테니까! " << 아아‥ 사양하겠어. 거기는 너무 춥거든. 더군다나 살인도 할 수 없어서 미칠 정도로 답답하더라고‥ >> 유쾌하게 중얼거리는 무전 속의 그. 하지만 그는 곧 웃음을 멈추고 이를 가 는 목소리로 진우에게 말했다. << 이번에는 내 차례야. 알아듣겠냐? 이번에는 네 놈이 지옥으로 갈 차례 란 말이다‥ 크크크큭! 내가 그 때 말했었지? 지옥에서 돌아오면 네 놈 을 찢어 죽여주겠다고. 캇캇캇캇캇!! 반드시 죽여주마!! 아까도 말했겠 지만 난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남자거든!! 기대해도 좋아. >> " ......... " <<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괴롭혀준 후에 죽여주마. 차근 차근‥ 아주 천천히 말이야. 기대하고 있어라, 피스 그린‥. >> 그 말을 끝으로 무전기 속에서 더 이상 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진우 는 충혈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달은 며칠 전에 보았을 때와는 달 리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을 그 녀석의 눈동자 같이. " 라트-------!!! " 진우의 노기 섞인 목소리가 요령산에 메아리쳤다. " 오빠아∼ 놀자아∼ " 침상에 누워있는 가인의 위에 올라탄채 그에게 매달리는 하나.가인은 쓴 웃 음을 지으며 그런 하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하나의 부모를 찾아준지 벌써 5일이 흘렀다. 그때 이후로 하나는 매일 가인의 병실을 찾아왔다. 치료를 받 을 때 외에는 밥도 여기서 먹고 가인에게 붙어 다녔기에, 마치 가인과 같은 병실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가인은 자신을 보채는 하나에게 웃으며 말 했다. " 그래. 뭐하고 놀까? " " 술래잡기!! "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하는 하나. 술래잡기? 그거 어릴 때 이후로는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거 같은데…. 거기다 이 넓은 병원에서 술래 잡기를 하자고?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그럼 누가 술래를 할 건데? " " 오빠가 해야지이! " 당연하다듯한 하나의 대답에 가인은 장난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 너무한다. 오빠는 다리도 안 좋은데.오빠가 술래해야 되는 이유를 말해봐. " " 오빠가 오빠니까! "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냐고…. 가인은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하며 졌다는듯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 좋아! 오빠가 하나를 위해서 특별히 술래가 되어주지! " " 와아∼ 오빠 너무 좋아♥ 쪽! " 가인의 목을 끌어 안고, 그의 볼에 뽀뽀를 하는 하나. 그때 가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하나를 끌어 안으며 소리쳤다. " 잡았다! 자, 이제 하나가 술래야. " " 에에∼ 그런 게 어딨어어! " " 어딨긴. 여기있지. " " 시러!! 하나 술래 시러! " " 싫어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현실은. " " 으앙! 시러어∼!! 오빠 바보!! " 울음을 터뜨릴려는 하나. 가인은 하나에게 장난 치는 것을 그만두며 하나를 서둘러 달랬다. 아아‥ 너무 심술 궂었나. 그만 예전에 신이에게 장난칠 때 처럼 하나에게도 장난을 친 가인이었다. 하나는 울면 달래기 힘든데‥. 그렇 게 가인이 하나를 끌어안고 한참 달래고 있을 때,결국 보다못한 시더가 소리 쳤다. " 으아∼ 병실에서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환자들은 조용히 있어!! " " 으앙!! 의사언니 무서워∼!! " 시더가 소리치는 바람에 놀라 더 울음을 터뜨리는 하나.가인은 그런 하나의 등을 토닥이며 시더를 힐책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가인의 눈초리를 받 자 시더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 나,난 울릴 생각으로 그런 거 아닌데…. " " ......... " " 그러니까 난 의사된 입장으로서 병실에서 너무 소란스럽게 하니까‥ " " ......... " " ......미안. 잘못했어. " 가인의 노려봄에 항복해버리는 시더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싱긋 웃으며 하나에게 말했다. " 하나야. 의사 언니가 하나에게 소리쳐서 미안하대. 그래서 하나를 재밌게 해주고 싶대. " " 에에‥ 진짜아? "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더를 돌아보는 하나.시더는 순간 기가 막혀 가 인에게 소리쳤다. " 내가 언제?!! 그리고 재밌게 해주겠다니? 뭘?!! " " 쉿. 쉿! " 가인은 시더가 다시 언성을 높이자 재빨리 한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며 조용 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으나, 이미 하나는 다시 울어 버리는 중이었다.시더 는 그런 하나를 보며 울그락 불그락해진 얼굴로 가인을 돌아보며 무언으로 소리쳤다. 나,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러자 가인도 무언으로 답했 다. 알아서 할 것! 시더는 한 숨을 푸욱 내쉬며 억지 웃음을 지은채 하나에 게 말했다. " 하,하나야. 의사 언니가 소리질러서 미안해. 그,그러니까 언니가 하나 재 밌게‥ 재,재밌게 해줄테니까… " " 히잉∼ 훌쩍∼ "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더를 돌아보는 하나.그 눈빛을 받자 시더 는 깊은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이렇게 우는 애를 도대체 뭘로 재밌게 하란 말이야? 나 보고 개그라도 하라는 거야, 유가인?!! 으아!! 난 몰라∼!! - 끼익‥ 그때 병실 문을 열며 들어오는 한 여성.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시더를 주시하던 하나가 반색하며 여인에게 소 리쳤다. " 엄마아∼!! " 그러면서 침대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 달려가 안기는 하나. 그 모습에 시더 는 가슴을 쓸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살았다‥. 안해도 되는 건가,개 그…. 가인은 그런 시더를 쓴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다가 하나의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와는 저번 하나를 찾아줄때 만나면서부터 안면을 튼 사이 였었다. 최근들어 하나가 자신의 병실에 매일 와 있었기에 그녀와는 자주 얘 기를 나눌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윤미연 씨? " " 예. 가인 군도 안녕하셨구요. 매번 우리 하나 때문에 폐만 끼치내요. " 살짝 미소지으며 답하는 미연. 그녀의 이름은 윤미연. 올해로 스물 여섯이 되는 하나의 엄마였다. 하나가 여섯 살이니까 적어도 그녀가 스무살 때 하 나를 낳았다는 얘긴데…정말 결혼을 일찍하셨구나 하고 생각하는 가인이었다. 그녀는 가인이 하나를 봐주는 것이 내심 고마웠는듯 그를 살갑게 대하고 있 었다. 가인은 처음에 아이가 있는 유부녀의 이름을 부르는 게 실례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시민 씨 뻘 밖에 안되는 여자를 벌써부터 아주머니 라 고 부르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그냥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다행히 미연도 그것을 맘에 들어했기에 가인은 맘놓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가인은 미연 의 말에 손을 저으며 말했다. " 아뇨. 폐라뇨∼! 저도 하나하고 있어서 얼마나 재밌고 좋은데요. " " 정마알? 에헤‥ " 가인의 말에 쪼르르 다시 침대로 올라와 그를 껴안는 하나였다. 그 모습에 미연이 웃으며 말했다. " 우리 하나가 가인 군이 너무 좋나 보내요. 원래는 낯가림이 심한 앤데. " " 그,그래요? " 가인은 쑥스러운 얼굴로 뒷 머리를 긁적였다.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는데‥. 낯가림이라니….자신을 꼬옥 끌어안고 있는 하나를 잠시 의아한 눈으로 살펴 보는 가인이었다.미연은 가인의 침상 곁에 앉으며 미소지었다. " 그래도 가인 군 덕분에 살았어요.하나 간호를 하느라고 한동안 집에도 못 들어갔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가인 군이 하나를 돌봐주시느라 오랫만에 집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할 수 있었어요. " 어린 하나를 놔두고 병원을 떠나지 못하던 미연은 모처럼 가인 덕에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잠시라도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면 펑펑 울어대던 하나였는데…이상하게도 가인의 옆에만 있으면 고분고분하게 그를 따르는 것 이었다. 미연은 그것이 내심 신기하면서도 기뻤다. 그리고 하나를 귀찮은 기 색 하나 없이 봐주는 가인이 고마웠다. 가인은 하나의 머리에 턱을 얹으며 말했다. " 그러셨어요? 그래도 남편 분이 하나를 봐주셨으면 됐을텐데… 많이 바쁘 신가 봐요,남편 분은? " " 아‥그렇내요‥. " 잠시 어색하게 미소짓는 미연. 그런 그녀의 표정에 가인은 아차하는 심정으 로 고개를 숙였다. " 아‥죄,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는 소리를 해버렸내요. " " 아뇨.아뇨. 맞는 말인데요. 뭘‥ 후훗‥ " 가볍게 웃어넘기는 그녀였다.그때, 가인의 품에 안겨있던 하나가 우울한 목 소리로 말했다. " 아빠‥ 하나 보러 안와‥. " " 뭐? " 무슨 소리야 그게? 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하나를 문병하러 온 하나 아빠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가인이었다. 마주칠 기회가 없 었나 보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문병을 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 린 딸아이가 팔에 깁스까지 하는 상처를 입고 입원한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문병 한번 오지 않는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아빠야?! 그렇게 가인이 생각 하고 있는데 미연이 하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 하나야. 아빠는 잠시 사정이 생겨셔 못 오시는 것 뿐이야. 하나도 알잖니? 아빠가 하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 " 그래두… 그래두… 안 오자나‥. 분명 아빠‥ 하나가 시른 거야. "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하나. 어린애 답지 않게 어두운 표정을 짓는 하 나의 모습에 가인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하나야. 자기 자식을 싫어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어. " " 히잉‥ 그래두‥ " " 하나는 아빠 싫어해? " 가인의 질문에 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머리 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 아냐. 하나 아빠 조아해. " " 그래. 하나가 아빠를 좋아하는데 아빠가 하나를 싫어할리가 있겠니? 당연 히 하나를 좋아하지∼ " " 에에‥정마알? " " 그럼! 분명 하나가 너무 너무 보고 싶은데 바쁜 일이 생겨서 못 오시는걸 꺼야. 그러니까 하나는 울지 말고 아빠를 기다리는 거야. 알았지? 오빠도 같이 기다려줄테니까. " " 에헤, 진짜? 오빠 조아♥ 쪽! " 또 가인의 볼에 뽀뽀를 하는 하나. 그 모습에 미연은 '어머'하며 웃음 지었 고 가인도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시더는 살며시 미 소지었다. ' 역시 가인이는… 자상하네…. '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며칠 전 자신의 품에서 울부짖던 가인의 모 습이 거짓말 처럼 느껴지는 시더였다. 분명 자기 자신도 힘들텐데…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시더는 그런 가인이 왠지 믿음직해 보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런 그녀에게 가인의 말이 들려왔다. " 의사 언니도 기다려준데. 그렇지,시더? " " 예? 으,으응∼!! 그러엄∼! 당연히 기다려줘야지! " 얼떨결에 큰소리로 답하는 시더. 그런 그녀를 큰 두 눈으로 올려다보던 하 나는 생긋 웃으며 시더에게 말했다. " 에헤, 그럼 나 재밌게 해조‥ " " ......뭐? " 순간 안색이 창백해지는 시더. 아,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그걸?!! 으아∼ 그런 건 잊어버려도 되는데…. 시더는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하나에 게 말했다. " 저,저기… 하나야‥. 그거 말고 다른 거 하면… 안될까‥? " " 안돼! " " .........훌쩍. " 결국, 평생 해보지도 않던 개그를 해야만 했던 시더였다. 참고로 그녀가 했 던 개그는 코마네치(*)… 라고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 코마네치: 양 다리를 엉거주춤 벌린채 양 손을 가랑이로 절도 있게 모으며 '코마네치'라고 외치는 알 수 없는 센스의 개그. 꽤 유행이 지 난 구닥다리 개그이다. - 위이이이잉‥ 소형 전기 톱이 돌아가는 소리. 가인이 입원한 7월 3일로부터 2주가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7월 17일 되는 오늘, 그는 깁스를 풀 수 있었다. 가인과 유리, 시민과 시더는 긴장된 얼굴로 톱에 잘려나가는 깁스를 주시하고 있었다.가인 은 귀를 울리는 전동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 …나‥ 움직일 수‥ 있을까? ' 그동안 끊임 없이 재활 훈련을 해왔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인은 쓴 맛을 봐야만 했다. 아무런 감각이 없던 오른 발.한 발 한 발 내딛는 것도 힘들었지만,땅을 내딛는 오른발에서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것이 그 무엇 보다 견딜 수 없었다.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그리 고 지금 그 발을 감싸고 있던 깁스가 풀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 오빠‥. " 떨리는 손으로 가인의 손을 잡는 유리. 가인은 그런 그녀의 불안해하는 기 색을 느끼고선 싱긋 웃어주었다. " 괜찮을 거야. 걱정마. " " …으응. " 자신이 위로해줘도 모자랄 판에 위로를 받으면 어쩌자는 거야,이유리. 하지 만 유리는 마저 자신을 자책하지도 못하고 개봉되는 가인의 깁스를 바라봐야 만 했다. 그 결과에 따라 유리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 아…. " 지켜보던 시민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깁스 밖으로 나오는 가인의 오른발.그 것은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기에 너무도 새하얀 빛을 띄고 있었다. 다행히도 겉으로는 별 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걷는 것은 과연 어떨지…? 시더 는 긴장된 표정으로 가인에게 말했다. " 가인, 한 번 걸어 봐. " " 응? 아,아아… " 가인도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 그리고 천천히 오른 발을 바닥에 내딛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가인 의 오른발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 탁‥ " ......... "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가인. 굳어 있던 가인 의 얼굴 표정이 차츰 차츰 밝아졌다. 가인은 모두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 괘,괜찮아! 아프지 않아! 감각도 느껴져! " " 나이스! " 환호하는 시더. 다행히도 심어 놓은 인공 근육이 잘 연결된 모양이었다. 한 동안 가인이 발에 느낌이 없다고 호소한 것은, 본 근육과 인공 근육이 서로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경련도 일어났던 것이다.하지만 깁스 를 푼 지금, 더 이상 어떠한 문제점도 가인의 발에서는 발생하지 않고 있었 다. 수술은 대 성공이었다! " 다행이에요, 가인 씨. " " 어때?! 걱정하지 말랬잖아,가인∼ " 안도의 한 숨을 내쉬는 시민과 웃음을 터뜨리는 시더.가인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아아, 모두 고마워. 정말! 매일 병문안 와주신 시민 씨도 고맙고, 그동안 신경써준 시더도 정말 고마워! 정말…! " 자신의 오른 다리를 만지며 몇번이고 안도하는 가인. 사,살았다. 십년 감수 했네. 다시는 다리를 못 쓰는 줄 알았다고. 하아아아아…. 가인은 가슴을 쓸 어내리며 숨을 돌렸다. 정작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초조해 했던 것은 가인 자 신이었던 것이다. 그때, 그런 가인의 어깨를 시민이 살짝 두들겼다. 가인이 그녀를 돌아보자 시민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저편에 서있는 유리를 손가락으 로 가리켰다. 유리는 가인에게서 등을 돌린채 아무 말 없이 창 가를 바라보 고만 있었다. 가인은 소리 없이 웃으며 천천히 그런 유리의 뒤로 다가갔다. " ......... " 떨리고 있는 유리의 어깨. 유리는 울고 있었다. 그것은 안도와 기쁨의 눈물 이었다.가인이 다시 걷는 모습을 보게 되자 그만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 버린 그녀였던 것이다. 유리는 연신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행이야,오빠‥ 정 말 다행이야…. 정말‥ 정말‥ " ‥울긴 왜 울어? 바보같이. " 그런 유리를 살며시 뒤에서 안아주는 가인.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하자만 가인의 마음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고마워‥ 다시 걸어줘서‥ 내가 날 미워하지 않게 해줘서…. - 고마워… ' 그래. 거기까지는 다 좋았단 말이지…. ' 유리는 험악하게 굳은 인상으로 중얼거렸다.시민은 가인의 보호자로서 그의 퇴원 수속을 밟기 위해 잠시 병실을 나가있었고, 남아있는 이는 가인과 유리 그리고 시더였다. 아니…. 한 명이 더 있었군. 바로 오빠의 품에 안겨 있는 저 어린 꼬맹이…! " 하나도 오늘 퇴원하는 거야? 잘 됐네∼ " " 잘 돼써∼ " 가인의 말을 흉내내며 그의 목에 매달리는 여섯 살의 여자 아이. 바로 정하 나였던 것이다. 이 어린 꼬맹이의 태도는 아까부터 유리의 모든 신경을 자극 시키고 있었다. ' 나,나도‥ 오빠한테 저렇게 안겨보지는 못했는데…. ' 원색적으로 가인에게 매달리는 하나를 보자 알게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 오 르는 유리. 아,아니야‥. 저런 어린 꼬맹이를 내가 질투한다는 건 말도 안돼. 어린 꼬맹이일 뿐이잖아. 그래. 내 적수가 아니야.질투했다간 나만 우스워져. 참자. 참는 거야,이유리. 신경 쓰지마. " 어? 하나도 깁스 풀었네? 이야∼ 깁스 푸니깐 더 예쁜 걸? " " 지인짜? 예뻐? " " 그럼∼ " " 에헤, 오빠 너무 좋아♥ 쪽-! " - 쿵!!! 가인의 볼에 입을 맞추는 하나.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유리의 가슴으로 거 대한 철추가 내려 앉는 소리가 났다.유리는 눈꼬리를 부르르 떨며 하나를 무 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본 채 중얼거렸다. " …떠,떨어져. " " 응? 유리야? " 갑작스런 유리의 말에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는 가인.그의 품에 안겨 있던 하나도 큰 눈을 깜빡이며 유리를 바라본다.왠지 그런 모습 만으로도 울 화가 치미는 유리. 하지만 가인이 그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유리야. 얘는 정하나라고‥내가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친해진 아이야.하 나야. 여기는 오빠하고 같이 살고 있는 이유리 언니. 서로 인사해야지. " " 안녕하세요오. " 고개를 꾸벅이며 천진난만하게 인사하는 하나.유리도 엉겹결에 고개를 끄덕 였다. 그 덕에 화낼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그녀. 아, 뭔가 말리고 있어. 말리 고 있다고‥! 가인은 그런 둘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부드러운 가인의 미소를 대하자 유리는 한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 안돼, 이유리. 이제 오빠한테 다시는 화내지 않기로 맹세했었잖아? 착한 동생이 되자고 말이야. 그래. 참는 거야. 참아내는 거야,이유리. ' 그리고 저런 꼬맹이를 상대로 화낼 수야 없지. (자기도 만만찮게 어리면서) 훗, 그래. 어른으로서의 태연함을 보여주마. 너 같은 꼬맹이는 절대로 따라 올 수 없는 여유를 보여주겠어! " 오빠아, 저 언니‥ 말 업써. " " 그게‥ 쑥스러워서 그런거야. " " 에헤, 진짜아? 그럼 쑥스럼쟁이 언니야? " 저게…. 유리의 이마로 실핏줄이 살짝 떠올랐다. 하나는 덥지도 않은지 가 인에게 계속 엉겨붙어 있었다. 그것이 못내 눈에 거슬리는 유리였다.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아,진짜 저 코흘리개 꼬맹이가! 유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소리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 덜컥. " 가인 씨, 퇴원 수속 마쳤어요∼ " 병실 문을 열며 들어오는 시민. 또 다시 유리는 화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 다. 아, 뭔가 속에서 부글부글 타오르고 있어. 타오르고 있다고. 유리는 다 시 무거운 한 숨을 내쉬었다. 가인은 하나를 끌어안고 시민에게 말했다. " 그럼 이제 가도 되는 거에요? 2주 만에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구나∼ " " 후훗, 그러내요. " 살며시 웃음 짓는 시민. 그때, 가인의 품에 있던 하나가 고개를 들어 시민 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러다 곧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 시미니 언니? " " 어머? 하나‥? 하나구나!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니? " 시민은 하나를 보며 놀라워했다. 가인은 시민과 하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 시민 씨, 하나하고 아는 사이였어요? " " 그럼요. 우리 옆 집에 사는 진우 씨 딸이잖아요. " " 우리 옆 집요? " 이런 기막힌 우연이! 같은 지역, 같은 동네, 거기다 바로 옆 집의 이웃이었 단 말이야?! 아니 그 동안 거기서 산지가 3개월이 넘었는데 나는 어떻게 그 런 것도 몰랐지? 새삼 자신의 폐쇄적인 생활 태도에 회의감을 느끼는 가인이 었다. 가인은 웃으며 하나에게 말했다. " 그랬구나∼ 바로 이웃 집이었어∼ 이웃 집… "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뒷 말을 흐리는 가인. 자,잠깐‥. 시민 씨 아까 뭐라 고 했었지? 우리 옆 집에 사는 누구 씨 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누,누구 딸이라고 했더라…. 가인은 자신이 잘못들은 것은 아닌가 해서 다시 시민에 게 물어보았다. " …시민 씨, 하,하나가 누구 딸이라고요? " " 가인 씨도 참…. 진우 씨 딸이라고 했잖아요. 정진우 씨. 우리 옆 집에서 사시잖아요. " 뜨아아아아아앗!!!! 비명이 나올 뻔한 입을 한 손으로 막으며 간신히 하나 를 돌아보는 가인. 맙소사. 하나.정하나. 정 씨였다. 정진우!! 진우 씨의 딸 이었단 말이야?!!! 시더와 유리도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그 경박한 남자에게 이런 딸이…. 연구 대상일지도. " " ......역시 그랬군. 저 신경이 거슬리는 태도는 어디선가 본 것이었어. "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두 눈을 깜빡이며 의아해하는 하나. 말도 안돼.이 귀 여운 아이의 어디가 진우 씨를 닮았단 거야? 그,그래. 시민 씨의 농담일거야. 농담 말이지. 하,하하… 거,참…시민 씨도 모처럼 이렇게 쇼킹한 농담을∼ - 벌컥. " 가인 군? 우리 하나 여기 있어요? " 그 순간을 맞춰 때 마침 병실로 들어오는 하나의 엄마, 윤미연. 그녀는 들 어오다가 문 가에 서있던 시민을 보며 놀란 얼굴로 말했다. " 어머? 시민 씨? " " 안녕하셨어요, 하나 어머니? " 서로 인사를 나누는 그녀들. 그것은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었다.가인은 떨떠 름해진 표정으로 품 안에 안겨있는 하나를 내려다 보았다. 저번 운동회 때 타이거 마스크 복면을 쓰며 난동을 부렸던 진우의 모습이 하나와 겹쳐 보이 기 시작했다. 진우의 외침이 환청처럼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 했다. - 크랴아아아앗!! 타이거 슛------!! ' …저,절대로 안 닮았어…. ' 창백해진 안색으로 중얼거리는 가인이었다. 결국, 퇴원을 하고 26구역의 보금 자리로 돌아오게 된 가인들. 하나의 엄마, 윤미연은 하나와 가인의 퇴원 축하를 겸해서 가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저녁식 사에 초대하였다. 처음으로 진우의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된 가인. 뜻 밖에도 진우의 집은 산뜻하고도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진우의 성격 상 이런 정리 정돈과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았는데… 미연 씨의 작품인걸까. 가인은 여 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의외의 연속이로군. " " 응? 어외? " 가인의 손을 잡고 물어보는 하나.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하나의 질문을 얼버무렸다. 하나의 신발을 벗겨주고서 거실로 들어서는 가인. 그곳에는 커 다란 액자에 사진이 하나 붙어 있었다.하나와 미연을 끌어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진우의 가족 사진이었다. 가인과 유리는 창백한 안색으로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 …사실이었어…. " " 합성은 아닌 것 같은데…. " 어떻게 해서든지 진우가 가장이라는 것을 부인해 보이려는 그들이었다.하지 만 집 안에는 진우와 하나가 부녀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들이 도 처에 널려 있었다.그 수 많은 물증들에 결국 의심하기를 포기하고 마는 가인 과 유리. 한 숨까지 쉬며 아쉬워 하는 것이 상당히 실례되는 행동이었다.(남 의 집에서 뭐하고 있는 건지…) 그때, 가인들과 같이 사진을 보던 하나가 침 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빠… 하나 병원에 있을 때‥ 한 번도 안 와써…. " 그 말에 조용히 하나의 손을 잡아주며 사진을 바라보는 가인. 그는 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와 미연 씨를 안고 미소를 띈 진우의 사진. 그것은 가 인이 평상시에 봐왔던 진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가족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의 모습이었다. 사진에 찍힌 진우의 미소는 행복해 보였다. 저렇게 행복해하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기에 가능한 것이 라고 가인은 생각했다. " 하나야. 오빠가 병원에서 뭐랬어? " " …아빠 바빠서 못 온다고… " " 그래. 그리고? " " 그러니까… 울지 말고 기다리기‥. " " 그래. 오빠도 같이 기다려 준댔지? …우리 같이 기다리자. " " 으응. " 가인은 또 울먹이려는 하나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낮게 한숨을 쉬며 가 인은 생각했다.그러고 보니 나도 입원한 이후로는 한동안 진우 씨를 못 만나 봤내. 평상시 같으면 분명 시끌벅적하게 병문안이라도 왔을 사람인데….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냐? 괜시리 걱정이 되는 가인이었다.그 때,부엌 쪽 에서 미연이 나오며 말했다. " 배 많이 고프죠, 가인 씨? 지금 시민 씨하고 요리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 아,아뇨. 천천히 하세요. 신경쓰실 필요 없어요. " " 아,그래…. 가인 씨 입원해 있는 동안 씻지 못하셨을 텐데 목욕이라도 하 시는 건 어때요? 마침 하나도 목욕시켜야 했는데 잘 됐네요∼ 좀 부탁드 릴게요. " " 예? 아, 그러죠. 뭐. "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 하지만 잠자코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유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뭐? 뭘 부탁드린다는 거지? 오빠 보고 목욕하 라는 것 까지는 알아 듣겠는데… 그 뒤에 한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야? 하지 만 유리가 그 뜻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결국, 하 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 그녀. 그리고 불행히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 자,잠깐!! 그럼 오빠하고 저 어린 꼬맹이하고 같이 목욕하라는 소리인 거 야?!! ' 서,설마 그럴리가!! 유리는 떨리는 눈길로 가인을 돌아보았다.가인은 웃으 며 하나의 손을 잡고 거실의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 는 곳에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목욕탕이었다. 유리는 화들짝 놀라 가인의 옷 자락을 붙잡았다. " 오,오빠?! 지금 뭐하는 거야?! " " …뭐하기는? 하나 목욕시킬 겸 나도 목욕할려고 그러는데. " 태연하게 대답하는 가인. 어릴때부터 부모님이 안 계셔서 동생 신이와 자주 목욕을 해왔던 그였다.이제와서 하나와 목욕한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함을 느 낄수는 없었던 것이다.유리는 가인의 의연한 태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그렇지만… 가,같이 목욕한다는 건… " " 아,그래. 유리도 같이 목욕할래? 어차피 식사 준비도 오래 걸릴 것 같은 데 시간도 때울겸 오빠 등이라도 밀어줘. " 그런 가인의 말에 머리 끝까지 피가 치솟는 유리. 한순간 그녀의 머리 속으 로 가인의 넓은 어깨에 비누칠을 해주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안돼!! 현기증이…. 현기증이…!! 유리는 비명같이 소리쳤다. " 오,오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 " 아,유리는 좀 그런가? 하긴 오빠하고 같이 목욕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겠 다. 그럼 우리가 하고 나오면 그 뒤에 하도록 해. " 웃으며 욕탕으로 들어가는 가인. 그런 가인의 손을 잡고 뒤 따라 들어가는 하나. 그들을 바라보며 유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안돼! 저 어린 꼬 맹이하고 오빠를 단 둘이서… 그것도 목욕하게 놔둘수는 없어!! 아까부터 봤 잖아?! 오빠한테 가증스럽게 엉겨붙는 저 꼬맹이의 모습을!! 분명 목욕탕에 서도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야!! ' 하,하지만 그렇다고 따라들어가기도… '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유리. 어,어떡하지? 이대로 저 꼬맹이가 오빠와 목 욕하게 놔둘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그렇다고 내가 같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인과 하나가 들어간 욕탕의 문은 이미 닫히고 있었다. 그 안 에서 가인과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나야, 가만 있어봐. 옷 벗어야지. " " 갸아, 간지러∼ "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호흡이 멎는 유리. 더 이상 고민할 필요 따위는 없었 다. 저대로 둘이서 목욕하게끔 놔둬서는 안돼!! 절대로!! 유리는 벌컥 목욕 탕의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막 하나의 옷을 벗겨주던 가인이 의아한 눈 으로 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 어, 유리야? 왜…? " " ..........나,나도 할거야. " 얼굴을 잔뜩 붉힌채 오기가 서린 얼굴로 말하는 유리. 아, 나 지금 무슨 짓 을 해버린 거지? 무슨 짓을 해버린 거냐고,이유리! - 촤아아아‥ 욕조에 물을 받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퍼졌다. 따뜻한 온수 때문에 옅은 김이 서린 목욕탕. 그 안에서 가인은 하체에 수건을 두른 채 물의 온도를 재 보고 있었다. 음‥. 이 정도면 적당한 것 같은데‥. '끼릭!' 욕조에 물이 흘 러 넘치자 가인은 샤워기를 잠궜다. " 자, 물 다 받았으니까 목욕하자. " " 와아∼ 목욕! 목욕∼! " 신이 나서 욕탕에 뛰어들려는 하나.하지만 가인은 그런 하나의 행동을 제지 시키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욕탕에 들어가기 전에는 비누칠 부터 해야지. " " 네에∼ " 하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인은 수건에 비누 거품을 묻혀 하나의 전신을 닦아주었다. 하나는 간지러운듯 몸을 비틀며 웃음을 터뜨렸다. " 갸아∼ 간지러! " " 가만있어. 넘어지겠다. " 비누칠을 다 한후 하나에게 물을 뿌려주는 가인. 따뜻한 온수가 몸에 닿자 하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인은 그런 하나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녀 를 들어서 욕탕에 넣어주었다. 하나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기분이 좋아 졌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가인은 그런 하나를 뒤로 하며 비누칠을 할 다음 타자를 불렀다. " 유리야, 이리 와. 비누칠 해야지. " " .........으응. " 유리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주춤 주춤 가인에게로 걸어왔다. 그녀는 타올 을 몸에 두른채 연신 쭈삣거리고 있었다. 오,오빠와 목욕…. 가인의 벗은 상 체를 보자 귀까지 달아오르는 유리였다. 심장이 얼마나 방망이 질을 치는지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지,진정하자. 이유리. 마음을 가라 앉히는 거야…. ' ......이런 상황에서 가라 앉으면 그게 마음이냐?!! ' 속으로 버럭 자신에게 소리치는 유리. 그녀는 의식적으로 가인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의 앞에 섰다. 가인은 그렇게 늦장을 부리는 유리의 모습 에 의아해 하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 펄럭…. " .........?!?!?! " 밑으로 흘러내리는 타올.바로 유리의 알 몸을 감싸던 타올이었던 것이다.경 악의 눈빛으로 가인을 올려다보는 유리. 오,오빠?! 이게 무슨 짓…!! 하지만 가인은 여전히 태연했다. " 뒤로 돌아. 비누칠 해줄게. " " .........으,으으응. " 유리는 거의 신음 수준으로 대답을 하며 몸을 돌렸다. 손을 가슴에 대어 보 았다. 두근! 두근! 쿵! 쿵! 심장이 뛰는 건지 폭탄이 터지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그것은 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리는 알몸이라서 몸이 서늘할 텐데도 사우나에 있는 것 처럼 전신으로 식은 땀을 흘렸다. 꿀꺽. 유난히도 유리의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 ......핫…! " 등 뒤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에 몸을 떠는 유리. 가인이 그녀의 등을 공 략(?)하기 시작한 것이다.비누 거품 위로 느껴지는 가인의 손길에 유리의 몸 은 뜨거워지다 못해 불이 나기 시작했다. ' 쓰,쓰러질 거 같아…. ' 온 몸이 극도로 예민해진 유리의 몸은 가인의 손길 하나 하나에 반응을 했 다.그 반응에서 오는 자극이라는 게 얼마나 심한 것인지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안돼! 오빠, 거기는! 꺅! 그,그런 곳 까지! 머,멈춰 줘! 거 기는 정말 안된단 말이야! 아,아아앗! 아,안되는데… ' 나‥난 몰라∼! ' 울쌍이 되어 중얼거리는 유리. 하지만 가인은 그런 그녀의 속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정말 철저하게 비누칠을 해주었다. " 자, 뒤는 다 됐고. 이제 앞으로 돌아. " " ......그,그건‥. " " ......? 유리야? 왜 그래? 아까부터? " 유리가 주춤 거리며 움직일 생각을 안하자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 가인.유 리는 그런 그의 태도에 거짓말 안 보태고 미칠 지경이었다.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오빠는?! 아무리 내가 어리다지만 이,이건 너무… " 어? 혹시 감기라도 걸린 거야?! 얼굴이 빨개! " 유리의 얼굴이 홍시 처럼 붉어진 것에 놀라서 소리치는 가인.그,그게 아냐!! 오빠… 그게 아니구∼!! 유리는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 가,감기 같은 거 아냐‥. " " 뭘! 열이 있는데! " " 아니라니까… 앗! " 말을 하다가 흠칫 놀라는 유리. 가인이 자신의 이마를 유리의 이마에 대어 왔기 때문이다. 유리는 한순간 돌부처 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움직일 수 도 없었다. 가인의 얼굴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그의 숨결이 유리의 코 끝 을 간지럽히듯 자극하고 있었다. 유리는 순간 현기증을 느끼며 코 끝이 뜨거 워지는 것을 느꼈다. " 아…? " 뜨끈한 한 줄기 액체가 유리의 코를 타고 밑으로 흘러 내렸다. 아? 뭐지,이 거?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코 밑을 만져 보는 유리.그녀의 손 끝에는 빨간 액체가 묻어있었다. 어, 이건… ' 코,코피이이이이∼?!!! '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그녀. 마,말도 안돼! 왜 이런 게 갑자기 흘러 나오는 거지?! 자,자극이 너무 심했던 건가?! 가인과의 지금 상황을 견디다 못해 결 국에는 코피까지 흘려버린 유리였다.그런 유리를 보며 가인이 놀라 소리쳤다. " 유,유리야?!! 아니 갑자기 왠 코피야?! 진짜 어디 아픈 거야?!! " " 아,아니야! 그,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해서! " 더 이상 붉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계까지 얼굴이 달아오른 유리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뒤로 몸을 돌렸다. 마,맙소사.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 지? 그것도 다름 아닌 오빠 앞에서? 변질자도 아닌데 남자 알몸을 보고 코피 를 흘리다니! 나 어떻게 된 거 아냐?! 깊은 자괴감에 빠져드는 유리였다. 망 신이다…망신… 이건 대 망신이라고…!! " 유리야, 휴지로 라도 막아야지. " " 괘,괜찮아. 이런 거…. 그냥 풀어버리면 돼…. " 대충 물로 코피를 풀어버리며 유리는 욕탕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코피는 이내 멎어버렸지만 이미 유리는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뒤였 다. 하아아아아…. 난 몰라…. 나… 이렇게 밝히는 애였다니….(…) 유리는 코 끝까지 물에 집어 넣고 중얼거렸다. - 촤악… 그때, 그런 욕탕 안으로 들어오는 가인. 유리와 하나의 사이로 가인이 들어 온 것이다.욕조는 충분히 넓었기에 세 사람이 들어간다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문제가 많아도 한참 많 은 것이다. 자신의 뒤로 가인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몸으로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힐끔 가인을 돌아보는 유리.가인 은 최근 훈련의 성과 때문인지 단단한 몸을 하고 있었다. 하얀 피부 사이로 우락부락하지 않은 강인한 몸의 굴곡이 돋보였다. 그리고 유리의 몸에 닿는 가인의 몸은 생각보다 탄력있고 부드러웠다. 유리는 뒤에서 느껴지는 가인의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 유리야, 뜨거운 물에 들어왔는데도 추워? " 걱정스레 들려오는 가인의 목소리. 유리는 억지 웃음을 지은채 가인을 돌아 보며 말했다. " 아,아니…. 전혀. " 가인은 물기가 젖은 머리를 늘어뜨리며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가인 의 모습이 묘하게 섹시하게 보이는 유리였다. 아,안돼. 또 현기증이 날려고 하잖아.마음을 비우자, 이유리. 무념무상. 넌 할 수 있어. " 아…. " 하지만 무념무상이고 뭐고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유리였다.가인이 뒤에서 부터 자신의 몸을 꼬옥 끌어 안은 것이다. 오,오빠?! 가, 갑자기 왜!! 유리 의 얼굴로는 피가 치솟아 올랐고 귓가로는 따뜻한 가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 자, 이렇게 하니까 안 춥지? " " 아,으으응…. " 자신도 모르게 나른해진 음성으로 답하는 유리.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 슴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유리는 가인의 가슴에 등을 기대 어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가인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탕에 들어오기 전에 한 비누칠 냄새인가? 어쨋든, 그 알싸한 향기가 그녀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고 있었다. ' 오빠의 가슴......넓어…. ' 그것은 모든 것을 감싸안을듯이 유리의 몸을 포용하고 있었다. 유리는 살며 시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온 몸이 편안해지는 게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 부글 부글 부글… 하지만 점차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유리.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몸 을 맡겨버린 것이다. 유리의 머리가 물 속으로 가라 앉은 채 그 위로 거품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유리의 잠수에 가인이 비명을 질렀다. " 유,유리야?!! " 그러나 유리는 가인의 부름에 응답을 하지 않고 더더욱 물 아래로 가라 앉 고만 있었다.(…) " 시민 씨, 유리는 어때요? " " 단순히 뜨거운 탕 안에 오래 있어서 기절한 것 뿐이에요. 너무 걱정 말아 요,가인 씨. " 쓴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시민. 가인들의 앞에는 타월로 몸을 가린채 혼수 상태에 빠진 유리가 쇼파에 누워있었다. 그녀가 탕 속으로 잠기자 놀란 가인 이 재빨리 유리를 꺼내 밖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시민의 대답에 가인은 한숨 을 쉬며 말했다. " 다,다행이다….유리도 참. 뜨거우면 나가도 되는데 무리하게 들어가 있었 다니…. " " 그보다 가인 씨…. 옷이라도 입으시는게… " 시민은 살짝 고개를 돌리며 쑥스럽게 말했다.가인은 너무 급하게 유리를 데 리고 나오느라 타월로 하체만 가린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 시민의 지적에 가 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시민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깨닫고서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욕탕으로 뛰어갔다. " 죄,죄송해요…! " 으아…!! 이게 무슨 쪽 팔리는 짓이람!! 그것도 하필이면 시민 씨 앞에서!! 나가 죽어버렷,유가인!!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욕탕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목욕탕에서 하나가 발가벗은 모습으로 나오며 가인의 다리를 끌어안았 다. " 오빠아∼ 하나 혼자 목욕 하기 시러∼ " " 아‥ 미안,하나야. 우리 다시 목욕하자. " 가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하나를 안아 올렸다. 아아,그래. 우선 목욕이나 마저 끝내고 보자. 목욕 한 번 하는데 뭔 일이 이렇게 자꾸 터지는 거야? 정 신 사납게 시리. 가인은 하나를 데리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그때,목 욕탕의 옆에 있던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 여어∼!! 사랑스런 우리 하나야∼ 이 아빠가 왔단다∼!! 그 동안 아빠 보 고 싶었지? " 그렇게 외치며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이 집의 가장, 정진우. 가인의 품에 안겨 있던 하나가 진우를 보며 외쳤다. " 아빠! " " 어이구, 우리 딸 거기 있었구만∼!! " 웃으며 하나를 돌아보는 진우. 하지만 그는 볼 수 있었다. 하나를 안고 있 는 가인의 모습을. 그것도 그는 타월로 하체만 가리고 있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알몸으로 그에게 안겨있는 자신의 하나뿐이자 사랑스러운 외동딸 하 나의 모습까지도! " ......아…. " 그제서야 가인은 자신의 처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하나는 진우 씨의 딸이고 그런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안겨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는 가인과 하나, 둘 다 알몸이라는 것이다. 뭐, 알몸이래봐야 무슨 일이 있었겠냐만은 아버지 의 시각으로 이 사태를 조명하자면 없는 일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 이었다. 가인은 창백해지는 얼굴로 하나와 진우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자,잠깐…! 진우 씨, 혹시나 행여나 오해하실까봐 그러는 건데… 우,우 선 진정하시고 제 설명부터 들으시겠어요…? " 그런 가인의 물음에게 돌아온 것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가인. 아, 이거 아무래도 꼬여도 지독하게 꼬인 상황 같지? 그리고 그런 가인에게로 진우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죽여버린다, 네 놈…. " 이 순간을 기점으로 앞으로 이 날을 '유가인 최후의 날'이라고 명명 짓자. " 야아아아∼ 미안했어,소년. 하하핫‥ 난 그것도 모르고 말이야∼ " 진우는 자신을 노려보는 가인에게 손을 저으며 웃어보였다.가인은 진우의 헤 드락에 걸려 거의 생사의 고비까지 갈 뻔했으나 필사적으로 그간의 사정을 설 명해 그의 손길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가인은 진우에게 당한 헤드락으로 빨 갛게 부어오른 목을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 …지나간 다음에 하는 사과는 누가 못하겠어요? " " 에이∼ 여전히 쫀쫀하구나, 소년은. " " 누가 쫀쫀하다는 거에요,누가?!! "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가인. 하지만 그때까지 실실거리기만 하던 진우가 갑자 기 가인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번쩍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겠지? " " 아까부터 계속 그 말만 하는데… 도대체 뭘 바라는 거에요?! " 가인은 울그락 불그락 해진 얼굴로 소리쳤다.정말, 이 사람 머리 속에는 뭐 가 들어있는 거야,도대체 뭐가!! 진우는 그렇게 화내는 가인을 보면서도 여 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못한채 말했다. " 그러니까 평소 행실이 중요한 거잖아. 다 소년의 업보라고. 업보. " " …그,그런…! " 자괴감에 빠져드는 가인. 아, 나 평상시 행실이 어땠기에 이런 대접을 받아 야 하는 거지?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저 진우 씨에게 이런 소리를 듣게 되다니….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인이었다. 그때, 가인의 무릎에 앉아 있던 하나가 진우에게 소리쳤다. " 아빠 바보! 오빠한테 소리지르지 마! " - 쿠쿵!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진우. 자신의 금지옥엽인 딸 하나가 두 눈을 부릅 뜨 며 자신에게 소리치자 진우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그 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 하,하나야‥ 어,어째서! 지금 아빠보다 저 녀석 편을 드는 거냐‥!! " " 아빠는 하나가 아플 때 한 번도 안 왔어! 오빠는 계속 옆에 있어줬단 말 이야!! 아빠보다 오빠가 훠얼∼∼∼씬 좋아! " - 쿠쿵! 다시 가슴이 내려앉는 진우. 아빠보다 오빠가 훠얼씬 좋아.아빠보다 오빠가 훠얼씬 좋아.훠얼씬 좋아. 훠얼씬 좋아. 좋아. 좋아. 좋아‥. 하나가 한 발 언의 여파가 가시지 않고 진우의 귀에서 끊임 없이 울려퍼졌다. 진우는 두눈 을 번쩍이며 가인에게로 달려들었다. " 유우가아이인!! 네 녀석이!! 네 녀석이 결국에는 내 딸에게 까지 그 마수 를 뻗쳐버린 거냐아아앗!! " " 으앗!! 내가 뭘 어쨌다고‥!! " 우득.우득. 진우의 헤드락에 끼인 가인의 목에서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로 들을 수 없는 진귀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질투에 눈이 먼 진우의 파상 공 세였다.어찌나 세게 조르는지 가인은 두 눈이 돌아간채 진우의 팔 안에서 허 우적 거렸다. 그때, 그런 진우의 몸을 하나가 그 작은 손으로 두드리며 울음 을 터뜨렸다. " 으앙∼ 그러지마!! 오빠 아파한단 말야!! 아빠 바보!! 정말 싫어!! " " 허,허어어어엇‥!! " - 쿠쿵! 세번째로 가슴이 내려앉는 진우. 이번 것은 치명타였는듯 진우는 울쌍이 된 얼굴로 하나에게 울부 짖었다. " 하,하나야아아아아∼∼!! " 내 딸이 나보고 바보래! 날 싫어한대!! 딸에게 버림받은 아버지 만큼 비참 한 것은 없는 법이다. 역시 딸 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어! 결국에는 왠 산도둑 같은 놈들한테 콩깍지 씌여서 이렇게 부모를 찬 밥 취급하잖아! 흑흑 거리며 울먹이는 진우였다.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그런 진우를 바라보았 다.저,저거… 진짜로 우는 거잖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야,진우 씨 …. 그때, 부엌 쪽에서 나온 미연이 쓴 웃음을 지으며 진우에게 소리쳤다. " 정말 당신도 참! 완전 애라니깐∼ 그게 뭐가 울 일이라고 울어요?! 그리고 오랫만에 집에 왔놓고서는 당신 눈에는 하나 밖에 안 보이죠?! " " 하,하지만 하나가‥하나가∼!!! " " 당신 잘못이라고요. 하나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느데도 아빠란 사람은 코 빼기도 보이질 않았으니 하나가 화낼 만도 하지! " " 그런∼∼∼∼!! " 억울하다는듯이 눈물 섞인 눈으로 좌중에게 호소하는 진우.하지만 미연은 그 런 진우를 무시하며 가인에게 말했다. " 이런 사람 상대하지 말아요,가인 씨. 어떤 때는 내가 애하고 결혼한 것 같 다는 착각까지 든다니깐요∼ 이건 정말이지 애를 두 명 키우는 거나 마찬 가지라니까∼ " " …하,하하‥.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라는 것은 눈꼽만 큼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원…. 무엇보다도 가족에게서 조차 외면 받는 것이 치명적이로군. 가인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미연이 그의 품에 안겨있 는 하나에게 물었다. " 하나야, 하나는 오빠가 정말 좋니? " " 응, 정말 좋아!! " " 얼만큼? " " 하늘만큼 땅만크음! " 서슴 없이 대답하는 하나의 말에 가인은 왠지 쑥스러워져 얼굴을 붉혔다.꾸 밈 없는 하나의 순수함에 감격스러워지기 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 가인을 바 라보며 미연은 미소를 띈채 말했다. " 그렇다는 데요, 사위? " " ......예‥? " 순간, 미연이 자신을 칭한 호칭을 깨닫지 못하고 되묻는 가인. 사위? 사위 라 함은 딸의 남편을 칭하는 말. 같은 말로는 여서(女絳). 그러니까 지금 미 연 씨가 한 말은 나를 자신의 딸의 남편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미연 씨의 딸은 하나. 결론을 내리자면,나를 하나의 남편이라고 부른 것이 되는 셈이군. " 예에에에에엣?!! " 미연의 말을 깨닫자 마자 가인은 입을 딱 벌리며 소리쳤다. 아니, 미연 씨! 지금 그게 무슨 소리‥! 절 보고 사위라니∼!! 하지만 가인은 자신에게 살짝 윙크하는 미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 자,장난이신가? 그,그래! 장난 인게 당연하잖아, 유가인!! 하지만 이런 장난을 왜‥! " 우우우우우‥. " 가인은 미연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들의 뒤에서 두 눈을 부릅 뜬 채 이를 가는 진우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호오라∼! 그래! 그런 것이었군! 가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내심 겉으로는 진지한 표정을 유지 한채 하나를 꼬옥 끌어안으며 미연에게 말했다. " 장모님, 하나의 모든 것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 록 하나 만을 사랑하겠습니다. " " 어머, 믿음직해라∼ " 싱긋 웃으며 진우의 가슴에 염장을 지르는 미연.진우는 얼마나 스팀을 받았 는지 그의 머리 위로는 새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가인은 그런 진 우의 반응에 고소를 금치 못하면서 하나에게 말했다. " 하나야, 하나는 오빠 좋아하지? " " 으응! " " 그럼, 우리 하나 뽀뽀∼ " " 쪽-! " 가인에게 뽀뽀를 하는 하나. 하지만 이번에 하나가 뽀뽀한 부위는 평상시와 는 다르게 가인의 입술이었다.그 광경을 도끼눈을 뜬 채 지켜보던 진우는 순 간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우는 괴성을 질렀다. " 유가인!! 용서 못한다!! 감히 하나의 첫 키스를!!! 내 딸의 소중한 첫 키 스를!! " - 쾅! 그런 진우의 머리를 쥐어박는 주먹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미연이었다.그런 그녀의 행동에 진우는 울쌍을 지으며 소리쳤다. " 안돼! 난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 우리 하나를 저런 경파한 녀석에게는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여보∼!! " " 그 경파가 당신의 입에서 나오니깐 설득력을 잃어 버리내요. 애도 아니고 이제 그만 울어요! 계속 소리지르니까 하나도 싫어하잖아요! " " 우우우우우‥ " 결국 하나의 눈치를 살피며 눈물을 삼키는 진우였다.이 정도면 팔불출 소리 도 무색할 지경인데….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미연에 의해서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자 그녀는 진우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정말 그 동안 왜 안 오셨던 거에요? " " 쳇… 뭐, 안 오니깐 다들 맘대로 하고 좋았겠구만. 내 허락도 없이 사위 도 들이고 말이야‥. " 여전히 삐졌는듯 투덜거리며 비아냥거리는 진우.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연 이 살며시 미소지은채 조용히 말했다. " 걱정‥ 했어요…. 하나하고 나…. " " .........? " 미연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읽은 것일까.진우는 장난끼 서린 태도를 버리 며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연은 가인의 품에서 하나를 건내 받아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 하나가 교통 사고를 당해서 입원했는데… 당신에게서는 연락도 안되고…. 밤마다 하나가 아파하면서 아빠를 찾는게 얼마나 가여웠는 줄 알아요? " " …내,내가 긴급 연락망이라고 준 번호로 연락하지 그랬어…? " " 당신에게 방해될까봐서… 못했어요. 당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 는지는 저도 잘 알고 있다고요‥. " 미연은 진우가 피스메이커의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미연은 살며시 어깨를 떨며 하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 불안했어요…. 행여나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당신이 심 하게 다쳐서 나와 하나를 부르며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이지… 너무나 불안해서… 너무 불안해서… 이대로 나와 하나만 남는 것이 아닐 까 두려워져서… " " ......미안. "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미연과 하나를 끌어안는 진우. 하나는 미연이 흐느낄 려고 하자 영문을 모른채 울쌍을 지었다. " 엄마아‥ 울어? " " 아‥아냐,하나야. 아빠도 왔는데 엄마가 울긴 왜 우니? " 진우는 그런 미연과 하나를 바라보며 그들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 다. 지금 내 품에 안겨있는 이들이 내 삶의 전부다. 내가 사는 이유인 것이 다.하지만 정작 그들이 옆에도 있어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라니‥. 진우는 작지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동안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 가장이 되어서 당신과 하나에게 걱정만 끼치고 연락도 못해서 정말‥ 미안해….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줘…. "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 나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과 하나를 사랑한다는 걸‥. 언제나 우리 가족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렇기에… " 그렇기에… " 나는 싸울 수 있다는 걸. " " …그래요‥. " 살며시 웃으며 진우를 끌어안는 미연.가인은 그런 진우의 가족 모습에서 그 리운 자신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 가인아, 잊지말거라. 언제나 우리 가족은 함께라는 걸. 자신의 머리를 그 큰 손으로 쓰다듬어주시며 듬직하게 말씀해주시던 아버지. 가인은 옆에 있는 신이의 손을 꼬옥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응. 언제 어 디서나‥ 행여 떨어져 있더라도‥ 우리 가족은 함께‥ 같이 있는 거야‥. - 같이 있어…. 그런 가인을 내려다보며 대견스러운 미소를 짓는 아버지와 어머니. 신이는 영문도 모른채 가인을 올려다 보며 미소짓는다. 환한 신이의 웃음. 하지만… 이제 다시는 그 웃음을 볼 수 없다…. 가인은 눈시울이 괜히 붉어져 진우의 가족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 …뭐가 함께라는 거야…. 뭐가…. ' 자신이 과거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작게 조소하는 가인. 자조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려 본다. 그래봤자 죽어버리면 아무 소용 없는 거라고…. 죽어버리면 함께 할 수 없는 거란 말이야…. 곁에 없으면… 내 곁에 없다면…. " 자자∼ 하나야, 그 동안 아빠가 우리 하나 보러 못 와서 미안해. 그런 의 미에서 이번 일요일 날 하나가 좋아하는 유원지에 같이 가자! 응? " " 어머, 정말요? 하나는 좋겠네∼ " 진우와 미연은 활짝 웃으며 하나에게 말했다.가인은 맞은편 쇼파에 앉아 그 런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가인의 눈빛에는 부 러움과 그리움‥ 그리고 작은 질투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진우를 보 며 되물었다. " 유원지‥? " " 그래! 유원지∼! " " …아빠하고 같이? " " 그래! 아빠하고 같이∼! " 씨익 웃음짓는 진우. 그래! 그동안 가족들과 헤어진 공백을 이 유원지 행으 로 한 번에 만회 해버리는 거닷!! 진우는 하나가 얼마나 유원지를 좋아하는 지 알고 있었기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런 진우를 향해 하나가 살 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 ......그래놓고서 이번에도 아빠 약속 안 지키는 거 아냐? " - 쿠쿵!! 네번째로 가슴이 내려 앉는 진우였다.가인은 한 숨을 쉬며 진우에게 물었다. " 어떻게 하면 자기 딸에게 이렇게 까지 신용을 잃어버린 아빠가 될 수 있 는 거죠? " " …시끄러워‥. " 진우는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침울히 중얼거렸다. 여전히 가장으로서의 권 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밤. 또 다시 밤이 찾아왔다.어두운 밤 하늘에는 옅은 달빛이 지상으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무수한 도심의 불빛들이 내려다 보이는 이 곳은 32구역에 위 치한 50층 짜리 고층 빌딩. 그 50층의 옥상에는 한 은빛 털을 번쩍이는 거대 한 늑대 인간이 서 있었다.3m에 달하는 육중한 덩치에 잔인하게 일그러진 얼 굴. 그리고 어둠을 밝히는 녹색의 눈동자는 광기가 서린 달빛을 잔뜩 머금고 번뜩이고 있었다. " …크르르르르‥ 늦으셨군요. " 이를 갈며 자신의 뒤편을 향해 중얼거리는 은빛털의 늑대인간.그리고 그 늑 대인간의 말을 받아줄 상대가 어둠의 하늘에서 옥상으로 날아 내려왔다.활짝 젖혀져 퍼득이는 피막의 검은 날개. 그리고 그 사이를 휘날리는 에메랄드 빛 의 머리카락. 바로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밤의 여왕 '리리스'였다. 그녀는 녹색 눈동자를 늑대인간에게 향하며 오만하게 말했다. " 너를 되살린지 벌써 2주가 흘러간다. 계약 조건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 " 크크큭‥그걸 어떻게 잊겠습니까?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도 잊지 않고 기다려온 나요. 반드시 이행할테니 걱정마시지요. " " 흐응‥ 뭐,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 리리스는 눈을 흘기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달은 아직 가득차 있지 않았다. 둥글지만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는 달. 그것을 바라보며 리리스는 중얼거렸다. " 만월까지는 앞으로 2일이겠군. " " …그때가 D-데이지. 만월로 세상이 가득찼을 때 나는 힘으로 충만해진다! 그리고 그때가 피스 그린의 최후가 되는 거다!! 크크크큭‥크캇캇캇캇캇!! " 그렇게 미친듯이 광소를 터뜨리는 웨어울프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는 리리 스. 그녀는 경고하듯 늑대인간에게 말했다. " 명심해라,라트. 피스 그린에게 신경을 쓰는 거야 개인적인 복수일테니 간 섭하지는 않겠다만… 그 보다 우선해야 되는 일이 있다는 걸 명심해. " " 걱정마십시오, 크큭… 푸른 오라 능력을 가진 피스 메이커의 애송이를 적 당히 건드려 달라고 했던가? 크크큭…적당히‥ 적당히라…. 하지만 내 사 전에 적당히라는 건 없어서 말이야‥ 잘못하다간 또 죽여버릴텐데… 크큭 … 인간이라는 건 너무도 연약해서 말이지. " " 그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죽이든 살리든 네 맘대로 해라. " " 크하하하하핫!! 그거 맘에 드는군!! " 포효하는 웨어울프,라트.달빛을 받은 그의 은색 털이 곤두서며 빛을 내뿜었 다. 라트는 옥상의 난간에 올라서며 리리스에게 말했다. " 어쨋든, 얘기가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다음에 만날 때는 놈들의 머리를 가지고 찾아 뵙겠습니다!크랴하핫!! " 그러면서 라트는 매섭게 빌딩 아래로 뛰어내렸다. 곧 어두운 밤하늘로 은색 의 원호가 그려지며 매섭게 바람 가르는 소리를 동반한채 라트는 어둠 속으 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 라트를 내려다 보며 인상을 구기는 리리스. 그녀에 게 라트는 불쾌한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천한 잡종 같으니라고…! " " 그 말을 저 잡종 씨가 들으면 슬퍼하겠군요. " 그렇게 리리스의 말에 대답하며 옥상의 어둠 사이로 슬며시 나타나는 검은 양복의 남자. 바로 저번 오페라의 유령 사건 때 모습을 내비췄던 적이 있었 던 시민의 혈육, 한시영이었다.그는 여전히 검은 선글라스를 낀채 입가에 시 니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리리스는 이 갑작스런 불청객의 등장에 한 숨을 쉬며 말했다. " 여기는 왠 일이냐? 난 부른 기억이 없는데…. " "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해두죠.그나저나 저 늑대인간을 저대로 내버려 둬도 좋습니까? 너무 제멋대로인 것 같던데…. " " 뭐,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경향이 있지만…그것 때문에 녀석을 선택한 건 지도 모르지. 이왕 자극을 시킬 거 화끈하게 자극을 시키는 쪽이 좋지 않 겠어? " " 훗…,후후훗… 여전히 재밌으신 분입니다,밤의 여왕님은. " 시영은 키득거리며 도심을 내려다 보았다. 화려한 네온 사인들과 인공 조명 들로 형형 색색 빛나고 있는 도시의 모습. 운치는 있지만 차가움이 스며있는 전경이었다. 그런 도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분명한 건 저 늑대인간은 안된다는 겁니다.괜히 자극은 커녕 혼 란만 가져오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군요. 더구나 무엇보다도 그는 피스 그 린의 적수가 못됩니다. " " 하, 옛 동료의 손을 들어주는 건가? " " …사실을 말한 것 뿐입니다. " 피식 웃어보이며 고개를 젓는 시영. 리리스는 이 남자의 심중을 떠볼려는듯 그를 말 없이 주시하다가, 곧 그것을 포기하며 말했다. " 어쨋든,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그럴 줄 알고 미리 보험을 녀석에게 심어 뒀으니까. " " …보험요? " 시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리리스는 그런 그를 힐끔 보다가 다시 달로 시선을 돌리며 싸늘히 웃었다. " 그래. 그것도 아주 뜨거운 보험을…. " - 딩동‥ 가인이 퇴원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요일 아침. 26구역에 위치한 가인의 집을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재영과 테레이아. 바로 가인 의 같은 반 클래스메이트들이었다. - 철컥‥ " 누구시죠? "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며 나오는 이는 가인과 유리의 보호자 겸 직장 동료 인 한시민.그녀는 막 집안 청소를 하다가 나왔는듯 머리에는 수건을, 몸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것으로도 그녀의 미모를 가리기에는 부 족했는듯 재영은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아,안녕하세요, 시민 씨! 그동안 별 일 없으셨어요?! " " …안녕하셨는지요. " 떠들썩한 재영과는 반대로 다소곳이 인사하는 테레이아. 시민은 그런 둘의 모습에 방긋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 어머, 안녕하세요.재영 씨. 테레이아 양. 좋은 주말이네요. " " 예,옙! 좋은 주말입니다! "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두서 없이 인사하는 재영.테레이아는 그런 재영의 모 습에 가볍게 한 숨을 쉰 후, 시민에게 말했다. " 가인이가 저희한테 얘기도 하지 않고 퇴원하는 바람에 퇴원 축하 파티도 못해줘서, 이렇게 주말에 찾아오게 되었어요. 괜찮죠? " " 어머, 그래요? 그런데 이를 어쩌나…. " 곤란하다는듯이 시민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테레이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시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가인 씨, 지금 집에 없는데…. " " 예엣-------?!! " 서로를 돌아보며 소리치는 재영과 테레이아.테레이아는 굉장히 실망한 얼굴 로 시민에게 물었다. " 가인‥ 어딜 간 거죠? 이렇게 주말 아침부터…. " " 옆집에 사는 이웃 분들하고 같이 메리 고 랜드에 간다고 하던데요. " " …메리 고 랜드? " 그게 뭐냐는듯이 테레이아가 되묻자, 답변을 해준 것은 재영이었다. " 테마 파크 놀이 공원이에요, 민체스터 양. 미국에 디즈니 랜드가 있다면 한국에는 메리 고 랜드가 있다고 할 정도로 그 큰 규모를 자랑하는 청춘 남녀들의 데이트 명소이지요. 아, 최근에는 꽃놀이 이벤트가 한창이라고 하던데…. " " ......쉽게 말해 데이트를 하러 갔다는 거로군. " 재영이 한 말 중 '데이트 명소'라는 말 외에 나머지는 생략해버리는 테레이 아였다. 그녀는 냉정히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시민을 돌아보며 물 었다. " 물론 유리는 따라간 거겠죠? " " ......아,예‥. 그래요,테레이아 양. " 쓴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답하는 시민.그제서야 테레이아는 두 눈을 번 쩍이며 예의 방전 현상을 내뿜었다. 파지지지직!! 그녀의 곁에 있다가 애꿋 이 감전당한 재영. 가인이 자식, 매번 이런 걸 견뎌냈단 말이지! 그 녀석은 탁월한 절전 능력을 가진 것이 틀림 없어! " 재영 씨, 메리 고 랜드는 어디있죠? " " 예? 아, 그런데 그건 왜…. " 떠듬 거리며 재영은 되물으려다가 테레이아의 살벌한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 다. 아, 지금은 말을 아껴야 할 때…. 그런데 민체스터 양, 왜 메리 고 랜드 의 주소를 묻는 거지? 설마 따라 갈 셈인가…? ' 자,잠깐잠깐∼!! 박재영!! 이건 찬스일지도 모른다!! ' 순간 재영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는 섬광 하나. 분명 민체스터 양의 성격 상 십중팔구 그녀는 가인들을 따라 메리 고 랜드에 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길을 안내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따라가게 된다면…!! ' 그렇다면 그것은 나름대로의 민체스터 양과의 두근 두근 데이트가 되는 것일지도!! ' 그렇게 재영은 멋대로 상상을 하며 나이스를 외쳤다. 테레이아는 재영이 혼 자서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싱글거리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재영 씨, 몰라요? 메리 고 랜드? " " 아,아닙니다!! 당연히 알고 말고요!! 그냥 지하철을 타고 8호선으로 가서 12구역에서 내리면 되요! " " 그래요. 흐으음∼ " 고심의 표정을 짓는 테레이아. 재영은 그렇게 고민을 하는 테레이아의 모습 에 쾌재를 불렀다. 좋아. 아무리 그녀가 한국의 문화에 능통하다지만,지리까 지는 그렇지 않을 것! 자아, 민체스터 양. 어서 말하세요! '재영 씨,우리 같 이 메리 고 랜드에 가요.'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테레이아는 입을 열었다. " 알았어요. 고마워요, 재영 씨.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 " ......예? " 순간 벙찐 표정이 되는 재영. 어, 이게 아닌데…. 자,잠깐만요,민체스터 양! 그러나 테레이아는 이미 시민에게 인사를 하며 발 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 시민 씨, 아침부터 실례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 " ‥그래요, 테레이아 양. " 시민은 굳어버린 재영을 보며 쓴 웃음으로 테레이아에게 답했다. 그렇게 테 레이아는 저편의 골목으로 사라져 갔고 재영은 닭 쫓던 개 꼴이 되어 하염없 이 골목길만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런 재영에게 시민이 말했다. " 아, 재영 씨. 혹시 지금부터 시간 되세요? " " ......예? 다,당연하지요!! 인간 박재영! 시간 빼면 시체인 놈입니다!! " 금새 부활하는 재영. 정말 배알도 없는 놈이었다. 음하하하하, 오늘부로 나 를 불사조 박재영이라고 불러줘라! 시민 씨, 차라도 대접해주실 생각이신 건 가?! 좋지! 좋아! 저 시민 씨와의 아침 티 타임이라니!! 이런 뜻하지 않은 행운이이∼!! 그리고 시민은 입을 열었다. " 다행이네요. 지금부터 대청소를 할 생각이었는데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서요. 보시다시피 집이 좀 넓어요? 그런데 정말 시간되시죠? " " ......에…. " 거대한 시민의 집 크기에 압도당해 버린 소년. 박재영,17살. 그의 신조, '미인의 부탁은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도 자신의 신조를 지키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재영 군이었다. " …유리야, 정말 괜찮은 거야? " " 으,으응 " " …정말… 괜찮은 거지? 문제 없는 거지? " " ‥그,그래. 여‥여기 앉으면 되는 거야‥? " " 응‥ 내 옆에‥ 좀 더… 조금만 더 가까이 앉아. " " ‥아,알았어, 오빠‥. " " 좋아‥ 그럼 시작한다‥ " " 으,으응! " 유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가인은 한 숨을 쉬며 유리의 손을 잡 아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둘의 몸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우웅‥ " 으으으…으읏! " -부우우우우웅‥ " 꺄아아아아아아!! " 놀이 동산의 전통적인 놀이기구이자, 아주 아주 대중적이며 모든 이들의 사 랑을 한 몸에 받는 놀이기구! …'바이킹'에 탄 가인과 유리였다.참고로 유리의 옆에 앉아 있는 여섯 살짜 리 여자 아이는 정진우 씨의 딸 정하나라고 한다. " 갸아아아∼ 꺄하하하! " 하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손까지 휘두를 정도로 바이킹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반면,그 옆에 앉아 있는 유리의 안색은 점점 푸른 색으로 변해가고만 있었으 니… ' 내,내려줘‥! 내려줘어어어어∼∼∼!! '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는 처절한 유리의 울부짖음이었다.고소공포증은 아 니었지만, 유독 놀이 기구에 약한 자신이었다.유리 자신이 여덟 살이었을 때, 그녀는 최초로 놀이기구라는 것에 탈 수 있었다.그 당시 탔던 놀이기구는 회 전 목마. 하지만 그 탑승의 결과는 너무도 참담한 것이었다.회전하던 목마의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멋들어지게 낙마했었던 것이다. (회전목마의 원심력으로 가능할까마는…) 그때 이후로 놀이기구라면 치를 떨던 그녀.언제 나 그렇듯이 첫 경험이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법이다. ' 이건 지옥이야! 날 내려줘!! 내려달란 말이야!! 난 죽고 싶지않아! 토할 것 같아…! 내려줘어어어어∼∼∼∼!! ' 가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유리. 평상시라면 그녀 로서는 상당히 기분 좋을 상황이었지만, 불행히도 지금 유리의 오감은 그 기 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오직 느껴지는 것은 엄청난 체감 높이에서 앞 뒤로 끊임없이 진자 운동을 하는 무시무시한 중력의 반란 뿐.만약 가인만 아 니었더라면 절대로 이런 것에 타지는 않았을 자신이었다! " 꺄아아아아악!! " 유리는 생각을 멈춘채 비명을 지르는 데에만 다시 열중하기 시작했다.5분만 참으면 모든 것은 끝날거야…! 끝낼 수 있어! 라는 신념 하나 만이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전초전이었을 뿐이니… " 오,오빠‥ 정말‥ 이,이런 걸 탈거야? " " 그야‥하나도 타고 싶어하고… 놀이 공원에 와서 이걸 타지 않으면 뭔가 허전할 것 같기도 하고…. " " 하,하지만‥ 보기에도‥ 너,너무 위험하고‥ 만,만약! 저러다 떨어지기라 도 한다면…! " " 에이∼ 그러니까 더더욱 스릴 있는 거지! 어느 정도의 위험성이 있어야 더욱 등골이 오싹해지는 거라구. 으음… 그런데 유리야‥ 너 혹시…. " " 왜,왜…? " " 혹시∼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냐? " -쿠쿵! (유리의 심장 내려 앉는 소리) " 무,무슨 소리를…!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 " 아니,그건 어린애니 어른이니를 떠나는 문제인 거 같은데…. 뭐,좋아! 괜 찮다면 어서 타자! " " …하지만. …오,오빠아아아아∼ 자,잡아 당기지마! " 유리는 가인의 팔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놀이 기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들의 위에 세워진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놀이 기구의 명칭이 적혀 있었다. - 롤러 코스터(Roller Coaster). 지옥의 연환 질주! " 싫어어어어어어어∼ " 드래곤 루프 지역에서 절정에 달한 유리의 피 맺힌 절규였다. 이 코스를 끝낸 후에도 유리는 가인의 손아귀에 잡혀 몇 몇 하이 코스들을 두루 섭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코스를 선정하는 이는 다름아닌 가인의 품에 안겨 깔깔거리며 웃는 정하나. 유리는 핏발이 선 눈으로 하나를 노려보 며 이를 갈았다. ' 아,악마야…! 저 꼬맹이는 악마라고!! ' 그러면서 유리가 다음으로 끌려간 곳은 '자이언트 드롭(Giant Drop)'이라고 하는 놀이기구였다. " 헉‥헉‥헉‥헉‥ " 창백한 안색으로 근처의 벤치에 앉아 숨을 몰아 쉬는 유리. 그녀는 제 정신 을 차릴 수 없었다. 바이킹도 제대로 못 타는 주제에 자이언트 드롭을 탄 건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다. 다리가 얼마나 후들거리는지 제대로 서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하나가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 언니, 왜 그래에? " " ......... " 유리는 대답 대신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이를 갈았다. 왜 그러냐고?! 지금 왜 그러냐고 물었단 말이지?! 이 겁이라고는 이세계에 출장시켜 버린 꼬맹아! 도대체 어떤 심장을 지녔길래 저런 것만 골라탈 수 있냔 말이다!! 당장에라 도 하나를 닥달하며 소리치고 싶은 유리였다. 하지만…. ' 관두자….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 언제나 하나를 상대함에 있어서 자신을 어른이라고 강조하는 그녀였다.그래. 난 너 따위하고는 상대도 안 될 만큼의 여유와 관대함을 가졌다고. 너 같은 꼬맹이의 행동에 일일히 발끈하며 화낼 이유가 없단 말이다. 알아듣겠어, 이 핏덩어리야?!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화를 가라 앉히는 유리. 그렇게 유리와 하나가 벤치에 앉아 있자 곧 그들에게로 가인과 미연이 소프트 아이 스크림을 양손에 사들고 다가왔다. " 유리야? 몸은 괜찮아? " " ......으응. " 아이스크림을 유리에게 건내주며 걱정스럽게 묻는 가인. 그런 그의 걱정에 유리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오빠한테 이런 약한 모 습이나 보여주고…. 형편없구나,이유리. 오빠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이런 놀 이기구도 제대로 타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애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정작 가인은 전혀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러게 왜 그렇게 무리했던 거야? 타지 못하겠으면 말을 하지. " ' 그랬다간 오빠와 저 어린 꼬맹이만 탔겠지…. ' 속으로 말을 삼키는 유리. 절대로 그 꼴만은 볼 수 없었던 그녀였다.오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것은 나 밖에 없다고! 그런 이유로 유리는 일부러 가인과 하나의 사이에 줄창 끼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유리는 이런 자신의 유치함을 애써 부인하며 조용히 가인의 말에 답했다. " …놀이기구는 같이 타는 사람이 많을 수록… 재미있는 거잖아‥. " 전혀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만 가인은 그런 유리의 말에 조금 감명 받았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 유리는 착하구나,정말. " " …아,아니‥! 그런… 착하다니…. " 유리는 뒷 말을 흐리며 얼굴을 붉혔다. 아, 좀… 양심이 찔리지만…뭐,어때. 그때 그런 유리의 손을 하나가 잡으며 방긋 웃었다. " 착해에∼ 언니 좋아! " 하나는 유리가 마음에 들었는듯 어린애 특유의 친근함을 표하며 유리를 껴 안았다. 가인과 미연은 그런 유리와 하나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단지, 유리만은 기괴하게 굳은 표정으로 속으로 소리쳤다. ' 난 싫어…! ' 어찌되었든,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 숨을 돌리던 중 미연이 가인 에게 말했다. " 고마워요, 가인 군. 이런 일요일 날,놀러 가고 싶은 데도 많을텐데 같이 유원지에 와주셔서…. " " 아,아뇨. 저도 와보고 싶었는데요∼ 하나가 좋아하는 거 보니까 저도 기 분이 좋내요. " 가인의 말에 미연은 방긋 미소지었다. 그때 그 둘의 말을 듣고 있던 하나가 갑자기 빽 소리쳤다. " 아빠 바보! 거짓말쟁이! 같이 와주기로 해놓고서는 또 거짓말 했어어! " 그런 하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가인과 미연. 미연은 쓴 웃음을 지 으며 하나를 다독였다. " 하나야, 아빠는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못 오신 거지 거짓말하신 게 아 냐. 아빠도 얼마나 하나하고 유원지 오는 걸 기대하셨는데…. " " 몰라!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아빠 따윈 정말 시러!! " 막무가내로 소리만 치는 하나였다.가인은 이렇게 까지 딸에게 미움 받는 진 우에게 가벼운 동정을 표하며 하나를 안아올렸다. " 하나야. 아빠한테는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야. 아빠가 하나를 얼마나 좋아 하는데 그러니? " " 우웅… 그치만…. " " 대신 오늘은 오빠가 같이 놀아줄테니까 아빠 미워하면 안돼. 알았지? " " 응! 에헤, 오빠 너무 좋아! 쪽-! " 가인의 볼에 입을 맞추는 하나.만약 진우가 봤더라면 곡을 쳤을 장면이었다. 뭐, 그렇다고 여기에 곡을 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니었지만…. - 파직! " 아…. " 악력으로 터져나간 아이스크림을 쥔 채 흠칫 놀라는 유리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인들이 다음에 탄 놀이기구는 자이언트 휠(Giant Whe el). 관람차였다.면적 25×35m. 높이 60m. 정원 128인승.소화능력 1280명/hr 의 이 거대한 놀이기구는 공원의 랜드 마크 기능으로써 최고 정점에 오르면 주변의 모든 것이 한눈에 와 닿을 정도로 전망이 좋았고,그 덕에 연인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어 허니문 카라는 애칭까지 가지고 있었다. " 유리야? 괜찮아? " " ......으응. " 가인은 불안한듯 창가를 두리번 거리는 유리에게 물었고, 그녀는 불안한 기 색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와는 대비적으로 창가에 바짝 붙어 정신 없이 밖을 구경하는 하나. 어찌나 창가에 붙는지 그녀가 떨어질까봐 하 나의 허리를 미연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유리는 그런 하나를 힐끔 보며 중얼 거렸다. 저 꼬맹이는 겁도 없나…! - 끼익‥끼익‥ 관람차는 회전하면서 기이한 쇠울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녹이 슬어서 소 리가 나는 것 같은 그것은 유리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아, 이거 진짜 안 전한 건가? 진짜 안전한 거 맞아? 안전 검사를 꾸준히 하고 있는 거 맞냔 말 이야? 창 밖으로는 붉은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메리 고 랜드의 전경이 보이 고 있었다. 그 높이가 얼마나 아찔하게 보였는지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 를 부르르 떨었다. " 아‥. " 그때, 그런 유리의 어깨를 살며시 껴안아 주는 손길 하나. 바로 가인이었다. 유리는 이런 갑작스런 그의 포옹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 오,오빠‥? " " 유리야, 오늘 많이 힘들었지? 유원지 좋아하지도 않는데 나 때문에 따라 와서‥. " 부드럽게 웃어주는 가인.그 따뜻한 미소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 혔다. 가인의 품 속이 너무도 포근했기에 미연과 하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 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는 가인에게서 몸을 빼지 못했다. " 아,아니‥ 나도 즐거웠어…. " " 그럼 다행이고. 오빠도 즐거웠어. " 유리는 붉은 노을로 자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가인이 눈치채 지 못한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나,유원지 오길 정말 잘했 어.정말‥. 그때, 미연의 품에 있던 하나가 불쑥 가인에게로 달려와 그를 껴 안으며 외쳤다. " 오빠아∼ 나도 안아줘∼! " " 하하‥ 그래.그래. "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벌려 하나도 끌어 안아주는 가인. 하나는 헤헤 웃으며 가인의 목에 매달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리의 이마로 실핏줄이 다시 그어졌다. ' 이 꼬맹이가∼∼∼∼!! ' " 유리야, 그럼 잠시 하나 좀 보고 있어. 미연 씨와 차 잡으러 갔다 올테니 까. " 어느새 7시를 넘긴 시각. 사방은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메리 고 랜드의 주 차장은 희미한 가로수의 불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가인과 미연은 주 차장의 바깥에 위치하는 도로에서 차를 잡기 위해 걸어갔다. 지하철로 가도 되었지만 이 시간에는 사람들이 너무 붐볐기에 그쪽은 피하고 싶었다. 더구 나 일행에는 하나와 같은 어린 아이가 있었서 인파가 많은 곳은 위험했던 것 이다. 어쨋든, 하나와 단 둘이 주차장에 남게 된 유리. 하나는 유리의 손을 꼬옥 잡은채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가인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리는 한 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 왜… 어째서 이 꼬맹이와 단 둘이 남아 있어야 하는 거지… ' 오늘 하나 때문에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자 머리 속이 엉망 진창이 되는 유 리였다. 물론 유리가 사서 고생을 한 것이었지만,가인에게 내내 매달리며 애 교를 부리는 하나의 태도에 속이 상했던 것이다. 더구나 더 속이 상할 수 밖 에 없었던 것은… " 언니이∼ 나 업어줘어∼ " 유리의 속도 모른채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하나의 행동 때문이었다. 으, 이걸 쥐어박을 수도 없고∼!! 유리는 눈꼬리를 실룩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너와 나의 신장 차이를 눈이 달렸다면 유심히 비교해보도록. 내가 널 업 을 수 있을 거 같아? " " …신장? 비교오? 그게 뭐야? " 두 눈을 말똥 말똥 뜨며 물어오는 하나.그런 하나의 모습에 유리는 더 화가 끓어올랐다. 아, 진짜 이 바보같은게! 콱 무시할 수도 없고!! 유리는 버럭 하나에게 소리를 지르려다가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 아냐.아냐.이 꼬맹이는 겨우 여섯 살일 뿐이잖아.일곱 살이나 더 많이 먹 은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아,이래서 어린애를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 이라니깐. 하아∼ ' 유리는 한숨까지 내쉬며 혀를 찼다. 누가 보면 참으로 웃긴 광경이었겠지만, 주차장에는 유리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은 보이질 않고 있었다. 유리는 피식 웃으며 하나에게 설명해주었다. " 신장은 키를 말하는 거고, 비교는 너와 내 키를 대보라는 거야. 내가 널 업어봐. 네 발은 땅에 질질 끌릴 거고, 그러면 안 업느니만도 못한 꼴이 될거야. 그리고 난 너 업어줄 힘 없어. " " 으으응∼ 언니 말 너무 빨라서 하나도 모르겠저…. " 하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고, 그 바람에 참고 있던 유리의 화가 폭발했다. 유리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빽 소리쳤다. " 아,진짜!! 나 너 업어주기 싫단 소리야!! 알아듣겠어?!! " " 으앙∼ 언니 무서워∼∼∼!! " 유리가 소리치는 바람에 놀라 울음을 터뜨리는 하나. 유리는 그제서야 아차 하는 심정이 되어 쩔쩔매며 하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 우,울지마‥! 울지말라고‥!! " " 그,그치만‥후엥‥ 하나한테‥ 흑‥소리쳤잖아‥우아아아앙∼ " " 미,미안‥! 소,소리친 거 미안하니까‥ 울지마‥. 응?! " 하나는 유리가 달래자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유리는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져 머리를 싸매며 고민했다. 어,어쩌지? 어떻게 해야 울음을 그치는 거야?! 유리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져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이 게 무슨 꼴이냐고, 이유리! 왜 괜히 애를 울려가지고 이 고생을 하는 거야!! 유리는 하나를 어색하게 안아주며 말했다. " 아,그래! 언니가 업어줄게‥ 그러니까 울지마! 응?! " " 흑‥ 진짜아? " 그 순간 거짓말 처럼 눈물을 그치며 눈물이 그렁 그렁한 눈을 들어 유리를 올려다보는 하나.그 모습을 보자 유리는 그녀에게 왠지 말렸다는 생각을 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이 꼬맹이‥ 사실은 이게 목적이었던 거 아냐?!! 울 었던 것도 다 뻥이지?! 하지만 하나의 부탁을 거절했다간 또 그녀가 울어 버 릴까 봐 유리는 쓴 맛을 들이삼키며 하나를 업어올렸다. " 에헤♥ 언니 좋아∼ " " ......... " 유리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으며 웃는 하나의 모습에 이를 갈며 소리 없이 허공에 욕을 했다. 유리 자신도 13살 치고서는 140cm의 작은 키였기에 하나 를 업자, 발이 질질 끌리는 우스운 몰꼴을 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아,진짜 … 이게 뭐하는 짓이람…. 하나를 업은 유리의 입에서는 한 숨 밖에 나오질 않았다. - 탁…. 그때 유리의 뒤에서 느껴지는 발소리. 누군가의 인기척이었다.아,오빠가 돌 아온 건가?! 유리는 하나를 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 며 고개를 돌렸다. " 오빠? 아, 저기 이건… 하나가 하도 떼를 써서…! " 하지만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유리였다.그녀의 뒤에 서 있는 것은 가인과 미 연이 아니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낯선 남자 둘이 유리와 하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물었다. " 누,누구…? " - 크르르릉…! 순간, 몸을 뒤틀며 으르렁 거리는 남자들. 그들은 입고 있던 옷자락을 찢어 발기며 삽시간에 약 2배 가량의 덩치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온 몸에서 돋아 나는 갈색의 털들과 짐승의 그것 같이 흉폭하게 일그러지는 얼굴. 그것들은 늑대의 모습에 인간의 모습을 합한 혐오스러운 존재들이었다. " 꺄아아아아악!! " 유리의 비명이 어두운 주차장의 밤하늘을 타고 올랐다. 그런 밤 하늘에 떠 있던 것은 유독히도 진한 노란빛을 뿌리고 있는 보름달이었다. " 가,가인 군! 찾았어요?! " " 아뇨! 미아 보호소 쪽도 가봤는데 없었어요!! " 저녁 9시가 넘어가는 시각. 미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가인에게 물었고, 가인 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차를 잡아 주차장으로 돌아온 가인들은 유리와 하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근처 화장실에라도 간 건가 하고 생 각했었는데… 벌써 2시간이 지나가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다. 미아 신고 도 했고,메리 고 랜드의 구석 구석을 찾아 다녀보았지만 어디에도 유리들은 없었다. ' 어떻게 된 거야,유리야? ' 가인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손목에 달린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A.I 슈츠를 착용하게 해주며 비상시에는 피스 대원들끼리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무전기. 이 무전기로 실종된 유리와 연락을 취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 리는 아무런 신호도 받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분명 유리에게 는 무슨 일이 생긴 거였다! " 가인 군, 어떻게 해요‥ 어떻게… " 미연은 황망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흐느끼기 시작했고 가인은 식은 땀이 흐르는 손을 훔치며 그런 그녀를 달랬다. " 걱정말아요, 미연 씨. 유리가 같이 있잖아요. 별 문제 없을 거에요…. " " 흑,흑흑… 하나가 교통 사고 당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이런 일까지 …. " 그동안 하나의 병 간호를 혼자 해오느라 지쳐있었던 미연이었다. 이제는 하 나도 퇴원하고 한 숨 돌리나 했었는데, 채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또 문제 가 생긴 것이다. 그녀는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만 같았다. 어디선가 '엄마'라고 외치며 하나가 나타날 것 같았다. 미연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물을 흘렸다. " 하나야….흐흑‥ " " 미연 씨, 울지 마세요!! " 가인은 그런 미연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미연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가 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 하나한테는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에요! 어디선가 그냥 길을 잃어버려서 헤매고 있을 뿐이라구요! 하나… 분명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을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빨리 하나를 찾아 줘야죠! " " 가인 군…. " 미연은 그런 가인을 멍하니 보다가 곧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 녀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미소지었다. " 맞아요.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를 찾지 않으면…. 미안하네요, 가 인 군에게.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칠칠치 못한 모습이나 보이고…. " " 아,아니요. 그런…. 어쨋든 계속 찾아보자구요!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의 표정은 근심으로 가 득차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정말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무엇보 다 유리에게서 연락이 없다는 것이 걱정이었다. 왠만해서는 무전기에 신호가 오는 것을 모를리가 없을텐데…. ' 유리야, 괜찮은 거지? 응? ' 가인은 계속 무전기로 유리에게 신호를 보내며 중얼거렸다.그런데 그때… - 삐‥삑…! 짧지만 확실히 울리는 신호음. 가인은 눈을 번쩍 떴다. 발신자 란에 떠오르 는 알파벳 Peace Pink. 바로 유리에게서 온 신호였다! " 유리야?! 유리니?! " << 오,오빠…? >> " 어디야?! 그 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 가인은 유리의 목소리를 듣자 안도 반, 화남 반으로 소리쳤다. 바보! 이렇 게 잔뜩 걱정이나 시켜놓고! 하지만 유리의 목소리는 상태가 안 좋았다. 수 신 장소가 좋지 않은 건지 무전 속에 들려오는 유리의 목소리에는 연신 잡음 이 섞여 있었고, 말 소리도 분명치 않게 들렸다. 가인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소리쳤다. " 유리야, 지금 어디니? 메리 고 랜드 근처니? " << 몰라‥ 지금‥ 위치 추적 신호를‥ >> " 뭐? " 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잘 안들려, 유리야! 잘 안들린다고!! << 늑대‥ 몬스터… 하나와 나… >> - 치지지지직… 그 말을 끝으로 연결이 끊어져버리는 통신. 가인은 당황하며 무전기에 소리 쳤다. " 유리야?! 유리야!! " " 왜‥ 왜 그러는 거에요,가인 군? " 가인이 손목의 무전기에 대고 소리치는 모습에 놀란 얼굴로 묻는 미연.가인 은 이를 악물며 불안해하는 미연을 돌아보았다. 가인은 방금 전 유리가 무전 속에서 했던 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정확히는 들리지 않았지만 위치 추적신 호를 보내겠다고 했었고, 그리고… " 몬스터…!! " 나지막히 중얼거리는 가인. 몬스터인 건가?! 몬스터가 유리와 하나를 납치 한 걸까? 하지만 왜 그 아이들을 잡아간 거지?! 그리고 어떻게? 유리가 피스 메이커인 것을 알고 납치한 걸까? 아니면…!! 가인은 혼란스러워지는 생각을 멈추고 손목의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유리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는지 위 치 추적의 신호가 표시되고 있었다. 액정에 떠오르는 지도와 신호의 발신지. 그것은 메리 고 랜드의 개발 지역 중 하나인 F구역을 표시하고 있었다.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 가인은 생각했다. 만약 유리들이 몬스터에게 잡혀 있다면 일 분 일 초가 위 험하다. 지원을 기다렸다가는 늦을 게 분명했다! 가인은 미연을 돌아보며 말 했다. " 미연 씨, 미연 씨는 어서 여기서 피하세요. 되도록이면 이 메리 고 랜드 밖으로 피신하시는 게 좋겠어요! " " 예? 가,가인 군… 그게 무슨…! " " 진우 씨 비상 연락망 알죠? 그 분한테 전화하면 안전할 거에요!! 저는 이 대로 유리와 하나를 찾으러 가겠어요! " " 가,가인 군?!! " 그러면서 그대로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가인. 미연은 당황하며 그런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칠 것 같은 불안함이 가슴을 죄어 오고 있었 다. 아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미연은 떨리는 손으로 진 우에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귓가로 들려오는 핸드폰의 신 호음이 너무도 크게 울려오고 있었다. " 여보세요? 진우 씨? 당신 이에요? 저에요,미연! 지금… " - 크르르르르… 유리는 자신들을 내려다 보며 낮게 으르렁 거리는 늑대인간을 두려운 눈으 로 바라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흉흉히 빛나는 한 쌍의 녹색 눈동자. 거기 다 3m는 될 듯한 육중한 덩치가 유리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기는 메리 고 랜드의 개발 구역에 있는 한 건물이었는듯 방 안은 아직 도색도 되 어 있지 않았고,전기도 들어오질 않고 있었다. 천정에서는 물이 새어나와 계 속 똑 똑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으흑… 흑… 언니이… " " ......... " 유리의 몸을 끌어안으며 울고 있는 하나. 하나는 늑대인간들에게 납치된 이 후로부터 계속 울고 있었다.일반인들 조차도 공포로 몸을 떨 상황인데 여섯 살 짜리 여자아이는 오죽했겠는가. 만약 유리도 피스 메이커로써 몬스터를 자주 접하지 않았더라면 공포로 사고가 굳어버렸을 것이다. 유리는 늑대인간 을 경계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며 하나를 토닥여 주었다. " 괜찮아. 울지 마…. 조금만 참으면 구조될 거야. 응? " " 우우흑… " 하나는 애써 울음을 참아낼려고 했지만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런 하나 의 모습에 유리는 인상을 굳히며 하나를 더욱 꼬옥 끌어 안았다. 바보야! 울 지마! 울지 말란 말이야! 나도 무서워…. 나도 무섭다고…. ' 힘내,이유리! 너까지 겁 먹으면 하나가 더 불안해 한단 말이야! 이런 일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잖아! 할 수 있어! 그치, 오빠? 유리는 이 정도 쯤은 견뎌낼 수 있어. ' 유리는 가인을 떠올리며 약해질려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위치 추적 신호를 늑대인간들 몰래 가인에게 보낼 수 있었던 유리였다. 일단, 신호만 가인에게 보내졌다면 가인이 본부에 연락을 했을테고 지원도 데리고 올 수 있을 것이 다. 그리고… ' 오빠가 반드시 와줄거야…. ' 가인이 올 거라는 그 믿음 만은 절대로 흔들림 없이 유리의 불안한 마음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는 신념이었다. 그만큼 유리는 가인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유리는 점점 불안감이 가셔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나저나… ' 유리는 늑대인간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아마도 자신들을 감시하는 역할이었 는듯 미동도 하지 않은채 유리와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는 늑대 인간 의 머리 속에 재핑(zapping)을 넣어 혼란을 일으켜 볼려고도 했지만, 눈 앞 의 늑대 인간은 정상적인 사고 회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아마도 어떤 존재 에게 조종당하고 있는듯 자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이 없는 상대에 게는 유리의 오라 능력도 별 도움이 될 수 없었다. - 철컹… 그때 철문이 열리며 어두운 방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그것은 어둠 속에 서도 빛이 나는 은색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 인간이었다. 녀석은 지금껏 자 신들을 지키고 있던 늑대 인간과는 격이 다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의 심할 것도 없었다. 이 늑대인간이 바로 본체였다! 그리고 녀석은 놀랍게도 입을 벌려 사람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 크크크큭… 오래 기다리게 해버렸군. 꽤나 지루하셨겠어들? " " .........!! " 유리는 눈을 부릅 뜨며 이 은색털의 늑대인간, 라트를 노려보았다.놀라웠다. 그 동안 몬스터를 상대해 오면서 이렇게 까지 유창하게 인간의 말을 하는 몬 스터를 유리는 본 적이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몬스터는 지금까지 유리들 이 상대 해온 몬스터와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리 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우,우리를 어쩔 셈이야?! " " 오오∼ 신기한 걸.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런 상황에서 우릴 보면 겁에 질려 꼴사납기 그지 없게 구는데 말이야∼제법이라고 칭찬이라도 해줄까나? 크 크크큭… " 라트는 유리의 반응이 재미 있다는듯 킥킥 거리다가, 몸을 굽히며 유리들을 그 녹색의 번쩍이는 눈동자로 내려다 보았다. 라트는 으르릉 거리며 비웃음 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그나저나 이를 어쩌지…. 우리는 두 명이나 필요하지 않거든? " " ......그게 무슨…? "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유리. 무슨 소리지? 두명이나 필요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유리는 늑대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공포에 몸이 움츠러 들려는 것을 참아내며 고집스럽게 라트를 노려보았다.라트는 피식 웃 으며 말을 이었다. " 나약해 빠진 인간을 두 명이나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간은 한 명 뿐이거든. 바로 피스 그린의 혈육…!! " " .........!! " 라트의 말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하나 는 지금의 상황에 너무 놀랐는지 울지도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주위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유리는 마른 침을 삼켰다.피스 그린이라 하면 다름 아닌 정진우를 말하는 것이고, 그의 혈육은 바로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정하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놈들이 노리던 것은 하나였었던 건가?! 유리는 떨리는 눈길로 애써 침착히 라트에게 말했다. " 뭣 때문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 " " 크크크큭… 그걸 너에게 말해줄 이유는 없지만… 뭐, 좋아. 그 인간 답지 않은 용기가 가상해서 특별히 가르쳐주도록 하지,인간.굳이 말 하자면 복 수 때문이라고 해야하나? 크큭… 피스 그린은 내게 특별한 인간이거든,크 크크큭…특별한 인간? 그거 말되는군. 카하하하핫!! " 라트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웃긴다는듯 연신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 에 유리의 품에 안겨 있던 하나가 놀라 울음을 터뜨릴려고 했다.유리는 그런 하나를 달래며 조심스럽게 라트에게 물었다. " 혈육이 필요하다고? 그럼 나머지 사람은 어쩔 생각이야…? " " 그야 우리에게 별 필요도 없고 신경 쓸 가치도 없지. …뭐, 그냥 풀어줄 까나? " 라트는 뭔가 유리의 속 마음을 알아챈듯 히죽 웃으며 답했다. 유리는 그 말 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적어도 하나를 저런 놈들의 수중에 맡길 수는 없었기 에 결심을 굳혔다. 유리는 하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온통 울음 범벅이 된 채 겁먹은 하나의 얼굴. 그 떨리는 눈동자가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는 낮게 한숨을 내쉰 후, 라트에게 말했다. " 내가 피스 그린의 혈육이야. " " 호오‥? " 의외라는듯 어깨를 으쓱이는 라트. 왠지 그런 라트의 태도에 초조해진 유리 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 내가 바로 네가 찾던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이 아이는 풀어줘. " " …풋, 크크큭‥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핫!! "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건지 라트는 포복 절도를 하기 시작했다. 유리는 그 웃 음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왜, 왜 웃는 거야?!! " " 크크, 크힛‥ 아니 아니, 정말 가관이라서….카하하하핫!! 정말 가관이야! " 한참을 키득이면서 웃던 라트. 그러다 그는 거짓말 처럼 웃음을 멈추며 타 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유리를 노려보았다.그 눈동자가 얼마나 강렬한지 유리 는 호흡을 멈추며 몸을 떨었다. 라트는 으르렁 거리며 차갑게 말했다. " 눈물 겨운 인간애를 보여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미안하게도 난 거짓말 쟁이는 싫어하거든, 크크큭… 네 년한테서는 피스 그린의 냄새가 나질 않 아…. " " .........!! " 낯빛이 창백해지는 유리. 라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유리의 품에 안겨 있는 하나를 가리켰다. " 그리고 그렇게 소중하게 안고 있으면 '얘는 소중한 아이에요∼' 하고 말 하는 것 밖에 더 되냐? 그 꼬마에게서 나는 피스 그린의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 군…. 크크‥ 장난은 끝이다. 그 꼬마를 내놔. " " 아,안돼‥!! " " 지금 네가 거부할 수 있는 처지인 줄 아냐? " 라트는 피식 비웃으며 유리에게서 거칠게 하나를 빼앗아 들어 올렸다. 하나 는 라트의 억센 팔에 부여잡히자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유리는 이 를 악물며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 하나를 풀어줘!! " - 파칭! " 캇…!! " 짧게 비명을 지르며 하나를 놓쳐버린 라트. 유리의 재핑에 정신 공격을 당 한 것이다. 그 틈에 유리는 떨어지는 하나를 재빨리 받아 뒤의 벽 쪽으로 물 러섰다. 라트는 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유리를 노려보았다. " 네 년…!! " 유리의 몸에서는 핑크색의 오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라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를 갈았다. 저 기운은 자신이 그렇게도 증오하던 삼차원의 힘.자신을 지옥으로 밀어넣었던 저주받을 오라였던 것이다! " 오라 능력자였던 거냐-----!! " - 크앙!! 괴성을 지르며 흉폭하게 유리에게 달려드는 라트. 어찌나 그 움직임이 빠른 지 유리는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대신, 유리는 오라를 전개해 라트와 자 신의 사이로 오라의 막을 전개했다. 라트의 거대한 앞발이 오라의 막을 사정 없이 때렸다. - 퍼엉!! " 아악!! " 단숨에 오라의 막이 깨져 나가며 유리는 뒤로 튕겨 올랐다. 벽에 등을 부딪 혀서 바닥에 쓰러져 내리는 유리. 다행히도 라트의 앞발은 오라의 막에 차단 당해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유리는 막이 깨지는 충격을 온 몸으로 받아야만 했다. 유리는 신음을 흘리며 입 가로 한 줄기 선혈을 흘 렸다. 하나가 울음을 터뜨리며 유리를 끌어안았다. " 언니이이이이∼!! " " 하,하나야…. " 자신에게 매달리는 하나를 힘 없이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유리. 전신의 힘이 한번에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벽에 부딪힌 등에서는 불이 나는 것 같이 뜨거 워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파하고 있을 틈이 그녀에게는 없었다.유리 들을 향해 라트가 두 눈을 흉흉히 빛내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크크크큭… 너 같이 어린 년이 피스 메이커였었다니….내가 방심했었어…. 카하하하핫!! 어쨋든, 그런 의미에서 갈기갈기 찢어죽여주마!! 피스 그린 이 오기 전의 향연으로는 그만이로군!! " " 으으윽…. " 벽에 몸을 기대어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유리.A.I 슈츠를 장착하면 어느 정 도 이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자신이 변신하는 사이에 생기 는 딜레이를 놓치지 않을 적이었다.그 틈에 공격을 당했다간 십중 팔구 죽임 을 당할 것이다. 유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라트를 노려보았다. 라트는 잔인 한 웃음을 지으며 날카로운 손톱이 드러난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손톱 이 유리의 목으로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유리의 몸에서 핑크 빛 오라가 폭 사되었다. - 파파파파파파팟!! " 크아아아악!! " 마인드 브레이크(Mind Break). 재핑보다 한 단계 높은 유리의 정신 공격.라 트는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의 뇌를 수백개의 바늘이 찌르 는 듯한 느낌이었다.그 틈에 열려진 철문 사이로 하나를 데리고 도망치는 유 리. 라트는 충혈된 눈을 유리에게 향하며, 자신의 뒤에 멍하니 서있던 갈색 의 늑대 인간들에게 소리쳤다. " 잡아!! " - 크아아앙!!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괴성을 지르며 유리에게 달려드는 늑대 인간들. 날카로운 앞발들이 유리와 하나를 노렸다. 유리는 이를 악물며 오라의 보호 막을 전개했다. - 퍼엉!! " ......!! " 다행히도 라트가 공격할 때와는 달리 막은 부서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의 입가로는 선혈이 다시 흘러 내렸다. 급하게 보호막을 형성하느라 충격을 완 하시키지 못한 것이다. 유리는 두 눈을 번쩍이며 오라를 거대한 반원형으로 전개시켰다. 그러자 늑대 인간들은 오라에 몸이 닿는 것을 피하며 뒤로 재빨 리 물러섰다. 오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차원의 존재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위력을 지녔던 것이다. 어쨋든, 그렇게 틈이 생기자 유리는 하나 의 손을 잡고 철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유리의 두 눈으로는 아픔 때문인지 무서움 때문인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오빠…! 오빠…!! ' 이를 악물며 마음 속으로 가인을 부르는 유리. 오빠는 반드시 올 거야!! 그 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유리는 어두운 복도를 오라의 빛에 의지해 달렸 다. 유리의 손에 잡힌채 힘들게 끌려가던 하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들이 달려온 뒤쪽에서는 늑대의 울음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놈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늦장 부릴 틈이 없었다. - 철컹! 또다시 눈 앞을 가로막는 철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가는 유리와 하나. 차 가운 공기가 코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밖이었다. 어두운 밤 하늘이 유리들을 반기고 있었다. 어두운 건물 안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일단 마음이 놓였다.그 래. 거기서 나온 것 까지는 좋았어. 좋았는데…. 유리는 딱딱하게 굳은 안색 으로 주위를 돌아보다가 신음을 흘렸다. " 여,여기는…!! " 유리와 하나가 있는 곳은 지상에서 30m 정도 떨어진 상공에 위치한 전망대 였던 것이다. 어두운 방안이라서 지하에 갇혀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이런 말 도 안되는 장소에 있었을 줄이야!! 차가운 밤 바람이 서늘하게 유리와 하나 를 훑고 지나갔다. 안돼…. 이런 곳에서는 절대로 도망칠 수 없어…. - 크앙!! " .........!! " 그때 뒤 쪽에서 들이닥친 늑대인간의 공격. 유리는 볼 것 없이 하나를 끌어 안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유리의 등을 날카로운 다섯 개의 손톱이 할퀴고 지 나갔다.붉은 선혈이 유리의 옷가지를 금새 적시기 시작했다. " 아,아아아악…!! " 화상을 입은 것 같은 등의 아픔에 비명을 지르는 유리. 하지만 늑대 인간이 그런 유리의 사정을 생각해줄 이유는 없었다. 늑대 인간은 재차 쓰러진 유리 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유리는 목 구멍으로 핏물이 올라오는 것을 참으며 오라의 막을 형성했다. - 퍼엉!! 간발의 차로 늑대인간의 공격을 막아낸 유리.하지만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 고 유리는 땅바닥에 피를 토해냈다. 유리의 품에 안겨 있던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 어,언니!! 언니이이이!! " " …괜찮…아‥. " 하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힘겹게 말을 하며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유리는 금새 다시 선혈을 내뿜었다. 오라의 막을 연신 두들기는 늑대 인간들 의 공격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유리의 몸을 두들기는듯한 충격으로 유리 의 전신에 충격을 주고 있었다. " 하아‥ 하아‥ " 가쁜 숨을 몰아쉬는 유리. 입가에 피를 토한 자국이 묻어 있고 얼굴은 파랗 게 질려 있었다. 유리는 계속 감길려는 눈을 부릅 뜨며 오라의 막을 유지하 려고 애썼다. ' 안돼‥. 조금만 기다리면 오빠가 올거야…. 오빠가… ' - 퍼엉!! 다시 한번 유리의 몸을 뒤흔드는 충격. 유리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다 시 피를 토했다. 너무 심한 출혈에 오한이 들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 고 그와 함께 밀려드는 졸음. 하나를 껴안고 있던 유리의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 언니이이이이!! " 울음을 터뜨리며 유리를 끌어 안는 하나.유리는 멍한 눈으로 하나를 내려다 보았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귀에서 연신 윙윙 거리는 소리가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 하나야…. ' 미안…. 나… 더 이상은 버티질 못하겠어….유리와 하나를 보호해주고 있던 핑크색의 막이 옅어지고 있었다. 유리는 하나를 끌어안으며 힘 없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치려는 늑대 인간을 바라 보았다. 늑대 인간의 손톱이 유리 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 오빠…. ' 마지막으로 보았던 가인의 얼굴이 유리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고 있었 다. 유리는 중얼거렸다.…이대로 오빠를 보지 못하고 죽는 걸까….그때 오빠 를 봤던 게 마지막이 되는 걸까…? ' …그건 싫은데…. ' 유리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다. - 터엉!! 그때 유리의 목을 칠려던 늑대인간의 공격을 막아내는 손 하나.어느새 늑대 인간의 앞에는 한 인영이 유리와 하나를 막아서고 있었다. 늑대 인간은 자신 의 공격을 저지한 눈 앞의 불청객을 바라보며 당황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 러나 그 불청객은 그런 늑대 인간의 기색에도 상관 없이, 자신의 오른 손을 늑대 인간의 복부에 대며 나지막히 외쳤다. " 천공권(天空卷)…! " - 투카카칵! 사정없이 늑대 인간의 복부를 꿰뚫고 터져 오르는 푸른빛의 토네이도. 늑대 인간은 배에 거대한 원통 형의 구멍이 생긴 채 비틀거리다가 피를 토하며 뒤 로 넘어갔다. '쿠웅!' 육중한 소리가 전망대에 울려퍼졌다. " 아아…. " 유리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 다. 와줬어. 와준 거야…. 늦지 않고 와줬어…! 결국 유리는 울음을 참지 못 하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오빠…!! " 푸른 A.I 슈츠를 입고 있는 피스 대원. 그는 다름 아닌 유가인이었다! - 크르르르르‥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의 빛이 어두운 전망대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세 마리의 갈색 늑대인간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경계 하며 으르렁 거렸다.푸른 오라의 빛을 흘리며 유리와 하나의 앞을 가로 막아 선 남자, 피스 블루 유가인. 그는 긴장을 풀지 않으며 늑대인간들을 바라 보 았다. " …유리야, 괜찮니? " " ......으응‥. " 나지막한 가인의 물음에 유리는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인은 유리와 하나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유리는 군데 군데 옷이 찢어져 있었으며 각혈을 했는듯 입가가 피투성이였다. 안색은 또 얼마나 파리한지 당장 쓰러져도 이 상할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하나는 별 다 른 상처는 없는 것 같았지만 얼굴이 눈물 범벅인 게 고생한 흔적을 뚜렷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유리들의 모습을 보자 가인은 늑대 인간들에 대한 분 노가 무섭도록 치밀어 올랐다. " ......네 놈들이…! " 네 놈들이 유리와 하나를 납치해서 지금껏 괴롭혀 왔단 말이지?! 저렇게 어 린 아이들을…!! 가인의 A.I 슈츠에서 푸른 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 죽여주마!! " - 크왕! 가인의 성난 외침과 함께 서로에게 뛰어드는 가인과 늑대인간들. 늑대 인간 들은 이 눈 앞의 인간을 찢어 발기기 위해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하지만 가인은 간단히 옆으로 손톱들을 피해냄과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근접해 있던 늑대인간의 턱을 오라가 가득 실린 장(掌)으로 올려쳤다. - 퍼걱!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핑그르르 도는 늑대인간. 그러나 가 인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그는 그대로 공중에서 내려오는 늑대인간의 머리 에 중단 정강이 차기를 날렸다. - 투학!! 시뻘건 핏물이 튀며 늑대인간은 전망대의 저편으로 날아가 떨어졌다.A.I 부 츠의 각력이 더해진 가인의 정강이 차기는 늑대 인간의 머리를 그대로 박살 내버렸던 것이다. 같이 가인을 공격해오던 늑대인간들은 뜻 밖의 인간의 공 격에 당황했는듯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가인은 호흡 조차 흐트러 뜨리지 않 으며 그런 늑대 인간들을 향해 말했다. " 겁 먹었냐? 계속 덤벼봐! " - 크르르르…!! " 오지 않으면 내가 간다!! "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늑대인간들에게 달려드는 가인. 늑대 인간들은 본능적 으로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이런 인간은 처음이었다.자 신들에게 겁을 집어 먹지도 않았으며, 자신들의 빠른 움직임을 파악해 피하 는 건 물론 반격까지 해오고 있었다. - 크헥!! 가인의 오라가 실린 정권에 얼굴을 가격당한 늑대 인간.늑대 인간은 이까짓 충격 쯤은 무시하며 가인에게 달려들려고 했다.그렇지만 그런 늑대인간의 뒤 로 돌아 들어오는 가인의 발 뒤꿈치. 가인의 뒤돌려차기가 늑대 인간의 후두 부를 세차게 강타한 것이다. 머리가 앞뒤로 뒤흔들리는 충격. 늑대인간은 코 에서 피를 뿜어 내며 침을 흘렸다.그러나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에 대한 분노 로 늑대인간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가인에게 손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다 섯 개의 손톱이 가인을 노렸다. - 케켕!! 하지만 이번에도 공격을 당한 것은 가인이 아닌 늑대 인간 자신이었다.가인 은 늑대 인간의 손톱을 뒤로 돌아 피함과 동시에 섬머솔트 킥을 늑대 인간의 턱에 날린 것이다.A.I 부츠에 실린 각력과 돌진하던 늑대인간의 힘까지 합쳐 져 늑대 인간의 턱뼈는 완전히 으스러져 덜렁거렸다. - 크앙!! " .........!! " 막 턱뼈가 부서진 늑대인간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가인은 옆으로 회전하며 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뒤에서 세번째의 늑대 인간이 자신을 공 격해왔던 것이다.가인은 회전하던 몸을 지상에 착지시키며 오른손의 헤븐 스 매쉬에 오라의 기류를 끌어 모았다.푸른 오라의 빛이 어두운 늑대 인간의 얼 굴을 밝혀주었다. " 천공권----!! " - 투카카칵!! 사정 없이 늑대 인간의 몸을 관통하며 치솟아 오르는 천공권의 토네이도.그 것으로 세번째 늑대 인간은 그대로 전투불능이 되어버렸다. 내장기관은 물론 척추까지 가인의 천공권에게 찢겨 나간 것이다. 가인의 뒤에서 으스러진 턱 뼈를 붙잡으며 비틀거리던 두번째의 늑대 인간. 가인은 순간, 헤븐 스매쉬의 팔꿈치 부분에서 짧은 검날의 오라 소드를 빼내 들었다. 오라 소드는 가인의 오라에 반응하여 푸른 회오리의 검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바람의 검날 은 턱을 부여잡고 있던 늑대 인간의 머리를 사정 없이 쳐올렸다. - 파앗!! 깨끗하게 잘려져 공중으로 튕겨오르는 늑대 인간의 머리. '터텅' 전망대의 바닥에 떨어지는 그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목이 떨 어져 나간 늑대 인간의 몸은 붉은 피를 목줄기에서 뿜어내며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 후우…. " 가볍게 한 숨을 쉬며 오라 소드를 거두는 가인. 설명은 길었지만 상황은 순 식간이었다. 세 마리의 늑대인간이 가인에게 당한 것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 던 것이다. 뒤에서 가인의 전투를 지켜보던 유리는 놀란 눈으로 가인을 바라 보았다. 설마 가인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그녀였다. 마치 눈 앞에 있는 가인이 다른 사람 처럼 보일 정도로 지금의 그는 평상시의 그와는 다른 이질감을 보이고 있었다. 형형색색 눈을 빛내며 늑대인간들의 주검을 바라 보는 가인을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 오,오빠…? " " 아‥ 유리야! 몸은 괜찮아?! 맙소사. 이 피 좀 봐! " 재빨리 달려와 A.I 헬맷을 뒤로 젖히며 유리의 안부를 묻는 가인.그 걱정스 러워 하는 얼굴에 유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언제나의 오빠였다.아까 같은 이질감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는 그만 마음이 놓여버려 가인 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가인은 그런 유리를 껴안아주며 뒤의 하나에게 물었 다. " 하나도 괜찮니? 많이 놀랐지? " " 우,우우우‥ 오빠아아아∼!! " 그렇게 울고도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하나. 가인은 하나도 껴안아주며 한숨 을 쉬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모처럼 만의 휴일에 유원지에 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런 무서운 일을 겪게 되다니 …. 이 어린 애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가인은 유리와 하나를 안은 팔에 더 욱 힘을 주었다. - 짝짝짝짝…! 그때, 그런 가인의 뒤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가인은 표정을 굳히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낌새도 눈치 채지 못했는데 어느새인가 은색 털의 늑대 인간이 전망대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긴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 누구냐!! " " 크크크크큭‥ 네가 멋들어지게 쓰러뜨린 그 세 멍청이들의 두목이라고나 할까? 카카카캇… 정말 멋진 솜씨야! " 자신의 부하 따위야 어찌되든 상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늑대 인간. 한 눈에 보아도 아까 가인이 상대했던 늑대들과는 격이 다른 몬스터였다. 달 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저 은빛 털과 쓰러진 늑대인간의 두 배는 됨직한 저 덩치. 그래…. 두목이란 말이지…. 가인은 어깨의 장갑을 열어 포 션을 꺼내 유리에게 주사했다. 유리는 주사 바늘의 아픔에 살짝 인상을 찌푸 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 오빠…? " " 유리야. 저 녀석은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테니까…. 그 사이에 하나를 데 리고 여기를 빠져나가. " " 그런…!! " 유리는 포션으로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가인은 식은 땀을 흘 리며 은빛 털의 늑대 인간, 라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서운 살 기가 저 괴물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공포 처럼 가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 여기에 오면서 지원 요청을 해뒀으니까 금방 진우 씨들이 달려올 거야.그 러니까…. " " 싫어!! 오빠를 놔두고 갈 수 있을 거 같아?! " 버럭 소리치는 유리. 가인은 그런 유리의 반응에 흠칫 놀라며 그녀를 돌아 보았다. 유리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가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유리는 아 까 늑대 인간들에게 꼼짝 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때, 유리에게 가장 두 려웠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이대로 가인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었다. ' 겨우 다시 오빠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절대로 헤어질 수 없어! ' 유리는 절대로 가인을 놓칠 수 없다는듯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가인은 그렇 게 자신의 팔에 매달리는 유리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웃으며 그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고마워,유리야. 하지만 하나는 어쩌고? 여기에 하나가 있다간 위험해져. " " 그건…! " 유리는 반박하려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모습에 말을 흐렸다. 가 인은 유리의 손을 잡아주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네가 하나를 무사히 지켜줘. 오빠는 유리를 믿을테니까. " " ......... " 유리는 가인의 말에 대답을 못하며 고개를 떨구었다.하지만 곧 빨갛게 부은 눈을 들어 가인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 " 나… 하나를 데려다 주고… 안전하게 해주고… 다시 돌아올테니까….그러 니까 오빠… " 제발 그때까지 무사하게 있어줘…. 가인은 그런 유리의 마음을 알아챈듯 웃 으며 유리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었다. 유리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가인의 손길을 느끼며 하나의 손을 꼬옥 잡아 끌었다. 그때 그런 그들의 모 습을 바라보던 라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거,참…. 누가 보내준다냐? 미안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 " 그건 네 생각이고…. 난 이 아이들을 보내야 겠어! " 가인은 유리와 하나의 앞에 서며 자세를 취했다.라트는 킬킬 웃음을 터뜨리 며 가인에게 달려들 준비를 취했다. " 크크크큭… 그럼 어디 그런 말할 실력이 되는지 테스트나 해볼까나? " - 파앗!! 순간, 땅을 박차며 가인에게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라트.이전까지 가인이 상대했었던 늑대인간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가인은 생 각해둔 것이 있었는듯 자신의 앞으로 푸른 회오리의 기류를 끌어 모았다. 오 라 쉴드였다. 라트는 그렇게 수동적인 가인의 전술에 비웃음을 날리며 오라 쉴드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 파앗!! " ......크극?!! " 그러나 라트의 주먹이 가인이 전개한 오라 쉴드에 채 닿기도 전에 오라 쉴 드는 순식간에 걷혀 나갔다. 그 바람에 헛 손질을 해버리는 라트. 그리고 그 런 라트의 뒤로 가인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가인은 회오리가 피어오르는 오 라 소드를 라트의 등에 박아 넣었다. " 크아아아아악!! " 비명을 지르며 뒤로 손을 휘두르려는 라트. 하지만 등에 박혀 있던 오라 소 드로 부터 무서운 기운이 라트의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라트의 체내에 박힌 오라 소드로 가인이 있는 힘껏 오라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 충격이란 삼차원의 존재로서는 상상도 못할 끔찍한 것이었다. - 파파파파파팟!! " 끄랴아아아아학!! " 라트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엎어져 바닥을 긁으며 괴성을 질렀다. 가인 은 발버둥 치는 라트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오라 소드를 역수로 힘 있게 움켜쥐며 유리에게 소리쳤다. " 어서 가!! 어서!! " " 으응…!! " 유리는 이를 악물며 하나의 손을 잡고 철문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뒤에 서 울려퍼지는 라트의 괴성 소리에 유리는 가인이 걱정되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볼려고 했지만 애써 참아내며 전망대의 밑으로 내려 갔다. 지금 자신이 가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하나를 안전한 곳 까지 피신시키는 것. 그것 뿐 이었다. 유리는 인상을 굳히며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 조금만 기다려,오빠…! 나 반드시 돌아올테니까…!! ' 한편,가인은 유리들이 무사히 전망대를 빠져나간 것을 지켜보며 한 숨을 내 쉬었다. 이제부터는 가인, 자신이 얼마 만큼 이 괴물을 붙잡고 있느냐가 관 건이었다. " 크르르르르…. " " .........!! " 순간, 거세게 튕겨 올라가는 가인의 오라 소드. 라트가 등에서 가슴으로 관 통해 있던 오라 소드를 앞에서 밀어 올렸던 것이다. 말도 안돼!! 가인은 경 악의 눈초리로 라트를 내려다 보았다. 이세계의 존재가 오라에서 오는 격심 한 고통을 참아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라트는 그런 고통을 참아 내며 몸 안에 박혀 있던 오라 소드를 뽑아낸 것이었다. 그것도 검날을 붙잡 고서…!! " 크아아아앙!! " - 퍼걱!! 오라 소드가 뽑혀나가자 마자 뒤로 몸을 돌리며 가인에게 주먹을 날리는 라 트. 가인은 오라 쉴드를 자신의 앞으로 생성시키며 두 팔을 교차해 라트의 주먹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힘이 얼마나 굉장했는지 가인은 약 3m 정도 공중으로 붕 뜨며 뒤로 날아 올랐다. 비틀 거리며 착지하는 가인. 라트의 공 격을 막아낸 두 손이 불에 대인 것 처럼 뜨거워지고 있었다.다행히 부러지지 는 않은 것 같은데…. 라트는 이를 갈며 가인에게 달려들었다. " 이 저주받을 오라 능력쟁이가!! " - 퍼억!! 뒤로 몸을 굴려 몸을 피하는 가인. 라트의 손이 앞에 가인이 서있던 자리를 잡아 뜯고 지나갔다. 콘크리트가 치즈 처럼 뜯겨져 나가는 광경을 보자 가인 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라트는 그대로 바닥에 손을 대며 비정상적으로 몸을 회전시켜 가인에게 킥을 날렸다.가인의 몸통만한 라트의 정강이가 가인의 몸 에 작열했다. " 트핫!! " 간신히 가인은 오라 쉴드로 라트의 공격을 빗겨내었다. 그와 동시에 라트의 품 속으로 파고드는 가인. 가인의 헤븐 스매쉬가 푸른 회오리의 기류를 머금 기 시작했다. " 천공권----!! " " 캇!! " 푸른 토네이도가 가인의 헤븐 스매쉬에서 날아오름과 동시에 라트는 팽이처 럼 몸을 회전시키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전망대에서 밤 하늘로 치솟아 오 르는 연푸른빛의 토네이도.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빗나갔다! - 퍼엉!! " 으앗!! " 등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 라트가 가인의 뒤에 내려섬과 동시에 가인을 어깨로 들이받았던 것이다. 가인은 피를 토해내며 전망대의 난간 쪽으로 나 가 떨어졌다. '촤아아악!' 바닥을 긁으며 넘어진채 미끄러지는 가인. 척추가 끊어진듯한 통증에 가인은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 했다. 다행히도 A.I 슈츠에 내재된 오라의 기운이 라트의 공격을 무마시켜주었는지 척추는 부러지지 않 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정도로 아팠다. " 크크크크큭…! 왜 그래? 벌써 끝인 거냐? " 유유하게 웃으며 가인에게로 걸어오는 라트. 가인은 비틀 거리며 몸을 일으 켜세웠다. 아직 쓰러져서는 안된다. 좀 더 녀석을 붙잡아두어야만 했다.가인 은 오라 소드에 힘을 불어 넣으며 자세를 취했다. 라트는 그런 가인의 모습 이 갸륵하다는듯이 혀를 끌끌찼다. " 그래.그래. 날 좀 더 즐겁게 해줘야지.그렇게 쉽게 나자빠지면 안되는 거 잖아? 그렇지? 응? " " …덤벼. " 가인은 담담히 라트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도발이었다. 물론 라트는 이런 단순한 도발에 걸려드는 멍청이가 아니었지만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약해빠진 인간 나부랭이가 어디서…!! 라트는 날카로운 손톱을 치켜세우 며 가인에게 달려들었다. 가인은 순간, 달려드는 라트의 미간으로 수중의 오 라 소드를 힘껏 집어 던졌다. 라트는 그런 가인의 공격을 비웃으며 날아드는 오라 소드를 가볍게 손으로 쳐 떨어뜨렸다. " 어디서 이런 조잡한 짓을…! " - 파앗! 하지만 그런 라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라트의 배에 닿아있는 가인의 주먹.푸른 오라의 회오리를 머금은 헤븐 스매쉬였다.최대 출력의 천공권이다! 어디 이번에도 피해봐라!! " 천공권-----!! " - 투카카카칵!! 라트의 몸으로 거세게 몰아치는 토네이도. 라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가 인의 천공권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용권풍이 라트의 주변에 생겨나며 라트의 육중한 몸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라트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몸을 감싸는 천공권의 토네이도를 노려보았다. - 콰콰콰콰콰콰콰!! 밤하늘로 휘몰아쳐 오르는 토네이도.가인은 그 회오리를 바라보며 그만 땅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이 천공권에 모든 오라를 사용해버린 것이다. 헤 븐 스매쉬도 최대 출력의 천공권을 견뎌내기에는 무리였는듯 뜨겁게 달아올 라 있었다. " …끝난 건가…? " 가볍게 한 숨을 내쉬는 가인. 이런 토네이도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아 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했다. 일단 토네이도에 닿기만 해도 그 몸은 갈갈이 찢겨져 나가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토네이도 속에 갇혀 버리고서는….그래. 불가능해…. 절대로 살아날 수 없어…. - 콰지직!! " 큭!! " 순간, 가인이 앉아 있던 콘크리트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가인은 두눈이 휘둥그래지며 속수 무책으로 무너지는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그리고 그런 떨어지는 그의 멱살을 잡아채는 거대한 손 하나. 다름 아닌 용권풍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했던 라트였다. 가인은 헛 숨을 들이키며 놀란 눈으로 라트를 바라보았다. " 켓!! 대단해!! 정말 대단해!! 설마 그런 수까지 보여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카카카카캇!! " 광기 서린 눈동자로 가인을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는 라트. 그제서야 가인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알 수 있었다. 라트는 용권풍에 갇히기 전에 콘크리트 바닥을 부수고 밑으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 라트는 미친듯이 웃음 을 터뜨리며 가인의 멱살을 잡은채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퍽! 가인은 방어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라트의 무지막지한 주먹에 전신을 난 타당했다. " 큭! " 그렇게 신나게 가인을 두들기던 라트는 순간 신음을 흘리며 주먹질을 멈췄 다. 가인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던 핏물을 라트의 얼굴로 뱉어버린 것이다. 라 트는 이를 갈며 콘크리트가 무너진 위의 구멍으로 가인을 집어 던졌다. " 이 망할 자식이…!! " " 크핫!! " 다시 전망대 밖으로 나오게 된 가인. 그는 실 끊어진 인형 처럼 허공을 날 다가 전망대에 털퍽 떨어져 내렸다. 그런 그에게로 구멍에서 나온 라트가 잔 인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 먹기 편하게 반죽을 해주지! " 라트는 가인의 오른 발을 잡아 들어올렸다. 힘 없이 끌려올라가는 가인. 그 리고 라트는 그런 그를 벽이며 바닥을 향해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 투학!! 퍽!! 콰직!! 콘크리트에 뼈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정신 없이 콘크리트에 연신 온 몸을 부딪히는 가인. 그렇게 가인이 부딪힌 자리에서는 새빨간 선혈이 묻어 올랐다. 가인은 이 지독한 고통에 치를 떨며 몸을 늘어뜨렸다. 라트는 피식 웃으며 가인을 벽으로 집어 던졌다. - 퍼억!! 벽에 부딪힌채 핏자국을 남기며 밑으로 미끄러져 내리는 가인.온 몸이 깨지 고 박살난 것이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라트는 킬킬 웃으며 그런 가 인을 조롱했다. " 크크큭… 멋진 모습이 됐잖아? 크하하핫!! 모처럼 재미 있었다,인간! " 그런 라트의 말에도 대꾸하지 못하는 가인. 시야가 붉어지고 있었다. 깨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눈동자에 스며든 것 같았다. 이미 전신의 감각은 사 라진지 오래였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라트는 가인이 전투 불능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마지막을 선사할려는듯 날카로운 손톱을 뽑아 내며 다 가왔다. " 네 녀석이 그분이 말씀하셨던 푸른 오라를 쓰는 애송이였군. 제법 괜찮은 실력이었지만 그렇게 대단할 것 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야. 켓! 뭣 때문에 너 같은 녀석을 신경쓰시는지 모르겠군…. " " .........? " 무슨 소리? 하지만 귀에서 들려오는 이명에 라트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는 가인이었다. 그렇게 가인이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라트는 피 식 비웃으며 손톱을 들어올렸다. " 자자. 괴롭지? 죽고 싶지? 걱정마. 친히 목을 따줄테니까. 크큭…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 거야. " 라트의 손톱이 달빛을 받아 차가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 그 쯤 해둬, 라트. " 그때 가인과 라트의 뒤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 라트는 그 목소리에 온 몸 에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암! 잊을 수야 없지! 절대로!! 라트는 환희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뒤를 돌 아 보았다. " 크크크큭!! 왔구나, 피스 그린!! " 그런 그의 외침에 라트를 노려보는 녹색 A.I 슈츠의 남자.그는 활화산 같이 불타오르는 눈을 라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라트의 뒤에서 흐릿한 눈으로 A.I슈츠의 남자를 바라보던 가인은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진우…씨…. " " ......... " 진우는 A.I 헬맷 사이로 날카로운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눈 앞의 라트를 지나쳐 그 뒤에 주저 앉아 있는 가인에게 향했다. 가인은 말 그 대로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것이 의식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진우는 그를 소리쳐 불렀다. " 소년, 괜찮은 거냐?! " " ......... " 말도 할 수 없었는지 간신히 몸을 꿈틀거리는 가인. 그것이 대답 대신인 모 양이었다. 진우는 가인의 그런 모습에 저 밑 바닥 부터 뜨거운 분노가 치밀 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기가 서린 목소리로 라트에게 말했다. " …내 딸을 납치하고… 그것도 모자라 내 동료를 잘도 저렇게 만들어 놓았 구나,라트. " " 카카카카카캇!! 너를 위해 준비한 만찬이다!! 맘에 들지 않았나 보지?! " 희열이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진우에게 소리치는 라트.이 순간을 기다려 왔 다. 부활하고 나서 3주가 흐르는 시간 동안 줄곧 이 순간만을…!! " 하지만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지! 네 놈이 왔으니 이제 이런 건 다 필요 없다!! 전채(前菜)는 질렸어!! 메인 디쉬를 즐길 시간이다!! 바로 너,피 스 그린이라는 메인 디쉬를 말이야!! " " …잘도…. " 그런 라트에게 진우는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넘실거리기 시작하는 녹색의 오라. 라트는 인상을 찡그리며 다가오는 진우를 노려보았다. 진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기세에 전신의 털이 움츠러 들고 있 었다. " ......쳇! " 라트는 다가오는 진우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를 갈며 하늘을 날아 올라 그에게서 몇 미터 떨어진 근방으로 착지했다. 라트의 전신으로 식은 땀 이 솟아나고 있었다. 케헷…!! 역시 피스 그린…!! 이 느낌이다!! 내가 기다 려온 것은 바로 이 느낌이었어!! 하지만 그렇게 흥분하는 라트를 무시하며 진우는 쓰러진 가인에게 다가갔다. " ......... "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A.I 슈츠 밑으로 느껴지는 부서진 인간의 몸. 가인은 피가 스며들은 눈동자를 들어 진우를 올려다 보았다. " 지,진우‥ 씨…. " " 말하지마. 수고했다. " 진우는 말하려는 가인을 제지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포션을 가인에게 주 사했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은 망신창이의 상태는 벗어나게 해줄 것이 분명했다. 진우는 가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피 식 웃음을 터뜨렸다. " 애 썼다. 내가 올 동안 버텨줘서. " 그리고… " 그리고 내 딸을 지켜줘서…. " " 하…. " 그 말에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는 가인. 하지만 얼마 웃지도 못하고 거친 기 침을 해야만 했다. 폐에 피가 들어차서 맘대로 웃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 나 가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다행이다…. 유리와 하나…. 구조되었나 보구나…. 이런 몰골이 되도록 시간을 끈 보람이 있었어. ' 다행이야…. ' 진우는 가인이 너털해진 걸레 꼴이 되어서도 하나가 무사하다는 말에 안도 하는 표정을 짓자 자신도 모르게 코 끝이 시큰거렸다. 이 자식….제 몸 하나 돌보지 못하면서 건방지게…. 진우는 가인의 머리를 헝클어 뜨리며 웃음 지 었다. " 푹 쉬어라. 뒤는 내가 맡을테니. " " 으으…. " 가인은 떨리는 손을 들어올리며 진우를 말리려고 했다. 진우의 실력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저 은빛 털의 늑대인간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가인 의 기색을 알아챈 진우는 씨익 미소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 날 믿어라.제자가 이 꼴이 되었는데도 가만이 있는다는 건 사부된 자로서 의 도리가 아니지. " 누가 내 사부라는 거에요…. 누가…. 가인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피식 웃음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 믿자. 진우 씨를. 내 앞에 서 있는 이 강한 남 자를 믿어 보자…. ' 힘내요......사부…. ' 그런 가인의 염원을 등에 업고 라트와 대면하는 진우. 라트는 킬킬 거리며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크큭, 거기 쓰러진 애송이가 네 제자였던 모양이지? " " 그래. 남의 제자를 이렇게 떡으로 만들어 놓으니 재밌냐? 웃음이 나와? " " 카카카카캇!! 너무 화내지 말라고. 어디 얼마나 녹녹한지 좀 건드려 봤을 뿐이니까. 크크큭… 하지만 실망인 걸? 저 정도의 실력으로 피스 그린,네 놈의 제자였다니…! " 라트는 자신이 비웃고 있는 그 제자란 녀석에게 몇 분 전 까지만 해도 악전 고투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채 가인을 업신 여겼다. 그때, 라트의 코 끝으 로 세차게 느껴지는 풍압! 그것은 어느새 자신의 코 앞으로 날아온 진우의 주먹이었던 것이다. 라트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미 진우의 주먹은 라트의 코를 후려 갈기고 있었다. - 퍼억!! " 케켕…!! " 코 끝을 부여잡으며 뒷 걸음질 치는 라트. 진우의 주먹에 얻어맞은 코뼈는 사정 없이 부러져 버렸고,그 코 끝에서는 검 붉은 액체가 스며나왔다.라트는 놀란 눈으로 진우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자신의 코 앞 으로 다가올 때 까지 그 기척 조차 눈치를 못 챈 것이다…!! 더군다나 눈 뻔히 뜨고 정면에서의 공격을 허용해버리다니…. 부러진 코 쯤이야 라이컨슬 로프의 재생력으로 이미 회복되고 있었지만, 라트의 자존심은 이미 만갈래로 찢어진 뒤였다. 그런 라트의 귀로 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비웃지마…! " 최선을 다해 내 딸을 보호한, 내 뒤에 있는 저 녀석을…!! " 비웃지 말란 말이닷-------!! " 끓어오르는 외침을 내지르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진우. 녹색의 잔광이 그가 움직이는 자리로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다. 뇌의 시계 주파수를 조정하 는 진우의 오라 능력, 가속(加速)이 전개된 것이다. 라트는 이 숨막히는 진 우의 움직임에 이를 악물었다. " 우오오오오오오오!!! " - 퍼퍼퍼퍼퍼퍼퍽!! 순식간에 터져오르는 일곱 번의 타격음.진우가 시전한 칠성권(七星卷)의 하 나인 연환칠격(連環七擊)이었다. 눈 깜박할 새, 라트는 진우의 양쪽 팔꿈치 에 일곱 번이나 강타당하며 수십 미터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팔꿈치에 격 중당한 라트의 가슴뼈는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분명, 보통 몬스터라면 이 정 도 상처에서 이미 전투 불능이 되었어야 했지만, 라트는 라이컨슬로프의 정 점에 선 웨어 울프였다. 더구나 보름달이 뜬 날의 웨어 울프는 달의 정기를 받아 그 재생 능력이 한층 더 탁월해지는 것이다.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시키 며 진우에게 달려드는 라트! 하지만 진우는 그런 라트의 회복되는 가슴 속으 로 어깨를 들이밀었다. 라트는 그런 진우를 비웃었다. 자신의 세 배가 넘는 덩치에게 어깨 치기라니! 그런 게 통할 것 같으냐?!! " 개산벽(蓋山璧)…! " - 터엉! 하나, 진우의 몸과 부딪치는 순간, 라트는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진우의 어 깨 치기가 가슴에 와닿자 무언가 거대한 쇠망치 같은 것에 자신의 전신이 샅 샅이 분해되는 것을 라트는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진우의 어깨치 기가 단순한 몸통 공격이 아님을 깨달은 라트.하지만 그 깨달음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이미 자신의 가슴뼈는 미처 아물기도 전에 다시 으스러지고 있었 던 것이다. 라트는 피를 게워내며 전망대의 벽 쪽에 몸을 처박아야만 했다. - 콰지지직! " 크아아아아아아…! " 라트의 등에 부딪치자 반원형으로 금이 가는 콘크리트 벽.진우는 호흡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런 라트를 노려보며 처음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라트는 부서진 가슴에 대한 통증으로 이를 갈다가, 진우의 의연한 모습을 보 게 되자 지독한 모욕감을 느끼며 미친듯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 이 건방진 새끼가…!! " " 칠성권(七星卷) 파군(破軍)! " 광폭한 라트의 손길을 몸을 낮춰 피해내며,다시 라트의 가슴에 찍어드는 진 우의 권(卷)! 칠성권의 일곱 발경(發經) 중 최고로 무거운 권 '파군'이었다. 라트는 세번째로 가슴을 적중당하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칠공분혈(七孔噴血: 양 눈,양 귀, 코,입의 7개의 구멍에서 피가 나옴)을 일으켰다. 진우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 넌 예전에도 졌어!! 어떻게 되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지옥으로 보 내주마!! " -투학!! 순간, 라트의 본체에서 수십 개의 충격파가 터져 올랐다. 진우의 주먹이 괴 물을 난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주먹으로 가격하는 것이 아닌,오라의 힘이 깃들어진 주먹이었다. 그는 가속 능력으로 음속의 벽에 들어서며 라트 의 몸을 쉴새 없이 가격했다. " 아타타타타타타타타탓!! " 라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 오라의 주먹에 핏덩어리가 되어갔다.수 십 개 의 오라의 충격파가 라트의 몸을 뚫고 터져 나갔고, 그 등 뒤로 검 붉은색의 체액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쿵. 정확히 백발의 주먹을 끝으로 넝마 조각이 되어 바닥에 쓰러지는 라트.진우 는 마지막으로 주먹을 뻗은 자세 그대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 .........피스 백열권(百熱卷)….잘가라,라트. " 가인은 포션으로 시야가 회복되어가는 것을 느꼈다.넝마 조각이 된 몸은 포 션으로도 삼할 조차 회복되지 않았지만,적어도 가인의 의식만은 완벽히 회복 시켜준 것이었다. 정신이 혼수상태일 때는 몰랐는데,의식이 또렷해지자 가인 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신음을 내질렀다. ' 으으으윽… 주,죽을 것 같아…. ' 눈가에 눈물이 맺혀 주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조금 참아내자 그럭 저럭 견 뎌낼 것도 같았다. 포션의 약효가 그 효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서서히 아픔 이 가셔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통증에 무감각해지는 것 뿐이었지만 가인은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때, 그런 그에게로 진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어이, 좀 괜찮아지냐, 소년? " " 지,진우 씨?! " 가인은 들려오는 진우의 목소리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언제나 처럼 히죽 웃으며 가인의 몸을 받쳐주고 있었다. 진우 씨? 진우 씨는 그 늑대 인간과 싸우던 도중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째서…? " 진우 씨, 그 몬스터는…? " " 아아…. 그거라면 상황 종료다. 보시다시피 저런 꼴이 된지라…. " 진우가 자신의 뒤편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황급히 그 손 가락을 뒤쫓는 가인의 시선.그곳에는 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핏덩이가 된 괴물의 시신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가인이 그 핏덩어리가 라트라는 것 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시신에 붙어있는 은빛 털 때문이었다. 가 인은 놀란 얼굴로 진우를 돌아보며 감탄했다. " 괴,굉장해요…,진우 씨…. 절대로 죽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 " " 에헴∼ 뭐, 이 정도 쯤이야∼ 어때? 이 사부님의 실력이? 놀랍지? 굉장하 지? 경의롭지? " " ......단지 가장의 권위를 상실한 경파한 남자라고만 생각했었는데…. " " ......농담을 하는 걸 보니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로구나,소년∼ " 진우는 눈을 빛내며 가인의 목에 헤드락을 걸려고 하자,가인은 창백한 웃음 을 지으며 서둘러 손을 휘저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진우는 피식 웃음을 터 뜨렸고, 가인도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어쨋든, 진우의 말대로 상황은 종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마무리를 짓기에는 성급함이 있었으니. 무엇보 다 보름달의 광기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별이 흐른다‥ 달이 빛난다‥ 꿈의 세우라메튬‥ " 지,진우 씨‥ 저거…!! " 가인은 진우의 어깨에 부축되다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진우의 동공 도 긴장으로 수축되기 시작했다. 별이 흐른다‥ 달이 빛난다‥ 알카라 세우라메튬‥ " 우오오오오오오오오∼!! " 핏빛이 스며든듯이 붉은 기운을 띄기 시작하는 보름달. 그리고 그 밑으로는 거대한 은색의 늑대 인간이 보름달을 향해 긴 장송곡을 터뜨리고 있었다. 찬 란한 은색의 털들은 죽은 피들을 털어내고 한올 한올 생명의 힘, 달의 힘을 깃들이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저거…. " 카카카카카카카캇!! 만월로 세상이 가득찼을 때 나는 힘으로 충만해진다! " 라트의 두 눈이 핏빛으로 희번뜩 거렸다. 순식간에 재생된 몸. 죽음에서 삶 으로 돌아온 영혼. 이것이 바로 만월의 권능! " 네 놈들의 머리를 저 피의 만월에게 바쳐주마!! " 라트는 순간 온 몸을 말아서 돌며 진우들에게 날아들았다.그 흉폭한 공격에 진우는 가인을 안아들고 A.I 부츠로 점프해 피해냈다. '와지끈!' 라트의 롤 링 공격에 금방까지 가인들이 서있던 자리가 가루로 화했다. 라트는 말았던 몸을 풀며 저편으로 내려서는 진우들을 노려보았다. " 피했냐?! 피한 거냐?!! " - 촤르르르륵… 꽂꽂이 일어서는 라트의 은색 털들. 마치 고슴도치와 같은 형국이었다.그리 고 그 털들은 하나의 은빛 창들이 되어 사방으로 발사되었다. - 파파파파파팍!! " 으아아아앗!! " 콘크리트 벽과 바닥을 우습게 뚫어버리는 라트의 은빛 털들.가인은 그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공격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진우는 간단히 녹색의 오라 쉴드를 생성하여 자신과 가인의 몸을 보호해내었고 그 모습에 라트는 이를 갈며 그들에게 돌진해왔다. " 죽여버릴테다!! " 라트의 팔뚝에서 돋아난 기형의 칼날들이 진우의 전신을 난자하기 위해 날 아들었다. 그러나 진우는 그 칼날의 등을 가볍게 손을 털듯이 두들기자 칼날 은 목표를 잃고 그 공격 또한 무산되어 버렸다. 진우는 라트를 향해 외쳤다. " 이게 만월의 힘이냐?! 이게 네 놈의 힘의 전부냐?! " " 크아아아아아아!! " 쩌억 입을 벌리는 라트. 그런 라트의 입으로 푸른 구의 입자가 생성되었다. 루나의 정기가 모인 공격이다! 받아봐라!! 라트의 입에서 굵은 입자포가 진 우를 향해 발사되었다. - 투하아아악!! 진우의 몸을 뒤덮어버리는 입자포. 라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야 말로 그 뼈까지 가루가 되었을 거다!! 지옥에나 떨어져라,피스 그린!! 그러 나 라트는 볼 수 있었다. 녹색의 잔광과 함께 입자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진우의 모습을…. 그리고… " ......슈팅 스타(Shooting Star). " - 퍼엉! 라트의 몸을 꿰뚫는 녹색의 빛. 라트는 반응할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 린 순간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몸뚱아리에 뚫린 거대한 구멍 뿐.그 리고 어느새 인가 자신의 뒤로 이동해 몸을 일으키는 진우의 모습이었다. 라 트는 허리가 통째로 날아간 채 비척이다가 결국 땅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진 우는 녹색의 오라가 뻗어나오는 몸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 이번에도 재생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보도록. 기다려줄 용의는 있으니 까 말이야. " 물론, 라트는 재생하지 못했다. - 두근‥ 안돼…. 이대로 다시 죽을 수는 없어…. - 두근‥ 죽기 싫다. 죽기 싫어. 그 지옥의 유황불로 돌아가는 것은 싫어‥! - 두근‥ 안돼! 죽을 수 없어! 절대로! 저녀석에게 또 이렇게 당해야만 한다니‥!!라 트는 이를 갈았다. 달의 재생력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육체의 무능력함에 치가 떨렸다. 안돼. 이렇게 끝낼 수는 없 어. 적어도 나를 지옥 속에 처넣은 저 눈 앞의 녀석 만은…!! 피스 그린만은 …!! 그때, 그런 라트의 귀로 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태워 버리는 거다…. ' ......리,리리스…? ' - 모든 걸 태워버리는 거야‥ 네 자신 조차… ' 자,잠깐…!! 그게 무슨 소리…!! 내 몸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 - 널 되살려준 건 나. 네 몸에 무슨 짓을 하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잠자코 분노의 염화(炎火)에 몸을 맡기는 거다…. ' 아,안돼…! '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 크아아아아아아아--------!! " 라트의 비명과 함께 그의 몸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가인을 부 축한채 밑으로 내려가던 진우는 라트의 비명에 당황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 뭐,뭐야?! 저건?! " 라트는 눈 앞에 떠 있는 휘황찬란한 보름달을 보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라트의 손과 발이 터져 나가며 뱀의 혀 같은 불길들이 그 밖으로 휘몰아쳐 올랐다. 라트는 냉소하고 있을 리리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주를 내뱉었다. ' 그 계집…!! 날 그냥 되살려 놓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내 몸에 이 따위 장난질을…!! ' - 투화아아아악!! 라트는 더 생각하지 못하고 눈을 뒤집었다. 그의 뚫려진 아랫배에서도 불길 이 치솟은 것이다. 라트는 자신의 생명 핵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리리스, 그 계집은 자신의 핵을 매체로 하여 사라만더(Salamander)의 불꽃을 이 곳에 불러들인 것이다! ' 당했…다‥. ' 거침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불길들과 함께 라트는 검은 숯덩이가 되어 그 의식을 잃어버렸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나오는 불길들이 진우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진우는 가인을 들쳐업으며 전망대 밑의 계단으로 달리기 시 작했다. " 라트, 이 자식!! 끝까지 이런 말도 안되는 짓을‥!! " 가인은 진우의 어깨에서 거칠게 들썩이며 황망한 눈으로 자신들을 쫓아오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 열기가 심했는지, 아직 자신들에게 미처 접근 도 하지 않았건만 가인의 등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A.I 슈츠의 오리 하르콘이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당황하며 진우에게 소리쳤다. " 지,진우 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 " 몰라! 저 자식 자폭이라도 할 셈인가?! " " 자폭‥!! " 맙소사. 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진우가 한 말을 되뇌었다.지상에서 30m 높 이인 이곳에서 자폭? 폭발한다고?! 그랬다가는 진우와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가인은 비명 섞인 목소리로 진우에게 소리쳤다. " 오,오라 능력을 써요,진우 씨!! 진우 씨의 가속 능력이라면 이 곳 따위 금새 벗어날 수 있잖아요?!! " " ......하하‥ 그게‥. " 진우는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태평스럽게 가인에게 말했다. " 오라 능력이 바닥 났어. 아까 너무 힘을 써버렸나봐. " " 그런 바보 같은∼∼∼∼!!! " 가인의 외침이 전망대 홀을 타고 처량하게 울려퍼졌다.위에서부터 가인들을 쫓아내려오는 거대한 불길들. 불이 타오르며 산소를 흡수하는지 호흡하는 것 조차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열기 속에 피어오르는 수증기.진 우의 체력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라트와의 결전에서 오라 능력은 물론, 체력까지 바닥이 나버린 것이다.진우의 가속 능력은 뇌의 시계 주파수를 150 배 정도 올려 그를 음속의 벽에 다다를 수 있게 해주었지만,그 육체 까지 빠 르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기에 엄청난 체력 소모를 요구했다. " 헉…헉… 제,젠장…. " 진우는 숨을 몰아 쉬며 흘러내리려는 가인을 재차 들쳐 업었다. 온 몸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진우의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A.I 슈츠를 입 고 있었다지만 가속 능력이란 것은 오래 쓸 것이 못 되는 것이다. 그래서 되 도록이면 오라를 제한 칠성권(七星卷) 만으로 적을 제압하고 싶었는데, 의외 로 끈질긴 라트의 재생 능력에 그만 과도하게 힘을 써버린 진우였다. 가인은 진우의 지친 기색을 깨닫자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 진우 씨…. " " 말 시키지 마! 힘 빠지니까! " " …저‥ 내버려두고 가요…. " " .........?!?! " 진우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가인을 돌아보았다.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포션으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지만,넝마가 된 몸 은 여전했다. 어차피 이렇게 엉망이 된 몸…. 방해만 될 뿐이라면…. " 진우 씨 혼자라면 빠져나갈 수 있잖아요…. 저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 - 퍼억!! 순간, 가인의 머리를 쥐어박는 진우의 주먹. 가인은 갑작스런 진우의 주먹 세례에 인상을 구겼다. 으윽! 진우 씨, 이게 무슨 짓?!! 하지만 가인은 소리 칠 수 없었다.멱살을 잡아 올리며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진 우 때문이었다. " 말 다했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방해니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느니 계속 그렇게 시건방진 소리 할래?!! " " 하,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두 사람 다… 죽을 뿐이라고요…. " 아직 전망대의 반도 내려오질 못했다. 처음에는 뛰던 발걸음도 지금은 지쳐 서 거의 산보하는 수준이었다. 이랬다가는 저 위에서 내려오는 불길에 다 타 죽을 것이다. 진우는 그런 가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 그래서?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놓고 가라고? 버려두고 가라고? " " …진우 씨한테는 미연 씨가‥ 하나가 있잖아요‥. 기다리고 있잖아요‥! " 언제나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이 있잖아요! 가인은 자포자기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어차피 나 같은 녀석보다‥ 기다려 줄 가족도 없는 나 같은 녀석 보다는 진우 씨가…. 진우 씨가 살아남는게…! " - 퍼억!! 다시 가인의 머리를 쥐어박는 진우의 주먹. 이번에는 정말 아팠기에 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 무,무슨 짓이에요!? 아까부터 계속?!! " " 뭐가 가족도 없다는 거야?!! 너 진짜 정신 안 차릴래?!! 지금까지 그 따 위로 생각하며 살아왔던 거냐?!! 그런 생각으로 우리와 함께 지내온 거냔 말이다!! " " .........!! " 가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우는 굳은 얼굴로 가인을 노려보고 있었 다. 위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둘을 향해 내려 오고 있었지만, 진우와 가 인은 미동도 하지 않으며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진우는 가인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너도 내 가족이다. " " ......예? " 가인은 진우의 말에 그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단호한 표정으로 마치 가인을 꾸짖듯이 말했다. " 너도 내 소중한 가족이란 말이다. 단 한번도 널 남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 다. 그건 나 뿐만이 아니라 시민도, 마리도, 유리도 마찬가지일 거야. 왜 혼자라고 생각했던 거야? 왜 모두의 마음을 몰라주는 거냐? " 그런… 내 가족은…. 가인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진우는 언 제나 처럼 히죽 웃으며 가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 너라면… 그런 가족을 버리고 갈 수 있을 거 같냐? " " 지,진우 씨…. " " …그리고 뭐, 맘에는 들지 않지만… 살아나가면 내 딸을 책임져야 될 거 아냐? 응? 사위? " " 푸,푸하하하… " 가인은 그런 진우의 말에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진우 씨,진우 씨는 정말이지…. 정말이지 못 말리는 사람이라니까….하하하하… 가인은 자 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맺혀 올랐다. 뜨거운 열기에 눈물조차 수증기가 되 어버릴 정도였지만 가인은 진정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울었다. ' 고마워요…. ' 고마워요,진우 씨. 고마워요‥. 진우는 그런 가인의 모습에 피식 웃음 지으 며 그를 부축했다. " 자자∼ 어서 내려가자고. 우리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야. " " …그,그렇내요. "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지체한 사이 불길은 정말 바로 그들의 뒤까 지 쫓아오고 있었다. 진우와 가인을 이를 악물며 정신 없이 계단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가인은 뜻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발을 부여잡으며 최대한 진우에 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해제시켜놓았던 A.I 헬맷과 마스크 를 장착했다. A.I 슈츠의 전신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오리하르콘이 뜨겁게 발열하고 있었다. 그 지독한 열기에 가인은 신음을 내질렀다. " 크읏… " 그리고 발을 헛딪은 가인. 그는 대번에 대 여섯 개의 계단을 미끄러지며 바 닥으로 쓰러졌다. 진우는 그런 가인을 서둘러 일으켜 세우며 소리쳤다. " 소년, 괜찮냐?! 정신 차려! " " 하아‥하아… " 가인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호흡할 산소조차 다 타버리는 이 열기 속에서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진우는 주 위를 둘러 보았다. 이 전망대 건물은 어떻게 된 모양인지 제대로 된 유리 창 하나 없었다. 딱 죽기 좋게 설계해 놓았군. 진우는 얼굴도 모르는 전망대의 건축 설계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가인을 부축했다. - 화르르르륵!! 그리고 결국, 진우와 가인을 따라붙은 불길. 홀을 가득 채운 거대한 염화가 둘을 덮치고 있었다. 진우는 한숨을 내쉬며 가인을 보호한채 바닥에 주저 앉 아버렸다. 제길… 여기까지 인가…. ' 미연…. 하나야…. ' 떠오르는 가족들의 얼굴. 그들을 두번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걸까? - 촤아아아아악!! 그때, 그런 진우와 가인에게 다가오던 불길들이 사방으로 갈라지기 시작했 다. 진우와 가인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이 알 수 없는 조화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앞에는 어느새인지 투명한 반원형의 막이 형성되어 불길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이건 오라 쉴드?! 어떻게?!! 그렇게 놀라는 가인들의 뒤로 낯 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무 늦어 버렸죠? 미안해요,가인 씨. 진우 씨. " " 시,시민 씨?!! " 이 목소리는 피스 옐로우 한시민의 목소리!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 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시민 뿐만 아니라, 마리와 유리까지 같이 서 있었다. 이 오라 쉴드는 이 세 사람이 힘을 모아 형성시켰던 것이다. 그런 가인에게 로 마리가 붉은 오라의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 " …수고했다. 뒤는 우리에게 맡겨라. " " 마리 선배…. " 언제나 처럼 짧고 과묵한 마리의 말투였지만, 가인의 귀에는 그녀의 음성이 너무도 따뜻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유리도 핑크빛의 오라를 내뿜으며 가인에 게 말했다. " 돌아왔어,오빠‥. 하나는 팔라딘들에게 맡겨뒀으니까…. 안전할 거야. " " 유리야…. " 약간의 울음끼가 묻어있는듯한 유리의 목소리. 다들… 다들 와주었구나…. 가인은 기쁨과 희열로 몸이 떨려왔다.하지만 가인은 그들에게 물었다. " 왜… 어째서… " 여기가 불바다가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 어째서…? " " 가족이잖아요. " 시민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녹아있는 온기는 진우에게서 느꼈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말에 마리와 유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래. 아직 가르칠 것이 많이 남았다. " " 오빠한테 맛있는 요리… 아직 해주질 못했는걸. " 모두…. 가인은 멍하니 그녀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가인의 어깨 를 진우가 두들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 어때? 내가 말한 대로지? "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 몸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기 분만은 그 어느때보다 최고였다. 미칠 정도로 유쾌했다. 그런 가인에게로 시 민이 말했다. " 자, 그러니 이런 불길 쯤 얼른 막아내고 집으로 돌아가자구요. " " 예…! " 가인은 진우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며 미약하나마 몸 안에 남아있던 오 라를 끌어모았다.곧이어 오라의 장벽으로 푸른색과 녹색의 빛도 스며들기 시 작했다. 불길은 다섯 명의 오라가 모인 쉴드를 뚫지 못하고 사방으로 퍼져나 갔다. ' 집으로… 돌아가자…. ' 가인은 눈을 감으며 집중했다. 느낄 수 있었다. 모두의 마음을. 자신의 몸 에서 뻗어나오는 무한한 오라의 흐름을. 오라란 어쩌면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문득, 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껏 오라를 발산했다. " 으아아아아아앗!! " 전망대를 뒤덮은 염화.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는 다섯 명의 피스 대원들. 그 런 그들에게로 사라만더의 염화가 그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길이 지나가고 폐허가 되어 버린 전망대.보름달은 여전히 그 창백한 빛을 전망대에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아래로 검게 탄 숯덩어리가 꿈틀거리 고 있었다. 살라만더의 불꽃에 생명핵이 다 타버린 라트였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미약한 떨림 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일하게 타버리지 않고 멀쩡한 라트의 오른쪽 눈동자가 처량하게 달빛을 향하고 있었 다. 그때, 전망대의 그림자가 늘어나며 하나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어둠 속 에서 떠오르는 검은 양복의 남자. 그는 한시영이었다. " ‥죽고 싶지 않죠? " 라트의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에게 묻는 시영. 눈동자가 시영에게 향 했다. 그것은 애원하듯 떨리며 시영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살고 싶다고.아직 은 죽고 싶지 않다고…. 시영은 시니컬하게 웃으며 쓰고 있던 선글래스를 벗 었다.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흑요석 같이 빛나고 있었다. " 당신의 그 투쟁 본능…. 접수하겠습니다. " 만월의 빛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유원지 사건으로부터 5일이 지났다.가인은 또 다시 일주일 전 자신이 입 원했던 그 병원,그 병동, 그 병실에 누워있었다.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 의 모습에 하지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러니까 이번에는 유원지에 놀러갔다가 놀이 기구에서 떨어지려는 유 리를 보호하다 다쳤다고…. " 그 어딘가 장황하고 유사한 패턴의 사고 경위에 쓴 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가인과 유리. 그래. 좀 위험한 놀이기구였지. 아니…아주 많이 위 험한 놀이기구였다…. 그래. 정말 위험했어…. " 하,하하… 예에…. " " 용케도 죽지 않았구나? " " ......그나저나 병실에서는 금연이라고요,선생님. " 가인은 또 담배를 꼬나무는 지연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일일히 신경을 쓴다면 그녀는 하지연이 아닐 것이다. 그때, 그런 가인에게로 테레이아가 살며시 다가와 손을 잡아주며 소근거렸다. " 가인, 많이 아프지? " " ......아,으응. " " 다음 번에 유원지를 같이 가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널 보호해줄게…. " 마치 유리 보고 들으라는듯한 그 말에, 역시나 유리는 도끼 눈을 뜨며 테레 이아를 노려보았다. 테레이아는 자신의 에메랄드 빛 머리를 쓸어넘기며 그런 유리에게 웃음을 날렸다. " 매번 보호받으셔서 좋으시겠어? 하지만 가인은 자신이 보호 받을 수 있는 성숙한 여성을 원하고 있다고. 이를 테면… 바로 나 같은. " " ......꼴 사나워. 여자의 질투 따위. " - 파지지지직!! 대번에 터져오르는 방전 현상. 한동안 뜸하다 싶었더니 역시나다.가인은 식 은땀을 흘리며 자신을 병문안 온 사람들을 둘러보았다.저번과 같은 멤버들이 었다. 단지, 이번에는 오퍼레이터들 대신에 진우 씨네 가족이 와 있다는 것 이 다른 점이었지만. 미연이 하나를 안으며 가인에게 다가와 물었다. " 이제 몸은 괜찮아요,가인 군? " " 예. 이번에는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 전신 골절에 머리가 깨지고 근육이 찢어진 것이 별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가인. 매번 깨지고 박살나는 생활을 해왔으니 이제 이 정도 중상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지도 몰랐다. 적어도 인공 근육을 심는다느니 의족 비슷한 것 을 단다느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거지, 뭘…. " …고마워요,가인 군. 우리 하나를 지켜줘서…. " 미연은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단지 불안해 하며 슬 퍼만 했을 뿐. 하지만 자신보다 한참 어린 가인은 믿음직하게 자신을 격려해 주며 결국에는 이렇게 무사히 하나를 되찾아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진우에게 서 가인이 하나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들었던 그녀는 가인에게 정말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사례를 하고 싶었다. 가인은 그런 미연의 말에 쑥 스러워진듯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 아,아뇨. 저야 별로 한 것도 없고….끝에 가서 진우 씨 도움만 받았을 뿐 인데요,뭘…. " 아, 그렇게 얘기하니 서글퍼지는데…. 나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 인간 아니 야? 왠지 이렇게 누워있는 자신의 처지까지 한심해져 가인은 한숨을 푹 내쉬 었다. 그런 가인을 바라보던 미연은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 훗… 걱정말아요. 가인 씨는 믿음직하니까…. 우리 하나의 남편 될 자격 으로는 충분해요. 그쵸,여보? " " ......나는 아직 인정하지 않았어…. " 우울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진우. 가인을 사위라고 불렀던 것은 벌써 예전에 잊어 먹은 모습이었다.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거,참… 진우 씨도…. " .........에… 나,남편?!! " 순간, 굳어버리는 좌중. 가인은 미연이 농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쓴 웃 음만 짓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돌변하는 좌중의 분위기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거 오해할 소지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대화들이었잖아?! 가인은 창백해져 가는 안색으로 미연에게 말했다. " 미,미연 씨…. 노,농담도 참….남편이라니…! " " 하나야∼ 오빠한테 '여보∼'라고 해야지. " " 헤헷, 여보오∼♥ " " 자, 가서 안기렴∼ " 미연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가인에게 달려가 안기는 하나. 그 천인공노할 광경에 시민은 '어머'하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려 웃었고, 마리와 시더는 입을 쩍 벌리며 굳어 버렸고, 유리와 테레이아는 방전 현상을 뚝 멈추며 어이없다 는 표정으로 가인을 노려보았다. 재영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이 사 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학교에 퍼뜨릴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 는 것이 분명했다. 가인은 품에 안긴 하나와 좌중을 번갈아 보며 다급히 손 을 휘저었다. " 아,아냐…!! 저기 이건 단순히…!! " 하지만 가인은 뒷 말을 흐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멱살을 잡아올리며 담 배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지연의 살인적인 눈초리 때문이었다. " 유,유가인…. 너란 녀석은∼∼∼∼!!! " " 으아아악!!! 오해에요,선생님!! 오해라구요!!! " 그 날, 가인과 같은 병동을 쓰던 사람들은 오랫만에 다시 그 처량한 가인의 외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신아…, ' 괜찮지? …나 이렇게 즐거워 해도… ' 소란에 휩싸인 가인의 병실 속에서 가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침대 옆 테이블 에 놓인 자신의 가족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들을 봐도 죄책감이 느껴 지지 않았다. 진우 씨, 마리 선배, 시민 씨, 유리…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아버지, 어머니, 신아… ' 이 사람들이… 내 새로운 가족들이야…. ' 가인은 미소지었다. 그런 그에게 사진 속의 부모님과 신이는 웃고 있었다. <제 9 화 만월인랑 完> 豫告 가인: 여름하면 바다! 바다하면 수영! 재영: 수영하면 수영복!! 가인: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어쨋든, 몬스터의 퇴치 겸, 여름 휴가 겸 바닷가로 오게 된 우리들! 뜨거운 햇살 아래,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 속에서 우리는 청춘을 불태운다!! - 파팡!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시민: 어머, 여름 미인 대회…? 테레이아&유리: 사랑은∼ 미스테리∼ 서스펜스∼!! 第 10 話 Ｂlue Ｓummer Ｂeach - 짝! 마리: 넌 도대체 네 목숨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거냐?!! 가인: ......마리‥ 선배?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0 話 Ｂlue Ｓummer Ｂeach (上) =-=-=-=-=-=-=-=-=-=-=-=-=-=-=-=-=-=-=-=-=-=-=-=-=-=-=-=-=-=-=-=-=-=-=-= << 여기는 피스 그린. 놈을 놓쳤다. 지금 그 쪽으로 향하고 있어! >> " 제길…!! " 추적추적하게 비가 내리는 8월의 장마철.한참 고교생들은 여름 방학으로 피 서니 여행이니 하며 기분을 내고 있었겠지만, 피스 메이커 블루 유가인은 전 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직무에 충실하고 있었다. " 마리 선배! 준비해요!! " " 음…. " 마리는 침착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중의 오라 소드를 뽑아들었다. 붉은 오라 의 검날이 날카롭게 뻗어나왔다. 가인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도 오라 소드에서 바람의 검날을 생성시켰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22구역에서 위 치한 일본 전국 시대 문화 박물관. 와프 입자의 이상 수치로 인한 게이트의 발생을 감지한 피스 메이커들은 관객들을 피신시키고, 몬스터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오라 배틀 필드(Aura Battle Field)를 박물관에 펼쳐놓은 상태였다. - 두두두두두두‥ 거친 짐승의 발소리.가인과 마리는 오라 소드로 자세를 취하며 긴장했다.온 다! 온다!! 그리고 가인과 마리가 대기하고 있던 홀의 벽을 넘어서 착지하는 몬스터! 가인은 외쳤다. " 기다렸다!! " 달려나가는 가인. 몬스터는 팔이 여섯 개나 달린 인간형 타입이었다. 더구 나 특이하게도 놈은 몸체에 사무라이의 갑옷을 껴입고 있었고, 여섯 개의 팔 에는 각각 전시용으로 박물관에 진열되었던 일본도(日本刀) 여섯 개를 들고 있었다.그 날카롭게 날이 선 여섯 개의 일본도에 마른 침을 삼키는 가인. 쳇! 검을 많이 들고 있다고 유리한게 아니란 말이다!! - 채앵!! 채앵! 격렬하게 부딪히는 오라 소드와 일본도. 하지만 몇번 도합을 겨루던 가인의 등에서는 식은 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몬스터는 여섯 개의 팔을 자유 자 재로 사용하여 공격해왔던 것이다. 아예, 호흡까지 착착 맞게 협공을 해오는 것이, 여섯 명의 적에게 둘러싸인듯한 착각까지 느끼게 할 정도였다. " 으으으읏‥!! " 가인은 간신히 자신의 몸쪽에 날아드는 일본도를 오라 소드로 빗겨 내었다. 그 순간, 자신의 귓 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가는 일본도의 찌르기.가 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기겁했다. 마,맙소사! 주,죽을 뻔했다! 잘못했으면 머리가 일본도에 꿰일 뻔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로 날아드는 몬 스터의 무차별한 여섯 개의 찌르기. 맙소사!! 이,이런 거 피할 수 있는 건가?! - 파파파팡!! 그렇게 가인의 몸을 난자하려던 일본도들은 마리가 들고 있던 오라 소드에 헛되이 목표를 놓쳐야만 했다. 어느새 가인의 앞을 막아선 마리가 재빠르게 몬스터의 공격들을 막아낸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리에게 말했다. " 마,마리 선배‥! 고마워요‥! " " 무모한 짓 하지마!! 네 상대가 아니다! " 호통을 치는 마리. 가인은 움찔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눈 앞의 적 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한채 하단 베기 자세를 취했다.몬스터는 여섯 개의 일 본도로 기묘한 자세를 취하며 마리와 대치했다. 마리는 그 헛점 없는 자세에 가볍운 탄식을 터뜨리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 역시‥베파치티(Vepacitti비마질다라[毘摩質多羅])‥! 투쟁의 역사를 이 끌어온 아수라(阿修羅)다운 솜씨로군. " - Dasa‥Dasyu‥ Pani‥Saram‥! 마리의 말에 카부토 투구 사이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두서 없이 내지르는 베 파치티.베파치티는 이 눈 앞의 여자가 발하는 오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눈 에서 기광이 돌며 살인의 욕구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 Vala! 베파치티는 괴성을 내지르며 여섯 개의 일본도로 마리를 공격해왔다.마리는 침착히 오라 소드를 마주 휘둘렀다. 전신의 신경이 곤두서고,감각 세포가 눈 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움직임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뇌에 서 분비되는 노르 아드레날린은 체내를 활발하게 만들었고, 아드레날린은 공 포에 대하여 신경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 챙! ' 하나! ' - 챙! ' 둘! ' 슬로우 비디오를 보듯, 베파치티의 일본도는 마리의 눈에 느리게 보여왔다. 마리는 무거운 공기 속을 움직이며 오라 소드로 여섯 개의 일본도를 하나 하 나 씩 막아갔다.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인에게는 뭐가 뭔지 모를 정 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쾌검(快劍)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 대,대단해‥! 역시 마리 선배는‥! ' - 채채채채챙!! 순식간에 십팔 합을 넘기며 검을 휘두르는 그들.하지만 베파치티와 마리 중 그 어느 누구도 한 발자국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리의 오라 소드가 여섯 개의 일본도 사이에 벌어진 공간을 찔러 갔다. 걸렸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사식(四式) 단월(斷月) " 물에 비친 달을 반으로 가르는 쾌속의 찌르기.오라 소드는 사정없이 베파치 티의 여섯 개의 팔 중 하나를 가르고 지나갔다. - Sakka-----!!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는 베파치티.몬스터의 발 밑으로 일본도를 쥔 손 하나가 툭 떨어졌다.그런 떨어진 팔을 뛰어넘으며 마리는 베파치티에게서 떨 어지지 않은채 검을 휘둘렀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식(五式)‥! " 순간, 붉은 검광이 베파치티의 눈 앞에서 세 줄기로 갈라지며 풍차처럼 휘 둘러졌다. 그리고 떨어져나가는 베파치티의 손목들. 잘려나간 세 개의 손목 에서 녹색의 체액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 요란(搖亂). " - Patala! Saram vala!! 남은 두 개의 손에 들린 일본도를 거둬들이며 땅을 박차고 오르는 베파치티. 자신이 마리의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몸을 피한 것이다. 마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어딜 도망치려고!! " 천공권!! " - 푸칵!! 그때, 허공으로 도약하던 베파치티를 푸른 토네이도가 가르며 지나갔다. 마 리의 뒤에 서있던 가인이 내쏘은 천공권이었던 것이다. 베파치티는 천공권에 어깨가 찢겨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텅!' 땅에 부딪히면서 베파치티가 껴입고 있던 사무라이의 갑옷들이 이음새가 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베파치 티는 자신의 잘려나간 손들이 흩어진 그 자리에 쓰러져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Amrta‥Pani Sakka‥! " …고통스럽지 않게 목을 쳐주마. " 그런 베파치티의 앞으로 다가와 오라 소드를 들어올리는 마리. 카부토 투구 속에서 베파치티의 안광이 그런 마리를 힐끔 거렸다. 그때, 붉은 기광을 띄 기 시작한 베파치티의 안광. 그리고 마리와 베파치티의 주위에 널려있던 베 파치티의 잘려진 손들이 꿈틀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가인이 마 리에게 소리쳤다. " 마리 선배!! 조심해요!! " " ......?!! " - 푸홧!! 순간, 잘려진 손들에게 들려있던 4개의 일본도가 마리를 향해 치솟았다. 마 리는 막 베파치티의 목을 날리려다가 이 조화에 두 눈을 부릅 떴다. 이 자식! 아까부터 계속 뭔가를 중얼거린다 싶었더니… 떨어진 일본도에 사술(邪術)을 걸어놨던 건가?!! - 파파파팍!! " 크윽…!! " 마리를 교차하는 4개의 일본도. 마리의 A.I 슈츠 위로 4개의 혈선이 그어졌 다. 무의식적으로 오라 쉴드를 전개하며 몸을 피하느라, 이 정도의 상처에서 그친 것이었다. 하지만 오리하르콘을 가르는 날카로움이라니…! 일본도에 흉 흉히 서려있던 기광은 아무래도 베파치티의 검기였던 모양이었다. 만약, 아 무런 방비도 없이 저 도를 맞았었다면 마리는 4개의 조각으로 잘려졌을 것이 다. 그런 마리의 앞으로 베파치티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눈에서 기광을 뿌 렸다. 마리를 공격했던 4개의 일본도가 베파치티의 주위를 선회 하며 사악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 Vairocana‥Maha ‥Virocanal! " 으음‥! " 마리는 피가 흐르는 몸으로 오라 소드를 쥔 채 방어 자세를 취했다.다른 상 처는 별 달리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그녀의 허벅 다리에 난 검흔이 치명적 이었다. 이제는 아까같은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제압당한 건가‥! 마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베파치티를 노려보았다.베파치티는 그런 마리의 상 처를 눈치챈 건지 득의 양양하게 4개의 일본도를 그녀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채챙!' '채챙!'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덤벼드는 4개의 일본도.마리는 힘겹 게 방어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 없어!! 그때 마리의 앞으로 난입하는 푸른 A.I슈츠의 남자, 유가인! 그의 헤븐 스매쉬가 날아오 는 일본도를 향해 뻗어졌다. " 천공권 산(散)! " - 투앙! 헤븐 스매쉬에서 압축되어 터져나오는 토네이도의 기세.일본도들은 그 충격 에 튕겨 사방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런 가인의 행동에 분개한 베파치 티가 고함을 내지르며 남은 두 팔로 일본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 Gohhhhhhh‥!!! " 차아아아아앗!! " 마주 고함을 내지르며 베파치티에게 달려드는 가인. 그의 오라 소드가 베파 치티의 허리로 휘둘러졌다. 한편 가인의 목을 찔러 오는 베파치티의 일본도! 그리고 둘의 그림자가 서로 교차했다! - 파앗!! " ......... " 묘한 정적이 박물관을 감돌았다.검을 휘두른 자세에서 서로 꼼짝도 하지 않 는 가인과 베파치티. 곧이어 그 사투의 결과가 드러났다. - Sak‥. 긴 혈선이 베파치티의 허리에 그어지며 그 상체가 주르륵 미끄러져 떨어졌 다. '터텅!'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베파치티의 상체. 사무라이의 갑옷까지 한꺼번에 일도한 가인의 승리였다. 상체가 떨어져 나간 베파치티의 하체가 녹색의 피를 촤악 뽑아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해‥해냈다…. " 그런 베파치티의 모습을 보며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가인.가인은 자 신의 목 주변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목 주위의 A.I 슈츠가 얕게 잘려져 있었 다. 베파치티의 찌르기가 스쳐지나간 것이다. 느껴지는 감촉으로 보아 A.I슈 츠 밑의 목까지 살짝이지만 상처가 나있는 것 같았다. ' 주,죽을 뻔 했다…. ' 가인은 그런 목을 쓸어넘기며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일본 도의 공격이 깊었어도 죽는 쪽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베파치티의 허리를 벨 때 무의식적으로 몸을 튼 것이 가인의 목숨을 구했다. ' 여,역시…! 나… 악운에 강해진 것일지도….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나자 뭔 가 초탈한 심정마저 들고 있었다. 아, 그나저나 목이 점점 쓰라려 오는게 장 난 아니게 아프잖아….가인은 왠지 목의 상처가 걱정되어 살펴보기 위해 A.I 헬맷을 해체시켰다. 마스크에 가려져 있던 가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 크으‥ " 다행히 드러난 목에는 얕게 베인 자국 밖에 없었다. 아,다행이다.피가 조금 흐르지만 이 정도 쯤이야‥. 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목을 쓰다 듬었다. 그때, 그런 그에게로 마리가 다가왔다. 가인은 마리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 아아‥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마리 선배. A.I 슈츠를 입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 뻔 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건지 태평스럽게 말 하는 그의 모습. 마리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런 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 너…. " " 예? " 그리고 가인의 뺨으로 휘둘러지는 마리의 손바닥. -짝! 날카로운 손바닥 소리와 함께 가인은 고개를 젓혀야만 했다. 가인은 얻어맞 은 뺨을 감싸며 놀란 눈으로 마리를 돌아보았다. 마,마리 선배?! 갑자기 왜 …?!! 그런 가인의 귀로 날카로운 마리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 넌 도대체 네 목숨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거냐?!! " " ......마리‥ 선배? " 멍하니 마리의 이름을 되뇌이며 그녀를 바라보는 가인.그 당황한 가인의 얼 굴을 보자, 마리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쥐고 있던 그녀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인의 목에 난 상처로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베파치니의 칼이 한치만 더 깊었어도 가인은 목의 동맥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리는 아찔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 뭣 때문에 그렇게 무모한 공격을 한 거지!! " 무모해! 너무 무모해…!! " 하마터면 죽을 뻔 했잖아!! 네 목숨은 그렇게 헐 값인 거냐?!! 죽어 버려 도 상관 없는 거야?!! " " 하,하지만… 마리 선배가 위험에 처해서… 나도 모르게… " 마리의 고함 소리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저 주저 말하는 가인. 마리는 그 런 가인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잊었지만, 곧 냉정하게 소리쳤다. " 난 네 녀석한테 도움을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 " 죽음. 피를 토하며 죽어간 한 남자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 누나…. 난 지켜주지 못했어…. 눈치도 채지 못했어…. 그러니까 이번 만큼은 반드시 지켜줄거야. 절대로 위험에 빠뜨리게 하지 않아…! " 네 도움 따윈 필요 없어!! " 그렇게 외치며 몸을 돌려 가버리는 마리.가인은 여전히 마리에게 얻어 맞은 뺨을 감싼채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마리 선배… 왜…. 왜…? ' 박물관 밖의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 날은 장 마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第 10 話 Ｂlue Ｓummer Ｂeach 8월 23일.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늦더위가 시작되었다. 푸른 하늘에 떠있 는 태양은 살인적으로 그 열기를 내리 쬐고 있었고,그 기온은 34도까지 올라 갔다. 이렇게 더우면 사람들은 선풍기나 에어컨이 있는 집 안에서 떠나기 싫 어지는 법. 당연히 운동을 한다던지 땀을 내는 일을 피하게 되는 것이 당연 지사였다. " 핫! " - 타탕! 그러나 가인은 검도복을 입은채 죽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곳은 마리의 도 장인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고요한 도장의 정적을 깨뜨리며 가인은 혼 자 밀짚으로 감싼 목표물을 향해 죽도를 휘둘렀다. 온 몸에서 비오듯 땀이 흐르며 물 먹은 솜 처럼 몸이 무거웠다. - 넌 도대체 네 목숨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흘 전, 몬스터와의 격전을 치룬 후 마리 선배가 자신에게 했던 말. 그때 의 그녀는 정말 화가 난 모습이었다. 귓가로 계속 그때 그녀가 했던 말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 뭣 때문에 그렇게 무모한 공격을 한 거지!! - 하마터면 죽을 뻔 했잖아!! 네 목숨은 그렇게 헐 값인 거냐?!! 죽어 버려 도 상관 없는 거야?!! - 난 네 녀석한테 도움을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 - 네 도움 따윈 필요 없어!! " 으아아앗!! " - 투웅! 가인의 기합소리와 함께 죽도가 밀짚 인형의 머리를 거세게 강타했다.그 바 람에 밀짚 인형을 지탱시켜주던 나무 막대가 부러지며,인형은 거칠게 바닥으 로 무너져 내렸다. " 하아‥하아‥ " 거세게 몰아쉬는 호흡.가인은 멍한 얼굴로 죽도를 내린채 부서진 인형을 내 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부서진 인형이 아닌,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마리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 하아∼∼ " 가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도장 마루에 주저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자신의 뺨을 때리 며 야단치던 마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 마리 선배, 어째서 그랬던 거지? 왜? ' 가인은 고요한 도장을 둘러 보았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름 방학 인데다가 이 무더위 속에서, 그것도 이 한낮에 도장에 오는 이가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 벌써 나흘 째가 되는 건가. ' 마리 선배, 그 때 이후로는 통 볼 수가 없었으니…. ' 자신의 검도 훈련을 책임져 줄 그녀는 그 날 이후로 가인의 앞에 단 한 번 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유가인,자신이 빼먹으면 빼먹었지 그녀 쪽에서 이 렇게 아무 말도 없이 훈련에 빠진 적은 없었는데…. ' 화… 많이 난 걸까‥. ' 그래. 내가 무모했다는 건 인정해요. 인정한다구요.하지만‥하지만 그건 마 리 선배가 위험해서…. 선배가 다칠까봐서 그랬던 건데… 그녀를 구할려고 그랬던 것 뿐인데! 그런데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었단 말인가? " 으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 가인은 계속 그 말만 하며 푸념했다. 그래. 마리 선배, 차라리 화가 났다면 절 꾸짖어져요. 제 앞에 나타나서 야단을 치라고요! 그렇게 라도 하면 속이 라도 편하지… 이건 얼굴 조차 볼 수가 없으니…! 원래는 아침 7시에서 2시 간 정도 훈련을 받는 그였었지만,모습을 보이지 않는 마리와 만나기 위해 점 심 시간이 넘도록 도장을 떠나지 않은 가인이었다. 이런 기다림도 어느덧 나 흘째가 되어간다. ' 아, 오늘도 못 만나려나…. ' 점심 시간도 벌써 한 참 지난 시간이었기에, 배도 고파오고 있었다. 가인은 주섬 주섬 몸을 일으키며 부서진 밀짚 인형의 조각들을 줍기 시작했다. 하아, 오늘은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한 숨을 내쉬는 가인. 그때, 그런 가인의 귀로 한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 좋은 강격(强擊)이로군. 초심자의 실력이라고는 볼 수 없겠는데. " " 아…? "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그 곳에는 50대 정 도로 보이는 검은 한복의 중년인이 서있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은 나이에 걸 맞지 않게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그 눈매는 날카로움과 위엄을 가지고 있었 다. 가인은 이 건장한 중년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성마리의 부친이자 무영신풍류의 관장, 성비영이었던 것이다. 가인은 긴장하며 고개를 꾸벅 숙여 비영에게 인사했다. " 안녕하십니까, 관장님! " " 하하‥ 그래. 이런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도장에서 소리가 들려 오길래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구만,유가인 군. " 가인은 비영이 자신을 알고 있자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먼 발치에서 비영 을 봤을 뿐,자신은 정식 문하가 아니었기에 비영과는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 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날 알고 있는 거지? 그런 가인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비영은 웃음지으며 말했다. " 우리 마리가 직접 검을 가르치는 제자를 내가 모를 리가 있겠나? " " 아,예…. 그러셨군요. " 가인은 자신의 속 마음을 그에게 들키자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영은 가 인의 발 밑에 있는 부서진 밀짚 인형의 잔재를 줏으며 말했다. " 죽도에 힘이 고루 퍼지기 시작했어. 아주 잘도 부셔놓았구만. " " 아,예…? 죄,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사죄했다. 아까는 멍해 있느라고 생각을 못했지만 자 신은 도장의 기물을 파손한 것이다. 으아, 물어드려야 될까? 그래야겠지? 그 런 가인의 모습에 비영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 하하‥ 꾸짖는게 아닐세. 난 칭찬하고 있는 게야.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발은 다치지 않게 확실히 청소는 해놓아야겠지? " " 예, 그,그래야죠. 그러겠습니다. " 으‥ 얼굴 팔려. 가인은 화끈거리는 얼굴로 애써 미소지었다. 아, 그나저나 관장님이라면 마리 선배가 어딨는지 아실지도 모르겠다! 가인은 화색을 띄며 비영에게 물었다. " 아, 관장 님! 저기‥혹시 마리 선배 어디있는지 아십니까? " " 음? 오늘 아침에 못 만났었나? 같이 수련하잖는가? " " 예에. 그게… 며칠 째 계속 혼자서만 연습하고 있는데요…. " " 흐음…. "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기는 비영.아아, 관장님도 모르시는 걸까.가인은 낙담했다. 도대체 무전기로 연락도 안되지! 핸드폰도 안되지! 무엇보다 만날 수도 없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에요, 마리 선배∼!! 가인은 그녀가 자신에 게 집뜰이 선물로 준 목걸이를 꺼내 바라보았다. 자신의 오라에 반응하여 푸 른빛을 띄고 있는 원석의 목걸이. 그래. 이대로는 안돼….어떻게든 마리 선 배와 만나 얘기를 해야…. " …가인 군, 그 목걸이는…? " 그때, 가인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며 안색을 굳히는 비영. 아, 이거 분명 마리 선배가 말하길… 죽은 동생의 유품이라고 했었지…? 가인은 마리 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비영의 질문에 답했다. " 이건… 마리 선배가 제 집뜰이 선물로…. " " ......그런가‥. 그 아이가. " 비영은 탄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가인은 무거워지는 비영의 얼굴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고, 비영은 그런 가인의 태도에 쓴 웃 음을 지으며 말했다. " 아아, 피곤한 사람 붙잡고 이 늙은이가 계속 귀찮게 해버렸구만.아침부터 내내 수련을 했으면 무척 피곤할 터인데 어서 가보게나. " " 아,예…. 먼저 들어가세요. 전 도장 청소 끝내고 가겠습니다. " " 음. 그럼 수고하게. " " 아, 저기 그리고…! " 막 도장을 나가려는 비영을 불러세우는 가인. 비영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 자,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마리 선배를 만나시면 제가 찾고 있다고… 얘기 좀 해주십시오. 부탁 드 리겠습니다. " " 알았네. 내 얘기 해놓지. 스승이 제자를 이렇게 팽개쳐 두고 어딜 간 건 지, 원…. 비영은 가인의 어깨를 두들겨 준 후 도장 밖으로 나갔고, 가인은 그런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목에서 푸른 빛을 띄고 있는 목걸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품 안으로 갈무리하는 가인. 마리 선배 의 남동생….과연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들 저렇게 쉬쉬하는 걸까…. 가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도장을 둘러보던 중 한 쪽 벽에 늘어서 있는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문패로 시작되다가 중간에 흑백 사진,그리고 컬러 사진 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 사진에는 각각 검도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 이 찍혀 있었는데 마리 선배가 말하길,무영신풍류의 후계자였던 고인(故人) 들이라고 했다. ' 아,혹시…. ' 가인은 가장 최근의 사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마리 선배는 여자이 니 도장의 후계자는 아닐테고…. 그럼, 남동생 쪽이 후계자였다는 얘기일텐 데…. 그렇다면 그의 사진도 여기에 있을 게 분명했다. " 찾았다! " 그리고 가인은 볼 수 있었다. 두 눈이 유난히도 큰 한 미소년의 모습을. 앳 되 보이는 사진 속 그의 모습은 대략 열 다섯 정도로 보였다. 긴 흑발을 뒤 로 묶어 올리고 짙은 검은 눈썹이 어딘가 마리 선배와 닮아 있었다. 다른 고 인들의 사진이 엄숙하고 딱딱해 보이는 반면, 이 소년의 사진은 나이 탓이었 는지 천진난만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이 애가… 마리 선배의…남동생…. " 이 목걸이의 원 주인…. 마리는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에 무릎을 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 가인의 뺨을 때리며 소리쳤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그녀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 …나, 왜 그랬던 거지…. ' 마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후회했다.그날 자신이 왜 그랬는지 마리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가인이 최근들어 자신의 몸을 너무 돌보지 않고 위태 위태해 보였기에 주의를 줄 생각이었는데 그 날 따라 이상하게 감정적이 되 어있던 그녀였다. 소리친 것도 모자라 뺨까지…. 가인이 얼마나 황당해 했 을까나…. ' 하지만‥ 너무 위험해…. ' 근래 들어 부상을 자주 입는 가인이었다. 다리가 부서진 것도 모자라, 저번 에는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적도 있었고, 나흘 전의 전투에서는 하마터면 목 이 베일 뻔하지 않았는가? 그 일만 생각해도 마리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 몸 을 떨었다. 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분명 가인이 이대로 계속 전투를 했다 간 목숨이 수 백개가 있어도 모자를 것이다. 그것이 마리를 몹시도 걱정스럽 게 만들고 있었다.마리는 가인이 자신의 동생의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았 다. ' 그래도 이렇게 계속 수련을 빼먹는 건 잘못인데…. ' 얼굴을 숙이며 다시 한 숨을 토해내는 마리. 이렇게 가인을 피하는 것도 한 두번이지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나…. 아아… 난 몰라.왜 그랬던 거지? 앞 으로 어떻게 가인의 얼굴을 볼려고. 그렇게 마리가 끙끙 거리며 고민하고 있 을때, 그녀의 방문을 노크하며 들어오는 비영. 마리가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 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 아,아버님. 오셨습니까. " " 그래. 그나저나 이렇게 방 안에 틀어박혀서 뭘 하고 있었던 게냐? 수련하 는 제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 비영이 끌끌거리며 혀를 차자, 마리는 면목없다는듯 고개를 숙였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비영에게 물었다. " …만나‥셨습니까? 가인을‥. " " 물론.네가 평상시에 맨날 가인 가인 하며 노래를 부르길래 어떤 남자일까 한 번 궁금해서 만나보았지. " " 아,아버님---!!! 제가 언제…!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고,비영은 그런 딸의 반응에 고소를 금치 못하 며 말했다. " 어쨋거나 제법이더구나,그 아이. 검을 배운지 이제 3개월 밖에 안되었을 텐데 벌써부터 강격을 사용할 줄 알더군. " " 그,그랬습니까? " 화색을 띄며 대꾸하는 마리. 자신의 제자가 칭찬을 받자 기분이 좋아진 그 녀였다. 마리는 가인의 진척도가 궁금했는지 연신 비영에게 이것 저것을 물 어 보았다. " 가인은 상단 치기를 할 때 잠시 흐름을 끊는 버릇이 있어서 주의하라고 얘기해줬는데 고쳐졌던가요? 그리고 스탭은 왼발부터 나오던가요? 양발을 번갈아 쓰며 페인팅을 주라고 했었는데…. 아, 찌르기를 할 때 시선 처리 는 어떻던가요? 상대의 눈을 주시하라고 했었는데 잘 지켜지던가요? " "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나가보지 그랬느냐…. " 비영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마리는 급히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멈췄 다.그런 딸의 모습에 비영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 그 아이, 벌써 며칠째 하루 왠 종일 도장에서 너를 기다리다 가더구나.… 보다 못해서 오늘은 내가 돌려보냈다만. " 비영의 말에 흠칫 떨리는 마리의 어깨.마리는 고개를 들어 비영을 바라보았 다. 비영은 그런 마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 그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이제 그만 기분을 푸는 것 이 어떻겠느냐? 그렇게 한 가지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가는 더 소중한 것 을 놓치게 되는 법이다. " " ......예…. " 침울히 대답하는 마리. 비영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나머지 고 민은 딸의 몫인 것. 그녀가 알아서 잘 해낼 거라고 믿는 비영이었다. 그렇게 마리의 방을 나설려던 비영은 잠시 생각난 것이 있어, 마리를 돌아보며 말했 다. " 아인이의 목걸이…. 그 아이에게 줬었더냐. " " 예?! …예에. 제가 줬습니다. " 갑작스런 비영의 말에 마리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비영은 그런 마리를 조용 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고, 마리는 기 운이 빠져 털썩 침대에 주저 앉았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책상에 있는 사진 을 바라보았다. 사진에는 아까 가인이 봤던 후계자 소년의 모습이 찍혀 있 었다. 환하게 웃으며 목검을 등에 댄 검은 머리의 미소년. 마리는 그 소년의 이름을 나직히 불렀다. " 아인아…. "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응답할 소년은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한편, 이곳은 피스메이커의 본부. 어두운 방안에서 진 사령관과 닥터, 수정 은 한 가지 사안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사안이란 다름 아닌… " 크라켄(KRAKEN)…이라고요?! "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닥터.그는 연신 믿을 수 없다는듯 진 사령관에게 소리쳤다. " 그 A급 몬스터가 동해안에 출현했다는 말입니까?! " " …목격자들의 얘기에 의하면 크기가 약 11m 가량의 거대한 오징어 였다고 해요. 아직까지 인명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 르겠내요. " 닥터의 말을 받은 이는 진 사령관의 여비서, 민수정 양.수정도 크라켄 이라 는 몬스터의 출현에 내내 얼굴에서 긴장한 빛을 숨기지 못했다. 크라켄이란 바다의 마왕이라고 까지 불리는 거대한 A급 몬스터였다. 예전, 딱 한 번 일 본의 해안에 출현한 적이 있던 그 몬스터는 일본 훗카이도 지방을 거의 쑥대 밭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다행히도 더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아시아 연합의 피스 메이커들에게 격퇴 되었다고 한다. 분명, 그때 크라켄을 섬멸했다고 들 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놈인 걸까…?! 닥터는 신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 하지만 전 여전히 믿을 수가 없군요, 수정 양. A급 몬스터가 삼차원으로 넘어 왔다면 그 공간의 뒤흔들림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로 격렬했을 겁니다. 그러나 와프 입자의 변동에서는 어떠한 A급 게이트 의 발생도 감지하지 못했잖습니까. " " 게이트의 발생은 있었다. " 단호히 말하는 진 사령관. 그의 말에 닥터와 민수정이 그를 돌아보자 진 사 령관은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 미미한 수준이지만 동해안 135구역에서 게이트의 반응이 감지되었지. " " 그건 말 그대로 미미한 수준 아닙니까? 아무리 최근들어 와프 입자 수치 의 변동으로 인한 그 판별법의 신용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수치 변동으로는 제대로 된 몬스터 하나 출현하기 힘듭니다. 하물며 크라켄 같 은 몬스터는…. " " 내가 말한 것은 크라켄이 게이트로 출현했다는 것이 아니다. 크라켄이 출 현했다고 하는 장소에 게이트의 반응이 있었다는 것 뿐이지. 그리고 크라 켄의 출현이 꼭 불가능한 것 만도 아니다. " " ......예? " 진 사령관의 말에 닥터는 안색을 굳혔다.그는 진 사령관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 깨닫고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 …네이티브(Native:原住民)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 ......... " 그 말에 진 사령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침묵할 뿐. 닥터는 그런 진 사 령관의 태도에 흥분한 기색을 가라 앉히며 한 숨을 내쉬었다.결국 확실한 것 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군….그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닥터의 귀로 진 사 령관 특유의 무뚝뚝한 소리가 들려왔다. " 그런 이유로 이번 피스 메이커의 여름 피서지는 동해안이다. " " 예?! "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진 사령관을 돌아보는 닥터. 하지만 진 사령관은 닥터를 보고 있지 않았다. 진 사령관의 말을 받은 이는 그의 옆에 서있던 민 수정이었다.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어머, 그럼 숙소와 차편을 예약하지 않으면… 인원은 몇 명으로 하실 건 가요? " " 무제한. " 성의 없게 답하는 진 사령관. 닥터는 그런 사령관과 수정의 모습에 쓴 웃음 을 지었다. 언제나 그들의 페이스에 말리는 자신이었다. ' 이번… 이라는 말이 계속 맘에 걸리기는 하는데…. ' 그럼 매년있었다는 말인가. 그 피스메이커의 여름 피서라는 것은…. 닥터는 혀를 내둘렀다. 조사 겸 휴가인 셈이로군….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든 그는 진 사령관에게 물었다. " 진 사령관, 그랬다간 수도 쪽의 방어가 비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 사이 에 몬스터가 이 곳으로 습격이라도 해온다면… " " 몬스터는 오지 않는다. " 진 사령관은 단호히 닥터의 말을 끊었다. 그 알 수 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 으로 그를 바라보는 닥터. 진 사령관은 웃고 있었다. " 몬스터는 오지 않는다.내기 해도 좋아. " 그런 근거 없는 진 사령관의 자신감을 뒤로 하며 피스메이커… 동해안으로 여름 휴가 확정. 8월 25일. 오늘은 바로 피스 메이커의 여름 피서 여행날이었다.가인들은 버 스 한대를 렌트해서 타고 가고 있었다. 버스에는 16명이라는 대량의 인원들 이 타고 있었는데, 그 멤버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가인, 유리, 시민, 마리, 진우의 피스 대원 멤버들과 재영, 테레이아, 지연의 학교 멤버들. 그리고 윤 채영 외 3인방인 피스 메이커의 오퍼레이터 멤버들과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 스 양. 기타로는 미연과 하나의 진우 씨네 가족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인원을 통솔하기 위해 민수정 양이 책임자 역을 맡았다. " 승차하신 여러분. 이번에도 저희 블루 섬머 비치 관광버스를 이용해주셔 서 대단히 감사 드립니다.전 여러분과 함께 가게된 버스가이드 민수정이 라고 합니다. " " 오오오오∼!! " 버스 안의 모두가 수정의 소개에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가인은 굳은 표정으로 좌석 앞의 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인은 지금 한 가지 의 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정 씨,그렇게 자기 소개를 하며 분위기를 띄우시는 건 좋은데… ' 어째서 진짜 버스 가이드 옷까지 입고 있는 거지…? ' 수정은 버스 가이드 제복을 갖춰 입은채 마이크까지 들고, 본직이 의심스러 울 정도로 유창히 가이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번 여행을 통솔하 는 사람은 그녀인 것 같았는데… 어째서 저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가인이었다. " 이 버스는 잠시 후에 135구역, <블루 섬머 비치>에 도착하겠습니다. 여러 분, 그때까지 차 안 여행을 천천히 즐겨주십시오. " 가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어제의 일을 회상해 보았다. 언제나 처럼 마리의 도장에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여행 통보를 받은 그였다. 설마 그 피스 메이커에서 자신들에게 이렇게 휴가를 보내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는데…. 하지만‥ 이거… 괜찮을려나? 여행을 가라고 하니 기분이야 좋다 만… 그 사이에 몬스터라도 습격해오면 어쩌려고 그러지? 뭐, 본부에서 괜 찮다고 하는 걸로 봐서는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것 같지만…. " 오른쪽을 봐주십시요. 오른쪽에 보이는 저 기암괴석이 <추암 촛대 바위> 라고 합니다.추암의 일출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바위로서,각도만 잘 잡 으신다면 촛대 바위 끄트머리에 촛불 처럼 매달리는 해를 목격하실 수도 있습니다. " ' 관광 명소 소개까지…. ' 가인은 철저한 수정의 관광 가이드에 혀를 내둘렀다. 그녀의 가이드는 계속 되고 있었다. 한편, 그런 가인의 뒷 좌석 쪽에는 재영과 테레이아가 앉아있 었다. 재영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싱글 벙글이었다.왜냐하면 버스 안 에 널린 것이 미녀들이었기 때문이다. ' 오오… 저 버스가이드 누님도 멋지고, 마리 선배에 민체스터 양까지! 거 기다 저쪽에 계신 여인 분들은 분명 가인의 병문안을 오셨던 분들인데…! 캐,캡이다! 시민 씨에 유리까지! 아아∼이 얼마나 호화스러운 멤버인가∼ ' 가인의 여행에 따라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재영이었다. 사실, 재영과 테레이아,그리고 지연을 위시한 학교 멤버가 이 여행에 동참하게 된 것은 지 연의 가정 방문에 의해서였다. 원래는 방학 초반 부터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 해야했던 그녀지만,미루고 미루다가 어제 8월 24일이 되어서야 담임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마침 가인의 집에 가니 언제나 처럼 테레이아와 재영 도 있고 해서 지연은 쾌재를 부르며 그들의 가정 방문까지 그 자리에서 해치 워버릴려고 했다.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가인의 여행 얘기가 나왔고,시민 이 지연과 재영, 테레이아에게 여행에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를 해왔 던 것이다. 그때에 지연과 시민이 나눴던 대화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 식비는? - 음식은 저희가 머물 곳에서 다 준다고 하던데요. - 숙박비는? - 이미 저희 쪽에서 대금을 다 치뤘어요. 대인원인지라 다섯 명 정도 더 받 아줄 수 있다고 주인장이 말씀하셔서. - 그러니까… 공짜…? - 예, 공짜. 그 한 마디에 더 생각할 것 없이 여행에 동참을 표한 지연. 술,담배 다음으 로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No Money'. 공짜였던 것이다. 지연이 여지껏 노쳐 녀인 이유에는 결혼 지참금을 공짜로 해주는 신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 도 있다. 하여간, 학교 멤버가 이 여행에 참가하게 된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 였다. 재영은 헤벌쭉 웃으며 생각했다. ' 그나저나 역시 부자 동네라니까. 26구역은…. 여름 피서로 계를 얼마나 들었길래 우리까지 공짜로 여행을 보내준다는 거야? 그것도 블루 섬머 비 치라니! 거기 꽤 비싸기로 유명한 피서지인데∼ ' 재영들은 단순히, 이번 여행이 26구역에 사는 이웃들끼리의 계 모임 여행으 로 알고 있었다. 뭐, 틀린 말도 아닌 것이 피스 메이커의 관계자들은 모두가 28구역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실제로도 이웃인 것이다. 어쨋든, 뭐‥ 공짜로 보내준다는데 인간 박재영이 거절할소냐! 더구나 이런 절호의 기회를!! 사방 이 미녀들 뿐이니 이건 말 그대로 환상의 파라다이스였다. ' 좋아! 하고만다! 17세 박재영! 이번 여름에야 말로!! ' 뭘 하고만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합만은 칭찬해주자. 한편 재영의 맞은 편 좌석에 앉아있던 테레이아와 유리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 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뻔히 보이는 구만…. 어쨋든,그녀 들은 긴장된 눈으로 주위의 멤버들을 살피고 있었다. ' 불안해. ' 그렇다. 불안했다. 여자가 많아도 너무 많은 것이다! 거기다 저 여자들 중 53% 이상이 가인과 썸싱이 있었던 이들이었다. 참고로 53%라는 수치는 7/13 ×100 이라는 확률법에 의거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 …당분간 휴전하는게 어때? 적이 너무 많아. " " 동의하겠어. " 주위의 여성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협약을 맺는 테레이아와 유리. 지금은 서 로의 힘을 합쳐야 할때였다. 한편, 이번 여행에 특별히 휴가 겸 동참할 수 있었던 윤채영. 그녀는 속으 로 연신 '나이스!'를 외치고 있었다. 운 좋게도 자신이 휴가를 받은 날이 가 인들의 여행 날짜와 겹쳤기에 무리 없이 여행에 동참할 수 있었던 그녀였다. 그래! 이건 찬스야! 하늘도 날 돕고 있다는 표시라고! 어제 밤은 너무도 흥 분되어 잠을 이루지 못한 그녀였다. 그런데… " …너희들은 왜 따라온 거지? " 채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자신의 옆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오퍼레이터 부하 들을 노려보았다. 채영의 직속 부하들인 그녀들(이하 3인방으로 명명)은 그 런 치프의 으름장에도 아랑곳 없이 깔깔거리며 대꾸했다. " 으응∼ 꼭 어린 아이를 강가에 던져둔 것 같은 느낌이라서 안심이 되어 야 말이죠∼ " " 그래요! 호기심은 사명감을 이겨내는 법이라구! " " 저희만 믿어요,치프! 반드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묘안을 가르쳐드릴테 니까요∼ " 3인방은 그렇게 말하며 채영을 끌어당겨 귓속 말로 속닥이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여름이란 말이죠. 여름! 여름의 포인트는 뭐라고 생각해요? " " 아,나 그거 알아! 수영복이야! 수영복! " " 맞았어! 내가 그럴 줄 알고 치프를 위해 특별히 바텀 스타일 Gstring비키 니를 사왔지!! " " 뭐야,그게? " " 끈 팬티∼ " " 꺄아∼!! 대담해!! " " 하지만 수영복만 입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 그런 대담한 수영복을 입은 만큼 대담한 유혹이 필요한 법이라구! " " 예를 들어서∼? " " 흠, 고전적이지만 오일(Oil)로 유혹을 한다든지… 아니면 수영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자연스러운 스킨 쉽을 유도한다던가…. " 그런 3인방의 말을 듣던 채영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 바,바보 자식들…! 그,그런 거 할 수 있을 거 같냐?! " 라고 하면서도 열심히 3인방의 말을 포켓 수첩에 받아적는 채영이었다.(…) 어쨋든,승부는 비키니와 오일…인가? 그리고 그런 채영들의 뒷 자리에서는 시민과 미연이 서로 웃으며 화목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시민은 방긋 웃으며 미연에게 말했다. " 후훗‥매일 정신 없이 집안 일만 하다가 모처럼 휴가를 나오니 기분이 좋 내요. " " 어머, 시민 씨도 그래요? 저도 그래요! 하나 돌봐야되지‥ 그러면서 장도 보고, 요리도 해야되지‥그 큰 집을 혼자 청소하는 건 또 얼마나 힘이 드 는데요! " " 그런가요? 전 그래도 가인 씨와 유리 양이 도와줘서 힘든 줄은 모르겠던 데…. 아,미연 씨! 그럼 다음부터 대청소할 때는 서로 같이 도와주는 건 어떨까요? 그럼 훨씬 빨리 편하게 끝낼 수 있잖아요. " " 어머, 좋내요∼ 그거! " 미연은 손뼉을 치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시민에게 말했다. " …이번 여행‥ 다들 미혼이시고 혼자만 기혼인지라 좀 부담스러웠는데,시 민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 " 저기… 저도 미혼인데요…. " 미연의 말에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 다시 앞자리의 가인에게로 돌아와 보자.가인의 옆에는 한 검은 머리 의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그녀는 다름 아닌 피스 메이커의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 양이었다. 그녀는 기름 때 묻은 연구복과 뱅뱅이 안경을 벗고 미소녀 모드로 변신해 있었다. " 헤에∼ " 수정과 가인에 의해 여행에 동참한 그녀는 왠지 흥분한 얼굴로 창 가에 비 치는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가보는 여름 여행에 기분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한 여행이라고는 13살 때 우주 개 발 본부의 팀원으로 스페이스 셔틀을 탔던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렇게 여 러 명이서 바다에 놀러간다든지 하는 것은 그녀의 17년 인생 중 최초로 해 보는 것이었다. 가인은 하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며 그런 시더에게 물었다. " 이런 여행 처음이지,시더? " " 으응!! 아아∼ 나 이렇게 여러 명이서 하는 여행은 처음이야! 흥분돼! 그 래도 처음이라서 실수나 하지 않을까 걱정인데… " 괜히 분위기 파악 못하고 행여나 다른 이들의 흥을 깨버릴까봐 조심스러운 시더였다. 그녀 답지 않게 긴장한 모습에 가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걱정마. 내가 옆에서 도와줄테니까. " " 엣?! 그,그래도 그러면 가인에게 폐가 되잖아…. " " 뭘…, 나 다리 다쳤을 때 옆에서 간호해준 게 누군데 그래? 이 정도 폐 라면 언제든지 끼치라구. " " 그,그래도∼ " 시더는 의미 없는 손가락 장난을 하며 쑥스러워했다.가인은 그런 시더의 손 을 잡아주며 윙크했다. " 이번 휴가는 저에게 맡기시죠, 선생님. " " 으,으응…. " 결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더. 와아아…뜻 밖의 행운이다아아…. 그때 가인의 무릎에 앉아있던 하나는 계속 시더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봤던 얼굴인데…. 으응, 어디선가…. 그러다 '짝'손뼉을 치는 하나. 지금껏 시더가 안경을 벗고 있었던지라 그녀를 못 알아봤던 것이다. " 아, 코마네치 선생님! " " ......... " 시더는 들뜨던 마음이 깊은 좌절감과 함께 수렁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그 녀는 깊은 자기 혐오에 빠져 앞 좌석에 머리를 묻으며 중얼중얼거렸다. 코마 네치 선생님.코마네치 선생님.코마네치 선생님. 코마네치…. 그런 시더의 모 습에 쓴 웃음을 짓는 가인. 그렇게 창피한 걸까…? 가인은 시더에게서 눈을 돌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가인에 게서 얼굴을 돌린채 무표정하게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 간신히 마리 선배를 만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래서는 말을 붙일 수 도 없잖아…. 하아…. ' 여행 아침 날, 집합소에 모인 마리를 보았을 때 반가움으로 마음이 들떴던 가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일에 대한 화가 아직도 안 풀렸는지 가인 과 시선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으며 말도 꺼내질 않았다. 아아… 어떻게든 마 리 선배와 화해해야 할텐데…. 속으로 끙끙 거리며 고민하는 가인.그러나 고 민하고 있던 것은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 …도저히 가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 그녀의 화는 풀어진지 오래였다. 도리어 가인의 뺨을 때리고 소리친 것이 마음에 걸려 어서 빨리 그에게 사과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질 않 는 것이다. 더구나 너무 긴장해서 얼굴 표정까지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 꼭 화를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안돼…. 이대로는…. 어떻게든 가인과 화해해 야 할텐데…. 역시나 속으로 끙끙 거리며 고민하는 마리였다. 둘 중 하나가 먼저 말을 꺼내면 금방 풀릴 것을…. 아무래도 둘의 사이는 당분간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버스 안의 모두를 맨 앞 좌석에서 둘러보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정진우. 그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 히죽 히죽 웃으며 말 을 건냈다. " …다들 즐거워 보이지 않나요? " " …그보다 어째서 내 옆에 당신이 앉아 있는 거지? " 실핏줄을 띄우며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지연. 저번 운동회 때의 일로 진우에 대한 감정은 최악인 그녀였다. 저기 당신 마누라 있잖아! 그 옆으로 얼른 가버리라고! 휙! 휙! 한편 버스의 앞에서는‥ " 창밖을 봐주십시오. 바다 한가운데 있는 저 섬은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서 금구도인데‥ 지금 여기서 보면 전혀 거북이 같지 않지만 초도항에서 보 면 왜 거북이인지 아시게 될겁니다. 아,그리고 여러분! 5분 뒤면 <블루 서머 비치>에 도착할 예정이오니 짐을 잊어버리지 않게 잘 챙겨주시길 바 랍니다. " 여전히 충실하게 가이드를 하고 있는 수정이었다. 블루 서머 비치에 도착한 가인들. 그들이 머물게 된 곳은 바닷가가 훤히 내 려다 보이는 허브 랜드였다. 이 허브랜드는 2,000여평의 대지에 본관허브shop 과 부속건물(식당 및 기념품 판매점), 야외정원, 민박, 대형주차장으로 이루 어진 허브를 테마로 새롭게 탄생한 곳이었다. 계곡과 산,바다가 어우러져 전 망조차 좋은 것이 특급 호텔 못지 않았다.거기다 이 허브랜드에는 노천탕까 지 갖춰져 있다고 한다! " 우와∼ 대단하다. 대단해∼ " 재영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허브 랜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넓이도 넓이지만 최근에 구조한듯 설비들이 하나 같이 깨끗했다. 분명 철저한 관리 와 위생 점검의 산물이겠지…. " 이거 비싸도 보통 비싼 곳이 아닐텐데…. " 이런 재영의 말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었다. 가인도 눈이 휘둥그래져 유리와 시민을 돌아보며 눈으로 물었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에요? 당황하며 고개를 젓는 그녀들. 우리도 처음이에요…. 그때,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일행들에게로 허브 랜드의 주인장으로 보이는 40대 남자가 다가왔다. "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 정중하게 말하며 90도로 인사를 하는 주인장.그의 뒤에 있던 종업원들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동시에 인사해왔다. 우렁찬 목소리. " 어서 오십쇼∼!! " 뭔가 기합이 들어가도 단단히 들어간 태도들이었다. 그런 부담스런 환영 인 파에 가인들이 주춤거리자, 수정이 방긋 웃으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 자자∼ 어서들 배정 받은 숙소로 가서 짐 풀고 나오세요. 간단히 점심 부 터 먹고 바다로 가야겠죠? " " …예에‥. " 왠지 주눅들은 말투로 대꾸하는 일행들. 그때 가인은 이 넓은 허브 랜드에 손님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리가…. 피서 시즌 이 한창일텐데 이렇게 손님이 없을리가 없는데…. 다른 일행들도 손님이 없 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인지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그 중에서 지연이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던 수정에게 살며시 물었다. " 저기… 여기 손님이 우리 밖에 없나봐요…? " " 예. 저희 밖에 없어요. 내일까지 이 곳, 저희가 통째로 빌렸거든요. " 태연하게 대꾸하는 수정. 마무리로 미소까지 지어준다. 지연들은 다시 한번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다. 통째로 빌려?!! 여길---?!! ' 피스메이커의 힘이로군…. ' ' 역시 피스메이커…! ' 오늘,다시 한번 피스 메이커의 힘을 깨달을 수 있었던 피스 관계자들이었다. 전시보다 이런 상황에서 더 피스 메이커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니…. 가인 은 뭔가 복잡한 기분이 되어 중얼거렸다. " 이거… 공권력 남용…. " 가인과 재영, 진우는 블루 서머 비치의 수영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푸른 바 다에서 물장구를 치며 웃는 사람들. 넓은 백사장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사람 들. 8월 말의 바닷가는 피서의 분위기가 최고조로 올라 사람들로 붐비고 있 었다.자신들의 곁을 지나가는 비키니의 여성들을 보며 진우와 재영이 휘파람 을 불었다. " 휘우∼ 좋구나∼ 좋아∼ 역시 여름은 멋진 계절이야∼ " " 오오오오오∼ 이 여름의 열기! 뜨겁습니다… 뜨거워요! " 히죽 히죽 웃으며 뭔가 흐뭇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진우와 재영.그런 둘을 바라보며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거,참… 영감탱이들 같은 소리나 하고 있고…. ' 뭐‥ 좋기는 좋구나…. ' 가인도 남자는 남자였는지라 가슴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그는 미 소를 지은채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손목에 찬 무전기를 내려 다 보았다. 시간은 벌써 10분이 흘러가고 있었다. " 많이 늦네… 여자들…. " 방을 잡고, 짐을 푼 가인들은 간단히 점심 식사를 마치고 수영장으로 향했 다. 그리고 수영복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에서 헤어진 그들. 남자들 쪽이야 속사포로 갈아입고 나와 있었지만, 여자들 쪽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이 었다. 뭐,수영복을 갈아입는 것에도 남녀의 차이가 있는 걸까나…? 그때,재 영이 휘둥그래 눈을 뜨며 가인에게 말했다. " 야아, 그나저나 가인이 너 몸 많이 좋아졌다? " " 어‥ 그래…? " 가인은 뒷 머리를 긁적이며 재영의 말을 받았다. 하긴,피스 메이커가 된 후 훈련을 얼마나 받았는데…. 몸이 좋아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 겠지.가 인의 몸은 그 굴곡이 발달되어 있었고,어느 정도 가슴선과 복근이 갈라져 있 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우락부락한 근육이라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A.I 슈츠의 연동 작용으로 2배 이상 상승한 힘 덕분에 따로 근육 트레이닝 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붙은 실용적인 근육. 한 마 디로 미끈하게 빠졌다고 해야하나?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번 씩 돌아볼 만한 가인의 몸이었다.그렇게 재영이 부럽다는 눈초리로 가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의 뒤에서 진우가 손가락을 흔들며 웃음을 흘렸다. " 후후후‥ 아직 멀었다, 유가인. 그 정도의 몸으로는 나의 상대가 되지 못 한다! " 그러면서 트렁크 수영 복 위에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어던지는 진우.그러자 그의 발달된 가슴과 이두근, 어깨와 삼두근, 복근이 드러났다. 특히나 저 핏 줄이 드러난 이두박근. 평상시 진우에게 헤드락을 당하던 가인은 마침내 그 고통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바로 저것이었군! 저 이두박근이 그 지옥 헤드락의 정체였던 거야! 어쨋든, 진우의 체격 답지않게 그 건장한 몸에 가 인과 재영은 신음을 흘렸다. 화,확실히 저거‥ 굉장하기는 한데…. " 어머, 징그럽다,얘…. 저기 저 남자 좀 봐. " " 보디 빌더인가? 되게 무식하게 생겼네∼ " - 쿵! 지나가던 비키니의 여성들이 던지는 한 마디의 말들.그 바람에 모래가 되어 바람따라 휘날려 가는 진우였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 모래 위에 낙서를 하며 중얼거렸다. 지,징그럽다고… 무식하다니… 그런…나,남자의 매력은…. 남자 의 매력은 근육인 것을…. 그런 진우의 모습에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하 긴 남자들이야 근육에 대한 동경이 있다지만, 여자들은 그렇게 근육에 대한 집착이 없었던 것이다. 터미네이터 같은 근육남의 시대는 이미 흘러간지 오 래.그런 세월의 흐름을 몸소 느끼며 한 숨을 내쉬는 세 남자들이었다. (정확 히는 진우 혼자 뿐이었지만) 그때, 그런 그들을 부르며 한 무리의 여자들이 등장했다. " 많이 기다렸죠,가인 씨? " " 어? 채영 씨? " 채영의 목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돌리는 가인.그리고 세 남자들의 동공은 확 대 되었다. 그들이 바라본 곳에는 채영과 3인방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다 가오고 있었던 것이다.채영은 그 버스 안에서 얘기하던 Gstring 스타일의 비 키니(끈팬티)는 심각한 고뇌 끝에 결국 논외시키고 홀터넥 원피스 계열의 검 은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도 가인을 자극시키기에는 충 분했다.움푹 파인 등과 목 뒤로 묶인 끈이 묘하게도 어른으로써의 매력을 풍 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채영의 뒤로는 3인방들이 한 세트로 보이는듯한 원피스 계열의 수영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 또한 만만치 않게 자극적이 었다.가인은 생각했다. 혹시 피스메이커 오퍼레이터들의 선출 기준은 미모였 던 게 아닐까…. " …가인 씨? 저기‥왜 그래요? 그렇게 계속 쳐다보기만 하고‥? " 쑥스러운 표정으로 가인에게 묻는 채영. 아,이런 너무 멍하게 쳐다본 걸까?! 가인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 아,아뇨! 잘 어울리네요, 수영복‥! " " 그래요? (좋아라∼) "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하는 것과는 달리 속으로 빅토리를 그리는 채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뒤에 있는 3인방을 돌아보았다. Gstring스타일을 제의했던 오 퍼레이터는 한 숨을 쉬며 고개를 젓고 있었지만,나머지 2인방은 히죽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채영에게 펴주었다. 일단 초반 대쉬는 성공∼! " 저,저기∼ " 그때 3인방의 뒤에서 주춤 거리며 등장하는 시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가인이 소리쳤다. " 시더, 나왔어? " " 아,으응. 그런데∼ " 시더는 얼굴을 붉히며 3인방의 뒤에서 가인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 다. 그러자 3인방들이 히죽 웃으며 시더의 등을 떠밀어 가인의 앞으로 보내 주었다. " 에이∼ 잘 어울리는 구만, 시더 양! " " 자자∼ 어서 남자들에게 보이라구요! 시더 양의 수영복 모습! " " 꺅∼! " 엉겹결에 떠밀려 가인의 앞에 선 시더. 그녀가 입고 있는 수영복도 원피스 계열의 수영복이었는데, 단순한 선들을 연결시켜 화려한 이미지로 변화시킨 디자인과 3도의 컬러풀한 색감 처리로 프린트의 느낌을 주며 앞 전면과 엉덩 이 한쪽으로 들어간 문양이 시원함과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었다.문양의 이중 으로 들어간 선처리가 돋보이는 수영복이었다. 가인은 활짝 웃으며 시더에게 말했다. " 이야∼ 예쁘다,시더! 잘 어울리는데! " " 으,으응? 그래?! "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시더. 그녀는 가인의 반응이 좋자 평상시의 태도로 돌아가 웃으며 말했다. " 전문선수용 원단으로 개발된 최강의 함염소성 Lycra(라이크라)와 폴리에 스텔, Micro-fiber(마이크로 화이버)로 이루어진 Rally-011과 같은 최첨 단 소재를 사용한 수영복이야. 인체공학적 체형에 맞는 디자인을 적용해 수영복이 인체와 하나가 되도록 설계했지! " " .........그거‥네 발명품이었던 거야‥?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여,역시 특이하다니깐 시더 는…. 그때, 그런 가인의 뒤에서 홍조를 띈 채 여인들을 바라보던 재영은 가 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다. 좋아! 내가 원한 것은 바로 이 런 것이었어! 그는 뒤에 나올 다른 여인들에 대한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다음 여인들의 출현 또한 그런 재영의 기대 를 저버리지 않았다. " 후훗, 가인‥. 나 나왔어. " " 오빠‥. " 도발적인 웃음을 흘리며 나오는 테레이아와 양 볼을 붉히며 가인의 시선을 피하는 유리.가인과 재영은 멍 하니 그런 테레이아와 유리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테레이아의 수영복은 푸른 버터 플라이 비키니였는데, 그녀의 하얀 살결과 더불어 비키니가 너무도 선명히 부각되었기에 왠지 모르게 에로틱 했 던 것이다.거기다 에메랄드 빛 머리를 늘어뜨린 초절정 미소녀의 모습이라니! 그 순간, 가인들의 근처를 지나가던 남자들은 발걸음을 멈춘채 테레이아를 입을 벌리며 바라보기 시작했다.그런 그들의 반응에 만족한 테레이아는 살며 시 웃으며 가인의 팔짱을 꼈다. " 어때? 내 수영복 모습? " " …머,멋져…. "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며 신음을 흘리는 가인. 테레이아는 자신 을 노려보는 채영과 시더,유리의 시선에 보란듯이 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 대며 소근거렸다. " 훗…. 내 이런 모습… 가인에게만 보여주고 싶었지만…용서해줄 수 있지? " " ......에? 으,으응‥ " 뭘 용서해달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대담한 테레이아의 태도에 가인은 얼굴 이 달아올라 버벅거리며 대답했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한 유리가 가인의 반대편 팔짱을 끼며 골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 오빠, 난? " " …유,유리도 귀여워. "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가인. 유리의 수영복은 레이스가 달린 분홍 색 원피스 수영복이었다. 유리의 맘 같아서는 테레이아 따윈 상대도 안 되는 초대담무쌍한 비키니를 입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녀에게 맞는 사이즈는 존 재하지 않았다. 결국, 어린이 수영복을 입어야만 했던 유리.가인에게서 귀엽 다는 말을 들은 유리는 낙담하고 있었다. ' 우우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 우울한 유리의 속 마음. 하지만 어느새 모여든 건지 가인들의 주위로 늘어 선 남자 구경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 귀,귀엽다아아∼∼ " 분홍색 수영복을 입고 큰 눈을 깜빡이는 유리의 모습은 로리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남자들. 귀여움으로도 강 하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유리였다. " 어머, 벌써 다들 나와 있었네요? " 그리고 드디어 가인이 그렇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녀, 한시민의 등장.가 인은 떨리는 가슴을 참아내며 시민을 바라보았다. 시,시민 씨의 수영복 모습! 과,과연∼∼∼!! " 우오오오오오!! " 주위 남자 구경꾼들의 환호 소리. 어느새 그들의 선두에 서있던 재영도 남 자들과 한 마음이 되어 소리지르고 있었다.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시민을 바라보는 가인. 시민의 수영복은 트라이앵글 타입의 비키니였다.더구 나 그 비키니에 그려져 있던 것은 표범 무늬!! 시민의 풍만한 가슴을 은밀 하게 감싼듯한 표범 무늬였던 것이다!! 저,저 시민 씨가 표범 무늬라니!! 뜻 밖이다! 시민의 청초하면서도 그 육감적인 차림새에 가인은 홀린듯한 표정으 로 중얼거렸다. " 화,환상적이에요‥ 시민 씨…. " 그것은 시민을 바라보는 모든 남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테레이아는 이를 갈며 패배감에 치를 떨었다. " …여,역시 강해…. " 시더와 채영,유리도 한 숨을 내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들의 반응에 시민은 두 눈을 깜빡이며 의아해했고, 시민의 뒤에서는 민수정이 살며시 미 소지으며 손으로 브이 사인을 짓고 있었다.시민의 섹시도+100의 수영복을 코 디해줬던 것은 다름 아닌 수정,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 어라? 우리가 가장 늦게 나온 건가? " 그렇게 말하며 나오는 이들은 하지연과 성마리. 마지막으로 나온 그녀들은 앞전의 여인들과는 달리 평범한 디자인의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모 두는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냐하면… ' 크,크다…!! ' 그녀들의 가슴은 현 여자들 중 최고의 크기를 자랑했던 것이다.가인의 옆에 있던 진우가 참지 못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 휘익∼!! 주,죽인다∼!! " " ......뭐가 죽인다고요? " 그런 진우의 뒤로 떠오르는 검은 그림자. 바로 하나를 품에 안고 있는 미연 이었다. 미연은 웃고 있었지만, 그 이마에는 가는 실핏줄이 돋아있었다.진우 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아,아니… 그게‥!! ............주,죽여주십시오…라고‥. " 약한 남자,그의 이름은 정진우. 한편 가인과 남자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 며 전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지연 선생님이야 글래머라는 것은 알고 있었 지만 마리 선배의 가슴은 저렇게 크지 않았었는데…?! 가인과 재영은 마리의 가슴에 한가닥 의구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평상시 마리의 교복 위로 보 이던 그녀의 가슴은 작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로 크지도 않았던 것이다! 재영 의 눈에 의하면 지금 마리의 가슴은 92cm E컵이었다.(뭐냐? 이 자식은…) 마 리는 자신에게 남자들의 시선이 쏠려 있자 쑥스러움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 다. 결국, 의문을 참지 못한 가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 마,마리 선배… 그거 어떻게 된…? " 차마 가슴이라고 얘기하지는 못하는 가인.그런 그가 한 질문의 뜻을 알아들 은 건지 마리는 자신의 가슴을 슬쩍 바라본 후 담담하게 대답했다. " …평상시 생활할 때는 붕대로 묶고 다녔다. " 엑? 부,붕대?! 어째서?!! 그런 그녀의 말에 가인은 어처구니가 없어져 물 었다. " 어,어째서…? " " …검을 쓰는데 거추장스러우니까. " 할 말을 잊는 좌중. 평상시 붕대로 묶고 다녔는데도 그 정도였단 말이지…. 가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마리를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쨋든, 그런 모두의 경악을 뒤로 하며 수영의 시간은 다가왔다. " 하나야, 아빠하고 뭐하고 놀까∼! " " 나 오빠하고 놀거야. " 하면서 가인에게 달려가 모래성 쌓기를 하는 하나. 진우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하나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하,하나야‥어째서! 어째서∼!! " 우우우우우우∼ " 울먹이며 모래 사장을 내리치는 진우. 그래. 딸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결 국은 이렇게 아비의 품을 떠나버리는 게 딸이란 말이지!! 내가 얼마나 애지 중지 널 키웠는데∼!! 그런 진우의 모습을 보다 못한 미연이 쓴 웃음을 지으 며 그의 팔짱을 꼈다. " 자자,여보∼ 하나는 가인 군에게 맡겨두고 모처럼 둘이서 데이트라도 해 요. 모처럼 만이잖아요? 이렇게 해변가에서 데이트라니∼ " " ......하,하지만∼ " 연신 울먹거리는 진우를 무시하며 그를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가버리는 미 연이었다. 가인은 그런 진우 부부의 모습에 식은 땀을 흘리며 하나에게 물 었다. " 하나야‥ 가끔은 아빠하고도 놀아주는게 어떠니‥? " " 하지만 아빠는 엄마의 남편인걸. 내 남편은 오빠니까 오빠하고 놀아야지! " - 와수수‥ 가인이 쌓아올리던 모래성이 단숨에 무너져 내린다.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 니?! 하나야∼!!! 가인은 하나가 한 엄청난 발언에 갑자기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애써 벌려 그녀에게 물었다. " 하,하나야‥? 그게 무슨‥? " " 엄마가 그랬어어. 내 남편은 오빠라고오∼! " 그러면서 찰싹 가인에게 달라붙는 하나.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미연 씨.도대체 어째서 하나에게 그런 말을…. 만약 진우가 지금 하나의 말을 들었더라면 자신은 백사장에 산채로 매장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때,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하나와 모래 장난을 하던 가인을 채영이 불렀다. " 가,가인 씨! " " …채영 씨? 무슨 일이세요? " 채영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가인에게 다가와 뭔가 말을 꺼낼려고 했지만 계 속 주저하고 있었다. 왜 그러시지, 채영 씨? 가인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더 말하기가 곤란해진 채영. 그녀는 자신의 뒤를 돌아 보았다.저편 에서 3인방이 히죽히죽 웃으며 무언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그,그래! 부하들의 응원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말하고야 만다!! 윤채영! 부하들의 믿음 을 저버려선 안돼! 그녀는 마음을 굳히며 자신이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가 인의 앞으로 꺼내 외쳤다. " 서,선 오일 좀 발라주세요…!! " " ......예? " 이것은 바로 버스 안에서 3인방에게 전수받은 오일 공략법! 가인은 엉겹결 에 채영에게서 선 오일을 건내받고 돌 처럼 굳어있었다. 오,오일을 발라달라 고?! 이,이게 그 말로만 듣던 그 백사장에서의 오일 맛사지?!! 가인이 오일 을 든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를 않고 있자,불안해진 채영이 조심스럽게 그에 게 물었다. " 시,싫으세요? " " …아,아뇨‥! 시,싫은 게 아니라… 해,해드릴게요. " 나이스! 가인의 승락에 채영은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며 엄지 손가락을 내 밀었다.의기 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3인방. 드디어 그녀들의 노력 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의 결실을 막아서는 결정 적인 방해물 등장! " 가인…, 그 선 오일… 나에게 먼저 발라주는 게 어때? " 그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바로 테레이아 민체스터의 목 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장소를 돌아보자,그 곳에는 돗자리 밑에 업드 려 있는 테레이아가 있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녀의 비키니 상의가 풀어 져 있었다는 것!! 가인은 얼굴이 시뻘개져 소리쳤다. " 테레이아?!! 수,수영복이…!! " " 으응‥그렇지만 수영복 자국 남기기 싫은걸‥. " 마치 응석부리듯이 가인에게 말하는 테레이아. 저렇게 태연하게 말하니 할 말도 없다. 그런 테레이아의 옆에 있던 유리가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 이거 휴정 협정 위반이잖아…! " " …훗. 협정이란 깨지라고 있는 법. " 테레이아는 간단히 유리에게 대꾸하며 선글래스를 낀 채 가인에게 손짓했다. 아,그 동작에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가? 어서 이리로 와서 자 신의 등에 오일 맛사지를 해달라는 부탁과 유혹, 그리고 도발까지! 그 모든 것이 함축된 손 동작인 것이다! 테레이아는 자신에 찬 미소를 띄우며 편안히 업드려 눈을 감았다. 가인이 반드시 와서 자신의 등에 맛사지를 해줄 거라는 확신을 가진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대로 곧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어 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 아‥ " 자신도 모르게 살짝 신음을 흘리는 테레이아. 오일의 끈적함과 매끄러움 속 에서 두개의 손이 자유자재로 흘러 다니고 있었다.등의 척추 부분을 따라 움 직이다가 허리를 가볍게 조인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면서 강렬하게 어깨죽지 를 안아올리는 손바닥! 테레이아는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가인‥! 좋아.바로 그렇게…! 나‥몰랐어. 너에게 이런 화끈한 면이 있었을 줄은…! " 으음… " 테레이아는 기분 좋게 신음을 흘렸다.그 손길은 다시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 고 있었다. 마치 엉덩이까지 맛사지해줄 기세였다. 테레이아는 얼굴을 붉히 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거,거기는 안돼…. 가인…. 그,그만…! 테레이아는 너무도 능수능란한 손의 움직임을 참지 못하고 뒤에 있을 가인을 돌아보았다. " 가인‥ 자,잠깐......엑- " 하지만 그녀의 등에서 오일을 발라주던 이는 가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 지껏 누가?! 테레이아에게 오일 맛사지를 해준 이는 다름 아닌 박재영. 바 로 그였던 것이다! 재영은 상쾌하게 이빨을 번쩍이며 테레이아에게 웃어 보 였다. " 민체스터 양, 맛사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 " 크오오오오오!! "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드려 맞고 바다에 매장당한 재영. 가인은 그런 북새통 사이에 이미 그들을 빠져 나와 유유히 매점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 아아… 간신히 빠져나왔네…. " 한숨을 내쉬는 가인. 그는 근처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해변가를 걷고 있었다. 역시나 이 멤버로 여행을 온 것은 무리가 있었다. 아직 여행의 반도 지나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이러면 모 처럼 바닷가 까지 여행 온 보람이 없는데…나,참!(그게 다 네 놈때문이다….) 자신이 모든일의 원흉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가인이었다. " …어? " 그때 저편의 바닷가에서 물에 들어갈려고 하는 시더를 발견한 가인.그는 그 녀를 부르며 시더에게 다가갔다. " 시더∼ 뭐하고 있어? " 발목까지 물에 담근채 고심한 표정으로 바닷물을 바라보고 있던 시더. 그녀 는 갑작스런 가인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 응? 아,아무 것도…! " " 물에 들어가려면 빨리 들어가지 왜 그러고 서 있는 거야? " " 아,하하∼ 뭐, 그냥∼ " 가인이 묻자 시더는 어설프게 웃으며 예의 손가락 장난을 했다.수영복을 입 고 이렇게 바다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평상시 어두운 방 안에서 뱅 뱅이 안경을 쓰며 연구를 하는 시더가 그녀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았다.가인은 시더가 계속 대답을 얼버무리며 딴 짓을 하자, 뭔가를 알아챈 듯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 혹시… 수영 못하는 거야? " " 시,실례내,정말!! 못하는 게 아니라 배운 적이 없는 것 뿐이야! 뭐, 언제 이렇게 바다에 와 봤어야지…. " 가인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듯 발끈하며 소리치다가 다시 뒷 말을 흐리는 시 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뒷 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 뭐야,그럼∼ 진작에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좋아! 그럼 내가 가르쳐 줄까? " " 에‥ 지,진짜∼∼?! " " 내가 버스에서 도와주겠다고 했었잖아. 그리고 이래뵈도 나 수영 잘 한다 구. " " 으,으응∼ 그,그럼 부탁해 볼까나∼ " 얼굴을 붉히며 생글 웃음짓는 시더. 수영… 가인이 가르쳐준다고….뭔가 버 스에서도 그렇고 지금 바닷가에서도 그렇고…. 계속 가인과 썸싱 거리가 생 기는 시더였다. 와… 뜻 밖의 행운이다아아∼ " ......오빠, 나도‥! " 그때, 그런 가인과 시더의 뒤로 유리가 나타나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가인 과 시더는 쓴 웃음을 지으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왜 조용한가 했다…. 가인은 가볍게 웃으며 유리에게 물었다. " 유리야, 수영 못 해? " " ......유감스럽게도. " " 흐음. 뜻 밖이네. 유리는 수영 잘할 것 같았는데…. 좋아! 그럼 다 같이 배워보자고! 열심히 가르쳐줄테니까! " 그렇게 해서 가인에게 수영 교습을 받게된 시더와 유리.가인은 우선 시더에 게 자신의 어깨를 짚게 한 다음, 가슴까지 오르는 물 속으로 이끌었다. 시더 는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지자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뭐,뭐야?! 이 느 낌은?!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바다 경험이 전무한 시더로써는 짧은 견식 상 바다물과 목욕물을 비교해보며 놀랄수 밖에 없었다. 차가운 것도 차가운 것이었지만 바닷물의 부력과 파도에 몸이 계속 떠밀리는 것이 영 불안했다. 시더는 자신도 모르게 앞의 가인을 끌어 안았다. " 시,시더…?! " " 아,미‥미안∼∼!! " 하고 소리치면서도 떨어지질 못하는 시더.그것을 보고 있던 유리의 눈이 사 나워지고 있었다. 그런 유리의 기색을 눈치챈 가인이 쓴 웃음을 지으며 시더 의 손을 잡아 연습을 시키기 시작했다. " 자자∼ 내가 손을 잡아줄테니까 물장구를 치는 연습부터 해보자! 내가 살 살 끌어당길테니까 물에 빠지지 않게 앞뒤로 물장구를 쳐 봐! " " 이,이렇게∼? " 그러면서 열심히 가인이 가르쳐준 대로 물장구를 치는 시더. 그래,시더! 잘 한다! 잘 하고 있어! 그렇게 계속…!! - 부글부글부글… " 푸앗…! " 물 속에 가라 앉았다가 기겁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 그녀였다.가인은 당황하 며 시더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 괘,괜찮아? " " 으엑∼!! 물이 짜!! 짠 물이 코로 들어갔어어∼!! " 시더는 염분이 강한 바닷물을 들이키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달 래주며 가인은 의문에 빠져 있었다. 거,참….왜 물장구를 치는데 몸이 물 밑 으로 가라 앉는 거지? 어쨋든 시더는 납득할 수 없다는듯이 타오르는 눈을 가인에게 향하며 소리쳤다. " 가인! 다시 한번 더!! " " 으,으응…. " 그리고 또 다시 '부글 부글', '푸앗!'을 연거푸 반복하는 그녀였다. 시더는 억울하다는듯 물기 젖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소리쳤다. " 말도 안돼! 중력과 부력 상, 저항과 양력 상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왜 안 뜨는 거야! " " ......그런 걸 맥주병이라고들 하지…. " 한 숨을 쉬며 중얼거리는 가인. 결국 전혀 진보가 없는 시더를 보다못한 유 리가 피식 미소를 흘리며 가인에게 다가왔다. " 자,오빠. 그 맥주병은 포기하고 이번에는 날 가르쳐줘. " " 누,누가 맥주병이야∼∼!! " 시더가 항의했지만, 유리는 간단히 무시하며 가인의 손을 잡았다.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유리의 손을 잡아 끌었다. 에휴, 그래. 우선 유리부터 가르쳐 주고 시더의 맥주병을 고쳐주자. 그게 아무래도 빠르겠지? - 부글부글부글… " 푸핫! " 물에 가라앉았다가 허우적거리며 고개를 드는 유리. 가인의 인상이 가볍게 굳어졌다. 켁켁 거리며 기침을 한 유리는 초조한 기색으로 다시 물장구를 치 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하지만 역시나 또 '부글부글'. 가인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생각했다. 맙소사. 시더와 전혀 다를 게 없잖아!! 이유리,그 녀 역시 맥주병이었던 것이다! 뭐, 굳이 시더 때와 다른 점을 한 가지 들자 면 유리는 땅에 발조차 안 닿았기에 익사할 뻔 한 것을 가인이 들어올려주었 다는 것 뿐이었다.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가인에게 안겨 숨을 몰아쉬는 유리.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시더가 헤헹 코웃음을 쳤다. " 거,참∼∼ 누가 맥주병이라고? " " ......... " 할 말이 없는 유리였다. 가인은 그런 둘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물었다. " 시더, 유리…. 튜브를 끼는 게? " " 으응…. " 둘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시민과 수정,미연은 유유히 파라솔 밑에 앉아 레몬 티를 마시고 있었 다. 그녀들의 자태는 주위의 어떤 여자들 보다도 빼어났기에 지나가는 남성 들의 시선을 끊임 없이 붙잡고 있었다. 특히나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채 표범 무늬의 비키니를 입은 시민은 뭇 남성들의 가슴을 주체할 수 없이 울리고 있 는 중이었다. 몇몇 남자들은 그런 그녀들에게 헌팅을 시도할려고도 했었지만 방긋 웃으며 정중히 거절하는 시민의 태도에 그들은 한결 같이 얼굴만 붉히 며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시민은 방긋 웃으며 수 정과 미연에게 수박을 들어올렸다. " 자,수박 하나 씩 드세요. 아, 그리고 저편에 구운 옥수수도 팔던 것 같던 데 좀 사와 볼까요? " " ......그건 다 좋은데, 시민 양‥. 모처럼 막강 수영복을 입은 보람이 전 혀 없잖아요…. " 평상시와 다름 없이 음식 챙기기에 여념 없는 시민의 모습에 수정과 미연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거야 원‥ 피서를 즐기러 온 건지…가사 일을 하러 온 건지…. 그때, 가인들이 있던 백사장에서는 뜻 밖의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그것은 진우와 지연이 가인이 수영하고 있던 것을 보는 것에서 부터 비롯되었다. " 호오라∼ 역시, 나의 제자. 빼어난 솜씨로군. " " 좋아! 역시 담임인 나를 닮은 손색 없는 자유형이다! " 잠시 침묵. 그러다 서로를 돌아보는 진우와 지연. 그들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진우는 히죽 웃으며 지연에게 말했다. " 이봐요,담임 선생님. 가인의 저 몸놀림은 저의 훈련으로 만들어진 것입니 다. 저 힘있는 암 스트로크(arm stroke:팔 동작)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잘 단련된 승모근과 광배근 덕분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모두 다 스승인 저 의 공이라는 겁니다. " " 저 지칠줄 모르는 비트(Beat:다리 동작)와 스태미너는 나의 체육 수업에 충실한 산물인 셈이지.가인은 내가 달아준 산소통을 메고 수영을 하는 것 과 같다고나 할까? 당신…! 어디의 헬스 클럽 관장인지는 모르겠지만 가 인은 나의 학생이야! 끼어들지 말아주었으면 해! " 한 순간 지연이 한 말에 호흡이 멎는 진우.헤,헬스 클럽… 관장…? 헬스 클 럽 관장이라고?!! " 누가 헬스 클럽 관장입니까?!! 이 담탱 씨가! 학교 수업에서 배우면 얼마 나 배운다고 그러는 거야?! 가인의 저 모습은 나와의 훈련으로 단련된 성과 그 자체! 결코 학교 선생 따위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 다,담탱∼?!! 이 무식하게 근육만 키운 마초가!! 그리고 내 교육을 무시 하다니! 아니 나 뿐만이 아니로군. 이건 전 대한민국의 교육자들에 대한 명백한 모욕이다! " 으그그그극!!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둘. 진우는 재밌어졌다는듯 씨익 미소를 지으며 지연에게 소리쳤다. " 꽤나 자신만만하신데… 하지만 그 태도만큼 실력이 받쳐주실까? " " ......수영 경력 10년을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거야…. " 학생 때는 이래뵈도 전국 수영대회 입상까지 든 나다! 지연은 입에 물고 있 던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코웃음을 날렸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지연 과 진우는 백사장의 일행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좋아! 배틀이다!! 수영 시합이다!! " '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데…. ' 서로를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는 일행들. 막 수영을 끝내고 물가로 나온 가 인만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며 눈을 멀뚱 거릴 뿐이었다. 여전히 자신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가인이었다. - 삑! " …양 팀 선수, 정렬해주세요! "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맨 가인이 호루라기를 불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의 앞에서 양쪽으로 대치하듯 줄을 서는 일행들. 우선 가인의 오른쪽은 하지 연을 위시한 테레이아,유리,재영으로 이루어진 학교 팀이었고 왼쪽은 진우를 위시한 마리,시더,채영으로 이루어진 피스메이커 팀이었다.그렇게 팀이 나누 어지자, 심판은 유가인이 맡게 되었다. 그는 배틀을 유발한 간접적인 장본인 이자 일종의 상품(?)이었기에 어느 팀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하지만‥ ' 잘된 일일지도…. ' 오히려 안도하고 있는 가인이었다.그는 하나를 안아올리며 양 팀의 주장,지 연과 진우에게 말했다. " 시합은 저기에 있는 바위를 반환점으로 하여 출발점까지 되돌아오는 것입 니다. 선발은 누구로 하실 건가요? " " 당연히 주장들이 먼저지! "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진우와 지연.그들은 연신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 리고 있었다. 거,참…. 애들도 아니고….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 어올렸다. 진우와 지연은 바다에 몸을 담그며 스타트할 준비를 취했다. 그들 에게서 약 50m 떨어진 곳에는 기이한 바위가 바다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저 바위를 반환하여 먼저 오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진우와 지연은 가인의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 삑! " 시작!! " 가인의 외침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스타트하는 진우와 지연.거센 물살을 헤 치며 앞으로 쑥쑥 나가는 것이 범상치 않은 실력들이었다. 각 팀의 선수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 선생님, 파이팅!! " " 진우 씨, 힘내요!! " 지연은 돌핀 킥(Dolphin Kick)을 차며 세차게 전진했다.전국 입상 3위에 들 은 실력 답게(학생 때지만) 힘찬 접영이었다. 반면,진우는 지연과는 달리 평 범한 자유형이었으나 그녀보다 약간 앞서는 면이 있었다. 자유형이 접영보다 빠른 점도 있었지만, 진우는 응당 수영을 하면서 하는 호흡법 조차 하질 않 았던 것이다. 호흡을 하지 않는 만큼 그 딜레이가 적기에 지연보다 앞서 나 갈 수 있는 그였지만, 100m나 되는 시합에서 사용하기에는 무모한 감이 있는 전법이었다.지연은 이를 갈았다. 뭐야! 폐활량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그 녀의 허리가 한 마리의 돌고래 처럼 파도를 타며 수중으로 튀어올랐다. " 으아∼ 벌써 반환점이야! " 재영이 소리쳤다. 일행의 주위로도 구경꾼들이 모여 그들의 시합을 구경하 고 있었다. 금방 출발한 것 같았는데 그새 50m를 돌파한 지연과 진우였다.그 리고 반환점으로 삼은 바위가 그들의 앞으로 나타났다.여기까지는 우열을 가 리기 힘들게 접전을 벌였던 둘이었기에,반환법에서 그 승부가 정해질지도 몰 랐다. 그리고 180도로 몸을 회전시키며 바위를 차고 상승하는 둘. 손색 없는 롤 오버 턴이었다. ' 마,만만찮은 상대다‥! ' 서로의 실력에 경각심을 느끼는 지연과 진우.하지만 그것도 잠시.곧 그들의 투쟁 본능은 상대의 실력에 거센 반발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젠장,질 수 없 다!! 반환하면서 자유형으로 바꾼 지연과 무호흡법의 진우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골인점으로 향했다. - 삑! 도착을 알리는 가인의 호루라기 소리. 그리고 다음 주자들이 출발했다.누가 이겼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진우와 지연의 도착은 같았다.둘은 백사장에 주 저앉아 숨을 몰아쉬면서도 계속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 제,제법이군,담탱‥! " " 입 만 살은 것은…하아‥하아,아니었군,마초‥! " 어쨋든 그렇게 주장들의 시합이 끝나고, 다음 주자는 테레이아와 마리였다. 테레이아는 능숙한 자유형으로 속력을 내며 마리를 앞서가기 시작했다. ' 훗‥ 영국의 수영을 얕보지 않는 것이 좋아‥! ' 영국 수영 협회의 일원이기도 한 그녀. 처음으로 수영 경기가 개최된 본 고 장의 실력 답게 그 스피드는 발군이었다. 테레이아는 여유만만한 웃음을 흘 리며 뒤에서 오고 있을 마리에게 코 웃음을 날렸다. 성마리. 당신은 내 적수 가 되지 못하는 군요,후후…. " 아앗?!! " 그러나 시합을 관람하던 가인들에게서 터져나온 감탄성.테레이아에게 뒤쳐지 던 마리가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따라 붙기 시작한 것이다.마리의 자유형에는 특별한 뭔가는 없었지만, 힘이 있었다. …그렇다! 바로 체력!! 그리고 근력에 서 테레이아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시합을 보던 재영이 감탄하 며 소리쳤다. " 역시 검도 소녀!! " " …전혀 상관 없잖아. " 옆에 있던 유리의 냉정한 중얼거림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반환점을 돌아 골인하는 테레이아와 마리.압도적인 체력으로 기술의 테레이아를 압도한 마리 였다. 여기서는 마리를 칭찬해줘야 했다. 그리고 다음 주자들은…!! " ......... " 시더와 유리. 바로 그녀들이었다. 그녀들은 사이좋게 튜브를 낀채 출발했다. 그러나… - 쏴아아 " 꺄아! " - 쏴아아 " 꺄아! " 파도가 한번 일어날 때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더와 유리였다. 그녀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던 구경꾼들의 이마에서 한줄기 식은땀들이 흘러내리기 시 작했다. 그렇게 앞으로 전진하다가 파도에 떠밀리기를 수십 번 반복. 결국 보다 못한 가인이 호루라기를 불며 소리쳤다. - 삑! " 무승부! " 지연 팀과 진우 팀의 무승부를 선언하는 가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마지막 주자였던 재영과 채영이 서로 를 돌아보며 우울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 …우리의 등장은 없는 겁니까…. " 물론 그들의 등장은 없었다. " 아아∼ 피곤해. " 해수욕을 끝내고 허브 랜드로 돌아온 일행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그냥 수영을 해도 피곤한 것을 왠 말도 안되는 시합에 말려들어 혹사만 당하 다가 온 것이다. 정작 그 수영 시합을 주선했던 지연과 진우는 멀쩡하게 팔 짱을 낀 채, 주저 앉아 있는 가인들에게 소리쳤다. " 녀석들, 체력이 약하다! " " ......우리가 약한게 아니라 그 쪽이 무식하게 강한 거라구요…. " 툴툴 거리며 중얼거린 가인. 하지만 그 댓가는 진우의 목 조르기와 지연의 바디 블로우 콤보였다. 아마도 '무식'이라는 단어가 그들의 신경을 건드렸나 보다. 그렇게 퍼져 있는 이들에게 수정이 방에서 목욕 도구를 가져오며 말했 다. " 자자∼ 수영도 했고, 그럼 다음은 온천이겠죠? " " 에에---?! " 온천이라는 말에 서로를 돌아보는 가인들. 아, 맞아. 이 허브랜드에는 노천 탕도 있다고 했었지? 바닷가 근처의 산 기슭에 지은 이 허브 랜드는 천연 온 천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그래….온천. 온천이란 말이지∼!! 가인의 뒤에 있던 재영과 진우가 서로를 돌아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 서,설마…! 그것?! " " 하,하하하∼ 호,혼욕일수도…. " 나름대로 두근 거리는 가슴으로 기대를 하는 그들. 가인도 왠지 그 말에 솔 깃해져 얼굴을 붉혔다. 에,에이…. 거,참.그럴리가 없잖아∼ 혼욕이라니! 하, 하하하∼ 그래. 그럴리가 없어.여기는 자체 검열 강경 보수주의의 통일 한국 이라고. 절대로 혼욕일리가 없잖아. 그래. 혼욕일리 없어. 하,하지만 그래도 만일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으니까. 후,후후후‥ 그렇게 얼굴을 붉히며 히죽 거리는 세 남자들.여성들은 그런 그들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 볼 뿐이었다.그 때,시민이 일행에게 웃으며 말했다. " 아, 그럼 저는 근처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장이라도 봐올게요. " " 에? 시민 씨는 온천에 안 가실 거에요? 저녁 식사는 여기서 다 준비해준 다던데…. " 가인이 그녀의 말에 반색을 하며 묻자,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 예에‥. 전 온천은 그렇게 좋아하질 않아서….그리고 이런 여행지일 수록 음식에 더더욱 신경을 써서 먹어야 되는 법이에요. 사먹는 것은 좋지 않 아요. " " 그래도…. " 섭섭한 기색으로 중얼거리는 가인. 아, 절대 혼욕이라거나 시민 씨의 몸을 볼 수 없어졌다고 해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절대!! 그런 가인의 모습에 시민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 가인 씨에게 맛있는 것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후훗,좀 허락해주세요.예? " " 예? 아,아뇨. 그런! 허,허락이라뇨! 다녀오세요! " 시민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손을 휘젓는 가인. 아, 내가 이런 말할 군번은 아니지만… 금방 시민 씨… 괴,굉장히 귀여웠어∼ 뭔가 응석 부리듯 이 말하는 시민의 모습에 가인은 마음이 떨렸다. 그렇게 시민은 서둘러 일행 에게 손을 흔들며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그럼 다들 온천욕 잘하세요∼ " " 예, 시민 씨도 장 잘봐요! " 마주 손을 흔들며 온천탕으로 향하는 일행들. 하지만 가인은 방으로 향하는 시민의 뒷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민 씨, 왠지… 지금 서둘러 뭔가를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가인은 뒷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 …기분 탓인가…? " " 오빠, 온천 안가? " " 아,으응…. 가야지‥. " 가인이 또 시민만 보고 있자, 뿔이 난 표정으로 유리가 가인의 팔을 잡아끌 었다. 가인은 잠시 시민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 는 이유 모를 한 숨을 내쉬고서 일행의 뒤를 따라 온천으로 향했다. " …쳇. 실망이다. 실망이야…. " "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놓고서 말이야. 매너가 아니로군. 흠…. " 탈의실에서 투덜거리며 수영복을 벗는 재영과 진우의 말에 가인은 쓴 웃음 을 지었다. 나,참…. 기대는 자기들이 멋대로 해놓고서는…. 혹시나 혼욕이 아닐까 하며 기대한 그들이었지만, 불행히도(‥) 노천탕은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진우와 재영은 출입구에서부터 탈의실 에 오는 동안 내내 투덜거리고만 있었다. 그런 그들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가 인은 진우들에게 소리쳤다. " 아, 그만들 좀 해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녜요! 당연히 혼욕일리가 없지…! " " 쳇, 자기도 기대한 주제에…. " " 누가!! " 인상을 찌푸리며 가인은 수영복을 벗었다. 아,진짜. 계속 상대했다간 내가 바보되지. 빨리 온천에나 들어가야겠다. 그때,그렇게 수영복을 벗던 가인을 지켜보던 진우가 히죽 웃으며 그를 불렀다. " 오호라∼ 소년∼ " " …왜,왜요? " " ......큰데? " " .........!! " 진우 씨!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가인은 재빨리 수건으로 아랫도리 를 가리며 붉어진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진우는 전혀 무안해 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양손을 허리 춤에 올리며 당당히 소리쳤다. " 그래도 적어도 남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여자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거 다! 어떠냐,소년?! 나의 베이비를 감상한 소감은?! " " ......그냥 죽어버려요. " 냉정한 가인의 평이었다. 어쨋든 셋은 탈의실을 나와 온천탕으로 들어갔다. 온천탕은 자연의 멋을 한껏 살리는 분위기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탕은 큰 바 위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근처에는 대나무까지 심어놓은 게 노천이라는 이름 을 무색하지 않게 했다.가인과 재영은 이런 노천탕은 난생 처음이었기에 감 탄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진우는 이미 머리에 수건을 올리 며 탕 깊숙히 몸을 담그고 있었다. " 허어어어∼ 좋구나. 좋아∼ " " ......... " 늙은이 같기는…. 이라는 말이 가인과 재영의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둘은 애써 참아넘겼다. 온천욕 만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하고 싶었던 그들인 것이다.가인은 천천히 온천탕에 발을 담궈 보았다. 따뜻한 열기가 발가락 구 석 구석부터 피부를 뚫고 근육 사이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몸을 다 담그고 나자 가인은 몸이 저릿저릿 떨리는 것을 느끼며 기분좋은 한 숨을 내쉬었다. " 하아∼ 좋다아∼ " " 푸하하핫, 늙은이 같기는∼ " " 누,누가! " 가인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리는 진우였다. 으읏! 댁도 마찬가지라고!! 가인 은 왜 자신이 먼저 그 말을 안 했을까 후회하며 인상을 구겼다. 옆을 돌아보 니 재영도 노곤한 표정으로 바위에 기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가인은 목까지 온천에 담그며 미소지었다. 그래. 늙은이라도 좋다. 이렇게 기분 좋 은 것인 줄은 몰랐다고, 온천! " ......쉿! 다들 조용히! " 그렇게 한동안 온천을 즐기고 있는 가인들에게 순간, 진우가 날카로운 목소 리로 소리치며 입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가인과 재영 은 서로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왜,왜 저러시는 거지, 진우 씨?! 가인은 진우 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 지,진우 씨? 왜 그러는 거에요? " " 잘 들어봐라‥. 들릴 거다‥! " 뭐가 들린다는 거지? 가인과 재영은 조용히 하며 진우의 지시대로 근처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곧이어 작지만 뚜렷한 여러 명의 목소리 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아아∼ 온천이야∼ 온천∼ 유리 양, 더 들어와요. " 수정의 목소리. " …싫어. 뜨거워. " 이건 유리의 목소리. " 훗. 온천이야말로 매끄러운 피부의 원천이지.이 정도 뜨거움 쯤이야 가인 을 위해서라면…. " " …들어가겠어. " 테레이아의 도발에 온천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유리의 목소리. " 노노노∼ 이 온천은 피부하고는 별 상관이 없을걸∼구성 성분이 나트륨염 화물천(식염천Na-cl)이잖아. 류마티스, 신경통, 창상요통, 근육통,외상후 유증. 만성위장염, 만성변비 정도에 밖에 효험이 없다구. " 아무래도 시더겠지? " 자,결산해보죠. 지금까지 치프에 대한 그의 호감도는 20정도.부진하다 못 해 무관심 쪽에 가깝다구요,이건!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 요! " " 그,그렇지만… 이 이상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 " 걱정말아요. 제가 이럴 줄 알고 준비한 시츄에이션 타입 B가 있으니까! " " …그 시츄에이션 B라는 건 뭐야? " 이쪽은 윤채영과 그 오퍼레이터 3인방. 그녀들은 가인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었지만,정작 가인 본인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고 있었다. " 크으∼ 온천에서 술이라니∼ 잘 받는다. 잘 받아∼ " " ......자제하십시오. 심장에 안 좋습니다. " 술을 마시며 온천을 즐기는 지연과 그런 그녀를 조용히 말리는 마리. 그 대 화를 듣고 있던 가인과 재영은 한 숨을 쉬었다. 이런 뜨거운 탕 안에서 술이 라고…. 그러다 혈압이라도 올라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 우우우우… 나 오빠하고 같이 목욕하고 싶은데에…. " " 하나야,그런 건 나중에 오빠하고 단 둘이서만 은밀히 하는 거야.알았니? " " 으응∼ " 보채는 하나와 달래는 미연. 그런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진우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가인은 당황하며 손을 저었지만 이미 진우 의 헤드락은 그의 목을 사정없이 조르고 있었다. 어쨋든,그런 그녀들의 대화 는 가인들이 있는 온천의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세 남자는 목으로 침 을 꿀꺽 삼키며 대화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그 곳에는 단지 성의 없게 만들어진듯한 나무 판자만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 저런 단순한 나무 벽 너머에 여탕이…. ' 두근 거리는 가슴을 추스리는 가인들. 그때, 진우가 벌떡 탕에서 몸을 일으 키며 가인과 재영에게 소리쳤다. " 피서지에 낭만이 꽃피는 구나!! 엿보기다! 다들 나를 따르라!! " " 우오오오오!!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 진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재영.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그들에게 소리쳤다. " 안돼! 엿보기는!! " 소,솔직히 보고는 싶지만‥!! 안돼! 유가인! 이성은 본능을 이겨낼 수 있 는 법!!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이 없는 인간이 되겠다!! 가인은 마음 속의 유혹을 뿌리치고 강경 보수파의 자세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런 가 인은 안중에도 없이 벽에 찰싹 달라붙어 구멍을 찾고 있는 진우와 재영.으… 무시하고 있어…. 가인은 진우에게 소리쳤다. " 진우 씨,그만둬요!! 건너편에는 미연 씨와 하나도 있다구요!! " 가족을 들먹이다니 좀 치사하지만 어쩔 수 있겠냐! 하지만 진우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으니. "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하는 법‥! " " 그,그걸 말이라고!! 당신이란 사람은∼∼∼∼!! " 진우의 등에 올라타 그의 목을 조르며 저지하는 가인. 진우는 켁켁 거리며 몸부림을 쳤고, 재영은 그런 가인을 진우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안간 힘을 썼 다.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엿보지 못하게 해주마! 가인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 으읏! 네가 감히 스승에게 이런 하극상을…!! " " 스승이면 스승답게 굴어요! " 이를 갈며 소리치는 가인. 하지만 그때 진우의 목을 조르고 있던 가인의 손 이 느슨해졌다.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인을 나무 판자 쪽으로 메쳤다. " 차랏-!! " - 콰당!! 무너지는 나무 벽. 그리고 그 순간, 남탕과 여탕의 구분은 없어졌다! 가인 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몸을 일으키며 신음을 흘렸다. 아야야… 진우 씨, 정 말 그렇게 사정 없이 메치다니…!! 너무하잖아!! 가인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 으켰다. 왠지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다고 느끼는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 .........아. "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화들짝 굳어버리는 가인. 그의 주위에는 타월로 몸 을 가리며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여인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아,아니 … 이건…!! 이건!! " 자,잠깐만요…, 저,저기 이건…!! " 진우 씨와 재영이 때문이라고!! 나는 단지 말리려고!! 가인은 가슴이 내려 앉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변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변명거리가 될 재영과 진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 ......Shit‥! ' 무겁게 가인의 가슴을 파고드는 절망감. 뒤에서는 테레이아와 유리가 얼굴 을 붉히며 '훔쳐보다니… 기쁘지만….'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그 외 지연 과 여인들은 살기를 띄우며 가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가인의 얼굴이 거대한 여인들의 그림자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온천탕 안인데도 담배를 질겅질겅 씹 으며 목의 관절을 뚜둑 뚜둑 꺽고 있는 지연의 카리스마가 그로테스크했다. " 유가인… 너란 녀석은∼∼∼∼!! " " 끄아아아아악!!! " 처량하게 노천탕에서 울려퍼지는 가인의 비명 소리. 그런 그의 소리에 놀란 숲의 새들이 퍼드득 날개짓을 하며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참으로 험난한 17 세 소년의 인생이었다. - 부글부글부글‥ 한편, 진우와 재영은 어디 있었느냐하면‥. 그들은 온천수 밑바닥에 개구리 처럼 납짝 업드린 채 잠수해 있었다.그들은 가파오는 숨을 참으며 위의 재앙 들이 빨리 지나가길 빌고 있었다…. 그렇게 온천욕도 끝내고 어느덧 6시.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가인들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휘황찬란한 요리들을 넋을 잃고 바라 보고 있었다. " 후훗,역시 바닷가라서 신선한 재료들이 많더라구요. " 그런 그들의 반응에 쑥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는 시민. 그녀가 준비한 요리는 가자미 찜, 갈치 조림, 청어 구이, 홍어회를 위시한 생선 요리와 골뱅이무침, 꽃게 찌게, 낙지 볶음, 해물 전골을 위시한 해물요리였다.이 많은 요리를 우 리들이 목욕할 동안 혼자서 다 준비했다니… 뭔가 경악을 넘어서 경외심까지 드는 시민의 요리 솜씨였다. 가인들은 군침이 도는 것을 느끼며 시민에게 말 했다. " 자,잘 먹겠습니다. " " 예. 맛있게 드셔주세요. " 살짝 웃음짓는 시민. 재영은 진지한 안색으로 낙지 볶음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한 점 두 점 조심스럽게 씹기 시작하는 그.왠지 모르게 모두 의 시선이 재영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런 모두의 시선 속에서 입 안의 낙지 볶음을 꿀꺽 삼키는 그. 그리고 재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 허어어어엇!! 동해의 낙지를 소금으로 문질러 씻은 후 살짝 데친 것이 마 치 입 안에서 낙지가 살아있는 것 처럼 춤을 추는구나! 더구나 이 낙지 의 맛을 더더욱 돋보여주는 양념장의 존재란 마치 부부의 연을 맺은 연인 의 그것!! " " ......먹어도 되는군. " 평상시 재영의 저런 주접을 자주 접한 지연과 가인, 테레이아와 유리의 중 얼거림이었다. 어쨋든, 재영의 주접을 제외하고서라도 맛있는 시민의 요리였 다. 모두는 감탄하면서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시민은 그런 일행의 모습에 미 소지으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미연이 한 손으 로 볼을 감싸며 시민에게 말했다. " 후훗‥시민 씨,이렇게 자신이 만든 요리를 남들이 맛있게 먹어줄 때가 주 부로서의 보람을 느낄 때이지 않나요? " " ......저기, 그러니까 전 아직 미혼이라니까요…. "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시민이었다. - 타당‥타당‥ 나무 판자로 만든 복도는 가인의 발걸음으로 미약하지만 살며시‥ 그 소리 를 내고 있었지. - 끼익‥끼익‥ 벌써 20년도 넘게 공사된 목조 건물이었기에 그 삐걱 거림은 무척이나 컸어. 더구나 이렇게 완벽한 적막 속에서는 더더욱 그 소리가 컸지.가인은 마른 침 을 삼키며 발걸음을 재촉했어. 한시라도 이 기분 나쁜 장소를 떠나고 싶었지 만,그럴 수는 없었지. 헤어진 일행들을 찾아야만 했거든. " 유리야? 테레이아? 어디 있어? " 마음 속으로 몰려드는 공포를 없애기 위해 애써 크게 일행을 소리쳐 부르는 소년이었어. 손에 들고 있는 랜턴의 빛에 의지하면서 그렇게 가인은 어둠 속 을 헤쳐나갔지. " 선생님? 재영아? " - 삐걱…. 그리고 그때 가인은 들을 수 있었지. 자신의 앞쪽에서 들려오는 다른 이의 발걸음 소리를! 가인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발걸음을 멈 췄어.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 착각한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 런 가인의 주저함에 쇄기를 박기라도 하는듯 이번에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지. - 사각‥사각‥ 그 소리는 마치 뭔가를 갉아먹는듯한 소리였어. 그래. 이빨로 뼈를 가는 듯 한 소리라고나 할까? 어찌나 섬뜩한 소리였는지 가인의 등으로는 한줄기 식 은 땀이 흘러내렸어. 가인은 랜턴을 소리가 나는 앞쪽으로 비추며 떨리는 목 소리로 소리쳤어. " 누,누구에요?! 거기?! " - 사각‥사각‥사각..............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누군가도 가인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그 소리 내는 것 을 멈췄어. 그것이 가인을 더 공포스럽게도 했지만, 그래도 상대가 말이 통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안도할 수 있었지. 가인은 수중의 각목을 힘 있게 움켜쥐며 조심스럽게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다가갔어. 점점 랜턴의 불빛에 어두운 복도 안이 희미하게 드러났지. 한 걸음.한 걸음. 답답할 정도로 느린 가인의 발걸음이었지만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어. 왜냐 하며 가인의 앞쪽은 막다른 복도였었거든. 그리고 그 랜턴에 비친 복도의 끝 에는 아무도 없었어. 단지… 단지… 사람의 두개골로 보이는 것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을 뿐. " 으,으아아아아아…!!! "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저 앉아 버리는 가인. 호흡하기도 곤란해지고 구토가 나올 것 같았기에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어.눈가로는 눈물이 맺혀 올랐어.어 쩔 수 없지. 이런 끔찍한 광경을 17세 소년이 어디에서 봤겠어? 그 두개골은 막 누군가가 갉아 먹은듯 군데군데에 살점과 피가 묻어 있었지.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도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광경이었어. 소년은 그 자리를 벗 어나고 싶었어. 도망치고 싶었어. 하지만 한심하게도 다리에 힘이 빠져 제대 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허우적 뒤로 기어가야만 했지. - 턱… 그리고 그렇게 뒤로 물러서던 가인의 등에 뭔가가 닿았어.가인은 화들짝 놀 라며 뒤를 돌아보았지. 그곳에는 누군가가 서있었어. 하지만 너무도 어두웠 기에 보이지 않았어. 가인은 떨리는 손길로 랜턴을 들어올렸어. " 오빠… " 나지막히 가인을 불러오는 목소리.그 목소리는 가인이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목소리였어. 그래. 같은 집에서 한 솥밥을 먹으며 지내온 동생, 유리의 목소 리였으니까. 가인은 그런 유리의 목소리를 듣자 반가움과 안도감이 벅차 올 라 몸을 일으켜 덥썩 그녀를 끌어 안았어. 가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 지. " 다,다행이다! 유리야, 정말 다행이야! 무사해서…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 " 오빠… " 그리고 유리도 역시 가인을 끌어안았지. 둘은 그렇게 서로를 포옹한채 살아 남았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어. 그러다 문득 다른 일행에게로도 생각이 미 친 가인이 유리에게 물었지. " 유리야! 다른 사람들은 어딜 간 거야? 테레이아는? 선생님은? 재영이는? " " 몰라…. 난… 몰라‥. " 너무도 놀랐기 때문일까. 유리의 목소리는 아이 답지 않게 침착했지.가인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어. 그래. 모르는 걸까. 나도 그렇게 정신이 없었는데 어 린 유리는 오죽했겠어‥. 어쨋든, 가인은 유리라도 이 곳에서 데리고 나가기 로 결심했어. 그런데 그때‥. " 어, 뭐지 이게? " 가인은 자신의 셔츠 앞부분이 뭔가 축축해진다고 느꼈어. 뭐야? 이건? 물에 젖은 것 같은데? ' 하지만 이 근처에 물이 있을리가‥ ' 그 액체를 만져보았지. 그래. 그건 소년의 생각대로 물이 아니었어. 진득하 면서도 뜨거운 감촉. 더구나 가인의 코를 찔러오는 그 비릿함이란‥. 랜턴의 불빛에 비친 그것은 선명히 붉은… 바로 피였어! " 으,으앗?!! "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뒷 걸음질을 쳤지.그러나 그런 가인의 허리춤을 끌어 안는 손길 하나. 바로 유리였어. 유리는 여전히 멍한듯 하면서도 어딘가 음 산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가인에게 중얼거렸어. " 어딜가‥오빠‥? " " 유,유리야? " 왜, 왜 이러는 거야?! 가인은 숨 막힐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랜턴을 유리의 얼굴에 비췄지. 유리는 살며시 웃으며 가인을 올려다 보고 있었어.하지만 어 딘가 지금의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웃음…. 그리고 웃고 있는 유리 의 입가에 묻어있는 저것은… 피…? 그리고 가인의 귓가에 들려오는 유리의 음성. " 이제야 둘만 남았네…. " 가인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유리의 몸은 너무도 차가웠어. 그래. 마치 죽은 이의 그것 처럼…. " 으,으아아아아아아앗!! " " 끄,끝이에요? " " 응. " 어둠 속에서 들려온 가인의 질문에 무성의하게 답하는 진우의 답변.'하아아' 누구의 것인지 모를 여러 한숨들이 들려오며 방 안의 불이 켜졌다.진우를 중 심으로 둘러 앉아 있던 일행들은 고뇌의 표정으로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 었다. 진우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 무서운 얘기였지? " " 어디가!! " 발끈한 하지연의 외침이었다.그녀는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진우에게 투덜 거렸다. " 도대체가…. 처음에 무서운 얘기를 하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그 게 어디가 무서운 얘기야?! " " …더구나 그런 찝찝한 얘기에 왜 애꿋은 우리 이름들을 들먹이는 거에요? " 지연의 투덜거림에 재영이 구겨진 인상으로 탄식했다. 시민이 만든 저녁 식 사를 끝내고 진우가 제안한 것은, 이런 더운 여름의 밤에 빠질 수 없는 무서 운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래. 불을 끄고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얘기를 한 것 까지는 좋았어. 그래. 좋았는데…. 가인은 냉정히 진우가 한 이야기를 요약 하기 시작했다. " 결국, 우리 일행이 여행갔는데 다 죽었다는 얘기 아니에요? 뼈만 발려진 채? " " …범인은 나…. " 졸지에 일행을 모두 죽인 연쇄 식인귀가 되버린 유리는 우울한 안색으로 중 얼거렸다. 그런 유리의 중얼거림에 맞추기라도 한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일행들. 이런 여행지에서 궂이 저런 불길한 얘기를 했어야만 했나…. 특히 이야기에 이름이 언급되었던 가인들은 불만의 눈길로 진우를 노려보고 있었 다. 그때,가인의 옆에 있던 테레이아가 살며시 가인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 가인…, 나 무서웠어. 조금만 이대로 있어주지 않겠어? " " 에? 으응…. " 어디가 무서웠다는 건지…. 가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그냥 쓴 웃음만 지으 며 자신을 끌어 안는 테레이아를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그의 왼편에 앉아 있 던 유리가 이를 갈며 테레이아에게 말했다. " …쇼하지 말고 떨어져. " " 꺅! 식인귀다! " " 누가!! " 발끈하며 소리치는 유리. 하지만 차마 이야기의 찝찝함 때문에 반발을 못하 는 그녀였다. 나,나도 오빠한테 안기고 싶은데…. 가인에게 안길 수 없는 몸 (?)이 되게 한 진우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유리였다. 그때, 방 문이 열리며 허브 랜드의 주인장이 수박을 들고 들어왔다. " 주문하신 수박 가져왔습니다. " " 오오오∼ " 일행은 언제 진우의 얘기에 찝찝한 기분이었느냐는듯 환호를 터뜨리며 가져 온 수박에 달려들었다. 그래도 진우는 아직 무서운 얘기에 미련이 남았던 듯 히죽 웃으며 주인장에게 물었다. " 아, 주인장. 혹시 이 근방에는 무시무시한 일 같은 것 없나요? " " 그만해! " 수박을 먹던 일행의 불만 섞인 외침. 주인은 그런 일행을 이상한 눈으로 쳐 다보다가 손바닥을 치며 진우에게 말했다. " 아, 한 가지가 있기는 합니다만…. 음. 마치 잘 됐군요. 손님들에게 진작 에 주의를 드린다는 걸 깜빡 했습니다. " " .........? " 주인장이 정색을 하며 말을 꺼내자 그에게 주목하는 일행들. 그래. 적어도 진우‥ 저 인간의 얘기보단 훨씬 정상적인 것이겠지.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 되는 것을 느끼며 주인장은 짧게 기침을 한 후,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오늘 수영을 하시면서 건너편에 있던 절벽… 보셨습니까? " " 예? 아아‥ 그거…. " 낮에 블루 섬머 비치에서 수영할 때 일행은 산길 쪽에 있는 높은 해안 절벽 을 볼 수 있었다.수영장 근처에 있는 절벽이라고는 그것 하나 밖에 없었기에 주인장이 얘기하는 절벽이 뭘 가리키는 건지 일행은 쉽게 알 수 있었다.주인 장은 일행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 같자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말했다. " ‥나온답니다. " " ......예? " 뭐가? 유령이? 기대 반, 웃음 반으로 주인장을 바라보는 가인들. 하지만 다 음에 나올 주인장의 말은 그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 거대한 오징어가! " " ......... " 그리고 정적에 휩싸이는 방 안. 천천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본다.주인장은 일행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서둘러 뒷 말을 잇기 시작했다. " 원래 저 해안 절벽은 블루 섬머 비치에서 최고로 인기가 있던 관광명소였 지요. 젊은 연인들이나 부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는데‥ 그런데 며칠 전 부터 밤마다 거대한 오징어가 출현해 절벽에서 바람을 쐬던 연인들을 습 격하고 있습니다. " " ......... " 여전히 조용한 일행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하지연이 포복 절도를 터 뜨렸다. " 푸,푸하하하하하핫!! 오,오징어! 오징어라고∼∼∼∼!! " 눈물까지 흘리며 배가 아픈듯 방 안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 그녀. 왠지 저 런 사람이 자신들의 담임 선생이라는 것에 우울해지는 가인들이었지만 그들 도 마찬가지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 그럼 그 오징어는 머,먹물로 공격하는 건가? 파하하핫!! " " 어머나,혹시 해변가에서 오징어 구이가 되어 팔려버린 자식들에 대한 보 복일지도. " 재영은 바닥을 긁으며 웃어댔고, 시민은 낮에 먹었던 오징어 구이를 떠올리 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게 일행이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리자, 주인은 약간 언성을 높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 농담이 아닙니다. 이 부근의 사람들도 처음에는 손님들 처럼 우스갯 소리 로 치부하며 넘겼었지만… 하지만… 그 사망자와 실종자 수만 해도 벌써 스무 명이 넘어가고 있어요‥! " " …에? " 웃음을 뚝 멈추고 주인장을 돌아보는 일행들. 사망자와 실종자 수가 스무명 이라고?! 주인장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 이틀 전 경찰 쪽에서도 조사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해안 절벽쪽 은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그러니 부디 해안 절벽 쪽으로 가 시는 불상사가 없기를 바라겠습니다. " 너무도 진지한 주인장의 말에 일행은 왠지 몰골이 송연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우스며 넘기기에는 현장 증거가 너무 많은 이야기였던 것이다.사람들은 근거가 있는 무서운 이야기에 공포를 느끼는 법 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행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겠다던 주인장의 의도는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곧 주인장이 방 안을 나가자 그가 한 얘기가 사실일 까 하며 서로 말을 주고 받는 일행들. 그러나 진우는 그런 일행들 속에서 아 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수정에게만 물었다. " …아무래도 휴가는 여기까지가 되는 건가요? " " 확실하지는 않지만… 좀 더 기다려보도록 하죠. " 수정은 창 밖에 보이는 해안 절벽을 바라보며 답했다. " 하아∼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 취침 시간. 가인은 허브 랜드의 방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쐬며 중얼거렸다. 원래 이런 여행지에서는 올 나이트를 하는 게 기본이었지만, 의외로 지연과 어른들이 지친 기색을 보이며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밤을 지새겠 다던 청소년들의 계획은 무산되고야 말았다.하지만 가인은 오히려 이 상황을 반기고 있었다. " 마리 선배, 자고 있을까나. " 가인은 여자 숙소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일행들과 어울려 소란 스럽게 지냈던지라 마리와 단 둘이서 얘기할 틈이 없었던 그였다. 간신히 여 행지에서 다시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그녀였는데, 어떻게 해서든 지난 오해 를 풀어야만 했다. ' 하지만… 도대체 뭣 때문에 그랬던 거지. 왜…. ' 내가 무모했기 때문일까. 하긴 잘못했으면 그때 죽을 뻔 했었지.베파치티의 도가 자신의 목을 스쳐갔던 감촉을 기억해내며 가인은 한 숨을 쉬었다. 그렇 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리 선배가 위험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성마리,그녀가 죽거나 혹은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 난 단지… 언제나 마리 선배에게 신세만 지고 있기에… 도움이 되고 싶었 을 뿐인데…. ' 그러고 보니 그녀를 만나서 어떻게 사과를 해야되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 가인이었다. 아,진짜 대책 없군.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 끼익…. 그때,그렇게 막 여자 숙소에 다다른 가인에게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인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화들짝 놀라 근처의 벽으로 몸을 숨겼다. 만 약 여기서 자신이 이러고 있다는 것을 지연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뼈 도 못 추릴 것이 분명했다. 가인은 온천에서도 그렇고 지은 죄가 많았던 것 이다.(그게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그는 긴장한 눈초리로 여자 숙소에서 나 오는 인영을 살펴보았다. ' 누,누구지? ' …화장실에라도 가는 사람인 걸까? 어두웠기에 나오는 이의 얼굴이 잘 보이 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달빛에 비춰 드러난 그 사람의 얼굴은… ' …마리 선배? ' 그렇다. 그녀였다. 이 밤 늦은 시각에 숙소를 나오는 이는 가인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성마리,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마리가 알아서 나와주니 가인으로 서는 일이 편해졌다만… 마리 선배, 어딜 가는 거지? ' 웃! ' 가인은 잽싸게 벽 쪽으로 몸을 밀착시켰다.마리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주 위를 두리번 거린 것이다. 누,눈치챈 걸까‥마리 선배. 그러나 그런 가인의 걱정과는 달리,마리는 곧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인은 안도의 한숨 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밟았다. ' …밖으로 나가고 있어…? ' 의아해하는 가인. 마리는 허브랜드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아니…. 이 으슥한 야밤에 어딜가는 거야,마리 선배는?! 밤 바다라도 구경하러 갈 셈인 가? 더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를 쫓아가던 가인은 이 윽고 마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인은 불안한 표정으 로 중얼거렸다.어라‥? 이 방향은… ' 이 방향은… 해안 절벽?! ' - 쏴아아아‥ 어두운 밤의 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륙풍에 마리의 긴 머리가 가늘게 휘날렸다.마리는 자신의 눈을 때리는 앞 머리를 쓸 어넘기며 눈 앞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 쏴아아아‥ 파랑(波浪)이 해안에 있는 산지에 부딪쳐 침식하면서 생긴 해식애(海蝕崖) 였다. 이 정도 높이면 약 15미터 가량은 될까나. 절벽에서 내려다본 밤의 바 다에 마리는 현기증을 느끼며 인상을 굳혔다. 그래. 이 곳이란 말이지‥. ' 거대한 오징어라고…. ' 허브랜드의 주인장이 말했던 그것. 이 해안 절벽에 오는 사람들을 습격한다 는 거대한 오징어. 마리는 주인장이 말한 그것이 아마도 몬스터 임이 틀림없 을 거라고 확신했다.현재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분명 그것은 A급 몬스터 '크 라켄'! 하지만 그 정도의 몬스터 라면 피스 메이커 측에서 알아채지 못할 리 가 없다. ' 분명 뭔가가 있을지도…. ' 크라켄은 아니겠지만 몬스터의 개입이 있는 것 만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피 스 메이커에서 우리를 이곳으로 피서를 보낸 거겠지. 애초에 피스 메이커 쪽 에서 피서지까지 마련해주며 휴가를 보내준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아마 도 휴가를 즐기면서 조사도 겸하라는 뜻이었을까. " …별 다른 것은 있어 보이지 않는데…. " 마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벼운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기에 밤바람이 좀 차가웠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해안 절벽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마리는 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 나… 뭘 하고 있는 거지…. "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원래 이런 현장 조사 는 팀을 이루어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자신은 혼자서, 그것도 상관에게 보고 도 하질 않고 멋대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개인 행동이 되는 것이 로군. 어째서 나는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지? 평상시의 그녀라면 생각 도 못 할 일이다. ' 그때부터… 인가…. ' 베파치티의 퇴치 때 가인의 뺨을 때린… 그 날부터. 그래. 그 날 부터였다. 이렇게 정신 없이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은. 나 답지 않게 군율을 어 기고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은. " 하아…. "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뭔가가 가슴에 걸린 것 처럼 답답했다. 더구나 이 답답함은 여행지에 와서 가인의 얼굴을 볼 때 마다 더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지…. 이 답답함은 어째서…. ' 솔직히 사과하면 될 것을…. ' 가인에게 사과하면 모든 것이 다 편해질텐데….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마리 였다. 그에게 사과를 할려고 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고,결 국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다시는 저질러서는 안되는 과거의 기억들이…. ' 그래.난 잘못한 게 없어.분명 그대로 가인을 내버려둬서는 안되는 거였어. ' 가인은 다쳐서는 안된다. 위험에 처하게 해서는 안된다. 내 동생과 같이 만 들어서는 안된다. 다시는 떠나보낼 수 없었다. ' 지켜낼 거야…. ' 마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동해의 밤 하늘은 유난히도 별이 반짝이고 있었 다. 그 별들의 흐름을 지켜보며 굳은 의지로 맹세했다. 난… 다시는 놓치지 않겠어. 이번만큼은 절대로…. - 타닥…. 그때 마리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그녀는 순간,상념을 머리 속에서 지 우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에 차고있던 오라 소드는 어느새 마리의 오른 손에 들려 그 붉은 빛을 흘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마리의 목소리가 해 안 절벽에 울려퍼졌다. " 누구냐?!! " 그리고 그런 그녀의 외침에 응답한 이는…. " 저,저에요. 마리 선배…. " 그녀의 뒤를 허브 랜드에서부터 쫓아온 유가인이었다. 그는 줄곧 절벽 쪽의 수풀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그만 나올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마리에게 들켜버린 것이었다. 굳이 숨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며 가 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에요? " 마리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묻는 가인. 하하, 마리 선배. 경치라도 감상하 고 있었던 걸까? 의외인데…. 하지만 마리는 무표정하게 그에게 답했다. " 조사. " " …예? 무슨…? " 난데 없는 마리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가인. 그런 그를 힐끗 보며 마리는 탄 식하듯 말했다. " 주인장의 제보에 의하면 이곳에서 거대 몬스터가 출현했다고 하질 않았나? 미연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사건 현장은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 " " …하,하지만 그건 그냥 농담이었잖아요.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거대한 오징어가 커플을 습격했다느니 어쨋다느니 하는 주인장의 말은 농담으로 치부하고 있던 그였다. 솔직히 그게 말이나 되 는 소리야? 거대한 오징어라니? 나,참….우습지도 않아서. 믿을 걸 믿어 달 래야지. 하지만 그런 가인의 비웃음에 따라온 것은 마리의 거센 호통이었다. " 바보 같은 녀석! 그런 흐리멍텅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으니 매번 위기에 처하는 거다! 뭐가 농담인 거냐?! 설사 허위 정보라고 할지라도 조사를 하는 게 바로 우리 피스 메이커의 일이다! 몬스터에 의한 사고를 예측하 고 최소한으로 피해를 줄이는게 우리의 일이란 말이다! " " 아….죄,죄송합니다‥. " 마리의 호통에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는 가인.그런 그의 모습에 마리는 흠칫 말을 멈췄다. 아, 나 또‥ 가인에게…. 자신도 모르게 가인에게 자꾸만 퉁명 스럽게 대하는 그녀였다. 왜,왜 이러지. 나…. 야단칠 생각은 아니었는데….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마리는 가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싸늘히 말했다. " 나한테 사과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과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직무에 충실하도록. " " 예…. 알았어요,마리 선배‥. " 아니야,가인. 나 사실은… 사실은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 지금부터 이 근방을 좀 더 수색한다.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즉각 보고하 도록 해라. " " 알겠습니다‥. " 애써 웃음지으며 마리의 말에 답하는 가인. 마리는 그런 그의 모습에 왠지 견딜 수 없게 가슴이 아파져 주먹을 으스러지듯 쥐었다.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사실은 사과하고 싶었던 건데….그냥 미안해‥라고 말했으면‥ 솔직하게 말했으면 되었을 것을…. ' 난…최저야…. ' 자신의 마음을 애써 부인하며 가인에게 화풀이만 한 자신이 못내 바보 같은 그녀였다.마리는 우울한 낯빛을 가인에게서 돌린채 애써 조사에 전념했다.하 지만 이런 기분으로는 수색이고 뭐고 아무 것도 될 거 같지 않았다. 언제부 터 이렇게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집어 넣게 된 것일까…. ' 난 군인으로서 자격 미달인 것일지도…. ' 그리고 좋은 누나로서도… - 킷킷킷킷킷‥ 그때 조사를 하고 있던 마리와 가인의 귀로 거친 짐승의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는 푸른 안광들.가인 은 당황하며 곁에 있는 마리를 불렀다. " 마리 선배‥?! 뭔가 있어요! " " 음…! " 마리는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라 소드를 들어올렸다. 어두운 수 풀 너머로 뭔가가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그것도 한 두마리가 아니었다. 뭐지? 이것들은?! 놈들은 마리와 가인의 뒤로 절벽을 지게 하며 그들을 포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희미한 달빛 아래로 놈들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이,이 녀석들은…?!! " 놈들의 정체에 두눈을 크게 뜨는 가인. 그것들은 온 몸에 비늘이 돋아 있는 사람 형태의 몬스터였다.귀와 손바닥,발바닥에는 물고기의 갈퀴로 보이는 것 들이 달려 있었고, 흉악한 얼굴의 좌측에는 아가미같은 것이 연신 벌렁이고 있었다. 입에는 사람을 뼈째 으깨어 먹을듯한 날카로운 이빨들이 촘촘히 박 혀 있었으며 그 눈동자는 푸른빛으로 가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리는 그 런 몬스터들의 이름을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 …머맨(MERMAN)‥이로군. " " 뭐,뭐죠? 그게? " "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물고기인 인어를 말하는 거다.바다의 신 포세이 돈의 궁정 군소신(群小神)이란 것들이지….육지에 올라오면 하반신도 인 간형으로 변신할 수 있다. " " 그런…. " 마리의 설명에 할 말을 잊는 가인. 저,저런 녀석들이 인어란 말이야? 시,심 하다. 평상시 품고 있던 인어에 대한 상상이 완전히 깨져버리는 순간이로군! 눈 앞의 존재들은 적어도 인어 공주에 나오는 그런 인어들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가인은 욕지거리가 나올려는 것을 참아내며 마리와 같 이 오라 소드를 꺼내 들었다. - 킷킷킷킷킷 웃음 소리인지 울음 소리인지 분간이 안 가는 소리를 내며 가인들에게 서서 히 다가오는 머맨들. 그것들의 손에는 날카로운 빛을 뿌리는 작살들이 들려 있었다. 그 창에 묻어 있는 것은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듯한 피.그 혈흔을 보 게 되자, 마리의 안광이 날카로워 졌다. " …그렇군.네 녀석들이 이 근방에서 벌어졌던 실종 사건의 범인들이로군. " 사망자와 실종자들이 이 녀석들에 의해…. 어째서 거대한 오징어 라는 소문 이 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크라켄 보다는 머맨이 나았다. 이런 때 는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마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 가인, 변신이다‥! " " 예! " 무전기를 찬 왼손을 반원으로 돌리며 음성 인식 장치 가동! " 변신, 피스 레드! " " 변신, 피스 블루! " 그리고 착용자의 음성을 인식한 무전기는 미세 분자 입자 상태로 에테르 계 에 속해 있던 오리하르콘의 전투복을 대기 중으로 끌어냈다.검은 A.I 슈츠복 에 감싸인 마리와 가인. 그리고 그들의 오라에 반응하여 A.I 슈츠는 제 각각 붉은빛과 파란빛을 뿜어냈다. 피스 메이커의 피스 대원, 레드와 블루의 등장 이었다. - 킷킷킷킷킷!! 그런 가인들의 변신에 위협을 느낀 머맨들은 이성을 잃으며 그들에게 달려 들기 시작했다. 가인과 마리는 양 옆으로 흩어지며 수중의 오라 소드를 휘둘 렀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섬전같은 마리의 오라 소드가 달려들던 세 마리의 머맨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밤 하늘로 터져오르는 머맨들의 푸른 체액들. 하지만 마리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뒤로 날아들던 작살을 마리는 근소하게 피해내며 팽이처럼 몸을 돌렸다. 그 회전력을 이용하여 머맨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그녀.붉은 오 라 소드의 검광이 회전을 따라 머맨의 복부를 갈라버렸다. " 이식(二式) 파쇄(波殺) " - 투웅!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으로 육중하게 떨어져 내리는 머맨의 사체. 그런 마리 의 기세에 눌린 머맨들은 두 눈을 희번뜩 거리며 그녀에게서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마리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가인 쪽을 살펴 보았다. 그는 천 공권과 오라 소드를 병행해 가며 그럭 저럭 머맨들을 잘 상대하고 있었다.저 정도면 문제 없겠군‥. 그런 가인의 모습에 마리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신 쪽의 머맨들을 상대할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가인에게 날아드는 거대한 트라이던트(Trident)! 마리는 가인에게 소리쳤다. " 가인, 피해!! " " .........?!! " 마리의 비명에 본능적으로 몸을 좌측으로 틀은 가인. 그리고 아슬 아슬하게 트라이던트가 가인의 A.I 헬맷을 스치며 지나갔다.'터엉!' 지면에 깊숙히 박 혀들어가는 트라이던트. 얼마나 굉장한 힘으로 이 삼지창을 던졌던지, 한 눈 에 봐도 무거워 보이는 트라이던트는 땅에 꽂혀서도 탄력있게 흔들리고 있었 다. 가인과 마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창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 우힛‥우힛‥ 피했다‥ 너‥! " 그리고 괴상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며 등장하는 몬스터. 그것은 얼핏 보기 에는 주위의 머맨들과 비슷해보였지만,그 크기나 생김새가 확연히 틀렸다.머 맨들의 세 배는 됨직한 덩치의 이 녀석은 얼굴 자체가 물고기의 그것이었던 것이다.유리구슬 처럼 튀어나온 눈알에 두꺼운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날카로 운 이빨. 비늘로 덮힌 그 육체는 우락부락한 근육들로 뭉쳐져 있었다. 이 거 구의 괴물이 아마도 가인을 공격한 트라이던트의 주인인 것 같았다. 마리는 가인의 곁으로 다가오며 괴물에게 소리쳤다. " 네 녀석이 이 머맨들의 우두머리냐? " " 우힛‥우힛‥ 그래‥. 다곤(Dagon)이라고 한다‥ 나‥! " 뭔가 모자란듯한 웃음 소리를 내며 자신을 다곤이라고 밝힌 머맨.하지만 마 리는 그 흉폭한 괴물의 눈 속에서 교활한 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오 라 소드로 자세를 취하며 계속 다곤에게 질문을 던졌다. " 무슨 일로 이 바닷가에 모습을 드러낸 거냐?! 네 놈들이 노리는 것은 수 도에 있지 않았나?! " " 우힛‥가르쳐 줄‥우힛‥ 이유‥없다! 카르르르르‥! " 괴성을 터뜨리며 손 안에 있던 쇠줄을 잡아 당기는 다곤. 그 쇠줄은 가인을 노리던 트라이던트의 끝 부분에 연결되어 있었다. 땅에 깊숙히 박혀 있던 트 라이던트가 튕기다 시피 허공으로 날아올라 다곤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것만 봐도 이 다곤이라는 괴물의 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다곤 을 식은 땀을 흘리며 노려보는 마리. 하지만 가인이 그런 마리를 떨리는 목 소리로 불렀다. " 마,마리 선배‥. 주위를… 둘러봐요‥! " " .........? " 가인의 말대로 주위를 둘러보는 마리. 순간, 그녀의 몸이 경직되었다.그들 의 주위로는 어느 새인지 수 십 마리의 머맨들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게 잡아도 스무 마리는 넘는 것 같았다. 마리는 이를 갈며 중얼거 렸다. " …포위‥됐군‥. " " 우힛‥우힛‥ 인간‥ 살려보내지‥않는다‥우힛! 죽인다‥! " 가인과 마리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리는 다곤. 머맨들은 이를 갈며 흉폭한 눈을 빛내는 것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았다. 마리는 전방을 주시한채 조용히 가인에게 말했다. " 가인…. " " 왜 그래요,선배? " 가인은 마리와 등을 맞댄채 오라 소드로 머맨들을 견제하며 답했다. 식은땀 이 등 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 나한테 여분의 오라 필드(Aura Field)가 하나 있다. 그걸 잠시 후에 터뜨 릴테니까… " 오라 필드? 가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와 처음 학교에서 도플 갱어들과 싸웠을 때, 그녀가 썼던 오라의 섬광탄을 말하 는 것이었다. 그래! 그거라면 이 포위를 뚫을 수 있을 지도! 하지만 마리의 다음 말은 들뜬 가인의 마음에 찬 물을 끼얹었다. " 이 포위망을 뚫고 나가 지원을 데리고 오도록. " " 예‥? 자,잠깐만요‥! 잠깐만요,마리 선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지원을 데리고 오라니… 그럼 마리 선배는요?! " 그런 가인의 말에 마리는 냉정히 답했다. " 둘 다 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는 없어.한 사람은 미끼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너보다 오래 시간을 끌 수 있을 테니 미끼는 내가 한다. " " 그런 말도 안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 가인은 비명 처럼 마리에게 소리쳤다. 말도 안돼! 선배를 남겨 두고 나 혼 자 도망치라고!! 그런 짓! 내가 할 수 있을 거 같아?!! 마리는 가인이 명령 을 듣지 않자 노기가 깃든 목소리로 마주 소리쳤다. " 그럼 이 상황에서 더 좋은 수가 있단 말이냐?!! 잔소리 말고 내 지시에 따라! 명령이다!! " " 명령이래도 안되는 건 안돼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거에 요!! " 가인은 한 풀도 꺽임 없이 마리에게 소리쳤다. 그런 그의 태도에 마리는 분 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바보가…!! 뭐가 살아도 같이 살어고 뭐가 죽어도 같이 죽어야?!! 누가 죽게 내버려둔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마리는 너무 화가 나서 가인의 멱살을 잡아 소리쳤다. " 절대로 죽게 하지 않는다!! 내가 지켜줄거다!! 내가 지켜낼 거야!! " 멍한 눈초리로 마리를 바라보는 가인. 마리는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이 가인 에게 계속 소리쳤다. " 넌 살아!! 살려내겠어!! 그러니까 어서 명령을 들으란 말이다!! " 아…. 마리를 바라보던 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마리 선배…! 그 랬던 건가?! 그랬던 거야?!! 가인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던 마리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쳤다. " 내…! 내 몸 하나는 내가 지켜낼 수 있어요!! 마리 선배가 지켜주지 않아 도 괜찮단 말이에요!! " 난… 난 마리 선배의…!! " 난 마리 선배의 동료에요… 보살핌 받아야하는 동생이 아니란 말이에요!! " 순간,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가인을 바라보는 마리. 가인은 씩씩 거리며 숨 을 몰아쉰채 그런 마리를 마주 보았다. 마리는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뒷걸음 질을 치기 시작했다. ' 난… 난… 어째서… '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걸까? 어디서부 터? 난 단지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번만은 지켜주고 싶었을 뿐인 데…. 어째서…!! " 아…. " 비틀거리며 땅 바닥에 주저 앉는 마리.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그런 마리를 부축했다. " 마,마리 선배?! " " 아아아…. " 혼란스러웠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지독한 현기증이 마리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가인은 이를 악물며 그녀를 부축했다.저,정신차려요! 마리 선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에요?!! 예?!! 그때,그런 가인들에게로 다곤의 웃음 소 리가 들려왔다. " 우힛‥우힛‥! 내부 분열‥이냐! 우힛! " " 이 자식이-----!!! " 저 괴물 자식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가인이 분노한 얼굴로 다곤을 노 려보았다. 하지만 다곤이 그런 가인의 외침에 주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다 곤은 부하 머맨들에게 손짓을 하며 삼지창을 들어올렸다.그러자 다곤을 따라 같이 작살을 들어올리는 머맨들. 동시에 가인들에게 무기를 날릴 속셈이었다. 가인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던 마리는 인상을 굳혔다. 이젠 도망이고 뭐고 다 틀렸다‥.깊은 절망감 만이 가인과 마리의 마음을 파고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 그오오오오오!! '퍼엉!' 거대한 해일이 절벽을 때리며 터져 올랐다. 그리고 검은 바다를 가 르며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존재! 달빛을 받아 발광(發光)을 하는 그 존재는 절벽을 그 그림자로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다. 가인과 마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생물을 올려다 보았다. " 마,맙소사… 정말이었어…?! " 허브 랜드 주인장의 말을 떠올리며 멍하니 중얼거리는 가인. 마리는 가인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키며 침착하지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크라켄…. " - 그오오오오오!! 마리가 부른 그 이름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 처럼 포효를 내지르는 괴수,크 라켄.그 괴성이 얼마나 큰지 마리와 가인은 귀를 틀어막으며 괴로워했다. 마 리는 이를 악물며 그 와중에도 다곤과 머맨들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크라켄 까지 녀석들이 불러들였을 줄이야…!! ' .........? ' 하지만 다곤과 머맨들도 크라켄의 등장에 동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아니,오 히려 자신들보다 더 당황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 그때 다시 한번 더 크라켄 의 괴성이 울려퍼졌다. - 그오오오오오!! 그리고 절벽을 내리치는 크라켄의 촉완(觸腕)! '쿠쿵!' 땅이 울리며 절벽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허공으로 튕겨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가인과 마 리는 땅을 구르며 몸을 일으켰다. 가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라켄의 공격 으로 머맨들의 포위망이 뚫려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가인은 절벽 가에서 몸을 일으키는 마리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 선배!! 지금이에요!! 어서 여기서 도망치자구요! " - 쩌저적…! 그러나 마리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절벽이 갈라지는 소리에 묻혀 버린 것 이다. 마,맙소사! 절벽이… 절벽이 무너지고 있어?!! 가인의 앞에서 금이 가 기 시작한 지면은 곧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가인은 무 사할지 몰라도, 졀벽 가에 있는 마리는 십중 팔구 떨어질게 분명했다. 마리 는 이를 악물며 허전해지는 발 밑을 바라보았다.15m의 아래로는 거대한 검은 바다가 무너지는 암석들을 삼키고 있었다. ' …끝인가…! ' 마리는 탄식하듯 속으로 중얼거리며 허공을 날았다. 중력의 법칙에 따라 그 녀는 천천히 밑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밑도 끝도 없는 암흑으로 떨어지는 기분. 마리는 있는 힘껏 오라를 몸 안으로 모았다.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라 쉴드와 A.I 슈츠의 중력장 작용에 모든 걸 걸어볼 생각이었다. 적어도…적어 도 몸이 박살나 죽지는 않겠지…. ' 가인은… 무사한 걸까…. ' 마리는 왠지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져,무너지 는 절벽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는 무사할 것이다. 무너진 것은 절벽 외 곽 쪽 뿐이었으니까… 그래‥ 그는 무사할거야. 그래야 하는데…. " 마리 선배에에에에에에--------!! " 고함 소리와 함께 자신에게로 뛰어 내리는 가인의 모습이 마리의 눈에 들어 왔다. 마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비명을 질렀다. " …가인?!!!!! " 바,바보! 바보 같은 녀석…!!!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그런 마리의 마 음 속 절규를 뒤로 하고, 가인은 무서운 속도로 마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마리의 손을 낚아채는 가인! 그러나 그 뒤는 짙은 암흑의 바다가 그 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느,늦었어?!! - 투우웅!!! 거대한 물줄기가 치솟으며 마리와 가인은 깊은 해저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 위를 뒤덮기 시작하는 거대한 파도의 물결. 바다는 언제 그들을 삼켰느냐는듯 태연하게 원 상태로 돌아갔다. - 촤아아아아…! 그리고 이 모든 소동을 일으킨 크라켄 또한 붉은 안광을 빛내며 해저 속으 로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괴물의 울음 소리가 무너진 절벽 가에 울려퍼 지고 있었다. - 그오오오오오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0 話 Ｂlue Ｓummer Ｂeach (下) =-=-=-=-=-=-=-=-=-=-=-=-=-=-=-=-=-=-=-=-=-=-=-=-=-=-=-=-=-=-=-=-=-=-=-= " 해변가 쪽에는 없어요, 선생님! " 재영의 외침에 지연은 인상을 구기며 입 안의 담배를 질겅질겅 씹었다.허브 랜드의 구석 구석을 뒤지던 일행들도 제각기 한 숨을 내쉬며 수확 없이 지연 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 여기에도 없던데요. " 시민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지연에게 말했다. 지연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 아니, 이 자식들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 그녀의 '이 자식들' 이라는 말은 숙소에서 사라진 가인과 마리를 칭하는 것 이었다. 이런 일련의 수색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유리와 테레이아가 벌인 소 동 때문이었는데, 여기서 그녀들이 벌였던 '소동'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잠시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그러니까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분 전에 있 었던 일이다. - 부스럭‥ 유리는 자신의 옆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무거운 눈꺼풀을 뜰 수 있었다.어 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뭐지? 다들 잠든 이 시간에‥? 방 안에 있던 누군가가 밖으로 나갈려고 하는 것 같았다. 누굴까‥? - 드르륵‥ ' …테레이아‥? ' 미닫이 문을 열자, 어두운 방으로 복도의 불빛이 스며들어 왔다. 그러면서 방을 나갈려는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그녀는 다름아닌 테레이아 민체스 터였던 것이다. 테레이아는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피며 다시 방 안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 바람에 유리는 재빨리 눈을 감고 잠든 척 해 보였다. " …다들‥ 자는군…. "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테레이아. 그리고 문은 다시 드르륵 닫혔다.그 제서야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유리. 그녀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테레이아가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 수상해…! 너무도 수상한 냄새가…! '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유리는 재빨리 테레이아를 따라 방을 나섰 다. 테레이아는 저편의 복도에서 도둑 고양이 같은 발걸음으로 소리죽여 움 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 남자 숙소…!! ' 유리는 감을 잡았다는듯 인상을 구기기 시작했다. 한편, 테레이아는 그런 유리의 추적을 눈치 채지 못하며 점점 남자 숙소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는 긴장된 표정으로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마른 침 을 삼키며 벽에 붙어 주위를 살피는 그녀. 좋아…. 여기까지는 별 다른 방해 가 없이 왔는데…. 남자 숙소의 방 문 앞에 다다른 테레이아는 살며시 미소 를 지었다. " 후훗‥ 이 문 너머에 가인이…. " 그렇다. 테레이아 민체스터. 그녀가 이렇게 한 밤 중에,그것도 다들 잠들어 있을 시간에 행동을 개시한 것은 다름 아닌 문 너머에 잠들어 있을 유가인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각에 가인을 만나서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할려는 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 피서지에서의 밤은 정열적이어야 하는 법…후훗‥ " 뭔가 의미 심장한 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런 그녀의 계획은 애초에 미 행당했다는 점에서, 그것도 그 미행자가 다름 아닌 유리였다는 점에서 그 실 현 가능성은 제로로 떨어졌다. " 거기까지야. 더 이상은 용서하지 않겠어. " 남자 숙소의 방 문을 열려던 테레이아의 행동을 제지하는 차가운 목소리 하 나. 테레이아는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그 녀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자조 섞인 미소를 흘렸다. " 훗‥ 여기까지 인가‥. " 테레이아가 뒤돌아본 곳에는 지옥의 화신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투기를 발산하는 유리가 서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밤 바람에 유리의 머 리카락이 음산하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 여기서 무슨 짓을 할 생각이었지‥? " 유리의 질문에 테레이아는 언제나 처럼 태연하게 답했다. "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지. " " 역시‥!! " 한층 더 강렬해지는 유리의 눈빛. 테레이아는 지지않고 그런 유리의 눈빛을 마주 보았다. 주위의 기압이 낮아지며 예의 방전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리는 이를 갈며 테레이아에게 경고했다. " 절대 허락하지 않겠어.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는게 좋을거야. " " 훗… 타협의 여지는 없는 건가. "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흔드는 테레이아. 왠지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그녀 의 모습에 유리는 의아해졌다. 이상한데…. 이렇게 순순히 내 말을 따를리가 없을텐데…. 그리고 그런 유리의 의혹은 정확했다. - 드륵…!! " 앗…?!! " 유리가 잠시 빈 틈을 보이는 순간,재빨리 남자 숙소의 문을 열고 침입을 시 도하는 테레이아. 아차, 당했다!! 유리는 당황하며 테레이아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멈춰…!! " " 후훗‥ 이미 늦었어‥! " 다급한 비명을 내지르는 유리와 승자의 여유를 보이는 테레이아. 방 안에는 세 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진우는 이불을 다 걷어차며 자고 있었고, 재영으로 보이는 이는 이 더운 날에도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자고 있었다. '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저 침대가 바로 가인의…!! ' 목표… 접수! 남은 것은 이 손에 취하는 것 뿐! 테레이아는 있는 힘껏 도약 하며 가인의 침대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블라우스가 세차게 휘날렸다. " 자, 가인…! 드디어 하나가 되는 거야! " " 안돼------!! " 유리의 절규. 하지만 이미 테레이아는 침대에 누워있을 가인을 껴안으며 이 불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으니…. 아, 가인의 넓은 가슴. 테레이아는 그 포근 함을 느끼며 가인의 허리를 두 팔로 힘 있게 껴 안았다. 그때,그런 테레이아 의 어깨를 끌어안는 손길 하나. 바로 가인이었다.가,가인이 날 껴안았어? 가, 갑작스럽지만… 나,기뻐…. 행복한 미소를 짓는 테레이아. 그런 그녀의 귀로 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잠꼬대가 들려왔다. " 음냐음냐… 우후후… 그래, 이리와…. 내가 꼬옥 안아줄게… 쿨…. " " .........? " 테레이아는 뭔가의 이질감을 느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목소리는…. 설마…?! 그리고 때 맞춰 유리에 의해 켜지는 방 안의 불.그리고 테레이아는 자신이 껴안고 있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바로… " …음냐‥ " 다름 아닌 박재영! 바로 그였던 것이다! 순간, 테레이아의 이성은 그 리미 터가 해제되어 버렸다. " 크오오오오오오!!! " 그리고 재영은 테레이아의 회오리 메치기에 침대 위로 메다 꽂혔다. 어쨋든, 그렇게 한 바탕 소란이 나고서야 가인이 숙소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을 깨달은 일행들. 더구나 마리까지 사라졌다는 것은 여자들에게 큰 파문을 던져 주고 있었다. 재영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혹시… 가인과 마리 선배…으쓱한 어딘가에서 모종의 썸씽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나∼ " 그러나 그런 말을 한 댓가로 재영에게 돌아온 것은 테레이아,유리,시더, 채 영의 4인 콤보 크러쉬였다. " 포메이션 유지…! " " 그리고 지금! 산(散)! " 흩어지며 재영의 사방을 점하는 네 명의 여인들. 그리고 발현! " 스프렌더 져지먼트------!! " 그 광휘의 심판 앞에 재영은 무참히 무너져야만 했다.그가 쓰러지면서 중얼 거린 말은 다음과 같았다. " …이,이번 것은 오리지날…. "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의식을 잃는 재영.그 처참한 광경에 시민이 쓴 웃 음을 지으며 지연에게 말했다. " …빨리 찾아야 할 거 같내요,가인 씨들…. " " 그럴지도…. " 하지만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거냐고….지연은 혀를 차며 머리를 긁적였다.아, 이 자식들 성가시게…. 사실 재영의 말대로 둘이 모종의 섬씽이 있기에 모습 을 감춘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만약 무슨 사고라도 일어났기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면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 아니지. 만약 전자라고 해도 문제는 문제로군. 지연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 …돌아오면 죽일테다. " 그런 그녀의 말에 식은 땀을 흘리며 숨을 죽여야 했던 일행이었다. 그러나 그 때… - 쩌저저적…!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 그리고… - 우르르르르‥ 투우우웅!!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거친 파도소리가 울려퍼졌다. 모두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허둥지둥 시선을 옮겼다. 해안 절벽! 주인장이 말했던 그 해안 절 벽이 지금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연이 비명을 질렀다. " 뭐,뭐야?!! 저건?!! 무슨 일이야!! " " 절벽이 무너졌어요! " 비명을 지르는 하나를 끌어 안으며 소리치는 미연. 그 때, 진우와 유리, 시 민은 서로를 돌아보았다.미약한 오라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이차원의 존재,몬 스터의 기운! 진우는 수정에게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겠군요. " " 그래요. 승인하겠어요‥! " 수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피스 대원들.그들은 다른 일행이 눈치 채지 못 하게 재빨리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런 그들을 조용한 눈길로 지켜 보던 여인 하나. " …훗. " 살며시 그려지는 입 가의 미소. 그리고 초록색으로 빛나는 안광이 절벽으로 향했다. 거친 밤 바람에 휘날리는 에메랄드 빛의 머리카락. 테레이아 민체스터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 하아‥하아‥ " 마리는 비틀 거리며 차가운 물 속에서 동굴로 기어 올라 왔다. 그녀는 옆구 리에 끼고 있던 가인을 붙들은채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털썩!' 차 가운 돌바닥이 거칠게 몸에 부딪혀 왔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 허억‥헉‥! " 마리는 A.I 헬맷을 해제시키며 숨을 몰아쉬었다.다행히 헬맷을 착용하고 있 었기에 물을 먹지는 않았다. 그리고 몸도 A.I슈츠의 중력장이 다행히 작용되 었는지 좀 욱씬 거리는 것을 제외하면은 그다지 이상은 없었다. 마리는 안도 의 한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기는‥. " …해식동굴(海蝕洞窟)? " 해식동굴.파도·조류·연안수 등의 침식작용을 받아 해안에 생긴 동굴을 말 한다. 아마도 자신들이 떨어진 절벽 근처에 있는 동굴인 것 같은데, 절벽에 생긴 틈바구니를 파도가 밀어닥쳐서 쐐기 역할을 하여 그 틈바구니가 넓어진 동굴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해식 동굴치고는 어딘가 너무 넓 고 깊은데… ' 그래도 이런 동굴이라도 있었으니 다행이야‥. ' 만약 이 동굴 조차 없었다면 이 절벽으로만 이루어진 해안선을 따라 몇 킬 로미터나 떨어진 뭍까지 헤엄쳐 가야 했을테니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영을 하기에는 자신은 너무 지쳐있었고,가인은 의식 을 잃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였다. ' 의식을…잃어…? 가인?! ' 그제서야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가인에게 생각이 미친 마리. 그녀는 다 급히 가인 쪽을 돌아 보았다. 가인과 마리의 A.I 슈츠에서 나오는 오라의 빛 만이 어두운 주위를 밝혀 주고 있었다. 그런 오라의 빛에 드러난 가인은… " 어째서 A.I 헬맷이?! " A.I 헬맷이 해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파도에 부딪힐 때의 충격으 로 해제 장치가 작동되었던 걸까? 가인은 A.I 헬맷 사이로 창백한 얼굴을 드 러내고 있었다. 그럼 이 상태로 물에 빠졌다는 얘기인데…! " 가인…?! " 마리는 가인의 볼을 두드리며 그를 불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마리의 손 길에 닿은 가인의 볼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마리는 당황하며 가인의 심 장 부근에 귀를 가져갔다. 응당 울려야할 심장 소리가… " 들리지… 않아‥? " A.I 슈츠 상의의 지퍼를 내리고, 드러난 가인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맥박 이 뛰지 않고 있었다. 코 밑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숨 쉬는 게 느껴지지 않았 다. 가인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저,정신 차려! 가인?!! 유가인!! " 마리는 호흡이 가파지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가인의 창백한 얼굴에 죽은 동생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아,안돼! 안돼!! 가인도… 설마 가인 도…!! ' 정신차려, 성마리!!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 마리는 주먹을 으스러지듯 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지금은 이럴 때가 아 니야. 우선 가인이 다시 숨을 쉬게 해야…! 그래. 인공 호흡이다! 인공 호흡 을 하면…! 마리는 가인의 머리를 뒤로 젓히면서 턱을 들어주었다. " ......흡. " 그리고 그녀는 볼 것 없이 가인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기도확보를 시 행했는데도 호흡이 멎었거나 호흡의 양이 극히 적을 때는 입에서 입으로 인 공호흡을 실시해야 한다. 부끄러움이나 어색함도 없었다. 마리는 거침 없이 입으로 가인의 입에 숨을 불어 넣었다. ' 깨어나…! 가인, 제발…! ' 가인의 코를 쥐고 입 주위로 숨이 새지 않도록 입을 덮고 숨을 불어 넣었다. 처음에는 강하게. 그리고 그후에는 5초 간격으로 1회씩 반복했다. 코를 잡았 던 손을 놓아 공기가 쉽게 외부로 유출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마리는 질끈 눈을 감았다. 깨어나! 어서! 눈을 뜨라고!! " ......흡… " 마리의 눈가로 눈물이 맺혀 올랐다.제발 정신을 차려! 가인!! 이,이대로 영 원히 일어나지 않을 셈이야?! 이대로 죽을 셈이냐고!! "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 마리는 소리지르며 가인의 위로 올라탔다.가인의 A.I슈츠 상의를 벗기며 그 녀는 가인의 가슴에 꽉지 낀 손을 대었다. 마리는 있는 힘 껏 가인의 심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 일어나! " 내가 잘못했어,가인…!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 네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만 했는데…!! " 일어나!! " 아직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 일어나!!! " 어서!! 어서 일어나 줘-----!!! " ......일어‥나란 말이야‥ " 미안‥ 미안해‥. 미안… " 흑‥ 흐흑… " 가인의 가슴으로 작은 물 방울들이 떨어져 내렸다. 마리는 울고 있었다. 그 녀의 두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가인의 차가워진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 난‥ 난 가인에게 뭐라고 했었지… ' - 난 네 녀석한테 도움을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 네 도움 따윈 필요 없 어!!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상처 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절대로 죽게 하지 않는다!! 내가 지켜줄거다!! 내가 지켜낼 거야!! " 뭐가 지켜줄거라는 거야? 응? 성마리! 지켜주기는 커녕… 오히려‥ 오히려‥ - 하마터면 죽을 뻔 했잖아!! 네 목숨은 그렇게 헐 값인 거냐?!! 죽어 버려 도 상관 없는 거야?!! 미안해. 가인. 미안해. 나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지? 넌 내 동생이 아니었는 데‥ 죽은 내 동생‥ 아인이가 아니었는데…. 자신이 마치 가인을 죽음으로 내몰은 것만 같았다.죄책감과 상실감으로 마리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 흑… 흑… " 그렇게 마리가 하염 없이 울고 있을 때‥ " 쿨럭…!! " 순간, 마리의 밑에 있던 가인이 격하게 몸을 떨며 입으로 물을 토해내기 시 작했다. 마리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다급히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 정신 이… 든 거야? 살아… 있는 거야‥? " 커헉‥켁! 하악‥! 하아‥ 하아‥ " 고통스럽게 물을 토해내며 기침을 하는 가인. 한참을 토하던 그는 곧 기진 맥진한 얼굴로 자신의 위에 있는 마리를 바라보며 힘 없이 입을 열었다. " 마리‥ 선배‥? " 살아… 있었어‥. 가인, 살아 있는 거야‥! 그러자 마리는 허탈한 안도감과 함께 이유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가인을 바 라보며 소리쳤다. " 그래! 나야!! 유가인,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도 대체 왜‥!! " " 하,하하‥ 그래도… 둘 다… 살았잖아요. " " …이 바보!! " 죽다 살아난 주제에 웃고 있는 가인을 보자,다시 눈물이 흘러내릴려고 했다. 마리는 애써 눈물을 참아내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가인에게 물었다. " 일어날 순 있겠어? " " …일어…나야 겠죠‥. " 창백한 안색으로 비슬 몸을 일으킬려는 가인.하지만 그는 곧 신음을 흘리며 다시 땅바닥에 쓰러져야 했다.오른쪽 어깨에서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던 것이 다. 뭐지? 왜 이렇게 아픈 거야?! " 가만 있어. 어깨가 탈골되어 있다‥! " 몸을 일으킬려는 가인을 제지하며 마리는 가인의 어깨를 살펴보았다.A.I 슈 츠의 보호를 받은 이상 어깨가 탈골될 일은 없었을텐데‥어째서…? ' 아…. ' 마리는 가인이 어깨가 탈골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 마리와 가 인의 상태가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들 치고는 양호한 이유이기도 했다. 가인 은 바다에 떨어지기 직전, 천공권의 토네이도를 바다에 날렸던 것이다. 그것 으로 낙하 속도를 감속시켰기에, 비록 가인의 어깨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탈골 되었지만 그들은 살 수 있었다.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또… 도움을… 받은 건가…. " 조금만 참아라. " " 아,예…. " 가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올리는 마리. 그리고 순간,힘있게 뼈를 맞췄 다. '우두둑' 심한 통증이 있었지만, 가인은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 자 곧 격심한 어깨의 통증은 가라 앉기 시작했다. " 고,고마워요…, 선배. " " ......... " 가인의 말에 아무 대꾸 없이 고개를 돌리는 마리. 가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 에 고개를 떨구었다. 마리 선배…, 분명 더 화가 났겠지….이렇게 무모한 짓 이나 해댔으니 말이야…. 하지만 후회는 않는다. 그런 무모한 짓 덕분에 그 녀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몸의 상태를 살펴 보았다. 몸이 물 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그리고… 지독하게 느껴지는 오한…. " 으윽…. "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감싸안았다. 뼈속 까지 시린 추위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왜‥왜 이러는 거지? 지금은 여름이 한창인 8월일텐데‥어째서 이 렇게 추운 거야? 얼마나 추웠는지 얼굴이 새파래지며 이빨이 딱딱 떨렸다.그 런 가인의 상태를 눈치챈 마리가 그에게 물어왔다. " 왜 그러는 거냐? 추운 거야? " " 아,예‥ 가,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킬려는 가인.하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고 통이 눈에 훤히 보였다.마리는 인상을 굳히며 가인의 손목에 차여 있는 무전 기를 만지작 거렸다. A.I 슈츠를 해제시키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무전기는 떨 어질 때의 충격으로 고장이라도 났는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리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 곤란한데… 통신도 할 수 없게 된 건가…. ' 이제는 구조 요청도 보낼 수 없게된 마리들이었다. 가인은 오한에 떨면서도 마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 …고장…난 거에요? " " 그래. A.I슈츠에 관련된 옵션들도‥ 무전도 다 불능이로군. " " 그런…. "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인식했는지 무겁게 탄식하는 가인. 한 마디로 진우씨 들이 자신들을 구조하러 올 때까지는 꼼짝 없이 이곳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 는 얘기로군. 하지만 그런 그의 걱정도 몸 속 깊숙히 파고드는 오한에 의해 곧 잊혀져야만 했다. 마리는 그런 가인을 바라보다가 곧 그의 A.I 슈츠를 벗 기기 시작했다. " 마,마리 선배? 무,무슨 짓이에요…? " " 이대로 두면 체온이 떨어져 위험할 수도 있다.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 해. " 그,그러니까 몸을 따뜻하게 해줘도 모자랄 판에 왜 옷을…?! 마리는 가인의 젖은 옷을 모두 벗기고 있었다. 가인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말릴려고 했지만 온 몸에 힘이 빠져 움직이질 않았다. 창백한 그의 얼굴이 가볍게 달아올랐다. " 그,그만둬요…! 그만…! " 그러나 결국 속옷 한장 외에는 모두 벗겨진 가인. 으,으아…! 죽고 싶다!! 여자한테 옷이 벗겨지는 남자라니…!! 무엇보다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했다는 게 더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도 밀려드는 오한에 의해 곧 잊혀져 버렸다. 마,마리 선배…!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런 가인의 의 문에 대답이라도 하려는듯이 몸을 일으키는 마리. 그리고… - 스륵…. 마리의 발 밑으로 검은 색의 A.I 슈츠가 떨어져 내렸다.마,마리 선배?!! 갑 자기 옷은 왜?!! 그러나 마리의 다음 행동은 가인을 더 놀라게 하기에 충분 했다. 그녀는 A.I 슈츠 밑에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기 시작한 것이다. 가 인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놀랐다. " 무,무슨 짓이에요?!! " " 가만 있어. " 의외로 담담한 마리의 음성. 하지만 그녀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리는 가인의 뒤에 앉아 천천히 그를 등 뒤에서부터 껴안았다. 으, 으아…!! 마리 선배의 가슴이…! 가슴이…!! 가슴이 내 등에…!! 자신의 등 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에 가인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귀로 마리의 무뚝뚝한, 하지만 어딘가 쑥스러워하는 목 소리가 들려왔다. " 저체온증이다. 차가운 물에 빠진 경우에는 익사보다 체온 저하 때문에 죽 는 경우가 더 많지. 저체온증의 환자는 더 이상의 체온 손실을 방지하고 몸을 다시 덥혀야만 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 방법 외에는…. " 그러니까 쉽게 말해 몸으로 덮히는 수 밖에는 없다는 거군. 옷은 다 젖었으 니 체온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벗긴 거고….하,하지만 그래도 이건…. 가인은 마리의 알몸이 자신에게 닿아있다는 것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어쨋든 체온 상승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한데…. 가인이 그런 생각 을 하고 있는 동안 마리는 A.I 슈츠에서 포션을 꺼내 그에게 주사했다. - 쏴아아아아‥ 동굴 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A.I 슈츠의 불빛도 사라진 지금, 동굴 안 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만이 주위를 어렴풋하게나마 밝혀 주고 있었다. 가인은 차마 마리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못하며 어색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건 마리도 마찬가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그녀의 몸이 느껴져 왔 기에 가인은 뻣뻣하게 몸을 굳히며 부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그런 가인의 행동에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자신 쪽으로 더 끌어 당겼다. " 편하게 있어도‥ 돼. " " 예,예에…. " 하,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편히 있으라는 거에요,마리 선배?!! 가인은 애써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녀가 끌어당기는데로 움직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닿아있는 등 부분 의 감촉에 가인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 ......... " 어색한 침묵.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가인과 마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 민에 빠졌다. 마리는 생각했다. 나,나도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이런 대담 한 짓을 하다니…. 하,하지만 이러지 않았으면 가인이 위험해지니까…! 그래! 가인을 구할려면 어쩔 수 없었던 거니까!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였어! 그러 니까…!! ' 아무 생각 말자…. '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는 마리였다. 더 생각해봤자 머리만 혼란스러울 뿐이니까. 그러나 가인은 마리가 자신의 등에 머리를 기대오자 깜짝 놀라며 몸을 흠칫 거렸다. 그 바람에 덩달아 놀란 마리도 가인의 등에서 머리를 떼 며 얼굴을 붉혔다. 나,나 지금 뭐하는 거지…! 나도 참! 부끄러움 때문이었 을까 마리와 가인은 자신에게 닿아있는 상대의 몸이 뜨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때 어색해하는 가인의 목소리가 마리의 귀로 들려왔다. " 저,저기 선배…. " " …응? 왜‥? " 그녀 답지 않은 가녀린 음성이 마리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가인은 기분이 이상했다. 왜,왠지 마리 선배가 평상시보다 더 여성스럽게 느껴지는데…. 기 분 탓일까나…. " 저… 뭐 좀 물어 봐도… 돼요? " " …물어봐…. " 물어볼 거라니…. 뭘까? 마리는 긴장하며 가슴을 졸였다. 자신의 크게 울리 는 심장 소리가 가인에게도 들릴까봐 노심 초사한 그녀였다. 그리고 가인이 물었다. " 선배의 동생… 에 대해 얘기해주시면… 안될까요? " " .........!! " 전혀 뜻 밖인 가인의 질문에 두 눈을 크게 뜨는 마리. 가인은 등 뒤에 있는 마리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당황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 아,아뇨…. 그런 게 아니라…! 얘기해주시기 싫으면 말하지 않으셔도 되 요…. " " ......... " 아무 대답이 없는 그녀. 가인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며 조심스럽게 사과 했다. " 죄,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이상한 질문이나 해서….마음 상하셨다면 사 과드릴게요…. " " ......아니. " 마리는 짧게 대답하며 한 숨을 쉬었다. 설마 가인이 자신의 동생에 대해 물 어올 줄은 몰랐던 그녀였다. 하지만…얘기해줘도… 상관 없지 않을까…. 그 라면…. 가인이라면…. " 가인이라면… 얘기‥해줘도…. " " 예…? " 너무나도 작은 그녀의 목소리에 반문하는 가인.마리는 작게 도리질을 친 후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상관‥없어. 얘기해줄게…. " " ......예에…. " 그리고 이 해식 동굴에서 마리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 우와아‥ 누나! 그거 무슨 돌이야?! 노을이 지는 해변가. 마리는 7살. 아인은 6살이었다.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오는 아인에게 마리는 손 안의 돌을 들어올렸다. 돌은 신비한 붉은 빛을 흘리고 있었다. - 이거‥ 신기하지? 여기서 줏은 건데… 처음에는 그냥 돌멩이 같았는데 내 가 줍자 붉은 색으로 변했어! - 에에? 진짜?! 아인은 얼른 마리에게서 붉은 빛이 나는 돌을 건내 받았다. 그러자 아인의 손에 들린 돌은 빛을 거짓말 같이 감추고 평범한 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가? 소년은 깜짝 놀라며 다시 마리에게 돌을 건내주었다. 그러자 다시 흘러 나오는 붉은 빛. - 우와! 우와아∼! 멋지다∼! 아인은 흥분한 목소리로 두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고,그런 동생의 모습에 마 리는 활짝 웃었다.이 무렵의 마리는 아직 아이다운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인은 연신 신기하다는듯 마리가 가진 돌을 만지작 거리며 돌에서 눈을 떼 지 못했다. 마리는 그런 동생을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 …이거… 갖고 싶어? - 에? 으,으응…. 그래도! 누나가 먼저 발견한 거구… 내가 가져도 빛은 안 나니까…그게…. 아인은 어린 아이 답지 않게 사양하며 웃음 지었다. 하지만 마리의 돌을 가 지고 싶어하는 기색이 눈에 띄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마리는 잠 자코 아인의 손에 돌을 쥐어 주었다. 아인은 그녀에게서 건내받은 돌과 마리 를 번갈아 보며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 어… 누,누나? - 가져. 너 줄게. 빛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내가 쥐어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언제나 네 곁에 있으면서 빛을 보여줄테니까…. 그래. 언제나 네 곁에서…. 일곱 살이었던 마리의 작은 약속. 아인은 그런 마리의 미소에 마주 답하며 손 안의 돌을 움켜쥐었다. - 응. 알았어. 그 후로 아인은 그 돌을 절대로 몸에서 떼지 않았다. - 우와아∼ 크다! 세월의 흐름이 있었다. 어느덧 마리는 9살이 되었고, 아인은 8살이 되었다. 두 오누이는 막 검도 수련을 마쳤는듯,땀에 젖은 검도복을 입고 죽도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고목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 누나! 봐봐! 크지?! - 응. 진짜‥ 크다…. 마리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수백배는 될 듯한 크기의 고목.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벌써 수백년 간을 살아온 마을의 수호신 격인 나무라고 했다. 그런 나무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인이 마리를 향 해 천천히 중얼거렸다. - 이 나무… 자를 수 있을까…? - 응? 동생의 엉뚱한 질문에 아인을 바라보는 마리.하지만 이 질문은 자신도 아버 지에게 했었던 질문이었다. 마리는 그것을 생각해내고 살며시 미소지었다.그 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지. 마리는 아버지가 했던 말을 똑같이 아인에게 해주었다. - 한 자루의 검이 되어라. 몸도 마음도, 하나의 날카로운 검이 되어 본질을 뛰어넘을 때. 그리고 손 안의 검날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눈 앞의 모든 것은 베어질 것이다…. - …뭐야? 그건…? - 아버님이 하셨던 말씀…. 나도 잘은 몰라…. 마리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뒷 머리를 매만졌다. - 하지만 검을 수련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 고목을 벨 수 있지 않을까? - 진짜? 이렇게 큰 나무를 벨 수 있다고? - …열심히 수련한다면. 흥분해하는 동생에게 쓴 웃음을 지으며 답하는 마리. 하지만 마리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과연 그런 날이 올 수가 있으려나.그것 도 이런 거대한 고목을 검 하나로 벨 수 있을리가…. 그러나 아인은 마리가 한 말을 철썩같이 믿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마리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 이 나무를 벨 수 있게 된다면 분명 굉장히 강해지겠지?! 그치?! - 응? 아, 그럴‥거야. - 좋아! 누나! 우리 열심히 수련해서! 진짜 진짜 열심히 수련해서…!! 나중 에 이 나무, 꼭 베자!! - 뭐‥? - 응?! 누나! 난 강해질 거야! 그러니까 약속해 줘! 응?! 응?! 막무가내로 보채기 시작하는 아인의 모습에 마리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 그래. 약속이야…. - 헤헤, 약속! 마리와 새끼 손가락을 걸며 엄지 도장을 찍는 소년. 그 후로 아인은 그 약 속을 잊지 않았다. - 바보 녀석. 좌수검(左手劍)은 그 성질 상 위력이 강하고 괴이악랄하지만 검도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제약이 뒤따르기 때문에 상승검도(上 乘劍道) 를 익히기에는 부적당하다. 검도의 정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좌수검을 익혀서는 안돼! 그런 자신의 꾸짖음에 소년은 언제나 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로 수중의 검을 들어보였다. - 헤헷, 걱정마,누나. 난 좌수검으로 검도의 일인자가 될테니까!! 아인은 열두 살이 되어서도 변한 것이 없었다. 아인은 어렸을 때 부터 고집 스럽게 좌수검을 익혀왔었다. 바보같으니라구.좌수검은 우수검(右手劍)을 이 기지 못해. 오른손과 왼손에 각각 연결되어 있는 좌뇌와 우뇌는 그 담당하는 영역이 틀리단 말이다. 더구나 원래 오른손 잡이인 녀석이 왼손으로 검을 쓰 겠다니! 마리는 아인의 고집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 아무도 좌수검으로 일인자가 된 적이 없잖아! 난 우수검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좌수검의 달인이 되겠어! - 맘대로 하려무나. 그런 아인의 외침에 마리는 언제나 처럼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인 은 저렇게 큰 소리를 치는 만큼 실력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에게 더 이상 뭐 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자신보다 1살 어린 남동생이었지만 그 소질만큼은 마 리, 자신을 뛰어 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아인이 마리를 뛰어넘기에는 아 직 무리가 있었다. 물론,거기에는 남몰래 열심히 수련하는 마리의 노력이 있 었지만. - 그럼 난 갈테니… 도장 정리 잘하고 들어와라. - 응! 그렇게 동생에게 뒷 정리를 맡기고 도장 뒤의 집으로 들어오는 마리. 막 현 관으로 들어오던 그녀는 낯선이의 하이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 구지? 손님인가? 마리는 조심스럽게 거실로 걸어갔다. 그곳에서는 차를 마시 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비영과 낯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막 그들에게 다 가갈려던 마리는 순간, 평상시와는 달리 어딘가 어두운 듯한 아버지의 목소 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 …그렇‥ 습니까? 우리 딸아이가…. - 예, 교관 님. 하지만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것도 아니고…. 아닐 수도 있으 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낯선 여인의 목소리. 마리는 왠지 함부로 나가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에 벽 뒤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아버지와 여인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 허허… 걱정은 무슨. 그래. 어쨋든 진 사령관님은 잘 계시는 가,수정 양? - 예. 비영 교관 님께 안부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그렇고… 정말 괜찮으신가요? 마리 양을 저희 쪽에서 인계해도…. - …그 애의 힘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래야 겠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꾸하는 비영. 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무거움을 수정 은 읽어낼 수 있었다. 벽 뒤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마리의 머리로는 수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아버님…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도움이 될 수 있다니 …? 뭘? 날 인계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일까? 저 여자는 누구지? 무슨 말들 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마리의 생각을 뚫고 비영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 어차피 도장은… 아인이에게 물려줄 생각이었으니까…. 그 순간, 마리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단지 비영의 마지막 말 만이 그 녀의 귀에서 멤돌고 있었다. 도장을… 물려줘? 아인이에게? 내가 아니고? - 어째서…! 내가 분명 아인이보다 실력도 더 위고…! 내가, 내가 누나인데…! 어째서! 어째서 아인이가 도장을 물려받는다는 거지?! 어째서?! - 아니야. 이건 뭐가 잘못된 걸 거야. 후계자는 나야…! 바로 나라고!! 그러나 비영은 그런 마리의 마음 속 외침에 쐐기를 박았다. - 무엇보다… 후계자는 남자 아이가 적임이기도 하니…. 그런…. 그리고 다음 날, 비영은 아인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망설임 없이 후계자 서임을 받아들이는 아인. 그 동생의 모습에 마리는 다시 한 번 상처를 받았 다.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짓는 아인.하지만 마리는 마주 웃어주지 않 았다. 아니, 웃어 줄 수 없었다. 지금껏 13년 동안 키워오던 그녀의 꿈은 송 두리째 박살이 나버렸기에…. 그것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동생 아인에 의 해 깨져버렸기에. - 용서할 수 없어…. 용서하지 않겠어. 나에게서 꿈을 빼앗아간….내 목표를 아무렇지도 않게 뺏 앗아간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절대로!! 사랑하던 동생은 어느새 그녀에게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 용서할 수 없어…. 그 후로 아인은 마리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 아,저… 누나…. 예전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마리를 부르는 동생의 목소리. 하지만 마리는 더 이상 아인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주지 않았다. 더 이상 따뜻한 목소리로 답해주지도 않았다. 단지 서릿발 같은 차가움으로 대할 뿐. - 뭐냐? - 아,저기.........아,아무 것도…. 마리의 싸늘한 태도에 결국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말 꼬리를 흐리는 아인.그 런 그의 모습에 마리는 짧게 코 웃음을 치며 다시 수련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인은 어딘가 서글퍼진 얼굴로 자신의 누나를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 그 자리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후계자가 결정된지 어언 3년이 흘렀지만,여전 히 그녀는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고 있었다. - ......... 아인은 손 안의 죽도를 힘 있게 움켜쥐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마리가 자신 을 차갑게 대하는 이유를. 그녀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를. 당장에라도 그녀에 게 후계자의 자리를 양보하고 싶었다. 누나는 강하다.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 지 않을 정도로…. 무영신풍류의 후계자는 그녀가 더 적임이었다. - 하지만… 아인은 이를 악물며 죽도를 휘둘렀다. 예전과 같이 누나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그녀에게 기대고만 싶었다.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하 지만… 하지만…! - 그래서는 안돼…. 아인은 죽도를 휘둘렀다. 도복의 사이로 드러난 그의 피부는 유달리도 창백 해 보이고 있었다. - 결투를 신청하겠다. 그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아인은 목도(木刀)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굳어진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리의 말은 계속되었다. - 아버님이 정한 후계자의 선정. 난 납득할 수 없다. 내가 아닌… 나보다도 약한 네가 후계자가 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어. 단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더더욱 인정할 수 없다! - 내가 이기면, 후계자의 자리를 넘겨라. 모든 건 실력으로 말하는 법. 만 약 진다면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겠다. 그런 마리의 대답에 아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알았어. 그 말을 지켜주길 바래. 자신만만한 미소까지 짓고 있는 아인. 그 모습에 마리는 저 마음 깊숙한 곳 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 건방진…!! 절대로 지지 않는다! 반드시 후계자의 자리를 되돌려 받겠어! 순수한 나의 힘 만으로!! 원래 내 것이어야 할 것을 되찾아 오겠어!! 네 녀석한테 내주지 는 않아! - 절대로!! 그런 마리의 분노가 실린 표정을 대하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아인. 긴 검은 머릿결 사이로 드러난 그의 미소는 너무도 창백했기에 투명해 보이 기 까지 했다. - 간다!! 아무도 없는 도장에서 마리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무 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목도. 그것은 사정 없이 아인의 급소들을 노리고 날아 들었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는 마리의 목도! 하지만 아인은 마리의 이 공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팽이 처럼 몸을 숙여 회전하는 아인. 마리의 찌르기가 아슬 아슬하게 아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아 인의 반격이 시작 되었다. - 이식(二式) 파쇄(波殺) - 으읏!! 자신의 턱을 올려쳐 오는 아인의 목도를 간신히 피해낸 마리. 그녀의 등 뒤 에서 식은 땀이 피어 올랐다. 이런 날카로운 공격을 해낼 줄이야…! 마리는 자신이 아인을 과소평가 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인. 언제 이런 실 력을 키운거지…! 그런 마리의 귀로 아인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후계자의 자리… 필요 하지 않아? - 네 녀석이…!! 노기가 실린 마리의 외침. 그리고 마리는 거칠게 목도를 휘두르며 아인에게 달려들었다. 오식(五式) 요란(搖亂)! 어디 막을테면 막아봐라!! 그때, 마리 의 목도에 휘감기는 아인의 목도. 마리의 동공이 커졌다. 이건…?! - 수식(守式) 파란(波蘭) - 탕! 공격할 상대를 잃고 튕겨오르는 마리의 목도.그리고 그런 마리를 향해 일직 선으로 날아드는 빛이 있었다. 바로 사식(四式) 단월(斷月)! 아인의 목도가 마리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것이다. 이,이까짓거! 이 정도에 당할까 보냐?!! 마리는 거세게 스텝을 밟으며 직선의 공격을 자신의 뒤로 흘렸다. 찌르기는 빠르고 강맹하지만, 어디까지나 일격필살. 그것을 실패하게 되면 너에게 제 이격의 기회란 없다! 이 승부… 내가 가지겠어! - 으아아아아앗!! 마리의 혼신의 힘을 다한 목도가 아인의 배로 휘둘러 졌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하는 것 처럼 보였다. - 타탕…! 도장의 바닥을 울리는 목도의 소리.하나의 목도가 마리와 아인의 옆으로 떨 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떨어진 목도는 마리의 손에 들려있던 것이었다.마리 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자신의 목에 겨눠져 있는 아인의 목도를 바라보 았다.어떻게…? 단월이라면… 분명 막아냈는데…? 그런 마리의 궁금증을 풀 어줄려는듯 아인이 짧게 답했다. - 단월의 또 다른 모습, 잔월(殘月). 숨겨진 이형의 식이지. - 그런…. 잔월. 그래. 세 번의 찌르기였어. 맨 처음 찌르기로 상대를 교란시키고 두 번째 찌르기로 자신의 목도를 쳐날렸으면, 세 번째 찌르기로 목을 노렸다.지 금의 마리, 그녀로서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마리는 이를 악 물며 고개를 숙였다. 졌다…. 완전히 졌어. 기술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 로도 완전히 졌어. - …내‥ 패배…다. 마치 흐느끼는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마리. 아인은 그런 자신의 누나를 담담한 눈초리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숨가쁜 결투를 벌였기 때문인지 가득히나 창백한 피부가 더 하얗게 보이고 있었다. - 탱그랑…. 아인의 목도가 마리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 는 마리. 그리고… - 커억…. 순간, 아인은 입 안 가득 검붉은 피를 바닥으로 토해냈다.이 갑작스러운 아 인의 각혈에 가슴이 내려 앉는 마리. 어,어째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 아인?!!! 마리의 비명. 그러나 아인은 이미 자신이 토한 피 속으로 그 몸을 쓰러뜨리 고 있었다. - 원인 불명의 병입니다. 이런 케이스는 저희도 처음이라서… 당혹해하며 뒷 말을 흐리는 의사. 비영과 마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있는 아인을 바라보았다. 아인이 각혈을 하고 쓰러진지 5일째. 그는 빠 른 속도로 병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얼굴 색은 비정상적으로 하얗게 변해 있 었고, 온 몸은 눈에 보일 정도로 마르고 있었다. 그는 산소 호흡기를 입에 착용한채 죽은듯이 잠만 자고 있었다. 의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 아마, 요 이 삼년동안 자주 각혈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만… 가족 분들은 아시고 계셨습니까? - …그,그렇습니까…. 무거운 비영의 탄식. 마리는 그 말을 듣자, 흠칫 몸을 떨었다. 그 기간은… 그 기간은 자신과 아인의 사이가 멀어진 시기였었다.일부러 아인에게 차갑게 대하며 냉정하게 굴은… 바로 그 시기…. - ......... 혹시… 혹시 내가 아인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예전 처럼 사 이좋게 지냈더라면… 그의 병을 일찍 알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기에 치 료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난…난 누나인데… 이 아이의 누나인데도… 어째 서 이토록 무관심했던 거지? - …내 탓이야…. 어째서 난 알지 못했던 거지? 어째서 눈치 채지 못했던 거지? 이렇게 아픈 몸이었는데…. 이렇게 동생이 괴로워하고 있었는데도… 어째서… 난… - 네 탓이 아니다,마리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비영의 위로 섞인 말도 마리에게는 다가오지 않았다. 마리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 탓이야. 내 탓이야. 내 탓이야. 내 탓이야. 내 탓…. - 아마 오늘 밤이 고비일 것 같습니다…. 뒤를 이어 들려오는 의사의 말도 마리에게는 다가오지 않았다. - 삐‥삐‥ 미약해져 가는 생명 신호. 그것은 막 한 생명의 죽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점점 그 생명의 불빛이 꺼져가는 아인의 앞에서 비영과 마리는 우두 커니 서있었다.의사가 말한 마지막 순간은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었다.마리는 붉은 핏발이 선 눈으로 하염 없이 아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 딸의 모 습을 보다 못한 비영이 마리에게 말했다. - 좀 눈이라도 붙이거라‥. - ......... 하지만 묵묵부답. 마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비영은 나직히 한 숨을 내쉬었다.도대체 이 어린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 런 일이…. 자신의 아이들이 아파하는 모습에 그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 다. 그리고 그 때… - 아인…? 정신 들어?! 나 알아보겠어?! 다급히 들려온 마리의 외침. 비영은 황급히 병석에 누워있는 아인을 바라보 았다. 아인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눈을 뜨고 있었다. 5일만 에 의식을 찾은 것이었다. 소년은 자신을 부르며 소리치는 마리를 올려다 보 았다. - 누‥나…? - 그래! 나야,아인아! 바보같이…!! 왜 말 안했었던 거야?! 이렇게 아프면 서…!! 어째서 그 동안 병에 대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던 거지?!! 그렇게… 그렇게 후계자의 자리를 원했던 거야?! 병에 걸리면 후계자가 되 지 못할까봐 그랬던 거야?!! 바보… 바보같으니라구!! - 후계자 따위…!! 도대체 그런게 다 뭐라고…!!!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걸 왜 몰랐던 거야?!! 이 바보!! 바보!! 바보!! 마리는 아인의 침상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동생이 이렇게 아픈데 도, 그것도 모르고 시합을 벌이다니!! 후계자 따위…!! 중요한 것이 아니었 는데!! 마리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보다 더 중요한 것 이 있었다는 걸. 바로 자신의 동생, 아인이었다는 걸. - 바보…! 그때, 그런 마리의 손을 살며시 잡아오는 손길 하나. 바로 아인이었다.소년 은 힘 없는 손길로 마리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고 있었다. 그것은…. - 이건…? 어린 시절, 마리가 아인에게 주었던 붉은 빛이 나는 돌이었다. 그것은 아 인의 손에서 마리의 손에 넘어오자 다시 그 신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아 직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런 걸…. 그 돌은 잘 다듬어져 목걸이의 형 태를 하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아인이 이 돌을 얼마나 소중히 보관해 왔 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인은 마리의 손에서 돌이 빛나고 있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역시… 그 돌은… 누나에게 더‥ 어울려…. - 아인! - 잘… 보관‥해줘‥. - 그,그런 말 하지마! 네 것을 왜 내가 보관해야 하는 거야?!! 살아! 살아 서 네가 계속 가지고 있어!! 마리의 외침이 잘 들리지 않는지 눈을 깜빡이며 숨을 몰아쉬는 아인.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기운을 모아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말을 이었다. - 누나… 예전에 했던 약속… 기억나…? 약속…? 거대한 고목에 관련된 기억이 마리의 머리로 떠올랐다.아인은 감겨 가는 눈으로 마리를 보고 있었다. 마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기억나! 기억하고 있어! - 다행… 이다‥. 나‥ 누나가 잊어버렸나… 했어‥. 잊을리가 있겠어! 그 약속을‥!! 내가 뭣 때문에 그렇게 무영신풍류에 집착 했는데…! 뭣 때문에 후계자에 집착한 건데!! 다… 그 약속을 위해서…! - 약속… 반드시 지켜야 해‥. 그리고 그것이 아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 아인----------!!!! - 쏴아아아아‥ 아인의 장례식은 폭우 속에서 진행되었다. 아인은 화장 되어, 그 가루만 남 기고 마리를 떠나갔다. 그리고 마리는 그 화장한 가루를 든 채, 그리고 목도 를 든채 예전의 장소에 와 있었다. 도장의 뒷 산에 있는,동생과 한가지 약속 을 했었던 거대한 고목이 있는 곳. 바로 그 장소. 나무는 예전,자신들이 왔 을 때와 한 치의 변함도 없는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마리는 폭우 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 거대한 고목을 올려다 보았다. - 쏴아아아아‥ 마리는 아인의 화장 가루가 담긴 상자를 고목 앞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수 중의 목도를 들어올렸다. 마리는 젖어내린 머리 카락 사이로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위의 공기가‥휘날리던 바람 이 멈추기 시작했다. - 쏴아아아아‥ 젖어있는 대기 사이로 번져가는 붉은 색의 기운.그것은 마리의 몸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인의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던 빛과 같은 성질의 것. 그리고 지금 그 빛은 마리의 전신에서 피어올라 수중의 목도를 휘감고 있었다. 벨 수 있다‥. 벨 수 있어…. 그 생각만이 마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벨 수 있어. - 흐아아아아아아앗-----------!!! 휘둘러지는 마리의 목도.한순간의 붉은 빛이 주위의 모든 것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드러난 것은… - 쿠쿠쿠쿵…! 날카롭게 베어진 채 천천히 쓰러져 넘어가는 고목. 마리의 수백배는 넘을듯 한 고목이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목검 한자루에 진정 베어진 것이었다.비에 젖 은 고목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 수백년의 삶을 마감했다. - 허억… 허억… 마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베었다…. 정말로 베었어. 아인,보란 말이야! 그때의 그 나무…. 정말로 베어낼 수 있었다고…!! - 약속… 지켰단 말이야‥. '탱그랑'. 마리의 손에서 떨어져내리는 목검.마리는 천천히 주저 앉아 고목 의 앞에 놓아두었던 화장 상자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한 인간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운 무게의 것이었다. 마리는 상자를 끌어안은채 중 얼거렸다. 아인, 약속을 지켰어‥. 나‥ 지켰다고…. - 흑… 흑흑… 마리의 오열이 쏟아지는 빗 줄기 사이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 ......... " 마리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자 무거운 침묵이 그녀와 가인을 감싸오기 시작했다. 단지,은은히 파도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동굴에 흘 러들어오는 달빛은 희미하게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마리의 이야기를 조용 히 듣고 있던 가인은 천천히 뒤에서 자신을 껴안고 있던 그녀를 돌아 보았다. 가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 …마리 선배. " 가인은 마리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자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마리는 그 런 가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내가 예전에도 말했었지? 이미 지난 일이라고. 신경 쓸 필요는 없어. " " ......... " " 단지…. " 마리는 고개를 돌려, 동굴 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검은 물결 사이 로 동생, 아인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 단지 궁금할 뿐이야…. " 어째서 아인은 나에게 병을 숨겼던 거지…? " 그렇게… 후계자의 자리가 가지고 싶었던 걸까…? " " 선배…. " " 바보같으니라구…. " 그런 게 다 뭐라고…. 후계자 따위가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거야? " 나는 그 아이의 누나인데…. 누나였는데…. 아인은 왜 나에게 얘기를 안 했던 걸까? 병에 걸렸다고. 몸이 안좋다고. 왜 일찍 얘기를 안했던 걸까? " 아니, 그것보다도… " 나는 왜 눈치 채지 못했던 거지.누구보다 그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동생이 평상시보다 안색이 안 좋았다는 것도,각혈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걸까? 정말이지…. 정말이지 나는 그 아이에게 형편 없는 누나였어…. " 자조 섞인 미소가 마리의 입가에 머물렀다. 가슴이 답답해졌다.슬프지는 않 았다.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눈물도 그때 이후로는 단 한번도 흘려본 적이 없었다. 입으로는 동생을 제일 사랑했다느니 하고 말하고 있어도, 사실 나는 그 아이를 위해 제대로 슬퍼해 본 적도 없었다. 단지… ' 단지 가슴이 너무도 답답할 뿐…. ' 이 답답함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때 그런 마리에게 가인이 조용히 말 해왔다. " 좋아했던 거에요…. " 마리는 천천히 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초 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인, 지금 뭐라고 한 거지…? " 동생은… 선배를 너무 좋아했던 것 뿐이에요. " " 난…, 난 그 아이에게 쌀쌀맞게 대했어. 단지 후계자의 자리를 뺏기고 싶 지 않다는 질투 때문에…! 그 죄 없는 아이에게 나는 몹쓸 짓을 하고 만 거야. 언제나 곁에서 지켜주겠다고 했었는데…. 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했 었는데… 그런데도 나는…! " 이런 나를… " 이런 나를 그 아이가 좋아했었다고? " " 선배의 동생은… 인정 받고 싶었던 거에요. " 인정? 가인을 바라보는 마리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가인은 자신이 하는 말로 그녀가 상처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도. 아인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얘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가인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동생은 지켜지는 존재만이 아닌…. 자신도 선배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위해 노력했던 거에요. " 단지 보호만을 받을 뿐이 아닌…. 마리 선배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 어렸을 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의 남자로서, 한 사람의 동생으 로서 선배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에요. " 마리는 멍한 눈초리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가인을 바라 보고 있었다. 가인 은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애써 참아내며 간신히 다음 말을 이었다. " 분명 기대고 싶었을 거에요. 선배에게 응석도 부리고 싶었을 거고, 힘들 때는 위로도 받고 싶었을 거에요. 하지만… " 하지만 선배를 너무도 좋아하니까… 선배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 " 아인은 선배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했던… 거에요. " 가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껴안고 있던 마리가 살며시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리는 멍한 눈초리로 상념에 빠져들 고 있었다. - 좋아! 누나! 우리 열심히 수련해서! 진짜 진짜 열심히 수련해서…!! 나중 에 이 나무, 꼭 베자!! - 뭐‥? - 응?! 누나! 난 강해질 거야! 그러니까 약속해 줘! 응?! 응?! 자신에게 강해지겠다고 소리치던 아인.그때는 그것이 그냥 강해지고 싶다는 어린 아이의 소망인 줄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그건… - 누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 - 나도 누나를 돕고 싶으니까‥ - 나는 누나를… -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니까. " 아…. " 주륵. 마리의 눈가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다시는 동생을 생 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했었는데… 어째서… 눈물이… " 아아… " 한 번 흘러나오던 눈물은 곧 거침없이 마리의 눈가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이제야 깨닫다니…. 이제야 알아채다니… " 나… 아인이에게‥ 사과하고 싶었는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잘 대해주고 싶었는데… 어째서 나는… 이제야 알아챈 거지‥. " 사실, 후계자의 문제로 아인이에게 화가 났던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자신 에게 기대오지 않는 동생에게‥ 홀로 일어서려던 동생에게 단지 섭섭한 마음 이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것이 나름대로 나를 생각하며 행동 한 아인이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던 거지…. " 난‥ 어째서 이렇게 바보같은 걸까…? " 2년이나 지나서야…. 아인이 죽은지 2년이 지나서야 그의 사랑을 알게 되다 니. 나는 어쩌면 이렇게 둔한 것일까? 나는 제대로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지 도, 따뜻한 말 한마디도 건내주지 못했는데. 사랑한다고 답해주지도 못했는 데… " 아인아… 미안‥해…. " 마리는 마치 그동안 참아왔던 마음이 터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 이 흐느끼기 시작했다.가인은 그런 마리를 끌어안아주며 그녀가 자신의 가슴 에서 울게 해주었다.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눈시울이 붉어져 버렸다. 그는 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 울어요…. 얼마든지. 곁에 있어 줄테니까. " " 흑‥흐흐흑…. " 마리의 눈물로 가인의 가슴은 젖어들었다. 마리는 하염없이 울었다. 마치 그 동안 아인을 위해 울어주지 못했던 것에 사죄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그녀였다.막힌 감정은 이렇게 한번 씩 토해내 주어야만 하는 것이 다. 그렇게 라도 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인생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다. "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됐어요, 선배? " " ......음. " 대답하는 그녀는 언제나의 마리로 돌아와 있었다.마리는 자신이 그 동안 가 인의 품에서 그것도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그를 껴안고 있었다는 것에 생각 이 미치자,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가인의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기에 더 이상 그를 껴안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 미,미안‥하다. 나… 폐를 끼쳐버렸군…. " " …아니요. 이런 폐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 따뜻한 가인의 말. 마리는 그에게서 상기된 얼굴을 돌리며 살며시 미소지었 다. 고마워, 가인…. 나는…언제나 너에게서 도움만 받게 되는구나…. 자신 을 배려해주는 가인의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운 마리였다.그런 그녀의 뒤에서 조용한 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도… 마리 선배의 동생과… 같은 마음이에요. " " ........? " 가인? 그게 무슨…? 가인의 난데 없는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그를 바라 보는 마리. 가인은 그런 그녀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 저요…. 매번 위험에 빠지기만 하고…선배에게 도움만 받아왔잖아요….죄 송해요. 언제나 선배에게는 고마워하고 있었어요. " 마리는 그제서야 가인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가인…. 그렇지 않아. 나도 도움을 받은 걸. " 지금은 단지… 선배의 발목이나 붙잡으며 방해가 될 뿐이겠지만… 하지만 반드시… 선배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실력을 키우겠어요. 그러니까…그 때가 되면… " 제가 좀 더 실력을 쌓게 되면…. 지금보다 더 강해지게 되면…. " 절‥ 동료로… 인정해주세요. " 그렇게 말하며 가인은 긴장된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 리는 얼굴. 마리는 그런 가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 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자,가인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을 맞잡은 마리는 미소짓고 있었다. " ......지금도 충분해. 넌 최고의 동료야. " " 선배‥! " 가인의 얼굴로 미소가 번졌다. 나,인정받은 건가! 드디어 선배에게! 마리는 잡고 있는 가인의 손에 힘을 더욱 주며 말했다. " 앞으로도 잘 부탁해. " " 예!! " 가인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 킷킷‥ 그때, 가인과 마리에게 들려오는 희미한 웃음 소리. 그들은 인상을 굳히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소리는‥!! 분명 절벽에서 자신들을 공격했던 머맨들 의 목소리! 가인은 긴장하며 마리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 들킨‥걸까요? 우리? " " …그건 아닌 것 같은데. " 놈들의 목소리는 해식 동굴의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동굴은 꽤나 깊은 것 같았는데, 저 깊숙한 안쪽에서는 머맨들의 안광으로 추정되는 작은 빛들 이 번쩍이고 있었다. 아직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건 모르고 있는 것 같아. " " …다,다행이네요. …하지만 그럼 녀석들은 왜 여기 있는 거죠? " 우리를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가인의 질문에 마리는 가만히 생 각하다가 조용히 답했다. " 혹시… 이곳이 녀석들의 주둔지라면…. " " 예? " 그런 마리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는 가인.마리는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 다. 녀석들은 50명이 넘는 대단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정도의 수가 마 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고 행동한다는 것은 어딘가 녀석들의 은신처가 있 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런 깊은 해식 동굴이라면 머맨들 의 서식처로도 안성맞춤이다. " 어쨋든, 녀석들의 뒤를 따라가 보자. 만약 주둔지가 아니더라도 안쪽에서 녀석들이 나타난 걸로 보아 이 동굴은 지상과도 연결되어 있을 거다. " " 그,그렇군요…! 녀석들이 이 입구 쪽에서 들어오지는 않았으니까…! " 이곳에서 구조될 때 까지 꼼짝도 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가인은 마리의 말 에 서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가인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소리 쳤다. " 자, 어서 가죠! 마리 선배! 녀석들을 놓치기 전에! " " ......자,잠깐… 가인, 그 전에…. " 어딘가 당황한 것 같은 마리의 음성. 가인은 의아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 예? 왜요,선배? " " …그 전에 우리… 옷부터 입는 것이…. " 부끄러운듯이 뒷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는 마리의 말에 가인은 얼굴을 붉 히며 서둘러 땅에 떨어진 A.I 슈츠를 껴입어야만 했다. 석회암 동굴은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는 석회암층의 내부를 빗물이 용식 해서 형성한 동굴로,대체로 종유석(鍾乳石)이 있으므로 종유동이라고도 한다. 가인들이 있던 해식 동굴은 넓은 석회암 동굴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크기와 위용은 자연의 위대함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가인과 마리는 그런 동굴 속에서 적외선 고글에 의지한채 몸을 움직이고 있 었다.A.I 슈츠에서 오라의 빛이 흘러나올 것을 염두해 두어, 오라의 기운은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있었다. " …믿을 수 없어요.이런 동굴이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채 존재할 수 있 었다니…. " 가인은 석회암 동굴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 있던 마리 는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 동굴의 앞에는 거센 파도가 있어서 접근하기 힘들었을테고,그리고 입구는 기암 바위들로 가려져 외부에는 보이질 않았으니까. 우리가 이 곳을 발견 한 것도 대단한 우연인 거지. " " 하지만 이 동굴…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거라기에는 믿 기가 힘든데요. " 그의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넓은 석회암 동굴이 만들어질려 면 수천 년이 흘러도 힘들다.아무래도 외부의 힘이 개입된 흔적이 있었다. " …그래. 하지만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 인공적으로 구축된 것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어쨋든,그렇게 머맨의 뒤를 따라 들어가던 가인들은 곧 거대한 광장 크기의 공간으로 들어설 수 있 었다. 하지만 둘은 주춤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 한 것이다. " 이,이 빛은 뭐죠? " " …달빛이… 지상에서 흘러들어온 달빛이 동굴의 거울 같은 종유석에 부딪 혀 동굴 전체가 발광하는 것 같은데…? " 하지만 종유석에서 이 정도로 빛이 반사될리는 없을텐데…. 마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뭔가 바위 자체에서 발광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발광하는 바위라니…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쨋든,이 빛 때 문에 가인들은 더 이상 고글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져 A.I 헬맷을 해제시켰다. " 아, 마리 선배…! 잠깐 저기…! " 그때, 생각에 빠져 있던 마리의 어깨를 치며 손가락으로 저편을 가리키는 가인. 마리는 가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그곳에는 주위의 빛을 받 아 비늘이 초록색으로 빛나는 머맨 하나가 우두커니 작살을 든채 서 있었다. 보초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리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 탁‥ - ......키잇?! 뭔가 자신의 뒤편에서 들려온 소리에 반응을 하며 뒤를 돌아보는 머맨.그러 나 마리의 오라 소드를 막아내기에는 너무도 굼뜬 반응이었다. 붉은 잔상이 머맨의 목을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 푸켁‥! 괴상한 소리와 함께 머맨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그리고 그런 머맨의 뒤에 서 오라 소드를 거두며 몸을 일으키는 마리. 가인은 그런 그녀의 뒤를 쫓아 오며 중얼거렸다. " …인정 사정 없내요. " " 좀 더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가인.우리는 지금 적의 본거지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거니까. " " …예. " 마리의 가벼운 질책에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몸을 기대 울음을 터뜨리던 그녀와 지금의 그녀가 매치가 안되는 가인이었다. 마리 선배… 정말 강한 사람이다. 가인은 속으로 감탄하며 앞서 가는 마리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며 머맨들의 눈을 피해 동굴의 안 쪽으로 계속 들어가는 둘.다행히도 보초를 서고 있는 머맨들의 수가 얼마 되 지 않았기에 발각될 위험은 없었다. 그리고 또 다시 넓은 공터가 둘의 눈 앞 에 나타났다. " 여긴…? " 가인은 신음하듯 감탄하며 중얼거렸다.넓은 공간의 동굴에 반 정도 물이 차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저 물은 바닷물 같은데….그렇다는 것은 바다와 통해 있다는 것일까? 마리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바위 뒤에서 주위를 살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많은 수의 머맨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 엄중한 감시로군…. 뭔가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 " " 마,마리 선배‥! 저기를 봐요! " 그때, 가인이 놀란 목소리로 마리에게 속삭였다.그리고 그가 가리킨 방향에 있던 것은… " 저건?! " " 우힛! 우힛! 오셨‥습니까? " 다곤은 예의 웃음 소리를 흘리며 부복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런 다곤의 앞에 는 칠흑같은 어둠을 자랑하는 피막의 날개가 퍼득이고 있었다. 그 날개의 중 심부에는 긴 에메랄드 빛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그 오만한 눈빛이 다곤을 내려다 본다. 바로 밤의 여왕, 리리스. 몬 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그녀였다. " …계획한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거냐? " " 우힛! 그렇습니다…! 미끼는‥ 던져 놓았‥습니다‥! " 어색한 다곤의 언어에 미간을 찌푸리는 리리스. 그녀는 이 눈 앞의 아둔한 생물을 보는 것이 곤혹스러웠는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하지만 대단한 우연이었어.설마 이런 바닷가에 서식하고 있었을 줄이야‥. " 그래. 잘도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고,수천년 간을…아니, 수만년 간을 버텨 왔구나. 잘도 말이야…. 리리스의 눈빛은 생포될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며 흥 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다곤은 웃음을 흘리며 리리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 우힛‥!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인을 못 알아보는‥아둔한 생물…! 누가 자신들의 진정한 주인인지… 깨닫게 해주어야…지요‥! 힛! 힛!힛! " 리리스는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누가 진정 아둔한 것일까? 주인에게 복종되 어 명령 만을 기다리는 개와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 어느 쪽이 더 아둔한 지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리리스는 그런 다곤에게 가벼운 비웃음을 흘 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나저나… 녀석들이 냄새를 맡았던 것 같던데…. " " 우힛!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다곤! ‥일을 방해하는 자…! 모 두 죽였‥습니다! " " 그래…? " 그건 모를 일이지. 리리스는 자신의 에메랄드 빛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렇 게 쉽게 제거될 이들이 아니다. 오라의 능력자라는 것은.더구나 특히 '그'는 말이지…! 리리스는 그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 아직 죽어서는 안될 거야…. 나를 위해서라도…. 우리를 위해서라도. " " 우힛…! 예…? 그게 무슨…? " "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운들이 한층 더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그래.온 건 가? 당연히 그래야지. 암…. 리리스는 입 가의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다곤 에게 말했다. " 쥐새끼들이 들어왔군. 정중히 맞이해줘라. 나는 이만 가볼테니. " " 우힛…? 예,예…! " " 저,저게… 대체 뭐죠‥? " 가인은 눈 앞의 광경을 바위 뒤에서 훔쳐 보며 마리에게 물었다.수 십 마리 의 머맨들이 지키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철창에 갇힌 기이한 생물 두 마리 였던 것이다. 철창 안의 그 생물들은 흡사 오징어처럼 생겼었지만…그 크기 는 오징어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컸다. 저 정도면 사람 크기만 하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가인에게로 마리가 조용히 말했다. " …크라켄의 새끼… 들이다. " " 예? 크라켄이라면… 우,우리를 절벽에서 떨어뜨린 그 괴물…?! " 가인은 가볍게 다리를 휘둘러 절벽을 두 조각 내버린 그 거대한 괴물을 생 각해내며 가볍게 말꼬리를 떨었다. 그런 괴물의 새끼들이라니….그,그거! 엄 청 위험한 놈들 아니야?!! 저 작은녀석들도 나중에 크면 그 크라켄 처럼 거 대해지건가? 왠지 기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가인. 그런데, 가인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 하지만 저것들이 크라켄의 새끼들이라면… 왜 머맨들은 그 새끼들을 지키 고 있는 거죠? " 그렇다. 그것도 철창에 가둬가면서 까지! 같은 몬스터들 끼리 저럴 필요가 있을까? 그런 가인의 질문에 마리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우며 조심스러운 목소 리로 말했다. " …혹시 그 크라켄과 머맨들이 협조 관계가 아니라면…? " " …예?! "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한 가인.그는 재빨리 입을 막고 놀란 표정으로 마리 를 바라보았다. 협조 관계가 아니라니?!! 마리 선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리는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잘 생각해봐. 절벽에서 있었을 때의 일을…. " 가인은 마리의 말대로 절벽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 속에서 더듬어 가기 시작 했다.처음에 머맨들의 습격을 받다가, 갑자기 등장한 크라켄. 녀석은 거대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사정없이 자신들을 공격해왔다.그래. 우리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공격하던 머맨들까지도. " …그럼 머맨들과 크라켄은 서로 적…? " 그리고 저기 보이는 크라켄의 새끼들은…. " 새끼들이 머맨들에게 볼모로 잡힌 걸까요? 하지만 같은 몬스터인데…그럴 이유가…. " " 이유는 있어. " 마리는 가인의 말을 끊으며 단정적인 말투로 말했다. " 만약 그 크라켄이 네이티브(Native:原住民)라면…. " " 예? 네이‥티브…? " 뭐에요,그건? " " 우리는 이차원(異次元)에서 공간 도약을 해온 침략자들을 '몬스터'로 칭 하고 있지.삼차원의 존재가 아닌 것들을 말이야.여기까지는 알고 있지? " " 아,예. " " …하지만 꼭 몬스터가 이차원의 존재인 것만도 아니야. " 그런 마리의 말에 두 눈이 휘둥그래진 가인.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 무,무슨 말이에요, 그건?! " " 삼차원에도 몬스터는 살아가고 있어.…그 수는 많지 않지만 말이야. 그런 몬스터들을 우리는 네이티브 라고 부르고 있지. " " 그런…! " 가인은 믿을 수 없다는듯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마리의 말은 충격적이 었다. 그런… 몬스터들이… 삼차원에도 살고 있었단 말인가? 이차원의 존재 가 아닌…? 그렇다면 삼차원의 몬스터와 이차원의 몬스터들의 차이는 뭐지?!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밀려들려고 한다. " 네이티브들은 특이하게도 이차원의 존재들같은 공격성은 없다고 해. 그들 은 인류의 눈에 띄지 않게 자신들 만의 보금 자리에서 조용히 살아가지. 이번 같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흔치 않아. " " ......자기의 새끼들이… 볼모로 잡혀 있어서 화가 난게 아닐까요? " 가인의 말에 마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럴 것이다.크라켄 같은 몬스터는 수 백년에 한번 씩 번식을 한다고 했다. 그런 만큼 모처럼 얻은 자식을 뺏겼으 니 그 분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마리 역시,그렇게 생각 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녀석들은 크라켄의 새끼를 이용해,크라켄을 포획할 생각인 거다. " 그리고 네이티브인 크라켄을 노리는 녀석들의 목적은… " 자신들의 수족으로 만들 생각인 거겠지. " " 그렇군요…! " 가인은 굳은 안색으로 주먹을 쥐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피해는 상상 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 그런 크라켄이 도시의 한복판에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하는 모습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막아야 해! 반드시! - 킷!킷! 그때, 가인과 마리의 머리 위에서 들려온 머맨의 낮은 울부짖음. 마리는 반 사적으로 가인을 밀쳐내며 자신도 옆으로 몸을 굴렀다. 그러자 그들이 피한 자리로 작살들이 내리꽂히며 머맨들이 착지했다. 마리와 가인은 인상을 찌푸 리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들킨 건가?!! - 킷킷킷킷킷‥ 어느새 몰려든 건지 가인과 마리가 있는 동굴은 머맨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이렇게 포위를 하는 동안 눈치도 채지 못하다니! 마리는 자신의 무신경함을 질책하며 가인과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그런 머맨의 포위망 사이로 녀석 들의 우두머리가 등장했다. 바로 절벽에서도 자신들을 공격했었던 그 괴물! 다곤이라고 했던가…? 녀석은 기분 나쁜 웃음 소리를 흘리며 가인들의 앞으 로 걸어 나왔다. " 우힛! 힛! 죽지‥않았었군…! 다시 만나…반갑다‥! " " 그래.그래. 너무 반가워서 죽을 지경이다. " 가인은 이를 갈며 오라 소드에 힘을 불어 넣었다. 푸른 오라의 바람이 모여 들며, 검날이 생성되었다. 마리 역시 붉은 오라의 검날을 생성시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갚아야 할 빚도 있고 말이야…. " " 우힛!힛!힛! 가능…할까? 그렇게 단합도‥ 되지 않았으면서…! " 절벽 위에서 가인과 마리가 적을 눈 앞에 두고도 자기들끼리 다툼을 벌였던 것을 비꼬는 말이었다.그런 다곤의 비웃음에 가인과 마리는 서로를 바라보았 다. 흔들림 없는 마리의 눈동자와 가인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 쳤다. 그 시선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감과 믿음이 녹아 있었다. 그들은 씨익 서로 에게 미소 지으며 다곤에게 소리쳤다. " 그럼 이번에는 단합된 피스 메이커의 힘을 보여주마! " 그와 동시에 가인과 마리의 오라 소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하아아앗----!! " 붉은 잔광을 흘리며 마리의 오라소드가 머맨의 가슴을 가르고 지나갔다. 급 격하게 끊어져가는 머맨의 숨길. 하지만 채 그 머맨이 쓰러지기도 전에 다른 머맨이 마리에게 달려들었다. 마리는 몸을 낮춰 팽이 처럼 회전하며 머맨에 게 돌진해 들어갔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이식(二式) 파쇄(波殺) " - 촤촤촤좌! 붉은 검기의 돌풍에 머맨은 세 조각으로 잘려 나갔다. 그 뒤에 서있던 머맨 들이 잘려나간 머맨의 피를 뒤집어 쓰며 뒤로 물러났다.머맨들은 주춤거리며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것도 잠시. 곧 머맨들은 광기가 서린 눈빛들 을 희번뜩 거리며 악착같이 마리에게 달려들었다. - 키아아학! - 퍼걱! 그런 머맨들의 공세를 마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우선 우측에 있는 머맨의 작살을 오라 소드로 튕겨내고, 그대로 앞쪽의 머맨을 힐킥으로 올려찼다. '컥'하며 숨을 들이키는 머맨. 그 순간,마리의 오라 소드가 장검 에서 단검 정도의 길이로 그 검신을 줄여들였다.오라 소드는 마리의 오라 능 력에 따라 얼마든지 그 길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기. 길이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짧은 반원의 검광이 머맨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 킷! 캇!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식(五式)‥! " 순간, 붉은 검광이 세 마리의 머맨들 앞에서 세 줄기로 갈라지며 풍차처럼 휘둘러졌다. 정신 없이 머맨들의 작살을 막고, 튕겨내고, 그 안을 파고드는 마리의 붉은 검날. 마치, 마리의 몸이 세 개로 늘어나 각각의 머맨들을 공격 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챙' '챙' '챙'! 머맨들은 마리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있는 힘껏 작살을 휘둘러 방어했지만, 신들린 듯한 마리의 오라소 드를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그 틈을 내주고 말았다. " 요란(搖亂)…! " - 푸쉬시시싯! 푸른 혈흔들이 분무기가 뿌려지듯 머맨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푸른 피의 안 개가 깔리며 세 마리의 멈내들은 동굴 바닥에 그 몸을 처박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거미 처럼 몸을 낮춰 오라 소드를 늘어뜨린채 다음의 공격을 준비 하는 마리가 서있었다. 그때,마리의 뒤로 두 마리의 머맨들이 달려들었다.마 치 뒤의 적들은 생각지도 않는다는듯한 마리의 공격에 머맨들이 후방을 노려 온 것이다. 하지만 마리가 후방을 신경쓰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 천공권!! " - 투카카카칵! 한 마리의 머맨을 뚫고 지나가는 오라의 토네이도. 그것은 가인의 천공권이 었다. 가인의 공격에 동료가 너덜한 걸레 조각으로 변하자, 남은 머맨은 놀 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그리고 그런 머맨을 반겨준 것은 가인의 오라 소 드였다. - 촤악! 깨끗하게 잘려나가는 머맨의 머리. 가인은 재빨리 오라 소드로 주위의 적들 을 견제하며 마리의 뒤로 내려섰다. 마리는 가인이 자신의 뒤를 지켜줄 거라 고 믿고서 아무 걱정 없이 공격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가인은 마리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소리쳤다. " 선배에게는 손 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할테니 걱정말아요! " " …훗. 믿음직스러워 졌는데. " 마리는 날카로운 웃음을 흘리며 자세를 갖췄다.가인은 그런 마리의 등에 자 신의 등을 갔다 대며,역시 자세를 취했다. 머맨들은 그런 둘을 원형으로 둘 러싼 채 으르렁 거렸다. 금새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그 이상 둘에게 다가 갔다가는 가인들의 절대 사정권에서 피를 토하며 죽을 뿐이라는 것을 머맨들 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머맨들이 자신들을 견제하며 다가오지 못하자,마리와 가인은 간신히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 …하아‥ 마리 선배, 버틸 수 있겠어요? " " ......아직 멀었다. " 숨이 거칠어진 가인에 비해, 여전히 차분한 안색으로 답하는 마리. 하지만 이런 대치 상황이 오래 못간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마리는 자신 들의 근처에 쓰러진 머맨들의 수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열 두마리. 꽤 쓰러뜨린 것 같았는데 아직 적들의 반의 반도 쓰러뜨리지 못한 수였다. ' 이 상태로는 힘들어…. ' 마리는 가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긴장한 안색으로 자신에게 등을 맞댄 채 오라 소드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은 가인이라도 살리 기 위해 희생해서라도 포위망을 뚫고 그를 내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 그는… 동료니까. ' 자신과 대등한 동료. 서로의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존재이니까. 살 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 그것이 가인에 대한 존중이자, 동료로 서의 예의였다.그리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고 했지만,사실 죽을 생각 같은 것 은 전혀 없었다. ' 반드시 둘이서 헤쳐나갈테다…! ' 지켜주는 것만이 아닌, 지켜진다라는 감정.서로를 지켜준다는 그 믿음이 끝 없는 투지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좋아! 이거면 돼! 할 수 있어! 마리는 가 인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냈다. " 가인, 잠시 후에 머맨들의 포위망이 뚫릴 거다. " " ......예. " 어떻게 포위망을 뚫을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가인은 침착한 안색으로 마리 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는 머맨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리고 한동안 나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거야. …조금만 쉬면 되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지. " " ......... " " 그러니까 내가 몸이 회복될 때까지…. " 그리고 마주치는 가인과 마리의 눈동자. 그녀는 미소지었다. " 나를 지켜줘. " " 맡겨두세요. " 씨익 미소짓는 가인. 그리고 마리는 몸을 움직였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의(奧義)‥! " 마리의 나지막한 중얼거림. 순간, 그녀와 머맨들 사이에 있던 대기가 그 움 직임을 멈췄다. 검의 움직임도 없었고, 어떠한 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그리 고 그녀에게 달려들려던 머맨들의 움직임 또한 멈춰 있었다. " 운요(雲燿) " - 치지지직‥ 마리의 A.I 슈츠에서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치솟았다. 마리는 신음도 흘 리지 못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감싸안았다. 무영신풍류의 오의 중 하 나인 운요. 이름 그대로 번개와 같은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이 기술은, 아직 대기와 하나가 되지 못하는 마리에게는 무리가 따르는 기술이었다. 만약 A.I 슈츠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몸은 대기와의 마찰을 이겨내지 못 한채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분(分)'과 '초(炒)'그리 고 '사(乍)'와 '홀(忽)', '호(毫)'를 뛰어 넘는 '운요(雲燿)'의 초속검(超速 劍)! 그리고 가인과 마리를 덮칠려던 머맨들의 몸 사이로 천천히 그어져 있 던 수 많은 실선들이 나타났다. 그와 함께 실선을 따라 갈라지며 무너져 내 리는 머맨들의 육체들. - 스르르륵‥ 순식간에 머맨들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가 마리의 검에 무릎을 꿇었다.그 한 순간에 무려 스무 마리가 넘는 머맨들이 그 생명을 다한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곤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 우힛‥! 힉! 무,무슨 짓을 한 거냐‥?!! " 하지만 마리는 그런 다곤의 외침에 대답하지 못하며 두 손으로 온 몸을 감 싸 안은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운요를 쓴 이후에 나타나는 경직 현상. 아 주 잠시였지만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다음이었기에, 돌아오는 충격은 매우 컸다.그녀가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다곤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 힛! 힛! 무리한 기술‥! 적은 움직이지‥못한다! 지금이‥기회다! " - 킷킷킷킷킷! 그런 다곤의 명에 따라 머맨들은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머맨들의 앞으로 마 리를 보호하듯 가인이 나서며 오른손의 헤븐 스매쉬를 들어 올렸다. " 뭐가 지금이 기회라는 거냐?!! 으랴아아아아앗------!! " 기합과 함께 헤븐 스매쉬의 코어로 모여드는 푸른 오라의 기운.가인의 오른 손이 번쩍이며 무시무시한 오라의 토네이도가 모여들었다. 자식들, 선배에게 는 손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어디 덤빌테면 덤벼봐!! " 천공권(天空卷) 선풍(旋風)! " - 투가가가가가각! 헤븐 스매쉬로 전개한 새로운 천공권. 그것은 평상시와는 달리 수직 방향의 규모보다 수평방향의 확대가 큰, 선풍계(旋風系)의 천공권이었던 것이다. 하 늘로 뻗어올린 헤븐 스매쉬로 부터, 넓은 지름으로 전개되는 회오리 바람.그 것은 중심에 있는 가인과 마리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그들을 포위 하고 있던 머맨들 만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 키아아아앗!! " 우힛‥! 뭐,뭐냐‥?! 이것은‥!! " 경악하는 다곤의 외침. 그리고 가인들에게 달려들던 머맨들은 마저 비명도 다 지르지 못하며 선풍에 온 몸이 찢겨져 나갔다. 천공권 선풍을 전개한 가 인조차, 이 뜻 밖의 위력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엉겹결에 상황에 맞춰 천 공권을 응용한 것 뿐이었는데 이런 위력을 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 키핫! 칵! 천공권의 바람이 흩어지며 머맨들은 지상에 떨어져내렸다. 이미 온 몸이 난 자당한 것도 모자라 지면에 떨어지면서 전신까지 박살나는 몬스터들이었다. 가인의 뒤에 있던 마리는 애써 정신을 수습하며, 가인에게 소리쳤다. " ‥지금이다! 우두머리를 노려! " 마리가 무리를 하면서 까지 포위망을 뚫은 이유는 바로 그것! 다곤이 목적 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 머맨들은 저 다곤이라는 괴물의 분신들일테지. 그렇 다면 본체를 노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 가인은 마리의 외침에 A.I 부츠에 오 라를 불어 넣으며, 다곤을 향해 박차 올랐다. " 차아아아아앗----!! " 오라 소드를 역수로 쥐며 다곤을 향해 두손으로 힘있게 검을 내리 꽂는 가 인. 하지만 다곤은 그런 가인의 기습을 수중의 트라이던트로 막아내었다. 막 아냈어?! 다곤과 힘겨루기를 하며 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저 트라이던트 너 머로 다곤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가인을 비웃고 있었다. " 우힛‥! 힛! 그런 기습 따위‥! 통하지 않는다‥! " " 그래?! " 하지만 가인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트라이던트의 삼지창 사이 에 끼어 있던 가인의 오라 소드가 한층 더 푸른빛을 띄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현상에 당황해 하는 다곤. 가인은 두 손으로 오라 소드를 잡으며 오라를 불어 넣었다. " 이거나 먹어라------!! " - 투확!! 그리고 날카로운 한 줄기의 토네이도가 다곤을 덮쳤다.바로 오라 소드의 검 날에서 전개된 천공권이었다. 가인은 바람의 검날을 천공권과 같은 토네이도 로 전환시켜 다곤에게 날렸던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다곤은 미처 방 어도 하지 못하며 오른쪽 눈을 소형의 토네이도에게 꿰뚫렸다. " 키라아아아앗! " 괴성을 지르며 다곤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피가 터져 나오는 오른쪽 눈을 감싸며 미친듯이 비명을 질렀다. 가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곤에게 달 려들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 터엉…!! 하지만 거친 쇳소리와 함께 튕겨나간 것은 다곤에게 달려들던 가인이었다. '퍼억!' 탄환 처럼 튕겨나가 바위 벽에 처박히는 가인. 바위가 깨져 나가며 가인의 입으로 피가 터져나왔다. " 크헉…! " 어,어떻게 된 거지?! 공격은 분명 내가 했는데… 어째서…?!! 충격에 비틀 거리며 가인은 바위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자신이 튕겨나갔는지 영 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가인의 귀로 마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 가인, 위다!! " " .........!! " 순간, 가인은 A.I 부츠에 오라를 불어넣으며 볼 것 없이 땅을 박차고 옆으 로 튀어올랐다.그리고 그렇게 가인이 피한 자리로 사정 없이 들이 닥치는 다 곤의 드롭킥. '콰지지직!' 돌바닥을 부수며 움풀 파여들어가는 그 위력에 가 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뭐야?! 이 자식?! 어째서 갑자기!! " 카카카캇!! 장난은 끝이다! 죽여주마!! " 그렇게 포효하며 몸을 일으키는 다곤은, 조금 전까지의 다곤과는 확연히 다 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3m에 달하던 그 덩치는 5m에 다다를 정도로 거대해 져 있었으며,온 몸의 비늘은 칼날 같이 일어나 공격적인 형상을 취하고 있었 다. 더구나 그 얼굴에서는 더 이상의 아둔함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살인적 인 이빨들과 날카로운 톱 모양의 코. 붉게 피어오르는 눈동자는 교활함과 지 능적인 기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가인은 이 눈 앞의 존재를 바라보며 이 를 악물었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모습을 하게 된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 …으윽‥. " 주위를 둘러보던 가인은 가볍게 신음을 내질렀다.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머맨들의 시체가 녹아들듯 사라지고 있었고,나머지 머맨들도 마찬 가지로 그 형상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 자식, 자신이 만들어 냈던 분신들 을 거둬들이고 있는 건가?!! 그리고 그런 가인의 생각대로 다곤은 흩어져 있던 자신의 힘을 모조리 흡수하고 있었다. " 어차피 일이 마무리 되어가는 지금…! 더 이상 힘을 분배하는 건 의미 없 는 짓…! 카카캇! 완전체인 모습으로 상대해주마! " " 마,말도 안돼?! " 가인은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아까 전의 모습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 했는데 난데 없이 완전체라니?! 하지만 더 놀라고 있을 틈도 없었다. 흉폭 하게 휘둘러지는 다곤의 트라이던트 때문이었다. " 카카카캇! " 웃는 건지 소리를 지르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인정 사정 없이 트 라이던트를 휘두르는 다곤.그의 삼지창이 닿은 바위들은 거친 쇳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갔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괴력이었다. 정신 없이 트라이던 트를 피하기만 하며 뒤로 물러서던 가인은 결국, 삼지창의 공세를 받아들이 기로 마음 먹었다. - 캉!! " 으아앗!! " 비명에 가까운 기합을 내지르며 가인은 오라 소드로 트라이던트를 막아내었 다.하지만 오라 소드를 쥐고 있던 손으로 무시무시한 진동이 울려 오고 있었 다. A.I 글러브로 3배 가까이 힘이 높아지지 않았더라면 양 손이 찢어져 나 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이었다. 가인은 엄청난 괴력이 오라 소드로 밀 려드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 으으으으읏…! " " 키핫!! " 순간, 트라이던트를 놓아버리며 양손에 돋아난 비늘 칼날로 공격해오는 다 곤. 가인 역시 오라 소드를 놓아버리며 재빨리 좌측으로 몸을 피했다. 다곤 의 톱날 손은 날카롭게 가인이 등을 기대고 있던 벽을 부수고 들어갔다. - 콰지지직! ' 괴,괴물…! ' 가인은 안색이 새파래져 중얼거렸다. 마치 모래로 만든 벽을 무너뜨리는 것 같이 석회암의 벽을 허무는 다곤의 모습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런 가 인을 천천히 돌아보며 다곤은 날카로운 이빨로 미소지었다.가인은 자신도 모 르게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몸을 떨었다. - 츄칵!! 그때, 그런 다곤의 뒤로 소리 없이 날아드는 붉은 검광.마리의 오라 소드였 다. 다곤은 오라 소드에 등이 베인채 비명을 지르며 뒤로 손을 휘둘렀다. " 캇!! 이 계집이…!! "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삼식(三式) " 마리는 오라 소드를 땅에 끌며 다곤의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아래 에서 위로 번개 같이 휘둘러지는 그녀의 검. 푸른 체액이 하늘 높이 직각으 로 치솟았다. " 격멸(擊滅). " " 키아아아앗!! " 다곤은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마리는 오라 소드를 거두지 못했 다. 거둬져야 할 오라 소드가 다곤의 손에 꼼짝 없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더 군다나 다곤을 반으로 갈라야 할 오라 소드는 다곤의 가슴 부위에서 멈춰져 있었다. 마리는 두 눈을 부릅 떴다. 이런 말도 안되는…?!! - 퍼억------!! " 흡…!! " 다곤의 앞차기에 오라 소드를 놓치며 뒤로 튕겨나가는 마리.그 엄청난 각력 에 오장 육부가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마리는 수 차례 땅을 굴러 멈춘 후 헛구역질을 일으켰다. 그런 마리를 가인이 부축하며 소리쳤다. " 마리 선배!! 괜찮아요?! " " …으음. " 고통스런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는 그녀. 가인은 마리를 부축하며 다곤을 노 려보았다. 다곤은 이를 갈며 자신을 반토막으로 만들뻔한 마리의 오라 소드 를 힘겹게 몸 속에서 뽑아내고 있었다. " 캇캇‥! 마지막까지 성가시게 하는군‥!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 " 젠장‥! " 자신들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다곤을 바라보며 가인은 힘있게 마리를 끌어안 았다. 그녀를 끌어안은 팔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가인은 이를 악 물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걸까? 생각해 내,유가인! 어서!어서! 어서! - 그루루루루‥!! 그때, 가인들과 다곤에게로 애절하게 울려퍼지는 울음 소리.바로 철창 안에 갇혀 있던 크라켄의 새끼들이 내는 울음 소리였다. 그 울음 소리를 듣는 순 간, 다곤은 몸을 경직시키며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캇캇!! 서,설마‥ 벌써 나타난 건가‥!! " 나타나?! 뭐가?!! 놀란 눈으로 다곤을 바라보는 가인들. 그리고 뒤를 이어 거세게 동굴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 우르르르르‥!! " 우왁?!! 지진인가?!! "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바위 가루들을 피하며 가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런 가 인에게 마리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 그게 아니야! 오는 거다! 크라켄이!! " " 예에?!! " 크라켄? 크라켄이라고?!! 가인이 미처 다 놀라기도 전에 동굴에 차 있던 바 닷물이 치솟으며 거대한 무언가가 등장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울려퍼지는 예의 괴성. - 그오오오오오오!! 바로 자신의 새끼들을 찾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크라켄이었다. - 그오오오오오오…!! 동굴을 뒤흔들 정도로 거센 크라켄의 괴성이 울려퍼졌다. 그 쩌렁쩌렁한 포 효 소리에 마리와 가인은 귀를 막으며 비틀거렸다. 그 괴성은 단순한 고음이 아닌, 크라켄의 분노와 파괴적인 사념의 분출이었다. " 저,저거…!! " 크라켄이 앞 발을 천장까지 들어올리자 가인은 신음을 흘렸다.내려칠 셈인 가?! 크라켄이 가볍게 절벽을 때려부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가인들로서는 괴물이 앞으로 할 행동에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 그리고 크라켄은 그들의 예 상대로 거침 없이 동굴의 벽을 앞발로 후려쳤다. - 퍼엉!! " 트앗!! " 석회암 동굴이 거세게 위 아래로 흔들렸다. 가인과 마리는 그 충격에 허공 으로 튕겼다가 거칠게 바닥으로 떨어졌다.그것은 크라켄의 새끼들이 있는 쪽 으로 달려가던 다곤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마리는 넘어진 몸을 힘겹게 일 으켜 세웠다. 천장에 균열이 가는 것이 조만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누워 있다가는 떨어지는 암석에 맞아 죽을 지도 모른다. " ......?!! " 마리는 순간, 눈 앞이 밝아오자 놀란 안색으로 눈을 가렸다. 뭐,뭐지?! 이 빛은?! 갑자기 주위의 암석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인도 눈을 가리며 마리에게 소리쳤다. " 서,선배! 이건 뭐에요?!! " " 이건… " 석회암 동굴의 이상 발광. 처음에 이 동굴에 들어왔을 때 바위들이 빛을 내 는 것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크라켄이 들어오자마자 그에 상응 하듯 발광하는 동굴을 보게 되자,마리는 마침내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바위에 묻어있던 발광 박테리아가 크라켄의 발광기에 반응하고 있어. " 그리고 발광 박테리아가 이 석회암 동굴에 묻어있다는 것은… " 여기는 크라켄의 레어…. 바로 크라켄의 서식지였던 거다! " - 그오오오오오!! 마리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괴성을 지르며 다시 동굴을 후려치는 크라 켄. 이번에는 튕겨오르지 않도록 가인과 마리는 주위의 암석을 붙잡은채 진 동을 버텼다. 마리는 저편에서 진동에 악전고투하고 있는 다곤을 노려보았다. 미친 녀석…!! 크라켄의 레어에 들어와 크라켄의 새끼를 붙잡아놓고 있었다 니…. 죽고 싶어 환장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 놈들은 그렇게 해서 까지 크라켄을 수중에 넣을려는 것인가?! ' 과연 크라켄 같은 몬스터에게 새끼를 이용한 인질극이 통용될지는 의문이었 지만, 같은 몬스터이니 의사소통에 지장은 없을 테고… 충분히 가능한 얘기 였다. 마리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수습하며 가인에게 소리쳤다. " 가인! 저 녀석이 크라켄의 새끼들한테 다가가지 못하도록 해!! 놈이 새끼 를 이용해 크라켄을 수중에 넣으면 그걸로 우리는 끝장이야!! " " 아,알았어요! " 가인은 A.I 부츠에 오라를 불어 넣으며 도약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때 발로 디딛고 있던 지면이 내려 앉기 시작했다. 연신 동굴을 내려친 크라켄 의 앞발에 지층 붕괴가 일어난 것이다.가인은 비틀 거리며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천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무너질려는지 거대한 암석들이 후두둑 떨어 져 내리고 있었다. - 콰직! " 앗…!! " 그때, 가인의 귀로 마리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마리의 발 밑이 갈라 지며 붕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갑작스런 붕괴에 그녀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인이 그런 마리에게 손을 뻗으 며 비명을 질렀다. " 마리 선배-------!! " 잡을 수 있어! 잡을 수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가인의 발 밑에 있던 암석이 솟아 오르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가인과 마 리 사이로 역단층이 발생한 것이다. " 안돼-----!!! " - 팟!! 순간, 떨어져내리는 마리에게로 녹색의 잔광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녀 는 한 남자의 품에 안긴채 지층 위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가인은 마리를 구 출한 남자를 바라보며 반가움에 소리쳤다. " 진우 씨!!! " " 휘우∼ 간발의 차로 등장이다! " 가인의 반대편 지층으로 착지한 진우가 마리를 내려주며 언제나 처럼 너스 레를 떨었다. 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철렁했던 가슴을 진정시켰다. 다 행이다,마리 선배‥ 정말 다행이야‥! 진우와 마리는 지층이 점점 넓게 갈 라지자, 가인이 있는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며 발을 동동 굴렸다.마리가 가인 에게 소리쳤다. " 가인!! 어서 놈을 쫓아!! 늦기 전에!! " 아차! 그러고보니 다곤, 그 녀석을 잊고 있었구나‥! 가인이 놀라며 다곤이 있는 쪽을 바라보니,어느새 녀석은 크라켄의 새끼들을 가둬놓은 철창에 다가 가고 있었다. 철창은 지층 붕괴로 인해 마치 기형 바위 위에 매달린 것 처럼 천장으로 솟아 있었고 다곤은 그 기형 바위를 타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가인 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쫓아가기에는 너무 늦었어‥!! '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 " 천공권--------!! "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위를 오르는 다곤에게 가인은 천공권을 날렸다. 푸 른색의 오라를 머금은 토네이도가 다곤을 위협하며 날아들었다. 다곤은 어쩔 수 없이 토네이도를 피해 다시 밑으로 뛰어내려야만 했다. " 캇----!! 저 건방진 인간이 방해를‥!! " 다곤은 기껏 오른 바위 밑으로 착지하며 가인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크 라켄의 새끼들을 볼모로 하여, 저 아둔한 생물에게 주인의 맹약을 맺으면 크 라켄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든지 저 귀찮은 인간 녀석들을 쓸어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일일히 저 인 간 놈을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우선, 새끼들에게 다가가야‥! " 캇?!! " 그때, 다곤을 휘감는 거대한 크라켄의 앞발.다곤의 몸통보다도 굵은 다리가 촉수 처럼 그의 몸을 감싸안은 것이었다. 다곤은 당황하며 손에 들고 있던 트라이던트로 크라켄의 다리를 내리쳤다. " 놔,놔라!! 캇!! 놓치 못해?!! " - 탕! 탕! 마치 단단한 강철을 내리치는 것 처럼 트라이던트는 다리에서 튕겨나왔다. 그 엄청난 괴력을 자랑하던 다곤의 공격도 크라켄의 앞에서는 한낱 모기에게 물린 충격 밖에 주지를 못하는 것이다. 크라켄은 천천히 앞발로 잡은 다곤을 자신의 얼굴 앞으로 들어올렸다. - 그오오오오오‥ " 크,크으으읏‥. " 본능적인 공포에 몸을 떨며 크라켄을 바라보는 다곤. 크라켄의 거대한 눈동 자는 붉게 물들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다곤은 그 압도적인 공포 앞에 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크라켄의 앞발이 그의 몸을 사정 없 이 죄어 왔다. " 카,카아아아아앗------!!! " - 우두두두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다곤을 죄던 크라켄의 앞발 사이로 푸른 피가 터져 나왔다. 그 한번의 죄임으로 다곤은 그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 광경에 가인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자신들 을 괴롭히던 다곤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죽여버리는 크라켄의 모습에 공포심 을 넘어선 경외감 마저 들 정도였다. " 도,도저히 우리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크라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지금껏 상대해온 몬스터들 중 이렇게 무력감이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몬스터는 처음이었다. 진우가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 …하지만 새끼들도 다시 찾았고, 더 이상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지도… 하,하하......... 너무 안일한 생각일려나∼ " - 그오오오오오-----!! 그렇다. 안일한 생각이었나 보다. 크라켄은 여전히 지독한 분노에 휩싸인채 붉은 눈을 번쩍이며 포효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가인을 비롯한 피스 대원들 을 다음 목표로 선택한 모양이었다. 크라켄의 앞발은 자신에게 제일 가까이 에 있던 가인을 향해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 쉬익! " 으아아아앗!! "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좌측으로 도약했다. '콰지지직!' '투웅!' 좀 전까지 가인이 디딛고 있던 지층이 대번에 박살나며 붕괴되었다. 저런 거에 한방이라도 맞았다간 전신이 박살나 즉사할 게 분명했다.가인은 그만 다리가 풀려 주저 앉아 버렸다. 이 절대적인 공포 앞에 하반신이 굳어 버렸다. 가인 은 당황하며 몸을 일으킬려고 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 우,움직여‥! 어서! 이대로 죽고 싶은 거냐,유가인?!! ' 울쌍이 된채 다리를 부여잡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가인.하지만 하체는 마 비된채 요지부동이었다. 가인은 어깨를 떨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천천히 자 신을 향해 거대한 붉은 눈동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사자 처럼 꿈틀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크라켄의 앞발. - 그오오오오오‥ 그 앞발 너머로 처참하게 박살나 죽은 다곤의 시체가 보였다.가인은 창백해 진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나,나도 저렇게 죽는 건가?!! 저렇게‥?!! - 라아아아아아‥ 그때. 절망하는 가인의 마음을 파고드는 한 줄기의 노래 소리. 그것은 지치 고 메마른 가인의 정신을 치유해주는 안식(安息)의 노래였다. 특별히 가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마치 '이제는 안심해도 좋아요' 라고 속삭여 오는 것만 같아서 가인은 전신의 피로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인은 환한 미 소를 띄며 그녀를 불렀다. 분명 이런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 이는… " 시민 씨!! " 피스 옐로우 한시민.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노란색의 A.I 슈츠를 착용한채 가인의 앞으로 내려서며 크라켄의 정면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인은 공포에 굳어버린 하바신의 마비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 웠다. 시민의 노래는 가인에게만 영향을 주지 않고, 크라켄의 마음까지 파고 들고 있었다. 가인은 볼 수 있었다. 붉게 물든 크라켄의 눈빛이 본래의 색 이었던 푸른빛으로 돌아가는 것을. - 그루루루루‥ 크라켄의 포효 소리가 잦아 들어갔다. 시민의 노래는 빠르게 크라켄의 분노 를 잠재우고 있었다.가인은 경이롭다는 눈빛으로 시민의 등을 바라보았다.이 거대한 크라켄을 진정시키다니… 그녀의 능력은 어디까지 일까? 새삼 시민의 오라 능력에 감탄하게 되는 가인이었다. - 오빠, 괜찮아? - …유리야? 그리고 마음 속으로 들려오는 유리의 목소리. 가인은 자신의 오른 손을 살 며시 부여잡는 한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내려다 보았다. 자신의 오른 편에는 어느새인가 다가온 유리가 핑크 빛의 A.I 슈츠를 입은채 서 있었다. - 걱정했었어. - 아,응…. 미안. 유리의 목소리에 답하며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자신의 손을 힘주어 움켜 쥐는 유리의 손길에서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난데 없이 숙소 에서 사라진데다가 무너진 절벽에서 실종까지 됐으니 얼마나 걱정을 했을까? 만약 입장을 바꿔 유리가 실종되었더라면 가인, 자신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안과 초조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정말… 유리에게 못할 짓을 한 셈이로군. " 유리 양, 이번에는 유리 양 차례에요. " 어느 정도 크라켄이 안정되는 것 처럼 보이자, 시민이 노래 부르던 것을 멈 추고 유리에게 말했다. 그러자 천천히 가인의 손을 놓고 크라켄의 앞으로 걸 어가는 유리.가인은 그런 유리의 행동에 당황하며 그녀를 불렀다. " 유,유리야…? 잠깐…! " " 가인 씨, 걱정말아요. " 유리의 어깨를 잡을려는 가인의 손을 부드러운 시민의 손이 제지했다. 시민 은 언제나 처럼 미소지은채 가인에게 말했다. " 유리 양은 지금부터 크라켄의 마음과 접촉할려는 거에요. 제가 어느 정도 그를 안정시켜 놓았으니까… 남은 것은 유리 양이 얼마만큼 크라켄을 잘 달래느냐가 관건이 될 거에요. " " 그런… 달랜다니! " 저런 거대한 괴물을 어떻게 달랜다는 걸까?! 가인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되서 크라켄을 화나게 한다면…! 하지만 시민은 그런 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유리 양은 지금껏 네이티브 몬스터와 수차례 교신을 해 성공한 경험이 있 어요. 이번에도 잘 해낼테니 우리는 그냥 지켜보도록 해요. " " ......... " 시민이 그렇게 까지 말하니 가인도 유리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유리는 핑크 빛의 오라를 몸에서 피어 올리며 크라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접 촉하고 있는 것이겠지…. 가인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유리의 뒷 모습을 바라 보며 생각했다. ' 유리는 지금, 크라켄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 그것은 유리와 크라켄만이 알 일이었다. - 촤아아아아… 가인과 진우,마리와 유리,시민은 해안가에 선채 멀어져 가는 크라켄들을 바 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지평선 너머에서는 일출이 일어나고 있었다. 밝아 오 는 여명을 향해 거대한 크라켄과 그 새끼들은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 …정말 긴 하루였어요…. " " ......음. " 왠지 지친 목소리로 가인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마리가 묵묵히 고개를 끄 덕였다. 이 두 남녀에게는 특히나 여러모로 길었던 하루였다. 절벽에서 떨어 지지를 않았나… 해저 동굴에서 추위에 떨며 지내지를 않았나,거기다 인어라 면 앞으로 치를 떨 정도로 싸워대질 않았나…. 정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 …저 크라켄은‥ 이 동굴에서 수만년 간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살아 왔었대,오빠. " 유리의 말에 가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유리는 멀어져가는 크라켄에게서 시 선을 떼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 그런데 난데 없는 침입자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자신의 사랑스러운 새끼들을 빼앗기고‥. 정말 너무너무 화가 나서… 그 동안 조용히 살아온 댓가가 이런 것이었냐며 크라켄은 울고 있었어…. " 그런 유리의 말에 가인들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뭔가 공허하면서 도 허전한 상실감을 맛볼 뿐. 유리는 살며시 가인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 …크라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려는 걸까…? 앞으로 어디에서… 살아갈 려는 걸까…? " " ......... " 어느새 크라켄들의 모습은 저 바다 너머로 사라져 있었다. 진우는 가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 네이티브는… 우리 인류가 태어나기 전부터…, 훨씬 오래 전부터 이 지구 에서 살아왔다고 해. " 그 말에 가인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진우를 바라보았다. 마리에게 들은 바로 는 네이티브 란, 단순히 삼차원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를 칭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 매머드(mammoth) 알지? 빙하기에 살았다는 코끼리 비슷한 생물.지금은 멸 종했지만, 그것도 네이티브의 일종이야. 네이티브는 그렇게 오래 전부터 이 세상에 존재해왔었어. " 진우는 다시 크라켄들이 사라진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동해안의 일출은 넓게 퍼져 하늘과 바다를 감싸안고 있었다. 일출 속으로 사라져간 크라켄들 을 보며,가인들은 크라켄들이 앞으로 살아갈 곳을 저 태양으로 정한 것은 아 닐까 생각해 보았다. 진우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 어쩌면… 저들이 진정한 이 세계의 주인일지도 모르지…. " " 크으으으윽∼ 당신들은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 마치 끓어오르듯이 터져나오는 지연의 외침에 거짓말 안 보태고 집으로 돌 아가던 버스가 뒤흔들렸다.지연이 얼마나 담배를 씹어댔는지, 그녀가 가지고 왔던 담배 한 갑은 벌써 송두리째 그 허리들이 모두 끊어져 있었다. 만약 담 배 애호가들이 이 처참한 담배의 모습을 목격했더라면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다. " 죄,죄송합니다아‥. " 그런 지연의 앞에서는 진우와 시민,유리가 얼굴을 들지 못한채 고개를 숙이 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재영과 수정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 또 한 진우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가득히나 애들이 사라져서 걱정이 태산이었는 데 힘을 모아 같이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덩달아 사라져 버리다니!! 남 아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 줄 알긴 아는 거냐고!! " 남아있던 사람들은 정말이지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했다. 사라진 진우들을 찾는 것도 고생이었지만,무시무시한 지연의 폭주를 감당해야만 했던 것이 무 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것이다.그 결과로 지금 재영, 테레이아, 수정, 미연,채 영들의 안색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초췌했다.진우는 그런 지연의 두 시간 째 계속되는 화풀이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거,참…. 저렇게 여자가 목청이 크면 시집가기 힘들텐데…. " " ......뭐‥라고… 네 놈…. " 순간,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버스 안의 공기.일행은 모두 입을 쩍 벌리며 진 우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진우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서는 당 황하며 지연에게 소리쳤다. " 아,아니…. 그게…하,하하하∼ 모,목청이 크면 애를 잘 낳는다고…. " 전혀 도움이 안되잖아!!! 말을 돌려도 어째서 저 따위로 밖에 못 돌리는 걸 까?! 일행은 앞으로 벌어질 사태를 예감하며 무거운 안색으로 한숨을 내쉬었 다. 지연은 일행 중 진우의 아내, 미연을 바라보았다.미연은 그런 지연의 시 선에 한 숨을 내쉬며 생각하더니, 곧 목을 긋는 시늉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 제서야 악귀같은 표정으로 다시 진우를 돌아보는 지연. 진우는 미연을 돌아 보며 비명을 질렀다. " 자,잠깐∼∼∼!!! 여,여보! 그 제스처의 의미는 뭐였던 거야?! 서,설마 날 저 마녀에게 팔아버린 것은…!!! " " 크크크크큭‥ 마녀…. 마녀라고. " 어느새 진우의 뒤로 다가왔는지 지연은 잔인한 웃음을 흘리며 혀를 낼름거 리고 있었다. 전신에 소름이 쫘악 돋은 진우. 버스 안으로 처참한 그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 히이이이이익!! " 이후의 상황 묘사는 검열 상 자제하겠다. 참고로 슬래쉬 계열이었다는 것만 은 밝혀두겠다. 그렇게 한 바탕의 소란이 일어나는 와중에 시민은 조용히 시선을 돌려 앞좌 석의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 두 남녀는 다름 아닌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 되었던 유가인과 성마리.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곤한 안색으로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이 난리 속에서도 깨어 나지 않는 걸로 보아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었다. 서로 머리를 기댄채 자고 있는 둘. 시민의 눈에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꼭 사이 좋은 오누이인 것 처럼 보였다.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 두 사람 다… 좋은 꿈 꾸고 있을까…? " 그것은 블루 서머 비치. 푸른 여름 해변가에서 있었던 일…. <제 10 화 Blue Summer Beach 完> 豫告 유가인: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도 아닌, 그것도 통일 한국도 아닌, 리 장군: 북경에 온 것을 환영하오. 유가인: 어째서~~~~~~~~~!!! 중국의 북경 지부 피스메이커에 오게 된 유가인. 유적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용(龍)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은‥?! 第 11 話 적색지대 유가인: …무엇보다 왜 내가 당신과 함께 여길 와야 되는 거지? 진 사령관: …천천히 즐기도록.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1 話 적색지대(赤色地帶) =-=-=-=-=-=-=-=-=-=-=-=-=-=-=-=-=-=-=-=-=-=-=-=-=-=-=-=-=-=-=-=-=-=-=-= " 자자자∼ 드디어 방학 끝∼! 개학이다! " 9월 2일. 2학기의 첫 날.교탁을 출석부로 탕 내리치며 지연이 꺼낸 첫 한마 디는 2달이 채 안되는 방학의 공백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쳐 흘렀다. 1학년 C반의 학생들은 그런 담임의 말에 김빠진다는듯 야유를 보냈다. " 우우우우‥. " " …나도 다시 교편을 들어야 한다는게 니들 못지 않게 짜증나거든? 너무 노골적으로 그러지들 마라, 학생! " 뭔가 교사로서의 핀트가 어긋난 말이었지만,학생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 다. 그들의 담임, 하지연 선생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눈초리였다. 지연은 그런 학생들의 얼굴을 마주 보며 히죽 웃었다. " 그럼 어디 방학 동안 뭐하고 살으셨는지 얘기나 들어 보실까? 어이, 유영 철! 너 부터 얘기해봐! " 유영철.반장 안지혜가 부산으로 전학간 후 다음 반장으로 뽑힌 학생이었다. 학급 투표도 없이 단지,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지연에게 반장으로 지목당한 비운의 소년이기도 했다. 영철은 오늘 이 개학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지 1개월 약간의 반장 생 활이었지만,영철은 지연과 매일 얼굴을 마주쳐야한다는 것 만으로도 이 반장 이라는 직책에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2학기가 되면 반장이 바뀐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영철은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개학을 쌍수들며 환영하고 있었다. " 옙! 저는 부모님을 따라 호주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 " 오오오오∼ " 영철의 어딘가 뽐내는듯한 태도가 아니꼬웠지만,해외 여행을 갔다왔다는 그 의 말에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감탄해주었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영철. 하지 만 그런 소년의 들뜬 기분을 지연은 다음 말로 간단히 가라앉혀 버렸다. " ......아,재수. " " ......... " 식은땀을 흘리며 지연을 바라보는 학생들. 그녀는 그런 학생들의 시선에 뭘 야리느냐는 듯 마주 쏘아봐주었다. 그때 손을 번쩍들며 일어서는 인영 하나. 바로 자칭 1학년 C반의 분위기 메이커 박재영이었다. 그는 이 싸늘하게 식은 학급의 분위기를 쇄신시켜야 된다는 의무감에 불타올라 지연에게 질문했다. " 저기∼ 선생님은 어디 놀러 안 가셨어요? " " 예에∼ 얘기해주세요∼! " 재영의 의도를 파악하고 학생들은 재빨리 지연에게 재촉하는 목소리로 소리 쳤다. 뭔가 지연의 피부가 탄 것으로 보아, 그녀가 어딘가에 놀러갔다 온 것 만은 확실했다. 자기 여행 얘기를 하면 좀 기분이 풀리지는 않을까‥라는 것 이 학생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런 학생들의 의도를 뒤엎으며 지연 은 담배를 질겅질겅 씹은채 교탁을 내리쳤다. - 탕! " …자, 방학 얘기는 이쯤에서 접자. "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서는…. 이런 불만이 학생들을 사로잡았지만, 직접 그 얘기를 꺼내는 바보는 없었다.학생들은 저기압인 지연을 바라보며 생각했 다. ' 도대체 방학 때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 ' ......나는 알지. '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재영이었다. 1박 2일의 블루 섬머 비치 여행. 재영은 그 여행 동안 지연이 한 행동들을 생각하면 호흡 곤란이 올 정도로 심박수가 높아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 가인과 마리가 실 종되자 지연은 자신들을 잠도 재우지 않고 히스테리를 부렸던 것이다. 평상 시의 지연은 그때의 지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했다는 것을 그 여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그것은 분명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이었어…. 재영은 왠지 자신도 저기압이 되어버려 한 숨을 내쉬었다. " ......어라? " 그때, 학급을 둘러보던 지연의 눈에 비어있는 자리 하나가 들어왔다. 허어, 개학 첫 날부터 결석을? 그녀는 눈에 살기를 띄우며 예의 흉신악살의 표정을 지었다. 이래뵈도 1학기 내내 결석자 수 0, 지각생 수 0를 유지해온 것을 은 근히 자랑으로 삼던 자신이었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들은 정신 건 강 상 묻어두기로 하자) 그런 자신의 자랑을 개학 첫 날부터 처참히 깨부숴 놓다니… 도대체 어떤 간 큰 녀석이야?!! " ......저 자리는…. " 1학년 C반의 자리 배치 중 유일하게 2열 10행의 원칙을 깨고, 3열로 붙어있 는 자리 배열. 한성 고등학교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테레이아와 유리가 앉아 있는 저 자리. 그 사이에 앉아 있어야 될 녀석이 보이질 않고 있었다. 그 녀 석은 바로… " 유가인∼∼∼ " 마치 으르렁 거리듯이 결석자의 이름을 뇌까리는 지연. 결석자의 이름은 다 름 아닌 '1학년 C반에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남자'로 통하는 유가인, 바로 그 였던 것이다. 아니, 이 자식이 피서 때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렇고 나를 물 먹일려고 작정한 건가?!! 지연은 허리가 분질러진 담배를 입에서 뱉어내며 다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테레이아와 유리 를 돌아보며 물어볼려고 했다. 하지만, " 하아∼∼∼∼ "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 테레이아와 유리. 마치 삶의 의욕을 상실한듯한 그 모습들에 지연은 차마 말을 건내지 못했다. 그녀들의 그 반응 이 유가인의 결석과 관계있다는 것은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이었다. 지연은 결국 그녀들에게 묻는 대신,재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뭔 일이야? ' 지연의 눈은 재영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그런 무언의 질문을 잘도 알아듣 고 재영은 그녀에게 답했다. " …중국에 갔대요. " " ......뭐? " 다시 한번만 더. " 중국요.중국. 북경에 무슨 일이 생겨서 갔다던데… 연락 못 받으셨어요? " - 툭‥ 그제서야 재영의 말을 알아들은 지연은 멍하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땅에 떨어 뜨렸다. " 중국∼∼∼∼∼?!! " 第 11 話 적색지대(赤色地帶) - …어,어째서?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네 놈?!! 한 용병이 거친 목소리로 외쳐왔다.하지만 차가운 눈길로 노려보자 곧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섰다. 녀석은 나보다 약하다. 이곳은 강한 자가 곧 법.녀석은 나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 두고보자! 전장에서 뒤를 조심하라고! 녀석은 나머지 용병들을 이끌고 나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가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채 내 앞에 있는 소녀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흑… 흐흑… 울고 있었다. 이제 막 열 일곱 정도 되었을까.아이는 무참하게 찢어진 옷을 움켜쥔채 흐느끼고 있었다. 웅크린 그 작은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 다. 나는 그 아이의 앞에 다가가 섰다. 아이는 자신의 몸을 거대한 그림자가 뒤덮자 눈물이 맺힌 눈을 들어 날 올려다 보았다.그 모습이 안스러웠지만 난 그 아이를 다독거려주지도, 위로의 말 한마디도 건내주지 않았다. 단지… - 일어서라. 네 두 다리로. 전혀 부드러운 어감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나는 괘념치 않고 말을 이었다. - 강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여기는 그런 곳이니까. 아니… 세상은 원래부터 그런 곳이니까. - 그러니까… 아이는 떨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눈동자에서 비춰있 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 그러니까 강해져라. 반드시….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진 사령관 님? " 자신의 어깨를 살며시 흔드는 부드러운 손길에 진 사령관은 눈을 떴다.선글 래스를 끼고 있었기에 세상은 한 없이 어두워만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게는 익숙한 것이었기에 재빨리 그의 시야는 안정을 되찾았다. " …무슨 일인가? " 전혀 부드러운 어감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그러나 이 눈 앞의 여성은 이런 자신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익숙 해진듯 여전히 미소지은채 말하고 있었다. " 20분 뒤면 북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전에 정신은 차리고 계셔야죠? " " ......음. " 무표정하게 좌석에 앉아 짧게 고개만 끄덕이는 진 사령관. 그런 그를 깨운 이는 다름 아닌 비서 민수정 양이었다.그녀는 언제나 처럼 상황에 적절한 코 스츔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스튜어디스 제복 차림이었다. 수정은 능숙 한 손놀림으로 좌석의 음료수 테이블을 진사령관의 앞으로 내려놓으며 그 위 에 네프킨을 깔았다. - 탁… 남들은 그 속 마음을 읽기가 힘들다는 진 사령관이었지만,수정은 그의 작은 손짓 하나 만으로도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이 10년 동안 진 사령관의 옆에서 아무 문제 없이 그를 보좌할 수 있었던 그녀 만의 노하우인지도 모른다. 수정은 각설탕 두 개를 얹어 헤이즐 넛 커피를 진 사령관에게 주며 물었다. " 무슨 꿈이라도 꾸셨어요? 잠꼬대를 하시던데…. " " ......잠꼬대? 어떤…? " 진 사령관은 눈썹을 살짝 움직이며 물었다.그것이 당황했을 때의 그의 반응 이라는 것을 수정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열에 들뜬 목소리로 거친 신음 소리를 흘리시던데∼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무감각하게 물어오는 진 사령관의 말에 수정은 쓴 웃음을 지었다. 거,참. 농담도 안 통하시는 분이라니까…. 그런 그녀에게서 진 사령관은 비행기의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도 수천 킬로미터의 상공. 푸른 하늘 밑으로 낮게 깔린 구름들이 지금의 높이를 말해주고 있었다.그 경 치를 바라보며 진 사령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자네의 꿈을‥ 꾸고 있었을 뿐이다. " " ......예? " 뜻 밖의 대답에 수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내,내 꿈을? 사령 관 님이…? 뭔가 믿기 힘든 대답에 수정은 붉게 달아오르는 뺨에 손을 가 져가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진 사령관은 여전히 창 밖만 바라 본채 말을 이었다. " …그때… 처음으로 자네를 만났을 때의 꿈‥ 말이야…. " " ......... " 수정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런 사령관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직까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계실 줄이야…. '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까…. ' 그래…. 절대로 잊을 수야 없지. 진 사령관을 처음 만난 그 날을…. 어떻게 그 날의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하지만 그도 여지껏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솔직히 뜻 밖이었다. 매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길래 그런 옛날 기억 같은 건… 다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었는데. 수정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 려 살며시 가슴에 손을 대었다. 옅은 심장의 고동 소리가 손을 타고 울려퍼 졌다. 그때, 그런 두 남녀의 뒤로 헛기침을 하며 한 소년이 나타났다. " …흠! 흠! 좀 더 늦게 올 걸 그랬나요? 분위기 좋으셨는데 미안하게시리. " " 아, 가인 군. 와,왔어요? " 수정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오늘이 개학 날임에도 불 구하고 학교를 결석한 소년, 유가인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는 쓴 웃음을 짓는 수정을 지나치다가 잠시 진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 보는 소년의 눈길은 매우 사나웠다. " …야한 꿈이나 꾸고‥ 에로 중년 같으니라구. " 가인의 비꼬는 말에 수정은 벌어지는 입을 한 손으로 재빨리 막았다. 가,가 인 군‥ 다 들은 걸까나? 진 사령관은 그런 가인의 말에 피식 한번 웃은 후 답했다. " …유가인,자네 만큼은 아니지. " " 으으윽…. " 왠지 저 열받는 대답에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는 내 자신에게 더 화가 나 는데…. 가인은 구겨질려는 인상을 애써 유지하며 소리쳤다. " 아,그러세요? 그렇게 잘나신 분이 어째서 저같은 못난 부하를 이끌고 이 중국까지 오셨나 모르겠네?! " " …불만인가? " " 당연히 불만이죠!! 전 고등학생이라구요! 그리고 오늘은 다름 아닌 개학 날이구요! 개학!! 2학기의 첫날부터 학교를 빠졌단 말이에요! " 그런 가인의 말에 수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수정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는 표시를 보이자 가인은 더욱 의기 양양해져 소리쳤다. " 도대체가 왜 하필 저인 거에요?! 진우 씨도 있었잖아요! 진우 씨도! 중국 여행을 가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부르던 사람을 제쳐 두고 학교를 다녀야 하는 학생을 굳이 이 중국 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잖아요?!! " 어제 밤의 일이었다. 피스 메이커의 소집 신호를 받고 부랴부랴 모인 대원 들의 앞에서 진 사령관이 꺼낸 말은 다음과 같았다. - 중국에 갈 일이 생겼다. 피스 메이커 중국 지부에 일이 생긴 것 같다. 그래. 거기까지는 OK. - 피스 대원 한 사람이 동행해줘야 겠는데…. 피스 블루. 자네가 같이 간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냐고-----!!!! " 사령관 님, 저도 이해가 안돼요. 가인 군 말고도 진우 씨나 시민 양도 있 는데 왜, 학교도 다녀야 하는 가인 군을…. " 수정이 의아하다는듯 묻자, 진 사령관은 의자에 깊숙히 몸을 파묻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3일 전, 북경의 외곽 지역에서 용(龍)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 ......용? " 가인은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뭐야,그건? 그러나 수정은 진 사령관이 한 말을 알아들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가인은 그런 수정의 반응에 괜히 불안해져 진 사령관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 뭐에요, 그‥ 용이라는 건? " 그 말에 답한 것은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수정이었다. " …SA급 몬스터 드래곤(DRAGON)을 말하는 거에요, 가인 군. " " SA?! "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소리치는 가인. 아니,도대체 어떤 몬스터이길래 그런 무지막지한 등급이 붙은 거야?! A급 몬스터라면 가인도 대면한 적이 있 었다. 저번 피서지에서 마주쳤던 네이티브 몬스터 '크라켄'! 그 압도적인 몬 스터의 힘에 자신은 얼마나 무력감을 느꼈던가? 그런데 그런 크라켄을 뛰어 넘는 몬스터라니… 상상도 가질 않는다.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그런 위험한 몬스터가 중국에서 발견되었다구요?! " " 그렇다. 다행히도 죽은 시체였었지만. " 진 사령관의 말에 가인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뭐,뭐야?!놀 래키기는! 나,참…!! 그래. 죽은 거였구나. 하,하하하∼ 난 또 뭐라고…. 가 인은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자,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다시 진 사령관 에게 물었다. " 근데 그 용의 시체가 나타났다는 거랑, 절 중국에 데려오는 거랑 무슨 상 관이 있는 거죠? "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물었던 건 왜 날 중국에 데려온 거냐 였다고! 어 디서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 거야, 이 능구렁이 같은 작자가! 진 사 령관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제법 눈치가 빠르군. 칭찬해주지. " " 천만에요… 가 아니잖아!! 계속 말 돌리기나 할거에요?! 절 뭣 때문에 데 리고 왔는지 그 이유를 대보란 말이에요! 어서! " 으,안돼. 또 저 인간 페이스에 말리고 있어! 가인은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 앉히며 진 사령관을 째려 보았다. 진 사령관은 그런 가인의 눈초 리를 무표정하게 마주 대하다가 말했다. " 자네는 피스 대원들 중 가장 원거리 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 " …그런데요? " " 다른 말로 하자면 대 괴수전에 적합한 능력이라는 것이지. " " …그,그래서요‥? " 서,설마… 설마…!! 가인은 왠지 불길한 상상이 들어 마른 침을 꿀꺽 삼켰 다. 그런 가인의 표정을 재밌다는듯이 바라보며 진 사령관은 말했다. "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까…. 보험이라고 할 수 있겠군. " " 뭐,뭐에요?! 그 보험이라는 건?!!! 서,설마 나 보고 그 드래곤과 싸우라 는 건 아니겠지?!! 그 드래곤이라는 거 죽었다면서?! " " …그러니까 만약이다. " 주,죽어버려!! 가인의 눈에는 저 검은 선글래스를 낀 중년 남자가 마귀 이 상으로 보이질 않았다.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저 지옥 밑바닥에서 부터 기어 올라온 지긋지긋한 마귀!! 허망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가인에게 진 사령관은 특별히 미소까지 지어주며 서비스했다. " …이 중국 여행. 천천히 즐기도록. " 그런 진 사령관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짓는 수정. 또 시작이시네.사령관 님 도 참…. 저렇게 괴롭히고 싶으신 걸까. 진 사령관이 가인을 심술 궂게 대하 는 것은 즐기고 있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수정은 진 사령관 의 옆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비행기는 북경 공항의 활주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 면적 1만 6800㎢,인구 약 1284만 명(2000)인 이 곳은 허베이성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정부 직할시(直轄市)이다. 광 대한 화베이평야의 북연부(北緣部)에 샤오우타이산·쥔두산·옌산산 등 평균 해발고도 400∼ 500m의 산지에 의해 동·서·북의 3면이 둘러싸인 분지가 펼 쳐져 있다.그 주머니 모양의 평지 중앙에 베이징이 자리한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를 보여 겨울에는 한랭건조하고,여름에 고온다우하며,봄 ·가을은 기간이 짧으나 날씨와 식생(植生) 경관이 화사하다. 1월 평균기온 ―5℃ , 7월 평균기온 26℃, 연평균기온 11.9℃이고, 연강수량은 635mm이다. 지금은 9월.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은 북경은 덥고도 습했다. " 찌,찐다‥ 쪄‥. " 북경 공항의 게이트를 나오며 가인은 땀이 흐르는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 했 다.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기는 했지만, 에어컨의 냉기로도 북경의 더위는 가 시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왠 공항에 이렇게 사람은 또 많은지….그 많은 인 파를 보고있자니 괜시리 더 덥게 느껴지는 가인이었다. 그렇게 가인이 더워 하는 기색을 보이자, 옆에 있던 수정은 미소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 조금만 참아요,가인 씨. 마중 나온 사람들과 만나면 최대한 빨리 숙소로 이동할테니까. " " 마중…나온다고요? 누가? " " 중국 지부 피스 메이커겠죠. 아마도. " 수정도 확신은 하지 못했다.이번 중국 지부의 연락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것 이었기에 어떠한 스케쥴도 계획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무언가 이상했다.드 래곤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분명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이렇게 급하게 자신들을 찾을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죽은 몬스터의 사체는 화상 자 료만으로도 충분했다. 더구나 진 사령관은 침묵으로 일관한채 연락이 온 다 음 날 바로 중국으로 향했다.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만큼 사할이 걸린 일이라는 걸까.하지만 도대체 왜? " 한구얼렌 피스메이커? " 그때, 수정들에게 들려온 한 중국 여인의 목소리. 그 바람에 수정은 생각하 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녹색 제복의 한 여군이 곧은 자 세로 자신들을 직시하고 있었다. 제복의 휘장선이 2개인 것으로 보아 놀랍게 도 이 여군의 직위는 소령인 것 같았다.짧은 검은 단발 머리의 이 중국 여인 은 수정과 진 사령관을 둘러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 넝지언미언 헝가오싱. 환이영니 다오 베이징 라이. " 그런 여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진 사령관과 수정. 하지만 중국어라고는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던 가인으로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리 가 없었다. 가인은 수정의 어깨를 살짝 두들기며 속삭이듯 물었다. " 뭐,뭐라고 하는 거에요, 수정씨? " " 아…? 가인 씨, 통역기 안 달고 계셨어요? " " ......예? " 통역기? 뭐야, 그건? 가인이 전혀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수정 은 자신의 귓 가에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귀에 착용한 서클렛(Circ let)을 보여주었다. " 아까 비행기에서 건내줬잖아요, 이것. " " 아, 그게…! " 그제서야 가인은 서둘러 품에서 서클렛을 꺼냈다.비행기에서 수정이 건내주 길래 이게 뭔가 하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주머니 속에 쑤셔박아뒀던 것이다. 남자에게 서클렛을 주길래 이상하다고만 했지 이게 통 역기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가인이었다. 어쨋든, 가인은 귀에 서클렛을 끼고 작동시켰다. " 엇?! " 순간, 가인은 공항 안에 있던 중국 사람들의 말이 한국 말로 들려오는 착각 을 받았다. 그러니까 여전히 중국말로 들려오기는 했는데 그 의미가 이해되 기 시작한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기에 신경도 쓰지 않던 주위의 중국말들이 갑작스레 귀 속을 파고들자, 가인은 언어 중추에 혼란이 와서 인상을 찌푸렸 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곧 어느 정도 안정되자 가인은 놀랍다는듯 수정에게 소리쳤다. " 괴,굉장하네요. 이거! 중국어라고는 생전 배우지도 않았는데 다 알아들을 수가 있어요! " " 후훗, 중국어 뿐만이 아니라 세계 10개국의 언어까지 다 번역할 수 있는 통역기라구요. 아직 실험 단계라서 민간인들에게는 배포되지 않았지만 조 만간 상품화가 될 예정이래요. 뭐‥ 하지만 언어학자들의 반대가 워낙 심 한지라 가능할까 모르겠내요. " 가인은 수정의 설명에 새삼 통역기를 놀랍다는듯이 어루만졌다. 이, 이것만 있으면 그 지긋 지긋한 영어고 일본어고 다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물건이!! 가인은 또 다시 자신이 모르는 하이 테크놀로지의 세 계를 접하게 되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것이 과학의 힘! 무한한 기술력! ' …어떻게 하나 빼돌릴 수 없을까…. 이 것만 있으면 영어 시험 따위 문제 도 아닐텐데! ' 순수하게 감탄만 하지 못했던 것은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의 비애라고나 할 까.(…)그러니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가인을 너무 매도하지는 말도록 하자. 어쨋든, 가인은 서클렛을 끼자 여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 주유화 소령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을 모시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 자신을 소개한 그녀, 주유화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군인 특유의 자세로 가인들을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 사령관에게 존대를 했지만 경례 를 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녀가 피스메이커 측의 사람이 아님을 알려주 고 있었다. 진 사령관은 선글래스 안에서 눈을 빛내며 유화 소령에게 물었다. " …어째서 피스메이커의 일에 인민 해방군이 끼어든 거지? " 그 말에 앞서가던 유화 소령은 잠시 발걸음을 멈칫했지만,곧 살며시 미소지 으며 답했다. 미소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 이번 용(龍)의 발견은 각국의 군대가 주목하고 있습니다.저희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문제가 더 복잡해졌을지도 모릅니다. " " 어디까지나 자국에서 발생한 일이란 건가…. " 진 사령관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지나가듯 중얼거렸다.어떻게 일이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는 가인이었지만,유화 소령과 진 사령관 사이의 공기가 무거워졌다는 것 만은 눈치챌 수 있었다.저 유화라는 여자는 결코 자 신들에게 호의적인 상대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불현듯 들었다. 가인은 힐끔 유화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 겉보기에는 아직 20대 초반같은데 벌써부터 소령이라니….나이가 더 들은 걸까? ' 주유화는 170Cm를 넘는 장신에 동안의 미인이었다. 저 짙게 한 화장만 아니 라면 더 어려보일 용모였다. 아마도,젊은 나이에 높은 직위에 있게 되어선지 밑의 부하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한 것 같았다.그녀는 표 정이 굳어서인지 상당히 냉정해 보이는 인상을 주고 있었는데,가인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끼자 유화는 이 소년에게 살며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차가운 인상은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 밖에 차를 대기시켜놓았습니다. 타시죠. " 공항 입구 쪽에는 검은 벤츠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피스 메이커들과 여 러모로 그 골이 깊은 군의 대접치고서는 이상하게 화려했기에 일행의 표정은 잠시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피스 메이커들의 반응에 유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대 몬스터 특무 기관 피스 메이커의 손님 분들을 대접함에 있어서 조촐한 감이 있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 …아뇨. 천만에요. " 그런 유화의 말에 수정은 재빨리 손을 저으며 답했다.유화의 정중한 태도는 적어도 거짓이 없었기에 수정은 그녀에 대한 의심은 풀기로 결심했다.그렇다 고 경계심까지 푼 것은 아니었지만. 곧 일행을 태운 벤츠는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 ......... " 막상 차에 타자, 얘기의 흐름이 완전히 끊겨버린 그들이었다.수정은 분위기 를 쇄신할겸 웃음지으며 앞 좌석의 유화에게 말을 건냈다. " 그런데 주 소령 님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 " …스물 하나입니다만. 그것이 왜…? " 유화의 나이에 놀라는 표정을 지은 수정과 가인. 젊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젊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스물 하나에 소령이라니. 그것은 그녀 가 그만큼 유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수정은 미소지으며 답했다. " 아, 그냥 젊어보이시길래 물어본 것 뿐이에요. 혹시나 불쾌하셨더라면 사 과드리겠습니다. " " 아닙니다. 사과는 무슨…. 오히려 젊어보인다니 기분은 좋은데요? " 유화는 시원스럽게 수정의 말을 받아넘기며 미소지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은 일행의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유화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앞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 우연찮게 생체공학을 공부하다가 군의 기술장교에 발탁되었습니다.덕분에 이런 큰 임무를 맡게된 행운을 얻게 되었죠. 드래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거든요. " 그렇군. 그제서야 일행은 그녀 같은 젊은 여자가 어재서 이 일을 맡게되었 는지 알 수 있었다. 유화는 '우연찮게'란 말과 '행운'이라는 말을 썼는데,그 건 지나친 겸손이었다. 그런 것으로 이런 중대한 일에 그녀를 투입시킬리가 없지 않는가? 그런 일행의 생각대로, 주유화 그녀는 MIT를 수석 졸업한 박사 학위까지 딴 생체공학의 스페셜 리스트였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겨우 군의 기술장교를 맡고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 기술장교란 직 때문에 드래곤을 연구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 우와∼ 수정 씨, 저 강 좀 봐요! " 벤츠가 시가지를 벗어나 외곽으로 들어설 때,가인이 창 밖을 보며 소리쳤다. 그런 가인의 외침에 창 밖을 바라보던 수정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 아… 굉장하네요‥! " 창 밖에는 엄청난 넓이의 강이 보이고 있었다. 마치 산수화에서나 볼 수 있 을 것 같은 그 한 폭의 풍경에 가인과 수정은 눈을 떼지 못하고 구경하고 있 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앞좌석의 유화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후훗‥ 저건 용장호(龍葬湖)라고 하는 호수에요. 강이 아니죠. " " 에엑---?!! 저렇게 넓은 데요?! " 호수라는 말에 기겁을 하며 유화를 돌아보는 가인.유화는 문득 그런 소년이 귀엽다고 느꼈지만, 왜 이런 어린 소년이 피스메이커의 일행에 끼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기껏해야 열 일곱 정도의 고교생으로 밖에 안되어 보이는데… ' 수행원인 걸까…. ' 하지만 수행원이라고 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하지만 유화 자신도 이 제 스물 하나의 어린 나이에 소령이란 직위에 있었으니,그리 이상할 것도 없 다고 생각했다. 유화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침묵하던 진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 …이 호수‥ 대재해(大災害)의 산물이로군. " 그 말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수정과 가인. 대재해라면 12년 전의 그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게이트가 발생했던 그 날. 이차원과 삼 차원의 존재가 처음으로 대면했던 그 날. 그리고 그 날, 세계는 경악했었다. - LA 사건 대재해로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었다.LA의 인구 절반이 사라져 버리고,도시 의 한복판에 핵폭발이라도 일어난 것 처럼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된 그 사 건. 그 사건 이후, 몬스터에게 타격을 받은 각국은 국가 간의 이해를 초월하 여 피스메이커 라는 대(對) 몬스터 특무 기관을 만들게 되었다.정확히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사고가 생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가인은 대재 해 라는 말에 숨을 멈추고 방금 전까지 감탄했던 용장호를 긴장한 얼굴로 돌 아 보았다. " 여,여기가… 대재해가 일어났던 곳이라고요?! " 신음 처럼 중얼거리는 가인의 말을 받은 것은 냉정한 얼굴로 진 사령관을 바라보고 있던 유화였다. " 예, 그래요. 대재해는 미국 한 곳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닌,세계 각지에서 벌어졌던 참사였죠. 그것은 저희 중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12년 전 그 날 북경에서도 게이트가 발생했었고, 그 증거가 이 호수입니다. 북경의 외곽 지역을 날려버리고 그곳에 호수가 생성된 거죠. 저 호수의 밑바닥에는 아 직도 건져내지 못한 중국인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 " ......... " 할 말을 잃은 일행들.그 말을 하는 유화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깔려 있었 다. 가인은 마른 침을 삼키고 용장호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저렇게 아름 다운 호수가 그런 피비린내 나는 곳이었다니…. 어쨋든, 일행의 분위기가 가 라앉아 버리자 유화는 무거웠던 안색을 풀고 가볍게 말을 이었다. " 저 호수가 왜 용장호라고 불리는지 아십니까? 그건 용의 태골(兌骨)과 관 계가 있기 때문이에요. " " 용의 태골요? " 가인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묻자 유화는 살풋 미소 지으며 답했다. " 용은 천 년에 한 번, 깊은 산골에서 뼈를 벗는 다고 해요.이런 현상을 태 골이라고 하는데, 소위 탈피에 해당하는 현상이죠.동해 바다에 있는 방장 산(方丈山) 동쪽에 용이 태골하는 장소가 있는데, 여기에 약 5백ha에 이 르는 용의 가죽과 뼈가 산처럼 쌓여 있죠. 또 중국 진녕현(晋寧縣) 용장 주(龍葬洲)라는 곳도 있는데, 이곳 수중에서도 용이 벗어놓은 뼈를 볼 수 있다고 해요. 이 호수의 이름은 그 용장주를 따서 지어진 거에요. " " 예에…. 하지만 그 태골이 이 호수와 무슨…? " 그런 가인의 질문에 답변한 것은 과묵히 앉아있던 진 사령관이었다. " …이 호수의 밑에 용이 있다는 거로군. 그 드래곤의 사체가. " 그 말에 흠칫 놀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본 유화. 그녀는 냉정한 얼굴로 고개 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그럼 목적지가 이 용장호라는 것도 아셨겠군요. 10분 뒤면 호수의 연구소에 도착할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 음. " 진 사령관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침묵했다.가인은 그런 진 사령관 과 유화를 번갈아보다가 다시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용장호의 물결이 햇 살에 비춰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 …저 곳에 용이…. '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자꾸만 가인을 죄어온다. " …뭐,뭔가 굉장한데로 온 것 같은데‥. " 그것은 가인이 용장호의 연구소를 보고 한 말이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가인의 눈에는 이 곳이 연구소로는 절대 보이질 않고 있었다. 물론, 가인이 평상시에 생각하는 연구소라는 이미지가 모 로봇 만화에 나오는 '광자력 연 구소'라는 것도 문제가 있었지만, 이 용장호의 연구소는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던 것이다. 그래. 이 곳은 마치…. 그런 가인의 심정을 대변한 것은 그의 옆에 있던 진 사령관이었다. "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가? 엄청난 군사 시설이로군. " 그렇다. 용장호의 연구소에는 가인으로서는 생전 처음보는 군인들과 무기들 이 즐비해 있었던 것이다. 가인의 짧은 밀리터리 지식으로는 저 낯익은 바퀴 달린 전차는 탱크라는 것이었고, 저 현실감 없이 발사대에 올려진 거대한 막 대기들은 아마도 미사일이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중화기들을 마치 당 연하다는 듯이 들고 다니는 군인들. 가인은 이 모든 상황이 현실이 아닌 것 만 같았다. 저, 저거 진짜 총인 걸까…? " 어디까지나 만약이라는 경우에 대한 대비책일 뿐입니다.그리고 용은 지하 에 위치한 기술시설 안에 있습니다. " 그런 일행에게 유화는 안심시킬려는 목적으로 차분히 설명을 해주었다.하지 만 진 사령관은 그녀의 말을 건성으로만 들으며 주위의 시설들에서 눈을 떼 지 않고 있었다. '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 구내에는 전부 적외선 레이더 탐지 투성이 로군. ' 이거야 말로 감옥이 따로 없었다. 외부로부터의 침입 뿐만이 아니라 내부에 서의 탈출도 제한하는듯한 바리케이트들에 진 사령관은 살짝 인상을 굳혔다. 아무래도 단순히 연구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거 같았다. 저 군대 들은…. ' 훗…. 욕심많은 인간들 같으니라고. ' 진 사령관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창 밖의 시설들에서 차 안으로 눈을 돌 렸다.용장호의 연구시설은 꽤나 방대했다.철창을 지나 내부 건물로 들어가는 데만 해도 벤츠로 한참을 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연구 시설에 들어 선 가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잘 정렬된 군인들과 그들의 지휘관으로 보 이는 한 중년의 장군이었다. 벤츠에서 일행이 모두 내리는 것을 확인하며 유 화는 장군에게 다가갔다. " 리 장군 님, 한국 지부의 피스메이커 분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 경례를 하며 절도있는 태도로 가인들을 중년 장군에게 소개하는 유화. 그런 그녀의 말에 장군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 잘 오셨습니다. 제가 이곳의 책임자인 리유운이라고 합니다. 피스메이커 의 총사령관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 …나야말로. " 퉁명스럽기 까지한 진 사령관의 태도에 뒤에 있던 가인과 수정은 움찔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부대의 장군인 사람에게 하는 행동치고는 너무 무례했던 것이다. 가인은 당장에라도 리 장군이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낼 거라고 생각 했다. 자신이 매일 열 받았던 것도 진 사령관의 저런 태도 때문이었지 않은 가. " 훗,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여행을 하시느라 꽤 허기가 지셨을 텐데. " 그러나 리 장군은 여전히 미소 띈 얼굴을 유지한채 나긋한 태도로 진 사령 관을 대하고 있었다. 가인과 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 며 안도했다. 다,다행히도 화가 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진 사령관 의 다음 말에 가인들은 다시 숨을 죽여야만 했다. " 아니. 필요 없다. 나중에 하도록 하지." 말의 내용은 그렇다치고 상대의 성의까지 무시하는 저 말투. 가인은 이번에 야말로 리 장군이 화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생각했다.이래도 참는다 면 성인 군자다. " 그러십니까? 그럼 우선 숙소부터 안내해드리도록 하지요. " ' …성인 군자 맞군. '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리 장군의 저런 여유있는 행동에 가인은 자신 도 모르게 감탄했다. 여,역시 저런 지휘관 직에 있는 사람은 뭔가가 틀리군. 사람을 포용하는 힘이 있달까. ' 그에 비해 우리 쪽 지휘관은 왜 이 모양인지…. ' 가인은 진 사령관을 힐끗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시리 사람을 열 받게만 할 줄 알았지 도대체 할 줄 아는게 뭐가 있는 거야? 자신의 지휘관인 진 사 령관에게는 티끌 만큼의 충성심도 없는 가인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가인 은 볼 수 없었다. 리 장군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타는 듯한 시선 으로 진 사령관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것을. " 그보다 누 대인은 어디 계시는 건가? " 진 사령관의 질문에 리 장군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 연구소의 안에서 총사령관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최근 몸 상태가 안 좋 아지셔서 좀 쉬시고 계시죠. " " …몸이 안 좋아졌다고…. "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는 진 사령관. 그는 선글래스 안으로 리 장군을 노려보 았다. 저 능청스럽게 웃고 있는 가면 뒤로 리 장군이 짓고 있을 표정이 훤하 게 보이고 있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가인이 수정에게 물었다. " 누 대인이 누구죠? " " 중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책임자예요. 진 사령관 님과는 나름 대로 친분이 있으신 분이죠. …하지만 이상하네요. 평소에는 그렇게 정정하신 분이 마 중도 못 나오실 정도로 아프시다니… 흐음. " 수정도 뭔가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챘는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연구소의 분위기도 이상했고, 저 리 장군이라는 남자도 자신들에게 뭔가 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렇게 속삭이는 둘의 모습을 본 리 장군이 웃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 그런데 거기 두 분들은 누구십니까? 사령관 님하고 같이 오신 걸로 봐서 는 피스 메이커의 분들인 것 같은데. " " 아, 예. 전 진 사령관 님을 보좌하는 민수정이라고 합니다. " " 호오, 그럼 그 피스메이커의 부사령관이라고 불리우는…. " 리 장군의 입에서 뜻하지 않은 자신의 별명이 나오자, 수정은 쓴 웃음을 지 어야만 했다. 설마 그가 자신을 알고 있을 줄이야….역시 사전 조사에 꽤 공 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 " 아니요. 부 사령관은 무슨…. 과분한 말씀이네요. " " 하하, 겸손하시군요. 아,그럼 그 쪽 소년 분은? " 리 장군은 가인을 바라보며 수정에게 물었다. 하지만 말이 물어본다는 거였 지, 사실 예의 상 질문한 것 뿐이었다. 그는 이 고등학생 쯤 되어보이는 소 년에게 이미 흥미를 잃고 있었다. 기껏해야 수행원이겠지. 진 사령관도 취향 이 별나군. 이런 어린 꼬마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닐 줄이야…. 그런 리 장 군에게 수정은 가인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아, 이 쪽 소년은 오라 패턴 피스 블루.저희 피스메이커의 피스 대원 유 가인 군이라고 합니다. " " .........!! " 그때,연구소의 웅성거리던 소리들이 한순간 뚝 멈춰버렸다. 그리고 뒤를 잇 는 정적. 가인은 갑작스런 이들의 반응에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뭐, 뭐야? 갑자기 왜들 이러는 거지? 리 장군의 얼굴에서는 아까까지 소년을 무 시하던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대신 긴장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일행을 따라오던 유화도 마찬가지였는데,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놀란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스메이커 일행에 끼어 있길래 범 상치는 않은 사람일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이런 어린 소년이 피스 대 원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 …놀랍군요. 이제 막 고등학생 쯤 되어보이는데….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 게 되시는지? " 리 장군의 엄숙하기까지한 정중한 질문에 가인은 긴장하며 답했다. " …열‥일곱인데요. " 그의 대답에 주위의 군인들은 더욱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인은 그런 그들 을 바라보며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자신보다 한살은 많지만 마 리 선배도 있었고, 그보다 훨씬 어린 유리도 피스 대원이었기에 가인은 자신 의 나이에 놀라는 중국인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리 장군은 당 혹해 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재빨리 일행에게서 등을 돌렸다. " …갑자기 급한 용무가 있어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유화 소령, 이분들을 숙소로 안내해 주게. " " 아,예! 알겠습니다. " 갑자기 냉담해진 그의 반응에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저편의 복도로 도망 치듯 걸어가는 리 장군의 등을 바라 보았다. 뭐야? 저 사람은? 내가 뭘 잘못 말하기라도 한 건가? 가인은 괜히 기분이 찜짐해져 중얼거렸다. 이상한 사 람이네, 정말…. 어쨋든, 일행이 망연자실하게 서있자 유화는 쓴웃음을 지으 며 그들에게 말했다. " 숙소로 안내해드릴테니 절 따라오십시오. 마침 비어있는 방이 세 곳 있으 니 한분 씩 쓰시면 되겠군요. " " 아,예…. 그러도록 하죠. " 가인들은 그런 유화의 뒤를 따라 지하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편,이곳은 통일 한국의 수도 서울.그리고 26구역에 위치한 무영신풍류 도 장. 도장의 뒤에 위치한 자택에서 마리는 부엌에 있는 석지조를 이용하여 차 를 끓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석조는 찻물을 끓이며 차 달이는 부뚜막이고,석 지는 찻물을 보관하는 기구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전혀 구경도 할 수 없는 이런 것들을 마리의 부친 비영은 한국의 다도를 위해 특별히 주 방에 설치해 놓았었다. 마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석지에 찻물을 길어다 놓고 석조에 불을 피워서 찻물을 끓였다. 그녀는 피어오르는 불길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빠져있었다. ' 가인… 괜찮을까? ' 마리는 중국으로 떠난 가인을 떠올리며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자신이 이 렇게 말하면 이상했지만, 마치 물가에 내놓은 자식 처럼 그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마리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석조 옆에 물을 채워 물이 데워지도록 했다. ' 나도 참….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 내가 무슨 가인의 엄마도 아니고…. 마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 워져 중얼거렸다. 아아, 부끄러운 줄 알아라,성마리.물 가에 내놓은 자식이 라니… 이 얼마나 주책스러운 생각인가?! '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 마리는 다구를 깨끗이 씻어서 준비하고 찻물이 끓기를 기다려 물이 끓자 약 간의 탕수를 떠내 찻잔을 데웠다. 떡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돌솥에 넣어 끓이며 그녀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사령관님이 그렇게 서둘러 중국에 가신 이유는? ' 벌써 피스메이커에 들어온지 2년이 되어 가는 자신이었지만,그녀의 기억 상 이런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진 사령관은 피스 메이커 기관의 핵심 인물 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이와 같이 직접 움직이게 만들 었다는 것은 중국 쪽에서 뭔가 대단한 일이 발생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장소에 가인을 데리고 갔다. 그것이 마리의 가슴을 불안하게 만 들고 있었다. '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고…. ' 그래. 괜한 걱정일 뿐이다. 만약 그렇게 위험한 일이었다면,진 사령관이 피 스 대원들을 한국에 놔두고 가인 만을 중국으로 데려갔을 리가 없다. 마리는 애써 그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며 차의 양을 맞췄다. 찻잔에 물을 버리고 잘 달여진 차를 떠내서 두 개의 찻잔에 나누어 따랐다.그녀는 거실에 있는 자신 의 아버지 성비영에게 차를 날랐다. " 아버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 " …좋은 향이다. 차를 타는 실력이 늘었구나. " 마리가 타온 차의 향을 음미하며 비영이 칭찬하자,마리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녹차는 보통 우전(雨前), 세작(細雀), 중작(中雀), 대작(大雀)으로 구분하는데 지금 비영 부녀가 마시는 녹차는 세작과 대작의 중간인 중작이 었다. 보통 전문가들은 우전과 세작을 주로 마시며 중작은 대중화된 차라고 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 맛도 떨어지지 않고 잘 마시면 색향미를 다 즐길 수 있었기에 비영은 중작을 선호했다. 비영은 천천히 차를 음미하며 자신의 딸 에게 말했다. " 마리야, 너는 왜 우리가 차를 마시는지 아느냐? " " 예. 화(和). 정(靜). 청(淸)인 신라 시대의 다도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입니다. " " 그렇지…. 정확히는 화랑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란다. " 신라의 화랑들과 다도와는 깊은 관계가 있다. 삼국유사의 충담(忠談)과 차 관계에 관한 것에서 이미 충담은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올리고 남산의 오 솔길을 내려 오면서 지난날 화랑 기파랑(耆婆郞)의 인격을 기리며 다음과 같 은 노래를 불렀다.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떠가는 어디에 새파란 냇물속에 기랑의 모습 잠겼세라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이 랑의 지나신 마음갓(際)을 쫓고자 아 잦(栢)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 신라 화랑과 다도와의 관계는 고려 중엽의 문인 이곡의 기행문 동유기(東遊 記)에서도 엿볼 수 있고 그의 다시 가운데에도 엿볼 수 있다.그의 다시 「강 릉동헌의 운을 잇다.」(次江陵東軒韻) 또는 「한송정(寒松亭)」 등에서도 엿 볼 수 있을 뿐이 아니라 김극기의 화랑 「차부뚜막」을 읊은 시 등에서도 알 수 있고 고려시대의 대학자 이규보(李奎報)의 「원효방(元曉房)」을 심방하 고 원효와 사복(蛇福)간의 차생활 기록 등에서도 관계를 알 수 있었다. " 그러면 화랑도 정신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세속오계를 드나,이는 합당 치 않으며 또 어떤 사람은 미덕을 들기도 하나 미덕이란 지나치게 개연적 인 것이어서 이를 취하기에도 석연치 않다.그럼 과연 화랑 정신이란 무엇 이겠느냐? " " 화랑도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했으며, 충효신의를 지켜 유교를 무의무언지교 화광동진(和光同塵) 충기이위화 하는 선교를 또 자 비덕행하는 석가의 불도를 다 같이 수련했습니다. 이와 같이 화랑의 기상 은 유. 불. 선의 장점을 산천에의 주유와 더불어 심신을 단련하여 또 차 와 더불어 체득하는 것에 있습니다. " " 그래.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라시대의 화랑정신은 이를 「화합(和合).충절 (忠節). 숭경(崇敬). 청결(淸潔)」로 요약할 수 있다.그러므로 화랑의 다 도 정신도 화(和). 충(忠). 경(敬). 청(淸)이라고 할 수 있겠지. " 비영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에게 말했다. " 무영신풍류는 신라의 화랑에게서 계승된 것. 그러므로 우리는 한 시도 화 랑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 " 예, 알겠습니다. " 마리는 차의 향을 살짝 들이키며 화,충,경,청을 되새겼다.그런 딸의 모습에 비영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 " 허허, 너무 딱딱한 얘기만 했구나. 그래. 그건 그렇고… 오늘은 그 아이 가 안 왔더구나. " "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 " 누구긴 누구겠느냐.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는 제자, 가인 군이지. " " 풋…! " 비영의 입에서 가인의 이름이 나오자, 마리는 마시던 차에 사래가 걸려 콜 록 콜록 기침을 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비영에게 더듬 더듬 말했다. " 아,아버님…. 제가 언제 그를 애지중지 했다고… 그,그런데 갑자기 왜 가 인의 얘기는 꺼내시는 겁니까? " " 그야 하루만 그 아이가 안 보여도 내 딸 아이가 힘이 쭉 빠진채 기운없 어하니까 걱정되서 묻는 것이 아니냐. " " 아버님---!!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찻잔을 들고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내,내가 그렇게 티를 많이 냈던 걸까?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버 님이 저런 말씀까지 하실 정도라니….마리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려 애쓰며 무뚝뚝하게 비영에게 말했다. " 그,그럼 저는 이만 도장에 수련을 하러 가보겠습니다.찻잔은 나중에 치울 테니 테이블에 놔두십시오. " " …그래. 그러려무나. " 비영은 그 답지 않게 히죽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그런 아버지의 모습 에 마리는 창피해져 서둘러 현관으로 걸어갔다.그때,현관을 나설려는 마리의 뒤로 비영이 소리쳤다. " 마리야, 도장에 가는 것 까지는 좋은데… 찻잔을 도장에 까지 가져갈 필 요는 없지 않느냐? " 아…. " 마리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찻잔을 바라보며 한순간 굳어버렸다. 가인들이 방을 안내받고 여장을 풀자,시간은 어느덧 7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가인은 공복을 느끼며 방에서 복도로 나왔다. 가인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둘 러보며 중얼거렸다. " 아, 진짜‥ 여긴 도대체 뭐야? 연구소라는 게 원래 이런 곳인가? 사람이 라고는 구경조차 하기 힘드니…. " 그렇다. 몇 시간 전,리 장군을 만났을 때 그 수 많은 군인들이 정렬해 있었 던 게 마치 신기루였던 것 처럼 연구소 내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저녁 시간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가인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 혹시… 저녁 밥 먹으러 간 것이…. " …일리가 없잖냐?! 어쨋든, 자신과는 별 달리 상관도 없는 일에 기력을 낭 비할 필요는 없겠지.가인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수정의 방으로 걸어갔다. - 삑‥! " 수정 씨, 안에 계세요? " 가인은 수정의 방 출입문에 서서 지급 받은 ID카드를 제시했다.아무래도 비 밀리에 연구를 추진하는 시설이라 그런지, 세세한 데까지 보완에 신경을 쓰 고 있었다. 어떤 게이트를 통과하든 ID 카드를 긁어야만 했던 것이다.가인은 방을 배치받기 전에 유화가 나누어주었던 ID 카드를 보며 생각했다. ' …뭔가 열쇠보다는 편한 거 같기도 한데…. ' 가인이 카드를 제시하자, 소형 모니터에 가인의 사진이 뜨며 OK사인이 나왔 다. 이 방의 주인이 가인을 통과시키기로 허락했다는 표시였다. 곧 자동문이 미끄러지듯 열리며 가인은 수정의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미안해요,가인 씨. 많이 기다렸죠? " 수정은 방긋 웃으며 입구로 들어오는 가인을 맞이했다. 하지만 굳은 표정으 로 그녀를 바라봐야만 했던 가인.그는 더듬거리며 수정의 옷차림을 지적했다. " 수,수정 씨‥ 그 모습은…. " " 어때요? 어울려요? " 수정은 이상해진 가인의 표정을 신경도 쓰지 않으며 제 자리에서 빙글 한바 퀴 돌았다.그러자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가볍게 펄럭이며 작은 반원을 그렸 다. 민수정.그녀의 이번 코스츔은 다름 아닌 차이나 드레스였던 것이다. "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고… 중국에서는 역시 이거겠죠? " " …그,글쎄요. " 수중의 깃털 부채를 촤악 펼치며 입을 가리는 수정의 모습에 가인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정의 머리는 일명 '만두 머리'라고 하는 스 타일로 바뀌어 있었는데, 가인은 그 머리를 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떠 올랐다. ' 저건 또 누가 땋아준 거야…? ' 설마 그 긴 머리를 혼자서 저렇게 땋으신 걸까? 그렇다면 분명 그것은 신기 라고 불러줄만 했다. 거,참…. 이상한 곳에서만 감탄하게 되는군. 어쨋든,수 정은 마무리로 출처를 알 수 없는 중국제 향수를 몸에 뿌린 후 가인에게 말 했다. " 자, 그럼 식사하러 가죠. 배 많이 고프죠? " " 아,예…. 그런데‥ 그 사람은? " 가인은 수정에게 끌려 복도로 나오며 그녀에게 물었다. 가인이 칭한 '그 사 람'이란 당연히 진 사령관을 말하는 것이었다.사령관 님이란 호칭을 결코 쓰 는 법이 없는 가인의 모습에 수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 사령관 님은 누 대인을 뵈러 가셨어요. 아마 밥은 우리끼리 먹어야 될 것 같내요. " " 예에. " 아,그런 희소식이! 진 사령관을 안 봐도 된다는 수정의 말에 가인의 얼굴은 화색을 띄기 시작했다. 그런 가인의 반응에 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한 숨을 내쉬었다. ' 분명… 이건 문제가 있는 거야…. 부하에게 존경 받지 못하는 지휘관이라 니…. ' 가인 군, 사실 진 사령관 님은 좋은 분이에요…. 하지만 그와 가인의 사이 를 잘 알고 있는 수정으로서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 녀는 조소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자업자득이신 걸까. 사령관 님…. ' " 아, 수정 씨. 가인 군. 식당에 가시는 길이에요? " 그때, 그런 수정들에게 여군 제복의 중국 여인이 다가왔다.주유화 소령이었 다. 가인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예. 그런데 소령 님은 식사 하셨어요? 안 하셨으면 같이 해요. " " …그럴까요? " 차분하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유화의 모습에 가인은 그녀의 성숙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유화를 따라 가인들은 몇 군데의 게이트를 통과하여 연구시 설의 기내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은 군의 영향을 받았는지 음식을 배식 받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가인은 배식은 처음이었기에 어딘가 어색해진 얼굴로 식판을 들어야만 했다. 유화는 그런 가인을 보며 말했다. " 특별히 외부에서 손님이 오셨기에 식당에서 메뉴를 더 신경 썼대요.뭐,한 국 분들의 입에는 안 맞으실 수도 있겠지만…. " " 아뇨. 다 맛있어 보이는데요…. " 가인은 즐비해있는 저녁 메뉴를 보며 정신이 없었다. 그의 눈 앞에 있는 음 식들은 생전 본적도 없던 희귀한 음식들이었던 것이다. 뭔가 중국 집에서 본 음식들 같기도 한데…. 유화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 오늘은 A코스네요. 이게 삼풍냉채(三品盤)라는 거고, 이쪽은 유삼슬(流三 絲), 간소새우(乾燒蝦仁). 그리고 연조기(軟椒鷄)와 바쓰찹쌀떡(拔絲元宵) 이에요. 아, 그리고 오늘 주방장이 내놓은 스폐셜 메뉴가 있는데…바로 저 기 있는 오리 고기 보이죠? 저게 바로 북경오리라는 거에요. 이왕 북경까 지 오셨으니,이 지역이 자랑하는 음식은 드셔 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 " 그,그런가요? " 가인은 유화의 설명을 들으며 식판에 음식들을 천천히 담아갔다. 그런데 중국 음식이라는 게 워낙 튀기고 볶고 기름을 많이 썼던지라 건강에는 좋을지 몰라 도 대단히 느끼하게 보였다. 가인은 중얼거렸다. 이거 먹고 뒷 탈은 없으려나? " 잘 먹겠습니다∼ " " 맛있게 드십시오. " 음식을 식판에 챙겨 식당의 테이블에 앉은 가인들에게 유화는 정중히 말을 건 냈다.가인은 계속 자신에게 존대를 하는 유화의 말투가 맘에 걸렸다. 수정이나 시민 같은 경우에야 자신과 나이 차도 많이 나고, 하도 존대를 해서 이제는 익 숙해졌다지만 유화 소령 같은 경우에는 지위는 소령이었지만 나이 차가 그리 나지 않아서 그냥 누나 같았던 것이다. 원래 나이 차가 적게 나는 윗 사람에게 서 존대를 들을수록 불편해지는 법이다. 좋아! 가인은 결정을 내리고 유화에게 말을 건냈다. " …저기, 소령 님? " " 예? 무슨 문제라도…? " 다급히 안색이 바뀌는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혀를 찼다. 왜 이렇게 긴장하시 는 거야? 정말….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유화에게 말했다. " 그냥 편하게 대해주세요. 제가 한참 어리니까 말도 낮추시고요. " " 예? 아,아니 저‥그건… " " 낮추세요∼ 누나∼ 누나라고 불러도 돼죠? " 태연하게 웃으며 위와 같이 말하는 가인의 태도에 유화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 다. 민간인도 아닌 군인, 거기다 소령이기 까지한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 는 이는 가인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걸 천진난만하다고 해야할지…아니면 군 인 계급이라는 걸 모르는 철부지 소년이라고 해야할지…. " …안돼요? " " 아,아니 그런 게 아니라…. " 이 눈 앞의 소년은 이 지구 상에서 채 10명도 되지 않는 피스 대원이라는 존 재였다. 피스 대원이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까지는 유화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삼차원 내에서 그 무시무시한 이차원의 존재,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피스 대원은 그 존재 자체만으 로도 국가의 귀빈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이들이었기에 유화는 이 소년을 정중 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말을 놓고, 거기다 누나라고 부르 기 까지 하다니…. 유화는 가인의 옆에 앉아 있는 수정을 바라보며 SOS 신호를 보냈다. 그런 유화의 난처해하는 모습에 수정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괜찮아요, 소령 님. 가인 군 말대로 편하게 대해주세요. " " 예? 아,예에…. " 유화는 식은 땀을 흘리며 가인을 돌아보았다.가인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기 대감에 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장난스러워 보이는 모습에서는 인류의 운명을 손에 쥔 피스 대원의 모습을 찾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단지 이 눈 앞의 소년은 17살의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유화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 으며 말했다. " …그럼 그렇게 할게. 대신 나중에 후회해도 물리기 없기야? " " 하하, 그럴게요.누나. " 가인은 이제는 장난스럽게 되받아치기까지 하는 유화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 다. 유화가 아무리 생체 공학의 대가인데다가 소령이라는 직위에 있다지만,그 속은 단지 스물 한 살의 여인일 뿐이었다. 그동안 딱딱한 군대 속에서 같은 또 래의 친구 하나 없이 지내기에는 너무 답답하고 외로웠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며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가인의 존재는 유화에게 신선 한 느낌을 주었다. 금새 서로 친해져서 말을 나누는 가인과 유화. 수정은 그런 가인을 경이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 …역시 가공할 능력이네. 순식간에 여자에게 접근하는 가인 군…. ' 도대체 저 미소의 어디에 피스 메이커의 여 대원들을 홀리는 힘이 있는 걸까. 자의든 타의든 가인의 저 능력은 분명 탁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정이었다. 혹시 가인의 오라는 무차별 페르몬 발산의 능력도 갖춘 것이 아닐까…. 어쨋든, 가인은 수정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며 유화와 얘기를 나 누고 있었다. " 그런데 누나. 아까 제가 피스 대원이라고 했을 때,왜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 던 거에요? " " 뭐? 아… 그건‥ " 유화는 가인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 소년은 자신이 피스 대원이라는 게 얼마 나 대단한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 이차원의 존재 몬스터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지,피스 대원이란…. 더구나 그 수는 세계에서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극소수이거 든. 한 마디로 얘기해 무척이나 귀한 인적 자원이란 거야.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그런데 그런 피스 대원이 설마 가인‥(여기서 그녀는 가인의 이 름을 막 불러도 되나 잠시 고민했다가 멀뚱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소년의 모 습에 그냥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같은 고등학생이었을 줄을 꿈에나 알았 겠어? 아까 가인이 피스 대원이란 걸 알았을 때는 정말 놀랐다고. " " …그,그런 거였어요? " 유화의 설명으로 간신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중요함을 자각한 가인. 정작 피스 메이커였으면서도 외부인보다도 그 역할을 모르고 있었다니 한심한 노릇 이었다.유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래. 피스 대원이란 거… 정말 대단한 거야. 그 몬스터를 없앨 수 있는 힘 을 가졌다니…. 더구나 가인 같은 나이에 말이야. " " …하지만 저 말고도 피스 대원은 많은데요? 한국에는 저보다 한 살 위의 피 스 대원도 있고, 저보다 훨씬 어린 아이도 있어요. 제 나이 정도는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닌데…. " 그런 가인의 말에 유화는 놀랍다는듯 눈을 크게 떴다.그녀는 가인에게 소리치 듯 물었다. " 뭐? 그 말 사실이야?! " " 예,예에…. 그리고 저까지 합하면 다섯이나 되는 걸요. " " 다섯?!!! " 갑작스런 유화의 반응에 가인이 놀라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제 서야 유화는 높아졌던 언성을 낮추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꼬리는 긴장과 흥분 으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노,놀라운 일이네…. 중국의 피스 대원은… 단지 하나 뿐인데…. " " 예? 하나요? " 가인은 이상하다는듯 물었다. 아니 이 넓은 대륙에 피스 대원이 달랑 하나 뿐 이라고? 단지 하나?! 가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화는 그런 가인 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응. 그래‥. 그래서 귀중한 거야. 피스 대원이란 건…. 정말 구경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그 수가 적거든‥. 하지만 정말 놀랍네‥. 그 피스 대원이 한 국에는 다섯 명이나 된단 말이야? 아아, 역시 피스 메이커의 총본산다워. " " …하지만 그 중국의 피스 대원이란 분도… 대단하네요.혼자서 이 중국을 지 킨다니…. 그 분은 지금 이곳에 계신가요? " " 뭐? 아,아니…. 지금은 임무… 중이라고 들었는데…. " 유화는 가인의 질문에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렸다.그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수 상했지만, 가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그의 옆에 있던 수정은 냉정한 눈으 로 처음부터 유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수정은 속으로 옅게 한숨을 내쉬며 가인 을 바라보았다. 이 소년은 극비에 붙여진 피스 메이커의 기밀을 멋도 모르고 유화에게 말하고 있었다. 피스 대원에 관한 정보는 절대로 외부에 유출 되어서 는 안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군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뭐‥아직까지는 위험할만한 선까지는 발설하지 않았기에 수정은 가인을 제지하지 않았다. 섣불 리 제지했다가는 상대에게 정보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 곤란해요, 가인 군∼ ' 수정은 유화와의 대화에 열중하는 가인에게 중얼거렸다.다행히도 그녀의 걱정 과는 달리 가인은 더 이상 피스 메이커에 관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속으로 조용히 안도하는 수정. 그때, 그녀는 등 쪽을 스쳐지나가는 이상한 기운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느낌은… ' 살기(殺氣)…?! ' 도대체 누가?! 수정은 굳어진 인상으로 식당 내를 둘러 보았다.그렇게 테이블 을 둘러보던 그녀는 곧 살기의 진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정의 시선이 고 정된 곳에는 검은 군복을 입은 세 남자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짧은 스포츠 머리에 군인 답지 않은 왜소한 체구의 중국인들이었는데, 수정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세 명의 이목구비들은 마치 판으로 찍어놓은 것 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 세 쌍둥이…! ' 그런데 저들이 왜 나에게 살기를? 수정은 그 세 쌍둥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 으며 유화에게 물었다. " 소령 님, 저들은 누군가요? " " 예? 아… 저 세 쌍둥이들 말이군요.저들은 리 장군님의 직속 부하들인 샤오 (紹)형제들이에요. 마치 언제나 가드 처럼 리 장군님의 곁에 붙어다니는 자 들이죠. 저도 이곳으로 온지는 며칠 안되었기에 저들에 관해서 자세히는 알 지 못해요. " " ......그런가요. " 수정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리 장군의 직속 부하들이라고…. - 벌떡…. 그때, 식사를 마친 그들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동시에 일어나 식판을 들고 식수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마치 한 사람인 것 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모 습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묘한 기분을 들게 하고 있었다.그런 그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수정은 미소지었다. ' 재밌어지는데…. ' " 유리 양, 밥 먹어요∼! " 통일 한국의 수도 서울의 26구역, 피스 옐로우 한시민의 집. 시민은 에어프런 을 두른채 2층 유리의 방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 유리 양∼! "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유리가 방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한데 도통 대답이 없었던 것이다. 유리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방에 틀어 박혀 나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민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하아∼ 큰일이네. 아무리 가인 씨가 집에 없다지만…. " 유리의 저런 반응은 가인이 여행을 떠난 직후부터 계속되었다. 평상시 가인에 게 유리가 많이 의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가 좀 심했 던 것이다. 그 동안 많이 밝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가인이 없자 금새 예전의 모 습으로 돌아가버리는 유리였다. 그 모습에 시민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 역시 가인 씨가 있어야…. ' 시민은 중국에 간 가인을 떠올렸다.그와 같이 한 집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겨 우 5개월 남짓 밖에 안되었지만, 이미 그가 자신들에게 차지하는 부분은 너무 도 컸다. 시민은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끼며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 시미니 언니∼∼ 유리 언니는? 응? " 막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시민에게 달려오는 한 여자 아이. 바로 진우의 딸인 정하나 양이었다. 시민은 미소지으며 그런 하나를 안아올렸다. " 이를 어떡하면 좋니∼ 유리 언니는 많이 아파서 방에서 못 나오는데. " " 히잉∼∼ 보고시픈데∼ 언니 많이 아파? " " 아니야. 가인 오빠만 오면 금새 나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하나 너무 걱정 하지 말아요. 알았죠? " " 우웅∼ 오빠도 보고시퍼∼ " 하나는 그 큰 눈을 깜빡이며 보채듯이 중얼거렸다.시민은 하나를 토닥이며 생 각했다. ' 저도 정말 보고 싶내요,가인 씨. ' 그러니까 어서 빨리 돌아오세요‥. 시민은 그렇게 바다 건너에 있을 가인에게 속삭이며 부엌으로 향했다.부엌에서는 하나의 엄마인 윤미연이 요리를 하고 있 었다.그녀는 시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 어머,유리 양은 저녁 안 먹을 건가 보죠? 모처럼 이웃끼리 식사해볼려고 했 는데…. " " 예. 몸이 많이 안 좋은가봐요. 그냥 우리끼리 먹어야 할 것 같네요. " " 흐으음∼ 날을 잘못 잡았나…. 가인 군도 없고, 이러면 의미가 없는데. " 미연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프라이팬으로 부치고 있던 전을 접시에 떨어뜨 렸다. 시민은 안고 있던 하나를 내려 놓으며 자신도 미연을 돕기 위해 가스레 인지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때마침 울리기 시작하는 전화 벨 소리…. - 띠리리리리‥ " …이 시간에 누구지? " 시민은 거실 쪽으로 재빨리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시계를 보니 7시 반을 넘어 서고 있었다. 이상하네. 이런 시간에 우리 집에 전화를 할 사람은 없을 텐데…. << 여보세요? 시민 씨? >>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시민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 .........가인 씨?! " 가인 씨? 가인 씨인 거야? 시민은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이며 서둘러 쇼파에 앉았다. 집에 전화를 걸어왔던 이는 다름 아닌 중국으로 떠난 유가인이었던 것 이다. " 중국에 잘 도착한 거에요? " << 예에. 도착한 건 한참 됐어요. 지금은 저녁 먹고 쉬는 중이었는데,마침 공 중 전화기가 보여서 이렇게 전화한 거에요. 여기 이상하게 전화기가 없는 거 있죠? 전화기 찾아서 한참 헤맸어요. >> " 예에. 그랬군요…. "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살풋 미소지으며 말했다.헤어진지 몇 시간 밖에 되지도 않았는데, 전화기로 들려오는 가인의 목소리는 너무도 반가웠다. 마치 몇 주간 못 본 사람이기라도 한 것 처럼. 그때, 부엌에서 시민이 '가인 씨'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은 미연과 하나는 재빨리 거실로 달려나왔다. " 시민 씨? 가인 군이에요? " " 시미니 언니, 오빠야? 응? 나 바꿔 져∼! " 시민은 미연 모녀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모녀 아 니랄까봐 이렇게 똑같이 행동하는지. ' 아, 유리 양에게도 알려줘야겠다‥! ' 분명 굉장히 기뻐할테지! 시민은 방에서 잠적하고 있을 유리를 떠올리며 그녀 를 부르기 위해 쇼파에서 일어났다.시민은 '바꿔줘'를 목놓아 외치는 하나에게 전화기를 건내주고 2층으로 올라갔다. - 탕! 탕! " 유리 양! 유리 양! 가인 씨 한테서 전화왔어요! 어서 나와봐요! " 시민은 몇 번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그러나 여전히 무반응. 시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유리 양… 잠들어버린 걸까? 허나, 시민이 그런 생각을 채 마저하기도 전에 방문이 무섭게 열리며 유리가 튕겨지듯 뛰쳐 나왔다. " 정말?! 정말 오빠 전화라구?! " " …예,예에. 얼른 내려가 봐요. "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유리의 기세에 밀려 대답했다.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부를 때에는 아무 대답도 하질 않더니… 가인 씨 전화 하나에 이렇게 확 바뀌 어 버릴 수 있는 걸까…. 시민은 뭔가 섭섭한 마음이 들어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이미 정신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 조,조심해요‥! 유리 양! 그러다 넘어지겠어요! " 시민은 가슴이 조마조마해져 유리에게 소리쳤으나 들리지도 않나 보다.유리는 순식간에 거실로 달려가 버렸고, 시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런 유리의 뒤 를 따라 거실로 걸어갔다. 거실에서는 한창 하나가 웃음을 터뜨리며 가인의 전 화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 에헤, 오빠아∼ 하나도∼ 하나도 오빠 보고 시퍼∼ " << 응. 그래. 오빠 빨리 내려갈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갈때 선물 사 갈테니까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있고. >> " 에, 진짜아? 선물?! 헤헤, 오빠 너무 조아, 쪽♥ " 전화기에다가 뽀뽀를 하며 좋아하는 하나의 모습에 미연은 풋 웃음을 터뜨렸 다. 그녀는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어휴, 우리 하나 좋겠네∼ 오빠가 선물도 사주고. " " 응! 헤헤∼ " - 탕! 그때 거칠게 거실로 들어와 전화기의 앞으로 달려드는 한 인영.미연과 하나가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그 곳에는 숨을 몰아쉬며 전화기를 바라보는 유리가 서 있었다. 미연은 당황하며 유리에게 말했다. " 유,유리 양. 몸은 괜찮아? 아‥그,그렇지. 가인 군에게서 전화왔어요. 빨리 받아봐요. 하나야, 언니한테 전화기 건내주렴. 어서∼ " " 우웅∼ 자아,언니. " 하나가 건내주는 전화기를 조심스럽게 받아드는 유리.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꼈다.유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화기 너머 에 있을 가인을 불렀다. " 오,오빠‥? " << 아, 유리구나. 학교 잘 갔다왔어? >> 순간, 가인의 목소리를 듣자 유리는 눈물이 핑 돌았다. 유리는 목이 메여오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 으응‥. " << 유리야?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전화 회선이 안 좋은 건가? >> 아니야,오빠. 그런 거 아니구‥.유리는 눈물이 맺힌 눈을 손으로 비비며 미소 지었다. 오빠 목소리 들으니까 좋아서… 너무 좋아서 그런 거야….유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보고 싶어,오빠. 너무 보고 싶어‥. " 유리 양‥. " 시민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그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따뜻 한 목소리로 유리에게 말했다. " 그렇게 울면 가인 씨가 걱정하잖아요.가인 씨에게 활기 찬 목소리를 들려줘 야죠. " " 으응. " 유리는 그런 시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빠한테 우는 목소리 를 들려주면 안돼. 웃으면서 전화받아야지,이유리! 유리는 눈물을 그칠려고 애쓰며 전화기에 말하려고 했다. " 저‥오빠… " << 이거 회선이 너무 안 좋은가 보네‥. 하아, 다음에 전화 걸어야겠다…. >> - 뚜우‥뚜우‥ 순간, 거친 신호음을 내며 꺼지는 전화. 유리가 작게 말하고, 한참 동안 대답 이 없자 전화 회선이 불량한 걸로 착각한 가인이 전화를 끊은 것이었다. 그 바 람에 유리는 망연자실하게 전화기를 든 채 굳어 버렸고 시민과 하나,미연은 그 런 유리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 ......유,유리 양? " " 언니? " " ......... " 그러나… 굳어버린 유리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 위잉…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진 사령관은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에 는 마치 사람이 없는 것 처럼 고요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볼 수 있었다. 방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노인의 모습 을. 진 사령관은 어둡지도 않은지, 여전히 선글래스를 낀 채 노인에게 말했다. " 오랫만입니다,누 대인. " " …결국 왔는가, 진 사령관. " 이 노인이 바로 중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총 책임자 누자운 대인이었다. 누 대 인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미소를 띈채 온화하게 진 사령관을 바라보 고 있었다.하지만 그 시선은 자괴감으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바보 같은 짓을…. 자네는 여전히 무모해. " " 그렇습니까. " 진 사령관은 무표정하게 누 대인의 말을 받았다. 마치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는듯한 그의 태도에 누 대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받쳤던 것이 아닌가? 그때,어 두운 방 안의 불이 켜지며 진 사령관의 뒤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시 인사를 드려야 겠군요. " 진 사령관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리 장군과 검은 군복을 입은 세 쌍둥이 샤오 형제들이 서 있었다. 진 사령관을 바라보는 리 장군은 좀 전과 는 달리 그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 북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진 사령관. " - 척…! 진 사령관을 포위하는 샤오 형제들. 리 장군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 지금부터는 저희들의 지시를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 가인은 표류하고 있었다. 넓은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은 너무나도 기분 좋고 편안한 것이었다. 마치 가인이 예전에 상실했던 그 무언가를 채워 주기라도 하려는 것 처럼 그 느낌은 그를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었다. ' 잊고 있었어…. ' 이 느낌을. 이런 포근한 느낌을. 난 언제부터 이 느낌을 잊어버리고 살아왔 던 것일까. 가인은 수십 년 전에 이별했던 연인을 다시 만나기라도 한 것 같 은 감정에 휩싸여 버렸다. 전신에서 무한한 행복감이 샘솟고 있었다. ' 그래. 이 느낌은…. ' 내가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그 느낌. 다시는 접하지 못할 줄로만 알았던 그 느낌. ' 이 순간이… '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가인은 마음 속 깊이 빌고 또 빌었다. 하 지만 어디선가 아련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가인 군‥. 수정 씨?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그리고 다음에 들려오는 목소리 는 한층 더 뚜렷하게 가인의 정신을 꿰뚫었다. - 가인 군! " 아…. " 가인은 무거운 두 눈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낯선 천장의 풍경이 보였고, 자 신을 걱정스레 내려다 보는 수정의 모습이 보였다.수정 씨? 수정 씨가 날 깨 운 건가? 가인은 어느새인가 자신이 꾸고 있었던 꿈에 대한 내용을 잊어버리 기 시작했다. 단지, 꿈 속에서 느꼈던 아련한 느낌만이 가슴에 남아 있을 뿐. 단지 그 뿐이었다. 수정은 가인이 눈을 뜨자 안심했다는듯 말했다. " 가인 군, 깨어났어요? " " …예‥. 그런데… 수정 씨가 여길 왜? " 가인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수정에게 물었다.수정 은 그런 가인의 모습에 방긋 웃으며 손목에 찬 시계를 그의 눈 앞에 들어올 렸다. " 벌써 9시에요.9시. 오늘은 발견된 드래곤의 사체를 구경하기로 한 날이잖 아요.유화 소령 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구요. " " 아, 그랬지…. 늦어버렸네‥. 죄송해요, 수정 씨. " 가인은 묘하게 담담한 얼굴로 수정에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 에 수정은 살짝 안색을 굳혔다. 뭐라고 할까…. 평상시의 가인 군 답지 않다 고나 할까…. 수정은 가인을 깨우기 전에 이 방에서 벌어졌던 광경을 떠올리 며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 …가인 군, 괜찮아요‥? " " 예? 예에‥. 얼른 세수하고 준비할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가인은 여전히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한채 방에 딸린 화장실로 걸어 갔다.그런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수정은 좀 전까지 그에게서 발생했던 현 상을 떠올렸다. ' …그건 뭐였지…. ' 수정은 가인을 깨우기 위해, 그의 방을 ID카드로 열고 들어왔었다. 방 안은 한 치의 불빛도 없었기에 짙은 어둠으로 휩싸여 있었다. 단지… 가인이 있는 침상 쪽을 제외하고서…. - 우우우우우우우… 그것은 은은하게 흐느끼고 있었다.아니, 웃고 있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어 떻게 들으면 화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희노애락의 감정이 섞인 소 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가인을 감싸고 있는 푸른 기류의 흐름 속에서. ' 그 기류는 분명 오라의 집합체였어…. ' 가인은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져 있었다. 입 가에 미소까지 띄우고 있는 것 이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의 몸 속에서는 마치 끓어 오르는 것 처럼 오라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런 격렬한 오라의 반응이라니….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정은 조심스럽게 가인을 불렀었다. - 가인 군! 가인 군! " …수정 씨? 뭐하고 계세요? " 수정은 자신을 부르는 가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가인은 급하게 세수 를 했는지, 물기가 묻은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와 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수 정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서 옷 갈아 입고 나갈 준비를 하죠. " " 예에- " 가인은 작게 하품을 하며 자신의 짐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고,수정은 그런 가인의 모습을 조용히 주시했다. ' 가인 군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 북경 용장호의 연구소는 전 날과는 달리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어디 에 갔었는지 보이지도 않던 군인들은 도처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 고, 그 사이를 연구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가인은 어제 와는 딴 판인 연구소의 모습에 중얼거렸다. " …사람들이 있긴 있었잖아‥. " 어제는 마치 유령의 집인 것 처럼,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를 않더니만…. 그런 가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유화는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 다들 연구 준비로 드래곤의 사체가 있는 지하에 있었거든.병사들 같은 경 우는 밖의 감시병들을 제외하면 일찌감치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 " 으음∼ 그래서 안보였던 거군요? " 가인은 그제서야 납득이 간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가인의 모습은 전 날과는 달리 너무도 활기찬 것이었다. 그 이상할 정도로 활력이 넘치는 모습 에 수정은 수상함을 느끼며 가인을 불렀다. " 가인 군,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 " 예? 예에∼ 꿈을 꿨었거든요. " " 꿈요? " 수정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묻자, 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게… 무슨 꿈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서도…뭔가 굉장히 편안한 꿈이었어요. 뭐랄까… 말로는 잘 표현을 못하겠는데… 으음. 어쨋든, 그 꿈을 꾸고 나서부터는 몸이 날아갈듯 상쾌하네요. 사실 어제 한국을 떠나 면서부터 몸 상태가 영 안 좋았거든요.기분도 저조해지는게 막 짜증도 났 고….그런데 북경에 오고나서부터는 다시 괜찮아지기 시작하더라구요. 이 상하죠? " " …비행기 여행이 처음이라 피곤했었나 보죠. " " 그럴까요? " 수정의 말에 가인은 히죽 웃으며 다시 기지 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수정 은 활기차졌다는 것 외에는 가인에게서 별 달리 이상한 기색을 발견할 수 없 자, 안심하며 유화의 뒤를 따랐다. 수정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유화에게 물었다. " 아, 그런데 사령관 님은 먼저 사체를 구경하러 가셨다구요? " " 예? …아,예. 그렇습니다. 자신은 먼저 갈테니 일행을 부탁한다고… 말씀 하시더군요. " 유화는 차분한 미소로 일관하며 수정의 말에 대답했다. 수정은 알았다는 표 시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지만,속으로는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다니실 분이 아닌데…. ' 더구나 어제 진 사령관의 숙소를 수정이 찾아가보았지만, 그는 방안에 없었 다. ID카드로 진 사령관의 외출 시간을 체크해보았지만 저녁 6시 반 이후부 터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그렇다면…그 시간 이후로는 방에 들어오 시지 않았다는 소리인데…. ' 뭔가 이상해…. ' 수정은 기분 나쁜 불안함을 느끼며 발걸음을 놀렸다.유화들은 몇 번의 엘리 베이터를 갈아타고 계속 밑으로 향했다.가인은 정처없이 유화가 밑으로만 내 려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더 내려가야 돼요? " " 응. 조금만 더 내려가면 돼. 드래곤의 사체는 호수의 밑바닥에 있거든. " 유화의 말에 가인과 수정은 자신들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호수의 밑바닥 이라니… 그럼 저 위는 전부 물이라는 소리인가? 아마도 이 연구소는 호수의 측면에서부터 해저로 통로를 깍아만든 시설인 것 같았다. ' 저거… 천장이 무너지면 그대로 물이 쏟아져 내리는 거 아냐? ' 물론 그럴 정도로 연구소가 부실하게 지어졌을리는 없겠지만 가인은 괜시리 불안해져 힐끔 힐끔 천장을 바라봐야만 했다.그러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지 하의 최하층에 도달했다. - 팅…!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유화의 뒤를 따라 가인과 수정은 최하층에 발을 내딛었다. 최하층 부는 굉장히 넓은 돔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그 안은 연구원들로 가득차 있었다. 수정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몬 스터의 사체를 연구하는 사람들 치고서는 그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았다.이렇 게까지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는 않을텐데…. 거기다가 저 군인들은 또 뭔가? 왜 그들이 이런 지하의 연구소에 있는 거지? " 수,수정 씨…! " 그때 수정의 어깨를 가인이 두들기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인은 놀란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수정은 그런 가인 의 손가락을 따라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왜 그러는 거지,가인 군? " ......아…. " 하지만 수정 조차 '그것'을 보고나자 말을 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앞 에는 직경 10m의 거대한 유리로 된 실험관이 있었다.그리고 그 안에 바로 가 인들이 찾던 그것이 있었다! " 이,이것이… SA급 몬스터…드래곤‥? " 유리관의 안에는 몸 길이가 25m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동물의 뼈가 드러 누워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백악기 박물관에 전시된 공룡의 뼈 같기도 했는데,이 실험관 안에 있는 유골은 그 박력부터가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었 다. 가인과 수정은 이 드래곤의 유골을 접하자 숨이 막힐듯한 압박감을 받 았다. " 괴,굉장하네요‥. " 가인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뼈만 남아있었기에 본래의 그 위용과는 거리가 멀었지만,뼈의 생김새 만으로도 살아 생전 이 몬 스터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유화는 드래곤의 유골을 보면서 가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 그렇지? 정말 굉장한 생물이야. 저 이빨을 봐. 표면이 작은 가시로 덮여 있지? 저 가시는 아마도 톱이나 줄처럼 살점을 찢거나 뼈에서 벗겨내는데 유용하게 쓰였을 거야. 거기다 크게 발달한 뼈의 돌기가 온몸을 보호하고 있는데, 저 돌기는 근육의 움직임에 맞춰서 자유롭게 움직이기 때문에 무 기로서뿐만 아니라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갑옷으로도 효과적이지.그리 고 저 등 부분에 있는 몸통만한 뼈가 날개 뼈인데, 드래곤의 날개는 새나 박쥐처럼 팔이 변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등에 솟아난 뼈의 돌기가 날개처 럼 보이는 거야. " 유화의 설명을 놀랍다는듯 듣고 있던 가인은 실험관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 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 하지만… 저런 거구의 생물이 정말 하늘을 날 수 있을까요? 저 무게만 해 도 몇 t은 우습게 나갈 것 같은데…. 그런 몸을 저런 날개 두개만으로 띄 운다는 건 아무래도…. " " 그렇게 생각해? 자, 저 드래곤의 뼈를 자세히 살펴봐. 뭔가 이상하지 않 아? " 가인은 유화의 말대로 드래곤의 뼈를 바라보았다.자세히 살펴보니 드래곤의 뼈는 마치 부식이라도 된 것 처럼 뼈의 군데군데에 촘촘한 구멍들이 뚫려져 있었다.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 …물 속에 오래동안 있어서… 뼈가 부식된 거 아니에요? " " 훗, 아니야. 저게 바로 드래곤이 하늘을 날 수 있는 비밀이지. 드래곤의 뼈는 무거운 몸을 지탱하기 위해 굵고 튼튼한 구조로 되어 있지만, 뼛 속 에는 작은 구멍이 많이 나 있는 데다가 그 안이 대부분 비어있어서 그 무 게는 놀랍도록 가벼워. 거기다가 드래곤은 아마도 신경색을 가지고 있었 을 거야. 하늘을 날 수 있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거지. " " 예에…. " 하지만 가인은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유화는 그런 가인 의 심정을 이해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런 작은 빌딩만한 크기의 괴물이 하늘을 날라다닌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자신도 이 괴물을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믿지 못했겠지….그녀는 다시 실험관으로 시선을 돌렸 다. 유리 실험관의 드래곤은 퀭 하게 뚫린 두 눈으로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 었다.그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고 있었다. " 소령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 그때, 유화의 곁으로 한 연구원이 다가와 말했다. 그의 말에 유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있던 마이크에 대고 연구원들에게 말했다. << 지금부터 세포분열촉진제와 P.E.T(Potion Expulsive from Troll) 용액을 투여하겠다. 사체의 관절 부분에 호스를 연결하라. >> " 펄스 송신 완료. " " 초기 콘택트 문제 없습니다. " 오퍼레이터들이 정신 없이 작업에 임하며 소리쳤다.가인은 갑작스레 분주해 지는 연구소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해졌다. 왜 이러는 거지? 뭘 할려는 거야? 가인은 수정에게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어볼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수정의 얼굴은 백지장 처럼 창백해져 있었던 것이다. ' …수정 씨? ' 왜 그러시는 거지? 그런 가인을 뒤로 하며 수정은 유화에게 다가갔다. 그녀 의 얼굴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상상으로 참혹하게 굳어져 있었다. 수 정은 노기 서린 목소리로 유화에게 소리쳤다. " 지금 무슨 짓을 하실려는 겁니까,유화 소령?! " 수정의 말에 유화는 예상했다는듯 차분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그런 유화의 모습에 수정은 더더욱 당황스러운 기분이 되어 버렸다.주위의 연구원들이 수 정의 고함 소리를 들었는지 몇몇 그녀들 쪽을 돌아보았지만, 유화가 손짓을 하자 다시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유화는 수정을 똑바로 응시하며 가라 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보시는대로 입니다. " " P.E.T 용액은 분명 포션(Potion)의 메이저 버젼. 그 엄청난 재생 수치 때 문에 개발이 중단되었다고 들었었는데…. 거기다 저 엄청난 양의 세포분 열촉진제라니…! …당신들은 설마…. " 수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설마 저 몬스터를 재생시킬 생각인 겁니까?!! " 순간, 그 말을 듣고 있던 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무슨?! 재생이 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수정 씨?! 가인은 그녀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이 연구 원들은 저 실험관 안의 괴물을 되살릴려고 하고 있다는 것…! " 그,그런….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수정 씨? 유화 누나가 그런 짓을… 아니, 중국 쪽에서 그런 짓을 할리가 없잖아요? 하하… 유화 누나? 수정 씨가 뭔가 잘못 안거죠? 그렇죠? " " ......... " 그럴리가 없어.도대체 왜 저 괴물을 되살릴 거냔 말이야? 무슨 이득이 있다 고? 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유화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그의 말에 대 답해야할 유화는 굳은 안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가인은 그런 유화 의 모습에 가슴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왜,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에요? 가 인은 애타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서 아니라고 말해봐요,누나! 아 니라고 말해요! 그리고 유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맞아. 우리는 저 용을 부활시킬 거야. " - 쿵! 가인의 가슴이 망치로 얻어맞든 철렁 내려 앉았다. 수정은 차가워진 표정으 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 도대체 뭣 때문에?!그런 짓을 해봐야 좋을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요?! 이 런 짓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건 중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뜻입 니까?! " " …그 말에는 내가 답하도록 하지. " 그때, 최하층 돔의 입구 쪽에서 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리 장군이 군인들을 대동한채 서 있었다. 그는 만면에 가득 미소를 띄우며 가인들에게로 걸어왔다. " 이미 피스메이커의 중국 지부는 우리 군의 수중에 들어와 있다.그들은 우 리의 연구를 전면적으로 부정했었거든.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라고는 티끌 만큼도 없던 매국노 같은 녀석들이지. " " …그런! 피스메이커를 구금했다는 건가요? 무슨 권리로?! 이건 PM 협정을 깨버리는 중대한 불법 행위에요! 세계를 적으로 돌리실 생각입니까?! " " 웃기는 소리! 뭐가 불법이란 말인가?!! 여기는 중국이야!! " 수정의 말에 리 장군은 핏대를 세우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 기세가 히 스테리에 가까웠기에 수정은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리 장군은 마치 타 오르는 것 같은 시선을 들어 수정을 노려보았다. " 너희들이 뭘 안단 말이냐?! 저 평화로운 나라에서 호위호식하며 아무 걱 정 없이 살아온 것들이!! 권리? 지금 권리를 들먹였었나?! 우리 중국의 처참한 실태를 알고도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아니! 당 연히 알 수 없겠지! 피스 대원이 다섯이나 되는 그런 강대국에서 몬스터 들에게 짓밟혀 죽는 우리 중국 인민들의 고통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중국은 오라의 황무지다! 이 넓은 중원 땅 어디에도 오라 능력자를 찾을 수가 없어! 우리 중국 인민들은 몬스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지! 그런데 그런 우리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고 방치만 해왔던 네놈 들이 지금 우리에게 권리를 들먹인단 말이냐!! " 거기까지 외친 후,리 장군은 숨을 몰아쉬며 씩씩 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냉정히 바라보던 수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 방법입니까? " 이들이 드래곤을 재생시킬려는 이유. 수정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 드래곤을 자신들의 수족으로 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 그 말에 가인은 두 눈을 번쩍 뜨며 수정을 바라보았다. 저… 드래곤을… 수 족으로 부린다고…? 리 장군은 수정의 말에 놀랍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하하, 놀랍군 그래.과연 한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부 사령관이라 불 릴만하군. " " …그 이유 밖에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피스 대원 한 명으로 이 넓은 대륙 을 지켜내기란 역부족이었겠죠.하지만 그렇게 드래곤을 손에 넣는다고 해 서 과연 그 모든 일들이 원만히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거기다 SA 급이라고까지 불리는 드래곤이 과연 인간의 힘으로 제어 가능할까요? 자 칫 잘못했다가는 제 2의 대재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너무 위험해 요! " " 그런 걱정을 자네가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제 2의 대재해 라는 것을 막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거니까! 도전을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 한다는 것을 너희 한 민족은 모르는 것이냐!! 이미 우리에게 선택권이란 없어! 이것은 우리 중국 인민이 결정한 뜻이니 너희가 참견할 문제가 아 니다! " " .........!! " 그렇다면 그 도전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누가 질 것이란 말인가! 수정은 그 렇게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사상에 반하는 의견은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힘 으로라도 저지해야 겠지! 이 무모한 계획을! 하지만 수정이 수상한 기미를 보이려고 하자 대번에 리 장군의 뒤에 서잇던 군인들이 수정들에게 총을 겨 눴다. 리 장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수정에게 말했다. " 쓸데 없는 짓은 하지 않는게 좋아.손가락 하나라도 잘못 움직였다가는 순 식간에 벌집이 되어 버릴테니까. 아,그리고 거기 뒤의 소년. " 리 장군이 수정의 뒤에 있던 가인을 가리켰다. 나? 가인은 자신이 지목당하 자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리 장군을 바라보았다. " 분명 피스대원이라고 했었던가? 하지만 함부로 오라를 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거야. 자네의 지휘관이 우리의 수중에 있거든? " " 아…. " 그 말에 수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역시, 진 사령관 님은 저들의 손에….그 녀는 이를 악물며 그가 무사하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리 장군은 그런 수정 들의 반응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그에게는 특별히 오라를 감지하는 오리하르콘 감응 수소 폭탄을 선물로 장착해 두었으니까… 실수로라도 자네의 상관을 가루로 만드는 일 은 없도록 하게. " " 제길…! " 가인과 수정은 자신들이 완전히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분노했 다. 이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유화는 무거 워진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리 장군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 자, 실험을 재개해라! 용이 부활할 때다! " " ............ " 진 사령관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수소폭탄水素爆彈(hyd rogen bomb).수소의 원자핵이 융합하여 헬륨의 원자핵을 만들때 방출되는 에 너지를 살상·파괴용으로 이용한 폭탄이 자신의 목에 채워져 있었다. 정확히 구분하자면 수소화 리튬을 이용한 리튬폭탄(lithium bomb)이었는데, 건성 수 소 폭탄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2중·3중 수소를 제조하기 위한 기술적 경제적 어려움과 그것을 액상으로 보존하기 위한 저온장치가 용적이 커서 취급 곤란 한 습성 수소폭탄의 결점을 없애기 위하여 고체화한 수소화 리튬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폭탄은 부피가 작고 가벼워서 비행기에 탑재할 수 있었으며,이것 으로 수소폭탄이 실용화 단계에 들어갔다. 수소폭탄의 반응에는 임계량(臨界量)이 없으므로 지금과 같은 소형화가 가 능했지만,말이 소형화지 지표폭발(地表爆發)의 경우 풍향에 따라 150km 이상 에 걸친 방사능의 국지적 강하에 의한 치사지구(致死地區)를 형성할 위력인 것이다. 물론, 진 사령관의 목에 걸린 폭탄은 그보다 더 위력을 줄인 것이었 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략 무기라고 불리는 대형 핵무기가 수류탄이 되는 것 은 아니었다. 이런 것을 사람의 몸에 달아놓다니… 리 장군이라는 남자는 제 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 이 정도로까지 오라 능력을 견제하다니… 제법이군.여차하면 다 날려버리 겠다는 건가. ' 하지만 도리어 자신의 목에 폭탄을 건 장본인을 칭찬하며 테이블의 차를 음 미하는 진 사령관. 목에 폭탄이 걸려서 감근된 상태인데도 태연스럽게 티 타 임을 즐기는 그도 리 장군과 마찬가지로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누 대인은 진 사령관이 차를 들이키자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 어떤가? 복건성에서 나온 명차의 맛이? " " …신창 이서문을 독살한 차 치고서는 좋은 맛이군요. " 이서문이란 이씨 팔극권의 창시자이며 신창이라 불렸던 하북성 창주의 불패 의 무술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무술가를 독살할 때 썼다는 차를 건내주 는 누대인이나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진 사령관이나 비위가 보통 좋 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독방에 갇혀 있는 신세였는데,어디를 봐 도 포로로서의 면모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감시하는 샤오 형 제들의 눈은 변함없이 날카로웠다. 진 사령관은 그런 샤오 형제를 훑어 보며 누대인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피스 그레이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이런 병력으로는 그를 막 을 수 없었을텐데. " " 그렇지. 브루스가 있었더라면 저들이 피스메이커를 점거할 수는 없었을테 지…. 하지만 그는 지금 은허(殷墟)에 가있네. " " 은허…라면 하남성의 유적을 말하는 겁니까? " " 잘 알고 있구먼. 중국 최고의 왕조 은 왕조의 수도인 곳이지. " 전설에 따르면 은 왕조 이전에 하(夏) 왕조라는 왕조가 존재했다고 하지만, 은허처럼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따라서 존재가 확인된 왕조 중에서는 은 왕조가 중국 최고의 왕조다.탕(湯) 왕에 의해 처음 시작된 은 왕조는 B.C 16 세기에서 B.C 11세기에 번영을 누리며,현재 하남성을 중심으로 황하 하류 지 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최초 수도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지만,몇 차례 수도 를 옮기는 과정에서 최후의 수도가 바로 은허였다. 은허는 1899년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에서 발견되어, 1928∼1937 년에 걸쳐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그 후 중일전쟁의 반발 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후 중국과학원에 의해 그 조사가 재개되어 현재도 조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진 사령관은 누대인의 말에 선글래스 안의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 가이아(Gaia)의 흔적은 남아있었습니까? " " …없었네. 자네의 말대로 였어. 중국은 이미 대지의 여신의 축복을 잃어 버린거지. 모든 오라의 흐름은 서울로 향하고 있는 게야.한국에게는 가혹 한 일이 되겠지만 더 이상 이 중원에서는 몬스터를 볼 수 없게 될 걸세. 허허‥ 아무리 우리가 대자연의 미개한 존재라지만 이 세계가 무엇을 생 각하고 있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구먼. " " …탈레스는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신의 생각을 인간들이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그보다 그래서 피스 그레 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 중화인민공화국의 흑월당(黑月幢)이 그를 암살하기 위해 은허로 보내졌다 고 하더군. 하지만 그를 암살한다니 웃음이 나올 소리지. 앞으로는 흑월 당이라는 존재를 이 땅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걸세. " " …그렇습니까. " 흑월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비밀리에 키운 최고의 살수들이 모인 암살 집단 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집단을 전멸시켰다는 피스 그레이는 분명 인간의 범 주를 넘어선 존재였다. 진 사령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를 들이 켰다. 어느새 차는 아까의 온기를 잃어버리고 차갑게 식어있었다. 누대인은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시간을 확인하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지금쯤이면 시작했겠군. 실험이…. " " …그렇겠군요. " 진 사령관은 자신과는 상관 없다는듯이 너무도 담담히 답했다.그 모습에 기 가 막힌 누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 이 친구야, 그렇게 태연할 때인가! 잘못하면 이 기지 전체가 쑥대밭이 될 지도 모른다고! 몸에 폭탄까지 붙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무슨 수라도 내지 않으면‥! " " …어차피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납니다. " " 뭣?! " 누대인은 진 사령관의 말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버렸다. 그 바 람에 샤오 형제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누대인은 재빨리 목소리를 낮 추며 진 사령관에게 물었다. " 그,그게 무슨 말인가? 실패한다니? " " …그들이 발견한 것은 용이 아니니까요. " 그 뜻 밖의 말에 누대인은 할 말을 잊어버리고 진 사령관을 뚫어지듯 쳐다 보았다.진 사령관은 다음 대답을 열망하는 누대인을 바라보다가 식어버린 차 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 " 펄스(pulse) 수치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 " Type T의 뉴런이 Type D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각 부분 도파민 레벨 정상! " " 뇌량 재생 완료. 척추 신경 형성 완료. 전신 말초 신경 구축 개시. " " 생명 유지 장치계 형성 중! " 오퍼레이터들의 흥분한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리 장군은 미소지었다.그의 앞 에 있는 유리 실험관에서는 하나의 생명이 죽음에서 부활하고 있었다. C-급 몬스터 트로글로다이트(Troglodyte)의 뉴런의 단백질 구조를 재구축하여 P.E. T 용액을 이용, 드래곤의 뼈에 저장된 생체 정보가 용의 몸을 생전의 모습으 로 활성화시키고 있었다.거기에 세포분열촉진제가 가해지면서 드래곤의 사체 는 순식간에 근육의 밀도를 증가시켰다. 트로글로다이트는 드래곤과 같은 파충류 계열의 몬스터였는데, 그 DNA가 가장 드래곤과 밀접하다고 판명된 것 이었다. 곧이어, 드래곤의 늑골 사이로 재생된 심장이 '쿵''쿵' 거리며 뛰기 시작했고 리 장군은 환희에 몸을 떨었다. " 드디어‥ 깨어나는 거다. 우리 중화 인민을 지켜줄 존재가‥! " 대재해로부터 12년이 지났다. 그때부터 준비해온 프로젝트가 지금 그 성과 를 거두게 되는 것이었다. 리 장군은 자신이 그 역사적인 순간의 주역이 되 었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 이제 방해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만약 그 괴물 같은 브루스 녀석이 나 타난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어. 우릴 막을 수는 없다! ' 피스메이커의 총사령관까지 인질로 잡고 있는 이상, 더 이상의 방해자는 있 을 수 없었다. 계획을 늦추면서까지 한국 지부의 피스메이커를 끌어들인 보 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 용이 눈을 뜰 때만을‥! ' 한편, 그런 리 장군의 뒤에서는 군인들에 둘러싸인 수정과 가인이 서있었다. 그들은 불안한 눈초리로 실험관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 은 아랫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 이 실험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 육체는 복원시킨다고 하더라도 마인 드 컨트롤은 도저히 무리야.마인드 디텍터인 피스 핑크 이유리도 몬스터 의 사고 회로를 조정하는 것 만큼은 불가능했다고. 드래곤의 세뇌는 절대 로 불가능해! ' 하지만 만약 가능해진다면? ' 그때는… 중국은 막강한 힘을 손에 넣게 되는 거다…. ' 인류를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힘을. " ......... " 그런 수정의 옆에서 가인은 유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화는 담담한 얼굴로 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왠지 모를 불안감 과 죄책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단지, 단호한 의지 만이 그녀의 흔들리는 마 음을 잡아주고 있었다. 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유화에게 말했다. "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죠,누나? " " ......얘기했었지? 중국은 피스 대원이 하나 뿐이라고. " 유화의 말에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화는 짧게 숨을 들이킨 후 말을 이 었다. " 그 하나의 피스 대원으로는 이 넓은 대륙을 몬스터로부터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해. 몬스터가 나타나서 피스 메이커가 출동할 때는 이미 수 천명의 중국인들이 피를 흘린 뒤였지.이런 악순환이 끊임 없이 반복되어 왔어.이 12년 동안…. " 가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리고, 그렇게 내 부모님도 몬스터의 손에 돌아가셨다. " " .........! " 유화의 눈빛은 처연함을 넘어서 어떤 비장미까지 갖추고 있었다. 유화는 끓 어오르는 눈동자로 실험관의 드래곤을 노려보았다.그런 그녀의 옆 모습을 지 켜보며 가인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녀의 기분을 뼈 저릴 정도로 동감할 수 있었다. 그녀가, 중국인들이 이 길을 택한 것이 필연 같이 느껴져 왔다. 이미 그들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유화는 싸늘히 식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더 이상의 피는 흘려서는 안돼. 이 길만이 최선이야. " 수레 바퀴가 어긋난 채 돌아가는 것 처럼,다시는 원상태로 돌릴 수 없는 것 처럼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다. 가인은 이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 신의 무능력함을 곱 씹으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 우우우우… 그때. '그것'이 울었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울음 처럼 그 소리는 순수했다. 어떻게 들으면 다시 살아난 자신에게 환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리 장군은 실험관의 유리벽 에 손을 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 오오, 깨어난 건가?! " - 그르르륵… 그것이 낮게 그르릉 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직 깨어난 현실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리 장군의 옆으로 유화가 다가오며 오 퍼레이터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 이제부터 Type-D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시행한다. 대뇌 반구의 피질에 장 착한 마이크로 칩으로 전자파를 발생시켜라. >> " M1 작동 개시. 기억 통제를 시행합니다. " " M2 작동 개시. 사고 회로를 분석합니다. " 모니터 상에 드래곤의 뇌가 홀로그램으로 뜨며 뇌파 수치가 그래프로 산출 되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대뇌에 설치된 마이크로 칩은 마인드 컨트롤에 필 요한 특수 전자 파를 발생시키는데, 이것을 전기적 충격으로 변화시켜 뇌의 신경 세포를 통해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드래곤은 자신의 자아를 미처 하기도 전에 이 전기적 충격에 의한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 명령 을 따르게 된다. 모두의 흥분한 시선이 홀로그램의 그래프에 머물렀다. 과연 성공할 것인가? - 비잉비잉비잉비잉‥ 그때, 홀로그램의 영상 위로 떠오르는 'Caution'. 날카로운 사이렌의 소리 가 터져나오며 모두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었다.리 장군이 당황하며 유화에 게 소리쳤다. " 무슨 일인가,소령?!! 왜, 왜 이러는 거지?!! " " …Type-D의 사고 회로를 읽을 수 없습니다‥! 이럴‥이럴 리가 없을텐데‥! " 유화는 M2 마이크로 칩의 산출표를 다급히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사고 회로 를 분석하지 못하면 기억 통제를 할 수 없게 되며, 그렇게 되면 전기적 충격 으로 생각을 만들어내도 뇌가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식을 못하게 된다. 사고 회로가 없다니‥ 단순한 야생 동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의식을 가지 질 못한단 말인가?! 적어도 SA급 몬스터 드래곤이라면 자의식은‥! " …혹시… Type-D의 개체 판별이 틀렸다면…. " 만약… 이 실험관 안의 괴물이 드래곤이 아닌 다른 것이라면…! 거기에 생 각이 미치자 유화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실험은 실험 대상 이 자의식을 가진 고등 몬스터라는 가정 하에 성립되는 것이었다. 만약,드래 곤이 아니라면 이 실험은 애초부터 실패인 것이다! " 저건‥저건 드래곤이 아니야…! " 수정이 실험관에서 몸을 일으키는 몬스터를 바라보며 신음을 흘렸다.몬스터 는 전반적인 생김새가 드래곤과 흡사해 보였다. 하지만 녀석은 두 발로 서있 었다. 사족 보행인 드래곤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드래곤과 유사한 몬스터 라는 것은… " B급 몬스터 와이번(Wyvern)‥! " - 그와아아아아아악!! - 콰지지직! 돔 안을 흔들 정도의 괴성이 울려퍼지며 실험관의 유리벽이 박살났다. 살인 적으로 떨어져내리는 거대한 유리 파편에 몇몇의 연구원들이 난도질 되어 죽 었고, 순식간에 돔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가인은 수정을 끌어 안고 테이블 밑에서 유리 파편들을 피했다. 그들을 감시하던 군인들은 그로데스크한 와이 번의 모습에 패닉을 일으켰다. 그나마 도망을 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훈련된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 우아아아아아…!! " 당황한 군인들은 수중의 총기구를 와이번에게 난사했다. 하지만 그것은 와 이번을 더욱 난폭하게 만들 뿐이었다. 와이번은 꼬리를 휘둘러 병사들을 쳐 올렸다.병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벽으로 날아가 한줌의 피떡이 되어버 렸다. 그 광경에 멍하니 할 말을 잊는 사람들. 하지만 뒤를 이어 비어 버린 가슴을 지독한 공포감이 채우기 시작했다. " 으아아앗!! 사람 살려!! " " 괴물이다!! " 순식간에 돔의 출입구로 군인들과 연구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그들은 서 로 먼저 나가기 위해 악착같이 출구에 매달리고 있었다.그들의 발 밑으로 몇 몇 사람들이 넘어졌고, 넘어진 이들은 밀려드는 인파에 사정없이 짓밟혔다. - 그르르르륵… 와이번은 실험관의 위 쪽으로 연결된 통로를 노려보며 으르렁 거리고 있었 다.그 통로는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 몬스터를 외부로 빼내기 위해 설 치한 일종의 개폐구였다.그 개폐구는 용장호의 밑으로 연결되어 수중을 통해 나가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와이번은 본능적으로 위의 통로를 나갈 방향으로 정하고, 접고 있던 날개를 펼쳤다. - 콰지지지직!! 30m가 넘어보이는 날개가 펴지면서 주위의 기물들이 사정 없이 박살나 버렸 다.그러나 그렇게 날개를 펴고서 위로 나가기에는 개폐구가 너무도 비좁았다. 아직 완전히 열려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그 개폐구가 굉음을 울리며 좌우 로 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개폐구를 개방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 에 놀란 유화는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다. " 장군 님?!! " 연구소의 관리실에서 개폐구를 개방시킨 이는 다름 아닌 리 장군이었다. 유 화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 지,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 " 놈을 바깥으로 끌어내 지상에 배치해둔 병력으로 공격한다! " " 하지만 그러다 녀석이 시가지 쪽으로 날아가면 어떡하실려구요?!! 잘못했 다간 대참사가 벌어집니다! " " 시끄럽다,소령!! 잔소리 말고 내 명령에 따라라!! 저 괴물에 놀라서 자신 이 군인인 것도 잊어 버린거냐?!! " " 그런…!! " 유화는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뒷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와이번이 날개짓을 몇 번하더니 그 거대한 몸체가 거짓말처럼 튕겨지며 위의 통로로 날아오른 것이다. 그 바람에 돔 안이 거칠게 흔들리며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 마,맙소사! 무너진다!! " - 우르르르르!! 사정없이 흔들리며 무너지는 돔. 아마도 와이번이 통로를 통과하며 벽을 긁 어버렸는지, 용정호의 호수도 밑으로 터져나오고 있었다.수정은 가인을 돌아 보며 소리쳤다. " 가인 군,어서 쉘터로 피해요! 이대로는 이곳이 수압을 못 견딜 거에요! " " 하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아야…!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작게 투덜거렸다.기지 내에 물이 차오르고 있어서 뛰기도 힘들었다. 그때 그들을 향해 유화가 소리쳤다. " 이쪽이에요! 이쪽! " 순간, 천장이 처참하게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고 거대한 물살이 폭포처럼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인은 수정을 끌어안고, 쉘터의 입구를 열어 자신들 을 기다리는 유화에게로 몸을 날렸다. A.I슈츠의 동조 작용으로 수십 미터를 가로지르며 쉘터로 날아가는 가인이었다. 간발의 차로 가인과 수정은 구르듯 이 쉘터 안으로 들어왔고, 그 즉시 유화가 문을 닫았다. - 투웅---!! 거센 물살이 강철로 된 쉘터의 문을 두들겼다.그대로 문이 박살나지는 않을 까 하는 걱정에 가인들은 떨리는 눈으로 문을 주시했다. 다행히도 문은 단단 하게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제서야 가인은 힘 없이 벽에 기대어 중 얼거렸다. " …사,살았다…. " - 투확!! 2015년에 완성된 FMBT(Furture Main Battle Tank) '아브라함(abraham)'의 재래식 140mm 고체추진제(SP:Solid Propellant)포가 불을 뿜었다. 반응장갑 (ERA : Explosive Reactive Armor)의 파괴와 균질압연장갑(RHA : Rolled Hom ogeneous Armor)의 관통 및 명중률에서 성능이 더욱 향상된 M829E3탄이 약 2 ,200m/sec의 포구 속도로 용장호를 활공하고 있는 와이번에게 날아들었다. - 퍼어엉!! 와이번의 표면에 폭발음을 울리며 직격하는 운동에너지탄. 그 뒤를 이어 수 십개의 탄들이 와이번에게 적중했다.그 폭발의 여파로 짙은 연기가 와이번의 거대한 몸체를 가렸다. " …제,제거 한 건가…? " 쌍안경으로 와이번을 주시하던 리 장군이 중얼거렸다. 그는 어느새 연구소 지하의 돔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군인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연구소의 주변에 는 수 십대의 아브라함들과 K-10 자주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모든 화력 들이 지금 와이번 한 마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리 장군 의 애 타는 중얼거림도 한낱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연기를 걷어내며 다시 모 습을 드러낸 와이번은 그 피부에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분노에 찬 와이번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 크와아아아악!! 와이번은 거세게 저공 비행을 하며 연구소로 날아들었다. 와이번의 비행으 로 발생한 충격파가 용장호의 물살을 좌우로 갈랐다. " 으,으아아아앗!! " - 콰지직!! 와이번의 꼬리가 지상을 훑고 지나가자, 대 여섯 대의 아브라함들이 뒤집혀 버렸다. 그제서야 지상에 착지한 와이번은 볼 것 없이 꼬리를 휘둘러 탱크들 을 내리쳤다. - 퍼엉! 연쇄 폭발을 일으키듯 아브라함들이 폭발했다. 단순히 꼬리를 내려치는 것 뿐이었는데도 균질압연장갑(RHA : Rolled Homogeneous Armor)으로 만들어진 아브라함들이 종잇장 처럼 찢겨져 버렸다.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연구소의 전 장.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지상은 끓어오르듯 아지랑이들이 넘실대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거대한 와이번이 지옥의 악마 처럼 으르렁 거리며 포효하고 있었다. " 제길!! 자주포는 뭘하고 있는 거야!! 어서 발사해!! " " 하지만 장군 님! 표적의 움직임이 너무 빠릅니다! 군사 위성이 따라가질 못합니다! " 자주포 내부에는 컴퓨터가 있어 자체 탄도 계산을 하며 현재의 위치도 위성 에서 좌표를 받기 때문에 정확히 표적을 맞힐 수 있었다.하지만 군사 위성이 무용지물이 된 지금은, 이런 우수한 자주포를 가지고 있어도 그 기능을 십분 발휘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리 장군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 빌어먹을!! 네놈들은 눈 앞에 있는 저 거대한 괴물도 못 맞추겠다고 지 금 위성 타령이나 하며 징징 거리는 것이냐!! 쏴!! 좌표 예측을 못하겠으 면 눈으로 라도 보고 쏘란 말이다! 발사-------!!! " - 투웅! 투웅! 투웅! K-10 자주포가 거세게 불을 내뿜었다.급하게 발사했는지라 좌표가 불안했지 만,워낙 표적이 크다보니 탄의 대부분이 와이번을 두들겼다. 하지만 그런 자 주포들도 결국은 아브라함들과 같은 경로를 밟아야만 했다. 자주포를 맞으면 서도 와이번은 유유히 불을 내뿜는 K-10들에게로 다가가 그 꼬리로 자주포들 을 하나 하나씩 쳐올렸다. - 투앙----!!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자주포.너무도 허망하게 병력의 2/3가 사라지는 순간 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용장호에 배치된 중국군들은 허망함과 무력감을 맛봐야만 했다. 리 장군은 주먹으로 옆의 장갑차를 때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 말도 안돼! 우리 중화 인민 공화국이‥고작‥! 고작 저런 괴물 하나에 이 렇게 까지 유린당해야 한다니‥! " 와이번을 '고작 저런 괴물 하나'로 취급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리 장군은 자존심에 커다란 타격을 받았기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일생에 한 번 있을까말까 했던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건만,저 괴물의 난동과 함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버렸던 것이다. 리장군의 기분은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 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이대로 어떻게‥ 어떻게 상부에 보고를 하란 말인가‥! " 모처럼 상부가 전적으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위임했건만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흘러가고 있었다.솔직히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한 시 라도 빨리 와이번을 어떻게 막을까 궁리하는게 좋았지만, 이 중국인 장군은 자신의 안위 문제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그런 리 장군 의 귀로 청천 벽력 같은 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장군 님!! 표적이‥ 표적이 용장호에서 북경 시로‥ 루트를 바꿨습니다! " " .........!!! " 리 장군은 눈 앞이 깜깜해졌다. 언더 시티 유레카의 피스메이커 본부실.윤채영을 비롯한 오퍼레이터들은 모 처럼 느긋한 근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이유인 즉슨, 언제나 그녀들의 뒤에서 눈초리를 번쩍이던 상관들이 지금 이곳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의 오퍼레이터 3인방은 이 뜻 밖의 자유 시간을 어김 없이 활용하여 수다를 떨 고 있었다. " 아아∼ 어제 그 드라마 봤어? <위기의 부부>?! " " 당근 빳따지! 결국은 그 남자, 가족을 떠나 그 여우같은 여자한테로 가더 만! 체- 그딴 자식 믿고 수십년을 살아온 아내가 불쌍하다! 불쌍해! " "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중년에 찾아온 사랑이라니∼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택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아아∼ 러블리 파워 120% 충전이야∼ " " 무슨 러블리 파워야! 네가 만약 그 자식의 아내가 되어 봐라! 그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할 수 있을 거 같아? 사랑하는 건 자유더라도,져야 할 책임까지 자유인 건 아니란 말이야! 기껏 낳아서 기른 자식들은 어쩌 고서 사랑 찾아 아듀야?! 난 그런 무책임한 남자만 보면 하이힐로 머리 를 잘근잘근 밟아 버리고 싶어! " " .........어째 경험담 같다야? 왜 그렇게 정색을 해? " " 뭐어∼ 그만큼 몰입했다라고나 할까? 감수성의 여왕님이라고 불러주렴.어 쨋든, 그딴 남자 자식에게 계속 아내가 당하기만 해서는 안돼! 화끈한 반 격을 해야 한다고! " " 화끈한......예를 들어 어떤? " " 당근 맞바람이지! " " .........그거야말로 콩가루 집안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 3인방의 둘은 한참동안 드라마를 화제로 꽃피우다가, 아까부터 계속 조용히 만 있던 나머지 한 명에게 물었다. " 넌 요즘 무슨 드라마 봐? " " ......주말 대하드라마 <광개토대왕>. " " …어,그래. " 물어본 이인방은 식은 땀을 흘리며 침묵했다. 그렇게 수다를 떠는 3인방의 뒤로 인상이 구겨진채 눈꼬리를 파르르 떨고 있는 여성이 하나있었으니‥ 바 로 오퍼레이터들의 치프 '윤채영'이었다. 그녀는 3인방의 수다에 참다 참다 못 참고 결국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조용히들 좀 못하겠냐-----!! 지금은 근무 중이야! 일체 잡담 금지!! 사 령관 님이 없다고 너무 제멋대로들이잖아! " " 네네네∼ 알았어요,치프. 우리도 치프 맘 다 안다구요∼ " 채영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3인방은 히죽히죽 웃으며 채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채영은 그녀들의 반응에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 뭐,뭘‥? 뭘 안다는 거야‥? " " 그래요∼ 사랑하는 님이 저 먼 타지로 가서 소식도 없으니 얼마나 걱정이 되겠어요? " " 그러니까 조금 투정부리셔도 다 이해하고 받아줄 게요. 자∼어디 맘껏 저 희에게 속 마음을 털어나봐요∼ " " 걱정되죠, 가인 군? " 그녀들의 말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채영. 그녀는 말을 더듬 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이미 3인방에게 말려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 바,바보 자식들‥! 그,그런 게 아니라 나는 단지‥! 치프로서‥! " " 치프로서? " " 그래! 치프로서 당연히 근무에 태만한 너희들을 혼내키는 것 뿐이야! " 내가 또 다시 니들에게 말려들 줄 아냐! 치프 알기를 우습게 아는 너희들의 버르장 머리‥ 오늘에야 말로 뿌리째 근절시켜 주마! 채영은 단호한 태도로 3인방에게 맞서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3인방들은 채영의 자리를 슬쩍 겹 눈질하다가 순간,무언가를 발견한듯 눈을 반짝 거렸다. " 어헛∼! 어헛∼! 이것은∼∼! " " 앗! 아,안돼! 보지마!! " 채영은 재빨리 책상을 가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가 가릴려고 했던 것은 이미 상대의 수중으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빼,뺏겼다…!! " 우후후후후∼∼ 치프도 참∼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다니깐∼ " " 얼∼ 포토샵 기술이 늘었는데∼ " " 마,말하지마! 더 이상 말하지마!!! " 채영은 절규하며 3인방의 손에 있는 것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가볍게 채영의 손길을 피하며 서로 서로 그것을 돌려보는 오퍼레이터 3 인방. 그들이 채영에게서 빼앗은 것은 다름 아닌 포토샵으로 처리된 유가인의 뽀샤 시 모드 사진이었던 것이다. 절제된 디자인과 광원 처리가 돋보이는 것이 상 당히 공을 들인 역작이었다.사진에 들어간 'My Sweet boy' 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 가인 군도 이렇게 보니깐 꽃미남이다. 그치? " " 우후후∼ 하지만 이 정도로 까지 하면 우리 치프∼ 범죄 수준 아닐까? 도 청까지 한다면 영락 없이 그거잖아! 그거∼! " " …그런 이들을 우리는 흔히 스토커라고 부르고들 하지. " 결국, 언제나와 같은 패턴. 치프로서의 단호한 태도? 그딴 거 개 먹이로나 줘버려라! 윤채영은 괴성을 지르며 3인방에게 달려들었다. " 잘도 지껄였겠다∼∼∼∼이 자식들아!! " " 으악! 우리 치프 화났다! 열받았어! " " 어멋, 스토커야∼! 잡히면 쇼타 병이 옮는다! " " 아… 그런데 가인 군은 쇼타라고 볼 수는 없잖아. " 하여간 채영까지 합세하여 더더욱 소란스러워지는 작전 본부실이었다. - 삐삐삐삐삐삐‥ 그때, 본부실에 울려퍼지는 전자 신호음. 한 순간, 시끄럽던 본부실이 대번 에 조용해졌다. 채영을 비롯한 오퍼레이터들의 시선이 모두 신호음이 울려퍼 지는 곳을 향해 집중되었다. 멍하니 그 신호를 듣고 있던 중 가장 먼저 정신 을 차린 이는 치프 윤채영이었다. " 비상 연락망‥?! " 오퍼레이터들은 굳은 표정으로 재빨리 자리에 앉아,신호를 캐취하기 시작했 다. 빠르게 자판이 두들겨지는 소리가 들리며 곧이어, 본부실의 대형 스크린 으로 신호의 발신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 긴급 레벨 3을 발동시키겠습니다‥! 상황 설정은 A+.장소는 북경의 용장 호 부근.정확한 위치는 발신 신호를 따라 델타 위성으로 파악해주세요! >> " 긴급 레벨 3 발동. 델타 위성 가동시킵니다! " 아까까지 수다를 떨며 장난을 치던 모습과는 딴판으로 신속하게 작업에 임 하는 오퍼레이터 팀.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무슨 영문인지도 몰랐지만 그 녀들은 평상시의 시뮬레이션 훈련대로 재빠르게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 위치 파악 완료. 다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 스크린에서는 세계지도로 전환되었다가, 중국으로 확대,북경의 용장호 부근 이 위성 사진으로 떠올랐다. 발신자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 오라 배틀 필드(Aura Battle Field) 전개! >> " 피스! 10초 후 ABF 전개 합니다! " 윤채영은 정신 없이 ABF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북경에 오라 배틀 필드를 펼치는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그곳 은 분명 중국 지부의 담당 구역이었다. 이렇게 한국 지부 쪽에서 손을 쓸 이 유는 없는 것이다. ' 혹시 중국 지부에 문제가 생긴걸까‥! ' 어떤 이유로 인해 중국 지부 쪽의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럴 정도의 일이라니‥.중국 지부가 폐쇄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이잖아,그런 거! 채영은 오라 배틀 필드가 가동 표시 되고 있는 스크린을 바 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한 남자의 이름을 되뇌였다. " 가인 씨…! "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에요? 예?! 용장호의 하늘에 껴 있던 구름들이 휘몰아치며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 름이 흩어진 그곳에서 거대한 기류가 지표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웅… 번쩍. 거대한 섬광이 연구 시설과 용장호 주변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그 빛 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렸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느낌이 틀려졌다고나 할까. " 뭐,뭐죠? 이것은…?! " 유화는 방금 전의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답한 이는 자신의 차이나 드레스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수정이었다. " 위성으로부터 오라 필드를 떨어뜨린 거에요.이제부터 이 용장호에는 약 1 시간 동안 반경 5Km 이내까지 오라의 막이 펼쳐져 있게 되지요. 몬스터는 이 방어막을 벗어 날 수 없답니다. " " 그,그렇나요…? 그런 것이…. " 유화는 반신반의하며 중얼거렸다.그들은 쉘터로 피신해 간신히 지상으로 올 라올 수 있었다.하지만 지상으로 올라와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와이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중국군의 모습이었다. 유유히 군의 시 설을 마비시킨 뒤, 와이번이 다음 목표로 삼았던 것은 북경 시였다.와이번이 시가지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유화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져 땅에 주저앉을 뻔했다. 북경 시에서 벌어질 대형 참사가 눈 앞에서 아른거렸던 것 이다. " 어쨋든,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 가인은 안도하며 유화를 부축해주었다. 그 대형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수정 이 한국 지부 피스메이커에 무전을 친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그녀는 임시 사 령관의 자격으로서 용장호 부근에 오라 배틀 필드의 전개를 명령했던 것이다. 수정의 말처럼 이제부터 1시간 동안 와이번은 이 용정호를 벗어날 수 없었다. "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러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니까.더구나 제한 시간 이내에 몬스터를 격퇴하지 못하면 ABF를 친 보람도 없어지죠. " 수정의 냉정한 말에 가인과 유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가인은 저 멀리에서 용장호를 벗어나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는 와이번을 바라보며 수정에게 물었다. " 그럼 그 한 시간 후에 다시 오라 배틀 필드를 친다면? " " …무리에요. ABF 위성에 남은 오라 잔여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ABF를 쓸려면 앞으로 12시간의 충전 뒤에나 가능해요. " " 결국, 다른 방법이 없군요. 저 괴물을 물리치는 방법 외에는‥. " 가인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저 괴물을 없앨 수 있을까? 여기에는 진우 씨도, 시민 씨도, 마리 선배와 유리도… 아무도 없는데…. 단 지 가인 혼자서 저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절대적인 무리가 있었다.무엇보다‥ " 무엇보다 진 사령관 님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제가 오라를 쓸 수도 없 는 노릇 아니에요? " 그렇다. 그것이 가장 최대의 문제. 그 남자가 중국군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이상 가인은 오라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가인이 오라를 사용한다 면 진 사령관의 목에 걸린 수소 폭탄은 사정 없이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그 의 말에 곁에 있던 유화는 고개를 숙이며 침통하게 말했다. " 미안…. 모두 우리의 잘못이야…. 우리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거지. " 그때는 드래곤을 부활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그런데 기껏 부활시킨 존재는 드래곤도 아닌 와이번이란 괴물이었고, 이제는 도리어 북경 시의 주민들까지 그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유화는 이 막막한 현실에 가슴이 무거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유화의 귀를 파고드는 가인의 목소리. " 늦지 않았잖아요. " 유화는 가인의 말에 그를 바라보았다.이 상황에서도 이 17세의 소년은 자신 만만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 미소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순수한 매력 을 가지고 있었다. 가인은 유화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 저라면 지나간 일에 후회만 하기 보다는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대책을 세우겠는데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다…라는 말도 있고 말 이에요.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요? " " …맞는 말이야,가인. " 유화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아직 1시간이 남아있다.그 안에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해볼 생각이다. 아직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질 않았으니까. 후회는 노력한 뒤에 해도 좋아! 그런 유화의 모습에 가인은 씨 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 바로 그거에요,누나. " 그런 둘을 바라보며 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바로 그거에요,가인 군.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를 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거에요. 수정은 정색하 며 말을 꺼냈다. " 그럼 지금부터 두 사람은 리 장군을 찾아가서 ABF의 존재를 알리도록 하 세요. 그리고 북경 시의 시민들을 대피시키구요. " " …수정 씨는요? 같이 안 가실거에요? " 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수정은 코 웃음을 치며 깃털 부채로 입을 가렸다.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차이나 드레스가 휘날 린다. " 저는 지금부터 진 사령관 님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 " 장군 님, 표적이 에어리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 " 으음…. 무슨 꿍꿍이지…. 저 괴물 녀석. " 리 장군은 쌍안경으로 용장호의 상공에서 괴성을 지르며 거칠게 활공하는 와이번을 주시했다.와이번은 무슨 이유에선지 용장호의 반경 10Km 구간을 벗 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대체 뭣 때문에 저러는 거야? 그런 리 장군의 의문을 풀어준 것은 그의 뒤에서 들려온 한 여 성의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 …오라 배틀 필드가 현재 이 용장호 부근에 펼쳐져 있어서 그런 겁니다. " " ......?! 소령‥! " 리 장군은 뒤를 돌아보고 흠칫 인상을 굳혔다. 그의 뒤에는 냉랭한 표정의 주유화와 유가인이 서있었다. 리 장군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 무사히 탈출했었군. 그나저나 오라 배틀 필드라 하면…? " " 몬스터의 행동 범위를 제약시켜주는 일종의 방위 시스템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한국 지부의 피스메이커 쪽에서 도움을 주셨지요. " " 오오…. 그런가! 몬스터의 행동 범위를 제약시켜준다고! " 리 장군은 이 뜻 밖의 희소식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유화의 옆에 있던 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그렇게 너무 좋아하시지 마세요. 어차피 1시간 뒤에는 사라져 버리니까. "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어서 이 사이에 북경 시에 연락을 취해 시민들이 대피하게끔 해야 합니다! " 유화의 외침에 리 장군은 딱딱하게 인상을 굳혔다.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려 유화를 추궁했다. " 말도 안되는 소리! 그랬다가는 상부에 이곳의 현황이 보고되어버린다! 어 떻게든 우리 선에서 사태를 수습해야 돼! " " 그런…! 지,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 유화와 가인은 기가 막혔다. 상부에 자신의 잘못이 보고 될까봐 북경 시의 시민들에게 대피 명령 조차 내리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지금 이게 장군이란 사람이 할 소리인가?! 유화는 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 지금 그런 것보다는 시민의 대피가 우선입니다!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일 생각을 하셔야죠!! " " 시끄럽다! 그런 소극적인 태도로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가?!! 우리 중화 인민 공화국은 어떠한 외력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 " 조국의 이름을 함부로 팔지 마십시오! 장군 님은 단지 문책을 피하고 싶 으실 뿐 아닙니까?!! 인민 해방군으로서의 자각이 아직도 남아있으시다면 부디 정신 차리십시오! 장군 님만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북경 시의 시민들을 전부 희생시킬 생각이십니까?!! " " 못하는 소리가 없군,소령!! 올바른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시킨다! 상부에 보고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 못한다! " 리 장군에게 항의하는 유화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차고 있었다.안돼.이 사 람은 중국인민들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 단지 자신의 안위 만을 걱정하고 있 을 뿐이다. 이래서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질 않았다. 유화는 이런 인간을 그동 안 상관으로 섬겨왔던 자신이 치욕스러웠다. 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이렇 게 싸우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 고! 가인은 리 장군에게 소리쳤다. " 그럼 진 사령관이라도 풀어주세요! 그럼 제가 어떻게든 녀석을 막아 보이 겠어요! 제 오라 능력이라면 무슨 방법이 생길 거에요! " " 하, 자네가? 고맙지만 사양하지. 우리 인민 해방군은 외부인의 힘은 빌리 지 않는다. 무엇보다… " 리 장군은 가인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 자네의 어디를 믿으란 말인가? 피스 대원?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는 모 르겠지만 자네 혼자서 저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사령 관을 풀어준다고 해도 자네가 행여나 배신을 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질텐가? " " …바,바보 같은…!! " 가인은 리 장군의 말에 바닥까지 허탈해져 말이 다 안 나왔다.지금 이 작자 는 판단 능력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 상황에서 저렇게 자신의 자존심 만 챙기며 책임 회피에만 급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저런 인간이 장군이라는 직책에 올라있는지 가인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리 장군은 그런 가인을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 외부인은 자국의 일에 상관하지 마라. 거기서 잠자코 구경이나 하고 있으 라고! " " …대책은 있으신 겁니까?! " 유화는 안타까운 어조로 리 장군에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순양함 황화 1호에 순항 미사일의 발사를 요청할 생각이다.그것이라면 저 괴물을 잠재울 수 있겠지. " "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요?! " 유화는 와이번에 의해 초토화가 된 군화기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 장군 님은 착각에 빠져 계십니다! 저기를 보세요! 저 군화기들도 저 괴물 에게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순항 미사일로는 어림도 없다구요! 왜 그렇 게 쓸데 없는 고집을 피우시는 겁니까?! 저희로는 역부족이에요! 부디 현 실을 직시하십시오!! " " 닥쳐라-------!! " 리 장군의 노기 섞인 외침이 유화의 말을 끊었다. 그는 분노에 얼굴을 일그 러뜨리며 유화에게 소리쳤다. " 뭐가 역부족이라는 거냐?!! 자국에서 일어난 일은 그 나라의 국민이 책임 을 지는 거다!! 넌 인민 해방군의 긍지조차 버려버린 것이냐!! 더 이상의 말대꾸는 허용치 않겠다! 군인이라면 잔소리 말고 명령에 따라!! " 그의 말에 유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움켜쥐 었다. 그래…. 군인이면 명령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군인의 사 명이니까. 하지만… '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 군인의 진정한 목적은 자국을 수호하는 것. 국토를 방위하는 것. 중국 인민 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군인이 지켜야할 모든 것이었다. …그래요. 틀 린 것은 제가 아니라 리 장군님, 바로 당신입니다! 유화는 단호히 마음을 바 로잡으며 소리쳤다. " 중요한 것은 책임이나 긍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중국 인민. 우리의 동포들의 생명인 것입니다! 장군 님의 명령, 거부하겠습니다! 지금은 내 부인 외부인을 떠나서 힘을 합쳐야 할 때 입니다! " " …다 말한 건가? " - 철컥. 순간, 리 장군은 권총을 꺼내 유화에게 겨눴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주위의 군인들과 가인은 굳어버렸다. 지,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저 자식?!! 장 군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전쟁 시에 명령을 거부하는 군인은 총살형이다.어디 총에 겨눠진 채로 계 속 지껄여 보시지. " " …시민들을‥ 대피시키십시오. 그리고 진 사령관 님을‥ 풀어주세요. " 꿈틀. 리 장군의 안면 근육이 한번 실룩거렸다.그는 코 웃음을 치며 말했다. " 그래? 알았다,소령. …자네는 총살이다. " " .........!!!! " - 탕‥! 용장호에 단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연구 시설의 지하 11층. 진 사령관과 누대인이 구속되어 있는 이 곳에서 세 쌍둥이 샤오 형제들은 여전히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전에 있었던 진동과 폭발음이 신경 쓰였는지 샤오 형제의 맏형, 샤오싱은 셋 째 샤오즈에게 말했다. " …샤오즈,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와라. " " …응. " 샤오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통로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런 동생 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샤오싱은 생각했다. 아마도 실험은 실패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연구소가 쥐새끼 한 마리 없이 조용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맡은 임무는 이곳에서 포로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다른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는 전혀 움 직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둘째 샤오루는 그런 샤오싱과는 달리 적잖이 불 안한 모양이었다. " 형…, 아무래도 다들 대피한 것 같아. 이곳도 위험해질지 몰라. " " …샤오루, 우리의 임무는 이곳을 지키는 거다. " 나지막히 동생을 노려보며 입을 여는 샤오싱. 결국, 샤오루도 짧게 한 숨을 내쉬며 무표정한 얼굴로 감시를 계속하기 시작했다.샤오싱은 그런 동생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 일단 샤오즈를 보냈으니 소식은 알 수 있겠지. ' 샤오싱은 긴장으로 조급해질려는 마음을 가라 앉히며 방 안의 포로들을 돌 아보았다. 진 사령관과 누대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화기애애하게 서로들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솔직히 그 모습을 보면서 감시를 하자니 김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샤오싱은 나태해질려는 자신을 일깨우며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쨋든, 샤오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 휙…! 하지만 게이트의 밖으로 나오는 순간, 샤오싱에게 날아드는 물체 하나.그것 은 아슬아슬하게 샤오싱의 베레모를 스치고 지나갔다.날카롭게 찢어진 채 바 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베레모.샤오싱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 누구냐?! " " …어머, 오랫만에 기습이란 걸 하려니까 뜻대로 잘 안되네요. " 그렇게 얘기하며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는 이는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민수 정이었다. 그녀는 깃털 부채를 촤악 펼쳐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아마 도 저 부채가 샤오싱을 기습할 때 썼던 무기였던 거 같았다.샤오싱과 샤오루 는 이 난데 없는 침입자를 노려보며 품 안의 베레타 92FS를 뽑아들었다.그렇 게 눈 앞에 권총이 겨눠졌는데도, 수정은 긴장감이라는 것이 없는지 샤오 형 제들에게 가볍게 윙크까지 해보였다. " 사령관 님을 풀어주세요… 라고 말하면 역시 안 풀어주겠죠? " " ......... " " 하아, 좋습니다. 그럼 실력으로 데려가도록 하죠. " 수정의 한숨이 터짐과 동시에, 그녀의 몸은 번개 같이 샤오싱에게 날아들었 다. 샤오싱은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뭐야,이 한국 여자는?! 공포심이라는 게 없는 거냐?! 이 총이 보이지 않는 거냔 말이다!! 그는 무의식 중에 방아쇠의 검지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베레타는 그 총성을 울리지 못했다. - 키릭…! 샤오싱은 눈을 부릅 뜨며 자신의 베레타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베레타의 슬라이드와 노리쇠 뭉치가 수정의 손에 의해 뽑혀져 나가 있 었다. 그는 허무한 눈빛으로 손잡이 부분만 남은 베레타를 쥔채 중얼거렸다. 이런 말도 안되는… - 퍼억! 그리고 콧잔등이 돌아가는 아찔한 충격! 베레타를 분해시킴과 동시에 몸을 돌린 수정은 팔꿈치로 샤오싱의 코를 가격해 버린 것이다. 샤오싱의 코뼈가 돌아가며 검 붉은 코피를 뿜어져 나왔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샤오루 는 당황하며 수정에게 달려들었다.그녀가 샤오싱에게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 는지라 잘못하면 형까지 쏘게 될까봐 샤오루는 베레타를 버리고 육탄 공격을 가해 왔다. - 팟! 샤오루의 날카로운 권이 수정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수정은 그런 거친 샤오 루의 공세에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 …숙녀에 대한 에티켓이 제로군요. " 살짝 고개를 꺽으며 샤오루의 권을 피해내는 수정.그녀의 몸이 내려 앉았다 가 퉁겨지듯 솟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수정의 손바닥이 샤오루의 턱을 올려 쳤다. '파식!' 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샤오루의 입에서 핏덩이가 섞 인 이빨 가루들이 허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 샤오루---!! " 코뼈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서던 샤오싱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는 샤오루의 모습에 괴성을 지르며 수정에게 달려들었다. 수정은 그 모습에 고소를 금치 못하며 수중의 부채로 샤오싱의 다리 차기를 막아냈다. 상대가 흥분하면 흥 분할 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자신이다. 그래. 어디 계속 화내 보시라고‥! - 투학! 퍽! 하지만 샤오싱도 만만찮은 강권의 고수였다. 그는 패도적인 기세를 자랑하 며 연속으로 수정에게 주먹을 휘둘러 댔다.수정은 잘도 그 공격들을 얇은 부 채 하나로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 역시 쉽게 볼 상대들은 아닌데‥. ' - 휘리리릭!! 그때 수정의 뒤로 날아드는 비수! 그것은 사람의 손 크기만한 철제로 된 손 톱 모양의 갈고리였다. 그 갈고리는 줄로 연결되어 샤오루의 손에 들려 있었 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턱을 부여잡고 줄을 조정하고 있었는데, 수정의 앞 에서 공격하고 있는 샤오싱과 절묘한 타이밍으로 후방 공격을 해왔는지라 그 녀로서는 피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사각(死角)에서의 공격이다! - 텅! 하지만 수정은 마치 뒤에 눈이 달리기라도 한 것 처럼, 샤오싱의 강권을 부 채로 내려침과 동시에 뒤로 날아드는 갈고리를 뒷발질로 쳐올렸다.그녀는 놀 랍다는듯 샤오루에게 말했다. " 비조(飛爪)로군요‥! 무척 다루기가 힘들텐데‥. " " 큭…!! " 수정은 진정으로 감탄해서 한 말이었지만,샤오루의 입장에서는 비웃는 것으 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 어디까지 그 여유만만한 태도를 유지하는 지 보자! 샤오루는 매섭게 비조를 그녀에게 휘둘렀다. 이 무기의 길이는 약 6m이기 때문에 공격 범위가 넓고, 손톱 모양을 한 쇠갈고리는 목표물에 걸기 쉽도록 관절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이 비조의 용도는 살상 용이 아닌, 적의 투구나 갑옷, 신체에 걸어서 적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었지만, 샤오루의 비조 는 특별하게도 살상 용으로 개조된 것이었다. 용의 발 모양을 한 쇠갈고리, 용타(龍咤)가 사정 없이 수정을 노려왔다. - 촤악-! 용의 발톱에 수정의 차이나 드레스가 어깨부터 가슴까지 발톱 모양으로 찢 어졌다.찢어진 옷 사이로 다섯 개의 혈선이 수정의 피부에 그어져 있었다.다 행히도 공격이 얕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어깨뼈가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찢어졌을 것이다. 용타는 회수되기가 무섭게 다시 수정에게 날아들었다.수정 은 접었던 부채를 펴서 세 방향으로 공격해오는 용타를 털어내듯 쳐냈다. 샤 오루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수정의 부채를 노려보았다. ' 말도 안돼.어떻게 저런 부채 쪼가리로 이 강철 발톱을 막아낼 수 있는 거 지?! ' 그리고 수정은 그런 샤오루의 의문을 친절히 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 빡! 거세게 샤오루의 볼을 후려치는 수정의 부채. 그 충격에 샤오루는 허공에서 팽이 처럼 돌며 땅 바닥에 처박혔다. 그 한 방에 턱뼈가 어긋나 그대로 돌아 가버렸다. 무섭도록 강한 일격이었다. ' 처,철선(鐵扇)…! ' 수정의 부채. 그것은 철제로 만들어진 부채 무기였던 것이다. 샤오루는 극 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런 동생의 처참한 모 습에 샤오싱은 분노를 터뜨리며 허리 춤에 묶여있던 금속 벨트를 풀어 수정 에게 휘둘렀다. 순간, 그 금속 벨트는 순식간에 길이 230cm의 다절편(多節鞭) 으로 변하여 날카롭게 수정을 내리쳤다. - 쩌억! 땅바닥에 날카롭게 내리꽂히는 다절편.수정은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몸을 움 직여 다절편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대로 다절편을 얻어맞았더라 면 머리가 깨진채 뇌수를 흘리며 쓰러졌을 것이다.샤오싱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절편을 흔들자, 아홉 마디의 다절편은 살아있는 뱀 처럼 꿈틀거리며 수정 에게 밀려 들었다. 수정은 재빨리 뒤로 스텝을 밟으며 철선으로 다가오는 다 절편을 막아내었다. 샤오싱은 철선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아까부터 눈에 거슬려…. 저 부채…!! ' - 촤라라라락! 그리고 수정의 철선을 휘감는 다절편. 샤오싱은 무서운 힘으로 다절편을 끌 어당겼다. 훗, 그 잘난 부채… 다시는 쓰지 못하도록 만들어주지! 수정은 당 황하며 부채와 함께 샤오싱에게 천천히 끌려왔다. 하지만… - 툭…. 가볍게 부채를 놓아버리는 그녀. 그 바람에 샤오싱은 제풀을 못이겨 비틀거 리며 다절편을 끌어 당겼다. 뭐,뭐야?! 부채를 버렸어‥? " .........! " 샤오싱은 볼 수 있었다.자신의 눈 가를 스치며 지나가는 옅은 붉은 빛의 차 이나 드레스 자락을. 그것이 기절하기 직전 그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 뻑‥! 샤오싱의 관자놀이에 정확히 꽂히는 수정의 선풍각(旋風脚). 샤오싱은 그대 로 눈과 코에서 피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샤오싱은 고수였지 만 미처 방어도 하기 전에 치명적인 급소를 가격당했는지라 기절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죽지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겠지. " …늦었지요, 사령관 님? " 수정은 두 고수를 반죽음 상태로 때려 눕힌 사람 같지 않게 화사하게 웃으 며 진 사령관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진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히 말했다. " 기다리느라 무척이나 지루했다. " 그 말에 그의 옆에 있던 누대인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 늙은이와 차 마시는 건 무척이나 따분한 일이었겠지….진 사령관은 그것을 염두해두고 그 런 말을 한 것일까나? 어쨋든, 누대인이 언짢은 기색을 보이자 수정은 눈치 빠르게 그에게 인사했다. " 그 동안 별고 없으셨어요,누 대인? 뒤늦게 인사 올리는 걸 용서해주세요. " " 허허… 아니네. 용서는 오히려 내가 자네들에게 빌어야지…. 그나저나… 4년 만인가? 그렇지? 자네는 더 예뻐졌구먼, 수정 양. " " 어머, 별 말씀을요. " 수정은 진 사령관의 눈치를 살피며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예뻐졌다는 말 을 듣는 여자 치고서 기분 나쁠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이왕이면 진 사 령관에게서 그 말을 듣길 바라는 수정이었다. 물론, 세상이 두 쪽 나도 그런 일은 없을테지만…. " 그나저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 역시…. 무뚝뚝한 진 사령관의 말에 수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그녀는 그에게 현 상황을 보고했다. "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고, 와이번이 지상의 군부를 괴멸시킨 상태에요. 용 장호에 ABF를 가동시켜 간신히 와이번 만은 붙잡아 놓았습니다. " " …그렇군. " 진 사령관은 여전히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정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에서 시선을 멈췄다. 바로 리 장군이 얘기했던 그 수소 폭탄이었다. 오라를 감지하면 내부에 장치된 오리하르콘이 반응하여 기폭시킨다는…. " 어쨋든, 폭탄의 해체가 먼저겠군요. 잠시 이쪽에 누워주세요,사령관 님. " " …음. " 진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의 침대로 걸어갔다. 폭탄을 해체하겠다 고 저렇게 간단히 말하다니…. 수정은 아마도 폭탄에 관한 지식도 해박한 모 양이었다. 누대인은 그런 수정을 감탄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추억에 빠져들었 다. 그때,진 사령관의 손을 붙잡고 겁 먹은 눈초리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어 린 소녀가 벌써 저렇게 성장하다니…. ' 세월이란 정말이지 유수같군…. ' 누대인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수정의 뒤를 바 라보는 순간 멎을 수 밖에 없었다. 누 대인은 다급히 그녀에게 소리쳤다. " 조심…! " 하지만 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샤오 형제의 막내, 샤오즈가 수정의 뒤 에서 미첨도(眉尖刀)를 휘두르고 있었다. - 촤악! 날카로운 미첨도의 칼날이 진 사령관이 누워있던 침대를 반토막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 칼날에 허리가 두 동강이 나야 했을 수정과 진 사령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둘은 어느새 샤오즈의 뒤로 몸을 피해 있었던 것이다. 샤오즈는 날카롭게 인상을 굳히며 수정을 쏘아보았다. 감히 내 미첨도를 피해내다니…. ' …고수다. ' 대도(大刀)에 속하는 미첨도는 화려한 장식이 붙어 있는 언월도와는 달리 철저히 실전용으로 만들어진 칼이었다. 칼의 몸체는 강철로 되어 있고 손잡 이는 나무로 되어있지만, 총 길이가 3m나 되는 54kg의 무기였던 것이다.물론 무게가 과한 감이 있지만, 미첨도는 그 무게의 중량에 따라 파괴력이 결정된 다. 그리고 샤오즈 자신은 이 미첨도를 피땀 어린 수련의 결과로써, 자신의 수족 처럼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의 미첨도를 침대에 누워 있던 남자 까지 데리고 피해낼 수 있었다니….이 한국 여인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형들을 때려눕힌 장본인이 아닌가. " 한 사람이 더 있었다는 걸 깜빡했군요. " 수정은 진 사령관을 뒤로 물러서게 하며 다절곤에 휘감긴채 땅에 떨어져 있 던 자신의 철편을 주워 들었다. 샤오즈는 수정의 말에 반응조차 하지 않으며 무섭도록 전신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수정은 그 모습을 보며 탄성을 올렸다. ' 지법(指法), 수법(手法), 신법(身法), 보법(步法), 안법(眼法)…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 없이 높은 경지에 올라있어. 냉병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아 는 권법가다. ' " 타앗! " 수정이 마음 속으로 감탄하기가 무섭게 샤오즈는 미첨도를 그녀에게 휘둘러 왔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수정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지만, 그녀는 용케 도 미첨도의 움직임을 읽고서 근소한 차로 칼날을 피해내고 있었다. 미첨도 는 몸체에 어느 정도의 무게가 있고, 칼날은 활처럼 휘어있기에, 만약 상대 방이 베인다면 단순히 베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중량이 작용하여 타격 까지 입히게 된다.갑옷과 투구로 상대방이 무장했더라도 치명적인 손상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 아…! " 수정은 뒤로 물러서다가, 등 뒤에 닿는 벽의 감촉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리고 샤오즈는 그 기회를 놓칠새라 더더욱 미첨 도를 힘있게 베어온다. 마치 벽과 함께 수정을 베어버릴 것 처럼. - 투학…! 둔탁한 파음이 울려퍼지며 샤오즈는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의 미첨도는 눈 앞의 한국 여자를 베지 못했다. 미첨도는 그녀가 들고 있던 철선에 막혀 있 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철선이라고 해도 샤오즈의 미첨도를 막아내기에 는 부족함이 있었다. 수정이 잽싸게 뒤로 물러나자, 그녀가 들고 있던 철선 이 반으로 쩍 갈라진 채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 아… 모처럼 맘에 드는 부채였었는데…. " 수정은 미첨도에 의해 풍전등화가 된 자신의 목숨보다도 동강난 부채가 더 걱정인 모양이었다. 곧 그녀는 자신의 치맛 자락을 뒤로 날카롭게 걷어내며 화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 당신, 용서하지 않겠어요. 부러진 부채에 대한 응징을 해드리죠. " " ......... " 샤오즈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수정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 여자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저런 엉뚱한 말이나 해댈리가 없다. 어쨋든,그런 그녀의 정신 상태까지 내가 걱정 해 줄 여유는 없는 거겠지. 빨리 끝장을 내주마! 샤오즈는 힘있게 미첨도를 움켜쥐며 다시 수정에게 휘두를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때…. - 탕‥! 탕…! 날카로운 금속음이 두 번 울려퍼졌다. 재빨리 자신에게 날아드는 암기들을 미첨도로 막아낸 샤오즈. 그는 식은 땀을 흘리며 수정을 바라보았다.뭐,뭐냐 ? 이건?! " 나한전(羅漢錢)‥?! " 암기를 방어한 샤오즈의 미첨도 자루에는 두 개의 경화가 날카롭게 박혀 있 었다. 그것은 나한전 혹은 금전표라고 부르는 암기였는데, 보통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금속으로 된 경화를 던지는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 이었다. 경화는 소지하고 있다고 해서 특별히 의심받을 일이 없으며 휴대하 기도 편리하고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부채로 위장한 철선에다가 나한전으로 사용하는 동전이라… ' 세관을 무사히 통과한 이유는 이거 였었군…. 하지만 샤오즈는 생각을 거기 까지만 하고서 재빨리 미첨도를 휘둘러 수정의 나한전을 막아냈다.그녀가 나 한전으로 사용하는 경화는 가장 자리를 갈아서 예리하게 칼날처럼 만든 것이 었기에 꽤 날카로운 맛이 있었다. ' 그러나 어디까지나 동전. 8g도 나가지 않는 무게로는 암기 자체가 가지는 효과를 내기란 무리다…! ' 샤오즈는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수정에게 보법을 밟으며 들어갔다. 어차피 경화의 수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맞아도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 애초에 이 미첨도에 나한전 같은 것으로 대적할려던 쪽이 어리석은 거라고! 그리고 샤 오즈의 예상대로 수정의 나한전이 그 바닥을 드러냈다. ' 이겼다…! ' - 촤악! 잘려나가는 수정의 차이나 드레스 자락. 샤오즈는 미첨도를 앞으로 뻗은 채 승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입가의 웃음은 딱딱히 굳어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 …우웃! " 샤오즈는 미첨도를 끌어당기려고 했으나, 이 냉병기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잡혀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수정을 노려보았다. ' 이건… 말도 안돼…! ' 미첨도는 수정의 머리카락 끈에 휘감긴채 마치 그녀의 손에 달라 붙기라도 한 것 처럼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수정은 급하게 자신의 머리카락 끈을 푸르느라, 한쪽만 만두 머리가 된 채 여유있게 미소짓고 있었다. " 강(剛)은 유(柔)로 제압하고 유는 강으로 제압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자의 말씀을 따라가야 겠군요. 당신은 너무 무기에 의존했어요. " " 차앗------!! " 꼼짝도 않는 미첨도를 포기하고 샤오즈는 권(拳)을 수정에게 내찔렀다. 그 러나 그녀는 너무도 여유만만하게 샤오즈의 권을 피해 그의 안으로 파고 들 었다. - 투웅…! 뒤를 이어 무겁게 울리는 소리 하나.샤오즈는 천천히 두 눈을 뒤집으며 수 정의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수정은 단순히 주먹을 앞으로 내뻗은채 서 있 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형의권(形意拳) 붕권(崩拳)을 단순한 주먹으로 칭하기에는 그 위력이 너무도 고강했다. 정확히 샤오즈의 명치를 가격한 수 정의 붕권은 그의 가슴뼈를 으스러 뜨려 놓았던 것이다. " 대단하구먼. 형의권의 오의를 터뜩한겐가? " " …아직 미흡할 뿐이죠. " 수정은 누대인의 말에 쓴 웃음을 지으며 미첨도에 의해 찢어진 차이나 드레 스의 앞자락을 여미었다. 그때, 그런 그녀의 몸을 감싸안는 커다란 검은 옷 자락 하나. 바로 진 사령관이 자신의 제복 상의를 벗어 수정을 감싸 안아 준 것이었다. 수정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얼굴로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 사,사령관 님…? " " 상황은 정리된 것 같군. 어서 폭탄을 해체하도록. "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며 수정에게서 뒤돌아서는 진 사령관. 언제나 처럼 무 뚝뚝한 태도였지만, 진 사령관의 귀가 살짝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수정은 볼 수 있었다. 사령관 님도 참…. 어쩔 수 없으시다니깐.수정은 기분 좋은 미소 를 지으며 그가 건내준 제복을 살짝 끌어안았다. 진 사령관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 이제 가인 군의 차례만 남은 건가…. ' 수정은 지상에서 와이번과 대면하고 있을 가인과 유화를 떠올리며 서둘러 폭탄 해체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한편, 지상에서는…. " 아,아아…. " 유화는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벌려진 입술 사이로는 의미 없는 신음성 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야가 온 통 붉게 물들어만 가는 것만 같았다. 유화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시선 을 들어올렸다.그녀의 눈 앞에서는 리 장군이 총구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권 총을 쥔채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옆에 있는 가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 으,으으윽‥. " 17세의 한국인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어깨를 움켜쥔채 비명을 흘리고 있었 다. 그의 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고통으로 인한 쇼크 때문인지 몸을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 상처의 아픔을 참기 위해 얼마 나 이를 악물고 있었는지, 잇몸 사이로는 가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그 제서야 유화는 정신을 차리고 쓰러져 있는 가인을 끌어 안았다. " 가인?! 괜찮아?! 정신 차려! " 가인을 끌어안자 그의 어깨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에 유화의 제복이 검 붉게 물들어 갔다. 유화는 가인의 상처를 압박하며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어째서! 어째서 이 아이가!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 나를 대신해서 총을 맞았어‥! ' 리 장군이 유화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고 할때,유화는 가인에 의해 거칠게 옆으로 떠밀려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머리 속이 하얗게 물 들고 귓가로는 방금 전의 총성 만이 끊임 없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옆에서는 가인이 어깨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유화는 당황하며 가인의 상세를 살펴 보았다.다 행히도 총알은 관통당했기에, 파편을 제거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어깨 뼈 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총상이었다. 이대로는 출혈 쇼크로 죽을지도 모른다! 유화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리 장군에게 소리쳤다. " 어떻게 이런 어린 아이에게‥!!! 당신은…! 당신이란 사람은…!!! " 리 장군은 그런 유화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후, 총의 슬라이드를 잡 아당겼다. '철컥'. 다음 탄알이 장전되며 빈 탄 껍질이 튀어올랐다. "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난 자네를 쏠려고 했을 뿐이야.명령을 듣지 않는 부하에게 총살형을 내릴려고 했을 뿐인데, 저 소년이 주변머리 없이 끼어들어 자네 대신에 맞은 것이라고. "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 유화는 증오가 서린 눈동자로 리 장군을 노려보았다.이 어린 소년을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 같은 건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당장에라도 리 장군의 총 이 자신에게 향해질 수 있었지만, 유화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여 지도 없었다.단지 가인을 다치게 한 그에게서 살의에 가까운 분노를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리 장군은 그런 유화의 시선을 무시하며 쓰러진 가인의 머리 를 군화로 툭툭 차올렸다. " 그나저나 피스 대원이라길래 뭔가 특이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총 맞고 비명을 지르는 걸 보니 인간하고 똑같구만. 이거의 어디를 믿고 서 저 괴물의 처치를 맡긴단 말인가? 웃기지도 않을 소리지. " " 그 발… 떼지 못해!!! " 유화는 리 장군의 행위에 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리 장군은 간단하게 달려드는 유화를 피해버리며 그녀의 뒤통수를 총의 손잡이로 내리 쳤다. 유화는 짧은 비명을 올리며 바닥에 처박혔다. 리 장군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무력함으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맺혀 올랐다. 리 장군은 총을 쓰러 진 유화의 뒤통수에 겨누며 싸늘하게 말했다. " 자, 그럼 자네에 대한 사형 집행을 마무리 지어 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는 상관에 대한 태도가 글러먹었어. 다음 생애에도 군인으로 태어난 다면 부디 상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길 바라네. " - 끼릭‥! 방아쇠가 천천히 당겨지는 소리가 유화의 귀에는 번개 소리 보다도 더 크게 들려왔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건가. 그것도 저런 인간의 손에…. ' 제길…!!! ' 유화는 이를 악물고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때, 막 그녀에게 총 을 쏠려던 리 장군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헬리콥터의 소리가 들려왔다. -타타타타타타타타‥! 리 장군들의 근처로 내려서는 헬리콥터 한 대. 그 헬리콥터에 탄 한 군인이 리 장군에게 소리쳤다. " 장군 님! 헬기가 준비되었습니다! 어서 탑승해 주십시오! 표적이 이쪽으 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 " 흐음… 준비되었는가…. " 그리고 유화에게 겨눠졌던 리 장군의 권총이 내려갔다. 유화는 속으로 안도 의 한 숨을 내쉬었다. 죽이지… 않는 건가‥? 하지만 리 장군은 그런 유화의 생각을 읽은듯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 너무 좋아할 것 없다,소령. 어차피 자네들은 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저 괴물에 의해 죽게 될 테니까. 뭐, 후에 증거 인멸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 는 것도 힘들었는데 잘 되었군. 괴물에게 죽으면 그런 귀찮은 절차는 필 요 없어질테니까. " " …혼자서 도망칠 생각‥인 거냐‥! " 유화는 쓰러진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낮게 소리쳤다. 리 장군은 그녀 쪽을 돌아보지도 않으며 헬리콥터에 탑승하고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헬리콥터 의 로터 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저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우선 안전 지대로 빠져나간 다음, 그 곳에 서 순항 미사일을 발사할 생각이지. " " 그럼 여기에 있는 부하들은 어쩌고요!! " 유화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군인들을 가리켰다. 군인들 은 상관의 명령과 소령의 절규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리 장군은 그런 그 들을 담담히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 자네들은 어떡할텐가?! 내 명령을 따를거냐? 아니면 여기에 있는 이 소령 의 말을 따를거냐?! " " ......... " 아무런 대답도 없이 차갑게 리 장군을 바라보는 군인들. 그들의 시선에서는 이미 상관을 대하는 존중의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리 장군은 피식 웃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럼 다들 개죽음이나 당하시지. " -타타타타타타타타‥! 리 장군을 태운 헬리콥터는 양력과 분력을 이용하여 날아올랐고,곧 하늘 높 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유화는 이를 갈며 그런 헬리콥터를 노려보았다.하 지만 그녀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가인의 신음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를 끌 어안았다. " 가인‥?! " " 으‥으윽‥! 유화 누나‥! " 유화를 알아보며 초췌해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가인. 유화는 제복의 상의를 벗어던지고, 안의 군용 티셔츠를 부욱 찢어내 가인의 상처 부위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 이 바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거야!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 " 그래도‥ 그러지 않았으면 누나가 맞았을 거 아니에요. " 힘 없이 미소를 지어보이는 가인의 모습에 유화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민 간인 주제에‥ 잘난척이나 하고 있어‥. 누나의 앞에서 어른인 척이나 하고‥. 유화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내며 가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 일어날 수 있겠어,가인?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돼. 놈이 용장호에서 돌아 오고 있어. " " …으윽‥! " 가인은 환부가 쏠리는지 짧은 비명을 올렸지만,그래도 유화를 따라 몸을 일 으켰다. 피를 많이 흘려선지 머리가 지끈 거리고,귀에서는 연신 이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현실 감각이 사라져선지 묘하게 앞으로 닥쳐올 위기에 담담 해져 있었다.사실은 상처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 다는 게 맞는 말이었지만. " 아‥? " 하지만 힘겹게 가인을 부축하는 유화에게서, 대신 소년을 부축하는 손길들. 바로 그녀들과 함께 용장호에 남아있던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유화의 시선을 받으며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유화는 놀란 목소리로 그 들에게 말했다. " 너희들‥. " " 뭐‥ 저 늙은 꼰대 처럼 꼬리나 말며 도망가는 것은 아무래도 저희 성격 에 맞지 않아서…. " " 무엇보다 이대로 이 꼬마를 놔두고 가면 왠지 빚진 것 같아서 싫거든요? " " 이왕 죽을 거라면 조국에 몸 바쳐 죽는 게 뽀대나잖아요. " 채 열 명도 되지 않는 군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히죽 웃음을 터뜨렸다. 그 들을 바라보는 유화의 가슴은 뜨거운 환희로 견딜 수 없게 떨려 오고 있었다. 그래…. 아직 우리 인민 해방군의 정신은 살아있어. 틀린 것은 우리가 아니 였어…. ' 틀린 건 리 장군, 바로 당신이야…! ' 군인들은 그런 자신들의 소령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유화는 그들을 향해 마주 미소 지으며 소리쳤다. " 좋아! 앞으로 남은 시간은 40분. 그 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저 괴물을 무찌른다. 녀석에게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는 거야! " " 오오오!! " 그녀의 말에 군인들은 환호하며 소리질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인은 어깨의 상처를 끌어안은채 중얼거렸다.나도 저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 반드시 저들을 도와주고 싶어. ' 오라를 사용할 수만 있다면…! ' 그는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연태까지 오라를 사용한 것은 자의든 타의 든 상황에 끌려다니며 어쩔 수 없이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저들을 위해… 여기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진 힘을 사용하고 싶었다. 내가 가진 오라를 사용하여… ' 저 괴물을 무찌르고 싶다고…!! ' - 크와아아아아악!! 용장호의 저편에서 와이번의 포효소리가 들려오며 거대한 날개의 퍼득임이 느껴져 왔다. 유화들의 얼굴 표정이 한 순간 두려움과 공포에 굳어버렸다.하 지만 곧 그런 긴장감을 떨쳐버리고 유화는 군인들에게 소리쳤다. " 지금부터 이곳을 이탈한다! 연구소의 안에는 어느 정도의 방어 시설이 갖 춰져 있으니까 모두 그곳으로 피해! " " 라져! " 경례를 부치며 군용 지프들에 올라타는 군인들. 유화는 가인을 돌아보며 말 했다. " 괜찮아,가인? 우리는 지금부터 연구소로 대피할 거야. 상처는 괜찮겠어? " " 아아…예에. " 하지만 힘 없이 대답하는 가인의 모습이 못 미더워 보였는지, 유화는 그를 힘있게 부축하며 지프에 올랐다. 곧 거칠게 출발하는 지프.유화는 가인을 껴 안은채 뒷좌석에 앉아 뒤를 돌아보았다. 빠른 속도로 와이번이 활공을 하며 자신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구소에 도착하기 전에 덜미를 잡힐 것만 같은 불길한 상상이 계속 머리 속을 멤돈다.유화는 가인을 끌어안은 손에 힘 을 주며 그에게 속삭였다. " 미안…. 우리 때문에 너까지 말려들게 해서…. " " 그런… 누나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요. " 안색이 창백해진채 고개를 흔드는 가인. 유화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 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우리… 여기서 다 죽게 되는 걸까…. " 부하들 앞에서야 큰 소리를 쳤지만, 가망이 없어보였다.FMBT와 자주포도 통 하지 않은 상대에게 그보다 강한 화력의 무기도 없이 어떻게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부하들도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죽음을 각오하 고 있기에 이처럼 담담할 뿐. 가인은 그런 유화에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 다. " 약한 소리하지 말아요,누나. 모두 살아나갈 수 있어요‥! 반드시 살 수 있다고요! " 제가 오라만 사용할 수 있다면….가인은 분한 마음에 주먹을 움켜쥐었다.분 명 오라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저 괴물에게 자신의 오라가 통할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사용할 수만 있게 된다면…. ' 수정 씨, 뭘하고 계신 거에요‥! 이대로는 모두 죽어요‥! 늦는다구요! ' 가인은 아무런 소식도 없는 수정을 마음 속으로 소리쳐 불렀다.하지만 그때 유화들이 탄 지프를 몰던 군인이 비명을 질렀다. " 으,으읏!! 소령 님, 지프의 뒤로 놈이 근접했습니다!! " " .........!!! " 덜컹! 거칠게 흔들리는 지프. 어느새 다가온 와이번이 그 발로 지프를 잡아 챈 것이었다.와이번은 낚아챈 지프를 잡고 서서히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 다. 이대로 공중에서 떨어뜨릴 셈인 건가?! 유화와 군인들의 비명 소리들을 들으며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 수정 씨---------!! ' - 삐삐‥! 그리고 가인의 손목에 찬 무전기가 신호음을 터뜨렸다. ＡＰＰＲＯＶＥ ＣＨＡＮＧＩＮＧ ＯＦ ＰＥＡＣＥ ＢＬＵＥ " 아악----!! " 유화는 거칠게 흔들리는 지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좌석을 부여잡고 버 텼다. 지프는 와이번의 발에 뒤부터 붙잡혀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이 미 지상에서 10여m의 상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지프의 밑으로 보이는 지 상과의 거리가 유화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 턱‥. 그 때, 가인이 천천히 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그 모습에 유화는 깜짝 놀라 가인의 허리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 가인?! 무슨 짓이야! 그러다간 떨어져! " " …걱정말아요,누나. " 하지만 가인은 웃고 있었다.그는 놀랄 정도로 차분한 표정으로 와이번을 노 려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떨림은 와 이번에 대한 공포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오라 능력을 사용할 수 있 게 되었다는 환희에 대한 떨림이었다. 가인은 무전기를 찬 왼손을 반원으로 그리며 소리쳤다. " 변신…! " 그와 함께 가인의 등 뒤로 마치 수면 위로 떠오르듯 A.I 슈츠가 나타나 그 에게 장착되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타이즈와 관절 부위에 부착된 연푸른빛 장갑들. 헬맷과 마스크까지 장착되자, A.I 슈츠는 가인의 오라에 반응하여 푸른빛을 띄기 시작했다. " 피스 블루(Peace Blue)! " 가인의 오라 패턴은 블루! 짙은 푸른빛이 넘실대며 그의 A.I 슈츠를 물들 인다! 유화와 지프를 몰던 군인은 이 갑작스런 소년의 변신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저 모습은?! " 가인…? 그,그건 도대체…! " 그러나 가인은 유화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프를 끌어올리던 와이번 이 오라의 존재를 느끼고서 가인들을 내려다 본 것이다.거대한 와이번의 머 리가 지프에 다가오고 있었다. 거센 와이번의 콧김이 느껴지고 날카롭고도 거대한 이빨이 살인적으로 눈 앞에 아른 거린다.가인은 그렇게 다가오는 괴 물의 얼굴을 향해 오른손의 헤븐 스매쉬를 천천히 뻗었다.헤븐 스매쉬의 코 어가 푸른 오라의 기류로 회오리쳤다. " 천공권(天空拳) 산(散)!! " - 투학!! 거센 회오리의 충격파가 지프와 와이번의 사이에서 터져 올랐다. 오라의 천 공권을 수중에서 압축 폭파시키는 천공권 산이 가인의 헤븐 스매쉬에서 시전 된 것이다. 오라의 폭발을 정통으로 얼굴에 맞은 와이번은 괴성을 지르며 지 프를 잡고 있던 발을 놓아 버렸다.그와 동시에 지프는 중력의 이끌림에 따라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 꺄아아아악…!! " " 으아앗!! " 10m의 상공에서 밑도 끝도 없는 절벽으로 낙하하는 그 느낌에 유화와 군인 은 목청껏 비명을 내질렀다. 점점 다가오는 지상의 모습에 그만 기절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하지만 가인은 그런 둘의 허리를 껴안고서 지프를 박차 며 날아올랐다. " 아,아아아…!! " 유화는 지금 이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중력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세상과 땅이 번갈아가며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가인에게 들어올려진채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사고 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지상의 모습에 유화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가인의 품에 고개를 묻어버렸다. - 탁…! 가볍게 지상으로 착지하는 가인. 그 모습은 도저히 두 명의 성인 남녀를 든 채 10여 미터를 뛰어내린 사람의 모습으로는 볼 수 없었다. 가인의 품에 안 겨있던 유화와 군인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한 눈초리로 서로를 응시할 뿐 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 이런 거‥. - 콰앙! " ........!! " 하지만 뒤늦게 자신들의 뒤로 떨어져 내리는 지프의 모습에 번개 같이 제정 신으로 돌아오는 유화와 군인이었다. 지프는 10m에서 떨어진 모습 답게 처참 하게 박살나 있었다. 유화와 군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지프를 바라보았 다. …그래. 저게 일반적으로 10m에서 떨어진 모습이라고….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착지한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일이야…. " 괜찮아요? 두 분 다? " 들려온 가인의 목소리에 유화와 군인은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인 은 A.I 헬맷을 해제시키며 태연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모습은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어서 괴리감 마저 느껴질 정도였다.유화는 얼이 빠진 표 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으,으응…. 하지만… 그 모습은…. " " 이게 바로 피스 대원의 원래 모습이에요. 뭐,일종의 변신이라고나 할까? " 가인은 자신이 말하고도 이 만화같은 설정에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 전히 이 A.I 슈츠 차림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가인은 가볍게 한 숨 을 쉬며 품 안에서 포션을 꺼내 오른쪽 어깨에 주사했다.급속도로 총상이 아 물어져 가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 역시! 정말 끝내주게 잘 듣는 약이라니까! " 가인은 언제 다쳤냐는듯이 오른쪽 손을 거침없이 붕붕 돌리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유화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 가,가인…? 그렇게 다친 부위를 움직이면…! " " 괜찮아요! 다 나았다구요! " 기운차게 소리치는 그의 모습에 유화와 군인은 다시 한번 할 말을 잊었다. 뭐냐, 이 아이는…. 대체…! - 끼이익! " 괜찮으십니까, 소령 님?!! " 그때, 가인들에게로 급하게 다가와 멈춰서는 지프 한 대. 아까 전에 유화들 과 함께 도망치던 군인들이 탄 지프들 중 하나였다.유화는 그런 그들을 바라 보며 소리쳤다. " 너희들… 다시 돌아온 거냐?! 분명 연구소로 피하라고 했을 텐데! " " 어서 타십쇼! 명령 불복종에 대한 벌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 이 녀석들! 유화는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지프에 올라타는 유화에게 군인들이 물었다. " 그런데 정말 억세게도 운이 좋으십니다,소령 님. 분명 와이번에게 낚아채 이셨던 것 같았는데…. " " 아,으응. 믿기 힘들지만 이 소년 덕분에…. " 유화는 가인을 가리키며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옆에 없었다.유화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어디 간 거지. 이 아이는?! 그리고 그녀는 지프에도 올라타지 않은채 자신들에게서 뒤돌아서 있는 가인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유화는 소리쳤다. " 가인?!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타지 않고! " " …누나.누나는 그 아저씨들과 함께 최대한 빨리 이 곳을 벗어나요. " 유화는 불안한 눈동자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너…. " ‥너 혼자서 저 괴물을 상대할 생각이야‥?! " - 끄덕. 그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 그 태연한 모습에 유화는 기가 막힐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당황함보다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 며 그에게 소리쳤다. " 말도 안되는 소리마! 네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더라도 혼자서 저 괴물을 상대할 수는 없어!! " " …누나. " 그때 가인은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제된 A.I헬맷 사이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절 믿어봐요. 적어도 이제부터는 제가 누나들을 보호해줄테니까…! " 그와 동시에 가인의 몸에서 푸른 오라의 기운이 물결치듯 흘러 넘쳐 나오기 시작했다. 유화와 군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며 그 모습을 꿀먹은 벙어리 마 냥 바라보고 있었다. 가인은 천천히 뒤돌아 서며 군인들에게 말했다. " 거기 아저씨들. 아저씨들도 남자라면 여자 한 사람 쯤은 잘 보호해 줄 수 있겠죠? " " …무,물론이다‥! " 군인들은 애써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인은 A.I 헬맷 을 다시 장착시켰다. '철컥'.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그의 얼굴은 고글과 마 스크에 의해 가려졌다. 가인은 뒤돌아 보지 않은채 군인들에게 엄지 손가락 을 펴 보였다. " 누나를 잘 지켜주세요. " " 가,가인‥! " 유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군인들이 그런 그녀의 어깨 를 손으로 짚으며 가인에게 소리쳤다. " 걱정마라, 꼬마야! 우리도 남자다! " " 애송이 자식이 멋이나 부리고 말이야!! " " 그렇게 큰소리 쳐 놓고 당하기라도 한다면 볼기를 쳐줄테다!! " 가인은 마스크 안으로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 …다들 살아서 만나자구요. " " 그래… 반드시 살아서 보는 거다! " " 이 일 끝나면 각오하라고! 진탕 술을 먹여줄테니까!! " 군인들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우리는… 우리는 저 아이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만 하는 것인가… 저 어린 아이에게…. 그 생각은 군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했지만,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가인 의 모습과 피스 대원이라는 명성은 군인들이 이 17세 소년을 의지하게끔 만 들어 주고 있었다. 더구나 가인의 행동은 그들에게 묘한 감동을 주고 있었다. 꼬마 자식! 이 자식은 정말이지… 정말‥ 멋진 녀석이다‥!! " 저 따위 괴물한테 지지마!! " " 아저씨들도요. " - 바아아앙! 거칠게 연구소로 출발하는 지프. 유화는 군인들 사이에서 가인을 떨리는 눈 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장에 홀로 남아 멀어져만 가는 가인의 모습. 그 모 습에 유화는 울컥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 가인--------!!! " 누나, 걱정 말아요‥. 가인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인의 오라에 의해 피해를 입은 와 이번이 괴성을 내지르며 가인의 머리 위를 멤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 시.오라에 대한 타격을 어느 정도 완하시킨 괴물은 눈에서 복수의 불길을 내 뿜으며 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세게 지상의 가인에게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런 와이번의 박력에 가인은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 괜찮아. 할 수 있어‥. " 가인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오늘 아침 에 꿈을 꿨을 때와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유 모를 자신감이 오라에 담겨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인의 몸을 감싸 고 있는 오라는 여느 때와 달리 무한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 우아아아아아아앗--------!!! " 그 순간, 가인의 오라에 반응하여 대지가 끓어 올랐다. " 아‥. " 시민은 떨리는 손길로 싱크대를 부여잡았다. 그녀의 발 아래에는 그릇이 산 산조각이 난 채 깨져 있었다. 평상시의 그녀라면 아까운 그릇을 깨먹었다면 서 유리 조각을 치웠겠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 다. 그녀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허공을 둘러보았다. " 설마 이것은‥ " 말도 안돼….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어. 그것은 시영, 그 남자의 선에서 끝 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든 것은 12년 전의 그 날로 끝났을텐데…. " 어째서…!! " 척추를 타고 흘러넘치는 강렬한 오라의 반응. 그렇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가 없는 바로 '그'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 오라의 느낌은 시민,자신이 잘 알 고 있는 사람의 것. 그 사람은 바로… " 가인 씨…? " 그녀는 망연자실하게 가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 마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유리도 인상 을 찡그리며 배에 손을 가져갔다. 강렬한 오라의 울부짖음이 몸 속에서 느껴 지고 있었다. " 누구지? 누가 이렇게 강대한 오라의 기운을‥? " 그 오라의 기운은 마치 자신들의 오라마저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거대 한 오라의 흐름에 떠밀리는 그 느낌은, 그녀들을 아찔함과 동시에 몽롱함 속 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그때, 그런 둘을 향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영이었다. " 어라? 두 사람 뭐하고 있는 거에요? 점심 안 먹을 거에요? " 지금은 학교의 점심 시간. 비록 가인이 이 자리에 없었지만,그들은 여느 때 와 같은 멤버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재영과 테레이아는 갑자기 마리와 유리가 식사를 하지 않고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중얼거리자 의아한 눈으로 그 녀들을 바라보았다. 테레이아는 걱정스런 얼굴로 마리에게 물었다. " 괜찮아요? 식은 땀이 흐르는데‥. " " 응? 아아… 아무 것도 아니야…. " 마리는 대충 얼버무리며 식사에 손을 가져갔지만, 그 느낌은 계속되고 있었 다. 몸 속에서 끓어오르는 오라를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안간 힘을 쓰고 있 었다. 잘못했다간 재영과 테레이아가 보는 앞에서 오라를 뿜어낼 것만 같았 다. 왜 이러는 거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옆의 유리를 바라보 니 자신과 같은 반응이 그녀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 우아아아아아아앗--------!!! 그때, 유리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남자의 외침. 그것은 그녀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불렀다. " …오빠‥? "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던 테레이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용장호 측과의 연락이 두절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전파 방해가 이루어지 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채영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피스 메이커의 본부실에 울려퍼졌다. 닥터 는 스크린에 떠오르는 영상들을 보며 인상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옆 에 서있는 피스 그린 정진우에게 물었다. " 진우 씨? 그 느낌은 계속되고 있습니까? " " …예.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거대한 오라의 기운에 계속 저의 오라가 공 명하고 있습니다. " 진우는 식은 땀을 흘리며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평상시의 여유를 지금 의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만큼,느껴지는 오라의 흐름은 진우를 전 신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닥터는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그곳에서는 위성에서 보내오는 용장호의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사물을 분간할 정도도 아닌,단지 지형만을 알아볼 비율의 영상이었지만 그 영상의 중앙에서 솟아오 르는 푸른 오라의 기운 만은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닥터는 탄식하며 입 을 열었다. " 저건… 가인 군이군요. " " 어째서 그 녀석이… 아니, 도대체 중국 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 는 겁니까?! " "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여기서는 피스 블루가 보내 오는 영상과 위성에서 보내오는 영상에 의지하는 수 밖에 없겠군요. …그 보다‥ 시더 양? " 닥터는 기술부 치프, 시더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컴 퓨터의 모니터에 모든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시더는 정신 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58,59… 맙소사. 60노트(Note:오라의 단위)가 넘어가고 있어! 어디까지 올라갈 셈인 거야?!! " " 유,육십 노트?!! " 순간, 작전실 안의 모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진우는 믿을 수 없다 는 표정으로 시더에게 물었다. " 육십 노트라고? " " 아니… 60N을 넘어서서 계속 상승 중이에요! 인간의 몸에서 이 정도의 오 라가 발산될 수 있다니…!! " 그녀의 말대로 모니터의 오라 수치는 70N을 향해 다다르고 있었다. 진우는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 도대체 가인이 녀석! 어떻게 된 거야, 이건?!! 그 녀석, 처음 오라 측정 에서야 50N을 받았었다지만 한동안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았는데! 그 녀석, 최고 수치래봐야 30N 정도이지 않았나요, 닥터?! " 진우의 말에 닥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솔직히 가인 군의 오라 수치는 30N을 못 넘기고 있었죠. 처음 50N의 오라 를 발산했다는 게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말이죠. " " 그런데 어째서!!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 그때,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시더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 …가이아 애드번트 이펙트(Gaia Advent Effect)…. " " 뭐…? " 그런 시더의 중얼거림에 진우는 인상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하지만 시더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채, 12년 전에 있었던 기억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12년 전… 12년 전이라고…? ' 하지만… 내가 12년 전에 있었던 일 같은 것을 기억할 수 있을리가… ' 하지만 그런 의문은 밀려드는 정보의 바다에 순식간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 가이아 애드번트 이펙트…. " 수정은 진 사령관의 말을 되뇌이며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진 사령관은 목에 달려 있던 수소 폭탄을 제거한 모습이었는데, 그 폭탄은 수정에 의해 뇌관까 지 깨끗하게 분해되어 있었다. 그녀의 말에 진 사령관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 그래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지. " 바로 이 용맥(龍脈)의 정기가 모인 이 곳으로…. " 용맥의 흐름이 모인 곳은 대대로 번화가를 이루며 한 나라의 수도를 이루 게 된다. 우리는 그곳을 내룡(來龍)이라고 부르며 다른 말로는… " " 바로 오라의 성지(聖地), 가이아(Gaia)라고 부르지요. " 뒷 말은 수정이 받았다. 그녀는 무거운 안색으로 말했다. " 사령관 님이 가인 군을 이곳으로 데려올 때 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 은 했었지만… 설마 가인 군이…. " " 그래. 그는 이미 자격을 갖췄다. " 그때, 진 사령관과 수정의 뒤에서 그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누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진 사령관에게 물었다. " 그게 무슨 소린가? 설마하니 지금 자네가 데려온 피스 대원이…. " " 예. 누대인의 생각대로입니다. 가이아는 그를 선택했습니다. " 진 사령관의 말에 누대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 믿을 수가 없네….가이아는 이미 12년 전에 한 사람을 택하지 않았었는가? " " 그 자는 스스로 가이아를 저버렸습니다. 또 다른 선택이 필요했겠지요. " 진 사령관과 수정은 가이아를 저버린 한 남자를 떠올렸다.짙은 흑발에 감홍 빛 눈동자를 가진 오라 능력자.그의 오라 패턴은 칠흙과도 같은 블랙(Black) 이었다. 수정은 그를 떠올리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침울하게 말했다. " 그때의 일은 비극이었어요.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되요. 더 구나 가인 군에게서는 더더욱…. " "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지금은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우선이다. " 진 사령관은 지상에서 활개를 치고 있을 몬스터 '와이번'이 마치 눈 앞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 처럼 천장을 노려 보았다. 그는 검은 선글래스를 번쩍이 며 수정에게 말했다. " 이제부터 우리는 P.E.T 개발 연구실로 향한다. " " 예? 하지만… 그 곳은 왜…? " 수정의 질문에 진 사령관은 그 답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 인민 해방군 놈들… 멋대로 우릴 감금시켜놓았겠다…. 댓가로써,적어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받아가 주는 게 녀석들에 대한 예의겠지. " 그 말에 수정은 쓴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 …진 사령관 님. 감금당하셨던 것… 계속 마음에 두고 있으셨나 보네‥. ' - 크와아아아아악!! 와이번이 포효를 내지르며 그 거대한 몸으로 지상에 내려섰다. 직경 25m의 덩치는 그 무게만 해도 150톤을 우습게 넘겼기에, 와이번이 착지하자 연구소 의 일대가 진동을 하며 흔들렸다. 하지만 그 진동 속에서도 가인은 당황하지 않으며 와이번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오라의 기류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그리고 그것은 가인에게 알 수 없는 평온함과 자 신감을 주었다. " 하아아아아아앗!! " 헤븐 스매쉬의 코어로 푸른 오라의 회오리가 휘몰아 쳤다.확실히 그것은 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반응이었다. 가인은 헤븐 스매쉬의 주 먹을 움켜 쥐었다. 좋아! 간다! 맘껏 날려주겠어! - 쿠오오오오오오!!! 와이번이 괴성을 지르며 가인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가인은 이 미 A.I 부츠를 이용하여 5m의 상공으로 도약한 뒤였다. '딱!' 괴물은 목표를 잃어버린 채 헛되이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내야만 했다. 그리고 뒤이어 가인 의 헤븐 스매쉬가 와이번에게로 휘둘러졌다. " 천공권-------!!! " - 투카카카카카카!!! 최대 출력의 천공권! 그것은 여지껏 가인이 써오던 그 어떤 천공권 보다도 강렬한 토네이도를 생성시키고 있었다. 직경 2m의 토네이도는 바람을 찢어발 기는 파공음을 내지르며 거칠게 와이번의 안면에 적중했다. - 키에에에에엑!!! " 으앗…!! " 토네이도의 무시무시한 반동에 허공에서 뒤로 튕겨나간 가인. 위력이 강해 진 만큼 그 반동의 여파도 강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그와 중에도 침 착하게 지면을 살피며 지상에 내려섰다.'츠츠츠측!' A.I 부츠가 땅을 긁으며 뒤로 끌렸고, 가인은 애써 중심을 잡으며 넘어지는 것을 모면했다.부츠가 훑 고 지나간 지면은 강한 마찰에 의한 열로 검은 발자국 선을 남겼다. - 콰지지직! 그러나 무사히 착지한 가인과는 달리, 천공권을 정통으로 얻어 맞은 와이번 은 콘크리트 바닥을 크게 박살내며 지상으로 쓰러져야 했다. 그 바람에 근처 에 있던 탱크들과 전차들이,박살난 지면을 따라 뒤집어졌고,더러는 콘크리트 의 파편에 묻히기도 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가인은 중얼거렸다. " …이,이렇게 강했었나? 천공권이? "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장착된 헤븐 스매쉬를 바라보았다. 최대 출력의 천공 권을 발산한 헤븐 스매쉬는, 그 위력의 여파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 뭔가 이상해졌어… 내 몸…. ' 이상했다. 저런 거대한 괴물이 앞에 있는데도 전혀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것도 이상했지만, 아까부터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오라가 생성되는 것 또한 충분히 이상했다. 컨디션이 좋다면 좋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자꾸 몰려드는 것만 같아 가인은 마음이 불안했던 것이다. 그 기운은 분명 친근한 느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지만,거기에는 짙은 이방인의 느낌도 섞여 있었다. " 뭐… 상관 없을려나…. " 가인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지금 이 상황에서는 힘이 절실히 필요했고,힘 이 강해져서는 안될 이유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네 정체가 뭔지는 모 르겠지만, 지금은 제발 나를 도와줘…! 가인은 자신에게 밀려드는 기운에게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 좋아! 다시 간다!! " - 쿠와아아아악!!! 천공권의 충격에서 벗어나서 흉폭하게 가인에게 달려드는 와이번. 와이번은 그 큰 몸집에 걸맞지 않게 재빨리 뒤로 몸을 돌리며 거대한 꼬리를 가인에게 휘둘러 왔다. 가인은 인상을 굳혔다. " 그 따위 거에 맞을까 보냐!! " 산(散)! - 투학! 가인의 천공권 산에 거짓말 처럼 와이번의 꼬리 공격이 튕겨 나갔다. 놀랄 정도로 강해진 위력! 가인은 강해진 자신의 천공권 산에 감탄하면서도 와이 번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이번 게 진짜다! " 차아아아앗!! " - 투카카카카칵!!! 전신의 힘을 한데 부은 가인의 천공권이 다시 한번 와이번에게 작열했다.가 인은 그 탄력으로 뒤로 밀리는 것을 견뎌내며 힘껏 헤븐 스매쉬를 내뻗었다. 푸른 오라의 토네이도를 내뿜는 헤븐 스매쉬의 코어가 다시 한번 번쩍였다. " 한번 더!! " - 투학-----!!! 천공권 제 이격(二擊)! 거대한 천공권의 토네이도 안에서 두번째의 천공권 이 터져올랐다. 천공권이 이중으로 겹쳐져 나간 것이다. 그것도 두번째의 토 네이도는 바깥의 토네이도와는 달리 역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었는데, 그것으 로 인해 기압의 뒤틀림이 발생하였다. - 트트트트트트트트‥!!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와이번. 와이번은 기압의 뒤틀림에 몸이 찢겨져 나가지 않기 위해 안간 힘으로 버텼다.한 순간이라도 버티고 있는 힘 을 놓아버린다면 살이 찢어지고 뼈가 꺽일 정도로 이 토네이도는 위력적이었 던 것이다.와이번의 전신에서 뼈가 비명을 질렀다. - 우드드드드득‥!!! 천공권의 토네이도가 걷혀나가고, 와이번은 간신히 기압의 뒤틀림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괴물은 기진맥진하였는지 힘 없이 몸을 쓰러 뜨렸다. '쿵!!' 지축을 울리며 쓰러지는 와이번. 가인은 그런 괴물의 모습에 놀란 목소리로 환성을 올렸다. " 이,이거 굉장하잖아‥! 천공권의 이중 발사에 이은 역회전이라니! " 전에는 천공권을 한 번만 시전해도 다음 천공권을 준비하기까지 어느 정도 의 딜레이가 필요했다. 아무리 오라의 증폭을 돕는 헤븐 스매쉬가 있었다지 만 오라는 한정되어 있었기에 마음대로 천공권을 남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라의 힘이 강해지자 평상시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 던 일들이 가능해지고 있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다고! ' 하지만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힘이 생긴 거지‥? ' 순간,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인의 마음 속에 스며 들었다. 이유 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힘이 강해질리는 없는 것이었다. 왜 강해진 걸까? 이 엄청난 오라의 기류들은 어디에서 오고 있는 거지? 그리고 왜 나에게로 오고 있는 거야? - 크우우우우우‥ 그때, 쓰러졌던 와이번이 정신을 차리며 비틀 비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인은 흠칫 놀라며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 자식?! 그런 굉장한 걸 얻어맞고도 다시 일어서고 있어?! ' 젠장! 그리고 보니 저 괴물… 상처 하나도 없이 멀쩡하잖아?! ' 그랬다.와이번이 가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티 끌만한 상처 하나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괴물은 지친듯 허헉 거리면서도 용케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저렇게 숨을 몰아쉬는 것으로 보아 타격을 받기 는 받은 것 같은데‥? " 쳇‥! 좋아!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끝내주마!! " 가인은 다시 천공권을 날리기 위해 와이번에게 헤븐 스매쉬를 뻗었다. 하지 만 그때, 거대한 날개의 펄럭임이 느껴지며 거센 바람이 가인에게 불어왔다. 뭐,뭐야?! 이거?! - 푸드드드득‥! 천천히 날개짓을 하며 공중으로 떠오르는 와이번.그 모습에 가인은 이를 갈 았다. 저 자식‥! 도망칠 셈인가?! 무엇보다 하늘로 도망치면 가인으로서는 녀석을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와이번이 날아오르도록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누구 맘대로 도망칠 생각이야?!!! " 가인은 최대한 있는 힘껏 오라를 끌어모으며 헤븐 스매쉬를 들어 올렸다.여 기서는 이거다! 헤븐 스매쉬로 부터 오라의 회오리가 넓게 퍼져올랐다. " 천공권 선풍(旋風)!! " - 촤아아아아아아!! 수직 방향의 규모보다 수평방향의 확대가 큰,선풍계(旋風系)의 천공권이 헤 븐 스매쉬로 부터 시전되었다. 넓은 지름으로 전개된 회오리 바람은 하늘로 떠오르는 와이번의 전신을 감싸며 휘몰아쳤다. - 크와아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허우적대기 시작하는 와이번.천공권의 영향으로 와이번의 날 개 표면을 흐르는 기류의 흐름이 날개 윗면으로부터 박리되어, 그 결과 양력 (揚力)이 감소되고 항력(抗力)이 증가하여 비행을 유지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바로 실속(失速:stall) 현상! - 쿠우우우웅!!! 헛된 날개짓을 하다가 다시 지면을 부수며 떨어지는 와이번. 이번의 진동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해서 700m가량 떨어져 있는 연구소까지 들썩 거렸다.가인은 그만 그 지진파에 의해 넘어져 버렸다. - 쿠르르르…!! " 하…! " 폐허 속에 묻힌 와이번을 내려다 보며 몸을 일으킨 가인은 너털 웃음을 터 뜨렸다.어떠냐? 자식아! 멋 모르고 날뛸 때가 좋았지?! 가인은 처음으로 몬 스터에게서 우위를 보이는 자신의 힘에 희열을 느꼈다. 그것도 B급이나 되는 상위의 몬스터에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지금의 나는…! - 치이이이이익…. 그때 불길한 소리를 울리며 가인의 헤븐 스매쉬에서 열이 피어올랐다. 가인 은 화들짝 놀라 헤븐 스매쉬를 바라보았다. " 뭐,뭐야?! 왜 이러는 거지?! " 헤븐 스매쉬는 고온을 내며 달아올라 있었다. 금새라도 백열할 것 처럼 빛 을 흘리던 헤븐 스매쉬는 잠시 후, 모든 빛을 감추고 원래의 흑색으로 돌아 가버렸다. 그리고 헤븐 스매쉬를 낀 가인의 오른손으로는 더 이상 어떠한 오 라도 모이지를 않았다.아마도 과도한 맥스 파워의 천공권을 남발함으로써 헤 븐 스매쉬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 …이거… 부서진 건가…? " 맙소사…! 말도 안돼! 그럼 이제부터 뭘로 싸우라고?!! 가인은 울쌍이 된채 헤븐 스매쉬로 오라를 모으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이 몸 속에 주체 할 수 없이 흘러 넘치는 오라 중 티끌 만큼의 오라도 헤븐 스매쉬로는 모이지를 않고 있었다. 그리고 때를 맞춰 콘크리트 잔해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 는 와이번. - 으르르르르르르… " 하,하하하… " 가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무시무시한 와이번의 눈빛을 마주 대했다.거 대한 와이번의 그림자가 가인의 창백한 얼굴을 뒤덮기 시작한다. ' …어떡하지?!!! ' 알리가 있겠냐… 그런 거…. " 황하 1호, 발사 준비 완료 되었습니다. " 용장호에서 벗어난 북경의 군사 지역. 그곳에서는 한창 바쁜 작업이 행해지 고 있었다. 헬리콥터를 타고 용장호를 빠져나온 리 장군은 지금 이곳에서 오 퍼레이터들의 보고를 들으며 다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 목표는 북경시의 용장호 남부의 산간부로 정한다." " 예. 목표 입력 되었습니다.정부, 인민 해방군, 현지 자치단체에 연락. 용 장호 부근에 있을 주민들의 피난을 방송하겠습니다. " " …아니. 그럴 필요 없다. " 싸늘한 리 장군의 목소리에 오퍼레이터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뒤돌아보 았다. " 예? 장군 님… 그게 무슨… " " 용장호에 남아 있는 병력이란 없다. 이미 몬스터에 의해 그곳은 궤멸된지 오래란 말이다. " " 하,하지만…! " - 쾅! 오퍼레이터는 리 장군이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입을 닫았다.리 장군은 노 한 얼굴로 그에게 소리쳤다. " 지금 이 순간에도 몬스터는 북경 시로 접근해 오고 있다. 서둘러 녀석을 처지하지 않았다간 이곳이 불바다가 될 거다. 그걸 바라고 있는 거냐? 네 놈이 그 사태를 책임질 수 있냔 말이다! " " .........명령… 이행하겠습니다. " 오퍼레이터는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뒤돌아 작업에 임했고, 그런 병사의 모 습에 리 장군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그는 용장호에 남아 있을 유화들과 가 인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 …잘된 일이지. 어차피 '그 분'의 명 대로 제거해야 할 녀석들이었으니까. 뭐, 남아있는 병사들이 마음에는 걸리지만…말을 듣지 않는 개들은 그 효 용 가치가 없다. 같이 저세상으로 보내주마. ' 리 장군은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해안선에 있을 순양함에 명령만 내리면 순양 미사일 '황하 1호'가 발사되어 용장호를 흔적도 없이 소멸 시켜 버릴 것이다. 그렇게 연구 시설과 와이번에 관한 자료들을 없애버리기만 한 다면 '그 분'도 이번 실패에 대해서 용서해 주실지 모른다. " 장군 님, 비상 회선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 " …음? " 리 장군은 오퍼레이터의 보고에 인상을 찡그렸다. 비상 회선으로 나에게 연 락이 올 사람이라면… 분명… ' 그 분이시다…! ' 리 장군은 서둘러 오퍼레이터에게서 무전기를 건내받았다. 무전기에서는 그 분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리 장군은 황송스럽다는 표정으로 비굴할 정 도로 공손하게 답했다. " 예…. 그렇습니다. 계획대로 일은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걱정마십시요. " << ............ >> 하지만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그 분의 다음 말에 리 장군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유지해오던 공손한 표정을 잃어버리며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 다. " 하,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모든 것이 원만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습 니까?! 굳이 여기서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 << ............ >> " 죄,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명령대로 이행하겠습니다…. " 리 장군은 그 말을 끝으로 무전을 끝냈다. 그의 얼굴은 마치 몇 년은 늙어 버린 것 처럼 쇠약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리 장군은 한 숨을 쉬며 오퍼레이 터에게 명했다. " 발사… 중지. 지금까지의 명령을 백지화시켜라…. " " 예…? " 오퍼레이터는 리 장군의 뜻 밖의 명령에 다시 한번 반문하며 그를 돌아보았 다. 하지만 '쾅!'하며 거칠게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재빨리 시선을 앞으로 돌린다. 리 장군은 침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도대체… 왜…! " 그 분은 무슨 생각이신 걸까…?!! 리 장군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감싸며 고 민에 빠졌다. 도저히 그 분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다 완료된 명 령을 취소시키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때, 그런 리 장군의 뒤편에 그려져 있던 그림자 하나가 살며시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는 마치 리 장군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처럼 작게 꿈틀되더니 곧이어 작은 박쥐 의 형상으로 변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 처럼…. - 인간이란… 참으로 단순한 동물이지…. 그것은, 그 존재가 사라지기 전에 리 장군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듯 한 말 이었다. - 콰아아아앙…! " 대,대단해…. " 거대한 25m의 와이번은 한 인간 소년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인간 소년,가인에게서 터져나오는 푸른 토네이도의 공격은 와이번을 쉴 틈도 없이 몰아 붙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멀리 떨어진 연구소에서 지켜보던 유화 와 인민 해방군들은 탄성을 올리며 소리쳤다. " 저 꼬마 자식! 대단하잖아?! 정말로 저 괴물을 혼자서 상대하고 있어! " " 저게 피스 대원의 힘이라는 건가?! 굉장하다! " 군인들은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힘, 오라의 존재를 처음으로 목 격하게 되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몬스터의 앞에서는 그 모든 병기 들이 무력했었다. 실제로 앞전까지만 해도 저 괴물에게 FMBT 140mm고체 추진 제 포나, K-10 자주포…그 어떠한 것도 통용되지 않질 않았는가. 하지만 지 금, 겨우 저 17세의 인간 소년에게 괴물은 너무도 무력하게 공격당하고 있었 다. 그것은 군인들의 마음에 비현실적인 신비함과 황홀한 경외심을 불러 일 으켰다. - 쿠우우우웅!!! " 어엇…! " 가인을 상대하다가 안되겠던지, 와이번은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했지만 가 인의 토네이도에 허우적거리며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바람에 지 진파가 생겨 700m 가까이 떨어진 이 연구소까지 그 진동으로 흔들려 왔다.유 화와 군인들은 간신히 주위의 물건들을 붙잡고 진동을 버텨냈다. " 어,엄청나군…. 이미 인간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야,이건…! " " 어쨋든 이대로만 간다면 저 괴물을 무찌르는 것도 순식간이겠다! " " 힘내라,꼬마야!! " 군인들은 멀리서 와이번과 싸우는 가인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적어도 지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저 소년을 응원하는 일 밖에는 없었으니까. 이 응 원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늦췄다간 어린 아이에게 모든 일을 맡겨버린 자신 들에게 혐오감이 들 것만 같았다. 그때, 쌍안경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유화가 근심이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뭔가… 이상해…. " " 예…? 소령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녀의 중얼거림에 의아해하며 묻는 군인들. 유화는 쌍안경에서 눈을 떼며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 언뜻 보기에는 가인이 우세한 것 같지만… 저 와이번…,아무런 상처도 없 어…. " " 예엣?!! " 놀란 얼굴로 군인들은 소리쳤다.아니! 저렇게까지 당하고 있는데도 아무 소 용이 없단 말이야?! 군인들은 믿기지 않는다는듯 유화에게서 쌍안경을 건내 받아 괴물을 살펴보았다. 과연 유화의 말대로 와이번은 지친 기색은 역력했 지만 몸의 어디에도 상처 자국 같은 것은 보이질 않았다.군인들은 안색이 어 두워지며 유화에게 물었다. " 어째서…! 그럼 저 꼬마가 한 공격들이 모두 헛수고였단 말입니까…? " " 아니, 분명 와이번도 데미지를 입었을 거야…. 하지만… " 유화는 지금부터 자신이 할 설명들을 군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 해 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말을 잇기만을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에 유화는 짧 게 한숨을 내쉰 후 설명을 시작했다. " P.E.T 용액으로 복구된 와이번의 몸체는 아마도 FMPT를 간단히 파괴하는 것으로 보아 ERA나 균질압연장갑의 강도와 경도 쯤은 우습게 상회하는 경 질화가 진행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굉장히 단단하다 는 거지. " " 단단하다구요? " " 그래.저 와이번을 감싼 비늘같은 게 보이지? 저게 단단한 갑옷 역할을 하 고 있는 걸 거야. 저 비늘로 놈이 감싸여 있는 한, 가인의 공격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그 위력은 경감될 수 밖에 없어. " 나직이 고개를 떨구는 군인들. 아마도 희망이 보였다 싶었는데,유화가 초를 치는 소리를 하자 다들 기운들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유화는 걱정스러운 표 정으로 가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다시 괴물과의 접전이 시작되었는지,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와이번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 힘내, 가인…! ' 유화는 애타는 마음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뭔가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 다. 자신들이 저 와이번의 앞에서 뭐를 할 수 있겠는냐만은, 아주 작은 사소 한 힘이나마 그에게 보태고 싶었다. 그래. 아주 작은 힘이나마…. " …저 녀석‥ 왜 저러는 거지? " 그때, 쌍안경으로 전장을 살펴보던 한 군인이 중얼거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 에게로 집중되었다. 유화가 그 군인을 다그치듯 물었다. "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 " 아,아니… 그게… 저 꼬마 녀석,아까까지만 해도 쓰던 그 회오리 같은 공 격을 하지는 않고… 대책 없이 와이번의 공격을 피하고만 있는데요…? " " 이리 줘봐! " 재빨리 군인에게서 쌍안경을 뺏어 전장을 살펴보는 유화. 과연 군인의 말대 로 가인은 토네이도 공격을 하지 않은채 연신 와이번의 공격에 위기로 몰리 고 있었다.왜 저러는 거지? 왜 공격을 하지 않는 거야, 가인?! 아까처럼 그 회오리 공격으로 상대를 견제하란 말이야! 어서!! " ......혹시… 더 이상 그 회오리 공격을 못하는 건…? " 유화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만약 그렇다면 상황은 더 악화된 것 임이 틀림 없었다. 유화는 손톱을 깨물며 창백해진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어떡하 지? 어떻게 하면…! 아아… 제발 아무 생각이라도 해봐,주유화! 어서! " …어머, 가인 군. 역시나 예상대로네. " 그때, 유화에게 들려온 한 여성의 목소리. 그것은 바로 진 사령관을 구하러 갔던 수정의 목소리였다. 유화와 군인들은 이 기척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진 사령관과 민수 정, 그리고 누대인의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유화는 무뚝뚝한 진 사령관의 얼 굴을 마주하자 당황하며 서둘러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 모,모두 차렷…! 진 사령관 님에게 경례!! " - 척! 인민 해방군들이 자신에게 경례하는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 는 진 사령관.그런 그의 모습에 유화의 등 뒤로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그 를 불법 체포하여 감금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인민 해방군,바로 자신들이지 않 은가? 그런데 이제와서 뻔뻔스럽게 경례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경멸 이라도 받지 않으면 감지덕지겠지….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진 사령관은 별 다 른 반응 없이 유화에게 물었다. "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 " 예,옛! 현재 피스 대원 유가인이 와이번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 음에 보였던 우세와는 달리, 지금은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유화의 긴장한 대답에 진 사령관은 쌍안경을 건내받아 전장을 살폈다. 그는 곧 무언가를 발견한듯 예의 중얼거리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헤븐 스매쉬가… 고장난 건가…? " " 예? " 그 말에 그를 바라보는 좌중. 진 사령관은 천천히 쌍안경을 내리며 수정에 게 말했다. " 가이아의 힘이 오히려 그의 발을 잡고 있군.증폭된 오라의 힘을 헤븐 스 매쉬가 견뎌내질 못한 것 같다. " " …하긴. 헤븐 스매쉬는 가인 군의 평상시 오라 수치(30N)에 맞춰져 제작 된 것이니까요. …견뎌낼 리가 만무하지. " 수정은 걱정스런 얼굴로 혀를 찼다. 누대인은 진 사령관에게서 쌍안경을 받 아 전장을 살펴보다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허어, 저렇게 어린 소년이었단 말인가… 선택을 받은 이가…. 놀랍군. 정 말 놀라워. " " 그렇습니까. " 별 감흥 없는 태도로 누대인의 말을 받으며 진 사령관은 유화에게 말했다. " 소령, 자네의 전공이 분명… 생체 공학이라고 했던가…? " " 예. 그렇습니다만…? " 유화는 의아해진 표정으로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그런 유화에게로 수정이 품에 가지고 있던 물건을 그녀에게 건내주었다. 뭐,뭐지? 이건? 그리고 물건 을 바라보던 유화의 두 눈이 커졌다. " 아…! 어,어째서 이것을 당신들이…! " " 알아보겠나? " " 물론입니다! 제 손으로 만든 것을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 " 그럼 얘기가 빠르겠군. " 진 사령관은 선글래스를 빛내며 유화와 군인들에게 말했다. " 지금부터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PM조약에 따라 인민 해방군의 임시 지휘관의 자격으로서 명령하겠다. …나를 따르겠는가? " 그의 말에 유화와 군인들은 서로를 잠시 돌아보다가,곧 고개를 끄덕이며 단 호하게 소리쳤다. " 예! " " 으아아아앗!! " - 콰지지지직!! A.I 부츠로 점프한 가인의 밑으로 거대한 와이번의 머리가 난폭하게 날아들 었다. 말이 머리로 공격한다는 것이었지,그 위력은 왠만한 미사일 못지 않은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번에 지면과 더불어 쓰러진 탱크와 장갑차가 와 이번의 머리에 의해 짓뭉개 졌다 - 크와아아아악!!! 와이번의 분노에 찬 포효 소리가 쩌렁 쩌렁하게 용장호에 울려퍼졌다. 녀석 은 아까 전,가인에게 당한 수모를 갚아줄려는듯 앞뒤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오 고 있었다. 그래. 자신보다 몇 배나 작은 인간에게 밀렸으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 ' 그,그렇게 납득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 가인은 허공에서 회전을 하며 와이번의 뒤로 내려섰다. 거친 숨이 가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새어나왔다. 제,젠장‥! 아무리 천공권을 못 쓰게 되었다 지만 이건 너무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는 거잖아?! 가인은 새삼 자신이 천공 권에게 그동안 얼마나 의존해 왔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 하지만… 저 자식… 통하질 않는다고…. ' 자신의 천공권은 평상시보다 몇 배나 그 위력이 상승되어 있었다.그러나 그 오라의 토네이도를 수차례 얻어 맞았음에도 불구하고,와이번은 상처 하나 없 이 멀쩡하게 자신을 공격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가인의 천공권에 문제가 있 다기 보다는 아무래도 괴물의 방어력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 엇…? ' 그때, 가인의 눈으로 와이번의 피부에서 번짝이고 있는 뭔가가 눈에 들어왔 다. 그 번쩍임은 아주 작았지만,와이번의 몸 이곳저곳에서 빛을 반사하고 있 었다. 뭐지? 저건? 저건 마치… 비늘‥ 같은데…? ' 비늘…? ' 그래. 그건가? 저 비늘로 몸이 덮혀 있어서 천공권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었던 걸까? - 투학!! 위에서 부터 내리쳐 오는 와이번의 꼬리를 가인은 잽싸게 옆으로 몸을 굴려 피해냈다. '쿵!!' 꼬리가 거세게 지축을 울렸고, 가인은 연신 데굴데굴 굴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와 중에도 가인은 와이번의 비늘을 생각하느라 정 신이 없었다. ' 내 공격들 중 천공권 만큼 강한 위력을 지닌 것은 없어….그런데 그런 천 공권을 막아내는 저 녀석의 피부를 뭔 수로 공격 한다지? 이제는 그나마 천공권 조차 사용할 수 없게 되었는데…? ' 정말이지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어차피 공격해도 피해를 주지 못한다면 와 이번의 비늘이 없는 쪽을 공격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와이번은 전신 이 비늘로 덮혀 있는 것 같았다. 젠장, 때릴 구석이 없잖아…! 가인은 투덜 거리며 와이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순간, 와이번을 노려보던 가인의 동공 이 크게 확대 되었다. ' 아니…! 있다! 공격할 틈이…!! ' 가인의 시선은 와이번의 얼굴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이번의 얼굴 중 에서도 바로 노란빛으로 번뜩이는 녀석의 거대한 눈동자! 그래! 바로 저기다!! ' 맞아! 저기는 비늘로 덮혀있지 않아! ' 가인은 이 승부에 다시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을 느끼며 양 손을 자신의 양 어깨로 교차시켰다. 공격할 장소가 정해졌으니, 이제는 그 곳을 공격하는 일 만 남은 것이다! - 챙! 챙! 가인의 어깨 장갑에서 양 손으로 단검 형태의 오라 소드 두 개가 튀어 나왔 다. 가인은 쓸모 없어진 헤븐 스매쉬를 벗어버리고서 양 손으로 오라 소드들 을 쥐어 이도류(二刀流)의 자세를 취했다. 평상시에는 오른손에 헤븐 스매쉬 를 끼고 있었기에 나머지 오라 소드를 뽑지 않았지만, 이미 그것을 벗어버린 가인에게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사용해 줄테다! " 좋아! 각오해라,자식아!! " - 크오오오오오!!! 와이번의 포효 소리를 들으며 가인은 괴물에게 달리기 시작했다. 와이번은 꼬리로 콘크리트를 두들기며 가인을 공격해왔지만, 이 인간은 정말이지 얄미 울 정도로 자신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제대로 한대만 맞아도 박살낼 수 있을 텐데, 상대는 분이 터지게도 맞아주지를 않는 것이다. - 휘리리리릭!! 휘둘러진 꼬리가 가인과 함께 쓰러진 탱크들과 콘크리트 더미를 휩쓸었다. 드디어 맞은 걸까?! 하지만 가인은 꼬리에 맞고 박살나기는 커녕 오히려, 와 이번의 꼬리에 올라타서 괴물의 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인은 시험 삼 아 오라 소드를 와이번의 등 줄기에 휘둘러 보았다. '챙!' 거친 쇳소리와 함 께 오라 소드는 아무런 상처도 와이번에게 주지 못하며 가볍게 튕겨 올랐다. ' 역시 소용없잖아…. ' - 크와아아아아악!!! 자신의 등 뒤에 엉겨붙은 가인을 떼어 놓기 위해 와이번이 거칠게 몸을 뒤 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와이번을 놓치고 떨어질 뻔한 가인. 그는 와이번 의 등을 박차고 A.I 부츠의 힘으로 날아 올랐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와이번 의 머리 위로 올라섰다. - 탁! 정확히 와이번의 미간 사이로 착지하는 가인. 와이번의 눈동자가 가인에게 로 향했고, 밟고 있는 괴물의 미간이 꿈틀 거리며 모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인상 긁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고! " 이거나 먹어라------!!! " - 푸슉! 가인은 두 개의 오라 소드를 역수로 쥐고 그대로 와이번의 오른쪽 눈을 향 해 내찔렀다. 비늘로 둘러싸인 피부와는 달리, 괴물의 안구는 너무도 쉽게 오라 소드에 찔려졌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대량의 피가 와이번의 눈동 자에서 터져나왔다. - 크에에에에엑!! " 우,우아아악! " 가인은 와이번의 녹색 피를 한 바가지나 뒤집어 쓰고서는, 괴물에게서 떨어 지지 않기 위해 와이번의 안구에 꽂혀진 오라 소드를 힘있게 잡고 버텼다.격 심한 통증에 와이번이 발광하듯 머리를 흔들었기에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허 공에서 몸을 흔들어야 했다.무서운 기세로 휘둘려지는 것이 금새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귓 가로 거센 바람 소리가 '휘이이이잉'하며 울려퍼진다. ' 여,여기서 오라 소드를 통해 천공권만 날린다면…!! ' 예전, 블루 섬머 비치에서 다곤이라는 머맨을 상대했을 때. 가인은 오라 소 드의 검날을 이용해 소형의 토네이도를 생성시켰던 것을 거억해냈다. 가인의 손을 통해 오라가 밀려들자, 두 개의 오라 소드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래. 이대로 천공권을 사용해 녀석의 머리를 헤집어 버리기만 한다면 그걸로 상황은 끝이다…! - 부우우우우웅!!! 하지만 가인은 천공권을 날릴 수 없었다.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와 이번의 머리 때문에, 괴물의 안구에 꽂혀 있던 오라 소드가 뽑혀 나왔던 것 이다. 가인은 천공권을 못 날렸다는 것 보다는 어떻게 무사히 착지할 것인지 를 더 신경 써야만 했다. " 쳇…! " 가인은 인상을 구기며 땅으로 내려섰다. 제길…!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텼더 라면…! 그랬다면 녀석의 머리에 한 방 먹여 줄 수 있었을 텐데…! 끝내 버 릴 수 있었는데…! - 휘이이이잉!! " …엇? " 거대한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리고 가인은 볼 수 있었 다.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와이번의 꼬리를. 아… 피하지 못했‥다…. - 퍼어어억------!!! 뼛 속이 울리는 충격. 가인은 실 끊어진 연 처럼 허공으로 휘익 날아올랐다 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강력한 일격이었는지 가인은 거의 10여 미 터를 나가 떨어져야 했다. 코와 입으로 피가 터져 나와 마스크 안을 채우는 느낌이 불쾌했다. - 쿠당탕탕!! 부서진 콘크리트 파편 위로 떨어진 가인. 떨어질 때 잘못 떨어졌는지 오른 쪽 다리가 이상하게 비틀려 있었다. 거기다가 와이번의 꼬리를 막으려고 엉 겹결에 방어했던 오른 손은 뼈가 박살난 건지 힘 없이 덜렁 거리고 있었다. 급하지만 분명히 오라의 보호막을 쳤는데 이런 걸레 모양이 된 것이다.하긴, 70kg 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이 150톤 괴수의 꼬리 공격을 당했는데 이 정도 에서 그친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 우웩! 우웨에엑! " 가인은 급하게 A.I 헬맷을 해제시키며 피가 섞인 위액을 토해냈다.아무래도 뱃 속이 뒤집힌 게 내장 기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가인은 눈물,콧 물 범벅이 된채 떨리는 왼손으로 포션을 꺼내 주사했다. 거짓말 처럼 고통이 사라지며 상처가 수복되고 있었다. ' 여,역시… 아무리 오라가 강해져도 한 방만 맞으면 이 꼴이구나…. ' 가인은 새삼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몬스터가 B급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몸 을 일으켰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쓰러져 졸도라도 하고 싶었지만 저편에 서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와이번의 발 소리를 무시하고 잘 정도로 가인의 신경은 무심하지 않았다. - 쿵! 쿵! " 으으…. ' 이제는 어떡할 거냐,유가인? 가인은 자신의 수중을 바라보았다.오른손에 있 던 오라 소드는 앞전의 충격 때에 놓쳐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마 왼 손의 오라 소드는 그 충격 속에서도 용케 놓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 거 하나 가지고 뭘 하라는 거지…? 가인은 오른손과 비틀린 발의 신경이 연 결되는 짜릿함을 느끼며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 라의 기운은 변함 없이 강맹했지만, 그것 만으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 끼이이이이익…! 그때, 가인의 뒤로 들려온 자동차 소리. 바로 아까 전에 피신시켰던 중국군 들의 지프였다. 가인은 당황한 눈동자로 지프에서 내려 자신에게 달려 오는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 …아저씨들, 왜 여길…! 어서 피하세요! 저기 다가오는 괴물이 보이지도 않아요?! " " 시끄러,꼬마야! 누군 좋아서 왔는 줄 아냐?! 명령이란 말이야! " " 잠자코 지프에 올라타! " 군인들은 가인을 부축해 지프에 올라탔다.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오던 와이 번은 상대가 도망칠려는 기색을 보이자 거칠게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 다. 군인들은 그런 괴수의 기세에 안색이 창백해져 재빨리 지프를 몰아 연구 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 자,잠깐만요! 이 쪽으로 가면 연구소 잖아요?! 괴물을 연구소에 끌어들일 셈이에요?! " " 아,거 참! 이건 다 꼬마, 네 녀석의 상관이 내린 명령이라고! 불만 있으 면 사령관 님에게 얘기해! " " 그런…!! " 가인은 벙찐 표정으로 연구소를 돌아보았다. 아마도,진 사령관은 수정 씨에 의해 무사히 구출된 모양이었다. 가인은 선글래스를 낀채 바늘로 찔러도 되 려 바늘이 구부러질 것 같은 무표정한 진 사령관의 얼굴을 떠올렸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 사람은…?!! ' 가인은 뒤에서 쿵 쿵 거리며 달려오는 와이번의 기세를 느끼며 속으로 비명 을 질렀다. 저격 소총은 일반 소총에 비하여 긴 총신과 짧은 탄창을 가지고 있으며 견 착 사격이 용이 하도록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치크패드를 대부분 기본 장착 하고 있다. 수정은 중국군들에게서 건내받은 G3계통의 반자동식 저격 소총 ' PSG-1'을 이리 저리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 이거… 꽤나 고가일 텐데… 인민 해방군은 군자금이 풍부한가 보군요? " " 그,글쎄요… 하지만 그것보다 어째서‥ 그런 옷차림이신 건지…. " 유화는 수정의 말에 답하면서도 수정의 옷차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정 은 아까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차이나 드레스는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대신 가스 마스크와 방탄 베스트에 검은색 화생방을 한 BCME변형 방 호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격수로 코스츔을 한 것 같았는데,저 옷들 이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건지는 이 자리의 그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 PSG-1이라면… 300m가 사격 유효 거리 겠군요. " 　 수정은 PSG-1을 들어보다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중량이 8.1Kg이나 나가 는 소총이었기에 아무래도 자신의 힘으로는 들고 다니기에는 벅찬 감이 있었 다. PSG-1은 비싼 가격과 이 무거운 무게 때문에 현재는 기동성이 좋은 MSG- 90을 애용하는 편이었지만,정확한 스나이핑을 요구할 때는 PSG-1을 사용하고 있었다. 클러 & 코흐의 HK-91 라이플의 저격용 버젼인 PSG-1은 세계에서 가 장 정확한 반자동 소총으로 일컬어 지는 것이다.가령 예를 들어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표적에 조준을 하고 50발을 사격할 경우 50발이 8cm 직경의 원 에 다 들어간다. 이것은 PSG-1만이 가질수 있는 특징이었고, 수정이 저격을 위해 이 총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 그런데… 준비는 다 끝내신 건가요,소령 님? " " 예, 잠시만요…. " 유화는 수정의 말에 답하며,7.62mm NATO탄의 납합금을 제거하고 있었다. 보 다 더 강한 파괴력과 정확도 그리고 더 긴 사정거리의 확보를 위해 저격용 소총들은 일반적인 보병 개인화기들이 사용하는 5.56mm 탄환이 아닌 7.62mm 탄환(M-60과 같은 구경)을 사용한다. 유화는 그 7.62mm 탄환을 해체하고 한 액체를 유리 막대를 통해 흘려 붓고 있었다.유화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 보 던 진 사령관은 무표정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 그게 P.E.T 세포파괴조직인가? " " …예,그렇습니다. 예전, D-Type을 재생시키기 위해 재생 수치를 비약적으 로 상승시킬 수 있는 P.E.T 용액을 개발하던 도중, 만약을 대비해 개발한 세포 파괴 샘플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험 용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효과를 기대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 " 지금은 그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르는 시험 샘플에 기대를 걸어야만 하는 입장이다. " 유화는 한 숨을 쉬며 탄환의 구멍을 촛농으로 막기 시작했다. 정상적으로는 피갑을 입혀야 겠지만 그럴 시간도 여유도 지금의 자신들에게는 없었다. 진 사령관들이 구해온 P.E.T 세포파괴조직은 그 양이 너무도 적었기에, 세포 파 괴 탄을 세 발 밖에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유화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수정 에게 탄환을 건내주며 말했다. " 일단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세 번의 기회 밖에는…. " " 그걸로 충분해요. 수고하셨습니다,소령 님. " 수정은 유화의 마음을 알기는 아는 건지 여유있게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저 격 준비를 하였다. 정말 괜찮은 걸까…. 유화는 불신의 표정으로 저 멀리서 연구소를 향해 달려오는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와이번에게 쫓기 고 있는 한 지프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에 자신의 부하들과 가인이…. ' 제발…! ' 유화는 진심으로 수정의 스나이핑 실력이 뛰어나기를 간곡히 빌고 또 빌었 다. - 쿵! 쿵! 쿵! 쿵! 뒤에서 무시 무시한 와이번의 발자국 소리가 빠른 템포로 들려왔다.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지프를 모는 군인에게 소리쳤다. " 좀 더 빨리 몰 수 없어요?! 이대로는 따라 잡히겠어요! " " 젠장! 이게 최고 속력이라고! " 군인은 창백해진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지프의 속도 계기판 바 늘은 예전에 MAX 눈금에 닿아 있었다. 이제 연구소 까지의 거리는 약 400 여 m를 남겨두고 있었다. 일단, 진 사령관의 작전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 소한 그의 말대로 연구소 까지는 가야만 했다. 그때까지는 저 괴물에게 붙잡 혀서는 안된다. " 제길! 모두들 떨어지지 않게 아무 거나 붙잡아요! " " …? 무,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 갑작스런 가인의 외침에 군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가인은 좌석에 반대로 몸을 눕히더니 발로 시트를 밟아 최대한 안정적인 자세를 취 했다. 그 모습에 더 불안해진 군인들도 안전 벨트를 메고 시트를 부여잡았다. 가인은 군인들이 준비를 마쳤는지 확인한 다음,고개를 들어 자신들에게로 달 려오는 와이번을 노려 보았다. 녀석은 얼굴부터 쭉 내밀어 지프를 이빨로 씹 어 먹을려는듯 바로 지척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가인은 포션으로 막 회복된 오른손을 들어 와이번의 머리를 향했다. 헤븐 스매쉬도 없고,잘 될지도 모르 겠지만…. " 천공권--------!!!! " - 투카카카카칵!! 가인의 손에서 푸른 오라의 토네이도가 터져 나왔다.비록 헤븐 스매쉬가 없 는 상태였지만, 전력으로 발산한 천공권은 맹렬하게 와이번의 얼굴에 적중되 었다. 그 반탄력으로 가인들이 탄 지프가 타이어에 불길을 치솟으며 무시무 시한 속도로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으아아아아아앗!! " 눈도 뜨지 못할 속도에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차를 부여잡았다.귓가로 광 풍 소리가 휘날리며 앞 유리창이 '투학!' 부서져 고개를 숙인 군인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버렸다. 그 무서운 속도감에 군인들은 치를 떨었다. 꼬마 자식!! 이런 일을 벌일거였으면 진작에 알려주기라도 할 것이지…!!! " 으으… 어,어쨋든 한 숨 돌린 건가…? " 가인은 뒷 좌석의 시트에 거꾸로 처박힌채 중얼거렸다. 위로 보이는 하늘이 눈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왠지 그런 하늘을 보고 있 자니 옆으로 시선을 돌리기가 두려운 가인이었다. 그,그래. 이 정도 속도면 와이번에게 붙잡히지 않고 금새 연구소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 휘이이이이이… 그러나 귓 가를 파고드는 바람 소리. 마치 항공기가 이륙할 때 내는듯한 소 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인은 불길한 마음에 슬며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 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들을 덮쳐오고 있었다.가인은 입 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 말도… 안돼…! ' 와이번. 그 150톤의 거구가 점프를 하여 지프의 위로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 다! 가인은 이를 악물며 앞 좌석의 군인에게서 운전대를 낚아채며 옆으로 사 정 없이 꺽었다.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지듯 지프는 핸들의 방향대로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와이번이 지상으로 내려섰다. - 쿠우우우우웅!! 콘크리트가 부숴져 오르며 튕겨 나가는 지프를 후려쳤다. 안전벨트를 맨 군 인들이야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무방비 상태의 가인은 지프에서 떠밀리듯 튕 겨올랐다. " 우아아아악!! " 가인은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머리를 보호했다. 머리만 무사하다면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포션으로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취한 낙법이었다. 가인은 마치 포대 자루에 감긴채 108계단에서 구르듯 투다다닥 지면을 굴렀 다. 전신을 본치맨의 망치에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 끄으으으으… " 가인은 신음을 흘리며 지면에 핏물을 쭈욱 늘여뜨린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뼈가 깍이는듯한 통증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가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포 션을 자신에게 주사하며 초췌해진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 아저씨 들은…? 지프에 있던 군인 아저씨들은 무사할까…? ' 아…. ' 뒤집어진 채 불길이 흘러나오는 지프가 보였다. 가인은 비틀거리며 지프에 다가가기 위해 애썼다. 지프가 폭파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군인들을 구출 해야 했다.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지만, 전자의 경우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들… 제발 무사해 줘요…! - 콰지지직!! 그때, 거대한 파충류의 발이 가인이 다가갈려던 지프를 위에서 부터 사정없 이 짓밟아 버렸다.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는지라, 가인은 멍 하니 지프를 밟아버린 괴수의 발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저 발 아래에 아 저씨들이… ' 아저씨들이… ' 몇 시간도…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군인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가인의 귓 가에 울려오고 있었다. - …다들 살아서 만나자구요. - 그래… 반드시 살아서 보는 거다! - 이 일 끝나면 각오하라고! 진탕 술을 먹여줄테니까!! 살아서 보기로 했었는데…. 그러기로 했었는데… 그런데… - 크르르르르… 거친 으르렁 거림과 함께 오른쪽 눈이 피투성이가 된 와이번이 가인을 내려 다 보고 있었다. 가인은 눈물이 끓어오르는 눈으로 괴수를 노려보았다.네 놈 이…! 네 놈이…!! " 네 녀석이----------!!!! " 그리고 그런 가인과 와이번이 대치하고 있던 곳은 연구소에서 200m 떨어진 지점. 그 거리는 바로 수정의 저격 범위권 안이었다! " 빙고…! " 연구소의 옥상에 있던 수정이 PSG-1의 방아쇠를 흔들림 없이 당겼다. - 탕…! 짧은 한 발의 총성. 그리고 와이번의 오른쪽 눈에서 녹색의 체액이 터져 올 랐다.수정이 PSG-1으로 쏜 7.62mm NATO탄이 와이번의 오른쪽 눈에 저격된 것 이다. 그녀가 괴수의 오른쪽 눈을 노린 이유는, 이미 가인에 의해 상처를 입 은 부위였었고 왼쪽 눈은 혹시라도 눈의 깜빡임에 탄환이 차단 당할지도 모 른다는 생각에 의해서였다. 스나이핑은 한 발로 성공시키지 못하면 상대방이 스나이퍼의 존재를 눈치 채기에 그 의미가 없어진다. " 서,성공이다…! " 수정의 뒤에서 그녀의 스나이핑을 지켜보던 유화가 짧은 탄성을 올렸다. 이 제 NATO탄에 들어간 P.E.T 세포파괴체는 와이번의 시신경을 따라 뇌부터 파 괴를 시작할 것이다. 우선, 피부의 각질화 현상이 사라질 것이고, 뼈와 근육 이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좋아. 상황은 끝이야. P.E.T 용액 이 투입된지 채 60분도 경과되지 않았다.세포 파괴체는 충분히 그 기능을 수 행할 수 있어…! - 크르르르르르륵…!! 그리고 유화의 생각대로 와이번의 몸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와이번은 자신의 몸에서 발생하는 현상에 당황하고 있었다.안정되어 있던 몸 의 밸런스가 천천히 무너지며 육체가 뇌에서 전달하는 명령들을 무시하고 있 었다. 왜냐…! 왜냐…! 왜냐…!! - 크와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와이번의 날개가 기이하게 부풀어 올랐다. 근육이 이상 증식을 하며 혈액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마치 물이 끓는듯한 소리를 내며 와이번의 거대한 날개가 격렬하게 좌우로 뒤틀렸다. 유화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그런 와이번의 현상을 지켜보았다.그래! 잘 되어 가고 있어! 효과가 있다! - 퍼어어어엉!! 결국, 와이번의 날개 근육이 몸 안의 팽창을 이기지 못하고 피부 채 터져나 갔다. 세포파괴체를 맞은 와이번의 오른 쪽 눈동자가 날개 쪽의 신경과 더불 어 기포를 발생시키면서 짓이겨지고 있었다. 유화는 수정을 끌어 안으며 환 호했다. " 성공이에요! 다행히도 P.E.T 용액이 정착되기 전에 시간을 맞출 수 있었 던 거에요! 늦지 않았어요! " " 하아아…! " 수정은 유화의 등을 토닥이며 지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해결이 된 모 양이었다. 이미 용장호는 와이번에 의해 쑥대밭이 된지 오래였지만,B급 몬스 터의 출현치고서는 놀랄 정도로 그 피해 규모는 적었다. 만약, 저 괴물이 도 시로 나갔더라면 생각하기도 싫은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래…. 다 행이다. 다행…. 수정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 자,잠깐…! 이보게들, 아직 그럴 때가 아니야! " 그때,그녀들의 뒤로 누대인의 당황해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경직하는 수정 과 유화. 그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와이번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괴수는… - 쿠오오오오오오오!!! 거대한 괴성을 울리며 유화들을 노려보고 있었다.와이번의 전신에서는 세포 의 분열로 비늘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고, 얼굴은 피부가 녹아 들어가고 있 었다. 끔찍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용케도 괴물은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오히려 악귀와 같은 얼굴로 남은 왼쪽 눈을 번뜩이며 이를 갈고 있을 뿐. 얼마나 거 칠게 이를 갈았는지, 와이번의 어금니들이 녹아내리는 피부들을 뚫고 지상으 로 떨어져 내렸다. - 쿵!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며 연구소로 달려드는 와이번.200m, 100m‥ 거리가 순식간에 좁 혀 들고 있었다. 이미 생과 사를 초월한 마지막 발악인듯한 움직임이었다.맹 렬한 육탄 공격! 와이번의 육중한 몸이 연구소를 들이 받았다. - 콰지지지직!! " 꺄아아아아앗!! " 그대로 콘크리트가 부숴지며 연구소를 뒤흔드는 충격. 옥상에 있던 수정과 유화, 누대인과 진 사령관은 옥상의 철조망을 붙잡고 진동을 견뎌냈다. 하지 만 철조망은 가볍게 찢어지며 유화들을 끌어당긴채 지상으로 늘어져 내렸다. 그녀들은 5층 높이의 연구소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철조망을 부 여 잡았다. - 쿠쿵! 다시 한번 충격으로 내려 앉는 철조망. 매달려있던 유화와 수정이 짧은 비 명을 질렀다. 진 사령관은 체력이 열세인 누대인이 떨어지지 않게 그의 옷자 락을 붙잡고서는 간신히 철조망에 매달려 있었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렸었나…! " 진 사령관은 미간을 가볍게 구기며 중얼거렸다. 세포 파괴체는 분명 효과가 있었지만, 완전히 와이번의 숨통을 끊어놓지는 못한 것이다. 진 사령관이 말 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의 의미는 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철조망을 부 여잡고 있던 그의 손은 누대인의 무게와 더불어 금새라도 끊어질 것 처럼 선 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철조망이 손가락을 파고드는 고통에 진 사령관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 진 사령관에게 수정의 절망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 사령관 님! 조심하세요! " " .........?! " 진 사령관은 수정이 경고한 물체를 노려보았다. 선글래스 사이로 자신에게 향한 거대한 눈동자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흉측해 보 이기 까지 한 와이번은 모세혈관이 터져 붉게 물든 눈동자로 진 사령관을 응 시하고 있었다. '우르르르…' 와이번이 건물에 묻혀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 자 콘크리트의 잔해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분명 세포파괴체의 침투가 시작됐을텐데…! ' 수정은 진 사령관에게 다가가는 와이번의 머리를 노려보며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조금만 철조망에 힘을 줘도, 이 약한 철사 의 그물들은 수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슬아슬한 쇳소리와 함께 내려 앉고 있었다.와이번은 천천히 진 사령관과 누대인을 향해 그 거대한 입을 벌 렸다. 그대로 콘크리트 째 씹어 삼킬 생각인듯 했다. 수정은 그 광경을 바라 보면서도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꼈다. 그녀는 애처 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 진 사령관 님--------!!! " - 휘리리리리리릭!! 그때,그런 수정의 비명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 처럼 와이번의 머리 위로 한 푸른 빛의 인영이 날아들고 있었다. 바로 피스 블루 유가인! 그는 와이번의 뒤에서 A.I 부츠를 이용한 점프로 와이번의 얼굴을 향해 무섭게 날아 들고 있었던 것이다. " 이거나… 먹어라------!!! " - 콰직!! 그대로 회전과 함께 와이번의 콧잔등을 팔꿈치로 찍어내리는 가인. A.I 슈 츠로 강화된 근력과 오라의 힘이 합쳐진 필살의 일격이었다.와이번은 위에서 부터 내리치는 충격에 '딱!'하는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밑으로 얼굴을 처박아야만 했다. 다시 한번 지축이 울리며 연구소가 흔들렸고,그 바 람에 유화들이 붙잡고 있던 철조망이 삐걱 거리며 밑으로 무너져 내렸다. - 철컹…! 하지만 와이번에게 일격을 먹이고 그 탄력으로 옥상으로 올라선 가인이 흘 러내리던 철조망을 부여잡았다. " 크윽…! " 밑으로 딸려가려는 것을 옥상의 난간에 발을 걸치며 버텨낸 가인. 그는 철 조망에 매달려 있는 유화들에게 소리쳤다. " 모두들, 끌어올릴테니까 꽉 잡고 있어요! " - 키리리리리링!! 끌리는 철사 소리와 함께 가인은 무서운 힘으로 철조망을 끌어올렸다. 오라 를 물리력으로 바꿔주는 A.I 슈츠가 없었더라면 생각도 못할 행동이었다. 제 일 먼저 옥상으로 끌려온 유화가 비틀 거리며 옥상에 주저 앉았다.그녀는 여 전히 괴력을 발휘하는 가인을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 보고 있었다. 지구의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그의 행동에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수 정과 진 사령관,누대인까지 모두 끌어올리고 나서야 가인은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 두근…! 그때 가인의 오라가 짧게 요동을 쳤다. 가인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몸의 변화에 민감히 반응했다. 뭐,뭐야?! 방금 전의 그건…? 오라가‥ 울부 짖고 있어…? " 가인, 괜찮은 거야? " 하지만 가인의 상념은 걱정스레 말을 걸어오는 유화에 의해 끝맺어야 했다. 가인은 이상하게 열이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 ‥예? 그야… 저는 괜찮죠. " "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봐! 열이 나고 있잖아! " 가인의 이마에 손을 짚은 유화는 그 뜨거운 열기에 놀라 소리쳤다.그제서야 가인은 자신의 몸에서 불덩어리 같은 열기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열로 인해 왠지 의식까지 흐릿해지는 것 같다. " 어라…? 가,갑자기 왜 이러지…? " 무리라도 한 걸까? 아니면 어디에 상처라도 입은 건…? 하지만 포션도 주사 했는데 그럴리는 없다. 이 열은 상처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왜 …? 시야까지 안개가 서린듯 침침해져 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인이 견디기 힘든 것은…. ' 뜨거…워…. '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가인은 애써 균형을 잡았다.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게 조금만 그 끈을 놓아버려도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진 사령관을 챙겨주던 수정도 가인의 변화를 눈치 챘는지 걱정스레 물어왔다. " 왜 그러는 거에요,가인 군? " " 글쎄요…. 그게 저도‥ " 거기까지 말하던 가인은 숨을 들이키며 말을 멈춰야 했다.그들의 뒤로 천천 히 와이번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가인들을 노려보는 와이번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피부가 녹아내려 끔찍한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가인은 급하게 유화들을 뒤로 물리며 괴물과 대치해 섰다. 와이번은 뒤틀려버린 자 신의 꼬리를 몇 번 움직이더니 몸을 돌리며 가인들에게 휘둘러 왔다.그 무지 막지한 공격에 노출당한 가인을 보며 유화가 비명을 질렀다. " 가인----!! " 질풍(疾風)의 벽(壁) - 투우우웅! 공격하던 기세와는 달리 너무도 가볍게 튕겨오르는 와이번의 꼬리.유화들은 놀란 얼굴로 와이번의 공격을 막아낸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가인의 이름을 불렀다. " 가인 군‥? " - 츠츠츠츠츠츠‥. 가인은 손바닥을 편채 양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손바닥으로는 거센 오라의 회오리가 휘몰아 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방패와 같은 형상으 로 전개되어 있었는데, 가인은 아마도 그것으로 와이번의 공격을 막아낸 모 양이었다. 그런 가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 사령관이 선글래스 안의 눈을 빛 내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 ‥시작했군. " - 크오오오오오오오!! 와이번은 믿을 수 없다는듯 괴성을 지르며 가인에게 얼굴을 들이 받을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가인의 A.I 부츠에서 푸른 회오리의 기류가 모여 들고 있었다. 그것은 질풍. 그것은 오라의 힘. " 차아아아앗------!!! " - 투학----!! 마치 미사일이 발사대에서 불을 뿜고 날아오르는 것 처럼 가인은 무서운 속 도로 와이번의 얼굴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오라의 회오리가 모여든 가인의 두 다리가 와이번의 오른쪽 눈을 노렸다. " 라이징 킥(Rising Kick)-------!! " - 투확!!!! 마치 포탄 처럼 가인의 킥은 와이번의 오른쪽 눈을 꿰뚫고 뒤의 두개골까 지 부숴버리며 괴수의 동체에서 빠져 나왔다. 그 바람에 와이번의 머리를 헤 집고 나온 가인의 A.I 슈츠는 괴수의 체액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 우오오오오오오오!!!! 머리의 절반이 날아간채 괴로운 비명을 내지르는 와이번. 그런 괴수의 뒤로 내려선 가인은 열기로 얼굴이 달아오른 채 숨을 몰아 쉬었다. 가인은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자각도 없었다. 단지 몸 안에서 미칠듯이 끓어 오르는 기운을 어떻게든 처리해야된다는 생각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가인의 몸에서 끓어오르는 오라의 기류가 주위와 동조하여 대지를 뒤흔들고 있었다. - 쿵‥! 쿵‥! 와이번은 비틀 비틀 거리며 힘겹게 가인을 뒤돌아 보았다. 가인의 라이징킥 으로 절반이 날아가 버린 와이번의 머리 쪽에서는 죽어버린 뇌조각들과 뇌수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괴수는 측두엽이 날아가 버렸기에 기억의 기전( 機轉)에 들어가서 지각이해 ·인식 등의 정보처리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단 지,눈 앞의 인간에 대한 분노만이 그 육체를 움직여주고 있을 뿐. 와이번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불태워가며 가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 가,가인?!! "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숨을 죽이는 유화들.가인은 열로 흐릿해져만 가 는 시선을 들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 두근…! 다시 한번 전신의 오라가 가인의 몸을 뒤흔들었다.마치 척추를 관통하여 뇌 의 구석 구석에 까지 퍼져가는 오라의 느낌. 가인은 왼손에 쥐고 있던 오라 소드를 늘어뜨리며 발검(拔劍) 자세를 취했다. - 쿵! 쿵! 쿵! 쿵! 거칠기 짝이 없는 와이번의 발 소리가 가인의 귀를 연신 때렸다. 하지만 가 인은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 두근…! 더 이상 오라의 고동 소리가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미 그것은 비교할 수 없 는 쾌감으로 가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끊임 없이 솟아오르는 열기로 가인 의 머리 속은 백지 같이 하얘졌고, 가인이 쥐고 있던 오라 소드는 타오르듯 백열하며 오라의 소용돌이로 휘몰아쳤다. 그래… 그리고 이걸… - 쿠와아아아아아악!! 휘두른다…! 질풍(疾風)의 검(劍) 바람 가르기 - 촤아아아아악! 피부가 찢어지고 그 안의 뼈가 종이장 처럼 잘려나갔다. 와이번은 가인에게 달려들던 그 기세,그대로 정확히 이등분이 된 채 가인을 덮치지도 못하며 그 뒤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가인의 앞에서는 작은 광풍이 소용돌이를 치며 와이번에게서 흘러나온 선혈들을 하늘로 올려보내고 있었다.녹색의 체액들이 방울 방울 흩어진 채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것이,마치 천상의 아름다움을 엿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 화아아아아악! 가인은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멍하니 바라 보고만 있었다.자신의 주변이 하 얗게 물들어 가고 있었지만 그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리고… 가인은 그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오빠…. 가인은 신이를 만났다. 하얀 백색의 공간.그 안에는 자신과 신이 만이 존재 하고 있었다.그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공간.가인은 떨리는 손을 신이에게 내뻗 었다. 신아… 내 하나 뿐인‥ 동생…. 신이는 뻗어오는 가인의 손을 살며시 잡아 자신의 볼로 가져갔다.따뜻한 체 온이 가인의 손길을 타고 스며 들어 온다. 신이는 가인의 얼굴을 직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오빠는 앞으로도 많은 일들을 겪게 될거야…. - 때로는 힘들고… - 때로는 지치고… - 때로는 괴롭겠지… 가인은 자신의 품 안에 안겨오는 신이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신이는 마치 울 것만 같은 얼굴로 가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가인의 옷깃을 부여잡는 신 이의 손가락이 너무도 애처롭게 느껴졌다. - 언제나 내가 곁에서 지켜줄게… - 그러니까… - 그러니까… 가인은 떨리는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어.알고 있다고,신 아.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다고….가인은 이상하게도 무거워진 입을 열기 위해 애를 썼다.신이의 모습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가인은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끝나가고 있다는 걸. 가인은 마음이 조 급해지는 것을 느끼며 신이에게 힘겹게 '목소리'를 꺼냈다. - …나도 - ......... -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 .........응. 환하게 웃는 신이의 얼굴. 그리고 그 아이는 가인의 품 속에서 흩날리는 바 람처럼 사라져 갔다…. 가인의 목소리는 공간 속에서 끊임 없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 언제나 네 곁에‥ " 아…. " 가인은 눈을 떴다.하얀 백색의 천장과 산들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의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가인은 정신이 멍한듯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유화가 침대 맡에 머리를 베고 잠이 들어 있었다. " ......... " 상황은… 끝이 난 걸까…. 여긴‥ 어디 인 거지? 병원? 기억이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몸이 무거웠다. 마치 전신에 무거운 추라도 매달아 놓은 것 처럼. 가인은 힘겹게 몸을 뒤틀었다. 그런 가인의 기척에 잠들어 있 던 유화가 눈을 뜨며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가인은 여전히 멍한 눈초리로 그 런 유화를 바라보았다. " 가인?! 깨어‥ 난 거야? 깨어난 거니?! " " ......... " " 정신이 들어? 응? " 유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가인은 천천히 눈꺼풀을 움직여 긍정의 표시를 취했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유화는 가인의 손을 자신의 손 으로 꼬옥 움켜쥐며 말했다. " 다행이다‥. 마치 깨어나지 않을 것 처럼 자고 있었다고,너‥. 벌써 그때 로부터 삼 일이나 지난 후야. " 유화의 말에 가인은 꿈틀 인상을 찌푸렸다. 삼 일…? 삼 일동안 잠만 자고 있었다고? 내가? 그럴리가…. 방금 전만 해도 난…. 가인의 메마른 입술에 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방금‥ 전만 해도‥ 난 신이와… " " .........? 신이‥? 무슨 소리야,가인? " 유화는 뜻 모를 가인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지만, 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힘 없는 눈동자로 병실의 창 밖을 돌아 보았다. 창 밖에서는 푸른 하늘 사이로 옅은 흰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 그건… 뭐였을까…? ' 그리고 내가 했던 말은… -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 하앗! " 이른 아침, 26구역에 위치한 마리의 무영신풍류 도장에서는 기운찬 한 소녀 의 기합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휘둘려지는 죽도가 아름다운 호 를 그리며 힘차게 허공을 가른다. 무영신풍류는 검술(劍術)이다. 검술은 원래 전투에서 육탄전 같은 접근전이 벌어졌을 때 도검(刀劍)으로써 적을 죽이는 무술로서 발달하였다. 한국 고유 의 전통적인 검술에는 본국검(本國劍)이 있는데,이 본국검은 신라검 또는 신 검(新劍)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신라 화랑들의 무술 연마와 아울러 실전에서 도 사용하였던 검술로서, 이것이 이어져 고려 ·조선시대에는 보졸(步卒)의 환도(環刀)로써 이용된 검술이 본국검이었다.이 검술은 중국에까지 전해져서 신라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그리고 무영신풍류는 이 신라검에 그 뿌리를 두 고 있는 도검술이었다. 도장의 아침 시간에 수련을 하는 단원들은 마리가 죽도를 휘두르는 모습에 언제나 처럼 감탄을 터뜨리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 이야∼역시 대단한 걸,마리 사범님은. 관장 님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강해. " " 도저히 우리가 배우는 검도가 마리 사범 님이 쓰는 검도와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단 말이야∼ 박력부터가 틀려. " 단순히, 무영신풍류를 호신술(護身術)로서 배워온 단원들에게 마리가 쓰는 무도(武道)로서의 무영신풍류는 다르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마리의 검은 몬 스터들과의 전장을 치르며 닦아온 생사입멸(生死入滅)의 검이었던 것이다.그 검에 서린 무게는 단원들의 것과는 그 근본부터가 틀렸다. 마리는 단원들이 자신의 얘기를 나누고 있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죽도를 갈무리했다. 평상시 에는 이른 새벽에 아무도 없을 시간에 나와 단원들이 오기 전까지 수련을 마 쳤던 그녀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상쾌한 기분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마리는 시계를 보았다. 슬슬 학교 갈 준비를 해야할 시간이었다. '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 마리는 이상하게도 들뜬 기분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도장을 나설려고 했다. " 그런데 오늘은 유달리도 기운이 넘치시지 않아, 마리 사범 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걸까? " " 이 친구야, 자네는 도장 단원이면서 그것도 몰라? 오늘은 여행갔던 마리 사범 님의 애인이 한국에 돌아오는 날이잖아∼ " 순간, 발걸음을 멈추며 휘둥그래진 눈으로, 얘기를 나누는 단원들을 천천히 돌아보는 마리. 무,무슨 소리들이지? 그게? 애,애인이라니…? 다들 무슨 소 리를 하고 있는 거야? 마리는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럽게 단원들의 목소리 에 귀를 기울였다. 단원들은 마리가 자신들의 얘기를 엿듣고 있다는 것도 모 른채 신나게 잡담을 하고 있었다. " 에엣? 그거 진짜입니까?! 마리 사범 님,애인이 있으셨어요? 으아,쇼크다! 아니 도대체 어떤 사람이랍니까? 우리 도장 단원이에요? " " 그게… 도장 단원은 아닌 거 같지만, 마리 사범 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 는 속가 제자라나 봐. " " 예? 마리 사범 님이 직접 가르치신다고요? 아무도 안 가르치시기로 유명 한 저 마리 사범 님이?! 그거… 진짜 사범 님이 그 남자에게 맘이 있나보 군요! " " 그렇지! 그리고 그것 뿐만이 아냐.들리는 말에 의하면,마리 사범 님의 애 인이 차기 도장 후계자가 될 거라는 말도 있어…! " " 엑?! 후,후계자라면…! 그거 마리 사범 님과의 결혼… " - 탕…! 마리는 더 듣지 못하고 밀려드는 현기증에 들고 있던 죽도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도장 마루 바닥에 죽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단원들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멈추었고, 그제서야 자신들의 뒤에 마리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 자 그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단원들은 식은 땀을 흘리며 마리에게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아,안녕하십니까, 마리 사범 님? " " 오,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시는 건가요? " 그런 그들에게 비틀거리는 걸음 걸이로 다가온 마리. 그녀의 앞머리가 길게 흐트러져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단원들은 마리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무겁게 내려 앉는 공기만이 그녀의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단원들에게 마리의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그런 말… 도대체 누가…? " " 예…? 그,그게 저기… 관장 님이 하신 말씀이라…. " " .........그렇습니까. " 그 말을 끝으로 마리는 몸을 돌려 도장 밖으로 재빨리 걸어 나가 버렸다.단 원들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 하 지만 잠시 후,단원들은 도장이 떠나갈 듯한 마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아버님------------!!!! " 그 날 이후로 마리의 아버지,성비영은 딸이 해주는 차를 한동안 마실 수 없 었다고 한다.그리고 비영이 분노한 딸에게 항변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 …허허, 가인 군이 데릴 사위가 되는 게 맘이 걸리겠지만 그렇다고 초서 혼(招絳婚)은 시키지 않을 테니까… " 초서혼(招絳婚):여자가 자기의 친가를 떠나지 아니하고, 남자가 여가(女家) 로 들어와서 여가의 가장의 권위에 복종하며 생활하는 혼인 형태. " 아버님----------!!!! " " 으음…. " 하지연은 신음을 흘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되나 고민에 빠졌다. 지 금은 언제나와 같은 조회 시간.언제나와 같은 1학년 3반에 언제나와 같은 학 생들이 눈 앞에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 어머, 유리야. 시민 씨가 머리 땋아준 거니? 너무 예쁘다. 잘 어울려. " " …고마워. 테레이아의 머리핀도 예뻐. " " 훗… 그렇지? 유리한테도 어울릴 것 같아서 하나 사왔어. 자,받아. " " 친절하구나,테레이아는. " 유리와 테레이아가 앉아 있는 창 가 쪽의 자리는 창에서 밀려드는 아침 햇 살 때문인지 환한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리고 그곳에서는 믿을 수 없는 장 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활짝 웃는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테 레이아와 유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 활짝 웃고 있는…. 마치 전신에서 빛 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은 모습들로 그녀들은 웃음 꽃을 피우고 있었다. ' …미,믿을 수 없어…. ' 지연과 학급의 모두는 할 말을 잃은 채 테레이아와 유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테레이아와 유리가… 같은 하늘 아래, 절대로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들이… 언제나 만나기만 하면 방전 현상을 내뿜으며 서로 를 못 잡아먹어 으르렁 거리던 그녀들이… ' 지금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어?!! ' 그렇다. 그것은 전대 미문의 현상이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이 혹시 지구 최후의 날은 아닐까하는 의심 마저 들게 하는 장면이었다. 테레이아와 유리는 주위의 불신 어린 시선들을 느끼지 못하는지, 계속 빛을 뿌리며 다정 스럽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 유리는 생각보다 필기를 꼼꼼하게 하는 구나. 혹시 그것이 시험을 잘 받 는 비결? 부럽다. 난 아직 한국어를 쓰는데는 서툴러서 필기할 것을 많 이 놓치는데. " " …보고 싶으면 봐도 좋아. " " 정말? 유리는 배려심이 많구나. " 그녀들의 대화를 듣던 학생들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얼굴로 마음 속 깊 이 절규했다. ' 지저스 크라이스트-----! ' 지연은 질렸다는 얼굴로 누군가가 이 사태를 해명해주길 바라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리고 그런 지연의 시선을 알아챈 것은 역시나 자칭 1학 년 3반의 분위기 메이커 박재영 군이었다. ' 뭔 일이야? ' 지연의 눈은 재영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그런 무언의 질문을 잘도 알아듣 고 재영은 그녀에게 답했다. " …돌아온데요. " " ......뭐? " 다시 한번만 더. " 오늘, 가인이 녀석이 중국에서 돌아온데요… 연락 못 받으셨어요? " 지연은 그제서야 이 모든 상황을 납득을 할 수 있었다. 1학년 3반에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유가인. 그가 일주일간의 여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것이 었다. 과연 그렇다면 유리와 테레이아가 저러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 었다. 음…. 결국,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는데 다시 시끌벅적해지는 건가? 가 인이 없는 동안 그로 인한 테레이아와 유리의 여파가 없었기에 지연의 반은 새삼 정상스러운 학급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유가인,그 가 돌아옴으로써 다시 원상 복귀가 될 터였다. 일주일 만의 평화가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또 재밌어지겠는데…. ' 지연은 피식 웃으며 언제나 처럼 담배를 꼬나물었다. 한편,재영과 남학생들 은 어느새인가 원탁으로 책상을 모아 회의를 열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이 조 회시간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는 모양들이었다. 원탁 회의의 의장, 박재영 은 근심 어린 어투로 입을 열었다. " 녀석이 다시 돌아온다. 중국 4000년의 신비를 몸에 지니고. " 그의 말에 모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말에 포함된 무게를 모두는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 놈의 귀환으로 유리 양과 테레이아 양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지만… 난, 난…! " 그때, 한 남학생이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재영은 그런 남학생의 등에 위로의 손을 얹어주며 따뜻하게 말했다. " 그래. 이해할 수 있어,너의 기분은.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앞으로의 투 쟁을 준비해야할 때! 이렇게 분개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제로스(jealous) 1호! " " 으응…! 그래. 지금은 울 때가 아니지…! 나약한 모습을 보여버렸어,미안. " 제로스 1호라 불린 남학생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해맑게 웃었다.그런 그를 바라보는 남학생들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한 자식! 바로 그거야! 재영은 하나로 단합되는 마음들을 느끼며 기운 차게 외 쳤다. " 자! 우리는 두려워할 때가 아니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녀석 에게 맞서 싸울 수 없는 것이다! 두려움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더 이상 두 려움이 아니다! " " 맞아! 우리는 유가인, 녀석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진정으로 기쁘게 받아 들여야 해! 더욱 큰 싸움을 위해서! " "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이상! " 재영은 책상을 거세게 내리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 그래! 그것이야 말로 반(反) 가인 파의 회원으로서 우리가 가져야할 진정 한 마음가짐! 상대방이 아무리 더럽게 나와도, 우리는 초지일관의 자세로 녀석에게 대항해야 하는 것이다! " " 오오오오, 역시 회장! " " 훌륭해! " 박수까지 치며 재영을 환호하는 남학생들. 재영은 흐뭇하게 웃으며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하늘은 그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듯 맑고 푸르렀다.재 영은 저 하늘 너머 중국에 있을 가인에게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 와라,가인…! 우리는 언제나 네 녀석을 기다리고 있다‥! ' 재영의 그 모습은 진정 적의 모든 것을 수용한 도전자의 자세. 바로 그것이 었다! 그 동기야 어쨋든, 재영의 마음가짐 만은 원초적일 정도로 순수했었 다. 하지만 그 바람에 재영은 자신을 엄습해오는 일련의 살기들을 눈치챌 수 없었으니…. 재영의 뒤통수를 통렬한 일격이 강타했다! " 더블 라이더 킥------!! " - 퍼억! 바로 유리와 테레이아의 합체기, 필살의 라이더 킥이었던 것이다.재영은 그 필살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처참하게 날아가 떨어졌다. 재영은 희미해져 만 가는 의식을 붙잡고서는 힘 없이 중얼거렸다. " …이,이제는 응용기까지‥. " - 털썩!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회장!" 울부짖으며 쓰러진 재영을 부 축하는 남학생들. 하지만 정작 그들의 회장을 그 꼴로 만든 테레이아와 유리 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서로를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 …마음이 통했군. " " 응. "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연과 학생들은 생각했다. 서로 으르렁 거리며 방전을 내뿜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지만, 저렇게 두 사람이 하하호호 하며 웃는 것도 다른 의미로는 무서운 일인 거라고. 유가인,그는 아직 돌아오지도 않았건만 1학년 3반에서는 벌써부터 파란의 기미가 불어오고 있었다. - 치이이이익… " 시민 씨?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음식 다 타겠어요! " 시민은 들려오는 미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프라 이팬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서는 부치고 있던 해물 파전이 검은 연기를 내며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시민은 재빨리 가스 렌지의 불을 끄며 한 숨을 내쉬었다. " 난 몰라… 다 타버렸네…. " " 정말∼∼ 무슨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어요? 시민 씨 답지 않게 요리를 태워먹지를 않나… 아까부터 멍하게 있지를 않나…. 도대체 왜 그러는 거 에요? " " 아,아니에요‥. 어제 잠을 많이 못자서 그런가 봐요. "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프라이팬에 눌러붙은 파전을 떼어 냈다.미연은 시 민의 말에 알 것 같다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 후후, 가인 군 온다니깐 기뻐서 잠이라도 설치셨던 거 아니에요? " " 하아‥, 그런가 보내요. 그나저나 가인 씨한테 줄 요리들인데 좀 더 신경 쓰지 않으면…. " 시민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연은 그런 시민의 모습에 그녀의 어깨를 떠밀으며 말했다. " 좀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요,시민 씨. 요리는 제가 하고 있을테니까. " " 아,아니에요. 전 괜찮은데‥ " " 어서! 명령이에요∼ " " …예‥. 그럼 잠시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을 게요…. " 시민은 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부엌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사실,잠을 못 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줄곧 가인 만을 생각해 오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며 칠 전에 느꼈던 그 기운에 대해서. 나중에 본부실에서 들은 바로는,그 날 중 국에서 인민 해방군에 의해 와이번이 부활했었고, 그것을 가인이 홀로 막아 냈었다고 했었다. 혼자서 B급 몬스터를 막아낸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지만,무 엇보다 시민의 맘에 걸렸던 것은 가인의 오라 수치가 이상하게도 증폭되었다 는 점이었다. ' 설마 가인 씨도… ' 가인 씨도 그 남자와 같은… 한시영과 같은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은…. 거 기까지만 생각이 미쳐도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한 번으로 족했다. 두번 다시 생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시민은 가인이 그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 절대로 가인 씨 만은…. ' " 헛! 헛! 이 맛있는 냄새는∼!! " 시민의 그런 상념은 하나를 끌어안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진우에 의해 사라 지고 말았다. 시민은 미소지으며 진우에게 말했다. " 진우 씨, 오늘은 비번인가 봐요? " " 뭐, 그렇죠∼ 게이트 반응도 없겠다. 며칠 전의 비상 소집령도 풀렸고.더 구나 오늘은 녀석이 오는 날이잖아요∼ " 진우가 말한 '녀석'이 가인을 칭하는 것 임은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이다. 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아, 그리고 채영 씨들에게 말씀 하셨어요? 오늘 밤 저녁 식사… " " 물론이죠∼ 밤에 유가인 귀국 파티를 한다고 하니까 다들 단단히 기합을 넣던데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겠다더군요. " " 후훗,그래요‥. " 시민은 윤채영과 오퍼레이터들을 생각하자 웃음을 터뜨렸다.아마도 오늘 밤 에는 꽤나 시끌 벅적해질 것 같다. 진우는 하나를 끌어안은채 요리를 하는 미연에게로 걸어갔다. 아마도 부엌에서 진동하는 맛있는 냄새의 정체가 무엇 인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 이,이것은∼!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해물 파전!! " 진우는 프라이팬에서 온갖 해물들이 들어간 특대 파전을 보게 되자 군침이 돌았는지 감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만들어 놓은 파전들에게로 손을 가져가는 진우. 하지만 그의 손길은 미연과 하나에 의해 가로 막혀야만 했다. " 안돼요! 이건 가인 군한테 줄 거란 말이에요! 저리 가요! " " 떼찌! 오빠 먹을 거 건드리지 마! " " 우,우우우우우우∼!!! 어째서…! " 상처입은 표정으로 울쌍을 짓는 진우. 그가 가족에게 사랑받는 가장이 되 는 날까지는 아직 멀고도 멀은 것 같다. 힘내라,정진우! 아내와 딸의 사랑 을 유가인 녀석에게서 되찾을 그 날까지! " 하,하지만 하나만 먹으면 안될까…? " " 저리가요!! " …비굴해지지는 말고. 그리고 대 파란의 주인공,유가인은 북경 공항의 게이트에서 중국군들의 환 송을 받고 있었다. 한국으로 떠날려던 가인과 진 사령관,수정을 마중나온 이 들은 유화와 용장호에서 생존했던 인민 해방군들이었다. 가인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유화에게 말했다. " 원래는 삼일 정도만 있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일주일이나 지나서야 돌아가게 됐네요. " " 대신 북경 관광은 잘 했잖아? " 유화는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가인은 오라의 후유증으로 삼일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기껏 퇴원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 사 령관이 인민 해방군들의 PM조약을 무시한 행위와 피스 메이커의 중국 지부를 공격한 행위를 문제시 삼아 다시 협약을 맺는 일로 일정이 늦어지고 말았다. 수정에게 들은 바로는 진 사령관은 '벼룩의 간도 빼앗아 먹을 정도로' 인민 해방군에게서 보상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 보상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가인으 로서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용장호에서 와이번을 물리친 가인의 공이 있었기에 재 협정은 가능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상받았냐고 가인이 진 사 령관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는 단지 다음과 같은 말로 일관했을 뿐이다. " 월급… 10% 인상하도록 선처하지. " 어쨋든, 진 사령관과 수정이 그렇게 중국에서의 일을 마무리 하는 동안, 가 인은 유화의 안내를 받아 마음껏 북경 시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흘 을 보내고 나서야, 가인들은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유화는 가인 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따뜻한 음성이 가인의 귀로 들어왔 다. " 가인…. 우리는 네가 보여준 용기와 우리에게 준 도움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 " 유화 누나…. " 유화의 뒤에 있던 군인들도 씨익 미소지으며 가인에게 말을 건냈다. " 정말 고마웠다,꼬마야. " " 다음에도 또 북경으로 놀러와라. 그 때는 좋은데로 데리고 가줄테니. " " …좋은데요? " 가인이 반문을 하자, 유화가 날카로운 눈으로 군인들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군인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들 딴청을 부렸다. 유화는 얼굴을 붉힌채 헛 기 침을 하며 가인에게 계속 말했다. " 비록 한국에 가있더라도 넌 우리들의 동지이며… 좋은 친구야. " " 아∼ 거,참! 소령 님, 답답하게 그런 말만 계속 하고 있으실 겁니까?! " " 자자! 꼬맹이하고도 잠시후면 이별이란 말입니다! " " 아,자‥잠깐만! " 엉겹결에 군인들에게 등을 떠밀린 유화는 그만 가인을 끌어 안아버렸다. 가 인과 유화는 얼굴을 붉히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화는 의외로 가인 에게서 떨어지지 않은채 그를 꼬옥 안아주었다. 가인도 부끄러웠지만,웃으며 유화를 껴안아주었다. " 펑요우(朋友). " 눈시울을 붉히며 유화가 건낸 한 마디.가인은 서클렛으로 통역되어 자신의 의식으로 들어오는 그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벗. 마음이 서로 통하여 친하게 사귀는 사람. 친구‥. 가인은 자신도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며 유화에게 말했다. " 펑요우. " 유화의 뒤에 있던 군인들도 씨익 미소지으며 가인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가인은 미소지었다. 누나, 아저씨들.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 절대로 북경을 잊지 않을게요. ' 가인은 중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런 가인의 뒤 로 헛 기침 소리를 내며 수정이 말했다. " 저기‥ 가인 군? 이제 탑승 시간이니까∼ 거기까지 하는 게 어때요? " " 예? 아,예‥옛! " 다급하게 서로 떨어지는 가인과 유화.유화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풋 미소를 지었다.서둘러 진 사령관들 쪽으로 다가오던 가인. 하지만 그는 천천히 인상 을 구겨야만 했다. 진 사령관이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 던 것이다. 가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뭐,뭐야? 또 무슨 말을 할려고‥? " ......... "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진 사령관.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게이트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가인은 의아한 눈으로 그런 진 사령관의 뒤를 바라보았 다. 어라? 이럴리가 없을 텐데? 저 인간 성격 상,분명 한 소리를 할 줄 알았 는데? 왜 저러는 거지? ' …이,이상해…. 이 찝찝한 기분은 뭐야…? ' 가인은 불신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아무 말 하지 않는다면 나야 좋 지만…. 하지만 가인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진 사령관이 가인의 행실을 피스 메이커의 어느 여성에게 얘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고민하고 있었 다는 사실을. " .........?! " 그때, 일련의 군인들과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남자를 알아 본 순간 가인들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져 버렸다.왜냐하면 그 남자는 바로… " 하하하, 지금 가시는 길이십니까? " 다름 아닌 리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가인과 수정은 기가 막혀 그를 노려 보 았다. 아니, 저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얼굴을 내밀어?!! 용장호에서 그에 게 당한 것을 생각하자 치가 다 떨리는 가인들이었다. 더구나 가인은 그에게 서 총까지 맞지 않았던가? 그러나 리 장군은 그런 그들의 반응에도 아랑 곳 없이 뻔뻔하게도 진 사령관에게 말했다. " 섭섭하군요. 저에게 말씀도 없이 가시다니. 귀 뜸이라도 해주셨다면 이렇 게 초라하게 환송해드리지는 않았을 텐데. " 그것은 은연 중에 가인들을 환송하는 유화들을 비웃는 말이었다.그 말을 듣 고 있던 유화들의 표정이 험상 궂어졌다. 리 장군은 가인을 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 아, 가인 군. 자네 몸은 괜찮은 건가? 그렇게 다쳤었는데 말이야…. 건강 한 거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 구만,하하하. " " ......뭐,이런…. " 가인은 너무 화가 나 되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안하무인도 정도가 있지, 이 자식은 자신들을 열받게 하기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임이 분명했다. 아니,진 사령관‥! 당신은 도대체 요 일주일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저 런 자식, 짤라 버리지도 못하고! 분명, 리 장군이 용장호에서 한 행동은 진 사령관이나 유화들을 통해 중국 측의 상부에도 보고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 정부는 저 자식을 아무런 처벌도 없이 내버려두고 있었다. 인민 해방군 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가인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 저벅…. 그때, 유화가 리 장군의 앞으로 걸어왔다.리 장군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 녀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 뭔가, 소령? 내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는 건가? " " 예…. 다름이 아니라… " - 퍼억------!!! 리 장군은 유화가 하는 말을 마저 듣지도 못하고 공항 바닥에 쓰러져야만 했다. 그는 검 붉은 코피가 흘러나오는 자신의 코를 부여잡은채 놀란 얼굴로 유화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유화는 리 장군의 안면을 후려갈겼던 주먹을 천 천히 내리며 냉랭하기 그지없이 말했다. " 용장호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끝내기에는 아깝지만…. 더 이상 손을 대지는 않겠습니다. 더 손을 댔다간 제 손이 썩어버릴 것만 같 거든요, 장 군 님? " 가인들과 군인들은 입을 쩍 벌린채 유화의 행동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리 장군을 따라온 군인들도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 하고 멍하니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리 장군은 유화에게서 맞았다는 사 실에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으나, 곧 제 정신을 차리고 분노에 찬 목소리 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 이,이게 무슨…! 네 년이 미치기라도 한 거냐‥! 어떻게 상관에게!! 군법 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 계집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 " " 제 정신이 아닌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군법은 상관 없습니다. 왜 냐하면‥. " - 찌익. 자신의 휘장선을 뜯어서 리 장군의 얼굴에 던지는 유화.그녀는 방긋 웃으며 멍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리 장군에게 말했다. " 전 이제부터 군인이 아니거든요? 댁 같은 상관 밑에서 일할 마음은 추호 에도 없습니다. " - 찌익‥! 찌익! 그리고 그런 그녀를 뒤따라 휘장선을 뜯어버리는 군인들. 그들은 유화에게 웃으며 소리쳤다. " 순둥이 소령 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재밌는 일이 있었으면 진작 에 일러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 "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따라가드리죠. " 유화는 대충 그런 그들의 반응을 예상했었는지 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한숨 을 쉬었다. 네 녀석들이나 나나… 정말 둘도 없을 바보들이로구나. 정말…. 그런 그녀들에게 가인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 누,누나? 괜찮아요? 이런 짓을 해도…! " " 걱정마시게,소년. " 그러나 가인의 말을 받은 것은 뒤늦게 공항에 나타난 누대인이었다. 누대인 은 천천히 걸어와 유화의 곁에 서며 가인에게 말했다. " 이 사람들은 지금 시간 부로 중국 지부 피스 메이커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까. 아마 실직할 염려는 없을게야. 때 마침 생체 공학 부와 팔라딘 대의 자리가 몇 군데 비어있었거든. " " 예?! " 어리둥절한 얼굴로 누대인과 유화들을 돌아보는 가인. 유화와 군인들은 그 런 가인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아… 그,그렇게 된 거였구 나. 유화 누나와 아저씨들이 피스 메이커로 들어오신 거로구나…. 그제야 생 각이 정리된 가인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정말 다들! 괜히 걱정했잖 아! 피스메이커 소속이 되면 인민 해방군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더 이상 리 장군이 유화들을 위협할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다. 리 장군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똥 씹은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 제,제길…!! 이 잡것들이…!! " " …음? 자네는 아직도 안 가고 있었던 겐가? " 누 대인은 마치 이웃 집 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리 장군의 가 슴을 후벼팠다. 리 장군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군인들의 부축을 받아 도망 치듯 공항을 나가버렸고, 가인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끝까 지 꼴 사나운 인간이었잖아,저 자식은…. 누대인은 천천히 진 사령관에게 다 가와 말했다. " 자네는 정말 끝까지 무심한 사람이로구먼. 이 늙은이한테 배웅 받기가 그 렇게 싫었던 겐가? " " …힘든 걸음을 하시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여전히 무뚝뚝한 진 사령관의 말. 누 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자네는 그런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구만…. 누대인은 진 사령관을 보며 말했다. 그 것은 부모의 온기가 담긴 눈이었다. " 반드시 이루게나‥. 자네의 꿈. " " 예. 반드시. " 그리고 진 사령관들은 한국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누대인과 유화들은 가인 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 까지 그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우정은 꽃향기와 마찬가지로 역시 좀 담백한 것이 좋다. 담백한 향기일수록 사람을 은근히 그리워하게 만들고, 또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_ 、 -三毛san mao(대만작가) - 고오오오오… 한국 행 비행기가 활주로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항의 옥상에 서 그 비행기를 눈으로 배웅하는 탑승객들의 가족들. 그런 사람들의 인파 속 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 장발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그의 이름은 한시영. 오라 패턴은 블랙. " 후… " 그는 선글래스를 벗고 감홍빛 눈동자로 이륙하는 비행기를 쫓았다. 그는 세 상의 모든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처럼 시니컬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 축하한다,소년. 오라의 주인으로 선택 받은 것을…. " 그는 자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지금 여기서 마음껏 목 놓아 웃어버렸다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터 솟구치는 이 감정들을 제 어하지 못할 것만 같았기에…. 시영은 천천히 뒤돌아서서 옥상의 그림자가 지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은 마치 그림자에 녹아들듯 암흑 속으 로 묻혀간다. " 그리고… " 시영의 목소리에는 연민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 또 다른 희생양으로 선택 받은 것을…. " <제 11 화 적색지대 完> 豫告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나는 강해져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오라의 힘과 그에 따른 자신감. 그렇다. 나는 힘에 취해 있었다. 더 이상 몬스터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랬었는데… 초류향(楚留香): 오라의 주인? …이런 녀석이? 납득할 수 없다. 내가 직접 시험해보도록 할테니‥ 넌 이제부터 이 일에서 손을 떼도록. 리리스: 좋을데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 용마인 초류향.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게 된다. " 시민 씨가… 시민 씨가 나 때문에…! " 브루스: 난폭하기 그지 없는 녀석이군. 네 녀석은 오라의 힘을 제대로 사용 하는 방법도 모르는 녀석이다. …강해지고 싶냐? 유가인: .........? 그리고 나는 중국에서 온 사자를 만났다. 第 12 話 중국에서 온 사자(師資) 가인: 유리야, 반드시 시민 씨와 셋이서 생일 파티를 열자. 반드시…! 유리: 응,오빠…. 나 시민 언니와 함께‥ 함께 기다릴테니까‥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설정편.1 - 시더의 '알고 싶어요, 선생님!' - =-=-=-=-=-=-=-=-=-=-=-=-=-=-=-=-=-=-=-=-=-=-=-=-=-=-=-=-=-=-=-=-=-=-=-= - ＡＩＲ " 자! 이번 코너는 특별히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이 천재 미 소녀 시더 웰리스 님이 직접 등장하는 '알고 싶어요, 선생님!' 코너 입니 다! " 시더 웰리스. 열 일곱 살. 피스메이커의 기술부 치프로서 무기 개발을 담당 하고 있다. 슈퍼 로봇의 광팬이며 현재 즐겨보는 프로는 용자전기(勇子戰記) 엑스 카이저. " 시끄러워! 어쨌든 이 몸이 그동안 풀리지 않은 피스메이커의 기밀들을 다 얘기해주도록 하지! 사실 이런 건 본문에서 자연스럽게 풀어놔야하는 건 데 말이야. 흥.흥. " …반성하고 있습니다. " 자! 그럼 오늘은 신비의 금속 오리하르콘과 오라의 신비 A.I 컴플릿트 세 트에 관한 것을 설명해보자! " 오리하르콘이란 무엇인가요? " 오리하르콘(Oriharcon)이란! 아틀란티스 전설에서 막대한 에너지를 가진 신비의 금속으로 언급되며 중세 연금술에서 추구하던 현자의 돌과도 관계 가 있는 마력의 정수이지! "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A.I 슈츠를 구성하는 바로 그…? " 끝까지 들어! " …예. " 하지만 가이아의 옴파로스에서 발굴해낸 이 금속은 전설과는 그다지 연관 성을 보이지 않는 정신 감응 금속(精神感應金屬)으로서 그 능력으로는,인 간의 정신력에 반응한 중력장 조절과 오라의 증폭 기능, 자기 복구 기능 등이 있지! 그 제련 방법은 내 할머니, 노엘 웰리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그에 대한 사항은 현재 피스 메이커의 1급 기밀에 부쳐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발설은 금물! " 에이, 다 얘기해준다면서. " 투덜대지마! 내가 이런 수고를 하는 것도 다 네 녀석의 무능함 때문이잖 아! 난 지금 시간 외 근무 수당도 받지 않으며 무보수로 일해주고 있다고! " …감사해요. " 어쨌든, 이 오리하르콘은 현재까지 A.I 컴플리트 세트와 피스 대원들을 위한 보급 장비로서만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지. 그 외의 용도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 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 A.I 컴플리트 세트(Complete Set)란 뭔가요? " A.I 컴플리트 세트는 이차원의 생물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하여 오라 능력 자들의 힘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끌어내기 위해 오리하르콘을 이용,제조해 낸 수우우퍼 수츠인 거야! " ……뭐가 수우우퍼 수츠인 건 가요? " …묘하게 비꼬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흠! 흠! 이제부터 이 수퍼 수츠의 대단한 점을 설명해주지! 일단 A.I 컴플리트 세트는 오리하 르콘의 특징을 최대한으로 잘 살려낸 현 테크놀로지의 승리라고 할 수 있 어! " 현 테크놀로지…. 과연 그런 것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할까요? " …당연히 불가능하지.당신의 뇌 속에는 악토퍼스라고 자생하고 있는 거야? 민간인들이 알고 있는 과학이란 것은 현 인류가 이룩해낸 테크놀로지의 십분지의 일도 안 돼! 이런 정보를 시중에 유포할 정도로 각 국의 수내부 들이 문어인 줄 알아? 과학은 넘치면 적당한 것만 못한 법이야.이건 인간 의 오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무분별한 기술력의 공개는 여러 사회 문제를 일으키지.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거야. 참고로 피스메이커의 기술력 은 당신의 상상을 가볍게 비웃어줄 정도로 발달해 있다고만 알아둬. " …그래서 본론은? " 그래! 이제부터가 중요해! A.I 컴플리트 세트는 다음과 같은 4가지 기능 이 있어! " 그 첫째! " 오라 인크리스(Aura Increase)! A.I의 약자는 바로 이것을 뜻하는 거야. 말 그대로 착용자의 오라 증폭을 도우며,오라 능력이 사용자의 조절 범위 내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지. 단순히 증폭 뿐만이 아니라,오라의 정착 에도 효과가 있어. " 그 두번째! " 그래비테이셔널 필드 컨트롤(Gravitational Field Control)! 중력장(重力 場)이라고도 하지? 지구가 주변 공간에 변화를 일으켜 지구의 중력이 물 체에 영향을 미치는 공간을 말하는 거야. A.I 슈츠는 이 중력장을 사용자 가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며,이것은 A.I슈츠의 성분 금속 인 오리하르콘의 특징이기도 하지.이것으로 인해 A.I 슈츠의 착용자는 능 력에 따라 10m이상의 도약과 착지가 가능해진다고! " 계속해서 세번째! " 셀프 라이팅(Self Righting)! 자기 복원기능! 이것 역시 오리하르콘의 특 징이며, 변경된 A.I슈츠의 상태,기억 장치나 레지스터의 내용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기능이야.기본적으로 컴퓨터의 복원 기능과 유사하며 중단 발생 시 레지스터의 내용은 저장되고 중단 처리 후 원래 프로그램으로 복귀할 때 그 내용이 복원되도록 되어 있어. 복원 속도는 착용자의 오라 능력에 따라 달라지지. " 마지막 네번째! " 오라 쉴드(Aura Shield)! 이것은 오라 능력을 응용한 기술로 알려져 있지 만, 실은 A.I 슈츠의 기능이기도 한 거야. 착용자가 무의식 중에 발하는 방어 본능이 정신 감응 금속 오리하르콘과 반응하여 A.I슈츠 표면에 오라 를 집약시켜주는 거지! 그 방어력은 평상시의 A.I슈츠에 깃든 오라 방어 력의 3배 이상!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사용 가능! " 그 외의 기능은 없나요? " 옵션으로 방열, 방한 기능이 내재되어 있는 것 외에도…. 아! 중요한 것 한 가지 더! " 한 가지 더? " 이건 셀프 라이팅과 관계된 오리하르콘의 능력인데, A.I 슈츠는 평소에는 미세 분자 입자 상태로 착용자의 몸 주변에 흩어져 그 몸을 숨기고 있지 만,일정 주파의 신호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게 가능하지! 이것으로 비상 시, 재빠른 착용이 가능하며 미세 분자 상태로 존재 시에는 착용자 에게 어떠한 불편도 끼치지 않을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이것이 바로-! " 바로? " 변-------신(變身)! " ………변신? " 그래! 변신인 거야! 또 이것을 위해 꽤나 공을 들였지! A.I 컴플리트 세 트의 A.I 헬맷은 오라 능력자의 집중도를 높여주는 역할도 있지만, 실은 몬스터들이나 일반 대중에게 피스 대원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익명 보장 용으로 만들어진 거지! " …굳이 그런 수고를 할 것 까지야…. " 모르는 소리!! 이것은 아주 중요해! 왜냐하면!! " …왜냐하면? " 마스크는 가면 영웅의 필수 요소이니까!! " 쿵! " 어쨌든, 신비의 만능 갑옷 A.I 컴플리트 세트! 이것만 있으면 당신도 클 래스의 인기인! " …일리가 없잖아! <시더의 '알고 싶어요, 선생님!' 完>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Ｖolume.2 "내 생애 봄날은 왔다!" =-=-=-=-=-=-=-=-=-=-=-=-=-=-=-=-=-=-=-=-=-=-=-=-=-=-=-=-=-=-=-=-=-=-=-= 유가인 박멸 조직회 제 1 장 총 칙 제 1 조 (명 칭) 본 회는 유가인 박멸 조직회 혹은 반(反) 가인 회로 칭한다. 제 2 조 (목 적) 본 회는 솔로 정신에 입각하여 회원 상호간의 위로를 도모하며 운명 공동체 로서 공동의 적 유가인의 박멸 사업에 증진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제 3 조 (소 재 지) 본 회는 한성 고등학교 1학년 3반에 둔다. 제 2 장 회 원 제 4 조 (회원의 자격 및 탈퇴) 1. 본 회의 회원은 한성 고등학교 1학년 3반에 적을 둔 솔로 남성들을 원칙 으로 한다. (단,공동의 적 유가인의 박멸을 염원하는 참여자에 한해 1학 년 3반 외의 학급도 참여할 수 있다) 2. 본 회의 목적, 유가인의 박멸에 회의감을 느꼈거나 그에게 호감을 느꼈 을 경우, 그리고 감히 솔로를 탈출하였을 경우 그에 합당한 응징과 처벌 (자세한 사항은 제 5 장 처벌 편에서 다루겠다)을 가하여 제명시킨다. 제 5 조 (회원의 의무) 1. 본 회의 회원은 본 회의 목적에 따른 유가인 박멸을 위하여 힘쓰며,회원 상호 간에 친목을 돈독히 한다. 2. 특별히 사유가 없는 한 정기 월례회에 참석하여야 한다. 3. 반드시 이 세상의 미녀를 유가인의 마수로부터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 · · (중 략) · · 제 1 대 회장 박 재 영(인) Ｖolume.2 "내 생애 봄날은 왔다!" " 오빠… 이거…. " 가인은 유리가 건내주는 것을 엉겹결에 받아들었다. 그것은 갓 구워낸듯한 쿠키를 정성스럽게 포장지에 감싼 것이었다. 어딘가 쿠키의 모양도 무질서하 고 포장지도 엉성한 감이 있었지만, 유리의 정성이 들어간 것을 한 눈에 보 아도 알아챌 수 있었다. 가인은 의아한 얼굴로 유리에게 물었다. " 왠 쿠키야,유리야? " " 그거… 가사 시간에 만든 거. " 한성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때부터 남녀 전공 수업이 있다. 그것이 남자는 교련 수업이었고, 여자는 가사 수업이었다. 두 과목은 엄연히 틀린 과목이었 지만 응급 처치와 같은 곳에서는 겹치는 부분도 많았기에 특별히 동시에 수 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학생들이 교련을 하러 밖으로 나갈 때,여 학생들은 교실에서 가사 수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 덕분에 교련을 하러 간 가인으로서는 유리가 가사 시간에 무엇을 했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 그렇구나∼ 오늘 가사 시간에는 쿠키를 만들었었구나∼ ' 그러고 보니 어제 밤에 유리가 시민 씨에게서 이것 저것 요리를 배우고 있 었는데, 그것이 다 오늘의 가사 수업 때문이었는듯 했다. " 응…? " 가인은 자신을 계속 뚫어지게 올려다보는 유리의 시선을 눈치 채고 그녀를 바라 보았다. 유리는 내심 노심초사한 표정으로 가인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 다. 아마도 가인이 자신의 쿠키를 맘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의 눈길인 것 같았다.가인은 그런 유리의 기색을 알아채고 쓴 웃음을 지었다. 빠,빨리 먹고 감상을 들려줘야 하는 건가,이거…? - 바삭‥바삭‥ 천천히 쿠키를 씹으며 맛을 음미하는 가인. 유리는 그런 가인의 모습을 마 른 침을 삼키며 바라 보고 있었다.가인은 쿠키를 삼킨 후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가 만든 쿠키는… " 마,맛있다∼유리야∼! 이거 진짜 네가 만든 거야? " " ......응. " " 놀라운데! 나 유리가 이렇게 요리를 잘하는지 몰랐어. " " ......다 시민 언니가 가르쳐준 덕분‥. " 유리는 가인의 칭찬이 쑥스러웠는듯 애써 무뚝뚝하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뛸듯이 기쁜 그녀였다. 오빠한테 칭찬 받았 어….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 자신을 서포트 해준 시민에게 일말의 감사를 보내는 것을 유리는 잊지 않았다. 가인은 정말 유리의 쿠키가 맛있었는듯 연 신 그녀의 쿠키를 집어먹고 있었다. ' 모양도 별로 예쁘게 나오지 않아서 걱정했었는데… 맛이라도 있다니까 다 행이다…. ' 가인이 쿠키를 먹는 모습을 조용히 행복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리.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유리와 가인의 뒤로 들 려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에 의해 사건은 새로운 전개를 맞이해야 했다. " 가인, 오늘 가사 시간 때 내가 만든 쿠키 맛도 좀 봐주지 않겠어? " 그녀의 이름은 테레이아 민체스터. 4월 달에 한성 고등학교로 온 외국인 전 학생. 그리고 한성 고등학교의 꽃으로서 이미 수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낸 에 메랄드 머리 빛의 신비한 소녀. 그런 그녀가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 면서 가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테레이아는 가인에게 다가와 그 의 귀에 예의 감미로운듯한 음성으로 속삭이며 말했다. " 쿠키를 만드는 내내 가인 만을 생각했어. 가인이 먹어준다면 나‥ 행복할 거야‥. " " 응? 아,아아∼ 그,그래‥. 먹어야지. 자,잘 먹을게,테레이아. " 언제나와 같이 테레이아의 대담한 페이스에 휘말려 얼굴을 붉히는 가인. 그 는 테레이아가 내미는 쿠키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만든 쿠키는 별 모양에서 부터 초승달 모양, 하트 모양에 까지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테레 이아는 가인이 들고 있는 유리의 쿠키를 힐끔 바라보았다. 유리의 쿠키 모양 은 분명, 테레이아의 쿠키 모양과 비교하자면 볼품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테 레이아는 그 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 어머, 가인? 그 손에 들고 있는 귀 엽 게 생긴 쿠키는 뭐니? 너무 개성있 게 생겼다,훗…. " - 빠직…. 그 말을 듣고 있던 유리의 이마로 가는 실핏줄이 떠올랐다. 가득히나 테레 이아가 가인에게 엉겨붙는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죽겠는데, 저렇게 노골적 인 비웃음을 받게 되었으니 참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유리는 테레이아를 노 려보며 이를 갈았다. " …지금 그 말은 전쟁 선포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 " 훗…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걸까? 난 단지 개성이 있다고 얘기 했을 뿐인데. 하긴 뭐… 개성이란 그 사람의 성격,취향, 사고방식이 나타 나는 것이니까‥. " " …접수. 지금 이 순간 부터 전쟁이야. " - 파지지지지지직!!! 그와 동시에 1학년 3반을 뒤덮는 푸른 방전 현상이 시작되었다.그것은 테레 이아와 유리의 사이에서 거세게 푸른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가인은 망연자 실하게 그녀들의 쿠키를 양손에 든채 내려가는 기압으로 몸을 떨었다. ' 어,어째서 또 이렇게 되는 거야∼∼∼∼!!! ' 어째서 하루라도 무사히 넘어가는 날이 없는 거냐고?! 모든 것은 자신의 원 죄였지만,죽었다 깨어나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가인이었다. 그때,그런 가 인의 어깨를 손으로 두들기며 나타나는 한 인영. 그 인영은 다름 아닌… " 재영아? " 바로 자칭 1학년 3반의 분위기 메이커이자,가인과의 죽마고우 박재영이었다. 재영은 혀를 차며 가인에게 말했다. " 쯔쯔∼ 나의 절친한 벗 가인아, 저렇게 미녀들이 싸우는 걸 잠자코 바라 보고 있는 것은 남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 " 그럼 어쩌라고? 말려보기라도 할까? 저 분위기에? " " .........아니. 그건 솔직히 무모한 짓이다. " 재영은 테레이아와 유리의 방전 현상에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질린 표정 으로 답했다. 아무리 미녀가 좋은 그라지만, 많은 시행 착오 끝에 저 분위기 에 휩쓸렸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진보 라고 할 수 있었다. " 가인…? " 그때, 뭔가 주저하는듯 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가인의 뒤에서 들려왔다.가 인과 재영이 뒤돌아 보니, 그곳에는 1학년 3반의 교실을 조심히 살펴보며 차 마 교실로는 들어오지 않고 있는 마리가 있었다. 가인은 그런 마리를 반갑게 부르며 다가갔다. " 마리 선배? 어쩐 일이에요? 아직 점심 시간도 아닌데…. " 평상시, 점심을 같이 먹을 때 외에는 학교에서 직접 자신을 찾아 오는 일이 없었던 마리였다. 무슨 일이시지? 혹시…. 가인은 재영한테 들리지 않게 조 심스럽게 마리에게 물었다. " 본부에서 연락이라도 온 거에요? 아니면 몬스터가… " " 아,아니. 그런 일로 온 건 아니야…. " 마리는 당황하며 가인의 말을 끊었다. 그럼 무슨 일로? 의아해하는 가인을 앞에 두고 마리는 잠시 고민에 빠진듯 고심의 표정을 짓다가, 곧 마음을 정 한듯 뒤에 감추고 있던 '그것'을 가인의 앞으로 꺼냈다. " 이거… 괜찮다면…. " " 예? " 가인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마리가 건내준 것을 바라보았다.그것은 반듯 하게 직육면체로 잘린 하얀 케익 같은 것이었다. 아니… 케익보다는 왠지 떡 에 가까운듯한…. 가인은 접시에 있는 그 정체 불명의 음식에 마리를 바라보 며 물었다. " 선배? 이건…? " " 백설기.멥쌀가루에 물 또는 설탕물을 내려서 시루에 안쳐 깨끗하게 찐 한 국 전래의 시루떡이야. " 배,백설기…? 가인은 마리의 설명에 쓴 웃음을 지었다. 아니, 선배…. 제가 물은 건 그게 아니라… 왜 이걸 제게…? 마리는 가인이 뭘 물은 건지 뒤늦게 깨닫고서는 당황하며 말했다. " 아,아니… 그게… 음. 오늘 가사 시간은…케익을 만드는 시간이었기에…. " 케익을 만드는데 어째서 가지고 온 건 백설기였는지 의문이었지만, 가인은 애써 웃으며 마리에게 말했다. " 아, 고마워요. 마리 선배. 그런데 이거‥ 제가 먹어도 되는 거에요? " " ......음. 그럴려고 만든… 거니까‥. " 마리는 무표정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귀가 달아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 었다. 가인은 그런 마리의 모습에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 그럼 잘 먹을게요,선배. 그런데 아‥ " 가인은 바로 백설기를 먹을려고 했지만, 그의 손에 들린 쿠키들 때문에 자 유롭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가인은 테레이아와 유리에게서 받은 쿠키들을 옆에 있던 재영에게 넘겨주었다. " 재영아, 잠시만 들고 있어주라. " " 어? 응. " 재영은 엉겹결에 가인에게서 쿠키를 건내받고서는 쿠키와 가인을 번갈아 바 라봐야만 했다. 가인은 마리에게서 받은 백설기를 먹으며 그녀와 담소를 나 누고 있었다. 재영은 아무런 생각 없이 손에 들린 쿠키를 바라보았다. ' 이것이… 유리 양과 민체스터 양의 정성 어린 손길로 갓 구워진 쿠키… ' 그녀들은 아마도 가사 수업 시간 내내 사랑을 담아 그 여린 손가락으로 이 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백옥같은 손으로….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쿠키를 하나 집어들어 자신의 입 안으로 넣었다. - 와삭….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쿠키의 소리.그 향과 맛이 재영의 입 안을 가 득 메웠다. 재영은 감동의 물결에 몸을 맡기며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이것이 … 이것이 바로 민체스터 양과 유리 양의 쿠키…. ' 마,맛있어∼∼ ' 재영은 지금 이 순간,그의 인생에 다시 없을 것만 같은 행복에 취하고 있었 다. 그는 무아지경의 경지에 빠져 닥치는 데로 쿠키를 입에 집어 넣었다. 그 가 조금만 더 제정신이었다면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련만…. 하지 만 재영은 입 안 가득 퍼지는 쿠키의 향에 이미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 다.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도교의 지옥 중 하나인 구유지옥(九幽地獄) 중 죄 인을 차가운 연못에 집어넣고 얼음창,서리칼로 뼈와 근육을 찢어 놓은 다음, 백가지 독이 들어간 즙을 뿌려 몸을 녹이고 내장을 파괴시킨다는 북방 명령 (溟怜)의 지옥에서 들려오는듯한 음성들이 들려왔다. " 어째서… 우리의 쿠키를‥ 재영… " 그것은 바로 방전 현상을 멈추고 재영을 돌아보는 테레이아와 유리의 음성 이었다. 재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서는 속으로 비명 을 질렀다. 히이이이이이이익…!! 도,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 어째서 그 쿠키가‥ 가인이 아닌‥ 어째서… " 재영은 살아야만 했다. " 그,그게…! 가인이 녀석이 잠시 저한테…! 그래! 그 녀석이 저 한테 맡긴 거랍니다,민체스터 양! 유리 양! 그,그렇지? 가인아?! " 재영은 살기 위해 애절한 빛을 담은 눈으로 자신의 뒤에서 마리와 얘기하고 있을 가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변호해 줄 가인은… ' 어디 간 거야-------!!! ' 그 자리에 없었다. 가인은 그 사이에 마리를 따라 잠시 밖으로 나간 모양이 었다. 재영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살기의 파동에 차마 뒤로 눈을 돌 리지를 못하고 체념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공간의 여운이 주는 여백의 미 소였다. ' 그래…. 세상은 원래부터 이렇게 가혹했던 것…. ' 그리고 재영은 그 날, 지옥을 보았다. " 어째서 유가인, 그 녀석에게만∼∼∼∼∼∼!!!! " 이곳은 24구역에 위치한 박재영의 집.재영의 방에서는 한 남자의 비통한 외 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올해로 15세가 되는 박재영의 동생,박재민은 그런 형 의 태도를 언제나 보아왔기에 이미 익숙해진듯 태연스럽게 말했다. " 형아, 그렇게 소리지르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 맛사지 하고 있는 계란이 깨져 버리겠어. " 재영의 얼굴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참혹할 정도로 부어 있었다. 다 테레이아 와 유리의 신 합체기로 인한 결과물이었지만, 절반 쯤은 재영이 자초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결과였다. 재영은 무겁게 내려 앉은 눈을 날계란으로 문 지르며 이를 갈았다. "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그런 녀석에게 유리 양도! 민체스터 양도! 거 기다 마리 선배까지∼∼!!! 유가인! 어째서 네놈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 은 얼굴로 그녀들의 맘을 겟-한 거란 말이냐!! 도대체 무슨 수로!! " 그것은 바로 재영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화산 폭발이라도 하듯이 터져 오 르고 있던 절규의 외침이었다.그런 형의 모습에 재민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 그쯤 해둬,형아.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땅만 파봤자 형만 자괴감으로 괴 로울 뿐이라고. 형의 그런 행동 양식도 다 형의 피해 망상에서 오는 거야. 현실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공동의 적을 만들어서 애꿋은 사람 만 들볶 는 거지. " " .........잔인한 자식. " 재영의 마음을 심층 구석 구석까지 뒤집어 까발리는 재민의 분석에 재영은 상처를 입었다. 재민은 눈을 초롱 초롱 빛내며 그런 재영을 위로했다. " 하지만 걱정마,형아. 난 그런 형아라도 좋으니까. " " ......퍽이나 고맙구나. " 재영은 수려한 재민의 얼굴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어떻게 자신들의 가족에 게서 재민과 같은 외모의 녀석이 나올 수 있었는지 재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재민은 형인 재영과는 달리 이제 15세 임에도 불구하고 160을 넘는 훤칠한 키에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를 가진 미소년이었다.재영은 문득 어째서 이 자식이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지내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야,박재민. 그런데 넌 여자 친구 안 만들거냐? " " 그,그런…!! 형아!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형아를 놔두고 내가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 재영의 말에 상처 받았다는듯이 눈시울을 붉히며 소리를 지르는 재민. 뭔가 뺨을 붉히며 재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위험스러워 보였지만 이미 15년을 같이 살아온 동생의 모습에 재영은 그러려니 했다. 아니, 오히려 재영은 재 민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감동의 눈초리로 동생의 손을 맞잡고 소리쳤 다. " 나,나 몰랐구나‥! 재민이 네가 그런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 " " 그,그럼 형아‥ 드디어 내 마음을 알아준 거야? " " 그래,알고 말고! 이 형에게 애인 하나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일부러 내가 애인이 생길 때 까지 솔로로 지낼려고 했던 거로 구나! 크흑‥! 미안하다, 동생아. 이 애인 하나 못 만드는 못난 형아를 용서해줘‥! 크흐흐흐흑‥! " ' .........그게 아닌데. ' 재영에게 손이 맞잡힌 것을 기뻐하면서도 재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 하아…. " 다음 날 아침, 재영은 힘 없는 발 걸음으로 학교에 등교했다. 하나 뿐인 죽 마 고우를 적으로 몰아붙이고 동생에게 까지 피해를 주며 살아 가는 자신이 왠지 한심해져 재영은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 그래. 모든 것은 내가 못나서일 뿐…. ' 평상시의 포지티브한 생각 마저 어디론가 날려 버리고 네가티브의 사고 방 식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재영. 그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던 그 끝이 없을 낙천적인 모습을 떠올려 보면 지금의 재영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 습이었다. " 에휴∼ " 재영은 본관 건물에 들어와 자신의 신발장으로 걸어갔다. 귀찮았지만 신발 은 실내화로 갈아 신어야 하지 않겠는가? 왠지 몸에서 기운이 쫘악∼ 빠지는 것이 신발장을 여는 것 조차 힘들었다. - 끼익‥! 기이한 쇳 소리를 내며 열리는 신발장. 그때 뭔가가 재영의 신발장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뭐지? 뭐가 떨어진 거야? 재영은 슬쩍 밑으로 시선을 내 려 떨어진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재영의 눈동자가 천천히 커 지기 시작했다. " .........편지‥? " 어,어째서? 어째서 편지 같은 것이 내 신발장에서 나올 수가‥. 재영은 왠 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떨어진 편지를 주워들었다.노란 편지지에는 깨 끗한 글씨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박재영 군에게」 재영의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다. 서,설마 이것이 그 유명한 신발장 안의 러 브 레터…? " 하,하하하하∼ 설마 그럴리가∼! 나에게 러브 레터라니∼ 무슨 청구서 같 은 것 임이 틀림없어∼(누가 학교 신발장에 청구서를 넣어 놓겠냐…) 러 브 레터일리 없을 거야∼ 암∼ " 재영은 애써 현실을 부인하며 헛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사시 나무 떨리듯 떨리며 편지 봉투 안의 편지지를 펼치고 있었다. 재영은 떨리는 눈동자로 편지지에 적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안녕, 박재영 군? 갑자기 이렇게 편지 보내서 놀랐지? 만약 놀랐다면 미안해. 하지만 조금이라도 재영 군의 가슴이 두근 거렸다면 나도 기쁠 거야. 으음… 내가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역시 편지로는 밝히기가 그렇네….이런 건 역시 직접 만나서 얘기해 야 한다고 생각해. 재영 군도 그렇게 생각하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점심 시간에 학교 옥상 뒤에서 나와 만나줘. 으응… 그때 재영 군이 안 나와도 내가 재영 군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나와 줬으면 좋겠어…. 나 재영 군에게 할 말이 있거든…. 저기, 그럼 나 꼭 기다릴테니까… 점심 시간에 나와주세요. -Y " ......어머나‥. " 이, 이거 정말… 러브레터? - 딩동댕동‥ 재영은 1교시 종이 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멍하니 편지를 들고 서 있었 다. 점심 시간 까지는 앞으로 4시간이 남아 있었다…. 2교시 휴식 시간… 그 때부터 박재영에게서는 이상한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 오늘의 안건은 성마리 추종회와 본 회의 결합에 관한 건 입니다. " 유가인 박멸 조직회의 제 2인자이자, 부회장인 엔비 Q(실명 미공개)는 차분 한 어조로 원탁 회의의 장을 열었다. 반 가인 회의 일원들은 모두 진지한 눈 빛으로 엔비 Q의 얼굴을 주목하고 있었다. " 평상시 마리 선배에게 악성 고독과 같은 존재로 붙어 있던 유가인은 아마 성마리 추종회,그녀들에게도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우리 회와 성마리 추종회의 이해 관계는 성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누가 얘기 했었던 가요? 우리는 그녀들과의 결합에 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려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 " 하지만… 하지만 그녀들과 저희 회의 설립 취지는 엄연히 틀립니다. 결합 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 유가인 박멸 조직회의 모범 회원이자 가녀린 심성의 소유자, 제로스 1호(역 시 실명 미공개)는 떨리지만 굳은 고집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가 반대하고 나서자 몇몇 회원들도 같이 들고 일어났다. " 맞습니다! 저희 회의 목적은 유가인의 공존계 박멸을 궁극으로 삼고 있는 것! 그런데 성마리 추종회와 같은 팬 클럽 따위와 몸을 섞는다는 것은 우 리 반 가인 회의 수치입니다! " " 그렇습니다! 그 결합은 오히려 저희의 몸에 독을 섞는 것이나 마찬 가지! 섣부른 결합이 가져올 본 회의 파장을 부회장은 알고나 계신 겁니까! 이 건은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습니다! " " 흐음…. " 엔비 Q는 거센 회원들의 반발에 고뇌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반대가 있 을 줄은 예상했었지만,설마 이렇게 까지 기를 쓰며 거부할 줄은 그로서도 예 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솔직히 엔비 Q의 입장에서는 성마리 추종파와의 합의 건은 반대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적극적으로 이 건을 추진하고 만 싶었다. 부회장으로서,회의 일에 앞장 선 엔비 Q로서는 자신들 만으로는 공공의 적 유가인을 박멸시키기에는 많은 무리수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 던 것이다. 더구나 무엇보다 그는… ' 더 이상 남자들 만의 땀내나는 회의는 사양하고 싶다고…! ' 그렇다. 엔비 Q. 그는 유가인 박멸 조직회의 부회장이기 이전에 이성 친구 하나 없는 나날이나 보내는 솔로리스트를 탈출하고 싶은 건전한 17세의 고교 생이었던 것이다. 만약 본 회가 여자들로만 구성된 성마리 추종파와 결합하 기만 한다면, 대량의 여성 회원들이 생기게 된다. 당연히 이성과의 접촉 기 회가 높아지는 것이다! 왜 이들은 눈 앞의 사소한 것에 사로잡혀 더 큰 이상 을 보지 못한단 말인가! ' 남을 질투하기 이전에 자신들이 솔로를 탈출 해버리면 그만 아닌가! ' 그것은 유가인 박멸 조직회에 몸을 담고 있는 회원 답지 않게 놀랍도록 건 설적인 사고 방식이었다. 엔비 Q. 그는 이 반 가인 회에 있기에는 너무나 안 타까운 인재였던 것이다. 그는 벌써부터 반 가인 회의 한계를 알아차리고 있 었다. ' 어떻게 해서든 이 건을 성사시켜야 한다…! ' 솔로를 탈출할 그 날까지! 건전한 본 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엔비 Q는 필 살의 각오를 다지며 반대파의 의견을 잠재울 '무기'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 이것은… 성마리 추종회에서 보내온 약간의 성의…입니다. " - 촤락…! 엔비 Q의 품에서 펼쳐져 나와 원탁을 감싼 것.그것을 바라보던 회원들은 모 두들 할 말을 잊고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엔비 Q가 꺼낸 무기. 그 것은 바로 다름아닌… '체육대회에서 육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체육복 차림의 성마리' …의 특대 포스터 였던 것이다! " 이,이런 굉장한…!! 어떻게 이런 대단한 작품을…! " " 놀랍군요! 이 무방비적인 포즈와 대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듯한 노골 적인 카메라의 앵글! 이 작품을 만들어낸 과감하고 용기 있는 작가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 " 이,이것은 같은 동성이기에 순간의 방심을 틈 타 찍은 사진! 여자이기에 여자로서만 찍을 수 있는 사진이로구나…! " 마리의 포스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연신 찬탄과 감탄을 내뱉는 회원들.그 반응은 엔비 Q가 충분히 예상했던 것들이었다. 일이 자신의 뜻 대로 되어 간 다는 증거! 그것은 분명 기뻐할 만한 일이었지만,이렇게까지 단순하게 반응 하는 회원들을 보게 되자 엔비 Q는 일말의 서글픈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단 말이지…. 어쨋든, 엔비 Q는 계획했던 데로 일을 밀고 나갔다. "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마리 추종회가 추진하는 마리 프로젝트의 빙산의 일 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벌써 팬시와 일러스트 쪽에까지 손을 뻗었 을 뿐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 작업에 까지 착수했다고 합니 다. " " 오오---!! 팬시와 일러스트라고! " " 본격적이로군! 이건 기대해 볼 만하다! 대박의 가능성이 있다고! " 회원들은 정신 없이 엔비 Q의 말에 끌려다녔다. 엔비 Q는 회심의 미소를 지 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더더욱 열광하라고. 그럴수록 성마리 추종회와의 결합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명. 그런 엔비 Q의 회유에 넘어 오 지 않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가녀린 심성의 모범 회원 제로스 1호였다. " 모두들 정신 차려! 너희들은 우리의 테레이아 양과 유리 양을 잊어 버리 기라도 한 것이란 말이야! " " 웃…! " 움찔하는 회원들. 제로스 1호는 그 기세 그대로 회원들을 몰아붙였다. " 우리는 애초에 테레이아 양과 유리 양을 공공의 적,유가인의 손에서 지켜 내기 위해 조직되었다! 저런 포스터 같은 것에 혹하여 처음의 마음 가짐 을 잃어버려서는 안돼!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녀들을 수호할 수 있단 말 이야! 난… 난… 난 단지 그녀들의 행복 만이… 흑…. " 자신의 감정에 복 받쳐 눈물을 훌쩍이는 제로스 1호. 그러자 주위의 회원들 이 그런 그를 위로했다. " 알아! 너의 마음을! " " 미안… 우리가 너무 경솔했다…. 그래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 "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녀들이었던 것을…. " " 아,알아 주었구나, 너희들…. " 뜨겁게 서로를 끌어 안으며 해맑은 미소를 짓는 그들.그런 회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엔비 Q는 쓴 입맛을 다셨다. 제로스 1호…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놓 다니….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고! 엔비 Q는 각오를 다지며 말했다. " 하지만 여러분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 " 무,무슨…! " " 분명 본 회의 설립 목적은 테레이아 양과 유리 양의 수호에 있습니다! 그 러나 유가인의 마수에 빠진 것은 비단 그녀들 뿐 만이 아니지요! 우리는 공공의 적 유가인의 손에서 이 세상의 모든 여성들을 지키기로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마리 선배 또한 그 마수의 손에서 지켜내야만 하 는 것이 자명한 일 아니겠습니까! " " …그,그렇지. 분명…. " " 맞아‥. 테레이아 양과 유리 양은 소중하지만…마리 선배 또한 소중하다. " 금새 동요하는 회원들. 정말 줏대 없는 것들이다. 결국,엔비 Q를 위시한 개 혁파와 제로스 1호를 위시한 보수파로 나뉘게 된 반 가인 회. 그들은 생각했 다. 이 건에 관해 종지부를 찍어줄 수 있는 이는 자신들의 회장 박재영 뿐이 라는 것을! 자신들의 질투와 욕망을 포용했던 그의 의견이라면 모두들 군말 없이 따르기로 결심하는 엔비 Q와 제로스 1호들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회 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의 태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회장은… " ......... " 멍한 눈초리로 회의 내용을 제대로 듣기라도 한 건지 의심스러울 태도로 앉 아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약이라도 한 것 같은 재영의 태도에 회원들은 조 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회장? " " ......삶이란… 놀라움의 연속… " 중얼거리며 재영이 내뱉은 한마디. 회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무,무슨 소리지?!?! ' 물론 알리가 없겠지만. 4교시 체육 시간… 여전히 재영은 이상했다. " 자자∼ 주목하도록. 허들(Hurdle)은 1850년 영국의 크로스컨트리 경주에 서 시작하였다. 남자는 110m·200m·400m·3,000m 장애물경주,여자는 100 m·400m가 있으며, 남자 200m를 제외하고는 올림픽 정식종목이다.남녀 모 두 10개의 허들을 세워 이것을 뛰어넘어 승패를 겨루는 경기인데… " 지연은 다음 시간에 있을 허들 시험을 위해 오늘은 특별히 교실 수업을 행 하고 있었다. 원래, 그녀의 수업 방침은 학생들이 하고 싶은 데로 내버려 둔 다‥가 모토였었지만, 그녀도 내신을 따지는 실기 시험 만큼은 무시할 수 없 었기에 특별히 적성에도 맞지 않는 교내 수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런 수업은 선생이나 학생이나… 모두에게 피곤하기만 한 수업이라고… ' 수업은 좀 더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그것이 지연의 생각이었다.정말이지 놀 랍도록 개방적인 교육 방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지,관점의 차이에서 보자 면 그것은 무성의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게 문제였지만…. (사실 진실은 후자 일런지도 모른다) ' 후… 역시나 벌써부터 조는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하는군. ' 지연은 짜증이 난다는듯 머리를 긁적이며 출석부를 펼쳤다. 학생들의 졸음 을 깨게 만드는 데에는 호명하여 질문하는 것이 최고겠지…. 지연은 눈으로 학생들의 이름과 번호를 훑다가 한 이름을 불렀다. " 32번 박재영! " " ......... " 하지만 녀석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지연의 미간이 점점 모여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잘근 잘근 씹으며 눈으로 재영을 찾 았다. 도대체 이 놈의 자식은 말이지… " 박재영! 대답 안해?! " " ......... " 어허라… 이 놈 봐라.지연은 한 숨을 푸욱 내쉬며 재영을 바라보았다. 아무 래도 간덩어리가 부어도 단단히 부은 모양이었다. 최근들어 너무 민주적으로 자신이 수업을 하지는 않았던가 생각해보는 지연이었다. 물론 그런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 ......... " 재영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입을 헤∼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 었던 것이다. 지연과 학생들은 그런 재영의 표정에 약간 질린 얼굴을 하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잠을 잤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재영은 남들이 자신을 주목하건 말건 여전히 멍한 표정을 고수하며 자신 만의 상상의 나래에 빠져 있었다. 지연은 결국 이마에 실핏줄을 떠올리며 출석부를 들어올렸다. 감히 내 수업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고 계셨겠다… 배짱이 좋아졌구나, 네 놈. - 뻐억----!! 통렬하게 울리는 출석부의 소리. 지연의 손을 떠난 출석부는 정확하게 재영 의 얼굴에 작열했다. 그 예사롭게 울리지 않은 출석부의 소리를 보나 재영의 맞은 부위를 보나 꽤나 그에게는 치명적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스 르르 밑으로 떨어지는 출석부 사이로 드러난 재영은 쌍코피를 터뜨리고 있었 다. " 헤,헤헤‥ " 하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작은 웃음 소리.그렇다! 박재영.그는 쌍코피가 흐르는 와중에도 히죽 히죽 멍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그 로테스크하고도 지독한 부조리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재영은 자신이 맞았 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듯 약에 취한 웃음 소리를 흘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지연과 학급의 모두는 그런 재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소,소름 끼쳐‥! ' 그리고 결국, 문제의 점심 시간이 다가왔다. ' 드,드디어 승부의 시간인가‥! ' 점심 시간. 재영은 4교시 마침 종이 울리자 마자, 모든 것을 도외시하고 학 교의 옥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너무 긴장되서 점심 식사를 먹겠다는 건 생각 조차 할 수 없었던 그였다.재영은 그 문제의 러브 레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 과연 도대체 어떤 프리티 걸이 나에게 이것을…! ' 편지의 발신녀를 벌써부터 프리티 걸로 확정짓고 있던 재영.하지만 곧 네가 티브한 생각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 아,아니야…! 프리티 걸이 아닐지도…! 어째서 나는 편지의 발신녀가 프 리티 걸일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무슨 이유로! 무슨 근거로! 발신녀는 평범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추녀일 수도 있다! 섣부른 판단 은 금물이다, 박재영…! 너무 기대를 했다간 실망도 커지는 법! 그래…!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포인트일 수도 있다‥! 그래! 바로 그 거야! 기대를 버리자! ' 재영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를 않기로 했다. 그러자 이번에 떠오른 생각은 ' 발신자는 과연 어떤 여자일까?' 였다. ' 이런 러브 레터를 보내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의외로 적극적이고 행동력 이 있을 수도 있어‥! 거기다 직접 대면해서 나에게 고백을 하겠다는 대 담성 까지! 의외로 그녀는 운동부일 수도 있다‥! ' 잘도 거기까지 추리를 할 수 있는 거로군.하지만 재영은 거기서 한 가지 오 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그는 재빨리 러브 레터를 펼쳐 꼼꼼히 세부적으로 읽 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 어,어디에도 그녀가 나에게 사랑 고백을 하겠다는 얘기같은 것은 없다‥! ' 바로 그것이었다.애초에 할 말이 있으니 학교의 옥상으로 올라와 달라는 것 뿐이었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던 것 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 편지를 러브 레터라고 단정짓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또 네가티브한 생각이 작용. ' 편지의 발신인은 혹시 여자가 아닐런지도 모른다‥! ' 그렇다. 단지 Y라고만 적어 놓았는데, 그것이 남자일런지 여자일런지 재영 이 알 도리가 없었다. 서,설마 그런 끔찍한 결과일리가…. 세상에 어떤 남자 놈이 같은 남자의 신발장에 이렇게 편지를 적어 놓겠냐….변태가 아니고서야… ' 그,그런∼∼ 변태?!!!! ' 역시나 네가티브 작용. 재영은 머리를 감싸쥐며 속으로 비명을 올렸다.그래. 이 놈의 세상, 여러 군상의 인간들이 있을테고, 그 중 자신을 타켓으로 삼은 이상 성욕 변질자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 아,안돼‥! 난 아직 그런 변질자의 세계는 알고 싶지 않다고-----!! ' 그렇다는 것은 후에는 알고 싶은 의사가 있다는 것? 어쨋든, 재영의 네가티 브한 사고는 끊임 없이 그를 번뇌에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재 영의 108 번뇌는 그를 부르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 저기‥ 혹시 박재영 군? " " 헛---!! " 드,드디어 온 것인가?! 과연 미녀냐 추녀냐 아니면 그것도 아닌 변질자냐!! 재영은 이후,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지도 모를 발신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 다. 그리고 그런 재영의 눈에 들어온 이는‥ " 나와 줬구나‥ 나, 기뻐…. " ' 허어어어어어어엇-----!!! ' 여자다. 귀엽다. 예쁘다. 추녀가 아니다. 무엇보다 변질자가 아니다아아앗! 볼을 붉힌채 재영을 올려다보고 있던 발신자는, 그의 처음 예상대로 프리티 걸이었던 것이다! ' 미인이다∼! ' 정확히는 미인이라기 보다는 귀여운 외모였지만, 콩깍지 화 현상이 일어나 고 있던 재영에게 이 소녀는 이 세상에 다시 없을 미인으로만 보이고 있었다. 재영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보낸 러브 레터를 들어올렸다. " 이,이거‥ 네가… " " 으,으응. 갑자기 그런 편지 받아서 당황스러웠지? 미안해요. "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재영에게 사과하는 그녀.재영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휘저었다. " 아,아냐! 나,나 괜찮으니까‥! " " 그래? 와∼ 다행이다∼ " 그녀는 활짝 웃으며 뛸듯이 기뻐했다.그 모습에 재영은 속으로 감동의 눈물 을 흘렸다. 귀,귀엽다아아아아아∼ 재영은 애써 입이 찢어질려는 것을 참아 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아,저기‥ 그런데… 무슨 일로 날…? " " 아,맞아! 내 정신 좀 봐. 깜빡하고 있었네. " 자기의 머리를 살짝 두들기며 혀를 삐죽내미는 그녀. 그것은 충분히 매력있 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재영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우선 내 소개부터 할게. 내 이름은 유시내. 재영 군의 옆 반인 1학년 4반 이야. 소속 동아리는 유도부. 자, 우리 악수할까? " " 아,으응… " 재영은 엉겹결에 자신의 이름을 시내라고 밝히는 여학생과 악수를 나눴다. 재영은 시내가 밝힌 자기 소개를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유도부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유시내라고? 이 름도 예쁘구나…. 그리고 시내는 그런 재영을 향해 쑥스러운 미소를 보내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내가 재영 군을 보자고 한 이유는… " 웃! 그래! 바로 그게 남아있었군! 재영은 순간,몸을 움찔 떨며 생각했다. ' 그,그래…! 솔직히 이런 귀여운 애가 나에게 고백 같은 걸 할리가 없겠지. 동아리가 유도부랬으니까 뭐, 동아리 가입 권유 같은 걸 할려는 게 틀림 없어.하,하하하… 그래. 박재영. 미리부터 김칫 국 마시지 말자. 고백 받 을리가 없다고. 이런 아이에게 내가 고백 받을리가… ' " 나와 사귀어 줘!! " 고백… 받아버렸다…. 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응…. " 너무도 어이 없게 커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삶이란 예측불허, 그렇기에 그 의미를 가진다‥ 어느새 마지막 7교시가 끝나고 학교에서의 일과가 마무리 되었다. 정말이지 유수와 같은 시간의 흐름이라 할 수 있겠다.재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지연이 종례를 끝마치고 난 뒤였다. 뭔가 재영에게는 여러가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그렇게 비몽사몽하는 재영에게 가인이 말을 걸어왔다. " 재영아, 오늘 잠깐 서점에 들렸다가 가자. 오늘이 '한국 고전 문답 100선' 이라는 책이 출간되는 날이라고 테레이아가 며칠 전부터 벼르고 별렀었거 든. 뭐,나도 사고 싶은 책이 있었고 유리도 따라간다니까‥ " 가인은 슬쩍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이 정도만 얘기해줘도… - 간다! 가줄테다! 인간 박재영, 이 한 몸 불사르겠다! …라고 하며 여느때 처럼 법썩을 떨기 마련이었을텐데…. 그러나 재영은 가 인의 예상을 뒤엎고 아주 아주 뜻 밖의 반응을 보였다. " 어? 하,하하∼ 미안하다,가인아. 나 오늘은 안되겠다∼ " …라고 하며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가인은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목격한 외계인 관계자 처럼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 재,재영아…? 너‥ 박재영 맞는 거냐? " " 응? 무슨 소리냐? 어쨋든, 그렇게 됐으니까 잘 갔다오도록 하여라∼ " 재영은 콧 노래까지 부르며 자신의 가방을 둘러맸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 할 수 없다. 저 박재영이라는 녀석이 이런 이상한 반응을 보일리가 없다. 아 니,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박재영! 넌 지금까지의 네 존재 의의를 부정 하고 있는 거라고!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재영에게 물었다. " 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아니면 무슨 앓고 있는 병이라도? 어서 얘기해봐! " " 뭐? 앓고 있는 병은 없지만… 하긴, 훗.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지…. " 재영은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들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우수에 찬 표정으 로 창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 꼈다. 이 녀석… 제 정신이 아닌 것 만은 분명해‥.사고 회로에 문제가 생긴 거라고! "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지…. "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런 가인의 의문은 다음에 들려오는 한 목소리에 의해 풀리고 말았다. " 재영 군! " 재영을 부르는 한 여 학생의 목소리! 가인이 돌아본 그 곳에는 한성 고등학 교의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한 귀여운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그녀의 이름 은 유시내. 오늘 점심 시간 부로 재영의 여자 친구가 된 소녀이다.재영은 활 짝 얼굴을 펴며 그런 시내를 불렀다. " 아,시내야∼!! " 이 갑작스러운 전개에 가인은 재영과 시내라는 여학생의 얼굴 만을 연신 돌 아봐야 했다. 어,어떻게 된 거지? 이 상황은? 뭐야 이건? 누가 내게 설명을 좀 해줘∼!! " 많이 기다렸어? " " 아아니∼ 그리고 뭐, 바로 옆 반인데 좀 기다리는게 대순가? " 실로 다정스럽고도 자연스러운 저 대화 패턴!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인과 1학년 3반 일동은 숨을 죽였다. 가인은 아직 상황이 이해가 안된다는듯 혼란 스러운 표정으로 재영에게 물었다. " 재,재영아? 지금 이게 어떻게 된‥ " " 아아아∼ 나의 절친한 벗 가인아! 난 지금부터 이 여성 분과 함께 하교를 해야겠으니까 내일 보자꾸나! 좋은 하루 보내라고! 아하하하하하하∼ " 실로 자아 도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저 웃음 소리. 그러면서 재영은 시내 와 함께 현란하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가인과 1학년 3반 일동은 멍한 얼굴로 재영의 사라져 간 자취를 뒤쫓는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여자 친구…생긴 거냐…? " 그,그런! 박재영! 그 녀석에게 드디어 여자가 생겼단 말인가?! 가인은 자신 이 너무 섣불리 짐작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래. 단순히 알고 지 내는 친구 사이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재영이 접하는 여 자들 중에서도 그녀는 유독 친근한 파장을 내뿜고 있었다. 저 시내라는 여학 생은…! ' 그런가…. ' 가인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재영이 녀석….드디어 여자 친구가 생길 걸까‥. 왠지 자신을 훌쩍 앞서나가버린 듯한 재영의 모습에 가인은 씁쓸함과 부러움 의 감정을 느꼈다. 마치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나(…) 가인은 예전,재영과 둘이서 방과 후에 같이 돌아다니던 기억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려 보았다. 그래…. 이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는 거로구나…. " 여자다. " 그때, 낮게 중얼거리며 가인의 앞으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남학생들.바로 엔비 Q와 제로스 1호를 위시한 유가인 박멸 조직회의 일원들이었다. 가인은 그런 그들의 등장에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뭐,뭐야? 이것들은?!! " 여자다. " " 여자다. " " 여자다. " 회원들은 눈에 기괴한 빛을 띄우며 재영이 사라진 뒷문을 노려본채 음성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연신 '여자다'란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돌리게 만들 정도로 괴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 여자다. " " 여자다. " " 여자다. " 가인과 주위의 학생들은 질린 표정으로 슬그머니 그들의 눈을 피해 교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인 박멸 조직회의 중얼거림은 계속 되고 있었다. 마치 태엽이 고장난 뻐꾸기 시계처럼… " 여자다. " " 여자다. " " 여자다. " .........어이.그쯤해 두라고. " 있잖아∼ 방금 전에 재영 군과 애기하던 그 친구 말이야…. " 한성 고등학교의 근처에 심어진 가로수들 밑을 걸어가던 중 시내가 재영에 게 말을 꺼냈다. 재영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 가인이? " " 응. 그래. 유가인 군이라고 하지,그 사람? …재영 군은 가인 군하고 많이 친한가 봐? " " 그럼∼!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벌써 8년째구나∼ 거,참‥ 오래도 알고 지냈네. 나하고는 가장 친한 친구 사이야. 그런데 그건 왜? " 재영의 물음에 시내는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 아? 그,그냥‥ 언제나 재영 군하고 같이 다니잖아,그 사람. 그래서 눈에 띄길래 물어본 것 뿐이야. 아,참! 그나저나 재영 군 이번 일요일 날 시 간 돼? " " 일요일 날? 그러니까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이틀 후를 말하는 거야? " " 응! 그 날! " 시내는 어딘가 초조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재영은 눈치 채지 못했 다. 그의 머리 속은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득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그런 걸 묻는 거지,시내는? 호,혹시‥ 시간이 있냐고 묻는 것은…그,그것 때문이 아닐까?! 재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시내에게 물었다. " …우,우리 그 날 영화라도 보러 갈까? " " 어어? 어떻게 알았어,재영 군? 내가 그 말 하려는 걸? 마음이 통했나 보 다∼ " 시내는 신기하다는듯 미소지으며 말했고, 재영은 얼굴을 붉혔다. 마,마음이 통했다고? 그것은 이심전심‥! 그래! 이건 운명이야! 시내와 나는 운명의 빨 간줄로 맺어진 관계라고!! 재영은 여자가 이렇게 자신의 데이트 신청을 기쁘 게 승락해 준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그 기쁨은 더더욱 컸다. 모 신발 광고에 나오는 멘트처럼 머리가 하늘까지 닿을 정도 재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시내는 그런 재영에게 그야말로 상큼하게 웃으며 말해왔다. " 그럼 이번 일요일 날 영화 보러가는 거다? 나 마침 보고 싶은 영화가 있 었거든∼ 아,그런데 재영 군은 멜로… 좋아해? " " 조,좋아해‥! " 무지 무지 좋아해! 그리고 드디어 시내와의 데이트 약속이 있는 대망의 일요일 아침이 찾아왔 다. 어딘가 급전개적인 느낌이 있었지만,이번 타이틀은 외전 임을 명시해 두 도록 하자. 재영은 아침부터 샤워를 하고 잔뜩 멋을 부리고 있었다. 콧 노래 까지 부르면서 젖은 머리를 드라이로 말리는 것이 보통 기분이 업된 것이 아 니었다. 그런 형의 모습에 동생 재민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 형아,오늘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그렇게 아침부터 꽃단장을 다 하고. " " 약속? 훗. 후후후후후후… 그래.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지. 이 인간 박재 영의 인생에 전환점이 될 그런 약속이 말이야∼ " " 에에? 뭐야,그건? 형아,무슨 약속인데? " "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마라,동생아∼ 다친다∼ " 재민은 재영의 말에 그 고운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래 저렇게 형아의 기분이 들뜬 거지? 분명 재영의 좋아하는 모습 은 보기 좋았지만, 그 이유가 너무도 수상쩍었던 것이다. 재영은 연신 히죽 히죽 웃으며 재민을 돌아보았다. " 어때? 나도 이렇게 꾸미니까 꽤 폼나지 않냐? " " 흐응∼ " 재민은 뚱한 얼굴로 그런 재영의 옷차림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뭐야,정말. 평상시에는 이런 거 전혀 신경도 안썼던 주제에….재민은 왠지 모를 화가 나 는 것을 느끼며 뾰루퉁하게 답했다. " 형아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지만…. " " 자식! 네가 아침부터 이 형을 띄워주는구나! 좋아! 뭔가가 될 거 같은 느 낌이야! 음! " 재영은 파이팅 포즈를 취해 보이며 몇번이고 각오를 다졌다.재민은 그런 재 영의 모습을 수상하다는듯이 쳐다보다가 곧 어깨를 으쓱이며 덜 잠긴 재영의 단추들을 직접 채워 주었다. " 형아, 내가 누누히 말했지. 단정히 하고 다니라고. " " 으,으응. " 재영은 그런 동생의 말에 쑥스러웠는지 잠자코 재민이 단추를 잠궈주는 것 을 지켜보았다. 재민은 살짝 볼을 상기시키며 중얼거렸다. 역시 형아는 내가 없으면 안된다니깐…. 재민은 재영의 주름진 옷자락도 펴주며 지나가는 말투 로 물었다. " 무슨 여자라도 만나러 가는 거야? 평소답지 않게. " " 어‥? 어떻게 알았냐,그걸? "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재민의 말에 답하는 재영. 재민은 그런 재영의 말 에 그 보다 더 어리둥절해져 재영을 바라보았다. 엣?! 뭐야? 진짜 여자를 만 나러 가는 거란 말이야?! " 그,그럼 형아… 오늘 데,데이트를 하러 가는 거란 말이야? " " 응. 이야∼ 그나저나 너 눈치 죽인다∼ 내가 얘기도 안했는데 어떻게 알 아챈 거냐? " 그,그런!!! 그제서야 재민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솔직히 일요일 아침에 몸 치장에 정성을 쏟고, 중대한 약속이 있다며 신바람 을 내는 것이 여자 아이와의 데이트 외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단 말인가?! 하 지만 워낙에나 여자와 인연이 없던 재영이다보니, 재민은 형과 여자 문제를 결부시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만큼 재영이 데이트를 하러 간다는 건 재민에게 쇼킹하고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재민은 울먹이는 얼굴로 재영에게 물었다. " 누,누구야? 그 아이는? " " 엥? " " 오늘 형아와 데이트한다는 여자 아이는 누구냐고! " 왜,왜 소리지르고 그러는 거야? 이 자식…. 재영은 격한 동생의 반응에 의 아해 하며 답했다. " 그야… 내 여자 친구하고지‥. 우리 학교 아인데…이틀 전부터 사귀기 시 작했어. " - 쿠웅! 재민의 가슴으로 무거운 납 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배신감.그것이 재민이 느낀 모든 것이었다. 재민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재영에게 다음 과 같이 소리질렀다. " 혀,형아 따위! 여자 아이와의 데이트로 헤벌레 하는 형아 따위! 정말 꼴 도 보기 싫어------!!!! " - 다다다다다다! 그러면서 복도 저편의 자기 방으로 달려가 버리는 재민.'쿵!' 문 닫히는 소 리가 유난히도 크다. 재영은 그런 동생의 반응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 ......저 자식,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하나뿐인 형이 처음으로 데이트 를 하게 되었다는데 축하는 못해줄 망정‥. " 그러다 곧 재영은 재민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는듯 손뼉을 마주 쳤다.그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듯 자상한 눈빛으로 굳게 닫힌 재민의 방문을 바라 보 며 말했다. " 아, 하긴‥ 그 동안 나 때문에 여자 친구 하나 못 사귀었을 테니 쌓인 감 정도 많았을테지…. 그래. 미안하다,동생아. 하지만 이제부터는 마음 놓 고 여자 친구를 사귀렴. 더 이상 내 눈치 따위는 보지 않아도 되니까. " 당신…. 하나도 이해하질 못하고 있잖아…. - 프랑소와, 만나고 싶었소! - 마르틴‥! 마르틴‥! 정말 그대는 마르틴인가요?! 귀족 가문의 영애 프랑소와. 그녀는 눈 앞의 이 초라한 남자 마르틴을 바라 보았다. 신분 계급의 최하층민인 음유시인. 그것이 마르틴의 직업이었고, 그 의 모든 것이었다.귀족과 음유시인의 신분이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라고 표 현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격차가 극심했다. 절대로 만날 일이 없고, 인간적으 로 서로를 대할 수도 없을‥그리고 그런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는 신분들.그 것이 이 사회의 법이었고, 그것이 곧 진리였다. 하지만 지금 이 두 남녀는 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채 둘 만의 세계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난‥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꿈꿔왔는지 모르오,프랑소와. 그대와 헤어진 이후, 그 수 많은 날들을 그대만을 생각하며 지내왔다오. - 그래요,마르틴. 저도 그랬어요. 저도 당신 만을 그리며 살아왔어요. 서로를 껴안는 두 남녀. 그렇다. 프랑소와와 마르틴. 이 둘은 절대로 허락 될리 없는 금단의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세상을 적으로 돌려 가면서 까지! 마르틴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눈 앞의 여인에게 속삭였다. - 만약, 이 세상에서 그대를 사랑하는 수 많은 남자들이 있다면‥ 그 중의 한 남자는 나일 것이오. 그리고 만약,이 세상에서 그대를 사랑하는 한 남 자 만이 존재한다면 그것 역시 바로 나일 것이오. 그리고 만약,이 세상에 서 그대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무도 없게 된다면… - 아아, 마르틴… - 그건 바로 내가 죽었을 때일 것이오.난 지금 이 세상의 모두를 등지고,당 신마저 나와 같은 길을 걷게 하려고 하고 있소. 이런 나를… 용서해주겠소? - 용서‥ 하겠어요‥. - 이런 나를… 사랑해주겠소? - 아아, 사랑해요, 마르틴…! - 사랑하오, 프랑소와. 내 목숨이 다할 그 날까지. 흐느끼며 서로를 끌어안는 마르틴과 프랑소와.시내는 살며시 눈시울이 붉어 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그녀의 눈 앞에서는 너무도 아름다운 영상이 펼쳐져 있었고, 감미로운 로맨스가 있었다. 시내는 손 안에 들고 있던 영화 의 팜플렛을 소중하게 감싸며, 이런 감동을 준 감독에게 찬사를 보냈다. " 흑, 흐흑…. " 그때, 그녀의 옆 자리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울먹임 소리. 시내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옆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 어두운 공간에서 영화의 불빛 으로만 비춰지고 있는 재영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울고 있었 다. 그것도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 자,잘됐다… 마르틴‥! " 소매로 눈물을 거칠게 닦으며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재영. 그렇다.그 는 지금 마르틴과 프랑소와의 사랑에 감동을 먹고, 그만 눈물을 흘려 버리고 만 것이었다. 남자 치고서는 참으로 감수성이 높다고 해야 겠다. 어쨋든, 그 렇게 17살이나 먹은 남자가 훌쩍이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기 에 시내는 멍하니 그런 재영을 바라만 보았다. ' 남자도‥ 영화를 보면서 우는 구나…. ' 시내는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만 같은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신선한 느낌이었다. 시내는 재영의 우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살며시 미 소지었다. 그때, 재영과 시내의 주위에 있던 관객들의 수근 거림이 들려왔다. " 엄마, 저 오빠 지금 울고 있어…. " " 어머, 남자 주제에 영화 보면서 울고 있잖아? 꼴불견이다,얘. " " 남자 망신은 저 혼자서 다 시키고 있구만…. " 얼굴이 붉어지는 시내. 그녀는 다급히 재영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그에게 속삭였다. " 재,재영 군…. 저기 눈물… 그치는 게…. " " 하,하지만…! 하지만 마르틴과 프랑소와가…! " 여전히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스크린을 가리키는 재영. 덕분에 시내는 그 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단지, 영화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 만이 그 녀를 유일하게 위로해주는 요소였다.(…) " 미,미안∼!!! 나,나 때문에 많이 곤란했지? " 영화관 근처의 까페에서 음료수를 마시던 도중, 재영이 시내에게 고개를 숙 이며 사과했다. 시내는 좀 전에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 으응∼ 괜찮아,재영 군. …의외로 재밌었으니까. " 무,무슨 뜻이지 그건…. 재밌었다니? 재영은 식은 땀을 흘리며 시내가 한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재영은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죽 을 것만 같았다. 으아∼! 영화를 보고 질질 눈물이나 짜는 남자라니!! 나라 는 녀석은∼!! ' 최악이다…. 최악이야…! ' 분명 형편 없는 남자로 그녀에게 인식되었을 게 틀림없다. 재영은 한 숨을 푹푹 내쉬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신분 제도를 뛰어넘어 고귀한 아가씨를 차지하는 마르틴의 모습은 평소, 재영이 생각해오던 남자의 로망이었고 그것 이 재영의 눈물 샘을 자극한 이유였다. 그는 마르틴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나 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그렇게까지나…) 시내는 그렇게 고뇌 에 빠진 재영의 모습이 재밌었는듯 빙글 빙글 미소를 띄우며 물어왔다. " 재영 군은 평소에 영화 볼 때도 그래? " " 아,아니…! 평상시에는 이런 멜로 영화를 잘 안보는지라‥ 가인이와 같이 영화를 보러 가면 대게는 SF블록 버스터를 봤었어. " " 가인 군과? 가인 군은 SF를 좋아하나봐? " 시내는 눈을 반짝이며 재영에게 물어왔다. 재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 을 이어나갔다. 그래! 어서 화제를 다른 쪽으로 몰고 가야한다! 영화관에서 의 한심한 내 모습을 그녀가 또 다시 떠올리게 해서는 안돼! " 응.그 녀석은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블록 버스터 만을 봐야 한다는 이상한 고집이 있거든! 멜로나 다른 장르도 좋아하기는 하는데 대부분 집 에서 DVD 플레이어로 보나 봐∼ " " 흐응∼ 그럼 꼭 sf를 좋아하는 건 아닌거네? " " 글쎄… 가인이, 그 녀석은 잡식성인지라∼ " " 그렇구나. "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한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는 시내. 아무래도 재영 의 화제 전환은 어느 정도 성공을 본 것 같았다. 시내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 로 다시 재영에게 물었다. " 그런데 말이야… 그 가인 군‥ 과 언제나 함께 있는 여자 둘‥말이야…. " " 응? 아아∼ 테레이아와 유리 말이구나∼ 그렇지.거의 언제나 가인이 녀석 에게 붙어다니지. 크∼ 가인이 놈, 진짜 억세게 복도 많지.그런 미인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니 말야∼ " " 그럼 그거‥ 역시 가인 군, 그 두 사람과 사귀는 거야? " 시내는 어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영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 그런 거 아냐∼ 가인이 녀석, 그래보여도 외골수인 녀석인지라∼ 그런 바 람둥이 같은 짓은 죽어도 못해. 그냥 워낙 순해 빠져 놓으니까 테레이아 와 유리에게 자주 끌려다니는 것 뿐이지. " " 그래? 으응∼ 그렇구나∼ " 재영의 대답을 듣고서야 활짝 웃으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 시내.재영은 그런 시내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 …근데 꽤나 가인이에게 관심이 많다, 너? " " 응? 무,무슨 소리야∼! 가인 군이야‥ 재영 군의 절친한 친구니까∼ 나‥ 재영 군의 여자 친구로서‥ 잘 알아둬야 할 거 같아서 그런거지∼ " " 응? 으,으응…! 그,그렇구나∼ " 재영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자신의 살구 쥬스를 마셨다.재영은 시내가 연 신 가인에 대해서만 물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터무니 없는 생각을 했었던 것 이다. 혹시, 그녀가 가인이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 정신 차려라, 박재영! 벌써부터 의처증이냐! 설마 저 예쁜 시내가 그럴리 가 없잖아…! 아,박재영! 소심해졌다! 정말이지 소심해졌어! ' 시내는 떳떳하게 재영,자신에게 '여자 친구'라고 밝히고 있는데…. 재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머리 속의 잡 생각을 지워냈다. 시내를 앞에 두고 그딴 터 무니 없는 생각이나 해서는 안되지! 그런 재영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던 시내 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나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게…. " " 으응! 잘 갔다와! " 화장실로 가는 시내에게 혼쾌히 손을 흔드는 재영.시내는 그런 재영의 태도 에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화장실로 걸어갔다. 여자가 화장실에 간다는데 한 다는 소리가 잘갔다와가 뭔가? 잘 갔다와가? 재영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 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웃는 낯으로 시내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바보 녀석) ' 아아∼ 정말 내 여자 친구라서가 아니라 시내는 진짜 예쁘구나∼ ' 저런 아이가 내 여자 친구가 되다니…. 재영은 자신이 참 복 받았다고 생각 했다. 시내같은 여자는 분명 흔치 않은 것이다. 착하지. 귀엽지. 예쁘지. 스 타일 좋지. 성격도 좋지. 거기다가 애교까지! 다,단점이라고는 하나도 없구 나∼! ' 흑‥. 팔자 폈구나. 박재영. 네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재영. 벌써부터 팔불출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 예사롭 지 않았다. 앞으로 꽉 잡혀 살 타입이다. 박재영,너는…. " 어‥? " 그때 재영의 눈에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과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그것은 시 내의 것이었다. 아마, 그녀가 화장실에 가기 전에 놓고 간 모양이었다. 재영 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자코 시내의 지갑을 바라보았다. " ......... " 여자들은… 지갑에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사진을 넣어놓기도 한다는데…. 그거 진짜일까나? 재영은 갑자기 호기심이 왕성해져 자신도 모르게 시내의 지갑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 살며시 지갑을 열려고 하는 그. 하지만… ' 아,안돼! 내가 무슨 짓을…! 시내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서 맘대로 들춰보 는 건 실례야! 안된다고,박재영! 넌 최저의 인간이 되고픈 거냐! ' 재영은 재빨리 지갑을 제자리에 원상복귀시켰다. 하지만 호기심이라는 게… 한번 들기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이 불어나버리지 않던가. 재영은 지갑 안을 보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며 고민에 빠졌다. ' 아아…. 그냥 잠시만 보면…? 그래. 그냥 재빨리 보기만 하는 거야…. 그 리고 시내가 오기 전에 제자리에 놔두면 내가 지갑 본 줄 어떻게 알겠어? 내가 뭐 나쁜 짓할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것 뿐인데…. ......아,아니야. 그래도 그렇게 멋대로 행동하는 건 분명 좋지 않아. 시 내에게 떳떳해질 수가 없다고! 박재영. 넌 그녀에게 떳떳해지고 싶지 않 은 거냐? '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떳떳해지고 싶지. 난 시내의… ' 난 시내의 남자 친구잖아! ' 거기서 재영의 사고가 멈췄다. 남자친구. 그래. 난 남자친구란 말이지.시내 의 지갑 속에 있을 남자의 사진을 볼 자격이 있단 말이지. 응. 그래. 잠시만 보는 거야. 잠시만…. 결국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재영은 슬그머니 시내의 지갑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 ......어라? ' 사진이… 있기는 하나 있었다. 그것도 사진 속의 남자는 재영, 자신이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낯익은 얼굴. 아니. 낯익은 정도가 아니지. 재영의 하나뿐 인 죽마고우의 사진이었으니까… ' …유가인? ' 어째서 그녀석의 사진이…. 어째서 시내의 지갑 속에…?!?! " 많이 기다렸지? " " 으,으응… 아니‥. " 화장실에 갔다온 시내의 말에 재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재영은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 두근‥ 혹시… 시내는‥ 처음부터 가인이가 목적이었던 걸까…? - 두근‥ 내가 아니라‥ 나는 단지, 가인이에게 접근할 수단으로…? 그런 걸까…? ' 아,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시내 같이 착한애가 그런 짓을 할리가 없잖 아. 그런 짓을 할리가…. ' 하, 박재영. 네가 시내, 저 아이를 알면 얼마나 잘 안다고 벌써부터 착하다 느니 어쨋다느니 장담할 수 있는 거야? 엉? 만난지 겨우 이틀 밖에 안됐으면 서…. 사실은 너를 이용해 먹을려고 접근했었던 거야, 저 아이는. ' 시끄러! 멋대로 지껄이지마! 단지, 시내의 지갑 속에 가인이 녀석의 사진 이 있었을 뿐이잖아! 단지 그것 뿐…! ' 아니지. 단지 그것 뿐만이 아니지. 잘 생각해 보라구. - 유가인 군이라고 하지,그 사람? …재영 군은 가인 군하고 많이 친한가 봐? - 그럼∼!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벌써 8년째구나∼ 거,참‥ 오래도 알고 지냈네. 나하고는 가장 친한 친구 사이야. 그런데 그건 왜? - 아? 그,그냥‥ 언제나 재영 군하고 같이 다니잖아,그 사람. 그래서 눈에 띄길래 물어본 것 뿐이야. 그래. 그리고 또 있잖아‥ - 역시 가인 군, 그 두 사람과 사귀는 거야? - 그런 거 아냐∼ 가인이 녀석, 그래보여도 외골수인 녀석인지라∼ 그런 바 람둥이 같은 짓은 죽어도 못해. 그냥 워낙 순해 빠져 놓으니까 테레이아 와 유리에게 자주 끌려다니는 것 뿐이지. - 그래? 으응∼ 그렇구나∼ - …근데 꽤나 가인이에게 관심이 많다, 너? - 응? 무,무슨 소리야∼! 가인 군이야‥ 재영 군의 절친한 친구니까∼ 나‥ 재영 군의 여자 친구로서‥ 잘 알아둬야 할 거 같아서 그런거지∼ ' 그,그만해…. ' 재영은 감당하기 힘든 비참함에 테이블 밑의 주먹을 움켜쥐었다.알 수 없는 분함과 질투, 그리고 한심함에 몸이 떨려오고 있었다. 시야가 자꾸 흐려지는 것이 재영의 신경을 건드렸다.얼굴에 무거운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자꾸 무 거워져 왠지 고개를 들기 힘들다. ' 그럴리가 없다고! 그럴리가! 시내는 나를 좋아한다고 해줬단 말이야! 나 에게 남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했다고! 그런 애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리 가… 나를 속일리가 없어! ' 하, 정말 순진하구나,박재영. 너 답지 않게 왜 그렇게 자꾸 바보 같이 구는 거야? ' 시끄러! ' 그래.그래. …좋아. 그럼 직접 당사자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안 그래? 그러 면 되는 거 아냐. 확실하고 정확하고. 자자, 어디 네가 그렇게 철썩 같이 믿 고있는 시내 양에게 물어 보라고. ' 사실은 가인이 한테 볼 일이 있는 거 아 냐?' 라고. ' 조,좋아. 물어봐주지…! 난 시내를 믿으니까‥내 여자 친구를 믿으니까‥' 재영은 아무 말이 없는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내에게 애써 말을 꺼냈다. " 저… 시,시내야. " " 왜? 재영 군? 나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 테이블에 양 손으로 턱을 받치며 물어오는 시내. 그녀의 두 눈이 자신을 바 라보자 재영은 잠시 할 말을 잊어버렸다. 마치 시내의 시선이 자신의 전신을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재영은 이를 악물고 결국, 다음과 같은 질 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 저기… 너‥ 가인이 한테… 볼 일이 있는 거… 아냐? " " 뭐…?! " 깜짝 놀란 얼굴로 재영을 바라보는 시내.그렇게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 자, 재영은 마음이 철렁 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 왜,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응? …저,정말이었단 거야? 시내야? 그런 거였어? " 나… 다 알고 있으니까…. " 재영은 힘겹게 말을 이으며 힐끔 시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 아,알고 있었던 거야,재영 군? 어쩜…. 난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말을 꺼 내야 하나 했네…. " 쑥스러운듯 미소를 지으며 재영을 바라보는 시내. 그 순간, 재영의 마음 한 구석이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재영은 속 마음과 다르게 겉으로는 웃고 있었 다. "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고 그랬어? 진작에 말을 하지∼! " " 와아∼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안 거야? 응? 난 아무 얘기도 안했는데. " " 아하하하하∼ 마음이 통했다고 하지 않았어? 이심전심! 당연히 시내의 마 음을 읽었던 거지∼! " " 대단해∼ 정말 대단하다,재영 군∼ " " 뭘, 이 정도 가지고∼ 좋아.좋아. 가인이가 만나고 싶단 말이지? 내일 당 장에라도 자리를 주선해주지! " " 진짜? 그렇게 빨리? " " 맡겨만 두라고! " 그래…. 맡겨만 둬…. 재영은 시내에게 씨익 웃어보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그 날,저녁. 재영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와인을 병째로 들이키고 있었다. 와인의 라벨에는 '뉴이 생 조르쥬 프레스티쥬 2020…' 라는 이탈리 아어가 휘갈겨 써져 있었는데, 르팡의 부활이라고도 불리는 이 와인은 한 병 에 2500파운드 씩이나 하는, 일명 '괴물 와인'이었던 것이다. 재영의 아버지는 유별난 와인 콜렉터였는데,그 중에서도 이 프레스티쥬는 그 가 끔찍히도 아끼는 것이었다. 그런 그것을 저렇게 무턱대고 뽑아들어 와인 잔도 아닌 병째로 들이키고 있다니…. 뒷 감당도 뒷 감당이지만 와인의 독기 도 장난이 아닌 것을 감안할 때, 재영은 정말 오늘로서 생을 마감하려는 것 처럼 무모한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크으으…. " 재영은 그 지독한 취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헛구역질을 참았다. 부르고뉴에 서 명실공히 1위를 자치하고 있는 이 프레스티쥬는 타닌과 산미의 균형이 완 벽하게 이루어진 와인으로 유명했다. 유피와 중국차의 부케(숙성이 진행됨에 따라 와인에 묻어나는 향기)를 지닌 이 와인은 로마네 콘티 못지 않기로 평 이 났지만,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프레스티쥬가 지금 한 고교생에 의해 병째 로 무식하게 박살나고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 괜찮아…. " 재영은 무의식 중에 흥얼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뭐, 이런 경우도 있는 거지…. 안 그래, 박재영…? " 그래. 뭐, 여자한테 한 두번 차여봤냐? 솔직히 거짓이었지만, 이번에는 예 쁜 아이한테 고백까지 받아봤잖아? 응?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수확인 거라고! " 흐흐흐… " 왠지 웃음이 나왔다. 재영은 술병을 놓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기분 좋은 현기증과 몸이 붕 뜨는 느낌에 재영은 왠지 유쾌해져 연신 웃어 제꼈다.귓가 로 낮에 들었던 시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고 있었던 거야,재영 군? 어쩜…. 난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말을 꺼내 나 했네…. " 젠장…. " 재영은 무릎을 자신의 얼굴로 끌어당기며 고개를 숙였다. 가인이에게 볼 일 이 있다고 했던 그녀. 단지, 나는 가인이에게 접근하기 위한 발판 밖에 안되 었다는 소리였다. 그래. 가인이 한테… ' 유가인…. ' 8년지기 친구이자, 어릴 때부터 항상 함께였던 녀석. 일이 이쯤되면 녀석을 원망도 할 법 한데 재영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가인이는 재영 에게 너무도 소중한 친구였다. 그래. 새삼스러울 것도 없잖아? 생각해 보니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옛날에도… 훨신 옛날에도…. 언제나 인기가 있었던 건 가인이었다. 자신은 단지,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 " 상관 없잖아∼ 그래‥. 이번에도 단지 예전과 같은 반복일 뿐이라고‥.새 삼스러울 것도 없는‥. " 그래. 그럴텐데… " 아,젠장∼ " 왜 이렇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거지? 야, 박재영! 사나이 박재영! 이딴 일로 질질 짤 셈이냐?! 너 이 정도 밖에 안되는 녀석이었어?! 조금이라도 눈물 보 여봐라,자식아! 그 날로 두번 다시 나 볼 생각하지 말라고! 이‥ 이 한심한 녀석…! " 아아∼ 그래. 한심해…. " 한심할 뿐만 아니라. 지지리도 바보같은 녀석! 그러니깐 울지는 말라고. 투 정부리지도 말고. 넌 사나이잖냐. 여자는 많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어. 그러니까∼ 대범해지자! 응? " 하,하하하…. " 그래…. 괜찮아. 그렇게 하면 돼. 재영은 다시 한번 헛 웃음을 터뜨렸다.어 느 정도 기분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황은 가혹하게 재 영을 몰아가고 있었다. - 쾅! " 형아∼! 같이 자자! 나 잠잘 준비 다해왔어! " 그렇게 소리지르며 나타난 이는 재영의 미소년 동생, 박재민 군. 그는 실크 잠옷을 껴입고, 담요를 든채 위풍 당당히 재영의 앞에 서있었다. 은은히 느 껴지는 향기로 보아, 샤워까지 철두철미하게 끝내고 온듯 했다. 재영은 그런 동생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재민은 뭔가 방안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 을 눈치 채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 어,이,이건 아빠가 애지중지하는 프레스티쥬…! 혀,형아. 이거 형아가 마 신 거야? 응? 술 마신 거야? " " ......... " " 으아∼ 술 냄새! 아니, 왠 술을 혼자서 이렇게 마셨어? 맙소사. 벌써 절 반이나 비워냈잖아? 이 와인 아직 뜯지도 않았던 거였을텐데…. 형아, 오 늘 무슨 일 있었어? 응? " 걱정스럽게 물으며 재영을 바라보는 재민. 그런 동생의 모습에 재영은 목이 메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 흑,흐흑…. " " 혀,형아?! " " 으흐흐흐흐흑!! " 재영은 대성통곡을 하며 재민을 부여안은채 흐느끼기 시작했다.재민은 그런 재영의 모습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 혀,형아? 도,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응? 왜 우는데?! 얼마나 속상한 일 이 있었길래…. 흑… 우,울지마,형아‥! 형아가 우니깐 나까지… 나까지 …괜히 눈물이 나올려고… 하잖아‥. 흑,흐흐흑‥! " 그렇게 두 형제는 서로를 꼬옥 끌어안은채 밤새워 눈물을 흘렸다.마치 눈물 로 모든 것을 흘려보낼려는 것 처럼. 그리고 밤은 깊어 갔다‥. " 가인아, 부탁한다…! " " 뭐…? " 다음 날, 가인을 본 재영은 머리를 숙이며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해왔다.가인 은 어이가 없다는듯 재영에게 되물었다. " 나보고 지금… 소개팅을 나가달라고…? " " 제발 이유는 묻지 말고! 하나 뿐인 친구의 부탁이다! 제발 좀 들어줘! " " 야… 하,하지만…! " 가인은 재영의 부탁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거절할려고 했지만, 퀭하 면서도 새빨갛게 부은 재영의 눈길을 마주대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 이 자식… 울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재영은 피곤했던지 목소리까지 갈라져 있었다. " 부탁한다,가인아…! " " ......... " 가인은 결국 영문도 모른채 재영의 부탁을 승락해야만 했다. - 딸랑…. 간간히 울리는 출입문의 종소리. 그때마다 재영은 흠칫 거리며 출입문을 돌 아보았다. 하지만 곧 힘없는 표정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아, 아직 그가 기다 리는 사람은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은 방과 후. 여기는 학교 앞에 위치 한 찻집 '테이스트(Taste)'였다. 가인은 현재 이곳의 한 테이블에 재영과 같 이 앉아 있었다.어딜가냐며 자신을 따라오던 테레이아와 유리에게 변명을 하 느라 가인은 진땀을 빼야만 했다. 평소 같으면 재영에게 '내가 왜 너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만 하는 거지?'라며 단단히 따졌을 가인이었지만,지금은 풀 죽은 재영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질 못했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 재영은 저런 기운 없는 모습을 남에게 절대로 보여주는 녀석이 아니다. 속 마음이야 어떻든 언제나 밝은 웃음과 장난끼로 일관하던 녀석이었는데…. 그 나마 재영이 이렇게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 건 가인이나 자기 가족 정도 뿐이 었다.가인도 이런 재영의 모습은 8년동안 손에 꼽을 정도로 밖에 볼 수 없었 다. 지금 자신의 친구가 괴로워 한다…. 가인은 어떻게든 재영을 도와주고만 싶었다. " 재영아…, 도대체 무슨 일… " " 미안,가인아.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라. " " ......으응. " 무거운 재영의 목소리에 가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어느덧 약속의 시간이 다가왔다. - 딸랑…! 출입구를 돌아보던 재영의 고개가 멈칫 굳어졌다. 아마도 지금 들어온 손님 이 재영이 기다리던 사람이었나 보다. 가인은 재영의 시선을 따라, 출입구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어라? 저 사람은…. ' 분명… 재영의 여자 친구라는… ' 이름까지는 기억나질 않지만, 저번 주에 재영과 같이 하교를 하던 그 여학 생이 틀림 없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여길 왜? …뭔가 정리가 안되고 있었 다. 가인은 이 알 수 없는 전개에 떠밀려 잠자코 사태를 관망하기로 결심 했다.재영은 여느 때 처럼 히죽 웃으며 그런 여인,시내에게 손을 흔들었다. " 여기야∼ 시내야∼ " " 아, 먼저 와있었구나. 미안‥ 좀 늦었지? " " 무슨∼ 우리도 금방 왔어∼ "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싱글 벙글 웃는 재영. 하지만 가인의 눈에는 그런 재 영의 웃음이 어딘가 억지스러워 보였다. 왜 저런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일까? 재영은 가인에게 시내를 소개시켜줬다. " 가인아, 여기는 유시내. 우리 옆 반인 1학년 4반이야. 동아리는 유도부래. 시내야, 이쪽은 네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유가인 군.설명은 생략해도 되겠 지? 서로 인사들 해. " " 아,안녕하세요,가인 군∼ 얘기는 재영 군에게서 많이 들었어요∼ " " 예‥ 안녕하세요‥ " 가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내의 인사를 받으며 재영을 바라보았다.재영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설명을 좀 해달라고…. 하지만 재영은 그런 가 인의 시선을 피하며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 자자∼ 그럼 나는 이만 가볼테니까∼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하, 하하하하∼ " " …재영아? " " 재영 군? " 그렇게 자리를 뜰려는 재영을 이상하다는듯 부르는 가인과 시내. 시내는 재 영의 옷자락을 잡으면서 물었다. " 버,벌써 갈려고? 왜 그러는 거야? "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재영은 왠지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 이라서 주먹을 움켜 쥐었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말했다. " 그,그게… 늙은이는 방해만 될 뿐이고∼ " " 그게 무슨 소리야? 재영 군, 오늘 따라 이상해…. " " 아,아니 나는 이만 가줄테니까…. " " 그러니까 왜 갈려고… " " 그,그쯤 해둬!! " 결국 참다 못한 재영이 시내에게 소리를 질렀다. 재영은 이를 악물며 목이 메여오는 것을 참아넘겼다. 여기서 울 수는 없다.시내의 앞에서는 더더욱 울 어서는 안된다. 너무하다. 정말 너무해, 시내야…. 너는 정말…. " 네 소원대로 가인이와 이렇게 자리까지 주선해줬잖아! 그러니까 이제 나 는 필요 없어졌을 거 아냐! 그래서 자리 피해주겠다는데 왜 계속 이렇게 붙잡는 거야?! 네가 고백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라는 거야? 엉?! "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내. 재영은 그런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아랫 입술을 악물었다. 끝내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하고 말았다. " 정말… 잔인하다, 너…. " 그리고 재영은 가게를 뛰쳐나갔다. 가인과 시내는 멍하니 그런 재영의 뒷모 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곧, 상황이 인식되었는듯 시내는 가인을 돌아보 며 소리쳤다. " 아,저기… 가인 군! 나 재영 군을 따라갈테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 고 있어줘! 알았지? 조금만 기다리면 될테니까‥! " " 어? 으,으응‥. "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하는 가인을 뒤로 하고,시내는 급하게 재영의 뒤를 따 라 가게를 뛰쳐나갔다. 가인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삐걱 거리는 가게의 문 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뭐,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 가인은 현기증이 나 테이블에 도로 앉았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재영 의 말로는 아마도, 그 시내라는 아이와 나를 소개팅 시켜줄려고 했던 것 같 던데… 시내는 재영이 녀석의 여자 친구 아닌가? 그런데 왜 나에게 소개를? 그리고 재영이 녀석의 그 반응은 또 뭐람…. - 딸랑… 그리고 다시 출입문의 종이 울렸다. 가인은 서둘러 출입문을 바라보았다.벌 써 돌아온 걸까? 하지만 들어오는 이는 시내라는 여학생이 아닌 다른 여학생 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위를 몇번 둘러보더니 가인을 발견하고, 그대로 그 를 향해 걸어왔다. 가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학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 누,누구…? " " 하아… 하… " 재영은 숨을 몰아 쉬며 허리를 굽혔다. 테이스트에서 부터 줄곧 학교 근처 의 공원까지 뛰어온 그였다. 얼마나 정신 없이 뛰었던지 그 복잡하던 머리가 새하얗게 텅 비워진 것만 같았다. 재영은 땀이 흐르는 얼굴로, 몸을 활짝 피 며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하… 하하하하…. " 하지만 곧 그 웃음도 밀려드는 거친 호흡에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재영은 힘 없이 터벅 터벅 걸어 공원의 벤치에 걸터 앉았다. 이제 슬슬 가을인듯 공 원의 나무들은 붉게 물들어 단풍을 띄우고 있었다. " …이걸로 된 거야…. " 재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서로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 끼리 만 나게 해줬으니까 그걸로 된 거였다. 어차피 자신의 짝이 아니었다,시내는…. ' 그럼 그렇지. 그렇게 예쁜 애가 나의 여자 친구가 된다니… 나,참…. 박 재영. 꿈도 컸지. 그럴리가 없잖아. ' 재영은 괜히 비실 비실 웃었다. 모처럼 17년 인생에 최초로 여자 친구가 생 기나 했었는데 결국은 이 모양이다. 아무래도 자신은 아직 여자 친구를 사귈 팔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주제에 맞게 살아야지…. 내 주제에 무슨…. " 삼일만의… 꿈이었나…. " 재영은 시내와 사귀었던 삼 일간을 되새겨 보았다. 러브레터를 받고,옥상에 서 난데 없는 고백을 받았고… 같이 하교도 하고… 영화관에서 데이트도 해 보았다. 뭐, 그래…. 이 정도만 해도 큰 수확이다. 그치,박재영? " 자자∼ 오늘부로 다시 솔로 생활이다. 힘내자고! " 언제나 낙천적이고 포지티브한 생활 방식! 그게 바로 나의 장점 아니겠어?! 재영은 가인과 시내가 잘 되기를 빌어주며 벤치에서 힘 있게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 게임이나 실컷 할 생각이었다.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풀면 어느 정도 나아지겠지….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사놓고 뜯지도 않은 게임 소 프트웨어가 생각났다. 그래. 집에 가서 그거나 하자고. " 재영 군…! " 그러나 재영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뒤에서 자신을 불러온 한 여인의 목소리에 의해서. 이 목소리는…? 재영은 설마하며 뒤를 돌아 보 았다. " 시내…? " " 하아… 하아… 재영 군, 정말‥ 발 빠르네…. 쫓아오기‥힘들었어… 하아 아∼ " 그곳에는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도 웃는 얼굴로 말을 건내는 시내가 있었다. 재영은 그런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어째서 시내가? 어째서 여 기에 있는 거야? 지금쯤이면 가인하고 찻집에서 한창 애기 중이어야 할텐데…. 재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시내에게 물었다. " 어,어째서? 어째서 여기에…? " " 그야 재영 군이 그렇게 뛰쳐 나가 버리니깐 그렇지. 그것도 말도 안되는 오해만 잔뜩 하고서. " 오해? " 무,무슨 오해? 사,사실이잖아…. 네가 가인이와 만나게 해달라면서…! " " 오해하고 있구만,무슨! 가인이를 소개시켜달라고 한 건 내가 아니라 내 친구란 말이야! " 에엑----!! 이,이게 무슨 소리?!! 재영은 어리 벙벙해진 표정으로 아무 대 꾸 없이 시내의 말만 경청했다. " 재영 군이 다 알고 있다고 하길래… 난 그런가 보다 하고 얘길 꺼냈던 건 데. 사실, 내 친구가 가인 군을 짝 사랑하고 있어서,내가 재영 군과 사귀 니까 어떻게 좀 안되겠냐고 부탁해왔던 거란 말이야. " " 그,그럼… 가인이에 대해서 그렇게 물었던 건… " " 그야, 당연히 내 친한 친구가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 사람이니까 어떤 사 람일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 아악! 말도 안돼! 그럴리가 없어! 재영은 곧 시내의 지갑 속에 있던 가인의 사진을 떠올렸다. " 그래! 그럼 지갑 속에 가인이의 사진은 왜 가지고 있었던 거야?! " " 그,그런… 재영 군, 내 지갑 봤던 거야…? " " 아,아니‥! 그게! 그건 그냥 단지…! 난 단지 여자들은 자신의 지갑에 좋 아하는 남자 사진을 넣고 다닌다고 하길래! 나,난 그냥 그게 궁금해서… " 횡설수설하는 재영의 조잡한 변명. 그런 재영을 바라보던 시내의 입가에 살 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시내는 방긋 웃으며 재영에게 물었다. " 걱정됐어? 내가 재영 군 사진을 안 가지고 다닐까봐? " " 그,그런 게 아니라…. " " 후훗… 잘 봐. " 시내는 지갑을 펼치고 그 안에 있던 가인의 사진을 빼냈다. 그러자 그 밑에 는 농구를 하고 있는 재영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끼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시내는 가인의 사진을 들어보이며 귀엽게 혀를 내밀었다. " 이 사진은,혹시나 내가 가인 군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을까… 하고 친구가 걱정해서 나에게 빌려준 것 뿐이야. 이제 모든 궁금증은 풀렸어요, 의 심 쟁 이 씨? " " .........우으…. " 할 말이 없다. 의심쟁이라고 불려도, 소심한 남자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재영은 마음 속의 앙금이 모두 걷혀나가는 기분이었다. 시내는 그런 재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 나… 체육 대회 때 처음으로 재영 군을 보았어. 그때 1학년 3반 결승전까 지 올라갔었잖아,농구 대회? " " 으,으응. " " 나 처음부터 쭉 보았는 걸. 우리 반도 아닌데… 나,재영 군의 모습 만 눈 에 들어와서…. 열심히 뛰는 재영 군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그래서 경기가 끝날때 까지 농구 코트를 떠나질 못했어. 후훗…나 그때 소리치며 재영 군을 응원했었는데…재영 군은 못 들었어? " 모,못 들었어…. " 그 이후로, 우연히 복도에서 재영 군과 마주칠 때 마다 괜히 가슴이 두근 거리고… 하루라도 재영 군을 보지 않으면 불안해져서… 어떻게든 고백을 해야지 고백을 해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못하다가‥여름 방학이 끝나고 이 렇게 고백을 하게 된 거야. 나… 재영 군에게 거절당하면 어떡하나…너무 두렵고 겁도 났었지만… 그래도 재영 군이 승락해줬으니까… 나, 재영 군 의 여자 친구가 됐으니까…. " 감정이 고조됐는지 시내는 뒷 말을 울먹이며 눈물을 흘렸다.재영은 털썩 공 원 바닥에 무릎을 꿇어 시내에게 업드리면서 소리쳤다. " 미,미안…! " 나라는 녀석은… 나라는 녀석은 정말이지… " 나,난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혼자 오해하기만 하고…네 마음만 아 프게 해서 미안…. 정말 미안해‥! 무엇보다 시내, 널 믿지 않았어. 시내 는 내 여자 친구인데‥ 누구보다도 믿어줘야할 사람이었는데… 나는… 나 는…! " 재영은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이렇게나 날 좋아해주는 여 자 아이인데… 이렇게나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 아이인데 난… 그런 시내를‥ 울려 버렸다…. " 이런 나라도 용서해준다면… 이렇게 바보같은 나라도 용서해준다면…! " " 바보…. " 그렇게 머리를 땅바닥에 박는 재영의 어깨를 한 가녀린 손이 일으켜 세웠다. 재영은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시내를 바라보았다.시내 는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어떡해…? 당당하게 어깨를 펴 고 있어야지‥. " " 으,으응…. " 재영은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훔쳐내며 시내에게 마주 웃어보였다. " 아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재영이 녀석…. " 가인은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의 앞에 앉아 있던 여학생은 긴장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 으응…. 결국, 내 무리한 부탁 땜에 시내와 재영 군에게 피해만 줘버린 거내…. 어떡하지? 나 때문에 두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 " 글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 가인은 의자에 몸을 묻히며 창 밖을 향해 씨익 웃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 겠지,재영아? 너라면 분명 잘 해냈을 테니까. 아마,내일이면 누구보다도 화 기애애한 재영과 시내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짜식…. 축하하다. ' 박재영 17년 인생에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을. 가인은 싱긋 미소지으며 푸념 비슷한 말을 눈 앞의 여학생에게 중얼거렸다. 아,그러고 보니 아직 이 여학 생‥ 이름 조차 묻지 않고 있었구나. " 아아∼ 나도 빨리 여자 친구나 생겼으면∼ " " 으,으응? 그,그래? " 가인의 중얼거림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는 여학생. 아마도 자신에게 말한 것인 줄 알고 당황하는 것 같았다. 가인은 행복해할 재영의 모습에 괜 히 웃음이 나와, 싱긋 싱긋 미소지었는데 그 바람에 여학생은 더더욱 당황하 며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때… 가인의 귀로 불교의 육도의 하나로, 전생에 악업을 행한 자가 다시 태어나 벌을 받는다는 지옥도(地獄道)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들이 속삭여 왔다. " 훗…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하셨는데… " " 이런 곳에서 우리들 몰래 소개팅을 하고 있었던 거내,오빠…? " 이, 이 목소리들은------!!!! 가인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뒤 에서는 에리니스(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여신들. 지옥 타르타로스에 살면서 친족을 죽인 중죄인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 죄를 비난하는데,때때로 죄인 을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의 화신 같은 그녀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들의 이름은 바로 테레이아 민체스터와 이유리… " 자,잠깐----!!! 내게 설명할 시간을…!!! " " 현장을 목격당했는데 어디서 오리발을----!! " " 각오…! " " 히이이이이이이익!!! " 가인의 앞에 앉아 있던 여학생은 그 날, 한 인간의 종말을 뇌리 속에 깊이 깊이 각인시킬 수 있었다. Ｅpilogue 한편, 우리의 재영 군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냐 하면… " 이 놈의 자식!!! 네 녀석이 귀중한 나의 프레스티쥬를!! 한 병 밖에 남지 않아 두고 두고 마실려고 했던 나의 프레스티쥬를!! 네,네 녀석이---!! " " 아,아버지…! 제발 고정…! " "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어어어엇-----!!! " " 으앙∼ 형아--!!! " …2500파운드의 가치를 직접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가인 박멸 조직회 제 2 장 회 원 제 4 조 (회원의 자격 및 탈퇴) 1. 본 회의 회원은 한성 고등학교 1학년 3반에 적을 둔 솔로 남성들을 원칙 으로 한다. (단,공동의 적 유가인의 박멸을 염원하는 참여자에 한해 1학 년 3반 외의 학급도 참여할 수 있다) 2. 본 회의 목적, 유가인의 박멸에 회의감을 느꼈거나 그에게 호감을 느꼈 을 경우, 그리고 감히 솔로를 탈출하였을 경우 그에 합당한 응징과 처벌 (자세한 사항은 제 5 장 처벌 편에서 다루겠다)을 가하여 제명시킨다. · · (중 략) · · 제 5 장 처 벌 제 16 조 (집행 방법) 1. 팔대지옥(八大地獄) 편 ① 등활지옥(等活地獄) ② 흑승지옥(黑繩地獄) ③ 중합지옥(衆合地獄) ④ 규환지옥(叫喚地獄) ⑤ 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 ⑥ 초열지옥(焦熱地獄) ⑦ 대초열지옥(大焦熱地獄) ⑧ 무간지옥(無姦地獄) 2. 팔한지옥(八寒地獄) 편 · · (중 략) · · " 뭐가 좋겠습니까? " " …그래도 한때 회장이었던 정을 생각해서.........극형 쪽이…. " " 동감입니다. 모범을 보여야지요. " 눈을 빛내며, 재영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는 유가인 박멸 조직회. 재영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Ｖolume.2 完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2 話 중국에서 온 사자(師資) (上) =-=-=-=-=-=-=-=-=-=-=-=-=-=-=-=-=-=-=-=-=-=-=-=-=-=-=-=-=-=-=-=-=-=-=-= 중국 지부 피스 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중국 지부 총 책임자, 누대인의 앞 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어두운 방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스크린의 불 빛만 이 은은히, 남자의 검은 도복을 비춰주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제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 남자의 어딘가 앳된 목소리는 그를 더더욱 어려보이게 하고 있었다.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기에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키가 작고 체격이 왜소한 것이 채 15살도 못 넘긴 소년인 것만 같았다. 누대인은 그런 남자의 말에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 자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네. 자네도 나름대로 고충이 많지 않았는가? 그 래. 은허(殷墟)의 유적지는 어땠는가? " " 누대인의 말씀 대로, 아무런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원인을 알아 낼려고 했지만, 흑월당(黑月幢)의 간섭이 너무나 집요했던 관계로…. " " 아니. 그 건은 이제 됐네. 더 이상 알아볼 필요는 없을 게야. " " ......예? " 누대인의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는 남자.하지만 그는 그 이 유를 묻지는 않는다. 다음에 나올 누대인의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테니까. " 가이아가 한 소년을 선택했네. " " ......그 말씀은…? " 남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누대인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렇네. 바로 오라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얘기이지. " "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하지만 그 음성이 기이한 흥분으로 떨리고 있 었다는 것을 누대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렇겠지…. 그라면 아마도 자네의 여 행에 종지부를 찍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바로 한국이네. 가이아의 흐름은 이제 그곳을 향해 모여들테지.그래서 부 탁이네만… " 누대인은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 한국으로 가주지 않겠는가,부르스? 오라의 주인을 지켜주게. " " .........! " 부르스. 신원미상의 중국인 권법가.그는 회색의 오라를 사용하는 중국 지부 의 피스 대원,피스 그레이(PEACE GRAY)로 불리우고 있었다. 第 12 話 중국에서 온 사자(師資) " 앗‥! " "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 바람에 뒤로 몸이 떠밀리려는 유리를 가인이 재빨리 손으로 잡아 주었다.해 발 300m에서 불어오는 밤 바람은 긴장이 풀린 몸을 떠밀 정도로 사나웠다.그 바람의 세기도 세기였지만, 추위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만약 A.I슈츠의 방열 효과가 없었더라면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어야만 했을 것이다.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철탑의 상층부를 올려다 보았다. " 도대체 저 자식은 왜 저렇게 위로만 올라가고 있는 거에요? " " …바보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 뭐, 이런 게 아닐까? 저 자식의 경우에는 바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는 거 같으니…. " 한국 지부 피스 대원들의 리더 피스 그린, 정진우는 해체된 A.I 헬맷 사이 로 히죽 웃는 낯을 하며 중얼거렸다. 언제나 처럼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 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의 높이에 있으면 어느 정도 고소 공포로 인 한 긴장이라도 있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이 남자는 예외였던 모양이었다. " 하지만 곤란하네요. 잘도 이런 장소를…. " 가인과 유리의 보호자이자, 피스 옐로우 한시민은 살짝 한 숨을 쉬며 휘날 리는 금발 머리 사이로 감홍빛 눈동자를 위로 향했다. 그녀의 곁에 있던 가 인은 은은히 느껴져 오는 그녀의 머리 향기에 얼굴을 붉히다가, 유리의 쏘아 봄에 헛기침을 하여 주위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 가인, 긴장해라! 지금은 임무 중이다! " " 예,예‥! " 검은 포니테일 여성의 호통에 가인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임무에 집중하 기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가인에게 경고를 준 이는 그의 검술 사범이자,학교 선배이기도 한 피스 레드 성마리였다. 그녀는 굳은 안색으로 철탑의 주위를 둘러 보며 중얼거렸다. " 아무리 그래도… 역시 장소가 너무 안 좋아. 하필이면… " " 하필이면 신(新) 서울 타워라니 말이에요…. " 마리의 말을 가인이 받았다. 그렇다.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12구 역에 위치한 신 서울 타워였던 것이다. 남산에 있는 구(舊) 서울 타워가 아 닌 이곳은 2009년 노스 코리아와 사우스 코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진 후, 텔레 비젼과 라디오 방송을 확장된 수도권에 송출하기 위하여 2011년에 착공, 20 17년에 완공된 한국의 두번째 종합전파탑이었던 것이다. 현재, 신 서울 타워는 9개채널의 수도권 텔레비젼 전파와 5개의 FM채널의 전 파를 담당하고 있다.아울러 한국 철도나 관청용 통신관련 송수신전파의 중개 기지 역할과 교통정보를 송신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 고 속통신망도 이곳 서울 타워 내에 위치해 있다. 또한 풍향·풍속계를 비롯한 일산화탄소와 질소산화 등을 고도별로 감시하는 측정기, 기상관측, 대기오염 측정에 사용되는 중요한 데이터도 이곳에 집중되어 있으며, 고도정보화가 가 속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통신, 방송분야 등 신분야의 급속한 발전 상을 예측하기란 어려운 것이지만 종합전파탑으로서의 서울 타워는 질적이나 양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세워진 결과라 하겠다. 현재 구 서울 타워는 전파탑의 역할은 신 서울 타워 에 맡긴채, 전망대와 기념품점, 음식점을 주로 하는 여가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 휘이이이이잉…! " 추,추워‥. " A.I 슈츠를 입고 있어도, 밤 바람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가인은 몸 을 떠는 유리의 어깨를 감싸안아주며 밑을 내려다 보았다. 무려 340m나 되는 신 서울 타워는 파리의 에펠탑 보다도 20m가 높고, 일본의 동경 타워 보다도 7m가 더 높은 탑이었다.신 서울 타워는 탑체 명소에 설치되어진 180개의 투 광기에 의해 그 아름다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겨울은 오렌지색, 여름은 주황색으로 변하는 그 불빛들은 방문객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 고 있었다.분명 직접 올라오지만 않았어도, 가인들은 신 서울 타워의 아름다 움에 순수하게 감동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올라오지만 않았더라면…. - 크우아아아아앙!! " 저 자식, 비웃고 있어∼∼ " 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놈'에게 웃어 보였다. '놈'은 10m정도의 비쩍 마 른 드래곤 같은 괴물이었다. 길고 가는 목 끝에 물고기 같은 머리가 붙어 있 고, 눈에서 빛을 뿜어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머리 위에 두 개, 그리고 뾰족 한 앞니가 있는 입 양 언저리에 다시 두 개의 촉수가 나와 있었다. 어깨에는 박쥐의 날개가 달려 있었고, 뭔가를 휘감기에 알맞을 듯한 긴 꼬리를 가졌으 며, 온 몸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가늘고 긴 팔 끝에는 털이 나 있는 네 개 의 긴 손가락이 나와 있으며, 손가락 끝은 날카로운 꼬챙이 모양의 발톱으로 되어 있었다. 다리 또한 가늘고 긴데, 대지를 딛고 있는 발은 두껍고 크며 세 개의 발톱이 나 있었다. " ......드래곤의 사촌 쯤 되는 괴물인가 보죠? " 가인은 신 서울 타워의 투광기에 비치는 괴물의 모습을 바라보며 옆의 동료 들에게 물었다. 저번 중국에서 보았던 와이번과 저 괴물은 어딘가 생김새가 비슷했던 것이다. 그런 가인의 물음에 답한 이는 시민이었다. " 가인 씨, 거울 나라의 앨리스 라는 책‥읽어 보셨어요? "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아는데요‥. " 가인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멋쩍게 고개를 흔들었고, 시민은 그런 그의 모습 에 방긋 미소를 지어주며 말을 이었다. " 약 120년 전에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라는 수학자가 있었어요. 그는 사 랑스러운 소녀 앨리스 리델에게 두 권의 책을 바쳤다고 하는데‥ 하나는 가인 군이 말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요. 저 괴물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 제 1 장에 나오는 재 버워키(jabberwocky)라는 난해하고 넌센스에 가득찬 시에 등장하는 재버 워크(jabberwock)라는 괴물이에요.C+급 몬스터죠. " " …재버 워크? 재버 워키라는 단어는 알겠지만…. 그거, 무의미한 말,의 미 없는 말이라는 뜻 아닌가요? " " 예. 결국, 시 자체도 이해하기 힘들고 넌센스에 찬 시이므로 알고자 하는 노력은 의미 없는 짓,즉 넌센스라는 거죠. 꽤 재미있지 않아요? " " ......뭐,뭔가 미묘하게 꼬인듯한 유래의 괴물이네요‥.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혀를 내둘렀다. 재버워크라는 괴물은 연신 괴상한 울음 소리를 내며 신 서울 타워의 꼭대기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대로 떨어져서 죽어버리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테지만…. 분명, 등의 저 날개는 단순한 장식품은 아닐테지…. 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인과 시민에 게 말했다. " 자자∼ 잡담은 거기까지.슬슬 녀석이 지루해 하는 것 같으니까 무료해 하 지 않도록 놀아주자구요∼ " " 피스‥! " 가인과 마리, 유리와 시민은 진우에게 엄지 손가락을 내보이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그들은 A.I 부츠에 오라를 불어 넣어 천천히 철탑을 뛰어 올라,탑의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재버워크에게 다가갔다. - 크륵‥ 크륵‥ 크륵‥ 몸을 흔들 거리며 부글 부글 거리는듯한 울음 소리를 내는 재버워크. 재버 워크의 커다란 눈동자가 휘번뜩 거리며 가인들을 주시했다. 큰 눈에 비해 유 난히 작은 동공이 괴물의 영민함을 엿보여주고 있었다. " 언제나 처럼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세요∼ 피스 레드와 나, 소년은 이대로 목표에게 접근하고, 피스 옐로우와 피스 핑크는 후방 지원을 부탁 드립니다! " " 음‥. " 마리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중의 오라 소드에 오라를 불어넣었다. '부웅' 붉은 검날이 은은하게 울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재버워크는 마리 의 오라 소드에서 나오는 붉은 빛이 눈에 거슬렸는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리 는 자신의 뒤를 이어 오라 소드를 뽑아 드는 가인에게 말했다. " 가인, 너는 왼쪽. 나는 오른쪽. " " 알았어요! " - 팟! 그와 동시에 괴물의 양쪽으로 뛰어오르는 가인과 마리. 그리고 시민의 공명 음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라아아아아아‥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신 서울 타워의 철골 구조가 은은하게 떨려왔다. 재 버워크는 날카로운 쇳 소리를 지르며 타워의 꼭대기에서 밑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괴물은 가인과 마리의 오라 소드 합격을 받아내야 했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 타아아아아앗!! " - 크우아아앙!! '스컥!' 날카롭게 생물체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가인과 마리가 재버 워크를 크로스하며 지나갔다. 엑스 자로 그어지는 마리의 붉은 검광과 가인의 푸른 검광. 그 사이로 재버워크의 녹색 체액이 튀어 오른다. 하지만 이대로 끝난 것은 아니지‥! " 합식(合式) 역린(逆鱗)! " 재버워크의 앞 뒤로 선 가인과 마리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오라 소드를 괴 물에게 휘둘렀다. 기 막힌 타이밍으로 두 개의 오라 소드는 재버워크의 배와 등가죽을 동시에 찢어 발겼다. - 크우아아아아앙!! " 큭‥! "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마리를 향해 채찍같은 꼬리를 휘두르는 재버워크. 마 리는 오라 소드로 괴물의 꼬리 공격을 받아 넘겼으나, 그만 밟고 있던 철 구 조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 자자∼선수 교대! " 하지만 그런 떨어지는 마리의 손을 잡으며 말 그대로 선수 교체하듯 재버워 크에게 튕겨져 오르는 진우. 마리는 진우에 의해 생겨난 반동으로 서울 타워 의 철 구조에 내려설 수 있었고, 진우는 녹색의 잔광을 흘리며 재버 워크에 게 솟아 올랐다. 진우의 오라로 물든 A.I 글러브가 재버워크의 턱을 노렸다. - 크힉! 그러나 재버워크는 이대로 어이 없게 당하는 것은 사양할려는듯 등의 날개 를 펴며 훌쩍 위로 뛰어 올랐다. 마치 바람을 등에 업고 중력이 없는 듯한 움직임으로 간단하게 진우의 공격을 피해내는 재버워크. 진우는 철조물을 한 손으로 잡아 회전하며 그대로 위로 솟구칠려던 자신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 었다.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단 말이로군! - 크왓!! 그때, 재버워크의 뇌 속을 찔러오는 수 많은 무형의 바늘들. 바로 피스 핑 크 이유리의 재핑(zapping) 공격이었다. 몬스터의 사념에 노이즈를 일으켜 사고를 마비시키는 오라 능력! 과연, 재버워크는 날카로운 괴성을 지르며 괴 로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괴물은 밑에서 핑크색의 A.I 슈츠를 입고 있는 유 리가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챘는듯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녀를 노려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 크우아아악!! " 꺅‥! " 순간, 재버워크의 입을 통해 짙은 노란색의 액체가 유리에게 발사되었다.유 리는 한정된 탑의 철골 구조에 머뭇거리다가 그만 재버워크의 액체에 적중당 하고 말았다. - 치이이이이!! 연기를 피어올리며 녹아내리는 철골 구조물과 유리의 A.I 슈츠. 재버워크가 발사한 액체는 짙은 농도의 산성 물질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오리하르콘의 구조를 분해시킬 정도로 강력한 산은 아니었지만, 유리를 당황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만 발을 헛디디며 밑으로 떨어져내리는 유리. 가인은 철탑의 위 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 보며 비명을 질렀다. " 유리야!!! " - 탁! 그러나 무방비하게 떨어질려던 유리를 낚아채는 손길 하나. 바로 시민이었 다. 그녀는 날쌔게 철골 구조를 박차며 밑으로 도약하여,유리를 품 안에 안 고 간신히 탑으로 내려섰던 것이다! 얼마나 아슬 아슬했는지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모두의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가인은 유리가 무사한 것에 안 도감이 들자, 뒤를 이어 재버워크에 대한 무시무시한 분노가 치솟았다. " 이 자식이----------!!!! 죽여버린다!! " 순간, 가인의 몸 주위로 휘몰아치는 푸른 오라의 회오리. 마치 폭발하듯 터 져나오는 오라의 기세에 마리와 진우는 흠칫 놀라 가인을 바라보았다. 저것 이 바로 중국에서 가인이 뿜어냈던 기운‥! " 라이징--------킥!!!! " - 투확! 마치 발사대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듯 재버워크를 향해 내리 꽂히는 가인의 라이징 킥! 거센 폭발음과 함께 재버워크는 가인의 킥에 의해 어깨죽지부터 오른 손까지가 사정 없이 뜯겨 나갔다.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번개 같은 공격이었다.그러나 가인의 분노는 이제야 시작이었다. " 으랴아아아아앗!!!! " - 퍼퍼퍼펑! 가인은 회오리가 몰아치는 주먹으로 사정 없이 재버워크를 연타했다. 수 십 개의 폭발음이 터져오르며 괴물의 전신이 바람의 주먹에 의해 짓이겨져 대기 중으로 분쇄 되어갔다.순식간에 재버워크는 자신의 체액을 뒤집어 쓰며 반쯤 거덜난 몸으로 철탑의 위로 도망쳐 오르기 시작했다. " 괴,굉장해‥! " 시민의 품에 안긴채 기력을 되찾던 유리는, 재버워크를 몰아부치는 가인의 모습에 탄성을 올렸다. 저것이 바로 중국에서 오빠가 찾아낸 힘! 몬스터를 압도하는 오라의 능력! 푸른 오라의 기류를 머금은 가인의 모습은 일면 낯 설고 무서운 감도 있었지만, 그 만큼 유리의 눈에는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 ......... " 그러나 그런 유리를 안고 있는 시민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그 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마치 역동하듯 꿈틀거리며 가 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라의 기운. 저것은 분명 대단한 것임에는 틀림 없 다. 몬스터를 우습게 압도하는 가인의 힘과 기세는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 안돼요. 가인 군. 그만해요‥. 더 이상 그 힘을 썼다가는…! ' " 차아아아아아앗------!!! " 가인의 괴성과 함께 그의 헤븐 스매쉬가 재버워크의 턱을 올려쳤다.탑의 꼭 대기 까지 솟구쳐 오르는 재버워크.무섭도록 강맹한 일격에 재버워크의 턱이 날카롭게 깎여져 나갔다. 어느새 재버워크의 눈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본 능적으로 움직이던 이 몬스터가 눈 앞의 한 인간에게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 다. 가인은 날카롭게 재버워크를 노려보며 달려들 준비를 취했다. " 아직 멀었어! 이 세계에 넘어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 - 크륵‥크륵‥ 크륵‥ 예의 부글 거리는 소리를 목에서 흘리며 불안한 눈으로 가인을 바라 보는 재버워크. 어느새 그런 재버워크의 뒤로, 마리와 진우도 괴물을 포위하듯 올 라오고 있었다. 더 이상 네 놈이 도망칠 곳은 없다! - 쿠후후후후후‥ 순간, 재버워크는 밤 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그와 함 께 활짝 펴지는 날개. 거센 풍압이 가인들에게 밀려들며 재버워크가 허공으 로 떠올랐다. 그 바람에 진우와 마리는 바람에 날려 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철 구조물을 붙잡아야만 했다.으읏‥!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거센 강풍이 마리들에게 몰아쳐 왔다. " 가,가인‥! " 힘겹게 철구조물을 붙잡으며 가인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마리. 혹시나 그가 그대로 탑에서 떨어졌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담긴 눈빛이었다.그러나 그 녀의 걱정과는 달리, 가인은 너무도 멀쩡하게 탑에 서서 재버워크를 노려 보 고 있었다. 마치 그의 주변으로는 강풍이 닿지도 않는 것 처럼, 바람들은 가 인을 비껴 날리고 있었다. 그런 가인의 모습이 자신들의 상황과는 너무나 대 조적이었기에 마리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그를 나직히 불렀다. ' 가인…? 어떻게 된 거야…? ' - 크우와아아아아앙!! 괴성과 함께 밤 하늘로 날아오른 재버워크. 보름달에 거대한 박쥐의 문양을 찍어올리며 재버워크는 여유있게 자신의 발 아래에 있는 신 서울 타워를 내 려다 보고 있었다. 진우는 그런 재버워크를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젠장…. 탑 주위에 ABF를 펼쳐 놓았으니 멀리는 가지 못하겠지만… 녀석 이 다시 아래로 내려 가버리면 성가셔지는데…. ' 되도록이면 탑 위에서 결판을 내려고 했던 진우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갈 생 각을 하자 눈 앞이 깜깜해졌다. 탑 밑으로 내려가는 사이에 ABF의 유효 시간 은 끝나 버릴 것이다. ' 엇…? ' 그런 진우의 눈에 들어오는 한 인영. 헤븐 스매쉬를 재버워크에게 치켜올린 가인이었다. 진우는 가인에게 소리쳤다. " 그만둬! 섣불리 천공권으로 녀석을 공격했다간 저 자식,정말로 탑에서 도 망쳐 버린다고! 일격에 녀석을 죽여버리지 못하면 다 헛수고란 말이야! " " 걱정 말아요‥! " 가인은 헤븐 스매쉬에 오라를 끌어 모으며 나직히 답했다.걱정 말라구요,진 우 씨! 일격에 없애버릴테니까‥! 가인은 자신이 있었다. 헤븐 스매쉬에 모 여든 오라가 맥스 수치까지 차올랐는듯 백열하기 시작했다. 가인은 밤 하늘 에서 날개 짓을 하며 여유롭게 자신을 내려다 보는 재버워크를 노려보았다. 간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 천공권(天空拳) 연쇄(連鎖)!! " 맥스 파워의 천공권. 그리고 그 안으로 또 하나의 역(逆) 천공권을 연쇄 발 사. 그때 발생하는 기압의 뒤틀림으로 적을 분쇄시킨다! - 콰드드드드드드드득!!! 재버워크를 덮쳐 오르는 천공권 연쇄.토네이도와 이중 연쇄로 인한 역 토네 이도 사이에 휘말린 재버워크는 자신의 뼈가 살을 찢고, 전신이 뒤틀려 부숴 져 가는 것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재버워크는 날카롭게 괴성을 올렸지 만 불어오는 강풍의 소리에 곧 묻혀져야만 했다. 반대 방향으로 휘몰아치는 연쇄 토네이도의 흐름을 따라, 재버워크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녹색 체액 이 천공권의 돌풍 밖으로 터져 나왔다. - 후두두두둑… 녹색의 폭죽이 터지는 것 처럼 재버워크의 체액이 서울 타워로 떨어져 내렸 다. 천공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하늘 만이 있었 다. 재버워크의 육신은 천공권의 돌풍 사이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 이다! 정말이지 무서운 위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지금의 천공권은…. " ......... " 할 말을 잊은채 헤븐 스매쉬를 들어올린 가인을 바라보고만 있는 피스 대원 들. 그런 가인의 오라는 예전보다 더더욱 짙은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짙은 푸른빛…. 마치 검은 색이 섞인 것 처럼…. ' 안돼…! ' 가인을 바라보는 시민은 눈동자는 불안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큐우우우우웅… 피스메이커의 광속 기차 안.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임무를 끝마친 피스 대원 들은 그들의 집이 있는 26구역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그러니까 일종의 퇴근이라고나 할까. 단,오늘이 신체 검사 날이었던 가인은 이 자리에 없었다. 진우는 히죽 히죽 웃으며 어딘가 들뜬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 이야∼ 그나저나 대단하죠? 이제 막 6개월도 안된 녀석이 말이야∼ " " ......무슨? " 난데 없는 진우의 말에 마리가 슬쩍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 소년 말이에요. 소년! 그 녀석, 피스 메이커에 들어온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한 사람 몫의 일을 거뜬히 해내고 있잖아요∼ 대견스럽게시리. " " 음…. 그렇죠. " 마리는 흐뭇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방금 전 신 서울 타워에서 가인이 보여줬던 오라 능력을 떠올리며 연신 감탄을 금치 못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자신들이 보살펴 줘야한다고만 생각하던 그가,어느 덧 몬스터를 퇴치하는데 일등 공신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진우와 마리 같은 경우에는 특히나 가인을 가르치는 교관의 입장이었기에 그 감격이 더더욱 남 다를 수 밖에 없었다. " 가르치는 보람이 있단 말이야∼ 뭐,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나 할까? 역 시 가르치는 스승이 뛰어나니까 그 제자도 뛰어날 수 밖에∼ " " ......그건 확실히 아니야. " 진우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유리는 피식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순간, 진우는 귀를 쫑긋 움직이며 유리 쪽을 돌아보았다. " 무슨 말 했어요,유리 양? " " ......아무 것도. " 유리는 슬며시 광속 기차의 창 밖을 내다보며 태연스럽게 답했다.그런 그녀 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찜찜했지만 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신경을 끄기로 했다. 유리가 창문으로 비치고 있는 자신에게 혓 바닥을 슬쩍 내밀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그때, 돌연 진우가 목소리를 낮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 하지만 괜찮은 걸까나,소년‥. 갑자기 그렇게 오라 수치가 높아져도…. " 그런 그의 말에 창 밖을 보고 있던 유리도,시민도 어깨를 움찔하며 그를 바 라보았다. 마리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진우에게 물었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 " 아니.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지만…. 단지,지금보다 강대한 힘을 손 쉽 게 얻어버린 것에 소년이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해서 말이에요∼ " " ......노력 없이 얻은 힘은 집중이 되지 않는다‥. " 마리는 진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고서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힘이란 수련을 통해서 심신이 조화가 되었을 때 그 위력을 발휘하지.하지 만 과정이 없는 힘이란 제어하기 힘든 법이에요. " " 그런…, 그럼 오빠는 괜찮은 거야? " 유리는 불안해진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며 물었고, 그 시선을 따라 시민과 마리의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이 뒤 따른다. 진우는 그런 그녀들을 돌아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아니∼ 너무 심각한 얘기가 되버렸는데∼ 그러니까 뭐,힘이 강해졌다 고 소년이 위험해졌다거나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아니에요∼ 결국, 강해 진 힘 만큼 그 힘을 마음껏 다룰 수 있는 수련이 필요하다…이 말이죠. " " 음. 그렇군요‥. 그럼 지금부터 특훈을 시작해야… " 마리는 뭔가 계획을 떠올렸다는듯 한층 밝아진 얼굴로 중얼거렸고, 그런 그 녀의 모습에 진우는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혀를 찼다. " 어허어허∼ 오라를 다루는 데에는 체술 만큼 좋은 것이 없죠∼ 검술은 잠 시 뒤로 미뤄도 좋을 것 같은데? " " ......검술이야 말로 심신의 조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그건 진우 씨도 앞에서 얘기했던 것이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체술을 뒤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군요. " " 그런∼! 소년은 나의 제자입니다! 체술이 먼저에요! 먼저! " " 가인은 저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 " 서로를 응시하며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진우와 마리. 이 모든 것이 겹 사 부를 취한 가인의 죄라고 해야 겠다. 어쨋든, 진우와 마리는 서로에게 지지 않을 훈련 계획을 구상하며 경쟁 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무복 (武福)이 있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체복(體福)이 있다고 해야할지…. 분명한 것은 내일부터 가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양의 훈련이라는 것이 었다. 그때, 그런 둘을 향해 시민이 조용히 말해왔다. " 정말 위험하지 않을까요,가인 씨의 힘…. " " .........? " 시민을 돌아보는 진우들. 그녀는 평상시 답지 않게 어두운 안색으로 진우들 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민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이유도 없이 힘이 강대해질리는 없는 거잖아요. 힘이란 그 만큼의 댓가가 필요한 법. 강한 힘이 생길 수록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뤄야 하는 법인데 … 전 왠지 걱정스럽네요. " " 흐음∼ 하지만 소년의 처음 오라 측정 수치도 50N이었고… 그 동안 그 힘 을 발휘하지 못한채 30N만 사용해 왔다는 게 도리어 이상하지 않아요? " 진우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 옆의 마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아마, 한동안 오라를 사용하는데 익숙하지 않았었는데… 최근 들어 자신 의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 " 맞아요∼ 괜한 걱정일 거에요.괜한 걱정∼ 오늘 따라 시민 씨 답지 않게 왜 그렇게 페이스 다운인 겁니까? " " ......그,그런가요? " 진우의 말에 시민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 말을 흐렸다. 유리는 그런 시 민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문득, 당돌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 …시민 언니는 오빠가 강해진 게 싫어? " " ......예? " 난데 없는 유리의 질문에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는 시민.유리는 무표 정하지만 그 눈빛 만은 시민을 또렷히 주시하고 있었다. " 오빠를 못 믿는 거야? 강해진 오라 능력을 주체하지 못할까 봐? " " …유리 양.그건… 그런 게 아니에요.전 단지… " 하지만 시민은 말을 맺지 못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유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유리는 왠지 모르게 그런 시민의 모습에 화가 났다. 오빠는…오빠는 시민 언 니를 좋아하는데…. 시민 언니의 말이라면 모든지 믿고 따르는데…그런데 어 째서 시민 언니는… 그런 오빠를 믿어주지 않는 거야? " 나는 오빠를 믿어. " 유리는 단호하게 시민에게 말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오빠를 믿어. 난 오빠 를 좋아하니까. 오빠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시민 언니는 오빠의 사랑을 받으 면서도 어째서 오빠를 믿지 못하는 거지? 어째서? ' 나는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데… 이런 내 마음을 오빠에게 표현하고 싶 어도 하지 못하는데…. ' 유리는 가인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의 마음에 답하지 않는 시민에게 질투 와 원망의 감정을 느꼈다. 나라면… 나라면 누구보다도 오빠를 믿고 사랑해 줄 거란 말이야. 나라면…. 시민은 그런 유리의 감정을 눈치 챘는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 미안해요,유리 양. 저도 가인 씨를 믿어요…. " 하지만… 하지만 말이에요,유리 양…. ' …저는 그 사람도 믿었답니다…. ' 귓가로 들려오는 짙은 검은 오라의 파동 소리. 그 소리가 자꾸만 시민의 가 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그녀의 불안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 자자, 오라 측정 수치가 끝났으니 그만 힘을 줄이도록 해요,가인 군. >> " 아,예…. " 방송으로 들려오는 닥터의 말에 가인은 가볍게 한 숨을 쉬며 집중시켰던 오 라를 풀어버렸다.그러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오라의 장벽이 대기 중 으로 흩어지듯 사라져 갔다. 가인은 A.I 슈츠를 입고 있지도 않았는데,그 상 태로도 이렇듯 오라가 눈으로 구분될 정도로 확연히 발현된 것이었다. 분명 강해진 오라의 힘이 아니었다면, 가인으로서는 이렇게 쉽게 오라를 구현시키 지는 못했을 것이다. << 그럼 수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잠시 쉬기로 할까요? 마침, 가인 군을 찾 아온 손님도 있고 하니 말이에요. >> " ......손님? " 닥터의 농담 섞인 말투에 가인은 의아해하며 신체검사실 밖의 유리관을 바 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뱅뱅이 안경을 쓴채 언제나 처럼 연구복을 입은 시더 가 히죽 웃으며 가인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인은 반가운 마음에 유리관 밖으로 걸어나오며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 시더? 왠 일이야,여길? 집에 가지 않았었어? " " 아∼ 그게… 마침 오늘 철야 작업할 것도 있었고… 손 볼 메카닉도 있고 해서, 뭐‥ 그런 거지∼ 그리고 난 연구소 근처에 룸이 있어서 특별히 유 레카 밖으로 나가지는 않아. " 시더의 말에 가인은 웃으며 뭔가 아쉽다는 말투로 말했다. " 아,그렇구나. 난 또 오늘이 내 신검 날이라는 거 시더가 알고서는 남아있 어준 건가 했지∼ " " 에? 아,그,그게… 사실은 저‥ 나, 그것도 있고 해서… 저기‥ " 시더는 가인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하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사실,철 야 작업이니 뭐니 해도, 일부러 그녀가 메디컬 센터까지 올 일은 없는 것이 다. 시더가 가인을 만나보기 위해 온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둔하게도 가인 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시더에게 노골적으로 물어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시더는 당황하며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애썼다. " 그,그래! 그나저나 새로 손 본 A.I 슈츠와 헤븐 스매쉬는 어때? " " 아, 딱 좋아! 헤븐 스매쉬의 컨트롤 감도 예전과 비슷해졌고,도리어 성능 면에서는 이번 쪽이 훨씬 낫더라고! " " 그럼∼ 당연하지! 괜히 MK-2가 아니라고! MK-2가! " MK…2…. 그,그건 뭐야…? 가인은 애써 시더에게 묻지 않을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쓰는 용어들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가인에게 무 리가 있었다. " A.I 슈츠도 가인의 오라력에 맞춰서 새로 조절해 보았는데 어땠어? 움직 이는데 불편함 같은 건 없었지? " " 응. 강도가 약간 세진 느낌이 들지만 묘하게 밸런스가 맞더라고. 시더가 신경쓴 게 느껴지더라. " " 아,역시 알아주네∼ 그거 꽤 고생했단 말이지.아무래도 증폭된 오라 수치 를 감당하기에는 지금의 보디나 오리하르콘 배합 구조로는 무리가 있었거 든. 거의 새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며칠 날밤 새면서 다 음 몬스터의 침공이 있기 전까지 기간을 맞추느라… " 거기까지 말하던 시더는 순간,가인의 눈초리가 바뀐 것을 느끼고서 말을 멈 췄다. 가인은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시더를 바라보고 있었 던 것이다. " 역시…. 그 동안 시더가 너무 고생했었구나. 미안. 힘들게 해서. " " 아,아니‥! 그런 건… " 시더는 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녀는 겉과 속으로 다르게 외치기 시작했다. " 그,그냥∼ 흥미로운 소재이기도 하고‥A.I 슈츠의 강화는 평상시 부터 계 속 생각해오던 거라서… " 라고 겉으로 말하면서도‥ ' 사,사실 가인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더 몬스터 와의 싸움에서 가인이 무사하길 빌면서 나… 노력한 거야‥! ' 라는 말이 시더의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하며 되새김질 되고 있었다.그,그래. 이건 기회일지도 몰라‥! 그냥 솔직하게 다 말하는 거야.가인을 생각하며 만 든 거라고! 조금이라도 가인에게 힘이 되고 싶었노라고! 시더는 굳은 결심을 하며 심호흡을 내쉬었다. 좋아‥. 말한다‥! " ‥가인은‥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 조,좋아! 소중한‥!! 시더의 말에 가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올 려다 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대하자 시더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아,안돼! 가인! 그런 눈으로 보지마! 그,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면 ∼ 흐아아아∼ " 소중한‥! " 시더 웰리스!! 가랏!!! 그리고 시더의 입이 다음과 같은 말을 흘렸다. " 소중한 연구 대상이니까‥! " 바,바보-------------!!!! 시더는 속으로 절규했다.어,어째서‥! 어째서 그 런 말이 나온 거야! 연구 대상이라니∼!! 이러면 내가 가인을 몰모트 취급이 라도 하는 것 같잖아?!! 벙찐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가인의 모습에 시더는 그만 울것만 같은 심정이 되었다.그리고, 가인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 며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 하긴….시더의 최대 관심사는 연구니까. 뭐, 그런 점이 시더 답지만… 하, 하하‥. " 그,그게 아냐,가인∼! 난∼ 나안∼∼!! 시더는 가인의 멱살이라도 흔들며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미 버스는 정거장을 지나간 뒤였다.한번 뱉 은 말은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시더가 스스로 자폭하고 있 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닥터는, 그녀에게 가벼운 동정을 표하며 가인에 게 말했다. " 자, 뭐… 거기까지 해두도록 하죠, 가인 군. 갓 나온 따끈 따끈한 오라 측정 수치가 저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 예에…. " 방 구석에서 머리를 부여잡으며 쪼그리고 앉아 있는 시더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가인은 닥터의 말에 그를 돌아보았다. 닥터는 수치 결과가 나온 프 린트를 차분히 살펴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 오라 측정 수치는 평균 50N입니다.오차 범위가 2.5N으로 불분명하지만 증 폭되었던 오라는 착실히 가인 군의 몸에 안정되고 있어요. 북경에서 발휘 했던 수치,70N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이미 이런 오라 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저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 " …70N요? " 중국에서 뿜어냈던 오라가 70N이라니….하지만 측정된 수치는 50N. 그럼 지 금은 오히려 북경의 그때만 못 하다는 얘기인가? ' 확실히 중국에서 썼었던 그 힘들은 사용할 수가 없었어…. ' 온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로 정신조차 차릴 수 없었던 그 때.희미한 기억 사 이로 와이번의 꼬리 공격을 막아내며, 그 괴수를 단번에 오라 소드로 이등분 한 그 힘…. 손 안으로 모여들던 새로운 느낌의 바람을 현재,가인은 느낄 수 가 없었다. 천공권과 같은 가인 자신의 몸 안에서 끌어내는 힘이 아닌, 마치 거대한 존재가 자신에게 떠맡기듯 뿜어낼 수 있었던 힘. ' 그것은 뭐였을까…. ' 백열하듯 타오르던 바람의 힘. 그것은 도대체…. " 가인 군? 측정된 오라 수치에 관한 사항… 다 숙지한 겁니까? " " 예? 아,죄‥죄송합니다. " 가인은 갑작스레 들려온 닥터의 목소리에 곧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닥터 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다가, 곧 미소지으며 가인의 어깨를 두들겼다. " 하긴 전투가 끝나자 마자 신체 검사를 강행한 것은 역시 무리였을지도…. 지치는 게 당연해요. 뭐,대부분 중요한 실험은 다 마쳤으니까 오늘은 이 쯤에서 끝내도록 할까요? " " 아,예에. " 가인은 엉겹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기색으로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무척이나 피곤했었는데, 닥터가 눈치 빠르게도 그런 가 인의 상태를 알아보고 조치를 취해준 것이다.거의 반 나절이 걸리는 신체 검 사를 이 정도에서 끝내주다니….분명 나중에 세부 검사를 하지 않은 것을 도 출해낼려면 많은 수고가 들 텐데도 닥터는 아무 내색 없이 검사를 끝내주고 있었다.그런 그의 배려에 가인은 감사를 표하며 몸을 일으켰다. ' 그래. 뭐, 상관 없으려나…. ' 어차피 그런 미지의 힘 같은 거에 기대지 않아도 지금의 자신은 강했다. 가 인은 오늘의 전투로서 다시 한번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무 반항도 하 지 못하며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몬스터의 모습이 새삼 가인의 머리 속에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재버워크를 꿰뚫던 천공권의 감촉이 가인의 오른 손 에 아직까지 여운을 주고 있었다. ' 나는… 강하다‥! ' 이건 자아도취가 아니다. 난 분명히 강해졌어.중국에서 와이번을 상대한 이 후로! 가인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 것을 느끼며 힘있게 주먹을 움켜 쥐었다. 이 힘이라면‥ 이 힘이라면 나는‥ ' 모두를 지켜줄 수 있어…! ' 그래.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진우 씨, 시민 씨, 마리 선배, 유리… 그리고 피스 메이커의 모두들을…. 나아가서는 학교의 친우들을, 더 나아가서는 세 계의 인류를…! 이차원의 몬스터들에게서 그들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 이 힘만 있으면. ' 힘이란 아편과도 같은 것이었다. 쓰면 쓸수록 그 품 안에서 헤어나오질 못 하는…. 그것은 달콤한 유혹. 그것은 강렬한 쾌감. 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 이에 힘이 가져다 주는 매력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아주 깊숙하게…. - 두근… 짙은 오라의 파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어두운 밤 하늘.연푸른색 달빛 만이 이 어두운 세계를 비춰주고 있었다. 서 울 시 외곽에 위치한 이 곳.인적 드문 고속 도로는 가로등 조차 세워져 있지 않았기에 정말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다. 그리고 이런 외 딴 장소에 이상하게도 홀로 세워져 있는 한 건물이 있었다. - 푸드드드득‥ 그것은 성당이었다.프랑스 초기 고딕 성당의 모습같은 이 건축물은 국토 관 리 사업의 일환으로서 이 구역에 도로 건설 사업이 추진되면서 천천히 사회 와 박리되어 왔었다. 원래대로라면 수 십년도 전에 허물어 졌어야 하지만,이 성당의 소유주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 후우우우우우‥ 싸늘한 가을의 밤 바람이 이 낡은 건축물을 쓸고 지나가자, 마치 여자가 흐 느껴 우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꽤나 몰골히 송연해 지는 소리들이었다. 늑골교차궁륭(肋骨交差穹隆)으로 덮인 길이 약 130 m의 장대한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하는 오낭식(五廊式)의 웅대한 건축으로,신랑 양측의 열주(列柱) ·트리포리움(명층 아래 연이은 층) ·명층(明層:높은 창 )으로 된 명쾌한 3층 구성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구조물이 여지껏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 기분 나쁜 곳이로군. " 리리스는 휘날리는 에메랄드 머리카락을 추스리며 거대한 피막의 날개로 여 린 몸을 감싸 안았다. 붉은 기가 감도는 검은 가죽 재질의 옷이 마치 그녀의 몸을 탄력있게 조르듯 밀착되어 있었다.그것에는 사람의 원초적인 감성을 건 드리는 굴곡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 또각‥ 또각‥ 리리스의 검은 가죽 부츠가 이 적막한 장소에 구두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낡은 옛 건물의 구석 구석까지 울려퍼지는 그 소리가 묘하게도 선정적이다. 리리스는 마치 옛 유적지를 구경하는 관광객 처럼 유유자적하게 건물을 둘러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출입문을 포함한 3개의 출입구를 지나,'제왕의 상'이 늘어선 가로가 긴 중간대를 거쳐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뜬 지름 9.6 m 의 장미의 창을 중심으로 하는 층에 들어섰다.건물의 외벽은 철거 작업의 흔 적이었는지 큰 구멍이 난채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안쪽은 창문도 없는 외벽 으로 막혀 있었기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으로 뒤덮혀 있었다. " 손님 대접이 엉망이로군. 안데르슨. " 리리스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창백한 달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에서는 유 독 그 입술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 그런 그녀의 중얼거림을 이 건물의 주인이 듣기라도 한 것인지 '확'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개의 초들에 불이 피 어 올랐다.그 붉은 불빛이 드러난 곳에는 거대한 제단이 자리잡고 있었다.수 십년간 사람의 손길 조차 받아보지 못한 다른 장소와는 달리, 깔끔하게 정리 되어있는 공간이었다. 아마도 이곳이 접대실인 모양이로군…. " 블러디 노블맨(Bloody Nobleman) 님은 이곳에 안계십니다. " 부드럽지만 공허한 목소리가 제단의 뒤에서 들려왔다.리리스가 시선을 들어 바라보니, 그 곳에는 검은 양복의 흑발 남자가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 장식용 은제 십자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한시영. 과거 피스 블랙으로 불리우던 오라 능력자. 하지만 지금은 삼차원의 모든 것을 거부한 인류의 반 역자,악의 피스 메이커이다. 리리스는 시영의 예의 시니컬한 웃음을 대하자 급속도로 심신이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 그게 무슨 말이냐? 손님을 초대해놓고서 정작 집 주인이 자리를 비우다니? " " 뭐, 여러모로 바쁘신 분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없어도 회의에는 지장이 없겠지'라는 말을 남기셨었습니다. " " 큭‥ 네이 안데르슨! 제멋대로인 귀족 나부랭이 같으니라고! " 리리스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독설을 내뱉었다. 네이·안데르슨. 몬스 터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자로, 일명 블러디 노블맨. 피의 귀족이라 불리우 는 퍼스트 블러드(First Blood)이다. 삼차원의 존재들은 그를 통칭 뱀파이어 (Vampire)라고 칭한다. " 흡혈귀 주제에 이 따위 십자가 건물을 사들인 것도 역겨워! 미치지 않고 서는 이렇게 성당 건축물을 모으는 취미를 뱀파이어가 가질 수는 없는 거 라고! " " 뭐, 나름대로의 개성이지 않을까요? 어차피 흡혈귀가 십자가를 무서워 한 다는 것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꾸며낸 거짓 소설의 얘기일 뿐. 어쩌면 네 이 님이 이런 취미를 가지신 것도 그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 " …콤플렉스 덩어리 같으니라고. " 리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듯이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단에는 자신과 한시영 외에는 다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 안데르슨이야 그렇다고 치고…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된 거야? " " 카이 님 같은 경우에는 아직 게이트를 통과하지 않으셨기에 기각. 그리고 초류향(楚留香) 님은 중국에서 넘어오신지 며칠 안되었기에 시차 적응을 못 하신 것 아닐까요? " 리리스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답하는 시영. 그때,그런 시영의 앞에 있던 촛 불이 끓어오르듯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어디서 건방진 입을 놀리고 있는 거냐,인간? - 푸확! 순간, 촛불이 거칠게 터져 오르며 제단을 불꽃의 회오리가 감싸 안았다. 그 바람에 성당의 위에 걸려있던 샹들리에와 커텐에 불이 옮겨 붙었다. 그 광경 에 리리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 …거칠기 짝이 없군. 초류향, 넌 변한게 하나도 없구나. " " 쉽게 변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얘기지. 주위에 혹해 금새 금새 변해버리는 자신 따위는 차라리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게 어때? " 그렇게 말하며 불꽃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청룡이 수놓아져 있는 청포 (靑袍)의 한 남자였다. 가볍게 190을 넘을 듯한 큰 키에 벌어진 어깨는 그의 자신 만만함을 보여주고 있었고, 고개를 들어올려 리리스들을 밑으로 내려다 보는 푸른 눈빛에는 그 특유의 오만함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녹색 머리 카락과 무겁게 내려 앉는 대기의 흐름은 그가 단순한 인간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 자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오셨습니까, 초류향 님.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닥쳐라,인간! 네 놈의 입에 내 신성한 이름을 담지 말아라! 귀가 썩을 것 같으니…! " 마치 갓 시집 온 새색시가 바퀴벌레를 보고 진저리를 치듯이,초류향은 인간 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을 내비추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새삼 어제 오 늘의 일은 아니었기에 시영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초류향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초류향은 시영 쪽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리리스에게 말했다. " 이제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 같군. 1년 여 만의 회의를 시작해 볼까? " " 그러도록 하지. 중국의 상황은 어때? " " 그 곳은 이제 별 볼일 없다. 속은 비었고 껍데기만 남았다고 할까. 더 이 상 오라의 황무지인 곳을 들쑤셔 봤자 기력만 낭비할 뿐…. 무의미한 일 이지. " 초류향은 도포 속에서 섭천선을 꺼내 얼굴에 신경질 적으로 부채질을 하며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불쾌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이게 다 리리스, 너가 맡고 있는 그 인간 나부랭이 때문이라는 건 부인하 지 않겠지? 언제까지 그렇게 지켜보기만 할 거냐? " " …지금 그건 월권 행위라고 봐야하는 건가. 애초에 서로의 일에는 간섭하 지 않겠다고 했던 걸로 아는데. " 리리스는 비릿한 비웃음을 흘리며 초류향을 노려보았다.초류향은 그런 그녀 의 태도에 화가 나기 시작했는듯 두 눈에서 검붉은 안광을 내뿜었다. "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우리가 사적인 취미를 즐 길려고 이 곳에 온 줄 아는 거냐? 네가 그렇게 어설픈 일 처리를 하는 동 안 우리가 입은 피해는 얼마인지 아는가! 더 이상 그 인간은 너 하나 만 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 - 우르르르르‥ 초류향의 목소리에 낡은 성당의 건축물이 반응하며 흔들렸다.리리스는 그런 초류향의 태도에 어깨를 으쓱이며 혀를 내둘렀다. 저 성질 머리 하고는‥.초 류향은 겉보기에는 날카로운 미청년으로 보이지만 그 실상은 활화산 같은 분 노를 감추고 있는 오만한 자신의 동족이다. 그가 한 번 화났다 하면 자신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말릴 수는 없을 것이다. 리리스는 차가운 눈으로 초류 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 그래서. 용건이 뭐야? 뭘 원하시는 거지? " " 이 일을 나한테 넘겨라. " '촤악!' 초류향은 섭철선을 모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한시영은 여유만만한 얼굴로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지었다. 과연 저 리리스가 그를 쉽게 초류 향에게 넘겨줄려고 할까? 잘못했다간 이 곳에서 5대 간부의 두 명이 전쟁을 벌일지도 몰랐다. 뭐, 그들이 무엇을 하든간에 시영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 지만…. 하지만 리리스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좋을데로…. " 너무 순순하게 응해주자 초류향은 도리어 의아해진 눈으로 리리스를 바라보 았다. 이렇게 쉽게 응해줄 여인이 아닌 것이다. 이 밤의 여왕은….도대체 무 슨 꿍꿍이지? " 단…, " 대신 리리스는 조건을 달았다. " 기회는 이번 한 번 뿐이다.만약 실패한다면 더 이상 내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말도록. " " 후… 지금 이 초류향의 앞에서 실패라는 말을 꺼낸 건가? " 초류향은 냉정한 얼굴로 오른손의 검지를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불 길이 원호를 그리며 허공에 단선을 수놓았다. " 내 사전에 실패란 없다.더구나… " 그 단선으로 그려진 공간에는 하나의 암석이 형성되어 있었다. 짙은 흑빛의 돌. 그것은 머나먼 중국 대륙에 위치한 은허(殷墟)에서 초류향의 손에 의해 발견되어진 것이었다. " 오라의 주인을 위해 특별한 선물까지 준비해두었으니까 말이야…. " 초류향.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이자 용마인(龍魔人)인 그가 피스 블 루,유가인을 노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26구역에 위치한 시민의 집에서는 언제나 처럼 하루가 시작 되고 있었다. 가인은 허겁 지겁 세면을 끝내고 화장실을 뛰쳐 나와, 2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 으아∼ 도대체 어제는 별 다른 일도 없이 일찍 잤는데도∼! ' 시간은 8시 15분. 8시 30분까지가 등교 시간이었지만, 두 정거장이나 지하 철을 타고 가야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미 지각이었다. 가인은 애꿋은 머 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아직도 꿈나라에 빠져 있는 유리를 흔들어 깨웠다. " 유리야! 유리야, 지각이야! 빨리 일어나! " " 으으응∼ 싫어… 조금만 더‥ 잘래…. " 칭얼거리며 베게 속으로 얼굴을 묻는 유리.그녀는 저혈압이라 언제나 아침 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 한다.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런 유리를 안아 올렸다. 그는 1층의 화장실로 내려와 품에 안겨 있던 유리를 내려주었다. " 자자자∼ 빨리 세수하고 학교갈 준비해. 어서. " " 으응‥ 하암… " 유리는 하품을 하며 비척 비척 화장실로 들어갔다. 가인은 그런 유리의 뒷 모습에 미소짓다가 곧 시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8시 20분…. 이제는 포기다‥. ' 에이, 모르겠다. 가인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털썩 거실의 쇼파에 몸을 파 묻었다. 어차피 늦은 거 느긋하게 가볼까나. 그의 담임 하지연 교사는 지각 생과 결석생들에게 엄하기로 유명했지만, 이미 가인의 중국행에 의해 무결 석 무지각의 기록은 깨져버렸기에 생각보다 혼날 것 같지도 않았다.물론 그 것이 가인, 그 자신 만의 생각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 덜컥! " 어머, 미안해요‥! 가인 씨! 늦었죠? " 그때 허겁지겁 방문을 열며 거실로 나오는 시민. 가인은 그런 그녀를 바라 보며 정답게 인사를 건냈다. " 안녕히 주무셨어요? " " 예에‥. 정말 죄송해요. 제가 늦잠을 자버려서 그만 못 깨워드렸네요.이 를 어떡하지…. 도시락도 싸드리지 못하고…. " " 에이, 괜찮아요!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죠∼ 그리고 원래는 저희가 스스 로 일어나야 하는 거잖아요∼ 시민 씨가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 그렇다. 평상시 대로라면 언제나 처럼 시민에 의해 아침 7시에 기상. 세면 을 끝내고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즐긴다.그리고 그녀가 만든 도시락을 건내 받으며 8시에 집을 나오는 것. 이것이 가인들의 아침 패턴이었던 것이다.하 지만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시민이 늦잠을 잤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가인 들은 오늘과 같은 결과를 맞이해야만 했다. 하아… 그 동안 시민 씨에게 너 무 의지하고 있었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가인은 그녀가 매일 깨워주는 것을 어느덧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시민 씨‥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 평소 답지 않게 늦잠을 다 주무시고…. ' 부엌으로 서둘러 들어가는 시민을 가인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시민 씨도 사람인데 늦잠 한번 잘 수 있지. 유가인, 넌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쇼파에 머리를 기댔다. 아,그러고 보니 마리 선배하고의 아침 수련도 빠져 버린 건가…. 나중에 학교에서 사 과해야 겠다. 하아…. " 가인 씨, 이거 받으세요. " 그때 부엌에서 다시 나온 시민이 작은 도시락 통을 가인에게 내밀었다. 가 인은 의아한 눈으로 도시락 통을 받아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 이건…? " " 급한 김에 어제 저녁 식사 때 만든 음식들로 도시락을 싸 봤어요. 물론, 다 식은 거라서 맛은 없겠지만…그래도 빵으로 점심을 때우는 것 보단 나 을 것 같아서요. " 그렇게 말하며 방긋 미소짓는 시민.가인의 눈에는 그런 그녀가 천사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정말 이렇게 마음 씨 고운 천사가 또 있을까.가인은 감동 먹 은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 고,고맙습니다. 매번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 " 그런 말 하지 말아요,가인 씨. 그렇게 정색하며 말하시면 저, 섭섭해지니 까요. 대신 맛있게만 먹어주면 되는 거에요. 알았죠? " " 예,예에. " 이,이런 사람과 같은 집에 사는 나는 정말 행운아야….분명! 가인은 품 안 의 도시락을 끌어 안으며 행복감에 도취했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이렇게 나 에게 잘 해주는 것일까? 어떻게 이런 따뜻한 미소를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일까? ' 그거야… 같은 동료… 라서일까…? ' 같은 오라를 쓰는 피스 대원이니까. 같은 집에 사는 가족이니까. 아마 그런 것일테지. 그렇게 생각하자 가인은 새삼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그 렇게 생각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지만… 그녀는 나를 남자로는 봐주지 않고 있을 것이다. 지금 시민과의 관계만으로도 가인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 었지만, 사람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이 생기는 법. 그는 그녀에게 이성으 로서, 한 사람의 남자로서 보여지고 싶었다. ' 무리일려나…. ' 나이 차도 많이 나고, 더구나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나 같은 별 볼일 없 는 녀석을 그렇게 봐줄리가 없지. …호,혹시‥ 고아인 날 불쌍하게 여겨 한 집에서 같이 살도록 해주는 것이 아닐까? …아,아닐거야. 유가인,추하다! 그 런 피해 망상은 이제 그만둬! 무엇보다 저 시민 씨가 그런 생각을 하실리가 없잖아! 시민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 아,그만두자.그만둬! ' 가인은 질끈 눈을 감고 거세게 머리를 휘저었다. 어쨋든, 분명한 건 그녀가 자신을 이성으로는 대해주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친절하게 대 해주면서도… 이렇게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면서도… 그것은 어차피 가족으로 서의… 동료로서의 배려 때문. 단지 그 뿐이다. 그것이 묘하게 서글픈 가인 이었다. " 아,참! 가인 씨. " " 예, 예에?! " 그렇게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시민이 자신을 부르자, 가인은 화들짝 놀 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런 가인의 반응에 시민은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지 만, 곧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 오늘 방과 후에 시간 되세요? " " 방과… 후요‥? 그야… 시간이야 얼마든지 되지만…. " 그건 왜요,시민 씨? " 그럼 말이에요,가인 씨. 우리… " 예. 말씀하세요! 가인은 다음에 나올 시민의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며 웃 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민의 말이 이어졌다. " …데이트 할까요? " " .........네? " 저기… 시민 씨. 지금… 뭐라고 하셨죠? 가인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하지 만 시민은 그런 가인을 바라본 채 긍정의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 에취…! " 그리고 화장실에서 멍하니 세면대에 서 있던 유리는 갑작스레 드는 오한에 재채기를 하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뭐,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 그럼 말이에요,가인 씨. 우리… 언제들어도 감미로운 시민 씨의 목소리. 금빛의 폭포수 같은 머릿결들 사이 로 옅은 감홍빛의 눈동자가 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 …데이트 할까요? " 아…. " 꿈만 같다‥. 지금은 국사 시간. 가인은 책상에 팔을 괸채 한창 수업 중인 칠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칠판의 스크린에 떠오르는 지도와 그에 관 한 설명들이 보였지만, 가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질 않고 있었다.심지 어는 선생님의 목소리 조차 들려오질 않았고, 단지 아침에 들었던 시민 씨의 목소리 만이 속삭이듯 가인의 귓 가를 끊임없이 멤돌고 있었다.그녀는 아무 런 대답도 못하며 얼굴을 붉히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었다. - 훗,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사실은 다른 용건이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니까요‥. 솔직히 그 대목에서는 맥이 빠지는게 사실이었다. 그럼 그렇지‥.시민 씨가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리가 없지…. 가인은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하며 시 민의 다음 말을 계속 경청했다. - 이번 9월 25일. 무슨 날인지 알아요,가인 씨? …9월 25일? 갑자기 왜 그런 걸 나에게 물어보시는 거지? 가인은 의아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에,또… 어디보자. 9월 25일이라면 오늘이 18일 이니까 다음 주 화요일‥. 일주일 뒤를 말하는 건가? 그 날이 무슨 날이라 는 거지? 가인은 전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그런 그에게 시민이 말해주었다. - 바로 유리 양 생일이에요. 유리의‥ 생일…? 가인은 자신의 옆 자리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유리를 슬 며시 돌아 보았다.유리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수업을 듣다가, 자신을 바라 보는 가인의 눈길을 느끼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 …왜 그래,오빠? - 아,아냐. 아무 것도! 마음 속으로 말을 걸어오는 유리의 목소리에 가인은 서툴게 답하며 시선을 다시 칠판으로 돌렸다. 유리는 그런 가인의 태도가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갸 우뚱 거렸지만 이내 다시 칠판을 돌아 보았다. 가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 9월 25일이 유리의 생일이라고… 전혀 몰랐었어…. ' 생각지도 못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피스 메이커 관 계자들의 생일 같은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뭐, 그 동안 몬스터의 침공이니 훈련이니 해서 정신 없이 바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생 일을 몰랐다는 것은 핑계 밖에 되질 않는다. ' 나라는 녀석은 도대체가… ' 유리의 오빠를 자처한다는 녀석이… 그 아이의 생일도 여지껏 모르고 지내 왔다니….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이 얼마나 한심 한 노릇이냐. 유리 보기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유가인! 가인은 자기 자신의 둔함을 탓하며 시민과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 그래서 유리 양 생일 선물도 고를 겸, 가인 씨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해서 보자고 한 거에요. 괜찮죠? - 예,예! 무,물론이죠‥. 하고 싶은 말? 과연 무슨 말이길래‥.가인은 진정되던 가슴이 다시 뛰는 것 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냥 집에서 얘기하셔도 될 것을 밖에서 하시겠다는 건 도대체가…. 호,혹시… 단 둘만의 은밀한 얘기인 것은…?! ' …그럴리가 없지.나,참…. 어쨋든 지금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은 유리의 생 일이야! ' 그래! 시민 씨와 단 둘이 만나는 걸로 헤벌레해서는 안돼! 난 그러니까 단 지 유리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 시민 씨와 만나기로 한 것 뿐이야! 불순 한 생각 마라,유가인! " ......... " 하,하지만… 역시 이건 데이트야…. 하,하하하…. 가인은 홍조를 띈 표정으 로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러면 안되는데∼ " 오빠? 뭐하고 있어? " " .........!!!! " 순간, 갑작스런 유리의 목소리에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 보았다. 유리는 그런 가인의 모습을 여전히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가 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유리에게 물었다. " 수,수업은? 벌써 끝난 거야? " " 으응. 오빠, 수업 끝나는 종소리도 못 들은 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 똘히 하고 있었길래 그래? " " 아,아니. 아무 것도…. " 가인은 혹시나 유리가 자신의 마음을 읽을까 걱정되어 그녀의 눈치를 살폈 지만, 유리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듯 멀뚱히 가인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그래. 함부로 남의 마음을 읽지 않기로 나하고 약속했었지…. 예전에 가 인과 유리가 맺었던 약속.그것을 유리는 아직도 굳게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하교할 준비를 했다. 오늘 아침 조회 시간 때,지연 이 말하기를 오늘은 종례를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역시나 제멋대이신 분이라 니까.우리 담임은…. " 아,오빠. 저기… 오늘 시간 있어? " 그렇게 가방을 둘러 메는 가인에게 유리가 말을 걸어왔다.가인이 그녀를 내 려다 보자, 유리는 무표정하지만 쑥스러운 끼가 서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나, 오늘 잠깐 옷 살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저기, 나 옷 볼 줄을 잘 몰 라서… 오빠가 골라주었으면 하거든. " " ......아. " 가인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하필이면 오늘…! 평상시라면 만사 제쳐두고 유 리를 따라가 주었을 가인이었지만, 오늘은 시민 씨와의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거기다 유리의 생일 선물도 골라야 하질 않는가. 일주일 뒤면 그 녀의 생일이고 해서, 유리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고 싶었지만….가인은 쓴 웃 음을 지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 미안. 나 오늘 잠깐 들릴 곳이 있어서 따라가지 못할 거 같아. 미안해,유 리야. " " 아…, 으응‥. " 유리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마 음이 찔렸지만 이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좋은 선물로 골라 올 테 니까 용서해줘,유리야. 응? "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오빠? " 그때, 기습같이 물어오는 유리의 목소리. 가인은 움찔하며 순간, 머리를 굴 렸다. 아무래도 유리의 생일 선물을 고르는 건데, 당사자한테는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한다냐? 유리는 가인이 대답을 빨 리 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에 뭔가 수상하다는 듯 인상을 굳히고 있었다.아 무 이유라도 대질 않았다간 당장에 가인의 목숨이 위험해질 판이었다. ' 그,그렇다고 시민 씨와 데이트 한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 그런 말을 했다간 나를 기다리는 것은 지옥이 될테지. 분명….그때,그런 가 인을 구해주는 뜻 밖의 조력자가 있었으니… " 훗… 가인은 나와 같이 레코드 점에 들릴 거야. 나에게 들려줄 한국 민요 를 골라주기로 했었거든? 그렇지,가인? " 바로 테레이아 민체스터! 그녀였던 것이다.그녀는 언제나 처럼 속삭이는 듯 한 음성과 함께 가인의 팔짱을 끼어왔다. 가인은 그런 테레이아의 모습을 바 라보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 내가 언제…? '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그것을 입 밖으로는 꺼내지는 않는 가인. 왠지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방법이 순간이지만 테레이아의 말에서 보인 것 같았 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런 가인의 생각대로 유리의 신경은 가인에게서 테레 이아로 옮겨졌다. " 오빠는 바쁜 일이 있어서 널 따라갈 여유가 없어. 헛물은 그만 켜시는게 어때? " " 지금 자신이 거절 당했다고 나까지 거절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훗, 어린 아이의 질투 따위… 보기 안 좋다,정말. " " …지,질투! " " …그럼 아닌 거야? " 가볍게 코 웃음을 치며 여유있게 유리를 내려다 보는 테레이아. 유리는 인 상을 찡그린채 그런 그녀를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아,안돼. 말려들면 끝장 이야! 흥분해서는 안된다고! 냉정해지는 거야! 유리는 싸늘해진 목소리로 테레이아에게 말했다. " 피해 망상은 그쯤으로 해두시지. 질투는 오히려 그 쪽에서 하고 있는 것 아니야? 그리고 CD 사는 것 쯤은 혼자서 하도록 해. 귀찮게 사사건건 오 빠를 끌어들이지 말고. " " 그,그런… 가인이 날 귀찮해 할리가 없잖아‥? " "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너의 낙천적인 사고 방식을 칭찬해주지. 아주 세 상 살기가 편하시겠어. " " 후‥ 너야말로 가인을 그만 귀찮게 하는 것이 어때? 같은 집에 살면서 도 학교에서 내내 붙어다니고… 아마,내가 가인이라면 너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지겨울 거라 생각하는데? " " .........말 다 한 거야‥. " - 파지지지지직!! 무시무시한 방전 현상. 서로를 노려보는 테레이아와 유리의 눈동자에서 시 퍼런 불빛이 거짓말 보태지 않고 튀어 올랐다. 결국, 그녀들은 가인을 돌아 보며 소리쳤다. " 가인, 정말 날 귀찮아 하는 거야?! " " 오빠, 내가 지겨워?! " " ......... " 하지만 그 대답을 해줄 가인은 이미,교실을 빠져나가 교문으로 달려가고 있 는 중이었다. - 웅성 웅성… 언제나 공항은 사람으로 붐볐다. 특히나 그것이 수도 서울의 지척에 자리잡 은 김포 국제공항이라면 더더욱. 이 곳의 이용객 증가율은 매년 세계 1위를 차지할 만큼 항상 '과부하'에 걸려 있다. 더구나 통일 한국 전국에 있는 32 개 공항 중 인천 국제 공항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매년 흑자를 내, 나머지 30 개 지방 공항을 먹여 살리는 막중한 책임까지 떠 안고 있다. 좁은 국토에 광 활한 부지를 필요로 하는 대규모 국제공항을 여러 개 만들 수 없다 보니 통 일이 된지 어언 20여년 가까이 흘렀건만, 모든 부담을 김포공항과 인천 공항 만이 감당해 온 셈이었다. " …시끄럽군. " 이제 막 15살 정도 되보이는 어린 소년은 날카로운 흑빛의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뭔가가 계속 맘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소년의 외모가 워낙에 출중하다보니 그런 신경질적인 태도도 별 다 른 흠집이 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검은 권법 도복 차림을 하고 있었 는데, 중국 하북성에서나 볼 수 있을듯한 옷차림이었기에 주위 사람들의 이 목을 한껏 끌어모으고 있었다. " 오랫만에 나왔건만 이 놈의 사바(娑婆) 세계는 변한게 없군. " 소년의 목소리는 앳되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탁해 있었다.그 무미 건조하면서도 고전적인 말투는 묘하게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비단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소년은 회색빛 머리 카락을 길게 땋아 목에 감고 있 었는데, 가까이에서보면 투명한 흰색에 가까운 그 빛깔은 헤어 샵의 염색 도 료로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색이었다. 어쨋든,상당히 튀는 용모였기에 공 항의 관계자들은 다들 수근거리며 그를 훔쳐 보았다. " 호오…. " 소년은 그런 사람들의 수근 거림을 무시하며 가늘게 뜬 눈으로 앞의 전시물 을 구경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국제선 제2청사 3층 대합실에 있는 '국보 급 문화재 전시실'이었는데,그는 고대의 유물을 구경하는 것에 큰 흥미를 가 지고 있었다. 더구나 이곳은 한국이다. 평상시 접해보지 못했던 신기한 물건 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 칠지도(七支刀)라…. " 길이 74.9cm.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 소장.곧은 칼의 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칼이 각각 3개씩 나와 있어 모두 7개 의 칼날을 이루고 있으므로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소년은 문화 재 설명 부분을 읽으며 의문에 빠졌다. 어째서 일본의 국보라는 물건이 이곳 에…? ' 명문을 해석해 놓은 건가? ' 문화재 설명 부분에는 칠지도의 칼몸[刀身]의 앞뒷면에 있는 61자(字) 명문 을 해석해 놓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앞면)태(泰□) 4년 □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 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후왕 (旨를 가리킴)에게 줄 만하다. (뒷면)선세(先世) 이래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자왕(百慈王)은 세세로 기생성음(奇生聖音:길상어) 하므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든다.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 ' 명문의 마멸 부분 및 그 해석에서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나 보군….이건 최근의 명문해석인 건가? ' 어쨋든 명문에 따르면,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서 보듯 독자적인 연호를 사 용한 백제왕이 중국의 연호나 사용하는 제후와 같은 존재였다면 왜왕을 '후 왕(侯王)'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특히 이름이 지(旨)인 왜왕은 중국 사 서(史書)에 등장하는 찬(讚)·진(珍)·제(濟)·흥(興)·무(武)의 '왜오왕(倭 五王)'과 같은 신분의 왜의 지배층으로서 백제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는 귀족 으로 보았다.이렇게 해석할 때 부월(斧鉞) 및 도검(刀劍)의 하사(下賜)가 아 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신표(信標)라는 성격과도 부합하며, 하사 동기도 왜 왕에 대한 일본열도 내에서의 대표권을 승인하는, 종주·신속 관계를 설정하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과연… 그렇다면 이것은 한국의 국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로군. ' 그는 나름대로 납득을 했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칠지도를 감상했다. 말이 도 검이었지만, 사실 실용성이 도외시된 의례용 장식 검이었다. 장식적인 선물 이었으므로 가능한 한 진기하고 귀한 물건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칠지도가 국보로 지정된 것은 도검으로서의 가치 때문이 아 니라 고고학적인 자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인듯 했다. " …인상적이군. 이렇게 색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검도 존재한다니…. " 소년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을 구경하던 이들은 소년의 품에서 나온 물건에 곧 두 눈이 휘둥그 래져야만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담뱃대, 일명 곰방대라고 하는 것이었다! " 저,저저…. " 구경꾼들 중 몇몇이 입을 벌리며 소년을 가리켰다. 오늘날에는 궐련이 보급 되어 썬 담배의 수요가 날로 감소됨으로써 담뱃대는 거의 자취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지금 보기 힘든 담뱃대에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이 아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어린 녀석이 이렇게 보는 눈도 많은 데에서 대놓고 담 배를 필려고하니 기가 막혔던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사람들의 기색에 도 아랑 곳을 하지 않고 물부리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막 담배에 불을 피울 려고 할 때… 그를 말리는 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손님, 죄송하지만 이곳은 금연 구역입니다. " 소년이 눈꼬리를 올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 보았다.그 곳에는 한 스튜어디스가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스튜어 디스를 한동안 뚱하게 쳐다보던 소년은 천천히 담뱃대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 었다. " …늦었어,수정. 이런 게 바로 코리아 타임이라는 거냐? " " 어머, 죄송해요.부르스 님. 하지만 이게 다 항공사 귀빈실에 있으시라는 저의 말을 무시한 부르스 님의 행동 때문인 걸요. " 그렇게 말하며 제복의 모자를 슬쩍 들어보이는 스튜어디스는 다름 아닌, 피 스메이커의 총사령관 직속 비서 민수정 양이었다. 부르스라 불린 소년은 짧 게 코 웃음을 치며 수정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 많이 컸구나. 코 흘리개 시절이 엊그제 같았건만 이제 말 대꾸도 다할 줄 알고. " " 부르스 님은 여전하시네요. " " 쳇. " 수정의 반가워 하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부르스는 혀를 찼다. 소년 은 눈을 가늘게 뜨며 수정의 아래 위 복장을 살펴본 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냐? " " 뭐, 일단은 취미… 라고 해두죠. 피스 그레이의 한국 방문을 축하드린다 는 의미도 있구요. " " …그래. 취미고 축하고 다 좋은데 말이야…. " 부르스는 현기증이 난다는 관자 놀이를 지긋이 손으로 압박하며 말했다. " 더 떨어져서 걸어라. 여자가 곁에 있으면 부정 탄다. " " ......... " - 부우우우웅‥ 최고 출력 542마력을 자랑하는 재규어 XJ 220이 서울의 국도를 마음껏 달리 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황량한 사막을 거침 없이 누비는 검은 표범과도 같 은 자태였다.차에서 경쾌하게 흘러나오는 CD플레이어의 음악이 순식간에 뒤 로 밀려나는 배경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린다. 지미 이트 월드의 더 미 들(The Middle)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재규어를 가속시키고 있었다. " …여전히 고약한 취미로군. 이런 흘러간 팝송 따위를…. " 보조석에 안전벨트를 맨채 불안한 눈으로 차 밖을 지켜보던 부르스는 인상 을 구기며 운전석의 수정을 노려보았다. 수정은 어느새 검은 가죽 자켓에 검 은 가죽 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만 스킨 헤드가 아니지,이건 완전히 폭주족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런 폭주족 차림도 수정이 하고 있자,왠지 모를 세련미를 보여 주고 있었다. 역시 옷은 입는 사람 나름인 걸까? " 그래도 경극을 틀어 드리기를 바라시는 것은 아니시 겠죠? " "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 수정은 검은 선글래스를 치켜올리며 여유있게 미소지었다.그 모습에 부르스 는 더더욱 인상을 구기며 다시 그녀에게서 차 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수 정은 그런 그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생각했다. 여전히 귀여운 구석 이 있으신 분이라니까…. 그때, 부르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트롯트 가수의 노래는 없는 거냐? " " ......... " " 되도록이면 나훈아 선생의 노래를 듣고 싶은데. " 수정은 쓴 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노래를 꺼버렸다.자신이 몰고 다니는 차에 트롯트 노래가 있을 턱이 있겠나. 더구나 이런 재규어를 몰고서…. 결국, 트 롯트를 찾는다는 것은 음악을 끄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고약하신 분이야, 정말…. 수정이 그렇게 노래를 꺼버리자 부르스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말했다. " 그나저나 어째서 네가 마중을 나온 거지? 사령관 직속 비서라는 것은 그 렇게 한가한 것이냐? " "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스승이 먼 곳에서부터 힘든 발걸음을 하셨는 데 제자된 도리로서 당연히 마중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징그러운 소리마라. 누가 네 스승이야? 난 여자를 제자로 둔 적 없다. 진 사령관의 부탁만 아니었더라면 누가 너 같은 골치 덩어리를…. " " 하아…. 오랫만에 만났는데 섭섭한 말씀만 계속하시네요. " 수정은 퉁명스럽기만 한 부르스의 태도에 왠지 심통이 나서 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렇다고 옛날에는 태도가 부드러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 도 간만에 보는 건데 조금은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여주면 안되는 건가? 그때 부르스가 고집스럽게 팔짱을 끼며 물어왔다. " 그나저나 진 사령관은 괜찮은 거냐? " " .....예. 아직까지는. " " 그렇군. " 부르스의 질문에 수정은 잠시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정 면을 응시했다.부르스는 회한이 담긴 눈동자로 그런 수정을 바라보며 생각했 다. ' 가혹한 일이로군. 남겨진 사람이나…. 지켜보는 사람이나…. '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다.자신은 어디까지나 관조자의 입장. 괜한 참 견은 동정이 될 뿐이다. 부르스는 차 밖으로 보이는 익숙치 않은 고층 빌딩 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 그런데 그건 확실한 거냐? " " 예? 무슨 말씀이세요? " 수정의 되물음에 부르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 오라의 주인‥! " 그 말에 수정의 표정이 가볍게 굳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 확실합니다. 강림(降臨)은 이루어졌어요. 그는 지금 성육신(成肉身)의 단 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 " 아직 육신의 죄를 정화하지는 못했나 보군. " " 모노피시티즘(monophysitism).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완전히 결합되 지 못한 거죠. 융합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단일의 성(性)을 이룰 수는 없어 요. " " 그래서 나를 부른 건가? " " 그렇죠. " 수정의 미소에 부르스의 인상은 또 여지 없이 구겨지고 말았다.부르스는 한 숨을 내쉬며 혀를 내둘렀다. " 뭔가를 착각한 것 아니냐? 나는 단성설(單性說)을 따를 생각이 추호도 없 다. 그리고 할 수도 없지. 굳이 따지자면 단의설(單義設) 쪽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신인양성(神人兩性)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의지(意志)는 오 직 하나 뿐인 거다. " " 예. 저희도 그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스승 님께 부탁드릴 것은 그 소년의 보호 뿐이에요. 모든 것은 소년이 결정할 일이니까요. " " 그래.그래. 다 알았으니까… 제발 그 스승 소리 좀 그만하지 못하겠냐! " 부르스는 골치가 아프다는듯 좌석에 푹 머리를 기대고서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수정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굳이 그녀를 돌 아보지는 않았다. 겉으로야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부르스의 가슴에서 는 기이한 흥분이 울려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 길고 긴 나날이었다…. ' 거대한 오라 력이 마치 곁에서 박동하는 것 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잘만 한 다면 이 동쪽의 나라에서 그는 자신의 방황을 끝낼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바 로 그 오라의 주인으로 인해! 하지만 그 전에… ' 마음껏 시험해주도록 하지.부디 내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녀석이길 바라마. ' 부르스는 굳은 얼굴을 풀며 수정을 돌아 보았다. 수정은 부르스의 표정에서 근심이 사라진 것 같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부르스는 그런 그녀에게 예의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나저나 트롯트는 언제 틀어 줄 거냐? " " .........농담 아니셨어요? " 수정은 맥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여긴가? " 가인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곳은 26구역 지하철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건물. 밖의 간판에는 「아르센 피아노 학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피아노 소리 만이 아련하게 가인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 이곳이 시민 씨가 일하시는 피아노 학원‥! ' 그렇다. 한시민.그녀는 피스메이커의 피스 대원, 피스 옐로우였지만 평상시 에는 피아노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그는 오늘 시민 씨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가인은 새삼 긴장되는 자신을 발견하며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 되게 조용하네? ' 희미하게 울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제외하면 이곳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고 있었다. 방음 시설도 방음 시설이지만,이 동네 자체가 그 흔한 자 동차 소음 하나 없을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다. 피아노 학원을 세우기에는 가 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나 할까. ' 이런 곳에서 시민 씨는 일하시고 계셨던 거구나. ' 왠지 이곳의 분위기가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가인은 생각했다. 계단 으로 3층까지 올라가자, 학원의 출입구로 보이는듯한 문이 보여왔다. 가인은 그 문 앞에서 옷 차림을 단정히 하고 몇 번 헛기침을 했다.그는 학교를 마치 자 마자 집에서 교복을 벗어던지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온 것이었다. 갈색 바 지에 황색 줄무늬 니트로 가을의 분위기를 잘 살린 옷차림이었다. 그래.이래 뵈도 꽤 신경을 썼다고. - 딸랑‥ 도어 문에 걸린 종이 울리며 가인은 천천히 학원 안으로 들어갔다. 학원은 인테리어를 나무 판자 집 형식으로 꾸미고 있었는데,큰 유리창에서 들어오는 햇살들이 이 곳의 분위기를 포근하게 잘 살려주고 있었다. 청소를 매일 꼼꼼 히 하는 건지, 건물 안은 상당히 청결했다. 벽에는 쇼팽과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피아니스트들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 저기, 무슨 일로 오셨나요? " 그때, 정신 없이 학원을 구경하던 가인을 불러세우는 한 목소리. 가인이 재 빨리 돌아보니 그곳에는 뿔테 안경을 쓴 20대 후반의 여성이 자신을 바라 보 고 있었다. 이곳의 선생님인 걸까? 가인은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입 을 열었다. " 예에‥.안녕하세요? 저, 여기 한시민 선생님‥을 찾아왔거든요. " " 한시민 선생님요? "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순간, 가인을 위 아래로 살펴보기 시작했다.가인 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깜짝 놀라 목으로 마른 침을 사켰다.왜,왜 이러는 거 지,이 여자? 그러나 그렇게 가인이 불편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여인은 뚫어져라 가인을 살펴 보다가 곧 손뼉을 마주 치며 소리쳤다. " 어머! 그럼 혹시 당신이 유가인 씨?! " " ......예? 예,예에…. 제가 유가인이 맞기는 합니다만‥. " …이 사람.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가인은 영문을 몰라 당황하 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그제서야 가인이 자신 때문에 놀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아, 죄송해요! 제가 그만 경황이 없어서….전 이 학원의 원장 김민경이라 고 해요. " " 아,예‥.원장‥ 선생님. " 이렇게 젊은 사람이 원장이었구나. 가인은 악수를 청하는 민경의 손을 맞 잡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시민 씨는 이 사람의 밑에서 일하시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가인은 민경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다시 생각이 미쳤다. " 아,그나저나 절 어떻게 아시고‥. " " 그야 평상시에 시민 씨한테 얘기를 많이 들어서 알고 있죠∼시민 씨가 가 인 씨 얘기를 얼마나 자주 하는지 모르죠? 전 아주 귀에 못이 박힐 정도 로 들어서 이제는 아주 외운다니깐요∼ " " 에?! " 아니, 시민 씨가 나에 대한 얘기를 자주 했었다고? 도,도대체 어떤 얘기 길 래…! 가인은 왠지 귀가 솔깃해져 조심스럽게 민경에게 물었다. " 대,대부분 어떤 얘기를 하던가요? " " 에이∼ 아무렴 자기 남자 친구를 나쁘게 얘기라도 할까봐서요? 그야 듣고 있으면 배가 아플 정도로 깨가 쏟아지는 얘기뿐이었으니까 너무 걱정 말 아요∼" 그,그런…! 거,걱정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뭐라고 하셨죠, 지금?! ' 나,남자 친구?!! ' 시,시민 씨가 날 남자 친구라고 했다고?!! 가인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며 민경의 눈치를 살펴보았는데, 그녀는 아예 대놓고 재확인을 시 켜주고 있었다. 민경은 학원의 방 안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얘들아,여기 좀 나와봐! 시민 선생님 남자 친구가 지금 여길 왔단다! " " 에에에엣-------?!!! " 그러자 방 안에서는 초등학생들로 보이는 꼬마 아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쏟 아져 나왔다. 아마도 이 꼬마들이 학원의 학생들인 모양이었다. 가인은 자신 을 초롱 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 에에? 이 사람이 시민 선생님 남자 친구야? " " 너무 평범하게 생겼다! " " 늙은 아저씨잖아! 시민 선생님이 아까워! " 우선은 남학생 일동의 가인에 대한 평. 가인은 그 얘기를 들으며 관자 놀이 를 꿈틀거렸다. 이,이 어린 녀석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늙어?! 아저씨라 고?! 지금 아저씨랬냐?!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저씨 소리에 가인은 기가 막 혀 꼬마 녀석들을 어이 없이 바라보았다. " 아냐! 미남 오빠야. 니들보다는 천배 만배 잘 생겼다고! " " 시민 선생님이 남자 보는 눈은 나하고 좀 비슷한가 봐∼분위기가 열라 짱 멋져∼! " " 오빠, 정말 시민 선생님 남자 친구야? 만약 아니라면 내가 오빠 여자 친 구해도 돼? " 반대로 호화찬란한 여학생 일동의 가인에 대한 평. 아마도 가인의 페로몬이 여기에서도 진가를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여학생들 을 돌아보았다. 이 녀석들… 초등학생들 맞는 거야? 어쨋든,상당히 남녀 성 별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리는 가인의 평이었다. " 이 녀석들! 지금 손님에게 무례한 소리들이나 할래?! " 그런 아이들의 말에 민경은 화를 내며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아무래도 아 이들이 재빨리 입을 닫는 것으로 보아, 이 원장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대단히 강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듯 했다. 민경은 검은 뿔테 안경을 반짝이 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 자자, 시민 선생님이 자랑하는 남자 친구 분한테 그런 소리하면 못 써요! 어서 사과해요. " " 예에--- " 초등학생들은 기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 시민 선생님, 행복하게 해주세요∼ " '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냐고--------!!! ' 가인은 왠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민경을 돌아 보았다. 그녀는 그런 가인에게 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어머, 얘들도 참. 요즘 애들은 참 조숙하단 말이에요. 그렇죠? " " ......하,하하…. " 웃을 수 밖에. 가인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이 사람들 뭔가 대단 한 착각들을 하신 모양인데…. 전 시민 씨의 남자 친구가 아니란 말이에요∼! 혹시라도 이런 말들이 시민 씨의 귀에 들어갔다간 지금의 관계마저 무너질까 봐 두려운 가인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들어갔을 수도…. ' 안되겠다. 어서 이 오해를 풀지 않으면…!! ' 도대체 시민 씨가 뭐라고 말씀하셨길래 다들 이러는 건지…. 가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진실을 얘기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고 했다. 그때, 그는 시민 씨가 학원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 어라? 시민 씨는… 여기 안 계신 건가요? " 복도에 나온 이들이 학원에 있는 사람들의 전부인 것 같은데….어디에도 시 민 씨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어디에 가신 거지? 방 안에 계시는 건가? 그렇게 시민을 찾는 가인에게 민경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 아,참! 말하는 걸 깜빡했네∼! 오늘은 시민 씨, 호출이 있는 날이라서 일 찍 나갔어요. " " ......호출요? " 가인은 전혀 모르겠다는듯 중얼거렸다. 호출? 설마, 피스 메이커의 호출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일반인들이 그런 것을 알리가 없을텐데…. 하지만 그런 가인의 의문은 민경의 다음 말에 의해 풀릴 수 있었다. " 시민 씨는 화요일 밤마다 저희 학원과 교분이 있는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주시거든요. 그걸 저희는 호출이라고 해요. 아까 시민 씨가 가 시기 전에, 오늘 아침에 가인 씨에게 말하는 것을 깜빡했다고…가인 씨가 학원에 오시면 반드시 얘기해달라고 부탁 했었어요. " " 아, 그랬군요…. " 가인은 그제서야 납득이 갔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 핸 드폰으로 연락하셨으면 됐을텐데…. 가인은 핸드폰을 살펴 보다가 살며시 인 상을 찡그렸다. 아, 밧데리가 나갔었네…. 그러고 보니 어제 충전하는 것을 깜빡 잊었었나 보다. " 자, 레스토랑이 어딨는지 가르쳐 드릴게요. 말로 하는 것보단 약도를 그 려 드리는 게 더 빠르겠죠? " " 예. 감사합니다. " 민경의 설명을 주의깊게 들으며 가인은 몇 번이고 약도를 바라 보았다.약도 에는 시민이 간 레스토랑의 이름이 영어로 적혀져 있었다. ' 튜즈… 데이(Tuesday)? ' 레스토랑 는 26구역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24구역의 번화가에 위 치하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7시를 넘어서고 있었기에 주위는 어두워져 있 었다. 가인은 손에 든 약도와 레스토랑의 간판을 번갈아 보며 안도의 한 숨 을 내쉬었다. " 아,제대로 찾아왔어. " 처음에는 조금 헤맸었지만, 의외로 이 튜즈데이는 이 지역에서 꽤나 유명한 레스토랑이었기에 길 가는 사람들에게만 물어봐도 손쉽게 찾아 올 수 있었다. 가인은 몇번 헛기침을 한 후, 조심스럽게 레스토랑의 유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청량한 음식의 냄새와 귀품있는 인테리어의 불빛이 가인을 반겼다. 그 불빛들 위로는 거대한 창문으로 뒤덮힌 레스토랑의 천장이 밤 하늘의 별 빛을 건물 안으로 들여 보내고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 자면… ' 비,비싼 데다…. ' ‥였던 것이다. 가게의 유니폼인듯한 고급스런 정장을 착용한 웨이트리스들 은 물론이고,카운터에 진열된 양주들은 그 이름 부터 희귀한 것이 범상치 않 은 가격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인은 괜스레 긴장하며 천천히 빈 테이블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꽤 장사가 잘되는 곳이었는지, 레스토랑의 테이 블은 손님들로 가득차 있었다. 가인은 가까스로 도어 근처의 빈 테이블을 발 견하고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 이런 굉장한 곳에서 시민 씨가 연주를 한다고… ' 가인은 손님으로 만원인 가게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레스토랑의 가운데에 는 한 그랜드 피아노가 조명을 받으며 놓여져 있었는데, 아마도 저곳에서 시 민 씨가 연주를 하는 모양이었다.하지만 시민 씨의 모습은 정작 어디에도 보 이지를 않고 있었으니… 벌써 다 끝나 버린 걸까, 시민 씨의 연주…? " 손님, 주문 하시겠습니까? "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가인에게 한 웨이트리스가 다가왔다. 아직 20대를 넘기지 않은 듯한 외모로 보아, 아마도 이 곳의 아르바이트 생인 모양이었다. 가인은 엉겹결에 그녀에게서 메뉴판을 건내받았다. " 아,예‥ 저‥ 사실 전 식사하러 온 게 아니라… " " .....예? " " 그러니까 여기서 피아노를 연주하신다는 한시민 씨를 뵈려고 왔는데요‥. " 식당에 와서 식사를 하러온게 아니라니… 이렇게 말해도 되려나? 가인은 복 잡해지는 표정으로 말을 하며, 웨이트리스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눈치 빠르게 가인의 말을 알아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 아아∼ 시민 씨 연주를 구경하러 오신 분이시군요? 어쩐지 이런 레스토랑 에 일행도 없이 혼자 오셨다 싶었죠∼ " " 예? 아,아뇨. 그게‥ 연주를 듣고 싶기도 하지만‥ 사실 전 시민 씨와의 약속이 있어서 만나러 온 건데요‥. " 그런 가인의 말에 웨이트리스는 갑자기 퉁명해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가인에게 말했다. " 시민 씨를 보러 온 분들은 누구나 다 그런 말씀들을 하시죠.시민 씨가 여 기서 얼마나 인기인이신데 함부로 외부인과 만나게 하겠어요? 손님∼ 속 들여다 보이시니까 그냥 조용히 연주만 감상하시고 돌아 가시죠? " " ......예? 아니 그러니까 전 시민 씨와 약속이 있어서 온 거라니까요. " " 네네네∼ 믿어드릴 테니 그만하세요. 그나저나 두번째 연주는 10분 쯤 있 어야 시작할텐데… 일단 주문이라도 하시죠? " 뭐야,이 웨이트리스? 믿기는 개뿔을 믿어. 전혀 안 믿고 있는 태도잖아! 웨 이트리스의 불량한 태도에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메뉴판을 펼쳤다. 도대체 약속이 있다고 해도 믿어주지를 않는다니… 평상시에 시민 씨를 만나려고 거 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길래 이런 거야? 가인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 었다. 에휴… 뭐, 내가 나중에 시민 씨와 만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겠 지.젠장…. 가인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메뉴판의 메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뭐야? 무슨 커피 종류가 이렇게 많은 거야? 블루 마운틴… 아이리쉬 커피 … 헤이즐넛… 으악! 값도 캡 비싸! 커피 한 잔에 6000원?! 아니 커피를 무슨 봉지 째 줄려고 그러는 건가?! 뭐가 이렇게 비싸?!! '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 그 뒤의 식사 값과 술 값은 더더욱 천문학적인 수 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가인은 새삼 이곳이 그 흔한 찻집이나 카페가 아닌 레스토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젠장, 이런 곳에서 매 끼니를 해결 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정신 구조들을 가지고 있을까나. 돈 아까운 줄을 모르고 낭비하는 부르주아들 같으니라고! 가인은 고심의 눈초리로 메뉴판을 살펴 보다가 조심스럽게 웨이트리스를 향해 말했다. " 저기… 그냥 물만 시키는 건......... 역시 안되겠죠? " " ......... " " ......헤이즐 넛 하나. " " 예, 감사합니다. 손님∼ " 방긋 웃으며 주문을 받아가는 웨이트리스의 뒷 모습에 가인은 인상을 구겼 다. 아, 진짜 장사 잘해 부자 되시겠어∼쳇! 아무리 피스대원으로서 250만원 의 월급에 세금 면제 혜택까지 받는 가인이었지만,예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 가난뱅이 근성이 어디를 갔겠는가? 그가 현재까지 받은 월급은 공납금과 준비물 값, 참고서 값 등을 제외하고서는 고스란히 가인의 통장에 저축되고 있었다. 아마 그동안 불어난 이자까지 합하면 저축금 만 해도 1500 만원을 거뜬히 넘었을 것이다.그동안 옷 한번 사입는 데에도 쓰지 않았던 돈 이었는데… 고작 이런 커피 하나를 비싼 돈 주고 사 마실려고 하니 가인의 속은 쓰릴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분명히 횡포라고! 횡포! " 주문하신 헤이즐 넛 나왔습니다, 손님∼ " 그런 가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는 낯으로 가인에게 커피를 가져 오 는 웨이트리스. 가인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헤이즐 넛을 음미했다. " 뭐, 맛은 좋내요‥. " " 그러믄요! 저희 레스토랑의 헤이즐 넛은 4종 이상의 아라비카 커피를 적 절히 배합하여 가공한 것에 하와이안 헤이즐넛 향을 첨가한 것으로 여러 가지 향커피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젊음과 낭만의 커피이지요. " …뭐야? 그 TV 광고몰의 아가씨 같은 소개 멘트는…. 뭐, 충실한 직업 의식 일려니∼ 하고 생각하며 가인은 남은 시간도 때울 겸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아, 그나저나 이 레스토랑 이름이 튜즈데이(화요일)인 건 뭣 때문이에요? 무슨 유래 라도 있나요? " 그것은, 처음 피아노 학원의 원장 선생에게서 튜즈데이라는 레스토랑 이름 을 들었을 때부터 가인이 계속 궁금해 했던 것이었다.그런 가인의 질문에 웨 이트리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반색을 하며 답했다. " 어머, 손님∼ 의외로 디테일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손님의 말씀대로 저희 레스토랑의 이름은 원래는 프라이데이(Friday:금요일)였어요. 개점한 요 일이 금요일이었거든요? " 뭔가 생각 없이 지은 기색이 역력하군‥. 가인은 가게 주인의 작명 센스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 그럼 튜즈데이로 바뀐 건,무슨 화요일과 관계된 일이 있었기 때문인가 보 죠? " " 예, 맞아요. 바로 손님이 그렇게 찾으시는 한시민 씨가 1년 전부터 저희 레스토랑에 오시고 나서 부터 가게 이름이 튜즈데이로 바뀌게 된 거에요! " " .........예? " 시민 씨가 오고 나서 부터라고? 가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웨이트리스 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는 가인이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자,신이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시민 씨가 매주 화요일 마다 저희 레스토랑에 들리셔서 피아노 연주를 하 시자, 화요일 날만 되면 연주를 들을려는 손님들로 가게가 북적거리게 되 는 거였어요.오죽했으면 평상시 매상을 전부 합쳐도 화요일 매상의 반도 채 되지 않는다니까요. 결국,그렇게 시민 씨 때문에 매상이 올라가게 되 자 지점장님이 그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가게 이름을 시민 씨가 오는 요일인 튜즈데이로 바꾸게 된 거죠. " " 그런 일이 있었군요‥. " 가인은 새삼 주위의 손님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많은 손님들이 시민 씨의 연주를 듣기 위해 모인 거란 말이지? 한 레스토랑의 이름이 바뀔 정도의 연주라는 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가인은 두근 거리는 가슴으로 중 앙의 그랜드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한시민. 그녀가 보여줄 새로운 모습이 가 인을 흥분케 했다. 그리고 웨이트리스가 말했다. " 아,손님. 시작해요. " 그녀의 말대로 주위의 조명이 꺼지며, 테이블들의 파라핀 초들 만이 레스토 랑 안을 밝히기 시작했다.그와 동시에 중앙의 그랜드 피아노로 옅은 노란 빛 의 조명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그녀가 서 있었다. ' 시민 씨‥. ' 옅은 금발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한시민.그녀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조용 히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 박수 소리 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가인의 귀가 다 멍멍해질 정도였다.그런 사람들의 환호를 받 으며 시민은 천천히 피아노의 의자에 앉아 건반에 손을 올려 놓았다. 하얗고 가는 그녀의 손가락은 이윽고… 천천히 피아노의 건반들을 어루만지기 시작 했다. 오선지 위를 수놓은 음표들이 그녀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었다. 때로는 청명하고 때로는 격렬하며 때로는 애절하고 부드럽게… 시민이 처음 선보인 곡은 바하의 "영국 조곡 제 2번"이었다.편곡 없는 클래 식이었지만 그 음에는 무한한 개성이 녹아 있었다. 레스토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은 피아노를 치는 시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그 귀는 시민 이 연주하는 음악의 세계 속에서 헤어나올 줄을 몰랐다.가인은 잔잔하면서도 힘이 서려 있는 시민의 피아노 연주를 행여나 놓칠 새라 전신의 촉각을 곤두 세우며 듣고 있었다. 움켜쥔 그의 손에서는 어느새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 시민 씨의 오라 능력은 음파…. ' 말 그대로 마음껏 음파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그녀는 가졌다. 하지만 설마 악기 연주로도 이런 마력의 힘을 이끌어낼 줄이야…. 아니.그렇다면 이건 오 라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닌, 시민 씨 만의 연주인 걸까? 어쨋든 정말이지 사 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피아노의 음색이었다. 가인은 조명을 받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의 연주는 영국 조곡 제 2번에서 미 뉴에트로 넘어가고 있었다. ' 마음 속의 격정이… 물밀 듯이 사라져 간다…. ' 모든 희노애락이 녹아있으면서도 그 감정들에서 벗어나는듯한 해방감. 음악 에 취해 자신의 껍질을 벗어버리는듯한 이 느낌은 가인이 최초로 접해 보는 미지의 감성이었다. 무한한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그에게 생전 처음 맛 보는 행복감을 주고 있었다. ' 아아…. ' 연주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관객들은 그것을 느끼고 있었 다. 아쉬움과 애타는 갈증이 느껴져 온다.하지만 아직 시민의 연주는 끝나지 를 않았다. 모두는 그녀의 연주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돌릴 수도, 귀를 닫을 수도 없었다. ' 나는…. ' 라스트로 시민이 장식한 곡은 리스트의 '장송곡'. 그녀의 피아노는 너무나 자유로웠다. 그것은 끝없는 음악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고, 무한 그 자체 였다. 무한의 가능성…. ' 나는…. ' 시민의 손이 멈췄고, 끝이 없을 것 같던 피아노 연주가 그 막을 내렸다. 하 지만 레스토랑의 모두는 한참 동안 연주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 었다. 별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듯한 귀환감. 마치 연주를 청취하는 시 간이 반나절이었던 것만 같은 비몽 사몽의 느낌….이윽고 그 모든 것에서 현 실의 감각을 되찾게 되자, 관객들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우레와 같은 박수 를 시민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 짝짝짝짝짝짝… 레스토랑이 떠나갈듯이 울려퍼지는 박수와 갈채 소리. 가인과 함께 시민의 연주를 듣고 있던 웨이트리스는 손이 떨어져 나가라 박수를 쳐대며 가인에게 소리쳤다. " 어때요?! 정말 대단하죠, 시민 씨의 연주! " " ......... " 그러나 그런 웨이트리스의 말에 가인은 답하지를 않았다. 뭐야? 시끄러워서 내 말이 안들린 건가? 웨이트리스는 의아해진 표정으로 가인을 돌아보며 말 했다. " 저기, 손님…? " " .....? " 그제서야 웨이트리스의 존재를 알아차린듯 반응해오는 가인.하지만 그런 그 의 모습에 웨이트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 아…? " 뜨거운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가인은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를 못한채 멍하니 시민을 바라보고만 있었 다. 그녀는 조명 속에서 무대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나는… ' 나는 시민 씨에게… ' 다시 한번‥ 반하고 말았다…. ' " 정말이지∼ 이래도 될까 몰라∼ 하아∼ " 웨이트리스는 푸념을 하며 가인을 레스토랑의 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며 가인은 연신 사과의 말을 그녀에게 건내고 있었다. " 저, 죄송합니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해서…. " " 아니 왜 사과를 하는 거에요?! 손님이 아까 말씀하시기를,시민 씨와 약속 이 되어 있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저는 그래서 지금 손님을 시민 씨에게 안내해드리고 있는 건데… 뭐, 잘못 되었어요? " " 아,아뇨.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그래도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제 말을 안 믿으실려고 했잖아요? 거기다, 만약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는 거라면 어쩌실려고… " 가인의 말에 웨이트리스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다가 곧 코웃음을 치며 말했 다. " 됐네요,손님∼ 이래뵈도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있거든요? 적어도 손님은 거짓말 하실 분이 아니에요∼ " " ......... " 언제는 그렇게 의심을 하며 사람 속을 긁어 되더니만…. 갑자기 왜 이렇게 태도가 돌변한 거야? 가인은 그런 웨이트리스의 태도에 입 맛을 다시며 다시 그녀의 뒤를 따라 시민 씨가 쉬고 있을 대기실로 걸어갔다. 그러던 중 웨이 트리스가 가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 그런데 시민 씨와는 어떤 관계세요? 혹시 애인? " " 예? …그,그런…! " 가인은 갑작스런 웨이트리스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며 버벅거렸다.왠지 오늘 따라 자주 듣게 되는 말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이 모양이다.웨이트리스는 그 런 가인의 모습을 살펴 보다가 곧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 하∼ 뭐, 그럴리가 없겠죠∼ 그 시민 씨한테 손님 같은 분이 애인일리가∼ " " ......하,하하….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맞는 말이긴 하지만…왠지 섭섭해 지는군. ' …그렇게 단정하듯이 말할 필요까지는 없을텐데…쳇. ' 가인은 앞에서 걷고 있는 웨이트리스를 슬쩍 째려보며 푸념했다. 그렇게 두 런 두런 애기를 하는 사이에 그들은 대기실이라고 적힌 문 앞에 도착하게 되 었다. ' 여,여기에 시민 씨가…. ' 맨날 보는 사이인데도, 무대에서의 시민을 떠올리자 가인은 새삼 가슴이 두 근거려졌다.그런 가인을 뒤로 하고 웨이트리스가 대기실의 문을 두들기며 소 리쳤다. " 시민 씨, 저희 들어가요∼ " - 덜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화장대와 큰 유리창이 있는 방의 모습이 보여왔다. 옷 걸이에 걸린 수 십 가지의 옷들로 보아 아마도 이곳은 분장실도 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민은 그런 대기실에서, 무대에서의 검은 드레스 차림 대신 원 래의 회색 여성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가인은 그런 그녀를 보며, 시민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대기실에는 시민 외에도 또 다른 한 남자가 서있었다. 시민은 들어오는 가인을 보고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 아… 가인 씨! " " 시민 씨! 조금 늦었죠? 시민 씨 연주 끝날 때까지 기다리느라 그랬어요. " 가인은 시민이 자신을 반겨주자 화색을 띄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민은 그 런 가인에게 방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 어머, 그럼 들으셨어요? 제 연주…. " " 예! 아주 좋았어요! 정말이지 최고에요! 최고! 아, 그런데… " 가인은 시민과 얘기하다가 자신을 노려보는 한 남자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는 가인을 향해 '분위기 좋았는데 이게 어디서 날아온 파리냐?'와 같은 시선 을 던지고 있었는데, 그 시선을 마주 대하자 가인은 괜히 기분이 불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뭐야? 이 사람은? 시민도 그런 가인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불편해진 얼굴로 남자를 소개했다. " 가인 씨, 이 분은 우지환 선생님. 유명하신 피아니스트이시죠. 이렇게 가 끔 제가 연주하는 날에는 절 찾아오셔서 격려를 해주시는 분이에요. " " 아,예에…. "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유명한 피아니스트니 뭐니 하는 건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노려보는 저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 …왜 계속 날 노려보는 거야? ' 우지환이라고 시민에 의해 소개된 남자는, 가인에게 통성명을 할 분위기였 는데도 의도적으로 가인을 무시하는 건지 시민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다. " 시민 씨, 저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 시민은 남자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품에 큰 꽃다발을 안고 있었는데, 아마도 우지환. 저 남자가 시민에게 건내준 모양이었다.가인은 왠 지 모르게 이 사태에 긴장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지환에게 말했다. " 저… 선생님, 말씀은 고맙지만…. " " 거절하지는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밤은 시민 씨와 단 둘이서 모짜르 트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 뭐?! 오늘 밤 단 둘이서?! 가인은 지환의 말에 놀란 눈으로 시민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 보았다. 시민은 남자의 제안을 사양할려는듯 거부의 뜻을 계속 내 비추고 있었지만, 지환이라는 이 작자는 의외로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시 민은 꽃다발을 화장대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 저기… 매번 이렇게 절 찾아와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이건 좀… 부담 스 럽내요‥. " " 시민 씨, 그렇게 제 마음을 몰라주시는 겁니까?! 전 지금 시민 씨에게 프 로포즈를 하고 있는 겁니다! " 그러면서 덥썩 시민의 손을 잡는 지환. 순간,그 광경을 보던 가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마,망할 자식∼!! 지금 누구 손을 잡고 있는 거야?!! 시민은 당황하며 가인 쪽에게 흔들리는 눈빛을 보냈다. 시민 씨의 저 눈빛은… 나에 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 뭐, 실상은 제껴두고서 라도 가인은 그렇게 느꼈다. 그는 성큼 성큼 시민과 지환의 사이로 걸어갔다. " 아,손님‥?! " 그런 가인의 행동에 놀란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웨이트리스. 그리고 가인은 시민의 손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억세게 저지했다. - 턱! " 무,무슨 짓이냐, 네 놈은‥?! " 당황하며 자신의 손을 붙잡은 가인에게 소리지르는 지환. 그러나 가인은 그 런 지환을 노려본채 한 걸음의 물러섬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민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가인의 등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환은 인상을 찡그리며 가인에게 소리쳤다. " 지금 내가 시민 씨와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 거냐?! 얼른 비켜서지 못해! 나이도 어린 녀석이 어른의 일을 방해하면 쓰나! " 그 말이 결국, 가인의 꼭지를 돌아버리게 했다.가인은 덥썩 시민의 손을 잡 아 자신에게 끌어당기며 지환에게 소리쳤다. " 남의 애인에게 집쩍거리는 건 그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시지! 시민 씨는 나 와 선약이 있다고! " " .........!! " 그런 가인의 폭탄 선언에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는 시민. 하지만 가인 은 평상시의 그 답지 않게 매우 흥분했는지라 그런 시민의 시선을 느낄 수 가 없었다. 아마,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지환 은 가인의 말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 뭐,뭣‥! 너, 너 같은 녀석이 시민 씨의 애인이라고‥! " " 가요, 시민 씨! 이런 사람 상대하지 말고! " " 아, 예‥ 가인‥씨. " 가인은 얼떨떨해 하는 시민을 이끌고 서둘러 대기실을 빠져나가버렸다.지환 은 그런 둘을 쫓아 나갈 수도 없고 해서,방 안에서 발만 동동 굴리며 분통을 터뜨릴 뿐.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숨 죽여 지켜보고 있던 웨이트리스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인들이 빠져나간 대기실의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어머, 진짜… 애인 사이였나 보네…. " - 탁탁탁탁…. 시민과 가인은 레스토랑을 빠져나와 한참을 빠르게 걷고 있었다. 가인에게 손을 붙잡힌채 힘겹게 그를 따라걷던 시민은, 지친 목소리로 가인을 불러 세 웠다. " 저… 가인 씨, 이제 그만 멈추시는게… " " 아…! 죄,죄송해요! " 시민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가인. 가인은 당황하며 억세게 잡고 있던 시민의 팔을 풀어 주었다. 시민은 가인에게 잡힌 손이 아팠었는지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인은 방금 전 레 스토랑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을 떠올릴 수 있었다. ' 나,난… 무,무슨 짓을 해버린 거냐아아아아∼∼!!! ' 가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대기실에서는 흥분과 긴장으로 잠시 제 정신 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자신이 했을 리가 없다! 시민 씨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그 이상한 녀석 때문에 순간,이성을 잃어 버리 고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질러 버렸다. 무엇보다 나는… ' 시,시민 씨의 애인이라니…! ' 으앗!! 유가인! 이 바보 같은 자식아! 어째서 그런 제멋대로인 말을 감히 시민 씨의 앞에서 할 수가 있었던 거냔 말이다!! 너 혹시 머리가 돌아 버린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가인은 생각 없이 일을 벌인 자신을 속으로 무수히 저주하고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아아,끝장 이다! 이제 시민 씨와 나 사이는 끝이라고! ' 시,시민 씨… 화나셨겠지…? ' 가인에게 붙잡혔던 손을 흔들며 아무 말이 없는 시민.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울쌍이 되어 버렸다. 화,화나시는 게 당연하지.나,나 같은 녀석과 사 귄다는 오해를 다른 사람들이 하게 생겼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으실까? 서,설마 이대로 시민 씨와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제발 그것만 은 피하고 싶은데…!! 가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민에게 사과했다. " 미,미안해요… 시민 씨. 하,하하… 그 남자 때문에 시민 씨가 곤란해 하 시는 것 같길래 제가 그만… " " ......... " " 여,역시 주제 넘었죠‥? 미안합니다. 미안…. 다,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 니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예? " " ......... " 으아, 정말 화나셨나 봐∼!! 아무 대답이 없는 시민의 모습에 가인은 절망 했다. 이제 다시는 시민 씨의 그 따뜻한 음성을 들을 수가 없고, 시민 씨의 요리도 못 먹게 되는 걸까…. 시,시민 씨의 그 부드러운 미소도 이제는… ' 아… 이,이제는… 정말‥ 끝이다…! ' 가인은 울쌍이 되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아무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이 이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줄이야….시민 씨와 보낸 지난 6개월 간의 일 들이 꿈만 같았다. 정말‥ 끝인 건가…. 정말…! - 슥…. 그때,가인은 자신의 오른 팔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놀라 눈을 떴다. 거기에는 한시민이 자신의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어라? 어라라? 가 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시,시민 씨…? " " 제 애인이라면서요? 팔짱 끼는 거… 싫으세요? " " 아,아뇨…! 그,그런 게 아니라… " 가인은 얼굴이 상기되며 고개를 흔들었다. 시,시민 씨가 내 팔짱을 끼고 있 어? 뭔가 묘하게 현실과 어긋난 것 같은 이 상황에 가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시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오히려 제가 고마웠어요,가인 씨. 그 사람… 좀 지나쳐서 제가 곤혹스러 웠 거든요? 가인 씨가 그렇게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참을 더 그 곳에 붙잡혀 있어야만 했을 거에요. " " 그,그런… " 화나신 게… 아니었어? 나… 잘못한 게 아니었던 건가?! 가인은 기사 회생 한 기분으로 마음 속 깊이 환호를 올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있는 시민을 떨 리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시민은 그런 가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며 말 했다. " 그럼 가인 씨 말대로 우리… 오늘 하루 만은 애인 사이 할까요? " " ......예…? " 시민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답하는 가인. 에? 시민 씨? 지금 뭐라고 말씀하 시는 거…? 오늘 하루 만은 애인 사이라고? 그,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시민은 가인이 얼빠진 표정으로 버벅거리고만 있자, 쿡- 웃음을 터뜨리며 그 의 팔을 이끌었다. " 자, 그럼 이제부터 유리 양의 생일 선물을 고르러 가요. 백화점 폐관 시 간도 다가오니까 어서 서두르자구요. " " 예,예에…! " 가인은 목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26구역에 위치한 한시민의 집에서는… " ......느,늦어. " 8시를 넘어서는 시계를 노려보며 유리가 긴장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 다.(…) - 빵! 빵! 저녁 8시가 넘어서는 20구역의 8차선 도로는 극심한 교통 체증을 보여주고 있었다.사방 팔방에서 들려오는 클렉션 소리와 한 치도 움직일 줄 모르는 자 동차들의 정체는 운전자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런 정체된 차들 속에는 수정의 재규어 XJ220도 끼어 있었다. ' 바보같이….러시 아워(Rush Hour)때의 롯데 백화점을 생각하지 못했다니. ' 수정은 쓰고 있던 선글래스를 벗어버리며 한 숨을 내쉬었다. 사은행사와 세 일을 함께 실시해 대규모 고객을 모음으로써 기존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을 긴 장시켰던 롯데 백화점. 20구역에는 바로 이 백화점이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고객과 그로 인한 교통체증은 유통업계에서 롯데 백화점이 차지하는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내세운 롯데 백 화점에도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교통 문제였다. 백화점 주변에서 주정차 위반으로 범칙금 통지서를 발부한 건수만 해도 대 략 2,200여건.출퇴근 시간이나 세일 기간이면 롯데 백화점 주변을 지나는 차 량들은 극심한 교통체증을 겪게 된다. 20구역에서 21구역에 이르는 8차선 도 로가 바로 그것이다. 21 구역에서 롯데백화점 방향으로 진행하는 차량은 롯 데 백화점에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차량들로 도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 야 했다. 백화점으로 진입하는 차량들이 3,4차선을 모두 차지하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19구역쪽에서 오는 차량들도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20구역 앞에 서 좌회전을 받아 롯데 백화점으로 진입하려는 차량과 맞은 편에서 우회전하 는 차량,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사람들로 인해 백화점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 라장으로 변한다. 이것이 서울 시민들이 모두 피할려고 한다는 롯데 백화점의 교통 체증인 것 이다. 한동안 언더 시티에서 체류하느라 지상의 교통 실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수정의 화근이었다.설마 이렇게 극악의 교통 문제가 있을 줄을 누가 알 았겠는가. 그녀는 낙담하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지하철로 가는 거였는데…. " 지하철에서 피스 메이커의 광속 기차를 호출한다면 10분도 되지 않아서 유 레카로 진입할 수 있다. 그런데 괜히 오랫만에 지상에서 드라이브나 즐길까 하여 차를 가져온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지금와서 자 신이 아끼는 재규어를 아무 곳에나 팽개쳐 두고 지하철을 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최소한 안전한 주차장에 주차라도 시켜두지 않으면…. ' 그럴려면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는 하라고. ' 꼼짝도 하지 않는 교통 체증에 수정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 다.그녀는 치밀어 오를려는 짜증을 지긋이 억눌러 참으며 조심스럽게 조수석 의 분위기를 살폈다. " 아,저기… 스승… " 막 조수석에 탄 부르스를 부를려고 했던 수정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부르스는 무시무시하게 굳은 표정으로 전방의 차들을 노려보며 곰방대를 뻑 뻑 피워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수정이 자신을 부른 것 같자,천천히 시선 을 돌려 수정을 바라보았다. " ......뭐야? " 낮고 탁한 음성.하지만 그 밑에 깔린 활화산과 같은 분노를 수정은 느낄 수 있었다. 금새라도 뛰쳐올라 닥치는 데로 주위의 모든 것을 때려부술 것만 같 은 저 모습. 수정은 위험함을 느끼며 억지 웃음을 띄웠다. " 아,아뇨. 혹시 심심하시다면 트롯트라도 틀어드릴까 해서…. " " ......때려쳐. " 아아∼ 화났다. 화난 거야∼ 수정은 속으로 울쌍을 지으며 제발 교통 체증 이 한시라도 빨리 풀리기를 기원했다. 저러다 부르스의 짜증이 폭발하기 라 도 하는 날에는 이 8차선을 메우고 있는 자동차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 심기를 가라앉혀야 할텐데…! 수정은 조심스럽게 부르 스에게 말을 건냈다. " 주,중국인과 한국인은 많이 다르죠? 뭐,언어 면에 있어서나 문화 면에 있 어서나. " " ......적어도 이렇게 좁아터진 땅에서 무식하게 끼어 사는 짓은 하지 않 지. " " …그렇내요. " 수정은 이를 갈며 중얼거리는 부르스의 빈정거림에 쓴 웃음을 지었다. 부르 스는 그런 수정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 내 짜증을 풀어주고 싶다면 뭣 때문에 이렇게 길이 막히는 건지 설명이라 도 해주는 게 어떠냐? 내가 납득이라도 할 수 있게. " " 아,예…. 저기 큰 건물 보이시죠? 저 건물에 들어갈려는 차들과 나올려는 차들 때문에 이렇게 교통이 마비된 거에요. " 수정이 가리킨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부르스는 납득이 안간다는듯 투덜 거렸다. " ......저기가 뭐하는 데인데? " " 백화점요. " 순간, 수정의 백화점이란 말에 움찔하며 동요의 빛을 보이는 부르스.하지만 부르스는 밖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수정은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하며 말 을 계속 이었다. " 한국 유통업계를 이끄는 롯데 백화점이란 곳이에요. 이미, 서울 지역에만 해도 10군데의 지점을 가진 한국 최대의 백화점이죠. 여기는 그 중에서도 본점인 곳인데… 아마 세일 기간이라는 것도 한 몫해서 이렇게 인파가 많 이 몰리는 걸 거에요. " " ......백화점. " 수정의 뒷 설명을 듣기는 한 건지, 나지막히 백화점이라고만 중얼거리는 부 르스. 그는 뭔가 호기심이 어린 눈초리로 롯데 백화점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백화점이라 하면… 그‥신기한 것들이 많이 널려 있는 잡화점이 아닌가‥! ' 판매촉진,서비스 향상, 경영 및 회계의 합리화 등을 위하여 상점 조직을 상 품별·고객별로 부문화하고 이를 통합적인 기업으로 경영하는 대규모 소매상 … 같은 것은 일절 알지 못한채, 단지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는 장소. 그것이 부르스가 생각하는 백화점이었다. 원체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 는 그에게 있어서, 여러 물품들이 즐비해있는 백화점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 이었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백화점에는… ' 오,오랫만에 탈 수 있게 되는 건가…. 「그것」을…. ' 흥분한 기색을 수정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녀의 눈치를 조용히 살피는 부 르스. 그가 생각하는 그것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범상치 않 은 것임이 분명할리라. 그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부르스의 귀로 날카로 운 수정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앞으로 쏠리는 몸체. " 꺅…! " - 끼이이이익… 쿵! 거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수정의 재규어가 멈춰섰다. 그녀의 앞에서 있던 자동차가 기껏 정체가 풀려 잘 나간다 싶더만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밟은 것 이었다. 그 바람에 재수 없게도 앞 차와 살짝 충돌해버린 수정의 재규어. 범 퍼가 약간 나가는 가벼운 접촉 사고였지만 어쨋든 사고는 사고인 셈이다. 수 정은 안전벨트에 죄여진 몸을 뒤척이며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조수석의 부르스를 돌아보았다. " 스승님, 괜찮으세요? " " ......... " 하지만 대답이 없는 부르스. 그도 당연한 것이 그녀의 말에 대답해야 할 부 르스는 조수석에 이미 없었던 것이다. 수정은 벙찐 표정으로 비어있는 조수 석을 바라보다가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 어,어디 가신 거지?! " 그러나 이미 육안으로 그를 찾아내기에는 늦었다. 누구보다도 부르스의 신 출귀몰함을 잘 알고 있던 그녀였던 것이다. 아아, 스승님도 참!! 가득히나 늦어져서 죽겠는데 또 어딜 가신 거야,정말∼?!! " 아,혹시…! " 방금 전 부르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롯데 백화점을 의심의 눈초리 로 돌아보는 수정. 만약 그녀의 스승이 갈만한 곳이 있다면, 이 근방에서는 저곳 밖에 없었다. 부르스는 지독한 관광 중독자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새로 운 뭔가가 있다면 구경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그렇 지만 백화점은 분명 관광지가 아니다…) ' 빨리 모셔오지 않으면…! 스승님은 내버려두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구 경하는데 여념이 없으실 거란 말이야. '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스승이다. 수정은 체념의 한 숨을 내뱉으며 재규 어에서 내려섰다. 주차고 나발이고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미아가 되기 전 에 한시라도 빨리 그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서두를려는 그녀를 제지 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 아니! 이 아가씨야! 도대체 눈을 어따 달고 다니는 거야?!! 그렇게 밖에 운전 못하겠어?!! " 바로 수정의 차와 부딪힌 앞 차의 주인이 오만 인상을 쓰며 고래 고래 그녀 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수정은 쓴 웃음을 지으며 험상 궂은 얼굴의 차 주인에게 말했다. " 아,저기… 죄송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바빠서… " " 뭐?! 지금 도망치겠다는 거야?! 기껏 남의 차 받아놓고서 태도가 그게 뭐 야,앙!! 돈 좀 있다고 비싼 외제차 모시나 본데 지금 그걸로 유세 떠는 거야?!! " " 아,아뇨‥. 그게 아니라∼ " 결국 부르스를 찾으러 가지도 못하고 남자에게 붙잡혀 있어야만 했던 수정.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어딘가로 사라진 부르스를 원망 100배로 마음 속 깊이 부르짖었다. ' 아아아∼ 스승 님, 바보------!!! ' " 이건 어떨 것 같아요, 가인 씨? " 시민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작은 핸드백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옅은 붉은 빛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세련된 구찌 핸드백이었다. 검은 자실로 장미 문 양이 수놓아진 것이 너무나도 예뻤다. 그러나 가인은 시민의 손에 들린 핸드 백을 유심히 살펴 보다가 곧 고개를 내저었다. " 예쁘긴 하지만… 유리가 가지고 다니기에는 너무 어른스러운 데요? " " 그래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 " 저와 같은 고등학생이지만 유리는 아직 13살 밖에 안된 아이라구요. 아직 핸드백을 가지고 다닐 나이는 아니잖아요. " " 으음…. " 유리 양은 가인 씨가 생각하는 것 만큼 어리지 않다구요…. 시민은 그 말이 목구멍 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가인은 유리가 그렇게 노골적인 애정 표현을 보여주어도, 아직 그녀를 동생 이상으로는 보지 못하 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여자로 인식하지 못한다…였지만. ' 유리 양도 힘들겠구나. ' 시민은 가인의 둔함에 쓴 웃음을 지으며, 홀로 속 앓이를 하는 유리에게 동 정을 보냈다. 시민과 가인은 유리의 선물을 사기 위해 20구역의 롯데 백화점 에 와있었다. 그리고 지금 선물을 고르는 곳은 1층의 명품관/패션 잡화.롯데 백화점은 무려 12층이나 되는 매장을 가지고 있었는데,세계 명품에서부터 생 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세점,식당가 등 차 별화된 문화 생활 공간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가히 한국을 대표하는 백화점이 라 할만했다. 솔직히 브랜드 파워로 인한 뻥 튀기 가격이 마음에 걸렸지만 특별히 돈에 구애받지 않았던 가인과 시민이었고, 유리의 생일 선물에 돈을 아끼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애초부터 없던 그들이었다. " 그럼 유리 양에게 무슨 선물이 좋을 거 같아요,가인 씨? " 핸드백을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가인에게 묻는 시민.막상 선택권을 그녀에게 서 넘겨받자 가인은 당황하며 뒷 머리를 긁적였다. " 그,글쎄요…. 유리가 좋아할 만 한게 뭐였더라…. " 아마 유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가인의 관심과 사랑이었겠지만,그런 것을 이 둔한 남자가 알리가 없다. 그는 애써 머리를 쥐어짜다가 곧 한 가지를 생각 해낼 수 있었다. 오늘 시민 씨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교실을 나오기 전,유리 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 나, 오늘 잠깐 옷 살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저기, 나 옷 볼 줄을 잘 몰 라서… 오빠가 골라주었으면 하거든. 그래! 바로 그거다! 가인은 시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 옷! 옷을 고르러 가죠. 유리가 오늘 옷 사러가자고 그러던데 마침 잘 됐 내요∼ " " 아,정말요? 그럼 여성 의류 코너로 가도록 해요. " 시민은 방긋 웃으며 가인의 팔을 잡아 당겼다.가인은 시민에게 팔짱이 껴진 오른 팔의 감촉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시민 씨‥ 오늘따라 묘하게 적극적 이시네…. ' 이,이거 꿈은 아니겠지…. ' 가인은 들뜨는 마음으로 시민의 옆얼굴을 훔쳐 보았다.긴 금발을 곱게 빗어 내린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도 아름다웠다. 저 섬세하게 조각된 듯한 이목구비와 신비한 감홍빛 눈동자. 가인은 이런 시민 씨가 정말 자신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 매장 안을 거닐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려 있었다. 아니, 정확 히는 가인의 옆에 있는 한시민에게 주목되어 있었다. 남자들이야 두 말할 것 도 없이 시민의 미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여자들 또한 동경과 질 투의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고 있었다.커플 중에서는 남자들이 시민에게서 고 개를 돌리지를 못하자 심통이 난 여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 정도 로 시민의 미모는 탁월했다. 그녀에게서는 뭔가 미모 외에도 사람의 혼을 빨 아 들이는 듯한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가인은 점점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했다. ' 그래. 나는 이런 시민 씨와 잘 아는 사이란 말이지! ' 무엇보다도 나는 시민 씨와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사이라고! (비록 집 주인 과 하숙생의 관계지만…) 가인은 괜스레 헛기침이 나오고 어깨에 힘이 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주위 남자들이 부러움과 선망의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래. 더 부러워 하라고! 더! 에헴! " 훗. " 그런 가인의 기색을 눈치 챘는지 시민은 살짝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가인 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렇잖아도 가득히나 붉어진 얼굴을 더더욱 상기 시키는 가인. 시,시민 씨?!! 어,어째서 갑자기 이런…!! 아니아니! 기쁘지만 서도 이건…!! 그리고 그런 가인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남자들의 시선은 곧 동경과 선망을 넘어서서 질투와 증오의 시선으로 치솟기 시작했다.뭐든지 과 하면 넘치는 법이다. 결국, 소년 유가인. 그는 어디서나 남자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 왜 그래요,가인 씨? " 가인이 몸이 굳은채 뻣뻣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자,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그를 올려다보는 시민.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차마 시선을 마주칠 용기 를 내지 못하며 어색하게 에스컬레이터를 가리켰다. " 아,아뇨! 아무 것도…. 그,그나저나 2층부터 여성의류 점이네요‥! " " 훗.그렇내요. 우리 올라가요. " 아아… 녹는다, 시민 씨의 저 감미로운 목소리. 가인은 거짓말 안보태고 마 치 오늘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어쨋든, 그렇게 헤롱 헤롱 거리며 시민과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가인.여전히 느껴지는 주위의 시 선에 가인은 자신의 팔짱을 끼고 옆에 서있는 시민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시 민 씨와 나… 함께 서 있으면… ' 다른 사람들에게… 애인 사이로 보일까…? ' 그,그야 시민 씨는 스물 여섯 살의 성인 여성이시고 나야 이제 막 고등학교 들어온 열 일곱 핏덩어리라지만… 요즘 시대에 연상 연하 커플이야 아무렇지 도 않은 일이고… 시민 씨도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굉장히 앳된 용모잖아! 아,그리고 보니 나‥ 좀 고리타분하게 늙어보인다는 소리도 듣고는 하니까… 한 두 살 정도는 많게 보인다고 쳐주면…그,그래! 그렇게 시민 씨와 나이 차 가 많이 안 나게 보일지도. ' 맞아‥! 시민 씨와 내가 연인 사이로 안 보일 이유도 없지! 응! ' 자신의 나이를 뻥튀기 시키면서까지 스스로의 생각을 합리화 시키는 가인. 그 노력에 일단은 경의를 표해주기로 하자. 어쨋든,그렇게 혼자서 별 생각을 다 해내고 있는 가인에게 시민이 말을 걸었다. " 어머, 가인 씨. " " 예,옛?! 아, 그러니까 시민 씨와 전 별로 아무 것도‥! " 갑작스런 시민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가인이 허둥지둥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자, 시민은 의아해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예? 그게 무슨‥? " " 아,아뇨! 아무 것도…! .........그나저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 " 아,그래. 저길 봐요. 되게 신기한 사람이 있어요. " 시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살펴보는 가인. 그것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맞은 편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쪽이었다. 그리고 시민이 칭한 신기 한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에스컬레이터의 중앙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사 람을 바라 보던 가인도 시민 처럼 신기하다는듯 눈을 크게 떴다. " 진짜네요. 되게 웃긴 아이네. 이런 백화점에서 저런 옷차림이라니. 무슨 이벤트라도 하고 있는 건가, 지금? " 가인의 중얼거림대로 그 신기한 사람은 대단히 특이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 다. 이제 막 열 서너살 정도 되보이는 앳된 소년이었는데, 중국식 검은 권복 을 입고 있던 것이다. 더구나 흰색에 가까운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목에 두르고 있는 것이 더더욱 해괴망칙했다. 뭐야,저 머리는? 가발인가? 그 소년은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상기된 표정으로 유심히 에스컬레이터를 살펴보 고 있었는데, 곧 자신을 주시하는 가인의 시선을 느꼈는지 슬며시 그들을 향 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 두근…! 가볍게 울리는 고동 소리. 그리고 가인과 그 중국 권복 소년의 시선이 마주 쳤다. 하지만 가인과 시민이 탄 에스컬레이터는 위로 향하는 것이었고, 소년 이 탄 에스컬레이터는 밑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곧 그들은 점점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가인은 멍하니 그런 소년의 뒷모습을 쫓다가 천천히 자신의 가슴 을 어루만졌다. ' 뭐지? 방금 전의 그건? 오라의 느낌이었나…? '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가인. 그러나 이내 피식 미소를 짓고 만다. 설 마 그럴리가…. 그래. 과민 반응이다. 그렇게 격렬한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착각한 것일 수도 있어. 무엇보다 저런 괴상한 꼬마에게서 오라를 느낄리가 없잖냐. 그런 가인에게 시민도 미소지으며 말을 건냈다. " 중국인 아이인가 봐요. 귀여웠죠? " " 글쎄요…. 단순히 이상한 녀석일지도…. " 가인과 시민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2층의 여성 의류점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를 정도로 그들을 맞이하는 수많은 옷가지들. 그것들은, 방금 전 마주쳤던 중국 소년의 일을 가인들이 잊게 하기에는 충분 했다. " 꽤 재밌는 꼬마들이 살고 있는 동네로군. " 부르스는 에스컬레이터로 1층에 내려서며 위를 올려다 보았다.방금 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오라의 흐름을.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 내뿜는 오라 의 기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강대했다. 부르스는 살며시 인상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내 착각일려나…. 하긴 이 건물은 쓸데 없이 인간들로 가득차 있군. 오라 의 잔류가 너무 심해. ' 그래. 착각일 것이다. 인간이 그런 오라를 지니고 있을 리가 없다. 더구나 피스메이커의 인간도 아닌 저런 민간인 애송이라면 더더욱. 방금 만난 유가 인이 자신과 같은 피스 대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부르스로서는 단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부르스의 흥미를 끄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저기 저 아이…. 아까부터 계속 저 에스컬레이터만 타고 있지? " " 길이라도 잃어버린 거 아니에요? " 부르스의 근처에서 그를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몇몇 사람들. 그렇다. 부르스. 그는 아까부터 다른 행동은 일절 하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만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주위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 언제 타봐도 재미있단 말이야…. 이 이동 계단이라는 것은…. ' 부르스가 수정을 홀로 교통 체증으로 막힌 8차선 도로에 내버려두고 롯데 백화점까지 온 이유. 그것은 단지 에스컬레이터를 한 번 타보겠다는 부르스 의 작은 염원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상기된 표정으로 끊임 없이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 공항에서는 그 재미없는 이동 상자(엘리베이터)를 타느라 이 재미난 것을 타지 못했단 말이지…. 이게 다 수정, 그 골치덩어리 녀석 때문이야.옆에 서 귀찮게 달라붙어 다니니 신경이 쓰여서 뭘 할 수가 있어야지. ' 부르스는 수정을 떨구기를 참으로 잘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최상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도 해보았고… ' 이번에는 색다른 시도를 해볼 참이었다. ' …그래. 이번에는 위로 올라오는 디딤판 쪽에서 밑으로 내려가기를 해볼 까. ' …어이.어이. 그건 민폐라고. "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걸까요? " 가인은 포장된 선물 꾸러미를 바라보며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가인 의 말에 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럼요. 너무 아동적인 옷 보다는 어느 정도 캐쥬얼한 옷이 좋다구요. 그 리고 유리 양도 열 세살이에요.열 세살.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라구요. " " 으음… 그렇지만. " 가인은 뭔가 미련이 남는듯 유리의 선물을 산 옷 매장을 자꾸만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남몰래 쓴 웃음을 짓는 시민. 자꾸만 유리의 옷을 아동 복 코너에서만 살려고 하는 가인이 답답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어른스 러운 옷을 시민이 고를려고만 하면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아 마음에 들지 않 는다고 하니…. 결국 타협점을 본 것이 캐쥬얼이었다. 시민은 미소지으며 가 인에게 말했다. " 그리고 나이는 어리다지만 유리 양은 엄연히 고등학생이잖아요. 고등학생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면 유리 양 화낼지도 몰라요. " " …그럴까요? " " 그럼요. 거기다 유리 양이 좀 조숙해요? " " 흐음…. " 조숙? 그런가? 가인은 시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어느 정도 납득 을 했다는듯,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시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집에 있을 유리를 떠올려 보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가인에게 이성으로 보여 질 나날은 아직도 멀고도 먼 것 같았다. 가인 씨… 둔하기도 하지. 참…. 그 렇게 시민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인이 물끄러미 선물 꾸러미를 보다가 입 을 열었다. " 근데 시민 씨…. 어째서 하필이면 유리의 선물로 커플 니트 같은 걸….그 것도 하나는 왜 제 사이즈로 맞춘 거죠? " 그렇다. 가인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금했었다.분명 유리의 생일 선물로 고 른 옷이었건만… 무슨 이유로 커플 티를 사야했던 것인지. 무엇보다 왜 남자 용 것은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서 산 것인지 가인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 이다. 그런 가인의 물음에 시민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듯 얘기했다. " 어머, 그 편이 유리 양이 훨씬 기뻐할 테니까요. " " ......예? " 뭐,뭐지…. 그 훨씬 기뻐한다는 것은…? 가인은 멍한 표정으로 시민의 말뜻 이 무엇인지, 그 진의를 알기 위해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가인의 의문을 풀어 줄 시민은 그에게 웃음으로만 일관할 뿐이었다. 어쨋든, 그렇게 의류점을 거닐던 가인과 시민. 그러던 와중 가인의 눈에 한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원피스는 단아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벨트 니트 원피스였는데 따뜻한 베이지 색깔이 시민의 금발과 잘 어울려 보이는 옷이었 다. ' 그래. 시민 씨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 같아…. ' 자신도 모르게 저 원피스를 입은 시민의 모습을 상상하는 가인.그러고 보니 시민 씨의 원피스 차림… 저번 동창회 때 외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 니 그 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에 자신과 유레카에서 만났을 때의 스커트 차림 도 그때 뿐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직장에 나갈 때는 항상 바지로 된 정장 차림이었고, 집에서도 평상복은 청바지나 반 바지 같은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시민이 치마 차림을 하고 있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것이다. ' …치마 입는 것… 싫어하시는 건가? ' 뭐, 그리 이상할 것 까지는 없는 일이지만…. 가인은 평상시에는 느끼지도 못했던 사실을 엉겹결에 알게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 ......하지만 정말 잘 어울릴 거 같은데. ' 그래. 진짜 예쁠거야! 가인은 꼭 원피스 차림의 시민이 보고 싶어 그녀에게 말했다. " 시민 씨, 저기 저 옷. 시민 씨에게 진짜 어울릴 거 같지 않아요? " " …예? 어느 거요? " 시민은 가인의 말에 그가 가리키는 베이지 색 벨트 니트 원피스를 바라보았 다. 순간, 그녀의 안색이 조명을 등져서인지 약간이지만 어두워지는 것 같았 다. 시민은 조용한 목소리로 가인에게 말했다. " ......정말 어울릴 거 같아요? 저 옷이 저한테? " " 예에! 정말 잘 어울릴 거 같은데요? 한번 입어보세요! 제가 봐드릴게요! " " 하지만…. " 뭔가 곤란해하는듯한 인상을 짓는 시민. 그런 시민의 태도에 가인은 의아해 하는 얼굴로 생각했다. 역시나 시민 씨…치마 입는 것 싫어하시는 걸지도.가 인은 괜히 무리하게 권유했다 싶어 재빨리 두손을 휘저었다. " 아,아뇨. 입기 싫으시다면 입지 마시구요. 단지… 시민 씨하고 저 원피스 가 딱이길래…. " " ......... " 다급히 잇는 가인의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응시하는 시민. 뒷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해 하는 기색을 보이는 가인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좋아요. " " .........예? " 시민의 대답에 가인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방금 전의 어두웠던 것 같 은 표정과는 달리 그녀는 여느 때 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시민은 가인의 팔 을 이끌고 벨트 니트 원피스가 전시된 매장으로 걸어들어가 점원에게 말했다. " 저기, 저 원피스‥ 한 번 입어보고 싶은데요. " " 아,예-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 매장에 있던 여 점원은 이 금발의 미인 손님의 외모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 예의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시민에게 맞는 옷 사이즈를 꺼내기 시작했다. 가 인은 왠지 시민이 무리하는 것은 아닌가‥걱정스런 마음이 들어 슬며시 그녀 를 불렀다. " 시민 씨? " " 가인 씨, 저 이 원피스 잠깐 갈아입고 나올테니까 저한테 잘 어울리는지 제대로 얘기해주셔야 해요. " " 아,예‥. " 점원에게서 건내받은 원피스를 들고 탈의실로 향하는 시민. 가인은 그런 그 녀의 뒷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중얼거렸다.그래.기 우겠지‥. 시민 씨, 기분 좋아 보이는 걸? ' …그녀의 어디가 우울해 보인다는 거냐,유가인! ' 하여간 쓸데 없이 눈치 보는 이 습관을 고쳐야 한다니까. 애꿎은 자신의 눈 치만 탓하며 기분 좋게 시민을 기다리는 가인. 잠시지만 가인의 이상하리 만 치 둔한 면모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알게 된 부분인 것 같다. ' 그나저나 시민 씨… 뭔가 나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 오늘 아침에 시민이 했었던 얘기를 떠올려 보는 가인. 맞아. 그랬었지.유리 생일 선물도 살겸 나한테 할 얘기도 있으시다고 했어. 도대체 무슨 얘기이길 래 이런 밖에서 하시려는 걸까? ' …뭐,뭐‥ 그렇게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단순한 집안 관련 문제 일 수 도 있고, 내 학교 생활에 대해 물으시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야…. ' 하지만 그런 얘기들은 언제나 집에서 나눌 수 있는 것들인데. 피스 메이커 측에 대한 얘기도 그다지 나눌 것은 없고 말이야. 흐으음… 그렇다면 혹시… ' 교제 신청‥ 같은 것은… 역시… 아닐려나… 하,하하∼ ' 말도 안되는 소리.유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괜히 자신의 머리를 몇 번 두 들겼다. 어째서 이런 터무니 없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오늘 하루 시민 씨 가 일일 애인 노릇을 해주니까 잠시 착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냐, 유가인! 저 시민 씨가 너 같은 녀석한테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잖아! 가인은 민망 해져 살짝 얼굴을 붉히며 헛 기침을 했다. ' ......그래도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 좋겠지…? ' 그래. 조금 상상하는 것도 죄냐! 어디까지나 만약이라고! 만약! 가인은 두 근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시민이 들어간 탈의실을 바라보았 다. 시민 씨와의 단둘이 데이트라던지, 오늘 하루 시민 씨의 말투와 행동들 이 묘하게 가인에게 기대를 하게 만들고 있었다.시민 씨가 내 연인이라면… 하는 기대를. - 달칵‥ " 저기‥ 어때요,가인 씨? " 그리고 탈의실 문을 열고 나온 시민. 베이지 색 벨트 니트 원피스로 갈아입 은 그녀의 모습은 역시나 가인의 생각대로 너무나 잘 어울렸다. 가인은 멍하 니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 자,잘 어울려요. 정말로‥. 정말‥ " " 후훗, 고마워요. 가인 씨. " 이런 사람이 정말 내 연인이라면… " 저기‥! 시민 씨! 제가 사드릴게요,그 옷! 잠시만 기다리세요! " " 아,아뇨. 그러시지 않아도… " " 언제나 시민 씨에게 신세만 지고 있었잖아요. 보답이라고 하기에도 뭐 하 지만 약소하게나마 드리는 제 선물이에요. 평상시부터 뭔가 이렇게 해드 리고 싶었어요. " " ......가인 씨…. 그래요. 고마워요‥. " 가인의 말에 살며시 미소 지어보이는 그녀.그 미소를 대하자 애써 진정시키 던 가인의 가슴이 다시 두근 거렸다. 이런 사람이 정말 내 연인이라면… ' ......정말 좋겠지…? ' " …진짜 여기에 들어오신 거… 맞는 걸까나. " 수정은 롯데 백화점 1층의 출입구에 들어서며 한 숨을 내쉬었다.이 12층 짜 리 건물 안에서 부르스를 찾는 건 둘째 치고, 백화점 안에 북적이는 어마어 마한 사람들의 수에 기 부터 질렸던 것이다. 도대체 이 많은 인파 속에서 어 떻게 한 사람 만 콕 집어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 아∼피곤한 일의 연속이야,정말…. 방금 전의 일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 수정은 아까 부르스의 잠적과 함께 당했던 충돌 사고를 떠올리자,두통이 지 끈 지끈 치밀어 올랐기에 관자놀이를 억눌렀다.그 인상 험한 차 주인의 삿대 질을 감당하는 것도, 어떻게든 그 상황을 빠져나올려고 노력했던 것도 다 피 곤한 일이었다. 결국,뒤늦게 달려온 교통 경찰에게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피스 카드(PEACE CARD)를 제시하고서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던 수정. ' 되도록이면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하아… ' 사람 차별하냐며 경찰에게 따지는 차 주인을 떠올리자 수정은 다시 한번 두 통이 치밀어 올랐다. 어쨋든, 이런 카드 하나로 규모는 작았지만 교통 사고 를 간단히 무마시킬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아,그리고 참고로 범퍼가 살짝 나간 그녀의 재규어는 차 키 째로 경찰에게 맡겨두고 왔다. 아마,인근 의 주차장에 잘 주차시켜 놓아줄 것이다. " 그나저나 어디 계신 걸까, 이 바보 스승님은? " 수정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경비실을 찾아볼 생 각이었다.부르스야 워낙 튀는 용모의 소유자였기에 감시 카메라로 금새 발견 할 수 있을 지도 몰랐고 만약 그걸로도 안된다면 수정은 미아 보호 신고 센 터에 신고라도 할 생각이었다.(…) ' 부디 이 건물 안에만 계시라고요. '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2층으로 향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어 가는 수정. 하지만 에스컬레이터 쪽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여 종업 원 몇 명과 경비병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뭔가 시끌 시끌한 게 말 싸움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수정은 슬며시 불안한 기분이 들어 구 경꾼들 사이를 파고 들어 갔다. 호,혹시…? " 저,저기‥ 저희 백화점 안에서는 금연인지라… " " 무례한 녀석들이로군.그래서 지금 내가 피는 담배를 빼앗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 " 아,아니‥ 그게 아니라… 아,아직 나이도 어리고… " " 네 녀석들 보다는 먹을 만큼 먹었으니 신경 끄도록. " 여종업원들과 경비병들에게 예의 퉁명스런 말투를 내쏘며 태연스럽게 곰방 대를 물고 있는 한 소년. 그가 부르스 라는 건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수정은 치밀어 오르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억누르며 낙담했다. ' 역시-------- ' " 가인 씨,우리 뭐 먹을까요? " " 글쎄요. 저야 시민 씨가 좋아하는 거라면 다 좋죠. " 가인은 싱글 벙글 웃으며 시민에게 말했다.자신이 사준 벨트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유쾌했던 것이다.이렇게 같이 옷도 사 고, 같이 밥도 먹고… 가인은 자꾸 자신이 시민의 애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이 들었다. 뭐, 어때… 기분일 뿐인데. 그렇게 쇼핑을 끝내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11층과 12층의 식당가였다.생각해보니 지금껏 저녁 식사도 해결하지 않 았던 그들이었기에 배가 꽤 고팠다. " 그럼∼ 아,저기! 일본식 돈까스 점에 가요. " " …일본 식 돈까스? 돈까스에도 일본 식이 있나요? " 생전 처음 보는 일본식 돈까스 점에 어리숙하게 반문하는 가인.돈까스 하면 단순히 비후까스 보다 1000원 싼 음식 정도로 생각하던 그였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시민은 친절히 답해주었다. " 돈까스는 사실 일본 음식이에요,가인 씨. 서양 요리인 포크 커틀릿(Fork Cuttlet)을 일본식으로 개량한 거죠. 그 유래를 알아볼려면 메이지 초기 의 문명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요. 당시는 순수한 서양요리 커틀릿 으로 불리웠고 조리법도 지금과 다르게 소량의 버터류 기름으로 굽는 요 리였어요. 1인분도 75g 정도의 작은 사이즈로 약 1.2cm 정도 두께를 두들 겨 크게 늘려서 건조한 빵가루로 튀김 옷을 입혀 후라이판에 구운 거였죠. 그러던 게 메이지 말기에 와서야 일본인 입 맛에 맞는 일본식 돈까스로 등장하게 된 거에요. " " …그,그렇군요. 전 처음 알았어요. 그런 거…. " 가인은 처음 들어보는 돈까스의 유래에 어리둥절 해져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던 돈까스가 일본 요리였을 줄은 꿈에도 생 각지 못한 그였다.과연 시민의 설명대로 일본 돈까스의 메뉴를 보게 되자,일 반 음식점에서 먹는 돈까스와 일본식의 차이가 더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 히레까스? 로스까스? 뭐야? 저 찌게 느낌의 까스 나베라는 것은? 으엑- 돈까스에 피자를 섞은 것도 있어? ' 돈까스와 피자를 조합시킨 코루돈 보루를 보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가인. 그런 가인의 모습에 시민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메뉴를 골라주었다. " 다른 것도 맛있겠지만,가인 씨 입 맛에 맞는 거라면 이 카레 돈까스가 좋 을 거에요. 가인 씨는 카레 좋아하잖아요? " " 예에… 그야 그렇지만…. 아,알았어요. 먹어 볼게요. " 뭔가 돈까스에 카레를 섞는다는 게 미심 쩍었지만 특별히 카레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시민의 권유도 있고 해서 가인은 별 말 하지 않고 먹기로 했다. 시민은 능숙하게 음식들을 시키며 가인에게 말했다. " 그럼 가인 씨는 근처 테이블에 자리 잡고 있으세요. 제가 음식 나오면 받 아서 가지고 갈테니까. " " 아,아뇨. 제가 음식을 가져가는 게… " 라고 말을 하려던 가인은,어떻게 음식 값을 치루고 음식을 받아오는지도 자 신이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런 백화점 같은 곳.그 동안 자신이 올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도 그다지 가정 형편이 풍족 했던 것은 아니었고, 사고 이후에 한동안은 혼자서 뼈 빠지게 아르바이트 하 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었다.당연히 백화점에 올 여유 같은 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 시민과 함께 백화점에 온 것이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 다. 가인은 괜히 멋쩍어져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그럼 먼저 가 있을테니까‥ " " 그래요.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세요. " 시민은 그런 가인에게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고, 가인은 그녀에게서 쇼핑백 을 받아들고 근처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래도 저녁 식사 시간 이 지나서 그런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9시가 다 되어가고 있 었으니 사실 식당가는 폐점 시간인 것이다. 아마 가인과 시민이 마지막 손님 이 될 듯 했다. 가인은 힘껏 기지개를 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뭔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하루였다. ' 그래도 재밌었어. ' 그래. 그것은 분명… 시민과 함께 였었기 때문일 것이다.레스토랑에서 그녀 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 부터 백화점에서 쇼핑을 할 때까지…. 계속 자신 의 곁에서 미소를 지어주는 시민의 모습에,그녀가 하는 하나 하나의 말과 행 동들에 가인은 기뻐하고 흥분해야만 했다. ' 하하‥ 요즘은 만사가 다 잘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 오늘의 일도 그렇고, 피스 대원으로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그랬다.그래. 모 든 건 중국을 갔다 온 이후부터 일 것이다. 그때 그 힘을 얻은 후 부터는 더 이상 전투 중에 심하게 다친다 거나 죽을 위험을 겪는 일도 없게 되었고…무 엇보다도 가인은 점점 자신의 오라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 그래.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그 힘 덕분일지도 모를려나∼ ' 시민 씨가 이렇게 갑자기 태도가 변하신 것도…어쩌면 전투 중에 활약하는 내 모습에 반하셔서 그런 것일지도…? 솔직히 그럴리는 없겠지만, 가인은 상 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히죽 히죽 미소를 지었다. ' 그래. 이 모든 게 다 그 힘 덕분일 거야. 고맙다,자식∼ ' 그렇게 가인이 자신의 오라에 감사를 보내는 사이, 시민이 주문한 음식들을 가지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가인은 그녀에게서 서둘러 음식들을 건내 받았다. " 이야, 맛있겠네요∼ " " 후훗, 많이 들어요.가인 씨의 선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제가 내는 거니 까요. " " 예, 감사히 먹겠습니다! " 저녁도 안 먹고 쇼핑을 해서 그런지, 가인에게 지금 먹는 돈까스는 다시 없 을 정도로 꿀 맛이었다. 시민은 가인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저기‥ 가인 씨. 오늘 아침에 제가 했던 말 기억나요? " " 예? 무슨… " " 잠깐 할 얘기가 있다고 했던 것 말이에요. " " 아,예에…. " 드,드디어! 가인은 음식 먹는 것도 중단하고 긴장한 눈으로 시민을 바라 보 았다.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려고! 가인은 두근 거리는 가슴으로 시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저 말이에요… " 예에! 말씀하세요,시민 씨! " 요즘들어...... 가인 씨 생각으로 머리 속이 가득차서… 아무 것도 할 수 가 없었어요…. " " 에… " …에? 에에에에에에엣?!!! 가인은 이 갑작스런 시민의 말에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어딘가 심각해진 표정의 시민. 아,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제 생각을 하셨다고요?!!! 지,지금 그렇게 말하신 거 맞 죠? 그렇죠?!! ' 이,이게 꿈이냐 생시냐…. ' 저 시민 씨가 그렇게 까지 내 생각을 하고 있으셨다니! 그,그래. 나만 그렇 게 시민 씨를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어‥! 시민 씨도 나를 이렇게나…!! 가인은 너무 흥분해서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렸고 긴장으로 마른 침이 계속 삼켜졌다. 시민은 다 음 말을 하기를 주저하며 가인을 살며시 바라보았다. " 그래서 말이에요‥ 가인 씨… " 예! 계,계속하세요! 가인은 떨리는 눈으로 시민을 마주 보았다.시민은 그런 가인의 눈빛에 마음을 굳혔는지, 곧 신중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피스 메이커를… 그만두세요. " " .........예? " 두 눈을 멀뚱 멀뚱하게 뜬 채 한 박자 늦게 대답해야만 했던 가인이었다. - 스샤‥ 스샤악‥ 낮고 서릿한 숨 소리. '그것'은 붉은 안광을 흘리며 조용히 자신의 주인이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도시의 야경 속에서 맞은 편에 위 치한 휘황찬란한 백화점의 불빛 만이 '그것'의 신경을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불쾌해진 기분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일까. 이윽고 그것의 주인 은 명령을 내렸다. " 가라. " - 샤아아아아아아‥!!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거칠게 옥상에서 맞은편 백화점으로 뛰어 오르는 그 것. 그런 녀석의 모습을 내려다 보며 초류향은 백화점을 향해 싸늘한 웃음을 날렸다. " …어디 한 번 보여봐라. 선택된 이의 힘이라는 걸. " "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시면 어떡해요? 스승님이 어린애에요? 아무리 구 경하고 싶으신 게 있다지만 그렇게 무책임하게 사라지시면 전 어떡하라구 요? 이러시면 정말 곤란해요! " " ......... " " 도대체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신 게 없다니깐.그저 신기한 게 있다 싶으면 주위 사람 생각 안하고 사라지시는 그 관광 중독증은! 자기 취미 생활을 즐기시는 것 까지는 아무 말 안 하겠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는 주지 말라구요! " 수정은 그녀 답지 않게 무진장 열받았는듯 고함에 가까운 열변을 토해냈다. 하긴 교통 사고 부터 시작해서,부르스가 백화점에 끼친 민폐까지 모든 책임 을 뒤집어쓴 그녀로서는 화가 날만도 했다. 부르스야 겉보기에는 열 서넛 밖 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로 보였으니, 사람들에게는 수정이 그의 보호자 처럼 보였던 것이다. 임무는 임무 대로 늦었고, 환영 파티 같은 이후의 계획은 이 미 파토난지가 오래. 수정은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눈 앞의 중국인 소년이 남의 짜증을 받아주는 그런 위인은 또 아니다. " ......그래서 너 지금 나한테 소리지르는 거냐? "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수정에게 낮은 목소리로 으름짱을 놓는 부르스.모 든 일의 발단이 자신에게 있었지만,수정의 투정을 받아줄 배려 같은 것은 애 초부터 그에게 없었다. 수정은 그런 스승의 모습에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애 써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 그,그럴리가 있겠어요? 저야 스승 님이 너무 걱정되어서 그랬던 거죠. 감 히 제가 어떻게… " " ......그럼 잠자코 입 다물도록. 정신 사나우니까. " 다 때려 칠까 보다‥! 수정은 무심하게 뒤돌아 걷는 부르스의 뒷 모습에 치 를 떨었다. 지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정말이지 스승 님만 아니었어도…! 수정은 울분을 삼키며 힘 없이 부르스의 뒤를 따라 걸어야만 했다. 그나저나 길은 아시고 저렇게 앞장 서시는 건가,스승 님은∼! " .........음? " 그때, 부르스가 걸음을 멈추며 굳은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무표정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찌푸린 인상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뒤따라오던 수정이 그런 그의 모습에 의아해 하며 물었다. " 무슨 일이세요,스승 님? 왜 갑자기… " " 온다. " 짧게 한 마디 내 뱉는 부르스.하지만 수정은 그런 부르스의 한 마디에서 많 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부르스가 노려보는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 …상황 설정은 A-로 지정하겠습니다. 전 사람들의 대피와 ABF 시동을 맡 을테니 스승 님은 위로 향해주세요. " " 스승 님이라고 하지 말랬지? " " 서둘러 주세요. " " 흥‥! 명령하는 거냐? " 부르스는 코웃음을 치며 투덜거렸지만, 이미 바람 같이 위 층으로 몸을 날 리고 있었다. 기이한 보법을 밟으며 몸을 움직이자, 거리와 거리가 압축되는 것 처럼 공간을 이동하는 부르스. 그런 그의 뒷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수정 은 자신도 곧 재빨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서둘러야 해‥! ' 잠시 후면 이 곳은 전장이 될 테니까! " ......피스 메이커를‥ 그만… 두라고요? " 가인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여 다시 그녀에게 되물었다.하 지만 시민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대하 고 있자 가인은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진담이신…건가? 시 민 씨?!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어,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제가…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던 거에요? 아니면‥ " " 그런 게 아니에요,가인 씨…. " 시민은 안타까운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시민 씨?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으 시는 거에요? 예? 가인은 테이블 밑의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표정을 밝게 하 려고 애썼다. " 그,그럼 왜…? " " …이대로 피스메이커에 있다간… 가인 씨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에요. " 위험? 내가 위험해진다고? 피스메이커에 있다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의 문투성이 뿐인 시민의 말이었다. '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시민 씨? 전… 전 이제 강해졌다고요‥. ' 그래. 나는 이제 강해졌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오라의 힘과 저력. 아무리 사용해도 그 한계가 느껴지지 않는 힘. 나는 그 힘을 손에 넣었다고‥! 더 이상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위험하지 않아‥. 난, 난 예전의 약해 빠진 내가 아니라고! " 그, 그렇지 않아요‥! 제가 위험하다뇨? 시,시민 씨도 잘 아시잖아요! 제 가 사용하는 오라의 힘을! " B급 몬스터를 갈기 갈기 찢는 그 힘을! 그 해방된 강함을! 이 힘의 굉장함 을 시민 씨는 모르시는 걸까?! 그러나 시민은 그런 가인의 말을 냉랭하게 끊 었다. " 그래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거에요‥. " 잘… 알기 때문‥ 이라뇨? " 그것은 절대 인간이 건드려서는 안되는 힘이에요. 지금이야 그 힘이 가인 씨에게 순순히 힘을 보태주고 있는 것 같이 보이겠지만… 하지만,그건 가 인 씨가 생각하는 것 처럼 도움을 주는 존재 같은 게 아니에요. 그것은…. 그 힘을 계속 사용하다간, 가인 씨… " 시민은 애원의 눈빛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 어나오고 있었다. " 가인 씨는 그 힘에 잠식당하고 말 거에요‥! " " .........!! " 잠식? 먹힌다는 말인가? 가인은 두 눈을 부릅 뜨며 시민을 바라보았다.너무 나도 뜻 밖의 말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가인을 시민은 촉촉히 젖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가인은 복잡해지는 심정으로 그녀를 마주 응 시했다. ' 시민 씨는… 지금 날 걱정해주고 계시는 걸까…? ' 내가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할까봐‥. 그러다 행여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부상 을 입을 까봐…. 그걸 걱정하시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꼭 마음이 상하 는 것 만은 아니었다. 피스메이커를 그만두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곧 그것이 그녀의 호의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작게나마 가인은 기 뻤던 것이다. 가인은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머뭇거리며 시민에게 말 했다. "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시민 씨. " 가인 씨? 내 말을 알아들으신 건가? 시민은 가인이 자신의 생각 만큼 격렬 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알아줬군요, 가인 씨! 그래요. 그 힘을 계속 사용하다간 당신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말 거 에요. 차라리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미리 피스메이커를 그만두게 된다면…. ' 가인 씨는 안전해질 수 있어‥! ' 그 파멸의 힘으로 부터! 아마, 피스메이커 본부에서 가인이 그만두는 것을 쉽사리 용납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다.가인을 빼내 기 위해서라면 무슨 행동이라도 불사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가인이 자신의 말에 반발하고 나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었는데, 순순히 응해주어서 다행이었다. 그래… 다행이야‥. 시민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다행이에요…. 전 가인 씨 마저 그 사람과 같은 길을 걷게 될까 봐…. 행 여나 그 사람 처럼 가인 씨를 잃게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정말… 다행이 네요…. " " ......그 사람…요? " 시민의 말에 순간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는 가인. 그 사람? 그 사람이라니? 그런 가인에게 시민은 허공을 응시하며 그리움이 깃든 목소리로 답했다. " …제 소중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도 가인 씨와 같았다면… 그랬 다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 예? 소중… 했던‥ 사람이요? " 만약 그 때도 지금과 같이‥ 가인 씨에게 말한 것 처럼… 그 사람에게 말 할 수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제가 신경을 썼었더라면…이렇게나 후회스 런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을 텐데…. " 가인은 시민의 표정에서 안타까움과 그리움, 그리고 연모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가인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쥐었다. 그는 갑자기 목소 리가 꺼지기라도 한 것 처럼 낮은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 ......그 사람‥ 많이 좋아하셨‥어요? " " 예…? …그럼요. 제 목숨보다도 더… 소중했던 사람이죠. " 시민은 가인의 뜻 밖의 질문에 의아해진 표정을 지었지만, 살며시 미소지으 며 답했다. 하지만 그 말을 시민에게서 듣는 순간, 가인은 도저히 미소 지을 수가 없었다. 단지, 시민이 한 마지막 말 만이 귓 가에 멤돌 뿐이었다. ' 목숨보다도 더… 소중했던‥ 사람이라고…? ' 그,그래….그런‥ 것이었나…. 가인은 뜨거운 뭔가가 얼굴로 밀어 닥친다는 느낌을 받으며 이를 악물었다. 시민 씨는… 그럼 지금까지… ' 날… 바라본 게‥ 아니었어…? ' 그 소중하다는‥ 목숨보다도 소중하다는 남자를 나에게서 비춰 보았던 것‥ 이었나? 이,이렇게 같이 쇼핑을 하고‥ 음식을 먹고… 이렇게 데이트를 했던 것이 그,그런 이유 뿐이었던 거야? 날 피스메이커에서 그만두게 하려고? 시 민 씨가 소중하게 여기는 남자와 내가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에…? 그, 그런 말을 하실려고 이렇게 친절히 대해주셨던 건가? ' 난… 안중에도 없었던‥거야‥? ' 참기 힘든 부끄러움과 분노, 수치심이 밀려들었다.아니,정확히 말하자면 질 투였다! 시민 씨가 소중히 여긴다는 그 남자에 대한 질투‥! 하지만 가인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마냥 화가 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시 민의 미소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게 쇼크였다. " 하,하하하‥ "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그동안 착각을 하고 있던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민의 행동 하나 하나에, 그녀의 말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며 가슴을 두근 거리던 자신이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었다. 시민은 가인이 난데 없이 웃음을 터뜨리자, 불안해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가인 씨? " - 탕! 하지만 시민의 부름에 대한 대답을 가인은 거칠게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 는 것으로 대신했다. 가인은 낮지만 희미한 분노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 시민 씨, 죄송하지만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내요‥. " " 예? " 가인 씨, 그게 무슨…? 갑자기 왜…? 시민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는 것을 느꼈다. 가인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민의 눈빛을 피하며 말을 이었 다. 가슴이 찢어질 것 처럼 아파왔다. " 전 피스메이커를 그만두지 않겠어요. 그리고…이 힘도 포기할 수 없어요. " " 가인 씨!! " 가인의 말에 놀란 표정으로 그를 애처롭게 부르는 시민.하지만 가인은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은 단호하게 굳어 있었다. 가인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 …이 힘만 있으면… 이제 모두를 지켜줄 수 있어요.더 이상 그 누구도 잃 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 그,그래요. 이건 결코 자만심 이나 그런 게 아니에요. 건방지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지만… 이 힘만 있으 면 몬스터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않아도 된다구요. 지켜줄 수 있어요! 전 ‥ 전 자신이 있다구요! " 처음에는 시민의 소중한 사람에 대한 반발심으로 감정이 격해졌으나, 이번 에는 좀 더 내면에 있던 가인의 외침이 흘러 나오고 있엇다. 더 이상 내 주 위의 사람들을 잃지 않아도 돼. 예전, 그 사고 때와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신이가 내 곁을 떠나갔던 그 때 그 사고… " 이 힘만 그 때 있었더라면 모두를 살릴 수 있었어! 아버지, 어머니, 신이! 내 가족! 난 내 가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이에요! 이렇게 혼자 남아 있지 않을 수 있었어‥!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 아직도 그 사고 현장에서의 기억이 선명하다. 갑작스레 중앙선을 넘어 달려 들던 덤프 트럭. 미처 피하지 못하고 트럭과 내 가족이 탄 차는 충돌하고 말 았지. 유리창을 산산히 조각내며 차 밖으로 튕겨나가는 육체. 거친 아스팔트 와의 부딪힘에 전신의 뼈가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활활 타오르는 자동차 의 검은 연기 속에서,나는 피투성이가 된채 벌레 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너 무나도 무기력하게‥ 너무나도 무능력하게… 나는 단지 부모님과 신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이제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아‥! 내 곁의 누군가가 죽고 홀로 남는 기 분 같은 건!! 난 힘이 있다고! 모두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이! 난 더 이상 그 때의 무능력한 내가 아니란 말이에요! " " 가,가인 씨‥! " 광기가 들린 것 처럼 거칠게 소리치는 가인의 모습에 시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마 가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녀 였다. 그의 외침 속에서 느껴지는 절규와도 같은 흐느낌. 그 필사적인 듯한 가인의 모습은 시민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가인은 움켜쥔 주먹을 잡아먹 을 듯이 노려보며 낮게 외쳤다. " 이 힘만 있다면‥! 이 힘만 있었더라면…! 그래‥! 더 이상 놓치지 않을 거야! 놓칠 수 없어! 난 절대 피스메이커를 그만두지 않겠어‥! " 피스메이커를 그만둬버리면…소중한 사람 조차 지킬 수 없었던 무능력한 옛 날의 나로 돌아가 버릴테니까‥!! " 난…! 절대로!! 이 힘을 놓치지 않을 거야!! " - 콰장창창창!!!! 그때, 가인의 목소리에 답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산산 조각 부서지는 12층 의 대형 유리창들! 그리고 거대한 무언가가 거칠게 식당가의 테이블들을 부 수며 내려섰다. - 콰장창창창!!!! " 꺄아아아아악----!!!! " " 으앗!! " 수십개의 대형 유리창을 박살내며 12층의 식당가에 내려서는 그것. 식당 가 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홀 안을 메웠다. 가인과 시민은 놀란 눈 으로 이 갑작스레 등장한 존재를 바라보았다.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휴화산 모양의 등딱지로 둘러싸인 배갑(背甲)의 거대한 덩어리가 놓여져 있었다.그 지름은 대략 6m 정도 되었는데, 그 모양이 흡사 거북이의 등딱지 같은 모양 이었다. " 뭐,뭐야?!! " - 스샷‥! 등딱지 안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파충류의 소리. 그리고 순간, 배갑과 복 갑(腹甲)의 측면으로 네 개의 다리와 하나의 머리,마지막으로 날카로운 꼬리 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렇게 드러낸 모습은 영락 없이 거북이였던 것이다,이 괴물은! 무려 6m가 넘는 거대한 크기였지만. - 스샤아아아아앗!!! " 꺄아아아악!! " 얼굴을 드러내고 나자, 거북이 괴물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근처의 한 여 자를 향해 자신의 꼬리를 내찌른 것이었다.여인은 이 괴물의 모습에 패닉 상 태를 일으키다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꼬리에 꿰뚫렸다. - 츄확! " 으,으아아아앗!! 괴,괴물!! 괴물이다앗---!!! "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비상구로 도망치는 사람들.거대한 공포감이 그들 의 마음을 갉아 먹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되면 정상적인 사고 판단을 하기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괴물은 그런 사람들을 마치 비웃는 것 같은 표정으로 예의 새어나가는 울음 소리와 함께 몸을 움직였다. - 스샤아아앗! 꿰어 있던 여성의 시신을 떨구며 다시 새로운 표적을 향해 꼬리를 휘두를려 는 괴물. 몬스터의 앞에서 모든 삼차원의 존재는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었다. 오라 능력을 가진 피스 대원이 아닌 한‥! - 투학! 그리고 지금, 그 괴물의 꼬리를 푸른 회오리의 방패로 막아서는 한 오라 능 력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가인. 이차원의 존재 몬스터에게 유일하게 대 항할 수 있는 오라의 소유자, 피스 대원! 그의 오라 패턴은 블루. 피스 블루 였다! " 더 이상 네 놈 마음대로 놔둘 것 같냐!! " 어느새 푸른 A.I 슈츠 복을 장착하고 괴물과 대치해 선 가인. 마치 몬스터 가 나타나길 기다렸다는 것 같은 활기를 띈 목소리였다.방금 전의 우울한 모 습을 그에게서 찾아 볼 수는 없었다. 그런 그의 뒤로 노란 A.I 슈츠 차림의 시민이 내려서며 가인에게 말했다. " 가인 씨, 조심해요‥! 그렇게 갑작스럽게 뛰쳐 나가면…! " " 시민 씨, 보세요. " 그런 시민의 말을 끊으며 무감각하게 말을 잇는 가인. 시민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가인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돌아서 있었기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짓 고 있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등 뒤에서 푸른 오라의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것 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가인은 눈 앞의 괴물을 가리키며 시민 에게 소리쳤다. " 이런 괴물이 바로 우리의 상대에요! 눈 깜빡할 새에 사람 여럿은 우습게 죽여버리는 괴물이라구요! " 괴물의 꼬리 공격에 즉사한 여성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우득!' 가인의 이빨이 거칠게 갈리며 소리를 냈다. " 이런 괴물들을 놔두고 피스메이커를 그만 두라구요? 이런 놈들을 없애 버 릴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 " 가인 씨…! " 시민은 가인의 등 뒤에서 점점 세차게 피어오르는 오라의 흐름에 신음을 흘 렸다. 안돼…. 가인 씨‥ 그렇게 계속 오라를 내뿜었다가는…! 하지만 그녀 는 흉흉한 가인의 기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인은 냉소가 섞인 말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 어디 한 번 수수방관해 볼까요? 저 괴물이 사람들을 죽이는 걸 잠자코 지 켜보고만 있을까요? 예? 그게 시민 씨가 바라시는 거에요? " " 그런 게 아니에요‥! 가인 씨, 난…! " " 이 힘을 쓰지 않는 건 죄악이에요! 설령 이 힘이 날 잠식한다고 해도 난 사용하겠어! 한 사람이라도 더 지켜보이겠다구요! 시민 씨는 잠자코 지켜 보기나 하고 있어요!! " " 가인 씨!! " 그 말을 끝으로 거칠게 괴물에게 달려드는 가인. 그의 두 손으로 푸른 오라 의 기류가 휘몰아쳤다. 그의 A.I 슈츠가 증폭되는 오라의 힘에 비명을 지르 기 시작했다. - 위이이이이잉!! " 으아아아아아아아-------!!!! " - 퍼엉----!!! 무시 무시한 기세로 괴물의 등껍질을 후려치는 가인의 오라 공격.거친 오라 의 충격파가 터지며 괴물은 거짓말 처럼 뒤로 떨어져 나갔다.6m의 거구를 단 지 주먹질 몇 방에 날려 보낸 그의 괴력은 사람의 것으로 보기 힘들었다. 괴 물을 비상구에서 떨어뜨린 가인은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 간다! 라이징---------킥!!! " 가인의 A.I 부츠가 폭발음을 내며 오라의 회오리를 발산했다. 그러자 마치 호버 크래프트 같이 홀 안을 저공 비행하며 나선을 그리는 가인. 그는 거칠 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처럼 괴물의 측면으로 돌아들어갔다. 그리고 오라로 휘감긴 그의 오른 발이 괴물의 등껍질에 내리 꽂혔다. - 와지지지지직!!! 괴물이 부딪히는 충격으로 시멘트 가루가 폭발하듯 터져올랐다.그리고 괴물 의 하중을 이기지 못한 바닥은 무너져 내려야만 했다. - 우르르르르…!! 12층에서 11층으로 내려 앉는 괴물의 몸체.가인은 그렇게 괴물이 밑 층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내려다 보며 숨을 몰아 쉬었다. 갑작스럽게 오라를 끌어 올 려서인지 예의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가인은 열이 오른 눈빛으로 괴물의 흔 적을 쫓았다. 괴물이 떨어진 11층은 다행히도 인명 피해가 없었는데, 아마도 12층의 사람들이 대피할 때 11층의 사람들도 같이 대피한 모양이었다.하지만 만약 사람들이 남아있었더라면 끔찍한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시 민은 가인의 행동에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 무,무슨 짓이에요, 가인 씨!! 밑의 층에 사람이 남아있었으면 어떡할려고! " " ......찾았다‥! " 하지만 시민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가인은 연기 속에서 괴물의 모습을 발 견하고서는 재빨리 11층으로 뛰어내렸다. 이미 괴물 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가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민의 안색은 점 점 창백해졌다 ' 가인 씨‥ 정상이 아니야‥! 이대로는 위험해‥! ' 어떻게든 막지 않으면! 시민은 재빨리 가인의 뒤를 따라 자신 역시 밑으로 뛰어 내렸다. 한편, 밑으로 먼저 내려온 가인은 콘크리트의 폐허 속에 처박 힌 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괴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인은 미동 조차 하지 않는 몬스터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 …이 정도로 끝날리가 없을 텐데…. " - 스샷…. 가인의 말에 동의라도 하는 것 처럼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 괴물. 괴물은 천 천히 콘크리트의 잔해 속에서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드드득' 콘 크리트 조각들이 떨어져 내리며 희미한 먼지를 일으켰다. 그런 괴물의 모습 을 노려보던 가인의 눈빛이 순간 당황으로 흔들렸다. ' 이 자식…!! ' 상처가 없어?!! 그 통렬한 라이징 킥의 일격에 적중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몸 을 일으키는 괴물에게서는 그 어떤 외상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와이번도 꿰뚫은 공격이었는데…!! 어째서?!! - 스샤아아아앗!! 그런 가인에게 기세등등하게 괴성을 올리는 괴물. 괴물의 배갑은 피부에서 생기는 골질(骨質)의 판으로 되어 있었는데, 척추와 늑골은 이 골판의 뒷 면 에서 하나로 되어 있었다.골판 위에는 각질의 판이 덮여 있고 각질판의 모양 과 배열은 그 아래의 골판과 비슷한데,크기와 수가 달라서 합쳐진 자리가 골 판의 합쳐진 곳과 어긋나 있어 갑 전체의 견고성이 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라이징 킥을 막아낸 내구성을 설명해낼 수가 없다. ' 저건…?! ' 뒤늦게 11층에 내려서던 시민은 괴물의 배갑 부분에서 희미하게 붉은 빛이 번뜩였다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순간, 시민은 모든 정황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가인이 아무리 괴물을 공격한다 해도 놈에 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할 것이다! " 가인 씨, 멈추세요! 지금은 공격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 가인 씨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구요!! 하지만 가인은 시민이 단순히 힘을 쓰지 말라고 소리치는 줄로 알고 코웃음을 쳤다. 시민 씨, 아직도 그런 말씀 을 하시는 거에요? 두 눈 똑똑히 뜨고 잘 보시라구요! 제가 반드시 이 괴물 을 없애보일테니까!! ' 시민 씨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테니! ' " 차아아아아아앗!!! " 가인의 기합과 함께 그의 헤븐 스매쉬로 거대한 오라의 회오리가 집중 되기 시작했다. 얼마나 거대한 힘이 모여들고 있는지, 공명으로 11층 자체가 진동 했다. 헤븐 스매쉬는 맥스 수치의 오라가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처럼 백열했다. 좋아! 간다! 어디 이것도 견딜 수 있다면 견뎌 봐라! " 천공권(天空拳) 연쇄(連鎖)!! " 맥스 파워의 천공권. 그리고 그 안으로 또 하나의 역(逆) 천공권을 연쇄 발 사. 그때 발생하는 기압의 뒤틀림으로 적을 분쇄시킨다! - 콰드드드드드드드득!!! 괴물을 덮쳐 오르는 천공권 연쇄.토네이도와 이중 연쇄로 인한 역 토네이도 사이에 놈이 휘말리는 것을 가인은 명확히 볼 수 있었다. 끝이다,네 놈! 이 이중 토네이도에 한 번 휘말렸다 하면 뼈가 살을 찢고,전신이 뒤틀려 부숴진 다고! - 투아아아아아아앙!!! 괴물을 지나 11층의 벽을 깨부수고 밖으로 치솟아 오르는 천공권 연쇄. 어 찌나 흉폭한 바람이었던지, 11층 자체가 너덜 너덜하게 부서져 내렸다. 기압 의 뒤틀림이 사방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인지, 숨 쉬기가 곤란했다. 가인은 A.I 헬맷을 해체시키며 충혈된 눈을 들어 괴물의 잔재를 찾았다. 입 가로는 호흡 곤란 때문인지 끊임 없이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 보라구요… 시민 씨… 해냈어‥ 난 해냈다고…. " 쉰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며 뻗고 있던 헤븐 스매쉬를 힘겹게 내리는 가인. 11층의 부서진 벽 사이로 밖의 밤 바람이 안의 먼지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 고 천천히 괴물의 잔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잔재라… 천공권 연쇄를 맞고 도 잔재라는 게 남아있을 수 있다면 말이지. " .........?!! " 하지만 걷혀 나간 연기 사이로 드러난 것은 거대한 괴물의 등껍질이었다.비 록 얼굴과 다리, 꼬리가 사라진 모습이었지만 그 배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 었다. 가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허망한 표정으로 등껍질만 남은 괴물을 노려 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공격을 당하고도…?! ' 뭐,뭐야?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는 거지? 그리고 저 모습은? 껍질 안으로 숨기라도 한 건가?! ' - 스스스스슥‥ 그리고 예의 붉은 빛이 괴물의 껍질에서 흘러나왔고,그와 동시에 껍질만 남 은 녀석의 몸체가 부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인은 움 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사,살아 있어?!! 이 자식‥?!! 순간, 괴물의 배갑은 튕겨지듯 튀어오르며 거칠게 회전을 개시했다. - 쿠콰콰콰콰콰!! " 으앗?!! " 마치 팽이 처럼 회전하며 가인에게 달려드는 괴물의 배갑.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몸을 굴렸다. 아슬아슬하게 가인을 빗겨나간 괴물의 배갑은 건물의 기둥을 으스러뜨리듯 박살내며 지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인 의 등골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 어째서 죽지 않는 거야?! 어째서‥!! ' - 콰직! 쿵! 쿠드드드드득‥!!! 사방팔방으로 정신 없이 튕겨 오르며 가인을 압박하는 괴물의 배갑. 가인 은 딴 생각할 여유도 없이 급하게 괴물의 공격을 피해 달아났다. 괴물은 그 야말로 인정 사정 없이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닥치는 데로 부숴 뜨리며 가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 윽!! " 그리고 결국, 구석으로 몰린 가인.괴물의 배갑은 고속으로 회전하며 한 치 의 틈도 없이 가인에게 쇄도했다. 가인은 이를 악물며 오라의 보호막을 펼 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제,젠장!! 어째서 이런 자식에게!! - 라아아아아아‥ 그때, 괴물의 움직임을 막아서는 오라의 기운. 바로 시민의 오라 능력, 페 르마타(fermata:늘임표)였다. 상대의 움직임을 음파의 늘어뜨림으로 지연시 키는 기술. 괴물의 배갑이 그녀가 내는 음파의 늘임표로 그 움직임을 멈추었 다.그리고 노란색 잔영과 함께 시민이 가인과 괴물의 사이에 내려섰다. 그녀 는 다급하게 가인을 향해 외쳤다. " 가인 씨, 어서 몸을 피해요! 지금은 저 몬스터에게 어떠한 공격을 해도 무용지물일 뿐이에요! 이렇게 막아낼 수 있는 것도 지금 뿐이라구요! " " 그,그런‥! " 가인은 이를 악물며 괴물의 배갑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나,난 강대한 힘 을 손에 넣었을 텐데…!! 이제 다시는 지지 않을 줄 알았었는데…! 어째서 또 다시‥!! ' 다시 무능력해지는 건가? 그때로 돌아가는 거야?! ' 그럴 순 없어‥! 그럴 순 없어!! 난 B급 몬스터 와이번도 물리쳤다고! 겨우 이 따위 하급 몬스터 녀석한테 질수는 없어…. 이런 녀석에게…!! 난‥!! " 난 질 수 없어----!!!!! " " 안돼!! 가인 씨!! " 괴물에게 달려들려는 가인을 향해 소리치는 시민. 그때,시민의 오라에 휩싸 여 꿈틀거리던 괴물의 배갑에서 다시 한번 예의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 고 다음 순간, 시민의 오라는 더 이상 괴물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 아‥. " - 쿵!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짧게 울리는 시멘트의 파쇄음.괴물의 배 갑 안에서 날카로운 꼬리가 튀어나와 시멘트의 벽을 내찌른 것이었다. " ......... " 그리고 그 꼬리에는 한 여인이 꿰여 있었다. 해체된 A.I 헬맷 사이로 금발 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깜빡 이는 감홍빛 눈동자. 한시민은 짧게 몸을 떨었다. " 아…. " - 츄확! 날카롭게 뽑혀나가는 꼬리. 오리하르콘 구조를 꿰뚫을 정도의 위력을 지닌 그것은 시민의 내장기관을 사정 없이 헤집고 지나갔다. 시민은 천천히 구멍 이 뚫린 자신의 배를 움켜쥐었다. 마치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하수처럼 구 멍이 난 배에서 뜨거운 액체가 주륵 주륵 펌프질을 하듯 흘러 나왔다.그녀의 뒤에 멍하니 서있던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시민…씨‥? " - 푸확! 그와 동시에 입으로 선혈을 토해내는 시민. 그녀는 그대로 머리부터 앞으로 거꾸러져 내렸다. 코와 입으로 터져나온 피가 그녀의 얼굴을 순식간에 붉은 핏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 가인은 그녀를 끌어 안으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 앉았다. 이 모든 게 현실 같지 않았다. 눈 앞에서 배갑 속의 얼굴을 내 미는 저 몬스터의 모습도… 품 안에서 핏투성이가 된 시민 씨의 모습도… 그 리고… 그와 중에도 똑똑히 느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죄책감. ' 난, 난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린 거지…? '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그의 품 안에 안긴 시민의 붉게 물든 모습이었다. 이 힘만 있다면 난 모두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 자신이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더 이상 아무런 후회도 남길 필요 없이… 더 이상 내 소중한 이들을 잃지 않을 줄 알았었는데… ' 아니야…. ' 그게 아니야…. 유가인,넌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거냐? 정말 모두를 지키겠 다는 생각으로 싸워왔던 거야? 정말 그랬던 거냐고? - 단지 자신의 강해진 힘에 취해… 예전의 무기력한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 발버둥을 쳤을 뿐. 결국, 네 녀석은… ' 뭐가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야? 뭐가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야? ' 결국, 네 녀석은… - 모든 건 너 자신을 위해서였을 뿐…. 가인은 자신의 품에 쓰러져 있는 시민을 창백해진 얼굴로 내려다 보았다.그 녀의 몸은 붉게 물든채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단지 망연자실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있을 뿐.가 인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아‥ 빨리‥ 포션을 주사해야… " 흔들리는 손길로 가인은 품 안의 포션을 꺼냈다. 그,그래.어쨋든 지금은 시 민 씨의 치료가 먼저야.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따윈 없다고. 재생 능력을 높 여주는 포션만 주사한다면 시민 씨의 이런 상처 쯤이야 순식간에 나을 수 있 을 거야‥ 분명…. 가인은 황망히 시민에게 포션의 주사 바늘을 꽂을려고 했 다.하지만… - 휘리리리릭! " 큭…! " 가인과 시민의 눈 앞에 있던 괴물의 배갑 속에서 네 가닥의 촉수가 튀어 나 와 가인을 노렸다.그것들은 포션을 들고 있던 가인의 손과 목에 휘감겨 무서 운 힘으로 가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 으윽‥! 놔‥. 어서…! " - 투둑‥! 가인의 손에 들려 있던 포션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호흡을 하기 곤란할 정도로 목을 조여오는 괴물의 촉수에 가인은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이,이러지마‥! 방해하지마! 이대로 시민 씨를 내버려두면 그녀가 위 험해진다고‥! 한시라도 빨리 포션을 주사해야 한단 말이야‥!! - 우우우우우우‥! 가인의 몸에서 끓어오르듯 터져나오는 푸른 오라의 기류. 그와 동시에 가인 은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괴물의 촉수를 두 손으로 쥐어 뜯었다. '푸쉿!' 오 라가 서린 가인의 악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괴물의 촉수가 찢어져 나갔다. 고 통에 찬 괴물의 비명이 울려퍼졌고, 그 뒤를 이어 분노에 찬 가인의 외침이 이어졌다. " 방해‥ 하지… 마아아아아------!!!! " - 투학------!!! 오라로 휘감긴 가인의 주먹이 괴물의 배갑에 내리 꽂혔다. '쿵!' 그 충격으 로 거칠게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히는 괴물의 배갑. 가인은 자신의 몸에서 걸 리적 거리는 괴물의 촉수를 풀어 헤치며 쓰러져 있는 시민에게로 다가갔다. 시민 씨에게 포션을 주사해야 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기 전에…! 그러니 까 제발 날 방해하지마‥! - 쿵! " 크헉…! " 그러나 가인은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괴물의 배갑에서 포탄처럼 머리 가 튀어나와 가인의 배를 들이 받았기 때문이다. 가인은 숨 끊어지는 비명을 흘리며, 뒤의 콘크리트 벽을 향해 늘어난 괴물의 머리와 함께 날아가버렸다. 마치 배를 관통하는듯한 그 충격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 스으으으으… 그리고 그런 가인을 눈 앞에 둔 채 예의 붉은 빛을 흘리는 괴물의 배갑. 그 러자 한층 강해진 괴물의 힘이 가인을 엄습해 왔다. 그런 괴물에게서는 가인 의 오라에 당한 흔적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어째서…. ' 어째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는 거지‥? 어째서? ' 내 힘이란 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였나? ' 그런 주제에‥ 난 그렇게 건방을 떨었던 건가? 가인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저편에 쓰러져 있는 시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자신 사이의 거리는 얼마 떨 어져 있지 않았지만,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조차 없었다. 뭐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야? 다시는 아무도 잃지 않겠다고? ' 시민 씨 한 사람도 제대로 지키질 못했으면서… ' " 으아아아아아!!!! 제길!! 제기랄-----!!! " - 우우우우우우!!! 가인은 미친듯이 두 팔을 내저으며 오라를 내뿜었다. 하지만 그렇게 강맹한 기운도 괴물이 흘리는 붉은 빛과 맞닿자 무너지는 모래성 처럼 허무하게 중 화되어 갔다. 되려 자신의 오라에 대한 반탄력으로 가인은 뒤로 튕겨나가야 만 했다. - 투학…! ' 어째서…. ' 가인은 허공을 날다가 홀의 테이블들 위로 처박혔다.가인의 눈에 보이는 모 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테이블에 부딪힌 몸의 고 통도 느껴지지 않았다.단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자신의 오라에 대한 배 신감 만이 느껴질 뿐. 어째서 이렇게 무기력할 수가 있는 거지…? ' 이런 주제에 모두를 지키겠다고? ' 몬스터 몇 마리를 물리쳤다고 기고만장했던 거냐? 그렇게 큰 소리를 쳤던 주제에… 다 맡겨만 두라고 호언장담을 했던 주제에…. 시민 씨에게 화를 낼 자격이 네 녀석한테 있기라도 했냔 말이야! 유가인 넌…! ' 부끄‥ 럽다… ' 가인은 그제서야 자신의 오만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자신의 몸 하나 지키기 에도 벅찼으면서 남을 지키겠다니… 모두를 구하겠다느니… 인류를 구하겠다 느니 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생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 얼마 나 허황된 자신감이었던가. 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었던가. 유가인! 넌 네 몸 하나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해! 네 자신이 신 이라도 된 줄 알았던 거야? ' 아니야…. 난 그런 게… ' 자,봐라! 너의 그 오만한 태도가 불러온 결과가 이거다! 저 피투성이가 되 어 쓰러져 있는 시민 씨를 보라고! 너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 ' 아니야…! 시민 씨는‥! 시민 씨는 아직 죽지 않았어‥! ' 가인은 부서진 테이블 조각의 잔해 속에서 버둥거리며 시민이 쓰러져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쓰러져 있는 바닥으로는 짙은 선혈들이 번져 나 오고 있었다. 가인의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두근 거리기 시작 했다. 왠지 숨 쉬기가 힘들어진다. 가인은 사고가 마비된 채 멍하니 중얼거 렸다. " 시민 씨… " 정말‥ " 죽은… 거에요‥? " 그러나 시민은 그런 가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 분명 저대로 놔두면 죽을 테지. " 그때, 가인의 귓 가로 들려온 한 소년의 목소리.가인은 황망히 목소리가 들 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11층으로 올라온 것인지, 회색 빛 의 긴 머리카락을 땋아내린 검은 권복 차림의 중국인 소년이 서 있었다. 그 소년을 바라보는 가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저 아이는… 분명, 아까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마주쳤었던… ' 어째서 여기에…? 대피하지 않았던 건가? ' 가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이 중국인 소년에게 소리를 지를려고 했다.도 망치라고! 여기는 위험해! 하지만 이 소년은 너무도 태평하게 마치 산보하듯 이 11층의 부서진 잔해들을 훑어 보고 있었다.그런 소년의 기색에 가인은 기 가 막혀 외쳤다. " 이,이봐…! 어서 피해! 뭘 하고 있는 거야?! " 그러나 소년은 그런 가인의 외침이 귀에 거슬렸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되려 가인을 노려보았다. " 난폭하기 그지 없는 녀석이군.네 녀석은 오라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 법도 모르는 녀석이다. " " ......뭐…? " 뭐,뭐라고? 가인은 소년의 입에서 오라 라는 말이 나오자 당황하며 그를 바 라보았다. 뭐지? 이 녀석,방금 오라 라는 말을 했었나? 오라를 알고 있는 거 야? 하지만 이 중국인 소년은 가인이 당황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 오라의 주인이라길래 어떤 녀석인가 했더니…설마 이런 애송이 녀석일 줄 이야…. 정말 기가 차는군. " " ......무,무슨…? " 그게 무슨 소리야?! 오라의 주인이라니?! 이 녀석‥ 피스메이커 관계자인가? 하지만 유레카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가인은 혼란스러운 얼굴 로 이 중국인 소년을 바라보았다. 넌 도대체 누구지? 정체를 밝혀! 그런 가 인의 마음 속 의문점을 알아챘는지 중국인 소년은 천천히 괴물의 앞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 내 이름은 부르스. " - 스샤아아아앗! 그리고 으르렁 거리며 그런 소년에게 달려드는 배갑의 괴물. 순간,부르스의 몸에서 회색의 오라가 피어올랐다.소년을 바라보던 가인의 동공이 확대 되었 다. 이 녀석,설마… 오라 능력자?! " 오늘부터 한국으로 발령받은 중국 지부 피스 대원이다‥! " - 쿵! 거세게 진각(震脚)을 밟으며 달려드는 괴물에게 주먹을 내찌르는 부르스.마 치 회오리가 치밀어 오르듯 그의 몸을 감싸던 회색의 오라가 권(拳)으로 집 중되었다. 그와 함께 진각을 밟던 콘크리트가 터져 올랐다. - 투앙---!!!! 압축. 그리고 폭발! 상,중,하의 삼반합일이 이루어진 경(勁)의 집중. 인간 이 낼 수 있는 근육의 힘을 뛰어넘은 위력이 펼쳐졌다. 그것은 바로 발경(發 勁)! 괴물의 그 육중한 몸이 거짓말 처럼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 쿠웅‥! 십 여 미터를 날아가 떨어진 괴물의 배갑. 그 충격에 백화점의 11층이 지진 이라도 난 것 처럼 흔들거렸다. 그러나 가인은 그런 진동도 느끼지 못한 채 괴물을 날려보낸 이 중국인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마,말도 안돼…. A.I 슈츠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저런 힘을…! ' 그렇다. 자신을 중국에서 온 피스 대원이라고 밝힌 소년, 부르스는 오라의 증폭을 돕는 A.I 슈츠 조차 장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인과 대등한 힘을 발 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르스는 그렇게 가인이 얼이 빠진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예의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 뭘 그렇게 넋이 빠져 있는 거냐? 네 발 밑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그대로 내버려 둘 셈이냐? " " 아…! " 부르스의 지적에 그제서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민을 깨달은 가인.그는 서 둘러 나머지 포션을 꺼내 그녀에게 다급히 주사했다. 아무리 부르스의 오라 능력에 정신을 빼앗겼었다고 해도, 부상당한 시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자기 혐오에 가까운 죄책감이 가인에게 밀려들었다. ' 차갑다… ' 품 안의 시민에게서는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의 체온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냉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괴물의 꼬리에 관통당한 그녀의 배에서는 이제 더 이상 흘러내릴 혈액도 없는지 점점 피가 멎고 있었다. ' 피,피가 응고 되고 있어…. 포션의 영향인가? 아니면… ' 가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를 악물었다. 불길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 지를 않았다. 안돼! 그럴리 없어! 절대 그럴리가 없다고! 늦지 않았을 거야! 시민 씨는 반드시 살아날 수 있어! 반드시 살아나실 거라고!!!! 그렇게 불안 에 떠는 가인을 바라보며 혀를 차는 부르스. 그는 고집스럽게 굳은 얼굴을 돌려 다시 괴물 쪽을 바라 보았다. 괴물은 가인 때와 마찬가지로 붉은 빛을 몸 안에서 뿜어내며 천천히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런 괴 물의 모습이 의외였던듯 부르스는 눈꼬리를 살짝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 무곡(武曲)을 맞고도 일어서다니…. 내 경도 그 위력이 쇠해진 건가? " 부르스는 요사스러운 붉은 빛을 흘리는 배갑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의 눈으 로 배갑의 중심에 박혀 있는 한 물체가 들어왔다. 파셋 수가 천 이상으로 내 부에 깃든 광채와 외부의 빛으로 인해 마치 쏟아지는 비처럼 반짝이는 흑빛 의 돌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부르스의 얼굴에 가는 미소가 그어졌다. " 귀석(貴石)이었군. 어쩐지 오라가 중화되어간다고 했었지….은허(殷墟)에 서 도굴해간 것을 이런 용도로 써먹을 줄은 미처 몰랐는 걸. " - 스샤아아아아앗!! 계속되는 오라의 공격이 자신에게 효과가 없자, 기세가 등등해진 괴물은 날 카로운 포효를 내지르며 다시 부르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에게 날아온 것은 부르스의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 아무리 아켄석을 뒤집어썼다고 해도 길조(吉弔)가 용(龍)이 될 수는 없는 법. 네 주제를 깨달아라‥! "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방어하는 각도를 원과 같이 만들며 동시에 숨을 들이 마셔서 압축 폭발을 위해 준비. 기를 아랫배로 떨어뜨리면서 자세를 급 격히 낮춘다. 그리고 순간! 강력한 전사경을 사용하여 가속화시키며 동시에 숨을 내뿜는다! " 칠성권(七星拳) 파군(破軍)‥! " - 콰직------!!!!! 금이 가버리는 철벽의 방어막. 가인의 오라 공격에 꿈쩍도 하지 않던 괴물 의 배갑이 처음으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린 것이었다. 괴물은 배갑 에 부르스의 주먹 자국이 나선형으로 도장 처럼 찍힌채 뒤의 콘크리트 벽까 지 날아가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11층의 벽 한 면이 통째로 부서져 나갔다. " 아아‥. " 괴,굉장해…. 시민을 끌어안은채 부르스의 싸움을 지켜보던 가인은 입을 다 물지 못했다.자신의 오라에 그토록 꿈쩍도 하지 않던 괴물을 저 어린 소년은 멋들어지게 박살내 버린 것이다. 가인은 그제서야 이 눈 앞의 중국인 소년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회색 의 오라 기운이 가인의 전신으로 느껴져 왔다. " 흥… 역시 이대로는 시간 낭비로군. " 투덜거리는 부르스의 중얼거림에 가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낭비 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러나 가인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부르스의 무 시 무시한 발경 공격을 얻어 맞았던 괴물이 끈질기게 붉은 빛을 흘리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울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부르스의 공격이 정말 강하기는 강했던 것인지, 괴물은 예전과 같이 쉽사리 회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부르 스는 꿈틀거리는 괴물을 무시하면서 그 곁을 태연하게 지나쳐 구멍이 뚫린 벽으로 걸어갔다. - 휘이이이이잉… 밤의 야경이 보이는 무너진 벽으로 차가운 밤 바람이 밀어 닥쳤다. 11층이 나 되는 높이였기에 발 밑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찔하기 그지없었지만, 부르 스는 밑으로 시선 조차 주지 않으며 단지 맞은 편의 건물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맞은 편 건물을 살펴보던 부르스는 이내 자신이 찾던 목표 를 발견하고서는 낮게 조소했다. " 찾았다…. " - 콰직! 그 말과 함께 부르스는 거센 진각을 밟으며 맞은편 건물로 뛰쳐 올랐다. " 후… 겨우 저런 것이 오라의 주인이었단 말인가? 역시 하찮은 벌레,그 이 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었군. " 차가운 목소리로 경멸섞인 말들을 중얼거리는 청포의 남자. 초류향은 섭철 선으로 얼굴을 가리며 자신이 있는 건물의 맞은 편에 보이는 롯데 백화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보낸 몬스터는 오라의 주인이라는 한 인간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라를 중화시키는 아켄석을 달아 보냈다지만, 이 정도에 애를 먹는 꼬락서니 라니… 수준 미달이로군. 비류향은 음산한 미소 를 흘리며 밤의 여왕 리리스가 당황해 할 얼굴을 떠올렸다. " 결국 너한테 돌아갈 기회는 없어졌군,리리스. 이 무의미한 놀이도 이것으 로 끝이다. 애지중지하던 너의 장난감…. 사정 없이 부숴뜨려 주지. " - 콰앙-----!!! 그때, 맞은 편에 보이던 롯데 백화점의 11층 벽이 폭발음과 함께 산산히 부 서져 나갔다. 그 충격파로 거세게 나부끼는 초류향의 초록색 머리카락.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너진 벽을 바라보았다. ' 뭐지?! ' 롯데 백화점의 무너진 잔해 속으로 보이는 것은 비틀거리며 붉은 빛을 뿜어 내는 자신의 수하와 정체 불명의 권복 소년이었다. 권복 소년,부르스의 몸에 서 흘러나오는 회색의 기운에 초류향의 안색이 굳어졌다. 저 녀석은…?! " 네,네 녀석은-----!!! " 부르스를 알아보며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는 초류향. 그런 그를 반대편의 건물에서 힐끔 쳐다보던 부르스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거세게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이 중국인 소년은 거짓말 처럼 30m 거리의 허공을 가르며, 초류향이 서있는 반대편 건물로 쇄도해 드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초류향으로서는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 나올 장면이었다.그리고 그런 초류향의 귀로 나지막 히 들려오는 부르스의 목소리. " 칠성권(七星拳) 염정(廉貞)…! " " 크핫----!!!! " - 투학-! 피스 그레이의 오라가 실린 칠성권 제 5의 발경은 초류향이 들고 있던 섭철 선에 의해 그 궤도가 바뀌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버렸 다. 그 경에 실린 강기(强氣)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이었던지,염정을 막은 초 류향의 섭철선은 물론이고 그의 도포 자락 까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초류 향은 그 답지 않게 낭패한 기색으로 이를 갈며 부르스를 노려보았다. " 어째서 네 녀석이 이곳에?! " " 네 놈, 물 먹이러. " 그렇게 대답하며 재차 초류향에게 권을 날리려는 부르스. 하지만 이미 초류 향은 공중으로 몸을 날린 상태였다. 그의 초록색 머리카락이 용의 지느러미 처럼 흩날리며, 초류향의 몸을 공중에 띄워주었다. 부르스는 입 맛을 다시며 자세를 풀었다. " 모처럼 환영 인사를 해주려고 했건만 남의 성의를 무시하는 건 여전하군. " " 크으윽…! 또 다시 내 일을 방해할 셈이냐,인간?!! " " 그래. 앞으로도 끊임 없이 방해할 거다. " 부르스의 대답에 초류향은 분노한듯 기세가 흉흉해졌다.자신이 가장 무시하 던 인간 나부랭이 한테 이런 치욕을 당해야만 한다니…. 무엇보다 더 초류향 의 자존심을 찢어 놓은 것은, 그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힘을 자신이 두려워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초류향의 분노에 반응하여 그의 몸으로 붉은 불꽃 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 사사건건 네 놈이 문제였었지. 중국에서 짓지 못한 승부를 여기에서 가려 볼 테냐? " " …뭐,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그보다 저대로 놔둘거냐? 네 놈의 아휘(*)? " *아휘: 상하이 사투리로 불량배란 뜻. 부르스는 저편의 롯데 백화점에서 붉은 빛을 흘리며 부들 부들 몸을 떨고있 는 괴물을 가리켰다.그런 자신의 수하를 바라보던 초류향의 안색이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부르스는 재차 비웃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 아무리 일회용품이라고 하더라도, 저 놈의 몸에 달린 아켄석은 아직 여러 모로 유용할텐데? 저대로 놔두었다가는 숙주의 몸이 소멸됨과 동시에 정 기를 빨아들일 곳이 없는 아켄석도 붕괴되어 버릴 거다. " " 젠장…!! " 초류향은 부르스의 말에 이를 갈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롯데 백화점에 있던 괴물이 배갑 안으로 몸을 집어 넣으며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 오르 기 시작했다. 녀석은 초류향에게로 날아가 주인의 곁을 멤돌았다. " 오늘은 인사 차 온 것이었으니 이쯤에서 돌아가주마. 하지만 다음에 만났 을 때는 네 놈을 산채로 씹어 죽일테다. " " 날 씹어 죽이든 말든, 그 전에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이나 하고 와라. " " 큭…. " 초류향은 부르스의 시덥지 않은 농담에 인상을 구겼다.저 인간의 모든 것이 초류향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부르스를 상대할 마음이 없어졌 는지 주위의 불꽃을 자신의 몸과 수하에게 휘감았다. 불꽃은 나선 형으로 거 칠게 타오르더니 초류향과 수하의 몸이 사라짐과 동시에 소멸되었다. 그러자 언제 소동이 있었냐는듯이 조용해지는 도시의 야경. 단지 폐허의 잔해 만이 방금 전의 소동을 증명하고 있었다.부르스는 피스 메이커의 뒷 처리 반과 팔 라딘들이 건물 밑으로 모여드는 것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5대 간부…. "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반대편 건물에서 시민을 끌어안고 있는 가인을 돌아 보았다. 오라의 주인은 너무도 초라한 몰골로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부 르스는 흥미롭다는듯 관조자의 입장으로 중얼거렸다. " 오라의 주인이여… 너는 그들을 상대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 " 2032년, 9월 18일.21시 42분. 20구역의 롯데 백화점에 C-급 몬스터 '길조 (吉弔)'가 출현했었습니다. 사건 현장에 있던 블루와 옐로우가 길조와 조 우. ABF가 전개되어 있지도 않았는데 피스 대원을 습격한 것으로 보아,아 마도 처음부터 피스 대원을, 그것도 피스 블루를 노린 습격으로 예상됩니 다.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대형 스크린에 떠오르는 자료 화면과 함께 상황 을 보고하는 수정의 설명에 진 사령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수정은 그런 사 령관의 반응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길조의 배갑 부분입니다. " 그 말과 함께 길조의 자료 사진에서 배갑 부분이 클로즈 업 되었다. 배갑의 중앙에서 희미한 붉은 빛을 흘리고 있는 흑빛의 돌이 화면에 포착되었다. 그 제서야 진 사령관은 입을 열었다. " 귀석(貴石). 아켄석이로군. " " 그렇습니다. 중국 지부에서 전달받은 정보에 의하면 아마도 은허의 유물 로 추정됩니다. 피스 그레이,부르스 대원의 설명에 의하면 길조는 오라를 중화시키고 A.I 슈츠의 오라 장벽을 꿰뚫었다고 합니다. 분명 아켄석의 능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 " …귀찮게 됐군. 설마 그런 것이 놈들의 수중에 들어갈 줄이야‥. " 말투가 한탄조였지, 여전히 무뚝뚝한 진 사령관의 말이었다.진 사령관은 검 은 선글래스 사이로 스크린의 자료 화면을 살펴보다가 이내,초록색 머리카락 이 나부끼는 청포 괴인의 모습에서 시선이 멈췄다. 진 사령관은 눈을 빛내며 더더욱 냉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 5대 간부인가? " " …예. 중국에서 활동했던 용마인 '초류향'입니다. 최근 들어 중국 지부에 서 몬스터의 발생율이 줄어든 것도, 초류향이 한국으로 넘어온 영향 때문 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건 현장에서는 다행히도 피스 그레이와의 대면으 로 모습을 감췄다고 합니다. " " 슬슬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것이겠지. 이 작은 동방의 소국으로…. 예상 했던 일이다. " 수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진 사령관의 믿음직해 보이는 태도 가 그녀의 침중한 마음을 덜어 주고 있었다.진 사령관은 잠시 침묵하다가 일 부러 묻지 않고 있던 보고를 수정에게 물었다. " …피스 옐로우의 상태는 어떤가? " " ......그건… " 수정은 뒷 말을 흐렸다. " 내장 기관의 손상은 포션 치료로 어느 정도 수습이 가능했지만,문제는 척 추의 파열입니다. 경추부가 외력에 의하여 과신전(過伸展) ·과굴곡(過屈 曲)되어 경추 주위를 싸고 있는 근육 ·인대 등이 늘어나 찢어져 붓는 경 추부염좌 頸椎部捻挫(whiplash injury) 증세가 일어났고, 상부의 척추가 앞쪽으로 일탈해 척추탈위증 脊椎脫位症(spondylolisthesis) 증세까지 일 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P.E.T 용액을 사용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 겠군요. " " 그런…! 수술은 성공이라고 하셨잖습니까?! " 메디컬 센터에서 7시간의 대 수술을 끝내고 나온 닥터에게 진우가 소리쳤다. 닥터의 앞으로는 마리와 진우, 유리가 서있었는데 가인은 뒤편의 좌석에 앉 은채 초췌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닥터는 진우와 다른 이 들의 얼굴을 둘러보다가 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 맞아요,진우 군.수술은 성공입니다. 시민 양의 부상은 어느 정도 호전 상 태를 보이고 있어요. 피스 대원 답게 그녀의 강인한 체력이 도움이 됐지 요. 외적인 상처는 요양만 잘하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 " ......외적인 상처는… 이라고요? " 가만히 닥터의 얘기를 듣고 있던 마리가 조용히 말문을 띄웠다.외적인 상처 가 문제가 아니라면 다른 문제가 있다는 소리인가? 그녀의 말에 일행이 다시 자신을 주시하자, 닥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녀의 몸에서 포타슘훼로시안나이드(Potassium Ferrocyanide)와 유사한 성분이 7.2ppm 씩이나 검출되었습니다. " " …그,그거 분명 청산가리 성분…? " " 맞습니다.포타슘헤로시안나이드와 70%이상 유사한 구조를 가진 새로운 독 물이에요. 아마도 몬스터의 공격을 당할때 감염된듯 싶습니다. " 시민의 몸을 꿰뚫은 길조의 꼬리에 독이 발려 있었던 모양이었다.유리는 떨 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런 거…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리가 없어‥. " " 다행히도 시민 씨의 오라가 독과 맞서고 있는듯 합니다만…어디까지나 시 간 문제에요. 그녀의 체력이 다하기라도 하면, 즉각 억제되어 있던 독 성 분이 그녀의 몸을 잠식해 들어갈 겁니다. " " 해독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 진우는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진우 자신이 닥터에게 물은 것이었 지만, 돌아올 대답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해독할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에 시민의 독은 해결됐을 것이다. 닥터는 진우의 질문에 무언으로 긍정했다. " ......... " 한순간에 시민의 병실 앞이 조용해졌다. 모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민이 입원해 있는 병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나 올 것만 같았다. 진우는 말 없이 앉아 있는 가인의 옆 자리에 털썩 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가인은 이상하리 만치 아무 말이 없었다. 마리가 그런 가 인의 앞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 …혹시라도 시민 씨의 일로 자책하고 있다면… 그러지마,가인. 너가 아니 었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 " ......... " 고개를 숙인채 여전히 입을 닫고 있는 가인의 모습에 마리는 마음이 무거워 졌다. 그 이상 그를 위로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가인이 이대로 자신을 자책하다 망가져 버릴까봐 그녀는 걱정되었다. 그는 자신을 탓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동료가 당하는 장면을 옆에서 목격한 이로서는…. ' 가인…. 힘내. ' 마리는 마음 속으로 나직히 그 말을 가인에게 건냈다. 그녀의 곁으로 유리 가 다가와 가인의 손을 맞잡았다.유리는 그녀 답지 않게 떨리는 눈길로 가인 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새라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시민의 저런 처참한 모습은 유리에게도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 오빠…. 시민 언니‥ 어떡해? 응‥? 시민 언니… " " ......... " 가인은 잠자코 그런 유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자 유리는 가인의 품에서 희미하게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민이 가인이 좋아하는 사람이 라고 해도… 자신이 그 때문에 그녀를 질투하고 있었다고 해도, 시민은 유리 의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단 하나 뿐인 언니였다. 언제나 미소를 지으 며 자신과 가인을 집에서 맞이해주던 시민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 거려 유리 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가인은 그런 유리를 떨리는 손길로 힘껏 끌어 안으며 멍한 눈으로 시민의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잔뜩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미안‥유리야…. 셋이서 즐겁게… 네 생일파티를 해줄 생각이었는데… 선 물도 사놨었는데… " 어디서 부터… 이렇게 잘못된 거지? 멍하니 미안하다는 말만 중얼거리고 있는 가인의 모습에 마리와 진우도 어두워진 안색으로 고개를 떨구었다.그들 은 차마 가인의 모습을 계속 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려야만 했다. 조용한 병 실에 유리의 흐느낌 만이 간간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아마 낮이 가고 다시 밤.그리고 새벽인 것 같았다. 가인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시민의 병실 앞 의자에 앉은채 하염 없 이 병실 문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문을 보고 있으면,시민 씨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기에…. 가인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며 단지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 ......... " 진우와 마리는 그런 가인을 끌어내 볼려고도 했지만,아무런 반응이 없는 가 인의 모습에 결국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리고 진 사령관으로 부터의 호 출이 있었기에 잠시 둘은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병실 앞에는 가인과 유리,둘 뿐이었다. " ......... " 유리는 자고 있었다. 울다가 지쳐 가인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잠이 든 모양 이었다.가인은 그런 유리를 멍하니 내려다 보다가 다시 병실 문으로 눈을 돌 렸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자신의 마음 어딘가가 부서져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물은 흘러 내리지 않는다. ' 나는…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릴… 자격 조차 없어. '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가인의 눈물샘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자신이 운다는 것은 너무나도 뻔뻔스 러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민 씨는 나를 막아서다가 그렇게 중상을 입으셨 다.내가 쓸데 없는 고집만 부리지 않았더라도… 내가 그런 허황된 생각만 하 지 않았더라도… 내가 그렇게 이기적이지만 않았더라도…그녀는 저런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날… 용서할 수가 없어…. ' 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가인은 숨어버리고만 싶었다.자신의 죄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 었다. 가인은 유리의 머리에서 자신의 무릎을 빼내며 비척 비척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비틀 거리며 초췌해진 안색으로 시민의 병실 문을 열었다. - 덜컥… 그리고 가인은 볼 수 있었다. 검붉은 액체 속에 몸을 담근채 전신에 수혈을 위한 호스와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는 시민의 모습을…. 가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만 다리에 힘이 빠져 천천히 주저 앉고 말았다. 다시 한번 자신이 불러온 이 참상에 전신이 떨려왔다. " 아아… " 흐느끼면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 가인. 하지만 역시 눈물은 나오지를 않 는다. 미칠 것만 같은 답답함과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만 싶다.시민 씨를 지 켜주고 싶었다. 그녀 만은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었다고…. 그녀를 지키지 못 한 자신의 나약함에 가인은 치를 떨었다. " …강해지고 싶냐? " 그때, 가인의 뒤편에서 들려온 한 목소리. 가인이 돌아본 그곳에는 피스 그 레이, 부르스가 담담한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가인은 주저 앉은 채로 멍하니 그런 그를 올려다 보고만 있었다. 뭐? 강해지고… 싶냐고‥? 부 르스는 가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구기며 재차 물었다. " 정신이 썩었다고 귀까지 썩었냐? 강해지고 싶지 않냐고? " " ......... " 숨이 막힐듯한 기도가 부르스에게서 느껴져 왔다.가인은 그 기세에 눌려 반 쯤 얼이 빠진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부르스는 씨익 미소를 지 으며 말했다. " 좋아. 그럼 강해지게 해주마. " " …으응? " 유리는 갑작스런 허전함에 잠에서 깨어났다.자신에게 무릎을 빌려주던 가인 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유리는 충혈된 눈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 러보다가 나지막히 가인을 불렀다. " …오빠? " 그러나 그런 그녀의 부름에 답할 가인은 이미 언더 시티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 그 소문 들었니? " 피스메이커 오퍼레이터 부의 치프, 윤채영은 휴게실을 지나다가 우연히 3인 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언제나 수다스러운 그녀들은 세 명이서 모 였다 하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채영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3인방이 과연 무슨 말을 하나 보자~ 란 심보로 조용히 그녀들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 가인 군 무단 이탈했다는 거? " " 그래.그래. 벌써 전산실에는 소문이 쫙 퍼졌다구! 피스 블루가 행방 불명 됐다는 소식! " " 역시… 믿기 힘들지만… 가인 군… " 3인방은 잠시 침묵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생각하고 있는 바가 같음을 확인한 후 얘기를 꺼냈다. " 도망‥ 친‥ 거 겠지? " " 으응…. " " 무리도 아니지. 시민 씨는 그렇게 반 죽음 상태가 되었고, 그때 같이 있 었던 게 가인 군이었으니까….쇼크가 컸겠지. 아무리 가인 군이 오라 능 력자라고 해도 아직은 고등학교 1학년 생인 걸. " 가인이 도망쳤다고 해도, 그녀들은 별로 그를 탓하고 싶은 맘은 없었다. 자 신들은 후방에서 상황을 보고할 뿐인 오퍼레이터였지만, 가끔 피스메이커와 유레카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았던 것이다.스크린에 떠오르는 몬스터들의 모습과 그 피해, 그리고 앞으로의 전황을 생각하면 그녀들이 두 려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하물며 사건 현장에서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 는 피스 대원이야 오죽했겠는가. 아마 가인은 그 동안 감당하기 힘든 공포와 싸워 왔을 것이다. - 탕! 그러나 3인방의 대화는 뒤에서 들려온 벽을 후려치는 한 소리에 멈춰지고 말았다. 3인방이 화들짝 놀라 돌아본 그곳에는 윤채영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 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 치,치프…. " " 허튼 소리하지 말고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휴식 시간은 끝났으니까! " " 예,예에…. " 삼인방은 채영의 눈치를 살피며 황급히 휴게실을 빠져나갔다.채영은 그녀들 이 모두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테이블에 몸을 앉혔다. 굳어있던 그녀의 표정으로 점점 서글픈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 가인 씨…. ' 언제나 그의 활약을 모니터링 하며 지켜봐온 채영으로서는 확신할 수 있었 다. 절대 가인은 도망가거나 현실을 회피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하지만 걱 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째서 그는 유레카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것일 까? 어째서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상부에서도 가인의 행방 불명 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것이 채영은 너무도 불안했다. " 가인 씨…. 돌아올 거죠? 그렇죠? " 채영은 고개를 테이블에 파묻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괜찮을 까요,사령관 님? " 작전 본부실 만큼이나 어두운 진 사령관의 개인 사무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이 방은 사실, 언더 시티의 어느 곳보다도 밝아야 했지만 진 사 령관의 취향 상 베니션블라인드(Venetian blind)를, 그것도 검은 색으로 햇 빛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희미한 전광등 만이 간신히 방 안의 윤곽을 잡아주 고 있었다. 진 사령관은 그런 어둠 속에서도 선글래스를 벗지 않은채 수정의 질문에 답했다. " 그는 자네의 스승이다. 문제 없다. " " …하지만 그렇게 쉽게만 말씀하실 일이 아니라구요. 사령관 님도 보셨잖 아요, 가인 군의 상태! 아무리 피스 대원이라고 해도… 오라의 주인이라 고 해도 그는 아직 17세의 소년에 불과해요.잘못했다간 영영 상처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구요. " " 그렇기에 더더욱 피스 그레이에게 그의 신변을 맡긴 거다. " 단호하게 수정의 말을 끊는 진 사령관.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정을 바라보 며 말을 이었다. " 못 믿는 건가? 자네의 스승을? " " ......그런 건 아니지만…. " 수정은 뭔가 불만스러운듯 한 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자신의 스승이었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 스승의 고약한 성격을 직접 겪어본 자신이었 으니까 말이야…. 분명 가인 군의 기분 같은 것은 일체 신경도 쓰지 않으실 분이란 말이지. 진 사령관은 그렇게 수정이 고민하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 다가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 두었다. " " …예? " 보험이라뇨? 수정은 뜻 밖의 말에 진 사령관을 돌아 보았다.진 사령관은 그 런 수정의 시선에서 얼굴을 돌리며 무감각히 말했다. " 피스 그린과 레드로 이루어진 후발대가 오늘 출발했으니까…. 지금쯤이면 그곳에 도착했겠군. " " 아…! " 수정은 그제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진 사령관은 슬며시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채 침묵하고 있었는데,그것이 그가 쑥스러워 할 때라는 것을 수정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 후훗… 사령관 님도 역시 걱정은 되셨던 거죠? " " ......아니. 단지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다. " 여전히 솔직하시지 못하다니깐.수정은 따뜻한 눈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 사령관의 말대로, 후발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아니,어떤 의미 로는 지금부터 출발이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 피스 그린,정진우는 한 손으로 얼굴에 비치는 태양 빛을 가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 휘유∼ 여기란 말이죠? 소년이 있는 곳이…. " " ......그런 것 같군요. " 피스 레드,성마리는 애써 표정의 변화를 갖지 않으려고 애쓰며 진우가 올려 다 보는 것을 따라 보았다. 그들의 앞으로는 한국에 있는 산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몇 가닥의 산맥이나 산지가 집합, 형성된 산계(山 系)가 펼쳐져 있었다.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이 산계가 서울에서 그리 떨어 지지 않은 시의 외곽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마리는 믿을 수 없다 는듯 연신 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 아무리 여기가 개발 제한 구역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산계를 서울 시에서 은폐 시키고 있었다니…. " " 아무래도 속세의 인간들이 발을 들여 놓기에는 위험한 장소였기 때문이겠 죠? 이곳은 도도산(桃都山)이니까. " " 도도산? " 마리는 진우의 말에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 " 도삭산(度朔山)이라고도 하는…. " " 어, 알고 있었어요? 그럼 얘기하기가 편하겠군.동남 쪽의 넓은 바다에 존 재한다는 성스러운 산. 무려 12킬로미터나 되는 높이의 복숭아 나무의 서 식지. 여기가 바로 그곳이죠. " " …전설인 줄로만 알았었는데…하지만 가인이 여기 있다는 것과 이곳이 도 도산이라는 게 무슨 상관이 있죠?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이곳을 알고 있 는 겁니까? " " 아아∼ 그렇게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하죠. " 진우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흔들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 우선 이곳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소개되는 천계의 산이라는 것. " " 산해…경? " 생소하다는듯 진우가 한 말을 되뇌이는 마리에게 진우는 부가 설명을 해주 었다. " 선인(仙人)들을 위한 산악 관광서… 정도 라고 해두죠. 옛부터 선인들의 도를 깨치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이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는데, 그들 중 십중팔구는 산신(山神)들에게 당했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런 산신들의 위험으로 부터 선인 수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저술된 책 이 바로 산해경인 겁니다. 그 안에는 산신의 모습과 제사 방법 등이 기록 되어 있고 신비의 땅과 그 안에 사는 불가사의한 민족들이 소개되어 있다 고 해요. 물론,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산해경은 원작의 아주 일부분 만을 인간이 허구를 섞어 편집한 것이죠. " " ......그런데 그게 지금 가인을 찾는 것과 무슨 연관이? " " 가인을 데려간 이가 바로 선인 수련자 거든요. " " 예?! " 마리는 이 난데 없는 진우의 말에 크게 반문 할 수 밖에 없었다. 선인… 이 라니…. 그런 게 실제로 존재했단 말인가? 진 사령관의 말을 듣기로는 가인 을 데려간 이는 중국에서 파견된 오라 능력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마리의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우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 아마도 이곳에서 가인을 수련시킬 생각인가 보군요. 뭐, 수련하기에는 이 곳 만큼 적합한 곳도 없겠지만…. " 진우의 말과 태도를 보아서는, 그는 가인을 데려간 이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이 도도산이라고 하는 곳은 인간의 발길이 전혀 미치지 않은 곳 답게 안개로 뒤덮혀 있는 게 마치 이세계의 공간 처럼 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는데,진 우는 이런 이질적인 장소 속에서도 태연히 행동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산과 안 면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 진우 씨는‥ 가인을 데려간 오라 능력자와 잘 아는 사이… 인 겁니까? " " 뭐, 그야 당연히 잘 알 수 밖에 없겠죠∼ " 진우는 마리를 돌아 보며 히죽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 분은 제 사부님이니까. " 산해경에 수록되어 있는 천계의 산들은 세계의 곳곳에 숨어 있다고 한다.지 금 진우와 마리가 오르고 있는 이 도도산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기세가 흉흉 하고 알 수 없는 기운이 감도는 것이 사람의 접근을 피하게 하기에는 충분 했다. 마리는 산을 오를 수록 차가워져 가는 기온에 입고 있던 검은색 다운 파커를 여미었다. 벌써 세 시간 째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산의 중턱에도 다 다르지 못한 것 같았다. "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오르기만 할 겁니까? " 계속되는 산행에 결국 참지 못하고 진우에게 묻는 마리.하지만 진우의 대답 은 언제나 처럼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 그야 소년과 사부님을 찾기 전까지는 올라가야 되겠죠? " " .........그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 마리는 기가 막혀 진우를 바라보았다. 계속 앞장을 서고 있길래 무슨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그야말로 무대포였던 것이다. 그래….저 인간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던 나의 불찰이었어…. 마리는 두통이 치밀어 오 르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직 가을이건만 입 가로 새하얀 입김이 뿜 어져 나왔다. " 분명 가인이 무전기를 착용하고 있다면, 발신 추적이 가능할테니까 위성 으로 알아보는 것이…. " " 안되요. " 마리의 말에 히죽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 진우. 안돼? 도대체 뭐가? 진우는 자신의 무전기를 가리키며 마리에게 말했다. " 이 산에서는 그 어떤 전파나 주파수도 잡히질 않아요. 이 곳은 엄연히 삼 차원의 범주를 벗어난 곳이니까. " " 그,그런…. " 진우의 말에 다급히 자신의 손목 무전기를 바라보는 마리.과연 진우의 말대 로 무전기는 먹통이었다. 마리는 더더욱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진우 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히죽거리고 있었다. " 괜히 천계의 산이라고 이름 붙여진 게 아니란 말이죠∼ 이런 거대한 산세 가 위성 사진에 찍히지 않는 건 이곳이 3차원 유클리드 공간과 4차원의 시공 세계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구요∼ " " ......그거, 별로 그렇게 으쓱해 하면서까지 할 말은 아닌듯 싶지만…. " 마리는 허탈해진 얼굴로 혀를 찼다. 결국,이 넓은 산세를 무작정 뒤지고 다 녀야만 된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진우, 저 인간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그럼 진작에 무슨 사전 대비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 닌가?! 마리는 진우와 동행을 하겠다고 자원했었던 자신이 후회되기 시작했 다. " 자자∼ 너무 그렇게 절망적인 표정은 짓지 말라구요. 어느 정도 짐작되는 곳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 " ......... " 그런 건 미리 미리 말하란 말입니다! 마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속으로 중얼 거렸다. 어쨋든,진우에게 뭔가 방법이 있는 모양이니 잠자코 그의 말대로 행 동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것 같았다. ' 불안하지만… 말이지. ' 마리는 한 숨을 내쉬며 밑을 내려다 보았다. 과연 세 시간 동안 올라온 게 헛 일은 아니었는지, 지상과는 꽤나 멀어져 있었다. 이런데도 산의 절반 밖 에 못 올라 온 것은 이 산이 괴물 같이 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는 어느 덧 서산으로 저물고 있었다.마리는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유리, 정말… 안 갈 거냐? 시민의 병실. 전신 포션 치료를 받고 있는 시민의 침상 곁에서 마리는 유리 에게 물었다. 유리는 검붉은 P.E.T 용액 속에 잠겨 있는 시민에게서 눈을 떼 지 않은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으응…. 시민 언니… 혼자 놔두고 나… 갈 수 없어. 어딘가 처연하기까지한 그 태도에 마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 다도 가인을 좋아했던 그녀였다. 분명 지금 당장에라도 가인을 찾으러 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는 시민의 옆에 남는 것을 선택했었다.그녀는 마 리를 돌아 보았다. 마리를 바라보는 유리의 눈은 굳은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 하지만 나… 오빠를 믿으니까. 유리는 무릎 언저리에 놓인 그 작은 손을 꼬옥 쥐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하 지만 눈가에 맺히는 눈물 방울을 감출 수는 없었다. - 반드시… 셋이서 생일 파티 하기로 했으니까…. - ......그래. 마리는 조용히 그런 유리를 지켜보며 나직히 되뇌였다. 기다리고 있어라,유 리. 반드시 가인을 찾아 올테니까‥! ' 가인… ' 마리는 어둑해지는 산 길을 올려다 보았다. 이 산 어디인가에 그가 있을 터 였다. 시민의 병실 앞에서 극도로 심신이 지친채 자신을 자책하던 가인의 모 습이 그녀의 눈 앞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마리는 아련히 가슴이 저려오는 것 을 애써 떨치며 이를 악물었다. ' 가인, 어디 있는 거야? ' 다시 만날 수… 있는 거 겠지? 결국, 마리와 진우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도도산에서 그 날 밤을 보내야만 했다. 밤이 되자 도도산 주위는 빛 한 점 없는 암흑으로 둘러 쌓여졌기에 더 이상 산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진우와 마리는 모닥불을 피우고 배낭에 매 어둔 침낭을 꺼내 폈다. " 에휴∼ 역시 노숙인가? " ' 역시 믿는 게 아니었어…! ' 마리는 이마에 핏줄이 돋은채 나직히 중얼거렸다. 물론,하루 만에 가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오늘 진우와 그녀는 정말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작정 산만 올라왔던 것이다. 진우가 짐작이 간다고 하는 장 소들도 모조리 허탕이었다. 마리는 뿔이 난 목소리로 진우에게 물었다. "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가인들이 있을 장소를 찾을려고 했던 겁니까? " " 아무래도 산 속에서의 수련이라면…폭포에서 하는 것이 제격일 거라고 생 각했었는데…. " " …그 거였습니까? 단지 그런 이유에서? " 마리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머리를 손으로 받치며 진우를 노려보았다. 저 남 자를 믿었던 자신이 왜 이렇게 바보 같았는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그 런 마리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진우는 손을 휘두르며 서둘러 답했다. " 아,아니∼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방법이라구요! 천계의 산에 속한 수련 지에는 그 산의 정기(精氣)가 발생되는 근원지들이 몇 개씩 존재하는데, 그 근원지에는 반드시 호수가 생성되거든요? 그리고 선도 수행자들이 수 련을 위해 짓는 선약(仙藥)의 재료들도 대부분 이 호수 근처에 서식 한단 말입니다. 분명 제 사부님이 계신 곳은 호수 부근일 게 분명해요. " " ......확실한 겁니까? " 마리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진우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란 녀석, 어지간히 신용을 못 받고 있군…. " 확실합니다.더구나 그곳은 산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장소이기도 하기에 수련지로서는 더 할 나위 없이 적합하죠. 분명 사부님과 소년은 그 곳에 있을 거에요! 제가 120% 보장합니다! " " 그렇습니까…. " 진우의 120% 보장이라는 것이 어떤 근거로 나온 수치인지는 의심스러웠지만, 마리는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진우의 말 중에서 계속 언급 되는 '산신'이라는 존재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 …그런데 그 산신이라는 것은 정확히 어떤 존재입니까? " " 아, 설명하는 걸 깜빡했군요∼ 아주 중요한 건데. " …그런 건 제발 미리미리 얘기해달란 말입니다‥! 마리는 뚱한 표정으로 진 우의 말을 경청했다. " 산해경에 수록된 천계의 산에는 빠짐 없이 그 산의 신이 살고 있어요.산 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힘도 더욱 강대해지죠. 이들은 거의가 인간들에게 는 관용적인 신이 아닌데‥왜냐하면 산신들에게 있어서 인간이란,산을 파 헤치고 논밭과 집을 마련하고 산짐승을 잡아가는 적일 뿐이였 거든요. " 마리는 진우의 말을 듣다가 왠지 불안해지는 기분이 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관용적인 신이… 아니었다구요? " " 예. 선약을 짓기 위해 단독으로 산중에 들어간 이들은 거의 다 이 산신 때문에 목숨을 잃어버렸죠. 최고의 도를 깨우쳐 불로불사의 선인이 된 인 간에게 산신 정도야 두려운 존재가 아닐테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산신은 그야말로 두려운 적이었거든요. 산신은 적절한 방법을 알지 못하는 인간 들을 다양한 수법으로 공격했는데 자기 수하의 악귀,요괴,독충,짐승을 보 내어 덮치기도 하고 병이 들게 하거나 돌을 떨어뜨리거나 나무를 부러뜨 려 사람들에게 해를 입혔다고 해요. 또 수상한 빛이나 이상한 소리 등으 로 다양한 환영을 일으켜서 겁을 주어 인간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거나 미쳐서 죽게 만들기도 했다네요. " " .........!! " 이,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마리는 등골이 오싹해져 마른 침을 삼 켰다.아무래도 그 산신이라는 것이 자신들에게 상당히 위험스러운 존재인 것 만은 분명했다. 마리는 잔뜩 굳은 얼굴로 진우에게 물었다. " …그럼 대처 방법은…있는 겁니까? " " 그야 물론이죠∼ 산신들에 대한 대처 방법은 선도 수행자들의 경험을 바 탕으로 저술된 포박자(抱朴子)나 등섭편(登涉篇)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니 까. " " ......그럼 진우 씨는 그 책을 지금 가지고 계신 겁니까? " " 예? 안 가지고 있는데요? " 자신이 어떻게 그 귀한 책을 가지고 있겠느냐는 표정을 짓는 진우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마리는 품 안의 오라 소드를 뽑고 쉽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야 만 했다. 도,도대체가… 이 남자는…!! 마리는 진우를 당장에라도 닥달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결국 자신들은… ' 그 산신이란 존재에게 노출되어 있는 중이란 말인가? ' 그러자 대번에 마리의 전신은 긴장으로 수축되기 시작했다. 만약 진우의 말 대로 산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그의 영역 안에 들어온 자신들이 무사할 리가 없는 것이다. 마리는 대번에 전투 태세로 들어가 오라 소드를 뽑으며 주위를 살폈다. 가인을 만나보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 그녀 였다. " 어? 지금 뭐하는 겁니까,마리 양? " 그런 마리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묻는 진우. 마리는 인상을 찡그리 며,태연자약하게 앉아있는 진우를 노려보았다. " 지금 그걸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그 산신이란 존재가 우릴 공격하기 전에 대비책을 마련해야 될 것 아닙니까! 어째서 당신은 그런 사실을 알 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있었던 겁니까?! " 마리로서는 진우의 대책 없는 무책임함이 그야말로 원망스러워서 죽을 지경 이었다. 그러고 보니 왠지 요사스러워 보이던 숲에서 한층 더 요사스러운 기 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밤 짐승의 소리들도 유난히 크게 마리의 귀 에 들려오기 시작했고,주변에 깔려 있던 안개들도 한층 짙어진 것만 같았다. ' 산신이라는 것… 몬스터의 한 종류인 건가? ' 마리는 수중의 오라 소드에 오라를 불어넣어 붉은 빛의 반 물질 절삭성 커 터를 생성 시키며 생각했다.진우의 설명으로는 아무래도 그 산신이란 존재가 몬스터 같이 느껴졌지만…, 아니. 몬스터라고 하기에는 뭔가…. 오히려 귀신 쪽에 가까운 존재인 것만 같았다. ' 귀신? ' 그렇게 생각하자 마리는 몸에 소름이 돋고,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몬스터와의 전장 속을 헤쳐다니던 그녀의 모습으로는 믿기 힘들겠지만…성마 리, 그녀는 귀신이란 존재에 유독 약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주변에서 멤돌다고 있다고만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차라리 모습이 존재하고 쳐부술 수 있는 존재라면 이렇게 까지 공포심이 들지는 않 을 것이다.무엇보다 그녀가 귀신이란 존재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어릴 적 이 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자신에게 끈질기게 귀신 얘기를 들려주던 아버지 성 비영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쨋든, 귀신이라니…기분 나쁘다! ' 귀,귀신이든 괴물이든 모조리 베어 버릴테다‥! ' 마리는 무섭도록 눈을 빛내며 주위를 희번뜩 둘러본채 오라 소드를 으스러 져라 쥐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진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내 웃어버렸 다. " 푸,푸하하핫∼ 마리 양,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되요∼ 설마 제가 아무 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노숙하자고 했겠습니까? " " ......예‥? " 한순간 벙찐 표정으로 진우를 돌아본 마리. 대책… 세우고 있었던 겁니까? 그런 그녀의 표정이 더욱 웃겼는지 진우는 아예 배까지 움켜쥐고 키득거렸다. " 크큭‥ 산에는 각각 들어가도 좋은 시기가‥ 정해져 있다구요‥푸흡‥ 기 본적으로 3월과 9월이 좋다고 되어 있는데, 산에 들어 가선 안되는 해와 달을 표시해 두죠. 큭큭‥! 그리고 산에 들어가도 되는 날을 알기 위해서 는 언제 그 산에 들어가야 재앙을 피할 수 있는지 점을 쳐야하는데… 전 이미 재난을 피하는 기술인 둔갑술(遁甲術)을 써서 미리 점을 쳐둔 상태 라구요∼ 한 마디로 오늘은 안전한 날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놀라는 모습이라니‥ 푸하하하하핫∼!!! " " ......... " " 그리고 산신의 세력은 깊은 산중일수록 더욱 강하다구요∼ 여기는 아직 산세의 외각 지역이니까 행여나 산신이 출몰할 일은 없단 말씀∼! " " ......... " 진우는 한참을 웃다가 마리가 아무 말이 없자, 웃음을 그치며 조심스레 그 녀를 올려다 보았다. 마리의 주위로는 날카로운 파동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 었다. 뭔가… 이 알 수 없는 살기는 어째서…? " …마리 양? " " 다 웃으신 겁니까? " " .........예? " 낮은 목소리로 음산하게 묻는 마리에게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진우. 그리고 마리는 천천히 오라의 검날이 서린 오라 소드를 들어 올렸다.오라 소드의 검 날에서 핏빛과도 같은 붉은 빛이 겁에 질린 진우의 얼굴에 내리 깔리기 시작 했다. 마,마리 양…? " 히이이이이이이익-------!!!! " 날카롭게 도도산에 메아리치는 진우의 비명 소리.반사면이 음원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었고 또 음원과 반사면 사이의 대기 속에서 음향의 감쇠가 적었기 에, 잘만 하면 그의 비명은 저 밑 구릉 지대에 까지 도달했을 지도 모르겠다. " 저어∼ 마리 양? " " ......... " " 제가 잘못했으니까 이쯤해서 풀어주셨으면 하는데… " " …말 걸지 마십시오. 정신 사납습니다. " 냉정하게 진우의 말을 끊으며 침낭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마리. 그녀의 곁 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는 정진우가 침낭에 둘둘 말린채 애처롭게 나뭇 가지에 묶여 있었다. 애초에 장난을 친 것도 그였고,얼빠진 짓을 한 것도 그 였지만 지금의 이 모습은 어딘가 불쌍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저렇게 묶어 올린 장본인에게는 진우의 그 모습 마저도 가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진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 너무 침울해 있길래 장난을 좀 쳤을 뿐인데…. ' 솔직히 시민이 중상을 입고 가인이 사라진 지금,모두의 마음 속에서는 근심 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그 정도가 심했던 게 피스 대원 들이었는데, 유리야 울면서 솔직하게 슬퍼하는 면을 숨기지 않았지만, 마리 같은 경우는 억지로 냉정해질려고 하는 모습이 보여 안스러웠던 것이다.분명, 가인과 친하게 지내던 그녀로서는 시민의 중상과 가인의 행방 불명에 애가 탓을 게 분명했건만,책임감 때문인지 애써 감정을 추스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행동하는 마리가 진우로서는 마음이 걸렸다. 그 증거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진우가 말을 걸지 않으면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고 근심스러운 표정 만 짓고 있었다. ' 뭐, 저렇게 반응하는 것만 해도 다행일려나? ' 진우는 자신의 장난에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안도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딱딱하면 부러지기 쉽상이다. 이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는 편이 좋았다. 그런 면에서 진 우가 의도한 바는 성공한 셈이었다. 물론, 마리의 저런 반응을 그가 즐기지 않았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결과가 중요한 법이다.진우 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어둠에 둘러싸인 계곡을 내려다 보았다. ' 에휴, 어디 있을려나… 이 녀석은. ' 유가인. 진우가 아는 그 소년은 그렇게 나약한 이가 아니었다. 신념이 있으 며, 무엇보다 동료를 아낄 줄 아는 아이였다. 사실 그것 때문에 더더욱 시민 의 일로 충격을 받은 것이겠지만… 적어도 괴롭고 힘들다고 피스메이커에서 도망칠 녀석은 아니라는 거다. 진우는 자신의 말에 화를 내며 헛 웃음을 터 뜨리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 많이 힘드냐…? ' 진우는 이 산의 어딘가에 있을 가인에게 말을 건냈다. 동료가 다치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봐야만 했고, 상대에게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 무력함을 느 껴야만 했을 것이다. 분명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이것은 시련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었다. 단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시련. " 젠장… " 진우는 혀를 찼다. 정작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가.가 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가족이라고 했으면서 … 녀석의 사부라고 자칭했으면서도… 자신의 제자가 가장 힘들 때 도움 하 나 줄 수 없는 사부라니. 진우는 자신의 스승을 떠올렸다. 중국에 있던 그가 갑작스레 한국을 찾아온 것이 이상했지만, 그가 가인을 데려갔다는 말을 들 었을 때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었다. ' 힘들겠지만 견뎌내라. 그는 반드시 네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 줄 거다. '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말이야…. - 쿵…! 그때 나지막히 울려오는 산울림 소리. 그것은 매우 작은 소리였기에 자세히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진우는 인상을 굳히며 밑을 내려다 보았다. 마리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진우를 올려다 보았다. " …들으셨습니까? " " 분명히. " 진우는 나무에 묶여있던 침낭 속에서 불가사의(?)하게 몸을 빼내어 밑으로 착지했다. 마리 역시 침낭에서 몸을 일으켜 오라 소드를 챙겨들고 있었다. - 쿵! 다시 한번 그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한층 더 뚜렷한 소리였다. 마리는 긴장한 표정으로 진우에게 물었다. " …무슨 소리일까요? " " 글쎄요….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 같기도 한데…. 우선, A.I 슈츠를 착용 하고 보죠. 이 상태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 진우의 말대로 그와 마리는 A.I 컴플릿 세트를 착용한 후, A.I 헬맷의 적외 선 고글을 사용했다. 그러자 어둠 속의 세계는 붉은 빛으로 그 모습을 드러 내었고, 둘은 모든 사물을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적외선 고글로 사방 을 탐지하던 마리는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고 진우에게 손짓했다. " 저기…! " " .........!! " - 쿵!! 그녀가 가리킨 곳은 계곡의 위쪽에 펼쳐져 있는 고원 부근이었는데, 숲으로 덮혀진 그곳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과연 진우의 말 대로 나무들이 천천히 기울어져 쓰러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자신들 이 듣고 있는 소리는 바로 저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였으리라. - 우우우… 이번에는 더더욱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괴상한 소리와 함께 푸 르스름한 빛이 숲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마리와 진우는 서 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나무가 부러지고… " " 수상한 빛이나 이상한 소리… " 그것은 분명, 진우가 아까 말했었던 산신의 수법이라는….진우는 멋쩍은 표 정으로 마리에게 말했다. " …그 수법이라는 건 거짓말이었는데. " " ......... " 진우를 침낭에 묶고 계곡 밑으로 굴려버리는 게 어떨까 진지하게 고려해보 는 마리였다. 어쨋든, 산신의 수법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다. " 오라 현상…! " 마리는 짧게 외치며 A.I슈츠에 오라를 불어 넣어 재빨리 위로 도약해 올랐 다. 그런 갑작스러운 마리의 반응에 혼자 남겨진 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중 얼거렸다. " 급하기도 하지∼ " 하지만 그 역시 마리의 뒤를 따라 빛의 발생지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 다. " 헉… 헉… " 가인…! 유가인! 너인거야? 마리는 정신 없이 산을 타고 고원 지대로 달려 가고 있었다. A.I 헬맷의 적외선 시각과 A.I 부츠의 각력이 아니었다면 이렇 게 표범처럼 인간이 산을 타고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리는 행여나 빛이 사라질 까봐 서둘러 고원을 향해 다리를 놀렸다. - 파앗! 암벽을 거칠게 밟고 달려올라, 발판 삼아 뛰어 오르는 마리. 순식간에 20여 m의 거리가 발 밑으로 사라져 가는 순간이었다.그녀는 공중에서 선회하며 지 면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다시 앞으로 달려나갔다.잔가지들이 그녀의 몸을 스 치고 지나갔지만, A.I 슈츠를 장착한 마리에게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 쿵…! 가까이 다가갈 수록 그 소리는 한층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부러진 나무 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보통 나무가 아닌 거대한 고목이 부서지는 소 리. 저 곳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멀리서 바라보던 푸르스름한 빛은 이제 확연히 푸른색과 회색으로 구분되어지고 있었다. 분명 저 푸른빛은 가인의 오라색이 틀림 없었고, 저 회색은 중국에서 온 피스 대 원의 것 임이 분명했다. 어째서 이런 밤 중에 저렇게 오라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 .........? " 그때 달려가던 마리의 앞으로 스산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리 는 무의식적으로 멈춰선채 긴장된 얼굴로 전방을 살폈다. 전신의 오감이 미 지의 힘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주위의 공기가 저 앞의 누군가에게 빨려가고 있는 것 만 같은 느낌.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섬뜩해져 몸을 재빨리 낮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콰앙-----!!!! 마치 폭발음과도 같은 경력의 소리. 거대한 기의 폭발음이었다.마리는 무섭 게 자신에게 날아드는 대기의 폭풍을 몸을 숙여 피하며 이를 악물었다.뭐,뭐 지?! 이건?!! - 휙…! 그런 마리의 머리 위로 검은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거칠게 마리 를 지나쳐 날아가더니 뒤의 한 나무에 그 몸을 처박았다. '쿵!' 충격으로 나 무가 뿌리째 흔들리더니 그 잎사귀들을 우수수 떨어 뜨렸다.나무에서는 부딪 힐 때의 충격으로 인한 마찰열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희미한 오 라의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나무에 부딪 힌 물체를 돌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 이름을 외쳤다. " …가인?!! " 그렇다. 갑작스레 날아와 나무에 부딪힌 인영은 다름 아닌,실종되었던 유가 인. 바로 그였던 것이다! 마리는 너무도 놀라 A.I 헬맷을 해제시키며 그에게 로 달려갔다. 마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오라의 빛에 의해 비춰진 가인 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 으으… " 망신창이. 그 말이 가인의 몸 상태를 대신하고 있었다. 전신이 흙투성이 인 것은 둘째 치더라도, A.I 슈츠를 걸치고 있는 몸을 불로 지지기라도 한 건지 너털 너털해져 있었던 것이다.몸의 상태로 보아 어깨가 내려 앉아 있었고,왼 쪽 팔이 기이하게 꺾여 있는 게 부러져 있었다. 그의 A.I 슈츠에서 흘러나오 는 오라의 불빛도 미약한 것이 금새라도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유일하게 드 러난 가인의 얼굴은 물기도 없이 푸석 푸석한 게 탈수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 가,가인?!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늘어져 있는 가인의 상체를 부축하며 소리치는 마리. 하지만 가인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지 그녀가 흔드는 데로 이리 저리 흔들거리고만 있었다. 아마도 의식이 없는듯 했다.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숨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죽 었다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 어째서 가인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어째서? ' 마리는 떨리는 눈길로 가인의 상세를 살폈다. 모든 것이 의문이었지만,일단 은 포션으로 그를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가인이 정신을 차리면 전후 사정을 들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품 안에서 포션을 꺼낼 때였다. " 쓸 데 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 " ........?!! " 천천히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는 한 인영의 모습. 마리는 자신의 앞으로 다 가오는 그 사람의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검은 권복 차림을 한 회색 빛 머리의 소년이었는데, 너무나도 유유자적한 그 모습이 지 금의 상황과는 이상한 부조리를 느끼게 했다.마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눈 앞 의 소년을 노려보았다. 이 자가 가인을 이런 모습으로 만든 장본인 인가? ' 적? ' 마리는 오라 소드에 오라를 불어넣으며 긴장된 자세로 소년을 견제했다. 권 복 차림의 소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소년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숨 막힐듯한 기도가 마리의 전신을 억누 르고 있었다. 뭐지? 이 아이는? 정체가 뭐야?! - 탁…! 그때, 뒤늦게 마리를 따라나선 진우가 고원에 도착했다. 그는 마리의 품 안 에 있는 가인의 엉망인 몰골을 바라보고서 놀라 소리쳤다. "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 " 아마도 앞의… 저 자의 짓인 것 같습니다. " 마리는 긴장의 기색을 풀지 않으며 눈 앞의 소년을 견제했다. 소년은 그런 그녀의 기색에도 아랑곳 없이, 퉁명한 얼굴로 마리와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 다.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그녀가 불쾌한 모양이었다. 마리가 가리키는 데로 그 소년을 바라보던 진우는 순간, A.I 헬맷을 해제시키며 어이 없다는 목소 리로 말했다. " 어라? …사부님? " " ......예? " 그런 진우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반문하는 마리.그녀는 재차 소년을 바 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노려보는 소년. 피스 그 레이, 부르스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쏴아아아아… 어둠이 깔린 숲 속에 차가운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가인과 정체 불명의 중국인,부르스.그들과 조우한 마리들은 고원의 안쪽에 위치한 호수로 올 수 있었다. 과연,진우의 말 대로 이 곳은 산의 정기가 흘러 나오는 장소 였던지 호수가 형성 되어 있었다. 아마도 여기가 가인의 수련 장소인 모양이 었다. " 언제까지 자고 있을 셈이냐? " " ......예에‥ 죄송… " " 시끄러워. 얼른 일어나서 들어가기나 해라. " 부르스는 퀭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는 가인을 보며 못 마땅한 듯 인상을 구 겼다. 가인은 부르스의 재촉에 희미해질려는 의식을 붙잡고 눈 앞에 보이는 나무 욕탕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 욕탕은 급조해서 만든 것인지 대충 나무 를 잘라 엮어 럼(rum) 통 처럼 만든 것이었는데, 그 안에는 거무튀튀한 액체 로 가득 차 있었다. 럼 통의 밑으로는 나뭇가지로 불이 피워져 있었는데, 그 로 인한 열기가 통 안의 액체를 끓게 하고 있었다. 가인들의 뒤에 있던 마리 가 옆의 진우에게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 저건… 뭡니까? " " 선약(仙藥)으로 제조한 약수(藥水)일 거에요. " " 선약이라면 아까 전에 진우 씨가 말했던…? " " 예.선인이나 선도 수행자들이 만드는 약이죠. 선약은 상약(上藥),중약(中 藥), 하약(下藥)의 세 종류로 분류되는데, 상약은 약 120여 종으로 인간 이 장수를 누리게 하는 약으로서 이 중에는 선인이 되거나 선술을 부릴 수 있도록 돕는 약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고 다음이 중약. 역시 120여 종 정도 되고, 찢어진 뼈와 살을 이어 붙이고 새 살이 돋아 나게 하는 신 체 강장 효과가 있죠. 마지막이 하약. 125종이고 병을 고치는 효과가 있 는데… 아마 저건 중약과 하약을 섞어 제조한 치료제일 거에요. 아마 포 션 보다 효과가 좋을 걸요? " " 으음…. " 마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가인에게 포션을 주사할려고 했을 때, '쓸데 없는 짓 하지마라'라고 얘기하던 부르스의 진위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저 약수 로 가인을 회복시킬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저 가인의 엉망 진창 인 모습은 뭐란 말인가? 어째서 그는 저런 상처를 입고 있는 거지? ' …가인. ' 마리는 보행 조차 힘들어 하는 가인의 모습에 속이 상해 괜히 부르스를 노 려 보았다. 아마도 가인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연유에는 저 중국인 소년 이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리는 가인을 거칠게 다루는 부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르스는 가인이 멍하니 A.I 슈츠를 껴입은채 욕탕으로 들어갈 려고 하자 한숨을 내쉬며 그의 발을 걸어 넘어 뜨렸다. - 털썩…! " 한심한 놈.그런 꼬락서니로 저 귀한 약재를 더럽힐 생각이냐? 정신 안 차 리고 계속 빌빌 될래? " " 으윽…. " 하지만 쓰러진 가인은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전신에 힘이 들어가 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넘어질 때 부러진 팔이 지면과 겹질러져서 기절 할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다.그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한 마리가 부르스를 향해 소리쳤다. " 그만두십시오! 그렇게 심하게 다친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 " …넌 뭐냐? " 마리의 외침에 인상을 찡그리며 반문하는 부르스. 그도 아까부터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이 소녀가 맘에 들지 않았던 참이었다. 마리는 험악해 지는 부르스의 기색에 지지 않으며 마주 소리쳤다. " 가인은 저의 제자입니다! 함부로 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 " 이 놈은 이제부터 내 제자다. 진 사령관도 신변을 내게 양도했고. 그러니 까 너와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 알겠냐? 신경 끄고,잠자코 지켜보기나 하도록. " " 뭐,뭣…!! " 부르스의 말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은 마리.그녀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오 라 소드에 손을 가져갔다.그녀의 등 뒤로 날카로운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마 리는 이를 갈며 부르스에게 낮게 으르렁 거렸다. " 어디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 " …신경 끄라고 했다. ' " ........!! "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오라 소드를 뽑아낼려는 그녀.하지만 옆에 있던 진 우가 재빨리 마리의 오라 소드가 검집에서 뽑혀나오지 않도록 밀어 넣으며 마리를 막아섰다. 마리는 자신을 방해하는 진우를 향해 소리쳤다. " 무,무슨 짓입니까?! " " 자자∼ 참으라구요,마리 양∼ 사부님도 나쁜 의도가 있어서 저렇게 말씀 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사령관 님의 명령이기도 하니까,우리는 우선 잠자 코 지켜보도록 하자구요∼ " " 하,하지만…! " 진우가 사령관의 명령이라는 말을 꺼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마리는 씩씩 거리면서도 기세가 한 풀 꺽였다.그녀는 정말 분한지,쓰러져 있는 가인을 바 라보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 하지만 정말 너무 하잖아,이건…! ' 그렇게 마리와 진우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가볍게 코 웃음을 치는 부르스. 그 모습에 마리가 다시 발끈할려는 것을 진우가 뜯어 말렸다. 부르스는 마리 들에게서 신경을 끊으며 발 밑에 쓰러져 있는 가인에게로 손을 가져갔다. - 투둑…! " 크윽…. " 가볍게 손을 놀려 가인의 내려 앉은 어깨와 어긋난 왼팔의 뼈를 맞춰 주는 부르스. 그 바람에 가인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지만, 부르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가인이 손에 찬 무전기를 조작하여 그의 A.I 슈츠를 해제 시켰 다. 그러자 A.I 슈츠의 밑으로 감춰져 있던 가인의 알몸이 드러났다. " 자,잠깐…! " 갑작스런 가인의 알몸에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는 마리. 설마 A.I 슈츠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을 줄이야…. 얼굴을 붉히고 있던 그녀는, 눈을 돌린 가인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을 생각해내고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가인의 알몸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 아…! " 드러난 가인의 하얀 몸은 전신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공업 용 망치로 몸을 두들겨 맞은듯한 그 자국들은 피가 죽어 있었는지 시꺼 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몰꼴이었던 것이다.마리는 부 르스를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도,도대체 가인에게 무슨 짓을…무슨 짓을 했었던 겁니까…! 이게 도대체… " " …정신 개조를 시켜줄 겸 조금 두들겨 주었을 뿐이지. " 가인의 저 상태가 조금 두들겨 준 것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마리 가 재차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부르스가 가인을 약수로 가득 찬 욕탕에 집 어 넣었다. '부글부글…' 약수 안으로 가라 앉아 나올 줄을 모르는 가인. 부 르스는 그런 가인의 모습에 혀를 차며 소매를 걷어 약수 밑에서 가인의 머리 를 끄집어 냈다. " 쿨럭… 크헉…켁… " " 이 미련한 놈아. 그대로 약수 속에서 질식이라도 할 셈이냐? 정말 머리에 서 발 끝까지 맘에 드는 점라곤 없는 놈이로세.그렇게 비실 될 거면서 내 경(經)을 몸으로 받을 생각을 해?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 " 부르스는 가인이 욕탕에서 머리를 빼내 약수를 토하는 것을 보고 눈쌀을 찌 푸리다가 마리와 진우를 돌아 보았다. 마리는 갑작스런 부르스의 시선에 몸 을 움찔 떨었다. " 약수 속에 있는 건 1시간이면 충분할 거다. 오늘 수련은 이것으로 끝이니 까 저 놈, 잠이나 잘 재워두도록. " " ......... " 마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호숫가 쪽으로 걸어가버리는 부르 스. 진우는 그런 부르스의 뒤를 따라 황급히 걸음을 옮겼고, 마리는 멍하니 부르스와 욕탕 속에 있는 가인을 번갈아 바라봐야만 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 러웠다. 1시간이 지난 후, 약수의 욕탕 속에서 가인을 빼낸 마리는 그의 몸에 간편 한 옷가지를 입혀 주었다. 남자의 알몸을,그것도 가인의 알몸을 대하자니 낯 뜨거워질 만도 했건만, 마리는 침중한 안색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워낙에 가 인의 몸이 엉망이다 보니 부끄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는 여전 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가인의 모습에 너무 속이 상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 바보 녀석…. ' 마리는 늘어진 가인의 몸을 끌어 안았다. 그를 침낭 속에 눕힐 생각이었지 만 잠시동안은 이 자세를 풀고 싶지 않았다.가인은 갈라터진 입술 사이로 희 미한 숨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근처에 피워놓은 모닥불 빛이 아른거리 며 그런 가인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 내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 마리는 가인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도도산에 올라와 그를 찾아 다녔다. 그래서 간신히 다시 만났는데… 미처 재회의 기쁨을 가지기도 전에 이런 모습의 가인을 대해야만 한다니…. ' 바보 녀석…. ' 마리는 가인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어김 없는 수련의 시작. 부르스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채 가인은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상처야 약수 욕탕의 효 과를 보고 있는 건지, 많이 좋아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제의 피곤까지 회복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인은 여전히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 으으으… " 있는 힘껏 이를 악물며 업드려 있는 가인.그의 머리 속은 치밀어 오르는 열 기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상반신의 A.I 슈츠를 벗은채 보기만 해도 섬뜩할 금침을 몸의 이곳 저곳에 꼽고 있었는데 그 금침을 중심으로 참 기 힘든 신열(神熱)이 느껴지고 있었다. 외관 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았지만 실은,가인은 침을 꽂은 부위가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시끄러우니까 입 닫아라. 고기가 달아나잖냐. " 그런 가인의 등 위에 올라탄 이는 부르스. 그는 평지에 앉아 있는 것 처럼 태평스럽게 가인의 위에 정좌한채 낚시를 하고 있었다.지금 그들은 폭포수가 떨어지는 호숫가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부르스는 그곳에 가인을 업 드리게 하여 그를 깔고 앉아 유유자적 낚시를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 …너,너무… 뜨거워요…. " 가인은 참지 못하고 쉰 목소리를 내뱉었다.금침을 꽂은 부위가 미칠 정도로 뜨거워서 당장에라도 발광하듯 들판을 구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등 위 에 올라탄 부르스는 마치 수천 톤은 나가는 철근같이 무거워, 가인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부르스가 자신의 체중을 늘려 가인이 날뛰지 못하도 록 천근추(千斤錘)라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그런 것을 가 인이 알리가 없었다. 부르스는 심드렁하게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러게 누가 분수에 맞지도 않는 힘을 가지래냐? 네 그릇은 만호배(*) 정 도 밖에 안되는 데,저 호수 만한 힘을 품고 있으려니 당연히 신열이 생 길 수 밖에. " *만호배:자마노(紫瑪瑙)로 만든 술잔. " 크으으으으… " 가인은 이를 악물며 몸을 비틀었다. 전신에서 비오듯이 땀이 흘러내려,마치 몸 안의 수분이 증발하는 것만 같았다. 부르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네 놈은 너무 쓸데 없이 많이 품고 있어. 우선, 비워놓고 천천히 쌓아 올 려야 하니까 앞으로 반 시진 동안만 더 기다려라. " " 큭…! " 이런 고통을 앞으로 반 시진 동안이나?! 가인은 그만 허탈해져 땅바닥에 쓰 러져 버렸다. 전신으로 몸 안의 오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흐려져 가는 의식 사이로 부르스의 한탄하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정말 기가 막히군.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침경(鍼經)으로 몸 안의 오라를 빼낸지가 어제 아침이건만 또 다시 비워줘야만 한다니… " 어쨋든, 그렇게 가인은 침경으로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부르스는 몸 길이 60cm의 대어(大漁)를 낚아 점심 찬 거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 크핫-----!!! " - 퉁…! 뼛 속까지 파고드는 전신의 울림.가인은 부르스의 권에서 느껴지는 경을 이 겨내지 못하고 허공을 날아야 했다. 그렇게 뒤로 나가 떨어지는 동안,가인의 눈에 들어온 하늘은 너무나도 눈부신 백색을 띄고 있다. 머리 속이 고통으로 하얗게 변색되어 간다. " 크흑… 쿨럭… " 땅바닥에 쓰러진 후, 몸을 비틀다 쓴 물을 토해내는 가인.전신의 혈액이 끓 어올라 넘치는 것만 같았다. 귓 속이 바늘로 찔리는 것 처럼 아프다.그런 가 인의 앞으로는 부르스가 뻗었던 권을 거두어들이며 혀를 차고 있었다. " 여전히 둔하기 짝이 없는 놈이구나. 그래. 내 경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 맷집으로 버텨볼 수 있을 것 같냐? 어디 한번 끝까지 몸으로 떼워봐라. " 그 말과 함께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가인에게로 날아드는 부르스.그렇게 격 렬하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건만,그는 기이한 보법으로 가인과의 거리를 압축 시키듯 앞으로 쇄도해 오고 있었다. 거친 진각의 소리와 함께 회색의 오라가 회오리 치듯 부르스의 권에 모여들고 있었다. ' 피해야 한다…! ' 가인은 그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부르스의 권에 감당할 수 없 는 공포심을 그는 느꼈다. 저 권으로 인해 죽어도 겪고 싶지 않는 고통을 수 십 번도 더 느껴야만 했던 자신이었다. 다시는 맞고 싶지 않다. 피해야 해! " 핫…! " A.I 부츠에 오라를 불어 넣으며 뒤로 뛰어 오르는 가인. 그의 몸이 가볍게 10M의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가인의 귓 가로는 마치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것 처럼 부르스의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기껏 생각해낸 게 그렇게 뒷 꽁무니질을 치는 거냐? 아무래도 넌 더 맞을 필요가 있겠다. " - 쿵! " 크핫-------!!!! " 거세게 진각을 밟으며 가인에게로 쏘아지듯 튀어나오며 권을 가인의 배에 꽂아 넣는 부르스. 마,말도 안돼…! A.I 슈츠도 입지 않은 몸으로 어떻게 저 런 움직임을…! 하지만 그렇게 놀라는 것도 밀려드는 고통에 잊혀져 버린다. 가인은 뒤편의 땅바닥에 쓰러진 채,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고통을 느 껴야만 했다. 온 몸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며 코 속으로 뜨거운 피가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 으으으… 으아아아아… " " 엄살 피울래? 죽지 않을 정도로 때렸으니까 일어나라.아직 내장기관이 터 져나간 것도 아니고,척추가 으스러진 것도 아니고, 뇌가 녹아내리지도 않 았잖냐?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는 몸이니까 일어나, 당장. " 정말 피도 눈물도 없구나…. 가인은 부르스의 냉랭한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 보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아픔으로 인한 떨림 보다도 부르스에게서 느 껴지는 원초적인 공포가 가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섭다. 그에 게서는 사람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A.I 컴플릿 세트도 장착하지 않 은 상태에서 보이는 저 움직임이라던지, 뼈가 깍여나가는 것 같은 발경의 고 통이라던지… 무엇보다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해서 공격해도 아무런 통용이 되 지 않는 부르스의 철벽과도 같은 강함에 절망감이 가인을 엄습해 왔던 것이 다. ' 정말이지 나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 ' 한때나마 힘이라는 것에 취해 있어본 가인으로서는 자신이 얼마나 햇병아리 같은 수준이었는지 절실히 통감할 수 있었다.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발 악하듯 부르스에게 덤벼들었지만, 수십번 수백번을 두들겨 맞다보니 자존심 같은 것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부르스는 꿈틀거리는 가인을 바라보며 코웃음 을 쳤다. " 그래? 어떠냐? 별 것도 아니지, 네 놈의 힘이라는 거? 겨우 그런 힘 하나 믿고 그렇게 건방을 떨었던 거냐? 흐… 우습지도 않아서…. " 부르스의 빈정거림에 부끄러움을 느낄 기운도 가인에게는 없었다. " 네 놈은 댓가를 치뤄야 해. 약한 놈이 강한 척 하는 것 만한 죄악은 없는 거다. 그래. 그 별볼일 없는 힘가지고 저급한 괴물들 괴롭혀 보니까 기분 이 좋든? 뭔가 우월감 같은 거라도 느껴지든? " " 으으… 아,아니야… 그런 거… 절대… " " 흐… 우습지도 않아서. 꼴 같잖구나.너 같은 놈들의 말로란 항상 이런 것 이지. 자신보다 더한 강자를 만나 되통 당하는 거. 어디 네 놈이 했던 그 대로 당해봐라. 그러면서 절망해 봐.네 놈이 한 때라도 오만한 착각을 했 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다. " 부르스는 업드려 있는 가인에게로 다가와 그의 배를 거칠게 올려찼다. - 퍼억! " 일어나,이 꼬마야! 그렇게 누워서 응석부리고 있으면 봐줄 거 같냐?! 계 속 그렇게 뻗대고 있다간 소원대로 배를 째버릴 테다?! " " 크헉- " 가인의 입으로 시커멓게 죽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내상을 입은 관계로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이 그 수명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한참을 더 굴러 가 흙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 그만 기절하고만 싶었다.하지만 부르스는 가 인이 정신을 잃지 않을 정도로 교묘하게 고통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의 식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었다.정말이지 사람을 어떻게 주워 패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지를 부르스는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부르스는 가인이 여전히 누워서 일어날 줄을 모르자 인상이 날카롭게 변해가며 가인에게로 걸 어오기 시작했다.쓰러진 가인의 입가로 피가 부글부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휘리리릭…! 그때 가인에게 다가가는 부르스의 발 앞에 날아와 박히는 붉은 빛의 검날. 바로 마리의 오라 소드였다. 그녀는 무섭게 분노한 표정으로 부르스를 노려 보고 있었다. 부르스는 한쪽 눈썹을 꿈틀대며 마리를 돌아 보았다. " 이거 지금 뭐하는 짓이냐? " " …그쯤해서 그만두지 않으면 더 이상 당신은 나의 동료가 아닙니다‥! 이 이상 가인을 괴롭히지 말아요! 이건 수련이 아니라 고문일 뿐입니다! 진 사령관 님도 이런 걸 바라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며 간신히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눌러 삼켰다. 하지만 눈 앞의 중국인 소년에게 품은 살심이 눌러지지를 않았다. ' 가인을 건드렸어‥. 가인을…. 용서할 수 없어. 죽여 버릴 테다…. '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을…. 부르스의 강함을 눈으로 보면서도 마리는 살기를 지우지 않았다. 자신이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더 이상 가인을 건드렸다가는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저 남자를 죽여버릴 테다. 이렇게 감정적이 되는 것은 성마리,그녀로서 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부르스에게 이런 마리의 모습은 우습게 밖에 보이질 않았나 보다. 부르스는 가는 미소를 지으며, 그 웃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말들을 내뱉었다. " …내가 말했지? 더 이상 상관 마라고….내 말이 그렇게 우습게 들리는 거 냐? 응? " - 우우우우우… 순간, 마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부르스의 오라가 은연 중에 마리의 오라 를 짓누르며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두 눈이 충혈 되어 갔다. 움켜쥔 그녀의 손이 무의식 중에 떨리기 시작했다. 온 몸이 공포를 느 끼고 있었다. 이 눈 앞의 소년에게…! ' 지, 질 수 없어…! ' 하지만 마리는 기세를 꺽지 않으며 부르스를 마주 노려보았다. 주위의 압박 감이 얼마나 심한지 주먹을 쥔 마리의 손으로 붉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은 것이었다. 부르스는 마리가 자신의 기운을 견뎌내자 놀랍다는듯 찰나의 감탄을 보였다.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찰라였 을 뿐.부르스의 인상이 다시 험악하게 굳어졌다. 이대로 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보다 못한 정진 우가 황급히 마리의 앞을 막아섰다. " 하,하하하하∼ 사부님∼ 배 고프시죠? 지금 마리 양도 배가 고파 다들 신 경이 날카로운 것 같네요∼ 사부님이 낚은 대어를 지금 맛있게 요리 중이 니까 오늘 점심! 기대해주십시오! " 그러면서 그는 재빨리 마리의 팔을 잡아 끌었다. " 자자∼ 마리 양도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점심 차리는 것 좀 도와달라구요 ∼ 가인이 녀석, 밥이라도 먹여야 되지 않겠어요? " " 자,잠깐…! 진우 씨, 이러지 마십시오! 여기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아 직 전 저 남자에게서 확답을 듣지 못했다구요! " 의외로 마리가 완강하게 버티자 곤란한 표정을 짓는 진우. 그는 당장에라도 부르스가 그 성질을 터뜨릴까봐 등 뒤로 식은 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진우는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마리에게 속삭였다. " 제발 절 봐서라도 이쯤에서 물러나줘요,마리 양∼ 만약 사부님이 분노하 는 날에는 우리 모두 끝장이라구요∼ 설마 사부님이 소년을 죽이기야 하 겠습니까? 알아서 잘 하실 거에요∼ " " 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진우 씨도 보셨잖아요?! 저건 도저히 수련이라 고 할 수 없는 것이에요! 저러다 가인이 폐인이라도 되는 날에는 누가 책 임을 질 거란 말입니까! " " 으윽‥! 제발 목소리 좀 낮춰요, 마리 양∼!! " 그렇게 진우와 마리가 욱신각신 하는 모습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부르스. 그는 결국 그들에게서 관심이 사라졌는지, 다시 널부러져 있는 가인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놈이 아직까지 일어서지 않고 있어? " 너, 내 소리가 개소리로 들리냐? 일어서랬잖아? " " ......크으‥ " 찢어지는 목소리를 흘리며 땅바닥에서 허우적되는 가인. 이미 그에게서 그 이상의 움직임을 바라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부르스는 그런 가인의 모습 을 잠시 지켜보다가 곧 코웃음을 치며 투덜거렸다. " 역시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자식이로군.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근성으로 까 부니까 결국, 그 여자가 그 꼴이 된 거다. " " .........! " 순간, 번쩍 뜨이는 가인의 눈. 그는 부르스를 바라보았다.지,지금 뭐라고‥? 부르스는 자신의 말에 가인이 반응을 보이자,입 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 었다. " 네가 보이는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그 여자가 네 놈한테는 꽤 소중한 사람 이었던 모양인데… 정말 기가 막히는 구나. 넌 너의 소중한 사람 조차 지 켜내질 못했던 거냐? " " 으으… " " 하긴 그렇게 허약해 빠진 놈이니 여자가 대신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어쩔 수 있겠냐? 다 네놈이 약해서 인 걸. 아마, 그 여자… 널 감싸다가 식물 인간 상태가 됐다지? 흐… 정말 불쌍한 아낙네로군. 겨우 이런 놈을 감싸 다가 인생을 조지다니. " " 으으으으으----!!! " 순간, 가인은 괴성을 지르며 쥐어짜듯 힘을 내어 몸을 일으켰다. 가인의 눈 은 고통으로 모세혈관이 터졌는지 붉게 물들고 있었다.가인의 전신이 고통으 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어디 다 시 한 번 말해봐! 지금 뭐라고 했어?!! " 으으으------!!! " " 허어, 그래도 소중하기는 소중했던 모양이지? 그렇게 열을 내는 것을 보 니까 말이야. 것 봐라. 아직은 일어날 수 있잖냐? " " 죽여 버린다--------!!! " 나를 욕하는 건 참아도… 시민 씨를 욕하는 건 못 참아!!!! 가인은 오른손 의 헤븐 스매쉬를 부르스에게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주위의 대기가 찢겨져 나가는 것 처럼 광풍이 몰아치며 그의 손으로 푸른 오라의 토네이도가 모여 들었다. 용서 못해! 용서 못해! 용서 못해-----!!!!! " 으아아아아아아아-------!!!! " - 투카카카카카카!!! 거대한 이중 연쇄의 토네이도! 그렇다! 바로 천공권 연쇄! 모든 것을 갈기 갈기 찢어버리는 가인의 필살기. 지금 그것이 부르스를 향해 무섭도록 휘몰 아쳐 든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던 마리와 진우도 날아드는 격렬한 바람에 뒤 로 밀려 나며 비명을 질렀다. 안돼! 이런 말도 안되는 위력이라니! 저런 공 격에 적중되었다가는…!!!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날아드는 천공권을 바라보 는 부르스의 얼굴에는 가는 미소가 그어져 있었다. 마치 전력을 다하는 가인 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처럼. " 겨우 그거냐? " 천천히 심호흡을 들이키며 진각으로 기공을 끌어올리는 부르스.그리고 하중 에서 얻은 기공을 전신의 호(弧)와 원(圓)의 동작을 연속적으로 반복시켜 끊 어지는 동작이 없이 권으로 기공을 모았다. 이것이 바로 전사경(纏絲勁)! 회 색의 오라가 회오리 모양으로 기공의 흐름을 따라 부르스의 몸을 감쌌다. " 칠성권(七星拳) 문곡(文曲)‥! " - 촤아아아아악------!!!! 부르스는 자신을 덥쳐오는 거대한 토네이도의 중심부로 권을 내찔렀다.그러 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천공권의 토네이도가 찢어져 나가는 종이처 럼 십자 형으로 잘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대기의 흐름이 끊겨나간 토네이도는 그 힘을 잃어버리며 허공에서 분산되어 버렸다. " 아아‥! " 마,말도 안돼‥! 천공권이…! 천공권 연쇄가 이렇게나 쉽게…! 가인은 멍하 니 헤븐 스매쉬를 뻗은 상태에서 부르스를 바라보았다. 부르스는 그런 가인 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냉랭히 말했다. " 봤냐? 너 같이 겉만 화려하고 집중되지 않은 힘은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거다. 진정한 힘이란 그 깊이가 있어야 하는 법. 이런 요란하기만 한 기 술은 안 하니만 못하는 거지. " " 크으윽… 라이징------!!! " 가인은 자신의 두 발로 푸른 오라의 회오리를 모았다.천공권이 통하지 않는 다면 이번에는 라이징 킥이다! 어디 이것도 받아봐…! 하지만 그런 가인의 귀로 청천 벽력 같은 부르스의 외침이 꽂혔다. " 틀렸어!!!! " " .........?!!! " - 투칵! 어느새 가인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 번개 같이 가인의 턱을 두 번 올려차 는 부르스. 칠성권 승룡퇴(乘龍退)! 정확히 부르스의 발뒤꿈치가 가인의 아 래턱을 두들겼다. 그 충격이 가인의 뇌를 뒤흔든다! - 쿵…!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가인. 의식을 잃기 전 자신을 부르는 마리의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가인!!! " …이제… 더 이상은… ' 한계‥야…. ' 밤. 도도산에서 수련을 시작하고 3일째의 밤이 찾아왔다. 가인은 전신이 으 스러진 몰꼴로 비틀 거리며 약수 욕탕으로 걸어갔다.말이 걸어간다였지 거의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정신을 잃은 뒤에도 곧 바로 부르스에 의해 의식을 찾 아 다시 수련을 해야만 했던 가인. 아니,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입장이었 으니까 수련이라는 말도 무색했을 것이다. 그의 전신은 부르스의 발경으로 A .I슈츠가 타들어 가고 있었고, 슈츠 안의 몸은 정상인 곳이 단 한군데도 없 었다. " 아… " 욕탕에 다가가다가 그만 제 자리에서 쓰러지는 가인. 그렇게 쓰러지자 전신 의 힘이 모두 고갈되어 버린 자신의 빈껍질 같은 육체가 느껴져 왔다.그것은 너무도 처량한 기분이었다. 가인은 혹시 자신의 육체가 울고 있는 것은 아닌 가 생각하며 힘 없이 조소했다. 그 때,그런 가인의 몸을 부축하는 손길 하나. 바로 성마리였다. " 가인! 괜찮은 거냐? " " 하… "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가인은 희미하게 마리에게 미소를 지었다.그 모 습에 마리는 그만 울화가 치밀어 가인을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 이 바보야! 지금 이게 뭐하고 있는 짓이야?! 그만 가자! 이렇게 너 자신 을 혹사시킬 필요는 없다고! 지금 바로 산을 내려가는 거야! " 마리는 더 이상 가인의 이런 모습을 지켜 볼 수가 없었다. 가인이 부르스에 게서 그렇게 반 죽음 상태가 되면서도 수련을 그만 두지 않는 것이, 꼭 자해 하는 사람 처럼 보였던 것이다. 마리의 품에 안겨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 던 가인은 힘겹게 말하기 시작했다. " 그럴 수는… 없어요‥. " " 왜! 뭐가 그럴 수 없다는 거야?! 네가 거부하면 내가 강제로 라도 끌고 내려갈 테다! 네가 이렇게 까지 할 이유가 뭐가 있어?! " 마리는 고집을 부리는 가인이 야속했다. 자신이 이렇게 걱정하는 게 보이지 도 않는단 말인가?! 이런 망신창이가 된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이 편할 거라 고 생각하는가?! 몹쓸 녀석! 그런 마리에게 가인은 조용히 말했다. " 미안‥ 해요… 선배‥. " 바보!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뭐가! " 하지만 나… 이럴 수 밖에… 없어요‥. 전 제 자신을‥ 용서‥ 못해요‥ " " .........? " 마리는 영문 모를 가인의 말에 그를 내려다보았다.가인은 희미하게 두 눈을 감은채 무의식 적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 전 지켜주고 싶었어요‥ 시민 씨를… 어떻게든 시민 씨를 지켜주고 싶었 는데… 전‥ 너무… 무력했어요… " " 그건… 네 탓이 아니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 마리는 가인이 자신을 자책하자 안타까워하며 말했다.그리고 한편으로는 가 슴이 무거워졌다. 가인…. 너는… ' 너는 그렇게나 시민 씨를… ' 알고는 있었지만…. 마리는 시민에 대한 가인의 마음에 애가 탔다. 그가 그 녀 만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 지금와서 이런 기분이 들 이유는 없는 거잖아,성마리? 응? 하지만… 마음이‥너무‥ 아프다. " 하지만 사실‥ 그것 뿐 만이‥ 아니에요. " 가인의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마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인의 얼 굴은 죄책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 자신의 강해진 힘에 취해… 쓸데 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던 거에요… 지 고 싶지 않다는 고집이… 그럴 상황이 아니었는데… 모두를 지켜내겠다는 … 오만한 생각에 빠져 시민 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 " ......가인? " " 흐,흐흐… 시민 씨 한 사람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주제에… 그런 우습지도 않는… " 어깨를 들썩이며 자신에 대한 비웃음을 흘리는 가인. 마리는 그런 가인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해져 그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인은 마리의 품 속으로 얼굴을 묻으며 희미하게 말했다. " 이런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까요…? 어떻게 용서해야 하죠…? 알고 있다면 가르쳐 줘요,선배…. 저는…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 가인은 의식이 희미해지는지 점점 목소리에서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가인은 두 눈을 감으며 마리에게 기댔다. " 저요… 잠시… 이대로 눈 좀 붙일 게요…. " " .........응. " " 마리 선배의 품은… 따뜻하내요… " " .........응. " 가인의 숨소리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마리는 그렇게 가인을 끌어 안은채 슬픈 눈으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타닥… 타닥…' 모닥불의 불빛 만이 그들 을 밝혀주고 있었다. - 부글부글부글… 어두운 밤 하늘 사이로 옅은 초승달이 호수를 밝혀 주고 있었다. 그 호수는 마치 밑바닥에 불을 떼고 있기라도 한 것 처럼,호수의 내부에서 주위의 호수 를 밀어내고 기포(氣泡)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호수의 가장 자리 에는 한 청포의 남자가 수면 위에 서서 끓어오르는 기포들을 내려다 보고 있 었다. 차가운 달빛에 남자의 머리가 신비한 초록 빛을 흩뿌렸다. " …설마 아켄석이 이 정도로 까지 타격을 받았을 줄이야. " 청포의 남자, 초류향은 냉기가 서린 얼굴로 중얼거렸다.그때의 영상이 지워 지지 않고 있었다. 아켄석을 매체로 만들어낸 길조(吉弔)를 경(經)으로 가볍 게 무력화 시키며 심지어는 자신에게까지 공격을 해왔던 오라 능력자,부르스 의 모습이…. " 어디까지 나를 쫓아올 셈이냐,인간…! " 초류향이 중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부르스는 자신을 사사건건 방해 해왔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자존심은 얼마나 짓뭉개졌는지 모른다. 저 하찮 은 인간 나부랭이에게, 그것도 한 두번도 아닌 치욕을… 다른 이도 아닌 이 초류향이…! - 부글부글부글… 마치 초류향의 분노에 반응하듯이 호수의 물이 한층 더 심하게 끓어 올랐다. 하지만 초류향은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단지 다시 부르스를 만날 때까지 이 활화산 같은 분노를 차갑게 다듬어 하나의 비수로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 비수는 그 오만한 인간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 " 기다려라…. " 초류향은 호수의 밑바닥에서 정기(精氣)를 빨아들이고 있는 자신의 수하를 내려다 보며 차갑게 되뇌였다. 도도산에 들어온지 6일 째 되는 날.처음으로 가인은 부르스의 권을 피할 수 있었다. 진각을 통해 끌어올려진 기공이 전사경을 통해 그의 주먹으로 모이 는 것이 보였다. 그의 호흡이 보였다. 그의 움직임이 보였다! " 호오…. " 나지막히 들리는 부르스의 감탄사. 그들을 지켜보던 진우와 마리도 눈을 크 게 뜨며 놀라고 있었다. 하물며 당사자인 가인으로서는 무의식 중에 행한 자 신의 움직임에 더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피했다! 저 발경을…! 처음으로…! " 놀라움이 가시자, 다음으로 기쁨이 흘러 넘쳤다. 이 6일 동안 자신을 피곤죽 이 되게 만들던 남자의 공격을 드디어 피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 지금 피했다 이거냐? " - 투웅…! " 크헉-!! " 뻗었던 주먹을 꺾으며 대번에 가인의 가슴팍을 후려치는 부르스의 어깨치기. 하지만 그것은 철포환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공격은 바로…! " 칠성권(七星拳) 개산벽(蓋山璧). " " 으으으으으윽…. " 언제 부르스의 공격을 피했었냐는듯이 다시 땅을 구르며 괴로워하는 가인. 부르스의 어깨치기가 자신의 가슴팍에 적중하는 순간, 쇠망치로 가슴을 얻어 맞는 충격과 함께 전신이 샅샅이 분해되는 고통을 받아야만 했었다. 부르스 는 그렇게 가인이 개산벽의 충격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주먹침 한방 씩만 놔줬다고 나한테는 연환기가 없을 줄 알았었냐? 피했으 면 싸게 싸게 다음 공격을 대비할 것이지… 건방지게 어디서 피했다고 웃 고 있는 거야,지금?! " 자신의 공격을 가인이 피해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듯 투덜거리는 부르스. 하지만 그 반응만 보아도 가인의 수련은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인이 비실 거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부르스는 내심 미 소를 지었다. ' 개산벽을 얻어 맞고도 군말 없이 일어나다니…. 그 동안 두드려 팬 보람 은 있었군. ' 그러나 속으로 그렇게 가인을 칭찬해준 것과는 달리, 부르스는 가인에게로 무섭게 쇄도해들고 있었다. 부르스는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며 가인에게 쌍장 을 휘둘렀다. " 어디 네 놈이 실력으로 피했는지 우연으로 피했는지…다시 한 번 피해 봐 라! " " 큭-! " 뼈가 울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부르스의 쌍장을 몸을 비틀어 피해내 는 가인.아무래도 부르스의 발경을 피해낸 것은 요행은 아니었는듯 싶다. 부 르스는 그런 가인의 모습에 피식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 네 팔과 다리는 장식품이냐?! 피할 수 있게 되었으면 손발 놀리지 말고 공격이라도 해 봐! " ' 마,말이 쉽지…! 이 상황에서 어떻게 공격을…! ' 가인은 부르스의 발경을 근소한 차로 피해내며 정신 없이 눈을 굴렸다.눈으 로 보고 피하면 늦는다. 가인은 눈 뿐만이 아니라 전신으로 부르스의 공격을 느껴야만 했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몸이 부르스의 공격에 두려움을 느끼 면서 알아서 피해주고 있었다. 매도 계속 맞다보니 요령이 생긴 것이다. 하 지만 그것 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 으앗-! " 자신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드는 부르스의 권에 기겁을 하며 재빨리 몸을 피 해내는 가인. 그 모습에 부르스의 인상이 꿈틀거리며 가늘게 떨렸다. " 바보 놈! 그렇게 겁 먹고 움츠려 있어서야 어디 잘도 나를 공격해 보겠다. 그리고 네 놈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 부르스의 주먹이 가인의 옆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미처 그 권이 지나가기도 전에 팔꿈치를 가인의 가슴팍으로 올려치는 부르스! 가인은 무 의식 중에 그 팔꿈치를 십자 방어로 막아냈지만,곧 파도와도 같은 충격에 몸 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드를 했건만 그 가드 속으로 경의 충격이 파고 들었던 것이다. " 크어어어어어억-----!! " 어째서?! 발경이 아니었는데도 이런 충격이…?!! 가인이 고통 속에서도 의 문을 가지며 땅을 구르고 있을 때, 부르스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 아둔한 녀석아! 어째서 그렇게 꽉 막혀있는 거냐?! 나이도 어린 놈이 어째서 그런 좁은 사고 밖에 하지를 못하는 거냐고! " " ......? " 좁은… 사고…? 막혀 있어? " 경(經)이 꼭 손으로 시전해야만 경인 줄 아냐?! 손은 가장 경을 발하기 쉬운 매개체일 뿐이다! 기초 중의 기초란 말이다! " 부르스는 가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인상을 팍 쓰며 쓰러진 가인 에게로 걸어왔다. 뭔가를 설명해줄려고 하는 모습이었지만,가인은 자신이 그 설명의 교재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느끼고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 무리 가르침이라지만 손 놓고 앉아서 부르스의 공격을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 「경」이란…! " - 투학-! 부르스의 어깨 공격이 가인의 가슴을 기묘하게 파고들었다. 느껴지는 경의 충격! 가인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다가 내려왔다. 전신의 혈액이 끓어 오르는 예의 고통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부르스의 호통 소리가 귓 가를 파고 든다. " 끌어올린 기공을 전신으로 발하는 것! 엄연히 력(力)과는 틀린 존재다! 인위적이며 후천적이며 폭발적이지! 힘은 적은 면적에 대해서 크게 영향 을 발휘할 수 없지만 경은 손끝만으로도 상대방을 날려버릴 수 있다! 이 해가 되냐?! 경은 온 몸으로 발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이다! " - 투학-! 이번에는 무릎이었다.부르스는 회색의 오라가 휘감겨 오르는 무릎차기로 가 인의 배를 후려쳤고, 그 공격에 가인은 뒤로 날아가 땅바닥을 굴렀다.역시나 숨이 막힐듯한 경의 충격이 가인을 엄습해 왔다. " 봤냐? 얼마든지 신체의 다른 부위로도 경을 펼쳐낼 수가 있지. 공격 거리 가 짧으면 전사경으로 공격 거리를 늘릴 수도 있고, 가속도를 증가시키고 결국 스피드를 증가시켜 파괴력 또한 증가시킨다! 알겠냐?! 내가 무슨 말 을 하려고 하는 건지. " 가인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부르스는 옷깃 하나 구겨짐 없이,심 호 흡 하나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그 눈빛 만이 무거운 뭔가를 가인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 일탈해라! 너를 얽매이고 있는 그 고정된 틀을 부셔버리란 말이다! " " .........! " 가인은 그런 부르스의 기세에 움찔 뒤로 물러섰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뇌리 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인의 심장이 두근 거리며 들뜨기 시작했다. 일탈해라. 일탈해라. 일탈하라고? ' 고정된 틀을… 부셔…? ' 그렇게 가인이 멍하니 서있자, 부르스는 한 숨을 내쉬며 살며시 고개를 흔 들었다. 역시 무리였나?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부르스는 다시 자세를 잡으며 가인을 노려보았다. 그래…. 모르면 깨달을 때까지 두드 려주는 수 밖에…. " 이 오지게도 둔한 놈…! " 합(哈)! 부르스의 전사경이 시전되며 무시무시한 경이 실린 권이 가인에게 로 뻗어왔다.가인은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부르스의 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이 놈이… 이제는 피할 생각도 안해? 도대체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 냐?!! ' 부르스의 권이 가인의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권이 가인의 코 끝 을 파고들려는 순간… 가인은 움직였다. - 푸확…! " .........?! " 이 녀석…?! 부르스의 굳은 인상 속에서 짧은 경악의 빛이 스쳐나왔다.가인 의 얼굴 부분에 꽂힐려던 자신의 권은 푸른 회오리의 기운에 가로막혀 있었 던 것이다. 가인은 자신의 얼굴 부위로만 오라의 회오리 막을 형성시키고 있 었다. " …껍질을… 깬 거냐…?! " " 하아아아아아아…! " 날카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가인의 헤븐 스매쉬가 부르스에게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푸른 오라의 기류를 머금고 요동치고 있었다. 이것은…천공권? " 또 그 놈의 천공권이냐?! 이런 공격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수 없이 그 몸에다가 가르쳐줬었지…! " - 투학! 헤븐 스매쉬에서 뻗어나올려던 천공권의 토네이도를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 치는 벽경으로 분쇄시키는 부르스. 부르스는 흐트러지는 기류 사이로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변화를 보이나 싶더니만… 이 발전 없는 자식…! 날 실망시킨 죄는 무겁다! 부르스는 진각을 밟으며 기공 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 - 투카카칵! " .........?!?! " 부르스의 측면으로 뻗어나오는 또 다른 오라의 회오리. 이것은…?!! 가인의 헤븐 스매쉬는 부르스에 의해 밑으로 처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 천공권은 도 대체 어디에서 시전된 거지?! ' ......왼손! ' 그렇다. 가인의 왼손. 그 곳에서는 제 2의 천공권이 시전되고 있었던 것이 다! 이 녀석… 양 손으로 천공권을 사용한 건가? 하지만 부르스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바람에 녹듯 그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부르스의 잔상을 스쳐 지나며 날아오르는 왼손 천공권. 가인은 이를 갈며 눈으로 부르스의 자취를 찾았다. 쳇! 이번에는 맞을 줄 알았었는데…! ' 어디로 사라진 거지?! ' 눈으로 쫓을려고 하면 늦는다. 느껴라! 몸으로 느끼는 거야! 가인은 자신 의 뒤로 느껴지는 강맹한 기운에 몸을 팽이 처럼 돌리며 뒤로 발길질을 날렸 다. 거기냐! - 촤아아아아----!!! 놀랍게도 가인의 발을 휘감으며 폭사하는 오라의 토네이도.가인은 다리로도 천공권을 사용했던 것이다. 날카로운 오라의 토네이도가 가인의 뒤에 서있던 부르스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읏…! 역시 피해낸 건가?! " …이제야 한꺼풀 벗겨낸 거로군. 축하한다. " 그리고 부르스는 행동으로도 가인을 축하해 주었다. " 칠성권(七星拳) 연환칠격(連環七擊)…! " - 퍼퍼퍼퍼퍼퍽! 번개같이 가인의 배를 일곱 번 가격하는 부르스의 팔꿈치 공격. 가인은 허 리가 꺽인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숲의 저편으로 날아갔다.'콰직!!' 거칠게 부러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쓰러져 내리는 숲의 나무들. 그렇게 수풀 속으로 사라진 가인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부르스는 그런 수풀을 향해 예 의 가는 미소를 날리며 중얼거렸다. " 네 놈… 제법 잘 하고 있잖냐. 응? " " …아야야…. " 가인은 시퍼렇게 멍이 든 육체를 끓는 약수 속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넣었다. 오늘은 어떻게 좀 멀쩡한 몰골을 유지할 수 있을려나 했는데… 역시나 이렇 듯 넝마조각이 되어 약수 신세를 져야만 했다. 가인은 부르스의 발경으로 타 들어간 살과 뼈 속으로 약수가 스며드는 감촉을 느끼며 신음 섞인 한숨을 내 쉬었다. " 으- 음…. " 그래도 오늘은 생각 외로 많은 수확이 있었다. 어제와 별 다름 없는 몰골이 기는 했지만 최초로 부르스의 발경을 피한 날이기도 했고, 천공권의 새로운 사용법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이 피곤하지 않았다! 언제나 기진 맥진 상태로 약수 통에서 잠들었던 자신이 오늘은 이렇듯 제 정 신을 차리고 있었으니… 대단한 발전이었다. ' 그래서 퍽이나 좋으냐,유가인? 젠장…. ' 가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회복시키는 데에 주력했다.몸 안에 스며 드는 약수를 느끼며 오라를 천천히 약수의 흐름에 맞춰 돌리기 시작한다. 부 르스가 특별히 지시한 방법이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하니 몸이 회복 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게 느껴져 왔다. " 요오∼ 오늘도 약수 통 신세냐? " 그렇게 치료에 열중하는 가인의 뒤로 들려온 한 목소리. 바로 진우였다. 가 인은 그의 등장에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어쩔 수 없죠. 저는 둔하기 짝이 없는 데 다가, 미숙하기 짝이 없는 녀석 이니까요. " 가인의 그 말은 부르스가 수련 도중 자신에게 윽박지르며 꾸중하던 것을 은 연 중에 비꼬는 것이었다. 그렇게 신물이 나도록 맞으면서 들은 소리니, 감 정이 생길 만도 하지. 진우는 그런 가인의 태도를 이해하며 히죽 웃었다. " 이해해라,소년. 사부님도 너한테 감정이 있어서 그런 소릴 하신 건 아니 니까. 독설이 심하셔서 그렇지 나쁜 분은 아니셔. " " ......그래도 좋은 분이라는 얘기는 안 하시내요…. " 가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 그한테서는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 맞고,평생 듣지 못할 욕설과 굴욕감을 느 꼈다. 하지만 가인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거칠게 자신을 다룸으로써, 가인이 자신을 자책하고 자해할려던 것을 도맡아 서 해주었던 것이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인을 몰아 붙이고, 가 인이 스스로를 용서 못하고 죄책감에 허우적 거리지 않도록, 그를 대신하여 부르스는 가인에게 벌을 주었다. 그 덕분에 가인은 자신에 대한 분노를 수련 을 통하여 분출시킬 수 있었다. ' …날 생각해준 걸까…. ' 확실히 도도산을 올라오기 전에 비하면, 가인은 많이 밝아져 있었다.자신을 탓하고 자아 속으로 도망치는 것 대신에 어떻게든 강해져서 시민 씨를 구하 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부르스가 이런 의도로 가인을 수련 에 임하게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가인은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수 련의 덕을 보고 있었다. " 그런데… 부르스가 진우 씨의… 사부님이라고요? " 가인은 문득, 품고 있던 의문점이 하나 생각나서 진우를 향해 물었다. 맞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하나 있었다. 부르스는 아무리 잘 봐줘도 15세 미만의 어린 소년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그런데 그런 그가 진우 씨의 사부 님이라니? 그럼 도대체 부르스는 몇 살이라는 거야? 진우는 그런 가인의 질 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래. 내가 피스메이커에 가입한 후, 날 가르치신 훈련 교관이시지. 내가 쓰는 칠성권도 그때 당시 사부님에게서 배운 거야. 사부님은 32대 칠성권 의 전승자이시자 경기공(經氣功)의 달인이신 선도 수행자이거든. " " …그,그렇군요. " 뭐,뭐야…. 그 경기공이니 선도 수행자라는 건? 가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생 각에 빠졌다. 선도 수행자라니… 산신령이라도 되려는 건가? 하긴.어쩐지 인 간같지 않은 사람이었어. 가인은 부르스의 그 불가사의한 존재감을 떠올리며 대충 납득해 버렸다. 아, 그리고 그 32대 칠성권이라는 건 또 뭐야? " 진우 씨가 쓰던 무술도 그… 칠성권이라고 했죠? 도대체 그건 뭐에요? " " 오로지 한 자식에게만 비법을 전수하며 비밀리에 은닉해 온 궁극적인 살 육암살의 권법이지. 이 권법의 창시는 대략 1800여년 전 삼국 시대로 거 슬러 올라가는데… 아직 세력이 미약했던 서방의 불교도들이, 군웅할거의 난세에 그 가르침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비권이었지. 다만 너 무나도 처절한 그 비권은 태평성대기에는 사신의 권법이라 하여 기피를 당하고 지금은 단지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다고 해…. " " 에엑-?! " 뭐,뭐야? 그 무시무시한 유래는?! 그리고 그 어디선가 접해본듯한 내용은?! 가인은 진우의 말에 두 눈이 휘둥그래져 물었다. " 저,정말이에요? 그 권법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 " 파하하하하∼ 농담이야.농담∼ 한 자식에게만 전수한다고 말했는데, 만약 그랬다면 내가 사부님의 아들이게? 칠성권은 경기공을 수행하는 운체풍신 술(雲體風神術)의 하나일 뿐이야. " " .......... " 제,제길… 몸만 멀쩡했더라면…. 가인은 당장에라도 눈 앞의 이 경박한 남 자를 도도산의 정상에서 밑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뭐야? 그 우습지도 않은 농담은?! 부탁이니까 제발 농담할 시기를 가려달라구요! 그렇게 가인이 독 오른 표정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우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 어쨋든, 이로서 네 녀석이 나의 사제(舍弟)가 되는 구나. 내 밑에서 가르 침을 받던게 엊그제 같은데 왠지 감개가 무량해지네. 자∼ 어쨋든, 날 사 형(舍兄)이라고 불러봐라! " " …제발 그 정도에서 그만두지 않을래요? " 그리고 누가 당신같은 인간과 사형제가 되고 싶다고!! 가인은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듯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진우는 그런 가인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안도했다. ' 녀석…. 그래도 많이 밝아졌구나. ' 며칠 전만 해도 죽을 상을 쓰고 있던 녀석이….진우는 다행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민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모습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역시 가인에게는 어울렸다. 메디컬 센터에 잠들어 있는 시민도 가인 이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 에 잠겨있던 진우에게 순간, 가인이 말을 걸었다. " 진우 씨. " " 왜? " 무슨 일이냐,녀석아? 웃는 얼굴로 답하는 진우. 하지만 진우의 그런 표정은 다음에 들려온 가인의 말에 의해 굳어버렸다. " …시민 씨는 어때요? " " ......... " 역시….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그 일을…. 진우는 나지막히 한숨 을 내쉬며 가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 …안 좋아. 닥터의 말에 의하면 시민 씨가 중독된 독은 날이 갈수록 그녀 의 몸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데. 오래는 버티기 힘들다나 봐…. 길어야… 일주일… 이라고. " " .........일주일…. " 나지막히 '일주일'을 되뇌이며 고개를 숙이는 가인. 욕탕 안에 들어있는 가 인의 손이 힘겹게 쥐어졌다. 일주일…. 지금이 6일 지났으니까… 이제… 하 루 밖에는…? 가인은 이를 악물며 쥐어짜듯 진우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 …시민 씨를 구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 " " ......아니. 방법은 있다. " 순간 진우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보는 가인. 진우는 그런 가 인의 태도에 고소를 금치 못하며 말했다. " 닥터가 제시한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해. 병원체를 감염시킨 숙주를 제 거할 수 만 있다면, 차원 숙주를 잃어버린 병원체는 3차원 유클리드 공간 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소멸하거든. 쉽게 말하자면…시민 씨를 중 독시킨 몬스터를 섬멸하는 것 만이 그녀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거야. " " .........! " 순간, 약수탕에서 두 눈을 번뜩이는 가인. 그의 몸은 희열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몬스터를 없애기만 한다면… 시민 씨가 살아날 수 있다고…?! 그녀 가… 살아날 수 있어…? 몬스터를 없애기만 하면? " 방법이… 있었어…! " 낮게 중얼거리며 욕탕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는 가인.그 바람에 약수 방울이 촤악 사방으로 튀었다. 진우는 갑작스런 가인의 행동에 놀라 굳은 얼굴로 그 를 바라보았다. " ......소년? " " …방법이 있었던 거에요‥진우 씨‥. 시민 씨를 살려낼 방법이‥! 일주일 안에 그 몬스터를 없애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한다면…! "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생기 어린 눈초리로 진우를 돌아 보았 다.가인은 그야말로 기사 회생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시민이 가사 상태로 쓰러져 있었을 때… 닥터에게서 절망적인 얘기만을 들었을 때… 가인은 얼마 나 절규하며 시민을 부르짖었는지 모른다.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 는 자신의 무능함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하지만 지금 자신이 그녀를 위 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아낸 것이었다. 그래… 그 몬스터를 없애 기만 한다면 시민 씨가…! 시민 씨가…! " 이,이럴 때가 아니야…! 내일이면 일주일 째가 되어버려! 어서 그 몬스터 를 찾지 않으면…! 지,진우 씨! 나 부르스에게 얘기해서 수련을 중단하겠 어요! 수련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한시라도 빨리 그 몬스터를 찾아야하 잖아요? 왜 이런 중요한 얘기를 이제서야 하신 거에요! " " 잠깐,소년…! " 진우는 가인을 부르려고 했지만, 소년은 재빨리 A.I 슈츠를 껴입으며 부르 스를 찾아 수풀 너머의 호숫가로 달려가 버렸다. 진우는 그런 가인의 사라진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뒷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 거,참… 성질 한 번 급하기는…. 아직 몬스터의 행방도 찾지 못했건만… 저렇게 마음만 앞서서야∼ " 하지만 진우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저게 바로 저 녀석 다운 거겠지∼ 정말이지 시민 씨를 끔찍하게도 생각한다니깐∼일편단심 순애 보 녀석같으니라고. 진우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순간, 아무도 없는 수풀을 돌 아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 그만 나오시지 그래요? 훔쳐 듣는 건 다 큰 처녀가 할 짓이 못 됩니 다∼ " 그건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하지만 잠시 후, 진우가 말을 건낸 상대가 숲의 나무 뒤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곳에는 피스 레드 성마리가 머쓱한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 후,훔쳐 들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나오기가 뭐해서…. " 아무래도 본의아니게 엿들은 것이 그녀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그런 마리의 모습에 진우는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아무래도 소년의 마음을 얻는 것은 힘들 것 같던데요,마리 양? 뭐,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 너무 실망은 하지 말아요. " " 쓰,쓸데 없는 소리를…! " 마리는 진우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르다, 헛 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그 녀는 붉게 물든 얼굴로 말했다. " 특별히… 그에게서 뭔가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저 혼자만의 마음 이었으니까…. " " 거,참….소년은 복도 많지∼ 분명 벌 받을 거야∼ 이런 마리 양의 마음도 몰라주고 시민 씨한테만 온 정신이 팔려있으니… 나, 원∼ " 진우의 말에 마리는 살짝 그를 흘겨보다가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 …그런 가인의 모습에 전 반한 겁니다. " " 그런 겁니까? " 진우는 두 손 들었다는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 눈 앞의 소녀 가 그 마음에 보답을 받기를 바랬다. 일방 통행의 마음은 그 댓가를 바라지 않는 만큼 순수하지만 그 만큼 험난한 법이니까. - 푸화화확----!!! 그때, 들려오는 거친 물살 소리. 마치 폭포수를 누군가가 헤집기라도 하는 듯 물살이 터져오르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 보던 진우와 마리는 중얼거렸다. " 이거… " " 호숫가에서 난 소리 맞죠? " 호숫가에는 부르스와 가인이 있을 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진 우와 마리는 재빨리 호숫가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후두두두두둑… 밤하늘의 어둠을 머금은 물방울들이 거세게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그것은 비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폭포수가 반으로 갈라져 오르며 사방으로 뿌린 물방울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치 밤 하늘의 이슬처럼 떨어져 내리는 물 방울들 사이로 부르스가 회색의 오라를 번뜩이며 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 노기가 서린 목소리.그리고 짙은 흑빛의 눈동자가 끓어오르는 것 처럼 가인 에게 향하고 있었다. 부르스는 지금 화가 나있었다. 무엇보다도 폭포수를 향 해 손을 휘두르자, 폭포수가 반으로 갈라지며 터져 오른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장면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마치 태산과도 같은 기세.그 숨막힐듯 한 부르스의 기운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비틀거릴려고 하는 것을 참 아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 하,하지만 부르스…! 이대로 있다간 시민 씨가 위험하다구요! 지금은 여 기서 수련할 때가 아니에요! 한시라도 빨리 그 몬스터를 찾아내서 없애 지 않으면…!! " " 허… 몬스터를 없앤다고? 네가? " 부르스는 기가 찬다는듯 가볍게 코웃음 치며 두 눈을 감았다.그런 부르스의 모습에 초조해진 가인이 소리쳤다. " 그,그래요! 분명 그때보다는 강해졌잖아요,저?! 또 그렇기 위한 수련이었 고요! 이번에는 반드시 그 괴물을 없앨 수 있을 거에요! 그러니까…! " " 시끄러워-----------!!!!! " 순간, 숲을 뒤흔드는 거대한 부르스의 고함 소리. 그 바람에 숲의 나뭇가지 에 앉아 있던 새들이 거칠게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푸드드드득!' 마치 광풍 이라도 분 것 처럼 거목들에게서 나뭇 잎들이 휘날려 떨어진다. 가인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막아 헛구역질을 참아냈다.부르스의 괴성은 단 순한 괴성이 아닌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자후(獅子吼) 같았다. 그렇 게 비틀거리는 가인에게 부르스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 이 새끼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건방이 하늘을 찌를려고 하는 구나!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놈이 어디서 하늘을 날아오를려고 해?! 뭐? 강해졌다고?! 네 놈이 강하다는 것의 의미를 알기는 아는 거냐?! 네 놈이 그런 건방진 소리를 입에 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 " 으으으…! " 가인은 무릎을 꿇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부르스의 고함 소리가 마치 쇠망치 라도 되는 것 처럼 가인의 속을 두들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켜 세워 부르스에게 대들었다. " 그래도 전 가야만 해요! 이대로 시민 씨를…시민 씨를 죽게 내버려 둘 수 는 없단 말이에요! 전 반드시 그녀를 구할 거에요! 그러니까 제발 절 보 내줘요!! " " 허… 그래? " 부르스는 그런 가인의 모습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짧게 한 마디 내 뱉었다. " 그럼 죽어라. " " .........!! " - 투학!! 순간, 포환처럼 날아드는 부르스의 발경. 가인은 그런 부르스의 공격에 기 겁을 하며 우측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부르스의 권은 헛되이 가인이 서있 던 뒤편의 바위를 가루로 분쇄시켜 버렸다. 그 광경에 가인은 마른 침을 삼 키며 몸을 떨었다. 지,진짜로 날 죽일려고 했어?! 만약 가인이 부르스의 공 격을 피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했더라면, 방금 전의 공격으로 전신이 박살났을 것이다. " 아켄 석의 수호도 뚫지 못했던 놈이 그 괴물을 없애겠다고? 네 놈이 그 괴물에게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그 놈의 몸에 상처 하나 남기지 못할 거다! 그렇게 놈한테 개죽음을 당하고 싶다면 차라리 내 손에 죽어버려! " " 사,사부님----!!! " 그때, 가인과 부르스의 사이로 수풀을 뚫고 달려온 진우와 마리가 둘을 막 아섰다. 마리는 비틀 거리는 가인을 감싸안으며 부르스를 경계했고, 진우는 부르스에게 긴장한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 저 녀석에게 제가 쓸데 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녀석의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그냥 사부님이 이해하시고 한 번만 넘어가 주세요. 예? " 그런 진우의 말에 반박한 것은 부르스가 아닌 가인이었다. " 전 반드시 갈 거에요! 아니, 가야 해요! 그러니까 제발 절 보내줘요! " ' 으아아아앗∼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이 녀석아!! ' 진우는 가인의 말에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부르스를 살펴보았다. 역시나 예 상대로 부르스는 활화산 같은 분노를 내뿜으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우는 속으로 눈물을 뿌렸다. 산통 깨졌다…. 이제 사부님 한테 우리 모두 는 살해 당할 거야…! 죽을 거라고!! " 으윽…! " 가인은 있는 힘을 다해 부르스를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숨막힐듯한 긴장 감이 호숫가를 멤돌고 있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부르스의 사자후 때문에 산 짐승들도 다 도망을 가버렸는지 숲은 그야말로 침묵, 그 자체였다.가인과 진 우, 마리는 마른 침을 삼키며 이 침묵의 무게를 힘겹게 버텨내었다. 이 침묵 이 끝날 때가 자신들의 마지막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요로로로로… 하지만 그 침묵을 깬 것은 부르스가 아닌, 한 짐승의 것인듯한 요상한 울음 소리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행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 다. 그것을 바라보던 가인과 마리는 두눈이 휘둥그래져 중얼거렸다. " 뭐,뭐야… 저건…? " 그것은 흡사 원숭이와도 같았다.하지만 그 얼굴은 백발을 무성하게 기른 인 간 노인의 그것이었고, 몸은 잿빛의 털로 덮힌 거대한 짐승의 것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자연의 범주를 벗어난 생명체였다. 몸은 투명한 것이 마치 금새 라도 꺼질 것만 같았고,그 안광에서는 흉흉한 녹색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그 정체 불명의 생명체를 바라보던 진우는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 산신 태봉(泰逢)?! " …산신‥? 진우의 그 말에 그와 생명체를 돌아보며 상황 파악을 못하는 가 인. 단지 마리 만이 진우의 말에 굳은 안색으로 되물을 뿐이었다. " 산,산신이라면… 저번에 얘기하던… " " 예. 아마도 저 산신은 이 도도산의 주인일 거에요. 이 산… 생각보다 꽤 강대한 정을 품고 있었나 보군요. 태봉의 서식지였다니…. 설마 이런 곳 에서 태봉을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 진우도 믿기지 않는다는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산신 이 여기에 모습을 드러낸 거지? 분명 이 곳은 사부 님에 의해 산신으로 부터 수호를 받는 주술이 펼쳐져 있을 터였는데…. 진우는 설명을 바라는 눈길로 부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부르스는 그런 진우들의 시선에는 일체 신경을 쓰지 않으며 심각한 안색으로 산신 태봉 만을 바라 볼 뿐이었다. - 요로로로로… 그러자 부르스의 앞으로 달려와 부복하는 태봉. 그런 산신의 모습에 진우들 은 숨을 멈추며 그 광경을 주시했다. 사,산신이 어째서 인간에게 저런 태도 를 보이는 거지? 어째서…?! 가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낮은 목 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부르스와 태봉. 그 목소리들이 굉장히 작았 던 데다가 사람의 언어가 아니었기에,가인들은 부르스와 태봉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부르스가 설명하기만을 기다릴 뿐.부 르스는 태봉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런 가인들의 시선이 신경쓰였는듯 힐끔 그 들을 돌아 보았다. 그러다가 가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 다. " 하아…. " " .........? " 왜,왜 저러시는 거지? 부르스는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굴리고만 있는 가인에 게 투덜거리며 말했다. " 네 놈…. 어지간히도 운이 없구나.아니… 운이 있다고 해야하는 건가? " " ......예? " 도대체 그게 무슨 말…? 부르스는 짜증을 내며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 수련은 여기까지란 말이다! 이 산신이 네 놈이 애타게 찾던 그 괴물을 찾 아냈다고 하는 구나. " " 예?!! 그,그게 정말이에요?!! " 가인은 대경실색하며 부르스에게 되물었다. 그런 그에게 부르스는 '이 놈이 속고만 살았냐'라는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가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소리쳤다. " 어,어디있대요?! 그 괴물 놈이 도대체 어디에… " " 흐… " 그런 가인의 허둥대는 모습에 낮게 웃음을 흘리는 부르스.그는 뒤편에 솟 아있는 거대한 도도산의 정상을 가르키며 말했다. " 바로 여기. 도도산의 산정에 있는 용왕담(龍王潭)에. " " .........!!!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2 話 중국에서 온 사자(師資) (下) =-=-=-=-=-=-=-=-=-=-=-=-=-=-=-=-=-=-=-=-=-=-=-=-=-=-=-=-=-=-=-=-=-=-=-= " 이봐,소년∼ 좀 천천히 올라가! 몬스터를 만나기도 전에 힘을 다 뺄 셈이 야?! " 뒤에서 들려오는 진우의 말에 가인은 그제서야 서두르던 걸음을 멈췄다. 얼 마나 내 달려왔는지 어느덧 수련을 하던 고원 지대를 벗어나 산의 중턱에 다 다르고 있었다. 가인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진우에게 소리쳤다. " 하지만 이대로는 산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날이 밝을 거라구요! 그 전에 몬스터를 없애지 못하면 시민 씨가…! " 그녀가 몬스터의 독에 중독된지 벌써 6일 째가 되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7 일로 넘어가 버린다. 닥터가 말한 위험 시효가 지나버리는 것이다.만약 손을 쓰는 게 늦어서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 안돼. 불길한 생각하지마, 유가인! ' 가인은 고개를 저으며 머리 속에 밀려드는 불안한 상상들을 지워버렸다. 지 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말자.날이 밝기 전에 몬스터를 제거하는 일에만 온 신 경을 집중해! 그렇게 가인이 초조해하는 기색을 읽어낸 마리가 고개를 끄덕 이며 진우에게 말했다. " 그래요, 진우 씨. 지금은 가인의 말대로 서둘러야 합니다.이런 곳에서 늦 장을 피울 시간이 없습니다. " " 아아∼ 나는 단지 좀 여유를 가지자는 의미에서… 하하. " 진우가 어설프게 웃으며 말을 흐리자, 가인과 마리는 뚱한 얼굴로 그를 바 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여유를 가질 시기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정말이지 이 남자의 속은 알면 알수록 이해 난감하다.가인과 마리는 한숨을 내쉬며 고 개를 내저었다. 그러던 중 가인은 자신들과는 달리 전혀 지친 기색도 없이 산보하듯 걷고 있는 부르스를 돌아 보았다. 정말 이 눈 앞의 중국인 소년은 사람 같은 구석이 보이지를 않는다. " 저기… 부르스? " " 뭐냐? " 가인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부르스는 예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는 내심 가인이 제대로 수련을 끝내지 않고 몬스터와 조우해야만 하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가인은 그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을려고 노력 하며 말을 이었다. " 어째서 녀석들이 이 산에 있었던 거죠? 그리고 부르스는 그걸 어떻게 안 거에요? " " 내가 알아냈다는 게 불만이기라도 한 거냐? 그냥 조용히 안 따라올래? " 당장에 으르렁 거리며 답하는 부르스. 아, 저 놈의 성질 머리 하고는…. 가 인은 자신이 왜 이 부르스에게 이렇듯 조심스러워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 다. 자신보다도 어려보이는 이런 꼬마에게. 솔직히 부르스가 진우 씨의 사부 님이라고는 하지만, 저 어려보이는 외모는 절대로 그를 그렇게 나이들어 보 이지 않게 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나이에 비해 외관 상 어려보이는 동안들 이 많다고는 하지만… 부르스의 외모는 그런 차원을 떠나서 확실한 어린 아 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난 이 아이를 대하는 게 어려운 거지? ' …보통 어린 아이가 아니지…. 이 눈 앞의 사람은. ' 그가 보여준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기운은 15세 어린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오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아늑함과 동시에 강렬한 위압감. 그것이 가인과 마리들이 그를 대하기 어려운 이유였다.마치 이질적인 다른 무엇과도 같은 그 존재감이 그를 어린 소년으로 느껴지지 않 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인은 자연스럽게 부르스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이지 묘한 느낌이 었다. " 아,아뇨…. 저‥ 하지만 궁금해서 그냥…. " 가인은 우물쭈물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부르스가 화내는 것은 정말이지 무 섭다. 요 며칠 간 그에게서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드려 맞던 가인으로서는 부 르스의 인상 구기는 모습만으로도 그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부르스는 그 런 가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 그 괴물은 아켄석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너도 당해봐서 알겠지? 그 돌이 어떤 것인지…. " " 아켄석…? " 가인은 나지막히 말을 되씹으며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자신의 공격을 무 효화 시키던 괴물의 붉은 빛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괴물의 배갑에 박혀 있 던 흑빛의 돌. 그래…. 그것인가? 가인은 인상을 굳히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 였다. 부르스는 말을 이었다. " 그것은 중국 은허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가이아의 유산. 아켄석은 단지 흑 색의 돌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실상은 오라를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하 고 있지. " " 그래서 그 때…. " 가인은 분한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내 오라 능력이 그 녀 석에게 통하질 않았던 것이었어. 그래서 시민 씨도…. " 감이 오고 있냐? 아켄석의 수호를 받고 있는 한 녀석에게는 어떠한 오라 도 무용지물이라는 거다.그 껍질 안에 숨어있는 녀석에게 타격을 주지 않 는 한 지난 번과 같은 결과 만을 초래할 뿐이지. " '지금의 네 놈이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부르스는 눈빛으로 그 렇게 가인에게 물어오고 있었다. 가인은 차마 그런 부르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며 화제를 돌렸다. " 그,그런데…그 아켄석이 녀석에게 있는 것과‥ 놈들이 이 산에 있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죠? " " 아켄석은 에레보르(동떨어진 산)의 광도에서 산의 정수가 응축된 원석.그 때 녀석의 아켄석은 나의 경으로 그 그릇에 타격을 입었다. " 깨어진 그릇은 그 정을 담아 두지 못하는 법. " 그리고 새어버린 아켄석의 원기를 보충할려면 천계의 산에서 흘러 나오는 정기를 다시 흡수해야만 하는 거지. " " 그렇다면 지금 녀석은 아켄석의 원기를 보충하기 위해 이 도도산에 있다 는 말인가요? " " 그래. 이제 알겠냐? 이 동쪽의 나라에서 천계의 산이 있는 곳은 오직 이 산 뿐이다. 처음부터 녀석들의 행보는 읽혀지고 있었던 거야. 단지‥이렇 게나 놈들을 찾는데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지만…. 이 도도산의 산계가 워낙 넓어서 다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부득이하게 산신의 도움을 빌렸 었지. 그런데… 이 느려터진 정령 놈이 이제서야 녀석들을 발견한 모양이 다. " 부르스는 코웃음을 치며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던 산신 태봉을 바라 보았 다. 태봉은 그런 부르스와 모두의 시선에 예의 '요로로로-' 하는 울음 소리 를 내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가인은 부르스를 감탄 어린 눈초리로 바라 보았 다. 부르스가 말한데로 라면 그는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자신을 이 산으로 데려온 것이 된다.그 선견지명에 놀랍다는 말 밖에는….가인은 진 정으로 존경의 의미를 담아 부르스에게 말했다. " 대,대단하세요. 정말…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 " 웃기지 마라,꼬마야. 지금 네놈이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라도 있는 줄 아는 거냐? " 대번에 가인에게 면박을 주는 부르스. 그 바람에 가인의 들뜨던 기분은 대 번에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부르스는 혀를 끌끌 차며 이상한 표정이 된 가인에게 말했다. " 어차피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는 거다. 그래.녀석을 발견했다고 하자.그 런데 그게 뭐가 어쨌는데? 네 놈이 그 아켄석의 수호를 받는 괴물에게 티 끌만큼이라도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거 같냐? 응? 그럴 자신이 있어? " " 그,그건…! " 가인은 차마 부르스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며 고개를 떨궜다.그런 그의 모습 에 부르스는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 " 그 때 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저번에는 운이 좋아 서 네 놈 대신 그 여자가 피를 봤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운이 따라 줄 것 같으냐? 이번에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여자를 구하겠다고 했지? 흐,우습지도 않아서…. 네 놈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 " 하,하지만 이번에는 부르스… 당신도 있고… 저도 어느 정도 수련을 했으 니까…. " " 내가 그렇게 건방을 떨지 말라고 했건만 그새 다 잊어먹은 거냐? 그런 쥐 꼬리 만한 힘으로 또 자만하는 거냐?! 지금 네 놈의 실력으로는 아켄석의 수호를 꿰뚫을 수 없어! 그리고 나한테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 데… 내가 네 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방금 전의 수련까지가 전부다. 그 괴물을 상대하는 건 모두 네 놈의 몫이라고. 네 놈이 그 길조에게 죽든 말든 그 이후는 내 상관할 바가 아니지. " " 말씀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 듣다 못한 마리가 인상을 찡그리며 부르스에게 소리쳤지만, 그는 그녀에게 아랑곳도 하지 않으며 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가인은 그런 그의 시선에 전 신이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부르스의 말은 모두 맞 았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가인, 자신의 몫이었다. 시민 씨의 복수를 하겠다고 했으면서도… 그녀를 구하겠다고 했으면서도, 불 안해지자 금새 남에게 의존할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라니…. ' 부끄럽다…. '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부르스의 말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것보다 도 걱정이 앞섰다. 그의 말대로라면 어떻게 그 괴물을 없애야만 한단 말인가?! 가인은 불안한 목소리로 부르스에게 물었다. " 어떻게 하면… 돼죠? " " ......... " " 어떻게 해야… 제가 녀석을… 없앨 수 있죠? " 부르스는 담담히 그런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그런 부르스의 시선을 마 주하며 그가 대답해주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부르스에게 대답을 바라는 것 조차 그에게 의존하는 행위였지만… 지금의 가인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 었다.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 이다. 부르스는 그런 가인의 태도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인에게 대답을 하나 던져 주었다. " 일탈해라. …그러면 길이 보일지도 모르지. " " 일탈......... " 가인은 멍하니 부르스가 한 말을 되뇌이며 서 있었다. 일탈….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부르스는 수련 도중에도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하지만 여전 히 가인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젠장…! '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가인은 자신의 둔함을 탓하며 부르스의 뒤를 따 라 자신도 걷기 시작했다.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마 치 시민의 생명이 꺼져가는 소리가 귓 가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가인은 초조한 마음을 움켜쥐며 도도산의 정상에 있을 용왕담(龍王潭)을 올려다 보 았다. 불안함과 초조함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가인은 애써 모든 것을 눌러 삼켰다. 일단은 괴물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다음부터는 죽이되든 밥이되든 가인 자신이 어떻게든 해 볼 일이었고…. 가인은 병상에 누워있을 시민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시민 씨…, 조금만 기다려요…! 나… 반드시 해낼테니까! ' " 호오…. " 초류향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과 길조가 있는 용왕담으로 접근해 오는 오 라의 기운들을…. 그것은 분명 낯익은 느낌의 것들이었다. 오라의 주인… 그 리고 부르스…. 네 놈인가? " 후후후… " 초류향은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용왕담의 밑에서 붉은 빛을 흘리고 있는 자 신의 수하,길조를 내려다 보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아켄석은 잃어버린 정 기를 보충한지 오래였고, 자신 역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 이쪽에서 찾아갈 수고를 덜어주다니… 고마운 일이로군. " 마음껏 환영해주마. " " 여기… 인가요? 놈들이 있는 곳이…. " 가인은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부르스에게 물었다. 용왕담은 칼 데라(caldera:화산지역에서 볼 수 있는 대규모의 화구火口 모양의 와지窪地) 안에 물이 괴어서 된 칼데라 호였다. 호안은 경사가 급하며, 수심이 크고,밑 바닥은 대체로 평탄한 이 곳은 산성(酸性)이 강하고, 영양물질이 적기 때문 에 식물이 적은 빈영양호(貧營養湖)가 많았다. 진우는 칼데라 호를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는 화구벽(火口壁)에 서서 그 밑의 호반 일대에 펼쳐진 거대한 용왕담을 내려다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 한국의 칼데라 호는 백두산의 천지가 유일한 것인 줄 알았는데. " " 산의 정기가 집중되어 분출할 곳을 찾을 때 열운(熱雲)이라는 다량의 마 그마가 일거에 폭발하게 된다. 그 직후 산체의 함몰에 의하여 생긴 것이 칼데라인 거지. 아마 이곳은 이 산의 모든 정기가 집중되는 곳일 거다. " 부르스의 설명에 가인과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래서 녀석들은 이 곳에서 아켄석의 정기를 채우겠다는 거로군. 과연 산의 정기가 모이는 곳 이라서 그런지 용왕담은 알 수 없는 기운들로 가득차 있었다.그 정기에 가인 들의 오라가 희미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오라란 3차원 유클리드 공간에서 가 이아의 영향 하에 발휘되는 힘. 가이아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용맥의 기운이 넘치는 이 용왕담은 그야말로 오라의 덩어리라 할 수 있었다.이 곳에서 라면 아켄석의 모자란 정기도 충분히 채워지고 남았을 것이다. " 하지만… 너무 조용하군요. " 마리는 주의 깊게 용왕담을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부르스의 말대로 몬스터 가 있는 곳 치고서는 너무 조용했다. 단지 푸르스름한 달빛이 깔린 용왕담만 이 출렁이고 있을 뿐이었다.가인은 산 정상의 추위로 인해 입김을 하얗게 내 뿜으며 말했다. " 정말… 여기 맞아요,부르스? 확실해요? " " ......그래서 지금 내가 잘못 데려오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 당장에 험악해지는 부르스의 표정. 가인은 흉흉해지는 그의 기세에 찔끔 하 여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저 놈의 성질 머리하고는…. " 그,그럴리가요…. 단지 너무 조용해서…. " " 흐… 잠자고 있는 것은 아닐테고…. 우리가 온 것을 눈치 채고 숨었는지 도 모르지. " 그 말에 대번에 긴장하며 주위를 살피는 마리들. 그렇다. 적이 매복해 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어둠 속에서 기습을 당하는 것 만큼 치명적인 일 은 또 없겠지. 진우는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 "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일단은 상황을 살피도록 하죠. " 가인은 그런 진우의 제지에 나지막히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슬쩍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새벽에 다다르는지 어둠이 많이 가시고 있었다. 가인은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용왕담을 내려다 보았다. ' 제길…, 이럴 때가 아닌데…! 한시라도 빨리 서둘러야 하는데…! ' 아무 것도 않하고 단지 기다려야만 한다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가인은 그 만 진우의 제지를 참지 못하고 화구벽의 남쪽에 있는 파극(破隙)을 통해서 호반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가인의 모습에 진우가 소리쳤다. " 어이! 소년! 기다려! " " 이렇게 주춤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진우 씨! 녀석이 도망치 기라도 하면 어쩔려고 그러는 거에요! 어차피 싸워야 되는 거라면 얼마든 지 싸워 주겠어! 그러니까 경계하면서 늦장 부릴 때가 아니라구요! " 진우들은 가인의 막무가내 행동에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며 어쩔 수 없이 가인을 따라 용왕담의 밑으로 내려왔다. 분명 가인이 시민의 일로 인해 너무 서두르는 감이 있었지만, 그가 하는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적 이 매복하고 있다고 해도 지금의 자신들로서는 그들을 피할 상황이 아니었다. - 첨벙… 호반 일대에는 약간의 평탄한 땅이 있을 뿐 그 밖에는 깎아세운 듯한 절벽 만이 서있었다.그리고 그 가운데에 너비 3.6Km의 용왕담이 위치해 있었다.호 수의 외곽은 수심이 얕았기에 가인의 무릎 정도로 물이 올라왔다. 수온이 10 도 내외여서 그런지 물에 잠긴 부분들이 깨나 차가웠지만 A.I 슈츠의 방열작 용이 있었기에 그리 추운 것을 느낄 수는 없었다. 면적이 9㎢ 정도 되는 이 자연 호수는 빈영양호(貧營養湖)이므로 식물성 부유생물·작은 곤충류·물속 이끼류가 살고 있었으나 어류나 파충류는 서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득히나 조용한 호수가 더욱 더 적막했다. " 윽…! 이거 생각 보다 더 깊을 것 같은데요. " 몇 발 앞으로 걷다가 밑으로 발이 쑤욱 빠지는 바람에 가인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진우가 허리까지 올라오는 호수를 가리키 며 말했다. " 조심하라구.칼데라호니까 아마 200m는 거뜬히 넘길 정도로 깊을 거야. 이 이상 앞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해. " " 그런…. 그럼 이런 곳에서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는 거에요? "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부르스에게 대답을 구하기 위해 그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가인은 미처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입을 벌린 채 부르스를 멍하니 주시해야만 했다.A.I 슈츠도 입지 않은 그가 이 차가운 물 속으로 어떻게 들 어올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부르스. 그는 수면 위에 떠 있었던 것 이다! " 어,어떻게 이런…. " 기가 막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가인. 옆에 있던 마리도 놀라기는 마찬 가지였다. 사람이 수면 위에 떠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장면이란 말인가?!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 아…. " 하지만 가인과 마리는 곧 부르스의 발과 수면 사이에 놓여 있는 한 물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대나무 장대였던 것이다.아마도 용왕담 근처에 보 이는 저 대나무 숲에서 하나를 뜯어온 것 같았다. 부르스는 그 뜯어온 대나 무를 물 위에 던져두고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하,하지만 저런 거… 가능한 건가? 대나무 위에 올라타서 물 위에 떠있는다니… 말이 되냔 말이야! 부르 스는 그런 가인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 대나무의 얼마 안되는 부력을 이용해서 떠 있는 거니까 그렇게 이상한 눈 으로 보지 마라. " " 예에…. " 그,그래. 어차피 저 사람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사람이야. 지 금까지 말도 안되는 모습 만을 보여왔었잖아? 이제와서 저런 모습을 보인다 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 가인과 마리는 애써 눈 앞의 비현실적인 장면 을 합리화 시킬려고 노력했다. 어쨋든 이대로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은 불 가능한데… 어떡하지?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 하아… 도대체 이 곳 어디에 숨을 만한 데가 있냔 말이야,녀석들? " 그리고 그런 가인의 말을 받은 것은 진우도, 마리도, 부르스도 아닌 한 날 카로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 누가 숨어 있다는 거냐? " " .........?! " 그 목소리는 가인들의 머리 위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가인들이 흠칫 놀라며 위를 올려다보니, 그 곳에는 한 청포의 남자가 녹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가 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용마 인 초류향이었다! " 후, 네 놈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준비가 소홀한 감이 있지만… 마음껏 환영해주도록 하지. " - 탁! 초류향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그러자 놀랍게도 용왕담을 병풍 처럼 감싸고 있던 장군봉(將軍峰)을 비롯한 화구벽 오봉(火口壁五峰)에 불이 붙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불길은 빠르게 퍼져나가, 마치 용왕담에 가인들을 가두기라도 하는 것처럼 칼데라 호를 둘러싸 버렸다.화구벽에서 타 오르는 불길에 얼굴이 붉은 빛을 띄는 부르스가 초류향을 향해 말했다. " 잘도 환영해주는 군. 산불이라도 낼 셈이냐? " " 후후후후, 그럴리가…. 단지 2라운드를 위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였을 뿐. 이제 무대도 갖춰졌고, 선수들도 등장했으니… " 초류향은 수중의 섭철선을 용왕담을 향해 거칠게 휘둘렀다. " 남은 것은 설욕전 뿐이다---------!!!!!! " - 푸화아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용왕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배갑의 괴물. 바로 6일 전 롯데 백화점에서 가인과 시민을 공격했던 C-급 몬스터 길조였다! 거대한 거 북이와도 같은 이 괴물은 예의 붉은 빛을 몸 안에서 흘리며 거칠게 포효하고 있었다. - 스샤아아아아앗!! 그러자 한층 더 강해지는 붉은빛. 길조의 배갑에 달린 아켄석이 괴물을 수 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괴물에게서 흘러나오는 붉은 빛에 가인은 이 를 갈았다. 그래…. 저것이 바로 아켄석이란 말이지…! 저 돌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오라 공격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시 민 씨의 A.I 슈츠가 발하는 오라 장벽 마저 꿰뚫어 버렸다! 젠장! 용서할 수 없어, 네 놈! " …어라? " 하지만 괴물을 바라보던 가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녀석은 뭔가가 변해 있었다. 기분 탓인가? 녀석이 예전보다 더 크게 보이는 것 같은데…. 설마…. 그런 가인들의 놀라는 기색에 초류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 이 도도산의 용맥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하더군. 아켄석의 허기를 채우고 도 남을 오라가 이곳에서는 샘솟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설욕전인데 예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후후후후후,어디 너 희들이 가진 오라의 힘에 스스로의 목이 졸려 봐라! " " 제,제길…. " 가인들은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앞은 거대한 괴물이 다가오고 있 었고, 뒤로는 뜨거운 열기의 불꽃들이 그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퇴로가 완 전히 차단된 상태. 괴물을 해치운다고 해도 무사히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 을지 걱정 되었다. 그 정도로 불길은 거칠게 모든 것을 태우며 이제는 화구 벽 근처의 숲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저대로 불길을 놔두었다가는 산 밑자 락까지 다 불 타 버릴 것이다. 부르스의 옆에 있던 산신 태봉이 자신의 영역 이 불타오르자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 요로로로로로로…!!! " 안돼! 이대로는 도도산 전체에 산불이 옮겨 붙을 거야! " 오라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천계의 산이 불타버린다면 그 피해는 가이아에게 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그리고 그 재앙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삼차원의 차 원 결계에 까지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산신 태봉은 도도산에 산불로 피해가 속출하자 그 몸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저 불길이 도도산에 번져 나가도록 놔둬서는 안되는 것이다! "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 어떻게 하면 이 거대한 산불을 막을 수 있다는 거지?! 그건 우리들의 힘으 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가인과 마리,진우는 절망적인 눈으로 칼데라 호를 둘 러싼 불의 장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이렇게 빤히 눈 뜨고 도도산이 불타 버리는 것을 지켜봐야만 한단 말인가…?! " 젠장…. " 그때 나지막히 투덜거리는 부르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인들이 그를 돌아 보자 부르스는 어쩔 수 없다는듯이 한 숨을 내쉬며 그 몸을 움직였다. " 좋아. 특별히 서비스 해주마. " - 추확! 그리고 밟고 있던 대나무 장대에서 용왕담의 중앙으로 뛰어 오르는 부르스. 한번에 40m를 밑으로 흘려보내는 굉장한 도약력이었다. 하지만 중력에 의해 몸이 점차 호수 쪽으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는 200m깊이의 호수 속으로 빠져버릴 판이었다. 하지만 그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 팍! 부르스는 호수 속으로 빠져들기 직전, 오른발로 자신의 왼발 발등을 찍으며 그 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다시 한번 몸을 솟구쳤던 것이다! 그것은 발보 등공(跋步登空)이라고 하는 전설 속의 신법이었지만, 지켜보던 가인들로서는 단지 경악하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감탄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 휘리리리릭…! 그리고 허공에서 부르스의 몸은 마치 하나의 검은 회오리 처럼 거칠게 회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선형 운동에 의한 경. 바로 전사경이었다. 허공에 몸이 떠 있는 관계로 진각으로 기공을 끌어올리지 못한 부르스는 폭풍과도 같은 전사경으로 기공을 끌어 모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수면으로 떨어질 려는 순간! 부르스는 용왕담의 물살 속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동조(同調)… ' 그리고… ' 해방(解放)‥! - 푸카아아아아악-----------!!!!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부르스가 경으로 내려친 용왕담의 수면을 반 경으로 호수의 물들이 폭발하듯 원으로 터져올랐던 것이다. 마치 화산 폭발 이라도 일어나는 것과 같은 호수의 대분출! 거대한 물줄기들이 칼데라 호의 밖으로 뻗어 올랐다. 그리고 호수의 남쪽과 북쪽에 있던 화구뢰(火口瀨)들이 터져 나오는 물의 수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허물어져, 마치 폭포와도 같은 물 살들이 도도산의 협곡들로 쏟아져 내렸다. " 으앗…!!! " 가인과 마리, 진우는 터져나오는 물살에 떠밀려 간신히 화구 쪽의 절벽에 매달린채 산 밑자락으로 떠내려 가는 것 만은 모면할 수 있었다. 거친 물살 들로 인해 전신의 뼈가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그런 육체적인 충격 보다도 부 르스가 보여준 신적인 무용에 가인들은 정신적인 충격을 입어야만 했다.이건 정말이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능력이었다. 인간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인간이 이런 일을 해낼 수가…. - 후두두두두둑… 거센 물줄기가 지나간 뒤 내리는 물방울들은 마치 부슬 비 처럼 용왕담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칼데라에 괴어있는 물들은 대략 절반 이상이 산 밑자락 으로 흘러가 버리고, 용왕담은 작아진 모습으로 초라하게 칼데라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용왕담의 중간에는 회색 머리의 소년, 부르스 가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서 있었다. " 후우우우… " 부르스가 그렇게 용왕담의 물을 거덜내면서 경을 사용한 보람이 있었는지 칼데라를 감싸며 타오르던 불길들은 어느새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 뿐 만 아니라 산자락에 옮겨 붙던 산불들 조차 남김 없이 꺼져버린 것이다. 초 류향은 자신이 행한 일을 무위로 돌리는 부르스의 행동에 치를 떨며 분노했 다. 아니, 그것보다도 인간을 벗어난 부르스의 능력에 경악하고 있었다. " 네, 네 놈이란 녀석은…! " 하지만 부르스는 그런 초류향을 무시하며 화구벽에서 물을 털며 몸을 일 으키는 가인에게 말했다. " 내가 네 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줬다. 내가 말했었지? 저 괴물은 네 놈이 책임지라고! " - 스샤아아아아앗!! 그리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괴물의 괴성. 그러나 부르스의 음성은 그 무엇보 다도 똑똑하게 가인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 자, 어디 한 번 수련의 성과를 보여봐!! " " 으아아아아아아아---------!! " 가인은 부르스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신들을 돌아보는 거대한 배갑의 괴 물을 향해 오라를 내뿜으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 스샤아아아아앗!!! 길조의 날카로운 괴성이 가인의 귀를 파고 들었다. 그 바람에 순간 적으로 몸이 움찔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전신의 근육이 수축한 것일 뿐. 가인의 돌 격에 어떠한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 우우우우우우‥ 가인의 몸 안에서 푸른 오라의 회오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저 깊은 내면 속에 잠들어 있던 힘이 불똥을 튀기며 급속도로 과열되는 느낌. 하지만 그것 은 예전과는 틀린 반응이었다. ' 오라가 모이는 것이 느껴진다…! 지난 번과는 틀려! ' 수련을 받기 전만 해도 가인은 단순히 오라를 무작정 끌어 올려 사용하려고 만 했다. 오라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그 원천지 조차 느끼질 못했으며, 몸 안의 구석 구석을 파고드는 오라의 흐름도 느끼지를 못했었다. 무엇보다 자 신의 몸 속에 오라가 얼마나 있는지 조차 파악 못하며 많으면 많을 수록 좋 다는 생각으로 있는 힘껏 오라를 내뿜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 오라가 내 손끝과 발끝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느껴져.내 모공 하나 하나에 서 흘러나오는 오라의 숨결이 들려온다. ' 그것이 첫번째로 부르스가 가인을 단련시켜준 점이었다.부르스는 가인의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오라의 모습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침경(鍼經)으로 오라를 한 번 허물어 뜨리고 다시 되쌓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오라가 얼마 만큼 있는지, 그리고 차근 차 근 모이는 오라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응하게 되는 거지. 네 녀석은 지금 자신의 몸 속에서 흘러나오는 오라를 마치 눈에 보이듯 훤하게 조절할 수 있을 거다. ' 그것이 바로 오라 능력의 기초.무엇보다 자신의 힘을 최고조로 발휘하기 위 해 갖춰야할 능력! 오라의 컨트롤이었던 것이다! - 촤라라라라락!! 길조의 팔 다리가 배갑 속으로 들어가며, 예의 촉수들이 수십 가닥 배갑 속 에서 튀어 나왔다. 그 촉수들은 날카로운 독침들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가인 에게로 날아들었다. 수십 가닥의 독침들이 허공에서 번뜩이며 날아드는 모습 은 분명 섬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독침들을 노려보는 가인의 시선은 침착 하기 그지 없었다. - 쉬쉭! 우선 가인의 머리를 향해 두 개의 독침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그러나 가인 의 몸은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 공기의 흐름과 독침의 날아드는 소리,그리고 독침의 궤도가 눈으로 읽혀지고 있었던 것이 다. 그리고 외부의 공격이 시작된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몸이 최소한의 움직 임으로 공격에 반응하고 있었다. 머리를 노려오던 두 개의 독침은 아슬아슬 하게 가인의 양 볼을 스칠듯 지나갔지만 가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몸 을 틀어 가슴을 노리던 독침을 피해냄과 동시에 다리를 살짝 들어 정강이를 노리던 독침 또한 피해냈다.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 사사사사사사삭! 순식간에 15번의 독침 공격이 가인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며 무위로 돌 아갔다. 가인은 길조의 독침 공격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독침들은 처음부터 가인을 맞추지 않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 처럼 그 의 몸을 빗나가고 있었다. 그런 가인의 모습에 부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6일 내내 지겹도록 두드려 팬 보람이 나오는 군.육체가 대기의 흐름을 느 끼고 반응하고 있는 거다. 나의 발경에 얻어 맞던 기억이 네 놈의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거지. 그게 바로 환각지(幻覺肢)! ' 사지(四肢)가 절단된 후에도 마치 그것이 존재해 있는 것처럼 감각되는 현 상. 그것이 바로 환각지, 팬텀 라임(Phantom Limb)이라는 것이었다. 사지의 하나가 외상이나 수술 등에 의하여 상실되어도 대뇌에서는 상실된 팔다리에 관한 기능이 상당 부분 남게 되어 감각상 상실된 팔다리가 잔존하여 여러 가 지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부르스가 말한 환각지는 수련 으로 가인의 대뇌에 경의 충격을 각인시켜, 어떠한 외부의 공격에도 가인의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만든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가인은 부르스의 경 에 대한 충격이 몸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 충격을 다 시는 느끼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부르스 가 두번째로 가인을 단련시켜준 점이었다. - 탁! 탁! 마지막으로 날아들던 독 침 두 개를 손등으로 털어내듯 그 궤도를 바꿔 버 리는 가인. 그 순간,그는 길조를 공격할 수 있는 유효 공격 범위 안으로 들 어설 수 있었다. - 스샤아아아아아앗!! 괴성을 올리는 길조. 그리고 가인의 헤븐 스매쉬로 오라의 푸른 토네이도가 모여들었다. 좋아! 간다! " 으랴아아아아아압!! 천공권------------!!! " - 투카카카카카칵!! 짧은 시간 안에 최고조로 끌어올린 오라의 토네이도가 가인의 주먹에서 길 조에게로 뻗어 나갔다.그것은 용왕담의 화구벽을 뒤흔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 었다. 하지만 그 때,길조의 몸에서 터져나오는 붉은 아켄석의 수호막! 그 수 호막은 철벽의 방어를 자랑하며 가인의 토네이도를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 쿠구구구구구구구!!!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가인과 길조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대치하기 시작했다.가인의 헤븐 스매쉬에서는 천공권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뻗어나오고 있었고, 길조는 붉은 아켄석의 수호막으로 그것을 받아내 고 있었다. 그 충격으로 천천히 서로 뒤로 밀려나려는 가인과 길조. 하지만 가인은 이를 악물며 되려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고, 길조 또한 그 배갑을 직 각으로 세우며 천공권을 받는 면적을 크게 했다. 가인의 오라가 고갈하기 전 까지는 이 대치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때, 가인은 헤븐 스 매쉬를 뻗은 상태에서 자신의 왼쪽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 왼쪽 주먹에서도 푸른 오라의 회오리가 꿈틀거리며 무섭도록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 한번 더------!!! " - 투카카카카칵!! 제 이격! 제 2의 천공권이 가인의 왼쪽 주먹에서 터져나오며 길조의 배갑을 덮쳐 올랐다. 그 충격에 거칠게 뒤흔들리며 뒤로 주춤 물러서는 길조. 왼손 천공권의 가세로 한 순간, 그 대치 상황이 깨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길조 의 등에 박힌 아켄석은 한 층 더 짙은 붉은 빛을 흘리며 더블 천공권의 위력 을 견뎌내기 시작했다. 뒤로 밀리던 배갑의 움직임이 멈추며 천천히 가인 쪽 을 향해 길조는 다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 제길! 아무리 오라를 담아내는 아켄석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더블 천공권 마저 견뎌내다니… 반칙이라고! ' 이 정도면 아켄석의 위력에 질릴만도 했다. 그러나 가인의 눈빛은 아직 포 기한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 하지만…! ' 가인의 오른쪽 무릎으로 모여드는 오라의 토네이도. 그렇다. 그것 역시 천 공권이었다! 부르스와의 수련 도중에 가인이 사용했었던 바로 그 기술! " 이것도 견뎌내봐라! 헤븐 스트라이크(Heaven Strike)-------!!! " 양 손에서 천공권의 토네이도가 떠나가는 순간,거세게 오라의 토네이도가 모 인 오른쪽 발을 차올리는 가인. 그러자 더블 천공권의 뒤를 이어 제 삼의 천 공권이 가인의 발에서 길조의 배갑을 덮쳐 나갔다! 그것은 바로 발로 시전한 오라의 토네이도! 헤븐 스트라이크였던 것이다! -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 쇠가 찢겨져 나가는 것 같은 소리! 바로 길조의 배갑이 가인의 연속 천공권 에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 더블 천공권에 이은 헤븐 스트라이크 공격! 가인 의 천공권 연환 공격이 길조를 강타했다! - 스샤아아아아아아아앗!! - 퍼컹--------!! 순간, 가인의 헤븐 스트라이크를 견뎌내지 못하고 허공으로 튕겨오르는 길조. 괴물의 배갑은 팽이처럼 회전하며 공중을 선회하다가 칼데라 호의 화구벽 한 쪽에 거칠게 처박혀 버렸다. - 콰지직!! 그 충격으로 무너져내리는 화구벽. 괴물은 화구벽의 폐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괴성과 함께 칼데라 호로 가라 앉았다. '푸화하하학!' 용왕담의 얼마 남지 않은 물살들이 폭죽 처럼 터져오르며 길조가 사라진 폐허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런 폐허를 바라보며 가인은 고요한 눈길로 주먹을 움켜쥐었 다. 설욕전의 시작은 가인의 승리였다! " 큭…! " 한편, 칼데라 호의 화구벽 위에서 초류향은 청포를 휘날리며 수중의 섭철선 을 날카롭게 휘두르고 있었다.그러자 섭철선은 휘둘러지는 궤도를 따라 붉은 불꽃을 일으키며 허공을 수놓았다. - 촤아아아악!! 불꽃의 난무. 마치 한 마리의 뱀과도 같은 불꽃이 그 꼬리를 꿈틀거리며 날 아드는 오라의 검날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 오라의 검날은 날카롭게 불꽃 을 베어내며 초류향에게 휘둘러졌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식(五式) 요란(搖亂) " 그와 동시에 풍차처럼 휘둘러지며 초류향의 전신을 압박하는 붉은 빛의 검 광! 그런 피스 레드 성마리의 사정 없는 공세에 초류향은 표정을 일그러 뜨 리며 섭철선을 좌에서 우로 크게 그어 내렸다. " 이 보잘 것 없는 인간 암컷이 어디서…! " - 푸화화확!! 섭철선이 그어내린 공간에서 터져나오는 익스플로젼(Explosion). 연소 반응 도 없고,섭철선이 가연성 물질도 아니건만 폭압(爆壓)이 발생했던 것이다.그 것은 말 그대로 공간을 초속으로 찢어내어 마찰열로 발생시킨 기술.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폭압은 공간을 단열압축(斷熱壓縮)하여 고 열을 발생시켰고, 그 고열은 잇따라 폭발을 전하여 폭굉(爆轟:detonation)현 상을 일으켰다. 기체의 폭굉으로 속도 4000m/sec의 폭발파가 마리를 덮쳐 왔 던 것이다! - 투아아앙…!!! 마리의 상체를 감싸며 터지는 불꽃의 폭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초류향은 싸늘한 미소를 날렸다. 아무리 차원의 힘을 가진 오라 능력자라고 해도, 그 힘을 사용하는 육체는 한낱 허약한 인간 나부랭이. 분수에 맞지도 않는 힘을 가지고 이 초류향 님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 수식(守式)… " 그때, 폭발의 불꽃 속에서 나지막히 들려오는 한 목소리. 그리고 다음 순간 불꽃이 반으로 날카롭게 베어지며 좌우로 퍼져나갔다. " 파란(波蘭) " " .........?!! " 수식 파란. 마리는 불꽃의 흐름을 검광으로 둘러싸 산소와 불꽃을 격리시키 면서 그와 동시에 불꽃을 베어냈던 것이다. 그녀의 오라 능력은 '절단'! 그 능력 앞에서 마리가 베어내지 못할 것은 없었다. 마리는 불꽃을 헤쳐내며 그 안에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초류향에게 오라 소드를 거침 없이 내찔렀 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사식(四式)… 단월(斷月)! " " 트핫-----!! " - 퍼엉!! 초속으로 날아드는 오라 소드와 폭압을 동반한 섭철선이 부딪히며 거센 폭 발을 일으켰다. 그 충격으로 뒤로 튕겨지듯 물러서는 마리. 오라로 구현시킨 오라 소드의 절삭성 커터가 방금 전의 충격으로 절반 이상 날아가 있었다.마 리는 어깨가 빠질듯한 통증을 견뎌내며 이를 악물었다. ' 역시 5대 간부…! 괜히 몬스터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로군…! ' " 이 몸에게 겁 없이 덤빈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타올라라! " 일갈을 터뜨리며 불꽃으로 휘감긴 섭철선을 무방비 상태의 마리에게 휘두르 는 초류향. 마리는 그 공격을 피할려고 했지만 극심한 어깨 통증에 몸을 가 누지 못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대로 저 불꽃을 받아냈다가는 아무리 A.I슈츠 의 오라 쉴드라고 하더라도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 치이이이이잉…! 하지만 초류향은 뒤이어 들리는 물체의 잔향(殘響) 소리에 마리로 향하던 섭철선을 거두어 들이며 뒤로 날아올라야 했다.그런 그를 향해 한 녹색의 잔 광이 무서운 기세로 쇄도하고 있었다. " 슈팅------- 스타!!!! " " .........!!! " 피스 그린, 정진우.그의 오라 능력은 뇌의 주파수를 올림으로써 가능해지는 가속 능력이었다. 그의 가속 능력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슈팅 스타가 마리 를 공격할려던 초류향을 제지하고 있었다. 진우는 하나의 녹색 유성이 되어 초류향을 들이 받았다. - 투아아아아앙!!! 음속으로 움직이는 진우의 앞으로 쇼크 웨이브(Shock wave)가 형성되어 초 류향의 몸에 충격을 주었다. 쇼크 웨이브, 충격파는 공기와 같은 기체 속을 음속 보다도 빨리 전달되는 강력한 압력파로서, 음속 이상으로 움직일 수 있 는 진우이기에 가능한 기술이었다. 그런 진우의 슈팅 스타를 막아냈던 초류 향의 섭철선은 불똥을 튀기며 하늘 높이 튕겨 올랐다. " 크으으읏!! 이 잡것들이!! " " 그래. 그 잡것들한테 한번 당해봐라! " - 퍼퍼퍼퍼퍼펑!! 진우의 가속이 전개된 트래핑(Trapping:가까운 거리에서 사용하는 타격 테 크닉)이 눈 깜짝할 새에 초류향을 여덟 번 가격해 들어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진우의 주먹은 녹색의 잔상을 남기며 초류향을 쳐올렸다. 초류 향은 그런 진우의 트래핑을 불꽃의 벽으로 막아냈지만, 그 불꽃 조차 진우의 주먹이 뿜어내는 풍압으로 인해 날아가 버려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쓰러져 있던 마리도 진우가 엄호해주고 있는 틈을 타서 다시 초류향을 공격 해 들어갔다. " 크핫------!! " - 화르르르르륵!! 순간, 불꽃으로 몸을 휘감으며 풍차 처럼 몸을 회전시키는 초류향. 그러자 눈깜짝할 새에 초류향은 하나의 불꽃 돌개 바람이 되어 진우와 마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불꽃의 폭풍에 몸을 허용한 진우와 마리는 불꽃에 휘 감긴 채 허공으로 튕겨났다가 지면으로 처박혔다. " 으으…! " " 크흐읏…! " 신음을 흘리며 땅을 뒹굴어 몸에 붙은 불을 끄는 마리와 진우.A.I슈츠의 오 리하르콘은 불이 붙지 않는 소재였기에 불꽃은 A.I 슈츠의 표면 만을 쓸어가 다가 곧 꺼져버렸다. 하지만 진우와 마리는 뼈속까지 파고든 불꽃의 충격에 괴로워해야만 했다.A.I 슈츠의 방열 작용을 뚫고서 까지 들어오는 열기라니…. " 그래. 그게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벌레 처럼 꿈틀거리는 그 모 습이 말이지…! " 돌개 바람을 푼 초류향은 그런 둘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 보며 이를 갈 았다. 아무리 이들이 오라 능력자라고는 하지만, 한 순간의 틈만 허용했어도 당하는 것은 초류향 자신이었을 것이다. 인간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초류향에 게 있어서 이것은 더 없는 모욕이자 수치였다. 빌어먹을 오라능력자! 빌어먹 을 삼차원 같으니라고! 초류향은 살기를 흘리며 진우들의 숨을 거두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떨어뜨렸던 섭철선이 팽이 처럼 회전하며 그의 손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 게헨나의 불구덩이 속으로 처박아주마. 꺼져 버려라! " 그리고 막 섭철선이 불꽃을 머금으며 진우들에게 휘둘려지려는 순간…! - 피리리리릭!! " .........!! " 어디선가 날아온 날카로운 대나무의 창이 초류향의 섭철선을 꿰뚫고 지나갔 다. 그 바람에 섭철선을 놓치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초류향. 그런 그의 귀로 낮은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쯤에서 그만 두는 게 좋을 거야. " " ......네 놈…! " 초류향이 돌아본 곳에는 부르스가 유유하게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 금 전의 대나무도 그가 던졌던 것이다. 아마 수면에 띄워두고 그 위에 올라 탈 때 사용했던 그 대나무였던 모양이었다. 초류향은 그런 부르스의 행동에 분통이 터져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 정말이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끊임 없이 날 방해하는구나,인간!! " " 내가 예전에도 얘기하지 않았던가? 끊임 없이 방해하겠다고. " " 크으으으!! " 분노하는 초류향의 기분에 맞춰 그의 녹색 머리카락이 칼날 처럼 서기 시작 했다. 마치 악귀와도 같은 모습. 하지만 부르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 전혀 주 눅들지 않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 그만두라고 말했잖아. 어차피 화신(化身)으로 구현해 있는 이상, 지금의 네 놈에게는 승산이 없어. 아니면 그 잘난 네 놈의 육체라도 꺼내 볼 셈 이냐? " " 네 녀석‥! " " 그리고 내가 여기서 화신인 네 놈을 쓰러뜨린다고 해도,본체가 남아 있는 이상 네 놈은 또 어디선가 부활할테지…. 어차피 너와 내가 여기서 싸운 다는 것은 여러모로 피곤하고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거다. " " ......... " 부르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초류향은 어느새 아까의 분노한 모습을 사 그러 뜨리고 있었다. 초류향은 비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부르스에게 말했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 " 흐… " 그런 초류향의 반응에 낮게 웃음을 터뜨리는 부르스. 초류향의 성격 상 그 는 인간의 말을 귀담아들어줄 위인이 되지 못했지만, 눈 앞의 부르스가 상대 라면 말이 틀려진다.부르스는 유일하게 초류향이 인정하고 있는 삼차원 인간 으로서 '대등한' 존재였던 것이다. 부르스는 화구벽 밑의 칼데라 호를 손으 로 가리켰다. 그 곳에서는 길조와 가인의 싸움이 한창이고 있었다. " 저 두 놈에게 이 싸움… 맡겨두는 게 어떠냐? " " ......저들에게…? " 초류향은 부르스의 뜻 밖의 제안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 다. 도대체 이 인간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 " 내 제자 놈이 이긴다면 군말 없이 여기서 물러가라. 그리고 네 놈의 아휘 가 이긴다면… 뭐, 네 뜻대로 하도록. " " 내 뜻대로…? " 살짝 인상을 꿈틀거리며 그런 부르스를 노려보는 초류향. 부르스는 그런 그 의 반응에 피식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네 놈 뜻대로. 순순히 네 놈에게 당해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네놈 의 일은 방해하지 않도록 하마. 그리고 난 네 놈에게 손 끝 하나 댈 생각 이 없으니까… " " 사부님!!! " 부르스의 말에 진우가 기겁을 하며 그를 불렀다. 마리도 두 눈을 크게 뜨며 부르스를 노려보았다. 지금 저 인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란 말인가?! 저 5대 간부의 뜻 대로 하게 내버려두겠다니?! 그것도 그 승부에 가인을 걸 고서…!! 하지만 부르스는 그런 진우와 마리의 반응을 무시하며 초류향을 주 시하고만 있었다. " 어때? " " ......큭… 크크크… " 음산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초류향. 그는 부르스의 제안이 마음에 든듯 흡족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좋아. 그 제안… 받아들이지. 하지만 한 입으로 두 말하기는 없겠지? " " 네 놈에게 거짓말이나 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별 볼 일이 없어 보이냐? " " 크크크… 그래. 믿어주마,인간. " 그런 초류향의 말에 진우와 마리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부르스와 칼데라 호 의 가인을 돌아 보았다. 부르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 으로 칼데라 호의 전황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초류향은 그런 부르스를 바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 아켄석의 수호를 저런 미숙한 애송이가 깨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크크크… 승산이 없는 도박에 목숨을 걸다니… 인간이란 정말이지 어리석 은 존재로군…. ' 초류향. 그는 자신의 길조가 가인을 이김과 동시에 부르스를 제외한 이 자 리의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 투둑… 투둑… 길조가 가라앉은 폐허 위의 잔재들이 조금씩 들썩임을 보이고 있었다. 가인 은 주의 깊게 그 반응을 지켜보며 자세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래…. 그 정 도에서 끝날리가 없지. 놈은 아켄석의 수호를 받고 있지 않은가? 분명 자신 의 공격에 별 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 스샤아아아아앗!!! - 투화악!! 그리고 그런 가인의 생각대로 무너진 돌 더미 속에서 거칠게 몸을 일으키는 길조. 짙은 아켄석의 붉은 빛이 놈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그래….다시 한 번 덤벼 보라고…!! - 스샷! 스샷! - 투구구구구구구… 길조는 자신의 배갑 안으로 얼굴과 팔 다리를 집어 넣으며 회전하기 시작했 다. 그것은 예전 백화점에서 선보였던 롤링 공격이었다. 배갑이 회전을 개시 하자 그 밑에 있던 용왕담의 물살이 사방으로 날카롭게 튀어 올랐다.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며 길조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 온다…! ' - 촤아아아아아악!! 날카롭게 물살을 헤치며 가인에게로 날아드는 괴물의 배갑. 가인은 몸을 숙 여 자세를 낮추며 주의깊게 괴물의 배갑을 살폈다.좌우로 무시무시하게 회전 하며 돌격해오는 괴물의 배갑에는 전혀 공격할 틈이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저 배갑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가는 A.I 슈츠를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 의 몸은 걸레 조각 처럼 갈가리 찢겨질 것이다. ' 그렇다면… ' - 촤악!! 순간, 괴물의 배갑이 눈 앞에 날아들기 직전 재빠르게 슬라이딩하며 지면에 미끄러지는 가인. 그러자 길조의 배갑은 가인을 놓치고 그 위를 지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회전하는 배갑이 자신의 몸 위를 지나갈 때 가인은 재빨리 자 신의 두 다리로 오라를 끌어 모아 배갑을 향해 킥을 날렸다. " 이거나 먹어라! 라이징---------킥!! " 지면을 손으로 짚으며 괴물의 아랫배를 향해 드롭킥(Drop kick)을 먹이는 가인. 오라의 회오리가 모인 가인의 라이징 킥은 괴물의 아랫배에 깊숙히 박 힘과 동시에 발을 통해 천공권의 토네이도를 분출시켰다. - 투카카카카카칵!! 아무리 배갑이 철갑 처럼 단단하다고 하더라도 그 밑의 복갑(腹甲)은 배갑 에 비해 그 방어력이 약할 것! 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괴물의 복갑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헤븐 스트라이크를 괴물의 배에 먹인 가인은 용수철 처 럼 몸을 일으켜 재차 더블 천공권을 괴물의 복갑으로 날렸던 것이다. 길조는 그런 천공권의 집중 포화에 뒤로 튕겨지며 용왕담으로 떨어져 내렸다. - 퉁! 거칠게 회전하며 수명을 퉁겨 오르는 길조의 배갑. 가인은 그런 길조를 바 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지금 방식대로 녀석을 상대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한 건 자신! 가인은 그것을 염두 해두며 양 손을 자신의 양 어깨로 엇갈렸다. - 챙! 챙! 가인의 어깨 장갑 부분이 열리며 두 개의 오라 소드가 튀어나와 가인의 양 손에 잡혔다. 가인은 두 개의 오라 소드로 이도류를 취하며 다시 자신에게로 날아들려는 길조를 노려보았다. - 일탈해라! 너를 얽매이고 있는 그 고정된 틀을 부셔버리란 말이다! 부르스가 자신에게 던졌던 그 가르침. 그가 했던 말만이 가인의 머리 속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일탈해라. 일탈해라. 일탈해라! ' 일탈…! " - 위이이이이이잉!! 순간, 가인의 손에 들린 오라 소드로부터 마치 전기톱의 모터 소리 같은 회 전 소리가 터져나오며 오라의 검날이 생성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예전 가인 이 만들어내었던 바람의 검날이 아니었다. 작은 소형의 토네이도 같았던 그 검날은 오히려 회전하는 전기톱 같이 수직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과 같이 수평으로 회전하는 비효율 적인 바람의 검날이 아닌, 검날의 방 향으로 바람을 회전시키는 검날이었다. " 하아아아아아아…! " 그리고 가인의 등으로부터 시작되는 오라의 바람. 가인은 등으로 천공권을 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회오리 바람은 가인의 양 승모근으로부터 두 줄 기로 뻗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날개와 같은 모양을 형성하고 있었 다. 그것은 바로 바람의 날개…! - 우우우우우우웅! 가인의 등 뒤에 있던 오라의 토네이도가 프로펠러 처럼 회전하며 가인의 몸 을 길조에게 돌진시키기 시작했다. 길조는 그런 가인의 모습에 아켄석의 붉 은 빛을 짙게 뿜어내며 날카롭게 괴성을 내질렀다. - 스샤아아아아앗!!! 네 놈의 그 잘난 아켄석…!! 깨부셔주마! 가인은 백열하는 두 개의 오라 소 드를 엇갈리듯 쥐어올리며 길조에게 날아들었다. 벤다! 베어버린다! 네 놈을 이 두 자루의 검으로…!! " 간다!! 오라----------베기!! " - 츠아아아아앙!! 거친 쇳소리와 함께 길조의 배갑을 꿰뚫고 지나가는 가인.오라 소드의 횡방 향 회오리가 정확히 괴물의 배갑과 복갑 사이를 후려친 것이다.그리고 한 순 간, 길조의 배갑에 있던 아켄석은 그 붉은 빛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 투항! 폭음과 함께 수면에 튕겨 200여 미터를 날아가 화구벽에 다시 처박히는 길 조.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인의 손에 들려 있던 오라 소드의 검날이 천천히 그 회전을 멈추며 사라져 갔다.아무래도 방 금 전의 오라 운용은 아직까지는 가인에게 무리인 것 같았다. " 하아… 하아… 끝난… 건가?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인은 알 수 있었다. 아직 길조의 숨통은 끊어지지 않 았다는 것을…. 그래…. 하지만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난 반드시 시민 씨를 위해서라도 네 녀석을 없애야만 하니까! - 부스스스스… " 역시…. " 가인의 생각대로 길조는 끈질기게 화구벽의 무너진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 키고 있었다. 아켄석은 여전히 그 붉은 빛을 넘실거리며 길조를 보호하고 있 었다. 그래…. 젠장! 알고 있었다고!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테니까…! " 좋아…. 다시 한 번 간다! 오라----- " 가인은 수 중의 오라 소드들을 엇갈리게 잡으며 다시 오라 베기를 시전하기 위해 몸 안의 오라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때, 가인은 두 눈을 잠시 찡그 리며 감아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눈 앞으로 환한 빛이 쇄도해 들어왔던 것이 다. ' 이건…?! ' 그것은 바로 도도산의 정상 위로 슬그머니 그 모습을 드러낸 조양(朝陽)의 노을 빛이었다. 산자락 가까이의 하늘이 햇빛을 받아 붉게 물들고 있었다.가 인은 망연자실하게 그 아침 햇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날이 밝고 있었던 것 이다. 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며 한 사람의 이름을 마음 속으로 부르 짖었다. ' 시민 씨…!! ' - 삐삐삐삐삐삐…!! " 혈압과 맥박 수치가 계속 상승하고 있습니다! 체내에 잠적하고 있던 타슘 훼로시안나이드(PotassiumFerrocyanide)의 활동도 시작하고 있습니다! " " 모노클로널항체(monoclonal antibody)는 실패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지않 으면 환자의 생체 세포가 괴사할 겁니다! " " 닥터!!! " - 쾅!! 닥터는 스텝들의 상황 보고에 분통을 터뜨리며 시민의 곁에 있던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테이블에 놓여있던 의료기구들이 들썩이며 요란한 소리 를 냈다.스텝들은 평상시 온화하던 닥터의 이런 신경질 적인 반응에 입을 다 물었다. " 나도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만해!! " 제길! 닥터는 인상을 구기며 안경을 쓸어 올렸다.안경 안의 그 눈은 무력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시민의 상태는 급속도로 안 좋아지 고 있었다. 그녀의 몸 속에 잠재해 있던 독소가 빠른 속도로 그녀의 몸을 잠 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독을 막아내던 시민의 오라가 그녀의 체력이 다함 과 동시에 사라진 것이 주 원인이었다.닥터는 이를 악물며 자기 자신한테 다 짐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 하지만…! 기다리는 수 밖에…!!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는! " 가인과 진우, 그리고 마리가 병원체의 숙주를 한 시라도 빨리 제거해주는 수 밖에는! 그리고 그런 병실 밖에서는 안에서 들려오는 스텝들의 분주한 움 직임에 유리가 불안한 마음을 움켜쥐며 도도산에 있을 가인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오빠…, 제발 서둘러 줘…! " " 제길…!! 죽어! 죽어! 죽어어어엇!!! " - 위이이이이이잉!! 가인은 길조의 배갑에 달라붙은채 검날이 회전하는 오라 소드로 녀석의 몸 에 베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검날과 닿는 면적이 불똥을 몇 번 튀길 뿐, 길조의 배갑은 흠집 하나 나지 않고 멀쩡했다. 제길! 아켄석이 다 뭐야! 오라를 담는 그릇이 다 뭐냐고!! " 빌어먹을----!!! " 시민 씨를 돌려달란 말이야아아앗!!!! 가인은 짐승이 포효하는 것처럼 소리 지르며 다리로 배갑의 모서리에 몸을 고정한채 양 손에 들고 있던 오라 소드 들을 미친듯이 괴물의 배갑을 향해 휘둘렀다. 그 바람에 마치 폭죽놀이라도 하는 것 처럼 괴물의 배갑 위로 불똥들이 튀어 올랐지만 아켄석의 붉은 빛이 몇 번 번쩍이자 가인의 공격은 모두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 저 아켄석만 없애버린다면…!!! " 가인은 길조의 배갑에 박힌 흑빛의 돌로 시선을 돌리며 오라 소드를 치켜 올렸다. 마치 미친 황소에라도 탄 것 처럼 배갑에 탄 몸이 들썩였지만 가인 은 필사적으로 배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버텨내며 아켄석을 향해 오라 소드 를 내리쳤다. 바람의 검날이 닿자 아켄석은 마모되는 소리를 날카롭게 내지 르며 불똥을 튀겼다. - 카가가가가가강! " 제발 부숴져 버려!! "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인의 희망사항일 뿐. 아켄석의 수호를 받는 괴 물의 배갑 조차 뚫지 못한 그였는데, 오라를 담아내는 그릇 아켄석에게 가인 이 피해를 줄 수 있을리는 만무했다. 헛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 촤자자자작!! 괴물의 배갑 속에서 수십개의 촉수들이 튀어나와 배갑 위에 매달린 가인에 게 날아들었다. 가인은 순간 기겁을 하며 독침들로 번뜩이는 촉수들을 수중 의 오라 소드로 닥치는 데로 잘라 버렸다.하지만 워낙 경황이 없던 중이었는 데 다가 침착함까지 잃어버린 가인으로서는 모든 촉수를 막아낼 수 없었다. 그는 시민에게 위기가 닥쳤다고 생각하자 부르스와 수련했던 모든 것을 잊어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 으앗!! " - 핏!! 환각지를 적절히 응용하지 못한 가인은 순식간에 독침들의 세례를 당해야만 했다. 그래도 무의식 중에 몸을 움직였는지 촉수들에게 꿰뚫리는 사태 만은 면했지만, 예의 독침들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 대번에 가인의 몸은 피투성이 가 되어 버렸다. A.I 슈츠의 오리하르콘을 찢어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었지만, 길조의 아켄석이 오라를 막아낼 뿐만 아니라 오라 능력 그 자체를 무효화시켰기에 오리하르콘은 맥 없이 찢겨져 나간 것이다. " 으으으으!! " 가인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이 독침이 시민 씨를 그렇게 만든…!! 시민 씨 도 독침 한 번에 그렇게 쓰러져 버렸는데, 자신은 마치 난도질 당하듯 되어 버렸으니…!! ' 안돼! 버텨내야 해! ' 가인은 허겁지겁 품 안에서 포션을 꺼내 들었다. 배갑이 미친듯이 들썩이고 있어서 주사를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같았지만, 다행히도 포션은 권총 형의 고압주사기(high pressure injector)였기에 이런 악 조건 속에서도 주 사가 가능했다. 더구나 포션은 정맥 주사가 아닌 피하 주사였기에 고압주사 가 더더욱 효과적이었다. - 푹! 가인은 찢어져 버린 A.I 슈츠 사이로 주사기의 총구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약액이 강하게 분사되며 피부 내로 침투하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포션의 효과로 전신이 짜릿하게 떨리며 두 눈이 맑아졌다. ' 포션이 과연 이 독에 효과가 있을까?! ' 닥터는 시민 씨의 증세에 포션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렇다면 이렇게 주사한다고 해도 헛수고가 아닌가!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주 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 스샤아아아앗!! " ......어라…? " 그러나 가인이 포션을 주사한다고 잠시 틈을 보이자,길조의 촉수들이 그 순 간을 놓치지 않고 날아들어 가인의 전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가인은 눈을 크게 치켜 떴다. 뭐,뭐야?! 무슨 짓을 할려는 거야?! - 후우우우우우우… " ........!!! "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시작하는 괴물의 배갑. 가인은 괴물의 촉수에 묶여 꼼짝도 하지 못하며 배갑 위에서 대(大)자로 묶여있어야만 했다. 주위의 풍 경이 일그러지며 무시 무시한 회전음 만이 귓 가를 파고 들고 있었다. 이 자 식! 설마…!! - 투아아아앙!!! " 으헉…! " 순간, 지면을 퉁기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배갑.가인은 그 충격에 자신 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눈을 부릅 떴다.배갑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중력 에 의해 천천히 공중에서 그 움직임을 멈추며, 그 다음으로는 지면을 향해 무시 무시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떠,떨어진다! 떨어져!! - 휘릭! 떨어져 내리는 순간 배갑이 간단히 몸을 한 번 틀며 위에 있던 가인과 자신 의 위치를 바꿔 버렸다. 이 자세로 떨어졌다가는 가인은 지면과 배갑 사이에 압사 되어 한 줌의 핏덩어리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가인은 눈 깜짝할 새 에 눈 앞까지 들이 닥치는 지면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안돼! 이대로는 죽 는다!! " 으아아아아아아아아!!! " - 투카카카카칵!! 하지만 지면과 부딪히기 직전,가인의 가슴에서는 거대한 오라의 토네이도가 생성되어 지면을 후려쳤다. 온 몸이 포박당한 상태에서 가인은 충격을 피하 기 위해 가슴에서 천공권을 시전하여 지면에 부딪히는 것을 모면한 것이다. 배갑은 다시 허공으로 튕겨올랐고 그 사이에 가인은 등 뒤로 다시 천공권을 분출시켰다. "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엇!! " - 푸확!! 천공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끊어져 나가는 촉수들.그렇게 자유의 몸 이 된 것 까지는 좋았지만 가인은 분출시켰던 천공권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 고 거칠게 용왕담의 수면 속으로 처박혀 버렸다. - 푸화화확!! " 크헥…! 쿨럭! 쿨럭! " 물 속에서 허우적 거리다가 간신히 수면 위로 몸을 일으킨 가인. 그는 정신 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허둥대다가 손에 쥐고 있던 오라 소드들이 어디로인 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젠장! 촉수들을 풀어헤치고 나 오는 와중에 그만 놓쳐버린 걸까?! - 스샤‥스샤‥ 스샷! 상황은 가인에게 절망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인은 유혈이 낭자한 낭패 한 모습인데 반해 길조는 아켄석의 수호로 여전히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인은 지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 쥐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흠 뻑 젖은 것이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지만 가인의 두 눈 만큼은 전의 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 나… 반드시 해낼거야‥! 두번 다시 포기하지 않겠어! 이번 만큼은 시민 씨를 지켜낼 거야! ' 시민 씨…. 아직 무사한 거죠? 그렇죠? 아직 늦지 않은 거죠? 가인은 마음 속으로 되묻고 또 되물으며 헤븐 스매쉬에 오라를 끌어 모았다. 아켄석의 붉 은 빛을 흘리고 있는 길조의 모습이 그렇게도 증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시간 이 없어. 한시라도 빨리 네 놈을 없애지 못하면…!! " 네 놈을 없애지 못하면------!! " 가인은 고함을 내지르며 길조를 향해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인 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렇게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가인, 자신에게는 더더욱 승산이 없어진다는 것을…. " 저것 봐요,사부님! 소년에게는 아직 무리라고 했었잖아요! " 진우는 화구벽 위에서 용왕담의 상황을 지켜보며 원망스런 목소리로 부르스 에게 소리쳤다. 마리 역시 가인이 밀리는 모습에 당장이라도 칼데라 호 쪽으 로 뛰어내릴려고 했지만, 그것을 간신히 진우가 뜯어말리고 있었다. " 이것 놓으십시오,진우 씨! 이대로는 가인이 위험합니다! " " 하지만 마리 양…! " 진우는 자신들의 곁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초류향을 살펴보며 마리에 게 긴장의 눈빛을 보냈다. 초류향은 그런 둘의 기색에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약속을 깨는 순간, 네 놈들은 모두 죽는다. 조용히 있는게 신상에 좋을 거야. " " .........!!! " 마리는 두 눈을 부릅 뜨며 그런 초류향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초 류향은 그런 그녀를 비웃는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용왕담으로 시선 을 돌릴 뿐이였다. 마치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 같은 그 태도에 마리는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거망동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그 녀는 이를 악물며 이번에는 부르스를 돌아 보았다. 부르스는 인상을 구긴 채 길조와 사투를 벌이는 가인을 바라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마리는 그런 그 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 이게 다 저 사람 때문이야! 가인을 사지로만 몰아 넣다니! 어째서 우리 가 가인을 돕지 못하도록 하는 거지?! ' 그때, 부르스는 그런 마리의 눈길을 깨닫고서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부르스 의 얼굴을 대하자 마리는 알 수 없는 그 존재감에 부담을 느껴야만 했다. 부 르스는 카랑 카랑한 목소리로 마리에게 말했다. " 내가 한 행동이 불만인 거냐? 저 애송이 녀석에게 모든 것을 맡겨둔 게? " " ......그렇습니다. " 마리는 자신의 심중을 날카롭게 헤아리는 부르스의 말에 한층 기세가 수그 러져서는 불만이 섞인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부르스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 그렇다면 너는, 여기서 저 녀석을 돕는 게 진정 녀석을 위한 일이라고 생 각하는 거냐? " " ......예? " 갑작스런 부르스의 질문에 마리는 당황하며 반문했다. 무슨 의미지,그건…? " 녀석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런 이들은 흔히 두 가지 길을 걷게 되는데… 하나는 평생 자신을 탓하며 후회하는 인생 속에서 살 아가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 해서든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 해 발버둥을 치는 것이지. 너라면 어느 쪽을 추천하겠냐? " " 하,하지만 그것과 이건…! " " 여기서 놈을 도와주면 언제까지나 녀석은 기대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또 다시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겠지. 알겠냐? 남에게 의지하기만 해서는 절대로 강해질 수 없는 거야! " " .........!! " 마리와 진우는 아무런 할 말을 찾지 못하며 부르스를 바라 보았다. 부르스 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용왕담의 가인을 주시하며 말했다. "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일어서는 수 밖에 없다.그러니 녀석 을 믿어라. 녀석이 스스로의 힘으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올 때 까지 기 다려! 그것이 녀석을 위한 일이고, 우리가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다. " " ......... " 마리는 그런 부르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의 말이 옳았다. 난 왜 그렇게 가인을 믿지 못하고 안절부절했던 것일까…. 진정으로 그를 돕는 길은 믿고 기다리는 일 뿐이었거늘…. ' 믿을게,가인…. ' 유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 아이도 가인을 믿겠다고 했었지…. 유리는 이 사실을 알고서 그렇게 자신에게 말했던 것일까. 마리는 가인을 믿지 못하 고 안절부절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져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믿겠어,가인. 그러니까… ' 부디 무사히 돌아와 줘…! ' 마리는 떨리는 눈으로 전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한편, 정작 가인을 믿으 라고 말했던 부르스는 뭐가 그렇게도 맘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구기며 가인 을 노려보고 있었다. ' 바보 자식, 그렇게나 가르쳐줬건만 당황하자 다 잊어버린 거냐? ' 아마도 날이 밝아오며 시민의 상태가 위험해지자 가인의 집중도가 현저하게 떨어진 모양이었다.저 잡념덩어리 같으니라고…! 가인의 산만하고 답답한 모 습에 부르스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 진정으로 일탈해라.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다…! '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란 말이다, 오라의 주인!! " 하아‥ 하아… " 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는 몸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 힘을 다 했다. 마치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정신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마 길조의 독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포션으로는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군…. 젠장. 눈 앞이 침침해져 가고 구토가 일어날 것만 같 아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용왕담 속으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다. ' 안돼!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어…! ' 자신을 막아서며 대신 길조의 촉수에 몸이 꿰뚫렸던 시민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가인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병원의 침상에 누워 의식을 회복하 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은 얼마나 마음 속으로 맹세하고 또 맹세했는 가! ' 그녀를 반드시… 내 손으로 구해내겠다고…!!! ' 난 아직…! 시민 씨에게 제대로 용서 조차 빌지 못했단 말이야아아앗!!! " 이야아아아아아압-----!!! " 가인은 피투성이가 된 채 촉수들을 환각지로 피해내며 길조의 안 쪽으로 파 고들었다. 네 놈을 죽인다! 반드시 시민 씨를 깨어나게 하겠어!! 그리고 그 녀에게 용서를 빌어야 해!! 난 그러기 전까지는 절대 네 놈에게 지지 않아!! " 천공---------!!!! " 가인의 헤븐 스매쉬로 거칠게 모여드는 오라의 기운! 이미 수차례 천공권으 로 길조를 공격했지만 소용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인은 이 기술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자신에게는 이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천공권이 상대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 젠장------!!!! ' 가인은 오라의 토네이도가 생성되는 헤븐 스매쉬를 괴물의 배갑을 향해 내 찔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가인의 눈에 보인 세상은 슬로우 모션 처럼 그 움 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주위의 소리도 고장난 오디오에서 나오는 소리 처 럼 늘어지고 있었고, 길조의 움직임 또한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려졌다.하지 만 가인의 의식 만큼은 너무나도 또렷하게 주위의 시간에 영향 받지 않으며 끊임 없이 사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미묘한 경험이었다.가인은 아 직도 배갑을 향해 내찔러지고 있는 자신의 헤븐 스매쉬를 멍청한 눈으로 바 라보며 중얼거렸다. ' 이대로… 녀석에게… 천공권을‥. ' 그러나 그런 주위의 느린 시간 속에서도 가인의 귀를 통렬하게 내찌르는 한 목소리가 있었다. " 그게 아니야-------!!! " " .........!!!! " 가인의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것 처럼 파고드는 고함 소리.그것은 부르스의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가인은 수 많은 기억의 파편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이 아둔한 녀석아! 어째서 그렇게 꽉 막혀있는 거냐?! 나이도 어린 놈이 어째서 그런 좁은 사고 밖에 하지를 못하는 거냐고! 부르스…. 그의 경을 처음으로 피해냈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 일탈해라! 너를 얽매이고 있는 그 고정된 틀을 부셔버리란 말이다! 일탈…. 그건 도대체 뭐지? 어떻게 나를 얽매이고 있는 고정된 틀을 부수라 는 것일까? 부르스. 모르겠어요. 난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요…. - 아켄석은… 오라를 담는 그릇의 역할… - 아켄석의 수호를 받고 있는 한 녀석에게는 어떠한 오라도 무용지물… 아켄석…. 어떻게 하면 그 돌 안에 있는 녀석을 공격할 수 있는 거지? - 그 껍질 안에 숨어있는 녀석에게 타격을 주지 않는 한 지난 번과 같은 결 과 만을 초래할 뿐… 껍질 안에 숨어있는 녀석에게 타격을 주지 않는 한…. 아켄석의 수호 안에 있는 녀석에게 타격을 주지 않는 한…. ' 아켄석의 수호 안에 있는 녀석에게 타격을 준다면…?! ' 순간,멈춰있던 그 모든 시공간이 다시 원래의 속도 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인의 헤븐 스매쉬는 오라를 한껏 머금은채 괴물의 배갑으로 내찔러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급한 상황 속에서도 가인은 부르스의 목소리 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 일탈해라! 일탈!!! 알았다! 드디어!!! 그와 동시에 가인의 권에서는 망설임이 사라졌 다. 가인은 이를 악물며 길조의 배갑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내찔렀다. - 투하아아아아아악!!! 울려퍼지는 둔탁음!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가인의 손에서는 천공권이 나가 지도 않았고, 괴물 또한 별 다른 피해를 입고 있지 않았다. 가인은 단지 괴 물의 정면에 주먹을 내찌른 것 뿐이었다. 결국 가인은 부르스의 가르침을 깨 닫지 못한 것일까? " ......... " 주먹을 찌른 상태에서 길조를 노려보고 있는 가인. 그런 가인을 앞에 두고 길조는 아무런 반응 없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르스와 마리, 진우, 초 류향은 숨 쉬는 소리 조차 내지 않으며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 리와 진우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 어,어떻게 된 거지…? " 그리고 부르스는 입가에 가는 미소를 지었다. " 해냈구나,꼬마야. " - 쿠구구구구구구… 순간 들려오는 거대한 진동 소리. 마치 저 깊은 땅 속에서 드릴이 회전하며 지면을 파헤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칼데라 호의 지 하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길조의 배갑 안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였던 것이다.그리고 길조의 배갑은 희미하게 떨리다 가 곧 눈에 보일 정도로 거칠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 트트트트트트트트…!! 마치 무엇인가가 길조의 몸 안에서 부터 그 속을 헤집고 밖으로 뛰쳐 나올 려는 것 같았다. 그런 길조의 모습을 바라보며 초류향은 침착하던 자세를 잊 어버리고 당황했다. " 뭐,뭐지?! 무슨 짓을 한 거냐?!! " - 투카카카카카카칵!!! 그리고 그런 초류향의 물음에 답한 것은 길조의 몸 속에서 터져나오는 4개 의 토네이도였다. 그 토네이도는 마치 천공권의 그것과 흡사했는데, 지금 그 살인적인 돌개 바람들이 길조의 내부에서 부터 모든 것을 발기 발기 찢으며 밖으로 튀어 나왔던 것이다. - 스샤아아아아아앗!!! 괴성을 지르며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토네이도에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하는 길조. 그것은 아켄석의 수호를 받아오며 지금껏 의기양양했던 모습 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런 길조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인은 굳 은 얼굴로 주먹을 내찌른 자세를 풀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게 된 진우와 마리는 부르스에게 말했다. " 사부님? 도대체 가인이 녀석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 " 그 철벽같던 아켄석의 수호를… 어떻게 해서… " 그들의 적인 초류향 조차 이 상황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마치 대답 을 구하듯 부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부르스는 낮은 웃 음 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 그리 멍청한 녀석은 아니었다는 거다. 제법 머리를 잘 굴렸어. 천공권을 적의 내부에서 부터 발생시킬 줄이야…. " " …예? " 천공권을… 적의 내부에서 발생시켰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마리가 여 전히 모르겠다는듯 인상을 굳히며 부르스에게 물었다. " 그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 " 흐…,녀석은 이번 수련 기간 동안 천공권을 주먹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체 부위로도 쓸 수 있게 되었지. " 분명 그의 말대로 가인은 양 손부터 다리까지, 심지어는 가슴과 등으로부터 도 천공권을 사용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녀석은 이제는 천공권의 시작점 또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 다. 신체 부위에서 부터 오라의 토네이도를 생성시키는 게 아니라 몸으로 부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천공권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거지. 그래 ….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몬스터의 내부에서 부터 천공권을 만들어냈 다던가…. " " 아! " 그제서야 진우와 마리는 부르스의 설명을 알아듣고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가인은 주먹에서 떨어진 거리,적의 내부에 시작점을 만들어 그 안 에서 부터 오라의 토네이도를 생성시켜낸 것이다.당연히 그 토네이도들은 아 켄석의 수호를 받지 못하는 적의 내부를 찢으면서 밖으로 빠져 나오게 된 것 이고… " 뭐, 아직 멀었지만… 일단은 이 정도에서 만족해 줘야 겠군. " 부르스는 전투에서 승리한 자신의 제자를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자, 약속을 지키시지. " 부르스는 폐허가 된 용왕담에서 가인의 옆에 선채 담담한 눈초리로 초류향 을 돌아보며 말했다. 초류향은 산산히 찢겨나간 길조의 사체를 내려다 보며 분노로 어깨를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그는 지금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 었다.자신의 길조가 진 것도 그러했지만, 설마 자신이 이런 인간들한테 패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초류향. 그는 그 자존심 만큼이나 자신의 명예를 중시할 줄 아는 자 였다. 초류향은 잔혹하게 구겨진 얼굴로 부르스에게 말했다. " 그래….약속은 지킨다. 하지만 이 수치는 후에 네 놈들의 피로 갚아주겠 다. " " 능력이 된다면 그렇게 해보도록. " " 크읏…!! " 초류향은 끝까지 빈정거리는 부르스의 말에 이를 갈며 불꽃과 함께 용왕담 에서 사라져 버렸다.그렇게 5대 간부 중의 하나가 사라져 버리자 마리와 진 우는 지금껏 참고 있던 긴장감을 풀어 버리며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 털썩…. 그때, 그들의 곁에 있던 가인이 마치 실 끊어진 인형 처럼 맥 없이 땅으로 거꾸러졌다. 그런 가인의 모습에 진우와 마리가 당황하며 그를 부축했다. " 이봐! 괜찮아,소년?! " " 가인! 어디를 다친 거냐! " 그런 그들에게 가인은 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뇨…. 단지‥ 긴장이 풀려서… " 그러나 단순히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길조에게 타격을 입었 던 것도 있었고, 감염됐던 병원체가 숙주의 소멸로 인하여 가인의 몸 안에 서 해독 작용을 일으킴과 동시에 현기증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것만 보더라 도 가인이 길조와의 사투에 얼마나 기력을 다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가인은 그런 피로 속에서도 절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보다… 어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시민 씨를 만나지 않으면… " 그런 가인의 말에 진우와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들도 시민의 상태가 걱 정되었던 것이다. 어쨋든 서둘러 용왕담을 떠날려고 하는 가인들. 그들을 바 라보며 부르스는 용왕담 바닥에 떨어져 있는 흑빛의 아켄석을 회수한 채 중 얼거렸다. "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군. " ' 나는… 시민 씨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할까… ' 가인은 정신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넝마 조각인 A.I 슈츠를 껴입은 채 미 친 사람 마냥 병원의 복도를 달리고 있는 가인을 본 간호사들이 짤막한 비명 을 내질렀다. 가인의 머리와 A.I 슈츠 밖으로 드러난 상체에는 붉은 핏 자국 들이 덕지 덕지 붙어 있어서, 외관 상으로는 금방이라도 출혈과다로 쓰러질 중환자 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그런 간호사들의 시선을 신경 쓰 지 않으며 일주일 전 시민이 입원해있던 병실을 향해 달렸다. ' 그녀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해…. ' 모든 것은 유가인,그 자신의 죄. 그녀가 다친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었다. 시민은 무모하게 날뛰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쓰러져야만 했었다.혼수 상태의 그녀 앞에서 자신은 그 얼마나 무기력하고도 나약했던가. ' 비록 날 용서해주지 않더라도… 나는… 시민 씨에게… ' 애초에 그녀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평생 날 미워하 고 원망해도 좋다. 단지 살아만 있어준다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준다면…. 나에게 그 미소를 보여주지 않아도… 나에게 그 따뜻한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도… ' 다시 깨어나주기만 한다면…! ' 도도산의 정상에서 언더 그라운드 유레카로 돌아오니 어느덧 해는 저물고 저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유레카의 인공 조명 또한 그런 시각에 맞춰 저녁 노을 같은 오렌지 빛 석양을 만들어내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 석양 같 은 빛살이 메디컬 센터의 창문들로 들어와 병원의 복도를 노랗게 물들여 주 고 있었다. 그리고 가인은 시민의 병실 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 시민 씨…. ' 순간, 병실 문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려던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 움직임 을 멈춰야만 했다. 막상 문을 열려고 하니까 손이 움직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녀를 보기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자신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겁이 나고 무섭기도 했다.하지만 자신은 확인해야만 한다. 모든 것은 나의 죄.내 두 눈 으로 시민 씨의 생사를 똑똑히 확인해야만 해. - 달칵… 문이 열리고 천천히 병실 안의 풍경이 보여왔다. 그리고 그런 병실을 바라 보던 가인의 두 눈이 순간 당황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 아무도… 없어‥? " 그 많던 의료기구들이 아무 것도 없었고, 의사도 간호사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 씨가 누워있어야 할 침대에 그녀는 없고, 하얀 시트 만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시,시민 씨가 없어? 어디로 간 거지?! ' 설마… ' 내가… 너무 늦어 버린 건…. 가인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아찔 해져 그만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 왔다. ' 아,아니야… 유가인…. 아직 제대로 확인한 건 아무 것도 없잖아‥그렇게 섣불리 생각할 건… '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시민 씨가 왜 병실 안에 없는 거지?! 그녀가 완 쾌됐다고 하더라도 아직 치료를 더 받아야 할 텐데…! 이렇게 빨리 병실을 옮길리가 없는 것이다! 병실에 그녀가 없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 ' 나… 늦어 버린 건가…. '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가인 이 그렇게 몸을 떨고 있을 때, 진우와 마리, 부르스가 뒤늦게 병실에 도착했 다. 진우는 숨을 몰아쉬며 가인에게 소리쳤다. " 이봐, 소년∼! 그렇게 먼저 가버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 하지만 진우는 가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닫고서는 굳은 표정으 로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시민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자 당 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시,시민 양… 어디로 간거지? " " 가인! 어떻게 된 거야! " 마리는 무릎을 꿇고 몸을 떠는 가인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가인은 떨 리는 눈동자로 마리를 바라보며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마리는 그런 가인의 태도에 이를 악물었다. 그럴리가…! 시민 씨, 이미 늦어버린 건가?! 시민의 미소짓는 모습이 마리와 진우의 눈 앞에 아른거렸다. - 촤륵… " 어머…? " 그때 그들의 뒤에서 한 금속음 소리가 나자 모두의 시선이 그 쪽으로 집중 되었다.그 곳에는 한 금발의 여인이 휠체어를 탄채 의아한 표정으로 가인들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인을 바라보던 모두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 시,시민 씨…? " 그렇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여인은 다름 아닌 피스 옐로우, 한시민.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의 뒤에서는 피스 핑크, 이유리가 시민의 휠체어를 밀 어주고 있었다.시민은 멍하니 자신을 주시하고만 있는 가인들에게 말했다. " 다들… 왜 그러고 계시는 거에요? " " 시,시민 양? 정말 시민 양입니까? " 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되묻자, 시민은 예의 환한 미소로 진우의 질문에 답했다.그제서야 진우는 환호를 내지르며 시민에게 달려가 그녀의 두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고, 마리 또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부르스는 부 루퉁한 얼굴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아마도 자신이 소외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때,그런 일행의 뒤로 닥터가 나 타나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시민 양,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으니까 병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되도록 자제해달라고 했잖습니까? 그리고 진우 군. 병원에서는 좀 더 정숙해주세 요. " " 아,닥터!! 시민 양은 완전히 치유된 겁니까? 이 휠체어는 또 뭐에요? " 자신을 보자마자 대뜸 질문하기에 바쁜 진우의 태도에 닥터는 쓴 웃음을 지 으며 답했다. " 걱정말아요,진우 군. 시민 양의 상태는 극히 양호하니까. 그녀의 몸에 있 던 독극물은 완전히 해독되었고 후유증도 지금까지는 발생하고 있지 않습 니다. 이제 안심해도 좋은 단계에요. 그리고 휠체어는 그녀의 파열된 척 추가 아직 재생된지 얼마 안되었기에 만약을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어요? " " 그렇군요! " 진우와 마리는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닥터는 그들의 반응에 미소 지었다. 그때, 휠체어의 시민은 아무 말도 없이 진우들의 뒤에서 고개만 숙 이고 있는 가인을 발견하고서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 …가인 씨? 거기서 뭐하고 있어요? " " 아…. " 가인은 시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몸을 움찔 떨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차마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자신 하나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면서 의식을 잃고 있던 그녀였다. 다행히 그녀가 완쾌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이제와 서 시민을 웃는 얼굴로 마주하겠는가. 가인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내 시 민에게 말했다. " 시,시민 씨….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 시민 씨, 죄송해요. 모두 저의 잘못이었어요. 저만 아니었더라면 시민 씨가 그런 일을 겪으실 필요도, 이렇듯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시지 않으셨어도 됐 을텐데… 모두 저 때문에… 제가 잘못해서… " 정말이지… 저는…저는… " 가인은 목이 막혀 뒷 말을 흐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에게 용서를 빌고 또 빌어도 자신의 죄는 씻겨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아픔을 준 자 기 자신부터가 용서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죄송하다는 말을 하 는 것 조차 뻔뻔스러운 것 같았다. 그런 가인을 시민이 조용한 목소리로 불 렀다. " 가인 씨…. 그렇게 계속 저한테서 등 돌리시고만 있으실 거에요? " 그녀의 말에 가인은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시민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 전히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시민은 천천히 그 감홍빛 눈동자로 가인을 살펴보았다. 가인은 핏투성이에 A.I 슈츠 복은 찢어 져서 그야말로 낭패한 모습이었다.가인이 요 일주일간 얼마 만큼 고생했는지 는 지금의 그 모습이 잘 가르쳐주고 있었다. 시민은 천천히 휠체어를 움직여 가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죠? " 아,아뇨…. 저 같은 놈 보다는 시민 씨가 훨씬… 훨씬… " 아…. " 가인은 자신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는 시민의 손길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런 그에게 시민은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말을 이었다. " …모습이 말이 아니에요. 그 동안… 많이 힘들었죠? " " 그,그렇지 않아요….저 보다는… 저 같은 녀석보다는…시민 씨가 훨씬…! " 시민 씨가 훨씬 힘드셨잖아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에요! 가인은 자 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시민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죄책감이 눈녹듯 사라져 가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시민의 따뜻한 미소를 마주하자 다 시 그녀가 좋아지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유가인, 너 한테 이럴 자격 이 있는 것 같아? 그런 짓을 해놓고도 이렇듯 시민 씨의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거냐고! 나는… 나는… - 사락… 순간 가인의 머리 속에 있던 수 많은 상념들이 사라져 버렸다. 시민이 가 인의 머리를 자신의 품 안으로 깊이 끌어 안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속 삭이듯 가인에게 말했다. " 고마워요,가인 씨…. 절 구해줘서…. 그리고‥ " 난… 나는… " 저 때문에 애써줘서…. " " 아아아… " 그 말에 결국 가인은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눈물 은 말라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나한테는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다고 생 각했었는데…. 가인은 시민의 품 안에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자신을 안아주고 있는 시민의 품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마리와 진우, 유리, 닥터는 눈시울을 붉히며 미소 지었다. 이제서 야 어긋났던 톱니 바퀴가 들어 맞으며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부르스 는 시민의 품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가인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제 한 목숨 보존하는 것 조차 힘든데 하물며 남까지 생각해 줄 여유는 없는 노릇이지. " 가인은 부르스의 말에 시민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부르스 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가인은 그 안에서 한 줄기의 따뜻함을 느 낄 수가 있었다. " 하지만 너는 모두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다.너에게는 무한한 오라의 가 능성이 있으니까. 오라를 믿어라. 그리고… " 부르스의 다음 말을 가인은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 소중한 이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라. 너는 오라의 주인이니까. " <제 12 화 중국에서 온 사자 完> 次回豫告 진우: 저건… 배트맨? 시민: 저건… 스파이더맨일지도? 10월로 접어든 어느 날, 갑작스레 나타난 새로운 타입의 몬스터! 시더: 아앗! 가면 라이더!! 역시 녀석은 매니아 였어!! 비공식 명칭 '히어로 매니아(Hero Mania)'의 등장! 그의 등장으로 기술 부 치프 시더 웰리스는 불타오른다!! 第 13 話 흔들리는 마음 도심을 누비며 활약하는 히어로 매니아에게 오라의 천공권을 먹여라,유가인!! 테레이아: 가인… 날‥ 혼자 두지마…. 가인: 테레이아…?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Ｖolume.3 " 하지연의 노처녀 탈출기 " =-=-=-=-=-=-=-=-=-=-=-=-=-=-=-=-=-=-=-=-=-=-=-=-=-=-=-=-=-=-=-=-=-=-=-= " 하 선생님∼ " 지연은 교무실에서 자신을 부르는 한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가 익히 잘 알고 있고 되도록이면 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것 이었다. 지연은 예의 담배를 입에서 질겅 질겅 씹는 태도를 고수하며 뜨악한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에게 답했다. " 아아…. 왠 일이세요, 박 선생님. " 박미정. 눈 앞의 여인의 이름은 그러했다.이 평범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 녀는 무척이나 비평범하고도 특별한 위치의 여인이었다. - 양호 선생님. 그렇다. 그녀는 어느 학교에서나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양호 선생님 이었던 것이다.그런 희귀성을 제하고서라도 미정은 한성 고등학교 내에서 여 러가지 의미로 특별한 여인이었는데… 그 첫번째로 특별한 이유를 꼽자면 그 녀는 언제나 옅은 분홍빛의 간호복을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건강 을 책임지는 양호 선생으로서 보건 상 청결한 의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지만 왜 하필 그 청결한 의복이란 것이 반드시 간호복이어야 하는 지는 의문이었다. 거기다 그 간호복이란 것도 초 미니 스 커트에 잘 빠진 각선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문은 더더욱 증폭되 고 있었다. 아,그리고 그렇게 초 미니 스커트 라면 겨울에 춥지 않겠느냐고? 박미정. 그녀는 한국의 4계절 기후에 맞춰서 4가지 타입의 간호복을 구비하 고 있었다. " 왠 일이긴요∼ 잘 아시면서 모르는 척 하시긴∼ "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미정이 말하자 그녀의 뒤로 출처 불명의 꽃잎들이 날 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특별한 두 번째 이유였다. 살짝 얼 굴을 붉히며 뭔가 의미있는 미소를 그녀가 지을 때 마다 한 번도 빠짐 없이 그 뒷 배경을 꽃잎들이 장식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뿌려주지도 않았고, 무엇 보다 한성 고등학교의 화단에는 꽃들이 피어있지도 않다는 점을 주목해 볼 때 꽃 잎들이 나타난다는 건 분명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지연은 그런 미정의 모습에 창백해진 안색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꽃잎들이 어디서 날아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연은 그 이유를 한사코 알고 싶지도 않았다. " 그,글쎄요…. 전 무슨 말씀이신지 잘…. " ．． ． ． " 못 됐어,하 선생님도∼ 저번에 말씀드렸던 맞선 말이에요∼ 맞 선∼ " 세번 째로 미정이 특별한 이유.그녀는 다름 아닌 엄청난 마당발을 자랑하는 전적 100전 100승의 중매쟁이였던 것이다. 일단 한성 고등학교 내의 모든 솔 로 생활을 하던 교사들이 그녀의 중매를 거친 직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결 혼으로 골인하게 되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미정은 그런 식으로 연태까지 한성 고등학교 내에서 지연 이외의 모든 교사를 결혼시켜 버린 것이다. 지연 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 그,그건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전 별로 관심없다고… " " 그런∼∼!!! 하 선생님은 여성의 행복을 모욕하시는 겁니까---!!! " - 타앙! 단번에 테이블을 내리치며 강경 모드로 들어선 미정.그녀의 기세에 맞춰 뒷 배경의 꽃잎들도 거칠게 휘날리기 시작했다.미정은 초롱 초롱하게 눈을 빛내 며 두 손을 맞잡은채 말했다. " 이 괴롭고 험난한 인생 역정을 헤쳐나가기 위해 자신의 반려자를 맞아들 이는 것! 오직 자신 만을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남자와 함께 행복한 가정 을 꾸려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결혼인 것이에요!! 그런 궁극의 행복을 지양하고 선망해야 할 한창 나이의 처녀가 결혼에 대해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다니! 그것은 죄에요! 용서받지 못할 죄인 것이에요! 하 선생님의 그 말씀은 한 사람의 여자로서 가볍게 듣고 넘길 수가 없군요! " " 그,그런…. 박 선생님도 아직까지는 솔로시잖아요‥! " 지연은 미정이 펼치는 인생행복결혼찬양론을 견디다 못하고 그만 소리쳐 버 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정은 암흑으로 물든채 추욱 늘어지며 우울하게 말했다. 그녀의 뒷배경의 꽃잎들도 급속도로 시들어 가고 있었다. " 그,그래요‥. 어차피 나 같은 여잘 받아주는 매니악한 취향의 남자 따위 는… 유라시아 대륙 전부를 뒤져봐도 없으니까… 흑…. " 어째서 그 범위가 유라시아로 한정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뒤로 하 고,미정의 말대로 그녀는 지연과 더불어 한성 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결혼하 지 않은 노처녀였다. 거기다 지연 보다 한 술 더 떠서 내년이면 미정의 나이 는 서른 셋! 생긴 것은 완전히 10대 소녀 같으면서도 그렇게 나이가 먹었다 는 것 또한 미정의 특별한 이유 중의 하나였지만…. 어쨋든, 그렇게 유능한 중매쟁이 이면서 정작 자신은 여지껏 솔로라는 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 특별한 요소들을 고려해본다면 그리 이해 못할 일 도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 남들을 중매해주는 것에 강한 집착 을 보이는 것도 다 이런 마이너스한 자신의 상황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강렬 한 욕구의 한 발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지연은 교무실의 한 구석에서 쪼그리 고 앉아 마이너스한 기운을 뿜어내는 미정의 모습을 외면할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 저,저기 박 선생님…. 생각은 해볼테니까… " 그 순간, 교무실을 뒤덮던 모든 마이너스한 기운이 먹구름이 걷히듯 사라져 버리고, 미정은 다시 꽃잎을 휘날리며 지연의 손을 맞잡았다. " 그래요?! 알았어요, 하 선생님! 현명한 선택을 하셨어요! 이제부터는 유 라시아 대륙 동단의 시베리아와 북 아메리카 대륙 서단의 알래스카 사이 에 위치한 베링 해협에 몸을 맡긴다는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저에게 모든 일을 맡겨 주세요! " 어째서 또 유라시아가 들어가는 것일까? " 아,아니 그러니까 생각 만 해본다니까요! " 하지만 이런 지연의 외침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미정은 이미 교무실 밖으로 사라져 버렸고, 지연은 무참하게 굳어진 얼굴로 입에 물던 담배의 허리를 끊 어 먹었다. 지연은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 아,진짜∼!! 골치 아파졌네! " 나중에 미정이 주선한 맞선을 거절할 생각을 하자니 지금부터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왔다. 으으으…! 괜시리 쓸데 없는 말을 해가지고서 는!! 이 뒷 감당을 어떻게 할려고! " 하아아∼ 결혼… 이라고…. " 지연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그 러고 보니 어느덧 자신의 나이도 스물 아홉이었다. 그래….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건가…. 서른…. 서른이라고? " 그,그래도 아직은 20대니까…. " 내년의 일은 내년에 걱정하자. 그것이 지연의 신조였다. Ｖolume.3 " 하지연의 노처녀 탈출기 " " 그,그게 도대체 무슨 모습이야, 가인∼∼!! " 테레이아는 믿을 수 없다는듯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꼬리까지 부들부들 떤채 소리 질렀다. 그런 테레이아의 질타를 받으면서 가인은 얼굴이 붉어진채 고 개를 떨구었다. " 아니… 그러니까 설명을 하자면 이해못할 것도 아닌데…. " 그러나 굳이 구차하게 변명을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가인이었다.이런 자신 의 모습에 부가 설명을 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1학년 3반의 모두들 도 저마다 쑥덕거리며 가인의 차림새에 대해서 한 마디 씩 하고 있었다. " 드디어 가인이 녀석! 결정을 내린 걸까? " " 아니야…. 저 우유부단한 녀석이 그런 과감한 결단을 내릴리가… " " 하지만 저 모습은 무언의 발언인 거잖아! " 시끄럽다,녀석들아….다 들린다고! 가인은 이를 갈면서도 자꾸만 얼굴이 붉 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도대체 그는 어떤 차림새를 하고 있었길래 이 토록 구설수에 올라야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의문은 가인의 팔짱을 끼 며 나서는 유리에 의해 풀릴 수가 있었다. ． ． ． ． " 무슨 모습인 걸로 보여? 이건 '커플 니트'라는 거지. 커 플 니 트. 혹시 처음 보는 거야,이런 거? " " 그,그런…! 내,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런 게 아니잖아! 어째서 가인이 너와 커플 니트 따위를 입고 있어햐 하는 거냐고! " 테레이아의 흥분한 외침. 그렇다. 가인과 유리.둘은 같은 디자인의 커플 니 트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차이점을 들자면 가인 쪽이 좀 더 짙은 남색 이고, 유리 쪽이 밝은 남색이라는 게 유일한 차이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좀 더 센스 있게 보였다. 커플 티라는 건 디자인까지 같은데 색까지 같으면 되려 촌스러워 보이는 법이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가인과 유리는 커플 니 트 같은 것을 입고 있는 것일까?! 그 의문 역시 유리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 다. " 커플 니트의 의미를 모르는 거야? 훗…. 설명해주지. 커플 니트란! 커플 들 끼리 서로 맞춰 입고 다니는 옷을 말하는 거야! " " 유,유리야…! " 유리의 말에 참다 못한 가인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오른채 그녀를 말렸지 만, 기세가 등등해진 유리에게는 이미 거칠 것이 없었다. 유리는 모처럼 잡 은 이 승기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 이 커플 니트는 다름 아닌 오빠가 날 위해 사준 생일 선물이야.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빠와 나의 사랑의 증표가 되는 것이지! 알겠어,테레이아? 사 랑의 증표! " " 사,사랑의 증표…?!! " 한 손으로 입을 가린채 신음을 흘리며 물러서는 테레이아. 지금 가인과 유 리가 입고 있는 커플 티는 유리의 말대로 가인이 유리의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설명하자면 시민이 골라주고,가인이 샀다는 것이 올 바른 표현이겠지만…. 어쨋든, 가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 여,역시… 커플 니트라니…. 뭔가가 이상했다고…! 어째서 시민 씨는 유 리의 선물로 이런 옷을 고르셨던 거야?! ' 아니. 커플 니트를 선물로 산 것 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 그리고 같이 학교에 까지 입고 와야 한다니! ' 바로 그것이었다. 가인은 며칠 전의 일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유리는 생 일 선물로 가인에게서 커플 니트를 받자 얼굴까지 붉히며 젖은 눈동자로 그 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때부터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는 생각했었 지만 설마 이런 사태에 처할 줄은 정말이지 가인은 몰랐었다. - 오빠…. 고,고마워‥. 정말… 정말이지… 받고 싶었던 선물이었어…. - 그래? 하하하…. 맘에 든다니 다행이다,유리야∼ - 으응….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게‥. 기뻐하는 유리의 모습을 봤을 때 유가인, 그는 얼마나 뿌듯했던가? 가인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시민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어떻게 시민 씨는 유 리가 커플 니트를 원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을까? 난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는데…. 가인은 정말이지 시민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다. 어쨋든, 유리 가 기뻐하면 나야 좋지. 그 순간 까지는 그렇게만 생각했던 가인이었는데… - 오빠, 나한테 선물… 하나만 더 주면 안돼? 선물이랄 것 까지도 없고 그 냥 단순한 부탁인데… 커플 니트를 품에 안은채 홍조를 띈 표정으로 가인을 올려다 보는 유리. 그 모습에 가인은 아무 것도 모르며 환하게 미소지은채 고개를 끄덕였다. - 당연히 들어줘야지! 오늘은 유리의 생일인 걸! 그런데 무슨 부탁이야? - 으응…. 다름이 아니라… …그 뒤는 생략하겠다.지금의 상황이 모든 것을 얘기해주고 있으니까. 유리 는 커플 니트를 산 기념으로 자신과 같이 니트를 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을 가인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멋 모르고 가인이 그 소원에 응했던 것이 결국, 한성 고등학교에 이런 대파란의 센세이션을 불러오고 말았다. " 가,가인…. 어,어떻게…. 어떻게 네가 나한테… " " …테,테레이아? " 어깨를 부들 부들 떨며 고개를 숙이는 테레이아의 모습에 가인은 찔끔 하여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순간,테레이아는 눈시울이 붉어진채 울먹이는 목 소리로 가인에게 말했다. "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흑… 흐흑… " " .........!! " 순간 가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그 콧대 높고 당당하던 여 왕 같은 분위기의 테레이아가 눈물을 보인 것이다! 가인은 그런 테레이아의 눈물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가인의 옆에 있던 유리도 자신이 너 무한 것이 아닌가 후회하며 테레이아를 조심스럽게 올려다 보았다. ' 테레이아…. ' 어,어째서 우는 거야? 겨우 이런 일을 가지고….가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이는 테레이아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자신과 유리가 커플 니트를 입 고 온 것이 그렇게나 울음을 터뜨릴 만한 일이었단 말인가? 가인은 그런 그 녀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처음으로 보는 테레이아의 눈물에 무진장 죄스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죽을 죄를 진 것만 같았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테레이아의 어깨를 살며시 잡으며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 우,울지마….테레이아…! 내,내가… 잘못했으니까… 잘못한 건 나니까…! " " 흑… 가인! " 순간, 위로하는 가인의 품으로 덥썩 안겨드는 테레이아. 가인은 그 바람에 숨이 컥 막혔지만,애써 표현하지 않으며 자신의 품에서 흐느끼는 테레이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여 주었다. " 미안해,테레이아…. 저기… 난… 설마 네가 이렇게 슬퍼할 줄은 정말이지… " " 흑… 흐흑‥ " 가늘게 어깨를 떨며 가인에게 안기는 테레이아. 가인은 그녀가 너무도 갸날 프게 느껴졌다. 아, 이런 테레이아를 울리다니‥! 유가인. 넌 최저다! 최저! 여전히 그녀가 왜 우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가인은 자신이 죽일 놈이라 고 생각했다. 원래 여자의 눈물에 남자는 약한 법이다. 그때, 그런 가인에게 테레이아가 훌쩍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가인… " " 그,그래! 테레이아! " 아아… 이제 눈물을 그친 건가? 다행이야…. 가인은 흐느낌이 잦아든 테레 이아의 목소리에 안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테레이아는 예의 가냘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 나… 이해하니까… " " …뭐? 이해? " 그게 무슨…소리야? " 남자들은 가끔 가다가 외도를 즐기기도 하는 거니까… 나 이해할게. " " 외,외도?! " 가인은 황당해서 그만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무슨 말을 하는 거야! 테레이아! 하지만 그녀는 이런 가인의 반응에도 상관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 다 가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니까… 나의 잘못이었으니까 … 앞으로는 더더욱 노력해서 가인이 나만을 바라보게 만들겠어. 그러니 까… 이번 한 번 만큼은 용서 해줄게. " 더더욱 노력하겠다니….이 이상 노력해서 어떡할려고? 상당히 등골이 서늘 해지는 테레이아의 말이었다.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들을 손으로 훔쳐내 며 가인에게 방긋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결정타! " 그러니까 앞으로는 바람 같은 거 피우면 안돼. 알았지,가인? " - 쿠웅!! 순간,정확히 가인의 심장은 3초간 그 움직임을 정지하며 그에 따른 호흡 곤 란과 심박항진, 심장동통을 가져왔다. 가인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를 않았 다. 바람? 바람이라니?! 그런 가인의 속내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테레이 아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가인의 품에 더더욱 꼬옥 안겨들었다. 그때, 그 런 그들의 뒤로 유리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테 레이아에 말했다. " …그,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바람이라니? " " 바람의 의미를 모르는 거야? 훗… 설명해주지. 바람이란! 영어로 플러테 이션(flirtation)! 한 때의 불장난, 남녀간의 무분별한 사귐을 말하는 거 야! " 그 말에 영락없이 한순간 유부남과 바람을 피운 가정파괴범이 되어 버리는 유리였다. 더구나 테레이아는 아까 유리가 했던 말투까지 흉내내면서 비웃음 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도발! 바로 그것이었다! 그 말에 순간 그녀와 유리 사이의 기체가 강한 전기장하에서 절연성을 상실하고 전류가 그 속을 흐르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방전! 이것 이 디스차지(discharge) 현상! 덕분에 테레이아와 유리 사이에 낀 가인 만이 애꿋이 그 방전 현상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 히이이이이익!! 결국은 또 이거냐!! ' 그렇게 가인이 언제나와 같이 시련을 겪고 있을 무렵,교실 한쪽에서도 언제 나와 같이 피 맺힌 번뇌의 표출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 요,용서할 수 없다아아아아,유가인!! 감히 민체스터 양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다니! 더구나 유리 양과의 커플 니트라는 건 또 왠 말이냐!! ' 그렇게 울분에 가득찬 목소리로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이는 다름 아닌,박재 영. 바로 그였던 것이다.뭐,당연하다고 해야할까…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언 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니 그리 색다를 것도 없었지만…. 하지만 평상 시와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재영의 외침에 같이 동조해야 할 1학년 3반 남학생 일동, 반 가인회가 여느 때와는 달리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이다.더구나 그들은 싸늘한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보기 까지 하고 있었다. 재 영은 그런 반 가인회의 반응에 당황하며 말했다. " 왜,왜지?! 뭐야,다들! 그 차가운 반응은 뭐냔 말이다! 너희들은 우리의 테레이아와 유리가 겪는 수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도 않는단 말인가!!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거냐!! " " 후… " 그런 재영의 외침에 차가운 코웃음을 치는 반 가인 회의 남학생들. 그들 중 유가인 박멸 조직회의 제 이인자 엔비 Q(역시 실명 미공개)는 그야말로 '당 신을 경멸합니다!'라는 시선을 보내며 재영에게 말했다. " 지금 '우리의 테레이아와 유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 " " …엔비 Q? " 엔비 Q의 냉소적인 반응에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재영. 엔비 Q는 그 야말로 매몰차게 재영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 과연 당신에게 '우리'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에 게는 이미 더 이상 테레이아와 유리에 대한 어떠한 말도 입에 담을 자격 이 없습니다! 홀로 솔로를 탈피해버린 몸이 된 당신이! 반 가인 회를 무 책임하게 버려두고 혼자서 살 길을 도모했던 당신이 말입니다! " " 그,그런…!! " 엔비 Q의 말에 충격을 받으며 주춤 뒤로 물러서는 재영.하지만 엔비 Q의 분 노의 질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당신은 더 이상 반 가인 회의 일원이 아니다! 달콤한 말로 우리에게 가르 침을 설파하던 당신이… 타의 모범이 되었어야 할 회장인 당신이! 가장 먼저 본회의 회칙을 깨버리다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란 말입니 까! 당신의 그런 생각 없는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느껴야 할 배신감과 허 탈감은 그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 " 크으으윽…! 에,엔비 Q! 나는…! 나는…! " 재영은 괴로워하며 그만 무릎을 꿇어버렸다.자신의 죄의 무게로 인해 더 이 상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 미,미안하다‥! 미안해‥! 나는 그만 너희들에게 상처를 줘버렸구나….어 째서 나는 너희들의 신뢰를 배반해 버린 거지…? 크으으… 이런 나를…내 자신도 용서할 수가 없어…. " " 그렇습니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더더욱 절실 하게 느껴보도록 하시지요. 끊임 없이 후회하고 통곡하며 죄 많은 자신을 탓하십시오! 그것 만이 유일하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 엔비 Q는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재영을 내려다 보았다. 한때 반 가 인회의 회장으로서 강대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던 남자가 지금 이렇듯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처럼 처연한 울림을 띄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모습을 하고 있겠 지…. 엔비 Q는 왠지 자신의 미래를 엿본 것만 같은 씁쓸한 기분이 들어 재 영에게서 차갑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때나마 진정으로 존경했던 남자이었 건만…. " 그리고 더 이상 미안해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없어도 저희 반 가인회의 미래는 얼마든지 밝으니까요. 저희는…오늘부로 성마리 추종회와 그 뜻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 " 그,그런!! 엔비 Q! 지금 성마리 추종회라고 했는가?!! " 재영은 깜작 놀라서 고개를 들고 엔비 Q를 바라보았다.그의 두 눈에서는 노 기가 서리고 있었다. " 그건 아니될 말이다! 성마리 추종회와의 결합은 본 회의 취지를 어지럽히 고 회의 결속을 뿌리 째 뒤흔들 것이 자명한 일! 엔비 Q! 넌 한 순간의 이익에 사로 잡혀 그 뒤를 보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대로 성마리 추종회 와 뜻을 함께 했다간 본 회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될 거다! " " 이미 회를 배반한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잊으신 겁니까! 당신은 이미 솔로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 - 쿠궁! 재영의 가슴으로 엔비 Q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솔로의 몸이 아니 라는 것을…. 솔로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재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절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더 이상 반 가인회의 일원 이 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엔비 Q는 그런 재영의 모습에 혀를 차며 말 했다. " 더 이상 우리의 일에 상관하지 마십시오. 회의 규칙 상 배반자에게는 철 저한 응징이 내려져야 하지만… 한때나마 저희의 꿈이었던 당신이었기에 이 정도 선에서 끝내는 겁니다. 후… 앞으로는 서로 얼굴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도록 하죠. 그럼 이만…. " 그렇게 말하며 재영에게서 몸을 돌려 떠나는 엔비Q. 그런 그를 따라 나머지 회원들도 냉정하게 재영에게서 등을 돌려 가버렸다. 철저한 혼자. 그렇다.박 재영. 그는 반 가인 회에게서 버려진 것이다. …아니. 회를 버린 것은 재영, 그 자신이라고 해야할까…. " 나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구나…. " 재영은 헛 웃음을 흘리며 몸을 들썩였다. 한 여자를 위해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희생해버렸다…. 자신의 정열도. 꿈도. 야망도.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 이었던 반 가인회 조차도…. 나는 이렇게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무엇을 이룰려고 했던 것일까….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재영에 게 순간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회장…. " " .........? " 재영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이를 바라보았다.그곳에는 낯익은 한 명의 남학생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의 이름을 불렀다. " 제,제로스 1호…. " 그렇다. 반 가인 회의 모범 회원이자, 가녀린 심성의 소유자 제로스 1호(여 전히 실명 미공개).그가 지금 재영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의 뒤로도 세 명의 남학생들이 서서 재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어째서… 어째서 너희 들이… " 어째서 나에게 돌아온 것이냐? 난 이미 본 회로 부터 버림 받은 몸. 더 이상 너희들의 회장이 아니다. " 재영은 자조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앞으로 제로스 1호들 은 털썩 무릎 꿇으며 재영에게 말했다. " 아닙니다! 저희들의 회장은 오직 하나! 바로 박재영, 당신 뿐입니다! 저 부회장 엔비 Q는 단지 자신의 사리 사욕으로 회를 운영할 생각만 하고 있 을 뿐. 진정으로 본 회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 이가 아닙니다! 이대로 성마리 추종회와의 결합이 있을 시에는 본 회를 기다리는 것은 파멸 뿐인 것입니다! " " 제로스 1호…. " 재영은 제로스 1호의 통찰력에 놀라움을 표시해야만 했다. 설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가 아직도 본 회에 있었다니…. 제로스 1호는 애끓는 목 소리로 재영에게 간청했다. " 부디 저희들을 이끌 수 있는 이는 순수하게 본 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회 장! 당신 뿐입니다! 부디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 다! " " 이, 이 녀석들…! " 재영은 눈물이 핑 돌아 그만 뒷 말을 흐려 버렸다.아직 세상의 모두가 자신 을 버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재영은 이를 악물며 무릎 꿇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이 정도에서 포기해서는 안되지…. 나에게는 아직 나를 믿 어주며 따라주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살아간다! " 너희들의 믿음과 신뢰! 받아들이겠다! 나와 함께 하겠는가?! " " 예, 회장!! " " 좋아!! 너희들의 그 마음이 있는 한 반 가인회의 정신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는 죽어서라도 테레이아와 유리를 지키는 반 가인회의 귀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 우오오오오----!!! " 서로를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재영과 제로스 1호들. 그런 그들의 모습 은 눈물과 땀으로 이루어진 뜨거운 남자들의 전우애였다.그렇게 서로를 신뢰 하며 단결하는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하지만 재영들이 그렇게 기쁨의 눈 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들의 뒤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재,재영 군…. 너무해…. 역시 재영 군은 반 가인 회에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있었던 거내…. " 그렇게 말하며 울먹이는 그녀는 다름 아닌 재영의 걸 프렌드, 유시내. 그녀 였었다! 그런 시내의 등장에 재영은 당황하며 말했다. " 아,아니야, 시내야…! 반 가인 회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야! " " 나도 알고 있어! 테레이아와 유리를 가인 군으로 부터 사수하는 남학생들 의 모임이라는 거! 그리고 그 회원의 자격 조건이라는 게 반드시 솔로여 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면 재영 군이 반 가인회를 포기하지 못하겠다 는 건 나와 사귄다는 것을 부정하겠다는 소리잖아! " " 그,그렇게 되는 건가…. " " 그렇게 되는 거야! "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치는 시내의 모습에 재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반 가인 회를 포기하자니 남자인 자신이 울고, 시내를 포기하자니 그녀에 대 한 자신의 사랑이 울었다. 아,이 얼마나 양자택일 적인 상황이란 말인가! 재 영에게는 선택! 그리고 또 선택의 길 밖에는 없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지 땅을 치며 피눈물을 흘릴 결과만이 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내는 그렇게 재영이 양자의 기로에서 혼란스러워 하자, 단호하게 소리쳤다. " 재영 군, 선택해! 나야?! 아니면 반 가인 회인 거야?! " " 나,나는…! " 재영은 떨리는 손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뒤덮으며 부들 부들 떨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신은 잔인한 선택을 나에게 강요하신단 말인가! 아무리 살아가면서 인간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매번 찾아온다지만,재영은 아직 17세의 소년에 불 과琴다. 이렇게 하나의 길 만을 선택하기에는 그는 아직 너무도 나약했던 것 이다. " 회장! " " 재영 군! " 애타게 재영을 부르며 그의 선택을 기다리는 제로스 1호들과 시내. 그들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믿음으로 가득한 시선을 재영에게 던지고 있었다.재영 은 그런 그들의 시선에 숨이 막힐 정도의 부담감을 느껴야만 했다. 자, 선택 의 시간이다! 박재영! 너는 남자의 이노센트인 반 가인회를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너 만을 바라보는 유시내의 사랑을 선택할 것이냐! 재영은 결국 머리 를 감싸안으며 절규했다. " 아아아아…! 둘 다 내게는 너무도 소중해! 하나만을 선택하라니…! 절대 로 그럴 수는 없어어어어!! " " 재,재영군…!! 이 우유부단한 남자!! " - 턱! 순간 시내의 손이 재영의 앞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며 그녀의 어깨가 재영의 가슴을 날쌔게 받쳐 올렸다. 그리고 재영의 몸은 허공을 반 회전하기 시작했 다. 그 때까지 재영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 지 그 사이에 재영의 머리 속에 떠올랐던 것은 시내의 프로필이 전부였다. 이름: 유시내 성별: 女 나이: 17세 혈액형: B Rh- 키: 162Cm 몸무게: 48Kg 쓰리 사이즈: 34/28/35 (이 녀석은 정말이지….) 소속 동아리: 한성 고등학교 유도부 소속. 경력: 도내 중학교 유도 체전 3연패 달성. 한성 고등학교 유도부의 떠오르는 메치기 여왕. ' 유,유도부… 메,메치기의 여왕…? ' - 콰직! 거기까지! 재영은 시내의 메치기에 머리부터 교실 바닥을 향해 내리 꽂혀야 만 했다. 그리고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1학년 3반 일동의 시선이 모인 곳에 는 비참하게 바닥에 쓰러진채 게 거품을 물고 있는 재영의 모습이 있었다. " 재영아! " " 회장!! " " 재영 군---!! " 가인들과 제로스 1호, 그리고 갸날픈 시내의 비명 소리.그들의 비명 소리를 뒤로 하고 재영의 의식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 흑… 재영 군, 많이 아파? 응? " " 아,아니…. "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말하는 시내에게 재영은 이마에 붕대를 감은 모습으로 창백히 답해야만 했다. 지금 이곳은 한성 고등학교의 양호실. 시내의 메치기에 깨끗히 한판을 당한 재영은 내리 의식을 잃고 있었고, 그런 재영의 상태가 매우 위험함을 깨달은 가인들은 재영을 양호실로 급히 이송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양호 교사 미정의 응급 처치 덕에 재영은 눈을 뜰 수 있었다. " 미,미안해…. 나…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면 나도 모르게 유도 기술을 쓸 때가 있어서… " 그,그것은…순간 온수기?!! 재영은 더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불안에 몸을 떨 어야만 했다. 유시내. 재영의 걸프렌드인 그녀는 모든 것이 합격점인 미소녀 였지만, 실은 언제 기술을 걸어올지 모를 돌발 유도녀라는 무시 무시한 면모 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더더욱 무서운 점은 그런 기술을 걸고 나 서는 다시 평상시의 청초녀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있었다.재영은 아직도 시내 가 건 메치기의 후유증이 남아있는지 몸을 떨며 어설픈 미소로 답했다. " 아,아니…. 내,내가 미안하지‥. 우유부단하게 너에 대한 마음을 확실히 하지 못했던 내가…. " " 재영 군! " 그런 재영에게 훌쩍이는 얼굴로 그를 껴안는 시내. 재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내의 어깨를 토닥였다. " 나,나… 재영 군을 이해할려고 노력할테니까….재영 군에게 있어서 반 가 인 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으니까… " " 시내야…. " " 재영 군은 활동을 계속해. 난… 그런 재영 군의 뒤에서 언제나 내조하는 연인이 될테니…. " " 알아… 주었구나! 이해해준 거야! " 재영은 감격을 터뜨리며 시내를 부둥켜 안았다.역시 너는 나의 여자 친구야! 이런 나를 이해해주다니…!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상대의 모든 허물까지 감 싸주는 것이 연인으로서의 자세! 재영은 크나 큰 시내의 사랑을 느끼며 기쁨 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거센 꽃잎이 휘날림과 동시에 한 여인의 격정에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아∼ 이 얼마나 애틋하고 감동적인 사랑이란 말인가! 너희들의 모습에 서 이 선생님은 이 세상의 연인들이 추구해야할 궁극의 행복을 엿볼 수가 있었구나! " 그렇다. 양호실에는 이 선생이 있었다. 박미정 교사. 그녀는 두 눈을 초롱 초롱 빛내며 재영과 시내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 내가 말한 반 가인회를 이해하겠다느니, 내조를 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들은 가인으로서는 미정 처럼 순수하게 감탄만 하며 넘어갈 수가 없었다. ' …그런 건 이해 안해도 된다구…. ' 어쨋든, 그렇게 시끌벅적해질려는 양호실.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지연의 고 함 소리가 가인들의 목소리를 쥐 죽은듯이 잠재워 버렸다. " 이 자식들이! 뭘 잘했다고 떠들어---!! " " .........!! " 겁에 질린 얼굴로 가인들이 돌아본 곳에는 자신들의 담임 하지연이 이마에 실 핏줄을 드러낸채 담배를 질끈 질끈 씹고 있었다. 아,살인멸구의 표정! 이 때의 하지연은 건드려서는 안된다.그것이 암묵적인 1학년 3반의 룰이었다.지 연은 양호실에 있는 가인과 테레이아, 유리 그리고 재영과 시내를 돌아보며 외쳤다. " 도대체 한 두번도 아니고 왜 맨날 이런 귀찮은 일만 벌리는 거야!! 한 시 도 조용하게 넘어가는 적이 없어! 니들, 담임인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 이는 거냐?!! " - 도리.도리. 가인들은 지연의 기세에 압도되어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하기 사 지연으로서는 이렇게 큰 소리를 지를만도 했다. 교무실에서 한가롭게 시 간을 보내고 있던 그녀는, 갑작스레 방송으로 '1학년 3반 하지연 선생님, 선 생님 반의 한 학생이 의식 불명으로 양호실로 실려왔으니 신속히 양호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란 소식을 듣고서 얼마나 놀래야만 했던가. 그래서 기껏 부리나케 양호실로 뛰어 왔더니 이렇게 시시닥 거리며 잡담이나 나누는 재영 들의 모습이라니…. 지연의 분노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어 쨋든,불 같이 화내는 지연을 박미정 교사가 중재하고 나섰다. " 하 선생님∼ 너무 그렇게 화내시지 말아요. 호호… 한창 나이의 학생들이 팔 다리 하나 씩 깨부수는 거야 예사인 일이잖아요∼ 다행히도 다친 구 석 하나 없이 살아났으니 오히려 칭찬을 해주셔야지 왜 그렇게 화를 내시 는 거에요? "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양호실을 운영해오면, 양호 교사의 입에서 저런 소리 가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지연은 그런 미정의 얘기에 급속도로 열이 나던 머리가 냉각되는 것을 느끼며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아무래도 이 여자를 상 대하면 지연은 계속 자신의 페이스를 잊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미정이 뒤에서 꽃잎을 화려하게 뿜어내며 지연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 그나저나 맞선 날짜는 언제로 잡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내일 당장에라도 오케이 랍니다∼ " " 무,무슨!! 저,전 생각해본다고만 했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잖아요!! " 지연은 얼굴을 붉히며 미정에게 버럭 소리치다가, 곧 가인들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미정을 잡아채듯이 양호실 밖으로 끌고 나왔 다. 지연은 가인들이 듣지 못하도록 양호실 문을 닫아 버리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미정에게 말했다. " 저기… 박 선생님. 솔직히 말해서 전 맞선 같은 거 생각해본적도 없고,앞 으로 할 예정 같은 것도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제발 그만 절 괴롭히세요! " " 그,그런…! " 미정은 상처 받은 표정으로 두 눈을 그렁그렁 물들이며 지연을 바라보았고, 그 바람에 지연은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잠시 후회 도 해봤지만 이렇게 라도 하지 않았다간 미정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다시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잊어버려서는 안된 다! 박미정! 그녀는 집요하면서도 회유책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연이 꼭 그렇게 그녀를 걱정해 줄 필요 따위도 사실은 없었 다. " 하 선생님…! 선생님은 혹시…! " " …왜,왜요? " " 역시 그랬군요! 아아∼ 맞선같은 인위적인 만남보다는 자연스럽고도 우연 적인 만남을 원하셨던 거군요! 아아! 전 감동해버렸어요! 하 선생님도 저 같은 로맨티스트의 기질을 가지고 계셨다니! 그래요! 역시 결혼은 연애 결혼인 것이죠! " 이렇듯 마이 페이스를 가진 사람을 뭣 때문에 지연이 걱정해줘야 한단 말인 가? 지연은 맥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독한 두통이 머리 속 으로 밀려오고 있었다.도대체 이 사람을 무슨 수로 상대하란 말인가? 미정을 감당하기에는 지연이 너무도 정상적인 범주에 속해 있었다. 어쨋든, 지연이 그렇게 미정의 앞에서 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한 남자가 그녀들에 게 말을 걸어왔다. " 여어∼ 노처녀 선생 두 분께서 뭘 그렇게 얘기하고 계신가? " 순간, 그 말을 들은 지연과 미정의 이마에서 가는 실핏줄들이 돋아 나왔다. 지연은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온 남자가 누군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저 짜증 나는 목소리와 건들 거리는 말투는…. 지연은 얼굴에 억지 미소를 간신히 지 어보이며 남자에게 말했다. " 안녕하세요,주임 선생님? 왠 일로 그 비대한 몸을 힘들게 거동 하시면서 까지 이 외딴 양호실로 몸소 오셨나요? " 남자의 이름은 김학도. 3학년 2반의 담임 선생이자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 주임인 남자였다. 그리고 덧붙여 설명하자면 지연과는 철저한 지옥의 관계 를 유지하고 있는 선생이기도 했다. 그들의 관계에 대한 기원을 또 다시 설 명하자면… '노 처녀 시집 안가?'와 '남근(男根) 무릎 찍기'…. 이 두 문장 으로 간략히 요약할 수 있겠다. " 허허…. 학생 주임의 일은 일개 담임 선생 나부랭이의 것보다 훨씬 많다 네. 이렇게 가끔씩 교내를 둘러보면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살 펴보기도 해야하지. " " 하하, 아주 바쁘시겠네요∼ 저는 일개 담임 나부랭이라서 주임 님이 얼 마나 고생하시는지 차마 헤아리지를 못하겠내요. 하지만 그렇게 직무에 열심이시면서도 그 탄력있는 뱃살은 왜 그대로 일까요? " - 파지지지지직!! 허공에서 지연과 학도의 눈빛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얽혀 들어갔다. 학도는 이를 갈며 지연을 노려보았다. 이 건방진 여 선생은 왠만해서는 그 콧대가 꺽일 줄을 몰랐다.나 같이 20여년 동안 교편을 잡은 베테랑 교사에게 이제 막 5년 째 접어드는 병아리 교사가 보이는 저 버릇 없는 태도는 또 뭐란 말 인가?! 학도는 지연의 하나 하나가 맘에 들지 않아 죽을 지경이었다.뭐,그 건 지연 쪽도 마찬가지였기에 둘의 관계는 언제나 제 자리를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어쨋든 그렇게 서로 탐색전을 벌이던 두 교사.그러던 중 학 도 쪽이 먼저 상대의 꼬투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 쯔쯔쯔… 여 선생 주제에 입에 담배 물고 있는 꼬락서니 하고는…. 자네 는 학생들 마주 하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 순간, 지연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며 뒤틀렸다. 학도는 지금 지연이 가장 듣 기 싫어하는 말을 꺼내 버린 것이다.여자가 어쨋다느니 저쨋느니 하며 일방 적인 남성 우월주의 사상을 내세운 구 시대적인 발언. 그것을 지금 김학도 가 지연에게 들먹이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지연은 이런 이야기를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한다. " 하,하하하…. 제가 담배를 물고 있는 거 하고 주임 선생님이 담배를 물 고 있는 거 하고 도대체 뭐가 틀리다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내요. 한번 그렇게 얘기하신 그 근거를 제가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지연은 속으로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저 망할 놈의 중년 늙은이. 저 따위 구 시대적인 발상이나 하고 있으니까 여지껏 평교사로 썩고 있는 거지! 더 구나 김학도는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하루에 담배 3갑을 태우는 지독한 골초 로 통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나에게 담배 얘기를 꺼내다니…그야말로 안 하무인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됐네∼! 자네하고는 말이 통하질 않으니. 하여간 저러니까 여지껏 저 나 이에 노처녀로 살고 있는 게야! 원∼ 불쌍하구먼.그런 식으로 살다간 평 생 홀 몸으로 살아야 할 걸∼ " - 빠직! 그 순간, 지연의 머리 속에 한 줄기 남아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지연은 부들 부들 떨며 마치 마그마가 끓어 오르는 활화산 처럼 불타오르 기 시작했다. 노처녀라고….노처녀라고…. 평생 홀 몸으로 살아야 한다고…? 후,후후후후… ' 이 망할 중년 늙은이가아아아아----------!!!!!! ' 지연은 결국 분화(噴火) 해버렸다! " 누가 평생 노처녀로 산다고요?!!! 웃기지 말아요,영감!!! 이래뵈도 매일 결혼하라고 맞선 들어오는 몸이란 말이야!! " " 여,영감…?!! 자,자네 지금…! " 기가 막혀 한 소리 할려고 하는 학도.하지만 지연은 그런 그를 깨끗하게 무 시해 버리며 고개를 돌려 미정에게 말했다. " 박 선생님! 제 맞선 날짜가 언제라고 하셨죠?! 전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 합니다만!! " " 아,그‥그게… 내일이면 될 거에요…. 내일이면… 호,호호호호…. " 지연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 식은 땀을 흘리며 답하는 미정.하지만 속으로는 'Get you!'를 외치며 또 한명의 노처녀를 맞선 시키게 되었다는 것에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연은 미정의 말에 학도를 돌아보며 한껏 의기 양양해져 외 쳤다. " 어때요?! 아시겠습니까! 전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 뿐이라 고요! 전 제 자신이 원해서 노처녀로 있는 거고, 제 자신이 원해서 담배 를 무는 거라 이 말씀입니다! 전 주임 선생님 같이 무능하기 때문에 여 지껏 홀로 사는 게 아니라고요!! " " 무,무능? 지,지금 무능이라고 했어?!! " 학도는 얼굴이 시뻘개진채 당장에라도 혈압으로 쓸어질 것 처럼 핏대를 세 웠다. 그 사이에서 미정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둘의 반응을 살피고 있 었다. 학도는 이를 갈며 지연에게 소리쳤다. " 흥! 자네 같은 망나니 여교사는 아무리 맞선을 보아도 안될게야! 어디 한 번 맞선을 보지 그래? 아마 만나는 즉시 딱지를 맞게 될 걸!! " " 크으으으으…!! 조,좋습니다! 만약 제가 딱지를 맞지 않는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어떡하실 거에요?!! " 서로 잡아먹을듯이 으르렁 거리는 지연과 학도.그때,그런 둘에게 미정이 화 려한 꽃잎을 날리며 난입했다. " 자자∼ 그럼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겠어요? 두 분 다 담배를 애호하시는 분들이니까∼ 내기에서 지는 쪽이… 금연하기! " 그것은 한시라도 입에서 담배를 떼지 않는 지연과 학도에게 있어서는 반역 지옥(反逆地獄)에 떨어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에게 금연이라 니…. 미정은 정말이지 악마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지연과 학도는 이 미 그 열기로 인해 더 이상의 사고를 하지 못하며 서로를 향해 소리쳤다. " 좋아! 그 내기 받아들이겠어! 두말하기 없기요,영감! " " 두번 다시 니코틴을 접하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노처녀! " 좋아. 이것으로 내기 성립! 미정은 눈을 빛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우리 담임…. 맞선을 볼려나 본데…. " " 헤에…. 그 담임이 맞선이라고…. " 조용히 양호실의 문에 귀를 기대어 밖의 상황을 엿들은 가인들.그들은 서로 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수근 거리고 있었다.아무리 생각해봐도 지 연이 맞선을 나가는 모습은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언제나 체육복을 입고 담 배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담임의 모습에서 어디가 맞선을 나갈 구석이 있단 말인가? 테레이아와 유리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 이건 결과가 너무 뻔히 보이는 승부야. 우리 차쥐(Charge)에게는 승산이 없어. " " …무모해. 한시라도 빨리 그냥 기권하는 쪽을 권장하겠어. " 유리의 그 말을 끝으로 가인들은 잠시 침묵해야만 했다. 그때, 슬며시 서로 의 눈치를 살피던 일행 중 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다들 이대로 담임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을 셈이야? " 그러자 재영과 테레이아,유리는 씨익 미소지으며 소리쳤다. " 당연히 구경가야지! 이런 재미있는 구경 거리를 놓칠 수가 있겠냐!! " " 훗…. 승부의 묘미는 그 결과가 나올 때 까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 있 는 거니까. " " …뭔가 내 인생의 전환이 될 그 어떠한 것을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몰라. "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내가 주저하면서도 말을 꺼냈다. " 저,저어… 1학년 4반의 참관인 자격으로서… 가도 되겠죠? " 그런 친구들의 모습에 가인은 엄지를 들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만장일치로 결정된 거로군! 좋아! 내일은 맞선 구경이다! " 어이…. 너희들의 담임이라고…. 그리고 다음 날, 하지연의 29년 인생사 중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맞선의 시간이 다가왔다. 맞선은 방과 후, 양호 교사 박미정의 지도 아래 신 속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맞선의 장소는 '크리스탈'이라고 하는 레스토랑 이 었는데, 놀랍게도 이 곳은 현대 미술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기획력 있는 전시들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해외 유명작가들을 소개해온 국제 갤러리 공간 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2028년 1월 말에 오픈한 크리스탈은 약 100여평, 120석 규모로 전시장의 미 술품 감상과 함께 독창적인 메뉴를 즐길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특히 냉동재료나 화학조미료는 일체 사용하지 않으며 식재의 신 선함과 고유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섬세하고 창조적인 메뉴로 미식가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었으며,경복궁과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전망과 국 제 갤러리 건물 외관 및 전시공간 특유의 모던함이 그대로 연결된 레스토랑 인테리어의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탈은 갤러리와 레스토랑 공간 특유의 조형미를 바탕으로 코스 및 일 품요리의 조화로운 셀렉션과 함께 여러가지 행사들을 위한 공간제공 및 진행 도 도와 주고 있었다. 각 50석과 70석의 좌석을 구비한 2, 3층으로 나뉘어진 레스토랑 공간과 레스토랑에 접해있는 높은 천정의 넓은 전시공간은 각종 파 티 및 소규모 세미나 장소로 아주 적합하며, 이미 2028년 5월 30일 '제 28회 L'Amista Salon Concert'를 성황리에 치뤄 좋은 반응과 많은 관심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긴 설명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신다면…이 크 리스탈 레스토랑은 그 품격과 등급에 있어서는 최상을 달리는 그야말로 최고 의 레스토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 가인의 말을 빌어서 설명하자 면 '아주 아주 값 비싼 곳'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뭔가 맞선의 장소로 서는 상당히 부담되고 화려한 곳이었다. " 박 화백 님, 오늘의 메뉴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 이 레스토랑의 지배인으로 보이는듯한 중년인이 깍듯하게 미정의 테이블로 와 그녀에게 인사를 날렸다. 미정은 여전히 이 레스토랑에서도 예의 간호복 차림으로 와 있었는데… 그 간호복이라는 것이 외출복 타입이었는듯 목과 소 매에 여우털이 달린 희안한 디자인이었다.아마 머리에 쓰고 있는 너스 캡 만 아니었더라면 간호복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그녀에게 지 배인은 어째서 '화백 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던 것일까? "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호호∼오늘의 주인공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에∼ " " 일행이 더 있으셨군요? 죄송합니다.아,그나저나 지난 번에 저희 레스토랑 에 박 화백 님의 작품을 전시하게 해주셔서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그 덕 분에 저희 크리스탈이 '이 달의 미술 박람회장'으로 선정되게 되었습니다. " " 어머∼ 별 말씀을∼ 그나저나 오늘 식사는 당연히 서비스겠죠? " 미정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다가 순간, 눈을 빛내며 지배인에게 물었 고 지배인은 비위도 좋게 그런 그녀의 웃음을 미소로 마주하며 답했다. " 박 화백 님은 저희 레스토랑의 영원한 VIP 고객이십니다. 오시는 것 만으 로도 환영입니다. " " 고마워요, 지배인 님∼ 그럼 식사는 조금 있다가 시킬게요∼ " " 예.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 지배인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을 떠나갔고,미정은 여전히 그 속 모를 미소 를 짓고 있었다. 과연, 그녀가 이 레스토랑에 기부한 작품이 무엇이었길래 지배인이 저렇게도 싹싹히 나온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도 미정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하지만 놀라워 하지 말자. 그녀는 특별한 여인이니까. 그녀의 심오하고도 해석 불가능한 정신 세계를 생각해본 다면 그리 납득 못할 일도 아닌 것이다. 참고로 그녀가 그린 작품을 본 사람 들은 한결 같이 '이 세상의 끝이 보였다….'라는 의미 불명의 말들을 남겼다 고 한다. " …늦는군요. " 그때, 그런 미정의 앞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쓸어 올 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정장 차림을 한 인텔리한 분위기의 남자였는데, 조금 인상이 날카로워 보인다는 것 외에는 외모 면에서 합격을 줄 만했다.그는 미 정이 데리고 온 맞선남이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것이 그녀의 중매 취향은 의외로 대중적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었다. " 호호∼ 하 선생님이 처음 맞선 보시는 거라 긴장하셨나 보내요∼ 원래는 시간 약속 하난 철저하신 분인데∼ " " 흠! 흠! 하지만 벌써 10분이나 지나버렸으니…. 나,원…. " 미정은 투덜거리는 남자를 잘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10분 정도 늦는 거 가 지고 생색 내지 말란 말이야!' 라고 남자에게 외치고 있었다. 미정은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며 오늘의 맞선녀 하지연을 떠올려 보았다. 도대체 이 사람 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 하 선생님∼ 어서 빨리 와주세요∼ 흑흑∼ ' 미정은 점점 날카로워져 가는 남자의 분위기에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지연 을 애타게 불렀다. 한편, 그런 미정과 남자 쪽 테이블을 아까부터 유심히 지 켜보고 있는 일련의 무리들이 있었으니… " 호오… 저 사람이 바로 우리 담임의 맞선남…. " " 양호 선생님,꽤 하시잖아∼ 생각보다 꽤 괜찮은 남자를 데리고 왔는데. " 검은 코트에 검은 중절모, 그리고 검은 선글래스를 쓴 5명의 괴인들이 미정 들의 테이블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녀들을 관찰하 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정체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오오∼ 양호 선생의 주선이라기에 난 좀 더 매니악한 남자가 나올 줄 알 았는데 말이야. " 이렇게 말하며 히죽 거리는 이는 박재영. " 저,저기… 재영 군. 그래도 난… 매니악한 남자라도 좋아하니까…. " " ......엥? " 그렇게 말하여 재영이 얼빠진 표정을 짓게 만든 이는 그의 여자 친구,유시내. " 과연 100전 100승을 자랑하는 네고시에이터(negotiator:교섭가) 다워.장소 선정에서 부터 맞선남에 이르기 까지 현재로서는 흠 잡을 곳이 없군. "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에메랄드 빛 머리의 괴인. 물론, 테레이아다. " …중매쟁이는 매치 메이커(matchmaker) 아냐? 네고시에이터는 인질 협상 가를 말하는…. " " 아니. 그건 안일한 생각이야. 맞선이란 한치의 양보와 틈도 찾을 수 없는 전쟁터. 긴장을 늦춰서도 안되지. 이런 상황에서 중재를 해나가는 그들이 야말로 진정한 협상가라고 할 수 있어. 그리고 이런 말도 있잖아? 맞선이 결렬되어도 중매쟁이에게는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라는. " " …그러니까 그건 네고시에이터의 얘기라니까…. " 테레이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두르는 어린 아이 같은 체구의 괴인. 굳이 유리라고 밝힐 필요가 있을까나? " …저기,그런데 말이야…. " 하지만 앞의 이들이 흥미 있게 미정들을 살펴보는 것과는 달리 마지막 괴인, 가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심각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유리가 돌아보며 물었다. " 왜 그래,오빠? " " …으응. 아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저기, 아무래도 이 복장 은 좀… 이상하지 않아? " 그렇다. 단지 담임 선생님의 맞선을 구경하러 온 것 뿐인데 뭣 때문에 이런 수상쩍은 복장을 하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가인은 검은 코트에 검은 중절 모,검은 선글래스를 낀 자신들의 복장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해야만 했다.그 렇게 그가 자신들의 복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때 유리는 단호한 목 소리로 가인의 의문을 일축시켰다. " 이건 미행자들의 유니폼. " " …유,유니폼? 그렇다면 반드시 입어야 하는…? " " 응. 반드시. " 당연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의 모습에 가인은 아무런 할 말도 찾지 를 못했다.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유리는 조용히 혼잣말을 하는 것 처럼 뒷 말을 덧붙였다. " …그리고 예전에도 오빠 때문에 잠시 입었던 적은 있었으니까… " " .........뭐? " " …아니. 아무 것도. " 가인의 물음에 피식 미소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젓는 유리.가인은 뭔가 상당 히 찜찜했지만 애써 미정과 맞선남의 테이블로 눈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이 세상에는 알아서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일들도 있는 법이다. 어쨋든 그렇게 가인들이 미정들을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지연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재영은 하품을 하며 투덜거렸다. " 에이∼ 그럼 그렇지. 설마 그 담임이 맞선 같은 걸 보러 나오겠어? 분명 귀찮아서 집으로 가버렸을 거야. " " 하지만 재영 군…, 그래도 맞선 자리인 걸. 선생님이 그렇게 책임감 없는 행동을 하실리는 없으시잖아. " 시내는 재영의 말에 반박하며 조심스럽게 일행들을 둘러보았다.하지만 하나 같이 가인들은 재영의 말에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 그래…. 책임감이라니…. 우리 담임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말이지. " " 애초에 맞선을 보겠다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했다니까.홧김에 하겠다고 했 었으니 포기하는 것도 홧김에 해버렸을 테지. " " 응.응. "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들의 모습에 시내는 쓴 웃음을 지 었다. 도대체 하지연 선생님…. 평상시에 학생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셨 길래 다들 이런 소리나 하고 있는 걸까? - 딸랑…. 그때 크리스탈 레스토랑의 출입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누군가가 레스토랑 으로 들어온 것이었다.그리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 처럼 가인들의 시선이 동 시다발적으로 출입구를 향했다. 드디어 오신건가,선생님?! " ......어라? " 아니였다. 레스토랑으로 막 들어오는 손님은 여자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녀 는 체육복을 입지도 않고 있었고, 담배를 꼬나물고 있지도 않았다. 저 단정 하게 길러서 곱게 땋아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하지연의 부시시한 머리 카락 과는 차이가 있었고,저 옅게 화장한 얼굴은 불철주야 맨 얼굴로 다니는 하지 연의 얼굴과는 극심한 괴리감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원피스라니? 그것도 하얀색이다.절대로 하지연이 입고 다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 이다.가인들은 한마디 씩 했다. " 아니군. " " 절대로 아니야. " " 혹시라도 저런 모습을 한 하지연 선생님은 있어서도 안돼. " 있어서도 안된다니…. 그러나 그런 그들의 예상을 뒤엎으며 이 의문의 여인 은 천천히, 그 걸음 걸이 또한 조신하게 미정의 테이블로 향하고 있었다. 가 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끝이 떨리는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 " 서,설마… 정말‥ 우리 담임인 것은…. " 그리고 여인은 미정에게 인사를 건냈다. " 조금 늦었지요, 박 선생님? 죄송합니다. " ' 허걱-----------!!! ' 모두는 입을 가리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혹시나 했는데, 저 의문의 원피 스 여인은 다름 아닌 1학년 3반의 담임 하지연, 그녀였던 것이다! 재영은 흥 분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쥔채 소리쳤다. " 오오오오옷!!! 저것이 바로 진흙 속의 진주!! 서,설마 우리 담임이 저런 퀸카였을 줄은-------!!! " " 재,재영 군…! 이 바보!! " - 퍽! 재영의 태도에 그만 발끈한 시내가 그의 아랫 턱을 주먹으로 올려쳤고,재영 은 덜컥 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뒤집었다.테레이아와 유리는 그런 재 영을 '맞아도 싸지'란 눈으로 내려다 보다가 다시 지연을 돌아보며 중얼거 렸다. " 우리 담임. 대단한 각오인 걸. 오늘 맞선에 임하는 태도가 아주 적극적이 야. " " 아무래도 금연이 내기로 걸린 만큼 필사적이었던 거 겠지…. " 뭔가 핀트가 어긋나지 않았나,그건…. 어쨋든 다들 그렇게 놀라워하는 가운 데에 가인 만은 냉정한 눈으로 지연의 변신에 가까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 다.확실히 평상시의 그 흉신악살과 같은 담임과 저 하얀 원피스의 청초녀가 매치가 안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 그렇지만…. " …겉이 변한다고 해서......... 그 속 까지 변할 수가 있는 걸까? " 가인의 의문성 짙은 발언. 그 말에 모두는 그를 바라보며 침착히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다. 겉이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그 속은 분명 자신들의 담임 하 지연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하루 아침에 그녀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은 불 가능한 일. 인간이란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 뭐, 어쨋든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며 맞선 테이블의 상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한편,맞선 테이블의 미정은 지연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잊고 있다가 곧 두 손을 꽉지 끼며 두 눈을 초롱 초롱 빛냈다. " 가,감동이에요∼ 하 선생님∼!! 역시 하 선생님도 맞선을 염두해 두시고 계셨던 거군요! 이렇게나 멋지게 준비하고 나오실 줄은∼! 전 정말이지 하 선생님의 정성에 감동해버렸어요∼ " " 아,예? 그,그러세요…. " 단지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일 뿐이거늘…. 지연은 속으로 입 맛을 다시며 애써 미정의 반응을 의연히 넘기기 위해 애 썼다. 어쨋든, 그렇게 말을 아끼 는 그녀의 모습은 생각 외로 맞선남에게 좋은 반응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는 데… 맞선남의 눈에 비친 지연은 영락 없는 조신한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는 지연에게 호감이 일었는듯 들뜬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냈다. " 안녕하십니까, 하지연 씨? 박 선생님의 주선이라길래 어떤 여성 분이 나 오실까 했었는데…,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나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 다,하하…. " - 푸웃-! 그런 맞선남의 말에 물을 마시고 있던 가인들은 목에 타레가 걸려 콜록 거렸다. 아니? 저 남자가 지금 우리 담임에게 뭐라고 한 거지? 아름다우신 분? 아름다우신 분이라고라? 가인들은 마음 속으로 맞선남에게 외쳤다. ' 당신은 속고 있는 거야…! 속고 있는 거라고!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란 말이야…! ' 지금 당장에라도 맞선남에게 하지연의 과거를 알려주지 않았다간,한 남자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는 파경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도덕적 사명감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연 역시 맞선남의 말이 황당했는듯 표정이 일그러질려는 것을 간신히 견뎌 내며 말했다. " 아,고‥고마워요…. " " 어머어머∼! 서로 몸이 달아오르는 분위기에요! 좋아요! 이 분위기를 이 어서 서로 상견례를 하도록 하죠! " 꽃 잎을 휘날리며 흥분한 어조로 소리치는 미정 덕분에 지연의 표정 변화를 맞선남은 감지할 수 없었다. 어쨋든,그녀의 말 대로 상견례 라는 것을 시작 해보도록 하자. " 자∼ 이쪽은 하지연 선생님. 현재 한성 고등학교 1학년 3반의 담임을 맡 고 계시며 담당 과목은 체육이에요∼ 자세한 사항은 제가 프로필을 드렸 었죠? " " 아,예. " 고개를 끄덕이는 맞선남. 하지만 지연은 뜨끔한 표정으로 미정을 돌아 보아 야만 했다. 프로필? 프로필이라니? ' 혹시… 그 프린트를 말하는 건가? ' 오늘 아침, 미정이 자신에게 주었던 프린트.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뭔가 사진 도 붙어 있었고, 이력서 비스므리하게 작성되었던 걸로 보아 아마 이 맞선남 의 프로필이라는 게 그거였던 모양이다. 나는 그 프린트를 박 선생님에게 받 은 후… ' …내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지…분명…. ' 애초에 맞선이라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었으니…. 지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미정은 그런 지연의 태도에 감을 잡고서는 맞선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지연에게 물어 보았다. " 하 선생님? …혹시 프로필… 안 읽어 보셨어요? " " …그게… 어쩌다 보니…. " 뭔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하지만 이런 사소한 사항에 그녀가 굴했더라면 100전 100승의 중매쟁이라는 호칭이 무색했을 것이다. 미정은 마 치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등 뒤의 꽃잎을 거세게 휘날리며 말 했다. " 그럼 이제 이쪽의 멋진 남자분도 소개 시켜드려야 겠죠? 이 분은 제갈 후 씨. 나이는 서른 두 살이시고 현재 대원 그룹에서 일하시고 계시답니다. " " 아,예…. " 지연은 별 관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미정의 말 중 자신의 뇌리를 파고드는 두 개의 단어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두 개의 단어는 '제갈 후' 그리고 '대원 그룹'이었다. ' 설마…. ' 그들의 애기를 엿듣고 있던 가인들도 서로를 돌아보며 의혹의 시선을 던져 야만 했다. 자,잠깐…. 대원 그룹이라고? 그리고 저 남자의 성이 제갈이라고 했지? 그렇다는 것은…. 미정의 다음 말은 이런 모두의 의혹을 해결해주었다. " 호호∼ 그리고 놀라지 마세요? 제갈 후 씨는 다름 아닌,우리 학교의 학생 회장 제갈 영 군의 사촌이랍니다∼ " ' 역시------------!!! ' 제갈 영. H.F.P라고 불리는 한성 고등학교 학생회의 회장이자, 한성 고등학 교를 후원해 주는 대원 그룹의 차기 후계자. 미정은 지금 이 맞선남을 그런 제갈 영의 사촌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대원 그룹 의 부장 직 정도는 꿰어차고 있을 남자라는 소리인데…. 가인들은 설마 미정 이 이 정도 되는 남자를 데리고 나올 줄은 몰랐는지라 기가 막혀 그녀를 바 라보았다. " 여,역시… 100전 100승의 중매쟁이…. " " 허명이 아니었어. " 지연 역시, 맞선남의 정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미정을 바라보았다.미정 은 그런 지연의 눈을 마주하자 더더욱 기고만장해져 등 뒤의 꽃잎을 휘날리 며 소리쳤다. " 자자∼ 그럼 상견례도 했으니 이제부터는 둘 만의 뜨거운 시간을 보내도 록 하세요∼ 방해꾼은 이만 사라져 드릴테니∼ " " 아,아니… 저, 박 선생님…! " 지연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만 놓아두고 미정이 떠날려고 하자, 당황하며 그 녀를 붙잡을려고 했다. 하지만 박미정.그녀가 언제 지연이 부르면 달려와 주 고 잡으면 멈춰주는 존재였던가. 미정은 그 발걸음도 경쾌하게 레스토랑 출 입구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지연의 손은 허망히 허공을 수 놓아야만 했다. ' 제,젠장…! 아니,떠넘길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알아서 하라는 거야! ' 지연은 급속도로 머리에 편두통이 도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하여간 자신이 자초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지만, 생각할수록 뭔가가 부조리하다 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연은 한 숨을 푸욱 내쉬며 습관적으로 핸드 백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담배를 입에 무는 버릇 이 여지 없이 나온 것이었다. 지연은 지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 른채 무의식 중에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 던 가인들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 그럼 그렇지…. ' 담배를 입에 물고 있지 않으면 하지연이 아니다.가인들은 지연이 담배를 집 어든 것을 보며 두 눈이 휘둥그래지는 맞선남, 제갈후의 모습에 고개를 살며 시 내저었다. 맞선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끝이로군. - 투다다다다다닥! 그때 번개 같이 지연들의 테이블로 날아드는 한 인영의 그림자. 그 그림자 는 다름 아닌 레스토랑을 막 나갈려고 하던 양호 교사,박미정! 바로 그녀였 던 것이다! 미정은 매섭고도 정확한 손놀림으로 지연의 손에 들린 담배를 낚 아챘고, 지연은 담배를 뺏긴 자신의 손 만을 허멍하게 바라봐야 했다. 미정 은 등 뒤의 꽃 잎을 화려하게 휘날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 오호호호호∼ 제가 하 선생님에게 담배를 맡긴 것을 그만 깜빡하고 가버 릴 뻔 했지 뭐에요? 하 선생님∼ 제 담배 보관해 주셔서 정말이지 너무너 무 고마워요∼ " " …예?! 아, 그‥그렇죠! " 지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닫고서는 서툴게 미정의 말에 맞장구 를 쳤다. 한 눈에 보아도 어색함이 뚝뚝 흘러넘치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 지만 이미 그녀에게 콩깍지가 씌인 제갈 후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 하,하하∼ 그러셨군요∼! 어쩐지 지연 씨 같은 여성스러운 분께서 담배를 꺼내 드시기에 깜짝 놀랬지 뭡니까! 그럼 그렇지. 박 선생님의 것을 잠시 맡아두고 있으셨던 거군요∼ " " 그,그렇지요∼ 호호‥호…. " 지연과 미정은 식은 땀을 흘리며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미정은 제갈 후가 잠시 자신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지연을 무시무시한 얼굴로 쳐다 보며 낮게 으르렁 거렸다. ' 하 선생님∼∼!! 담배는∼! 절대로∼! 안됩니다----! 맞선 말아 먹을 일 있으세요?!! 한순간이라도 방심하지 말고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마세요! 아 시겠어요?! 아시겠냐고요!!! ' ' 예,예엣…! ' 미정의 박력에 밀려 어깨를 움찔 떨며 대답한 지연. 그러다 다시 제갈 후가 자신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미정은 언제 분노했냐는듯이 화사하게 웃는 얼 굴로 일관했다. …참으로 가증스러울 정도로 변화무쌍한 태도였다. " 그,그럼 저는 담배도 찾았으니까∼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두 분 다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하세요∼ " 미정은 담배를 갈무리 하며 지연에게 한번 더 눈치를 준 뒤 도망치듯 테이 블을 떠났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만 같은 정신 사나움이었다.그런 미정의 떠나가는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제갈 후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흔 들었다. " 거,참… 박 선생님도 어쩔 수 없으신 분이군요. 여자가 담배라니…. 저러 니 지금껏 배우자를 찾지 못하고 홀로 사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 '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리냐,그건…?! ' 지연은 한순간 제갈 후의 말에 욱 하고 성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눌 러삼킬 수 있었다. 그래. 하지연. 생각해라. 여기서 성질을 부렸다간 금연은 고사하고,그 보기 싫은 꼴통 인간, 김학도 한테 교사 생활 내내 모욕적인 수 모를 당해야만 한다고! 지연은 꾹꾹 화를 가라 앉히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억지 웃음을 지었다. " 그,그러게 말이에요…. 여자가 담배라뇨. 호,호호…. " " 하하,그렇지요. 상스럽게 말입니다. " 뭐? 상,상스러워?!! 지연은 순간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지만 초인적인 인내 심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또 다시 참아넘겼다. 차,참아야 하느니라.하지연! 참아! 참으라고! 금연을 떠올려! 김학도를 떠올려 봐! ' 제,젠장…. 이거 못할 짓이네…! ' 하지연.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인격을 시험당하고 있었다. " 우와… 저거 분명 무리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 " 내 눈에는 보이고 있어. 선생님의 웃음 저 깊은 곳에서 부터 느껴지고 있 는 분화의 징조가. " " 폭발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로군. " 재영과 유리,테레이아는 한 마디 씩 하며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연들의 테이 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지연의 맞선 관람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묘미가 있었던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발을 잘못 디뎠다간 저 깊은 나락 속으로 끝 없이 떨어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가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괜찮을려나,선생님? 괴로워 보이시는데…. " 내기 반 오기 반으로 시작한 맞선이라지만… 그래도 결혼할 배우자를 만나 는 자리인데… 좀 더 즐거워야하는 것 아닐까? 지연이 저렇게 고생하는 것 도 다 그녀가 자초한 일이었지만, 저렇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화를 눌러 삼키 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인의 말에 모두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빛을 보였다. 재영과 테레이아, 유리는 각자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래…. 우리 담임도 어느덧 서른이 다 되어가실려고 하는데…. 한시라도 빨리 좋은 남편감 만나 결혼하셔야지. " " 스핀스터(spinster:미혼 여성) 혼자서 그 나이 되도록 살아갈려면 얼마나 힘들었겠어? 학교에서야 아무런 내색도 안하시지만…분명 힘드셨을 거야. " " 이번 혼기를 놓쳤다가는 앞으로 기회란 영영 없을지도…. " 그리고 무엇보다도… ' 결혼해서 가정이 생긴다면 저 난폭한 담임의 성격이 완하될지도 모른다고! ' 그렇다. 지금이야 홀로 생활하고 있기에 그 성격이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날 카롭다지만, 일단 결혼만 해보라! 힘들 때 옆에서 지켜주는 남편 있겠다! 옥 이야 보배야 같은 자식까지! 당연히 마음에 여유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 다! 한 자식의 부모가 된다는 것은 그 만큼 인격적으로 풍부해지고 너그러워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런 의미에서 지연의 맞선은 반드시 성사되어야만 했 다. ' 그래. 우리 1학년 3반의 존망을 위해서라도…! ' …그렇게 까지나? 어쨋든,재영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시내 는 감동 어린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는 재영들이 담임 선생님의 혼사를 걱정하는 정 많고 기특한 학생들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미소지으며 재영들에게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너희들은 정말… 착하구나…. " " .........? " 재영들은 '이게 왠 뚱딴지 같은 소리야?' 라는 얼굴로 시내를 바라보았지만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그냥 오해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나은 일도 있는 법 이니까. 뒤에 진실을 알게된 시내가 실망을 하든 말든 그것은 그들이 알 바 아니었다.그때, 뒤를 이어 격앙된 한 여인의 목소리가 가인들의 테이블을 덥 쳐왔다. " 아아아아아아∼너희들의 그 담임 선생님을 걱정하는 아름다운 마음씨! 이 선생님은 차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구나! 역시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 빛을 발하는 너희들의 사랑 에 이 선생님은 아직도 이 암흑 같은 세상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 아갈 수가 있는 거란다∼! " " 으헉-! " 가인들은 이 갑작스러운 여인의 침입에 하마터면 심장이 덜컥 멎을 뻔 했다. 자신들의 뒤에서 꽃잎을 흩뿌리며 두 눈을 빛내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박 미정. 그녀였던 것이다! 아니, 이 여자… 집에 가지 않았었나?! 가인은 얼어 붙은 입을 간신히 움직여 미정에게 말했다. " 서,선생님… 아직… 안 가셨던 거에요? " " 오호호호호호∼ 중매쟁이는 맞선이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자리를 뜨지 않는 법이지! 잠시 둘 만의 시간을 가지게 해주고서는 은연 중에 뒤에서 그들을 뜨겁게 서포트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전도사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란다! " " 그,그것이 바로 100전 100승의 노하우…! " 감탄하는 테레이아. 하지만 그다지 감탄할 일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어 쨋든 유리는 경계의 눈초리로 미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 …처음부터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챘었던 건가? " " 훗. 변장이 꽤 훌륭했지만 내 눈을 속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 아직은 모 자란 감이 있지만… 뭐, 일단은 합격점을 주겠어요∼ " 윙크를 하며 유리의 머리를 토닥이는 미정. 하지만 가인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는 검은 바바리 코트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 변장? 훌륭해? 어디가! ' 아마 그것은, 가인으로서는 평생을 걸쳐 고민해도 이해하지 못할 의문일 것 이다. 재영은 고민하는 가인을 뒤로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은채 미정에게 말 했다. " 저어… 양호 선생님? 저,저희는 이만 가볼테니까∼수고하십시오! 하하,양 호 선생님이 계신다면야 저희들은 안심하고 담임 선생님의 일을 맡길 수 있으니까∼ " " 어머∼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요, 재영 학생? " 재빨리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몸을 돌려 레스토랑을 나갈려던 재영의 뒷 덜 미를 붙잡는 미정. 재영들은 긴장하며 목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 미정 이 지연에게 자신들이 여기에 왔었다는 애기를 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분명 무사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하는데∼ 미정은 그런 재영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예의 음흉한 미소를 지 으며 말했다. " 흐응∼ 그런데 만약∼ 음. 만약이에요∼ 만약 제가 하 선생님에게 '선생 님∼ 선생님 반 제자들이 아까부터 맞선 장소에 보이던데∼ 이것은 과연 우연일까요? 아니면 필연일까요?'하고 묻는다면 하 선생님은 어떤 반응을 보여주실까요? " ' 악마…. ' 가인들은 화사한 웃음을 짓고 있는 미정의 얼굴에서 악마를 볼 수 있었다. 저건 협박이지 않은가?! 아니,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저래도 되는 거야?! 가인은 침울해진 얼굴로 미정에게 물었다. " 저,저희가 어떻게 해드리길 바라시나요? " " 어머∼ 바라다니? 난 그런 거 없단다∼ " 거짓말. " 그냥 단지∼ 이왕 참석한 거 끝까지 이 양호 선생님과 함께 하 선생님의 맞선이 성사되도록 응원해주면 어떨까 해서∼ " 박미정.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그녀는 집요하면서도 회유책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이였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게 구석으로 몰아넣은 다음,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죽음의 늪에 끌어들이는 여인.가인들은 이미 자신들이 그 죽음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철저히 느껴야만 했다. 코가 꿰 여도 단단히 꿰였다. 이 상황에서 가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었다. " …시켜만 주십시오…. " 그렇게 하지연 선생의 맞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모와 계락이 넘치는 가 운데, 슬슬 그 중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 좋은 분위기의 칵테일 바네요‥ 」 「 하 선생님을 위해 특별히 신경 썼지요. 마음에 드십니까? 」 「 …예에…. 바의 조용한 분위기도 그렇고… 이 술도… 」 「아, 그 술은 무 알콜인 프로즌(FROZEN) 계열의 스트로 바나 콜라다(STRAW BANA COLADA)라고 하는 것 입니다.하 선생님 같은 여성 분은 아무래도 독 한 알콜의 맛은 모르실 것 같아서요. 」 「 …예? 아,뭐… 그,그렇지요…. 저 술은 잘 못하니까… 호,호호… 」 헤드폰으로 작지만 뚜렷하게 들려오는 하지연과 제갈후의 목소리. 그 전파 상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가인과 유리는 신경을 곤두세워 야만 했다. " 21번 테이블 도청 주파수 고정. " " 잡음 소거. 송신 거리 450M로 유효. " 그리고 미정은 이런 가인들의 보고를 받으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가 다 시 지시를 내렸다. " 흠… 하지만 전파가 좀 튀는 것 같지 않니? 가인 군,주파수를 20MHz 정도 낮춰봐요. " " 예,선생님.........이 아니잖아요! " 가인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입장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는 미정에게 항의해야만 했다. 가인은 자신들의 테이블 칸막이 밑에 펼쳐 져 있는 기재들과 프리 업으로 연결된 코드들을 내려다 보았다. 척 보기에도 왜 이런 칵테일 바에 이런 것들이 설치되어 있는 지가 의심스러웠다. " 엉겹결에 미행한 것 까지도 모자라서 제자들에게 도청까지 시키다니! " 지연과 제갈 후가 레스토랑 크리스탈에서 식사를 끝낸 후,다음 코스로 들린 곳은 바로 이 '지직스(ZZYZX)'라고 하는 칵테일 바였다. 식사 다음은 술집이 라는 좀 흔한 패턴이었지만, 지직스의 세련된 분위기와 은은한 불빛들은 그 런 흔한 패턴을 흔치 않은 패턴으로 바꿔주고 있어서 별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문제는 지연 일행이 아닌 바로 유가인,자신들에게 있었던 것이다.아 무리 자신들이 박미정,그녀에게 덜미가 잡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도와주게 되었다지만,도청이라니? 이건 엄연한 불법 행위 아닌가! 거기다 이 기재들 은 자신들이 오기 전 부터 이 테이블에 설치되어 있었다.그리고 이런 자리를 정확히 골라 앉은 박미정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에는… ' 설마 이거…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사전에 설치해둔 것은… ' 불현듯 가인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추측은 꽤나 높은 신빙성을 보이고 있었다. 가인은 복잡해질려는 생각들을 떨쳐버릴려는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 다가 다시 미정에게 말을 이어나갔다. " 더구나 여긴 술집이라고요! 술집! 미성년자를 술집까지 데려오다니…이거 분명 교칙 위반 아니에요?! " 그렇다. 가인과 유리, 테레이아,재영, 시내는 엄연한 고교 1년생.17살인 것 이다. 유리는 13살이 아니냐고 굳이 분류해 내어도 뭔가 사태의 해결점이 보 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들을 칵테일 바로 데려온 것은 다름 아닌 박미정 교사. 그래. 교사인 것이다.교외 지도 선생에게 지금의 이런 모 습들을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한성 고등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눈 앞의 양호 교사는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 지 살며시 눈 웃음까지 치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가인에게 말했다. " 호호홋∼이제보니 가인 군은 참 고지식하군요∼사회 체험을 통한 교외 수 업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을∼ 폐쇄적인 사고는 정신을 굳게 만든다는 것. 명심해두도록 하세요. " " …그렇게 은근슬쩍 잘도 타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넘기시는 군요…. " 가인은 미정과 더 이상 어떠한 얘기를 해도 무의미할 것이라는 회의감에 빠 져 자신의 친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이 녀석들 만이라도 데리고 서 이 칵테일 바를 벗어나야 할텐데…. " 우오오오오- 이 메뉴들 좀 봐! 이 무궁무진한 칵테일의 종류라니! 이것이 바로 21세기를 주도하는 주류 문화의 선구지, 칵테일 바의 진면목이란 말 인가! " " 재영 군! 여기 남자를 위한 칵테일과 여자를 위한 칵테일도 있어! " " 어디! 어디?! " 감탄을 터뜨리며 메뉴를 뒤적거리는 재영과 시내 커플.저 모습을 보고 있자 니 가인의 의욕은 저 밑바닥 까지 가라앉아 떠오를 줄을 몰랐다.차라리 재영 혼자서 저렇게 주책 없이 굴고 있었더라면 '역시나∼' 라는 체념으로 그나마 덜 힘이 빠질 것을…. 누가 커플 아니랄까봐 시내까지 덩달아 재영에게 맞장 구를 쳐주고 있으니까 강렬한 더블 임팩트가 가인을 엄습해왔던 것이다.재영 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메뉴판을 한층 더 세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 푸핫,이 칵테일 이름 죽이는데! 침실의 여왕(BEDROOM QUEEN)! 오늘 밤 난 침실의 여왕이 될 거야… 라니?! " " 이 이름도 웃겨,재영 군. 신데렐라 컴플렉스(CINDELLA COMPLEX)래. " " 오오옷! 이 이름은 어때?! 섹스 온 더 비치(SEX ON THE BEACH)! " " 꺄∼ 재,재영 군∼ 야해! " 하여간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들어온다고.재영이 가리키는 칵테일의 이름에 서는 그의 취향이 여실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얼굴을 붉히는 시내를 뒤로 하 고 가인 역시 인상을 찡그리며 메뉴를 바라보았다. 재영이 말한 '섹스 온 더 비치'라는 칵테일은 이름도 이름이었지만 그 멘트 또한 가관이었던 것이다. '눈을 감고 마셔봐,어때 느껴지지∼ 해변의 OO가…' 라니.정말 이 이름과 멘 트를 쓴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보고 싶어지는 일행들이었다. 외국인 인 테레이아 역시 칵테일 바는 처음이었는듯 신기하게 메뉴를 살펴보았다. " B-52? 이건 뭐죠,재영 씨? " " 폭격기래잖아요. 크큭.'오늘밤 융단폭격 한번 받아볼래?'라는 데요. 푸하 하핫.골때리는구만∼ " " 이것도 재밌지 않아요? 스크리밍 오르가즘(SCREAMING ORGASM)! " " 오옷! 좋아! 좋아! 그럼 이건 어때요! 가미가제(KAMIKAZE)! " " 풋…! " 테레이아와 재영은 죽이 맞아 서로 메뉴의 칵테일들을 짚으며 키득 거렸다. 처음으로 와본 칵테일 바인 만큼 모든 게 신기했던 것이다.그렇게 둘이 특이 한 칵테일 이름을 대며 경쟁 아닌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나지막한 유 리의 목소리가 둘의 목소리를 끊었다. " …좀비(ZOMBIE). " " ......... " …에? 갑자기 그게 무슨…? 의아한 눈으로 유리를 돌아보는 테레이아와 재 영. 그곳에는 도청기의 헤드폰을 머리에서 벗겨내며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 리키고 있는 유리가 있었다.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메뉴에는 다음과 같은 문 구가 적혀 있었다. - 오늘의 SPECIAL Cocktail! - ZOMBIE 좀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 PRICE: 13,000 " 헉- " …져,졌다. 테레이아와 재영은 유리가 제시한 칵테일의 이름에 숨을 들이키 며 승리를 유리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미정은 그런 재영들의 반응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손바닥을 마주 치며 말했다. " 자∼ 그럼 이제 실습으로 넘어가 볼까요! 사회 생활을 잘 할려면 무엇 보 다도 주류 문화를 얼마나! 잘! 능숙하게 즐길 수 있느냐가 관건이에요! 그럴려면 수 없이 마셔보고 술에 익숙해지는 수 밖에는 없는 법이죠! 여 러분은 지금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진기한 수업을 체험하고 있는 거에 요! 자! 어서 마시고 싶은 칵테일을 아무 거나 하나 골라 주문하세요! " " 서,선생님--------!!! " 가인은 미정의 말에 기가 막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도대체 학생에게 술을 적극 권장하는 선생이라니…. 지금 저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하시는 걸까?! 가인은 더 이상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흐르 기 전에 모든 것을 중지시켜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 우오오오옷!! 정말 아무 거나 골라서 주문해도 되는 거죠?! " " 자,잠깐만 재영 군. 그래도 우린 아직 학생인데… " " 괜찮아! 선생님이 책임지신대잖아! 걱정말고 시키자! 시켜! 시키는 거야! " 물 만난 물고기 처럼 옳다구나를 외치며 종업원을 부를려는 재영.가인은 그 런 재영의 입을 틀어 막으며 비명 처럼 소리쳤다. " 시키기는 뭘 시켜! 너 제정신이야?! 그리고 선생님도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미성년자인 학생에게 술을 먹으라고 부추기시다니! 이러 다가 학교 측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징계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고 요! " " 야,야∼ 유가인. 약간 술 마시는 것 뿐이잖냐∼ 뭐 어때서 그래∼ " 재영은 고지식한 가인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으며 투덜거렸지만,유가인. 그 는 강경 보수파의 화신으로 변해 있었다. 가인이 무시 무시한 눈빛으로 자신 을 노려보자, 재영은 반발의 여지도 없이 움츠러 들어야만 했다. 저럴 때의 가인을 자극시켰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 상 알고 있는 재 영이었다. 괜히 8년지기 친구이겠는가? ' 자식…. 고리타분하기는…. ' 차마 가인에게 하지 못하는 재영의 말이었다. 어쨋든,가인은 재영이 조용해 지자 이번에는 박미정 교사를 돌아보았다. 무엇보다도 이 불량 교사가 모든 탈선의 원인이었다. 여기서 더 이상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렸다가는 정말 죽 도 밥도 안된다. 그러나 가인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미정이 한 발 먼저 선수 를 쳤다. - 탕! 강하게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 미정의 주먹이 테이블을 내리쳤던 것이다. 한 순간이었지만 공업용 나사로 고정된 테이블이 흔들린 것 처럼 보였던 것 은 착각이었을까? 그런 미정의 모습에 가인은 막 할려던 말을 잊어 버리고 꿀 먹은 벙어리 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살짝 고개를 숙여 음영을 얼굴에 드 리운 미정의 등 뒤로는 예의 꽃잎들이 거세게 휘날리고 있었다. " 가인 군. " " …예,옛? " 낮게 가라 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대답한 가인.다른 일행들도 마른 침을 삼키며 미정을 주시했다. 뭔가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일 행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 학생의 본분은 무엇인가요? " " …예? 그,그게 갑자기 무슨… " 난데 없는 질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가인.어김 없이 버벅거리며 당황하 고 있다. 하지만 미정은 쉴 틈을 주지 않고 가인을 압박해 왔다. " 학생의 본분은 바로…! 자신을 이끌고 가르쳐주는 교사에게 믿음과 신뢰 의 마음으로서 따라주는 것이 아니었던 가요?!!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게 변해간다고는 하지만! 사제 간의 사랑으로서 지켜나가야할 유대 관계 마 저 변질 되어서는 안되는 법!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불신해서야 어떻게 이 사회에 진정한 교육의 뿌리가 내려질 수 있겠습니까! 제 말이 틀렸나 요,가인 군?! 어서 대답해봐요! " " 그,그게… 맞는 말인 것‥ 같기는 하지만… " " 그렇다면 무엇을 더 망설이고 있는 것이죠?! 옳다고 생각하면 실행에 옮 기는 것! 그것이 바로 탐구하고 학업에 열중하는 진정한 학생의 자세가 아니었던 가요! 젊음이란 도전! 그리고 도전에 필요한 것은 추진력! 그런 거침 없는 태도야 말로 젊은 학생! 여러분이 가져야할 태도가 아닙니까!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면서도 망설임이 있다니! 가인 군은 언제부터 그런 우유부단하고도 나약한 학생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 - 쿠쿵! 순식간에 탁상공론이나 벌이며 공약을 실천하지 않는 우유부단한 정치인이 되어버린 유가인.그는 쇼크 상태에 빠져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중얼거렸다. 나,나는 언제부터 그런 젊음의 열정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지…. 내가 제 일 싫어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답습하고 있었다니…. 부끄럽다. 나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인간이다… 라는 식의 중얼거림. 미정은 그런 가인 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경을 반짝인채 예의 청량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었 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재영들의 눈에는 그것은 청량한 미소가 아 니라 악귀와도 같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미소로 비춰지고 있었다. ' …사악해. 너무나도 사악한 인간이다. ' 어찌되었든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가인에게 도청이나 하라며 그를 테 이블 한 구석으로 추방시켜버린 미정은 이번에는 재영들을 돌아보며 예의 청 량한 미소를 날렸다. " 자,여러분∼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사회 체험 수업 시간을 가질까요? " " 오오! " 언제 그녀의 미소에 두려움을 느꼈냐는듯이 환성을 내지르며 메뉴판에 달려 드는 재영들. 그것은 믿음과 신뢰와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사제 간의 모습 …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었다. " 하하하∼ 그래서 말이지요. 때마침 제 어머니의 성화도 있고해서 기분 좋 게 박 선생님의 맞선을 받아들였지요.얼마나 결혼하라고 성화셨던지 글쎄, 제 맞선녀들이라면서 리스트를 한 다발 씩 뽑아오셨지 않겠습니까? " " 아,예…. 그러셨어요? " 화색을 띄며 들뜬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제갈 후. 그는 어지간히나 이 눈 앞의 조숙한 맞선녀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 있는 조숙한 맞선녀, 하지연으로서는 애써 뚱한 표정을 숨키며 답하는 것이 한 눈 에 보아도 억지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녀는 겉으로는 방 긋 방긋 웃으며 제갈 후의 말에 성의 없게 답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갈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 아,젠장…. 뭐 이딴 마더 콤플렉스 덩어리가 다 있는 거야? 말 끝마다 어 머니, 어머니 라니. 넌 네 에미가 없으면 손가락도 빨지 못하는 자식이냐? ' 만약 제갈 후가 그녀의 이런 속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 면, 정확히 몸의 체온이 10도 정도는 과감히 떨어졌으리라.하지만 지연이 이 런 생각을 안할 수도 없는 것이,제갈 후는 그녀의 생각 그대로 말 끝마다 자 신의 어머니를 들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대충 그가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요 약하자면… - 통일 한국을 움직이는 여성 10걸 중 한 분이시자 현 유진 그룹 명예 이사 이시기도 한 저희 어머니는 자식 사랑이 대단하신 분이신지라 마침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저를 위해 수 많은 맞선을 준비해주셨지만,저는 제 결혼 만큼은 제 힘으로 하고 싶었기에 어머니의 정성을 거절하고 이렇게 하지 연 선생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제 어머니의 말씀을 거슬렀다는 것이 심 히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제 선택을 존중해서 지연 선생님에 게 심한 해꼬지 같은 것은 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리 큰 걱정 은 하지 마십시오…. …가 되겠다. 잘도 이런 말을 2시간 씩 듣고서도 참고 있었군.그것도 저 하 지연이…. 단지 김학도와의 내기에서 승리하기 위한 집념 만이 그녀의 모든 것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 하아….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래. 이런 얼빠진 자식이나 상대하고 있고…. ' 지연은 이런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나와있는 자기 자신이 한심해졌다. 괜히 김학도, 그 인간하고 시비가 붙는 바람에 성질에 맞지도 않는 짓을 할려니 속이 터져 죽겠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 때려치자니 지금까지 앉아 있던 시간 이 아까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눈 앞의 얼빠진 맞선남이 자신에게 호 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 맞선을 성 사시켜서 그 학생 주임 늙은이를 금연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거야. 그리고 그 늙은이 앞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꼬나 물며 비아냥 거리는 거지.후후후…. ' 하지만 정말이지… 이 자식은 아니야…. ' 지연은 혼자서 맘껏 떠들고 있는 제갈 후를 바라보다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맞선남은 도저히 자신의 타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외모나 학력, 직업 면에서는 더 할 나위 없는 최고의 남자였지만… ' 그래. 성격이 최악이야. 이딴 근성 없는 마더 콤플렉스 자식. ' 하지연. 그녀는 운동부 출신인 만큼 근성 없는 인간을 싫어했다. 더구나 자 신의 집안이나 믿고서 엘리트 행세나 하려 하는 인간은 더더욱 싫어했다. 이 눈 앞의 제갈 후란 남자는 영광스럽게도 지연이 가장 싫어하는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 사내 자식이 저렇게 비리비리해서야 어디다 써먹느냐고…. ' 제갈 후야 평범한 일상 남자 수준의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연이 보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다.역시 그녀가 운동부 출신이라서 그런 건지 지 연에게 있어서 '남자!'하면, '남성미!'였던 것이다. ' 그래. 남자라고 하면 어느 정도 근육도 있고 덩치도 있어야지…. 저렇게 허여멀건하고 비쩍 말라서야… '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상적인 남성 상. 흔히 이럴 때 만들어지는 남 성상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남자들을 기초로 구성되어진다. ' 근육도 있고… 덩치도 좀 있으며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남자라면… ' 그때 그녀의 머리 속에 바이러스 처럼 스며드는 남성 하나. 그의 모습이 강 렬하게 오버 랩되기 시작했다. - 크랴아아아앗!! 타이거 슛-------!!! 다름 아닌 정진우. 바로 그였던 것이다! 이 순간, 지연의 안색은 더 없이 창백해지며 핏기가 사라졌다. ' 말도 안돼---!! 어떻게 그런 마초를!! 더구나 유부남이잖아! 아무리 주위 에 남자가 없었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경박한 남자를 떠올릴 수가 있는 거지----!! ' 지연은 진우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산출해낸 자신의 신피질계 정보 처리 기능을 저주하며 강력하게 앞의 결과를 부인했다. 그,그래! 아무리 남성미가 있어야 한다고 해도 그 인간 처럼 쓰잘데기 없이 한껏 부풀어 오른 근육은 필요없단 말이지. 괜히 둔해보이기만 하고 말이야. 자고로 가장 실용적인 근 육이 아름다운 법이니까! 무엇보다도 그런 경파한 성격 따위… 이 쪽에서 받 아들일성 싶으냐!! 지연은 진우를 떠올린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남성을 떠올릴려고 애썼다. 그래! 요즘 남자는 좀 곱상하게 생겨야지! 그렇 게 아저씨 같이 생길 필요는 없는 거야! 그리고 성격도 좀 강인하면서도 자 상스러운 면도 있어야 할테고…. 음…. ' 어라…. ' 지연은 다음으로 머리 속에 떠오른 남성의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 다. 떠오른 남성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제자, '유가인'이었던 것이다. 지연 은 씁쓸한 고소를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 정말 내 주위에 남자가 없기는 없는 모양이내…. ' 자신의 제자를 이상적인 남성으로 꼽을 정도라니…. 이건 솔직히 문제가 좀 있었다.아무리 남자 없이 살아온 29년 인생사라지만 이럴 때 떠올릴 수 있는 변변찮은 남자도 없다니…. ' 아,젠장∼ 그냥 떠올려 봤을 뿐이잖아.그렇게 까지 자신을 비하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 그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상적인 남자가 가인이 그 녀석이라는 거지. 뭐, 그 녀석에게 연애 감정이 생겼다는 것도 아니고…. 그래. 내가 괜히 자기 비 하를 할 필요는 없는 거야. 지연은 그렇게 억지로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 그러고 보니… 가인이 녀석‥. ' 그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인지도 어느덧 8개월이 다 되어가는군….지연은 새 삼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탄식했다.가인이 재영들과 어울려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 어느새 그렇게 웃을 줄도 알게 되고…. 처음에는 그렇게나 어두웠던 녀석 이 말이야. ' 지연은 1학기 초에 처음으로 유가인을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 38번 유가인. 갓 중학교에서 올라온 뜨내기 고교생 40명을 앉혀두고 1학년 3반에서 지연 은 아이들의 번호와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자신이 부른 38번 학생이 특이한 학적부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예. 낮게 답하며 손을 올렸다 내리는 가인.앞 머리가 눈을 가리고 있어 꽤나 어 두운 인상이었다. 평상시의 지연,그녀라면 그런 의기 소침한 학생에게 반 농 담 식으로 라도 '힘내!' 라고 소리쳤겠지만 그녀는 그러지를 못했다.그의 학 적부에 기록된 가족 사항이 너무나도 짙은 무게감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父(死) 母(死) 弟(死) 1년 전의 자동차 사고로 유가인,그 아이만 남기고 가족은 모두 사망. 친척 집을 전전하며 중학교 3학년을 무사히 마친 후, 고등학교 입학. 현재 보호자 가 없고 학비는 국가에서 나오는 생활 보조금과 아르바이트로 충당. 솔직히 담임인 지연으로서는 가인을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았다. - 아,저기… 이번 급식비 말인데, 가인아…. 그건 이 선생님이… - 아뇨. 이번 달 말이면 아르바이트 비가 나오니까 괜찮습니다. - 으응? 아…, 그래. 가인은 마치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 처럼 타인의 동정에 민감히 반응했다.뭐 든지 자기 스스로가 해낼려고 했으며 남들에게 모자란 점을 보이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가족이 없어도 자신은 다른 집의 아이들과 하나도 다 를 바 없이 잘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무언으로 얘기하려 했던 것 같았다.지 연은 그런 가인에게서 녀석이 어딘가 무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지연은 가인이 눈치 채지 못하는 한도 내에서 그의 편의를 봐주며 되 도록이면 다른 학생들과 그를 똑같이 대할려고 애썼다.그것이 그 아이를 위 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 …그러나… 그게 과연 진정으로 그 녀석을 위한 것이었을까…. ' 단지 대하기가 껄끄러워서 더욱 도움을 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아이를 그냥 방치해 둔 것은 아니었을까? 지연은 가인을 볼 때 마다 마 음 한 켠으로 그런 생각들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인은 때때로 수업 도중 창 밖을 멍하니 응시하며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면 그 아이가 자신 의 가족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스러웠다. - 그 녀석에게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도 못 해주는 내가 무슨 교사란 말이 야…. 교사는 만능이 아니다.자신의 학급에 있는 모든 학생들을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변명이 되지는 않았다.자신은 분명 가인을 대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그 아이가 상처 받을까봐. 자신이 아무렇 지도 않게 한 무심한 말이 그 아이에게 비수가 되어 꽂힐까봐. 가인은 언제 나 무표정하게 교실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지연에게는 마치 그가 울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된 '테레이아 민체스터'라 고 합니다. 하지만 전학생이 오고… - 가라,유가인! 체육대회를 지나서… - 또 그 녀석들이 문제를 일으켰단 말이지∼! 친구들과 함께 자신을 사사건건 정신 없게 만드는 말썽꾸러기가 되면서… ' 너는… 어느새 그렇게 웃게 되었구나. '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마음의 여 유라고는 없었던 녀석이 말이다. 지연은 그렇게 나날이 밝아져 가는 가인의 모습에 뿌듯해지면서도 교사로서의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감탄했다. 유가인. 그 아이는 강한 아이라는 것을. ' 그래. 아무래도 남자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야. '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성도 있겠다.성격도 참하겠다. 신체 조건도 좋아! 이 정도면 남자로서는 최고가 아니겠어? 지연 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미소지었다. ' 잠깐… '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야만 했다. 뭔가 자신의 생각에 중대한 오류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 내, 내가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자신의 제자에게 두 근거리다니?!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하지연! 너 지금 그 어린 아이를 남자로 느꼈던 것은 아니겠지?! 주책 맞게!! ' 지연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자신의 앞에 놓인 스트로 바나 콜라다를 그대로 원샷해버렸다. 무아지경으로 자신이 할 말만 늘어 놓고 있던 제갈 후 는 갑작스런 지연의 행동에 깜짝 놀라 말했다. " 하 선생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 " 예?! 아,아뇨. 아무 것도 아니어요. 호,호호… " " 하지만 얼굴색이 붉어지신게 영… " " 수,술을 마셔서 그런가봐요! 제가 워낙에 술이 약한지라∼! " " 저기… 그 술은 무 알콜인데…. " " 쿨럭…! " 제갈 후의 말에 뜨금하여 마셨던 스트로 바나 콜라다에 사례가 걸린 지연은 격하게 콜록 거리며 기침을 해야만 했다.제갈 후는 그런 지연의 상태가 심히 걱정되었는지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이런! 괜찮으십니까,하 선생님? 제가 물이라도 가져오는게… " " 아,아뇨!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로 멀쩡해요! 그, 그보다 우 리 얘기나 계속해요! 아,어디까지 얘기 했더라… 그래! 제갈 후 씨는 왜 그 좋은 선처 자리를 마다하셨어요? 어머님이 소개시켜준 여자들이라면 하나 같이 절색에 좋은 집안의 분들이셨을 텐데…. " " 예? 아,하하하… 그것 말씀이십니까? " 지연은 급한 김에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제갈 후는 일 어서던 것을 멈추고 다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지연은 그런 그의 반응에 가 슴을 쓸어내리며 속으로 한 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젠장….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래…. " 하긴 하 선생님도 뜻 밖이시겠죠. 제가 왜 좋은 선처 자리를 다 마다하고 하필이면 체육 교사 출신의 하 선생님과 맞선을 하러 온 것인지. " " .........예? " 순간, 지연의 이마에 가는 실핏줄이 그어지는 것을 제갈 후는 보지 못했다. 아니…, 저 자식이 지금 뭐라고 했던 거야?! 하필이면 체육 교사 출신의…?! 금방 그 따위로 지껄였던 거냐,네 놈?!! " …하 선생님? " " 어머! 아무 것도 아니어요. 계속 말씀하세요,호호… " 간신히 웃음 비스므레한 형상을 입 가에 유지하며 지연은 테이블 시트를 주 먹으로 한 움큼 움켜쥐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 머리카락이 다 뻗뻗하게 쏟아 오를 것만 같았다. 지연,그녀가 순전히 참아 넘긴 것은 우연과 인내의 산물 이었던 것이다.그,그래. 여기서 화를 내면 말짱 도루묵이다.평생 학도,그 인 간에게 비웃음을 당하며 살고 싶은 거냐,하지연?! 참아! 아직 참을 수 있잖 아! 근성으로 버텨내는 거다! 지연은 웃는 얼굴이 구겨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제갈 후에게 물었다. " 제갈 후 씨가 그러셨던 이유가 참으로 궁금하네요? " 궁금하기는 개뿔이…. " 하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대원 그룹의 부장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관 련 사업의 전무로 일하기 때문에 자주 외국에 나갈 일이 많습니다. " 그래서? " 그러다 보니 집을 자주 비우게 되더군요. 그래선지 아무래도 집을 지켜줄 가정적인 사람을 찾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소개시켜주는 여성 분들이란 사람들이 한결 같이 귀한 가문의 콧대 높은 마나 님들이라서 말이죠.집에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도 않고,제 말을 잘 들을려고 하지도 않더라구요.그 래서 전 좀 좋은 가문의 사람은 아니더라도 착실히 가정을 지켜주는 여성 과 결혼하고 싶은 겁니다. 뭐, 질문에 대한 대답은 되셨습니까? "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지연을 바라보는 제갈 후.지연 역시 미소로 그에게 답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 안에서는 수 많은 생각의 회오리들이 휘날 리고 있었다. ' 잘도… 잘도 그런 썩어빠진 소리를 웃는 낯짝으로 하고 있구나,네 놈! 그 런 이유로 결혼 상대를 고르고 있었던 거냐?!! 차라리 가정부를 하나 고 용하시지 그래?!! ' 정말이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지연, 그녀의 인생사 중 이런 최악의 남 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테이블 밑의 식탁보에 가려진 지연의 손이 거세 게 움츠러 들며 뼈 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내고 있었다.지금 당장에라도 그 녀의 얼굴에 흉신악살의 표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신기할 노릇이었다. ' 크으으으으… ' 하지만 지연은 참았다. 마지막으로 참았다. 김학도와의 내기를 간신히 떠올 릴 수 있었기에. 자신을 '노처녀'라고 비웃던 그 늙은이의 목소리를 되새길 수 있었기에. 그러나 참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다.지연은 간신히 목소리를 끌 어올려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로 제갈 후에게 말했다. " 그럼…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제 직업은… " " 예? 그거야 당연히 그만두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몸도 힘들고 애들 도 상대하기 힘든 체육 교사 같은 거 그만두는게 차라리 낫잖아요? 고등 학생들. 열심히 가르쳐준다고 해서 교사에게 고마워하는 녀석들도 없을 테고. 뭐하러 그런 일을 계속 합니까? 그냥 편하게 60평 자택에서 저와 함께 사시면 되실 것을…. " 네 놈. 만약 그게 개그라면 네 놈은 성공한 거다. 날 웃겨줬으니까. 지연은 여자를 비하시키는 말까지는 참아넘길 만 했다. 하지만 자신의 교사 직 까지 깔아뭉개는 제갈 후의 말은 차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 놈의 자 식이… 네 놈의 자식이 교사에 대해 뭘 안다고…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알고 그 따위 소리를… ' 오늘이 네 놈의 제삿 날이다-------!!!!! ' 지연의 두 눈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결국 참는 것도 여기까지였나 보다. 전 부터 누누히 얘기하는 것이지만, 사람은 아무리 겉이 변한다고 해도 속이 바뀔 수는 없는 법. 지금 이후부터는 제갈 후의 명복을 빌어주도록 하자. - 챙…! 그때 저편의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술잔 소리와 함께 시끌 벅적한 사람들의 소리. 참으로 요란하게도 술을 마시는 모양이었다. 제갈 후는 흉신악살의 표 정을 짓고 있는 지연의 얼굴을 다행스럽게도 보지 못하며 소리가 나는 방향 을 바라본채 인상을 찌푸렸다. " 거,참…. 예의도 없는 녀석들이로군요.들리는 목소리로 봐서는 나이도 어 린 녀석들 같은데…. " 제갈 후의 말대로 저편의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웃음 소리나 말 소리들은 분 명 이런 칵테일 바에는 어울리지 않는 여린 사람들의 목소리와 말투였다. 마 치… 고등학생 같은 이들의 목소리와 말투라고나 할까…. ' 고등학생…?! ' 지연은 슬며시 불안한 느낌이 치밀어 올랐다. 계속 듣고 있어 보니깐 뭔가 익숙하고도 상당히 낯익은 목소리들인 것 같았다.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는데도 지금껏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일 어나서, 소리가 들려오는 테이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하 선생님?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 뒤늦게 지연을 따라 제갈 후가 그녀를 부르며 일어섰지만, 지연은 돌아보지 도 않고 저편의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사회 체험 수업 시간(…)을 가지고 있던 가인들의 테이블에서는…. " 크으으으…! 주,죽인다! 이거 무지하게 세잖아?!! 완전히 공업용 알콜이 야! 공업용 알콜!! " " …재영 구운… 속이‥ 안 좋아…. " 오만상을 찌푸리며 빈 술 잔을 든채 혓 바닥을 내미는 재영과 그의 어깨에 기댄채 헤롱 거리고 있는 시내. 그들의 술 잔은 이미 모두 비워져 있는 상태 였다. 그런 둘에게 박미정 교사는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 어머, 수고하셨어요∼ 재영 군, 시내 양∼! 선생님 말대로 모두 원 샷에 들이켰군요! 자고로 술 자리에서 원 샷으로 마시는 것은 주류 문화의 암묵적인 룰인 것이에요. 잘 알겠죠? " " 옛써! " " 머리가… 머리가…. " 얼굴이 시뻘개진채로 미정에게 거수 경례를 붙이는 재영과 그의 어깨에 얼 굴을 파묻은채 고개를 들 줄을 모르는 시내. 그것만 봐도 그들의 현재 상태 를 파악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가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런 일 행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표현했다. " …콩가루다. " 가인은 히히덕 거리며 웃고 있는 재영들을 바라본채 나지막히 한 숨을 내쉬 었다.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접어든지 오래였다.그나마 처음 에는 이 술 집의 사장이 미성년자에게는 술을 팔리가 없다는 것에 희망을 걸 었지만…. 그 희망은 미정과 사장의 간단한 대화에 의해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려야만 했다. - 어머, 사장님 아니세요? - 아니! 박 여사님?! 여기는 어쩐 일로…? - 다름이 아니라 제 제자들에게 술을 좀 가르쳐 줄까 해서 데리고 왔거든요. - 아,그러셨습니까! 당연히 술은 어른에게서 배워야 하는 법이지요! 잘 오 셨습니다! 언제나 그 독특한 미각으로 저희 업소의 칵테일을 시잔해주시 는 애주가 님의 제자들을 모시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졸지에 애주가와 그녀의 제자들이 되어버린 가인들이었다. 가인은 의심스러 운 눈초리로 박미정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앞의 레스토랑에서도 그렇고 여기 에서도 그렇고…. 저 양호 선생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호칭도 박 화 백 부터 시작해서 박 여사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도대체 어느 것이 그녀의 진 면목인지 감도 오질 않았다. 과연 특별한 여인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수식어 가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쨋든, 가인으로서는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었고, 단지 교외 지도 선생님들에게만 이 상황이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 었다.진심으로. ' 에휴…. 그럼 난 도청이나 계속할까나…. ' 특별히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었고,가인은 반 자포자기 심정으로 헤드폰을 귀에 꽂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하는 것 이 고지식한 그 다웠다. " .........응? " 하지만 헤드폰에 귀를 기울이던 가인은 살짝 인상을 찡그려야만 했다.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잘 들려오던 헤드폰 속에서 아무런 음성도 들려오지를 않 았던 것이다. " 어라? 고장난 걸까? " 도청 기구들에는 별 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면 도청기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그 도청 장치가 설치된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말이 되는… ' 자리에…아무도‥없어?! ' 순간 가인의 등 뒤로 서늘한 찬바람이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굳어버린 가인 의 귓가로는 자신들의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헤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연들이 있는 테이블까지 자신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까지 심하게 떠들고 있었단 말이지? ' 호,혹시…! ' 우리… 발각된 것은…?!! 가인은 안색이 창백해져 서둘러 미정과 모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허둥거렸다. 만약 하지연. 그녀에게 자신들이 이곳 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교외 지도 교사에게 걸리는 것보 다도 더 지독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그것 만큼은 절대로 피해야만 했다! " 서,선생님…! " 그렇게 가인이 미정을 부를려고 할 때, 가인은 순간, 자신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오는 누군가의 머리를 느낄 수 있었다. 옅은 샴푸 향에 취해 잠시 멍해 있던 가인은 곧 자신의 옆에 다가온 여인을 내려다보며 놀란 목소리로 그녀 를 불렀다. " 테,테레이아?! " 가인의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이는 테레이아 민체스터, 그녀였던 것이다. 테 레이아는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붉은 기가 촉촉 도는 눈으로 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얘,얘는 도대체 또 왜 이런데…?! " 왜,왜 그러는 거야,테레이아? " " 훗. 가인…. 잠시만 이대로 있으면 안될까? 가인의 품 속은 언제나 따뜻 해서… 한번 안기면 헤어나오기가 싫어져…. " " 뭐?! " 가인은 자신의 팔짱을 깊숙히 끼어오는 테레이아를 얼굴이 붉어진채 바라 보았다. 이제보니 간간히 테레이아의 숨결 사이로 희미한 술 냄새가 느껴지 고 있었다. 아,테레이아…. 마셔버린 건가…? " 술 취한 거야,테레이아?! " " 응…. 취해버렸어…. 하지만 이제는 가인에게 취하고 싶어…. " 너무나도 자극적인 테레이아의 말.그 꺼질듯하면서도 도발적인 목소리가 가 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거기다 묘하게 흐트러져서 어깨 선이 보이는 테레이아의 모습은 두 말 할 것 없이 가인의 심박수를 올려주는 데에 큰 기 여를 하고 있었다. 자,잠깐만 테레이아!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제발 정신 차려! 그러나 그런 가인과 테레이아의 귓 가로 언제나 처럼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 하나가 있었으니. " 안 취한 거 다 아니까 쇼하지 마. " " …훗. " 테레이아는 아쉬운듯 짧게 코웃음을 치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노려보았 다. 그 곳에는 유리가 그야말로 서슬이 퍼런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 다. 얼마나 그 눈빛이 처절했던지 괜시리 테레이아의 옆에 있던 가인마저 그 한기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유리를 불 러 보았다. " 유,유리야? " " 오빠…. " 한 치의 감정도 들어 있는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인에게 다가오는 유리. 가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에게 걸어오는 유리를 겁 먹은 얼굴로 올 려다 보았다. 테레이아와 전쟁 중일 때의 유리는 정말이지 무섭다. 정말. " 유,유리야. 저기… 진정하고… 잠시만 화내지 말아 봐…. 알았지? 응? " - 털썩! 하지만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가인에게 다가오던 유리는 순간, 휘청 거리며 그대로 가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가인은 당황하며 그런 유리를 안아올리며 소리쳤다. 뭐,뭐야? 의식이 없어?! " 유리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응?! " " .........오빠‥. " "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 자신을 올려다 보며 창백한 얼굴로 힘 없이 말하는 유리. 가인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그런 유리에게 소리쳤다. 유리는 그야말로 정신을 잃기 전에 안간 힘을 다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어서 말해봐,유리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졸려‥. " " .........뭐? " 그 말과 동시에 곤히 가인의 품에서 잠들어 버리는 유리. 뒤를 이어 가인의 코 끝을 강렬히 파고드는 역한 술 냄새가 느껴졌다.으아앗! 유리야! 역시 너 도 마셨던 거야?! 가인은 당황하며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유리의 이마를 쓰다 듬었다. 얼마나 독한 술을 원샷으로 마셨는지 체온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가인은 기가 막혀 미정을 돌아 보았다. 아니,이런 어린애한테 술을 주다니…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재영이 녀석과 시내 도 그렇지! 좀 말리지 않고서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다니! " 웩- " 하지만 막상 재영들 쪽을 돌아본 가인은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그 쪽의 상황은 자신들 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가볍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재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시내가 그대로 재영의 옷에 오바이트를 한창 하는 중이었다.더구나 그런 애인의 토악질을 몸에 묻힌 재영의 멘트가 가관이었다. " …따뜻해…. " 이미 인사불성이 된 듯 눈이 풀린채 멍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재영. 그야말 로 아비규환의 재래라고 할 수 있었다. 가인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 로 입을 가리며 비명을 들이 삼켜야만 했다.완전히 술 하나로 인간들이 망가 지고 있었던 것이다. " 앗,치사해.가인…! 유리만 안아주고… 나도‥ 안아줘…. " " 테,테레이아! 제발 이러지 마! 이럴 때가 아니라고! " " 졸려…. " " 우우우욱…. " " …온기가…. 따뜻한 온기가 내 어깨에…. " 이것이 바로 미성년자에게 술을 먹인 결과라고 해야 할까나. 이렇게 교과서 적으로 술 하나에 적나라하게 망가지는 꼴을 보고 있자니 되려 동정심 마저 들 정도였다. 가인은 테레이아와 유리의 사이에서 꿈틀거리며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지만 술을 마신 사람들은 전신의 힘이 다 풀리기 때 문에 보통 때보다 더더욱 무거운 법이다. 가인은 그야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 었다. 그때, 그런 그를 도와주는 한 손길이 있었으니. 누군가가 가인의 몸에 서 유리와 테레이아를 떼어내주는 것이었다. 가인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자유 롭게 된 몸을 일으켜 자신을 도와준 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 아아…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이대로 꼼짝도 못할 뻔 했어요. " " .........천만에. " 허리를 두들기며 웃는 얼굴로 도와준 이를 바라보는 가인.그리고 은인의 얼 굴을 알아보고서 그는 정확히 3초간 굳어 있어야만 했다. 가인의 얼굴에서는 마치 변온 동물의 그것 처럼 온기가 싹 가시기 시작했다.왜냐하면 가인의 눈 앞에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담임 선생님인 하지연. 바로 그녀였던 것 이다! 그녀는 흉흉한 안광을 번뜩이며 지옥의 사자 처럼 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연은 마치 최후의 사형 통고를 내리는 사형 집행인 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가인을 추궁했다. "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겠냐? " " 아,저기…! 이건! 그,그러니까 우선… 제 얘기를 듣기보다는 양호 선생님 에게 얘기를 듣는 것이…. " 가인은 비겁하게도 모든 책임을 미정에게 떠넘기기로 결심했다. 일말의 양 심이 찔렸지만 솔직히 이 사태는 박미정, 그녀가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 니었기에 죄책감은 느껴지질 않았다. 그래. 우리는 단지 양호 선생한테 끌려 다닌 죄 밖에는 없다고…! 난 분명 반대했으니까! 그러니까… " ......... " 하지만 이 모든 사태를 유발시키고,지금의 상황을 하지연에게 설명해주어야 할 박미정, 그녀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곳에 존재하지 않 았던 것 처럼. 자신의 자취를 깨끗하게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지연은 가인 이 가리켰던 아무도 없는 테이블에서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 …아무도 없잖아? " 한 순간이었지만 가인은 의식의 끈을 놓쳐버릴 뻔 했다.이제부터 모든 책임 은 이 자리에서 멀쩡히 남아 있던 유가인, 자신이 져야만 했다. 정말이지 너 무나도 가혹한 현실이었다.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뒤늦게 지연을 쫓아온 제갈 후에 의해 가인의 데스 카운트 다운은 잠시나마 늦춰질 수 있었다. " 무슨 일입니까,하 선생님? " 제갈 후는 가인의 테이블을 보고서는 벙찐 표정으로 그렇게 지연에게 물어 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를 못했다. 여전 히 재영의 품에서 토악질을 하고 있는 시내의 모습에 지연의 시선이 잠시나 마 가늘게 떨렸다. 감당할 자신이 없어진다고 해야할까,이건…. 차마 지연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제갈 후는 알아서 상황을 파악한듯 인상을 구기 며 말했다. " 하여간 이 업소 이렇게 보지 않았었는데 미성년자에게도 술을 판매하고 있었던 건가?! 이거야 원…. 엉망이로군.척 보기에도 고등학생 같은데 이 런 추태나 부리고 말이야. " 그리고 지연의 인상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 이런 놈들 가르치는 선생 놈들 얼굴이 참으로 궁금하구만.쯔쯔….하긴 선 생이라고 다를게 뭐 있겠어? 제자 놈 보면 그 놈의 스승들도 뻔할 뻔자지. 하여간 이래서 이 나라의 교육자들은 되먹지를 못했다니까! 너희들의 스 승이란 작자도 네 놈들 가리키는 선생이라고 얼굴 들고 다니냐?! 부끄러 운 줄을 알아야지! 앙?! " " 그만--------!!!! " 그때, 한창 열이 오른 제갈 후의 말을 끊은 것은 우뢰와도 같은 지연의 외 침이었다. 그 바람에 화들짝 놀란 제갈 후는 얼빠진 얼굴로 지연을 돌아 보 았다. " 하,하 선생님? " " 아,젠장! 그쯤 말했으면 됐지 않냐?! 사내 새끼가 더럽게 말 많구만!! " " ......예? " 결국 그 동안 참고 있던 본색을 한 순간에 풀어내버리는 지연. 그런 지연의 모습에 제갈 후는 얼 빠진 표정으로 말을 버벅였다. 이건 한 순간에 사람이 바껴버린 것 만 같았다. 폭언을 내뱉고 으르렁 거리는 지연에게서는 앞의 요 조 숙녀의 모습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지연은 이를 갈며 가인들 의 테이블에 놓여 있던 한 술병을 집어 들었다.그것은 미정이 특별하게 주문 을 해놓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증류수 보드카(Vodka)였는데 알콜 농도가 40∼ 50 도인 무지막지하게 독한 술이었다. 지연은 그런 보드카를 그대로 병나발 불기 시작했다. - 꿀꺽꿀꺽꿀꺽꿀꺽… 독한 알콜 덩어리가 목 안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지연이 보드카 한 병을 원 샷해버리는 모습에 가인과 제갈 후는 입이 함자박 만큼 벌어져 다물 줄을 몰 랐다. 저,저거…. 저렇게 마시다간 죽지 않나? 하지만 그런 가인들의 걱정과 는 달리 지연은 마치 NGMπ워터를 마신 것 처럼 개운한 표정으로 탄성을 내 질렀다. " 크으! 좋다! 아까부터 마시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는데 역시나 좋구나! " " 하,하 선생님…. " 신음과도 같은 비명을 흘리는 제갈 후. 그는 아직도 이 눈 앞의 현실을 받 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연은 그런 제갈 후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숨 죽인채 몸을 떨고 있는 가인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 당겼다.지연 은 가인과 쓰러져 있는 재영들을 가리키며 제갈 후에게 소리쳤다. " 이 녀석들 가르치는 선생 얼굴이 궁금하다고 하셨던가?! 내가 바로 이 녀 석들 담임인 사람이다! 어때? 네 놈 말대로 되먹지 못해 보이냐?! " " 마,맙소사…. 뭐 이런…이런… " " 그리고 아까 이런 말도 하셨었지? 뭣 때문에 교사 같은 일을 하냐고? " 제갈 후는 얼굴이 시뻘개진채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부들 부들 몸을 떨었 다. 지연은 그런 그의 모습에 한 숨을 푹 내쉰 후, 씨익 미소지으며 그를 떠 밀었다. 제갈 후는 힘 없이 쇼파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지연은 그런 그를 내려다 보며 박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이런 녀석들을 내가 아니면 누가 가르칠 수 있냔 말이야! 난 말이지! 이 녀석들을 가르칠 때가 가장 보람차다고! 절대로 교사를 그만 둘 생각 따 위는 없단 말이지! " 지연의 팔에 목이 감겨 있던 가인은 그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지연을 바 라보았다. 선생님…. 제갈 후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지연을 올려다 보고만 있었다. 지연은 그런 그를 내려다 보다가 곧 가인을 잡고 있던 팔을 풀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후,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그런 이유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 그것이 지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맞선의 결말이었다. Ｅpilogue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은…. " 헉…. 헉…. 서,선생님…. 지쳤어요…. 이제 더 이상은… " " 10바퀴 추가. " " 히이이이익!! " 칵테일 바 '지직스'에서 그 난리를 피운 가인들은 다행히도 뒤 늦게 나타난 미정에 의해 그 오해가 풀려 징계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벌까지 면하 지 못했던지 다음 날 학교에 등교한 그들을 기다리던 것은 지연의 고문에 가 까운 살인적인 운동장 돌리기였다. 그녀의 성격 상 이 정도 체벌에서 끝나 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지금의 가인들에게 그리 위안이 될만한 일 은 아니었다. " 제,젠장…. 죽겠다,가인아! 더 이상은∼∼!! " " 닥쳐. " 숙취로 머리가 울려 죽겠는데 오전 내내 운동장을 뛰고 있으니 재영이 죽는 소리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재영의 울부짖음을 가인은 냉정하 게 끊으며 이를 갈았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번 사건의 최고 희생자 는 유가인,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 놈의 애꿋은 호기심이 모든 일의 발단이 었다. 이번 사건으로 '호기심으로 흥한 자 호기심으로 망하리라'라는 교훈을 가인은 뼛 속 깊이 새길 수 있었다. 가인은 자신들의 뒤로 처질려는 테레이 아와 유리를 토닥여 주며 힐끗 지연을 돌아 보았다.그녀는 예의 체육복 차 림으로 팔짱을 낀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는데,그녀 의 입에는 여전히 담배가 물려 있었다. 가인은 의아한 목소리로 재영에게 물 었다. " 야,재영아. 우리 담임. 결국에는 내기에서 진 것 아니야? " " 헉… 그렇겠지…. 맞선은 결국‥ 실패였으니까. " "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담배를? 진 쪽이 금연 아니었어? " " 헉헉… 유가인. 너 아직도 몰랐었냐? 우리 담임은 담배 안 피운다는 거… 헉…. " " 에? " 담배를 안 피운다고?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 우리 담임은 담배를 피울려고 무는 게 아니라 담배를 씹어 분지르려고 무 는 거라고. 우리 담임, 지독한 운동부 출신이잖냐. 운동부 출신은 담배같 은 거 절대 안 피운다는 것도 몰라? 그리고 실제로도 우리 담임이 담배 피운 적은 한번도 없었잖아. " " 그,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 가인은 당황하며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 속 어디에도 지연이 담배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모습만이 있을 뿐,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 습은 한 번도 없었다. " 그,그런… 아니! 그럼 담임은 어째서 담배를 씹는 건데? 그거 다 자기 돈 으로 사는 거잖아? 돈 아깝게 시리! " " 뭐라더라…. 이 세상의 담배를 조금이라도 없애자는 신념 하에 하루에 한 갑 씩 씹어 분지르는 거래나 뭐래나…. " " 뭐,뭐냐… 그건? " 가인은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들의 담임, 하지연 교사…. 전혀 알 수가 없는 분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사실은,결국 김학도 선생이 내기에서 이겨도 지연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 그거…. 사기 잖아…. " 가인들은 투덜거리며 남은 운동장 바퀴 수를 채우기 위해 끊임 없이 달려야 만 했다. 이대로는 오후 내내까지 달려야 할지도 몰랐다. 한편 양호실에서는 모종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한 사람이야 당 연히 양호실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양호 교사 박미정이었지만, 나머지 한 사 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학생회 H.F.P의 학생 회장 제갈 영 이었던 것이다! 둘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었던 것 처럼 말을 건내받 고 있었다. " 결국, 후 형님은 그렇게 되신 겁니까. " " 바보 같은 녀석이지. 모든 것은 완벽했건만…. " 영의 말을 받으며 싸늘하게 조소를 날리는 미정. 그녀에게서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영은 그런 분위기의 미정이 자연 스러운듯 태연하게 말했다. " 하지만 후 형님 만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중반에 칵테일 바에서 그런 일 만 없었더라면… " " 그건 다 계획의 일환이었어. 단지 제갈 후 녀석이 처신을 잘못한 것일 뿐 이지. " " …즐기셨던 것 같기도 했는데. " " 어머? 호호, 좀 그랬을려나∼ " 미정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제갈 영의 책망하는 눈빛을 흘러 넘겼다. 미정은 한 숨을 푸욱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 하지만 숙모 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작스레 나에게 그 애물 단지 제갈 후 의 맞선을 추진시키라고 하면 날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덕분에 난 100전 100승의 중매쟁이라는 타이틀에 첫 패배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이제는 알 아서 하시라고 해! 난 더 이상은 모르겠으니. " " 후…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부디 패배의 오명을 씻어내시길, 사 촌 누 이 님. " " 그래∼ 그래∼ 걱정마시고 돌아가시게나, 사 촌 동 생 님. " 그렇게 두 사촌들은 작별을 고하고 서로의 장소로 돌아갔다. 대원 그룹의 서열 16위 박미정은 쇼파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흘러내리는 안경 사이로 눈 웃음을 흘렸다. " 자자∼ 하지연 선생님은 긴장하시는 게 좋을 거에요.제 상처 받은 명예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올해 안에는 반드시 짝을 찾아 드릴테니.호호호호∼ " 자! 힘내라,하지연! 미정의 중매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Ｖolume.3 完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3 話 흔들리는 마음 (上) =-=-=-=-=-=-=-=-=-=-=-=-=-=-=-=-=-=-=-=-=-=-=-=-=-=-=-=-=-=-=-=-=-=-=-= 나는… 혼돈의 정신 세계를 엿 보고 그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이. 나는… 어두운 암흑이 만들어내는 몽환의 세계 속을 거니는 밤의 여왕. - 오늘부터 네 이름은 리리스(Lilith).리리스다. 그들은 나에게 이름을 주었다. - 그 이름은 모든 데몬 족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밤의 여왕을 뜻하지. 그들은 나에게 사명 역시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나를 차가운 벽 속에서 꺼내주지를 않았다. 단지 저 벽 너머로 무심한 눈빛 만을 나에게 향 하고 있을 뿐. 이름을 주었으면서… 사명을 주었으면서… 어째서…어째서 그 들은 날… - 날… 혼자 두는 거야? 그러나 그런 의문은 나 혼자 만의 것. 그 누구도 나에게 해답을 제시해주 지는 않았다.그리고 그 해답이란 것을 더 이상 찾아 헤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벽 속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던 거니까…. 마음의 벽이… 나를 가둬두고 있었으니까. " 후…. " 리리스는 감았던 눈을 뜨며 가볍게 조소를 흘렸다. 인간의 정신 세계 속을 들여다 볼 때 마다 찾아오는 자신의 옛 잔영들이 잠깐이지만 뇌리 속을 엄습 해왔던 것이다.주기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보아야 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유쾌 한 경험이 아니었다.그런 이유로 리리스는 이 일을 하는 순간 만큼은 신경이 가장 날카로웠다. " 왜 작업을 멈추는 거냐,리리스? " 자신과 같은 5대 간부이자 용마인 초류향의 음성이 그녀의 뒤에서 들려왔다. 작업을 늦추는 리리스의 모습에 의아해 하는 것 같았다. 리리스는 입가에 짓 고 있던 웃음을 순식간에 감춰버리며 예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간 채 냉정 히 대꾸했다. " 아무 것도 아니니 신경 끄시지. 그것 보다… 내가 얘기하지 않았던가? 더 이상 내 일에는 참견하지 말라고. 너는 나와의 내기에서 졌어. " " 크윽…. 그래…. 잠시 잊고 있었군. " 초류향은 자신의 아픈 부분을 사정없이 난도질 하는 리리스의 말에 이를 악 다물었다. 검은 날개를 지닌 저 도도한 동료의 말에 그는 단 한 마디도 반박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초류향,자신은 그녀와의 내기에서 져버렸다. 아켄석을 대동한 오라 능력자와의 싸움에서 그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던 것 이다. 그리고 그 결과,자신은 오라의 주인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내기의 조건이었으니까. 리리스는 그런 초류향의 분노하는 모습을 속으로 비웃었지만, 이 이상 그의 신경을 건드릴 생각은 없 었다. 그의 화를 복 돋아서 자신에게 이로울 것은 없었던 것이다. " 아, 말이 좀 심했던 것 같내. 어쨋든, 구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 지 않을 테니까 잠자코 지켜보기나 하시지. " " 흥…! " 초류향은 짧게 코웃음을 치며 수중의 섭철선을 펼쳐 든채 거칠게 부채질을 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잠자코 있는 것이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 라는 걸 납득했나 보다. 리리스는 그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눈 앞의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 인간은 그녀들과는 다른 3차원의 생명체였다.그는 안 경을 쓴 평범하기 짝이 없게 생긴 남자였는데, 두 눈이 뒤집어져 흰 동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마치 혼이 빠져나간 껍데기가 흐느적 거리고 있는 것 만 같았다. - 우우우… 리리스가 다시 그 인간의 이마에 손을 가져가자 남자의 몸이 벼락을 맞은 것 처럼 떨리며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짙은 암흑의 기운이 그 육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던 초류향은 그런 인간의 반응에 솟아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리리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 그것이 네가 찾아낸 삼차원의 법칙인가? " 애초에 초류향의 성격 상 누군가의 말을 잠자코 따른다는 건 우스운 일이 었다. 리리스는 자신의 말을 단 1분도 따르지 않는 초류향의 행동에 쓴 웃음 을 짓고는 그냥 대답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 그래. 적어도 나나 네이 안데르슨은 너 같이 아바타(Avatar) 능력을 지니 고 있지는 않으니까 삼 차원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런 숙주가 필요한 법 이지. 그리고 이 융합(融合)에 의한 방법으로 더 이상 게이트를 열기 위 해 쓸데 없이 힘을 남발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 다고 할까? " " 어차피 방법론의 차이일 뿐이다. 도약(跳躍)을 통한 문의 통과나 삼 차원 의 존재를 매개체로 삼아 기생수를 만들어내는 것. 도대체 뭐가 틀리다는 거지? 소비하는 힘의 차이도 엇비슷하지 않은가. " 초류향은 이해할 수 없다는듯 혀를 찼다. 뭣 때문에 리리스는 지름 길이 있 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했단 말인가? 어차피 결과적으로 마찬 가지인 일을 저렇게 번거롭게 처리하는 이유를 그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리스는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초류향이 딱해보였는지 안타까움마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을 하지 못하니까 초류향, 네가 중국에서 일을 그 르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 " 뭣이…! " "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 너는 삼차원의 녀석들이 우리의 공격을 어떻게 예측하고 방어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 놈들은 디멘션 트랜스퍼 를 시행할 때 변동되는 게이트의 수치로 우리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삼차원의 존재에 융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 다면 굳이 '문'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니까 더 이상 녀석들이 우리 의 움직임을 읽을 수 없게 되지! 이것이 내가 이런 번거로운 작업을 택 하게 된 첫번째 이유야. " " …첫번째… 이유? 그렇다면 두번째도 있다는 거냐? " 초류향의 질문에 리리스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 앞의 인간 남자 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리스의 손이 닿아있던 남자의 이마로는 이미 기생 수의 침투가 시작되었는듯 희생양의 낙인과도 같은 흔적 만이 남아 있었다. 리리스는 그 흔적을 조용히 주시하다가 문득 초류향에게 나지막 하게 질문을 던졌다. " …초류향. 너는 가장 무서운 것이 뭔지 알아? " " ......? 그게… 무슨 소리냐? " 영문을 알 수 없다는듯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자신의 동료에게 리리스는 가 벼운 동정을 표했다. 그는 아마 죽었다가 깨어나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초류향. 그는 삼차원의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 공상(空想)이라는 거지. 인간의 상상력 말이야. 그들은 그것을 원천으로 끊임 없이 진화하고 발전해왔지. 놀랍도록…. " 그것은 분명 이차원의 존재인 우리들에게는 없는… 그들만이 가진 능력. " 그리고 나는 지금 밤의 여왕으로서,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한 인간의 꿈 을 이뤄주겠다는 거야…. " 공상이 이루어질 때… 그것은 더 이상 공상이 아니게 된다. 第 13 話 흔들리는 마음 - 쉿…! 가벼운 발사음과 함께 녀석의 손에서 가늘고 흰 빛을 띈 비단실 같은 물질 이 압축 분사하듯 터져나왔다. 그 액은 방적돌기에 있는 무수한 토사관과 가 는 관으로부터 나오는 찰나, 공기에 접촉되어 굳어져 실이 되었다.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거미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그 거미줄은 빌딩의 20층 높이에 위치한 외곽의 사자 동상에 접착되어 팽팽하게 당겨졌다. - 후우우우우웅… 70kg을 넘어서는 인간의 육체가 가는 거미줄 하나에 지탱된채 날카롭게 도 심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그 뒤를 힘겹게 따라붙고 있던 가인으로서는 그 시 원할 정도로 날쌔게 도망치는 녀석의 모습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빌어먹을…! 이런 만화같은 일이!! " - 오오오오오… 순식간에 다음 거미줄을 발사하여 콘크리트의 빌딩들 사이를 이동하는 몬스 터. 녀석은 마치 거미라도 되는 것 처럼 자유자재로 거미줄을 날려 피스 대 원들이 감당못할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라 배틀 필드(ABF)의 전개로 녀석의 이동 범위를 반경 5Km로 축소 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물론 1시간이라는 제한 시간이 그 조건으로 따라 붙었지만. " 도대체 저런 녀석을 어떻게 잡으란 말이야?! 말도 안돼! 불가능하다고! " 가인은 회의가 맺힌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A.I 부츠에 오라를 불어 넣어 있 는 힘껏 뛰어 올랐다.10월의 중반에 들어선지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 었지만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도시의 조명등과 네온 사인들 만이 주 위를 밝혀주고 있을 뿐.그리고 그런 불빛들 사이로 푸른 A.I 슈츠를 입은 가 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정신 없이 몬스터의 뒤를 쫓아가던 중 가인의 귓가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자! 불평은 거기까지,소년! 이제부터 불가능을 가능하게 바꿔보자고! " 가인이 돌아본 그곳에는 옅은 초록빛을 흘리고 있는 A.I 슈츠복의 남자 정 진우가 어느 사이엔가 그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진우는 가인에게 엄지 손 가락을 들어보이며 A.I 헬맷을 장착,순간 전신의 오라를 분출시켰다. 그러자 진우의 오라 패턴 그린(Green)은 그 가속 능력을 전개시키기 시작했다. " 간다! " 초록색의 오라가 진우의 몸을 감싸며 그의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세계가 회 색톤이 깔린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진우는 숨을 멈췄다.어차피 이 상 태로는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감싸는 공기가 마치 시멘트라 도 되는 것 처럼 무거워져 있었고, A.I 슈츠의 보디가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 는 것 처럼 기이한 쇠울림을 흘리며 몸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고 있는 그의 발바닥 만은 물 위에 떠있는 것 처럼 지표와의 마찰이 적어지 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씩 그의 몸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치이이이이잉…! 울려퍼지는 물체의 잔향소리. 그와 동시에 진우의 몸은 초록색의 잔광 만을 남긴채 가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가인은 짧은 탄성을 터뜨리며 무서 운 속도로 뻗어나가는 초록빛의 흔적을 눈으로 쫓았다. 진우의 가속 능력은 언제 보아도 놀라운 것이었다. 음속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라니…! - 쉿! 붉은 거미줄로 전신을 감싸고 있던 몬스터는 예의 거미줄로 이동을 하던 중 자신을 엄습해오는 위기를 느끼고 몸을 움찔 떨었다. 무언가 빠른 속도로 자 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본능과도 같은 위기 지각 능력이 자 신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몬스터는 재빨리 수중의 거미줄을 풀어내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한 발 앞서 녹색의 잔광이 떨 어지는 몬스터의 뒤를 덮쳤다. " 슈팅----------스타!!! " - 퍼엉-----!!! 강렬한 쇼크 웨이브가 몬스터의 등을 후려쳤다. 그러나 몬스터는 마치 스프 링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충격파를 발로 차 흡수하며 지상으로 떨어졌다.몇번 바닥을 데굴 데굴 구르다가 신속히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충격을 입 은 것 같지는 않았다. 진우는 가속 능력을 풀며 그런 몬스터에게로 달려 들 었다. 일단 녀석이 도주를 멈춘 이상, 다시 도망가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 칠성권(七星拳) 개산벽(蓋山璧)…! " - 터엉! 강렬한 진각 소리와 함께 진우의 어깨가 몬스터의 가슴뼈를 들이 받았다.강 렬한 위력을 자랑하는 칠성권의 몸통 공격이 녀석에게 적중한 것이다. 하지 만 이번에도 진우의 어깨에서는 상대를 가격할 때 느껴지는 반응이 없었다. 이 용수철과도 같은 몬스터는 탄력있게 뒤로 튀어 올라 진우의 공격을 흘려 버렸던 것이다. 거미 같이 몸을 숙여 뒤로 착지하는 몬스터의 모습에 진우는 인상을 굳히며 발을 차올림과 동시에 주먹을 녀석에게로 내찔렀다. " 파군(破軍)! " 칠성권의 일곱 발경 중 가장 무거움을 자랑하는 권! 어디 이것까지 피할 수 있는지 보자! 그러나 진사경에 휘감긴 진우의 주먹에 하얀 실줄기들이 날아 들었다. " 웃…! " 진우의 주먹에 실타래 처럼 감겨오는 몬스터의 거미줄. 그것은 그야말로 무 시무시한 힘으로 진우의 주먹을 죄어오고 있었다. 진우가 주먹의 통증을 미 처 호소하기도 전에, 다음 순간 거대한 원심력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 부우우우웅…! " .........!!!! " 진우의 손에 휘감긴 거미줄을 붙잡은채 불가사의한 근력으로 그것을 휘둘러 근처의 건물 쪽에 휘둘러 버리는 몬스터. 진우의 몸은 그대로 거미줄을 따라 허공을 가른 후, 근처에 있던 상가의 닫힌 셔터를 부수며 그 안으로 처박혀 버렸다. 너무나도 허망하게 당해버린 진우의 모습에 가인은 비명을 질렀다. " 진우 씨?!! " - 쉿! 하지만 몬스터는 틈을 주지 않고 가인에게도 거미줄을 날려왔다. 황급히 몸 을 틀어 거미줄을 피해내는 가인. 저 거미줄에 몸이 휘감겼다가는 나도 진우 씨와 같은 절차를 밟을테지…! 한 줄기의 식은 땀이 가인의 이마 아래로 흘 러내렸다. " 이 자식이------!!!! " 분노한 가인의 헤븐 스매쉬로 모여지는 오라의 기운. 그것은 순식간에 푸른 오라의 토네이도가 되어 금방이라도 상대에게 날아들듯이 그 몸을 들썩 거렸 다. 좋아, 천공권이다! 그 잘난 거미줄로 어디 한 번 막아봐!! - 쉬싯! 그러나 몬스터는 그런 가인의 기세에도 아랑 곳 없이 되려 그를 향해 양 손 의 거미줄들을 발사해왔다. 가인은 거미줄이 자신에게로 날아들자 긴장하며 몸을 피할려고 했지만 의외로 거미줄들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 엉뚱한 건물 의 벽들에게로 붙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 뭐,뭐야? 이 자식…? " 날 맞추려다가 빗 맞춘 건가? 하지만 빗 맞췄다고 하기에는 뭔가가…. 그러 나 그렇게 잠시 가인이 방심을 해버린 사이,몬스터는 양 손의 거미줄을 끌어 당기기 시작했다.붉은 거미 줄기로 감싸인 몬스터의 이두박근이 터질듯이 부 풀어 올랐다. - 트드드드드득…! " ......에? " 순간, 거미줄이 붙어 있던 건물의 벽에서 콘크리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 며 벽의 표면을 따라 빗날 무늬 같은 금이 그어졌다.가인은 두 눈을 크게 뜨 며 자신의 양 옆에 위치한 콘크리트의 벽을 바라보았다. 이거…설마‥? - 콰지지지지직!!! " 으아아아앗!! " 벽돌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거미줄에 붙은 채로 끌려나오는 콘크리트의 벽 들. 직사각형의 형태로 떨어져 나온 벽들은 사정 없이 거미줄의 움직임을 따 라 그 가운데에 서 있던 가인에게로 날아들었다. 가인은 이 날벼락과도 같은 공격에 미처 대비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콘크리트의 벽들 사이로 깔려버렸다. - 후드드득‥ 짙은 흙연기가 콘크리트의 폐허를 뒤덮었다. 붉은 거미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몬스터는 여전히 짐승같은 몸 놀림으로 마치 쪼그려 앉듯 땅바닥에 몸 을 낮춘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붉은 마스크를 뒤집어쓴 몬스터의 입 가 에서는 낮은 웃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음흐흐흐흐흐‥ 그것은 승리에 겨운 짐승의 웃음 소리였다. 순식간에 자신을 공격해오던 상 대를 둘 씩이나 쓰러뜨렸으니 그 기세가 등등해질 만도 했다.하지만 그가 착 각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자신을 공격해오던 상대들은 다름 아닌 삼차원의 힘, 오라를 사용하는 피스 대원이라는 것이었다. " 천공권…! " - 투카카카카카카칵! 순간, 흙 연기를 좌우로 가르며 콘크리트의 폐허 속에서 뻗어나오는 오라의 토네이도! 그것은 자신 만만하게 웃음을 흘리던 몬스터에게 거침 없이 날아 들었다. 몬스터는 더 이상 웃지 못하고 재빨리 건물의 위쪽으로 거미줄을 쏘 아 위로 튕겨지듯 솟구쳐 올랐다. 그 바람에 가인의 천공권은 아슬 아슬하게 상대를 놓쳐버리며 도로의 가로등을 후려쳤다. " 젠장! 피해버리다니…! " 그렇게 이를 갈며 가인은 콘크리트의 폐허를 헤치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스 럽게도 자신에게 날아든 콘크리트의 벽이 경량 콘크리트였던 데다가 A.I슈츠 의 오라 쉴드가 발동해준 덕분에 별 다른 상처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그것 은 상점가의 셔터에 처박힌 진우 또한 마찬가지였는지,그 역시 맥 없는 미소 를 지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진우 씨, 괜찮아요? " " 아아∼ 이렇게 날아가 보는 것도 정말이지 간 만이군.그나저나 참으로 성 가신 녀석일세,저 몬스터 놈. 하는 짓은 완전히 거미인데다가 전신이 스 프링 처럼 반응하여 공격을 피해내다니….도대체 저 녀석… 정체가 뭐야? " 가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진우는 투덜거리며 대답했다.확실히 상대를 얕잡 아본 경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까지 농락당할 줄이야…. 저 몬스터의 움직임은 지금까지의 몬스터들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가인의 손목에 찬 무전기에 신호음이 들어왔다. 무전기의 액정에는 'EUREKA' 라는 문구가 떠오르고 있었다. 언더 시티에서의 무전. 채영 씨인가? 하지만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채영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 미스터 그린의 질문에는 내가 답해주겠어요! >> " …시더? " 그렇다. 무전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시더 웰리스.바로 그녀였던 것이다.가 인은 의아해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 어째서 시더가 오퍼레이터 실에서 무전을 보내고 있는 거야? " << 어? 아아∼ 그건 말이지… >> " 그건 말이지… 내 연구실에서 가인들의 전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가 뜻 밖의 몬스터를 보게 되어서 말이야∼ 이야∼ 신기하다고 해야할까∼ 반갑 다고 해야할까∼ 흥분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 << …저 몬스터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야? >> " 에헴! 당연히 알다마다!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에서 오퍼레이터 윤채영의 마이크를 뺏앗은채 신 이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는 시더.그녀의 옆에서는 오퍼레이터들의 치프 윤 채영이 불만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지만,시더는 조금도 의 식하지 않은채 가인과의 무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채영이 항의에 찬 눈빛 으로 진 사령관들을 돌아보았지만, 수수방관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다지 시더의 행동을 말리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쨋든,시더 는 스크린 상에 비치는 몬스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 만만한 목소리로 소 리쳤다. " 녀석의 정체는…!! " << …정체는? >> " 다름 아닌…!! " << …다름 아닌? >> 그리고 시더의 다음 말에 작전 본부실의 모두는 침묵해야만 했다. " 스파이더 맨(Spider Man)!! " " …스,스파이더 맨? " 가인과 진우는 서로를 돌아본채 벙찐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그 적나 라하고도 마초틱한 이름은? 그런 둘에게로 무전기를 통한 시더의 부가 설명 이 이어졌다. << 1962년, 미국의 양대 만화 산맥 중 하나인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 가 탄생시킨 슈퍼 히어로 물의 주인공 중 하나야! 슈퍼 거미에 물려 거 미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정의 캐릭터지! >> " …만화 캐릭터였냐…. " 가인과 진우는 뭔가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바람에 고층 빌딩의 벽에 붙어 위 로만 계속 올라가는 몬스터의 모습을 올려다 보았다. 가인이야 이런 쪽 방면 에 취미가 없었기에 잘 몰랐지만, 진우는 어렸을 적에 즐겨보던 만화 프로그 램 중 스파이더맨이라는 타이틀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시더는 가인과 진우의 반응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좀 시큰둥 하자 서둘러 말을 이어 나갔다. << 하지만 히어로 물의 영웅들 중 스파이더 맨은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최 장수 캐릭터라고! 스탠 리, 스티브 딧코 원작의 이 만화는 애니메이션으 로 12시즌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사랑받은 데 다가 영화로도 공전 절 후의 히트를 친 대작이었지! 지금도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원작 코믹스가 그 희귀성 때문에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는 중이야! 응! 응! >> " …아,그래…. " 가인은 열성을 토해내며 말하는 시더의 목소리에 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무리 그렇게 얘기한다고 한들 전혀 모르겠다고,시더…. 가인은 계속 슈퍼 히어로 물의 대단한 점을 역설할려는 시더의 말을 간신히 끊으며 진우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이 슈퍼 히어로 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이미 엄두도 안 나는 곳으로 도망쳐 버렸는데…. " 가인은 그 '엄두도 안나는 곳'으로 도망쳐 버린 몬스터 '스파이더 맨'을 올 려다 보았다. 코믹스에서는 월 크러울링(Wall Crawling)이라고 불리우는 기 술로 건물의 벽을 기어 올라가고 있는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30층 빌딩의 절반 이상은 올라가버렸나 보다.분명 잡으러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 는 높이였다. " 아아∼ 그렇게 근심스러운 표정은 짓지 말라고,소년. " 하지만 진우는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 없이 여유 있게 답했다. " 이제부터는 저쪽 팀에게 맡기는 거야. " - 스스스스스… 손가락 끝에서 뻗어나온 작은 칼퀴들로 콘크리트 벽에 몸을 고정시킨채 인 간의 수십 배를 뛰어 넘는 근력으로 클라이머(Climber)처럼 건물을 기어오른 다. 몬스터는 이런 자신의 상황에 순수히 감탄하고 있었다.놀랍다.언제나 상 상으로만 꿈꿔오던 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는 현실은 그에게 더 없는 쾌 감으로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가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감탄이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왜 이런 힘을 가지게 되었는 지도 몰랐고, 그 이유를 알아야 겠다는 생각 마저 할 수가 없었다.단지 신기 한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 아이 처럼 마냥 즐거워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 음후흐흐흐… 그는 벽을 기어오르던 것을 멈추며 자신이 올라온 높이를 가늠이라도 할려 는듯 밑을 내려다 보았다.이미 자신은 지상에서 수 십 미터는 떨어진 위치의 벽에 매달려 있었다.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자신을 귀찮게 하던 그 이상한 인 간들이 보이지를 않았다. 자신의 의도대로 잘 따돌린 모양이었다. 난 초인이 다. 범인이 초인을 따라올 수는 없는 법.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자신을 어느 누가 막을 쏘냐. 몬스터는 술래를 따돌린 도망자의 기쁨을 느끼며 낮게 조소 했다. " …재미 있냐? 이런 상황이? " 그때 몬스터의 옆에서 낮지만 카랑 카랑한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몬 스터는 이런 높이에서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당 황한듯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누,누구냐? 누가 나에게…? " 여기다. 여기. " 그리고 몬스터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옆에서 좀 떨어진 빌딩의 벽에 수직 으로 서있는 한 소년의 모습을. 그 소년은 검은 권복 차림에 회색 머리를 길 게 땋아 목에 감고 있는 특이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그 특이한 차림새 만큼이나 그의 상황은 더욱 특이했다.이 권복 소년은 산보라도 나온 것 처럼 유유히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마치 지면 위에 서 있기라도 한 것 처럼 건물 의 벽을 꽂꽂히 밟고 서있었던 것이다. 몬스터는 자신과 수직 방향으로 대치 하고 서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경계의 빛을 띄었다. - 우우우우우… " 뭘 그렇게 놀라고 있는 거야? 벽에 붙어 있는 네놈이나 벽에 서 있는 나 나 다를 게 뭐가 있다고. " 권복 차림의 소년, 부르스는 예의 인상을 잔뜩 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 는 지금 기공(氣功)을 발바닥의 용천혈(涌泉穴)로 빨아들여 그 사이에 생기 는 흡착력으로 건물의 벽에 붙어 있는 중이었다. 흡기공(吸氣功)이라는 명칭 을 가지고 있는 이 기술은 기공을 역순환시킬 줄 알아야만 사용이 가능한 상 급의 기공술이었는데, 기공의 자연스러운 순환을 깨버리고 그 흐름을 역행시 킨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그런 것을 이렇게 간단히 사용해 내는 부르스의 모습은 그가 기공의 제어에 완숙하다는 것을 여실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하지만 그것으로 중력을 무시하듯 건물의 벽에 수직으로 서있는 그 의 모습이 완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부르스의 전신 근육에는 중 력으로 인한 엄청난 하중이 걸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저렇게 태연한 얼굴이라니…. - 쉬쉿…! 몬스터는 본능적으로 이 눈 앞의 소년에게서 위험을 느꼈다. 코믹스에서 스 파이더 센스(Spider-Sense)라고 불리우는 이것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해 내는 스파이더맨의 능력 중 하나였다. 그 만화 속의 영웅은 이 능력으로 수 많은 악당들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르스는 자신을 경계하기 시작 하는 몬스터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형(形)을 취했다. " 피차 간에 말이 너무 많았군. …덤벼라. " - 음하하앗!! 괴성과 함께 몬스터는 손목에 있는 방적돌기(紡績突起)에서 거미줄을 발사 하여 빌딩의 위쪽에 위치한 사자 동상에 줄을 접착시켰다. 그리고 고정된 거 미줄을 양손으로 붙잡으며 벽을 발로 차는 몬스터! 탄력있는 거미줄은 몬스 터의 무게를 견뎌내며 진자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 후우우우우웅!! 몬스터는 바람을 가르며 10m 정도 떨어져 있던 부르스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스파이더맨의 특기 중 하나인 '웹 슬링(Web-Slinging)이었다. 녀석은 거미줄 을 붙잡고 부르스에게 드롭킥을 날리기 위해 맹렬히 날아들었다. 하지만 부 르스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양 손을 들어, 한 손으로는 몬스터의 드롭킥 을 흘림과 동시에 나머지 한 손으로는 녀석을 힘의 방향으로 밀어 당겼다.태 극권의 사기종인(舍己從人)의 원리를 따른,상대의 공격에 대항하지 않고 그 힘을 이용한 수법이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로 끌려오는 몬스터의 복부로 손을 가져가는 부르스. 그리고 발경 작열! 몬스터는 기이한 쇳 소리를 흘리 며 뒤로 튕겨 나갔다. - 쉿! 쉬쉿! 손 마디에 돋아난 갈퀴들을 이용해 벽에 붙음으로서 간신히 떨어지는 것을 면한 몬스터. 녀석은 예의 그 고무와도 같은 탄력있는 육체로 발경의 위력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경의 충격을 완전히 막아내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몬스터는 자신에개 이런 충격을 안겨준 건방진 인간을 찾기 위해 8개의 홑눈을 분주히 움직였다. 머리 앞쪽에 전후 2열로 나란히 있는 그 눈들은 창백한 흰 빛에서 붉은 빛으 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 으으음…. 없다. 몬스터의 시야에 그 인간은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그 짧은 순간에 어 디로 모습을 감춘 거지?! 어디에 있는 거냐?! 그러나 그런 몬스터의 의문은 다음 순간 자신이 붙어있던 건물의 아래 쪽에 위치한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 리와 함께 해결될 수 있었다. - 와장창창!! - .........!!!! 햇빛의 적외선을 반사함으로써 냉난방 효율을 높이는 적외선 반사 유리가 박살남과 동시에 몸을 둥글게 웅크린 부르스가 몬스터의 밑에서부터 튀어나 왔다. 그는 흡기공으로 건물의 벽을 박차오름과 동시에 몬스터의 턱을 번개 같이 두 번 차올렸다. " 칠성권 승룡퇴(乘龍退)! " - 투학! 몬스터의 아래턱이 부숴지며 뇌가 위 아래로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 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몬스터는 승룡퇴의 위력에 10여 미터 가까이 허공 으로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며 반대편 건물의 대형 간판 쪽으로 거미줄을 날렸다. 또 다시 거미줄을 이용한 웹 슬 링으로 도망을 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몬스터를 향해 날카로운 한 줄기의 붉은 섬광이 날아들었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 촤악! 그것은 바로 피스 레드 성마리의 오라 소드! 부르스와 한 팀으로써 빌딩의 상층부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몬스터가 자신이 대기하고 있는 지 점으로 올라오자 주저 없이 공격 태세에 들어간 것이었다.그녀로서는 부르스 의 흡기공과 같은 재주가 없었기에 옥상에 설치한 와이어에 의지하여 몬스터 를 공격해야만 했다. 마리의 오라 소드는 몬스터가 웹 슬링을 하려던 거미줄 을 끊어버리고서 몬스터의 목을 쳐버릴려는듯 무시 무시한 기세로 휘둘러져 왔다. - 스스스스스…!! 발바닥에 갈퀴를 세워 벽에 고정하며 마리의 오라 소드를 향해 양 손을 들 어올리는 몬스터. 그 양 손 사이로 거미줄이 실타래 처럼 복잡하게 얽혀 하 나의 그물이 만들어졌다. 그 그물은 그대로 찔러오는 오라 소드를 튕겨 내었 고 마리는 와이어의 움직임을 따라 벽을 달리며 몬스터와 거리를 둔 채 떨어 져 갔다. " 저 거미줄은 도대체…! " 오라 소드의 절삭성 커터를 막아내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삼 차원의 존재 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셈이었다. 좋아.그렇다면 더더욱 거리낄 것이 없 어졌다. 마리는 와이어가 다시 몬스터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벽을 박차 며 녀석에게로 달려나갔다. " 사식(四式) 단월(斷月)…! " - 츄왁! 붉은 선을 그리며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오라 소드.몬스터는 갈퀴가 난 손을 벽에 짚으며 간발의 차로 그 공격을 피해냈다. - 턱! 하지만 그런 몬스터의 목을 덮치는 마리의 왼 팔. 마리는 단월을 상대가 피 해냄과 동시에 녀석의 목을 팔로 휘감아 잡아챈 것이었다. 몬스터는 그대로 마리와 함께 와이어에 매달려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진자의 움직임이 평 형점(平衡點)을 벗어나 다시 그 평형의 위치로 돌아갈려고 할 때, 마리는 붙 들고 있던 몬스터의 목을 놓아 버렸다. - 우우우우우우…!! 괴성을 울리며 그대로 빌딩의 아래 쪽으로 떨어지는 몬스터. 녀석은 당황하 며 거미 줄을 발사하여 어떻게 해서든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을 피할려고 했 지만, 마리는 거미줄이 빌딩에 닿는 족족 그것들을 오라 소드로 끊어 버렸다. 몬스터로서는 영락 없이 떨어지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휘리리리릭…! 그때 떨어지던 몬스터가 검은 기류에 휩싸이며 허공을 한 번 선회하자 다음 순간, 녀석은 다른 존재로 변해 있었다. 방금 전의 붉은 거미줄을 몸에 감싸 고 있던 모습이 아닌, 검은 가죽 피부를 가진 박쥐 인간의 모습으로 되어 있 었던 것이다. 박쥐 인간으로 변한 몬스터가 양 팔을 좌우로 벌리자, 등 뒤에 피어오르던 검은 망토가 박쥐 날개형으로 활짝 펼쳐졌다. - 그오오오오오… 도시 상공을 가르며 반대편의 빌딩 옥상으로 유유히 날아가는 몬스터. 마리 는 와이어에 매달린채 허탈한 표정으로 녀석의 자취를 뒤쫓으며 중얼거렸다. " …뭐,뭐야… 저건…? " 어쨋든 여기서 분명한 건, 자신들은 저 몬스터 녀석을 놓쳤버렸다는 것이다. 마리는 가볍게 한 숨을 내쉬며 손에 찬 무전기로 무전을 보냈다. " 여기는 레드. 놈을 놓쳤다. 뒤를 부탁한다. " << 피스. >> " 오오오오!!! 나왔다! 나왔어! 마블 코믹스의 스파이더맨에 이어 DC코믹스 의 배트맨(BAT MAN)까지∼ " " …여,역시 이번에도 만화 캐릭터. " 피스 본부실에 울려퍼지는 시더의 목소리에 채영은 맥이 빠지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시더는 그야말로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스크린의 몬스터에 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사실 연도 별로 따지자면 배트맨은 1939년에 데뷔했으니,스파이더 맨의 대 선배 격이 되는 히어로 란 말이지! 그래! 초대 영웅의 기세를 보여줘봐! " " …기세를 보여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 채영은 다시 항의에 찬 눈빛을 진 사령관들에게로 보냈다.하지만 여전히 침 묵을 유지하고 있는 수수방관의 태도. 그 태도로 미루어 보아, 여전히 진 사 령관들은 시더를 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자자자! 다음 번에는 무슨 히어로냐! " " 궁금해할 게 아니잖아요, 시더 양! " 배트맨은 마블 코믹스의 라이벌 격인 만화 출판사 DC 코믹스의 초기 영웅 캐릭터 중 하나였다. 1939년, 빌 핑거와 밥 케인에 의해 탄생한 이 히어로는 대공황 시대였던 1940년대부터 DC 코믹북에서 활동하였으며, 베트남 전이 고 조에 달했던 1960년대 말 방영되던 인기 TV 시리즈로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 다. 그 인기의 비결은 물론 박쥐 형상의 복장을 한,밤과 낮이 다른 정체불명 의 부르주아 브루스 웨인이 매주 악당들과 싸우는 모험활극의 미스테리 때문 이었다. 배트맨은 그 어둡고도 암울한 안티 히어로 성이 특징이었는데,소돔 과 고모라에서 이름을 따온 온갖 범죄의 도시 고담 시에서 낮에는 사회의 저 명인사이며 젊은 경영총수 브루스 웨인이지만,밤만 되면 부모의 원수를 찾아 박쥐 복장을 하고 고담시를 떠도는 분노와 원한 속에서 저주의 사슬을 벗지 못하는 귀족이었던 것이다. - 후우우우우… 어두운 밤 하늘을 가르며 반대편 빌딩의 옥상에 착지하는 몬스터.그의 칠흑 과도 같은 가죽 피부는 하늘에 떠오른 달빛을 받아 창백한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검은 망토가 옥상의 바닥을 끌며 꿈틀거렸다. - 라아아아아… 그때, 몬스터의 귓 가로 마치 속삭이는 것 같은 감미로운 노랫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부드럽게 몬스터를 유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몬스터는 이 수 상쩍은 음색에 경계의 빛을 띄다가 곧,그 음에 취해버려 멍하니 움직임을 멈 춰버렸다. - 퍼엉! 하지만 순식간에 그런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깨버리는 날카로운 음파 공격. 부드럽기만 하던 음파들이 날카로운 어조를 띄며 맹렬히 몬스터에게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몬스터가 딛고 있던 콘크리트의 바닥들이 굉음과 함께 터져 오르며 흙 연기를 날렸다. - 크후흐으…! 재빨리 망토로 전신을 가리며 콘크리트의 파편들을 방어하는 몬스터. 그를 공격한 것은 피스 옐로우의 특기, 공명음(共鳴音)이었다.물체의 진동수에 음 으로 그 주파수를 맞추어 진동을 증폭시키는 한시민의 파괴적인 음파 공격! 그리고 공명음의 충격으로 흙 연기가 몬스터의 시야를 가리는 사이에 그의 뒤로 시민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 촤악! 무섭게 휘둘러지는 시민의 돌려차기.간신히 그녀의 기척을 알아챈 몬스터가 고개를 숙여 그 공격을 피하자, 그 위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시민은 기습이 실패했지만 한치도 주저함 없이 재차 몬스터의 명치에 리버스 킥(Reverse Ki ck)을 꽂아 넣었다. - 크흑…! 몬스터는 낮은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서다가 검은 망토 속에서 손을 빼내 들었다. 그 손에는 검은 금속제의 박쥐 형 부메랑이 들려 있었다. 몬스터는 뒤로 스텝을 밟아 시민과의 거리를 벌리며 자신의 옆으로 부메랑을 가볍게 던졌다. 그것은 코믹스의 배트맨이 자주 사용하는 배트랭(Batrang)이라는 원 격 조정 부메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르는 시민으로서는 엉뚱 한 방향으로 무기를 던지는 몬스터의 행동이 의아했을 뿐이었다. " 무슨 짓을…. " - 쉭! 하지만 그런 한 순간의 틈은 언제나 치명적인 법이다. 시민은 자신의 귀로 들려오는 부메랑의 선회 소리에 놀라 앞으로 핸드 스프링을 했고 그 위로 날 카로운 배트랭의 칼날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몇 올 자르며 지나갔다. 만약 멍 청하게 그대로 서있었더라면 잘리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닌 그녀의 목이 되었 으리라. 그러나 배트랭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원격 조정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도록 그 무기는 선회 방향을 불가사의하게 바꿔오며 집요히 시민을 공격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 쉬쉭! 육안으로도 따라가기 힘든 부메랑의 공격을 연속으로 피해내는 것은 아무래 도 무리가 있었다. 몇 번이나 A.I 슈츠의 오라 쉴드에 불똥을 튀기며 시민은 배트랭의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언제까지 이 쉴드가 지속될지는 모른다.그녀 는 인상을 굳히며 각오를 다졌다. - 쉬리리리릭!! " …핫! " 시민의 뒤를 향해 날아오던 배트랭.하지만 그녀는 뒤에 눈이 달리기라도 한 것 처럼 지면으로 꺼지듯 몸을 낮추며,손으로 땅을 짚은채 위를 지나가는 부 메랑을 차올려 버렸다. - 투앙! 시민의 면도날 같은 킥에 불꽃을 일으키며 소형의 폭발을 일으키는 배트랭. 그 폭발의 여파에 몬스터는 눈을 가리며 뒤로 주춤거렸고, 그 사이를 놓칠새 라 시민의 입이 열리며 오라를 띈 음조가 흘러나왔다. - 라아아아아… 페르마타(fermata:늘임표).상대의 움직임을 음파의 늘어뜨림으로 지연시키 는 기술. 그 기술에 사로잡힌 몬스터는 움직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리 고 시민은 외쳤다. " 지금이에요! 유리 양! " - 파칭! 그와 동시에 옥상의 반대편에 대기하고 있던 피스 핑크 이유리의 재핑(zapp ing)공격이 몬스터의 뇌리 속을 침투해 들어갔다.상대의 사념을 헝클어 뜨리 는 이 기술은 작게는 적을 혼란 상태에 빠지게 하거나 심하게는 그 정신을 파괴시키기 까지 한다. 하지만 인간의 몸에 기생한 몬스터를 상대로 그 위력 을 마음 껏 발휘할 수는 없는 법. 유리는 적을 기절시킬 정도로만 힘을 줘서 상대의 사념을 헝클어 뜨릴려고 했다. 하지만… - 크흐흐…!! 괴성과 함께 재핑을 떨쳐버리는 몬스터. 유리는 눈을 크게 떴다.뭐야,저 몬 스터는…? ' 자신의 사념을… 가지고 있지 않아? ' - 후아아아악!! 순간, 망토 속에서 배트 그래플(Bat Grapple)을 꺼내든 몬스터는 유리를 향 해 그것을 발사했다. 합금 소재로 된 듯한 소형의 작살이 와이어를 그 끝에 매단채 날카롭게 유리에게로 날아들었다.유리는 황급히 몸을 틀어 그 작살을 피해냈고, 그것은 그대로 반대편의 건물 유리창을 깬채 그 창 턱에 걸려버렸 다. " 하아…! 하아…! " 유리는 가늘게 떨리는 숨을 몰아 쉬며 주저 앉은채 자신의 위에 걸려 있는 와이어를 올려다 보았다. 저 정도의 무게를 가진 와이어를 몸에 단채 반대편 의 건물까지 날아가는 작살이라니. 만약 꿰여 버렸다면 그대로 뼈와 살이 박 살났을 것이다.그렇게 유리의 등골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을 때, 그녀를 향한 시민의 외침이 있었다. " 조심해요, 유리 양!! " " …에? " 짧은 신음을 흘리는 유리.그리고 그런 그녀를 검은 그림자가 날카롭게 덮쳐 올랐다. 그것은 유리에게 수 십 미터 거리에서 작살을 발사했던 몬스터의 습 격이었던 것이다! 그는 배트 그래플에 연결된 와이어를 무섭게 감아들이며, 마치 저공 비행을 하듯 유리에게로 날아들었던 것이다.몬스터는 그대로 유리 의 목덜미를 잡아챈 뒤 작살이 박힌 반대편 빌딩 쪽으로 날아올랐다. " 아아앗!! " 순식간에 빌딩과 빌딩 사이의 허공을 가르는 둘.유리는 허전해진 발 밑으로 보이는 무시무시한 지상의 모습에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몬스터는 그런 유리의 비명을 계속 감상이라도 할려는듯 천천히 잡고 있던 유리의 목 덜미를 놓아버렸다. " ..........!!!! " 유리는 '헉' 숨을 들이 삼켰다.중력의 영향으로 천천히 밑으로 떨어지는 섬 뜩한 느낌이 전신을 엄습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60여 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추락 뿐이었다. " 유리 양------!!! " 그때 날카로운 시민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그녀가 빌딩의 옥상에서 유리에게 로 뛰어 내렸다. 유리는 그 광경을 떨어지는 순간에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시,시민 언니?! - 탁! 그리고 유리의 허리를 잡아챈 시민은 반대편의 빌딩에 있던 유리창으로 교 묘히 뛰어들었다.'와장창!' 전신으로 유리창의 파편이 튀는 느낌과 함께 시 민과 유리는 건물 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 콰장창! 유리를 끌어안은채 건물의 시멘트 바닥을 끊임 없이 구르던 시민은 벽에 부 딪히고 나서야 그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그녀들이 굴러왔던 곳에는 사무 용 테이블과 의자들이 박살난채 널부러져 있었다.아마도 무슨 마케팅 회사라 도 되는지 사무실의 곳곳에 상품 광고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 으윽… 괜찮‥아요, 유리 양? " " 시,시민 언니?! " 시민의 품 속에서 재빨리 고개를 들며 놀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유리. 시민은 지친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쓰러진채 유리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몇 번 몸을 일으킬려고 노력하던 시민은 전신의 통증을 참아내지 못하며 다시 쓰러져 버렸다. 옆구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로 보아, 늑골이라도 부러진 모양이었다. " 언니! 괜찮아?! " " 아아… 건물로 들어오면서 테이블에 라도 부딪힌 모양이네요….그리 걱정 할 건…아니에요…. 그보다는… 어서 포션을…. " " 아,응! " 유리는 허둥지둥 A.I 슈츠 속에서 고압 주사기 형식의 포션을 꺼내 시민에 게 주사했다. 전신이 짜릿해지며 눈이 맑아지는 포션의 효과가 느껴져 왔다. 시민은 힘 없이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에는 척추가 부러지지를 않나….이번 에는 늑골이 부러지지를 않나…. 그녀는 집에 가면 인터넷 운세로 자신의 건 강 운이라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런 이유로… 뒤를 부탁할게요, 모두…. ' " 시민 언니?! " 유리의 다급한 외침을 뒤로 하고, 시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이런 젠장! 다시 우리 쪽으로 온대요, 진우 씨! " " 역시 마무리는 우리 선에서 끝내야 하는 법이지! 가자고,소년! " 언제는 '저쪽 팀에게 맡기는 거야'라는 소리나 하더니 금새 말이 바뀌는 진 우였다. 가인은 몬스터를 놓쳤다는 마리와 유리의 무전에 이를 갈며 몬스터 가 있는 지점으로 달려 나갔다. 유리에게서 시민 씨가 다쳤다는 보고를 듣게 되자 눈에 보이는 게 없게 된 그였다. ' 이 개 자식! 죽여 버린다----!!! ' 몬스터는 마치 활강이라도 하듯 유유히 빌딩 사이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몬스터의 모습을 발견한 가인은 대번에 인상을 굳히며 다리에 오라를 끌어모 았다.몬스터의 형태가 아까와는 달라져 있었다는 것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가인의 다리로 푸른 오라의 바람이 모여들었다. " 간다! 라이징---------킥!!! " 가인의 A.I 부츠가 폭발음을 내며 오라의 회오리를 발산했다. 그러자 마치 호버 크래프트 같이 도시의 거리를 저공 비행하며 나선을 그리는 가인. 그리 고 오라가 한껏 모인 그의 다리가 지면에 내려서던 몬스터를 향해 일직선으 로 날아 들었다. - 휘리리리리릭! 하지만 때맞춰 다시 검은 기류에 휩싸이며 그 모습을 바꾸는 몬스터.그리고 몬스터는 다음과 같이 외치며 지면을 박차고 가인에게 날아들었다. - 라이더-------킥!!! " .........?!! " - 투학----!!!!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가인과 몬스터의 킥이 허공에서 작열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지듯 뒤로 물러서는 가인과 몬스터. 가인은 방금 전의 충 돌로 골반이 골절되는 것만 같은 아픔을 느껴야 했지만,미처 그 아픔을 느끼 지도 못한채 놀란 얼굴로 몬스터를 바라봐야만 했다.뭐,뭐야….도대체 이 자 식은…?! - 훔!!! 손을 좌우로 겹치다가 올리며 기합 소리를 내뱉는 몬스터.그 녀석의 모습은 어느 사이엔가 다시 바뀌어 있었다. 녹색 피부에 마치 외골격과도 같은 피부. 그리고 더듬이와 거대한 홑눈.녀석의 배에 달린 버클(buckle)의 중앙에서는 날개차(impeller)로 보이는 바람개비가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고 있었고 붉은 기류로 휘감긴 녀석의 목에서는 붉은 스카프가 생겨나와 거칠게 바람에 휘날 리기 시작했다.그런 몬스터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가인과 진우에게 로 시더의 절정에 이른 외침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 아앗! 가면 라이더!! 역시 녀석은 매니아 였어-----!! >> 어두운 빌딩의 옥상에서,피스 대원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몬스터를 주시 하던 리리스와 초류향.리리스는 등 뒤의 검은 날개를 촤악 펼쳐 올리며 속삭 이듯 말했다. " 훗…, 오늘은 여기까지. " "10월 22일 19시 20분.11구역에서의 전투는 결국 몬스터가 도주함으로서 그 미션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C+급 몬스터 '히어로 매니아(HERO MANIA)' 는…" ".........히어로 매니아…?" 수정의 보고를 듣던 중, 가인들은 몬스터의 코드 네임(CODE NAME) 대목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되뇌여야 했다.수정은 그런 그들의 반응에 쓴 웃음 을 지으며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기술 부 치프 시더 웰리스 양의 간곡한 건의가 있었기에…." "…코드 네임이란 거…. 그렇게 간단히 붙일 수 있는 거였구나…." 가인은 맥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사실 몬스터의 이름과 그 등급이 무 슨 기준으로 붙여지게 되는지는 피스 관계자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지 금의 상황으로 보아 그 기준이란 게 그다지 까다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평상시에는 진 사령관과 그 간부 측에서 모든 사항을 정한다고 하 던데…이번 기회에 사원 내에서 몬스터 이름을 모집하는 방법을 채택해 보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는 가인이었다.특별히 이번 회의에서 만큼은 그 모 습을 드러내고 있던 기술 부 치프 시더 웰리스는 탁자를 치며 고집 섞인 목 소리로 좌중에게 소리쳤다. "하,하지만 그건 분명 고(考) 이시노모리 쇼타로 원작의 가면 라이더였다고! 현실세계의 관료주의와 악덕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악의 조직 '쇼커' 에 맞 서 싸우는 비운의 개조 인간 히어로! 울트라맨과 함께 일본 특촬(특수촬영 의 준말)물의 양대 산맥 중 하나로 칭송받는 이 히어로 물은 '변신'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키고, 그 메뚜기를 모티브로 삼은 디자인 또한 후세에 까지 두고 두고 센세이션을 일으켰었지!" "…그거…메뚜기였었냐…." 특촬이라는 생소한 장르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매니아이기는 단단히 매 니아였던 모양이었다,그 몬스터 놈…. 어쨌든 묘한 점에서 몬스터의 코드 네 임을 납득한 가인들. 사실 절반 이상을 알아 먹지 못할 시더의 설명을 계속 듣는 것 보다는 수정의 상황 보고를 듣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 다.수정은 그런 좌중의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시더가 가면 라이더 특유의 괴 기스러움과 리얼성을 막 역설하려고 하기 전에 재빠르게 브리핑을 재개했다. " 이 C+급 몬스터 '히어로 매니아'는 전투 중 세 차례에 걸쳐 원자 레벨로 구조 변화를 일으켰으며, 그 변화에 따른 능력으로 ABF의 제한 시간 까지 그 개체를 피스 대원으로 부터 유지해 내었습니다. " 이 대목에서 피스 대원들은 모두 할 말이 없었다. 수정의 말대로 자신들은 그 몬스터를 놓쳐버리고 말았으니까. 세 번째 타입,가면 라이더로 변한 녀석 은 A.I 부츠의 10미터 점프력을 우습게 뛰어 넘는 25미터의 점프력으로 자신 들을 따돌린 후, 유유히 해제되는 ABF의 장막 너머로 도주해 버린 것이었다. 시더의 설명에 의하면 가면 라이더는 메뚜기의 개조 인간이기 때문에 25미터 의 점프가 가능하며, 또 이 점프력을 이용한 50톤 위력의 라이더 킥이 필살 기였다고 한다. " 현재 도주한 몬스터의 생체 반응은 22시가 넘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팔라딘들도 그 자취를 놓쳤다고 합니다. " "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로군요. " 메디컬 센터의 총책임자 닥터는 수정의 말을 듣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 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 이번 몬스터 또한 삼차원의 인간을 매개로 한 융합 형이었습니다.그런 몬 스터의 반응이 사라졌다는 것은, 코얼레슨스(coalescence) 상태에서 디스 정크션(disjunction)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죠. …쉽게 말하자면 몬스터 상태에서 인간 상태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 닥터의 뒷 말에 그제 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 가인들. 그때 진우가 인상 을 굳히며 닥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 그렇다는 것은… 그 기생하던 녀석이 숙주의 몸을 떠났다는 겁니까? 아니 면… " " 단순히 잠적 상태일 수도 있겠죠.하지만 그 목적이 몬스터들에게 있는 이 상, 번거롭게 숙주의 몸을 옮기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 " 흐음…. " 모두는 서로를 바라보며 낮게 한 숨을 내쉬었다.결국 어떻게든 녀석과 다시 조우해야한다는 소리였다. 이번 처럼 몬스터를 놓쳐본 적은 처음이었기에,가 인과 피스 대원들은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녀석이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기로 마음만 먹었다 하면 아무리 피스 메 이커의 대응이 빨라도 A급 긴급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이것은 그야말 로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 폭탄이 서울 시의 한 복판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 과 마찬가지인 소리였다.그렇게 가인들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 자, 피스 그레이 브루스는 예의 곰방대를 입에 문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 했다. " 흐….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게야. 어차피 놈들이 원하는 것은 무차 별 적인 인명 살상이 아니니까. " " …예? 그건… 무슨 뜻이죠,부르스? " 가인은 부르스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인명 살상이 목적이 아니 라니? 몬스터의 목적은 다름 아닌 그것 아니었던가? 가인은 자신이 알고 있 던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부르스의 말에 깊은 의문을 보였다.부르스는 그런 그를 흘겨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 네 놈도 머리가 있다면 생각해 보는 건 좀 어떠냐? 설마 여지껏 몬스터가 나타나는게 인류의 말살을 위해서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 " …아,아니였나요? 그게…? " 가인은 당황하며 작전 본부실의 모두를 둘러보았다.마리와 유리는 가인과같 이 부르스의 말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이들은 담담한 안색 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부르스는 그런 가인들의 반응에 가볍게 혀를 차며 슬쩍 진사령관을 돌아보았다. " 말도 안해줬던 건가? " " …사냥에 동기를 부여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 사냥? 가인과 마리,유리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진 사령관을 바 라보았다. 그,그건 무슨 뜻이지? 그러나 그는 가인들에게 그다지 설명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고, 대신 진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가 인들에게 말했다. " 사령관 님이 말은 저렇게 하셔도… 사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과 그다지 차이는 없어. 피스 메이커의 목적은 몬스터에게서 삼차원을 지켜내는 것. 몬스터에 의한 피해로 부터 시민들을 보호한다는 것이니까. " " …하,하지만 금방 사냥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 " 자자∼ 이미 너희들은 그 해답을 알고 있어. 단지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 을 뿐이지. 그러니까 나머지는 스스로 찾아내려고 노력해봐. 남에게 의존 만 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야∼ " 진우는 설레 설레 손을 저으며 입을 닫았고, 가인들은 의구심이 담긴 눈으 로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몬스터의 진 정한 목적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다들 저렇게 함구하고 있는 거지? 지금 상 황에서는 아직 우리에게 얘기해 줄 필요가 없다는 건가? 아니면…. "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일이잖아? 정말 몬스터가 인류를 공격하기 위해서 였다면 이렇게 무분별하고 비효율적으로 나타났겠나? " " ..........!" 부르스의 말에 가인들은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자신들도 느 끼고 있었다. 그동안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한번 쯤 의문 이 들기는 했었다. 어째서 몬스터가 그렇게 무분별하게 나타났는지…. 적어 도 그 목적이 인류의 피해에 있는 거라면, 좀 더 효과적으로 인구가 밀집 되 어 있는 곳을 노리고 나타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예전에야 몬스터들이 지 각 능력도 없는 미개 생물체인 줄로만 알았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었지 만, 이미 그 5대 간부까지 등장한 이상 몬스터도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성체 임이 판명났다.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피스 대원들과의 조우를 피하지 않고 전투를 벌였던 것일까? 사회의 혼란이 목적이 아니었단 말인가? ' 이건 마치… ' 마치 처음부터 우리와 접촉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 같은…. 하지만 가인들은 거기까지만 생각해야 했다. 진 사령관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 어쨌든, 몬스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니 다음 안건 사항으로 이만 넘어가겠다. " 어찌보면 상당히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가장 냉정하고도 이성적인 말 이기도 했다. 진 사령관은 잠시 브루스를 바라보다가 피스 대원들 쪽을 돌아 보며 말을 이었다. " 다름이 아니라 이번 사항은… " " ..........." 그리고 다음에 나온 그의 지시 사항에 가인들은 잠시간 할 말을 잊어버려 야만 했다. -짹짹… 다음날 아침. 언제나 처럼 26구역에 위치한 시민의 집은 이 시각에 제일 분 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달그락 거리는 식기 소리가 들려 오 고 있었고, 이 집에서 제일 늦게 잠에서 깨어나는 소녀는 천천히 그 눈을 떠 야 했다. " 으으응… "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저혈압인 유리는 오늘 아침도 침대에 서 뒤척이며 괴로운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그녀는 몸에 시트를 둘둘 두른채 그 하얀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잠에 취한 정신이 맑 게 개이기 까지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유리는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 러보다가 곧 거짓말 처럼 확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 아… 없어…. ' 자신의 곁에 가인이 없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건가. 여기는 가인의 방이 아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잠은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유리는 부루퉁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장품 대와 레이스로 깔 끔하게 정리된 방. 시민의 방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 그랬었지…. ' 유리는 여전히 이 방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약 6개 월 간 가인의 방에서 생활하다가 이렇듯 잠자리를 바꿔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유리는 한숨을 내쉬며 시민의 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 ......... " 그녀는 물끄러미 가인의 방으로 올라가는 2층 계단을 올려다보았다.항상 지 나다니던 저 길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단순히 잠자 리를 바꿔서기 때문 만은 아닌 것 같았다. 유리는 자신을 이런 상황으로 몰 아 넣은 한 사람을 떠올리며 험악하게 인상을 굳혔다. 이게 다 그 사람 때문 이야…. 이게 다…. 그때 부엌에서 막 앞치마를 두른채 나오던 시민이 그런 유리를 불렀다. " 아, 유리 양. 일어났어요? 후후… 오늘은 일찍 일어났내요? " " …응. " 유리는 침울히 답하다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 오빠는? 아직 안 일어났어? " " 아뇨…. 그게…깨우러 올라가보니까 이미 방에 없던걸요. 아마 '그 분'과 함께 나가신 것 같은데…. " " ..........." 유리는 시민이 언급한 그 분이란 말에서 다시 험악하게 인상을 굳혔다.하여 간 그가 우리 집에 오고나서 부터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가인 의 방에서 밀려난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는 무슨 일만 있으면 가인을 끌고 다녔기에 유리는 학교나 유레카 외에서는 가인과 마주칠 일이 극도로 적어지 게 된 것이었다.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던 가인과 각방을 쓰게 된 것 만 해 도 억울해 죽겠는데 만나 볼 시간 마저 줄어들다니…. 유리에게 있어서 이것 보다도 더 화가 나는 일은 없었다. - 달칵. 그리고 때맞춰 열리는 대문.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들어오는 이는 다 름 아닌 가인과 '그 분'이었던 것이다.유리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들 어오는 가인들을 맞았다. " 오,오빠…. 지금 왔어? " " 응. 유리야. 잘 잤니? 오늘은 일찍 일어났내. " 자신의 머리를 토닥여 주는 가인을 올려다보며 유리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오빠도 참…. 시민도 그렇고 누가 들으면 내가 완전히 늦잠꾸러기인 줄 알겠 잖아….가인의 얼굴을 보게 되자 뭔가 허전했던 기분이 가득 차는 느낌을 받 은 그녀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유가인이라는 남자는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 는 이였으니까. " …여전히 늦게 일어나는 꼬맹이로군. " 그러나 그렇게 들뜨던 기분은 뒤를 이어 들려오는 한 카랑카랑한 한 소년의 목소리에 지옥으로 곤두박질 쳐야만 했다. 유리는 가인을 대할 때와는 극과 극을 달리는 험악한 인상으로 '그 분'을 노려보았다. " ......... " 그녀가 바라본 가인의 뒤편에는 한 검은 권복을 입고 뒷짐을 지고 있는 회 색 빛 머리의 소년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중국 지부에서 한국 지부로 발령 받은 피스 대원. 피스 그레이 부르스였던 것이다.유리와 시민이 아까부터 언 급하던 '그 분'이란 사람은 그를 칭하는 것이었다. 유리의 적의 서린 눈빛과 부르스의 고집 서린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 들어갔다. " ......언제까지 노려볼 셈이냐? 어른에게 인사도 하지 않을 셈이냐? " " ......우…. 안녕…. " " 높임말. " " …하세요. " 부르스의 눈을 피해 투덜거리며 내키지 않는 인사를 하는 유리. 그녀는 이 눈앞의 인간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생긴 것은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생겼으 면서도 아이 같지 않은 기도가 전신에서 풍겨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생 각 없이 마주하면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이 굉장한 위압감이었다. 사람의 사념 을 읽어낼 수 있는 유리였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아마 그는 저 어려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자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긴 세월을 살아왔을 것이다. 부르스의 마음은 굉장한 심층 구조와 장벽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세한 것 까 지는 들여다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여기의 누구보다도 연장자라는 것은 분명 히 알 수 있었다. 사람 같지 않은 그 느낌. 그것이 유리를 어려워하게 만들 고 있었다. 유리는 그가 무서웠다. " 어머, 때맞춰 잘 들어오셨내요.가인 씨, 부르스 님. 막 아침 밥을 다 차 려 놓은 중이었어요. " 시민은 유리가 자신의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자 쓴 웃음을 지으며 가인들에 게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부르스는 대뜸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 …푸얼 차(Puerh Tea)는? " " 예? 아, 저번에 말씀하셨던 보이차 말씀이시죠? 이미 준비해 놓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중국 운남의 것은 아니라서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내요. " " 흠. " 부르스는 고집스러운 얼굴이었지만,시민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부르스는 유난히도 식사 전에는 차를 마시는 것을 고집했는데, 그 것도 중국 명차 중 발효차로 유명한 보이차를 선호했던 것이다.그 정도가 심 해서 보이차가 없을 경우에는 밥에 손도 데지 않는 그였다.유리는 그런 그를 힐끗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 …까다로운 노친네. " " 보이차는 콜레스테롤을 낮춰주고 비만을 방지하며 소화를 돕고 위를 따뜻 하게 하며 면역력 증강, 숙취해소, 갈증해소에 효과가 있지. 알겠나? 패 스트 푸드와 정크 푸드가 판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네 나이 또래의 어린 애들은 반드시 먹어 줘야할 필수 기호품이라는 거다. " " 누,누가 어린애…!! " 유리는 거칠게 항의할려고 했지만 부르스는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 는 유리를 위 아래로 살펴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 흐, 그리고 요즘 살이 좀 찌지 않았나? 한 2kg정도는 찐 것 같아 보이는 데 꽤 방만한 생활을 하였군. 보이차는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좋으니까 자 주 마셔 두는게 좋을 거야. " " .........!!!! " 유리는 마치 벼락을 맞듯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부르스 는 그야말로 그녀의 정곡을 찔러 버렸던 것이다. 2,2kg? 어,어떻게 안 거지?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쪄버린 건가,나? 하,하지만… 난 지금 성장 기이고 한창 먹을 나이니까…. 2kg 정도 찐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란 말이야. 그래. 어쩔 수 없어…! 당연한 거라고! 하지만 가인은 유리를 놀란 눈으로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 …유리야, 살 찐 거야? " -쿵! 그것으로 재기 불능이었다. 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대로 재빨리 시민의 방 으로 달려 들어가버렸고, 당황한 가인이 그 뒤를 쫓았다.상황을 지켜보던 시 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는 부르스에게 말 했다. " 너무 짓굿으셨어요,부르스 님…. " " 난 틀린 말 같은 거 한 적 없다. " 절대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를 않는 그였다.시민은 그런 그의 모습 에 한 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젓다가, 곧 손을 마주하며 부르스에게 물었다. " …아, 그런데 그 차…. 정말로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는 건가요? 피부 미 용에는 효과가 없을까요? " " .......어…? …아마도…. " " 정말요? 잘됐네요∼ 그럼 한 박스 더 주문해야겠내∼ " " ......... " 부르스는 그렇게 말하며 부엌으로 걸어들어가는 시민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봐야만 했다. " 아, 가인 씨. 그 그릇 이리로 주세요. " " 괜찮아요. 제가 갔다 놓을 게요. 시민 씨는 아직 몸도 안 좋으시잖아요. " 식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중에, 시민은 자신의 밥 그릇을 옮기는 가인 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씩 웃으며 행여나 시민이 자신에게서 그릇 을 뺏앗아가기라도 할듯이 서둘러 싱크대로 그릇들을 옮겨 버렸다.시민은 내 밀었던 손을 거두며 조용히 가인의 등을 바라보았다.그는 그 날 이후로 예전 보다도 더 시민,자신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예전보다도 더 자신에게 잘 대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 시,시민 씨….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 아,아아아아아… 그 날, 몬스터와의 격전 끝에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가인은 시민의 품에 서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었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다쳤다고 자책하면서.자 신 때문에 그녀가 죽을 뻔 했다고 죄책감을 느끼면서. 시민은 아직도 그 날 자신의 품에서 흐느끼던 가인의 모습이 잊혀지지를 않고 있었다. 어쨌든, 그 날 이후로 가인은 예전보다도 더욱 극진하게…그리고 훨씬 더 조심스럽게 시 민을 대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 뭘까…. 이 알 수 없는 거리감은…. 시민은 부르스가 마셨던 찻잔을 들어올 리며 생각했다. 가인은 분명 예전보다도 자신에게 잘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만큼 자신의 속내를 시민에게 털어놓을려고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만 일관할 뿐…. 마치 그녀에게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을려는 것 처럼 그는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에서 시민은 묘한 거리감을 느껴야만 했다. 시민 은 가인의 등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 저기… 가인 씨? " " 예? 왜 그러세요? " 시민을 돌아보며 활짝 웃는 얼굴로 되묻는 가인. 시민은 그런 그의 모습에 가슴 한켠이 무거워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으 며 말했다. "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어서 학교 갈 준비하셔야죠? 밖에 서 유리 양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 " 하지만 이것 까지는 다 도와드리고… " " 후후… 그 마음만 받을게요. 너무 병자 취급만 하시면 저 화낼거에요∼ " " 아,예에….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학교에 가 볼게요. " " 그래요. " 가인은 아쉽다는듯 접시를 내려놓고 부엌을 빠져나갔고, 시민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 숨을 내쉬었다.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 갔다 올게. " 가인과 유리는 한성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둘러맨채 대문을 나 서고 있었다. 시민과 부르스는 그런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부르스는 가인 의 손을 잡은채 문을 나서려는 유리에게 한 마디 던졌다. " …높임말. " " 갔다 올게…요. " 유리는 잔뜩 인상이 굳어져 투덜거렸고,가인과 시민은 쓴 웃음을 지었다.좀 부르스가 유리에게 너무한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유리의 반말 일색인 말투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었기에 가인들은 잠자코 있었다.자신들이 아무 리 고쳐줄려고 해도 안되던 것을 부르스는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참에 유 리의 말투가 고쳐지면 좋을 텐데…. 좀 유리에게 미안한 감도 들었지만 가인 과 시민은 유리에 대한 부르스의 태도를 방관하기로 마음 먹었다. " 아,그리고…. " 막 다시 문을 나서려던 가인과 유리를 부르스가 불러 세웠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뒷짐을 쥔채 곰방대를 입에 물며 말했다. " …좀 있다 보자. " " ......... " 가인과 유리는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그 표정에 깊은 음영을 드리워야만 했다. "자자∼ 조용! 조용!" 교탁을 치는 소리와 함께 여느 때처럼, 1학년 3반의 담임 하지연은 조회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느 때와 같이 그녀는 담배를 물고 있지 않았고, 여느 때 와 같이 고래고래 고함을 치지도 않았다.1학년 3반의 학생 모두는 그런 지연 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을 읽어 낼 수 있었다. ' 뭐냐? 이번에는…. ' 그런 학생들의 긴장하는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하며 지연은 뭔가 알 수 없다 는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도…아니고…. 무려 세번 씩이나…. 그것도 하필 또 우 리 반이라니…. " ".........?" 뭔가 더더욱 알 수 없어지는 학생들.그런 그들의 시선을 그제 서야 눈치챈 건지 지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에, 또…우리 학급으로 제 3의 전학생이 편입되었다." 그때, 재영이 기세 좋게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여,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남자라면 사양하겠습니다!!" -퍼억! 재영은 여전히 변함 없는 멘트로 지연에게 출석부를 얻어맞고 쓰러져야 했 다. 저런 혹독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 념을 관철시키는 그의 모습은 분명 본 받을 점이 있었다.물론 진지하게 받아 들일 만한 의견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겠지…. 지연은 여전히 떨떠 름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며 말했다. "여자들. 기뻐해라. 이번에는 남자 전학생이다. " " 꺄아-! "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두 손을 맞잡고 환호하는 여학생들. 그녀들 로서는 테레이아와 유리를 위시한 한성 고등학교의 꽃이 두 명 씩이나 반에 있었기에 전혀 빛을 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재영을 위 시한 반 가인 회의 남자들은 주먹을 휘두르며 야유를 퍼부었다. " 우우우우…남자 따위 죽어버려! " " 네 놈들은 남자 아니냐? 어디서 그런 정체성을 위협하는 소리들을….어쨌 든 밖에 있는 전학생, 들어와! " 지연은 교실 밖에서 서있을 전학생을 소리쳐 불렀다.그리고 1학년 3반 학생 들의 시선이 교실의 앞문으로 집중되었다. 과연, 최초로 1학년 3반에 전학오 는 남학생이란 어떤 존재일 것인가?!! 그런 아이들의 기대 속에서(정확히는 여학생들 뿐이었지만) 전학생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등장하는 전학생.그리고 그 전학생을 바라보는 순간,1학년 3반 학생들의 동공은 정확히 1.5배로 확대되었다. ' 뭐,뭐야…저건…? ' 모두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간 의문 하나.전학생은 한성 고등학교의 교복 대 신 검은 권복 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극권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아 니면 어째서 저런 옷 차림을…. 마치 액션 스쿨에 다니기라도 하는 것 같은 차림새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 회, 회색 머리…? ' 전학생의 머리카락은 은발에 가까운 회색이었던 것이다. 그 길이도 보통 긴 것이 아니라서 길게 땋아 목에 세 바퀴 정도 감아 내리고 있었다.저 정도 라 면 왠만한 여자들도 기르기 힘든 길이일텐데…. 그리고 키도 그리 크지 않고 앳되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고등학생으로는 보이지를 않았다.1학년 3반의 교 실에 지독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고 지연은 그런 학생들의 반응에 한 숨을 푹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 중국의 자매 학교에서 전학을 오게 된 브루스 류(劉)다. 상하이 출신으로 현재 나이 15세이고, 한국의 역사에 흥미를 느껴 전학을 지원 했다고한다." " 오오…. " 도대체 무슨 놈의 학교가 이렇게 자매학교가 많은 건지…. 지연의 투덜거림 을 뒤로 하며 반의 학생들은 이 중국인 전학생에게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일단 전학생이 중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반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 워 지고 있었다.저 이상한 복장과 머리카락에서 오는 부담감도 외국인이라는 한 마디에 다 용납이 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속 편한 무지에서의 외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그렇게 첫 대면에서의 부담감이 사라져 버리자 여학생 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 꺄아∼ 미소년이야∼ 피부가 여자 피부 처럼 되게 뽀샤시해∼ ' ' 귀,귀여워∼ 저 헐렁거리는 도복 좀 봐∼ ' ' 중국 출신이라니까 혹시 권법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아아∼너 무 앙증맞을 거 같아∼ ' 부르스의 괴상한 분위기는 곧 개성 있는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고, 그 앳되 보이는 외모는 꽃미남이라는 감투를 써서 순식간에 여학생들에게 어필 되어 지고 있었다. 재영들은 그런 여학생들의 반응에 한 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 역시 어쩔 수 없다니까,여자들이란∼ 외모 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저 태 도들이라니∼ " …너희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겠지? 어쨌든,새로 운 전학생의 등장으로 떠들썩해지는 1학년 3반의 교실.하지만 이상하게도 유 리와 가인이 앉아 있는 자리 만큼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테레이아는 시 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도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기만 한 가인들에게 의아 함을 느끼며 물었다. " 가인? 왜 그러는 거야? 어디 아프니? " " …아니. 그냥… 앞으로의 학교 생활에 대해 나름대로의 고찰을 하고 있었 다고나 할까…. " " .........? " 알아들을 수 없는 가인의 말에 테레이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리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유리는 한술 더 떠서 어린 아이 답지 않게 고뇌의 표정으로 깊은 한 숨 마저 내쉬고 있는 것이었다.'하아….' 그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한 고심의 표출이라니…. 테레이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두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왜… 이러는 거지…? 다들? " ......... " 한편 가인은 초조한 안색으로 교단에 서 있는 부르스를 주시하고 있었다.그 의 머리 속으로는 연신 걱정과 근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가인은 오늘 아침에 부르스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려 보았다. - 부르스! 절대로 학교에서는 지금과 같이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돼요! 절 대로! 알았죠?! - 왜? - 그걸 몰라서 묻는 거에요? 학교에서 부르스의 신분은 분명 학생일텐데 선 생님들에게 지금처럼 퉁명스럽게 굴었다가는 큰 난리가 날 거라고요! 더 구나 학생들 중에는 짓궂은 아이들도 있을 텐데, 혹시나 화난다고 성질대 로 행동했다간…! 가인은 거기까지 말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그 이상의 사태를 생각하는 것만 으로도 그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있었다. 학교의 벽을 때려 부수는 기물 파손 행위는 둘째 치더라도 예전 자신에게 행했던 것 처럼 사람을 맘에 안든다고 두들겨 팼다간,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픽픽 죽어나갈게 분명했다. 도,도대체 가∼! 진 사령관! 그 인간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낼 수가 있는 거지?!! 브 리핑에서 자신들에게 지시 사항을 내리던 그의 무심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 피스 그레이. 자네는 이제부터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이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서 한참 동안 그 진의를 깨닫기 위해 눈만 깜빡거려 야 했던 가인들이었다. 그리고 진 사령관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그를 제외한 그 자리의 모두는 비명을 지르며 기겁을 해야 만 했고. 특히 부르스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수정과 진우의 표정이 참으로 가 관이었다. 아마 가인으로서는 평생 그들이 그때 지었던 표정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 흐… 걱정하지마라. 그렇게 어제의 일을 회상하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인에게로 부르스 는 예의 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달래는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까. …그 말에 가인이 불신감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그,그래.…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 정도 주의를 줬으면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을 거야. 그래…. ' 가인은 불안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입꼬리는 파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가인과 유리는 서로의 손을 꼬옥 맞잡으 며 긴장된 눈동자를 교단으로 향했다. " 자,부르스. 할 말 있나? " " .........예. " 지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교탁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부르 스. 드,드디어…!! 가인과 유리의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부르스는 입 을 열었다. " 미국인 W.E.그리피스가 저술한 '은둔의 나라 한국(The Hermit Nation Cor ea)'이라는 책을 읽고 한국의 역사가 전설과 유적이 풍부하다는 것에 깊 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한국사를 문학적인 관점에서 연구 하였으므로 놀랄 만한 관찰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편중의 한국연구를 경계한 점이 무엇보다도 훌륭했습니다. " " ......... " 침묵. " 외국어로 쓴 한국사 가운데 가장 흥미있고 포괄적인 저술로서 평가받았던 그 책은 발간 당시에 한국이 아직 쇄국정책을 풀지 않아 외부 접촉이 없 었으므로,서양인은 이 책의 제목을 본따서 한국을 '은둔국'이라고 불렀습 니다. 1897년, 1905년, 1907년, 1911년에 각각 증보판이 나왔으며, 곁들 어져 있던 지도와 많은 삽화가 인상적이었죠. 그 책을 읽고 저는 이 한국 이라는 나라에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 …부,부르스? 가인과 유리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봐야만 했다. 뭐, 뭘까? 저 이질감이 물씬 묻어 나오는 말투와 태도는? 무엇보다도 그가 온화 한 어투로 높임말을 쓰고 있다는 점이 놀라운 일이었다. 저 자기만 잘난 줄 알고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인간이…. 한편,그런 가인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지연과 학생들은 부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레 한국사의 문화적인 관 점이 어떻다느니 중국 편중의 한국 연구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에 적응이 되 지를 않았던 것이다.부르스는 그런 지연과 학생들의 반응을 잠시 살펴보다가 곧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흥분해서 재미 없는 얘기들이나 해 버렸네요…. " 어리숙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홍조를 볼에 머금은채 멋쩍은 미소까 지 짓는 부르스.그 모습에 가인과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비며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뭐,뭐야…. 금방의 그건? 시,신기루였나? 뭔가 말도 안되는 것을 본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것이 신기루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듯이 여학생들의 비명에 가까운 탄성들이 울려퍼졌다. " 귀,귀여워어어어∼!! " " 꺄! 깜찍해!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아∼!! " " 하트가! 내 하트가! 아아아아∼!! " 어,어떻게 이런 반응들이…! 가인과 유리는 믿을 수 없다는듯 주위의 학생 들을 둘러보며 불신의 표정을 지어야 했다. 말도 안돼! 저 앞에 있는 저 인 간은 부르스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남자가 아니라고! 부르스는 그 야말로 자신의 본색을 철저하게 숨기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 이다. 가인은 생각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건가?! " …선생님? 저기…. " 그리고 멍하게 부르스를 바라보고 있던 지연에게 그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부르자, 그제 서야 하지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녀도 순간 적으로 부르스가 보여준 귀여운 표정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 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 아, 그,그래! 그럼 자기 소개는 이것으로 끝내기로 하고…. 에∼ 어,어디 보자. 어느 자리에 앉는 게 좋을까나. " " …전 선생님이 정해준 자리라면 어디라도 좋아요. " - 쿠쿵! 지연을 올려다 보며 예의 홍조가 서린 표정으로 말하는 부르스의 모습. 그 어딘가 쑥스러워하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모습에 지연의 가슴은 내려 앉 고 말았다.하지연. 어느덧 삼십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서 부 르스의 이런 모습들은 신성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모, 모성애 를 건드리고 있다고 해야하나…. 이건…. 그렇게 하지연이 주춤 거리는 모습 을 보이자, 여학생들에게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 어머, 별 꼴이야! 얼굴이 빨개졌어! " " 선생님 체면이 있지 어떻게 학생에게 두근 거릴 수가 있는 걸까? " " 저건 분명 욕정을 느낀 표정이야! 굶주려 있는 짐승의 것이라고! " " 시,시끄러워!! 이 녀석들이!! " 당황하며 반박하는 지연. 그리고 1학년 3반의 교실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 다. 가인은 그런 광경들을 바라보면서도 내심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예상 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생각하던 것 보다는 이쪽이 더 나았던 것이다. 그,그래…. 이렇게 가주기만 한다면… 별 문제 없이 끝날 수 도 있을 것 같은데…. - 칙…. 그때 뭔가 발화연소제가 마찰제와 마찰을 일으키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쉽 게 설명하자면 성냥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한창 여학생들과 실랑이를 하던 지연은 자신의 옆에서 들려온 이 정체 불명의 소리에 의아함 을 느끼며 슬쩍 부르스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였지? 그거? " ......... " 그리고 지연은 볼 수 있었다. 곰방대로 보이는 듯한 것에 성냥으로 불을 붙 이고 있는 부르스의 모습을. …지연과 학생들은 한순간 얼어 붙었다. " .........? 왜 그러세요? "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부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지연에게 물었 다. 그러나 지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부르스가 물고 있는 곰방대를 가리키 며 굳어 있는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 …그,그거…. " " 곰방대 모르시나요? 한국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는 1618년경이고, 담뱃대는 17세기 초엽경에 보급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담뱃대에는 장죽이라는 긴 것과 곰방대라는 짧은 것이 있죠. 장죽은 양반의 권위의 상징처럼 되었 다가 담배가 대중에 파급되면서 널리 퍼졌지만, 일반 서민들의 일상활동에 는 거추장스러웠으므로 설대가 점점 짧아졌다고 합니다.그 후 점점 짧아져 서 호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짧아진 것이 바로 이 곰방대이죠. " 부르스는 친절하게 설명까지 곁들여 가면서 담배를 한 모금 맛있게 빨아 들 였다.그 너무나도 능숙한 모습에 지연은 일그러진 얼굴로 간신히 소리를 쥐 어짜서 그에게 말했다. " 아,그… 중국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한국…이거든? 미성년 자는 흡연을 할 수 없는 나라라서… 그러니까 중국에서 처럼 여기에서 담 배를 펴서는 안 되는 거야,부르스…. " 지연으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게 말한 것이었다. 그,그래. 이제 막 중국에서 한국으로 온 아이이니까 이 정도의 문화적 차이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이해 해줘야지.지금 부터 하나 씩 고쳐나가게 하면 되 는 거야. 그래…. 하나 씩 고쳐나가게 하면… " 선생님. 뭘 잘 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중국에서도 미성년자에게는 흡연 을 금하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듯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은 제 자신 이 피우고 싶어서 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듯이 마치 책망하는 것 처럼 지연에게 말하는 부르 스. 지연은 너무나도 태연스럽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점점 고개를 수그 러뜨리며 이를 가는듯한 어조로 물었다. " …그러니까 네가 피우고 싶어서 피우고 있는 거라고? " " 그렇습니다. 자신의 신념은 자신이 관철시키는 것이니까요. " " …그러니까 중국의 문화적 차이이거나 그런 것은 전혀 아니고? " " 흐, 우습군요. 선생님. 너무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무지하신 것 아닙니 까? 한국인들은 아주 이상한 습성이 있는데, 뭔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생기면 그것을 여러 가지 요소들의 탓으로 돌리며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성향이 있더군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주쳐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 이십시오. 초조해 하지 말고 관찰하여 자신의 위치로 파악하는 겁니다. " " ......... " 침묵하는 1학년 3반 일동.그 모습에 가인과 유리는 이마를 손으로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그럼 그렇지…. 이 뒤의 상황은 너무나도 뻔해서 생 각하기 조차 싫었다. 부르스는 곰방대를 여전히 뻐끔뻐금 피어올리며 지연에 게 물었다. " …그런데 제 자리는 어디로 하실 겁니까? " -빠직. 이성의 끈이 끊어 지는 소리…. 그리고 다음 순간 지연은 폭발했다. " 으아아아아아아!!! 이 놈의 자식을---------!!!!!! " " 으앗! 막아! 다들 뜯어 말려!! " " 죽여버릴 테다! 네 녀석은 지금 교사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고 있어---!! " " 히이이이이이익!!!! 선생님이 이성을 잃었어!!! " 순식간에 공성전을 방불케하는 교실. 그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수라장(阿修羅場). 바로 그것이었다. -웅성웅성… " ......... " -웅성웅성… " ......... " 서로 수근거리며 긴장한 눈으로 전학생을 살피는 1학년 3반 일동.그들의 중 심에는 중국에서 온 전학생 부르스가 의자에 앉아 철저히 관찰 당해지고 있 었다. 원래 전학생이 오면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질문 공세를 받는 것이 일 반적인 관례였지만 앞에 보여주었던 부르스의 임팩트가 너무도 강했기에 학 생들은 섣불리 그에게로 접근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몇몇이 용기 를 내어서 그에게 말을 붙여 보려고도 했지만, 무참하게 굳어져 있는 부르스 의 얼굴에 그만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그는 자신을 겹눈질하며 속삭이고 있는 학생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점점 인상이 험악해져가고 있었 다. - 웅성웅성… " .........! " 그리고 막 부르스의 화가 폭발하려고 하는 순간,재빨리 학생들 사이에서 가 인과 유리가 튀어나오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아,하하하∼ 안녕, 전학생? 부르스 라고 했지? 난 오늘부로 너와 같은 클 래스메이트가 된 유가인이라고 해. 이쪽은 클래스메이트 이유리. 한국과 중국은 여러모로 다른 부분이 많을 테니까 어려운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라구. 물신양면으로 도와줄테니까! 자,그럼 잘 부탁 한다∼ " " …잘 부탁. " 그렇게 말하는 둘을 잠시 바라보던 부르스.그는 곧이어 무표정한 얼굴로 그 들에게 말했다. " …쇼 하네. 웬 되먹지도 못한 짓이냐? " " .........!! " 마,맞 장구를 쳐주지는 못할 망정!! 가인과 유리는 인상을 구기며 그를 노 려보았다. 이봐요! 부르스! 당신과 우린 여기서 처음 만난 사이여야 된단 말 이에요! 그리고 쇼라니? 그럼 당신이 앞에 했던 행동들은 뭐가 되냐고?! 적 반하장도 유분수가 있지!! 하지만 가인은 그런 그의 성격을 몸으로 직접 체 험해 본 적이 있었기에 괜히 그의 기분을 거스릴려고 하지 않고 억지 웃음을 지었다. " 하,하하…. 아니… 그냥 전학생에 대한 형식적인 인사말이라고 해두죠. " " …집어쳐. 거슬리니까. " …아,진짜! 기껏 맞춰주려고 하니까!!! 가인은 새삼 부르스의 성깔 머리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맞춰주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 인이 막 그에게 뭐라고 하기도 전에 부르스는 자신을 보고 웅성거리는 학생 들을 향해 예의 카랑 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시끄러워!! 이 애송이 자식들!! 어디서 시건방지게 사람을 앞에 두고 뒷 다마를 까고 있는 거야?!! 할 말이 있으면 내 앞에 와서 하란 말이다!!어 린 것들이 그 정도의 배짱도 없어서 뭐에 쓰겠다는 거야?! 이 건방진 꼬 마들이!! " - ......... 침묵. 대번에 학생들의 웅성거림을 잠재우는 부르스의 노호성이었다.가인은 얼굴이 창백해져 비틀거렸다. 쓰,쓰러져 버릴 것 같아…. 부르스는 기껏 쌓 아놓은 이미지가 곰방대로 무너져 버리자 더 이상 볼 것 없다는 듯이 막 가 는데로 행동하고 있었다. 가인은 울쌍이 된 얼굴로 주위의 학생들에게 들리 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 뭐가 걱정하지 말라는 거에요,부르스? 뭐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야?! 이럴 거라면 뭣 때문에 앞에서 그렇게 내숭을 떨었던 거에요?! 도대체 뭣 때문에!! ' 부르스는 그런 가인을 연민의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건 서비스. ' - 쿵! 서비…스…? 가인은 부르스의 그 한 마디에 굳어 버려야 했다. 그때 그렇게 굳어버린 가인의 뒤로 재영과 테레이아가 다가왔다.재영은 가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 야,유가인. 전학생하고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냐? " " …아,아니! 절대! 오,오늘 처음 만난 사이잖아!! 그지, 유리야?! " -끄덕끄덕. 가인과 유리는 재영의 말을 전면 부정하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저런 인간 과 한 집에서 산다는 게 알려진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재영은 그런 그들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히죽 웃으며 부르스에게 말했다. " 뭐, 어쨌든! 이제부터 같은 반이 됐으니 서로 통성명이나 하며 지내야 겠 지? 난 1학년 3반의 핸섬 가이 박재영이라고 한다! 부르스 라고 했지? 앞 으로 잘 지내보자고! 아, 그리고 이쪽은… " 재영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옆에 있던 에메랄드 빛 머리의 소녀,테레이아 를 가리켰다. 그것은 재영의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후, 네 녀석이 아무리 딱딱하게 굴어도 남자인 이상, 미인의 앞에서는 약해질 수 밖 에 없는 법! 자, 이 쑥스럼쟁이 녀석! 내가 너의 가면을 벗겨주마! 마음껏 미인의 앞에서 너의 약한 모습을 보여 봐! 테레이아는 그런 재영과 사전에 합의를 한듯 그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부르스에게 말했다. " 훗, 만나서 반가워요, 부르스 씨. 전 저번 학기부터 한성 고등학교에 전 학 오게된 테레이아 민체스터 라고 해요. 외국에서 온 유학생이 저 밖에 없었던지라 좀 적적했었는데…. 이렇듯 저와 같은 유학생이 같은 반으로 오게 되니까 정말 반갑내요. 우리 앞으로, 힘들 때는 서로에게 힘이 되 어주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어요. " 마치 속삭이는 것 처럼 말하며 그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부르스에게 향하 는 그녀. 그 감미로운 느낌에 그녀를 지켜보던 남학생들은 가슴을 떨었다.그 들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었다. ' 그런! 테레이아 양! 그 동안 저희들이 곁에 있었는데도 적적하셨단 말씀 이십니까!! ' '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좋은 친구라니…!! 저희들은 그렇게 당신에게 힘 이 되어 주질 못했던 존재들이었단 말씀이십니까! ' ' 크윽…! 모두…모두 저희의 불찰입니다! 저희의 불찰…! ' 그리고 그런 그들의 슬픔은 곧 질투의 불꽃으로 승화되어 모두 전학생 부르 스에게로 향해지기 시작했다. ' 용서 못해! 용서 못한다, 네 놈! ' 그것은 삐뚤어진 마이너스 에너지의 발로. 그런 이글 거리는 남자들의 파동 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부르스는 눈 하나 깜빡 않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테레이아를 바라보았다. 테레이아는 예의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입가에 흘 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재영은 그것을 보 며 날카롭게 미소를 지었다. ' 후… 전학생! 이제 그만 본색을 드러내는 거다! ' 그리고 부르스는 그런 테레이아의 푸른 눈동자를 천천히 마주 보았다. - .........!!!! 그 때 테레이아의 뇌리를 관통하는 느낌 하나.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을 느끼며 부르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치 모든 것을 빨아 들일 것 처럼 짙은 흑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공간은 암흑으로 물들어 가며 그 안에는 테레이아와 부르스 둘 만이 서 있었다.그 리고 테레이아는 부르스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그 안에 있었나? - .........!!!! 마치 전신에 벼락을 맞은 것만 같은 충격! 테레이아의 눈동자가 불신의 빛 을 띄며 흔들렸다. 어떻게? 설마… 알아챈 건가…? ' 그럴리가?!!! ' - 화악!! 그러나 그 암흑의 공간은 나타날 때와 같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테레이 아는 다시 한성 고등학교의 1학년 3반에 서 있었다.그녀는 하얗게 질린 표정 으로 천천히 부르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보인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 지만 그 눈 만은 웃고 있었다. 마치 숨바꼭질에서 범인을 찾아낸 술래처럼. - 두근…. 테레이아의 심장이 불안한 소리를 내며 떨려왔다.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알아챌리가 없다. 그가 날 알아볼 방법이 없지 않은가? 지금의 내 모습은 완 벽하다. 절대로 들킬리가 없다. - 두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떨림은 도대체…. 테레이아는 애써 마음 속으로 스 며드는 의혹과 불안을 떨쳐내며 미소 띈 얼굴로 부르스에게 말했다. " 숙녀의 손을 무안하게 만들 작정이에요? 레이디가 악수를 청하는데도 이 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 " ......... " 무표정한 얼굴.부르스는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그녀를 빤 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곧 코웃음을 치며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 치워라. 여자가 곁에 있으면 부정탄다. " - 쿠쿵! 순간, 부르스의 행동에 쇼크를 받는 테레이아와 1학년 3반 남학생 일동. 남 학생들의 눈에 불꽃의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 저,저런 죽일 놈이…!!! 가,감히 테레이아 양의 악수를 거절해?!! ' ' 레이디의 모욕은 곧 우리의 모욕! ' ' 용서할 수 없다!!! ' 그것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질투 파동의 극치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보기 만해도 숨이 막힐 듯한 느낌…! 가인은 그 어마어마한 살기에 얼굴이 창백해 져 재빨리 부르스를 잡아끌며 소리쳤다. " 하,하하!! 오늘이 전학 첫 날이니까 생소한 게 많을 테지?! 자, 걱정마! 너에게는 클래스메이트 유가인과 이유리가 있으니까! 그럼 교내 안내부터 시작해보자고!! 어,어서 가자! 어서 빨리! " " ......... " 순식간에 부르스의 양쪽으로 팔짱을 끼며 도망치듯 그를 끌고 나가는 가인 과 유리.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이 교실에서 사라지자 반 가인회의 울분이 섞인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아아아!! 더럽혀진 레이디의 명예를 어떻게 회복해야 한단 말인가?! " " 뭐가 테레이아 양을 위해서고! 뭐가 테레이아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란 말 인가?! 우리는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 " 용서할 수 없다! 부르스! 너는 이제부터 1학년 3반에 대 파란을 불러일으 키는 남자 유가인과 더불어 우리의 척살 대상 1호다! 반드시 제거해 줄테 다! 반드시!! " 피 맺힌 고함을 지르며 각오를 다지는 반 가인회. 하지만 그런 그들의 옆에 서는 순간, 굉장한 함성 소리와 함께 여학생들의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가 터 져나왔다. " 꺄악----!!! 쿠,쿨(COOL)해! 신선했다고! " " 아아…!! 저렇게 냉정할수가 있다니! 그것도 테레이아 같은 미인에게! " " 왕자님이야. 이것은 왕자님의 재래라고! " 얼굴 가득 홍조를 띄우며 그야말로 눈동자에 하트 표시가 떠오른 여학생들. 그녀들은 그야말로 감동하고 있었다.그 누가 한성 고등학교의 꽃 테레이아에 게 이처럼 완벽히 냉정하게 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래! 열등한 자들의 저 열한 기쁨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바로 이런 남자를 기다려 왔어! " 부르스 님∼ " 여학생들은 두 손을 맞잡은채 홀린 목소리로 부르스의 이름을 되뇌였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반 가인 회의 남자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 새,새로운 변혁의 물결이…. " 그렇게 1학년 3반의 교실이 시끄러워져 가는 가운데에, 테레이아 민체스터 만은 냉정한 얼굴로 가인들이 나간 교실의 뒷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옅은 녹색 빛을 띄고 있었다. ' 설마…. ' …들킨 건가…. - 딩동댕동… 한성 고등학교에 모든 수업이 종료했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다음으로는 언제나와 같이 담임의 종례를 받으며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일가 를 모두 마치게 된다.그리고 지금 여기, 종례를 마치고 힘 없는 걸음 걸이로 교문을 향하고 있는 세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 …최악이었어. " 제일 평범한 고교생으로 보이는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 유가인이 핼쓱한 표 정으로 중얼거렸다. " …미래가 보이질 않아. " 그리고 흡사 초등학생에게 교복을 입혀놓은듯한 비범한 고교생으로 보이는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 이유리가 얼굴에 짙은 수심을 깔은채 중얼거렸다. " …그럴 때 갖춰야 할 것이 후(後)의 선(先)이지.너희들은 미래의 일을 내 다 볼 줄 아는 선견지명이 부족한 거다. " " ......... " 마지막으로 제일 비범하다 못해 외면하고 싶기 까지 한 고교생으로 보이는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 부르스가 곰방대를 입에 물며 혀를 찼다. 그 말에 가 인과 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의 뻔뻔한 얼굴을 노려보아야만 했다. '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 가인과 유리는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단 하루 만에 1학년 3반의 반 가인회에 버금가는 왕자회(王子會) 라는 사조직을 만들 어내지를 않았나, 수업 시간에 곰방대를 피워 물며 담배 연기를 내뿜지를 않 았나, 교사가 질문을 해와도 '닥쳐'라고 말을 하지를 않았나,체육 수업 도중 에 운기 행공이다 뭐다 하며 하지연 교사의 수업을 정면으로 개 무시를 하지 않았나…. 나열하자면 끝도 한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문제는 그런 부르스의 뒷수습을 다 가인과 유리, 그들이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가인은 창백해진 낯빛으로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 ......... ' 있었다. 오늘 하루만에 조직된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단체. 왕자회 라는 명 칭을 지닌 그녀들이 벽과 나무의 뒤에 숨어서 내내 부르스와 함께 서있는 가 인들에게 타오르는 눈빛들을 보내고 있었다. 가인은 잠시 이 신생 단체에 대 한 생각들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왕자회. 그 목적은 부르스를 '왕자 님'이라는 알 수 없는 호칭으로 부르며 맹목적으 로 따르는 것. 그 외의 사항들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지만, 가인은 이것 하나 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왕자회라는 조직은 반 가인 회 에 버금갈 정도로 그 질이 안 좋다는 것을…. ' 무엇보다도 전혀 엉뚱한 제 삼자에게 자신들의 원념을 투영시킨다는 점에 서 그 폐해가 너무나도 흡사하지. '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 애송이. 그나저나 오늘도 각오는 되어 있겠지. 사정 없이 가줄테다. " " ......... " 언제나와 같이 거칠기 짝이 없는 말투로 가인에게 으름짱을 놓는 부르스.하 지만 그 말투와는 너무나도 다른 화사한 표정을 그는 짓고 있었던 것이다.마 치 친근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몸이 달아올라 있는 것만 같은 그 얼굴이라니 …. 그 눈동자에서 동경의 빛이 느껴지고 있다면 말 다 했을까.어떻게 이 정 도로 까지 표정과 말에 괴리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기가 찰 정도 였다. - 고오오오오오오… 그리고 뒤를 이어 벽과 나무의 뒤에서 느껴지던 살기의 파동들이 두 배는 상승하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게 문제란 말이지…. 어째서 또 이렇게… ' 용서할 수 없어, 유가인. ' ' 감히 우리의 왕자 님에게 접근을 하다니…! 네 녀석의 타겟은 XX 염색체 만이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가…! ' ' 그럼으로 인해 너는 우리 여성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이상성욕자인 것이지! ' ' 불결해! 불결하기 짝이 없어! 견딜 수가 없다고! ' 온갖 잡념과 원기의 소용돌이가 가인의 뒤통수를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가 인은 차마 뒤 돌아 볼 엄두를 내지 못하며 고개를 수그러 뜨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부르스는 여전히 화사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인상 안 필래? 어디서 근심 걱정은 네 놈 혼자하는 것 처럼 건방을 떠는 거야? " " ......... " 억울해. 나는 억울하다고. 가인은 정말이지 재판관에게 자신의 결백을 외치 는 사형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반 가인회에 이어 왕자 회라니…. 재 앙이 두 번을 겹치니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어둠이 그의 눈 앞을 가리 고 있었다. " 여어∼ 앞에 가는 세 사람들∼ " 그때 그런 가인들을 불러 세우는 한 남자의 목소리. 재영이었다. 그는 테레 이아와 함께 가인들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 수업 끝난지가 얼마나 됐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가려는 거야?평 소 답지 않게시리∼ " " …그와 그녀의 사정이라는 거지. " 가인은 유리와 잠시 서로를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재영도 등 뒤 에서 느껴지는 왕자회의 기세를 느꼈는지 쓴 웃음을 지으며 가인의 어깨를 두들겼다. " 하하∼ 힘내라,가인아.인기인은 어디를 가나 주목을 받기 마련이니까. 그 냥 연예인이 달고 다니는 스캔들이라고 생각해∼ " ' 그건 네 놈이 할 소리가 아닌 걸로 아는데…. ' 지금이야 현역에서 물러났다지만, 한 때는 반 가인회의 선봉에 서서 자신을 핍박했던 녀석이 이제와서 위로의 말을 건내고 있다니…. 아무리 여자 친구 가 생기고, 반 가인회에서 제명을 당했다지만… 이 녀석은 정말이지… ' 간사한 녀석…. ' 가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그런 가인의 속 마음이야 어찌되었든 재 영은 히죽거리며 부르스를 돌아보았다. " 자자! 그건 그렇고 전학생! 모처럼 전학 온 첫 날인데 이렇게 서둘러 집 에 갈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요, 민체스터 양? " " 그럼요,재영 씨. 전학생에게 같은 반 클래스메이트들이 축하 파티 정도는 해줄 기회를 주어야지요. " 재영의 장단에 맞춰 살며시 미소 지으며 부르스에게 말하는 테레이아. 가인 과 유리는 그 말에 얼굴이 창백해져 부르스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부르스는 그야말로 심드렁한 표정으로 재영과 태레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안 돼. 저 표정은 '계속 귀찮게 굴면 죽여버린다'라는 표정! ' 물론 가인과 유리에게 표정으로 그 사람의 속 마음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 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부르스의 표정은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가인과 유리는 당황하며 테레이아와 재영을 제지했다. " 아,그! 저기 말이야∼ 오늘은 좀 날도 안 좋고… 그,그래! 무엇보다도 전 학 첫 날이라서 아직 우리와 많이 친해지지도 않았잖아∼ 서둘지 말고 천 천히 교우 관계를 쌓아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 " 응. 그래. " 그런 그들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재영과 테레이아는 말했다. " 그렇기에 더더욱 빨리 친해지자는 의미에서 축하 파티를 하자는 거잖아∼" " 그래. 우정을 돈독히 하자는 것 뿐인데…. " 부,분명 그렇기는 하지만….가인과 유리는 재영들이 쉽게 포기할 생각을 안 하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부르스 본인도 아닌 자신들이 재 영들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부르스,이 인간 을 축하 파티에 데려가자니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어떻게든 해야….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는 가인들을 부르스는 무 책임한 얼굴로 멀뚱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때,그런 가인들을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주는 광명의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 어머, 가인 군! 이제 마친 거에요? " 교문에서는 한 여성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성을 바라보던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수정 씨? " 그렇다. 한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진 사령관 직속 비서, 민수정.그녀가 자신 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애차, 재규어 XJ 220에서 내리 며 가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등장에 교문 근처 에 있던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사전에 짜기라도 한 것 처럼 동시에 웅 성거림을 멈췄다. " 어떻게 여기에…? " " 그야 오늘은 부르스 님의 전학 첫날이잖아요.축하도 할 겸 상황도 알아볼 겸 해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 수정은 가인의 질문에 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그러나 그녀는 곧 살며시 그 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별 일은… 없었나요? ' ' ......어떤…? ' ' 인명 피해라든지… 공공기물 파손이라든지… ' 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게 걱정이었던 거로군, 수정 씨. 진우 에게 들은 바로는 수정도 한때나마 부르스의 제자였었다고 한다.그렇다면 부 르스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녀였을 것이다. 분명 부르스가 학 교에 있는 동안 태산같이 걱정을 했겠지….가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 걱정마세요. 무사히 잘 넘어갔으니까…. ' ' 정말인가요? ' ' 정말. ' ' 진짜로? ' ' 진짜. ' 가인에게서 몇 번의 확답을 얻어내고서야 안도의 표정을 짓는 수정. 도대체 어떤 모습을 보여줬길래 이렇게 제자가 스승을 못 믿는단 말인가? 부르스를 대하는 진우와 수정의 이런 태도들은 그야말로 FBI의 폭탄 전문가들이 본부 로 우송된 시한 폭탄을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었다.그렇게 생각하던 가 인의 머리는 다음 순간 수정의 옷차림을 바라봄으로써 잠시 하얗게 비워져야 만 했다. 가인과 유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수정의 옷차림을 가리키며 낮은 목 소리로 물었다. " 저기… 그런데 수정씨. 그 옷차림은…? " " 아, 이거요? " 그렇게 말하며 가인들의 앞에서 제자리를 한 바퀴 스윽 돌아보이는 수정.그 러자 그녀가 입고 있던 푸른 색의 슈트가 그 광택을 번뜩였다. 무릅, 팔꿈치 부분에 보호대가 들어가있었고, 등 뒤에는 척추보호대까지 들어가있는 레이 서 용 슈트였다. 거기다 글러브와 부츠까지…. 헬맷만 쓰지 않았다 뿐이지 이건 완벽한 로드 레이서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어,어째서 저런 모습인 거지? 어째서…?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가인들의 질문을 수정은 눈치 빠르 게 알아채며 답했다. " 라이더의 기본 소양이라는 거죠. " " ......... " 할 말을 잊는 가인들.그들로서는 언제나 처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단지 부르스만은 그런 자신의 제자를 멀뚱히 쳐다보며 다음 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 그럼 어째서 저번에는 그런 복장이었던 거지…? ' 예전, 자신을 공항으로 마중나올 때 입었던 그 폭주족 차림새는 분명 라이 더의 기본 소양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런 부르스 의 의문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 상 어둠 속으로 조용히 묻혀져야 만 했다. 어쨌든,그런 수정의 차림새에 잠시 얼이 빠졌던 재영과 테레이아도 곧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냈다. " 앗,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저번 블루 섬머 비치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가인의 베스트 프렌드 박재영이라고 합니다! " " 테레이아 민체스터에요. " " 아, 그래요. 정말 오랫만이네요. 재영 군과 민체스터 양. " 살며시 웃으며 말하는 수정의 모습에 언제나와 같이 재영은 흐물거렸다. 그 의 곁에 예의 걸프렌드 유시내 양이 있었더라면 한바탕 초를 칠 장면이 연출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뒤로 하며 테레이아는 의아한 얼굴로 수정에게 물 었다. "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 " 아,그게… 부르스 님과 가인 군들을 데리러 온 거에요.전학 첫 날이고 해 서 외식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 " 아,예…. " 테레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다가,문득 수정이 한 말 중에서 한 단어 가 묘하게 귀에 거슬린다는 것을 알아채고서는 되묻듯이 중얼거렸다. " ......부르스… 님? " 그렇다. 수정은 이 전학생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이 중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상한 중국인 꼬마에게. 수정은 그런 테레 이아의 질문 의도를 눈치 챘는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친절히 답하려고 했다. " 아, 전 부르스 님의… " 제자이거든요. 그 뒷 말을 수정은 이으려고 했지만 자신을 무시무시하게 노 려보는 부르스의 눈빛에 잠시 그 입을 닫아야만 했다. 부르스는 수정을 극구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며 부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그녀가 자신 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했었다.부 르스는 수정이 말을 멈춘 사이에 그녀를 대신하여 다음과 같이 테레이아에 게 답했다. " 이 녀석은 내 시중을 드는 아이다. " - 쿵!! 순간, 교문 근처에 있던 한성 고등학교의 모든 학생들의 입이 턱이 빠진 것 처럼 밑으로 벌어졌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수정과 가인들도 기가 막혔는지 부르스를 돌아보며 차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중? 시중이라고? 아 니, 저 인간이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런 가인들 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부르스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수정에게 말했다. " 내 말이 틀리기라도 한 거냐? 날 모시겠다고 하지 않았었냐,네 놈? " " 하,하지만 스승…! " " 죽인다. " " 아,예.예. 부르스 님…. 부르스 님 말이 다 맞지요.예. 맞아요. " 수정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부르스의 말을 인정했고, 그것이 주위에 준 여파는 컸다. 재영과 남학생들은 그야말로 두 눈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흥분 을 하기 시작했다. ' 그,그렇다면 저것이 바로 그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하는… 메이드(maid)?! ' ' 시,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로군…! ' ' 저것이 바로 상류층의 퇴폐적인 잔재물이란 말인가! 요, 용서할 수 없어! 저런 미인에게서 시중을 받을 수가 있다니! 세상은 불공평해! 세상은 미쳐 가고 있다고! ' 그런 그들의 원념과 잡념의 소용돌이를 느낀 것일까. 가인과 유리는 식은땀 이 흐르는 얼굴로, 질투의 불꽃을 일으키는 재영들에게 말했다. " 아,저기…. 그럼 우리는 이런 이유로 이만 가볼테니까…. 그… 축하 파티 란 건 다음에 하자고. 알았지? 자∼ 우린 이만 간다! 부르스! 어서 차에 타요! 수정 씨, 얼른 출발하자고요! " " 아,예! 그래요,가인 군. " 마치 도망치듯 순식간에 재규어 XJ 220에 올라타 한성 고등학교를 떠나는 가인들. 그런 그들의 사라지는 뒷 모습을 바라보며 재영을 비롯한 반 가인회 의 일원들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 놈은 자본주의의 암적인 존재다! 사회주의에게 지탄 받을 구실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메이드라니! 부가 낳은 사치 중의 사치로군! " " 놈은 매일 저런 미인에게서 성심성의를 다한 뜨거운 봉사를 받고 있었단 말인가? 빌어먹을! 인정할 수 없어! 이런 부조리한 세상의 시스템 따위 인정할 수 없다고! " " 하,하지만… 부러운 것도 사실이야…. " 분개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반 가인회. 그들은 이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전학생 부르스. 그는 자신들 의 지상 과제 유가인과 같은 동류였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은 그런 그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그들의 기세는 다음 에 터져나오는 여학생들의 환성에 주춤거려야만 했다. " 여,역시 그는 우리의 왕자 님이었어! " " 개인 시녀가 직접 마중까지 나와주다니! 이것이야말로 귀공자의 위엄! " " 아아∼ 부르스 님! " 왕자회의 멤버가 틀림 없을 그녀들은 예의 홀린 표정으로 부르스가 사라진 자취를 눈으로 뒤쫓았고,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며 반 가인회는 탄식했다.앞으 로 1학년 3반이 걸어갈 행보가 심히 걱정 되었던 것이다.자신들의 반 가인회 에 이어 마리 추종회, 거기다 이 신생 왕자회의 탄생이라니….이것은 그야말 로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 라보며 현역에서 물러났기에 좀 더 냉정한 눈으로 사태를 관망할 수 있었던 반 가인회의 전 회장이었던 남자, 박재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옆의 테레이아 에게 물었다. " 에휴…. 앞으로의 전개가 꽤나 기대되지 않아요, 민체스터 양? " " ......... " " …민체스터 양? " 대답이 없는 테레이아를 돌아보며 묻는 재영. 하지만 이미 테레이아 민체스 터의 모습은 한성 고등학교에서 사라진 뒤였다. 재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 위를 두리번 거렸다. " …버,벌써 가버린 건가? " 내 꿈은 슈퍼 영웅이었다. 우리 집은 옛날부터 그리 유복한 편이 아니었다.그래서 내 부모님은 새벽부 터 자정이 될 때까지 일하셔야만 했고 당연히 집에는 나 혼자만이 남아 있어 야 했다. 그런 나를 달래주었던 것은 부모님이 매일 아침마다 빌려 놓고 가 신 애니메이션 DVD세트가 전부였다. << 변신! >> 그리고 난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언제나 약자들을 도와주며 초인적인 힘 을 발휘하던 슈퍼 영웅들을. 난 그런 그들에게 열광했었고, 언제나 잠들기 전에 신에게 기도했었다. 슈퍼 영웅이… - 슈퍼 영웅이 되게 해달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부모님은 여전히 맞벌이 일을 하셨고, 나는 여전히 혼자인 삶을 보내야만 했다.그렇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를 졸업하게 되었다. - 퍽! 퍽! …그리고 고등학교 생활. 나의 고등학교 생활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지옥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수한 구타와 욕설, 조롱과 비웃음. 학교의 뒤뜰에 서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들겨 맞고 쓰러지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 런 나에게 녀석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 이 자식, 웃기는 놈이잖아? 나이가 몇인데 맨날 슈퍼 영웅이 어쨌다느니 정의가 어쨌다느니 하는 거야? 좀 모자란 거 아냐? - 그렇게 눈에 띄고 싶었으면 그냥 콱 죽어버리지 그랬냐? - 어디 네 그 잘난 영웅 님 좀 불러보라고. 이렇게 얻어 맞는 네 놈이 불쌍 해 보이지도 않냐면서! 자자! 영웅 님을 불러봐! 구해달라고 불러보란 말 이야! 지독한 놈들이었다.난 고등학교 3년 내내 그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내가 왜 그런 괴롭힘을 당해야 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워낙 오래된 일 이었으니까.하지만 이것 만은 기억하고 있었다.내 꿈이 슈퍼 영웅이 되는 것 이라고 말한게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는 것을. 난 내 꿈을 말한 것으로 인해 한순간에 모두의 비웃음을 받아야만 했고,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내 꿈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자네는 도대체 제대로 하는 일이 뭐야?!어디다 정신을 팔고 앉아 있는 거 냐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간신히 취직해 직장인이 되었다.하지만 내 삶은 여전히 변함 없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여전히 계속되는 구박과 비웃음. 그것 뿐 이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떨어져 나 만의 가정을 꾸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곳에서도 나는 혼자여야만 했다. - 당신은 이제 지겹지도 않아요? 허구헌날 그 놈의 영웅 타령!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요! 내 삶의 낙은 히어로 물의 애니메이션과 비디오를 보는 것이 전부가 되었다. 무미건조한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슈퍼 영웅을 생각할 때 뿐이었던 것이다. 이런 나에게 아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제발 현실을 직시해요! 그녀는 슈퍼 영웅이 되고 싶다는 내 꿈을 부인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이런 내 꿈은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하지만… 하지만 꿈을 꾸는 건 잘못된 게 아니잖아.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 해서 잘못인 것은 아니잖아. 그냥 단지…꿈을 꾸고 싶었을 뿐인데…. 동경하고 싶었을 뿐인데…. - 그럼… 내가 그 꿈을 이뤄줄까? 그리고 나는 만났다. 내 꿈을 이뤄줄 검은 날개를 가진 한 천사를. 그리고 나는 될 수 있었다. " 자, 변신 시간이다. " 바로… 슈퍼 영웅이. - 부우우우우웅… V6 3.5ℓ 트윈 터보 엔진 소리가 27구역의 고속도로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앞서나간 엔진 소리를 따라잡기라도 하려는듯이 재규어 XJ220이 먹이를 노리 며 엎드린 악어처럼 고속 도로를 지나갔다. 스포츠성과 안락성 위에 영국신 사의 기품을 더한 차를 만들어 오던 재규어. 그런 재규어를 대표하는 슈퍼카 로 들 수 있는 것이 이 XJ220이었던 것이다. XJ220은 원래 재규어 회사적으로 개발이 진행된 차가 아니라 '프라이 데이 클럽'이라는 사모임에서 개발을 시작한 후 개발이 마무리 될 단계에서 회사 의 결재를 받아 양산형이 나오게 된 차였다. 그 XJ220이란 이름도 최고 시속 220마일(354Km)을 목표로 개발을 시작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프로토 타 입은 V12 6.2L DOHC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500마력을 내며 퍼거슨 포뮬러에 서 만든 4WD를 달았지만 이 양산형은 4WD를 없앴으며, 엔진은 V12대신 V6 3. 5L DOHC에 트윈 터보를 얹어 최고출력을 542마력으로 올렸다. 무게도 1,700K g에서 300Kg가량 줄었으나 안타깝게도 최고속도는 처음 목표에 못 미치는 수 치인 시속 320Km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XJ220의 주인 민수정은 여느 때 처럼 흘러간 팝송을 튼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몰고 있었다.참고로 이번의 팝송은 그린 데이(Green Day)의 'Basket case'였다. " 수정 씨, 지금 어디로 가는 거에요? " 뒷좌석에 타고 있던 가인은 창 밖의 경치를 둘러보다가 수정에게 물었다. 2 인승인 재규어XJ220에 뒷좌석이 있을리가 없었지만,수정의 것은 승차 정원을 4인용으로 늘린 개조형이었기에 최대 5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외양 상으로 는 전혀 티나지 않으면서도 뒷 좌석을 만들어낸 것이 그야말로 인테리어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껏 스포츠 카를 사놓고서는 이런 터무니 없는 개조를 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 흐음∼ 저녁 식사라도 할까 해서 근처의 식당에 예약을 해두었는데…. " 가인들에게 의견을 묻는 것 처럼 수정은 말 꼬리를 흐렸다. 그때 보조석에 앉아있던 부르스가 창 밖을 바라보며 지나가는듯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 …레스토랑 같은 곳은 아니겠지? 난 칼질하는 곳은 질색이다. " " 후훗, 걱정마세요,스승 님. 그럴 줄 알고 스승 님이 그 동안 먹고 싶어하 시던 한국의 갈비 집으로 예약해 두었으니까. " " …스승이라고 부르지 말랬잖냐. " 부르스는 수정의 호칭에 투덜거리면서도,저녁 식사가 갈비라는 것에 마음이 동했는지 내심 조용히 넘어갔다.그런 부르스의 모습에 가인은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생각했다. ' 부르스는 어째 묘한 부분에서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단 말이야. ' 물론 직접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할 소리였지만…. 한편 유리는 그런 가인 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어 부르스의 뒷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그녀로 서는 부르스에게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집과 유레카에 이어서 학교에서 까지 그와 얼굴을 마주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과 가인이 가질 수 있는 시간도 현저히 줄어듦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이건 곤란해…. 정말이지 곤란하다고…. ' 어떻게든 저 찰거머리 인간을 오빠에게서 떼어놓지 않으면….유리는 부르스 가 있는 한 가인을 향한 자신의 연애 노선에 난조가 많을 것 임을 새삼 깨달 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사사건건 눈엣 가시 같은 인간이었다. - 부우우우우우우웅… 그때 유리는 재규어XJ220의 엔진 소리에 묘한 다른 엔진 소리가 섞여 들려 옴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인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백밀러를 살 펴보았다.이 27구역의 고속도로에는 자신들의 차 외에는 어떠한 다른 차들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 아무 것도 없는데…? " - 부와아아아아앙!!!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가인의 창가 쪽으로 엔진의 괴성과 함 께 한 오토바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가인은 그런 갑작스런 오토바이의 등장 에 깜짝 놀라며 뒤로 몸을 물렸다. " 뭐,뭐지?!!! " 오토바이에는 한 인영이 타고 있었다.녹색의 메뚜기 얼굴에 붉은 마후라,그 리고 외골격 피부에 바람개비가 달린 버클. 그것은 바로… " …히어로 매니아? " 어째서 녀석이 여기에…?!! - 삐! 삐! 삐! 그런 히어로 매니아의 등장에 가인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피스 블루의 무전 기로 신호음이 울려퍼졌다. 액정에 떠있는 문구 'EUREKA'. 피스메이커에서의 무전이었다. 가인이 다급히 무전을 켜자 피스메이커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 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아앗!! 가인! 나타났지?! 나타난 거지?! >> << 시더 양! 또 이렇게 오퍼레이터 실에 들어오면…! >> 뒤를 이어 윤채영의 항의가 섞인 외침. 하지만 시더는 전혀 개념치 않는다 는 목소리로 연신 가인에게 무전을 보냈다. << 드디어 신 메카의 등장인 거야! 히어로 매니아가 타고 있는 저 모델은 분명 타치바나 레이싱클럽과 FBI수사관 타키씨가 공동 설계한 머신! 700 마력의 강화 제트엔진을 탑재해,최고 시속이 500Km를 넘는 신(新)사이클 론 호라고!! >> " …신 사이클론 호? " 뭐냐. 그 연상 작용이 일어나는 이름은? 그리고 저 몬스터 놈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도 그 특촬… 뭐라고 하는 거에서 나오는 건가? 가인의 그런 의문 을 미리 눈치 채기라도 한 건지 시더는 막힘 없이 술술 얘기를 풀어나갔다. << 가면 라이더라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초고속 성능이 탑 재된 수퍼 바이크를 개인마다 가지고 있지! 그리고 바이크와 한 몸이 되 어 공격과 방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테크닉션까지 지니고 있다고!>> " 정말 가지 가지 하는 영웅이로군. " 가인은 한숨을 쉬며 재규어 XJ220과 나란히 달리는 히어로 매니아를 노려 보았다. 녀석은 그 거대한 붉은 홑 눈으로 재규어의 가인들을 힐끔 바라보다 가 곧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부아아아아아아앙!!! 재규어의 앞으로 치고 나와 가인들과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는 히어로 매니 아.그것은 엄연한 도발이었다. 보조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부르스가 턱을 괴 며 인상을 찌푸렸다. " …저런 시건방진 놈을 봤나…. " 히어로 매니아는 재규어와 점점 멀어지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시더가 말 한 700마력이 어쩌니 시속 500km가 넘느니 하는 것은 분명 허무맹랑한 소리 였지만, 재규어 XJ220을 따돌리는 속도로 보아 저 신 사이클론 호라는 것도 엉성한 외관에 비해 만만찮은 성능을 지닌 머신인 것 같았다. 유리는 자신들 의 앞에서 달리고 있는 히어로 매니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 며 중얼거렸다. " 하지만 저럴 바에는 뭣 때문에 나타난 거지…. " 자신들에게 공격을 걸어오는 것도 아니고,오토바이로 시덥잖은 도발이나 걸 어오다니…. 뭔가 나타날 필요까지는 있었던 걸까? 유리는 전혀 공격에는 관 심도 없다는듯이 열심히 바이크만 몰아가는 히어로 매니아의 모습에 혀를 찼 다. ' …바보로군. ' 그런 유치하게 호승심을 자극시키는 수법에 넘어갈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고.그렇게 생각하는 건 가인과 부르스도 마찬가지였는지 히어로 매니아의 뒷 모습을 뚱한 눈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때,재규어XJ220의 무전기를 들어 수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본부에 연락을 취했다. " 긴급 레벨 1을 발동시키겠습니다. 상황 설정은 B-. 27구역의 47번 도로에 있는 모든 차들을 대피시키길 바랍니다. " << 긴급 레벨 1 발동시켰습니다! 그리고 ABF는… >> 오라 배틀 필드의 전개 유무를 묻는 윤채영. 하지만 의외로 수정은 뜻 밖의 대답을 했다. " …오라 배틀 필드는 전개하지 않습니다. " " 예? " 수정을 돌아보며 되묻는 가인들. 아니, 피해를 확산시키지 않을려면 ABF의 전개는 필수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그런…. 수정은 그런 가인들을 돌아 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 지금와서 오라 배틀 필드를 전개시킨다고 해도, 사람들의 대피가 너무 늦 었어요. 이대로 시가지에서 전투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죠. " " …그럼? " " 이대로 녀석을 27구역의 외곽에 있는 도로로 유인해내는 수 밖에 없어요. 이 47번 도로를 쭉 타고 가다보면 마의 고개라고 불리는 27구역의 내리막 길이 있으니까 거기라면 인적도 드물고 10여분의 시간 상 여유도 있어서 민간인의 대피가 가능해요. 무엇보다도… " 무엇보다도? " 저쪽에서 걸어 온 승부를 이쪽에서 마다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 " ......예? " 그게 무슨…? 하지만 수정은 채 가인들이 되묻기도 전에 기어를 올리며 엑 셀 페달을 밟아버렸다.그러자 후미로부터 포효하듯 들려오는 엔진의 거친 작 열음! 그와 동시에 XJ220은 엔진이 큰 스포츠카 처럼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바람에 앞좌석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가인과 유리는 뒤로 날아 가 좌석에 몸을 처박았다. " 우,우왓?!!! " 무시무시한 속도로 앞의 히어로 매니아를 따라 잡아나가는 XJ220.그리고 수 정은 어느새 히어로 매니아와 나란히 재규어를 몰아가며 녀석에게 미소를 날 렸다. " 이 배틀(BATTLE). 받아들이겠어요! " 배,배틀? 뭐지 그 용어는? 하지만 가인과 유리는 재차 올라가는 재규어의 속도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부여잡았다.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눈깜짝할 새에 저 뒤로 밀려나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이다. 가인은 떨리는 눈동자로 계기판을 보다가 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속도 계는 이미 220km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는 창백한 표정으로 중얼거 렸다. " 도발 당했다…? " - 부아아아아아아아앙!! 거친 엔진의 고동소리가 차체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르스는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슬그머니 품에 넣으며 좌석과 손잡이를 꼭 움켜 쥐었다. 그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가인과 유리에게 낮게 말했다. "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 " 마,마음의 준비라니…! " 부르스가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가인과 유리는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좌 석의 안전 벨트를 몸에 둘렀다. 그리고 겁먹은채 서로를 끌어 안은 그들. 그 런 가인들에게로 수정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음 코너를 공략하겠습니다! " " .........!!! " - 부우우우우우웅!! 재규어 XJ220은 차 주인의 의지를 충실히 수행하여 단번에 250km를 넘어서기 시작했다.가인과 유리는 서로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여, 여기는 통일 한국이라고…. 이 나라에서는 이런 속력으로 달릴 수가 있다니… 믿을 수 없어. 믿을 수가 없다고!! 그리고 재규어의 앞으로 가드레일이 보이 고 있었다. 27구역 내리막 길의 제 1코너에 진입하게 된 것이었다. 가인은 자 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 너,너무 빨라요,수정 씨!!! " 이대로는 차가 가드레일을 뚫고 계곡 밑으로 떨어지겠어! 하지만 수정은 침 착한 안색으로 풀 브레이킹하여 하중을 프론트에 집중시켰다.어쩡쩡한 브레이 킹은 슬라이드 시에 코스 이탈을 부르기 때문에 과감해져야만 했다.그리고 그 녀는 스티어링을 꺽을 시점까지 브레이크를 약간 남겨 놓았다. 그러면서 RPM 이 떨어지지 않도록 힐앤토 구사! 원하는 시점에 브레이크에서 발을 뗌과 동 시에 스티어링을 꺽자 테일 슬라이드가 시작되었다. 수정은 스티어링을 센터 보다 약간 반대편으로 꺽어주며 액셀을 ON상태로 유지했다. 테일의 흐름에 맞 추어 바로 카운터를 주면서 액셀을 미묘하게 ON/OFF하자 재규어는 가드 레일 을 스치듯 지나갔다. 이것이 바로 드리프트! - 끼이이이이이익!! 재규어는 가드레일과 근소한 간격을 유지하며 코너를 돌아 나갔다.무의식 중 에 가드레일 쪽의 창가를 바라보던 가인은 그만 졸도할 뻔한 것을 간신히 견 뎌내었다. 오,오 센치…. 오 센치미터도 떨어지지 않았어…. 재규어가 가드 레일에 언제 부딪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수정은 너무도 태평한 안색으 로 엑셀의 양과 카운터 각을 미묘하게 조작해 주고 있었다. 지나치게 밟으면 그립을 완전히 잃고 180도 혹은 그 이상의 스핀을 부르게 되기 때문에 많이 미끄러진다 싶으면 엑셀을 약간 풀고 카운터 각을 크게 하고, 안 미끄러진다 싶으면 좀 더 밟아주면서 카운터 각을 작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CP에 가까 워지자 그녀는 엑셀 조작으로 후륜의 그립을 찾아주면서 스티어링을 센터로 돌렸다. 그리고 코너 통과! 드리프트를 성공한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은 길었 지만 드리프트로 코너를 통과한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 아…? 으아…? " 가인과 유리는 멍청하게 입에서 신음만을 흘리며 수정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무,무서웠어…. 죽는 줄 알았다고…. 하지만 그들은 수정의 다음 말에 이제부 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좋아. 이 앞의 5연속 헤어핀 커브가 포인트. 백밀러에서 그 모습이 사라 지게 만들어드리죠. " " 히이이이이이익!!! " 그와 동시에 다시 가속을 시작하는 재규어. 수정은 아무래도, 몬스터를 시가 지에서 인적이 드문 고개길로 유인하겠다는 애초의 목적을 잊어버린 것만 같 았다. 백밀러로 재규어의 뒤를 따라붙는 히어로 매니아를 노려본채 냉소를 흘 리는 수정. 가인들은 그런 그녀의 미소에 치를 떠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 었다.그리고 재규어는 27구역 내리막 길의 마의 협곡 5연속 헤어핀 커브로 접 어들었다. C-121. 이 구간의 정식 명칭은 그러했다. - 부아아아아아아앙!! 재규어는 마치 부딪혀서 죽을 것만 같은 속도를 내며 코너에 진입했다.그 정 도의 각오로 이 C-121 코너에 돌입하지 않으면 스피드가 부족해서 드리프트가 출구까지 이어지지를 못했던 것이다. 민수정. 그녀는 지금 코너의 입구에서부 터 출구까지 미끄러뜨린채로 전속력 노브레이크로 통과할 생각이었다. - 끼이이이이이익!! 한계 스피드의 4륜 드리프트! 울트라 D 난이도의 기술이 지금 재규어XJ220으 로 시전되고 있었다. 타고 있던 가인과 유리, 부르스는 숨조차 내쉬지 못하며 귀청을 때리는 타이어 그립 끌리는 소리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야만 했다. 그 리고 결국 참다 못한 유리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푹 꺽어버렸다. 기절해 버 린 것이다. " 유,유리야!! 정신 차려!! " 가인이 그런 유리를 부둥켜 안으며 소리쳤지만, 그녀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 지 않고 있었다. 가인은 울쌍이 된채 전방을 주시했다.만약 반대편 차선에서 차라도 오는 날에는 대형 사고가 일어날 게 분명했지만,피스메이커의 팔라딘 들이 재빨리 이 27구역의 내리막 길을 잘 통제해낸 모양이었다. 그,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달릴 필요는 없는 거잖아∼?! 가인은 수정에게 소리쳤다. " 수정 씨! 어디까지 달릴 생각이에요?! 히어로 매니아도 따라오지를 못하 잖아요?! " " …아, 참…! 그랬었죠? "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듯 수정은 재규어의 속도를 줄였다. 아마,배틀에 전 념하느라고 몬스터를 유인해 내는 게 본래의 목적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 버린게 분명했다. 수정 씨!! 너무해요! 너무하다고요!! 어쨌든, 백밀러에서 히어로 매니아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자 수정도 당황하며 재규어를 멈춰세웠 다.'끼이이익!' 타이어가 끌리며 타는 냄새가 났다. " 어머나…. 몬스터가 어디로 가버린 거죠? " " ......... " 주위를 둘러보며 당황한 얼굴로 가인들에게 묻는 수정. 가인들은 그런 그녀 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며 투덜거렸다.그렇게 맘껏 달려놓고서 이제와서 우 리에게 물어봤자… 나,참…. 가인은 희미하게 정신을 차릴려고 하는 유리를 토닥이며 후방을 살펴보았다. 그 악착 같이 따라오던 히어로 매니아는 어디 론가 증발이라도 한 건지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이 자식, 어디로 간 거야? 도망이라도 친 건가? - 후우우우우웅… 하지만 녀석은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무거운 뭔가가 바람을 가르 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그리고 부르스의 날카로운 외침이 차 안에 울려퍼졌다. " 모두, 머리 숙여! " " .........!!! " - 콰지지지직! 순간, 재규어 XJ220의 차 지붕이 비명을 지르며 내려앉았다. 거대한 쇳덩어 리가 차 위로 떨어진 것이었다.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히어로 매니아가 탄 모터사이클, 신 사이클론 호였다! " 맙소사! " 도로 맞은 편의 가파른 협곡 위로 올라갔던 녀석은 오토바이에 탄 채 재규 어의 위에 뛰어내린 것이었다.5m는 될듯한 높이에서 바이크 채 차 위로 뛰어 내리다니…. 이건 역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히어로 매니 아를 태운 신 사이클론 호는 재규어의 차 지붕을 우그러 뜨린채 뒷 유리창을 깨뜨렸고, 그 파편이 안으로 쏟아졌다. 가인은 유리를 감싸안은채 그 파편을 등으로 맞았다. " 크윽! " - 쿵! 묵직한 오토바이가 차 지붕에서 뒷면을 타고 내리며 지면으로 내려갔다. 하 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녀석은 재규어에서 잠시 떨어진다 싶더니만 다 시 방향을 틀어 엑셀을 풀로 당기며 앞 바퀴를 들어올린채 달려드는 것이었 다. 그리고 그대로 사이드 밀러를 앞바퀴로 내려찍음과 동시에 뒷바퀴를 들 어 옆의 창문을 후려 갈겼다. - 콰장창!! " 으악!! " 다시 한 번 차의 유리창이 깨지며 그 파편이 가인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가 인들은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하며 파편들을 등으로 받아내었다. 그렇게 화끈하게 재규어를 박살낸 히어로 매니아는 마치 도발하는 것 처럼 재규어 의 앞으로 달려나가 고개를 간신히 들어올리는 수정들에게 손가락을 까딱 였다. 그리고 그런 녀석의 도발은 너무나도 멋들어지게 수정과 부르스의 마 음에 불을 지폈다. 부르스는 이를 갈며 수정에게 외쳤다. " 쫓아!! " - 부아아아아앙!!! 몬스터의 공격에 형편 없는 몰꼴이 된 재규어였지만,다행히 엔진 쪽에는 이 상이 없었는지 수정이 엑셀 페달을 밟자 거칠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가인은 또 다시 수정이 드라이브를 재개하자 하얗게 얼굴이 질리며 부르스에게 소리 쳤다. " 차,차라리 여기에서 내려서 녀석과 싸우는 게 낫지 않아요,부르스?! 이대 로 녀석을 쫓아가봤자 차 안에서 어떻게 공격을 한다고… " " 이렇게 할 거다. " 부르스는 그런 가인에게 짧게 답하며 재규어의 차 지붕을 장(掌)으로 올려 쳤다. 그러자 신 사이클론 호에 구겨져 내려 앉은 차 지붕이 거짓말 처럼 폭 음을 내며 위로 튀어 올랐다. '투앙!' 떨어져 나가는 차 지붕.차 지붕은 하 늘을 유유히 날다가 도로의 저편으로 떨어져 쇳소리를 울렸고, 개방된 차 지 붕 쪽으로 세찬 바람이 휘날려 들어왔다. 이런 난폭하기 짝이 없는 부르스의 행동에 가인들은 입을 쩍 벌리며 할 말을 잊었고, 수정은 울쌍이 되어 소리 쳤다. " 스,스승 님…!!! 제 차를 부서뜨리면 어떻게 해요!! " " 스승이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그리고 어차피 비싼 수리비 들여서 고치는 것 보다는 새 차를 뽑는 게 더 경제적일 거다! 그냥 차 하나 버린 셈 쳐! " " 그런…!! " 그렇게 순식간에 고철 취급을 받게된 재규어XJ220. 부르스는 항의를 할려는 수정을 무시하며 가인들에게 외쳤다. " 자, 애송이들아! 이러면 이제 공격할 수 있겠지? 잽싸게들 움직여 봐! " 가인과 유리는 서로를 돌아보며 한 숨을 푸욱 내쉰 후, 자리에서 몸을 일으 켰다. 개방된 차 지붕 위로 몸을 일으키자 세찬 바람이 얼굴을 때려 눈 조차 뜨기 힘들 정도였다.가인과 유리는 휘날리는 머리 카락 사이로 간신히 두 눈 을 뜬채 오른손을 반원으로 그리며 소리쳤다. " 변신! 피스 블루! " " 변신! 피스 핑크! " 가인과 유리의 시동어에 무전기의 음성 인식 장치가 반응하며 대기 중에 미 세분자 입자 상태로 존재하던 A.I 컴플릿 세트가 그들의 등 뒤로 모습을 드 러냈다. 검은색의 타이츠와 관절 부위에 부착된 연푸른빛의 장갑들. 헬맷과 마스크까지 장착되자, A.I 슈츠는 가인과 유리의 오라에 반응하여 각자의 오 라 패턴을 띄기 시작했다. 유가인의 오라 패턴은 블루! 푸른 빛의 오라가 그 의 몸으로 깃들었다. 이유리의 오라 패턴은 핑크! 핑크 빛의 오라가 그녀의 몸으로 깃들었다. 이것으로 가인과 유리는 피스 대원, 피스 블루와 피스 핑 크가 되는 것이었다. " 하아아아아앗!! " 가인은 오른손의 헤븐 스매쉬를 들어올려 오라를 끌어모았다.그러자 푸른오 라의 기류가 휘몰아치며 그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오라의 토네이도. 바로 천 공권이었다. 가인이 옆의 유리에게 눈짓을 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 라능력을 전개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핑크빛이 흘러나오며 재핑 공격이 전개 되었다. - 파칭! 유리의 재핑 공격에 사념을 침투당한 히어로 매니아.사념이 없는 이 몬스터 에게 유리의 오라 공격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지만,잠시 그 의지를 흩뜨려 놓 는 것 만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인은 그 짧은 틈을 노려 끌어모았던 오른손의 토네이도를 몬스터에게 내뻗은 것이다. " 천공권--------!!!! " - 투카카카카카카!!! 거대한 오라의 회오리가 신 사이클론 호를 후려쳤다.프레임 부터 휘어져 오 르는 모터 사이클. 가인의 천공권이라면 이런 모터 사이클 하나 쯤이야 한순 간에 고철로 분해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정작 천공권에 걸렸어야 할 히어로 매니아는 신 사이클론 호를 박차며 천공권의 사정 거리를 피해낸지 오래였다.녀석은 붉은 마후라를 휘날리며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지면을 낙 법으로 구른 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 쳇…! 저 미꾸라지 같은 놈이…! " 가인은 탄식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히어로 매니아에 대한 공격은 가인의 천공권이 다가 아니었다. 재규어를 몰고 있던 수정이 그대로 전방에 있던 히어로 매니아를 차 체로 들이 받은 것이다.그녀는 자신의 애마가 부서 진 것에 어지간히 분통이 터졌는듯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 멸살(滅殺)! " - 쾅! 거친 둔탁음과 함께 히어로 매니아는 재규어에 치여 도로 안쪽의 절벽에 부 딪혀 버렸다.그 바람에 절벽이 무너져 내리며 흙먼지가 피어 올라 가인들의 시야를 가렸다. 가인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수정에게 소리쳤다. " 도,도대체 수정 씨…! 이렇게 난폭한 짓을! " " …쿨럭! 애마를 잃은 주인의 분노…라는 거죠…쿨럭! 쿨럭! " 가인들 처럼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기에 수정은 기침을 하며 먼지로 괴로 워 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유리는 그런 수정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전방을 살펴보았다. 재규어와 함께 절벽으로 처박힌 히어로 매니아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차체에 깔려 있었다. 그런 심한 꼴을 당했으니 움직일 수 없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 완전히… 끝장난 걸까? " 유리의 막연한 중얼거림. 하지만 부르스는 그런 유리의 말에 혀를 차며 말 했다. " …아직이다. " - 드드드드드드드…!! 그와 동시에 들썩이는 차체. 가인들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이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다. 뭐,뭐야?! 이번에는?!! -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억!!! 한 괴물의 억압된 포효 소리와 함께 고철덩어리가 된 재규어가 번쩍 들어올 려졌다. 그리고 가인들은 볼 수 있었다. 재규어를 들어올리고 있는 한 녹색 피부의 거인을. 거인은 그야말로 터질듯한 이두박근과 승모근을 가지고 있었 으며 그 얼굴은 야수와 같이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거인은 피스 대원들 의 A.I 슈츠를 웃도는 괴력으로 재규어를 허공에서 흔들다가 곧 싫증을 느꼈 는지 도로를 향해 성의 없게 그것을 내던졌다. " 우왓!! " 가인은 재빨리 유리를 끌어안으며 재규어를 박차 허공을 날랐고, 부르스는 운전석의 수정을 끌어안아 재빨리 도로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지 면에 떨어진 재규어 XJ220은 비명과도 같은 쇳소리를 내며 박살나 버렸다. - 콰지지지직!! " 빨리 뒤로 물러서요, 가인 군! " 부르스에 의해 재규어에게서 멀어지며 가인에게 소리치는 수정.가인은 그런 수정의 말에 의아해 하다가 곧 가스가 연소되는 듯한 소리를 듣고서는 재빨 리 유리와 함께 몸을 피했다. 그리고 폭발! - 콰아아아앙!!! 결국 재규어가 그 수명을 다하고 폭발해버린 것이었다.약 75만 달러(9억4천 만원)의 가격을 자랑하는 차에 걸맞는 화려한 최후라고 할 수 있겠다.그렇게 자신의 애마가 처참히 박살나는 광경을 목격한 수정은 지독한 상실감을 느 꼈는지 얼굴을 푹 숙이며 공허함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로 가인들에게 명령 했다. " 상황 설정은 C-로 지정. 피스 대원들은 신속히 몬스터를 격파하십시오.그 리고… " 수정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가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이 글거리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 저번 처럼 몬스터를 놓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 " .........피,피스. " 가인과 유리는 수정의 눈치를 살피며 겁 먹은 목소리로 답했다. " 오오옷!! 저것은 마블 코믹스의 스탠 리와 잭 커비의 마지막 합작품인 헐 크(Hulk)!! 이성적 사고에 스스로의 삶을 묶어 놓은 인텔리 과학자 '브루 스 배너'를 본능적이고 지극히 육체적이며 분노하는 괴물 '헐크'와 병치 시키는 구조가 매력적이었던 작품이지! " " …상황 설정 C-로 지정. 몬스터와 피스 대원이 조우했습니다. ABF의 전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 스크린에 떠오른 거대한 녹색의 괴물로 변한 히어로 매니아에게 열광 하며 소리치는 시더. 그리고 채영은 그런 그녀에게 이미 적응이 되었는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진 사령관에게 상황을 보고 하고 있었다. 진 사령관은 스크 린에 떠오른 몬스터와 피스 대원의 전투 장면을 잠시 지켜보다가 천천히 말 을 꺼냈다. " …오라 배틀 필드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전투 현장의 반경 10Km 부근 에서 오라 수치의 변동이 있었는지 신속히 체크하라. " " 예? 아, 알겠습니다…. " 채영은 진 사령관이 내린 명령이 뜻밖이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속히 작업에 들어갔다. 진 사령관의 옆에 있던 닥터는 안경을 쓸어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 …팔란티어를 사용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 " 분명히. 그들의 역할은 일단…주시자(注視者)니까. " 진 사령관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무심하게 답했다.하지만 선글래스 안 의 그 눈동자 만큼은 날카롭게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닥터는 진 사령관 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 그리고 팔란티어로 오라의 변동이 있는 곳에 그들이 있겠지요…. " 몬스터들을 지배하는 자. " 5대 간부들이. " 진 사령관은 그런 닥터의 말에 잠시 그를 돌아보다가 곧 윤채영에게 명령을 내렸다. " 피스 그레이의 무전을 연결시켜라. " " …답답하군. " 초류향은 리리스가 들고 있는 수정 구슬에 비춰지고 있는 가인들과 몬스터 의 모습에 투덜거렸다. 팔란티어. 그것은 실마릴의 유산으로 '보는 돌'이었 다.먼 장소에 있는 것이라도 사용자의 의지가 투영되면 구슬에 모든 것을 비 춰주는 돌. 5대 간부들은 그것으로 전황을 지켜보며 몬스터들에게 명령을 내려 왔었다. " 도대체 뭐가 또 그렇게 답답한 거냐, 초류향. " 먼 장소와의 거리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인지 구슬의 내부는 어두워서 마치 검은 구슬인 것 처럼 보이고 있었다.하지만 그 중심은 불에 타는 것 처럼 빛 나며 가인들과 히어로 매니아의 모습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리리스는 그런 수정 구슬에서 초류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자신의 동족은 또 그녀의 방법에 불만 사항이 생긴 모양이었다. " 무엇 때문에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는 거지? 어차피 저 빌어먹을 오라 능력자를 죽여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매번 이 런 식으로 저들을 자극 시키기만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냐! " " 후…. " 리리스는 그런 초류향의 투정에 가벼운 미소로 답했다. 자신의 일에 사사건 건 간섭하는 그의 태도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의 도움이 필요했 다. " 우리의 목적은 오라 능력자가 아니다. 그 안에 있는 옴팔로스(Omphlos)와 의 접촉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지.그러기 위해서는 무작정 오라 능 력을 적대시해서만은 안된다고. " " 하! 이 저주받을 삼차원의 능력에게 고개라도 숙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 겠지! 리리스. 넌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지금까지 그 오라 능력에 목숨을 잃은 우리 동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는 하는 소리냐고! " " 알고 있어. " " .........! " 너무나도 간단히 답하는 리리스의 모습에 초류향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는 이 눈 앞에 서있는 자신의 동족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냐, 리리스? 네 녀석은…. 리리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말을 이었다. "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택한 거다. 이대로 삼차원 유 클리드 공간의 가이아와 전면전을 벌였다가는 우리의 피해는 더더욱 커져 버릴거야. 여러모로 심신의 낭비일 뿐이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녀석들이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그 가이아의 힘을 이용한다. 그게 내가 생각해낸 방 법이야. " " 너는 그래서 녀석들과 손을 잡겠다는 거냐…. " 초류향은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에서 붉은 빛의 잔향을 흘리기 시 작했다.그는 리리스의 말이 자신들을 배신하겠다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를 않 았다. 배신자는 죽여버린다. 그것이 초류향의 방침이었다. 그렇게 분노하는 초류향의 모습에 리리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 그렇게 이분법적인 사고 밖에 할 수는 없는 거야?! 나는 이용이라고 말했 다. 우리 동족을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라도 이용할 거야! 넌 그 잘난 자 존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테지만 나는 아니야!난 너와 다르다!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삼차원의 힘이라도 난 이용해낼 거 라고! 그게 바로 나의 방식이야! " " ......... " 초류향은 그런 리리스의 말에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천천히 분노하는 기색을 풀어냈다. 하지만 그 눈에서는 아직도 의심의 빛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초류향은 낮게 으름짱을 놓듯 말했다. " 그 생각… 앞으로도 잊지 말아라. 네가 다른 생각이라도 품는 날에는 내 가 반드시 용서치 않겠다. " " 부디 그러기를 바라지. " 리리스는 앞뒤 막힌 그의 행동을 비아냥 거리며 건성으로 답했다.그녀는 자 신의 손에 들린 팔란티어를 다시 내려다 보았다. 삼차원의 인간에게 심어놓 은 기생수의 숙주는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 그래…. 그렇게 천천히 끌어 모으는 거야. 그럴 수록 옴팔로스로 향하는 길은 더더욱 넓어진다. ' 리리스는 다음으로 몬스터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피스 대원, 유가인을 바라 보았다. 그는 헐크로 변한 히어로 매니아를 상대로 오라 소드를 뽑아든채 상 대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리리스의 눈빛은 충실히 자신의 지시를 따르는 장기 말을 바라보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 좀 더 분발하도록 해,오라의 주인.네가 없으면 내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 아가 버릴테니…. ' 그래. 넌 옴팔로스의 열쇠이기도 하니까. 리리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팔란티어를 쓰다듬었다. 마치 수정 안의 가인을 쓰다듬기라도 하려는듯이.그 런 그녀를 바라보는 초류향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 …위험해. 리리스. 넌 너무나도 위험하다…. ' 정녕 네가 우리와 같은 존재란 말인가…. 초류향은 알 수 없는 일말의 공포 를 그녀에게서 느껴야만 했다. 오라의 힘을 이용하겠다니….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을 생각해낸 리 리스란 존재는 이미 자신들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위험하다. 그녀에게 서는 왠지 모를 위험한 냄새가 나고 있어…. " 응…? " 그렇게 초류향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팔란티어 안 을 들여다 보던 리리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수정의 안에서는 한 사람이 보이지를 않고 있었던 것이다. ' 어디로 간 거지? ' 검은색의 권복을 입은 중국의 오라 능력자. 그가 팔란티어의 시야에서 사라 져 있었다.리리스는 자신이 그를 보지 못하고 지나간 것은 아닐까 하여 다시 한번 팔란티어의 사고를 넓혀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가인과 유리, 그리고 수 정과 히어로 매니아 뿐이었다. 없다.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고 있 었다. 어떻게 팔란티어의 시야 속에서 사라질 수가 있는 거지?! " 날 찾고 있었나…. " 그리고 낮지만 너무도 뚜렷히 리리스의 귓가를 파고드는 한 음성. 리리스는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였다. 피스 그레이, 부 르스. 그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리리스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 순간 볼 것 없이 뒤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기다렸다는듯이 그녀가 서있던 고속 도 로의 아스팔트가 터져올랐다. - 투아앙!!! " .........?!! " 리리스는 등 뒤의 피막의 날개로 터져나오는 아스팔트의 조각들로 부터 몸 을 보호해 내었다. 하지만 그런 검은 날개 속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짙은 의혹에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발 견해낸 거지? 어떻게?! " 이 놈!! " 리리스와 함께 몸을 피했던 초류향은 자신들을 공격했던 것이 피스 그레이 부르스였다는 것을 깨닫자 노호성을 내지르며 수중의 섭철선을 그에게로 휘 둘렀다.그러자 아스팔트의 폭파로 도로를 뒤덮던 흙먼지가 가로로 촤악 갈라 지며 그 안의 부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스는 흩어지는 흙 먼지 사이로 유유자적하게 초류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리스는 재빨리 초류향의 뒤로 몸 을 숨기며 그에게 속삭였다. " 초류향. 분진폭발(粉塵爆發)을 일으켜! 지금 저 자에게 내 모습을 보이게 해서는 안 돼! " " .........? " 초류향은 그런 리리스의 주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재빨리 섭철선을 아스팔트 먼지로 휩싸인 도로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공기를 가르는 마찰 열로 불꽃이 일어나며 공기 중에 떠도는 농도 짙은 분진이 에너지를 받아 열 과 압력을 발생시켜 연소, 폭발을 일으켰다. 더스트 익스플로젼(Dust Explos ion)! - 콰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불꽃으로 휩싸이는 고속 도로. 그 불빛들을 내려다 보며 리리스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었다. 내 모습을 그 에게 들키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 쉭! 하지만 그 때,분진 폭발 사이로 한 검은 인영이 불꽃으로 몸이 휩싸인채 리 리스들이 있는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마치 불꽃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 만 같은 모습. 그리고 붉은 잔향을 남기며 불꽃이 꺼져나가자 그곳에는 부르 스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그는 온 몸을 회전시키며 하나의 폭풍 처럼 전신 으로 전사경을 끌어 모았다. " .........!!! " - 투아아아앙!!! 작열.리리스는 한 순간 눈 앞이 백색의 세상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 었다. 전신을 거대한 피막의 날개로 감싸고 있었는데도,등 쪽에 가격당한 부 르스의 발경이 전신의 신경을 끊어버리는 것만 같았다.리리스는 이를 악물며 발경의 충격 속에서 도로 옆의 절벽 밑으로 추락했다. " 리리스…! " 그런 리리스의 모습에 초류향은 이를 갈며 전신을 불꽃으로 휘감았다. 그리 고 불꽃이 걷혀나가자 다음 순간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부르스와 정면 충돌 을 해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잽싸게 몸을 피해버린 것이었다.부 르스는 도로에 내려서서 그렇게 사라져버린 초류향을 향해 혀를 차다가,천천 히 도로 외곽의 절벽을 내려다 보았다. 붉게 깔린 저녁 노을이 47번 국도의 협곡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흐…. 도망친 건가. " 부르스는 가늘게 미소지으며 리리스에게 발경을 날렸던 오른쪽 주먹을 쥐어 보였다. 경의 충격이 희미하지만 느껴지고 있었다. 적은 분명 피해를 입었다. 일단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하지…. 부르스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곰방대를 피워물며 중얼거렸다. " 아쉽군. " " 어라? " 가인은 헐크로 변한 히어로 매니아의 공격을 피해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만 해도 흉폭한 기세로 공격을 해오던 이 녹색 피부의 거인이 한 순 간 모든 공격을 멈추고 멍청하게 허공을 주시하고만 있었던 것이다.뭐야, 이 녀석? 또 왜 이러는 거지? " 가인 군! 뭐해요! 공격하세요! " " 아,예! " 수정의 질타에 가인은 정신을 차리며 양 손의 오라 소드를 엇갈려 잡았다. 오라 베기의 자세였다. 그래. 이 한 방으로 모든 걸 끝내주마! 가인은 오라 를 끌어모으며 땅을 박찰 준비를 했다. - 우워어어어어억…!!! 그때 갑자기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몬스터. 그리고 녀석은 거칠게 몸을 돌려 도로 옆의 협곡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어라? 도망 가 는 거야?! " 하지만 그쪽은 절벽이라고! " 가인은 그렇게 외치며 히어로 매니아를 제지할려고 했지만, 녀석은 이미 허 공을 가르며 밑으로 뛰어내린 뒤였다. 저 자식…! 진짜로 뛰어내렸다?! 가인 은 멍청히 가드레일을 붙잡은채 몬스터가 절벽 밑의 호수 쪽으로 사라져 가 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유리도 가인의 옆에서 그런 몬스터의 모습을 지 켜보며 그에게 물었다. " 어,어떻게 하지… 오빠? " " 글쎄…. " 그런 그들의 의문을 해소시켜준 이는 그들의 뒤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을 번 뜩이는 수정이었다. " …어떻게 하기는…. 멋지게 놓쳐버렸지 않아요? " " ......아. " 가인과 유리는 그런 그녀의 기세에 몸을 흠칫 떨며 불안한 눈으로 수정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75만 달러의 댓가는 자신들이 치뤄야만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 - 덜컹…. 29구역에 위치한 한 맨션의 룸.룸의 문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천 천히 그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룸 안으로 지친 발걸음의 한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테레이아 민체스터. 현재 한성 고등학교 1학년 3반에 외국인 유학생의 신분으로 재학 중이며 이 룸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학교에서의 그 밝은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피폐해지고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힘 없는 걸음 걸이로 천천히 방 안의 침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탁…. 탁…. 비틀거리며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흘리는 테레이아. 그녀는 창백해진 안 색으로 간신히 방 문을 열어 젖혔다. 한시라도 빨리 침대에서 쓰러져 자고 싶 은 것 같았다. 그 만큼 그녀는 피곤해 보였다. 그렇게 힘겨운 걸음으로 침대 를 향하던 테레이아는 곧 휘청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리고… " 커억…! " 순간, 몸을 꺽은 테레이아의 입으로 짙은 검붉은색의 각혈이 터져나왔다. 그 녀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기침을 하려 했지만 이미 교복과 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어 엉망이 된지 오래였다. 테레이아는 천천히 벽에 기대어 바닥으로 미끄러 져 내렸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고통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아, 아아… " 테레이아는 몸을 두 손으로 감싸며 낮게 웅크렸다. 각혈을 해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더 없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몸을 떨며 바닥에 업드린 그녀의 입 가로 는 짙은 선혈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 아아아아…. " 테레이아는 마치 흐느끼는 것 처럼 신음을 흘리며 웅크린 몸을 펼 줄 몰랐다. " 자자,다음 주에 있을 모의 고사 준비는 다들 잘 하고 있으시겠지? 어차피 그 뒤를 이어 중간 고사가 너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냥 이번 주는 죽 었구나∼ 생각하고 공부만 파거라, 제발. 알겠지? " " …예에- " 하지연의 완곡한(?) 부탁에 1학년 3반의 학생들은 맥 빠지는 목소리로 답했 다. 정말이지 이 놈의 통일한국 교육청은 어떻게 이리도 자국의 고등학생들 을 괴롭힐 생각 밖에 하지 않는단 말인가? 한창 피어날 파릇파릇한 고교생들 에게 보장해준다는 것이 기껏 3년의 시간 동안 오로지 수능 준비를 위한 모 의고사와 중간고사, 기말고사로 점철된 학창 생활이라니….왜 외국인들이 통 일 한국의 고등학생들을 보고 시간에 쫓기는 마리오네트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쨌든,지연은 그런 교육청의 지시를 따라야만 하는 통 일 한국의 한 교육자로서 충실히 자신의 직무를 다하고 있었다. " 그리고 혹시나 해서 얘기해 두겠는데…만약 이번 2학기 중간 고사 점수가 1학기 기말 고사 때보다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한동안 내 체육 시간 동안 무산소로 육체 기능의 30%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 .......... " 그 말에 안색이 창백해지는 학생들. 지연의 그 말은 한 마디로 '점수 잘 받 기 싫으면 살지 마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분명 저번 1학기 기말 고사 때의 벌칙은 토끼 뜀으로 운동장 스무 바퀴였었지….중요한 것은 저 악 마 같은 자신들의 담임은 한달 동안 체육 시간 내내 그 토끼뜀을 자신들에게 시켰다는 것이다.그리고 더더욱 무서운 점은 그 스무 바퀴를 한 사람의 탈락 자도 없이 돌렸다는 점…. 이번 벌칙은 과연 무엇일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 자신의 공부는 자신이 알아서 하는 거다. 다른 이의 강요로 하는 공부는 오래가지 못하는 법. 그러니까 여러분은 자발적으로 공부하기를 바란다. 이상! " ' …앞 뒤가 안 맞잖아.그건! ' 학생들의 마음 속 절규. 그러나 지연은 언제나 처럼 태연하게 담배를 꼬나 물며 종례를 마쳤다.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담 임 선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아,그리고… " 그렇게 막 교실을 나서려던 지연은 뭔가가 생각났는지 잠시 그 발걸음을 멈 추고 학생들 쪽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출석부에 끼어있던 DVD를 꺼내 들며 창 가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을 불렀다. " 유가인! " " …예? "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가인은 자신을 부르는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에 그 녀를 돌아보았다. 지연은 그에게 다가가 DVD를 건내주며 말했다. " 이거…. 병문안 가면서 넘겨주도록. 요 3일 동안의 수업 내용에다가 공지 사항도 포함된 거니까. 원래대로라면 내가 가야겠지만… 좀 부탁하마. " " 예. " 가인은 DVD를 품에 넣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테레이아가 결석한지… 벌써 삼일 째인가…. ' 가인은 집에 갈 채비를 하며 자신의 옆에 비어있는 한 자리를 바라보았다. 테레이아 민체스터의 자리. 언제나 그 옆에 앉아서 자신에게 얘기를 걸던 그 녀의 모습은 삼일 째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지연의 얘기로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며칠간 결석하겠다는 전화가 왔었다고 하는데…. ' 많이 아픈 걸까? ' 가인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테레이아의 빈 자리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 리 감기라고 해도 내리 삼일 동안 결석이라니…. 꽤 심한 독감에 걸린 것 같 았다. 아, 그러고 보니 TV 뉴스에서 요즘 독감이 유행한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처음 이틀 동안은 아픈 사람 찾아가서 귀찮게 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병문안을 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오늘 쯤은 찾아가 봐야할 것 같았다.더구 나 하지연 선생의 부탁도 있고 하니까….원래는 지연이 테레이아의 병문안을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마침 빠지기 힘든 교사 회식이 생기는 바람에 그녀는 갈 수가 없었다. " 좋아! 그럼 병문안이다! " 가인은 힘차게 가방을 둘러매고 교실 문을 나섰다. - 탁.탁.탁.탁. 교실 복도를 거니는 가인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 그리고… - 척.척.척.척. 그 뒤를 잇는 일련의 무리들의 발걸음 소리가 그 화음을 이뤘다. 가인은 자 신의 뒤를 따라 붙는 한 무리의 그림자 떼에 식은 땀을 흘리며 천천히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그 뒤돌아본 곳에는 어느새 모여든 건지 수십 명의 인 파들이 가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한성 고등학교의 꽃 중 하나인 이유리 를 선두로 반 가인회라 일컬어지는 테레이아의 추종회 학생들이 그들이었다. " 저기 말이야… " " 응? " 가인의 조심스러운 말에 그야말로 활짝 웃으며 동시에 답하는 모두. 가인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상당한 위화감을 느끼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 테레이아의 병 문안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은 필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 하는데…? " " 하지만 그렇다고 오빠 혼자만 테레이아의 집에 보낼 수는 없어. " " 옳은 말씀! " 단호한 유리의 답변과 그 뒤를 잇는 반 가인회의 격렬한 반응. 반 가인회의 회장 엔비Q는 모두의 앞으로 나와 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 1학년 3반에 대파란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유가인. 당신은 이미 저희 회 의 요 체크망 1순위에 오른 남자입니다. 그런 당신을 테레이아 양의 집에 홀로 들여보낸다는 것은 당신의 손으로부터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을 지켜 내겠다는 저희의 신념에 비추어 볼 때 그야말로 어불성설! 절대로 있어서 는 안되는 일! 당신이 순순히 테레이아 양과 단 둘이 있게끔 저희가 두고 보기만 할 것 같습니까?! " " 그렇다! 가증스러운 양의 탈을 쓴 늑대,유가인! 너에게 우리는 테레이아 양의 신변을 양도할 생각이 한사코 없다! " " 물러가라! 너의 그 사악한 손길을 그녀에게서 거두란 말이다! " …내가 무슨 12세 소녀 리건에게 씌인 악령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가 인은 신부들에게 엑소시즘을 당하는 빙의령의 기분을 느끼며 고소를 금치 못 했다.이 정도가 되면은 미움을 넘어서서 거의 박해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그런 그들에게 물었다. "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데? " " 우리도 따라가겠어! " " ......... " 유리와 반 가인회의 하나된 목소리.그런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가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그래…. 뭐, 병 문안은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래도 이 인원은 너무 많아. 쓸데 없이 많다고….이런 대인 원이 병문안을 갔다간 오히려 민폐만 끼치고 올 게 분명했다.그렇다고 이 녀 석들의 요구를 거절하자니 잘못했다간 그 재난이 전부 자신에게로 쏟아질 것 만 같았고… ' 에휴…. 이 일을 어쩐다냐…. ' 대책없이 근심만 쌓여가는 가인. 이것이 다 네 녀석의 업보라고 얘기한다면 17세 소년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얘기가 될려나.하지만 그 때 뜻 밖 의 구원군이 등장했다. " 잠깐. " " .........? "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에는 두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한쪽은 검은 권복을 입은 회색 머리의 소년 부르스. 나머지 한 쪽은 반 가인회의 전 회장이자 자 칭 가인의 베스트 프렌드라는 박재영. 그 둘이 가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 어째서 너희들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가인에게 부르스와 재영은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 가라. 여기는 우리가 맡겠다. " " .........에? " 그,그게 무슨? 하지만 그런 가인의 의문을 뒤로 하며 부르스와 재영은 가인 과 반 가인회의 사이를 가로 막았다. 유리와 반 가인회는 긴장한 눈으로 자 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그들을 노려보았다. 유리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앙칼진 목소리로 부르스에게 말했다. " 무,무슨 속셈이지? 이건? 우리는 단지 병 문안을 가겠다는 것 뿐이야. 우 리를 제지할 권리는 너희들에게 없다고 보는데…. " " 후…. "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부르스.그런 그의 태도에 유리는 더더욱 긴장의 끈을 조여야만 했다. 뭐냐! 도대체 그 여유는 무엇이냐고! 그리고 부르스는 다음 과 같이 유리에게 물었다. " 오늘이 몇 일이냐? " " ......몇 일이냐니…. " 부르스가 질문을 하는 그 진의를 알아차리기 위해 유리는 고민을 해야만 했 다. 몇 일이냐고 해도… 오늘은 10월 26일…. 그게 뭘 어쨌기에…? ' ......26일?! ' 순간, 유리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 하나. 그렇다. 26일. 오늘은 바로… ' 한달에 한 번 있는 피스 핑크의 신체 검사날! ' - 쿠쿵! 유리는 무릎을 꿇으며 두눈을 부릅 뜬채 바닥을 내려봐야만 했다.피스 대원 의 신체 검사는, 수시로 바뀌는 체내 오라의 변동을 측정하여 유지시키는 중 요한 작업이었기에 절대로 빠져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 검사에 걸리는 시간 은 대략 반나절. 내일 아침까지는 꼼짝 없이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유리의 모습에 반 가인회는 영문을 몰라 당황하 고 있었다. ' 뭐,뭐지? ' 갑자기 왜 유리 양이…? 알 수 없는 말 한 마디에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유리를 무릎 꿇리는 부르스를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들. 단지 전후 사 정을 알고 있는 가인 만이 쓴 웃음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부르스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유리를 내려다보다가 당황하는 반 가인회의 학생들에 게 가는 미소를 날렸다. " 뭐, 이런 거다.정신적 지주가 빠지게 되었으니 나머지는 오합지졸일 뿐이 겠지…. 뒤는 너한테 맡기겠다. " " 맡겨만 두란 말씀! " 그리고 기세 좋게 부르스와 터치하며 재영은 반 가인회의 앞으로 나섰다.그 런 그의 등장에 반 가인회의 현 회장 엔비Q는 초조한 낯빛으로 숨을 죽였다. 아무리 현재 회에서 탈퇴 당한 몸이라고 해도 한때는 회장이었던 남자…. 그 기도가 자신들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엔비Q는 더 이상 그런 그의 기세에 압도당하기 전에 소리쳤다. " 배신자께서 여기에는 왠 일이십니까? 전에 더 이상 저희들의 눈 앞에 나 타나지는 말아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던 가요?! " " …그래. 그랬었지…. 한때는 그런 소리를 듣기도 했다. " 순순히 엔비Q의 말을 인정하는 재영. 그런 그의 모습에 엔비Q는 더더욱 긴 장의 빛을 늦출 수 없었다.재영에게서는 예의 조급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회장으로서의 관용(寬容),그 자체! 엔비Q는 마음 이 뛰는 것을 느끼며 재차 소리쳤다. " 그렇다면 지금 본 회의 앞 길을 막는 당신의 행동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혹 아직도 본 회에 미련이 남은 것입니까?! 추하군요! 너무나도 추합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을 당신 스스로가 살펴보십시오! 자신의 발로 떠났던 본 회였잖습니까?! 이제 와서 당신이 본 회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니! 하나가 아직 남아있군요! 깨끗하게 저희들의 앞에 서 사라져 주는 것! 바로 그것만이 당신이 저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 일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라져 주십시오! 반 가인회의 명예를 더럽 힌 반 가인회의 수치! " " .......... " 그것은 그야말로 언어의 탈을 쓴 흉기였다. 아마 재영은 전신이 엔비Q의 말 에 난도질 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수그린 채 엔비Q의 말 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엔비Q는 씁 쓸한 표정으로 그런 재영을 바라보았다. ' …당신이 이렇게 나오지만 않았어도 저도 이렇게 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 니다. ' 모든 것은 당신의 원죄. 그러니 지금의 이런 상황도 다 당신이 자초한 것입 니다. 엔비Q와 반 가인회의 모두는 숙연해졌다. 그때 그런 그들을 향해 고개 를 숙이고 있던 재영이 얼굴을 들었다.그런 그의 얼굴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 그렇다. 나는 너희들의 명예를 더럽힌 비겁한 배신자다. " " .........!!! " "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변하지 않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테레이아 양을 위하는 이 마음일 것이다! " 그 순간 반 가인회의 모두에게 재영은 빛나고 있었다. 어,어째서…?! 분명 배신자인 그에게서 어째서 이런 빛이…? 엔비Q는 애써 재영의 그런 모습을 부인하며 외쳤다. " 뻐,뻔뻔스럽군요! 우리의 테레이아 양이라니! 분명 당신은 그 이름을 입 에 다물수 없는 몸이지 않습니까?! " " 엔비Q! 넌 대체 뭘 보고 있는 거냐!! " 그런 엔비Q를 통렬히 흔드는 재영의 외침. 재영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그 노여움이 느껴지는 눈초리에 엔비Q는 압도되었다. "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오직 테레이아 양과 유리 양 만을 생각 하며 그녀들을 위해 움직이는 것! 그녀들을 위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회의 본래 취지였지 않은가?!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듯 자격 운 운하며 그녀들을 위한 우리의 마음을 제한해 왔단 말인가?! 우리에게 그 럴 자격이 있었단 말인가?! 테레이아 양과 유리 양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 누구의 것이라도 소중히 해야 한단 말이다!! " - 쿵!!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반 가인회의 마음을 뒤흔드는 영혼의 외침.재영 의 말에는 그들이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통렬함이 있었다! 엔비Q 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치 발악이라도 하는 것 처럼 악을 썼다. " 그건 궤변이야! 솔로만이 그녀들을 사랑할 자격이 있다! 이것은 당신이 만들어낸 본 회의 회칙이었지 않은가?! 당신은 지금 본 회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겠다는 건가?!! " " 바보같으니!! 너는 본 회의 규칙과 테레이아 양과 유리 양을 위한 마음! 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건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 까지 그 옛 악습을 고수할 생각이란 말이냐! 본래의 의의까지 변색시키는 회칙이라면 당연히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 " 오오…. " 반 가인회의 일원들은 서서히 재영의 말에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재영이 말하는 그것은 자신들도 이미 무의식 중에 느껴오고 있던 바였다. 그것을 그 는 날카롭게 꼬집으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엔비Q는 주위 의 모두가 재영의 말에 동조하는 기색을 보이자 다급히 머리를 굴렸다. 안돼! 이대로는 다시 옛 악몽이 부활할지도 모른다! 간신히 움켜진 이 권력의 굴레 를 벗어던질 수는 없어! 지금의 반 가인회는 내 것이란 말이다!! ' 하지만… 하지만 박재영… 그의 말은 분명… 진솔하다! ' 재영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엔비Q는 예전 자신이 존경하며 따르던 그의 옛모 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재영….그는 솔로에서 벗어난 몸이건만 여지껏 과 거의 순수를 지켜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 지만…) 아아,박재영 회장….당신은 어쩌면 이렇게도 매력적인 남자란 말인 가…! 엔비Q는 순수하게 재영에게 감탄했다.하지만 지금 그와 자신은 적이자 공존할 수 없는 신념의 대립자이기도 했다. 엔비Q는 이런 상황 속에 빠진 자 신에게 서글픔을 느끼며 고집스럽게 재영에게 소리쳤다. " 그렇다면… 만약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째서 우리의 앞 길을 막는 것이란 말입니까?! 테레이아 양을 위한다는 당신이?! 이것이야말로 당신 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가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 아닙니까?! " " 그것은… 내가 진정 테레이아 양을 위하고 있기 때문이지…! " 자조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재영.그런 그의 말에 모두는 의아함을 금 치 못했다. 진정 테레이아 양을 위해서라니? 도대체 뭐지 그것은?! 무슨 말 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그들을 천천히 돌아 보던 재영은 입을 열었다. " 너희들은 테레이아 양이 진정 기뻐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 그건… " " 인정하기는 싫지만… 너무나도 싫지만…. " 재영은 주먹을 움켜쥐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 테레이아 양이 기뻐할 때는 바로 지옥 대원수 유가인! 그와 함께 있을 때 뿐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테레이아 양을 위해 발벗고 나선다고 해도 우 리가 못하는 일을 유가인! 그는 테레이아 양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 " .........!! " " 그런 그녀가 과연 우리와 유가인. 둘 중 어느 쪽이 자신을 병문안 와주기 를 바랄 것 같은가?!!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유가인! 그가 와주기를 그녀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 아,아아…! " " 난… 그저… 테레이아 양의 미소 만 볼 수 있다면… " 재영은 서글픈 표정으로 힘없이 말을 이었다. " 그걸로 만족한다. " 반 가인회의 모두는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자신들의 눈 앞 에 서있는 이 남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사랑까지 희생하 면서도 진정으로 테레이아 양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자신이 사랑하는 여 인에게 자신이 해줄 수 없는 일을 다른 남자가 해줄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만 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니…! 이 얼마나 희생적인 사랑이란 말인 가?! 자신들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헌신이었다! 아름다운 남자다…. 박재영.그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었어…!! " 회장!! " 엔비Q와 반 가인회의 모두는 무릎을 꿇으며 재영의 앞에 부복했다. 그들은 연신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재영이 보여준 그 희생적인 정신에 감복 했고, 그것에서 반 가인회의 회장이 갖춰야할 자질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박재영. 그 만이 자신들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 그 동안 저희들이 우둔한 나머지 당신의 깊은 사랑을 외면하고 있었습니 다! " " 모든 것은 저희의 죄! 부디 문초해 주십시오! " 녀석들…. 드디어 알아준 거냐…. 드디어…. 재영은 뜨거운 감동에 벅차 올 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런 그들을 부둥켜 안았다. " 아니다…. 너희들은 잘못한게 없어…. 모든 건 다 내가 부덕한 탓일 뿐이 었지…. 지금이라도 다시 나를 믿어줘서 정말이지… 고맙다,모두…. 정말 고마워…. " " 회장!! " 교내의 복도를 뜨겁게 달궈주는 감동의 도가니. 수십명의 남자들이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분명 미관 상으로 보기에도 괴로운 것 이었지만 그 동기 또한 만만찮게 괴로운 것이었다. 어떻게 저런 일에도 쉽게 쉽게 감동을 할 수가 있는 건지…. 그 단순함에 감탄이라도 해주자. 어쨌든, 그런 부르스와 재영의 활약 아닌 활약에 무사히 테레이아의 집으로 향할 수 있었던 가인. 부르스는 창가에서 교문을 빠져나가는 가인을 내려다보다가 침 울한 표정으로 옆에 서있는 유리에게 말했다. " …오늘부터 중국 지부 피스 대원의 신체 검사 고문으로서 나도 검사에 참 여하게 될 거다. 어때? 기쁘지? " " .......... " 유리는 울고 싶어졌다. - 툭… 침대에서 베개 하나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그러나 침대 위의 주인은 그것 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쓴채 웅크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단지 그 이불 사이로 삐져나온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 만이 그녀가 테레이아 민체스터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펄럭… 펄럭… 활짝 열려진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주위의 커튼을 휘날려 주고 있었다.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만이 이 어두운 방 안을 밝혀주고 있었다.테레이아 는 그런 어둠 속에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마치 숨이 끊 어진 것만 같은 모습.간간히 이불 밑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만이 그녀가 살 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 아아…. " 잠에 취한듯하면서도 고통이 섞인 신음 소리. 테레이아는 이불 안에 자신의 몸을 꼭꼭 숨기며 침대 시트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녀는 이를 갈며 어둠속 에서 중얼거렸다. " 바보 같으니라고…. " 기껏 모아놓은 정(情)이 그 피스 그레이 라는 인간의 일격에 당한 부위를 치유하는데 쓰여지고 있었다. 마치 전신의 마디 마디에 전기가 관통하는듯한 그 느낌. 그 충격.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리리스는 그때의 그 아픔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 으으윽…. " 전신이 식은 땀으로 물들며 열이 피어올랐다. 머리 속이 새하얗게 타버리는 느낌이었다. 리리스는 이를 악물고 그 열증을 견뎌내었다. 벌써 삼일 째였다. 이런 전신을 태우는 고통 때문에 수면을 취하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던 것이 ….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지 이빨이 다 너덜너덜할 지경이었다. 이제는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차라리 이 열에 온 몸이 다 타버렸으면 하는 마음까 지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한 보람은 있었는지,그녀의 외상은 거의 아물어 가고 있었다.솔직히 피스 그레이의 공격은 육체 보다는 그 정신 에 더더욱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정신체라는 것을 알고 서 행한 것이었을까? ' 무슨 속셈이지… 그 인간은…. ' 리리스는 풀린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학교에서 자신과 마주친 그 부르스라는 인간은 한 눈에 그녀의 정체를 간파해낸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을 방치해두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지금이라면 날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텐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었 다. 무엇 때문에? ' 내가 옴파로스에 접촉하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을텐데…. ' 어째서 날 오라의 주인 곁에 멤돌도록 내버려 두는 거지? 도대체 왜? - 파칭! " 아아…! " 등쪽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고통.그녀의 등에 낙인 처럼 찍힌 부르스의 발경 자국에서 다시 한번 고통이 밀려들고 있었다. 리리스는 그 지독한 고통 에 눈가에서 눈물이 맺혀 올랐다.눈가에도 열이 올라 그 눈물 까지 뜨거웠다. 제길! 제길! 역시 인간의 육체는 너무나도 나약하다.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 도 힘을 풀어버렸다가는 이 인간 여자는 금새 죽어버릴게 분명했다. " 으윽…. " - 쿵! 몸부림이 너무 심하다 보니 그만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리리스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이 그녀에게서 풀려나갔다.그리고 들어난 것 은 하얀 와이셔츠 만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테레이아 민체스터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열에 들뜬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가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 다. 헝클어진 에메랄드 머리카락이 그녀를 안스럽게 보이게 했다. 그녀는 멍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아파…. " 마음이…. " 아파…. " 내가 혼자라는 사실이… " 아…파…. "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 유메. 난 정말 혼자인 걸까….그렇다면 난 무엇 때문에 여기 와있는 거지? 난 무엇 때문에… '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지? ' 제발 날… ' 혼자 두지마…. -딩동…. 그때 리리스의 귓가를 파고드는 초인종의 소리. 옅은 녹색빛이었던 그녀의 눈동자 색이 진하게 타오르며 리리스는 경계의 기색을 얼굴에 띄웠다.누군가 가… 왔다? ' 설마 그 인간이…?! ' 리리스는 머리속을 태우는 두통 속에서도 간신히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피스 그레이, 부르스! 그 자인가?! 제길! 너무 안일했어! 지금이 날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텐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 었다니…. 열로 정신이 나가버린 것은 아니냐, 리리스!! - 딩동…. 다시 한번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리리스는 조심스럽게 벽에 붙어 문 밖에 있을 인간을 노려보았다.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저런 문 쯤 투시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겠지만,지금 그녀는 당장에 기절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 태였었다. 투시는 물론 염력을 쓰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초 인종과 연결된 폰을 들어 힘겹게 말했다. " 누구…세요? " << 어? 테레이아?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 이 목소리는…?! 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 유…가인? " 어째서 너가 여기에?!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3 話 흔들리는 마음 (下) =-=-=-=-=-=-=-=-=-=-=-=-=-=-=-=-=-=-=-=-=-=-=-=-=-=-=-=-=-=-=-=-=-=-=-= 테레이아가 살고 있는 맨션은 29구역의 지하철 역에서 한참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한적한 공터에 자리 잡은 이 맨션은 근처에 도로 하 나 없는 외딴 곳이어서 꽤나 고요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가인은 하지 연이 가르쳐 준 약도가 맞는 지를 재차 확인하며 맨션 안으로 들어섰다.관리 인이 몇 번인가 제지를 했지만 사정을 설명하자 무리 없이 그를 들여 보내주 었다. " 에, 또…506호라면…. " 맨션의 각 동마다 위치한 우편함을 들여다보며 506호를 찾아낸 가인.아마도 앞의 숫자가 층을 가리키는 거였었지? 그럼 5층일려나? 가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5층으로 향했다. -띵. 5층에 도착하자 벨소리를 내며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문을 나오자 여전히 고요한 적막이 가인을 반겨 주었다. 정말 지독하게도 조용한 곳이로군, 여기 는…. ' 사람이 살기는 사는 건가? ' 뭐, 방음 시설이 좋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 가인은 대충 납득하며 발 걸음을 놀렸다. 유난히도 그의 발소리가 크게 복도에 울려퍼진다. 그는 그렇 게 506호의 대문 앞에 도달했다. " 여기겠지…? " 맞다. 506호. 가인은 몇 번 심 호흡을 한 후, 벨을 눌렀다. '딩동'. 청명한 울림을 내는 벨소리. 가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렇듯 남의 집에 처음 방문하는 것은 긴장된 일이었다. 더구나 테레이아의 부모님 도 계실텐데…. 아마 테레이아는 아파서 누워있을 테니까 그 부모님이 나오 실려나. -딩동…. 다시 한번 벨을 눌렀다.그러자 이윽고 초인종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 러나왔다. << 누구…세요? >> 그러나 벨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테레이아 본인의 목소리였다.어라? 많이 아 픈 거 아니었나? 안 자고 있었네? " 어? 테레이아?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 부모님 대하는 것은 영 껄끄러웠는데 잘 됐다. 가인은 테레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도 겸 반가움도 들어 밝게 답했다.그러나 문 안의 테레이아는 잠 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매우 의외라는듯 천천히 중얼거렸다. << 유…가인? >> " 응. 그래. 나야∼ " << .........무슨 일로…? >> 어라? 별로 안 반가운가 보네….가인은 어딘가 차갑게 반응하는 테레이아의 목소리에 머리를 긁적였다.항상 미소만 지으며 자신을 대하던 테레이아가 이 런 반응을 보이자 갑자기 그녀가 낯선 사람 처럼 느껴졌다. 가인은 조심스럽 게 답했다. " 으응…. 테레이아 독감에 걸렸다면서? 그래서 걱정되길래 병문안 온 거지 …. 하지만 역시 쉬는데 방해됐나 보다. 미안….많이 아플텐데 이렇게 찾 아와서…. " << .........아니. 그렇지는 않아…. >> 한결 부드러워진 테레이아의 음성.하지만 아직도 어딘가 차가움이 느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불안해 하는 것 같으면서도 경계를 하는 목소리. 역시 많이 아픈게 분명해…. 원래 아픈 사람들은 평상시와 달리 초조해 하고 안절부절 못하지 않는가. 가인은 더 이상 쉬고 있는 그녀를 방해하면 안되겠 다 싶어서 테레이아에게 건내줄 DVD를 가방에서 꺼내들었다. " 아, 그리고 이거… 담임 선생님이 너 가져다 주라고 한 건데…. 3일 동안 결석한 분량의 수업 내용과 공지 사항이야. " << ......... >> - 끼익….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대문. 가인은 테레이아에게 DVD를 주기 위해 문을 열 고 나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던 가인은 순간 숨을 짧 게 들이키며 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 테,테레이아…?! ' 가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테레이아.그녀는 얇은 와이셔츠 하나 만을 몸에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래로 드러난 쭉 뻗은 하얀 다리 한 쌍. 하얀 와 이셔츠 사이로 옅은 살색이 비치는 것을 보아,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몸에 걸치지를 않은 것 같았다. 가인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테,테레이아…. 집에서는 저런 차림으로 생활하고 있었 던 건가…! " 여,여기! 이거 받아…! " 가인은 떨리는 손으로 테레이아에게 DVD를 건냈다.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고 서 멍한 눈초리로 가인을 바라보는 그녀. 가인은 차마 그런 테레이아의 시선 을 마주하지 못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 하,하하…. 생각보다 많이 아픈 거 같지 않아 다행이다…. 저,저기 아무 래도 역시 쉬고 있는데 방해가 된 거 겠지? 그… 난 이제 돌아갈테니까 넌 다시 들어가 누워 있어. 감기에는 잠이 최고라더라.약도 잘 챙겨 먹고 …. " " .........응. " 그런 가인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테레이아. 가인은 그녀의 미소에 가슴이 두근 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테레이아가… 미인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예뻐 보인 적이 있었던가?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은 아름답다 라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 그럼 몸조리 잘해. " 가인은 괜히 더 얼굴이 붉어지기 전에 서둘러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을 걸어가려고 했다. 그때 그런 그의 발걸음을 테레이아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 …가인. 이대로 그냥 갈 생각? " " .........? " 그냥 갈 생각이 아니면? 가인은 의아한 얼굴로 테레이아를 돌아보았다. 그 리고 가인은 다시 한번 짧게 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테레이아는 문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채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살 며시 벌어진 와이셔츠의 가슴자락이 그의 가슴을 방망이질 치게 만들었다.테 레이아가 입을 열자 달콤한 체리 향이 풍겨 나왔다. " …차라도 한 잔 하고 가. " " ......차,차? " 가인은 묘한 위험함과 두근 거림을 느끼며 말을 더듬었다. 차라니…. 그… 마시는 차를 말하는 거 겠지? 하,하하…. 그래. 모처럼 남의 집까지 왔는데 차 한잔 하지도 않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더라. 그,그래.차 한잔 정도야…. 물론 테레이아의 부모님도 계실테고….무엇보다 차 한잔 마시라는 그녀의 말 에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는 뭐지?!! 가인은 테레이아의 성의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 아,으응…. " 그리고 테레이아의 미소는 짙어졌다. - 부글부글부글… 차 끓는 소리가 부엌 쪽에서 은은하게 울려왔다. 가인은 조심스럽게 테레이 아의 원 룸을 둘러보고 있었다.척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맨션인 만큼 원 룸 또 한 무지하게 넓었다. 으음…. 이런 아파트는 방이 여러 개 달린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로군…. 가인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쇼파에 풀러 놓았 다. 베란다 쪽의 창가에서는 커튼이 바람에 날려 계속 펄럭이고 있었다. ' …썰렁…하내. ' 가인이 방안을 둘러보고 느낀 점은 바로 그것. 뭔가 넓기는 넓은 원 룸이건 만 그에 비해 가구와 가전 제품은 턱 없이 적었던 것이다. TV가 없을 정도라 면 말 다 했을까. 굉장히 삭막한 방이로군….가인은 침대와 옷장, 쇼파,그리 고 탁자 하나가 놓여진 게 전부인 그녀의 방을 조심스럽게 거닐었다. ' 테레이아… 혼자서 살고 있는 건가? '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은 보이지를 않았다.가인은 침대에 살 짝 걸터 앉아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 보았다. 혹시나 무슨 가족 사진이라도 걸려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사진은 커녕 액자 하나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이 거… 정말 여자애의 방이 맞기는 한 건지…. 그때, 그런 가인의 귓가로 테레 이아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뭘 그렇게 두리번 거리고 있어? " " 앗?! 아, 그,그냥 테레이아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테레이아에게 소리치는 가인. 아,놀라라.그렇게 기척 도 없이 다가오니 놀라잖아. 가인은 괜히 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테레 이아가 건내주는 찻잔을 받았다. 테레이아는 가인의 침대 옆에 앉아 묘하게 홍조가 어린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 후훗… 궁금했어? 내가 사는 곳이? …그럼 실망했겠내. 되게 썰렁하지? 이 방. " " 아,아니…. 뭐…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 4월 달에 이사온게 얼마 되지 않았다니….가인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어처구 니가 없어 뒷 말을 흐렸다. 긴장하니까 말까지 헛 나오는 모양이었다.으음…. 어떤 말이든 해야 하겠는데…. 가인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 었다. " 그나저나… 테레이아는 혼자 사는 거였어? " " 응? 아,뭐… 그렇지…. " " 부모님은…? " " …My daddy와 mommy는 워낙 바쁘셔서…. " 뭔가 당황한듯한 기색.가인은 그런 테레이아의 모습에 더 이상 그녀의 부모 님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언급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가인 자신도 자기의 가족 얘기가 나올 때면 민감해지는 부분이 있었기에…. 둔하디 둔한 그로서도 이 부분에 서 만큼은 눈치가 빠를 수 밖에 없었다. 가인은 서둘러 말을 바꿨다. " 몸은 어때? 아직도 많이 아파? " " …아니.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 테레이아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안도했다.아,평상 시의 테레이아야. 이건. 가인도 마주 미소지으며 말했다. " 그래도 많이 걱정했다고. 삼일 동안 아무 연락도 없이 결석하고 말이야…. 연락도 못할 정도로 많이 아팠구나? " " 후훗…. 그렇게 걱정됐었어? 내가? " - 스윽. 다시 가인의 코 끝을 자극하는 체리 향. 테레이아가 살며시 가인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여 왔던 것이다. 가인은 대번에 얼굴이 시뻘개져 고개 를 크게 끄덕였다. " 그,그야 당연하지…! 테레이아는 소중한 내 친구인 걸…! " 테레이아의 이런 행동.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어딘가 이 상했다. 뭔가 굉장히 선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하, 하기는 이제 보니 그녀와 자신은 아무도 없는 방에… 그것도 침대 위에 둘이서만 있었으니 그런 기분이 들 만도 했다. 무엇보다… " 정말… 그런 이유때문이야…? 단지 클래스메이트라서? " 바로 이거였다. 저 붉은 기가 감도는 촉촉한 눈빛. 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 보고 있자 가인은 마치 고양이 앞의 쥐 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 볼을 옅게 물들이는 홍조라던지 속삭이는 목소리라던지…. 가인은 그대로 계속 테레이아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빠져버릴까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 아,아니 그러니까 그건… 단지 그런 것 만은 아니고… " " 그럼? " 자신이 몸을 빼는 것 만큼 가인에게로 몸을 숙여 다가오는 테레이아.가인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등 뒤로 식은 땀이 다 흐를 지경이었다. 뭐,뭔가 이상해. 테레이아! 뭔가가 이상하다고! 오늘따라 유난히도 더…?! - 턱…. 그리고 테레이아는 가인의 품으로 안겨왔다.가인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가 슴으로 그녀의 얼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단지 코 끝으로 느껴지는 진한 체 리 향 만이 그가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자신의 품 안에 있는 테레이아의 몸 이 유난히도 뜨겁게 느껴졌다. ' 으,으아아아아아… 자,잠깐…! 테레이아아아아…!! ' 그야말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린 가인.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도 잡지 못하며 그저 안절부절 몸을 떨어야만 했다. 차마 테레이아의 어깨 를 감싸주지 못하는 그의 두 팔이 안스럽게도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이, 이 거 어떡하지?! 지금 이 곳에서는 평상시 처럼 테레이아가 대담한 행동을 해 와도 유리나 반 가인회 같은 그녀를 막아줄 요소가 아무 것도 없었다.그야말 로 리미터 해제. 바로 그것이었다. 가인이 그렇게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 테 레이아가 조용히 그의 귓가로 속삭여왔다. " 가인… 너하고 나 외에는… 이 곳에… 아무도 없는 거지…? 그렇지…? " " 에…?! " 에에에엣?!! 테,테레이아! 지금 그 말을 하는 의도는?!! 가인은 가슴이 철 렁 내려 앉았다. 마치 어디선가 에코로 '밥상은 차려졌다∼'하는 소리가 울 려오는 것만 같았다.시,시끄러!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그리 고 테레이아는 그런 가인의 목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 다행이야…. " " .........응? " " 다행…. " - 스르르… 순간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늘어뜨리는 테레이아. 가인은 자신에게서 미끄러 져 내리려는 그녀를 황급히 부축해야만 했다. 테,테레이아?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 아…. " 그녀를 팔로 끌어안자 뜨거운 열기가 가인의 손으로 느껴져 왔다.그녀의 몸 이 뜨겁게 느껴졌던 게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굉장한 열이잖아? 이거?! 가 인은 서둘러 테레이아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이마는 식은 땀 으로 촉촉히 젖어 있었다. 거기다가 뜨거운 열까지! 지금까지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다 이상할 정도였다. " 이,이대로 놔두다가는 큰일 나겠는데…! 빨리 병원에라도 데려가지 않으 면…!! " 그렇게 가인이 테레이아를 안고 일어서려는 순간, 그의 소매를 테레이아가 움켜쥐었다. 가인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테레이아…? " 잠깐…. 가인… 병원은…싫어. " " 하,하지만 테레이아! 이대로 여기 있으면…! " " 제발…. 병원은… 안돼. 난 괜찮으니까…. " 눈에 눈물까지 맺힌채 열 오른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녀.가인은 그런 테레 이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왜? 왜 그렇게 병원을 가 기 싫어하는 거지? 어째서…. " 제발… 부탁이야…. " " .........으응…. " 가인은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테레이아가 저 렇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자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그제서야 테레이아는 안도 했는지 표정을 풀며 숨을 몰아 쉬었다.가녀린 그녀의 몸이 거칠게 위 아래로 움직이는 게 안타까워 보였다. " 나 좀… 눕혀줄래…? " " 아,그래! " 가인은 다급히 안고 있던 테레이아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녀를 안고 있 던 가인의 팔이 그녀가 흘린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잠시 만 안고 있었을 뿐인데…! 가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서 헐떡이는 테레이아에게 물었다. " 정말 괜찮겠어? 정말 병원에 가지 않아도… " " 괜찮아,가인…. 괜찮아…. " 몸을 잔뜩 웅크리며 중얼거리는 그녀.가인은 하는 수 없이 침대 시트를 끌 어당겨 테레이아를 덮어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침대 시트를 꼬 옥 끌어안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인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근심스러 운 눈초리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 테레이아…. ' 이렇게 까지 아팠을 줄이야…. 그것도 이 넓은 집에 가족도 없이 혼자서…. 가인은 땀에 젖은 테레이아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손끝으로 그녀의 열기가 느껴져 왔다. '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 테레이아가 아파서 그랬던 건데….나란 녀석은 괜히 이상한 생각이나 하며 그녀가 얼마나 아픈지도 알아차리지를 못했었다니…. 최저다, 유가인! 정말 최저라고! 테레이아는 침대에 눕혀지자 긴장이 풀렸는지 다시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가인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순간 자신의 머 리를 거칠게 한 방 쥐어 박았다. 그런 후, 그는 두 팔을 걷으며 자기 자신 에게 다짐하듯 소리쳤다. " 좋아.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테레이아의 병 간호를 해볼까! " - 리리스! 리리스! 날 부르는 한 여성의 목소리.난 능력 개발 실험을 잠시 중단하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하얀 가운을 껴입은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는 여 성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 유메? 무슨 일이야? 그녀의 이름은 유메 크라이시스.내가 태어나면서 자라온 것을 언제나 내 곁 에서 지켜봐온 업저버(observer)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 친구이자 언니이자 어머니인… 나의 보호자였다. 그녀는 나보다 수십 살은 연상이었지 만 언제나 모든 면에 있어서 어리숙하게 행동했다. 그것이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꾸밈 없는 태도로 날 대하고 있었다. 어쨌든,그 녀는 꽤나 멀리서 부터 달려왔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환호하듯 소리쳤 다. - 기뻐해, 리리스! 오늘 원로회에서 널 바르의 별로 임명했어! 라무의 아 이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다섯 명 만을 선출하는 그 자리에 네가 오르게 되었다고!! - 응? 아아…. 그렇게 되었구나. 난 유메의 호들갑 떠는 모습과는 반대로 아주 담담하게 답했다. 이미 나는 이 모든 걸 에견하고 있었기에 놀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내 능력이라면 이 결과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메는 역시 나와는 틀렸는 지 감격에 젖은 얼굴로 날 껴안았다. 난 그런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 잊은 거야? 난 유메의 아이라고.바르의 별 쯤이야 당연히 되고도 남을 만 큼 뛰어나단 말이야. - 그래.그래! 잘됐어! 정말! 정말 잘 됐어! '잘 됐어'만을 연신 반복해 외치는 그녀.난 그런 유메를 철딱서니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그 마음 만큼은 따뜻해지고 있었다. 유메의 품은 언제나 따 뜻하고 평온했다.이런 그녀가 없었더라면 난 여지껏 견뎌오지 못했을 것이다. - 나의 자랑스러운 딸, 리리스…. 유메의 속삭이는듯한 그 말에 난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 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어감이 내 귓가를 멤돌고 있었다.자랑 스러운 딸…. 자랑스러운 딸…. 바르의 별. 그것은 실험체일 뿐인 나에게 있어서 신분 상승의 기회이자 지 금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탈출한 유일한 돌파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평 온하고 따뜻한 길이 아니었다. - 아,아아…! 꺼내줘! 제발 날 꺼내줘---------!!!! 그들은 수 없이 나에게 실험을 가하고 또 가했다.그 지옥같이 반복되어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나의 처지는 모르모트. 바로 그것. 라무의 아이들 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 유메!! 제발 날 여기서 꺼내줘-------!!!! 난 몇 번이고 그녀를 소리쳐 부르며 유리관을 두들겼다. 내 두 손은 절대로 부서질리 없는 유리관을 의미 없이 두들기며 피투성이로 변해가고 있었다.하 지만 저 유리관 너머의 업저버들은 너무도 무심한 눈빛으로 이런 나를 관찰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실험 당하는 것보다도 견딜 수 없는 건 바로 그들의 눈 빛이었다. - 유메 크라이시스!!!! 그리고 유리관 너머의 업저버들 사이에서 두손으로 입을 막은채 떨리는 눈 길을 나에게 보내고 있는 그녀. 나의 보호자인 그녀가 내 눈에 들어왔다. 하 지만 그녀도 이런 나를 구원해주지는 못했다. 단지 겁먹은 모습으로 나를 바 라만 보고 있을 뿐. 나는 그것에 절규했다. - 꺼내줘-----------!!!!! 실험에 익숙해져 갈수록 내 정신은 그 만큼 피폐해져 갔다. 그렇게 하지 않 고서는 이 살아있는 지옥 속에서 생활해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날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하나 뿐이 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고독하고 차가운 단 하나의 진리였다. - 리리스…. 어두운 유리관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난 웅크린 상태에서 눈만 들어 목 소리의 주인을 노려보았다.그곳에는 나의 보호자이자 날 배신했던 그녀가 서 있었다. 유메 크라이시스. 그녀를 보자 내 가슴 속에 죽어버린 분노가 다시 그 머리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 미안해…. 미안해,리리스…. 미안해…. 죄책감에 사로잡혀 흐느끼는 그녀.하지만 그런 그녀의 슬픔을 받아주기에는 내 자신의 슬픔이 너무도 컸다. 나에게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줄 여유 따위 는 없었던 것이다.내 입으로는 내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흘 러나왔다. - 꺼져…. - .........리리스. - 꺼져버려!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려!!!! - .........! 상처받은 그 모습. 그리고 그녀는 힘 없이 유리관 저 너머로 사라져 갔다. 그 사라져 가는 유메의 뒷 모습이 마치 신기루와도 같아서 난 멍하니 그녀 를 삼켜버린 어둠을 주시해야만 했다. 어디선가 계속 유메의 흐느끼는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 난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 날 이후로, 유메는 더 이상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무관 심한 눈빛을 가진 업저버들이 그녀의 자리를 대신했다. 뭐… 상관 없는 일이 잖아…. 그녀가 보이든 말든…. 어차피 날 배신한 여자다. 내가 그녀에게 이 렇듯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 거라고…. - ......... 그러나 난 그녀의 안부가 너무도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난 약물에 취해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유리관 너머의 한 업저버에게 말을 걸었다. - 유메… 크라이시스는…? 그녀는 어디에…? 잠시 그 뒤를 따라오는 침묵. 업저버들은 자기들끼리 몇 번 귓속말을 주고 받다가 곧 대표로 한 업저버가 대답을 했다. - 그녀는 감금당했다. 감금…? 난 쓰러져 있던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우며 업저버들을 돌아 보았 다. 그게 무슨 소리일까? 감금? 감금이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 NP3223. 그녀는 원로회의 방침을 무시하고 너를 불법으로 빼돌릴려고 했 었지. 원로회의 방침을… 무시…? 유메… 크라이시스…. 그녀가…? - 하지만 결국 웅(熊) 족의 도사들에게 붙잡혀 조기에 사태가 커지는 것을 수습할 수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유메… 당신이…! 어째서 그런 짓을…! 난 다급해지는 마 음에 유리관으로 달려들어 업저버를 추궁하듯 소리쳤다. - 그,그렇다면 유메는? 유메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녀는…! - 그녀는 원로회를 거역한 위험 분자로 판명되었다.더구나 바르의 별로 채택 된 라무의 아이를 빼돌리려고 했으니…아마도 무기 징역을 피할 수는 없을 거다. - 아….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빠져 스르르 유리관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유메, 어째서 그런 짓을 해버린 거야…. 어째서…. - 어째서 나 같은 것을 위해서… 그녀에게 소리치며 원망의 눈빛을 보내던 자신이 생각났다. 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입으로 흐느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억눌린 목소리 가 흘러나왔다.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되는 건가…? 그녀를 다시 는…? - 오늘부터 네 이름은 리리스. 리리스야. 나에게 이름을 주었던 그녀. - 그 이름은 모든 데몬 족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밤의 여왕을 뜻하지. 넌 앞 으로 우리의 여왕이 되는 거야! 나에게 언제나 미소를 보여주었던 그녀. 언제나 날 지켜주었던 그녀. 그런 그녀를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아,아아아아아…. 약에 취했기 때문이 아니였다. 감정이 고조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그냥 눈 물이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그럴 뿐이었는데… 그럴 뿐이었는데… 이 눈물은 멈추지를 않고 끊임없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난 가슴을 쥐어 뜯으며 그 녀의 이름을 연신 목놓아 불렀다. - 유메…. 유메…!! 난 아무 것도 몰랐다.그녀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그리고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 유메…!!! 그리고 난 그녀를 잃어버린 후에야 그것을 알 수 있었다. " …흑. …흐흑…. "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리리스는 자신의 눈가로 눈물이 타고 흘러내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한 두통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고 목을 바싹 타게 만드는 열로 전신에 아무런 힘도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중에도 그녀의 머리로는 너무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자의식 하나가 있었다. 난… 혼자다…라는 자의식이…. " 싫어…. 더 이상 이런 건… " 혼자인 것은 더 이상 싫었다. 리리스는 지독한 외로움에 치를 떨며 열에 들 뜬 눈동자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마치 예전의 약물 투여 때 처럼 시야가 흩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지옥과도 같은 그 실험관으로 자신이 돌아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어 전신을 떨었다. 무서웠다.너무도 무 서웠다. 다시는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며 관찰 만 당하던 그 때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유메를 잃어버린 그 때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 누가 제발…!! ' 누구라도 제발 내 옆에 있어준다면…!! " 테레이아? 깨어난 거야? " 그리고 그런 리리스의 마음 속 외침에 현실의 누군가가 답해왔다.그 곳에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국자를 들고 있는 한 고교생이 서있었다.유가인.바로 그 였다. 리리스는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안도감이 드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 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아직… 있었구나…. " " 당연하지! 테레이아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혼자 두고 갈 수가 있겠어? " 가인은 국자를 재빨리 부엌의 가스렌지 위에 올려진 냄비에 놔두고서는 리 리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막 그녀를 위해 죽을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아무래 도 공복에 아픈 건 좋지 않았다.가인은 경험 상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뭔 가 허기를 채울 음식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가인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테 레이아의 열이 나는 이마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 테레이아가 잠결에 흐느끼는 소리는 부엌에 까지 들려왔었다. 아마 열에 몸 이 들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울 정도라면 꽤나 슬픈 꿈을 꾼 모양 이었다.그런 가인의 질문에 테레이아이자 리리스인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저 었다. " 아니…. 그런 건 아니었어…. " " 흐음…. 그래….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테레이아의 침대 곁에 놓아둔 세수대야에서 물수건 을 꺼내, 물을 한번 짜준 다음 그녀의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입술이 바싹 말라 갈라져 있는 것이 가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메마른 테레이아의 입술을 살짝 문질러 주다가 그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화들짝 손을 떼었다. " 아,미…미안…. " " ......... " 아무 대답이 없는 그녀. 가인은 서둘러 다시 물수건을 물에 넣고 짠 뒤, 테 레이아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그녀는 그런 가인의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 오빠. " " .........에? " 가인은 갑작스런 테레이아의 말에 이상하게 굳어 버린 표정으로 그녀를 내 려 봐야만 했다. 아,아니? 오빠? 오빠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그런 가인 의 표정에 테레이아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서는 살짝 얼굴을 붉 히며 말을 이었다. " 아니…. 가인이 병 간호를 해주는게… 오빠 같아서….만약 오빠가 있었다 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 " 아? 하,하하… 그,그렇구나…. " 그제서야 납득을 하고서 쓴 웃음을 짓는 가인.그래도 난데 없이 오빠라니…. 무지하게 놀랐다.정말…. 가인은 미소지으며 테레이아에게 말했다. " 아마 내 여동생 간호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럴 거야…. 우리 부모 님 이 맞벌이를 하셔서 동생이 아프면 언제나 내가 간호해야 했거든. " " …여…동생? " 리리스는 잠시 가인이 한 말을 되새겨 보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가인에게 는 여동생이 있었구나. 하지만 분명 사고로 부모님과 함께…. 리리스는 거기 까지만 생각하고는 조용히 가인에게 말했다. " ......미안. " " 응? 뭐가? " 웃으며 되묻는 가인.그 모습에 리리스는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며 열오 른 목소리로 자그마하게 답했다. " …나 때문에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했잖아…. 계속 내 옆에만 있어서… " 리리스의 눈에 벽에 걸린 시계가 보여왔다. 시간은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 다. 벌써 이런 시각…. 가인이 왔던 게 5시 쯤이었으니까 무려 4시간이 넘어 가는 중이었다. 리리스는 촉촉히 젖은 눈으로 가인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 계속 내 곁에… 있어주었구나…. " " 아,으응…. 뭐… 그다지 할 일도 없었으니까 잘 됐지…. " 가인은 쑥스러웠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고,그 모습에 리리스는 살며 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얼굴이 뜨거워질려고 하자 가인은 화 제도 전환할겸 리리스에게 말했다. " 아! 그나저나 혹시 배고플까봐 죽 끓여놓았는데…. 먹을 수 있겠어? " " …죽? " 그러고 보니 뭔가 맛있는 냄새가 부엌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 가 인이 국자를 들고 뭔가를 한다 싶었는데, 죽을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하 지만 집에 쌀도 없고 요리를 할 만한 어떤 재료도 없었을 텐데? 리리스가 그 런 시선을 보내자, 가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 아,그게…. 뭔가 요리를 해볼려고 했는데 집에 아무 것도 없더라고. 그래 서 잠시 요 앞 마트에 가서 장 좀 봐왔어. " " …그런.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장을 봐올거면 날 깨우지 그랬어…? 하다못해 돈이라도 줘야… " " 에이∼ 무슨 돈이야? 됐으니까 그냥 누워 있어. 그냥 내가 멋대로 장봐오 고 싶어서 장 본 것 뿐이니까. " " 그래도… " " 대신 맛있게만 먹어줘.그럼 그걸로 내가 장 봐온 비하고 셈셈으로 쳐줄게. 이래뵈도 꽤 맛있게 끓일 줄 안다고, 죽 정도는. " 활짝 웃으며 답하는 가인. 그 모습에 리리스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천 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알았어…. 맛있게 먹을게. " " 좋았어!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죽 가져올테니까∼ " 가인은 힘차게 일어나서 부엌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뒤를 이어 침대 시트에서 들려오는 '푹!' 하고 뭔가 쓰러지는 소리. 가인이 돌아보니 그곳에 는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얘기하던 테레이아가 침대에서 바닥으로 몸을 늘어 뜨리며 쓰러져 있었다.몸을 일으킬려다가 그대로 쓰러져 버린 모양이었다.가 인은 다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 테레이아? 괜찮아?! 또 어디가 아픈 거야?! " " 아니…. 그런 게 아냐…. 그냥 잠시 쉬면 나아질 거야…. 쉬면…. " 또 다시 스르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그녀. 가인은 그런 테레이아를 다 시 침대에 뉘어주며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정말 아파도 보 통 아픈게 아닌 거 같았다. 이대로 놔둬도 되려나? 저 상태로는 죽은 커녕 아무 것도 먹지 못할 거 같았다. 가인은 끓고 있는 죽의 가스 렌지 불을 끄 며 한 숨을 내쉬었다.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 보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하철 폐관 시간까지 생각해본다면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할 시간이 었지만… ' 이대로 테레이아를 놔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떡하지? ' 분명 시민 씨…. 기다리고 계실텐데….가인은 집에서 식사 준비를 하며 자 신들을 기다릴 시민을 생각하자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왔다. 그때, 그런 그의 귓가로 테레이아의 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인… 아직 거기 있어…? " " 응? 아,그래! 나 여기 있어. 테레이아. " 가인은 재빨리 테레이아의 침대 곁으로 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땀에 젖은 얼굴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도저히 열이 내릴 기미는 보 이지를 않고 있었다. 아아…이를 어떡하지? 도저히 이런 테레이아를 혼자 두 고 갈 수는 없는데…. - 슥…. 그때 고민하고 있던 가인의 옷자락을 테레이아의 하얀 손이 살짝 움켜 쥐었 다. 가인은 이런 테레이아의 행동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테레이아…? 그 리고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헐떡이며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 가인… 날… 혼자 두지마…. " " .........! " 그 말에 가인은 마음을 굳혔다. " 자,유리 양. 오라 측정이 끝났으니 몸 안의 오라를 가라 앉혀 주세요. " << …응. >> 힘 없는 대답. 메디컬 센터의 총 책임자 닥터는 쓴 웃음을 지으며 유리관 너머의 유리를 바라보았다. 피스 핑크,이유리.그녀는 피스 대원의 신체 검사 를 언 8시간 넘게 받고 있는 동안 내내 저 우울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있었 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 …분명 가인 군과 관계된 일일테지…. ' 굳이 깊게 생각하지도 않아도 유리의 저 표정을 가인과 연관시킬 수 있었던 닥터였다. 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저 상태로는 분명 다음 검 사를 진행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 그럼 다음 검사까지 잠시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죠. 유리 양은 편하게 앉 아 있도록 해요. " << ......... >> 그나마 검사에 관련된 말이 아니면 답변조차 돌아오지를 않는다. 닥터는 혀 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눈에 옆에서 유리의 오라 측정 수치 를 살피고 있는 한 검은 권복 차림의 소년이 들어왔다. 그는 피스 그레이.부 르스라는 이름의 중국 지부 피스 대원이었다. 닥터는 그에게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 …부르스 님. 뭔가 피스 핑크의 데이터 수치에 궁금한 것이라도…? " 부르스 류.피스 그레이 라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신원 불명인 남자.하지만 닥터는 상층 부에서 그의 정체에 대한 것을 약간이나마 귓뜸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 …흥미롭군. 저 꼬마…. 마인드 디텍터(Mind Detector)라는 건가. " 예의 가는 미소를 지으며 회색 머리 사이의 두 눈으로 유리관 너머의 소녀 를 응시하는 부르스. 그 두 눈에서 한순간이지만 푸르스름한 광채가 나타났 다가 사라진 것은 눈의 착각이었을까.닥터는 그런 그의 모습에 마른 침을 삼 키며 목소리가 떨리려는 것을 애써 참아내었다. " 그렇습니다. 그녀는 감각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사물을 인지(認知)하거나, 남의 마음을 알아낼 수 있는 오라 능력자입니다.뿐만 아니라 원격인지(遠 隔認知) 또는 투시(透視)와, 감각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 의 의사소통을 하는 원격감응(遠隔感應:telepathy)까지 가능하죠.그 능력 으로 그녀는 몬스터와의 접촉이 가능한 유일한 피스 대원이 될 수 있었습 니다. " " 초심리학(超心理學:parapsychology)을 말하는 거로군. 그 근원을 육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오라 능력이라는 건가.꽤나 재 미있는 능력이야. " 닥터는 피스 핑크의 데이터를 뒤적이는 부르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남자가 한국 지부로 온 것도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한달동 안 그가 한 일은 몬스터와의 전투 외에도 모든 피스 대원의 신체 검사에 참 여하여 그 데이터를 낱낱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들의 일거 수 일투족을 관찰하는 감찰자의 그것과 같았다. " 하지만… "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닥터를 일깨운 것은 부르스의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 마인드 디텍터와 마인드 브레이커(Mind Breaker)는 종이 한 장 차이….양 날의 검이라는 건가…. " " .........? " 그게 무슨…? 닥터가 두눈을 크게 뜨며 부르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마치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서류를 접었다. " 저 어린 녀석이 지니기에는 너무도 과분한 능력이다.잘못하면 큰 화를 부 를지도 모를 터…. " " 부르스 님? 지금 그 말씀은 도대체… " " 아아… 신경 쓸 필요 없다. 혼잣말이니까. 그것 보다… " 부르스는 예의 인상을 찡그리는 표정으로 돌아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 했다. " …저 꼬맹이는 언제까지 저 따위로 굴고 있을 생각인 거지…. " " 하하…. " 닥터는 그런 부르스의 투덜거림에 쓴 웃음을 지었다. 부르스의 말대로 유리 관 너머의 유리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검사실의 한 구석에 앉아 힘 없이 축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가인 만 옆에 없으면 저렇게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다니….아무래도 가인에 대한 유리의 의존도는 비 정상적으로 큰 모양이었다. 저건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데…. 하지만 가인이 옆에 없는 것 만으로는 저 맥빠진 모습을 설명하기에는 뭔가가 부족 했다. 닥터는 부르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아무리 가인 군과 떨어져있 다고는 하지만… 오늘은 평상시의 신검 날 보다 더 그 정도가 심한 것 같 은데요? " " .........아아. 그러고 보니 그럴 만한 일이 하나 있었군…. " 부르스는 한층 더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 아마 유가인… 그 애송이 놈이 테레이아… 라고 하는 여자의 병문안을 가 버려서 그런 것일테지. 하여간 여심이란…. " 부르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 혀를 차며 끌끌거렸다. 하지만 닥터는 순 간 부르스가 한 말의 내용이 놀라웠는지 두 눈을 부릅 뜨며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 테레이아…라면 그…! 아니! 어째서 그녀와 가인 군을 접촉하게 놔둔 것 입니까?! 더구나 병 문안이라면 가인 군이 그녀의 집을 찾아 가기라도 했 다는 겁니까? 그것도 혼자서? " " 그래. " 너무나도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부르스. 그런 그의 태도에 닥 터는 할 말을 잊어 버렸다.그는 뚫어져라 부르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이해할 수 없군요. 부르스 님…당신이나 진 사령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전 짐작조차 못하겠습니다.당신들은 도대체 뭘 의도하고 있 으신 겁니까? " " .........흐. " 그리고 부르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 처럼 꾸밈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르스는 그런 닥터에게서 시선을 돌려 유리관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장계취계(將計就計)…라고 해두지. 일단은…. 어쨌든,꼬맹이의 상태가 저 래서야 이 이상의 검사는 무리일 거 같은데. " " …그렇군요. " 닥터는 부르스가 말을 돌리는 것으로 보아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려고 한다 는 것을 느꼈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부르스는 인상을 구기며 으르 렁 거리는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 저 썩어빠진 근성을 고쳐주도록 하지…. 하여간 어린 것들은 손이 많이가 서 번거롭다니까. " 당장에라도 두 손을 걷어 붙이고 유리관 너머의 유리에게 달려들 듯한 기세. 닥터는 그런 부르스의 모습에 작게 한 숨을 내쉬며 그런 그를 조심스럽게 제 지했다. " …그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군요. 일단 저에게 맡겨주시죠. " " ......... " 묘하게 일그러지는 부르스의 표정. 닥터는 그런 그를 못 본 척 하며 검사실 의 마이크를 잡고 유리관 안의 유리에게 말했다. " 자자… 유리 양. 모처럼 검사실에 혼자 있으려니 심심하죠? 집에 있을 가 인 군과 시민 양도 보고 싶을 거고 말이에요. " << .........아. >> 닥터의 입에서 '가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대번에 반응을 보이는 그녀.그 모 습에 닥터는 부르스를 향해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게 집에 전화라도 해주는 게 어때요? '가인' 군 목 소리도 들을 겸 해서 말이에요. " << …으,으응. >> 유리는 닥터의 제안에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재빨리 끄덕여 보였다. 닥 터는 고소를 금치 못하며 검사실과 연결된 전화 회선을 통해 한시민의 집 전 화번호를 입력시켰다. '띠리리리리' 몇 번의 통화 연결음. 그리고 곧이어 유 리관 안의 스피커로 한 여성의 미성이 들려왔다. << …여보세요? >> 한시민이었다.닥터는 유리에게 윙크를 해보였고,유리는 허둥지둥 자세를 바 로 하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시민 언니? " << 어머,유리 양? 지금 검사 중일텐데 어떻게 전화한 거에요? 검사는 잘 받 고 있는 거에요? >> " …으응. 잠깐 휴식 시간이라서 전화한 거야. " << 아,그랬군요∼ 저녁은 잘 챙겨 먹었고요? >> " 으응…. 저기… 그런데 오빠는? " 꽤나 단도직입적이로군….시민과 통화를 하는 유리를 바라보며 닥터와 부르 스가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시민도 같은 심정이었는 지 어딘가 씁쓸한 미소가 섞인 목소리로 말해왔다. << 후후… 유리 양, 실은 가인 씨가 보고 싶어 전화한 거로군요? 전 안중에 도 없고 말에요. 약간 섭섭해지네∼ >> " 아니… 그게… 시민… 언니도 보고 싶었고… 으응…. " 얼굴을 살짝 붉히며 중얼거리는 그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목 소리가 듣고 싶었는지 유리는 긴장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기색을 목소리 만으로도 눈치 챈 건지 시민은 더 이상 장난치지 않으며 조심 스럽게 말을 꺼냈다. << 으음… 그런데 유리 양…. >> " ......응. " << 이를 어쩌죠? >> " ......응? " 시민의 말에 천천히 굳어져가는 유리의 표정.뭔가 불길한 생각이 그녀의 마 음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시민 언니…. 왜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뭣 때 문에…. 그리고 그런 유리의 의문은 시민의 다음 말이 풀어 주었다. << 가인 씨…. 지금 집에 없는데…. >> " .........!!!! " 마치 머리털이 곤두서기라도 하는 것 처럼 뻣뻣하게 몸을 굳히는 유리.그리 고 유리관 너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부르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옆의 닥터 를 노려보았다. " .........일단 맡겨 달라고? " " ......하하…. " 닥터는 좀 처럼 짓지 않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 딸칵. " 하아…. " 시민은 유리에게서 온 전화를 끊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평상시 와는 어딘가 다른 힘 없는 발 걸음으로 부엌으로 걸어들어갔다. 그곳에는 잘 차려진 저녁 밥상이 테이블에 차려져 있었다. 그 메인 메뉴는 하이 라이스. " …가인 씨가 좋아하는 하이 라이스도 만들어 놓았는데…. " 시민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망연자실하게 저녁 밥상을 바라보았다.모처럼 가인 씨와 단 둘이서 저녁을 먹게 되어서 솜씨 발 휘를 해보았는데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이것 저것 얘기할 것이 많았는데…. 정말 요즘 들어서 가인과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시민은 왠지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테이블 위 의 식사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 달그락… 달그락… 가인 씨….테레이아 양의 병 간호 때문에 오늘 집에 못 들어오겠다고…. - 달그락… 달그락… " 하아…. " 세번 째 한 숨. 시민은 식기 정리하던 손길을 멈추며 잠시 아까 전에 있었 던 가인과의 통화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 나… 왜 그랬던 거지…. " 어째서 가인 씨에게 그런 말을…. 시민은 다시 식기들로 손을 움직이며 조 용히 어깨를 떨어뜨렸다. 가인 씨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자신 답지 않았다. 그녀는 방금 전에 있었던 가인과의 통화 내용을 되새겨 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 달그락… 달그락… 귓가로 테레이아의 숨결 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안정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숨소리는 거칠었다. 열도 그다지 내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분간 병은 호전 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휴우. " 가인은 테레이아의 머리에 있던 물수건을 갈아주며 근심스런 표정으로 한숨 을 내쉬었다. 테레이아의 상태도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보다 시민과의 통화 내용이 더 걱정인 그였다.방금 전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시민의 목소리가 가 인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 그런…! 가인 씨, 아무리 병간호라고는 한다지만…여자애와 단 둘이서 밤 을 지새겠다뇨! - 예? 아니… 그건 그렇지만 테레이아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 그럼 병원에 데려가면 됐잖아요? 그렇게 상태가 좋지 않다면서 어째서 계 속 집에 두고 있었던 거에요? - 그건… 테레이아가 절대로 병원은 가기 싫다고 해서…. - 몰라요! 그렇게 가인 씨 마음대로 할 거면 저한테 전화는 왜 한 거에요?! 그래요…. 좋을대로 해요. 집에 들어 오든 들어오지 말든 가인 씨 맘대로 하세요! - 띠띠띠띠… 그게 시민과 한 통화 내용의 전부였다. 시민 씨…. 왜 그렇게 감정적이셨던 거지? 평상시라면 그냥 웃으면서 '그러세요'하고 얘기하셨을 분이…. ' …하긴 저녁도 다 차려놓으시고 계셨을 텐데 10시가 넘어 기껏 전화해 한 다는 말이 집에 못 들어가겠다는 거였으니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 에휴…. 맞아. 내가 다 죽일 놈이로군. ' 가인은 축 쳐져서 침대 맡에 업드리며 울쌍을 지었다.점점 시민에게 자신이 못할 짓만 한다는 죄책감이 들어왔다. 저번의 그 사건 이후로 더 이상 그녀 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란 녀석은 어김 없이 또 그녀에게 폐를 끼치고만 있었다. 이러다가는 저 천사표 같은 시민 씨에게서 미움 받는 것은 아닐까? 아니… 벌써 미움 받은 것은? ' 최악이다.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유가인. ' 시민과의 관계에 전혀 변함도 없고, 더구나 도리어 그녀에게서 호감까지 잃 어버리게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자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지는 그였다. 그때 그런 좌절 모드에 들어가 있는 그를 일깨우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 가인…? 무슨… 일이야…? " 너무도 가늘어서 금새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 가인이 고개를 들어보 니 침대에 잠들어 있던 테레이아가 가늘게 눈을 뜨며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 다.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 아, 내가 깨운 거야? 미안해,테레이아. 더 자. " " 아니…. 하지만 가인에게 뭔가 일이 생긴 거 같아서…. 무슨 곤란한 일이 라도…? " " 아하, 뭐 그렇게 곤란한 일인 것 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야단 들었을 뿐 이야. 아무래도 외박을 하게 되니까 집 주인한테 혼나버렸네. 하하…. " 가인은 어설프게 미소지으며 웃음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그를 테레이아 는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 …미안. 나 때문에…. " " 에이∼ 또 그런다.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라니까. 나는 내가 원해서 여기 있는 거니까 테레이아가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아마 시민 씨도 이렇게 아픈 테레이아를 홀로 놔두고 집에 들어가면 날 꾸짖으실 걸? " " 그럴까…? " " 그래. 그러니까 나 같은 녀석 걱정하지 말고 테레이아의 몸 상태를 더 걱 정하라고. " 누워있는 테레이아의 에메랄드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며 그런 그녀를 걱정 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가인. 테레이아는 그런 가인을 응시하다가 살짝 이불을 끌어당겨 코까지 끌어 올리며 낮게 말했다. " …그래도… 좋겠다…. 가인은. " " 응? " 그게 무슨 말? 가인이 의아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테레이아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으며 말을 이었다. " 가인은… 집에 늦으면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잖아…. " 테레이아…? " …혼자가…아니잖아. " 그렇게 말을 하는 테레이아의 목소리에서는 짙은 외로움이 깔려 있었다. 무 언가를 상실한 사람의 그것. 한 순간, 가인은 그녀에게서 자신과 같은 동류 의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홀로 남은 사람의 슬 픔을…. ' 테레이아…. 어째서 그런 표정을…? ' 가인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애써 미소를 지은채 말했다. " 에이∼ 뭐야,테레이아. 남이 들으면 테레이아에게는 가족도 없는 줄로 알 겠다∼ 테레이아에게는 걱정해줄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잖아.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 ......그럴까…. " 어딘가 씁쓸함을 지우지 못한 웃음으로 대답하는 테레이아. 가인은 그런 그 녀의 모습에서 테레이아가 오랫동안 외롭게 지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테레이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녀를 찾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테레 이아가 혼자 살고 있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지도…. " 테레이아…. 혹시 너… " 가인이 주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녀의 가족 사를 물으려고 할 때 테레이 아의 공허한 목소리가 한 발 먼저 가인에게 다가왔다. " 가인…. 되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지? "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지만 가인은 굳이 그녀에게 되묻지 않고서 천천히 대답했다. 테레이아의 쓸쓸해 하는 표정이 너무도 크게 그의 가슴에 다가왔 던 것이다. " …그,글쎄…. 더 이상… 저녁 밥을 혼자 먹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 이랄 까? " " 후‥후후후훗, 뭐야 그게…. " 열에 들뜬 주제에도 소리내어 웃는 테레이아. 가인은 괜히 무안해져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 하하… 역시 웃긴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저녁 밥 얘기라니…. " " 후후후후훗 " 테레이아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몸을 흔들며 웃었는지 이마에 얹어 놓았던 물수건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가인은 그런 물 수건을 다시 물에 짜서 편 다음 그녀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 하지만 말이야,테레이아…. " " 응…? " 작은 목소리로 들려오는 가인의 말에 테레이아는 웃음을 멈추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 따뜻한 밥이라고…. 혼자 먹을 때와 같은 식은 밥이 아니란 말이야. 그리 고 내 앞에 같이 숟가락을 들어주는 사람이 앉아 있어.난 그 사람에게 오 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거지. 학교에서 수업했던 내용… 친구들 과 있었던 일들…. 그리고 그 사람은 웃으면서 내 얘기를 받아주는 거야. 또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도 내게 얘기해주고…. 그건 말이지, 혼자서 밥 을 먹을 때는 절대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야. " 테레이아는 멍한 눈빛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가인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얘 기를 하고 있는 가인의 표정은 너무도 행복해 보여서 그녀는 아무런 할 말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가인의 얘기에 웃을 래야 웃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꿈의 한 단편 이었기 때문에…. 리리스는 그런 가인에게서 부러움의 감정을 느꼈다. ' .........!! ' 그리고 그런 감정을 깨닫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리리스 는 이를 앙 다물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이 무슨 표정일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것을 이 눈 앞의 소년에게 보이 기 싫었던 것이다. 분했다. 자신에게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 눈 앞 의 소년에게 심한 질투와 분노를 느꼈다. 이런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다가는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온 모든 것이 떨어뜨린 크리스탈 잔 처럼 산산히 부 숴져 버릴 것만 같았다. " …테레이아? " 갑자기 이불을 푹 눌러쓴 테레이아의 행동에 의아해 하며 묻는 가인.테레이 아는 천천히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 다. 그녀의 입자락에 걸린 미소는 그 마음의 삐뚤어짐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 다. " 그렇다면… 가족들과 헤어졌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어? " " .........! " 한 순간 굳어져버리는 가인의 표정. 그 모습을 보게 되자 테레이아는 저열 한 기쁨을 느꼈다기 보다는 끝 없는 후회의 감정에 휩싸여야만 했다. 가인의 상처 받은 표정이 그녀의 가슴 속을 파고 들어 하나의 송곳 처럼 찔러왔던 것이다. 테레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욱씬 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며 떨 리는 눈길로 가인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입으 로는 계속 비수와도 같은 심술 궂은 말이 흘러나왔다. " 지금과 같은 따뜻한 저녁 밥은 못 먹었겠지? 혼자였으니까…. " 아니야…. 가인. 난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잔인한 미소를 짓 고있는 것과는 달리 테레이아의 눈빛은 슬픔으로 젖어 들어갔다.어째서 나는 이 어린 소년에게 상처를 주는 소리 밖에는 하지를 못하는 걸까. 왜 따뜻하 게 대해주지를 못하는 거지? 단지 감싸주기만 하여도… ' 따뜻하게… 대해…준다고…? ' 적인 그에게? 이계의 오라 능력자를 따뜻하게 대해준다고? 어,어째서 난 그 런 생각을 했던 거지? 어째서? 난 단지 이 아이를 이용할 뿐인 게 아니었던 건가? …리리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어버린 거야? 리리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있어서 저 아이는… ' 옴팔로스의 열쇠… '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 맞아. " 그리고 그런 리리스의 혼란은 가인의 굳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 마디에 사라져 버렸다. 테레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가인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친 그의 얼굴은… 미소짓고 있었다. " 더 이상 따뜻한 저녁 밥은 없었어…. 언제나 식어버린 밥을 먹어야만 했 지. 더 이상 같이 숟가락을 들어주고 같이 얘기를 나눠줄 사람도 없었어. 그래서 난 저녁 밥을 먹는 시간이 가장 싫었어. " 그것은 너무도 슬픈 미소. 하지만 그 미소는 무작정 슬프지만은 않았다. 너 무나 애처로웠지만, 너무나 처량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삶의 의지가 느껴 지는 미소였던 것이다. " 처음에는 이 세상에 나 혼자인 것만 같았어.먼저 간 가족들을 원망하기도 하고 나 혼자 남겨진 현실을 원망하기도 했지. 난 혼자가 되었는데도 여 전히 변함 없이 흘러가는 일상이 너무도 미워 견딜 수가 없었어. 하루 하 루가 사는 것 같지 않았고 숨 쉬는 것 같지 않았지. 내가 뭣 때문에 사는 걸까 고민도 해봤고 울기도 해봤어. 난 왜 혼자 살아 있는 걸까…. 혼자 살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떠난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느냐고…. 그 래서 죽어버릴까 하는 고민도 많이 했었어. " " 아…. " 이불을 움켜쥔 테레이아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전신이 떨려왔다.그것 은 열로 인한 떨림이 아닌 그녀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떨림이었다. "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테레이아. " 가인은 그렇게 이불을 움켜쥐고 있는 테레이아의 손을 살짝 잡아주며 말했 다. " 너와 난 혼자가 아니야. " " .........!! " 가인? " 우리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힘들어 할 때는 같이 힘들 어 해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기쁠 때 같이 기뻐해주고 우리가 슬 플 때 같이 슬퍼해주고… 우리가 웃을 때 같이 웃어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 같이…? " 그래서 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날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 래서는 안돼. 내가 그 사람들에게 받은 것 만큼 난 그 배로 갚아 보이겠 어. 내가 슬퍼하면 그 사람들도 슬퍼질 테니까… 내가 힘들어 하면 그 사 람들도 힘들어 질테니까… 그래서 난 웃을 거야. 그리고 열심히 살 거야. 그것이 날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니까. 그리고… " 가인은 환하게 웃음 지었다. " 그것이 먼저 간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될 테니까. " " 가인…. " 테레이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그 의 손을 한껏 움켜 잡았다. 열에 취했기 때문일까…. 아무런 생각도 들지를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열로 인 해 거동하기도 힘든 상체를 억지로 일으켜세우며 마치 애원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가인을 열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 나도… 나도 정말 혼자가 아닌 걸까…? 날 위해 걱정해주는 사람이 정말 로 있는 걸까? 정말… 내가 웃을 때… 같이 웃어줄 사람이… 있는‥걸까? " 잊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 만큼은 자신이 바르의 별이라는 것도…. 자신이 밤의 여왕이었다는 것도…. 자신의 이름이 리리스였다는… 것도. 지금의 그 녀는 단지 테레이아 민체스터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녀였을 뿐이었다. " 응. 있어. " 그리고 가인은 그런 그녀를 두 팔로 끌어 안아 주었다. 그녀의 어깨를 안아 주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테레이아가 슬플 때 내가 같이 슬퍼해줄게. " 나는 혼자인 줄 알았다…. " 테레이아가 힘들 때 같이 힘들어하겠어. " 나는 앞으로도 계속 혼자인 줄로만 알았다…. " 그리고 테레이아가 웃을 때는 반드시… 같이 웃어 줄 거야.그러니까… 더 이상… " 하지만 나는 더 이상… " 테레이아는 혼자가 아니야. " " 아아… " 고마워…. 고마워…. 그녀는 울었다.열에 들떠 감정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열에 들떠 자신을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은 진실 이었다. 그녀 만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눈물은 멈추지를 않고 흘 러나왔다. 자신을 힘있게 안아주는 가인의 손길이 너무도 편안했기 때문이었 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유메를 잃은 후 처음으로 마 음껏 목놓아 울었다. ' 고마워…. ' - 짹짹… 새의 지저귀는 소리.그리고 펄럭이는 커튼과 그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 이 느껴져 왔다. 테레이아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천장을 응시하는 그 눈은 밤새 흘렸던 눈물의 흔적으로 붉게 상기되 어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지…? ' 난 분명히 가인의 품에서 울다가… ' …그렇게 잠이 든 건가…. ' 테레이아는 천천히 침대에 깊숙히 묻혀있던 몸을 일으켜세웠다.어제와 같은 몸의 무거움이 느껴지지를 않았다. 그 심한 고열도 씻은듯이 사라져 있었다. 자신이 아팠던 것이… 가인이 병 문안을 왔던 것이 마치 꿈이었던 것 처럼…. " …가인? " 테레이아는 자신을 밤새 간호했던 가인에게 생각이 미쳐 그를 찾았다. 하지 만 소년의 모습은 원 룸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가 버린…건가? 아 니면 정말 꿈…? - 사락… 사락… 테레이아는 땀에 젖은 와이셔츠가 말라서 느껴지는 오한에 이불을 끌어 안 고서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그것은… 그 아이가 찾아 왔던 것은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 ......... " 부엌의 테이블에는 냄비 그릇과 한 메모가 놓여 있었다.테레이아는 냄비 뚜 껑을 살짝 열어보았다. 죽이었다.어제 그가 만들어 놓았던 것 임이 분명한… - 슥… 그녀는 메모를 들어 보았다. 가인의 필적. 그가 써놓고 간 것이었다. 그녀 는 메모를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이 가인의 목소리로 바뀌어 귓가로 들려왔 다. - 깨어났어? 난 슬슬 학교 갈 시간이라서 이만 가볼게. 혼자 있을 테레이아 가 걱정되지만 열도 내렸고, 땀도 흘리지를 않길래 한 시름 놓았어. 오늘 하루 무리하지 말고 잘 쉬면 내일부터는 학교에서 볼 수 있을 거야.꼭 건 강한 모습으로 학교 나오는 거다? 아, 그리고…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배 많이 고프지? 어제 죽 만들어 놓은 게 있으니까 잘 데워서 먹어. 일단 이 걸로 허기를 채우고 나중에 제대로 된 식사를 꼭 하라고∼ 그럼 진짜 갈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 …유…가인. " 테레이아는 멍하니 메모지를 든채 그의 이름을 되뇌였다.그의 체취가 느껴 져 왔다. 마치 옆에 있기라도 한 것 처럼…. 테레이아는 살며시 눈을 감으 며 그 체취를 한껏 들이켰다. "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 그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차갑게 얼리는 한 남자의 목소리. 테레이아, 아 니 리리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느낌을 받으며 뒤를 돌아 보았다. 그 곳 에는 휘날리는 커튼 사이로 한 검은 양복의 남자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보이는 한 쌍의 감홍빛 눈동자. 비트레이어(betr ayer)! 한시영! " 후후, 모처럼 병문안이나 할까 해서 왔는데… 반갑지 않으신가 보군요. " "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거지? " 미소짓는 시영에게 무섭도록 차가운 표정으로 되묻는 그녀. 하지만 그 표정 과는 반대로 리리스의 가슴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 보고 있었던 걸 까? 저 녀석이…? 하지만 시영은 그런 리리스의 마음을 마치 들여다보고 있 기라도 한 것 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 후,하하하하하하-- 걱정마시지요. 저에게 무슨 보여주기 싫은 잠꼬대라도 하셨던 모양이지만, 전 잠자고 있는 레이디를 숨어서 엿보는 취미는 없는 지라…후후… 안심이십니까? " " 흥…!! " 리리스는 이를 갈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들켰건 들키지 않았건…저 삼 차원의 인간은 상대하기 껄끄러운 이였다. 만약 다 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보지 않았다고 능청을 떨면 그만인 것이다. 리리스는 아랫 입술을 깨물으며 분을 삭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런 그녀의 뒷 모습을 시영은 예의 시니 컬한 미소를 지으며 주시하고 있었다. " 아,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 몸으로 마정(魔情)의 숙주를 제어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 웃기는 소리! " 날카롭게 일갈하는 리리스. 그녀는 마치 타오르는 것만 같은 두눈으로 시영 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리리스! 위대한 밤의 여왕이다!! 너 같은 허약하기 짝이 없는 3차원의 존재와 날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 겠지?!! " " 그럴리가요.후후…. 단지 리리스 님의 몸 상태가 걱정되었을 뿐입니다.부 디 노여워하시지는 마십시오. " " 크으으으으… 네 놈의 자식이----------!! " 리리스의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이 스산하게 일어서며 한 쌍의 검은 날개가 그녀가 걸치고 있던 와이셔츠를 찢어 발기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몬스터들 의 5대 간부 리리스 치고서는 보기 드물 게 감정적인 모습이었다. 이럴 때는 더 이상 자극시키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 시영은 재빨리 그림자 속으로 녹 아 들어가며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후후… 초류향 님께서는 이미 모든 준비를 하셨습니다. 리리스 님도 노여 움이 풀리시면 늦지 않게 나와주시기를…. " " .........!! " 리리스는 눈을 부릅 뜨며 시영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녀 는 분노로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제길! 농락당했다! 저 인간에게! " …큭! " 리리스는 애써 분을 죽이며 등 뒤에 솟아오른 검은 날개를 접었다. 벽에 걸 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와이셔츠가 찢겨져 나가 하얀 알몸을 드러 낸 자신이 서 있었다. 너무도 황폐한 모습…. " 한심하군…. " 리리스는 날카롭게 인상을 찡그리며 거울에서 고개를 돌렸고, 그와 동시에 거울은 '쩍'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 와장창!! 리리스는 이글 거리는 눈빛으로 그런 거울의 파편을 뒤로 하며 자신에게 다 짐하듯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 나는 리리스…. 위대한 밤의 여왕이다…. " 모두 다 끝났다.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 아내는 집을 나가버렸고, 내 자식들 마저 모두 데려가 버렸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난 그 상황을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것! 한심하다! 내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다! 제발 꿈이라면 깨어나기를 바란다! 제발 이 현실이 꿈이라고 누군가가 내게 말해줘! 어디서 부터 잘못된 거지? 어디서 부터? " ......... " 그런 내 눈에 여전히 방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DVD 플레이어와 수 많은 히어로 물의 애니메이션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향해 마치 손이라도 벌리 고 있는 것 같은 나의 우상들. 그래…. 너희들 만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어. 계속 내 곁에 있어 주는 거야…. 그래…. 아무 것도 필요 없었다.나는 단지 영웅이 되면 족했다. 그 순간 만큼은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에 취할 수 있었다. 그래…. 다시 영웅이 되는 거다.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그 강대한 힘을 손 에 넣는 거야. 그거면 충분해. 그거라면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어. 나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집 밖으로 걸어나갔다. 때 마침 떠오르는 일출이 나를 반겨주 고 있었다. 그래…. 변하는 거다! " 슈퍼… 영웅으로…! " " 다들 수고한다!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피스 오퍼레이터 팀의 치프 윤채영은 오늘도 한 치의 변함 없이 근무 시간에 맞춰 오퍼레이터 실에 출근했다. 피스 오퍼레이 터 팀은 3개조로 나뉘어 아침 8시와 저녁 6시를 기준으로 교대했는데, 채영 은 치프였기에 비상 시 외에는 특별히 근무할 필요가 없었다.지금과 같은 경 우는 근무 시찰이라고나 할까. 근무 중인 오퍼레이터들의 격려 겸 지원 차원 에서 들린 것이었다. " 엇, 치프! 이런 이른 시각에 왠 일이에요? " " 해가 서쪽에서 뜰려나? " " 아냐. 오늘 해는 이미 동쪽에서 떴으니까 아마 내일 해 부터 서쪽에서 뜨 겠지. " 오늘부터 일 주일 간을 주간 근무해야 하는 3인방들은 치프의 뜻 밖의 방문 에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맞이 했다. 윤채영은 그런 그녀들의 곱지 않은 아 침 인사에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말했다. " 주간 근무라서 스트레스가 많이들 쌓이셨나 보지만∼그래도 다 세계 평화 에 이바지 하는 일이잖아. 힘들 내라고! " " 아-저 무책임한 말투! 치프는 저희 같은 말단 오퍼레이터가 아니기에 이 힘겨움을 알지 못한다구요∼ 도대체가 왜 주간 근무는 쉬는 날도 없이 일 주일 간 풀로 서야하는 거야∼ 그나마 야간 근무는 이틀 간격으로 출근하 니까 견딜만은 한데∼ " " 아니야. 그래도 난 주간 근무가 더 좋아. 야간 근무하면 피부에 치명적이 잖아. " " 맞아! 난 이 일 시작하면서 나하고 전혀 관계도 없던 피부 과까지 정기적 으로 다니게 됐다고∼ 힝∼ " 언제나와 같이 재잘거리며 수다를 떠는 삼인방. 채영은 그런 그녀들을 못말 린다는 듯 바라보다가 자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 뭐야, 이 녀석들.그런 말투는…. 나 만큼 열심히 일하는 상관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런 섭섭한 말들을 하는 거야? " " 후- 아무리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치프,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개 구리가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그 전 선임이 치프 때문에 골머리 앓았 던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구요∼ " " 맞아. 맞아. 아마 이런 말도 했었지? '이번 후임은 그야말로 핵탄두로군. 도무지 감당이 안돼∼' 라고. 도대체 선임 치프가 보는 앞에서 근무 중에 레슬링 시청을 몰래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 " 아마 그게 결정적이었을 걸? 선임 치프와 쇼핑하러 나갔다가 치한에게 넥 브레이커(Neckbreaker:*)를 먹인 사건! 그 사건 이후로 한동안 선임이 치 프를 피해다녔었잖아? " *넥브레이커(Neckbreaker): 상대방과 마주 본 상태에서 상대의 머리를 잡고 한바퀴를 돌려 자신과 상대방이 서로 등을 맞대게 하여 상대의 후두부를 자신의 어깨에 올린 뒤, 그리고 그대로 수직으로 주저앉으며 상대의 목에 타격을 주는 레슬링 기술. 대부분 피니쉬로 쓰이며 굉장히 위험하다! 이,이 녀석들…. 나도 잊어버린 그 옛날 일들을…. 채영은 얼굴이 시뻘개져 이를 갈았다. 물론 그때는 지하철에서 치한이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었는지라 무의식 중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그랬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치 한에게 넥브레이커를 먹이다니….평범한 일반 여성이 행할 수 있는 일은 아 니었다. 새삼 윤채영,그녀가 레슬링 매니아라는 게 밝혀지는 부분이다. " 흐,흠! 옛날 일은 옛날 일! 무엇보다 현재가 가장 중요한 법이잖아…. " " 에이∼그렇게 옛날 일도 아닌걸요,뭘∼ 그나마 치프의 그 성질이 죽은 것 도 가인 군이 피스메이커에 가입한 이후였었나? " " 아마 그럴 걸? 맞아. 맨날 가인 군 걱정만 하느라 성질 부릴 겨를도 없었 잖아∼ " " 맞아. 맞아. 처음에는 무지 웃겼다니깐∼ 저 치프가 가인 군만 근처에 있 으면 차분한 캐리어 우먼 흉내 내는 게∼ " " 오호라∼ 성인의 매력으로서 승부하겠다는 건가? 좋은 각오로군. " "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해∼ 러브 러브 파워야∼♥ " 이, 이 자식들이이이이이이∼∼∼∼!!! 채영은 결국 눈이 돌아가 주먹을 움 켜쥐었다. 아마 그녀가 괴수였다면 입에서 7색 살인광선을 내뿜는 것도 가능 했을 것이다. " 그,그만두지 못해, 이 바보 자식들--------!!!! " " 꺅! 러브러브 천경권이다! 피해! " " 죽인다!! " 그렇게 언제나와 같이 시끌벅적한 아침을 맞이하는 오퍼레이터 팀. 어떻게 보면 전혀 진보가 없는 인간 관계라고도 할 수 있겠다.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는 다른 오퍼레이터들은 항상 접해오던 광경이었기에 새삼 놀라지도 않는다는듯 당연하게 자신들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단지 이번 10월 부터 피 스 오퍼레이터에 발령받은 신입 오퍼레이터 '문세희' 양 만은 식은 땀을 흘 리며 흉폭한 윤채영의 기세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 도,도대체가 이 사람들은∼∼ 전혀 긴장감이 없어! 여기는 몬스터와 인류 의 존망을 내건 대 몬스터 특무기관 피스메이커! 인류 최후의 보루란 말 이야! 그런데 저런 경망한 행동들이라니…!! 미,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가 없다고! 무엇보다도 저 치프란 사람 부터가…! ' 문세희. 그녀는 정말이지 부푼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이 피스메이커 오퍼레 이터 팀에 들어 왔었다.원래 평범한 항공 회사의 오퍼레이터를 맡고 있던 그 녀에게 어느 날 피스메이커로부터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정말이지 모 든 것이 꿈만 같았다. 지루하고도 반복적인 일상에서 탈출한 그 느낌.그리고 진정으로 하고 싶던 일을 하게 되었다는 그 성취감! 새로운 인생에 도전한다 는 그 모험심 또한 다 좋았던 것이다! 단지… " 꺅! 치프의 이런 모습! 가인 군에게 다 일러 바쳐야지∼! " " 가인 군∼ 가인 군∼ 우리 치프는 사실 무식한 마초 마니아에다가 순간 온수기 타입의 과격 프로 레슬러 라구요∼! " " 다 한 거냐? 말 다 한 거냐고?! 어디 살아있는 동안 계속 그 입들을 놀려 보시지!! " …이런 고참들의 모습에 그 성취감도 그 모험심도 요 한 달간 산산히 부숴 진지는 오래였지만…. 세희는 울쌍을 지으며 최대한 채영과 삼인방의 목소리 를 귓가로 흘릴려고 노력하며 업무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때, 한 순간 작전 본부실의 불이 '팟'하고 꺼지며 붉은 비상 경보등이 울리기 시작했다. - 비잉비잉비잉비잉비잉비잉비잉!! " ........!! " 뭐,뭐지? 설마 몬스터?! 세희는 당황하며 허둥지둥 착용하고 있던 헤드셋마 이크로 상황을 보고하려고 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상황에 가슴이 떨려 목소 리조차 잘 나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이,이를 어떡하지? 빨리 상황 보고를 해 야하는데…! 이대로 있음 안된단 말이야! 빨리 보고를…! 그리고 애써 입을 벌려 말을 꺼낼려는 순간,그녀의 모기만한 목소리를 삼켜버리는 강렬한 목소 리들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 << 와프 입자의 수치 변동과 몬스터의 생체 반응 체크! 우주수(宇宙樹) 가 동! >> << 와프 입자 수치 변동 없습니다. >> << 29구역에서 몬스터의 생체 반응 확인! >> << 위그드라실(Yggdrasil) 가동 완료! 29구역을 스캔합니다! >> " ........!! " 세희는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티격태격 장난질을 쳤 냐는듯이 윤채영과 삼인방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재빨리 상황에 대처 하고 있었다. 이, 이 사람들이… 아까의 그… 사람들과 동일… 인물 이란 말 인가? 어쩌면 저리도 냉정할 수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잖아?! 그때 그 렇게 감탄만 하고 있던 그녀에게로 윤채영의 불같은 호통이 떨어져 내렸다. " 이봐, 신입! 정신 똑바로 못 차리겠어?!! 사령관 님과 피스 대원들에 대 한 호출은 어떻게 된 거야?!! " " 아,예! 옛! 죄송…! " " 사과할 시간 있으면 빨리 빨리 호출 방송부터 햇!! " " 네에에에에에…!! " 히익! 울쌍을 머금으며 재빨리 언더 시티 유레카에 호출 방송을 하는 세희. 그런 그녀의 뇌리에서 채영들의 방만한 모습들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윤채영 은 혀를 차며 그런 세희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삼인방에게 말했다. << 메인 스크린으로 델타 위성의 영상을 전송하도록. 몬스터의 소재 파악을 우선시 하는 거다. >> << 피스! >> 재빠르게 델타 위성과 접속하여 29구역의 영상을 띄우는 삼인방. 그리고 영 상에 뜬 몬스터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작전 본부실의 모두는 지독한 침묵 을 유지해야만 했다. 마치 금방의 긴박함이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조용해지 는 그녀들.그리고 그런 침묵을 깬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채영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 …저, 저건 또 뭐야…? >> " 하암…. 역시… 밤을 새는 건 무리였어…. " 가인은 두 눈 밑에 잔뜩 기미가 서린채 연신 하품을 하며 29구역의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만 눈을 감았다 하면 사정 없이 밀려드는 몽마 에 눈도 제대로 깜빡 거리기 힘들었다. 그는 테레이아의 병 간호를 위해 어 제 저녁 부터 한 숨도 자지를 않았던 것이다. 중반에 잠시라도 눈을 붙이면 될 것을 미련하게 자지도 않으며 강행군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점 이 그 답다고 한다면 그 다운 거였겠지만…. " …이 상태로 과연 오늘 하루를 견딜 수 있으려나…. " 학교 수업이야 눈치 봐서 조금씩 잔다고 쳐도…. 방과 후에 있을 피스 메이 커의 전투 훈련이 문제였다. 2시간이 넘게 받는 하드 트레이닝을 이 상태로 는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 최근의 훈련 교관은 바로 그 부르스란 말이지…. ' 그렇다. 최악의 문제는 바로 그것.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인의 훈련 교 관은 피스 그린 정진우와 피스 레드 성마리였기에 어느 정도 사정을 설명하 면 그 날의 훈련은 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성질 머리 고약한 훈 련 교관은 일말의 타협할 여지도 없이 강경했던 것이다. - 엄살 피울래? 죽지 않을 정도로 때렸으니까 일어나라.아직 내장기관이 터 져나간 것도 아니고,척추가 으스러진 것도 아니고, 뇌가 녹아내리지도 않 았잖냐?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는 몸이니까 일어나, 당장! …이 정도면 말 다 했을려나. 어쨌든,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이다.교 육자로 치면 스파르타(Sparta) 교사 정도? 그런 그에게 피곤하다는 둥 훈련 을 쉬겠다는 둥 얘기를 꺼냈다가는 그 결과가 눈에 보듯 훤했다. 결국, 학교 에서 쉴 수 있는 만큼 쉬어논 다음 훈련을 견뎌내는 수 밖에 없었다.에휴,이 럴 줄 알았으면 테레이아의 집에서 좀 자둘 것을…. ' 뭐…,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으니까. ' 가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발걸음을 놀렸다. 그래…. 몸은 피곤하더라도 마음은 이렇게 가벼운 걸. 테레이아가 많이 나은 걸 생각하면 이 정도 피곤 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 테레이아의 병 간호… 하길 잘 했다! ' 저 멀리서 29구역의 지하철 역이 보여왔다. 등교 시간까지 아직 30분 정도 남았기에 그는 모처럼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 휘오오오오오오오… " 읏…! " 그때 때 마침 불어오는 맞바람에 가인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인상을 찡그렸 다. 갑작스런 광풍이 정면에서 부터 불어왔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그의 머리 가 휘날리며 옷깃이 펄럭였다. 뭐,뭐지? 이 바람은? 하늘은 구름 한 점도 없 고 날씨 또한 맑건만 흙 먼지가 일어날 정도의 광풍이라니…? " 아,젠장…! 눈에 먼지가…. " 가인은 바람에 날아온 먼지를 한껏 뒤집어 쓰며 콜록 거리다가 바람이 조금 멎는 것 같자 간신히 눈을 떴다. 제길, 모처럼 산뜻한 기분으로 등교 좀 해 볼까 했었는데 방금 전의 바람으로 산통이 다 깨져버렸다. 어째서 갑자기 이 런 바람이 부는 거야?! " ......어라? "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눈을 뜬 가인은 눈을 감기 전의 세계와 눈을 뜬 후 의 세계가 바뀌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눈을 감기 전만 해도 밝은 아침 햇살에 환하게 빛나던 세계가 바람 땜에 잠시 눈을 감고 뜨자 어둡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밤과 같은 어둠이 아닌 거대한 무언가에 햇빛이 가려져 그늘이 진 어둠. - 드드드드드드드드… 지면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낮춰 주 위를 두리번 거리며 갑작스런 이 변화에 어리둥절해졌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왜 이렇게 어둡게? " 아…. " 그리고 가인은 볼 수 있었다. 이 일대를 그림자로 뒤덮은 물체의 정체를!29 구역의 지하철 역 부근에서 거대하게 일어서고 있는 그것.마치 인간을 수백 배 부풀린 듯한 크기의 그것.그것은 거대한 인간의 형체를 한 거인이었던 것 이다! " 아아아아아앗!!! " " 호오… 대단하군…. " 초류향은 29구역의 한 20층 빌딩 위에서 아래의 상황을 내려다 보며 감탄하 고 있었다. 그가 내려다 보고 있는 곳에서는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한 그 육 체가 꿈틀거리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그것은 모든 것에 냉소적인 그로서도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 탓! 그때, 그런 그의 뒤로 검은 피막의 날개를 가진 그의 동료가 가볍게 내려섰 다. 지상에서 50미터 떨어진 상공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 에메랄드 빛 머리 카락이 파도가 치듯 출렁거렸다. 초류향은 섭철선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입을 가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 늦었지 않나, 리리스. 시간 관념이 없는 것은 네이 안데르슨, 그 녀석 뿐 인 줄로만 알았건만…. " " …아아. 사과하지. 그러니까 적어도 그 녀석과 날 비교하는 것 만은 참아 주길 바래. " 리리스는 예의 붉은 기가 감도는 검은 가죽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것이 그녀의 검은 날개와 어울려 한층 밤의 여왕이라는 이름에 걸 맞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초류향의 주위를 둘러 보다가 그에게 물 었다. " 한시영. 그 인간은 어디에 있는 거지? " " …그 인간의 소재를 왜 나에게서 묻는 거냐? 이 몸이 그런 삼차원의 오라 쟁이를 신경쓰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 대번에 불 같이 화를 내며 분노를 표하는 초류향. 그런 그의 반응에 리리스 는 조심스럽게 말을 돌렸다. " 그럼 나에게 그를 보낸 것은 너가 아니었단 말이야? " " …리리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그 인간과 날 결부시키는 말 따위를 하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난 그런 하찮은 존재에게 내가 할 일을 떠맡기지는 않는다! 알겠나?! " " .........!! " 그런…! 그렇다면 한시영. 그는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고 나타났었던 거 지? 초류향에게서 날 불러오라고 시킴을 당한 것도 아닌 것을…. ' …날 속였군…. ' 그 건방진 인간 녀석이…!! 리리스는 능구렁이 같은 한시영의 행동에 이가 다 갈릴 지경이었지만 그것을 초류향의 앞에서 표현하지는 않았다.그녀는 애 써 속으로만 분노를 죽이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 그나저나…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건가? " " 후후후후…. 직접 네 눈으로 보겠나? 저것을…. " 초류향은 섭철선으로 그들의 밑에 펼쳐진 광경을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리리스는 살며시 초류향의 옆에서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과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군…. 리리스의 입 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그녀의 귀로 초 류향으로서는 드물게 감탄을 하는 말이 들려왔다. " 리리스. 네가 처음에 이 얘기를 꺼냈을 때는 꽤 반신반의했었지만….대단 한 것이었군. 그…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 " 그렇지…. 마정의 숙주로 한껏 부풀려진 인간의 공상을 발현시키면 일단 이 정도… 라는 거지. " 리리스는 한껏 검은 날개를 펼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에 맞춰 마정의 숙주가 된 욕망의 소용돌이는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마음껏 울부짖어라! 이제부터 너희는 너희가 만든 무한한 상상력에 공포 를 맛보는 거다! 너희를 진화시키고 발전시켰던 그 힘에 댓가를 치룰 때 란 말이다!! " -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리고 그것은 울부 짖었다. " 맙소사…. 저건… 저런 것 까지… " 피스메이커의 기술 부 치프, 시더 웰리스는 자신의 어두운 연구실에서 하얗 게 빛나는 컴퓨터의 모니터를 부여 잡으며 믿을 수 없다는듯 시선을 떼지 못 했다. 마른 침이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설마 저런 것이 도심의 한 가 운데 에서 등장하게 될 줄이야…. 시더는 모니터에 떠오른 저 괴물의 정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 이번에 녀석이 선택한 모습은… ' 히어로 매니아가 변신한 것은…! 다름 아닌! " …울트라 맨?!!! " " m78성운의 빛의 나라에서 온 신장 40m,체중 3만 5천톤에 마하 2.5의 속도 로 비행할 수 있는 추정 연령 2만세 이상의 초인…이라고요? " " 덧붙여서 기술은 발탄성인이 싫어하는 스페시움을 사용하는 스페시움 광 선! 이 '울트라맨'은 '고지라'로 쌓아올린 일본식 괴수물을 적절히 혼합 하여 미국의 히어로와 차별된, '거대화' 히어로라는 일본 특유의 패턴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기념비적 작품이라고요! 더구나 거대한 괴수를 상대하 는 히어로 울트라맨이 스스로도 거대화되어 싸운다는 것은 당시 엄청난 발상이었죠! " 얼빠진 표정을 지은 닥터의 질문에 언제나와 같이 열의를 다하여 답변 하는 시더. 그렇다. 히어로 매니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가 이번에 변신한 대상은 다름 아닌 츠부라야 프로덕션의 1966년 작, 울트라 맨이었던 것이다! 닥터는 스크린에 떠오른 수십미터 신장의 몬스터를 바라보다가 머리가 아팠 는지 이마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 …정말 터무니 없는 발상이로군…. 저렇게 인체의 밀도와 체적을 무시한 발상을 해내다니… 감탄이 다 나올 정도군요…. " 인간의 24배인 40m 신장은 그렇다고 치자….하지만 3만 5천톤의 체중이라니 …. 울트라맨의 몸이 인간과 같은 물질로 되어 있다고 치자면 적어도 저 초 인의 적정 체중은 세로,가로, 두께로 24배가 되야하니 즉 1만3천 배. 860톤 이상은 되어야 정상인 것이다. 저 울트라맨이라는 것의 체중은 그 적정 체중 과 약 37배의 중량비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인간 몸의 밀도가 1g/㎤이니 울트 라맨의 몸은 백금이나 금과 비교해서 2배씩이나 무거운 물질로 이루어져 있 다는 소리다. 이런 우주인이 지구 상에서 날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 더구나 밀도가 인간의 40배라는 소리는 인간의 신장으로 쳤을 때 체중이 2.7톤이 된다는 소리지…. 인간의 발 면적으로 승용차 2대를 받치고 있는 정도의 압력이 지면에 걸린단 말이다…. ' 흙 위라면 발이 빠져 버릴 거고 모래 위라면 발이 걸려 걷지를 못할 테지…. 더구나 저런 말도 안되는 신장과 체중을 가진 주제에 체형은 인간과 다를 바 가 없다. 체중은 신장 배율의 3제곱으로 늘어나지만 뼈나 근육의 강도는 단 면적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신장 배율의 제곱에 비례한다. 몸이 크면 클수 록 몸에 비해 다리의 굵기는 커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저 울트라맨에게 는 인간을 전후좌우로 4.9배 부풀린 듯한 프로포션이 요구되어야 한다. 말하 자면 멀쩡한 생물이 울트라맨의 신장으로 살아가려면 신장과 몸의 폭이 거의 같은 주사위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 …그러면 상당히 추하겠군…. ' 어쨌든 인체에 대해 끊임 없는 탐구를 해야만 하는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 닥터에게 저 울트라맨이라는 것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무지의 산물이 었던 것이다. 시더는 그런 닥터의 심정을 눈치 챘는지 히죽 웃으며 말했다. " 노노노∼ 그렇기에 울트라맨은 m78성운에서 온 우주인 이라는 것이죠! 그 것이야 말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초인! " " …그건 일종의 회피 성 발언입니다만…. " 닥터의 한탄 섞인 중얼거림. 그런 닥터와 시더의 대화에 고소를 금치 못하 던 수정은 헤드셋으로 현장에 있는 가인에게 말했다. " 들었죠, 가인 씨? 이런 사유를 가진 정의의 히어로 라네요. " << …예. 뭔가 무책임한 녀석이로군요…. >> 메인 스크린으로 가인의 얼굴이 작게 뜨며 그가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여왔다.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의 등장에 맞춰 29 구역에 미리 출동해 있었다. 다른 피스 대원들은 급히 현장으로 파견되었고, 그 만이 유일하게 히어로 매니아와 조우한 피스 대원인 것이다. 가인의 곤란 한 듯한 목소리가 작전 본부실의 스피커로 들려왔다. << …그나저나 이 무지막지한 몬스터를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시죠? 도저 히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는데…. >> " …그러게요. " 쓴 웃음으로 일관할 뿐인 수정. 그녀로서도 전혀 앞이 내다보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2m도 되지 않는 인간이 40m의 거인을 상대한다는 것 부터가 대책이 없었다. 그녀는 괜히 저런 말도 안되는 존재를 창조해낸 일본 츠부라야 프로 덕션에게 한껏 불평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그런 그들에게 시 더가 말을 꺼냈다. " …걱정마, 가인. 녀석에게도 약점은 있어! " 순간 그녀에게로 집중되는 모두의 시선. 그런 시선을 봤자 시더는 한껏 고 무되어 위풍 당당하게 소리를 높였다. "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한가지 약점은 지니고 있는 법! 그것은 저 울트라맨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거야! 제 아무리 울트라맨이라고 하더 라도 약점이 없었더라면 시청자들이 무슨 재미로 프로를 시청했겠어?! 시 련이 없는 완벽한 영웅은 인기가 없단 말이지! " …뭐,뭔가 상당히 시사 성 있는 말인데…. 어쨌든, 시더는 그런 서론을 시 작으로 본론으로 돌입했다. " 울트라맨의 약점은 바로 '지구에서는 3분 밖에 활동할 수 없다'…인 거야! 울트라맨을 받쳐 주는 태양 에너지가 지구 상에서는 급격히 소모되기 때 문인 거지! 태양 에너지가 부족해지기 시작하면 저 가슴에 달린 컬러 타 이머가 점멸하기 시작하여,그 타이머가 꺼져 버리는 순간 울트라맨은 두 번 다시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려! " ' …그런 어처구니가 없는…. ' 작전 본부실에 있는 모두의 생각은 그러했다.저 대단한 체격에 능력을 가진 초인에게 3분이란 시간 밖에 주어지지를 않다니… 이 얼마나 심술 궂은 설정 이란 말인가? 그것도 '지구 상'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주에서는 늘 저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건가? " 그럼 굳이 이 지구까지 와서 평화를 지킬 것 까지야…. " 수정의 지나가는 중얼거림. 그것은 무의식 중에 울트라맨 프로의 어폐를 찌 르는 날카로운 말이었던 것이다. 츠부라야 프로덕션….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울트라맨의 활동 시간을 3분으로 제한했단 말인가? 어째서? 그 의문 은 시더의 다음 말로 어느 정도 납득 될 수 있었다. " 아마 그것은 제작 측의 사정 때문이었겠지.우선 프로그램 방송 시간의 문 제! 30분 짜리 프로일 경우 CM과 오프닝,예고편 등의 시간을 제외하면 실 질적으로 작품이라 불리는 부분은 20분 내외. 여기에 매회 사건의 발생과 인간 드라마, 적의 출현, 거리의 피해, 공격… 등의 표준 구성을 집어 넣 다 보면 필연적으로 영웅의 등장 시간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두 번째로 에산의 문제! 거대 괴수와 영웅의 출현 시간을 늘리면 특수 촬영 용 세트를 하나 더 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 지! 아무래도 40m 거대화 란 설정이니 주위의 건물들이 축소된 디오라마 세트에서 싸워야 되지 않겠어? 이런 점에서 사람 사이즈의 영웅 물에서는 대부분 시간 제한이 없었다고. " " ......... " …이 정도되면 더 이상 웃고 넘길 수만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뭔가 설명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는데 결국 중요한 것은 울트라맨의 활동 제한 시간이 3분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황은 피스메이커 측에 유 리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 …현 시각 8시 10분. …몬스터가 출현한지 15분 경과했습니다.>> 맥빠진 윤채영의 보고에 모두는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시더는 화면 상의 몬스터에게 항의하듯 소리쳤다. " Foul Play! 반칙이라고! 설정은 지켜줘야 할 거 아냐?! " " …하아…. " 뭐, 적에게 그런 설정까지 바라는 게 더 반칙이지 않을까나…. 그렇게 작전 본부실의 상황을 뒤에서 조용히 주시하던 진 사령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적의 동태는? " << 현재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 " 민간인의 대피 상황은? " << 29구역의 쉘터 안에서 현재, 인원 조사에 들어가고 있습니다.앞으로 5분 뒤면 체크는 완료됩니다. >> " 그래…. " 채영의 보고를 잠자코 듣던 진 사령관은 다음 지시 사항을 내렸다. " ABF 가동.그리고 위그드라실의 락(Lock)을 가동시켜라. 범위는 29구역 상 에 있는 사인(sine) 파와 펄스(pulse) 파. " << ABF 가동! 반송파(搬送波) 발생시킵니다. 간섭잡음(干涉雜音) 발생! 29 구역의 모든 반송파는 앞으로 1시간 동안 그 기능을 상실합니다! >>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비롯하여 무선통신에서 정보를 실어보내는 사인 파와 펄스 파를 반송파라 칭한다. 지금 피스메이커는 전파 상호간에 간섭을 일으 켜 수신 방해를 일으키려는 것이다.이로써 29구역의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마 비. 몬스터의 모습을 대중에게서 감추는 것이 가능해졌다. 몬스터의 모습이 민간인에게 공개되었다가는 그 돌아오는 것은 혼란과 패닉 뿐이다. " 29구역의 쉘터에 민간인이 모두 대피되는 데로 최면 방송을 내보내도록. 절대로 몬스터의 존재를 공개해서는 안된다. " << 피스-! >> 민간인은 몬스터의 존재 유무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 그 이상의 정보 유출 은 용납 못한다. 진 사령관의 선글래스 안의 두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하실 작정이시죠? 역시 '그것'을 사용하 실 건가요? " " …아니. 시기상조다. 상대에게 이 쪽의 히든 카드를 먼저 보여줄 수는 없 는 노릇이지. 무엇보다도… " 진 사령관이 시더를 돌아보자, 그녀는 얼굴에 쓴 안경을 살짝 쓸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직 '아더(Artur)' 군을 움직이게 하기에는 여러 요소들이 부족해요. 무 엇보다 피스 블루와 피스 핑크의 각성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죠. " " …그렇…지요. 하지만… 지금의 전력 만으로는…! " 수정은 반박하려고 했지만, 그런 그녀의 말을 진 사령관은 단호하게 끊었다. " 지금의 전력 만으로도 충분하다. 피스 블루는 나머지 대원들이 29구역에 도착할 때 까지 사태를 주시하며 대기하고 있도록. " << …피스. >> 진 사령관의 명령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답하며 스크린의 창을 닫는 가인.수 정은 그런 진 사령관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메인 스크린을 돌아 보며 한숨 을 쉬었다. 메인 스크린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채 침묵하고만 있 는 울트라맨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 …40m의 초인과 2m 인간의 싸움이라니… ' …그런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29구역에 계신 모든 시민 분들에게 알립니다. 29구역에게 계신 모든 시민 분들에게 알립니다. 이 방송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은 침착히 가까운 지하 의 대피소로 피난해주시길 바랍니다. 정확히 2분 뒤면 모든 대피소의 문 에 락이 걸리니, 시민 분들은 걸음을 서둘러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알려 드립니다… 》 사이렌 소리에 걸맞지 않은 귀여운 여자 목소리의 대피 방송이 29구역에 설 치된 스피커들을 통해 방송 되었다. 이미 대피는 신속히 이루어져 거리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인적이 사라진 29구역의 지하 철 역 부근에서 푸른 A.I 컴플릿 세트를 장착한 가인 만이 홀로 두려운 눈으 로 눈 앞의 거대한 존재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 우우우우우우…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그 40m의 몸으로 서있는 울트라맨. 가인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에 몸을 숨긴채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번 와이번을 상대할 때도 그 거대한 크기에 압도당했었는데 이번에는 거의 2배에 가까운 크기의 괴물이다. 도저히 저런 것을 인간이 정면으로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 다. ' 잘못하다가 밟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즉사겠지…. ' 그야말로 사람과 개미의 싸움. 바로 그것이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 가인 은 대기하고 있으라는 진 사령관의 명령에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서 한 숨을 내쉬었다. ' 하지만… 저런 녀석을 상대로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 가인은 이를 악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뭔가를 해야된다는 초조함과 거인의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해지는 무기력함이 그를 사로 잡았다. 일단 지금의 그 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기다리는 수 밖에…. ' 진우 씨들이 올 때까지…. 그때까지 저 괴물이 지금처럼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제발 꼼짝 말고 있어라! 제발…! - 삐삐삐! 그때, 갑작스럽게 울리는 신호음. 가인은 깜짝 놀라 자신의 손목을 바라 보 았다. 신호음은 손목에 찬 무전기에서 울려 오는 것이었다. 무전기의 액정에 는 PEACE GREEN이라는 영문이 찍혀 있었다. 진우 씨! 젠장! 깜짝 놀랐잖아?! 가인은 무전을 켜며 잔뜩 불만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 뭐,뭐에요? 놀랐잖아요? " << 자자∼ 덕분에 긴장도 풀어지고 좋잖아∼ 어때,소년? 몬스터에게 별 다 른 움직임은 안 보여? >> 진우의 농담 섞인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자 가인은 마음 속 한 켠으로 안 도하고 있었다. 언제나 진우에게 화 밖에 낼 줄 모르는 소년이었지만, 가인 은 진심으로 진우를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이런 심정을 진우에게 들 켜서는 안되겠지만. 절대로! " …글쎄요. 지금까지는 조용한 걸요? 저럴 거면 뭣 때문에 나타난 건지,원 …. " << 오∼ 마치 움직여 달라고 녀석에게 부탁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 "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저 괴물이 움직이면 무슨 수로 녀석 을 막아낸단 말이에요? 뭔가 본부 측에서는 대책이라도 있는 거에요? " 기겁을 하며 진우의 말을 부정하는 가인. 진우는 그런 그의 반응에 더더욱 장난끼 서린 목소리로 무전을 쳐왔다. 정말이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라니… 긴장감과는 전혀 담을 쌓은 인간이 분명하다. << 전혀∼ 아무런 대책도 없는 모양이던데? 모든 걸 우리에게 맡기겠다는 식이야. >> " .........젠장! " 가인은 짧게 혀를 찼다. 제길! 진 사령관, 그 작자는!! 정말이지 무책임 하 기 그지 없는 작자로군! 총 사령관이나 됐으면 뭔가 대책을 마련해 보란 말 이야! 모든 걸 맡기겠다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 어쨌든, 지금 시민 씨와 마리 양과 함께 그 곳으로 달려가는 중이니까… 절대로! 절대로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몬스터의 상태를 살피고만 있어야 한다! 알았지? 아무리 한창 욕구 불만인 소년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저런 녀석에게 달려들었다간 혼이 날 테니까∼ >> " …도대체 누가 욕구 불만인 거에요?! 누가! " 그리고 혼자서 달려든다니…. 그런 무모한 짓은 이쪽에서 사양이라고! 그런 가인의 날카로운 반응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건지 진우의 무전은 끊어졌고,가 인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골목 쪽에서 조심스 럽게 몬스터를 올려다 보았다. 하여간 크기는 무지막지하게 컸다. 저 히어로 매니아 자식…. ' 그런데… 시민 씨와 마리 선배가 같이 오고 있다고…? 유리와 부르스는? 따로 온다는 소리인 걸까? ' 가인은 진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유리는 어제가 신 체검사 날이었으니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에서 출발했을 것이고, 부르스는 그 런 유리를 따라갔으니… 아마 행동을 같이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진우 씨와 시민 씨,마리 선배는 26구역의 자택에 있었을 테니 그 곳에서 같이 오고 있 는 것일 테고…. 그렇게 생각하던 중, 가인의 생각은 시민에게서 다시 멈춰 졌다. ' 그나저나 시민 씨…. 이제는 화가 풀리셨을려나…. ' 어제는 그렇게나 화를 내셨는데…. 한번도 자신에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던 그녀가 유래 없이 화를 냈다는 점이 더 마음에 걸렸다. 가인은 가슴 한 켠이 무거워져 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너무 도 난감했다. 그냥 무릎 꿇고 손발이 닳도록 빌고 또 빌어봐? …아니야. 그 래도 그렇게 까지 할 정도로 잘못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 테레이아의 병 간호 때문이었다고….내가 뭐,밤의 거리를 나돌아 다닌 것 도 아니고 폭주족 패거리들과 어울려 다닌 것도 아닌데… 뭣 때문에 이렇 게 까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거지…? 그리고 또 외박한 게 뭐 어때서? 물론 시민 씨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갑작스레 외박을 하게 된 건 분명 사과 해야겠지만 이제 난 고교생이라고…. 내 몸 하나 쯤은 챙길 수 있는 나이라는 거야…! ' 뭔가 타당성은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외박의 이유들을 찾아내는 가인. 그렇 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점점 시민에게 야단 맞은 것이 분한 그였다. 분명 그 녀에게서 그렇게 까지 야단 맞을 짓을 한 건 아니라고….그래! 난 잘못한 거 없어! 난 오히려 테레이아의 병 간호까지 하며 밤을 지샌 몸이라고! 칭찬을 해줬으면 해줬지 야단이라니! ' 억울해! ' 여자애와 단 둘이서 밤을 보냈다는 사항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 신만 잘났다고 외치다니…. 오늘 부로 그를 비 양심 파렴치한 이라고 불러주 자. 어쨌든, 그렇게 몬스터를 앞에 두고 온갖 잡생각을 하고 있던 가인. 그 리고 그런 그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 우우우우우우우…! 순간, 강하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직일 기세를 보이는 울트라맨. 가인은 그런 몬스터의 반응에 대번에 잡념을 떨쳐내고 두눈을 휘둥그래 떴다. " 이,이 자식…! 움직이려는 건가?! " 갑자기 왜?! 그러나 그런 그의 의문을 뒤로 하고 40m의 거구는 한발짝을 떼 어 움직였다. - 쿵! " …크윽! " 울트라맨이 한발자국을 내딛는 것 만으로도 그 주위의 지표가 지진파에 의 해 파도가 치듯 출렁거렸다. 가인은 넘어지지 않도록 골목의 벽을 부여 잡으 며 그 진동을 견뎌내었다. 마,맙소사….단지 걷는 것 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 쏘아아아아아아아!!! - 터엉---------!!!! " .........!!! " 하지만 다음 순간 울트라맨이 근처의 20층 빌딩에 주먹을 휘두르는 행동에 가인은 더더욱 놀라야만 했다. 단지 휘둘렀을 뿐인데 건물은 마치 레고로 쌓 은 장난감 집을 무너뜨리는 것 처럼 조각 조각나며 부서져 내린 것이다. - 쿠구구구구구구… " 으,으앗!! " 가인은 기겁을 하며 재빨리 골목의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두동강이 나서 쓰 러져 내리는 건물이 하필이면 가인이 있던 골목 쪽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가 인은 A.I 슈츠에 오라를 불어 넣으며 골목의 양 벽을 번갈아 도약하여 골목 에서 10여 미터 가량을 재빨리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콘크리트가 박 살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 콰지지지지직!! 제,젠장! 가인은 떨리는 다리로 근처의 건물 옥상에 내려서며 자신이 서있 던 골목을 돌아 보았다. 그곳은 이미 쓰러진 건물 자재와 무너져 내린 콘크 리트들로 폐허가 된지 오래였다. 피어오르는 거대한 흙 먼지들 사이로 울트 라맨이 노란색 눈을 빛내며 서 있는 모습에 가인은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 다.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진우에게 무전을 쳤다. " 진우 씨! 큰일 났어요!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 << …이런 젠장…! 역시 우리가 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 것은 너무 무 리한 부탁이었을려나…. 이봐, 소년! 몬스터의 근처에 민간인들이 있는 지 살펴봐! 모두들 대피한 건가?! >> " 아,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요. " 가인은 쥐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를 않는 29구역의 거리를 둘러보며 말했 다. 몬스터가 출현한지 12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사람들의 대피 활동은 체계 적이면서도 신속하게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시민 의식이 확고히 자리 잡았 다고 해야 하나? 무엇보다 대피를 하지 않아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맏이 한 민간인들의 사망 소식이 뉴스에 뜨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더욱 빨라졌 지만…. << 좋아. 일단 우리가 도착할 때 까지 녀석이 마음껏 활보하도록 내버려 둬. 아직 몬스터에게 위치를 들킨 것은 아니겠지? >> " 예, 아직까지는…. " << 도시가 꽤 파괴되기는 하겠지만… 뭐, 환경 미화원들에게 꽤나 잔소리를 들을려나? 어쨌든, 절대로 몬스터와 접촉하지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알 았지? 섣불리 녀석과 조우하지 말고! >> "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 가인은 혀를 차며 옥상에 몸을 숨겨 몬스터를 지켜보았다. 울트라맨으로 변 한 저 히어로 매니아는 천천히 그 발걸음을 떼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녀 석이 한 번 걸을 때마다 주위의 건물들이 파르르 진동을 하며 흔들렸다.그나 저나 저 자식… '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거지? ' 뭔가 아무런 목적 의식도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아무 생각 도 없는 거 아냐? 울트라맨은 말 그대로 거리를 걷고만 있을 뿐, 간혹 가다 가 자신을 가로 막고 있는 건물들을 무너뜨리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다. ' 하아…. 그나마 사람들이 대피하여 인명 피해가 없는 게 다행이로군…. ' 저런 상태라면 진우들이 올 때 까지 내버려 두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단지 저 녀석이 무분별하게 어딘가로 계속 걸어가는 것 같아서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지만….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거야? ' 잠깐…. ' 순간, 가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저 녀석이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은… ' 테레이아의 맨션이… 있는 곳…? ' 서,설마…. 저 녀석이 거기로 갈 이유가 뭐가 있다는 거야? 그래. 하필 그 곳으로 갈 이유가… ' 왜 하필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야?! ' 저 망할 몬스터가?! 가인은 이를 악물며 거리를 걷고있는 울트라맨을 조마 조마한 심정으로 바라 보았다. 제,제길! 그쪽이 아니잖아?! 다른 방향으로 가라고! 야,이 자식아! 넌 방향도 틀 줄을 모르는 거냐?! 앞으로만 걷지 말 고 다른 쪽으로도 가보라니까?! ' 테레이아…! 대피했을까?! ' 가인은 몬스터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 있을 테레이아를 떠올리며 불안한 가 슴을 부여잡았다. 그,그래. 이렇게 요란하게 대피 방송을 했는 걸. 분명 다 른 사람들과 함께 대피했을 거야! 이런 어처구니 없는 전장에 남아 있을리가 없잖아? 내가 그녀를 걱정할 필요 따위는 없다고…. ' 하지만 많이 아팠는데…. ' 그렇다. 테레이아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많이 아팠지 않은가? 아침에 그 녀의 집에서 나오기 전에 살펴 봤을 때는 꽤나 상태가 좋아져 있었지만, 만 약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대로 정신을 잃고 계속 자고 있었더라면 대피방 송을 못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젠장!!! " << …어이? 소년? >> 가인의 이상한 기색을 무전 속에서 느낀 진우가 그를 불러보았지만, 가인은 이미 반대편 건물로 도약하여 날아 오른 뒤였다. 그는 재빨리 건물과 건물의 수풀 사이를 누비며 몬스터 보다 한 발 먼저 테레이아가 살고 있는 맨션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계속 되어 들려오는 진우의 무전 소리도 그의 귀에는 들려 오지 않고 있었다. ' 제발…. 제발 테레이아… 반드시 대피해 있어줘…! ' 제발 그 곳에 있지 마!! " .........?! " 29구역의 한 건물 옥상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리리스는 그 눈꼬리를 잠시 파 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건물을 뛰어다니며 울트라맨을 앞질 러 어디론가 향하는 오라 능력자의 모습이였다. 푸른 오라의 빛이 그에게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저것은 분명… 유가인…. 그였다. ' …어디로… 가는 거지? ' 그것도 몬스터에게 들킨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그냥 다른 동료들이 올 때 까지 숨어 있는 것이 이로울 텐데…. 그렇게 리리스가 가인에게 한 눈을 팔고 있자 그녀의 곁에 있던 초류향이 그 차가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 …왜 그러는 거지, 리리스? " " 아,아니…. 아무 것도…. " 리리스는 서둘러 답변하며 눈을 가인에게서 울트라맨을 향해 돌렸다.초류향 은 그런 그녀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들이 만들어낸 마정 의 숙주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 이대로 얼마나 방치해두고 있어야 하는 거냐? 조금있으면 그 쥐새끼 같은 오라 능력자들이 나타날 게 분명한데…. " " …마정의 핵이 가이아의 정으로 충만해질 때.아직은 거두어 드릴 때가 아 니야. 어차피 오라 능력자들과 마주 쳐도 사태는 변하는 게 없으니까 그 만 조바심을 부리지, 초류향? " " 흥…. 누가 조바심을 부렸다고 그러는 거냐. 단지 저번과 같은 곤란한 사 태는 이제 사양하고 싶었을 뿐이다. " " ......... " 초류향은 섭철선을 펼쳐 얼굴을 부치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가 말한 곤란한 사태라는 것은 분명 리리스가 피스 그레이 부르스에게 당한 사건을 말하는 것일테지…. 리리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런 초류향을 노려보았지만,그는 그 녀의 시선을 모르는 척 하며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용케도 이런 발상을 해냈군. 가이아의 정을 끌어모으는 마정의 숙주라니…. 단순한 기생체인 줄로만 알았건만. " " …3차원의 인간들이 품고 있는 정은 가이아의 옴팔로스가 내린 뿌리의 한 가닥들이지. 그 양은 극히 미비하지만 이렇듯 그 용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증폭시키는 게 가능하다.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힘,오라는 3차원 인간들 의 것 만이 아니라고. " 코웃음을 치며 거대한 히어로 매니아의 모습에 만족스런 눈길을 보내는 그 녀. 초류향은 그런 리리스의 모습에 한 가닥의 경각심을 느끼며 생각했다.분 명 그녀의 방법은 효율적이지만… ' 위험하군. ' 도리를 벗어났다고 해야할까…. 점점 주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 는 것만 같았다. 초류향의 눈에 비친 리리스는 언젠가 그 3차원을 향해 피워 올리던 불길을 자신들에게 까지 향하게 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모든 것을 불 태워 버릴 것 같은 재앙의 전조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런 초류향의 예 감이 들어 맞게 된 것은 그로부터 많은 시일이 지난 후였다. " ......... " 그렇게 초류향이 자신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 하며 리리스의 주의는 여전히 피스 블루 유가인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살짝 아랫 입술을 깨물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 내가… 뭣 때문에 이렇듯 저 오라 능력자를 신경 쓰고 있는 거지? ' 리리스는 자신의 마음에 의구심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래.그는 오라의 주인. 옴팔로스로 향하는 데 필요한 열쇠다. 그것 만으로도 자신이 그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충분했다. 리리스는 애써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납득시키며 자 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 나는 그를… 이용하는 것 뿐이다…! ' 그래. 단지 그런 관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었다. 하지 만… - 테레이아는 혼자가 아니야. …어째서… 그 아이가 했던 말이 이렇게 까지 머리 속을… 멤도는 걸까…. ' 설마…. ' 리리스는 황급히 시선을 저 멀리까지 떨어진 유가인을 향해 돌렸다.그가 저 렇게 서둘러 어딘가로 향하는 이유를 어렴풋하게 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뇌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 ' 혹시… 내가 아직도 그 맨션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 그럴리가…. 그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 테레이아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혼자 두고 갈 수가 있겠어? 그런 바보 같은…! 리리스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하던 가인의 모 습을 기억해냈다. 그렇다. 그런 아이인 것이다.저 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 했다. ' 저 바보가…!! ' 리리스는 주먹을 움켜쥐며 초류향을 돌아 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지 때맞 춰서 그들의 신경을 자극하는 이색적인 기운 셋이 느껴져 왔다. 오라 능력자! 그들이 이 곳에 거의 당도한 모양이었다. " 초류향! 느꼈겠지? " " 아아…. 귀찮은 버러지들이 느껴지는 군. 세 명인 건가? " 초류향의 차갑게 흐르는 두 눈동자가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 이 느껴지고 있었다.그가 가장 증오해 마지 않는 삼차원의 하수인들이…! 하 지만 섭철선으로 가린 그의 입은 자꾸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피스 그레이 부르스…. 그의 기운은 느껴지지를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 될 것은 없 었다. 리리스는 그런 초류향을 힐끗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 절대로 그들이 마정의 숙주 쪽으로 향하게 하지 마라! 난 이대로 저 아이 를 따라갈 테니…! " " 후… 바라는 바다. " 리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등 뒤의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쳐 도심을 가르며 날 아갔고, 초류향은 불꽃으로 몸을 휘감으며 사라졌다. " 헉…! 헉…! " 가인은 무서운 속도로 도심의 빌딩들을 누비며 달려나갔다. 29구역은 통근, 통학,쇼핑,오락과 관련된 위성 도시의 성향이 강했기에 대도시와 같은 번잡 함은 없었다. 그나마 아파트 단지 내에 자리 잡고 있던 인구도 대피 방송으 로 모습을 감춘 지금, 거리는 그야말로 한산 그 자체였다. 가인은 건물 위에 서 깨끗하게 보도 블럭이 깔린 광장으로 착지하며 재차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자취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그 뒤를 거대한 몬스터의 발이 뒤따랐 다. '쿠웅!' 무지막지한 울림 소리가 퍼지며 광장의 보도 블럭들이 산산히 부서진채 거대한 발자국을 남겼다. ' 저기다…! ' 그렇게 최대한 울트라맨과의 거리를 벌릴려고 노력하는 가인의 눈으로 테레 이아가 살고 있는 맨션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506호. 5층 이었다. 하지만 지금 계단으로 올라갈 시간은 없었다.가인은 대충 그녀의 방 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되는 5층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A.I 슈츠로 푸른 오라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 차앗---------!!! " 땅을 박차며 허공을 가르는 가인. 그가 차올린 보도 블럭이 흙먼지를 뿌리 며 뒤로 박살나 날아갔다. 가인은 단번에 15m나 되는 높이를 무리 없이 날아 오른 것이다. 가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10m가 한계인 A.I부츠의 점프 력은 가인의 비약적으로 상승한 오라 능력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가인은 테레이아의 베란다에 무리 없이 내려서며 재빨리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테레이아?! 테레이아!! 안에 있는 거야?! " 그는 황급히 룸 안을 둘러보며 테레이아를 찾았다. 혹시 다른 룸으로 들어 온 것이 아닐까 하여 재차 확인해보았지만 이 곳은 테레이아 민체스터의 룸 이 확실했다. 무엇보다 부엌에 자신이 차려놓은 죽이 그 증거였다.흩트러진 침대 시트. 하지만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 테레이아… " 대피…했었구나…. 그제서야 가인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 내 렸다. 다행이다.정말 다행이야…. 가인은 자신의 노파심을 꾸짖으며 다시 베 란다로 나왔다.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에 잠시 시야가 가려졌다. - 후우우우우우우… 아마도 테레이아가 무사히 대피했다는 것에 잠시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 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와 같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 .........!!! " 막 베란다에서 뛰어내릴려던 가인은 자신에게서 햇빛을 가리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와 맞닥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인의 표정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베 란다에서 나오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 제길…!!! " 울트라맨으로 변한 히어로 매니아, 바로 그것이었다! 녀석은 몸을 숙인 채 베란다에서 나오려던 가인을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재빨리 베란다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가인이 범한 또 하 나의 실수였다. - 쏘아아아아아아아…!! 헉…. 짧게 숨을 들이키는 가인. 그리고 그런 그의 몸을 거대한 주먹이 거 세게 훑고 지나갔다. 가인은 자신의 전신이 박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콰직! 세상이 붉게 물들어 갔다. - 큐우우우우웅… 29구역의 철도 위로 지금은 철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파시 넘버의 증 기 기관차가 멈춰섰다. 디젤 기관차도 사라진 2032년에 증기 기관차가, 그것 도 지하철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상당히 세기의 흐름을 무시하는 장면 이 연출되었지만 그것은 겉으로 만 보이는 모습일 뿐.실은 이 증기 기관차는 자동 열차 제어장치(ATC)와 열차 집중 제어장치(CTC) 등의 기술이 집약된 특 수 전동차로 시속 20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다는 일본의 신칸센(新幹線)과 도 맞먹는 초고속을 자랑하는 피스메이커의 자기 부상 열차(magnetic levita tion train)였던 것이다. 피스 대원들은 이 광속 기차로 서울의 지하를 신속 히 누비며 몬스터의 발생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 철컹! 기관실 한 칸으로만 이루어진 증기 기관차의 옆 문이 열리며 3명의 피스 대 원들이 서둘러 플랫 홈에 내려섰다.그 중 녹색의 A.I 슈츠를 입은 피스 대원, 피스 그린 정진우는 다급한 얼굴로 무전기에 소리를 치고 있었다. " …어이? 소년? 소년! " << ......... >> 무전기 너머에서 대답해야할 소년에게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피스 블루, 유가인. 그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히어로 매니아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으라는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는 자리를 이탈한 것이 었다. 진우는 인상을 굳히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이 바보가! 제멋대로 굴고 있어! " " 진우 씨? 그게 무슨 소리에요?! " 그런 진우의 반응에 불안한 목소리로 묻는 피스 옐로우, 한시민. 그녀의 옆 에서 오라 소드를 꺼내들던 피스 레드 성마리도 진우에게 물었다. " 피스 그린! 가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 " 아,젠장∼ 이 바보 같은 녀석이 기다리라는 말도 듣지 않고 자리를 이탈 했지 뭡니까! 하여간 이 사형의 말이라고는 지독스럽게 듣지 않는 말썽쟁 이 사제 같으니라고! " 만약 이 자리에 가인이 있었더라면, '누가 당신 사제야!'라고 반박했겠지만 그 반박해야할 이는 한창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중이었다. 진우는 이를 갈며 마리와 시민에게 소리쳤다. " 이 바보 녀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 전에 어서 움직이자구요! " - 탁! 진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리와 시민은 위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로 달려 나갔다.진우는 그런 그녀들의 뒷 모습을 뒤 쳐지면서 멍하니 바라보 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재빨리 자신도 그 뒤를 따랐다. 29구역의 지하철 역은 이미 대피 방송으로 인해 어떠한 사람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그래서인 지 진우들의 뜀박질 소리 만이 유독 지하철 역에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 탁! 탁! 탁! 탁! 어두운 역 안에 울려퍼지는 그들의 뜀박질 소리. 29구역의 지하철 역은 대 피 방송과 함께 미연의 사고를 방지 하기 위해 그 전기가 차단 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아침 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역은 짙은 어둠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마리와 나란한 속도로 달리고 있던 시민은 아랫 입술을 깨물며 생 각했다. ' 가인 씨…! ' 하필이면 테레이아의 병 간호로 그가 29구역에 있을 때, 몬스터가 그곳으로 출몰할 줄이야…. 이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미 수 차례,가인이 있 는 곳에서는 언제나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 설마…. ' 오라의 주인. 그 이유 밖에 없었다. 몬스터들은 오라의 주인을 목표로 삼은 것이 분명했다.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몬스터들은 가인의 주위를 멤 돌고 있었다. ' 뭣 때문이지…? ' 이차원의 존재가 삼차원의 존재에 관심을 보이다니…. 그것도 삼차원 유클리 드 공간의 근원적인 힘, 오라의 주인에게…. 몬스터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것은 가인의 각성과도 관계가 있는 것일까? 가인의 모 습에 피스 블랙, 한시영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다. ' 가인 씨, 제발 무사해요…! ' 시민은 불안으로 죄어 오는 가슴을 애써 참아내며 어둠을 갈랐다.그때,그런 어두운 홀 안에서 촛 불이 켜지는 것 처럼 작은 불빛들이 저 멀리서 부터 켜 져오기 시작했다. " .........?! " 달려가던 것을 멈추며 재빨리 오라 소드로 발검 자세를 취하는 마리.그녀는 날카롭게 번뜩이는 안광으로 저 멀리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불빛들을 노려 보 았다. 뭐지, 저것은?! - 파파파팍! 순간, 촛불의 불길이 다른 초에 옮겨 붙듯 불빛은 순식간에 그 수를 늘리며 마리들이 서 있던 홀에 까지 퍼져 나왔다.당황하며 경계의 태세를 갖추는 그 들. 마리는 굳은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며 진우에게 나직히 물었다. " 이건…? " " …아무래도 쉽게는 못 지나갈 상대가 나타난 것 같은데요. " 무거운 탄식을 흘리며 주먹을 움켜쥐는 진우.그리고 그의 말에 답하듯 그들 의 앞으로 거대한 불꽃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모여들었다. " 후후후후후… 꽤나 맹랑한 소리를 하는구나,인간! 지금 그 말은 이 몸이 지키는 이 곳을 어떻게든 지나가겠다는 소리인 거냐? " " .........! " 이 목소리는?! 마리와 진우는 불꽃 속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웃음 소리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이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 용마인?! "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용마인, 초류향. 그가 진우들의 앞에 모습 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는 수중의 섭철선으로 입을 가리며 경멸의 눈초리를 진우에게 보냈다. " 후, 그 두 눈이 장식품은 아닌 게로군. 어쨌든, 너희들은 지금부터 이 자 리에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아니… " 푸른빛으로 물들어가는 초류향의 눈동자. 그와 동시에 그의 초록색 머리카 락들이 한올 한올 꿈틀거리며 바람도 없는 허공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진우 와 마리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대단한 살기다! 인간을 원천 적으로 싫어하는 저 순수한 살의의 감정. " 이 곳을 너희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언제나 눈에 거슬리는 쥐새끼들! 다시는 지상 구경을 못하도록 만들어 주지! " " 누가 쥐새끼냐!! " 순간, 뇌의 주파수를 끌어올리며 초류향에게 달려나가는 피스 그린. 그리고 예의 잔향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그와 동시에 진우의 몸은 초록색의 잔광 만 을 남긴채 초류향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치이이이이이이잉!! " 흥! " 어느새 초류향의 뒤에서 나타나 그에게 번개같이 주먹을 내찌르는 정진우. 초류향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섭철선을 들어올리자, 그의 등 뒤로 불의 벽이 치솟아 오르며 진우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정진우는 이를 악물며 몸의 속도를 음속으로 끌어 올려 불꽃의 벽을 돌파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거세게 진각을 밟으며 초류향에게 권을 날렸다. " 칠성권(七星拳) 무곡(武曲)! " 운체풍신술 칠성권의 일곱 개의 주먹 중 속도를 중시한 여섯 번째의 발경! 그것이 초류향을 감싸고 있던 몇 겹의 불꽃들을 꿰뚫으며 그에게 날아들었다. 초류향은 그런 진우의 주먹을 향해 섭철선을 그으며 소리쳤다. " 갈(喝)! " 순간, 칼 같이 날카로운 직선의 폭파가 일어나며 주먹을 내뻗던 진우를 불 꽃의 단면적이 가로로 날카롭게 지나갔다. 그리고 진우는 폭팔의 여파와 함 께 불꽃에 휩싸여 뒤로 퉁겨 나갔다. " 크억! " - 스칵! 하지만 진우를 떨어뜨렸다고 초류향이 마음을 놓는 사이, 날카로운 붉은 색 의 검기가 그의 도포 자락을 갈랐다. 진우에게 초류향의 시선이 가있는 틈을 타서 어느새인가 마리가 그에게로 쇄도해 들어왔던 것이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이름 그대로의 섬광과도 같은 검격! 마리의 오라 소드는 초류향의 앞에 생 성되는 불꽃의 보호막들을 섬광과도 같이 조각 조각 내어버렸다.초류향은 이 를 갈며 섭철선을 들어올렸다. 이것들이! 처음부터 협공 할 생각이었던가?! " 건방진 인간 계집이!! " " 사식(四式) 단월(斷月) " 한치의 쉴틈도 주지 않고 쾌속의 찌르기로 공격해들어오는 그녀. 초류향은 즉각 섭철선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불꽃의 검을 만들어내어 마리의 오라소드 를 쳐올렸다. 하지만 마리의 찌르기는 순간 세번의 변화를 만들어 내며 이형 의 움직임을 보였다. " 이형(異形) 잔월(殘月) " - 즈컥! 단월의 또 다른 모습.잔월! 그것은 초류향의 불꽃의 검을 가름과 동시에 그 육체 또한 붉은 직선으로 그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마리의 오라 소드에 당 한 초류향은 그 몸의 베인 면에서 불꽃을 피어 올리며 뒤로 물러났다.마리의 회심의 일격에 당한 것 치고서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지만,그 얼 굴은 수치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역시 이것들은…! ' 방심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피스 그레이 부르스와는 그 격이 다르긴 했지 만 조금만 틈을 보여도 매섭게 자신의 목을 노려오는 녀석들이었다. 단순히 삼차원의 파수꾼들이라고 경시하다가는 되려 자신의 목이 떨어질 판이었다. 하지만 피스 대원들의 연합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피스 옐로우의 공명음이 날카롭게 대기를 가르며 초류향에게 날아든 것이다. 공명음 특유의 진동음이 초류향의 밑에서 들려왔다. - 위이이이이이잉!! " 큭! " '콰앙!!' 폭파! 거세게 회전하며 불꽃의 소용돌이로 터져오르는 콘크리트의 파편들을 피해내는 초류향.그러나 시민의 공명음은 그런 초류향을 놓치지 않 고 연신 폭발을 일으키며 쫓아왔다. 초류향은 소용돌이를 풀며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 귀찮다-------!!!! " - 쿵! 초류향이 자신의 앞으로 터져오르는 콘크리트의 바닥을 향해 거세게 오른발 을 굴렸다. 그러자 콘크리트의 폭파가 멈추며 저 멀리 시민이 서 있던 발 밑 으로 거대한 불꽃의 불기둥이 터져 오르는 것이었다. 시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불꽃의 기둥에 온 몸이 휩싸였다. " 시민 씨!!! " 짧게 울려퍼지는 마리의 외침. 그러나 초류향은 자신의 뒤에서 날아드는 무 시무시한 투기의 덩어리에 미처 시민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며 몸을 피해야만 했다. 그곳에는 분명 불꽃에 몸이 휩싸였다고 생각되었던 진우가 귀신 같은 분노를 표하며 달려들고 있었다. " 하아아아아아아앗!!!! " - 칭! 칭! 치이이이이이잉!! 가속! 가속! 녹색의 잔상만을 남기며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진우.하지만 사 라진 것이 아니었다. 음속의 벽에 접어든 것이었다. 그리고 초음속(超音速)! 마하수가 커짐에 따라 압축성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물체 표면에서는 국소적으로 초음속이 되는 부분이 생기며, 여기서 충격파가 발생한다. 진우 가 초류향에게 주먹을 휘두르자 강렬한 충격파가 생성되어 그를 노렸다. - 투투투투투투퉁! 초류향의 전신에서 터져오르는 진우의 충격파! 그리고 충격파로 부서진 육 체에서는 불꽃들이 피처럼 터져 올랐다. 자신의 몸에서 불꽃의 분수들이 흘 러나온다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깨달은 초류향은 순간, 괴성을 지르며 두눈을 붉게 물들였다. - 크롸아아아아아아!!! " .........!!! " 그리고 짙은 선홍빛의 화염으로 붉게 물드는 그의 몸. 그것은 주위의 공기 를 강하게 빨아들이며 데토네이션(detonation)을 준비했다. 진우는 이를 갈 며 A.I 슈츠의 오라 쉴드를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 시민을 부축하던 마리 역 시 숨을 흡 들이키며 오라 쉴드를 펼쳤다. - 푸콰카카카카칵!! 격렬하게 홀 안을 뒤덮으며 폭음과 함께 발생하는 이상폭발(異常爆發)! 그 것은 마치 화산 폭발 처럼 지하철 역 안을 불꽃으로 가득 메워 버렸다. 순식 간에 29구역 지하철 역의 절반을 폭파시키며 그 잔해 속에서 초록색 머리카 락을 넘실거리며 서있는 푸른 도포의 남자. 초류향은 끓어 오르는 기운을 가 라 앉히며 언짢은 기색으로 섭철선을 펼쳐 들었다. 그의 찢어진 도포와 부서 진 육체는 어느 사이엔가 원 상태로 멀쩡히 돌아와 있었다. " 이 기어다니는 벌레 같은 족속들…! " 초류향은 폐허의 잔해 속에서 간신히 오라 쉴드로 폭굉을 버텨낸 오라 능력 자들을 바라보았다.마리와 시민이야 폭발 속에서 그나마 떨어져 있었기에 어 떻게든 버텨낸 모양이었지만, 폭발의 근원지에 있었던 진우는 비틀 거리다가 초류향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라 쉴드로 열기는 막아냈다고 하더라도 약 50atm에 가까운 압력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진우는 악물은 이 빨 사이로 피를 흘리며 바닥에 몸을 쓰러뜨렸다. 초류향은 그런 진우의 머리 를 발로 밟아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거슬린다. 네 놈들의 존재가 내게는 치가 떨릴 정도로 거추장스러워! 오 늘로서 네 놈들의 존재 자체를 뿌리째 뽑아주마! 이 이상 우리의 일을 방 해하지 못하도록 저 세상으로 보내주지! " " 으으으윽…. " 신음을 흘리며 부릅 뜬 눈으로 초류향을 노려보는 진우. 그런 그의 눈빛에 초류향은 비릿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 분노하는 건가? 그렇다면 자신의 무력함에게로 그 분노를 보내도록. 모든 건 네놈들이 허약할 정도로 약해 빠졌기 때문이니까. 어디 살려달라고 벌 레 처럼 빌어 보시지? " " 쿡…. 엿이나… 먹어라…!! " " ........?! " 순간, 전투 기능을 상실했다고 여겨진 진우의 육체가 움직였다. 그는 고개 를 비틀어 초류향의 발에 밟혀 있던 머리를 비틀어 빼냄과 동시에 손으로 땅 을 짚고 발을 차올렸다.진우의 두 다리가 녹색의 잔광을 흘리며 초류향의 턱 을 두번 가격했다. " 칠성권 승룡퇴(乘龍退)! " - 퍼컹! 불꽃이 흩날리며 화염의 안개로 변한 초류향이 간신히 진우의 승룡퇴에서 몸을 피해냈다. 하지만 진우의 승룡퇴를 막아낼 때 사용한 그의 섭철선은 자 루만 남긴채 날카롭게 박살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초류향의 박살난 프라이 드를 대변이라도 해주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진우는 혀를 차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 제길…. 역시 체질에도 안 맞는 기습은 무리였나…. " " 진우 씨! " 무사한 진우의 모습에 환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다가온 마리와 시민.그와 는 반대로 초류향의 얼굴은 무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 으윽…. " 하지만 진우는 다시 무릎을 꿇으며 쓰러질려는 것을 간신히 마리와 시민의 부축을 받아 면해야만 했다. 초류향에게 당한 타격도 타격이었지만, 무엇보 다 가속의 능력을 무리하게 사용한 것이 그 육체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이 다.아무리 A.I슈츠로 몸의 강도를 높여놓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육체가 150 배의 뇌 주파수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진우에게 포션을 놓아 주며 마리와 시민은 긴장한 눈으로 초류향을 바라보았다. 숨 막힐듯한 무거 운 기세가 그에게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 삐삐! 그때 그런 대치 상황을 깨는 무전기의 건조한 신호음 소리. 피스 그린의 무 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신호였다. 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런 상 황에서 무전이라니…! 하지만 초류향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지는 않았기 에 진우는 조심스럽게 무전에 답했다. " …여기는 피스 그린. 무슨 일인가? " << 피스 그린! 도대체 그곳에서 뭘하고 있는 거에요?! 어서 피스 블루에게 가지 않고! >> 다급한 채영의 목소리. 진우는 한 숨을 내쉬며 지끈 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감싸안았다. 하여간,가인의 일이라면 이렇게 열성이시구만,이 아가씨는….하 지만 이쪽의 상황도 좀 고려해 달라고! 그러나 이런 진우의 불평은 다음 채 영의 말에 의해 사라져야 했다. << 피스 블루의 심박 수치가… 가인 씨의 생명 반응이 멈추고 있단 말이에 요!! >> " .........!!!! "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진우 일행. 지하철 역에 옮겨 붙은 불꽃들에 비치는 시민과 마리의 얼굴이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생명 반응이 멈추고 있다니? 가 인이 죽기라도 한단 말인가?! 진우는 이를 갈며 초류향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들의 당황한 기색에 차가운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 빌어먹을…!!! ' 지금 당장에라도 가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이 눈 앞 의 존재는 몬스터들의 5대 간부인 초류향이었다. 자신들로서는 뛰어 넘기 힘 든 거대한 철벽이었던 것이다. 그 철벽이 지금 가인과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 다. 진우는 여전히 마리들에게 부축받고 있는 탈진한 몸을 탓하며 주먹을 움 켜쥐었다. 이대로…이대로 있을 수 밖에는 없는… 건가? 방법은… 없는 거야? - 화륵. 그때, 지하철 역 안의 공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초류향 의 여파로 불 붙어 있던 불꽃들이 거칠게 휘날리듯 피어올랐다. 진우와 마리, 초류향은 갑작스런 주위의 변화에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 뭐,뭐지…? " 붉었던 불꽃들이 그 색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검은 불꽃. 주위에 붙어있 던 모든 불들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불꽃이 타오르며 어 두운 암흑을 밝히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건조한 한 여성 의 목소리가 작지만 뚜렷하게 역 안으로 울려퍼졌다. " 흑성가(黑聖歌) 28장… " 피스 옐로우 한시민. 그녀가 진우들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오며 초류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주위의 검은 불꽃들이 더더욱 고통 스럽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이질적인 모습에 진우와 마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자신 없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시,시민 씨…? " 검은 불꽃에 비친 시민의 얼굴은 하얗게 창백해져 있었고 그 감홍빛 눈동자 는 짙은 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그녀의 검게 변한 입술이 작게 달싹이며 어 둠의 목소리를 흘렸다. " 흑염초래(黑炎招來). …간다. " - 에헤헤… 오빠! 오빠! 오늘 저녁은 뭐 해줄거야? 나는 언제나 처럼 학교를 마친 후, 신이와 함께 장을 보고 있었다.부모님이 집에 안 계시기에 저녁 밥을 차리는 것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 글쎄… 신이는 뭐 먹고 싶어? 하지만 난 그것이 싫지 않았다. 신이의 웃는 표정을 볼 때면. 이 아이가 내 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볼 때면. 마주 본채 같이 담소를 나누며 식 사를 하고 있을 때면… 나는 너무나도 행복해지기 때문이었다. - 으음∼ 난 하이 라이스! - 또? 저번에도 해 먹었잖아. 그건∼ - 으으응… 그치만, 나… 오빠가 해주는 하이 라이스… 맛있는 걸! - 흐음…. 곤란한 표정으로 생각을 하는 나. 이렇게 자주 식단이 한 쪽으로 치우치면 건강에 좋지 않은데…. 신이의 영양 상태까지 생각해야 하는 나로서는 이번 메뉴의 선정은 반대였다. 하지만… - 오빠아∼ 하이 라이스∼ 하이 라이스으∼ 신이는 함박 웃는 얼굴로 내 손을 두손으로 붙잡은채 흔들며 날 보챘다.난 그런 신이의 행동에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럴 수 밖에….이런 사랑 스러운 동생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내게는 무리니까…. - 좋아! 하지만 오늘 이후로 한 동안 하이 라이스는 금지야. 알았지? - 에에? 우웅∼ 그건… 싫은데…. -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유신 양? - 네,네에∼ 알았습니다아∼ 어쩔 수 없다는듯이 힘내서 대답하는 신이에게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 아 이의 손을 이끌었다. 어차피 하이 라이스는 오늘 뿐이라고 얘기해도, 내일이 면 또 다시 하이 라이스를 해달라고 보챌 신이였다.그러면 난 또 어쩔 수 없 다는듯이 웃으며 신이에게 하이 라이스를 해주게 되겠지.그렇게 생각하자 왠 지 웃음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신이는 그렇게 혼자서 웃고 있는 나를 올 려다 보며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다가 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귓가로 신이의 신이 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하이 라이스∼ 하이 라이스∼ …하지만… - 하이 라이스∼ 이런 저녁 시간의 풍경은… - 하이 라이스… 나에게… 더 이상은 없어…. " ......... " 눈을 떴다. 가인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멍한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생각했다. ' 꿈…이구나…. ' 그런 저녁 시간의 풍경. 신이의 보채는 모습. 이미 볼 수 없게 된지 오래인 데…. 가인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킬려고 했다.하지만 몸은 그의 것이 아닌냥 한 치의 움직임도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오히려 지독한 고통의 느낌 만을 가인에게 던져 줄 뿐. " 크윽…! " 가인은 낮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들썩이다 가라 앉혔다. 크게 괴성을 지르 며 땅을 뒹굴고 라도 싶을 아픔이었다. 하지만 마음껏 비명을 지르지도 못할 정도로 자신의 몸은 망가져 있었다. 어깨가 부러져 있었다. 그 바람에 덩달 아 부러진 쇄골이 목을 찌르고 있었고, 부서진 늑골들도 폐를 찌르고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 컥…. 컥…! " 가인은 폐가 뭉개져 버렸는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며 고통을 호소했다.두 눈에서 아픔으로 인한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며 뺨을 적셨다.시야가 붉게 물드는게 망막도 다친 모양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내 몸이 이렇게 된 거지? 어째서… ' 아아…. ' 그래. 그 거대한 모습으로 변한 히어로 매니아의 주먹 한 방에 이렇게 되어 버린 건가…. 그 40m의 거인에게 당하고서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기적이 로군. 가인은 고통 속에서도 너무나 뚜렷해지는 정신으로 생각했다. 아마 자 신이 이렇듯 살아있는 것은 입고 있는 A.I 슈츠 덕분인듯 했다. 하지만 그나 마 목숨만 붙어 있을 뿐. 몸의 상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망 가져 있었다. " 쿨럭…. " 힘없이 기침한 입으로 검붉은 핏덩어리가 흘러내렸다. 이빨이 깨지며 입 천 장과 혀에 박혀 있었고, A.I 슈츠 밑으로 느껴지는 육체는 피부와 근육이 잘 믹스되어 다져지기라도 했는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지독한 절망감 과 허무함이 가인의 마음에 스며 들었다. ' 하,하하…. 이렇게 죽는 건가? 이렇게… ' 굳어가는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히어로 매니아의 주먹에 맞은 자신은 근처의 건물을 부수며 콘크리트 속에 처박혀 있었다. 서 있지도,앉아 있지도 못한 상태로 콘크리트에 몸이 묻혀 있는 것이 가관이었다. 아마 콘크리트를 부숴뜨리며 튀어나온 철근이 그의 옆구리를 후려쳐 늑골을 부러뜨린 모양이 었다.A.I 슈츠가 없었더라면 쇠꼬챙이에 꿰뚫린 것 처럼 철근이 몸을 관통했 을 것이다. - 우수수수수… 가인은 콘크리트에 끼인 몸을 비틀다가 힘 없이 땅으로 몸을 처박았다.애초 에 서 있을 기력도 없었고, 정강이 뼈가 무릎 연골을 부수며 튀어 나온 탓에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발이 붙어만 있다 뿐이었지, 가인은 두 다리를 모두 잃은 셈이었다. ' 하아…. ' 죽을 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다고 했던가. 지금 가인의 눈 앞으로 그것들이 보이고 있었다. 재영과 친구 들과의 학교 생활, 피스메이커에 가입하여 몬스터들과 싸웠던 일, 시민 씨의 집에서 그녀들과 생활하며 겪었던 일들, 그리고… 먼저 떠나갔던 가족들과의 추억들…. ' 아아…. 죽는구나. ' 가인은 자신의 죽음을 인정했다. 점점 자신의 숨이 꺼져가고 있는 게 느껴 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죽으면 먼저 간 부모님과 신이 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에 삶에 대한 미련이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인이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누워있 는 그의 머리 맡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 ......누구…? ' 가인은 희미하게 흐려져 가는 시야 사이로 누워있는 자신의 상체를 부축하 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 눈이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기에 정확한 윤곽 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의 머리 색깔 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머리색 은 옅은 에메랄드 빛을 뿌리고 있었다. ' …테레…이아…? ' 그러나 가인의 생각은 거기까지 였다. 리리스는 자신의 품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한 인간 소년을 내려다 보았다. 전신이 부서진채 급속히 생명이 꺼져가는 그 모습…. 리리스는 망연하게 그 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이해…할 수 없어…. " 이 무슨…바보 같은 짓이란 말이지…. 리리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리를 지키고 상황을 살피지 않았던 거지, 이 인간 소년은? 그랬다면 이런 모습이 되지도 않았을 테고, 이런 상황에 처하지도 않았을텐데…. " 바보… 같으니라고…. " 리리스는 냉정한 눈으로 가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희 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눈 앞의 소년은 바보다. 이치를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 임이 틀림 없다. 아무리 테레이아로서의 자신이 걱정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물불 가리지 않고 움직이다 몬스터에게 발각되어 이렇듯 당해 버리다 니…. 어째서 자신의 몸을 돌볼 생각도 하지 않고 타인의 일에 뛰어들 수가 있는 걸까? 어째서? ' 어째서… 유메도… 너도… 그렇게… ' 리리스는 피투성이가 된 가인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있던 그녀 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유메 크라이시스. 자신의 보호자이자, 친구이자, 가족 이었던 그녀. 그녀도 이 소년 처럼 어리석은 짓을 해서 영영 자신과 헤어지 고 말았지. 유메와 가인. 그 둘은 닮은 꼴을 하고 있었다. " 이해할 수 없어! " 리리스는 날카롭게 소리치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의 품에서 숨이 가늘어지고 있는 가인을 노려보았다. 리리스는 이를 갈 며 정신을 잃고 있는 그에게 소리쳤다. "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야, 유가인! 이런 일로 넌 쓰러져서는 안돼! " 옴팔로스의 열쇠인 네가… 오라의 주인인 네가 이대로 숨을 거두면 모든 것 은 수포로 돌아간다! 리리스는 그렇게 자신에게 다짐하듯 소리치고 또 소리 치며 가인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 공상은 공상일 뿐.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야! " 리리스의 손에서 뻗어나오는 푸른색의 영기(靈氣). 그것은 가인의 이마에서 피로 젖은 그의 얼굴을 감싸기 시작했다.그 영기에 비친 리리스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절박함을 띄고 있었다. " 네가 죽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오라의 주인!! " - 라아아아아아아… 깊고 낮은, 그러면서도 음울하고 어두운 음조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초류향 은 전신이 식은 땀으로 젖은채 어둠 속을 헤치고 있었다. 뭐지?! 무슨 짓을 한 거냐, 저 인간 암컷은?!! - 라아아아아아아… " 크억…! " 검은 불꽃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에서 수십개의 손들이 뻗어나왔다. 어둡게 물든 사자(死者)의 손들. 그것들이 초류향의 다리와 손, 목과 어깨를 붙들며 끌어당기고 있었다. 초류향은 비명을 지르며 그것들을 풀어내기 위해 발버둥 을 쳤다. " 놔,놔라!! 내 몸에 손대지 맛!! 뭐지?! 이것들은 도대체 뭐냐고?! 이 기 분 나쁜 것들은?! " 하지만 그런 초류향의 절박한 외침과 뿌리침도 그의 그림자에서 나오는 검 은 손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검은 손들은 더더욱 그 수를 늘리며 초류향의 전신을 붙들고 암흑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초류향은 떨리는 눈동자로 자 신이 끌어당겨지는 암흑을 돌아보았다. 왠지 이대로 저곳으로 끌려갔다간 저 깊은 지옥의 나락 속으로 끊임 없이 떨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화,환각인가? 환각인 거냐고?! 이런 말도 안되는…!!! " 초류향은 발악하며 자신의 주위로 불꽃들을 생성시켰다. " 크,크크큭…! 태워 버리겠어…! 이 따위 환각…모조리 태워버려 주마! 이 런 눈속임 따위에 이 몸이 당할까 보냐!!! " - 라아아아아아아아… 그러나 애써 생성시킨 불꽃은 다음 순간 그 몸을 검게 물들이며 그 속에서 또 다시 검은 손을 생성시켰다.그렇게 흘러나온 검은 손은 초류향을 암흑 속 으로 떠밀며 검은 불꽃을 초류향에게로 번지게 하고 있었다. 초류향은 자신 의 전신이 검은 불꽃에 휩싸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공포였다.아무 것 도 무서울 게 없었던 자신이 이런 원초적인 감정에 붙들리게 되다니! "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 이런 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초류향은 절규했다.그리 고 그런 그를 저 어둠 너머에서 피빛 눈동자로 지켜보는 한 존재가 있었다. 그는 바로 한시민. 피스 옐로우인 그녀였다.시민은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이 질적인 기운을 띄고 있었다.검게 물든 입술로 암흑의 노래를 부르며 피빛 눈 동자로 초류향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것은 마녀(魔女)의 모습이었다. " 아…! " 그런 시민의 뒤에서 떨리는 눈동자로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마리. 이런 시민의 모습… 그녀로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 자상하고 따 뜻했던 시민 씨가… 어떻게 이런 악마 같은 모습을… " 시,시민 씨…. 그만하십시오! 그쯤해둬요! " 마리는 더 이상 시민의 그런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하며 그녀를 뜯어 말렸다. 왠지 이대로 그녀를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무의식이 강하게 마리를 사로 잡 고 있었다. 진우 역시 냉정한 눈빛으로 시민의 어깨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 노래를 멈춰요,한시민!! 다시는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몸이 되고 싶습니까?! " " .........! " 놀란 눈으로 진우를 돌아보는 마리. 진우 씨는 시민의 이런 모습에 대해 뭔 가를 알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몸이라니?! 그건 또 무 슨 말이지?! " 아…. " 그런 마리의 의문을 뒤로 하고, 진우의 제지가 시민에게 먹혀들었는지 그녀 는 노래를 부르던 것을 중단했다. 그렇게 노래가 멎는 순간, 검은색으로 타 오르던 불꽃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갔고 주위의 어두운 기운들도 씻은듯이 사 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원래대로 돌아온 지하철 역에서는 초류향의 모 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 하아… 하아… "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이는 시민. 마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등에서 흠칫 손을 떼고 말았다.진우는 침착하지만 긴장된 눈빛으로 그런 시민을 바라보고 있었다.시 민은 천천히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힘 없이 말했다. " 이제… 됐어요…. 어서 가인 씨가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하죠. " 진우들을 바라보는 시민의 얼굴은 극도의 황폐함으로 심신이 메말라 있었다. 원래대로 돌아온 그녀의 감홍빛 눈동자는 마치 죽은 자의 눈빛 처럼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고, 아까와 같은 요사스러움은 사라져 있었지만 어딘가 혼백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시민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마리는 그녀가 자신을 돌아보자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그렇게 하죠. 빨리 가인에게…. " 포션으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진우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 섰다. 그는 뭔가 시민에게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으며 위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로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뒤를 시민 이 힘없이 따랐고,뒤에 남은 마리는 그 둘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발 걸음을 놀렸다.마리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진우와 시민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그건 도대 체…. - 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그러나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진우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짐승의 억압된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진원지를 알 수 없이 어두운 지하철 역 속에서 난폭하게 울리고 있었다. 진우는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 서,설마… " -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순간 진우들의 앞으로 거세게 모여드는 불꽃.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의 창백 한 안색에 경악의 빛이 스며들었다. 말도 안돼…! 어떻게 흑염의 지옥 속에 서…! " 크아아아아아아악!!! " 찢어지는 괴성과 함께 불꽃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역시나 초류향이었 다. 그는 도포가 찢어지고 광기가 도는 낭패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만 큼 흉폭한 기세로 날 뛰고 있었다. " 죽여버린다!!! 죽여 버릴 테다!! " " .........!! " 초류향의 손톱에서 불꽃의 채찍들이 뻗어나오며 시민에게 날아들었다. 자신 에게 지옥을 맛보여준 시민 외에는 다른 이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 었다. 열개의 손톱에서 뻗어 나온 열개의 채찍들이 시민의 전신을 감싸며 불 꽃으로 그녀의 몸을 지졌고, 시민은 비명을 내질렀다. " 아아아아아아아악!!! " " 빌어먹을 인간! 빌어먹을 삼차원---------!!!!! " - 쿵! 쿵! 채찍에 몸이 감싸인 시민을 엄청난 괴력으로 역의 사방 팔방에 휘두르며 괴 성을 지르는 초류향. 시민은 힘 없이 채찍에 휘감겨 전신을 콘크리트에 부딪 히며 비명을 흘렸다. " 감히… 감히 이 몸에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 무서웠어!! 무서웠다고! 이 내가 무서웠단 말이다!!! " 용서 못해! 갈기 갈기 찢어 죽일 테다!!! " " 그만 햇!! " 날카롭게 초류향에게 일갈하며 시민을 묶은 불꽃의 채찍을 오라 소드로 끊 어버리는 마리. 그 바람에 허공에서 지탱할 곳을 잃은 시민이 에스컬레이터 밑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것을 간신히 진우가 받아내었다. 초류향은 자신을 방해한 마리에게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며 이를 갈았다. - 쿠구구구구구구… 그의 분노에 반응하여 폐허가 된 29구역의 지하철 역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리는 초류향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살기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위 압감을 느끼며 재빨리 에스컬레이터 밑으로 뛰어내려 진우들이 있는 곳까지 물러났다. 초류향은 에스컬레이터의 위에서 진우들을 끓어오르는 눈으로 내 려다 보며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녹색 머리가 불꽃 처럼 휘날려 올랐고, 그 얼굴에는 귀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 역시 너희 버러지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해! 차원의 힘을 좀 먹는 기생 충 같은 놈들! 하나도 남김 없이 쓸어 버릴테다! " - 쿠우우우우우우… 초류향의 손으로 모이기 시작하는 거대한 불꽃의 소용돌이.그것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그 어떤 불길보다도 위협적이게 초류향의 손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진우들은 주위의 공기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을 수 있 었다. 괴,굉장한 열기다…! " 다시는 지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이 곳을 네 놈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게헨나의 불길 속에서 고통스러워 하며 타들어가라! " 초류향은 그 말을 끝으로 수중의 거대한 염화를 지하로 휘두르려고 했다.그 러나 그런 그의 행동을 제지하는 낯익은 한 목소리가 초류향의 귓가에 들려 왔다. " …여전히 말이 많은 녀석이군. " " .........!!! " - 투학!! 순간 초류향은 자신의 전신을 박살낼 것 처럼 쇄도해 들어오는 전사경의 주 먹을 불꽃의 벽으로 막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꽃조차 소멸시켜 버리 며 날아들었고,초류향은 불꽃의 안개로 몸을 변화시켜서야 간신히 공격을 피 해낼 수 있었다. - 쿵!! 충격으로 터져오르는 역의 콘크리트 벽. 초류향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하며 자신을 공격한 이를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역시나 자신이 생각하던 인간이 웃 음을 흘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이름을 반갑게 부른 이들은 진우 들이었다. " 사부 님!! " " 부르스! " 피스 그레이,부르스. 검은 중국 권복을 입은 회색 머리의 소년이 예의 곰방 대를 물며 그곳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초류향은 그런 진우들을 내려다 보 다가 무성의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늦었다. " 조금만 더 그가 늦었더라면 이 자리의 자신들은 다 죽었을 테지…. 마리는 내심 부르스의 성의 없는 태도에 화가 났지만 어차피 말해도 씨가 안 먹힐 인간. 언제나 처럼 속으로만 화를 삭였다. 이왕 나타날 거라면 일찍 일찍 나 타나 달라고…! " 시민 언니? 어디 다쳤어? " 그리고 시민의 곁에 나타나 그녀의 안부를 묻는 소녀 하나. 핑크 빛의 A.I 슈츠를 입은 피스 대원, 이유리였다. 시민은 창백한 표정으로 유리에게 힘 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저는 괜찮아요, 유리 양…. 그 보다… 가인 씨가…. " 시민의 입에서 가인의 이름이 언급되자, 다시 마음이 촉박해지는 피스 대 원들.가인의 위험을 알리는 무전을 들은지 벌써 10여분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가인이 위험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지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런 진우들의 마 음을 알아챘는지 부르스는 예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들에게 소리쳤다. " 뭘 꾸물 거리고 있는 거냐,이 애송이들아? 잽싸게 튀어나가지 않고! " " 부,부르스…? " " 네 놈들이 여기 있어봤자 방해만 될 뿐이다! 어서 그 꼬마 녀석에게로 달 려가! 어서! " " 예,예엣…! " 부르스의 말에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진우들. 그들은 재빨리 초 류향과는 반대편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로 달려올라갔고,초류향은 험악하게 일 그러진 표정으로 부르스를 노려보았다. 부르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 피식 코 웃음을 치며 물었다. " 뭐야? 저들을 막는게 네 녀석 임무 아니었냐? 뭘 멍하니 서있는 거야? " " .........후. " 그런 부르스를 죽일듯이 노려보다가 곧 싸늘하게 미소짓는 초류향. 그러자 그의 몸에 옅은 선홍색의 불꽃이 휘감기다 사라지며 그의 찢어진 도포와 낭 패한 모습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 상태로 돌아갔다. 그는 앞의 불 같이 치 밀어 오르던 화가 가라 앉았는지 예의 냉소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 어차피 하찮은 버러지들. 이 자리에서 네 놈을 먼저 없애버린 다음 쫓아 가 죽여도 별 상관 없는 일이지. 어차피 죽는 순서가 바뀔 뿐이니까. " " 흐…. 그래? " 부르스는 초류향의 말에 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품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강렬 하게 빛을 발하며 초류향을 꿰뚫었다. " …그렇다면 이번에는 봐주지 않으마. 박살을 내주지. " " .........!! " 봐! 날 보라고! 나는 영웅이다! 너희들이 비웃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바로 그 슈퍼 영웅! 지금의 날 보고도 너희들은 그 때의 그 날 처럼 날 비웃을 수 있는가?! 어디 한 번 부정해 보시지! 너희들의 눈 앞에 나타난 이 슈퍼 영웅을! - 쏘아아아아아아아아!!! 내가 지른 함성은 거대한 괴성이 되어 도시의 곳곳에 울려퍼졌다. 모든 것 이 작아 보이고 모든 것이 왜소해 보였다. 답답하고 나를 억누르던 세상에서 벗어난 이 해방감! 이 고양감! 그리고… - 슈퍼 영웅이라니… 이 자식 뭐가 모자란 거 아냐? 학교 생활 내내 들어왔던 녀석들의 말.후후후… 어때? 지금도 내가 모자라 보이는 거냐? - 이런 어린애나 볼 만화에 빠져있을 시간이 있으면 일을 하란 말이야! 일을! 직장 상사의 짜증섞인 말투와 한심하다는듯 날 내려다 보던 눈초리. 하하하 … 어디 지금의 나에게도 그 말을 해보시지! - 당신…, 제발 그만해둬요! 그만하란 말이에요! …그리고 나의…아내. 그녀가 언제인가 눈물 젖은 눈으로 호소해오던 그 목 소리. - 저… 결정했어요. 어느 날 커다란 짐 가방을 싸며 두 아이의 손을 잡은채 나에게 말을 꺼내던 그녀. 그때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 집을 나가겠어요. 아이들과 함께…. 하지만… 당신에게는 이런 거…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겠죠? 우리가 당신 앞에서 사라져도… 다시는 당신과 만 나지 않더라도… 당신은… 당신은 여전히…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며 아이들과 함께 뒤돌아서는 그녀. 하지만 난 그런 가족들의 뒷 모습도 돌아보지 못했다. 단지 DVD플레이어에서 돌아가는 애니 메이션의 화면 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하지만 그런 내 눈에는 TV 화면에 서 떠오르는 영웅들의 모습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었다. 단지 떠 나가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기 싫었을 뿐이다. 그들의 뒤를 계속 바라 보고 있다가는 내 자신의 무기력함과 내 자신의 어리석음에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에…. - 꿈은 꿈일 뿐이잖아요! 제발 현실을 직시해요! 그렇지… 않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라고…. 더 이상 이건 꿈이 아니야…. 이루지 못할 꿈인 것이 아니라고…. 이건 현실이란 말이야…. -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다시 내 곁으로… -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돌아‥와줘…! - 쏘아아아아아아아아아!!!!! " 하앗…! " 몬스터의 사념과 접속을 하던 유리는 강제로 의식의 전달을 종료 당하며 짧 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곁에 있던 시민이 붙잡아주며 말했 다. " 괜찮아요,유리 양? 역시… 저 히어로 매니아의 사념은 읽혀지지 않는 거 에요? " " 아니…. 읽을 수는… 있었어. " 유리는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처음 저 몬스터와 조우 했을 때의 그녀는 아무런 사념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 게도 몬스터의 사념이 고양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몬스터의 사념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인간의 사념이었지만…. " 역시 저 몬스터 속에는 사람이 들어 있는 거야. 그 사람의 이상할 정도로 증폭 된 사념이 몬스터를 움직이고 있었어. " 유리의 말에 마리와 진우는 놀란 눈으로 40m의 울트라맨을 올려다보았다.그 들은 작전 본부실에서 온 명령에 따라 몬스터에게 접근하지는 못하며 주변의 빌딩 속에서 다음 지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솔직히 명령도 명령이었지만, 40m의 거인에게 달려든다는 것 자체가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었다.진우는 무 거운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 저런 거대한 녀석도 융합 형이었단 말인가…. 정말이지 몬스터 놈들, 날 이 갈수록 재주가 좋아지는 구만∼ " - 쿠웅! 쿠웅! 발을 울리며 그 거대한 몸을 움직이는 히어로 매니아.울트라맨의 모습을 한 그것은 사방 팔방에 놓여진 빌딩들을 닥치는 데로 부수며 마치 분풀이라도 하는 것 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방금도 한 채의 고층 빌딩을 무너뜨려서 그 진동으로 이 지역 전체가 흔들리게 만들고 있었다. 진우는 구역 하나가 초토 화된 이번 사태를 피스메이커가 어떻게 민간인들에게 보도할지 심히 궁금해 졌다. 이번 몬스터의 출현은 예전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그 피해 가 극심했던 것이다. 지진이라도 났다고 둘러대면 믿어줄려나…. ' ......... ' 한편 시민은 이상하다는듯이 지하철 역에서 부터 자신들이 달려온 거리를 돌아 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하철 역에서 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시민은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몬스터가 있는 곳 까지 달려오는 동안 그녀는 29구역의 파괴된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 었던 것이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저 거대한 괴 물이 난동을 피운 것 치고서는 도시에는 그 발자국 하나 찍혀 있지 않은 게 이상했다.분명 저 히어로 매니아가 나타난 것은 지하철 역 부근 부터라고 했 을텐데…. ' 어째서…. '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은 역으로부터 3km는 떨어진 곳. 몬스터가 지금 이곳에 서 초토화에 가까운 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을 감안해 볼때 3km가 넘는 거리 를 얌전히 날아서 라도 오지 않는 이상,도시의 거리가 저렇게 멀쩡히 유지되 어 있는 것은 설명이 안된다. 아, 저 울트라맨이라는 것은 비행도 가능한 히 어로 라고 했으니까 정말 날아왔을 수도 있겠지…. 무전으로 설명해주던 시 더의 말이 떠올랐다. " …계속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을 겁니까,피스 그린? " 건물 밖의 울트라맨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오라 소드를 움켜쥐던 마리가 진 우에게 물었다. 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저런 괴물에게 섣불리 접근하다 가는… " " 이러는 사이에 가인이 죽습니다!!! " 마리는 날카롭게 소리치며 진우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모두 가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있던 불안과 걱정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시민과 유리의 얼굴에는 숨기고 있던 근심이 다시 떠올랐고 진우 역시 굳은 표정으 로 입을 다물었다.그들이 이 장소에 도착한 후, 제일 처음 한 일은 피스 블 루 유가인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스 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로부터는 피스 블루의 위치 탐색기가 이상하게도 불통이라는 무전 뿐이었고, 유리의 마인드 디텍드 능력을 이용해도 가인은 무 응답일 뿐이었다. 생사 불 명. 거기다가 소재 까지 파악되지 않다니….시민은 자꾸만 엄습해 오려는 불 안함을 떨치려고 노력하며 유리에게 물었다. " 유리 양…. 여전히 가인 씨에게서는… " " …응. 아무런 대답도… 없어…. " 유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 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잡고 있던 시민의 손을 꼬 옥 움켜쥐었다. 그나마 유리가 눈물을 터뜨리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가인의 수색에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 였다. 울면 안 돼…. 울면 안돼,이유리…. 오빠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불길한 생 각은 하지마.유리는 약해질려는 자신을 끊임 없이 다그치며 냉정해질려고 애 썼다. 하지만 금새 어디선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을 가인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유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유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시민 의 손을 움켜 쥐며 금새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내는 일이었다. - 오빠…. 제발… 제발 살아있으면 대답해줘! 유리는 가인에게 마음의 소리를 던지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방울의 눈 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그런 유리의 모습에 시민은 안타까 운 표정을 지으며 떨고 있는 유리의 어깨를 꼬옥 안아 주었다.진우는 시민과 유리를 침중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창 밖의 울트라맨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 제길…. ' 40m의 거인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녀석에게 돌진하고 싶었지만,즉 시 가인의 구조 작업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이성이 경고하고 있었다. 절대로 저 괴물에게는 접근하지 말라는…. 그것은 수 많은 몬스터와의 전장을 헤쳐 나온 진우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외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확 신이기도 했다.이대로 저 괴물에게 대책없이 달려들었다가는 헛되이 죽을 뿐 이다. - 탁. 그러나 그런 진우의 앞을 지나 출입구로 건물을 나갈려는 이가 하나 있었다. 피스 레드 성마리. 바로 그녀였다. 마리는 손에 쥔 오라 소드로 길게 붉은 검신을 흘리며 무언의 각오를 보이고 있었다. 진우는 마리가 무슨 생각을 하 고 있는지 깨닫고서는 서둘러 그녀를 제지했다. " 그만둬요,마리 양. 그렇게 무턱대고 나가서 될 일이 아니라고요! " " …그렇다면? 이대로 있는다고 무슨 방법이라도 생기는 겁니까? " 마리는 짧게 답하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우를 돌아보았다.그녀의 눈동자가 레드의 오라 패턴에 반응하여 붉은 빛을 띄기 시작했다. 마리는 이미 마음을 결정했는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소리쳤다. " 지금 이 순간에도 가인은 죽어가고 있을 지 모릅니다! 더는 지체할 수 없 어요,피스 그린! 적어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한,전 나갈 겁니다! " - 마리 선배! 웃는 얼굴로 자신을 부르던 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리고 그 곁에는 자신 의 남동생 아인이의 모습도 겹쳐 보이고 있었다. 죽게 할 거 같아? 이렇게 두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할 거 같아? 절대로 그렇게는 못해! 반드시 구해낸다! ' 지켜내겠어! ' 동료로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 나도…! 나도 나갈거야! " 시민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던 유리도 소리쳤다. 유리는 마리의 곁으로 걸어 나와 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직도 채 눈물이 마르지 않 고 있었다. " 오빠를 잃고 싶지 않아…. 오빠가 보고 싶어…! " 가인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마음 을 믿지 못하며 자신의 마음 속에서만 사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 외로움. 그 고독함. 그런 것들에게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가인이었다. 자신에게 삶의 기쁨과 행복을 가르쳐 준 것은 오직 그 사람 뿐. 가인이 죽는다면 자신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 이대로 오빠와 헤어질 순 없어! " " 그래요, 유리 양. " 시민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그런 유리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따뜻하지만 강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 반드시 가인 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우리 모두…. " " 응…! " 그 말에 유리와 마리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다졌다.반드시 가인을 구해낸다. 그리고 같이 돌아갈테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우 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 숨을 내쉬었다. 모두의 시선이 진우에게로 향했다. " 하아∼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라니까∼ 리더의 말은 쥐꼬리 만 큼도 들어 주지를 않으니, 원∼ " 그런 얘기들을 듣고 있으면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진우는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마리들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여 보였다. " 그럼 필승의 각오로 저 괴물에게 달려드는 겁니다,모두! 단 전술 작전은 제가 지휘합니다! 아시겠습니까? " " 피스! " 마리와 유리, 시민은 환한 얼굴로 진우에게 경례를 붙였다. " …이로써 9개의 심장 중 2개를 없애버린 건가…. " 부르스는 어두운 지하철 역의 계단에 몸을 앉히며 무감각히 중얼거렸다. 그 는 자신의 곁에 버려져 있던 신문 더미에서 타오르고 있던 불씨에 손을 가져 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작은 불씨 하나가 부르스의 손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으며 옮겨 붙는 것이었다. 부르스는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 그 불씨로 대통 에 재운 담배를 태운 다음 손을 튕겨 불씨를 털어내 버렸다. " 후우…. " 깊게 곰방대의 물부리를 빨아들이자 향초(香草)의 진한 맛이 폐 속 깊숙히 번져나가며 정신을 맑게 했다.설대(煙道)가 길어야 연기가 식어 담배의 맛이 좋아지지만 이 곰방대로 그런 것 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부르스는 그것 이 불만이었는지 인상을 살짝 찡그리다가 더욱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 쿠구구구구구구… 옅게 울려오는 진동. 그것은 아마도 지상에서 피스 대원들과 몬스터가 접전 을 벌이는 것에 대한 여파일 것이다. 부르스는 짧게 혀를 차며 곰방대를 입 에서 떼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그 렇게 유유자적하게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다가 잠시 뒤를 돌아서 밑 의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부르스는 '그것'을 향해 가늘게 미소를 지어 보 이며 말했다. " 다음에는 좀 더 버텨보도록. 이쪽에서 상대해줄 마음이 들게 말이야. " 그런 그의 눈에 비친 역의 바닥에는 주인을 잃은 찢어진 푸른 도포 하나가 펼쳐져 있었고, 그 주위로는 채 마르지 않은 녹색의 유혈이 대량으로 번져 피의 바다를 연출하고 있었다. " …여기는? " 가인은 자신이 있는 장소를 둘러보며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자신은 아무 것 도 없는 하얀 백색의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언제 이곳으로 왔는지, 언제부 터 여기에 있었는지 가인, 자신 조차 알 수가 없다는 점이 그를 더욱 혼란스 럽게 하고 있었다. " …말도 안돼…. 난 분명히… " 히어로 매니아의 주먹에 핏덩어리가 되어 죽어가고 있었을텐데….그러나 내 려다 본 자신의 몸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고, 입고 있는 옷 또한 A.I 슈 츠가 아닌 한성 고등학교의 교복이었다. 가인은 뇌리를 찌르는 것만 같은 두 통을 느끼고 이마를 감쌌다. " …꿈? 꿈인가? " 하지만 꿈은 아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했다.손가락 끝 마디 의 감촉 부터 숨을 쉬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생각하는 정신.그 어느 것 하나도 살아있는 것 처럼 생생했다. 이건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 서 이런 곳에 와 있는 걸까? " …혹시…나… 죽은… 건가? " 자신이 말해놓고도 그 허무할 정도로 현실감 없는 내용에 헛웃음이 나왔다. 가인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무도 없는…심지어 하늘과 땅의 경 계도 구분되어 있지 않은 하얗디 하얀 백색의 공간. 그래…. 그런 건가? 난 죽은 건가…? 하긴… 이런 이상한 장소….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야. " 하하… 그렇구나….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뭐, 상황을 보니 난 죽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울고 불고 하는 것도 그렇고 … 그다지 삶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 흐음…. 이게 죽은 거로군. " 여전히 긴장감이 결여된 목소리. 그렇다. 유가인.그는 삶에 대한 미련이 그 다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죽기를 바라는,그런 것도 아닌…. 어차피 살아 있을 때 열심히 살다가 죽으면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하는 체념이랄 까. 어쩌면 자신은 이 날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죽음에 당도하 는 날을…. " …죽었구나…. " 가인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죽음을 인정했 건만 슬프지 않은 것으로 보 아 어지간히 애착 없는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가인은 낮게 한숨을 쉬며 숙 였던 얼굴을 들었다. 그래…. 그럼 이제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신이. 날 먼저 두고 가버린 내 가족들과 이제는 만날 수 있게 되는 걸까? 만약 그 렇게만 된다면 이렇게 죽어버린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가족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그리움의 감정이 몰려들었다. 그 리고 격정.감동. 그들과의 재회를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가인은 자신이 흥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우선 잘 있었느냐고 인사 부터 해야할까? 아니면 우선 끌어안으며 보고 싶었다고 말해야하나? 아아…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할까? 주체할 수 없을 정도 로 가슴이 떨려온다. " ......... " 그러나 한 순간 든 허전함. 어딘가에 소중한 뭔가를 놓고 온듯한 상실감이 가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한 순간이었을 뿐. 가인은 마치 이 백색의 공간에 마음이 하얗게 물들기라도 하는 것 처럼 그 감정들을 잊어 버렸다. 그리고 행복감에 차올라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만나는 거 다.드디어 만나는 거야, 내 가족들을. " …저건? " 그런 가인의 눈에 백색의 공간을 밝혀주는 불빛이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 다.그것은 따뜻함. 모든 것을 안아주는 광명의 빛. 가인은 타오르는 불길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무의식 중에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그 불빛에 다가갈수록 그는 자신의 머리 속 깊은 곳까지 물들어오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오래 전에 잃어버린 부모의 품 속 처럼 그 빛은 가인을 감싸주고 있었다. 가인은 마치 홀린 것 처럼 빛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 저기에서… " 저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부모님과 신이가? 가인의 그런 생각은 어느 순간 확신이 되었고, 그는 한시라도 빨리 빛에 도달하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 다. 그러나 그때,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가지마! " " ........? " 누구? 가인은 자신을 불러세우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걷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한 소녀가 서있었다. 소녀를 바라보는 가인의 동공이 크게 뜨여져 갔다.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신음 처럼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 …신…아? " 유신.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자신의 여동생. 그리고 지금 그녀가 가인의 앞 에 나타났다. - 쏘아아아아아아!!! 히어로 매니아는 괴성을 내지르며 도심 속으로 몸을 숙였다.자신을 향해 네 명의 인간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녹색과 붉은색, 노란색과 핑크색의 무리들. 그들에게서는 히어로 매니아의 신경을 자극시키는 위험한 기운이 느껴져오고 있었다. 히어로 매니아는 그 거대한 손을 들어 이 개미같은 인간들을 한번에 쓸어 버리기 위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 후우우우우우웅!! 듣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 울트라맨의 집채 만한 팔이 29구역의 도로를 긁고 지나갔다. '콰지지지지직!!' 가로등과 아스팔트, 콘크리트… 히어로 매니아의 손에 휩쓸린 모든 것이 종이 조각 처럼 구겨지 며 부숴져 나갔다. 그러나 그 휩쓸린 폐허의 더미 속에는 앞의 네 존재가 끼 어 있지 않았다. 히어로 매니아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들의 접근을 허용한 뒤였다. " 하아아아아아…! " 피스 레드, 성마리. 그녀가 무서운 속도로 히어로 매니아의 두 다리 사이에 뛰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오라 소드를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쥐며 정신을 집중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오라소드의 붉은 검신이 '웅웅'거리며 마리의 오라 와 공진을 시작했다. - 츄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 오라 소드의 검날이 그 붉은 빛을 폭사시키며 직경 7m로 치솟아 올랐 다. 오라 소드의 검날은 마리의 오라 능력에 반응하여 소검으로도 장검으로 도 그 길이 변화가 자유로워진다. 마리는 그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하여 지 금 오라 소드의 검날을 한계까지 늘여뜨린 것이었다. 늘어난 검신의 길이에 맞춰 오라 소드를 구성하는 오리하르콘이 중력장을 조절하기 시작했고, 무려 7m나 늘어난 검의 무게 중심이 그 균형을 유지해 나갔다. 대신 엄청나게 무 거워지는 그 무게. 마리는 이를 악물며 A.I 슈츠의 근력을 한계까지 끌어올 려 7m의 오라 소드를 휘둘렀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의(奧義)… " 마리의 눈동자가 오라 패턴 레드에 반응하여 선홍빛을 흘렸다. 패턴 레드의 능력은 절단(切斷)! 모든 것을 베어내는 그 능력! 자른다! 자를 수 있어! 내 검이 자르지 못하는 것은 없다! - 촤아아아아아아악…! 7m의 검신이 바닥을 긁으며 원을 그렸다. 그것은 늘어난 검의 무게를 견디 지 못한 그녀가 검을 땅에 끄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회전하던 그녀의 움직임이 대기 속으로 녹아들었고, 7m의 붉은 검광만 이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졌다. 무영신풍류의 삼대 오의 중 하나가 지금 발현 된 것이었다. 단공(斷空) - 슥! 가볍게 베이는 소리만이 울려퍼졌을 뿐이다. 그리고 7m의 붉은 검신을 늘어 뜨린 마리가 울트라맨의 오른쪽 발목 뒤로 사라졌던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몰아 쉬며 생각했다.기묘한 흥분감과 떨림이 전 신에서 울려퍼졌다. ' 해냈다…. ' 단공을…. ' 무영신풍류의 삼대 오의 중 하나를…! ' 단공, 그것은 운요와 더불어 무영신풍류의 삼대 오의 중 하나. 이름 그대로 공간을 가르며 모든 것을 베어내는 기술. 하지만 그 만큼의 검기(劍氣)와 기 력(氣力)이 필요한 기술이었기에, 지금 마리의 수련으로는 부족하다고만 생 각되어지던 기술이었다. 하지만 모자라던 검기를 오라 소드로 보충하고, 기 력을 A.I 슈츠로 대체하자 단공의 본디 위력에는 못 미치지만 어느 정도의 발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마리는 평상시에 어렴풋이 생각만 해오던 방법을 실제로 성공시키자 그 성취감에 사로 잡혔다.실제의 단공은 말 그대로 눈 앞 의 공간을 가르며 모든 것을 베어내고,오라 소드나 A.I 슈츠의 힘을 빌린 것 이 아닌 검과 육체 만으로 펼쳐내는 것이었지만…. 마리는 자신의 수련에 있 어서 커다란 한 걸음을 내딪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쏘아아아아아아아…! 히어로 매니아의 비명! 그와 함께 마리의 뒤 쪽에 있던 녀석의 오른 발목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유혈도 흐르지 않은 깨끗한 절단이었다. 그러나 한쪽 발 목을 잃어버렸건만 히어로 매니아는 용케도 그 거대한 몸을 유지하며 쓰 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버티고 있던 나머지 왼쪽 발목으로도 녹 색의 잔광이 달려들고 있었다. - 칭! 칭! 치이이이이잉!! 패턴 그린의 가속 능력. 공간에 울려퍼지는 물체의 잔향(殘響) 소리! 피스 그린은 음속으로 몸을 움직이며 울트라맨의 왼쪽 발목에 날아들고 있었다.음 속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그의 앞으로 강한 쇼크 웨이브가 형성 되었다. " 슈팅------------스타!!! " - 투학!! 그대로 왼쪽 발목을 꿰뚫고 지나가버리는 진우의 슈팅 스타. 녹색의 유성이 울트라맨의 남은 발 마저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지탱할 곳을 잃어버린 거인 은 괴성을 내지르며 그 거대한 몸을 도시의 아스팔트에 처 박았다. - 투아아아아아아앙!! 표면을 따라 지진파가 전해졌고, 3만 5천톤의 거인이 쓰러진 댓가로 지면이 파도 처럼 출렁거리며 건물이 위 아래로 흔들거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3만 5천 톤의 무게가 지표에 떨어진 것 치고서는 그 피해가 놀라울 정도로 가벼 웠다. 그것은 분명 정상적인 물리 반응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진파를 피하기 위해 공중으로 뛰어오른 피스 대원들은 누구 하나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 다. - 우오오오오오오오!!! 울트라맨은 괴성을 내지르며 쓰러진 상태에서 손을 휘둘러 공중으로 뛰어오 른 피스 대원들을 공격했다. 히어로 매니아가 처음으로 노린 것은 자신에게 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피스 옐로우 한시민이었다. - 파칭! 그러나 그런 거인의 사고를 한 순간 마비시키는 정신 공격! 피스 핑크 이유 리의 능력 중 하나인 재핑(zapping)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고양되어 있는 몬 스터의 사념에 예전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재핑이 먹혀들기 시작한 것이 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시민의 공명음이 몬스터의 양 손을 덥쳤다. - 퍼엉! 물체의 진동수에 음으로 그 주파수를 맞추어 진동을 증폭시키는 시민의 파 괴적인 음파 공격! 40m 거인의 양손에서 폭발음과 함께 육편이 터져 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진우는 주먹을 움켜쥐며 마리에게 소리쳤다. " 마리 양! " " 타아아아앗! " 순간, A.I 부츠로 쓰러진 몬스터의 허벅지를 밟고 마리가 히어로 매니아의 얼굴을 향해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7m의 붉은 검신을 등에 짊어진 그녀가 선 회하며 거인의 목을 노렸다. " 육식(六式)… 활강(滑降)!! " - 서걱! 회전하던 기세 그대로 미끄러져 내리며 몬스터의 목을 절단하는 마리. 둔중 한 파육음과 함께 히어로 매니아의 목을 가르며 7m의 검신이 땅에 꽂혔다.마 치 죄인을 단죄하는 작두(斫刀)처럼 몬스터의 목이 잘려나간 것이다. 마리는 수중의 오라 소드에서 육중한 감각을 느끼며 숨을 몰아 쉬었다. ' 느낌이 있었어…. 끝났다…! ' " 휘우∼ 끝내준다! " 진우가 환호를 하며 소리쳤고, 시민과 유리도 마리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졌던 40m의 거인을 의외로 손 쉽게 끝장낼 수 있었던 것 이다. 그 방법이란 게 사실 절대로 손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맥 없이 적을 퇴치한 것이 되어 버렸다. 속전속결. 바로 그것! 마리는 이 거대 한 몬스터를 제거했다는 안도감에 오라 소드의 검신을 원상태로 돌리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오라 소드의 능력을 한계까지 뽑아낸 데에다가 오의까지 사 용하는 바람에 몸이 물 먹은 솜 마냥 무거웠던 것이다. 전신의 오라가 모두 고갈된 것만 같았다. ' 이제… 가인만… 찾으면…. ' 그녀는 식은 땀이 흐르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힘껏 몸을 일으켰다. 이런데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가인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아 무리 몬스터를 쓰러뜨렸다고 하더라도 가인에게 무슨 일이 생겨버리면, 아무 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우우우우우우… 그때,마리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울부짖음이 등 뒤로 느껴져 왔다. 그 리고 그녀의 전신을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 마리는 그 순간 만큼은 다리가 땅에 고정 된 것 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편에서 경악한 얼굴로 마리에 게 소리치는 일행의 모습이 보여왔다. " 마리 양!!! " - 후우우우우웅!! 풍압 만으로도 전신을 압도하는 거대한 주먹이 그녀에게 날아들었다.마리는 두 눈을 크게 부릅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몸을 움직일 여력도 없어서 피할 수도 없었다. 치명적이다! - 퍼커커커컥!! 아스팔트를 긁으며 가로등을 나무 젓가락 마냥 부숴뜨린 주먹이 옆의 빌딩 에 직격했다. '퍼엉!' 빌딩에 달려있던 모든 유리창이 충격으로 터져 올랐고 그 육중한 콘크리트의 집합체가 뒤로 무너져 내렸다. 29구역의 거리가 뒤흔 들렸고 콘크리트 잔해가 연기를 피워 올렸다.그 연기 더미 사이로 거대한 거 인이 두 눈의 안광을 붉히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 맙소사! 뭐 저런 녀석이…! " 진우의 한탄 섞인 외침. 사지가 잘리고 심지어 목까지 잘려나갔건만 어느새 인가 몸을 복원시킨 녀석이 그곳에는 서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사력을 다 한 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히어로 매니아의 모습에 진우들은 극심한 허탈함과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 마리 양!! 진우 씨, 마리 양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아요! " 시민은 당황한 얼굴로 진우에게 소리치며 사라진 마리를 목 놓아 불렀다.마 리는 울트라맨의 주먹 공격에 휩쓸려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는 비틀거리다가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가인에 이어 마리 까지 ….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 끝났어…. 이제 모두 끝이야…. " 유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자포자기에 가까운 체념 만이 그녀에 게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때, 그런 피스 대원들의 뒤로 퉁명스러운 한 소 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여간 요즘 것들은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군…. 이 따위 일로 벌써 부터 포기하는 거냐? " " .........사부님…?! " 모두가 다급히 돌아본 그곳에는 예의 부르스가 기진맥진한 마리를 들쳐업은 채 서있었다. 그것을 바라본 모두는 십년 감수했다는듯 안도의 한 숨을 내쉬 었다. 마리 양,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 부르스는 인상을 찡 그리며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마리에게 말했다. " 살았으면 이제 그만 떨어져라. 여자가 곁에 있으면 부정탄다. " "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 마리는 비틀 거리며 부르스의 품에서 빠져나와 시민의 부축을 받았다. 그녀 는 부르스에게 보이지 않게 입술을 깨물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 로서는 제일 도움 받기 싫은 인간에게 도움을 받은 꼴이 되어 버렸으니 자존심이 상 할 만도 했다. ' …그나저나 초류향은? ' 그것은 부르스를 바라보는 모두의 의문이기도 했다.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 은 그 용마인을 물리쳤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용마인의 강함을 직접 체험 한 적이 있던 마리들로서는 부르스의 그 고강함이 경악스러울 뿐이었다. 부 르스는 저편에서 붉은 안광을 빛내며 몸을 숙이고 있는 히어로 매니아의 모 습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 " 흐… 그나저나 정말 터무니 없는 놈을 상대하고 있었군. " - 우오오오오오오오오!!! 도시가 떠나갈듯 포효하며 부르스 일행을 내려다 보는 울트라맨.그 붉게 물 든 안광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노 밖에 없었다. 히어로 매니아는 땅을 거세게 박차며 일행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 쿵!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며 그 거대한 40m의 거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광경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오그라들 정도로 무시 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황하는 진우 들의 앞으로 부르스는 태연하게 걸어나와 달려오는 괴물을 마주했다. 유리는 자신을 스쳐지나가며 부르스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 ' 뭐…? ' 자신이 잘못들은 것은 아닐까 눈을 깜빡이며 유리는 부르스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부르스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있었기에,유리는 그의 얼굴에 한 가득 퍼져나가고 있는 그 미소를 볼 수가 없었다. 히어로 매니아를 바라보 고 있는 부르스는 정말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쿵! 쿵! 쿵! 쿵! 40m의 초인과 2m도 채 되지 않는 인간 소년. " 와라! " - 우오오오오오오오!!! 괴성을 내지르며 그 거대한 주먹을 부르스에게 내찌르는 히어로 매니아. 그 리고 그 압도적인 크기의 주먹을 향해 마주 권을 내찌르는 부르스. " 칠성권(七星拳) 녹존(祿存)!! " 그것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모의 극치를 달리는 행위인 것 같았다. " 시,신아…. " 가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자신의 눈 앞에 서있는 소녀의 모습을. 아무런 생 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 곳에는 그 아이가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나 그리워 하던… 자신이 그렇게나 목놓아 부르던 그 아이가 그 곳에는 있었다.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녀에게 물었다. " …정말… 정말 너인 거야? 정말…? " 끄덕. " …정말…내 동생… 신이… 유신 인 거니…? " 끄덕. 살며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 저 눈과 저 코, 저 입술, 저 미 소짓는 얼굴은 분명 가인의 기억 속에 살아 숨쉬던 동생의 그것이었다. 그리 고 소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 또한… " …보고 싶었어, 오빠. " " .........! " 신이다. 신이야. 분명히 신이라고! 가인은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여지 껏 참고있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오르며 신이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손을 둘러 힘있게 끌어안았다. 존재하고 있었다. 신이를 끌어안은 감촉이 전 신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이 눈 앞의 동생은 언제나의 그것 처럼 꿈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이다.그것을 깨닫자 가인의 눈으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신이야… 신이야… 보고 싶었어! 만나고 싶었어! 아아, 그렇게 너와 헤어 졌을 때부터 줄곧 만나고 싶었어! 꿈 속에서도 수 없이 너를 만났어! 너 와 부모님의 꿈을 꾸지 않은 날이 한 번도 없었어!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면…꿈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너는 없었어! 아무도 없었어! 나 혼자 뿐이 었어! " " 오빠…. " 귓가로 들려오는 신이의 음성. 가인은 다시 한번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나 는 드디어 만난 것이다! " 다행이야…. 정말 다행…. 드디어 만나게 되었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 라고만 생각했는데…. " 이게 꿈은 아니겠지? 현실이겠지? " 신아…. "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환희의 떨림이 멈추지를 않았다.이 루어질리 없는 기적이 이루어졌다. "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야…. 두 번 다시 헤어지지 않겠어! " 울고 있는 가인의 머리를 신이가 그 작은 두 팔로 감싸 안았다.따뜻함이 가 인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 이제부터 언제나 너의 곁에 있겠어…. " 반드시…! 반드시…! 가인은 행여나 신이가 사라질까봐 그 작은 몸을 더욱 힘있게 끌어 안았다.제발 이 현실이 언제나와 같은 악질적인 꿈의 장난이 아 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도록…. 제발 현실이 라면 이대로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지만 그렇게 흐느끼는 가인의 귀로 신 이의 조용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빠, 그럴 수는 없어…. " " .........!! " 가인은 난데 없는 동생의 말에 그 품에서 고개를 빼내며 신이를 바라 보았 다. 눈물로 흐려진 그의 시야에는 신이가 여전히 변함 없이 웃고 있었다.신 이의 작은 손이 살며시 가인의 눈 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 언제나 내 곁에 있겠다니… 그래서는 안돼…. " 가인은 멍하니 생각했다. 안돼…? 안된다니…? 신아, 그게 무슨… " 왜… 그런 말을… " 그게 무슨 소리야? 가슴이 점점 아파오기 시작했다. 가인은 떨리는 눈동자 를 신이에게서 떼지 못하며 말했다. 짙은 불길함이 그의 마음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뭐가 안되는 건데? 그냥… 그냥 이렇게 둘이 같이 있으면 되는 거잖아? 앞으로도 계속… 둘이 함께… " 가인은 뭔가 필사적인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말했다. " 그,그래. 분명 신이도 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도 계실테지! 잘 됐다! 옛 날 처럼 우리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거야! " 그 사고가 있기 전 처럼….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그 때로… " 신아, 너 내가 해주는 하이라이스 좋아했었잖아? 앞으로도 많이 많이 해 줄게!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제대로 가족 여행 한 번 해본 적이 없 었지? 그치? 잘됐다∼ 부모님과 함께 자주 여행 가자. 그 동안 못했던 거 다 해보는 거야! " 가인은 어떻게 해서든 신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얼굴로 식은 땀이 흘러내리며 목소리도 차츰 차츰 작아지며 떨리기 시작했다. 입 가에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무엇보다 신이의 변하지 않는 얼굴 표정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 오빠… " "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 계시는 거야? 저기 보이는 빛 너머에 계시는 거 야? 왜 신이 혼자 여기에 있는 거지? 아, 혹시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 리 마중 나와있었던 거구나! 그렇게 오빠가 보고 싶었어? 하긴 나도 우리 동생 많이 보고 싶었지! 아,그리고… " " 오빠, 그만… " " 역시 난 죽은 건가? 그렇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너도 다시 만나게 된 거 고 말이야. 하하, 뭐, 꼭 죽는게 나쁜 것 만은 아니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죽어버릴 걸 그랬나? 아, 이건 질 나쁜 농담이다. 그래.그래. 취 소할 테니까 그런 무서운 얼굴 하지마. 오빠가 잘못했어∼ " " 오빠, 그만해. " " 그만하기 싫어!!! " 가인은 버럭 소리질렀다. 그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신이의 어깨를 맞잡 았다. 신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왜, 왜 그러는 거야?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니, 신아?! 난… 난 지금껏 이 날 만을 기다려 왔는데… 넌… 넌 오빠가 보고 싶지도 않았어? 만나고 싶지 않았어?! " 신이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가인의 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 그렇지 않아. 나도 언제나… 항상… 오빠 만을 생각했었어…. " " 그런데 왜! " 그런 가인에게 신이는 미소 지었다. " …하지만… 난… 이미 죽었잖아. " " .........!! " 가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 말은 신이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가인은 애써 그 무게감을 떨쳐 버리 려는 듯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 그,그게 뭐가 어때서? 봐. 나도 죽었잖아∼ 나도 신이하고 똑같애.그러니 까 이렇게 신이와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거고… " " …아니. 오빠와 난 틀려. 오빠는 아직 살아있어. " " .........!! " 그 말은 가인이 처음부터 느끼고 있던, 계속 부정해 오던 이질감을 날카롭 게 찌르는 것이었다. 신이는 연신 말을 이었다. " 아직은 오빠와 내가 만날 시간이 아니야…. 우리가 만나는 것은 좀 더 먼 훗날… 오빠가 좀 더 나이가 든 다음일 때…. 지금은 너무 일러. " " ......... " " 아빠도… 엄마도 그러셨어…. 아직은 이르다고. 아직은 오빠가 이 곳으로 올 때가 아니라고…. " 가인은 거세게 고개를 휘저으며 신이의 말을 부정했다. " 아,아니야…. 이렇게…이렇게 신이를 만났다는 것은 결국 나도 죽음에 다 다랐다는 거잖아? 그렇다면…그렇다면 난 죽음을 택하겠어! 이대로 너와 헤어질 수는 없어! 부모님도 반드시 만날 거야! 난… 난… " 두 번 다시… " 혼자이기는 싫어! " 가인은 신이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 " 이대로 다시 살아간다고 해도 난 혼자야! 현실에서는 아버지도 없고, 어 머니도 없고, 신이 너도 없어! 이게 꿈이라도 좋아! 거짓이라도 좋아! 그 러니까 제발! 다시는… 다시는 날 혼자로 만들지마! " " ......... " 신이는 어린 아이 답지 않게 침착한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 정이 마치 그를 꾸짖는 것 만 같았기에,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이에게서 주 춤 물러섰다. 자신이 한 말에서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신이 는 그런 가인을 말 없이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정말… 혼자… 라고 생각해? " - 투아아아아아아아아앙!! 40m의 거구가 날았다. 그것은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분명한 사실이었 다. 40m의 히어로 매니아는 10여 미터를 날아가 근처의 빌딩에 몸을 부딪혔 다. 거대한 지진파가 주위의 건물들을 덮쳤고 그 바람에 구역에 있던 빌딩들 에서는 유리란 유리가 모두 박살나며 떨어져 내렸다. 마치 유리의 비가 하늘 에서 쏟아지는 것 만 같았다. -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도로의 아스팔트가 으깨지며 마치 진도 6의 열진이 도시를 휩쓸고 지나간 것 처럼 땅이 갈라져 나갔다.그렇게 시가지를 박살내며 빌딩의 숲 사이에 몸 을 처박은 울트라맨의 앞으로는 주먹을 내뻗은채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한 소년이 서 있었다. 피스 그레이,부르스. 자신의 24배를 넘기는 괴물을 주먹 한 방으로 날려보낸 괴물 보다 더 괴물 같은 인간이 지금 여기 있었다. " 후우우우우우우… " 브루스는 천천히 자세를 풀며 심호흡을 들이켰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굉 장히 길었다. 그는 유달리 하얘진 얼굴로 들이마신 숨을 내쉬며 뻗었던 주먹 을 거두었다. 그런 그에게로 지진파를 견뎌낸 진우들이 달려왔다. " 사,사부 님…! 괜찮으십니까?! " 진우의 다급한 질문에 부르스는 무거운 시선을 그에게 향하며 천천히 고개 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뒤의 유리와 시민, 마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보여주는 능력은 자신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압도적일 정도로 강맹했다. 마리는 혀를 내 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 도대체…어느 정도의 수련을 쌓아야 인간이 저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 그녀는 부르스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은 뒤로 제껴두더라도 그의 신적인 무용 에 무술가로서 순수히 경탄했다. 분명 저것은 투신(鬪神)이라고 불러도 손색 이 없을 정도의 무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스 역시 저런 괴물과의 충돌 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는지 그 몸에서 이상한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 모,몸이…? " 유리는 부르스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건 부르스를 바라보는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권복 안에 있던 부르스의 몸이 천천히 투 명해지는 것 같더니,그 형체가 안개가 낀듯 흐려졌던 것이다.하지만 재차 원 상태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그 육체. 마치 몸을 구성하는 실체가 희미해져 만 가는 것 처럼 보였다. 진우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 사부님… 몸이… " " …혹시 지금 건방지게 날 걱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네 놈? " 부르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짜증이 섞인 눈으로 진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모두의 시선이 걱정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낮게 혀를 찼다. " …흥. 방금의 경(經)으로 선기(仙氣)가 떨어졌을 뿐이다. 체내의 정(情) 을 보충할 때까지는 잠시 동안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해. " " 아,예…. 그렇군요. " 진우와 모두의 얼굴에서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부르스는 그런 그들의 얼 굴을 마주하지 못하며 몬스터에게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제길.제길.그는 속 으로 이를 갈며 투덜거렸다. -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괴성을 내지르며 히어로 매니아가 폐허의 잔해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제대로 몇 발 걷지도 못하며 몸을 비틀 거렸다. 그 모습을 보 며 부르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 흥…. 녹존은 상대의 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녀석의 정을 담는 그 릇에서는 균열로 인해 밑 빠진 독 처럼 정이 새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 그것이 바로 칠성권 제 3의 발경. 그리고… " 앗! " 히어로 매니아를 바라보던 진우들의 입가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40m 의 거인. 그 육체가 이상하게 왜곡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공간 이 뒤틀리는 것 처럼 울트라맨의 형상은 부분 부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마 치 고장난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 처럼…. " 호오라… " 그리고 부르스는 낮게 웃었다. 그는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히어로 매니아의 정체를…! " 그런 거였군. " " …사령관 님. 저것은… " 피스메이커 작전 본부실의 메인 스크린은 히어로 매니아의 상태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수정은 그런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옆의 진 사령관 에게 물었다. 진 사령관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하다가 곧 오 퍼레이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위그드라실의 델타 위성에 잡힌 29구역의 영상을 모두 메인 스크린으로. 몬스터가 활동했던 경로를 모두 체크하여 그 피해를 보고하라. " << 피스! >> 순식간에 메인 스크린에 떠오르는 29구역의 부분 영상들. 그것은 히어로 매 니아가 처음 등장했던 지하철 역에서 부터 현 전투 지점까지의 구간 영상들 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닥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 구간 영상에 보이는 29구역의 도심은 멀쩡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다! 분명 40m로 거대화된 히어로 매니아의 난동에 수 십 채의 빌딩들이 박살 나며 시가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을 터인데… 영상에 잡혀 있는 도시의 모습 은 언제 폐허로 변해있었냐는듯 멀쩡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그야말로 귀 신이 곡할 노릇! 그렇게 영상을 바라보던 수정은 곧 뭔가를 깨달았는지 진 사령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혹시 일루젼(illusion)? …환술(幻術)이었던 건가요?! " " …브로켄의 요정이라는 거지. " 진 사령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정에게 답한 후,오퍼레이터들에게 소리쳤다. " 10월 27일 9시 32분을 기점으로 몬스터의 코드 네임을 히어로 매니아에서 스펙터(spector)로 변경한다! " " …저,저게 환각이라는 겁니까? 저것이?! " 마리는 믿을 수 없다는듯 재차 부르스를 향해 물었다. 그것은 진우와 시민, 유리도 마찬가지였다.그런 그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부르스는 인상을 찡그리 며 짜증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 몇 번을 답해야 하는 거냐? 저 앞에 있는 건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신기루일 뿐이다. 실체가 없는 허상이란 말이다. " " 하지만… 저렇게 건물들과 거리가 박살나 있는데… " 마리들의 눈에 비치는 도시의 모습은 여전히 폐허 그 자체였다. 그것은 40m 의 거인이 휘젓고 다닌 결과의 산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부르스는 한심 하다는듯 비웃음을 흘렸다. " 흐…그거야 네 놈들의 글러먹은 정신 상태가 여전히 저 신기루에 현혹되 어 있기 때문이지. 진실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자는 허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너희들은 스스로가 만든 환상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을 뿐이야. " " 그런…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일행의 얼굴.솔직히 부르스의 말이 조금도 납득이 가지를 않았다. 지금의 이 광경들이 다 환상이라니….이렇게나 생생한데? 이 렇게나 피부에 와닿는데? 단지, 시민 만이 앞에서 느꼈던 도시의 이질감을 떠올리며 부르스의 말에 수긍하고 있었다. ' 그래서였던 건가… ' 몬스터가 날뛴 것 치고서는 도시에서 파괴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그렇다면 예전의 이해할 수 없던 상황들도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 히어 로 매니아와 조우했을 때 자신들의 오라 능력이 통하지 않았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 였던 것이다. 부르스는 시민 외에는 일행이 여전히 자신의 말을 이 해하지 못하자 혀를 차며 말했다. " 하긴 너희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이 환상은 눈속임 정도의 단순한 수준이 아니니까. 녀석은 인간의 공포심을 자극시켜 실제로도 몸 에 이변이 오도록 만들고 있다. " 다시 말해서… " 저게 허구라는 것을 깨닫지 못 한다면 스스로가 걸린 최면에 자신의 목 을 조르게 된다는 거다! " - 우오오오오오오오!!! 도시를 뒤덮는 거인의 장송곡. 모두는 그 굉장한 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며 이를 악물었다. 맙소사! 이런 게 가짜라니? 이런 게 허구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머리로는 이해하겠지만 몸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가 짜라고 수긍하던 시민 역시도 반신반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부르스 만 이 그 괴성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며 몬스터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 나는… 슈퍼… 영웅이다- 모두는 하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정말… 혼자… 라고 생각해? " " ......... " 신이의 질문에 가인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그것은 지 금껏 그가 느껴오던 감정, 어딘가에 뭔가를 놓고 온 듯한 허전함과 안타까움 과 관계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것이 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 만… ' 하지만 그렇게 되면… '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신이와는 다시 헤어지고 말 것이다!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밀려드는 죄책감과 미안함 의 감정을 뿌리치며 가인은 그것을 부인했다. 간신히 생각나려고 하는 뭔가 를 애써 머리 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 나는… 나는… " 가인은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달싹이며 할 말을 찾았다.부인하려고 해도 그 의 마음 속으로는 지금껏 소중히 해오던 뭔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건… 그 건 바로…. 신이는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 오빠는 혼자가 아니야…. " " 나는…!! " 가인은 신이의 말을 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백색의 공간은 29 구역의 한 건물 안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가인이 지금껏 잊고 있 던 '그들'이 서있었다. " 아… "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이자 선배이자 동생이자… 가족… 인 사람들…. ' 시민 씨! 마리 선배! 유리야! 진우 씨! ' 가인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그들은 A.I 슈츠를 착용한 채 근심스러운 표 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우들의 눈에는 가인과 신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가인을 향해 한 사람 한 사람 소리치고 있 었다. " 지금 이 순간에도 가인은 죽어가고 있을 지 모릅니다! 더는 지체할 수 없 어요,피스 그린! 적어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한,전 나갈 겁니다! " 마리 선배… " 나도…! 나도 나갈거야! 오빠를 잃고 싶지 않아…. 오빠가 보고 싶어…! 이대로 오빠와 헤어질 순 없어! " 유리야… " 그래요, 유리 양. 반드시 가인 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우리 모두…. " 시민 씨… " 그럼 필승의 각오로 저 괴물에게 달려드는 겁니다,모두! 단 전술 작전은 제가 지휘합니다! 아시겠습니까? " 진우 씨…. 다들…. 가인은 떨리는 가슴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자 신이 느껴오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자신이 놓고 온 소중한 뭔가가 무엇 이었는지를. 그렇다. 자신이 이대로 죽어버리면 다시는 이들과 만날 수 없 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인의 손을 신이가 맞잡으며 미소지었다. " 봐. 오빠는 혼자가 아니야. 이렇게 오빠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잖아. " " ......하지만… " 가인은 차마 신이를 바라보지 못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알 수 없는 죄책감 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신아…, 너는… 그걸로 좋은 거야…? 너는… " 너는… 정말 그걸로 좋은 거야…? 이대로… 나와 헤어져도 좋은 거야…? " 이대로 앞으로도 계속 못 보게 되어도… " 오빠…. " 하지만 신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가인에게 말했다. " …오빠는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게 너무 즐겁지? " " ......... " 가인은 멍하니 그런 신이를 바라보았다.신이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 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켜버린 그 느낌. "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웃어야지. " " 내가… " 살아가는게 즐겁다고…? 신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잡고 있는 가인의 손을 더 욱 힘주어 잡았다. 그 손은 너무도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 오빠는 살아 생전에 나에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주었어…. " 그러니까… " 그러니까… 이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오빠가 즐겁게 사는 걸 나와 부 모님에게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 " 신아… " " 이제는 오빠도 오빠 만의 삶을 살아야지….그게 진정으로 나와 부모님이 바라는 일이야. 오빠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램이야. " " ......... " 신아…. 가인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신이를 잡고 있는 가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신이는 그런 자신의 오빠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가인의 눈에 비친 그 미소는 너무도 슬퍼 보였다. 애처로워 보였다! 그의 눈 으로 한 줄기 눈물이 주륵 흘러 내렸다. " 신아… 나… " 가인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 나… 그럴 수는 없어. " 그는 살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 나는 슈퍼 영웅… - 슈퍼 영웅이다-! 한 남자가 소리치고 있었다. 흐느끼며,자랑스럽게, 울고, 웃으며 그는 소리 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삶이 엿보이고 있었다. 슈퍼 영웅이 꿈 이었던 소년. 하지만 모두가 그의 꿈을 부정했다. - 꿈은 꿈일 뿐.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 헛된 꿈이야.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 하지만… 하지만 슈퍼 영웅이 되고 싶어하면 안되는 걸까? 헛된 꿈은 꾸어서는 안되 는 걸까? 누구나 이루고 싶어하는 소망 하나 쯤은 있는 거잖아. 어릴 때부터 소중히 간직해오던 꿈.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꿈을 버려야만 하는걸까? 사 회를 알게 되면 그것을 버려야만 하는 거야? 어릴 때 순수하게 느꼈던 그 감 정은 어른이 되면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되는 거야? - 가지마! 아내가 떠나고 두 딸 아이도 떠났다. 모두가 떠났다. 내가 어렸을 때의 부 모님 처럼. 그들도 날 돌아 봐 주지를 않았다. - 날 혼자 두지마! 그렇다. 난 혼자였다. 그런 내 곁에 항상 있어 주었던 것은 슈퍼 영웅들의 애니메이션 뿐. - 그렇다. 슈퍼 영웅. 그들이 있는 한 난 혼자가 아니였다. 더 이상 혼자일 필요가 없 었다. 모두가 날 떠나간다고 해도 그들만은 내 곁을 항상 지켜주었다. - 슈퍼 영웅이 되고 싶어! 난 슈퍼 영웅이 되고 싶었다. 슈퍼 영웅이 되면… 슈퍼 영웅이 되면 그들과, - 슈퍼 영웅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더 이상 혼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 기에…! -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 아아아아악!! " 울트라맨의 모습을 한 스펙터에서 무수한 사념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부 르스의 발경에 의해 정의 그릇이 깨져나가면서 정과 함께 사념들 또한 봇물 터지듯 흘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피스 핑크, 이유리는 그 어지러운 사념 의 목소리에게서 귀를 틀어막고 무릎을 꿇었다. 타인의 사념을 읽어내는 그 녀에게 있어서 이런 무분별한 사념의 폭발은 머리를 하얗게 태우는 고통을 주고 있었다. " 유리 양! " 시민은 그런 유리를 끌어 안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에게도 몬스터의 사 념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귓가에 전축을 틀어 놓은 것 처럼 무시무시한 소리로. 사념은 직접 머리 속에서 울려퍼지는 것이었기에 귀를 막아봤자 아 무런 소용이 없었다. 시민이 이럴 정도이니,마인드 디텍터인 유리가 받는 고 통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진우와 마리 역시 이를 갈며 정신 속으로 스 며드는 몬스터의 사념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 쏘아아아아아아!! " .........!! " 그러나 다음 순간, 괴성과 함께 피스 대원들을 공격해 오는 스펙터. 진우들 은 사념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재빨리 몬스터의 공격 범위에서 몸을 피해냈다. 아무리 저 거대한 40m의 거인이 환영이라고 해도, 그 공격은 너무나 현실감 이 있었기에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콰지지지지직!! 부서져 내리는 아스팔트. 거대한 진동이 도심을 뒤흔들었다. 각자 건물들의 위로 몸을 피신한 진우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몬스터에 의해 폐허가 된 거리 를 바라보았다. 저런 것을 다 환영으로 믿으라니… 도저히 불가능한 소리다. " …바보 같은 것들. " 부르스는 몸을 피한 진우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 만이 유일하게 몬스 터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거리에 유유히 서있었다. 몬스터가 환영이라는 것 을 깨달은 순간, 그에게 있어서 스펙터의 공격은 더 이상 어떠한 피해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폐허의 잔해들이 튀어와도, 지진파가 그를 덥쳐와도 부 르스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으며 홀로 딴세상에 있는 것 처럼 멀쩡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저렇게 공격을 피해버리는게 녀석들 한테는 나을지도…. ' 어설픈 자각으로 저 환영과 맞서다가는 되려 목숨을 잃을 테니까. 부르스는 품 속에서 곰방대를 꺼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순간, 그의 몸이 전과 같이 투명해지면서 손에 쥐고 있던 곰방대가 형체를 잃은 손바닥 밑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부르스는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진 곰방대를 내려다 보며 허 탈한 표정을 지었다. ' 역시 나는…. ' 무리한 선기의 사용으로 육체의 형상이 유지 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저 몬 스터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었는데,이런 상태로는 전투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부르스는 점점 그 얼굴에 분노를 띄우며 이를 갈았다. ' 천계(天界)! ' 아직도 멀었단 말인가! 이렇게나! 부르스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아수라장 이 된 지상과는 달리 하늘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푸르렀다. 그것이 자신을 조 소하고 있었다. " 크으으으으윽…! " 이런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 어디 있는 거냐, 애송아!! 어서 나오지 못해!! " 가이아가 선택한 옴팔로스의 열쇠. " 오라의 주인---------!!! " 부르스의 노호성이 몬스터의 사념 속에서 우뢰와 같이 하늘을 갈랐다. 가인의 눈 앞으로 폐허가 된 29구역의 모습이 보여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는 40m 거구의 몬스터와 진우들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가인은 당황하며 신이 를 돌아보았다. " 이건…?! " " 다들… 지금 오빠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어…. " 날… 구하기… 위해? 가인은 떨리는 눈으로 전투를 지켜보았다. 자신이 녀 석의 주먹 한 방에 피떡이 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저리 도 무모하게 전투를 벌이다니… 다들 무슨 생각인 거야?! 위험하다고요! " 마리 선배!! " 막 몬스터의 주먹에 마리가 휩쓸려 가는 것이 보여왔다.가인은 비명을 지르 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이내 부르스가 그녀를 구해내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등 뒤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 왜… 왜…! " 왜 나 같은 녀석 때문에 다들…! 가인은 그들에게 자신의 말이 들릴리 없다 는 것을 알면서도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그만둬요! 난 돌아가지 않아! 난 이미 죽었다고요!! " 부르스와 몬스터의 격돌! 그리고 다시 위기에 빠지는 일행들.하지만 그들은 끝내 몬스터에게 달려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인은 그런 모두의 모습 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모두들… 어째서…어째서 그렇게나….신이 는 가인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 그건…저 사람들에게 오빠는 가족이기 때문이야. " " …가족? " 가인은 고개를 들어 신이를 바라보았다. " 그래. 오빠가 날 생각해주는 것 처럼, 저 사람들에게도 오빠는 그런 소중 한 사람인 거야.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겠지. 분명 저 사람들에게 위험이 닥치면 오빠도 저렇게 행동할 걸. " " ......... "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진우 씨, 마리 선배, 시민 씨, 유리야! 몬스터 의 공격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그들의 모습에 가인은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 들에게 달려가 버리면… " 오빠,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서는 안돼. "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산 사람의 의무. 죽은 이들을 위한 책임. 신이는 그렇게 가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 오빠는 저 사람들에게 우리를 잃었을 때와 같은 슬픔을 줄 생각이야? " " .........!! " 신이의 말이 가인을 꿰뚫었다. 수 없이 외치고 흐느끼던 자신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 아버지! 어머니! 신아! 왜 날 혼자 두고 간 거야?! - 나 혼자 어떻게 살아가라고! - 제발 날 혼자 두지마! - 혼자이기 싫어! - 날… - 떠나지마-------!! 그리고 한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긴 에메랄드 빛 머리를 가진 소녀의 모 습이. 병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붙잡던 그녀의 모습이. " ......... " 가인은 몸을 일으켰다. 그 얼굴에서 더 이상 어떠한 고뇌도 찾아볼 수가 없 었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깨달은 모습. 가인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신이 에게 말했다. " …나, 약속했었어. " - 날… 혼자 두지마…. " 혼자로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한 친구가 있어. 언제나 곁에 있어주겠다고 약속했었어. " " .........! " 가인의 말에 신이의 어깨가 흠칫 떨려왔다. 가인은 그런 신이의 어깨를 끌 어 안으며 말했다. " 절대로 그 친구에게는 부모님과 신이를 잃었을 때 내가 느꼈던 아픔을 주 고 싶지 않아. " " ......... " " …정말… 가도… 되겠어? 널 혼자 두고 가도… 외롭지 않겠어? " 가인의 말에 신이는 그를 올려다 보며 미소지었다. " 난 한 번도 혼자인 적 없는 걸…. 오빠가 날 기억해주는 한 난 외롭지 않 으니까… 혼자가 아니니까. " " .........응. " 가인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몸이 희미하게 사라져 가 기 시작했다.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을 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가인은 사라져 가는 마지막까지 신이의 손을 놓지 않 았다. " …꼭 다시 만나러 올테니까… 반드시 만나러 올테니까… " 그러니까 신아… - 기다리고 있어줘…. 그리고 가인은 신이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죽음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그 는 다시 삶의 굴레 속으로 돌아간 것이었다.신이는 그런 가인의 사라진 자리 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뒤로 돌렸다. " ......... " 그러자 다음 순간, 신이는 긴 에메랄드 빛 머리를 늘어뜨린 밤의 여왕으로 변해있었다.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리리스. 가인을 설득하던 신이 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스펙터의 환상에 사로잡힌 가 인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직접 죽음의 문턱까지 그를 뒤 쫓아왔었다. 신이 의 모습으로 그녀가 조금만 더 늦게 나타났더라면 가인은 죽음의 환상에 취 해 그대로 목숨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 …약속…이라고…. " 리리스는 가인이 남긴 말을 되새기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눈동자 가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 …바보 같은… " 열에 취해 무의식 중에 한 말이었을 뿐인데…. 그것을… 그는… 가인은… " …바보. "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이들이었다. 유메나 가인이나…. 어차피 세상은 혼자 서 살아가는 것인데… 혼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째서 그들은… - 고마워요…. 그때, 그런 리리스의 귓가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리리 스가 돌아본 그곳에는,저 멀리에서 부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한 소녀가 있었다. 너무나 멀었기에 그 모습 조차 희미하게 보이지를 않았지만, 리리스 는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가인의 동생인… - 넌…? - 고마워요. 오빠를 지켜주어서…. 그러나 리리스는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백색의 공간에서 사라져 갔다.가인 이 의식을 되찾자, 그녀도 더 이상 그의 정신 세계 속에서 머무를 수가 없었 던 것이다. -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진우들은 자신의 몸 속에서 오라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대지가 울고 오라가 울었다. 이 느낌은…? " 설마…! " 마리가 돌아본 그 곳에서는 푸른 빛이 솟아 오르며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그 빛은 저 편에 떨어진 건물의 옥상에서 부터 퍼져나오고 있었다.유리는 환 하게 밝아진 얼굴로 소리쳤다. " 오빠! " 이 익숙한 느낌은… 저 오라의 푸른 빛은… 피스 블루,유가인! 그의 것이었 다! 시민은 그 오라의 빛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진심으로 안도했 다. ' 가인 씨….무사했군요…. '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 " 녀석! 사람 애 간장 태우기는! " 환호하는 진우. 그의 곁에서 부르스는 인상을 구기며 투덜거리고 있었다.하 지만 그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 …빌어먹을 애송이…. 늦었잖아! " -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오라의 포효. 그리고 가인은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그에게 보인 것은 푸 르디 푸른 창공의 모습이었다. ' 여기는…? ' 그는 자신이 10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 눕혀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자신의 몸을 둘러 보았다. 티끌 만큼의 상처도 없었다. 앞의 그 심각한 부상이 거짓 말이었던 것 처럼. 그러나 이 이상한 상황을 가인은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눈 앞의 거인이 환상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 사람은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는 법이라고 했던가… ' 웃음이 나왔다. - 쏘아아아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목표를 진우들에게서 가인으로 수정한 스펙터. 40m의 거구는 흉폭한 기세를 띄우며 가인이 서있는 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인은 그런 몬스터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으며 침착히 오른손의 헤븐 스매쉬를 뒤로 끌어 당겼다. - 알겠냐? 진실로 무서운 것은 그 육체 보다 마음을 공격하는 것.상대의 심 정(心情)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것을 주심(主心). 변하지 않는 심맥(心脈) 이라고 하지! 자신을 훈련시키던 부르스의 가르침.그리고 그에 의해 깨달을 수 있었던 기 술! 가인의 헤븐 스매쉬로 푸른 오라의 기류가 회오리치며 모여들었다. 그리 고 가인은 달려드는 스펙터의 안쪽으로 뛰어 들었다! - 주심(主心)! " 하아아아아아아앗-------!!! " 天천 空공 主주 心심 拳권 - 투카카카카카카카칵!!!!! 몬스터의 내부에서 부터 그 모든 것을 찢어 발기며 솟아 오르는 오라의 토 네이도들! 가인이 용정호에서 길조를 소멸시킬 때 썼던 그 기술이 스펙터에 게 작열한 것이었다! 가인은 스펙터가 보여주는 환상에 현혹되지 않고 그 환 상의 근원지를 향해 오라의 토네이도를 터뜨렸다. 스펙터에게 기생당했던 숙 주의 절규가 모두의 마음 속으로 울려퍼졌다. - 나는 단지 꿈을 이루고 싶었을 뿐인데…! 슈퍼 영웅…! 그 하나 만을 원 했을 뿐인데…!! " 왜곡된 방법으로 도달하려하는 욕망은 왜곡된 결과를 빚을 수 밖에 없다. 과정도 그 결과의 일부이니까. " 부르스는 그런 스펙터의 최후를 보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가인은 소 리쳤다. " 무엇보다! 슈퍼 영웅은 평화를 수호하기 때문에 영웅인 거란 말이다앗!!! " - 푸화하하하하하하학!!!! 대기가 흩어지듯 산산조각나는 스펙터! 그렇게 거짓 영웅의 꿈은 끝이 났다. 몬스터가 사라지자 29구역의 폐허가 된 모습은 모두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 다. 그리고 그곳의 한 골목에서는 몬스터에게 기생당했던 한 남자가 의식을 잃은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이마에 박혀 있던 마정(魔情)의 핵은 숙주의 모 든 욕망을 빨아들였는지 그 검은 빛을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곁 에 있던 그림자가 길어진다 싶더니 한 검은 양복의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 을 드러냈다. " 정말이지… 무책임하신 분들이로군요. 이렇게 뒷 마무리가 허술해서야… 후후…. " 피스 블랙, 한시영. 그는 리리스와 초류향을 향해 가볍게 조소하며 남자의 이마에 박혀있던 마정의 핵을 거두어 들였다. 마정의 핵은 검은 보석 처럼 시영의 손에서 그 탐욕스러운 빛을 번뜩였다. 시영은 잠시 그 보석을 이채 로운 눈으로 바라 보다가 시선을 돌려 골목의 저편에 있는 피스 대원들을 바 라보았다. 그의 눈은 일행들 중에서도 오라의 주인 유가인을 향하고 있었다. " …한차례 고비는 넘긴건가,소년? 하지만 이제부터다. 부디 너무 쉽게 절 망하지는 말라고…후후후… " 절망의 끝에는… 암흑 만이 있을 뿐이니까. 시영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 져갔다. " 가인 씨? 테레이아 양의 상태는 좀 좋아졌나요? " 활짝 웃으며 말하는 시민. 하지만 가인은 차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며 고 개를 떨어뜨렸다. " 물론 오빠의 간호를 그렇게나 정 성 스 럽 게 받았는데 좋아지지 않으면 곤란하겠지…. " 활짝 웃으며 말하는 유리. 하지만 가인은 차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며 고 개를 더더욱 떨어뜨렸다. 단지, 마리 만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 며 시민과 유리의 태도에 의아해할 뿐이었다. " 시민 씨와 유리, 두 사람 다 가인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얘기를 들어 보니 테레이아의 병 간호를 가인이 해준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에 대해 칭찬은 못 해줄 망정… " " 마,마리 선배…! " 역시 선배 밖에 없어요! 가인은 자신을 시민과 유리에게서 막아주는 마리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하지만 시민과 유리는 그런 마리를 향해 여 전히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지금 저희는 칭찬하고 있는 거에요, 마리 양. 밤 새 도 록 테레이아 양을 병 간호해준 가인 씨에게. " " 그것도 단 둘 이 서 말이지. " " ......... " 그런 둘의 말에 조용히 침묵하는 마리.가인은 왠지 불안해져 조심스럽게 마 리를 불렀다. " 마,마리 선배…? " " …유가인. 지금 그 말이 사실인 거냐? " - 고오오오오오… 순간, 가인을 천천히 뒤돌아보며 낮게 되묻는 마리.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투기가 가인을 엄습해 왔다. 가인은 그 굉장한 기세에 그대로 찌그러져 버렸 다. 한편 그런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진우는 히죽 웃으며 옆의 부르 스에게 물었다. " …어째, 몬스터와의 전투 보다 이쪽이 더 긴박감이 넘칩니다? " " …여심이란…. " 혀를 차며 곰방대를 무는 부르스.그런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가인은 다 음과 같이 후회했다. 그대로 신이의 곁에 남아있을 것을… 이라고…. " ......... " 테레이아는 자신의 룸에 있는 부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의 위에는 가인이 만들어 놓고 간 죽이 놓여 있었다.그녀는 냄비의 뚜껑을 열고 수저를 가져갔 다. " ......... " 한 입을 떠 먹었다. 죽은 차갑게 식어 있어서 무슨 맛인지 조차 알 수 없었 다. 그러나 그녀는 데워 먹을 생각도 하지 않으며 다시 한 스푼을 떠먹었다. " ......... " 차갑게 식어버린 죽. 하지만… " ......따뜻…하다…. " 그것은 리리스가 난생 처음 먹어보는 따뜻한 음식이었다. <제 13 화 흔들리는 마음 完> 次回豫告 투 신 자 살 - 13살 K군의 자살이 있은지 채 이틀도 되지 않아 25구역의 13살 M모 양 역 시 옥상에서 뛰어내려 그 어린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번 달 들어 세 번째 로 벌어진 연쇄 초등 학생 자살 사건은 모두 같은 초등학교, 같은 구역의 학생들에게서 일어난 일로서, 경찰에서는 이 자살을 타살로도… 어느 비 오는 날 아침, 소녀의 눈을 사로 잡은 뉴스. 그리고… 시민: 유리 양? 왜 그래요? 유리: ......저 아이들… 자살한 세 명의 아이들. 그들은 다름 아닌… 유리의 초등학교 동창들이었다. - 나는… 진실을 알고 싶어…. 진실을 찾아 헤매는 소녀. 그리고 그런 소녀의 앞에 나타난 소년. 마유빈: 유리야, 우리는 서로 닮았어. 유리: .........(발그레) 第 14 話 마인드 브레이커(Mind Breaker) 유가인! 챔피언 타이틀 방어전 그 첫 번째다! 가인: …유,유리야…?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Ｖolume.4 " 특훈! 추가 시험! " =-=-=-=-=-=-=-=-=-=-=-=-=-=-=-=-=-=-=-=-=-=-=-=-=-=-=-=-=-=-=-=-=-=-=-= 11월 9일. 한성 고등학교의 중간 고사가 끝난 이틀 뒤…. " 에휴…. 가인이 녀석. " 재영은 방과 후, 학생들이 빠져나간 1학년 3반의 교실에 남아서 한 숨을 쉬 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의 걸 프렌드 유시내와 한성 고등학교의 꽃이라 불 리우는 그녀들, 테레이아와 유리가 서있었다. 시내는 테레이아와 유리의 얼 굴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재영에게 물었다. " …재영 군, 그러니까 가인 군… 결정된 거지? " " 응. " 입 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이는 재영. 그런 그의 긍정에 테레이아와 유리 의 얼굴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유리는 아이 답지 않은 근심어린 얼굴로 비어 있는 가인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 오빠…. " 어째서 이런 일이…. 어째서 이런 일이 오빠에게…. 테레이아 역시 걱정스 러운 표정을 지으며 재영에게 물었다. " 가인은 이번이 처음… 인 거죠, 재영 씨? " " 그렇죠∼ 절대로 관계가 없을 줄로만 알았던 녀석인데…. 아마 충격이 클 거에요.꽤…. " " ......하아∼ " 가인의 6년지기 친구인 재영의 대답에 교실 안의 모두는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런 그들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검은 권복의 소 년,부르스는 예의 곰방대를 입에서 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됐다는 거야, 그 놈? " " 추가 시험 확정. " 그 말에 답한 것도 역시 재영이었다. Ｖolume.4 " 특훈! 추가 시험! " 추가 시험. 그것은 중간 고사와 기말 고사를 끝낸 후, 특별한 상황에 처한 학생에게 주어지는 한성 고등학교의 시험 제도였다. 중간 시험이나 학기 말 시험에 응하지 않는 경우는 F가 되어 추가 시험 제도가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갑작스럽고 중대한 사고, 집안의 예기치 않은 참사, 기타 중대한 일 로 시험이 불가피한 학생은 추가 시험이 허락 되어진다. 하지만 그런 케이스 외에도 추가 시험을 받는 학생들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 로 가인과 같이 몇 몇의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는 경우였다. 1학년 3반 38번 유가인.그는 과학, 수학, 한문, 영어… 이상과 같은 총 4개 의 과목에서 낙제를 기록하며 추가 시험을 받는 영광의 낙제 군단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교무실 제일 가측에 있는 지연의 자리에서 자신의 담임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1학년 3반의 담임이자 체육 교사인 하지연은 최대한 성질을 죽이려고 노력하며 참을성 있게 가인에게 물었다. " …혹시 이번 시험, 꽤 어려웠던 것? " " …아니요. " " …아니면 공부에 열중하지 못할 정도로 고민하는 일이 있었다던가… " " ……아니요. " " …그것도 아니라면 진학하기를 포기했다던가…. " " ………아니요. " 담배를 씹으며 푸념 섞인 목소리로 묻는 지연의 말에 점점 고개를 수그러뜨 리며 '아니요'만 연발하는 가인. 그런 그의 모습에 지연은 길게 한 숨을 내 쉬었다.불 같이 화를 낼만도 하건만 낙담하는 가인의 모습에 화를 낼 마음도 들지 않았던 것이다. 지연은 전산 처리된 가인의 성적표를 그의 앞에 보여주 며 말했다. " 눈이 있다면 잘 봐라. 그리고 비교해봐. 저번 1학기 때 중간,기말 성적과 이번 중간 고사 성적. " " ......... " 지연은 이렇게 자꾸만 가인을 다그쳐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뭐,원 래 이런 건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다. 몸이 고생하면 정신을 차리는 법. 처음 에 내건 슬로건 대로 '무산소로 육체 기능의 30%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마'로 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무작정 밀어 부치기에는 가인의 성적이 너무 떨어져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전 학기 성적은 그리 뛰어난 것 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신경써서 공부하고 있다는 흔적이 보이기는 했다.성 적도 중 상위권. 나름대로 봐줄만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이번 시험에서 무 려 4개의 과목이나 낙제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전의 모의 고사도 약 50 점 가까이 곤두박질 쳤다. 이건 이미 체벌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 ......... " 그리고 가인 역시 자신의 성적표에 한 숨이 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저것이 자신의 성적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지금껏 낙제라고는 받아 본 적도 없던 그가 무려 4개 씩이나 낙제를 받았던 것이다. 그 F라는 알파벳 이 눈 앞을 깜깜하게 만들었다. ' 꼴 좋다,유가인….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 가인은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성적에 신경쓰고 있다 고 생각했는데 이 모양이다. 물론, 낙제를 받은 이유를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들어서 아침 저녁으로 받는 부르스의 스파르타 식 훈련에 심신이 지친 것을 이유로 들 수도 있었고, 시험 전 날 몬스터의 출현 에 잠을 설친 것도 이유로 들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낙제점을 받은 것은 가인 혼자 뿐이었다. 유리도,마리 선배도, 부르스도 누구 하나 낙제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런 저런 이유를 든다고 해도… ' …핑계일 뿐이지…. 다 내가 공부를 안했기 때문이잖아…. ' 그렇게 생각하자 더더욱 자신이 한심해졌다. 어차피 피스 메이커에 들어 오 게 되면서 공부와는 상관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에 연연하는 자신의 모습이라니…. ' 어차피 뭘 할지도 모르고 어떤 대학에 들어갈지도 결정하지 않았잖아…. ' 그래. 어차피 학업 같은 거… 그다지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난 어째서… " ......... " 하지만… 가인에게 있어서 학교란 일종의 고리 같은 것이었다. 피스 메이커 의 일원이 되어 몬스터와 싸우는 비현실적인 삶 속에서 유일하게 일상적인 삶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자신이 오라 능력자라는 것을 잊게 해주는 곳.그 래서 가인은 옛날보다도 더 학교 생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애착 이 깊었던 만큼 그 결과가 좋지 못하자 실망도 깊었던 것이다. 지연은 그렇 게 풀이 죽어 있는 가인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굳혔다. " 어쨌든, 추가 시험 전에 절차는 밟아야겠지. 그래서 말인데… " " .........? " " 지금 네 녀석 보호자 분은 일단 그… 한시민 씨지? " " 예? 예에…. 그런데 그게 왜…? " 가인은 불안한 얼굴로 지연을 바라보았다. 시민 씨의 이름이 지연의 입에서 나오자 긴장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 그리고 그런 가인의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 보호자 상담이다. 성적이 이렇게나 떨어진 건 아무래도 가정 문제일 수도 있는 거니까. 무엇보다 보호자에게는 상황을 알려야하지 않겠냐? " " .........!!! " 가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그 시민 씨가 자신의 성적이 떨어진 걸 로 학교에 까지 불려오셔야 한단 말인가? 그 시민 씨가?! - …죄송합니다,선생님. 죄송합니다. 가인의 머리로 지연에게 고개 숙이며 사과하는 시민의 모습이 연상되고 있 었다. 아,안돼! 그럴 수는 없어! 이런 참담한 사태가!! " 아,안돼요, 선생님!! " 가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지연에게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지연은 그 런 가인의 기세에 깜짝 놀라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가인은 애원 조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 제발 그것 만은 안돼요! 자,잘못했습니다! 전부 제 잘못이에요!! " 눈 앞이 캄캄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가 인은 그만 울고 싶어졌다. 가득히나 시민 씨에게 폐만 끼치며 지내 왔는데 이제는 자신의 성적 문제로 까지 그녀에게 폐를 끼쳐야 하는 것이다! 제발 그것만은 어떻게라도 막고 싶은 가인이었다. 그랬다가는 더 이상 시민을 볼 면목조차 없어질 것이다! " 어떻게 해서든 추가 시험을 합격하겠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합격하겠어 요! 오늘부터 죽을 각오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시민 씨를 학교에 부르시는 것만은 참아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 " ......에? 아,아아… 그,그래. " 지연은 자신에게 마치 달려들 것 처럼 소리치는 가인의 기세에 압도되어 엉 겹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그 애처로운 눈이라니! 지연은 그런 가인의 눈 빛을 받자 가슴 한 켠이 철렁 내려 앉으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가인은 지연 이 보호자 호출을 철회하자 화색을 띄며 연신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 " 아니…. 뭐… 그런 것쯤이야…. " 지연은 붉어진 얼굴을 가인에게서 돌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하며 가인은 주먹을 움켜쥔 채 소리쳤다. " 반드시 합격하겠어요! 추가 시험까지 앞으로 사 일! 그 동안 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 전의에 불타오르며 필사의 각오를 다지는 가인. 지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 패기 있는 모습이라니…! 지연의 눈에 비친 가인 의 모습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늠름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 남자라면 그 정 도 각오 쯤은 있어야지! 지연은 가인의 태도가 마음에 든듯 상기 된 얼굴을 하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 좋아! 마음에 들었어! 그 기세만 있다면 추가 시험 따위 아무런 문제도 아닌 거다! 간단히 패스해버려! " " 예! 선생님! " 절대로…! 절대로 시민 씨에게 더 이상의 폐를 끼쳐서는 안돼! ' 절대로!! ' 가인은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날 저녁. " …가인 씨? 오늘 저녁 식사… 맘에 안드세요? " 언제나와 같은 저녁 식사 시간. 식탁에는 가인과 유리, 부르스 그리고 시민 이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맞이하는 저녁 식사 시간은 시민에게 있어서 정겨운 가족들의 모임 시간 같은 것이었다. 더욱이 요리하 기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오늘의 요리는 시민의 자신작 인 닭 가슴살 채소 볶음. 볶은 닭가슴살과 쇠고기, 채소들을 만두피 튀김에 담아내는 별 세개 짜리 메뉴였던 것이다. 하지만… " 아,아뇨. 맛있게 먹었는 걸요! 시민 씨의 요리는 언제 먹어도 정말 맛있 다구요∼ " 순식간에 식사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가인. 그런 그의 모습에 시민은 식사가 그의 입맛에 맞지 않은 것인가 걱정스럽게 물었고 가인은 웃 으며 손을 저었다. 시민은 그런 그에게 물을 따른 컵을 건내주며 물었다. " 하지만… 이렇게나 식사를 서둘러 하시다니….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으신 거에요? " " 예? 예,예에…. 뭐,그냥 이것저것 공부할 게 있어서… 그럼 저는 이만 올 라가 볼게요! 시민 씨, 잘 먹었습니다∼ " 가인은 시민이 자신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 채려고 하자 서둘러 물을 마시 고 부엌을 빠져나갔다. 시민은 그런 그의 뒷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잠자 코 식사를 하고 있는 유리에게 물었다. " 저기, 유리 양? 가인 씨,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 " .........! " 흠칫. 짧게 어깨를 떠는 유리. 그녀는 시민을 슬쩍 올려다 보다가 곧 고개 를 양 옆으로 젓고서는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시민은 그런 유리의 반응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인 씨? 시민은 유리의 옆에 앉으며 그녀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군요? 말해봐요,유리 양. " " ......몰라. " 유리는 시민의 시선을 피하며 짤막히 답했다.유리는 속으로 한 숨을 쉬었다. 어떻게 오빠가 추가 시험을 받는다고 시민에게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 오빠…. ' 유리는 아까 교무실에서 힘없이 걸어나오던 가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이 무거워졌다.기다리던 유리들에게 애써 웃는 얼굴로 쾌활한 모습을 보이던 그 였지만, 유리에게는 가인의 속 마음이 얼핏 읽혀졌던 것이다. 시민이 보호자 호출을 당할뻔 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던 그의 마음이…. 그런데 이런 사 정을 어떻게 시민에게 얘기하란 말이야! 유리는 그렇게 무신경한 짓을 할 수 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와는 달리, 옆에 앉아 있던 소년은 꽤나 무신경 한 신경의 소유자였다. " 아,그거? 별 거 아니다. 추가 시험을 받는 거 뿐이야, 애송이 녀석. " " ......... " 부르스의 무심한 답변에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이를 가는 유리.그녀는 부 르스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노려 보았다. 어쩌면 인간이 이리도 무신경할 수 가 있단 말인가?! 시민에게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오빠의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 유리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부르스는 태연히 수중의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시며 되물었다. " …뭐냐, 그 건방진 눈초리는? " " ......아무 것도. " 자신은 하나도 잘못한 거 없다는 듯한 저 뻔뻔스러운 얼굴이라니… 저렇게 뻔뻔스럽게 나오며 오히려 상대하기가 싫어지는 법이다. 유리는 한 숨을 내 쉬며 슬쩍 시민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부르스의 말이 충격이었는지 그녀 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고 있었다. " 추가 시험… 이라고요? 가인 씨가? " 그 말에 답한 것도 역시나 무신경한 성격의 소유자, 부르스였다. " …후, 그렇다. 꽤나 학문을 닦는데 소홀히 했더군,그 자식. 아전즉극(我 戰則克).도(道)를 알아야 싸워도 꼭 승리하는 법이거늘…. 그 놈은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다. 더구나 보호자 호출까지 당할 뻔 했다더군. " " …예?! " 보호자 호출이라는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는 시민. 유리는 이마를 손으로 감 싸며 이를 갈았다. 부르스…, 저 정도가 되면 무심함을 넘어서 악의로 똘똘 뭉친 사악함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도 상당히 질이 좋지 않은 사악함! 유리 가 다시 자신을 쏘아보자 부르스는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 …해보겠다는 거냐? " " ......아니. " 역시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던 유리였다. 어쨌든,시민은 가인의 방이 있 는 2층을 올려다 보며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 가인 씨, 어째서… ' 어째서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해주지 않았던 거에요? 어째서…. 시민은 속이 상했다. 가인이 추가 시험을 받을 정도로 공부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났고, 또 보호자 호출 건을 자신에게 얘 기하지 않은 가인의 태도에도 화가 났다. 적어도 자신은 가인의 보호자인 줄 알았는데… 가족인 줄 알았었는데…그런데 그런 일들을 자신에게 숨기며 아 무 내색도 하지 않다니…. 너무해요. 가인 씨, 너무하다고요. " …얘기해주면 좋았을 텐데…. " 시민은 침울하게 중얼거렸고, 그 말에 유리도 시민을 바라보며 우울한 얼굴 을 했다. 그 심정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가인은 그렇게나 자신들을 도와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는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는다. 기대오지 않 는다. 그것이 섭섭하면서도 안타까운 그녀들이었다. 그때, 그런 시민을 향해 부르스가 보이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 …너희는 아직도 그 애송이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는 거냐? 녀석은 얘기 를 안 하는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 " .........? " 그게 무슨…? 시민과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르스를 바라보자, 그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 놈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문제는 혼자서 끙끙 앓는 경향이 있지.그런 주제 에 다른 사람의 일에는 자신의 일 처럼 간섭한다. 녀석은 다른 사람의 걱 정을 받아주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걱정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에는 익숙하지가 않은 거야. " " .........! " " 너희들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은 거겠지. 너희를 좋아하는 만큼 더더욱 말 이야. …녀석은 바보니까. " " 그런… " 시민과 유리의 어깨가 힘없이 처졌다.가인과 만난 기간이 자신들 보다도 짧 은 부르스가 가인의 성격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에 맥이 빠졌으며, 가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쇼크였다. 그런 가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민은 안타까운 눈빛을 떨구었다. ' 가인 씨, 얼마든지 기대어도 좋은데…. 얼마든지 걱정 끼쳐도 좋은데…. ' 그렇게나 우리를 걱정해주었으면서….시민은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려는 가 인이 야속했다. 그를 생각하고 있자니 가슴 한 켠이 무거워져만 갔다. 부르 스는 그런 시민과 유리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비어버린 찻잔을 들어올리며 다 음과 같이 말했다. " …한 잔 더. " " ......... " …끝내주게 무신경한 성격이로군. 어떠한 것에도 굴하지 않는 마이 페이스 적인 성격이 부럽기까지 할 정도였다.그렇게 부르스에 의해서 한 층 더 시민 과 유리의 기분이 다운 되고 있을 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비어 있던 가인의 테이블 쪽에서 들려왔다. " 흐음….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 " …진우 씨? " 시민의 놀란 중얼거림. 그녀의 말대로,비어있던 가인의 자리에는 어느 새인 가 나타난 진우가 팔짱을 끼며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 보는 모두에게 히죽 웃어 보이며 손을 들었다. " 언제나! 어디서나! 고민에 빠진 사람들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 는 남자, 정진우 입니다∼ " " ......피곤한 성격이야. " 유리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고, 진우는 상처를 입었 다. 하지만 그는 금새 두 손을 맞잡으며 활기 차게 말했다. " 어쨌든, 추가 시험입니까! 정말이지 소년도 곤란하군요∼ 학창 시절에 연 애에 주력하는 것도 좋은 자세이지만, 무엇보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인 것 을∼ " " …뭐라고요? " 하지만 진우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민과 유리의 시선이었다. 진우는 그 런 그녀들의 시선에 찔끔하여 째빨리 부르스를 향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 아,하하하하하∼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큰일∼ 이대로 아무 대책도 없이 추가 시험을 받았다가는 그 녀석 유급 당할지도 모를텐데∼ 그렇죠, 사부 님? " " …내 알 바 아니다. 그보다 한 잔 더. " 부르스는 귀찮다는듯 인상을 찌푸리며 빈 찻 잔을 내밀었고, 그로인해 부엌 의 분위기는 한층 더 험악해졌다. 진우의 등 뒤로 한 줄기 식은 땀이 흘러내 렸다. 잘못했다가는 괜시리 나타나서 본전도 못 뽑고 쫓겨날 판이다.그때,표 독스러워지는 유리와는 달리 시민은 진우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 …아무 대책도 없이…라면? 진우 씨는 뭔가 대책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저에게는 그렇게 들렸는데…. " 그런 시민의 질문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 진우. 그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단 번에 역전시키겠다는듯 기세 좋게 외쳤다. " 날카로운 지적! 바로 그겁니다,시민 씨! 아무래도 공부란 것은 홀로 독학 하기 보다는 훌륭한 선생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일취월장 하는 법!지 금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지요! " " …한 잔 더. " 부르스가 여전히 찻 잔을 내밀며 리필을 요구했지만,그런 그의 요구는 진우 의 기운 찬 외침과 그 분위기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유리와 시민은 마른 침 을 삼키며 진우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 …방법은 확실한 거겠지? " 미심쩍어하는 눈빛을 진우에게 보내며 낮게 되묻는 유리. 그런 그녀에게 진 우는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내보이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이 몸에게 맡겨만 주라고요! " - 쾅!! 순간, 거세게 탁자를 내리치며 난폭하게 부엌에서 나가버리는 부르스. 그렇 게 그가 떠나간 자리에는 빈 찻잔 만이 테이블의 떨림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 다. 아마도 세 번이나 리필을 원한 자신의 요구가 깨끗하게 묵살당하자 삐져 버린 모양이었다. " ......... " 시민과 유리, 진우는 그런 부르스의 뒷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서 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은 가인의 추가 시험 대비책을 세우는 게 더 시급한 문제였다. 다음 날은 목요일.추가 시험 날인 일요일까지는 앞으로 삼 일 밖에 남지 않 았다. 가인은 학교를 마치자 마자 집으로 달려와 방에 처박혀 있었다. 그는 이번 일요일 까지는 훈련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공부에만 전념할 생각이었 다. 그 부르스가 훈련을 빠지도록 배려를 해줬다는 게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 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 좋아! 오늘도 열심히! " 가인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책상에 앉자 각오를 다졌다. 어제 밤에도 무리해 서 밤을 세웠건만 그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일단 체 력이 바탕이 되었고, 무엇보다 이번 시험의 결과가 시민에게 영향을 미친다 고 생각하자니 잠이 올래야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절대로…절대로 시민 씨 에게 만은 걱정을 끼쳐드려서는 안돼. 절대로! " 어디 보자. " 가인은 교재들을 꺼내며 시험 범위를 살펴보았다. 추가 시험의 범위는 일단 중간 고사의 범위와 똑같았다. 그 범위라는 게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 이었지만, 그렇다고 모의 고사 처럼 광범위한 것도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안 심이 되었다. 더구나 4과목만 공부하면 되는 것! 무엇보다 추가시험은 본 시 험보다 난이도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꼭 막막한 것만은 아닌 가인 이었다. ' 좋아! 할 수 있다! ' 반드시 합격해 보이겠어! 나를 위해서라도! 시민 씨를 위해서라도! 가인은 다시 한 번 전의를 다지며 교재를 펼쳐들려고 했다. 그 때, 방 문이 벌컥 열 리며 진우가 들어왔다. " 요∼ 소년! 공부는 잘 되어 가시나? " " …지,진우 씨? " 가인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진우에게 당황을 금치 못하며 그를 바라 보았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가인을 엄습해왔다. 무,무슨 일로 날 찾아 온거 지? 그것도 하필이면 시험 공부를 할 때 말이야…. 행여나 자신의 공부를 방 해하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가인이었다. 솔직히 이 남자가 얽혀서 제대로 일이 풀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거 같다. " …무슨…일이죠? "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묻는 가인. 진우는 그런 그의 반응에 섭 섭하다는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 에이∼ 너무하는 거 아냐? 공부하는 소년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 고자 찾아온 사람한테 말이야∼ " " ......힘? "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가인이 호기심을 보이자 진우는 히죽 웃으며 그의 어 깨를 떠밀었다. " 자자자∼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따라와 보라고! 소개시켜줄 사람들이 있 으니까! " " 예? 자,잠깐만요, 진우 씨! " 그에게 떠밀려 엉겹결에 밑의 층으로 끌려온 가인. 뭐야? 소개시켜줄 사람 이라니? 그 사람들이 내 공부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영문을 모르며 내려온 가인은 1층 거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본 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라? 어째서 이 사람들이 여 기에? 그런 소년의 반응에 진우는 미소지으며 기세 좋게 외쳤다. " 자,소년! 너의 추가 시험 특훈을 위해 특별히 모셔온 선생님들이다! " " .........!!! "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으응…. 잘 부탁. " 작은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며 인사하는 그들.진우가 데려온 가정 교 사와 가인의 상견례였다. 진우가 데려온 가정 교사는 총 세 명이었는데, 그 중 첫번째 가정 교사는 가인의 수학과 과학을 담당하고 있었다. 가인은 수학 교재를 펼쳐들며 멋쩍게 말했다. " 그나저나 시더가 공부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을 때는 깜짝 놀랐어. " " 아,아아∼ 나도 미스터 그린이 난데 없이 '가인의 교사가 되어주십시오!' 하고 찾아왔을 때는 놀랐지 뭐야∼ " 수학 및 과학 담당 교사, 시더 웰리스는 처음으로 들어와보는 가인의 방을 정신 없이 둘러 보다가 가인의 갑작스런 말에 서툴게 답하며 볼을 붉혔다.그 녀는 속으로 감격하고 있었다. ' 이, 이곳이 가인의 방이란 말이지! ' 가인의 방은 남자 방 답지 않게 굉장히 깨끗했다. 먼지 하나 없이 청소되어 있는 그 청결함! (시민이 청소해주었다)쓸데없는 옷가지를 제외한 필요한 옷 만 옷걸이에 걸어놓은 그 단정함!(그것 역시 시민이 해주었다) 방 안에서 은 은하게 풍겨 나오는 산뜻한 그 향수 내음!(역시나 시민이 뿌려준 것이다) 하 나부터 열까지 모두 시민의 손길이 들어간 것이었지만, 시더는 멋대로 흥분 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시더의 눈에도 거슬 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 …어째서 너가 거기에 있는 거야? " 시더는 가인의 침대에 업드려 있는 한 소녀를 향해 뚱한 눈길을 주며 투덜 거렸다.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 소녀를 향해 말했다. " 유리야. 오빠 방에 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 " 가인의 물음에 소녀,유리는 여전히 침대에 업드린채 시더를 힐끗 바라보며 짤막히 답했다. " …시더가 공부만 가르키려는 건지 지켜보려고. " " 저,정말 실례되는 소리만 하고 있어! 그럼 내가 가인에게 공부를 안 가르 키고 뭘 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인의 공 부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나갔는데 혼자서만 끝까지 남아있는 건 무슨 심 보니! " 시더는 얼굴을 붉히며 억울하다는듯 소리쳤지만,유리는 가인의 침대에서 한 번 뒹굴거리며 말했다. " …내 방이니까 있겠다는 것 뿐. 그러니 신경쓰지 마. " " 신경 쓰여! 충분히 신경 쓰이고 있다고! 그리고 자꾸 가인의 침대에서 뒹 굴거리지마! 가인에게 실례되잖아! " 시더는 유리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뭐야! 저 제멋대로인 아이 는!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으니깐 정말 너무하잖아! 수업을 방해하는 것은 둘 째 치더라도 가인의 방에 들어와 그의 허락도 없이 침대에 드러눕다니! 가인 이 매일 잠드는 저 침대 위에서! 그러나 거기까지 투덜거리던 시더는 순간, 유리가 앞에 한 말 중 하나가 마음에 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내…방? 내 방이라니? " " 이 방은 오빠와 나의 방. 오빠와 나는 매일 이 침대에서 같이 잠들지. " 정확하게 요 몇 주간은 부르스에게 자리를 뺏겨버렸지만…. 그러나 이미 앞 의 설명 만으로도 유리는 충분히 시더의 넋을 빼놓을 수 있었다. 시더는 그 턱이 빠진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입을 벌리며 가인을 향해 버벅거렸 다. " 에에에에엣?! 가,가인…! 지금 이게 무슨, 무슨 소리야?! 침대에서 같이 잠든다니!! " " ......... " 가인은 밀려드는 두통에 이마를 감싸 안았다. 뭔가 처음부터 삐걱거리는 것 이 심히 불안했다. 이거… 제대로 공부는 할 수 있는 걸까….유리는 다시 침 대에서 한바퀴 굴러 몸을 바로 하며 패닉 상태에 빠진 시더를 제쳐 둔채 가 인에게 말했다. " 오빠, 이건 시간 낭비야. 그냥 내가 출제자의 마음을 읽어내면… " " 안돼. " 딱부러지는 목소리로 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는 가인. 유리는 고개를 움츠리 며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가인의 성격 상 미리 답을 알아내는 행위 같 은 것을 용납할 리가 없다. 유리는 그것을 잘 알면서도 가인에게 위와 같은 권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런 일 밖 에 없었던 것이다.솔직히 가인에게 시더 처럼 공부를 가르쳐 주고 싶어도 유 리로서는 역부족이었다.아무리 고등학교 1학년이라지만 실제 나이는 초등학 교 6학년 생 밖에 되지 않았고, 유리 자신도 출제자의 마음을 읽어서 시험을 패스해왔었기에 그다지 공부와는 연관이 없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가인에게 공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시더가 부러워서 이렇듯 심술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인은 그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따뜻하게 말했다. " 유리야, 오빠는 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그래도 난 내 힘으로 시험에 합 격하고 싶어. 그 편이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고…또 유리나 시민 씨를 볼 때도 떳떳할 수 있을 테니까. " " ......응. " 유리는 여전히 침대에 업드린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가인의 손길에 볼 을 붉히며 베개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이런 오빠에게 시험 문제를 가르쳐주 겠다고 한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나도 알고 있었다구….오 빠가 이렇게 말할 줄을…. ' 그래도… ' 뭔가 오빠에게 작게 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시더는 그런 가인과 유 리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서로를 생각하는 그 마음 씀씀이가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좋아.좋아. 그럼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 " 자자∼ 그럼 어서 수업을 시작하자구요, 가인 학생! " 시더는 손뼉을 치며 품에서 예의 커다란 돋보기 안경을 꺼내 들었다. 오늘 의 그녀는 '미소녀' 버젼이었기에 콘택트 렌즈를 끼고 있었지만, 역시 책을 읽기에는 익숙하지 않은 렌즈보다 안경이 더 편했다. " 에,또∼ 그럼 일단 수학부터 보도록 할까∼ " 시더는 가인의 시험 범위에 맞춰 수학 문제집과 그 교재를 펼쳤다. 오늘 그 녀가 맡은 과목은 수학과 과학. 그녀의 전공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적합한 캐스팅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이번 수학 시험의 핵심은 바로 함수로군! " " 오- " 교재를 쭉 훑어 보고서 순식간에 결론을 내리는 시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과 유리는 박수를 치며 짧게 감탄했다. 역시 지능지수 210의 천재 소녀! 가인은 믿음이 담긴 눈으로 시더를 바라보며 말했다. " 맡길게,시더. " " 그래.그래. 맡겨만 줘.펑컨(function:함수)은 와프 입자의 수치를 측정하 여 게이트 발생을 예측하는 디멘션 트랜스퍼(Dimension Transfer) 개념의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이 이론을 모른다면 피스 메이커라는 이름이 운다 고! " 시더는 자신있게 말하며 간단히 함수의 개념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 우선 들어가기에 앞서 알고 있어야 할 것은, 1905년 A.아인슈타인에 의하 여 제창된 특수 상대성 이론이야. 모든 관측자에 대하여 빛이 일정한 속 력으로 진행한다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와, 자연법칙은 일정한 상대속도를 가지는 모든 관측자에 대하여 불변인 형식을 가진다’는 상대성원리를 기 본가정으로 하고, 4차원 쌍곡선 공간의 기하학을 수학적 조작으로 전개하 지. 이 이론의 기하학적 표현수단으로 1908년 수학자 H.민코프스키가 도 입한 공간이 바로 민코프스키즈 스페이스 타임 월드(Minkowski's space-t ime world)야. 다른 말로는 4차원공간(四次元空間)이라고 하는데 이 시공 세계는 디멘션 트랜스퍼의 핵심이 되는 이론이지! " " ......... " 잠시 침묵.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시더에게 말했다. " 시,시더….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함수를 공부하는 건데… 피스메이커의 차원 이동 이론은 그다지 상관 없지…않아? " " 에? 에에- 상관 없어? "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인과 유리의 등 뒤로 식은 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뭐,뭔가 잘못 되고 있어….뭔가가 잘 못 되어가고 있다고…. 어쨌든, 시더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 이제 막 중요한 로렌츠 변환에 대해 설명할려고 했는데…로렌츠변환에 대 한 물리법칙의 공변성(共變性)은 3차원 유클리드 공간으로부터의 유추에 의해 벡터나 텐서를 써서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동시에 일반화하기가 쉽지. " " ......그러니까 더 쉽게…. " " 으으으음∼ " 시더는 인상을 쓰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이보다 더 쉽게 설명을 할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았던 것이다. 아,그래! 혹시 차원 개념으로 설명을 해서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함수는 더 밑의 개념이니까! 시더 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서 이번에는 함수에 대해 설명하기로 했다. " 에, 일단 변수 x와 y 사이에 x의 값이 정해지면 따라서 y값이 정해진다는 관계가 있을 때, y를 x의 함수라고 해. 또 x를 독립변수(獨立變數), y를 종속변수(從屬變數)라고 하는데 이것은 P.G.L.디리클레에 의해 내려진 정 의지.함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G.W.F.라이프니츠였거든. 함 수라는 개념은 수학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했었다고 보아도 될 거야. 여기 까지는 이해하겠어? " " ......으,으응. " 그거… 함수의 역사 같은 건가? 가인은 적어도 X니 Y니 독립 변수니 종속변 수니 하는 익숙한 단어가 나왔기에 간신히 시더의 설명을 납득했다. 시더는 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더욱 의욕에 찬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했다. " 현재의 함수의 기초를 구축한 것은 J.B.J.푸리에 및 A.L.코시야. 코시의 함수에 대한 정의는 디리클레의 정의와 가까운 것이었는데,디리클레는 임 의의 함수를 푸리에 급수로써 표현하는 연구의 결과, 하나의 함수는 동일 한 법칙에 의해 관계를 가지지 않아도 되며 식으로 표시할 필요성도 없다 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정의에 도달했지. y가 x의 함수일 때, 기호로 y=f (x), y=g(x), y=扁(x) " " ......... " " 이때, x=a로 되는 함수값을 f(a) 등으로 나타낼 수 있어. 또 독립변수가 2개 이상의 함수를 다변수함수라고도 하지.이와 비슷한 관계는 실로 헤아 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많은 함수들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낼 수 있 어. " 그러면서 시더는 1차 함수 부터 비롯하여 로그함수에 이르기 까지 7개의 식 들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가인은 멀뚱히 그것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 다. " 저기 시더…. 그… 지금 우리가 공부할 건 '수학10-나'인데…. " " 응? 그런데? " " ......수학10-나에서는 지수함수와 로그함수는 나오지 않아. " " 에엣?! 어째서? 지수와 로그는 잘 알아두어야 할 개념이라고! " " …그,글쎄. 아마도 난이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 " 언빌리버블! " 시더는 말도 안된다는듯 다시 교재를 훑어 보며 투덜거렸다.그러나 정말 수 학10-나에는 지수와 로그가 없었다. 더구나 삼각 함수도 범위 밖이었던 것이 다. 시더는 연신 '넌센스'를 외치며 혀를 찼고, 가인은 슬그머니 수학 책을 집어 넣고 과학책을 꺼내들었다. " 저기, 수학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과학 부터 하는 게 어때? " " …그럴까? 그럼 그렇게 하자. " 시더는 가인에게서 과학책을 건내 받으며 책을 펼쳤다. 가인의 선택과목은 물리1과 화학1이었다. 가인은 조심스럽게 시더에게 말했다. " 저기…시더. 공부는 내가 할테니까… 시더는 내가 공부하기 쉽도록 요령 만 가르쳐 주는 게 어때? " " …요령? " " 에, 그러니까… 기본 개념을 내게 이해시켜주려고 하기 보다는 뭐랄까… 범위 안의 내용들을 쉽게 공부할 수 있는 그 방법만 가르쳐줘. " " 으으으음∼ " 시더는 뭔가 이해할 수 없다는듯 인상을 찌푸렸다.기본 개념을 이해해야 공 부하기가 쉬워질텐데∼ 그녀로서는 가인이 말하는 의미를 잘 이해할 수가 없 었던 것이다. 침대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유리는 짤막히 가인의 말을 시더에 게 요약해주었다. " …간단히 설명하라는 거잖아. 어렵지 않게. " " 에엑- 어려웠나, 내 설명이? " - 끄덕끄덕.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과 유리.그런 둘의 모습에 시더는 머리를 긁 적이며 생각했다. 으음…. 공부하는 요령을 가르쳐달라고…. 뭐, 어려울 건 그다지 없지만 그러면 내가 굳이 올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시더는 작게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 우선 화학은 주기율표를 족별로 원자번호순으로 줄줄이 외우도록 해. 그 다음 원자의 특성을 족별로 이해하면 분자의 특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서는 물질의 화학적 특성을 기술하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면서 계산문제를 연습해봐.이 단계가 지나면 화학반응식에 대한 이 해가 쉽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물질의 특성이 보이기 시작하지. 유기화 학은 기본이 되는 물질의 합성식을 꿰고 있으면 각 유기물질에 대한 특성 이 이해 될 거야. 결론은 최소한으로 외우고 대부분을 이해하는데 노력하 도록 해. 그 어마어마하게 많은 식을 지금 당장 외울 수는 없을 테니까. " " ......... " " 그리고 물리는 주로 뉴튼 역학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도록 해.많은 계산 문제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수식의 전개를 잘하려면 수학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 하지만 개념 이해가 먼저 되어야 하지. 미적분을 잘하면 많은 도움 이 돼. 뉴튼은 자신의 역학 개념을 설명하기위해 미적분을 발견할 정도였 거든. " " ......... " " 고교과정은 각 학문분야의 기초가 되는 부분을 배우는 것일테니까 일단 깊은 내용보다는 사고의 정확한 전개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 " ......... " 가인은 시더의 설명이 다 끝나자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 리로 중얼거렸다. " ......응…. 고마워…,시더…. " …아무래도 수학과 과학 담당 교사는 미스 캐스팅이었나 보다. " 파티서플(pariciple:분사)의 기본 용법 중에는 주격 보어, 목적격 보어로 서의 역할이 있어. 다음 예문들을 읽어봐. " " 으,으응. " 가인은 자신의 코 끝을 자극시키는 체리 향에 마른 침을 삼키며 애써 시선 을 영어 교재에 두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새하얀 목덜미와 살짝 들어나는 어 깨선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두번째 가정 교사는 가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귓가로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며 그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 고 있었던 것이다. " I,I felt someone touching my back…. " " 그래. 여기서의 touching이 목적격 보어로 쓰인 대표적인 예야. 이렇게… " 가인은 흠칫 몸을 떨었다.자신의 등을 살짝 쓸어내리는 여인의 손길을 느꼈 기 때문이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는 네이티브 스피커의 목소리. " 나는 누가 내 등을 만지는 것을 느꼈다…란 뜻이지,가인? 어때? 확실히 알겠어? " " 으,으응…. " " 후후, You became excited.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건 분사의 주격 보어 가 되어 버리내? 그렇지? " " 하,하하….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저,저기… 이제 쓰다듬는 건 그만 둬줘도 좋을텐데…. 그리고 그런 가정 교사의 행위를 제지한 것은 가인이 아 닌 유리와 시더였다. " 그쯤에서 그만두는게 신상에 좋을 거야…! " " 그,그래! 불결해! 그만 가인에게서 떨어지라고! " " 훗- " 짧게 코웃음을 치며 유리와 시더의 으름짱을 무시하는 두번째 가정 교사.그 녀는 다름아닌 에메랄드 머리 카락을 가진 외국인 소녀,테레이아 민체스터였 다. 그녀가 맡은 과목은 영어. 그녀가 지금껏 살아온 생활권으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더 할 나위 없이 적합한 캐스팅이었다. 외국인 보다 외국어를 더 잘 가르칠 교사가 어디있단 말인가! …란 취지였을 게 분명하다. 테레이아는 보란듯이 유리들의 앞에서 가인의 목을 끌어 안으며 말했다. " 지금은 내 수업 시간. 참관인들은 조용히 참관만 하고 있는 게 어때? " " …참관이라는 게 선생의 추태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 걸 말하는 건 아니 겠지? " " 이건 Sexual Harassment야! 사제 간 성희롱이라고! " 테레이아는 그런 그녀들을 무시하며 가인을 향해 물었다. " 가인? 지금 내 수업이 가인에게 불쾌해? 이렇게… 나하고 함께 있는 것이 싫은 거야? " " 에? 아,아니… 그럴리가…. " 가인은 테레이아의 대담스러운 행동에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테레이아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유리들을 향해 말했다. " 성희롱 여부의 판단은 피해자의 주관적인 사정에 고려하는 것. 피해자가 수치심, 굴욕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성희롱은 성립될 수 없어. " " .........!! " 뭔가 논점에서 벗어나고 있다고….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한 숨을 내 쉬었다. ' 설마 이 분위기로 수업이 계속 되는 것은 아니겠지…? ' " 어쨌든, 오빠에게서 떨어져! " " 언제까지 끌어 안고 있을 생각이야! " " 훗, 이 시간이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 …그러나 그의 예상은 어김없이 적중해버렸다. 애초에 교사부터 수업할 마 음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미스 캐스팅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가정 교사. 담당 과목은 한문이었다. " 백구과극(白駒過隙).'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는 뜻 으로, '인생과 세월의 덧없고 짧음'을 이르는 말이지.인생이 지나가는 것 의 빠르기가, 문틈으로 흰 말이 지나가는 것을 봄과 같다는 말이다. " 앳되면서도 어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 진우가 '한문에 박식하다'며 데려온 세번째 선생은 다름 아닌 부르스, 바로 그였다. 부르스는 가인의 한문 교재 를 펼쳐들고 그 안의 사자성어들을 풀이해주고 있었다. 가인은 그의 설명에 집중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 장자(莊子)의 '지북유편(知北遊篇)'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지. 사람이 하 늘과 땅 사이에서 사는 것은, '흰 말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 는 것(白駒之過隙)'처럼 순간일 뿐이다. 모든 사물들은 물이 솟아나듯이 문득 생겨났다가 물이 흐르듯 아득하게 사라져가는 것이다. 변화로써 태 어났다가 또한 변화로써 죽을 뿐이다. 생물들은 이를 슬퍼하고, 사람들도 이를 슬퍼한다. 죽음이란 화살이 살통을 빠져나가고, 칼이 칼집을 빠져나 감과 같이 혼백이 육신에서 빠져나가고 이에 몸이 따라 무(無)로 돌아가 는 것을 말함이니, 이야말로 위대한 복귀(復歸)가 아닌가! 사람이 이 세 상을 산다는 것은 이처럼 허무한 일이다…라는. " " ......... " " 사기(史記)의 '유후세가(留侯世家)'에도 여태후(呂太后)가 유후(留侯)에 대하여 한 말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실려 있지.인생의 한 세상 사이는 '흰 말이 틈을 지나가는 것(白駒過隙)'과 같다. 어찌 스스로 괴로워하기가 이 와 같음에 이르겠는가? …라고. " " ......... " 분명, 중국에서 선인의 수련을 해온 부르스는 이런 방면으로 그 끝이 보이 지 않을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자 성어 하나만으로도 이렇듯 긴 설 명을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 파죽지세(破竹之勢).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으로 맹렬한 기세,세력 이 강대하여 적대하는 자가 없음, 무인지경을 가듯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진군함을 비유하지. 같은 말로는 영인이해(迎刃而解). 세여파죽(勢 如破竹)이 있다. " " ......... " " 위(魏)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제(武帝)라 일컫고, 국호를 진(晉)이라고 했었다.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나라로 나뉘어 대립하 게 되었고 이윽고 무제는 진남 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 을 명하게 되었지. " " ......... " " 이듬해 280년 2월,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 했지.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 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 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요.대 나무란 처음 두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 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그렇게 말 하고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업(建業)으로 쇄도(殺到)하여 단숨에 공략했지.이어 오왕(吳王) 손호(孫晧)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하게 된 거 다. " " ......... " 고교생 유가인에게 있어서 한문이란 '사저성어를 외우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가인은 부르스의 설명을 끝까지 참아내지 못하고 결국 고개 를 떨구었다. " …부르스. 이제 됐어요…. " " 하아- " 가인의 뒤에서 수업을 지켜보던 유리와 시더, 테레이아도 깊은 한 숨을 내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마지막 가정 교사의 수업도 그 끝을 고했다. " 흐음∼ 결국 모두 미스 캐스팅이었단 말인가∼ 이 정도면 호화 멤버라고 생각했는데∼ " " …앞으로는 좀 더 평범한 사람들을 선택하라고. " 진우의 탄식에 유리가 가볍게 충고해주었다. 가인에게 데리고 왔던 가정 교 사들은 하나 같이 가인의 수업에 실패해버렸다. 그 원인은 유리의 말 마 따 나 멤버의 비범함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 애초에 이 구성원들로 일을 추진시킬려고 했던 게 잘못이지…. ' 그런 유리의 낙담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우는 걸어 잠긴 가인의 2층 방문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 에휴∼ 덕분에 이제는 출입금지인 건가? 그래도 너무하는 소년이로군.'방 해하지마!'라고 딱 잘라 말할 것 까지는 없었을 텐데∼ " " …그만큼 가인도 신경이 날카로운 거 겠죠. " 시더는 쓰고 있던 뱅뱅이 안경을 벗으며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수 업을 해준답시고 그 난리를 쳤으니…. 그나마 가인 정도 되니까 지금까지 잘 참아줬던 것이다.그녀가 침울해지자 덩달아 유리와 테레이아 역시 침울해져 버렸다. 그런 그녀들에게 부르스는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시며 따뜻한 목소리 로 위로의 말을 건내주었다. " …그러니까 여자가 부정스럽게 너무 나서는 게 아니다. " " 부정스러운 건 바로 당신이잖아! " 이를 갈며 부르스에게 외치는 유리들. 부르스는 그런 그녀들이 지긋지긋하 다는듯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무시해버렸고 흥분하는 여자들을 진우가 간신 히 뜯어말렸다. 단지 그 소란 중에서도 시민 만은 조용히 가인의 2층 방문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 가인 씨…. ' 힘내세요…. 시민은 진심으로 기원했다. - 큐우우우웅… 아무리 추가 시험 날이 이틀 남았다고 하더라도 몬스터는 기다려주지 않는 모양이었다.가인은 피스메이커의 광속 기차 안에서 열심히 영어 단어를 외우 며 추가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A.I 슈츠를 입고서 영어 단어집을 들고 있 는 그 모습이 상당히 긴장감을 떨어뜨렸다. ' 젠장….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몬스터가 나타날 게 뭐야?! ' 오늘은 금요일. 일요일의 추가 시험까지 채 이틀도 남지 않았다. 어제 저녁 에도 잠을 설치면서 공부했건만 여전히 범위의 반도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수학과 과학이 낙제 과목으로 끼어 있는 게 치명적이 었다. 그러게 평상시에 공부를 좀 해둘 것이지…. " …가인? 뭐하고 있는 거냐? " 그때, 가인의 옆자리에서 들려온 한 여인의 목소리. 붉은 A.I 슈츠를 입은 피스 레드, 성마리였다. 가인은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단어집을 뒤로 숨기 며 쓴 웃음을 지었다. " 아,하하…. 마리 선배,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 " 으음…. " 마리는 살짝 한 숨을 내쉰 후 그런 그에게 말했다. " 가인, 이번 일요일 날 추가 시험을 받는다는 얘기는 들었다. " ' 으윽- ' 가인이 이를 갈며 돌아보니, 앞 자리에서 히죽 웃으며 브이 사인을 하고 있 는 진우의 모습이 있었다. 하여간 진우, 저 인간은!! 추가 시험을 받는 게 자랑이냐? 자랑이냐고! 왜 그걸 이쪽 저쪽 다 소문 내고 돌아다니는 거야?! 오죽했으면 오퍼레이터 실의 윤채영도 가인의 추가 시험에 대해 다 알고 있 을 정도였다. "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우리는 지금 몬스터와의 전투를 눈 앞에 두 고 있다. 좀 더 상황에 집중하도록. " " 예에…. 죄송해요. " 가인은 부끄러워져 마리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사과했다. 마리는 그런 그 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 음…. 그래도… 단어 암기 정도는 쓸데 없는 긴장을 푸는데 도움이 될테 니까… " " ......예? " 가인이 고개를 들어 마리를 바라보니, 그녀는 쑥스러운듯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볼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을 가인은 볼 수 있었다. ' 마리 선배… ' 고마워요…. 가인은 자신을 배려해주는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가인 은 미소 지으며 마리에게 말했다. " 그나저나 피스 대원도 정말 큰일이네요.몬스터가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 도 아니고 매일 훈련에다 교육이라니….이러다간 공부할 시간도 없어지는 게 아닐까요? 하하…. " " …그렇군. " 아,그러고 보니… " 참! 마리 선배. 이번 시험, 학년 삼 등 안에 들었죠? 2학년 복도에 붙어 있는 중간 고사 성적표 봤어요! 대단해요! " " ......응. " 여전히 가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마리.가인의 칭 찬에 얼굴이 붉어진 탓이었다. 가인은 그런 마리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며 앞을 바라본채 말을 이었다. " 이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거에요? 전 훈련 끝나 면 지쳐 쓰러지기 바쁜데.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죠? 따로 공부할 시간도 제대로 없었을 텐데…. 마리 선배는 되게 머리가 좋군요∼ " " …문무 겸비도 무사의 기본 소양이니까. " 마리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가인을 돌아보았다. 뭔가 여기서 가인이 공부 를 하는데 도움이 되는 소리를 해주고 싶었던 게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도 없이 좋은 결과를 받을 수는 없는 법. 시간이 없 으면 만들어 내면 되는 거다.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는 건 핑계 밖 에 되지 않겠지. " " .........!! " 날카롭게 가인의 가슴을 찌르는 한 마디. 그렇다. 아무리 공부할 시간이 없 었다느니,피스메이커의 탓이라느니 해도 정작 공부를 할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거다. 훈련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면 잠자는 시간을 아껴서라도 하면 되었고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도 좀 더 집중해서 들었더라면 추가 시험을 받을 상황에 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건 노력을 하지 않은 자신의 탓! 가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그렇…군요. 핑계일 뿐이네요…. " " .........응? " 갑작스런 가인의 우울한 모습에 마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나…뭔 가 말을 잘못한 건가? 다,단지 힘내라고 격려해줄 생각이었는데…! 마리는 침울해지는 가인을 앞에 두고 뭔가 말을 걸려고 했지만, 도저히 말을 걸 분 위기가 아니었다. 마리는 결국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며 낙담해버렸다.이,이 게 아니었는데…. 나 무슨 짓을 해버린 거지…. 가,가인! 난 이럴 생각이 아 니었어! " .......... " 그리고 그런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시민은 낮게 한 숨을 쉬었다. 토요일. 추가 시험을 앞둔지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가인은 오전 수업을 끝 내자 마자 집으로 돌아와 내내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 느덧 밤 12시.자정이 넘었으니 엄연히 지금부터는 시험 당일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벌써…. " 가인은 퀭한 눈으로 시계를 보며 탄식했다. 요 나흘 간 밤 잠 설치며 시험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다 멍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시험 범위는 그럭저럭 따 라잡을 수 있었지만…과연 이렇게 피곤한 상태로 몇 시간 후에 있을 추가 시 험을 제대로 칠 수나 있을런지 걱정이었다. " 아,안돼! 정신차려,유가인! " 가인은 밀려드는 수마에 고개가 계속 앞으로 숙여지려는 것을 참아내며 이 를 악물었다. 이제 마지막 날이다.오늘만 잘 참고 넘기면 된다고! 하지만 잘 새지 않던 밤을 삼일 연속이나 새며 무리했더니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이렇 게 잠을 참기 힘든 적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 딸칵…. 그때, 가인의 방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누구지? 이런 시 각에? ' 브루스와 유리는 자고 있을 텐데…. ' 과연 그의 생각대로 들어온 이는 브루스와 유리가 아닌 한시민이었다. 가인 은 그녀가 이 시각에 방으로 찾아오자 깜짝 놀라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 시,시민 씨?! 여기는 어쩐 일로…? " " 후훗, 놀랐어요? 가인 씨 피곤해 할까봐 커피 좀 끓여왔는데…. " " 아…. " 가인은 얼굴을 붉혔다. 시민 씨. 이렇게나 신경을 써주시다니…! 가인은 시 민의 미소짓는 얼굴에 피곤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시민은 그런 그에게 커 피를 건내주었다.헤이즐 넛 커피의 향긋한 향을 맡는 것 만으로도 정신이 맑 아지는 것 같았다. " 고맙습니다. " " 천만에요. 이렇게 가인 씨 혼자 고생하고 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 려야지요. " " ......예에. " 가인은 시민의 말에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민은 가인의 책상 에 펼쳐져 있는 교재들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 공부는 어때요? 잘 되어가고 있어요? " " 하하…, 뭐… 그냥 그렇죠. 그래도 어떻게든 합격할 것 같기는 하내요.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어질러진 책들을 정리했다.자 신의 이런 모습을 시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렇게 칠칠치 못하 게 시험에 떨어져 추가 시험 공부나 하는 자신이라니…. 그때 그런 그의 귀 로 작지만 은은하게 울려오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 .........? " 가인이 돌아본 그곳에는 시민이 방의 베란다 문을 열며 살며시 노래를 부르 고 있었다. 베란다로 들어오는 밤 바람에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들이 한올 한 올 휘날려 올랐다. Understand the things I say Don't turn away from me Cause I spent half my life out there You wouldn't disagree D'you see me, d'you see Do you like me, do you like me standing there D'you notice, d'you know Do you see me, do you see me Does anyone care? Unhappiness, where's when I was young And we didn't give a damn Cause we were raised To see life as fun and take it if we can My mother, my mother she'd hold me She'd hold me, when I was out there My father, my father he liked me Oh he liked me, does anyone care? 이건…무슨 노래일까? 가인은 시민이 부르는 팝송에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뺏겨 버렸다.분명 노래만 부르고 있을 뿐인데 어디에선가 옅은 반주 소리 마 저 들려오는 착각이 들었다. 노래는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듯, 작지만 뚜렷하 게 밤하늘 속으로 울려퍼졌다. " …어때요? 가인 씨? " " 예? " 어느새인가 노래는 끝나 있었고, 시민은 가인을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달빛 에 비친 그녀의 머리카락은 옅은 은빛을 띄고 있었고, 그 속에서 웃고 있는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박수를 쳤다. " 머,멋져요…. 시민 씨! 역시 잘 부르시내요. " " 아뇨. 그게 아니라… " 시민은 살며시 웃으며 손을 저었다. " 가인 씨 뭔가 자신에게 변한 거… 느껴지지 않아요? " " ......예? 변한 거라뇨? " 가인은 시민의 물음에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한 거라 니….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는데…그러던 순간,가인은 자신에게 더 이상 잠 이 쏟아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 아…! 어라? 잠이… " 피곤이… 사라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시민이 순풍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 으로 쓸어올리며 말했다. " 포르만트(Formant)라고 해요. 음정의 주파수 세기의 분포를 조정해서 사 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능력이 있죠. 가인 씨의 심장 고동 소리에 맞 춰 노래해봤는데… 조금 피곤이 가셨어요? " " 예? 예에…. " 오라…능력이었구나. 그러고보니 이 능력은 예전 블루 섬머 비치에서 크라 켄을 진정시킬 때도 그녀가 사용했던 것 같다. 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 켜 줄 수 있다니… 정말… 굉장하다…. 가인은 시민이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깨닫고 감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시민 씨…. " " 가인 씨, 지금은 이런 일 밖에 해줄 수 없지만… " 시민은 가인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맞잡았다.가인은 그저 얼굴을 붉힌채 시 민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그래도 가인 씨가 힘들면 제 힘이 닿는 한 언제든지 도와드릴게요….그러 니까 조금만…조금만 저에게 기대주시지 않을래요? " 시,시민 씨…. " 저는 가인 씨의 가족이니까 말이에요. "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쑥스러웠는지 살짝 그 볼을 붉히며 미소짓고 있었다. 가인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닫고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랬지…. 시민 씨는… 나의 가족… ' 나는 그런 그녀에게 왜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던 거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걸까. 분명 시민 씨 는 그것이 서운했던 것이리라. 가인은 맞잡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 …미안해요, 시민 씨. 나… 지금까지 시민 씨에게 남 같이 굴어 버렸내요. " 기쁨과 슬픔, 고민과 걱정을 함께 나누는 것도 가족인 것을…. 시민은 그런 가인의 모습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듯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가인 의 책상에 펼쳐진 교재들을 바라보며 그를 향해 웃음을 흘렸다. "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죠,시험 공부? …힘내세요. " " 예! " 가인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추가 시험에 대한 부담감을 그에게서 찾아 볼 수는 없었다. Ｅpilogue " 하 선생님∼ 저기저기∼ 오늘 저녁 시간 되시죠? " " …없습니다. " 방과 후, 언제나와 같이 등 뒤로 출처 불명의 꽃잎들을 휘날리며 교무실에 모습을 드러내는 박미정. 지연은 이 양호 교사를 향해 단호하게 말하며 애프 터(AFTER)의 여지를 끊어 버렸다. 미정은 그렁 그렁 눈물이 맺힌 눈으로 지 연에게 하소연을 했다. " 흑흑∼ 이 계절의 막바지에 쓸쓸히 혼자서 연말을 보내실 생각이신 가요? 그러지 말고 이 사랑의 전도사 박미연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 주시기만 한 다면∼ " " …필요 없습니다. " " 맞선- " " 필요 없습니다! " 지연은 진저리를 치며 입에 물은 담배를 질끈질끈 씹었다. 정말이지, 이 양 호교사는 예전의 맞선이 끝난 이후로 틈만 나면 지연에게 맞선을 주선해왔다! 볼 때 마다 상대가 다른 것이 어디서 그 맞선남들을 다 알아낸 걸까 경이로 울 정도였다. 과연 엄청난 마당발! …이라고 감탄해줘야 하는 걸까….미정은 지연의 이런 반응에 쳇- 혀를 차며 말했다. " 네네네∼ 알았다고요∼ 그럼 오늘은 그냥 오붓하게 둘이서 저녁 식사나 하죠? " " .........무슨 속셈입니까? " 뚱한 시선으로 미정을 부비트랩 쳐다보듯 하는 지연.그런 지연의 차가운 반 응에 미정은 등 뒤의 꽃잎들을 격하게 휘날리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흘렸 다. " 흑흑흑∼ 저의 순수한 호의를 이렇게나 저버리시다니… 언제나 저는 일편 단심으로 하 선생님 만을 생각하고 있건만∼ " " ......그냥 식사만 하는 겁니다. " 미심쩍은 눈빛을 버리지 못하며 결국 언제나 처럼 승낙하는 지연의 모습에 미정은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예스!'를 외쳤다. 왠지 그 모습을 보고 있 자니 자신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늪 속으로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후 회가 밀려 들었다.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지연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 자 그때 바닥으로 작은 프린트 몇 장이 떨어져 내렸다. - 툭…. " 어머? 그건 뭐에요,하 선생님? " " 아, 아아아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자! 그보다 오늘 저녁 은 박 선생님이 쏘시는 거 겠죠? " " 아앙∼♥ 너무해요∼ " 지연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프린트들을 줏어서 책상에 올려놓고는 미정 의 등을 떠밀었고, 미정은 영문도 모른채 지연의 손길에 이끌려 급하게 교무 실을 나섰다. 지연은 교무실 문을 나가기 전에 잠시 자신의 책상 쪽을 돌아 보았다. 그녀는 프린트에 적혀 있는 내용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 수고했다. " 추가 시험 결과 번 호/이 름/등 수/시험 과목 및 합격 여부 · · · 1338/유가인/1/45/수학 P 과학 P 영어 P 한문 P · · · - 드륵! 소란스러운 두 여 교사들을 내보내며 교무실의 문이 힘차게 닫혔다. Ｖolume.4 完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4 話 마인드 브레이커(Mind Breaker) (上) =-=-=-=-=-=-=-=-=-=-=-=-=-=-=-=-=-=-=-=-=-=-=-=-=-=-=-=-=-=-=-=-=-=-=-= - 유리야∼ 네 친구들 왔다. 얼른 내려 오렴. 엄마의 목소리.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허둥지둥 밑으로 내려갔다.밑에 는 야구 모자를 뒤집어 쓴 남자 아이 하나와 짧은 단발머리의 여자아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 아이의 이름은 김준호. 여자 아이의 이름은 문주희. - 정말∼ 그러게 엄마가 일찍 일찍 좀 준비하라고 했지∼! - 내가 늦은 거 아니다,뭐! 얘네들이 일찍 온 거지! 나는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런 내 모습에 엄마는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셨다. 준호와 주희는 나를 향해 야유하며 말했다. - 일찍 오라고 한 건 유리, 너였잖아∼ 그래놓구선 자기가 늦으면 어떡해. - 준호야, 그러게 내가 좀 더 천천히 가도 된댔잖아. 분명 유리 늦장 부릴 게 뻔하다고. - 아냐. 그래도 우리가 일찍 왔으니까 망정이지.분명 우리가 늦었으면 자기 가 길길이 날뛰었을 걸? - 우우… 그쯤에서 그만둬. 난 뿔이 난 표정으로 투덜거렸고,준호와 주희는 킥킥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 다. 옆의 엄마는 내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 넌 친구들에게 그런 말 들어도 싸!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원∼! …얘들아, 미안하다. 이 아주머니가 못난 딸을 대신해서 사과할게.그러니 까 앞으로도 우리 딸하고는 좋은 친구로 지내주세요∼ - 엄마! 난 울쌍을 지으며 항의했지만 엄마는 뭐가 그렇게도 재밌는지 웃기만 할 뿐 이었다. 엄마가 웃자 친구들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야,김준호! 문주희! 니들은 또 왜 웃는 거야! 웃지마! - 유리야, 우리 이러다 제 시간에 늦겠다! 이제 가지 않으면…. 주희는 웃다가 자신의 시계를 보며 다급히 말했고,그제서야 나도 정신을 차 렸다. 아,그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잘못했다가는 선생님이 우리 들을 놓고 가버리실지도! 오늘이 얼마나 기다려온 소풍날인데! - 엄마! 우리 빨리 가야돼! - 네에∼네에∼ 여기 도시락! 우리 유리가 좋아하는 김밥이야. 침착하게 도시락을 건내주는 엄마. 난 도시락을 건내받고 볼에 홍조를 띄었 다. 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밥! 이래서 난 소풍 날이 좋다니까! 엄마는 그런 나에게 윙크를 하며 뒤의 친구들에게도 말했다. - 특별히 많이 쌌으니까 친구들하고도 사이좋게 나눠 먹으렴.자! 자! 차 시 간 늦겠다,얘들아! 어서들 가봐! - 예에, 아줌마! 다녀오겠습니다∼ - 엄마, 갔다올게! - 그래. 그래. 서둘러 집을 나서며 대문에서 우리를 전송하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엄 마는 그런 우리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며 미소 짓고 있었다. 너무나도 따뜻한 그 미소. 따뜻한 그 눈길. 하지만… - 잘 다녀오렴∼! …웃고 있을 엄마의 얼굴이 지금의 내게는 생각나지 않는다. 第 14 話 마인드 브레이커(Mind Breaker) " ......... " 유리는 멍하니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킨채 잠에 취한 눈을 깜빡였다. 오랫 만에 꿈을 꾸었다. 그것도 엄마와 친구들이 나오는 꿈을…. 분명 자신이 오 라 능력에 눈을 뜨기 전의 기억들이었다. 기다리던 소풍 날. 엄마가 싸준 도 시락을 들고 친구들과 집을 나서던 그 때의 기억. 유리는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 …엄마. " 유리의 기억 속에 있는 그녀. 언제나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 하지만 꿈 속에서의 그녀는… " …그렇게 웃었었구나…. " 유리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귓가로 꿈속에서 들었던 엄마의 웃음 소리가 멤돌고 있었다. 유리는 그 소리를 떨쳐버리려는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침 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왠지 아침인데도 날이 이 상하게 어둡다 싶더니,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금새라도 한 바탕 비가 쏟아내릴 분위기였다. " 오빠한테… 가야지…. " 유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시민의 방을 나섰다. 평상시의 그녀라면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야 그를 만나러 갔겠지만, 간밤의 꿈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했는지라 한시라도 빨리 가인이 보고 싶었다. 그래. 오빠를 만나면 이 기분도 좀 나아질 거야! - 덜컥…. 그러나 가인은 2층의 방에 없었다. 아마도 부르스, 그 인간과 또 아침 훈련 을 하러 간 것 같았다. 유리는 한 숨을 내쉬고서 힘 없이 발 걸음을 돌려 1 층으로 내려왔다. 괜시리 가인을 끌고 간 부르스가 밑도 끝도 없이 원망스러 웠다. ' 오늘은 일요일이잖아. 모처럼의 휴일인데 좀 쉬게 해주면 어때서 또 오빠 를 끌고 나간 거야?! ' 유리는 저번에 한 번 호기심으로 부르스의 수련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그 수련이라는 것이 정말 가관이어서 기가 다 막힐 지경이었다.부르스는 가인에 게 뭔가를 가르친다기 보다는 단순히 화풀이 삼아 그를 두들겨 팼을 뿐이었 던 것이다. 말 끝마다 욕을 하며 가인을 죽어라 괴롭히는 그 모습은 어찌 보 면 즐기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 …변태가 틀림 없어. 가학성 변태. ' 유리는 잠정적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거실로 향했다. 모처럼의 주말인 데 오빠를 그런 변태에게 뺏아길 수는 없다. 시민이라면 그들이 어디로 수련 을 하러 갔는지 알겠지. 반드시 찾아내서 오빠를 데리고 오겠어! " …시민 언니? 지금 뭐하고 있어? " 부엌에서 요리를 할 줄 알았던 시민은 의외로 거실의 쇼파에 앉아 TV를 보 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유리의 물음에 시민은 살짝 자신의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가며 유리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유리는 더욱 의아해졌다. 도대체 뭘 보고 있길래 그런 거야? ' …뉴스…네. ' TV에서는 뉴스가 한창 방송되고 있었다. 왠 아파트가 나오고 주민들의 보도 와 형사들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유리는 아나운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13살 K군의 자살이 있은지 채 이주일도 지나지 않아 25구역의 13살 M모 양 역시 옥상에서 뛰어내려 그 어린 생을 마감했습니다.이번 달 들어 세 번 째로 벌어진 연쇄 초등 학생 자살 사건은 모두 같은 초등학교,같은 구역의 학생들에게서 일어난 일로서…>> ' …투신…자살? ' 유리는 방송에 떠오르는 자막을 읽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연쇄 초등학생 자살 사건'. 그 문구에서 왠지 모를 섬뜩함을 그녀는 받았던 것이다. 불길한 사념이 알게 모르게 유리를 죄어 오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막 자살한 소녀의 부모로 추정되는 어른들이 울면서 통곡하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그 어머니는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들려오는 기 자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무감각했다. << 평소 M모 양은 행실이 바르고 교우 관계도 원만했기에,그녀가 자살한 이 유에 대해서 의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경찰은 작년 2월 달 경에 있었던 중학생 자살 사이트 소동의 여파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으며, 현재 이 세 명의 초등학생들이 자살한 원인을 파악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 하아… 정말 무섭군요. 자살이라니…. " 뉴스를 보던 시민은 그제서야 TV에서 눈을 떼며 낮게 탄식했다.그녀는 몬스 터와의 싸움 속에서 살아가는 오라 능력자였다.그리고 몇 번이나 셀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무사히 살 아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그 만큼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겨왔기 때문 이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살아야 된다는, 살아서 모두에게 다시 돌 아오겠다는 신념 하나 만이 그 모든 것을 견뎌내게 해주었다.하지만 지금 눈 앞에 나오는 뉴스에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린 아이들의 얘기가 나오고 있 었다. 자살. 자아로서 삶보다 죽음을 택하는 행위. 시민은 자살한 아이들이 지금 옆에 있는 유리와 같은 또래라는 것에 다시 한 번 무서움을 느꼈다. 도 대체 어떤 상황이 그 어린 아이들에게 자살이라는 수단을 강요한 것일까. 그 렇게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것일까.시민은 자살한 아이들과 나이가 같 은 유리를 돌아보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 …응? ' 그렇게 유리를 바라보던 시민은 잠시 유리의 상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 리는 움직이는 법을 잊기라도 했는지 뻣뻣하게 굳어서 뉴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유리 양? 왜 그래요? " 시민은 유리의 시선을 따라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TV에서는 자살한 초등학 생들의 사진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시민은 그 사진을 보며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사진에 찍힌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 저렇게 어린 아이들이…. ' " ......저 아이들… " 그때, 시민의 귀로 들려오는 유리의 중얼거림. 유리는 떨리는 눈으로 아이 들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살한 세 명의 아이들. 그들은 다름 아닌… " …내 초등학교… 동창 들이야…. " - 쏴아아아아아…. 순간 창 밖에서 차가운 가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이야∼ 대단하다! 어떻게 한 거야? - 진짜 마음을 읽는 거야? 내가 처음으로 친구들의 앞에서 오라 능력을 공개했을 때였다. 아이들은 사 람의 마음을 읽어낸다는 내 능력에 모두들 감탄하며 떠들썩해 있었다. 난 며 칠 전 그들에게 일종의 예언을 했었다. 이번 시험의 결과를 너희들에게 알려 주겠노라고. 선생님의 마음을 읽어서 오늘 있을 시험 문제를 모두에게 가르 쳐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 너어∼ 거짓말하지마! 그때, 그 아이가 내게 다가와 소리쳤다. 그다지 친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그 아이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단지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던 것 만이 생각났다. 시험 결과가 나오면 언제나 그 아이의 점수는 100점이었다. 하지 만 이번 시험은 나의 장난으로 반 아이들 모두가 100점을 맞아버렸기에 1등 인 그 아이로서는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아이는 나에게 소리쳤다. - 너어∼ 거짓말하지마! 선생님 몰래 답안지를 훔쳐 본 거지? 그렇지?! - 아냐! 나 답안지 같은 거 보지 않았어! - 바보야! 사람 마음을 읽는다니, 그게 말이나 돼! 이 거짓말쟁이야! - 아냐! 나 거짓말쟁이 아냐! 나는 화가 나서 그 아이에게 소리쳤다. 내가 애초에 이 능력을,사람의 마음 을 읽어내는 능력을 모두에게 공개한 이유가 뭐였는데…. 거짓말쟁이라는 말 을 듣기 싫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내 마음 속으로 아이의 사념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격한 질투심. 어린 아이였기에 그 분노는 그 만큼 순수했다. 그 아이가 했던 마지막 말이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았다. - 나 선생님한테 일러바칠 거야! " ......... " 유리는 우산을 쓴채 자신의 발 밑을 내려다 보았다. 차가운 가을 비가 추적 추적 내리고 있는 그 곳에는 하얀 스프레이가 사람의 형태로 뿌려져 있었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이번에는 하늘을 바라보았다.20층의 아파트가 그녀의 눈 앞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 저곳에서… 뛰어내린 건가…. ' 이곳은 아침에 뉴스에서 나왔던 자살 사건의 현장. 뉴스를 본 뒤,유리의 발 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게 어느덧 정신을 차 려보니 사건 현장. 유리는 자신이 왜 이곳에 온 것인지 의문을 느끼며 한 숨 을 내쉬었다. - 민수미. 연쇄 자살 사건의 세번째 초등학생의 이름이었다.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유 리를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던 그 동창생…. 살아 생전에는 모르다가 죽 어서야 그 이름을 알게 되다니… 뭔가 얄궂은 기분이었다. 민수미가 자살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의 일이었다. 아침에 뉴스에 보 도된 내용도 꽤 여러번에 걸쳐 방영되고 있었던 것 같았다.사건 현장에는 감 식반이 현장 보전을 위해 경계 테이프를 둘러 놓고 있었지만 타살 사건이 아 니라 특별히 증거 수집 같은 건 필요 없었는지 경찰들은 현장에서 이미 철수 해 있었다. 덕분에 이곳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유리. 자살한 장소 라는 것이 기분 나빴던지 현장의 주위로는 사람 하나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유리 는 다시 스프레이가 뿌려진 아스팔트를 내려다 보았다.저 곳에 그 아이가 죽 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모를 오한이 느껴진다. " ......... " 자살한 세 명의 초등학생들 중에는 그 아이들도 끼어 있었다.자신이 초등학 교를 다닐 무렵 단짝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아이들,김준호와 문주희가.우 산을 쥐고 있던 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를 않았다. 정말 그 아이들이 죽은 걸까? 정말로…? ' 어째서 자살 따위를 한 거야? 왜! ' 유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아이들이 자 살할 만한 일이 뭐가 있었을까? 더구나 자신이 아는 세 명의 아이들이 연속 으로 자살을 해버렸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 석연치가 않아…. ' 그렇다. 흐린 안개가 끼인 것 처럼 모든 게 명확하지 않았다. 유리가 이 곳 에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유리는 본능적으로 세 아이의 죽음에 공통된 뭔가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 ......... " 그다지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어쨌든 같은 초등학교에 같은 반 을 다녔던 아이들이었다. 한 때는 친구로 지내기도 했었다.그런 아이들의 죽 음에 유리는 무신경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들이 자살한 이유 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유리는 천천히 쪼그려 앉아 스프레이가 뿌려진 자리에 손을 가져갔 다.민수미라는 아이가 20층의 옥상에서 부터 뛰어 내린 곳. 그 곳에 시신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손 끝이 차가워진다. 유리는 잡념을 떨치며 정신을 집중 했다. - 파칭! 물질은 그것과 접촉한 모든 시공간대의 기억을 어떤 파장의 원리로서 간직 하고 있다. 그것을 사물의 혼(The soul of things)이라고 하며, 그 혼을 계 측하여 해석하는 능력을 사이코메트리(Psycometry)라고 한다. 유리의 마인드 디텍트 능력은 사람의 사념 외에도 사물의 사념 또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 서 사이코메트리와 상당히 유사한 기능을 해낼 수 있었다.단지 다른 점을 들 라면 사이코메트리는 그 혼을 해석하여 자신의 것으로도 만들 수 있지만, 마 인드 디텍트는 단지 남아있는 영상을 엿볼 뿐이라는 것이었다. 유리는 지금 그녀의 오라능력으로 자살 현장에 남아있을 사념의 조각들을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 옆동 204호 말이에요‥ - 아기가 너무 심하게 울지 않아요? - 이번 계 모임에서‥ 수 많은 사념의 조각들. 그 안에서 곧바로 민수미의 사념 만을 찾아내는 것 은 유리에게도 힘든 작업이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인 만큼, 가 장 강한 사념이 깃든 일인 만큼 그 혼은 뚜렷하게 사물에 기억되어 있다. 유 리는 그것을 찾고 있었다. - 자,잘못했어…! 그리고 보였다. 민수미. 그 아이의 모습이! 아이는 옥상에서 오열을 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처절했기에 유리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 다 내 잘못이었어! 다 내가 나쁜 거였어! 그것은 누구에게 하는 외침이었을까. 수미는 혼자 있는 옥상을 황망히 둘러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듯한 모습. 하지만 그녀 외에 다른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수미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면서도 그 발걸음을 옥상의 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제발 용서해주세요! 애원조로 바뀌어가는 소녀의 목소리. 저것이 정말 자살하는 이의 모습이란 말인가? 유리는 이미 과거의 영상인데도 몸을 떨며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을 돌리는 것 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사념이란 그런 것이다. - 싫어…! 제발… " 아…! " 자신도 모르게 떨어지려는 수미에게 손을 뻗는 유리. 하지만 잡힐리가 없다. 막을 수 있을리가 없다. 그것은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이니까. 수미는 다음 과 같이 절규하며 수십여 미터의 허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 살고 싶어어어어어어어…!!!! " .........!!!! " 유리는 번쩍 눈을 떴다.그 짧은 순간에 전신이 식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사 념은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유리의 눈에는 수미가 떨어져 내리던 장면이 계속 아른 거리고 있었다. 몸이 떨려오고 있었다. ' 이런…일이… ' 유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우산이 땅에 떨어져 버려 몸이 비에 젖었지만, 유리는 그것 조차 깨닫지 못하며 떨고 있었다. 이럴 수 가… 수미는… 그 아이는… ' …자살한 게 아니야…? ' - 쏴아아아아아… 가을 비는 멈추지 않았다. 수미의 장례식은 인근의 한 병원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숨이 끊어진 소녀의 시신은 염습(殮襲)과 입관(入棺), 발인(發靷)의 절차를 끝내고 영결식을 행 하고 있었다. 식장에는 영정이 세워져 있었고,제단에는 수미의 사진을 놓고 촛대향로 및 향을 피워 놓고 있었다. 그 흑백 사진 속의 소녀는 그 나이 아 이 답게 해맑은 웃음을 띄고 있었다. " 으흐흐흐흑… 수미야! " 상복을 입은채 목 놓아 우는 소녀의 어머니. 그 바람에 삼베로 만든 완장과 두건이 볼 품 없이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할 여력조차 그녀에게 는 없어 보였다. 부고(訃告)를 받아 온 친척들이 그런 여인을 위로하며 무거 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지 그 남편 만이 침중한 표정 속에서도 문상객들 을 접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 ......... " 그리고 그런 문상객들 속에 유리도 끼어 있었다.그녀는 내내 창백한 표정으 로 일관하고 있었다. 소녀의 눈에는 여러 죽음의 단상들이 계속 보이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그 오라 능력으로 인해 몸을 피해야 할 장소가 몇 군데 있었는데,그 중에서도 죽음과 관련된 장례식장, 영안실이나 화장터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인드 디텍터로서의 능력으로 인해 장례식장에 배여 있는 짙은 죽음의 사념들이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 죽은 이들의 가족들이 내뱉 던 울분과 절규, 슬픔의 감정들이 새삼 눈 앞에 아른 거리며 유리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 유리는 아랫 입술을 깨물며 애써 수 많은 사념들을 갈무리했다. 귓 가에 들 려오던 사념의 흐느낌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무리해서 계속 사념 들을 관리해야 했기에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듯한 두통이 엄습해왔다. " 으음…. " 유리는 이마를 손으로 강하게 누르며 신음을 흘렸다. 이렇게 사념의 강도가 짙어져 강제로 그녀의 정신을 침범해 올 때가 마인드 디텍터로서 가장 고통 스러울 때였다.읽기 싫은 데도 읽혀지는 사람의 염(念) 만큼 괴로운 것은 없 는 것이다. 알기 싫은 데도 알게 되고, 보기 싫은 데도 보게 된다.유리는 비 틀 거리는 몸을 간신히 의자에 앉히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이 곳에 오래 있어서는 안돼. 한시라도 빨리 나가지 않으면… ' 유리는 수미의 자살 연휴를 좀 더 알아내기 위해 직접 수미의 사념을 읽기 위하여 그녀의 시신이 있는 장례식장을 찾았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수미 의 사념을 읽기는 커녕, 제대로 문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머리 를 하얗게 태우는 것 같은 두통으로 인해,유리는 오라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 파칭…! 순간, 유리의 뇌리를 파고드는 낯선 느낌. 유리는 숙였던 상체를 벌떡 일으 켜 세우며 두눈을 깜빡였다. 뭐,뭐지? 방금 전에 느껴졌던 그것은?! ' 공명(共鳴)? ' 유리는 잠시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예전 가인의 오라에 반응하여 패 턴 핑크의 오라가 들끓는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격하지 않은, 말 그대로 한 순간의 반응. 유리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착각…인가? ' 더 이상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마치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워진 흰종이 의 여백 처럼 그것은 사라져 있었다. 유리는 한 숨을 작게 내쉬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이 장례식장에 들어왔을 때 부터 느껴지던 이질감. 무언가를 놓치 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 유리는 이런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도리 질을 쳤다. 아무래도 식장의 사념들 때문에 자신의 감각조차 어긋나 버린 것 같았다. ' …어라? ' 하지만 다음 순간 유리는 깨달았다. 더 이상 사념이 자신의 정신으로 밀려 들어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나 자신을 괴롭히던 사념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사념은 그 공간에 남아있는 과거의 기억과 감정의 잔재.사념은 시간이 지날 수록 옅어져서 결국은 사라지고, 공간은 새로운 사념들로 가득차게 된다. 하 지만 이것은 경우가 틀렸다. 사념이 옅어진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니 었다.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사념 자체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유리가 마인드 디텍트 능력에 눈을 뜬 후 처음 으로 겪는 일이었다! ' .........! ' 그때,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유리의 시선이 한 명의 사람에게 고정되었다.유 리의 나이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저편의 문상객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다. 블루 블랙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라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평범해 보이는 소년. 하지만 유리는 그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뭔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그에게서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 후… 소년은 미소짓고 있었다.앞머리가 소년의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그 미소가 유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유리는 괜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재 빨리 다른 곳으로 돌렸다. ' 뭐,뭐야? 갑자기 사람을 보고 실실 웃다니…! 기분 나쁘게! ' 유리는 작게 투덜거리며 다시 조심스럽게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소년은 여전히 눈을 가린 앞머리로 인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유리는 그가 왠지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시선 이 불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얼굴이 붉어지는 자신에게 유리는 의아함 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 저기, 잠깐… " 그때, 유리를 불러세우는 한 남자의 목소리. 상복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아 마도 수미의 아버지인 모양이었다. 유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모습 에 당황하여 표정을 굳혔다. " 우리 수미의 친구니? " " 아…, 예…. " 친구라…. 유리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그 대답에 고소를 머금어야만 했다.같 은 반 클래스 메이트였을 뿐. 뉴스에서 사고를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미의 이름조차 알지못했던 자신이었다. 친구였던 기억도 없지만,자신이 수미를 친 구라고 말할 자격 역시 없었다. " 정말 고맙구나…. 이렇게 찾아와줘서. " " …아뇨. 그보다… 수미는 도대체 왜… " 유리는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수미 아버지의 모습이 부담스러웠기에 재빨리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 곳에 오래 있어봤자 자신에게 좋을 것은 하나 도 없었다. 가시 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그렇다면 얼른 본 래의 목적인 수미의 자살 사유를 알아내고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무엇 보다 제단에 놓여있는 수미의 사진이 자꾸만 자신을 주시하는 것 같아 괴로 웠다. 유리의 질문에 수미 아버지는 무거운 표정으로 낮게 탄식했다. " 글쎄다…. 난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구나…. 우리 수미가 왜 그렇게 가 버렸는지…. " 씁쓸한 웃음. 하지만 짙은 슬픔이 느껴졌다. 수미의 아버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웃고 있었다. " 하하, 이 아저씨는 아마도 몹쓸 부모였던 모양이야…. 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르다니…. 정말이지… 몹쓸 부모구나. " 그의 사념은 너무도 애절하게 유리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기에 소녀의 표 정 또한 어두워졌다. 수미 아버지는 결국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작게 흐느꼈다. " …못된 것. 이렇게 우리를 내버려두고 가버리다니… 정말… 정말…. " " ......... " 유리는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낮게 오열하는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 시 수미의 사진을 돌아보았다. 수미는 자신의 부모가 이렇게 슬퍼하고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자식이 부모를 놔두고 먼저 죽는 것 만큼 불효는 없다. 만약 이런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알고 있다면 함부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 은 없을 것이다. ' 내… 아빠, 엄마도… ' 유리는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 내가 죽는다면… 이렇듯 슬퍼해줄까? ' 하지만 유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무서워하고 혐오하던 부모의 눈 빛을 떠올리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무의미해졌던 것이다. 하아….남의 장례 식 장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유리는 자신의 철없음을 질책하며 몸을 일으켰다.아무래도 수미의 부모님들은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여기에 더 있어봤자 시간 낭비겠지. 유리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 무엇보다… ' 혹시라도… 이곳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들과 마주쳤다가는 상당히 귀찮은 일 이 벌어질테니까…. 유리는 가볍게 수미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고 출입구로 나갈려고 했다. 하지만… - 달칵 그녀 보다 한 발 먼저 출입구를 열고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유리는 그들 을 마주하는 순간, 짓궂은 신의 장난과 대면해야만 했다. 문을 열고 장례식 장을 찾아온 이들은 예전, 자신이 수미와 같은 청송 초등학교를 다닐 때인 6 학년 3반의 동기들과 담임 선생님이었던 것이다.하필이면…! 유리가 가장 우 려하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 아…. " 유리를 보던 동기들과 담임 선생의 눈동자도 커져 갔다. 그와 함께 유리는 한발짝 두발짝 뒤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런 소녀를 담임 선생이었던 안 경잡이 여성이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 이유리? …유리니? " " .........! " 유리는 반사적으로 담임의 부름에 이를 악물었다. 7개월 전의 일들이 단상 처럼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교실에 앉아 있어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하 루 하루의 날들. 무관심과 공포가 섞인 그들의 시선들. 이제는 잊어 버렸다 고 생각했었는데…이제는 더 이상 그 시선들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텐데…. - 웅성 웅성 담임 선생이 유리를 부름과 함께 장례식장 안의 문상객들 중에서 유리를 알 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아마도 문상객 중에는 청송 초등학교 관 계자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유리의 귓가로 수 많은 사념의 속삭 임들이 들려왔다. - 저 아이가 바로 그… -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기분 나쁜 아이! - 다른 학교로 전학갔다고 들었는데… - 어째서 저 아이가 여기에 있는 걸까? 유리는 그 속삭임들을 들으며 얼굴이 창백해져갔다. 속삭임은 사념 뿐 만이 아니었다. 청송 초등학교의 교사들은 유리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들 끼리 얘기를 주고 받았다. " 그러고 보니 수미가 5학년일 때 둘이 같은 반이었지. " " 사이가 꽤나 좋지 않았다고 하던데… 더구나 그런 소동까지 있었고… " " 아, 그 5학년 2반의 담임 선생이 실성한 소동. 그 소동도 저 유리라는 아 이가 한 짓이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설마… " 그들의 사념은 다음과 같이 점점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그것은 다 름 아닌… - 혹시 수미의 죽음에도 저 아이가 연관된 것은…! ' 아,아니야! ' 유리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그 냉막함 속에서 알 수 없는 공포가 수면 위로 떠오 른다. 점점 사람들의 기세가 흉흉해져 갔다. - 그래! 저 아이가 분명…! - 복수인 게 아닐까?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 대한? - 그렇다면 그 앞의 자살한 아이들도 저 아이가… - 저 아이의 짓이다! 저 아이가 죽인 거라고! 그렇지 않아! 멋대로 말하지마! - 살인자! 그 사념의 공통된 외침에 유리의 숨이 턱 막혔다. 유리는 그만 자신도 모르 게 뒤돌아 서서 출입구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이 자리에 있는 것 이 무서웠다. 어떻게든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가 장례 식장을 뛰쳐나가자, 뒤에서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 앗! 도망쳤다! " " 잡아!! " 아니야! 난 아니란 말이야! 유리의 귓 가로 수미의 부모들인 것 같은 사람 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저 아이가 한 짓이 분명해요! " " 저 아이가 우리 수미를! " 수미의 부모들도 유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5학년일 때 클래스 메이트였던 여자 아이.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소문이 있 었고, 그리고 그 담임이 저 아이로 인해 실성해버리는 소동이 있었다.그것은 청송 초등학교 학부모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수미의 부모들은 자신의 딸 아이가 사건 당일 날, 집으로 돌아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두려움에 떨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소문의 아이가 지금 수미의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냈다.다른 학교로 전 학까지 갔으면서. 이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성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유리에 대한 의혹이 감정적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 놓쳐서는 안돼! " " 저기로 갔다! " 도망가는 유리의 모습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뒤를 쫓았다. 그들에게 쫓 기면서 유리는 필사적으로 병원의 복도를 달려 나갔다. 귓가로 자신의 숨 소 리와 심장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 다. 일단 도망쳐야 했다. 무서웠다! " 하아! 하아! 하아! " 유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저 위편의 계단에서 사람들 의 뜀박질 소리와 거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사념들에 유리는 진저리를 쳤다. 저주와 원망, 분노의 소용돌이. 자신이 이렇듯 도망 가야 되는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그들이 내뿜는 사념의 소용돌이가 유리를 전신으로 죄어오고 있었다. 유리는 사람들에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이 뿜어내는 사념에게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유리는 숨을 몰아 쉬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하다간 저들의 손에 잡 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식은 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념의 목소리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 잡아라! - 잡아라! - 잡아라! " 그만해!!! " 유리는 발작적으로 외치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귀를 틀어막았다.하지만 그 렇게 한다고 해서 사념의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리는 구토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고통으로 눈가에 눈물이 맺혀 올랐다. 유리의 외침에 그녀를 쫓아오던 사람들이 그녀의 위치를 파악하고 소리쳤다. " 저기다! " " 놓치지마! " 유리는 비틀거리며 저편에 보이는 모퉁이로 향했다. 이상했다. 모두들 미쳐 있는 것만 같았다. 군중 심리도 저렇게 난폭하고 도발적이지는 않다.마치 누 군가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 처럼 저들은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 제 정신들이 아니야…. 이건 뭐가 잘못되어 있다고. ' 유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벽을 짚었다. 지독한 두통과 현기증으로 정 신이 아늑해질 지경이었다. 앞 머리가 식은 땀으로 젖어 이마에 들러 붙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안돼. 이 상태로는 붙잡혀 버릴 거야….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 덜컥 순간, 유리가 지나가고 있던 복도의 문 중 하나가 열리며 누군가가 유리의 몸을 낚아채어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유리는 엉겹결에 그 힘에 떠밀려 어두 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탕!' 재빨리 닫히는 문. 어둠이 그녀의 시야를 가 렸다. " 누,누구…! " " 쉿! 조용히 해. " 그녀를 방 안으로 끌어당긴 누군가가 유리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나 지막히 말했다. 목소리가 앳된 것이 아무래도 유리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의 소년인 것 같았다.유리는 소년의 행동에 거칠게 항의를 할려고 하다가,문 밖 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입을 꼭 닫았다. " 어디로 간 거야?! " " 분명 이 쪽으로 왔는데…! " " 저쪽인가? 저기로 가보자! " - 탁탁탁탁탁… 거친 사람들의 목소리와 함께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유리는 의문의 소년과 함께 숨을 죽이며 침묵했다. 어둠에 익 숙해지자 방 안의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좁고 작은 골방. 빗자루 나 청소용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여기는 청소부들이 사용하는 방 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유리가 생각하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소년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끌었다. " 자, 날 따라와. 어른들에게 잡히기 싫으면. " " .........으응. " 유리는 의심의 눈초리로 소년을 노려보다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이 상황에서는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순 없지만 이 아이를 따 라가는 수 밖에는…. 소년은 유리의 대답에 어둠 속에서 옅게 미소지으며 그 녀를 잡아 끌었다. 그들이 들어온 문 외에도 청소용구 방은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소년은 용의주도하게 밖을 살핀 후 유리를 데리고 나왔다. 밝은 곳으로 나오자 유리는 소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 이 아이는…! ' 짙은 블루 블랙의 머리카락. 눈을 가린 긴 앞머리. 분명 수미의 장례식 장에서 자신을 바라 보며 웃고 있던 그 소년이었다! " 하아… 하아… " 병원에서 떨어진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유리는 놀이터의 그네에 앉은채 숨 을 몰아쉬고 있었다. 끊임 없이 내리던 가을비는 잠시지만 멈춰 있었다.하늘 에 먹구름이 가시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만간 다시 비가 내릴 것 같았다. " 하아…. " 소년의 손에 이끌려 정신 없이 도망치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유리는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근처의 자판기에서 예의 소년이 음료수를 두 개 뽑아든 채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자, 이거 받아. "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음료수를 건내주는 소년.블루 블랙의 긴 앞머리 때문에 그 눈은 여전히 가려 보이지를 않았다.소년은 유리와는 대조적으로 그 먼 거 리를 뛰어왔는데도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땀 한 방울조차 흘 리지 않는 그 모습이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유리는 소년이 건내주는 음료수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유리의 모습에 소년은 웃으며 말했다. " 안 받을 거야? " " …너 누구야? " 차가운 유리의 되물음. 소녀의 냉정한 반응에 소년은 내밀던 음료수를 옆의 시소에 놓아 두었다.그는 여유로운 발 놀림으로 유리의 옆에 있는 그네에 앉 은 후 말했다. " 유빈. 마유빈이라고 해. " " ......... " 누가 네 이름 같은 거 물어봤는 줄 알아? 유리는 눈꼬리를 살짝 치켜 뜨며 자신을 마유빈이라고 밝힌 소년을 째려 보았다.연신 싱글 벙글 웃고 있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년, 마유빈은 유리의 시선에 잠시 고개를 갸 우뚱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자기의 소개가 부실했다는 걸 깨달 은 모양이었다. " 너랑 같은 청송 초등학교 같은 학년 출신이야. 너 이유리 맞지? 꽤나 유 명인이라서 쉽게 알아봤어. " " …유명인? " " 응. 청송 초등학교에 다니는 선생과 학생들 중에서 네 이름을 모르는 사 람은 아무도 없을 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아이라면서? " " ......... " 그런 의미였나…. 유리는 아랫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런 소녀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빈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 하지만 굉장하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니. …부러운 걸? " " .........!! " 유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유빈의 말에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러워? 이 따위 능력이 부럽단 말이야? " 네, 네가 뭘 안다고… " 떨리는 유리의 목소리.그런 소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 거리며 살피는 소 년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을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 올 랐다. 이 철딱서니 없는 꼬마 자식이! "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부러워?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이 능력이 부러워 보인다고! " 이 저주받은 능력으로 인해 얼마나 괴로웠는데…. 얼마나 괴로운 일들이 많 았는데! 그런데 지금 그걸 부럽다고?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거야? -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재수없다, 저 아이! - 무서워! - 저리가! 친구들에게 외면받고 - 와,왔구나. - 더 이상 연관되기 싫소. 엄마와 아빠에게도 외면받아 버렸다. 이 능력이 있음으로 인해 자신은 너무 나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버림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부럽다고? 멋 모르 고 지껄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 이 능력 만 없었으면 난 친구들과 평범하게 하루 하루를 보낼 수 있었어! 집에서 나오지 않아도 됐었어! 다른 아이들 처럼 당연하게 부모님의 사랑 을 받을수 있었어! 하지만 이 능력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때 문에… "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그 당연한 것 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그런데도 부러워 보인단 말이야? 남들에게 미움받고 멸시 받는 내 모습이 부러워 보인단 말이지! " 사람은 평상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그것을 당연 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 '평범'이라는 것이 깨져 버리는 순간,그 '일상'이 라는 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그것의 절 실함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간, 고마움을 알게 되는 순간, 행복은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다시는 닿지 않는 저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야!! " 유리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금새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병원에서 있었던 일만 생각해도 마음이 찢어질듯 아팠는데,이 눈 앞의 꼬마가 하는 철 없는 말까지 듣고 있자니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그런 유리의 모습을 유빈 은 조용히 주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유리한 거야. 사람은 평생 살아 가면서 절대로 타인의 마음을 알 수가 없거든. 단지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무엇을 바랄까? 뭐, 이렇게 생각 하면서 그 사람을 이해했다고 착각하지. " " ......... " 무슨 소리를…. 하지만 유리가 입을 열 틈을 주지 않고 유빈은 말을 이어나 갔다. " 그래. 사람은 절대로 다른 이의 마음을 알아내는 게 불가능 해. 할 수 없 는 일이지. 하지만… 넌 할 수 있어. " 유빈은 그네에서 일어나 천천히 유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위압감을 받은 유리는 흠칫 몸을 떨었다. 유빈은 천천히 몸을 숙여 유 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후 말했다. "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야. 자신이 못하는 것을 남이 할 수 있다면 배 아 파하거든. 질투하는 거지.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너를 배타 하는 거야. 자신들 보다 유리하니까. 자신들의 마음을 알고 있는 네가 부 러운 거야. " 소년의 긴 앞 머리 사이로 드러나는 눈동자는 놀랄 정도로 따뜻한 빛을 띄 고 있었다. 절대로 연민과 동정의 빛이 아닌… 너무나도 푸근한 눈빛이었다. 유리는 그런 유빈의 눈빛에 얼굴을 붉히며 애써 소리쳤다. " 우,웃기지마! 네가 뭘 안다는 거야? 유리하다고? 부러워한다고? 누가 그 런 거 원한댔어?! 난, 난 단지 남들 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 단지 다른 아이들 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고,친구들과 어 울려 노는… 그런 것 만을 바랬을 뿐인데… " 이 따위 능력은 필요 없었단 말이야!!! "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앞에서 저런 눈빛을 보내는 이 마유빈이라는 소년이 싫었다. 보기 싫었다.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도 싫었고,저 따뜻한 목 소리도 듣기 싫었다. 유리는 입가에 삐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흥! 결국 너도 내가 무서울 걸? 난 지금부터 네 마음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테니까. 네가 마음 속 깊숙히 숨겨둔 비밀까지 하나하나 다 까발려 버 리겠어. 너의 모든 비밀을 다 꺼내보이겠어! 어때? 이래도 무섭지 않아? 두렵지 않아? 지금도 내가 부러워 보여? " 어차피 너도 남들과 똑같아! 지금 겉으로는 그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을 짓고 있어도 속으로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걸? 너의 마음을 들여다볼 내가 무서울 걸? 유리는 마유빈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 가! 사라져! 내 눈 앞에서 사라지란 말이야! 내가 네 마음을 들여다 보기 전에! " 그런 유리의 고함 소리에도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전히 변함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마음을 찔러오고 있었다. 유리는 두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 꺼져 버리란 말이야! " - 턱 그러나 유빈은 소리치는 유리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며 낮은 목소리로 소녀에게 말했다. " 읽어봐. 내 마음을 마음껏 들여다 봐. " " .........! " 갑작스런 소년의 행동에 유리는 당황했다.유빈은 도저히 초등학교 6학년 생 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엄숙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 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유리가 거역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 아… ' 한 치의 거리낌도 없는 공개(公開). 유빈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가지 고 있을 마음의 장벽조차 없었다. 그것은 완벽한 개방(開放)이었다. 어떻게 타인을 상대로 이렇게 완전하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수가 있는 거지? 유리 는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보이는 유빈의 태도에 순수히 감탄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유빈의 마음을! - 어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 같아? ' .........!! ' 마음 속으로 들려오는 유빈의 말에 유리는 깜짝 놀라며 그의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그런 유리를 바라보는 유빈은 예의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유리는 유 빈의 가슴에 대었던 손을 움켜쥐며 얼굴을 붉혔다. 귓가로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행동으 로 표현할 수 없듯이, 행동하는 것과 그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일치할 수 없 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년은 달랐다. 지금 자신에게 보여주는 저 태도와 행 동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소년의 마음은 그 행동과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다니! 그런 유리의 생각 을 알아챘는지 유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난 유리, 네가 무섭지 않아. 너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무섭지 않아. 왜냐 하면 난 숨길 것이 없으니까. 내 모든 것을 너에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유리는 열병에 걸린 사람 처럼 얼굴을 붉히며 눈앞 의 소년을 주시하고 있었다. 유빈은 그런 그녀와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했다. " 모든 사람들이 이렇듯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면 좋을텐데…. 겉과 속이 같 으면 상처받을 일은 없을텐데…. "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목소리는 어딘가 쓸쓸한 울림을 간직하고 있었다. 유 빈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지? " " ......... "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미의 장례식에서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유리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또 다른 동창 김준호의 집이었다. 수미,주희와 함께 자살한 청송 초등학교 학생 중의 한 명. 그리고 제일 먼저 자살한 아이이기도 했다. 아무런 단서가 없는 지금, 유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준호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 ......... "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준호의 집으로 발걸음을 놀리는 유리. " ......... "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를 여유있게 따라오며 미소짓고 있는 소년.유리는 살 짝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따라오던 소년,유빈은 예의 웃 음 띤 얼굴로 손을 들어 보였다. " 이제야 돌아 봐 주네. " " …너. " 유리는 밀려오는 현기증에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살짝 두 눈을 감았다.그런 소녀의 반응에 유빈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 어디 아픈 거야? " " …왜 따라오는 거야? " 두 눈을 뜨며 무뚝뚝하게 묻는 유리.소녀의 물음에 유빈은 씨익 미소지으며 말했다. " 따라 가면 안되는 거야? " " 안돼! " " 왜? " " 그건…! " 유리는 막 소리치려다가, 그게 부질 없는 짓임을 알고 한 숨을 내쉬었다.마 유빈. 이 소년은 그 놀이터에서 부터 자신을 계속 따라왔던 것이었다. 처음 에는 어디까지 따라오나 싶었는데… 어느덧 벌써 1시간이 지나버렸다. 맘 먹 고 따라오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 이걸 진짜! ' 유리는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놀이터에서는 자신이 정신이라도 나간 게 분 명했다. 이런 자식을 보고 얼굴을 붉혔었다니…. 병원에서 사람들에게 쫓기 고 고생하다보니까 제 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 난 오빠 밖에 없어! 이런 녀석은 오빠의 발 끝에도 못 미치는 녀석이잖아! 이런 스토커 자식에게 가슴이 두근거렸다니… 이유리, 네가 제 정신이야! ' 유리는 가인을 떠올리며 애써 자신의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잠시 뭐에 홀렸던 거야.내가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갈리가 없잖아.난 일편단심 오빠 뿐이라고! 그러니까 더 이상 이 이상한 녀석하고는 헤어지는 게 상책이야! 왜 귀찮게 쫓아오고 그러는 거야! " 어쨌든 더 이상 따라오지마. 날 병원에서 도와준 것은 고맙지만,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여전히 네가 싫고, 이렇게 너와 함께 할 이유도 없 다고! " " 흐음∼ " 유빈은 그런 유리의 말에도 여전히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고 미소지었다.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유리는 또 얼굴이 다시 붉어질 것 같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도,도대체가!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자꾸 저딴 자식 보면서 얼굴 붉 히지 말란 말이야,이유리! " 따라오면 경찰에 신고해 버릴 거야! " 이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까지 해가며 유빈에게서 등을 돌린채 걸음을 재촉 하는 유리. 자신이 해놓고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경찰에 신고한다니. 초등학생 스토커가 계속 따라온다고 하면 경찰들이 옳다구나 하고 잘도 잡아 가 주겠다. 유리는 귀까지 빨개진채 더욱 빨리 걸었다. 아무래도 저 아이와 계속 하다간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소년에게서 멀 어지려고 할 때, 유리의 등 뒤에서 유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살한 다른 아이의 집을 찾아갈 생각이지? " " .........!! " 유리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유빈을 돌아보았다. 어,어떻게 안 거지? 내가 자 살한 아이의 집을 찾아간다는 걸? 그런 유리의 시선에 유빈은 여전히 싱글 벙글 웃으며 말했다. " 그야 척하면 딱이지. 수미의 장례식에 와서 아무 것도 알아낸게 없으니까 다른 아이의 집에라도 가야하지 않겠어? 청송 초등학교에 자살한 아이는 세 명이니까. 아마… 김준호와 문주희… 둘 중 한 집이겠지? " " 어,어떻게 그걸…! " " 흠, 뭐… 나도 그 아이들의 친구라면 친구인 셈이니까. 아무래도 이상하 잖아. 연속으로 자살한 아이들이라니.그 아이들의 자살 이유가 궁금한 건 너뿐만이 아니라고. " 그럼 이녀석도 나 처럼 자살한 아이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건가? 유리는 의심쩍은 눈초리로 유빈을 바라보았다. 유빈은 빙긋 미소지으며 물었다. " 자, 누구부터 찾아갈 생각이야? 준호? 주희? " "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 유리는 매몰차게 대답하며 다시 뒤돌아섰다. 이런 이상한 녀석과 동행할 생 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지만,어딘지 모르게 수상 했던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일을 방해만 할 게 분명했다. 유빈은 그런 유리 의 등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 주소는 알고 있어? " 그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으로 소리쳤다. 준호와 주희는 어렸을 때부터 지내온 소꿉 친구들이었는지라 그 집에 놀러간 것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눈 감고 찾아가라고 해도 찾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유빈의 말에 유리는 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 …걔네들 이사간지 꽤 됐어. 당연히 주소가 바뀌었을 거야. " " .........!! " 유리는 쌍심지를 돋구며 유빈을 돌아보았다. 유빈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 를 지으며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 거,거짓말! " "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지? 정 못 믿겠으면 내 마음을 읽어봐도 좋아. " " ......... " 할 말을 없게 만든다. 뭔가 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자꾸만 이 소 년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자신이 답답했다. 유리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 …난 함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지는 않아. " " 후훗,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빈. 유리는 그런 그를 마음에 안 든다 는듯 노려보았다. 뭐야. 저 모든 걸 다 파악했다는 듯한 말과 행동들은? 유 리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흥. 그럼 넌 그 아이들의 주소를 알고 있나 보지? " " 나? 난 몰라. " 이게 진짜!! 유리는 유빈의 뻔뻔함에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치려고 했다.하 지만 유빈이 그녀보다 한 발 빨랐다. " 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 유빈이 준호와 주희의 주소를 알려주겠다고 유리를 데려온 곳은 근처의 PC 방이었다.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카페 분위기의 조용한 PC방을 둘러보 았다. 그녀는 컴퓨터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이렇게 PC방 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학교의 데스크 탑 컴퓨터 정도나 만질 줄 알았지 컴퓨터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다. 유리는 유빈이 자신을 왜 이 곳으로 데 려왔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 …날 속인 건가? ' 유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접수처의 아르바이트 생과 얘기하는 유빈을 노 려보았다.유빈은 유리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바이트 생과 계산을 끝 내고 있었다. 물론,당연히 유리는 한 푼도 PC방 비에 자신의 돈을 보태지 않 았다. 멋대로 끌고 왔으니 계산은 네가 하란 말이야! …라는 심보였다. " 1시간으로 끊어주세요. " " 예, 손님. 선불입니다. 게임 전용 방으로 드릴까요? " " 아뇨. 그냥 인터넷 검색만 할 거에요. "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르바이트 생에게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하는 유 빈. 그런 소년의 미소에 아르바이트 생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카드를 끊어주 었다. 긴 앞머리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지만, 마유빈은 꽤나 투명한 느낌의 미소년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유리는 투덜거렸다. 흥, 바람둥이 기질이 풍부하시군 그래. " 자, 여기 카드 키 받으세요. 저편에 보이는 12번 방으로 가시면 되요. " " 예, 감사합니다. " 웃으며 카드 키를 받아드는 유빈. 아르바이트생은 그런 소년이 귀엽다는듯 바라보다가 뒤의 유리를 번갈아 보며 미소지은채 말했다. " 그럼 데이트 잘 하세요, 꼬마 손님들∼ " " .........!! " 데,데이트? 데이트라니!! 유리는 아르바이트 생의 말에 얼굴이 시뻘겋게 물 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약 먹었어? 이런 자식하고 데이트 따위를 한다니! 난 이 자식보다 백만 배는 멋 진 오빠가 있단 말이야!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유리는 씩씩 거리며 아르바 이트 생에게 따끔하게 소리를 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잡아끄는 마유빈 의 손길에 그 항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더구나 유빈은 아르바이트 생에게 다 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 고마워요, 누나. 덕분에 데이트 잘할게요. " " .........!!! " 이 자식이 진짜! 유리는 이를 갈며 유빈을 잡아 먹을듯이 노려보았다. 12번 방으로 들어와 문이 닫히자 마자 유리는 유빈의 손길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 정말 보자 보자하니까 이게 웃기고 있어! 누구 멋대로 데이트야? 데이트 는!! " " …어라? 데이트 아니었어? "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려 반문하는 유빈. 저 뻔뻔스러움이라니! 유리는 유 빈의 능청스러움에 치를 떨며 말을 이었다. " 좋아하지도 않는데 무슨 데이트야! 난 너 처럼 가벼운 남자애가 제일 싫 어! 좋아한다는 감정도 모르는 어린애가! " " 만약 좋아한다면? " " .........! " 유리는 갑작스런 유빈의 말에 할 말을 잊고 숨을 틀이켰다. 조,좋아한다고? 좋아한다니! 그,그게 무슨 소리래? 이 자식, 뭘 잘 못 먹은 거 아냐? " 마,만난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정말 우습지도 않 아서…!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네가 가볍다는 증거야! " " 사람을 좋아하는 데 시간 같은 건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나는 이래보여도 꽤나 진지하단 말이야. 어린 아이라고 그 감정까지는 무시하 지 말아줘. " 직격! 유리는 막힘 없는 유빈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말한 것은 평상시 자신도 생각하고 있던 바였던 것이다. 가인을 향한 자신의 마음 이 어리다고 무시당하기 싫은 것 처럼. 가인을 좋아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 는지 모르는 것 처럼. 유리는 인정하기 싫지만 유빈의 말에 동의해야만 했다. 유빈은 그런 유리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 자자, 어쨌든 PC방에 왔으니 빨리 볼 일 부터 보자.준호와 주희의 주소를 찾으려고 온 거잖아? " " ......응. " 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나이이건만 훨씬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유빈의 모습에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고, 한심스럽기도 했다. 무엇 보다 그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이것은 애써 유리가 인정하기 싫은 점 이기도 했다. 안돼. 이유리! 너에게는 오빠가 있어! 한 눈 팔 생각은 아니겠 지? 경멸해줄테다!(그렇게까지나….) - 탁탁탁 카드키를 넣고 가볍게 키보드를 두들기는 유빈. 유리는 물끄러미 그의 옆에 앉아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힐끔 유빈의 옆 얼굴을 쳐다보았다. 경황 중이라 못 느꼈지만 그는 상당히 선이 가는 미소년이었다. ' 흐,흥! 그래. 도련님이라는 건가? 부티 나셔서 좋으시겠어! ' 유리는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 신이 의아스러웠다. 자꾸만 왜 이러는 걸까? 내 마음을 나도 이해못하겠어! 미소짓고 있는 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가벼운 죄책감이 들었다. " 아, 여기다. " 유빈의 말에 유리는 애써 상념을 지우며 모니터로 눈을 향했다. 모니터에는 청송 초등학교의 홈페이지가 떠올라 있었다. 아, 그렇구나! 여기라면 준호와 주희의 바뀐 주소를 알 수 있을지도… ' …그럴리가 없잖아! ' 그렇게 함부로 학생의 신상 명세를 공개하는 학교 홈페이지가 어딨다는 거 야? 유리는 한숨을 내쉬며 유빈을 노려보았다. 역시 이 자식을 믿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유빈은 그런 유리의 모습에 씨익 웃으며 홈페이지에 로 그인을 했다. 그러자 대번에 학생들의 신상명세를 볼 수 있는 화면으로 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유리는 이런 조화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유빈을 바라보았 다. " 어,어떻게 한 거야? 이건? 이럴 리가 없을 텐데. 개인 정보를 이렇게 쉽 게 공개할리가 없잖아! " " 그야 당연하지. 난 지금 준호와 주희의 담임이었던 분의 아이디(ID)를 사 용하고 있는 것이니까. " " .........!!! " 뭐,뭐야?! 유리는 유빈의 터무니 없는 짓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악했다. 이건 엄연히 범죄인 것이다! 사이버 범죄!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너,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거야? " " 흠. 뭐, 맘 편히 생각하자구. 잠깐 빌리는 걸로 생각하면 되겠내. " 이,이 자식은!!!! 유리가 흥분하여 막 소리칠려고 할 때, 유빈은 재빨리 마 우스를 클릭하여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음 순간 화면에 뜨는 일련의 정보들. 준호와 주희의 바뀐 주소들이었다. 유빈은 유리를 돌아보며 예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 자, 주소도 알았겠다. 이 다음은 너에게 맡길게. " " .........! " 유리는 결국, 화면에 뜬 주소를 프린트로 출력해야만 했다. - 유,유리야! 날 부르는 한 남자애의 목소리.돌아본 곳에는 야구모자를 뒤집어 쓴 한 개 구쟁이 소년이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다.아이의 이름은 김준호.나의 가장 친 한 소꿉친구 중 하나이자 같은 반 친구이기도 하다. 준호는 평소 답지 않게 뭔가를 말하길 주저하고 있었다. - 왜 그래,준호야? - 이,이거 받앗!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내 손에 작은 선물 꾸러미를 건내 주는 소년.난 두 눈을 크게 뜨며 선물과 준호를 번갈아 보았다. - 준호야? 이건… - 오늘 생일이지? 선물이야! - 아…. 그렇다. 생일.아침을 나올 때만 해도 엄마가 해주는 미역 국을 먹고 오늘이 생일 임을 알고 있었는데,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놀다보니깐 잠시 깜빡한 모 양이었다. 난 얼굴을 붉히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서,선물은 고맙지만…설 마 교실 안에서 이렇게 줄 줄은…. 그리고 그런 나의 걱정은 어김 없이 적중했다. 순식간에 나와 준호의 주위 로 반 아이들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 우와아-! 김준호! 사랑 고백이냐! - 드디어 해냈어! 축하해∼ - 멋쟁이 준호 씨! 그게 바로 남자다! - 유리는 좋겠내∼ 러브리 해주는 남자도 있고∼ 대번에 놀리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나이 대의 아이들은 어디서나 그렇듯 남 녀 문제에 짓궂은 법이다. 거의 괴롭힘 수준으로 놀려대는 아이들의 장난에 나와 준호는 얼굴이 시뻘개져 동시에 소리쳤다. - 그,그런 게 아냐!! 한 자도 틀림 없는 똑 같은 외침. 그 바람에 나와 준호는 깜짝 놀라 서로를 돌아보았고,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며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그것이 도화 선이 되어 아이들은 다시 우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 얼레리 꼴레리∼ 준호와∼ 유리는∼ 결혼했대요∼ 결혼했대요∼ - 자,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키-스♥ 어째서 선물을 받은 것 가지고 결혼할 사이까지 되는지 그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서로 껴안으며 입을 맞추는 시늉 까지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난 울 쌍을 지었다. 우스꽝스럽게도 알 수 없는 서러움에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난 책상에 업드려 훌쩍이기 시작했고, 준호가 안절부절하며 주위 의 아이들에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그렇게 거세게 반응해 줄 수록 녀석들의 장난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난 소리내어 울었고 아이들의 장난질은 한층 더 고조되어 갔다. - 탕! 그때 거세게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혹시나 선생님인가 해서 급하게 장난을 멈추는 아이들. 하지만 돌아본 곳에는 자신들의 동급생인 문 주희가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준호와 함께 나의 또 다른 소꿉친구인 그녀 는 평상시의 조용한 성격과는 달리 그야말로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주 희는 나와 준호를 둘러싼 아이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 야! 너희들은 이게 재밌어? 힘 없는 여자애 괴롭히는 게 재미 있냔 말이 야! 혼자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것들이 비겁하게 여럿일 때만 기가 살아서 소리치지! 생일 선물 주는 게 신기해? 유리의 생일이라고 축하는 못해줄 망정 이게 뭐하는 짓들이야!! - 우,우우… 그건…! 주희의 기세에 눌려 우물쭈물하는 아이들.주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거세게 아이들을 몰아갔다. - 자, 다들 저리가! 볼 일 다 봤으면 사라지란 말이야! 아직도 놀릴 꺼리가 남아 있어? - .........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천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난 그런 주희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주희는 평상시에는 혼자 독서하는 게 취미인 조용한 아이였지만,일단 화가 나면 누구도 못 말릴 정도로 독설가로 변한다. 나와 준호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주희는 평소의 수줍은 얼굴로 돌아가 말했다. - 자,자자… 유리야. 울기는 왜 우는 거야? 오늘 같은 날에.그리고 준호 너 도 바보다.이렇게 교실 한 가운데에서 유리에게 선물을 주면 아이들이 어 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던 거야? - 으,으응. 미안…. 준호는 주희의 질책에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마도 많은 아이들의 앞에 서 프로포즈 한다는 심정으로 선물을 준 건데,되려 역효과가 나자 입맛이 쓴 모양이었다. 주희는 눈물이 맺힌 내 눈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 그보다 유리야. 모처럼 준호에게 받은 선물이잖아. 끌러보지 않을 거야? - 아…. 준호에게 받은 선물을 들고 그를 바라보니,준호는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긁 적이고 있었다. 준호는 내가 선물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 반, 기대 반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선물의 포장지를 뜯고 그 안을 살펴 보았다. - 와아. 준호가 준 선물은 작은 오카리나였다. 수공업품이 아닌 조악한 플라스틱 제 품이지만, 초등학생의 용돈 치고서는 꽤나 부담이 가는 선물이었다. 그리고 유리가 놀랐던 것은, 방과 후 집에 가는 길목에서 악기 점에 진열되어 있던 이 오카리나를 자신이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 의 곁에서 같이 오카리나를 구경하던 준호가 용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유리에게 선물해 준 것이다. - 고마워, 준호야. 너무 맘에 들어! - 헤헤….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준호. 그런 준호와 나를 바라보며 주희는 웃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린 오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준호의 목소리 가 귓가에 들려왔다. - 생일 축하해, 유리야…. 나는 지금도 준호가 선물해준 오카리나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준호의 집이 이사간 곳은 예전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굳이 이 사를 갈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되었지만, 그들이 이사한 시기가 자신의 능력 으로 사건이 일어났을 직후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유리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유리와 유빈은 PC방에서 주소를 프린트 한 후, 그것을 따라 어느덧 준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는 그쳐있었지만 주말의 하늘은 여전히 짙은 먹구 름으로 뒤덮혀 있었다. 유리는 준호의 집이 있는 아파트 입구에 서서 유빈을 돌아보았다. 유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 정말 안 따라가도 되겠어? " " …따라오지 않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유리는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 근처에 남은 유 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리는 자신이 유빈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 그래. 저런 자식에게 잘 대해 줄 필요 없어! 나에게는 오빠가 있으니까! '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는 준호의 집 문 앞에 섰다. 막상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자 주저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에는 누가 있을까? 준호의 아빠? 아니면 엄마? 예전, 유리가 준호의 집에 놀러왔을 때에는 준호의 어머니 밖 에 만나지 못했었다. 준호의 어머니를 떠올려 보았다. - 어머, 유리 왔구나? 우리 준호가 좋아하겠내∼ 그녀는 언제나 유리가 자신의 집을 찾아오면 기쁜 표정으로 맞이해주었다. 마치 자신이 준호이기라도 한 것 처럼 좋아해주던 그녀. 지금도… 준호의 어 머니는 자신을 반겨줄 수 있을 것인가? 유리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 리며 회의적인 감정에 빠졌다. 되도록이면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준호의 아 버지를 만나고 싶었다. - 딩동! 울리는 차임벨 소리. 곧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리는 마음을 단단 히 잡으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 우리 준호에게 이런 예쁜 여자 친구가 있었구나. " 준호의 아버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를 반겨주었다. 유리는 자신에 게 홍차를 건내주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준호의 아버지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자식을 잃은 지 채 이주일도 지나지 않았으니,그 슬픔이 완 전히 가셨을 리가 없었다. 유리는 홍차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 " 아니. 모처럼 손님이 와주었는데 대접할 게 이런 홍차 뿐이라 미안하구나. " 준호의 아버지는 유리의 머리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하지만 그 손길에 진한 그리움의 감정이 묻어 있다는 것을 유리는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찾아온 자 신을 바라 보며 그는 하늘로 가버린 준호를 그리워하는 것일테지….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찾아온 것이 되려 그를 고통스럽게만 하는 것이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 그런데… 아주머니는? " 준호의 어머니는 집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얼핏 들어올 때 안방 을 볼 수 있었지만, 그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이렇게 홍차를 준호의 아버지 가 직접 들고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집에 없었다. " 아, 잠시 근처의 마트에 갔단다. 저녁 찬 거리를 준비하러. " 그렇게 말하는 준호의 아버지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그는 슬픈 얼 굴로 애써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 이제는 준호가 없지만… 살아가려면 먹는 수 밖에 없더구나…. " " ......... " 자신의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슬퍼질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그가 없어도 세상은 변함 없이 흘러간다는 것을 느낄 때가 아닐까 하고 유리는 생 각했다. 그가 없어도 자신은 변함 없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일을 하며 살아 간다. 그가 없어도 사람들은 출근하고, 즐겁게 웃으며 어제 본 TV 얘기를 한 다. 그가 없어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태양 빛은 따스하다. 이런 모 든 것이 슬퍼질 수 있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덩달아 기분이 가라앉는 유리. 그렇다. 자신의 친한 소꿉 친구가 이제는 세 상에 없음에도 자신의 생활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학교를 다 니고, 밥을 먹고, 피스 대원으로서 몬스터와의 전장에 뛰어들겠지. ' 그리고… ' 무엇보다 준호의 죽음이 크게 슬프지 않았다는 게 유리는 충격이었다. 그렇 게 절친한 친구였는데도, 항상 같이 붙어 다니던 친구였는데도 그의 죽음이 슬프지가 않았다. 예전 자신의 능력에 눈을 뜬 후,그 아이와 멀어져 버린 것 도 그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죽음에 익숙해져 있다는 게 더 큰 이유 였었다. 그렇다. 피스 대원. 자신은 삼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힘,오라를 사용하여 이 차원의 존재와 싸우는 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수 많은 전장을 겪 게 되었고, 보통 민간인들이 경험할 수 없는 수 많은 감정을 접하고야 말았 다. 사람이 죽는 모습을 수 차례 보게 되었고,그것에 점점 익숙해져 버린 것 이다. 그렇다. 유리는 더 이상 옛날의 그녀가 아니었다.오라 능력에 눈을 뜨기 전 의 그녀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준호의 집에 와서도 준호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는 자신의 처지에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유리는 이런 자신이 싫었다. 나는 이기적인 것일까…. " 왠지 이 아저씨가 어두운 얘기만 해버렸구나. 미안하다. " " …아,아뇨. " 유리가 침울한 안색을 하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착각한 준호의 아버지가 사과를 해오자, 유리는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그녀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이럴 바에는 빨리 볼 일만 보고 이 집을 나가는 게 좋 을 것 같았다.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물었다. " 저기… 잠시만 준호의 방을 구경해도 될까요? " " 아, 그래. " 준호의 아버지에 의해 준호의 방으로 안내된 유리. 준호의 방은 그가 살아 생전 해놓은 그대로 꾸며져 있었다. 책장에 꽂힌 만화책들도 그대로였고, 보 물 1호라며 자랑하던 장난감들도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 지 않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준호의 어머니가 청소만은 했는지 방 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아마 준호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이 방을 부모가 정리하기란 무리였을 것이다.준호의 아버지는 방 안을 둘러보는 유리에게 말 했다. " 그럼 아저씨는 나가있을 테니 마음껏 구경하거라. " " 감사합니다. " 죽은 자식의 방에 들어오자 옛 향수가 되살아났는지 그는 재빨리 방을 나가 버렸다. 유리는 닫히는 방문을 바라보며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오 히려 혼자가 되는 게 조사하기 더 편하겠지. 옆에서 준호의 아버지가 지켜보 고 있으면 마음껏 사념을 읽지도 못할테니까. ' 뭐 부터 시작해야 할까…. ' 유리는 방 안을 둘러보며 준호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제일 확실한 것은 사 념보다도 일기를 찾는 것일테지만, 경찰 조사에서 자살 이유가 밝혀지지 않 은 것으로 보아 일기는 단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 속 에서도 준호는 일기를 쓰는 것과는 담을 쌓은 아이였었다. 뭔가 단서가 될만 한 것이 없을려나? " 아…. " 책장에 꽂힌 책들 중 아무 거나 하나 펼쳐 보던 유리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그녀의 시선은 책 사이에 조심스레 꽂혀 있던 사진에 머물러 있었다. 때가 묻고 모퉁이가 살짝 찢어져 있는 사진. 그 곳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모 습은… ' .........나? '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내 능력으로 인해 소동이 일어 난 후 날 멀리했다고만 생각했다. 나 같은 것은 그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줄 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준호는 여전히 나를 기억해주고 있었다. 날 생각해주 고 있었다. 책 사이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던 사진. 그 속에 있던 것은 웃 고 있는 유리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유리는 그제서야 준호의 죽음을 실감했 다. 슬픔이 느껴졌다. 이제 다시는 그 아이를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 생일 축하해, 유리야…. 쑥스러워하던 그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유리는 책 사이에 꽂혀 있는 사진을 꺼내 들었다. 준호의 사념이 느껴졌다.그가 얼마나 소중히 사진을 보 관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 다시는 유리와 놀아서는 안돼! 알았니, 준호야? - 어,엄마! 하지만…! - 안된다면 안돼! 그 아이와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돼! 너희 반 선생님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면서도 그러는 거니? 준호를 혼내면서 꾸짖는 그의 어머니. 유리가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아주 머니의 얼굴이었다. 유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랬구나…. 아주머니가 준 호를…. 학교에서 보여주던 준호의 차가운 태도는 사실… - 엄마! 버리지 말아요! 유리가 준 거란 말이야! - 이런 불길한 물건은 버려야 해! 엄마 말 들어! 준호의 생일에 줬던 유리의 선물들이 사정 없이 소각로 속으로 버려졌다.울 면서 매달리는 준호를 매몰차게 뿌리치며…. 준호는 소각로에 불타오르는 유 리의 물건들을 하염 없이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 뒷 모 습이 너무도 처량해 보였기에 유리는 마음이 아팠다. ' 준호야…. ' 준호는 간신히 소각로에 타지 않은 유리의 사진 하나를 건질 수 있었다. 소 년은 조심스레 사진을 품고서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겨왔었다.그것이 바 로 이 사진이었다.유리의 손에 들린 사진은 그렇게 준호에 의해서 소중히 보 관되어 왔다. ' 고마워,준호야…. ' 유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소중히 사진을 쥐었다. 모두에게 외면받은 줄로만 알았었다. 소중한 친구들도 모두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사실 준호는 누구보다도 유리를 생각해오고 있었던 것이다.그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운 유리였다. 하지만 그 감사를 할 친구는 이미 유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 저 먼 곳으로 가버렸다. 다시는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어 디서 부터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것일까? 뭐가 잘못되었던 것일까? 사진을 쥐 고 있던 유리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 너,넌 누구야! 순간, 사념이 끝났다고 생각하자 새롭게 들려오는 준호의 목소리.유리는 눈 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이건 무슨 사념이지? 어째서 이 사진에 이런 것이 …! 유리는 자신의 눈 앞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광경에 숨을 죽였다. -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야! 창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두운 준호의 방 안. 그 곳에서 준호는 눈 앞의 침입자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준호 혼자 뿐이 었다. 소년은 떨고 있었다. - 사진을… 보고 있었나 보내. 침입자의 얼굴은 방 안의 어두운 사각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 만 그 입이 웃고 있다는 것 만은 확연히 보여왔다. 준호의 또래로 보이는 소 년이었다. 그 침입자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울려퍼지며 원래의 음성을 알아듣 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어딘가 섬뜩한 모습이었다. 침입자는 준호가 떨 어뜨린 사진을 주워 들고 웃고 있었다. 준호는 몸을 떨면서도 애써 소리쳤다. - 내,내놔! 그 사진은 내 꺼야! - 후,후후후후… 음산하게 울려퍼지는 침입자의 웃음 소리. 그 웃음 소리에 유리는 심장으로 한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웃음.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유 리는 부질 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과거의 잔영을 향해 소리쳤다. ' 준호야! 도망쳐! 도망치라고! ' 그러나 침입자는 여유있게 준호를 향해 다가갔고, 준호는 천천히 뒷 걸음질 을 치며 유리창에 등을 부딪혔다. 침입자는 준호의 얼굴 앞으로 유리의 사진 을 들어올리며 속삭였다. - 이 사진이 네 꺼라고? 희미하게 전해지는 분노의 감정. 그리고 그것은 벼락 같이 터져나왔다. - 넌 이 사진을 가질 자격이 없어!!! " 허억! " 유리는 비명이 터져 나올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새 사념은 끝나 있었고 준호의 방에는 자신 만이 서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 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쥐고 있던 사진이 손의 떨림에 밑으로 흘러내렸다.여, 역시… 역시 준호의 죽음은… ' 자살이 아니었어…. ' 이번에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준호를 자살로 몰고간 침입자의 모습을. 그 가 준호를 죽인게 확실했다. 하지만 어째서 얼굴이 보이지 않은 거지? 어째 서! 유리는 그 침입자를 향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자살이 타살이라고 깨달 은 순간, 범인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준호를 죽이다니! 내 소중한 친구를 죽이다니! ' 용서 할 수 없어! ' 유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이렇게 화만 내 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일단 냉정하게 생각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 진 정해, 이유리. 차근 차근 생각해보는 거야. 유리는 떨어뜨린 사진을 주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 그 범인…. ' 준호의 방에 침입해왔던 소년. 그 얼굴을 확실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준호를 죽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 살의와 분노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그 렇다면… ' 수미를 자살로 몰고 간 범인도… 그 녀석일까? ' 동일범일까?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수미 때의 사념에서는 그녀 외에는 아 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준호의 죽음과 수미의 죽음은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 아니야! ' 유리는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두 사건에서 연관성을 느낄 수 있었다.그 사 념에서 느껴지던 기운이 같았던 것이다. 사념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영상처럼 보여주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때 있었던 분위기와 기운, 느낌들을 똑같이 느끼게 해준다. 수미의 사념에서 느껴지던 상대의 기운과 준호의 사 념에서 느껴지던 기운이 서로 흡사했다! 범인은 수미 때와의 동일범이 분명 했다! ' 그렇다면 어째서 녀석은 이런 범행을 저지른 거지…. ' 그리고 그 수법 또한 알 수가 없었다. 녀석은 어떻게 수미와 준호를 죽음으 로 몰아 넣은 것일까? 경찰에서는 타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미와 준호는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말이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녀석은 무슨 방법을 쓴 거지? 이래서는 아무리 범인을 잡는 다고 하더라도 무혐의로 풀려날게 분명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것 이다. 유리는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깨물었다.얼굴 없는 범인이 어디선가 그 녀를 향해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준호를 죽일 때 녀석이 흘리던 그 음산한 웃음 소리…. - 탕! 그때 거세게 준호의 방문이 열렸다. 유리는 깜짝 놀라며 문 쪽을 돌아보았 다. 그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문을 통해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준 호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아마 마트에 갔다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유리를 바 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너무도 매서워 무섭게만 느껴졌다. " 아,안녕하세요, 아주머니…. "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인사했다. 예전에 자신에게 보여주던 그 따 뜻한 미소를 지금의 아주머니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그 차가운 시선.그 분노의 사념들. 그 모든 것이 유리를 숨 막히게 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천 천히 입을 열었다. " 나가…. " " .........! "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는 유리. 그리고 여인의 분노가 폭발했다.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분노의 감정이 유리를 향했다. " 당장 나가,이 악마!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네가 우리 준호를 죽 인 거지? 그 마음을 읽는 능력으로! 난 다 알고 있어! 네가 죽인거야! " " 여,여보! " 당장에라도 유리에게 달려들듯한 그녀를 말린 것은 준호의 아버지였다.그는 갑작스런 아내의 난폭한 반응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소리쳤다. "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저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 " 이거 놔요! 저 아이는 악마란 말이야! 우리 준호에게 복수를 하러 온 게 분명해! 자기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러 온 거란 말이야! " " .........!! " 유리는 마치 굳어버린 장승처럼 멍하니 아주머니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 사람 좋은 웃음으로 자신을 대해주던 그녀가 저렇게 악귀같은 표정으로 분 노를 표하고 있었다. 이건… 뭐가 잘못된 거야…. 이럴 수는 없는 거야…. " 우리 준호가 무슨 죄가 있다고!!!! " 울음을 터뜨리며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는 아주머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 정의 소용돌이가 유리를 엄습해왔다. 원망. 분노. 슬픔. 그 모든 것이 숨김 없이 유리에게는 보였다. 그리고 유리는 몸을 떨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가 전 신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신을 죽일듯이 달려들려고 하는 아주머니가 무 서웠다. 무서웠다! " 이 살인자!!! "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 어서! 어서 나가거라! " 자신의 아내를 힘겹게 뜯어 말리며 유리에게 소리치는 준호의 아버지. 유리 는 몸을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준호의 아버지는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어서!!! " " 아…! " 그리고 유리는 뛰었다. 준호의 아버지와 준호의 어머니를 지나쳐 방을 빠져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뛰었다. 쉬지 않고 뛰었다. 뒤 에서 금새라도 아주머니가 따라올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이 잊 혀지지가 않는다! " 어? 유리야! " 아파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유빈이 소녀를 불렀지만, 유리는 무 시하고 계속 뛰었다. 최대한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싶었다. 가인의 얼굴이 떠 올랐다. 가인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 오빠! 오빠! ' 하늘에서 다시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리는 달리는 것 을 멈춘채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서웠 다. 알 수 없는 공포가 계속 밀려들어왔다. 가인이 보고 싶었다! ' 오빠! ' 유리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 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 호음이 울려왔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가인의 목소리 만이 절 실히 필요했다. 이 불안한 자신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오빠 밖에 없었다. ' 제발 받아줘…! ' 끊임 없이 울리는 신호음. 하지만 가인은 유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리 의 기원을 무시하듯 수신 불가 멘트 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음성 메세지를 남기실 분은… >> - 탁…. 유리는 핸드폰을 쥔 손을 내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비가 쏟아지기 시작 했다. 그 빗방울들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려왔지만 유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 다. 두 눈에서 빗방울과는 다른 뜨거운 뭔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아아… " 보고 싶어. 보고 싶어,오빠…. 어째서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 " 아아아…. " 유리는 목놓아 울었다. 무엇이 그렇게 슬픈지는 그녀도 알 수가 없었다. 가 인이 보고 싶었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것 조차 맘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싫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답답함은 간절함으로, 간절함은 배신감으로, 배신 감은 슬픔으로 이어져 유리의 가슴을 적셨다.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끊 임 없이 솟아 오르는 슬픔의 감정에, 서러움의 감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 었다. - 쏴아아아아아… 쏟아지는 가을 비. 소녀는 가을 비에 몸을 맡기며 울었다. 자신이 무엇때문 에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난 뭐를 위해 살아가는거지? 어째 서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된 거야? 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거지? 이 능력 만 없었더라면 준호와 주희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부모님과 헤어 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자신은 무엇을 위 해 살아야 하는 걸까? - 투둑… 투둑… 그때 유리를 향해 쏟아지던 비가 멈췄다. 유리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블루 블랙 머리의 소년이 유리에게 우산을 받쳐 주고 있었다. " 슬플 땐 울어. " 유빈은 예의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곁에 있어 줄 테니까. " 오열(嗚咽). 유리는 유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내어 울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가 을 비 사이로 울려 퍼졌다. 그런 유리를 바라보는 유빈의 얼굴은 안타까움으 로 물들어 있었다. 한편 우리의 유가인 군은… - 투학! 언더 시티 유레카의 연무장에서 터져나오는 전사경의 충격음.가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허공을 날아 바닥을 굴렀다. 이미 아침부터 내내 두들겨 맞았 던지라 몰골이 성한 곳이 없었다. 껴입고 있던 A.I 슈츠라도 없었더라면 당 장에 병원 신세를 져야 했을 것이다. " …오늘 수련은 이것으로 끝. " " 으아- " 여느 때 처럼 검은 권복을 입고 있는 부르스의 말에 가인은 땅바닥에 몸을 벌렁 드러눕히며 죽는 시늉을 했다. 지금까지 점심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9시간 내내 부르스의 수련을 받은 그였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손 끝 하나에 도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부르스는 그렇게 가인의 드러누운 작태가 마음 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버르장머리라곤 찾아볼 수가 없군. 어디 어른의 앞에서 누워있는 거냐? " " …좀 봐줘요,부르스…. 죽을 것 같다고요. " 가인은 그런 부르스의 반응에 지친 미소를 지으며 엄살을 부렸다. 그때 도 도산에서의 수련 이후, 매일 같은 수련을 통해서 어느 정도 부르스와 친해진 가인이었다. 처음의 그 활화산 같은 모습을 지금의 부르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게 그 증거였다. 이제는 서로 농담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해진 것 같 았다. " 호오라…. 봐주란 말이지…. " 부르스는 친절하게 미소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 건방진 애송이가 오냐 오냐해주니까 제 분수도 모르고 머리 꼭대기 까 지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어? 그렇게 계속 뻗대고 있다간 소원대로 배를 째버릴 테다? " - 벌떡! 부르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 가인이었다. 그 바람에 전신의 타박상들이 비명을 지르며 뼈속까지 울려왔다. 가인은 고통으로 눈물 을 찔끔거리며 생각했다. 친해지기는 개뿔이…. '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귀신 같으니라고! ' " 아, 그건 그렇고… " 막 연무실을 나갈려다가 다시 가인을 돌아보는 부르스. 그 순간 가인은 언 제 속으로 욕을 했냐는 듯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예,부르스! 무슨 일이시죠? " 일견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태도. 하지만 너무 가인을 탓하지 말자.여 기서 부르스에게 잘못 보이면 기껏 끝마친 수련이 자정까지 연장될 수 있으 니까. 부르스는 그런 가인의 태도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 평소대로 해라. 평소대로. 사내 녀석이 비굴하게 남의 눈치나 살피지 말 고. " " 누,누가!! " 가인은 결국 평상시 처럼 버럭 소리지르며 으르렁거렸다. 도대체 누구 땜에 내가 이런 신세가 된 건데? 다름 아닌 당신이잖아! 당신!! 이 남을 배려해주 는 마음이라고는 별의 바다에나 던져버린 성질 머리 고약한 폭력 마왕아! 그 런 가인의 생각 대로 부르스는 남을 배려해주는 마음이라고는 별의 바다에나 던져버린채 자기 할 말 만을 했다. " 네 놈은 언제까지 나를 부르스라고 부를 거냐? " " .........? " 그 뜻 밖의 질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인. 어라? 그,그럼 부르스라고 부르면 안되는 거였나? ' 솔직히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 선생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분명 잘못 된 일일테지…. ' 하지만 가인은 여전히 부르스가 자기 또래 이상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하 는 짓은 백살 먹은 고령의 노인네 뺨치지만 생긴 것은 영락 없이 십 대 초반 이었기 때문이다.아무리 많이 쳐줘도 부르스는 가인보다 어리게만 보였다.그 런 그에게 존칭을 붙이는 것만 해도 익숙치가 않은데, 호칭까지 존대해야 한 다니! 가인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물었다. "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 뭐, 진우 씨 처럼 사부 님, 혹은 수정 씨 처럼 스승 님 정도가 되겠지.가인 은 이런 성질 머리 더러운 인간을 스승으로 불러야 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 했다. 부르스는 그런 그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명쾌히 답안을 제시해줬다. " 코치라고 불러라. " " ......... " " 코치. " " ......... " 가인은 할 말을 잊었다.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4 話 마인드 브레이커(Mind Breaker) (下) =-=-=-=-=-=-=-=-=-=-=-=-=-=-=-=-=-=-=-=-=-=-=-=-=-=-=-=-=-=-=-=-=-=-=-= - 슬플 땐 울어. 편안한 미소. 그 따뜻한 눈빛…. - 곁에 있어 줄 테니까. …그의 이름은 마유빈이라고 했다. ' 내가 미쳤지! ' 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어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얼굴이 타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부끄러웠다. 제 정신이 아니었 던 게 분명했다. 도대체 그 빗 속에서 남자애를 끌어 안고 있는 힘껏 소리내 어 울다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면서 뭐라고 생각했을까? ' 무엇보다… 오빠를 놔두고 이유리 네가 그럴 수가 있어! ' 가인이 다른 여자와 있기만 해도 불 같이 화를 내며 질투했던 자신이 정작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버렸다. 거기다 울기까지 하다니! 앞으로 가인을 무 슨 낯으로 봐야 한단 말인가! ' 미안해, 오빠. 나 떳떳치 못한 몸이 되어버렸어…. ' 그건 오버인 거 같은데…. 어쨌든,오늘 학교에 등교한 이후로 방과 후가 될 때까지 내내 가인과는 말 한 마디 놔두지 못했던 그녀였다. 유리는 작게 한 숨을 내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옅은 블루 블랙의 머리카락이 눈 앞에서 아 른거리는 것 같았다. - 자,잠깐만…! 헤어질려고 하는 유빈의 모습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불렀었다. 유빈 은 예의 미소를 지으며 유리를 돌아보았다. - 왜? - 아,아니… 그게… 저, 다음에는 언제… 차마 뒷 말을 잇지 못했던 그녀.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지만,자신이 왜 그를 불러세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그와 헤어지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유빈은 유리의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입 가의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말했다. -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 누,누가 걱정했다는 거야!! 버럭 소리치며 항의하는 유리.그러나 유빈은 그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 이며 가을 비 사이로 사라져 갔다. 유리는 그가 사라질 때 까지 그 뒷 모습 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뒤로 자신이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 아앗! 안돼! 또 생각하고 있잖아! ' 유리는 다시 도리질을 치며 마유빈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이 정도면 중증이었다.무슨 생각을 하든 결국 그 끝이 전부 마유빈으로 연결 되고 있었던 것이다. 안돼! 정신 차려야 해! 이런 외도(外道)는 용납 못한다 고! " 유리야? " 그때, 번뇌에 휩싸인 유리를 부르는 한 남자의 목소리.그 목소리를 듣는 순 간 유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자신을 부른 이는 다름 아닌 유가인,바 로 그였던 것이다! " …오,오빠? "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유리는 척 보기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대꾸 했다. 그 억지로 괜찮은 척 웃음 띤 얼굴이 애처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유리 의 모습에 가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 괜찮은 거야? 아까부터 계속 얼굴이 창백하던데…. " " 에? 아,으응…. 문제 없어. " 강하게 도리질을 치며 답하는 그녀. 가인은 작게 한 숨을 쉬며 유리의 이마 에 손을 가져갔다. " 문제 없기는! 그러게 어제 비 맞고 돌아다녀서 그런 거잖아. 봐! 열도 있 고. " " 아…. " 유리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는 가인의 행동에 얼굴을 붉혔다.이마에서 느 껴지는 가인의 손길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스레 내려다 보 는 그 눈빛도…. 가슴이 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 이,이상해. 역시 난 이렇게 오빠를 좋아하는데… ' 이렇게나 가인의 손길에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어째서 자신은 어제 잠시 만났던 그 정체 불명의 소년을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걸까. '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 ' 그리고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가인은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부르스 와 수련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자, 유리는 비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자신 과 시민을 놀라게 했다. 더구나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자신들에게 제대로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멍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유리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가인은 적잖이 당황해야만 했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자신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얘기를 하기 싫은 것일지도 ….가인은 그런 유리의 태도에 섭섭함을 느끼며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 다. " 유리야. 고민이 있으면 오빠에게 즉시 얘기해야 해. " " 오빠…. " 유리는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가인을 떨리는 눈으로 올려다 보았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가인의 마음이 절실하게 느껴져 왔다. 가인은 여느 때와 같이 그 자상한 얼굴로 말했다. "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항상 유리 편이니까. " " .........! " 가인의 그 말이 유리를 감동시켰다. 그 말 한마디에 그의 모든 마음이 담겨 져 있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유리를 지켜주겠다는 마음. 유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믿고 따라주겠다는 마음. 그 모든 것이 너 무도 따뜻하게 와 닿고 있었다. ' 고마워,오빠. …정말 좋아해. '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앞으로도 없을 것이 다. 유리는 가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며 미소 지었다. 그래. 오빠에 게 말하자. 어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하는 거야. 그럼 오빠는 누가 뭐래도 날 믿고 따라 줄 것이다. 날 소중히 여겨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너무도 든든했다. 불안했던 마음이 행복함으로 충 만해져 갔다. ' 그래! 말하는 거야. ' 오늘 유리는 방과 후에 마지막 남은 주희의 집을 찾아갈 생각이었다.하지만 어제의 일들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혼자 가기에는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 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인이 함께 가준다면…. 그래. 오빠에게 말하자. 오빠 와 함께 가는 거야. 오빠 만 곁에 있어준다면 두려울 것은 없어. 유리는 환 하게 미소지으며 가인에게 입을 열었다. " 오빠…! " " 가인∼ " 하지만 그런 유리의 목소리를 막아서며 가인에게 다가오는 한 여성.다름 아 닌 에메랄드 머리빛을 가진 한성 고등학교의 꽃, 테레이아 민체스터였다. 그 녀는 언제나 처럼 가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속 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 나와 함께 '한국의 역사- 제국주의의 침략과 근대화의 모색' 2쇄 양 장본을 사기로 약속했었지? 나 오늘이 오기 만을 손꼽아 기다려왔어. " " 테,테레이아? " 가인은 자신에게 붙어 오는 테레이아의 행동에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 다. 뭐,뭐야?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다는 거지?! 더구나 그 이름도 외우기 힘 든 한국의 역사 2쇄 양장본이라는 건 또 뭐야? 그런 수 많은 의문들을 뒤로 하고서라도 가인은 테레이아의 적극적인 공세에 언제나와 같은 패턴을 답습 하고 있었다. 더구나… " …그렇게는 안된다, 여자. " " .........! " 그렇게 말하며 테레이아에게 안겨 정신을 못 차리는 가인의 뒷덜미를 가로 채는 손 하나. 그 손의 주인은 불쾌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부르 스였다. 그는 자신의 뒤로 가인을 내팽개치며 테레이아에게 말했다. " 애송이는 지금부터 나와의 선약이 있다. 다음 기회를 노려보도록. " " 그,그런…! 선약이라니! 그게 사실이야, 가인? " 가인은 생각했다. 어제 죽어라고 수련했으니, 오늘 같은 날은 하루 정도 쉬 어도 좋으련만….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부르스에게 말했다. " 저기, 부르스…. 오늘 하루는 쉬는 게 어때요? 요즘 매일 같이 땀 흘리며 기진맥진한 나날을 보냈잖아요. 이대로 무리하다가는 언젠가 쓰러져 버릴 거에요. " " ......... " 그런 가인의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는 부르스. 그 모습에 가인 은 '아차'하는 심정이었다. 자신의 이런 부탁을 저 스파르타 사고 방식이 머 리 속 깊숙히 박혀 있는 인간이 들어줄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되려 정신 상 태가 글러먹었다느니,나태하기 짝이 없다느니 하며 자신의 머리 끄덩이를 붙 잡고 연무장으로 끌고갈지 모를 일이었다. ' 서,설마…. ' 그렇게 생각하자 가인의 낯빛이 창백해져 갔다.요즘들어 부르스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엄살 피우는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 었다. 절대로 엄살이 통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것을 뼛속 사무치게 알고 있으 면서도! " …쉬고…싶다고? " 고개를 숙인 부르스의 입에서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가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제,젠장! 결국 또 터지는 건 가, 저 놈의 성질 머리?! 그러나 고개를 드는 부르스는 아주 아주 뜻 밖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 마음대로 해. " 어라? 가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부르스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지,지금 뭐라고 했지, 저 부르스가? 마음대로 하라고? 분명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 ' …독약이라도 먹은 건가?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부르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건 뭔가 잘못된 반응인 것이다.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독설과 폭행을 병행하며 독재자 행세 를 하던 저 인간이 이 같은 민주적인 발언을 할 리가 없다! 그래! 봐! 저 얼 굴을 보라고! 저 볼까지 붉힌 모습이라니! ' .........잠깐. ' 가인은 부르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일그러뜨렸다.뭐? 볼을 붉히고 있다고? 가인의 눈에 비친 부르스의 표정은 다음과 같았다.금새 울 것만 같은, 붉어진 눈시울.거기에 상기된 볼과 그 실망한 표정이라니! 더 구나 약간의 원망이 서린 눈동자까지 포함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당히 기분을 묘하게 만들고 있었다. 뭐,뭐야? 저 표정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것 같은 저 표정은! ' 하,하하…하하하하∼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이라고…. ' …그럴리가 있겠냐! 가인은 자신의 어처구니 없는 발상을 비웃으며 필사적으로 얼버무릴려고 했 다. 그,그래. 버림이라니…. 어째서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버린 거지? 꿈자리가 사나워지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부르스다! 저 부르스 를 그런 공식에 끼워맞춘 네 녀석이 지금 제 정신이라는 거냐, 유가인!! - 웅성웅성웅성 하지만 그런 공식을 생각해낸 건 유가인 만이 아닌 모양이다. 1학년 3반의 학생들 또한 부르스와 가인에게서 미묘한 거리를 두며 자기들끼리 속삭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레? 뭐지? 이 분위기는? " 유가인, 네 녀석…! "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재영이 신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 그, 그 동안 그 수 많은 여성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설마 … 설마 네 녀석이!! 설마 그런 정도를 벗어난 길을 걷고 있었을 줄이야!! " " ......에? " 가인은 재영의 말을 십 분지의 일도 못 알아 들었건만 뭔가 알 수 없는 오 한에 몸을 떨어야 했다. 이,이봐! 정도를 벗어난 길이라니? 뭘 말하는 거야? 그리고 가인에게 매달리던 테레이아 역시 그에게서 주춤 떨어지며 한 손으 로 입을 가린채 말했다. " 가인, 그런…. 믿을 수가 없어. 설마 네가…. " " …테,테레이아? " 그런 그녀에게 손을 뻗는 가인. 그러나 테레이아는 반사적으로 그런 가인의 손길을 피해내며 몸을 떨었다. " 미,미안. 나… 가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잠시 만… 잠시만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 " 뭐야? 그건!!! 제발 알아듣게 얘기해줘!! 그러나 재영의 말을 완벽히 이해 한 다른 학생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저마다 소리쳤다. " 드,들었냐? 매일 땀흘리는 기진맥진한 나날이었데! 도대체 뭘했길래! " " 그것보다 부르스의 표정 봤어? 저건 버림 받은 이의 애수가 서린 표정이 잖아! " " 유가인…. 녀석 만은 남자의 길을 꿋꿋히 고수할 줄 알았건만…. " '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들이냐고!! ' 가인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린 채 학생들과 부르스를 번갈아 바라 보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저기, 부르스….지금 얘네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당 신은 알 것 같아요? 하하,난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영 이해를 못해 먹겠내…. ' 크악!! 제발 그런 표정은 짓지 말라고!!! ' 여전히 애잔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부르스에게 가인은 비명을 내지 르며 이를 악물었다. 뭔가 상당히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끌려들어가는 기분이 었다. 가인은 어떻게든 이 굉장한 착각을 하는 녀석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야한다고 생각했다. " 저기… 다들 뭔가를 잘못 이해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 그러나 그는 이미 발언권도 갖을 수 없는 염치 없는 인간으로 낙인 찍힌 뒤 였다. 채 가인이 말을 잇기도 전에 그에게로 부르스를 추종하는 왕자회의 여 학생들이 피 눈물을 흘리며 달려든 것이다. " 용서할 수 없어,유가인-------!!!! 그래도! 그래도 너만은 끝까지 그 문 란하기 짝이 없는 수컷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거라 믿었는데!! " " 이 만족이란 것을 모르는 인간!! 뭐가 부족해서 이제는 남자에게까지 그 추악한 손길을 뻗치는 거야!! " " 삐뚤어졌어! 네 놈의 모든 것은 삐뚤어져 있다고!! " " 그렇게 우리의 왕자 님을 네 녀석의 마수에 말려들게 해놓고는 쓴물 단물 다 빨아먹고 이제는 내치겠다는 것이냐!! 네가 인간이야!!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럴 수는 없어!! " " 악마! 난잡해! 더러워! " 아비규환(阿鼻叫喚). 다른 말이 필요치 않았다. 수 십명의 여학생들에게 멱 살이 붙잡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유가인은 자연의 섭리를 저버린 이상성욕자 로서 그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상황을 유도해낸 부르스는 그런 그들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속으로 다음과 같이 투덜거렸 다. ' …코치라고 불러주길 바랬는데…. ' 어쨌든, 그런 그들을 뒤로 하며 유리는 작은 한 숨과 함께 교실을 떠나야만 했다. 아무래도 가인의 도움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던 모양이었다.유 리는 홀로 주희의 집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 주희야, 뭐하고 있어? 방과 후 교실에서 혼자 뭔가를 쓰고 있는 주희. 난 그녀에게 잽싸게 달려가 며 물었다. 주희는 황급히 쓰고 있던 노트를 덮으며 나에게 웃어 보였다. - 아,응! 벼,별 거 아냐. 수업 시간에 필기 못한 게 조금 있어서. - 흐응…. 별 거 아닌 거 치고서는 너무 당황하는 모습인데….뭔가를 나에게서 숨기는 주희. 하지만 난 내심 그것이 뭔지를 알고 있었다. 일기였던 것이다. 주희는 일기를 쓰는 취미가 있었는데, 뭔가 기록할 게 있으면 그녀는 참지 못하고 즉시 즉시 그 자리에서 일기를 쓰는 버릇이 있었다. 왜 하필 일기를 쓰는 게 취미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림 일기부터 시작해서 주희는 벌써 8년간 꾸준히 일기를 써오고 있었다. 그 끈기가 굉장하다고 해야 할까…. - 그럼 얼른 정리하고 있어. 난 잠시 화장실에 갔다올테니까∼ 난 주희가 자신의 취미를 맘 편히 즐기도록 일부러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하지만 눈치 없기로 소문 난 내 또 다른 소꿉 친구는 언제나 처럼 눈치 없게 내 의도를 깡그리 무시하는 행동을 해버렸다. - 얍! 뭘 그렇게 숨기고 있는 거야? 재빨리 주희의 품에서 노트를 빼앗아 드는 또 다른 소꿉 친구. 준호였다.그 에게 노트를 빼앗긴 주희는 비명을 지르며 준호에게 달려들었다. - 앗! 돌려줘,바보! 돌려주란 말이야! - 헤헤∼ 어디 보자∼ 준호는 주희의 손길을 여유있게 피하며 노트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 4월 28일. 날씨. 봄 날의 따사로운 햇빛에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 꺅! 그 도입 부분에서 얼굴을 붉히며 울쌍을 짓는 주희. 언제나 아이 답지 않게 침착한 구석이 있던 그녀였기에 이런 침착하지 못한 모습은 우리에게 색 다 른 재미를 주고 있었다. 난 준호의 행동이 좀 너무하다고는 생각했지만,주희 의 흔히 볼 수 없는 반응에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며 둘의 모습을 구경했다. 역시나 저 노트는 주희의 일기였던 모양이다. - 언제나 처럼 유리와 준호를 보는 것으로 오늘 하루도 시작했다.유리는 저 혈압이라 항상 늦게 일어난다. 덕분에 유리를 기다리느라 오늘도 지각할 뻔했다. - 야, 김준호! - 하지만 유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이다.솔직하며 꾸밈 없는 그 모습 이 요즘 아이들 답지 않게 내 마음에 든다. …솔직하며 꾸밈 없는 모습? 내가? 더구나 그 '요즘 아이들 답지 않게'라는 묘하게 애늙은이 같은 문구는 또 뭐야?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친구라는 말에 난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주희 역시 그것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준 호는 그런 나와 주희의 반응에 킥킥 거리며 계속 일기를 읽어 나갔다. - 그런 유리에 비해서 김준호. 이 아이는 상당히 철딱서니가 없다. 머리 속 에는 장난을 칠 생각 밖에 없는 것 같고 또 눈치는 정말 없어서 항상 주 위의 눈총을 산다.그래도 그 둔한 모습이 불쌍해서 친구로 삼아주고 있기 는 하다. ……야, 문주희!! 일기를 읽다가 점점 인상을 찌푸리며 결국에는 주희에게 항의하는 준호. 하 지만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난 잽싸게 준호의 어깨를 붙잡을 수 있었다. 내 뜻 밖의 행동에 준호는 당황하며 날 돌아보았다. - 앗! 유리야! - 딱! 그리고 그런 준호의 머리는 주희의 주먹에 의해 뒤로 젖혀져야 했다. 그 뒤 를 이어 분노가 가득 실린 주희의 주먹질이 준호를 넝마 조각 처럼 교실 바 닥으로 널부러지게 만들었다.쓰러진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 보며 주희가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 땡큐, 유리. - 아니. 당연한 응징이였으니까. 그런 우리의 모습에 준호는 울쌍을 지으며 얻어 맞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 우,우우… 너무해, 너희들…. - 뭐가! 넌 맞아도 싸! - 우우우…. 주희와 나의 무시무시한 눈초리에 준호는 찍 소리도 못 내며 눈물을 삼켰다.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주희가 한 숨을 내쉬었다. - 정말∼ 이렇게 어린애 같은 짓을 하는 녀석들 때문에 일기도 맘 놓고 못 쓰겠내∼ - 그럼 홈페이지에 일기를 쓰면 되잖아? 아무도 못 보게 락(lock)을 걸어놓 으면 될 테고. 나의 말에 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 웃음을 지었다. - 그래야 될까봐. 그래도 일기는 손으로 적는 게 더 의미가 있어서 노트를 고집했는데…. - 잘 됐잖아. 이 참에 하나 만들어, 홈페이지. 어차피 앞으로도 필요할테고. - 응. 그럼 오늘부터 공부해야 되겠내. 적어도 홈페이지 제작 업체에 맡기 기는 싫으니까. 그렇게 화목하게 서로 얘기를 나누는 우리를 준호는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 다가 투덜거렸다. - 체- 어느 세월에 만들려고…. 컴퓨터에 컴 자도 모르는 컴맹 주제에…. - 딱! 그러나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준호는 다시 주희와 나의 주먹에 머리를 얻 어맞아야 했다. 준호는 울쌍을 지으며 소리쳤다. - 으아아! 제발 그만 좀 때려! -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될 걸 스스로 매를 벌고 있잖아! - 후후…. 다시 주먹을 치켜 올리는 주희의 모습에 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언제나 조 용하며 어른스럽게 굴던 그녀가 우리들의 앞에서 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 는 게 너무나도 유쾌했던 것이다. 그런 나의 웃음에 티격태격하려던 준호와 주희도 장난을 멈추며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후후… - 헤헤헤… 방과 후의 교실. 그 교실에 울려퍼지는 우리들의 웃음 소리. - 후후후…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나에게 그런 웃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가을 비는 끊임 없이 내리고 또 내렸다.그런 빗 속을 걸으며 유리는 어느덧 주희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사를 간 주희의 집은 역 근처의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의외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유리는 우산을 든 채 숨 죽여 주희의 집 대문을 응시하고 있었다.이러고 있으니 어제 준호의 집을 찾 아갔던 때가 생각났다. - 당장 나가,이 악마!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유리를 향해 달려들듯 광분하며 외치던 준호의 어머니. - 난 다 알고 있어! 네가 죽인거야! - 이 살인자!!! - 살인자! - 살인자! " ......... " 가슴이 아파왔다.유리는 무거워지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떨어뜨렸 다. 도저히 주희의 집 차임벨을 누를 자신이 없었다. 주희의 부모님을 볼 자 신이 없었다. 분명 어제의 반복이 될 게 뻔했다.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일 리 가 없었다. ' 그냥… 가버릴까. ' 주희의 부모님을 만나기 싫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그 분들은 더 이상 여기 에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며 반겨주던 그 분들은….이 제는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에게 품고 있던 좋은 추억들은, 그 들을 만남으로서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이다. 그렇다면…그렇다면 이대로 돌 아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굳이 그들을 만나서 좋은 추억을 깨뜨릴 필요는 없 잖아? 유리는 그들에게 상처를 입기도, 상처를 입히기도 싫었다. ' 난 도대체 뭐하러 여길 온 거지…. ' 그래. 주희네 부모님과 마주치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뜨자. 준호와 주희의 죽음에 대한 단서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여기에 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 아…. " 하지만 유리는 대문에서 몸을 돌려, 채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멈춰 서야만 했다. 유리의 앞에는 막 장 바구니를 들고 집을 향해 돌아 오던 주희의 어머 니가 있었던 것이다. 주희의 어머니도 자신의 집 앞을 서성이고 있는 유리를 발견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 쏴아아아아… 정적. 그 사이로 빗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유리는 조심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가지런히 꽂혀 있는 수 많은 책들과 잘 정리된 옷가지들. 생전의 주희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여실히 보여 줄 정도 로 방은 그녀를 닮아 있었다. 언제나 꼼꼼하며 자신이 할 말은 확실히 하는, 그러면서도 친구를 챙겨주는 배려. ' 그래. 주희는 어른스러웠어. ' 유리는 그녀를 떠올리며 작게 미소지었다. 만약 자신에게 언니가 있었더라 면 주희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주희는 유리가 준호와 함께 진심으로 좋아했 던 친구였었다. 그래. 진심으로 좋아했었어. " ......... " 주희의 책상 위에는 맞춤 유리가 얹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리 안에는 수 많은 사진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거기에는 유리와 준호, 주희의 추억이 펼 쳐져 있었다. 8년간의 추억이 담겨있는 사진들. - 헤에∼ 너,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준호와 주희를 처음 만난 것은 8년 전 한 놀이터에서 였다. 유리가 그들이 사는 동네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소녀는 언제나 처럼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혼자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그런 그녀에 게 두 아이가 찾아왔다. - 같이 놀 친구 없어? 자신에게 조심 스럽게 묻는 여자 아이. 그 아이의 질문에 유리는 주춤 하며 말했다. - 그,그런 거 아냐. 단지 이사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 그래서 친구가 없다고? - 아니라니까!! 웃으면서 말하는 남자 아이에게 빽 소리치며 유리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 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친구가 없다고 얕잡아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 때 그녀에게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 에이∼ 친구가 없는 거 같아서 같이 놀아줄려고 했는데∼ - 그러게. 뭐, 그럼 할 수 없지. 우리 끼리 놀자.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 가버리려는 그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불렀 다. - 자,잠깐만! 부르고 나서 생각하니 아차하는 심정이다. 그런 유리를 두 소년소녀가 씨익 웃으며 돌아보았고, 유리는 얼굴이 시뻘개져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어 들 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저기… 친구 없으면… 그, 내… 친구해 줄 거야? 유리의 말에 소년과 소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 그럼 당연하지! 같이 놀자! - 난 주희. 얘는 준호야. 넌 이름이 뭐니? 자신을 주희라고 밝힌 아이의 물음에 유리는 주저하며 이름을 밝혔다. - 이유리. - 그래, 유리야! 우리 이웃이 된 걸 환영해! 앞으로 좋은 친구로 지내자! 좋은 친구. 유리는 그 때를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래. 준호와 주 희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었다. 지난 8년 동안 그들과 함께 한 나날들은 유 리에게 있어서 더 없이 값진 보물이었다.주희의 책상에 있는 사진들에는 세 명이 함께 한 8년의 추억들이 있었다. ' 아, 이건 초등학교 1학년 소풍 갔을 때. 이건 준호 네 집과 주희 네 집 과 함께 가족 여행 갔을 때 사진이구나. ' 그 외에도 여러 사진들 속에서 세 아이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유리는 주 희와 팔짱을 끼며 사진에 브이 사인을 하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친했었는데…. ' 다시는…볼 수 없게 되버렸어. ' 준호도. 주희도. 이제는 먼 발치에서도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유리는 살 짝 아랫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자살로 몰고 간 범인의 형체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입가에 짓고 있는 그 비웃음 만이 뚜렷하게 각인된다. ' 용서 할 수 없어! ' 반드시 밝혀내겠어. 그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보상을 독톡히 받아내주겠어! 유리는 범인에 대한 단서를 밝혀내기 위해 책장부터 주희의 물품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살피기 시작했다. 방안의 모든 것에 일일히 손을 가져가며 사념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 없어. ' 아무 것도 없었다. 남아있는 사념이 없었다. 기껏 읽혀지는 사념들은 주희 와 그 가족들이 남긴 작은 사념의 조각들 뿐. 수미와 준호 때와는 달리 아무 것도 없었다. 유리는 실망하며 낮게 탄식했다.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을 지 모른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단서를 찾지 못하면 범인을 쫓는 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 반드시 범인을 잡아낼 거야! 반드시! 유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책장에 손을 가져갔다. 준호처럼 책 사이에 단서가 끼어있을 지도 모른다.그리고 주희 같 은 경우는 일기를 꾸준히 써왔으니까 뭔가가 기록되어 있을지도. " ……. " 하지만 없었다. 주희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써오던 일기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유리는 당황하며 책장 사이를 자세히 뒤져 보았지만 일기는 눈에 들 어오지 않았다. 단지 보이는 것은 컴퓨터 관련 책자들과 인터넷 관련 서적뿐 이었다. ' 어디로 간 거지? 주희 부모님이 다 치워버리신 걸까? ' 하지만 그럴 바에는 주희의 물품들도 다 함께 정리했어야 했다.일기만 치워 놨다는 건 뭔가 이상하다. 아,혹시…. ' 그래. 홈페이지! ' 그렇다. 분명 주희는 그때 홈페이지를 만들어 일기를 쓰겠다고 했었지.책장 에 있는 이 서적들도 그것과 관련된 게 분명해. 유리는 서둘러 책장 사이에 꽂힌 컴퓨터 관련 서적 중 인터넷 서적과 홈페이지 서적들을 뒤적였다. ' 아, 이건가? ' 홈페이지 메이커 라고 하는 두꺼운 서적의 앞 표지에 볼펜으로 인터넷 주소 가 하나 쓰여 있었다. www.moon.lil.to 유리는 그 주소를 휴대폰의 메세지 란에 저장시켰다.부디 이 주소가 맞아야 할텐데…. 주희의 컴퓨터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컴퓨터는 이미 경찰들 이 하드를 빼간 뒤였다. 경찰이 조사에 착수한지 벌써 2주가 넘었으니까 주 희의 홈페이지는 이미 조사가 끝났는지도 모른다. ' 지금껏 아무 소식이 없다는 건 홈페이지에도 별 다른 정보가 없다는 말 이 되는데. ' 경찰들이라면 금새 홈페이지의 락(Lock)도 풀어냈을 게 분명하다.유리는 작 게 한숨을 내쉬며 뽑아든 서적을 다시 책장에 밀어 넣었다.아무래도 홈 페이 지는 그다지 기대를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것 만이 유일한 단서였는 데……. " 방은 다 둘러봤니? " 그때 유리의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주희의 엄마였다.유 리는 긴장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 아,예. 다 둘러봤어요. " " 그럼 차라도 한 잔 마시자꾸나. 거실로 오렴. " 살짝 웃으며 유리를 거실로 이끄는 여인. 유리는 그런 주희 엄마의 모습에 가슴을 졸이며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솔직히 유리는 그녀가 자신을 보면 노발대발하며 집에서 쫓아낼 줄 알았다. 하지만 뜻 밖에도 그녀는 예전에 유 리를 대하던 것 처럼 자상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유리는 금세라도 그녀의 분노가 터지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 후후, 이렇게 있으니까 옛날로 돌아간 거 같구나. 유리가 오면 언제나 이 렇게 차를 타줬었지. 우리 주희야 차를 좋아했지만 유리는 쓰다고 질색했 는데 말이야. " " 예에. " 차를 내려놓으며 유리를 마주보는 주희 엄마.유리는 차마 그녀의 시선을 마 주하지 못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목으로 마른 침을 간신히 삼켰다.주희 엄마 는 살짝 미소지었다. " 그래도 고맙구나. 이렇게 잊지 않고 우리 주희를 찾아줘서. " " 아,아뇨. 그건! " 그건 당연히…! 유리는 소리치려다가 다시 뒷 말을 흐렸다. 주희 엄마는 그 런 유리의 반응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고마워. 정말. 아마 주희가 살아있었더라면 굉장히 기뻐했을거야.우리 주 희는 다시 유리를 만나는 게 소원이었거든. " " ……. " 유리는 천천히 주희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그녀는 딸의 얘기를 하면 서도 웃고 있었다. 그것이 우는 것 보다도 더 슬프게만 느껴졌다. 아마 이렇 게 주희의 죽음에 의연해지기 까지 많은 가슴앓이를 했을 것이다. 그녀는 잠 시 유리의 안색을 살피다가 물었다. " 유리야, 혹시……우리 주희 미워했었니? " " 예? " " 아니, 우리 주희가 유리 전학 갈 때까지 많이 섭섭하게 대했잖아. 예전에 는 하루라도 얼굴을 맞대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차갑게 돌변해서…. " " ……. "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울적해진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을 배척하더라도 준호와 주희만은,그 친구들 만은 자신 을 감싸줄 거라 생각했다.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함께 해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혼자 만의 착각이었다. - 준호야! 주희야! - ……. 어느 순간부터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싸늘하게 대하던 그들. 유리 는 망연자실하게 그들을 부르던 손을 떨어뜨려야만 했다. 자신의 말에 답변 도 하지 않으며 냉정하게 돌아서는 둘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울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틀어박혀 오열했다. 목으로부 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오르고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가 슴이 찢어질 것 처럼 아팠다. 아마 그렇게 서럽게 울어보기는 그 때가 처음 이었을 것이다.그리고 더욱 슬펐던 것은 그것이 꿈이 아니라 다음 날에도 계 속 되는 악몽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때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 부디 주희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렴. " 주희 엄마는 유리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유리는 테이블 밑의 주먹을 꼬 옥 움켜쥐었다. " 모든 건 다 내 잘못이니까……. 이 아줌마가 주희를 그렇게 다그쳤던 것 뿐이니까. 그러니 미워할려면 차라리 이 아줌마를 미워해줘. " " …아줌마. " 주희 엄마는 쇼파에 몸을 맡기며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 아직도 기억이 나는구나. 네가 전학 갔을 때……. 우리 주희는 펑펑 울 었단다. 그 어린 것이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뭘까. 내가 돌이 킬 수 없는 잘못을 한 건 아닐까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들어서…….고개를 들 수 없었어. " 그녀는 두 눈을 붉게 충혈시키며 지나간 일들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렇 게 주희에 대해서 얘기하면서도 끝내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마 더 이상 흘릴 눈물 조차 없는 것이 아닐까. " 그러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좋아하는 친구로부터 떼어놓는 게 아니었는 데……. 나는 도대체 뭘 그리 두려워했던 걸까? 정말 유리한테도 주희 한 테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어, 이 아줌마는…. " " 아,아니에요. 그런. " 유리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 사람의 마음 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무섭게 보일 수 밖에 없다. 비밀이 없어진다 는 것.다른 이에게 자신의 모든 치부를 보여준다는 건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유리는 슬프지만 그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내가 주희 엄마라 도 딸 아이를 나 같은 아이와 놀지 못하게 했겠지. 더구나 그렇게 소중했던 딸이 자살을 해버렸다.그리고 때마침 문제가 되던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우연으로 여기지 않고 연 관지어 생각하는 것이다. 저 아이가 원인이야. 저 아이 때문에 우리 아이가 자살을 한 거야. 그렇게 소리치며 모든 분노를 나에게 퍼붓는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러 했다. ' 하지만 어째서 아주머니는…. ' 주희의 엄마는……날 탓하지 않는 걸까? 왜 다른 사람들 처럼 그러지 않는 거지? 유리는 주저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 ……아주머니는, 절… 원망하지 않으세요? " " 응? " 유리의 질문에 그녀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 제가 주희의 자살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지금까지 만난 사 람들은 모두 저를 의심했어요. 학교 선생님도, 반 친구들도……그리고 준 호 네 엄마도…. " 모두가 나를 원망했다. 하지만 유리 자신도 그들의 말을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녀 역시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자신을 싫어하고 원망했으니까. 마음 어 디에선가는 원망을 받는 것도,미움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제가 밉지……않으세요? " 유리는 주희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테이블 밑으로 깍지 끼고 있는 손에 힘이 더더욱 들어간다. 나…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아주머니 가 화내지 않아서 오히려 불안한 거야? 아니면 지금 아주머니가 보여주는 모 습이 진실된 건지 알고 싶어서? 그런 걸 알아서 뭘 하려고? 알아봤자 실망 만 하게 될 게 뻔한데. 되려 미움만 받을 뿐인데. " 응. 미웠어. " 그러나 그녀는 솔직했다. 유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솔직히 원망도 했었어. 유리가 한 짓은 아닐까? 유리 때문에 주희가 자 살한 거야. 유리가 주희를 죽인 거야 하고 말도 안되는 생각을 했었지. " " 그,그런데 왜…. "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주희 엄마는 그런 유리의 머 리를 그 따뜻한 손으로 다시 쓰다듬어 주었다. " 하지만 유리는 주희의 친구잖니. 우리 주희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 가장 좋아하는 친구……. " 그런 딸의 친구를 어떻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니? 그랬다가는 분명 하늘 에 있을 주희도 슬퍼할 거야. " " 아…. " 유리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희 엄마는 그런 유리를 바라 보며 생전의 딸아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진한 그리움과 아련 한 추억이 엿보이고 있었다. " 세상의 어머니들은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해줄 수 있는 법이 야. 그건 유리의 아빠 엄마도 마찬가지겠지. " " 우리…아빠도, 엄마도…? "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주희 엄마의 얼굴에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 는 엄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래. 왜냐하면 자기 자식만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부모에게 없으니까. " 그리고 결국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 이런 거……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만 더 일찍. " - 세상의 어머니들은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해줄 수 있는 법이야. 유리는 26구역의 집으로 돌아와 내내 주희의 엄마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 다. 그 말 속에서 주희를 생각하는 아주머니의 사랑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 다. 저렇듯 죽어서도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주희가 부러웠다.자신에게 있어서 부모의 사랑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그건 유리의 아빠 엄마도 마찬가지겠지. 우리 아빠와 엄마도? 유리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기 억나지 않았다. 그 분들이 어떤 식으로 웃었는지도, 어떤 식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는지도. ' 아직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 8개월 정도 집을 나와 부모님과 따로 생활을 해왔을 뿐인데 그 얼굴조차 기 억이 나지를 않다니…. 자신이 부모님에게 무심하기도 했지만, 오라 능력을 깨달은 후 그만큼 가족과의 교류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 이 미치자 기분이 씁쓸해진다. " 우우웅∼ 유리 언니! " " 응? " 유리는 자신을 흔드는 작은 손길에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정신을 차렸다. 돌 아보니 진우의 딸 하나가 입을 부루퉁 하게 내밀며 서있었다. 어라. 언제 우 리 집으로 온 거지? 유리는 당황하며 물었다. " 어, 너……. 어쩐 일이야? " " 언니 미워! 하나가 다섯 번이나 불렀는데 보지도 않고! 히잉. " 하나는 울쌍을 지으며 소리쳤고, 유리는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생 각하는 거지만 이 아이를 상대하는 일은 피곤하다. 뭐,보나마나 오빠를 만나 러 온 거겠지. 유리는 뚱한 표정으로 하나에게 말했다. " 흥. 미안하지만 오빠는 지금 집에 없어. 안 되셨네. " 유리가 집으로 돌아오자 가인과 시민은 집에 없었다.가인이야,아까 낮에 테 레이아와 무슨 책을 사러간다고 하는 것 같았고 시민은 피아노 학원에 갔으 니 9시가 넘어야 돌아올 터였다. 아무도 없는 집을 유리 혼자 지키고 있으니 기분도 착잡할 수 밖에. 하나는 가인이 없다는 말에 더더욱 울쌍을 지었다. " 에에, 오빠 없어? 정말? " " 그래. 없어. 없다고.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마. " " 히잉∼ " 가인만 찾는 하나의 모습에 유리는 쌍심지를 돋구며 콧방귀를 뀌었다. 꼴좋 다, 꼬맹아. 그러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버려! 얼른! 하지만 하나는 유리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 그러엄∼ 언니가 나하고 놀아줘! " " 내,내가? " " 하나 심심하단 말이야아∼ " 유리는 자신에게 엉겨붙는 하나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져 눈꼬리를 파르 르 떨었다. 이게 툭하면 심심하다고 놀아달래! " 야! 떨어지지 못해! 난 바빠서 너하고 놀아줄 시간 없어! " 그리고 무엇보다 난 네가 싫다고! 유리는 달라붙는 하나에게서 빠져 나오려 애썼지만, 하나는 그야말로 진뜨기였다. " 싫어∼ 하나하고 놀아줄 때까지 안 떨어질 거야! " " 이게 진짜! ……앗! " 쿵! 쇼파에서 버둥거리다가 유리는 하나를 끌어안은채 그만 바닥으로 쓰러져 버 렸다. 워낙에 유리가 몸이 작다보니, 여섯 살인 하나가 매달려 와도 그 무게 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간 것이다. 유리는 머리가 헝클어진채 하나와 뒤엉켜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하나는 깔깔 거리며 유리의 위에 업드린채 웃음을 터 뜨렸다. " 에헤헤헤! 재밌어! 구르기! " " ……재미 있다고. 이게? " 유리는 자신의 위에서 가증스럽게 웃는 하나를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하나는 그런 유리의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하며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 응! 재밌어! 또 하자! " " 또 하기는 뭘 또 해!! " 딱! 유리는 버럭 소리지르며 사정없이 하나의 머리를 쥐어박았다.하나는 유리에 게 얻어맞자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울음을 터뜨렸다. " 으아아아아앙!! 때렸어! 하나 때렸어! 으아아아앙! " " 으이그! 시끄러워. " 유리는 귀를 막으며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난 애가 싫어! 싫다고! 뭐? 나 도 애가 아니냐고? 내 말은 정신 연령이 어린 녀석들이 싫단 소리야! 유리는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워 소리치며 우는 하나의 모습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 다. 그래. 울어라. 맘껏 울어. 누가 신경 써줄 줄 알아. 저렇게 울다 지치면 그치겠지. 흥! " ……. " 하지만 유리는 울고 있는 하나를 무시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달래줘야만 했 다. 유리는 속으로 이를 갈며 애써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을 띄웠다. " 저기…… 내가 놀아줄게. 그러니까 뚝 그쳐. 뚝. " " 으엥! 흑! 으아아아앙! " " 놀아 준다니까. " " 으아아아아앙! " " 야! 울지 마. 그치라고! " " …흑. 흑. 또 소리치잖아. "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유리는 그런 하나를 토닥이며 말했다. " 미,미안. 미안해. 이제 소리치지 않을 테니까. 눈물 그쳐. 뚝! " " 흑……. 그럼, 나랑 놀아줄 거야? 흑. " " 그래. 구르기 하쟀지? 구르기? " 유리는 거실 바닥에 구르며 속으로 신세 한탄을 했다. 아, 정말. 이게 무슨 꼴이람. 그때, 대문이 열리며 하나의 엄마, 미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 유리야, 집에 있니? 나 왔어∼ " " 엄마! " 순간,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미연에게 달려가 안기는 하나. 그 모습을 유리 는 바닥에서 구르는 자세로 멍청히 바라보았다. 미연은 자신의 품에 안기는 하나를 끌어안으며 유리에게 물었다. " 유리야?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 " ……. " 여,역시 난 저 꼬맹이가 싫어! 유리는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 해진채 슬그머 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연은 하나를 안아들고 유리에게 다가왔다. " 가인이한테서 전화왔어. 오늘 시민 씨도 늦게 오고, 자기도 밖에서 저녁 먹고 온다고, 유리 저녁 좀 챙겨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 언니가 힘 좀 써서 장 봐 왔지! " " 아……. " 그럼 혼자 저녁 먹어야 되는 거구나. 유리는 침울히 중얼거렸다.대체로 시 민은 학원 때문에 늦고, 가인은 훈련 땜에 늦었다.그다지 평소와 다를 바 없 는 일상인 것이다.하지만 오늘 따라 혼자 밥을 먹어야 된다는 사실이 왜 이 렇게 쓸쓸한 걸까…. " 엄마아. 유리 언니가 나 때렸어어. " 미연에게 안겨 칭얼대는 하나. 유리는 이마에 실핏줄을 띄웠다. 아, 치사해! 고자질 하는 거냐, 꼬맹이! 미연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런 하나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 그거야 하나가 언니를 못 살게 구니까 그러는 거지. 자, 어디보자. 어머 나∼ 큰 혹이 났네? 아프지 않게 호 해줄게. 호∼ " " 호∼ " 미연은 하나의 이마에 입김을 불어줬고, 하나는 엄마의 행동을 따라하며 웃 었다. 유리는 그런 모녀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미연과 하나의 얼굴은 너무 나 행복해 보였다. 유리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 이제 안 아프지? " " 응! 안 아퍼! 에헤헤, 엄마 좋아! " 하나는 미연의 목을 끌어안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는 반대로 유리의 안 색은 어두워져 갔다. 그래. 엄마의 사랑을 받는 아이는 저런 표정을 짓는 거 구나. ' 나도, 나도 저런 시절은 있었어.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며,웃을 수 있던 …그런 시절이. ' 하지만……지금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유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 다. 이미 그녀에게는 없는, 상실해 버린 것들. 그것이 너무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주희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 자기 자식만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부모에게 없으니까. 내 아빠도. 내 엄마도. - 자기 자식만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부모에게 없으니까 날……지금도 사랑해줄 수 있을까? - 그건 유리의 아빠 엄마도 마찬가지겠지. 탕! 유리는 재빨리 대문을 뛰쳐나갔다. 그 바람에 거칠게 열리던 대문이 다시 닫히며 큰 쇳소리를 냈다. 미연은 그런 유리의 행동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유리야? 어디 가니! " 비가 그친 밤 길을 달렸다. 물 웅덩이 위를 뛰어가다가 옷이 흠뻑 젖어버렸 지만 신경쓰지 않았다.유리는 예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 아빠와 엄마가 살고 있는 집. 자신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 가족. 가인과 시민이 떠올랐다. 분명 그들은 유리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 만 진짜 가족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곳 역시 그녀가 원래 있어 야 할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라온 곳.부모님과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 유리는 지금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아빠. 엄마. ' 그들이 보고 싶었다. 아무리 자신을 내쳤더라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유리는 그들이 보고 싶었다.딱 한 번만이라도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잊 어버린 그들의 얼굴을 다시 기억하고 싶었다. - 자기 자식만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부모에게 없으니까 주희의 엄마가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래. 유리는 아랫 입술을 깨물며 약해질려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주희의 엄마가 했던 말을 믿고 싶었다. 아 무리 마음을 읽는 기분 나쁜 딸이더라도 아빠와 엄마 만은 다시 자신을 받아 들일 수 있을 거라고. " 하아. 하아. " 유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도달한 곳을 바라 보았다. 낯익은 문패 와 낯익은 대문, 낯익은 양옥집. 유리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진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집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 아빠…. 엄마…. " 유리는 대문에 손을 가져가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이 문 너머에 그들이 있 었다. 아빠와 엄마.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 이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반겨줄 것만 같았다.안 좋 은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부모님과 보냈던 좋은 나날들만이 생생히 기억 났다. 아빠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 끼익. 그때, 대문 안쪽의 정원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유리는 대문에 가져가 던 손을 멈추며 재빨리 문 근처의 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자신이 왜 몸을 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치 본능처럼 한 행동이었다. 유리는 숨 죽 이며 대문을 응시했다. 곧이어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 끼이익. " 여보, 우산 가지고 가는 거에요? " " 뭐, 비도 안 오는데 괜찮겠지. " 낯익은 목소리. 그리운 음성. 유리는 떨리는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대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은 바로 자신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화목하 게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 안돼요. 우산 가지고 나와요. 모처럼의 외출인데 비에 젖을 일 있어요? " " 나,참. 알았어. 알았다고. " 아빠는 엄마의 말에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그런 아빠 의 모습을 유리는 멍하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저 따뜻하면서도 자상한 모 습. 분명 유리가 어렸을 적에 볼 수 있었던 아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녀가 오라 능력을 깨달은 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 후후,그나저나 이렇게 영화 보러 가니까 옛날 기억 나지 않아요? 우리 결 혼하고 나서 처음이죠? 이렇듯 둘이서 데이트하는 건? " " 아아. " 엄마는 아빠의 팔짱을 끼며 다정히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역시 멍하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언제나 자신을 두려운 눈 으로 바라만 보셨던 분인데. 저렇게 웃어주기를 간절히 바랬었는데……. ' 아빠와 엄마는……이제 화해하신 걸까? ' 두 사람의 모습에서는 예전의 차가운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마 유리 가 떠난 후 어떻게든 화해를 한 모양이었다. 유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자 신의 오라 능력 때문에 부모님은 이혼을 하실 뻔하지 않았던가? 그런 부부관 계가 다시 원만해지다니……. 웬지 죄가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 하아. ' 유리는 작게 미소지었다. 다정한 부모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마 치 예전의 가족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유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골 목 밖으로 걸어나왔다. ' 이제……돌아갈 수 있는 거야? ' 예전의 화목했던 가족으로. 내가 오라 능력을 깨닫기 전의 가족으로? 유리 는 다정하게 변한 부모님의 모습에 자신이 돌아갈 자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자신을 받아 줄 것만 같았다. 잘 돌아왔다고.두 번 다시 헤어지지 말 자고 해줄 것 같았다. ' 다시는 마음을 읽거나 소동을 피우지 않을 게요.저 착한 딸이 될게요. 두 번 다시 부모님 속 상하지 않게 할게요. 아빠! 엄마! 그러니까 제발! ' 유리는 그들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가 두런 두런하게 들려왔다. " 그나저나 이름은 뭘로 할 거에요? " ……이름? " 글쎄. 아직 아들인지도 딸인지도 모르잖아. " 아들? 딸? " 전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딸이라면 왠지……자신이 없내요. " 엄마? " 음. 그게 어디 우리 맘대로 되는 일인가. 하지만 나도 아들이면 좋겠어. " ……아빠? " 어쨌든,우리가 볼 멜로 영화가 뱃 속의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 면 하네요. " " 뭐, 수태(受胎)에는 좋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 그렇게 말을 주고 받으며 골목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부부.하지만 유리는 멍하니 그 뒤를 바라보아야만 했다.그들에게 뻗던 손을 내릴 생각도 하지 못 하며 서있었다. 지금……무슨 소리였지? 수태? 수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 임신? ' 털썩. 유리는 그만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밀려들기 시 작했다. ' 엄마가 임신하신 건가? 그런 거야? 나 외에도 아빠와 엄마에게 다른 아이 가 생기는 거야? 그래서 두 분, 그렇게 웃고 계셨던 건가? ' 유리는 퀭한 두 눈으로 다시 부모님의 자취를 쫓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유리는 지독한 투통에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 다.부모님에게 아이가 생겼다. 유리에게는 동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하 지만 이건……. ' 더 이상…… 내 자리는 없는 걸까. ' 두 분의 행복한 웃음. 그 행복 속에 나는 없는 건가? 내 자리는 없는 거야? ' 그럼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 목이 메여 왔다. 유리는 자신의 눈 가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지만, 눈물은 쉼 없이 흘러내렸다.유리는 멍 하니 집을 돌아 보았다. 굳게 닫힌 대문. 이제 저 집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자리는 없어진 것이다.부모님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완전히……버림 받았다. ' 이건 아니야. ' 유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돌아 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자기 자식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부모에게 없는 거 라고? 그럼 나는 뭐지? 부모님에게 다른 자식이 생겼으니 이제 나는 사랑 받 을 수도 없다는 소린가? 부모님에게 나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소린가? 그 런 거야? ' 이건 아니야. ' 제발 가르쳐줘.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나는 어디로 가는 거야? 이럴 바에는 왜 태어났을까. 왜 이런 오라 능력을 가지고! " 유리야. " 흐느끼는 유리를 부르는 한 목소리가 있었다.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한 소년 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루 블랙 머리카락의 소년. 마유빈이었다. " 울고 있는 거야? " 소년은 무릎을 꿇으며 유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유리는 눈에 눈물 이 그렁하게 맺힌채 그에게 물었다. " 모르겠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빠도. 엄마도.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난 뭘 해야 하는 거 야? " 이 마음을 읽는 능력만 없었더라면……. 이 오라 능력만 없었더라면. " 가르쳐줘. 제발……. 내가 있어야 할 곳을 가르쳐 줘……. " 유빈은 그런 유리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유 리는 힘없이 그 손길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유빈은 유리의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매만져 주며 말했다. " 날 따라와.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있어. " 유빈이 안내한 곳은 어느 아파트 단지의 옥상이었다. 그곳은 도시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였다. 유리는 멍하니 유빈에게 이끌려 옥상 난간에 다 가갔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 등골이 서늘했다. " 왜 여기에? " 유리는 빨갛게 부은 눈으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힘 없이 유빈에게 물 었다. 왜 자신을 이런 곳으로 데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유빈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 봐봐.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아. 굉장하지 않아? " " ……. " 뭐냐,그건. 유리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유빈을 뚱하니 쳐다보았다. " 그러니까 별이 어쨌다고? 그런 거….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거 잖 아? " 역시 어린애로군. 겨우 저런 걸 가지고 호들갑이나 떨고.흥! 유리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과연 유빈의 말대로 하늘에는 수 많은 별 들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있다고 해놓고는 기껏 데 리고 온 게 이런 곳이라니 맥이 빠진다. 유빈은 유리가 보고 있는 하늘을 같 이 올려다 보며 말했다. "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들이 생각날 때면 언제나 찾아온 장소야. " " ……! " 유리는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 보았다. 유빈은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지우 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 이상하게도 이곳에 오면 기분이 가라앉고 슬픔도 사라졌었거든.하늘의 별 들을 바라보고,밑에 보이는 도시의 네온 사인들을 바라보면 내 자신이 한 없이 작게만 느껴져. 그러면 내가 슬퍼하는 것도 왠지 아무 것도 아닌 거 처럼 느껴지는 거야. 이 넓은 세상과 세계 속에서 나의 슬픔 같은 건 저 수 많은 작은 불빛들 중의 하나일테니. " " ……. " 유리는 그런 유빈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하늘의 별빛과 도시의 네온 사인들 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수백, 수천개의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이 한 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만약 자신이 저런 흔한 불빛들 중의 하나 라면 이 슬픔이란 것도 별 게 아니리라. 그러자 왠지 울적함이 가셔가는 것 같기도 하다. " 어때? 기분은 좀 괜찮아져? " " ……으응. " 유빈의 말에 유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은 그런 유리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유리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그의 웃 는 얼굴과 목소리를 대할 때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가인 이 외에도 이렇게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 유리는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 부모님……돌아가셨구나. " " 응. 그래도 뭐, 내가 아무 것도 모를 갓난 아이 때 돌아가셔서 기억도 나 지 않아. 부모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도 어떤 분이셨는지도 모르겠어. 사 진도 한 장 남아있지 않거든? " " 으응. " 유빈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얘기하듯 가볍게 얘기하고 있었다.그 모습에 유 리는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도, 보기보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가지 고 살았구나. " 하지만 아무리 얼굴을 모르더라도 부모님은 부모님이야.다른 아이들이 아 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것을 보면 괜시리 부럽기도 하고,질투가 나 기도 했어. 그리고 그런 기분을 깨달았을 때는 이유없이 슬퍼졌지. " 유빈은 아파트 옥상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장소.평소라면 차갑 고 삭막한 장소로 보였겠지만, 지금의 유리에게는 이보다 더 포근한 장소는 없는 것 처럼 느껴졌다. "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들때마다 이곳에 와서 내 자신을 달랬었어.이렇게 하 늘과 닿아있고, 별들이 잘 보이는 이곳에. 도시의 불빛들이 잘 보이는 이 곳에. 여기에 오면 왠지 부모님이 곁에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가라 앉았어. " " ……그렇구나. "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빈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자신을 이 곳에 데리고 와 기분을 풀어주려는 그 정성이 고마웠다. 유빈은 장난스럽 게 말했다. " 무엇보다 돈도 들지 않고 말이야. " " 뭐야, 그건? 바보 같아. " 유리는 실소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유빈과 시선이 마주치자 웃음 을 참을 수 없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유빈과 웃었다. 마음껏 웃었다. 이렇게 웃어보는 게 몇 년 만일까.오라 능력을 깨달은 후 이렇듯 웃어본 적이 또 있 을까. " 어쨌든, 다음부터 기분이 울적하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여기로 와. 고민 거리 같은 건 들어줄 수 있으니까. " 유빈은 조용히 말하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기 또래의 남자아 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도 유리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마치 유빈 이 가인 같았다. 오빠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 항상 유리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게. " 그 음성이 너무나 부드러웠기에 유리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바,바보. 내가 언제 올지 어떻게 알고 기다리겠다는 거야? 너도 학교 가 고,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을 거 아냐. " " 아, 그렇내. 하하. 뭐, 우연히 여기서 만나게 된다면 말이지. 내 말은. " 유리는 능청스럽게 웃는 유빈에게 눈을 흘기며 작게 미소지었다.그에게서는 너무나 기분 좋은 사념이 느껴지고 있었다. 일체의 숨김도 없는 마음. 유빈 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이 진실이라는 것에 유리는 가슴이 벅차올랐다.자신을 배려해주는 그의 모습이 거짓이 아니라는 게 너무나 기뻤다. 이런 아이를 두번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그나저나 조사는 잘 되어가고 있어? " 갑작스런 유빈의 질문에 유리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살며 시 저으며 말했다. " ……아니. 주희의 집에서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었어.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겨우 이런 것 밖에는…. " 유리는 핸드폰에 저장시켜 놓았던 주희의 홈페이지 주소를 보여 주었다. 유 빈은 그것을 받아 보며 말했다. " 흐음. 적어도 단서가 완전히 끊긴 건 아니잖아. 잘 됐네? " " 하지만 이미 홈페이지는 경찰의 조사가 끝났을 거야. 경찰도 발견하지 못 한 걸 우리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어? " " 조사해봐. " 유빈은 유리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 리로 말을 이었다. " 지금 걸 수 있는 건 여기 밖에 없잖아? 경찰이 놓치고 지나갔을 수도 있 고. 직접 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야. 무엇보다 주희의 자살 사유를 조사하 던 경찰들의 사건 보고서에서 홈페이지의 언급은 일절 없었어. " " ……! " 유리는 두 눈을 부릅 떴다. 어떻게 네가 그런 걸 알고 있는 거지? 경찰의 사건 보고서 같은 걸 우리 같은 사람이 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유빈은 그 런 유리의 생각을 훤히 알고 있다는듯 말했다. " 너무 그렇게 놀라지는 마. 내 아는 분 중에 이 사건을 맡은 담당 형사 분 이 계시거든. 그 분에게서 들은 것 뿐이야. " " 아. " 그런 거야? 유리는 내심 맥이 빠져 작게 중얼거렸다.그런 소녀의 모습에 유 빈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 난 유리 네가 반드시 범인을 찾았으면 해. 왠지는 모르겠지만, 범인을 찾 으면 너의 고민도, 걱정도 모두 해결 될 거라고 믿어. " 유빈은 유리에게 다가와 살며시 그 손을 쥐어 주었다.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지만, 그에게서 손을 뺄 생각을 하지 못했다.블루 블랙의 머리카락 사 이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 깊고 고요했다.그 속에 빠져버릴 것만 같 다! " 왜, 왜 날 이렇게 도와주는 거야? "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에 유빈은 너무나도 시원하게 답했 다. " 닮았으니까. " " 닮았……다고? " 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유리의 볼을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왠지 그 미소가 안타까워 보이는 것은 그녀 만의 생각이었을까. " 그래. 유리야, 우리는 서로 닮았어. " " ……. " 유리는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끼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필 사적으로 가인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가인의 얼굴이 기억 나지 않았다. -후우우우우우 지상에서 340m나 떨어져 있는 높이.신 서울 타워의 최상 층에 한 검은 양복 의 남자가 걸터 앉아 있었다. 어두운 암흑이 가린 하늘. 피스 블랙 한시영은 그런 밤하늘을 짙은 흑요석 같은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그에게 있어서 어둠이란 안식. 밤은 자신 만의 세계.그는 이 광활한 암흑에 동화되는 것 처럼 어둠 속에 녹아 들 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지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휘황찬란 한 네온 사인들의 도시가 있었다.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도시의 불빛은 마치 어둠에 먹히기 싫어하는 인간들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몸부림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영은 웃었다. " 후후후, 인간이란 똑같은 과오를 범하는 존재들이로군. 저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게 하늘의 불과 유황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걸까요? " " ……소돔(sodom)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시영의 말을 받은 것은 그의 뒤에 있던 검은 신부복의 남자였다. 2m는 넘을 듯한 훤칠한 키에 푸른빛이 서린 은발 머리, 시영의 두배는 됨직한 덩치. 시 영은 신부의 등장에 시니컬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 The LORD rained upon Sodom and upon Gomorrah brimstone and fire from the LORD out of heaven! "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 And he overthrew those cities, and all the plain, and all the inhabi tants of the cities, and that which grew upon the ground!"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 더라! 그렇게 소리친 그는 신부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 더 없이 어울리지 않나요, 신부님? 과연 신은 저 타락의 세계에 철퇴를 내려주실까요? 신의 자비는 언제까지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이번에 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신부님! 답을 알고 계시다면 부디 저에게 가르 쳐 주시지요! " " ……그만두십시오. " 신부는 시영의 장난끼 서린 말투에 가볍게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저어 보였 다. 시영은 그 반응에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 모처럼 신부 복을 입으셨기에 신의 가르침이란 걸 듣고 싶었건만. " " 그런 이유로 입은 신부복이 아닙니다. " 무뚝뚝하게 답하는 신부의 모습에 시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상당한 차이가 있군, 지금의 저 모습은. 어느 쪽이 원래의 성격인 걸까? "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 신부의 질문에 시영은 생각하는 것을 멈추며 반문했다. " 무슨 소식? " " 그 자살한 아이들 말입니다. " 그제서야 질문의 요지를 이해한 시영은 미소했다. " 아아. 그런 일이 있었더랬죠. 하지만 그것이 왜? " " 그대로 내버려두실 생각이십니까? 녀석은 너무 제멋대로 입니다. " 신부는 '그'를 떠올리자 기분이 불쾌해졌는지 인상을 찌푸렸다.시영은 고소 를 머금어야만 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닐텐데…. 그렇게 생각 했지만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시영은 타이르듯 말했다. " 자자, 어차피 어리지 않습니까. 귀엽게 봐주자고요. " " 그렇게 방관만 하실게 아닙니다! 언제까지 녀석의 어리광을 받아 주실 생 각입니까! " 신부는 시영의 태도에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그것을 제지하며 시영이 낮게 말했다. " 이건 선전 포고입니다. 자신들이 가이아에 선택되었다고 착각하는 이들을 향한. " " ……! " " 그런 의미에서 그는 꽤 잘 해주고 있습니다. 더더욱 날뛰어 주지 않으면 곤란하죠. " 시영은 다시 뒤를 돌아 소돔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시니컬한 미소가 맺혀간다. "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 다음 날. 유리는 학교를 마치자 마자 피스메이커의 광속 전차를 타고 언더 시티 유레카로 향했다. 그녀는 창 밖으로 보이는 유레카의 인공 바다와 하늘 을 바라보고 있었다. - 끼룩. 끼룩. 갈매기가 광속 전차의 곁을 지나치며 날아갔다. 유리는 그것을 눈으로 쫓다 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는 빈 자리를 돌아보았다.그 곳은 원래 가인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였다. ' 어차피 언더 시티에 갈거면 오빠와 같이 가는 게 좋았을 텐데. ' 가인이야 항상 수련 때문에 언더 시티의 연무장을 들리니 이왕 올 거 그와 같이 오는 게 좋을 뻔했다. 하지만 유리는 그러지 않았다.그의 얼굴을 볼 자 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빈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이 있는 한, 그를 볼 자 신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내내 그를 피해다녔다. 평상시에는 어떻게든 가인과 더 얘기를 나눠볼려고 했던 자신이었는데……. 유리는 자신의 행동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런 모순된 행동들. 그렇게나 오빠를 좋아했으면서. 그렇게 나 그와 함께 있기를 바랐으면서. 자신은 그런 그를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 '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 지금도 가인을 생각하면 아플 정도로 가슴이 시리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 부터 시작해서 함께한 나날들이 하나도 빠짐 없이 기억난다. - 안녕, 유리야? 웃으며 인사를 건넸던 그.하지만 자신은 처음에 그를 무시했었다.가인도 다 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식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인은 누구보다도 유리를 이해해주고 그녀를 위해주었다. -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오라 능력을 가진 자신을 탓하는 유리에게 그는 말했다.그녀의 잘못이 아니 라고. 오히려…. - 유리야, 네가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날 구해 줘서. 그는 고맙다고 까지 해주었다.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주 었다. 그 전까지 어느 누구도 유리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었다. 모두가 그녀의 마인드 디텍트 능력을 무서워하며 피했을 뿐이다. 그러나 가인은 알 아주었다. 유리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감싸안아주었다.그만이 오직 그렇게 해 주었다. 가인은 언제나 자신을 위해 주었고 심지어는 그녀를 감싸다 다치기 까지 했었다. 유리는 그런 그를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 마유빈. ' 그를 좋아하는 내 마음은 또 뭐지? 그에게 끌리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 야하는 걸까? 그는 너무나 진실되기 자신을 대해주었다. 하나의 숨김도 없이 모든 것을 공개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그것은 가인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 만약 좋아한다면? 유리는 유빈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신 이 싫었다. 이런 상태로는 가인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 좋아하는 마음이 변하면……그건 진실되게 그 사람을 좋아한게 아니잖아.' 유리는 자기 자신에게 되물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가인을 좋아했던 것인지. 진정으로 그를 사랑했던 것인지. 모든 건 유리 혼자 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그의 친절함에 두근 거렸던 것을 사랑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 자 가인과 만나온 모든 시간이 거짓인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팠다. ' 이대로 유빈을 좋아하게되면……그를 좋아한다고 오빠에게 말하면……. '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화를 내거나 질투를 한다는 반응은 상상도 할 수 업었다. 아마 그는 웃으면서 축하해줄 것이다. '유리도 드디어 남자 친구가 생겼구나'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그는 자신을 여동생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 그렇다면 된 거 아니야? 이대로 유빈을 좋아해도……. 오빠에 대한 내 마 음을 정리한다해도. ' 어느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축하해줄 것이다. 그렇지 만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걸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데. 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유리는 심호흡을 했다. - 좋아하는 마음이 변하면 그건 진실되게 그 사람을 좋아한 게 아니잖아. 그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유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인과 보 냈던 8개월의 나날들이 주마등 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간다.이렇게나 그를 좋 아하는데……. 오빠를 좋아하는데……. - 사람을 좋아하는 데 시간 같은 건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나는 이래보여도 꽤나 진지하단 말이야. 어린 아이라고 그 감정까지는 무시하 지 말아줘. 유빈이 했던 말. 그건 유리가 가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유리 는 눈시울을 붉히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정해주길 바랬다.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누군가가 가르쳐주길 바랬다. 이 혼란스러움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 그만해. 이유리. 이럴 때가 아니잖아. 이런 걸로 고민할 때가. ' 준호와 주희를 자살로 몰아넣은 범인을 잡는 것.그것이 네가 해야할 일이잖 아.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지금은 조사에만 집중해. ……부탁이야. " ……. " 유리는 품에서 사진을 꺼내들었다.준호의 집에서 가져왔던 자신의 사진이었 다.준호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보관해 온 것일까? 이 테두리의 낡은 부 분이 많은 만큼. 손 때가 묻은 부분이 많은 만큼. 사진은 소중히 보관되어 왔을 것이다. ' 반드시 잡아낼 거야! 그 범인을! ' 그러기 위해 유리는 지금 유레카로 향하고 있었다. 일단, 유리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 수 밖에 없는 것은 주희의 홈 페이지였 다. 근처의 PC방에서 홈페이지에 접속을 해보려고 했지만, 락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분명 경찰들이 조사했더라면 락은 풀려 있어야 정상일 텐데 왜 지 금껏 락이 걸려 있는 것일까? ' 정말 유빈의 말대로 경찰들이 주희의 홈 페이지를 조사하지 않은 건가? '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유리는 언더 시티 유레카에 거주 중인 그 사람을 찾 아가야만 했다. 그 사람은 바로……. " ……홈 페이지 락을 풀어달라고? " 심드렁한 표정으로 유리에게 대꾸하는 뱅뱅이 안경의 소녀.바로 피스메이커 기술 부 치프인 시더 웰리스였다. 그녀는 언제나 처럼 골방으로 변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유리는 그녀의 고자세에 배알이 꼴렸 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반드시 시더에게 부탁할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자신 이 알고 있는 기술부의 사람은 시더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유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좀 부탁할게. " " 헤헹∼ 부탁? 전혀 부탁하는 자세가 아니잖아∼ 태도는 명령이라도 하는 것 같으면서 말로만 부탁이야? " 쳇. 유리는 이마에 실핏줄을 띄우며 인상을 구겼다. 평소에 가인에게 마음 을 보이던 시더를 꼬깝게 보며 퉁명스럽게 대했던 게 화근이었다. 시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옳다구나 마음껏 유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었다.시더 는 히죽 히죽 웃으며 말했다. " 이 몸은 너무나 바쁘셔서 말이야∼ 피스 대원들의 안전과 세계 평화의 안 녕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다고. 홈페이지의 락 같은 거 풀어 줄 시간은 없단 말씀∼ " ' 실컷 놀고 있었던 주제에. ' 유리는 방 안에 어질러져 있는 액션 피규어들과 슈퍼 로봇들의 초합금 제품 들, 게임 소프트로 추정되는 CD 더미들을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런 걸 지적해봤자 시더의 기분 만 더 상하게 할 뿐. 홈페이지 락 해제와는 거리 가 멀어진다. 유리는 한 숨을 내쉬며 결국 준비해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 기로 마음 먹었다. " 이거 받아. " " ……? " 영문을 모르고 유리가 건네주는 종이 가방을 받은 시더.그녀는 고개를 꺄우 뚱 거리며 유리에게 물었다. " What is this? " " 풀어 보면 알 게 될 거야. " " 흐응……. "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더는 가방의 내용물을 살폈다. 뭐지, 이건? 시디같은 데? 아, DVD인가? 상자 안의 내용물은 다름 아닌 DVD박스 세트였다. 그리고 그 DVD의 타이틀을 보는 순간, 시더의 두 눈은 휘둥그래졌다. " 이,이건!! " - 진(眞) 엑스카이져. 세계 최후의 날 - " 우오오오오오오!!! " 시더는 거의 괴성에 가까운 감탄사를 터뜨리며 DVD박스 세트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유리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뭐,뭐 야? 왜 이러는 거야? " 엑스카이져의 마지막 OVA시리즈이자 스페셜 프라이스 한정 판매로 발매되 었던 전설의 DVD! 뒤늦게 월급이 들어와서 구입하지 못했던 거였는데!! " ' ……그런 거였나. ' 유리는 혹시나 시더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이 DVD를 모 종의 거래를 통해 입수할 수 있었다. 저 DVD의 원주인은 다름아닌 박재영.바 로 그였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반 클래스메이트인 그 남자는 의외로 게임과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방면에 취미를 두고 있었다. 이미 한성 고등학교 내에서는 암암리 에 그 쪽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해 들은 유리는 혹 시나 하는 심정으로 재영에게 오타쿠를 한 번에 넉 아웃 시킬 만한 물건은 없느냐고 물어 보았다.그러자 미인의 부탁은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는 신조에 입각한 재영은 대번에 이런 것을 유리에게 건네준 것이다. 그에게서 이것을 받아들었을 때만 해도 유리는 과연 이걸로 시더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다. 하지만 저 반응은……. ' 상상 이상의 효과로군. ' 유리는 DVD를 껴안고 빙글 빙글 도는 시더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 가 물었다. "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 " Of course! 광대하면서도 독창적인 서플먼트로 무장된 레퍼런스 급 타이 틀인데다가 애니메이션 최초의 'Multi-Angle Vignettes'가 도입되어 있다 고! 엑스카이져의 합체 장면과 격투 장면을 무려 다섯 가지 이상의 앵글 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거지! 거기다 스토리 보드와 콘티의 수록으로 소장 가치는 세 배 상승! 그리고 일반 판과는 달리 잔인하다고 삭제된 장면들 을 모두 살려 놓았으며 스폰서의 압력으로 변경되었던 엔딩 대신에 감독 이 본래 추구하던 엑스카이져의 진 엔딩이 수록되어 있지! " ' ……그러니까 그거의 어디가 대단한 점이냐고. ' 유리는 아마 죽었다가 깨어나도 시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저 정도의 반응이라면 거래 성립이겠지. 유리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 그럼 내 제의는 수락한 거겠지? " " 쿠쿠쿠쿠쿠∼ 맡겨만 달란 말씀! ' 대번에 손가락을 풀며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하는 시더. 유리는 잠시 자신 이 가지고 온 DVD 세트와 시더를 번갈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이것이 바로 만 화의 힘! 이것이 바로 특전 판매의 힘!……이란 거로군. 대단한데. " 이거란 말이지? " 시더는 유리에게서 받은 주희의 주소로 접속하였다. 그러자 거대한 자물쇠 그림과 함께 홈 페이지의 대문이 모니터에 떴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이거야. 풀 수 있겠……. " " 다 풀었어. " 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돌아보며 말하는 시더. 유리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 ……다 풀었다고? 벌써? " " 그래. 대충 보니까 시중의 인터넷 잠금 프로그램을 사용한 거 같은데, 이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지. 나의 대 시큐리티 전용 파괴 프로그램 '로그 마 스터'가 있는 한! " " ……. " 어째서 시큐리티 파괴 프로그램 같은 걸 만든 걸까? 유리는 작은 의문을 느 꼈지만 모니터에 뜨는 홈페이지의 메뉴 화면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기로 했다. 메뉴는 예전 주희의 말대로 일기를 쓸 용도로 만들어졌기에 철저히 DIARY 중 심으로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 굳이 홈페이지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그림도 들어가고 넷 펫(Net Pet;인터넷 상으로 키우는 애완 용 동물)도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었다. 시더는 대충 홈페이지를 훑어 보더니 곧 두 눈을 빛내며 손가락 관절을 풀 기 시작했다. 뭔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 헤헤헹∼ 좋아. 좋아. 그럼 어디 그 구석 구석까지 세밀하게 파헤쳐 보실 까∼! 나의 로그 마스터를 움직이게 한 댓가를 단단히 받아내주겠어! " " 엉뚱한 짓 하면 DVD는 없을 줄 알아. " " ……쳇. " 시더는 홈페이지를 막 해킹할려다가 유리의 으름짱에 가볍게 혀를 찼다. 유 리는 그런 시더의 뒤에 서서 모니터를 보며 지시를 내렸다. " 일기를 찾아봐. 아마 2031년 중순 정도면 될 거야. " " 이거 DIARY? 흐응∼ 핑크 베이비는 남의 일기를 보는 게 취미였던 거야? " " 내가 넌 줄 알아!!! 그리고 누가 핑크 베이비라는 거야!! " 시더의 시덥잖은 농담에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유리.그 외침에 시더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 막았다. " 으엑! 너무해! 남의 방까지 와서 영 매너가 말이 아니잖아! " " 매너를 바란다면 그쪽부터 먼저 지키시지. 잔 말 말고 빨리 찾아봐. " 유리는 가볍게 콧 방귀를 뀌며 재촉했고, 시더는 투덜거리면서도 마우스를 움직였다. 주희의 홈페이지는 생전 그녀가 쓴 일기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것 들을 살펴보던 시더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 헤에∼ 굉장한 텍스트 분량이잖아. 최소한 7,8년은 되겠는걸? " " ……. " 유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전에 썼던 일기들도 모두 홈페이지 에 옮겨놓았던 건가? 그래서 주희의 방에 일기가 없었던 거였구나.시더는 그 렇게 고심하는 유리와는 달리 태연자약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일기들을 하나 하나 넘겼다. " 흐흥∼ 흐흥∼ 2031년, 2031년∼ 랄라라∼ 열혈을 불태워라∼ " " ……. " 유리는 그 알 수 없는 노래에 시더의 뒷통수를 노려보았다. 이게 왠 괴상망 칙한 노래야? 설마 내 신경을 건드리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물론 시더가 부르고 있는 건 엑스카이져의 주제가를 콧 노래로 바꾼 것이었지 만 유리가 그런 걸 알리 없었다. 시더는 홈페이지를 뒤적이다가 탄성을 올렸다. " 아, 이거다. " 그리고 화면에 2031년의 일기들이 차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유리는 마른 침을 삼키며 화면을 주시했다.이 안에 반드시 범인에 대한 단서가 있기를 바 라면서. 2031년 3월 12일. 날씨: 맑음.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난 너무 기쁘다.4학년에 이어 5학년에도 준호 와 유리가 한 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1년 간 그 아이들과 보낼 생각 을 하니 기분이 들떠 잠이 안왔다. 내일 잠꾸러기 유리를 깨우러 가려면 일 찍 일어나야 하는데. 2031년 3월 27일. 날씨: 흐림. 오늘 과학 숙제가 있다는 걸 그만 깜빡해버렸다.그 바보 준호도 다 해왔을 정도니 아마 반에서는 나 혼자 안해온 모양이다. 분명 선생님이 이번 숙제를 안해오면 회초리 열대 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회초리를 아이들 앞에서 혼자 맞을 생각을 하니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그런 나에게 유리가 오늘 3교시 과학 수업은 없을 거라고 얘기했다. 단순히 날 위로해주려는 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놀랍게도 선생님이 갑작스런 집안 사 정으로 3교시 수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가다가 생각하는 거지만 유리의 예상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할 때가 있 다. 2031년 4월 9일. 날씨: 비. 유리와 준호와 스맥 타운에 놀러갔었다. 며칠 전 부터 약속한 거라서 다들 들뜬 기분으로 집을 나왔다. 스맥 타운으로 가자 바보 준호는 어뮤즈먼트 파 크의 게임에 미쳐서 헤어나올 줄을 몰랐다.덕분에 유리와 난 둘이서만 2층의 쇼핑 홀을 돌아다녀야 했다. 평소 눈여겨 봐둔 악세사리도 사고 패스트 푸드 점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사먹었다. 그렇게 볼 일을 보고 어뮤즈먼트 파 크로 돌아왔는데 일이 터졌다. 준호가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었다. 어뮤즈 먼트 파크 안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이 바보는 보일 생각을 하지 않 았다. 이 넓은 곳에서 길이라도 잊어버리면 큰 일인데! 걱정이 되어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유리가 준호 있는 곳을 알았 다면서 날 끌고 3층의 장난감 점으로 갔다. 그리고 과연 유리의 말대로 그곳 에는 준호가 넋을 잃고 장난감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 바보! 멍청이! 욕을 하며 잔뜩 준호를 걷어차 주었다. 준호는 울쌍이 된 채 우리가 올 생각을 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찾아 나선 거라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한 번 더 차주었다. 그나저나 유리는 어떻게 준호가 장난감 점에 있는 것을 알았을까? 신기한 일이다. 2031년 4월 21일. 날씨: 맑음. 내일은 산수 쪽지 시험이 있는 날이다.그다지 공부를 하지 않아 걱정스럽지 만 나보다는 준호가 더 걱정이다.공부하는 거 보다 노는 걸 더 좋아하는 아 이인데 시험 범위가 어디인지 알기나 하려나? 부디 빵점이나 안 맞았으면 좋 겠다.(그 바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오늘, 유리가 놀라운 얘기를 했다.자신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이었다. 그 얘기로 교실에서는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난 유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거짓말을 할 아이가 아닌데. 농담이라 고 하기에는 유리의 얼굴이 너무도 진지했다. 결국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유리는 증명해 보이겠다며 내일 있을 쪽지 시험의 답들을 아이들에게 전부 가르쳐주었다. 유리는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만약 거짓이라면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텐데……. 걱정이다. 2031년 4월 22일. 날씨: 맑음. 놀랍다. 나도 놀랐고, 반 아이들도 모두 놀랐다. 거짓말이라고만 생각했는 데 유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유리가 가르쳐준 시험 문제의 답들은 모두 정답 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유리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예전에 느꼈던 의문점들도 차차 풀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유리가 때때로 보여준 그 정확할 정도의 예상은 바로 이것이 었을까? 하지만 마저 놀라기도 전에 교실로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아이들이 모두 백 점을 맞자 화가 난 수미가 선생님에게 일러바친 것이었다. 수미는 평상시 학 급에서 1등을 놓치지 않던 아이였는지라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터졌다.다그치던 선생님에게 유리가 반발하다가 선생님의 마 음을 읽어낸 것이었다. 유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실성한 것 처럼 유리를 때려 대소동이 일어났다. 옆 반의 선생 님들이 오셔서 간신히 말렸지만 너무도 무서운 일이었다. 난 왠지 유리 보기가 겁이 나서 따로 집으로 와야만 했다. 2031년 5월 4일. 날씨: 흐림. 모두들 유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유리가 마음을 읽는 다는 게 학교 전체에 알려지면서 아무도 유리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와 준호는 그런 유리 가 안쓰러웠지만 섣불리 말을 걸지는 못했다. 마음을 읽는다라. 만약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읽고 감추고 싶던 일까지 다 알아낸다면 그건 섬뜩한 일이 될 것이다. 솔직히 시선도 마주치기 힘들 정도 로 유리가 무서웠다. 하지만 우리가 겁먹는 모습을 보인다면 유리는 분명 상 처를 입겠지. 준호와 나는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유리 에게 행동하려고 했다. 하지만……우리의 이런 행동을 유리는 과연 몰랐을까? 2031년 5월 13일. 날씨: 맑음. 아무리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유리는 유리다. 나의 친구 유리다.그건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아무 것도 변한 건 없다. 그렇게 믿고 싶다. 2031년 5월 17일. 날씨: 맑음.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가 날 불렀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이제는 유리와 놀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미 유리가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학부모들 사이에 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소문이었다. 엄마도 그 소문을 듣 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모양이다. 화가 났다. 그리고 너무 서글펐다. 그렇게 오랫동안 유리와 알고 지냈으면 서 한 순간에 태도를 바꾸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난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 다면서 엄마에게 대들었고, 잔뜩 야단만 맞고 방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렇게나 착한 아이인데. 유리는 정말 좋은 아이인데. 왜 다들 마음을 읽는 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 아이를 멀리 하는 것일까? 왜 유리가 어떤 아이인 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일까?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은 알고 있는지 모른다.유리를 대할 때 면 나도 모르게 긴장되고 조심스러워지니까. 유리와 눈도 마주치기 힘들어지 니까. 결국 나는 내일부터 엄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2031년 5월 19일. 날씨: 흐림. 나 외에도 준호까지 유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학교에서 유리와 얘 기하는 사람은 없어진 것이다. 몇 번 유리가 나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차갑게 대해 버렸다. 이럴려고 했던 게 아닌데. 난 유리에게 이러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차갑게 대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점점 유리를 매몰차게 대한다. 방과 후에 교실을 나오다 뒤를 돌아 보았다. 교실에는 유리 혼자 책상에 앉 아 울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 2031년 6월 1일. 날씨: 비. 엄마의 심부름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놀이터의 그네 에 앉아 있는 유리를 볼 수 있었다. 비가 오는데도 유리는 우산도 없이 홀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이 놀이터는 분명 준호와 내가 처음으로 유리를 만났던 장소였다. 유리 는 지금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엄마에게서 유리 네 부모님이 굉장히 크게 싸우셨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왠지 이 늦은 시 각에 비까지 맞으며 집에 들어가지 않는 유리가 너무 쓸쓸해 보였다. 난 나도 모르게 유리의 뒤로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갔지만. 끝내. 끝내 말을 걸지 못하고 집으로 도망쳐 와버렸다. 나는 뭐하는 애일까? 문주희. 너는 대체 뭐냐고! 그렇게 유리를 좋아 했으면서. 그렇게 친했으면서! 넌 도대체 뭘 두려워 하는 거야!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 주희야. " 유리는 모니터에 떠오르는 일기를 마저 읽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조 차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남의 시각으로 보게 되니까 더더욱 마음이 아 팠다. 유리와 같이 일기를 읽던 시더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 어떻게 할 거야? 계속…… 읽을 거야? " " 응. 하지만 2031년은 이제 그만 넘겨. " 아무래도 단서는 좀 더 뒤쪽에. 자신이 청송 초등학교에서 한성 고등학교로 전학 온 이후에 있을 것 같았다. 아마 그 날이 2032년……. " 2032년 5월 10일로 가봐. " " Okay. " 시더는 2031년에서 2032년으로 메뉴를 넘겼다. 2032년 5월 10일. 날씨: 흐림. 유리가 전학 갔다는 것을 유리 네 반 아이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준호와 내 가 유리의 반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유리가 학교를 떠난 뒤였다.유리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유리의 부모님은 유리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 았다. 너무도 무관심한 모습이었다. 유리는 평소 집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 와야 했던 걸까? 그것도 부모님한테? 집으로 돌아오면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옆에서 따라 걷던 준호도 남자 인 주제에 따라 울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며 울었다.부끄러웠 다. 그리고 자신한테 화가 났다. 우리는 왜 유리를 따뜻히 대해주지 못했던 걸까.남들이 차갑게 대하더라도 우리 만은,친구인 우리 만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우리가 오히려 유리를 보호하고 감싸줬어야 하는 건데. 유리는 학교에서도 혼자였고, 집에서도 혼자였다.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었 던 것이다. 우리가 곁에 있어줘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내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2032년 6월 9일. 날씨: 맑음. 유리가 떠난지 한달이 다 되어간다. 그 동안 여러 말들이 많았다. 지방으로 전학을 갔다는 것 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정신 병원에 다시 들어갔다는 얘 기도 있었다. 어느새 준호와도 멀어지게 되었다.학교에서도 그다지 아는 척 하지 않게 되 었고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아마 유리를 떠나보낸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 책감 때문일 것이다.준호를 볼 때마다 유리에게 차갑게 대한 그의 행동을 질 책하게 되었고 그 질책은 결국 나에게로 되돌아온다.그건 준호도 마찬가지였 을 것이다. 서로의 얼굴을 볼 때마다 유리가 생각났고, 그 아이에게 몹쓸 짓 을 한 우리의 죄책감이 떠오른다. 결국 우리 세 소꿉 친구는 완전히 헤어지게 되었다. 2032년 7월 21일. 날씨: 흐림. 집으로 돌아오면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내 책상 위의 사진들이 다.책상의 유리 판에 끼워진 사진들은 모두 준호, 유리와 함께 찍은 것들 뿐 이다. 그 사진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며 그 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게 최근 에 생긴 버릇이다.그렇게 하염 없이 사진들을 들여다 보면 다시 눈물이 난다. 이렇게 잘 울지 않았는데. 마치 우는 것도 버릇이 된 거 같다. 유리는 뭘 하고 지낼까? 만약 그때 내가 유리를 차갑게 대하지 않았더라면. 유리와 친구로 지냈더라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유리는 남아있지 않았을까? 준호와 나와, 셋이서 계속 잘 지낼 수 있지 않 았을까? 그때 유리가 날 부를 때 한 번이라도 돌아봐주었더라면. 그랬다면 유리는……. 2032년 8월 18일. 날씨: 맑음. 우연히 준호와 만날 수 있었다. 옛날 유리와 함께 한 놀이터에 왔는데 마침 준호도 있었던 것이다. 오랫만에 만나니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유리와 놀던 얘기들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준호와 얘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준호와 나는 해 질 무렵에야 얘기 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유리에게 우리가 했던 짓을 떠올리며 고개 를 들지 못했다. 유리를 만나고 싶었다. 다시 유리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 리고 다시 친구로 지내고 싶었다. 그건 준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리는 일기를 읽다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준호와 주희의 마음을 몰랐던 자신도 바보였었다. 용기를 내서 그 아이들을 다시 한 번만 찾아갔더라면.그 랬다면 예전의 관계를 되돌릴 수도 있었을 텐데.다시 세명이서 함께 다닐 수 도 있었을 텐데. 왜 나는 그들을 잡을 용기가 없었던 걸까?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한번만 더 그들을 만났더라면……. ' 이렇게 후회하지는 않았을 텐데. ' 유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주먹을 쥐었다. 살아만 있었더라면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을 그들이었다. 살아만 있었더라면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다시 한번만 만났더라면…다시 한번만……. '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주희와 준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유리는 주희와 준호를 자살로 몰고간 범인이 견딜 수 없이 미웠 다.증오로 머리 속이 들끓는 것만 같다. 어떻게 해서든 녀석을 잡고 싶었다. " 저기……. " 유리는 시더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시더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 괜찮아? " " 으응. "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이대로 주저앉고 울 수 는 없는 노릇이잖아. 끝까지 이를 악물고라도 범인을 찾는 수 밖에 없어! 절 대 이대로 끝내서는 안된다고! ' 하지만……. ' 유리는 얼마 남지 않은 일기의 분량을 바라보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이 안에서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할까봐 초조해졌다.유리는 시더에게서 직 접 마우스를 받아들고 일기를 넘겼다. ' 나오란 말이야!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나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 범인을 향한 것인지, 일기 속에 있을 단서를 향한 것인지 모를 외침.유리는 이를 갈며 일기를 내려 나갔다. 8월, 9월, 10월……어디에도 범인에 대한 단 서는 없었다. 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 ' 아……. ' 그때 11월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유리의 눈동자가 멈췄다. 2032년 11월 1일. 날씨: 흐리다가 비. 아침에 올 것 같던 비가 결국에는 내리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 학교를 마치 고 집으로 가던 도중에 쏟아져 내렸다. 난 어쩔 수 없이 근처의 가게에서 비 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그 아이를 만났다. - 같이 쓰고 갈래? 유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기에 남아있던 사념의 목소리였다.유리는 너무 놀라 숨도 쉴 수 없었다. ' 어떻게 여기에 사념이? 인터넷 상에 사념 같은 게 남아있을리 없을텐데. '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사념은 계속되었다. - ……누구? 주희의 당황하는 목소리. 그러나 상대방은 그녀보다 연장자인 것 처럼 차 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문주희지? 학교에서 몇 번 봐서 알고 있어. - 아, 그래……. - 저번에 보니까 주희네 집도 우리집과 같은 방향이던데 같이 쓰고 가자. - 으응. 유리는 마른 침을 목으로 삼켰다. 이 놀라운 현상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렸 다. 인터넷 상에 사념이 남아있다니……. 이런 현상이 가능하려면. ' 누군가가 인터넷 상에 고의로 사념을 남겨두지 않는 한…. ' 유리는 두 눈을 부릅 떴다. 바로 그거였다! 고의로 남겨둔 것! '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상상은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설 마 이 사념을 남겨둔 이가 나와 같은 오라 능력자라면……. '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곳에 사념을 남겨둔 거지? ' 그건 바로 메세지. 아마도 내가 홈페이지를 열리라는 걸 알고 나에게 던지 는 메세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오라 능력자는 어째서 나에게 이런 메세 지를 보내온 걸까? ' 그것은 바로… ' 그 오라능력자가 바로……범인이라면…. 쿵.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유리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며 어깨를 떨었다.등 골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들어맞고 있었다. 주희와 준호를 자살로 몰고 간 범인이 오라 능력자? 그런 건가? '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일을……. ' 오라 능력자가 그 아이들을 해할 이유가……. 그 이유를 알려면 이 일기에 남아있는 사념을 계속 읽어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유리는 떨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눈으로는 일기를 읽고 있었지만, 마치 자신이 그때의 주희인 것 처럼 그녀가 경험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2032년 11월 3일. 날씨: 맑음. 가슴이 떨렸다. 학교에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며칠 전 나에게 우산을 씌 워주던 아이. 정말 우리 학교 학생이었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아이와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웃었다. 유리가 떠날 때 웃음이란 것도 같이 떠나 보낸 줄로만 알았는 데.그 아이와 얘기하는 순간 만큼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 었다. 아마 바보 준호가 오지만 않았더라면 그 아이와 더 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난 떠나가는 그 아이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묻지 못했다. 아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2032년 11월 4일. 날씨: 맑음. 하루 종일 그 아이 생각만 했다. 내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가 이렇 게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한동안 유리의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는데……. 따르르릉. 주희의 집에 울리는 전화. 주희는 방에 있다가 전화를 받으러 달려가고 있 었다. - 네, 여보세요? - ……. - 누구세요? 아무 대답이 없는 발신자. 주희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전화를 끊으려고했 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주희니? 아! 그 목소리를 듣자 주희의 얼굴에 화색이 번져 갔다.주희는 전화기를 두 손으로 끌어 잡고 말했다. - 혹시……. - 응. 나야. 집에 있었구나. 다행이네. 유리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 혔다. 그 목소리를 반기며 즐겁게 통화를 하는 주희를 안절 부절 못하며 바 라봐야 했다. ' 안돼. 주희야. 그 사람은……. ' 유리는 거기까지 소리치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라니? 이유리.넌 저 사람을 알고 있는 거야? 어떻게? 유리는 수화기의 목소리에 귀 를 기울였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 목소리의 음성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또한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 인식 방해…! ' 그녀가 사념 속의 상황에서 제한된 부분 만을 겪도록 상대방 쪽이 고의로 인식 요소를 잘라놓은 상황이었다. 그러고보니 앞에 주희가 만났던 그 아이 도 유리는 인식할 수가 없었다. 분명 어떻게 생겼는지 보았는데도 그 생김새 가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이 사념의 주인이 유리 자신보다 한 수 위의 능력자라는 것! 범인은 유리와 같은 능력자이면서도 보다 마인드 디텍트를 능수능란하게 사 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 지금 잠시 나와줄 수 있어? - 지금? 그리고 수화기 너머의 그는 주희를 밖으로 불러냈다. 유리는 사념 속에서 주희의 뒤를 따라 그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앞으로 주희에게 다가올 일들 이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며 약속 장소로 나가 는 주희의 모습에 애가 탔다. …그 아이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인근의 한 아파트 옥상이었다.어째서 이런 곳에서 만나기로 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난 그 아이와 만난다는 기대에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그리고 그곳에는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 여기는! ' 유리는 주희와 그의 약속 장소를 보며 몸을 떨었다. 여기는 유리도 알고 있 는 장소였다. 그녀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어제! - 봐봐.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아. 굉장하지 않아?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며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그대로 주저앉아 버 릴 것만 같다.그리고 어두운 아파트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막 드러난 달빛을 받으며 주희와 유리를 돌아보았다. - 잘 와줬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유리는 숨 이 막히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모두 얘기해주었다. 배신자라고. 친구를 저버렸다고.그때 유 리를 감싸주었더라면, 그 아이의 곁에 있어주었더라면 유리는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유리는 상처받지 않았을 거라고. 유리를 궁지로 몰고 간 사람은 다 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고. 나는 한 마디의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모두 내 잘못이 었다. 나는 유리를 걱정할 자격도 없었고, 유리를 위해 눈물을 흘릴 자격 조 차 없었다. 나의 모든 건 가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유리가 안쓰럽고 걱정 되었다면 당연히 그녀를 도와야만 했다. 친구로서 그녀의 곁에 남아있어야 만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두려웠던 거다. 유리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무섭 고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그런 주제에 나는 유리 때문에 마음이 아픈 척,힘 든 척, 괴로운 척 연기를 해오고 있었다. 나는 그저 비겁한 거짓말쟁일 뿐이 었다. 그 아이는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내 죄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해주 었다. 나는 그 모든 걸 인정해야만 했다. 깨달은 죄의 무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런 나에게 그는 해답 을 제시해주었다. 내 죄를 없앨 방법을 얘기해주었다. - 여기서 뛰어 내려. 그리고 나는 뛰어 내렸다. 그때 그 모든 사념들이 꺼지듯 사라져 버리고 유리는 시더의 연구실로 돌 아와 있었다. 시더는 유리의 이상한 반응에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일 있는 거니? ……앗! " 유리는 그런 시더를 제치고 컴퓨터의 모니터에 달려들었다. 다시 사념을 읽 어볼려고 했지만, 이미 사념은 깨끗이 지워진 뒤였다.아마 유리가 사념과 접 촉하는 순간, 사념의 삭제도 동시에 진행되도록 손을 써둔 모양이었다. 유리 는 이를 악물며 키보드를 내리쳤다. - 쾅! " 으악! 무슨 짓이야! 너!! " 시더는 유리의 행동에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뜯어 말렸지만, 유리는 흥분을 멈출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다! 믿을 수가 없어! 어째서 그가 거기에 있었 던 거지? 어째서 주희가 자살해버린 거야? 어째서! ' 아……. ' 유리는 순간, 모니터의 일기를 보고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분명 주 희가 자살한 날은 11월 4일. 아까 사념에서 봤듯이 그녀는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로 달려갔으니 일기를 쓸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11월 4일의 일 기는 쓰여질 수 없다. 쓰여져서도 안된다. 하지만 모니터의 화면에는 쓰여져 있을 리 없는 11월 4일의 일기가 쓰여져 있었다. 이건 어떻게 된 조화일까? 유리는 11월 4일의 일기 밑으로 메뉴를 내려 보았다. 있을 리 없는 공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제 모든 걸 알았겠지? 큐우우우웅 피스메이커의 광속 전차 안. 유리는 언더 시티에서 25구역으로 향하고 있었 다. 아랫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실망, 그 리고 원망이 머리 속을 멤돌았다. - 난 유리, 네가 무섭지 않아. 너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무섭지 않아. 왜냐 하면 난 숨길 것이 없으니까. 내 모든 것을 너에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했으면서……. - 슬플 땐 울어. 곁에 있어 줄테니까. 그렇게 자상하게 대해줬으면서! ' 어째서. 어째서 그런! ' 유리는 황망히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며 불안하게 전차 안을 살폈다. 무릎 위에 깍지를 끼고 있던 손 사이로 식은 땀이 배어나왔다. 초조해서 견딜 수 가 없었다. 지상으로 가는 10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진다. - 만약 좋아한다면? 날…… 좋아한다고 해줬었는데. 그 마음은 거짓이 아니라고 믿었는데. 모두 나만의 착각이었던 거야? 단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거야? ' 왜 그랬던 거야? 왜! ' 유리는 마음 속으로 절규하며 창가에 보이는 지하 터널을 노려보았다.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다음부터 기분이 울적하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여기로 와.고민 거리 같은 건 들어줄 수 있으니까. ' 그래…. ' 지금은 그의 말대로 그곳으로 향하는 수 밖에 없었다. 주희가 자살한 아파 트 단지의 옥상으로! " 흡! " 탕! 언더 시티 유레카의 연무장.그 안에서는 날카로운 타격음이 울려 퍼지고 있 었다.가인은 자신을 압도하는 상대의 기세에 속수무책으로 수세에 몰려야만 했다. ' 으윽! ' 가인은 상대의 죽도에 옆구리를 얻어 맞고 입으로 나올려는 신음을 삼켰다. 만약 호구를 착용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과장해서 늑골이 나갔을 지도 모른다. 그 만큼 상대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으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 어떻게 된 거냐! 검 끝이 죽어있잖아! " " 으앗! " 탕! 가인의 검술 사범이자 그의 동료인 피스 레드 성마리. 그녀가 바로 가인의 상대였다. 호구를 모두 착용한 가인과는 달리 그녀는 간단한 검도복 만을 입 은채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눈 앞의 상대를 전심전력으로 쳐부수겠 다는 필살의 의지가 담긴 그 눈빛! 그 눈빛을 호면 속에서 대하자 가인은 울 쌍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 이건 다른 사람이야. 수련할 때의 마리 선배는 내가 알고 있는 선배가 아 니라고! '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 잠시 가인이 한 눈을 판 사이에 마리의 죽도가 힘으로 대치하고 있던 가인 의 죽도를 비스듬히 빗겨 내리며 그의 손목을 노렸다. 그 수에 깜짝 놀란 가 인은 무의식 중에 재빨리 마리의 옆으로 스텝을 뛰며 마리의 죽도가 죽대를 타고 내려오려는 것을 견제했다.죽도를 사이에 두고 가인의 전신은 긴장으로 수축되었다. 등 뒤에 흐르는 땀이 식어가는 것만 같다. ' 이 거리가 생명이다. 절대로 이 거리를 유지해야해! ' 가인은 필사적으로 마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며 그녀와 대치했다.비 록 그녀에게 선방을 날리지는 못하겠지만 더 이상 맞지 않으려면 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가인의 전술에 마리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 훗. 꽤나 괜찮은 겨눔세를 보여주는군. ' 분명 가인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무의식 중에 겨눔세 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리는 가인에게 기본 적인 검세 외에는 특별히 형 (形)이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철저한 실전과 대련을 통해서만 그 감각 을 쌓아준 것이다. 그런 마리의 선택이 적합했던 것인지, 가인은 수 많은 몬 스터와의 실전을 치뤄오면서 나름대로 자신 만의 검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금 그가 보여주는 겨눔세도 마찬가지였다. 마리는 이론으로 가르치기 보다 는 직접 몸으로 그를 가르쳤고, 가인 역시 스스로 깨달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는 가인의 검을 무영신풍류 라는 틀 속에 가둬두고 싶지 않았다. ' 하지만 너의 겨눔세에는 공세가 빠져 있다. 상대를 압박하여 격자의 기회 를 찾으려는 공격행위가 없단 말이다. ' 가인은 단지 수세에 몰리자 방어 수단으로서 겨눔세를 취했을 뿐,특별히 마 리에게 반격을 가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마리는 정신을 집중하며 호흡을 들 이켰다. 유가인……. 그런 소극적인 전술로는 날 이길 수 없다! 진정한 공세 가 무엇인지 보여주지. ' 기(氣)에 의한 공세! ' 마리는 강한 기백으로써 가인의 기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의욕을 꺾 어 공격의지를 좌절시키기 위함이었다. ' 몸에 의한 공세! ' 허리를 중심으로 마리는 경쾌한 발 운용과 강력한 몸받음을 보여주었다. 상 대의 밸런스를 무너뜨림으로서 상대를 수세에 몰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 그리고…. ' " 앗! " 가인은 마리의 죽도가 자신의 죽도를 누르며 동시에 헤쳐나옴에 당황했다. 그녀가 보여주는 기세에 놀라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리는 가인에게서 정중 선을 차지한 것이다. 순식간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며 격자의 기회가 만들 어졌다. ' 칼끝에 의한 공세! ' 이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니,이것이 바로 기검체일체(氣劍體一體)! 이 것이 바로 진정한 공세! 투앙! " ……! " 가인은 자신의 귀를 울리는 타격음과 함께 시야가 흔들려야만 했다.무슨 일 이 일어났는지 깨달을 수도 없었다. 눈앞에 별이 번쩍인다 싶더니 어느 순간 무릎이 꺽이고 있었다. " 아…. " 가인은 도장의 바닥에 넘어진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넘어진 것조차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마리에게 당한 충격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가인은 그만 다시 주저 앉아야만 했다. 몸 의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를 않았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지? ' 분명 마리 선배의 죽도가 내 호면을 쳐올린 것 같았는데……. 어째서 그렇 게 쉽게 내 죽도 속을 파고든 거지? 스쳐 올리기였나? 너무나 맥 없이 마리 에게 머리를 허용해 버리자 가인은 허탈해질 지경이었다.적어도 실전으로 강 해졌다고 자부했던 자신이었는데, 마리에게 이렇게 손쉽게 일격을 허용하고 말다니. 그것도 치명적인 머리를! ' 역시 마리 선배야……. 정말 강하다. ' 나 따위는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가인은 새삼 마리의 검술에 감탄하 며 고배를 들이켜야 했다.마리는 그런 가인의 실망한 기색을 눈치챘지만 짐 짓 엄하게 말했다. " 그 동안 수련을 게을리 한 결과다. 좀 더 정진하도록. " " 예에. " 마리가 그동안 검술 훈련에 빠진 것을 탓하는 것 같아 힘 없이 답했다.최근 들어 하루도 빠짐 없이 부르스에게 이끌려 수련을 가장한 두들김을 당하다보 니 마리와 진우의 훈련은 받을 엄두도 내지를 못했던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마리와 검술 훈련을 하는 것도 이주일 만에 처음이었다. 마리는 가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자, 일어서라. " " 고마워요. " 가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머리에 착용한 호면을 벗어낸 그의 얼 굴은 시무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느새 또 자만이 몸에 배여있었던 모양 이다. 실전으로 강해졌다고? 유가인,넌 그렇게 혼나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렸 던 거냐? 넌 아직도 멀었어! 마리는 그런 가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 가인. 이제 슬슬 정하는 게 어떻겠나? " " 예? " 정하다뇨? 뭘? 어리둥절해 하는 가인에게 마리는 작게 한 숨을 쉬었다. " 검(劍)하고 권(拳). 둘 중에 하나 말이다. " " ……! " 그제야 가인은 마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깨닫고서 안색을 굳혔다.그건 평 소에 자신도 걱정해오고 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 이 상태로는 어느 것 하나 성취하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경지에서만 멤돌 게 될 거다. 물론 중국권은 무기를 쓰는 것을 상정하고 권법을 익히니까 부르스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와는 견해가 다르다. 적어 도 하나에만 집중하지 않는다면…….언제까지 지금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를 못하겠지. " " 그렇……군요. " 매일 매일 뼈를 깍는 수련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띄엄 띄엄 수련을 했 으니……. 가인은 자신의 나태함이 한심해져 씁쓸하게 대꾸했다. 이제 생각 해보니 자신은 검도 권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 없이 중간 정도만 하는 얼치기였다. 이래서야 마리 선배에게 혼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 정해야겠지. ' 마리의 말대로 자신은 결정을 해야만 했다. 검과 권.둘 중 어느 한 쪽에 힘 을 쏟아부울 것인지.이대로 있다간 자신의 실력은 항상 제자리일 것이다. 검 과 권은 한꺼번에 대성을 이룰 정도로 만만한 것들이 아니다. 그렇게 가인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마리는 낮게 헛기침을 했다. " 그래도 뭐……지금의 네 수준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니까. 그…… 지금 당 장 정할 필요는 없겠지. 천천히 생각해 봐라. " " 예. 알았어요. " 가인은 마리의 서투른 위로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언제나 엄한 태도를 보이 지만 누구보다 그녀의 마음이 따뜻하다는 걸 가인은 잘 알고 있었다. 마리는 그런 가인의 미소에 고개를 돌리며 붉어지려는 얼굴을 감췄다. 엄해야 할 때 는 엄해야 하는데……. 마리는 유독 가인에게 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고소 를 금치 못하며 고개를 저었다. 삐리리리리 그때 희미하게 탈의실 쪽에서 들려오는 벨소리. 마리는 개미 소리 만한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이 원음으로 놔둔 벨소리는 분명 가인의 핸드폰 소리? 마리는 그 벨소리가 남자 탈의실 쪽에서 들려온다는 걸 깨닫고서 가인의 것 임을 확신했다. 가인을 돌아보니, 그는 벨소리를 듣지못 하고서 주섬 주섬 떨어뜨린 죽도를 챙기고 있었다. " 가인, 네 폰으로 전화가 온 거 같은데. " " 예? " 왠 전화?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는데? 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리를 돌 아보았다. 여기서 가인과 마리의 예민함이 차이가 나는 부분이었는데,언제나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대련에 임하는 마리는 대련이 끝난 시점에서도 긴 장을 풀지 않으며 청각의 예민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경의 집중이 일상화 가 되었다는 증거였다. 당연히 둔한 가인으로서는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 이런 시각에 왠 전화지? 시민 씨인가? '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탈의실로 뛰어갔다. 과연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희미하게나마 핸드폰이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인은 휘파람을 불며 자신 이 벗어놓은 바지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제 서야 확연하게 핸드 폰의 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굉장하잖아,마리 선배. 어떻게 이런 작은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던 거지? ' 가인은 마리의 청각에 감탄하며 핸드폰을 서둘러 받았다. 너무 늦게 받아서 끊어지는 건 아닐려나? 그런데 정말 누구지? " 여보세요? " << 가인? 가인이야? >> 어라, 이 목소리는……. 가인은 웃으며 말했다. " 시더구나. 웬 일이야? "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시더 웰리스였던 것이다.무슨 일이지? 왠지 목 소리가 다급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 아, 저기∼ 그러니까 그게……유리가 아까 왔다갔는데 왠지 가인에게는 얘기해줘야 할 거 같아서……. >> " 유리가? " 가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하아. 하아. " 유리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 보았다.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혀 있어서 이제 막 7시가 넘는 시각 임에도 불구하고 한 밤이나 다름 없이 어두웠다. 그리고 부슬 부슬 떨어져 내리는 가을 비.유 리의 입가로 하얀 김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 저기에……. ' 저기에 그가. 유리는 분노한 표정으로 아파트의 옥상을 노려보았다. 아직도 그녀는 그가 범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어째 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마음 한편으로는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으면 하는 생각 까지 들었다. 하지만 유리는 곧 고개 를 세차게 저었다. ' 그럴 순 없어! ' 주희와 준호, 수미를 죽인 그를 용서해서는 안된다. 용서할 수 없었다.유리 는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아파트 입구로 발 걸음을 옮겼다. 아파트는 하늘 의 먹구름 때문인지 유독 어둡고 음침했다. 아파트 단지에 불 하나 켜져 있 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 벌써 다들 자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텐데……. ' 조용히 피어오르는 불안감. 의혹. 유리는 두근 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아 파트 내부에 들어섰다.전기 차단 장치라도 내려진 건지 계단을 거닐어도 불 하나 켜지지 않는다. 그 완벽한 어둠에 유리는 숨을 죽여야만 했다. 기분 나 쁜 사념들이 아파트 내에 멤돌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무언가라도 튀어 나올 것만 같다. 띵! " 앗! " 순간, 유리의 뒤편에서 들려온 기계음. 깜짝 놀란 유리가 뒤돌아 보니, 그 곳에는 틈 사이로 밝은 빛을 비추며 자동으로 열려지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있었다.복도의 불들이 켜지지 않아서 전기가 나간 줄로만 알았는데…….어떻 게 작동하고 있는 거지? 유리는 입 가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애써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 좋아.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지. ' 유리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서 최상층의 버튼을 눌렀다.스르르 닫히는 자동 문. 그 위로 차츰 차츰 올라가는 층수가 보였다. 유리는 그것을 올려다 보며 주먹을 꼬옥 움켜쥐었다.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밀려 들었다. 이대로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으며 떠나고만 싶었다. 최상층에서 자 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공포와 마주하기 싫었다. 하지만 유리는 도망치 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며 최상층으로 향했다. 띵! 그리고 최상층. 유리는 저번에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옥상으로 올라갔다.옥 상의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유리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텅 쇳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옥상의 전경이 보여왔다. 유리는 옥상에 발을 내딛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으로 그를 찾았다. 모든 게 자신 만의 착각이기를 바랬다. 그가 범인이 아니기를, 이곳에 아무도 없 기를 바랬다. 하지만…… " ……. " 그는 있었다. 유리에게서 등을 돌린채 옥상의 난간에서 밑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유리는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아니기를 바랬는데….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는데……. ' ……마유빈. ' 결국 너였던 거니? 유리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유리 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이 블루 블랙 머리칼의 소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 다. 눈을 가린 앞 머리의 밑으로 보이는 그 입은 웃고 있었다. " 왔구나. " 짧은 한 마디.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자 유리는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배신감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증오와 원망이 무섭도 록 타오른다. 하지만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수 밖에. 유빈은 그런 유리의 모습에 천천히 난간에 기댔던 몸을 바로 하며 말을 이었다. " 내 선물은 잘 받았어? " " ……! " 선물. 선물이라고? 그게 선물이었단 말이야? 유리는 순간, 분노를 참지 못 하며 소리쳤다. " 입 닥쳐! " 눈 가로 눈물이 맺혀 올랐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어떻게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배신할 수 있는 건데? 믿었는데……. 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고 믿었는데! " 이런 비참함이라니! 이런 잔인함이라니! "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거야! " " 난 거짓말을 한 적 없어. " 유빈은 그런 유리의 반응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 너에게 했던 말은 모두 진실이었어. 난 너에게 내 모든 마음을 열었고,널 좋아한다고 했던 것도 거짓이 아니었어.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 " 그렇다면 왜! " 왜 그 아이들을 죽인 거지? 왜! 그런 유리의 마음 속 외침에 유빈은 마음으 로 답했다. - 말했잖아. 선물이라고. 아! 유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마음 속으로 들려오는 유빈의 목소리에 그가 새삼 자신과 같은 마인드 디텍트를 가진 오라 능력자라는 걸 깨달았다. " ……선물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야? " " 너를 아프게 했던 모든 것. 너에게 상처를 줬던 그 모든 것에 널 대신해 서 벌을 내린 것 뿐이야. "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너무나 태연스럽게 말하는 유빈의 모습에 유리 는 현기증을 느꼈다. 유리는 가라앉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간신히 물었다. " 벌……이라고? " " 그래. 그들은 모두 죄인이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댓가를 받 아야만 했으니까. " 웃으면서 말하는 유빈의 모습에 유리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 뭐가 벌이라는 거야! 그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었다고! 주희와 준호는 진심으로 날 생각해주는 아이들이었어. 내 친구들이었어! 날 진심으로 사 랑해줬었다고! " 그런데 너는……. " 벌을 내렸다고? 네가 뭔데? 네가 뭐길래 그 아이들에게 벌을 내릴 수 있 는 거야?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죽이는 걸 벌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주제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 아이들이 너에게 죽어야할 이유가 있었다면 얘기해봐! 어서 얘기해보란 말이야! " " 하,하하하하하하. " 유빈은 그런 유리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소리는 희미한 분노를 담고 있었기에 유리는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유빈은 웃음을 멈추며 노기 가 서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 진심으로 생각해줬다고? 진심으로 사랑해줬다고? 그걸 지금 진심으로 하 는 소리니? " " ……! " 유리는 몸을 움찔 떨었다. 유빈은 입가에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싸늘한 냉 소를 날렸다. " 그 아이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너를 경멸하고 두려워했어. 다른 사 람들이 널 따돌릴 때 같이 너를 따돌렸지. 도대체 괴롭힘을 당한 당사자 가 그 아이들을 감싸는 이유가 뭐야? " " 그,그렇지 않아! 준호와 주희는……! " 그 아이들 만은 적어도! 그러나 유빈은 냉정히 유리의 말을 끊었다. " 그 사진 때문이야? 그 일기 때문이야? 그건 단지 위선일 뿐이야. " " 위선? " " 그래. 위선. 그 아이들은 분명 너를 감싸주지 못했어. 다른 사람들과 마 찬가지로 네 곁을 떠나 버린 거야. 그런 그들이 그 후로 널 걱정하며 고 민했다고 생각해? 그 일기에서 처럼 네 생각을 하며 괴로워했다고 생각해?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너에게로 돌아왔어야만 했어! " 유리는 가랑비로 자신의 옷이 젖어들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며 유빈의 말에서 귀를 떼지 못했다. 유빈은 분노하며 소리쳤다. "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국은 너와 함께 하는 것보다 자신 들의 안위를 더 챙긴 거야. 뭐, 이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겠어. 사 람이란 원래 타인보다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는 법이니까.하지만 내가 용 서할 수 없었던 건 그들의 거짓된 마음이었어! 차라리 널 버렸더라면 그 대로 버렸어야만 했다! 더 이상 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어야만 했어! 그런 그들이 널 떠올리며 일기에 네 얘기를 쓰고 사진을 보며 널 생각했 던 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해? " 유빈의 질문에 유리는 아무런 할 말을 찾지 못했다.유빈은 차갑게 대꾸했다. " 바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자신들이 당혹스러웠기 때문이지.자신들이 그 런 냉혈한들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일부러 너에 대해 떠올리려고 애쓰며, 없는 죄책감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거야.힘 껏 괴로운 척하고 힘껏 슬픈 척한 거지. 그렇게 연기하면서 스스로를 위 로한 거야. 난 슬프다.유리를 잃어서 괴롭다. 난 나쁜 아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슬퍼해주면 되는 거다 하면서!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면서 자기들 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정작 눈을 돌려버린 거지. 정말 구역질이 나지 않 아? " " 그,그렇지 않아! 그 아이들은 그런……! " " 눈을 돌리지 마! " 유빈은 천천히 유리에게 걸어오며 소리쳤다. " 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실제로 그 아이들이 너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였 을 때 넌 그 아이들의 마음을 읽었잖아! " " ……! " 유리는 뒷걸음질 치던 발걸음도 멈추며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다.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차가운 냉기가 머리 속을 얼려 버리는 것 같다. 춥다. 너무 추워서 팔로 몸을 감싸야만 했다.이빨이 딱딱 떨려온다. ' 나는……. ' 그래. 나는 그 때, 준호와 주희의 마음을 읽었다……. 차갑게 날 대하는 그 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나에게……. - 괴물! 털썩 유리는 비로 젖은 옥상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잊고 싶었던 기억. 떠올리 기 싫었던 기억. 그것이 생각나 버렸다. 그렇다.그들이 마음 속으로 날 향해 외치던 그 목소리가 생각나 버렸다. 괴물. 그들은 날 괴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마음을 읽는 나를 괴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내 곁을 떠난 것이다.부모님의 제지도,주위 사람들의 따돌림 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 내가 무서웠던 것 뿐이야……. '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믿고 싶지 않았 다. 그래서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적어도 준호와 주희 만은 다른 사람 들과 틀리다고 기억하고 싶었는데. 사실은 모두 거짓이었다. 모두 혼자 만의 착각이었다. " 왜…… 왜 나에게 이러는 거야. 왜……? " 유리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유빈에게 물었다. 잊고 싶었던 과거를 들춰내는 유빈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거 기억해낼 필요 없었는데. 이대로 잊고 살아도 됐었는데. 어째서 다시 떠올리게 만든 거지? 어째서 생각나게 만든 거야? 어 째서……. " 넌 나와 닮았으니까. " 유빈은 그런 유리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유리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유리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닮았다니? 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빈의 목소리가 마음 속으로 들려왔다. - 너와 나는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리고 유리의 눈 앞으로 유빈이 보여주는 사념의 영상들이 펼쳐지기 시작 했다. '모두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너 때문에!' 짝! 짝! 여인이 작은 셋 칸 방에서 아이를 때리고 있었다. 아이는 반항 한 번 하지 않으며 그 무차별한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뺨이 빨갛게 물들어 가면서 도 온 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가면서도 아이는 신음 한 번 내지르지 않았다. '너만 아니었더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너 같은 건 내 자식이 아 니야!' 입술이 터져 피가 튀었다. 하지만 여인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짝! 짝! 자식이……아니라고? 아이는 젖혀지는 고개 사이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모든 건 나…… 때문.' 여인의 구타는 계속되었다. -여기는……어디지? 저 사람들은 누구야? -여기는 나의 정신 세계. 사념으로 재현한 과거의 시간이지. 지금 저 여인 은 나의 엄마이며, 그녀에게 맞는 아이는 바로 내 자신이야. -엄마? 그런데 어째서 널? -아빠가 돌아가셨거든. 그것도 차에 부딪히려던 날 구하려다가.엄마는 구제 불능일 정도로 도박 중독이 심하신 분이었지만,아빠를 만나 간신히 성실하 게 살아올 수 있었어. 아빠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기대 오셨던 거야. 그런 아빠가 날 구하려다 죽었으니 엄마의 눈에는 내가 아빠를 죽인 것 처 럼 보였겠지. -그런! 왜 맞고만 있는 거야!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잖아. -유리야, 너는 언제부터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어? 나는 아주 어렸을 적, 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어. 덕분에 난 엄마의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지. 저렇게 날 때리고 원망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아빠를 잃은 충격에 정신이 무너 져 내릴 정도로 슬퍼하셨어. 내가 좀 맞아서 엄마의 기분이 풀린다면 그것 으로 족했지.아빠가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엄마……. 어디 갔다와?' 아이는 밤 늦게 들어온 자신의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인은 신경질 적으로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흥. 내가 어딜 갔다오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귀찮게 하지말고 얼른 잠이나 자!' 그녀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하루 종일 도박장을 전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단지 얘기할 거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엄마와 얘기할 구실이. 비록 이런 가시 돋힌 대답일지라도 아이 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아이는 너무나 외로웠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다시 도박에 빠지셨어. 매일 마다 날 집에 놔 두고 문을 잠근채 도박장으로 향하셨지.난 그런 집에 혼자 남아 엄마를 기 다렸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울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끝내 눈물은 흘리 지 않았어. 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빠를 돌아가시게 했으니 엄마에게 미움을 받는 건 당연한 거라 생각했어. '아아, 제길! 이번에는 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의 엄마는 입가에 담배를 문채 부엌 테이블에 앉아 이를 갈았다. 전형 적인 도박 중독증이었다. 이미 그녀의 남편이 들어났던 보험금은 도박으로 탕진한지 오래였다. 이대로는 빚만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도박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포자기 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썩을…….' 술이라도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실컷 마시고 취하다 보면 이런 근심 걱정도, 상실감도 모두 채워질 테니까. 여인은 술을 꺼내기 위해 냉장고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여인의 앞에 앉아있던 아이가 두 눈을 빤히 뜨며 그녀 에게 말했다. '술을 마셔도 상실감은 채워지지 않아. 단지 잊혀질 뿐이야.' 여인은 갑작스런 아이의 말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한 거야? 상실감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잊혀질 뿐이라니? 그러나 의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다시 말했다. '맞아. 잊혀지는 거. 하지만 망각도 술기운이 떨어지면 그걸로 끝이야. 다 시 상실감은 계속돼. 술 같은 거에 의지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냐.' '너…….' 여인은 놀랍다는듯 두 눈을 크게 뜨며 아이를 응시했다. '혹시……내 마음을 읽는 거야?' '…….'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망설이던 아이.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것은 그녀의 마음 속으로 들려온 아이의 목소리였다. 아이는 사람의 마음 을 읽을 줄 아는 것 만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얘기를 건넬 수도 있었던 것이 다. -솔직히 엄마의 관심을 나에게로 돌리고 싶었어.내가 마음을 읽는 능력자라 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날 특별하게 생각해줄 것 같았거든. 조금이라도 말 을 걸어준다면. 조금이라도 나와 같이 있어준다면……더 바랄게 없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지? -……그 날 부로 나는 엄마에게 '쓸모 있는 아이'가 되었어. '엄마, 여긴 어디야?' '아아,좋은 곳이야. 좋은 곳.' 아이의 질문에 어딘가 들뜬 목소리로 답하는 여인. 아이는 주위를 둘러보았 다. 수 많은 사람들로 홀이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매표소에서 표를 사기 위 해 줄을 선 사람들. 그리고 저편으로 보이는 필마들.아이는 알 수 있었다.이 곳은 경마장이라는 걸. '자자. 유빈아. 할 수 있겠지? 어떤 말이 이길지?' '……으응.' 아이는 엄마의 부탁에 무표정한 얼굴로 말들을 응시했다. 필마들과 기수들 의 사념을 읽었다. 어렵지 않게 승부를 예측할 수 있었다. '저 3번.' '3번마! 폴리골드란 말이지?' 여인은 흥분하며 자신의 모든 금액을 3번마에 걸었다. 아이는 레이스를 구 경하기 위해 자신을 팽개쳐 두고 경마장으로 달려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 라보았다. 아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이걸로 된거야. 이 능력으로 인해 엄마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됐잖아? 엄마 의 관심을 받을 수 있게 됐잖아? 아이의 귀로 여인의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 만 그 외침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저 멀리 아득한 곳을 향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달려라! 달려!' 그리고 3번마는 우승했다. '하우스에 아이는 왜 데려온 거야?' 아이는 자신을 탐탁치 않게 바라보는 아줌마들과 아저씨들의 눈빛에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웃으며 그런 아이를 감싸주었다. '에이, 좀 봐줘. 유빈이는 내 수호신이라고. 난 이 아이 없으면 게임 못해.' '정말이지 극성이라니까.' 아이는 자신을 보듬어주는 여인의 손길에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상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안도했다. 엄마는 더 이상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더 이상 손찌검을 하지 않게 되었고, 더 이상 욕도 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었다. 아이는 그것이 기뻤다. 이것도 모두 그 능력 덕분이다. -유빈아, 준비 됐지? 시작해. 순간, 마음 속으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아이의 표정이 짧게 굳어졌다. 하지만 애써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으로 답했다. -응. 알았어. 아이는 카드를 돌려받는 아줌마들의 마음을 읽어내며 그들의 패를 엄마에게 알려주었다. 그럴 수록 여인의 표정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녀의 앞으로 모이는 돈은 점점 불어났다. 아이는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걸로 된 거야. 엄마가 기뻐하면 난 만족해.' 그런 아이의 표정은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 엄마가 진심으로 날 좋아하고 있지 않다는 건. 단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내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하지만 그래도 좋았어.엄 마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엄마가 날 필요로 하고 있 다는 게 좋았어. 그걸로 충분했던 거야. -엄마의 마음을…… 읽어보지는 않았어? -읽지 않았어. 가끔 엄마의 기분은 읽은 적이 있었지만 그 깊은 내면 만은 들여다 보지 않았어. 아니, 볼 수가 없었지. -……. -볼 엄두가 나지 않았어. '네가 유빈이구나?' 아이는 자신의 엄마와 함께 집에 온 남자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주시하는 아이의 모습에 남자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 이 아저씨는 네 엄마의 친구야.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까 친하게 지 내자꾸나.' '…….'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만 있다.그런 아이의 태도에 질 린 남자를 여인이 방으로 이끌며 말했다. '우리 유빈이는 원래 낯선 사람과 얘기를 잘 안 하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아 요. 자자, 그보다 일단 방으로 가요.' '아,응.' '그리고 유빈아.엄마는 이 분과 중요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저쪽에 가 있어야 해. 알았지?' 탕 아이는 엄마와 남자가 들어간 방을 바라보았다. 닫혀진 문. 그 안에서 남자 와 엄마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아이는 문 근처에 쪼그리 고 앉아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 남자는 그 이후로도 점점 아이의 집을 자주 찾아왔고, 결국에는 그들 모 자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이는 손가락을 꼽아보며 중얼거렸다. '하나. 둘, 셋…….' 아빠가 돌아가신지 3년. 엄마에게는 충분히 외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남자는 엄마가 도박판에서 알게 된 어느 한 사업가였어.아마 같이 사업 을 할 셈이었는데 엄마와 맘이 맞았었나 봐. 그는 나와 친해지려고 노력했 는데 솔직히 그 속셈이 뻔히 보였지. 그 사람, 엄마에게서 내 능력에 대한 얘기를 들은 뒤였거든. 결국에는 난 그 사람의 뒤를 따라 다니며 사업가들 의 마음을 읽어야 했어. 왜냐하면 엄마가 부탁했으니까. 그 남자가 좋아하 면 엄마도 좋아했으니까. -너 바보니? 그건 '이용'당했을 뿐이잖아! -맞아. 하지만 난 이용당하면서도 엄마가 날 필요로 해주기를 바랬어.그 분 은 내 엄마였으니까.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나에게 남은 마지막 가족이었으 니까. -그런 건……가족이 아니야. -난 엄마를 떠날 수 없었어. 남자와 여인은 사실 상 부부가 되어버렸다.그 속에서 아이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분명 가족은 한 사람이 더 늘었건만 외로움은 한층 더 심해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웃어주었다. 자상하게 대해주었다. 자신을 필요로 해주었다. '난 엄마의 아들이니까.'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엄마는 날……자식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리 지금은 날 잘 대해주지만,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너 같은 건 내 자식이 아니야! 그녀의 원망이 잊혀지지 않았다.단지 내 능력 때문에 날 데리고 있어준 것 이라도 좋았다. 하지만 날 자식이라고 생각해주기를, 아무리 애물 단지이고 골칫덩어리 라도 자식이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랬다. 아빠와 서로 사랑해서 난 자식이기를 바랬다. '믿자.' 엄마를 믿는 거야. 엄마의 마음을 믿는 거야. 믿자. 믿어. 그러니까…… '절대로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보지마.'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유리 잔의 믿음이었던가. '자,잠깐만요. 유빈이가 깨겠어요.' '하하,뭐 어때? 아까 전에 봤는데 그 녀석 세상 모르게 자고 있더라고.' 어두운 방 너머에서 들려오는 엄마와 그 남자의 목소리.아이는 무표정한 얼 굴로 닫혀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그들의 속삭임에도 이미 익숙해져 버린지 오래였다. 모르는 척, 무지한 척 해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아이는 엄 마의 신음소리가 들려와도 신경 쓰지 않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 들어서 한시라도 빨리 아침이 찾아 왔으면……. '그나저나 당신은 운도 좋군. 황금알을 낳는 오리가 자신의 아들이라니.' 아이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남자의 말에서 황금 알을 낳는 오리가 자 신을 가리킨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콧 방귀를 뀌며 말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아들이라니! 아무리 내가 아이를 낳 지 못하는 몸이라지만 저런 자식은 내 쪽에서 사양이야.' '……!'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라니? 엄마가?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는 누웠던 몸을 일으키며 부릅 뜬 눈으로 문을 응시했다. '쉿. 쉿. 애 깨겠다. 목소리 좀 낮추라고. 그나 저나 그럼 저 꼬마는 대체 누구 아이야?' '내 남편의 친구 아이에요. 그 친구 가족이 저 아이를 데리고 L.A로 여행을 갔던 모양인데, 그 유명한 사건 알죠? '대재해'라고 불리우는? 그 사건으 로 저 아이 빼고는 모두 죽은 모양이에요. 남편이 보호자를 자청하고 이제 막 한 살 박이인 아이를 데려온 거죠. 내가 아이를 못 가져서 많이 아쉬워 했던 사람이니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신음 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아이는 천천히 몸을 떨었다. 이게 다 무슨 얘기일까? 대재해? 남편의 친구 아이? 그렇다면 난 친 자식이 아니었단 말인가? 밀려드는 현기증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뭐? 그거 꽤 기분 나쁜데. 대재해에서 살아남았단 말이야? 혹시 저 아이의 특이한 능력도 그 때문인가?' '모르죠. 어쨌든 전 저 아이가 싫어요. 저 마음을 읽는 능력만 없었더 라면 진즉에 버렸을 거에요.' '이런이런. 너무하잖아. 그래도 기른 정이 있을 텐데.' '저 아이가 내 남편을 빼앗아가버렸어. 불길한 아이라고요.마음을 읽는다니. 행여나 내 친자식이었으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자자, 그만하자고. 어쨌든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아이잖아. 저 아이만 있으면 으리으리한 대 저택에서 사장 님, 사모 님 소리 들으며 살게 되는 것도 꿈은 아니라고. 그건 그렇고 당신은 언제까지 죽은 그 사람을 남편이 라고 부를 거야? 당신의 남편은 이제 나잖아?' '흥. 매번 돈 생각 밖에 없는 사람을 뭐가 좋다고 남편이라 부르겠어요? 어 차피 혼인신고도 안했으면서.' '아,그런데 유빈이. 그 아이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이미 읽은 것은 아닐까?' '걱정말아요. 당신과 내 마음 만은 절대로 읽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으 니까. 설마 우리의 마음을 알았는데도 여지껏 집에 남아 있었겠어요? 알잖 아요? 그 아이, 주제에 내 말은 끔찍히도 따른다는 거.' '하하, 기특하잖아. 잘 좀 대해주라고.' '흥. 죽은 지 부모를 닮은 건지 어쩌면 저리도 미련한 걸까.' 그들의 작은 웃음 소리를 들으며 아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터 떠 오르는 이 감정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배신감과 절망감이었다. -우습지 않아? 그렇게나 마음을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도.정작 그 속 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의 입에 의해서라니. 말로 듣는 것만 해도 그렇게나 끔 찍했는데 그 마음을 읽었더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분명 제 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그런……. -하하. 결국 난 그 집을 나왔어. 그리고 2년 여 동안 이 도시를 헤매며 살 아왔어. 그런데 우스운 건, 어디를 가나 똑같았다는 거야. 사람의 마음이 란 건. 아이는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때때로 지하철 노숙자 생활을 하며,때때로 뒷 골목을 전전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엄마의 곁을 떠나 살아가는 건 그리 어 렵지 않았다. 돈이 필요하면 능력을 이용해서 경마나 도박,주식 따위를 해서 벌 수도 있었고,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하여 먹을 것과 잠자리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 모든 게 너무도 쉬웠다. -정작 어려웠던 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맞대며 살아가는 것이었어. 아마 이 능력이 없었더라면 견뎌낼 수 없었을 거야. 사람들에게 속거나 죽을 뻔 했 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거든. 그리고 난 볼 수 있었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과 그 악의(惡義)를.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였어.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속 마 음이 있었고, 그 속 마음에 숨어있던 것을 풀어보면 모두 하나 같이 악의 로 가득 차 있었지. 시기, 질투, 원망, 분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추악한 감정의 덩어리 들. 아무리 착하고 아무리 인정 많아 보이는 사람이라도,그 만큼 그에 반 하는 감정을 그 속에 숨기고 있었어.아무리 선행을 하더라도 그 뒤에는 댓 가를 바라는 마음이 뒤따르고 있었지. 아이는 이 모든 것을 보며 절망했다. 그리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떠한 사람의 마음에도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 배신. 배신. 배신. 어디를 가나 그것 뿐이었어. 진실이라는 건 내 앞에서 너무나 우스운 가식 밖에 되지 않았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어.모든 것 을 알 수 있었어. 그리고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지. " 유빈이 보여주던 사념의 세계는 사라져 있었다. 유리와 그는 다시 비가 내 리는 아파트 단지의 옥상에 서 있었다. 유리는 냉소하는 유빈을 바라보며 아 무런 할 말도 찾지 못했다. 그가 느낀 분노는 예전의 자신도 느꼈던 것이기 때문이다. -저 아이 마음을 읽는다지? -기분 나빠. -재수 없어. 오라 능력으로 인한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배척. -준호야! 주희야! -아빠……. 엄마? 냉정하게 돌아서던 자신의 친구들과 부모님. 지금까지 품어왔던 모든 믿음 이 뿌리째 흔들리는 그 느낌. 그 배신감.이 모든 것을 자신도 경험했었다.유 리는 그제야 유빈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그녀는 닮아 있었다! "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인 거야. 그래서 서로를 이 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끝내 그 속 마음을 알 수는 없지.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너도 알 수 있어! 이 오라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이 해하고 느낄 수 있어! 심지어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심정조차 이해 할 수 있어! 우리는 맘 놓고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도 없는 거야! 우리를 배척하는 사람조차 이해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어! 하하하,이런 거. 불 공평하지 않아? 이런 능력이 왜 필요한 거지? " 유빈은 키득 거리며 옥상의 난간으로 걸어갔다. 그는 난간에 아슬아슬 하게 서서 밑을 내려다 보았다. " 한때는 죽어버릴까도 생각했었어.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점점 고립 되어가 는 현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거든. 삶을 살아갈 의 욕도,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도, 내가 왜 태어났는지도 알 수 없었어." 그것은 유리도 절실히 느껴왔던 감정. 유리는 유빈이 금세라도 아파트 밑으 로 뛰어내릴 것만 같아서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빈은 그런 유 리를 돌아보며 예의 환한 웃음을 지었다. " 그러던 차에 너를 만났어. " " ……! " " 나와 같은 힘을 가진 이유리라는 아이를 알게 되었지. 그리고 그 아이가 당한 일들을 하나 하나 알게 되면서 난 분노할 수 밖에 없었어. " 유빈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옅은 붉은 색의 기운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다.그는 이 능력으로 유리가 당해왔던 모든 일들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 나와 너무나도 똑 같은 길을 걸어오는 널 보며 나는 주위의 모든 것들에 게 화가 났어. 왜 널 감싸주지 않는 거지? 왜 널 도와주지 않는 거야? 조 금만 이해해줬더라면 조금만 너에게 손을 뻗어줬더라면 넌 상처 받지 않 았을 텐데. 절망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네 주위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널 배신하고 외면했지. " 유리는 유빈의 말을 들으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그의 음성에서 연민을 느 낄 수 있었다. 그의 사념에서 짙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 처럼 자신을 이렇게 까지 완벽하게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빈은 그녀에게 손을 뻗어왔다. " 자, 나만은 널 이해해줄게. 나만은 널 받아주겠어.주위의 누가 뭐라고 하 든 나만은 언제나 네 편에 서줄게. " 유리는 그 손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느 누구도 뻗어주지 않던 손.그 손 을 지금 이 눈 앞의 아이가 뻗어주고 있었다. " 나와 함께 가자. 더 이상 네가 상처 받지 않게 해 줄게. 널 행복하게 해 주겠어. 더 이상 넌 혼자가 아니야. " ' 나는……. 나는……. ' 유리는 떨리는 손을 그에게로 뻗어갔다.자신을 향한 유빈의 미소띈 얼굴.그 미소는 너무나 자상하고도 친근했다. 그래. 그의 손을 잡는 거야.그럼 더 이 상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어.누구보다도 날 잘 이 해해 주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거야. 지금껏 유빈이 만큼 날 이 해해주는 사람은 없었잖아? 유빈이만이 오직……. -유리야. 그때 유리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유빈을 향해 뻗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네가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유리는 눈가가 달 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 다. 나를 따뜻히 감싸주고 아껴주던 사람이 있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 사 람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던 걸까? " 유리야? " 유리가 행동을 멈추자 의아해진 유빈이 그녀를 불렀다. 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낮게 답했다. " 아니야. "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은 게 아니야. 아무도 날 이해해주지 않은 게 아니야. " 오빠는, " 유가인. 그는 언제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가 위험에 처할 때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와주었 다. " 오빠는 나에게 손을 뻗어주었어. "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항상 유리 편이니까. " 오빠 만은 언제나 날 이해해줬어. " 어째서 나는 지금까지 그를 잊고 지낸 걸까? 어째서 혼자라고 생각했던 거 지? 이렇게나 날 아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이렇게나 나와 함께 해준 사람이 있었는데. 유리는 의지가 깃든 눈동자로 유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난 혼자가 아니야! 오빠가 있으니까.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 " 유……가인. 그를 말하는 거야? " 굳은 얼굴로 말하는 유빈. 유리는 그가 가인의 이름을 언급하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네 말대로 죽고 싶을 때도 있었어. 내가 왜 태어났는지,왜 이런 힘 으로 고통을 받는지 모든 게 의문스럽고 괴로웠던 적도 있었어.하지만 그 런 나를 구해준 건 오빠야. 오빠가 있었기에 난 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어.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어. 내게 살아갈 의미를 준 건 바로 오빠야! " 유리는 유빈을 노려보았다. "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어. 그래서 서로 싸우며 다투기도 하고,때 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해. " 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 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거고, 이해해 줄 수 있는 거야.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고, 실망할 때가 있으면 감동받을 때가 있어.누군가를 배신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어! " 유리는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었다. "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해주겠다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어떻게? 사람 이란 원래 상처받고 불행한 존재인 걸.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건데. 자신이 상처를 받지 않으면 남에 게 상처를 주게 돼. 불행을 모르면 행복도 몰라. " 유리의 외침이 유빈의 마음을 관통했다. " 그런 고민도 걱정도 없는 인형 같은 삶은 거부하겠어! " 유빈은 그런 유리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소년은 낮게 쉰 목소리로 물었다. " ……그래? 그게 네 대답이야? 다시 생각해 볼 마음은 없어? " " 난 이미 마음을 정했어. " 흔들림 없이 확고한 유리. 그 모습에 유빈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차갑게 말 했다. " 그렇다면 지금부터 너와 난 적이야. " 덜컹! 순간 유리의 뒤에 있던 옥상의 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깜짝 놀란 유리 가 돌아본 그곳에는 수 십명의 사람들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천천히 옥상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유리는 재빨리 문 가에서 물러나며 유빈에게 소리쳤다. " 무,무슨 짓이야 이건? 이 사람들은 누구야? " "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 유빈은 여전히 사심 없이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더 이상 따뜻 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는 마른 침을 삼키며 옥상으로 들어선 열 여 명 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같이 눈들이 풀리고 무표정한 것이 제 정신들 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거야? ' 혹시! ' 유리는 이를 악물며 유빈을 노려보았다. " 너! 설마 오라 능력으로 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있는 건? " " 응. 맞았어. 간단하잖아,이런 거? 개인의 인격을 억누르고 사념으로 명령 하면 꼭두각시 처럼 내 말을 따르게 되지. 유리는 해본 적 없어? " " ……! " 유리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사람의 사념을 읽어 들 이는 것. 그것이 유리의 능력, 마인드 디텍트다. 하지만 이것을 반대로 말하 자면 사람의 사념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유리는 그 것을 최소화하여 상대에게 재핑을 일으키는 것 까지는 해봤지만 유빈 처럼 상대의 의식을 밀어내고 그 몸을 강탈하는 방법은 생각 조차 해보지 않았다. 이런 유빈의 행위에 유리는 혐오감에 가까운 욕지기를 느꼈다. "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이거야 말로 절대로 해서는 안될 행동이잖 아! 사람들이 우리를 더 미워하게 만들 셈이야? 이러면 우리를 배척한 사 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 " " 어차피 먼저 미워한 것도 그 쪽. 먼저 배신한 것도 그 쪽. 그렇다면 내쪽 에서 먼저 배신하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이왕 미움받는 거 확실하게 미움받는 게 좋잖아? 후후. " 유빈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키득 거렸다. 그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오라 능력으로 인해 옅은 붙은 빛을 흘리고 있었다. 유리는 옥상의 난간을 따라 넓게 그녀를 둘러싸는 사람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식 은 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이 사람들로 날 공격하려 해도 아 무런 소용이 없을 걸? " " 아니. 불가능해. 너의 힘은 나에게 못 미치니까. 네 능력으로는 내가 걸 어논 정신 조작을 풀지 못해. " " ……! "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느꼈던 것이었다.유빈의 자취를 쫓아오는 과정에서 그가 곳곳에 남긴 사념들을 읽으며 그 힘이 자신 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같은 능력자인 자신의 정신 은 침범해오지 못한다는 거였다. ' 하지만 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가는……. ' 유리는 옥상의 난간에 늘어선 사람들을 바라보며 긴장했다. A.I슈츠로 상대 한다고 해도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민간인들이었다.유리로서는 그들을 상 처입힐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유빈은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저런 수를 쓰 는 게 분명했다. " 아,하지만 걱정마. 야만적인 방법을 쓰려는 건 아니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거든. " 유빈은 유리의 생각을 읽었는지 난간의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러자 사람들은 유빈의 뜻에 따라 천천히 난간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유리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 자,잠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 그녀의 외침을 무시하며 열 여명의 사람들은 옥상의 난간에 위태 위태하게 올라섰다. 유빈은 그 광경에 미소를 띄며 유리에게 말했다. " 유리야, 이제부터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한 명도 남김 없이 하늘을 날게 될 거야. " " 뭐…? " 유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하지만 사람은 하늘을 날지 못하잖아? 눈 깜짝할 새에 지상으로 떨어져버 리겠지. 그리고……. " 유빈은 검지로 사람들을 가리키며 권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 쾅! " 그 순간, 유리의 뇌리로 지상에 떨어진채 산산조각이 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리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 안돼! "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유리의 생각을 읽었는지 유빈은 심 통이 난 얼굴로 말했다.그 모습이 지금의 상황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천 진난만했기에 되려 소름이 끼쳤다. " 나 안 미쳤어. 그러니까 네가 내 말만 잘 따르면 이 사람들이 하늘을 날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잖아. " 유리는 필사적으로 난간에 서있는 사람들을 제 정신으로 돌리기 위해 오라 능력을 전개했지만, 유빈이 친 정신 장벽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유빈은 그 녀의 부질 없는 몸부림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 소용 없는 짓이야. 불가능하다고 했잖아. " " 이런 짓 하지마! 제발! " 유리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이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죽는다는 건 생각하 기도 싫었다. 끔찍했다! 그리고 그것이 유빈이 노린 바이기도 했다. 그는 유 리에게 다시 손을 뻗으며 말했다. " 자, 마지막으로 선택할 기회를 줄게. 나와 함께 하겠어? 아니면 이 사람 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겠어? " 말이 선택이지 이건 강요였다.유빈도 그 점이 맘에 걸렸는지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 이런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뭐,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랄게. " " 나는……. " 유리는 유빈의 뻗은 손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수 많은 생각 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가인의 얼굴. ' 오빠……. 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 유리의 떨리는 손이 유빈을 향해 뻗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 멈춰! " 그때 유리와 유빈의 손길을 가르는 외침. 유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목 소리는……이 목소리는! " ……오빠? " 유리가 돌아본 옥상의 출입구. 그 곳에 서 있던 것은 평소와 같이 한성 고 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유가인이었다. 그는 급하게 달려왔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유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 오빠……. 어떻게, 어떻게 여길 알고? " " 하아. 하아. 손목의……무전기로. " 가인은 허리를 숙여 숨을 토하면서도 왼쪽 손목에 찬 무전기를 들어보였다. 유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무전기? 하지만 난 위치 추적 신호도 보내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질문은 가인의 뒤에서 나타나는 한 여인이 답해주었다. " 시더 웰리스에게 부탁해서 피스 핑크의 위치 추적 신호를 가동시켰다. " 그렇게 답한 이는 역시 교복 차림의 성마리였다. 그들은 연무관에서 시더의 연락을 받은 후, 시더가 전송하는 위치 추적 신호를 따라 유리를 찾아낸 것 이다. 가인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유리를 향해 물었다. " 유리야,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어? " " 오빠……. " 가인의 목소리를 듣자 유리는 그 동안 참고 있던 눈물이 핑 돌았다.역시 이 번에도 그는 자신이 가장 곤궁에 처할 때 나타나주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인과 자신을 강하 게 연결시켜주는 고리이리라. 유리는 울먹이며 가인에게 다가갔다. " 오빠, 난. " 하지만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소년.유빈이었다. 그는 유리를 돌아보며 싸늘 하게 미소지었다. " 유리야, 아직 너와 내 얘기는 끝나지 않았잖아? " 그제야 유리는 다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서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 인은 유리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 막는 유빈의 행동에 의아해 하며 물었다. " 유리야? 누구니, 그 아이는? " " 아, 그게……. " 말을 흐리는 유리.순간 그녀를 대신하여 유빈이 낮게 으르렁 거리며 가인을 쏘아 보았다. " 끼어들지마. 유리는 지금부터 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 파칭! " 읏! " 가인은 강한 정신적 충격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뭐,뭐지? 이 바늘로 머리 를 찌르는 것 같은 충격은?! 유빈의 눈길을 마주하는 순간, 머리 속이 타오 르는 것 처럼 화끈거려 손으로 이마를 감싸야 했다. 그 모습에 유리가 깜짝 놀라 외쳤다. " 오빠! " 비틀 거리는 가인을 마리가 부축하며 놀란 표정으로 유빈을 바라보았다. " 오라 능력? 너, 오라 능력자인가? " " ……! " 마리의 말에 역시 놀라 눈으로 유빈을 응시하는 가인. 그 둘의 시선을 받으 며 유빈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에게 유리가 소리쳤다. " 무슨 짓이야! 감히 오빠에게! " " 경고했을 뿐이야. 우리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 유빈은 싸늘한 표정으로 가인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증오에 가까운 분 노가 실려 있었다. " 지금 옥상의 난간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이겠지? 허튼 행동하지 마라. 이 사람들이 떨어지는 꼴을 보기 싫으면. " " 뭐? "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혹해하는 가인과 마리. 그런 둘에게 유리가 울상이 되 어 소리쳤다. " 오빠! 이 아이는 나와 같은 힘을 가진 오라 능력자야! 사념을 조작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뜻대로 조정하고 있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사람 들을 전부 옥상에서 떨어뜨릴 거래! " " 그런……. " 오라 능력자? 저 녀석이 오라 능력자라고? 가인과 마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유빈을 주시했다. 과연 유리의 말대로 그의 몸에서는 오라 능력자의 증거인 오라 패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유리의 분홍 빛보다 좀 더 핏빛에 가까운 붉 은색. 지금 저 녀석은 그 오라 능력으로 우리를 협박하고 있는 건가? 인질 을 잡고 있는 거야? " 그래. 인질이다. 이제 좀 알 것 같나? 그러니 거기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 어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죄 없는 민간인들이 다친다. " " 큭! " 가인과 마리는 자신들의 마음을 읽고 답하는 유빈의 모습에 침음했다. 그들 은 아직도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유리의 또래로 보이는 저 아이가 정 말 오라 능력으로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있단 말인가? 왜? 어째서? 무슨 이 유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유빈은 그런 가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유리에게 말했다. " 자, 더 이상 날 기다리게 하지 말아줘. 날 따라오겠어? 아니면 모두 떨어 지게 할 거야? " " ……! " 저 자식! 지금 유리를 협박하고 있잖아? 가인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그 에게로 뛰쳐 나가려고 했다. 그때 그런 가인을 재빨리 말리는 마리. 유빈은 인상을 가볍게 찡그리며 가인을 돌아보았다. " 아무래도 이렇게 말로만 해서는 실감하지 못하는 건가,너도 유리도? 좋아. 지금부터 한 사람씩 밑으로 떨어뜨리겠어. 그럼 좀 더 고분고분해지겠지? "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러자 난간에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몸을 주춤거리며 뛰어내릴 채비를 하는 게 아닌가? 유리는 그 광 경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비명을 질렀다. " 안 돼! 하지마! 갈 게! 내가 가면 되잖아? 그러니까 제발 그 사람들은 건 드리지마! " " 유리야! " 가인과 마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유리를 응시했다.심장이 점점 거칠게 뛰 어 올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유리가 저 정체불명의 아이를 따라갈 판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두 손 놓고 구경만 해야 하는 것이다! 유빈은 태도를 바꾸는 유리의 태도에 살며시 들었던 손을 내렸다. " 그래. 나도 쓸모 없는 살생은 피하고 싶어. 네가 따라만 와준다면 이런짓 을 할 이유도 없지. " " 왜, 왜 나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거야? 내가 아니더라도…… 굳이 내가 아 니더라도 상관은 없는 거잖아? 응? " 유리는 애원조로 호소했다. 하지만 유빈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네가 아니면 안 돼. 반드시 너여야만 해.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을, 나와 같은 능력을 공유한 사람. 유일하게 날 이해해 줄 사람. 영원히 내 반 쪽이 되어 줄 사람. ……그게 바로 너야, 유리야. " 그것은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완벽한 프로 포즈였다. 가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유빈의 얼굴을 보아하니 진지하기 그지 없는 게 아무래도 진심인 거 같았다. 저 꼬마 자식! 바,반 쪽이라니……. 이 상황에서 잘도 터무니 없는 소리를! 유빈은 여전히 주저하는 유리를 주시하다가 물었다. " 혹시 유가인. 그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거야? " " ……! " 정곡을 찔린 유리는 두 눈을 부릅 뜨며 유빈을 노려보았다. 유빈은 저편에 서 당황스러워 하는 가인을 경멸의 눈빛으로 쏘아 보며 유리에게 속삭였다. " 어차피 너의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는 남자다.계속 곁에 있어봤자 너의 마 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거야. " " 시,시끄러워! " 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쳤다. 나도 알아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다 고! ' 오빠는……날 여자로 봐주지 않으니까. ' 언제나 그 눈은 날 떠나 다른 이를 향하고 있으니까. 유리는 가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한시민. 그녀를 떠올리자 기분이 울적해 져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에게 유빈의 속삭임은 계속되었다. " 어차피 네가 떠나도 그에게는 별 상관 없는 일이잖아. 너가 그를 생각하 는 만큼 그가 널 생각하고 있을 거 같아? 어차피 그에게는 널 대신할 사 람이 많아! 언제나 다른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 히히덕 거리며 네 마음을 아프게 했잖아? 뭣 때문에 그런 남자의 곁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 거지? 어차피 상처만 받을 거면서. " " 시끄러워! 시끄러워! " 유리는 강하게 도리질 쳤다. 그가 하는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어디에도 부정할 구석은 없다. 자신은 가인에게 있어서 그를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 그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 나라면 그러지 않아. " 유빈은 비에 젖은 유리의 앞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 나라면 절대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아. 유리,너는 내게 있어서 그 누구 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소중한 사람이니까. " " ……! " 유리는 처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유빈은 그야말로 유리가 절실히 느끼는 감정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이것이 마음을 공유한다는 느낌일까.그녀와 같은 힘을 가진 유빈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위로였다. 아마 가인도 이렇게 까지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는 못할 것이다. " 누구보다도 널 소중히 여겨줄게. "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감미로웠다.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를 따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난 그 를 따라가는 수 밖에 없는 건가? " 그렇지 않아! " 순간, 귓가를 때리는 가인의 외침. 그 소리에 유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 다.그를 돌아 보았다. 가인은 주먹을 움켜쥔 채 소리치고 있었다. " 분명 나 때문에 유리가 아파했을 지도 몰라! 상처를 입었을 지도 몰라! 난 둔한 녀석이니까! 서투르기 짝이 없는 녀석이니까! " 하지만! " 하지만 유리는 소중해! 그 누구도 유리를 대신할 순 없어! 나에게도! 시 민 씨에게도! 진우 씨에게도! 마리 선배에게도! 유리는 이미 우리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가족이야! " 가인은 유리를 돌아보며 외쳤다. " 널 내버려두지 않아! 절대로 외롭지 않게 하겠어! 유리야,넌 결코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네가 필요해! " " 오빠……. " 유리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뭔가가 목으로 치밀어 오르 는 것 같았다. 벅찬 감동이 그녀의 가슴을 흔들고 있었다. 가인의 곁에 있던 마리도 유리를 향해 미소지었다. " 그렇다. 넌 이미 우리에게는 더 이상 없어서는 안 될 동료다.널 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지킨다! 무엇보다……. " 마리는 유빈을 향해 강하게 소리쳤다. " 인질극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자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치 않아! " " 네 녀석들이! " 유빈은 이를 갈며 손을 들어 올렸다. " 그렇다면 인질극이 뭔지 가르쳐주지! 인질범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인질은 죽는다! 그것이 인질극의 기본 중의 기본이야! " 그리고 거칠게 내려지는 손. 그와 동시에 난간 위의 인질들이 옥상 바깥으 로 몸을 날리려고 했다.유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가올 참극에 비명을 질 렀다. " 그만 둬! " " 하아아아아아아아! " 순간 오른 주먹을 움켜쥐며 기합을 내지르는 가인. 그의 오른 손으로 푸른 오라의 회오리가 모여들었다. 그는 주먹을 하늘로 쳐올리며 오라를 전개했다. " 천공권 선풍! " 그러자 옥상의 난간 밖으로 거대한 선풍계의 회오리가 휘몰아쳐 올랐다. 그 수평 방향으로 넓게 전개된 회오리 바람은 그 위로 바람의 줄기들을 끌어 들 이며 굉장한 흡입력으로 떨어지려던 사람들을 끌어 올렸다. 회오리의 중심으 로 모여들던 사람들은 천공권 선풍이 사라지자 다들 옥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 유우가아이인---------! " 분노의 고함을 내지르며 옅은 양홍(洋紅) 빛의 오라를 내뿜는 유빈. 가인은 재빨리 마리와 함께 유리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감정 만을 앞세우는 건 독선(獨善) 이고 아집(我執)이야! 난 너에게서 유리를 지켜 보이겠어! 마리 선배! 유리야! " " 음! " " 오빠! " 가인과 마리, 유리는 자신들의 왼쪽 손목에 달린 무전기를 반원으로 그리며 소리쳤다. 간다! " 변신! 피스-! " 가인의 오라는 대원소(大元素) 풍(風)을 다스리는 힘. 오라 패턴! " 블루! " 마리의 오라는 모든 것을 베어내는 절단(切斷)의 힘. 오라 패턴! " 레드! " 유리의 오라는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마인드 디텍트. 오라 패턴! " 핑크! " 피스 대원의 음성 인식이 시작됨과 동시에 미세 분자 상태로 그들의 몸 주 변에 머물러 있던 A.I 컴플리트 세트가 일정 주파의 신호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슈츠는 마치 그림자 처럼 그들의 몸을 감싸며 착용되었다. 그리고 오라 패턴 발현! 검은 색의 A.I슈츠는 착용자의 능력에 따라 그 색깔을 변화 시키며 빛을 뿜어냈다. 푸른 A.I슈츠의 대원, 유가인은 유빈에게 소리쳤다. "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라 능력자 끼리의 싸움은 피하고 싶 다. 우리의 적은 몬스터 잖아! " " 흥. 무지하기 짝이 없는 소리구나! 오라 능력자니 몬스터니 애초에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 " 뭐? " 유빈의 뜻 모를 말에 가인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지? 아무 의미가 없 다니? 하지만 유빈은 그런 가인을 가볍게 비웃어주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그 의 왼쪽 손목에는 낯익은 무전기가 차여져 있었다. " 그리고 A.I 슈츠는 너희들만의 전매품이 아니지. " 우우웅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양홍빛의 오라. 유빈은 왼손을 반원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 " 변신! 피스 카민(CARMINE)! " " ……! "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 순간 유빈은 가인들과 같은 형 태의 A.I슈츠를 장착한 것이다! 그의 오라 패턴, 카민은 마리와 유리의 중간 색인 양홍빛을 발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는 신음을 흘렸다. " 그럴리가! A.I 컴플리트 세트는 피스 대원 외에는 지급 받을 수 없을 텐 데! ……네 녀석, 피스 대원이었던 거냐! " " 뭐, 마음대로 생각하시지.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건 자유니까. " 유빈은 건성으로 답하며 옥상에 쓰러져 있는 민간인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 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 역시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나.유리 만 데리고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는데. " 유빈의 A.I 헬맷의 사이로 양홍빛의 눈동자가 번뜩였다.그는 어딘가 긴장감 이 결여된 목소리로 말했다. " 내 오라 패턴은 카민. 지금부터 너희들의 심층 구석 구석을 파헤쳐서 죽 고 싶을 정도로 괴롭히고 또 괴롭혀 주지. " 촤자자자자작! 순간 유빈을 중심으로 비가 오는 옥상의 풍경이 하얗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 다. 이 괴 현상에 가인과 마리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 뭐,뭐야 이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 " 후후,후후후……후후후후. " 그 백색의 공간에 유빈도 녹아들듯 사라져가기 시작했다.단지 그의 낮은 웃 음 소리만이 메아리치듯 공간에 울려퍼질 뿐이었다. 유리는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경계 했다. 유빈이 지금 부터 하려는 일을 그녀 만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 여기는 내가 만든 정신 세계……. 그 때 가인들의 마음 속을 파고 드는 유빈의 목소리. 가인은 유리 이외의 존재가 마음으로 대화를 시도하자 그 이질감에 몸을 떨었다. 이 녀석! 정말 로 유리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 - 마인드 브레이커(Mind Breaker)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리고 가인과 마리의 몸도 공간 속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 오빠……. 하얀 백색의 공간 속에서 들려오는 어린 여자 아이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처음에는 희미했다가, 차츰 차츰 뚜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상당히 낯 익 은 목소리였다. - 신아, 오빠가 많이 피곤한 거 같으니까 그냥 자게 내버려두렴. - 그래.그래. 아빠하고 같이 휴게소 우동이나 먹으러 갈까? 그리고 뒤를 이어 들려오는 성인 남녀의 목소리. 이 역시 낯익은 목소리다. 무엇보다……. ' 신이? 신이라고! ' 순간 번쩍 뜨이는 가인의 눈.그러자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리운 자신들 의 가족이었다. 신이는 가인이 눈을 뜬 것을 빤히 쳐다보며 소리쳤다. " 와! 오빠 깼다! 오빠! 오빠! 어서 일어나 봐. 휴게소 왔단 말이야! " ' ……휴게소? ' 그게 무슨 소리지? 가인은 이 갑작스런 상황에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그 리고 뒤를 잇는 당황스러움. 혼란. 주위를 둘러 보니 자신은 자동차의 뒷 좌 석에 몸을 눕히고 있었고, 앞 좌석에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의 소매자락을 끌어당기고 있는 신이! 어째서 여기에 신이와 부모님이 있는 거지? 어째서? 내 가족들은 분명 작년 에 있던 교통 사고로 모두……. ' 무엇보다 난 그 녀석과……. ' 그래. 유리를 위협하던 새로운 오라 능력자! 그와 대립하던 중이었을 텐데! 가인은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그래. 이건 그 녀석의 소행인가? 분명 녀석의 능력은 유리와 같은 마인드 디텍트라고 했으니 나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줘도 이상할 건 없지. 그래. 모두 환상인 거다. 거짓인 거야! " 아, 그래? 휴게소? "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가인의 입에서는 잠에서 덜 깬 태평스러운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두 눈을 부릅 떴다. 어라? 어라라? " 오빠아, 얼른 우동 먹으러 가자! 휴게소 우동! " " 시,신아. 그럼 이 아빠와는? " " 아빠는 엄마하고 사 먹고! " " ……. " 상처 받은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뒤로 하며 가인은 얼떨결에 신이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뒤를 돌아보니 울적해하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가인과 신이에게 손을 흔드는 어머니가 있었다. 가인은 그녀에게 멋쩍게 손을 들어 주며 신이와 휴게소로 향했다. '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말과 행동이 멋대로 나오고 있어? ' 태평스러운 겉 모습과는 달리 가인의 속 마음은 끊임 없는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의지를 벗어나 행동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일까? 이것도 그의 능력인가? 환상? 하지만 환상이라고 하 기에는 묘하게 현실감이 넘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낯익은 상황이라니! ' 하지만 환상이 아니라면…… 어째서 나에게 이런 걸 보여주는 걸까? ' 어째서 신이와 부모님의 모습을? 거기다 이 휴게소는……. " 아, 오빠! 나 호도 과자도 먹고 싶어! " 갑작스런 신이의 말에 가인의 의식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그래. 그래. 하지만 우선 우동이 먼저……. ' " 그래. 그래. 하지만 우선 우동이 먼저야. " 아……. 가인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이 시간. 이 장소. 그리고 신이와의 대화.이 모든 게 자신의 기억 속에 있었던 것 임을 깨달은 것이다. 가인은 떨리는 눈 으로 신이를 응시했다. 신이는 그런 오빠의 시선에 방긋 웃으며 말했다. " 응! 그리고 나 구운 감자도 먹고 싶어! 아, 핫바! 핫바도! 에,또……. " " 안 돼!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 거잖아? 하나만 골라. " 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흘러 나오는 목소리. 분명 얼굴은 미소를 띄고 있 을 것이다. " 에에? 나 다 먹고 싶은데! " " 오빠가 말했지? 음식 욕심 내는 사람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자,우 선 화장실 부터 가자. " " 우우. 그래도 이렇게 가족끼리 여행가는 거 처음인데……. 나 휴게소에서 하고 싶은 거 많았단 말이야. " 입을 뚱하게 내밀면서도 가인의 말을 따르는 신이. 그 모습에 가인은 자신 의 머리를 긁적이며 반성했다. 그래……. 이렇게 가족 여행을 가는 것도 이 번이 처음이었지. 그럼 좀 더 하고 싶은 데로 하게 해줄까나. ' 처음? 가족 여행? ' 가인의 의식은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의식과는 달리 여전히 말과 행동 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인은 신이의 머리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 알았어. 오빠가 잘못했어. 사실 나도 먹고 싶은 거 많았거든? 신이 말 대 로 하자. " " 에? 진짜? " " 응! "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신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기 시 작했다. " 와! 와! 오빠! 좋아해! " " 시,신아…! " 허리에 매달려 오는 신이의 행동에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 했다.그러 나 그런 행동과는 달리 가인의 의식은 긴장한 눈초리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 고 있었다. 그 시선에 편의점에 꽂혀있던 신문이 들어왔다. 신문에 기재된 날짜를 볼 수 있었다. ' 아……. ' 가인은 몸을 떨었다. 2031년 3월 14일. 그 날은 바로 가인의 가족들이 여행을 하다 사고를 당했던 날이었다! 뚜벅. 뚜벅. 뚜벅. 어두운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그렇게 걷고 있던 마리는 한순간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여기는 어디지? '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분명 가인과 함께 아파 트 단지의 옥상에 있었을 텐데……. 피스 카민. 그의 소행인 걸까? 뭔가 알 수 없는 술수에 빠진 건가? ' ……? ' 걸음을 멈추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그제서야 마 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몸이 뜻 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육체의 자유를 빼앗긴 건가?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닌 거 같은데. ' 하아. ' 결국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고 마리는 잠시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우선 자 신과 주위의 상태를 살펴 보았다. 그녀는 예의 검도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 고 손에 쥐어진 목도.어딘가 지금의 자신보다 몸이 왜소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곳은…… ' 도장? ' 무영신풍류의 도장이었다. 이 익숙한 복도는 분명 자신의 집과 도장을 연결 시켜주는 통로였다. 하지만 왜 이렇게 어두운 걸까? 왜 나는 이런 늦은 시각 에 도장으로 향하고 있는 거지? 끼익. 결국 복도의 끝에 다다른 그녀는 도장의 문을 열었다.목조로 건축된 건물의 문은 나무가 부대끼는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려졌다.그러자 어둠을 밝혀주는 도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촛불이 켜져있었다. 약하지만 여러 개의 촛불들이 도장을 밝혀주고 있었다. ' 아……. ' 그리고 도장의 한 가운데에 정좌를 하고있는 한 소년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예의 하얀 검도복을 입고 목도를 옆에 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리는 몸을 떨었다. 이건……. 이건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 기다리고 있었어. " 너무나 익숙한 소년의 목소리.그 목소리를 듣자 마리는 자신의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동요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 는 냉정하게 흘러나왔다. " 약속대로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결투다. " 후계자? 결투? 마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년은 그런 마리의 으름짱에 미 소지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리의 전신으로 한 줄기 전율이 흐른다. " 바라던 바야. 그럼 시작할까? "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롭게 목도를 들어올리는 소년. 마리는 가볍게 콧 방귀 를 뀌며 마주 목도를 들어올렸다.그제야 그녀의 의식은 깨달을 수 있었다.지 금 자신이 처한 상황도 깨달았다. 이것은…… ' 2년 전에 있었던 후계자 결투! ' 그리고 눈 앞의 소년은……. ' 아인아! ' 자신의 남동생, 성아인! 바로 그였다. 어째서? 아인이는…… 아인이는 2년 전에 죽었을 텐데……. 어째서! " 반드시 이길 테다! " ' 안돼! 그러지마! ' 낮게 아인에게 소리치는 마리와 반대로 절규하는 그녀의 마음. ' 이 결투 후 아인이의 목숨은……! ' 하지만 결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오빠? 마리? " 유리는 홀로 백색의 공간에 남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희미한 안개들 이 시야를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유리는 불안한 가슴을 억누르며 다 시 가인을 소리쳐 불렀다. " 오빠! " 오빠! 오빠…! 오빠……! 오… 하지만 외침은 메아리 처럼 울리다가 다시 안개 속으로 묻혀 간다. 유리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며 생각했다. ' 다들 어디를 간 거야? ' 유빈의 짓인 걸까? 유빈이 오빠와 마리를 데려간 걸까? 그녀는 긴장을 늦추 지 않으며 오라를 전개했다. 옅은 핑크 빛이 오라가 그녀의 몸에서 흘러 나 왔다. ' 분명……. ' 분명 이 공간은 유빈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 임이 틀림 없었다. 아마 자신 들은 여전히 아파트의 옥상에 있을 것이다.단지 안개속에 있다고 '느끼는 것' 뿐이다. 그의 사념에 의해서. ' 하지만 이렇게 까지 능력을 응용해낼 수 있다니. ' 유리는 유빈과 같은 오라를 가진 능력자로서 순수히 그의 실력에 감탄했다.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자신으로서는 생각도 해낼 수 없는 방법으로 그는 오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차이는 그와 자신의 오라에 대한 마음가짐이었다.유리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을 꺼리며 자신의 능력을 배타해 왔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을 꺼리지 않고 십분 자신의 능력을 활용했었 다. 타인의 마음을 농락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아마 자신은 절대 로 그와 같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 그때 유리의 마음 속으로 유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화들짝 놀라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돌아 보았다. 유빈이 자신의 마음을 읽고 대답해 온 것이다. 같은 능력자이지만 유리가 그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반면, 유빈은 자유자재로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에 자존심이 상한 유리가 마음속으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렇게 비겁하게 숨어있지만 말고 내 앞으로 나와! 이런 눈속임도 당장 그 만둬! " 숨어 있던 게 아니야. " 작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며 유리의 앞에 있던 안개가 좌우로 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양홍빛의 AI슈츠를 입은 유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AI 헬맷이 해제된 얼굴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 단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단 둘이 있고 싶었을 뿐이야. " 유리는 그 말에 인상을 굳혔다. 역시 네가 오빠와 마리를! 유빈은 그녀의 분노하는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감싸고 있는 안개들을 둘러 보았 다. 그는 좌우로 손을 펼치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 그나저나 어때? 내가 초대한 세계는? 인간의 사념을 잘만 조작하면 이렇 듯 상대의 오감을 이용하여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해. 재미있 지 않아? " 유리는 그런 그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 재미……라고? 넌 이게 재미있어? 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기만하고 사념을 빼앗는 행위가 재미있단 말이야? " " 어차피 우리의 능력은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조작하는 행위 다. 단지 너와 나의 차이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느냐 소극적으로 사 용하느냐의 차이 밖에 없어. 너도 이런 능력을 줄곧 써왔으면서 새삼 거 부하는 반응을 보이는 건 왜지? " " 아니야! 난! " 유리는 유빈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려고 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유리의 능력 마인드 디텍트는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힘이었다.사 념을 읽어내는 힘이었다. 이미 그것 부터가 상대의 마음을 기만하는 행위였 던 것이다. 유리는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 하지만, 하지만 틀려! 마음을 읽는 것과 마음을 빼앗는 건 틀리다고! " " 그래. 엄연히는 틀리지. 그러나 그 본질은 같아.어차피 시간의 차이일 뿐 이야. 네가 나와 같은 마인드 브레이커가 되는 건. " " 마인드……브레이커? " 뭐야, 그건? 유리의 낮은 되물음에 유빈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를 대하니 이유 없는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해온다. 유빈은 작게 키득거리며 답했다. " 그래. 마인드 브레이커. 타인의 마음을 빼앗는 능력. 타인의 마음을 파괴 하는 능력. 이 능력으로 상대의 정신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을 마인드 브레 이커라고 해. " 유빈은 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 그리고 너에게도 마인드 브레이커가 될 가능성이 있어. 아니, 넌 분명히 각성할 거야! 아무리 마인드 디텍트라는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려고 해도 네 능력은 그걸 원치 않아! 네 능력은 자유로워지기를 원해! 왜 스스로를 그렇게 억압하는 거지? 뭘 두려워하는 거야? 네 오라가 마음껏 날뛰도록 내버려둬. 그러면 한층 편해질 거야. " " 그래서 너 처럼 되라고? " 유리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 상대에게 상처만 입히고, 고통만 주는 사람이 되라는 거야? 타인의 믿음 을 저버리고 그 마음을 희롱하라는 거야? " " 믿음? 우습구나. 인간의 믿음이란 게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리고 상처만 입히고 고통만 주는 게 뭐가 어때서? 어차피 인간 들은 상대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보다 더한 짓을 하잖아? 거짓말 을 하고 사기를 치지. 그런 그들과 우리가 뭐가 다르다는 거지?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배려해야할 이유는 없어. " 유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유빈은 너무도 일찍 인간에게 절망해버렸다.자 신과는 달리 인간에게 일 말의 애정도 없었던 것이다.아무래도 더 이상의 대 화는 무익했다. ' 인간……? ' 유빈의 말을 듣고 있던 유리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껴 물었다. " 인간……이라니? 넌 마치 네 자신이 인간이 아닌 것 처럼 말한다? " " 하하? 인간? 우리가 인간일리 없잖아? " 유빈은 그런 유리의 말이 우습다는듯 킥킥거렸다. 유리는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 무슨……그게 무슨 소리야? " " 그 분이 말씀하셨어. 우리 오라 능력자는 인간들과 다르다고. " 그 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마유빈?! 유빈은 영웅을 동경하는 소년 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 우리는 인간이면서도 이런 오라 능력을 가 지고 있지? 인간이란 거 약해빠졌잖아? 이런 이상한 힘 같은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고. "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외쳤다. 뭔가가, 뭔가가 이상했다. 유빈의 상태가 이상했다. 유리는 그제서야 유빈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이질 감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 았던 것이다! " 오라 능력자가……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야? " " 그래! 인간과는 다른 존재지!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를 핍박하고 배척해왔 던 거야! 본능적으로 자신들과 다른 종이라는 걸 느꼈던 거지! 그 분은 말씀하셨어. 오라 능력자는 인간들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고! " " 그 분……이라니? " " 우리 오라 능력자를 언제나 걱정하시는 분. 우리 오라 능력자들의 유토피 아를 재건하실 분! 유리야, 난 그 분의 명을 받들어 널 데리러 온 거야! " 유리는 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유빈이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라 능력자가 인간이 아니라느니,오라 능력자들의 유토피아를 재건해야 한다느니 ……이 감당 못할 말들은 다 뭐란 말이지? ' 미쳤어. '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유빈은 그런 유리의 맘을 읽었는지 씁쓸 한 미소를 머금었다. " 물론 지금 당장 믿을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그 분을 만나면 생각이 달 라질 걸? 내가 한 말이 옳았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 " 유리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유빈의 배후에 있던 그 분이라는 사람 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는 것을. 유빈이 저렇게 삐뚤어지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는 걸! 인간의 마음을 저렇게 까지 왜곡시킬 수가 있다니,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유리는 유빈을 저렇게 만든 그 분이라는 사람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유빈은 유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자, 날 따라가자. 그 분이 만드는 세상에서라면 더 이상 누구의 핍박도 받지 않으며 살 수 있어. 너와 나 만의 왕국을 만드는 거야! " " 오,오빠와 마리를 어떻게 했어? 오빠와 마리를 돌려줘! " 유리는 두려움에 목소리를 떨며 황망히 가인과 마리를 찾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유빈은 실망하는 빛을 띄며 말했다. " 흥. 아직도 그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거야? 뭐가 진실인지도 알지 못 하는 바보들을……. " " 오빠와 마리는 어디 있냐니까! " " 아아,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는마. 살짝 손 봐주고 있을 뿐이니까.꽤나 강 한 트라우마(Trauma)를 가지고 있더라고, 그 둘. " " ……! " 한순간 유리의 귀로 저 안개 너머에서 가인과 마리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 는 것 같았다. 가인은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불안한 시선으로 차 안을 살폈다.지금 그의 가 족을 실은 자동차는 휴게소를 떠나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운전대 의 아버지는 조수석의 어머니에게서 커피를 받아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 며 한 모금 씩 들이키고 있었다. 뒷좌석에서는 신이가 가인의 곁에서 창밖에 보이는 바다를 가리키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 와! 와! 오빠, 바다야! 바다! " " 그래.그래. " 가인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신이에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창 밖을 바라보 았다.고속도로의 옆에 파랗게 펼쳐져 있는 동해의 바다는 그 역시 TV로만 보 아왔을 뿐.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말과 행동과는 달리 그 모든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엄습해오는 것만 같았다. ' 안돼. 제발 차를 멈춰요, 아버지! ' 가인의 의식은 운전을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이미 이 것이 환상이라는 건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자신이 사건 당일 날로 돌아와 있 다는 사실에 가인의 정신 경계가 풀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유빈의 정신공 격이 시작된 것이다. 자신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망각해버렸다.단지 어 떻게든 교통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차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 멈춰! 이대로는 부딪힌단 말이야! 모두 죽을 거라고! ' 부질 없는 짓이었다. 그의 외침은 머리 속에서만 울릴 뿐 입 밖으로는 나오 지 않았다. 그의 말과 행동은 의식을 배반하고 과거의 기억에 충실하고 있었 다. " 신아, 저기 봐! 갈매기다! 갈매기! " " 에에? 진짜! " 가인은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족들에게 앞으로 닥쳐올 위험을 알릴 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말하란 말이야! 차를 멈추라고 말해, 유가인! 이대로 가족들을 죽일 셈이야? 가족들이 죽는다는 걸 뻔히 알 면서도 내버려 둘 셈이냐고! 쿵! 쿵! ' ……! '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반 대편에서 오던 트럭이 차선을 넘어 자신들의 차로 달려든다는 것을. 자신의 기억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1분 뒤면 자신만 남겨 두고 모두가 죽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굉장한 공포였다. 가인의 의식은 반 광란 상태가 되어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 멈춰! 멈춰! 멈춰! 멈춰! 멈춰-------!!! ' - 멈추고 싶어? 그때 그런 가인의 의식으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인은 눈을 희번뜩 뜨며 주위를 돌아 보았다. 누구지? 누구야! 누가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거야? - 이대로는 다시 사고가 일어나고 말거야. 그러기를 원해? 아니! 절대로! 제발 멈추게 해줘! 그렇게만 해준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 무슨 짓이라도? 그래! 무슨 짓이라도! - 좋아. 그럼 이제부터 내 말을 따르라고. 그리고 가인의 정신은 완전히 침식당했다. " 무영신풍류 일식 섬광! "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는 마리의 목도! 하지만 아인은 팽이 처럼 몸을 숙였고 그 위를 마리의 찌르기가 아슬 아슬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뒤이 어 시작되는 아인의 반격! " 이식 파쇄! " " 으읏! " 마리는 자신의 턱을 올려쳐 오는 아인의 목도를 간신히 피해냈다.그녀의 등 뒤에서 식은 땀이 피어 올랐다. 이런 날카로운 공격을 해낼 줄이야! 마리는 자신이 아인을 과소평가 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인. 언제 이런 실 력을 키운거지? 그런 마리의 귀로 아인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후계자의 자리……필요 하지 않아? " " 네 녀석이! " 분노하는 마리. 하지만 그 의식은 그런 자신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 그만해! 성마리, 목도를 놔! 당장 놔! ' 이 결투를 당장 중지하란 말이야!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과거의 기억에 꼭두 각시 처럼 끌려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뚜렷하게 느껴 지는 움직임. 검에 실린 감정. 거친 호흡 속에서도 느껴지는 아인이를 향한 살기. 이 모든 게 너무도 생생했다. 도저히 과거를 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과거를 다시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다시는 겪기 싫은 과 거를! " 오식 요란! " 안돼! 마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 기술을 아인이는 수식 파 란으로 빗겨낸 후 사식 단월로 반격한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 멈춰--------!!! " 피바다 속에 얼굴을 처박는 아인이의 모습이 각인되었다. 마리는 반쯤 정신 이 나가 소리쳤다. 아인이와의 결투를 그만둬야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 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유빈의 정신 공격은 시작되었다. - 멈추고 싶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 ……! ' 마리의 정신은 완전히 침식 당했다. "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상처를 입고 타인을 상처 입히며 살아가지. 그 상처 중에는 다음 날 일어나면 '그저 그런 일이 있었지'라고 여겨지는 가 벼운 것이 있는가 하면 말로는 가능하지 않은 무거운 것까지 각양각색이야. " 유빈은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안개를 손으로 훑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 렸다. " 그리고 그 중에서도 보다 무겁고 강력한 영향을 지닌 것들이 있는데,그것 들을 바로 트라우마 라고 부르지. " "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 " 유리는 낮게 중얼거렸다. 트라우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오라 능력 을 개발하기 위해 피스메이커에서 교육받던 과정 중 접할 수 있었던 단어.유 빈은 유리의 대답에 환하게 웃었다. " 그래. 잘 알고 있구나. 트라우마는 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자신이 인 식하고 있는 트라우마는 의식에 존재하여 무의식에서 영향을 끼치고, 자 신이 잊어버린 트라우마는 의식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여 무의식에 영향을 끼치지. 요컨대 '자신도 모르게' 혹은 '자신의 의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동들에 영향력을 가진다는 거야. " 유빈은 안개로 뒤덮힌 백색의 공간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 그 영향에 대한 대응 양상 중 하나가 바로 '반복'이야. " " ……! " 유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유빈의 뒤 편에 있던 안개가 갈라지며 그 곳으 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AI슈츠의 남자와 붉은 AI슈츠의 여자였 다. 바로 가인과 마리! " 오빠! 마리! " 유리의 애절한 외침. 하지만 그 목소리는 둘에게 닿지 않았다. 가인과 마리 는 예의 유빈에게 조종되던 사람들 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며 두 눈이 풀려 있 었던 것이다. 둘은 천천히 유빈의 곁을 지나가 유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 다. 유빈은 재미 있는 장난감을 얻은 아이 처럼 흥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 트라우마가 생성될 당시의 행동을 반복하지.어리 석게도 같은 상황 속에 스스로가 빠지는 거야. " " 무슨 짓을…… 오빠와 마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 " 논리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는 이 행동은 한 가지 결과로 귀결 돼. 그 당시 와 '같은' 상황 속에서 그 때와 다른 '결과'가 나오길 바란다는 거지. 후 후후후, 웃기지 않아? 이미 끝난 과거에 이렇게나 집착하는 꼴들이라니. " 유빈은 마리와 가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 너희들. 내가 그 괴로운 과거를 멈추게 해주면 내 말대로 따른다고 했지? " 끄덕. 가인과 마리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에 유빈은 흡족 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자, 각자 오라 소드를 꺼내 들어. 슈츠 안에 다들 가지고 있잖아? " " 오,오빠와 마리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거야? 날……공격하게 할 셈이야? "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유빈에게 물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가인과 마리가 천천히 오라 소드를 꺼내 검날을 생성시키고 있었다. 유빈은 유리의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니. 유리 널 다치게 할 수는 없지.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어. " 그는 가인과 마리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 싸워라. 서로를 죽일 때까지 싸우고 또 싸워! " - 팟! 마리와 가인은 서로를 향해 오라 소드를 휘둘렀다. 촤악! 붉은 빛을 흘리는 절삭성 커터가 가인의 AI 슈츠를 스치고 지나갔다.하지만 가인은 아픔도 느끼지 못하며 무감각하게 바람의 검날을 마리에게 휘둘렀다. 마리는 가볍게 그 검날을 피해내며 가인의 가슴을 오라 소드의 손잡이로 올 려쳤다. " 컥! "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서는 가인.하지만 그는 재빨리 백 핸드 스 프링을 하며 몸을 낮춤과 동시에 강하게 마리를 어깨로 들이 받았다. 그러나 순순히 당할 마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인의 어깨를 발로 박차고 날아올랐 던 것이다. 휘리릭 마치 제비 처럼 가볍게 공중을 선회하며 가인에게서 거리를 벌려 착지하는 마리. 가인은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천천히 수중의 오라 소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리 역시 오라 소드로 발검 자세를 취했다. " 그만둬! 오빠! 마리! " 유리는 그런 둘에게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둘 에게 닿지 않았다. 유빈의 강한 지배력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리는 울 상이 되어 유빈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유있는 태도로 말했다. " 소용 없어. 저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필사적이거든.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환상 속의 가족이 죽으니까. 뭐, 당상자들은 자신들이 지켜내야 할 대상이 망령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지만. " " 너,너무 해! 어째서 이렇게 까지 하는 거야? 오빠와 마리는 이미 충분히 괴로운 경험을 했어. 그걸 왜 이제와서 들쑤시는 거야! 네가 무슨 권리로! " " 권리라면…… 힘이겠지? " 유빈은 피식 미소지으며 양홍빛 눈동자로 유리를 직시했다. " 저들이 오라 능력으로 날 상대하는 것 처럼 나도 내 오라 능력으로 저들 을 상대하는 것 뿐이야. 난 내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거라고. 아니면 이 대로 저들에게 두 손 놓고 당하란 말이야? " " ……! "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이럴 때 가인들을 돕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신이 싫 었다. 이대로 가인과 마리가 서로를 죽이려는 걸 지켜 봐야만 하는 것일까? 유빈은 그런 유리의 생각을 읽고 웃었다. " 그것봐. 너에게 힘이 있었더라면 저들을 도울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너 에겐 힘이 없지. 그게 권리라는 거야. 힘 없이는 권리도 없어. " " 나쁜 자식! " 유리는 이렇게 까지 인간의 약점을 파고들어 이용해먹는 유빈의 방식에 치 가 떨렸다. 유빈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이 정도로 미움 받으면 더 이상 그 녀의 마음을 얻기란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빈은 유리를 데려가야만 했다. 자신의 파트너로서. 자신의 반 쪽으로서. 그리고… ' 그분을 위해서라도! '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한 짓이더라도 다 해주지! 유빈은 마음을 단호 히 하며 다시 조건을 제시했다. " 자, 마지막이야. 만약 네가 지금이라도 날 따라오겠다면 이 둘은 깨끗하 게 놔주겠어. 이제 그만 포기하고 날 따라와.그게 너를 위해서도 저 사람 들을 위해서도 좋아. " 유리는 잠자코 유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떨구었다.결국 그를 따라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가인과 마리도 그녀를 도와주 지 못했다. 되려 위험한 그들을 그녀가 구해줘야할 차례였다. ' 하지만…… '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까지 그는 번거로운 방법을 택한 거지? 유리는 유빈 을 이해할 수 없었다.자신을 데려갈 거라면 애초에 정신 조작을 가해서 끌고 가면 그만이었다. 왜 그는 구차한 인질극 까지 벌이면서도 내 마음으로는 접 근해오지 않는 것일까? 오빠와 마리의 정신까지 조작하는 것을 보면 내 정신 방어도 순식간에 풀어버릴 수 있을 텐데. 그의 자존심 상 내가 스스로 자신을 따라오길 바라는 걸까? 아니면…… ' ……! ' 순간 유리는 재빨리 자신의 정신 장벽을 높여 유빈을 경계했다.방금 자신이 했던 생각을 유빈에게 들켜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유빈은 가인과 마리가 서로 싸우는 모습에 시선을 주느라 유리가 정신 장벽을 높이는 걸 깨 닫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유리는 작게 환호하며 생각을 계속했다.마유빈.그가 자신에게 정 신 조작을 걸지 않는 이유. 그것은……. ' 그는 내 마음을 뺏을 수 없어! ' 바로 그것이었다. 분명 오라 능력자의 정신까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유 빈의 능력은 탁월했지만,같은 능력을 지닌 자신의 정신 만큼은 접근할 수 없 었던 것이다. 아마 기껏해야 마음을 들여다보는 정도가 가능했겠지. 이것은 의외로 큰 수확이었다.마인드 디텍트는 거울과 비교할 수 있었다.자 신이 들여다 보는 만큼 상대도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고, 자신이 마음을 감 추는 만큼 상대도 마음을 감춘다. 힘의 상대성이 존재하는 것이다.물론 상대 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능력이 있다는 전제 하에 성립되는 이론이지만. 그렇다는 것은 유빈의 영향력 밑에 있는 정신체에 유리도 어느 정도의 간섭 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 바로 이거야! ' 유리는 반격의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만약 유빈이 유리가 마음의 장벽을 닫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 의심을 시 작할 것이다. 더구나 가인과 마리의 싸움도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주춤거릴 시간이 없는 것이다. '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 유리는 초조해하며 머리를 굴렸다. 유빈의 영향력에 자신이 간섭할 수 있다 는 걸 깨달았지만 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챙! 크으으윽. 서로의 오라 소드로 힘겨루기를 하며 이를 가는 가인과 마리의 모습이 보였 다. 그들의 AI슈츠에서는 곳곳에 혈선이 그어져 피가 베어나오고 있었다. 어 느 한 쪽이 치명상을 입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유리는 발을 동동 굴렸다. 난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오빠와 마리를 구할 수 있는 거야? ' ……. ' 순간 그녀의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 하나. 유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래… …. 방법은 있어……. 방법은. 탁! 유리는 AI부츠에 오라를 불어 넣으며 재빨리 가인과 마리를 향해 달려 들었 다. 일단 자신의 방법을 실행시키려면 가인과 마리의 정신에 접촉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유빈과의 능력 차를 생각하면 그것은 불가능.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 뿐이다! ' 물리 접촉(Physical contact)! ' 마인드 디텍트를 할 대상에게 신체 부위를 접촉시켜 그 내면 속으로 직접 다이브(DIVE) 하는 것! 일반적으로 사념을 읽어내기 어려운 사물을 대상으로 할 때 썼던 방법이지만 지금은 이 수 밖에 없었다! 유리가 가인과 마리의 사 이로 뛰어들자 놀란 유빈이 소리쳤다. " 무슨……! " 팍! 그리고 튀었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서로를 향해 찌르기를 넣던 가 인과 마리는 오라 소드를 든 채 주춤 거려야만 했다. 자신들의 오라 소드가 한 소녀를 꿰뚫은채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으으으윽……! " 유리는 자신의 양 손바닥을 꿰뚫고 나온 오라 소드들을 빠지지 않게 움켜쥐 었다. 그녀는 가인과 마리의 가운데에서 오라 소드에 양 손이 꿰여 있었던 것이다. 우연찮게 서로가 찌르기를 사용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한 명이라도 베기를 사용했더라면 손바닥이 꿰뚫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의 무모한 행동에 유빈이 비명을 질렀다. " 무,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유리! " " 아아, 아아아악! " 유리는 지독한 아픔을 이를 악물며 견뎌냈다.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잇몸사 이로 피가 베여 나올 정도였다. 유리는 유빈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 무슨 짓을 하느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지켜 보고 있어!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테니까! " " 뭐…?! " " 오빠와 마리를 되돌려 받겠어! " 파앗! 순간, 유리의 오라가 전개되며 사방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갔다. ' 헉……. 헉……. ' 가인은 끝없는 악몽의 늪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자신의 가족 들이 탄 자동차의 앞으로 거대한 덤프 트럭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인 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다가올 위기를 알려야만 했다. 하지만 마치 가 위에 눌린 것 처럼 속으로만 끙끙 거릴 뿐,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를 못한다. ' 왜 멈추지 않는 거야! 왜! ' 그의 마음이 초조해질수록 다른 정신 세계 속에서 벌이고 있을 마리와의 싸 움은 더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트럭은 슬로우 비디오 처럼 느리게 눈 앞으 로 다가오고 있었고 가인은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그것을 주시했다. - 오빠. " 아……. " 그때 자신을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가인의 말이 트였다.가인은 당황 하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움직이고 있었다.자신을 사슬처럼 묶고 있 던 행동의 제약이 풀려 있었다! 이,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째서 갑자기! " 오빠. " 다시 한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신이인가? 가인은 자신의 곁에 앉아 있을 신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앉아 있던 것은 신이가 아니었다. 다름아 닌……. " 유리야! " 창백한 표정으로 힘없이 앉아있는 유리였다. 가인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소리쳤다. " 어,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 신이는 어디로 가고? 가인은 앞좌석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어머 니가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느끼지 못하며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었다. 가 인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어떻게 된 조화지? 이게 어떻게……. " 이건 모두 오빠의 과거를 들춰낸 유빈의 환상이야. " 유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가인은 그녀를 돌아 보았다. 환상? 환상이라니? 믿을 수 없어. 지금 이 모든 게 가짜라는 소리야? 그런 가인의 모습에 유리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빈에 의해 지각 능력을 제거 당한 건가? " 그럼 오빠는 이게 현실이라고 생각해? " " 아,나는…… 이건……! " 말을 더듬으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가인. 이성적으로는 지금의 모순을 깨 닫고 있었지만 강한 세뇌가 그 인식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그의 정신 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번민하다 분열될 것이다. 유리는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인상을 굳혔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뒷 좌석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유리는 가라앉는 목소리로 말했다. " 좋아.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이게 진실이라면 사고가 난 후에는 모두 죽는 거겠지? " " 유리야! " 가인은 트럭이 천천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모든 것 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지만,유리와 가인 만은 그런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 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인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 너만이라도, 너만이라도 도망쳐!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 " " 절대 오빠를 내버려두고 가지는 않아! " 유리는 마주 소리치며 퀭한 눈으로 전방의 트럭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안색 이 백지장 처럼 하얘졌다. " 이건 현실이 아니야! 단지 오빠의 과거일 뿐이라고! 오빠는 과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버릴 거야? 앞으로 남아있을 미래까지 포기할 거냔 말이야! " " 아니야! 나는! " " 만약 여기에 남아있을 거라면 나도 함께 남아 있겠어! 이대로 같이 트럭 에 부딪혀 죽어버리던지! 아니면 같이 환상을 벗어나던지! 둘 중 어느 쪽 을 선택할 거야? " " 나는! " 가인은 이를 악물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트럭은 자신들의 코 앞까지 닥쳐오 고 있었다. " 아인아……. " 마리는 병실에서 죽은듯이 잠들어 있는 아인이의 앞에 앉아 있었다. 결투에 서 자신을 이겨낸 그는,승리의 순간을 채 느끼기도 전에 피를 토하며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벌써 이틀째 계속되는 혼수 상태. 마리는 그런 동생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 절대로 잠들어서는 안돼! ' 마리의 의식은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틀을 자 지않고 아인의 병간호를 한 그녀는 이미 체력도 정신도 모두 고갈된 상태였 다. 수면이라도 취해주지 않았다간 과로사로 먼저 쓰러질 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자신이 잠드는 사이에 혹시라도 아 인이 숨을 거두는 건 아닐까 미친듯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 아……. ' 하지만 결국에는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마리는 천천히 아인의 침상에 머 리를 묻고 잠들고 말았다. 어두운 병실에 아인의 생명 신호 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 마리. 그리고 그렇게 잠든 그녀를 한 소녀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유리였다. 아인 이가 누워있던 자리에는 그 대신 유리가 누워있었다. 소녀는 창백한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그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 마리도 알고 있지? 이게 과거라는 걸. " " ……. " 마리는 잠든 것인지 유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사람은 참 바보같아. 과거에 했던 일들을 후회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 야지 하면서도 또 같은 일을 반복하고. " " ……. " " 하지만 과거는 바뀔 수 없는 건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건데. 그래도 사람은 잘못된 과거를 돌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지. "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잠들어 있는 마리. 유리의 이마로 식은 땀이 흘 러내렸다. 숨도 가파지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 근데 그거 알아? " " ……. " " 미래도 과거가 된다는 거. 앞으로 있을 일들에도 수 없이 많은 후회가 기 다리고 있다는 거. " 마리의 어깨가 움찔 떨렸던 건 눈의 착각이었을까? "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과거를 후회하기 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거라 생각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시는 슬 퍼하지 않기 위해. 과거에 후회했던 자신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현재를 살 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 유리의 몸이 흐릿해져가며 침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 마리의 동생도……누나가 그러기를 바라지 않을까? " 그리고 병실에는 마리만 홀로 남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침상에 몸을 업 드린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굳게 감겨 있는 눈. 하지만 그 눈에서 한 줄기 긴 눈물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오오오오오 유리의 핑크 빛 오라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 오라는 그녀의 양 옆에서 오라 소드를 겨누고 있던 가인과 마리까지 따뜻히 감싸 안았다. 유빈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 이건……말도 안돼. 내 정신 제어를 깨뜨린 거야? " " 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고 했지? " 그리고 유리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유빈을 노려보았다. 양 손의 출혈로 인 해 그 안색이 창백해지고 두 눈이 빛을 잃고 있었지만 그 기백 만은 유빈을 압도하고 있었다. 유빈은 멍하니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망연자 실하게 서있었다. 파파파파파팍 그리고 유빈의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핑크 빛의 오라가 유빈이 창조한 안개의 세계를 핑크빛으로 물들였던 것이다. 마 치 물에 번지는 물감처럼 백색의 공간은 핑크색의 공간으로 변해 갔다. 유빈 은 자신의 세계가 유리에 의해 재창조되는 것을 바라보며 침음했다. " ……각성한 거야? 마인드 브레이커로? " 그것도 나보다 강한 이 능력이라니! 하지만 유리는 그런 유빈의 말에 고개 를 저었다. " 아니. 난 마인드 브레이커가 아니야. " 유리의 양 손을 꿰뚫던 오라 소드의 검날이 사라졌다. 그러자 유리는 버팀 목을 잃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피가 흐르는 양손을 감싸면서도 유 리의 입 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네가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는 마인드 브레이커라면, 난 사람의 마음을 지 키는 마인드 키퍼(Keeper)야. 네가 사람들의 마음을 농락하겠다면 난 그 런 너에게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키겠어! 네가 인간을 믿지 못하겠으면 난 인간을 믿어 보이겠어! 난 너와는 틀려! 난 마인드 브레이커가 아니야! " 파칭! " 크윽! " 유리에게 거부되는 유빈의 마음. 유빈은 강한 반발력을 느끼고 뒷 걸음질을 쳤다. 그때 유빈의 정신 조작에서 해방된 가인과 마리가 제 정신을 차렸다. " 유리야! 괜찮아? " 쓰러져서 어깨를 떨고 있는 유리를 부축하는 가인과 마리.마리는 오라 소드 에 꿰뚫렸던 유리의 양손을 바라보며 재빨리 포션을 주사해 주었다. 유리는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가인과 마리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난……괜찮아, 오빠. 이제야 모든 게 확실해졌거든. " 그 동안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패턴 핑크의 오라 능력. 사람들을 향한 그녀의 불신감.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의혹. 이 모든게 막힘 없이 풀려 버렸다. 그 동안 고민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복잡한 마음이 정리 되어간다.그 리고 무엇보다 확실해지는 오빠에 대한 내 마음! " 그래! " 가인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 광경을 바라보던 유빈은 배신감과 질투심으로 몸을 떨었다. " 인정할 수 없어! 이런 건! 사람의 마음을 믿는다는 건! " " 그게 바로 너와 유리의 차이야! " 가인은 유리를 마리에게 맡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전신의 오라를 끌어모 으며 유빈을 향해 걸어갔다. 푸른 오라의 회오리가 오른손의 헤븐 스매쉬로 모여들었다. " 사람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 넌 언제까지나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거다! 불신과 의혹으로 물든 힘은 신뢰를 이겨내지 못해! " " 네 놈이-----------!!!! " " 하아아아아아아앗! " 양홍빛을 뿜어내며 가인에게 달려드는 유빈! 그런 그를 향해 가인은 헤븐 스매쉬를 내찔렀다. 주심(主心)! 天천 空공 主주 心심 拳권 - 투카카카카카칵!!! 순간 유빈이 만든 환상의 세계가 깨져버렸다. 하얗게 부서져내리는 백색의 공간. 그리고 드러나는 아파트 단지의 옥상. 떨어져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유 빈의 몸이 튕겨 오르고 있었다. 적의 주심을 향해 내리치는 가인의 천공주심 권이 마인드 브레이커의 세계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유빈의 본체를 직접 공격한 것이다. " 컥! " 입가로 피를 토하며 허공을 날으는 소년. 천공주심권의 토네이도들이 유빈 을 휘감기 전에 가인은 주심권을 산으로 변환시켜 그 앞에서 폭발시켜 버렸 다. 다행히도 토네이도에 몸이 찢겨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유빈은 천공권 산 을 연속으로 네 번이나 얻어맞는 충격을 입어야만 했다. ' 나는……. ' 촤아아아아악 빗물이 고여있는 아파트 단지의 옥상을 미끄러져 난간에 몸을 처박는 유빈. 그는 아픔도 고통도 느끼지를 못했다. 단지 한 여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 릴 뿐이었다. - 너 같은 건 내 자식이 아니야! 한 여인이 있었다. 자신이 엄마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여인. 하지만 실 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친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에게 거짓말 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아들이라니! 아무리 내가 아이를 낳 지 못하는 몸이라지만 저런 자식은 내 쪽에서 사양이야.' 거짓말이라도 좋았다. 날 아들이라고 해주기를 바랬는데. 날 가족으로 여겨 주기를 바랬는데……. ' 믿었는데. 누구보다 절실히 그녀가 내 엄마이기를 믿었는데……. '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날 배신만 할 뿐이었는데……. 이런 내가…… 잘못된 거란 말인가? " 쿨럭. " 망신창이가 된 채 기침을 토하자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유빈은 촛점을 잃은채 그렇게 쓰러져 있었다. 가인은 그런 그를 보며 망설이다가 곧 마음을 정하고 유빈을 치료하기 위해 다가갔다. " 잠시만 기다려. 포션을 주사해줄테니! " " 나는…… 나는…… " 유빈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으로 손을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눈 가로 이유 모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나는 잘못된 건가? 쿨럭! 모든 건…… 내 잘못이었단 말이야? " " 너! " 가인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모두의 잘못이었다.그가 이렇게 된 것도. 그를 이런 막다른 구석으로 몰아 넣은 것도. 실은 그도 인간을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누구보다 절실히 인간을 믿었던 게 아닐까? " 거기까지. " 그때 그런 가인과 유빈의 뒤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신부 복을 입은 2미터의 거한이었다.그는 비에 젖은 은발 머리 사이로 녹색의 눈동자를 흉흉히 빛내며 서있었다. 가인은 당황하며 뒤돌아 보았다. 어느새! " 가인! " 유리를 부축하고 있던 마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는 긴장한 눈빛으로 신부를 노려보았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투기가 그녀의 전신을 죄어오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이 나타난 거지?! 신부는 그런 그들의 시선을 무감각하게 받아넘기며 유빈을 가리켰다. 침착 하지만 낮은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 그 녀석은 내가 데려가겠다. 물러서라. " " 그럴 수는 없어!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셈이야?! " 가인은 헤븐 스매쉬로 신부를 견제하며 표정을 굳혔다.그런 그의 반응에 신 부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혀를 찼다. " 말 귀를 못 알아듣는군. " 퍼억! 순간, 가인을 덮치는 거대한 충격. 그는 반응도 하지 못하며 신부의 공격에 허공을 날았다. 뭐,뭐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 큭! " 재빨리 가인은 허공에서 몸을 틀어 옥상에 착지했다. 그런 그의 뒤로 마리 와 유리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 오빠! " " 가인, 괜찮은 거냐! " " 아아……. "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신부의 공격을 막아낸 헤븐 스매쉬를 들어보았다. 오리하르콘으로 제조된 헤븐 스매쉬의 장갑에는 5개의 날카로운 손톱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아직까지 공격을 막아낸 오른손이 떨려온다. 굉장한 충격이야! " 크크크크크……. " 낮은 광기가 섞인 웃음 소리. 그 웃음 소리에 가인과 유리는 등골이 오싹해 져 신부를 바라보았다. 가인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신부의 오른손은 그 옷자 락을 찢고 근육질로 뭉쳐진 거대한 야수의 팔로 변해있었다. 은색의 날카로 운 갈기들이 그 손을 가리고 있었다. " 설마……! " 가인은 신음했다. 그것은 상당히 귀에 익은 웃음 소리였다. 저 웃음 소리를 나는 들은 적이 있어?! 그것은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저 녀석은! " 크크크크큭! 오랫만이다, 애송이! 카카카카캇! " 참을 수 없이 기쁘다는듯 울려퍼지는 광폭한 웃음 소리. 그와 함께 신부의 몸이 꿈틀거리며 거대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그 육체의 변화를 이겨내지 못 한 신부복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며 야수의 맨몸을 드러냈다. 은색의 털들로 뒤덮힌 거대한 짐승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을 한 늑대였다! 가인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외쳤다. " 라트?! " " 오오, 아직까지 이 몸을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크크크크큭! 그래! 잊어서 는 안되지! 우리 사이에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빚이 남아있잖아? " " 마,말도 안돼! " 가인은 안색이 창백해져 중얼거렸다. ' 저 자식은 분명 진우 씨의 손에 죽었을 텐데! ' 그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납치된 유리를 구하기 위해 유 원지의 전망대에서 라트와 벌였던 사투를. 저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자신은 너무도 무력히 당하지 않았던가! 만약 뒤늦게 라도 진우가 달려오지 않았다 면 자신은 그 곳에서 뼈를 묻었을 것이다. " 네 녀석은 그 때……. " " 아아, 그래. 죽어 버렸지. 그 증오스러운 피스 그린이 날 피떡으로 만드 는 바람에. 크크큭. 나도 참 얼간이었어. 똑같은 녀석에게 두번이나 죽임 을 당하다니. 큭. " 라트는 안광을 흉흉히 빛내며 이를 갈았다.그 모습을 가인과 유리는 두려워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라트가 공포의 대명사로 각인되 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자 라트는 가볍게 코 웃음을 쳤다. " 크크. 그렇게들 떨지 말라고. 오늘은 단지 그 분의 명으로 이 바보 녀석 을 데려가기 위해 왔을 뿐이니까. 네 놈들의 피 맛은 다음에 보도록 하지. " 라트는 자신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유빈을 한심스럽다는듯 바라보다가 그를 주워 올렸다. 그것을 바라보던 유리가 소리쳤다. " 도대체…… 너희들의 그 분이라는 건 누구야? 누가 유빈을 조종하고 있는 거지! " " 유리야? " 가인과 마리는 갑작스러운 유리의 질문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지 라 트 만은 조용히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킥 웃음을 터뜨렸다. " 크크크큭. 그렇게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조만간 너희들의 앞에 직접 모 습을 드러낼 테니까, 그 분이! " " 뭐? " 그러나 라트는 그 말을 끝으로 옥상의 난간을 박차며 아파트 단지의 밑으로 뛰어내렸다.가인들이 뒤를 쫓아 옥상의 밑을 내려다 보니 이미 라트는 도시 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마리는 망연자실하게 난간을 붙들며 중 얼거렸다. " 조만간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게 무슨……. "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가을비. 비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거세게 지상으로 내리고 있 었다. 답답한 가인들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려는 듯이. 유리는 망연자실하게 유빈이 사라진 도시의 어둠 속을 내려다 보았다. - 너는 나와 닮았어.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유리는 그 말을 부정했었다. 하지만…… ' 그는…… 결국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어. ' 가족에게 외면 받았을 때, 모두에게 외면 받았을 때 유빈과 유리는 절망했 었다.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괴로워했다. 누 군가가 손을 뻗어주기를 바랬다.외로워하는 자신들에게 손을 뻗어주기를. 하지만 유빈에게는 결국 그 손길이 오지 않았고, 그는 삐뚤어져 버렸다. " 오빠. " 유리는 가인을 돌아 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 만약 오빠가 없었더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 외로워하는 자신에게 그가 손을 뻗어주지 않았더라면……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자신도 유빈과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절망하고 그들을 미워하며 저주하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자신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단지 운이 좋았을 뿐……. " 유리야? " 가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놀란 목소리로 그 녀를 불렀다. 유리는 무너지듯 그에게 안기며 소리내어 울었다. 가인은 당황 하며 그 작은 몸을 안아주었다. 유리야! 왜 그러는 거야? - 오빠……. 그리고 가인의 마음 속으로 들려오는 애절한 목소리. - 제발 날 떠나지 마……. 소녀는 기원했다. " 2032년 11월 15일. 21시 40분.새로운 오라 능력자 카민은 피스 핑크와 접 촉하여 그녀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블루와 레드의 개입으로 실패. 피스 핑크의 각성과 더불어 도주했습니다.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수정의 보고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진 사령관은 나 지막히 중얼거렸다. " 옴파로스의 영향인가. 오라 패턴이 점점 한국지부로 집중되는군. " " 패턴 카민은 L.A 사건의 생존자입니다. 그의 각성이 빨랐던 것은 그 때문 이 아닐까요? " " 음. " 진 사령관은 스크린에 뜨는 마유빈의 프로필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겁게 가라앉는 회의석의 분위기.그런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하여 닥터가 밝은 어조로 말했다. " 그래도 피스 핑크의 각성이 원활하게 이루어져 다행입니다. 마인드 브레 이커가 아니었다는 게 꽤 의외였지만…… 뭐, 그녀 답군요. " 닥터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옆자리의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예전,피스 핑크 의 신체 검사때 브루스가 그녀를 마인드 브레이커 라고 했던 일을 은근슬쩍 지적한 것이었다. 브루스는 그런 닥터의 시선에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 흥. 그 꼬맹이가 설마 마인드 키퍼로 각성할 줄이야.솔직히 그 녀석을 과 소평가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부르스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 좋은 각오다, 꼬마. 꽤나 힘든 길을 택했지만 부디 처음의 마음을 잊지말 기 바란다. ' 마인드 브레이커가 살(殺)의 능력이라면 마인드 키퍼는 활(活)의 능력.사람 을 살리는데 그 힘을 쓰도록! 브루스는 자신을 향해 인상을 쓰며 투덜거리던 유리를 떠올리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 잠깐! 잠깐! 이번 일을 그렇게 가벼이 넘겨서는 안된다고요! " 탕! 하지만 피스메이커의 기술 부 치프 시더 웰리스는 책상을 두들기며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 미스터 카민은 AI슈츠를 지니고 있었어요!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아십니까? 피스메이커의 기술력이 외부로 빼돌려지고 있다는 겁니다! " 그렇다. 피스 대원에게만 주어지는 AI슈츠는 정확히 대원들의 수 만큼 제작 되어 있다. 현 세계에서는 단 9개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 부에서 자체 생산을 해냈다는 건데……. " 슈츠의 설계도 만으로는 AI슈츠의 제조는 불가능해! 이건 분명 오리하르 콘 제련 방법까지 유출됐다는 소리! 마이 그랜마(Grandmo)의 성취를 이 런 식으로 훔쳐내다니! 용서할 수 없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 그녀는 정말 분한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억울해 했다.피스메이커의 1급 기밀 이 유출됐다는 사실보다 할머니의 연구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에 더 화가나는 모양이었다.그런 시더의 반응에 수정은 작게 한숨을 쉬며 브리핑을 재개했다. " 어쨌든 피스 블루들의 증언에 의하면 패턴 카민에게는 그 뒤를 봐주는 세 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 ……피스 블랙. " 진 사령관이 낮게 그 이름을 언급하자 모두의 표정에 근심이 서리기 시작했 다. 인류의 배신자! 최근 들어 그 남자를 빼놓으면 얘기가 진행되지 않을 정 도로 그는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몬스터 보다도 더 요주 의 인물이었다. 진 사령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의 이름을 되뇌였다. " 한시영……. " 너는 오라 능력자들을 끌어모아서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어두운 밤 하늘. 달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신 서울 타워는 그 불빛을 드 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타워의 최상층에는 검은 양복의 남자와 한 소년이 앉 아있었다. " 마스터(Master)……. 저는…… 저는 잘못되지 않았죠? " 남자의 품에 안긴채 소년,유빈은 태엽이 풀린 인형처럼 그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약에라도 취한 것 같은 모습. 실제로 소년은 이 눈 앞의 남자 에게 취해 있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남자,한시영은 그런 유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듯이 속삭였다. " 그래.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 너는 나쁜 아이가 아니야. " " 다행이야……. 다행. 나……. 나쁜 아이가 아니어서 다행……. " 그의 말에 안도한 유빈은 천천히 그 눈을 감았다. 시영은 그렇게 잠든 소년 을 살피다가 천천히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하늘의 별들은 도시의 매연으로 그 본래의 빛들을 잃어버리지 오래였다. 시영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 좋은 꿈을 꾸거라, 유빈. " ……눈을 뜨면 다시 악몽과도 같은 나날이 계속될 테니까. <제 14 화 마인드 브레이커 完> 次回豫告 평화로운 12월의 시작. 하지만 그런 평화도 이른 아침의 무영신풍류 도장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성마리: 아버님? 이 사진은 누구? 성비영: ……네 맞선 상대다. 난데 없는 마리의 약혼식! 그를 위해 일본의 무영신풍류 도장에서 마리의 어머니가 귀국한다! 그리고 그녀를 뒤 따라온 의문의 맞선남! 신미수: 가자, 코마히코. 코마히코: 예, 사부님.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방황하는 소녀의 연정은? 第 15 話 타올라라, 검! 후계자의 자리는 네 손에 달려 있다, 유가인! 성마리: 유가인! 내……내 낭군(郎君)이 되어줘! 유가인: 예에에에엣?!!!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Ｖolume.5 "싸우는 소녀, 해적이 되다!" =-=-=-=-=-=-=-=-=-=-=-=-=-=-=-=-=-=-=-=-=-=-=-=-=-=-=-=-=-=-=-=-=-=-=-= 단풍으로 물드는 11월은 문화제의 계절이다. 문화제. 학부형과 내빈이 참석 하는 전통있는 학교 행사를 말한다. 이 날이 되면 학생과 교사는 저마다 다 양한 행사를 준비하여 외부인을 맞이 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인이 다니는 한 성 고등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 자자∼ 오늘의 안건은 '부용제(芙蓉祭)'다. " 부용제. 한성 고등학교의 문화제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다.그리고 언제나 학생을 걱정하며 모교의 미래를 염려하는 학생회 'H.F.P'는 오늘도 열심히 회의를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학생회를 이끄는 이는 대원 그룹의 차기 후계자이자 전대의 회장들과 마찬가지로 못말리는 독재자, 네로 제갈 영! " ……정말 그 말도 안되는 계획을 추진하실 겁니까? " 부 학생 회장이자 제갈 영의 충실한 신하 겸 비서 호일준은 언제나 처럼 못 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 솔직히 그는 지금껏 제갈 영을 보필해 오면서 그가 추진해온 계획 중 제대로 된 성과를 맺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일준의 근심을 알기나 하는 건지 제갈 영은 기세 좋게 외쳤다. " 당연하지! 나는 이 한성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사랑과 즐거움과 용기를 줘야 할 의무가 있다! " ' ……그런 이유일 리가 없잖아. ' 호일준은 속으로 투덜거렸으나 겉으로는 속 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명석함을 보였다. 제갈영은 자신에게로 주목되는 학생회 임원들의 시선에 강한 카타르 시스를 느꼈다.또한 그들의 기대에 보답해야만 한다는 강한 책임감 역시 느 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책임감 때문에 문제는 시작되는 것이다. " 이번 부용제의 규칙을 정하겠다! " 제갈영은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학생회를 몰아 붙였다. " 이번 문화제는 모든 학급의 배틀제로 실시한다! 카페든 귀신의 집이든 연 극이든 그 무엇이라도 좋다! 외부인에게 주어지는 적립 투표 수가 가장 높은 반이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대회의 우승 학급에게 주어지는 상품은 학급의 학생 모두와 담당 교사에게 주어지는 스페이스 콜로니 견학 풀 코 스 여행! " - 쿠쿵! 벙찐 표정으로 제갈영을 돌아보는 학생회의 임원들.호일준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 어째서 또 배틀인 거냐고! ' 스케일 2배! 심사 기준도 2배! 바야흐로 한성 고교에 문화제의 붐이 찾아왔다! Ｖolume.5 "싸우는 소녀, 해적이 되다!" " ……역시 어처구니 없는 녀석이야. " 가인과 재영은 학교 복도의 중앙에 붙어있는 학생회 공지 사항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공지 사항에는 '부용 리그 파이트. 스페이스 오딧세이'라는 타 이틀 하에 저번 1학기 때의 운동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내용들이 적혀 있 었다. " 질리지도 않고 잘도 이런 걸……. " " 야! 야! 하지만 굉장하잖아! 달에 개발 중인 스페이스 콜로니 견학이라고! 이거 관광비만 해도 오천만원은 넘어간다고 알고 있는데! 일반인들은 꿈 도 꾸지 못할 관광 코스란 말이야! 정말 우승하면 보내주는 건가? 여길! " 넘쳐오르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공지 사항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재영. 어딜 가나 이런 물욕에 사로잡힌 녀석들이 있기 때문에 저런 마초 경기가 성 립되는 것이리라. 가인은 한심하다는듯 그를 바라보았지만,게시판에 모여 있 는 다른 학생들도 재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솔직히 문화제 한 번에 우주 여행이라니! 이건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큰 것이다! 이 자리의 모두는 제갈 영의 큰 씀씀이에 감탄했다. ' ……아니. 스케일이 크다기 보다는 단순히 허영 바보라고 생각하는데. ' 가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이런 바보 같은 짓에 가담해 줄 생각은 눈 꼽 만큼도 없었다. 멍청하게 끌려다닌 건 저번 운동회 한 번으로 족하다고! 가인은 벽보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재영을 내버려두고 1학년 3반의 교실로 향했다. ' 그래. 한 두번도 아니고. 매번 그 녀석의 장단에 놀아날 이유가 없지! ' 가인은 이 모든 일의 주최자인 제갈 영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번 운동회 때 그 놈의 하와이 여행 티켓을 위해 자신들은 그 얼마나 땡 볕에서 몸을 굴려야만 했단 말인가? 두 번 다시 그런 고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렇게 투덜거리며 거칠게 교실문을 열어 제낀다. 드르륵! " 네 녀석들! 이번 문화제 공지 사항은 충분히 숙지했겠지! " " 오오오오! " 순간 교실에서 터져나오는 한 여성의 목소리. 바로 1학년 3반의 담임이자 체육 교사인 하지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외침에 주먹을 치켜들며 호응하는 학생들. 가인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설마……. " 저번 운동회 때의 치욕을 씻을 기회다! 이번 문화제에서 완벽한 우승을 거둬 우리의 손으로 콜로니를 쟁취하는 거다! " " 쟁취한다! " " 콜로니! " " 이긴다아아앗!! " 교사와 학생들은 한 마음이 되어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 는 뜨거운 열기에 가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야----?!! ' 그렇게 낙담하는 그에게 테레이아와 유리가 달려와 그의 팔을 하나 씩 붙들 었다. 테레이아는 언제나 처럼 가인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며 속삭이는 목소 리로 말했다. " 가인. 우리……콜로니에 가서 행복해지자. " " 오빠. 허니문은 역시 우주겠지? " 가인의 팔을 붙들며 테레이아를 향해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유리.그녀와 테 레이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어갔다. 그리고 방전 현상! 파지지지직! 결국 둘은 언제나와 같은 대결 모드로 돌입했고, 가인은 소외되었다. 아,안 돼. 여기에 있다간 나에게 하등 좋을 일이 없어. 다들 문화제의 열기에 미쳐 가고 있다고!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가인은 조심스럽게 교실 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하지만 그의 뒷 덜미를 낚 아채는 손 하나. " 어딜 가는 거냐, 녀석아! " ' 엿 됐다. ' 그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담배를 꼬나문 하지연이었다. 그녀는 가인의 어 깨에 손을 두르며 반의 모두를 향해 외쳤다. " 자,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최종 병기 유가인이 있다! 여기에 네 녀석들의 땀과 피 나는 노력이 합쳐진다면 더 이상 두려울 건 없단 말이 다! 우승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1학년 3반의 것! " " 우오오오오오!!! " " 최종 병기! " " 최종 병기! " '최종 병기'를 외치며 한 마음이 되어 유가인에게 환호를 보내는 1학년 3반. 단결된 그들의 모습은 교육자의 눈에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연은 자신의 제자들을 대견스러워 하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녀의 팔에 목을 졸리고 있는 가인은 반의 그 누구보다도 우울해 하고 있었 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반의 한 구석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부르스.그는 물고 있던 곰방대를 한 모금 빨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 젊군. " ……그건 무슨 의미? 한편 마리의 2학년 1반에서도 문화제에 대한 열기는 타오르고 있었다. " 드디어 우리의 이름을 떨칠 기회가 온 거야! " 이미 수 많은 지부를 한성 고교에 둔 성마리 추종회.오직 성마리 만을 추종 하며 그녀에 대한 모든 엔터테인먼트를 담당하는 여성 집단.그녀들의 회장이 자 2학년 1반의 문화제 실행 위원인 유미미는 교탁에서 회원들을 향해 소리 치고 있었다. " 충분히 승산이 있어! 그 동안 우리가 쌓아온 노하우와 프로젝트를 적극 활용한다면 우승은 우리의 차지야! 이번 문화제는 우리가 접수한다! " 짝짝짝짝 " 멋져요, 회장! " " 역시 우리를 이끌어갈 인재! " 여인들은 박수를 치며 자신들의 대표를 찬양했다. 미미는 손을 들어 그들에 게 답한 후, 신속하게 지령을 내렸다. " 마케팅 부는 오늘을 기점으로 문화제 시장 조사와 더불어 앙케이트를 이 용한 연령 별 취향도를 조사하도록! 그리고 개발부는 새로운 팬 아트와 신 상품 개발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연출부와 음향부야! " 그녀의 말에 연출부와 음향부의 회원들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는 그녀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연출과 음향은 무대의 영혼이며 생명! 배우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 니다. 부디 분발해주세요. " " 옛! 맡은 바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 " 모든 것은 그녀를 위해서! " 감동에 벅찬 목소리로 각오를 다지는 그녀들. 미미는 그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곧 교실의 뒤편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돌아 보았다.미 미는 볼에 홍조를 띠며 날아가는 발걸음으로 여인에게 다가갔다. " 마리 양∼♥ " " ……아, 음. " 마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교실의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다가 미미의 부름에 어색히 답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2학년 1반에 감도는 묘한 핑크 빛의 분위기 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가……문화제 회의를 하는 줄로만 알 았는데 연출부가 어쨌다느니, 음향부가 어쨌다느니…… 도통 얘기를 알아들 을 수가 있어야지. ' 무엇보다 이 꺼림칙한 기분은……. ' 마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미미는 그 녀의 손을 맞잡으며 두 눈을 빛냈다. " 걱정하지 말아요, 마리 양! 이번 문화제의 주역은 그 누구도 아닌 성마리! 바로 당신이니까! 이미 모든 기획이 짜여져 있어요! " " 으음. " " 그러니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저희들만 믿고 순풍에 몸을 맡기듯 따라오면 되는 거에요! " " 으으음……. " 마리는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 일까? 미미는 더욱 확실한 믿음을 그녀에게 심어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뒤의 회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 여러분! 우리 반드시 최선을 다해요! 혼신을 다해서 마리 양을 문화제의 여왕으로 만드는 겁니다! " " 성마리! 성마리! " 마리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는 회원들.경과를 지켜보던 마리의 등 뒤로 차 가운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미미와 회원들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마리를 돌 아보았다. 그것은 마치 '나 잘했죠?'라며 주인에게 칭찬받기를 원하는 애완 동물의 눈빛과 흡사했다. 그 초롱 초롱한 눈빛들이라니! 마리는 차마 그 시선을 거부하지 못하며 간 신히 답했다. " ……맡길게. " " 들었지? 힘내는 거야, 모두! " " 오오! " 미미와 성마리 추종회는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 문화제라고요? " 그 날 저녁. 26구역 시민의 집에는 여러 손님들이 찾아왔다.가인과 유리,부 르스야 원래 이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지만 재영과 테레이아,마리까지 그들 을 따라왔던 것이다. 시민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 많은 방문객들에게 차를 대접하며 물었다. " 예. 부용제라고……다음 주 수요일부터 목요일에 있을 예정이에요. " " 후훗. 그립네요. 문화제라. " 가인의 말에 시민은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문화제를 회상하며 그리운 표정 을 지었다.물론 고등학교 문화제가 아닌 중학교 문화제였다. 그녀는 개인 사 정 상 고등학교를 1학년 2학기 중반에 그만둬야 했기에, 고등학교 문화제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가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옅은 부러 움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가인은 둔감하게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며 말을 꺼냈다. " 저기, 그래서 말인데요, 시민 씨. " " 예? "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시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런 가인의 뒤로 테레이아와 유리, 재영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 저희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 " 예? "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시민. 부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낀 재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에, 그러니까 이번 문화제 때 저희 반은 카페를 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다들 경험이 없어놔서 아무래도 숙련자에게 가르침을 받는게 좋겠다 싶어 서요. " " 아아, 카페를 하는 거에요? " " 예. 뭐…… 좀 고전적이지만. " 1학년 3반은 그렇게 열의를 불태운 것 치고는 평범한 카페를 택했다. 하지 만 이것은 하지연의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승부수였다. 일단 지연은 1 학년 3반의 장점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 이 요약될 수 있었다. ' 성질 머리는 고약하지만 일단은 초 미소년인 부르스! ' ' 그다지 내세울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여인들을 끌어들이는 페로 몬 소년 유가인! ' ' 마지막으로 한성 고교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미의 철옹성! 테레이아 민체 스터와 이유리! ' 이상의 세 장점을 극도로 살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던 끝 에 지연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일단 카페 라고 하면 차 맛과 인테리어가 중시되지만,그것은 사회에서의 통념일 뿐! 학 교 문화제의 카페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 은 무엇인가? 하지연의 표현을 빌리자면… ' 꽃돌이와 꽃순이! ' …였던 것이다! 그렇다. 문화제의 카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웨이터들과 웨이트리스들의 미모였다! 아무리 허름하고 메뉴가 형 편 없어도 산뜻한 미소년 미소녀만 있으면 그 카페는 인기 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 이번 만큼은 반드시 이겨줄테다. 후후후훗. ' 어디선가 승리를 확신한 지연의 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어쨌든 시민은 그런 가인들의 부탁에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 으음. 하지만 저도 그다지 다도에는 정통하지 않아서…….차라리 저쪽의 부르스 님에게 배우는 게 나을 텐데요? " 시민에게 보이차라는 생소한 전통 차까지 소개시켜준 그라면 다도에도 상당 히 박식할 것이다. 하지만 가인들은 곰방대를 빨고 있는 부르스를 잠시 바라 보다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 ……됐어요. 그렇게 까지 배우고 싶지는 않아요. " " 무엇보다 스승이 나빠. " " 중국 오천년의 신비 같은 걸로 카페를 차렸다간 중국 집이 되어 버릴 거 야. 고리타분하다고. " 그런 가인들의 반응에 부르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 흥.너희 같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들이 어떻게 전통 차의 깊이를 느 끼겠느냐. 전통의 맛이란 세월의 흐름과도 같은 것. 인생이 뭔지도 모르 는 네놈들은 전통차를 논할 자격이 없다. " " ……. " 그래. 그래서 당신에게서는 배우고 싶지 않다고! 가인들은 인상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무엇보다 자신도 어린 주제에 그런 애늙은이 같은 소리나 하고! 물론 부르스의 실제 나이를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런 불경한 생각도 하지 못 하겠지만.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가인들에게 말했다. " 저기. 그럼 단순히 원두 커피를 타거나 애플 파이를 만드는 정도 라면 가 르쳐 드릴게요. " " 그거면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시민 씨의 애플 파이만 있다면 문화제의 승리도 저희 차지입니다! " " 각오. " 흥분하며 소리치는 재영과 시민의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겠다고 다 짐하는 유리. 그때 그런 그들의 뒤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문화제의 승리? 뭡니까, 그건? " " ……! "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모두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그들의 뒤로는 어 느새인가 소리 소문 없이 진우가 나타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두가 자신을 견제하며 물러나자 어깨를 늘어 뜨리며 말했다. " 에휴. 그렇게 사람을 바퀴벌레 보듯 할 것 까지야∼ " " ……. " " 어라?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까,다들? " 그렇게 생각받기 싫으면 인기척이라도 내고 다니란 말이다.가인은 재영에게 서 한성 고교의 문화제 배틀제에 대한 설명을 듣는 진우를 뒤로 하고 마리를 돌아보았다. 아, 혹시 마리 선배라면 다도에 대해 잘 알지 않을까? 평소 옛 관 습이나 전통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으니까. ' 고검류 무영신풍류의 계승자이기도 하고 말이지. ' 그렇게 생각하며 마리를 부르려던 가인. 하지만 뭔가 여러장의 페이퍼들을 들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에 말을 멈췄다.어라? 뭘 보고 있 는 거지, 선배? " 마리 선배. 뭐 하고 있어요? " " ……아, 아무 것도! " 가인의 말에 화들짝 놀란 마리는 그녀 답지 않게 당황하며 재빨리 들고 있 던 페이퍼를 뒤로 감췄다. 그 모습에 더욱 의아해지는 가인. 뭐야? 굳이 숨 길 것 까지는 없을 텐데. " 뭐 읽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 "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 강하게 도리질을 치며 소리치는 마리.그런 격렬한 반응에 되려 모두의 시선 이 그녀에게 집중 되어 버렸다. 그 시선들을 마주하자 마리는 얼굴을 홍시처 럼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일행의 의문은 더욱 증가되었다. 대체 뭐냐고! " 어디 보자∼ " " 앗! " 순간 마리의 뒤편으로 슬그머니 나타나 재빨리 그녀가 감추던 페이퍼를 낚 아채는 진우. 역시 바퀴벌레 뺨 치는 신출귀몰함이었다! 진우는 히죽 히죽 웃으며 페이퍼의 타이틀을 읽기 시작했다. " 에, 또…… 어라? 이거 연극 대본인가? " " 그,그만 두십시오! 당장 돌려주지 못하겠습니까! " " 어허∼ " 페이퍼를 빼앗으려고 마리가 손을 뻗었지만 진우는 간단히 그 손길을 피해 버렸다. 결국 그에게서 돌려받기를 포기하며 자포자기하는 마리.진우는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던지며 연극 대본의 제목을 한자 한자 읽기 시작했다. " 여해적, 캡틴……실버? " 1523년 이탈리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날 무렵.지중해에서 제노바의 해군을 골 머리 썩히게 만드는 한 해적이 나타난다. 그 해적의 이름은 실버(Silver). 여자의 몸으로 머매니안 해협의 해적 연합 블루 시드(Blue Seed)의 두목 자리에 오른 해적 중의 해적! '여해적 캡틴 실 버'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노래하는 일대기였다. 마리는 가인들이 한참동안 연극 대본을 읽고 있자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긴 장했다. " ……이 대본을 진짜 마리 양이 연기한단 말이에요? " 시민은 놀랍다는듯 마리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기 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아니, 그게……어쩌다 보니 그렇게. " 마리는 슬그머니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이 대본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리는 작게 한 숨을 쉬었다. ' 그래. 애초에 나 같은 게 연극과 어울릴 리가……. ' 처음부터 무리라고 생각했었다. 매일 땀 흘리며 수련이나 하던 자신이 이제 와서 분장을 하고 러브 씬을 하겠다니…….어울리지 않았도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수가! 아니. 어울리지 않다기 보다는 이건 코메디다! 비웃음만 살게 분 명하다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에게 가인의 들뜬 목소리 가 들려왔다. " 와! 굉장해요, 마리 선배! " 응? 마리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인을 바라보니 그는 연극 대본을 들 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주역이잖아요! 주역! 선배가 이 캡틴 실버를 연기하는 거죠? " " 아,으응. 그렇기는 한데……. " 마리는 가인이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는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리며 감탄했다. " 이거 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그리고 이 캡틴 실버라는 주인공도 마리 선 배와 잘 어울리고! 선배가 연기하면 진짜 멋질 거 같아요. " " 그,그래?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반색했다. 그런 가인의 말에 재영도 동의하며 대본을 들여다 보았다. 이 캡틴 실버라는 대본은 성마리 추종회의 역작이었다. 약간 의 소녀 취향이 엿보이기는 했지만 기승전결이 뚜렷한 플롯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성마리가 맡은 캡틴 실버는 남성들에게도 여성들에게도 어 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감탄이 절로 나올 캐스팅이다, 이건! ' 대박의 징조가 보이고 있어. ' 재영은 성마리 추종회의 뛰어난 기획력에 반 가인회의 회장으로서 진심으로 감탄했다. 성마리 추종회……. 단순한 팬 클럽 정도의 무리들이라고 생각했 었건만……. 이건 뜻 밖의 강적이다! 어쨌든 그런 경계심을 뒤로 하며 재영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 반드시 보겠습니다! 반드시 보고 말겠어요, 마리 선배의 연극! " " 아……. 고,고맙다. " 그런 열화와 같은 성원에 당황하는 마리.재영의 뒤로 테레이아와 유리도 진 심어린 응원을 보냈다. " 선배 님의 멋진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 " 열심히 해, 마리. " ' 모,모두! ' 마리는 감동을 먹으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식으로 남들의 기대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진우와 시민은 그런 심정을 눈치 챘는지 고소를 머금었다. " 자아∼ 그럼 나는 채영 씨들하고 수정 씨에게도 연락을 돌려볼까나. " " 어머, 좋은 생각이에요. 다 같이 구경가면 되겠네요. 마리 씨의 무대. " 가인은 마리에게 연극 대본을 쥐어주며 따뜻하게 말했다. " 힘내요, 선배. 응원할테니까. " " 으,으응! 최선을 다하겠다! " 마리는 상기된 얼굴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이 충만한 모습이었다.가 인! 반드시 해내보이겠어! 나, 캡틴 실버를 연기할 거야! ' 연극이 하고 싶어! ' 그때 일행의 구석에서 조용히 곰방대를 물고 있던 부르스는 고개를 갸웃거 렸다. ' 연극……이라. 분명 러브 씬도 있을 테지? ' ……가능한 거냐? 러브 씬? 부르스는 수 십년을 검도 하나에만 바쳐온 소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 나 이런 부르스의 눈길을 느끼지 못하며 마리는 연극 대본에 정신 없이 빠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마음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 열심히 하는 거야. ' 반드시 모두의 기대에 보답하는 거다, 성마리! 그 날 부터 마리의 특훈은 시작되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잘 때 외에는 항상 대본을 몸에서 떼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면서도 그녀의 입은 끊임 없이 캡틴 실버의 대사를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그것은 일상 생활에서도,몬스터와의 전 시 상황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 그대는 내 삶의 보람. 내 삶의 기쁨. " 캡틴 실버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적들의 앞에 당당히 맞서면서 중얼거리던 독백이 마리의 입으로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대사 낭독을 하기에는 상 황이 너무도 급박했다. AI슈츠를 입고 있는 그녀의 앞으로는 거대한 몬스터 가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지켜보던 가인이 비명을 질렀다. " 마리 선배! " 뭐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은 전투 중이란 말이에요! 가인은 마리가 연극에 빠져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빠져도 너무 빠졌다! 예전 광속 전차 안에 서 시험 공부를 하던 가인을 꾸짖던 그녀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지만 그 런 가인의 걱정과는 달리 마리는 여전히 연극 대사를 외치며 세차게 몸을 움 직였다. 그리고 허공을 가르는 오라 소드의 붉은 검광! " 나 지금 여기서 그대를 위해 죽는다! " 무영신풍류 반식(反式) 유수(流水)! 푸확! 공격해오던 몬스터의 팔을 붉은 검날이 타고 올라가며 유수와 같은 움직임 으로 그 육체를 분쇄시켰다. 이것이 바로 무영신풍류의 반격기! 마치 폭발하 는 것 처럼 녹색의 체액이 허공으로 튀어오르며 몬스터의 육중한 몸이 무너 져 내렸다. 쿵! " 내 인생 한 점 후회 없도다. " 검날에 묻은 녹색 체액을 지면에 날카롭게 뿌리며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이 오라 소드를 거두는 마리. 그러면서도 대본 낭독을 멈추지 않는다. 그 모습 에 가인과 피스 대원들은 넋이 빠져 중얼거렸다. " 미,믿을 수 없어……. " 어쨌든, 마리는 날이 갈수록 캡틴 실버에 빠져 들었다. " 현재 학교의 모든 학급은 자율 학습을 가장한 문화제 준비로 수업이 정상 운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 그렇게 문화제의 준비가 한창일 무렵, 학생회실에서 호일준은 냉정히 상황 을 보고하고 있었다. 제갈 영은 진심으로 기쁘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후…… 역시 내 생각대로군. 그래.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이 쪽이 곤란 하지. 강해져라! 강해져서 더욱 날 불타게 해주는 거다! 후후후후. " ' ……곤란한 건 이쪽이라고. ' 일준은 문화제 이후에 있을 한성 고교의 모의 고사와 기말 고사에서 전체학 급의 평점이 곤두박질 칠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교사들의 끝이 없는 상담과 긴급 교무 회의 호출일 것이다.결국 제갈 영이 벌려 놓은 일의 수습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 아, 그건 그렇고 녀석들의 움직임은 어떤가? " " 녀석들이라 하시면? " 제갈영의 질문에 표정을 굳히며 반문하는 호일준.제갈영은 답답하다는듯 소 리쳤다. " 1학년 3반 말이다! 1학년 3반! 그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 족속들! " 그의 목소리에는 분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제갈 영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 다. 운동회 때 그들에게 당했던 치욕들을! 그 수모들을! 그는 아직도 과거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호일준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회장 님은 그들을 이기셨지 않습니까? 굳이 지금와서 그들을 신경 쓸 필 요가……. " " 모르는 소리! 운동회 때의 우승은 진정한 우승이 아니었다.그런 부전패들 이 난무하는 시합 내용을 그 어느 누가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자고로 우승이란! 승리란! 정정당당히 서로의 자웅을 겨뤄 쟁취하는 것! 난 그런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당당한 승리를 원한단 말이다! " " 회,회장 님! " 일준은 제갈 영의 말에 영혼 깊이 감동하며 목소리를 떨었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그런 승리의 자세야 말로 제왕이 가져야 할 풍모! 역시 당신은 제 가 선택한 주군이셨습니다! 하지만 매번 말하는 건데 감격하기에는 너무 이 른 게 아닐까, 당신? " 무엇보다 압도적인 실력 차로 상대를 꺽지 못하면 멋이 나질 않아! 기품 이 없단 말이다! 실제로도 학생들의 환호가 적었어! " " ……. " 일준은 침묵했다. 그는 지끈지끈 아파오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보고를 계 속했다. " 어쨌든 1학년 3반은 카페를 한다고 합니다. 그다지 특별한 건 없어 보이 지만…… 요주의 인물들이 많습니다. 거기다 예전부터 그들을 따라 다니 던 변수들까지 감안한다면…… 더욱 무시할 수가 없겠죠. 회장 님의 말씀 대로 그들은 강적입니다. " " 후하하하! 그래야지! 그래야 내가 인정한 라이벌답지! 좋아. 당장 카페를 추진해라. 똑같은 조건과 똑같은 상황 하에서 녀석들을 무너뜨리는 거다! " " ……하지만 저희들의 적은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 적? 적이라…….일준은 제갈 영의 취향에 맞춰 이런 이분법적인 말이나 해 야하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어쨌든 신세 한탄은 신세 한탄.보고는 보고겠지. 일준의 말에 제갈 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 뭐가 또 있다는 거냐? " " 예. 2학년 1반의 성마리 추종회가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 " 뭣이! " 성마리 추종회. 그들은 반 가인회, 왕자회와 더불어 학생회가 주시하고 있 는 한성 고교의 3대 세력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치밀한 기획력과 왕성한 활 동력을 가진 그녀들은 다른 두 세력에 비해 캐릭터 마케팅을 통한 무시 못할 재정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학생회 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 워낙 기밀 유지가 철저한 단체라 세부 사항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 마도 연극인 거 같습니다. " " 연극! " 학교의 꽃은 문화제.그리고 그런 꽃 중에서도 최고의 꽃은 바로 연극이었다. " 무엇보다 그 성마리……인 것입니다.성마리 추종회는 그 엔터테인먼트 능 력도 무시 못할 수준.아마도 상품의 가치를 최고로 활용하여 부가 가치를 창출해내겠죠. " " 큭. 뒷통수를 맞았군. 그것도 멋지게 말이야. " 설마 그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을 줄이야, 성마리 추종회! 제갈 영은 이를 갈며 일준에게 소리쳤다. " 좋아.우리도 질 순 없지! 당장 최고의 기획사와 연출가들을 고용해라! 아 니. 무엇보다 배우가 문제로군. 그것도 성마리의 아성을 뛰어넘을 여배우! 요즘 연극계에서 가장 뛰어난 10대 연기자를 모색해! 당장! " " ……아니. 그렇게 쉽게 결정할 사항이……. " 그리고 카페는 어떻게 하고? " 녀석들에게 보여주는 거다! 프로와 아마의 차이라는 것을! 최고의 무대로 녀석들의 헛된 야망을 깨부숴주지! " ' 하아. ' 호일준은 결국 제갈영의 막무가내에 언제나 처럼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신은 충실한 회장 님의 심복.주군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지 따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무리하기 짝이 없는 제갈 영의 명령을 수행할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해진다. 어쨌든 너무도 착실한 그는 나머지 보고들 도 마저 하기로 했다. " 아, 그리고 2학년 7반의 안마 시술소도 꽤 눈여겨 볼 만 합니다. 1학년 4반의 귀신의 집도 그 세트가 독특하더군요. " " 그럼 그것도 모조리 추진이다! 전문 안마 시술사들과 SFX 특수 효과 팀에 의뢰 신청을…… " " 하나만 하십시오! 하나만! " 결국 일준은 참지 못하고 빽 고함을 내질렀다. " 리허설……이라고요? " 문화제를 하루 앞둔 어느 날. 1학년 3반에서 카페 인테리어를 꾸미고 있던 가인들은 자신들을 찾아온 마 리를 돌아 보았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음. 와줬으면 한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이 평가해주길 바라니까. " " 아,예. 그야……저희라도 상관 없다면. " 가인과 재영, 테레이아와 유리, 부르스는 서로를 바라 보다가 어깨를 으쓱 이며 마리의 제의를 승락했다. 그들은 뒷 일을 친구들에게 맡겨놓고 마리의 뒤를 따라 강당으로 이동했다. 문화제 때 연극을 하는 반들은 모두 이 강당 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지금 시각은 2학년 1반이 배정받은 시간인지 다른 반 학생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 저, 그럼 나는 무대를 준비하러 갈테니……. " " 예, 열심히 하세요! " 마리는 가인들의 응원에 볼을 상기시키며 뻣뻣하게 손을 흔든 후, 의상실로 도망치듯 사라졌다.그렇게 마리를 보내고 강당에 남은 가인들은 슬그머니 무 대 쪽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 이건……. " 이번 문화제는 학생회에서 특별히 신경을 썼는지, 강당은 왠만한 대형 공연 장 뺨치게 꾸며져 있었다. 수 십 가지의 조명 기구는 둘째 치더라도 무대를 만들기 위해 강당 전체를 재건축해 놓은 것이다.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재건축 기간이 채 삼일도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 ……학생회의 예산을 얼마로 알고 있는 거야, 그 인간은? " 가인은 이 모든 일을 추진하는 학생회의 회장 제갈 영을 떠올리며 혀를 찼 다. 이미 이건 학생의 범주를 벗어난 능력이었다. 아마 대원 그룹의 차기 후 계자로서 마음껏 재력을 과시한 거겠지. 가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중얼거 렸다. " 도대체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네,정말. " " 그거야 뻔하잖아. 제갈영의 3학년 8반도 이번 문화제 연극 출전 팀이니까. " " 뭐? 그 녀석들 카페도 하잖아? 그런데 거기다 연극까지 한다고? " " 그렇다나 봐. 문화제 규정 상 한 개만 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카페와 연극을 다 할 줄이야. 여러 가지 의미로 상식 밖이 다. 정말. " 재영과 모두는 제갈 영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이제는 어디까지 비상식적일 수 있을까 지켜보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호일준에 의해 '그나마' 연극과 카페만 하게된 거다. 그·나·마.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나? " 마리 양의 손님 분들이십니까? " 그때 무대의 규모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가인들에게 다가오는 한 여학생. 바로 2학년 1반의 문화제 실행 위원 유미미였다.뭔가 일부러 쓴듯한 진한 뿔 테 안경과 '행사 도우미'라는 안장이 심히 수상쩍었지만 가인들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아,예…….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쪽에 있는 시사회 장으로 가주십시오. " 엥? 왠 시사회장? 가인들은 어리둥절해 하며 유미미에 의해 시사회장이라는 고급 시트가 깔린 좌석으로 안내되었다.무대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자 리였다. 하지만 이 넓은 강당에 달랑 자신들만 앉아 있자니 썰렁한 감이 없 지 않아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있는 그들에게 유미미가 시사회 팜블렛과 책받임을 건 네주었다. 책받임에는 성마리가 해적 복장을 하며 검을 치켜 들고 있는 사진 이 붙여져 있었다.도대체 어느 사이에 이런 걸 찍어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 진의 각도와 양광 처리는 도저히 아마츄어의 솜씨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뛰 어난 것이었다. 모두는 생각햇다. ' 이런 게 동인의 힘이란 거군……. ' " 그럼 재밌게 관람해주십시오. 연극을 시작하겠습니다. " 정중히 인사를 하며 무대 쪽으로 사라지는 유미미. 그 뒷 모습을 바라보며 재영이 감탄을 터뜨렸다. " 대단하군. 이 정도로 뚜렷한 목적 의식과 일처리라니. 우리 반 가인 회가 본 받아야할 부분이다! " " ……그런 건 본 받지말라고. " 네놈들이 지금 상황에서 더 목적 의식과 일 처리가 뚜렷해지면 곤란한 건 이쪽이니까. 작게 투덜거리는 가인과 유리였다.그때 테레이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그들에게 주의를 줬다. " 쉿. 연극 시작이야. " 빰빠바바밤! 거대한 팡파레 소리가 울리며 스피커로 파도 소리가 흘러 나왔다. 최신 식 설비를 했다고 하더니만 입체 음향 시설까지 갖춘 모양이었다! 효과음에 좌 석이 부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시,실감나는군! 사회자의 나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때는 1523년.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혁명이 일어날 무렵의 일입니다. 장 소는 지중해. 뜨거운 햇살이 갑판으로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그런 에메랄 드 빛의 바다 위에서는 이탈리아 서부에 위치한 제노바 해군들이 한 척의 해적선을 뒤쫓고 있었습니다.》 " 캡틴! 따돌릴 수 없습니다.이대로는 녀석들에게 잡히는 건 시간 문제에요! " 해적선으로 보이는 배 모양의 세트 위에서 해적 두목을 연기하는 남학생과 부하를 연기하는 남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는 제노바 해군의 배로 보이는 세트가 있었고 군복을 입은 몇 몇의 배우들이 총과 칼을 들며 소리쳤 다. " 놓치지 마라! 이번 기회에 이 머매니안 해협에서 해적들의 씨를 말려 버 리는 거다! "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음악. 그리고 해적들의 배로 해군들이 뛰어 들기 시작 했다. 변변찮은 반항도 하지 못하며 훈련 받은 해군들의 손에 쓰러지는 해적 들. 이대로 있다간 그들을 기다리는 건 전멸 뿐이었다. 해적들의 두목은 창 백한 표정으로 객석을 향해 소리쳤다. " 이대로 저들의 손에 당하는 수 밖에 없는 건가! 내 바다의 여행은 여기까 지란 말인가! " 절체 절명의 순간! 그때 의외의 구원군이 해적들에게 등장했다.해군들의 배 에서 바다를 살피던 군인이 자신들의 장군을 향해 소리쳤다. " 자,장군 님! 전방에 정체 불명의 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 " 뭣이! 그 깃발이 무엇이냐! " " 은색의 독수리가 새겨진 졸리 로저(Jolly Roger:해적기)! 실버입니다! " " 뭐라고! " 그리고 해군들의 배로 거대한 그림자를 들이대는 또 한 척의 해적선. 그 배 를 바라보던 해적들과 해군들은 희비가 엇갈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아앗! 우리 블루 시드(Blue Seed)의 해적왕 캡틴 실버! 캡틴 실버가 나타 났다! " " 사,살았어! 우리는 이제 산거야! " " 제길! 어째서 저 무패의 해적이 이런 변방에! " 그때, 붉은 망토가 펄럭이며 캡틴 실버의 배에서 한 명의 인영이 번개 같이 해적들과 해군들의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 위압감은 객석에 있는 가인들까 지 압도할 정도로 굉장한 것이었다. 황금색의 머릿결과 붉은 깃털. 붉은 망 토의 여인. 바로 성마리가 분한 캡틴 실버였던 것이다! 허공을 선회하며 해적들과 해군들의 사이에 내려서는 그녀. 그 화려한 움직 임과 연출에 배우들도 무대 뒤의 연출가들도 숨을 죽였다. 마리는 수중의 검 을 해군에게 겨누며 근엄하게 소리쳤다. " 이 해협은 우리 블루 시드의 것.너희들은 지금 누구를 건드렸는지 아는가! " 그런 그녀의 어깨로 날카롭게 허공을 선회하며 내려서는 은색 털의 독수리. 그 독수리 때문에 그녀는 실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이 은색 스프 레이가 뿌려진 독수리를 구하기 위해 동물 병원과 근처의 동물원을 샅샅이 뒤진 성마리 추종회에게 경의를 표하라! " 그리고 나, 캡틴 실버는 해적왕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응징하겠다! " " 제,제길! 어차피 해적왕이라고는 하나 계집! 여자 홀 몸으로 우리 해군들 을 상대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얘들아, 겁먹을 필요 없다! 쳐라! " " 오오오오오! " 장군의 말에 사기를 되찾으며 마리에게 달려드는 해군들.마리는 붉은 망토 를 여미며 노기가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 어리석은! " 그리고 해군들의 검이 붉은 망토를 꿰뚫었다.하지만 망토와 함께 꿰뚫려야 할 마리의 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어,어디로 간 거지?! 그리고 마리는 해군들의 중앙에서 나타났다. " 검에는 검으로 응할 뿐! 내 손속을 탓하지 말라! " 촤촤촤촤! 마리의 레이피어(Rapier)가 번개같이 해군들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그리고 마리의 어깨에 있던 독수리가 하늘로 날아오르며 장송곡을 터뜨렸다. 삐이이이이익! " 컥! " " 이럴수가! " 검을 떨어뜨리며 갑판에 몸을 쓰러뜨리는 해군들. 마리의 검 솜씨가 유감없 이 발휘되는 부분이었다. 어설픈 연기로서의 검이 아닌, 실전을 누비는 검의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구경하던 가인들은 감탄을 터뜨렸다. 대단하다! 역시 마리 선배! 무대 뒤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마리 추종회는 환성이 터져 나올려는 입을 틀어막으며 간신히 비명을 참았다. ' 머,멋져요, 마리 양-------!! ' 그렇다고 눈물을 흘릴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감동으로 전율하는 유미미들을 제쳐두고 연극은 스피디 하게 진행되었다.해군들을 완벽히 제압한 마리는 자 신의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 이 해역은 다름 아닌 캡틴 실버의 해역! 이 바다에서 해적을 멸하려는 자 는 먼저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 " 우오오오오! " 붉은 망토를 다시 걸치며 부하들과 함께 자신의 배로 퇴장하는 마리. 그녀 에게 구원받은 해적들은 그 뒷 모습을 하염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도입부인 1막이 화려히 막을 내렸고, 그 뒤부터는 캡틴 실버의 과거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제노바와 대립 중인 베네치아의 명망 높은 귀족 카스 티아 가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녀는 제네바와의 정치적 정략 결혼으로 이용 되려는 자신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가문도 조국도 모두 저버린다. 그렇게 자 신의 호위 기사 안타레스 만을 데리고 베네치아를 떠난 그녀는 자신의 뛰어 난 검술을 살려 해적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머매니안 해협에 발을 들인 그녀는 실버라는 가명을 쓰며 해적들의 본거지인 블루 시드에 몸을 의탁하여 세력을 쌓고, 그 곳의 해적들을 차례 차례 꺽으며 해적왕의 후보에 오르게 된다. " 최근들어 머매니안 해협에 파견되는 해군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제 노바는 아무래도 대대적인 해적 소탕 작전을 시행할 모양입니다. " 캡틴 실버에게 충성을 맹세한 호위기사 안타레스. 그는 실버가 과거를 버리 고 해적이 되자 자신 역시 기사 직을 버리고 주저 없이 해적이 되는 길을 선 택했다. 그것은 충성심이라기 보다는 그녀에 대한 남 모를 연정이었으리라. 그래. 그런 설정이었단 말이지. 하지만 가인들은 한 가지 의문을 표할 수 밖 에 없었다. ' …… 여자잖아? ' 안타레스는 여학생이 열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짧은 검은 머리의 가발을 쓰 고 남자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여자였다. 어째서 안타레스를 남자로 캐 스팅 한 거지? 그다지 남학생이 부족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닌 거 같은데? 하 지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우리의 마리 양에게 수컷들이 얼쩡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어! ' 그런 성마리 추종회의 심보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성마리의 상대 남자 역 은 모두 다 여자들로 캐스팅 되어 있었다. 마리로서는 뭔가 김이 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히 연기했다. " 이게 다 드레이크, 그 자 때문이다. 날 해적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 남 자는 사사건건 말썽만 일으키고 있어! 재물은 빼앗데 목숨은 취하지 말라 는 내 명령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으니……. " 실버는 블루 시드의 해적들을 약탈보다는 머매니안 해협의 무역자로서 육성 시키려고 했지만, 그 중 실버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진 드레이크 파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해적은 해적. 약탈자는 약탈자일 뿐'이라는 말로 해적 들을 선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레스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 그렇다면 역시? " " 그래. ……부딪히는 수 밖에 없겠지. " 마리는 싸늘하게 웃으며 검을 치켜 들었다. 그리고 연극은 캡틴 실버와 캡 틴 드레이크의 대결 구도로 긴박감 넘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일반 연극 무 대에선 꿈도 꾸지 못할 특수 효과와 소도구들의 호화 잔치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블록 버스터 급 무대가 학생들의 손에 의해서 연출될 수 있다니! 새삼 제갈 영의 재력에 감탄하게 된다. " 정말 대단한 걸, 마리 선배! " 가인은 무대에서 열연하는 마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건 정말 예상 밖 이었다. 마리는 무대에서 그야말로 캡틴 실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성마리 추종회가 그녀의 이미지에 적합한 역을 주었던 것도 이유라고 할 수 는 있었지만,그 보다도 더 큰 이유는 마리의 카리스마 때문이었다.캡틴 실버 라는 역을 통해 마리는 자신이 가진 매력을 그야말로 한껏 쏟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냉철함과 중후함이라니! 테레이아와 유리는 넋을 잃고 마리의 연기를 구경하는 가인의 모습에 초조 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이,이건 안 좋아. ' 이대로 가다간 그의 마음이 혹시 마리에게로? 하지만 그런 걱정을 뒤로 하 고서라도 마리의 연기는 빼어났다. 으음. 분하지만 그녀의 연기 만은 인정해 주지 않으면……. 하지만 그런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객관적인 눈으로 마리를 평가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부르스! 그는 마치 그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무대 위의 마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러브 씬! ' 그리고 캡틴 실버의 클라이맥스인 러브 씬이 시작되었다! 캡틴 드레이크의 세력을 몰아낸 캡틴 실버는 완벽히 블루 시드를 장악하고 머매니안 해협의 무역 사업을 번창시켰다.하지만 분열된 세력을 가다듬고 익 숙치 않은 무역 사업을 펼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일단 가장 큰 문 제가 사업을 위한 자금 마련이었는데, 그 때문에 캡틴 실버는 어쩔 수 없이 해적질을 계속 해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 그녀는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된다. " 이, 이자식이! " 해적들은 자신들이 습격한 선박에서 출현한 정체 불명의 승객을 포위하듯 둘러 쌌다. 평소처럼 제노바와 베네치아를 항해하는 화물선을 습격했는데,선 원은 아닌듯한 한 승객이 검을 빼들고 자신들에게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거 기다 이 녀석……. 엄청나게 강하다! 자신들을 제외한 수 많은 해적들이 이 한 남자의 손에 쓰러져 버렸다! "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약해지는 건가? 애초에 습격한 것은 너희들.그렇 다면 끝까지 습격자의 면모를 고수하라. " " 이 자식이 깔보고 있어! " " 죽여버린다! " 검은 망토를 여미며 롱 소드로 자신들을 겨누는 승객의 태도에 해적들은 분 개했다. 하지만 큰 소리만 칠 뿐 쉽사리 덤비지는 못했다. 머릿수만 믿도 덤 빌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결국 보다 못한 캡틴 실버가 부하들을 뒤로 물리 며 남자의 앞으로 나섰다. " 물러서! 그는 내가 상대한다! " 마리는 남자와 대조되는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수중의 레이피어를 뽑아들었 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던 은색의 매가 전장의 허공을 날아 올랐다. 검의 실력자인 남자 승객…… 이란 설정의 여학생은 마리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애써 참아내며 대사를 계속했다. " 네가 이 해적들의 두목인가! " " 그렇다. 머매니안 해협의 캡틴 실버!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고의 아닌 피해를 주게 되어 미안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방식. 지금이라도 순순히 우 리의 지시를 따른다면 목숨은 취하지 않겠다! " " 미안……하다고? 해적 주제에 특이한 말을 하는 구나. 거기다 여자의 몸 이면서 두목이라니. " " ……! " 그 말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마리는 인상을 굳히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기세에 상대는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마주하며 검을 들 어올렸다. 그 모습에 실버의 옆에 있던 안타레스가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그 녀가 만류했다. " 그만둬! 이 녀석의 상대는 내가 한다! 물러나 있어! " " 하지만……! " 안타레스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결국 낮은 한숨과 함께 몸을 물렸다. 그는 실버와 대적하는 남자를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 었다.아가씨의 몸에 작은 생채기 하나라도 생기면 그날이 네놈의 제삿날이다! " 간다! " 짧은 노호성과 함께 마리의 레이피어가 상대에게 날아들었다.그야말로 강맹 한 기세! 상대 남자 역의 여학생은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마리 는 솜씨 좋게 여학생의 검과 자신의 검을 이리 저리 부딪히며 그럴싸한 검무 를 만들어 보였다. 마리에게 검을 배운 가인의 눈에는 그것이 그녀 혼자 만 의 검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일반 관객에게는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 던 것이다. ' 대단해, 마리 선배! ' 아무래도 애드립인 거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박진감 넘치는 검무 라니! 가인은 가상의 상대를 생각하며 검을 휘두르는 연습은 해봤었지만 지 금처럼 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에 끌어 들여 가상 의 검무를 펼쳐보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가 자신의 의지대 로 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증거! 어쨌든,그런 감탄을 뒤로하고 마리와 상대의 검은 허공에 불꽃을 튀겼다.마 찰할 때 작은 불똥이 튀는 효과가 소품에 장치되어 있었던 것이다.사소한 데 까지 첨단 장비를 도입하다니. 역시 학생회! 챙! 그렇게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치던 검투는 한쪽의 검이 허공을 날으며 그 끝 을 고했다. 의외로 검을 놓친 쪽은 캡틴 실버의 마리였던 것이다. 원래 이렇 게 패해야한다는 설정이다. 마리는 망연자실해 하는 얼굴로 자신의 목에 겨 눠진 남자의 검끝을 바라보았다. 남자 역의 여학생은 검은 망토 사이로 날카 롭게 눈을 번쩍였다. " 좋은 승부였다.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군. " " ……! " 이 뜻 밖의 결과에 안타레스는 두 눈을 부릅 떴다. 검술만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아가씨였다. 어릴 때부터 무가인 카스티아 가의 영애로서 한 시도 검술을 익히는 데 게을리 하지 않던 그녀는 호위 기사인 안타레스 마저도 넘 보지 못할 실력자였던 것이다. 그런 아가씨가……그런 아가씨가! " 네 녀석이! " 분노하며 남자에게 달려들려는 안타레스. 하지만 그를 실버가 날카롭게 제 지했다. " 물러나 있으라고 했지, 안타레스! " " 아가씨! " 안타레스는 분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실버는 그런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검을 겨눈 남자에게 말했다. " ……내가 졌다. 죽여라. " " 후. "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실버의 모습에 남자는 짧게 미소지었다. 그는 마리의 목에서 칼을 거두었다. 마리는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 무슨? 왜 검을 거두는 거냐? " " 기상이 맘에 들었다. 이런 데에서 죽기에는 네 실력과 그 고결한 정신이 아깝다. " " 그런! " 남자는 검은 망토를 여미며 당황해 하는 실버에게 말했다. " 선원들도 승객들도 목숨을 잃은 자들은 없더군. 네 지시인가? " " ……. " " 후. 그렇게 심정이 여려서야. " 남자는 미소지었다. 실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너라면 좋은 해적이 될 수 있을 거다. " 그렇게 말하며 여객실로 몸을 돌리는 남자.실버는 멍하니 그런 남자의 뒷모 습을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 잠깐! " 남자는 그녀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실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결심 을 굳혔는지 자신의 레이피어를 그의 발 아래에 꽂았다. 그 모습에 안타레스 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가씨?! " 난 어릴 적 내 자신에게 맹세한 일이 있었소. 그리고 그 맹세를 지금까지 지켜왔었지. " 실버는 남자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 검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소. 검은 내 자존심이자 내 명예이자 내 삶 그 자체. 그런 내 검은 당신의 검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 " 아가씨! " 설마 아가씨는! 안타레스는 실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고서 안색이 창 백해졌다. 안됩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요, 아가씨! 그러나 실버는 말을 계 속했다. " 날 이기는 남자에게 내 모든 것을 주기로……맹세했었소. 날 당신의 부하 로 삼아주십시오. 영원토록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 " ……. " 남자는 알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 난 그다지 부하가 필요 없다. 그리고 그 맹세 역시 내 알 바 아니지. 거 절하겠다. " " ……! " " 아니면 굳이 날 따라와야할 이유가 있다는 건가? " 남자의 질문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실버. 여기서 캡틴 실버의 고백인 '당 신을 사랑하기 때문' 이라는 명대사가 나와야 했다. 연출가들과 배우들, 관 객들은 한 마음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 어서 그 절정의 순간을! 그 리고 그 대사를 하기 위해 막 입을 열던 마리의 눈으로 객석에서 무대를 구 경하고 있는 가인이 들어왔다. ' 아……. ' 순간 마리는 할 말을 잊었다. 여기서…… 여기서 대사를 해야하는데. 당신 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하지만 가인의 눈빛을 대하자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를 않았다. 왜 이러는 거야? 성마리? 어서 사랑한다고 말 해! 그렇지 않으면 연극이 엉망이 되고만다! 연습 때는 그렇게 쉽게 했던 말 이잖아! 사랑한다고 말해. 사랑한다고…… ' 사랑? ' 사랑이 뭐지? 사랑이? 마리는 중얼거렸다. 난 지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고 하려는 건가? ' 나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 모르겠다. 마리는 알 수 없었다.단지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뿐이었다.마 리는 떨리는 눈동자로 객석의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대사가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그 눈빛을 대하니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도, 뭘 말해야하는지도 다 잊어 버렸다. 그런 와중에 마리의 머리 속 으로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 ' 사랑이란 말을……그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걸까? ' 사랑이란 건……좀 더 소중한 게 아니었던가? 여기서 이대로 얘기해도 아무 런 상관이 없는 건가? 그래. 단지 연극일 뿐이잖아. 가짜라고. 별 의미가 없 단 말이지. 어서 대사를 하고 연극을 재개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되는 거다, 성마리! " 당신을…… " 마리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대사. 그러나 마리의 시선은 가인에게 못박 히듯 움직이지 않았다. 가인은 무대 위에서 마리가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의아해졌다. ……선배? 왜 그러는 거에요? 빨리 대사를 해요.그러지 않으면! " 당신을…… " 하지만 마리는 그 이상 뒷 말을 잇지 못했다. 지켜보던 부르스는 가볍게 코 웃음을 쳤다. " 그럼 그렇지. " 그렇게 무대는 막을 내렸다. " 설마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 " 계산 착오였어. 좀 더 마리 양의 기분을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 캡틴 실버의 리허설을 끝맺지 못하고 마무리 지은 성마리 추종회. 유미미와 회원들은 심각한 얼굴로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성마리가 대 사를 못하다니! 조사를 해본 결과 그것도 특정 단어가 들어간 대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사·랑'이라는! " 으음. 하긴 마리 양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대사야. 사랑이라니……. " " 그럼 어떡하죠? 이 부분을 빼버릴까요? " 유미미의 침음에 의견을 제시하는 연출가들. 그때 그녀들을 향해 이 연극의 시나리오 라이터인 한 여학생이 소리쳤다. " 안돼, 그것만은! 그 부분이 연극의 하이라이트란 말이야! 클라이맥스! 그 고백이 있음으로 해서 실버가 남자를 따라가는 것에 대한 개연성이 부여 된다고! 그리고 안타레스와의 삼각 관계도 성립되는 거지! 이 부분을 빼 버리면 연극은 김 빠진 맥주,물 빠진 테스타롯사(Testarossa:붉은 머리칼) 라고! " ……뭔가 비유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러브 씬을 빼버리면 안된다는 것 만은 알겠다.그런 성마리 추종회의 긴급 대책 회의를 듣고 있던 마리는 갈수록 고 개를 숙였다. " 면목 없다. " " 아,아니! 마리 양! 마리 양이 사과할게 아니에요! 이 모든 건 우리 기획 팀의 실수! 사전에 마리 양의 입장을 좀 더 고려했어야 하는 건데! " 유미미는 당황하며 두 손을 내젓고 의욕에 불타는 눈빛으로 회원들을 향해 외쳤다. " 자,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처럼 이 위기를 잘 극복해낼 수 있을 거에요! 마리 양을 위한 사랑! 오직 그것만을 생각합시다! " " 마리 양을 위한 사랑! " 회원들은 필사의 각오를 다지며 안심하라는듯 마리에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리는 죄책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나는……나는 모두의 기대를 저 버렸어. 난 더 이상 연극을 할 자격이 없는 거야. " 마리 선배……. " 가인은 그런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도대체 왜 그랬던 거에요? 왜 대사를 못했던 거죠,선배? 재영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아까 무대에서 이쪽을 바라보던데 안색이 창백 하게 질려있더라고. " " 그런! 내일부터 당장 문화제인데 아프면 안되잖아! 큰일인데. 병원에 데 려가지 않으면. " ' 역시 남자들이란……. ' 유리와 테레이아는 그런 가인과 재영을 한심하다는듯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어렴풋하게 마리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리로서는 굳이 마음 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리가 왜 대사를 못했던 건지. ' 단지 고지식해서 그럴 뿐이잖아. ' 너무나도 고지식해서 가짜로 하는 고백 조차 하질 못하는 것이었다. 진심 으로 상대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좋아하는 척 하려고 하니 마리의 성격 상 고 역이었을 것이다. 굳이 억지로 대사를 하라고 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봤자 진심이 들어간 연기가 나올 리 없었다.저렇게 바보같이 순수할 수가 있 다니……. ' 정말 바보야. ' 유리와 테레이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왜 저런 바보같은 점이 부러워 지는 것일까? 자신들도 마리 처럼 누군가를 저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을까? 그때 가인과 재영의 고민에 부르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정말 못 들어주겠군. 네 놈들은 그것도 몰라서 아프다느니 어쨌다느니 헛 소리를 하는 거냐? " " 어라? 부르스. 그럼 부르스는 알고 있어요? 마리 선배가 왜 저러는지? " 그런 가인의 물음에 가볍게 콧방귀를 끼며 대답하는 부르스. " 나를 너희 같은 바보들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아라. 여심도 파악 못하는 풋내기들 같으니라고. 자,지금부터 설명해줄테니 귀를 잘 씻고 들어라.저 녀석이 대사를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 부르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마리를 돌아보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그때 그 입 을 틀어막는 유리와 테레이아. 그녀들은 부르스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 여심을 모르는 건 그 쪽이 더 하잖아! " 마리의 마음을, 그것도 유가인 본인에게 직접 말하려고 하다니! 어떻게 무 신경해도 이렇게 무신경할 수가 있는 것일까? 최저의 남자 같으니라고! 부르 스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을 말리는 둘의 의도를 깨달았는지 투덜거리면 서도 마리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가인과 재영만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 뭐야? 대체……. " 그때, 날카로운 한 여성의 웃음소리가 객석에서 들려왔다. " 오호호호호!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는 연극이야! " " ……? "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한 명의 여인과 두 명 의 남자들이 객석에 앉아있었다. 그 두 명의 남자들은 학생회장 제갈영과 부 회장 호일준이었고, 나머지 한 여성은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낯이 익은 얼굴.거기다 그 이목구비는 마치 조 각상을 깍아놓은 것 처럼 단정했다. 재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미,미인이다! 내 리스트에는 들어있지 않은 여성인데? ' 한성 고교의 모든 미소녀들을 체크하여 손수 작성한 재영의 리스트에도 그 녀에 관한 신상 명세는 없었다. 뉴 페이스인가? 하지만…… 저 정도의 미인 이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는데! ' 으음. 그러고 보니 어딘가 낯이 익기도……? ' 그 여성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재영. 순간 그는 그녀를 어디서 봤었는 지 깨달았다. 서,설마 저 여자 아이……! " 연극 계의 고귀한 혈통, 천매희! " " 뭣?! " 그의 말에 무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며 여인을 바라보았다.단지 가 인만이 영문을 몰라 두눈을 멀뚱히 뜨다가 재영에게 물었다. " ……천매희? 누구야, 그 사람이? " " 야야! 유가인, 넌 TV도 안 보냐? " " 응. "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대신하여 신이를 돌 봐오고, 각종 아르바이트에다가 최근들어서는 피스메이커의 일까지! 도저히 TV같은 건 볼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재영은 흥분하며 천매희에 대 한 설명을 시작했다. " 대배우 문연옥의 딸이라고! 문연옥! 연극 대종상을 세번이나 수상하고 올 해의 KBS 드라마 대상을 탄! 엄마가 대배우! 아빠는 유명한 영화감독! 그 둘의 천재적인 재능을 물려 받았다고 호평이 자자한 신인 아역 배우! 제 2의 문연옥이라는 칭호를 가진 그 천매희란 말이야! " " 어,어째서 그런 사람이 우리 학교를 찾아온 거야? " 그제야 대충 감을 잡고 놀라는 가인. 그래. 나도 문연옥은 알고 있다고! 그 대배우의 딸이란 말이지, 저 아이가? 그런 아이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그리고 어째서 그 옆에 제갈영이 있는 걸까? 그런 가인의 의문은 모두의 의 문이기도 했다. 모두의 경악에 한껏 콧대가 높아진 제갈 영은 자리에서 일어 나며 웃었다. " 제군들! 자네들의 궁금증을 이 몸이 친히 풀어주겠다! 여기 이 분은 우연 찮게 이번 학기에 우리 3학년 8반으로 전학오게 된 천매희라고 한다! 마 침 우리 반이 문화제의 연극에 출전하겠다고 하자 호쾌히 여주인공의 역 을 맡아주기로 하셨지. " ' 우연찮게……라고 말해도……. ' 역시나 과시욕의 황태자 제갈영! 보나마나 저번 체육 대회 때와 같은 공작 을 벌인 게 분명했다. 이렇게 진보가 없을 수가 있다니.무엇보다 고등학교의 문화제 연극에 실제 여배우를 영입해왔다는 것부터가 비상식이라고! 그렇게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도 마리는 인상을 굳히며 여배우, 천매희를 노려보았다. " 재미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 " 응? 아아, 신경쓰였나 보지? 그 말이? " 천매희는 마리의 질문에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말 그대로야. 난 이렇게 재밌는 연극은 본 적이 없거든.중반에 대사를 잊 어버리질 않나 쑥스러워 러브신을 못하겠다고 하지를 않나. " " ……! " 움찔 어깨를 떠는 마리. 천매희의 말에 되려 발끈한 성마리 추종회가 소리 쳤다. " 너무하잖아! 남의 연극을! " " 연극이라고? 훗. " 가볍게 비웃음을 터뜨린다. 천매희는 마리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 녀에게서 느껴지는 알수 없는 위압감에 모두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 다. 뭐,뭐지? 갑자기……저 아이의 몸에서 범접하지 못할 기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어? 매희는 마리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외쳤다. "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연극은 연극이 아니야! 그리고 무대가 끝나지도 않 았는데 무대를 내려오는 건 배우로서 자격미달이지! " 쿵!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마리의 가슴을 꿰뚫었다. 성마리 추종회는 마리를 대 신하여 매희에게 항의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천매희가 하는 말 은 모두 옳았던 것이다. 매희는 이 기세를 놓치지 않고 마리를 계속 구석으 로 몰아갔다. " 쑥스러워서 못하겠다고? 쑥스럽더라도 구걸하는 역에서는 구걸을 해야 하 는게 연기인 거야! 대사를 잊어 버렸다고? 대사를 외우니 잊어버리는 거 지! 배우는 대사를 외워서는 안돼! 느껴야 하는 거야! 그 의미를 이해하 고 상황을 느끼며 배역과 자신을 동일시 여겨야 해! 그게 바로 진정한 연 기! 진정한 배우의 자세라는 거야! 난 너처럼 어설프게 배우 흉내만 내는 사람을 가장 경멸해! " " ……! " 마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하다. 저 여자의 말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도 분해! 마리는 비틀 거리는 걸음 걸이로 무대를 뒤돌아섰다. 자신은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이런 어 중간한 마음으로는 모두에게 피해만 줄 뿐이다. 마리는 자신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유미미들에게 말했다. " 미안하다. 모든 건 내 탓.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다. 걱정하지 말고 문화제를 준비하도록. " " 마,마리 양! " 애절한 성마리 추종회의 부르짖음. 하지만 마리는 그 외침을 외면하며 빠른 발걸음으로 강당을 떠났다. 그 뒤로는 쓸쓸한 여운 만이 멤돌고 있었다.가인 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 있어서는 안돼. 마리 선배를 따라가야……! " 기다려요, 마리 선배! " 그렇게 가인들까지 마리를 쫓아 강당을 떠나자 제갈영과 천매희는 기세가 등등해져 성마리 추종회에게 말했다. " 자, 이제부터는 우리의 연습 시간이다. 볼일이 끝났으면 돌아들 가시지? " " 두,두고보자! 절대로 마리 양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아! 반드시 돌아올거 라고! " " 오호호호호! 그래. 기대하도록 할게. 이대로 시시하게 끝나는건 나도 원 치 않으니까. " " 윽! " 성마리 추종회는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결국 강당을 나서야만 했다. 이대로 그들은 3학년 8반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것인가? " 성마리라고……." 그때 강당의 한 구석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있었다. 검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어 그 모습은 보이질 않았지만 그 눈빛 만큼은 기이한 열망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껏 마리가 열연하던 캡틴 실버의 무 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희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소녀는, 저 소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소녀. " 드디어 찾았다! 내 보물……! 여인은 마리가 사라진 쪽으로 재빨리 향했다. " 마리 선배! 잠시만요! 얘기 좀 해요! " " ……. " 뒤에서 들려오는 가인의 부름을 무시하며 마리는 도망치듯 뒷뜰로 걸어갔다. 그녀의 뒤를 줄곧 따라오던 가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는 재빨 리 달려가 마리의 앞을 막아섰다. 그제야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 자자. 저 좀 봐요. 선배 답지 않게 왜 그러는 거에요? 겨우 이런 일 하나 가지고? " 가인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선배답지 못하다고. 언제나 자신의 행 동에 확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는데. 가인은 그녀가 금세 의기 소침한 모습을 털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줄곧 그녀의 옆에서,누구보다 가까이 그녀를 바라봐오던 자신이 아닌가? 몬 스터와의 전장에서도.도장에서 검을 배우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의지되고 선망이 되던 여성이었다.그런데……. " 나 다운 게 뭔데? " 가인의 질문에 마리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물었다.화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가인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 ……선배? ' 마리는 금세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눈동자에는 옅 은 수막이 맺혀 있었다. 그제서야 가인은 깨달았다. 마리도 자신과 마찬가지 로 고등학생일 뿐이라는 것을.18세의 소녀일 뿐이라는 것을! 마리는 무신경한 가인에게 화가 난 건지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모를 목소 리로 연신 소리쳤다. " 그래! 난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어릴 때부터 검만 잡아 왔어! 연기 같은 건 한번도 해본적이 없지! 당연히 이렇게 분장을 하고, 무대복을 입어도 하나도 어울리질 않아! 나에게 어울리는 건 검 밖에 없어! 그래. 알고 있 다고 그런 건! 그런 건……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단 말이다! " 마리는 급하게 소매로 자신의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 한심해…….난. 지금 뭘하고 있는 거지? 겨우 이런 일로 이렇게……. "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눈물이나 흘리다니. 언제부터 눈물이 헤퍼진 거냐,성마리? 이 보다 슬픈 일은 얼마든지 많았잖아? 어려운 일은 더 많았는 데……. 이런 눈물은 사치라고! " ……. " 뒤늦게 그들을 따라온 유리들도 조용히 마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렇 게 소녀로서 상처 받은 마리의 모습은 처음이었다.언제나 조용하고 과묵해서 남자 못지 않게 철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 나이 대의 소녀라면 누 구나 가지고 있을 감성도 그녀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 하아아아. 유가인, 이 바보같은 놈! 구제불능의 멍청이! ' 가인은 그토록 그녀와 지내온 기간이 길었으면서도 그녀의 마음 하나 파악 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 마리 선배도 나와 같은 고교생이라고. 또 래의 여자 아이들 처럼 예쁘게 꾸며보고도 싶고,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 하기도 하는……. " 선배. " " ……! " 가인은 그런 마리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유리와 테레이아는 마음 속으로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악! " 가,가인? " 갑작스런 가인의 포옹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마리.그런 그녀의 귓가로 가 인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잘 어울려요. " " 뭐? " 잘……어울린다니? 뭐가? " 선배가 무대 위에서 보여줬던 모습. 너무나 잘 어울렸다고요. 솔직히 저, 반해버렸는 걸요? 선배의 캡틴 실버. " " 아…….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가인을 외면했다. 그,그런. 그런 동정섞인 말은 필요 없어. 필요 없단 말이야, 가인……. 마리는 애써 무뚝뚝하게 말했다. " 위,위로 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내,내가 너무 약한 모습을 보여버렸군. " " 위로 같은 게 아니에요! " 가인은 마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미소지었다. " 선배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 너무나 좋았어요! 멋있었다고요! 다른 사람 들은 모르겠지만 저 만큼은 느꼈는 걸요? 선배의 진심을! 선배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요. ……그렇지,모두? " 가인은 마리의 뒤에 있는 재영과 부르스, 유리와 테레이아에게 동의를 구했 다. 유리와 테레이아는 구겨진 표정으로 서로 돌아보았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 인다. " ……응. 열심히 했으니까, 마리. " " 도저히 일주일간 연습한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무대였어요,선배 님. " " 그럼! 그럼! 선배의 캡틴 실버! 확실히 이 가슴에 받았습니다! " 그녀들의 곁에 있던 재영도 맞장구를 쳤다.단지 부르스 만이 곰방대를 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 모두……. " 마리는 떨리는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가인은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웃 었다. " 중요한 건 얼마나 잘 연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가 아 닐까요?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선배의 방법이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선배의 연기는 정말 좋았어요. 이것만큼은 제가 장담하죠! " " 가인……. " 마리는 그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그의 진심이 느껴지고 있 었다. 그래. 맞아. 난 아직 내 자신에게 떳떴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 어. 후회하고 실망하는 건 노력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그제서야 마리의 입 으로 한줄기 미소가 피어올랐다. ' 고맙다,가인. 난……언제나 너에게서 도움만 받는 구나. ' 정말 고마워. 정말……. 가인은 그런 마리의 마음을 알았는지 자신들을 바 라보는 재영들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부활이다, 마리 선배! 하지 만 그런 가인의 빅토리에 단지 재영만 반응해 줄 뿐 테레이아와 유리는 싸 늘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 왜, 왜들 저러는 거지? ' ' ……벽창호 같은 놈. ' 뚱한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던 부르스의 중얼거림이 정답이었다.어쨌든 마리 가 기운을 차렸다고 해서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여전히 마리의 연기는 천매희에게 미치지 못했고, 연극의 러브씬을 극복해낸 것도 아니었다.한시라 도 빨리 방법을 강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 정말 연극이 하고 싶어요? " 그때, 그런 가인들에게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누구지? 그렇게 가 인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는 검은 긴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 서있었다. 분명 스타일은 바뀌었지만 저 머리의 너스캡은! 가인들은 그녀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 양호 선생님? " 그렇다. 양호 교사 박미정. 그녀가 팔짱을 끼며 날카로운 눈으로 마리를 바 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선에 마리는 자신의 치부가 낱낱이 파헤쳐지는 느낌을 받으며 몸을 떨었다. 뭐,뭐지 이 사람은? " 연극이 하고 싶냐고 물었어요. " 미정의 기이한 열망에 사로잡힌 물음에 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하고……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는? " " 후후, 후후후후. " 낮게 웃음을 터뜨리는 미정. 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 양호 선생님. 혹시 연극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거에요? " " 뭐, 그래요. 연극 세계라면 잘 알고 있죠.나도 그 옛날에는 배우였으니까. " " 예엣? " 가인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양호 선생님이 배우였었 다고? 뭐, 이것 저것 안 해보신 일이 없는 분 같기는 했지만 설마 배우까지 하셨을 줄이야! 역시 특별한 여인! 미정은 그런 가인들의 감탄에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아픔이 엿보이는 미소였다. " 한때는 무대광풍(舞臺狂風)이라고 불렸었던 것도 같군요. 하지만 옛날 일 은 옛날 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 그녀는 마리를 가리키며 냉정히 말했다. "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중간한 정열이라면 그만두세요,마리 양. 의욕도 없 는 연극은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괴로운 법이니까. " " 어,어중간한 정열이 아닙니다! " 마리는 강하게 미정의 말을 부인했다. 그녀는 단호한 의지가 깃든 목소리로 소리쳤다. " 전 연극을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겁니다.비록 이번 문화제 연극이 처음 이자 마지막인 무대가 될지언정…… 전 후회없이 연기하고 싶어요! " " ……그 말 진심이에요? " " 예! "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듯 미정은 웃음을 터 뜨렸다. " 오호호호호호! 좋아! 그럼 날 따라와! 내가 가는 곳까지! 너에게 연극의 왕도를 보여주겠어! " " ……! " 연극의 왕도! 마리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 마리 선배, 괜찮을까? " 가인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걷 던 유리와 테레이아도 그다지 신통찮은 표정들이었다. 재영은 어깨를 으쓱이 며 그들에게 말했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일단은 양호 선생님을 믿고 마리 선배를 맡기는 수 밖에는. 그리고 우리가 걱정한다고 해서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 " 그렇기는 하지만. " 미정은 모든 연습이 끝나고 텅 빈 학교의 강당에 마리 선배와 단 둘이서 특 훈이라는 것을 할 모양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남아있 으려던 가인들을 냉정히 쫓아버렸다. 마리의 집중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에서 였다. 부르스는 그런 미정의 방식이 마음에 든듯 고개를 끄덕였다. " 후. 맞는 말이다. 그 녀석은 성격 상 미묘하게 여린 부분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 기댈 사람이 곁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약해진다.그 교사는 현명 한 선택을 한 거야. 교육이라는 게 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이지. " 그런 그의 말에 모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저 부르스가! 저 자기만 잘 난 줄 아는 성질 머리 고약한 인간이! 가인은 믿을 수 없다는듯 일부러 장난 끼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 하,하하. 부르스가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건 처음 봐요. 혹시 마음에 든 거 아니에요? 그 양호 선생님? " " ……교육자로서나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나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그 정도 면 꽤 괜찮다고 할 수 있지. " ' 지저스 크라이스트! ' 가인과 재영, 유리와 테레이아는 질겁을 하며 부르스에게서 물러섰다. 말도 안돼! 저 부르스가 그 양호 선생을 마음에 들어 한다니! 이해할 수 없어! 뭔 가 팔짱을 끼며 그녀의 모습을 음미하듯 눈을 감는 게 상당히 꺼림칙해 보였 다. 결국 가인들은 다음과 같이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 ……느,느끼는 건가? 같은 괴팍한 인간들끼리? ' 그래. 공명하는 것일 수도…….부르스는 그렇게 서로 속삭이는 가인들을 가 늘게 뜬 눈으로 기분 나쁘다는듯 바라보았다. 어쨌든 놀라는 건 거기까지 해 두기로 하고 테레이아는 모두에게 말했다. " 자자. 마리 선배 님의 문제는 마리 선배 님의 문제고, 우리는 내일 있을 카페 걱정부터 하자. 일단 메뉴도 준비는 다 되었고, 인테리어 구축도 다 끝났으니 서빙만 남은 거지? " 테레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가인에게 살며시 미소지었다. " 나……기대해도 될까? 가인의 서빙하는 모습. " " 에? 아,아아. 그치만 나 같은 녀석의 서빙하는 모습보다는 테레이아의 서 빙하는 모습 쪽이 더……. " 가인은 갑작스러운 테레이아의 어택에 얼굴을 붉히며 말을 얼버무렸다.테레 이아는 입가의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 모습 쪽이 더? 후후, 내 서빙하는 모습 쪽이 더 어떻다는 거야? " " 아,아니 그게 아니라……. " " 보고 싶은 거야? 내 서빙하는 모습? " 가까이 접근해오며 속삭이는 테레이아의 행동에 가인은 말도 제대로 하지못 하며 더듬거렸다. 테,테레리아! 잠깐! 그렇게 자꾸만 붙어오면……! 고오오오오오오. " 적당히 해둬. " ……이렇게 된단 말이지.가인은 자신의 뒤에서 유리가 불타오르는 시선으로 테레이아를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테레이아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더욱 가인의 품에 달라붙었다. " 어머, 난 단지 가인에게 내 서빙하는 모습이 보고 싶으냐고 물어본 것 뿐 이잖아?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는 거지? " " ……그 따위 거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아. 그러니 오빠를 귀찮게 하지 말고 떨어져. " " ……! " 파지지지지직! 이렇게 집에 가는 마당에 까지 방전 현상이냐! 가인은 불꽃이 튀는 테레이 아와 유리의 공방전에 몸을 떨었다. 안돼! 같은 패턴이야! 이대로 끝까지 갔 다간 결국엔 또 내가 희생양이 된다고! 가인은 도움의 눈길을 주변으로 보냈 다. 하지만 그 눈길을 받을 이들은 철저히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 아, 가인아! 나 시내의 반 문화제 준비를 도와주기로 한 걸 깜빡했다! 그, 그럼 내일 보자∼ " 도대체 시내의 반 문화제 준비를 왜 그가 도와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어쨌 든 그렇게 재영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곁을 부르스가 스쳐지나가며 짤막히 말했다. " 너무 늦지는 말도록. " 뭘 늦지 말라는 거야?! 가인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부르스 역시 잽싸 게 저편의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단지 가인 혼자만이 남겨진 것이다. 단 지 혼자만이. " 오빠! 테레이아의 서빙하는 모습 따위가 정말 보고 싶은 거야? " " 가인! 내가 꼴도 보기 싫어? " 뭔가 왜곡되어 버린 선문답.가인은 그만 심신이 피곤해져 고개를 숙였다. 한편, 아무도 없는 한성 고교의 강당. 그 곳에는 마리와 미정. 두 여인만이 남아 있었다. 짙게 깔리는 어둠을 무대의 조명 만이 밝혀주고 있었다. 그녀 들은 문화제의 준비가 끝난 무대 위로 올라섰다. " 마리 양, 집에는 연락했겠죠? " " 예. 문화제 준비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허락받았습니다. " 미정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답하는 마리. 뭔가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미정에 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 느낌은 무대에 오르자 한층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마리는 저절로 경외심이 들어 미정에게 고개를 숙였다. " 저,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하시고……. " " 이젠 됐어요. 그보다 마리 양에게 보여줄 게 있어요. " 보여줄 것? 미정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소품실에서 가져온 것들을 마리의 앞에 펼쳐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마리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이건? " 무엇……입니까? 이것들은? " 미정이 가져온 것은 수 십개의 가면들이었다. 미정이 박스에서 꺼내는 가면 들은 하나 하나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정은 그 중에서 몇 개의 가면들 을 꺼내들었다. " 이건 연극 연습용 가면이에요. 이 가면을 쓴 사람은 가면의 표정에 맞는 연기를 하게 되어 있죠. 이게 웃는 얼굴. 이게 우는 얼굴. 그리고 이건 화난 얼굴. " 미정은 싸늘하게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웃는 얼굴로 가렸다. " 인간의 단순한 세 가지 표정을 나타낸 가면이야. 이 세 가지를 가지고도 하나의 연극을 만들 수 있는 거지. 그래. 아까의 경우와 같이 이 웃는 얼 굴은 바로 무대 위의 너를 비웃던 천매희의 얼굴. " 순간, 가면을 쓰고 있는 미정에게서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오호호호호!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는 연극이야! " " ……! " 마리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웃는 얼굴의 가면을 쓴 미정에게서 흘 러나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천매희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아니. 분명 그녀와 는 다른 목소리였다. 하지만 억양이나 음성, 그 묘한 어투가 똑같았다. 마치 가면 뒤에 있는 여인이 천매희인 것만 같았다. 미정은 그렇게 놀라는 마리에 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화난 얼굴의 가면을 바꿔 썼다. " 너무하잖아! 남의 연극을! " 그것은 매희를 향해 소리치던 유미미의 목소리! 그리고 우는 얼굴로 바꿔 쓴 미정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 그래! 난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어릴 때부터 검만 잡아 왔어! 연기 같은 건 한번도 해본적이 없지! 당연히 이렇게 분장을 하고, 무대복을 입어도 하나도 어울리질 않아! " " 우웃! " 그건 무대에서 도망쳐 가인에게 흐느끼던 마리의 목소리였다.내가…… 저렇 게 말했었던가? 우선 부끄러움보다도 놀라움이 앞섰다.분명 나조차도 기억하 지 못하는 말들을 단지 한번만 듣고 외우다니! 아니 그 암기보다도 실감나 는 저 연기가 더 대단하다! 미정은 그런 마리의 반응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화난 얼굴의 가면을 벗었 다. " 하지만 인간의 표정이 이 세가지인 것만은 아니야! 질투! 기쁨! 증오! 사 랑!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가면을 배우들은 써야만 하는 거지. 기억해두 도록! 하나하나의 경험이 그대로 연기에 직결된다는 것을! " " 서,선생님! " 마리는 감동한 나머지 미정의 손을 붙들었다. 미정은 그녀에게 따뜻한 미소 를 지어보였다. " 마리 양. 당신은 천 개의 가면을 가지고 있어요. " " 천 개의 가면? " "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난 알 수 있어. 연기에 대한 기술이 부족하더 라도 무대 경험이 턱 없이 부족하더라도 그 자체가 단 하나의 재능이 되 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너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 강력한 무기! 마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선택은 탁월했다.미정 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자신은 분명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끝 맺지 못했던 대사를 마저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날 믿고 따라올 수 있겠어요? " " 이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 결의에 찬 마리의 외침! 그리고 혹독한 미정의 연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미 정의 가르침은 가혹했다. 꾸중은 예사였고 필요하면 손찌검도 마다하지 않았 다. 찰싹! 미정에게서 뺨을 얻어맞고 쓰러지는 마리.미정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소리쳤다. " 공연까지는 이제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데 도대체 언제쯤 제대로 하려 는 거야! 여긴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야! 실버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짐으로서 그녀의 인생이 변하게 되는 거란 말이야! 이 부분에 연극의 전부가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그 장면을 해내지 못하는 실 버라면 쓸모 없어! 그런 실버는 필요 없다! 좀 더 진지하게 못 하겠어? " " 한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 마리는 기합을 내지르며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미정 의 질책에 그 몸을 쓰러뜨려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꿋꿋히 몸 을 일으켰다. 오히려 이렇게 꾸짖음을 당하고 호통을 받으니까 되려 정신이 맑아지고 있었다. 챙! 챙! " 좀 더 화가 나 입술을 떨면서! 목이 메이면서! 이 손을 더 휘두르란 말이 야! " " 이 해역은 다름 아닌 캡틴 실버의 해역! 이 바다에서 해적을 멸하려는 자 는 먼저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 연극의 대사를 고함처럼 내지르며 미정에게 검을 휘두르는 마리. 미정은 그 녀의 검을 침착히 받아 넘기며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마리를 몰 아붙였다. 마리는 창백해지는 안색으로 이를 악물었다. 맙소사! 연극이 아니 야? 되려 내가 밀리고 있다! 초보자가 아닌 고수의 실력이라고! 채앵! " 큭! " 마리는 미정의 검을 방어하다가 몸이 떠밀리는 충격에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미정은 망연자실해하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 마리! 자신의 부하들이 원수 같은 제노바 의 해군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거야! 실버라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 꼈을 것이다! 좀 더 화를 내! 불합리한 폭력에 분노를 억누르지마! " "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 마리는 기합을 내지르며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지칠 줄을 모르고 미 정에게 달려들었고, 미정 역시 지치지도 않고 그녀를 가르켰다. 그렇게 시간 은 훌쩍 자정을 뛰어 넘어 새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둘의 열정은 꺼지지를 않고 더욱 불타올랐다. "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 " " 좀 더 감정을 넣어서!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어 고백하는 것 처럼! " " 당신을……사랑하기 때문! " "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라고! 그 사람을 상 대 역의 남자에게 투영하는 거야! 그렇게 넌 실버 그 자체가 되는 거다! " " 당신을…… " 마리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마음 속으로 한 남자의 이름을 부르짖었다.나 의 사랑하는 사람! 나의 소중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 사랑하기 때문--------!! " 가인! 마리는 마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모든 감정을 쥐어짜는 것 처럼 토해냈다. 숨이 거칠어지고 의식이 멀어져 갔지만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참는 대신 대사를 외웠다. 연기를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이 기분! 이 느낌! '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내 안에 또 다른 한 사람의 내가 있는 것 같아! 점점 내가 연기하는 실버가 느껴져! ' 그렇게 실버의 눈빛을 띄기 시작하는 마리를 바라보며 미정은 웃음을 터뜨 렸다. " 호호호호호! " 마리! 무서운 아이! 무대 위로 한 걸음 나서면 그때부터 넌 이미 네 자신이 아닌 거야! 넌 그 실버라는 여자의 가면을 쓰고 있는 거다! 그 여자의 기분 으로, 그 여자의 성격으로, 그 여자의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돼! 그 누구도 할 수 없지. 하지만 너라면 할 수 있어! ' 그래! 너라면! ' 그리고 문화제의 아침이 밝아왔다! " 아차차! 늦었다! 늦었어! " 서둘러 교복을 입으며 집을 뛰쳐나오는 가인. 어느새 아침 8시였다. 문화제 준비로 서둘러 일어난다고 했던 게 어김없이 또 늦잠 자버렸다! 그는 자신의 뒤에서 잠이 덜 깬 얼굴을 한 채 느릿느릿 걸어나오는 유리를 토닥였다. " 유리야, 정신 차려. 늦었다고! " " 으응……. 하지만……하암. " 하품을 하면서 애써 걸음을 옮기는 게 어째 위태위태해 보인다.가인은 유리 의 뒤를 따라 나오는 부르스에게 물었다. " 부르스. 부르스는 괜찮아요? 잠 부족하지 않아요? " " 흥. 이 나이가 되면 아침 잠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 " ……. " 여전히 애늙은이 같은 소리나 하고. 가인은 고개를 저으며 한 숨을 쉬었다. 그런 그에게 시민이 카페에 필요한 식기구들과 접시들을 상자에 담아 건네주 었다. " 가인 씨, 모양이 예쁘고 세트에 맞는 걸로 골라봤어요. 디자인이 통일 되 어 있으니까 좀 더 카페 분위기에 어울릴 거에요. " " 아, 고맙습니다! 소중히 잘 쓸게요! " 가인은 시민에게서 조심스럽게 식기구들이 든 상자를 건네받았다. 스티로폼 으로 꼼꼼히 싸여 있어서 깨지거나 부숴질 염려는 없었고 의외로 가벼운지라 들고 가는 데 무리가 없을 거 같았다.시민은 미소지었다. " 가인 씨가 들고갈 짐이 많으니까 도시락은 제가 나중에 갔다 드릴게요.이 따가 진우 씨네 가족들하고 같이 문화제 구경가기로 했으니까. " " 아,예? 시,시민 씨가 직접요?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떨었다. 시민 씨가 직접 도시락을 가져 오 신다고? 시민 씨가? 이,이런 영광이! 도시락을 싸주시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인데! 시민은 그렇게 기뻐하는 가인에게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 후훗. 그래요. 하지만 혹시나 일 열심히 안하고 있으면 안 줄지도 모르니 까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 " " 그,그럼요! 당연히 열심히 해야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 가인은 전혀 의욕도 없었던 주제에 시민의 방문에 기합이 들어가 결의를 다 졌다. 하여간 줏대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는 녀석이다. 그의 헬 렐레한 모습에 잠이 달아난 유리는 부루퉁해진 얼굴로 그의 소매를 잡아 끌 었다. " 오빠! 늦었다면서? 얼른 가자. " " 아,그,그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시민 씨! 이따 뵈요! " " ……다녀오겠다. " 한 명은 열성적으로 또 한명은 무심하게 인사를 하며 그들은 집을 나섰다. 시민은 그런 가인들이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다가 크게 숨을 들이킨 후 미소지었다. " 좋아! 그럼 나도 준비를 해볼까. " 그때 그 옆의 진우 네 집에서는…… " 여보! 여보! 이 정장을 입고 가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좀 더 캐쥬얼하게 입고 가는 게 좋을까요? " " 아빠! 아빠! 하나 예뻐? 응? 어제 새로 산 옷이란 말이야! " 가인들의 문화제에 초대받은 미연과 하나는 평소와는 달리 꽃단장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우는 그런 자신의 아내와 딸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가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하하. 둘 다 뭘 입어도 예뻐! 잘 어울려! 하지만 설마 날 위해서 이렇게 애써주다니……. 난 괜찮은데 말이야∼ " " 응? 애쓰다니? 무슨 소리에요? 그리고 당신은 또 왜 그렇게 기뻐하는 거 에요? " 진우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그를 돌아보는 미연.그 질문에 진우는 쑥 쓰러운 표정으로 몸을 꼬았다. " 아니∼ 문화제에서 더욱 날 빛나게 해주려고 내 아내와 딸들이 예쁘게 단 장한다는데 당연히 기쁘지∼ 뭐랄까. 감동해버렸다고. 하하하하. " 진우는 다시 한 번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미연은 그런 자신의 남편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화장대로 눈을 돌렸다. " 당신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에요. 우리. " " ……엥? " 웃던 표정 그대로 굳어버리는 진우. 그는 두 눈이 휘둥그래져 물었다. " 아,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여보? 나 때문이 아니라니? " " 당신이 문화제에 초대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가인이 한테 초대받았다 고요. 당연히 가인이 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거죠. " 쿠쿵! 내려앉는 진우의 순정. 언제나 그렇듯 진실은 쓰디 쓴 법이다.더구나 그 옆 에 있던 하나가 사심 없이 웃으며 진우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 하나는∼ 하나는 오빠한테 잘 보이고 싶어! " " ……. " 고개를 푹 숙이며 대번에 의기 소침해지는 진우.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한 성 고교의 문화제 티켓 3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티켓에 불을 붙이려는 그. 미연과 하나는 그 돌발 행동 에 깜짝 놀라 침대의 베개를 집어들었다. " 태우지마! " 퍽! 베개는 정확히 진우의 얼굴을 후려쳤다. 24구역에 위치한 박재영의 집에서도 한창 문화제의 열기는 들뜨고 있었다. " 형아! 여기 녹차하고 커피 가져가야지! 카페한다는 사람이 이걸 잊어버리 면 어떻게 해? " " 아, 고맙다! " 역시나 늦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서둘러 집을 나서던 재영은 재민이 건네주 는 준비물을 받고 얼굴을 붉혔다. 으음. 형이나 된 녀석이 매번 동생에게 이 렇게 챙김이나 받다니……. " 미안하다. 이렇게 칠칠치 못한 형이라서. " " 으응. 걱정마 형아. 난 그런 형아가 좋으니까. " 재영과는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히며 살며시 고개를 젓는 재민.아침부터 형 제끼리 얼굴을 붉히며 뭐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아름다운 형제애 정도로 봐주도록 하자. 재영은 재민에게서 준비물을 챙겨받고 집을 나서려다 가 뭔가가 생각난듯 그를 돌아보았다. " 아, 그런데 정말 문화제에 올 거야, 너? 오늘 학교도 쉬는 날이 아니잖아? " " 당연히 가야지! 학교를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 " ……아니. 학교를 빠진다니……. " 재영은 탐탁치 않다는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에게 재민이 상처를 받았다는 듯 눈시울을 붉히며 소리쳤다.뭔가 뺨까지 붉힌게 위험해보였지만 15년을 함 께 살아온 재영은 그러려니 했다. " 그,그런! 형아!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사 랑하는 형아가 문화제를 한다는데 동생인 내가 가만히 공부나 할 수 있을 거 같아! 만약 형아는 내가 문화제를 한다면 찾아 오지 않을 거야? " " 재,재민아! " 재영은 감동하며 재민의 두 손을 맞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형아… …라는 문구가 뭔가 맘에 걸렸지만 밀려드는 감동에 잊혀지고 말았다. " 나,나 몰랐구나! 재민이 네가 이 형아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 " 형아! 드디어 내 맘을 알아준 거야? " 재영과는 다른 의미로 감동에 벅차오르는 재민.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재영은 그런 동생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그래. 알고말고. 이런 착한 동생이 있다는 걸 알면 내 여자 친구도 기뻐 할 거야. " " …뭐? " 한순간 재민의 표정이 굳어버렸지만 재영은 눈치도 못채고 말을 이었다. " 아, 잘됐다! 이참에 학교에 와서 내 여자친구도 만나보면 되겠구나! " " 여자……친구? " " 응. 저번에 얘기했잖아? 유시내라는 예쁜 아이라고. 소개시켜줄테니까 예 의바르게 굴어야 한다. 알았지? " 재영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재빨리 집을 나섰다. 하지만 재민은 부 들부들 떨리는 눈동자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여자 친구! 여자 친구라고? 그래. 들어본 적이 있어. 나의 형아에게 달라붙은 기생충 같은 여 자가 하나있다고! ' 감히 내 형아에게! ' 용서할 수 없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형아를 꼬드긴 게 분명해! 나에 게서 형아를 빼앗아가다니! ' 그 얼굴을 똑똑히 봐주지! ' 재민은 얼굴도 모르는 재영의 여자 친구,유시내를 향해 적의를 발산했다.아 마 지금쯤 시내는 이유 모를 오한에 몸을 떨고 있을 것이다. " 하아아아아.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에서는 윤채영의 긴 한숨소리가 떠나지를 않고 있 었다. 그녀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실의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신입 오퍼레이터 문세희가 옆의 삼인방들에게 물었다. " 저기……선배님들. 치프가 아까부터 왜 저러는 거죠? 어디 아프신 건가요? " " 이런이런∼ 우리 귀염둥이가 그것이 궁금한 거로구나. " 귀염둥이라니……. 세희는 자신을 부르는 삼인방의 호칭에 인상이 구겨졌지 만 삼인방은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 귀염둥아. 생각을 해보렴. 만약 사랑하는 님이 축제에 자신을 초대했어. " " 그런데 일에 치이는 바람에 그 초대에 응하지 못한다면? " " 뭐, 궁상이라도 떨어야지. 어떡하겠니? " 삼인방의 대답에 세희는 한줄기 식은 땀을 흘렸다. 아,그거였나? 그녀는 감 을 잡을 수 있었다. " 그러고 보니 오늘이 피스 블루 유가인 군이 다니는 고등 학교가 문화제를 하는 날이군요? " " 그렇지! 과연 똑똑해, 귀염둥이! " 그러니까 제발 그 귀염둥이 소리만은 어떻게 안될까나? 세희는 작게 투덜거 렸지만 언제나 그렇듯 삼인방의 페이스에 말려들기만 한다. 삼인방은 히죽히 죽 웃으며 채영이 들으라는듯 큰 소리로 말했다. " 아아, 고등학생의 문화제라∼ 그 얼마나 재밌는 게 많으려나? 우리 학창 시절에도 꽤 볼거리가 많았지? " " 으응. 아직도 기억에 남아. 폰 미팅이라는 게 있었지. " " 뭐? 진짜! 그런 것도 허용해줬어, 너희 학교? " " 응. 뭐, 폰 미팅이라고 해봐야 종이컵에 실을 연결시켜 칸 막이를 사이에 두고 하는 거였지만.나중에 밖에서 만나기로 하고 입구로 나왔다가 왠 물 먹는 하마가 기다리고 있어서 모르는 척 하고 도망친 적이 있지! " " 푸하하하하! 가관이다. 그거! " 그런 삼인방들의 웃음 소리에 업드려 있던 채영의 이마로 실핏줄이 돋아났 다. 저것들이……. 남이 뻔히 기분이 안좋다는 걸 알면서도 도발하고 있어? "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가인 군은 이번에 뭘 한대니? " " 뭐라더라? 아, 카페! 그거다! 카페를 한다고 하던데? " " 에이. 평범하다. 별로 재미 없겠는데. " " 아니야. 그건 모르는 소리! 카페야 말로 문화제의 묘미라고! 얼마나 특색 있는 메뉴와 얼마나 특색있는 종업복으로 손님을 사로잡느냐가 관람의 키 워드! 거기다 종업원의 미모는 어떻고? 파릇파릇한 고교생들 중 엄선된 선남선녀들 만이 손님들을 맞이하지! " " 와!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그거 가장 까다로운 거였잖아? 그런 걸 가인 군이 한단 말이야? " " 으으음∼ 가인 군이라면 마스크도 출중하고 스타일도 괜찮으니까 서빙을 할까나? 꺄! 안타까운데. 가인 군의 서빙 차림을 볼 수 있는 찬스였잖아? " 삼인방은 입을 모아 치프의 업드린 등을 향해 속삭였다. · · · · · · · · · " 당 직 만 아 니 었 더 라 면. " " 시,시끄러워!!!! " 결국 참지 못하고 울상을 짓는 채영. 진우를 통해 한성 고교의 문화제 티켓 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한 달에 한 번 있는 당직으로 자리를 비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 억울함이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것이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나 들쑤셔 놓다니! 너무하잖아, 네 녀석들! " 어머머. 우리 치프 울려고 한다? " " 하긴 사랑하는 님을 만나러 가지 못하는 것 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이건 현대 판 견우와 직녀로군. " " 아, 그 표현은 좀 고리타분한데. " 그런 채영의 외침에도 거리낌 없이 수다를 계속하는 삼인방.그 모습을 지켜 보던 채영은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그야말로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그 외에는 달리 그녀의 모습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그 사이에 끼인 세희만이 안절부절 못하며 가슴을 졸일 뿐이었다. 그때 작전 본부실로 두 명의 여성이 들어왔다. " 여러분, 다들 안녕하세요? " " Good morning, everyone! " 바로 진 사령관 직속 비서 민수정과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였다.그녀들은 그야말로 반듯하게 꽃단장을 하고 있었는데, 수정의 옷이 어딘가 메이드 복 같다는 점만 빼면 그야말로 100점 만점에 100점을 줘도 아깝지 않을 차림새 였다. 그런 수정들의 화려한 복장에 오퍼레이터 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 어, 저기…… 두 분 어디가시는 건가요? " " 아아.마침 가인 군에게서 초대받은 문화제 티켓이 있어서 한번 가볼까 하 고요. " 사심없이 활짝 웃는 수정과 시더. 하지만 그 미소는 채영의 기분을 나락으 로 가라앉히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채영은 허탈한 마음에 사로잡혀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고 삼인방은 진심으로 그녀를 동정했다. 부,불쌍해, 우리 치프! 시더는 그런 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 디지털 캠코터로 담아올게. 가인의 모습. " " ……. " 하지만 그것도 별 다른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 자자! 여러분! 서둘러 주세요! " 한성 고교의 강당. 2학년 1반의 문화제 추진 위원 유미미는 성마리 추종회 를 이끌고 닫혀진 강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녀들은 그 어느 연극 팀보다도 일찍 강당을 찾아왔는데, 그것은 조금이라도 더 연습을 해보기 위함이었다. 어제의 리허설을 매듭짓지 못한 그녀들로서는 다른 팀보다 턱 없이 연습량 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들과의 공백을 메꿀려면 이 수 밖에 없어! " 빨리 빨리 세트를 장치하고 곧바로 연습에 돌입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 가 살 길은 연습! 또 연습 밖에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 " 예엣! " 성마리 추종회는 기운 차게 대답하며 재빨리 무대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무대 위의 두 그림자! 출입구의 열린 틈 사이 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무대를 비추자 확연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앗! " 성마리 추종회의 누군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무대 에 있던 여인들. 그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추앙해 마지 않던 성마리와 양 호 교사 박미정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놀라운 건 한바탕 난투라도 벌인 건지 그 옷들이 찢어지고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뭐, 뭐지! 저 모습은? 맹수 하고라도 싸운 건가? " 마,마리 양? 이,이게 어떻게 된……? " 유미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마리가 퀭한 눈동자를 들어 그녀 를 한번 바라보자 유미미는 벼락에 맞은 것 처럼 몸을 떨어야만 했다. 알 수 없는 전율이 전신을 엄습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놀라는 그녀들에게 미정의 낮게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드디어……완성됐다. 새로운, 새로운 실버가. " " 발견했습니다,선생님. 저 만의 실버를…… 찾았습니다. " 지친 기색이 완연한 마리의 목소리. 하지만 그 얼굴에서는 알 수 없는 희열 이 떠오르고 있었다.미정은 그런 마리의 모습에 어깨를 떨며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후후후후, 오호호호호호호! " 그리고 거짓말 처럼 뚝 웃음을 멈춘 그녀가 소리쳤다. " 가라,성마리! 이번 문화제의 연극은 네가 접수하는 거다! " " 흠∼ 흠∼ 박력분에다가 버터, 그리고 설탕하고 계란, 우유, 소금…….아, 사과를 잊을 뻔했네. " 테레이아는 학교 근처의 대형 마트에서 애플 파이의 재료들을 고르고 있었 다. 시민이 준 쪽지에는 애플파이의 재료와 만드는 방법, 사람 수에 따른 양 조절법까지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식료품 코너를 거니는 이 에메랄드 머리의 소녀에게 사람들의 이목은 집중되고 있었다. 외국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눈이 번쩍 뜨일 미소녀인 것이다. " 녹말에다가 으음…… 물은 학교의 식수를 이용하면 될테고. 건포도와 계 피 가루까지 챙기면 끝! " 테레이아는 자신이 사야할 물품들을 확인하고 계산대에 있는 남자 종업원에 게 자신이 선택한 물품 목록을 건네주었다. " 자, 이대로 한성 고교의 1학년 3반으로 보내주세요. "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거스릴 수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 종업원은 넋 을 잃고 테레이아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 아,예. 예. 여,여기 계산을. " " 카드 되나요? " 테레이아는 클래스메이트들에게서 건네받은 돈이 있었지만 현금으로 계산하 는 건 피곤했는지 그냥 카드로 계산해버렸다. 고등학생이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니는 게 뭔가 이상했지만, 테레이아에게서 풍겨나오는 기품이 그 이상함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종업원은 서둘러 카드로 계산을 치루며 조심스럽 게 테레이아에게 물었다. " 아,하하. 한성 고교 학생인가 보죠? 오늘 문화제가 있는. " " 예, 그래요. " 환하게 미소짓는 그녀. 그러자 가득히나 아름다운 테레이아의 미모가 한층 더 빛을 발했다.종업원은 애써 더 말을 걸지도 못하고 카드를 건네주었고 테 레이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트를 빠져나왔다. " 흠∼흠∼좀 늦어버렸네. " 그녀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애플 파이의 재료만 산다는 게 어쩌다 보니 이것 저것 구경하느라 시간을 지체해버렸다. 지금 쯤 이면 벌써 카페가 시작했을 텐데. 테레이아는 발걸음을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뭔가 이상하게 들뜨는 기분이었다. 이해 할 수는 없었지만 문화제라는 축제 에 흥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흥분……이라고? 내가? ' 테레이아는 들뜨던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인상을 굳혔다. 이런 인간들의 축 제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니……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모든게 다 거짓이잖아? 그녀가 그들과 함께하는 건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 때문이었 다. 단지 그것 뿐! 이런 인간들의 축제 따위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 때로는 이런 것도 좋겠지. ' 테레이아는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가인과 클래스 메이트들의 얼굴이 떠올 랐다. 그들과 방과 후에 남아 문화제 준비를 했던 며칠간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진다. 그래. 이런 인간들의 생활을 맛보는 것도 그리 나 쁘지만은 않았다. 굳이 부정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 ……즐거워 보이는군. " 그때 그녀의 귀에 들려온 낯익은 한 목소리. 테레이아는 흠칫 걸음을 멈추 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그녀의 생각대로 '그'가 있 었다. 푸른 청룡이 수놓인 청포의 남자. 염색을 한 것도 아닐텐데 은은한 빛이 흐 르는 초록색 머리와 푸른 눈동자가 상당한 이질감을 풍긴다.테레이아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초류향. 무슨 일로 나타난 거지? " " 후. 왜 그리 경계하는 거냐? 너 답지 않군. 뭔가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 테레이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솔직히 초조해 하고 있었다. 왜? 그는 나의 동료다. 이렇게 안절부절해 할 건 없잖아? 나는 뭘 걱정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그런 이유 모를 불안함을 철저히 숨기며 차갑게 대꾸했다. " 쓸데 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왜 나타난 거냐고 물었다. " " 단지 네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건 아닌가 궁금해서. " " ……! " 그렇다. 초류향에게서 느껴지던 불안감. 그것은 자신의 생활을 그가 한순간 에 망가뜨려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다.망가뜨려? 뭘? 내 생 활을? 내 생활이라는 게 나한테 있었던가? 테레이아는 자조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냉정히 초류향을 지나쳤다. "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실례하지. 이렇게 아침부터 날 찾아올 여유가 있다 면 너야말로 좀 더 분발하는 게 어때? " " 흥. 이 몸에게 설교를 하는 건가. " 초류향은 분노하는 기색을 지었지만 굳이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테레이 아에게서 뭔가를 느꼈는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지나가는 말투로 그녀를 도 발한다. " 인간들의 축제인가? 그렇다면 그들도 있겠군. 가이아의 꼭두각시들도. " " ……! " 테레이아는 날카로운 눈으로 초류향을 노려보았다.마치 눈빛 만으로도 사람 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의 그녀가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초류향은 여유롭게 그녀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코웃음을 쳤다. " 후후후. 그래. 네 말대로 분발하기 위해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잊지 말도록. 넌 우리와 같은 바르의 별이라는 걸. " 푸확! 순간 불꽃과 함께 테레이아의 앞에서 그 모습을 감추는 초류향. 그 바람에 거리를 걷고 있던 몇 몇의 사람들이 놀라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테레이 아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 그런 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 테레이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딘가 서글픈 울림이 섞인 음성이었다. " 아이스티 두 잔 가져왔습니다! " 한편 한성 고교의 1학년 3반은 순조롭게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가인은 유 니폼으로 준비한 하얀 반 팔 와이셔츠에 검은 조끼를 걸치고 차들을 날랐다. 목에 메고 있는 빨간 나비 넥타이가 어째 신경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 외에 는 무난한 차림새였다. " 여기요! 여기 홍차 하나 하고 커피 둘! " " 아,예! " 밀려드는 주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재빨리 주문을 받아적는 가인.그 때 그의 주변에 앉아있던 여성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아 마도 문화제에 놀러온 대학생들인 것 같았다. " 얘.얘. 저기 저 서빙하는 애, 괜찮지 않니? " " 아,그치? 그치? 은근히 눈이 가더라고. " " 한번 말이라도 붙여볼까? " 뭐야? 이 여자들은? 가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이블 근처에는 자신 밖에 없었다. 어라? 설마 이거…… ' 날……말하는 건 아닐테지. ' 그런 가인의 예감은 적중했다. 여자들이 그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 저기요∼ 아까부터 우리가 주문한 커피가 안와서 그러는데요. " " 아, 죄송합니다! " "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그 보다 혹시 일 끝나면 시간 되세요? " " ……예?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그리고 왜 이렇게 달라붙는 거야?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어설프게 말했다. " 시간이야 되지만…… 저기, 그런데 그건 왜? " " 꺄! 시간 된데! " " 저기요! 그럼 저희하고 같이 학교 구경 안하실래요? " 가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혹시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문화제 헌팅? 그걸 깨닫는 순간 가인의 얼굴은 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달아올랐다. 얘 기는 많이 들어보았는데 설마 이런 걸 자신이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이다. 그가 얼굴을 붉히자 여자들은 귀엽다면서 꺅꺅 거렸다. 아, 잠깐! 자 꾸 그렇게 달라붙지 말라니까! " 오빠! " 그때 그렇게 여자들에게 붙들려 정신을 못차리는 가인을 날카롭게 부르짖 는 한 목소리. 가인은 급히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이 목소리는! " 유리야! " 그곳에는 한껏 전투 본능에 달아오른 유리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리고 여자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공통된 의문. ' ……초등학생? ' 어째서 초등학생이 이런 곳에? 더구나 그 초등학생은 여기에서 서빙이라도 하는 건지 이 곳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뭔가 더더욱 미궁에 빠져드는 느 낌이다. 휙! 유리는 거칠게 가인을 여자들의 손아귀에서 빼돌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그 목소리는 초등학생의 것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도 살벌한 것이었다. " 헌팅을 할 거면 다른 데서 알아봐! " 그녀가 짓는 표정이 얼마나 표독스러웠는지 여자들은 몰골이 송연해져 쓴 웃음과 함께 교실을 나가버렸다. 가인은 그들을 붙잡기 위해 복도로 쫓아 나 왔지만 이미 여자들은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는 유리를 돌아보며 나무랐다. " 유리야, 왜 그랬어? 무례하게 구니까 손님들이 다 가버리잖아! " " 오빠는 바보 아냐?! " 되려 가인을 꾸짖는 유리. 그 벼락같은 호통에 가인은 깜짝 놀라 할 말을 잊었다. 유리는 화가 난 표정으로 그를 쏘아 보았다. " 뭐가 좋다고 여자들에게 실실 웃어 보이는 거야? 그렇게 웃으니까 여자들 이 오빨 쉽게 보는 거 아냐! " " 아,아니! 내가 언제 실실 웃었다고……. 그리고 쉽게 본다니, 너! " 그게 오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라고 말하려던 가인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 다. 유리의 주위로 은은한 핑크빛의 오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 은 기겁을 하며 유리에게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 유리야! 오라! 오라가! - 아……! 그런 가인의 충고에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서 재빨리 오라를 감추는 유리.다 행히도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인은 십 년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하아아. 다,다행이다.하지만 유리 녀석!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 도 그렇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라를 꺼내다니 무슨 생각이야! ' 날이 갈수록 성미가 불같아지니, 원. ' 작게 한숨을 쉬는 가인.자신에게 모든 원인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 다. " 이 녀석들! 일 안하고 뭐하고 있는 거야! " 그렇게 복도에 있던 그들에게 막 교실에서 나온 하지연이 소리쳤다.그녀의 부름에 가인과 유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지연은 가인과 같은 검 은색 정장 차림에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입에는 예의 담배까지 떡 하니 물고 있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마치…… " 저기, 선생님. 아까부터 생각했던 건데요. " " 뭔데? " " 그렇게 입으시니까…… 늙다리 호스트 같아요. " 퍽! 대번에 가인의 머리를 후려치는 지연.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며 물었다. " 그렇게 티가 많이 나냐? 아는 호스트 바에서 빌려오기는 했다만. " " ……. " 그래! 처음부터 이런 호스트 옷 같은 걸 가져올 때부터가 이상했다고! 가인 은 크게 낙담하며 부디 손님들이 이 옷의 출처지를 깨닫지 못하길 바랬다.그 나저나 어떻게 호스트 바에서 옷을 빌려올 수가 있는 거지? 평소 호스트 바 에 출근 도장이라도 찍고 다니시는 걸까,우리 담임? 지연은 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겠다는듯 인상을 찌푸렸다. " 엄한 상상하지 마라. 내 아는 지인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빌려 온 것 뿐이 니까. " 호스트 바를 운영하는 지인이라니……. 도대체 어떤 지인이길래? 어쨌든 가인이야 서빙을 하는 처지이니 어쩔 수 없이 호스트 복을 입고 있 다지만 지연은 이것을 입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저런 수고를 하고 있는 걸까? 그 의문은 뒤늦게 교실로 돌아온 테레이아에 의해 풀렸다. " 마스터(Master)! 물품 신청하고 왔습니다. 잠시 후면 마트에서 배달해 올 거에요. " " 오, 수고했다. 마트까지 갔다오느라 힘들었지? 좀 쉬어라. " 그렇다. 지연은 이 카페를 운영하는 마스터의 자격으로서 문화제에 참가하 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이 학생들 일하는데 끼어있다는 것부터가 뭔가 비상 식적이었지만, 이미 이 비상식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 학생회에서 내건 문화제의 우승 상품이 발단이었다. ' 이런 게 바로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드는 꼴이지. ' 가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테레이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 그래도 오래 걸렸네? 학교에서 마트까지 그리 멀지는 않았을텐데. " " 훗. 내가 늦게 돌아와서 걱정했던 거야,가인? " 테레이아는 나긋나긋하게 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그 모습에 유리는 반응하기에도 지쳤는지 인상만 찡그릴 뿐이었다. 테레이아는 유리가 평소처럼 자신을 제지하지 않자 가볍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 쳇. 재미없어. " " ……즐기고 있었던 거냐. " 이를 가며 주먹을 불끈 쥐는 유리. 그때 저편의 복도에서 재영이 헐레벌떡 가인들에게 달려왔다.그는 숨을 몰아쉬며 흥분하는 얼굴로 지연에게 소리쳤다. " 선생님! 선생님! 정찰병 박재영, 지금 돌아왔습니다! " 딱! 우선 그의 머리부터 후려치고 보는 지연. 재영은 난데없는 일격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연은 짧게 말했다. " 마스터. " " ……예, 마스터. 어쨌든 마스터의 말대로 3학년 8반에 갔다왔어요. " 재영은 작게 투덜거렸다. 정말 묘한데서 까다로운 분이라니까. 그는 지연에 게 한가지 특명을 부여받아 잠시 서빙조에서 이탈했었는데, 그건 다름아닌 3 학년 8반의 문화제 행사에 대한 정찰 및 보고였다. 3학년 8반. 바로 학생 회 장 제갈 영이 소속된 반이다. " 그 녀석들 정말 터무니 없이 일을 벌여놨던 데요? 아예 교실을 재건축해 서 무슨 레스토랑 같이 꾸며 놨어요.거기다가 그 웨이트리스들이라니! 아 마 저번 운동회 때 크라운 프린스들이니 뭐니 하던 그 여자들이 분명해! " " ……! " 지연은 이를 악물었다. 제갈영. 그는 자신이 우려한 대로 민주주의의 형평 성에 어긋나는 조건들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적극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반칙이야! 이대로 재력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가? 하지만 그녀는 냉정했다. " 아직 속단하기에는 일러. 아무리 겉이 번지르르하다고 해도 고객은 결국 특별한 걸 원하는 법. 우리는 철저히 녀석들과는 차별화된 전략으로 나간 다. 양보다는 질인 거다! " " 네네. " 가인들은 잘도 기죽지 않고 의욕을 불태우는 지연에게 박수를 쳐줬다. 아마 도 체육 교사로서의 오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그래. 의욕이 있다는 건 좋 은 일이지.하지만 그렇게 그녀가 불타오를수록 결국에는 자신들만 힘들어진 다는 걸 그들은 경험 상 잘 알고 있었다. 제발 적당히 해줘야 할텐데……. " 어쨌든 장기전이 될 추세니까 일단 너희들은 문화제 구경이나 하며 한 숨 돌리고 있어라. 아무래도 승부는 외부인들이 밀려들 오후 1시부터 일 테 니까. 늦지말고 점심 시간 까지는 돌아와! " " 예에. " 그래도 쉬게는 해주니 다행이다. 가인들은 작게 한숨을 쉬며 교복으로 갈아 입기 위해 교실 한편에 만들어 놓은 탈의실로 향했다.그때 그들을 재차 부르 는 하지연. " 아, 참. 그리고 가는 김에 '저것'도 좀 데리고 가라. " " ……예? " 저것이라니? 가인들은 지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 곳 에서는……. " 지금 뭐라고 했나, 애송이? 전통차는 돈 내고 먹기가 아깝다고? " " 아,아뇨. 그게 아니라…… 그, 녹차 같은 건 아무래도 그냥 물 같으니까 ……저기, 커피가 좋겠다고 한 건데. " " 너 같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녹차에 대해 뭘 안다는 거냐! 녹차 는 암발생 억제에 효과가 있고, 네 녀석의 몸 구석구석에 정크 푸드로 쌓 여있던 콜레스테롤을 제거해주기까지 한다! 거기다 동맥경화 억제와 혈소 판 응집 억제! 식중독 예방! 콜레라, 충치 예방까지! 그 얼마나 무궁무진 한 효능이 있는지 알기나 하고 그 뚫린 입으로 지껄이는 거냐! " " 히이이이익! " 커피를 시킨 손님의 멱살을 부여잡고 녹차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던 브루스. 이미 그 주변의 손님들은 겁에 질려 슬그머니 테이블에서 일어나고들 있었 다. 지연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끊어 먹으며 소리쳤다. " 당장 데려가! " 결국 브루스까지 합쳐 다섯 명이 된 멤버는 쫓겨나듯이 다른 교실로 이동했 다. " 자자. 그럼 일단 우리 옆 반인 1학년 4반부터 들려 볼까? " 가인들은 가장 가까운 1학년 4반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마침 1학년4반은 재 영의 여자 친구 유시내가 있는 반이기도 했다. 아,그러고보니 시내 네 반은 뭘 하고 있을까? 아마 그녀의 남자 친구인 재영이라면 알고 있겠지. " 재영아, 4반은 뭘 한대? " " ……. " 하지만 가인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지독한 침묵이었다. 재영을 돌아보니 그 는 창백한 표정으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어라? 평소대로라면 신이 나서 묻 지 않아도 알아서 다 말할 녀석인데 지금의 이 반응은 뭐지?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재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 하,하하. 뭐, 별 다른 게 있겠어? 다 거기서 거기겠지∼ 아, 그래! 4반 보다는 옆의 5반에서 하는 귀신의 집이 더 볼만할 거야! 거기로 가자! 거 기로! " ' ……뭔가가 있군. ' 가인들은 시내의 반이 비범하지 않은 아이템을 채택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재영이가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뭘 하고 있 다는 거야? 그때 억지로 가인들을 5반으로 이끄는 재영에게 한 정체불명의 소년이 달려 와 안겼다. " 형아∼ 여기 있었구나! " " 으앗! " 힘껏 저편에서 부터 달려와 재영을 덥썩 끌어 안는 소년. 바로 재영의 동생 박재민이었다. 그는 교복 대신 어딘가 아동틱한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아침 에 했던 말대로 학교를 빠지고서 온 모양이었다. 유리들은 이 갑작스런 소년 의 등장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 누구? " " 아아, 재영이 녀석 동생이야. 재민아, 안녕! " 질문에 답한 것은 옆에 있던 유가인이었다. 어릴적 부터 재영의 집을 자주 들락거렸기에 그의 동생인 재민과도 잘 알고 지냈던 것이다. 재민은 인사를 하는 가인을 알아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아앗! 가인이 형, 안녕하세요? " " 그래. 오랫만이다. 그 동안 잘 지냈냐? 작년 이후로 한동안 못 만났던 것 같은데. " " 그러게요. 자주 놀러 오고 좀 하세요. " 생긋 웃으며 말하는 재민은 재영과는 형제라고 하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는 미소년이었다. 유리들은 믿을 수 없다는듯 재민을 응시했다. 도대체 저 하늘 하늘한 이목 구비의 어디에 재영의 피가 섞여 있다는 거야? 그 괴리감이 얼 마나 심했던지 오죽했으면 재영이 먼저 태어난 것은 뒤늦게 태어날 동생에 게 모든 유전적 정보를 물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였을까 란 생각까지 들 정도 였다. 재민은 모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애교스럽게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박재민이라고 합니다.평소 저희 형아가 폐를 많이 끼치고 있 죠? 형아를 대신해서 감사드릴게요. " " 아,아니. 감사랄 거 까지야……. " 얼떨떨한 얼굴로 손을 내젓는 유리와 테레이아. 역시 안 닮았어. 이 아이의 어디가 저런 것(재영 지칭)과 닮았다는 거야? DNA 자체가 틀리다고! 재영은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재민에게 투덜거렸다. " 누가 폐를 끼친다는 거야? 이래뵈도 교우 관계는 꽤 착실하다고. " " 자기 입으로 착실하다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헤헷. " 재민은 살짝 볼을 붉히며 혀를 내밀었다. 자신의 형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은 애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래. 애정. 애정이라고……. ' 왠지 뭔가가……. ' 석연치 않은데? 유리와 테레이아는 슬슬 재민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재민은 연신 재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를 살갑게 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형제애가 좋은 거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겠지. 하 지만 이건……. " 그나저나 너 진짜 학교 빠진 거야? 며칠 있으면 기말 시험인데 이래도 돼? " " 하,하지만 형아가 처음으로 맞이 하는 고교 문화제잖아! 나, 형아의 문화 제 모습…… 꼭 보고 싶었단 말이야. " 재민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수줍어 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그 모습에 재영 은 감동을 먹고 그를 덥썩 안아 주었다. " 역시 너 밖에 없구나, 동생아! 이 형아를 위해주는 사람은! " " 으응. 앞으로도 형아를 위해서 살 거야. " 재민은 뜻하지 않게 재영의 품에 안기자 이 때를 놓칠새라 그의 가슴에 얼 굴을 묻었다. 그것을 보고 유리와 테레이아는 확신했다. ' 그거다. ' ' 그것이 분명하다고! ' 굳이 그것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단지 형이상학적으로 비틀린 노말 하지 못한 관계를 지칭한다는 것만 밝혀 두겠다. 하지만 그녀들의 옆에 있던 브루스와 가인은 재영 형제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요즘 세상에 보기드문 형제애로군. " " 그러게 말이에요. 부러울 정도네. " ' 하나도 모르고 있어! ' 유리와 테레이아는 둔하기 짝이 없는 가인들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가인 들의 말대로 그냥 우애가 깊은 형제가 아닐까 라고도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러기엔 재민의 애정 표현이 너무 진하고 노골적이었다. 원래 이런 쪽으로는 남자들보다 여자들 쪽이 예민한 법이다. 어쨌든, 그렇게 재영이 동생을 이끌고 다른 반으로 가려고 하자 가인이 물 었다. "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이대로 시내 안 만나고 가도? 도대체 1학년 4반에 서 뭘 하길래 여자 친구도 안 만나고 가겠다는 거야? " ' 여자친구! ' 그때 재민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래! 맞아! 난 그 여자를 보기 위해 온 거 였지! 감히 내게서 형아를 빼앗아 가려는 나의 적! 재민은 순간 두 눈을 불 태우며 재영에게 소리쳤다. " 형아! 나에게 여자 친구 소개시켜주기로 했잖아? 어서 소개시켜줘! " " 에? 아, 그, 그게 다음에 소개시켜주면 안될까? 지금 당장은……. " 재영은 동생의 격렬한 반응에 당황하며 말꼬리를 흐렸지만 재민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흥분하며 희번뜩 교실을 돌아보았다. " 1학년 4반! 1학년 4반이랬지? " 여기에 그 가증스러운 여자가! 재민은 미처 재영이 말리기도 전에 1학년 4 반의 교실 문을 열어 젖혔다. 좋아! 승부해주겠어! 그 여자의 손에서 형아의 순수를 지켜내는 거야! 그렇게 기세좋게 막 4반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 핫! " 타탕! 거센 여성의 기합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매트리스의 둔탁음. 재민은 발걸음 을 멈추고 교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건? " 다음! " " 이,이럴 리가 없어! 내가 이런 여자아이에게 질리가! " 타탕! 한 유도복을 입은 소녀가 자신의 배는 될 듯한 덩치의 남자들을 연신 매트 리스에 메다 꽂고 있었다. 재민의 뒤를 따라 들어온 가인들도 이 알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뭐야 이거?! " 자자! 더 도전하실 분 없으십니까? 유도녀와의 한판승! 그녀에게서 절반 을 따낸다면 판돈의 3배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 4반의 교실은 이미 유도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바닥은 초록색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학생들은 모두 유도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유리로 만들어진 모금함. 그 모금함 안에는 수 많은 돈들이 빼곡 하게 차여 있었다. 사회자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 만약 한판을 따내신다면 10배! 이 모금함 안의 돈은 전부 승자에게로 돌 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소녀를 보십시오! " 사회자가 가리킨 유도녀는 가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여자 아이였다. 그렇다. 유시내. 재영의 여자 친구인 유시내였던 것이다.그제서야 가인들은 4반의 전 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학 유도 체전 3연패를 달성하고 현 한성 고교의 유도부에서 메치기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시내를 앞세워 내기 유도를 벌이 고 있었던 것이다! 칠판에는 시내가 그 동안 이긴 승수가 적혀 있었는데 자그만치 20전 20승이 었다. 20전 20승. 전승! " 그나저나……이건 내기라고! " 이런 걸 문화제 아이템으로 채택하다니! 다들 무슨 생각인 거야? 가인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재영을 돌아보자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 뜨렸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라고. " 하지만 제갈영은 무조건 외부인의 적립 투표를 많이 획득한 반이 이기는 걸 로 규칙을 정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조 건까지 내걸었다. 애초에 이 문화제는 기본 구조 부터가 모순 덩어리였다. " 자, 없으십니까? 여러분은 이 작은 소녀 하나 이기지 못하시는 겁니까?! " 몰려든 남자들을 도발하는 사회자. 그리고 시내는 어설프게 손을 들어 보였 다. 아무리 메치기의 여왕이라지만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개미 하나 못 죽 일 청초녀로 밖에 보이지를 않았다. 그 가냘픈 몸을 보고있자니 가소로운 기 분까지 들 정도. 하지만 남자들은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그녀는 저 가냘픈 몸으로 벌써 20번 의 전승 행진을 이어온 것이다! 사회자는 유시내가 너무 막강하여 되려 손님들이 승부를 피하기 시작하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으음. 너무 몰아 붙인 건가. 시내 녀석. 조금은 져줘도 좋을 것을. 이렇 게 요령 없이 다 이겨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 결국 사회자는 비장의 수를 꺼내들었다. " 자자! 꼭 유도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이 아가씨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여기 이 바닥에 옷깃만 닿게 해도 승리는 여러분의 것! 주먹을 쓰셔도 되고 발을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 " 에에! " 시내가 너무한다는듯 사회자를 돌아보았지만,사회자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 했다. 이렇게 라도 하지 않았다간 교실에 파리만 날리게 생긴 것이다. 사회 자의 터무니 없는 조건에 가인들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 잠깐! 너무하잖아! 주먹이나 발을 써도 된다니! " " 시내는 여자 아이라고!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야! " " 재영아! 뭐하고 있는 거야? 이런 말도 안되는 시합 당장 말려! " 하지만 오히려 시내의 남자 친구인 재영은 태연했다. " ……아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 " 뭐? " 그게 무슨 소리야? 어쨌든 고의 아니게 그런 가인들의 반응은 손님들에게 바람을 불어넣었고 그들은 이제야 해볼 만하다는듯 하나 둘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중 대머리에 얼굴에 흉터가 난 거구의 남자가 시내의 첫 상대 가 되었다. " 흐흐흐.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실까? 다쳐도 책임 못진다, 꼬마야. " 음산하게 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들어올리는 남자. 생긴 것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이건 완전히 조폭이었다. 구경꾼들은 시내가 안되었다는듯 동정 의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야말로 저 아가씨가 큰 코를 다치겠구만. " 으랴아아앗! " 부웅! 무지막지하게 휘둘러지는 주먹. 그것은 인정 사정 봐주지 않고 시내의 얼굴 로 날아들었다. 지켜보던 테레이아와 유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너무해! 여자의 얼굴을 노리다니! 그러나 그 주먹을 맞이하는 시내의 표정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 ……! " 그리고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어 버렸다. 남자의 주먹을 흘림과 동시에 시 내는 그 팔에 매달려 남자의 목을 두 발로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양 손으로 팔을 관절 반대 방향으로 꺽어서 완벽히 상대를 무력화시킨다. 지켜 보던 구경꾼들은 저 보기만 해도 살벌한 기술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저, 저 런 것도 유도 기술? " 우,우우우! " 시내의 두 발에 거침없이 목이 졸리던 조폭 남자는 입에 게 거품을 물으며 매트에 몸을 처박았다. 하지만 그렇게 상대가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내의 기술은 풀릴 줄을 몰랐다. 저대로 죽여버릴 셈인가?! 사회자는 구경꾼들에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시내의 어깨를 두들겼다. " 자,자자! 거기까지! 거기까지! " " 어머. " 그제서야 깜짝 놀라며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시내. 놀란 건지 놀라는 척 하 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한 행동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쓰러져 있는 조 폭 남자는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날 줄을 몰랐다. 그것을 지켜보던 구경 꾼들의 등뒤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그때 시내가 뭔가를 깨달았는지 탄성을 지르며 사회자에게 말했다. " 아, 그러고 보니 금방 나 매트에 몸이 닿지 않았어? " " 아,아아아. 그,그렇습니다! 처음으로 내기에서 이긴 남자 분이 나오셨군 요! 축하드립니다! 역시 완벽한 무적을 아니었습니다, 저희의 유도녀! " 사회자는 어떻게든 21전 중에 한 번을 졌다는 걸 강조하려고 했지만 승자가 저 모양이어서야 별 의미가 없었다. 내기 판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이 의식불 명인데 그 누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려 하겠는가? 가인들은 그제야 재영이 보여줬던 일련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여자 친구의 저런 모습…… 친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 막상 재영의 여자 친구를 만나 혼줄을 내주려고 했던 재민도 꿀 먹은 벙어 리 마냥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 어머? 재영 군! 언제 왔어? " 쓰러져 있던 조폭 남자를 뒤로 하고 관객들 중에서 재영들을 발견한 시내가 화색을 띄며 다가왔다. 한순간 모두의 시선이 재영에게로 집중되었다. 저 무 지막지한 여자의 남자 친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리라. 재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시내에게 손을 흔들었다. " 아,아아. 조금 전에 왔어. 그……뭐냐. 강하더라. 너. " " 응! 칭찬 고마워! " 칭찬은 아닌 거 같은데. 어쨌든 시내는 재영을 따라온 가인들에게도 인사를 건네다가 낯선 얼굴의 재민을 발견했다. 재영은 그를 시내에게 소개시켜주었 다. " 내 남동생이야. 박재민이라고 하지. 재민아, 이쪽이 내 여자 친구 유시내. " " 와! 네가 재영 군의 동생이니? 만나서 반가워! 평상시에 네 오빠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 " " ……. " 재민은 주먹을 움켜쥐며 시내를 노려보았다. 이 여자가 바로 형아의 여자 친구! 그녀가 보여준 막강한 유도 실력에 가슴이 떨렸지만 이 정도에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그래! 애초의 생각대로 그녀를 형아에게서 떼어 놓는 거야! 형아는 나만의 것! 그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어! " 저기……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은 거야? " 시내는 재민이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만 있자 조심스럽게 미소지 었다. 그리고 재민은 입을 열었다. " 앞으로…… " 그래. 말하는 거야, 박재민! 앞으로 절대 형아의 앞에 얼씬 거리지 말라고!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 ……형아를 잘 부탁드릴게요. " " 아, 으응. 고마워! " 웃으며 재민의 손을 붙잡는 시내. 재영은 그런 자신의 여자 친구와 동생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아, 이 얼마나 보기 좋은 광경이란 말인가! 하 지만 시내와 악수를 하고 있는 재민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형아, 미안. 나…… 폭력에 굴해버렸어. ' 그럴 수도 있는 거지,뭘. 어쨌든 가인들은 시내와 재영 형제들의 대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을 내버려두고 다른 행선지로 향했다. " 와아. 시민 씨! 시민 씨! 저기 좀 봐요! 인형 전시회라는 게 있네요? 우 리 하나가 되게 좋아하겠어요. " " 예, 그러게요. " 시민은 문화제의 이것 저것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미연에게 쓴 웃음으 로 답했다. 아까부터 그녀에게 끌려다니느라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애 초에 가인을 찾겠다는 원래 목적도 잊어버린 것 같다. " 후아∼ 그립네요. 우리도 이렇게 문화제를 할 때가 있었는데. 우리 때 보 다 재밌는 것도 더 많아진 거 같아요. 부럽기도 하고, 후후. " 미연은 한 손으로 볼을 감싸며 미소지었다.아마도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가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려나. 시민은 웃으며 미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렇게 문화제를 구경하고 있으니 자신들도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 아, 저기……. " 그때 왠 낯선 남자 둘이 그녀들을 불러 세웠다. 시민과 미연은 의아한 얼굴 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그녀들을 불러세운 남자들은 한성 고교의 교 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남학생들이었다.그들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말 을 걸어왔다. " 혹시 학교를 안내해 줄 사람 필요하세요? " " 예? " " 그러니까 그게…… 동행할 남자들이 필요하지 않냐고요. " " ……예에? " 여전히 남학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시민과 미연. 하지만 남학생들은 끈기 있게 재차 말했다 " 저희들, 두 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 저희와 보내주세요! " " 에엣! " 그제야 남학생들이 뭘 말하려는지를 깨닫고서 소리를 지르는 그녀들. 다름 아닌 문화제 헌팅을 당한 것이다! 시민과 미연은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애매한 웃음만 지었다. 자신들 보다 한참이나 어린 학 생들에게서 이런 제의를 받다니……뭔가 복잡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고민하 는 시민과는 달리 미연은 싱긋 웃으며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 와아. 저희가 마음에 드셨어요? " " 에? 예? " " 후후훗. 이것 참. " 미연은 쑥스러운 듯 입을 가리며 웃었고 남학생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거 성공한 건가? 저 반응을 보아하니 먹혀들어간 거 같은데. 그들은 이 미인 들과의 헌팅이 성사될 것 같자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예! 마음에 듭니다! 들고 말고요! " " 어머, 이러면 곤란한데. 후후훗. " 미연은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남학생들과 연신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시민 이 보기에는 즐기고 있는 걸로 밖에 보이지를 않았다. 미연 씨,뒷 수습을 어 떻게 하시려고 저러시는 걸까……. "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 " 으음∼ 이를 어쩔까나? " 미연은 히죽 웃으며 시민을 돌아보았다. 시민은 쓴 웃음만 짓는 수 밖에 없 었다. 그 웃음이 승낙의 미소 처럼 보였는지 남학생들은 더욱 의기 충전해졌 다. 그리고 미연은 대번에 그런 남학생들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 후후. 성의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마침 일행이 와버려서. " " 일행? " 남학생들은 미연이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그곳에서는 진우가 하나의 손 을 잡고서 그들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남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야? 저 애 아빠는? 저 사람이 일행이라고? 그럼……. 미연은 남학생들의 상상에 못을 박아주었다. " 여보∼ 여기에요. 여기! " " 아아. 다녀왔어. " " 엄마! 엄마! 여기 사탕 가게도 있어! 아빠가 사탕 사줬어! " 미연에게 달려와 덥썩 안기는 하나. 미연은 웃으며 그런 하나의 등을 토닥 여 주었다. " 어휴. 우리 하나 좋았겠네∼ 사탕은 맛있었어? " " 응! 여기 엄마 꺼도 가져왔어! " " 와! 우리 딸 기특하기도 하지! " 하나가 귀여워 죽겠다는듯 볼 까지 부비는 미연. 그 모습에 남학생들은 좌 절했다. ' 유부녀였던 거냐! ' 한번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 그들은 창백한 얼굴로 비틀 거리 며 시민들에게서 몸을 돌렸다.그들의 뒷모습을 시민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 라보았다. 꽤 충격이 클텐데……. 불쌍하기도 하지. ' 미연 씨도 참 짓굿은 구석이 있다니까. ' 그렇게 생각하니 진우 씨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미연 씨를 아내로 맞 이할 결심을 다 하셨을까? 그녀는 새삼 진우를 감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진우는 영문을 몰라 두 눈만 깜빡일 뿐이다. 그 때 퇴짜 맞은 남학생들의 푸념 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그렇지. 왠지 묘하게 나이가 들어 보이더라고. " " 아깝다. 저런 미인들이 유부녀란 말이지? 첫 헌팅부터 유부녀를 건드리다 니 일진도 사납네. " ' 에……. ' 순간, 굳어버리는 시민. 한 가지 단어가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미인들. 미 인들이라고? 미인들이 유부녀라고? ' 나,나까지 유부녀 취급을 받은 건가! ' 엉겹결에 자신까지 애 엄마로 낙인 찍히다니! 뭔가 상당히 억울하면서도 서 글픈 기분이 밀려 들었다. 난,난 유부녀가 아닌데……. 아직 미혼인데! 이런 시민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연은 방긋 웃었다. " 꽤나 실망들 했나 보네, 저 아이들? 후훗. 너무했던 건가? 하지만 우리도 아직 젊어 보이기는 한 가봐요? 헌팅도 다 받고. 후후훗. " ' 우리가 아니잖아요……. ' 시민은 작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미연의 묘한 동질감에 가슴이 무거웠다.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연에게 물었다. " 헌팅? 헌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 " 호호,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가인이는 찾았어요? " " 아, 그게……3학년 교실까지 다 둘러 보았지만 안 보이더라고. 유리 양과 사부 님도 없는 걸로 봐서는 같이 있는 모양인데 어디로 간거지? " 이미 1학년 3반에도 들렸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뚱한 표정으로 호스 트 복을 입고 있는 지연이었다.그녀의 말에 의하면 '귀찮아서 쫓아버렸다'고 하는데 아마도 문화제 구경을 보냈다는 소리인 것 같다. 그렇게 가인들을 찾아 진우들은 벌써 30분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교내의 어디를 둘러봐도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갈수록 외부인들이 몰려 들고 있었기에 그 중에서 가인들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 어쨌든 계속 찾아봐요. 설마 학교를 떠났을리는 없잖아요? " " 우웅. 빨리 오빠 보고 싶어! " " 예이. 예이. " 진우는 보채는 하나를 목마 태워주며 다시 교실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때 저편에 남학생들이 수십 명 씩 뭉쳐 있는 게 보였다. 뭐지? 무슨 일이야? " 캐,캡이다! 우리 학교에 저런 퀸카들이 있었나? " "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들인데? 1학년일까? " 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미연과 시민을 돌아보았다. 대충 예쁜 여학생의 등 장에 남학생들이 흥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야 저 나이 때의 남자 아 이들한테서는 당연한 반응이지만. 어쨌든 혹시나 가인들이 있지는 않을까 싶 어서 진우는 군중을 헤집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워낙에 몰려든 구경꾼들 이 많아서 안으로 파고 들기엔 무리가 있었다. 미연이 진우의 목에 타고 있는 하나에게 물었다. " 하나야, 가인이 오빠와 유리 언니, 저기에 있니? " " 우웅. 아니. 없는데. " 하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하나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보이자 소녀는 소리쳤다. " 아! 있다! 있어! " " 뭐? 가인이가? " " 아니! 코마네치 선생님! " 코마네치 선생님? 진우들은 이상해진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 보았다.뭐야?그 코마네치 선생님이란 건? 그때 구경꾼들의 이목이 집중된 그 코마네치 선생 님이라는 인물이 진우들 쪽으로 다가오는지 인파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그 곳에는 하나가 코마네치 선생님이라고 칭한 여학생과 다른 여학생이 있었다.그 두 여학생들을 바라보던 진우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자신들은 그녀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수정 씨? 시더 양? " " 아! 진우 씨! 시민 씨! " 진우를 알아보고 수정이 반가운 표정을 띈채 다가왔다. 그러나 진우들은 그 녀처럼 순수히 반가워할 수 만은 없었다. 그들의 눈은 수정과 시더의 옷차림 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 ……어째서 교복을? " 그렇다. 수정과 시더는 다름 아닌 한성 고교의 여자 교복을 입고 있었던 것 이다. 그들의 중얼거림에 수정의 뒤에 있던 시더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며 힘 없이 중얼거렸다. " 그,그게 난 이런 옷 결단코 입고 싶지 않았고 수정 씨가 이걸 입으면 가 인이 좋아할 거라고 말해서 입은 건 더더욱 아니고 에, 또……. " 수정은 그런 시더의 어깨를 두들기며 기운 차게 외쳤다. " 자신을 가져요, 시더 양!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잖아 요? 이 복장은 한성 고교를 방문한 것에 대한 일종의 예의라고요! " " ……그런 예의는 혼자 만으로 만족하시죠. " 시더는 수정의 말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기색을 버리지 못했다. 아마도 코스 츔 매니아인 수정은 이런 기회를 대비하여 평소 한성 고교의 교복을 구비하 고 있었던 듯 하다.시더는 그 여세에 휩쓸려 덩달아 교복을 입게 된 듯 했고. 시더는 주위의 시선을 견뎌내지 못하며 수정에게 애처롭게 부탁했다. " 저기, 그냥 원래 입고 왔던 옷 입으면 안될까요? " " 예의! " " ……예. " 아마도 학교를 나가기 전까지는 갈아입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 교복 차림으로 가인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눈 앞이 깜깜해지는 시더였다. 시민은 그녀의 사정에 가벼운 동정을 표하며 수정에게 물었다. " 그건 그렇고, 수정 씨는 가인 씨 보셨어요? 아까부터 찾고 있었는데. " " 아뇨. 가인 군의 반에도 찾아가봤지만 없더라고요. 전 시민 씨들하고 같 이 있는 줄 알았어요. " " 으음……. " 근심스러운 여자들.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야, 가인 씨! 그때 그 답을 진 우가 제시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벽에 붙어 있는 한 포스터를 가리켰다. " 아, 혹시 여기로 간 거 아닐까요? " 포스터에는 '2학년 1반 연극 캡틴 실버, 주연 성마리' 라고 적혀 있었다. " 후하하하하! 이대로라면 우리 3학년 8반의 우승은 더 할 나위 없이 확실 해지는 거로군. 카페 쪽으로나! 무대 쪽으로나!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당 신이 있으니까, 천매희! " 제갈영은 학교 강당의 무대 대기실 A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유리 잔에 와인 을 따랐다.그는 그것을 연극 계의 고귀한 혈통 천매희에게 건네 주었고,그녀 는 미소를 지으며 그 잔을 받았다. " 호호호호. 과찬의 말씀이세요. 저를 영입하신 건 다름 아닌 제갈 영 님 이시잖아요. 그 빼어난 안목에 찬사를 보냅니다. " " 후후후, 그렇게 되는 건가? 어쨌든, 건배! 당신과 나의 문화제를 위하여! " " 문화제의 승리를 위하여! " 챙! 서로의 얼굴에 온갖 금칠을 해가며 건배를 하는 그들. 자신들이 우승을 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들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다 했다. 그리 고 자신들의 능력에 절대적인 자신감까지 있었다. 우리들이 질리는 없는 것 이다! 그때 그런 승리감에 도취된 그들에게로 뜻 밖의 전령이 날아들었다. 벌컥! " 회장 님! 큰일입니다! " 호일준이 거칠게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갈영은 눈쌀을 찌푸렸다. " 뭐냐? 그 품위 없는 호들갑은? 매희 양과 나의 티 타임을 깨뜨리다니! " " 와인을 마시는 티 타임은 처음 보는 군요? 무엇보다 교내에서 음주라니! 당장 압수입니다! " 대번에 냉정을 되찾고 제갈영과 천매희에게서 와인을 회수하는 호일준.제갈 영은 심통이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 풍취를 모르는 녀석. 그나저나 무슨 일인지 보고해봐. " " 아, 예! 양호실의 박미정 교사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쿵! 제갈영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아,아니!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란 말인가! 양호실의 박미정 교사라고? 다름 아닌 자신의 사촌 누이 아닌가! 평소 알 수 없는 구석이 많은 그녀는 사촌인 제갈영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다.무엇보다 그 제갈 가문에서 여성의 몸으로 서열 16위까지 올라선 인물인 것이다! 아마 그 숨기고 있는 능력까지 전부 개방한다면 서열 5위 안에 진입하는 것도 무 리가 아닐 것이다. " 움직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 " 그녀가 2학년 1반의 성마리와 접촉했다는 보고가 들어 왔습니다. 더구나 회장에서 성마리와 그 분이 나란히 동석하고 있던 것을 제가 이 두 눈으 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 " 그런! 2학년 1반이라고? 적으로 돌아섰단 말이냐?! 어째서! 그녀가 무슨 이유로 그런 행동을! " 쾅! 제갈영은 분노한듯 책상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 그 초조한 기색에 천매 희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 왜 그러시는 거죠? 양호 교사라니…… 그 사람이 무엇이기에 제갈영 님은 그리도 안절부절 못하시는 겁니까? " " 후……. 아마 당신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무대광풍이라는 호칭을. " 순간 천매희는 전율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전신에 떨림이 멈추지 를 않았다. " 무대광풍! 설마 연극계에 길이 남는 전설의 명작 <천년여왕>의 여 주인공 이었던 그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12년 전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던 그 여배우는 홀연히 연극계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런데 돌연 이런 곳에 서 그 모습을 드러내다니! " 무대광풍. 그것은 연극계의 모든 배우들에게 선망과도 같은 이름이었다. 매 희는 미정이 남긴 전설과도 같은 일화들을 들으면서 자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존경의 대상이 이런 고등학교에서 평범한 양호 교사를 하고 있었다?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이해의 경지를 벗어난 일이었다. " 그 무대광풍이 나의 적에게 손을 들어주었다고? 나의 적에게……. "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는 매희. 제갈영은 이를 악물며 속으로 소리쳤다. 누 님!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어째서 이 동생의 앞길을 막아서는 겁니까! 결국 제갈 영은 결단을 내렸다. " 어쩔 수 없지. 여기서 계획의 수정은 불가능하다. 이대로 밀고 나가는 수 밖에! " " 회장님! "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부르짖는 호일준. 제갈영은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 12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녀는 이미 망령에 불과해! 이제와서 모습을 드 러낸다고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어차피 우리의 적이 아니야! " " 그렇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 분은……! " " 닥쳐라! " 제갈영은 호일준의 말을 날카롭게 끊었다. 그는 타오르는 눈으로 일준을 응 시했는데, 그 눈빛에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일준은 제갈 영의 눈빛을 마주하자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보이고 있었다.그에게 서 자신이 추구하던 제왕의 모습이! " 언제까지 두려움에 벌벌 떨 작정이냐!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 만 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넌 네 자신을 그렇게도 못 믿는단 말인가! 하지 만 난 틀려! 난 결코 그런 두려움 따위에 지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상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철저히 이겨줄테다! " " 회장 님! "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추구해오던 이상! 감동으로 벅차 오르 는 호일준. 그의 옆에 있던 천매희도 제갈영의 기세에 감탄하며 외쳤다. " 아아! 전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걸까요? 당신의 당당한 모습을 대하 자니 제 자신의 나약함이 한 없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요! 제 자신을 믿 고 나아가겠어요! 아무리 무대광풍의 제자가 상대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겨보이겠어요! " " 바로 그 마음가짐입니다, 천매희! 당신이야말로 유일하게 무대광풍을 꺽 을 수 있는 소녀! 이 제갈영이 선택한 진정한 여배우란 말이오! " 매희는 어제 잠시 만났던 마리의 얼굴을 떠올렸다.연극의 기본 조차 되어있 지 않던 아이.자신의 비웃음을 받으며 쓸쓸히 무대를 퇴장했던 그 아이가 무 대광풍의 제자라고? 천매희는 호일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 무대광풍의 제자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했죠? " " 아, 예. 성마리……라고 합니다. " " 성마리! " 그 이름을 매희는 낮게 되뇌였다. 그래.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주지! 다 시는 잊어버리지 않겠어! ' 성마리! 나의 라이벌! ' " 후우우. " 마리는 무대 대기실B에서 차분히 숨을 들이키며 앉아 있었다.대기실에는 그 녀 혼자뿐이었다. 미정은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냈다면서 뒤를 그녀에게 맡 긴 채 객석으로 사라져 버렸다.그리고 유미미들 또한 마리의 정신 통일을 방 해할까봐 모두 자리를 피해주었다. 홀로 남은 대기실의 공기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 나…… 잘 해낼 수 있을까? ' 마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미정에게 밤을 새면서 받은 사투에 가까운 특훈이 기억났다. '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 뿐! ' 그 뒤의 결과는 관객들이 평가 내리겠지.그렇게 단순히 생각하자 고민도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이 이상 쓸데 없는 일로 걱정해봤자 득이 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단지 무대에 나가기 전에 한번만 더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왠지 힘이 날 것 같기도 했다.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불안감을 모조리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성마리! ' 마리는 그런 약한 생각이나 하는 자신을 꾸짖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앞 두 고 남자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한심하구나! 마리는 애써 떠오르는 그의 얼 굴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더 욱 명확하게 떠오른다. 마리는 얼굴을 붉혔다. ' 안돼. 이 상태로는! ' 단지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가인의 얼굴을 본다면……. 벌컥! 그때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그리고 한 남학생이 마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 다. " 마리 선배! 여기 있었군요? " 유가인. 바로 그였다! 마치 마리의 마음이 전해진 것 처럼 그는 제 때에 나 타나 주었다. 이 마법 같은 상황에 마리는 할 말을 잊었다.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 어라? 얼굴이 빨개요, 선배! 무슨 일 있었어요? " " 아,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 마리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가인은 그 반응에 이상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예의 둔감함으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 의 뒤를 따라 유리와 테레이아, 부르스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유리와 테레이아는 마리가 가인을 앞에 두고 얼굴을 붉히고 있자 수상하다 는듯 그녀를 쏘아보았다. " 어째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거지? " " 아, 그게! 잠을 못 자서……. 그래! 잠을 못 자서다! " 마리는 말을 얼버무리다가 좋은 핑계거리를 발견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가 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잠도 못 잔 거에요? 어쩐지! 안색이 창백하다 싶었어요! 그럼 어제 우리 와 헤어진 이후로 계속 연습한 거군요? " " 으응. " 가인의 걱정에 다시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그녀는 속 으로 그에게 사과琴다. 미안,가인. 나…… 거짓말을 해버렸다. 하지만 어리숙하게 속아넘어가는 가인과는 달리 유리와 테레이아는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았다. 아니야. 저 반응은! 잠을 못 잤기 때문이 아니라고! 애써 그녀들의 시선을 피하는 마리에게 이번에는 브루스가 말을 걸었다. " 훈련의 성과는 있었던 거냐? " " 음. 충분히. " 자신만만하게 마리는 대답했다. 미정과의 특훈은 분명 그녀를 어제와는 다 른 자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브루스는 짧게 코웃음 쳤다. " 후. 좋은 얼굴이다. 이번에는 기대해보지. " " 실망시키지 않겠다. " 마리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가인들의 방문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남 에게 기대 받는다는 게 이렇게 기운 나는 일일 줄이야! 그때 가인들에 이어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기실로 들이닥쳤다. " 가인 군, 마리 양! 역시 여기 있었내요! " " 어라? 시민 씨! 수정 씨! " 가인은 이 뜻 밖의 방문객들에게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 수정들에게서 하나가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 오빠아! " " 엇? 하나도? 그럼 진우 씨와 미연이 누나도 온 거구나! 시더는 왜 그 뒤 에 숨어 있어? " 다들 함께 온 건가? 시민은 그런 가인에게 살풋 웃으며 말했다. " 어떻게 하다보니까 같이 오게 됐어요. 가인씨 네 반을 먼저 들렸는데 보 이지를 않아서 한참을 찾았다고요. " " 으응! 하나도 오빠 찾았어! " 가인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하나를 안아주며 미소지었다. 이렇게 다들 찾아 와주다니! 왠지 감개가 무량해지는 가인이었다. 언제 자신이 문화제를 할 때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준 적이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찾아와 준 것은 찾아와 준 것이고, 이 좁은 대기실에 11명이나 들어 와 있으니 방이 미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것을 브루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콩나물 시루로군. " 어쨌든, 모두는 이 자리의 주역인 성마리에게 격려의 말을 보냈다. " 열심히 해요, 마리 양! " " 멋지게 해내라고요! " " 잘 해낼 수 있을 거에요, 꼭! 응원할테니까! " " ……이번에는 성사시켜라, 러브 씬. " 마지막은 부르스다.그런 모두의 응원에 마리는 감격에 젖어 연신 고개만 끄 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 열심히 할 거야. 나 정말 열심히 하겠어. ' 그런 마리를 가인은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래요, 마리 선배.이번 문 화제 연극. 멋지게 해내는 거에요! 삐삐삐삐! 그때 울리기 시작하는 신호음. 유리의 곁에 있던 테레이아가 주위를 둘러보 며 중얼거렸다. " 이게 무슨 소리지? " 시계 알람 소리 같은데? 그것도 한 두 군데에서 울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대략 여섯 일곱 군데에서 동시에 신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제일 가까이에서 나는 소리는 유리의 손목 시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 유리야? 시계 벨 울리는 거 아니니? " " 아……. " 하지만 유리는 테레이아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했다. 가인과 진우, 시민, 브 루스, 수정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손목에 찬 무전기를 내려다 보았다. 무전기에는 영어 알파벳으로 'MONSTER'라는 문구가 액정으로 떠오르고 있었 다. 바로 피스메이커 본부에서 보내오는 몬스터 출현 신호! ' 마리 선배!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리를 돌아보았다.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무전기 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와프 입자의 수치 변동으로 게이트 발생까지 앞으로 15분 남았습니다. 지 금 34구역은 비상 경보가 내린 상태에요. " 수정은 차분한 표정으로 가인을 위시한 여섯 명의 피스 대원들에게 상황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의 대기실에서 무전을 받자마자 테레이아와 미연, 하나를 제외하고 옆의 대기실로 자리를 옮겼다. 테레이아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그 뒤는 사정을 알고 있는 미연에게 맡겨두었다. 시더는 수정의 보고에 인상을 찌푸렸다. " 한동안 게이트를 이용한 디멘션 트랜스퍼는 이용하지 않더니. 이미 게이 트의 움직임은 우리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걸까? " "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뭐, 몬스터의 생각 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융합 형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자 고요. " " 한가하게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니다! " 시더와 수정의 대화를 듣고 있던 브루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 몬스터의 출현이다! 당장 출동한다! " " 자,잠깐만요! " 그때 대기실의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브루스를 가인이 다급하게 제지했다. 브루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 뭐가 잠깐이라는 거냐? 이 한시가 급한 상황에! " " 하지만! 하지만 마리 선배의 연극은 어떻게 하고요? " 가인은 복잡한 심정으로 소리쳤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마리에게로 향했 다.마리는 입고 있던 해적 복을 두 손에 든채 공허한 눈으로 그것을 좇고 있 었다. 공연 시작까지 20분도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20분만 있으면 연극을 시작하는데. 20분만 있으면……. '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는데! ' 가인은 그녀의 처지가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마리가 누구보다 열심히 이 번 문화제를 준비해왔다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하필 이런 때에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이건 마리 선배에게 너무 잔인하다고! 브루스는 노기가 서린 얼굴로 말했다. " 그럼 몬스터가 나타났는데 이대로 소꿉 장난이나 하자는 거냐? " " 그런 게 아니잖아요! " 소꿉 장난이라니! 가인은 부르스의 말을 강하게 반박했다. " 고교 생활에 다시 없을 추억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할 수 없는 일 이잖아요? 더구나 마리 선배는 생애 처음으로 연극까지 맡게 되었는데! " 그런데! "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무관심할 수 있어요? " 가인은 다른 이들을 돌아 보았다. 진우와 시민, 유리, 수정, 시더를 돌아보 았다. 그들의 안색은 다들 무거웠다.하지만 이미 출동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 힌 것 같았다. 브루스는 우습지도 않다는듯 코웃음을 쳤다. " 하. 그래. 그럼 네 녀석은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냐? " " 출동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 가인은 자신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브루스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며 고개 를 떨구었다.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러니까 저희는 수도 많잖아요? 꼭 마리 선배가 가지 않아도…… 저희들 로만 출동해도. " 그래. 브루스도! 진우 씨도 있잖아? 거기에 시민 씨와 유리도, 나도 있어!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히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다고! 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 그래요. 꼭 마리 선배까지 갈 필요가 뭐가 있어? 그깟 몬스터 따위 우리 로도 충분하다고요. 그렇죠? " " ……. " 침묵하는 진우들.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왜,왜들 그러는 거에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에요? 예? 진우 씨! 시민 씨! 유리야! " 그냥 마리 선배는 이대로 계속 연극을 하도록……. " " 지금 제 정신으로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거냐! " 브루스의 날카로운 호통 소리! 가인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브루스가 내뿜는 분노에 전신이 움츠러든 것이다. 숨조차 쉬기 힘들 이 분위기라니! 브루스는 진정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 그깟 몬스터라고? 넌 그렇게 몬스터를 상대해오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 는 거냐! 조금만 방심해도! 조금만 실수해도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게 몬 스터다! 수가 많다고? 그래서 한 명쯤 빠지면 안되겠느냐고? " 가인은 브루스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지금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처지인 줄 아는 거냐! 그러다 우리가 죽 으면 이 세상이 어떤 꼴이 되는 줄 알아? 우리만 죽는 게 아니라 모두 죽 는다! " " 자자, 사부님. 그 정도 말씀하셨으면 녀석도 알아들었을 거에요. " 진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브루스를 말렸다.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실 은 알고 있었다. 브루스의 말은 모두 옳았다. 자신이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 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마리가 연극을 그만둬야한다는 현실에 안타까웠을 뿐이다. 시더는 작게 한 숨을 쉬었다. " 몬스터는 바이러스야. 항생제로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대책은 안되지. 백신이 있어야 돼. 그리고 오라 능력자는 바로 몬스터에 대한 백신인 거야. 그리고 우리에겐 그 백신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 " 그래요, 가인 군. 오라 능력자의 수가 많을수록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반 드시 몬스터를 제거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승률이 높아지는 것 뿐이니까. " 수정은 피스메이커의 부사령관으로서 냉정히 말했다. 가인은 고개를 숙였다. 알아요. 안다고요! 하지만! " 그만해라,가인.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 " 그때 조용히 있던 마리가 입을 열었다. 가인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리는 예의 빈틈 없는 자세로 출입구를 향해 재빨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마리 선배! 괜찮은 거에요? 이렇게, 이렇게 끝내도 좋은 거에요,연극? " 가인은 그녀의 뒤를 향해 소리쳤다.그의 물음에 마리의 발걸음이 멈췄다.마 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난 피스 대원이다. 내가 맡은 임무는 몬스터의 제거.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 잠시 테이블에 잘 개어 놓은 해적 복장으로 눈이 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그 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금세 예의 날카로운 눈동자로 돌아간다.마리 는 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 ……어차피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어. "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웃고 있었다. " 아, 수정 씨! 시더 양! 다들 어디로 간 거에요? " 미연은 대기실로 돌아온 수정과 시더에게 일부러 테레이아가 들으라는듯 큰 목소리로 물었다. 수정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과장되게 말했다. " 그게 급한 일이 생겼나 봐요! 그……뭐라더라? 가인 씨들이 아는 사람이 크게 다쳤나 보던데. 그렇죠, 시더 양? " " 아,아아! 그래서 다들 급하게 병원으로 갔어요! 굉장히 위독한 환자라 큰 수술을 받는다고 하던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 시더는 당황하며 간신히 말을 맞췄다.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테레이아 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 다쳐요? 누가요? " " 아, 그게……으음. 가인이와 미스터 그린,아니! 진우 씨 네 집 근처에 사 는 이웃인데……굉장히 친하지! 응! 굉장히! " 급하게 변명하느라 등 뒤로 식은 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테레이아는 시더의 당황하는 모습에 수상쩍다는듯 재차 물었다. " 수술? 무슨 수술이죠? 그리고 무슨 병원이래요? " " 에, 또 그게…… 다들 급하게 가느라 경황이 없어서……. " 어수룩한 태도.자신 없는 말투. 시더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한 숨을 쉬 었다. 이건 그야말로 '나 거짓말 하고 있소' 하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 그 녀는 예전부터 거짓말에 천부적일 정도로 소질이 없었다. 17년 인생사 중에서 단 한번도 거짓말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면 그대는 믿겠는가! 이런 어설픈 거짓말에 누가 속아 넘어간다는 거야? " 아, 그렇군요. " 하지만 테레이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해버렸다. 처음으로 시더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사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시더는 이것을 감격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초류향……. 이 바보같은 놈. ' 한편 그런 시더에게 보이지 않게 테레이아는 이를 갈았다. 그녀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동족의 기운. 초류향의 것 임이 분명했다. 가인들은 그를 상대하기 위해 학교를 떠난 것 같았다. ' 기껏 모아놓은 정을 게이트를 여는 데 소비하다니! 왜 날 기다리지 않은거 지? 어째서! 왜 멋대로 구는 거야? ' 오늘 아침에 자신을 도발하던 초류향이 생각났다. 설마 이 녀석. 고의로 이 러는 건가? 날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 아무리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다지만 그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추진할 녀석이 아니다. 무슨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는 거냐, 리리스? 오히려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건 너잖아! 어째서 동족에게 적개심 을 품고 있는 거지? 왜! ' 혹시……. ' 설마 그 때문에 문화제를 방해받았다는 걸 불쾌하게 여기고 있는 건가? 그 래서 기분이 나빠진 걸까? 테레이아는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어처구니가 없 어 고개를 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하찮은 인간들의 축제 따위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잖아? 몇 달 간 인간들과 생활해왔다고 네 자신 도 인간인 줄 착각하는 거냐! " ……. " 그때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마리가 놔두고 간 연극의 대본이 들어왔다. 그것을 보자 꺼져가던 초류향에 대한 적개심이 다시 불타오른다. ' 빌어먹을! ' 테레이아는 힘껏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웅성웅성 학교의 강당은 술렁거리고 있었다.이미 2학년 1반의 연극은 시작 시간을 넘 기고 있었지만 무대의 어디에도 주연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객석에 앉아 있던 제갈영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 무슨 꿍꿍인 거지? 왜 나타나지 않는 거냐! 왜! " 그의 머리로는 현 상황에 대한 수십가지 번뇌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 이것도 누님의 작전 중 하나인 걸까? 우리를 초조하게 하려는?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누님이 이런 약은 수를 쓸 리가 없지! 그렇다면 이 지연 은 도대체 무엇을 의도하려는 걸까?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면 승부는 우 리의 패배일 런지도 모른다! ' 그 옆에 앉아있던 천매희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이건 무슨 뜻이지, 성마리? 설마 내가 두려운 거냐! 나와의 승부를 피할 생각인 거야? 안돼! 용납할 수 없어! 절대로 그래서는 안돼! " 전혀 엉뚱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두 남녀. 단순히 무대에 나오지 않는다는 걸로 저렇게 까지 고민할 수 있다니. 꽤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과 반대편에 있는 2학년 1반의 좌석. 그곳에서 유미미는 성마리 추종회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 마리 양이 보이지를 않는다니! 아까 까지만 해도 대기실에 있던 사람이 연극을 앞두고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야? " " 하지만 교내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았어요, 회장. " " 에이잇!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는 모두 돌아올 생각들 하지 말아요! 아아! 마리 양! 도대체 무슨 봉변을 당하신 거죠? 혹시 어딘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거라면! " " ……그럴 리가 없잖아요. " " 아아! 안돼! 반드시 찾아야 해요! 그녀는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털끝하 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 분명해요! 마리 양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 성마리 추종회 밖에는! " 훌쩍이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유미미. 제갈영들 못지 않게 상상력 이 풍부한 사람이다. 성마리 추종회는 유미미의 명대로 성마리를 찾아 다시 강당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한 여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박미정이었다. 그녀는 분주히 움직이는 성마리 추종회와는 달리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 여왕 님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 훗. 객석의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들어 긴장감과 함께 극도의 기대감을 불 러 모은다. 그리고 그 기대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극적인 등장과 함 께 관중의 카타르시스를 해소시킨다! 무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소녀야! 아무도 가르친 적이 없는 쇼맨쉽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다니. 이거야말로 본능이라고 할 수 있겠군! 배우로서의 본능! ' ……역시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 시각, 전장으로 변한 34구역에서는. " 하아아아앗! " 날카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마리는 오라 소드를 뽑아들고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파충류에게 달려들었다.14시 15분을 기점으로 작전 본부실은 이 몬스터의 코드 네임을 '히드라(HYDRA)'로 명명했다. [쿠오오오오!] 한껏 숨을 들이삼키는 히드라의 아홉 목. 그와 동시에 입이 열리며 거센 아 홉개의 불기둥이 마리에게 쏘아졌다.마리는 오라 소드를 빠르게 회전시켜 붉 은 검광의 보호막을 만들어 불꽃에서 몸을 지켜냈다. 하지만 히드라의 입에 서 나오는 불기둥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불기둥을 몸으로 받아내던 마리는 밀려드는 압력에 기를 쓰며 버텼지만 결국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 녀가 딛고 있던 아스팔트가 순수한 압력의 힘 만으로 음푹 패여 들기 시작했 다. " 천공권! " 그 순간, 마리를 압박하던 불기둥을 꿰뚫는 오라의 토네이도.가인의 천공권 이 몬스터의 불기둥을 스치며 불을 뿜던 아홉 개의 머리 중 하나에 직격했다. 거대한 녹색의 체액과 함께 머리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라아아아아아!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연속해서 이어지는 시민의 페르마타! 상대의 움직임 을 음파의 늘어뜨림으로 지연시키는 기술이었다. 몬스터의 움직임이 눈에 띄 게 느려지자 그 괴수를 향해 세 개의 그림자가 뛰어 올랐다! " 슈팅------------스타! " 푸칵! 히드라의 머리를 부숴버리는 녹색의 섬광. 정진우의 선공이었다.그 뒤를 이 어 회색의 오라가 실린 주먹이 그 옆의 머리를 연속으로 폭파시켰다. " 칠성권(七星拳) 녹존(祿存)! " 터엉! 그리고 마지막으로 뛰어오르는 붉은 검광의 마리! 그녀의 오라 소드로 펼쳐 진 무영신풍류 일식 섬광이 나머지 히드라의 머리를 절단했다. 연속으로 세 개의 머리가 날아간 히드라는 가인에게 날아간 머리까지 합해 총 네 개의 머 리를 잃고 지면에 그 거구를 쓰러뜨렸다. 쿵! 지진파의 영향으로 일대가 뒤흔들렸다.가인들은 쓰러진 괴물을 노려보며 숨 을 몰아 쉬었다. " 하아. 하아. 끝난 건가?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목의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액정에 뜬 시간은 14시 30분. 출동한지 이제 막 30분이 지났다. 이대로 녀석이 침묵하면 상황은 종 료인 것이다. ' 그래. 이대로 빨리 학교로 돌아간다면 1시간이 채 안 되니까……. ' 잘 하면 시간에 맞출 수도! 그래봤자 이미 공연으로부터 1시간이나 지나버 린 뒤일테지만 운이 좋으면 연극을 재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제발 이대로 일어나지 마라! 일어나지 마! 하지만 그런 가인의 기대를 배반하고 유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 방심하지마! 죽은 척하고 있을 뿐이야! " 몬스터의 사념을 읽어내고 주의를 주는 유리. 가인들은 화들짝 놀라며 AI부 츠에 오라를 불어 넣어 도약했다. 그렇게 뛰어오르자 그 자리를 괴물의 꼬리 가 거세게 훑고 지나간다. 이 자식! 살아있었나! [쿠우우우우!]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는 히드라. 그리고 가인들은 볼 수 있었다. 부서 진 머리 쪽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부서진 머리가 재생되고 있었다.그것도 단 순한 재생이 아닌 머리가 하나 부서진 곳에서 두개의 머리가 새로 생겨나고 있었다. 네 개의 머리를 부셔뜨렸으니 총 여덟개의 머리가 새로 생겨난 셈이 다. 앞에 남아있던 다섯 개의 머리까지 합하면 열 세개의 머리! 브루스는 귀찮게 되었다는듯 투덜거렸다. " 꽤나 고지식한 녀석이로군. 이렇게 충실히 신화를 재현해 보일 것 까지는 없을텐데. "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마수로서 태풍의 신 티폰과 에키드나 사 이에서 태어난 아홉 개의 목을 가진 물뱀이다.그 중 여덟 개의 목은 죽일 수 있지만 그 중에 있는 목 하나 만은 불사신이어서 설사 완전히 잘리더라도 죽 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목을 하나 잘라내면 새로운 목이 두개 더 생겨난 다는 극악한 설정까지 가지고 있다. " ……! " 이를 악무는 피스 대원들. 뭐야? 그렇다면 머리 하나가 잘리면 계속 두 개 의 머리가 생성된다는 건가? 가인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진우는 그런 모두 를 격려하며 소리쳤다. " 자자! 그렇다면 신화의 한계를 봐주도록 하죠! 과연 어디까지 머리를 만 들 수 있는지 지켜볼까! " [쿠오오오오!] 그리고 재차 격돌! 아스팔트가 부서지며 건물의 유리창들이 터져 올랐다.가 인은 히드라의 꼬리에 치여 자신에게 날아드는 자동차를 피해내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 제기랄! 제발 죽으란 말이다! ' 이대로 가면 문화제가! 연극이! 투아아아앙! 폭파되는 거리. ……그리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는 17시가 지나 있었다. " 여기는 피스 그린. 상황 종료. 귀환하겠다. " 진우는 무전기에 대고 말할 후 피곤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근 처에는 가인이 대자로 뻗어 일어날 줄을 몰랐다. 특별히 부상을 입은 것 처 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신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 게 영 낭패스런 몰골이었 다. 그 곁으로는 오라 소드로 몸을 지탱한채 숨을 몰아쉬는 마리와 주저앉은 유리가 보였다. 시민은 그다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후방에서 전투를 지원하는 역 할이었다지만 내내 가인들과 행동을 같이 했으므로 체력 손실에서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건재한 모습이라니. 시민 씨, 터프 하시구나……. " 흠. 노을인가. " 브루스는 부서진 콘크리트의 파편 더미 위에 앉아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그 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그 뿐만이 아니라 주위가 전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브루스의 말대로 노을이 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멍하니 붉은 빛 하늘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 ……벌써 해가 지는 건가. " 어느새 그렇게 시간이…….워낙 몬스터와의 싸움이 치열해지다보니 시간 가 는 줄을 몰랐다. 그는 힘없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17시 10분. 오후 5시가 넘어버렸다. 이미 문화제를 끝내고 뒷정리를 할 시 간이었다. ' 결국…….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이렇게. ' 가인은 자신의 옆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어느덧 가다듬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최전방에서 히드라를 상대했던 그녀는 전심 전력을 다해 전투에 임했었다. 언제나와 같은 믿음직 한 모습이었지만 가인의 눈에는 그녀가 연극을 잊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를 않았다. 마리는 오라 소드의 검날을 없애며 하늘을 바라보았다.붉은 노을에 비친 그 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가인은 기분이 우울 해져 시선을 깔았다. 그녀가 대기실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 ……어차피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어. ' 아니야! 그렇지 않아! 무대 위에서의 그녀는,마리 선배는 그 누구보다도 빛 나고 있었어! 누구보다도 무대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가인은 해적 복장 을 한채 연기하던 마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 는 그 누구보다도 캡틴 실버에 어울렸었다고! ' 좋아. ' 가인은 몸을 일으켜 검날을 잃은 오라 소드에 오라를 불어넣었다.그러자 바 람의 검날이 생성되어 검신을 따라 회오리쳤다. 그 모습에 마리가 의아해져 물었다 " 가인? 어째서 검을 뽑아드는 거냐? " 하지만 가인은 대답대신 검부터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살기는 안담겨 있었 지만 그 돌발적인 행동에 마리와 피스 대원들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 랐다. 챙! " 무슨 짓이냐! 왜 그러는 거야? " 마리는 신속히 오라 소드에 절삭성 커터를 생성시켜 가인의 오라 소드를 막 아냈다. 그녀는 인상을 굳혔다. 갑자기 가인이 왜 이러는 거지? 혹시 몬스터 의 정신 공격에 당하기라도 한 건가! 그때 가인의 입에서 위엄이 서린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 네가 이 해적들의 두목인가! " " ……! " 마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을 말리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던 피스 대원 들도 난데 없는 가인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 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같은데, 저거? ' 익숙한 대사였다. 유리와 브루스는 알 수 있었다. 그 대사는 마리가 연극하 던 캡틴 실버에서 나오는 대사라는 걸. 캡틴 실버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 주는 남자의 대사였다. ' 가인……. ' 마리는 멍하니 그런 가인을 바라보았다. 장난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하지 만 그의 얼굴은 다시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가인의 의도 를 알 수 있었다. 마리는 마음을 굳히며 진지하게 소리쳤다. " 그렇다. 머매니안 해협의 캡틴 실버!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고의 아닌 피해를 주게 되어 미안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방식. 지금이라도 순순히 우 리의 지시를 따른다면 목숨은 취하지 않겠다! " " 미안……하다고? 해적 주제에 특이한 말을 하는 구나. 거기다 여자의 몸 으로 두목이라니. " 가인은 잘도 한번 밖에 안본 연극의 대사를 틀리지도 않고 말했다.진우들은 이 갑작스런 단막극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와 가인의 오라 소드가 재차 부딪히며 불꽃들을 튀겨냈다. 실제 상황으로 보일 정도로 박진감이 넘 치는 검투였다. 챙! 그러다 가인의 오라 소드에 마리의 오라 소드가 허공을 날았다. '챙그랑'오 라소드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커다랗게 전장에 울려퍼졌다.마리는 망 연자실한 얼굴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고 대사 를 계속했다. " 좋은 승부였다.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다. " 여기서 나와야 할 안타레스의 대사. 하지만 이 자리에는 안타레스가 없었다. 이 급조한 연극도 여기까지 인가? 그러나 안타레스의 대사를 재빨리 낭독하 는 이가 있었다. " 네 녀석이! " 다름 아닌 브루스였다. 그는 가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재빨리 고 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맞춰주기도 힘들군……. 모두는 그런 그를 미소지으며 바라보았다. " 물러나 있으라고 했지, 안타레스! " 마리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 내가 졌다. 죽여라. " " 후. " 가인은 실소했다. 이 상황에서 연극을 하는 자신들 때문에 웃음이 나온건지 실제로 마리의 상대역에 충실해져서 웃음이 나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것은 실로 자연스러웠다. 가인이 검을 거두자 마리는 의아해져 물었다. " 무슨? 왜 검을 거두는 거냐? " " 기상이 맘에 들었다. 이런 데서 죽기에는 네 실력과 그 고결한 정신이 아 깝다. 너라면 좋은 해적이 될 수 있을 거다. " 가인은 미소지으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마리는 그 등을 바라보다가 천 천히 그의 발 아래에 오라 소드를 꽂았다. 마리는 무릎을 꿇고 고백했다. " 난 어릴 적 내 자신에게 맹세한 일이 있었소. 그리고 그 맹세를 지금까지 지켜왔었지. 검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소. 검은 내 자존심이자 내 명예이자 내 삶 그 자체. 그런 내 검은 당신의 검 앞에 무너져 내렸다. " " 아가씨! " 브루스는 투덜거리면서도 끝까지 충실하게 안타레스의 역할에 임했다. 마리 는 고개를 들어 가인을 바라보았다. " 날 이기는 남자에게 내 모든 것을 주기로……맹세했었소. 날 당신의 부하 로 삼아주십시오. 영원토록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 그 순간 연극 임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얼굴을 붉혔다. 마치 마리의 고백이 진짜처럼 들려왔던 것이다. 정말 연극인 걸까, 마리 선배? 가슴이 두근거려 대사가 나오지 않았지만 가인은 애써 입을 열었다. " 난 그다지 부하가 필요 없다. 그리고 그 맹세 역시 내 알 바 아니지.거절 하겠다. 아니면 굳이 날 따라와야할 이유가 있다는 건가? " 그래. 여기까지다. 내가 본 마리 선배의 무대는 여기까지였어.이 다음을 자 신은 보고 싶었다. 그녀의 연극을 끝맺어 주고 싶었다. 마리는 그런 가인을 조용히 응시했다.붉은 노을 빛에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여인 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마리는 주저하듯, 하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사랑을 고 백했다. " 당신을……사랑하기 때문. " 짝짝짝짝! 연극을 구경하던 시민이 천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박수 를 따라 진우도 유리도 브루스도 박수를 쳐주었다. 피스 대원들은 저마다 그 녀에게 한 마디 씩 했다. " 100점 만점에 100점 만점! 훌륭합니다, 마리 양! " " 좋은 연극이였어요. " " 수고했어, 마리. " " ……러브 씬. 확실히 받았다. " 마리는 그런 그들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격려에 감동하는 자 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모두……. ' 가인은 씨익 웃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선배. 최고의 해적이었어요. " " ……고맙다. " 마리는 그런 가인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가인.이렇게 연극을 끝맺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네 덕분이야. 더 이상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 내 연극은 이걸로 끝이야. ' 아……. ' 하지만 소녀는 끝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Ｅpilogue " 지금쯤 아마 난리가 났겠지? " 유리는 한성 고교의 입구에 들어서며 작게 중얼거렸다.그 말에 가인과 마리 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래. 그렇겠지.갑자기 문화제에 학생이 세명이나 사 라져 버렸으니까. ' 나와 유리야 담임 선생님한테 좀 깨진다고 쳐도 마리 선배는……. ' 마리는 연극을 나가지 않았다.그것도 주연 배우가 빠졌으니 아마 2학년 1반 의 연극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무대에 나가지도 못하고 몰수패를 당했겠 지. 과연 마리 선배의 반 학생들은 이런 그녀를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아마 모두가 그녀를 비난할 것이다. ' 마리 선배. ' 마리도 가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침울했다. 하지만 자신은 피스 대원으로써 맡은 바 사명을 다 한 것 뿐. 후회는 없었다. 단지 클래스 메이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욕을 먹어도 비난 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들과의 신의를 져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한성 고교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던 일행은 한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진우는 영문을 몰라 중얼거렸다. " 얼레? 아직 끝나지 않았네? " 그렇다. 모두 문화제 행사를 마치고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학생들도 외부인 들도 그대로 교내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때 그들 의 의문을 풀어줄 수정과 시더가 가인들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 아, 모두들! 이제야 귀환하는 군요! 수고하셨어요. " " 아, 예…….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수정 씨? " 가인들의 질문에 수정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 으음. 그러니까 그게…… 몬스터가 나타났었어요. " " 예에?! " 깜짝 놀라 반문하는 모두. 시민은 이해를 못하겠다는듯 수정에게 말했다. " 무슨 말이에요, 수정 씨?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그런데 어째서 다들 무사 할 수 있었던 거죠? 아니, 무엇보다 어째서 우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거에요? " " 일단 몬스터가 나타나기는 나타났어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 그 뒤는 시더가 이어서 말했다. "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사라져 버렸어. " " ……에에? " 더더욱 알 수 없어진 모두. 브루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몬스터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고?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 " That's right! 이건 분명히 연구 대상이야! 융합 형 타입이 아니었음에 도 불구하고 몬스터의 출현에 와프 입자의 수치 변화가 없다니! 거기 다 인명 피해는 제로! 이건 새로운 학설의 등장을 예고하는 거라고! " " 별로 반갑지 않은 학설의 예고지만 어쨌든 전황은 시더 양의 말대로에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에 비상 경보령으로 모두를 피신시키고 사 태를 지켜보았죠.몬스터는 3시간 가까이 잔류하다가 여러분이 오기 몇 분 전인 17시 10분에 그 모습을 감췄습니다. " 수정의 상황 보고에 가인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왜 몬스터는 나타난거지? 그리고 왜 날뛰지 않은 거야? 인명 피해가 없다는 건 물론 다행인 일이지만……. 시민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중얼거렸다. " 사건은 미궁 속으로……인가요? " " 에휴. 뭐, 어쨌든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니 다행입니다∼ " 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모두를 돌아보았고, 가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그들에게로 저편에서 재영과 테레이아가 달려왔다. " 어잇! 야, 유가인! 다들 어디 갔었던 거야? 너하고 유리, 마리 선배. 다 들 사라져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 " 어? 어어. 그게…… 어쩌다 보니 정신을 차리니까 대피소 안이더라. 하, 하하. " 어색하게 웃음지으며 변명하는 가인. 재영은 다행히도 속아넘어갔는지 걱정 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뭐? 하긴 몬스터가 나타나서 말도 아니었지.하여간 무사해서 다행이다!정 말 다행! 몬스터가 나타나는 바람에 문화제가 엉망이 되어 버렸어! 문화제 관련 행사도 연극도 다 뒤로 연기되고 말이야. " " 아아, 그렇구나. ……으응? " 뭐? 연기되었다고? 연극이? 그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그래. 몬스터가 나타나느라 다들 대피했을테니까 연극이고 행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테지. 그렇다면……! " 마리 선배! " 가인은 이 뜻 밖의 희소식에 마리를 돌아 보았다. 그녀도 가인과 마찬가지 였는지 어떻게 기뻐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극이 연기되 었다. 그것은 곧 마리가 연극을 빠진 게 무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인은 웃음이 터져나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마,만세다! 몬스터 만세 라고! 그는 마리를 바라보며 자신의 일 처럼 기뻐했다. " 잘 됐어요! 정말! " " 으응. " 하지만 마리는 연극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에도 의외로 담담하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원래 목적을 이루었다. 가인의 앞에 서 혼신을 다해 연기하는 것. 그가 자신의 연기를 봐주었기에, 그것도 가인을 상대로 연기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이미 만족하고 있었다. ' 모두 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가인. 네가 내 옆에 있어주었기에. ' 그랬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연극을 계속할 수 있었어.마리는 진심으로 가 인에게 감사했다. 그때,재영과 함께 온 테레이아가 그런 가인을 뒤에서 부터 힘껏 끌어 안음으로써 마리의 감사는 그 끝을 맺었다. " 가인. 나 갑자기 네가 사라져 버려서 너무 걱정했었어. 너무 너무 걱정되 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안했지만……그래도 나, 네가 무사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 " 아, 저기 테레리아! 그,그래. 난 무사해. 무사하다고. 그러니까 잠깐 이 거나 풀고! " 부끄러운 건 둘째치고 그녀가 있는 힘껏 가인의 목을 부둥켜 안고 있었기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그것을 바라보던 유리가 테레이아를 노려보며 말했 다. " 끝까지 이러기야? " " 훗.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난 가인을 놓치지 않겠어. " 어찌들으면 무섭기까지 한 말이다.테레이아는 가인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키 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짓다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브루스의 시선에 흠 칫 몸을 떨었다. 뭐지? 저 기분나쁜 시선은?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 무슨 용무죠, 브루스? 할 말이라도 있는 거에요? " " 후. 아니. 보기 좋군. 계속하도록. " 짧게 코웃음을 치며 그들을 지나치는 브루스. 교내로 들어가던 그는 테레이 아의 당황하는 모습에 소리 없이 웃었다. ' 기특한 짓을 했군. ' 어딘가 피곤해보이던데 아마 예정에도 없던 몬스터를 불러내느라 정을 소비 해서 그런 것일테지. 오늘 만큼은 내버려두기로 할까. 그런 브루스의 뒷 모습을 테레이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알아챈 건가. '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무 슨 짓을 했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째서 이런 문화제를 지연시키기 위해 기껏 모아놨던 정을 소비하면서 까지 몬스터를 출현시켰던 걸까? 이건 초류 향이 했던 행동보다 더 어리석었다. 사적인 감정에 흔들려 멋대로 정을 사용 하다니! ' 하지만……. ' 테레이아는 일행에게 둘러싸여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곁에서 기뻐하 고 있는 가인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 그래. 나쁠 건 없지. ' 어차피 소비한 정은 소량이었으니까. 이 정도 쯤은 금세 다시 보충할 수 있 을 것이다. 테레이아는 일단 가인과 마리의 미소를 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 다. 가인은 일행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자! 그럼 어서 돌아가자고요! 아직 문화제는 안 끝났잖아요? " " 오오! " 환호하는 진우들. 그렇다. 문화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마리 선배도 얼른 무대로 돌아가봐요!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에요! " " ……알았다. " 그리고 소녀의 연극도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Ｖolume.5 完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5 話 타올라라, 검! =-=-=-=-=-=-=-=-=-=-=-=-=-=-=-=-=-=-=-=-=-=-=-=-=-=-=-=-=-=-=-=-=-=-=-=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칼춤의 희(戱)라 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되 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황 창(黃 昌)'. 신라 사람이다. 이첨(李詹)의 고증에 의하면 '을축년(乙丑年) 겨울에 그가 게림(경주)에 손 님이 되어 부윤 배공(裵公)이 향악을 베풀어 위로하는데 탈을 쓴 동자(童子) 가 뜰에서 칼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소년이 바로 황창. 나이 15, 6세쯤 되어서 칼춤을 잘 추었는데 신라왕을 뵙고 말하기를,'신이 원하건데 임금을 위하여 백제왕을 죽여 원수를 갚고 싶 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소년은 곧 백제의 시중에 들어가 칼춤을 추니 그 칼춤의 영롱함이 백제 전 역에 널리 퍼져 백제 왕의 귀에 까지 들어가더라. 백제 왕이 창을 불러다가 마루에 올라 칼춤을 추라고 명령하니, 창은 기회를 보아 왕을 찔렀다. 이에 백제 인들은 그를 처형하였고 신라인들이 이를 슬퍼하여 그의 얼굴 모 습을 본떠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전해진다고 한다. 황창이 신라인인 것은 확실하나 화랑인지 아닌지 또 어느 왕때 인물인지 알 수 없으며, 무예원보통지(武藝圓譜通志)는 여지승람에서 이를 딴 것 같은데 여지승람은 또 어떤 문헌을 참고하였는지 밝히지 않았고 삼국사기에서도 황 창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첨은 스스로 이에 관해 고증하기를 내가 '삼국사기'를 보니 모든 것이 다 씌어 있는데 이런 소년이 적국의 왕을 살해한 애기가 없으니 이것은 아마 관 창의 이야기를 잘못 전한 것이 분명하다.창이 어찌 적국인 백제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일부는 춘추시대의 노나라 소년 왕기(汪錡) 와 함께 오직 둘뿐인 소년 영웅 관창의 이야기를 미화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황창은 가상의 인물인 걸까? 단순한 관창의 미화였을까? 하지만 그 소년은 실제로 존재했고,살아 백제를 빠져나와 신라와 인접한 왜 (倭)로 몸을 숨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검기(劍技)와 검무(劍舞) 를 전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라검에 뿌리를 둔 본국검법의 또 다른 전승이자 오늘 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무영신풍류의 시초였다. 그 일은 12월의 어느날 무영신풍류 도장에서 일어났다. " 잠깐 이 사진을 보거라. " 도장의 안쪽에 위치한 자택에서 마리는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 의 부친 성비영에게 밥을 퍼주다 그가 내미는 사진 한 장을 볼 수 있었다.사 진에는 한 날카로운 얼굴의 흑발 남자가 검도복을 입은채 찍혀 있었다. 마리는 의아해하며 사진을 받아들었다. " 아버님? 이 사진은 누구? " 그녀의 질문에 비영은 작게 한 숨을 쉬며 내키지 않는다는듯 말했다. " ……네 맞선 상대다. " " 예? " 마리는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그 반응에 비영은 다시 한번 한 숨을 쉬 었다.이런 복잡한 일에 자신의 딸을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솔 직한 심정이었다. " 너의 맞선 상대란다, 마리야. " " ……! " 그제서야 비영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두 눈을 크게 뜨는 그녀. 마리는 비영 이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 의 아버지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마리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설마 아버 님……. 진심……이신 건가? " 마,맞선이라니요? 아버님 이건! " " 그래. 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겠지. " 비영은 쓰디 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리는 전신의 수분이 바짝 바짝 마르는 느낌을 받았다. 노,농담이 아니야. 농담이 아니라고! 이런 말도 안되는! " 전……무슨 의도로 아버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습 니다. " 마리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하지만 비영의 다음 말에 그녀는 모 든 사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 네 어머니가 조만간 일본에서 귀국한다고 한다. 그 사진 속의 아이를 데 리고. " " ……! " 어머니? 어머니가? 마리는 망연자실하게 식탁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제 야 알 수 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아버님이 왜 저런 말씀을 하시 는 건지! ' 어머니가 귀국을 하신다고! ' 그것은 이 일이 자신과 아버님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라는 걸 의미했다. 第 15 話 타올라라, 검! 5교시 수업을 마친 쉬는 시간의 한성 고교 옥상. 옥상에는 평소와 같은 학생들의 활력이 없었다. 물론 점심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지만 가끔은 쉬는 시간에 옥상으로 올라와 바람을 쐬는 학생이라던가, 수업을 땡땡이 치고 낮 잠을 자는 학생이라던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활력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이 옥상이다. 하지만 지금 옥상에 감돌고 있던 것은 지독한 침묵과 고요. 그리고 끈이 팽 팽하게 당겨지는듯한 긴장감이었다. " 물건은 준비했겠지? " " 물론이야. " 냉정한 표정의 박재영과 유미미. 그 둘을 중심으로 반 가인회의 남학생들과 성마리 추종회의 여학생들이 대립해 서있었다. 박재영과 유미미는 긴장을 늦 추지 않으며 교섭을 계속했다. " 잠시 물건을 확인해도 될까? " " 어머, 우릴 못 믿는 거야? " " 만약을 대비해서다. " 재영의 의심이 섞인 말투에 미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친후,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펼쳐 그의 앞에 보여주었다. 재영은 찬찬히 그것을 확인한 후,고개를 끄덕였다. " 물건은 확실하군. " " 신용은 생명이야. 우리의 주 고객층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어.그나저나 이쪽이 성의를 보였으면 그쪽도 성의로 답해야겠지? " " 물론 그럴 생각이다. " 재영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미미와 같이 수중의 파일을 공개했다. 미 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역시 뛰어난 정보력이야. 솔직히 감탄했어.이 정도면 교섭은 대 만족이야. " " 후. 어차피 지금부터 당신들이 하려는 일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기 도 하다. 솔직히 말해 응원하고 있다. 부디 위업을 이루도록. " " 그 격려. 잊지 않지. " 재영과 미미는 파일을 교환한 후, 서로에게 미소지었다. 그것은 같은 길을 걷는 동업자로서의 웃음이었다. 그렇게 미미들이 파일을 챙기고 신속히 교섭 장소를 떠나자 재영은 참고 있던 한숨을 쉬었다. 그 뒤에 있던 반 가인회들 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소리쳤다. " 성공입니다,회장! 성공이에요! " " 무사히 성마리 추종회와의 접촉을 끝내다니! 역시 회장! " 재영은 그런 회원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 아니. 네고시에이터(Negotiator)로서는 자격 미달이다. 100을 뽑아낼 수 있다면 200을 뽑아내는 게 정석이지만 난 본래의 목표인 100 밖에 달성하 지 못했어. 아무래도 한방 먹은 것 같군. " " 그건 성마리 추종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히든 카드를 그들에 게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 반 가인 회의 부회장 엔비Q는 언제나 처럼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재영 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믿음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 이번 교섭의 50%는 엔비Q.너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성립될 수 있었다.솔 직히 나는 저번 문화제 전까지만 해도 성마리 추종회를 과소평가 하고 있 었지. 그것을 깨우쳐 준 건 다름아닌 너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한 단체! 그것을 예지하고 충언해준 너야말로 이번 교섭의 공로자다. " "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교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한때 회장의 뜻을 저버 렸던 절 끝까지 믿어준 당신 덕분……. " 엔비Q는 떨리는 눈동자로 재영을 바라보았다.그는 반 가인회에서 재영을 몰 아내고 회장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었다.하지만 그가 보여준 그 뜻 깊은 마 음과 진정으로 테레이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엔비Q는 감화받고 자신의 잘못 을 뉘우쳤다. 그런 그를 매정하게 내치지 않고 재영은 다시 한번 엔비Q에게 기회를 줬던 것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그릇이라니! 엔비Q는 감탄했다. 이것이 바로 반가 인회를 이끌 회장의 그릇!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내지 못할 인덕과 도량! 그래. 역시 우리의 회장은 당신 밖에 없습니다, 박재영. 당신이라면 우리에 게 반 가인회의 이상을 보여주실 수 있을 겁니다! " 그렇다면 교섭이 성립될 수 있었던 나머지 50%는 무엇인가요? " 재영의 충실한 심복이자 가녀린 심성의 소유자 제로스 1호가 물었다. 그 말 에 재영은 모두를 돌아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믿음이다. 반 가인회의 자격을 잃었던 날 믿고 다 시 회장으로 추대해준 건 다름 아닌 그대들! 여러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고 오늘의 교섭도 없었을 것이다! 반 가인회의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 오늘의 주역이다! " " 회장!!! " 모두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회장을 바라보았다. 눈이, 눈이 부 시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광채에 눈을 뜰 수가 없어! 역시 우리의 선 택은 틀리지 않았다. 박재영. 그가 있음으로 해서 반 가인회의 미래는 밝다! " 자자! 어쨌든 오늘의 성과를 직접 우리의 눈으로 확인해보도록 하자! " " 오오! " 환호하며 재영에게 모여드는 그들. 재영은 미미에게 건내받았던 파일을 개 봉하려고 했다. 그때 그들의 뒤로 들려오는 한 목소리가 있었으니. " 꽤나 소란스러운 녀석들이로군. " " ……! " 모두가 돌아본 그 곳에는 자신들의 클래스 메이트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중국인, 브루스가 곰방대를 피워물며 뚱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들의 공적이자 지옥 대원수 유가인이 쓴 웃음을 지으 며 서있는 게 아닌가! 재영들은 당황하며 그들에게 소리쳤다. " 어,어떻게 우리의 접선 장소를 네 녀석들이! " " 옥상에서 그렇게 떠들고 있으면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된다고. " 크윽! 그런 약점이! 재영은 브루스를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무,무슨 용건으로 여기에 나타난 거냐? " " 아무 것도. 단지……. " 브루스는 곰방대의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후 뱉으며 말했다. " 흡연할 장소를 찾다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되었군.요즘은 교실에서 피우려 해도 반대가 심해서 말이야. " " ……그런 얘기는 좀 더 반성을 하면서 하는 게 어때요? 애초에 학교에서 는 금연이라고요. " 그 뒤에 있던 가인이 작게 투덜거렸지만 브루스는 가볍게 묵살하며 얘기를 계속했다. " 어쨌든 탈선의 현장을 목격당한 건가? 곤란하겠군, 네 녀석들. " " 어디가 탈선의 현장이라는 거야! " 재영은 브루스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 우리 반 가인회는 적어도 학생의 본분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자 신들의 이윤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우리의 인협도 정신에 어긋 난다고! " ' 있었냐? 인협도라는 게……. ' 가인은 매번 그들에게 가해당하는 피해자로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다.브루 스도 어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는지 가볍게 코웃음치며 말했다. " 흥. 그럼 그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뭐냐? 당당하게 공개해보시지. " " 웃! " 재영은 자신의 손에 들린 파일을 품에 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회원들을 돌아보았다. 엔비Q는 그의 근심어린 시선에 고개를 끄 덕였다. " 공개한다고 해서 저희가 곤란할 건 없습니다. 어차피 뒷 말이 없게 하려 면 저들을 끌어들이는 게 현명하죠. " " 응? 역시 그렇겠지? " 그 대화에 가인의 기분은 상당히 꺼림칙해졌다. 결국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뭔가를 수습하기 위해 우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겠단 소리 아냐?! 그는 재영 의 손에 들린 파일을 의심 쩍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왠지 상당히 보기가 싫어졌다. " 자자∼ 마음껏 보라고. 마음 껏. " " 아,아니! 싫어! 저리로 치우라고! " 자신의 코 앞으로 들이대는 파일에 기겁을 하며 눈을 돌리는 가인. 그 모습 에 브루스가 한심하다는듯 재영에게서 파일을 건네받았다. 그는 파일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든 것은……. " ……뭐냐 이건? " 이해할 수 없다는듯 중얼거리는 브루스.그 의아해 하는 목소리에 가인은 실 눈을 뜨며 파일을 바라보았다. 뭐야? 뭐길래 브루스가 저러는 거지? 그리고 파일의 내용물을 살펴본 그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이,이것은! " 파일의 안에 들어있던 것.그것은 다름 아닌 수 십장의 사진과 브로마이드였 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나같이 공통된 피사체가 찍혀 있었다. 때로는 해적 복장! 때로는 드레스! 때로는 턱시도! 가인은 어이가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 ……마리 선배잖아? " 그렇다. 사진에 찍혀 있던 인물은 2학년 1반의 성마리였다. 이 사진들은 그 녀가 문화제의 연극을 할 때 찍었던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그 중 몇개는 저 번 체육대회 때 찍은 것이기도 하다. 가인은 뭔가 한심한 기분이 들어 재영들을 바라보았다. " 설마 이거 때문에 그 난리를 쳤던 거냐? " " 녀석! 이거라니? 넌 이 마리 선배의 사진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를 못한단 말이냐! " 재영은 마리의 사진을 부여잡으며 뜨거운 눈물과 함께 소리쳤다. " 이 사진에는 미의 아름다움이 집약되어 있다! 그녀의 정열과 열의가 느껴 지는 것은 물론 평상시에는 느낄 수 없었던 소녀적 감성까지! 그야말로 18세의 소녀이기에 가질 수 있는 모든 매력이 이 사진에는 담겨 있단 말 이다! 이것이야말로 찰나의 순간을 평생으로 승화시키는 마술 중의 마술! 그것이 사진의 힘! 느껴지지 않느냔 말이다! 크으윽! " 재영과 반 가인회는 사진을 끌어안고 좋아 죽겠다는듯 환희를 터뜨렸다. 가 인은 멀뚱히 자신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잘도 이 사진 한 장으로 그런 미사여구들을 붙일 수가 있는 거로군. ' 뭐, 하지만……정말 예쁘다, 마리 선배. ' 가인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재영이 녀석들이 이 사진들을 가지고 저렇게 광분하는 것도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었다. 마리 선배에게는 충분 히 그런 매력이 있으니까. ' 하긴 최근들어서 묘하게 더 여성스럽기도 해. ' 예전의 그녀는 한 자루의 칼날 같이 날카로워서 말을 거는 것 조차 힘들었 는데 요즘은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 게 뭔가 표정이 다양해졌다. 아마 그때부터 였을까? 선배가 부드러워진 것은? 블루 섬머 비치에서 선배 와 내가 단 둘이 있게 되었을 때 부터……. ' 으악! ' 가인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시뻘개졌다.갑자기 그 때의 일이 생 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절벽에서 떨어져 저체온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자 신을 그녀가 알몸으로 끌어안아주던 것이! 아, 안돼. 잊어라,유가인! 나중에 마리 선배를 무슨 얼굴로 보려고 그러는 거야! 브루스는 그렇게 사진 한 장을 들고 홍당무가 된 가인을 이상하다는듯 바라 보다가 재영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이 파일을 받을 때 너희들이 댓가로 건네준 것은 뭐냐? " 순간, 움찔 몸을 굳히며 브루스를 바라보는 재영들. 재영은 가인을 겹눈질 하며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하하하. 아니 댓가는 무슨∼ 그게 무슨 소리일까나∼ " " 내 눈을 속일 생각은 하지마라, 애송이. 이미 너희들의 음모는 만 천하에 공개 되었다. " " ……! " 재영은 브루스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지금껏 가식된 웃음으로 숨겨왔던 위 선의 가면이 깨진 것이다. 가면의 뒤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추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비열한 악당의 얼굴이다! " 후. 눈치 챈 건가. 그럼 더 이상 숨길 것도 없겠지. 그래. 너희가 생각하 는 그대로다. 우리는 성마리 추종회에게 유가인의 모든 비리가 기록된 보 고서를 넘겼다. 그것이 사진과의 교환 조건이었지. " " 뭐,뭣! 비리라니? 뭐야 그건! " 순간 재영의 말에 비명을 지르는 가인.그 반응에 재영과 반 가인회는 두 눈 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 어라? 몰랐던 거야? " " ……. " 재영들은 지레 짐작으로 자신들의 죄를 실토해버린 것이다. 그 실수를 깨달 았는지 재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반 가인회에게 소리쳤다. " 어쨌든 우리의 비밀을 알았으니 살려둘 수 없다! 이곳을 녀석들의 무덤으 로 만들어줘라! " " 그런 비밀 같은 거 알고 싶지도 않았다고! " " 우오오오오! " 항의하는 가인의 외침은 달려드는 반 가인회의 괴성에 묻혀 버렸다. 브루스 와 가인은 등을 맞대며 반 가인회의 공격에 대비할 자세를 취했다. 큭! 여기 서는 맞서 싸우는 수 밖에 없는 건가! " 멈춰! " 그때 두 명의 그림자가 옥상의 출입구에서 나타났다. 역광때문에 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한성 고교의 여학생들인 것 같았 다. 재영은 이 갑작스런 난입자들에게 소리쳤다. " 누구냐! " 휙! 하지만 문답무용. 대답 없이 그녀들은 가인들을 둘러싼 재영 무리들을 향해 돌진했다. 재영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바보같은! 단 두 명으로 이 인원들을 당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격(擊) 무쌍난무(無雙亂舞)! " 순간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과 에메랄드 머리빛을 가진 여학생이 서로 의 팔짱을 끼며 세차게 팽이 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그와 동시에 쏟아져 나 오는 팔과 다리의 연쇄 공격! 재영들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그 팔과 다리의 폭풍우에 전신을 두들겨 맞았다. " 크억! " 추풍낙엽처럼 재영들을 쓸어버리고 회전을 멈춘 두 여학생. 그녀들이 지나 온 뒤로는 반 가인회의 학생들이 두서 없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브루스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경지인가. 즐겁게 해주는군. " " ……칭찬을 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두 여학생을 주시했다.쓰러진채 간신히 고개를 드 는 재영. 그는 자신들을 괴멸시킨 두 여학생을 올려다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둣 말했다. " 어,어째서 당신들이 우리를……? 왜? "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이유리가 말했다. " 언제나 오빠에게 손을 대는 무뢰배들에게는 " 에메랄드 빛 머리를 가진 외국인 여학생, 테레이아 민체스터가 말했다. " 언제나 가인에게 해를 끼치는 래즈컬스(Rascals)에게는 " 서로 등을 맞대며 라이벌 포즈! " 우리 한성 고교의 꽃이 용서치 않아! " " 오오. " 쓰러진 주제에 박수를 치는 반 가인 회.가인은 질려 버린 얼굴로 옥상의 출 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건 도대체 제 정신들이 아니었다. 계속 보고 있다 간 나까지 저 바보 병에 옮아 버리겠다고! 무엇보다 이제 쉬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난 교실로 가겠어! " 앗! " 그때 옥상 입구로 걸어나오던 한 여학생과 충돌할 뻔한 가인. 그는 가까스 로 피해내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여학생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가인을 놀 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가인이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 어라? 마리 선배? " " ……여기 있었나. " 가인을 알아보고 담담하게 답하는 마리. 가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이제야 간신히 제 정상인 사람을 만났어. 그는 마리를 이끌고 재빨리 옥상을 벗어나려고 했다. " 자자. 얼른 내려가자고요, 선배. 여기에 계속 있다간 무슨 일에 말려들지 몰라요.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 " 자,잠깐! 나…… 할말이 있다. " 마리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가인의 행동에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제서 야 가인은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물었다. 할 말이라니? " 무슨 얘긴데요? " " 아, 음. 그게 다름이 아니라……. " 막상 말하려고 하니 얼굴이 달아오르는 그녀. 가인은 그 반응에 의아해졌다. 왜 저러시는 거지? 뭔가 말하기 곤란한 내용인가? 가인이 자신을 빤히 쳐다 보고만 있자 마리는 뭔가를 말하기 위해 애쓰다 결국은 포기해버렸다. 그녀는 거칠게 가인에게서 몸을 돌리며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 미,미안하다. 아무 것도 아니니 이만! " " 마리 선배! " 덥썩. 도망치듯 사라지려는 그녀를 붙잡는 가인. 엉겹결에 그녀의 손을 잡 아버렸다. 마리는 그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 보며 멍하니 그 자리에서 굳어버 렸다. " 그렇게 말도 안하고 가는 게 어딨어요? 할 얘기가 있으면 하고 가야죠? " " 아, 미안하다. " " 하하. 왜 계속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에요? 아까부터? " " 며, 면목 없다. " " 흠. 계속 그러시네? " 마리는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그에게 잡힌 손을 힘 없이 흔들었다. " 우,우선 이 손부터 놔라. " " 싫은데요? " 가인은 짓굿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 무슨 일인지 얘기해주지 않으면 이 손 안 놓을 거에요. " " 그런! " 그냥 뿌리치고 가도 될텐데 마리는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주춤 거렸다.가인 은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연신 싱글벙글 거렸는데 그것이 마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 가,가인. 비겁해. 그렇게 웃기만 하다니! 가인은 웃는 것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 혹시 저한테 부탁할 일이라도 있으신 거에요? 그럼 마음껏 얘기하세요.다 들어드릴테니. " " ……아니다. 염치없게 그럴수는 없다. " 그 말에 가인은 감을 잡았다. 역시 뭔가 부탁을 하려는 거였군? 가인은 마 리의 얼굴을 직시하며 힘있게 한자 한자 내뱉었다. "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있는 힘껏 도울게요. " " 가, 가인. " 마리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대하자 불안했던 마음 이 이상하게도 평온해졌다. 마리는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 정말……도와줄 수 있는 거냐? " " 예! " " 정말……다 들어줄 수 있는 거냐? " " 예! " 주저 없이 힘차게 답하는 가인. 그 시원시원한 대답에 마리는 용기를 얻었다. 그,그래. 얘기하는 거다. 모두 다 얘기하는 거야! 마리는 두 눈을 질끈 감으 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 그렇다면 유가인! 내……내 낭군이 되어줘! " " ……. " 순간 가인은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머리 속으로는 연신 마 리가 했던 말이 에코처럼 울리고 있었다. 낭군이 되어줘. 낭군이 되어줘. 낭군 이 되어줘. 낭군이 되어줘. 낭군이 되어달라고? ' 낭군이라면? ' 분명 남편을 정답게 일컫는 말이었던가? 그럼 낭군이 되어달라는 건 결혼해달 라는 소리가 되겠지? 어째서 선배는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하는 걸까? 아하. 알 았다. 이거 선배가 준비한 회심의 개그였군! 마리선배도 참! 개그라면 사람을 웃겨야지 이렇게 몰골이 송연해지게 하면 어떡해요?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래. 여기서는 웃어줘야겠지? ' 우,웃음이 안나와……. ' 너무나도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 그 모습에 가인은 자신이 앞으로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깨달았다. 여기선 웃는 게 아니라 기절을 해야 하는 거였다! 우당탕탕! 하지만 미처 그가 놀라기도 전에 옥상의 출입구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이 무 너지듯 쏟아져 나왔다.가인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계 속 거기서 듣고 있었던 거냐, 너희들? " 낭군?!!!!!! " 쓰러졌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테레이아와 유리, 재영을 위시한 모두의 외침 이 비명처럼 한성 고교에 울려퍼졌다. " 낭군이라 함은 남편. 낭군이 되어줘라는 건 남편이 되어달라는 소리인 거 같은데……. " 방과 후 26구역에 위치한 한시민의 집. 그곳에서 브루스가 지금까지의 상황 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는 마리가 고개를 숙이며 쇼파에 앉아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뒤에 앉아있던 네 명의 남녀를 돌아보았다. " 아무래도 부가 설명이 필요할 듯 싶군. " 끄덕. 끄덕. 그 말에 브루스의 뒤에서 팔짱을 끼고 고압적인 자세로 앉아 있던 테레이아 와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눈빛을 번뜩이며 낮게 으르렁 거렸다. " 그런 말을 오빠에게 한 저의가 뭔지 우리가 납득하도록 설명해 봐,마리. " "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없습니다. 일절의 거짓 없이 사건 시각에 맞춰 차례대로 경위를 진술하시죠. " 테레이아는 얼음장 같은 태도로 마리를 추궁했다. 평상시 마리를 '선배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하던 게 언제였냐는듯한 모습이었다.그 차가운 태도에 옆에 있 던 가인이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 아, 저기…….그,그렇게 재촉하지 말고 일단 마리 선배가 얘기하는 걸 들 어보자. 응? " " 오빠는 가만히 있어. "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가인을 쏘아보는 유리와 테레이아. 가인은 본전도 건 지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그런 유리들에게 시민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다들 진정하고 마리 양의 얘기부터 들어보죠. " " 분노에 몸을 맡기면 사리를 분별하기 힘들어지지. " 곰방대를 피워물며 되려 불난 집에 기름을 쏟아붓는 브루스. 테레이아와 유 리는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브루스는 언제나 그렇듯 무심 하게 대꾸했다. " 위로가 되지 않았나? " 될 리가 없잖아! 테레이아와 유리는 왠지 맥이 빠져 한 숨을 쉬었다. 시민 은 마리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마리 양. 아무리 그래도 낭군이라니…… 왜 그런 말을 한 거에요? 마리양 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말을 할 리 없잖아요? " " 그,그래요. 선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 가인이 맞장구를 치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지 침통한 표정으로 고 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 미안……하다. 못 들은 걸로 해주기를 바란다. " 마리는 힘 없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발끈한 유리가 소리쳤다. " 못 들은 걸로 하면 다야! " "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에요! " 뭔가 속담을 섞어쓰기 시작한 걸로 보아 테레이아도 열이 받기 시작한 모양 이다. 시민이 흥분하는 그녀들을 손짓으로 제지하며 마리를 부드럽게 타일렀 다. " 아무도 마리 양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마리 양이 고민이 있는데도 저희 에게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걱정되서 그러는 거에요. " ' 걱정은 무슨 걱정! ' 테레이아와 유리는 작게 투덜거렸지만 애써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시민 은 말을 계속했다. " 저희가 마리 양의 고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몰라요.하지만 마 리 양은 이미 저희에게 남이 아니니까. 저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저희에게도 고통인 거에요. 아마 가인 씨 도 마음이 많이 아플 거에요. " " ……가인도? " 마리는 그제서야 시민의 말에 눈을 뜨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래요. 제가 어려울 때 선배는 항상 절 도와주었잖아요? 그런 선배가 어 려워하는 지금, 제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한심해 서 죽을 지경이에요! 선배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 그 말에 복잡한 표정으로 마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마음이 동하는 지 죄책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 모든 건…… 내 실수다. 다 나의 잘못이었던 거다. " " 아까부터 듣자 듣자 하니까 도대체 뭐가 실수라는 거냐? " 브루스는 뜬 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마리에게 심드렁하게 물었다.모두는 그 에게 눈총을 줬다. ' 가만히 있어요! 제발! ' 당신은 입 다물고 있는게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 간신히 마리가 입을 열었 는데 저 인간이 초를 치면 다시 입을 닫을 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그런 일행 의 면박에 투덜거리며 곰방대만 뻑뻑 피워댔다. 마리는 천천히 얘기를 계속했다. " 그러니까 그건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아버님이 이 사진을 나에게 보 여주셨지. " 가인은 마리가 내민 사진을 받아보았다. 검도복을 입은 날카로운 눈빛의 미 남자였는데 어딘가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라? 난 이런 얼굴을 본 기 억이 없는데? 시민은 그 곁에서 사진을 살펴보며 마리에게 물었다. " 이게 누구에요? " " ……내 맞선남. " " 에에엣!! " 순간 기겁을 하며 마리를 쳐다보는 일행. 그 시선을 마리는 외면하며 힘없 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모두는 다시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이, 이 사람이 맞 선남이라고? 이 사람이? 시민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 하지만 마리 양은 이제 겨우 열 여덟살이잖아요? 어째서 맞선을……. " 그 말에 답한 것은 브루스였다. " 데릴 사위를 통한 후계자의 계승인가. " " ……! " 마리는 정곡을 찔렸는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힘 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 그렇습니다. " " 그런! " 가인은 분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말도 안되요! 후계자를 계승하기 위해 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맞선이라니! " " 요즘같은 시대에 잘도 그런 악습이 있을 수가 있군요. " 외국인인 테레이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듯 혀를 찼다. 유리는 그제서야 마리 에 대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 그래서 마리는 뭐라고 했어? 설마 이 맞선을 받아들일 생각인 거야? " " 나는……. " 마리는 무릎 위에 올려놨던 주먹을 움켜쥐며 조용히 말했다. " 나는 무영신풍류의 사람이다. 가문이 명하는 일은 따르는 수 밖에 없어. " " 가문이라뇨! 마리 선배는 마리 선배일 뿐이에요! 무영신풍류의 사람이기 이전에 자신의 인격을 가진 여자라고요! 결혼할 사람은 스스로가 골라야 하는 거잖아요? 생판 본 적도 없던 사람과 강제로 맞선이라니! 이건 마리 선배를 무시하는 처사에요! " 가인의 항의에 브루스는 가볍게 코웃음치며 말했다. " 함부로 떠들지 마라,애송이.계승이라는 게 뭔지나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 는 거냐? 무영신풍류는 현 검술 중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고검류다. 아 마 천 년은 넘게 그 맥을 이어왔을 걸? 그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무(武) 를 보존해오며 숭상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하는 거냐고. " " ……! " " 가문 앞에서는 개인의 의사란 없다.가문이 정한 일은 반드시 따라야만 한 다. 무엇보다 후계자가 될 남자가 집안에 없을 경우에는 여자가 후계자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그 맥을 잇지. 이건 너무도 당연한 거고 반드시 지켜 져야할 맹세다. "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런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런 건! 개인 의 의사가 없다니! " 그건 잘못된 거에요! 중요한 건 검술을 잇는다는 거지 개인의 행복을,그 미래를 빼앗는 건 아니잖아요?! " 가인의 외침에 마리의 두눈이 부릅 떠졌다. 가인은 그녀를 돌아보며 소리쳤 다. " 제 말이 틀려요, 선배? 선배는 이 맞선이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잠자코 따를 거냐고요! 후계자의 자리를 정하는 건 분명 중요해요! 하지만 그건 마리 선배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한 다음 정해도 충분하다고요! 가문에서 선배의 결혼을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어요! " ' 저 바보가. ' 브루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가문 검술에 무지하다지만 저렇게 정면 으로 반박해 버릴 줄이야. 물론 그 역시 검술의 명맥을 잇는다는 것과 혈족 을 잇는다는 건 다른 의미라고 생각했다. 반드시 그 집안의 사람이 아니더라 도 검술은 이을 수가 있는 거고, 피에서 정통성을 찾는다는 건 그의 관점에 서 볼 때 어리석은 일이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실력이 있고, 실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실력이 없다.그런 실력을 피의 계보에서 찾겠다는 건 노력과 재능을 무 시한다는 소리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 그러나……가문의 사람으로 살아오던 마리가 가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 을 것인가? ' 아마 노발대발하며 분노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의외로 마리는 분노하지 않 았다. " ……그렇게 생각하나? " 그녀는 미소짓고 있었다. 마리의 말에 가인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선배의 인생은 선배의 것이잖아요! 무영신풍류의 명맥을 잇는 책 임을 외면하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선배는 그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는 거 지 그 책임을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 " 그래. " 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가인을 직시했다. 가인은 눈을 돌리지 않고 그 얼굴을 마주했다. " 고맙다. " 그녀는 가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모두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지? " 내 생각이 옳다고 얘기해줘서. " " 마리 선배! " 가인은 미소지었다. 그래요,선배! 선배는 틀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런 강제적인 맞선을 따를 필요는 없어! 유리와 테레이아도, 시민도 미소지었다.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정하는 것.남에 의해 정해지는 앞길에 행복이 있을 리 가 없다. 그때, 브루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이 이것과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왜 가인에게 낭군 이 되어달라는 소리 따위를 한 거냐? " " ……! " 그렇다. 잘 생각해보니 맞선을 한다고 해서 가인에게 사과를 해야될 이유도 낭군이 되어달라고 할 이유도 없었다. 맞선이라는 말에 놀라 다들 논점을 잊 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와 테레이아는 다시 전투 태세를 갖추며 마리를 쏘아 보았다. " 계속해! " " 맞선을 거절할 방법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다름 아닌…… " 마리는 아침에 있었던 비영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아버님. 죄송하지만 이 맞선……할 수 없습니다. ' ' 네 어머니가 추진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알다시피 나에게는 네 말 을 받아줄 능력이 없구나. ' '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버님께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 마리의 말에 비영은 안색을 굳혔다.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마음을 단 단히 먹고 입을 열었다. ' 저에게는…… 마음에 둔 약혼자가 있습니다! ' " 약혼자! " 마리의 말을 듣고 있던 가인들이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소리쳤다. " 약혼자요? 마리 선배! 약혼자가 있었던 거에요? " " 마리! 사실이야? " " Oh, My holy god! " " 마리 양! " 마리는 그런 모두의 반응에 어깨를 움츠리며 우물쭈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로 말했다. " ……거짓말이었다. " " ……. " 그럼 그렇지. 모두는 안도 반 실망 반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브루스는 코 웃음을 치며 비아냥 거렸다. " 흥. 급한 김에 나온 거짓말 치고서는 참으로 지리멸렬하군. 잘도 너의 부 친이 그 말을 믿어주겠구나. 그래. 어쨌든 누가 약혼자라고 거짓말을 한 거냐? " " ……그,그건. " 마리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가인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가인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에 가인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 마리 선배가 왜 저러는 거지? ' 그러니까 네 녀석이 둔하다는 거야! 그를 제외한 모두는 마리의 행동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 서,설마! 약혼자라고 한 사람이! " 그들의 시선이 가인에게로 쏠렸다. 그 시선의 집중에도 가인은 여전히 깨닫 지 못하고 궁금해 했다. 정말 끝내주게 둔감한 인간이다. " 뭐에요? 그 약혼자라는 사람, 다들 아는 사람이었어요? 누구에요? 저에게 도 좀 알려줘요! " 다른 사람의 일에는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일에는 이 런 벽창호가 될 수 있을까? 브루스는 이를 갈며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 바로 네 녀석 얘기잖아! " " 으악! " 가인은 브루스에게 얻어맞은 머리를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세 게 후려쳤는지 두 눈에 눈물이 다 맺힐 지경이었다. 너,너무하잖아! 이게 갑 자기 무슨 짓이에요, 브루스! 그리고 내 얘기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아! ' 순간 브루스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한 가인.그는 입을 쩍 벌리며 마리에게 외쳤다. " 마리 선배! 설마 제가 약혼자라고 한 거에요? " ' 느려! ' 모두는 가인의 뒷 북에 혀를 찼지만 긴장한 얼굴로 마리를 주시했다.마리는 가인의 놀란 표정을 마주하자 얼굴을 들지 못하며 소리쳤다. " 미,미안하다! 다른 방법이 없었어! 모두 내 잘못이다! 기, 기분이 나빴다 면 사과한다! " " 이게 사과로 될 일이야! " 유리와 테레이아가 버럭 마리에게 소리쳤다. 다른 거짓말도 아니고 약혼자 얘기를 거짓말로 하다니! 그것도 가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서! 시민은 딱하다 는듯 마리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사정이 급했으면 저런 어처구니 없는 거짓 말을 했을까? 시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 아버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 " 그게 사실이라면…… 정식으로 소개를 해달라고……. " 뒷 말을 얼버무리며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마리.모두는 한 숨을 쉬었다. 정 말 대책이 안 서는 상황이로군! 가인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 그래서 마리 선배는……. ' 오늘 학교에서 낭군이 되어달라는 말을 한 거였나. 가인은 이해할 수 있었 다. 그녀에게는 거짓말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리라. 맞선을 거절했다간 심각할 경우 파문을 당할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무영신풍류를 떠난다는 건 그녀로선 생각도 못할 일이니까. 이대로 무력하게 집 안에서 정 해준 맞선남과 결혼을 하는 수 밖에 없는 건가?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브루스가 웃음을 흘렸다. " 호오. 가인이 약혼자라고? 그것 괜찮군. 의외로 나쁘진 않아. 과연 그 말 대로다. " 그 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드는 마리.브루스는 팔짱을 끼며 설명했다. " 너에게 약혼자가 있다면, 그것도 검술을 익힌 자가 약혼자라면 더 이상의 맞선은 필요 없지 않은가? 문제는 네 거짓말을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는거 다. " " 사실로? " 모두의 시선이 가인에게로 집중되었다. 가인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 그,그게 무슨 소리에요? 사실이라니? " " 정확히 말하면 사실 처럼 보여야 한다는 거지. 완벽하게 약혼자인 것 처 럼 보여서 이번 맞선을 취소시키라는 거다.물론 네 녀석이 동의해야만 이 거짓말은 유효하다. " " 브루스! " 가인은 반색하며 소리쳤다. 그런 말도 안되는! " 지금 저에게 마리 선배의 약혼자 흉내를 내란 말이에요?! " 그렇게 외치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굴을 붉 히며 시선을 돌렸다. 가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마,말도 안돼. 이런 거. 이 런 건 말도 안된다고! 브루스는 뚱한 얼굴로 가인을 쏘아보았다. " 안될 건 또 뭐가 있냐? 어차피 네 녀석, 특별히 사귀고 있는 여자도 없지 않나?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임자 있는 몸이 되어 무분별한 관계들을 정리 하는 것도 좋겠지. " " 그런 걸 누가 용납할 것 같아! " 브루스가 칭한 무분별한 관계의 두 여자,테레이아와 유리가 버럭 소리쳤다. 마리는 떨리는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자 가인은 마음 이 약해졌다. 아, 안돼! 나도 마리 선배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지! 하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무엇보다 나에게는…… ' 나에게는 시민 씨가! ' 가인은 시민을 돌아보았다. 나는,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비록 나 혼자 하고 있는 짝사랑이지만…….그래도 시민 씨를 맘에 두고 이런 연극 을 할 수는 없어! 마리는 그런 가인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침울하게 말했다. " 무리할 필요 없다,가인. 어차피 내 개인적인 문제다.널 끼어들게 하는 게 아니었어. " 그래. 어차피 알고 있다. 가인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한시민 뿐이라는 걸. 그를 향한 내 마음은 일방 통행이라는 걸. 이 이상 그를 끌어들였다간 가인 을 괴롭히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 집에 돌아가 진실을 말하겠다. " " 서,선배! " 가인은 마리의 말에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 었다. " 그,그럼 선배는 어떻게 되는 거에요? " " 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겠지……. " 당연하다는 대답. 하지만 그녀의 말꼬리는 흔들리고 있었다.가인은 이를 악 물었다. 돕고 싶다. 마리 선배를 돕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그럼 시민 씨에 대한 내 마음은? 여기서 내 마음을 포기하고 그녀를 돕는 게 정답인 건가? 하지만! " 가인 씨. " 그때 가인의 옆에 있던 시민이 그를 부드럽게 불렀다. 가인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뭘 그렇게 망설이고 있어요? 이미 답은 나왔잖아요. 마리 양을 돕기로. " " 그,그렇지만 시민 씨! " 시민 씨는, 시민 씨는! " ……시민 씨는 그래도 괜찮아요?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 말았다. 모두는 숨을 죽였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시민을 향한 가인의 고백! 그렇게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시민이 뭐라고 대답하느냐에 따라 가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민은 두 눈을 크게 뜨며 가인을 바라보다가 곧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 괜찮……냐니요? 당연히 마리 양을 돕는 건데 안 괜찮을리가 없잖아요? " 그녀는 평소처럼 방긋 웃으며 말했다. " 후훗. 어차피 진짜로 약혼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 편히 마리 양을 도와주 도록 하세요. 가인 씨는 남자잖아요? " " ……! " 순간 가인의 마음은 저 땅 속 깊은 지옥의 유황불 속으로 처박혀 버렸다.엄 습해오는 실망과 좌절! 무기력! 상처 받은 17세 소년의 마음! 재기불능이 된 그의 모습에 유리와 테레이아, 브루스는 중얼거렸다. ' 완벽히 차였군. ' 브루스는 힘빠진 가인의 목덜미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 자자. 그러면 이걸로 정해진 거로군. 이제부터 당분간 유가인은 성마리의 임시 약혼자다. " " 그런! " 항의하는 테레이아와 유리. 브루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 임시라고 했다. 임시. 아니면 이대로 마리가 원하지도 않는 맞선을 보길 원하나? " " 우……. " 할 말을 잊는 그녀들. 브루스는 상황이 정리되었다는듯 가인과 마리의 등을 두들겼다. ． ． ． ． ． " 자, 이걸로 됐겠지? 너희들은 지금부터 약혼한 사이다. 약 혼 한 사 이. " " ……! " 마리와 유리, 테레이아는 그 말이 갖는 무게에 숨도 쉬지 못하며 압도 당했 다. 약혼한 사이! 약혼한 사이라고! 한편 실의에 빠진 가인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죽은듯이 업드려 있을 뿐이었다. 그가 재기하기에는 많은 시 일이 소요될 듯 싶었다. " ……. " 그리고 그런 가인의 모습을 시민은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웅성웅성 다음 날. 한성고교의 1학년 3반은 아침부터 시끌벅적이고 있었다.그들은 한 가지 화제에 열을 올리며 토론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그,그게 사실이야? " " 우리 모두가 증인이다! 그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야! " 재영과 반 가인회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학생들은 믿을 수 없다는듯 눈 살을 찌푸렸다. "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된다고. " 그래. 말도 안돼! " 그 마리 선배가 유가인 녀석에게 프로포즈를 했다니! " 그렇다. 이른 아침부터 한성 고교를 들썩이게 하는 악성 루머(rumor). 그것 은 유가인과 성마리의 결혼설이었다. 목격자에 의하면 그것은 어제 5교시가 끝난 13시 58분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 낭군이라고 했단 말이야! 낭군! 유가인과 접촉한 마리 선배는 그런 말을 했다고! 이게 무슨 의미일 거 같아? " " 호,혹시 낭군이라는 건 무슨 패스워드가 아닐까? 비밀리에 추진하는 군 사 작전의 암호라던가? " " 현실 도피하지마! 낭군이라 함은! " 재영은 단호하게 결론 내렸다. " 남편! 결혼 상대자를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 " 으아아아아! "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듯 눈물을 흘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남학생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재영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나도 처음에는 저 들과 같은 절망감을 맛봤었지. 단지 지금은 고통에 익숙해져 있을 뿐. 그의 곁에 있던 엔비Q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 회장. 전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마리. 그녀는 왜 공공의 적 유가 인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요? " " 글쎄……. " 재영은 아직 등교하지 않은 가인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침음했다. " 그것은 유가인. 녀석이 오면 족치는 수 밖에. " " 알겠습니다. 반 가인회의 집행 조를 발동시키겠습니다.팔대지옥(八大地獄) 의 규환지옥(叫喚地獄)이라면 녀석의 입에서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 " 흠. 적합한 판단이다. 집행을 허가한다! " 팔대지옥. 그것은 반 가인회에서 배신자를 처리할 때 사용하는 고문 기술이 었다. 그것이 회의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에게 사용되는 것은 유가인이 처음 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분명 어제는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인협도 정신을 자랑스레 여긴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저렇듯 손 쉽게 태도를 바꿀 수 있다니. 유연한 사고 방식이 라고 칭찬해줘야 하나? 드르륵 그때 닫혀있던 교실의 뒷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뒷 문으로 들 어오는 한 인영에게 쏠렸다. 드디어 나타난 건가! 지옥 대원수 유가인! 1학 년 3반에 대파란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 ……. " 하지만 모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가인을 손 보기 위해 벼 르고 있던 반 가인회의 집행조 또한 움직이지 못했다. 분명 들어온 이는 유 가인이었지만 그의 앞으로는 테레이아와 유리가 먹구름을 동반한채 걷고있었 던 것이다. 파지지지직.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그 사이로 흐르는 방전 현상. 이것은 지 금까지 보아오던 그 어떤 방전 현상보다 강렬했다. 코로나 방전이었다. 한쪽 으로 몰려 있던 정전기 전하들이 도체와 접촉하거나 전하들이 쌓이고 쌓여 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이 되면 마주 보고 있던 두 물체 사이 의 공기들이 전기성을 띠고 번개처럼 빠르게 한쪽으로 내달려 불꽃을 튀기는 현상! 재영들은 그 모습에 차마 가인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며 상황을 주시했 다. 저벅 저벅 저벅 유난히도 크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 테레이아와 유리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가방을 풀었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다. 하지만 가인이 그 사이로 힘 없이 몸을 앉히자 급격한 압력 변화로 인해 정재파(standing wave)가 발생하여 그 들 사이의 공기가 공진(Resonance)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어머? 아침부터 왜 그렇게 힘이 없으실까? " 싸늘하게 미소지으며 가인에게 말을 건내는 테레이아. 그것은 평소 가인에 게 대담한 애정 공세를 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 좀 더 기운을 내는 게 어때, 오빠? 이제부터는 삶의 활력이 될 의미를 찾 았잖아? " 예전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한껏 딱딱하게 말을 건내는 유리.그것은 평소 가 인에게 만큼은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반응들 에 가인은 가뜩이나 힘이 없던 어깨를 더 늘어뜨렸다. 테레이아와 유리는 가 볍게 코웃음을 치며 입을 모아 말했다. ． ． ． " 힘들때면 항상 뒷바라지를 해줄 약 혼 녀까지 있으시면서. " 웅성웅성 술렁이는 1학년 3반. 재영과 반 가인회는 두 눈을 부릅 뜨며 가인을 노려보 았다. 여,역시 유가인! 그 루머는 정녕 사실이었단 말인가? 뒷바라지를 해줄 약혼녀라니! 어느새 마리 선배와 그런 관계가 된 거지? 가인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 그만들 해둬.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힘 빠지니까. " " 어머! 약혼녀 께서 잘 챙겨주지 않는 모양이지? " " 벌써부터 불화가 생긴 거야? " 전혀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듯 신랄하게 가인에게 빈정거리는 테레이아와 유 리. 가인은 이마를 감싸안았다. 머리가 지끈 지끈거리는 게 이대로 기절하고 만 싶었다. 그때 어느새 그들의 뒤로 와있던 브루스가 대화에 새로운 흐름을 제시했다. " 그럴리가. 불화라니 당치도 않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뜨거운 모닝 콜로 서로에게 밀어(密語)를 속삭이던데. " " 밀어(蜜語)! " 밀어라 함은 남녀 간에 은밀히 나누는 달콤한 말! 브루스가 말한 밀어는 남 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하는 말을 가리키는 거였지만 워낙에 미묘 한 타이밍으로 제기된 말이었기에 반의 분위기는 더 없이 흉흉해졌다. 테레 이아와 유리도 눈빛이 변하여 가인을 노려보았다. 가인은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하는 브루스를 진심으로 증오하며 어설픈 자기 변호에 나섰다. " 아,아니. 그건! 그냥 오늘은 방과 후에 수련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전화 였을 뿐이야! 밀어 같은 게 아니라고! " " 네,네 이녀석! " 순간 재영과 반 가인회가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올렸다. 그들은 울분 을 토하며 소리쳤다. " 수련이라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설마 마리 선배와 단 둘이서 뭔가를 했다는 거냐! " " 허튼 소리하지 말고 진실만을 토해내! 어서! " 가인은 억센 손아귀들에 잡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간신히 소리쳤다. "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아니라고! 마리 선배와는 단지 예전부터 검도 수 련을 해왔을 뿐인데…… 그냥 단순히 검을 가르침 받았던 거라고! " " 뭣! 검을 가르침 받았다고? 예전부터? " " 그래! 이제 알았겠지? 그러니까 제발 쓸데 없는 오해들은 하지마! " 하지만 재영들은 가인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 그것은 마리 선배와의 개인 교습! 예전부터라는 말은 꽤 오랫동안 해왔다 는 소리! " " 역시 용서할 수 없다,유가인! 네 녀석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다! " 한층 더 가인의 멱살을 잡아흔들며 그를 추궁하는 반 가인회. 그 모습을 바 라보며 유리와 테레이아, 브루스는 가인을 한심하다는듯 바라보았다.아예 제 무덤을 파라. 파. 탕! 그때 거칠게 열리는 교실 문. 재영과 반 가인회는 막 가인에게 팔대지옥의 규환지옥을 집행하려다가 앞문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또 누구야? " 유우가아이인! " 마치 지옥의 유황불들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목소리. 그 무시무시한 목소리 에 모두의 머리털이 삐쭉 하늘로 곤두섰다. 으앗! 저 사람은! " 서,선생님! " 1학년 3반의 담임 교사이자 체육 교사 하지연! 그녀가 사람 하나는 거뜬히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예의 담배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담배가 그녀의 입에서 두 동강 나며 그 재를 허공에 흩뿌린다. 그것 을 바라보던 학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좋지 않아! 이건 좋지 않다고! 곧바로 가인을 향해 폭군처럼 다가오는 지연. 그녀의 앞길을 막을 강심장 은 없었다. 가인에게 몰려있던 재영들은 홍해 바다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 지며 길을 열었다. 지연은 그대로 가인의 멱살을 잡아올리며 이를 갈았다. "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그때 블루 썸머 비치에서 네 녀석이 마리 와 단 둘이서 사라지던 날! 난 그 날 부터 알아봤다고! 네 녀석은 그때 이미 마리에게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될 짓을 저지른 거다! " " 예에에엣?! " 이 뜻 밖의 말에 흥분하는 반 가인회.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단 둘이서 사라지다니?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고! 재영은 손뼉을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 과연 그랬군! 모든 것의 발단은 그때부터 였던 거야! " " 무, 무슨 소리입니까? 회장! " " 그것은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었다. 한 밤 중에 가인과 마리 선배가 사라 지더니 다음날 아침에야 돌아오더군. " " 그것은! " 모두는 서로를 돌아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쳤다. " 그렇다! 유가인! 놈은 이미 마리 선배와 만리 장성을 쌓은 것이다! " 쿠쿵! 이 충격적인 사실에 벼락을 맞은 것 처럼 몸을 떠는 1학년 3반. 가인은 어 처구니가 없어 제대로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의 상황을 알고 있던 테레 이아와 유리만이 그를 가볍게 동정할 뿐이다. 일이 꼬이면 이렇게 걷잡을 수 없게 꼬일 수도 있군. 전황을 모르던 브루스는 놀랍다는듯 가인에게 말했다. " 그랬단 말인가,애송이? 제법이로군. 과연 그렇게 생각하면 이 모든 상황 이 일목요연해진다. " " 칭찬하지마! " 가인은 애처롭게 소리지르며 자신의 멱살을 붙잡은 지연을 돌아보았다.그녀 는 실망스럽다는듯 고개를 내저었다. " 내가 네 녀석을 잘못봤었다! 아무리 여자 관계가 문란하더라도 근성은 있 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고작 한순간의 유혹에 넘어가 이런 무 책임한 짓을 저지르다니! " " 선생님! 그런게 아니에요! " " 변명하지마! " 퍽! 가차 없이 가인의 배에 바디 블로우를 먹이는 지연. 가인은 숨을 컥 들이키 며 몸을 들썩였다.지연은 호흡곤란을 겪는 가인을 재영들에게로 팽개치며 체 육복의 상의를 벗어던졌다. 반팔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팔은 군살 하 나 없이 잘 단련된 하나의 흉기였다. " 네 녀석이 이런 탈선의 길을 걷게된 것은 모두 다 교사인 나의 책임! 오 늘 네 녀석을 죽이고 나도 죽는다! " " 죽여라! " " 죽여라! " " 죽여라! " 그런 가인과 지연을 둘러싸며 '죽여라'를 입맞추어 외치는 반 가인회. 이대 로 라면 가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릴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구 원해주는 이가 하나 있었다. " 가인! " 이 목소리는!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집중되는 시선들.그리고 그곳에 있던 것은 바로 이 모든 화제의 중심인 성마리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 들에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가인을 향해 걸어왔다. 지연과 모두는 마리의 행보에 마른 침을 삼켰다. 드디어 등장인가! 소문의 약혼녀! " 마,마리 선배. " 가인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교복이 구겨지고 낭패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처량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 비틀거리는 모습에 마리는 깜짝 놀라 그를 부축 했다. " 가인! 무슨 일이냐? 이 모습은! " " 하,하하…….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 " 신경쓰지 말라니! " 마리는 화를 내며 걱정스레 가인의 볼에 손을 가져갔다. 그 바람에 가인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마, 마리 선배!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 이 대담한 행동은! 그들을 지켜보던 지연과 재영들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반응에 브루스는 날카롭게 미소지었다. ' 좋아. 내가 말한 것을 잘 실천하고 있군.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다. ' 브루스가 가인과 마리에게 지시했던 것.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 너희들은 이제부터 약혼한 사이 처럼 다정스럽게 행동해야한다.그것은 학 교에서나 집에서나, 남들의 이목이 집중되어도 마찬가지. 그렇게 평상시 에 호흡을 맞춰놔야 마리의 부친을 만날 경우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겠 지. 최대한 너희들의 애정을 과시해라! 너희의 약혼이 거짓이라는 걸 아 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완벽히 속여! ' 그런 그의 가르침을 마리는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가인이야 상당히 의욕 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어차피 그는 '마리에게 코가 꿰였다'라는 인상이었기 에 되려 효과적일 수 있었다. 테레이아와 유리도 그런 가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잠자코 눈 감아주고 있었지만 치밀어 오르는 울화는 참을 수 없었다. " 누구냐! 너에게 이런 상처를 입힌 사람은! " " 나,난 괜찮아요. 선배. 괜찮다고요. " 속상한듯 가인의 얼굴을 매만지는 마리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가인. 그것은 어리숙한 약혼자를 정성스레 챙겨주는 약혼녀의 모습이었다.테 레이아와 유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 저,저건 아무래도 연기가 아니잖아. ' 분명 저번의 문화제 때 이후로 마리의 연기 실력이 일취월장 했다고는 하지 만, 저건 애정이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연기였다. 그녀들은 브루스를 노 려보며 생각했다. 이건 뭔가 속는 기분이야! " 그나저나 저희 교실에는 왠 일이세요,선배? " " 아, 그냥……. 네,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오면 안 되는 거였나? "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마리. 그 말과 행동에 모두는 뒤집어 졌 다.재영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아니야! 저건 우리의 마리 선배 가 아니야! 유가인의 페로몬에 오염된 게 분명하다고! 우리의 선배를 돌려줘! ' 용서할 수 없다, 유가인!! ' 유가인에 대한 반 가인회의 적의가 120% 증가했다. " 아,아뇨. 그런 게 아니라……. " 가인은 마리의 말에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마리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브루스가 다정스러워 보여야 한다는 지시 를 내리기는 했지만 마리의 행동은 좀 정도가 심했던 것이다.왠지 모르게 실 감나는 것이 만약 브루스의 얘기를 듣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행동을 진짜라 고 믿었을 것이다. " 그리고 한 가지 얘기할 것도 있었고. " " 예? 뭔데요? " 마리는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 어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작게 한 숨을 쉰 후 말을 이 었다. " ……오늘 아버님께 널 데려가기로 했다. " 쿵! 쇼크! 대 쇼크! 얘기를 듣고 있던 지연은 순간 밀려드는 현기증에 아찔해져 비틀거렸다. " 선생님! " 쓰러지려는 그녀를 다급하게 부축하는 학생들. 테레이아와 유리는 브루스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이,이건 너무 빠르잖아? " " 아니. 좋은 흐름이다. 이 흐름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 마리는 경악하는 모두의 반응에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가인에게서 몸을 돌 렸다. 이 이상 버티는 것은 그녀로서도 무리였다. " 그,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방과 후에 데리러오마! " " 아,예……. " 재빨리 1학년 3반 교실을 벗어나는 마리.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이 묘하게 들 떠 보이는 것은 가인의 착각이었을까. 그는 어설프게 그녀의 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 후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어쩔 수 없이 마리의 약혼자 흉내를 내게 되었지만 그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정신 없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마음 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자신은 마리가 강제로 맞선을 받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하지만 이 건 아니다. 마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약혼자라니! 더구나…… ' 시민 씨는 나 같은 녀석, 어떻게 되어도 전혀 상관 없는 거 같고……. ' 그것이 가장 기운 빠지는 일이었다. 그래. 알고 있어. 잘 알고 있다고.그녀 가 나 따위를 남자로 봐줄리가 없다는 거. 무엇보다 시민 씨는……. ' 제 소중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도 가인 씨와 같았다면…… 그랬다 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 ' 그 사람…… 많이 좋아하셨……어요? ' ' 예? ……그럼요. 제 목숨보다도 더……소중했던 사람이죠. ' 그래. 그랬었지. 가인은 예전 백화점에서 시민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씁쓸 함을 감추지 못했다. 시민 씨에게는 그 사람이 있었지. 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사람이……. 그러니 내가 뭘하든 신경쓰실리가 없지. 가인은 기분 이 우울해져 고개를 떨구었다. 유가인. 이 한심한 놈! 젠장! " 응? " 그때 가인은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으로는 도 끼 눈을 뜬 지연과 반 가인회, 재영, 테레이아, 유리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 던 것이다. 가인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생각했다. ' 그래.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고. ' 탕! " 격멸(擊滅)! 말살(抹殺)! 총살(銃殺)! " " 순순히 죽을 생각은 하지마라, 유가인! 마음껏 괴롭혀줄테다! " 거칠게 문이 열리며 또 다시 들어오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유미미를 위시한 2학년 1반의 성마리 추종회였다. 한껏 광분하는 모습들이 저 손에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다. 가인은 지긋이 눈 감으며 해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 ……후회없는 인생이었다. ' 17세 소년 유가인. 그 한 많은 인생을 여기에서 마치다? 26구역에 위치한 한시민의 집. " 웃차. " 시민은 집의 뒤뜰에 빨래를 널으며 한껏 허리를 폈다.그녀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빨래통을 들었다. 한바탕 집 안을 대청소하고 났더니 몸이 피 곤했다. " 오랫만에 혼자 청소를 하려니까 힘드네. " 그녀는 허리를 두들기며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근들어 가인과 유리 가 도와주었기에 잊고 있었지만,시민의 집은 홀로 청소하기에는 상당히 넓었 다. 거기다 그녀는 바닥 청소 뿐만이 아니라 한동안 정리하지 않았던 다락방 과 신발장까지 완전히 청소를 해버린 것이다. 아마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 대청소 한번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워야 할 것이다. 시민은 모처럼 피아노 학원을 쉬는 날이었기에 아침부터 대청소를 하고 있 었다. " 이제 가인 씨들이 올 시간이네. 빨리 저녁 식사를 준비하지 않으면……. " 시민은 시계를 돌아보며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정신 없이 청소하다 보니 어 느새 가인들이 학교를 마칠 시간이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장을 봐왔던 재료들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이 끓는 냄비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부글부글부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민의 얼굴에서는 방금 전까지의 활기를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우울해 보이기 까지 했다. 아마 아침부터 내내 청소 를 했던 것은 이런 근심을 떨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시민은 조용히 식 칼을 꺼내 재료들을 썰었다. 탁탁탁탁. 도마를 때리는 칼소리가 유독 크게 부엌에 울려퍼진다. 딩동 딩동 " 아……. " 시민은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 칼질을 멈췄다.초인종은 아 까부터 울리고 있었는데 딴 생각을 하느라 듣지를 못한 모양이다. 그녀는 물 에 씻은 손을 서둘러 앞치마에 닦으며 출입구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브 루스와 유리가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이제 오셨어요? 미안해요. 초인종 소리를 못 들어서 그만. " 탁탁탁탁탁 그런 시민을 빠르게 지나쳐서 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유리.그녀는 그대로 시 민의 방에 들어가며 거세게 문을 닫았다. 쾅! 문짝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크 게 소리가 터져나온다.시민은 유리의 저기압적인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져 브 루스에게 물었다. "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브루스 님? " " 아아, 그럴 일이 있었지. 그나저나 배고프다. " 브루스는 성의 없게 답하며 부엌으로 향했고 시민은 의문을 몰라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뭔가가 허전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가인 씨가 오지 않았어? " 브루스 님, 가인 씨는 어디 간 거죠? 같이 안 왔어요? " " 후. 그 녀석. " 브루스는 부엌 테이블에 앉아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 인사 드리러 갔다. " " 예? " 인사? 무슨 인사? 브루스의 말을 못 알아듣고 반문하는 시민. 브루스는 가 볍게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 자신의 장인 어른 되실 분한테 인사드리러 갔다고. " " 장인 어른요?! " 그제야 시민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뭔가 생각이 정리가 안돼.장인 어른 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니? 가인 씨가? 가인 씨한테 장인 어른이 있을리가 없 잖아? 브루스 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 아! 그걸 말하는 건가. ' 그녀는 어제 가인이 마리의 가짜 약혼자 흉내를 내기로 한 걸 기억해냈다. 아마 브루스는 그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장인 어른은 마리의 아버님을 말한 것일 테지. ' 그렇다면 인사를 드리러 갔다는 건? ' 마리 양이 가인 씨를 아버님께 소개 시키려 데려갔단 소리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시민은 당황하며 말했다. " 하,하지만 그건 너무 이르지 않나요? 벌써부터 인사라니! " "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겠지. 어차피 치뤄야할 일 아닌가? " 브루스는 흥분하는 시민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그제야 시민은 자신이 언성을 높였다는 걸 깨닫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머리 속으로는 수 많 은 생각들이 빗발치고 있었다. 가인 씨가 마리 양의 집을 따라갔다니. 잘 속 여넘길 수 있을까? 시민은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걱정했다. 아니.걱정과는 좀 더 다른 기분이었다.이런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뭔가 화가 나는 것 같 으면서도 분한 이 기분은? " 배고파. " " 아,예. 미안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 시민은 브루스의 보챔에 다시 요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도통 요리 가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 무슨 요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내가 요리를 하는 건지. 요리가 날 하는 건지……. 그때 잠자코 그녀의 뒤를 바라보던 브루스가 물었다. " 괜찮은 거냐? " " ……예? " 요리하던 손을 멈추며 되묻는 시민. 하지만 차마 브루스를 돌아보지는 못한 다. " 무슨 말씀이시죠? 괜찮다니요? " " 흠. 아무 것도 아니다. " 브루스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괜히 벌집을 들쑤셨다는 기분 이다. 그녀를 너무 구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어쨌든 이번 일로 그녀도 가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 볼 수 있을 테니까. 브루스가 사 실 마리와 가인의 가짜 약혼을 추진시킨 것도 반 쯤은 시민 때문이었다. 보 고 있자니 답답해서 말이지. "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지.언제 까지 그가 기 다려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 " ……! " 시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다. 브루스로서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때 시민이 있던 싱크 대쪽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콰장창! " 아, 이런! 접시를 꺼낸다는 게 그만. " 당황하며 중얼거리는 그녀. 접시를 꺼내다 그릇 더미를 쏟은 모양이었다.브 루스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물었다. " 괜찮은 거냐?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 " "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접시 깨진 것 좀 치워주세요. 지금 요 리에서 손을 떼기가 그래서. " 브루스는 시민의 말에 따라 싱크대에 깨진 접시 더미를 치웠다. 다행히 접 시가 많이 깨지지는 않았다. 브루스는 슬쩍 시민을 돌아 보았다.그녀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꽤나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시민을 도발시키는 걸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 너,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 브루스는 시민이 요리하고 있는 국을 손으로 가리키며 어이 없다는 목소리 로 물었다. 시민은 국자로 국을 젓고 있다가 의아해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 예? " " 국에 접시 파편이 들어갔잖아! " 과연 그의 말대로 시민은 국에 깨진 접시 조각이 들어갔는지도 모르고 국을 젓고 있었다. 그녀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당황하며 불을 껐다. " 어머……. 큰일 날 뻔 했네. " 어딘가 맥빠진듯한 목소리.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다. 브루스는 식은 땀을 흘리며 천천히 꼬리를 뺐다. " 흠. 그럼 난 방에 처박혀 있을 꼬맹이를 부르러 가겠다. 밥은 먹여야 할 테니. " " 예, 부탁드릴게요. " 브루스는 슬그머니 유리를 깨우러 부엌을 빠져나갔고 시민은 한 숨을 쉬며 끓이고 있던 국을 바라보았다. 아아. 아까워라……. 이 국을 만들기 위해 구 하기 힘든 재료를 찾아 아침 시장까지 갔었는데. 저번에 가인 씨도 맛있다고 해줬고……. ' 아. ' 시민은 가인을 떠올리자 국을 버리려고 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브루 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법 이라고? 언제까지 그가 기다려줄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걸요. "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26구역에 위치한 무영신풍류 도장. 그 도장의 뒤편에 있는 자택. 마리 는 부엌에서 차를 타다가 조심스럽게 거실을 살펴보았다.거실에는 마리의 부 친 성비영과 가인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가인은 차마 비영의 얼굴을 보 지 못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기가 죽은 모습 이었다. 거기다 분위기는 또 왜 이렇게 숙연한지 그 고요함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 가인……. ' 마리는 이런 상황에 그를 끌어들인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그에게 백 번을 빌어도 모자랄 판에 기대기만 해야하는 형편이라니. 마리는 끓는 차를 다시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그녀의 귀로 어디선가 사람들의 작은 소근거림이 들려왔다. " 저 사람이 바로 그 말로만 듣던 마리 사범 님의 약혼자? " " 그래.그래. 덕분에 일본 쪽의 본가에서 지목해준 맞선남과 일이 틀어져서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나 봐. 어디서 왔는지 모를 어중이 떠중이를 후계자로 받아들일 순 없다는 거지. " " 하긴. 본가 쪽에서는 반대할 만 하네요. 더구나 무영신풍류의 정식 문하 생도 아니고. " 마리는 인상을 굳히며 거실 쪽의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는 도장의 문 하생들 몇 명이 안의 상황을 엿보며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자 쓴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 아,안녕하십니까? 사범님. " " 지나가는 길에 잠시……. " " 수련하십시오. " 탕! 거세게 창문을 닫아버리는 그녀. 마리는 한숨을 푹 내쉬고 끓이던 차를 찻 잔에 따라 비영들에게 가져갔다.평소라면 웃으며 차를 받았을 비영이지만 지 금의 그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 차는 거기 놔두고, 너도 가인 군의 옆에 앉거라. " " ……예. " 마리는 긴장하며 재빨리 가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힐끔 옆의 가인을 바 라보니 그 역시 비영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었다. 마리는 마른 침을 삼켰 다. 아버님의 저런 모습은 아인이가 죽었을 때 외에는 본 적이 없어…….화 가 많이 나신 걸까? " 둘이 약혼을 했다고? " 비영의 질문에 가인과 마리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가인은 무언으로 그녀에 게 물었다. ' 어,어떡하죠? 선배? ' ' 맡겨둬라. ' 마리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담담하게 비영을 바라보았다. " 그렇습니다,아버님. 가인과 저는 분명 약혼을 했습니다.더 이상 그와 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 가인은 마리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마,마리 선배! 떨어질 수 없 는 사이라뇨? 너무 강하잖아요! 비영 역시 충격이었는지 뚫어져라 마리를 바라보았다. "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 " 예. 그와 헤어지게 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인을 낭군 으로 섬기기로 했습니다. 본가의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자신의 낭군 을 놔두고 다른 남자와 선을 볼 수 있단 말입니까? " 마리 역시 자신이 이런 대담한 말을 술술하는게 신기하기만 했다.아무래도 지금 자신이 제 정신이 아닌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말들을 아 버님 앞에서 당당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비영은 마리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듯 고개를 내젓다가 가인을 바라보았 다. 꿀먹은 벙어리 마냥 있던 가인은 비영의 시선을 받자 몸을 꽂꽂히 세우 며 긴장했다. " 마리의 말이 전부 사실인가? " " 예? 아, 예에. 그,그렇습니다. " 제,젠장. 떨지마. 떨지말라고! 가인은 애써 마리가 만들어놓은 분위기를 자 신이 까먹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떨지 말라고 해도……. ' 솔직히 나에게는 무리라고! ' 가인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이 상황은 그에게 너무도 벅찼다. 여기서 진 정하고 있는 쪽이 비정상이었다. 무엇보다 이건 비영 관장 님을 속이는 행동 이잖아?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님을 속여야 한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 도 올바른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간 마리 선배가 원하 지도 않는 결혼을 하게 생겼고! 가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 이렇게 저희 멋대로 약혼을 해서 죄송합니다.하지만 선배에 대한 저의 마 음은 진심입니다. 선배가 절 떠나지 못하듯 저도 선배를 떠나지 못합니다. 반드시 선배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 ' 가인! ' 그의 말에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의 두근 거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마리는 이 상황이 꿈만 같았 다. 가인에게서 저런 말을 들을 날이 오다니! 그녀는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 기 위해 무릎 위의 치맛자락을 손으로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귓가로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 밖에 들려오질 않는다. " 흐음.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말일세. " 비영은 의심스럽다는듯 가인과 마리를 살펴보며 첫번째 반론을 제시했다. " 자네는 자신의 약혼녀를 선배라고 부르나? 그리고 마리도. 너는 네 약혼 자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는 거냐? " " ……! " 화들짝 놀라는 가인과 마리. 아차! 이런 근본적인 실수를!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로에 대한 호칭을 급하게 바꿨다. " 하,하하. 아니. 아버님 앞에서 원래대로 행동하면 너무 버릇 없어 보일까 봐 그랬던 거에요. 마, 마리야! 자, 보세요? " 가인은 마리의 이름을 부르며 애써 눈 앞의 차를 들이켰다.그에게 처음으로 이름이 불린 마리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자신 역시 투지를 불태웠다.그래! 나 역시 분발해야돼! 마리는 가인을 돌아보며 공손히 말했다. " 부르셨습니까. ……서방님. " " 쿨럭! " 순간 마시고 있던 차가 목에 걸려 기침을 한 가인.그는 그야말로 얼굴이 시 뻘개져 마리를 돌아보았다. 마,마리 선배! 서방 님이라니!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그건 너무하잖아요! 너무 오버다! " 으음. " 하지만 마리의 성격을 잘 알고있는 비영은, 자신의 딸이 이렇게 까지 나오 자 반심반의하는 눈치였다. 가인과 마리는 숨을 죽였다. 머,먹힌 건가? " 그랬었군. 내 앞이라서 그랬던 건가? 그럼 이제부터는 서로를 편하게 대 하게. 눈치보지 말고. " " 아,예. " 먹혔군. 다행이야. 가인과 마리는 비영에게 들키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쉬 었다. 그러나 비영은 쉴 틈을 주지 않고 두번째 반론을 제기했다. " 그런데 호칭이야 그렇다치고. 약혼까지 했으면서 왜 그렇게 서먹해 보이 는 건가? 그렇게 서로 떨어져 앉은 것도 그렇고 말이야. " 가인과 마리는 즉각 서로에게 붙어 앉으며 답했다. " 이제 되었습니까? " " 흐음. 그리고 또……. " 아직도 뭔가가 불만족스러운지 고개를 갸웃하는 비영. 그 모습에 가인과 마 리는 생각했다. 뭔가 의도적으로 저러시는 것 같은데……. 혹시 눈치 채신 게 아닐까? " 아, 그렇지. " 비영은 뭔가를 생각해낸듯 무릎을 치며 세번째 반론을 제기했다. " 약혼한 사이라면 키스 정도야 당연히 해봤겠지? " " ……! " 벼락에 맞은 것 처럼 뻗뻗하게 몸을 굳히는 가인과 마리. 비영은 짓굿은 미 소를 지으며 말했다. " 자자. 사양들 하지 말고 한번 해보게. 어른 앞이라고 해서 빼지 말고. 내 다 용납해줄테니. " " 아,아아니. 그건! " 가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리를 돌아보았다.마리 역시 갈피를 못 잡는건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가인에게 무언으로 말했다. ' 할 수 밖에 없다, 가인! 여기까지 온 이상! ' ' 그런!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리의 입술로 눈이 갔다.그 옅은 붉은 빛의 입술 사 이로 드러나는 하얀 치아. 전신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것만 같다.정말 저 마 리 선배의 입술에 내 입술을……. 키, 키스를 해야하는 건가?! ' 그래도 내 첫키스인데! ' 사실 블루 썸머 비치에서 그는 마리의 인공호흡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굳이 따지자면 첫 키스는 아니다. 하지만 그 때 그는 의식도 없었고,아무 것도 느 끼지 못했기에, 그것을 첫 키스로 치기에는 억울한 감이 있다. 가인은 자신 의 얼굴에 다가오는 마리의 얼굴에 이를 악물었다. ' 그,그래. 하는 거야. 마리 선배도 이렇게 까지 하는데 내가 초를 칠 수는 없는 거잖아? ' 하지만! 하지만! 가인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언제나 자신을 향해 미소지어주던 그 사 람의 얼굴이 마리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가인은 그것을 참지 못하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마리의 뜨거운 숨결이 코 끝을 스쳐왔다. " 하하하하하하. " 그때 들려오는 웃음 소리에 가인과 마리는 화들짝 눈을 뜨며 서로에게서 몸 을 뺐다. 비영을 돌아보니, 그는 배를 잡으며 웃고 있었다.가인과 마리는 불 안해졌다. 들켰나? 거짓이라는 걸! " 아,아버님? " 떨리는 목소리로 비영을 부르는 마리. 그녀는 긴장하며 아버지의 반응을 살 폈다. 그렇게 딸이 초조해하는 모습에 비영은 웃음을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 다. " 좋아! 인정해주마! 이 약혼! " " 아버님! " 마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인정……받은 건가? 허락하신 거야? 비영은 가 인을 돌아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내 딸 아이를 잘 부탁하네, 가인 군. 아니. 이제는 가인 군이 아니지. 사 위! " " 과,관장 님. " " 관장님? " " 아니! 아버……님. " 가인은 애써 비영에 대한 호칭을 바꾸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 한 켠이 무 거웠다. 분명 무사히 넘겼으니 다행이기는 한데…….과연 잘 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가인의 어깨에 얹힌 비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리를 지켜주게. 난 자네를 믿을테니. " " ……! " 순간 가인은 깨달았다. 혹시……관장 님은? 하지만 미처 그가 뭐라고 하기 도 전에 비영은 마리를 돌아보며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 걱정하지 말거라. 네 어머니는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볼테니까. "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비영의 눈빛. 뭔가를 각오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 각오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마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 아버님……. " 죄송……합니다. " 선배. 관장 님은……눈치 채신 게 아닐까요? 우리의 연극을? " 비영과의 상견례를 끝내고 마리와 가인은 어둑해진 26구역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혼자 가겠다는 가인을 마리가 붙잡으며 굳이 자신이 데려다 주겠다 고 그를 따라나온 것이다. 뭔가 남녀의 역할이 바뀐 거 같지만 그것이 마리 다웠다. 가인의 물음에 마리는 옅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도. " " 역시……. " 가인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긴 그런 어설픈 연극이 통하실 분이 아니지. 그냥 모르는 척 해주신 거로구나. " 그렇다면 왜 거짓말이라는 걸 아시면서도 이 약혼을 승낙하신 거죠? " 거기다 마리 선배의 어머니를 설득하겠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관장 님의 승낙이면 모든 게 끝나는게 아니었나? ' 아니. 애초에 관장 님의 승낙으로 끝날 일이었다면 마리 선배가 일을 이 렇게 까지 복잡하게 끌고 오진 않았을 거야.이 맞선은 관장 님의 손을 떠 난 일인 건가? ' 하지만 무영신풍류의 현 계승자의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니. 이건 뭔가 이상 하다. 마리는 그런 가인의 생각을 알았는지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 이번 맞선은 어머니가 추친하신 거다. 아버님은 거기에 대해서 일절의 간 섭도 할 수 없으시지. " " 예? 어째서요? 마리 선배의 아버님이 계승자가 아닌가요? 계승자에게 모 든 권리가 있는 거잖아요? " " 응. 하지만……. " 마리는 침울하게 답했다. " 아버님은 데릴 사위이시거든. " " 데릴 사위요?!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반문했다. 데릴 사위라니? 비영 관장 님이? 마 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 무영신풍류의 계승 가문은 황씨 가문. 그 옛날 무영신풍 류의 시 조 황창 님의 자손들이지. 그 황씨 가문에서 이어오던 계승이, 아버지 대 에서 성 씨에게로 계승된 거야.당연히 본가에서는 이를 달갑게 여기고 있 지 않지. 처음에는 반대도 무척이나 심했다고 해.하지만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외할아버님은 무슨 이유에선지 아버지를 데릴 사위로 맞아들 이고 무영신풍류의 모든 것을 전수해주셨다. 그 덕에 아버님은 사실 가문 에서는 계승자로 인정받지 못하셔. 계승자의 실상은 내 어머니라고 봐도 무방해. " " 그런……. " 가인은 그제서야 비영의 말이 이해가 갔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리 선배를 지켜달라고 하시던 건 그런 의미였나! 관장 님은 사실 이번 맞선을 반대하시 는 거였군! ' 딸이 강제로 결혼당하는 걸 참을 수 없으셨던 거야. ' 누구보다 마리 선배를 생각하고 있던 사람은 성비영이었다. 그는 가문의 반 대를 무릅 쓰고 마리를 지켜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인과 마리의 거짓 약혼을 눈 감아 주었던 것이고.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리의 얼굴에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분명 관장 님의 걱정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으리라. 가인은 그런 마리를 안타 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화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 아, 선배. 그런데 무영신풍류의 시조인 황창 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 " 황창 님……말인가? " 마리는 이 뜻 밖의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설명을 시작했다. " 황창 님은 신라의 화랑으로서 백제 왕을 시살(弑殺)하신 분이다. " " 예? " " 그 분에 대한 이야기는 동국여지승람이나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이첨의 고증에서는 황창 님을 관창으로 보고 있기도 하나,오히려 신라 진 흥왕 15년에 백제왕을 죽였다는 고간도도(高干都刀)가 그 분이시지. " 백제의 왕을 죽였다고! 가인은 놀랍다는듯 물었다. " 그런데 백제의 왕을 죽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가요? " " 아니. 당연히 한 나라의 왕을 시해하였는데 무사하실 순 없었지.백제인들 에 의해 처형 날만을 기다리며 옥에 갇히셨는데,그러던 어느날 백제의 뛰 어난 장수가 황창 님을 찾아오셨다고 해. " 이 대목은 마리가 정말 좋아하는 부분이었기에 그녀는 들뜬 얼굴로 얘기를 계속했다. ' 네가 신라의 자객인가? 생각보다 어린 녀석이군. ' '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소? ' ' 네 칼춤이 그리 대단하여 왕을 홀렸다고 하니 내 이 두 눈으로 그것을 확 인하러 왔다. ' " 놀랍게도 그 백제의 장수는 옥에서 황 창님에게 검까지 건네주며 검무를 춰보이게 한 거다. 백제왕을 시해한 대역죄인에게. 그것도 검술의 고수에 게 자신의 검을 건네준 거지. 하지만 황 창 님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않 고 그 앞에서 검무를 쳐보이셨어. 황창무(黃창舞)라 불리우는 그것이지. 그 검무를 끝까지 지켜본 백제의 장수는 눈물을 흘리며 무인으로서 감탄 했다고 해. " ' 너 같은 인재가 여기에서 목숨을 잃는 건 하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다! ' " 그렇게 말하며 황창 님을 풀어준 장수는 그 분을 신라로 도망쳐 보내고, 자신은 그를 대신하여 자결했다고 해.이에 분개한 백제는 신라에 황창 님 의 인병을 넘기라며 협박을 가했고, 신라는 백제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황창 님을 국외로 추방하셨지. " " 그 국외라는 게? " " 왜. 지금의 일본이다. 그 곳에 자신의 가솔들을 데리고 넘어간 황창 님은 검기와 검무를 일본인들에게 전수하셨는데, 일본의 모든 도법들이 그 분 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사람들은 그 분의 검이 그림자 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하여,무에이(無影). 신이 가져다 준 바람 이다 하여 카미가제(神風)라고 부르셨지. 무영신풍류의 이름은 바로 여기 에서 나온 거야. " 가인은 들뜬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하는 마리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미 소지으며 말했다. " 마리 선배는……정말 무영신풍류를 좋아하는군요. " " 아? 아아, 음. 그래. " 마리는 자신 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고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 난 내가 무영신풍 류의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 " 그래요. " 가인은 결심했다. 무영신풍류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다고. 그녀가 영원토록 무영신풍류의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그리고 원하지 않는 맞선 역시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그는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던 감정들을 버리며 말했다. " 이번 약혼. 반드시 성사시키죠. " " ……가인? " 마리는 두 눈을 크게 떴다.그 말을 하는 가인에게서는 더 이상 어떠한 주저 함도 보이지를 않았다. " 마리 선배의 무영신풍류.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게요. " 마리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런 그의 모습에 반했었다는 걸. 마리는 달빛 속 에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 ……고맙다. " 《16시 30분 일본 행 비행기가 도착했습니다. 출구는 24번입니다.》 인천 국제 공항. 24번 출구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한 남녀가 있었다.여 인 쪽은 동안에 짙은 감색 한복을 입은 흑발의 미인이었고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남자는 막 20대를 넘긴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청년이 등에 메고 있는 외날 직도(直刀)였다. 그 직도는 특이하게도 칼 자루가 십악(十握)을 넘어가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상함을 느끼며 한번 씩 그들을 돌아보았다. 저런 물건이 세관을 통과할 리가 없을 텐데? 장식품이겠지? " 오랜만이로군. 한국도. " 앞서 걷던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거의 2년만의 방문이었다.그 녀의 말에 장발의 청년은 두 눈을 지긋이 감으며 말했다. " 비영 님께 얘기도 없이 오신 건 너무하지 않으셨습니까? " " 흥. 어차피 얘기도 없이 일을 추진한 건 그 사람이다. 피차일반이야. " 여인의 표정이 날카롭게 굳어졌다.청년은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한 숨을 내 쉬었다. " 그렇다면 지금부터 무영신풍류 도장으로 가시는 겁니까? " " 아니. 일단 네 문제로 유레카부터 들려볼 생각이다. 그리고 혼내줘야 할 녀석들도 있고 말이지. " " 혼내줘야 할 녀석들……입니까. " 청년은 그녀의 말을 조용히 되 뇌이다 입을 다물었다.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한 인영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다. 청년은 여인을 보호하듯 그 앞을 막아섰 다. 그 모습에 인영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 황연우 교관 님이십니까? 피스메이커 한국 지부의 민수정입니다.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 민수정……. 한국 지부의 부 사령관 님이시군요. 이렇게 몸소 나와주셔서 영광입니다. " 자신들을 데리러온 수정에게 여인, 황연우는 가볍게 일례했다. 그녀는 그제 서야 수정에 대한 긴장을 푸는 청년에게 소리쳤다. " 가자, 코마히코! " " ……예, 사부 님. " 청년, 코마히코는 묵묵히 여인의 뒤를 따랐다. " 차아아앗! " 전장으로 변한 12구역. 그곳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다. 몬스터에 대항하는 삼차원의 유일한 존재! 오라 능력의 소유자 피스 대원들! 그들은 자신들의 오라 패턴을 내뿜으며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쿠오오오오!] 이족보행을 하고 있는 거대한 도마뱀 형태의 몬스터는 괴성을 내지르며 그 비늘로 덮힌 손을 피스 대원들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선두에서 몬스터를 향 해 달려오던 피스 레드와 피스 블루는 가볍게 그 팔을 좌우로 피해냈다. " 간다, 가인! " " 하아아아앗! " 마리의 외침에 오라 소드를 움켜쥐며 기합을 내지르는 가인.푸른 검광과 붉 은 검광이 교차되며 몬스터를 지나갔다. " 합식(合式) 역린(逆鱗)! " 촤악! 그 교차 공격에 몬스터의 양 팔이 절단되었다.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녹색의 체액! 하지만 미처 몬스터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가인과 마리의 오라 소드 가 다시 한번 크로스 되었다. " 연식(連式) 박차(拍車)! " 촤촤촤촤! 마리와 가인의 몸이 회전하며 붉은 빛과 푸른 빛의 검기가 회오리쳤다. 그 검기의 회오리를 따라 솟구쳐 오르는 녹색의 체액들! 몬스터는 전신이 오라 소드에 난자되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 가인과 마리가 절묘한 타이 밍으로 뛰어올라 동시에 몬스터의 목을 쳐올렸다. " 종식(終式) 절명(絶命)! " 텅! 허공을 나는 몬스터의 목. 그 뒤를 따라 가인과 마리가 지상에 착지했고,머 리를 잃은 몬스터는 굉음과 함께 쓰러졌다. 쿵!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콤비네이션이었다. " 이야∼ 요즘 너무 티내는 거 아냐, 유·가·인·군? " 전투를 마치고 언더 시티의 유레카로 귀환한 가인들은 샤워를 한 후 탈의실 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가인은 갑작스레 능글 맞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진우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 뭐,뭐가요? " " 에이.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단 말이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고. " " 그러니까 뭘 알고 있다는 거에요? " 가인이 불안한 눈초리를 그를 노려보자,진우는 어쩔 수 없다는듯 어깨를 으 쓱하며 소리쳤다. " 바로 너와 마리 양의 약혼! " " ……. "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가인은 지독한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묵묵히 권복의 상의 단추를 메고 있는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 ……말한 거에요? " " 흠. 옛부터 집 안의 경사는 이웃들과 나누라는 말이 있지. 기쁨도 슬픔도 나눌수록 그 배가 되는 법이다. " " 배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제발 괜한 짓 좀 하지 말아요! " 진우는 히죽 히죽 웃으며 가인의 목에 팔을 둘렀다. " 후하하하하! 어쨌든 축하한다,소년. 드디어 결심이 선 거냐! 이로서 너의 그 문란한 사생활이 종결된다는 게 아쉽지만. 뭐, 한 여자의 행복을 위해 임자 있는 몸이 된다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 그런 의미에서 난 다 이해한 다고∼ " " 그 묘한 동질감에 절 끌어들이지 말아줄래요? 그리고 전 아직 미혼이라고 요, 이 유부남! " " 이런∼이런∼ 그래. 아직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 솔로로서의 자유를 잃는 다는 그 두려움은 나도 겪어본 거니까. 하지만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금 이야 옥이야 하는 자식도 낳고 하다보면 그런 두려움 쯤은 금세 날아간 다고. 다 안정된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야지. " 으아아악! 하나도 이해를 못하고 있잖아, 이 인간! 가인은 머리를 쥐어뜯으 며 억울함에 몸을 비틀었다. 제길! 별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이런 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밀려드는 이 억울함은 뭐지? 이 비참함은 뭐냐고! ' 그냥 콱 말해버려? ' 가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어차피 거짓 약혼 이었지만 마리 선배의 가문이 이 약혼을 납득할 때 까지는 기정 사실로 유지 되어야만 했다. 만약 가문의 귀에 거짓이라는 소리가 들어갔다간 마리 선배 가 곤란해지는 것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건 나와 마리 선배, 브루스와 유리,시민 씨,테레이아. 그 리고 비영 관장 님. 이 정도면 충분했다. 벌써 진실을 알고 있는 이가 7명씩 이나 되지 않는가? 이 이상 진실을 유포하는 건 좋지 않다. ' 하지만 억울하다고! ' 이런 기혼자 취급은! 차라리 진짜라면 억울하지 라도 않지!젠장! 가인은 기 분이 우울해져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런 취급을 하는 게 진우 혼자 만이 아 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가인의 억울함은 하루 이틀의 것이 아니었기에 그 골이 더더욱 깊어만 가고 있었다. 일단 진 사령관부터 시작해보겠다. ' 최초의 피스 대원 부부인가? 축하한다. ' 그 다음은 민수정 씨. ' 어머. 축하해요! 결혼식의 부케는 꼭 저한테 주는 거죠? ' 세번째로 오퍼레이터 팀. ' 왠 일이니! 왠 일이니! 정말 결혼하기로 마음 먹은 거에요, 가인 군? ' ' 아아아∼ 분명 축하할 일이건만 상처받은 한 여인의 마음은 어디로 향해 야 하는 것인가! ' ' 나,난 눈물이 나.이건 가인 씨들의 결혼을 축복하는 기쁨의 눈물인 걸까? 아니면 한 가녀린 여인을 향한 애도의 눈물인 걸까? ' 삼인방들의 집요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인을 바라보던 치프 윤채영.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아직도 가인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 추,축하해요. 가인 씨. 부,부디 행복하셔야……해요! ' ……채영 씨는 왜 그 말을 끝으로 뛰쳐나가신 걸까? 끝내 여인의 순정을 알아주지 못하는 둔감의 제왕, 유가인이었다.그리고 네 번째로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 ' ……. ' 거기까지 하도록 하자. 가인은 밀려드는 두통에 이마를 감싸안았다. 왜, 왠 지 더욱 비참해졌어. 솔로에서 멀어진다는 건 이런 기분인 건가? 이 비참함 을 넘어서 서글픔으로 승화되는 감정이란……. " 아아∼ 어쨌든 내 직장 동료 둘이 잘 되었다니까 너무나 흡족한걸. 전투 속에 싹 튼 사랑이라니. 정말정말정말 잘 됐다∼아하하하. 정말 잘 됐어! " " ……. " 가인은 자신의 기분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무신경한 진우의 태도에 이를 갈 았다. " 왠지 묘하게 즐거워 보이네요,진우 씨? 제가 약혼한 게 그렇게도 좋은 거 에요? "' " 암! 좋고 말고! 단지 하나 뿐인 우리 딸이 마음에 둔 남자를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지만…… 뭐, 다 성장의 고충이라고 생각 해야 지. 우리 하나도 네 녀석의 매정함은 이해해줄 거야. 분명. " " ……. " 그런 거였구만. 가인은 짙은 음영이 깔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 지. 정진우. 저 인간이 좋아할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인이 약혼을 하게 되 었으니 비로소 자신의 딸은 그 사탄의 마수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안도 감이었을 거다! 애초에 그에게서 축하받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건 축하받는 것보다 더 힘 빠지는 일이었다. 그렇게 가인이 120퍼센트 우울해지자 브루스 는 측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위로했다. " 그러니까 겹 사돈은 취하는 게 아니다. " " ……. " 가인은 지옥의 구렁텅이 속을 뒹구는 기분이었다. " 흠. 흠. " 한편 여자 탈의실에서 마리는 흥겹게 옷을 입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콧 노래가 흘러 나왔다. 요 며칠 간의 일들이 그녀에게는 꿈만 같았다. 가인과 같이 등하교를 하게 되었으며, 그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기다 몬스터와 의 전투에서도 척척 맞는 호흡이라니. 그리고……. ' 마리 선배의 무영신풍류.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게요. ' 며칠 전 비영에게 약혼 허락을 받으며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 그것을 떠올 리자 마리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말을 할 때의 가인의 표정과 목소리 가 잊혀지지 않았다.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할 것이다. 척척척 그러다 마리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한 소녀의 기척에 재빨리 콧 노래를 멈췄다. 쾅! 거칠게 열리는 로커의 문. 유리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로커에서 옷을 꺼냈 다. 그러다 옷에서 빠진 옷걸이가 발밑으로 떨어지자 사정 없이 옷걸이를 걷 어찬다. 그 모습에 마리는 숨을 죽이며 유리를 주시했다. 유리는 마리를 향 해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다. " 뭘 봐? " " ……아무 것도. " 마리는 조심스럽게 답하며 마저 옷을 껴입었다.그녀는 애써 유리와 눈을 마 주치려 하지않으며 뻣뻣하게 몸을 움직였다. 등 뒤로 자신을 노려보는 유리 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유리에게 말했다. "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다. " " ……. " " 그,그럼 이만. " " ……. "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주시하는 유리의 모습에 마리는 더 이상 할 말을 찾 지 못하고 도망치듯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 하아. " 마리는 탈의실의 문을 닫고 등을 기댄채 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알고 있 었다. 유리가 가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녀가 가인에 의해 말을 하게 되 었을 때도. 가인의 곁에서 차츰차츰 웃음을 찾아갈 때도. 마리는 빠짐 없이 그것을 지켜보았다. 지금의 유리는 가인이 없었더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 습이었다. 그 만큼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미안하다, 유리. ' 거짓 약혼이라지만 자신은 그런 유리에게서 가인을 빼앗아 버렸다. 유리도 마리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아무 말 없이 묵인해주는 것일테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오래 갈런지…….무엇보다 이 상황을 자신이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에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다.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가인이 자신 의 곁에 있다는 것에, 그가 거짓으로라도 자신의 약혼자라는 상황에 기뻐하 고 있었다. 마리는 이런 자신의 감정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나 역시 유리와 마찬가지일지도. ' 아무리 약혼자 행세를 하고 있다지만 가인의 마음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 았다. 마리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예전 시 민의 의식을 찾기 위해 도도산으로 수련을 하러 갔던 가인을 떠올려 보았다. ' 전 지켜주고 싶었어요. 시민 씨를…… 어떻게든 시민 씨를 지켜주고 싶었 는데. 전……너무나……무력했어요 ' ' 이런 제 자신을……용서할 수 있을 까요? 어떻게 용서해야 하죠? 알고 있 다면 가르쳐 줘요, 선배. 저는……영원히……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 엉망이 된 몰골로 힘 없이 자신의 품에 기대어 중얼거리던 가인. 의식을 잃 어 가면서 까지 시민을 찾던 그의 모습이 마리는 잊혀지지 않았다.그녀는 으 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시민에 대한 가인의 감정을 생각할 때 마다 아련히 가슴이 아파온다. ' 가인의 그 눈빛이……날 향한 것이라면……. ' 그 목소리와 행동들이 날 위한 것이었더라면.마리는 우두커니 서서 그런 생 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 아니. 난 내 마음에 충실하면 되는 거다.애초에 뭔가를 바라고 그를 좋아 한 게 아니었잖아? ' 가인의 시민에 대한 마음 역시……대가를 바라는 게 아닐 테고. 마리는 애 써 기운을 차렸다. 그래. 지금의 난 그를 좋아하는 일 밖에 할 수 없다.그렇 다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그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 하지만 시민 씨는 가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 가인은 시민 씨를 좋아한다지만……. 시민 씨는? 그녀는 가인을 어떻게 생 각하고 있을까? 평소 그를 대하는 시민의 모습은 무척이나 다정다감하다. 마 리 자신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가끔 가다가 어딘가 선을 그어 놓은 듯한 절제된 모습에 그녀는 가 인을 연애 대상으로는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시민이 가인을 잘 대해주는 건 같이 사는 동거인이기 때문인 걸까? ' 단지 그것 뿐? ' 그렇게 생각하던 마리는 황급히 생각을 멈춰야만 했다. 그녀의 앞으로 자신 이 생각하던 장본인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시민! 바로 그녀였다. " 마리 양, 이제 나오는 거에요? " " 아, 예. " 마리는 어설프게 손을 들며 당황하는 기색을 숨겼다. 시민은 항상 자신들과 는 따로 샤워를 했는데, 마리는 그녀의 몸에 뭔가 보여주기 싫은 상처가 있 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하지만 저번 수영장에서 봤을 때는 그런 상처가 없 었던 거 같은데. " 유리 양은 아직 안에 있어요? " " 아, 다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겁니다. " " 그럼 전 유리 양을 기다렸다가 데리고 갈테니까 마리 양은 먼저 작전 본 부실로 향하세요. 수정 씨가 브리핑 준비를 하고 있어요. " 알겠습니다. "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민을 지나쳤다. 슬쩍 뒤돌아보니 시민은 탈의실 문을 노크한 후 그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는 고개를 돌려 복도를 걸으며 작 게 기합을 넣었다. ' 그래. 시민 씨는 시민 씨. 나는 나다. 힘 내는 거야, 성마리! ' 그렇게 걷던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이 느껴지 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탈의실의 로커에 놔두고 온 걸까? 그녀는 몸을 돌 려 다시 탈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탈의실의 문을 막 열려고 할 때, 그 안에 서 터져나오는 거친 쇳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쾅! " 정말 이게 뭐야! 약혼이 뭐냐고! 약혼이! " 유리의 화난 목소리. 그리고 그녀를 달래는 시민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 그치만 유리 양.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리 양이 원치도 않는 결혼을 하게 되잖아요? " " 나도 알아! 하지만! 하지만 둘을 보고 있으면 화가 나! 이 기분을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 유리는 씩씩 거리며 발을 동동 굴렸다.아무리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지만 마 음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최근 들어 묘하게 호흡이 맞는 마리와 가인의 모습에 그녀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왠지 이대로 내버려 두면 오빠가 마리에게 넘어가 버릴 것 같아! " 그래도 어쩌겠어요? 지켜보는 수 밖에……. " 끈기있게 유리를 달래는 시민.하지만 유리는 그녀를 노려보며 난데 없이 물 었다. " 시민 언니는 괜찮아? " " ……예? " 한순간의 정적. 그리고 뒤늦은 반문. 시민은 멍한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 보 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괜찮……다니요? 뭐가? " " 오빠가 이대로 마리와 결혼해버려도 괜찮냔 말이야! " " 거짓 약혼일 뿐이잖아요. 실제로 결혼할리가……. " " 그걸 어떻게 시민 언니가 알아! 거짓말이 진짜가 될 지 모를 판에! 그렇 게 되면 언니는 오빠를 웃으면서 보내줄 거야? 정말 그럴 거냐고! " 시민은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브루스도 그렇고, 유리도 그렇고.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것을 묻는 걸까? 그녀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 보는 유리의 시 선을 마주하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유리는 이를 갈며 시민을 몰아부쳤다. " 사실 상관도 없는 거지? 오빠가 누구를 만나든 누구와 결혼하든! 어차피 언니는 오빠에게 관심도 없으니까! 오빠가 언니에게 보내는 관심이 귀찮 을 거 아냐? 잘 된 거네! 이 기회에 귀찮은 짐 하나 덜어낼 수 있으니까! " " 그렇치 않아요! " 순간, 유리와 마리도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반박하는 시민. 그녀는 흔들 리는 눈동자로 유리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 상관 없지 않아요! 귀찮지도 않고요! 저도, 저도 신경쓰여 죽겠단 말이에 요! 가인 씨가 이대로 마리 양과 결혼하는 건 아닐까! 너무너무 신경쓰인 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난! " 거기까지 말하던 시민의 눈동자가 공허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 나는……나는 가인 씨를……. " 시민을 올려다보던 유리도,탈의실 밖에서 엿듣고 있던 마리도 마른 침을 삼 켰다. 마리는 더더욱 귀를 문에 밀착시켰다. 시민 씨는……시민 씨는? 탁탁탁탁 그때 탈의실 안에서 갑작스럽게 문 쪽으로 들려오는 발소리. 마리는 화들짝 놀라 근처의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민이 복도 로 걸어 나왔다.그녀의 표정은 그 금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리는 숨 죽여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 시,시민이 언니? " 재빨리 저편의 복도로 사라지는 시민을 유리가 뒤늦게 부르며 따라 나왔다. 시민의 저런 모습은 유리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미소만 짓던 사람이었는데. " 언니! 기다려! " 유리는 시민을 뒤쫓아 다급히 사라졌고, 그제서야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있 던 마리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시민과 유리가 사라진 복 도를 바라 보았다. 시민의 애절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 시민……씨도……. ' 시민 씨도 가인을? 마리는 작전 본부실로 가야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우 두커니 서있었다. 피스메이커 기지 내의 휴게실. " 아아. 치프.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요! " " 그래요. 애초에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아이를 좋아했다니. 그것부터 가 이상했다고요! " " 맞아. 맞아. 그거 엄연히 범죄라고. 다행이잖아요? 이제부터 라도 범죄자 의 길에 빠져들지 않게 되었으니까? " 삼인방들은 자신들의 치프 윤채영을 향해 열심히 격려 아닌 격려를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채영은 단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에 삼인방은 고개를 저었다. " 안 돼. 글러 먹었어. 얘기가 전혀 들어 먹히질 않아. " " 거,참. 스물 다섯이나 되었으면서 묘하게 순정틱하다니까, 우리 치프? " " 아! 잠깐! 잠깐! " 그때 삼인방 중 한 명이 뭔가 회심의 방법을 떠올렸는듯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녀는 모두를 둘러보며 신중하게 말했다. " 한 가지 방법이 있어! 치프의 순정을 지켜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 움찔. 그 말에 엎드려 있던 채영의 어깨가 꿈틀거렸다.그 모습에 삼인방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우리 얘기가 들리기는 하는 모양이구만……. 그녀들은 채영이 귀를 열어놓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 재차 얘기를 계속했다. " 그래. 그 한 가지 방법이란 건 뭐야? " " 그건 바로! " " 바로? " " 불륜! " 쿵 한 순간 휴게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엎드려 있던 채영의 어깨가 꿈틀거리 다 못해 이제는 파르르 사시 나무 처럼 떨리고 있었다.그녀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신입 오퍼레이터 '귀염둥이' 문세희 양은 낙담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 은 위로를 해주겠다는 거야? 아니면 염장을 지르겠다는 거야! " 어라? 틀린 건가? " " 으음. 불륜이라.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지만…….좀 손해보는 느낌 이잖아? " " 무슨 소리! 그것이야말로 스릴과 서스펜스의 대 러브 로망 서사시! 어차 피 평범하지 않게 시작했던 연애! 화려하게 불태워버리는 거야! " " 흠. 어디 보자.그럼 원조 교제에 플러스 쇼타콤.거기다 불륜인 건가? 호 오! 차근 차근 밟아가고 있잖아, 우리 치프? " 부들부들부들 결국 참다 못한 채영. 활화산 같은 분노를 터뜨리다! " 이 자식들--------!! 남의 일이라고 멋대로 떠들지마! " " 으악! 부활이다! " " 맥시멈 불륜 파워인가! " " 승천시켜주마! " 결국은 또 이거냐…….세희는 조용히 마시던 커피를 들고 휴게실의 한 구석 으로 몸을 피했다.더 이상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는 것이 이미 그들의 분위 기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였다. 이로써 그녀도 훌륭한 피스 오퍼레이터의 한사 람으로서 자각한 것일까! ……라고 말해도 하나도 기쁘지 않다고.그런 건. " 잠시 말 좀 여쭙겠습니다. " 그때 세희의 뒤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그녀가 돌아보니 자신의 뒤에는 감 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긴 흑발의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세희는 눈을 깜 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 피스메이커 관계자인가? " 무슨 일이신지? " " 본의 아니게 일행과 떨어져서 그러는데, 피스메이커 작전 본부실로 가려 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 아, 예. 여기서 금방이에요. 이쪽 통로를 따라 쭉 가시기만 하면 되요.일 방 통행이니까 길을 잃으실 염려도 없을 거에요. " "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친절한 아가씨. " " 아,아뇨. 친절이라뇨……. " 세희는 여인의 칭찬에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 했다. 자신과 비슷한 연령 으로 보이는 사람 치고서는 말투가 너무 고풍스럽다는 게 이상했지만 여인이 목례를 하자 따라 목례를 하기 바빴다. " 그럼 이만. 귀중한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 " 처,천만에요. 살펴 가세요. " 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레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저 편의 복 도로 사라져가는 한복 여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뭔가 굉장히 특이 한 사람이네? 한복을 입은 것도 그렇고, 저 말투나 행동거지도 그렇고. 어째서 저런 사람이 이 유레카 내를 활보하고 있는 거지? 게다가 저 얼굴… …. 굉장히 낯익은 얼굴인데? " 아, 마리 양! " 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머리를 풀고 있어서 못 알아봤는데 방금 전의 여인은 성마리. 바로 그녀였다. 어째서 마리 양이 저런 복장을 하고 다니는 걸까? " 귀,귀염둥이! 살려줘! 치프가 우릴 죽이려고 해! " " 너만이라도! 너만이라도 달아나지 않으면! " " 더 비명을 질러라! 더! 더! 살려달라고 빌어! 어서!! " 채영에게 붙잡혀 롤 업(ROLL UP)에 고통스러워하는 삼인방. 그녀들의 비명 소리에 세희는 힘 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직 저들에게 완벽히 익숙해지 지 않았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그녀를 위로해주는 요소였다. " 12월 8일 16시 30분. 12구역에서 C-급 몬스터 리자드 맨(Lizard man)이 등장했습니다. 상황 설정은 D-. 피스 레드와 피스 블루의 연계 공격에 전 투는 10분만에 신속히 종료되었습니다. " 어두운 작전 본부실에서 수정의 보고를 듣고 있던 진 사령관이 나지막이 말 했다. " 기록이로군. 최단 시간 전투 종료. " 그는 힐끔 가인과 마리를 돌아보며 한 마디를 던졌다. " ……사랑의 힘인 건가? " " 무슨!! " 그의 저열한 비아냥거림에 가인은 버럭 항의했다.아니! 몬스터를 빨리 없앴 으면 그걸로 된 거지! 뭘 트집 잡을 게 있다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진 사령 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는지 진우와 브루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 구를 쳤다. " 하지만∼ 요즘 요상하게 대활약이잖아, 두 사람? 도대체 그 비결이 뭐야? " " 벌써부터 금술을 과시하는 건가? 너무 이른 화목은 불화를 가져 올 수도 있으니 적당히 자제하도록. " " ……! " 가인은 이를 갈았다. 정말 이 인간들이 작정을 하고 가지고 노는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렇게 사사건건 비꼬기만 하다니! " 농담은 그만하라고요! 지금은 브리핑 중이잖아! 진지하게 회의에 임해도 모자랄 판에……그렇죠? 예? " 가인은 주위의 동의를 얻기 위해 마리와 유리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 ……. " 돌아온 것은 싸늘한 침묵. 마리와 유리,시민은 다들 무슨 고민이 있는지 그 얼굴에 짙은 수심을 깔고 있었다. 가인은 두 눈을 깜빡이며 어리둥절 해졌다. 어,어라? 다들……왜 이러는 거지? 대번에 어색해지는 작전 본부실의 분위기. 수정은 헛기침을 한 후 분위기 를 쇄신할 겸 다음 사안을 보고했다. " 아, 그리고 오늘 일본에서 한국 지부를 찾아온 피스 대원이 있습니다. " 그녀의 말에 집중되는 시선. 모두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일본에서 온 피스 대원이라고? 그렇다면……. " 피스 버밀리온(PEACE VERMILION) 코마히코 카구라(拍彦 神樂)라고 해요.아 마 다들 한번 씩 그 이름은 들어보셨겠죠? " " 도츠카노츠루기(十握劍)의 주인! " 수정의 말에 마리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가인은 그 반응에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피스 버밀리온?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마리 선배가 이렇게 흥분을 하는 거지? 하지만 흥분하는 건 마리 뿐만이 아니었다.가인이 주위를 둘러보니 진우와 브루스, 시민도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 피스 버밀리온이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러는 거에요? 그리고 도츠…… 뭐의 주인이라니? "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묻는 가인.그에게 답한 것은 브루스 였다. " 도츠카노츠루기. 일본의 야마타노오로치라고 하는 마수를 베었던 신들의 신검이다. 일본의 기키(記紀) 신화에 여러 번 등장하며, 아마테라스의 동 생 스사노오라는 신의 용맹함을 보여준 신보(神寶)지. 쉽게 말해 전설 속 에서나 등장하던 검이라는 거다. " 끝의 설명 만을 간신히 알아들은 가인은 놀랍다는듯 소리쳤다. " 그런 신검을 가지고 있다고요? 어떻게? " " 아마 이름을 들어보니 카구라 일족의 꼬마인 거 같은데……후. 도츠카노 츠루기는 그들의 손에 있었던 거였군. 그들이 지키던 건 삼종의 신기만이 아니었다는 건가. "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어쨌든 피스 버밀리온은 도츠카노츠루기로도 유명하지만 그 신검을 유일 하게 다룰 수 있는 검기(劍氣)의 소유자로 더 알려져 있어. 무엇보다 저 일본을 홀로 지켜낸 실력자니까. " " 검? 역시 검을 사용하는 건가요? 그럼 마리 선배와 같은 능력인가? " 가인의 물음에 마리는 낮게 침음하며 답했다. " 그렇지 않다. 패턴 레드는 절단의 능력. 엄연히 검기와는 틀리지.오라 패 턴 버밀리온은 패턴 그레이와 마찬가지로 신체의 기(氣)를 다루는 능력으 로 보는 게 더 맞을 거야. " " 그렇군요. 하지만 그런 능력자가 왜 한국으로 온거죠? 브루스 처럼 한국 지부로 발령받은 건가? " 그 질문에 답할 이는 진 사령관이었다.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 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 그런 건 직접 당사자에게 들어보도록. " " 피스 버밀리온. 들어오세요. " 수정은 작전 본부실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피스 버밀리온을 불렀다. 가인 들은 긴장하며 문으로 들어오는 이를 살폈다. 벌써 와 있었던 건가? 피스 버 밀리온! 뚜벅 뚜벅 뚜벅 절제된 발걸음 소리. 그 발소리 만으로도 마리는 긴장해야만 했다.검술에서 는 보법 역시 상당히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녀는 피스 버밀리온의 발 걸음 소리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역시! 괜 히 신검의 주인이 아니로군! 마리는 같은 검을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강한 호승심을 느꼈다. ' 어? ' 하지만 자신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피스 버밀리온의 모습에 가인과 마리 의 두 눈이 점점 크게 뜨여졌다. 그것은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민과 유리, 브루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저 남자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다! " 다,당신은!! "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가인과 마리. 사전에 입을 맞춘 것 처럼 똑같이 행동하는 그 모습에 주위의 눈총을 샀다.그들은 얼굴을 붉히 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 왜 그래요? 가인 군? 마리 양? 피스 버밀리온을 알고 있었던 거에요? " " 예? 아,하하하. 그,그게……. " 수정의 질문에 어설프게 웃기만 하는 가인.마리는 앞과는 다른 의미에서 긴 장하기 시작했다. 피스 버밀리온! 이름이 코마히코 카구라라고 했던가? 그는 바로 비영이 건네줬던 사진 속의 맞선남이었던 것이다! 짙은 흑발을 등에서 묶어내린 남자, 코마히코는 침착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 보다가 천천히 목례했다. " 일본 지부의 피스 대원. 코마히코 카구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 유창한 한국어 실력. 목소리의 고저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능숙한 한국어 였다.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도 브루스 만은 냉정한 눈으로 코마히코의 등에 메여진 십악도를 주시하고 있었다. ' 저것이 도츠카노츠루기. ' 그의 눈에는 똑똑히 검에서 흘러나오는 주홍(朱紅) 빛이 보였다. 도의 신력 이 버밀리온의 오라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가? 꽤 쓸만한 경지에 이르렀군. 일단은 모양새가 잡혔어. ' 이 녀석보다 낫군. ' 브루스는 가인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저 코마히코라는 애송이는 마리들 보다는 연상으로 보였지만, 그리 나이 차가 많이 나지는 않 았을 거다. 그런데 벌써 저 정도의 수련을 이루다니! 가인은 브루스가 자신 을 계속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머쓱해져 고개를 돌렸다. " 그나저나 피스 버밀리온이 한국 지부에는 왠 일이십니까? " 일본의 수호는 어떻게 하고? 라는 뒷 말을 생략한 채 진우가 물었다.코마히 코는 지긋이 눈을 감으며 침착히 답했다. " 개인 사정 상 중요한 일로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지요. " " 개인 사정 상? " 고개를 갸웃 거리는 진우. 혼자 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는 건 또 뭐야? 코마히코는 그렇게 말하며 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그녀는 짧게 몸을 떨었다. ' 여,역시……. 결국 본가에서 그를 보내온 건가? 아버님의 의견은 묵살 당 한 건가! ' 그리고 그가 여기에 있다는 건……그녀 또한 동행했다는 말이 된다.바로 마 리의 모친인……. " 설마……어머니도 한국에? "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는 그녀.그때 마리의 귓 가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 그래. 나 역시 귀국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불효 자식 때문에. " " ……! " 마리는 기겁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한복의 여인이 그 어깨를 지긋이 눌러 마리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살짝 누 르는 것인데도 마리는 그 손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숨 막히는 여인의 기도가 그녀의 몸을 죄어 온다. " 어,어머니? " " 오랫만이구나, 마리야. " 마리의 모친, 황연우는 싸늘하게 웃으며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한 눈에 보아도 두 사람이 모녀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닮아 있었다. 쌍둥 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가인들은 그 광경에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두 모녀를 바라보았다. " 마리 선배의……어머니? " 연우는 그들의 시선에 여전히 마리의 어깨를 압박하며 목례를 했다. " 그렇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피스메이커 여러분. 제 못난 딸아이가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군요. 딸 아이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나저 나……. "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다 물었다. " 여러분 중에서 유·가·인 이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 " 예? " 순간,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렸다.그러자 그에게로 향하는 연우 와 코마히코의 날카로운 시선. 브루스와 모두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 저 바보……. ' 가인은 들었던 손을 어설프게 내리며 식은 땀을 흘렸다. ' 뭐,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 작전 본부실의 공기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26구역의 무영신풍류 도장. 도장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리의 모친 황연우가 도장의 가운 데에 정좌해 있었고, 그 옆에 부친 성비영이, 또 그 옆으로는 코마히코가 정 좌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마주보듯 그 앞으로 가인과 마리가 정좌해 있었다. 시민과 유리, 진우, 브루스는 그들과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는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가인과 마리는 이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진땀을 흘렸다.무엇보다 자신 들을 노려보는 황연우의 시선이 하나의 칼날처럼 그들을 찌르고 있었다. ' 마, 마리 선배는 어머니를 닮은 거였구나. ' 가인은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하며 황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흔 대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마리와 비슷한 연령 대로 보일 정도로 젊었다. 거기다 두 모녀가 쌍둥이 처럼 닮았다. 만약 황연우가 머리를 마리 처럼 포니테일로 하고 있었더라면 가인으로서는 둘을 구분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단지 저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눈빛 만이 마리와의 차이점이었다. 마치 옛날의 마리를 보는 것 처럼 그녀는 날카로웠다. ' 이크! ' 가인은 연우가 자신을 돌아보자 재빨리 시선을 그녀에게서 돌렸다. 등 뒤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뭐야? 이건 꼭 살기 같잖아? 날 죽이고 싶으신 걸 까. 마리 선배의 어머니는……. 그는 애써 시선을 마리의 맞선남에게로 돌렸다. 맞선남. 이름이 코마……히 코? 코마히코라고 했던가? 그는 짙은 회색의 검도복으로 갈아입은채 차분히 두눈을 감고 있었는데 가인과는 달리 너무도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가인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그는 격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 어라? ' 그렇게 코마히코를 바라보던 가인은 그의 사진을 봤을 때처럼 그가 낯이 익 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어째서 낯이 익은 거지? 난 분명 오늘 처음으로 저 사람을 만난 것일 텐데. ' ……! ' 아니다. 본 기억이 있어. 가인은 그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와 닮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코마히코가 낯이 익었던 이유. 그것은 그가 마리의 동생 성아인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인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저 남자의 나이가 됐더라면 저러했을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가인 뿐만이 아니라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놀 라워하며 코마히코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진으로는 잘 몰랐는데 직접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슥 그때 코마히코가 감고 있던 눈을 뜨자, 가인과 마리는 재빨리 그에게서 시 선을 돌렸다.그 모습이 기가 막히게 닮았던지라 보고 있던 브루스가 혀를 찰 정도였다. 연우는 한층 인상이 싸늘해져 둘을 노려보았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비영이었다. " 그래! 우선 서로 상견례부터 하는 게 좋겠군. " " 이미 서로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 차갑게 비영의 말을 일축하는 연우.그녀는 가인과 마리를 돌아보았다. " 서로 약혼을 했다고? " " 아, 예! 그렇습니다! " 어색하지만 최선을 다해 힘껏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 연우는 그런 열성적인 가인들의 태도에 가볍게 찬물을 끼얹었다. " 그 약혼은 무효다. " " ……! " 가인과 마리 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모두는 할 말을 잊었다.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 너,너무하십시다, 어머니! " 그렇게 단칼에 자르듯! 저희의 의사를 무시하듯 말씀하시다니! 하지만 그런 마리를 향한 연우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 앉아라. " 거역할 수 없는 한 마디. 마리는 소리치던 기세와는 달리 힘 없이 몸을 앉 혀야만 했다. 언제나 이랬다. 자신은 어머니의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처럼 몸을 떨었 다. 마리가 어릴 적부터 연우는 일본의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 신의 어머니를 자주 접할 수 없었다.물론 그것 때문에 모녀 사이가 어색하기 는 했지만 이렇게 까지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였다. 이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가 두 모녀 사이에 생긴 것은 아인이가 죽은 직후 부터였다. ' 그랬었지. ' 한달에 한번 꼴로 귀국하시던 어머니가 아인이의 장례식 이후로는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으셨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2년. 마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서 어떠한 모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비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인 이의 죽음은 자신들에게 있던 부부간의 온정도 앗아가 버렸다. 비영은 그런 아내의 변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 누구보다 아인이를 사랑하던 사람이었건만……. ' 아인이는 그녀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으며,그 아들을 잃은 분노 또한 누구보다 컸다. 아인이 의 제사 때 반쯤 실성해서 자신과 마리를 향해 외치던 연우의 울부짖음을 비 영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 너희들 때문이야! 아인이가 죽은 건! 어째서 옆에 있었으면서도! 어째서 그 아이의 옆에 있었으면서도 아인이를 지켜주지 못한 거지? 어째서---!! ' 그 후 그녀는 변했다. 그녀와 자신들 간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됐으며 더 이 상 어떠한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한때 연우에게서 연락이 없는 것을 걱정한 비영은 직접 일본으로 그녀를 찾 아갔지만 황 씨 일가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힘없이 귀국해야만 했다. 그는 아내의 슬픔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애써 담담하게 얘기했다. " 너무 그러지 말고 마리의 말도 들어봅시다. 혼사가 깨진 색시는 절름발이 라는 말도 있지 않소? 아무리 아이들끼리 한 약혼이라고 하더라도 파혼은 파혼. 다음 혼사에도 큰 지장을 줄지도 모르오. " " 아니. 먹에 가까이 가면 검어지는 법입니다. 개를 따라가면 가게 되는 곳 은 칙간(변소)뿐입니다. " " 어머님! " 마리는 연우의 비유에 화가 나 소리쳤다. 연우가 한 말은 나쁜 것을 가까이 하면 자기도 그와 같이 되어버린다는 일본 속담이었지만 도대체 칙간이 뭔가! 가인을 변소에 비유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딸의 분노에도 연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 약혼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누가 너희들의 약혼을 인정했다고 말하더 냐? 혼사를 정하는 건 모두 가문의 뜻이거늘! 어디서 이런 버르장 머리를 배운 거냐! " " 하,하지만! 하지만 저는……가인을 사랑합니다! " 순간, 마리의 돌발적인 외침에 옆에 있던 가인과 브루스들의 눈이 휘둥그래 졌다. 사,사랑! ' 강하다! ' 그런 모두의 경악을 뒤로 하고 마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연우에게 호소했다. " 어머니!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든 전 이 약혼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한번 지아비는 영원한 지아비니까요! 그건 어머니가 저에게 가르쳐주셨던 덕 목 아닙니까! " " 이 바보같은 녀석이! " 연우는 인상을 굳히며 가인을 노려보았다. " 그건 지아비가 생겼을 때 하는 말이다! 난 아직 저 아이를 네 지아비로 인정하지 않았어! 무엇보다 개인의 행복은 가문의 위업 앞에서는 그 빛 을 잃는 법이다! 너 혼자 행복하겠다고 가문을 내칠 생각이란 말이냐! 지 금껏 널 지탱시켜준 무영신풍류를 저버릴 셈이야! " " ……! "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연우는 딸의 기세가 사그러들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 고 계속 몰아 붙였다. "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 역시 네 할아버지가 저 사람과의 약혼을 추진했 을 때 군말 없이 그를 따랐다! 그것이 비록 황씨 일족의 무영신풍류 계승 이 끊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 그 말에 비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직접 아내에 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다른 일행들도 이 감당못할 연우의 얘기에 숨을 죽였다. " 난 네 할아버지를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무영신풍류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이 사람을 선택했다지만 그렇다고 가문의 계승을 끊어버리다 니! 가문의 계승을 끊어버리면서까지 한국에 무영신풍류를 되찾아줄 필요 가 있었단 말인가! " 비영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소리치는 연우. 하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그와 연우 사이의 골은 이미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 것 같았다. 연우는 타 오르는 것 같은 눈동자로 마리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마리는 몸을 떨었다. " 어차피 계승 문제가 날아간 이상 모든 건 내가 주관하겠다! 네 할아버지 가 하신 걸 내가 못할 이유가 없지! 지금 황씨 일족의 당주는 바로 나니 까! 만약 내 말을 거역하겠다면 당장 무영신풍류를 떠나라! " " 아……. " 마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절망적인 심정이었다. 어머니와는 조금도 얘기가 통할 것 같지 않다. 그나마 아버지를 믿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비영 의 보호는 되려 역효과를 부르리라. 비영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내심 침음하 며 말을 삼가했다. 가인은 곤혹스러워하는 마리 부녀의 모습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뭔가 말을 해야하는데…….어떻게든 마리 선배의 무영신풍류를 지켜줘야 하는데…….자 신이 무슨 말을 하든 주제 넘는 짓 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은 거짓 약혼자니까! 거기다 무영신풍류의 사람도 아니다. 이건 도저히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대로 두 손 놓고 마리 선배를 떠나보내야만 한단 말인가! " 잠깐. "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브루스가 말을 꺼냈다.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 다. 가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 브루스? ' 연우는 브루스의 말에 앞의 흥분했던 기색을 감추며 차분하게 답했다. 한 눈에 보아도 브루스를 존중한다는 태도가 그녀에게서 엿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던 건가? " 말씀하십시오, 브루스 님. " " 흠. 잠시 실례를 무릅쓰고 몇 마디 하지. " 브루스는 피워물던 곰방대를 내리며 말을 꺼냈다. 가인과 마리는 그를 신기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브루스 류.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 마리의 어머니까지 한 수 접어주시는 걸까? " 그렇게 다그치기만 하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 " 예? " 브루스의 말에 연우는 안색을 굳혔다. 너무하다니? " 네 입으로 직접 얘기했었지? 황씨 일족의 당주는 바로 너라고. 그렇다면 일족의 당주는 그렇게 모든 사안을 독단적으로 처리해도 되는 건가? 일족 의 구성원이 반대를 하더라도? " " 이미 일족의 모두는 이 혼사를 찬성했습니다.반대란 없습니다! " " 흥. 본인이 반대하고 있잖아? " 브루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마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연우는 이를 부드 득 갈았다.이쯤되면 브루스의 말을 무시할 법도 하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 만큼 브루스의 영향이 크다는 소리였다. " 당주라면 일족을 위해서 개인의 행복 쯤은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는 거냐? 당주란 일족 모두의 행복을 생각해야하는 게 아니었던가? " " 그건……그건 억지입니다! 무엇보다 이건 저희 일족의 일! 이 이상의 간 섭은 아무리 브루스 님이라고 해도 들어 드리기 힘듭니다. " ' 이런……. 여기까지인가. ' 브루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 역시 자신이 억지를 부렸다는 건 알고 있었 다. 연우의 말대로 애초부터 일족의 사안은 그 일족 만의 것. 외부인이 간섭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까지 자신의 말을 들어준 것만 해도 연우의 인내심에 박수를 쳐줘야 했다. 브루스가 했던 말은 어찌 들으면 당주를 모욕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브루스까지 그렇게 물러나자 마리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이젠 정말 끝이다! " 잠시만요, 사부 님. " 그때 의외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다름 아닌 지금껏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코마히코였다. 그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며 연우에게 말했다. " 저에게는 브루스 님이 뭔가 다른 해결책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좀 더 말씀을 들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 해결……책? " 연우는 신음을 흘리며 브루스를 돌아보았다.브루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로 그걸 기다렸다! 브루스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 그래. 원만히 해결할 방법이 하나 있지. " " 무엇입니까? " 가인과 마리는 기대에 벅차 올라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브루스! 뭔가 비장 의 한 수를 가지고 있었던 거였군! 평소에는 괴팍한 애늙은이라고만 생각했 지만……. 역시 그에게는 뭔가가 있었어! 브루스는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 바로 결투다. " " ……. " 잠시간의 정적. 모두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결투? 결투라니? 제 일 처음 그의 말을 이해한 것은 코마히코였다.그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되 물었다. " 설마 혼약을 걸고 결투……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 " 제대로 알아들었군. " 피식 웃으며 브루스는 코마히코의 말을 긍정했다. 그러자 대번에 도장의 공 기가 싸늘해졌다. 연우는 크게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하하! 브루스 님.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후후후후! 지금 그 결투 의 상대로 저 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연우는 가인을 돌아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 아무리 피스 대원이고 오라 능력자라고는 하나! 검술이란 건 그렇게 얕잡 아 볼 게 아닙니다. 같은 무(武)를 추구하는 무예가로서 브루스 님도 그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실텐데. " " ……. " 가인은 괜히 무안해져 고개를 숙였다. 그는 브루스를 힐끔 노려보았다.수치 심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 그럼 그렇지. 브루스. 저 인간이 제대로 된 의견을 낼리가 없잖아! 뭐야? 그 결투라는 건! 내가 들어도 터무니가 없내! ' 무엇보다 저 코마히코라는 남자는 황씨 일족이 직접 선정한 후계자였다. 굉 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게 틀림 없었다. 아마 마리 선배 보다도……강할까? 어쨌든 그런 실력자와 자신의 대결이라니. 말도 안되는 얘기다! " 하하하하하하. " 마리는 비웃음을 터뜨리는 자신의 어머니를 분한듯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녀 도 연우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분명 결투란 건 가인에게 무리한 소리다. 아무리 자신에게서 검을 가르침 받았다지만 그는 무영신풍류에 대해서는 아 무 것도 모르지 않는가! 무영신풍류의 오의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 브루스가 낮은 목소리로 연우의 웃음을 끊었다. " 지금……비웃는 거냐? " 마치 짐승이 으르렁 거리는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에 연우는 웃는 얼굴 그 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갑작스런 브루스의 흉흉한 기세에 의아해져 조심스 럽게 물었다. " 브루스……님? " " 저 애송이가 상대라는 게 불만인가? 그래서 비웃는 거냐? " " 예? " 브루스가 왜 화를 내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녀는 몸을 추슬렸다. 왜 진 노하신 거지? 무슨 이유로? 하지만 브루스의 다음 말로 연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잘도 비웃어 줬구나, 내 제자를. " " ……! " 순간, 그녀와 코마히코는 경악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새삼 가인을 놀란 눈 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연우 는 믿을 수 없다는듯 브루스에게 물었다. " 저,정말이십니까? 저 아이가 브루스 님의 제자라는 게? " " 그럼 지금 내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는 걸로 보이냐? " 대번에 으름짱을 놓는 브루스. 그의 태도에 연우는 침음했다.그런!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 마리의 약혼자라는 아이가 브루스 님의 제자일 줄은! 그녀는 초조해져 아랫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설마 이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암초에 걸릴 줄이야! 그때 코마히코는 연우와는 달리 눈에서 기광을 띄며 가인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가인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 왜 저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거지? " 재미있군요. " 코마히코가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진정 즐겁다는듯한 웃음이었다.그가 웃는 모습에 연우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코마히코가 웃다니? 저 웃음이라 고는 모르던 아이가! 코마히코는 브루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 그 제안……받아들이겠습니다. " " 코마히코! " 그의 행동에 버럭 소리치는 연우. 하지만 코마히코는 침착하게 자신의 사부 를 돌아보았다. " 무엇이 그리도 걱정이십니까, 사부님? 어차피 무영신풍류의 후계자는 강 하면 강할수록 좋은 법. 그렇다면 저와 그가 결투를 해서 이긴 쪽이 계승 자가 된다고 한들 무슨 상관입니까? " " 하지만! " 연우는 맘에 들지 않는다는듯 소리쳤다.왠지 브루스의 의도에 말려든 것 같 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코마히코 역시 느끼고 있는 바였 다. 그는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가 말했다. " 전 지지 않습니다. 사부님은 이 제자를 못 믿어주시는 겁니까? " 어떻게 들으면 오만방자하기 까지 한 그 말. 하지만 여기의 어느 누구도 그 말에 화를 내지 못했다. 그는 강했기 때문에! 마리는 그제서야 사태가 위험 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닫고 소리쳤다. " 전 이런 결투,납득할 수 없습니다! 무영신풍류를 정식으로 배운 문하생과 비문하생 간의 결투라니!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 그녀는 브루스를 원망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일이 이렇게 커지게 된 것도 다 저 남자 때문이었다! 무영신풍류의 결투에서 가인이 이기는 건 고사하고 잘못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을 지도 모른다! 상대는 절대로 손속을 봐줄리가 없으니까! 이것을 알면서도 그는 결투를 부추긴 건가! 그러나 그런 마리의 어깨를 제지하는 한 손길이 있었다. 가인이었다. 마리 는 힘 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 가인……. ' 가인은 그녀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의에 찬 눈빛이었다.그 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지금은 이 방법 밖에 없잖아요, 선배. 우리는 선택할 권리가 없으니까.이 결투를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어요. " " 하, 하지만! " " 걱정말아요. 그리고 약속했잖아요? 선배의 무영신풍류…….반드시 지켜주 겠다고. " ' 아……. ' 마리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려야 하는데……. 가인을 말려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가인은 그녀의 어 깨를 힘 있게 짚어준 다음 코마히코를 돌아보았다. "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 " 할 수 없지……. " 연우는 작게 한 숨을 쉬며 이 결투를 인정했다. 어차피 코마히코가 질 리는 없다. 귀찮지만 일이 이렇게 까지 커졌으면 따라주는 수 밖에. 그녀는 코마 히코를 돌아보며 물었다. " 괜찮겠느냐? " " 예. 어차피 이 문제를 단판짓기 위해 한국으로 온 것 아닙니까? 사부님에 게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렇게 결투가 기정 사실이 되자 비영은 어쩔 수 없다는듯 말했다. " 그럼 결투 시간은 이번 주 일요일 정오(正午)에 하기로 하지. 장소는 이 곳, 무영신풍류 도장에서. " " ……! " 모두는 비영의 선언에 마른 침을 삼켰다. 잠자코 얘기를 듣고만 있던 진우 와 시민, 유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가인을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으려나,이 결투? ' 가인 씨……. ' 시민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며 아련하게 가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한편 브루스는 그들과는 달리 코마히코가 한 말을 곰곰히 되새기고 있었다. 한국으로 온 이유. 한국으로 온 이유라……. 이 혼사 문제를 단판 짓기 위해 서라고? ' 과연 이유가 그것 밖에 없을까? ' 그것도 도츠카노츠루기라는 신물까지 들고서? 브루스는 곰방대를 다시 꺼내 물며 유심히 코마히코를 주시했다. 언더 시티 유레카에 있는 진 사령관의 개인 사무실.검은색 베니션 블라이드 로 빛이 차단된 방 안은 짙은 어둠으로 감싸여 있었다. 희미한 전광등 만이 방 안의 윤곽을 잡아주고 있었다. " 피스 버밀리온의 방문 목적이 정말 무영신풍류의 계승 문제 때문일까요? " 수정은 진 사령관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의심스럽다는듯 물었다. 진 사 령관은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며 답했다. " 물론 그것 뿐만이 아니겠지. " " 그럼? " 단정하는 진 사령관의 말투에 수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 사령관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후 입을 열었다. " 요르문간드. " " ……! " 진 사령관의 말에 나온 단어에 인상을 굳히는 수정.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 소리로 물었다. " 피스 그레이에 의해 초류향이 소멸된 것이 원인일까요? " " 아마도. 요르문간드의 여덟 화신 중 주인격이 되는 초류향이 사라졌으니 그 자리를 대신하여 일본 쪽에서 귀찮은 녀석이 하나 넘어온 모양이다. " " 설마……구사나기가? " " 그래. 그 설마다. " 진 사령관은 놀라는 수정을 뒤로 하고 자신이 할 말만 계속했다. " 카구라 일족이 맹신하고 있는 한 예언이 있다. '야마타노오로치가 부활할 때 도츠카노츠루기로 이를 퇴치하면 옛 영화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아마 도 그들은 요르문간드를 야마타노오로치로 단정지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피스 버밀리온이 도츠카노츠루기를 지니고 있는 거겠지. 그들은 구사나기 가 요르문간드의 주 인격이 되는 날을 기다려온 거다. " " 그렇……군요. 구사나기가 주 인격이 됨으로서 일본은 자연적으로 그에게 서 벗어남과 동시에 직접 요르문간드에 타격을 줄 수 있게 되니까.하지만 ……왠지 너무 약삭빠른데요? 만약 초류향이 소멸되지 않았더라면 일본 지부는 계속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을 거라는 소리잖아요? " " ……후. " 진 사령관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 거기다 한국을 전장으로 삼아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겠단 심보지. " 29구역. 테레이아가 거주하고 있는 맨션. 쾅! 거친 문소리와 함께 대문이 닫혔다.테레이아는 불도 켜지 않고 곧바로 어두 운 룸 안으로 들어섰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 지고 있었다. 테레이아는 자신의 신발을 벗다가, 잘 벗겨지지 않자 짜증을 내며 거칠게 신발을 팽개쳤다. 탁! 그녀의 발에서 신발이 날아가 거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단지 신발 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테레이아는 멍하니 신발이 날아간 곳 을 바라보았다. ' 내가……왜 이러고 있는 거지? ' 학교에서도 내내 이랬었다. 뭘 하든 귀찮고 짜증이 났다. 별 것도 아닌 일 에 신경질을 내며 화풀이를 했다. 평소의 자신 답지 않았다. 왜 이렇게 신경 이 곤두서 있는 걸까? 왜 이렇게 초조해 하고 있는 거지? 뭣 때문에? 그런 테레이아의 머리 속으로 가인과 마리가 같이 있는 모습이 스치고 지 나갔다. " ……! " 순간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테레이아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신발 장으로 팽개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신발장의 신발들이 가방을 따라 쏟아 져 내린다. 테레이아는 숨을 몰아쉬며 그것을 바라보다가 가방을 던진 자신 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자신의 이런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째서 가 인과 마리를 떠올릴 때마다 이렇듯 분개하고 있는 걸까? 내가 이런 기분이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데! ' 뭘 하고 있는 거야,리리스? 설마 그 꼬마를 질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리리스는 마리를 떠올리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은 강하게 부인하고 있었지만, 이성은 냉정히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은 약혼이니 뭐니 하며 가인 과 가까워지고 있는 마리를 질투하고 있었다! ' 아니야. 난 단지 내 유흥에 끼어드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불쾌할 뿐이 다. 유가인! 그는 내 장난감이기 때문에!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 드시 필요한 열쇠이기 때문에! ' 무엇보다 질투라니! 가당치도 않아! 그런 인간의 감정 따위는 예전에 버렸 다! 내 저주받은 인생을 깨달은 순간부터! 유메를 잃은 그 날부터! 리리스는 이를 갈며 난폭한 발걸음으로 거실에 들어섰다.불을 켜기 위해 벽 의 스위치를 찾았다. 간단한 염동으로 전등을 켤 수도 있었지만,이런 심란한 정신 상태로는 오히려 전등을 깨버릴지도 모른다. 팟! 하얗게 밝아오는 거실. 그리고 리리스는 깨달았다. 거실의 쇼파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짙은 녹색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낮은 웃 음 소리가 거실의 불청객에게서 흘러 나왔다. " 후후후후. 기분이 꽤나 안 좋아 보이는군. " " ……초류향. " 리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거실에 들어와있던 이는 다름 아닌 동료이자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초류향이었다. 리리스는 전신의 긴장을 돋구며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 아무리 오만하기 짝이 없는 너라지만 이건 너무 무례한 것 아니야? 언제 부터 초류향이 남의 집에 도둑 고양이 처럼 숨어들어오는 취미가 생겼나? " 그녀는 일부러 '도둑 고양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초류향을 도발시켰다.그의 불 같은 성격 상 이 정도 도발이라면 금세 반응을 해올 게 뻔했다. 일단 저 웃고 있는 면상부터 부셔버리겠어! " 후후후. 도둑 고양이라. " 하지만 초류향은 예전처럼 분노하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리리스는 이 뜻 밖의 반응에 의아해져 쇼파에 등을 돌리며 앉아 있는 그를 자세히 바라 보았 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 너……? " 초류향은 변해 있었다. 더 이상 그에게서 녹색의 머리카락을 찾아 볼 수 없 었다. 푸른색의 눈동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검게 물들어 있 었다. 입고 있는 옷 또한 청포가 아닌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상류 계급이 입 던 새하얀 히토에기누(單衣)였다. 그의 이런 변화에 리리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 변이(變異)……한 거야? " 휙 순간, 초류향은 웃음을 멈추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리리스는 자신을 돌 아보는 초류향의 눈빛에 짧게 숨을 들이켰다.뭔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 지고 있었다.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가 맞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외모만 변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도 변해 있는 것 같았다. " 그래. 오랫만의 변이지. 그 바보 같은 초류향이 피스 그레이의 손에 죽고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나 구사나기의 차례가! " 초류향.그는 저번 피스 그레이와의 사투에서 8개의 심장 중 하나를 잃어 버 렸다.그것은 예전 브리트라를 잃은 후 그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가 되는 죽음 이었다. 그것도 같은 상대에게 두번 씩이나 죽음을 당해버렸다.이것은 더 없 는 치욕이고 수치였다. 하지만 그는 예전 처럼 분노하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가 땅으로 떨어졌지만 안달해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분노가 밀려드는 만큼 더더욱 냉정해지고 있 었다. 그것은 구사나기라는 새로운 인격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도 다 변이를 위한 은둔이었던 모양이다. " 어쨌든 예전의 실수는 실수인 거고. 새로운 계획을 짜야겠지? 그나저나… …. " 구사나기는 미소지으며 그 짙은 흑색의 눈동자로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 이대로는 곤란하지, 리리스. " 그 시선에 리리스는 짧게 몸을 떨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구사나기의 눈동자 가 하나의 뱀 같이 느껴졌다. " 무슨……소리냐? " " 몰라서 묻는 건가? 후후후. 넌 변해 버렸어. 너무나도 나약해져버렸지.혹 시 정이라도 든 건가? 그 인간들과? " " ……! " 리리스는 눈을 부릅뜨며 구사나기를 노려보았다. 정이 들었다고? 인간들과? "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구사나기? " 한순간 주위의 모든 것을 얼어붙일 것 같은 한기가 그녀에게서 흘러 나왔다. 그것은 지독한 살기였다. 하지만 구사나기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속으로 웃었 다. 네가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거다. 리리스 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분개하면서도 살기를 거두었다. 구사나기는 낮게 조소했다. " 너무 정색하지는 말라고. 이후로 네가 보여줄 행동들이 모든 걸 증명해줄 테니까. 너의 충성심도. 우리와의 우정도. " 리리스는 깨달았다. 바로 저번 문화제 때부터 초류향의 태도가 저러했다는 것을. 이미 그때부터 변이가 시작되고 있었던 건가? 어쩐지 평소에는 자신을 경계하며 조심스러워했던 그가 그때 만큼은 유독 자신을 도발시킨다고 생각 했었다. 구사나기는 리리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다는듯 빙긋 웃었다. " 초류향과 나는 어차피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이다.그의 사고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지. 그가 알고 있는 건 우리도 알고 있다. " 그는 발 걸음 소리도 내지 않으며 리리스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 그나저나 일 얘기를 계속할까? " "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냐? " 리리스는 그와 오래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단도직입적으로 쏘아붙였다.구 사나기는 김이 샜다는듯 가볍게 한숨을 쉬며 몸을 물렸다. " 어차피 날 따라온 짐도 있고 하니까 이번에는 내가 녀석들을 상대하지.넌 아주 간단한 일 하나만 해주면 돼. " " 간단한 일? " " 그래. 간단한 일. 너무나도 손 쉬운 일. " 구사나기는 품에서 하나의 구슬을 꺼내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 구슬을 받 아든 리리스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 이건……마정의 핵? " " 그래. 나는 멍청이 초류향과는 달라서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일하는게 좋더군. 네가 추천해주는 방법을 써봤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어. 네가 할 일이란 다름아닌 이 녀석의 숙주를 찾아주는 일이야. " 리리스는 구사나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정의 핵 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숙주를 찾는 것 쯤이야 일도 아닐 텐데 굳이 자신에 게 숙주를 찾아달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 좀 특별한 숙주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 특별한 숙주? " 오라 능력자……라고 하는 숙주가 필요하지. " " ……! " 리리스는 구사나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모를 미소만을 띄고 있었다. 리리스는 움직이지 않는 입을 애써 달싹이며 그 에게 물었다. " 어째서? 어째서 오라 능력자를 마정의 숙주로 만들려고 하는 거지? 그리 고 오라 능력자의 정신 세계를 침범하는 건 무리다! 그건 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 " 어차피 너의 목적은 옴팔로스의 열쇠를 손에 넣는 게 아니었던가? 그러기 위해 오라의 주인을 노리고 있는 거고. " " 그건! " 네 녀석이 어떻게 그걸?! " 그러니까 그 전에 실험을 해보는 거야. 오라 능력자를 마정의 숙주로 만 들어 보는 거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 재.오라로 인해 높은 정신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고 해도 잘 찾아보면 헛 점이 있을 거다. 무엇보다 넌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오라 능력자들과 가 까이 접촉하는 이가 아닌가? " " 하지만……. " 리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 구사나기의 말은 옳다. 어차피 그녀가 계 획하던 일을 추진하려면 이 방법은 필요불가결했다. 언젠가는 사용해야 할 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 방법을 시행하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 ……주저하고 있군. 역시 정이 든 건가? " " ……! " 구사나기의 속삭임에 리리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아! 절대 그렇지 않아! 정이 들다니! 절대 그렇지 않다고! 리리스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 주저하고 있다고? 흥. 재미 없는 농담은 거기까지다,구사나기. 그 이상의 망언은 용서하지 않겠어. " " 오. 그럼 내 부탁, 받아주겠다는 소리군? " " 그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지. 그러니 용건이 끝났으면 어서 내 집 에서 꺼져버려. " 차가운 리리스의 말에도 구사나기는 입 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기분 나 쁜 자식! 녀석은 피스 블랙 한시영과는 다른 의미에서 리리스의 신경을 건드 리고 있었다. 한시영이 정체불명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불쾌하다면 구사나기 는 교활한 독사라는 점에서 혐오스러웠다. " 후후후. 좋아. 그럼 이 몸은 그만 꺼져드리지. " 낮은 웃음 소리를 흘리며 리리스의 곁을 지나치는 구사나기. 그때 그는 예 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리리스에게 말했다. " 아, 그러고 보니 메두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리리스에게 희소식이 있다고. " 희소식? 리리스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 뭐냐? " " 그 동안의 네 공로를 인정하여 원로회가 한 가지 혜택을 내리겠다는군.유 메 크라이시스의 가석방. 놀랍지 않아? 이건 지금까지 이례가 없었던 일 이라고. " " ……! " 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게 사실이냐고 소리칠 뻔했다. " 후후후후. 어때? 의욕이 생기지 않아? 좀 더 분발하라고.원로회의 자비는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니까. " " 너! " 리리스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구사나기는 자리에 없었다. 허깨비처럼 순식간에 꺼져버렸는지라 그를 만났던 게 환상은 아니었을까 하 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리리스의 손에는 그가 건네준 마정의 핵이 남아있었다. " ……. " 리리스는 구사나기가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 였다. ' 유메가……가석방? ' 그녀를……다시 볼 수 있는 건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리리스의 손에 쥐어진 마정의 핵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소문은 신속하게, 그리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퍼져나갔다. 일단 한성 고등학교 부터 시작을 하자면……. " 뭐? 마리 선배의 집안에서 정해준 새로운 약혼자가 나타났다고! " " 그럼 유가인은?! " 경악하는 재영과 반 가인회. " 겨, 결투……? " 어이 없다는듯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는 지연. " 언제! 어디서! " " 이번 일요일 정오. 장소는 무영신풍류 도장. " 밀려드는 질문 쇄도에 차분히 곰방대를 피워물며 그 답지 않게 상세히 하나 하나 답변해주는 브루스. " 스쿠프(Scoop)! 이것이야말로 다시 없을 희소식이야! 유가인의 패배는 확정적이라고! " " 가주겠어! 반드시 그의 최후를 보고 말겠어! " 전의를 불태우는 성마리 추종회.물론 불타고 있는 것은 한성 고등학교 뿐만 이 아니었다. " 아아! 이 얼마나 짓굳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의 피할 수 없는 결투라니! " " 거기다 같은 오라 능력자! 이건 운명이 아니야! 숙명이다! " " 강한 쪽이 미인을 차지한다……라는 거군. 점점 뜨거워지는 전개! " 언더 시티 유레카의 오퍼레이터 삼인방.그들의 흥분하는 꼬락서니를 보고있 던 채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한 마디 했다. " 훌쩍. " 기술 부 치프 시더 웰리스는 며칠 째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오지를 않고 있 었다. 연구실의 앞에 붙어있는 푯말은 '외부인 절대 사절'. " ……정말 대단한 반향이군요. 새삼 가인 군의 저력을 느끼게 됩니다. " " 동감이에요. " 닥터의 묘한 감탄사에 수정이 한 숨을 쉬며 동의했다. 피스 블루 유가인과 마리의 맞선남,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의 대결은 이미 피스메이커 자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뜨거운 화제였다.거기다 피스메이커의 가장 중요 한 업무를 담당하는 두 부서의 치프들이 전의를 상실함으로써 피스메이커 기 관은 유래 없는 업무 상의 타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눈에 띄는 문제 는 없었지만 자대 사기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에서 이대로 방치해둬서는 안 될 일이었다. ' 하지만 저거의 어디 부터 위로를 해야 하는 건지……. ' 거의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진 채영과 시더를 억지로 작전 본부실에 불러놓 고 수정은 한참동안 고민을 해야만 했다.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역 효과 만 일어날 것 같았다. 그렇게 대책을 찾지 못하고 수정이 한숨만 쉬고 있자 뜻 밖의 인물이 뜻 밖 의 돌파구를 제시했다. " 간단한 일이다. " " ……? " 그 무겁기로 유명한 입을 여는 진 사령관.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그는 우울해 하는 채영과 시더를 돌아보았다. " 결국 유가인이 패하면 모든 건 해결되는 일 아닌가. " 쿠쿵! 순간 채영과 시더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섬광 하나! 그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탄성을 올렸다.그 모습에 진 사령관은 기분 나 쁜 미소를 지었다. " 유가인의 패배. 그것은 곧 성마리와의 파혼을 의미. 더 이상 자네들의 앞 을 가로막는 건 아무 것도 없다. " " That's right! " " 마,맞아! 왜 그걸 생각못했지? "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시더와 채영은 급격히 생기를 되찾으 며 서로를 돌아 보았다. 솟아나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재간이 없다! " 그래! 가인 군과 마리 양에게는 미안하지만……. " " 제발 패배하게 해주세요! " 짝! 두 손을 합장하며 대우주의 의지를 향해 가인의 패배를 기원하는 그녀들.수정 은 식은 땀을 흘리며 진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 ……이게 사령관 님이 의도하신 방향인가요? " " ……. " 하지만 그 물음에 답할 진 사령관은 다시 입을 걸어 잠근 뒤였다. 한편 대결의 당사자들은 뭘하고 있었을까? 일단 마리의 임시 약혼자, 유가인의 상황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 하아아……. " 26구역, 한시민의 집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는 가인.그는 현재 후 회. 또 후회. 하여간 후회를 거듭하며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현재 그의 심정 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 내가 미쳤지! ' ……였다.가인은 이 대책 없는 상황에 말려든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서 울고 만 싶었다.그때 무영신풍류 도장에서 코마히코와의 결투를 받아들일 때는 어 딘가 나사가 하나 풀렸던 게 분명했다. 유가인!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결투를 받아들인 거냐? 네가 그 남자 의 상대가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검을 배운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초짜가 검술의 달인을 상대로 재롱이라도 떨어볼 셈이냐! 그나마 마리를 위해서 의연히 행동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눈 앞에서 사라지 자 대번에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가인이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시 민과 유리, 진우도 결투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 역시 무리겠죠? " " 무립니다. " " 절대 무리. " 시민의 물음에 손을 저으며 단호히 답하는 진우와 유리.진우는 가인의 사정 이 딱하다는듯 그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일단 피스 버밀리온은 카구라 일족의 남자로서 어릴 때부터 도츠카노츠루 기를 다루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아왔어. 거기다 2년 전, 연우 교관 님 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무영신풍류의 후계자로서 검을 가르침 받았지. " " 응. 응. " 진우의 말이 모두 옳다는듯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 " 여기서 주시해야될 것이 2년이라고. 2년. 그 2년동안 무영신풍류의 오의 를 대부분 터득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상상이나 가? 아무리 검술의 달인 이더라도 한 문파의 검법을 겨우 2년이라는 기간에 모두 숙지할 수 있다 니……. 그건 기본적으로 검술의 도예에 눈을 뜨지 않는 이상 엄두도 못 낼 일이야. " " 응. 응. " " 거기다 오라 능력자로 일본의 전역을 홀로 지켜왔다는 것! 이게 결정타로 군.예전 홋카이도에 크라켄이 출몰하여 아시아 연합의 피스메이커들이 격 퇴했다는 얘기 들었지? 그때 최전방에서 크라켄과 맞서 싸웠던 이가 바 로 피스 버밀리온이야! 네가 아무리 내 제자라지만 이건 정말이지 승산이 없는 싸움이다! " " 응. 응. " " ……. " " 응. 응. " 진우는 자신의 말에 연신 맞장구를 치는 유리를 멀뚱히 쳐다보며 물었다. " 유리 양. 어째 기분이 들떠 보입니다? " " 아! 뭐……. " 그제야 유리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 애초에 억지로 승낙했던 약혼이잖아? 지금와서 오빠가 진다고 해도 아무 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 오빠는 할 만큼 했으니까.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그녀의 속 마음은 이러했다. ' 결투에서 지면 오빠는 자유의 몸! 더 이상 마리의 약혼자 흉내 따위는 낼 필요가 없어! ' 그 동안 강제로 마리의 약혼자가 되는 가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얼마나 초조와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가! 그것도 이번 결투만 끝나면 종지부 를 찍을 수 있다! 초조와 불안의 나날 따위는 안녕이라고! " 흐음∼ 이유는 단지 그것 뿐입니까? " 진우는 그런 유리의 속 마음을 눈치챈건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고, 유리는 애써 태연하게 헛기침을 했다. " 흠. 흠. 어쩔 수 없잖아? 오빠가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니까. 마리가 불쌍 하기는 하지만 다 자업자득이야! 강제로 결혼하기 싫으면 무영신풍류를 떠나면 되는 거였는데, 둘 다 하기 싫으니까 오빠를 이용한 거잖아? 그런 거…… 너무 이기적이야! " " 유리 양. " 시민은 안타까운 얼굴로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유리 양의 말은 틀 리지 않았지만……. ' 그만큼 마리 양에게 있어서 무영신풍류는 소중한 거라고요. ' 그녀는 아마 무영신풍류가 없는 삶이란 생각치도 못했을 거다. 마리에게 있 어서 무영신풍류란 또 하나의 자신이었으니까. ' 하지만. ' 시민은 살며시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은 이 결투의 결과에 묘하게 안도하고 있었다. 가인이 질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시민은 이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 난 지금…… 마리 양이 강제로 결혼하기를 바라는 걸까? ' 확실한 건 가인과 마리의 약혼이 그 끝을 고할 거 같자 마음이 놓인다는 것. 시민은 이런 자신의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리에게 알 수 없는 죄책감 을 느꼈다. " 에휴. 어쨌든 소년의 패배는 확정적인 걸까요, 사부님? " 진우는 일말의 기대를 걸며 브루스에게 자문을 구했다.그 질문에 모두의 시 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일단 이 결투를 제안했던 장본인이 브루스였던 만큼 그는 가인에게서 무언가 일말의 희망을 보았음이 틀림 없다. 설마 대책도 없 이 일을 벌였을까? " 그래. 패배는 확정적이다. " 쿵! 하지만 단호하게 가인의 패배를 선언하는 브루스. 그 말에 가인은 그만 맥 이 빠져 테이블에 몸을 드러눕고 말았다. 그는 기가 막혀 소리칠 생각도 하 지 못하며 좌절, 또 좌절했다. ' 그럼 그렇지. 저 인간은 단지 내가 위기에 처해 악을 쓰며 발버둥을 치는 걸 즐기려고 했을 뿐이야. 하하, 하하하. 젠장. 난 뭘 기대했던 거지. ' 반면 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브루스가 뭔가 수를 내서 산통 을 깨버리지 않을까 잔뜩 긴장했는데,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브루스는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는데 일말의 주저도 하지 않 았다. "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은 있지. " " ……! " 순간 가인과 유리의 희비가 엇갈린다. 가인은 엎드렸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브루스에게 소리쳤다. " 방법! 방법이 있다고요?! " " 물론. 내가 설마 대책도 없이 결투를 제안했을 것 같냐? " " ……. " 죄송해요. 사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자, 귀를 씻고 잘 들어라. 방법이란 다름 아닌……. " 모두는 브루스의 말에 마른 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 ……. " 어둠이 깔린 무영신풍류 도장.연우는 아무도 없는 도장에 홀로 서있었다.그 녀는 무영신풍류의 고인이 된 후계자들의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사진 들의 맨 마지막에는 유독 어린 한 소년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연우는 소년의 사진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 아인아. ' 그 사진에는 그녀가 목숨과도 같이 아끼던 사랑하던 아들이 웃고 있었다.성 아인. 내 하나뿐인 아들. 그리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 뭘 생각하고 있으시오? " 그때 연우의 상념을 깨뜨리는 한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들려왔다. 연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싸늘하게 답했다. " 내일 있을 결투를 생각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니니 개념치 마십시오. " " 그렇소? " 허탈하게 웃음지으며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는 남자. 연우의 남편이자 그녀 가 원망하는 남자, 성비영이었다. 그는 연우가 바라보고 있던 아인이의 사진 을 담담하게 올려다보았다. " 아인이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 " 흥! " 연우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도장의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비영은 작게 한숨을 쉬며 그 뒤를 향해 말했다. " 당신이 데려온 아이……. 아인이를 닮았더군. " " ……. " 우뚝 멈춰서는 연우. 비영은 그녀의 뒷 모습을 향해 말을 이었다. " 당신은 그 아이를 아인이의 대타로 만들 생각이오? 하나 뿐인 딸을 희생 시키면서 까지? 그렇다면 마리가 너무도 불쌍하오.아니.그 코마히코란 아 이가 불쌍해. " 연우는 천천히 비영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무섭도록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를 애처로움이 그 속에 베여 있었다. 연우는 이를 갈며 소 리쳤다. " 듣자 듣자 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 이해하는 척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 " 그렇다면 내 말이 틀렸다는 것이오? " 비영의 물음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연우. 비영은 침울하게 말했다. " 부정하지는 않는군. " " 대타가……대타가 어떻다는 거지? " 연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어차피 마리는 결혼을 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 신랑 감이 아인이를 닮은 아이라면……. 아인이가 미처 못 이은 후계자를 이어 준다 면……. " " 불쌍한 사람같으니라고! 그게 아인이 한테도! 코마히코한테도 상처를 주 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르시오! " " ……! "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견딜 수 없는 적막이 도장을 감싸 안았다. 그 적막 을 이겨내고 연우의 입으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차피 후계자는 정해져야 합니다. 코마히코는 후계자에 적임인 아이에요. " " ……. " " 그럼 이만. " 연우는 끝내 비영을 돌아보지 않으며 힘 없이 도장의 출구로 사라져 갔다. 비영은 그런 아내의 뒷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아인이의 사진을 돌아보았다. 아인이가 지금 이런 자신들의 모습을 본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 ……. " 하지만 사진 속의 아인이는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얘기를 도장의 반대편 출구에서 본의 아니게 엿듣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였다. 그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도장으로 향하던 중, 그만 비영과 연우의 얘기를 듣고 만 것 이다. " ……. " 코마히코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장의 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 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도츠카노츠루기가 애처롭게 떨리기 시작했다. " 하아. " 마리는 자신의 방에서 가볍게 한 숨을 쉬며 시계를 바라보았다.어느덧 시침 은 밤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 날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 오늘이로군. " 마리는 굳은 표정으로 달력을 바라보았다. 달력에는 한자로 날 일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일요일. 바로 약속했던 결투의 날이다. " ……뭐야. 이건? " 일요일 정오. 가인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며 긴장된 몸가짐으로 일행과 함께 무영신풍류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작 무영신풍류 도장에 와서 그는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려야만 했다. 도장의 앞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 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뒤에 있던 시민과 유리도 이 뜻 밖의 인파에 두 눈 을 동그랗게 떴다. " 어떻게 된 거죠? " " 왠지 낯익은 얼굴들이……. " 떨떠름한 유리의 중얼거림을 반증이라도 하는 것 처럼, 인파 속에서 그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했다. " 오오! 드디어 등장이로군! 대결남 씨! " " 가인. 늦었어. " 바로 박재영과 테레이아. 그들이 가인을 아는체 하자 순간 공터에 있던 사 람들의 시선이 모두 가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 시선의 압박에 가인은 자신 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 어,어떻게 너희들이 여기에? " " 친구가 일생에 다시 없을 대결을 벌인다는데 어찌 친구로서 가만히 있을 손가! 응원하러 온거지∼ " 히죽 웃으며 가인의 어깨에 손을 두르는 재영. 그의 뒤에 서 있던 반가인회 회원들도 얼굴에서 히죽 히죽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여간 기분 나쁜 광경이 아니었다.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 뭔가 상당히 수상쩍게 기뻐하는 거 같다? 너희들? " " 그럴리가∼ 이렇게 순수 플랜 카드까지 준비해왔는데. " 그러면서 그들은 가인의 앞에 플랜카드를 활짝 펼쳐보였다. 그 카드에는 다 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가인이여, 무릎 꿇어라. 그리고 피를 토해라!」 Gain, Kneel now, and vomit blood! 퍼억! 순간 질펀하게 땅바닥에 드러눕는 재영과 반 가인회. 그들의 앞에는 테레이 아와 유리가 예의 라이벌 포즈를 취하며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 " 우리가 뭐라고 했지? " " ……언제나 가인에게 손을 대는 무뢰배들에게는, 으윽……한성 고교의 꽃 이……용서치 않아……. 큭! " 쓰러진 주제에 간신히 말을 잇고서 고개를 떨구는 재영들. 정말이지 진보라 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래파토리였다.하지만 그래도 반 가인회 같 은 경우에는 점잖은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반대 편에 위치한 성마리 추종회 같은 경우에는 아예 대놓고 가인을 박해하고 있었다. " 자! 우리 모두 유가인의 패배를 향하여 묵념! " " 묵념! " 탕! 탕! 폭죽을 쏘아올리며 유미미의 구호에 따라 경례를 부치는 성마리 추종회. 그 사이를 지나 도장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은 가인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화,확실히 승부하기도 전에 사람의 맥을 완벽히 빼놓으시는구만……. " 이 녀석들! 그쯤해둬! " 그때 성마리 추종회와 반 가인회의 학생들을 향해 날카롭게 고함을 치는 한 여인이 있었다. 바로 가인들의 담임인 하지연 교사! 그녀는 지금껏 초조함을 참기 위해 담배를 씹었는지 그 주위로 허리가 끊어진 담배들이 즐비해 있었 다. " 유가인! " " 아,예! " 지연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크게 답하는 가인. 지연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 를 바라보다가 잠시 머리를 긁적인 후, 이내 그의 어깨를 세차게 두들겼다. " 힘내라! " " 서,선생님……. " 가인은 유일하게 자신을 응원해주는 지연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 그녀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평소에 말보다 주먹을 앞세우는 폭력 교사 라느니, 혼기가 찬 히스테리의 마녀라느니 해도 사실은 잔정이 많은 여교사 였던 것이다! " 인생에 있어서 승부란 이번 한 번 뿐만이 아닌 것!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 더라도 그에 굴하지 않고 노력하는 불굴의 의지가 필요한 거야! " " ……예? " 어째 뭔가가 이상한듯……. " 패하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후회를 남기지 마! " " 저……선생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 가인이 듣다 듣다 못해서 인상을 찌푸리자, 지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반문 했다. " 응? 너 지는 게 아니었어? " " ……. " 가인은 잠시 힘을 얻었던 것이 무색하게 그 열배로 억장이 무너져 내려 어 깨를 늘어뜨렸다. 그는 힘 없이 도장의 출입구로 향했고, 시민들이 쓴 웃음 을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보아하니 이 자리의 모두는 9:1로 가인의 패배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도장의 출입구에서는 황연우와 코마히코,성마리와 성비영이 가인들 을 기다리고 있었다. " 왜 이렇게 늦으신 겁니까! " " 아, 예! 죄송합니다! " 연우의 일갈에 가인은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마리를 바라보았다.눈 밑에 살짝 기미가 낀 것이 오늘의 결투가 걱정되어 제 대로 잠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 걱정 말아요, 마리 선배. ' 가인은 그런 마리를 안심시켜줄려는듯 연우들이 눈치 못 채게 그녀에게 엄 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런 가인의 모습에 마리는 살며시 볼을 붉히며 실 소했다. ' 그래……. 성마리. 네가 불안해 하면 어쩌자는 거냐? 너만은 가인을 믿고 따라줘야지. ' 무엇보다 그는……내 약혼자니까! 마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믿음직스럽게 가 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가인이 출입구를 지나고, 그 다음을 시민이, 그 다음을 유리, 진우, 브루스가 지나자 연우는 출입구를 막아섰다. 그들의 뒤를 따라 도장으로 들어가려던 재영과 테레이아,지연은 뜻 밖의 제 지에 영문을 몰라 연우를 바라보았다. " 저……왜 그러시죠? " " 이 분들까지가 결투의 입회인(立會人)들입니다.그 외의 관계자 분들은 돌 아가주십시오. " 탕! 간단히 자신이 할 말만을 하고 도장의 문을 닫아 버리는 연우. 남겨진 재영 과 지연들은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닫혀진 문을 바라보다가 곧 제 정신을 차 리며 소리쳤다. " 그,그런게 어딨어------!!! " ……소리쳐도 소용없다고. " 그럼 지금부터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결투의 승자는 무영신풍류의 후계자를 계승하게 됨은 물론,무영신풍류 의 장녀 성마리를 아내로 맞이할 자격을 얻습니다. 승부의 맹세는 이 자 리의 모든 분들이 산 증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질 것입니다. " 결투의 심판을 맡게된 비영은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그를 사이에 두고 넓 은 도장에는 가인과 코마히코가 검도복을 입은 채 대치해 서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수중의 목도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 무영신풍류의 코마히코 카구라! " " 하잇(はい)! " 비영의 소개에 날카롭게 외치며 지검대적(持劍對賊)세를 취하는 코마히코. " 칠성권의 유가인! " " 예! " 마주 외치며 목도로 하단 베기 자세를 취하는 유가인. 솔직히 그의 유파는 칠성권이 아니었지만 일단 브루스의 제자로 나온 이상 칠성권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어야만 했다. 속해 있는 유파 마저 없었더라면, 연우가 이 결투 자체 를 인정하지 않았을 테니까. 중국권은 무기를 상정하고 권법을 익히기 때문 에 딱히 칠성권을 유파로 내세워도 이상할 점은 없었다. 그렇게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비영은 손을 들어올렸다. 이 손이 내려감과 동시에 결투의 시작인 것이다. 도장 내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비영의 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누군가가 목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 왔다. " 잠깐! " " ……! " 그때 대결을 중지하는 연우. 한껏 정신을 집중하던 가인과 코마히코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아해하는 모두.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도 연우는 흔들림 없이 브루스에게 말했다. "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 " 뭐냐? " 심드렁하게 묻는 브루스. 그를 향해 연우는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 목도를 진검으로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 " ……뭐? " 순간 브루스의 찡그리고 있던 눈썹이 살며시 흔들렸다. ' 사부님이 나를 아인이의 대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 진작부터 알고 있 었다. ' 그녀에게서 검을 배울 때마다…… 날 따뜻하게 바라보던 그 시선과 목소리 를 느낄 때마다……. ' 한국에는 너보다 조금 어린 내 아들이 있단다. 이름은 성아인이라고 해. ' 그렇게 나에게 말하던 사부 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사부 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녀의 아들이 부러웠다. 카구 라 일족의 후계자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온 나에게 있어 서 부모님의 온정이라는 건 손에 닿지 않는 아득한 그리움의 감정이었으니까. ' 이건 말도 안돼……. 어째서 아인이가……. 아인이가……. ' 하지만 사부님의 행복은 2년 전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날벼락이라고 해야했다. 사부님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원인 불명의 병으로 인해! 아들의 죽음을 접한 사부 님은 실성한 것 처럼 아인이란 이름 만을 되뇌였 다. 누구도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며, 심지어는 나조차도 일본에 남겨두 고 홀로 한국으로 떠나셨다. 그리고 한국에서 돌아온 뒤.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사부님은 변하셨다. 더 이상 예전의 따뜻함을 찾아볼 수 없었고 하나의 검 처럼 날카로워지셨다. 하지만 나는 사부님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의 슬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 언제나 제가 사부님의 곁에 있겠습니다. ' 사부님이 가끔씩 미소를 지을 때는 날 가르칠 때 뿐이었다. 그녀는 예전 보 다 더 나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주었고,날 가르치는 시간은 더 많아졌다. 그 애정이 사부님의 고독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그때 부터 그녀는 나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개념치 않았다. 그건 오히려 바라던 바였으니까.그렇게 해서라도 사부님이 슬픔을 덜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누구의 대용품이라고 해도 좋았다. 난 사부님을 사랑했으니까. ' 내 딸아이와 결혼하거라, 코마히코. 네가 무영신풍류의 후계자가 되는 거 다. ' 혼약 문제를 그녀가 꺼냈을 때도 말 없이 그것을 따랐다. 그것이 어떤 의미 였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녀가 내 어머니가 된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 했다.진정으로 날 아들로 받아줄 거라 생각했다. 대용품이면 어떤가! 누구의 대신이라고 해도 좋아! 난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 어차피 마리는 결혼을 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 신랑 감이 아인이를 닮은 아이라면……. ' 사부님이 그런 말을 했더라도 난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것 쯤 이미 알고있 었으니까.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난 기꺼이 그것을 할 것 이다. 그녀가 기뻐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 그래. 그거라면 충분해……. 그거라면. ' 코마히코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서있는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이 싸워야할 상대였다. " 진검이라니! 말도 안됩니다! " 마리는 연우가 제안한 요구에 버럭 소리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비영 역시 탄식하듯 말했다. " 그건 아니될 말이오.아무리 아이들의 싸움이라고는 하나 결투는 결투! 두 아이 중 하나는 크게 다칠 게 뻔하오! 이건 후계자를 가리는 결투지 상대 의 목숨을 취하는 결투가 아니잖소? " " 그러나! " 연우는 큰 소리로 비영과 마리의 항의를 끊으며 말을 이었다. " 무영신풍류는 생사입멸의 검! 보호구를 착용하고 죽음의 위협도 받지 않 는 곳에서 안전하게 검이나 휘두르는 호신술 따위가 아닙니다! 언제나 실 전 같이! 언제나 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수련을 거듭하는 것! 그것 이 무영신풍류가 추구하던 바 아니었습니까? 무엇보다 무영신풍류의 후계 자를 이렇게 안이한 방법으로 가려서는 안됩니다. " " 하지만 어머니! " 마리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자신의 어머니가 한 말은 분명 옳 다.하지만 이대로 가인을 진검 승부에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사실 이런 승부,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도 없지 않는가! 단지 마리를 위해서, 그녀가 강제로 결혼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짜 약혼자 흉내를 내준 것 뿐이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후계자 결투에 말려들게 되었다.그것도 모자라 진검 승부라니! 그러나 연우는 냉정하게 마리의 말을 묵인하며 브루스를 돌아보았다. " 제 말이 틀렸습니까, 브루스 님? " " ……. " 입을 다문 채 말 없이 그녀를 주시하는 브루스. 연우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 를 지었다.애초에 이 후계자 결투를 제안했을 때부터 그에게 뭔가 다른 꿍꿍 이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아무리 유가인,그가 브루스 님의 제자라 하더 라도 검에 있어서는 코마히코의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그것을 알면서도 그 가 가인과 코마히코의 대결을 부추긴 이유. 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 만 브루스는 뭔가 유가인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해두고 있었음이 틀림 없다. ' 그렇다면 난 그 수법을 처음부터 깨뜨려주지. ' 그런 이유로 연우는 목도를 진검으로 바꾸자고 제안한 것이다. 과연 그녀의 생각대로 브루스는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후후. 진검을 상대로는 어떤 잔재주도 부리지 못할 테지. 이것으로 코마히코의 승리는 확정적이다. " 진검으로 교체하지 않는다면 이 결투,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 확고한 연우의 선언에 가인들은 침음했다.시민과 유리는 불안으로 죄여오는 가슴을 움켜쥐며 자신들에게서 뒤돌아 서있는 가인을 바라보았다. ' 말도 안 돼. 진검이라니! ' 시민은 움켜쥐고 있는 주먹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이건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이젠 단순히 거짓말이었습니다 하고 넘 어갈 수준이 아닌 것이다.혹시 연우 관장 님은 가인 씨와 마리 양의 거짓 약 혼을 눈치채고 저런 제안을 하시는 걸까? ' 그만둬요, 가인 씨. 이런 승부……가인 씨가 받아들일 이유가 없잖아요? ' 이대로 진검 승부를 받아들여 결투를 하는 날에는 그의 몸이 성할리가 없었 다.팔이나 다리를 못 쓰게 되는 건 그나마 다행이지 잘못했다간 목숨까지 잃 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가인이 마리를 위해 승 부할 의리는 없다! " 아……. " 그녀는 자신의 손을 꼬옥 잡아오는 작은 손길 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유리 였다. 유리는 가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불안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시 민은 굳은 표정으로 유리의 손을 힘껏 잡아주었다.제발! 제발 받아들이면 안 되요, 가인 씨! " 연우 관장 님의 제안……. " 하지만 그는 시민들의 애원을 외면했다. " 받아들이겠습니다. " 시민은 질끈 눈을 감았다. 가인 씨! " 안 돼, 가인! " 마리는 비명처럼 소리지르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 미소가 마치 모든 걸 체념하는 것 처럼 보여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하지만 선배. 진검으로 하지 않으면 결투……할 수 없잖아요? " " 넌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결투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 가 아니다! 진검으로 승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거야! " 마리는 가인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 이 결투에서 네가 죽거나 다치더라도 상대에게는 그 책임을 절대 묻지 않 겠다는 의미인 거다! 넌 스스로 죽어도 괜찮다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다고! " " ……그렇게 되는 군요. " 가인은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상황에 맞지 않게 너 무나 태평스러워서 마리는 그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기나 한 건지 답답해졌다. " 웃지마! 지금이 웃을 때냐! " 마리는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와 코마히코의 사이를 막아섰다. 가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목으로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애써 참아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 이 결투 포기하자……. " " 예? " 가인은 마리의 뜻 밖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마리는 필사적인 심정이었 다. 어차피 거짓인 약혼이었다. 거짓인 약혼자 행세였을 뿐이다. 내 자신이 집안이 정해준 맞선남과 결혼하기 싫다고 가인을 끌어들인 것 뿐이다. 그런데 이런 거짓말에 그의 목숨까지 걸게 할 수는 없다. 내가 맞선남과 결 혼하면 모든 게 해결될 문제 아닌가! 내 욕심 때문에 가인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 가인! 어차피 넌 내 약혼자가……. " 어차피 넌 내 약혼자가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마리 의 입술을 가인이 살짝 손으로 매만지며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가인은 그녀 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선배. 약속했잖아요? 반드시 지키겠다고. " " 하,하지만! " 가인! 그런 약속,지키지 않아도 좋아! 너만! 너만 무사하다면 난 아무래도 상관 없다! 그러니까 제발……제발 그러지마! 마리는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자신의 문제에 그를 끌어들인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두렵게 하는 건 이대로 그를 잃어버 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가인은 울먹이는 마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 약속 때문 만이 아니에요. " " ……? " 가인의 말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마리.가인은 자신의 어깨를 짚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며 그 손을 힘껏 쥐어 주었다. " 이대로 마리 선배를 떠나보내면 제가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 ' 가인! ' 넌, 넌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까지……. 마리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네가 좋아하 는 사람은 시민 씨잖아. 그런데 어째서 나 따위에게 그렇게 신경을 써줄 수 있는 거지? 어째서……. 마리는 그에게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숙였다.그 모습을 서글픈 미소를 띈채 바라보던 가인은 옆의 비영에게 말했다. " 관장 님. 마리 선배를 부탁드립니다. " " ……그러지. " 비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딸을 다독거렸다. 하지만 가인을 바 라보는 그의 시선은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이겨주게, 가인 군! 제발! 반드시 이겨주게! '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가인은 코마히코에게 패할 것이다.그것 도 큰 부상을 입으며. 그러나 믿고 싶었다. 그가 이기기를 바랬다. 그를 위 해서라도. 마리를 위해서라도. 비영은 진심으로 기원했다. " 정말……결투를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 코마히코는 설마 가인이 결투를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에 속으로 감탄을 금 치 못했다. 이 소년은 진검 승부의 위험성을 모르기에 이리도 겁이 없단 말 인가! 그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인. 코마히코는 나직막히 한 숨을 쉬었다. " 알겠습니다. 그럼 결투를 시작하지요. " 그의 말에 연우는 진검을 꺼내어 가인과 코마히코에게 각자 넘겨 주었다.코 마히코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청백색의 검광이 나타났다 사라지자 싸 늘한 검기가 그 주위로 깔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시민과 유리, 진우는 자 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들은 불안한 눈으로 브루스를 돌아 보았다. 그 가 어떻게 해서라도 이 결투를 말려주길 바랬다. 속 사정을 알고 있는 그들 로서는 이 결투가 너무나도 무모해 보였던 것이다. ' 제발! ' 그런 그들의 기원을 눈치 챈 것일까? 브루스는 무겁게 닫고 있던 입을 열어 연우에게 말했다. " 한가지만 묻겠다. " " 예? "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연우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시민 들. 브루스는 시민들 쪽을 힐끔 거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 어떻게 해서라도 이기면 되는 거겠지? " " ……예? "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연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아, 그야……당연한 말씀이십니다. " " 좋아. " 브루스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뭔가 결투를 말려주길 바랬던 시민들로 서는 맥빠지는 태도였지만 브루스의 표정이 워낙에 근심스러워서 아무런 말 도 건넬 수 없었다. ' 역시……브루스 님도 별 수 없으신 걸까. ' 낙담하는 그들. 하지만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브루스는 웃고 있었 다. 그것은 그야말로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 ……여기까지는 내 생각대로다. ' 연우가 진검을 제의한 것은 예상 외였지만,오히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한 방 법에 플러스가 되면 플러스가 되었지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았다.아무런 문제 도 되지 않는 것이다! 가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 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녀석. 그래도 진검을 대하면 떨릴 만도 한데 용케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 구나. 브루스는 기특하게 생각하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 이제부터 모든 건 네 놈의 몫이다. 분발하도록! ' 가인과 코마히코는 몸에 입고 있던 모든 보호구를 벗으며 단지 검도복만을 입은채 진검을 뽑아들었다.예리한 검광이 일행을 스쳐지나가자 모두들 눈을 가렸다. 목도에서 진검을 바꾼 것 만으로도 결투의 성질이 변해버렸다. 이제 는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 침착해라. 유가인. 침착해! ' 가인은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애써 자신을 다그쳤다. 그래 도 마리를 달랠 때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진검을 눈 앞에서 대하자 전신 이 공포로 움츠려 들고 있었다. 저 검에 베이기라도 하면 자신은……. ' 안 돼! 불길한 상상 따위는 하지마! ' 가인은 속으로 일갈하며 두 손으로 수중의 검을 힘껏 움켜잡았다.하단 베기 자세! 자신이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익힌 가장 효율적인 검세였다. 어차피 오 라 소드가 진검으로 바뀐 것 뿐이고, 몬스터가 저 남자로 바뀐 것 뿐이다.어 차피 목숨을 걸어야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 마리 선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해! ' 가인은 정신을 집중했다.그러자 코마히코와 그의 사이에 있던 공기의 흐름 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코마히코의 눈빛이 가볍게 변했다. ' 멋진 투기로군. ' 이건 도저히 일년도 채 검술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낼 수 있는 기세가 아니 다. 역시 오라 능력자라는 건가……. ' 분명히 재능은 있군. 무의미한 대결은 되지 않겠어. ' 코마히코는 다시 없을 진지한 자세로 수중의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 넣었 다. 그것을 지켜보던 시민과 유리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검을 집어 넣는 거지? 결투할 상대를 눈 앞에 두고? 하지만 그녀들을 제외한 나머지 입회인들은 코마히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발도술(發刀術)! ' 검집에서 검을 빠르게 뽑음과 동시에 상대를 최단 거리로 공격하는 기술. 처음 일초로 모든 걸 끝내버릴 생각이란 말인가? 발도술의 대단한 점은 그 신속한 빠르기 보다도 상대가 검의 길이를 알지 못하게 납도 상태에서 공격 을 시작한다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사정 거리를 읽지 못하는 가인으로서는 순식간에 당할 위험이 있다. 가인은 발도술의 심리적인 압박에 전신을 긴장시켰다. 슥 소리 없이 엄지 손가락으로 검막을 밀어올리는 느낌! 순간,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번개 같이 뒤로 고개를 젖혔다. 그것은 그야말로 본능적인 선택이었 다. 생각도 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몸! 스륵 그리고 가인은 자신의 앞머리 중 몇 가닥이 천천히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이마에서 느껴지는 불에 데인 것 같은 뜨거움! 천천 히 뜨거운 핏방울이 미간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느새인가 코마히코의 검은 뽑혀 있었고 가인의 이마에는 얕지만 긴 검흔 이 생겨 있었다. " 피한……건가? " 놀랍다는듯 중얼거리는 코마히코. 설마 자신의 발도를 그가 피해낼 줄은 몰 랐기에 그는 순수히 감탄했다. 그가 행한 수법은 무영신풍류 일식 섬광.평소 마리가 행한 섬광을 그는 발도술로 시전한 것이다. 그러나 감탄하는 코마히코와는 달리 가인은 자신의 얼굴이 피로 물드는 것 조차 느끼지 못하며 망연자실해 했다. ' 보이지……않았어. ' 코마히코의 검이 보이질 않았다.방금의 발도술을 피한 건 그야말로 우연.조 금만 고개를 젓히는게 늦었어도 자신은 죽을 뻔 했다! 얼굴이 피로 물드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 뻔 했다고! ' 제,젠장! ' 안도 후 밀려드는 지독한 공포감. 이마의 상처가 아플 수록 진검에 대한 공 포가 그의 몸을 죄어왔다. 코마히코의 발도술에 가인은 진검 승부의 진정한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서 날아드는 코마히코의 검에 가인은 마저 공포를 느낄 새도 없 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챙! " ……! " 두번째 검격. 코마히코는 두 눈을 부릅 떴다. 자신의 검은 이번에도 가인의 검에 막혀 있었다. 발도를 피해낸 건 우연이 아니었던 건가! 그는 무섭도록 표정을 굳히며 재차 검을 휘둘러 갔다. 채채챙! 순식간에 팔초를 넘기는 공방! 하지만 용케도 가인은 코마히코의 검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더 연우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 어떻게 이런 일이! ' 검을 배운지 일년도 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던 건가! 연우는 마리와 비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두 부녀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코마히코 와 마리의 결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가인! 이 정도였던 건가! ' 마리는 가인의 뜻 밖의 건투에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는 서투르기는 했지 만 확실하게 코마히코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조화일까? 평소 자신과의 훈련에서 보여주던 움직임과 지금의 가인이 보여주는 움직임 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연습과 실전의 차이라지만 어떻게 저 정도 로 실력이 달라질 수 있는 걸까! " 앗! " 그때 결투를 지켜보던 유리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코마히코의 검을 튕겨내 느라 가인이 등을 드러내자,코마히코는 사정 없이 그 등으로 사식 단월을 시 전한 것이다. 날카롭게 가인을 향해 날아드는 찌르기! 가인은 꼼짝도 없이 코마히코의 검 에 등을 꿰일 것 처럼 보였다. 휙 " ……! " 하지만 가인은 간발의 차로 코마히코의 단월에 등을 스치며 공격을 피해냈 다. 마치 등에 눈이라도 달린 것 처럼! ' 단월마저 피해내다니. ' 코마히코는 더더욱 냉정하게 검세를 형성하며 가인을 몰아붙였다.가인은 전 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가면서도 용케 코마히코의 검을 받아 넘기고 있었다. 애당초 십 초도 안되어 코마히코의 검에 쓰러질 거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분 투였다. 모두가 이 결과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 브루스 만은 득의양 양하게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 일 단계는 성공이군. ' 가인의 예상 외의 회피. 그것은 바로 예전, 브루스가 도도산에서 가인의 뇌 리에 심어주었던 환각지의 능력이었다. 환각지! 그것은 수십 번, 아니 수 백 번 경으로 그의 몸을 두들겨서 충격을 그 뇌에 인지시킨 뒤 외부의 충격에 몸이 의지를 떠나 반사적으로 움직이도록 브루스가 가인에게 전수해준 회피 술이었다. ' 진검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이제야 기억해낸 모양이군. ' 그 동안 가인이 환각지를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 그것은 그의 나약한 정신 상태 때문이었다. 환각지가 발휘될려면 브루스의 경에 맞먹는 위기감과 긴장 감을 항상 유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다지 생명의 위기를 느끼지 못했던 가 인은 환각지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전투에 임해왔던 것이다.그 잊 혀진 감각이 이번 진검 승부에서 다시 살아난 모양이다. 브루스가 연우의 진 검 제안을 승인했던 것도 다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 하여간 느려터진 녀석. ' 브루스는 가인이 환각지를 발동시키지 못하고 패하는 건 아닐까 내심 초조 해 했다. 하지만 늦게나마 감각을 되찾아 다행이다! ' 흥. 이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되지. ' 그는 가인을 바라보았다.가인의 상태는 코마히코의 검을 잘 피해내는 것 치 고서는 낭패하기 그지 없었다.검도복의 상의는 찢어져 덜렁거렸으며 그 등판 과 얼굴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그 외에도 길다란 검흔이 전신에 생겨나고 있 었다. 지금이야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이대로 코마히코의 검을 방어만 하고 있으면 가인의 패배는 확정적인 것이다! 핏! " 으윽! " 가인은 코마히코의 검에 어깨를 베이고 신음을 흘렸다.그 자신도 알고 있었 다. 이대로 피하기만 해봤자 지치는 건 자신. 먼저 쓰러지는 것도 자신이라 는 걸. 이 집중력이 떨어지는 순간, 자신은 그의 검에 피를 흘리며 쓰러질 것이다. 그러기 전에 무슨 수를 내야만 했다! 가인은 며칠 전 브루스가 가르쳐준 방법을 떠올렸다. ' 네 녀석이 이길 수 있는 방법. '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닌. ' ……맨손으로 싸우는 거다. '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가인은 기가 막혔다. 아니. 기껏 가르쳐주는 방법 이 저딴 거라니. 저런 소리는 나도 하겠어! 그렇게 좌절하는 자신에게 그는 말을 계속 이었다. ' 네 녀석이 아무리 검들고 설쳐봐야 그 코마히코라는 녀석에게는 백전백패 다. 검으로는 전혀 승산이 없어. 일단 검을 피하며 기회를 보다가 녀석에 게서 검을 빼앗는 거다. 맨손 격투라면 그나마 네 녀석에게도 가망은 있 겠지. ' 말이 쉽지 브루스가 한 말 중 하나도 해낼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이미 자신 은 코마히코의 검을 피해내고 있다. 이대로라면 브루스의 말대로 검을 빼앗 고 맨손으로 격투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맨손으로 싸우는 걸 연우가 인정해줄지 의문이었지만, 브루스는 머리 좋게 도 이미 그녀에게서 약조를 받아낸 뒤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기면 된다는 약조를! ' 좋아! 그 방법에 걸어보자! 이미 다른 길은 없어! ' 체술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으니까! 가인은 마음을 굳게 먹으며 처음으로 검 술을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했다. " 읏! " 채챙! 코마히코는 가인이 갑작스레 공격을 해오자 다급히 그의 검을 막아냈다. 가 인은 코마히코의 검을 튕겨내지 않고 대번에 겨루기로 들어갔다. 힘과 힘의 대결! 가인과 코마히코는 서로 상대에게 검을 밀어내려고 노력했다.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 겨루기 상태에서 그의 검을 바깥으로 쳐올린다! 겨 루기는 코마히코의 손에서 검을 빼앗기 위한 가인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 차앗! " 채앵! 날카로운 쇳소리. 그리고 코마히코의 검이 날아가야 했다. 그래. 날아가야……. ' 젠장! ' 가인은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코마히코는 가인이 갑작스레 공 세로 전환해 오자 그것을 수상히 여겼다. 그렇게 그는 주의하고 있다가 가인 이 겨루기를 시도해오자 그 속셈을 눈치 채고 재빨리 가인의 검을 빗겨낸 것 이다. 코마히코는 가인의 검을 튕겨낸 방향으로 돌개바람 처럼 한 바퀴 돌며 가인의 왼쪽 어깨를 단월로 내찔렀다. 가인은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 가인!!! " 비명을 지르는 마리! 손으로 입을 막는 시민과 유리! 두 눈을 부릅 뜨는 진 우와 브루스! 가인의 어깨에서는 붉은 혈액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 코마히코는 그것을 냉정히 지켜보았다. " ……! " 하지만 순식간에 경악의 빛으로 물드는 그의 눈동자! 자신의 검은 가인의 왼쪽 어깨를 꿰뚫지 못했다. 그의 검은 가인의 겨드랑이 사이에 깊숙히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내 검을 피해냈단 말인가! " 큭! " 코마히코는 당황하며 그에게서 검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가인은 단단히 겨드랑이에 검날을 끼우고 그것을 빠지지 않게 양 손바닥으로 억눌렀다. 검 날에 닿은 그의 살들이 사정 없이 베여져 피로 물들어 갔지만 가인은 악에 받친 얼굴로 더더욱 검을 부여잡았다. 지독한 아픔! 고통! 가인은 그 모든 걸 기합으로 승화시켰다. " 으아아아아아앗!! " 퍼억------!!! 순간 코마히코의 아랫 턱을 가격하는 가인의 팔꿈치 공격! 그 충격에 코마 히코는 그만 검을 놓치고 뒤로 물러났다. 가인은 검을 팽개치며 그 뒤를 놓 칠새라 재빠르게 추격해 들어갔다.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가인의 몸이 공중을 날으며 그 무릎이 코마히코의 안면을 후려쳤다. 쾅! " 크흑! " 피가 흐르는 코를 부여잡고 코마히코는 신음을 흘렸다.정신을 차릴 수가 없 었다. 가인은 마치 지금껏 당할 걸 이 참에 모두 풀어버리겠다는듯 맹렬하게 코마히코를 공격해왔다. 그 일격 하나 하나가 무서울 만치 정확하게 급소를 노려온다! 순식간에 결투가 격투로 돌변하자 연우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 무, 무슨 짓인가! 이게! 이건 결투가 아니다! 당장 이 싸움을 멈추십시오! " " 애초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기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속행이다! " 마주 소리치는 브루스. 그 말에 연우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랬었 군! 그래서 아까 그런 질문을 한 거였나! " 이건 비겁합니다! 검술 시합에 체술을 사용하다니! " " 고수와 애송이를 검으로 시합시킨 건 비겁하지 않았다는 거냐! " 브루스는 한치의 눌림도 없이 연우에게 일갈했다.사실 이런 약은 수를 쓴것 이 찝찝하기는 했지만,이 수 외에는 도저히 코마히코와 가인의 실력 차를 메 꿀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해서든 이기면 된다고! ' 제길! ' 연우도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는지 독이 오른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다 가 다시 가인과 코마히코의 결투로 눈을 돌렸다. 제길! 제길! 제길! 설마 이런 웃기지도 않는 속임수에 걸릴 줄이야! ' 이렇게 된다면 이기는 수 밖에 없다, 코마히코! 절대로 지지마라! ' 반드시 이겨서 저들의 콧대를 꺽어버리는 거다! " 크핫! " 퍽! 가인은 코마히코와 거리를 벌리지 않으며 그에게 잽과 스트레이트를 연신 꽂아 넣었다. 코마히코는 간신히 그것을 방어하다가 가인에게 복부를 허용하 고 말았다. 강력한 바디 블로우! 코마히코는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참으며 뒤로 정신 없이 물러났다. 가인은 필사적으로 그 뒤를 쫓았다.간신히 잡은 기회를 놓칠 것 같으냐! " ……! " 그때 손으로 얼굴을 가린 틈 사이로 코마히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가인 은 하이 킥으로 그 가드를 후려치려다가 방향을 바꿔 비어있는 코마히코의 옆구리에 정강이 차기를 먹였다. " 큭! " 신음과 함께 열리는 코마히코의 가드. 그리고 가인은 비어있는 코마히코의 얼굴로 주먹을 내찔렀다. 이것으로……! ' 끝이다!! ' 휙! 하지만 코마히코는 기다렸다는듯 번개같이 몸을 숙여 가인의 주먹을 피해냈 다.그리고 가인의 목을 움켜 쥠과 동시에 그의 손을 단단히 죄어 돌풍 처럼 그를 앞으로 후렸다. 깃 대신에 목을 잡은, 깃 잡고 후리기였던 것이다.가인은 꼼짝도 하지 못하 고 무력하게 허공을 날았다. ' 어라? ' 그야말로 순식간에 하늘과 땅이 서로 위치를 바꿨다. 그리고 어두워지는 시 야. 충격이 느껴진 것은 도장의 바닥에 어깨를 부딪힌 뒤였다. 쿵! " 크억! " 숨 막히는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 가인.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메치기를 당한 건가? 이 자식, 유도도 할 줄 아는 거야? 브루스는 그것을 바 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 ……저 애송이, 우라 카구라였나. " " 예? 그게 뭡니까, 사부님? " 브루스의 중얼거림에 진우가 묻자, 시민과 유리도 당황하는 얼굴로 그를 바 라보았다. 브루스는 쓰러진 가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 카구라 일족에게는 검 뿐만 아니라 격투술도 있는데 그 검과 격투술을 다 익혀 카구라 일족을 위협하는 자들을 그늘에서 쓰러뜨리는 역할을 맡은 이들. 그들을 우라 카구라라고 하지. " 하필이면 저 후계자 애송이가 그것일 줄이야! 그는 사전에 가인에게 우라 카구라의 존재를 가르쳐주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코마히코는 자신이 승기를 잡았건만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머리부터 떨어지는 기술이었는데 이 가인이란 남자는 용케도 목을 비틀어 머리가 부딪히는 것을 면했던 것이 다. 기술이 걸렸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치명상을 피해내 다니……. ' 역시 이 남자는……. ' " 으앗! " 가인은 자신의 팔을 코마히코가 비틀자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 만 발버둥을 칠수록 코마히코의 꺽기는 한층 더 강해졌다. 가인은 팔이 끊어 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코마히코는 가인의 팔을 얽은 자 신의 팔이 풀리지 않도록 힘을 주며 물었다. " 기권……하시겠습니까? 일단 이 기술에 걸린 이상 당신은 빠져 나오지 못 합니다. 이대로 버티시다간 오른손을 못쓰게 됩니다. " " 으으윽! " 코마히코의 말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굳히기에서 빠져나오려고 발악하 는 가인. 코마히코는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 기권하실 생각이라면 손으로 바닥을 두들기십시오. " " 크으윽! " 그것을 보다 못한 마리가 소리쳤다. " 항복해, 가인! 그걸로 충분하다! 이제 그만해! " " 그래, 오빠! 제발 멈춰! " 유리가 비명을 지르며 울먹였다.안색이 창백해지면서도 시민은 고통에 일그 러지는 가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몸이 떨려왔다. 아니야.가인 씨 는…… 가인 씨는……. ' ……멈출 사람이 아니야. ' 시민은 차마 가인을 바라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코마히코는 자 신의 꺽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인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 기권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 " ……. " " ……할 수 없군요. " 코마히코는 자신을 노려보는 가인의 눈길에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손에 힘 을 주었다. 그리고 기묘한 파열음이 도장에 울려퍼졌다. 우드드드득! " 안 돼----------!!! " 마리와 유리의 비명! 그리고 시민은 감았던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는 코마 히코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도장의 바닥에 몸을 웅크리는 가인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 가, 가인 씨! "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쓰러진 그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망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에 한 가지 생각 밖에 할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인을 치료해야만 한다는 생각 밖에는! " 잠깐! " 그런 시민을 옆에서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브루스였다.시민은 다급한 얼 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 브,브루스 님! 왜 말리시는 거에요? 빨리 가인 씨를 치료하지 않으면! " " 애송이를 잘 봐라. " " ……예? " 시민은 그의 말에 천천히 가인을 돌아보았다. 연우에게 다가가던 코마히코 또한 믿을 수 없다는듯 가인을 돌아보았다.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오른팔이 기능을 상 실한채 축 늘어졌음에도. 가인은 천천히 그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장의 모두는 할 말을 잊었다. " 아직……끝나지……않았어. " 피투성이가 된 얼굴 사이로 가인의 눈빛 만은 한 치의 사그러짐도 없이 맹 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코마히코는 질린 얼굴로 그 시선을 마주했다.분명 정 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텐데! " 무엇이……무엇이 그리도 당신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까? " 코마히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가인의 기세에 자신도 모 르게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가인은 그 질문에 남은 왼팔을 들어올려 힘껏 주 먹을 쥐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 약속……했으니까! " 마리 선배의 무영신풍류! 지켜주기로! 결투가 끝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 하아……. 하아……. " 코마히코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주저 앉아 있었다. 그의 앞으로는 상체가 붉게 물든 한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한쪽 팔이 기이하게 비틀려 있는 것이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었다. 소년은 마치 죽기라도 한 건지 꼼짝도 하 지 않고 있었다. " 하아……. 하아……. " 코마히코의 모습 또한 낭패하기 그지 없었다.그의 검도복은 군데 군데가 피 에 젖어 검붉은 딱지가 굳어 있었고 그 옷 또한 흐트러져 이곳 저곳이 찢어 져 있었다. 전신이 땀으로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것도 한몫하고 있었 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옷에 묻은 피들은 모 두 앞의 쓰러진 소년에게서 묻은 것이었다. ' 끝난 건가. ' 그는 두려운 눈으로 쓰러진 소년을 내려다보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몸이 탈진을 일으킬 정도로 지쳐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 앉고 싶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때려도 때려도, 눕혀도 눕혀도 계속 일어나는 그 악착같음이라니! 코마히코 는 순수하게 자신이 상대했던 소년, 유가인을 존중했다. 그는 의지가 육체를 뛰어넘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아직 17세에 불과한 소년이 벌써부터 이와같은 강인한 정신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 하지만……아직 제 상대는 아닙니다. ' 코마히코는 애써 자신이 승리했다는 걸 강조하려고 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지독한 패배감에 빠져들 것만 같았기에. 이겼다고는 하지만 이건 전혀 이긴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이 그의 정신력에 압도되었다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었 다. ' 약속이라고……. '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걸까.코마히코는 이해할 수 없 었다. 유가인. 그는 마리를 지켜내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코마히코. 자신은 사부님을 지켜내기로 스스로 약속했었다. 둘 모두 똑같은 약속이건만 그와 자신의 약속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점이 있 었다. 그 차이점에서 이 같은 정신력의 차이가 나버렸다. 그 차이라는게 뭐지? ' 그와 나의 맹세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그 의문을 풀지 않고서는 이 지독한 패배감을 씻어낼 수가 없다! 코마히코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소년 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아마, 그 의문은 코마히코가 스스로 찾아내야 할 것이다. " ……! " 그때 코마히코는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는 무언가를 느꼈다. 설마! " 아직……이란 말입니까. " 코마히코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그의 발을 힘 없이 움켜쥐고 있 던 것은 다름 아닌 유가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았는 지 결투를 계속하려 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이미 정신이 없을 것이다. 단지 육체를 초월한 의지의 힘 만이 그에게 남아있었다. 그는 그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코마히코는 괴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그만하십시오. " 무엇이 그리도 당신을 움직이게 하고 있습니까? " 당신은 이미 졌습니다. " 당신과 나의 차이란 무엇입니까! " 이제 그만하란 말입니다! " 코마히코는 소리치며 자신의 발목을 움켜쥔 그의 팔을 떨쳐내려고 했다. 하 지만 이 다 죽어가는 소년의 손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코마히코는 그만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단지 힘 하나 없는 손아 귀가 발목에 걸터져 있을 뿐인데도 전신의 힘이 다 빠져버렸다. 코마히코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그에게 패했다고. " 거기까지다,애송이. " 순간 가인의 뒤로 떠오른 한 그림자. 브루스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 인의 뒷덜미를 수도로 가볍게 내리쳤다.그러자 간신히 의식의 끈을 잡고 있던 가인은 그만 고개를 떨어뜨렸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얼굴에 안식이 자리잡 기 시작했다. 마치 잠이라도 든 것 같은 얼굴이다. " 이 요령이라고는 없는 멍청이가. " 브루스는 딱하다는듯 혀를 찼다. 하지만 멍청이라고 칭한 것 치고서는 가인 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묘한 뿌듯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는 무언으로 가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수고했다고. " 코마히코라고 했던가? 네 녀석이 이겼다. 축하하마. " 브루스는 주저앉은 코마히코를 내려다보며 무감각히 말했다.그의 말에는 코 마히코에 대한 비웃음도 비난도 아무 것도 없었다. 순수한 축하였다. 하지만 코마히코는 굉장한 수치심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브루스의 축하가 그에게 있어서는 다시 없을 패배 선언으로 들려왔다. 브루스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회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 이대로 애송이를 죽게 내버려둘 셈이냐! 당장 준비해둔 포션을 가져와! " " 아……. " 그 말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는 모두. 그들은 방금까지만 해도 코마히코와 가인의 결투에 넋이 빠져 있었다. 특히 마리와 시민, 유리가 받은 충격은 말 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정신들 안 차릴 거냐! " 브루스의 일갈에 제일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시민이었다.그녀는 재빨리 준 비해놓았던 구급 약통에서 포션을 꺼냈다.그녀가 브루스에게 달려가자 그 뒤 를 이어 유리가 정신을 차렸다. " 오,오빠? " 유리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가인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그의 처 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깨진 이마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도장 바닥으 로 번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가인의 얼굴에 유리는 그만 현기증을 느꼈다. " 아! " 그녀는 쓰러질 뻔한 걸 시민의 옷자락을 잡고 간신히 버텼다. 시민은 사시 나무 떨듯 몸을 떠는 유리를 끌어안으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의 망신창 이가 된 모습에 그녀는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 자, 시민 씨. 유리 양은 저에게 맡기고. " 침중한 표정으로 다가온 진우가 시민에게서 유리를 건네받았다.유리는 여전 히 멍한 표정으로 가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시민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며 수중의 포션을 가인에게 주사하려 했다. 그때 브루스가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 잠깐. 이대로 포션을 주사하면 뼈가 어긋난 채 몸이 아물 거다. 일단 이 왼팔부터 손을 보겠다. " " 아,예. " 황망히 포션을 거두는 시민을 뒤로 하고 브루스는 가인의 부러진 팔을 잡았 다.그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다가 곧 가볍게 힘을 주며 그 팔을 비틀었다. 우둑! " ……! " 그 뼈를 맞추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이는 시민과 유리. 유리는 부러진 뼈를 맞춤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의식을 잃은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울음을 터뜨렸다. " 흑. 흐흑. 오빠……. " " 유,유리 양. " 진우는 유리가 서럽게 울기 시작하자 당황하여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유리 는 그야말로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소리내 울었다. 그 울음소리와 함 께 시민의 고개도 점점 무겁게 숙여졌다. 브루스는 유리의 울음 소리가 거슬 렸는지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 포션! " " ……예. " 브루스의 지시에 따라 가인의 왼쪽 어깨를 중심으로 포션을 주사하는 시민. 포션의 고압 주사에 가인의 몸이 덜컥 흔들렸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가인은 미동도 하지 않으며 시민의 품에 안겨 있었다. 미약한 숨 소리가 들리지 않 았다면 죽었다고 해도 믿을 상태였다. " 마리야. " 비영은 무거운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딸을 불렀다. 마리는 비영 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단지 가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가인……. ' 마리는 마음 속으로 그를 부르며 천천히 다가갔다.피투성이가 된 가인의 모 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우두커니 시민의 뒤에 서서 그 품에 쓰러진 가인을 바라보았다. 마리는 떨리는 손을 가인에게 가져가려고 했다. " 멈춰요! " 순간 시민의 외침에 마리는 행동을 멈췄다. 시민은 마리를 돌아보지도 않았 다. 하지만 그 등을 통해 그녀의 분노가 전해졌다. " 가인 씨에게 다가오지 말아요. " 차가운 시민의 목소리.마리는 가인에게 뻗던 손을 내리며 멍하니 시민의 등 을 바라보았다. 시민은 피투성이가 된 가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고개 를 숙였다. " 이 정도면……충분하지 않아요? 더 이상 가인 씨를 괴롭히지 말아줘요. " " ……. " 마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며 시민의 뒤에서 천천히 물러났다.붉게 충혈 된 눈으로 진우와 유리를 돌아보았다. 진우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 시선을 피 했고, 유리는 두 눈이 시뻘겋게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를 노려보았다. 마리는 다시 한번 가인을 돌아보았다. 결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향해 웃어보이던 그의 모습이 지금의 피투성이 가 된 모습과 겹쳐보이고 있었다. ' ……! ' 마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재빨리 문쪽으로 달려나갔다. 그 모습에 비영과 연우는 침음했다. 브루스는 짧게 한 숨을 쉬며 사라지는 마리를 바라보다가 시민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가인을 끌어 안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마리를 차갑게 대한 것과는 달리 슬픔에 잠겨 있었다. " 아,진짜! 결투는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벌써 한 시간 째잖아! " 도장의 바깥에서 결투의 결과를 기다리던 지연은 투덜거렸다. 그 옆에 있던 테레이아 역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굳게 닫힌 도장의 문을 바라보았다. " 저렇게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닫아놓았으니 엿볼 수도 없고……. " 가끔 가다가 도장에서 들려오는 기합 소리와 비명 소리를 듣는 게 전부였다. 그 소리 마저도 방금 전부터 들려오질 않았다. 승패가 가려진 걸까? 그렇게 지연과 테레이아가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문 주위를 서성거릴 때 재 영과 반 가인회는 열심히 자신들이 맡은 바 소행을 다하고 있었다. " 자. 자. 효험이 좋은 기원 모금함입니다.누구든지 소원을 빌고 이 모금함 에 복채를 넣기만 한다면 그 분의 소원은 이루어집니다∼ " " 유가인의 나락 행에 천원! " " 오! 천원입니까? 손님의 소원, 반드시 기원 모금함이 이뤄 줄 겁니다! " " 난 이 천원! " " 오오! 예쁜 아가씨의 복채!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 모금함을 든 재영에게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반 가인회의 남학생들과 성마 리 추종회의 여학생들이 복채를 기금하고 있었다. 그들의 꼬락서니를 바라보 던 지연과 테레이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듯 날쌔게 몸을 움직였다. 퍼억! 다음 순간 재영에게 통렬히 꽂히는 그녀들의 더블 펀치! 재영은 허공을 반 바퀴 선회하다가 반 가인회의 무리들과 뒤섞여 무참히 바닥을 뒹굴었다.쓰러 진 재영은 그 몸을 꿈틀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 크윽. 민체스터 양의 우호도는…유리 양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던가. " " 시끄러. " 퍽! 지연은 사정없이 쓰러진 재영의 머리를 발로 찍어 눌렀고,그는 완전히 의식 을 잃었다. 그 뒤를 서글픈 반 가인회의 외침이 뒤따랐다. " 회장!! " 쓰러진 재영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그들.지연은 그 모습에 혀를 차며 물었다. " 네 녀석들은 그렇게도 가인이 미우냐? " " 예! " 당연하다는듯 입을 모아 소리치는 반 가인회와 성마리 추종회. 지연은 왠지 눈 앞이 깜깜해져 무겁게 한 숨을 쉬었다. " 그래.그래. 가인이 미운 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왜 그렇게 가인이 결 투에 지는 걸 바라는 거냐? " "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저희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데 마리 선배가 유가인 녀석의 마수에 빠져드는 걸 어찌 지켜만 보고 있 겠습니까! " 어느 새 제 정신을 차렸는지 재영은 마치 지연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것 처럼 열성적으로 소리쳤다. 지연은 그런 재영을 가볍게 땅바닥에 때려눕히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 그·러·니·까! 왜 가인이 지는 걸 바라냔 말이냐! 어차피 가인이 지면 마리의 약혼자는 당연히 그 맞선남인가 뭔가하는 일본 남자가 되는 거 잖 아? 너희들은 가인만 아니면 마리가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다는 거냐? " 쿵! 순간 충격을 먹고 비틀거리는 반 가인회와 성마리 추종회.유미미는 몸을 떨 며 소리쳤다. " 그,그런! 그런 것이었나! 유가인이 지더라도 마리 양은 결혼을 해야만 하 는 것이었나! " " 계산 착오였어! 유가인 녀석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맞선남 자체를 잊어버 리다니! " 이제야 그걸 깨달은 거냐……. 재영과 반 가인회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 렸다. " 솔직히……가인보다는 맞선남이 차라리 나을 수도……. " " 그렇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유가인에 대한 질투심으로 그 몸을 살 찌웠으 니까요. " " 하지만……마리 양이 유부녀가 된다는 건 역시 싫은데 말이야. " 하여간 제멋대로인 인간들이다. 지연과 테레이아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어깨 를 추욱 늘어뜨렸다. 정말이지 이런 녀석들을 상대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 닌데 말이지. 쾅! 그때 거칠게 열리는 도장의 문.바깥에 있던 일행의 시선이 도장의 입구로 향했다.입구로는 그들의 모든 화제를 독차지하던 여인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성마리. 바로 그녀였다! 재영과 테레이아, 지연은 재빨리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 마리 선배! 어떻게 된 거에요? " " 선배 님! 가인은? 가인은 어떻게 되었죠? " 저벅.저벅.저벅.저벅. 하지만 마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들의 사이를 재빨리 지나쳐 가버렸다. 하지만 모두는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의 곁을 지나가던 마리는……. ' 울고 있었어? ' 자신들이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서로를 돌아보는 일행. 하지만 제일 먼저 정 신을 차린 지연이 테레이아를 향해 소리쳤다. " 얼른 마리를 따라가봐, 테레이아! " " 아, 예!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같은 여자인 테레이아를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연의 지시에 테레이아는 경황 중에도 마리의 뒤를 쫓아갔다. 지연 은 남아있는 재영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뭘 멍하니 있는 거야! 얼른 도장으로 들어가보자! " " ……! " 어떻게 된 거지? 결투의 결과는? 마리는 왜 울고 있었던 거지? 그 모든 궁 금증을 참지 못하고 지연과 재영 일행은 다급히 도장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때 열려진 문 앞으로 연우가 나타나 그들을 막아섰다. " 결투는 끝났습니다. 다들 돌아들 가십시오! " 탕! 간단히 자신이 할 말만을 하고 도장의 문을 닫아 버리는 연우. 남겨진 재영 과 지연들은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닫혀진 문을 바라보다가 곧 제 정신을 차 리며 소리쳤다. " 으악! 또야! " " 제발 적당히 해! " 하지만 닫혀진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마리는 26구역이 내려다 보이는 도장의 뒷산에 올라와 있었다. 예전 아인이 와의 약속으로 고목을 잘라낸 그 장소였다.그녀는 잘려나간 고목의 그루터기 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 난……이기적이야. ' 마리는 연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않으며 어깨 를 들썩였다. 피투성이가 된 가인의 모습이 눈 앞을 떠나지 않았다.코마히코 와 처절하게 결투를 벌이고 쓰러지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가 그 렇게 된 게 모두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몸을 가 눌 수가 없었다. ' 미안해. 미안해. ' 다신 가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그가 져서 자신이 코마히코와 결 혼 해야한다는 사실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단지 가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 처를 준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애초에 이렇게 될 것.순순히 어머니의 맞 선을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을. 결혼했으면 되었을 것을. 쓸데 없는 고집으로,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인을 다치게 해버렸다. 난 더 이상 그를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어! ' 아인아! '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어떻게 해야 가인에게 용서를 빌 수 있는 거지? 알고 있다면 가르쳐 줘! 제발 이 누나에게 가르쳐 줘! 마리는 이 장소의 어딘가에서 죽은 아인이가 자신을 힐책의 눈초리로 바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리는 터져나올려는 흐느낌을 참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가인이 너무 나 보고 싶었다. 그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다니! " ……. " 그리고 그런 마리를 조용히 뒤편의 수풀 쪽에서 응시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휘날리는 에메랄드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한 쌍의 초록색 눈동자. 테레이아 민체스터였다. ' 이렇게 쉽게……기회가 찾아오다니. ' 마리는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져 있었다. 지금이라면 오라 능력에 영향을 받 지 않고 그녀의 정신 속으로 침투하는 게 가능했다. 이것은 다시 없을 기회 일지도 모른다. " ……. " 리리스는 잠시 자신의 손에 들린 검붉은빛을 흘리는 마정의 핵을 내려다 보 았다. 그녀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한 여인의 얼굴을 떠 올리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 그래. 나는 밤의 여왕 리리스. ' 그것이 유메에게서 받은 이름! 리리스는 소리 없이 마리의 뒤로 다가갔다. 후우우우우 거세지기 시작하는 바람. 새하얀 히토에기누가 세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쿠 사나기는 한 고층의 빌딩에서 두 눈을 감고 있다가 씨익 미소지었다. 느껴지 고 있었다. 마정의 핵이 숙주를 찾아 자라나는 게. " 후후후후, 후후후후후후! " 쿠사나기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안광이 검붉게 물 들며 눈 가로 뱀의 비늘이 돋아났다. " 수고했다, 리리스. " 이 다음부터는 내가 맡으마! " 이로써 무영신풍류의 후계자는 코마히코 카구라가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장녀 성마리의 신랑이 되는 자격 역시! " 무영신풍류 도장에서 연우는 모두에게 선언했다. 모든 건 그녀가 원하는 데 로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녀는 좀 더 들뜨거나 흥분해야만 했다.그녀는 이겼으니까. 승리를 거두었으니까. " 아시겠습니까? 더 이상의 이의는 없습니다! "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승자의 여유를 찾아 볼 수 없었다.기쁨의 기색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모두에게 코마히코의 승리를 강조했다.그렇 게라도 하지 않았다간 스스로가 이겼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것 같았다. ' 큭! ' 그녀는 소리치는 것을 멈추고 잠시 분한 표정을 지었다. 쓰러져도 쓰러져도 계속해서 몸을 일으키던 가인의 모습과 그에 압도당하던 코마히코의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질 않았다. ' 코마히코, 바보 녀석! 그런 풋내기를 상대로 그 무슨 추태란 말인가! ' 풋내기였어! 일년도 채 검을 배우지 않은 미숙한 솜씨였다고! 그럼에도 불 구하고 수십년간 무영신풍류에 매진해온 코마히코가 그 기백 하나에 압도 당 하다니! 그렇게 속으로 제자를 질책하면서 연우는 마냥 코마히코를 나무랄 수 만도 없었다. 그녀 역시…… 가인이 보여준 투지에 압도당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 납득할 수 없어! ' 연우는 애써 그것을 부정하며 브루스와 비영에게 비웃음을 흘렸다. " 흥. 애초에 결과가 뻔히 보였던 승부. 사실 이런 결투를 벌일 필요 조차 없었지요. 유가인……이라고 했던가? " 그녀는 시민과 유리의 부축을 받고 있는 가인에게 싸늘히 말했다. " 예상 외로 분투해주었지만 코마히코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 그 말에 가인은 고개를 떨구었다.포션으로 치료를 받은 그는 언제 다쳤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지 찢어진 검도복과 말라붙은 핏 자국만 이 사투의 증거였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체력은 회복된 게 아니었기에 그의 얼굴은 피곤으로 지쳐 있었다. ' 져버렸어……. ' 가인은 질끈 눈을 감았다. 결국 마리 선배를……지켜주지 못했다. 가인은 너무나 분했다. 어떻게 해서든 지켜주고 싶었는데. 반드시 이기고 싶었는데. 하지만 자신의 능력은 부족했다. 그는 져버린 것이다. 반론의 여 지도 없이. 확실한 실력의 차이로. ' 마리 선배. ' 가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 도장에는 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실망했겠지. 그렇게나 큰 소리를 쳐댄 주제에 형편 없이 져버렸으니까. 아마 자신을 원망 하고 있을 것이다. 가인은 그녀에게 미움을 받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 그럼 마리 선배는……이대로 저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 건가? ' 가인은 코마히코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 했다. 비겁하게 난투전으로 끌어들였는데도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을 눌 러버린 것이다. 연우의 말대로 무영신풍류에 어울리는 것은 그 임이 틀림 없 었다. 그리고 마리 선배의 짝으로도……그가 더 어울렸다. ' 나 같은 녀석 보다는. ' 가인은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고개가 자꾸만 땅으로 떨어졌다. 그래. 그 래. 애초에 내가 저 남자의 상대가 될리 없었잖아. 이건 예정된 결과였어.당 연한 거라고. 분해할 이유도 자격도 내게는 없어. 그래. 당연한 건데……. ' 오라에 따라 빛깔이 변하는 목걸이야. ' 고개를 숙인 가인의 눈에 자신의 목에 걸린 푸른빛의 목걸이가 들어왔다.그 푸른빛에 마리의 쑥스러워하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 걸고 있는 사람을 지켜줄 거야. ……그거. ' 뜨끔. 가인은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숨이 막힐 정 도로 괴로워서 자신도 모르게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두 눈이 뜨겁게 달아올 랐다. ' 지금도 충분해. 넌 최고의 동료야. ' 해저 동굴에서 날 인정해주던 마리 선배. ' 나에게 어울리는 건 검 밖에 없어! 그래. 알고 있다고 그런 건! 그런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단 말이다! ' 평소의 강한 모습과는 달리 때때로 여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던 마리 선배. ' ……고맙다. ' 뺨을 붉히며 솔직히 고마움을 표시하던 마리 선배. ' 마리 선배는……정말 무영신풍류를 좋아하는군요. ' " 아? 아아, 음. 그래. 난 내가 무영신풍 류의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 무영신풍류를 정말로 사랑하던 마리 선배. 난 그런 선배에게 뭐라고 말했 던가? 뭐라고 약속했었지? 제길! 어째서 져버린 거야,유가인! 어째서! ' 내, 내 낭군이 되어줘! ' 가인은 마리가 자신에게 부탁했던 말을 떠올리며 목걸이를 움켜쥐던 손을 떨어뜨렸다.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요. 약속……. 지키지 못해서. ' 가인 씨. ' 그렇게 괴로워하는 가인의 모습을 시민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녀 또한 맘이 편치 않았다. 자신의 냉담한 말에 상처를 받고 도장을 나가던 마리의 모습이 잊혀지지를 않았다. 어째서 자신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왜? ' 지금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마리 양이었을 텐데……. ' 어쩌면 자신은 가인이 다쳤기 때문에 마리에게 화를 낸 게 아닐지도 모른다. 망신창이가 되면서도 마리를 위해 싸우던 가인. 그런 가인의 보호를 받는 마 리가 자신은 부러웠던 게 아닐까? 그녀를 질투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 할 때마다 시민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 다들 수긍하셨겠지요? " 연우는 입회인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말이 물어보는 거였지 어떠한 반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재빨리 이 결과를 마무리 짓고 마리와 코마히코의 결혼을 추진시키기로 결심했다.무영신풍류의 후계자가 되 는 코마히코의 모습을 본다면 이 찜찜한 기분도 금세 사라질거라 생각했다. 브루스도 비영도 가인도,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 았다. 연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전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코마히코의 목소리에 그녀의 표정이 유리조각처럼 산 산히 부숴져 버렸다. 연우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코마히코를 돌아보았다. " 뭐,뭐라고? " " 이 결투. 저의 승리가 아닙니다. " 코마히코는 짧게 답하며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자신의 말로 사부님이 어 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선했다. 예상대로 연우는 노기가 서린 얼굴로 소리쳤 다. "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 연우는 코마히코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평소 자신의 말을 한번도 거역 한 적이 없던 아이였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아이였는데! 어째서 이런 중요한 때에 빗나간 행동을 하는 거지? 어째서! " 이 사부가 농담을 싫어한다는 것, 잘 알지 않느냐? " " 어찌 사부님께 제자가 농담을 하겠습니까? 진담입니다. " " ……! " 연우는 이를 갈았다. 코마히코는 그런 사부의 모습에 죄스러움을 금치 못했 지만 이 순간 만큼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결투 상대였 던 가인을 돌아보았다. 가인은 뜻 밖의 사태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 승리란 육체도 정신도 상대를 능가했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 하지만 제 신념은 그의 신념을 능가하지 못했습니다. " 신념이 뭐가 어쨌다고? 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압도적으로 이긴 건 코마 히코였으면서……그는 어째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코마히코는 다시 연우를 돌아보았다. " 이것은 저에게 있어서 더 없는 수치입니다. 사부님은 이런데도 제가 승리 했다고 말씀하실 겁니까? " " 코마히코, 네 이 녀석! " 연우는 제자의 쓸데 없는 고집에 분노했다.육체가 패하면 정신 또한 따라서 패하게 되는 거다! 아무리 정신적인 승리를 거둬 봐야 육체가 패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 어째서 이런 고집을 부리는 거냐! 어째서! ' 연우는 코마히코의 고지식함에 한탄했다. 물론 그 고지식함 때문에 그를 아 끼는 것이기도 했지만 설마 이런 데에서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코마히코 는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사부 님. 하지만 저는……. ' 이대로 물러날 수 없습니다. 이건 사부님에 대한 제 마음과도 관계가 되는 것이기에……. ' 그의 맹세에 저의 맹세가 무릎 꿇어서는 안됩니다! ' 그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자신이 가인에게 정신적으로 압도당했던 이유.신 념을 관철시키지 못했던 이유. 그에게서 무엇이 밀렸는지 알고 싶었다.그렇 기에 코마히코는 가인과 다시 한번 대결하기를 원했다. ' 그의 신념을 뛰어넘기 위해! ' 연우는 코마히코가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는 걸 깨닫고 신음을 흘렸다.다 이 긴 결투를 또 다시 하겠다니! 네가 지금 제 정신이란 말이냐! 연우는 코마 히코의 어리석음이 원망스러웠다. 바보 녀석! 바보 녀석! 그때 카랑 카랑한 웃음 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터져나왔다. " 하하하하하하하! "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브루스가 웃고 있었다. 그는 코마히코가 마음에 든 다는듯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 좋아! 바로 그거다!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한다면 단순한 애송이 꼬마였겠 지! 진정한 승리란 육체도 정신도 상대를 능가해야 하는 거라고? 말 한번 잘해줬구나! " " 브루스 님! " 연우는 화를 내며 그에게 소리쳤다. " 코마히코를 부추기지 마십시오! 이미 끝난 결투입니다! 다시 재대결을 시 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 " 대결은 당사자들끼리 하는 거다! 네가 아무리 저 녀석의 스승이라지만 이 결투에서는 제 삼자일 뿐이라는 걸 알아야지! 무엇보다 저 녀석은 재 대 결을 바라고 있지 않느냐! " " 으윽! " 연우는 치를 떨며 코마히코와 가인을 노려보았다. 코마히코는 애써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아냈지만 가인은 그 표독스러움에 몸을 떨었다. 브루스는 의도 적으로 그들의 앞에 서서 연우를 가려주며 말했다. " 자자. 어때? 너희들도 지금 결투로는 만족하지 못하겠지? 무엇보다 떳떳 하지 못한 승부였지 않나! " " 예? " 코마히코와 가인은 서로를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솔직히 핸디가 많은 대결 이기는 했다. 일방적으로 가인에게 불리한 대결이었으니 코마히코도 결투내 내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 서로가 가진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결투! 결단코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결투! 너희들은 그것을 원하는 거겠지? 몸도 마음도, 심지어는 혼까지 서 로 부딪히며 겨루는 승부를 말이다! " " 그,그렇습니다! " 갈증에 목마른 사람이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 처럼 코마히코는 거세게 고개 를 끄덕였다.브루스는 진정한 승부를 원하는 코마히코의 순수한 마음을 잘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와 진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사악한 인간. 정말이지 사악해. ' " 그럼 브루스 님은 뭔가 좋은 방법이 있으시단 말씀이시군요? " 코마히코는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진지하게 물었다.그 옆에 있던 가인은 식 은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어이. 당신은 속고 있는 거야.넘어가는 것도 정 도껏 하라고. " 물론. 더 이상 일말의 불평도 없이 서로가 가지고 있는 동등한 것을 겨루 는 거다. " 며칠 전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한 패턴이잖아? 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 브루스의 말에서 귀를 떼지 못했다. 동등한 것이라니? " 그것은 바로! " 바로? " 오라 능력이다. " " ……. " 한 순간 도장을 감싸는 침묵. 그리고 연우의 분노가 폭발했다. " 그 무슨 억지십니까! 오라 능력은 이차원의 침략자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 해 필요한 힘! 인간 개인사에 사용되어져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그 능력 을 이용한 결투라니! 지금 브루스 님은 저 두 아이가 오라를 사용하여 서 로 피 흘리는 모습을 보시고 싶으신 겁니까! " " ……누가 오라로 서로 결투를 하라고 하더냐? " " 예? " 브루스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연우는 당황했다. 아니?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나? 브루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오라는 이차원의 침략자 몬스터에게만 사용되어야 할 힘! 그러니까 누가 몬스터를 먼저 그 오라로 쓰러뜨리느냐를 겨루는 거다! " " 예에에에엣?! " 이번에는 연우만 놀란 게 아니라 도장의 모두가 놀랐다.몬스터를 먼저 쓰러 뜨리는 걸 겨룬다고? 이 무슨 터무니 없는! 정말이지 브루스니까. 브루스이 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코마히코는 잠자코 생각하다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것이라면 서로 마음껏 자웅을 겨룰 수 있겠군요. " ' 동의하지마!!! ' 모두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브루스는 코마히코의 말에 만족스러운 웃음 을 띠며 가인을 돌아보았다. " 넌 어쩔테냐? 이 결투를 받아들일래? 아니면 다 포기하고 순순히 물러날래? " " 윽. "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포기하고 물러날리가 없잖은가! 무엇보다……. ' 다시 한번……기회가 생기는 건가. ' 마리 선배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그것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 받아들이겠습니다! " 가인의 대답에 브루스는 씩 미소를 지었다.그래.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다. 내가 만들어준 기회를 수포로 돌리지마! ' 이,이런 결투 인정할 수 없어! 뭐가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거냐! ' 연우는 브루스의 말에 코마히코가 놀아나는 게 화가 났는지 그를 향해 호통 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비영은 그녀를 제지했다. " 잠자코 지켜봅시다. 두 아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투를 하도록. " 연우는 비영을 노려보다가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더 이상 자신이 뭐라고 하든 일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브루스는 모두가 납득하는 것 같자 득 의 양양하게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정말이지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삐삐삐삐삐 그때 도장에 울려퍼지는 신호음. 피스 대원들이 끼고 있는 손목의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바로 몬스터가 발생했다는 신호! 모두는 그야말로 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다들 브루스를 돌아보았다. 브루스는 멍하니 시계를 주 시하다가 자신에게 주목되는 시선에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 ……난 아니다. " 그러니까 뭐가? 삐삐삐삐삐 한참동안 무전기의 신호가 울리고 있었다. 마리는 멍한 시선으로 전방을 주 시하다가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았다.그 곳에는 MONSTER라는 알파벳이 떠 오르고 있었다. 몬스터? 몬스터가 출현한 건가? " 아……. "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가벼운 현기증에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 를 둘러보았다. 뒷산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량한 수풀 만이 바 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 어떻게……된거지? ' 가인의 일로 울고 있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가 떠오르지 않 았다. 마리는 눈가를 매만졌다. 어느새인가 눈물이 말라 있었다.어라? 난 언 제 눈물을 그쳤던 거지? 눈물을 닦은 기억 같은 건 없었는데? 그녀는 인식을 할 수는 없었지만 무의식 중에 기억의 공백을 느끼며 혼란스 러워했다. 무슨 일이……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 는다. 삐삐삐삐삐 " 이런. " 마리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재빨리 뒷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분이 울적하더라도 울적한 것은 울적한 것이고, 피스 대원으로서의 의무는 의무인 거였다. 그녀는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늦어버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 그때 그녀의 목 뒷덜미로 흐릿하게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붉은 빛을 띄는 뱀의 비늘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며 그 위 에 AI슈츠를 착용했다. 큐우우우우웅 피스메이커의 광속 전차는 일곱명의 피스 대원을 태우고 빠르게 8구역을 통 과하고 있었다. 이번에 몬스터가 발생한 곳은 7구역. 목적지까지 앞으로 3 분 후면 도착할 예정이었다. 전차 안의 대원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 데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전투에 대한 긴장감이라기보다는 묘한 경쟁 의식에 서 오는 신경전이었다. ' 어처구니가 없어. ' AI슈츠를 착용한 가인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브루스의 뒷통수를 뚱한 눈 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전투에 대한 긴장감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지 태 연스럽게 곰방대를 물고 있었는데 어느 모로 보나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모 습이었다. ' 어떻게 몬스터와의 전투를 결투로 연결시킬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매번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가인으로서는 도저히 엄두 도 내지 못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브루스니까. 그 같은 강자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하지만……이렇게 라도 하지 않았더라면……나에게 기회란 없었을 테지. ' 그대로 코마히코에게 패한채 마리 선배가 떠나가는 것을, 그녀가 결혼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을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번 만큼은 승리해야 한다! ' 그래야……다시 마리 선배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을 테고. ' 가인은 자신의 앞에서 몸을 돌린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역에서 만났을 때부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심지어는 자 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시 연장 결투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 을 때도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나 자신에게 실망한 것일까……. 이제는 자신이 코마히코를 이긴다고 해도 마리가 기뻐해줄지 의문이었다.한 번 실망한 그녀의 마음을 무슨 수로 돌릴 수 있을까? 깊은 자괴감이 가인을 괴롭혔다. ' 일단……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 그것만이 그가 마리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가인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코마히코를 조심 스레 바라보았다. 그래. 이번에는 둘의 검술 실력을 겨루는 결투가 아니잖아? 단지 누가 먼저 몬스터를 해치우냐가 싸움의 승패를 좌우했다. 거기다 오라 능력을 사용하는 대결이다. 오라 능력에서만큼은 가인도 자신이 있었다.브루스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하 루도 빠짐 없이 받아왔고, 자신의 내부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오라에도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검술 보다는 자신이 있었다. ' 오라라면 나도 지지 않아! ' 가인은 헤븐 스매쉬를 착용한 오른 손을 움켜 쥐었다. 옅은 푸른빛이 스며 나왔다가 사라져갔다. 그때 자신의 주홍색 AI슈츠를 손보고 있던 코마히코가 가인을 돌아보았다. " 저, 유가인 씨 라고 하셨습니까? " " 예? " 뜻 밖에도 코마히코가 말을 걸어오자, 가인은 당황하며 헤븐 스매쉬를 내렸 다.코마히코를 바라보니 그는 가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 몸은 괜찮으십니까? 앞의 결투에서 본의 아니게 몸을 상하게 해버렸습니 다. 죄송합니다. " " 아,아뇨. 어차피 결투였는 걸요. " 가인은 그렇게 당해놓고도 속도 없는지 어설프게 웃었다. 그 사심없는 미소 에 코마히코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새삼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는 고등학생 소년을 상처 입혔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상호간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결 투였으니 그가 가인에게 미안해 할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가인의 선량한 얼 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사과를 하고 만다. 가인은 그런 코마히코의 복잡한 심정을 눈치챈 건지 화제를 돌렸다. " 그나저나 코마히코 씨……는 한국말을 굉장히 잘 하시네요? 전 처음에는 한국 사람이신가 착각할 정도였어요. " " 아, 예. 어렸을 적 무영신풍류에 입문하면서 부터 줄곧 배워왔습니다. 사 부 님이 일본어로 말씀하시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기에. " 코마히코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지금까지의 날카로운 이미지와는 달리 어 딘가 순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코마히코는 뭔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으로 창 가를 바라보았다. ' 그래. 사부 님 때문이었군. ' 자신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겠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 그것은 10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언제나 수련을 마치고 나면 연우는 제자들과 말도 없이 도장을 나가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문하생들은 다들 그녀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인식하며 대하기를 꺼려했다. 물론 코마히코도 별 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린 마음 에 그녀를 무서워하기 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날. ' 하앗! ' 늦은 시각에 우연찮게 도장을 지나가던 코마히코는 볼 수 있었다.어둠이 깔 린 도장에서 연우가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을.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빛이 어린 그녀의 모습은 어린 코마히코의 마음에 알 수 없는 감 동을 주었다. 그녀의 검은 그가 이제껏 보아온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으며……또한 그리 움의 빛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코마히코는 깨달았다.자신의 사부님은 먼 타 국에 남겨두고 온 자신의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그 그리움을 달 래기 위해 저렇듯 슬픈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걸. 그걸 알게되자 코마히코는 더 이상 연우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도리어 어떻게든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와 얘기하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더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녀와 얘기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녀의 차가운 모습 밑에 숨겨져 있던 따뜻한 마음과 무영신풍류에 대한 열정, 가족에 대한 사랑도 알 수 있게 되 었다. 연우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며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코마히코는 자신이 그 녀의 제자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이 연정(연정)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은 소년이 어른이 되고 난 후였다. 코마히코는 가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 이 소년의 마음도, 그때의 나와 마찬가지일테지. '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보내줄 수 없는 마음. 코마히코 는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인과 마리를 떨 어뜨리려고하는 자신의 행동에 회의를 느꼈다. '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 연우가 바라고 있는 이상,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이상 이 결투는 반드시 치뤄져야만 했다. 실수로 가인을 봐줄 생각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스 스로가 한 맹세를 잃어버리게 되기에. 연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거짓이 되 어버리기에. 코마히코는 약해질려는 마음을 붙잡으며 가인에게 말했다. " 저는……당신과 사부님의 따님에게 크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 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 " ……. " " 하지만. " 가인은 조용히 코마히코를 바라보았다. 코마히코의 목소리는 결의에 차 있 었다. " 이 승부를 양보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당신에게 당신의 정의가 있는 것 처럼 제게는 제 나름대로의 정의가 있으니까요. 저에게도 반드시 지켜 야할 약속이 있습니다. " " ……예. " 가인은 조금 전까지의 어설픈 모습을 지우며 진지하게 전방을 바라보았다.코 마히코 역시 가인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으며 전방을 바라보았다.서로에게 호 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애써 그것을 지워야만 했다. 그들은 싸워야만 했으니까. 지켜야할 약속이 있었으니까. 큐우우우우웅 전차가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ABF전개 완료. 시민들의 대피 또한 완료했습니다.》 《피스 대원들이 6구역으로 진입했습니다.게이트가 열리기 까지 앞으로 5분 남았습니다!》 《카운트 다운, 들어갑니다!》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에서는 오퍼레이터들이 분주히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오퍼레이터들의 치프 윤채영은 델타 위성이 보내오는 영상들을 모니 터링하다가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평소와 같이 진 사령관과 수정, 닥터가 스크린을 주시하며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 뭐,뭐지? 저 사람들은……. ' 그들의 옆으로는 왠 한복을 입은 부부 한 쌍이 당연하다는듯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채영이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얼굴 임을 미루어 보아, 피 스메이커 관계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 시티 유레카의, 그것도 가장 중축이라고 할 수 있 는 작전 본부실에 들어와 있다니! 도대체 사령관 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들 을 들여보내신 거지? 그 만큼 저들이 중요 인물들이라는 건가? " ……. " 한편 채영이 수상하게 여기는 부부, 성비영과 황연우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가인과 코마히코의 두번째 대결을 지켜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다. 그들이 작전 본부실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 는 무영신풍류와 피스메이커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무영신풍류는 오라 능력을 사용하는 두 명의 피스 대원을 배출해 낸 곳이다. 성마리와 코마히코 카구라. 거기다 그들이 사용하는 검술, 무영신풍류는 패턴 레드와 버밀리온의 능력 을 효과적으로 발휘시켜주는 귀중한 전력이었다. 그런 이유로 무영신풍류의 관장인 비영과 연우는 피스 대원들의 훈련 교관 을 겸하여 귀빈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번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선정도 피 스메이커에게 전혀 무관한 사안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무영신풍류의 후계자는 곧 피스메이커의 전력과 관계되는 일이니까. " 무의미한 대결입니다. " 연우는 비영을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그 말에 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무의미한 대결이지. 하지만 그 보다 더 무의미한 건 당신의 고집 이오. " " 흥! " 연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 지금 후계자를 가리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 아니. 후계자는 가려져야하지.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잖소? " " ……. " 연우는 상대하기 싫다는듯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비영은 그런 자신의 아내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사람은 스스로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할 때가 있다. 지금의 연우가 그러했다. 그녀는 아인이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그 외에 는 아무 것도 생각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자식을 원하는 슬픈 어미의 천성. 그것을 알기에 비영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깨닫길 바랄 뿐이다. 과거에 집착하다간 미래 까지 잃어버 릴 수 있다는 걸. 비영은 한탄하며 말했다. " 후회하게 될 거요. " " 아니. 후회하는 건 당신입니다. " 연우는 싸늘하게 비영의 말을 되받아쳤다. " 그 아이는 절대 코마히코를 이기지 못할 테니까요. 제가 단순히 코마히코 가 아인이를 닮았다고 해서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 줄 아십니까? " 비영을 돌아보는 연우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 코마히코의 진정한 힘은 오라 능력을 개방할 때에 드러납니다. 패턴 버밀 리온. 그 힘이야말로 무영신풍류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줄 힘! 무영신 풍류를 부흥시켜줄 힘입니다. " " 부흥……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 비영은 표정을 굳혔다. 그녀가 하는 말은 설마……. " 코마히코는 이미 무영신풍류의 삼대 오의를 터득했단 말입니다. " " ……! " 비잉비잉비잉비잉 그때 비영의 말을 가로막는 비상 경보음.그리고 긴장한 채영의 목소리가 작 전 본부실에 울려퍼졌다. 《게이트, 열렸습니다!》 " 결투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 유일하게 AI 슈츠를 착용하지 않는 피스 대원,브루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 인들에게 말했다.하지만 아무도 그가 말을 번복한다고 불평하지 않았다.그들 은 자신들의 눈 앞에 나타난 몬스터를 올려다 보았다. [끼에에에에엑]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을 뒤덮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인간의 여섯 배 정도 는 됨직한 괴수였다. 길고 뾰족한 악어와 같은 입에 빽빽하게 늘어선 날카로 운 이빨, 사자처럼 위로 솟아오른 코, 박쥐 처럼 가죽으로 된 날개가 한 쌍 등 뒤로 나 있었다. 또한 몸은 긴 털로 뒤덮여 있었고 꼬리 끝은 화살 촉과 같은 삼각형 모양이었다. 매의 앞발과 사자의 뒷발이 달려 있었다. 몬스터의 외양을 천천히 살펴보던 진우는 표정을 굳혔다. " B-급 몬스터 린드부름(Lindwurm)이다! " [끼에에에에엑] 괴성을 내지르며 몬스터, 린드부름이 날개짓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지상 으로 돌풍이 발생하며 먼지가 피스 대원들에게 날아들었다.가인과 모두는 돌 풍에 휘말리지 않도록 재빨리 도심의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 맙소사! 저건 와이번이잖아? " 가인은 린드부름의 모습에서 용장호의 와이번을 연상시킬 수 있었다. 분명 그때의 괴수보다 몸집도 작고, 생김새도 부분 부분이 달랐지만 같은 류에 속 하는 괴물이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시민이 상황에 맞지 않게 차분한 목소 리로 설명해주었다. " 와이번은 유성에서 이미지를 따온 비룡, 린드부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유럽 대륙에서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 '드래곤'이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다고 해요. 그러나 영국에서는 네 발 달린 것은 린드부름,두 발 달린 것은 와이번이라 부르며 엄밀히 구별하고 있죠. " " 굳이 구별할 것 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 가인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허공을 선회하는 린드부름을 올려다 보았다.과 연 그녀의 말대로 이 괴수는 와이번과는 달리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 며 덩치가 왜소해선지 약해보이기 까지 했다. 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이 몬스터는 지금까지와 달리 B-급인 것이다. 와 이번과 비슷하면 비슷했지 그 밑은 아닐 것이다.그 때문에 브루스도 더 이상 몬스터와의 싸움에 가인과 코마히코의 대결을 끌어들이지 않으며 냉정히 말 했다. " 몬스터의 섬멸을 최우선으로 한다. 지금부터 결투라느니 후계자라느니 하 는 말은 모두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라. 무엇보다 하늘을 누비는 녀석을 상대로 제대로 결투 같은 게 될 리 없다. " 그렇다. 일단 C급 이하의 몬스터라면, 그리고 지상에서의 싸움이라면 그가 제안한 결투가 성립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대원 들의 연계로 신속히 녀석을 섬멸하지 않았다간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섣부른 개인 행동은 금물이다. 브루스는 가인에게 외쳤다. " 애송아! 네 놈의 역할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 " 아,예. " 가인은 애써 침착히 고개를 끄덕였다.유일하게 원거리 전이 가능한 오라 능 력자. 그것이 자신이었다. 가인은 헤븐 스매쉬를 들어올렸다. ' 역시 천공권……인가. ' 그는 조심스럽게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를 바라보았다. 코마히코는 진지한 얼굴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가 가인과 눈이 마주치자 차분히 미소지었다. 혹시나 결투가 무산되고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에 그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이 일본 남자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인은 괜히 코마히코를 자신과 같이 속물로 취급한 거 같아 부끄러워졌다. 시민은 살며시 웃으며 그런 가인을 바라보다가 그 뒤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 껴져 고개를 돌렸다. 마리였다. 그녀는 가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시민이 갑작스레 자신 을 돌아보자 면목 없다는듯 눈을 피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숨을 내쉬었다. 마리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우는 일행의 주위를 환기시키려는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 자자∼ 지금부터 제 지시를 따라 움직여주시길 바랍니다! 일단 저 녀석을 하늘에서부터 끌어내리고 봅시다! " " 피스! " 일곱 명의 피스 대원들은 신속히 몸을 움직였다. 후우우우우우 린드부름은 도시의 건물 사이를 누비며 저공으로 비행했다. 본능적으로 수 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어디에선가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오라의 기 운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크륵] 이상하게도 그쪽에서 먼저 공격을 해오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괴물 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였다. 왜? 라는 의문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역시 기존의 몬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만의 지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빌딩의 옥상에서 잠복하고 있던 피스 대원들은 린드부 름이 자신들 쪽으로 접근해 오기만을 기다렸다. " 유리 양! 시민 양! 준비되셨습니까? " 진우는 자신의 뒤에 있는 유리와 시민에게 소리쳤다. 그녀들은 호흡을 가다 듬으며 자신 만의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패턴 옐로우와 핑크가 그 고유의 색 을 발산했다. [끼에에에엑] 빌딩을 지나치려던 린드부름은 확연히 느껴지는 오라의 흐름에 괴성을 지르 며 반응했다. 거세게 날개짓을 하며 선회 방향을 수정하는 몬스터! 그 바람 에 린드부름이 회전 축으로 삼은 빌딩의 유리창이 터져 올랐다. 허공에서 터 져오르는 유리창의 폭죽을 신호삼아 진우가 소리쳤다. " 지금입니다! " 라아아아아아아 시민의 입이 열리며 패턴 옐로우의 능력 페르마타가 흘러나왔다. 상대의 움 직임을 음파의 늘어뜨림으로 지연시키는 이 기술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 처럼 린드부름의 두 날개에 달라붙었다.린드부름은 날개가 달린 손의 움직임에 강 한 부하가 걸리는 것을 느끼며 당황했다. 파칭! 그 뒤를 이어 린드부름의 뇌를 파고드는 수 십개의 무형 바늘들. 패턴 핑크 의 능력인 재핑이었다.그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린드부름은 괴성을 지르며 몸 을 뒤틀었다.그러자 양력을 잃어버린 린드부름의 거체는 앞으로 날아가던 힘 에 이끌려 무서운 속도로 전방의 빌딩에 부딪쳐 갔다. 얄궂게도 피스 대원 들이 대기하고 있던 빌딩의 옥상이었다. " 2진! " 하지만 진우는 당황하지 않으며 근방의 빌딩으로 뛰어올랐다. 1진으로 린드 부름을 공격했던 시민 역시 유리를 껴안고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린드 부름이 그들이 있던 빌딩의 옥상을 긁으며 지나갔다. 콰지지지직! 린드부름의 육중한 거체에 층 자체가 박살나며 빌딩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린드부름을 향해 뛰어드는 두 명의 대원들이 있었다. 피스 레드와 피스 버밀리온! 무영신풍류가 배출해낸 두 명의 오라 능력자, 마리와 코마히코였다. 코마히 코는 등 뒤에서 허리로 바꿔 메고 있던 도츠카노츠루기를 뽑아 들었다. 그의 오라 능력 때문인지 주홍색의 검기가 아지랭이 처럼 그 검신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십악이 넘는 외날 직도로 옥상의 바닥을 긁으며 린드부름에게 달려들 었다. " 하아아아아아……. " 낮게 들이키는 심호흡. 그리고 시멘트를 긁는 거친 쇳소리. 그리고 코마히 코는 자신의 앞으로 날아드는 린드부름을 향해 도츠카노츠루기를 쳐올렸다. " 무영신풍류 삼식 격멸! " 푸카카카카칵! 순간, 코마히코의 앞으로 시멘트가 터져 오르며 날카로운 검강이 린드부름 의 한쪽 날개를 때렸다. 삼식 격멸은 패턴 버밀리온의 검기와 도츠카노츠루 기의 신력이 합쳐지자 마리가 펼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뿜어냈다.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날개를 향해 마리가 오라 소드를 휘둘렀다. " 이식 파쇄! " 붉은 폭풍이 날카롭게 린드부름의 날개를 가르며 지나갔다. 린드부름은 양 날개에서 녹색의 체액을 터뜨리면서도 그 움직임을 멈추지 못하고 옥상의 끝 자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피스 그레이 브루스와 피스 그린 정진 우의 3진이 린드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 뒤처지지 마라! " " 사부님이야말로! " 회색의 오라와 녹색의 오라가 그 둘에게서 소용돌이 치듯 터져나왔다. 그리 고 콘크리트를 부수는 거센 진각과 함께 전사경을 끌어올린다. " 칠성권 파군! " 투앙! 두 사제는 동시에 칠성권 제 7의 발경을 다가오는 린드부름에게 내리 꽂았 다. 그것은 그야말로 경기의 폭발이었다. 린드부름의 육중한 거체는 거짓말 처럼 반대편으로 퉁겨 올랐다. 그리고 브루스는 소리쳤다. " 이때다, 애송아! " " 흐아아아아압!! " 기합과 함께 뒤로 밀려나는 린드부름에게 뛰어드는 소년, 피스 블루 유가인! 그의 오른손에 장착된 헤븐 스매쉬의 코어들이 짙은 푸른빛과 함께 타올랐다. 전술작전부 작전국 제 1과 소속 정진우의 작전은 삼 진을 이용한 린드부름의 움직임 봉쇄와 피스 블루의 마무리였다. ' 간다! ' 가인은 린드부름을 향해 주먹을 내찌르며 오라를 개방했다. 天천 空공 主주 心심 拳권 천공권의 최종 진화! 적의 주심을 느끼고 그곳에서 오라의 토네이도를 발생 시키는 가인의 천공주심권이었다. 천공권의 시작점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기에 그가 터득해낸 기술! [끼에에에엑!]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무력화 된 것 처럼 보이던 린드부름이 놀라운 속도로 옥상을 두 다리로 박차며 뛰어오른 것이다. 그리고 린드부름 이 몸을 피했던 장소로 부터 오라의 소용돌이가 네 방향으로 뻗어올랐다. 투카카카칵! 그 거센 소용돌이의 여파에 몸이 휘날리면서도 가인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 고 망연자실히 서있었다. ' 피했……다? ' 지금껏 그 어떤 몬스터도 일격에 보낼 수 있었던 천공주심권이, 무적이라고 생각했던 천공주심권이……. " 이 멍청아! 뭘 하고 있는 거냐! " 멍하니 있는 가인을 향해 브루스가 노호성을 내질렀다. 지금껏 무패를 자랑 하던 천공주심권의 약점이 이번 기회에 드러나 버렸다.시작점을 조절하여 적 의 내부에서 토네이도를 터뜨리는 천공주심권은 분명 무시무시한 기술이었지 만 뜻 밖의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작점을 설정하고 토네이도를 생성시키는 사이에 존재하는 딜 레이였다. 천공주심권은 그 위력만큼이나 강대한 오라의 양이 끌어 모아야 했기에, 짧지만 무시못할 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텀 사이에 상대가 시작 점으로부터 몸을 피해버리면 천공주심권은 공격할 상대를 놓치게 되는 것이 다! ' 이런 터무니 없는 약점이 있을 줄은! ' 브루스는 이를 갈며 천공주심권의 여파로 터져오르는 기류의 폭발에 몸이 떠밀리지 않도록 견뎌냈다.거세게 휘날리는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허탈해 하 는 가인의 등이 보이고 있었다. 저 바보같은 녀석이! 기술이 실패했으면 재빨리 다음 공격을 준비해야지! 자신하던 기술이 실패했다고 넋을 놓는 꼬락서니라니! " 가인 씨! " 시민이 소용돌이 속에서 린드 부름의 움직임에 수상한 기미가 보이자 경고 하듯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거센 회오리 속에 묻혀 가인 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후우우우우우] 린드부름은 깊게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린드부름은 전투 능력에서 와 이번에 비해 뒤떨어졌지만 한 가지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가스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가벼운 가스 는 몸을 뜨게 하는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뼈가 변화해서 생긴 발화 장치를 이용해 하나의 강한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무기란 다름 아닌…… 탁 부리 끝에 있는 뼈의 돌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입을 통해 방출되 던 가스가 불꽃을 만들며 인화되었다! 푸화아아아아악! 강한 기세를 타며 린드고름의 입을 통해 폭염이 뿜어져 나왔다! 가인이 그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자신의 전신이 불꽃으로 뒤덮힌 뒤였다. " 으,으아아아앗!!! " " 오빠!!! " 유리의 비명소리가 찢어지듯 가인의 귀를 파고들었다. 가인은 불꽃의 압력 과 소용돌의 기세에 떠밀려 허공을 날다 반대측 건물로 떨어졌다. 그것을 바 라보던 진우가 이를 악물며 패턴 그린의 능력을 전개했다. " 젠장! " 치이이이이이잉! 잔향 소리를 내며 초록빛의 잔광이 허공을 갈랐다.진우는 그대로 허공을 달 리는 것 처럼 일직선으로 가인에게 나아간 후 그를 잡아챘다.미처 불꽃이 그 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진우는 다시 한번 가속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방향을 트는 것처럼 녹색의 잔광이 L자로 꺽이며 그대로 옆의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콰직! 녹색의 잔광이 사라지고 건물의 옥상에 무사히 착지한 진우의 두 발이 콘크 리트를 부서뜨리며 멈춰섰다. 그는 음속을 돌파하면서 불꽃이 꺼져버린 가인 의 몸을 옆으로 떨어뜨린채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뒤 늦게 가속을 풀은 데 다가 수십 미터 아래로 낙하한 충격이 합쳐져 그의 다리 뼈를 으스러 뜨린 것이다.아무리 AI 부츠로 각력을 높였다고 한들 그 속의 육체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이었다. 이런 결과는 어쩔 수가 없었다. " 네 녀석이!!! " 마리는 고함을 내지르며 린드부름에게 달려들었다. 가인을 다치게 했어! 괴 물에 대한 분노로 머리 속이 하얗게 타는 것만 같았다. 마리는 빌딩의 밑으 로 그 몸을 피하는 린드부름을 뒤따라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에 시 민과 유리가 비명을 질렀다. " 마리 양! " " 마리! " " 으아아아아아앗! " 마리는 자신의 몸이 수십 미터의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걸 느끼지도 못 하는지 기합과 함께 오라 소드를 치켜들었다.그러자 7미터로 늘어나는 오라 소드의 붉은 검신! 마리는 늘어난 오라 소드를 등에 짊어지며 낙하하는 린드 부름에게 선회했다. " 육식…… 활강! " 서걱! 회전하던 기세 그대로 미끄러져 내리며 몬스터의 두 발을 베어내는 그녀.린 드부름은 녹색의 체액을 흩뿌리며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끼에에에에엑!] 퍼억! 린드부름이 휘두르는 너덜해진 날개에 몸을 엊어맞고 마리는 빌딩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땅이 번갈아가며 시야를 어지럽히자 지독한 현기증이 밀려 들었다. 그때 그녀의 몸을 잡아채는 한 손길이 있었다. " 큭! " 낙하 방향과 반대로 몸이 멈추자 내장이 쏠리는 느낌에 마리는 신음을 흘렸 다. 그녀를 붙잡은 것은 빌딩의 벽에 가로로 붙어 있기라도 한 것 처럼 서있 던 브루스였다. 그는 예의 흡기공을 사용하여 건물의 벽을 위에서 부터 달려 와 마리를 받아낸 것이다.그는 무섭게 인상을 찡그리며 옆의 창문을 통해 붙 잡고 있던 마리를 안으로 집어 던졌다. 털썩! 거친 소리를 내며 건물의 복도에 쓰러지는 마리. 그녀가 충격으로 헛기침을 하며 괴로워하자, 그 뒤를 향해 브루스가 소리쳤다. " 이 바보같은 녀석이! 죽고 싶어 환장한 거냐! " " ……. " 마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라 소드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격한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브루스는 혀를 차며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지상으로 떨어져 피떡이 될 줄 알았던 린드부름은 용 케도 넝마조각이 된 날개를 움직여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스쳐지나가자 브루스는 옥상 쪽을 올려다보며 이 를 갈았다. 가인과 진우가 전투 불능이 된 지금, 옥상에는 시민과 유리 밖 에 없었다. 그는 재빨리 다시 옥상으로 뛰어가기 위해 용천혈로 기공을 끌어 모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믿고 맡길 녀석이 한 명도 없으니! ' ……아니, 한 명이 남아있었군! ' 도츠카노츠루기의 주인! [쿠에에에엑!] 린드부름이 옥상으로 솟구쳐 오르자 거센 광풍이 시민과 유리를 덮쳤다. 시 민은 유리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인상을 굳혔다. 아무래도 자제하던 그 힘을 다시 사용해야만 할 것 같았다. " 아……. " 하지만 그녀보다 한 발 앞서 외날의 직도를 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였다.린드부름의 그림자에 어두워진 옥상에서도 그 가 들고 있던 도츠카노츠루기 만이 선명한 주홍빛을 흘렸다. " 무영신풍류……. " 코마히코는 천천히 검을 허리의 검집에 갈무리하며 몸을 낮췄다. 가인과의 결투 때 보여줬던 발도술이었다. 시민과 유리는 숨이 막힐듯한 긴장감을 느 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상황에서 발도술을?! " 오의. " [끼에에에에엑!] 나지막한 코마히코의 중얼거림과 시끄럽게 귀를 울리는 몬스터의 괴성.그리 고 린드부름이 거세게 그들이 있는 옥상으로 활강했다. 시민은 전과 같이 몬 스터를 향해 페르마타를 사용하려 했지만 코마히코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 에 압도되어 행동을 멈췄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그를 도울 필요가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후우우우우우] 거센 심호흡 소리와 함께 린드부름이 코마히코에게로 입을 벌렸다.가인에게 사용했던 폭염의 준비 자세였다. 괴물은 그대로 코마히코에게 달려들면서 발 화 장치인 턱뼈를 서로 부딪혔다. 그리고 인화! 푸화아아아악! 거세게 날아드는 폭염! 그리고 코마히코의 몸이 움직였다. " 발파(發破) " 퍽! 단 한 번의 파육음. 불꽃이 갈렸다. 폭염이 갈렸다. 육신이 갈렸다. 그 모든 것이 정확히 이등 분되었다.린드부름의 육체에는 주홍빛의 선 하나가 세로로 그어져 있었다.그 선으로 천천히 녹색의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스릉 코마히코는 어느새 뽑아든 도츠카노츠루기를 천천히 검집에 밀어넣고 있었 다. 그리고 검막과 검집이 부딪히자 린드부름이 유지하고 있던 형상이 천천 히 무너져 내렸다. 촤아아아아악! 좌우로 이등분 되어 지상으로 떨어지는 육체. 하지만 놀랍게도 반으로 잘린 육체에선 어떠한 피도 쏟아져내리지 않았다. 코마히코의 검은 그 피 마저도 베어냈던 것이다. 시민과 유리는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하 며 멍하니 서있다가, 이윽고 지상에서 와이번의 육체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 에 정신을 차렸다. 등 뒤로 싸늘한 한기가 피어오른다. ' 이것이 피스 버밀리온……. ' 도츠카노 츠루기의 신력을 사용하는 오라 능력자! 반대편의 건물에서 막 진우의 포션으로 정신을 차리던 가인은 흐릿한 시선 속에서 코마히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자신과는 너무도 동떨어 져 보였다. ' 대단해……. ' 난……오라 능력으로도 그의 상대가 안 되는 걸까. " 여기는 피스 그린. 상황 종료. 귀환하겠다. " 지상으로 내려와 몬스터의 사체를 확인하며 진우는 무전을 쳤다. 그는 새삼 코마히코의 힘에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크라켄을 상대해낸 오라 능력자! 도 츠카노츠루기의 힘이 크다고는 하지만 실로 경이적인 실력이었다. ' 그에 비하면 우리의 소년은……. ' 진우는 쓴 웃음을 흘리며 시민과 유리의 부축을 받아 움직이는 가인을 돌아 보았다. 그는 폭염에 한번 휩쓸린 몸이라 전신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거 기다 폭염의 압력을 정면으로 받아선지 포션으로도 완치가 늦어지고 있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코마히코와 숯덩어리 같은 몰골의 유가인. 정말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아무리 결투를 뒤로 미뤘다지만, 이 상태로 보 아 굳이 결투 까지 갈 것도 없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결과가 뻔했다. ' 마리 양만 불쌍하게 됐군. ' 그는 마리를 돌아보았다. 뭔가 앞의 무모한 돌격도 그렇고 어딘가 정신적으 로 불안해 보였다. 그녀는 가인의 상태가 걱정되는지 연신 그를 돌아보면서 도 다가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 정말 이대로 저 둘의 결투를 강행하실 셈인가, 사부님은? ' 진우는 눈으로 브루스를 찾았다. 아마 그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생각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의 결투는 무의미하다고. " 어라? " 하지만 이제보니 어디에도 브루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신 거 야? 이 분은 또! " 이, 이제 괜찮아요. 시민 씨, 유리야. " 가인은 자신을 부축해주는 시민과 유리에게서 몸을 떼며 얼굴을 붉혔다.정 말이지 자신의 무능함에 한심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기껏 작전에서 가장 중 요한 역할을 맡았으면서도 실패한데다가, 천공주심권까지 실패해버렸다. 무 엇보다 코마히코와 자신의 실력이 그렇게나 차이가 심했다니. 오라능력 만큼 은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이건 뭐 비교도 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 오라 능력 만큼은 반드시 이기겠다고? 착각도 유분수지! ' 네 주제를 알라고, 유가인! 가인은 왠지 비참해져 억지로 불편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바람에 몇 발자국도 못 가 비틀 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 아, 가인! ' 마리는 가인이 쓰러지려하자 깜짝 놀라며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 보다 먼저 가인을 부축하는 이가 있었다. 시민이었다.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 으로 가인의 팔짱을 꼈다. " 그것봐요. 아직은 무리잖아요. " " 하, 하하……. 그러네요. " 가인은 어설프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코마히코의 앞에서 이렇게 약한 모 습을 보여야한다는 게 부끄러웠다. 시민은 그런 가인의 심정을 알겠다는듯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 무리하지 말아요, 가인 씨. " " ……시, 시민 씨? " 가인은 시민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하 지만 그녀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지 않으며 따뜻하게 말했다. " 가인 씨는 가인 씨 잖아요? 가인 씨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에요. 최선을 다해서. " " ……. " 가인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시민 씨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뭘 그렇게 초조해 했던 걸까? 자신이 코마히코의 상대 가 되지 못한다는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와의 실 력 차에 좌절할 이유가 없었다. ' 난……최선을 다할 뿐이니까. ' " 힘내, 오빠. " 유리도 가인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인은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 그래. 오빠가 칠칠맞게 걱정이나 끼쳐버렸네. 힘내야지! 힘! " " 후후훗. 그래요. 그래야 가인 씨 답죠. " 시민의 웃음에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지었다. 마리는 그런 가인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살며시 몸을 돌렸다. 가슴이 자꾸만 욱씬거렸다. 시민과 가인이 정답게 얘기나누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 난……그를 힘들 게만 할 뿐인데……. ' 시민은 가인에게 웃음을 주고 있었다. 자신은 그에게 시련만 주고 다치게 했는데, 그녀는 그를 위로하며 따뜻히 감싸안아주었다. 무엇보다 가인은 시 민을 좋아했다. 그리고 시민 역시……. ' 내가 끼어들 자리는……. ' 가인의 마음 속에 내가 있을 자리는……없어. 두근! 마리는 가슴을 쥐어 뜯었다. 마치 칼로 도려내는 것 처럼 가슴이 아팠다.마 리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츠렸다. ' 난 억지로 가인을 붙잡아둔 거야. 어차피 그의 마음은 나에게 없는 것을. 거짓 약혼이라는 하나 만으로……. ' 그에게 상처만 주고 있다. 두근! 마리의 AI슈츠 사이로 붉은 빛의 비늘이 흘러 나왔다. 그녀의 목 부근을 타 고 급속도로 비늘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는 자신의 변화를 느 끼지 못하며 회상에 빠져 있었다. 그 날 저녁. 가인과의 약혼을 아버지에게 승락받은 후, 그를 데려다주던 길 목에서 있었던 일.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 ' 마리 선배의 무영신풍류.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게요. ' 가인……. 그건……거짓말이었던 거야? 나와 했던 약속. 넌……. ' 넌……시민 씨를 좋아하잖아? ' 두근! 코마히코는 도츠카노츠루기를 허리에서 다시 등으로 바꿔 메며 작게 호흡을 골랐다. 아무리 자신이 신기(神器)에게 선택받았다지만 완벽히 신력을 다루 기에는 문제가 있었다.그것은 도츠카노츠루기에 대한 경계심도 한 몫 했는데 무작정 신기에 의지하려고 했다간 되려 신기에 혼이 묶이기 때문이다.그렇다 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으면 신기는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 경계가 상당히 모호했기 때문에 코마히코는 신력을 완전히 발휘해낼 수 없었다. 그나마 그가 도츠카노츠루기를 이 만큼이라도 다룰 수 있었던 것은 카구라 일족이 행한 주술적인 전승을 어릴 때부터 받아왔기에 가능한 것이었 다. ' 잡념이 서렸기 때문인가? 오늘따라 유독 신검을 다루기가 힘들군. ' 아마 그 결투라는 것에 집착했기 때문이리라. 코마히코는 가볍게 자신을 꾸 짖으며 오라를 가다듬었다. 도츠카노츠루기는 사용자의 오라에도 미세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언제나 평상심을 유지하지 않으면 멋대로 신력이 발동하게 된다.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했다. 우웅 " ……! " 그때 도츠카노츠루기가 '울었다'. 코마히코는 안색을 굳히며 검집에서 도츠카노츠루기를 뽑아들었다. 검신에 떠오르는 짙은 주홍 빛. 도츠카노츠루기가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의 적이 주 위에 나타났다고! ' 야마타노오로치인가? ' 설마! 벌써부터 그의 화신이 모습을 드러낼리가 없다! 코마히코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짙은 붉은 비 늘에 감싸인…… " 마리……양? " [우오오오오오] 그것이 울부짖자 짙은 먹구름이 회오리 처럼 하늘에 모여들었다. " 후후후후. 만족스럽군. 꽤나 훌륭한 숙주잖나! 역시 대단한 안목이야, 리 리스! " 쿠사나기는 팔란티어에 떠오르는 영상을 바라보며 흥분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의 앞에 떠있는 수정 구슬에서는 자신이 준비한 마정의 핵이 숙주의 힘을 빨아들여 그 싹을 틔우고 있었다. 리리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 영상을 조용히 지켜 보고만 있었다. 쿠사나기는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 저런. 저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군. 하긴 정들었던 인간들을 배신했 으니 마음이 아플만도 하지. " "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 리리스는 낮게 으름장을 놓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쿠사나기는 긴 소매로 입 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후후후. 이래뵈도 칭찬한 건데 말이야. 그대의 비정함은 충분히 매력적 이라고, 밤의 여왕 님. " 그는 붉은 눈가로 눈웃음을 쳤다. 그것이 꼭 뱀의 눈빛 같아서 리리스는 짙 은 혐오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쿠사나기 는 분명 초류향과 같은 요르문간드의 화신이었지만 초류향과는 그 질이 근본 적으로 틀렸다. " 어쨌든 이걸로 내 역할은 끝난 거겠지? 그럼 이만 가보겠어. " " 벌써? 마저 보고 가는 게 어때? 이제부터 재미있는 전개가 시작될텐데. " " 너의 악 취미를 함께 할 생각은 없어. " 리리스는 싸늘하게 쏘아붙이며 등 뒤의 날개를 펼쳤다.그녀의 눈이 잠시 수 정 구슬에 비친 마리에게 머물렀다. ' 애초부터 가져서는 안될 감정이었어. ' 난 바르의 별. 그들은 오라 능력자. 처음부터 그들과 자신은 가는 길이 틀 렸다. 이게 내 본분이고 이게 내 사명이다. ' 유메……. ' 내게 이름을 지어준 그녀. 그녀를 위해 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리리스는 슬픈 눈동자로 수정 구슬에 비치는 가인을 바라 보았다. 이후로도 계속 자신은 그의 곁을 멤돌테지만,이 순간을 기점으로 그와 자신의 길은 어 긋나 버렸다. 그리고 어긋난 길은 앞으로 다시는 마주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리리스는 세차게 날개짓을 했다. ' 안녕. ' 휙! 그녀는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며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사라져 갔다. 쿠사나 기는 그녀의 흔적을 눈으로 뒤쫓다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 정말이지 까탈스러운 여왕 님이로군. " 하긴.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가는 거지만. 수정 구슬에서는 마리가 막 가슴을 부여잡으며 변이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 다.그것을 바라보던 쿠사나기의 눈가가 한층 더 붉어졌다. 그는 격앙된 목소 리로 빠르게 소리쳤다. " 그래. 더! 더! 나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거다! 나의 검이 되어 네 동족 들의 피를 받아내고 너 자신 또한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거다!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 " 정신 없이 웃기 시작하는 쿠사나기. 그 얼굴로 다시 뱀의 비늘이 돋아나며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검은 먹구름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온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마정의 숙주가 자신의 수하로 변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가 준 비한 마정의 핵은 꽤 특별한 것이었으니까. " 여기 있었나? " 그때 쿠사나기의 뒤로 낮은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웃음을 멈 추고 천천히 뒤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권복을 입은 회색머리의 소년이 홀연히 나타나 있었다.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였다. 그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쿠사나기에게 말했다. " 흐. 꽤나 멍청한 짓을 해줬구나. 발각되는 줄도 모르고 팔란티어를 사용 하다니. 아니 기특한 짓이라고 해야 하나? " " ……. " 쿠사나기는 입맛이 쓴 것을 느꼈다. 초류향의 기억이 새삼 그의 머리 속으 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분명 팔란티어를 사용할 때 그 주위의 오라가 변동하 여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리리스도 함께 였는데……. ' 한 방 먹었군. ' 쿠사나기는 헛웃음을 흘렸다. 리리스. 그 여자는 분명 이것을 알면서도 자 신이 팔란티어를 사용하도록 방치한 채 홀로 자리를 피한 것이리라. 내키지 않은 일을 시킨 것에 대한 댓가라는 건가? 영악한 여자 같으니라고. " 크크크크. " 쿠사나기는 애써 멈췄던 웃음이 다시 터져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 어차피 한번 쯤은 만나리라 마음 먹고 있었다. 그것이 앞당겨졌을 뿐이지. " " 네 놈은……초류향이 아니군. " 브루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쿠사나기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쿠사나기의 눈가 가 한층 더 붉어졌다. " 그래. 내 기억 속에도 네가 있다. 그리고 초류향이 남긴 분노 또한 내 가 슴 속에 남아 있지. " " 비슈트라와 초류향에 이어 네가 세번째다. 요르문간드의 꼭두각시들을 처 리하는 건. " " ……! " 쿠사나기의 눈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새삼 브루스에게 당한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솟아오르는 분노에 비례하여 그 의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브루스는 콧방귀를 뀌며 자 세를 취했다. " 피차 쓸데 없는 말이 많았군. 와라! 먼저 간 녀석들의 전철을 밟게 해주 지. " " ……그 전에 잠시 여기를 주목하는 건 어때? " 쿠사나기는 브루스의 앞으로 팔란티어를 띄워 올렸다.그 수정구슬에는 마리 가 변이를 일으키며 몬스터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브루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쿠사나기는 비웃음을 흘렸다. " 일행과 떨어지지 말걸 그랬지? 하지만 이미 늦었어. 네가 돌아간다 한들 상황은 변하지 않을테니까. 아! 혹시 모르지. 너희들의 그 뜨거운 전우애 라든가 사랑이라든가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크크크크. " " ……. " 브루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 긴 회색 머리가 얼굴을 가려 표정을 읽 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 할 말은 그것으로 끝이냐? " 퍽! 순간 브루스는 자신의 앞에 떠있던 팔란티어를 재빨리 두번 걷어차 올렸다. 칠성권 승룡퇴였다.수정 구슬은 너무도 맥 없이 박살나며 그 유리 조각을 흩 뿌렸다. 쿠사나기는 그것을 어이없다는듯 바라보다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 네 녀석이! " " 조금 서둘러야겠다. 네 말대로 얼른 녀석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으니까. " 브루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강한 경기의 소용돌이가 그 주먹으로 모여들 었다. " 아, 그런데 말이야. " 막 쿠사나기에게 달려들려던 브루스는 그 답지 않게 미소지었다. " 네 놈은 얼마나 버틸 수 있지? " " ……! " 투둑……투둑…… 하늘을 뒤덮은 짙은 먹구름으로부터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 다.하지만 가인과 피스 대원들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마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우우우우우우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하늘의 먹구름 중 한 줄기가 지상으로 뻗어 내려와 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짙은 먹구름들 사이로 옅은 붉은 빛이 흘러나오자 가인은 신음을 흘렸다. " 이건……도대체? " [우오오오오오오!]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흉폭하게 울려퍼지는 괴수의 울음소리! 코마히코는 주홍빛을 발산하는 도츠카노츠루기를 들며 긴장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소리 쳤다. " 조심하십시오! 마리 양에게서 야마타노오로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습니 다! 도츠카노츠루기가 반응하고 있어요! " " ……! " 일행은 반신반의했다. 야마타노오로치? 도츠카노츠루기가 반응한다니? 뭐야, 그건?! 하지만 코마히코는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에게 부가 설명을 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빠졌다. ' 어째서 마리 양에게서 야마타노오로치의 흔적이 보이고 있는 거지? 그가 벌써부터 모습을 드러낼 리 없을 텐데! '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요르문간드의 화신 쿠사나기. 일본 지부는 확신하고 있었다. 8개의 화신을 가진 요르문간드는 바로 야마타노오로치의 재림이라고! 요 근래에 주인격 초류향이 피스 그레이에의해 소멸되자 일본 지부는 내내 쿠사나기를 주시해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부인격 중 하나인 쿠사나기가 주인 격으로 선택되는 날을. 주인격이 된 쿠사나기를 도츠카노츠루기가 쓰러뜨리면 전설에 따라 카구라 일족은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일본의 부흥을 의미 하는 것이기도 했다. 코마히코가 한국에 파견된 것은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문제도 있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야마타노오로치를 제거하는 것 이었다. 주인격이 된 쿠사나기를 제거한다면 야마타노오로치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테니까! ' 하지만! ' 하지만 쿠사나기는 고사하고 어째서 마리 양에게서 야마타노오로치의 그림 자가? " 아아…… 변하고 있어. " 유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마리를 뒤덮은 먹구름은 점점 하나 의 형상을 취해가고 있었다. 거대한 표범이었다. 짙은 먹구름이 회오리 처럼 그녀의 몸 주위를 돌아가며 그 사이로 붉은 비 늘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 두 눈은 패턴 레드의 불빛인지 아니면 마성에 사 로 잡혔기 때문인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챙 " ……! "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퍼지자 코마히코와 피스 대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 을 감싸안았다. 날카로운 예기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살이 베여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챙챙챙챙 " 윽! " 쇳소리가 점점 심해졌고 그와 함께 표범에게서 흘러나오는 예기도 한층 강 해졌다. 그리고 코마히코의 손에 들린 도츠카노츠루기가 격렬히 울음을 터뜨 렸다. 코마히코는 두 눈을 크게 떴다. ' 알았다. ' 도츠카노츠루기는…… 저 표범에게서 흘러나오는 예기에 반응하고 있었다. ' 도츠카노츠루기를 흥분시키는 건 야마타노오로치의 예기 뿐! ' 그렇다면 저 몬스터는 야마타노오로치의 화신 쿠사나기의 검! "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天叢雲劍)! " [우오오오오오!] 표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울음에 코마히코는 강렬한 반탄력을 느끼 며 도츠카노 츠루기를 손에서 놓칠 뻔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재차 닥쳐오는 반탄력에 떠밀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 삼종의 신기 중 하나라고 전해지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 ' 천상의 신 스사노오 노미코토가 전설의 마수 야마타노오로치를 죽이고 그 꼬리를 치는데,신들의 검인 도츠카노츠루기의 칼날이 뭔가 딱딱한 것에 부딪 혀 흠집이 생겼다고 한다.이에 놀라 꼬리를 갈라보니 거기에서 한 자루의 검 이 나왔다고 하는데, 야마타노 오로치의 머리 위쪽이 늘 구름에 싸여 있었으 므로, 그 모양을 빌어 검을 총운검, 무라쿠모노츠루기라 이름 지었다. '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 코마히코는 아츠타 신궁에 모셔져 있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를 본 기억 이 있었다. 그 전시되어 있던 검은 너무도 평범한 양날검이었다. 도츠카노츠 루기에 흠집을 내었다는 전설이 무색할 정도로 전시된 아메노무라쿠모노츠루 기에서는 어떠한 신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신검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 다. 그때는 단순히 수명이 다한 신검의 빈 그릇이라고 생각했는데……. ' 역시 진짜는 본 주인에게로 돌아갔었던 건가! ' 본 주인, 야마타노오로치에게로! 우우우우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는 깊게 호흡을 들이키며 몸을 낮추었다.그 모습에 본능적인 위기를 느낀 진우가 일행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피해! " 뭔가 터무니 없는 것이…… 막을 수 없는 것이 날아든다! 츠카카카카카칵 순간, 흑표범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수평방향으로 뻗어나왔다. 가인은 재빨 리 옆의 유리를 껴안고 위로 뛰어 올랐고, 시민과 진우, 코마히코가 그 뒤를 따랐다 즈컹 짤막한 단절음이 들렸다. 가인과 유리는 함께 지상에 착지하며 표범과 자신 들의 뒤를 번갈아 보았다.날카로운 뭔가가 날아들기에 엉겹결에 피하기는 했 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기운은 뭐였을까? 발 끝이 떨리 고 손끝이 차가워지던 그 기운은? 스스스스 그때 가인들의 뒤에 있던 건물에서 벽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이 알 수 없는 소리에 가인과 유리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 의 매장 중 옷 가게의 쇼윈도에 가는 금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그 금은 유 리를 따라 그 옆의 벽에, 그 옆의 건물까지 이어져갔다. 그리고 쇼윈도 안에 있던 마네킹의 허리가 미끄러지며 상체와 하체가 서로 분리되었다. 텅 마네킹이 떨어지는 소리. 그와 동시에 벽을 긁는 소리가 한층 더 심해졌다. 붉은 기운이 지나간 방향에 있던 가로등과 나무, 심지어는 고층 빌딩까지.그 모든게 무너지고 있었다. 저편에 착지했던 진우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 맙소사! 패턴 레드의 힘인가? " 쿠구구구구구구 거대한 굉음과 함께 나무들이 쓰러진다. 가로등이 쓰러진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표범의 몸에서 나왔던 붉은 기운의 정체는 패턴 레드, 성마리의 능 력인 절단이었다. ' 선배의 오라 능력을…… 몬스터가 사용한다? ' 가인은 망연자실하게 흑표범을 바라보았다. 몬스터가 되어버린 성마리의 모 습에서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배가 몬스터가 되어버렸다. 선 배의 힘을 몬스터가 사용한다. 그것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오빠! " 하지만 그에게 분노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 있던 모든 것 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의 다급한 외침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 린 가인은 자신들을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를 올려다 보며 숨을 멈췄 다. 10층에 가까운 빌딩이 자신들에게로 쓰러지고 있었다! 치이이이이잉! 그때 예의 잔향 소리와 함께 가속을 전개한 진우가 가인과 유리를 낚아챈 후 건물이 무너지는 범위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는 가인에게 버럭 소리쳤다. " 바보같이! 뭘 멍하니 있는 거야! " 쿠우우우우웅 그러나 그의 뒷 말은 건물이 무너지며 내는 굉음에 묻혀 버렸다. 귓청이 떨 어져 나갈 것 같은 소리! 뒤를 이어 거센 지진파가 가인들을 덮쳤다. 바닥이 균열을 일으키며 지반이 솟거나 가라 앉았다. 투카카카칵 흙 먼지와 함께 콘크리트의 파편들이 진우들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시민 이 재빨리 그 앞을 막아서며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입을 열며 공명음 전 개! 라아아아아 그녀와 진우 일행에게로 날아들던 파편들이 거대한 반원형 보호막에 가로 막힌 것처럼 도달하지도 못하고 가루가 되었다. 시민은 재빨리 뒤의 일행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일단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 " 아아. 그래! 일단 ABF의 바깥으로 몸을 피하자! " 진우는 가인과 유리의 어깨를 두들기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하지 만 그를 따르는 가인과는 달리 유리는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것 처럼 꼼 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흑표범으로 변한 마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마리……. ' 왜 몬스터로 변한 거야? 네가 몬스터로 변할 이유같은 건 하나도 없잖아? 유리는 그 동안 융합 형 몬스터들과 세 번의 대화를 가진 경험이 있었다. 그 리고 그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융합 형 몬스터들의 숙주가 된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병 들어 있었다는 것! ' 타인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에 목 말라했 던 사람들. ' 융합형 몬스터들은 이런 사람들을 자신들의 주 타켓으로 삼아왔다.그렇다면 이번 몬스터는 어째서 마리를 숙주로 삼을 수 있었던 걸까? ' 그렇게 오빠에게 보호받고, 오빠에게 가까이 있었던 그녀가 왜! ' 마리의 소망은 오빠의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었나? 나와 마찬가지로 오빠와 보다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게 아니었나? 그렇다면 오빠가 가짜라고는 하지만 약혼자가 된 상황에서 부족할 게 뭐가 있어! 그 정도로는 만족도 못 한다는 거야? 유리는 쌍심지를 돋구며 몬스터로 변한 마리의 사념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 가 마리에게 느끼는 것은 동정심이나 안타까움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분 노에 가까웠다. 마음 속으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난……그를 힘들게만 할 뿐이야……. 그? 오빠를 말하는 건가? 유리는 인상을 굳히며 마음 속으로 물었다. - 힘들게 한다니? 뭐가? 이번 결투 얘기를 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오빠가 마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잖아? 마리가 원하지도 않는 결 혼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 난……자격이 없어. 가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가인은 날 바라 봐주지 않아. - 바보! 누구는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유리는 화가 나서 마리에게 소리쳤다. 그녀의 소극적인 태도를 견딜 수가 없 었다. 마리의 말을 인정하는 건 결국 가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 게 되어버린다. - 나도 알고 있어! 나도 오빠가 시민 언니 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있 다고! 하지만 난 포기 안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겠어! 중요한 건 내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거잖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인위적인 게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 올지 알 수 없고, 좋아하게 되는 것도 싫어하게 되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 이 아니다. - 그렇다면…… 난 내 마음에 충실할 수 밖에 없어! 난 틀려! 틀리다고! 유리는 마리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비웃었다. 역시 오빠에 대한 그녀의 마 음은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였어! 마리는 유리의 말에 한 동안 침묵했다. - 만약……. 하지만 뒤를 이어 들려온 그녀의 사념에 유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 ……뭐? " 자신도 모르게 되묻는 유리. 그러나 마리의 사념은 이미 끊어진 뒤였다. 그 리고 아메노무라쿠모노츠루기에게서 다시 한번 붉은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츠카카카카칵! " ……! " 유리는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하고 흑표범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진우의 뒤를 따라 달려가던 가인은 그제야 유리가 자신들을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놀라 소리쳤다. " 유리야! " 안돼! 저대로는 유리가! 그러나 유리의 앞으로 코마히코가 뛰어들며 수중의 도츠카노츠루기를 역수 로 땅에 꽂았다. 그러자 검을 중심으로 마리의 검강이 좌우로 갈라지며 유리 를 빗겨나갔다. 코마히코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공격을 받아낸 것에 충격을 입었지만 이를 악물며 유리를 옆구리에 끼었다. " 실례하겠습니다. " 팟! 코마히코는 재빨리 유리를 데리고 진우들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유 리는 그와중에도 멀어지는 마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그녀가 마지막으 로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 만약……시민 씨도 가인을 좋아한다면? 시민 언니도…… 오빠를 좋아한다고? " 어째서 마리가, 왜……. " 작전본부실에서 스크린에 떠오른 마리의 모습에 연우가 비틀 거리며 중얼거 렸다. 그런 자신의 아내를 부축하며 비영이 날카롭게 수정들에게 소리쳤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수정 양! " " 마리 양에게서 몬스터의 양성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상황 보고 하세요, 채영 씨! " 수정의 명령에 채영은 긴장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피스 레드의 AI 슈츠를 구성하는 오리하르콘이 정신 감응을 정지했습니다. 마리 양의 오라 수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23! 22……! 그에 비례 하여 M타입 EX 반응은 상승합니다. 이건…….》 채영은 말문이 막혀 잠시 입을 닫았다가, 애써 목소리를 쥐어짜 소리쳤다. 《이건 개체 번호 412. 네번째 융합 형 몬스터 입니다!》 " 뭣! " 연우는 비명처럼 소리치며 스크린 앞으로 달려 나가다가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그 모습에 닥터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 설마 오라 능력자에게도 몬스터가 기생할 수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의 차 원 저항을 고려해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 " 패턴 레드의 면역 체계가 약해진 건가요? 무슨 이유로? " 아니. 그런 것들보다……. 그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공통된 생각. '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만 한단 말인가! ' 오라 능력자에, 그것도 피스 대원이 몬스터로 변해버렸다.이 전대미문의 사 건 앞에 모두는 할 말을 잊었다.유일하게 이차원의 존재에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피스 대원이 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렇게 일행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자 진 사령관은 결단을 내렸다. " 12월 9일 13시 50분을 기점으로 패턴 레드를 B+급 몬스터 '아메노무라 쿠모노 츠루기'로 간주한다. " " ……! " 그 말에 두 눈을 부릅 뜨며 진 사령관을 노려보는 연우.그녀는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그에게 소리쳤다. 그 어깨가 분노로 부들 부들 떨렸다. " 지금……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몬스터라니요! " 그녀는 부축해주는 비영의 손길을 뿌리치며 진 사령관에게 걸어갔다. 진 사 령관은 예의 선글래스를 낀채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연 우는 그의 앞에 있는 탁자를 두 손으로 내리쳤다. 탕! " 누가 몬스터라는 겁니까! 저 아이는 마리입니다! 당신들이 그토록 전장에 몰아 넣고 방패막이로 썼던 내 딸아이란 말이에요! 그랬던 것을 이제와서 몬스터라니! 써 먹을 만큼 써 먹어 놓고 이제와서 헌 신발짝 처럼 버리겠 다는 겁니까! " " 몬스터는 몬스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연우의 기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 사령관은 무감각히 말했다. 인간이라면 응당 있을 법한 감정의 동요가 그에게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그 냉정 한 태도에 연우의 입가가 짧게 경련했다. " 이……! " " 진정하세요, 황 교관 님! " 울분을 토할려는 연우를 재빨리 저지하며 진사령관의 앞을 막아서는 수정. 그녀는 사령관을 돌아보며 꾸짖듯이 소리쳤다. " 사령관 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마리 양 을 몬스터로 간주하다니! 그녀를 어떻게 구할지 방법부터 강구하는게 순 서잖아요! " " 지금껏 융합 형을 상대하면서 특별한 대안이 있었던가? " 진 사령관의 질문에 수정은 말문이 막혔다. 융합 형은 지금까지 네번 나타났었다. 처음으로 등장했던 건 한성 고등학교 의 운동회 날 가인의 클래스메이트였던 소녀에게서.두번째로 등장했던 건 아 트센터 한시민의 동창이자 소프라노 주세라에게서. 세번째 등장은 평범한 회 사직원. 그리고 네번째 등장은 바로 오라 능력자 패턴 레드 성마리에게서! 이 네 가지 상황의 공통점이라면 융합형이라는 것과 그 융합을 분리해낼 특 별한 대안책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운 좋게도 몬스터에게서 피해자 를 떼어낼 수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운이 좋았을 뿐. 요행일 뿐이었다. 진 사령관은 가장 냉정하게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 아……. " 연우도 자신의 딸을 구해낼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천천히 책상에서 미끄러졌다. 그녀의 손이 힘 없이 탁자에서 흘러 내렸다.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던 진 사령관은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게 황 교관 님이 바라시던 상황이지 않습니까? " 연우는 힘 없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바라다니? 그게……무슨 소리지? " 패턴 블루와 패턴 버밀리온의 대결. 몬스터로 변한 패턴 레드를 무영신풍 류의 후계자가 구해낸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구도로군요. 애초에 교관 님 에게서 패턴 레드의 안위는 관심 밖이었으니까. " " 진 사령관 님! " 그 말에 수정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말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다.연우가 마 리의 의사를 무시하고 후계자 대결을 벌이는 게 그들로서도 좋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렇듯 신랄하게 비아냥거리다니. " ……. " 연우는 무릎을 꿇은채 멍하니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비영은 천천히 그 옆 에 무릎을 꿇으며 아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연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크린에 떠오르는 마리를 바라보는 그 얼굴은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 사령관은 비영 부부에게서 채영에게로 눈을 돌리며 명령했다. " 상황은 A-로 설정. 피스 대원들에게 아메노무라쿠모노츠루기의 섬멸을 명 령한다. " 《아…….》 채영은 다급히 진 사령관을 돌아보며 신음을 흘렸다. 도저히 명령을 철회할 사람이 아니었다, 진 사령관은……. 이대로 그의 명령을 피스 대원들에게 전 해야만 하는 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채영은 수정과 닥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 이라고 별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때 작전 본부실의 스피커로 한 소년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그 명령은 따를 수 없어요!》 " 앗! " 채영과 모두는 깜짝 놀라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피스 블루 유가인 의 무전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가인 씨! 무전기를 켜놓고 있었던 건가! 그 는 지금까지의 얘기를 모두 들었던 건지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진 사령관은 스크린의 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단 말인가? " 가인은 그를 노려보다가 단호히 입을 열었다. 《방법은……있어요!》 " 유리야! " 6구역. 가인은 자신의 옆에 서있는 유리를 돌아보았다. 유리는 그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전기에 말했다. " 희미하지만 마리의 사념이 느껴져. 지금은 몬스터의 사념에 가로 막혀 있 지만 계기가 있으면 그 속으로 접속할 수 있을 거야. " " 그 계기를 내가 만든다! "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진우와 시민, 코마히코가 근심 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마히코는 ABF를 경계로 자신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아메노무라쿠모노츠루기를 바라보며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 하지만 정말 가능한 것입니까? 그 방법을 실행시키기에는 불안한 요소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건 도박이에요! " " 그래요, 가인 씨. 가인 씨의 위험 부담이 너무 커요. 만약 실패하는 날에 는 마리 양은 물론이고, 가인 씨 또한 온전치 못할 거에요. " 시민의 말에 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피스 대원의 전술을 담당하는 리더로 서 그 역시 이 방법이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리더의 입장이 아니라면 자신도 가인의 방법을 주저 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 가인은 이를 악물며 마리를 돌아보았다. 붉은 비늘과 짙은 먹구름에 뒤덮인 그녀에게서 옛 모습을 찾기란 무리였다. 가인은 약해질려는 자신을 꾸짖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 이런 일로……선배를 잃을 순 없어요. 이런 일로! " 무엇보다 자신은 아직 그녀에게 웃음을 찾아주지 못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 했다. " 여기서 물러설 순 없어! " 가인은 유리를 돌아보며 외쳤다. " 준비는 됐겠지? 유리야! " " 응! " 유리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마리에게 사과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녀의 진심을 알지 못하고 이기적이라 비난했었다. 가인을 생각하는 마리의 마음 역시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그녀의 모습 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던 건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줘 버렸다. ' 반드시 마리를 구해내겠어! ' 그녀에게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니까! 진우는 그런 가인과 유리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 숨을 쉬며 옆의 시민을 돌 아보았다. 그녀 역시 할 수 없다는듯 진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코 를 매만지며 히죽 웃었다. " 좋아! 그럼 그 길은 우리가 열어주마! " [우우우우우] 몬스터의 낮은 울음 소리가 질척한 비 사이로 울려퍼졌다.가인과 유리는 최 대한 숨을 죽이며 육교 위에 몸을 숨겼다. 쿵! 쿵! 쿵! 쿵!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가 한 발 한 발을 내딛을 때 마다 그 여파로 거리 가 진동했다. 그것은 육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발 밑의 괴물이 자 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길 빌었다. 쿵! 쿵! 쿵……. 순간, 육교의 밑을 지나가던 몬스터가 걸음을 멈췄다. 가인은 녀석의 발 소 리가 끊기자 마른 침을 삼켰다. 젠장. 잘 가더니만 왜 갑자기 멈춰서는 거야? ' ……들킨 건가? ' 벌써부터 들키면 안되는데! 가인의 옆에 있던 유리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 고 그의 손을 꼬옥 움켜쥐었다. 그들의 AI슈츠는 푸른색도 핑크색도 아닌 검 은 색을 띄고 있었는데, 그것은 몬스터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최대 한 오라를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쿵! 쿵!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몬스터는 다시 발걸음을 놀리며 육교를 벗어나기 시 작했다. 조심스럽게 밑을 내려다 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 몬스터가 다른 피스 대원들에게 시선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나와 유리가 마리 선배의 사념에 접촉한다. ' 가인은 슬쩍 옆에 있는 유리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 기에게 잠식당하고 있는 마리의 사념을 일깨우는 건 유리 하나면 족했다. 굳 이 가인이 따라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패턴 블루가 대 괴수 전에 유리하 다는 점을 고려해볼때 그는 몬스터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역을 맡는 게 효율 적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강력히 가인이 자신과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 도대체 유리는 왜 날 데리고 온 거지? ' 그런 가인의 의문은 뒤이어 들려온 유리의 마음 속 목소리에 풀렸다. - 오빠. 이번 마리와의 접속에는 오빠가 반드시 필요해. - 뭐? 마음 속으로 들려온 그녀의 말에 가인은 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반드시 필 요하다니? - 마리의 사념을 일깨울 수 있는 건 오빠 뿐이야. 일단 마리의 정신과 반발 이 제일 적을 사람이 접속하는 게 좋거든? 무엇보다……마리가 저렇게 된 데에는 오빠도 책임이 있어. -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가인은 이해하지 못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유리는 굳이 설명히지 않았다.마 리가 가인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 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걸 설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걸 설명하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다. 마리와 가인. 두 사람의 몫이었다. - 어쨌든, 내가 오빠와 마리의 의식을 연결하겠어. 그러니까 오빠는 꼭 마 리를 설득해서 데리고 와. - 그런……. 유리의 막무가내 식 요구에 가인은 작게 한 숨을 쉬었다.의식을 연결한다느 니 설득을 해야한다느니 알 수 없는 말 투성이였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일을 유리가 아닌 자신이 하게 됐다 는 것이다. ' 서로의 의식을 연결한다니……. 그런게 가능한 거야? ' 가인은 지금껏 유리가 직접 타인의 사념과 접속하는 것은 봐왔지만, 타인과 타인을. 제 삼자들의 정신을 서로 연결시키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아니. '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사용한 이는 유리가 아닌……. ' ……피스 카민? ' 그렇다. 분명 그의 능력이었다. 유리와 같은 능력을 가진 소년,마유빈! 마 인드 브레이커! 그가 자신과 마리, 유리를 가상의 정신 세계로 끌어 들인 적 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유리는 그것을 사용하려는 걸까? - 유리야! 너 설마! 가인은 다급히 유리의 어깨를 짚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는지 알겠다는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응. 그래. 바로 그 방법이야. 하지만 걱정하지마. 의식 공유는 마인드 브 레이커 만의 능력이 아니니까. 유리는 불안해하는 가인을 올려다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 깨를 짚고 있는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작은 손을 겹쳤다. - 난 마인드 키퍼.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게 나의 사명이야. 난 이 능력으 로 마리의 마음을 구해내겠어. - 유리야……. 가인은 소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리는 유빈과 는 틀리다. 유리의 오라는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힘이야! 유리가 날 믿듯 나도 유리를 믿어줘야해! 츠카카카칵! 그때 저편의 골목에서 붉은 검기가 뻗어나오며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가인 과 유리는 육교에 숨기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진우와 시민, 코마히코가 몬 스터의 주의를 끌기 시작한 모양이다. 가인은 유리를 돌아보며 외쳤다. " 가자, 유리야! " " 응! " 선배를 녀석에게서 되찾아 오는 거야! " 칫! " 진우는 날아드는 붉은 색의 기운들을 피해내며 옆의 벽을 밟고 가로등의 위 로 올라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피스 옐로우와 피스 버밀리온의 상황도 자신 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오라의 기척을 죽이며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 기가 자신들에게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기습을 감행했다. 애초에 자신들이 맡은 역할은 몬스터의 주의를 끄는 일 뿐. 기습은 예정에 없었다. 뒤는 가인과 유리에게 맡기기로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습이 성공 하면 그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생각으로 기습을 시도했는데 역시나 이 마수는 급조한 기습이 통할 정 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즈컹! 그때 진우가 딛고 있던 가로등이 마수가 내뿜는 검기에 깨끗히 잘려나갔다. 진우는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하는 가로등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 제길! 어쩔 수 없나! ' 그는 시민과 코마히코를 돌아보며 외쳤다. " 이단계 작전! 들어갑니다! " 칭! 칭! 치이이이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우의 몸은 녹색의 잔상을 뿌리며 가속했다. 촤자자자작! 진우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수직의 검기들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박 살나는 도시의 거리들. 진우는 아슬 아슬하게 검기를 피해내며 몬스터의 측 면으로 돌아 들어갔다. 일단 몬스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은 다음! 라아아아아아아! 시민의 공명음 공격! 몬스터의 안에 있는 마리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기에 공명음은 몬스터의 사방(四方)에서 터지는 것으로 그쳤다. 하지만 그것 만으 로도 몬스터의 시야를 가리기에는 충분했다. 그 틈을 타서 코마히코의 도츠카노 츠루기가 위용을 발휘했다. " 하아아아앗! " 그대로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앞에 신검을 내리 찍었다. 그리고 피스 버밀리온의 양 어깨의 갑주가 열리며 핏빛 문자가 새겨진 노란색의 부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적은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몬스터의 전신에 달라붙었다. " 눈을 떠라, 아메노오오바리! 그 눈에 닿는 이는 멈출지어다, 아카가카치! " 덜컥! 순간, 도츠카노 츠루기의 양홍빛이 부적들에게 번지며 그 주위로 진법이 펼 쳐졌다. 그와 동시에 부적에 휩싸인 표범의 몸도 정지했다. 코마히코가 사용한 것은 도츠카노츠루기의 신력을 밀법의 힘으로 발동시키 는 술법이었다.도츠카노츠루기에게 옛 이름을 상기시켜서 신의 강한 눈빛,아 카가카치로 요괴를 속박하는 것! 카구라 일족은 신검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여러가지의 비법들을 연구 해왔는데 지금 사용한 아카가카치도 그 중의 하나였다. " 좋았어! " 몬스터가 움직임을 멈추자 진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하지만 코마 히코는 수인을 풀지 않으며 경고했다. 강한 반발력이 그의 주술을 밀어내고 있었다. " 이 상태로는 얼마 견디지 못합니다! 빨리 피스 블루와 피스 핑크를! " 그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가인과 유리가 재빨리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에 게 달려왔다. 유리는 서둘러 마리의 정신에 접속하기 위해 오라 능력을 전개 했다. 핑크 빛의 오라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우우우우 " ……? " 그때 그들의 뒤에 있던 시민의 표정이 굳어졌다. 몬스터에게서 심상치 않 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조심해요, 가인 씨! 유리 양! " 츠카카카카칵! 하지만 미처 그녀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몬스터를 감싼 부적들이 갈기갈 기 찢겨지며 붉은 검기의 난무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그야말로 주위의 모 든 것을 난도질했다. " 으,으아아앗! " 가인은 재빨리 유리를 끌어안고 엎드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살벌한 파공성 이 스치듯 지나갔다. 몬스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패턴 레드의 힘은 마치 붉 은 거미줄 처럼 수십 가닥으로 얽혀서 가리는 것 없이 다 베어냈다. 순식간에 부근에 있던 건물들이 밑둥채 잘려나가며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구구! " 젠장! 실패인가! " 진우는 그 답지 않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가속을 전개했다.그러자 눈에 보 이지 않을 정도로 날아오던 검기들이 거짓말 처럼 느려졌다. 하지만 눈에 보 일 정도로만 느려졌다는 거지,결코 굼벵이 처럼 느려졌다는 건 아니었다. 맙소사. 아무리 음속의 벽에 닿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가속 상태에서 이 정 도의 속력이라니! 실제로는 저 검기의 빠르기가 얼마나 된다는 소리야? 진우는 패턴 그린의 힘을 사용하게된 이후 처음으로 상대의 빠르기에 감탄 해야만 했다. '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 내가 이 정도라면 다른 대원들이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진우는 도츠카노 츠루기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코마히코 보다는 가인과 시민들을 신경쓰기 로 했다. 치이이이이잉! 가속을 전개해서 시민을 잡아챈 그는 복잡하게 날아드는 붉은 검기의 선들 을 피해냈다. 자신 혼자라면 음속의 벽으로 가볍게 피해낼 수 있었겠지만 시 민과 함께 가속을 하는 지금, 그런 짓을 했다간 그녀의 몸이 견디질 못한다. 촤악! 촤악! 촤악!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검기에 사각이란 없었다. 더구나 엄폐물도 소용 이 없었으니 진우는 녀석이 공격을 멈출 때까지 끊임 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가인과 유리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파칭! 그때 최악의 상황이 그를 찾아왔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속이 풀려버 린 것이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 한계 시간을 초과했나! ' 진우의 가속 능력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가속 능력을 육체 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뇌의 시계 주파수를 올리는 건 가능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육체가 없다. 간신히 AI슈츠로 몸의 강도를 올려서 가속 체감 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었지만 대신 한계 시간이라는 폭탄을 안게 되었 다. " 으으으윽! " 진우는 전신을 엄습해오는 가속의 부작용에 땅을 구르며 괴로워했다. 아직 몬스터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건만, 그에게는 방어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때 시민이 진우의 앞을 막아섰다. " 시, 시민 씨! " " 저에게 신경쓰지 말고 어서 포션을 주사해요! " 그렇게 일갈하며 시민은 자신들에게 날아드는 붉은색의 검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라아아아아 라아아아아 그녀의 입으로 두 가지의 음파가 동시에 흘러나온 것이다.피스 옐로우의 능 력 중 하나인 '에코(ECHO)'였다. 한 번에 두 가지 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었 다. 시민이 지금껏 이 능력을 자제해 왔던 것은 성대와 폐에 상당한 무리가 가 기 때문이었다. 에코란 것은 음파의 반사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반사란 파동 이 한 매질(媒質)에서 다른 매질로 전파(傳播)해 갈 때 경계면에서 일부 파 동이 진행방향을 바꾸어 원래의 매질 안으로 되돌아오는 현상을 말한다. 그녀는 패턴 옐로우의 능력으로 자신의 성대와 폐를 매질로 삼아 음파를 반 사시켜 에코를 발생시킨 것이다. 폐를 매질로 삼아 탄성파(彈性波)를 전파시키는 것이기에 평소에는 절대로 사용해선 안되는 기술이기도 했다. 폐의 흡기와 호기가 계속되는 진동에 주 기를 잊어버려 호흡 자체가 멈출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사용하게 되면 에코는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라아아아아 일단 첫번째 목소리로 시민은 진우에게 포르만트(Formant)를 사용했다.포르 만트에는 음정의 주파수 세기 분포를 조정하여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능력이 있었다.그로인해 진우는 고통에 무감각해져 한결 수월하게 포션을 주 사할 수 있었다. 라아아아아 그리고 두번째 목소리는 자신들에게 날아드는 검기를 향해 사용했다.그녀는 음파로 공기를 진동시켜 검기를 이끄는 바람의 궤도를 바꿔낸 것이다. 공명 음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물체에 사용할 때 만큼은 위력이 나오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촤자자자작 시민과 진우를 빗겨나간 검기는 아슬아슬하게 근처의 빌딩을 가르며 지나갔 다. 시민은 튀어오르는 보도 블럭의 파편들을 손으로 막아내며 거칠게 기침 을 토해냈다. 아주 아슬 아슬한 순간에 에코를 중단시켰다. 하마터면 흉강과 폐가 축소된 상태에서 멈춰버릴 뻔 했다. 그녀의 뒤에서 몸을 회복시키던 진우는 분한 마음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 제길! 이럴 때 도움이 안되면 어쩌자는 거야! ' 그는 자신의 한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패턴 그린은 인간 형 몬스터를 상 대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이다. 한편 피스 버밀리온의 상황 또한 진우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메 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공격을 도츠카노 츠루기로 간신히 막아내고는 있었지 만, 마리를 인질로 삼고 있는 몬스터에게 함부로 신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쿠르르르르르 그때 하늘을 뒤덮은 비구름들이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를 향해 소용돌이 치듯 모여들었다. 거센 빗줄기가 일대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코마히코는 불 길함을 느끼며 도츠카노 츠루기를 역수로 땅에 꽂았다. ' 비구름을 조정하는 건 야마타노오로치의 능력! ' 패턴 레드의 힘이 아닌 진정한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공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쿠쿠쿠쿠쿠! 그때 모여들던 구름들이 흑표범을 중심으로 거세게 산개했다.그것은 하나의 검은 돌풍이 되어 진우와 시민, 코마히코를 덮쳤다. 휘이이이잉! 무력하게 하늘을 날아오르는 진우와 시민! 돌풍은 그들을 집어삼킨채 폐허 가 된 빌딩 사이로 날아갔다. " 진우 씨! 시민 씨! " 흑표범의 근처에 몸을 숨기느라 돌풍을 피할 수 있었던 가인은 사라진 동료 들을 부르짖으며 흑표범을 노려보았다. 네 녀석이! 네 녀석이 진우 씨와 시 민 씨를! " 으아아아아앗!! " 가인은 고함을 지르며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자신의 뒤에 있는 유리에 게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 유리야! 접속을 시작해! - 오,오빠! 당황하는 유리의 외침. 가인은 그대로 헤븐 스매쉬에 오라를 끌어 모아 흑 표범을 향해 내뻗었다. 일단 그와 마리의 정신이 공유되려면 둘 사이의 물리 접촉(Physical contact)이 필요하다고 유리가 말했다. 한 마디로 마리를 감 싼 저 표범의 형상을 한 먹구름을 없애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 천공권 선풍! " 거세게 흑표범을 둘러싸고 솟아 오르는 선풍계의 토네이도! 시작점을 표범 의 발 밑으로 한 천공권 선풍이었다. 거센 오라의 회오리에 흑표범의 형상이 무너지며 마리를 감싸던 먹구름들이 회오리를 따라 빨려 올라간다.그리고 드 러난 것은 붉은 비늘에 감싸인 마리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검붉은 마정의 핵이 하나 박혀 있었는데,그 핵을 중심으로 비늘이 돋아나 마리의 전 신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도 저것이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의 정체인 모 양이었다. 츠칵! 마리의 손에 들려 있던 오라 소드가 가인에게 휘둘러졌다. 오라소드에서 뻗 어나오는 붉은 검기가 간발의 차로 그를 스치며 지나갔다.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는 연태껏 패턴 레드의 힘을 저런 식으로 사용했왔던 모양이다! ' 하지만……잡혔어! ' 가인은 마리의 배후로 돌아가 비늘로 덮인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가 날뛰지 못하도록 오라 소드를 들고 있는 팔과 그 목을 있는 힘껏 졸랐다. 좋아! " 유리야! 빨리……! " 하지만 유리를 돌아보며 소리치던 가인은 말꼬리를 흐려야만 했다. 자신과 마리의 정신을 공유시켜줄 유리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어,어디로 간 거 지?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 아아아아악! " 하늘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 그리고 가인은 볼 수 있었다. 예의 검은 돌풍에 휘말려 날아가는 유리의 모습을! " 유리야! " 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안돼! 유리가! 저대로는 유리가! 가 인은 마리를 죄고 있던 팔을 풀고 유리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마 음 속으로 유리의 외침이 내리 꽂혔다. - 떨어지지마! " ……! " 가인은 엉겹결에 다시 마리의 몸을 조았다. 그러자 그와 마리의 사이로 핑크 빛의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리는 돌풍에 휘말려 가면서도 그대로 가인 과 마리에게 마인드 키핑(Mind Keeping)을 사용한 것이다. 가인은 이를 악물 었다. 시민과 진우, 유리의 얼굴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 제길! 제길! 제길! ' 제발! 모두들 무사해줘! ' 마리 선배는……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올 테니! ' [우오오오오!] " ……! " 그때 괴성과 함께 가인이 껴안고 있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가 몸을 비 틀었다. 그러자 거대한 짐승에게 휘둘리는 것 처럼 가인의 몸이 들썩이며 공 중으로 날아갈 뻔했다. 그 괴력에 깜짝 놀란 가인은 마리를 잡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대로 떨어져 나갔더라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두 물거 품이 될 뻔 했다. [우오오오오!] 마리는 그 체구로는 믿을 수 없는 힘을 내며 그대로 가인의 몸을 메단 채 옆의 빌딩을 향해 돌진했다. 가인은 다가오는 벽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 으아아아앗! " 퍼엉! 그대로 가인을 앞세워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는 벽을 꿰뚫었다.그 원시적 인 충돌에 가인은 등짝이 박살나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마리를 끌어안은 가인의 손은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으으윽! 누가 놓칠 줄 알아! 우우우우 그때 마리의 몸을 뒤덮던 붉은 빛이 한층 밝아지며 그녀가 들고 있던 오라 소드가 빛을 발했다. 가인을 두 눈을 부릅 떴다. 이것은! ' 설마! ' 패턴 레드의 절단?! 가인의 얼굴로 핏기가 싹 가셨다. 이 거리에서 저 공격을 받았다간 자신의 몸은 수 십 조각으로 동강날 것이다! ' 유리야! ' 아직도 멀은 거야? 이대로는 늦는 다고! 시행자인 유리가 앞의 돌풍으로 정신을 잃어버렸는지 마인드 키핑은 발동하 지 않고 있었다. 마리에게서 흘러나오는 붉은 빛은 금세라도 예의 검기를 뿜 어낼 것 처럼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 유리야앗-----!!! '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붉은색의 검기와 정신이 아찔해지는 고통! 그리고……. 촤자자자자작! ……발동하는 마인드 키핑! " 왜 그러는 거냐? 큰 소리를 쳐놓고선 그것 밖에 안되는 건가! " 쿠사나기의 양 손이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며 그 손가락 사이로 먹구름이 피 어올랐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푸른빛의 뇌전이 울음을 터뜨리며 연신 브루 스에게 날아들었다. 쾅! 공격할 상대를 놓친 뇌전이 바닥을 때리자 폭발음과 함께 콘크리트의 파편 들을 튀겼다. 브루스는 자신의 뒤통수로 날아드는 주먹 만한 파편 덩어리를 보지도 않고 가볍게 주먹으로 박살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센 비 바람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 크크크크. 솔직히 난 네 녀석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 촤악! 순간, 폭우 속에서 뚜렷히 들려오는 웃음 소리와 함께 검은 색의 실들이 날 아들어 브루스의 몸을 죄었다. 그 실은 쿠사나기의 양 손톱에 연결되어 있었 다. 그가 인형이라도 조종이라도 하는 것 처럼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자 실 에 딸려 있던 브루스의 손과 발이 좌우로 거세게 펴지며 고정되었다.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인 쿠사나기의 얼굴은 그 눈동자 만이 끈적한 빛을 내 며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눈 앞에 둔 뱀의 눈빛이었다. " 그건 무슨 소리냐? " 브루스의 물음에 쿠사나기는 손톱에 자라나 있던 검은 실을 좌우의 벽으로 던졌다.그러자 실은 살아있는 것 처럼 벽에 달라붙어 팽팽하게 브루스의 몸 을 잡아 당겼다.브루스는 사지가 포박 당한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사나기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별 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쿠사나기의 히토에기누 밑으로 천천히 거대한 뱀의 꼬리가 빠져 나왔다.그 꼬리의 끝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할 녹색으로 물든 독침이 달려 있었다. " 초류향. 주인격을 차지하고 있던 그는 사사건건 내 눈에 거슬렸거든.바보 같이 미련한데다가 멍청하기 짝이 없었어. 뭐가 명예이고, 뭐가 자존심이 란 말이야? 동족들을 구하고 싶었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았어야지! " 우르르르르 비구름 사이로 뇌광이 번쩍이며 이빨을 드러내 웃는 쿠사나기의 얼굴을 비 췄다. " 그런 의미에서 그 위선자를 제거해준 너,피스 그레이는 나에게 있어서 꽤 고마운 은인인 셈이다.녀석을 없애준 것도 모자라 날 주인격으로 부상시 켜줬으니까! 더 이상 날 막을 수 있는 녀석은 없어! 레비아탄도! 스머그 도! 파프니르도! 이제부터는 내가 모든 것을 통괄한다! " " 흥. 기껏 주인격이 되어 놓고서 한다는 짓이 이런 졸렬한 인질극이냐? " 브루스의 비아냥 거림이 쿠사나기의 흥분한 가슴에 찬물을 끼얹었다. 쿠사 나기는 입가의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말했다. " 크크크. 내 방식이 맘에 안드나 보지? 난 쓸데 없는 낭비를 싫어하는 성 격이야.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이용해야 직성이 풀리지. " " 초류향과는 다르군? " " 그래! 그런 아둔한 녀석는 근본부터가 틀리다! 녀석과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울 정도야. 주위에 혹해 금세 금세 변해버리 는 자신 따위는 차라리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라고 했던가? 크크크크. 그 러니까 넌 쓰레기통으로 떨어진 거다, 멍청한 놈! 크하하하하하! " " 하하하하하하! " 브루스는 뭐가 그렇게도 유쾌한 건지 쿠사나기의 웃음에 맞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그는 뚝 웃음을 멈추며 쿠사나기에게 말했다. " ……네 놈은 쓰레기야. " " 뭐? " 스스스스 순간 검은 실에 온 몸이 포박당해있던 브루스는 마치 연기라도 된 것 처럼 투명해지며 실을 빠져나왔다. 그 모습에 기겁을 하며 쿠사나기는 독침이 달 린 꼬리를 들어올렸다. " 명예나 자존심이 멍청하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된다고? " 브루스는 그렇게 되물으며 쿠사나기에게 다가갔다.쿠사나기는 그 기세에 밀 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브루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회색의 오라가 소용돌이 쳤다. " 긍지가 없는 자는 신념도 없다! 초류향은 적어도 정면으로 대결하는 법은 알고 있었지! 네 놈 처럼 말 뿐인 녀석은 아니었다! " 쿠사나기는 이를 갈며 브루스에게 꼬리를 내찔렀다. 하지만 브루스는 간단 히 벽경으로 그것을 후려치며 거세게 진각을 밟았다. " 암수나 펼치는 녀석! 네 녀석은 초류향을 욕할 자격이 없어! " 칠성권(七星拳)! " 녹존(祿存)! " 투아아아아아아앙! 칠성권 제 3의 발경은 그대로 쿠사나기의 몸을 꿰뚫고 그대로 뒤의 건물 옥 상을 통째로 뜯어 부쉈다.경기의 소용돌이에 콘크리트의 파편들이 휘말려 들 어갔다! " 으으으, 으아아아아아악! " 비명 소리! 하얀 히토에기누가 부풀어 오르다가 폭발하며 쿠사나기는 발경 을 얻어 맞은 가슴 중앙부터 돌조각 처럼 바스러졌다. 형체를 잃은 쿠사나기 는 손과 발 몇 조각 만을 남겨둔채 소멸했다. " 후우우우우우. " 깊게 심호흡을 하며 브루스는 선기를 가라 앉혔다. 그는 쿠사나기의 잔해를 내려다 보다가 싸늘하게 한 마디 했다. " ……형편 없군. " 가인은 하얀 백색의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전 피스 카민 마유빈이 끌어들였던 정신 세계와 상당히 유사한 곳이었다. - 어떻게 들어오기는 한 모양이군. 유리의 마인드 키핑 능력. 그것은 타인의 의식을 서로 공유시키는 게 가능 할 정도로 진보해있었다. 유리는 가인이 마리에게 물리 접촉을 시도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인과 마리의 정신을 자신이 만든 정신 세계에 끌어들인 것이다. 이건 마인드 브레이커인 마유빈이 보여줬던 능력과 동일한 것으로 서 이미 유리의 능력이 그를 따라잡았다는 걸 의미했다. - 선배는 어디에 있는 거야? 가인은 희미한 안개 속을 헤쳐나가며 마리를 찾았다. 하얀색. 하얀색. 하얀 색. 끝이 없는 하얀색의 공간 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마리는 보이 지 않았다. 가인은 초조한 마음으로 연신 마리를 불렀다. - 선배! 휘오오오오오 순간 밀려드는 바람과 함께 한층 안개가 짙어졌다. 한치 앞도 분간 못할 정 도로 시야가 가려졌다. 가인은 당황하며 눈 앞의 안개를 손으로 휘저었다. 어째서 갑자기 안개가 몰려드는 거야? - 아……. 그때 안개가 가인의 뒤로 사라져 가며 눈 앞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 여기는! 어느새인가 그는 바다가 보이는 해안 절벽에 올라와 있었다.눈에 익은 풍경 이었다. 가인은 분명 이 곳을 본 기억이 있었ㄷ. - 블루 썸머 비치? 크라켄의 공격을 받아 마리 선배와 절벽 밑으로 떨어진 장소! 어째서 여기 로 오게 된 거지? 마리 선배의 정신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니었나?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가인은 곧 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그토 록 찾아 헤매던 소녀, 마리였다. 가인은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향해 달려 갔 다. - 선배! 여기 있었군요! - 오지마! 절벽의 가장 자리에 걸터 앉아 밑을 내려다 보던 마리는 가인이 자신을 향 해 다가오자 버럭 소리쳤다. 그 바람에 가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 보았다. - ……선배? - 나에게 다가오지마. 마리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절벽 가로 불어오는 바람에 그 녀의 머리카락과 하얀 원피스가 거세게 휘날렸다. ' 원피스? ' 마리 선배는 AI슈츠를 입고 있었을 텐데? 가인은 이내 자신들이 있는 장소가 사념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이라는 걸 기억해냈다.그러자 가인의 AI슈츠도 어느새인가 한성 고교의 교복으로 바 뀌어 있었다. - 왜 그러는 거에요, 선배? 예? 어째서……. 가인의 질문에 마리의 얼굴은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가인의 시선을 외 면하며 조용히 절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난…… 널 아프게만 하니까. - 예? 그게 무슨……? - 너에게 상처만 주니까. 널 다치게만 하니까.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너에게 피해만 줄 뿐이야. -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에요? 선배가 저에게 해준 것이 없다니? 피해만 준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가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인상을 찡그렸다. - 혹시 이번 결투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그건 제가 원해서 그랬던 거라고 했잖아요. 물론 선배와 한 약속도 있어요. 하지만 선배를 지키고 싶어서, 선배의 무영신풍류를 지켜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고요. - 거짓말! 마리는 가인의 말을 끊으며 그를 팩 돌아보았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 었다. - 원했기 때문이라고? 그런 거…… 거짓말이야! 차라리 동정이었다고 말해! 불쌍해 보였다고 말하라고! 약혼 같은 거……. 내가 부탁했기 때문이잖아? 뭘 원했다는 거야! 유가인! 넌! - 넌 시민 씨를 좋아하잖아! - ……! 가인은 마리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마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뜨거운 눈물이 그 사이로 흘러내렸다. 또 가인에 게 상처를 줘 버렸다. 또! 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무력 할 뿐이야. 최악이다! - 괴로워…….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아.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이를 좋아한다는 건 이토록 괴로운 일이었나? 그에게 자신의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건…… 이토록 초라해지는 일이었나? -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준다면……. 날 한번만 돌아봐준다면……. 날…… 사랑, 해준다면. - 난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을텐데. 마리는 눈물을 흩뿌리며 고개를 들었다. 절벽을 등지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처음 모습 그대로 서있었다. 마리는 미소지었다. - 가인. 부럽구나. 좋아하는 이의 마음을 받았다는 것이.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은 시민을 사랑하고 시민은 가인을 사랑한다. 마리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계속 가다간 그녀는 절벽 밑으로 떨어질 것 이다. 마리는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이대로 가인에게 미련을 가지는 건 그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 밖에 안된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 또한 포기할 수 없다. -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사라지는 것이……. 이대로 여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 그렇지 않아요. 그때, 잠자코 있던 가인이 입을 열었다. 마리는 발걸음을 멈추며 그를 바라 보았다. 가인은 쓸쓸하게 웃고 있었다. - 시민 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 뭐? 마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가 인은 시민 씨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건가? - 아니야. 그렇지 않아,가인. 시민 씨는 너를……. - 시민 씨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가인의 말에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불어오는 바닷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 시민 씨에게서 직접 들은 거에요.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요. 마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하는 가인의 모습이 자신과 다 를 바가 없어 보였다. 마리는 힘 없이 자리에 주저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 넌……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거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안에 자신이 있 을 자리는 없는데. - 넌 어째서……. - 어쩔 수 없잖아요? 가인은 그녀의 곁에 털썩 주저 앉으며 미소지었다. -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 같은 거……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데. 일단 좋아하 게 됐으면 노력하는 수 밖에 없잖아요?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이 전해지도 록. 시민 씨가 날 바라봐주도록……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잖아요? - 가인…….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았다.가인은 그 손을 힘껏 마주 잡았다. - 애초에…… 댓가를 바라고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 ……! 그래……. 나 역시……. 마리는 입가로 웃음이 번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 응. 가인…….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 ……. " 마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폐허가 된 건물과 부서진 외벽이 눈에 들어왔다. 부서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비에 전신이 젖어 있었다. 멍하니 있던 그 녀의 눈동자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나는……. ' 나는 분명 몬스터로 변해……. 마리는 기억을 더듬다가 강한 두통을 느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가인에 의해 다시 제 정신을 찾은 건가? 그녀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마리의 의지가 살아나자 그녀를 잠식하 고 있던 마정의 핵이 약해졌는지, 얼굴을 감싸고 있던 붉은 비늘이 목 아래 까지 밀려났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눈을 뜨기 힘들다. ' 아……. ' 하지만 빗줄기를 이겨내자 볼 수 있었다. 자신을 깨우러 와준 유가인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그는 무너진 콘크리트 더 미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흘러나오는…… 피? " 가인! " 마리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소리쳐 불렀다. 먼지투성이가 된 그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곧이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깨어……났군요, 선배. " " 너! " 마리는 가인의 모습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바닥을 붉게 물들인 피. 그것은 가인의 오른 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가인의 오른 발. 보이지 않았다. 붙어있어야할 다리는 종아리 채 잘려나가 있었다.마리는 떨 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너, 다리가……오른쪽 다리가! " " 아아……. 걱정말아요. 어차피 인공 다리였으니까. " 가인은 자신의 사라진 다리 부분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불행인지 다 행인지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에 의해 잘려나간 신체 부위는 예전 유리를 구하느라 샹들리에에 깔렸던 오른쪽 다리였다. 시더에 의해 괴사된 근육들을 제거하고 오리하르콘으로 제작된 인공 근육을 삽입한 다리.특수 고무로 제작된 인공 피부 속에 전자신경이 흘러 촉감까지 느낄 수 있었기에 지금껏 인공 다리였다는 사실 조차 잊고 지내왔다. ' 하지만 잘려나간 곳이 왼쪽 다리였다면……. '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리고 아무리 인공다리가 잘려 나갔다고 해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인공 다리에 돌고 있던 피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고, 인공 근육에 연결된 근육들도 분명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 하지만 AI슈츠와 인공 근육의 오리하르콘을 끊어버릴 정도라니! ' 패턴 레드의 힘이 이 정도나 되었던가! 만약 그런 것을 몸에 얻어맞았더라 면……. " 윽! " 하지만 밀려드는 고통에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두 눈 이 불거지며 잘려나간 다리 부분이 불에 타들어가는 것 처럼 아팠다. 아, 안 돼. 빨리 포션을 주사하지 않으면! 대량의 출혈로 인한 쇼크로 몸에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그때 마리의 몸에 기생하고 있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가 활동을 개시했 다. 마리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 안돼! 그만둬! " 흩어졌던 먹구름이 다시 그녀에게로 모여들며 몸을 옭아매던 비늘들이 한층 짙은 붉은 빛을 발했다. 가인은 이를 악물며 그것을 지켜보았다. 제길! 기껏 마리 선배가 정신을 차렸는데! 다시 몬스터의 지배에 들어 가는 건가! 츠츠츠츠 하지만 거센 마리의 저항에 몬스터는 그녀의 몸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마리의 정신이 깨어나자 오라에 의한 정신 장벽이 재구축되어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기생당했던 다른 부분은 문제될 게 없었다. 아 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는 그녀의 정신을 정복하는 걸 포기하고 오라가 미치 지 않는 부분들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마리의 하체가 짙은 먹구름에 휩싸이며 예의 표범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전의 모습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단지 머리가 있던 부위에 마리의 상체가 존 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체 또한 붉은 비늘에 뒤덮여 아메노무 라쿠모노 츠루기의 제어를 받고 있었다. 마리의 손은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반 물질 절삭성 커터가 생성된 오 라 소드를 들어올렸다. 손 끝으로 흘러나온 비늘들이 오라 소드를 사슬 처럼 감아 올렸다. " 그만둬! 그만둬! " 마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가인에게 다가가는 자신의 육체를 멈추기 위해 안 간힘을 썼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가인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게 오라 소드를 들어올리는 마리를 올려다 보았다. 저 오라 소드가 내리 쳐지면 이번에 잘려나가는 건 다리 같은 게 아닌 자신의 생명이 될 것이다. " 하아아아앗! " 그때 기합과 함께 양홍빛의 검기가 마리에게 날아들었다. 코마히코의 도츠 카노츠루기였다. 그는 신검의 힘으로 앞의 돌풍에 휘말리지 않고 몸을 지켜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는 재빨리 그것을 옆으로 피해내며 오라소드를 코 마히코에게 휘둘렀다. 쩡! 붉은 검기가 파도처럼 뻗어나왔고 그것을 도츠카노츠루기로 간신히 막아낸 코마히코는 검기에 떠밀려 저편의 벽들을 통째로 부숴뜨리며 거리로 떨어져 나갔다. " 크핫! " AI헬맷의 안이 자신이 토해낸 피로 붉게 물들었다.코마히코는 이를 갈며 도 츠카노츠루기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마리를 몬스터에게서 구해 내야 한다지만, 그 바람에 다른 피스 대원들의 생사까지 알 수 없게 됐다.이 이상 피해를 확산시켜서는 안 돼! 그는 정말로 마리를 벨 셈으로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하지만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신력에 더해진 패턴 레드의 힘은 자신과 도츠카노 츠루기의 신력을 압도하고 있었다.도저히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스윽 그때 다시 가인에게로 향하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오라 소드.코마히 코는 마음이 다급해져 외쳤다.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에게서 가인을 지켜내 기엔 자신과 그들의 거리가 너무도 떨어져 있었다. " 止めて(멈춰)! " 츠카카카카카칵! 코마히코의 절규와 파쇄음. 하지만 이미 붉은 검기는 가인의 몸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 브루스, 오라란 뭔가요? ' 예전 브루스와의 수업 도중 가인이 물었던 질문이다. 브루스는 묘하게 감탄 한 얼굴로 말했다. ' 뜻밖이구나. 그런 걸 물어올 줄이야.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그냥 사는 골빈 녀석인줄 알았는데. ' ' 그,그럴리가 없잖아요! 저도 제가 사용하는 힘에 대해서는 내내 생각해봤 다고요. ' 가인은 부루퉁하게 투덜거렸다.브루스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설명을 시 작했다. ' 오라. 그것은 의지의 힘이다. ' ' 의지……요? ' ' 그래. 오라는 삼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힘, 가이아의 힘이지만 결국 그것 을 발현하는 것은 인간. 그리고 인간의 의지다. 너는 느끼지 못할 테지만 오라는 의지에 의해 구현되고, 의지에 의해 유지되지. 아마 네가 오라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의지가 모든 것을 초월했던 순간이 있었기에 가 능했을 거야. ' 뭐가 뭔지. 가인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고, 결국 브루스의 인상 은 구겨졌다. ' 그러니까 네 놈의 의지가 굳건해질 때 네 녀석의 오라도 강해진다는 거다! 알겠냐! 결국 네가 약해빠진 것도 다 네 놈의 의지가 형편 없기 때문이야! ' ' 너,너무해요! 그렇게 까지 말할 건 없잖아요? ' ' 흥. 이렇게 말해도 정신 못차리는 게 네 놈이다. ' ' 브루스! ' 오라는 의지의 힘. 의지에 의해 구현되고, 의지에 의해 유지된다고? " ……어라? " 가인은 여전히 쓰러진채로 더듬더듬 자신의 몸을 매만져 보았다. 분명 아메 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검기에 두 동각이 났던 것 같은데……. ' 사,살았어? ' 자신은 살아 있었다.그것도 검기에 베인 상처 하나 없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분명 건물도 통째로 잘라 버리는 패턴 레드의 힘에 적중당했을텐 데……. 툭 그때 가인의 AI헬맷으로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렸다. 가인은 자신의 앞 에 있던 몬스터를 올려다보았다.그 위에 오라 소드를 들고 있던 마리의 눈에 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가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 마리……선배? " 유일하게 비늘에 감싸여 있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 다. 아마 필사적으로 몬스터에게 저항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녀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가 가인을 베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인은 그녀의 오라소드에 베이고도 멀쩡할 수 있었던 걸까? ' 혹시! ' 불현듯 가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 브루스가 했던 말이 떠 올랐다. 의지. 오라는 의지의 힘이라고. 그렇다면……. ' 의지에 반하는 일을 오라가 할리 없잖아! ' 분명 정신을 차린 마리는 가인을 베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몬 스터에게 육체를 빼앗겨 패턴 레드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지만 의지가 해방 된 지금,자신의 힘이 왜곡된 일에 사용되는 걸 그녀가 원할 리 없다! ' 그런가! 그런 것인가! ' 가인의 뒤에 있던 콘크리트 더미가 앞의 검기에 베여졌는지 금이 가 있었다. 건물 전체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가인에게 더 큰 확신을 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베여도 자신은 베이지 않았다.의지가 깃들어있지 않은 오라는 아 무런 피해도 줄 수 없어! 마리 선배는 날 다치게 할 수 없는 거야! 챙! 그때 다시 가인에게 휘둘러지려던 마리의 오라 소드를 재빨리 달려온 코마 히코가 도츠카노 츠루기로 막아냈다. 그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앞을 막아서며 가인에게 소리쳤다. " 피스 블루! 살아있는 겁니까! " " 아……예. 간신히 살아있기는……하네요. " 들려온 가인의 대답에 코마히코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아메노무라쿠 모노 츠루기에 의해 정수리부터 반으로 절단나는 것 처럼 보였는데! 도츠카노 츠루기로 몬스터와의 거리를 벌려놓은 그는 안도하며 가인에게 말 했다. "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 그리고 고통스러우시겠지만 포션은 절대 사 용하지마십시오.그 상태에서 포션을 사용했다간 다리가 절단된 상태로 상 처가 아물어 버립니다. " 가인은 그 말에 깜짝 놀라서 몸에 포션을 주사하려던 걸 멈췄다. 아무 생각 없이 포션을 사용했다가 하마터면 영영 다리를 잃을 뻔 했다.다행히 인공 다 리의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으로 생체의 자기 제어가 이루어졌기에 출 혈은 멈추고 있었다. 코마히코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으며 쓰러진 가인을 부축했다. 그는 가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 그나저나…… 신속히 이 곳을 이탈하도록 합시다. " " 이탈……이라뇨? " 가인의 인상이 굳어졌다. 코마히코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 상부에서 후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마리 양을 저대로 놔두고 가는 건 안 타까운 일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 진 사령관! 그 작자가! 가인은 이를 악물며 코마히코의 부축을 뿌리쳤다.코 마히코는 가인의 거친 태도에 작게 한 숨을 쉬며 단호하게 외쳤다. " 이대로 있다간 마리 양 한 사람 때문에 대원 모두가 위험에 빠집니다! 벌 써 피스 그린도! 피스 옐로우도! 피스 핑크도! 다 당하지 않았습니까? 쓸 데 없는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에요! " 그는 가인의 어깨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 후에 대책을 세우자고요! " " 그렇지 않아! " 흠칫. 코마히코는 가인의 외침에 몸을 물렸다. 가인은 마치 타오르는 것같 은 눈으로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기세에 코마히코는 압도되 었다. " 물러서자고? 그리고 대책을 세우면 되는 거라고? 그건 틀렸어! " 가인은 하나만 남은 왼쪽 다리로 굳건히 서서 오라 소드를 꺼내 들었다.그 의 오라에 반응하여 바람의 검날이 생성되었다. " 여기서 물러서면 끝이야!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 을 거야! " 위이이이잉 검날에 서린 바람의 기류가 수직으로 회전하며 하얗게 타올랐다.그것은 주 위에 있던 모든 바람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인은 그것을 두 손으로 단 단히 움켜쥐며 소리쳤다. " 코마히코! 당신이 그랬죠? 반드시 지켜야할 약속이 있다고! " " ……! " 코마히코는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격정에 가슴이 들끓고 있었다.그는 떨리는 눈동자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마리를 옭아 매고 있는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를 노려보았다. " 저에게도 있어요! 마리 선배와의 약속이!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그녀의 무영신풍류를 지켜주겠다고! 그럼 물러서면 안되는 거잖아요? 지키기 위 해선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면 안돼! 자신의 사정이 힘들다고 물러나는 건 그녀를 지키는 게 아냐! " ' 사부님! ' 코마히코는 자신도 모르게 연우를 마음 속으로 불렀다. 그리고 깨달았다.유 가인. 그의 맹세가 자신의 맹세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 난……단지 사부님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따라왔다. ' 그녀가 검을 휘두르라고 하면 검을 휘둘렀고 약혼을 하라고 하면 약혼을 했 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녀가 바라는 게 있다면 그것을 말 없이 따르면 된 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한 발 물러서서 언제나 그렇게……. ' 하지만 그건…… 틀렸어. ' 누군가를 지킨다는 마음은 편의에 따라 바뀌어서는 안된다. 만약 바뀐다면 그것은 그때부터 맹세가 아닌 타협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난 물러섰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 저 남자를 이길 수 없었던 거야! 코마히코는 침착해진 안색으로 조용히 가인에게 물었다. " 방법은 있는 겁니까? " " 물론! " 가인은 코마히코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알려주었다. 코마히코는 잠자코 그의 얘기를 듣다가 짧게 탄성을 올렸다. " 정말 가능한 겁니까,그런 것이? 차라리 확실하다고 결론이 날 때까지……. " 거기까지 말하던 코마히코는 말을 멈추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물러나 자는 말을 또 할 뻔 했던 것이다. ' 좋아! ' 코마히코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믿겠습니다, 가인 씨.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 " 부탁해요! "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하단 베기 자세를 취했다. 한쪽 다리로 서있으면서도 그에게서는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코마히코 는 마음을 다 잡으며 서서히 야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 보여주십시오. 당신의 의지를. ' 그리고 내가 가야할 길을! " 마리 선배! " 가인은 야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상체에 붙어있는 마리에게 소리쳤다. 그 녀는 간신히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마리는 힘 없이 고개를 들어 가인을 바라보았다. " 절 믿어요? " 난데없는 그의 질문.하지만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선배! 이번 만큼은 반드시! 반드시! ' 지키고야 말겠어! ' " 으아아아아아앗! " 가인의 의지에 발맞춰 그의 오라가 끝 없이 솟아올랐다.그리고 타오르는 오 라 소드! 가인은 느낄 수 있었다. 힘을! 질풍의 힘을! 용장호에서 와이번을 상대할 때 느낄 수 있었던 오라의 흐름을! 질풍의 검 " 마리 선배-------!!!! " 바람 가르기 촤아아아악 검은 먹구름이 좌우로 찢어지며 그 안에 있던 마리를 질풍의 힘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먹구름이 사라진 곳에는 마리가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몸을 뒤덮고 있던 붉은 비늘들이 하나 하나 경련을 일으켰다. 코마히코는 두 눈을 부릅 떴다. 이것은! ' 카타마이치(かまいたち)? ' 선풍이 불 때 공기 중에 진공이 생겨 인체가 접촉하면 낫으로 벤 것 처럼 되는 초자연 현상! ' 어째서 이것을 저 소년이 사용해낸 건가! ' 검을 휘두른 가인은 천천히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면서 도 마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은 그녀를 벨 때 한가지만을 생각했다. 몬스터를 벤다. 하지만 마리는 다치지 않기를! 그녀에게는 자신의 오라가 영향을 주지 않기를! 그리고 의지는 질풍의 힘을 이끌어냈다! ' 제발! ' 제발 성공해줘! 투두두둑 순간 마리의 몸에 붙어있던 비늘들이 수직으로 이등분 되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안에 있던 마리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 의 생각은 적중했던 것이다! 마리는 마정의 핵에서 풀려나자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앞으로 거 꾸러졌다. " 앗! " 가인은 재빨리 앞으로 기어가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내었다. 한편 숙주를 잃은 마정의 핵은 마리에게서 빨아들인 정을 끌어 모아 스스 로 변이하고 있었다.가인의 바람 가르기는 마리를 핵에서 떼어내겠다는 의지 가 더 강했기에 완벽히 마정의 핵을 제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정의 핵은 건물의 바깥에서 먹구름들을 끌어 모아 예의 흑표범을 만들어 냈다. 가인은 그런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를 바라보며 밖에서 대기하고 있 던 코마히코에게 소리쳤다. " 지금이에요! " 휙! 코마히코는 도츠카노츠루기를 두손으로 움켜쥐며 번개같이 흑표범의 뒤로 돌진했다. 그의 오라에 반응하여 도츠카노츠루기의 신력이 발동했다. 간다! 간다! 간다! " 무영신풍류 영식(零式)! " 상살(上殺)! 촤아아아악 도츠카노츠루기의 주홍빛이 아래에서 위로 몬스터를 올려베었다. 하지만 코 마히코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평대세(平擡勢)로 앞을 향하여 당겨쳐서 아메 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허리를 옆으로 베어쳤다. 그리고 마치 펄럭이는 치마 를 거두는 것 처럼 손목을 앞으로 돌리면서 앞을 막는 동시에 상대의 하신 을 베어버린다! 이것이 평검(平劍)! 이것이 군란(裙欄)! 이것이 바로! " 거정격(擧鼎格)! " 푸카카카칵 양홍빛의 선들이 만들어낸 격자격세(擊刺格洗)는 흑표범을 상중하 삼등분으 로 만들어 버렸다. 몬스터에게서 마리가 떨어지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 진 코마히코는 마음껏 본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우오오오오오오!] 괴성과 함께 세 조각으로 나뉜 먹구름들이 타들어 갔다. 그리고 그 중앙에 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마정의 핵이 붉은 빛을 머금으며 떠 있었다. 코마히코는 횡으로 가볍게 도츠카노 츠루기를 휘두른 후 신검을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 ……切られられなさい(베어져라). " 스컹 나지막한 코마히코의 중얼거림과 함께 마정의 핵은 정확히 이등분 되어 땅 으로 떨어졌다. 도츠카노 츠루기의 신력은 마를 부정한다. 부정한 존재인 마 정의 핵은 신력의 힘 앞에 그대로 산화되었다. 지금껏 그들을 애 먹인 원흉 치고서는 너무도 맥 없는 최후였다. 코마히코는 마정의 최후를 담담히 지켜보다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부상 을 입은 가인과 마리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가인은 오른 다리까지 잃어버리 지 않았던가! 한시라도 빨리 응급 처치를 해야한다! 쩌저저저적 " ……! " 그때 가인과 마리가 있던 건물이 흔들렸다.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검 기로 인해 건물이 등분되어 있었는데, 거기다 가인의 질풍의 힘이 더해져 균 열을 촉진시켰던 것이다.코마히코는 두 눈을 부릅 뜨며 건물 안의 가인과 마 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탈진한 마리를 부둥켜 안은채 폐허 속에 주저 앉아 있는 가인이 있었다. 둘 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대로 있다간 무너지는 건물 속에 생매장 당할 것이다! " 가인 씨! 마리 양! " 코마히코는 그들을 소리쳐 부르며 무너지는 건물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하 지만 균열은 예상 외로 빨랐다. 미처 그가 건물에 도달하기도 전에 1층이 덜 컥 내려 앉은 것이다. 코마히코는 손을 뻗은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콰콰콰콰콰 지반을 잃은 건물은 좌우로 벌어지며 그 중반부터는 안쪽으로 무너져내렸다. 콘크리트의 폭우였다. 그리고 가인과 마리는 먼지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어떻게 손을 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너무도 간단하 게 두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안 돼! 가인 씨! 마리 양! " 그때 코마히코의 뒤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피스 옐로우 한시민의 목소리였다. 코마히코가 비틀거리며 돌아보니, 그곳에는 피스 그린의 부축을 받고 있는 그녀와 피스 핑크 이유리가 있었다.세 명 다 아메노무라쿠모노 츠 루기의 돌풍에서 목숨을 부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을 즐길 새도 없이 그들은 또 다른 동료들을 잃고 말았다. " 오,오빠? " 유리가 무너지는 건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시 민도 진우도 그녀를 부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단지 넋이 빠진 표정으로 눈 앞의 광경을 바라볼 뿐. 그리고 그들의 뒤로 흐릿한 잔상과 함께 한 회색 머리의 소년이 나타났다. " ……늦어버렸나. " 피스 그레이 브루스는 이를 갈며 무너지는 건물을 노려보았다.저 상황 속에 서 가인과 마리가 목숨을 부지하기란 아무래도 힘들듯 했다. 무엇보다 그들 은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콘 크리트 속에 파묻혔을 것이다. 탁! 그때 폐허가 된 건물을 바라보다가 가장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코마히코였 다. 그는 서둘러 가인과 마리가 있었던 부근으로 달려갔다.그의 침착하던 표 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가인 씨! 마리 양! " 그는 소리쳐 둘을 부르며 콘크리트 더미를 맨 손으로 헤쳤다.AI글러브의 강 화된 근력으로 무리 없이 돌 더미들을 치울 수 있었다. " 살아있다면 대답하십시오! " 그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 유가인! 이대로 죽는 겁니까! 이대로 마리 양과 함께 죽는다면 당신의 맹세는 무엇이 됩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까! ' 살아 있어야 맹세도 지킬 수 있는 법! " 사십시오! 살아 있어야 합니다! " 코마히코는 미친듯이 소리치며 돌더미를 치웠다. 그의 뒤에서는 진우와 시 민, 유리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들이 코마히 코를 돕지 않았던 것은 그 행동이 무의미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칭! 그때 그들의 곁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있던 브루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만은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미약하지만 분명히 박동하고 있는 오라의 흐 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번개같이 코마히코에게로 달려갔다. " 비켜라, 애송이! " " ……! " 당황하는 코마히코를 뒤로 물리며 브루스는 가인과 마리를 삼킨 콘크리트의 산을 노려보았다. 그는 뚫어져라 콘크리트들을 살펴보다가 그 중 하나를 향 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 흡! " 순간, 그는 진각을 밟지 않고 전사경만으로 눈 앞의 콘크리트를 내리찍었다. 쩍! 바위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브루스의 손이 콘크리트에 깊숙히 손도장 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손도장을 중심으로 가는 금이 콘크리 트의 전체로 퍼져나갔다. 퍽! 마치 수정얼음처럼 가늘게 쪼개지며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이 부서졌다.그러 자 더미의 안쪽으로 향할 수 있는 작은 틈이 그곳으로 생겼다. 그는 뒤를 돌 아보며 코마히코와 피스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 뭘 멍청히 보고 있는 거야! 어서 이리 오지 못해! " " ……! " 코마히코가 재빨리 브루스의 곁으로 다가와 콘크리트 더미의 안쪽으로 들어 갔다. 그 뒤를 따라 진우와 시민, 유리가 달려왔다. 그들은 신 들린 사람처 럼 콘크리트 조각을 치우고 또 치웠다. " 크윽! " 코마히코와 진우는 이를 악물며 있는 힘껏 눈 앞의 콘크리트 조각을 잡아당 겼다. 행여나 콘크리트 더미가 무너지면 어쩌나 걱정되었지만,브루스가 파놓 은 구멍은 교묘하게도 더미가 무너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AI글러브의 악력이 강해지면서 콘크리트 속으로 손가락이 파고들어갔다. " 크으으으! " 파직! 순간 코마히코와 진우가 잡아당기던 콘크리트가 뽑혀나왔다. 그들은 그것을 뒤로 던지며 앞을 바라보았다. 콘크리트를 치운 자리에는 생각 보다 넓은 공 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안을 살폈다.먹구름이 개인 하늘로부터 햇빛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빛은 콘크리트 더미 속의 어 둠을 밝혀주었다. 코마히코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 하하. " 있었다. 살아 있었다. 가인과 마리. 그들은 이 폐허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 가인은 마리를 끌어안은채 자신들의 머리 위로 헤븐 스매쉬를 낀 오른 주먹 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위로는 훵하니 구멍이 뚫려 있다. 가인은 콘크리트 더미에 갇히기 직전, 위로 천공권을 시전하여 돌조각들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해낸 것이다. 가인은 먼지로 뒤덮혀 죽은 듯이 앉아 있다가 코마히코의 웃음 소리에 기진 맥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 ……어때요? 지켜냈죠? "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마리도 천천히 눈을 뜨며 코마히코에게 미소를 보냈 다. 코마히코는 계속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가인의 말에 힘껏 고개 를 끄덕였다. ' 똑똑히 보았습니다, 당신의 맹세를! 마리 양을 지켜낸 당신의 힘을! ' 그리고 피스 대원들의 환호성이 폐허에 울려퍼졌다. " 살았어-----!!!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은 기쁨에 찬 오퍼레이터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했 다. 스크린에 떠오른 가인과 마리의 모습에 모두는 흥분하여 자리에 앉아있 질 못했다. 채영은 서로를 끌어안는 부하들의 모습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조 용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스크린의 가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수고했어요……. 수고했어요, 가인 씨. ' 그녀는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며 미소지었다. 수정은 그 모든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옆의 진 사령관에게 흡족한 표정 으로 물었다. " 사령관 님. 사령관 님은 정말 유리 양의 마인드 키핑 능력을 모르시고 계 셨어요? " " ……날 시험하지 말도록. " 진 사령관은 무뚝뚝하게 답하며 그녀에게서 몸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그 뒷 모습을 바라보는 수정과 닥터는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 ……. " 한편 연우는 스크린을 바라본채 여전히 비영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비 영은 천천히 그녀의 어깨로 손을 올렸다. " 이제는 인정해주는 수 밖에 없지 않겠소? 저 아이들을. " 흠칫. 연우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비영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스크린 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서는 피스 대원들에 의해 가인과 마리가 구조되 고 있었다. " 난 저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 보고 싶소. 그리고 믿고 있소. 잘 해낼 거라 고. 어떤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저 아이들은 지금처럼 이겨낼 거라고. 아 인이는 아인이고, 코마히코는 코마히코, 마리는 마리가 아니겠소? " " ……. " 연우는 천천히 비영을 돌아보았다. 뒤돌아선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 었다. 연우는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나도……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요. " 연우도 알고 있었다. 아인이를 대신할 존재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제자인 코마히코를 잃고 싶지 않았다. 카구라 일족의 후계자인 그는 언젠가 무영신풍류를 떠나야 하는 몸이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릴 사위로 삼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아인이에 대한 상실감도, 코마히코에 대한 상실감도 채워질 거라 믿었다. 어느덧 그녀는 아 인이와 코마히코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 마리를……원망했어요. " 그 아이가 결투로 아인이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생각했다. 마리의 잘못이 아 니었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그래서 내내 마리를 차갑게 대해왔 다. 부모의 온정을 바라는 그 아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 나는……아인이에 이어 마리까지 잃어버릴 뻔 했어. ' 그녀는 이번 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인이가 소중했던 만큼 마리 역시 자 신의 소중한 아이라고. 두 아이 모두 자신의 배로 난 같은 자식들이라는 걸. 어째서 이 당연한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일까? 이렇게 늦게서야……. " 이 바보같은 사람아. " 비영은 흐느끼는 연우를 살며시 껴안으며 그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연우가 마리를 차갑게 대했던 이유. 그녀는 도장 문제로 일본에 있어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마리와 아인이의 곁에서 제대로 된 부모 노릇 한번 해주지 못하는 걸 한스러워 했다. ' 아인이가 죽은 후……. 그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겠지. ' 아인이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자신을. 아인이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던 자신을. 그리고 홀로 남은 마리를 볼 때마다 아인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연우는 아인이에게 애정을 주지 못했으면서 이제와서 마리에게 애정을 주는 건 아인이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부모로서 자격이 없다고, 그러니 이제와서 마리에게 어머니로서 행 동할 자격 또한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 하지만……. ' 하지만 그것이 아인이에게 했던 실수를 똑 같이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왜 몰랐단 말인가? " 그걸로 된 거야. 그걸로. " 비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연우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기억은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당시 마리를 임신하여 자신에게 안기던 연 우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때 보여줬던 그녀의 눈물 역시. ' 고마워요, 여보……. 저에게 이런 행복을 안겨줘서. ' 눈물 속에서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의 모습, 뱃 속의 마리를 소중 히 여기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의 연우에게서 나타나고 있었다. 비영은 미소지었다. "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만. 당신이 이렇게 내 품에서 우는 모습을 다시 보 게 되는 게 . " 그것은 연우가 아인이의 죽음에서 벗어남을 의미했다. 6구역에 위치한 한 고층의 빌딩. 이 곳은 브루스와 쿠사나기가 결전을 벌였 던 장소였다. 하지만 결전 후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쿠사나기의 부서진 팔 다 리 조각과 찢어진 히토에기누 뿐. 우우우우 그때 썩은 고목 처럼 시커멓게 죽어있던 쿠사나기의 손이 꿈틀거렸다.그 손 에서는 짙은 먹구름이 스멀 스멀 피어올라 이윽고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형상. 그것은 브루스의 발경에 소멸되었다고 생각했던 쿠사나기였다. " 크핫! " 손으로부터 몸을 복원해낸 쿠사나기는 나머지 육신의 조각들을 연결시키며 숨을 헐떡였다. 그는 짐승처럼 엎드려 씩씩 거렸다. 히토에기누가 찢어져 땀 에 젖은 하얀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 크크, 크크크크, 크크크크. "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던 그는 이번에는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 쓰레기라고? 초류향 보다도 형편 없다고? 크크크, 크하하하하하! " 그는 광기에 물들어 미친듯이 소리내 웃었다. 그것은 웃음이라기 보다는 차 라리 오열에 가까웠다. 지독한 자괴감으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아 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가 소멸하자 하늘은 예의 푸른 하늘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그 푸른 하늘도! 저 태양도! 그 모든 게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쿠사나기는 순간 거짓말 처럼 웃음을 멈추며 얼굴을 손톱으로 쥐어 뜯었다. 길게 자라난 손톱이 살을 찢으며 녹색의 피가 흘러 나왔다.하지만 그렇게 자 해를 해도 귓가로 들려오는 예의 목소리가 끊기지를 않는다. ' 네 놈은 쓰레기야. ' ' 쓰레기. ' ' 형편 없군. ' ' 말 뿐인 녀석. '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 크크크크크. " 얼굴을 감싼 쿠사나기의 입으로 다시 웃음이 흘러나왔다.쿠사나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녹색의 피로 물든 그의 얼굴은 흡사 악귀 처럼 일그러져 있었 다. " 그래! 네 말 대로 난 쓰레기다! 그렇다면 쓰레기의 방식을 보여주지! " 피스 그레이! 반드시 네 놈을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말테다! 괴롭히고 괴롭 히고 또 괴롭혀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겠어! " 반드시! " 《09시 30분발 도쿄행 비행기에 탑승하실 손님들께서는 트랩으로 나와 주시 기 바랍니다.》 비행기의 이륙음이 들리고 있었다. 마리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연우를 바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가시는…… 겁니까? " " 그래. "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와의 전투가 있은지 일주일이 지났다. 피스 대원들 이 어느 정도 전투의 부상에서 완쾌되자, 연우는 갑작스레 일본으로 돌아가 겠다고 말을 꺼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마리는 제대로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아쉬 웠는지라 표정이 편치 못했다. 아무리 연우가 성격 상 대하기 힘들다고 해도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다. " 모처럼 오셨는데 한국의 단원들에게 가르침이라도……. " " 한시라도 빨리 일족의 어르신들에게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문제를 보고해 야 한다. 아마 지금쯤 노발대발하고 계실테니. " " ……예. " 마리는 침울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다 고 생각하니 기운이 빠졌다.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문제는 결국 연우가 고집을 꺽음으로 해서 해결되었다. 결코 의견을 굽히지 않을 것 같던 그녀는 마리를 끝까지 지켜낸 가인의 모습 에서 그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투의 승패를 떠나서, 그 실력을 떠나서 마리를 생각하는 마음 만큼은 분 명 그가 앞서고 있었기에. ' 그 아이라면 마리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 모른다……. ' 그런 이유로 연우는 지금부터 황씨 일족의 어른들에게 새로운 한국인 후계 자를 납득시켜야만 했다. 뼛 속 까지 폐쇄적인 그들을 상대로 연우가 얼마나 고생할 지는 눈에 보듯 훤한 일이었다. " ……죄송합니다, 어머니. " " 흥. " 마리의 사과에 연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차가운 모습에 마리는 더욱 면목이 없어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모녀를 옆에서 지켜보던 코마히코와 비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미 마리에 대한 앙금이 다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연우는 여전히 마리를 쌀쌀맞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집이 세다고 해야할지, 어린애같다고 해야할지……. 코마히코는 분위기를 전환할 겸 마리에게 물었다. " 그보다 가인 군은 좀 어떻습니까? 몸은 많이 좋아졌나요? " " 아,예. 수술은 무리 없이 끝냈고 며칠만 더 요양하면 예전처럼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몸이 불편해서 배웅하지 못한 점,죄송하다고 전해달라 하 였습니다. " 마리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연우를 배웅하겠다고 공항으로 나오려던 가 인을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녀는 가인을 걱정해주는 코마히코의 마 음씀씀이가 고마워서 가볍게 목레했다. "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아뇨. 감사받으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가인 군과는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니까요. ……이대로 떠나야 하니 아쉽군요. " " 일본 지부에서 요르문간드의 화신이 다시 나타났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 브루스가 쿠사나기를 소멸시킨 지금,코마히코는 일본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 었다. 앞으로 5대간부와 피스메이커의 정면 충돌이 있을 서울에 남아있는 것 이 차라리 전력 상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쿠사나기가 없어진 자리를 요르문간드 의 화신 중 하나인 레비아탄(Leviathan)이 대체했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코 마히코는 레비아탄으로부터 동경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 떠나야만 했다. 코마히코는 고소를 머금다가 마리에게 말했다. " 아, 혹시 이 말을 가인 씨에게 전해주겠습니까? " " ……예? " 코마히코는 이번 한국 방문에서 많은 것을 얻고 갈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득이 있었던 것은 유가인, 그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다음에는 지지 않겠다고. " 그는 가인이 마리를 지켜낸 것 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연우를 지켜내겠다고 마음 먹었다. 다음에는 그의 맹세에 절대로 뒤지지 않겠다고, 절대로 물러서 지 않는 남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마리는 그런 코마히코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단순히 다시 한번 결투를 하자는 얘기일 거라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 " 고맙습니다. " 코마히코는 마주 미소하며 유심히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결혼 할 뻔 했으면서도 이제껏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본 마리의 모습은 그가 사모하는 사람을 닮아 있었다. 마리는 코마히코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자 머쓱해져 물었다. " 저……. 왜 그러시는지? " " ……아닙니다. 반드시 행복해지십시오. " 코마히코는 가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지키기 위해서는 떨어지면 안된다고 했던가? " 언제나 그의 곁에 있어주십시오. " " ……. " 코마히코의 말에 마리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그녀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몇 번 달싹이다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그 모 습에 코마히코와 비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 코마히코! 뭘 하고 있느냐! 어서 따라오지 않고! " 그때 트랩으로 걸어가며 연우가 소리쳤다. 코마히코는 서둘러 비영과 마리 에게 인사를 하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그렇게 사라져 가는 둘을 바라보며 비 영은 자신의 딸에게 나지막히 물었다. " ……자신 있느냐? " 그것은 코마히코의 말을 따를 자신이 있냐는 것인지, 아니면 가인의 사랑을 얻을 자신이 있냐는 것인지 상당히 애매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굳이 비영에게 되묻지 않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 예. " 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것이 제 가 사랑하는 방식이니까요. ' 가인. ' 마리는 마음 속으로 그를 부르며 창에 비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그 녀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 처럼 높고 푸르렀다. 마리는 그것을 정면으 로 응시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정했다. 가인, 난……. ' ……난 너에 대한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 ' 후우우우웅 코마히코와 연우가 탄 비행기는 이륙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연우는 비행 기에 탑승한 이후로 계속 아무런 말도 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코마히 코는 그런 사부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침묵했다. 그때 연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미안하구나. " 갑작스런 그녀의 사과에 코마히코는 의아해졌다. 연우는 그를 바라보지 않 으며 말을 이었다. " 내 딸 아이 때문에 너의 혼사를 망쳤구나. 반드시 성사시켜주고 싶었는데 ……. 이 무능력한 사부를 원망해도 좋다. " 코마히코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 마리 양은 훌륭한 여성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후회 없이 행동하더군요. 과연 사부님의 딸이었습니다. " " ……. " " 그러니까 이 제자는 생각 마시고, 좀 더 따님의 작별 인사를 따뜻히 받 아주시지 그랬습니까? " " ……! " 연우는 코마히코의 말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자신의 마음을 정 확하게 읽고 있었던 것이다. 연우는 마리에 대한 마음의 앙금이 풀렸지만 코 마히코의 혼사가 무산되었다는 것에 그를 바라볼 면목이 없어 마리를 따뜻히 대해줄 수 없었다. 사실은 이번 만큼은 마리에게 어머니로서 정을 주고 싶었던 그녀였는데. " 다음에는……. " 연우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 다음에는……그 아이를 따뜻히 대해줄 수 있을까? " " ……물론입니다. " 코마히코는 연우와 마리의 관계가 호전을 보이자 자신의 일인 것 처럼 기뻐 했다. 그는 확신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 무엇보다 사부님은 마리 양의 어머니이지 않습니까? " " ……응. " 연우는 쑥스러웠는지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자그마하게 말했다. 코마히코는 미소지으며 그녀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카구라 일족의 후계자로서 어릴 때 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자란 온 그는,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부모 의 정이라고는 조금도 받을 수 없었다.그들은 자신을 하나의 자식이 아닌,하 나의 후계자로서 대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원망치 않는다. 만약 그런 시절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자신의 사부님을, 그녀를 만나지는 못 했을 테니까. " ……코마히코? " 연우는 갑작스레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코마히코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코마히코는 그 답지 않게 뺨을 상기시켰지만 그녀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 저에게도……. " " ……? " " ……저에게도 사부님은 어머니십니다. " 그 말에 연우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로는 천천히 웃음이 번져가고 있었다. " 그래……. " 후우우우웅 두 모자를 태운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 15 화 타올라라 검 完> 次回豫告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기분이 매우 좋아 내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갑작스레 잠을 깨니 틀림 없이 예전의 장주였다. 장주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나비인 내가 장주가 된 꿈을 꾸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으로 인해 나는 어느 것이 거짓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第 16 話 Season's Greeting 유신: 오빠! 깨어난 거야! 드디어 깨어난 거야! 유가인: ……아. 2035년 12월 24일. 내가 눈을 떴을 때는 4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설정편.2 - 시더의 '알고 싶어요, 선생님!' - 이번 설정편은 잊어먹고 보관(?)하지 않은 관계로 없습니다. 죄성.. ㅡㅜ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6 話 Season's Greeting =-=-=-=-=-=-=-=-=-=-=-=-=-=-=-=-=-=-=-=-=-=-=-=-=-=-=-=-=-=-=-=-=-=-=-=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기분이 매우 좋아 내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갑작스레 잠을 깨니 틀림 없이 예전의 장주였다. 장주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나비인 내가 장주가 된 꿈을 꾸었는지 알지 못했다……. " 나는 위의 고사(故事)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단지 그는 나에게 꿈과 현실. 그 중 어느 게 진실이고 어느 게 거짓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려고 장자(莊子)의 말씀을 인용했던 것 같다. 그때는 단순히 웃고 넘겼지만……. - 오빠!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진실인 것일까? 사실은 수 없이 꾸는 꿈 중의 하나인……. 한 순간의 착각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현 실로 돌아 갈 수 있지? -오빠! 오빠! 아냐. 굳이 현실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만약 꿈에서 깬 현실이 괴롭고 힘들기 만 하다면? 행복했던 꿈과는 반대로 너무나 가혹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사랑했던 가족이 죽고,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고, 홀로 하루 하루를 보내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게 차라리 행복한 것이 아닐까? -오빠! 일어나! 제발! 어차피 어느 게 현실이고 어느 게 거짓인지……. 어느 게 나비이고 어느 게 장주인지……. -오빠! 알 수 없다면……. 第 16 話 Season's Greeting " ……. " 맨 처음 보인 것은 하얀 천장이었다. 몇 번 눈을 깜빡여 보았다. 마치 눈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던 것 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을 뜨고 있다는 것 만 으로도 상당히 신선한, 그리고 기묘한 기분이다. 단지 눈을 뜨는 것 뿐인데…… 이 알 수 없는 이질감은……뭘까? " ……. "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내 몸이 아닌 것만 같 았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몸에 힘을 넣는 방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다. 난 당황스러운 기분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뒤튼다는 것 은 나만의 생각이었을 뿐.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눈동자를 굴리는 것 외에는 내 뜻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 ……오빠? " 한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하얀 병실의 천장을 가리는 그림자가 있었다.형광 등의 역광에 그림자가 져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 그림자가……. ' 그림자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보니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고 있었다.눈 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중에서도 하얀색과 검은 색이 강한 대비를 일으키며 물체의 윤곽을 어지럽혔다. 눈이 부시는지도 어 두운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 오빠? " 지금 날…… 부르는 건가? 오빠? 오빠라면……. ' 유리……인가? ' 아니야. 유리의 목소리가 아니다. 유리 또래의 목소리라기 보다는 나와 비 슷한 나이 대의 여자 아이 목소리다. 어딘가 낯익은 음성이었지만,누구의 목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 오빠! 내가 보여? 응? " 날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뼈가 흔들릴 정도로 아 팠기에 신음을 흘렸다.내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상대방은 내 몸 에서 손을 떼었다. " 아,미안! 하지만 깨어난 거지? 응? 응? " 소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듯 재차 물어왔다. 그 목소리는 또 왜 그렇게 큰 지 난 귀를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이런! 제발 목 소리를 낮춰! 귀가 울린다고! ' 그런데…… 여긴 어디지?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거야? ' 거기다 내 몸은 또 왜…….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을 생각하려고 하 면 머리가 깨질 것 처럼 아프다.생각한다는 행위 조차 내 맘대로 할 수 없으 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내 몸과 머리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진 적이 또 있었을까? 결국 난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소녀를 향해 연유를 묻기로 했다.입 을 열고 목소리를 내었다. " ……. "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입술만 몇 번 달싹이는 게 고 작이었다. 난 충격을 받았다. 목소리조차 나오지를 않다니! 응당 울려야할 성대는 울 리지 않았고,굴러가야할 혀는 굴러가지 않았다. 침이 전부 말라 버렸는지 입 안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 오빠! 깨어난 거야! 드디어 깨어난 거야! " 이런 내 고통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소녀는 환희에 젖은 목소리로 소리 쳤다. 그 바람에 내 귀가 다시 울렸다. " 잠시만 기다려!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그리고 절대로 잠들면 안돼! 절대 로! 알았지, 오빠? 응? 절대로 잠들면 안 돼! " 소녀는 몇 번씩이나 당부를 하며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아마 방 을 나간 것 같았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간신히 정적이 찾아온다. 난 식은땀 을 흘리며 몸을 움직이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그러자 몸을 꿈틀 거리는 게 가능해졌다. 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는지 전신에 쥐가 내렸다. 그리고 무채색 의 세상이 희미하게 나마 유채색을 띄었다. 여전히 촛점이 맞지 않았지만 사 물은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 아……. ' 살짝 고개를 옆으로 튼 곳에는 창문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었다. 창 밖은 짙 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하얀 뭔가가 그 사이로 흩날린다. 저건……. ' ……눈? ' 그래……. 분명 오늘은 12월 24일……. 맞아. 12월 24일이었다.그것만은 확 실하게 기억났다. 좋아. 이대로 천천히 기억을 돌이켜 보는 거야. 나에게 무 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긴 또 어디인지. 침착해져라, 유가인! " 가인 씨는 오랜 시간동안 잠들어 있었어요. " 담당 간호사의 말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난 이제는 움직일 수 있게 된 몸으로 천천히 침상 바로 옆에 붙어있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며칠 째 내 렸던 눈은 소복히 쌓여 대지를 새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병실로 들어오는 강한 햇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망연자실하게 그것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 2031년 3월 14일. 가인 씨네 가족들이 타고 가던 차는 마주 오던 덤프 트 럭과 충돌했어요. 그 사고로 인해 가인 씨의 아버님은……돌아가셨죠. " 난 그 대목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 으니까.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이제와서 돌아가셨다는 얘길 들어도 새삼 슬 플 건 없었다. 하지만……. " 하지만 가인 씨의 어머님과 가인 씨,그리고 신이는 무사할 수 있었답니다. 그 대형 사고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정말이지 기적이었어요. 가 인 씨의 아버님이 트럭과 부딪히기 전에 핸들을 조수석 방향으로 꺾어 정 면 충돌을 피해낼 수 있었던 거죠. " " ……. " " 물론 모두 무사했던 건 아니에요. 가인 씨는 지금껏 무의식 상태로 잠들어 있었으니까. ……정말이지 오랜 시간 동안. " 간호사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조용히 되뇌였다. 난 여전히 그녀를 돌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12월 28일. 내가 깨어난지 4일 째 되는 날이 다. 그리고……. " 4년. 아니. 정확히는 4년 하고도 9개월이 흘렀군요. 가인 씨는 그 동안 내내 잠들어 있었어요. 흔히 말하는……식물 인간 상태로. " 2035년. 달력의 연도는 분면 2035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웬지 비현실적인 숫자다. " 모든 게 믿어지지 않을 거에요.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을테고, 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을 테고. 하지만 가인 씨는 이제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요.그 동안 가인 씨를 간호해온 신이를 위해서라도. " " ……신이? " 난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가인 씨의 동생. 그 아이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는 담당 간호 사인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신이는 정말 하루도 빠짐 없이 가 인 씨의 곁을 지켰어요. 그 나이 또래 애들이라면 응당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들도 많았을 텐데. " " ……신이. " 난 여전히 무감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이. 신이. 신이. 신이. 신이. 몇 번을 되뇌여도 현실감이 오지 않는 이름이었다. 유신. 내 동생을 말하는 건가? 저 간호사는 지금 내 동생을 언급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내 동생은……. " ……죽었어. " " 예? " 내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간호사가 귀를 기울였다.난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 신이는……죽었다고. 그 때 그 사고로. 나 이외는 모두 죽었단 말이야. " " ……! " 간호사는 두 눈을 부릅 뜨며 날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우스꽝스 러운지 난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 모두 죽었어. 하하하! 아버지도! 어머니도! 신이도! 모두 죽었 단 말이야! " " 가인 씨! " " 도대체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은 뭐지! " 난 버럭 소리치며 간호사를 노려보았다. 내 표독스러운 눈초리에 그녀는 자 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거짓 된 세상! 거짓된 세계! 도대체 이건 무슨 짓거리지?! " 2035년이라고? 아니야! 말도 안 돼! 난 분명 2032년을 살아가고 있었다고! 나 혼자 힘들게! 힘들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다가! 그러다가! " 모두를……. 모두를 만났다! 마리 선배! 시민 씨! 진우 씨! 유리! 브루스! 피스 관계자들을 만나서 피스 대원이 되어 몬스터들과 싸우며! ……힘들지만 즐거운 나날들을! " 그럼 그건 다 뭐야! 그게 꿈이라는 거야? 4년 동안 잠결에 꾸던 꿈이라는 거야?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 " 가, 가인 씨……. " " 웃기지마! 난 알고 있어! " 그래! 이건 거짓이다! 현실이 아닌 거야! 전투 도중 몬스터의 공격으로 환 상에 빠진 게 분명해! 이런 경우는 몇 번이나 있었어! " 흥! 이 정도로 날 혼란스럽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어림도 없어! " 이런 것 쯤! 내 오라 능력으로! " 꺅! " 하지만 간호사를 향해 내뻗은 주먹으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이럴 리 가…… 이럴 리가! 왜 발현되지 않는 거지? 왜 오라가 나오지 않는 거야? 어 차피 환상인데! " 제길! " 내 힘으로는 깰 수 없는 환상 임이 분명했다.그렇다면 유리가 날 구하러 와 주길 기다리는 수 밖에! 그때까지는 맘에 들지 않지만 이 환상 속에 남아 있 어야만 했다. " 제길! " 그래. 다 거짓이야! 현실이 아닌 거야! 그래! 그런 건데! " 제길! " 제길! 제길! 제길!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거지?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도대체 왜! " ……오빠? " 그때 병실의 문가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무참하게 굳어진 표 정으로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병실 안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며 멍 하니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다시 웃음이 치 밀어 오른다. " 그래! 무엇보다 이게 가관이로군! " 저 눈 앞의 아이가!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저 소녀가! " 신이라고? " 내 동생 유신이란 말이지!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 아주 훌륭해! 내 동생이란 말이지! 네가! " 하긴! 2035년이니까 초등학생이었던 내 동생도 중학생이 될 나이지! 아, 사 고가 나기 전에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으니까 지금은 중학교 3학년생이겠군! 잘도 이런 설정을 생각해냈어! " 잘도! " 잘도 내 죽은 동생을! " 악! " 나에게 다가오던 그녀는 내가 휘두른 손에 얻어맞고 쓰러졌다. 간호사는 그 녀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 괜찮니, 신아! " " 아,아아. 괜찮아요……. 언니. " 그 아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듯 활짝 웃 었다. 그 웃음이…… 마치 날 비웃는 것만 같아……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이를 갈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리는 게 금세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 내가 불안 해 보였는지 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부축하려 했다. " 오빠, 그렇게 서 있으면 안 돼. 아직 물리 치료도 받지 않았……꺅! " 하지만 난 가차없이 그녀를 뿌리치고 병실 밖으로 향했다.견딜 수가 없었다. 내 여동생이라고 밝혀오는 저 아이의 모습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 다. 신이는 죽었어! 죽었다고! 그런 불쌍한 아이를 어째서 가만 내버려 두지 않 는 거지? 어째서! 죽은 아이를 이렇게나 모욕하다니! 따르르르릉 그때 병실에 난데없는 벨 소리가 울려퍼졌다. 비틀거리며 문을 통과하려던 나는 뒤를 돌아 보았다. 그 곳에는 신이를 끌어안고 있는 간호사가 침상 옆 의 벨을 누르고 있었다. 난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 너……! " 컥! 그때 내 등으로 강한 태클이 들어왔다. 난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러자 하얀 가운을 입은 장정 세명이 나의 사지를 붙잡았다. 제길! 저 벨 소리는 이 사람들을 부르는 거였나! " 놔! 이것 못 놔! " 난 미친듯이 발버둥을 치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장정들에게 붙잡힌 목과 팔 다리의 피부가 벗겨져 나갔지만 개의치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그런 내 시 야에 간호원의 품 속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그 아이의 눈길이 느껴졌다. 분 명 그녀에게서 신이의 모습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 다. 인정해서는 안된다! '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 그 아이가 날 바라보는 것은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동정. 연민. 슬 픔.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그 표정! 그것이 날 화나게 만들었다. 감히 가짜 주제에! 꿈인 주제에! 잘도 내 동생의 얼굴로! " ……윽! " 그때 팔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장정 중 한 사람이 내 팔에 주사를 놓고 있는 것이었다. 진정제인지 수면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급속도로 마음이 가라 앉으며 머리가 무거워진다. " 아,안 돼……. " 여기서 잠들면! 도망치지 않으면! ' 안되……는데. ' 하지만 난 밀려드는 수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 식물 인간이 되는 원인은 두부 외상, 척추 손상, 뇌 혈관 손상, 뇌 척수 종양, 중독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이 가인 군과 같은 교통 사고에 의한 두부 외상이지. 대뇌 표층부를 대뇌피질이라 하는데,이 곳에 는 신경 세포가 모여 있어서 운동, 감각, 의식 등의 작용을 담당하고 있 거든. 이 대뇌피질이 손상을 입으면 운동 기능이나 의식이 정지되고,뇌간 이 담당하는 호흡기능, 소화기능, 심장의 박동 기능 밖에 하지 못하게 되 지. " " 선생님, 오빠는 꿈을 꾸고 있었나 봐요. 요 4년간 계속……. " " 꿈을……꿨다고? " " 언제나. 언제나 꿈에서 있었던 일들만 얘기해요.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꿈 이라고, 거짓이라고 하면서. " " 흐음……. " " 어떡하죠, 선생님? 오빠는 어떻게 되는 거죠? 설마 저대로 계속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상 속에서만 살게되는 건가요? 그런 거에요? " " 하지만 신아. " " 예! " " 앞에 말했다시피 식물 인간이란 대뇌의 기능이 정지되는 것,즉 기억할 수 도 없고, 감정을 느낄 수도 없는 상태란다. " " ……? " " ……식물 인간은 꿈을 꿀 수가 없어. " 사각. 사각. 사과를 깎는 소리가 병실에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나는 창 밖에 시선을 두 며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 뜻과는 달리 마음은 점점 조 급해져 간다. 난 침상에 누운채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옆을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그 아이, 내 동생이라고 하는 아이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과를 깎고 있었다.그 모습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 신이……. 저 아이가 신이라고? ' 여전히 실감할 수 없었다. 어차피 가짜일 게 뻔했지만 그래도 죽은 동생의 모습을 이렇게나마 볼 수 있다는게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동생과 이 눈 앞의 아이는……너무나도 달랐다.언제나 울보이고 나에게 메달려오던 신이가, 그 작고 여리던 신이가 이렇게 훌쩍 자 라난 모습이라니. ' 틀려. 틀리다고. ' 난 힘껏 고개를 저으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환상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 되고 있으니 마음이 불안해졌다.정말 내가 그 동안 꿈을 꾼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 아니야. 이 쪽이 꿈이야. 이 쪽이 환상이라고! ' 하지만! 하지만 만약 환상이라면! 이 환상은 얼마나 계속되려는 거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어느덧 환상은 일주일을 넘어서서 이주일 째가 되어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이대로는 환상이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미쳐버릴 것이다. " 오빠, 뭘 그렇게 보고 있어? " 그때 들려온 여자 아이의 목소리에 난 상념에서 깨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신이라는 아이는 과일을 깎던 손을 멈추며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당혹스러워 난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 ……아무 것도. " " 헤에. 혹시 날 쭉 바라보고 있었던 거 아냐? 그치? 에이, 쑥스럽다. 정말. 내가 사과 깎는 모습이 그렇게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예뻤어? " " ……. " 내 무뚝뚝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 에 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정말 속 편한 녀석이로군. '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대했으면 충분히 깨닫고도 남았을 텐데.내 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난 줄곧 내 병간호를 해오는 그녀를 차갑게 대해왔다. 그녀가 아무리 살갑 게 굴어도, 아무리 친근하게 굴어도 노골적으로 그 태도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런 나의 태도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한결 같이 내 병 수발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 자∼ 오라버니. 여기 사과∼ " ……이쯤되면 차갑게 대하는 내 쪽이 오히려 미안할 정도다. 사과를 포크로 찍어 가져오는 그녀의 모습에 난 얼굴을 붉히며 빼앗듯이 그 것을 낚아챘다. " 이,이리줘. " " ……체- 먹여주고 싶었는데. " " 뭐? " " 으응∼아냐. 아무 것도. 자. 자. 얼른 먹어∼ " " ……. " 난 짧게 한 숨을 쉬며 사과를 입에 넣었다. 달콤한 사과 즙이 입 안 한가득 퍼지는 게 느껴졌다. 그 맛과 향에 나도 모르게 사과 씹는 것을 멈추며 포크 의 베어 문 사과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저히 이 느낌, 이 촉감이 가 짜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 시민 씨. ' 이렇게 병실에서 사과를 먹고 있자니 그녀가 떠올랐다. 피스 대원이 된 나 를 한 집에서 가족처럼 보살펴주던 시민 씨. 그녀도 입원해 있던 나에게 사과를 깎아주며 병간호를 해주었지. 그녀의 금 빛 머릿결도, 그녀의 다정스러운 눈동자도, 따뜻한 목소리도……. 그 모든 게 그리워졌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녀를 못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절망감이 나 를 엄습해온다. 그럴수록 더더욱 이 현실을 부정해야만 했다. ' 그래. 조금도 인정할 수 없어. 이런 현실 따위! ' 부정하자! 부정하자! 이 세상도! 이 병원도! 이 눈 앞의 아이도! ' 그 모든 것을 다! ' " 가인 씨, 물리 치료 받을 시간이에요∼ "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내 담당 간호사라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 역시 이 아이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기분 나쁜 존재였다. 내가 아무리 난폭하게 굴어 도 사람 좋은 미소로 일관할 뿐. 별 다른 대응을 해오질 않는다. 마치 내가 환자니까 자신이 이해하지 않으면 어떡하겠냐는듯한 태도였다. " 언니! 안녕하세요? " " 어이구. 우리 신이 열녀 다 됐네? 그냥 이제는 하루 왠 종일 오빠한테서 떨어질 줄 모르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둘이 부부인 줄 알겠다∼ " 그렇게 말하며 윙크하는 간호사에게 난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이 동생이라는 녀석은 눈치도 없는 건지 대담하게 내 팔짱 을 껴왔다. " 정말요? 이렇게 하면 더 부부 처럼 보이려나? " " 바,바보 같으니! 이게 무슨 짓이야! " 난 당황하여 재빨리 그 손을 뿌리쳤다. 가짜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이 아이 의 페이스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휩쓸려 버리고 만다.그것이 왠지 모르게 분 하고 화가 났지만 팔짱이 풀려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녀석의 모습에 도리어 맥이 빠졌다. 간호사는 우리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훗. 어쨌든 가인 씨가 기운을 많이 차린 것 같아 안심이야. 이렇게 불 평은 하고 있어도 신이의 간호 덕을 많이 보고 있나 봐? " " 에이∼ 그렇게 말하면 부끄러운데. " 녀석은 쑥스러운지 몸을 꼬았다. 어이. 볼은 붉히지 말라고! 힐끔 힐끔 날 쳐다보지도 마! " 이대로 상태가 좋아지면 다음 주 내에 퇴원도 가능할 거야. 물론 한달 정 도는 통원 치료를 받아야겠지만. " " 정말요? 아아∼ 드디어 꿈에서나 그리던 오빠와의 러브 러브한 생활이! " " ……러브 러브? " " 응! 러브 러브! " 어처구니가 없어져 되묻는 나에게 그 아이는 스스럼 없이 웃어보였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해봐야 나만 피곤해질 뿐이라는 걸 깨닫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가 퇴원한다는 소식을 정말 자신의 일 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짧게 도리질을 쳤다. " 자! 자! 그런 의미로 이 누님이 선물을 준비했지! 가인 씨의 퇴원이 결정 된 기념으로! 보고 놀라지나 마시라! " ……선물? 난 간호사의 말에 그녀가 가리킨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 곳에는……. " ……가인아? " 한 남자가 서있었다. 분명 내 기억 속에 있는 그 녀석과는 많이 변해있었지 만, 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재영아! " 박재영. 그 녀석이었다! 재영이는 믿을 수 없다는듯 날 바라보다가 흥분한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나도 침대에서 일어나 그 녀석에게 다가갔다.재 영이는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저,정말…… 가인이냐? 가인이, 너 맞냐고! " 난 미소로 답했다. 가슴이 알 수 없는 격정으로 벅차올랐다.지금껏 이 병원 에 있으며 모든 것이 낯설었다. 모두 내가 모르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익숙한, 내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나게 되다니! 이 가짜 뿐인 현실에서 처음으로 믿을 만한 존재가 내 앞에 등장했다. " 이 자식! " 재영은 환하게 웃으며 날 끌어 안았다. 나도 그를 마주 안았다.코가 시큰거 리고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반가운 감정이 지나가자, 그 다음 나를 찾아 오는 것은 안도감이었다. 지금껏 팽팽히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모두 풀어지 는 안도감! "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이 나쁜 자식! " 날 부둥켜 안은 재영이는 울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 진심으로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이 연쇄 반응이라도 일으킨 걸까. 난 내 두 눈을 손으로 부비며 중얼 거렸다. 어라. 어라라? ' 바, 바보 같이……. ' 내 두 눈으로도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 내렸다. 요 이주간 모든 것을 불신해왔다. 모든 것을 경계해왔다. 그런 나에게 있어 서 친구 재영이의 존재는 처음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편안한 안식처로 다 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 그렇게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더니! 하하! 정말 깨어난 거 맞지? 하하하! " " ……깨어나? " 나의 되물음에 재영은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실감 안 나냐? 무려 4년 만이라고! 4년하고 9개월! 넌 이제 평생 잘 잠은 다 잤다! 하하하! 정말 잘 깨어났어! 정말! " " ……. " 어설픈 감동과 기쁨은 단숨에 날아가버렸다.그리고 다시 한번 이 모든 게 환 상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 현실이……아니야. ' 그렇게 생각하자 흐르던 눈물이 거짓말 처럼 멈췄다. " 그래서 굉장히 위험했다는 거 아니냐? 정말 아슬아슬했다고. 2점 차이였 으니까. 문제는 거기서 끝난게 아니라 보결이었다는 거야. 다른 학교 다 떨어지고 오직 거기만 남았는데, 그 하나 남은 것도 내 앞에 세 명 씩이 나 진을 치고 있었던 거지, 원! 정말 그 때는 재수해야하는 건가 하고 반 쯤 포기했었어. " " ……어쨌든 결론은 합격했다는 거 아냐? " " 후하하하! 그럼! 당연하지! 악착같은 끈기와 노력의 성과라고! 하늘이 설 마 이 몸을 떨어뜨렸겠냐! " " 그래서……대학 생활은 어때? " " 그래! 어째서 그걸 묻지 않는가 했다! 흠. 흠. 좋아. 지금부터 이 박재영 님의 파란만장한 캠퍼스 러브 스토리를 들려드리지! " 러브 스토리는 무슨. 난 그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대학 생활을 얘기하는 재영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녀석은 많이 변해 있었다. 일단 고등학생은 꿈도 꾸지 못할 염색한 머리에 어른스러워진 이목구비. 굵어진 목소리. ' 4년이 지났다는 건가. ' 그 교통사고가 있은지 4년 여가 흐른 시간. 재영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짓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식물인간이 되어 깨어나지 못하는 동 안 녀석은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내 동생이란 여자 아이는 중학생이 되어 있 었다. 뭔가 상당히 잘 끼어맞춘 퍼즐 조각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 그 MT가 지옥이었지. 아직 눈도 녹지 않은 산을 오르게 하더라니까? 장난 이 아니었어! 다들 산을 탄다기에 농담인가 했는데 젠장. 이게 웬 일? 그 산악 오타쿠 교수는 저 혼자만 등산복 입고 다 준비해왔던 거 있지? 덕 분에 난생 처음 구두를 신고 눈으로 덮인 산을 오르는 경험을 다 했다.이 건 멤버쉽 트레이닝(Membership Training)이 아니라 마운틴 트레이닝(Mou ntain Training)이었다고! " 녀석이 대학 생활을 얘기하면 할 수록 내 기분은 가라앉기만 했다. 어차피 다 가짜니까. 다 거짓이니까.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재영이 녀석도 진짜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런 의욕도 생기질 않았다. 모든 게 허무해졌 다. 차라리 몬스터의 공격에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숴지는 편이 나았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꿈은 너무도 평화로웠지만…… 그 어디에도 내가 안주 할 곳은 보이지 않았다. 끝 없이. 끝 없이 안개 속을 헤매야만 했다. 끝 없이. 끝 없이. " ……. " 난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병원의 뒷뜰에 놓인 여러 개 의 벤치들 중 하나였다.재영이 녀석과 단 둘이서 얘기하기 위해 간호사도 그 동생이라는 아이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내 예감에 그 둘은 날 이 환상 속 에 빠뜨린 존재의 하수인 같았기 때문이다. 날 감시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했기에 재영이에게서 진실을 듣기 위해 그들과 떨어졌다.하지만 그것도 다 쓸데 없는 짓이었다. 재영이도 그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아니. 이 눈 앞의 남자는 재영이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녀석이 아 니었다. 단지 이 남자는 이 거짓 세상 속에서 4년간을 살아온 박재영이라는 배역을 맡고 있었을 뿐이다. 저 편에서 환자복을 입은 꼬마 아이가 간호사와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그것 을 보고있자니 이유모를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그 답답함에 숨이 다 막힐 지 경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누가 날 이런 환상 속에 빠뜨린 거야? 이런 짓을 해서 뭐가 이득이 된다는 거지? 차라리 날 해칠 목적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죽여줘! 이렇게 날 가지고 놀지 말고! ' 빌어먹을! '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눈 앞이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당장이라도 이 환상 을 만든 녀석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당황하는 나를 말 없이 지켜보고 있을 그 녀석이 증오스러웠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 언제까지 계속될 셈이지? 언제까지 계속될 셈이야! 이쯤하면 됐잖아? 더 이 상 나에게 뭘 보여주겠다는 거지! 이제 그만둬! 충분히 거짓이라는 건 알았 으니까 이런 속 보이는 연극은 그만두라고! " ……가인아?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재영이는……아니.재영이의 배 역을 맡고 있는 녀석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난 터져버릴 것만 같은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 아니. 그것보다…… 요즘 세상은 어때? " " ……? " 내 난데없는 질문에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하지만 이내 이해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 아, 하긴. 자고 있는 동안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겠다. 에, 어디 보자. 대통령이 바뀐 것 하고∼ M그룹 회장이 자살한 일. 그리고……. " " 피스메이커는? " 다른 건 알 바 아니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이계의 침략자 몬 스터로부터 유일하게 삼차원을 지킬수 있는 그들. 내가 환상 속에 빠지기 전 까지만 해도 몸 담고 있던 그 기관의 행방이 궁금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별 일이 없었다는 건 그들이 몬스터를 잘 막아내고 있다는 소리일 텐데……. " 피스……뭐? 그게 뭐야? " 재영의 되물음에 난 답답함을 느끼며 짜증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 몬스터로 부터 삼차원을 지키는 대 몬스터 특무 기관 말이야! 피스메이커! " " ……모,몬스터? 삼차원을 지켜? 그게 무슨 소리야? " 모르겠다는듯 고개만 연신 젓는 재영의 모습에 난 점점 불안해졌다.뭐야? 피 스메이커를 모르는 건가? 그럴리가 없을텐데. 분명 민간인에게는 정보가 한정 되어있다지만 피스메이커와 몬스터의 존재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 몬스터가 게이트를 넘어오면 대피 방송이 나오잖아? 그렇게 우리가 쉘터로 대피한 틈을 타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기관 말이야! " " ……. " " 몬스터 몰라? 몬스터! 2020년 대재해가 일어난 후로 부터 모습을 드러낸 이차원의 침략자 말이야! " " 가,가인아……. " 하지만 재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안타까운 시선을 나에게 던질 뿐이었 다. 난 이를 갈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길! 날 미친 놈 취급하고 있어! 가짜 주제에! 난 재영을 무시하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 그럼 이 환상은 피스메이커와 몬스터라는 존재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설정 인 건가? 2020년에 대재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설정인 거야? 하! 정말 겁나게 평화로운 미래로군! ' 그래. 그럼으로 해서 이쪽이 거짓이라는 게 더더욱 분명해진 거다! 바보같 으니! 아무리 가짜라도 지킬 건 지키고 있어야지! 피스메이커가 없다는 게 말이나 되냐! ' ……아니. ' 그게 아냐. 과연…… 어느 쪽이 말이 안되는 걸까? 이차원의 습격자라는 괴물들로부터 패턴에 따라 다른 빛을 내는 오라 능력 자가 지구를 지킨다는 쪽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평범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쪽. 어느 쪽이 더 말이 안되는 거지? 어느 쪽이 더 비현실적인 거야? ' 제길……. 토할 것 같아. ' 난 욕지기를 삼키며 애써 발걸음을 놀렸다.뒤에서 재영이가 날 불렀지만 그 소리는 나하고는 동 떨어진 먼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난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하아. 하아. 하아. ' 이쪽이 거짓이야. 이쪽이 거짓. ' 그렇죠,시민 씨? 그렇죠, 마리 선배? 이쪽이 거짓이죠? 네? 유리야! 진우 씨! 이쪽이 가짜잖아요? 피스메이커가 없다니…… 말도 안 돼! 브루스! 내 말 듣고 있죠? 그렇다면 대답해줘요! 여기가 가짜라고! 꿈인 거라고! ' 당황하지마, 유가인! 이래봤자 상대가 원하는데로 놀아날 뿐이야! 진정하 라고! ' 무엇보다 2020년 대재해가 없었다는 건 말도 안 돼! 이게 결정적인 증거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대재해는 있었으니까! ' 하지만……하지만! 하지만! ' 알 수 없는 오한에 이빨이 딱딱 거리며 떨려왔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몬스터는 분명히 삼차원을 습격해왔을 거다. 그렇다 면 분명 대피 훈련도 했을테고 피스메이커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있었을 거야. 그런데 왜 난……. ' 그것에 대한 기억이……없지? ' 교통 사고를 당하기 전에 몬스터에 대한 대피 훈련을 했었던가? 그에 관련 된 뉴스를 접한 기억이 있었던가? 아무 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분명 내 기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이 환상 속에 들어오기 전의 일들은 다 기억하는데! 어째서 정작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의 기억들은 이렇게 불분명 한 거지? ' 바, 바빴기 때문일 거야. 그래.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느라 내가 신이를 돌봐야했잖아? 그래. 정말 정신이 없었지. 학교가 마치면 부리나케 집으 로 돌아오기 바빴으니까. 맞아. TV같은 것도 볼 시간이 없었어. ' 그래. 그래서 몬스터가 나타났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소식을 접할 수 없었 던 거야. 운 좋게 내가 사는 구역에서는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았던 거고. 그 래.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설명돼. 특별히 기억이 없는 게 아니야. 단지 운 좋게 몬스터와 마주치지 않고 살아왔던 것 뿐이야. 운 좋게……. 2020년 대재해가 있은 후로부터 단 한번도 몬스터와 마주치지 않고……. ' 대……재해? ' 지금 생각해보니 대재해라는 것도 정말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난 누 구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었던 거지? 그냥 귓 동냥으로 듣다보니 2020년에 대 재해란 게 있었나 보다 하고 여겨왔던 건가? 아냐. 그렇지는 않아. 수업 시간에도 들었던 거 같은데. 정확히는 언제 들 었는지,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그러니까 난! ' 난…… 언제부터 2020년에 대재해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 기억의 불분명함. 혼란스러움. 난 처음으로 내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끼이익 나와 내 동생이라는 아이를 태운 택시는 22구역의 한 주택 앞에 멈춰섰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한동안 멍하니 눈 앞의 집을 바라봐야만 했다. " 여기는……. " 묘한 그리움과 감동이 내 가슴을 적셨다.이곳의 모든 것이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여기는 바로. "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어때, 오빠? " 녀석은 -절대로 신이라고 부를 생각은 없다-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 만 난 그 물음에도 대답하지 못하며 눈 앞의 저택에 모든 신경을 빼앗겼다. 여기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이다. 신이와 부모님. 그들과 지냈던 추억이 곳곳에 서려 있는 장소. 사고가 일어 난 후, 다시는 찾지 않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 있을 때면 죽은 가족들 이 생각나 도저히 제 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딱 한 번 자신의 짐을 챙기기 위해 이 곳을 들린 적이 있었는데, 짐 챙기는 것은 고사하고 목 놓아 울기 바빴던 게 기억났다. " 여기서……계속 살고 있었던 거야? " " 으응. 나중에 오빠가 깨어났을 때 집이 바뀌어 있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서……. "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감회가 새롭다는듯 집을 바라보았다. 난 말 없이 녀 석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듯 웃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내가 모르는 슬픔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물론 여전히 이 현실이 가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감정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설이나 영화가 사람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 처럼 이 가상 현실도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거 기다 생생하게 다가오는 현장감이 나를 자꾸만 착각에 빠지게 한다. 꿈과 현 실의 경계를 위협해온다. 난 그것을 내내 주의하며 이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지해야만 했다.그 리고 이 현실이 조금이라도 가짜라는 꼬투리를 보이려고 하면 즉시 그것에 매달렸다. 방금 전만 해도 난 수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 ……어머니는? " 끼익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녀석의 등 뒤로 그렇게 물었다. 어머니의 행방. 그것은 단지 지금와서 궁금해진 것 만은 아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내내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였다. 분명 담당 간호사는 아버지 외의 가족은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그렇다면 어 머니는? 그 분은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인가? 자기 자식이 4년 여 동안 식물인 간 상태로 지내다가 의식을 되찾았는 데 어째서 코빼기 조차 보이지를 않는 거지?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만사 제쳐두고 병원을 찾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병원에 있는 삼주간 난 어머니에 대한 그 어떤 얘기도 들을 수 없었다.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내 담당 간호사든, 의사 선생이든, 심지어는 내 동생이라는 녀석도. 그것이 너무나 어색했다. 그 당시에도 계속 이상하게 여겨왔지만 어차피 가짜, 금새라도 깰 꿈이라고 생각해서 별 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쯤되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 ……. " 내 질문에 녀석은 집으로 들어가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녀석의 뒤 를 따르며 행여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를 보이지 않을까 유심히 지켜보았 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녀석은 입을 열었다. " 오빠. 오빠는 오빠의 병원 비, 어떻게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 " " ……뭐? " " 이상하잖아? 식물인간이 된 사람을, 그것도 4년이나 입원해 있던 사람의 병원비를 우리 가족 형편 상 낼 수 있었다는 게.그것도 이제는 아버지 마 저 없는데. " 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 는데. 되려 내가 떠올리지 못했던 의문을 녀석이 제시해주었다. 그래. 충분히 이상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일지도 몰랐다. 녀석은 여전히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 오빠는 그거 알고 있었어? 엄마의 외가에 대해서. " " ……. " " 몰랐었는데 엄마의 외가, 상당한 부자였더라. 몇 개의 회사나 가진 큰 기 업을 운영하는 집안이더라고. " 알고 있었다. 사고로 가족들을 잃은 후 난 친척 집, 외가를 전전해야만 했 으니까. " 엄마네 집안에서는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셨나봐. 아빠한테 는 가족이 없잖아? 자신들이 곱게 곱게 기른 딸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고아와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기분이 었겠지. 엄마는 집 안 전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빠와의 결혼을 추진하 셨고 다시는 외가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되셨어. " 외가의 사람들이 어머니의 결혼을 얼마나 반대했는지는 직접 몸으로 겪어봐 서 알고 있었다. 사고 후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하루도 빠짐 없이 온갖 냉대와 푸대접을 받아야만 했으니까. ' 모든 건 너희 때문이다. ' ' 네 놈의 아비가 그 아이를 데려가지만 않았더라도! ' 자신들이 고집을 부리며 부모님을 받아들이질 못했다는 건 생각지도 않으며 모든 책임과 잘못을 아버지에게로만 돌렸다. 그때 받은 모멸감을 생각하니 지금도 눈앞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다. 결국 그들의 멸시를 참지 못한 나는 가족들의 보험금을 써서라도 자취하는 길을 택해야만 했다. " 그런데……그것이 내 입원비와 무슨 상관이야? " " 엄마는 오빠의 입원비를 받아내기 위해 다시 외가의 사람이 되셨어. " " ……! " 난 두 눈을 부릅 떴다. 어머니가…… 외가의 사람이 되셨다고? " 그 말이 사실이야? " " 응. 그리고 외가에서 오빠의 입원비를 내주는 대신 엄마에게 제시한 조건 이 있었지. ……그 조건이 뭐였을 거 같아? " 녀석은 여전히 날 돌아보지도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그 때문에 난 그 아이 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남의 얘기 를 하는 것인양 태평스러웠다. " 다시는 우리들을 만나지 말 것. 그리고 집 안에서 정해주는 사람과 재혼 해야 할 것. " " ……! "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기가 막힌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 어지간히 우리가 미우셨던 모양이야, 우리의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외할 아버지에게서 오빠의 입원비를 받아낸 것만 해도 기적이지. 어쨌든 엄마 는 그렇게 재혼하셨고 현재는 만나 볼 입장이 못 돼. 오빠가 깨어났다고 하더라도. "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고개는 자꾸만 숙여지고 표정은 자꾸만 일그러 지고 있었다. 아무리 환상이고 거짓이더라도, 이런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 올해 초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외가의 친척 집에 붙어있었는데, 헤헤. 도 저히 못참겠더라. 사람을 너무 애물단지로 취급하는 거 있지? 그래서 그 냥 나와버렸지. 현재의 이 집은 엄마가 구해주셨어. 더 좋은 집을 구해주 겠다고 하셨지만 난 여기가 맘에 들었거든. 생활비야 아직까지는 엄마의 손을 빌리고 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어. " 녀석은 날 돌아보았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이 아이는 웃고 있었다. " 여기서 쭉 기다려왔어. 오빠가 깨어나기만을……. 오빠가 깨어나면 여기 서 함께 생활할 수 있을테니까. 둘이서 같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 렇게 생각하면 힘든 일도 슬픈 일도 다 참아낼 수 있었어. " " ……. " 난 떨리는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쑥스러운지 볼을 붉히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 고생을 이 애 혼자서 어떻게 견뎌왔을까? 나만 하더라도,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었는 데. 녀석은 거기다 내 병 수발까지 들면서……. ' 이건 정말 가짜인 걸까? 이게 다 거짓인 거야? ' 이렇게 웃고 있는 저 녀석의 모습도……다 꿈인 걸까? " ……정말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이 잠꾸러기 오라버니. " 그렇게 말하며 혀를 내미는 녀석의 모습에 난 애써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쓸쓸함은 가시지를 않았다. 퐁……. 퐁……. 천장에 맺힌 물방울들이 욕조로 떨어져 내렸다.욕조에 받은 따뜻한 물에 몸 을 담그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김이 서린 욕탕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 꺄하하. 오빠, 간지러워! ' ' 가만히 좀 있어 봐. 비누가 눈에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 이곳에서 신이와 함께 목욕을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를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아침에 잠이 덜 깬 상태로 세면대에 나란히 서서 거울을 바라보며 이를 닦았던 기억이라든지, 신이의 젖은 머리 를 드라이 기로 말려주던 기억이라든지. ' 그때는 나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던 어린애였는데……. ' 하지만 이 환상 속의 신이는…… 더 이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자라나 어느덧 나와 비슷한 또래가 되어있었다. 분명 예나 지금 이나 그녀와 나 사이에는 변함 없이 4년의 터울이 있었지만, 더 이상 예전의 그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 흥. 쓸데 없는 감상이야. 어차피 거짓인데. ' 그때의 오빠 동생 사이로 돌아가 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난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거칠게 세수했다. 녀석은 집으로 들어오자 마자 날 욕탕에 밀어넣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제 대로 씻지도 못했으니 깨끗히 하고 나오란다.그 동안 자신은 저녁 식사를 준 비하겠다고 했다. 난 가볍게 한 숨을 쉬며 내 몸을 내려다 보았다. 그 동안 피스메이커의 훈 련을 받아 단단히 단련되어 있어야할 몸은 거짓말 같이 말라 있었다. 4년 동안 쭉 누워지냈다면 당연한 거겠지만……왠지 내 몸 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병원에서 물리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이 몸이 적응되지 않아 무척이 나 고생해야만 했다. 난 앙상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몸이 떨렸다. 이 무력해진 몸에 적응해 갈수록 나도 이 꿈에 적응되는 것은 아닐까 더럭 겁이 났다. ' 그럴 리 없어. ' 꿈이다. 이건 꿈인 거야. 절대로 적응해서는 안 돼. 익숙해져서도 안 돼.익 숙해지는 순간, 그 순간에 넌 다시는 현실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시민 씨와 마리 선배,유리와 진우 씨들이 있는 현실로는 돌아갈 수 없어! 가인은 몸을 담근 온수로 긴장이 풀리려는 것을 애써 참아내며 신경을 곤두 세웠다. 다시 한 번 오라를 모아보려고도 해봤지만 역시나 헛수고였다. 자신 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단지 기다리기만 할 뿐. 누군가가 자신을 이 꿈 속에서 끄집어 내주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덜컹 " 오빠∼ " 그때 욕실의 문이 열리며 녀석이 얼굴을 빼곰히 내밀었다.그 갑작스러운 등 장에 난 기겁을 하며 온수 속으로 깊숙이 몸을 담궜다. 뭐, 뭐야? 이 녀석은! " 무, 무슨 짓이야? " " ……무슨 짓은? 식사 준비 끝내고 오빠가 목욕하는 거 도와주려고 왔지. " 녀석은 잘도 태연한 얼굴로 그런 소리를 해댔다. 난 온수의 열기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난 악을 쓰며 소리쳤다. " 도와주기는 뭘 도와줘! 내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혼자서도 충분히 할수 있으니까 당장 나가! " " 에이. 혼자서 하기는 뭘 혼자서 하냐. 등은 혼자서 못 밀거 아냐? 사양하 지 말고 곱게 곱게 내 도움을 받으세요∼ "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욕실로 들어왔다. 아, 안 돼! 아무리 환상이라지만 이건 반칙이야! 동생의 알몸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난 손으로 얼굴을 가 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 뭐 하고 있는 거야, 오빠? " 어이없어 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그리고 녀석을 바라본 순간 난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이 녀석도 생각이 없지는 않았는지 짧은 민소매 셔츠에 반 바지를 입고 들 어왔던 것이다. 난 왠지 모르게 안도하여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아아. 정말이지 십년 감수하게 하고 있어, 이 자식!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여자애가 남자 목욕하는데 불쑥 불쑥 들어오다니! 상식이라곤 쓰레기통에 내 다버린 거냐! 녀석은 욕조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감 잡았다는듯 씨익 웃었다. " 호오라∼ 혹시 실망하셨어? 옷 입고 들어와서? " " 그럴 리가 있겠냐! " " 그럼 얼른 나오십시오∼ 이 몸이 구석 구석까지 깨끗하게 만들어 드릴 테 니까. " " ……. " 이 자식 설마. " ……너 말이야. " " 응? " " 내 등을 밀어줄 때까지는 여기서 절대로 안 나갈 셈이지? " " 당연한 말씀. 뭣하면 이대로 드러누울까? " 녀석은 무릎을 꿇고 욕조에 턱을 받친채 정면으로 날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난 치를 떨었다. 이 자식, 성격이 변했어……. 이런 성격의 여자 따위……절 대로 내 동생이 아냐! " ……. " ……결국 난 불가항력적으로 욕조 밖으로 끄집어내져 녀석에게 등을 맡겼다. 아무리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다 큰 여자애에게 알몸을 보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난 하체를 가린 수건이 행여나 떨어질까 주의하며 떨리 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내 근심을 알기는 하는 건지 녀석은 뒤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내 등에 비누칠 한 타올을 문지르고 있었다. " 헤헤. 이렇게 있으니까 옛날에 오빠가 나 목욕시켜주던 거 생각난다. " 그 말에 가뜩이나 붉어진 내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바보같이……. 그게 언 제적 이야긴데……. ' 무엇보다 넌 가짜라고. 가짜가 신이와 나의 추억을 들먹이지마! ' " 오빠! 등 좀 펴봐! 왜 이렇게 계속 웅크리고 있는 거야? 비누칠 하기가 힘들잖아. " 녀석이 내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난 당황하여 수건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그렇게 내가 그녀의 눈치나 살피고 있자 녀석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짜악! ……내 등짝을 후려쳤다. 난 기겁을 하며 녀석을 돌아보았다. " 야! 무슨 짓이야! " " 거,참! 남자가 왜 이렇게 숫기가 없냐? 오빠하고 내가 하루 이틀 보고 지 낸 사이도 아닌데 자꾸 어색하게 굴래? " " 하,하루 이틀 보고 지낸 게 문제가 아니잖아! 너 말이야! 여자애라면 좀 더 조신하게 굴어야지! " " 헤헹. 그래도 오빠니까 이렇게 서비스를 해주는 거라고. 내가 아무 남자 한테나 이러는 줄 알어? " 안돼. 틀렸어. 이 자식은 이미 이렇게 커버린 거다.그런 설정인 거라고! 하 지만 꿈이라고 해도 신이가 이런 성격이 되버리다니……. 도대체 그 4년이라 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하여간!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 하고 싶은 말은? " 천역덕스럽게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에 난 얼굴을 붉히며 다시 앞으로 고개 를 돌렸다. 젠장. 젠장. 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 적어도 남자 몸을 보고 있으면 좀 부끄러워할 줄은 알아라……. " 이게 오빠로서 동생에게 할 말인 걸까……. 좌절이다. 좌절. 뒤에서 웃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얼굴이 팔려 돌아가시 겠다. " 에이∼ 너무 그렇게 정색하지마, 오빠. " 녀석은 의기소침해진 날 달래줄 셈이었는지 비누 칠한 등에 뜨거운 물을 부 어주며 말했다. " 오빠가 쓰러져서 내내 자고 있을 때 오빨 씻겨줬던 게 누구라고 생각해? 나란 말이야. 바로 나. 하루도 빠짐없이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옷 갈아 입 혀주고. 어차피 볼 거 다 봤으니까 이제와서 새로울 것도 없다고. " ' 전혀 위로가 안되잖아! ' 물론 내가 녀석에게 고마워해야할 상황이겠지만 당연하다고 해야할까 역시 나라고 해야할까 절대로 고맙다는 생각이 안든다. 난 두통이 치밀어 올라 손 으로 미간을 힘껏 압박했다. 아무래도 머리에 피가 계속 몰리는 것이 이대로 목욕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 오빠. " 녀석이 날 불렀지만 난 답하지 않았다. 왠지 계속 녀석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녀석의 페이스에 휘말렸다 간 영원히 환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신이는 죽었고, 내 뒤의 아이는 신이가 아니다. 이것이 오직 진실이었다.그렇다면 이런 거짓된 상황 따위 상대할 필요가 없 는 것 아닌가? 그래. 무시하자. 어차피 진짜가 아니라면 그 끝은 분명히 존 재할 것이다. 한계가 있을 거야. 환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 ……! " 그때 내 등으로 녀석이 몸을 기대오는 게 느껴졌다. 난 흠칫 몸을 떨며 조 심스럽게 녀석을 돌아보았다.뭐지? 이 녀석. 이번에는 무슨 짓을 하려고……. " 오빠,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 거지? " 난데 없이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난 내 등에 이마를 갖다댄 녀석을 내려다 보며 답했다. " 없어. " "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지? " " ……없어. " 내 대답에 녀석은 몸을 살짝 떨었다. " ……다행이다. 의사 선생님이 그랬거든. 식물 인간이 된 사람이 깨어나면 신체의 어느 부분이 마비되거나 한다고……. 나 많이 걱정했었어. " " ……. " " 다행이다. 아픈 데가 없어서. " " ……. " " 정말 다행이야. " 몸에 묻은 물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며 내 체온을 빼앗아갔다. 하지만 차가 워지는 몸과는 반대로 마음은 점점 뜨거워져 갔다. 그 묘한 대비감을 견디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나는! ' 제길! ' " 어때? 입에 맞아? " " ……응. " " 맛있지? 그치? 이래뵈도 그것 하나 만은 확실하게 할 줄 안단 말이야. " " ……응. " 녀석의 질문에 성의 없게 답하며 난 눈 앞의 음식을 떠먹었다. 내가 목욕을 하는 동안 녀석이 준비했던 음식은 하이라이스였다. 하이라이스. 분명 신이가 어렸을 때 자주 해줬던 음식이기는 했다. 애써 무 표정한 척, 무덤덤한 척 하고 있었지만 마음이 동요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똑같았다. 녀석이 만든 하이라이스는 내가 만들던 하이라이스와 똑같은 맛이었다.감자 와 당근을 큼지막하게 써는 것도 같았고, 특별히 버섯과 피망을 넣는다든지, 케찹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게 하면서도 그 향이 은은하게 베여있게 하는 부 분까지 같았다. 모르고 먹었더라면 내가 만든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 어떻게……이걸? "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끄집어냈다.내 질문에 녀석은 팔로 얼굴을 괴 며 히죽 웃었다. " 헤헤. 혼자 살면서 자주 해먹었어. 오빠도 알다시피 나 하이라이스 굉장 히 좋아했잖아? " 그렇긴 했다. 어릴 때 녀석이 조르던 데로 하이라이스를 해줬더라면 하루 세 끼를 다 이렇게 먹어야 했을 것이다. 한때는 삼일 연속으로 하이라이스를 먹어서, 만드는 내가 다 물릴 정도였는데 신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음 날 도 하이라이스를 요구했었다. " 그런데 막상 만들어 보니까 오빠가 해줬던 맛이 아니더라. " 녀석은 물끄러미 자신의 앞에 놓인 하이라이스를 바라보았다. " 설명서 대로 만들었는데도, 정작 먹어보면 이게 정말 내가 좋아했던 그 하이라이스가 맞는 걸까 하고 의심스럽더라고. 그래서 연구를 좀 했지. 하나 하나 떠올려 봤어. 오빠가 어떻게 재료를 썰더라? 오빠가 어떻게 소스 맛을 내더라? 오빠가 해준 것은 좀 더 특이한 향이 있었던 거 같은 데? 그렇게 조금씩 되짚어보며 만들다 보니까 지금과 같은 맛이 나오게 됐어. " " ……. " 난 새삼 먹고 있던 하이라이스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얼마나 오랫동안 하 이라이스를 만들어 먹었을 지 생각해보았다.아무도 없는 집에서, 아무도 없 는 부엌에서, 그렇게 홀로……. " 어때? 비슷해? 오빠가 해주던 것 하고? " " ……으응. " 비슷해……. 하지만 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가짜라면…… 난 어째서 음식을 먹는 거지? 난 어째서 잠을 자 는 걸까? 이 모든 게 거짓이라면 식욕을 채울 필요도, 수면을 취할 필요도 없지 않겠 어? 하지만 나는 밥을 먹고, 이렇듯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수 없이 지 금의 현실을 부정했으면서도 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타협하고 있다. 그 이 율 배반적인 행동에 내 자신을 비웃었다. 뭐가 거짓이라는 거야? 뭐가 꿈이라는 거야? 잘도 적응하고 있는 주제에. 입으로만 투덜거리는 주제에. " ……. " 창 밖으로 흘러들어온 달빛이 어두운 방을 밝혀주었다. 난 방 바닥에 깐 이 불 위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노려보았다. 틀리다. 이곳은 시민 씨와 유리와 브루스와 함께 살던 그 집이 아니었다. 60여 평의 큰 저택도 아니었으며, 2층 집도 아닌,간신히 화장실과 부엌이 딸린 10평 남 짓의 골방. 방도 나뉘어지지 않았으며, TV도 없다. 이런 작은 집에서 우리 가족은 살아왔었다. 외가에서 버림 받은 어머니와 고아인 아버지. 가진 것이라고는 몸 밖에 없 으셨던 두 분은 이 이상의 집에서 살아가기란 무리였을 것이다. 더구나 나와 신이가 태어난 후, 우리 가족은 먹고 살기도 바빠서 이사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여기는 너무 좁다. 시민 씨의 집에서 살 때 있었던 내 방 보다도 작다.어떻게 이런 곳에서 15 년 간을 살아왔는지 내 자신이 신기할 정도다. 이런 생활을 해왔으니 처음 피스메이커에 가입했을 때 그렇게 당황했을 수 밖에. 한 달 월급이 5천만원이나 된다고 했으니. 그 전 까지는 그런 큰 돈을 내가 만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죽했 으면 통장에 돈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은행까지 찾아가 직접 확인했겠는 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일이다. ' 믿겨지지가 않아. ' 내가 그런 생활을 했었다는게. 솔직히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쪽이 현실 같고 저쪽이 꿈인 것 같다. 꿈. 정말 나는 꿈을 꿨었던 게 아닐까? 의식을 잃은 4년 동안. 사실은 시민 씨도, 마리 선배도, 유리도, 진우 씨도, 브루스도……. 피스메이커 자체가 꿈이었던 건 아닐까? ' 아니야. 아니야. '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 않다, 그런 건! 모든 게 꿈이었다니! 절대로 그 럴 리가 없어! " 오빠, 자? " 그때 내 옆으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잠들지 않았었나. 방이 방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줄곧 신이와 나는 이렇게 나란히 잠을 잤었 다. 그때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겼었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어색하다. 사실 이렇게 복잡하게 여러가질 생각했던 것도 다 저 아이가 내 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동생이니 뭐니 해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이다. 저 모습의 어디가 동생이고 어디가 신이란 말인가? 내가 그녀를 여자로 인식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난 녀석의 질문을 무시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답하기로 했다. " 그래. 잔다. " " ……자는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하냐? " " 넌 모르겠지만 지난 4년 동안 곤히 자면서 익히 수면 장애 중 하나지. 잠 을 자면서도 듣고 말할 수 있게 된 거야. " " ……. " " ……. " " 그거……진담? " " ……농담. " 으, 으윽.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괜스레 되먹지도 않은 농담을 해가지고선! 난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겠지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거칠게 녀석에 게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뜻 밖에 내 등 뒤로 녀석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 후후후후훗. 뭐야, 정말∼ " 녀석은 내 등을 두들기며 웃었고, 난 샐쭉해진 표정으로 녀석을 다시 돌아 보았다. " ……웃기냐? 그게? " " 아니. 예의 상 웃어준 건데. " " ……. " 끝내주는 성격이로군! 난 기가 막혀 녀석을 어이없다는듯 바라보았다.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는 않 았지만 녀석이 여전히 웃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어둠 속에서 상대방을 응시하기만 했다. 녀석 의 숨소리가 유달리도 크게 귓가로 들려온다. 아니. 이건 내 숨소리인가? 어 쨌든 이렇게 어색한 침묵 상태를 유지하고 있자니 급속도로 심신이 피곤해진 다. 그때 침묵을 깨고 녀석이 입을 열었다. " 오빠, 이렇게 누워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치? " " ……. " 난 살짝 표정을 굳혔다. 이 녀석, 아까부터 게속 옛날 일을 들먹이면서 날 끌어들이려고 하네? 그 때문인지 괜히 나까지 감상적인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것이 왠지 의도적인 것 같아서 난 그녀를 경계했다. " 몰라. 그런 거. 다 잊어버렸으니까. " 난 일부러 차갑게 대하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작게 한 숨이 새어나왔다. 사실 저 녀석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게 아닐까? 단지 이 환상을 만든 사람에게 저렇듯 조작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연민의 감정도 든다. 저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듯 나에게 냉대를 받아야 할까? 아무리 가짜더라도 저 아이는 내 동생이잖아? 꿈에서 깨어나면야 물론 의미가 없겠지만 그 전까지는 좀 더 잘 대해주는 것 이…….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유가인! ' 난 따끔히 나에게 일침했다. 태평스러운 소리나 하고 있네! 그거야 말로 상 대가 바라는 일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거야? 현실을 꿈이라고 인정하고, 꿈을 현실로 인정하는 것. 이거야 말로 이 환상의 목적이다! 꿈에 물들어 버리면 그 날로 넌 영원히 현실과 안녕이라고! " 상관없어……. " 그때 내 등의 옷자락을 쥐는 한 손길이 느껴졌다. 녀석이었다. 그 아이의 말에 난 의아해졌다. 상관 없어? 뭐가 상관 없다는 거지? " 상관 없어. 오빠가 다 잊어버려도. " " ……. " " 난 기억하고 있으니까……. 하나도 빠짐 없이. " " ……! " 나도 모르게 손으로 내 가슴 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녀의 말에 흔들리지 않 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토록 애절한데도! 이토록 날 생각해주는데도! 그것을 외면해야만 하다니! " 오빠, 손 잡고 자도 돼? " 그렇게 물어왔다. 난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내 손은 그녀 의 손을 부여잡은 상태였다. 녀석은 내 손을 살며시 풀더니 잡기 편하게 다 시 손을 맞잡았다. " ……고마워. " 등 너머로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 하지만 난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12월 24일을 전후로 모든 게 변해 버렸다. 도대체……. ' 12월 24일에……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난 잠들어 있는 녀석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그때의 일을 회상하 기 시작했다. 2032년 12월 24일 21시 23분 콰아아아아아 불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스타 사이드 호텔의 30층에 위치 한 스위트 홀에는 불의 바다가 넘실 거리고 있었다. 황금 빛을 띄고 있던 인 테리어들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은 도처에 죽은 것 처럼 쓰러져 있었다. " 으윽……. " 마리는 비틀 거리며 원목 식탁 밑에 숨기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깨진 접시 파편을 머리에 얻어맞아선지 이마에서부터 가는 선혈이 턱 밑으로 이어져 있 었다. 그녀는 흐릿한 촛점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 무슨……일이 있었던 거지? ' 그녀는 손에 끼고 있던 드레스 장갑을 벗어 이마를 지혈하며 주위를 둘러보 았다. 폐허가 된 홀 곳곳에서는 신음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는 화염. 마리는 아비규환이 된 홀 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 모두들……무사할까? ' 가인! 유리! 진우 씨! 시민 씨! 브루스!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리는 인상을 굳혔다. 자신은 갑작스럽게 변하 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오라 쉴드를 펼쳤다지만 다른 이들은……. ' 아니. 괜찮을 거야. ' 무엇보다도 브루스. 그가 함께 있었으니까. 그 정도 되는 남자가 내가 느꼈 던 징조를 느끼지 못했을리가 없다.마리는 치밀어 오르는 불안함을 털어내며 몸을 움직였다. 홀을 메우는 검은 연기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일단 AI슈 츠를 착용해야할 것 같았다. '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 수정과 그 외의 피스 관계자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과연 그들은 무사할 수 있을까? 마리는 도처에 쓰러진 부상자들의 상태를 살피다가 그만 자신의 드레스 자락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 이런! " 마리는 참고 있던 분통을 터뜨리며 입고 있던 붉은 드레스의 치마자락을 찢 어버렸다. 그러자 그 밑으로 주변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 하얀 다리 한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는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음을 확인하고, 찢어 낸 드레스 자락을 다시 한번 잘게 찢어 이마에 동여맸다. " ……채영 씨? " 그때 마리의 눈으로 저편에 쓰러져 있는 채영의 모습이 들어왔다.마리는 다 급히 채영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 채영 씨! 정신 차리십시오! " 마리의 부름에도 채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라 능력자인 마리와 는 달리 민간인인 채영은 폭발에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 의 전신에는 발적 현상과 함께 수포가 형성되어 있었다. 화상부위는 주위조 직에 비해 약간 부풀어 올라있었는데 아마도 진피층 대부분을 포함한 심부 2 도의 화상인 것 같았다. 거기다 폭발로 내장이 상했는지 입 가로 연신 피를 흘리는 모습이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마리는 아랫 입술을 깨물며 채영을 부축했다. 일단 피스 대원인 그녀로서는 민간인의 구출보다는 몬스터의 퇴치를 우선시 해야했지만 도저히 채영을 이렇게 놔두고 갈 수가 없었다. 일단 자신의 힘이 닿는 한도 내에서 홀 안의 부상자들을 모두 구해낼 생각이었다. " 마리 양! " 그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옅은 은색의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있는 수정이었다. 그녀는 이 폭발 속에서도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이 멀 쩡했지만 마리는 반가운 마음에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수정 씨! 무사하셨습니까! " " 아아.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잠시 몸을 피할 수 있었어요. 그나저나 여기 는 팔라딘 대에 맡기고 마리 양은 한시라도 빨리 브루스 님이 있는 곳으 로 가주세요. 어서! " " 아……. 알겠습니다! " 30층의 홀로 팔라딘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마리는 그들과 수정을 번갈아 보 다가 이내 마음을 추스리고 몸을 움직였다. 수정은 그렇게 마리를 홀의 테라 스 부근으로 보내 놓고서 주위의 팔라딘 대를 향해 소리쳤다. " 지금부터 상황 설정을 A로 지정하겠습니다! ABF 발동! " 2032년 12월 24일 21시 30분 " 네 녀석……. 용케도 살아 있었군. " 테라스는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크게 부숴져 있었다. 찢어진 커튼에 옮 겨 붙은 불은 불어오는 밤 바람으로 인해 도깨비 불 처럼 미쳐 날뛰었고 그 도깨비 불의 향연 사이로는 하얀 히토에기누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 크크크크크. 내 선물은 잘 받았나? " 브루스의 말에 쿠사나기는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는 가인과 진우 가 AI슈츠를 착용한 채 쿠사나기와 대치해 있었다. 가인은 이를 갈며 쿠사나 기에게 소리쳤다. " 선물! 선물이라고! 네 놈은 이런 걸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거냐! " 가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30층 스위트 홀에는 백 여명에 달하는 피스 관 계자들이 있었다.그들은 앞의 폭발에 제대로 된 대처도 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 했을 것이다. 으드득 가인의 입술 사이로 이 갈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옆에 있던 진우도 분노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 선물을 받았으면 답례를 해야겠지!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게 해주마! " " 크크크크. 좋아. 아주 좋아!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다! 어디 마음 껏 부딪혀 와라! " 쿠구구구구구 짙은 먹구름이 벽의 구멍 사이로 흘러들어와 쿠사나기의 몸을 감쌌다. 크리 스마스 이브의 밤하늘을 수놓던 눈송이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브루 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을 노려보았다. " 불멸의 태양 탄일(Nativitas Solisinvicti) 기간에 힘을 끌어올리다니.지 금 제 정신이기는 한 거냐? 화신으로 구현해 있기 조차 힘들텐데. " 브루스의 말대로 쿠사나기의 몸은 그 형체가 평소보다 많이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두 눈의 붉은 빛을 한층 더 짙게 했다. 그 얼 굴에 떠오른 비늘들이 살아있는 생물 처럼 꿈틀거렸다. " 크크크크. 쓰레기에게는 쓰레기의 방식이 있는 거다. 예를 들자면. " 쿠사나기는 자신의 옆에 쓰러져 있던 민간인들에게 손가락을 튕겼다.그러자 그의 손을 떠난 마정의 핵들이 그 육체를 가르고 대번에 변이를 시도했다. 크르르르르르 미약하나마 숨이 붙어 있던 부상자들의 몸으로 검은 먹구름들이 피어올랐 다.마정의 핵은 숙주의 정을 빨아들여 삼차원의 힘과 융합한 후 그들을 충실 한 쿠사나기의 노예들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 설마! " 가인과 진우는 창백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들의 앞으로는 쿠사나기가 만 들어낸 세 마리의 융합형 몬스터들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쿠사나기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크크, 크크크크! 삼차원의 힘이라는 건 정말이지 편리해! 이렇게 손 쉽 게 장기 말들을 얻을 수 있다니! 너희들의 힘은 너희 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보구나! " 크와아아아앙! 융합형 몬스터들의 포효가 홀 안을 가득 메웠다.가인과 진우는 이를 악물었 다. 저 먹구름의 몬스터들은 예전 마리에게 기생했었던 융합형 몬스터와 상 당히 흡사했다. 그때만 해도 고전을 금치 못했는데 이번에는 세 마리 씩이나 상대해야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긴장하는 가인들과는 달리 브루스는 여전히 무감각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연꽃이 수놓인 청록색 차이나 옷이 밤바람에 펄럭였 다. " 명을 재촉하는군. 제약 속에서 자신의 분신을 세 마리나 풀어놓다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거지? " " 모든 것은 다 네 녀석을 없애기 위해서다! " 쿠사나기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의 주위에 서려 있던 눈송이들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로 인해 스위 트 룸의 공기가 살을 에는 것 처럼 차가워졌다. " 네 놈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내 정이 깎여 나가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 니다! 긍지가 없다고 했나? 신념이 없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버린 나의 분노를 받아 봐라! " 그 외침과 동시에 융합형 몬스터들이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브루스는 혀를 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쳇! 어설프게 자존심을 건드려 버렸군! " 하아아아앗! " 브루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사마귀 형태의 몬스터를 노려보았다. 진각으로 끌어올린 힘을 전사경으로 주먹까지 전달한다. 그리고 상, 중, 하 의 삼반합일이 이루어진 경의 집중! " 칠성권 문곡(文曲)! " 투아아아앙! 칠성권 제 4의 발경이 몬스터를 감싸던 먹구름을 분쇄시켰다. 브루스는 단 한번의 발경으로 숙주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으며 그 마정의 핵 만을 소멸시킨 것이다. 예전 마리에게 기생했던 몬스터 하나에 다섯 명의 피스 대 원들이 고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신적인 무용이었다. 브루스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주춤거리는 쿠사나기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 였다. "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두겠다. 사양하지 말고 덤벼라. " " 없애버리겠다!! " 쿠사나기의 괴성과 함께 홀 안의 몬스터들이 모조리 브루스를 향해 달려들 었다. 2032년 12월 24일 21시 46분 " 꺄앗! " 아수라장이 된 29층.미연은 사람들과 함께 대피하다가 그만 억센 남자의 손 길에 떠밀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자신의 딸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쳐 버렸다. " 하나야! " " 엄마! " 하나는 엄마를 목 놓아 부르며 거센 인파의 흐름 속으로 휩쓸려 갔다. 미연은 비명을 지르며 딸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수 십명의 인파들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 30층의 폭발로 인해 29층은 그야말로 대혼란이었다. 하나가 밤 9시를 넘기자 피곤한 기색을 보였기에 미연은 그녀를 재우기 위 해 예약된 스위트 룸으로 향하느라 30층의 폭발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피하는 사람들로 인해 엘리베이터는 마비되었고,비상 계단 쪽도 아 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 으아아앗! " " 비켜! 비켜! " 미연은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채이면서도 간신히 몸을 일으켜 하나를 찾았 다. 하지만 어디에도 자신의 딸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인파 속에 여섯 살 짜리 아이가 휩쓸렸다간 사람들에게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 하자 미연은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인파를 헤쳐 나가려고도 해봤지만 도리어 자신조차 그 속에 휩쓸려 버렸다. " 하나야! 하나야! " 미연의 애처로운 외침에도 하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수 십명의 군중 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귀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대로 하나를 놓쳐버 렸다간 두 번 다시 그 아이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라아아아아아 그때 29층의 홀에 은은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신기 하게도 혼란스럽던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 앉히는 효과가 있었다. 미연은 자 신 조차 덩달아 마음 속의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 목소리는? " ……시민 씨? " 노란색의 AI슈츠를 입은 여인이 홀의 중심에 서있었다. AI헬맷을 쓰고 있어 서 그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미연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시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 수 많은 인파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것도 목소리 하나만으로!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멎고 소란도 잦아 들었다. 미연은 믿을 수 없다는듯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 보았다. " 엄마! " 그런 와중에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하나가 인파들을 헤치며 미연에게 달 려 들었다. " 엄마! 엄마! " " 하나야! " 하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미연의 목을 부둥켜 안았다.미연은 그런 하나를 달 래며 다시 시민이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이제 보니, 시민의 옆으로는 핑크 빛의 AI슈츠를 입은 한 여자 아이도 보이고 있었다.그녀의 몸으로는 옅은 핑 크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빛은 시민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묘하게 사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 어서 하나를 데리고 피해! " ……! " 미연은 갑작스레 마음 속으로 들려오는 유리의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뜨 며 핑크빛의 피스 대원을 바라보았다. 미연은 믿기지 않는다는듯 자신도 모 르게 마음 속으로 반문했다. - 유, 유리? 유리니? 방금 네가……. 하지만 핑크 빛의 피스 대원, 이유리는 말하는 것 조차 버거운지 간신히 고 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미연은 마른 침을 삼키며 하나를 안아 올렸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몸을 피하는 수 밖에는……. 쿠궁! 그때 29층이 짧지만 강하게 흔들렸다.아니. 29층 뿐만이 아니라 이 스타 사 이드 호텔 자체가 흔들린 것 같았다. 그 흔들림의 근원지는 폭발이 일어났던 30층 임이 분명했다. 그 흔들림에 사람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시민 과 유리의 힘이 간신히 그 혼란을 제어해냈다. ' 여보! ' 미연은 30층에 남아있을 진우를 떠올리며 하나를 껴안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욱 주었다. 시민과 유리의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불안함은 조금 도 가시지를 않았다. ' 반드시……반드시 무사해야 해요. 반드시. ' 그녀는 간절히 기원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떼어냈다. 2032년 12월 24일 21시 50분 " 유리 양, 괜찮아요? 무리하지 말아요! " 시민은 자신의 곁에 있는 유리를 향해 걱정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유리는 기 진맥진한 얼굴을 하면서도 패턴 핑크의 능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 얼굴이 식 은 땀으로 촉촉히 젖은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 으응…….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 밖에 없으니까. " 유리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현재 그녀는 29층 홀 안에 있는 모 든 사람들의 정신을 컨트롤하고 있었다. 단순히 불안과 공포를 억눌러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는 재핑보다도 간단한 능력이었지만, 홀 안의 사람수 가 수백명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해 볼때 지금 그녀는 엄청난 기력을 소진하 고 있는 것이었다. 시민이 포르만트로 진정시킨 사람들의 마음을 간신히 붙들고 있기는 했지만 한 순간이라도 힘을 풀어버렸다간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 오빠. ' 유리는 30층에 남아있을 가인을 떠올리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당장에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30층에서는 강대한 이차원의 존재가 느껴지고 있었 다. 그것도 예전 5대 간부 중 하나인 초류향이라는 몬스터와 맞먹는 존재감! 그를 상대로 보조 계 능력을 가진 자신은 걸림돌 밖에 되지 않는다. " 유리 양……. "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시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30층에서 요르문간드의 화신 을 상대할 동료들이 걱정되었지만 당장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들을 도 와 공격에 가담하기 보다는 구조 활동에 치중하는 쪽이 더더욱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자리의 모두를 무사히 대피시키는 게 우선이었 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브루스가 있다.그가 있는 한 가인들에게는 별 다른 일이 없을 것이다. ' 하지만……. ' 하지만 뭘까? 이 가시지 않는 불안함은! 시민은 알 수 없는 오한에 살며시 몸을 떨었다. 2032년 12월 24일 22시 00분 " 죽어! 죽어! 죽어! " 쿠사나기는 그야말로 앞뒤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마정의 핵을 사용했다. 이 미 30층 홀에 있던 대부분의 부상자들은 융합 형 몬스터로 탈바꿈된지 오래 였다. 몬스터의 수가 늘어날수록 쿠사나기의 몸은 점점 흐릿해져,몬스터들이 스무 마리가 넘는 지금, 그는 바람 앞에 꺼질 등불 처럼 그 존재를 위협당하 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사나기는 힘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피스 그레이! 네 놈만 없애버릴 수 있다면! ' 그것을 위해서라면 내 혼 마저 불태워 주마! 퍼엉! 브루스는 달려드는 융합형 몬스터를 발경으로 간단히 분쇄시키며 자신을 죽 이기 위해 혈안이 된 쿠사나기를 노려 보았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 며 힘을 사용하는 덕분에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다. " 흥! 어차피 시간 벌기일 뿐! " 브루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검은 회오리 처럼 두 마리의 몬스터 사이로 들어가 양 쪽으로 벽경을 내리쳤다. 브루스가 사용하는 칠성권 제 4의 발경 은 상대의 주심을 공격하는 심경(心經)이었기에 숙주에게는 전혀 피해를 주 지 않고 그 핵만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 쿠사나기는 브루스의 선전에 이를 갈며 재차 마정의 핵을 소환했다. " 네 놈의 힘이 먼저 고갈되느냐! 내 힘이 먼저 고갈되느냐! 승부다! " " 미친 놈! " 브루스는 가볍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재빨리 숨을 골랐다. 분명 그의 능력 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었다. 선기공은 기를 이용하는 능력인 만큼 호흡이 흐트러지면 그 위력도 감소한다. 더구나 패턴 그레이의 능력은 그 육체를 기 본 바탕에 두기 때문에 무한히 솟아나는 힘이 아닌 것이다. 쿠사나기의 말 처럼 전투가 소모전으로 들어가면 불리해지는 건 그나 자신 이나 마찬가지였다. ' 그때까지 녀석들이 버텨줄 수 있을까? ' 브루스는 저편에서 고전 중인 가인과 진우를 살펴보았다. 그들에게는 브루 스 처럼 숙주에게 기생한 마정의 핵 만을 공격하는 심경의 능력이 없었다.그 나마 가인의 천공주심권은 가장 심경에 가까운 기술이었지만 저 애송이는 그 것조차 마음대로 사용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라 능력은 이미지 메이킹이 뚜렷할수록 그 사용이 용이했지만, 천공주심 권과 같이 가상의 좌표를 설정해야 하는 추상적인 기술은 가인의 미숙한 솜 씨로는 아직 남발할 게 못 되었다. 거기다 오라의 배분 또한 비효율적었기에 최종기로서의 기능 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진우가 자신과 같은 칠성권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아직 심경의 경지 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들이군! ' 브루스는 짧게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쿠사나기는 그가 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분통을 터뜨렸다. " 남을 걱정할 여유가 있단 말이지! 나를 상대하면서! 그 오만함이 얼마나 가는지 보자! " 쿠사나기가 손짓을 하자 브루스에게 달려들던 태반의 몬스터들이 그 목표를 가인들에게로 수정했다. 간신히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던 가인과 진우는 갑작 스런 몬스터들의 대량 공세에 이를 악물었다. " 하아아아아앗! " 그때 브루스가 기합을 내지르며 가인들의 앞으로 폭풍 처럼 나타났다. 그는 전신을 회전시켜 전사경을 끌어모은 후, 몬스터들의 한 가운데로 주먹을 내 찔렀다. 업장(業障) 소멸! " 칠성권 녹존! " 촤아아아아악 브루스의 발경 한 방에 검은 먹구름이 좌우로 갈라지며 달려들던 몬스터 무 리의 절반이 소멸되었다. 추풍낙엽! 그야말로 브루스는 심경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가인은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브루스에게 감사를 표하려고 했지만 곧 그 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다급히 그를 불렀다. " 브루스! 괜찮아요? " " 조용히 해라, 애송아. 턱뼈를 부숴버리기 전에. " 브루스는 낮게 으름장을 놓으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무리하게 진기 를 끌어올리는 바람에 몸을 구성하고 있던 선기의 흐름이 어긋나고 있었다. 예전 스펙터와의 충돌 때 처럼 그의 몸이 반투명해지고 있었다. 앞으로 선기 가 회복될 때까지 그는 더 이상 인계(人界)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삼계(三界) 사이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브루스는 가볍게 혀를 차며 쿠사나기를 노려보았다. " 이제 네 놈이 바라는 데로 되었나? " " 아니. 이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되지! " 쿠사나기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으로는 검은 먹구 름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모두의 눈 이 크게 뜨여져 갔다. 저 구름은 앞에 30층의 연쇄 폭발을 유발시켰던 담체 (擔體)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저런 것을 가연성 물질이 도처에 널려 있는 이 홀에서 터뜨렸다간 저압폭발을 일으키며 건물 자체가 붕괴될 것이다. " 이 밑에 쓸데 없이 살아 숨쉬는 인간들을 모조리 없애버릴테다! 그 때가 되어서도 네 놈이 지금과 같은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크크크크크! 네 놈의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말테다! 막을 수 있으면 어디 막아봐! " " 그, 그만두지 못해! " 진우와 가인이 비명 처럼 고함을 내지르며 쿠사나기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미처 그에게 닿기도 전에 수 많은 몬스터들이 위에서부터 그들을 덮쳐 눌렀 다. 결국에는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며 사지를 결박 당해버렸다. 진 우는 이를 갈며 밑의 층에 있을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미연! 하나! " 으아아아아아앗! " 칭칭칭칭 그의 몸에서 녹색의 빛과 물체의 잔향 소리가 터져나오며 진우를 억누르고 있던 몬스터가 먹구름 채로 갈기 갈기 찢어져 나갔다. 음속을 넘어선 패턴 그린의 힘이 소닉 붐(Sonic Boom)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푸화아아아악! 몬스터에게 기생되어 있던 숙주도 한꺼번에 박살나 버렸다.그 살과 뼈가 압 력파에 의해 부숴지며 피 분수가 통째로 진우의 AI슈츠에 쏟아져 내렸다. " 아……. " 진우는 몬스터를 올려친 손을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하며 AI헬맷을 따라 흘러 내리는 핏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짙은 혈향과 붉게 변한 시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손으로…… ' 민간인을…… 죽여버렸다? ' 진우가 쇼크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브루스가 소리쳤다. " 바보같으니! 피해! " 퍼억! 그러나 미처 브루스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진우는 쿠사나기의 꼬리에 몸 을 얻어맞고 홀의 천장으로 날아올랐다.그는 그대로 샹들리에를 박살내며 홀 의 대리석으로 추락했다. " 진우 씨! " 가인은 몬스터에게 사지를 포박당한채 시야에서 사라진 진우를 목놓아 불렀 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인은 이를 갈며 쿠사나기를 노려보았 다. " 네 놈의 자식이! " " 크크크크. 지켜보고 있어라! 벌레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무능력한 자신을 탓해라! 힘이 없는 네 놈들은 패배자야! "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쿠사나기를 말릴 수가 없었다.브루스도! 가인도! 그 들은 단지 무기력하게 쿠사나기의 섬섬옥수가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 봐야만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촤악! 날카로운 붉은 빛이 먹구름을 집어든 쿠사나기의 손을 가르고 지나갔다. 쿠 사나기는 녹색의 체액이 터져오르는 자신의 잘려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은……? " 무영신풍류 이식 파쇄! " 푸카카카칵 붉은 선풍이 쿠사나기의 앞에서 휘몰아치며 그의 하얀 히토에기누를 갈가리 찢어 발겼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붉은 검기는 아래에서 위로 정확히 쿠사 나기를 이등분으로 올려쳤다! " 삼식 격멸! " 촤아아아아악! 직각으로 솟아오르는 녹색의 체액! 그리고 쿠사나기는 썩은 고목 처럼 뒤로 넘어갔다. 그 앞으로는 붉은 AI슈츠를 입은 한 여인이 검을 거두고 있었다. " 마리 선배! " 성마리! 바로 그녀였다. 가인은 쿠사나기의 제어가 잠시 약해진 틈을 타서 자신의 위에 올라타고 있던 몬스터에게 천공권 산을 사용했다. 투앙! 맥없이 떨어져나가는 몬스터. 그렇게 녀석을 뿌리치며 가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를 향해 브루스가 소리쳤다. " 아직 끝나지 않았어! " 츠츠츠츠츠츠 떨어져 나간 쿠사나기의 손은 여전히 짙은 먹구름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30 층 홀의 전반에 걸쳐서 펼쳐져 있던 먹구름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는지 간간 히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 제길! 끈질긴 자식이! " 가인은 이를 갈며 쿠사나기의 손으로 달려갔다. 쓰러진 진우를 부축하던 마 리는 가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 가인! 어떻게 하려는 거야? " " 이렇게 하려고요! " 가인은 쿠사나기의 손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쿠사나기의 손 주위 로 푸른 오라의 바람이 모여들며 그것을 공중으로 띄워올렸다. 홀 안의 먹구 름들은 쿠사나기의 손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천천히 그 몸을 움직였다. " 이대로 이것을 하늘에서 터뜨려 버리겠어! " 가인은 쿠사나기의 손을 부숴진 테라스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그것을 지 상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상공에 띄워 자폭시킬 셈이었다. 분명 가인의 능력이라면 그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 컥! " 바람에 딸려 올라가던 쿠사나기의 손이 순간 방향을 틀어 가인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가인의 목을 끊어버릴 것 처럼 움켜 잡 았다. " 으으윽! " 가인은 손을 떼어내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모두 허사였다. 거기다 무리해서 떼어냈다간 그대로 폭발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가인은 손을 떼어내길 포기하고 그대로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그러자 패턴 블루의 바람은 가인까지 동반한채 쿠사나기의 손을 테라스의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 가인! " 마리는 비명을 지르며 가인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앞 서 선기를 재구성한 브루스가 테라스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막 테라스 로부터 몸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가인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 ……! " 하지만 브루스의 손은 가인에게 닿지 않았다. 마리에 의해 이등분 되었다고 여겨졌던 쿠사나기가 그 몸을 먹구름으로 변화시켜 뒤에서부터 브루스의 몸 을 죄어 왔던 것이다.쿠사나기는 두 눈을 뱀 처럼 번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 크흐흐흐흐! 보내줄 성 싶으냐! " " 이 자식이! " 브루스는 노호성을 내지르며 천근추로 자신의 무게를 늘린 뒤 강하게 진각 을 밟았다. 그리고 진각으로 끌어올린 기공을 모조리 자신의 등 뒤로 발산! 칠성권 개산벽을 시전했다! 터어어엉! " 크헉! " 피를 토하며 브루스에게서 떨어져나가는 쿠사나기. 브루스는 그렇게 쿠사나 기를 떨구며 테라스 쪽으로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테라스에는 이미 가인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 애송이! " 브루스는 테라스로 달려나와 어두운 밤 하늘을 둘러 보았다. 지상으로는 스 타 사이드 호텔의 불빛을 받은 검푸른 강물이 출렁이고 있었다.그 강물의 위 로는 새하얀 눈송이들이 소리조차 내지않으며 떨어져 내린다.그리고 그 눈송 이들의 위로는 가인이 전신에서 푸른 빛을 흘리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 가인! " 진우를 부축하며 테라스로 나온 마리가 가인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쿠사나 기의 손과 먹구름을 동반한 가인은 끝없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끝없이. 끝없이. 계속해서……. " 아, 안돼! 그만둬! " 먹구름이 짙은 핏빛을 띄는 것이 금새라도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할 것 같았다. 마리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가인! 제발! 제발! " 그만둬, 가인---------!!! " 퍼어어어어어엉! 거친 폭발음! 그리고 거센 풍압이 스타 사이드 호텔로 밀려 들었다.그 여파 에 강물이 해일처럼 지상을 덮쳤고,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전부 산산히 터져 나갔다. 마리는 진우를 감싸 안은채 테라스의 벽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 크윽! " 브루스는 오라 쉴드를 펼쳐 간신히 폭발의 충격을 막아냈다. 그는 주위의 압력이 내려가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 애송이는? ' 폭발이 지나간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리고……. 2032년 12월 24일 22시 30분 소년이 있던 자리에는 새 하얀 눈꽃송이 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부글부글부글 꿈결 속에서 물 끓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점점 뚜렷하게 들려 오는 그 소리에 난 잠에서 깨어났다. " ……. " 눈을 뜨자 제일 먼저 그림자가 진 천장이 보였다.닫힌 커튼 사이로 새어 들 어오는 아침 햇살이 내 눈가를 찔렀다. 난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꿈 속에서 보았던 풍경이 잊혀지지 않 았다. 눈 내리는 밤하늘. 목이 졸리던 감촉. 그리고……. " ……! " 얼굴에서 손을 떼며 낮게 한 숨을 쉬었다. 이 환상에 들어온지 벌써 한 달 이 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난 언제나 같은 꿈을 꾸고 있었 다. 12월24일.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언제까지나……. " 어? 오빠, 일어났어? " 한창 아침 상을 차리고 있던 녀석은 내가 눈을 뜬 걸 확인했는지 그렇게 물 어왔다. 코 끝으로 옅은 김치 냄새가 났다. 난 이부자리에서 상체를 일으키 며 눈을 비볐다. " 아아. " " 에이. 내가 깨워버렸구나. 좀 더 자도록 내버려두려고 했는데. " 녀석은 검은 교복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샐쭉 웃고 있었다.난 그 교복을 멀 뚱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오늘……졸업식인 거 아냐? 바쁠텐데 그냥 가지 그랬어? " " 응. 헤헤. 괜찮어. 어차피 졸업식은 10시부터라고. 그 전까지만 가면 돼. " 녀석이 차린 아침 상을 바라보았다. 분명 시간에 쫓기면서 만들었을텐데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새하얀 쌀 밥에 김치 찌게, 계란 말이와 감자 조림, 햄 부침과 콩나물 국. ……잘도 이 많은 걸 준비해놨군. 아침부터 이걸 다 먹으란 소리냐? " ……. " 녀석이 아침 상을 차리는 건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겨울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아침부터 집을 나섰는데,그때마다 하루도 빠짐 없 이 아침 상을 차려놨던 것이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힘든 일이었을 텐데 거 기다 한 술 더 떠서 냉장고에는 점식 식사까지 준비해 놓는다. 그 때문에 녀 석은 새벽부터 잠을 설치는 모양이었다. " 자자. 얼른 씻고 밥 먹어. 이왕 일찍 일어났으면 나랑 같이 밥 먹자. 응? " 녀석에게 떠밀려 간단히 세면을 마친 다음, 상 앞에 앉았다. 난 내 앞에 마 주 앉아서 숟가락을 드는 녀석에게 말했다. " 같이 식사하고 가도 돼? 아무래도 늦은 거 같은데……. " 시간은 어느덧 8시다. 녀석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손사래를 쳤다. " 괜찮다니까. 어차피 졸업생은 지각 체크 같은 거 안 한다고. 그리고 무엇 보다도……. " 나는 갑자기 고개를 들이미는 녀석의 태도에 움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런 나의 반응에 녀석은 살짝 윙크하며 넉살 좋게 말했다. " 사랑하는 오라버니와의 아침 식사를 포기할 순 없단 말이야. " 뭐, 뭐가 사랑하는 오라버니라는 거야? 닭살스럽게!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얼굴이 달아 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요 이 주일 남짓 동거하면서 계속 생각해온 거지만 이 녀석은 내가 아는 신이가 아니었 다. 무엇보다 내 동생은 이렇게 노골적이면서 뻔뻔스럽지는 않았다고! " ……. " 아니. 그……태도는 확실히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았지만,그렇지만! 그 때 는 4년도 더 전이었고, 녀석은 초등학생 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중학교를 졸 업하는 마당에도 그때와 같은 태도를 취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난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가 식사 하기만을 기다리는 녀석을 노려보다가 작 게 한 숨을 쉬었다. ' 그래. 이렇게 예민하게 대해봤자 나만 손해라고. 저 녀석은 이런 나의 반 응까지도 즐기고 있는 거야. " 결국 녀석을 상대하길 포기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막 김이 모락 모락 피어 나는 하얀 쌀 밥을 한 입 떠먹고 김치 찌게를 맛보았다. 녀석은 하이 라이스 외에는 요리 솜씨가 젬병이라고 자신을 낮추었지만 그런 것 치고서는 상당히 괜찮은 요리였다. 거기다 요 며칠 간 식단이 중복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꽤 여러가지를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 ……아, 그런데. " 문득 밥을 먹던 나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 너, 고등학교는 어디로 가는 거냐? " 솔직히 이런 가짜 동생의 진로 따위, 내가 걱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그러니 까 순수한 호기심일 뿐이다. 순수한 호기심! 녀석은 그런 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입 안에 씹고 있던 음식을 빨리 넘기 려 애썼다. 어이. 천천히 대답해도 된다고. " 으응. 집에서도 가깝고…… 에, 또∼ 오빠가 입원해 있던 병원 근처를 찾 다 보니까 제일 적당한 데가 한 군데 있더라. " " 어디? " " 26구역에 있는 한성 고등학교. " " ……뭐? " 난 낯익은 학교의 이름에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런 내 모습에 녀석 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 뭐야, 그 반응은? 그래뵈도 이 근방에서는 꽤 명문인 학교란 말이야. 거 기 들어가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공부했는 줄 알아? 우리 담임은 내가 한성 고에 붙은 게 15년 교사 인생 중 일발 역전의 만루포라고 까지 했어. " " ……일발 역전의 만루포? " " 응. 나, 그 다지 공부는 잘 하지 못했거든. " 녀석은 그 다음부터 한성 고교의 장점을 역설하기 시작했지만,이미 내 귀에 는 다른 말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 그 곳일까? 내가 다녔던……그 고등학교일까? ' 단지 동명의 학교일런지도 모른다.어차피 여기는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 아 니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 이름을 듣는 것 만으로도 뛰는 가슴을 억누를 수 가 없다. ' 한성 고등학교. ' 그곳에서 나는 고교 1학년의 시간을 보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자 재영이 를 비롯한 수 많은 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 으악! 또야? ' 한성 고교에 합격해서 처음 1학년 3반의 교실로 들어 갔을 때, 재영이 녀석 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상당히 어이 없어 했다. ' 이게 도대체 몇 번째냐! 이제 그만 좀 따라다니시지, 유가인? 그렇게 이 몸과 또 다시 한 반이 되고 싶었던 거냐? ' '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인연이구만. ' ' 무엇이! 지긋지긋한 인연! 임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 그렇게 기쁨 반 농담 반으로 떠들던 우리는 잠시 후 교실로 들어오는 한 사 람에 의해 조용히 입을 닫아야만 했다. ' 네 놈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 그 말을 끝으로 재영과 나를 출석부로 사정 없이 두들겨 눕힌 장본인. 그것 이 하지연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체육복 차림에 입에는 담배를 물고,걸 핏하면 손 부터 나가는 것이 어떻게 이런 사람이 고등학교 교사를 다 할 수 있는 걸까 하고 그 때는 생각했었다.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된 테레이아 민체스터라고 합니다. ' 그러다 에메랄드 머리 빛을 가진 굉장히 예쁜 외국인 유학생이 전학을 왔다. 테레이아 민체스터. 그녀가 전학왔던 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 밤,그녀에 의해 학교 로 불려나간 나는 '그것'들을 최초로 접해야만 했으니까. ' 키에에에엑! ' 삼차원 유클리드 공간에 디멘션 트랜스퍼의 발생과 함께 나타나는 이차원의 생물체. 몬스터! 그들과의 접촉 후 나는 마리 선배의 권유로 피스 대원이 되 었다. ' 그럼,며칠 전과 같이 네 주변 사람들에게 위험이 닥쳐도 좋은 거냐? '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권유가 아닌 반 강제였군. 거기다 협박 아닌 협 박까지. ' 매달 국가에서 지급하는 5천만원의 월급. ' 아, 그리고 회유책도 추가하겠다. 어쨌든 그렇게 피스 메이커와 관계를 맺게 된 나는, 피스 옐로우 한시민 씨 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하하. 그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 처음 유레 카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그녀의 모습에 한 눈에 반해버렸는데, 대번에 그 런 사람과 동거하라고 했으니 이게 왠 꿈이냐 하는 심정이었을 거야. 그러다 유리를 만나고, 진우 씨와 미연이 누나, 하나를 알게 되고, 그리고 ……. " 오빠? "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는 나의 모습에 녀석은 의아한 목소 리로 날 불렀다. 하지만 난 미처 대답도 하지 못하고 힘껏 주먹을 쥔채 어깨 를 떨어야만 했다. ' 보고 싶어. ' 모두가…… 보고 싶어. " 오빠, 그럼 나 학교 갔다가 아르바이트 하고 올게. 점심 식사는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잊어 먹지 말고 꺼내먹고. 아, 그리고 국은 반드시 데워먹 어야 해. " " 알았어. " 난 매번 아침마다 위의 사항을 신신당부하는 녀석의 모습에 작게 혀를 찼다. 충분히 알아들었건만 녀석은 질리지도 않고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한다.그렇게 내가 못 미더운 건가. " 아,그리고 오빠 열쇠도 하나 만들어놨으니까 바람도 좀 쐬러 나가고 해라. 매일 집에만 있지 말고. 건강에 안 좋단 말이야. " 그러고 보니 최근 이 집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바깥 출입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녀석이 집에 계속 있었다면, 녀석에게 이끌려 이곳 저곳을 본의 아니게 돌아다녀야 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아침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저녁 을 먹을 때 쯤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 내 말 알아들은 거야, 오빠? 이 근방에 공원도 있으니까 산책 좀 하라고! " " 아아. " 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녀석에게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내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녀석은 입을 쭉 내밀다가 곧 시계를 보고 급하 게 집을 나섰다. " 으앗! 늦었다! 진짜 늦었어! 졸업식 날 까지 지각하면 안되는데! " " ……졸업생은 지각 체크 안 한다며? " " 아,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헤헤. 그럼 다녀올게, 오빠! " 녀석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집을 뛰쳐나갔다. 그러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 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난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한 후, 녀석의 자취가 사 라질 때까지 하염 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멍청히 서 있던 나는 문득 내 손에 들려있던 열쇠를 바라보았다. 녀 석이 여벌로 만들어준 열쇠.솔직히 그 동안 열쇠가 없었다는 것도 외출을 하 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었지. 하지만…… 열쇠가 생긴 지금도 나는 그다지 외출하고픈 마음이 없다. 덜컹 문을 닫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후 무릎을 앞으로 모았다.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한참동안을 가만히 있었다. 이 좁은 골방에서 움직이는 거라곤 열려진 창가로 펄럭이는 커튼 뿐이었다. 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외출을 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난 바깥 세상이 두려웠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과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을 바깥 세상이 두려웠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외출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난 녀석과 요 이 주간 생활해 오면서 반쯤 자포자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거짓……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결코 믿고 싶지 않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약 해질 데로 약해져 있었다. 왜 환상이라면 끝나지 않는 거지? 왜 꿈이라면 깨어나지 않는 거야? 왜 계속 무의미하게 하루 하루가 지나가는 거지? ' 어째서! 왜! ' 두렵다.그나마 이 집 안에만 있었기에 난 아직도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믿 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런 상태로 바깥 세상을 나가서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순간, 내 믿음은 가차 없이 부숴질 것이다. 피스메이커는 존재하지 않고, 대재해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몬스터도 없다. 그것은 결국, 내가 알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부정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그것만은 절대로 겪고 싶지 않았다. 시민 씨도, 마리 선배도, 유리도, 진우 씨도, 브루스도.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꿈으로 치부되는 것이 싫었다. 그 모든 게 거짓이라니. 그 모든 게 꿈이라니. ' 그런 건……믿을 수가 없어! ' 그러니까 제발 날 이 꿈속에서 깨워줘. 날 이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줘.제발. 제발. 제발. ' 제발! ' " 가인 씨, 일어나요. 가인 씨! " 날 부르는 한 여인의 목소리. 희미한 시야 사이로 금발의 긴 머리카락이 보 여왔다. 금발……. 금발? 금발이라고! 거기다 이 목소리는? " 시민 씨?! " " 꺅! "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나의 모습에 시민 씨는 깜짝 놀라며 뒤로 몸 을 물렸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그 감홍빛 눈동자를 몇 번 깜빡였다. " 깜짝이야……. 가인 씨, 놀랐잖아요? 정말. " " ……. " 난 그녀의 말에도 아랑 곳하지 않으며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나의 시선에 시민 씨는 뺨을 매만지며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 " 아, 아뇨. " 난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얀색 벽지가 발려진 넓은 2층 방. 낯익 은 옷걸이와 책상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 골방이 아니다. 그 아이와 함께 있던 골방이 아니다! 여기는 시민 씨의 집인 것이다! ' 아아……. ' 돌아왔어. 돌아온 건가? 격한 흥분이 가슴 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그렇 게 격앙된 나의 반응에 시민 씨는 의아해 하는 눈치였지만 애써 내 옆에 잠 들어 있던 사람을 마저 일깨운다. " 브루스 님. 브루스 님도 일어나셔야죠. " 브루스! " 아아. 이런. 늦잠을 자버렸군. " 그는 언제 잠들어 있었냐는듯 피곤한 기색도 없이 즉각 몸을 일으켰다. 난 그가 내 곁에 줄곧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기에 멍하니 그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브루스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냐? 버르장 머리 없이. " " 아,아아……. 미안해요. 미안. " 난 웃으며 몇 번이고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 버르장 머리 없이 굴어서 죄송합니다, 브루스. " 내가 그렇게 평상시와는 극과 극을 달리는 태도를 보이자 브루스는 눈꼬리 를 살며시 떨며 옆의 시민 씨를 돌아보았다. " 이 애송이……, 지금 나에게 빈정거리는 건가? 아니면 네가 뭐라도 잘못 먹인 거냐? " " ……아니요. " " 그런데 상태가 왜 이 모양이야? " " ……. " 평소 때의 나라면 브루스의 언행에 화부터 냈을 테지만, 지금의 난 그 퉁명 스러운 말 마저 반갑기 그지 없었다. 신선하다! 유쾌하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도 그리웠다! " 하,하하……. " 입 가에 웃음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렇게 실 없는 웃음을 터뜨리자 브루스 는 점점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에게서 거리를 뒀지만 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민 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히 나에게 물어왔다. " 가, 가인 씨? 갑자기 왜 그러는 거에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에요? 예? " " 하하, 아니에요. ……하하하.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하하하하. " 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웃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이. 뭐,어떠랴. 이럴 때 웃지 않으면 또 언제 웃는다고! 마음 껏 웃자! 마 음 껏!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탕! " 오빠! " 그때 방 문을 힘차게 열어젖히며 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내 웃음소 리에 영문을 몰라 허겁지겁 달려온 것 같았다. 그 모습 마저도 유쾌하다.너무 도 유쾌해! 이상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는 동거인들을 눈 앞에 두고 나는 몸까 지 들썩이며 웃었다. ' 그래. 역시 꿈이었던 거야. ' 이 쪽이 현실이었던 거야. " 하하하하하! " 여기가 현실……! " 아. "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 있던 그들이 보이질 않았다. 시민 씨도, 브루스도, 유리도……. 아무도 없었다. 넓은 하얀 벽지 의 방도 작은 골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 하……. " 짧게 흘러나오는 웃음.하지만 더 이상 웃을 기운이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았 다. 난 허탈한 기분에 사로 잡혀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 꿈이……. ' 꿈이 아니었나…….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으로 다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녀석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5시가 지나서였다. 녀석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나를 말 없이 바라 보다가 조심스레 커튼을 열어 젖혔다. 촤륵 붉은 노을 빛이 방 안을 비췄다. 녀석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 아이, 참! 이렇게 어둡게 하고 뭐했어, 오빠? 또 집에만 있었구나! 그치? " " ……. "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곧장 냉장고 안 부터 확인하며 소리 쳤다. " 우와! 내 이럴 줄 알았어! 점심에 손도 안 댔잖아? 이거 준비하느라 새벽 부터 얼마나 고생했는데! 아아∼ 동생의 성의를 이렇게나 무시하다니.너 무하다. 너무해∼ " " ……. " 녀석의 귀찮은 잔소리 따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녀석을 상 대하면 상대할수록 내 감이 자꾸만 흐려지는 것 같았다.거기다 지금의 내 기 분은 최악이다. 이런 가짜의 장단을 맞춰줄 여유 따위는 없다. 그렇게 내가 자꾸만 무시하는 태도를 고수하자 녀석은 볼을 잔뜩 부풀리며 나에게 성큼 성큼 다가왔다. " 오빠! " " ……! " 갑작스런 녀석의 행동에 난 움찔 몸을 떨었다. 녀석은 그야말로 내 앞에 바 짝 다가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난 두 눈을 크게 뜨며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나하고 눈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건 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으며 내 눈동자와 자신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눈 싸움 아닌 눈 싸움을 하던 녀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오빠, 우리……. " 우, 우리? " 장 보러 가자! " " ……. " 장? 난 순간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왠지 멋대로 긴장했다가 멋대로 실망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하지만 미처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녀석은 내 팔 을 잡아끌고 다짜고짜 외출할 준비 부터 시작했다.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 려보니 어느새 코트와 목도리가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 자자. 2월 달이래도 아직은 날씨가 쌀쌀하니까 따뜻하게 입고 나가야 해. 와! 오빠한테 딱이다, 아빠 코트! 잘 어울려! 아빠가 워낙에 체격이 커 서 오빠한테는 좀 헐렁할 거라 생각했는데. " " ……그만둬. " 내 목에 목도리를 감아주는 녀석의 손을 붙들고 작게 중얼거렸다. " 응? " " 이제……그만두라고! " 난 버럭 소리치며 목에 감긴 목도리를 풀러 땅바닥에 팽개쳤다.갑작스레 짜 증이 밀려들었다. 억지로 날 밖으로 끌고 나가려는 녀석의 행동에 화가 났다. 날 이 가짜 세상에 적응시키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 제발 날 그냥 내버려둬! 귀찮단 말이야! " 이건 가짜다! 이건 가짜야! 난 그 대명제를 수 없이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온 몸으로 녀석을 거부했다. " 넌 도대체 뭐야? 뭐길래 내 동생 흉내를 내는 거냐고! 재미있어? 당황하 는 내 모습을 보는게 그렇게 재미있어! " 눈 앞으로 시민 씨의 금빛 머릿결이 스쳐지나가는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유리와 마리 선배, 진우 씨의 목소리들이 생생하게 귓가에 울려퍼진다.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어! 그렇기에 더더욱 외출하고 싶지 않았다. 이 좁디 좁은 골방의 가짜 세상도 적응하기가 힘든데, 저 넓은 바깥 세상을 접 해버렸다간 내 믿음은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내가 아는 세상의 모습이 변하 는 게 싫었다. 피스메이커가 없는 현실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 ……. " 나의 말에 녀석은 처량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4년간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려온 녀석이었다. 그 동안 온갖 병수발을 다 들어왔을텐데 기껏 깨어난 오빠란 녀석은 자신을 동생으로도 인정하지 않으니 꽤나 상처받았을 거다. 금세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녀석의 얼굴에 가슴이 아팠다. 아팠지만! 죄책감을 받았지만! 애써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를 선택 했다간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시민 씨들을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 하지만……. ' 하지만 난……잘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아이에게 상처를 주면서, 이런 죄 책감을 느끼면서도. 난 과연……옳은 것일까? 내가 믿는 현실은……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딱! 그때 눈 앞으로 불똥이 튀었다. 난 얻어맞은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아프잖아, 이 자식! 뒤를 돌아보니 녀석이 화난 얼굴로 내 머리를 후려친 주먹을 내리고 있었다. " 무슨……. " ……짓이야! 하고 소리지르려고 했지만 그보다 한 발 앞서 녀석의 청천벽력 같은 목소리가 날 압도했다. " 맞을 짓을 하니까 때린 거야! " " ……! " 노기까지 서린 녀석의 눈을 대하자 난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고양이 앞에 선 쥐라도 된 기분이다. 뭐, 뭐야……. 이 박력은? " ……. " 녀석은 얼어버린 날 앞에 두고 천천히 땅바닥에 떨어진 목도리를 집어 들었 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내 목에 두른다. 컥! 얼마나 목도리를 세게 메는지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소,손에 감정이 실 려있잖아! 녀석은 그렇게 묶은 목도리를 자신의 앞으로 힘차게 끌어 당겼고 난 반항도 하지 못하며 그것에 이끌렸다.녀석은 날 노려보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잔 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해! " " 내,내가 왜……. " " ……. " 애써 반항하려고 했지만 녀석의 눈빛 한 방에 내 목소리는 다시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간다. 난 너무도 무기력하게 녀석에게 목도리를 붙들린채 우스꽝스 럽게 밖으로 끌려나가야 했다. 촤르르르르 자전거의 휠 돌아가는 소리가 22구역의 거리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난 익숙 하지 않은 발놀림으로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었다.내 뒷 좌석에 자리를 잡 고 앉은 녀석은 여전히 뚱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 아, 저 골목에서 왼쪽으로 들어가. " " ……. " " 여기서 오른쪽! " " ……. " 그렇게 한참을 가던 중 나는 슬쩍 녀석에게 질문을 던졌다. " 저기, 지금 장 보러 가는 거…… 맞아? " " ……. " " 막 마트…… 지났는데. " " ……. " 꾸욱 하지만 대답대신 내 허리를 안고 있던 녀석의 손이 무언의 압력 처럼 힘껏 나를 죄어온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계속 녀석의 요구대로 길을 달렸다. 왠지 구역의 외곽으로 자꾸만 나가는 기분이었다. ' 에이, 나도 모르겠다! ' 그렇게 막 녀석이 가리키는 전신주를 돌아 나왔을 때였다. " 자,잠깐. "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전거를 멈춰세웠다.우리의 앞으로는 가파른 경사 가 돋보이는 오르막길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언덕을 깎아 만든 S자 코스. 분명 그다지 높은 언덕은 아니었지만 자전거로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 지금 여길 올라가라고? " 끄덕끄덕 " 나, 날 죽일 셈이냐? " 끄덕끄덕 어이! 거기서 끄덕이는 건 무슨 의미야! 난 기가 차서 녀석을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되려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시선을 받아쳤다. " 올라가. " 예. 그 짧은 말 한 마디에 압도당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페달을 밟아야 했다. 녀석을 뒤에 태운채 나는 무모한 힐 클라임을 감행했다. 처음이야 그럭저럭 올라갈만 했지만 채 1/3을 오르기도 전에 숨이 턱까지 찼다. 밟고 있던 페달 이 점점 무거워져 페달링 조차 하기 힘들어 진다. 어느 새 전신을 식은 땀으로 물들인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 어,어이. 나……힘들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냐? " " 힘들어 보여. " " 그러면 좀 내리는 것이……. " " ……. " " ……. " " ……. " ' 제,젠자아아아아앙! ' 나는 악을 쓰며 다리가 부숴져라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제길! 도대체 언 덕 위에 뭐가 있길래…… 아니, 그것보다도 이 언덕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 야! 그런 의문들을 뒤로하며 난 그야말로 오기 하나로 정상까지 도달했다. " 헉.헉……. "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며 숨을 몰아쉬었다. 땀방울이 얼굴에 서 부터 쉴 새 없이 흘러 내렸다. 피스메이커에 있을 당시의 나라면 체력적 인 면에서나 근력적인 면에서 하등의 꿀릴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퇴 원한지 막 한 달이 넘는 환자였을 뿐이다.4년 동안 죽은 듯이 누워있다가 갑 작스레 육체를 혹사시켰더니 그야말로 하늘이 노래졌다. " 와! 수고했어! " 그때 내 뒤에 타고 있던 녀석이 상쾌한 목소리와 함께 자전거에서 내렸다. 녀석은 내 등을 힘차게 두들겼는데 그 바람에 난 비틀거리다가 자전거 채 땅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크앗! ' 저 자식……. 고의였던 거야. 앞의 분풀이였던 게 분명하다고! ' 언덕의 가드레일에 서서 밑을 내려다 보는 녀석의 태도에서는 방금 전 까지 나에게 화를 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완벽한 쇼였던 거다. 난 거기에 얼간이 처럼 놀아난 거고! 하지만 진이 빠져버린 나는 변변찮은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 오빠! 오빠! 이리와서 이 밑 좀 내려다 봐! " 내려다 보기는 뭘 내려다 봐. 난 그렇게 투덜거리며 애써 녀석의 곁으로 다 가갔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세상은……. ' 와……. ' 연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22구역의 도심은 막 저물어가는 노을 빛과 거 리의 수은등으로 푸른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언덕 쪽으로 지 나가는 차들도 없었기에 거리는 그야말로 정적 그 자체. 여기가 내가 살던 그 동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색달라 보였다.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녀석은 눈 앞의 풍경에 넋을 잃고 있는 날 웃으며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이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이 항상 궁금했었어. 학교를 가려 면 매일 이 근처를 지나야 했는데, 그때마다 여길 올려다 보기만 했지 직 접 올라온 적은 없었거든. " " 왜? " " 그게, 아르바이트하고 병원 들리고 하니까 시간이 안되더라고. 이래뵈도 바쁜 몸이었단 말이야. " 그녀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 그래서 결심했지. 오빠가 깨어나면 여기에 꼭 들리겠다고.오빠와 함께 언 덕 위의 풍경을 보러 오겠다고. " 진정으로 기쁜지 웃음까지 활짝 터뜨렸다. " 헤헤. 내 소원 한 가지가 이루어 졌네∼ " 소원……이라. " 어때? 근사하지? 오길 잘했지? 평소 상상해온 것 이상으로 멋져서 감동해 버렸어! " 난 신이 난 녀석을 뒤로 하며 천천히 언덕 위에서 도심을 내려다 보았다. 이것이 내가 두려워하던 바깥 세상. 목격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란 말인가…….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전경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용하면 서도 생동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 풍경을 그렇게 겁냈던 걸까, 나는? 이 곳은 내가 알고 있던 세상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훨 씬……훨씬 더…… 평화로웠다. "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 난 뜨거워지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난…… 그 사고 이후로, 줄곧, 혼자 살아 왔었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신이도……모두 죽고 그렇게 홀로……. " 녀석은 조용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난 가드레일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 그러다 만났어. 시민 씨를. 유리를. 진우 씨를. 마리 선배를. 브루스를… …. 그들을 만나면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었어. 더 이상 혼자 가…… 아니야. 괴롭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너무도 벅찬…… 벅찬……. " ……기쁨의 순간들도 있었다. " 그들이 나에게 베풀어준 것들을 생각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야.그 들과 보냈던 나날들은 나에게 다시 없을, 너무나 고마운 시간들이었어.시 간들이었는데……. " 이 무슨 횡설수설일까. 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런 녀석 앞에서. 어차 피 이렇게 말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을. 난 어째서……. 그렇게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녀석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사람들은…… 오빠의 가족들이었구나. " " ……가족? " 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가족. 그것 보다 시민 씨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그들은 소중한 나의 가족이 었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나는 수 많은 추억들을 가질 수 있었고,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무감각하기 짝이 없던 나의 하루 하루는 그들로 인해 생기 를 되찾을 수 있었다. 삶이란 즐거운 것. 나는 처음으로 삶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 하하. 웃기지, 이런 얘기? 넌 아마 믿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나는……. " 아마 그녀의 눈에는 내가 정신 나간 사람 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 마음 껏 비웃어도 좋아. 하지만 그들은 내 안에 살아 있어. 그들은 분명 존재했었어. 시민 씨. 마리 선배. 유리. 진우 씨. 브루스. 그들은 분명……. " 믿어. " 그때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있었다. 신이……였다. 신이 는 날 살며시 끌어 안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 믿어. " 눈물로 흐릿해져 가는 시야로 22구역을 내려다 보았다.거리에 하나 둘 씩 켜 져가는 네온 사인의 불빛들이 물감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흐느낌 섞인 한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눈 앞 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져 간다. " 하아……. " 아직 봄이 되기에는 이른 시간. 하지만 더 이상의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봄이 되었다. " 와. 와. 늦었다. 늦었어. " 신이는 호들갑을 떨며 부산하게 학교 갈 준비를 했다.난 그것을 말 없이 지 켜보다가 걱정스레 물었다. " ……괜찮겠어? " " 응? 뭐가? " 신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그런 녀석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 리 어딘가 들떠있었다. 자세히 보면 볼도 상기되어 있다.난 작게 한 숨을 쉬 며 녀석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 괜찮은 척 하지마. 이렇게 열도 있잖아. " 손바닥으로는 무시 못할 미열이 느껴지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아침에 늦 게 일어난다 싶더니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 석은 이미 내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까지 다 차려논 뒤였다. " 에이. 문제 없어, 이런 것 쯤. 무리하지만 않으면 별 일 없을 거야. " 그 무리라는 걸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는 거잖아. 난 가볍게 혀를 찼다. 녀석은 학교를 마치면 곧장 아르바이트로 달려갔다가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아르바이트는 학교 근처의 찻집 에서 한다고 했다. 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 ……미안. " " 응? 뭐가? " 내 말에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그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 아니. 그……너한테 짐만 되는 거 같아서. " " 짐?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 " ……나도 일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자조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모든 걸 녀석에게 맡겨야만 하는 내 자신이 한 심스러웠다. 2036년이 된 지금, 나는 스무 살이었지만 4년 여간을 식물 인간 으로 보내다 보니 제대로 고등학교 조차 나오지 않은 실정이었다. 아니. 이제보니 중학교 조차 졸업하지 않았군. 이런 상태이다 보니,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물론 노가 다 같은 육체 노동 쪽은 신원이 문제가 안 되었지만, 도리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약해질 데로 약해진 내 몸이었다. 4년간 병상에만 누워 있던 터라 내 몸은 간신히 일상 생활을 하는 것만 나에게 허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달 전에 자전거로 고갯길을 오른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일로 인해 이주 일 간 다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일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담당 의사는 다 시는 격한 운동을 하지 말라고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신이를 바라보았다. " 미안하다. 이렇게 무능한 오빠라서……. 그 동안 내 병수발 든다고 너에 게 온갖 고생만 시켰는데 깨어나서도 달라진 게 없으니. " 호강까지는 못 시켜주더라도 최소한 부담 만은 덜어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내가 의기소침해 있자 신이는 덥썩 내 손을 잡으며 크게 도리질을 쳤다. " 으으응! 그런 생각하지마, 오빠! 난 오빠만 곁에 있어주면 돼! 이렇게 깨 어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나와 얘기해주는 것 만으로도! 난 하나 도 힘들지 않단 말이야! 하나도! " " ……내가 무슨 자양 강장제냐? " 난 녀석의 태도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이는 예의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 그러엄∼ 오빠는 내 삶의 활력소라고! 그러니까 좀 더 밝게 웃어요. 스마 일. 스마일. " " 하하. " 나, 참. 되려 위로를 받아버렸네. 뭐, 어쨌든 여기선 일단 믿음직스런 오 빠의 모습을 보여줘야 겠지.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 늦었다면서? 얼른 가 봐.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고. " " 헤헤. 알았어. 오빠가 그렇게 말해주니 힘이 난다! " 너스레 떨기는. 신이는 나의 재촉에 서둘러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다 대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다시 날 돌아 보았다. " 아, 오빠.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으로 전화해.알 았지? 저번에 내가 가르쳐준 번호로. " " 지금 네가 날 걱정할 때야? 너야말로 상태가 안 좋다 싶으면 바로 집으로 와! 무리하지 말고! " " 헤헤. 다녀 올게∼ " 자식이!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한 거야? 신이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그렇게 지하철 역으로 달려가버렸다. 난 그런 녀석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 ……괜찮으려나? " 어딘가 위태위태해 보인단 말이야. 하지만 뭐, 기운 하나만은 남 부럽지 않은 녀석이니까……. 신이의 평소 모 습을 떠올리자 내가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다 쓸데 없는 짓 같다. 그래. 별 일 없을 거야. 별 일 없을 거라고. 우르르르 그때 하늘로부터 낮은 천둥 소리가 울려퍼졌다. 집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어느샌가 시커먼 먹구름으로 잔 뜩 뒤덮혀 있었다.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정말…… 별 일 없으려나……. " 결국, 먹구름으로 뒤덮혀 있던 하늘은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비 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열린 창문 사이로 비가 새어 들어오자 재빨리 창 문을 닫으며 밖을 바라보았다. 잔 비가 쉼 없이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 봄 비……인가. " 그 녀석, 우산도 없이 나갔는데. 난 지금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신이가 걱정되어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 였다. 젠장. 아무리 TV가 없다지만 전화로 일기 예보 같은 건 들어둘 걸 그 랬어. 그리고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잖아? 저렇게 먹구름이 끼어 있는데 비 가 온다는 것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유가인! ' 아, 그렇지! ' 녀석이 아르바이트하는 찻집의 전화 번호를 가르쳐줬었다.분명 어딘가에 메 모해뒀던 걸로 기억하는데…….난 한참동안 집안 곳곳을 뒤지며 메모지를 찾 았다. 하지만……. ' ……없다. ' 젠장. 어디에 놔둔 거야? 하필 찾으려고 하니까 또 보이지를 않네! 책상 위 에 굴러다니던 걸 언젠가 봤었는데! 난 한 숨을 쉬며 바닥에 길게 드러 누웠다.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노력 했다. 그래. 아르바이트 사장이 설마 자기 직원을 비 맞히겠어? 적어도 우산 하나 쯤은 빌려주겠지. 아니면 차로 태워준다던가. 그리고 녀석도 녀석이다. 그 영악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 설마 미련하게 이 폭우 속을 맨 몸으로 헤쳐올까나? 거기다가 감기도 걸렸잖아? 제 몸 하나는 자기가 알아서 관리하겠지. 다 쓸데 없는 걱정이라고. ' 하지만……. ' 열에 들뜬 얼굴로 애써 나에게 웃어보이던 그 얼굴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쏴아아아아 대문을 열자 빗줄기 소리가 요란하게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난 그것을 말 없이 지켜보다가 이내 결심을 굳혔다. 외출복을 껴입고 하나 밖에 없는 우산 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내가 집을 나섰을 때는 막 8시가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신이와 자전거로 고갯길을 오른 후에도…… 여전히 나는 바깥 세상을 두려워 했다. 여전히 이 현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만은 없었다. 단지 부정도 하 지 않을 뿐이었다. 그냥 살아갈 뿐이었다. 하루. 하루.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철컹 철컹 전차가 흔들리면서 가벼운 쇳 소리를 흘렸다. 한창 귀가 길에 오른 사람들로 전철은 만원이 되어야 정상이었지만, 웬 일인지 내가 탄 전차 칸 만은 한적하 기 그지 없었다. 덕분에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서 창 밖을 구경할 수 있었다. 옅은 어둠이 깔린 도시. 나는 그것을 처음 보는 것인양 계속 바라만 보았다.네온 사인들이 켜진 거리 는 나에게 너무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분명 익숙한 것일텐데.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는 모습인데. 그것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문득 시선을 돌리다 막 전광판에 뜨고 있는 지하철 노선표를 볼 수 있었다. 《이번 역은 23구역. 23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23구역을 지나면 곧 24구역이다. 그리고 좀 더 가다보면……. ' ……있다. ' 26구역. 시민 씨의 집이 있는 곳이 나온다. 유리와 브루스. 그들과 함께 살던 그 곳. 진우 씨 네 가족이 이웃 집에 살고 있으며, 마리 선배의 무영신풍류 도장이 그 곳에 있었다. " ……. " 26구역에…… 가보는 것은? 물론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이쪽이 현실이라면 꿈에 서 봤던 26구역의 모습은 실제의 그곳과 완전히 틀릴 것이다. 4년 동안 꿈만 꿨던 거라면……난 한번도 26구역을 구경해 본 적이 없을 테 니까. 그건 지금 들릴 24구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리가 틀리고, 사람이 틀리고……. 그 달라진 거리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미 이쪽 세상을 인정하는 것 처럼 행동하 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습지만. 하지만 난 아직 믿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 었다. 이것은 꿈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다시 시민 씨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신이의 얼굴을 마주하면 무거운 죄책감이 날 짓누른다. 그래서 애써 이런 생각을 떨치려고도 해봤지만 ……무리였다. 떨친다고 해서 떨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이 의문을 종결시키고 싶었다.하 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난 여전히 우유부단할 뿐이었다. 치이이이익 24구역에 도착했다.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순간,나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내리느냐. 아니면 26구역을 들려보느냐. 어차피 신이가 아르바이트를 마칠 때까지 한 시간 가량 여유가 있었다. 잠시 26구역에 들려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그곳이 내 기억 속의 그곳과 같은지를. 모두가…… 그 곳에 있는지를. 나는 열려진 문을 노려보며 우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 ……. " 하지만 이내 문이 닫히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투둑 투둑 우산을 쓰며 24구역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한 가지에 생각이 미친 나는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 신이가…… 어디서 아르바이트를 하더라? '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신이를 찾아나섰던 것이다.나는 그런 자신이 바보 같 아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가…… 나란 녀석은 대책이 없군.무슨 수 로 이 낯선 거리에서 신이를 찾아내려고 했던 거지? 집을 나서기 전에 한 번 쯤은 생각해 볼 수도 있었잖아? ' 낯선 거리……. 여기가? ' 24구역.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던 게 이유였나 보다.꿈인지 현실인지 확실하지는 않 지만 난 분명 2032년의 한 해를 이 구역에서 보냈으니까. 24구역의 한성 고 등학교에서. 그 때문에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나 보다. 어차 피 내가 알고 있는 24구역과는 모든 것이 다른데. 우연히 동명의 학교가 이 지역에 있을 뿐인데. 투둑 투둑 분명……. " ……. " 그래야 하는데. ' 말도 안돼. ' 우산에 빗 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온다. 나는 두 눈을 부릅 뜨며 한 동안 전방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건물 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성 고등학교 교문에는 그런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 보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도 눈을 돌렸다. 찬찬히 모든 것을 살펴 보았다. 눈 앞의 건물은…… 내가 알고 있던 한성 고등학교, 그 자체였다. 한 치의 다른 점도 없는, 내 기억 속의 학교. 내가 다니던……. 쏴아아아아 나는 닫혀진 교문으로 다가가 그 사이로 교정을 바라보았다.어둠이 깔린 운 동장에서는 빗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째서 나는 이 곳에 오게 된 걸까? 나도 모르게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예전 24구역에 있었을 때 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자세히 보니 이 골목도, 저 골목도, 이 앞의 상 점가도, 저 앞의 가로수도, 모든 것이 나에게 익숙했다.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던 것들이다. 그전까지는 낯설다고 느껴지던 24구역이 한성 고교에 도착하는 순간, 너무 나도 친숙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 곳은 더 이상 나에게 낯선 장소가 아니 었다. ' 노,농담이 아니야. ' 비가 내리기 때문일까? 근방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우산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에서 떨림이 멈추지를 않는다. " 신이를……데리러 가지 않으면……. " 나는 일부러 눈 앞의 한성 고를 외면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한시라도 빨리 이 장소를 떠나고 싶었다. 혼란스러웠다. 이제야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런 혼란함을 나에게 안겨주는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 곳이 싫었다. 싫어! ' 신이를 만나야 해. 신이를 만나지 않으면. ' 나는 주문을 외우듯 그 말만을 되뇌이며 골목을 가로 질렀다. 신이는 학교 근처의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학교 근처. 학교 근처. ' ……학교 근처? ' 한성 고 근처의 찻집은…… 한 군데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곳 을 알고 있었다. 테이스트(Taste). 그런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골목을 돌아 나오자 한 눈에 들어오는 찻집의 모습을. 유령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찻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딸랑 딸랑 출입문을 밀고 들어가자 예의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우산을 접으며 실 내를 돌아보았다. 인테리어와 테이블의 배치. 그 모든 게 내 기억 속에 있는 테이스트의 모습과 똑같았다.그렇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성이고만 있자 서 빙을 보던 한 점원이 내게로 다가왔다. "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 예? 아,아니 그게. " 당황하며 점원을 돌아보는 나. 그리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 ……오빠? " " 신아? " 나에게 말을 걸었던 점원은 다름 아닌 신이였던 것이다. 녀석은 메뉴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랍다는듯 말했다. " 어,어째서 오빠가 여기에? 아니.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거 야? 응? " " 아……, 그게 어쩌다 보니. " 신이의 질문에 한 박자 늦게 답했다.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 신이는 그렇게 묻다가 내 손에 들린 우산과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번갈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혹시…… 비가 오니까……날 데리러? " " 응, 그래. " 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내려다 보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평 소의 나라면 대번에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쑥스러워할 정신조차 없었다. 신이는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녀 답지 않게 볼을 붉혔다. " 그,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실은 주인 언니가 집까지 차 태워주기로 했 었거든. " " 아, 그랬구나. " " 으응. 그냥 전화를 하지 그랬어? " " 그게……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잃어버려서. " 역시 헛걸음을 한 거로군. 왠지 심경이 복잡해져 시선을 내리깔았다. 헛 고 생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단지……. ' 괜히…… 걱정해서, 괜히 여기까지 오게 되서……. ' 괜히 쓸데없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런 24구역의 모습 따위……사실은 보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이 쪽을 현 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신이와의 이런 생활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 아,저기. 그렇다고 오빠가 온 게 싫다는 게 아니라! 나, 나……너무 놀라 서! 설마 오빠가 날 마중하러 올 줄은 꿈에도 몰라서, 그……. " 신이는 의미 없는 손가락 장난을 하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 을 이었다. " ……기뻐. 정말……. " 그녀의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지금껏 내가 했던 고민을 다 날려 버릴 정 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죄책감 또한 나에게 안겨줬다. 이런 신이를 보면서도 가짜라고 받아들이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 아, 오빠. 그럼 잠시만 기다려. 어차피 마칠 시간 다 됐으니까 금방 퇴근 할 준비하고 올게. " " 차는? 사장 님이 태워주신다면서? " " 에? 으으응. 괜찮아. 오랜만에 오빠하고 같이 걸어가지, 뭐. 어차피 주인 언니 집이 우리 집하고 반대라서 번거롭게 해드리기 싫었거든. " " ……그랬구나. " 난 신이의 미소에 마주 미소지었다. 그것은 내 마음 만큼이나 공허한 미소 였다. ' 그래. ' 아직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어. 여기가 거짓이라는 것도, 여기가 진실이라는 것도. 아직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냥 꿈 속의 거리와 여기의 거리가 같 았던 것 뿐이다. 그래. 단지 그것 뿐. ' 하지만. ' 꿈에서 봤던 거리가…… 현실에도 실존하고 있다니……. ' 그런 일이…… 가능한 거야? '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겠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내가 꿈 을 꾸었다고 생각했던 게 현실인지, 이렇게 신이와 걷고 있는 현실이 꿈인지. 어지럽다. 애써 현실을 믿어보기로 결심했건만, 결심하기가 무섭게 그 믿음은 깨져버 렸다. 그렇다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도 판단할 수가 없다.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 그것은 내 곁에서 걷고 있는 신이를 대할 때였다.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 답답한 마음은 의심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죄책감이라는 것일까? 이제는 그것조차 판단할 수가 없다. 난 완전히 판단력을 상실해버린 것 같았다. " 오빠, 너무 내 쪽으로 우산 기울이지마. 그러면 오빠가 비 다 맞잖아? " 신이는 내가 들고 있던 우산을 바로 잡아 주며 내 팔짱을 끼었다. 난 그녀 의 행동에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 좀……떨어져. 갑갑하단 말이야. " " 에이. 하지만 떨어지면 비 맞는 걸.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서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오라버니. 예? " " ……. " 난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그녀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 지 모르겠 다. 지금까지 처럼 정색하며 받아주기에는 이미 현실에 대한 불신감이 너무 도 커져버렸다.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하기에는 현실에 대한 애착이 아직도 남 아있었다.이런 정체된 상황 속에서 무엇 하나 결정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 심스럽다. 그렇게 내 기분은 가라앉고만 있는데, 녀석은 눈치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 헤헤. 헤헤헤. " " ……갑자기 왜 웃어? " " 아니. 아까 주인 언니하고 했던 얘기가 생각나서. " " 주인 언니가 왜? " " 으응. 별 거는 아니고……. " 별 게 아니라면 얘기하지 말라고. 난 건성으로 녀석의 말을 들어주는 척 했 다. 신이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 그냥 주인 언니가 오빠가 누구냐고 그러길래……. " " 그러길래? " " 내 남자 친구라고 그랬지∼ " " ……. " 하,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대체가 이 자식은! 난 어처구니가 없어 녀석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녀석 은 내 시선을 받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 어이. 거기는 얼굴을 붉힐 때가 아니잖아? 고개는 또 왜 돌리는데! ' 무엇보다 난 지금 이럴 기분이 아니라고! ……이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마는 나. 그것이 불쾌해서 팔짱을 낀 녀석의 손을 흔들었다. " 요상한 소리하지 말고 당장 팔 빼. 덥단 말이야! " " 흑. 결국 내치시는 겁니까. 하나 뿐인 동생을? " " ……쇼할래? " 무엇보다 녀석에게 잡힌 팔이 진짜로 뜨거웠다. 이 녀석, 몸이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괜히 옆에 있는 나까지 더워지잖아? ' ……뜨겁다고? ' 그 순간 녀석이 감기에 걸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재빨리 녀석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신이는 그런 나의 행동에 두 눈을 깜빡이며 날 올려 다 보았다. " ……오빠? " " 너, 열이……. " 열이 장난이 아니잖아? 이제보니 이마에 식은 땀도 맺혀 있었다. 비에 젖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신이는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어라? 열 나는 거야? 난 못 느끼겠는데……. " " 임마! 그걸 자신이 어떻게 알아? 이마를 만지는 손 조차 이렇게 뜨거운데! " 난 녀석의 달아오른 손을 움켜쥐며 생각했다.왜 이렇게 상태가 악화된 거지? 분명 비를 맞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 내가 데리러도 와줬고……. ' 아, 학교. ' 학교에서 찻집으로 가는 도중에 비를 맞았나 보다. 바보같으니라고! 친구들 한테 우산이라도 좀 빌려쓸 것이지! 신이는 내 표정이 걱정스레 변하자 잡힌 손을 어색하게 흔들며 소리쳤다. " 에이, 괜찮어, 오빠. 봐! 이렇게 멀쩡하다고. 이∼렇게. " " 야! 우산 밖으로 나가지마! 비 맞잖아! " 난 얼른 녀석을 내 쪽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신이는 영락없이 내 품에 안기고 말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오,오빠. 아까는……붙지 말라고……했으면서. " " 시끄러. " 난 달아오르는 얼굴을 녀석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신이를 껴안은 팔 에 더욱 힘을 주었다. " 39.5도. " 완벽한 감기로군. 그것도 독감이다. 집에 도착한 나는 곧장 신이를 이불에 눕히고 온도계로 체온부터 쟀다. 신 이는 자신이 아프다는 자각이나 있는 건지 아까부터 자꾸만 몸을 일으키려 고 했다. " 괜찮다니까,오빠. 이런 것 쯤 내일 아침이면 다 낫는단 말이야. " " 그래. 오늘 저녁에 잘 쉰다면 말이지. " 난 냉정히 녀석의 말을 끊으며 녀석의 이마를 눌러 다시 자리에 눕혔다. 신 이는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 이렇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라고. 오빠 저녁밥도 해줘야 하고 밀린 빨래도 해야하고, 또……. " " 저녁 밥은 이미 챙겨 먹었고 빨래며 청소는 내가 낮에 다 해놨어. 그러니 까 환자는 환자답게 누워나 있으라고. " " 우와. 나보다 더 환자인 사람한테서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 " 녀석은 환자 취급받는 게 싫었는지 이불을 코까지 뒤집어 쓰며 칭얼댔다. " 오빨 간호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 " 그러게. " 이제는 오히려 입장이 반대가 되었군. 난 피식 웃으며 물수건을 짠 후 신이 의 이마에 올려다 주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녀석은 뭐가 그리도 좋은 지 혼자서 히죽 히죽 웃었다. " 헤헤. 이렇게 간호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구나∼상제비라도 된 기분이야∼ " " 어이구. 선녀 납셨네. " " 헤헤헤. 그리고 옛날 생각도 나고. " " ……. " 그래. 그러고 보니 옛날에도 이렇게 신이를 간호해줬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집에서 이렇게 단 둘이서. 뭔가 묘하게 그리운 기분이었다. 신이는 금세 물수건을 갈아줘야될 정도로 열이 나는 주제에 입가에서 웃음 이 떠날 줄을 몰랐다. 이런 간호 정도로 저렇게나 좋아할 수 있는 걸까? ' 그 정도로…… 홀로 지내왔으니까. ' 4년여간 혼자 힘으로 살아야만 했으니까……이런 작은 일에도 기뻐할 수 있 는 것이다. ' 단지 아플 때 누군가가 옆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 난 신이의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홀 로 살아가다가 시민 씨들과 동거하게 되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으니까. ' 시민 씨. ' 젠장. 또 생각나버렸다. 난 애써 떠오르는 모두의 얼굴을 떨쳐내며 애써 신 이의 간호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것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내 앞에서 신이 가 아파하고 있다. 내 동생이 아파하고 있어. 그것만을 생각하자. 꼬르르륵 그때 신이의 배에서 배곪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와 신이는 서로를 멀뚱 멀뚱히 쳐다보다가 점점 신이 쪽에서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후 다닥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고 난 그 위를 향해 물었다. " 저녁……안 먹었어? " " ……으응. " " 점심은? 점심도 안 싸가던 것 같던데. " " ……안 먹었어. " " 이 바보가! " 난 골 머리를 앓으며 신음했다. 이 자식. 평소에는 나보고 제 때 제 때 챙 겨 먹으라고 그렇게 잔소리했던 주제에! 신이는 이불 속에서 간신히 눈만 내밀며 우물우물 거렸다. " 하지만……오늘 급하게 나간다고 내 도시락은 쌀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렇다고 사먹기에는 또 돈이 아까워서. " " 그렇다고 굶기는 왜 굶어! 저녁은? 찻집에서 알바생 저녁도 안 챙겨줘? " " 그게 또 입맛이 없어서……. 헤헤. 감기 때문에 입맛이 없더라고∼ " " 그런데서만 감기 핑계대지마! " " 으앙∼ 소리치는 오라버니는 싫어∼ " 난 능청스러운 녀석의 머리를 이불 위에서 꾹꾹 누르다가 가볍게 한 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신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 오빠? 어디가? " " ……잠시만 기다려 봐. 죽이라도 만들어 올테니까. " " 죽? " " 그래. 죽. " 난 그 말을 끝으로 성큼 성큼 가스렌지 쪽으로 걸어갔다. " 자, 먹어. " 냉장고를 뒤져서 대충 대충 요리한 결과, 그럭저럭 먹을 만한 죽을 만들 수 있었다. 난 상을 펴놓고 신이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녀석은 내가 만든 죽을 바라보며 입이 함자박 만하게 벌어졌다. " 우와아∼ 이거, 정말 오빠가 만든 거야? " " ……그럼. 내가 만들지 않으면? " 나의 퉁명스런 대답에 신이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으으응. 아니. 아니. 너무 맛있어 보여서, 헤헤. " " 나, 참. 어서 먹기나 해. " " 네에∼ 잘 먹겠습니다∼ " 신이는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 ……. "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난 수저도 들지 않는 녀석의 태도에 살짝 눈살 을 찌푸리며 물었다. " ……안 먹을 거야? " " 아, 저기……오빠. " " 응? " " 나, 그게……. " 갑자기 녀석의 분위기가 심상찮게 변했다. 뭐야? 열이 심해진 걸까? 상태가 안 좋아진 거야? 난 걱정스레 물었다. " 왜 그래? 많이 아파? " " ……으응. " 몸을 웅크리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난 당황하며 녀석에게 다가 갔다. 얼굴이 상기되고 어깨를 희미하게 떠는 게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였다. " 오빠……, 나……너무 아파. " " 시,신아! " " 그래서……말인데. " " 으응! " 어서 얘기해, 신아!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지려는 몸을 안간 힘을 다해 버 티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오빠가…… 먹여주면 안될까? 이거? " " ……. " " ……. " " ……. " 난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움켜쥔 주먹을 떨었다. 그런 내 모습에 신이는 격 하게 기침을 하며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 콜록. 콜록. 아아. 한시라도 빨리 죽을 먹지 않으면…….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콜록. 콜록. " " 거짓말! " 난 이를 갈며 죽이 든 탁상을 녀석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 먹기 싫으면 먹기 싫다고 얘기해! 이대로 버려버릴테니! " " 으앙∼ 잘못했어요, 오라버니∼ 그냥 제가 알아서 먹을테니 한번만 용서 해주세요. 예? 예? " " ……. "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난 울상을 지으며 죽을 먹기 시작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녀석은 뭐가 그리도 불만인지 입이 한 움큼 씩 나와서 죽을 떠먹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라도 마주칠 새라면 금세 우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으이구. 저 화상……. " 이리 줘봐. " 보다 못한 내가 녀석에게서 수저를 빼앗아들고 죽을 비볐다. 그러자 신이는 자신이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듯 화사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아이, 참.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역시 오빠는 넘 넘 자상하단 말이야. " " ……. " 이 자식, 정말 아프기는 한 걸까? " 잔소리 말고 먹여줄 때 잠자코 받아 먹어라. 응? " " 헤헤. 알았어. 냠∼ " 녀석은 어미 새가 물어오는 모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잘도 내가 떠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그 모습이 웬지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실소해버렸다. 그러 자 죽을 먹던 신이도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 맛있어? " " 으응! 이 죽 최고다, 정말! 이야∼ 오빠한테 시집가는 여자는 정말 행복 하겠어∼ 이런 일등 신랑감이 해주는 음식을 매일 매일 먹을 수 있을테니. " " 하. 너무 후한 거 아냐? 겨우 죽 하나로 그렇게 쉽사리 일등 신랑감의 자 리를 안겨주다니. " " 헤헤헤. 적어도 내 평가는 오빠에 한해서 만큼은 한 없이 너그러워진다고. " " ……그거 참 영광이로구나. " " 아, 그래! 그러지 말고 그냥 나한테 장가 들어라. 오빠 정도라면 내 평 생 귀여워해 줄 자신이 있는데. " " 정중히 사양하마. " 난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내심 죽이 맛있게 만들어진 것에 안도했다. 마 지막으로 죽을 만들었던 때가 테레이아의 병 간호를 할 때라서 웬지 자신이 없었는데……. " ……. " 역시…… 그건 꿈이 아니었을까? 테레이아의 병 간호를 해줄 때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새삼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오빠. ' ' 만약 오빠가 있었더라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 하하. 그래. 갑작스레 날 테레이아가 오빠라고 부르자 깜짝 놀랐던 게 기억 난다.그때의 테레이아는 너무나 아팠기에 도저히 혼자 두고 집에 갈 수 없었 지. 밤을 새면서 그녀를 간호했었다. ' 나도 정말 혼자가 아닌 걸까? ' 그때의 그녀는 애원하듯 그렇게 물어왔다. 그런 그녀에게 난 뭐라고 대답했 던가? 나는 숟가락을 탁자에 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 모습에 신이는 의아 해 하며 날 불렀다. " 왜 그래, 오빠? " 하지만 난 답할 수 없었다. 꾹꾹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던 혼돈이 날 엄습 해오고 있었다. 수십가지의 의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태평스럽게 신이의 병 간호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어떻게든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야. 그쪽이 꿈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이 생활에 적응해서 신이를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혼자서 고생하는 이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어떻게든 그녀에게 도 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시민 씨와 모두를 잊어버리는 게 정답일까? 그게 바람직한 거야? 아니면 이 아이와 모든 걸 거부하고 시민 씨들을 기억하는 게 정답일까? 모르겠어. 아무 것도 모르겠어.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이렇듯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는 게 견딜 수 없이 괴로워! " 오빠. " 신이가 내 손을 잡았다.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 4년 여간 간호해준 아이.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려준 아이. 난 이 아이를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 아이를 거부해야 하는 걸까? 나는 신이의 손을 맞잡으며 넋두리하듯 말을 꺼냈다. " 지금처럼…… 병 간호를 해줬던 친구가 있었어. " 그녀는 나에게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되묻지 않았다. 조용히. 단지 조용히 내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 홀로 아파하던 그 친구에게 약속했었어. " ' 테레이아가 슬플 땐 내가 같이 슬퍼해줄게. ' " 함께 있어주겠다고. " ' 테레이아가 힘들 때 같이 힘들어하겠어. ' " 곁에 있어주겠다고. " ' 그리고 테레이아가 웃을 때는 반드시 같이 웃어 줄 거야. ' " 하지만 그 약속은……한낱 꿈이었을까? " ' 그러니까 더 이상 테레이아는 혼자가 아니야. ' " 이제는……. " 난 고개를 떨구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지킬 수 없는 약속인 걸까? " 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 예. 예. 상태는 많이 좋아지고 있어요. " 《…….》 " 요즘도 가끔씩 꿈에서의 얘기를 하지만…… 그래도 점점 이쪽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 《…….》 " 으응. 제가 힘내야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 《…….》 " 예. 잊어버리지 않았어요.그동안 믿어왔던 것이 꿈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사람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는 걸. " 《…….》 " 아무리 행복한 꿈이더라도…… 꿈은 꿈일뿐. 거짓이니까요. " 꿈은 꿈일뿐. ……거짓이라고? " 헉! " 난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스산한 새벽 공기와 검푸른 그림자 가 방을 뒤덮고 있었다. 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 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차츰 사물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 뭐지? 그건 뭐였지? ' 난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땀이 마르자 오한이 들었다. ' 신이의 목소리였어. ' 전화를 받고 있었던 걸까? 신이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잠결에 들었 던 것일까? 꿈이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그 내용이 생생 했다. 나는 눈을 희번뜩거리며 내 옆에 누워 있을 신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숨소 리조차 내지 않으며 곤히 자고 있었다. 상당히 깊게 잠들어 있는 것 같다. ' 내가 자고 있을 때 누군가와 통화한 걸까? '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무엇보다 녀석은 밤 늦도록 열에 들 떴다가 새벽 녘에야 잠들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잠들 때까지 나도 깨어있 었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였다. 새벽 2시 경에 잠들었으니까 약 3시간을 잔 것이다. 이 사이에 신이가 다시 일어났을 것 같지도 않고, 전화 통화를 했을 것 같지도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은가? 만약 의사 선생님과 통화했다고 하 더라도 이 한 밤에 연락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것도 아픈 몸을 이끌고? " ……. " 하지만 난 한참동안 신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 가슴 속에서 의심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 와. 와. 늦었다. 늦었어. " 신이는 호들갑을 떨며 부산하게 학교 갈 준비를 했다.난 그것을 말 없이 지 켜보다 걱정스레 물었다. " ……괜찮겠어? " " 응? 뭐가? " 신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그 얼굴에서는 어제 밤의 아팠던 흔적 같 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 한 숨 자고 일어나니 그 열이 다 내린 것이다. 최소한 이틀은 갈 거라 고 생각했는데……. 경이로운 체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오늘 하루도 열심히 해. " " 응! 오빠도! " 녀석은 기운차게 답하며 대문을 나섰다. 그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 아, 저기……오빠. " " 응? " " 어젯밤에…… 간호해줘서…… 고마워. 나, 정말 기뻤어. " " ……응. " 난 미소지었고 신이는 쑥스러운지 힘차게 대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 " 그래. 잘 다녀와. " 난 신이의 뒷 모습을 전송하며 우두커니 대문에 서있었다.그녀가 내 시야에 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더 이상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천천히 신발을 신고 대 문을 나섰다. 발걸음은 지하철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 ……가자. ' 26구역으로. ' 내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하는 거야! ' ' 저 혼자 와도 됐는데……. ' 시민 씨는 내 손에 들린 장 바구니를 바라보며 자꾸 같은 말을 반복했다.나 는 그런 그녀에게 씩 웃어 보였다. '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치 않아요.시민 씨는 항상 저희들을 위해 바쁜 와중에도 요리를 해주시잖아요? 최소한 장 보는 건 도와드려 야죠. ' ' 하지만……. ' ' 그 동안의 밥값 대신이라고 생각해주세요. ' ' 그런……. 저는 댓가를 바래서 음식을 해드린 게 아니에요. ' 섭섭해하는 시민 씨의 표정에서 나는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말을 꺼냈다. ' 그,그렇죠. 시민 씨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그게. 저, 제가 그러고 싶어서. 시민 씨에게 뭔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서. 아, 그러니까……. ' 대책없이 말이 꼬인다. 나는 생각 없이 말한 자신을 탓하며 어떻게든 사태 를 수습해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에 시민 씨는 곧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후훗. 알고 있어요. 가인 씨가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하 지만 섭섭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말씀 마세요. 알았 죠? ' ' 하,하아……. 예. ' 나는 어설프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매번 느끼는 거지만, 나란 녀석 은 말 재주가 지독스럽게도 없는 모양이다. 시민 씨는 그런 나를 지켜보다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하지만…… 이렇게 가인 씨가 도와주니 정말 수월하네요. 역시……집에는 남자가 있어야……. ' ' ……예? ' ' 아,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 시민 씨는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손사래를 쳤지만 난 그녀가 한 말을 놓치 지 않았다. 나,남자. 남자라고! 시민 씨! 나를 남자로 봐주셨던 걸까? 나는 확 얼굴이 달아올라 그녀를 바라 보았다.시민 씨는 그런 내 시선을 피 하며 쑥스럽게 미소지었다. ' 어서 가요, 가인 씨. 브루스 님과 유리 양이 기다리겠어요. ' ' 아, 그렇죠. ' 그 둘에 생각이 미치자 자연히 발걸음을 서둘게 된다. 난 문득 석양으로 붉 게 물드는 26구역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예고도 없이 한 줄기의 미소 가 날 찾아들었다. 단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녀와 함께 이 거리를 걷기에. ' 그래. ' 나에게 있어서 26구역은……. ……시민 씨의 거리였다. 지금 난 그때와 변함 없이 26구역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시민 씨가 없었다. 대신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은 그녀와 함께 보냈던 추억, 그리움의 감정들. 난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더듬으며 익숙한 골목 길을 거닐었다. ' 역시. ' 내 생각대로 26구역의 거리는 내가 알고 있던 그대로 였다. 꿈이라고 생각 했던 2032년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 속의 26구역. 한치의 다른 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여기는 바로 그곳이었다. ' 정말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니라면……. ' 그것이 진정 사실이었다면……이 거리에서도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시민 씨와 유리, 브루스, 마리 선배, 진우 씨. 그들을 정말 만날 수 있을까? 부디 그러기를 바랬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꿈이 아니기를 바랬다. 낯 익은 거리의 모습은 나에게 희망을 주고 있었다. 그들과의 재회가 금방이라 도 이뤄질 것 같았다. 점점 시민 씨와 함께 했던 집이 가까워질수록 내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뛰 기 시작했다. 그리운 2층 양옥 집. 모두와 함께 살았던 그 곳. 부디 존재하 고 있기를. 반드시 실재하고 있기를. 그것만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걷고 있던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 이제는 전력 질주에 가깝게 달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하지만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골목길을 헤쳐 나갔다. 달렸다. 달렸다. 달렸다. 눈 앞에 시민 씨의 모습이 아른 거렸다.손을 뻗기만 하면 그녀에게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쉽사리 좁 혀지지 않는다. ' 시민 씨! 제발! 제발 저에게 손을 뻗어주세요! 제발! '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아! 다시 만나고 싶어! 조금만 더 가면 만날 수 있 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 조금만! ' 화악 마지막 골목을 돌아나왔다. 그리고 나는 발 걸음을 멈추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면서도 입가로 번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 ……있어. " 역시 있었다. " 꿈이 아니었던 거야. "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볼 수 있었다. 꿈 속의 거리를. 그 곳에 위치한 우리들의 집을. 나는 드디어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격한 감동에 사로잡힌 나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느리지만 결코 망설임 없이 집을 향해 걸어갔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몸의 떨림은 한층 더 심해졌다. " ……. " 하지만 막상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니 망설임이 나를 찾아왔다. 초인 종의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채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손가락이 굳 어 버린다. 슬그머니 손을 내리다가 다시 올리기를 반복했다.하지만 끝내 누 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난 서늘하게 식어버린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하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 제길……. ' 여기까지와서도 망설이고 있는 거냐, 유가인? 이대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아무 것도. 넌 무엇 때문에 26구역을 찾아 온 거지? ' 시민 씨들을……만나기 위해서? ' 그게 아니면, ' 신이의 얼굴을……떳떳히 마주하려고? ' 어느 쪽이든간에 난 이 상황을 피해서는 안된다. 부딪혀서 직접 눈으로 확 인해야만 했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든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딩동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귀에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려퍼졌다.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 ……. " ……한번 더. 딩동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초인종을 눌러 보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아무런 반응 이 없었다.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근채 공허한 벨 소리만 토해낼 뿐. ' 아무도 없는 건가? ' 안도와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집으로 생각이 미 쳤다. 진우 씨 네 집. 이웃에는 그들이 살고 있었다. 진우 씨, 미연이 누나, 하나……. 맞아. 내 가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재빨리 이웃 집의 벨을 눌렀다. 긴장하며 초인종에서 대답이 들려오기 를 기다렸다. 제발 대답해줘. 제발. 제발. 제발! 《 누구세요? 》 대답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 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누구지? 이 목소리는? " 아, 저기. 정진우 씨…… 댁인 가요? "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당황하면서도 애써 말을 꺼냈다.그런 나의 질문에 초 인종의 상대는 너무도 간결히 답해주었다. 《 아닙니다. 》 탁 그것으로 끝이었다.더 이상 건너편의 상대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난 멍하니 서서 초인종을 노려보다가 울컥 화를 터뜨렸다. 재차 초인종을 눌러 상대에게 소리쳤다. " 잠시만요! 그럴리가 없어요! 여기에는 분명! " 《 그런 사람 없다니까요! 》 "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봐요! 여기 정진우 씨 댁이라는 걸 알고 찾아온 거 란 말이에요! 진우 씨가 없다뇨? " 《 없는 걸 없다고 하는 거지 어디서 생떼를 부리는 거에요? 자꾸 귀찮게 굴면 경찰을 부를 테니 당장 꺼져 버려! 》 정적. 날카로운 여자의 외침을 끝으로 나는 꿀 먹은 벙어리 마냥 할 말을 잊어버 렸다. 대문 위로 보이는 2층 창문에서는 한 여인이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그 경계하는 기색이 밑에 있는 나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라, 정말 경찰이라도 부르면 어쩌나 싶어서 일단은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 어째서……. ' 시민 씨의 집으로 돌아와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저 허탈할 뿐이었 다. 이제는 뭐가 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거리는 같지만 사람들은 다르다는 건가? 누군가가 세상을 기묘하게 비틀어 놓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상 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 ' 제길! ' 하지만 의문보다 실망이 앞선다. 난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를 악물었다. 결 국 잠시나마 품어본 희망이 부질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절망이 나를 엄 습해왔다. 그리고 절망은 자괴감이 되어 날 괴롭혔다. ' 역시 이것은 현실이었던 걸까? 모든 건 나의 망상이었던 거야? '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 신이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큰 죄를 지 은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26구역이건만, 의심을 털어 내고 보니 그곳에는 신이를 의심했던 나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난 끝까지 그 아이를 믿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날 자격이 있을까? " 저, 누구십니까? "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던 도중,내 정신을 일깨우는 한 목소리가 있었다.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그러자 어느새인가 내 앞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한 남 자가 서있었다. 검은 그림자, 검은 구두, 검은 정장.거기다 머리카락까지 검은색. 마치 칠 흑과도 같은 흑발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무의식 중에 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 시민……씨? " " ……! " 남자의 표정이 가볍게 굳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 지 못했다. 저 선이 얇은 얼굴과 감홍빛 눈동자……. 그것은 영락 없는 시민 씨의 얼굴 이었던 것이다! " 한……시민? " 남자는 내가 언급했던 이름을 정확히 성까지 덧붙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더 더욱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시민 씨? 시민 씨인가? 하지만……. 하지만 이 사람은……. " 금방 절 부르셨던 겁니까? " 남자는 흥미롭다는듯 그렇게 물어왔다.그리고 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그 의 목소리는 내가 아는 시민 씨의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 보다 훨씬 굵고, 어딘가 차가움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시민 씨가……아니야? ' 그,그래. 그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은 남자잖아? 시민 씨일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나 시민 씨와 닮을 수가 있다니……. "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사람을 잘못 본 거 같네요. " 난 당황하며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그런 내 모습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시민 씨와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그만, 또 다시 넋을 잃 고 바라볼 뻔 했다. 남자는 차분히 그 감홍빛 눈동자로 날 응시했다. " 그랬군요. 그럼 이 집에 용무가 있으신 겁니까? " " 예? 예……. " 난 마른 침을 삼키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뒤의 집을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 저, 저기. 혹시……이 집에서 사시는 분? " " 예. 이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민 씨를 닮은 사람이 시민 씨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니……. " 아, 그, 그러시군요. 저기, 그렇다면 혹시……. " ……한시민 씨를 알고 계세요? 그렇게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앞서 남자는 대문을 열쇠로 열며 나에게 말했다. " 일단 차라도 들며 얘기하도록 할까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 " ……. " 난 두 말 할 것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난 거실의 쇼파에 앉아 방 안을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방 안의 모습은 내 가 살았던 그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가구의 배치부터 커튼의 무늬,부 엌에 놓인 식기구의 배치까지. 모든 것이 동일했다. 난 마치 예전에 시민 씨 들과 동거했던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 자. 받도록 해요, 가인 군. " " 아, 감사합니다. " 그리고 현재 이 집의 주인인 시민 씨를 닮은 남자와 난 서로 통성명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시영이라고 했다. ' 한시영. ' ……뭔가 시민 씨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이름이었다. 난 그가 건네주는 찻 잔을 받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는 자신의 차를 가지고 내 맞은 편 쇼파에 앉 았다. 찻잔의 하얀 김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역시 놀랄 정도로 시민 씨를 닮아 있었다. " 그럼 얘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죠. " 갑작스레 그가 날 바라보며 얘기를 꺼냈다.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그 감홍빛 눈동자를 대하면, 마치 시민 씨가 날 바라보는 것 같아서 자 꾸만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이다. " 아, 예. 그러니까……. "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할까나? 난 이 뒤엉킨 이야기를 조리있게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아 말을 멈췄다. 막 막할 따름이었다. 엉겹결에 그를 따라 집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무엇보 다 이 얘기를 그가 제대로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미친 놈 취급이나 하지 않 으면 다행이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자, 시영은 자신 쪽에서 먼저 질문 을 던졌다. " 아까 절 보고 한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 아, 그래! 맞아! 난 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궁금했다. 난 크게 고개를 끄덕 이며 소리쳤다. " 예! 그,그래요! 한시민! 그렇게 불렀어요. 시영 씨는 시민 씨를 알고 계 시나요? " 그는 그녀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내가 언급하지 않은 그녀의 성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날 여기까지 데려 온 거 겠지. 과연 예상대로 시영은 순순히 그것을 인정했다. " 물론이에요. 가인 군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 때는 저도 상당히 놀랐 습니다. " " 여, 역시……. 그렇다면 시영 씨는 시민 씨의? " " 형제입니다. 저는 그 아이의 형이지요. " 에? 나는 잠시 멈칫해야만 했다. 형제? 형? 형이라니? 나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 아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 형……이라고요? " " 예. 그 애와 전 일란성 쌍둥이죠.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 " 아……그게. 제가 아는 시민 씨는…… 여자거든요. " " 여자? " 그는 흥미가 동한다는듯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 예. 분명 제가 찾고 있는 한시민 씨는 여자에요. 그것도 시영 씨와 똑같 이 생긴. " " 흐음. 그것 참 재미있군요. 저와 닮은 여성이라니……. 하지만 그렇다면 가인 군이 찾는 한시민 씨는 제 동생이 아닐 겁니다. 일단 생김새가 같은 일란성 쌍둥이는 성별이 틀릴 수가 없으니까요. 이란성이라면 모를까. " " 그,그렇죠. " 난 맥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그러다 문득 시영 씨의 남동생이라는 한시민 씨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 그렇다면 시영 씨의 동생 분은? 같이 사시는 건가요? 이 집에서? " " 아니오. 그 아이와 나는 벌써 10년도 넘게 떨어져 지내고 있습니다. 서로 의 소식도 알지 못하죠. " " 사이가…… 안 좋으신 모양이죠? " " 하하. 아무래도 녀석에게는 단단히 미움받고 있는지라. 그 아이를 위해서 한다고 했던 일이 그만, 녀석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죠. " 그는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 감홍빛 눈동자는 쓸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런 시영 씨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동생 분에 대한 것을 묻지 못하 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내가 조용해지자, 그는 언제 침울했냐는듯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기분 전환이 빠른 남자였다. " 그보다 가인 군의 한시민 씨는 어떤 분이십니까? 저와 닮은 외모의 여자 라니……상당히 궁금하군요. 괜찮으시다면 얘기해주겠습니까? " " 예? " 그 뜻 밖의 부탁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 제가 아는 시민 씨는……. " 내가 아는 그녀는……. " 굉장히 아름다운…… 그리고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던……. " 그래. 생각해보니 언제나 내 곁에는 시민 씨가 있었다.힘든 일이 있거나 슬 픈 일이 있을때, 기쁜 일이 있었을 때도 그녀는 언제나 내 곁에서 함께 해주 었다. 마치 가족처럼. " 혼자였던 날…… 혼자가 아니게 해주던……. " 그리고 또 날 지켜주었던 그녀. 날 위해 희생해주었던 그녀. 그러면서도 항 상 나에게 웃어주었던 그녀. " 언제나 절 걱정해주던……. "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차마 뒷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시민 씨 를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너무 아프다. 무엇보다 이대로 그녀를 만나지 못 할 거라 생각하니……정말……. " 그녀를 사랑하는군요? " " ……! " 나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시영 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시민 씨를 닮은 미소. 그것이 내 마음을 더더욱 아 프게 했다. " 예. 저는…… 그녀를 사랑해요. " 그녀의 흩날리는 금빛 머릿결을 사랑하고, 날 걱정해주던 목소리,요리를 만 드는 손,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 날 바라봐주던 감홍빛 눈동자까지. 그 모든 걸 사랑해요.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와 함께 한 2032년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내 입가로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시영은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 저에게 얘기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녀와 있었던 일들을. " " ……. " 난 그의 얼굴을 마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 입으로는 꿈 속 에서 보냈던 2032년의 일들이 두서 없이 흘러나왔다. 너무나 긴 얘기들. 차마 다 떠올릴 순 없는 얘기들.하지만 그 무엇 하나 잊 어버리지 않은 얘기들. 나는 그것들을 모두 시영 씨에게 얘기했다. 왜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단지 호소를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넋두리 라고 해도 좋았다. 분명 남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라면 날 나사 하나 쯤 빠진 인간으로 보았을 것이다.허황되다고 피식 비 웃을 그런 얘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누군가에게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얘기하고 싶었다. 시영 씨는 시종일관 주의 깊게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꽤 장 시간을 얘기했 으니 지루할 법도 했는데 그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난 2032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얘기하고, 식물 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요 근래의 일들까지 얘기를 끝마쳤다. 그제서야 시영 씨는 입을 열었다. " 흥미롭군요. " " ……예? " 내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그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 아니. 혹시 제 표현이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제 견해 상으 로 미루어 볼 때 가인 군의 얘기는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군요. " " 견해……라뇨? " 난 어리둥절해져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시영은 자신의 품에서 하나의 명함 을 꺼내 주었다. 그 명함에는 심리학자 한시영이라는 활자가 적혀 있었다. " 심리학자? 의사 선생님……이신 건가요? " " 아, 뭐. 선생님……이랄 것 까지는 아니고. 그냥 일개 학자일 뿐입니다만. 학문을 연구하면서 간간히 환자 치료도 병행하는 정도죠. " 그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듯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 일단 제 생각에 가인 군은 꿈을 꾼 것 같지는 않습니다. " " 예? " 꿈이 아니라니? " 인간은……잠이 들어서 눈을 뜰 때까지 두 가지 패턴의 수면을 반복하죠. 렘(REM) 수면과 비렘(NON REM) 수면이라는 게 바로 그것인데. 렘은 '빠른 눈의 움직임(Rapid Eye Movement)'의 줄임말로서 자고 있어도 눈이 활발 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겁니다. 비렘 수면은 뭐,렘 수면 과 반대의 개념이죠. 즉, 렘 수면은 얕은 잠. 비렘 수면은 깊은 잠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 난 잠자코 그의 얘기를 들었다. " 많은 사람들이 지난 밤 꿈을 꾸지 않았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은 꿈을 꿉 니다. 단지 잠자는 동안 뇌에서 짧은 기억을 담당하는 화학적 시스템이 차단되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 뿐이죠. 그러나 이 렘 수면이 나타 나는 시기에 바로 잠에서 깨면 95%정도는 꿈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 " 그럼…… 전 그 렘 수면이라는 것을? " " 하하.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굳이 장황하게 이런 얘기를 늘어놓은 것은 꿈이라는 개념을 가인 군에게 인지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 유는 없어요. " 그는 거기서 말을 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런 후 다시 얘기를 재개했다. " 가인 군은…… 4년 넘게 식물 인간 상태로 지냈다고 했죠? " " 예. " " 식물 인간이란 대뇌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를 말합니다.기억을 할 수도 없 고 감정을 느낄 수도 없죠. ……당연히 꿈을 꿀 수도 없습니다. " " ……! " 그는 내가 놀란 표정을 짓는 것에도 아랑 곳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 그래서 전 가인 군이 꿈을 꾸지 않았다고 말한 겁니다. 뭐, 식물 인간 상 태에서도 꿈을 꿨다느니 유체 이탈을 했다느니 하는 여러가지 사례가 있 기는 하지만 그다지 신빙성이 있는 얘기들은 아니죠. " " 그런……! 그럼! 그럼 저는? 저는 어떻게 된 거죠? 저는 분명! 분명히! " 당황하는 나에게 그는 차분히 있으라는 제스처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알고 있습니다. 가인 군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 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가인 군은 데자뷰(Dejavu) 현상을 겪은 것 같 습니다. " 데자뷰? 난 그 생소한 단어에 두 눈을 깜빡였다. " 기시(旣視)감이라고도 하죠. 사람이 끝없이 윤회되어 오는 과정에서 현생 에서는 비록 한번도 접한적이 없는 지역이나 사람들, 모든 행동의 표상들 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한 것 같은 현상. " " 아……. "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래. 그의 말대로 나는 한번도 가 본 적이 없 던 거리를 알고 있었다. 거기다 익숙함 마저 느낄 수 있었다. " 데자뷰가 생기는 이유는, 육체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정신 즉 영혼은 불멸 로 남아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죽음과 더불어 망각 하게 되어 있는 기억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는 경 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 " ……. " 데자뷰라……. 하지만……. 나는 그의 얘기를 듣던 중 묘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윤회니 전생이니 …….아무래도 심리학자인 그가 얘기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개념의 얘기였 던 것이다. 그런 나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그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 하긴. 이런 얘기, 심리학과 동 떨어지게 느껴지겠군요.하지만 전 윤회 사 상과 심리학을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무의식 속에는 무수히 많 은 정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정보는 때로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그런 축적된 깊이를 보 이기도 하죠. 전 그것을 이 윤회 사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 아, 예에……. " 윤회 사상을 믿는 심리학자라니……. 뭔가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의 얘기가 허황되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 딘가 진실성 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 그럼…… 그 데자뷰 현상이라는 걸…… 알아볼 방법이 있을까요? 제가 왜 이런 기시감을 받고 있는지……. " 내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듯이 답했다. " 물론. 그렇기에 이 얘기를 꺼낸 겁니다. "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시영 씨는 일단 나를 쇼파에 눕게 하며 거실의 거튼이란 커튼은 모두 닫아 방안을 어둡게 했다.난 불안한 눈으 로 그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 이런 낯선 장소에서,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을 상대로 난 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스스로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기에. 다른 선택 의 여지도 없었기에 반쯤 자포자기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시영 씨가 전축이라도 틀었는지,은은한 음악 소리가 거실을 채우기 시 작했다. " 저, 이건……? " 시영 씨는 불안해하는 날 안심시키주려는듯 내 이마에 붙은 앞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그 행위에서 시민 씨의 손길을 느낀 나는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작은 한 숨을 내쉬어야 했다. " 마음을 편히 먹고 몸에서 힘을 빼도록 하세요.이제부터 제가 당신에게 하 는 건 퇴행 최면이라고 하는 겁니다. 의식을 과거로 퇴행시켜 심층 심리 의 무의식을 살피는 치료법이죠. 이 치료법으로 저는 당신이 잊고 있던 4 년간의 공백을 끄집어낼 겁니다 "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과연 그런 치료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작 은 가능성에라도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싶었다. 식물인간으로 보낸 4년간의 시간. 그때, 나는 정말 꿈을 꾸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실제로 피스메이커의 오라 능력자로 살아갔던 건지……. 그것만 알 수 있다면! " 자, 제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여 주세요. 저처럼 빨리 호흡을 해봅시다. " 그의 지시에 따라 나는 호흡을 빨리하며 두 눈을 감았다. 귓가로는 그가 켜 놓은 전축의 음악이 들려오고 있었다. " 네, 좋아요. 그렇게……. " 멀어져가는 그의 목소리. 그것을 듣고 있자니……. " 당신은 이제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 의식이……점점……사라져……. '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훨훨 나는 나비였다. '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 ' 내 스스로 기분이 매우 좋아 내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 ' 갑작스레 잠을 깨니 틀림 없이 예전의 장주였다. ' ……그래. 이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 장주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 내가 처한 상황을 얘기하고 있었다. ' 나비인 내가 장주가 된 꿈을 꾸었는지 알지 못했다. ' ……그리고 나는 훨씬 전의 누군가에게서 이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짝 귓청을 때리는 박수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어 느샌가 방 안은 밝아져 있었고,내 앞에는 시영 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 아 있었다. " 수고했어요, 가인 군. 자, 이 물이라도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으세요. " 그가 건네주는 물 컵을 받아들었다. 아직도 꿈 속에 있는 것 처럼 정신이 멍했다. 나는 애써 한 모금 두 모금 물을 들이켰다. " 하아……. " 그러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다. 난 촛점이 맞지 않는 눈을 비비며 시영 씨에게 물었다. " 전 도대체……. 아니. 그, 결과는 어떻게 나왔죠? " " 흐음. " 그는 나의 맞은 편 쇼파에 몸을 앉히며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 다 신중히 말을 꺼냈다. "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일단 성과는 있었어요. " 시간이……많이 걸렸다고? 난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보았다. 시침은 놀랍게 도 세 칸이나 이동해 있었다. ' 어라? 채…… 1분도 잠들어 있지 않았던 거 같은데. ' 나는 믿어지지가 않아 시계와 창 밖을 몇 번이고 번갈아 보았다. 창 밖에는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 성과……라고요? " " 그래요. 하지만……. " 그는 갑자기 말을 끊어버렸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말을 잇는다. " 하지만 지금은 가인 군에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 " ……예? " 얘기하지……않는다고? 어째서? 아니, 기껏 세 시간 가량 공들여서 사람을 치료해놓고는 도대체 왜……? " 가인 군,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 그는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 " ……! " 난 두 눈을 부릅 떴다. 지금……뭐라고? " 훨훨 나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기분이 매우 좋아 내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 어떻게…… 그 이야기를? 어째서 이 남자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내가 꿈에서 들었던 그 이야기를! 어째서 이 남자도……! " 갑작스레 잠을 깨니 틀림 없이 예전의 장주였다. 장주인 내가 꿈에 나비 가 된 꿈을 꾸었는지 나비인 내가 장주가 된 꿈을 꾸었는지 알지 못했다. " " ……. "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난 단지 불신감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의 얼 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 이것은 장자의 제물론편(齊物論篇)에 나오는 고사입니다.호접지몽(胡蝶之 夢). 약해서 호접몽이라고도 하죠. 나비가 된 꿈이라는 뜻으로, 물아일체 (物我一體)의 경지, 또는 인생의 무상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 " ……. " " 하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하죠. " 시영 씨는 비어버린 찻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의미 심장하게 말했다. " 진실이란 없다. " 진실이란……없다? " 가인 군은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이 진실이라고 믿습니까? " " 전, 저는……잘……. " ……모르겠어요. 이 현실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아무 것도. " 그렇게 물으시는 시영 씨는……? " " 저는 믿지 않습니다. " 그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으로 흘러들어오는 노을 빛이 방 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방안을 서성이다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기다란 검은 그림자가 거실을 가로 지르며 나타났다. 그는 노을 빛을 정면으 로 받으면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 애초에 거짓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 또한 없다고 생각합니 다. 왜냐하면…… 알 수 없으니까요. " " 알 수…… 없다고요? " " 예. 그 누가 알고 있겠습니까? 사람이란 지극히 객관적인 정보로 살아가 는 생물인 것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만져 보는…… 그런 행위로만 간신히 정보를 수집할 수 있죠. 하지만 그런 오감의 안테나를 이용한 정보도 단순히 뇌가 받아들이는 전기 신호에 불과합니다.만약 뇌 가 변덕이라도 일으켜서 전기 신호에 담긴 정보를 다르게 해석이라도 하 는 날에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영락없이 바뀐 신호를 맹종하며 바뀐 정보를 받아들일 겁니다. 뇌의 노예란 거죠.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거짓일 수도 있 고, 거짓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객관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 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유물론적 주장도 이런 경우에는 전혀 도 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물질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으 니까요. 그러니 정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죠. 자신이 현 실을 살아가는 건지 꿈 속을 살아가는 건지. 그 누가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내 삶은 거짓이 아니라고? " " ……. " 난 그가 하는 얘기를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마냥 받아들 일 수만도 없었다. 그는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걸까? 그 모든 걸 부정하면서 까지 무엇을 추구하겠다는 거지? 하지만 한 가지 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현실이 진짜가 아니라 고 말하고 있었다! " 이렇게 말하면 부추기는 것 밖에 되지 않겠지만……. 포기하지 마십시오.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일 뿐.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직관해서는 안됩니 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그에 관련된 모든 기억은 강 력한 의식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을 겁니다. " 시영 씨가 저렇게 까지 말하는 것은…… 앞의 퇴행 치료법에서 뭔가를 알아 냈기 때문인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나에게 얘기해주지 않는 거지? 어째서? " 만약 가인 군이 이대로 안주하고 싶다면 잊어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죠. 하지만 가인 군은 믿고 있죠? 2032년의 그 날들이 실재했었다는 것을? " " ……. " 그의 질문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끝까지 믿으십시오. 눈 앞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 다. 주위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세요. 그러면……. " 그는 나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당신은 진실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 그 후, 우리는 서로에게 작별을 고했다. ' 재미있는 것을 보았어. 설마 저 소년의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 ' ……마스터. 기쁘신 것 같습니다? ' ' 후후후후. 기쁘고 말고. 무리해서 접근한 보람이 있었어. 이건 기대 이상 의 수확이야. ' ' 뜻한 바를 이루셨다니…… 다행이십니다. 하지만 이 이상은 버티기 힘들 군요. 서둘러 나가지 않으면 그녀가……. ' ' 아아. 수고했다, 유빈. 그럼 이만 물러나도록 할까. ' ' 예! ' ' 가인 군은 믿고 있죠? 2032년의 그 날들이 실재했다는 것을? ' 나는 믿고 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 그렇다면 끝까지 믿으십시오. 눈 앞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 다. ' 현혹되지 않겠다. ' 주위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세요. ' 모든 것을 의심하겠다. ' 그러면 당신은 진실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 그래! 반드시 진실을 찾아내고야 말겠어! " 오빠? " 22구역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다 됐을 무렵이었다. 나는 시영 씨 와 헤어진 후 정처 없이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노선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여기로 돌아오는 게 싫었다. " 오빠! " 신이는 내가 문을 열기가 무섭게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나를 와락 끌 어 안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바보! 이 시간까지 어디서 뭘 했던 거야! 아무런 얘기도 없이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 난 그 외침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시영 씨가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 진실이란 없다. '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는 나에게 포기하 지 말라고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 하지만……. ' 그 남자의 말 또한 미심쩍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더 우스운 일이었다. 꿈이 실재한다느니, 윤회 사상이 어쨌다 느니, 최면술로 과거를 알아보겠다느니……. 하나 같이 비현실적인 말투성이 였다. 그래. 언제부터 처음 만난 사람을 그렇게 맹신하게 된 거냐, 유가인? 시민 씨와 그가 얼굴이 닮았다는 건 이유가 안돼. 오히려 더 수상하잖아? 이상하 다는 생각은 안 해? '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떠나서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 존재감이란……. 한시 영, 그는 내가 이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 중 누구보다도 비현실적이었지만 누 구 보다도 강한 리얼리티를 풍기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의 주위에 있던 공기 마저도 생생한 현장감을 띄고 있었다. 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의 진실성이 날 압도했던 것이다. "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불은 모두 꺼져 있고……오빠는 보 이질 않고……. 난, 난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정말……! " 신이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격하게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눈물로 가 슴 팍이 흠뻑 젖어들었다. 불안, 걱정, 초조, 안도. 한 눈에 보아도 그 모든 감정들이 그녀에게서 느 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대하는 내 마음은 한 없이 차갑기만 했다. " 미안. 걱정 끼쳐서. "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며 흐느끼는 그녀를 내 품에서 밀어냈다. 그러자 신이는 아연해진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피하듯이 고개를 돌렸다. " 피곤해. ……들어가자. " 그녀를 지나쳐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날 바라보는 신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애달픈 표정으로? 갑자기 돌변 한 나의 태도에 당황스러워하고 있을까? 아니지.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을지도.내가 다시 자신을 의심하기 시 작했다고 눈치챘을지 몰라. " ……. " 그렇게 생각하니 한 줄기 오한이 날 찾아들었다. 그 후로도 신이와 나의 생활은 변함 없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학교 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였고,나는 밤 늦게 돌아오는 그녀를 집에서 기다렸다. " ……. " 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의 대화는 점점 줄어만 갔다. 한 마디, 두 마디……. 그렇게 점점 줄어들다가 최근에는 아침 인사와 저녁 인사 만 하는 처지가 됐 다. 신이야 어떻게든 나와의 대화를 늘이려고 노력했지만, 그 대화를 받아주 는 이가 묵묵부답이니 제 자리 걸음만 하는 수 밖에. 신이는 갑작스레 차가워진 나의 태도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듯 했다.한 밤에 우연히 잠에서 깨어났던 적이 있는데,내 곁에서 소리 죽여 우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죄책감. 불신감. 그 두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날 괴롭혔다. 그러나 끝내 나는 신이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없었다.한번 켜진 의심의 불씨는 주체할 수 없이 불어나 내 눈 을 멀게 했던 것이다. 믿어서는 안 돼. 믿어서는 안 돼. 난 강박관념에 사로 잡힌 채 신이가 집을 비우기만 하면 밖으로 나갔다.그 리고 내가 피스 대원이었을 당시,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였던 장소를 하나도 빠짐 없이 찾아가 보았다. 그곳은 모두 그 자리에 실재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실망감을 맛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 찾아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의 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달이 넘도록 발이 빠져라 서울 전역을 돌 아다녔다. " 오빠……. 늦게 왔네? " " ……. " 그러다 보니 날이 갈수록 내가 귀가하는 시간은 늦어졌다. 어떤 때는 신이 보다도 늦게 집으로 들어가 그녀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그럴수록 그녀가 눈 물을 흘리는 날은 많아졌다. 그리고 4월의 어느 날. 자정이 되어 집에 돌아온 나에게 신이는 그 동안 쌓아두었던 감정을 폭발시 켰다. "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오빠? 그 동안, 그 동안 잘 해왔었잖아? 아무런 문제도 없이! 그 날 이후부터 왜 계속 이러는 거야? " 그 날이란…… 시영 씨를 만났을 때겠지? 나는 속으로 냉소하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치는 그녀를 무시했다. 그 렇게 내가 지나치려 하자 신이는 날 붙들며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나,난…… 난 4년동안 오빠의 병 수발 들면서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하지만 지금과 같은 오빠의 태도는 너무 힘들어! 제발 내 말에 대꾸해줘! 날 무시하지 말아! " 무관심은 싫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울부짖는 그녀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 내 얼굴을 똑바로 봐! 제발 날 바라봐줘! 제발! 제발! " 그녀는 내 가슴을 두 손으로 두들기며 소리쳤다. " 나빠! 너무해! 오빤…… 잔인해! 이럴 수는 없어! 나에게 이래서는 안 돼! 안된단 말이야! " " ……. " " 오빠! " 끝까지 입을 걸어 잠근 나의 태도에 신이는 힘이 빠졌는지 천천히 내 가슴 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는 내 발 앞에 무릎을 꿇으며 어깨를 떨었다. " 흑, 흐흑. " 울고 있는 걸까? 아니. 모를 일이지. 고개를 숙여 보이지 않는 그 얼굴은…… 웃고 있을지도. " ……가버려. "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흐느낌으로 알아듣기가 힘 들었지만 나는 정확히 알아들었다. 나에게 고개를 드는 신이의 얼굴은 눈물 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날 바라보는 그 눈빛은 분노의 기색을 띄고 있었다. " 가버려! 오빠 따위! 이 집에서 나가란 말이야! " " ……. " " 나가! 사라져!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이 이상 날 괴롭히지 마! 날…… " 악을 쓰며 거기까지 소리치던 신이는 순간, 복받치는 서러움을 이겨내지 못 하고 소리내 엉엉 울었다. 그 목 놓아 우는 신이의 울음 소리가 쇠망치 처럼 내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나는 망연자실하게 그녀를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이 이상 괴로워하는 널 보는 것도, 널 의심해야 하는 내 자신도 싫었다. 모 든 건 내가 나가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것으로 끝. 사실, 시영 씨의 말을 들 었을 때 떠났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떠나지 못했던 건……. " 이제……그만두자. " 미련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 와서도 아직까지 신이와의 생활을 유지하 고 싶은……그런 미련이 나에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것으로 끝이다.난 신이에게서 몸을 돌리며 천천히 집을 나 섰다. " 잘……있어. " 더 이상 상처를 주는 일도, 더 이상 아프게 하는 일도 없을 거야. 모든 건 나 때문이니까. 나 때문에 넌 괴롭기만 했으니까. 그러니 해방시켜줄게.이제 부터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아. 나 같은 건 잊어 버리고. 나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각하고. 와락 하지만 내 발을 억세게 끌어안는 그녀의 손길에 발걸음을 멈췄다.신이는 전 신으로 날 막으며 오열했다. " 미안해, 오빠……! 미안해……! 그런 말 해서 미안해요! 미안! 미안……!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제발 날 떠나지마! 제발 날 혼자두지마! " " ……. " " 제발……! 흑, 흐흐흐흑. " 그 처연한 울음소리라니. 이런 게 거짓이란 말인가?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떨림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이런 게 정말……거짓이라고? " 날……버리지마……. " 결국, 난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또 다시 의미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여전히 신이와 나는 같은 집 에서 같은 밥을 먹고 살았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더 이상의 웃 음도 없었다. 그 날 이후 신이는 내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 하려고 최대한 주 의를 기울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날 부담스럽게 했다. 아무리 의심해도 아무런 성과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날 지치게 만들었 고, 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성취감이 없는 행위란 회의감을 안겨줄 뿐 이니까. 난 점점 초조해하며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회의감을 해소하지 못 해 안달이 나 있었다. 몇 번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이대로 편안해지고 싶었다. 한시영, 그런 수상쩍은 남자의 말 따위. 이렇게 맹목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잖아? 그 후, 몇번이고 그를 만나기 위해 26구역을 찾아가봤지만 가는 족족 헛수 고였다. 이사라도 갔는지 집에서는 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준 명함도 사라져 있었다. 마치 그를 만났던 일이 꿈이었던 것 처럼. 그에 대한 모든 건 사라져 있었다. 이래서야 그의 말을 믿을 이유도, 타당성도 없지 않은가? 난 어째서 그의 말을 이토록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거지? 어째서 내 동생을 믿지 못하고 이토록……. '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일 뿐.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직관해서는 안됩니 다. ' ……그가 한 말만을 뚜렷하게 떠올리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일은 신이의 중간 고사 기간에 일어났다. 덜컥 드물 게도 이 날의 신이는 5시 쯤에 귀가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대신 그녀의 뒤에는 한 사람이 동행하고 있었다. " 아, 오빠? 집에 있었네? " 내가 이 시각에 집에 있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신이는 놀라워했다.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흥분한 기색을 띄고 있었는데, 그 양 손에는 저녁 찬 거리로 보이는 재료들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난 낯선 방문객을 슬쩍 바라보 며 신이에게 물었다. " 저 아이는? " 방문객은 신이 또래로 보이는 한 여고생이었다. 한성 고등학교의 교복인 걸 로 보아 반 친구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신이는 내가 반응을 보이자 크게 기 뻐하며 자신의 친구를 나에게 소개했다. " 아! 같은 반 친구! 나하고 굉장히 친한 사이야! 내일부터 중간 고사 시즌 이라서,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려고 집으로 데려왔어! " " 흐응. " 녀석이 누군가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녀석의 말대로 굉 장히 친한 사이인가 보다. 신이는 자신의 친구에게 나를 소개했다. " 인사해. 우리 오빠야. " " 아, 안녕하세요……. 신이 친구, 이유리라고 합니다. " 신이의 친구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차분한 몸가짐으로 인사했다. 난 잠시 머 뭇거려야만 했다. 신이 외의 사람을 대한 적이 없다보니, 그녀에게도 차가운 태도를 고수해야 하나 망설여진 것이다. 신이를 돌아보니, 만면에 웃음을 띄 고 있는 게 마치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듯 친구를 데려온 것 같았다. 신이 나서 장까지 봐온 것으로 보아, 이번 일을 계기로 나와의 냉전 분위기를 쇄신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난 그 노력이 가상하여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순간 내 마음을 얼리는 한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잠깐……. '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신이의 친구에게 물었다. " 저기…… 지, 지금 이름이 뭐라고……? " 미묘하게 떨리는 나의 억양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는지, 아이는 나에게서 몸 을 물렸다. 하지만 애써 웃는 얼굴로 내 질문에 대답한다. " 이유리……라고 해요. " 유리! 이유리라고? 나는 새삼 그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그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 펴보았다. 그리고 탄성! 이럴수가……. ' ……닮았어! ' 유리와 닮았다! 유리가 열 일곱 살이 되면 이런 모습이 될까! 신이의 친구 에게서 유리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어깨를 붙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유,유리니? 정말 유리인 거니? 정말……. " " 아……. " 내가 붙잡은 어깨가 아팠는지 유리는 신음을 흘렸다.그 얼굴이 점점 고통으 로 일그러져 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재촉하듯 그 아 이에게 소리쳤다. " 정말인 거야? 응? 유리가 맞는 거냐고! 틀림 없는 거지? " " 아,아파…… 그만……! " " 왜 대답을 못해! 유리가 맞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 " 이 아이가 정말 유리일까? 내가 알고 있던 그 작고 여린 아이. 남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능력으로 인해 상처 받고, 힘들어하던…… 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결코 사람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던……그 유리인 걸까? 그 유리가 맞 는 거야? 짝 그때 내 뺨을 날카롭게 올려치는 한 손길이 있었다. 나는 유리를 잡던 손을 놓으며 주춤 뒷걸음질 쳤다.내 앞에는 어느새 신이가 유리를 감싸며 서 있었 다. 신이는 내 뺨을 친 손을 거두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왜, 왜 또 그러는 거야, 오빠? 왜 내 친구에게……. " " ……. " " 모처럼 친구도 데려왔는데……자꾸만, 자꾸만 왜 그러는 거야? 응? " 그 말을 끝으로 신이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로는 유리 가 겁먹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나의 모습은 내 자 신이 보기에도 흉흉한, 정신 나간 사람의 모습이었다. 나는 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전신의 힘이 발 밑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 다. 극도의 허탈감. 극도의 실망감. 극도의 자기 혐오. ' 눈 앞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 그만둬. 이제 그만 날 괴롭혀. 시영의 말은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 의심하고 또 의심하세요. ' 의심해서는? 의심한 결과, 뭐가 달라졌지?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잖아? 아 무 것도! 며칠이 지나도! 몇 달이 흘러도! 항상 제 자리 걸음만 할 뿐이야! 상처 입은 신이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젠 싫어! 그녀를 의심하는 내 자신도 싫어! 모든 것을 불신하며 살아가는 것도 이젠 지쳤어! 이제는……이 방황을 끝내고 싶어! " 오빠?! " 내가 갑자기 집을 뛰쳐나가자 신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난 제대 로 신발도 신지 않으며 거리를 내달렸다. 순식간에 날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 가 귓가에서 사라져간다. 대신 그 자리로 시영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 당신은 진실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 그래! 찾아내주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어! 내 두 눈으로 진실을 보고 말 겠어! 그리고 이 끝 없는 방황에 종지부를 찍을 거야! ' 지하철로! ' 언더 시티 유레카로……간다! 요 몇 달 간 모든 곳을 둘러 보았다고 자신한다.그리고 유일하게 확인하지 않은 곳. 그 곳은 바로 서울시의 지하에 위치하는 언더 시티,유레카였다. 한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본거지. 피스메이커의 시작이자 끝인 지점. 피스 대원이었을 때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광속 전차를 호출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직접 지하철 노선을 따라 걸으며 통로를 확인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엄두가 나지않아 시종일관 계획을 연기해왔지만…… 진실을 확인하 려면 이제 그 수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아. 가다가 지쳐 쓰러져도 좋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더 시티를 찾아내겠어! 《 잠시 후면 열차가 도착할 예정이오니……. 》 22구역의 지하철에 도착해서 정신 없이 승강장으로 내려왔다. 막 러시 아워 에 접어든 지하철은 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난 그들을 밀쳐내며 정신 없이 지하철 선로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눈살을 찌 푸리다가 내가 맨발인 것을 알자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모 습이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 뭐야? 저 남자……. " " 왜 저래? 맨발이잖아? " 무미건조하면서도 방관적인 태도들. 자신과는 동 떨어진 물건을 감상이라도 하는 것 처럼 한 마디 한 마디 내뱉고 있었다. 수 많은 수근거림이 끊이지를 않으며 내 신경을 자극시켰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은채 주위를 둘러 보았다.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믿 을 수가 없었다.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저기서 날 손가락질 하며 가리 키는 사람들도, 의자에 앉아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지하철을 타기 위해 줄을 서있는 사람들도, 그 모든 것이 진실되지 않았다. ' 장주인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나비인 내가 장주가 된 꿈을 꾸었 는지 알지 못했다. ' 그렇다. 알 수 있을리가 없다.사람은 눈으로 본 것만을 믿고, 귀로 들은 것 만을 믿으며, 직접 냄새 맡고, 맛을 본 것만을 믿는다. 시영의 말대로 사람 이란 뇌의 노예일 뿐이다.그런 한낱 노예에 불과한 자신이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아니. 노예란 표현도 잘못된 것이다. 뇌란 결국 나 자신이니까. 자기가 스 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진실이라고 나타난 것 또한 믿을 수 있을리가 없다. ' 진실이란 없다. ' 결국 그 말로 모든 것이 귀결된다. 그 말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지금 이렇 듯 언더 시티를 찾아가는 나의 행동도 헛된 몸부림이지 않을까? 우스꽝스러 운 광대 노릇이 아닐까? 그렇다면 난 왜 포기하지 못하는 거지? 포기만 하면 모든 것이 편해질텐데. 시영의 말대로 그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텐데. 어째서……. " 아……. " 하지만 눈 앞에 나타난 상대식 승강장의 모습에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 었다. 멍하니 비어있는 선로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진실 같은 건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었던 것이다. 단지 보고 싶었을 뿐이다. 만지고 싶었을 뿐이다. 냄새 맡고 싶었을 뿐이 다. 듣고 싶었을 뿐이다. 맛보고 싶었을 뿐이다. 피스메이커는 존재한다는 걸. 믿지 않는다고 그렇게나 되뇌였던 주제에, 뇌 의 노예라고 스스로를 조소했던 주제에 그것에 의지해서 확인하려 했던 것이 다. 난 그런 내 자신이 우스웠다.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 하, 하하하, 하하하하. " 바보같다. 바보같다. 이렇게나 바보같을 수 있다니. 이렇게나 어리석을 수 가 있다니. 믿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진실이란 없다고 했으면서.지금까지 줄 곧 내가 해온 행동들이란 대체……. " 꺅! " 내 뒤에 있던 한 여성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내가 선로로 뛰어내렸기 때문 이다. 차가운 레일의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졌다. 뛰어내릴 때의 충격으로 무 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비 틀 거리는 걸음새가 꼭 주정뱅이의 걸음 같았다. " 역무원 불러야 되는 거 아냐? " " 이봐요! " " 뭐야? 뭐야? " " 이봐! 학생! 얼른 올라와! 그러다 죽어! " 다들 자신감이 결여된, 공허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외친다. 흥.그 렇게 걱정되면 직접 내려와서 끌고 올라가지 그래? 그 위에서만 그렇게 야단 떨지말고. 난 그들의 외침을 완전히 무시하며 터널 쪽으로 향했다. 이대로 언더 시티 까지 걸어갈 셈이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내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진실이란 없다고 깨달았으면서. 뭘 해 도 부질 없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멈추지를 못할까? 왜 포기하지를 못할까? ' 포기하지 마십시오. ' 한시영. 그는 왜 그런 이율배반적인 말을 내게 한 거지? 진실은 없다고 말 했으면서 진실을 찾는 건 포기하지 말라니? 어째서……. 삐리리리리리 그때 내 눈앞에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던 터널에서 희미한 경보음이 울려퍼 지기 시작했다. 정지 신호를 현시하고 있는 신호기에 열차가 접근하자 경보 가 울린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게 현실 같지 않았다. 전혀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느긋함이라니! 빠아아아앙 전차의 기적 소리. 그 사이로 안내 방송이 부분 부분 들려왔다. 그리고 터 널 쪽에서부터 강한 공기의 흐름이 불어 온다. 그 서늘함을 피부로 맞대고 서야 천천히 몸 안의 감각이 돌아왔다.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바로 공포…… 라는 감정이. 콰아아아앙 전차가 굉음을 내며 터널 안 쪽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승강장 위 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아우성을 쳤다.나는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 하고 멍하니 빛이 새어나오는 터널을 바라보았다. 공포로 인해 발이 선로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단지 무력하게, 희미하게 어깨를 떨며 전차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 다. 치이이이익 기관사가 선로에 있던 날 본 것일까? 자동 열차 정지 장치를 작동시켰는지 전차는 귓청이 떨어져라 마찰 소리를 내며 바퀴에서 불꽃을 튀겼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전차는 무서운 속도로 날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 던 것이다. " ……! " 강렬히 덮쳐오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주위의 모든 풍경이 시야 속으로 사 라져갔다. 다가오는 전차도. 승강장의 모습도. 심지어는 내 자신까지도……. 끼이이이이익 연기가 시야를 가려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차륜의 브레이크 슈를 압박하 여 브레이크 효과를 주는 공기 브레이크 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것 처럼 아팠 다. 하지만 그런 귀의 고통도 등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 니었다. 어딘가에 강하게 내리꽂혔는지 어깨죽지부터 목덜미에 이르기 까지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프다. 그 외에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선로 위에 몸을 늘어뜨린 채 멍하니 승강장의 천장만 바라 보았다. 정말 고막이라도 다친 건지 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승강장은 너무나 고요했다. " ……역무……. " " 사람……어서……. " " 살아……아니……건가? " 한참을 누워있자 차츰 차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선로 주위에는 연기가 가득 차 있었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 히 두 눈을 깜빡였다. ' 살아있는……건가? ' 내가…… 살아 있어? 고통이 어느 정도 가시자, 나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내 자신에 놀라워 해야 했다. 분명 코 앞까지 전차가 들이닥쳤는데…….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 어째서…… ' ……살아있는 거지? 살아있다는 기쁨 같은 건 느낄 수도 없었다.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그 상황 속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내 자신에게. 난 아직도 얼얼한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레일 위에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져 작게 신음을 흘렸다. " 윽……. " 뭐지? 내 몸 위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사람? 사람인가? 누군가가 내 위에 쓰러져 있었다. 난 인상을 찡그리며 희미한 시야를 바로 하려 애썼다.그리고 그런 내 눈에 들어온 이는……. " 너……! " 난 기가 막혀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내 위에 쓰러져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신이였던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이 녀석이 여기에? ' 날…… 쫓아온 건가? ' 그녀가 날…… 구해준 걸까? 전차에 부딪히려던 날? 신이는 정신을 잃었는 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난 불안한 마음에 그녀의 상태를 살펴 보았다. 그다 지 다친 구석은 보이질 않았지만……. " ……! " 발바닥이…… 피투성이잖아? 난 피에 젖은 신이의 양발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급하게 날 쫓아오느라 제대로 신발도 신지 못했던 모양이다.거기다 선로 에 뛰어내릴 때 발이라도 접질렀는지 종아리가 심하게 부어 있었다. 난 차마 그 상처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며 신이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닫혀진 그 눈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오빠! '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세상이 사라지고, 귓청이 떨어져라 울리던 전차의 굉 음 소리. 그 속에서 나를 부르던 한 목소리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리 고 전차에 부딪히려던 날 그녀가 끌어안고 반대편 선로로 몸을 날렸다는 것 도 기억해냈다. 상대식 승강장이었기에 가능했던 행동이다. " 시,신아……. " 난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보았다.그 뺨을 두들기며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감겨있던 눈이 열리며 한 쌍의 눈동자가 날 힘 없이 올려다 보았다. " ……오빠? " 그 목소리를 듣자 울컥 목이 메여 왔다. 난 두 눈이 뜨거워지려는 걸 애써 참아내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 이, 이 바보야!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하마터면, 하마터면 너까지! "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눈 앞이 아찔해졌다. 그녀가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자, 내가 지하철을 앞에 두고 느꼈던 공포와는 다른 의미에 서의 공포가 날 찾아왔다. ' 그 때의……. ' 우리 가족이 탄 차를 덤프 트럭이 덮쳤을 때의 공포. 가족들이 불타오르던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그 날의 공포가 날 엄습해왔다. 하마터면! 하마터면 또 다시! 또 다시 그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뻔했다! 그러자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려왔다. 나는 품 안의 신이를 부숴져라 끌어 안으며 그 몸을 정신 없이 더듬었다.신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 고 확인해야 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그녀가 내 품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때와는 달리 내 안에서,이렇 듯, 두 눈을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와는 달라! 그 때와는! " 다행이다……. 다행이야……. " 나는 그 말만을 반복했다. 두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내가 흐느끼자 신이도 따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옷자락을 부여잡 으며 소리쳤다. " 누굴더러……바보라는 거야! 바보는 내가 아니라 오빠잖아! 이게 무슨 짓 이야? 자살이라도 할 셈이었던 거야?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나더러 어떻 게 살아가라고! " 신이는 목이 메였는지 어깨를 격하게 떨며 울음을 삼켰다.나는 그녀의 얼굴 을 매만지며 몇 번이고 용서를 빌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 누가 자살 같은 거 하게 내버려둔대? 오빠가 죽으면 나도 죽어! 두 번 다시 혼자가 되지 않을 거야! 이제 더 이상 혼자는 싫단 말이야! " 잊고 있었다. " 바보! 바보! 바보! 내가 오빠 때문에 못 살아! 누구 맘 대로 죽으려고 했 던 거야! 응? 누굴 죽이려고! 그렇게 내가 죽는 꼴이 보고 싶어? 내가 오 빨 따라 죽는 게 그렇게 보고 싶었냔 말이야! " 잊어버리고 있었다. 남겨진 자의 슬픔을. 혼자가 되는 괴로움을.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면서,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내 몸에 손대지맛! " 난 그녀의 주먹에 얻어맞으면서도 신이를 껴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껏 끌어 안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 그녀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 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앞에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나에 게 소리치며 화내고 있었다. 이 고마움을 어째서 깨닫지 못했던 거지? 누구보다도 신이가 살아있기를 빌 었으면서.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으면서. 어째서 지금까지 그녀를……. "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바보였어……. " 나는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로 신이에게 말했다. " 다시는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 부모님과 신이가 내 곁을 떠났을 때 부터 얼마나 간절히 빌었던가? 그들을 살려 달라고. 그것이 힘들다면 부디 한번 만이라도 다시 그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그런데……기껏 이렇게 신이와 만나게 되었으면서도 나란 녀석은 의심하기 만 했다. 그녀를 믿지 못했다. 절대로 이뤄질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더더욱 그녀를 거부했었다. 이런 내 모습에 신이는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 얼마나 가슴 아파 했을까? " 수십번, 수백번…… 너와 함께 하는 순간을 꿈꿔왔었어……. " 신이와 나는 서로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모습을 다시는 잊 지 않겠다는듯, 소중히, 하나 하나, 천천히 상대를 응시했다. " 그리고 그 꿈이 이뤄졌는데……. 네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어째서 난 ……. " 난 기껏 멈췄던 눈물을 다시 울컥 쏟아내며 미소지었다. " 어째서 난…… 널……. " " 괜찮아. 괜찮아, 오빠. " 신이는 날 부둥켜 안으며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 얼굴 은 나와 닮은 꼴로 웃고 있었다. " 그걸로 충분해. 그것만으로도…….오빠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누 구보다 행복해. 그러니까 제발 날 떠나지마……. 제발 내 곁에 있어줘.제 발……. 제발……. " 신이는 쉼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안도의 눈물이었다. 감사의 눈물이었다.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듯 기뻐해주는 이가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했다. ' 나는 이런 신이를……. ' 하마터면 두 번이나 죽게 할 뻔 했어……. 나는 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 했다. 사람은 몇번이고 망각한다.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을 매번 잊어버린다. 곁에 있을 때에는 알지 못하다가,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 소중함을. 그리고 후회하게 된다. 왜 좀 더 잘 해주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사랑해주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왜…….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있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있을 때 잘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진리이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진리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행이었다. 놓치지 않았어. 잃어버릴 뻔 했지만 간신 히 되찾을 수 있었어. ' 그러니 지켜낼 거야. ' 이 행복을. 이 소중함을. '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 신이를, 소중히 여기겠어……. 철컹……철컹……철컹……철컹……. 우리가 탄 열차는 고속철도와는 달리 곡선과 구배가 많은 재래선이었는지라 연신 진동과 소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나는 뒷전망을 강화하여 차량의 뒷부분에 조망성을 극대화시킨 파노라마 윈 도우 근처의 좌석에 앉아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8월로 접어든 지금. 산과 들은 짙은 녹림으로 물들어 있었고 하늘은 푸르기 그지 없었다. 그렇 게 내가 한참동안 밖을 바라보고만 있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신이는 내 옷자 락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 오빠, 덥지 않아? 햇볕도 뜨거운데 블라인드도 없이 창가에 앉아 있으면? " " 응? 아아. 뭐, 에어컨도 나오는데. " 원래 기차 여행은 창가에서 들어오는 바람도 맞고 해야 풍취가 있었지만,그 러기엔 날씨가 너무도 더웠다. 만약 눈치도 없이 창문을 열어젖혔다간 에어 컨 바람을 쐬는 다른 승객들에게 불편을 끼칠 것이다. 신이는 고개를 갸웃거 리며 내가 바라보던 파노라마 윈도우에 눈을 돌렸다. "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 " 그냥. 나무들이 울창해진게 어느덧 여름이구나……해서. " " 뭐야, 그건∼ 누가 영감 아니랄까봐 꼭 그렇게 파파 할아범 흉내를 내요∼ " " 뭐, 좋잖아? 어차피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정색하기는. " " 으엑! 누가 같이 늙어! 난 사양할테니 오라버니나 많이 늙으세요! " 신이는 기겁을 하며 손으로 엑스 자를 그려보였고,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그녀와 이런 농담을 주고 받는 것에도 익숙해진 나였다. 하긴.녀석과 지낸 시간도 어느덧 8개월이다. 익숙해지는 게 당연하지. 철컹……철컹……철컹……철컹……. 그때의 일들이 아늑한 옛날에 있었던 일 처럼 느껴진다. 그 만큼 시간은 모 든 것을 희석시키는가 보다. 기뻤던 일도, 슬펐던 일도 이제는 추억이라는 이름 하에 기억되고 있었다. 그 당시 느꼈던 감정들도 희미해져 이제는 어렴 풋한 느낌들로만 남아있다. " 그나저나 오빠가 웬 일이야? 여행을 다 하자고 하고. " 신이는 내 팔짱을 끼며 그렇게 물어왔다. 나는 이런 녀석의 행동에도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 응. 생각해보니까……우리, 제대로 된 가족 여행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 는 거 같아서. " " 아. " 신이는 잠시 주춤하다가 이내 살며시 미소지었다. 우리는 현재 동해로 여행 을 떠나는 중이었다. 신이가 여름방학인데 다가 마침 그녀가 일하는 테이스 트에서도 2박 3일로 직원들에게 휴가를 내준 것이 발단이 되었다.휴가 때 녀 석이 집에만 있는 것도 딱해보여서 내가 이 가족 여행을 제안했었다. ' 가족 여행이라……. ' 상당히 생소하면서도 어색한 단어였다. 가족 여행이라고는 딱 한번 해본 적 이 있었는데, 그 한번의 가족 여행도 불의의 사고로 도중 하차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최악의 사고로 인해……. 하지만 그 사고를 떠올린다고 해서 더 이상 마음이 아프다거나 새삼 슬퍼지 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때는 인원이 부모님과 나, 신이까지 합쳐서 총 네 명이었는데 지금은 신이와 나 둘 뿐이라는 게 좀 묘했을 뿐이다. 신이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는지 잠시 말을 아꼈지만, 이내 내 어깨에 머리 를 기대며 응석을 부렸다. " 와∼ 그래도 이게 얼마 만의 여행이야? 이렇게 단 둘이서 기차를 타니까 꼭 밀월 여행하는 기분이다∼ " " ……마치 해본 적이 있는 것 처럼 말한다? 밀월 여행? " " 에이∼ 까짓 거 지금 부터 해보면 되지∼ 너무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고. 경험이란 쌓이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차차 능숙해지는 법이니까. " " 능숙해질 필요가 뭐가 있냐! " 나는 못 말린다는듯 혀를 찼다. 최근 깨달은 건데, 이 녀석은 날 남자로 의 식하지 않는 것 처럼 행동하면서도 자신과 내가 이성 관계라는 걸 묘하게 강 조하고 있었다. 뭐,홀로 지낸 시간이 많았으니까 오빠에게 기대고 싶다는 건 알겠지만……. " 헤헤헤. 이러고 있으니까 꼭 오빠가 내 애인같다∼ "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소리를 하는 건 뭔가 좀…….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신이에게 물었다. " 신아, 넌 남자 친구 안 만들어? 지금쯤이면 슬슬 만들 시기인 거 같은데. " " 그런! 오빠! 고교생에게 불순 이성 교제는 금지란 말이야! 애인은 어른이 된 후에 만들어도 늦지 않아! " " ……그,그렇게 되는 건가? " " 그렇게 되는 거야! "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애인은 어른이 된 후에 만들어도 늦지 않다고? 애가 왜 이렇게 박복하게 변해버렸냐. 저 나이 의 여자애들이라면 흔히 남자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반응인데. 그 만큼 독립성이 강하다고 해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나에게 하는 태도가 영 아닌데……. ' 설마……그 말로만 듣던……. ' ……뭔가 해서는 안될 쪽으로 생각이 흘러갈 것 같다.나는 안색이 창백해져 슬금 슬금 신이에게서 몸을 물렸다. 하지만 신이는 내가 조금이라도 자신에 게서 벗어날라 치면 그때마다 단단히 팔짱을 조여왔다. 웬지 불길한 상상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 오빠. " " 아,응! 왜? " 갑작스런 신이의 부름에 내가 깜짝 놀라 답하자 그녀는 이상하다는듯 인상 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표정을 풀며 내 손에 들린 물건을 손가락으로 가리 켰다. "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 꽃, 왜 산 거야? " " 응? 이거? " 나는 들고 있던 작은 꽃 화분을 내려다 보았다. 오다가 역 근처의 꽃집에서 산 것이었다. 보라색 꽃잎을 가진 어딘가 백합을 닮은 꽃이었다.그것을 바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는다.신이는 내가 여행을 떠나는 마당 에 왜 비싼 돈을 들여가며 꽃 화분을 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답했다. " 잠깐…… 정리할 게 있어서. " " 뭐? " " 아니. 아무 것도 아냐. " 난 말을 얼버무리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135구역의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블루 썸머 비치. 그런 이름이었던 것 으로 기억한다. 푸른 바다에서 물장구를 치며 웃는 사람들. 넓은 백사장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 8월 말의 바닷가는 피서의 분위기가 최고조로 올 라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난 그때와 전혀 변함 없는 바닷가의 모습에 가 벼운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장소를 내가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더 이상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자 마음이 놀랍도록 평온해졌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달려오는 신이의 모습도 이 평온함에 일조하고 있었다. " 오빠∼ 많이 기다렸어? " " 아니……. " 나는 그녀의 모습에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신이의 하얀색 비키니 차림을 차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유가인. 지금 뭐하는 짓이냐? 동생 의 수영복 차림에 얼굴을 붉히기나 하다니. ' 하,하지만 역시…… 이건 불가항력이야……. ' 아무리 동생이라고 한다지만…… 이런 신이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갑자기 여자로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게 동생으로 대하 다가 이런 모습을 대할 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 짜잔∼ 내 수영복 어때? 꽤 고심해서 골랐던 건데, 어울려? 응? " 녀석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내 앞에서 한 바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내 가슴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으아악! 안 돼, 유가인! 가슴이 두근거려야할 번지수가 틀렸단 말이다! 난 명경지수를 노래하며 간신히 대꾸했다. " ……열나 이상해. " " 뭐어! " " 무엇보다 여자애가 창피한 줄도 모르냐? 너무 야하잖아! 비키니가 뭐야, 비키니가! 나이도 어린 게! " " 우와∼ 고지식해. 도대체 오빤 몇 세기 사람이야? 세미 누드가 판치는 요 즘 세상에 이 정도 비키니를 가지고 그렇게나 야단법썩을 떨 수 있다니. 그리고 내 나이면 어린 것도 아니다,뭐!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이야! " " 하지만! " " 거기다 오빠는 남자 아냐? 어차피 지나가는 비키니 여자들 보면서 한 눈 팔 건 다 팔았을 거 아냐? 그러면서 아닌 척 내숭 떠는 거 보기 안 좋아! 이왕 좋아한다면 떳떳하게 드러내놓고 좋아해 보란 말이야! 알았어? 비키 니 좋아해? 싫어해? " " ……으. " " 좋아해? 싫어해? 대답해 봐! " " ……조,좋아합니다. " 난 그녀의 기세에 떠밀려 모기 목소리만하게 중얼거렸다. 신이가 얼마나 크 게 소리를 질렀는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아, 쪽팔려 돌아가시겠네. 신이는 내게서 항복을 받아내자 언제 그랬냐는듯 방긋 웃으며 내 팔을 잡아 끌었다. " 헤헤. 그럼 이만 수영하러 가자. 나 수영 가르쳐 줄 거지? " " ……정말 끝내준다. " " 응? 뭐가? " 네 녀석 성격이 끝내준단 말이야! 성격이! 하지만 난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 하느니 점잖게 돌려서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 아니. 수영복이 끝내준다고. " ……단지 비굴할 뿐이잖아, 그건. " 오빠∼ " 신이는 저편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몇 번 가 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저 혼자서 능숙히 자유형을 구사해내고 있었다. 역시 체력과 운동 신경 하나 만은 발군인 녀석이다. 난 그런 신이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백사장에 몸을 앉혔다. 신이를 가 르쳐준다고 잠시 수영했던 것 뿐인데,내 허약한 몸은 벌써부터 나에게 고통 을 호소하고 있었다. 다리가 풀려서인지 더 이상 서있을 수도 없다. " 하아. " 뜨거운 모래의 느낌이 좋았다. 푸른 하늘 아래, 푸른 바다. 그리고 그 사이 에서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는 신이. 그 모든게 너무나 보기 좋았다.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지는 광경이었다. 이런 게 행복이라는 것일까? 신이의 웃고 있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으랏챠∼ "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태양 빛도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귓가에 들리는 파도 소리만으로도 전신이 시원해졌다. 끝 없는 창공. 닿기만 해도 터질듯한 뭉게 구름. 어느 새 나는 그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바람의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 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그 푸르름 속에서……. " 얍! " 그때 신이의 기합 소리와 함께 물컹한 뭔가가 내 얼굴을 뒤덮었다. 난 기겁 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으악! 뭐야, 이건! 떠,떨어지지를 않아? " 으가가가각! " 나는 얼굴에 붙은 정체 불명의 물건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 힘을 다 했다.그 것은 그야말로 빨판 처럼 강력하게 내 얼굴에 달라 붙었다. 잠깐. 빨판……. 빨판이라고? " ……. " 간신히 얼굴에 붙은 것을 뗀 나는 그 내용물을 확인해보았다.역시 예상대로 그것이었다. 팔완목(八腕目) 문어과의 연체 동물……. 낙지. " 이, 이 자식이……. " 난 낙지의 흡반으로 빨간 자국이 생긴 입술을 부들 부들 떨었다. 화가 치밀 어 올라 있는 힘껏 손 안의 낙지를 비틀었다. 그러자 순간, 낙지에게서 시커 먼 먹물이 튀어나와 정확히 내 얼굴을 가격했다. 퍽 난 얼굴에 흠뻑 먹물을 뒤집어 쓴 채, 엉거주춤 서있는 신이를 바라보았다. 허탈한 웃음 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녀석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이라니……. 나는 있는 힘껏 도발에 응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 죽일 테다아아아앗! " " 꺄악! 오빠아∼ 잘못했어! 살려줘∼! " " 이리 안 와? 죽었어! " 나는 체력적 열세를 극복하고 삼십분 가까이 낙지를 손에 든 채 녀석의 뒤 를 쫓아다녔다. 그런 내 필사의 추격은 결국, 신이의 한 외침이 백사장에 울 려퍼지면서 그 끝을 고해야 했다. " 벼, 변태다아아아앗! " " 야,야! 누가 변태야! 누가! " " 오빠∼ 아직도 화 안 풀렸어? 응? " " ……. " " 이제 그만 좀 풀어라∼ 남자가 그렇게 속 좁으면 여자들에게 인기 없다고. " " 너! " 민박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녀석에게 한 소리하려다가 간신히 마음을 억 누를 수 있었다. 젠장. 젠장. 이 자식 때문에 해양 감시원들에게 붙잡혔던 일을 생각하니 아 직도 분이 풀리지를 않는다. 더구나 그 뒤에도 해변가에서 변태가 어쩌느니 아직도 저런 놈이 있다느니 하며 온갖 수근거림을 다 들어야 했다. 뭐, 나중에는 보다 못한 신이가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애인 흉내를 내는 것으로 오해를 풀 순 있었지만…….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것도 아니고,하나 부터 열 까지 온통 맘에 안 드는 것 투성이였다! 거기다 녀석을 쫓아다니느라 쓸데 없이 체력을 소비해선지 다리가 후들 후 들 떨린다. 이대로는 민박 집에 들어가자마자 세상 모르고 자버릴 것 같다. ' 아……. ' 잠깐.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해변가에서도 내내 곁에 두고 있던 꽃 화분을 들고 신이에게 말했다. " 신아, 너 먼저 들어가 있어. 난 잠깐 이 근처 좀 다녀올게. " " 뭐? 어, 어디 가려고? " 신이는 갑자기 내가 정색하며 말하자, 불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난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 금방이면 될 거야. 아까 기차 안에서 말했었지? 정리할 게 있다고. " " 으응……. " 신이는 애써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많을텐데도 기특하 게 잘 참고 있었다. 신이는 내 손목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 오빠……. 정말……금방 와야 해? " " ……알았어. "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 눈으로 135 구역의 해안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 곳이 지금 내가 가야 할 장소였다. 휘오오오오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뒤를 파도 소리가 잇는다. 파랑이 해안의 산지에 부딪쳐 침식한 해식애. 60미터 높이의 절벽에서 내려다 본 바다의 모습이 눈 앞을 아찔하게 했다. 분명 여기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나에겐 조금도 낯설지가 않은 장소였다. ' 난 마리 선배의 동료잖아요. 보살핌을 받아야하는 동생이 아니란 말이에 요! ' ' 마리 선배에에에엣! ' '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해버린 거야! 도대체 왜! ' ' 편하게 있어도……돼. ' ' 지금도 충분해. 넌 최고의 동료야. ' 이 곳에서 마리 선배와 많은 일들이 있었다.그녀와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했 었고, 해식 동굴에서 서로를 의지한채 밤을 보내기도 했었다. 또 그녀가 마 음 속에 담아두고 있던 얘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여기는 여러모로 나에게 많 은 추억을 안겨주는 장소였다. 그러고 보니 마리 선배의 정신 세계에 들어갔을 때도 배경은 이 해안 절벽 이었지. 아마도 무의식 중에 난 여기를 마리 선배와의 추억이 담긴 장소로 여겨왔던 모양이다. 난 들고 있던 화분을 절벽의 가장 자리에 내려 놓았다.이 꽃은 예전 병문안 때 마리 선배에게서 받았던 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이름이 히아신스……라고 했던가? 마리 선배와 같은 하얀색을 사려고 했지만, 그 꽃집에는 이 보라색 히아신 스 밖에 팔지 않았다. 난 그것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모두들……. 잘 지내고 있어요? " 불어오는 바람에 상위에 걸친 셔츠가 나부낀다.난 고개를 들어 수평선을 바 라보았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지점. 저곳이라면…… 그들이 살고 있을까? 내 손이 닿지 않는 저 곳이라면……. "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 왔어요. "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변함 없었다. 이런 내 얘 기도 단순한 혼잣말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의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 오늘부터 전…… 여러분들을 잊을 거에요. " 마음 한 구석으로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내 자신에게 되뇌이고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잊어야만 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신 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 동생을 만났어요. " 모두들 알고 있죠? 제 동생, 신이 말이에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듯 동생과 함께 살 수 있게 됐어요. " 가뜩이나 못난 오빠라서, 지금까지 녀석을 울리기만 했지만……. " 갑자기 코가 시큰거렸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 이제부터는 그 아이를 웃게 해주고 싶어요. 그 미소를…… 지켜주고 싶어 요. " 불어오는 바람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러자 절벽에 놔둔 화분의 히아신스가 그 보라색 꽃잎들을 바닷가로 날려보냈다. 그 꽃잎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지 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울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운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앞으로는 지 나간 나날들을 생각하며 울지 않겠다.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그리워하며 울 지 않겠다. 오직 신이를, 내 동생을 기쁘게 해줄 것만 생각하겠다. " 그러니까…… 잊을 거에요, 여러분들을……. " 2032년의 그 날들을. 피스메이커에 관한 모든 것들을. " ……용서해주세요. " 난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괜찮아. 슬픈 건 한 순간일 뿐, 사람은 몇 번이고 망각하잖아? 결국 이 아픔도 추억으로 간직될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다를 바 없이. 그렇게 줄곧……. ' 이것으로 된 거겠지? 난 옳은 결정을 한 거겠지? ' 그리고 2032년은 꿈이 되었다. 2036년의 가을은 무척이나 추웠다. 나는 찻집 테이스트의 앞에 널려진 단풍잎들을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아직 11월이건만 날씨는 벌써 부터 겨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문득 며칠 전에 신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난 가을이 싫어. '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니 다짜고짜 물을 수 밖에 없었다. ' 왜? ' ' 쓸쓸하잖아. 그 공허함이 맘에 안 들어. 괜히 붉게 물든 단풍을 보면 마 음이 가라앉고 힘도 빠지는게……. 아아∼ 하여간 정말 싫은 계절이야∼ ' 그때는 왜 녀석이 그리도 가을을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 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가을은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던 계절이기 때문이다. ' 젠장. ' 나는 작게 한 숨을 쉬며 빗자루 질을 멈췄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투명한 허공 속에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려 애썼지만,그 얼굴이 잘 기억 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같으니라고, 하며 스스로를 꾸짖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 하아. " 차가워진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테이스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카운 터에 있던 사장 님이 날 반겨주었다. " 수고했어, 가인아. 따뜻한 차라도 마시렴. " " 아, 감사합니다. " 난 그녀가 건네주는 차로 손을 녹이며 카운터의 의자에 몸을 앉혔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슬슬 한성 고등학교도 마치고 손님들도 많이 몰려올 시간이었다. 한 숨 돌릴 시간은 아마 지금 뿐 일 것이다. 사장 님은 그런 내 생각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건지 방긋 미소지었다. " 그래도 가인이가 일을 잘 해주니 다행이야. 처음에는 어쩌나 싶었는데 이 제는 제법 테이스트의 직원으로서 모양새가 잡혔는 걸? " " ……그야 한달 내내 산더미 같은 일들에 치여 살다 보면 누구나 다 익숙 해질 수 있을 걸요. " " 어머. 싫다,정말.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악덕 고용주 같잖니? " 악덕 고용주 맞잖수! 나는 가볍게 투덜거리며 새삼 내 몸을 둘러 보았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테이스트의 서빙 복장. 그 복장만 봐도 알 수 있겠지? 나는 현재 테 이스트의 정식 직원으로 채용된 상태였다.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한 달간. 줄곧 여기서 일해왔다. 마침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찻집의 알바생으로 뛰던 한성고 학생들이 대번 에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찻집에 직원들이 없다고 한 탄하던 신이에게 그럼 내가 일을 해보겠다고 사정 사정하며 부탁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신이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던 나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 역시 신이의 오빠야. 근면 성실한 게 딱 내 맘에 들어. " " ……그럼 급료를 올려주시는 건? " " 거기다 고용주에게 불평불만도 하지 않고 말이야∼ " " ……. " 젠장. 여우가 따로 없구나. 나는 사장의 말 돌리는 솜씨에 혀를 찼다. 신이 는 여기서 2년 가까이 알바를 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지금과 같은 성격이 된 데에는 저 사장의 영향이 무엇보다 컸던 것 같았다. 저 능구렁이 같은 태도 에 사람을 슬슬 구슬리는 것 하며……. 정말 최악의 환경이로군. " 하지만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너희 두 오누이한테는. " 사장 님은 카운터에 턱을 괴며 흐뭇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너희들이 없었더라면 꽤나 재미없었을 거야. 여기서 일하는 것도. " " ……. " 그 말이 낯간지러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그렇게 정색하고 말 하니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 " 아, 아뇨. 감사는 저희가 해야죠.무엇보다 이렇게 신원도 불확실한 절 고 용해주셨으니……. " " 아직도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야? 신원이야 신이의 오빠만큼 확실한 게 어딨다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손해볼 게 없었다고. " " ……예? " 손해볼 게 없었다니? 사장 님은 대답 대신 손님들의 테이블로 손가락을 가 리켰다. 내가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수 많은 한성 고등학교의 여학생들이 테이블에 앉아 카운터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수 많은 시선의 집중에 난 뻗뻗 하게 몸을 굳히며 다시 카운터로 고개를 돌렸다. 사장 님은 만족스러운 웃음 을 짓고 있었다. " 가인이를 고용한 요 한 달간, 이렇게나 매상이 오를 줄은 누가 알았겠어? 후후후. 정말이지 예상 못한 결과야. 이른 바 미소년 효과라는 걸까. " ……역시 이 사람은.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었던 내 자신이 한심해진다. 사장 님은 축 늘어진 내 어깨를 힘차게 두들기며 말했다. " 앞으로도 잃어버리지 말라고, 그 뭇 소녀들을 사로잡는 미소. 테이스트의 미래는 너에게 달려있으니까. " " 사장 님! " 내 처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장 님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무리 봐도 이런 내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 후후. 농담이야. 농담. 무엇보다 이 이상 분발해줘도 되려 이쪽이 곤란하 다고. 그 아이 성화를 감당하는 것도 이젠 지쳤으니까. " 그 아이? 성화? 지친다고? 난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 렸다. 사장 님은 어깨를 으쓱하며 저편의 테이블을 턱으로 가리켰다. " 거, 참. 오빠 사랑도 정도 껏 해야지. " " ……. " 그제야 그녀의 말이 납득이 간다. 난 쓴 웃음을 지으며 사장 님이 말한 테 이블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오빠 사랑에 열성인 나의 여동생, 신이가 자신의 친구와 앉아 내 쪽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사장 님은 의미심장한 미 소를 지으며 나에게 속삭였다. " 비번 날까지 찾아올 정도로 오빠가 좋은가봐? 정말 신이가 말한 대로 둘 이 애인 사이인 거 아냐? " " 그럴 리가요. " 예전 내가 처음으로 테이스트를 찾아왔을 때 신이가 했던 농담을 그녀는 아 직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난 애써 태연한 척 가볍게 손을 저어보였지만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괜히 사장 님의 시선을 받자 뒷 통수가 따끔거리고 애꿎은 메뉴판 만 만지작 거려야 했다. ' 저 녀석……. ' 난 시선을 마주치기만 하면 연신 손을 흔드는 신이의 모습에 작게 한 숨을 쉬었다. " 먼저 가지 그랬어? 나 기다릴 필요 없었는데. " " 에이. 반응이 뭐 그러냐? 하나 뿐인 여동생이 오빠와 같이 가려고 두 시 간 씩이나 기다려줬는데∼ 흥. " 신이는 심드렁한 나의 반응이 섭섭했는지 금세 부루퉁해졌다. 녀석은 다섯 시부터 줄곧 테이스트에서 내가 일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 모습이 기특하기는 하다만……. " 하지만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사장 님이 보다 못해서 날 일찍 퇴근시켜주 셨잖아. 한창 바쁜 시간이었는데. 거기다 네 친구도 괜히 집에 가지 못하 고……. " " 아,아뇨. 전 괜찮아요! " 신이의 곁에서 걷고 있던 친구, 유리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 었다. 최근 테이스트에 일하면서부터 부쩍 그녀를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아 마 신이를 따라서 예전부터 테이스트에 자주 들렸던 모양이다. 처음 나와 재회했을 때는 그녀가 날 피해다니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내가 그녀에게 했던 행동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다짜 고짜 그렇게 난폭하게 굴었으니. 그나마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유리는 볼 을 붉히며 주춤 주춤 입을 열었다. " 저희 부모님은 신이가 함께라면 언제나 안심하시거든요. 두 분 모두 신이 를 굉장히 좋아하셔서……. " " 그게 정말이야? 이야∼ 왠 일이래. 무슨 귀여운 짓으로 유리 부모님께 점 수를 다 따셨나, 유신 양? " " 흠. 날 싫어하는 사람이 좀 없지. 내가 어디 가서 소박 받는 거 봤어? " " ……그래. 누구 동생인지 참으로 잘났구나. " 난 한껏 콧대가 높아진 녀석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그래도 내 동 생이 남의 집에서 좋은 대접을 받는다고 하니 나쁜 기분은 아니다. 난 더 물 어볼 셈으로 유리에게 말했다. " 그럼 매번 이렇게 늦게 집에 가는 거야? 아무리 신이와 함께라도 딸이 늦 으면 걱정하실텐데. " " 그,그렇지는 않아요. 평소에는 일찍 일찍 들어가지만 오늘 같은 날은……. " 거기까지 말하던 유리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 꼬리를 흐렸다. 뭐야? 갑 자기 왜 이러는 거지? 어디라도 아픈 건가? 나는 그녀의 상태에 의아해졌지 만 말 하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 아, 뭐……. 당연히 그렇겠지. 이 녀석에게 붙잡혀 있지만 않았어도 늦 게 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미안하다. 내 못난 동생이 붙잡게 만들어서. " " 예? 그, 그런 건……. " 어라? 한층 더 의기소침해지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난 그 알 수 없는 반응에 애꿎은 머리만 긁적였다. 그렇게 24구역 지하철 역에 도착하자 유리 는 크게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 아, 저! 그,그럼 이만 가볼게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 " 에……. " 즐거워? 뭐가? 내가 영문을 몰라 어설프게 손을 흔들어주자 그녀는 급하게 신이에게 인사한 후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 민에 빠졌다. 뭐야? 또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아니면 여전히 날 무서 워해서 그러는 거야? " 역시……예전의 일이 문제인가? " " ……. " " 하긴 제대로 사과한 적도 없으니……. 좀 더 신경을 써서 대하는 건데. " " ……. " 신이는 내 곁에서 멀뚱히 날 바라보다가 어이 없다는듯 물었다. " 오빠, 유리가 정말 왜 저러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 " 그 일 때문……아냐? 예전에 우리 집에 왔을 때 내가 난폭하게 굴어서……. " " 어휴! 뭐, 이런 밥통이 다 있냐! " 신이는 답답하다는듯 가슴을 치며 한탄했고, 난 인상을 찡그렸다. " 야! 오빠한테 밥통이 뭐야? 밥통이! " " 오빠 진짜 둔하다! 어떻게 그 정도도 몰라 볼 수가 있냐? 나,참. 눈치가 느린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느릴 수도 있다니. " " ……그러니까 내가 뭘 모르는 건데? " 난 기가 죽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런 나에게 신이는 한 소리하려다가 곧 무슨 생각에선지 입을 다물었다. " ……아냐. 관두자. 이건 내가 얘기할 게 아니다. " " 그러니까 무슨 얘기? " " 몰라도 돼, 이 둔탱이! " 신이는 그대로 내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고, 난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펄쩍 펄쩍 뛰었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다 나올 것 같다! 난 이를 갈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 무, 무슨 짓이야? " " 흥. 오빠는 말이야. 좀 더 자각이 없으면 안돼. 그렇게 여자 맘을 몰라주 다간 언젠가 줄 초상을 치룰걸? " 이 자식이 자꾸만 영문 모를 소리를……. 정강이를 부여잡은채 내가 여전히 자신의 말을 이해 못하고 있자 신이는 어쩔 수 없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 녀는 쪼그리고 앉아있는 날 일으켜 세우며 중얼거렸다. " 도대체 다들 이런 둔한 남자가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몰라. " " ……뭐? " "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라버니. 부디 앞으로도 이 둔함을 잃지 말아주 세요. " 신이는 히죽 웃으며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난 그녀에게 끌려가면서도 한 마 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 너야말로 그 폭력적인 성향을 고치지 않았다간 평생 시집 못갈 거다. " " 그래? 그럼 그때는 오빠가 데리고 살아줘. " ……그 무슨 끔찍한 소리를. " 야! 야! 나 허리 빠져! 빨리 이거 좀 잡아! " " 자,잠깐만! 그렇게 한꺼번에 들고 오면! " " 으악! " 미처 내가 말하기도 전에 재영이의 손에 들려있던 책들이 그대로 나에게 쏟아져내렸다. 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 책더미 속에 머리부터 발 끝까지 파묻혀야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재영이 걱정스 럽게 물었다. " 살아있냐? " ……그럼. 살아있지 않으면? 그 뒤 약 십여분 동안 재영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책더미 속에서 빠져 나 올 수 있었다. 난 녀석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그러게 평소에 조금씩 가져 왔으면 이 고생은 안 하잖아? " " 나,참. 누군들 이렇게 무식하게 가져오고 싶었냐? 이게 다 평일에 너희들 이 아르바이트를 하니까 그런 거잖아? 아아. 모처럼 황금같은 주말에 놀 러 가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람∼ " " ……미안. " 재영이의 말에 솔직히 사과했다. 그런 내 모습에 그는 슬쩍 내 가슴팍을 주 먹으로 치며 웃었다. " 아, 또 정색한다. 우리가 언제 남이었냐? 장난 친거니까 신경 쓰지마. " " 아니. 신경 쓴 건 아닌데……. 그냥 부려먹기에는 좀 양심이 찔려서. " " ……. " 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의 어깨를 두들기며 몸을 일으켰다. " 자자. 그보다 일단 이것들 부터 정리하고 보자.정리하는데만도 한 나절은 걸리겠네. " " 설마. " 재영이와 나는 함께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녀석이 가져온 책들 을 정리하다보니 방 한구석이 완전히 헌책방 처럼 변해버렸다. 거,참. 내가 시키기는 했지만 재영이 녀석, 무식하게도 많이 가져왔군. 이 많은 문제집들 을 녀석이 정말 다 공부했단 말이야? " 너 이거……. " " 아, 대부분 사놓고 하나도 안 푼 것들이니까 걱정하지마. " " ……. " 어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할 소리가 아니라고. 난 입맛을 다시며 책들을 펼쳐 보았다. 재영이 녀석이 가져온 것은 고등학 교 교과서들과 수능 때 공부했던 문제집들이었다. 녀석의 말과는 달리 꽤 공 부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재영은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 정말 해볼 셈이야? 대입 검정 고시? " " 응. 지금와서 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건 너무 늦은 거 같고……. 일단 합격 여부를 떠나서 공부는 한번 해보고 싶어. " 난 책을 펼쳐보며 지나가는 말투로 답했다. 하지만 내심 속으로는 각오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2037년 안에 검정 고시에 합격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재 영이에게 이렇듯 공부할 책들을 빌린 거니까. 재영이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아 챘는지 내 옆에 주저 앉아서 문제집들을 뒤적였다. " 일단 시험이란 게 매번 그 유형이 바뀌니까 문제집은 새로 사야할 거야. 이 문제집들은 그냥 공부한 걸 복습할 때만 사용하도록 해. " " 으응. " " 차라리 학원을 다니는게 어때? 입시 학원이라면 공부할 분위기도 조성될 테고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도 있을 텐데. " " 그런 학원 다닐 돈이 없으니까 너한테 책을 빌리는 거지. " " 아……그렇지. " 재영이는 멋쩍은듯 입을 다물었다.난 보고 있던 문제집을 닫으며 조용히 말 했다. " ……고맙다. " " 응? " " 책 빌려줘서. " 내 말에 재영이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 빌려주긴 뭘 빌려줘? 너 아니었으면 어차피 버릴 거였어. 다 가져도 좋아. " " 하지만. " " 괜찮다니까. 사양하지마. " " ……아니. 그래도 빌리는 걸로 만족할래. " 내 고집에 재영이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에게 씩 웃어보이며 말했다. " 안 그러면 이거 나중에 내가 다 버려야 할 거 아냐? 요즘은 쓰레기 버리 는 데도 돈 많이 든단 말이야. " " 야! 야! 안 가질 거면 도로 줘! 내가 치사해서라도 안 빌려준다! " "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농담이야, 자식! " 나와 재영이는 서로 엎치락 뒤치락 거리며 기껏 쌓아놓은 책들을 어지럽혔 고, 그때 부엌에서 나온 신이가 우리에게 소리쳤다. " 정말! 오빠들 뭐하고 있는 거야? 열심히 일한다 싶어서 차까지 타왔더니 순전히 놀고만 있어! " 순간, 나는 당황해야만 했다. 내 위에서 주먹질을 하고 있던 재영이가 갑자 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녀석은 어느샌가 신이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 그녀에 게서 찻잔이 담긴 쟁반을 받아내고 있었다. 빠,빠르다! " 요오∼ 우리 신이!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어느새 이 오빠의 가슴을 울릴 정도로 예쁜 숙녀가 됐는걸∼ " " 후후. 재영이 오빤 여전하네. " 재영이는 그야말로 느끼한 목소리와 느끼한 행동거지로 신이의 주위를 알짱 거리고 있었다. 저 자식, 저거! 저거 지금 작업 거는 거지? 작업 거는 거 맞 지? 응? 남의 동생한테 왠 수작이야, 임마! " 고등학생이 되어서 그러나? 지금껏 네게서 느낄 수 없었던 매력이 모두 다 느껴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대쉬할 걸 그랬다. " " 아이, 참∼ 그만해, 오빠∼ 후후후. " 잠깐! 야, 유신! 넌 또 왜 웃고 그러는 거야! 그러면 꼭 좋아서 웃는 거 같 잖아? 신이는 볼을 붉히며 재영이에게 말했다. " 후후. 재영이 오빤 만나는 여자들마다 이러지? " " 에이. 그렇지 않지. 신이는 나에게 특별하다고. " 뭐가 특별하다는 거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신이는 재영이 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럼 다음부터는 오빠가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절대 이러지마.그랬다간 오 는 여자들도 다 떠나버릴걸? " 쿵 그야말로 일발 역전의 필살기! 슈퍼 아츠다! 재영은 완전히 회생 불능 상태 가 되어 천천히 가라앉았다.신이는 그런 재영이에게서 재빨리 쟁반을 받아내 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 오빠, 여기 차. " 친절하게 차를 건네 주며 내 곁에 붙어 앉는다. 난 그런 신이를 질린 표정 으로 바라보다가 여전히 머리를 땅에 박고 쓰러져 있는 재영이를 돌아보았다. ……녀석이 그렇게 불쌍해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11월도 다 가고 눈 깜짝할 새에 12월이 되었다. 어느새 코트를 입고 다녀야 하는 날씨. 입을 열면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거리에서는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오고 있었다. 《 It's Christmas time, mistletoe and wine. Children singing christian ryhme With logs on the fire and gifts on the tree A time for rejoicing in all that we see……. 》 그리고 내가 깨어난지도 어느덧 일주년이 다 되어 갔다. " 우와∼ 역시 크리스마스는 이래야 돼! " 크리스마스 이브. 테이스트를 마치고 같이 귀가하는 도중 신이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돌 아 보며 혼자 신나하고 있었다. 난 그런 녀석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 그렇게 좋아? " " 응! 신나잖아! 우리도 집에 가서 파티하자! 파티! 주인 언니가 선물로 적 포도주도 주었고, 유리 네 집에서 얻어온 칠면조 바베큐도 있단 말이야! " " 유리 네 집에서? " " 아……으응. " 신이는 뭔가 얼버무리는 둣한 태도로 갑자기 말수를 줄였다. 하지만 난 별 달리 이상한 점을 못 느끼고 그녀와 같이 거리를 활보했다.밤 9시가 넘는 시 각이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캐롤들이 들려오 고 있었고,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난 빙긋 웃으며 신이에게 말했다. " 그래도 유리 네 부모님, 정말 고마우신 분들이네. 칠면조까지 선물해 주 시고. 우리도 뭔가 선물해야 하는 거 아닐까? " " 아니, 그게……. 그 칠면조 바베큐는……유리가 요리한 거야. " " 유리가? " 이야. 그랬단 말이지. 그 아이는 요리도 잘 했구나. 그러고 보니 모르는 사 이도 아닌데 크리스마스 선물 정도는 줄 걸 그랬나? 아니, 그것보다도……. " 그런 줄 알았더라면 유리도 파티에 초대할 걸 그랬다. 세명이서 파티하는 것도 꽤 재밌을 거 같은데……. 맞아! 지금이라도 부를까? 유리만 혼자 부르면 뭐하니까 재영이도 부르던지! " 아, 마지막 의견은 보류. 재영이 녀석이 오면 뭔가 평범하게 크리스마스 이 브를 못 넘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렇게 이것 저것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내 곁에서 신이가 보이지 않는다 는 걸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고개를 숙 이고 있었다. 난 신이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 신아?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 ……. " 신이는 방금 전만 해도 활기차게 떠들던 것과는 달리, 그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난 몸을 숙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라? " ……. " 신이는……울고 있었다. 왜 우는 거지? 왜……. " 오빠……나……거짓말을 해버렸어. " " ……뭐? " 무슨 거짓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신이는 울먹이면서 조금씩 말 을 이어 나갔다. " 나, 유리에게…… 거짓말 해버렸어. 오빠가 단 둘이서 크리스마스 파티하 자고, 그래서 유리는 올 수 없다고……그렇게……. " 아……. " 유리가 오빠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면 서도……. 나, 그런데도 유리한테…… 그런 거짓말을……. " 신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난 망연자실하게 그런 신이를 바라 보았다. " 미안해. 미안해……. 나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냥 오빠하고 크 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어째 서 유리한테……. " 신이는 연신 미안하다는 소리만 반복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울음소리를 가 만히 듣고 있던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신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 었다. 신이는 여전히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 오빠? "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주며 말했다. " 괜찮아. " " ……? " " 그러니까 그게, 나도……. " 아, 하여간 피곤한 녀석이야. 이런 말이나 하게 만들다니.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는 달리 내 입은 계속 웃고 있었다. " 나도 너하고만 단둘이서 파티를 하고 싶었으니……그, 거짓말한 건 아냐. " " 우우……오빠! " 신이는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며 나에게 덥썩 안겼다.난 울먹이는 녀석의 등 을 두들겨 주며 혀를 찼다. " 바보야. 이렇게 자주 울다간 정작 울고 싶을 때 눈물 안 나온다? " " 훌쩍……괜찮어. 나……오빠하고 있을 때만 우니까……. "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웃어보이는 신이의 얼굴은 마치 눈꽃송이 같았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조용한 골방이라도 이렇게 불을 꺼놓고 촛불 만 켜놓으니 다시 없을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우리는 탁자에 앉아 촛불로 붉게 물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는 유리에게서 받은 칠면조 바베큐와 적포도주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꼬르륵 우리의 배에서는 동시에 배 곪음 소리가 흘러 나온다. 나와 신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둘 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저녁식사를 챙겨 먹 지 못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다 보니 테이스트에 손님이 끊이질 않았 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었다. 난 군침을 삼키며 신이에게 말했다. " 자, 얼른 먹자. " " 응. 나도 배고파 쓰러지겠어. " 우리는 잘 썰어진 칠면조를 포크로 찍고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뭔가가 빠 진 기분이었지만 배 고픔 때문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자, 이걸 이대로 입 안에 넣기만 하면 그 부드러운 살결이 씹히는 감촉과 함께 향긋한 고기 냄새 가 입안 가득……. " 잠깐! " 신이가 그런 나를 제지했다. 난 코 앞까지 다가온 고기를 애써 멈추며 인상 을 찌푸렸다. " 왜? " " 이게 빠졌잖아. 이게. " 신이는 윙크를 하며 적포도주를 따른 유리잔을 들어올렸다. 오! 그래! 맞아. 이게 빠졌었지. 나는 내 자신의 잔을 들어올려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챙 하 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리 둘은 그대로 포도주를 원 샷했다.하지만 미처 다 마시기도 전에 나는 켁켁 거리며 기침을 토해내야만 했다.속이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다. " 켁! 으엑! 뭐, 뭐야! " " 푸훗. 그야 당연히 한번에 들이켰는데 괜찮을리 있겠어? 포도주도 엄연히 12도 이상의 알코올 농도를 가진 술인데, 초심자가 원샷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 " ……너는 마치 초심자가 아닌 것 처럼 말한다? " " 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시지요, 오라버니. " 젠장. 스타일 구겼다. 저 자식은 내가 자고 있을 때 뭔 짓을 하고 돌아다녔 던 거야? 저렇게 능숙하게 술을 마셔대다니? 녀석은 벌써 한 잔을 다 비우고 다음 잔을 채우고 있었다. 어이. 자작을 하면 그 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재수 없어진다는 것도 모르는 거냐? ' 에이. 뭐. 어쨌든! ' 드디어 칠면조를! 나는 다시 포크를 집어들고 서둘러 칠면조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 잠깐! " 정확히 고기가 내 입에 닿기 전에 또 다시 신이의 목소리가 나를 제지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 ……왜 또? " " 뭔가가 아직 빠졌단 말이야. 잠깐만 기다려 봐. " 신이는 배고픔에 지친 나를 내버려두고 혼자서 고민에 빠졌다. 난 그야말로 먹을 것을 눈 앞에 두고도 굶주림과 치열한 격전을 치뤄야만 했다.그나마 그 적포도주라도 억지로 먹어둔게 허기에 도움이 되었다. " 아, 맞아! 그게 빠졌어! " " ……그러니까 뭐? " 뿔이 난 음성으로 물었지만 신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답했다. " 소원 말이야! " " ……소원? " " 응! 소원! " " 그……입으로 촛불 끄고 비는……그 소원 말이야? " " 응! 그래! " " ……. " 이, 이 자식은 정말……. 난 이가 갈리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인내심 많게 녀석의 얘기를 받아주 었다. 난 탁자에 놓인 촛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 그래. 그래. 그럼 얼른 촛불 끄고 소원이나 빌자꾸나. " 지금의 내 상태로 소원을 빌었다간 칠면조 고기를 먹게 해달라는 게 소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신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 이걸로는 안돼! "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 뭐가 안돼? " " 부족해! " 아,진짜 억지도 정도껏 부리지.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 뭐가 부족해! 여기 네 말대로 촛불 있잖아? 그거면 됐지 또 뭘……. " " 케이크가 없단 말이야! " 에? " ……케이크? " " 응! 조금 비싸더라도 부쉬 드 노엘을 사야해! " " 부쉬 드 노엘? " 그건 또 뭐야? 설마 그 알 수 없는 이름의 케이크를 사러 이 칠면조를 놔두 고 밖에 나가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신이는 역시나 저 혼자서 신나서 당장 에 코트를 껴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 내가 최근에 이 근처에서 점찍어둔 케이크 가게가 있어! 거기 가르송에게 물어봤는데 가게 폐점 시간이 밤 12시랬으니까 지금 가면 시간에 맞게 살 수 있을 거야! " " 시, 싫어! " 난 울 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칠면조 고기를 놔두고 갈 수는 없다고! 최소한 한 입이라도 먹지 않으면! 쾅 그때 신발장에서 거센 구두 굽 소리가 났다. 나는 몸이 굳은채 천천히 고개 를 돌려 대문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그 곳에서는 신이가 내쪽으로 등을 돌 린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아, 그 무언의 압력이라니. 이건 정말이지 반칙이야. 누가 그런 협박 따위 에 굴할 줄 알고? 가볍게 무시해주마. 어디 계속 구두를 차던지 던지던지 맘 대로 해보라고! 쾅 그때 다시 한번 거센 구두 굽 소리가 났다.이번에는 앞의 것 보다 좀 더 힘 이 실린 소리였다. 나는 말 없이 포크를 내려놓고 신속히 코트를 걸쳤다. " 아아. 추워라. 젠장. " 나는 내 곁에서 팔짱을 끼고 걷는 신이에게 연신 간접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정말이지 이럴 것 까지는 없잖아? 그 칠면조를 먹고 간다고 해서 케이크 가 게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밤 12시까지라며? 그럼 아직 2시간은 충 분히 남았구만. 쳇. 쳇. 꾸욱 그때 내 팔짱을 끼고 있던 신이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날 죄어왔다. 난 즉시 입을 다물며 군말 없이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아, 진짜 이건 횡포야! 신이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떨어지는 눈송이를 손으로 받아내 며 말했다. " 헤헤. 이렇게 눈 내리는 거리를 걷는 것도 꽤 낭만적이네. 그치? " " ……. " 난 어느새 거리를 하얗게 뒤덮은 눈길을 밟으며 중얼거렸다.낭만은 무슨 낭 만? 발이 푹푹 빠지는 게 걷기도 힘들구만. 꾸욱 다시 한번 팔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 난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하며 눈물을 삼켰다. 도대체 불평할 자유까지 빼앗는 건 어느 나라 사상이래? ' 그래.그래. 네 소꿉 장난에 동참해주마. ' 힘 없는 사람이 참아야지. 나,참. " 근데 그 부쉬 드 노엘이라는 건 또 뭐야? " 내가 뚱하게 묻자 신이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듯이 즉각 대답했다. "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 때 먹는 장작모양의 케이크야! 밤 버터 크림이 들 어간 굉장히 예쁜 케이큰데 작은 게 딱 두 사람 먹을 분량이더라. " 하여간 여자들이란. 요상하게도 이런 걸 좋아한다니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듯 웃었다. 에휴. 어차피 가게 된 거 신이하고 즐겁게 구경이나 하고 올까나. 뭐, 칠면조는 뒤에 있을 즐거움으로 남겨두고 말이지. " 가게는 어디쯤이야? " " 아, 이제 다 왔어. 저기 저 골목을 돌아나가면 금방 나와. " 신이는 신이 났는지 나보다 먼저 골목 쪽으로 달려나갔다. 녀석. 그렇게도 좋을까? 나는 그런 동생의 뒷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해져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그려졌다. 눈까지 내릴 정도로 날씨가 추웠지만,난 하나도 그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마음이…… 따뜻했기에. 신이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 오빠! 빨리 와! " 어느새 멀찍이 떨어진 신이가 나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며 달리기 시작했다. " 얌마! 너무 빨리 가지마! " 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음껏 웃었다.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지금처럼? 이제는 꿈이라고 생각하는 2032년의 기억도 지금의 행복 앞에서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지금 나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난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하다고.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그리고 잠시 후 케이크를 사들고 집에 가면 한 가지 소원을 빌 것이다. 이 행복이 계속되기를.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기를. " 오빠! " 그렇게만 된다면……. 부우우우웅 여한이…… 없으련만. 끼이이이익 그때 신이의 맞은 편 골목 쪽에서 거센 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난 골목 을 빠져나오며 똑똑히 볼 수 있었다.눈길에 미끄러진 한 승용차가 신이를 향 해 진직하고 있었다. 멈출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계속, 신이를 향해.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은 신이의 얼굴이 유달리도 창백하게 보였다. 안돼! 이대로는 늦어! 내가 가기도 전에 차가 먼저! 차가 먼저 신이를 쳐버릴 거야! 막아야해! 막아야해! 신이가 차에 부딪히는 것을 막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신이가…… 그렇지 않으면 신이가! " 으, 으아아아아아앗! "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움켜쥐는 오른손. 그와 동시에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 천공……. ' 외쳐! 외치란 말이야, 그 이름을! 유가인! 넌 알고 있잖아?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힘을! 너만이 가지고 있는 그 힘을! 그 힘을…… 외 치 란 말 이 야! " 천 공 권! " 순간 내 손에서 푸른 빛의 토네이도가 뻗어나갔다! 투카카카카칵 귀에 익은 파공성. 대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날카로운 회오리. 푸른 빛을 머 금은 오라의 토네이도가 지금 내 주먹에서 발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콰지지지직 토네이도는 신이에게 향하던 승용차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날려보냈다. 승용 차는 그대로 측면의 문 부터 박살나며 차체가 들린 채 담벼락으로 부딪혔다.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담벼락은 산산히 부숴지며 승용차는 담 안의 정원을 몇 바퀴 구르다가 간신히 멈췄다. " 허억……. 허억……. "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에 눈 앞이 캄캄해졌다. 전신에서 뜨거운 김이 흘러나 오며 주위의 눈들을 녹이고 있었다. 나는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가슴을 쥐어 뜯었다. 공복에 가까운 허탈감이 날 엄습해왔다. 뭐지? 뭐였지? 방금 그건……. 나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내 오른주먹을 바라보았다.그곳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나타났다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듯 바라보았다. 이것은……오라? " 으으으윽! " 다시 한번 지독한 통증이 가슴을 관통했다. 난 억눌린 비명을 내지르며 눈 을 치켜떴다. 그리고 내가 벌인 사태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담벼락 이 무너져 있었고, 그 곳에 차가 뒤집혀 있었다. 저걸…… 내가 했다는 거야? 내가? ' 사람은? ' 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은?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도망치듯 내 자신에서 운전수의 행방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재빨리 승용차 쪽으로 달려갔다. 무너진 담벼락을 넘어서 뒤집 어진 차 밑을 살펴 보았다. " 이봐요! 괜찮아요? "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난 이를 악물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찢겨진 시트들 과 부숴진 유리 파편으로 인해 차 안은 엉망이었다.그리고 앞좌석에 타고 있 어야 할 운전수는……. " ……. " 없다. 어디에도 없었다. 부숴진 차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나는 황망히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디로 간 거지? 차가 구르면서 밖으로 튕겨나간 걸까? 아니면 차 밑으로 깔린 거야? ' 없어! '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무너진 담벼락을 넘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런 큰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주위의 인 가에서는 누구 하나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리는 너무나 조용했다. 마 치…… 아무도 없는 것 처럼. 그리고 어느새 눈도 그쳐있었다. ' 아니. ' 정확히는 눈발이 멈춰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눈들이 땅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내 앞에 떠있는 눈발로 손을 가져갔다. 만져 보았다. 차가운 느낌도 없었고, 부숴지는 느낌도 없었다. 마치 형체가 없는 것 처럼 내 손은 눈발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신이를 불렀다. " 시,신아……. 신아……! 신아! " 신이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신이는 없었다. 단지 눈 으로 뒤덮힌 어두운 골목만이 보일 뿐이었다. 여전히 거리는 조용했고, 심지 어는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 홀로 소리치고 있었다. 내 목소리 외에는 소리라는 것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털썩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 앉고 말았다. 고개를 숙였다.움켜쥔 주 먹이 부들 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내 뒤로 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결국…… 깨달았구나. 진실을. " 진실이라는 말에 내 어깨가 흠칫 떨린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넌…… 누구야? " 더 이상 신이가 아닌 '그녀'가 내 질문에 답했다. " 나의 이름은 리리스. 너희들이 몬스터라고 부르는, 너희들의 적이다. " 적! 나는 그제서야 힘겹게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그 곳에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신이가 서있었다. 그녀는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자 꾸만 꺼져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 했다. " 왜……? "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그 말이 가장 먼저 내 입에서 흘러 나왔 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묻는 건지, 무엇이 궁금하다는 건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용케도 내 요지를 알아들고 답했다. " 너에게는 너 자신도 모르는 위대한 힘이 숨어 있어. 그것을 손에 넣게 된 다면 우리는 평생의 숙원을 이룰 수 있게 돼. " " 그 힘이란 걸…… 얻기 위해서……. " 이 모든 걸 계획해서……. " 날……속인 거야? " 난 순식간에 몇 년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배신감도 느껴지지 않았 다.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단지 마음 한 구석이 비어버린듯한 상실감을 느 낄 뿐이었다. 그 리리스라는 여인은 이런 내 말에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 속이지 않았어. " 그녀의 등 뒤로 천천히 검은 빛의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주위 의 어둠과 맞물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난 멍하니 그것을 바라만 보았다. " 나는 밤의 여왕. 나는 타인의 꿈을 이뤄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 " 날개가 돋아난 것만으로도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녀는 여전 히 신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신이 가 아니었다. 이 숨이 막힐듯한 위압감. 날 엄습하는 존재감이라니. 지금의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연히 내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 나는 이 능력으로 너의 꿈을 이뤄준 것 뿐이야. " 그녀의 말에 난 어깨를 움찔 떨었다. 꿈. 꿈을 이뤄줬다고? " 네가 가장 바라던 꿈을. 네가 가장 원하던 꿈을. " 내가 가장 원하던 꿈? " ……그리고 꿈은 이루어졌어. " 너와 접촉하는 것은 여러모로 힘들었어. 강한 무의식의 장벽이 날 가로막고 있었거든.차원의 힘은 육체 뿐만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 보호해주는 힘이니까. 그래서 일단 네 주위를 멤도는 그들부터 네게서 떼어내야 했어. 너와 같은 능력을 지닌 그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서로의 힘은 공유되고, 그 결속력은 철벽과 같이 단 단해지지. ' 크흐흐흐흐! 보내줄 성 싶으냐! ' 결국 쉽지는 않았지만 내 동료를 이용하여 널 독립시킬 수 있었어. 그리고 곧장 너와의 접속을 시작했지. 접속 방법으로 선택한 매개체는 꿈이었어. ' 오빠! 깨어난 거야! 드디어 깨어난 거야! ' 네가 바라던 꿈은 여동생과의 생활이었어. 그녀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그녀 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그녀가 네 곁에 살아있는 것. 그것이 너의 소망이었지. ' 오빠? ' 난 너의 소망을 이뤄주기로 결심했어.너의 여동생이 되어 네 곁에 머물렀지. 너와 같은 꿈을 꾸기 시작한 거야.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 밖에. 꿈을 이뤄 줄 수는 있었지만 현실 속의 기억은 단절시킬 수 없었으니까. 너는 모든 것을 불신하며 모든 것을 거부했어. ' 믿을 수 없어! ' ' 이쪽이 꿈이야! 이쪽이 환상이라고! ' ' 제길! ' ' 제길! ' ' 그럴 리 없어! ' 난 기다렸어. 네가 이 꿈에 적응하기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를 숨 죽여 기다 리고 있었어. 꿈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꿈을 받아들이는 건 내 몫이 아니었 으니까. ' 대……재해? ' 현실을 너에게서 단절시키는 건 쉬웠어. 현대 미디어의 취약점을 이용했지. 삼차원의 인류가 받아들이는 모든 정보는 거의 조작된 혹은 변형된 채로 제 공되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미디어에 의한 정보의 조작 혹은 상업화에 따른 정보의 선택적 대량 공급이 차단됨을 의미해. 영화나 소설이나 그 외의 기타 미디어도 그러한 영 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지. 너희 인류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던가?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그 철학적 혹은 인문주의적 인식의 바탕도 제국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거대 한 힘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거야.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너는 미디어를 의심해왔어. 대재해라는 것도 미디어로만 접해봤기에 실감을 하지 못했지. 그래서 내가 던져준 약간의 의문에도 금세 반응했던 거야. ' 난…… 언제부터 2020년에 대재해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 그렇게 의문은 쌓여만 가고, 이제는 자신의 기억까지 불신하게 돼. 그리고 나는 네가 의심하는 것을 내버려뒀지. 의심. 또 의심. 그렇게 불어만 가는 불신과 의혹을 난 동생으로서 받아줬어. 그러면서 너에 게 이쪽이 현실이라는 걸 끊임 없이 인지시켰지. 너는 나날이 고립되어갔고, 위화감을 느꼈을 거야. 그리고 난 그 위화감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어. 너에게 모든 것을 확인할 기회를 줬던 거야. 24구역을 둘러보고, 26구역을 둘러보게 만들었지. 당연히 그곳은 너의 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현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어. 너는 그것들을 둘러보며 혼란스러워하더군. 어느 쪽이 현실인지 알 수 없게 된 거야. 그리고 넌 그 곳에서 그들을 찾아낼 수 없었어. 네 동료들. 그들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네가 바랬기 때문이야. 여동생과 함께 살아가는 꿈 속에 그들을 등장시킴으로서 행복이 깨지는 걸 막고 싶었던 거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그때부터 넌 꿈이 파괴당하는 걸 거 부했던 거야. 그러던 중 내가 데려온 유리의 모습에 네 의문은 갈 곳을 잃고 폭발했어. '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어! 내 두 눈으로 진실을 보고 말겠어! 그리고 이 끝 없는 방황에 종지부를 찍을 거야! ' 뼈는 한 번 부러졌다 다시 붙으면 더 단단해진다고 했던가. 그 말대로야.의 심을 하게 만든 뒤 그것을 해결. 깨끗히 떨쳐내게 하는 거지. 만들어줬던 거 야. 네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 나는 이런 신이를…… 하마터면 두 번이나 죽게 할 뻔 했어……. ' 전차에 부딪힐 뻔한 내가 무사함으로서 넌 안도하게 되었고, 의심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지. 알게 된 거야. 여동생이 살아있길 바래왔다는 걸. 이것이 자신이 바래왔던 행복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거야. ' 그 아이를 웃게 해주고 싶어요. 그 미소를……지켜주고 싶어요. ' 그리고 넌 그제서야 현실과 작별할 수 있었어. 꿈은 현실로, 현실은 꿈으로 받아들이게 된 거지. " 그리고 오늘 자정을 넘기면 네가 이 꿈 속에 있은지도 일주년이 돼. 이번 일만 잘 넘겼더라면 네 의식은 꿈과 완전히 동화되었을 거야. " 그 말을 하는 리리스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안타까움이 배여 있었지만, 고개 를 숙이고 있던 나는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게 있었어. " 순간, 내 주위의 풍경이 비상등을 켠 엠뷸런스 안으로 바꼈다. 또 눈 앞에 는 피투성이가 된 신이가 내 손을 움켜쥔 채 누워 있었다. 옆에 있던 응급처 치원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의 중상이었다. 처치원은 병원에 가기도 전에 신 이가 죽을 거라 생각했는지 나와 얘기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신이는 산소 마스크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 오빠……. 오빠……나 죽는 거야? 나 이대로……. " 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 보기만 했다. 신이의 손을 잡은 내 손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신이는 고통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 아아……. 정말……정말 어째서 이런……. 이런 크리스마스에 어째서 이 런 일이…… 난, 나는……. " 신이는 안간 힘을 다해 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힘이라 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오빠. 오빠……! 살아가야해! 반드시! 반드시! 내가 없더라도, 내가 없더 라도! 약속해줘! 제발……약속해줘! " 난 그 말에 답할 수 없었다. 신이는 울부짖으며 나에게 소리쳤다. " 내가 없어도 살아가겠다고……! 대답……해! " 나는 그 처절함에 나도 모르게 '알겠다'고 약속할 뻔 했다. 그 순간, 다시 주위는 22구역의 골목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앞에서는 언제 피투성이로 있 었냐는듯 리리스가 멀쩡히 서있었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만약 그 약속에 응했더라면 난 그녀의 말대로 이 꿈속 에서 영원히 살아갔을 거라는 걸. 그렇다면 그녀가 잘못 생각했다는 건 뭘까? " 신이에 대한 너의 마음을 과소평가했던 거야. 네가 그 아이의 소원을 이 뤄줄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 리리스는 날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왜……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 설마……자신의 행복한 꿈을 깨뜨리면서 까지 그녀를 구하리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어. " 꿈을 깨뜨렸다고? 나는 다시 내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푸른 오라의 기운이 확연히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제서야 오라를 사용할 수 있게 된걸까? 왜 이 제서야……. ' 오라는 꿈을 깨뜨리는 진실이었기에. ' 오라를 사용하는 나는 2032년의 피스 대원, 피스 블루였기에.부모님과 여동 생을 잃고 몬스터들과 싸우는 오라 능력자였던 것이다! 이 꿈 속에서 오라를 사용한다는 것은 2032년의 기억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증거였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단 하나의 진실! 나는 오라를 사용하지 못했던 게 아니다.단지 이 꿈을 깨고 싶지 않았을 뿐 이다. 그래서 지금껏 오라를 사용해오지 않았다. " 나는……알고 있었어. " 그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꿈이라는 걸. 그랬기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이 낯설지가 않았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어머니에 대해서도 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분은 예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처음부터……알고 있었다. ' 현실이길 바랬어. ' 진실이길 바랬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신이가 살아있다고. 그 아이와 이대 로 살고 싶다고. 이 행복을……. ' ……깨뜨리고 싶지 않았어. '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리리스는 그런 나를 연민의 표정으로 바라 보며 말했다. " 이것은 너의 꿈이야. 이대로 꿈에서 깰 것인지,아니면 계속 꿈을 꿀 것인 지는 너의 선택에 달렸어. " 그녀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마 음을 정했는지 나에게로 다가왔다. " 하지만 왜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거지? 행복하잖아? 동생과 함께 앞으로 도 평화로운 삶이 보장되어 있어.어째서 이런 행복을 거부하고 고통 뿐인 삶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거야? "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절박하게 변해갔다. 어째서 애원조로 내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어차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현실이고,무엇이 꿈인 지! 어떻게 알 수 있다고! 그런 거, 누구도 알 수 없잖아? " 그녀의 말에서 난 호접지몽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는 이야기.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 " 너만 원한다면 끝까지 널 행복하게 해줄게. 이 행복이 깨지 않도록 도와 줄게. 언제나 너의 여동생으로 네 곁에서 살아갈 거야. " 하지만……그것은 더 이상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눈빛에서 그런 마음을 읽어낸 걸까? 리리스는 화를 내며 내 가슴팍을 연 신 두들겼다.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함께 있어준댔잖아? 언제나 내 곁을 지켜준댔잖아? 그랬으면서! 그랬으면 서 왜! 그 때의 맹세는 거짓말이었던 거야? 대답해봐! " 그녀는 원망 어린 목소리로 연신 소리쳤다. " 아무리 꿈이라고 하지만! 너와 내가 만들었던 추억까지 모두 거짓인 건 아니야! 나와 함께 했던 시간까지 거짓인 건 아니야! 난 그때도 너의 여 동생이었고 지금도 너의 여동생이야! 이 모든 걸 부정할 셈이야? " 난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녀를 천천히 밀어냈다.눈물투성이인 얼굴 이 날 응시하고 있었다. 난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싸며 말했다. " 네가 그랬지? 꿈은 꿈일 뿐. 거짓이라고. " " ……! " 잠결 속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 그것을 난 잊지 않고 있었다. 리리스는 내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며 처량히 날 바라보았다. 난 그녀의 눈가에 남아있 는 눈물을 엄지 손가락으로 훔쳐 주었다. " 만약 내가 진실을 몰랐더라면 난 언제까지고 네 곁에 머물렀을 거야. 이 행복이 설령 꿈일지언정 깨뜨리지 않았을 거야. " 하지만. " 하지만 난 진실을 알았어. 이게 꿈이라는 걸 알았어.그것을 알고도 더 이 상 모르는 척, 거짓으로 너와의 생활을 지속해나갈 순 없어. 그건 너도. 나도. 모두를 속이는 행동이니까.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이니까. " 리리스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 어깨가 흐느낌으로 떨리고 있었 다. 난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 너와 했던 이 일 년간을……절대로 잊지 않을게. " " 아, 아아, 아아아악! "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내 울었다. 비탄. 오열. 실망. 그 모든 감정이 절 실하게 느껴져 왔다. 나는 그런 그녀를 위로해줄 수도, 안아줄 수도 없었다. 리리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 바보! 바보! 뭘 잊지 않겠다는 거야! 어차피 모두 잊어버릴 거면서! 잠 에서 깨는 순간 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이 모든 건 한 순간의 꿈일 뿐이니까! 나에 대해서도! 나와 있었던 일들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란 말이야! " " ……! " " 그래도 좋아? 그걸로 되는 거야? 난……나는……. "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내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흐느꼈다. " 나는 싫단…… 말이야……. "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녀는 절망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날 붙잡고 싶어하는 그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 안타까움을 참 지 못하고 나는 결국 그녀를 끌어안았다. " 미안. 도움이 못되서. " 나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 ……네가 바라는 힘을 주지 못해서. " 내 품에 있던 그녀가 몸을 움찔 떠는 게 느껴졌다.리리스는 난폭하게 내 팔 을 뿌리치며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는 비통한 목소리로 나에게 외쳤다. " 가! 가버려! 내 앞에서 사라져! 사라지란 말이야! " " ……응. " 나는 쓸쓸히 답하며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을 조금 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지난 일 년간 그녀와 함께 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 정말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이 잠꾸러기 오라버니? ' ' 상관 없어. 오빠가 다 잊어버려도. 난 기억하고 있으니까……. 하나도 빠 짐 없이. ' ' 결심했지. 오빠가 깨어나면 여기에 꼭 들리겠다고.오빠와 함께 언덕 위의 풍경을 보러 오겠다고. ' ' 간호해줘서……고마워. 나, 정말 기뻤어. ' ' 제발 날 떠나지마! 제발 날 혼자두지마! ' ' 오빠……. 정말……금방 와야 해? ' ' 나……오빠하고 있을 때만 우니까……. ' ' 오빠! 빨리 와! ' ' 오빠! ' ' 오빠……. ' 눈가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날 기억이 아니 었으니까. 내게는 다시 없을 행복한……기억이었으니까. 떠올리는 것 만으로 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 고마워. " 난 리리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준 그 녀가 고마웠다.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겨준……. " 성탄 선물……. 고마워. " 넌 잊어버릴 거라고 얘기했지만. 난 잊어버리지 않아. 너와 함께 했던 순간 들을 절대로……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절대로.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뎅 종소리가 어디선가 울려퍼졌다. 정확히 12번. 손목 시계를 내려다 보니 시 간은 어느덧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24일이 지나고 25일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였다. 그리고 나는 피스메이커의 오라 능력자, 피스 블루로 돌아가 있었다. 익숙 한 푸른 빛의 AI슈츠가 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난 AI헬맷을 장착한 후 천 천히 리리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뒤에서 그녀가 날 붙잡으려 하다가 힘 없이 손을 떨어뜨렸다는 걸 알 수 있 었다. 이것은 나의 꿈이었으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조차 알 수 있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으며 애써 그녀에게 인사를 건냈다. " 메리…… 크리스마스. " 헤븐 스매쉬로 오라를 끌어 모아 전방을 향해 주먹을 내찔렀다.그와 동시에 허공에 멈춰있던 눈들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 하아아아아앗! " 天천 空공 主주 心심 拳권 이제…… 꿈에서 깨어날 때야. 2032년 12월 25일 00시 01분 촤아아아아 어두운 물살을 가르며 수십대의 배들이 스타 사이드 호텔 근처에 있는 호수 를 수색하고 있었다. 그 배에는 각각 피스메이커의 팔라딘들이 조를 이루어 행동하고 있었다. " 하아. 끝이 없군. " 팔라딘 대의 부대장 유한진은 짧게 탄식하며 자신의 앞에 펼쳐진 호수면적 40만 제곱 킬로미터의 인공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 넓은 호수에서 사람 하나 를 찾아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주문이었다. ' 피스 블루 유가인. ' 지금 자신들이 찾고 있는 남자의 신원은 그러했다. 수색 작업은 두 가지 방 법으로 이루어졌는데 첫번째는 피스 블루가 입고 있는 AI슈츠의 오리하르콘 을 탐지하는 금속 측정기를 이용하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그의 슈츠에서 발 생하는 위치 추적 신호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 반 가량이 지난 지금. 두 가지 방법으로는 별 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 살아있기는 한 걸까? ' 아무리 그가 오라 능력자라고 해도 앞의 폭발 속에서 무사하리라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더구나 폭발은 어떻게든 견뎌냈다 치더라도 수천 미터의 상공 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 살아있어! " 그때 뒤에서 날카롭게 울려오는 소녀의 외침에 한진은 가슴이 뜨끔하여 돌 아보았다.그곳에는 피스 핑크 이유리가 금세라도 달려들듯한 기세로 그를 노 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한진의 마음을 읽어낸 모양이다. " 그래요. 살아있을 겁니다. " 한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유리는 독 오른 표정을 풀지 않 으며 연신 소리 질렀다. " 뭐가 살아있을 겁니다야!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미 포기하고 있잖아! 시간이 너무 흘렀다! 그 폭발 속에서는 살아날 수 없다! 불가능 하다!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뇌이고만 있으면서! " " 유리 양, 나는……. " " 시끄러워! 겉치레 소리는 집어치워! 듣기 싫어! " 아무리 오라 능력자라고 하더라도 아이는 아이였다. 가인을 잃은 유리는 정 신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해져 있었다.그나마 이렇게 수색에 나선 지금은 상태 가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가인과 쿠사나기의 동반 폭발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하게 히스테리를 부렸었다. 그렇게 한창 유리가 신경질 적으로 한진에게 소리치고 있을 때, 그녀를 제 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 그쯤 해둬요, 유리 양. 그렇게 다그치면 한진 군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 그렇게 말하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초췌한 미소를 띄고 있는 진우였다.그는 쿠사나기와의 격돌 이후, 줄곧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포션으 로도 상처가 완치되지 않은 건가 싶었지만, 이제보니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그런 진우를 따라 마리와 시민도 선원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 나도……나도 알고있어, 그런 건. 하지만……. " 유리의 목소리에는 울음끼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무서웠다. 이대로 가인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아까부터 계속 그의 마음을 향해 목소리를 던져보았지만 전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의식이 없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존재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 어떻게 해……. 오빠가……. 오빠가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 유리는 갑판에 쪼그리고 앉아 처량하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모두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시민은 그런 유리에게 다가가 그 작은 등을 토닥 여주었다. " 걱정말아요, 유리 양. 반드시 괜찮을 거에요. 반드시……. " 하지만 근거 없는 위로라는 건 누구보다도 시민,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그 녀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모질게 잡으며 가인의 생존만을 기원했다.진우는 자 신의 곁에 있던 마리가 희미하게 몸을 떤다는 걸 눈치 챘지만 애써 모르는 척 행동했다. 그녀의 성격 상 위로의 말 같은 건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배 뒷편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브루스가 진우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 며 소리쳤다. " 어디서 부정하게 눈물을 보이는 거냐! 당장 그치지 못해! 그렇게 훌쩍일 시간들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애송이의 오라를 감지하려고 노력해 봐! " 팔라딘 대가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 외에도 한 가지 수색 방법이 더 있었다. 오라 능력자인 피스 대원들만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바로 서로의 오라에 감응한다는 오라 능력의 특징을 이용한 수색 방법이었다. 만 약 가인이 이 호수 어딘가에 잠겨 있다면, 그에게 다가갈수록 자신들의 오라 가 반응할 것이다. 그 때문에 피스 대원들은 전투 후 휴식도 마다하며 수색 에 참여하고 있었다. 유리는 시민의 품에서 울먹이며 브루스에게 소리쳤다. "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오빠가 느껴지지 않잖아! 이 방법 만큼 확실한 건 없다고 그랬으면서! " " 허. 그래서 지금 애송이가 발견되지 않는 게 내 탓이라고 하는 거냐? " " 유, 유리 양! " 유리는 시민을 뿌리치며 일어나 브루스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 그래! 다 네 탓이야! 그렇게 강하면서! 그렇게 자신만만했으면서 왜 오빨 지켜주지 못했어? 왜 오빠를 내버려뒀냔 말이야! " " ……! " 순간 브루스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유리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그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듯한 표정으로 유리를 노려보며 낮게 되물었다. " 내버려뒀다고? 지금 내버려뒀다고 말한 거냐? " " 흑! " 유리는 그와 눈빛을 마주하자 고양이 앞의 쥐 처럼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목이 졸리는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울음 소리조차 목 구멍으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 우우. " 유리의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그것을 바라보던 브루스는 인 상을 찡그리며 그녀의 멱살을 풀어주었다. 유리는 거세게 기침을 하며 갑판 에 주저 앉았고 그런 그녀를 재빨리 시민이 감싸 안았다. 브루스는 유리의 멱살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 탄식했다. " 하긴. 틀린 말도 아니군……. " " 브루스 님. " 시민이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브루스는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다시 배의 뒷편으로 돌아가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는 다시 울음을 터뜨 렸다. 자신이 한심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철 없이 다른 사람의 신경 을 건드리는 말 밖에 하지 못하다니……. 마리는 브루스의 자취를 침울한 눈으로 뒤쫓았다. 그녀는 브루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가인이 쿠사나기의 폭 발에 휘말리는 장면을 두 손 놓고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 그 무력함이라니.그 허탈함이라니. 마리는 아프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힘 이 없는 자신이 미웠다. 그를 구할 수 없었던 자신이 싫었다. 자신들을 폭발 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 상공으로 끝 없이 올라가던 가인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았다. ' 가인……. 무사한 거지? ' 마리는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재빨리 닦아내며 어두운 호수를 바라 보았다. 스타 사이드 호텔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유일하게 호수를 밝혀주고 있었다. 출렁 거리는 그 물살 속에 가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당장에라도 호수로 뛰어들고 싶었다. ' 아……. ' 그때 마리가 바라보던 호수의 중앙에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미세 한 반응은 점점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수면 전체를 뒤흔들정도로 강 해졌다. 마리는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옆에 있던 진우를 두들겼다. " 자,잠깐……! 모두 저기를! " " ……! " 마리의 말에 따라 모두가 시선을 돌린 그 곳에는 거센 물살의 회오리가 생 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공진하는 오라의 흐름! 들끓기 시작하는 가슴을 부여 잡으며 시민이 화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 가인 씨! " 푸카카카카카칵 순간 검은 물살을 꿰뚫으며 거대한 오라의 토네이도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 랐다. 마치 거대한 분수대가 물줄기들을 힘차게 뿜어올리는 것 처럼. 배의 뒷편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브루스는 차분히 곰방대를 입에 물며 그 답 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 ……여전히 늦어. 빌어먹을 애송이. " 2032년 12월 25일 00시 20분 " 오빠! 정신이 들어? " " 가인! 눈을 떠! " " 가인 씨! " 걱정이 담긴 목소리.막 호수에서 구조된 가인은 전신이 얼음장 처럼 차가워 져 있었다. 진우는 그의 AI 슈츠를 해제시키며 담요를 가져와 몇 이나 그 몸을 덮어주었다. 한진은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 난방 기구란 기구는 모두 가져와! 아마 각 배마다 이동식 스토브가 있을 거다! 빠짐 없이 모아 와! 어서! " 시민은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는 가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그 앞 머 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냉기를 띠고 있었다. 코 끝 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숨결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얼어 죽었다고 해도 믿었 을 것이다. " 오빠! " 유리는 울먹이며 가인을 소리쳐 불렀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한 가인 이 살며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그는 체온이 떨어진 몸의 상태에 어울리지 않 게 막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 처럼 평온히 정신을 차렸다. " 유리……야? " 새파랗게 질린 그의 입술 사이로 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곁에 있던 모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건가! " 가인! 날……알아 보겠나? " 마리는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가인은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 당연히……알아보죠. 마리……선배. " " 아……. " 마리는 순간 눈시울을 붉히며 가인을 덥썩 끌어안았다.그런 마리의 돌발 행 동에 유리는 깜짝 놀라 그녀를 제지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마리는 울먹이며 그에게 소리쳤다. " 이, 이 몹쓸 녀석! 이렇게, 이렇게나 사람을 걱정시키다니! 얼마나 걱정 했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어째서 매번 이런 무모한 행동만 골라하는 거야! " " ……미안해요. " 가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마리는 크게 도리질을 치며 그 를 더더욱 끌어 안았다. " 아니다. 무사했으면 됐어! 그거면 충분해! 그거면……. " 그런 마리를 노려보던 유리는 이내 화를 내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도 가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래. 오빠가 살아 돌아왔다는 게 중요했다. 누가 그를 끌 어 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있다고. ' 정말……다행이야……. ' 유리는 그렇게 울고도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그녀들의 뒤에서 조용히 가인을 지켜보던 브루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 마치 한 숨 자다가 일어난 낯짝이구나.죽다 살아난 주제에 태평스럽기 짝 이 없어. 꿈이라도 꾼 건 아니겠지? " 찌릿. 여전히 입을 거칠게 놀리는 브루스에게 유리와 마리는 도끼눈을 치켜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브루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곰방대에 불을 지필 뿐이었다. 가인은 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꿈……이라고요? " " ……? " 가인은 뭔가를 생각해내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되려 그가 정색하며 반응 하자 모두는 의아해져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물 었다. " 하하하. 정말 꾸었던 거야? 꿈? " " ……그럴리가 없잖아요. " 가인은 말도 안된다는듯 피식 코웃음을 쳤다.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그 폭발 속에서 살아난 것만 해도 기적인데 꿈을 꿀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터무니 없는 소리도 정도가 있지. ' 정말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이 잠꾸러기 오라버니? ' ……어라? " 가인? " 가인을 껴안고 있던 마리는 자신의 얼굴로 뜨거운 뭔가가 떨어져 내리자 의 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유리도 두 눈을 크게 떴다. " 오빠? " 가인은…… 울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가인은 자 신이 왜 우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며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 하,하하. 왜 이러는 거지? 왜 갑자기 이런…….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 들었다.견딜 수 없 이 아련한……그러면서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이 감정은 대체……. " 가인 씨? 왜 그래요? " 시민은 걱정스레 그에게 물었다. 가인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돌아 보았다. 시민의 근심 어린 표정 속에서 자신을 걱정해주던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애써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움의 감정은 더더욱……. " 우으……. " 가인은 목으로 흐느낌이 나올려는 걸 참았다. 목이 메이려는 것을 필사적으 로 참았다. 하지만……. ' 상관 없어. 오빠가 다 잊어버려도. ' " 으으으윽……. " 가인은 무너지듯 시민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참고 있던 울음을 터 뜨렸다. 소리내 울었다. 눈물이……멈추지를 않았다. ' 난 기억하고 있으니까……. 하나도 빠짐 없이. ' 꿈은 잊혀진다. 하지만 추억은……잊혀지지 않아. ' 메리……크리스마스. '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받은 성탄 선물이었다. <제 16 화 Season's Greeting 完> 次回豫告 《태풍 야기가 경남 남해안 지방 등을 강타해 최소 60명에서 100여명이 사 망하거나 실종되었고 대규모 정전 및 통신불통, 열차 탈선 등 사회 기간 망이 마비됐습니다. 일부지역은 통신이 두절돼 인명 및 재산피해 집계가 늦어지고 있어 피해 규모는 앞으로도 크게 늘어날 전망입니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 하지만 통일 한국은 이 새학기를 유래 없는 최악의 태풍으로 맞이해야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을 간파한 피스메이커는 피스 블루를 제외한 피스 대원들을 지방으로 파견한다! 브루스: ……네 놈에게는 빚이 있었지. 쿠사나기: 크흐흐흐. 네 놈들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자리에서 모두 죽는 거다! 홀로 수도에 남게 된 유가인! 그리고 리리스는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카이: 보고 싶었어, 리리스……. 5대 간부 중 하나이자 리리스를 연모하는 카이 브릿드!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유가인을 고립시키는데. 카이: 인간이란……힘을 가진 이를 두려워하지. 비록 같은 동족일지라도. 第 17 話 네크로맨서(Necromancer) 카이 브릿드 카이: 자, 이들의 앞에서 네 힘을 보여봐라, 오라의 주인!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거지? 어차피 넌 이들과 다르잖아? 유가인: ……! 카이; 넌, 오라를 소유한…… 괴물이니까! 진실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Ｖolume.6 "12월 24일" =-=-=-=-=-=-=-=-=-=-=-=-=-=-=-=-=-=-=-=-=-=-=-=-=-=-=-=-=-=-=-=-=-=-=-= 2032년 12월 24일 19시 12분 검은 리무진(limousine)이 할리 데이비슨 모터 사이클들의 경호를 받으며 도심을 지나고 있었다. 기존의 타운카보다 15센티미터는 더 될듯한 그 차체 의 길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그 리무진 속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유가인은 이 부담스러운 분위기에 도저히 마음 편하게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타고 있던 남자들을 향해 물었다. " 이거……정말 괜찮은 거에요? " " 아아.이 리무진은 피스메이커 소유의 스타 사이드 호텔에서 마중 나온 거 니까 너무 걱정하진마. 승차값 달라고 째째하게 굴지는 않을테니. " 진우는 느긋하게 열선 내장 시트에 드러누우며 답했다.그는 이런 상황에 익 숙한지 스위치를 이용하여 오디오 까지 조작하고 있었다.그 여유만만한 모습 에 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요? 제 말은 이렇게 여유부려도 되는 거냔 말이 에요! 아무리 크리스마스 이브라지만……. " " 헤에∼ 그럼 일하고 싶다는 거야? 이런 날에? " 진우는 뜻 밖이라는듯 휘파람을 불었고, 가인은 속이 터져라 가슴을 쳤다. " 장난치지 말아요, 정말! " "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정말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니까, 소년은. " 진우는 히죽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고, 가인은 투덜거렸다. 쳇, 단순해서 미안하구만……. 진우는 가인의 의문을 단 한 마디로 일축했다. "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몬스터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 없어. " " ……예? 어째서요? " " 아, 이걸 설명하자면 크리스마스에 대한 것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일 단 소년은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이라고 알고 있어? "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가인은 주춤 거리다가 자신 없이 답했다. " 그……잘은 모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태어난 날 아 니에요? 그 크리스마스(Christmas)의 크리스트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거라 고 들은 거 같은데. " 솔직히 종교를 가지지 않은 그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진우도 그 대답을 예상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그렇게 알려져 있지.하지만 정확히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은 12월 25 일이 아니야. " " 예? " 가인은 이 뜻 밖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리스마스가 예수 그리스 도의 탄생일이 아니라고? " 그럼 어째서 성탄일이라고 하는 거에요? 아니,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이름 자체도……. " " 지금부터 이유를 설명할테니 잘 들어 둬. 일단 기원이니 서기니 하는 것 자체부터 잘못 계산된 거야.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라는 수사가 서기 525년 로마에서 예수 성탄을 기점으로 서력을 만들었으나 계산이 조금 틀 렸지. 일단 성서에서는 예수가 헤로데 대왕 생존시에 탄생했다고 나오는 데, 이 헤로데는 서기전 4년 예리고 길트 하천변 별궁에서 병사했으니까 예수는 서기전 4년보다 앞서 탄생했다는 게 되거든? 정확히 몇 년이나 앞 서 탄생했는지는 밝힐 길이 없어. 흔히 서기전 6에서 7년 경에 탄생했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지. " 뭐야, 이거? 가인은 난데 없이 기원과 서기부터 틀렸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 해졌다. 분명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과 서기가 나눠졌을테니, 예수가 크리스마스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그 계산도 모두 틀렸을 것이다. 진우는 미심쩍어하는 가인의 표정에 피식 미소지었다. " 자자. 정신차리고. 어쨌든 12월 25일 크리스마스도 예수의 진짜 탄생일이 아니야.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난 다음부터 예 수 탄일을 지내기 시작했는데, 언제 태어나셨는지 모르니까 로마 시민들 이 동짓달 경축하던 '불멸의 태양 탄일'을 예수 성탄일로 정한 거지. " " 불멸의 태양 탄일? 그럼 크리스마스라는 건 그, 불멸의 태양 탄일이라는 소리에요? " " 맞아. 그리고 이 불멸의 태양 탄일이 중요해. 무적의 태양신 탄일(Nativi tas Solisinvicti)이라고도 하는 이 축일은, 275년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완공한 태양신전 축성식을 기회로 12월 25일로 지정됐는데, 4세기 초엽에 도입된 예수 성탄 축일이 이 태양신 축일과 같은 이유는 아마도 이 날이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의 축일로 지내기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일 거야. 그 리고 놀랍게도 이 불멸의 태양 탄일 기간은 일 년 중에서 가이아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지. " " 가이아의 힘이……강해진다고요? " 가이아라면 그……. 그러고 보니 브루스가 수련 도중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가이아라는 것은 삼 차원을 주관하는 거대한 의지의 흐름이라고.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자신이 사용하는 오라도 이 가이아에게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 가이아의 흐름이 강해진다는 건……. " 삼차원 전체가 오라의 힘으로 충만해진다는 거야. 그리고 그 영향에선지 가이아의 독립성이 확실해져서 디멘션 트랜스퍼를 일으키는 와프 입자 수 치가 크게 줄어들지. 한 마디로 게이트가 열리지 않게 되는, 외부의 차원 과 완벽히 단절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돼. " " 그렇다면……몬스터들도 활동할 수 없게 된다는 거에요? " " 바로 그거야! 옛 로마인들이 이것을 알고서 축일로 정한 건지는 모르겠지 만 어쨌든,대재해가 일어난 후 이 12년간 크리스마스 만큼은 몬스터가 나 타났던 기록이 전무해. 그러니 상부에서도 안심하고 경계를 푸는 거겠지. " " 그렇군요. " 가인은 그제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만약 진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과 같은 피스메이커의 태도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 그래도 전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는다지만 피스 메이커 측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주최하다니……. 그것도 주요 관계자들 을 모두 불러들여서. " 그렇다. 그 진 사령관이 크리스마스 이브 당일 날,피스메이커 측에서 파티 를 연다고 했을 때 자신은 얼마나 놀랐던가? 다른 사람들이야 매년 하는 행 사였는지 별 다른 동요가 없었다만. " 뭘 좋잖아?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또 피스 관계자들끼리 친목을 다지겠어? 거기다 모처럼 피스메이커에서 호텔까지 내주며 마련한 자리라고.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야지. " " 그런 파티라면 유레카에서 해도 좋았잖아요? 그리고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렇듯 조마조마하게……. " " 쓸데 없는 걱정한다.몬스터가 나타날 확률은 제로라고 했잖아? 그리고 언 더 시티에서는 여전히 와프 입자 수치에 대비하고 있다고.진 사령관 님만 해도 유레카에 남으셨잖아? " " 하아……. " 진우의 긴장감 없는 말에 가인은 낮게 한 숨을 쉬었다.정말 쓸데 없는 걱정 인 걸까? 이렇게 나 혼자 초조해하는 게 이상한 거야? 아니. 무엇보다도 피 스메이커가 유독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건 왜일까? 그 때 지금껏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브루스가 입을 열었다. " 크리스마스는……인류에게 있어서 최초의 오라 능력자가 탄생한 것을 기 념하는 날이다. " " ……예? " 난데없는 그의 말에 가인은 그를 돌아보았다. 브루스는 시큰둥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초의 오라 능력자라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인의 시선에 신경쓰였는지 그는 귀찮다는듯 마저 답했다. "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가이아의 의지를 이어받은 자. 즉 오라 능력자 란 소리다. " " ……! " Ｖolume.6 " 12월 24일 " 2032년 12월 24일 19시 30분 22구역에 위치한 스타 사이드(Star Side)는 피스메이커 소유의 무궁화 5개 짜리 특급 호텔이었다. 이름 그대로 마치 별에라도 닿을듯한 높이에 아르데 코풍으로 만들어진 이 호텔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이 막힐듯한 압박감 을 주고 있었다. 가인은 멍하니 호텔을 올려다 보다가 진우에게 기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 ……이 호텔이 피스메이커 소유라는 거에요?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피스메이커라는 건 군대잖아요? 어떻게 군대가 이런……. " " 군대 라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야. 군대 체제는 팔라딘 대와 피스 대원 에 한해서일 뿐, 그 외의 운영 체제는 기업인 거지. 피스메이커의 자금이 어디서 나오는 거라 생각해? " " 그, 글쎄요. " 피스메이커는 2020년의 대재해 이후 출현한 몬스터들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 어진 국가 간의 이해를 초월한 대 몬스터 특무기관이라고 했다. 하지만 역시 어느 정도는 나라의 지원을 받고 있지 않을까……라는 게 가인의 생각이었다. 진우는 그런 가인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 일단 공권력과 같은 부분에서는 나라의 지원을 받고 있긴 하지만, 피스메 이커는 엄연히 세계 어느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독립 기관이야. 일단 권력에 몸을 맡기면 윗대가리들의 입김이 작용하게 되거든. " 윗대가리라……. 상당히 가차 없는 말이었다.가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 자자. 정리해보자고. 그렇다면 홀로서기를 위해서는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수 밖에는 없겠지? 그게 바로 기업 체제인 거야.스타 사이드 호텔은 빙산 의 일부에 불과해. 세계 도처에 피스메이커 소유의 기업들이 있어. 항공 회사를 비롯하여 작은 민간 기업부터 대 기업까지.그 중에서는 이름만 들 어도 알만한 유명 회사들도 포함되어 있지. 이런 자금력과 영향력이 있었 기에 피스메이커란 무장 단체는 지금껏 어느 나라의 밑에도 속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거야. " " 하아……. " 가인은 새삼 그 당연한 사실에 감탄하고 있었다. 피스메이커의 중축인 피스 대원으로서 활동했었다면 한번쯤 의문을 가질만도 했건만……. ' 그래.그래. 난 둔하니까. ' 가인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그렇게 이 얘기 저 얘기를 주 고 받으며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일행의 말 수는 대폭 줄어들었다.1층 로비의 모습에 압도되었던 것이다. 로비는 그야말로 황금색. 황금색. 황금색 또 황금색이었다. ' ……여,여기가 통일 한국이 맞기는 맞는 걸까? ' 가인은 엄숙하면서도 그 고요한 분위기에 기가 죽어 주춤 주춤 떨어지지 않 는 발걸음을 떼었다. 거기다 로비에 울려퍼지는 이 음악은, 흔히 영화에서 호텔 장면의 배경음으로 써먹던 바로 그것이었다. 우와. 실제로 이런 상황에 서 배경음으로 깔아주니 박력이 틀리잖아……. " 하하. 뒤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라고. " 진우는 호텔 직원의 인사에 당황해 하는 가인에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서도 브루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아, 사부님. 행여나 노파심으로 말씀드리는 거지만, 파티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신기한 거 많다고 한눈 파시다간 그대로 놓고 갈 거에요. " " ……쳇. " 예의 관광 중독증에 몸이 근질거리던 브루스는 진우가 단호히 취미 금지령 을 내리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일행은 30층의 스위트 홈으로 향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브루스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진우에게 물었다. " ……이 이동 상자 밖에 없는 거냐? " ……이동 상자? 그게 뭐지? 가인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힐끔 엘리베이터를 돌아 보았다. 아, 혹시 이걸 말하는 걸까? " 브루스, 다른 엘리베이터가 타고 싶어요? " 가인은 영문을 몰라 그렇게 물었으나 브루스는 일절 대꾸도 하지 않으며 진 우가 자신의 질문에 답하기만을 기다렸다. 진우는 그런 스승의 반응에 쓴 웃 음을 지으며 말했다. " 사부님이 좋아하시는 이동 계단은 아쉽게도 없답니다. " " ……쳇. " 브루스는 대번에 의기소침해져 힘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처럼 그 재미난 것을 다시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 이동 계단? 브루스가 좋아한다고? 그게 대체 뭐지? '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가인은 열심히 고민해보았지만 끝내 이동 계단이 에스컬레이터를 의미한다는 건 알아내지 못했다. 위이이이잉 그들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논스톱으로 30층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인은 숫자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램프를 바라보다가 진우에게 물었다. " 아, 그나저나 여자들은 먼저 도착했을까요? " " 으음. 우리보다 출발한지는 꽤 됐으니까. 하지만 이것 저것 준비할게 많 았을테니 우리와 비슷하게 도착하지 않을까? " " 흐으음. " 가인은 알 수 없다는듯 자신과 진우의 옷을 둘러보며 말했다. " 하긴. 수정 씨, 어딘가 신이 나신 것 같더라고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입혀보는 재미가 있다나 뭐래나? " " 뭐, 일 년 중 이날 만을 손 꼽아 기다린다는 말도 있으니……. " 피스메이커의 여자들은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한다며 아침 일찍 부터 집을 나섰다. 그녀들을 데리러 온 수정은 꽤나 의욕에 찼던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도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아마 그녀들을 모두 코디해 줄 것을 생각하니 기뻐 서 몸둘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런 와중에도 수정은 남자들도 코 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지금 가인들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인과 진우가 입고 있는 옷은 스포티한 느낌을 주는 클래식 스타일의 턱시 도(Tuxedo)였는데 둘 다 키와 몸매가 받쳐주니 꽤 그림이 되었다. 가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는 턱시도의 사이즈에 감탄하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 을 느끼고 진우에게 물었다. " 그런데…… 수정 씨는 어떻게 우리 치수를 알고 있는 거죠? " " 그,글쎄? "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뭐, 뭔가 기분 나쁜 상상을 해버렸는데……. 어디선가 수정이 줄자를 든채 뜨거운 눈빛으로 자신들을 관찰하는 걸 떠올려 버렸다. 그런 둘의 모습에 브루스는 혀를 차며 말했다. " 바보같은 녀석들. 메디컬 센터에 피스 대원들의 신체 검사 결과가 다 기 록되어 있잖아? " " 아,아아아∼ 맞다! 메디컬 센터! " " 하하하! 그래! 왜 그걸 생각 못했지? " 진우와 가인은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들의 망상을 애써 털어냈다. 브 루스는 그것을 한심하다는듯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 크윽……. ' 그러자 그 답지 않게 브루스는 얼굴에 깊은 음영을 드리웠다.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이상함을 느낀 가인과 진우는 슬며시 웃음을 멈추며 브루 스가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 ……. " 브루스의 옷은 특별히 수정이 신경 썼다는 게 엿보이고 있었다. 가인과 진 우의 턱시도와는 달리 그의 것은 개조형 차이나 옷이었던 것이다. 하늘 하늘 한 레이스가 소매 끝에 달린…… 거기다 호화 찬란한 연꽃무늬가 수놓인 청 록색의…… 여자 용이었다. 가인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 거, 걱정말아요, 브루스. 정말…… 잘 어울려요. " " ……죽인다. " 브루스는 이를 갈며 자신에게 이런 옷을 건네 준 수정의 사악함에 치를 떨 었다. 입을 당시에는 차이나 풍의 옷이라서 별 다른 이상한 점을 못 느꼈는 데,호텔로 오는 도중 점점 자신의 복장에 심각한 고찰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 다. 일단 무늬는 둘째로 치더라도 옷감이 수상하게 부드럽고 뭔가가 잔뜩 치렁 치렁 달려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여자 옷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 다. 허나, 이렇게 브루스가 그것을 입고 있으니 옷과 사람이 한 데 조화를 이뤄 완벽한 여자 용 옷으로 거듭나 있었던 것이다. ' 의도했던 게 분명해, 이 망할 녀석. ' 만나면 볼기를 쳐줄테다! 브루스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내내 씩씩 거렸고, 가인과 진우는 그에게 들키지 않게 배를 움켜쥐며 소리 없이 웃었다. 크큭. 수정 씨, 최고에요! 정말 최고! 땡! 그렇게 그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벨 소리와 함께 30층으로 도 착했다. 2032년 12월 24일 19시 45분 스타 사이드 호텔의 30층은 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중 엘리베 이터 출입구 근처의 얼음 석상에서는 일련의 여성들이 주위의 시선을 받으 며 한 데 모여 있었다. "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 은색의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수정은 시간을 확인하며 자신의 뒤에 있는 여 성들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추구했던 패션의 결정체들이 구현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낸 대작! 수정의 만족스러워 하는 시 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여성진들을 저마다 얼굴을 붉혔다. 일단 마리에게는 붉은색의 프린세스 드레스(princess dress)를 입혀 보았다. 체형에 꼭 맞도록 언더암홀 다트와 허리 다트를 연결하여 수직의 솔기를 이 루는 스타일이었는데 키가 큰 그녀가 입고 있으니 장신구들이 없음에도 불구 하고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거기다 평소 묶고 있던 포니테일을 풀어놓으니 한층 여성스러움이 강해졌다. 두번 째로 유리에게 입힌 것은 옅은 핑크 빛의 엠파이어 드레스(empire dre ss)였다.가슴 바로 밑에서 허리선이 절개되는 하이 웨이스트라인 드레스였는 데 의외로 성인 취향이라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다르게 완 벽히 소녀를 여인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수정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에게 의미 심장한 말을 했다. " 오늘 같은 날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어필해야하는 거에요. 이 정도라 면 가인 군의 마음을 잡는 것도 충분할 걸요? " " 그,그런…….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복장에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연신 엘리 베이터의 입구를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가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마리에 비해 유리는 한층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성인 취향이라는 게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미연과 하나에게는 한 눈에 보아도 둘이 모녀 사이라는 걸 알 수 있게끔 같 은 색의 부팡 드레스(bouffant dress)를 입혀 보았다. 어머니 쪽의 드레스는 진한 다크 블루, 딸 쪽은 화이트 블루였는데 푸른색 계열이라는 점에서 진우 의 반발이 예상되었지만, 그 반발을 잠재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하나는 가인이 늦자 연신 미연의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렸다. " 엄마아∼ 오빠는? 오빠는 왜 계속 안와? 응? " " 어휴. 우리 하나, 그렇게 오빠가 보고 싶어? " " 응! " " 엄마도 보고 싶은 데 꾸욱 참고 있는 거야.그러니까 우리,조금만 더 기다 려 보자. 알았지? " 그렇게 하나를 달래는 와중에도 두 모녀는 한번도 자신들의 남편과 아빠를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정진우. 여자 일동은 진심으로 그 가련한 남자에게 동정을 표했다. 한편 포멀 드레스(formal dress)를 입고 있던 채영과 시더는 각각 나름대로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채영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삼인방들이 남겨준 전언을 떠올리고 있었다. '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백을 하면 사랑이 전해진다죠. ' ' 거기다 마음이 담긴 성탄 선물까지! ' ' 선물하면 역시 손수 뜬 스웨터일려나? ' ' 에이. 그건 너무 고리타분하다. 무개성하다고. ' 그 대목에서 채영은 1개월간 밤새 뜨고 있던 스웨터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 그렇다면 그건 어때? 목에 선물 포장용 리본을 묶어 놓고 '제 자신을 받 아주세요∼' 라던가? ' ' 너무 추상적인데? 가인 군, 의외로 그런 부분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둔하 잖아? 차라리 호텔 키를 던져주면서 '나……기다릴테니까'라는 건? ' ' 안돼. 너무 노골적이야.거기다 치프의 성격 상 그런 방법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차라리……. ' ' 차라리? ' ' 진탕 술을 마셔서 꼭지가 돌아가게 한 다음 '널 갖고 싶어!'라고 대놓고 말하는 거야! ' ' 그게 더 노골적이다! ' 채영은 머리를 감싸쥐었다.매번 뻔한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녀 석들에게 문의를 구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혹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녀석들에 대한 의존도가 나날이 높아졌던 게 아닐까? 아, 그런 건 싫은데……. '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그 옆의 시더도 안절부절 못하는 건 채영과 마찬가지. 그녀는 며칠 동안 나름대 로 준비해온 대비책을 복습하고 있었다. 때 마침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연애 에 관한 정보들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 크리스마스에 야경이 보이는 스위트 룸이라. 여기까지는 아주 이상적이야. Excellent! 거기다 혈액형 대비표에 따르면 가인과 나의 혈액형은 각각 A 형, O형이니까 그 상성도 굉장히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선물 교환이란 말인데…… 여기가 좀 미묘∼하단 말이야. 일단 가인의 타입이 천재 예술가 쪽은 아니고, 우등생 쪽도 아닌데다 교사 쪽도 아니고, 이사 장은 더더욱 아니고. 그나마 스포츠 소년이라고 해줘야할 것 같지만 그것 도 뭔가가 아니야. 아아∼ 타입을 알아야 그에 따른 파라메터의 변동을 예측해서 선물을 유추할 수 있는데! ' ……참고로 그녀가 정보를 제공받은 사이트는 '심장박동 연대기 Girl's si de' 라는 미소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팬 사이트였다. " 그나저나…… 시민 씨가 제 코디에 따라주신 건 이번 크리스마스가 처음 이죠? 어떤 심경의 변화에요? " 수정은 뜻 밖이라는듯 시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시민이 크리스 마스 파티에 드레스를 입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매번 여성용 정 장만 고집하며 드레스 입기를 강하게 거부했던 그녀였는데……. 수정의 질문에 시민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 그냥……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하지만 역시 이상 하죠? 이런 거? " "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말 잘 어울려요! 아아, 시민 씨가 제가 만든 드 레스를 입어주는 날도 다 있다니∼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분발해보는 건 데 그랬어요. " ……이 정도 분발하면 충분하지 않았나. 시민은 자신의 피너포어 드레스(pi nafore dress)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에이프런을 닮은 드레스라는 점에서 사전부터 치밀히 준비해온 점이 엿보였다. 시민은 작게 한 숨을 쉬며 생각했다. ' 그래도 이런 모습…… 나에게는 역시 어울리지 않아. ' 그녀는 자신이 왜 드레스를 입겠다고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수 정이 마리들에게 드레스를 입혀주는 걸 지켜보던 중 자신도 모르게 드레스 를 골라버렸던 것이다. 어째서 그런 충동이 생겼던 걸까? ' 충동? '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시민은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의 결심이 흔들리는 것 을 느꼈다. 정신 없이 걸어오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역으로 발을 들여놔버린 기분이었다. 이제는…… 한계라는 걸까? ' 이러다 포기하게 되는 걸까? ' 안돼! 그럴 수는 없어! 지금껏 그에 대한 증오만을 떠올리며 살아왔는데!그 걸 이제와서 지워낼 수는 없었다. 익숙해져서는 안된다. 적응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시간이 망각의 샘이라지만 그것만은 망각해서는 안된다! ' 이제와서……! ' 그때 시민의 자책을 막아주는 한 손길이 있었다. 수정이었다. 그녀는 시민 의 손을 쥐어주며 차분히 말했다. " 분명……시민 씨가 겪었던 일을 잊어버려서는 안되요. 하지만 그 때문에 지금의 자신을 망각해서는 더더욱 안되고요. 그거야 말로 그가 바라는 일 이 아닐까요? " " ……! " 시민은 두눈을 크게 뜨며 수정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수정은 미소지 었다. " 지금의 시민 씨는 지금의 모습대로 좋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해봐요.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에요. " 스스로를 좋아해보라고? 그런 게……가능할까? " 그리고 시민 씨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 수정은 시민의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 분명 시민 씨는 마음 깊은 곳에선 지금의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거에요. " 그 말에 시민은 의아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지금의 자신을 좋 아하고 있다고? 내가? 그녀는 내심 씁쓸해졌다.수정이 자신을 위로할 셈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알겠지만 이런 어설픈 동정은 안 받느니만 못했다. 하지만 시민은 수정의 다음 말에 강렬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가인 씨가 그리도 시민 씨를 좋아하겠어요? " " ……! "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점. 그것을 수정이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어찌보면 통렬하기까지 한 그 지적 에 시민은 답답한 가슴이 한번에 뚫려버린 시원함을 받았다. 수정은 시민의 어깨를 두들기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내 장담하건데 시민 씨의 이런 모습, 충분히 아름다워요. 아마 가인 씨도 눈을 떼지 못할 걸요? " " ……그럴까요? " 시민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때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가 인 일행이 회장에 도착했다. 가인은 그녀들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 오다가, 시민을 보는 순간 할 말을 잊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에 수정은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시민에게 윙크해보였다. " 그것 보라고요. " 2032년 12월 24일 20시 05분 《 The child is a king, the carolers sing The old has passed, there's a new beginning Dreams of Santa, Dreams of snow Fingers numb, faces aglow It's Christmas time, mistletoe and wine. Children singing christian ryhme With logs on the fire and gifts on the tree A time for rejoicing in all that we see……. 》 잔잔한 멜로디와 함께 '겨우살이와 포도주(Mistletoe and wine)'라는 캐롤 이 파티 장에 울려퍼졌다. 그것은 시민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직접 노래 하는, 그녀 혼자 만의 연주회였다. 잔잔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그 고유의 목소리가 캐롤의 멜로디와 어울려 녹색의 파스텔 톤을 형성 해냈다. 짝짝짝짝짝 그리고 연주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회장을 뒤엎었다.그 속에서 는 열렬히 박수를 치는 가인도 끼어 있었다. 연주를 끝내고 다가오는 시민에 게 가인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수고하셨어요, 시민 씨! 캐롤 정말 좋았어요! " " 후훗. 고마워요, 가인 씨. 그렇게 말해주니까 연주한 보람이 있네요. " 시민의 부드러운 미소에 가인은 그야말로 전신이 녹는 기분이었다. 너,너무 예쁘시다, 시민 씨! 거기다 오늘의 그녀는 드레스 차림! 옅은 노란빛의 드레 스가 조명을 받아 마치 황금빛처럼 반짝이며 금빛 머릿결과 조화를 이뤘다. 그 모습이 너무나 눈부셔서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로. 가인은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아아. 이런 시민 씨를 알고 있는 난, 너무나 행운아야……. " 윽! " 그때 그의 곁에 있던 마리와 유리가 각각 가인의 옆구리와 발등을 후려쳤다. 그가 시민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자 울컥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인 은 눈치도 없이 마리와 유리를 돌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 아,아프잖아요? 아까부터 자꾸 왜들 그러는 거야? " " ……하아. " 어쩌다 이런 둔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녀들은 자신들의 순탄치 않을 미래를 생각하자 한 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 놓고 불만을 표시하기에는 시민의 매력을 부인할 수 없는 게 또 사실이었다. 여자인 자신들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인데 남자인 가인이야 오죽했겠는가. 진우는 그런 가인의 모습을 지켜보며 하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 하나야. 자고로 여자란 자신을 잘 헤아려 주는 남자를 만나야해. 절대로 눈치 없는 남자는 만나지 말거라. " " 아빠∼ 답답해∼ " 하지만 하나는 가인에게 가지 못하게 자신을 붙들고 있는 진우가 귀찮았을 뿐이다. 그때 사회를 보고 있던 수정이 진행을 계속했다. 《 한시민 씨의 캐롤로 흥겨워진 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갈까요? 이대로 댄스 타임입니다! 뭐라고요? 》 " 댄스 타임! " 《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 " 메리 크리스마스! " 활기 찬 사람들의 외침과 함께 컬트 뮤직(Court Music)이 스피커로 흘러나 왔다.바야흐로 피스메이커가 주최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의 백미라고 할 수 있 는 댄스 타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가인의 수난이 시작됨을 의미하기도 했다. 2032년 12월 24일 20시 55분 " 헉……. 헉……. " 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 밑에 웅크리고 앉아 몸을 피했다. 그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그를 주시했지만, 가인은 제발 모르 는 척 해달라고 손짓발짓 해가며 그들에게 사정했다. ' 장난이 아니야. 제발 봐달라고……. ' 가인은 조심스럽게 고개만 내밀어 테이블 주위를 살펴 보다가, 그녀들이 없 다는 사실에 그제서야 안심하고 두 다리를 뻗었다. 이미 체면이고 뭐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체력도 기력도 바닥난지 오래. 여기서 그녀들에게 붙잡혔 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일단 사건의 발단은 그 댄스 타임에서 비롯되었다. ' 시민 씨……. 저기! 저와 함께! ' 원하는 파트너와 춤을 출 수 있다는 수정의 제안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회 장 이곳 저곳에서 남녀가 서로에게 춤을 청하는 보기 좋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 때,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가인 역시 시민에게 춤을 청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은 인물들로 인해 순탄할 수가 없었다. ' 가, 가인! 그……나와 함께! ' ' 오빠! 원해! ' 일단 가장 적극적인 마리와 유리를 시작하여. ' 가인 씨! 저와 같이 이 밤을……앗! 아니에요! 이게 아니라! ' ' 가인! 내 호감도를 올려줘! ' 알 수 없는 말로 춤을 청하는 채영과 시더를 거쳐서. ' 오빠아∼ 하나는∼ 하나는∼ 오빠랑 춤 추고 싶어! ' ' 어머. 춤은 오랫만인데. 잘 출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 가장을 도외시한 두 모녀의 일방적인 요청, 그 외에도……. ' 용서할 수 없어. 내게서 남편과 아빠의 기쁨을 빼앗아 간 네 녀석만큼은! ' 가족을 빼앗긴 진우의 분노까지 합한 총 여섯 명의 여인 플러스 알파를 혼 자서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한 50분은 17세 소년에게 있어서 다시 없을 혹독한 시간이었다. 쉴 틈 없이 파트너를 바꿔 가며 춤을 춘 것은 체력을 바닥나게 하기에 충분 했고, 그 사이에 얽히고 얽힌 오묘한 인간 관계는 그의 정신력을 바닥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때, 그런 가인을 구해줬던 것은 뜻 밖에도 브루스였다. 그는 주위의 사 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회장의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감상하고 있었는 데, 때 마침 그를 아리따운 중국인 소녀로 착각한 어떤 남자가 그에게 춤을 청해왔던 것이다! ' 으악! 참으세요, 사부 님! 뭣들 해? 다들 뜯어 말려! ' 당연히 폭발하기 직전인 브루스에게서 그 남자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진 우들은 만사를 제쳐 두고 몸으로 막았고, 그 사이를 틈 타 가인은 간신히 그 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순간이지만 수정의 코디가 가인의 마음 속에서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 어,어쨌든 다시 붙잡히는 건 사양이야. 어디론가 도망치지 않으면……. " 가인은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다가 순간 저편에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오자 재빨리 몸을 낮췄다. 그의 심장이 두근두근 불안한 울림을 흘리기 시작 했다. " 오빠! " " 가인……. 어디로 간 거지? " 유리와 마리! 거기다 첩첩산중으로 반대 편의 테이블 쪽에서는 채영과 시더 가 감시망을 좁혀오고 있었다.가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하다가 마 침 발코니 쪽의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아슬 아슬한 타이밍 으로 멋들어지게 전방 구르기를 시도! 대번에 발코니의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 좋아! ' 가인은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신속히 발코니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커튼 의 뒤에 몸을 숨긴채 조용히 그녀들이 지나가기 만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마 리 일행은 발코니 쪽은 염두하지 못했는지 곧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가인은 그녀들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안 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 하아아∼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발코니 쪽으로 걸어나왔다.둥근 타원형 바닥에 고 풍스런 난간을 둘러싼 콘크리트 발코니였다. 바깥은 안과는 달리 꽤 추웠기 에 바람이 한번 불자 전신이 으슬으슬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눈까지 내리고 있었다. ' 제길. 여기도 오래있을 때가 못 되는구만. ' 한 숨 좀 돌리다가 얼른 들어가야지. 가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난간 쪽을 돌 아보았다. 그런데…… 그 곳에는 이미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 사람은……. " 브루스? " " ……흥. 네 놈이냐. " 브루스는 가인의 부름에 시큰둥히 답했다. 가인은 의아해 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 안에 있지 않고 왜 나와있어요? 처량하게시리. " " 그건 네 놈도 마찬가지잖아. " 브루스는 싫은 일을 떠올렸는지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에 가인 은 앞의 소동들을 기억해냈다. 아, 그래. 분명 그 남자 외에도 여러 남자들 에게 시달렸었지, 브루스……. 뭔가 안타까워서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어째 입으로는 웃음부터 나와버 렸다. " 푸훗. 크크큭. 그냥 한 번 춰주지 그랬어요? 하하하. " " ……오냐. 계속 웃어봐라. 그대로 저 호수 속에 처박아줄테니. " 브루스는 대번에 인상을 찡그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참. 농담도 안 통 한다니까. 가인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화제를 돌렸다. " 그건 그렇고, 브루스. " " 왜? " 브루스는 슬슬 가인과 대화하는게 귀찮아졌는지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가 인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 그……아까 그랬잖아요? " " 뭘? " " ……예수 그리스도가 오라 능력자라고. 그거 정말이에요? " 곰방대의 심지에 불을 지피던 브루스는 뜨악한 표정으로 가인을 돌아보았다. "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럼 내가 너하고 농담 따먹기나 할 거 같 냐? " " 아, 아뇨.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실감도 나지 않고. 그런 전설에 서나 나올 듯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오라 능력자라니……. " " ……흥. 적어도 너 같이 약해빠진 놈 보다는 백만 배는 위대한 능력자다. 비교할 걸 비교해라. " " ……. " 아, 진짜! 꼭 말을 해도 어떻게 저딴 식으로 밖에 하지 못하냐? 가인은 기분이 상해 부루퉁하게 말했다. " 그래요.그래요. 어찌 저 같은 미숙한 녀석과 그런 위인을 감히 비교나 하 겠습니까? " " 잘 아는군. " " ……! " 으윽. 이러다 살인 낸다. 참아라,유가인! 가인은 잔뜩 심통이 난채 이를 갈 았다. 그런 가인의 모습에 브루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다가 문득 뭔가가 생 각났는지 조용히 중얼거렸다. " 그러고 보니…… 그도…… 오라의 주인이었군. " " 예? " 가인이 되묻자 브루스는 그를 힐끔 바라본 후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켰다. " 아니. 어차피 네가 알 필요는 없는 얘기다. 신경 꺼라. " 알 필요 없는 얘기면 꺼내지나 말든지. 가인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발코니의 창문을 통해 한창 시끌벅적한 파티장 안을 돌아보았다. 안에서는 낯익은 피스 관계자들이 한데 모여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지켜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그려질 정도로 평화로운 광경들이 다. 그렇게 가인이 혼자서 히죽거리자 브루스는 조용히 그 꼴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 ……행복하냐? " " 예? " 가인은 그가 뜻 밖의 질문을 던지자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그야 당연하죠. 제 생전 이렇게 성대한 파티는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 파티라.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낯선 단어였다. 가끔 가족들의 생일 때 케 이크를 사서 조촐히 벌인 정도가 파티라고 할만 했을까. 그것도 부모님이 바 쁘셔서 신이와 단 둘이서 할 때가 대부분이었고. ' 그 때에 비하면……지금은 이렇게 여러 사람들 속에서 정신 없이 하루 하 루를 보내고,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고, 친구들도 많이 생겼지……. ' 가인은 괜히 시큰거릴려는 코를 문지르며 미소지었다. 그는 발코니의 난간 에 기대어 한껏 머리를 뒤로 제끼며 말했다. " 그래요. 정말 즐거워요. 정말……. " 모두를 만난 지금이 너무나 행복하다. ' 부디 이 행복이……. '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수만 있다면……. 그때 브루스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인의 상념을 일깨웠다. " 호접지몽이란 말이 있지. " 가인은 천천히 젖힌 몸을 원래대로 하며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입에서 하얀 연기를 피워내는 그의 옆 얼굴은 어딘가 무미건조해 보였다. "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기분이 매우 좋아 내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갑작스레 잠을 깨니 틀림 없이 예전의 장주였다. 장주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나비인 내가 장주가 된 꿈을 꾸었는지 알지 못했다……. " ……뭐지? 그 얘기는? 가인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 무슨 뜻이에요? 그 호접……. " " 호접지몽. 장자의 제물론편에 나오는 고사다.나비가 된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무상함을 비유하고 있지. " 인생의 무상함? 어째서? 가인은 여전히 브루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충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무엇이 꿈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는 것 같은데. " 그러니까 지금의 네가 행복해하는 현실도 사실 한낱 꿈일 수도 있다는 소 리다. 어느날 문득 잠에서 깨어보니 모든 게 꿈이었다는 거야. 네가 피스 메이커에 들어온 것도, 오라 능력자가 된 것도.지금 이렇게 나를 만나게 된 것도…… 모두 꿈. " " ……. " 가인은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브루스를 바라보았다.날씨 때문인지 갑자기 몸 에 오한이 들었다. 애써 농담이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한번 든 섬뜩함이 쉽 사리 가시지를 않는다. 가인은 간신히 미소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 나,참. 농담하지 말라고요, 브루스. 그럴리가 없잖아요? 이 모든 게 꿈이 라니. 제가 꿈 꾸는 것하고 깨어있는 것도 구별 못하는 바보인 줄 알아요? " " 흥. 바보 아니었냐? 의외로군. " " 브루스! " 가인은 그가 지금껏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걸 깨닫고서 있는 힘껏 소리질 렀다. 아무래도 자신이 처한 입장을 잠시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망각한 자에게는 그에 따른 철퇴가 내려지는 법이었다. 쾅! 거칠게 열리는 창문. 그리고 파티장의 불빛이 발코니를 비췄다. 가인은 처 참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역광으로 검게 물 들은 네 명의 여인들이 서 있었다.그녀들에게서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구동성으로 흘러나왔다. " ……찾았다. " " 히이이이익! " 가인은 마리와 유리, 채영과 시더에게 각각 사지가 붙들린 채 곧바로 무도 회장으로 끌려나갔다. 그의 모습은 분명 행복해 보여야 했지만,그에 앞서 연 민의 감정이 먼저 든 것은 어째서일까? " 후……. " 브루스는 앞에 가인이 했던 것 처럼 난간에 기대어 한껏 머리를 뒤로 제 꼈다.작은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어차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 왜냐하면……진실은 없으니까. 2032년 12월 24일 21시 20분 " 지금 차원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서도 가겠다는 거냐, 쿠사나기! " 스타 사이드 호텔의 근처에 만들어진 인공 호수. 그 상공에는 두 명의 남녀 가 떠 있었다. 소리치고 있는 쪽은 에메랄드 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밤의 여 왕, 리리스. 그녀는 자신의 동료를 향해 꾸짖듯이 소리쳤다. " 네 녀석은 지금 복수에 미쳐 있어! 제 정신이 아니야! " " 크크크크. 말릴 입장이 아닐텐데? 서로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잖아? 난 녀 석의 목숨을 갖고, 넌 옴팔로스의 열쇠에 접속한다. 거기다 불멸의 태양 탄일로 녀석들은 방심하고 있어. 이 이상 좋은 기회가 어디 있을까? " 하얀 히토에기누를 입은 남자,쿠사나기는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 그래, 리리스. 사실 네 계획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야. 난 녀석의 목을 갖 기만 하면 돼. 피스 그레이. 날 겁 없이 건드린 그 인간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아, 그건 아니군. 그렇게 쉽게 끝내서는 안되지. 녀석의 눈 앞에서 저 빌딩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거야.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으로 만 들어서 아비규환을 연출하는 거지. 인간들의 비명과 절규에 몸을 맡기면 서 지옥의 이쿠사 우타(전투가)를 연주하는 거야. 크크크, 크크크크. 이 거, 이거.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걸? 한시라도 빨리 녀석의 표정이 어떻 게 변할까 보고 싶어져. 크크크크! " 두 눈을 붉게 물들이며 키득거리는 쿠사나기의 모습에 리리스는 질린 표정 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미친 자식! 완전히 돌아버렸어! 브루스의 목숨을 빼앗는 것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저 수 많은 마정 의 핵들이라니. 동반 자살이라도 할 셈이야? ' 이런 무모한 계획에 동참해줄 필요는 없어! ' 리리스는 마음을 다 잡으며 자리를 뜨기 위해 피막의 날개를 움직였다.그때 쿠사나기의 말이 리리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 이제 기회는 얼마 남자 않았다, 리리스. 원로회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지.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란 말이다. 특히 너 같은 경우는 홀 몸도 아니잖아? 응? " 이 뱀 같은 자식이……! 리리스는 이를 갈며 쿠사나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그의 말에 수긍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기회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자신이 실패할수 록 유메의 목숨이 위태로워져 간다는 걸. ' 제길! ' 리리스는 짧게 탄식하며 쿠사나기에게 말했다. " 좋아. 협조하마. 대신 흥분하다 일을 망칠 시에는……. " " 크크크크. 그건 걱정하지 마시지. 오라의 주인을 손에 넣는 건 결국 녀 석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가 되는 셈이니까.그보다 나는 네 쪽이 더 걱정스러운데……. " " ……! " 리리스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녀석은 행여나 자신이 오라의 주인에게 마음을 뺏겨 일을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리리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지만 간신히 그것을 억눌러 참았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녀석 의 말을 인정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는 녹색의 안광을 짙게 물들이며 싸늘히 대꾸했다. " 쓸데 없는 소리. 내가 홀 몸이 아니라고 말한 건 너였다. 잔소리 말고 출 발이나 하시지 그래? " " 크크크크. 좋아! 그렇다면 슬슬 여왕 님의 분부를 받들어 보실까! " 츠츠츠츠츠츠 쿠사나기는 광소와 함께 자신의 손으로 짙은 먹구름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 했다. Ｖolume.6 完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브루스의 '유가인 생태 보고서' - 이번도 잊어먹고 보관(?)하지 않은 관계로 없습니다. 죄성.. ㅡㅜ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Ｖolume.7, 8 次回豫告 =-=-=-=-=-=-=-=-=-=-=-=-=-=-=-=-=-=-=-=-=-=-=-=-=-=-=-=-=-=-=-=-=-=-=-= 次回豫告 하영식: 피스메이커의 작전부는 그 자질이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지구 방위군과 피스메이커의 제 4차 합동 회의 하영식: 언제나 의문을 표하는 것이지만, 피스메이커는 전술에 관련된 메뉴 얼 하나 갖추지 못한 것입니까! 지극히 소모적이며 즉흥적이기 짝 이 없습니다! 현장의 대원들에게 판단에 맡기겠다니! 이 얼마나 무 책임하기 짝이 없는 소리입니까! 이번 142번 작전 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피스 레드가 몬스터로 융합했던 것으로 인해 피스메이커는 대 몬스터 기관 으로서의 자질을 의심받는다. 정진우: 현장의 판단에 맡긴다는 것은 저희 피스메이커의 방침일 뿐입니다. PM조약에 따라 외부의 간섭이나 항의를 받을 의무는 없습니다. 하영식: 의무? 지금 의무라고 했소! 당신들 피스메이커는 자신들이 세상의 수호자인 양 착각에 빠져 있나본데! 부디 착각하지 말고 똑똑히 들으시오! 당신들을 지원해주는 그 막대한 자금력과 공권력에는 우리 외에도 많은 기관들이 협조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회의가 진행될 수록 양 측의 골은 깊어만 가는데……. 진 사령관: ……크윽. 민수정: 사령관 님! 그러던 중, 돌연히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진 사령관! 브루스: (가혹한 일이로군. 남겨진 사람이나……지켜보는 사람이나…….)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ＳＳ Ｖolume.7 "제 4차 합동 회의" 변수는 존재한다! 그럼으로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시더: 동인지란 포괄적으로 말해서 일반적으로 출판되는 서적과 달리 개인 또는 써클이 모여 사비를 들여 출간한 책을 말하는 거야. 우리나라 의 동인은 문학에서 출발되었지만, 요즘 인기가 있는 것은 바로 만 화나 애니메이션 또는 소설을 소재로 재 창작한 동인지들이지. 야오 이 동인지나 레즈 동인지가 꽤 강세이기는 한데……. 틈틈히 귀축이 나 조교물들도 눈에 띄고 있어. 한국의 검열 수준을 생각하면 이건 놀라운 일이라고. 뭐, 어차피 내 취향은 아니지만……. 아, 그러고 보니 촉수물은 꽤 흥미가 동하더라. 결박 페티시즘을 자극하는 신체 상해 측면에서 여성에게 심각한 공포 코드를 주는 비정상적 장르의 발달이 흥미로워. 연구 대상이야. 가인: ……이해할 수 없어. 변수는……존재한다. 次回豫告 성마리……. 그녀는 내게 있어 절벽에 핀 가련한 백목련이었다. 가련하면서도 고결함을 잃지 않은 한 떨기의 야생화. 그녀는 내게 있어서 진리요, 빛이요, 생명이었으니. 그런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앞에서 밝혔다시피 그녀는 내 손이 닿지 않는 저 높은 곳에 있었다. 감히 그녀에게 내 더러운 손을 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고독하게 있음으로 해서 그 아름다움을 몇 곱절이나 승화시 켰다. 나날이 아름다워져 가는 그녀의 모습은 내 삶의 기쁨이자 보람이었다. 그래서 난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단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내 죄는 정화되었고, 희망찬 미래를 꿈 꿀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이제 참을 수 없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 내 순수를 더럽히려는 너, 유가인! 불쾌하다. 불쾌하다. 불쾌하다. 너의 그 악랄한 손길에 그녀가 타락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난 견딜 수가 없다. 혐오스럽다! 너의 마수로부터 그녀를 지켜내겠다. 더 이상 더럽혀지기 전에 그녀를 구해내고야 말겠다. 죽인다. 그 방법 밖에 없음을 난 깨달았다. 너, 유가인은 박테리아다. 구더기다. 기 생충이다. 완벽히 박멸시키지 않는 한 몇 번이고 다시 그녀를 오염시킬 것 이다. 그녀와 네가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 만으로도 네 구역질 나는 포자는 내 아름다움에 더러운 곰팡이를 설게 할 것이다. 완벽히 없애주겠다. 완벽히 처단해주겠다. 그것만이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ＳＳ Ｖolume.8 "엇나간 야상곡" 유가인: 누, 누구 없어요? 어이! 이봐요! 사람이 갇혔어! 제발 좀 구해줘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소리쳤다. 부르짖었다. 끊임 없이. 끊임 없이. 유가인: 사람 살려! 하지만 널 구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어!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7 話 네크로맨서(Necromancer) 카이 브릿드 =-=-=-=-=-=-=-=-=-=-=-=-=-=-=-=-=-=-=-=-=-=-=-=-=-=-=-=-=-=-=-=-=-=-=-= 《태풍 야기가 경남 남해안 지방 등을 강타해 최소 60명에서 100여명이 사 망하거나 실종되었고 대규모 정전 및 통신불통, 열차 탈선 등 사회 기간 망이 마비됐습니다. 일부지역은 통신이 두절돼 인명 및 재산피해 집계가 늦어지고 있어 피해 규모는 앞으로도 크게 늘어날 전망입니다.》 콰아아아아아 지독한 폭풍우였다. 송전탑을 휘게할 정도의 바람이 사방팔방에서 미친듯이 날뛰었고, 그에 따라 도로 표지판들과 가게의 간판들이 위험하게 허공을 날 아다녔다. 시간 상으로 봐서는 아직 낮이었건만 하늘의 짙은 먹구름이 도시 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 전역의 전기가 나갔는지 도시는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였다. 고오오오오오 거리에서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초속 60미터의 바람이 가로 수까지 뿌리째 뽑아내는 마당에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거리를 돌아다닐 사람은 없겠지만……. " 도시 전체에 인기척이 없군. " 브루스는 팔라딘 대가 점거한 남해안 182구역의 시외 버스 터미널에서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뒤에 있던 진우는 AI슈츠를 장착하며 고개를 끄덕였 다. "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를 마중나와야할 현지 병력들과도 연락이 두절되었 으니, 원. 아무래도 수색 팀을 보내야 할 것 같네요. " " 쓸데 없는 짓이야. " 브루스는 단호히 진우의 말을 끊으며 여전히 창 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폭우까지 동반한 비바람이 불고 있어서 산사태나 옹벽 붕괴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전기가 나가 어두운 시외 버스 터미널의 대기석에 앉아있던 시민은 브루스에게 물었다. " 쓸데 없는 짓이라뇨? " " 이건 녀석이 만들어 놓은 무대니까. " 우르르르르 그때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져내렸고, 브루스의 얼굴이 섬뜩하게 하얀 빛을 띄었다. 유리는 그 모습에 몸을 움츠렸고, 마리는 긴장한 얼굴로 수중의 오 라 소드를 움켜쥐었다. 시민은 그녀들이 불안해하자 화제를 돌릴 겸 진우에 게 말을 걸었다. " 그나저나…… 가인 씨는 혼자서 잘 지내고 있을까요? 밥이나 잘 챙겨 먹 을지 걱정이네요. " " 하하하.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걱정이십니까? 일단 제 집 사 람에게 녀석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으니 적어도 밥을 굶는 일은 없을 겁 니다. " 진우는 그렇게 말하며 마리와 유리를 돌아보았다. " 그러니까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을 마무리짓고 돌아가는 데에만 신 경 쓰자고요! 소년을 기다리게 하면 안되니까! " " 피스! " 마리와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힘차게 경례를 붙였다. 한층 밝아진 그녀 들의 모습에 시민도 소리 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브루스는 가볍게 코웃 음을 치며 물고 있던 곰방대를 품 속으로 집어 넣었다. " 흥, 그럼 무대 위로 올라가볼까. " 第 17 話 네크로맨서(Necromancer) 카이 브릿드 언제나 새학기의 학교는 소란스러운 법이다. 그것은 가인이 다니는 한성 고 등학교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한성 고교는 올 3월을 유래 없는 빅 센세이션 들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그 첫번째 센세이션은 대원 그룹의 후계자 제갈 영의 졸업이었다. 그의 졸업식은 그의 학창 생활만큼이나 비범하기 짝이 없었다. 졸업식장을 축하 화환들로 가득 채우는 기염을 토해내며 학년대표로 연설을 시작한 그는, 연설이 끝날 즈음 하늘에 대기하고 있던 체펠린(Zeppelin)비행선에서 수천만 송이의 장미 꽃잎들을 일제히 터뜨렸던 것이다. 그 바람에 한성 고교의 운동장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장미의 바다가 되어버 렸고,그 지독한 장미 향기 속에서 수 십명의 학생들은 질식성 치아노제를 일 으키며 줄줄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 무시무시한 일대 장관을 연출해낸 장본인, 제갈 영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했다고 하는데. ' I'll be back.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두번째 센세이션. 그것은 신생 H.F.P의 탄생이었다. 제 22대 학생회장 제갈 영이 졸업을 함에 따라 23대 회장의 선출이 불가피해졌는데, 제갈영은 뜻 밖 에도 이 대원 그룹의 후계자에게만 주어지는 권리를 자신의 부관, 호일준에 게 모두 양도했던 것이다. 언제나 제갈영의 뒷처리를 도맡아하느라 마음 고생이 심했던 호일준으로서 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 동안 선대 회 장을 보필하면서 참아넘기던 폐해를 남김없이 개혁,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하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의 재임 기간은 다음 제갈 가문의 후계자가 한성 고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끝을 맺는다고 하는데.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센세이션. 그것은 올해로 2학년 1반이 되는 1학년 3반의 반 배정이었다. 가인의 1학년 3반은 별 다른 인원 변동 없이 그대로 2학년 1반으로 진급되었는데, 이것은 수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성 고교의 꽃 이유리와 테레이아,거기다 브루스까지. 그들이 또 다시 한 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학급의 반발은 이미 예정되 었던 일인 것이다. 2학년 1반을 제외한 전 학급은 거센 불만을 터뜨리며 재 심을 요구했지만 이사장과 교장은 이를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분노한 학생들은 일제히 봉기, 대대적인 농성을 일으키며 한성 고교의 커리큘럼(curriculum)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서 제 23대 학생회장 호일준의 능력이 빛을 보였다.그는 새롭게 개편된 신생 H.F.P를 이끌고 단 반시진 만에 농성군을 완벽히 제압해낸 것이 다. 봉기의 주도자들은 학생회의 이름 아래 단호히 처벌되었고 결속력을 잃 은 농성군은 자연히 해산되었다. 이 1차 봉기군 해산은 호일준의 철권 통치를 기리는 첫번째 행보가 되었고 또한 학생회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탄생 계기가 되었다. ……라는 얘기는 잠시 미뤄두고서. 어쨌든 가인과 유리만이 3학기 때 브루스가 했던 말을 참고 삼아,이번 사건 의 뒤에도 피스메이커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낼 수 있었다. 누구의 말마따나 모르는 것이 약인 법이다. 그렇게 폭풍과도 같은 3월이 지나고 어느덧 4월. 가인은 2학년이 됨으로써 교실도 한 층 높아진 3층에서 창 밖을 내려다 보 고 있었다. 한성고의 운동장에는 낯선 얼굴의 새내기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 화창……하군. "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푸르름과 하얀 뭉게 구름.뜨겁 지도 않고 적당히 기분좋게 내리쬐는 햇볕. 그야말로 이상적인 날씨였다. 이 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봄의 정기가 느껴질 정도로……. ' 그런데 이런 날씨에 태풍이라고? ' 가인은 현재 한반도의 남부를 태풍 야기가 휩쓸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이건만 그렇게 극과 극으로 날씨 차이가 날 수 있다니. 뉴스에서 속속들이 올라오는 속보는 그야말로 실 감할 수 없는 대 피해 뿐이었다. 사망자와 실종자 수는 100여 명을 넘어섰고, 손보업계에 따르면 그 피해 건수만 해도 4만 여건. 손보사가 지급해야할 보 험금은 6000억원에 달한다고 했다. 6000억원이라……. 역시 실감이 나지 않는 액수다. ' 그것보다도 4월달에 태풍이라니. 태풍내습은 대게 여름철이잖아? ' 뉴스에서도 한 해에 3개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태풍이 4월달에 찾아든 것은 전대미문이라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기상청은 이것을 온실 효과로 인한 기온 이상이라고 보고 있었지만……. ' 하지만 태풍 피해 지역으로 피스 대원들이 파견되었다. ' 피스메이커는 이 비정상적인 태풍을 몬스터의 소행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가인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 그렇다면 어째서 피스메이커는 나 혼자만 수도에 남겨둔 걸까? ' 수도 방위가 목적이라면 차라리 브루스가 남는 게 효율적이었을 텐데. 이상한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어째서 몬스터는 계속 수도에서만 공격을 감행하고 있느냐는 것. 분명 들은 바로는 각 국에서 몬스터의 공격을 받고 있는 지역도 대부분 그 나라의 수도 였다고 한다. ' 하지만 대재해가 일어났던 L.A는 미국의 수도가 아닌데? ' 거기다 진 사령관도 몬스터의 목적은 단순한 파괴 공작이 아니라고 얘기했 었다. 그리고 몬스터를 제거하는 것을 '사냥'이라고 표현했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피스메이커는 나에게, 아니 피스 대원들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걸까? " 하아. " 가인은 한숨을 쉬며 애써 어지러워지려는 머리를 흔들었다. 매번 똑같은 의 문을 떠올리고, 매번 똑같은 의심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의문을 풀어주지 않는다. 진 사령관도. 수정 씨도. 브루스도. ' 하지만 물어보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거지……. ' 왠지 지금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알아버렸다간…… 더 이상 피스메이커로 활 동할 자신이 없어질 것 같았다. 변화가 없는 삶. 이대로 안주하는 것. 난 이것을 바라는 걸까? ' 이걸로…… 충분한 걸까? ' 그때 지금껏 고민하던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 처럼 한 떠들썩한 목소리가 가인의 정신을 일깨웠다. " 야! 야! 가인아, 쟤 정도라면 괜찮지 않냐? " " ……. " 가인의 옆에는 어느샌가 다가온 재영이 창밖을 가리키며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히죽거리고 있었는데 창가에 매달리다시피 한 그 모습이 심히 불안해보였다. " 우하하하! 이번 신입생들은 수준이 높아! 아아주 높아! 기대가 크다고! " 가인은 그의 말에 대꾸하기 싫어 잠자코 있다가 재영이 주섬주섬 뭔가를 꺼 내들자 그제야 그를 돌아보았다. " 어디 보자∼ 요 체크. 요 체크. 일단 1학년 각 반의 후보들은 선출해냈고 ∼ 이제부터는 숨은 유망주들을 찾아내는 일만 남았나. " 후보? 유망주? 이건 뭔 소리야? 가인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슬그머니 재영이 꺼내든 수첩을 바라보았다.그 리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첩에는 이번에 새로 입학한 여학생들의 사 진들과 각종 프로필들이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더듬었다. " 버, 벌써 돌아본 거냐. " " 훗. 미녀를 찾아 헤매는 순수한 열정이라고 해줘라. 이거 만드느라고 꽤 고생했다고. 일일히 내 발로 뛰어다니며 디카로 사진 찍고 교무실의 학적 부를 뒤져보고. 크으! 이건 내 순수와 땀의 결정체야! " 요 며칠간 동분서주한다 싶더니 다 이것때문이었구만. 가인은 역시나 자신의 예상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 재영의 행동에 혀를 찼 다.그러다 문득 반 가인회에 생각이 미친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어라? 야. 네 발로 뛰어다녔다고? 그럴 필요 없잖아? 그냥 반 가인회의 애들에게 말만 하면……. " " 어허. 이런 사적인 일에 어찌 반 가인회의 공권력을 함부로 사용하리요! 반 가인회는 회원 모두의 것. 그 힘은 본 회의 이득을 위해서만 사용되어 야 한다! " ' 평소에는 사적인 일에도 잘만 써온 주제에. ' 가인은 재영의 말이 가당치도 않다는듯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으로는 이상함을 떨칠 수 없었다. 분명 여자 신입생들의 정보는 반 가 인회의 공적인 이득이 되기에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사적인 일이라고 표현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녀석은 그런 왜곡된 표현을 사용한 거지? ' 무슨 이유로? ' 그런 가인의 의문은 뒤이어 들려온 한 여학생의 목소리에 의해 풀릴 수 있 었다. " 재영 군, 뭐 하고 있었어어? " 후다다닥 순간, 재영은 전광석화 같이 수첩을 품 속에 집어 넣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는 얼굴로 뒤돌아 보았다. 그 곳에는 그의 여자 친구이자 한성고 유도 부의 떠오르는 메치기 여왕 유시내가 서있었다. 가인은 그런 재영을 보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어쩔 수 없는 수컷의 모습이라고. " 어어어하하하. 시, 시내구나! 언제 온 거야? 요즘 신입생들 동아리 입부 문제로 한창 바쁜 줄로만 알았는데? " " 으으응.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남자 친구 만나러 올 시간은 충분히 있어. 그리고 아까 재영 군이 요 체크 라고 외칠 때부터 여기에 와 있었어. " " ……. " " ……. " " ……. " 선녀처럼 활짝 웃고 있는 시내의 얼굴에 재영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그는 생존 본능에 입각한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변명이라는 수단을 채택했다. " 그, 그게 아니라! 그 체크라는 건! 그러니까 하! 하하! 맞아! 다른 게 아 니라 바로 오늘 수학 시간에 있을 쪽지 시험을 말하는 거였어! 마침 시험 에 나올 예상 문제를 가인이가 얘기해주고 있었거든! 그렇지, 가인아? " " ……아, 응. " 가인은 마지못해 답해주었다. 그 놈의 팔년 지기, 아니. 올해로 구년지기로 군. 그 놈의 구년지기 친구라는 게 뭔지……. 시내는 그런 가인을 돌아보며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아. 그랬군요. 쪽지 시험이었군요? 호호호. 호호호호. " " 하, 하하하. 하하하하. " 재영과 가인은 어색하게 어깨동무를 하며 마주 웃음을 터뜨렸다. 너,넘어간 건가? 어떻게든 넘긴 거야? 그런 거지? " 호호호호. 그럼 그 순수와 땀의 결정체라는 건 뭘까요? 사적인 일이라는 건 뭐였죠? " " ……! " 넘기기는 개뿔이! 가인과 재영의 얼굴이 참혹하게 굳어졌다. 그 둘이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 무 말도 하지 못하자 시내는 손가락을 튕겼다.그러자 그녀의 뒤로 반 가인회 의 오른 팔, 왼팔이라 불리우는 엔비Q와 제로스 1호가 나타났다. 시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 동생 분들. 제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보고해주시겠 어요? " " 예! 최근 일주일간 회장 님은 직접 신입생들의 현지 상태를 파악하시고 체계적인 리스트를 작성하고 계셨습니다! " " 그 신입생이란……여학생에 한해서 만이겠죠? " " 예! 그렇습니다! " 시내의 질문에 엔비Q와 제로스1호는 거침없이 답했고, 재영은 가슴이 찢어 지는 듯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엔비Q와 제로스1호의 멱 살을 잡아 흔들었다. " 어째서! 어째서 너희들이 나를 고발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기쁠 때도 함께 기뻐하고 죽을 때도 함께 죽겠다고 맹세한 사이였지 않은가! " " ……내조가 없는 원수란 균형을 잃기 마련입니다. 부디 회장 님을 걱정하 시는 형수 님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길. " 형수 님이라고. 언제 그렇게 지위가 격상된 거지……. 가인은 반 가인회의 권력을 암암리에 손에 넣은 시내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내는 자 포자기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 친구의 팔짱을 끼며 가인에게 인사했다. " 그럼 가인 군. 저희는 이만 실례할게요. 자자, 재영 군은 잠시 밖에서 나 랑 얘기 좀 해. " " 하, 하하. 가, 가인아. 가인아! 가인아아아아아! " 재영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애처롭게 가인을 부르짖으며 교실 밖으로 사라져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로스1호와 엔비Q는 굵은 눈물 을 흩뿌렸다. " 크흑. 부디 저희의 불충을 용서해주시길! " " 이것도 다 반 가인회의 밑거름이 되어가는 과정.지금의 고통은 훗날 저희 의 피와 살이 될 것입니다. 견뎌 주십시오! 그리하여 불꽃과 함께 되살 아 나시는 겁니다! " " ……어이. 그러니까 너희들은 단순히 시내가 무서울 뿐인 거잖아. " 가인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 와. 이걸 전부 테레이아가 만든 거야? 대단한데! " 점심 시간.가인은 모처럼 학교의 옥상에서 테레이아와 점심 식사를 하고 있 었다. 평소 멤버였던 유리와 마리는 피스메이커의 일로 지방 파견, 재영이는 시내에게 끌려간 이후 소식 두절이었기에 오늘은 특별히 테레이아와 단 둘이 서 식사를 해야했다. 테레이아는 자신이 싸온 도시락에 가인이 감탄을 금치 못하자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그나저나 작년 이맘 때 쯤에도 이렇게 단 둘이서 점심을 먹었지? 왠지 모 르게 그리워지네. " " 그러게. 그때는 마리 선배도 몰랐고, 유리도 없었으니까. " 가인은 새삼 작년 4월 달에 학교 옥상에서 테레이아와 점심을 먹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 도플갱어에게 납치되었던 그녀를 구해준 보답으로 테레이아 가 도시락을 싸줬었지. ' 날 구해준 보답이에요, 기사 님. ' 그렇게 속삭이던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대담했다.하지만 벌써 1년 동안 그녀의 대담함을 접해와서 그런지 가인은 더 이상 테레이아의 말과 행 동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도리어 도발적이지 않은 그녀는 그녀답지 않다고 까지 여기게 되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익숙해졌다는 증거일까? ' 그러고보니 테레이아는……. ' 그때의 도플갱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쉽게 잊을 수 없는 무 서운 경험이었을텐데. 하지만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잊어버린 양 태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가 인은 식사를 하고 있는 테레이아의 옆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표 정 어디에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 어서 먹지 않고 뭘 해, 가인? " " 아, 그래. " 가인은 테레이아가 자신을 돌아보자 그제서야 식사를 시작했다.그녀가 싸온 것은 예전의 함박 스테이크 같은 서양 정식이 아닌, 계란 말이와 감자 조림, 햄 부침 등을 위시한 수수한 고교생 도시락이었다. 가인은 뜻 밖이라는듯 말 했다. " 헤에. 테레이아도 이제 한국인이 다 됐구나? 반찬이 딱 한국 식인 걸? 거 기다 이 김치 찌게까지! " " 한국인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한국인의 입맛에 따라야지. " 테레이아는 방긋 웃으며 거침없이 선방을 날렸다. 가인은 그녀의 의미심장 한 말에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난 이미 익숙해졌다고. 이쯤되면 멋지게 받아쳐주는 여유를 보여줘야겠지. " 하하하. 그럼 나도 외국인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외국인의 입맛에 따라야 하는 건가? " " 가, 가인……. " 제딴에는 농담이랍시고 한 가인의 말이었지만 테레이아는 도리어 얼굴을 붉 히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 그,그런. 설마……설마 가인도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줄은……. 아, 이를 어떡해야하지……. 나 가슴이 너무도 벅차서. 아아아! 가인! 내 사랑이 통한 거지?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지! " 덥썩 되려 역효과.가인은 태클에 가까운 테레이아의 포옹에 거의 넘어지다시피 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마! ' 그러게 농담도 평소 하던 사람이 해야 하는 법이다. 가인은 그런 작은 교훈 을 깨달으며 자신의 위에 올라탄 형색이 된 테레이아를 곤란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그 둘의 진한 애정 행각에 옥상에서 밥을 먹던 다른 학생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2학년들이나 3학년들이야 매번 보다시피 해온 광경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눈치들이었지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저마다 '불순 이 성 교제'니 '저 남자가 바로 소문의 여자 흡혈귀'라느니 하며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 테,테레이아! 잠시만! 다른 사람들이 보잖아! " " 괜찮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도. 난 지금 가인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아. " 어이! 내가 괜찮지 않다고! 가인은 테레이아를 매정하게 밀쳐내지도 못하며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평소라면 유리나 마리가 있어서 어느 정도의 견제가 가능했지만 지금의 테레이아는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가인 은 자꾸만 자신에게 밀착해오는 그녀에게서 최대한 몸을 떨어뜨리려 노력했 다. 제, 제발 참아줘, 테레이아! " 너희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몬스터니 피스메이커니. " 흠칫! 그때 갑자기 옥상에서 들려온 한 남학생의 목소리에 테레이아와 가인의 몸 이 경직되었다. 둘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즉각 몸을 일으켰다. 이,이게 무 슨 소리야? 몬스터? 피스메이커라니? " 누구 하나 제대로 본 적도 없잖아? 매번 한 구역이 폐허가 되는 일들이 빈번하면서도 뉴스나 신문에서는 그 사건을 보도 조차 하지 않아. 의도적 으로 매스 미디어를 조작한다는 게 눈에 보인다고. " " 그러게. 대중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기관이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어. " 그들이 돌아본 곳에는 웬 남학생들이 점심 식사를 하며 잡담들을 나누고 있 었다. 그 잡담의 주제가 피스메이커에 관한 것이라 가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대부분의 아이들 사이에서 피스메이커와 몬스터의 일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 다. 20여년간 계속된 생활에 익숙해진 것이기도 했지만, 피스메이커의 언론 통제가 너무도 빈틈 없이 행해졌기에 그냥 도시 전설 쯤으로 치부되었던 것 이다. 하지만 한번 화제에 올랐다 하면 지금과 같이 불신과 비난의 화살들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가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 거렸다. 어이. 지금 너희 들이 얘기하는 당사자가 바로 여기 있다고. " 거기다 그 몬스터라는 것도 말이 안돼. 다른 차원에서 넘어오는 이계의 생물체라니. 그런 거, 공상 과학에서나 나오는 거잖아? 어설픈 설정에 그 럴싸한 시츄에이션을 달은 에일리언 같은 거 말이야. " " 실제로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피스메이커니 몬스터니. 다 정부에서 꾸 며낸 거 아냐? " 테레이아도 가슴이 뜨끔 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설픈 설정에 그럴싸한 시츄에이션이라고? 그럼 너희들 옆에 있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제멋대로 잘도 떠들어대는군. " ……. " 그러다 가인과 테레이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둘은 서로를 돌아보 며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 하, 하하하. 하긴 그, 그렇네. 믿을만 한 게 못되지. 암. " " 호, 호호호. 에,에일리언. 너무 웃긴다, 그거. " 한 피스 대원과 한 몬스터는 그렇게 상황을 얼버무리다가 이내 기운이 빠져 어깨를 늘어뜨렸다. 설마 자신들이 민간인들에게 그렇게 비춰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아아아. 허, 허무해. 그때 남학생들 중에서 한 학생이 개인 소장용 노트북을 꺼내들며 말했다. " 아냐. 적어도 꾸며낸 얘기는 아닌 거 같아. 너희들 이거 봤어? 인터넷 상 에서 유포되고 있는 동영상인데……. " " 동영상? " 학생들은 곧 노트북에 몰려들어 한 동영상을 감상하기 시작했고, 가인과 테 레이아도 슬그머니 그들의 뒤로 다가갔다. 유포된 동영상이라니? " ……! " 순간,그 동영상을 바라보던 가인과 테레이아는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를 지 를 뻔했다. 그들의 귀로 학생들의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 아, 나도 이거 봤어. 정말 잘 만들었던데? 진짜같더라. " " 하지만 특수촬영 기법으로 보기에는 너무 리얼하지 않냐? " " 야, 너희들 끼리만 아는 소리하지 말고 나한테도 좀 가르쳐 줘라.이게 무 슨 동영상이라는 거야? " 화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화면에서는 한 푸른 전신 슈츠를 입은 남자가 인간 같지 않은 움직임으로 도시를 누비며 거대한 괴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원거 리에서 촬영을 했는지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가인 만은 확 신할 수 있었다. 화면에 찍혀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고 확인 사살 처럼 노트북의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 이게 피스메이커. 몬스터를 상대하는 피스 대원이라는 거래. " " ……! " 테레이아는 떨리는 눈으로 가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그 어느때 보다 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이미 늦은 건가. " 언더 시티 유레카에 위치한 진 사령관의 개인 사무실. 그 어두운 방 안에서 진 사령관은 음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 있던 수정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면목없다는듯 말했다. " 죄송합니다. ISOC에 압력을 넣는 것 만으로는 자료가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요. " " 멋지게 한 방 먹었군. 설마 이런 방법을 쓸 줄이야. " 진 사령관은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수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지구 방위군 쪽일까요? 일단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이들은 그들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 " 아니. 메리트가 없어. 그런 일을 해봤자 자신들의 입지만 흔들릴 뿐이다. 차라리 대피 지역의 민간인들 중 누군가가 촬영했다고 보는게 낫겠지. " " 그건 불가능해요. 쉘터에는 모든 민간인들이 신원 조회 기록이 남아 있습 니다. 망막 체크도 끝난 상태에요. " 수정의 단호한 어투에 진 사령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스크린을 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피스메이커의 정보부가 보낸 경남 지역의 태풍 현황 이 실시간으로 링크되고 있었다. 수정은 그를 따라 스크린으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 역시 몬스터와 관련된 일일까요? 저 태풍도. 이번 사태도. " " 그렇게 생각하는게 앞 뒤가 맞겠군. 아마도 이쪽이……. " 진 사령관은 스크린에 떠오른 태풍 피해 지역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 ……눈 속임이겠지. 유인책. 적은 분명 수도에서 모습을 드러낼 거다. " " 그런! " 수정은 당황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 그렇다면 어째서 피스 블루만 수도에 남겨둔 건가요? 그가 아무리 오라의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불안 요소가 많습니다. 사령관 님은 알고 계시 잖아요? 그들도 가인 군을 노리고 있다는 걸! " " 오라의 주인은 가이아를 떠나서는 안된다. " 진 사령관의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수정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꾸만 위험한 길을 선택하는 것 같 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붙잡을 수 없었다. 단지 곁에서 그가 가는 길을 지켜보기만 해야했다. " 다른 사도들이 가만 있지 않을 거에요. 비숍(Bishop)에서도 우리의 움직 임을 내내 주시하고 있고요. " 수정의 말에 진 사령관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그는 그녀에게 눈 길조차 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 어쩔 수 없지. 속성(屬性)의 교류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하는 수 밖에. " 그것을 위해서라면……. '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 진 사령관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 앉았다. 거센 태풍의 영향으로 182구역의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불어난 바 닷물로 인해 해안선과 밀접해있던 지역은 대부분 물에 잠겨 버렸고, 지대가 낮은 시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상가의 물건들은 휩쓸려나가고, 차체가 가벼 운 소형차들은 거짓말 처럼 물 위로 떠다녔다. 진우를 위시한 피스 대원들은 건물 위에서 범람하는 물들을 피하며 팔라딘 대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 B3. 응답하라, B3. " 《여기는 B3.》 진우의 부름에 무전에서 팔라딘 대의 부관 유한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현재 피스 대원들과 팔라딘 대는 각기 개별 행동을 하고 있었다. 도로 유실 로 인해 이동이 용이하지 못한 팔라딘 대는 구조 작업을 벌였고, 나머지 피 스 대원들은 몬스터의 수색 작업을 벌였다. 유리와 마리, 시민은 모두 진우의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 그쪽의 상황은 어떤가? " 《사망자 0. 부상자 0. 현재까지 발견된 거주자 없음. 마을 전체가 조용하 다.》 보고를 하는 한진도 지금의 상황에 당황스러웠는지 애써 냉정한 척 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우와 피스 대원들의 낯빛이 근처의 전신주에서 튀기는 스파크로 인해 유난히도 창백해 보였다.단지 브루스만이 감정의 변화를 보이 지 않고 있었다. " 일단 다른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계속 구조 작업에 임해주길 바란다.15분 간격으로 연락을 계속 취할 테지만……. " 진우는 평소와는 달리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만약 우리에게서 연락이 끊긴다면 지체 없이 182구역에서 철수하도록. " 《……라져.》 잠깐의 침묵 후, 한진의 대답이 들려왔다.그렇게 연락을 마친 후 진우는 브 루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덩달아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된다. 공식 적으로는 피스 그린 정진우가 일행의 리더였지만, 지금 이 자리의 실질적인 리더는 피스 그레이 브루스였다. 브루스는 비에 젖어 잔뜩 무거워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기며 모 두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 뭘 그렇게 힐끔 거리는 거냐? 내 꼴이 우스워 보인다, 이거지? " " ……. " 모두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브루스는 그다지 리더로 서 사태의 정황을 분석해줄 마음이 없는듯 했다. 마리는 AI헬맷 속에서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브루스. 당신도 우리처럼 AI컴플릿트 세트를 착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 같은 폭우를 계속 맞는 건 몸에 좋지 않습니다. " " 쓸데 없는 소리. 그런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너희같이 미숙한 녀석들에게 나 필요한 거다. 그리고 인계를 벗어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질병같은 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 마리는 기껏 걱정해줬더니 되려 야단만 치는 브루스의 태도에 정나미가 떨 어져 세차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라리 상대를 말아야지……. 진우는 일행의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 자자! 다들 비도 맞고 기분도 최악이겠지만 조금만 더 집중합시다! 유리 양, 뭔가 느껴지는 게 없나요? " 진우의 질문을 받은 유리는 옅은 핑크빛을 전신에서 흘리며 능력을 전개하 고 있었다. 그녀는 신중히 사념의 정보들을 읽어들이며 답했다. " ……주민들이 남긴 단편적인 사념의 조각들만 남아있을 뿐이야. 모두 과 거의 것. 현재에 느껴지는 사념은 없어. " " 그렇다는 말은……. "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시민이 침중한 목소리를 흘렸다. " 이 일대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 " 아니면 모두 죽었다던가. " 시민의 뒤를 잇는 브루스의 말에 일행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그렇다. 죽은 사람은 사념을 전하지 않는 법이다. 유리가 실종된 182구역의 주민들을 찾기 위해 마인드 디텍트를 전개했지만, 어떠한 수확도 얻을 수 없는 게 그 증거 였다.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브루스에게 외쳤다. " 그,그렇지 않아! 단순히 의식을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잖아? " " 그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의식을 잃고 있다?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 생각 하는 거냐. " 브루스는 냉정히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시민은 떨리는 유리의 어깨를 감 싸안아주며 타이르듯 말했다. " 어디까지나 브루스 님은 최악의 상황을 얘기한 것 뿐이니까 너무 신경쓰 지 말아요, 유리 양. 그리고 브루스 님도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유리 양에게 겁주지 마세요. " " 흥. 물러터지기는. " 브루스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땋은 머리에서 물을 짜냈다. 하지만 짠 보람도 없이 머리는 다시 폭우로 젖어버렸다. 진우는 그 모습에 실소를 터뜨렸다가 브루스의 무시 무시한 살기에 오금을 저려야만 했다. "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부분 부분 남아있는 사념의 조각들을 따라가는 수 밖에 없겠군요. 유리 양, 수고스럽지만 계속 부탁합니다. " " ……응. " 유리는 다시 마인드 디텍트를 전개하며 건너편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올랐고 진우와 일행들은 하나 둘 씩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브루스는 그들을 뒤따라가기 전에 잠시 적막에 감싸인 도시를 돌아보았다.짙은 먹구름 으로 인해 회색 빛을 띄고 있는 도시는 너무나 음습해 보였다. ' 희미하지만…… 느껴진다. ' 브루스는 느낄 수 있었다. 사념의 조각들이 이어진 길의 끝에 존재하는 낯 익은 기운의 정체를. 그것은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미약하기 짝이 없었기 에 삼계를 느낄 수 있는 브루스가 아니었더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 이다. ' 기다리고 있는 건가? 우리가 먼저 접근하기를. '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브루스의 입가로 희미한 미 소가 그려졌다. '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마. ' 스스슥 그는 유령의 도시 속으로 소리 없이 몸을 날렸다. " ……. "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 내내 가인은 말이 없었다. 그의 옆에서 발 걸음을 맞추고 있던 테레이아는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긴장, 초조, 불안. 그 모든 감정이 그에게서 엿보이고 있었다. 테레이아는 그가 무엇 때문에 그리도 고민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표현할 수 없다. 그 고민을 들어줄 수도 없다. 자신은 단지 그에게 클래스메이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여야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친구로 남아있어야 했다. ' 친구……. ' 하. 테레이아는 그 말을 떠올린 자신을 비웃었다. 친구라니. 뭐가 친구란 말인 가? 애초에 그런 개념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어떤 미사 여구를 가져다 붙이더라도 인간 관계는 상호간의 이익이 성립되어야만 존재 한다. 더구나 친구라는 관계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손 쳐도, 가인과 자신 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왜냐하면 거짓이니까. 그에게 보여준 자신의 모습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거짓이었으니까. 믿음 과 신뢰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신과 그를 친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 새삼 자괴감이 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 테레이아는 쓴 웃음을 지으며 가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향해 그녀는 마음 속으로 말을 걸었다. ' 가인. 내 이름은 사실 테레이아 민체스터가 아니야. ' 내 이름은 리리스. ' 그리고 네 앞에 보여지는 이 모습도 사실은 내 진짜 모습이 아니야. ' 몬스터. 너희들이 우리를 부르는 이름. 그것이 바로 나의 진정한 모습. ' 무엇보다 나는……. ' 처음부터. ' 너에게……. ' 옴팔로스의 열쇠에……. ' ……의도적으로 접근했어. ' 그것이 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그녀의 진실이었다. 지금까지도 말하지 못했 고 앞으로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얘기하지 못하는 한 그녀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아니. 얘기를 한다고 쳐도…… 그의 친구는 될 수 없다. ' 그때는 이렇게 거짓 친구 행세 마저도 못하게 되겠지. ' 이렇게 너의 옆에서, 네 모습을 바라보며, 네 생각을 하는 것 조차 못하게 될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한 치 앞도 보이질 않는 막막함에 속이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그런 기색을 내비추지 않으며 되 려 밝은 목소리로 가인에게 말했다. " 가인.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표정이 어두워 보여. " " 어? 아, 아니. 아무 것도. " 가인은 당황하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솔직한 반응이 한층 더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그가 당연히 얼버무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 어보는 자신이 너무나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테레이아는 가인의 팔짱을 끼며 심통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 흐응.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나한테도 말 못할 비밀이라는 거야? "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가식. " 흑. 결국 난 가인에게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거구나……. 우리의 사이가 특별하다고 여겼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어……. " " 아,아냐. 테레이아. 정말 아무 것도 아니야! 별 거 아니라고! " 가식. " 별 게 아니라고? 그럼 별 게 있다는 소리잖아. " " 으윽. " 가식. 당황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리리스? 그가 너 에게 완전히 속아넘어갔다는 것에 저열한 쾌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거야? ' 아니야! ' 하지만……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 나에게는 사명이 있으니까. 책임져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그를 알기 전에 유메를 먼저 알아버렸으니까. 테레이아는 처연히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그녀가 자신 때문에 침울해 진 거라 착각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말했다. " 그,그러니까 오늘 유리와 마리 선배, 브루스가 학교에 안 왔잖아? 그, 왠 지 허전하다 싶어서……. 매일 같이 붙어 다니다 갑자기 없으니까……. " " ……. " " 하, 하하! 그래. 단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진짜 별 거 아니지? 내가 이래서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 " ……. " 가인은 여전히 테레이아가 말이 없자 머쓱해져서 애꿎은 머리만 긁적였다. 그러다 결국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소리쳤다. " 미안, 테레이아! " 테레이아는 그 난데 없는 사과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인의 행동을 이 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왜…… 사과하는 거야? " 잘못한 건 난데. 사과해야할 건 난데. 널 속이고 있는 건 난데. 왜 네가 사 과하는 거지? 어째서? 그렇게 영문을 몰라하는 그녀에게 가인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 테레이아에게 거짓말을 해버렸거든. " " ……뭐? " 거짓말? 테레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 가인. 내게……거짓말을 했어? " " 응. 사실, 고민했던 이유는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일 때문이지. " " 다른, 일? " 테레이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 기 시작했다. 가인은 주저하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 어떤 일인지는……아직 테레이아에게 말해줄 수 없어. 하지만……. " 가인은 테레이아의 어깨를 짚으며 미소지었다. " 언젠가는. 언젠가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을 때가 오면…… 반드시 얘기 해줄게. 지금껏 얘기하지 못했던 일들까지 전부 다. " " ……가인. " 테레이아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은 자신이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 것이다. 자신은 도저히 꺼 낼 수 없었던 얘기를 지금 그는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혹시 내가 섭섭하게 했더라면 사과할게. 그, 테레이아가 특별하 지 않아서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 가인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었다. " 나에게도 테레이아는 소중한, 아니 특별한 친구니까. " 특별한……친구. 그 말만이 귀에 맴돌고 있었다. 테레이아는 그 말을 했던 가인의 입술을 뚫 어져라 쳐다보았다. 허전했던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 풍족함 을 주체할 수 없었다. '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아. ' 거짓말쟁이라고 욕해도 좋아. 하지만, 하지만……. ' 행복해. ' 지금만큼은 마음껏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지금만큼은 자신과 그가 적이라 사실을 잊고 싶었다. 몬스터도, 피스메이커도. 그 모든 것을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 테, 테레이아? " 가인은 갑작스레 자신을 끌어안는 테레이아의 행동에 얼굴을 붉혔다. 하지 만 테레이아는 개의치 않고 더욱 힘주어 그를 끌어안았다.그녀의 속삭이는듯 한 목소리가 가인의 귓가에 들려왔다. " 으응. 그래. 꼭, 꼭 얘기해줘야 해……. " 언젠가. 네 말대로 얘기를 할 수 있을 때가 오면……. ' 그때는……. ' 그때는 나도 꼭 너에게 얘기할테니까……. 말하지 못했던…… 말할 수 없었 던 내 비밀들을 전부 다……. ' 반드시 얘기할테니까……. ' 하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질리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용문달양(龍門達陽). 터널의 양쪽 입구 이마에는 그러한 한문이 새겨져 있었다.브루스는 거센 폭 우 속에서도 흥미가 동한다는듯 유심히 눈 앞의 터널을 살폈다. " 용문을 거쳐 산양(山陽)에 달한다……라. 멋지군. 이것이 동양 최초의 해 저 터널인가? " 길이 461미터에 너비 5미터, 높이 3.5미터의 이 콘크리트 터널은 브루스의 말마따나 바다 밑을 지나는 해저 터널이었다. 182구역은 관광 도시 답게 여 러 가지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해저터널도 그 중 하나였다. 브루스는 터널 입구 근처의 다 떨어진 표지판을 바라 보며 해저 터널의 역 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진우가 그 앞을 막아섰다. " 사부 님의 관광 욕구는 일이 다 끝난 후에 천천히 채우도록 하죠? 일단은 조사가 먼저입니다. " " 쳇. " 브루스는 짧게 투덜거리면서 터널의 입구로 발을 옮겼다. 그것을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다가 옆의 유리에게 물었다. " 유리 양, 정말 사념이 이쪽으로 이어지고 있나요? " " 응. 정확히는 저 섬으로 이어지고 있어. " 유리가 가리킨 곳에는 해저터널의 출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도가 있었다. 미륵도와 182구역을 연결해주는 다리들이 모두 태풍으로 무너졌기에 섬으로 향할 수 있는 길목은 오직 여기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 뿐인 길목 도 시원찮았던 것이, 바로 곁에 바다가 있었기에 일대 전체가 물에 잠겨 있 었던 것이다. 더구나 육지보다 낮은 위치에 뚫려있는 해저터널은 말할 것도 없이 물에 잠겨 있었다. 마치 폭포수를 방불케하는 것 처럼 주위의 바닷물이 터널의 입구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마리는 주변의 전신주를 붙잡은채 물살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몸을 지탱시 켰다. 터널로 떨어지는 물 소리 때문에 소리치지 않으면 다른 이들과 얘기할 수 없었다. " 하지만 이 안으로 들어갈 수나 있겠습니까? 터널 내부는 이미 물로 한 가 득 잠겨 있을텐데! " " 어쩔 수 없죠! AI슈츠의 중력장 조절로 물살에 떠밀리지 않도록 주의해서 가는 수 밖에! " 진우는 마리의 물음에 큰 소리로 답하며 브루스의 뒤를 따랐다. 일행 중 유 일하게 AI컴플리트 세트를 착용하지 않은 브루스가 걱정되었지만 그것은 기 우에 불과했다. 브루스는 흡기공을 이용하여 물이 차지 않은 벽면을 수직으 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와 유리는 그를 올려다 보며 혀를 찼다. ' 역시 인간이 아니야……. ' 그렇게 일행은 천천히 해저 터널로 진입했다.이미 해가 떨어진지 오래라 가 뜩이나 어두운 터널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다행히도 피스 대 원들의 AI헬맷에는 적외선 고글이 장착되어 있었기에 이런 어둠 정도야 문제 가 되지 않았지만, 브루스는 맨 몸이면서도 홀연히 선두로 나서고 있었다. 심권을 터득한 그는 그 만큼 심안이 발달되어 있었서 굳이 시각에 의존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촤아아아아아 귓가로는 물이 쓸려가는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은 내리막 이었기에 물이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았지만, 내려갈수록 점점 수면이 상승 하여 이내 가슴까지 차올랐다. 시민은 AI슈츠의 중력장을 끌어올려 뒤에서 자신을 내리치는 수압을 견뎌내 다가, 문득 신장이 제일 작은 유리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과연 그녀의 걱정 대로 유리는 간신히 목만 물 밖으로 내민채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 악! " 그렇게 심적으로 불안해지자 집중력이 흐트러진 유리는 자신을 지탱시켜주 던 중력장을 컨트롤해내지 못하고 물살에 떠밀려 버렸다. 그것을 마리가 간 신히 잡아주며 진우에게 소리쳤다. " 멈추십시오! 이 이상의 전진은 무립니다! " " 하아. 어쩔 수 없나. " 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AI슈츠로 중력장을 이용해 이 동하는 것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이 앞으로는 더욱 물이 차있을게 분명 했고, 그만큼 숨쉬는 것도 힘들어질 것이다. 아무리 만능인 AI컴플리트 세트 라고 해도 산소통이 달려있지 않은 이상 물 속에서의 장기적인 활동은 무리 였다. ' 차라리 물살에 떠밀려 신속히 지나가는 것은 어떨까나. ' 위험한 도박이다. 그랬다간 일행이 뿔뿔히 흩어지는 것은 물론 몬스터의 기 습에도 대응할 수 없다. 수중 형 몬스터와 조우라도 할 시에는 꼼짝없이 당 하고 말 것이다. " 아니. 이대로 계속 전진한다. " 그때 터널 전체에 은은하게 브루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진우들 처럼 목 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는데 그 목소리는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확연 히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패턴 그레이의 능력과 관계되는듯 했다. "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물의 흐름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물 이 저지대에 모이지 않고 반대편으로 계속 빠져나가고 있어. " " ……! " 모두의 표정에 긴장하는 빛이 스쳐지나갔다. 일행은 새삼 주위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향했다. 붉게 물든 적외선 시야 사이로 자신들의 거친 숨 소리 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과연 브루스의 말대로 터널의 가장 저지대인 중간 지점은 물이 고여있지 않 았다. 수면은 가슴 부근에서 멈춰있을 뿐, 물살은 용케도 브이자 지형을 관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형 상 낮은 지대부터 물이 차는 건 당연한 일. 이 런 현상은 있을 수가 없었다. 역시 이상 능력이 관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 응? ' 유리는 애써 마리와 시민의 손에 의지해 힘겹게 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자신에게 다가오는 뭔가를 볼 수 있었다. ' 쓰레기……인가? ' 바닷물에 휩쓸려 터널로 들어온 잡동사니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물체가 점점 가까워질 수록 유리는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 꺅! " 유리의 비명에 모두의 시선이 그것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리의 입에서도 낮 은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자신들에게로 떠내려온 것. 그것은 사실……. ' 시체! ' 썩은 나무토막같은 그것은 잔뜩 물에 불은 시체였던 것이다! 진우는 인상을 굳히며 시신이 유리들에게 닿지 않도록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 182구역의 주민……인가? " 시신을 조사하던 진우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입고 있는 옷가지 나 물품들을 봐서는 이 지역의 주민인듯 했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까지 발견 되지 않았던 182구역의 거주인이 이런데에서 시체로 나타난 것일까? 거기다 시신의 사인도 묘하기 그지 없었다. 시신은 마치 전신의 수분이 빨 려나간 것 처럼 피부며 장기가 잔뜩 오그라든 상태였던 것이다. 도저히 익사 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전방을 주시하던 시민이 다급히 소리쳤다. " 모두! 앞을 봐요! " " ……! " 그곳에는 방금 전의 시체와 마찬가지 상태인 시체들이 계속해서 떠내려 오 고 있었다. 하나같이 말라 비틀어진 미이라들.그것도 한두 구가 아니었다.시 체는 끊임 없이 계속해서 떠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일행이 있는 지역을 자신 들로 가득 채우려는 것 처럼. " 아, 아아, 아아아아. " 유리는 주위에 떠오르는 시체들에 진저리를 치며 시민에게 매달렸다.마리도 이 참상에 할 말을 잃고 오라 소드를 들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다. 주위를 둘러봐도 시체, 시체, 시체…… 시체 뿐이었다. 어두운 물 위로 일그러진 시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져 간다. 분명 방 열 기능이 확실한 AI슈츠를 입고 있건만 피스 대원들은 뼛 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 이건……! ' 브루스는 자신이 붙어있는 벽으로 다가온 시신을 살펴보다가 눈에서 이채를 띄었다. 미이라처럼 말라 비틀어진 시체들. 그것은 자연 계의 생물이라면 응 당 가지고 있어야 할 정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가 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서 육신을 남겨둔채 생명의 핵만 빼앗아간 것이다. 무슨 목적으로? 이 수 많은 사람들의 정을 대체 어디에 사용하려고? ' 설마! ' 브루스는 한 가지 예상을 떠올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설마! 설 마 그 녀석이! 《크크크크크크.》 그때 터널의 어둠 저편에서 음산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진우 일행은 화 들짝 놀라 서둘러 공격 태세를 취했다. 그들은 이 웃음 소리의 주인이 누구 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우는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 쿠사나기! " 콰아아아아아 순간 검은 물이 요동을 치며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덩달아 시체들 까지 몸을 뒤틀며 수면 위로 뛰어 올랐다.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 떼 처럼 푸드득 홰를 치는 그 모습들이 너무나도 그로테스크했다. " 크, 크크크크, 크크크크큭! 늦어! 늦어! 늦어! 늦어! 늦어! " 증발한 물들은 짙은 먹구름으로 탈바꿈 되어 한 데 뭉치더니 이윽고 한 사 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요르문간드의 여덟 화신 중 하나인 쿠사나기 였다. " 흑! " 하지만 드러난 그의 모습에 시민은 신음을 삼켰다. 구현된 쿠사나기의 모습 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하얀 백지장 같은 얼굴 밑으로 있어야 할 몸이 없었다. 단지 척추로 추정되 는 물체가 목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마치 어둠에게 몸이 먹혀 들어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브루스는 인상을 굳혔다. 아마 쿠사나기의 저 모습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무리하게 마정의 핵을 남발했던 결과일 것이다.한 눈에 보아도 그가 소멸 직 전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우는 전신에서 오라를 끌어올리며 쿠사나기에게 소리쳤다. " 용케도 살아있었구나. 그대로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 " 크크크크. 꽤나 얕보였던 모양이로군. 너 같은 잔챙이에게서 까지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 " 뭐야! " 진우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작년 크리스마 스때 자신의 눈 앞에서 갈기 갈기 찢어져 죽은 민간인의 모습을! 마정의 핵 에 조종당했다고는 하지만 원래대로 돌아올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구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끝내 구해내지 못했다. 도리어 자신의 손으로 민간인을 죽여 버리기 까지 했다. 그 이후 몇 날 며칠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던가! 어차피 쿠사나기를 죽인다고 해서 자신이 민간인을 죽인 죄는 씻겨지지 않 을 것이다. 그것은 끝까지 자신이 안고 가야할 업보였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 네 놈의 이죽거리는 면상 만큼은 박살내지 않으면! ' 쿠사나기는 진우에게서 흘러나오는 투기가 심상치 않게 변하자 가볍게 안색 을 바꿨다. 잔챙이라고 하대를 하기는 했지만 이 눈 앞의 인간은 무시 못할 능력의 소유자였다. 한 순간의 방심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 크크크크. 일단 여기까지 찾아온 너희들에게 일말의 감사를 보내지. 꽤나 공들여서 준비해왔는데 혹시나 찾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었거든. " " 준비란 건 이걸 말하는 거냐? " 브루스는 가볍게 코 웃음을 치며 물에 뜬 시체들을 가리켰다.쿠사나기는 두 눈을 짙은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이를 드러냈다. " 아니. 내 정성을 그 정도로 평가하면 곤란하지. " 푸확!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물 속에서 수 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정의 핵에 사로잡힌 민간인들이 변화한 아메노 무라쿠모 노 츠루기들이었다. 푸드드드득 거기다 터널의 안쪽에서도 조류 형의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들과 곤충형 의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이 터널의 가측에 벌떼처럼 매달려서 달려오 고 있었다. 그 엄청난 대군의 모습에 진우 일행은 숨이 막힐듯한 압박감을 받았다. ' 마, 맙소사. 182구역의 민간인들이 전부……몬스터가 된 건 아니겠지? ' 그렇게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피스 대원들과는 달리, 브루스는 단지 인상만 찡그릴 뿐이었다. 그는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네 놈에게는 빚이 있었지. " 쿠사나기로 인해 자신은 눈 앞에서 오라의 주인이 탈취당하는 걸 빤히 지켜 보기만 해야 했다. 비록 그를 되찾을 수는 있었지만 한번 느낀 무력감은 쉽 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브루스는 벽을 박차고 시체들로 뒤덮인 물 위에 홀연히 내려섰다. 부력으로 간신히 떠있는 시체를 밟고 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몸은 가라앉지 않았다. 마치 무게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다. 쿠사나기는 광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 크흐흐흐! 네 놈들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자리에서 모두 죽는 거 다! " 그 말을 끝으로 수 백마리의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가 피스 대원들에게 달려들었다! " 네 놈들이 이들에게도 오라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 모습은 변했다고 하지만 같은 동족이거늘! " 마정의 핵이 심어진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은 182구역의 민간인들을 그 숙주로 삼고 있었다. 통상의 몬스터 상대하듯 함부로 오라 능력을 사용했다 간 그 속의 민간인에게도 피해가 미친다. " 크크크크! 어디 마음껏 동족상잔 해보시지! " " 치사한 자식이! " 진우는 사람의 목숨까지 담보로 삼는 쿠사나기의 방식에 분해하며 오라를 끌어올렸다. 처음부터 쿠사나기는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 말로 최악의 상황! 인간의 심리 마저 이용하는 뱀 같은 술수였다! [키키키키키!]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의 기괴한 울음 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것 처럼 터널에 울려퍼졌다. 싸울 의욕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그 압도적인 개체 수에 유리는 평정심을 찾지 못했다. 그때 물 속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던 그녀를 안아 올리는 한 손길이 있었다. 시민이었다. 그녀는 유리의 허리를 안아 자신의 가슴께까지 끌어올리며 천천 히 입을 열었다. 라아아아아 그녀의 입에서 고운 선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음정의 주파수 세기 의 분포를 조정하여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패턴 옐로우의 능력, 포르 만트였다. 포르만트는 시민의 품안에 있던 유리에게서부터 주위의 피스 대원들에게 까 지 그 영향을 미쳤다. 유리는 몸의 떨림이 가라앉자 새삼 시민의 능력에 감 탄했다. 시민은 그런 유리의 얼굴을 마주하며 아무 말 없이 미소지었다. " ……고마워, 시민 언니. " 마음이 안정되자 유리는 한층 더 냉정하게 몬스터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그 리고 자신이 저들에게 겁 먹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패턴 핑크. 그 힘이 있는 한 저들은 자신에게 손 끝 하나 대지 못할 것이다. 시민은 오라 능력을 사용함으로서 자신에게 몸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유리 는 시민에게 감사를 표하며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촤자자자작 유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의 의식과 접속을 시 작했다. 마인드 키퍼로서 자각한 그녀는 한계에 달하는 운산(運算) 능력으로 마정의 핵에 사로잡힌 민간인들의 의식을 해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겹겹이 쌓인 정신 장벽을 해제하고 그 의식과 접속, 마정의 핵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부풀려진 감정들을 다스린다! [쿠와아아악] 순간, 유리와 시민을 덮치려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들을 감싸던 검은 먹구름들이 눈 녹듯 사라지며 마정의 핵 째 소멸하기 시작했다. 숙주가 저번과 같은 오라 능력자가 아닌 이상, 민간 인의 의식을 해킹하는 건 유리에게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마정의 핵에서 해방된 민간인들은 줄 끊어진 인형들 처럼 그들의 앞으로 떨 어져 내렸고 검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 유리의 활약에 힘 입어 다른 대원들도 맹렬히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대군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라아아아아아 라아아아아아 시민의 입에서 한 번에 두가지의 음파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지금껏 자제해 오던 능력, 에코였다. 폐와 성대를 매질로 삼아 탄성파를 전파시키는 기술이 었기에 그 동안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마음껏 에코를 사 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시민의 AI헬맷에 새로이 장착된 나르키소스(Narcissus) 덕분이었다. 피스메이커의 기술 부에서 패턴 옐로우에게 추가해준 이 장비는 오리하르콘 이 셀프 라이팅 기능을 수행 시 에테르 성질을 띈다는 것을 이용, 음원과 반 사면 사이에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폐를 매질로 삼지 않고도 에코를 생성시 킬 수 있게 해주었다. 즉 이 미디엄 제너레이터(Medium Generator)로 인해 시민은 더 이상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에코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키이이이잇] 피스 대원들에게 다가오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의 움직임이 하나 둘 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음파의 늘어뜨림으로 지연시키는 기 술, 페르마타였다. 페르마타와 같은 경우 사용 대상이 하나의 개체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다수 의 적들을 상대할 때는 용이하지 않았지만, 에코와 병행해서 사용하자 전방 위 공격이 가능해졌다. " 하아아아아! " 진우는 느려진 적의 움직임을 피해내며 그 안으로 주먹을 내찔렀다. 칠성권 제 5의 발경으로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 뿐만이 아니라 그 안의 숙주에 게 까지 타격을 주겠지만……. 터어어엉 놀랍게도 그의 발경은 숙주를 제외한 마정의 핵만을 파괴시켰다. 가속으로 인한 전사경으로 진우의 주위에 있던 물살들이 폭발하듯 터지며 터널의 벽 을 두들겼다. 진우는 거세게 고함을 내지르며 재차 다가오는 아메노무라쿠모 노 츠루기들에게 발경을 날렸다. " 칠성권 문곡! " 칠성권 제 4의 발경.상대의 주심 만을 공격하는 심경에 격중당한 적들은 하 나같이 괴성을 내지르며 숙주에게서 독립되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까지만 해 도 염정의 경지에 머물러 있던 그가 지금은 한 단계 위인 심경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타 사이드 호텔에서 실수로 민간인을 죽여버린 진우는 자신의 미숙함을 자책하면서 브루스에게 뼈를 깎는 수련을 받아왔는데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 고 있었다. 푸화아아아악! 가속으로 전사경을 끌어올린 진우는 최소한의 움직임 만으로 아메노 무라쿠 모노 츠루기들의 사이를 누비며 심권을 펼쳤다. 그렇게 심경으로 아메노무라 쿠모노 츠루기들이 숙주에게서 떨어져 나가자 그 뒷처리는 피스 레드 성마리 가 맡게 되었다. 특별히 융합 형 몬스터에게 대항할 능력을 가지지 않은 그녀는 사전에 진우 와 대응책을 세워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콤비네이션이었다. 진우가 심경으로 마정의 핵을 분리해내고, 마리가 그것을 처리한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실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일식(一式) 섬광(蟾光)! " [쿠와아아악] 커튼을 찢는 소리들과 함께 몬스터들은 붉은 섬광의 격자격세(擊刺格洗)에 수십 조각으로 난도질 되었다. 그녀는 예전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가 일식 섬광을 발도술로 시전한 것에 서 강한 영감을 얻었는데 그것은 동생 아인이 이형 잔월을 썼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었다. 본질을 우선시 하는 그 검술에서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낀 것 이다. 마리는 그때의 영감을 떠올리며 일식 섬광을 단지 형식에서 끝내는 게 아닌 하나의 본질로서 구사해냈다. 그러자 오라 소드가 그려낸 붉은 빛의 선들은 한 치의 끊어짐도 없이 공간 곡선의 축폐선(縮閉線)을 만들어 냈다. 그 붉은 선의 자취는 닿는 족족 모든 것을 베어냈으니 가히 섬광의 향연.섬 광무라고 부를 만 했다. " 이, 이런 일이! " 그런 피스 대원들의 강세에 쿠사나기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황 은 작년의 크리스마스 때와 너무나도 판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인질극으로 서의 의미는 잃어버린지 오래. 이래서야 단지 머릿수로 밀어 붙이는 꼴이다. 설마 마정의 핵에 이런 대응책들을 가지고 나왔을 줄이야! " 네 녀석이 준비하는 동안 우리도 놀고있던 건 아니라는 거다! " 브루스는 노호성을 내지르며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로 가득 찬 터널의 한 가운데로 뛰어내렸다. 그는 시체를 발판 삼아 내려선 뒤 크게 호흡을 들 이켰다. 그 짧은 딜레마를 놓치지 않고 주위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개미떼와 같은 모습 이었다. " 타아아아앗! " 그러나 브루스는 당황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번개같이 회전하여 전사경을 끌 어 모았다. 그렇게 진기를 끌어모은 그는 일단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마귀 형 몬스터의 아래턱을 개산벽으로 올려치고 그 반동으로 반대편에 있던 몬스터 에게 승룡퇴를 날린 후, 연환칠격으로 전방에 있던 몬스터들을 꿰뚫고 지나 갔다. 그 일격 하나 하나가 문곡의 힘이 실린 심경이었기에 아메노 무라쿠모 노 츠루기들은 마정의 핵 째 산산조각 나버렸다. [키이이이잇] 그때 물살을 가르며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가시 모양의 등 지느 러미가 하나 있었다. 귀상어의 외양을 띈 거대한 수중 형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였다. 그것은 물 속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브루스를 향해 뛰 어 올랐다. 한입에 그를 삼켜 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브루스는 되려 그 머리 좌우 측면의 돌출된 부위를 거세게 진각으로 밟으며 쏘아지는 탄환처럼 앞으로 날아 올랐다. 그는 터널을 벌집 처럼 가득 메운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의 무리들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업장(業障) 소멸! " 칠성권 녹존! " 촤아아아악 칠성권 제 3의 발경! 그 거대한 경기의 힘 앞에 몬스터들은 파도에 부서지 는 모래 성 처럼 산산히 소멸되어 갔다.그리고 녹존의 위력은 거기에서 그치 지 않고 수십 미터 뒤에 위치한 쿠사나기에게까지 밀려 들었다. " 크헉! " 간신히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을 방패 삼아 녹존을 막아낸 쿠사나기.그 는 식은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이,이것이 한낮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힘이란 말인가! ' 어째서 녀석과 나는 이렇게나……! ' 쿠사나기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그와 자신의 사이에 놓 여진 능력의 공백을 도저히 메꿀 방법이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네 녀석은 이렇게나 강한 거지? 나는 내 모든 것을 불태우 며, 심지어는 생명까지 불태우고 있는데! 어째서 녀석은 저렇게나 태연자약 한 얼굴로! ' 손 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거지? ' 분하다! 분하다! 자존심이나 명예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금껏 자신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나 비참하게 만드는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그 가 있음으로 해서! 네 녀석, 피스 그레이가 있음으로 해서 나, 쿠사나기라는 존 재는 한 없이 처량해진다! ' 보지마! ' 유리관에 갖힌 자신을 내려다 보던 그 차가운 눈동자들! 수 차례의 실험에 괴로워하던 자신을 무감각히 관찰만 하던 그 모습들! ' 그때로 돌아가는 건가? ' 간신히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모르모트 취급은 끝난 것이 라고 생각했는데! 능력을 얻음으로써! 누구도 무시못할 힘을 얻음으로써! 멸 시와 고통의 나날은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 인정할 수 없어! 이런 건! ' 쿠사나기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 나는! 질 수 없어! " 패배는! 실패는! " 나는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단 말이다아아아앗! " 쿠사나기의 산발한 머리칼들이 살아있는 것 처럼 꿈틀거리며 브루스에게 날 아들었다. 그것은 브루스의 전신을 옭아맨 후 터널의 천장으로 그를 끌어올 렸다. 그와 동시에 천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이 일 제히 시퍼런 칼날들을 그에게로 찔러온다.하지만 브루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 고 큰 소리로 외쳤다. " 지금이다! " " ……! " 그 외침에 쿠사나기는 두 눈을 부릅 뜨며 천장에서 정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지하 터널의 물살을 좌우로 가르며 자신에게 날아드는 녹색의 잔광 이 있었다. 그 잔광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순간, 어느샌가 쿠사나기의 앞까 지 도달해 있었다.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물체의 잔향 소리가 뒤이어 터 널에 울려퍼졌다. 치이이이잉! 그리고 쿠사나기를 강타하는 쇼크 웨이브! 미처 방어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브루스에 의해 방어진이 뚫리자 속전속결로 가속 능력을 전개한 진 우가 슈팅 스타를 사용한 것이다. 기체 속을 음속보다도 빨리 전달되는 강력 한 압력파가 정면에서부터 쿠사나기를 덮쳤다. 콰직! 머리 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쿠사나기는 그대로 허공에서 박살나 버렸다.아 바타라고는 하지만 정신구현화 능력에 의해 구성된 쿠사나기의 살과 뼈들은 산산히 폭발하여 터널의 좌우에 육편을 뿌렸다. 그야말로 완벽한 죽음이었다. 완벽한 소멸! [크에에엑!] 마리 때와는 달리 양산된 마정의 핵들은 피동(被動)적이었기에 조정자를 잃 자 그 능력을 상실하고 숙주에게서 떨어져나갔다. 그러자 터널 안을 가득 채 우고 있던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이 일제히 줄 끊어진 인형처럼 터널의 물 속으로 처박혔다.그 몸을 감싸던 짙은 먹구름들이 걷혀 나가자 정신을 잃 은 민간인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 하아. 하아. 끝난 건가. " 그제야 어느 정도 한숨을 놓은 피스 대원들은 긴장을 풀었다. 다들 한계에 가까운 능력을 장시간 사용했기에 숨들이 거칠어져 있었다.가장 정신력을 많 이 소모한 유리 같은 경우는 아예 다리가 풀려 물 속으로 가라앉을 뻔한 걸 시민이 붙잡아 주었다. 마리는 아직도 전투의 여운이 남아있는지 오라 소드의 절삭성 커터를 거두 지 않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진우는 그런 일행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 천히 터널의 한 쪽 벽을 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앞의 폭발에서 찢겨져 나간 쿠사나기의 안면이 가면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 두 눈과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심히 섬뜩해 보였다. 브루스는 흡기공으로 천천히 천장에서 벽면으로 걸어내려와 쿠사나기의 안 면 앞에 섰다. " 이로써 세 번째……인가. " 그의 젖어 있던 몸은 어느샌가 말라 있었다. 전신기화(全身氣化)로 묻어있 던 물들이 남김없이 수증기로 증발한 것이다. 브루스는 밑으로 늘어진 땋은 머리가 물에 닿지 않도록 자신의 목에 둘러 메며 생각했다. ' 앞으로 남은 것은 다섯. 이제 슬슬 본체가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은데. ' 아마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이 한국으로 모여들 것이다. 그것은 분명 피스메이커에게 강한 위협이 되겠지만 브루스로서는 내 심 바라는 바였다. 그는 원하고 있었다. 좀 더 강한, 그리고 자신에게 죽음 마저 인지시켜 줄 수 있는 적수들을. '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껏 살아온 이유니까. ' 되도록이면 오라의 주인에게는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그 아무 것도 모 르는 녀석을 자신의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를 이용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정이라도 든 건가. ' 브루스는 아직도 이런 인간적인 감정에 집착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이럴 수록 그가 천계에 도달할 날은 멀어져만 갈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닿지 못 할지도 모르지. 그는 끝이 나지 않을 잡념을 떨쳐 버리며 일행에게 소리쳤다. " 상황은 끝났다! 이만 철수한다! " " 피스! " 진우는 시원하게 경례를 붙이며 팔라딘 대에 무전을 치기 시작했다. 이 터 널에 널린 민간인들과 시체들의 뒷처리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왔 다. 아마 수해 복구에 맞먹는 대작업이 될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태 풍에 피해를 입은 수해민으로서의 기억 조작이 행해질 테고, 시체들은 사망 자 수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이다. 좀 더 미륵도까지 조사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나머지 발견되지 않은 주민들은 모두 그 곳에 안치되어 있을 것이 다. 살아있든, 죽어있든. 진우는 새삼 죽어버린 쿠사나기에게 분노를 느꼈다. 《키, 키히히…….》 " ……! " 그때 벽에 걸려 있던 쿠사나기의 안면에서부터 희미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 왔다. 피스 대원들은 그야말로 입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처럼 놀랐다. " 아, 아직도 살아있어……? " 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순간, 감겨있던 쿠사나기의 눈이 번쩍 뜨이며 붉은 안광이 흉흉히 빛났다. 《암! 살아있고 말고! 네 놈들을 놔두고 어떻게 나 혼자 죽을 수 있단 말인 가!》 " 으윽. " 그 원기 어린 목소리에 마리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유독 이런 괴기현상 에 약한 그녀로서는 몸서리가 쳐질 만한 장면이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창백 한 얼굴 가죽이 말을 하다니! 《킥! 키킥! 죽을 수 없지! 죽을 수 없어! 꺄하하하하! 이대로 두 손 놓고 죽을 성 싶으냐!》 턱 그러나 브루스는 그렇게 실성한 것 처럼 웃어대는 쿠사나기의 얼굴을 사정 없이 짓밟았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쿠사나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그래서? 두 손 놓고 죽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냐? " 《히,히히히히! 내가 처음에 뭐라고 말했지? 네 놈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했지? 이히히히힛! 그 말대로다! 하나도 남김 없이!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죽여주지!》 브루스는 천천히 인상을 찡그렸다. 녀석의 말이 단순한 죽기 직전의 발악으 로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미 손 하나도 까딱할 수 없 는 주제에 뭘 할 수 있다고……. ' 이 자리에서? ' 순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브루스는 진우 일행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이런 빌어먹을! 모두 당장 여기서 나가! " " ……? " 영문을 몰라 주춤 거리는 피스 대원들. 브루스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이 런 협소한 터널에서 녀석이 모습을 드러낼 때 부터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거기다 182구역을 덮친 이상 태풍! 녀석이 준비했다고 말한 건 이런 의미였던 건가! 《이미 늦었어. 너희들이 여기로 들어온 이상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던 거다.》 쿠사나기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브루스의 발밑에서 나오는 게 아닌 터널 전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브루스가 발을 떼어 보니 어느샌가 쿠사나기의 얼 굴은 그곳에서 사라져 있었다. 시민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 어, 어떻게 된 거죠? 이건 대체! " " 아까 물의 흐름이 이상하다고 얘기했던가? 바로 그거다. " 브루스는 무섭도록 굳은 표정으로 터널의 안 쪽을 노려보았다. " 이 터널 자체가 녀석의 몸 안이었던 거야. " " ……! "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182구역을 뒤덮고 있던 태풍도, 터널에 물이 고여 있지 않았던 것도, 녀석이 머리로만 구현되어있었던 것도. ' 터널 같은 건 애초에 부숴진지 오래였다. ' 단지 이곳은 녀석이 꾸며놓은 무대,스스로의 몸을 변이시켜 만든 위장 터널! 태풍은 쿠사나기의 육신이 변이를 일으킴으로서 발생한 차원 왜곡 현상이었 던 것이다! 브루스는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피스 대원들에게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우리는 스스로 걸어 들어온 거지. ……녀석의 입 안으로. " 투화아아아아악! 순간, 터널의 외벽들이 일제히 검은 먹구름이 되어 사라지며 바닷물과 진흙 덩어리가 한데 뭉쳐서 피스 대원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 헉! " 어두운 방 안. 곤히 잠들어 있던 가인은 갑작스레 잠에서 깨어났다.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몸을 둘러 보았다. 전신이 식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그는 머 리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 뭐지? 그 꿈은? ' 진우와 마리, 유리, 시민이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 앉는 꿈이었다. 그리고 그와 중에도 브루스가 자신을 향해 뭔가를 끊임 없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수중 속이라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지 만 거센 물살이 자신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가인은 단지 진우 일행이 깊은 해저 속으로 가라 앉는 걸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 하아. " 가인은 작게 한 숨을 쉬며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 보았다.자정이 넘어 가고 있었다. 자리에 누운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잠이 다 달아나 버렸다. 그 알 수 없는 꿈 때문에. ' 나도 참……. 오늘 하루만 시민 씨들과 헤어진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꼴이 람. '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자신도 꽤나 외로움을 잘 타는 모양이었다.가인은 시 민 씨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런 악몽을 꾼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꿈은 꿈일 뿐. 그리고 꿈과 현실은 흔히 반대라고들 하지 않는가? ' 그래. 별 일 없을 거야. 내일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들 웃으며 돌 아올 거야. ' 그렇게 불안함을 가라앉히며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 옆 자리에 누워 있던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 가인아, 아직 안 자니? " " ……. " 그곳에는 진우의 아내 미연이 막 잠에서 깨어났는지 눈을 비비고 있었다.가 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악몽을 꿨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이 불편한 잠 자리가 그 원인이었으리라! 가인은 더듬 더듬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 아, 저……깨워서 죄송해요, 누나. 더 주무세요. " " 으응. 아냐. 실은 나도 잠이 안 와서 계속 깨어 있었어. " ……아니. 그러니까 제발 좀 주무시라고요. 가인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자신과 미연의 사이에서 세상 모르게 자 고 있는 하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슬쩍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하나가 옷 자락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미 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어휴. 우리 하나가 꿈 속에서도 가인이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네. 따로 자게 했더라면 큰일 날 뻔 했겠다. " " 그……. 하지만 역시 이상해요. 이런 거…….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미연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이며 되물 었다. " 응? 뭐가 이상해? " " 그러니까…… 제가 이 자리에서 자고 있는게 이상하다는 말이에요. " 그제야 가인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 깨달은 미연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 후후. 미안해, 가인아. 우리 하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얘가 너하고 는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아마 너하고 따로 자게 했더라면 밤새워서 울어 댔을 거야. " 그렇다. 진우의 선처로 미연의 집에서 식사를 해결한 가인은 슬슬 취침 시 간이 되자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그것을 하나가 같이 자자며 떼를 써서 붙 잡은 것이다. 거기다 미연의 부추김도 있고 해서 가인은 아무 생각 없이 자 고 가기로 결정했는데……. " 아니, 그러니까 하나와 자는 게 문제가 아니라……. " 가인은 자신이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회의감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 미연이 누나도 함께 자는 게……이상하다는 거죠. " 그래. 이건 누가 봐도 오해할만한 상황인 것이다. 아무리 알고 지내는 동네 누나라지만 엄연한 유부녀. 남편이 있는 여자다.그런 사람과 이렇게 한 침대 를 쓰다니! 가인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무안해져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잠자코 있을 걸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분위기만 더 어색해져 버렸다. 미연은 가인의 얘기를 곰곰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나도 혼자 자는 건 익숙치가 않아서. 곁에 아무도 없으면 쓸 쓸하단 말이야. " 쓰, 쓸쓸하다니……. 이러면 꼭 내가 미연이 누나를 내치는 것 같잖아? 가인은 한순간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지만 이내 타지로 나간 진우를 떠올리 며 마음을 바로 잡았다. 그,그래. 역시 진우 씨를 생각해서라도 여기서는 냉 정하게 거절해야 하는 거야. 냉정하게 딱 잘라서……. 그때 가인의 눈치를 살피던 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혹시, 가인아. 나하고 함께 자는 게……불편해서 그러는 거야? " " 예? " 가인은 그녀에게 속 마음을 들키자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반문했다. 그 모습에 미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 어휴. 내가 그런 줄도 모르고 주책없이 굴어버렸네. 마냥 집에 손님이 오 니까 어린애 처럼 흥분해 가지고는……. 미안. 얼른 자리 비켜줄테니까 편안하게 쉬렴. " " 아, 누, 누나. " 가인은 그녀가 나가려고 하자 당황해서 그 손목을 붙잡았다.그냥 이대로 그 녀를 보내기에는 마음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미연은 마치 그걸 기다렸다 는 듯 가인이 붙잡기가 무색하게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 우후후후. 사실 쑥스러웠을 뿐인 거지?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어? " " ……. " 여,역시 미연이 누나는 진우 씨의 아내가 틀림 없어. 부부는 닮은 꼴이라고 하더니 이 능청스러움은 그야말로 진우 씨와 판박이라고! 미연은 생글 생글 웃으며 가인의 손을 맞잡았다. " 난 가인이가 내 친 자식 같으니까 너도 날 엄마로 여기렴. " ' 잘도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 가인은 기가 막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영락 없이 하나와 미 연 모녀에게 붙들려서 밤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부디 진우에게 이 광 경이 들키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때 귓가로 미연의 불안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가인아……. 괜찮겠지? 우리 하나 아빠? " " ……. " 가인은 가슴이 뜨끔했다. 갑자기 그런 걸 물어 올 줄이야……. 어둠 속에서 미연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역시 내색하지 않고 있었겠지만 그녀도 진우 씨들의 걱정에 밤 잠을 설치고 있었던 것이다. " 다들 무사히 돌아오겠지? 응?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오겠지?" 재촉하는 그녀의 물음에 가인은 앞의 악몽을 떠올렸지만 애써 그것을 지워 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서 말했다. 떨리는 그녀의 손을 힘껏 움켜쥐며. " 그럼요. 아무 일도 없을 거에요. 아무 일도……. " 하지만 그런 가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처럼 진우 일행은 다음 날이 되 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TV에서는 태풍 야기가 갑작스레 소멸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 41번 이유리. " ……. " 42번 브루스 류. " ……. 2학년 1반의 출석 체크 중 위의 두 명에게서 만큼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 다. 1학년 3반에 이어 2학년 1반까지 연이어 같은 학생들을 맡게 된 체육 교 사 하지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가인에게 소리 쳤다. " 유가인! 이 녀석들은 왜 오늘도 결석인 거냐? " " 그걸 저에게 물어보셔도……. " 가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뒷 말을 흐렸다. 그 확실치 못한 대답에 지연의 인 상은 더더욱 험악해졌다. " 유리와 브루스는 네 녀석의 동거인들이잖아? 함께 사는 녀석이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 " 아, 그게 저……. " 가인은 미처 변명거리를 준비해두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언제나 처럼 굴러 가지 않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가며 변명했다. " 브루스는……그, 중국 비자 문제로……. " " 비자? 비자 일이 만료된 건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교환 학생은 재단 쪽 에서 알아서 처리해준다고. " " 아뇨. 만료된 건 아닌 거 같지만……뭔가 문제가 있나 보더라고요.자세한 건 저도 잘……. " " 흐음. " 지연은 가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더듬 더듬 변명하는 게 심히 수상쩍었지만 그럭저럭 납득해버렸다.특별히 유학갈 일이 없었던 그녀는 비자에 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다. 더구나 교환학생의 지원 절차는 꽤나 복잡한 걸로 알고 있 다. 충분히 결석 사유가 될 수 있겠지. 하지만……. " 그럼 유리는? " " 아, 저……. 그, 그게……. " 하지만 가인으로서는 브루스의 사유를 꾸며낸 것 까지가 한계였다. 그에게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무리다. 지연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잘근 잘근 씹으 며 눈초리를 매섭게 올렸다. 그녀의 입에서 씹히고 있는 담배가 마치 자신인 것만 같아 가인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때 뜻 밖에도 그를 구원해준 이는 옆에 앉아 있던 테레이아였다. " 선생님, 유리는 부모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 " ……부모님? " 테레이아의 대답에 지연 보다 되려 가인이 큰 소리로 반문해버렸다. 테레이 아는 그렇게 산통을 깨는 가인의 모습에 살짝 인상을 쓰며 책상 밑에 있는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한 움큼 쥐어 뜯었다. 내가 알아서 처리테니까 제발 좀 조용히 해, 가인! 테레이아는 지연의 표정에서 의심의 빛이 강해지자 재빨리 말을 이었다. "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집안 문제인 거 같습니다. 선생님도 알고 계 시겠죠? 유리의 집에 대해서는. " " 아……그래. " 지연은 그제서야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당연히 담임인 그녀가 자신이 맡은 학생들의 가족사를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유리는 지연이 내심 주시하 고 있던 학생들 중 하나였는데, 열 네살의 나이에 부모님과 별거하고 있다는 범상치 않은 기록의 소유자였다. 서류 상으로는 단지 보호자가 한시민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별 다른 내용 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를 이상히 여긴 지연이 시민에게 물어본 바로 는 유리의 부모님에게 경제적인 문제가 있어서 자신이 그녀를 맡게 된 것이 라고 한다. 경제적인 문제……. 유리의 부친이 다니는 회사에 부도라도 난 건가? 시민 이 말을 아끼는 걸로 봐서는 혹시 빚쟁이에게 쫓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유리가 휘말리지 않도록 그녀의 부모님은 시민에게 딸의 신변을 부탁한 것일테고. 그것이 지연이 내린 결론이었다. ' 그래서 가인이 녀석이 쉽사리 대답하지 않은 건가? 유리의 부모님 문제 라서?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애꿎게 녀석만 닥달했으니……. ' 지연은 속으로 반성하며 새삼 가인을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인은 그 녀가 그런 오해를 하는 줄도 모르고 영문을 몰라 쭈뼛거렸다. 왜, 왜 저렇게 날 노려보시는 거지, 선생님? 테레이아의 거짓말이 들통난 걸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연은 더 이상 유리와 브루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나머지 조회 사항을 전달했다. " 아, 그리고 다들 알고 있겠지? 오늘 3교시 체육 시간에 수영 실습을 하는 건? 혹시 수영복 지참하지 않은 녀석들은 손 들어 봐! " 그녀의 말에 한 두명의 학생들이 자신 없게 손을 들었다.어딜 가나 꼭 이런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다. 일주일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강조해서 말해왔건 만! 지연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수영복 미지참자들에게 물었다. " 집에 수영복이 없거나 수영복을 살 돈이 없었던 건 아니지? " " ……예에. " " 그럼 어떻게든 구해와라. 수영부 녀석들에게 빌리든 쉬는 시간에 집을 다 녀 오든. 절대로 수업 시간에 열외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 " 너, 너무해요, 선생님! 수영복을 빌리라니……무리일게 뻔하잖아요! " 울상을 짓는 미지참자들. 지연은 코웃음을 쳤다. "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사전에 준비하지 않은 네 녀석들이 잘못한 거야.내 가 이렇게 까지 말했는데도 수업 시간까지 수영복이 없을 경우, 벌거벗은 채로 풀장을 돌릴테니 각오해라. " " 으엑! 너무해요, 선생님! " " 아아. 시끄러워. 자자. 조회 끝. 그럼 3교시에 보자. " " 선생님! " 미지참자들은 애처롭게 지연을 부르짖었지만, 그녀는 가볍게 무시하며 교실 을 나가버렸다. 학생들은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미지참자들에게 동정의 눈빛 을 던졌다. 그러게 진작에 준비할 것이지……. " 하아. " 가인은 지연이 나가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변명해준 테레이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 땡큐, 테레이아. 테레이아가 아니었으면 담임에게 한참을 시달려야 했을 거야. " " 으으응. 그것보다 정말 왜 결석한 거야? 그 둘은? " 테레이아는 손을 저으며 물었다. 일단 가인을 도울 생각으로 변명하기는 했 지만 그녀도 유리와 브루스의 결석 사유를 모르고 있었다. 가인은 그녀의 질 문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 글쎄. 나도 모르겠어, 정말……. " 정말 어떻게 된 걸까? 가인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음날이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진우 일행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나 임무를 방해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 면서도 무전을 쳐보았지만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언더 시티의 윤채영에게도 연락을 해보았지만,그녀 역시 진 우 일행과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 태풍도 멎었는데……. ' 왜 여전히 연락이 않되지? 어째서 피스메이커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는 거야? ' 별 일이 없다는 건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거야? ' 그렇다면 다행이기는 하지만……. 가인은 꽉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예의 피스메이커에 대한 강한 불신감 이 그를 엄습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애써 그것을 떨쳐낸다. 피스메이커에 의심을 품는 게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자신은 지금의 생활이 변하는 게 싫은 거다. 피스 대원으로서 살아가는 지금의 생활이. ' 젠장. 모두가 실종된 마당에 너는 아직도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 는 거냐, 유가인! ' 그런 걸로 고민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기원하라고! 모두가 무사하 기를! ' 그래. 무엇보다 그 브루스가 따라갔잖아? 다들 무사할 거야. ' 가인은 마음 속에서 계속 고개를 치켜드는 불안함을 억누르며, 자신을 바라 보는 테레이아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 별 일 아니야, 테레이아.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는 표정 짓지마. " " 으응. " 테레이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창 밖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 쿠사나기의 기운이…… 사라졌다. ' 태풍 야기가 사라졌다는게 그 증거였다. 초류향 때 처럼 소멸한 건가? 피스 대원들에게 당한 거야? 하지만 가인의 반응으로 봐서는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 역시 피스 대원들과는 연락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 도대체 182구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자꾸만 그녀를 죄어 온다. 그녀가 모르는 뭔가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예지몽이었는데, 꿈을 조정하는 그녀이기에 가능한 능력이었다. 테레이아는 초조한 눈빛으로 가인을 다시 돌아보았다.그는 1교시 수업을 준 비하기 위해 데스크 탑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있었다. '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건……가인, 바로 너야. ' 지금의 이 불길한 기운은 다름 아닌 너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으니까. 언더 시티 유레카의 피스메이커 작전 본부실. 오퍼레이터 팀의 치프 윤채영 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책상에 앉아 있었다. 어제 밤부터 시작된 강행군에 몸도 마음도 지쳐 버린지 오래였다. 그런 채영의 모습을 보다 못한 삼인방이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그녀의 책상 앞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 저, 치프. 이제는 저희들에게 맡겨두고 좀 쉬시는 게 어때요? " " 한 숨도 못 잤잖아요? " 채영은 그제서야 책상에서 의자로 몸을 기대며 충혈된 눈으로 삼인방을 돌 아보았다.하룻밤 사이에 며칠은 앓아누운 사람 처럼 그녀의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다. 채영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으며 푸념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 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쉴 수 있을 리가. " " 하지만 이대로는 쓰러지시겠어요. 저희들처럼 교대를 하시는 것도 아니고. " 피스메이커의 오퍼레이터 팀은 채영이 치프로 임명받기 전까지는 세 명의 치프들을 두고 있었다. 오퍼레이터 팀이 3개조인 만큼 효율적인 부서 관리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2028년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개편을 감행, 지금과 같은 일인 치프제가 확립되었다.채영이 홀로 대 몬스터 전 시뮬레이션 D-4를 수행 할 수 있는 피스메이커 사상 최초의 고속 처리 능력자라는 게 공식적인 이유 였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 '그것'의 개발이 착수되면서 부터였지……. 선임들이 그만둔 것은. ' 그들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한계를 깨닫고 후임인 채영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것이다. 채영은 그 책임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에 지금껏 오퍼레이터 팀의 치프로서 자신의 모든 생활을 맞춰 왔었다. 20대의 전반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일에 매진해왔다. 삼인방은 그런 채영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3개조로 교대를 하는 자신 들도 감당하기 힘든 업무에 하루 하루를 피 말리는 심정으로 근무하건만 어 떻게 그녀는 그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해올 수 있었던 걸까? 채영이 피스메 이커의 오퍼레이터 일에 집착하는 것은 결벽증에 가까웠다. " 이 정도로는 쓰러지지 않아. " 채영은 삼인방에게 하는 건지 자신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진한 블루 마운틴의 향기에 대번에 졸음이 달아났다. 그렇다고 피 곤까지 가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 고집스러운 모습에 삼인방은 더 이상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치프의 고 집이 어느 정도인지는 언제나 곁에서 붙어다니는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 는 것이다. 일단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강행군을 계속할게 분명했다. " 벌써 12시간이나 지났나. " 피스 대원들에게서 연락이 끊긴 것은. 채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스크린 에 떠오른 피스 대원들의 생명 수치를 바라보았다. AI슈츠의 센서로 착용자 의 신진대사를 측정하는 저 수치만이 유일하게 그들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무전기와는 다르게 생명수치는 AI슈츠의 오리하르콘이 착용자의 정신과 공명 하여 보내는 신호였기에 전파 신호와는 달리 두절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 가인 씨. ' 채영은 아침에 자신에게 무전으로 피스 대원들의 상황을 물어오던 그를 떠 올렸다. 그 때는 진 사령관의 명령으로 거짓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 숨길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가인의 성격 상 피스메이커 가 진실을 숨겼다는 걸 알게 된다면 강한 불신감부터 드러낼 것이다. ' 도대체 사령관 님은 무슨 생각이신 걸까. ' 대원들의 태반이 연락 불통인데 어떻게 저리도 태연할 수 있는 거지? 왜 피 스 블루에게는 대원들의 실종을 알리지 말라고 지시한 걸까? 채영은 자신의 뒤에서 무표정하게 상황을 주시하는 진 사령관과 수정을 돌 아보았다. 그나마 그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 다. 역시 내색은 하지 않고 있겠지만 그들도 피스 대원들의 신변이 걱정스러 울 것이다. 채영은 생명 수치로 다시 눈을 돌렸다. ' 다들……지금 뭘 하고 있는 거에요? ' 살아있다면 대답해줘요. 제발! 똑……똑…… 물방울이 수면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퍼진다. 유리는 두 눈을 감은채 숨을 고르고 있다가 이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격하게 뒤 틀었다.AI헬맷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촉촉히 젖어 있었다. " 이제……더 이상은 무리야……. " " 참아요, 유리 양. 조금만 더 힘을 내요. " 곁의 시민은 그녀를 달래며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AI슈츠에서 흘러나오는 오라의 불빛만이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호흡을 하는게 자꾸만 힘들어졌기 에 AI헬맷을 해제시켜버렸다. 방열 기능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줄어드는 산 소가 제일 절실했다. 진우는 턱까지 차오르는 물과 머리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진흙 천장을 바 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 이건 정말……최악의 환경이로군요. " " 웃으면서 할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좀 더 위기 의식을 가지십시오. " 마리는 그런 진우를 엄하게 꾸짖으며 유리를 조금이라도 더 높은 지대로 끌 어올릴려고 노력했다.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쿠사나기가 만들었던 가상의 공 간 밑에 위치하던 본래의 해저터널이었다.쿠사나기는 부숴진 해저 터널을 그 대로 자신의 몸에 덮어쓰고 있었기에, 일행은 다행히도 물에 휩쓸리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자신들이 고립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 그들은 절 망해야만 했다. 물은 빠른 속도로 폐허에 고여들기 시작했고,진흙 덩어리가 그 사이를 채워 들었다. 마음 먹은 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숨도 제한해서 쉬 어야만 했다. 그렇게 12시간을 물속에서 버티고 있자 점점 정신이 아늑해져 갔다. 계속되 는 긴장과 물에 대한 공포로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일 먼저 쓰러진 것은 유리였다. 발을 디딜 공간 조차 제대로 없었기에 간 신히 중력장을 조절하여 버티고 있었건만 정신력이 떨어지자 금세 물 속으로 몸이 가라앉으려 했다. 그런 유리를 마리와 진우, 시민이 번갈아가며 들어주고 있었지만 어느덧 12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AI 슈츠의 불빛도 점점 약해져서 이제는 희미한 촛불 정도의 밝기 밖에 되지 않 았다.오라를 사용하는 것은 극도로 정신력을 소모시키는 일이었기에 이렇게 장 시간 사용했다간 사용자의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푸확 그때 물 속에서부터 뭔가가 진우 일행에게로 재빨리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 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 브루스였다. 그의 등장에 진우가 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 사부님,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 " ……터널의 중앙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어서 우리가 들어왔던 쪽으로는 돌 아갈 수 없었다. 반대편의 섬 쪽 입구에서도 붕괴가 일어나더군. 이 상태 로는 조만간 여기도 물에 잠길 거다. " " 역시. " 진우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던듯 실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거기다 바닷물 속에 가라앉은 민간인들을 생각할 때면 그 씁 쓸함은 한층 더 강해진다.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있었으니까. ' 제길. ' 화낼 힘도 없었다. 그 정도로 진우 일행은 지쳐있었다. 그만큼 무력감도 빠 르게 그들을 잠식해온다. 아무리 오라 능력자라고 해도 이 상황을 벗어날 방 법이 없었다. 행여나 마리의 절단이나 시민의 공명음으로 터널을 부숴버렸다 간 터널 양쪽 압력의 균형이 깨져서 오히려 수심 25 미터의 바닷물이 한꺼번 에 그들을 덮칠 것이다. 마리는 줄어드는 산소로 인해 가쁘게 숨을 몰아쉬다가,멀뚱히 자신을 바라 보는 브루스에게 힘겹게 물었다. " 브루스, 힘들지도 않습니까? AI슈츠도 없으니 체온도 많이 떨어졌을텐데. " " 흥. 끄떡 없다. " 브루스는 마리의 걱정이 가당치도 않다는듯 코웃음을 쳤다. 마리는 그 모습 에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는 브루스의 상태를 이 해할 수 없었다. 저게 12시간 동안 AI슈츠도 없이 물 속에 노출되어 있던 사 람의 모습이란 말인가? 일단 사람이라면 호흡이 거칠어진다던가 안색이 창 백해진다던가 하는 기본적인 반응은 나타나기 마련인데 브루스는 그런 것도 없었다. 물에 젖어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 그는……정말 인간인 걸까? ' 매번 느껴지던 의문. 그 의문이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 한층 더 깊어졌다. 마리는 뚫어져라 브루스를 바라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눈을 피 해버렸다. " 그나저나 이대로 구조를 기다리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빠져나갈 방법 은 없는 건가요? " 마리에게서 유리를 건내받은 시민은 유리의 AI슈츠에 손을 가져가 그녀의 중력장을 직접 조절해주며 브루스에게 물었다. 브루스는 그녀의 질문에 인 상을 구기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 양 쪽의 입구가 다 막혔다고 했잖아? 내가 말한 걸 뭘로 들은 거냐! " " ……그렇죠. " 시민은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그래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브루스라면, 그라면 이런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분명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헤쳐나갈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것은 시민 만이 아닌 모두의 바램이기도 했다. 하지 만 브루스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도 사람인 이상 이 상황 속에서는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리는 더 이상 그에게 의지하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말을 꺼냈다. " 억지로라도 터널을 부숴보는 건 어떻습니까? 바닷물의 압력이야 AI슈츠 의 중력장을 조절한다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 " 흐. 무리다. 그 전에 진흙 더미에 깔려서 압사 당할 거다. " 브루스는 택도 없다는듯 비웃음을 흘렸다.마리는 그 태도에 마음이 상해 인 상을 찌푸렸다. " 그렇다면 터널의 붕괴된 입구 쪽을 뚫는 건? 진우 씨의 슈팅 스타라던지 저의 단공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브루스, 당신의 칠성권으로도……. " "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는 줄 아는 거냐? 지금 여기의 개개인은 각자 터 널을 빠져나갈 힘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 " 그럼 도대체 왜! "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듯 소리쳤다. 브루스는 혀를 차며,기진맥진해 있는 유리를 가리켰다. " 저 애물단지는 놓고 갈 셈이냐? 터널을 부수는데 전심전력을 다하면서 남 을 챙길 틈이 있을 거 같아? " " 아……. " " 거기다 숨은 어떻게 참으려고? 아무리 빠져나간다고 해도 여기는 해저 한 가운데다. 지상까지는 수십 미터가 넘어. 호흡이 흐트러지면 정신이 흐트 러지고 그러다 보면 오라까지 흐트러진다. 애초에 불확실한 방법에 목숨 을 거는 것도 미련한 짓이지. " " ……. " 마리는 할 말을 잊었다. 브루스의 말은 분할 정도로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 들 모두가 안전하게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마리는 자 신의 짧은 생각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가 입을 다물 자 다시 침묵이 일행을 감쌌다. 그때 시민의 부축을 받고 있던 유리가 입을 열었다. " 난……괜찮으니까……. " " 유리양? " 시민과 모두의 시선이 유리에게로 향했다. 유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나 때문에……모두의 발목을 붙잡고 싶진 않아. " " 유리!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쓸데 없는 소리하지 마! " 마리는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유리는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이 번이 처음이었기에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이내 아랫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 하지만……이대로는 모두 죽어버리잖아. "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 나 때문에, 내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죽어버린다니… …. 그런 거 싫어. 살 수 있는 사람은 사는 게 좋잖아? 뭐하러 같이 죽으 려고 하는 거야? " " 유리 양, 같이 살려는 방법을 찾으려는 거에요.같이 죽으려는 게 아니에요. " 시민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달래듯이 말했지만 유리는 버럭 소리쳤다. "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렇게도 모르겠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 " 거기까지 외치던 유리는 그만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울면 안되 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 난 괜찮으니까……난 괜찮으니까 가란 말이야……. 제발, 제발! 가버리라 고! " 가인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그의 얼굴을 보 아두는 건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그의 목소리를 들어두는 건데. 유리는 시민의 품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 편하게 일행을 보내 줄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역시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하려고 해도 자신은 아이였다. 혼자 남겨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다시는 가인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무서웠다. 유리의 애처로운 울음 소리에 마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렸고, 진우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들이 뭐가 오라 능력자이고 뭐가 피스메이커란 말인가? 능력을 지녔던 만큼 그들의 자괴감은 깊었다. 시민은 유리를 힘껏 끌어안으 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수록 유리의 울음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브루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 꼬맹아, 그런 말은 함부로 입에 담는 게 아니다. " 그는 드물게도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애물단지라고 말한 건 사과하마. 널 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더 이상은 울지마라. " " 하지만……하지만……. " 유리는 흐느끼면서 그 말만을 계속 했다. 브루스는 짧게 한숨을 쉬며 진흙 으로 뒤덮인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 역시 현재가 중요한 거다.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면 미래를 대비하는 건 아 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 소중한 이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라. ' 갑자기 애송이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브루스는 피식 웃음을 터뜨 렸다.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그렇게나 잘난 체 한 주제에……. 그는 새삼 진우 일행을 하나 하나 돌아보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 중한 이들은 바로 이들이었다. 진우, 마리, 유리, 시민. ' 무엇보다……이 녀석들을 무사히 돌려 보내지 않으면, 녀석을 다시 볼 면 목이 없으니까. ' 브루스는 이 자리에 없는 가인을 떠올리며 마음을 굳혔다. 그는 자신도 모 르게 중얼거렸다. " 브리트라 이후로 처음이로군. 다음 번을 위해 아껴둘 생각이었는데……. " " ……예? " 곁에 있던 진우가 그 중얼거림을 듣고 브루스를 돌아보았다. 브루스는 천천 히 고개를 저은 후 곧 예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행에게 소리쳤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잠시 후면 너희들의 머리 위로 빠져 나갈 구멍이 하나 생길 거다! " " 예? " 그 난데 없는 말에 진우 일행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마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이 상황을 탈출할 방법이? " " 지금 얘기하려고 하잖아, 그 방법을? " 브루스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고,그와 동시에 진우와 시민의 표정이 밝아졌 다.유리는 여전히 눈물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듯 그를 바라보 았다. " 거,거짓말.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왜 이제서야……. " " 지금 막 생각났으니까. " " ……. " 마리와 유리는 이를 갈며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하여간 저 놈의 인간은! 그 런 방법은 제때 제때 떠올릴 것이지! 애간장이란 애간장은 다 태워놓고는! 그렇게 사람 속을 썩여놓고는! ' 정말! ' 그녀들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못말려. 정말 못말린다고, 브루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 모습이 유쾌해보였다.브루스는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그 다웠다. 브루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진우를 돌아보았다. " 어쨌든 내가 책임지고 길을 열어줄테니 그 때부터는 전적으로 네 놈의 역 량에 모든 것이 달렸다. " " ……사부님, 혹시? " 진우는 브루스가 쓰려는 방법이 무엇인지 깨닫자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 를 바라보는 브루스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얘기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진우 는 마음이 무거워져 눈을 내리깔았다. " 알겠냐? 이 녀석들을 데리고 네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달려라. " 브루스는 엄포하듯 그 말을 강조했다. 진우는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 그 사제간의 미묘하게 변한 분위기에 마리와 시민, 유리는 의아해졌다.하지 만 브루스는 그녀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도록 빠르게 말을 이었다. "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지금 얘기해두는데, 아무래도 쿠사나기가 182 구역 의 민간인들을 끌어들인 것은 단순히 마정의 숙주로 이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 예? " " 사라진 주민들의 수와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의 수가 맞지 않았어.처 음에는 이 앞의 미륵도에 그들이 안치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 체들을 보고 생각이 바꼈다. 녀석이 이 남해안까지 와서 벌인 일련의 행 동들은 아마도……. " 그 다음의 말들은 진우 일행이 경악하기에 충분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진 우는 치를 떨며 소리쳤다. " 그런! 설마 녀석이 그런 일을! " " 그렇다면 수도의 가인 씨가 위험해요! " 시민의 얼굴이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브루스는 그녀를 담담히 바라보며 고 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러니까 네 녀석들은 반드시 여기를 빠져나가야 되는 거다. 빠져 나가서 내가 지금껏 해준 얘기를 녀석에게도 전해라. " " 피스! " 모두는 비장한 표정으로 경례를 했다.그때 마리는 브루스의 말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네 녀석들은 반드시 여기를 빠져나가야 된다고? 마치 자신은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 처럼 얘기하고 있어? ' 그래. 거기다 지금 저 얘기를 우리에게 해주는 것도 이상해. 이곳을 탈출 한 다음 얘기해줘도, 가인에게 직접 얘기해줘도 될 것을 왜……. ' 하지만 마리의 생각은 거기까지 였다. 순간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가 브루스 에게서 터져 나왔던 것이다! " 하아아아아아아! " 브루스의 주위로 패턴 그레이의 힘이 급격하게 모여들었다.오라의 토네이도. 그것은 평소 진각과 전사경으로 기공을 끌어올리던 브루스의 모습이 아니었 다. 진정한 오라의 힘. 피스 그레이는 최초로 자신의 오라 능력을 대원들의 앞에서 개방하고 있었다! 촤아아아아아 브루스는 순간 꺼지듯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 주변의 바 닷물이 회오리 처럼 나선 운동을 하며 하나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진우 는 재빨리 피스 대원들을 이끌고 옆의 진흙 벽으로 몸을 고정시켰다. 그는 AI헬맷을 장착하며 그녀들에게 소리쳤다. " 모두! 이제부터 저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단단히 붙잡아요! " 마찬가지로 AI헬맷을 장착한 시민과 유리는 긴장하며 진우를 끌어안았다.마 리는 진우의 손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 진우 씨! 브루스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 사부님 걱정은 하지 말아요! 일단 모두 저를 붙잡으셨으면 AI슈츠의 중력 장을 조절하는데 정신을 집중해요! 터널이 뚫릴 때 물살에 휩쓸려버리면 탈출은 물 건너 가버리니까! " 그 말을 끝으로 진우의 AI슈츠에서 녹색의 빛이 강렬하게 터져나왔다. 마리 와 시민, 유리도 각자의 AI슈츠에서 고유의 색을 뿜어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들의 의지가 오라를 움직이고, 오라가 AI슈츠를 움직였다. 그래비테이셔널 필드 컨트롤. 오리하르콘의 특징 중 하나인 그 능력이 지금 네 명의 오라에 의해 증폭되 었다. 중력을 조절하여 물보다 자신들의 비중을 크게 하여 음성부력(Negativ e Buoyancy)을 발생시킨 것이다. 그들은 숨을 멈추고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이내 터널의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쿠구구구구구 물 속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는 브루스가 오라를 끌어모으며 자신들 처 럼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는 그 격한 상황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차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올리고 있었다.진우 일행은 두 눈을 크게 뜨며 그 것을 지켜보았다. 텅! 그때 브루스가 강하게 땅을 박차며 물 위로 빠르게 치솟아 올랐다. 그와 함 께 그의 주위로 회색의 기류가 휘몰아치며 물살을 좌우로 갈랐다. 브루스는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비상하여, 자신에게 날아드는 진흙 천장을 향해 주먹 을 내찔렀다. 칠성권 제 1의 발경 " 탐랑(貪狼)! " 투아아아아아아앙! 순간 브루스의 권에 모인 회색의 오라는 빛이 되어 모든 것을 꿰뚫었다. 모 든 것을 소멸시키는 궁극의 힘이 터널을 뒤덮던 진흙과 수심 20여 미터에 달 하는 바닷물을 일거에 날려버린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인 화학 물질의 폭발 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 크으으윽! ' 그 폭발은 힘의 반대 방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터널의 밑바닥에 붙어있던 진우 일행은 전신을 후려치는 사나운 물살에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만 약 수면에 멋 모르고 계속 떠있었다면 진작에 휩쓸렸을 것이다. ' 이때다! ' 그리고 진우는 어느 정도 물살이 가시자,바닷물이 재차 터널의 안으로 밀려 들기 전에 가속 능력을 전개했다. 진우와 접촉되어 있던 일행의 AI슈츠가 각 패턴의 색깔에서 패턴 그린의 색깔로 모두 통일되었다. 일행이 오라 능력을 해제하자, 그 모든 제어가 진우에게로 넘어간 것이다.진우는 패턴 그린의 능 력으로 각 대원들의 AI슈츠에서 중력장을 풀어낸 뒤 가속을 전개했다.그러자 마치 미사일이 이륙되는 것 처럼, 그들은 물살을 가르며 브루스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쏘아져 나갔다. 퍼어엉! 수면을 뚫고 진우일행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2차 가속이 시작 되기 전, 모두는 볼 수 있었다. 하얀 빛으로 둘러 쌓여 천천히 하강하고 있 던 브루스의 모습을.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AI슈츠를 입고 있지 않 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라면 괜찮을 것이다. 브루스라면 맨몸으로도 진우 의 가속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브루스의 몸을 낚아 채려고 했다. 휙 ' ……! ' 하지만 마리의 손은 아무 것도 만질 수 없었다. 분명 브루스의 허리를 손으 로 휘감았건만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브루스는 마치 연기 처럼 흐릿해지면서 몸의 끝부분부터 차츰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대기 속으로 녹아드는 것 처럼. ' 가라. ' " 브루스! " 마리와 유리는 사라지려는 브루스에게 재차 손을 뻗었지만 이미 가속은 전 개된 뒤였다. 진우는 이를 악물며 오라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 사부님! ' 치이이이이이잉 그러자 패턴 그린의 능력에 휩싸인 그들은 순식간에 수심을 거슬러 오르며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브루스는 뒤덮이는 바닷물과 함께 그들의 시야 에서 사라졌다. " 아……. " 가인은 3교시 체육 수업을 대비하여 학교의 실내 수영장으로 걸어가던 중 발걸음을 멈췄다. 그 느낌이 계속 되고 있었다. 어제 밤에 꾸었던 악몽의 여 운. 그 알 수 없는 불길함에 가인은 손목에 찬 무전기를 내려다 보았다. '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별 일이 없다 면 왜 연락이 되지 않는 걸까? 왜 피스메이커 측에서도 그들과 연락이 안 되 는 거지? ' 젠장! ' 답답해! 답답하다고! 가인은 단지 기다리기만 해야하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났다. 역시 나도 가야하는 거였어. 진 사령관의 말 따위 무시해버리고 나도 갔어야 하는 건데! " 가인, 왜 멈췄어? " 그때 테레이아의 물음이 가인의 정신을 일깨웠다. 나란히 걷던 그녀는 가인 이 갑작스레 멈춰 서자 의아해진 모양이다.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 아, 미안. 생각할 게 있어서. " " 흐응. 요즘 이상해, 가인. 자꾸 멍하니 있기만 하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 "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 가인은 작게 한 숨을 쉬었다.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테레이아는 이내 밝 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 에이. 이러면 아무런 의미도 없겠다. " " 뭐? " " 모처럼 가인에게 보여주려고 예쁜 수영복도 준비해왔는데. " " ……! " 가인은 새침한 테레이아의 표정에 얼굴을 붉혔다. 예,예쁜 수영복을 준비해 왔다고? 나에게 보여주려고? 일단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가인을 위해서라고 하는 묘한 뉘앙스가 그를 자극시켰다. 테레이아는 가인의 곁에 바싹 붙으며 예의 감미로운 목소 리를 속삭였다. " 기대되지? 응? " " 모, 몰라. 그런 거……. 기대된다니……. " " 아, 너무해. 그런 거라니. 나 충격받았어. " 테레이아는 가인의 무뚝뚝한 반응에 실망한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은 가인은 필사적으로 두 손을 내 저었다. 이렇게나 상대의 의도에 잘 속아 넘어가는 남자라니. 테레이아는 가 인에게 보이지 않도록 슬쩍 미소지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런 그의 반응을 즐 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 아, 아니. 테레이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저기 그러니까……. " " 후후.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인정하시지? 내 수영복 입은 모습이 보 고 싶다고? " " ……네. 꼭 보고 싶습니다. " 가인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더 욱 테레이아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기분이었다.그 전까지는 외국인 특유의 분 위기 때문에 어색함이라도 느꼈건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완전히 한국 사람이 다 되었군, 테레이아. ' 그러고 보니 이런 식의 대화……. 예전에도 누군가와 했던 것 같은데……. ' 상대방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도 그것이 즐거웠던 기억.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뭔가 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우면서도, 슬픈……그 런 애절한 기억이……. 하지만 끝내 가인은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 그럼 조금 있다 수업 시간에 봐, 가인. " " 아, 응. " 실내 수영장에 당도한 그들은 수영복을 갈아입기 위해 각자 탈의실로 향했 다. 테레이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여자 탈의실로 향하다가 문득 소리 없이 웃 었다. 가인의 당황하던 얼굴이 떠오르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이상해. 이런 거……. ' 누군가를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자신이라니. 1년 전의 그녀라면 생각도 못했을 행동이었다. 새삼 자신의 변화가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테레 이아는 크게 숨을 들이키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 름다운 유채색을 띄고 있었다. ' 나에게 있어서 과거란 슬픈 일의 연속. ' 그렇기에 과거를 떠올려도 그녀는 웃음 같은 걸 터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그녀에게도 웃을 수 있는 추억들이 많이 생겼다. ' 이런 변화도……나쁘진 않아. ' 조금만 더 행복해 해도 되겠지. 조금만 더 이 순간을 즐겨도……. 슥 그때 테레이아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 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전방에서 한 남학생이 벽에 등을 기댄채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레 이아는 그 기이할 정도로 집요한 남학생의 시선에 불쾌함을 느꼈다. ' 뭐지? 이 녀석은? 더구나 여자 탈의실 쪽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 테레이아는 경계하며 재빨리 그의 앞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남학생의 낮 은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묘하게도 귀에 익은 저음이었다. " 오랜만이야, 테레이아. " " ……? " 테레이아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남학생을 돌아보았다.남학생은 싸늘한 미소 를 입가에 띄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왠지 그의 인상과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 다. 그는 여전히 테레이아가 자신을 못 알아보자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 를 숙였다. " 후후후. 역시 이 모습으로 날 알아봐주길 바란 건 무리였나? 난 네가 무 슨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알아볼 자신이 있는데. " " 너……누구야? " 테레이아는 작게 뒷걸음질 치며 남학생을 노려보았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그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분명 처음보는 남자이건만 그 말투나 행동이 너 무도 낯 익었던 것이다. 남학생은 웃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테레이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옅은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보고 싶었어, 리리스……. " 그리움과 반가움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 그제서야 테레이아는 눈 앞의 남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본명을 저렇게나 친근감 있게 부를 수 있는 남자는 분명……. " ……카이? " 그녀는 신음 처럼 기억 속의 이름을 내뱉었다. " 테레이아, 아까 그 남자 누구야? " 탈의실에서 멍하니 상의 단추를 풀고 있던 테레이아는 갑작스런 여학생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돌아보니 탈의실의 학우들이 초롱초롱한 눈빛 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 무슨……소리야? " " 에이. 모르는 척 하기는. 오면서 다 봤다고. 어떤 남자애가 여자 탈의실 앞까지 와서 테레이아를 기다리고 있었잖아? " " 응. 응. " 질문을 한 여학생이 주위의 동의를 구하듯 돌아보자 모두들 크게 고개를 끄 덕였다. 테레이아는 그제서야 그녀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닫고서 손을 내저었다. " 아니, 그러니까 그건…… 그런 게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었어. " " 아무 것도 아니긴! 그 남자애, 테레이아에게 엄청 다정스럽게 굴던 걸? 서로 손까지 잡았었잖아? " " 그래. 그래. 가인이에게는 비밀로 해줄테니까 어디 한번 사실대로 얘기해 봐. " " 테레이아같은 미인이라면 양다리도 걸칠 수 있는 거지, 뭘. " 양다리라니…….테레이아는 멋대로 떠드는 여학생들의 말에 인상을 살짝 찌 푸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깔며 냉정하게 답했다. "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쯤에서 그만둬. 난 지금 농담 할 기분이 아니야. " " 얘. 얘. 아까 그 남자애, 분명 이름표에 1학년이라고 적혀 있었지? 이번 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인가? " " 어쩐지. 지금껏 못 보던 얼굴이다 했어.인상은 평범하지만 스타일은 좋던 데. " " 뭔가 풋풋하지 않니? 아, 영계가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나도 나이가 들 기는 들었나 봐. 푸핫. " ……내 말 따윈 안중에도 없군. 테레이아는 의문의 신입생에 대한 화제로 열을 올리는 여학생들을 어이없다 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화제는 '테레이아, 유가인 전격 파혼설'로 까 지 대두되었고, 참다못한 테레이아는 거칠게 상의를 벗어 던졌다. 휙 그러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지는 탈의실. 여학생들은 거침없이 치마의 호크까 지 풀어버리는 테레이아를 놀란 토끼 마냥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남학 생들과는 달리 탈의에 민감한 여학생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선뜻 옷을 못 갈아 입고 있었는데, 테레이아가 과감하게 옷을 벗어버리자 그 기세에 압도 당한 것이다. 체육복과는 달리 수영복은 완전 탈의를 해야했기에 스커트 밑으로 바지를 입고 치마를 벗는 식의 가리기 탈의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화장실까지 가서 옷을 갈아입는 마당에 속옷까지 완벽히 벗어버리는 테레이아의 탈의는 소극 적인 그녀들에 대한 일종의 공격이 되는 셈이었다. 여학생들은 상아빛의 피부에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곡선을 그리는 테레이 아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이것이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유로피언 스타일! " ……왜들 그러고 있어? 옷 안 갈아 입을 거야? " 테레이아는 그녀들의 시선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 제서야 여학생들은 당황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아, 으응. 갈아입어야지. 갈아입어야……. " 여학생들은 하나 둘 서로 눈치를 살피며 탈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 서도 한사코 테레이아 쪽을 돌아보지는 않았는데,영 기가 죽어버린 모양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의문의 신입생 건을 잠재워버린 테레이아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이 철 없는 어린애들과 뭘 하고 있는 건지……. ' 카이……. ' 그녀는 준비한 수영복을 꺼내 입으며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떠올 려 보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의문의 남학생. 그녀는 그때 그를 처음 보았지만 동시에 이전부터 알고 있기도 했다. 카이라 불린 남학생은 테레이아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행복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 그래. 나야 리리스. 정확히 2년만의 재회구나. 마치 수 십년은 만나지 못 한 것 같아. ' ' 어떻게…… 어떻게 넘어온 거야? 아직 노아(Noah)의 기술로는 널 도약시 키는 게 무리였을텐데! 더구나 문이 열리는 느낌도 없었어! ' 테레이아의 당황하는 반응에 카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섭섭하다는듯 말했다. ' 반갑지……않은 거야? 난 이 날이 오기만을 손 꼽아 기다려 왔는데. 다시 너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 ' 아……. ' 테레이아는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그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에 놀라 제대로 웃어주지도 못하다니. 그녀는 동생을 달래듯 그의 볼을 쓰다듬어 주 었다. ' 아니. 미안해. 너무 놀라서 그랬던 거야.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 ' 리리스. ' 카이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테레이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 그나저나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어. ' ' 강령술(降靈術)을 발전시킨 기술이야. 너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도약은 아 직 노아에게 무리라서……. 하지만, 하지만 줄곧 능력을 개발해왔어. 너 를 만나기 위해. 네 곁에 다시 있기 위해. ' ' ……. ' 테레이아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의 지하고 있었다. 흘러간 시간 만큼 그가 성숙해지기를 바랬는데……. 카이는 어린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 아, 그나저나 요르문간드에게서 소식은 들었어? 내가 리리스에게 전해달 라고 메두사에게 부탁했었는데. ' ' 무슨 소식? ' ' 유메의 가석방 조건 말이야! ' ' ……아아. ' 테레이아는 흥분한 카이와 달리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는 내심 그 반응에 의아해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 ' 이제 조금만 참으면 돼. 조금만 더 견디면 예전처럼 셋이서 사는 것도 꿈 이 아니야. 너와 나, 유메. 이렇게 셋이서 살아가는 것도…….생각해 보 면 그때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인 거 같아. ' 즐거운 시절. 그 대목에서 테레이아는 떳떳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자신은 어느 새인가 잊고 있었다, 힘들지만 셋이서 함께한 그 시절을. 죽고 싶을 정 도로 괴로웠기에 필사적으로 서로를 의지해야만 했던 그 시절을. 지금의 생활에 흠뻑 취해버려서…… 무심결에 잊고 있었다. 테레이아는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 그건 그렇고 말이야……. ' 그때 카이가 묘한 눈빛으로 테레이아를 바라보았다. ' 아까의 그 인간이 메두사가 보고한 예의 테라(Terra) 인인가? ' ' 뭐? ' ' 너와 함께 걸어왔던 그 남자 말이야. ' 유가인! 테레이아는 가슴이 뜨끔했지만 애써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그 녀는 표정 변화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 그래. 그가 오라의 주인이야. ' ' 흐응. 그랬구나. 역시 그랬던 거였어. ' 카이는 뭔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가 왠지 신경쓰여 서 테레이아는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 그 녀석하고 얘기하는 리리스, 기뻐 보이더라. ……지금과는 다르게 말이 야. ' '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카이? ' 그녀는 당황하며 물었다. 하지만 카이는 대답 대신 질책의 눈빛을 그녀에게 던졌다. 테레이아는 등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최대한 침착하게 변명했다. '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본 그건 연극일 뿐이야. 오라의 주인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옴 팔로스의 열쇠와 접속하려 한다는 것을. 그 때를 위한 준비 작업인 거야. 반발력을 줄이려면 평소에도 끊임 없이 접속 대상에게 나를 인식시켜야 하니까. ' ' 하지만 나……연극으로는 보이지 않았어. 처음 보았단 말이야, 리리스가 그렇게나 밝게 웃는 건. ' ' ……. ' 테레이아는 할 말을 잊었다. 카이는 예전부터 그녀와 관련된 일에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그녀의 변화가 한 눈에 보였던 것이다. 테레이아는 이를 악물 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드는 한편, 자신을 자꾸만 몰아세우는 카이의 태 도에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카이를 노려보았다. '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카이? 내가 지금 임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거야? 유메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해? ' ' 그, 나는……! ' 카이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그녀에게 소리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그 는 테레이아의 시선에 고개를 떨어뜨리며 씁쓸하게 말했다. '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리리스가 유메를 잊어버릴 리가……. 미안. 잠시 내가 어떻게 됐었나 봐, 널 의심하다니. 아무래도 요르문간드가 자꾸 쓸 데 없는 소리를 한 게 원인인가봐. ' ' 요르문간드가? ' ' 응. 네가 오라의 주인에게 마음이 있다는……아니. 그만두자. 이런 불쾌 한 얘기는. ' 카이는 고개를 흔들며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마주 답하면서도 리리스는 마 음 한구석으로 쿠사나기에 대한 분노를 금치 못했다.그 망할 자식은 대체 어 디까지 자신을 괴롭혀야 직성이 풀릴 생각이란 말인가? 그러다 이내 쿠사나기가 남해안에서 일으킨 소동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카 이에게 물었다. ' 아, 그런데 어제의 태풍은 도대체 뭐였던 거야? 쿠사나기가 무슨 짓을 벌 인 건지 혹 알고 있어? ' ' 아아. 그거 말이야? ' 카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 거렸다. 그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녹 색 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 별 거 아니니 너무 걱정하진마. 쿠사나기는 생각보다 잘해줬으니까. 요르 문간드의 인격들 중 그래도 쓸만한 녀석이라고. ' ' 카이, 너……. ' 테레이아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2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변 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뭔가가 변해있었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었지만 뭔가가……카이의 뭔가가 변해있었다. 카이는 입을 가리던 손을 치우고 테레이아에게 사심 없이 웃어 보였다. ' 그래서 말인데 리리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 테레이아는 거기에서 생각을 멈추고 갈아입은 수영복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머리색에 맞춘듯한 옅은 크리소콜라(Chrysocolla) 빛의 비키니가 그 녀의 몸을 빈틈없이 조여주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부러움에 가득 찬 시선이 계속 느껴졌지만 테레이아는 그것을 무시하며 다시 카이가 부탁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가 왜 그런 일을 자신에게 부탁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기 에 더더욱 이 불안함을 달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라커 문을 닫으며 마음 속으로 카이에게 물었다. '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니, 카이? ' 탕 하지만 질문에 되돌아온 것은 라커 문의 거친 쇳소리였다. " 하아아아아아……. " 준비해온 수영복을 갈아입고 풀장에 모여있던 남학생들. 그 중 재영을 위시 한 반 가인회의 회원들은 한 숨을 쉬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곁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가인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아까부터 뭘 그렇게 안타까워 하는 거야? " " 모처럼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수영 시간이다! 이런 기 념비적인 날에!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 재영은 비통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 유리 양과 함께 자리를 못하다니! " " ……뭐? " 가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재영을 바라보았다. 재영과 그 일행들은 금 세라도 통곡할 것 처럼 슬퍼하고 있었는데, 그 꼬락서니들이 너무나 진지해 서 외면하고 싶을 정도였다. 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자식들은 정말……. " 유리가 이 자리에 없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 " 바보같은! 유리 양의 수영복 모습을 볼 수 없지 않은가! " 재영은 그것도 모르냐는듯 오히려 그를 질책했다. 가인은 더더욱 고민에 빠 졌다. 그러니까 유리의 수영복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유리를 여자로 인식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유리의 수영복 차림에 어떠한 메 리트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인이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자, 재영은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 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부회장 엔비Q가 쓰고 있던 안경을 살짝 밀어올리 며 앞으로 나섰다. " 유가인. 당신은 모르고 있군요. 자그마한 소녀의 에로틱함을. " 자그마한 소녀의……에로틱함? 가인은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엔비 Q는 싸늘한 미소를 날리며 한 발 더 가인에게 다가왔다. " 세간의 상식은 저희에게 경고하죠. 평범하게 사랑하라고. 도를 지나치지 말라고. 그런 편견에 사로잡힌 시선들로 하여금 어린 소녀에 대한 저희의 사랑을 변태 행위라느니, 원조 교제라느니 수 없이 부정적인 말들로 옭아 맵니다. 하지만! " 순간 가인은 엔비 Q의 뒤에서 일제히 파도가 터져 오르는 영상을 볼 수 있 었다. "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우민들의 생각! 또 다른 가능성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패배 근성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도전의 연속! 도전을 두려워 하는 이에게 발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을 올려다 보는 그 커다란 눈망울을! 느끼십시오! 껴안기만 해도 부서질 듯한 그 작고 여 린 몸을! 들으십시오! 당신을 '오빠'라고 수줍게 부르는 그 앳된 목소리 를! 당신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본능이 강렬하게 호 소하고 있지 않습니까! " 엔비 Q는 마치 자신이 그 본능의 사자라도 된 것 처럼 전신으로 울부짖었다. " 이 종을…… 사랑하라고! " " 후, 훌륭해! " 엔비 Q의 혼신을 다한 연설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박수치는 반 가인회 일 동. 가인은 그들이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이 녀석들? " 잘들 논다. " 그때 그들의 뒤에서 들려오는 한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미처 그들이 돌아 보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은 그들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 찼다. 그러자 중심 을 잃은 재영 일행은 보기 좋게 앞에 있던 풀장으로 빠져버렸다. " 으앗! " 풍덩! 물보라를 일으키며 가라앉는 학생들.그들이 빠진 코스는 수심이 2미터가 넘 는 중급자 용 코스였기에 수영을 할 수 있는 몇몇을 제외한 학생들은 가라 앉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다해 발버둥 쳐야 했다. 그렇게 그들을 풀장으로 떠밀은 장본인은 다름아닌 체육 교사 하지연. 그녀는 작년 블루 썸머 비치 때 입었던 수영복을 다시 입고 있었는데 그 입 에는 어김 없이 담배가 물려 있었다. 지연은 망연자실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 자자! 수업 시작이다! 준비 운동부터 할테니까 2열 횡대로 헤쳐 모여! " " 저, 선생님……저 녀석들은……. " 가인은 지연에게 풀장 사이드에 매달려 숨을 헐떡이는 재영 일행의 처분을 물었다. 원수 같은 녀석들이라도 일단은 친구인 이상 꺼내줘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연은 단호했다. " 내버려둬. 저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차기는 마스터 되니까. " ' 속성 코스였던가! ' 그 무지막지한 교육 방식에 학생들은 할 말을 잊었다. 어쨌든 그렇게 남학생들이 줄을 맞춰 서는 동안, 수영복을 갈아입은 여학생 들도 하나 둘 씩 풀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학교에서 단체로 수영 수업을 받 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그녀들은 남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선뜻 앞 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그것을 보다 못한 지연이 결국 짜증을 내며 소 리쳤다. " 네 녀석들도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생리하는 녀석들은 견학으로 빼줄테니 까 빨리 빨리 움직여! " " 꺅! 선생님! " 여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상이 되었다. 저렇게 대놓고 말하면 정작 견학 하려고 했던 사람들까지 견학을 못하게 되지 않는가! 만약 견학을 하려고 했 다간 남학생들에게 자신의 생리 주기를 밝히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가인은 혹시 이것이 지연이 의도한 고도의 봉쇄술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생리를 핑계로 너도 나도 견학하는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그 이름하여 견 학생 원천 봉쇄술! " 저……선생님. 전 이번 시간에 견학하겠습니다. " 그러나 이런 의기소침한 상황 속에서도 당당히 견학 의사를 밝히는 용감한 여학생이 있었다. 대번에 집중되는 시선. 그 곳에는 한성 고교의 꽃 테레이아 민체스터가 표정의 변화 없이 손을 들고 있었다. 그 대담함이라니! 그때 풀장에서 힘들게 기어 올라오던 재영이 탄성을 내질렀다. " 오오오오! 오늘이 바로 민체스터 양의 마술일……! " " 죽어. " 지연은 친절히 재영의 머리를 밟아 다시 풀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자 신의 봉쇄술을 무위로 돌린 테레이아를 도끼 눈으로 노려보았다. 테레이아는 사정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재빨리 견학 사유를 설명했다. " 사실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증세가 좀 심해져서요. 그냥 무시하 고 선생님의 수업을 받고 싶었지만……. " " 그래? 그럼 차라리 양호실에 가서 쉬지 그랬냐? " " 아뇨. 물에는 못 들어가도 수업은 견학하고 싶습니다. " " 흐으음. " 지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쩔 수 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다는데 어 쩔 것인가? 거기다 수영복도 갖춰 입고 양호실도 가지 않겠다고 하니, 그 성 의가 갸륵해서라도 열외시켜주는 수 밖에. 무엇보다 테레이아는 그 유명한 영국 수영 협회의 일원인 것이다. 그 실력 은 이미 작년 블루 썸머 비치 때 검증되었으니 오늘 하루 수업을 빠진다고 해서 중간 평가 때 곤란함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가인은 그렇게 테레이아가 뒤로 물러나자 살짝 줄을 빠져나와 그녀에게 다 가갔다. " 테레이아, 어디 아픈 거야? 아까까지는 괜찮았잖아? " 그가 걱정스럽게 물어오자 테레이아는 살며시 미소지었다.그 미소가 어딘가 초췌해보이는 것이 정말 아프기는 아픈 모양이었다. " 으응. 그러게. 조금 전만 해도 괜찮았는데……. 옷 갈아입을 때부터 몸에 오한이 들더니……. " 그제서야 가인은 그녀가 감기에 걸렸으면서도 수영복 하나만 달랑 입고 있 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근처에 놓아둔 커다란 타월을 하나 뽑아서 그녀의 몸 에 덮어 주었다. 그런 가인의 행동에 테레이아는 당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 가인? 이, 이러지 않아도……. " " 감기에 걸렸으면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지 왜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거야? 그러니까 감기가 더 심해졌잖아? " 테레이아는 가인이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새삼 가슴이 두근 거리는 걸 느꼈다. 그녀는 그가 감싸준 타월을 손으로 꼬옥 붙잡으며 기어들 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하지만……. " " ……? " " 하지만 가인이 내 수영복 입은 모습……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 뭐? 가인은 탈의실로 향하기 전에 그녀와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리고 화악 얼굴 을 붉혔다. 그, 그것 때문에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던 거야, 테레이아? 테레이아는 평소와는 달리 수줍은 태도로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여성스러워 보여서 가인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테레이아는 그가 자신을 바라본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신이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가인, 나한테 무슨 하고 싶은 말 없어? " " 하, 하고 싶은 말? " 가인은 테레이아가 질문을 하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왜 갑 자기 그런 걸 묻는 거지? 테레이아는 그렇게 가인이 헤매고만 있자 짧게 한 숨을 쉬며 볼을 부풀렸다. " 내 수영복 입은 모습에 대해서 할 말이 없냐고. " " 아! "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듣길 원하는지 깨달은 가인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 다. 뭐야.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거야, 테레이아? " 고마워. 감기 걸렸는데도 나 때문에 수영복을 입어줘서. " " ……. " ……그게 아니잖아, 가인. 테레이아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어떻게 이리도 둔감할 수 있을까? 고 맙다는 말 따위를 들으려고 그런 질문을 한 게 아니잖아! 예쁘다는! 단지 예쁘다는 말 한 마디만 해주면 되는데 그걸……! 그때 가인의 뒤에서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지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 유가인……. 네 녀석, 배짱이 아주 좋아졌구나. 이제는 내 수업 시간에도 노골적으로 연애질을 하다니……. " " 으악! " 순간 지연에게 귀를 붙잡힌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다. 그러나 그녀 는 더더욱 세게 그 귀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 네놈은 말이야, 자각이 없어! 자각이! 사내 자식이라면 좀 더 무게있게 행동하지 못하겠냐! 시도 때도 없이 낯간지러운 소리나 해대고! " " 으아아악! 선생님! 그만 하세요! 그마아아안! " 지연은 가인이 비명을 지르던 말던 상관하지 않고 이번에는 테레이아를 노 려보았다. 그 살벌한 눈빛에 테레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 그리고 테레이아! 분명 아프다고 하지 않았냐? " " 예, 예에……! " " 그럼 당장 강사실로 가지 않고 뭘 하는 거야! 견학하기 싫어? " " 아, 아뇨. 지금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 " 테레이아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도망치듯 강사실로 향했다. 지연은 그 뒷 모습을 쏘아 보다가 이내 자신에게 귀를 붙잡힌 가인을 내려다 보았다.도 대체 이런 한심한 녀석의 어디가 좋다고 다들 저러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으으으윽……. " 그러다 가인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지연은 화들짝 놀라서 잡고 있던 귀를 풀어주었다. 가인은 그녀에게서 풀려난 후에도 한동안 귀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 너, 너무 심했나……. ' 지연은 애써 헛기침을 하며, 울상을 짓는 가인에게 말했다. " 흠. 흠. 그나저나 네 녀석은 지금부터 나를 도와줘야겠다. " " 아야야야. " " ……. " " 으으으윽. " " ……자꾸 엄살 피우면 나머지 귀까지 늘여버리는 수가 있다? " " ……. " 정말 엄살 피우는 거 아닌데……. 가인은 빨갛게 부은 귀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삼켰다. 아무리 그라도 보살님 귀가 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 그래서 뭘 도와드리면 되는 거에요? " 가인이 투덜거리며 묻자 지연은 별거 아니라는듯 가볍게 대답했다. " 조교 시범. " 그렇게 지연에 의해 풀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가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왼쪽 손목에 응당 차여져 있어야 할 무전기가 사라져 있었다는 것을……. 182구역의 앞바다에서는 팔라딘 일개 중대와 피스메이커의 뒷처리 반이 상 황을 수습하고 있었다. 인근 지역의 구조대와 경찰들까지 동원되어 있었기 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하지만 이 난리 속에서도 방 송사의 기자진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피스메이커의 매스미디어 통제 가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 다들……괜찮으십니까? " AI슈츠를 해제한채 부목과 압박 붕대로 전신을 간이침대에 고정시키고 있던 진우는 부관 한진의 질문에 힘 없이 답했다. " ……지금 그걸 예의 상으로 묻는 건가? 아니면 빈정거리려고 묻는 건가? " " ……. " 자신의 꼴을 보면 모르겠냐는듯한 진우의 답변에 한진은 입을 다물었다. 자 신의 상관이 이토록 저기압일 때는 침묵이 최고라는 것을 경험 상 알고 있었 다. 한진은 진우와 마찬가지인 몰골을 하고 있는 다른 대원들을 둘러보며 마 른 침을 삼켰다. ' 도대체……터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마리와 유리, 시민은 패턴 그린의 능력이 음속을 초월하는 순간, 전신이 으 스러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나마 뒤를 이어 쇼크 웨이브가 빠르게 형성 되었 기에 망정이지,그 음속의 공간에 조금만 더 노출되었더라면 절대 이 정도 피 해에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민은 포션으로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새삼 그의 인내력에 경의를 표 했다. ' 진우 씨, 평소에도 능력을 사용할 때 이런 끔찍한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 던 걸까……. ' 그녀는 왜 진우의 몸이 근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AI슈츠를 착용하면서도 근육질인 건가 내내 궁금해왔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로 그 의문은 풀렸다.그 근육들은 가속의 충격을 견뎌오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하나의 결과물인 것 이다. 아마 패턴 그린의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 근육들은 하나 하나 진우 의 몸 위에 새겨졌을 것이다. 피를 토하는 고통들과 함께. 그때 탈진한듯 숨소리도 내지 않고 누워있던 유리가 천천히 두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 브루스는……괜찮을까? " 그 중얼거림에 일행의 얼굴로 짙은 상실감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터널을 빠 져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영상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브루스! ' ' 가라. ' 자신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사용해낸 브루스. 그 후 쏟아져내리는 바닷물과 함께 지하 깊은 곳으로 사라져 버린 그의 모습이 자꾸만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특히 그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었던 마리는 그의 몸을 꿰뚫고 지나간 자신 의 손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브루스의 이상 상태에 대한 의문과 그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한데 어우러져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진우는 그런 일행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 ……걱정하지 말아요. " " ……? " 유리는 금세라도 울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민과 마리도 진우 를 돌아보았다. 진우는 거짓말처럼 태풍이 개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 었다. " 걱정하지 말라고요. 오늘과 같은 일은 예전에도 있었으니까. " " 예전에도? " 시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그녀는 진우의 말에서 짐작이 가는 구석 이 하나 있었다. ' ……대재해. ' 2020년에 일어났던 바로 그 사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 사건과 브 루스를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측은 이내 확신으로 바뀌어 갔 다. 브루스와 대재해 사이에는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 하지만……역시 진실을 알고 있는 건……. ' 시민은 조용히 진우를 응시했다.그는 마치 브루스가 하늘에 있기라도 한 것 처럼 창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 그때도 사부님은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오실 거 에요. 반드시. " " ……. " 일행은 진우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일단 그의 말을 위로로 삼 는 수밖에 없었다. 브루스의 제자였던 진우라면 자신들보다 더 그에 대한 일 들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분명 저렇게 말하는 것도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 가 있기 때문일테지……. 유리는 여전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브루스에게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것 이 의미가 있든지 의미가 없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있는 힘껏 외쳤다.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 듣고 있지? 듣고 있다면 반드시 돌아와. 계속…… 계속 기다릴 테니까.우 리 모두 계속 기다려줄 테니까. ' 그러니까 제발 브루스! 그것은 유리 뿐만이 아닌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미 그 는 자신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정신적 지주였다. 벌떡 그때 누워있던 마리가 문득 억지로 그 몸을 일으켜세웠다.아무리 포션을 투 여했다지만 가속의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몸이었기에 일어나는 것 만으 로도 몸에 무리가 왔다. 대원들의 곁에서 그들을 치료하던 의무대원들이 당 황하며 그녀를 말렸지만, 마리는 침착히 그들을 제지하며 진우에게 말했다. " 지금……지금 이렇게 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브루스가 했던 말, 다들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 " 아……. " 일행은 마리의 말에 머리를 한데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사라진 브루스를 걱 정하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그가 전하라고 했던 말은 잊고 있었다니! 마리는 자신의 손목에 찬 무전기를 사용하려다가 이내 고장났다는 것을 깨 닫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한진에게 걸어가 그의 손목에 있던 무전 기를 빼앗듯이 건네 받았다. ' 분명 가인의 주파수가……. ' 마리는 한진의 주파수 기록 폴더를 뒤지다가 이윽고 피스 블루의 주파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힘겹게 간이 침대에 몸을 앉히며 가인에게 무전을 보냈다. 어느 새인가 몸을 일으킨 피스 대원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 와 있었다. 삐삐삐삐 무미건조한 신호음이 울려퍼졌다.먼저 피스메이커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우 선이었지만 마리는 홀로 수도에 남아있을 가인이 더 걱정되었다. 브루스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무엇보다 가인의 신변이 가장 위험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신호음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지만 정작 가인에게선 응답이 없었다. 옆에서 무전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유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왜……받지 않는 거지? 오빠? " " ……! " 마리는 초조한 빛을 숨기지 못하며 무전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인! 뭘 하고 있는 거냐! 어서 무전을 받아! 빨리! 그녀는 브루스의 전언(前言)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녀석이 이 남해안까지 와서 벌인 일련의 행동들은 아마도……. ' 가인! 삐삐삐삐 강사실에 홀로 앉아 있던 테레이아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가인의 무전기 를 내려다보았다. 액정디스플레이에 떠올라 있던 숫자가 사라지고 PEACE RED 라는 영문이 떠올라 있었다. 테레이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 밖의 풀장에서 수영 시범을 보이고 있는 가인을 바라보았다.풀장의 주위에서는 2학년 1반 학생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 지르고 있었다. " 빠,빠르다! " " 과연 최종병기! " 시원스럽게 앞으로 뻗어나가는 가인의 자유형에 학생들은 의외라는 듯 감탄 했다. 그 반응에 지연은 마치 자신이 가인이기라도 한 것 처럼 가슴이 뿌듯 해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학생들에게 소리쳤다. " 자자! 지금부터 유가인의 타임 레코드를 재겠다! 이번 중간 평가는 녀석 의 레코드를 커트 라인으로 삼을테니, 한 명도 빠짐없이 그 기록을 뛰어 넘도록! " " ……예? " " 아, 참고로 위의 사항이 지켜지지 않았을 시엔 네 놈들의 단위 면적 당 질량이 물의 표면 장력보다 가벼워지도록 다이어트다. 알겠냐! " " 에에엑! " 재영 일행은 비명을 질렀다. 또 다시 지연의 횡포가 시작된 것이다.예전 시 험 때 언급했던 무산소로 육체기능의 30퍼센트를 활용시키겠다는 벌칙과 비 슷한 류의 억지였다. 그들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 말도 안되요, 선생님! 우리들 중에는 물이라곤 들어가보지도 못한 맥주병 들도 있단 말이에요! " " 그러니까 다들 내 수업 시간에 수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하 고 있잖아? " " 하, 하지만 그런 형평성에 어긋난 단체 기합 같은 건……. " " 개인의 실수는 단체의 실수. 요즘같이 각박해져 가는 시대에 협동심은 반 드시 갖춰야할 덕목이다. 모두 다 네 녀석들의 단결력을 높이기 위한 나 의 교육적인 장치이니 군말 없이 따르도록. " ' 잘도! ' 2학년 1반 일동은 완고한 지연의 태도에 좌절했다. 그들은 울상이 된 얼굴 로 가인을 돌아 보았다. ' 네놈! 다리에 쥐라도 나버려라! ' ' 그대로 빠져죽어! 제발! 제발 돌아오지 말란 말이야! ' 언제 그의 수영 솜씨에 감탄했냐는듯 일제히 저주를 퍼붓는 학생들. 하지만 가인은 그들의 바램을 철저히 무시하며 100미터를 52초 55라는 경이적인 기 록으로 완주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그 기록에 학생들은 일제히 쓰러졌고 지 연 또한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 이, 이거……통과할 사람이 있으려나. ' 한국 기록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최상위권에 속하는 기록인데……. 그녀는 잠깐이지만 자신이 학생들에게 못할 짓을 한 건 아닐까 후회했다. 삐삐삐삐 테레이아는 그렇게 소란스러워진 학급의 모습에서 다시 무전기로 시선을 돌 렸다. 그 한 순간 수 많은 갈등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 결심 만큼은 흔들리게 할 수 없었다. ' 미안, 가인……. ' 나는 역시…….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들고 있던 무전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 하아. 다행이에요, 사령관 님. 모두들 무사해서. " 수정은 스크린에 떠오르는 피스 대원들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닥터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 모두가 무사한 게…… 아니잖습니까? 피스 그레이는, 브루스 님은……. " " 걱정할 필요 없다. " 조용히 앉아있던 진 사령관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는 일말의 동요도 없는 무심한 눈으로 닥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닥터는 자신도 모르게 뒷 말을 흐렸다. " 브루스 류는 돌아온다. "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이상. 그 약속을 이루지 못한 이상 반드시 ……. "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 " 진 사령관의 확신에 찬 말투에 닥터는 애써 표정을 누그러뜨렸다.그는 도저 히 눈 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브루스의 생사를 그가 안다는 듯이 얘 기해서가 아니다. 응당 사람이 가질 법한 감정의 표현을 그에게서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말하는 인형을 앞에 둔 기분이니……. ' 사령관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일까. ' 닥터는 자신의 불안함을 그의 수 많은 비밀 탓으로 돌렸다. 원래 사람은 미 지의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법이니까. 어쨌든 브루스의 제자인 수정 조 차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기에 닥터는 피스 그레이에 대한 건을 더 이상 언급 하지 않았다. 그때 상황을 체크하던 윤채영이 그들에게 보고해왔다. 《사령관 님! 현장에서 무전이 들어왔습니다. 피스 레드입니다.》 " 연결하도록. " 진 사령관의 짧은 한마디에 작전본부실의 메인 스크린으로 피스 레드의 영 상이 떠올랐다. 피스 레드 성마리는 무전이 연결되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외 쳤다. 《본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거에요!》 《마리 양?》 무전을 받던 채영은 격렬한 마리의 모습에 당황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진 사령관은 냉정하게 반응했다. " 상황부터 보고하라. " 《가인이! 피스 블루와의 무전이 불통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그 말에 채영의 가슴 한 켠이 싸늘해졌다. 진 사령관은 채영에게 손짓으로 피스 블루와의 연락을 시도하라고 지시하며 계속 마리를 상대했다. " 지금 조사해보겠다. 일단은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하도록. " 마리는 그의 무덤덤한 태도에 화가 났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것이 지휘관으로서의 가장 효율적인 행동인 것이다. 마리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 기에 애써 불만을 삭이며 보고했다. 《182구역의 지하 터널에서 요르문간드의 화신 쿠사나기와 조우했었습니다. 간신히 그를 소멸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덕분에 터널이 붕괴되어 12시 간 가까이 그곳에서 갖혀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브루스가…….》 " 피스 그레이가 남긴 전언은 없는가? " 막 침통한 표정으로 브루스의 실종을 보고하려던 마리는 진 사령관의 질문 에 대번에 어리둥절해졌다.어떻게 그가 전언을 남겼다는 것을 사령관이 알고 있는 거지? 《예, 예에. 있습니다. 브루스의 전언……. 그가 말하기를…….》 마리는 터널 속에서의 상황을 회상했다. ' 아무래도 쿠사나기가 182 구역의 민간인들을 끌어들인 것은 단순히 마정 의 숙주로 이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 예? ' ' 사라진 주민들의 수와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의 수가 맞지 않았어.처 음에는 이 앞의 미륵도에 그들이 안치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 체들을 보고 생각이 바꼈다. 녀석이 이 남해안까지 와서 벌인 일련의 행 동들은 아마도…… 채집이었을 거다. ' ' 채집? ' ' 그래. 삼차원의 인류가 가지고 있는 정을 채집한 거지. 미이라 화 된 시 체들은 체내의 정이 모조리 빨려나갔기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던 거야. 정이란 오라의 모태가 되는 근원적인 결정체이자 생명의 에너지. 그 힘은 가이아를 구성하는 요소이자 유클리드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차원의 힘이 다. 놈들은 마정의 핵이라는 매개체로 이 힘을 몇 번인가 이용해왔었지. 그 위력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겠지? ' ' 그런! 하지만 그 수 많은 정들을 어디에 사용하겠다고 끌어 모았단 말입 니까? 어차피 녀석은 죽었는데! ' ' 그러니까 얘기하지 않았나! 차원의 힘이란 말이다! 차원 결계를 열 수 있 는 힘!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어! ' ' ……! ' 한 구역의 주민들에게서 끌어모은 정. 차원 결계를 열 수 있는 힘. 그리고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사용했다는 건……. 순간 마리의 얘기를 듣고 있던 진 사령관이 그 답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 지금부터 상황 설정을 A+로 지정한다! 장소는 피스 블루의 한성 고교! 언 더 시티에 남아있는 병력을 모두 24구역으로 집중시켜라! 182구역의 팔라 딘 대와 피스 대원들도 지금 당장 수도로 귀환해! " " 사령관 님?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 당황한 수정의 질문에 진 사령관은 자신의 앞에 놓인 테이블을 두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는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애써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멋지게 당해버렸군. 와프 입자의 수치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너무 방심 하고 있었어. 182구역의 급격한 기후 변화는 3차원 유클리드 공간에 차원 결계가 열리면서 발생한 왜곡 현상이었던 거다. " " ……그렇다는 말은? " 진 사령관은 상황에 맞지 않게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 게이트가 열린 거지. 마지막 5대 간부가 등장한 거야. " " 거기! 무릎 굽히는 녀석 누구야! 좀 더 힘 줘서 발차기 하지 못해! " 지연의 외침에 학생들은 죽는 시늉을 하며 발차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중간 평가까지 꽤 여유가 있었기에 의외로 서두르지 않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 쳐나갔다. " 자꾸 옆으로 빠지는 놈들은 뭐야! 제대로 앞을 보고 가야 할 거 아냐! " 하지만 벌써 십오분 가까이 계속되는 발차기와 지연의 고함 소리에 학생들 은 거짓말 보태지 않고 익사 일보 직전이었다. 기력이 모두 바닥나서 팔 다 리가 따로 놀고 있다면 말 다했을까? 가인의 뒤를 따라오며 발차기를 하던 재영은 숨이 턱까지 찬 채 연신 투덜거렸다. " 흐엑. 흐엑. 차라리 죽여라, 죽여. 우리가 도대회에 출전할 수영 부 녀석 들도 아닌데 이 무지막지한 연습량은 뭐냐고! " " 야, 야. 목소리 낮춰. 다 들리겠다. " 가인은 재영에게 주의를 주며 지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불만이 쌓일대 로 싸인 재영의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 솔직히 첫 시간은 자유시간으로 해서 학생들에게 수영의 재미를 일깨워주 는게 낫지 않냐? 수업이 재미있어야 학생들의 의욕이 상승할테고, 의욕이 상승해야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질텐데! 하지만 이 평가에 급급한 무미 건조한 수업은 뭐지? 선진 교육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 퍽!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둔탁음에 재영의 불평은 사라졌다. 지연의 손에서 날 아온 수영판이 정확하게 그의 머리를 후려갈긴 것이다. 지연은 물 속으로 천 천히 가라앉는 재영에게 말했다. " 교육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너희들의 노력도 필요한 거다. 자신들만 시대 의 피해자인척 구구절히 떠들어 대봤자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변 화를 원한다면 스스로부터 변화해보지 그러냐? " " ……. " 어째서 훌륭한 얘기도 그녀의 입에서 나올 때면 신빙성을 잃어버리는 것일 까? ' 그야 말보다 폭력이 앞서기 때문이지. ' 2학년 1반의 학생들은 속으로 그 말들을 삼키며 묵묵히 발차기를 계속했다. 가인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 재영에게 애도를 표하며 얼굴을 물 속으로 집 어 넣었다.지연의 말대로 이왕 연습하는 거 좀 더 성심 성의껏 해 볼 셈이었 다.평소 호흡을 할때 팔의 빠른 전진 동작으로 유선형이 무너지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겨드랑이 밑으로 숨을 들이마시는 연습을 하고 싶었다. 부글부글부글 풀장의 물은 아직 쌀쌀한 봄 날씨 덕분에 적당히 데워진 미온수였다. 가인 은 두 눈을 감은채 그 기분 좋은 따뜻함을 느꼈다. 눈을 떠서 물 안을 살펴 보고 싶었지만 약품 처리가 된 풀장 물이라 거부감이 들었다. 아직 골 지점 까지는 꽤 거리가 남아있으니까 이 페이스로 가면 앞 사람과 부딪힐 염려는 없을 것이다. 삐이이이이이……. 그때 가인의 귓가로 어렴풋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는 바람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바람 소리와는 다른, 좀 더 가늘고 음율이 갖춰진 소리였다. 물 속에 있어서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일까.확실하게는 들 리지 않았다. ' 뭔가……피리 소리 같은데……? ' 가인은 풀장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의아함을 느끼며 물 밖으로 얼굴을 꺼내려고 했다. 부그르르르 ' 윽! ' 순간 가인은 입 밖으로 거품을 뿜으며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누군가가 자신 의 다리를 붙잡고 밑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가인은 애써 눈을 뜨며 밑을 내 려다 보았다. 물을 들이켰는지 속이 메스꺼웠다. ' ……! ' 가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재영 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며 발차기를 하던 그가 풀장의 바닥에 붙 어 자신을 끌어 당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서 붙 잡힌 다리를 가볍게 흔들었지만 이내 발목에서 느껴지는 강한 악력에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 자, 장난이 아니야? ' 그러던 중 가인은 볼 수 있었다. 하얗게 뒤집어진 재영의 눈동자를. 그것은 섬뜩하리 만치 푸른 빛을 흘리며 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인은 소름이 돋 는 것을 느끼며 발버둥을 쳤다. 놔! 놓으란 말이야, 박재영! ' 숨이……! ' 가인은 이를 악물며 재영의 가슴을 붙잡히지 않은 반대편 발로 강하게 떠밀 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재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인은 하 는 수 없이 재영의 명치를 발끝으로 걷어찼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 더라도 사람인 이상 명치를 얻어맞으면 숨이 막힐 것이다. ' 컥! ' 예상대로 재영은 신음을 흘리며 가인의 발을 놓아버렸다.그 틈을 놓치지 않 고 그는 재빨리 재영의 등을 밟고 도약했다. " 푸하! " 물 위로 떠오른 가인은 옆의 레일 줄을 붙잡고 거칠게 기침했다. 먹었던 물 들을 토해내며 간신히 한 숨을 돌리고 나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는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 재영이 녀석,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 장난치고서는 도가 지나치잖아! 날 정말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뭐야? 가인은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과 재영이 물 속에서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이는 동안 주위에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과 재영을 기 다리고 있는 건 지연의 가혹한 체벌일지도……. " 어라? "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했던 것이다. 아니. 조용 한 건 당연했다. 풀장 밖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연 선생님도, 반 친구 들도, 아무도……. ' 다들……어딜 간 거야? ' 심지어는 자신이 있는 레일에서 줄을 맞춰 발차기를 하던 친구들도 모두 사 라져 있었다. 단지 풀장에는 가인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 그 적막에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그 많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다니! 혹시 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 크앗! " 그때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물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누군가가 또 가 인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떴다.그 리고 물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 ……! ' 사라진 자신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빽빽하게 풀장의 바닥에 붙어서 자신 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하나같이 예의 푸른 빛이 흘러 나오 고 있었다. 가인은 자신의 전신을 붙드는 친구들의 손길에 그제야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그만둬! 그만둬! ' 몸을 비틀며 저항해봤지만 헛된 몸부림이었다. 2학년 1반의 학생들은 평범 한 인간이라고는 보기 힘든 괴력들을 발휘하고 있었다. ' 크으으으윽! ' 가인은 자신의 뒤에서 목을 조르고 있는 남학생을 향해 있는 힘껏 박치기를 넣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남학생은 코에서 피가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 히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자 입에서 거품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전신에서 힘이 빠지며 눈 앞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몸 속에 있던 모든 것을 토해내면서 동 시에 물을 마시는 기묘한 기분이 그를 엄습해왔다. 안……돼. 이 이상은……. 참을 수……없어……! ' 으으아아아아앗! ' 순간 가인은 괴로움을 참지 못하며 패턴 블루의 힘을 발산했다. 그러자 그 의 주위에 있던 물살들이 세차게 회전하며 한줄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 소용돌이의 여파에 가인을 붙잡고 있던 학생들이 떠밀려 날아갔다. 그렇 게 몸의 자유를 되찾은 그는 풀장의 바닥을 향해 발로 천공권을 발사했다.그 러자 그 반동으로 가인은 세차게 물살을 꿰뚫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텅! " 으앗! " 허공을 유영하던 그의 몸이 풀장 바깥의 타일에 세차게 내리꽂혔다.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몇 차례 몸을 구르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 다. 가슴을 가득 메운 알 수 없는 감각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가인은 떨리 는 손으로 정신없이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한시라도 빨리 숨을 쉬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 크엑! 쿨럭! 쿨럭! " 가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가슴을 두들기고 나서야 가인은 먹었던 물들을 토해낼 수 있었다.그렇게 한참을 웩웩 거리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 다들,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날…… 왜? ' 가인은 수 많은 의문에 시달리면서 비틀 비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공격 했던 반 친구들은 여전히 물속에서 푸른빛이 흐르는 눈으로 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그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그 러다 이내 뒤에 서있던 한 여성에게 등을 부딪히고 말았다.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유·가·인?] " 서, 선생님? " 가인은 뒤를 돌아보고 나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뒤에서는 자신의 담 임인 하지연 마저 두 눈을 푸르게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천 천히 손을 뻗어 가인의 뺨을 쓸어넘겼다. 그 입가로 어딘가 뒤틀린 듯한, 지 연답지 않은 미소가 그려졌다. [후후후. 이 사람은 너의 선생님이잖아? 왜 그런 사람을 괴물보듯 하는 거 지? 응? 좀 더 존경심을 보이는게 어때?] " 너, 넌……넌 누구야? "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 체온이 떨어져선지 한기가 밀려들었다. 지연은 실망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참……. 오라의 주인이라길래 좀 더 기대했더니만. 여타의 인간들과 다 를 바가 없군. 이렇게 벌벌 떠는 꼬락서니라니.] " 네 녀석은 선생님이 아니야! 누구야! " 가인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러자 지연은 마치 무대의 배우처럼 과장되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내 이름은 카이·브릿드.] 순간, 가인의 전신을 옭아매는 팔들. 가인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 샌가 물에서 빠져나온 재영과 친구들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들은 사정없 이 가인을 무릎 꿇리며 그 머리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자신을 카이 브릿드라 소개한 지연은 그런 가인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띄었다. [너희들의 적, 몬스터다. ……후후훗. 몬스터라. 그 호칭 참 가관이지 않아? 정말 제 멋대로 이름 붙이길 좋아하는 족속이라니까. 너희 테라는.] " 너! 내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 가인은 재영에게 머리를 눌리면서도 지연을 노려본채 소리쳤다. 그녀는 가 볍게 한 숨을 쉬며 말했다. [내 얘기를 전혀 듣고 있지 않군. 인류 대 인류로서 대화의 장을 열어 볼까 했더니만…….] " 무슨 짓을 했냐니까! " 가인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처럼 고함을 지르자 지연은 말을 멈췄다.그녀 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 웃었다. [알았어. 대답해줄게. 네크로맨시(Necromancy). 강령술(降靈術)이라는 거야. 쉽게 말해서 내 명령에 따르도록 그 아둔한 머리 속들을 좀 정리해줬다는 거지. 어디보자……. 아직 언어 중추가 익숙치 않아서 좀 혼란스러운데,너 희들의 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꼭두각시?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 뭐? 꼭두……각시? " [흐음. 아냐. 아냐. 그게 아냐. 좀 더 비슷한 단어가 있을 텐데……. 그래. 차라리 좀비(zombi)가 낫겠군.아이티의 마약으로 조종되는 백치 노예들.그 개념이 더 비슷해.] " ……! " 순간 가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망할 몬스터가! 감히! 감히 내 친구 들에게까지 손을 댔단 말이지! 네 녀석이! 그렇게 그가 분노하자 그의 몸에 서 푸른 빛의 오라가 흘러나왔다. [잠깐. 잠깐. 흥분하지 말라고. 네 친구들을 다치게 할 셈이야? 그 상태에 서 힘을 사용했다간…….] " 시끄러워! " 그녀의 말에 개의치 않으며 가인은 붙잡히지 않은 오른손을 위로 치켜들었 다. 그러자 거대한 선풍계의 회오리가 주변으로 휘몰아쳤다. " 천공권 선풍! " 촤아아아아 수평방향으로 넓게 전개된 회오리 바람은 그 위로 바람의 줄기들을 끌어 올 리며 굉장한 흡입력으로 가인의 친구들을 끌어올렸다.단지 오라를 전개한 가 인 본인만이 패턴 블루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 하아아아아아! ' 기합을 내지르며 오라를 거두자 하늘로 떠올랐던 친구들이 풀장에 물보라 를 일으키며 떨어졌다. 하지만 일부는 풀장의 바깥으로 떨어져서 피를 흘리 며 신음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움찔 몸을 떨었고 지연은 그것 보라는듯 혀 를 찼다. [그러게 사람 말을 귀 담아 들으랬잖아? 저런. 저런. 저 애들도 불쌍하지. 친구를 잘못 둔 덕에 오늘 험한 꼴을 당하는군.] " 네 녀석이 진짜! " 가인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라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러나 지연은 되 려 가인에게 다가오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하하하하. 그래. 아주 좋아. 이제는 너를 가르치는 선생님까지 날려버리겠 다는 거야? 어디 한 번 해보시지! 육체를 빌리고 있는 나로서는 조금도 손 해볼 게 없으니까!] " ……비겁한 자식! " 가인은 그 비열함에 치를 떨며 주먹을 내렸다.남들을 조종하면서 자신은 정 작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지연은 가인이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자 씨익 미 소지으며 재차 그에게 다가왔다.가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뒷걸음질만 쳤다. [뭐야? 기껏 화를 낸다 싶더니 공격도 하지 못하는 건가. 그렇게 계속 머뭇 거리다간 이쪽에서 먼저 가는 수밖에 없다고.] " ……! " 순간 천공권 선풍으로 날아갔던 학생들이 무감각하게 일어서며 다시 가인에 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지 피가 흐르는 상태에서도 맹 목적으로 가인을 공격해왔다. 가인은 그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대충 피해내 며 몇몇을 풀장으로 빠뜨렸다. " 그만두지 못해! 이런 우습지도 않은 장난은 그만둬! " [장난이라고? 그럼 수위를 좀 더 올려보도록 할까?] 지연이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학생들은 한층 더 민첩해졌다. 한 여학생이 손톱을 세워 거칠게 가인에게 휘두르자 그의 가슴팍으로 세줄기의 혈선들이 그어졌다. 그녀는 그 바람에 손톱이 부러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며 다른 쪽 손으로도 가인을 공격해왔다. 가인은 당황하며 그것을 피하다가 이내 재영의 주먹에 아랫 배를 가격당했다. " 컥! " 가인은 배를 움켜쥐며 몸을 굽혔다. 충격이 아랫배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것 이 묵직한 한 방이었다. 도저히 일반 사람으로서는 낼 수 없는 힘이다. 가인 은 자신의 오른쪽으로 재차 재영의 주먹이 날아들자 재빨리 백 핸드 스프링 을 했다. 쩍 가인을 지나친 재영의 주먹이 옆의 벽을 사정없이 가격했다.그러자 벽이 갈 라지며 붉은 피가 촤악 튀어올랐다. 가인은 그것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않으며 있는 힘껏 공격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그렇기에 이런 무시 못할 괴력을 낼 수 있었던 것이고! 가인은 이렇게 까지 자신의 친구들을 이용해먹는 몬스터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하지만 계속되는 친구들의 공격에 도저히 몬스터를 공격할 틈 이 없었다. ' 제길! 제길! ' 가인은 어쩔 수 없이 주먹을 앞으로 내찔렀다. 좋아! 최대한 약하게 사용하 는 거다! 최대한 힘을 자제해서……! " 천공권 산! " 퍼엉! 오라의 토네이도를 손안에서 터뜨리자 그 전방에 있던 학생들이 거짓말처럼 튕겨 올랐다. 허리가 꺽이다 시피 날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가인은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힘을 조절한답시고 오라 능력을 사용했건만 여전히 위력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가인은 벽에 몸을 박고 피를 토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뻗었던 주먹을 망연자실하게 떨어뜨렸다. ' 안돼. 이대로는…….역시 AI슈츠를 입지 않은 상태에선 미세한 오라의 조 절이 불가능해! ' 좋아! 그렇다면……! 가인은 천공권 산의 영향으로 학생들의 공격이 멈추자 재빨리 왼손으로 반 원을 그리며 소리쳤다. " 변신! 피스 블루! " 피스 대원의 음성인식이 시작됨과 동시에 미세 분자상태로 그들의 몸 주변 에 머물러 있던 AI컴플리트 세트는 일정 주파 신호에 반응하여 모습을 드러 내게끔 프로그램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 바로 가인의 왼 손에 달려있던 무전기였다.피스메이커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자 피스 대원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할 장비. 하지만……. " ……. "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AI슈츠가 장착되지 않았다. 그리고 가인은 깨달았다. 자신의 왼손에는 아무 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는 것을. 무전기가 사라져 있었 다는 것을! [후후후훗. 왜 그래? 뭔가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냐? 거창하게 변신이란 소 리까지 했으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지.] " 큭! " 지연의 비웃음에 가인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수 영복을 갈아입으면서 무전기를 끌러놓았던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은 지금까지 피스메이커의 신체 검사 날을 제 외하면 단 한번도 무전기를 끌러본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 동이었고, 절대로 해서도 안될 행동이었다. 피스메이커의 호출이 언제 올지 모르는 이상 무전기는 항상 착용하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 어디로, 어디로 간 거야! ' 가인은 풀장을 돌아보았다. 수영을 하던 도중 물 속으로 빠뜨린 건가? 아 까 친구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떨어뜨린 건가? 그런 건가? 하지만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학생들은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가 인을 공격해왔다. ' 젠장! ' 가인은 힘겹게 그들의 공격을 피해내며 이를 악물었다. 평소 브루스가 입버 릇처럼 강조하던 오라의 컨트롤에 무관심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오라를 정착시킴과 동시에 오라를 증폭시켜주는 AI슈츠는 오라 능력자의 능력을 십 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리한 도구였지만, 정작 그것에 너무 의지한 나머지 오라의 컨트롤에 정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자! 정신 차리라고! 제대로 하지 못하겠어!] 지연의 꾸짖음에 가인은 기가 막혔다. 그래! 장난이라 이거지? 빌어먹을 자 식! 가인은 적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최대한 상황을 냉정히 파악하려 노력 했다.녀석의 이런 능력은 분명 낯설지가 않았다. 예전 마인드 브레이커 마유 빈만 하더라도 이렇게 사람의 정신을 조작하여 인질극을 벌였던 사례가 있는 것이다. 녀석도 그와 같은 능력자인가! ' 아니야. ……틀려. ' 지금의 적과 마유빈의 능력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마유빈 은 그나마 자신을 드러내고 능력을 사용했지만 이 녀석은 아예 하지연 선생 님의 몸을 빌리고 있었다. 공격할 대상이 분명치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원리일까?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서 이들을 조종하는 걸까? '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지! 숨어 있는 녀석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 가인은 뒤에서 자신을 덮치려는 학생을 앞으로 엎어치며 벽을 등졌다.그러 자 그 주위로 2학년 1반의 학생들이 물샐 틈 없이 그를 둘러 쌓았다. 가인은 자신을 포위한 친구들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지연은 인상을 찡그리며 실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겨우 이 정도로 자포자기한 거냐? 그런 주제에 오라의 주인이야!] 멋대로 떠들어라! 가인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 모든 일을 꾸미고 비겁하게 저 혼자만 몸을 숨기고 있는 몬스 터! 녀석이 숨어있는 곳을 느끼기 위해 애썼다. 육체보다 마음을 공격하는 것! 상대의 심정을 공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 심! ' 간다! ' 가인은 눈을 뜨며 2층의 CCTV실을 향해 주먹을 내찔렀다. ' 흥. 형편 없군. ' 카이는 2층 창문에서 풀장의 상황을 내려다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곳 에는 막 자신이 조종하는 좀비들로 인해 궁지에 몰린 가인의 모습이 보였다. 겨우 이 정도 장난에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는 꼴이라니.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 녀석은 한 술 더 떠서 눈까지 감아버리는 것이다. " 겨우 이 정도로 자포자기한 거냐? 그런 주제에 오라의 주인이야! " 그의 꾸짖음은 자신이 조종하고 있던 인간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한심한 놈! 정에 이끌려서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니! 애초에 그것을 위한 노림수였 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걸려드니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정말 저런 인간에 게 리리스와 요르문간드가 애를 먹었단 말인가? ' 이래서야 모처럼 그녀에게 녀석의 무전기를 뺏으라고 한 보람도 없잖아? ' 카이는 자신이 준비한 계획이 실행도 되기 전에 그 끝을 보이려고 하자 한 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는게 좋을 뻔했다. 이런 장난 같은 강령술에 휘둘려서야……. " 하아아아아아앗! " ' 응? ' 그때 갑작스런 가인의 기합 소리에 카이는 안색을 굳혔다. 그가 자신이 있 는 방향을 향해 정확하게 주먹을 내뻗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눈치 챈 거지? 하지만 카이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곧 그의 주위로 강맹한 오라의 기운들이 모여들었다. 天천 空공 主주 心심 拳권 투카카카카카칵! 순간 CCTV실의 벽이 터져 나가며 네 줄기의 토네이도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 다. 그 칼날 같은 회오리의 무리는 자신들에게 닿는 모든 것들을 산산히 부 숴버리며 그 몸을 격하게 뒤틀었다. 주륵 카이는 그 파괴의 현장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이내 뺨에서 뜨거운 뭔가가 흐 르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만져보니 붉은 피가 묻어나오고 있었다.아마도 앞 의 폭발에서 튀어나온 콘크리트 파편에 얼굴을 베인 모양이었다. 가인이 AI슈츠를 착용하지 않고 있는 게 카이의 목숨을 살렸다. 그의 오라 컨트롤이 조금만 더 정확했더라면,그래서 오라의 토네이도가 카이의 전방에 서 터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의 몸은 토네이도의 폭발에 흔적도 없이 사 라졌을 것이다. " 하, 하하……. " 카이의 입으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나와 줘야지……. " 하하하하하! " 폭발의 여파가 걷혀나가자 무너지 벽 사이로 풀장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 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유가인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 다.카이는 아직 자신의 유흥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큰 소리 로 외쳤다. " 좋아! 다행이야! 이제야 해볼만 하군! " 순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은 색의 피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기묘한 화음. 앞에서 가인이 들었던 예의 피리 소리였다.그것은 카이 가 부르는 혼의 심퍼시(Sympathy). 그 소리에 반응하여 풀장의 밑에 잠들어 있던 마수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아] 촤아아아아 풀장의 수면으로 떠오르는 거대한 그림자. 면적이 140제곱미터에 달하는 몬 스터가 풀장의 레일 줄들을 일제히 끊어버리며 수면 위로 부상했다. 가인은 고막이 찢어질 듯한 괴물의 비명 소리에 귀를 틀어 막으며 신음했다. 칠판이 나 유리를 손톱으로 긁는 소리와 비슷했지만 그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음량이 었다. [후……후…….] 그때 몬스터의 두 눈에서 예의 푸른 빛이 번쩍이며 그 입으로 카이의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 ……! " 후우우우우 그것은 무색에 가까운 하얀색의 두꺼비였다. 일단은 그렇게 보였다. 하지 만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덩치와 등 뒤로 돋아난 날개 같은 지느러미 한 쌍, 육식동물에게나 있을 법한 날카로운 이빨은 녀석을 단순한 두꺼비가 아니게 하고 있었다. 거기다 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꼬리라니! " 뭐, 뭐야……? " 가인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괴물의 외관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녀석의 입에서 카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 괴물을……조종하는 건가? ' 친구들을 조종할 때와 같이? 푸른 빛을 번뜩이는 괴물의 눈이 그 증거였다. 괴물은 가인을 내려다 보며 유창하게 인간의 언어를 구사했다. [이런 건 처음 봤겠지? 이게 바로 내 능력이야.혼이 있는 생명체라면 무엇 이든지 조종할 수 있지. 이것이 바로 강령술! 이것이 바로 네크로맨시!] 순간 괴물은 그 거대한 지느러미로 수면을 치며 뛰어올랐다. [그렇기에 나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네크로맨서(Necromancer)!] 드드드드드드 괴물이 뛰어오른 것만으로도 수영장의 건물이 흔들리며 그 밑의 철근들이 비명을 질렀다. 가인은 밖으로 터져나오는 풀장의 물들에 전신을 얻어 맞으 면서도 괴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괴물의 그림자가 수영장을 검게 물들 였지만 가인의 얼굴에서는 한 치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이 따위 것! ' 이런 몬스터 따위! 수십 번도 더 상대해온 나다! 이제 와서 두려워할 것 같 으냐! 가인은 오른손으로 오라의 토네이도를 끌어모으며, 자신에게로 떨어져 내리는 몬스터를 향해 주먹을 내찔렀다. " 천공권! " 투카카카카칵 거센 오라의 토네이도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올랐다. AI슈츠를 입지 않 은 상태에서 있는 힘껏 천공권을 시전해선지 그 반탄력에 떠밀려 가인의 몸 이 허공으로 날아가려 했다. 가인은 튕겨나갈 것 같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떠 받치며 땅에서 다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무게 중심을 낮췄다.파괴적인 이미지 를 강하게 떠올리다 보니 오라를 사용한 가인의 몸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크으으윽! 역시 AI슈츠가 없으면! ' 토네이도의 여파에 노출된 맨살이 칼에 베이는 것 처럼 아프다! 하지만 가 인은 이를 악물며 몬스터를 노려보았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 최대한 힘을 실 은 천공권이다! 거기다 녀석은 더할 나위 없는 거대한 표적! " 피할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피해봐! " [……그럴까?] 휘릭 순간 몬스터는 그 거대한 몸으로는 믿기 힘든 선회력으로 토네이도를 피해 냈다. 그러자 표적을 잃어버린 천공권은 그대로 수영장의 천장에 부딪혔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콘크리트의 파편들이 풀장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인은 민첩한 몬스터의 회피에 할 말을 잊었다. 저 크기로 저런 민첩함을 보일 수 있다니! 거기다 녀석은 쏟아져 내리는 콘크리트의 파편들까지 S자로 피해내는 여유를 보였다. ' 빠르다! ' 기존의 몬스터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움직임이었다. 좀 더 능숙하면서도 이성적이라고 해야하나? 몬스터는 웃음을 터뜨리며 가인이 있는 방향으로 선 회해왔다. [하하하하하! 일단 내가 이 아이를 조종하는 이상, 지금까지의 녀석들처럼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마라!] 후우우웅 파공음과 함께 괴물이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가인의 앞으로 돌진해왔다.가 인은 다가올 충격을 대비하며 눈 앞으로 오라 쉴드를 끌어모았다. AI슈츠를 착용하고 있었더라면 부츠의 힘으로 가볍게 피해냈을 공격이지만 지금의 그 에게는 오라 쉴드로 막아내는 것만 해도 벅찬 일이었다. 휘이이이잉 " 큭! " 하지만 몬스터는 가인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코 앞까지 다가 오다가 재빨리 위로 날아 올랐다. 그러자 거센 풍압이 일어나며 가인의 얼굴을 때렸고, 휘 날리는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 ……! " 순간 가인은 반사적으로 옆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가 피한 자리로 괴물의 거대한 꼬리가 내려 찍혔다. 쩍! 타일이 박살나며 콘크리트가 한움큼 꼬리 모양으로 패여나갔다. 가인은 튀어오른 타일 조각에 등과 손을 베이며 몸을 일으켰다.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지금 자신은 녀석의 사정권 안에 들 어가 있는 것이다. 휘이이이익 그 생각을 하기가 무색하게 괴물의 꼬리가 횡 방향으로 날아 들었다. 가인 은 그 공격을 뛰어 넘어 피하려고 했지만, 곧 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 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오라 쉴드를 펼쳤다. 제길! AI슈츠만 있었더라면 이 따위 것! 퍼어어엉! 쉴드를 후려치는 괴물의 꼬리. 그 충격에 가인은 한참을 뒤로 밀려났다. 그 바람에 발 바닥이 까지면서 끌려온 자리에 핏 자국이 그려졌다.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전신이 아파왔다. 꼬리를 피해내는 과정에서 입은 타박상 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댔던 것이다. 그 고통들을 긴장감 하나로 참아내기 에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 ' 인간의 몸이란 게 이렇게 무력했던가? 이렇게 연약했던가? ' [하하하. 잘 피해내는데? 좀 더 피해보시지.] 괴물은 꼬리 하나만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가인을 유린해왔다. 마치 그 의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인은 사방팔방으로 자신을 후 려쳐오는 괴물의 꼬리를 오라 쉴드로 아슬아슬하게 막아내며 욕지거리를 내 뱉었다. ' 제길! 도저히 틈이 없어! ' 기존의 몬스터들이 짐승처럼 저돌적으로 공격해왔던 것에 비해, 이 카이라 는 녀석은 최대한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며 효과적으로 괴물을 조종하고 있 었다. AI슈츠를 입고 있더라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마 녀석이 처음부터 본 실력을 발휘했더다면 싸움의 승패는 예전에 갈라졌을 것 이다. ' 날……깔보고 있는 건가? ' 날 가지고 놀고 있는 거야? 가인은 힘겹게 괴물의 공격을 빗겨내며 이를 갈 았다. 귓가로 들려오는 카이의 비웃음 소리가 그의 신경을 잔뜩 긁어대고 있 었다. 가인은 오른손으로 오라 쉴드를 유지한채 왼손으로 토네이도를 끌어모 았다. ' 그래. 마음껏 깔보고 있어라. ' 그 오만함이 네 녀석의 패배로 이어질 테니까! 가인은 순간 재차 날아드는 괴물의 꼬리를 향해 오라 쉴드를 거두며 왼손으 로 천공권 산을 터뜨렸다. 퍼엉! 거센 폭발음과 함께 괴물의 꼬리가 튕겨 나 갔다. [엇!] 당황하는 카이. 그리고 가인은 주저없이 오른손의 천공권을 날렸다. " 이거나……먹어라--------!!! " 투카카카카칵 마치 포효하는 짐승처럼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가는 천공권. 그 오라의 토 네이도는 정확하게 천장을 꿰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가인은 주먹을 뻗은 상 태에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천장? 몬스터가 아니고 천장이라고? " ……! " 그리고 가인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오른손을 휘감고 있던 정체불명의 물 체를. 그것은 다름 아닌 몬스터의 혀였다. 두꺼지 특유의 길다란 혀가 그 입 에서부터 튀어나와 가인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녀석은 저 혀로 천공권의 궤도를 바꿔버린 모양이다. [흐우우우우!] 괴물의 혀는 그대로 가인의 팔을 감은채 그를 옆으로 거칠게 휘둘렀다.그러 자 가인은 너무도 맥 없이 수십 미터 떨어진 벽으로 몸을 처박았다.크악! 순 간 가인의 눈 앞으로 별들이 튀어오르며 얼굴의 반쪽이 피로 물들었다. 하지 만 괴물의 공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녀석은 여전히 가인의 팔을 놓치 않은채 그를 들어다가 벽과 바닥으로 사정 없이 패대기쳤다. 퍽! 쾅! 타일이 깨지면서 붉은 피가 그 자리에서 배여나왔다. 뼈와 살이 깎 여 나가는 고통에 피투성이가 된 가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괴물 은 그런 가인의 몰골에도 불구하고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다시 한번 그를 내던 지려고 했다. 그때 가인의 팔을 붙들고 있던 괴물의 혀 부근으로 푸른 빛의 기운들이 모여들었다. 위이이이이잉 그 현상에 수상함을 느낀 몬스터는 재빨리 가인에게서 혀를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늦었어! 투카카카카칵 [캬아아아악!] 괴물의 입에서 귀를 찢는 비명 소리와 함께 그 혀가 앞 귀둥이 짤린 채 허 공으로 피를 흩뿌렸다. 가인은 자신을 붙들고 있던 혀를 향해 그대로 천공 권을 발사했던 것이다. 원래대로 라면 천공권의 토네이도가 그 혀를 타고 그 대로 본체를 꿰뚫어야 했지만, 몬스터는 눈치 빠르게 몸을 빼냄으로서 그 피 해를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었다. 몬스터는 혀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분수로 입가를 적시며 카이의 목소리로 말했다. [후우, 후우. 역시 곧 죽어도 오라의 주인이라는 거로군. 꽤나 멋지게 해주 잖아?] " 크으으윽. " 그러나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것 치고서는 가인의 대가가 너무나 컸다. 일단 공격이 실패한 이상 회심의 일격이란 말도 의미가 없어졌고, 가인은 재기하 기 힘들 정도로 부상을 입은 것이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채 박살난 몸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입으로 연신 피 거 품이 흘러나오며 눈 앞이 어두워져 갔다. 희미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가인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가슴 부근에 손을 가져갔다.AI슈츠의 보호갑 속에서 포션 을 꺼내려고 했던 것이다. ' 아……. ' 하지만 없는 것이 만져질리가 없었다. 가인은 허무하게 손을 늘어뜨리며 고 개를 떨궜다.항상 당연하게 여겨왔던 AI슈츠와 포션이 이렇게나 절실하게 느 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부상 쯤이야 포션 한 방이면 순식간에 완 치될 수 있는데, 그래서 다시 한번 싸울 수 있는데……. AI슈츠만 있었더라 면……. 무전기만 있었더라면……! " 으우아아압! " 가인은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만신창이가 된 몸을 거칠 게 일으켜 세웠다. 그는 약해지려는 자신을 꾸짖었다. 바보같으니! 그래! AI 슈츠가 없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무전기가 없는 게 뭐가 어때서! 이런 위기쯤이야 언제든지 이겨냈잖아? 매번 목숨을 걸어왔잖아?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어! 그러니까 질질 짜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저 눈 앞에 있는 자식에게……. ' 한 방 먹여줄 생각이나 하란 말이야! ' 푸화아아악 가인의 몸에서 푸른 빛의 오라가 회오리치듯 모여들었다. 예전의 그였더라 면 진즉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예전의 그였더라면 진즉에 쓰러졌을 지도 모 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자신은! ' 너는 모두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다. 너에게는 무한한 오라의 가능성이 있으니까. ' 브루스. 그는 자신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뭐라고 가르쳤었지? ' 소중한 이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라. ' 소중한 이? 가인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편에 서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지연 선생님, 반 친구들.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눈에 새기기 위해 노력했 다. 모두 자신의 소중한 이들이었다. 자신이 지켜내고 싶은 이들이었다. 아 무리 AI슈츠가 없다 한들, 아무리 불리한 싸움이라한들,저들을 놔둔채 이 자 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 나는……. " 가인은 마치 쥐어짜는 것 처럼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질 수 없어! 지지 않 을 거야! 그 집념 하나 만이 그를 지탱해주었다. " 나는……피스메이커! " 피스메이커! 그 이름은 이차원의 생명체에게서 삼차원의 인류를 지켜내는 오라 능력자들의 호칭! 그리고 자신은 바로 오라 능력자였다. 그렇기에 나는! ' 모두를……지켜낼 거야! ' 그리고 네 녀석을……. " 쓰러뜨린다! " 가인의 기세에 발 맞추어 그에게서 끊임 없이 오라의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카이는 그런 가인의 모습을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경탄했다.이 상황에서도 아 직 포기를 모르겠다는 눈빛이로군. ' 후후후……. 그래야지. 아직은 일러. 이 정도로 포기하기에는……. ' 이쯤에서 슬슬…… 본 무대를 열어보도록 할까? 그리고 그는 자신이 메인으로 삼고 있던 몬스터를 제외한 나머지 네크로맨 시들을 모두 풀어버렸다. " 어, 어라? " " 이게 뭐야? " 가인은 자신의 뒷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들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카이에게 조종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오라를 감춰버렸다. " 무슨 일이……있었던 거지? " 가인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지연이 이마를 감싸 안으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까지의 일들이 기억나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수영장은 난장판이 되어 있고…….하 여간 영문을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그렇게 어리둥절해하던 중, 그녀의 눈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을 바라보 고 있는 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상태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유, 유가인? 그, 그게 무슨 꼴이냐? 그 피는 다 뭐야? " " 서, 선생님……. 이건……. 이건……! " 가인은 그 물음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주춤거렸다.지연은 사태를 파악 하지 못하며 서둘러 가인에게 다가와 그의 상처들을 살폈다. " 도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된 거야? 이마가 다 깨졌잖아? 아, 아니! 잠깐! 얘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 지혈부터 하자! 어서! " " 전 괜찮아요, 선생님. 그보다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니에요……! " " 시끄러워! 뭐가 괜찮다는 거야! 잔소리하지 말고 냉큼 치료부터 받아! 그 리고 너희들! " 지연은 당황하는 가인에게 크게 일갈하며 뒤를 돌아보았다.아이들을 시켜서 양호실의 박미정 선생님을 불러오게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응 해야 할 학생들은 그녀의 위쪽을 멍하니 올려다 본 채 다들 얼이 빠져 있었다. " ……? " 그제서야 지연은 자신의 주변이 거대한 그림자로 뒤덮혀 있다는 걸 깨달았 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위로 고개를 들 었다. " ……어? " 그리고 목격할 수 있었다. 바로 하늘을 날고 있는 거대한 두꺼비를! " 뭐, 뭐야? 저건? ' 지연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황당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지금 헛 것을 보 고 있는 건가? 마치 헐리우드의 B급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이 자신들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공포나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괴물이 그녀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삼차원의 여러분들, 다들 안녕하신가?] " 아……. " " 으……. " 순간, 공포는 빠르게 2학년 1반의 학생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 으, 으아아아악! 괴물이다! " " 사람살려! "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출입구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 도망치는 뒷 모습들 을 카이는 딱하다는 듯 바라보며 네크로맨시를 발동시켰다. [이런.이런. 관객들이 도망치면 곤란하지. 얌전히들 있어달라고.] " ……! " 강령술에 걸린 학생들은 모든 행동을 멈추고 다시 가인을 향해 뒤 돌아섰다. 하지만 아까의 강령술과는 달리, 이번의 강령술은 의식은 깨어있되 몸의 제 약만을 빼앗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을 마주하자 가인은 가슴 한 켠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학생들 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 으, 으아아아! 몸이, 몸이 안 움직여! " " 어떻게 된 거야! " 그들의 아우성에 가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몬스터를 노려보았다. 등 뒤로 친구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를 찌르고 있었다. 저 시선들이 있는 한 오라를 사용할 자신이 없었다. 비록 비상 시였지만……. 남의 이목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지만……. ' 시, 싫어……. ' 오라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오라를 사용한다면…… 모두에게 내가 오라 능력자라는 게 밝혀진다면……! 가인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죽음의 공포와는 다 른 공포가 밀려들었다. 자신의 생활이 완전히 깨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일상 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귓가로 카이의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인간이란……힘을 가진 이를 두려워하지. 비록 같은 동족일지라도.] " ……! " 가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몬스터를 올려다보았다. 카이는 그런 그를 내려다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자, 이들의 앞에서 네 힘을 보여봐라, 오라의 주인!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거지? 어차피 넌 이들과는 다르잖아?] 다르다고? 다르다니? ' ……뭐가? ' 그때 가인의 뒤쪽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 가, 가인아……. " " 유가인? " 가인은 안색이 창백해진채 뒤를 돌아보았다. 괴물과 얘기하는 그를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연도. 재영도. 2학년 1반의 모 두가 불신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자 가인은 자리에 못이 박힌 것처럼 굳어버렸다. 카이는 그 반응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재차 말을 이었다. [넌 오라를 소유한…… 괴물이니까!] 괴물! 그 한 마디가 가인의 가슴에 예리한 비수가 되어 꽂혔다. [끈질기군. 인내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대체…….] 카이는 자신이 몸을 빌린 괴물의 혀에 포박당한채 피투성이가 된 가인을 내 려다 보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친구들의 앞에서는 오 라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건가? ' 흥.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힘을 숨기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 카이는 물론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그에게 하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 는 건지. 그는 가인을 고립시키고 싶었다. 이 괴로움이라고는 모르는 세상에 서 태평스럽게 살아온 그에게 커다란 칼자국을 남기고 싶었다.무엇보다 자신 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을 뻗친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 하지만 죽이면 곤란하지. ' 일단 네 녀석은 그 구차한 목숨을 계속 이어줘야 되니까. 유가인. 그는 오라의 주인. 그리고 옴팔로스의 문을 열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다. 이 둔해빠진 인간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자극적인 뭔가가 필 요했다. 힘을 자각시킬 계기 말이다. ' 그런 의미에서 지금과 같은 방법이 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걸까? 녀석은 고집도 오기도 아닌 만용을 부리고 있었다. 저러다 죽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죽음일까? 아무리 괴물 취급을 받는 게 싫다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숨보다도 중요할 수 있을까? ' 그런 취급따위……이 쪽에서는 셀 수도 없이 받아왔단 말이다. ' 그런 와중에도 카이가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결국 살아남아야 한다 는 사실이었다. 살아 남아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삶도, 인생도, 가족도! ' 그리고 사랑도! ' 그렇기에 자신은 모든 것을 견뎌왔다. 그에게 있어서 가인의 저런 모습은 단순히 행복에 절은 얼간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카이는 가슴 밑바 닥에서부터 끌어오르는 혐오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그래. 저런 녀석에게 리리스가 끌릴 리 없어. ' 쿠사나기나 한시영이 했던 말들은 모두 헛소리 임이 틀림 없다. 자신과 같 은 절망 뿐인 인생을 걸어온 그녀라면, 바르의 별들이었던 그녀라면 이 풍족 한 세상에 참을 수 없는 증오를 느꼈을 것이다. 당연히 행복에 겨운 삶을 살 면서도 그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저 녀석에게 마음을 줄 리 가 없다! ' 기우였던 거야. 하. 나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런 근거도 없는 말들 에 조바심을 느꼈다니. ' 그녀에 대한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무엇보다 지금까지 자 신을 제지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카이는 한때나마 그 녀에게 의심을 품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거…… 나중에 무릎 꿇고서라 도 사과해야겠군. 그녀가 용서해줄지는 모르겠지만. ' 리리스, 미안. ' 카이는 자신의 머리를 따뜻히 쓰다듬어주던 그녀를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깊이 사죄했다. 탕! 그때 그는 본체로 삼았던 학생의 육체에서 CCTV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 을 수 있었다. 카이는 재빨리 몬스터의 육체를 대기 상태로 돌려놓고 학생의 육신으로 튕겨지듯 돌아왔다. 눈을 뜨고 문 쪽을 돌아보자 설마했던 인물이 그곳에 서있었다. 그의 기대가 산산히 부숴지는 순간이다. " 리리스……. " 카이는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리리스, 여기서는 테레이아 민체스 터라고 불리우는 여학생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째서?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리리스? 왜? 카이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그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리 고 테레이아는 입을 열었다. " 그만둬, 카이. " 뭐? "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해. " 테레이아는 카이를 꾸짖듯이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카이가 고개 를 떨구며 의기소침해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의 행동을 방관할 생각 이 없었다. 카이는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뭐가……충분하다는 거야? " 카이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원망의 빛이 서려있었다. " 전혀, 전혀 충분하지 않아! 어째서 저런 녀석을 감싸고 도는 거지? 저런 테라 인 따위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잖아? 응? " " ……감싸고 도는 게 아니야. " 테레이아는 그의 반응이 격해지자 애써 그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 지나친 자극은 자칫 잘못하면 마음의 이베니즈(eveness;균등성)를 무너뜨 리기 때문이야. 우리는 잠정적인 결론 끝에 옴팔로스의 열쇠를 이용하기 로 결심했어. 하지만 열쇠를 돌리기도 전에 부숴버리면 안되잖아? " " ……. " 카이는 입술을 앙 다물며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테레이아는 천천히 그에 게 다가가 그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그녀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동생을 달 래는 누나처럼 따뜻하게 속삭여 주었다. " 카이, 아까 나에게 뭐라고 했었지? 너와 나, 그리고 유메. 이렇게 셋이서 사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했지? 참고 견디자고 했지? 우리가 인내해온 시 간들을 떠올려봐. 여기서 감정대로 행동하다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버 린다고. 그걸 원하는 거야? 유메가 풀려나길 원했던 게 아니었니? " " ……. " "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야. 다 잘 될 테니까 …… 그러니까 더 이상……. " 테레이아는 카이의 기분이 많이 누그러진 것 같자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 그를 괴롭히지마. " " ……! " 순간 카이는 거칠게 테레이아의 손을 뿌리쳤다. 테레이아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그가 왜 이러는 거지? 그렇게 당 황하는 그녀에게 카이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 거짓말!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마, 리리스! " " ……카, 카이? 거짓말이라니? " 거짓말? 어째서? " 그게 무슨 소리야! " 소리치는 그녀에게 카이는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 감싸고 도는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그를 보호하는 거지? 내가 그를 죽일리가 없잖아? 죽일려면 진작에 죽일 수 있 었어. " 카이의 목소리에 비통함이 배여나오기 시작했다. " 내가 뭣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었다고 생각해? 내가 왜 이렇게 일 을 번거롭게 꾸몄다고 생각해? " 카이의 질문에 테레이아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다. 그는 애 초에 가인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단지 그는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 가인에 대한 나의……마음을……. ' 테레이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 날……시험했던 거야, 카이? " 믿을 수 없다. 설마 그가 날 속이다니. 설마 그가……. " 그런 거니? 그런 거야? " 계속되는 그녀의 추궁에 카이는 자조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사실이 아니길 바랐어. 누구보다 널 믿고 싶었는데……. 모두에게 너 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는데……. " 여기까지 나타나 자신을 제지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 없이 확실한 증거였다. 그녀의 말 속에서 오라의 주인을 걱정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침착함 속 에 숨겨진 그 다급함이라니! 그러자 배신감은 질투로, 질투는 증오로 변해갔다. " 모든 것이 변해버렸어, 리리스. 유메에 대한 마음도, 나에 대한 마음도. 노아의 리리스는 더 이상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유메가 풀려나기를 원하 지 않느냐고? 하! 잘도 그런 걸 물을 수 있군! 잘도 그런 거짓말에 유메 의 이름을 들먹일 수 있어! " " 카이……. " 테레이아는 안타까운 어조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얼굴에 깔리는 죄책감 에 카이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리리스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대신 그는 괴 물에게 붙들려 있는 가인을 노려보았다. 참을 수 없는 증오가 그를 향해 이 빨을 드러냈다. ' 다 네 놈 탓이야! 리리스가 저렇게 변한 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네 녀석! ' 밉다. 저 녀석이 밉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 하지만……. ' 죽일 수가 없다니! ' 그렇다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히는 수 밖에! 카이는 순간 네크로맨시를 발동시켜 하지연과 2학년 1반의 학생들을 움직였다. 지연과 재영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움직이는 몸에 비명을 질렀다. " 뭐, 뭐야? 이건? " " 맙소사! " 그들은 괴물의 혀에 전신을 포박당한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가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비몽사몽 간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 가인은 피 가 엉겨붙은 눈을 힘겹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채 앞을 확인하기도 전 에 날카로운 따귀가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철썩! " 아아……. " 지연은 가인의 뺨을 때린 자신의 손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얼마나 인정사정없이 때렸는지 가인의 입으로 가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하지 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지연의 뒤를 이어 2학년 1반의 학생들도 각각 한 번 씩 가인의 따귀를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철썩! 철썩! 순식간에 가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하! 어서 힘을 써보라고, 오라의 주인! 뭘 망설이고 있는 거지? 응? 마음만 먹으면 금방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잖아! " " ……싫……어. " 가인은 입가가 다 쥐어터진채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네크로맨시된 인간들에 게서 그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카이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정말 꼴 같잖은 자식! 아직도 그 따위 위선을 떨고 있는 거냐! 그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하겠어! 짝! 짝! 짝! 짝! 짝! " 그, 그만해! " 재영은 가인의 얼굴을 연신 후려치는 자신의 행동에 비명을 질렀다. 가인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그것을 얻어맞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피를 한 움큼 토 해냈다. 그러자 작은 웅덩이가 고일 정도로 검붉은 핏덩어리가 부러진 이빨 들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내렷다.그 모습에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눈 을 감을 수도 없었다. 얼굴을 돌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흐응. 역시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걸로는 꿈쩍도 하지 않겠다, 이 말이지 ……. " 카이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네 녀석이 그렇게 나온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 밖에. " 자, 잠깐! 하지마! " " 꺄악! " 학생들은 갑자기 풀장으로 걸어가는 자신들의 발걸음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가인은 부어오른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카이가 있는 CCTV실을 향해 소리 쳤다. "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 " 뭐어, 별 거 아냐. " 카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 네 녀석을 괴롭혀봐야 재미도 없으니까 좀 더 색다르게 놀아보려고. " " 색다……르게……? " 가인은 힘 없이 그 말을 중얼거리다가 곧 카이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고 선 두눈을 부릅 떴다. 지연 선생님과 친구들이 풀장으로 뛰어들려고 하고 있 었던 것이다. 설마 저 녀석! 선생님들을 풀장 밑으로 가라앉혀 죽일 셈인가! 그런 거야? " 그, 그만둬!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마! " " 하하. 그러니까 네가 직접 저들을 말려보란 말이야. 설마 저들이 물에 빠 져 죽는 걸 방관만 하고 있을 셈은 아니겠지? 그냥 오라를 사용하면 될 문제 아냐? 뭐가 어려워? " 카이는 가인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즐기면서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 설마 괴물 취급 받는게 무서워서 힘을 쓰지 않겠다는 거야? 따돌림 당하 는게 무서워서? 아하하하하! 이거 참 걸작이네! 넌 네 입으로 말했던 것 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피스메이커라면서? 그건 저들을 지켜내기 위한 이름이 아니었나! " 그래. 역시 이런 거겠지. 모두를 위한다는둥 모두를 지켜내겠다는둥 아무리 떠들어대봤자 너희들은 결국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인종이다. 자기만 무사 하면 남이야 상처를 입든 숨이 끊어지든 알 바 아니라는 거지! 너희 테라는 예전부터 그랬어! 그렇게 너희 놈들은 우리를 유린하고 약탈해왔다! " 이 이기적인 놈! " 이기적인 놈! 이기적인 놈! 카이의 목소리는 마치 메아리처럼 연신 울리며 가인의 귓가를 두들겼다. 가 인의 부어오른 눈에서 굵은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괴물 의 혀에 단단히 묶인 몸을 애처롭게 떨며 흐느꼈다. 카이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기적이었다. 이 상황에 와서도,모 두가 위험에 처한 상태에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힘을 사용하기 싫다고 소 리치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친구들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도 그들이 자신 을 외면하는 걸 더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 가, 가인아……. " 재영이 풀장의 사이드에 서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그 뿐만이 아니다.1년 동안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지내온 친구들이 겁에 질 린 모습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언제나 괄괄하던 하지연 선생님마저 어 깨를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하고 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독한 현기 증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혐오감만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제 한 목숨 보존하는 것 조차 힘든데 하물며 남까지 생각해 줄 여유는 없는 노릇이지. ' 브루스가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가인은 그 말이 갖는 의미를 절실히 깨 달았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지킨다는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알 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제 자 리를 멤돌고만 있었다. ' 하나도 성장하지 않았어. '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하나도 강해지지 않았어.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는 가인 자신을 불태우 고 끝내는 이 모든 일을 꾸민 카이에게까지 번져나갔다. 용서할 수 없어,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네 녀석을! ' 절대로……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 순간 가인의 주위에 있던 대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 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오라의 기운이 공간을 뒤흔들었다.무너진 CCTV실의 벽 너머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카이는 미소지었다. 그래! 저들의 앞에서 네 힘을 모두 드러내라! 그리고 고립되어라! 네가 믿 던 모든 것들에게서 외면당하는 아픔을 너도 느껴봐! 짝! 그때 날카로운 따귀 소리가 CCTV실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카이는 몸을 가누 지 못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 어……? " 카이는 멍하니 주저앉아서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자신의 뺨으로 손을 가 져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뺨이 차가운 손과 맞닿자 아릿한 아픔이 그 부위로 퍼져나갔다. 카이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천천히 시선 을 올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 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들어올렸다가 내려가는 손이 자신의 뺨을 때린 모양이다. " ……왜? " 카이는 찢어진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그 한마디를 했다.그러나 리리스는 아 무런 대답도 없이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너무도 차가웠다. 경 멸이 담겨 있었다! 카이는 어째서 그녀가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왜? " 왜, 왜 그래? 리리스? 왜? 어째서, 어째서 날 때린 거야? 응? 왜……. 휙 하지만 그녀는 대답을 구하는 카이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외면한 것이다. 리리스는 그렇게 CCTV실을 나가버렸고, 카이는 그 뒤를 향해 망연자실한 시 선을 던져야만 했다. ' 리리스가……화가 났어……. ' 나에게 화가 난 거야……. 그녀가 이렇게나 노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유메가 감근당한 이후로 처 음이었다. 왜? 어째서?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왜 화를 내는 거지? 왜? ' ……왜! ' " 하아……. 하아……. " 테레이아는 달리고 있었다. CCTV실을 나온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싶더니 어느샌가 숨이 턱까지 찰 정도로 달리고 있었다. ' 나는……. ' 나는 어떻게 되버린 거지? ' 왜 이렇게 되버린 걸까?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 이래서는 안되는데……. ' 지금 자신의 행동은 잘못되어 있었다.저번 크리스마스 때 가인의 꿈으로 다 이브했던 것에 대한 부작용 임이 분명했다. 가상의 세계 속에서 1년이란 시 간을 보낸 것은 그만큼 정신적인 혼란과 오류를 가져오게 된다. 불필요한 애 정이 생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머리로만 하는 생각일 뿐. 몸은 정 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다그치고 자제하고 꾸짖어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성이란 용질은 감 정이란 용매 속으로 흔적도 없이 녹아 들어간다. ' 나는 싫었어……. ' 실험체로서 사육되어가던 나날들이. 그 유리관 너머로 날 바라보던 관찰자 들의 눈빛이 싫었다. 마치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 같은 그 시선들이 싫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싫었던 건……. ' 과연……잘 만들어졌군. ' ' 성공적이야.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염원을 이뤄줄 바르의 별이란 말인가! '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나에 대한 성과를 자화자찬하던 원로회 임원들이 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난 더 이상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아니었다.도구였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호문클루스(Homonculous)들 중의 하나였다. ' 대단해! 대단한 능력이다! ' 그들에게서 칭찬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난 무기물이 되어갔다.나의 능력에 경 이를 표할 때마다 난 점점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바르의 별로서 입지를 굳 혀가면서 난 점점 외톨이가 되어갔다. 실험체 때보다 대접은 좋아졌다. 라무의 아이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특 혜와 권리를 누릴 수도 있었다. ' 하지만……. ' 바르의 별, 그것은 결국. ' 괴물……! ' 자신들과 동 떨어진 괴물. 자신들이 만들어낸 괴물이었기에. 그랬기에 그들 은 내 능력에 만족하며 그런 대접을 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바란 것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단지! 단지! ' 나의 자랑스러운 딸, 리리스……. ' 날 동등한 생명체로서 대해줬던 유메! 날 바르의 별이 아닌,한 가족으로 여 겨주었던 그녀! ' 난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녀가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어! ' 그녀를 잃고나서 난 얼마나 후회했던가? 얼마나 슬퍼했던가? 얼마나 아파했 던가? 유메를 잃은 상실감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 그렇기에 용서할 수 없어! ' 가인을 고립시키려는 카이의 행동을! 자신들이 느꼈던 슬픔을 그는 벌써 잊 어버렸단 말인가? 그 고통을 알면서도, 잃어버린 자의 슬픔을 알면서도 가 인에게 똑같은 짓을 저지르려 한단 말인가! 적어도 그는, 적어도 자신들만은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힘으로 그들을 제압할지언정 농락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스스로를 농락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괴물 취급하는 것이다! 유메에게서 받아왔던 애정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 나는……. ' 가인에게……. ' 그런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아! '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다. 막 오라를 끌어모으던 가인은 잠시 의아함을 느꼈다. 괴물이 움직임을 멈추 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자신을 죄어오던 괴물의 혀가 풀려나가고 있었 다. 거기다 수영장으로 뛰어들려던 친구들도 제약이 풀려버린 건지 다들 비 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찍었다. ' 무슨 일이 생긴 거지? ' 가인은 카이가 있는 CCTV실을 노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녀석에게 무슨 일 이 생긴 건가? 아니면 또 다른 술수? 어쨌든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쓰러진 친구들에게로 다가가 소리쳤다. " 모두! 빨리 여기서 도망쳐! " " 아……. " " 뭐하고 있는 거야! 빨리 도망치라니까! " 가인은 쇼크로 얼이 빠진 친구들을 잡아 흔들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하지 만 카이에게 몸을 빼앗겼던 후유증인지 다들 거동을 힘들어 하고 있었다. 가 인은 재영의 팔을 잡아당기다가 순간 밀려드는 현기증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 윽……. ' 그도 남말할 처지가 못되었다. 괴물에게 내던져지면서 늑골을 다쳤는지 숨 쉬기가 고통스러웠다. 거기다 척추에도 이상이 생겼는지 발걸음이 잘 떼어지 지 않는다. ' 우욱. ' 가인은 토악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출혈이 심해선지 속이 뒤집어 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지연은 비틀거리면서도 가인의 몸을 잡아끌 었다. " 이,일어나, 유가인! 어서! " " 야! 너희들도 도와! " 재영이 가인의 반대쪽을 부축하며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부름 에 응할 친구들은 이미 혼미백산하여 괴물에게서 떨어진 반대편 출입구 쪽으 로 도망치고 있었다. " 제길! " 재영은 진저리를 치며 자신들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괴물 을 올려다 보았다. 그 존재 자체가 너무나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런 괴물이 있다는 걸. 이런 괴물이 자신들의 앞에 나타났다는 걸. 굳이 비유하자면 호랑이와 한 우리 속에 갖혀있는듯한 두려움이었다. 한시라 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가인은 지연과 재영이 느끼는 공포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힘 없이 말했다. " 난……괜찮으니까…… 선생님과 재영이도 빨리……. " " 시끄러워! " 지연은 겁에 질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에게 버럭 소리질렀다. 그의 말에 한 순간 마음이 동했던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가인의 팔을 있는 힘껏 움켜쥐며 그에게 하는건지 자신에게 하는 건지 모를 소리들을 중얼거렸 다. " 누, 누가 놓고 갈성 싶으냐……. 제자를 버리고 도망치는 스승은 쓰레기 야……. 이 정도 쯤은 고3 수험생들의 담임을 맡는 것보다 식은 죽 먹기 라고……. " 그럼 몬스터보다 수험생이 더 무섭다는 소리인가?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면서 가인은 재영을 돌아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주제에 잘도 도망치지 않 는 그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는 몬스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그 옆 쪽에 위치 한 출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우리가 나갈 때까지만 움직이지 말아라! 모두는 한 마음이 되어 그 말만을 되내였다. 탕! 그때 수영장의 닫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테레이아 민체스터! 강사실에서 견학을 하고 있을 자신들의 클래스메이트였다! 그녀는 가인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 여기야! 어서 이쪽으로! " 테레이아! 무사했구나! 그들은 안도하며 서둘러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테 레이아는 거의 끌려오다시피하는 가인을 부축하며 그에게 속삭였다. " 가인? 괜찮아? 정신이 들어? " " 테, 테레이아……. " 잔뜩 부어터진 가인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테레이 아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마음을 정하고 손 에 들고 있던 무전기를 그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가인은 그녀가 무전기를 들 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 어, 어째서? 어째서 네가 이걸……. " " ……. " 그 질문에 그녀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애써 미소를 잃지 않으 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 ……오는 길에 주웠어. 그거……가인이, 네 꺼 맞지? " " 아, 으응……. 하지만……. " 가인은 혼란스러웠다. 역시 떨어뜨렸던 건가? 하지만 이게 스스로 풀릴 리 는 없을텐데……. 찾았다는 안도감보다도 분실 사유에 대한 강한 의문이 먼 저 들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가인의 모습에 테레이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 져갔다. [크룩] 하지만 그렇게 자괴감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괴물의 눈동자가 빠르게 몇 번 깜빡이더니 다음 순간, 자신의 밑에서 아른거 리던 가인 일행의 그림자를 포착한 것이다. [크르루룩] 그리고 적의를 뿜어내는 거대한 눈동자.가인 일행은 등 뒤가 싸늘해지는 느 낌을 받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멈췄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생리적으로 몸이 움츠러 든 것이다. [캬아아아악!] " 으악! "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괴물의 포효소리에 재영과 지연이 귀를 틀어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가인과 테레이아는 그들처럼 당황하기 보다는 재빨리 그들을 감싸안으며 몸을 숙였다. 퍼엉! 몸을 숙이기가 무섭게 그들의 위로 사람 몸통만한 꼬리가 스쳐 지나갔다.그 원시적인 흉기는 그대로 가인 일행이 빠져나가려던 출입구를 콘크리트 째 박 살내버렸다. 테레이아는 가인을 부축해 일어나며 CCTV실을 노려보았다. 아무 리 카이가 화가 났다지만 자신까지 노려서 공격하지는 않았을 텐데……! " 이, 이런! " 과연 그녀의 생각대로 카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잠시 정신을 놓고 있 는 사이에 괴수가 멋대로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는 괴수를 제어하기 위 해 재빨리 네크로맨시를 발동시켰다. 하지만 미처 강령술이 발휘되기도 전에 괴수의 꼬리가 무방비 상태로 있던 가인과 테레이아를 후려쳤다. 퍼억! 가인을 끌어안은채 등부터 꼬리를 얻어맞은 테레이아. 그 파괴적인 힘은 연 약한 인간 소녀의 육체 쯤은 간단히 부숴버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 다. 테레이아는 그대로 가인과 한 덩이가 되어 허공을 날다가 풀장으로 떨어 졌다. 그들이 사라진 궤적을 바라보며 지연과 재영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 았다. 가인……? 테레이아……? " 이 바보같은 라무의 아이가! " 카이는 뒤늦게 자신의 지배에 들어온 괴수를 노려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빌 어먹을! 빌어먹을!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버린 거지! 어째서 리리스까지 공 격한 거야, 이 아둔한 자식! 그는 가인과 테레이아가 가라앉은 지점을 바라보았다. 풀장의 밑에서는 피 로 보이는 검붉은 액체가 거품처럼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카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괴감에 빠졌다. 안돼! 나 때문에 리리스가! 내 실수로 리리스가! 우우우우우 " ……! " 그때 풀장의 물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카이는 머리를 쥐어뜯던 손을 멈추 며 천천히 풀장을 바라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물이 진동하고 있었 다. 그 진동은 점점 커져서 이내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기 시작 했다. 그리고 카이는 소용돌이의 근원지에서 거대한 오라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 설마……! " 녀석이 드디어! 푸카카카카카카칵 순간 풀장에서 거대한 선풍계의 토네이도가 일어나며 그 안의 물을 사방으 로 떨쳐내었다. 그리고 드러난 풀장의 빈 공간에는 푸른 빛의 AI슈츠를 입은 남자가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끌어안은채 오른손을 들어올리고 있 었다. 카이는 이를 악물었다. 저것이 바로……! ' 피스 메이커! ' 우리 노아의 적, 오라 능력자!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오라의 주인이 지금 AI 컴플리트 세트를 장착한 채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휙 가인은 가볍게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십미터 가까이 도약하여 재영과 지 연의 앞으로 내려섰다.그 허깨비 같은 움직임에 깜짝 놀란 재영 일행은 반사 적으로 뒷걸음질쳤다. " ……. " 가인은 그런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테레 이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대신하여 몬스터의 공격을 받고 혼절해 있었다. 물에 젖은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들이 창백한 얼굴에 엉겨붙어 있었 고, 입술 사이로는 가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뭐라 고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를 공격하고, 자신의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린 카이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들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 나는 뭘 그렇게 망설였던 거지……! ' 겨우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방관만 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우유부단함 이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미안, 테레이아……. ' 가인은 그녀의 입술에 묻어 나오는 피를 닦아주며 품에서 포션을 꺼내 들었 다.하나는 그녀에게, 하나는 자신에게 주사했다. 전신이 짜릿해지며 두 눈이 맑아지는 포션 특유의 청량함이 느껴졌다. ' 난……깨달았어. ' 날 지켜준 너의 모습을 통해서. 테레이아, 너의 보호를 받고나서야 나는……. ' 지킨다는 것은……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것. ' 자기 자신을 먼저 챙기고 있었던 나로서는…… 누군가를 지킨다는 게 가능 할 리가 없었다. 힘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그런 건 부수적인 문제였다. 가장 커다란 문제. 그것은 지킬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그런 너무나도 당연한 마음가짐 이었던 것이다! " 선생님, 재영아. " " ……! " 가인의 낮은 부름에 재영과 지연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들은 눈 앞의 AI슈 츠 복장을 한 남자에게서 가인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수업을 받고 있던 학생이었는데,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농담을 주고 받던 친구였는데……. 그런 그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자신들의 앞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낯설 게만 느껴졌다. " 여기……. " 재영과 지연은 가인이 넘겨주는 테레이아를 부축하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 다. AI헬맷이 해제되며 드러난 가인의 얼굴은 어딘가 처연해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 테레이아를 부탁할게. " 그렇게 말한 후 가인은 주저없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재영과 지연은 그 런 그를 붙잡지 못했다. 미처 이름을 불러주지도 못했다. 여기서 그를 붙잡 지 않으면, 이대로 그를 떠나보내면 다시는 그가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큭! 그래! 와라!] 카이는 그런 가인을 네크로맨시 된 괴수의 눈으로 내려다보며 공격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뒷문으로 도망치려던 2학년 1반의 학생들을 네크 로맨시로 다시 붙잡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구경꾼들을 끌어 모으는게 효과적이었다. 지킨다, 믿는다 따위의 말들이 갖는 무의미함 을 똑똑히 가르쳐주마! ' 리리스……. ' 제길! 쓰러진 그녀의 모습에 카이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 혼란스러움을 이 겨낼 정도로 가인에 대한 증오가 강했다. 카이는 냉소적으로 소리치며 괴수 의 능력을 개방시켰다. [자! 어디 한번 능력을 보여보실까!] 그러자 괴물의 꼬리로부터 날카로운 창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독침들이 튀어 나왔다. 예전 시민을 빈사 상태에 몰아갔던 길조의 독침과 같은 계열의 능력 이었다. [춤춰라!] 촤촤촤촤촤 순간, 괴물의 꼬리가 번개같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수 십개의 찌르기를 가인에게 퍼부었다. 공격의 범위가 넓지 않으면서도 빈 틈이 없는 정교한 찌 르기! 하지만 가인은 환각지로 독침들을 모조리 피해내며 조금도 물러섬 없 이 괴물을 향해 나아갔다. [이 놈이!] 카이는 노호성을 내지르며 재빨리 꼬리를 수평 방향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콘크리트의 타일들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가인이 있던 자리가 한움큼 뜯겨 져 나갔다. 지연과 재영은 걷혀나가는 연기 속에서 가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 자 비명을 질렀다. " 안 돼! " " 유가인! " 후오오오오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위로부터 거대한 바람의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느샌가 수십미터를 뛰어오른 가인이 수영장의 천 장에 발을 내딛으며 밑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지연과 2학년 1반 일동은 할 말을 잊었다! [아니!] 투아아앙 거센 폭발음과 함께 가인의 AI부츠에서 오라의 회오리가 발산되었다.그러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천장이 폭죽처럼 터져나가며 균열을 일으켰다.하지만 가인은 오히려 그 반동을 이용하여 마치 내리 꽂히듯 몬스터를 향해 일직선 으로 떨어져내렸다. " 라이징-----!!!! " 아래로 내뻗은 가인의 발에서 오라의 토네이도가 휘날려 올랐다! 가인은 전 신을 푸른 빛의 토네이도로 휘감으며 하나의 섬광이 되었다. " 킥----------!!! " 쩍! 회오리 그 자체가 된 가인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의 라이징 킥은 정확히 몬스터의 정수리를 파고들어 뼈와 살로 이루어진 그 육체를 깨부수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몬스터를 꿰뚫었음에도 불 구하고 가인의 킥은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한채 풀장의 바닥으로 내리 꽂혔다. 그러자 강렬한 후폭풍이 지연과 재영 일행을 덮쳤다. [크헉!] 몬스터의 입을 통해서 카이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 는 튕겨지듯 CCTV실의 육체로 돌아와야만 했다. 가인의 라이징 킥은 몬스터 의 혼마저 뒤흔들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카이는 비틀거리 는 학생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수영장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그곳에서는 몬 스터의 거대한 육체가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 이, 이런 일이……! " 단 한번의 공격으로 자신이 조종하던 라무의 아이가 전투 불능에 빠지다니! 믿을 수가 없군! 카이는 새삼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인간이 오라의 주인이었 다는 걸 깨달았다. 리리스에 대한 감정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서 녀석을 과소 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 ……? " 그때 몬스터의 피를 전신으로 뒤집어쓴 가인이 고개를 들어 CCTV실의 카이 를 노려 보았다. 그 싸늘한 눈빛에 카이는 마음 한 켠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 녀석에게는 아직…… 뭔가가 있다……? ' 채챙! 가인의 양 어깨에서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두개의 오라 소드가 튕겨져 나 왔다. 가인은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움켜 잡고 두 눈을 감은채 오라를 집중 시켰다. 그러자 푸른 바람의 검날이 두 줄기로 뻗어나왔다. 위이이이이잉! 거칠게 회전하는 오라 소드의 토네이도! 그 회전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자 토네이도는 마치 새 하얀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인은 검을 좌우로 엇갈리게 잡으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 ……간다! " 우우우우웅! 순간 가인의 양 어깨로 부터 강한 오라의 회오리가 터져나왔다. 그것은 마 치 한 쌍의 날개처럼 그를 허공으로 끌어 올렸다. 카이는 이를 악물며 들고 있던 피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삐이이이이이……. 카이 브릿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네크로맨서. 그 호칭은 단순히 타인의 혼을 조종할 수 있다고 해서 부여받은 것이 아니었다. 네크로맨서의 본질적인 능력은 바로 생명 창조. 네크로맨시를 이용한 무에 서 유를 창조해내는 창생(創生)의 술이야말로 그의 특기였던 것이다! 그렇게 카이의 피리 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가인의 몸은 무서운 속도로 CCTV실을 향해 돌진했다. ' 용서 못해! ' 내 친구들에게 손을 댄 네 녀석을! 테레이아를 건드린 네 녀석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 오라의 주인! ' 주제도 모르고 리리스에게 손을 뻗은 녀석! 내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네 놈! 그렇다면 너의 모든 것도 내가 다 빼앗아주마! " 으아아아아아! " 카이와 가인의 피를 토하는 기합 소리가 서로의 귓청을 두드렸다.그리고 한 발 먼저 카이에게 다다를 수 있었던 가인은 들고 있던 오라 소드를 사정없이 교차시켰다. 튀어오르는 불꽃! " 오라-----------베기! " 츠아아아아아앙! 거친 쇳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일도양단! 가인은 적을 베어내 고도 돌진하던 힘을 이기지 못해 튕겨지듯 바닥을 굴렀다. " 크악! 으윽! 으으으윽! " 가인은 호흡이 타는 것만 같은 격통을 느끼면서도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 다. 악다문 이빨 사이로 피가 배여 나왔다. 그는 빛을 잃어가는 오라 소드로 몸을 지탱하며 자신이 베어낸 상대를 돌아보았다. ' 놈은? ' 카이는? 분명히 손에 베어낸 감촉이 있었는데! " ……! " 하지만 돌아본 곳에는 깨끗하게 절단된 바위 괴물 만이 있을 뿐이었다. 카 이는 가인의 오라 베기에 당하기 직전, 창생의 술을 이용하여 주위의 콘크리 트를 매질로 삼은 골렘(Golem)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덕분에 골렘을 방패막 이로 삼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그. 대신 튀어오른 콘크리트의 파편에 아랫 배가 꿰뚫리는 중상을 입었다. " 컥! 으악! " 카이는 피로 범벅이 된 아랫배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네크로 맨시 된 몸이라고는 하나, 본체로 삼은 육신의 고통만큼은 고스란히 그에게 로 돌아오고 있었다. 카이는 두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가인을 노려 보았다. " 크,크크크큭. 꽤…… 하잖아? 역시 대단한 능력이군. 역시 대단한 괴물이 야……! " " 이 자식이! " 가인은 이를 갈며 카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카이는 출혈이 심해선지 안 색이 하얗게 질려있었지만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흐흐흐흐. 지금 기분은 어때? 힘으로 상대를 짓누른 기분이란? " " 웃기지마! 이건 네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야! 힘으로 상대를 짓누른 건 다 름 아닌 너였잖아! " " 하,하하하. 그래……. 내가 먼저 시작했었지.하지만 똑같은 짓을 저지른 너도 나와 별 반 다를 게 없어. 크크크. 나와 똑같은……괴물이다. " " 시끄러워! 입 닥치지 못해! " 가인은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애처롭게 소리쳤다. 카이는 그런 그의 모습에 조소를 흘렸다. " 왜 네가 괴물이라는 걸 부정하는 거지? 왜 네가 힘을 가졌다는 걸 부정하 는 거야? 너희들은 우리를 괴물(Monster)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너희 자신 은 왜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지? 똑같이 힘을 가졌잖아? 똑같이 폭 력을 행사하잖아? 너희가 우리를 몬스터라 부른다면 우리도 너희를 몬스 터라 부르겠다. 너와 난 영락없는 닮은 꼴, 괴물들이다! " " 닥쳐엇---------!! " 가인은 참지 못하고 그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러자 힘 없는 인간의 몸은 CCTV실의 무너진 벽을 통해 허공을 날았다. 그 추락하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 처럼 뚜렷하게 가인의 눈에 각인된다. 카이는 그대로 지연과 재영의 앞으로 떨어져내렸다. 쿵 무력한 인간의 육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머리가 깨지고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에게로 굴러오는 카이의 모습에 지연과 재영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 지연의 발목을 카이가 붙잡으며 힘 없이 신음했다. " 사, 살려줘……. " " ……? " CCTV실에서 내려오던 가인은 갑작스런 카이의 구걸에 어리둥절해졌다. 살려 달라니? 저 자식,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카이에게 발을 붙잡힌 지연도 당 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 살려주세요, 선생님……. " " 너, 너……. " 지연은 자신에게 호소하는 이 학생을 본 적이 있었다. 이름은 기억할 수 없 었지만 분명 자신의 수업을 받는 다른 반 학생들 중 한명이었다. 재영도 그 의 얼굴이 낯 익음을 깨닫고선 몸을 떨었다. 도망치던 2학년 1반의 학생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차츰 차츰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인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불안함을 느끼며 카이에게로 서둘러 다 가갔다. " 이 자식! 갑자기 무슨 속셈이야! " " 으, 으아아아! " 가인에게 멱살이 잡힌 카이는 발작처럼 소리지르며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안간 힘을 다 했다. 가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 자식이……. 연극이라도 하 고 있는 거야 뭐야?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처럼 굴고 있잖아! ' 아……. ' 그때 가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 녀석은 자신의 능력이 상대 의 혼을 조종하는 것이라고 했었다.그렇다면 지금 자신에게 멱살을 붙잡힌 이 학생도 실은 카이 본인이 아니라……. " 사람 살려! 죽이지마! 살려줘! " 엉겹결에 가인의 손에서 빠져나온 학생은 땅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학생들의 뒤편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기어가는 손에는 예의 검은 피리가 사라져 있었다. 가인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주위에 몰려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하지연 선생님과 재영이, 그리고 2학년 1반의 학생들. 그들은 AI헬맷 사이로 드러난 가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인간이란……힘을 가진 이를 두려워하지. ' 가인은 깨달았다. 카이 브릿드. 그가 무슨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었는지 를. 그리고 그가 준비해논 함정이 무엇이었는지를. ' 나는……보기 좋게…… 걸려든 건가? ' 아니야! 가인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차갑게 식어가는 손을 움켜쥐며 애 써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애써 태연한 척 모두에게 말을 걸었다. " 다, 다들…… 놀랐지? 하하, 그래. 놀랐을 거야. 나도 처음에는 이런 말 도 안되는 상황, 믿을 수가 없었어……굉장히, 굉장히 놀랐었어. " " ……. " " 저 괴물은 몬스터라는 거야. 한번도 본적 없었지? 사실 그동안 피스메이 커에서 매스 미디어의 정보를 제한해왔기 때문에 모두들 모르고 있었을텐 데……. 아, 그러니까 또 피스메이커라는 건……. " 가인은 지금 자신이 피스메이커의 기밀에 해당되는 사항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며 횡설수설했다. 단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고 있 었다.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친구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그런 말들을 찾 고 있었다. 친구들의 침묵을 참을 수가 없었다! ' 어차피 넌 이들과는 다르잖아? ' 그렇지 않아! 가인은 카이가 했던 말을 부정하며 재영에게 손을 뻗었다. 그 라면 이해해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해온 재영이라면……. " ……! " 하지만 그는 가인의 기대를 저버렸다.재영은 마치 가인의 손이 뱀이라도 되 는 마냥 반사적으로 몸을 피해버렸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반응을 취 했는지 깨닫고선 제 자리에 굳어버렸다. " ……. " 가인은 뻗었던 손을 내리며 망연자실하게 다른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릴 때 마다 모두들 눈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연 선생님 마저……자 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 아니야……. 이런 건……. ' 뭔가가 잘못된 거야. 나는 단지…… 단지 모두를 지키려고 했을 뿐인데.그 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었을 뿐인데……. 가인은 친구들의 반응 을 납득하지 못하며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 왜, 왜들 그래? 왜 나를……. " " 꺅! " 여학생들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그 비명 소리를 시작으로 학생들 사이 에선 어두운 그림자가 번져나갔다. 공포라는 그림자.자신들과는 다른 이질적 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 괴, 괴물……. " 괴물. 가인은 새삼 자신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쓴 채 흉흉한 살기를 띄고 있었다. 거기다 풀장에 쓰러져 있는 몬스터. 저 거대한 괴물을 쓰러뜨린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는 절대로 해내지 못할 일. 아니, 해내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 그런 일을 자신은 해내고야 말았다. [쿡, 쿠쿠쿠쿡…….] 그때 죽여버렸다고 생각했던 몬스터의 입에서 낯익은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 다. 카이의 웃음 소리였다.가인은 자신을 비웃고 있는 몬스터를 초췌해진 얼 굴로 돌아보았다. [어때? 소중한 이들을 지켜낸 소감이란? 보람은 있었어?] " ……. " 가인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그렇게 그가 입을 다물고만 있자 카이는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카하하하하! 가관이야! 정말 웃기는 꼬락서니야! 그렇게 기를 써 가면서 지켜냈더니 기껏 돌아온 것은 멸시와 공포라니! 하지만 너도 알고 있었지? 저런 대접을 받을 걸 알면서도 힘을 사용한 거잖아? 그런데 왜 이 제와서 후회하는 거야? 칭찬받아 마땅한 일을 했는데 왜 죄인처럼 떨고 있 는 거야?] 카이는 웃음을 그치고 지연과 재영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 겁에 질린 얼굴 들을 보고있자니 욕지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봐라, 오라의 주인. 네가 그렇게 까지 지키려고 했던 이들의 얼굴을. 저들 의 얼굴에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나? 일말의 애정이라도 느낄 수 있어?] " ……. " [저들에게는 네가 자신들을 지켜줬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냐. 네가 자신 들과 다른 힘을 사용했다는 게, 자신들로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우리들과는 다르다. 같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자 신들의 범주 속에서 널 제외시키려고 기를 쓰지.] 이때만큼은 카이의 눈빛에서도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기색은 나 타난 것 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 갔다. [왜냐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능력을 가진 너를! 자신들보다 뛰어난 너를! 무능력한 다수의 횡포지! 동물들도 이런 짓을 하진 않아! 인간들만 이 할 수 있는 저열한 짓거리야! 힘을 가진 자는 우대받아야 마땅하건만 오히려 시기당하고 멸시당하며 결국에는 매장되어버리지!] " 그, 그만해……. " 가인의 창백한 입술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카이 는 그만두지 않았다. [괴물이란 말은 다를 걸 뜻하는게 아냐! 자신들과는 다르다! 우리와 넌 틀 리다! 그걸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표현한 이기적인 말에 불과해!] " 그만해……! " [결국 너와 난 다를 게 없어! 저들의 눈에는 똑같은 괴물로 비춰질 뿐이다! 그렇게 괴물 취급 받으면서 화도 나지 않아? 회의감은 들지 않아? 이후로 도 넌 변함 없이 저들을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어!] " 그만햇! " 투카카카카칵 순간 괴물의 밑에서부터 천공권의 시작점이 발생하며 그 위로 날카로운 토 네이도가 솟아 올랐다.가인은 형체도 알 수 없이 찢겨져 나가는 몬스터를 노 려보며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 으악! " 괴물의 육편이 튀어오르자 학생들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재영과 지연을 위시한 몇몇의 사람들만이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들의 얼굴에서도 가인에 대한 공포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가인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힘 없이 미소지었다. ' 괴물……인가. ' 슬프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체념했을 뿐이다. 지 금까지 고민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깨끗하게. 실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저들에게 배신감을 느 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자신이 바보같았다. 어제까지 저들과 가까운 관계 였다고 착각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걸 타인에게 바라는 것 부터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 었다. 저들의 저런 반응은 카이의 말대로 당연한 것이었다. 인간이라면 당연 한 반응. 그것을 이해했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어리석음에 비 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런 당연한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 그래. 당연한 거야……. ' 가인은 천천히 뒤돌아서서 부서진 풀장의 문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자신이 있을 곳은 없었다. 그 증거로 누구도 자신을 붙잡지 않 는다. 가인은 처음으로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환멸을 느꼈다. 끼익 문이 열리자 가인의 그림자가 그 뒤로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가 닿는 곳 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테레이아가 있었다. ' 가인……. ' 혼수상태에서도 작게 그의 이름을 속삭이는 그녀. 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 렸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 2033년 4월 13일. 11시 25분. 24구역의 한성 고등학교에 D+급 몬스터 '워 터 리퍼(Water Leaper)'가 출현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네크로맨서가 있었 던 것으로 확인되며, 피스 블루를 노린 습격 같습니다. " " 작년 길조 때와 마찬가지로군요. 5대간부에 피스 블루를 노린 습격이라니. " 작전 본부실에서 수정의 보고를 듣던 닥터는 가볍게 한탄했다. 수정은 그의 한탄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A+의 상황 임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거 에요. 또 습격 장소가 실내 수영장이었던 만큼 2학년 1반의 학생들과 그 담임 교사를 제외하면 목격자가 없었습니다. "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진우를 돌아보았다. 현장 보 고는 팔라딘 대를 맡고 있는 그의 몫이었다. 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예. 예.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한 팔라딘 대는 실내 수영장에 몰려드는 학교 관계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다행으로 목 격자들의 신병도 빠짐 없이 확보할 수 있었고요. 피스 블루의 정체를 알 고 있는 이들은 총 39명. 모두 피스메이커의 수중에 있습니다. 정말 정말 다행이죠? " " ……너무 그러지 말아요, 진우 씨. 제가 말 실수 했네요. 죄송해요. " 수정은 진우의 비아냥 거리는 태도에 쓴 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쓴 '다행'이 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우는 그렇게 그녀가 순순히 사 과해오자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 아니. 저는 그냥……. 하아. 죄송합니다. " 그는 수도로 돌아온 이후 내내 신경질 적인 자신의 모습에 고소를 금치 못 했다. 자꾸만 왜 이러는 건지…… 나 답지 않게 말이야. 아무래도 브루스의 실종과 가인을 홀로 수도에 남겨놨다는 자괴감이 그 원인인 것 같았다. 닥터는 그렇게 침울해 하는 진우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안경을 쓸어올렸다. " 그건 그렇고, 신병을 확보한 목격자들의 처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느 때와 같은 기억 조작입니까? " " ……아, 그에 대한 사항을 지금부터 보고하려 했는데……. " 진우는 잠시 머뭇거리며 상관들의 안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 기억 조작은……아직……하지 않았습니다. " " 예? " 수정과 닥터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들의 반응에 진우는 입맛을 다시며 보고를 계속했다. " 일단은 각 목격자들에게 감시를 붙여두고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제재 를 가하고 있습니다만…….아무래도 감시 조에 필요한 인원을 재편성하는 게 좋을듯 싶습니다. 지금 팔라딘 대의 인원으로는 여러모로 무리 거든요. " " 아니! 아니! 감시 조라니요? 그게 지금 무슨 소리입니까, 진우 군? 그리 고 기억 조작을 못했다니? " " 아, 그게……목격자들이 한성 고교의 2학년 1반,그러니까 피스 블루의 클 래스메이트들 아닙니까? " 진우는 자신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든 가인을 떠올리며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제길, 어쩔 수 없잖아. 정말……. " 그들에게 기억 조작을 행할 경우, 피스메이커에 대한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겠다! ……이상이 피스 블루의 전언입니다. 그 녀석, 어찌나 막무가내 로 고집을 피우던지 아무도 못 말리겠더군요. " " ……. " 그 말에 닥터도 수정도 진우와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작년 4월, 박재영이 라는 소년의 기억을 지워버렸을 때 가인이 보여준 격한 반응을 생각한다면 이번 반응도 무리가 아니었다. 수정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 하지만…… 그걸로 괜찮을까요, 가인 군? 차라리 괴롭더라도 기억을 지우 는 편이 나았을텐데. " 피스메이커의 관계자들은 가인의 AI헬맷이 전송하는 영상으로 모든 전황을 볼 수 있었다.몬스터와의 혈투,그리고 두려워하던 친구들의 모습, 실망한 가 인의 모습까지도. " 슈퍼맨 같은……전개로는 갈 수 없나보군요. " 닥터는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받은 것은 지금까지 잠 자코 있던 진 사령관이었다. " 슈퍼맨은 단지 영화일 뿐이다. " 여느때와 같은 무심한 목소리.하지만 그 속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 힘을 가진 이가 영웅 취급을 받는다니…….편리한 데로 상상을 해도 정도 가 있지. " 사자와 한 우리에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사자가 잘 조련을 받아서 인간을 습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은 태연하게 사자와 살아 갈 수 있을까? 태연하게 사자를 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익숙해진다고 하더 라도, 아무리 사자가 온순하게 군다고 하더라도 만의 하나 습격해 올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자에게 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 을 수 있을까? 그나마 힘을 가진 쪽이 짐승이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힘을 가 진 이가 사람이라면? 자신들과 비슷해 보이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 인간은 한 없이 잔인한 동물이다. 이해하기보다 미워하는 쪽이 쉽다면 주 저없이 미워하는 쪽을 택하지. " 힘을 가진 소수는 다수에게 도태된다. 미움받는다. 멸시당한다. 이용당한다. 희생을 강요당한다. 그것은 인류의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잘 나타나고 있다.이런 자신들만 하더라도 이계의 침략자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 해 힘을 가진 소수, 오라 능력자들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수정은 진 사령관을 슬픈 얼굴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그렇군요. 그런 일이 가능했더라면…… 그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죠. " 그리고 그가 자신들을 떠나는 일도……. 닥터는 낮게 한탄하며 진우에게 물었다. " 그럼 가인 군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학교는 다니고 있습니까? " " ……아니요. 아무래도 자퇴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 진우는 연무장에 있을 가인을 떠올리며 힘 없이 고개를 저었다. 퍼억! 텅! 언더 시티의 연무장.그 안에서는 연신 보호 장벽을 후려치는 타격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수 없이 많은 몬스터의 홀로그램들. 그 속에서 푸른 AI 슈츠 의 남자가 쉼 없이 움직이며 섀도우 배틀(Shdow Battle)을 펼치고 있었다. " 하아아아아. " 가인의 기합에 발 맞춰 몬스터들의 발 밑으로부터 수 많은 천공권들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는 이미 한 번에 다섯 개 이상의 천공권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여기에 심경을 노리는 천공주심권만 응용하게 된다면 그는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 ……. " 그리고 연무장의 입구에서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바로 가인의 동료들인 피스 대원들이었다. 마리와 시민과 유리. 그들은 벌써 며칠 째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혹독한 훈련만 하고 있는 가인을 걱정스레 바라보 았다. ' 오빠. ' 유리는 며칠 전 자신에게 소리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그렇게 무서운 표 정으로 자신을 다그치던 가인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절대로 기억을 조작하지마! 알겠어? 만약 이 약속을 어기면 다시는 유리, 널 보지 않을 거야! ' 억지로 반 친구들의 기억을 지워버리겠다는 자신에게 그는 처음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유리는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처럼 사람들에게 배척 받 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여지 없는 결과라니! '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왜! ' 신이 있다면 원망하고 싶었다. 가인을 노린 몬스터의 간부가 원망스러웠다. 너무해. 이런 거. 지키려는 마음을 배신당하다니. 믿었던 사람들에게 외면당 하다니. 그 아픔을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리 역시 오라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은 케이스니까.그렇기에 가인 만은 이런 아픔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그만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기 바랐다. '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오빠의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아. ' 이제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원래의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믿었던 친구들의 외면을 잊어버릴 수 없다. 가인은 반 체념 상태로 그 모든 것을 받 아들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 헉……. 헉……. " 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AI슈츠의 헬맷과 상의를 벗어던졌다. 슈츠의 안이 땀으로 흠뻑 젖을 것을 대비해서 애초에 옷을 입지 않고 슈츠만 착용한 상태였다. 그가 땅바닥으로 주저앉자 땀들이 굵은 빗줄기처럼 그 자리를 적 시기 시작했다. " 가인, 받아라. " 그런 그에게 마리가 다가와 묵묵히 수건을 건네주었다. 가인은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다가 수건을 받아들고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마리는 무슨 말을 해야될지 고심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이대로……괜찮은 거냐? " " ……. " 얼굴을 닦던 수건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리는 그런 가인의 반응만으로도 기 분이 우울해졌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학교는……그만둘 셈이야? 결석한지 일주일이나 지났다. 일단 하지연 선 생님에게 얘기는 해놓았지만 그래도……. " " 쓸데 없는 참견하지 말아요. " 차가운 가인의 말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가인은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수 건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마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예전의 다정함 을 찾아볼 수 없었다. " 학교 같은 거……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에요. 어차피 전 피스메이커잖아 요? 오라 능력자.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제 임무. 그렇다면 쓸데 없이 학 교에 가느니 조금이라도 더 훈련을 하는게 효율적이잖아요. " " 쓸데 없다니…….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마리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가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의 눈빛을 피 하며 그녀를 지나쳤다. 과연 자신이 말하는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무감각한 목 소리가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 어차피 오라 능력자와 인간은 틀려요. 다른 인종이라고요. 그렇다면 서로 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하지 않겠어요? " " 유가인! " 마리는 화를 내며 가인의 등을 노려보았다.그녀는 울분이 쌓인 목소리로 소 리쳤다. " 그렇다면 나도 틀리다는 거야? 여기 있는 시민 씨와 유리도 인간이 아니 라는 거야? 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 " ……. " 가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애써 다 잡은 마음이 흔들릴까 봐 이를 악물었다. 이제 학교고 친구고 하나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그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자신의 믿음에 금이 가 버릴 것 같았기에. 몬스터로부터 그들을 지켜내겠다는 각오가 깨져버릴 것만 같았기에, 그렇기에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들이 자신을 외면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지켜주고 싶었다. 비록 카이에게 어리석은 녀석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지켜 주고 싶었다! ' 그렇기에……만나서는 안되는 거야. '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모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내가 무엇을 지키려고 하 는 건지……똑똑히 두 눈으로 응시하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나 혼자 마 음에 담아두고 있으면……그걸로……. " 가인 씨. " 그때 시민이 가인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그녀는 여느때와 다 름 없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 혼자서 너무 많은 짐을 지려고 하지 말아요. " " ……! " 가인은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민은 마치 그가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는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 우리에게 있어서 가인 씨는 언제나 가인 씨에요.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 닌 가인 씨요. 가인 씨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아요. " 피스메이커로서, 동료로서, 친구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이 자리의 누구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렇듯 한 자리에서 서 로를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니까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겨줘요.우리가 당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 처럼. " " ……시민 씨. " 멍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민은 그런 가인에게 웃어보이며 자신 의 옆에 있는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러니까 언제나 처럼 계속 학교도 다니세요.가인 씨가 다니질 않으니 덩 달아 유리 양까지 학교를 나가지 않잖아요? " " ……오빠가 없는 학교는 내게 의미가 없어. " 유리는 고집스럽게 시민의 말을 받으며 가인을 올려다 보았다.유리의 애 닳 은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필요하다고. 가인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고. 자신은 절대로 그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가인은 천천히 고개 를 들었다. 마리가 웃고 있었다. 시민이 웃고 있었다.유리가 웃고 있었다. 모두에게 외 면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자신을 바라봐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것도 자 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그렇다면……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들만 곁에 있다면……난 모두와 함 께, 앞으로도 계속……. " 하지만……이제와서 없었던 일처럼……행동할 순 없잖아요? " 가인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민은 가인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리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가인 씨! ' 괴물. ' 아무리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과거의 일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에게서 들었던 소리가 잊혀지지를 않는다. 이런 주제에, 그때의 미움, 슬픔, 분노를 가슴에 품어 둔 채 태연자약하게 지금까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그들 을 지킬 수 있겠어? 카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그렇게 괴물 취급 받으면서 화도 나지 않아? 회의감은 들지 않아? 이후로 도 넌 변함 없이 저들을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어! ' 난……자신이 없어. 지키겠다는 말……할 수가 없어. ' 브루스, 어떡하면 좋죠?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예? 제발 가르쳐줘요! 언제나 처럼, 윽박지르면서 가르쳐달라고요! ' 가인은 이 자리에 없는 브루스를 떠올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화난 목소리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의 꾸짖음이 너무나 절실했다. 쌍심지를 켠 그의 얼굴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 브루스! ' 그러나 해답을 제시해줄 피스 그레이는 어언 십 여일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 러내지 않고 있었다. " 어제 너희 집에도 찾아왔었냐? 그, 피스메이커에서? " " 아아. " 한성 고등학교 2학년 1반의 교실.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학생들은 저마 다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며 투덜거렸다. " 해도 너무한 거 아냐? 24시간 감시하고 있다느니, 모든 통화는 도청되고 있다느니……. 그러면서 여기가 자유 민주주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 " " 그런 방법으로 지금까지 비밀을 유지해온 거 겠지. 어차피 피스메이커라 는 것도 정부 기관과 비슷한 거잖아? 윗대가리들이 까라고 하면 힘 없는 국민들은 까야지 어떡하겠냐? " " 쳇. 맘에 안 들어.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어디선가 듣고 있을 게 분명해. 그나마 학교에서 그 때의 관계자들끼리 얘기하는 것만은 허용하 는 모양이니. " " 하지만……불안하다. 이러다 어느 순간, 한 사람 한 사람 씩 실종되는 거 아냐? 비밀 유지다 뭐다 해서 감옥 같은데에 가둬두는 거 아니냐고. " 그들은 피스메이커의 팔라딘 대에서 협박이나 다름 없는 경고를 받고 분개 해 했다. 그들에게는 공권력의 횡포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목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으니 불만 이 쌓일만도 하다. 어떻게 보면 기억을 지워버리는 피스메이커의 방식은 이 런 점을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몰랐다. " ……하지만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고. 설마 유가인……그 녀석이……. " 학생들은 테레이아의 옆에 비어있는 자리들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췄다.그 들은 옆에서 침묵하고 있던 재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 야, 박재영. 넌 혹시 알고 있었던 거 아냐? 그 녀석이 피스메이커였다는 거? " " ……아, 아니. 난 전혀……. " 재영은 그들의 시선에 당황하며 손을 내젓다가 이내 힘 없이 고개를 숙였다. " 그렇다면 역시 그 녀석과 함께 사는 사람들도 관계가 없지는 않겠지? " " 브루스와 유리 말이야? " " 그렇잖아. 처음부터 이상했다고. 그런 이상한 중국인이라든지,초등학생이 라든지. 범상치가 않잖아? 분명 뭔가가 있을 거야. " " 그 애들도…… 피스메이커일까? 유가인 처럼 그 무지막지한? " " 으아, 싫다. 싫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껏 우 리 곁에 있었단 말이야? 그것도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 학생들은 키득거리며 농담식으로 얘기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저번 실내 수 영장에서의 일들을 생각하면 단순히 웃고 넘길 일도 아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찢어 발기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의 유가인은 자신들 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학생들은 낯빛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 역시……괴물이야……. " 우리들과는 달라. " 틀리다고……. " 그들의 중얼거림에 재영은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단지 움켜쥔 주먹 만 이 갈 곳을 잃은채 흔들리고 있었다. 탕! 그때 거세게 탁자를 내려치는 소리가 교실에 울려퍼졌다. 그곳에는 테레이 아 민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 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 제멋대로구나, 너희들? "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교실의 소란이 잦아들고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레이아는 그런 시선들 속에서도 여유롭게 책상 사이를 거닐며 교단으로 나아갔다. " 하나만 물어볼게. 가인이가 몬스터를 상대할 때,너희들은 뭘 했지? 뭘 할 수 있었어?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테레이아는 비웃음을 띄며 말을 이었다. " 단지 구경만 하고 있었지?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어? 자신이 뭔 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니? " " 그, 그런! 도와야된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 학생들 중 하나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 외침에 발 맞춰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소리 질렀다. " 맞아! 그런 괴물을 상대로 우리가 뭘 할 수 있었다는 거야! 우린 아무런 힘도 없다고! " " 우리가 가인이 녀석처럼 무슨 피스메이커인 줄 알아! " " 우리가 나쁘다는 식으로 얘기하지마! " 탕! 그때 테레이아가 거세게 교탁을 내리쳤다. 그러자 기세가 꺽이는 학생들.그 들을 향해 테레이아는 한자 한자 또박또박하게 외쳤다. " 그·렇·다·면! 잠자코들 있어! 힘이 없었으니 못 도와줬다고 말하고 싶 은 거야? 능력이 되었으면 도와줬을 거라고! 그렇다면 지금 너희들의 행 동은 뭐지? 능력이 되서 도와준 가인이에게 너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 테레이아는 치가 떨렸다. 자신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학생 들이 새삼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뒤에서 헐뜯고! 불평하고! 험담하고! 단지 그것 뿐이잖아? 가인이는 너희 를 위해 싸웠는데 뭔가 고마움 같은 건 못 느끼는 거야? 감사를 표하고 싶진 않아? 그러지는 못할 망정 어째서 미워하기만 하는 거야! " 어째서! " 무서워하기만 하는 거지? " 그녀는 재영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친구였으며, 그렇게나 친한 사이인 것 처럼 굴었으면서! 어째서 그를 외면하는 거지? 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 는 거야! " " ……. " 고개를 떨구는 재영. 테레이아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 이 테라인? 카이가 말한 데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물의 모습인 걸까? 그의 말이 정답이라는 거야? ' 그런 건……인정하고 싶지 않아! ' 자신은 이들과 같은 생활을 공유하면서 한 순간이나마 희망을 가졌는지 모 른다. 노아에서 실험체로 지내온 생활만이 전부가 아닐 거라는, 그런 꿈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웃고, 울고, 화내고, 사랑하는. 그런 1년 간의 생활이 너무나 행복했었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진실은 이렇게도 깨지기 쉬웠단 말인가? 이렇게도 부질 없는 믿 음이었던가? ' 가인……. ' 자신이 정신을 잃었던 사이에 학교를 떠나버린 그. 그는 떠나기 직전 과연 무슨 심정이었을까? 믿었던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그 기분이란 대체……. 그 것을 상상할 때마다 테레이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 처럼 아팠다. 그녀는 교탁 을 붙잡은 양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숙였다. " 제발 지금이라도 말해줘. 거짓이 아니라고. 늦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 너희들과 보낸 1년 간의 시간이 거짓이 아니었다고……. 간절한 애원이 담긴 테레이아의 속삭임. 하지만 그 속삭임은 너무나도 작았 다. 교실의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어느 누구도 그녀의 애 원에 응해주지 않았다. " 너희들은……. " 테레이아는 고개를 들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모두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자 신의 기대가 헛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 ……이기적이야. " 그 말을 끝으로 테레이아는 교단을 내려왔다. 곧장 교실의 앞문으로 향했다. 수 많은 회의감과 의문이 그녀를 뒤 따르고 있었다.과연 자신은 저들에게 이 기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인 걸까? 테라도 아닌 노아인 자신이? 누구 에게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는 자신이 저들에게 진심을 바랄 입장이나 되는 것인가? ' ……그래. 가장 이기적인 것은 바로 나. ' 결국 나도 마찬가지였던 거야……. 테레이아는 그렇게 스스로를 조소하며 교실 문을 열었다. 탁 열려진 문에는 막 교실로 들어올려던 하지연이 서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수업이 체육 수업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교실로 들어오기 직전 테레이아의 말을 들었던 건지 무섭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 테레이아와 지연은 그렇게 교 실 문을 사이에 둔 채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슥 그러던 중 테레이아가 먼저 지연의 곁을 지나쳐 문을 빠져 나갔다. 그녀가 나간 자리로 차가운 공기가 세차게 지연을 훑고 지나간다. 하지만 지연은 교 실을 나가는 테레이아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제자리에 못 박힌채 서 있었을 뿐이다.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탕 지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 문을 닫고서 교단 위로 올라섰다.그녀는 출석 부를 교탁 위에 내려놓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쥐었다. 학생들이 모 두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있자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 반장! 인사해! " " 예! " 다급히 일어나며 대답하는 반장. 지연은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수업을 시 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꾹 하지만 지연의 손에 쥐어진 담배는 소리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이처럼 무거웠던가? 가인은 석양으로 붉게 물든 26구역의 거리를 말 없이 걷고 있었다.연무장에 서 수십 시간을 혹사당한 그의 육체는 움직일 때마다 뼈 마디에서 비명을 지 르고 있었다. 물론 지쳐버린 몸 쯤이야 포션 한 방이면 금새 회복될 수 있었 지만 가인은 일부러 포션을 쓰지 않았다. 육신의 고통이 강하면 강할수록 쓸 데 없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 무거워. '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늪지대에 몸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일은 이보다 더 발걸음이 무거워질 테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애써 참아 넘겼다.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몸과 마음. 이쯤 되면 다음날이 오는 게 다 두려울 정도였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매일의 연속. 이런 나날이 계속된다면 자신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단지 학교를 가지 않게 된 것 뿐인데, 매 일 보던 얼굴들을 보지 않게 된 것 뿐인데……. 그것이 이 정도로 차이가 있 었던 건가. 일상의 한 부분을 잘라낸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 ' 무거워. ' 후회하고 싶지 않아. 그때 오라를 사용했던 건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올바 른 선택을 한 거야. 난 틀리지 않았어. 틀리지 않았다고. ' 하지만……. ' 자꾸만 무거워져가는 발걸음.마치 옛 영화에 나오는 죄수들 처럼 다리에 거 대한 쇠사슬 추가 묶여 있는 느낌이다. 이 무거움은 대체 뭘까? 후회? 그런 걸까? 내 후회하는 감정인 걸까? 나는 후회하고 있는 걸까? 그때 모르는 척 하고 친구들을 외면했어야 하나? 그럼 지금과 같은 기분은 아니었을까?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까? ' ……그럴 리가 없잖아. ' 어쩔 수 없는 결과였어. 길든 짧든 언젠가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그 러니까 좀 더 의연하게 행동하자. 슬퍼할 필요 따위는 없이.좀 더 어깨를 펴 고……좀 더 당당히……. ' 계속 모두를 지켜나가는 거야……. ' 지금과 변함없이 앞으로도 쭉, 피스메이커로서 살아간다면, 몬스터들과 싸 워나가면. ' 그걸로 충분해. ' 그걸로 만족해. 가인은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공허함을 한 가 득 끌어안은채. 껍데기 뿐인 감정만 남겨둔채.무엇을 지켜야하는지도 모르게 된 채. 그렇게 지킨다 라는 말만 의미 없이 되새겼다. ' 가인. ' 그런 그의 뒤를 말 없이 따르고 있던 네 명의 일행. 마리와 진우, 시민과 유리였다. 그들은 활력을 느낄 수 없는 가인의 등을 향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할 말은 간단했다. 이겨내라. 극복해라. 지 켜내라. 그걸로 끝인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건 가인의 몫이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인에게 강요할 순 없었다. ' 사부님이 있었더라면……. ' 진우는 브루스를 떠올리며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그라면 지금의 가인에 게 뭔가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줬을텐데. 자신들 처럼 지켜만 보지 않고 구 체적인 해답을 제시해줬을 텐데. 새삼 자신의 무력함을 떠올리게 된다. " 음? " 그때 막 가인에게 말을 걸려던 마리는 전방의 골목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안색을 굳혔다. 누군가가 그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앞서 걷던 가 인도 그것을 느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힘 없이 고개를 들었다. " ……! " 돌아본 그곳에는 의외의 사람이 서있었다. 시민은 손으로 노을 빛을 가리며 상대를 확인한 후, 놀라움을 표했다. " 재영 씨? " 그렇다. 가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재영이었다. 그는 멍하 니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시민의 부름에 깜짝 놀라 가인 일행을 돌아보았 다. " 아, 가인아……. " 일주일 만이었다. 일주일 만에 보게 된 재영이었다. 하지만 가인의 눈에는 그가 처음 보는 사 람인양 낯설게만 느껴졌다. 팔년도 더 된 친구였는데. 그가 하는 행동이라면 눈을 감고도 알아맞출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데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는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 ……. " 가인은 무표정하게 재영을 노려보았다. 노을 빛이 정면에서 비춰져서 그런 지 가인의 눈동자가 불길한 붉은 빛을 띄었다. 재영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 으려 노력하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 오, 오랫만이다, 야. " " ……. " " 일주일간 연락도 없이……얼마나 걱정했는줄 아냐? 하여간 핸드폰은 장 식품이구만. 전화하면 좀 재깍재깍 받으라고. " " ……. " 묵묵부답. 가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재영은 품에서 시디를 꺼내며 가인 에게 다가왔다. " 야, 왜 이렇게 무뚝뚝해? 모처럼 친구가 일주일간 수업 내용을 정리해 서 찾아와줬잖아? 차 한 잔은 대접 못할 망정……. 아, 시민 씨.유리야. 마리 선배. 잘들 있었어요? 진우 씨도 안녕하셨고요? " " 아아. 오랜만이에요, 재영 씨. " 재영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준 것은 한시민 혼자 뿐이었다. 나머지 일행은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때 가인이 무심하게 재영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재영은 가인의 어깨를 붙들며 소리쳤다. " 야! 유가인! 임마! " " 놔. " 짧은 가인의 한 마디. 그와 동시에 가인의 어깨를 붙들던 재영의 손이 갑 작스런 돌풍으로 튕겨 나갔다. 재영은 깜짝 놀라며 손을 부여잡았다. 가인 의 어깨에서는 예의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가 사라져갔다. " 가인아, 너……. "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가인은 재영의 겁에 질린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던졌다. " 봤지? 이게 오라라는 거야. 몬스터를 상대하는 힘. 세상에서 아주 극 소 수의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래. " " 유가인! " 지켜보고 있던 마리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일반인에게 힘을 사용하다니! 그것도 자신의 친구에게! 왜 일부러 모난 행동을 하려는 거야! 그렇게 안타 까워 하며 가인에게 걸어가려던 그녀를 옆에 있던 시민이 제지했다. 의아해 하는 마리에게 시민은 조용히 속삭였다. " 잠시만요, 마리 양. 조그만 더 지켜봐요. " " ……? " 유리는 시민과 마리의 사이에서 불안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았다.오빠,무 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 무리하지 않아도 돼. " 가인은 천천히 재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재영은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간 신히 뒷걸음질 만은 치지 않았다. 가인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버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무섭잖아? 이상한 힘을 가진 내가 두렵지? 기분 나쁘지? " " 가, 가인아. " 후오오오오 가인의 손으로 부터 푸른 바람의 기류가 모여들었다.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 히 모습을 갖춘 바람이라니. 이런 건 생전 보도 듣도 못했다! 그렇게 놀라는 재영의 귓가로 가인이 속삭였다. " 이 힘은 말이야…… 사람 하나 쯤은 우습게 죽여버릴 수 있다고.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말이야. 그러니까 날 너무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야. 잘못했다간 뼈 째로 날려 버리는 수가 있거든? " 오라의 푸른 빛이 겁에 질린 재영의 얼굴을 비췄다. 공포로 인해 이빨이 연 신 딱딱 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 ……사라져. 그리고 다시는 날 찾지마. " 난 너희와 다르니까. 더 이상……너희들의 두려워하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 지 않으니까. 가인은 이를 악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더욱 무거워진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때 마다 비참함도 커져만 갔다. 사실 재영이 가 찾아와준 것이 기뻤다. 그가 아직도 자신을 친구라고 말해준 것이 기뻤다. 하지만……. 하지만……. ' 괴물. '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하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자신에게 조심스러워진 친구의 모습이 싫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잊혀지는 쪽이 낫단 말이야! 가 인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 야! 유가인! 이, 이 바보야! " 그때 가인의 뒤에서 버럭 소리치는 재영. 그 갑작스런 외침에 가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재영이 울상을 지으며 오만 가지 인상을 다 쓰고 있었 다. 그는 발을 동동 굴리며 분한 건지 슬픈 건지 모를 태도로 소리쳤다. " 그래! 무리하고 있다! 무서워! 두렵다고! 하지만 당연한 거 아냐? " 당연……하다고? " 팔년 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가 갑작스레 이상한 힘을 사용한 데 다가 그 무지막지한 괴물을 쓰러뜨리는데 놀라지 않을 수 있겠냐고! 제길! 빌어먹 을! 갑자기 피스메이커니 몬스터니! 그런 알 수 없는 얘기들이나 꺼내 놓 고선! 사람 정신을 완전히 빼놓고선! 그래놓고선 갑자기 납득하라고 하면 그런 거 쉽게 납득할 거 같냐? 내가 문어 대가리야! 아무 생각도 없는 무 뇌 덩어리야! " " 재, 재영아……. " 가인은 되려 재영이가 악을 쓰며 바락바락 소리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 춤거렸다. 재영은 소매로 눈가를 비비며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적어도 이해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냐! 놀란 마음은 가라앉도록 기다려 줬어야지! 제길!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테레이아도 너도 다 똑같은 놈들이야!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고! 비겁하기 짝이 없어! 내게도 기 회를 달란 말이야! " " ……기회? " " 그래! 그 정도도 못해주겠냐! 이해하고 싶어! 좀 더 너에 대해 알고 싶어! 내가 했던 행동들도 반성하고 있단 말이야! " 그 자리에서 널 감싸주지 못했던 걸, 낯선 네 모습을 외면했던 걸. " 후회하고 있어……! " 그러니까! 제발! " 널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달란 말이야! " 재영은 거기까지 외치다 목이 메여서 뒷 말을 흐렸다. 아, 젠장! 바보 같이! 왜 눈물이 나오는 거야? 이러면 꼴이 말이 아닌데! 재영은 거칠게 눈물을 훔 치며 투덜거렸다. 가인은 그런 재영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가 눈물을 흘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 나는……. " 가인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박재영, 이 바보 자식. 정말 제멋대로야. 뭐가 기회를 달라는 거야? 그렇게 고민하게 만들어놓고는,그렇게 사람 맘 고 생 다 시켜놓고는. 그런데 이제서야 찾아와선…… 이해해 달라고? ' 웃기지마! ' 자기 편리한 데로 갔다 붙이지마! 가인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며 거칠게 재영에게서 등을 돌렸다.그 모습에 재영은 소리치며 가인을 붙잡았다. " 야! 임마! " 그러나 가인은 재영의 예상과는 달리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그는 꽂꽂히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는데,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재영도 익히 알고 있는 사 람이 서 있었다. 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불렀다. " 서, 선생님……. " 가인과 재영의 담임 교사 하지연. 그녀가 골목 쪽에서 걸어나오다가 그들을 발견하고선 어색하게 서 있었다. 지연은 잠시 주뼛거리다가 이내 마음을 정 한듯 그대로 가인을 향해 걸어왔다. " 에, 또……그래. 잘 만났다, 유가인. 막 너희 집으로 향하던 참이었는데 수고를 덜었군. " 그녀는 가인의 옆에 있는 재영을 힐끔 쳐다보고선 뚱한 얼굴로 물었다. " ……넌 무슨 일로 여기에 있는 거냐? " " 그, 그러는 선생님이야말로 웬 일이세요? " 재영의 되물음에 지연은 그녀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다가 애써 머리를 긁적 인 후 곧 품에서 시디 한 장을 꺼내들었다. " 아, 그게……. 가정 방문 겸 해서 수업 요약한 거라도 건네줄까 하고……. " " ……. " 그건 이미 제가 가져왔는뎁쇼. 지연은 재영의 손에 들려있는 시디를 발견하고선 슬그머니 가지고 온 시디 를 품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녀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키려고 헛 기 침을 하다가 잽싸게 가인을 돌아보았다. " 아, 그건 그렇고 유가인. " " 예? " " 일단 두 대만 맞아라. " " ……예? " 퍽! 순간 가인은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하고 지연에게 통렬한 바디 블로우를 먹었 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재영도, 뒤에 있던 시민 일행도 벙찐 표정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어이가 없었던 건 가인이었다. " 서, 선생님……? " 가인은 배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지연을 올려다 보았다. 지연은 손가락 관절을 풀며 제 이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 일단 첫번째 것은 일주일 동안 무단 결석한 죄. " 그리고 다음은……. " 이건 그동안 나를 속인 죄! " 뻑! 그야말로 뼈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가인은 덜컥 뒤로 넘어갔다. 지연의 가 젤 펀치가 그대로 그의 턱을 올려친 것이다.맨주먹으로 친 것이 꽤나 아팠는 지 지연은 인상을 쓰며 가인을 친 주먹을 흔들었다. " 끄응! 어쨌든 그동안 잘도 나를 바보로 만들었겠다.설마 피스메이커가 내 제자였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 그런 건 생각하지 못하는게 당연하잖아요! 가인은 피가 흐르는 입을 부여 잡으며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난데없는 지연의 주먹질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세상에 어느 선생이 자기 제자를 이렇게 무식하게 두드려 팬데? " 선생……. " " 자! 그럼 이제부터는 내가 벌을 받을 차례다! " 지연은 막 항의하려던 가인의 말을 끊어버리며 그에게 오른쪽 뺨을 내밀었 다.그 행동에 일행은 다시 한번 벙 쩌버렸다. 버, 벌을 받을 차례라고? 가인 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되물었다. "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 " 너도 날 한 대 때리란 말이다. 한 입으로 두 말 했던 쓰레기 스승도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냐. " 아……. 가인은 그제서야 예전에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 누, 누가 놓고 갈성 싶으냐……. 제자를 버리고 도망치는 스승은 쓰레기 라고……. ' 그때의 말을 지금껏 염두에 두고 계셨던 건가, 선생님? 난 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가인은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지연은 그 런 가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 ……미안하다. " " ……! " 가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 정말……. 재영이나 선생님이나……. ' 다들 제멋대로야! ' 이제와서! 이제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그 동안 혼자 맘 고생한 나는? 혼자 상처받았던 나는 뭐지? 이제와서 사과하면 웃으면서 받아줄 거 같아! 멋대 로 구는 것도 정도가 있지! " 가인! " 뒤에 있던 마리가 막 주먹을 들어올리는 가인에게 소리쳤다. 지연은 자신을 노려보는 가인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뒤로 팔짱을 단단히 끼 며 다리를 벌리는게 그대로 가인의 주먹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진우는 그런 지연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대체 저 선생은, 어디까지 무대포인 거야? 퍽! 그리고 휘둘러지는 가인의 주먹. 울려퍼지는 타격음. 있는 힘껏 내찌른 가 인의 한 방에 충격을 이기지 못한 상대가 그대로 땅바닥을 굴렀다. " ……? " 질끈 눈을 감고 있던 지연은 예상했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살며시 눈을 뜨며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그곳에는 주먹을 뻗은 가인과 쓰러진 재영이 있 었다. 가인은 지연 대신 재영을 후려쳤던 것이다. 재영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다가 이내 자신이 얻어맞았다는 것을 깨 닫고선 불같이 화를 냈다. " 으악! 야, 유가인! 왜 날 때리는 거야? " " ……그렇다고 선생님을 때릴 수는 없잖아? " 뚱한 가인의 대답에 재영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었다. 아니, 그렇다고 날 때리냐! 그렇게 세게! 예고도 없이! ' 어라? '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막 가인에게 항의하려던 재영은 입을 다물었다. 가인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 뺨에서 떨어지 는 눈물도. " 정말이지……제멋대로야. 너나 선생님이나……모두……제멋대로. " " 가인아. " 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다가갔다. 가인은 서럽게 울고 있었다.지 금껏 참아왔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버리자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외 면받았다고 생각했었다.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그래서 다 포기하려고 했는데…….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 아직도 날……붙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었어……. ' 내 곁에 머물러주는 사람들이 있었어. 다 떠나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도. 아직도. " 그래. 제멋대로라서 미안하구나. " 지연은 시큰해진 코끝을 비비며 가인을 끌어안았다. 품에서 흐느끼는 그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새삼 자신들이 이 아이에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통감해야만 했다. 그녀는 단지 미안하다고 말해줄 수 밖에 없었다. 미안 하다. 미안해. 미안해. ' 그래. 분명 시기와 질투는 인간만의 저열한 감정이야. ' 하지만 인간이기에, 동물과는 달리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 후회할 수 있어. ' 반성할 수 있어. 그렇게 사람은 몇번이고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분명 그 중에서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의미 없는 반복만 일삼는 무 리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저들처럼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언젠가 인류는 새로운 모습을 보 여줄 수 있지 않을까? ' 내가 나설 자리는 없어졌군. ' 골목의 저편에서 가인 일행을 지켜보던 테레이아는 쓴 웃음을 지었다. 지연 과 재영. 그 둘이 자신이 할 말을 모두 다 해버렸다. 기껏 한 소리하고 뛰쳐 나왔는데, 이제와서 모습을 드러내면 나만 우스워지지. 테레이아는 흐뭇한 기분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 ……. " 그녀가 돌아본 그 곳에는 한 소년이 서있었다.모습은 바뀌어 있었지만 테레 이아는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료, 카이 브릿드였다. 아마도 네 크로맨시로 조종할 새로운 육신을 얻은 모양이다. 테레이아는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 다시는 내 먹이감에 손대지마, 카이. 이번에는 넘어가겠지만…… 다음 번 에도 오라의 주인을 건드린다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겠어. " " ……! " 부릅 떠지는 카이의 눈. 하지만 테레이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떠나 버렸다. 홀로 남겨진 카이는 사라진 테레이아의 자취를 처량한 눈빛으로 뒤 쫓았다. ' 왜……? ' 도대체 왜 화가 난 거야, 리리스? 왜? 카이는 담벼락에 힘 없이 몸을 기대며 저편의 가인을 돌아 보았다.일행들에 게 둘러 싸여 눈물을 닦고 있는 그는 웃고 있었다. 환한 웃음. 그 환한 웃음 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마음은 한 없이 어두워져만 갔다. 그가 밝은 곳에 있 을수록 자신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파묻혀 간다. ' 용서할 수 없어. ' 오라의 주인, 네 놈 만큼은 반드시……. 나에게서 리리스를 빼앗아간 네 놈 만큼은 반드시……. ' 용서 못해! ' " 네 녀석들, 싸게 싸게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뭘 했던 거냐? " " ……브루스? " 붉게 물든 하늘. 붉게 물든 세상. 그리고 시민의 집 앞에서는 곰방대를 피 워 문 브루스가 변함 없는 모습으로 가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17 화 네크로맨서, 카이 브릿드 完> 次回豫告 《에에에엑스 부우메에라아앙!》 귓가에 울려퍼지는 엑스 카이져의 고함 소리. 그리고 언제나 내게서 등을 돌린 할머니. 시더: 그랜마……. 나는 그런 할머니의 등을 12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레비아탄: 여기가 한국인가? 스머그: 볼 품 없는 나라로군. 이런 곳에서 소멸하다니, 쿠사나기도 운이 없 는 녀석이야. 켓. 파프니르: ……. 쿠사나기의 죽음과 함께 통일 한국으로 모여드는 요르문간드의 세 화신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카이: 하하하하, 여러분! 동방예의지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第 18 話 출동, 머신 아더(Machine Arthur)! 윤채영: 자세 교정, 기관부 압력 저하! 그래비테이셔널 필드 가동! 오라 크 록(Aura Cloak) 전개! 노엘: 체인--------- 스매셔(Chain-Smasher)! 시동!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第 18 話 출동, 머신 아더(Machine Arthur)! =-=-=-=-=-=-=-=-=-=-=-=-=-=-=-=-=-=-=-=-=-=-=-=-=-=-=-=-=-=-=-=-=-=-=-= 《에에에엑스 부우메에라아앙!》 어두운 방 안. 그 안을 밝혀주는 것은 TV에서 흘러나오는 형광색의 불빛 뿐 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 마저도 TV에 닿을 것처럼 앉아 있는 한 소녀에 의해 차단되고 있었다. 한 다섯 살 정도 되었을까. 긴 흑발 사이로 드러난 아이의 얼굴은 그 나이 또래의 천진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타아아아앗! 좋아! 이대로 엑스 원(One)으로 간다!》 《아니. 여기서는 엑스 투(Two)가 적격이다! 조종을 내게 넘겨라, 유찬!》 《뭣이! 지금 리더의 말을 무시하는 거냐, 진!》 《넌 지금 유미 씨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고 있어! 분별력을 잃은 너에게 리 더의 자리를 맡길 수는 없다!》 《네 녀석이!》 TV에서는 한창 용자전기 엑스카이저가 방영되고 있었다. 오늘의 방영 분은 1기에서 클라이맥스라고 칭해지는 '47화 죽음, 그리고 분열의 시작!' 이라는 에피소드였다. 엑스 조종사들이 남 몰래 사모해오던 가 박사의 딸,가유미가 죽음으로 해서 유찬과 진, 그리고 김유신이 서로에게 불신을 품게 된다는 내용이다. TV앞에 앉아있던 소녀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 었다. 마치 엑스 카이져에게 혼이라도 빼앗긴 듯한 모습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리더가 있었지! 유찬! 진! 착각하지마라! 엑스 카이저 는 우리 모두의 것! 세 명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 언제부터 우리 의 머리 위에 섰다는 거냐? 찬!》 《제길! 왜 내 맘을 몰라주는 거야! 유미 씨의 죽음으로 너까지 이성을 잃 은 거냐, 유신!》 《이성을 잃어버린 건 너겠지!》 《싸움을 부추기지마, 진!》 세 명의 싸움은 점점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진은 결국 말해서는 안될 금 기를 유찬에게 말해 버렸다. 《유미 씨는, 그녀는……! 너를 지켜내기 위해 그 목숨을 희생하셨다! 정신 을 잃은 네 녀석을 위해! 그렇게 그녀의 목숨으로 살아난 주제에! 그녀를 지켜내지도 못한 주제에! 그런 녀석에게 우리의 목숨을 맡길 수 있을 거 라 생각하나!》 《……!》 충격으로 침묵에 휩싸이는 콕피트(Cockpit).그리고 유찬은 자조섞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 하하. 그래. 모든 건…… 나의 죄……로군. 그녀를 지키지 못한…….》 《……찬.》 진은 그제야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닫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그리고 유미가 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조종을 너에게 넘기겠다, 진.》 《…….》 진은 이를 악물며 레버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일단은 눈 앞의 메카 사우르 스 부터 없애는 게 최우선 사항이었다. 진의 음성 인식 장치와 간단한 수 조 작으로 인해 엑스 카이저는 변신을 시작했다. 《엑스으으으 투(Two)!》 엑스 카이저가 삼단으로 불리되자 맨 앞에 위치하고 있던 1호기가 2호와 3 호기의 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지켜 볼 메카 사우르스가 아니 었다. 거기다 흔들리는 마음으로 인해 합체 타이밍까지 어긋난 엑스 대원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메카 사우르스의 화염 공격이 그들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아악!》 불길에 휩싸이며 합체 노선에서 튕겨나가는 기체들. 그렇게 엑스 카이저의 합체가 실패로 끝나자 지켜보던 소녀는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TV에서 반대편 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닥 타닥 타닥 시끄러운 TV소리로 인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 니 컴퓨터의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소녀가 돌아본 방향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 " 한 연구복 차림의 여인이 말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 다. 긴 금발 머리를 하나로 땋아내리고 있었는데, 모발 관리를 전혀 하지 않 아선지 땋은 이음새 사이로 머리칼들이 제멋대로 삐져 나와 있었다. TV앞의 소녀는 말 없이 그런 여인의 뒷 모습을 응시하다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 그랜마(Grandma). " 하지만 소녀의 목소리는 여인에게 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TV소리가 너무 컸 던 모양이다. 소녀는 아직 엑스카이저가 끝나지도 않았건만 미련 없이 TV를 꺼버리며 여인을 재차 불렀다. " 그랜마, 나 심심해. " 그제야 들린 것일까. 키보드를 치던 여인의 손길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차 손가락은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여인은 시더 를 돌아보지 않았다. " 우리 시더, 착하지?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으렴. 조금만 더……. " 여인은 어딘가 조급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여인의 작업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매진한다면 지난 30여 년간 매달려온 연구가 성과를 보일지도 몰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지만 그 조금만 더란 말을 얼마나 반복해왔던 것일까? 소녀는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심심 하다고 말하면 할머니는 매번 기다리라고만 말한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삑 다시 TV를 켰다. 그러자 엑스카이저의 엔딩과 함께 스탭롤이 떠오르고 있었 다. 그 잠깐의 순간에 47화가 끝났던 모양이다.이후부터는 재미없는 퀴즈 프 로그램과 쇼 프로그램이 이어질 것이다. 소녀는 더 이상 TV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 …….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계속 TV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녀가 자신을 돌아봐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계속 소녀는 TV만을 바라보았다. 第 18 화 출동, 머신 아더(Machine Arthur)! 《안돼! 멈춰!》 《바보같은 짓 그만둬라, 유신!》 절규하는 유찬과 진. 그들의 눈 앞에는 엑스 카이저의 세번째 타입,엑스 쓰 리(Three)가 자신의 배는 될 듯한 메카 사우르스를 끌어안은채 연 푸른 빛의 입자에 둘러싸여 빛나고 있었다. 엑스 쓰리의 조종사 김유신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찬과 진에게 히죽 미소 지 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뭐야. 걱정해주는 거냐, 너희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서로 티격태격 싸워대더니, 이제와서 무슨 얼굴들로 그렇게 한 마음이 되어 소리치는 거 야?》 《농담할 때가 아니야! 그대로 엑스 카이저의 융합로를 폭주시켰다간 수 십 메가톤에 달하는 에너지의 폭발이 일어난다! 그러면 너까지 무사하지 못 하다고!》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당장 귀환해! 부탁이야!》 애절한 찬과 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도리 어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망설임마저 버릴 수 있었 다. 내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 《헤, 헤헤. 그러고 보니 그때가 생각나는데. 처음 가 박사 님의 제의로 연 구소에 우리 셋이 모였을 바로 그 때가.그 때도 우리는 지금처럼 서로 합 심하지 못하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에 바빴었지.》 《……유신, 너.》 탄식하는 유찬. 그와 동시에 과거의 영상들이 그의 뒤로 오버랩되기 시작했 다. 저돌적인 자신과 시니컬한 진, 야수같은 순신. 이 셋은 너무나 각자의 개성이 강했기에 도저히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날, 사우르스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시범 운행도 하지 못하고 엑 스 카이저에 탑승했던 그 날.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콕피트 안에서 느껴지 던 서로의 숨결을. 서로의 생각을. 서로의 투기를! 《이 녀석들이라면 믿을 만하다! 이녀석들과 함께라면 해볼 만 하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지금껏 우리 셋은 싸워올 수 있었다.인간이라면 응당 진 저리를 칠 법한 사투의 현장들을 뚫고 올 수 있었다. 그것은 서로를 믿고 있 었기에!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난…… 너희들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자랑스럽다.》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나직한 김유신의 목소리. 유찬은 기어코 슬픔을 참지 못하며 눈물을 흘렸고, 냉정하기 짝이 없던 진 마저도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 를 숙였다. 이 고집불통 자식은 이미 결정해 버린 것이다. 자신들을 지켜내기로. 그러 기 위해선 기꺼이 자신의 목숨 마저도 내던져버릴 것이다. 《유신……!》 《헤헤. 미안하게 됐다. 젠장. 나도 이런 역은 사양하고 싶었는데. 큭.》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지는 콕피트 안에서 유신은 엑스 선 융합로의 열기를 견뎌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연구실의 모니터로 비치는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럼……이만 작별이다. 이 뒤는……너희들에게 맡기겠어.》 너희들을 믿고. 너희들의 손에 나의 바톤을 넘긴다! 《으랴아아아아아압!》 찢어져 나갈 것같은 고함 소리. 그와 동시에……. 유신과 엑스 카이저는 빛 과 함께 세계에서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우르스 제국이 준비한 최후의 메 카 사우르스를 동반한채. " 우, 우우우우우. " 그렇게 TV에서 펼쳐지는 영상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피스메이커의 기술 부 치프 시더 웰리스. 그 곁으로는 피스메이커의 중축이라 할 수 있는 오라 능력자, 피스 블루 유가인이 어색하 게 앉아 있었다. 시더는 옆에 잔뜩 준비해놓은 티슈로 연신 눈물을 닦으며 코를 풀었다. " 훌쩍! 몇 번을 봐도 감동적이야. 동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김유신 의 모습이라니! 이건 엑스 카이져 전 시리즈를 통틀어서 베스트 파이브 안에 들어가는 명 장면이라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47화에서 틀어졌던 찬 과 진의 관계는 회복되고 엑스 카이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지. " " ……. " 울면서 설명할 건 다 하잖아.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시더의 말에 대꾸했다. " 새로운 전기라고? " " 그래! 바로 제 4의 엑스 조종사 이순신의 등장이지! 순신은 유신의 빈 자 리를 메꾸게 되는데, 역시나 라고 해야 할까. 특공으로 눈부시게 가버린 선배의 후광에 가려져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돼. 이에 선배들 의 인정을 받으려고 분투하는 순신의 에피소드는 2기의 놓쳐서는 안될 볼 거리지! " " ……2, 2기? 그러면 방금 전까지가 1기였던 거야? " " That's right! 자, 어때? 가인? 이쯤되면 너도 나와 같이 엑스 카이저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겠지! " " 그, 글쎄. " 가인은 대답을 회피하며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뭐, 전보다는 확실히 재미 를 느끼게는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시더 처럼 열변을 토해낼 정도는 아 니라서.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다간 시더를 실망시키게 되겠지. ' ……그나저나 이 방은 전에 왔을 때보다 더 굉장해졌잖아? ' 가인은 눈에 들어오는 방의 풍경에 혀를 내둘렀다.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 는 시더의 지하 골방. 그 골방 안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가득 쌓여있던 연 구 자료들은 예전보다 정확히 2배로 불어나 있었고, 거기다 웬 액션 피규어 와 초합금 제품들이 그 사이 사이를 빈 틈 없이 채우고 있었다. 언제 봐도 생각하는 거지만, 도깨비 소굴이 따로 없는 방이다. " 자자자! 그렇다면 이제 2기로 넘어가 볼까! 대파된 엑스 카이저를 대신하 는 2호기, 그레이트 카이저와 멸망된 사우르스 제국을 대신하는 인베이더 들의 사투가 시작된다고! " " 아, 저기……. 지금 2기도 보려고? " " 그럼! 김유신의 죽음으로 텐션(Tension)이 절정에 이르렀잖아! 이 여세를 몰아서 오늘 안에 2기 30화까지 돌파하는 거야! " " 아……. 으응. " 가인은 힘없이 어깨가 떨구며 대답했다. 그나마 1기를 다 보게된 것만 해도 틈틈히 시더를 찾아와서 애니메이션(Animation)을 감상한 결과였거늘. 오늘 안에 30화를 돌파한다니…… 그런 건 절대 무리라고! ' ……애니메이션? ' 가인은 문득 자신이 중얼거린 단어를 떠올리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만 화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라. 어느새 시더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다 보니 그 단어가 입에 붙어버린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은근히 만화 영화 따 위, 하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 뭔가 말도 안되는 일만 생기면 '이런, 만화같은' 이라고 중얼거렸지. ' 그러던 것이 시더에게 이끌려 이것 저것 장르 불문하고 감상하다 보니 애니 메이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껴버렸다. 애니메이션은 어떤 의미에선 영화를 능가하는 표현 매체였던 것이다. 얼마든지 리얼한 연출이 가능한데다가 애니 메이션 만의 독창적인 기법은 실사의 그것보다 상당히 감각적이다.더구나 영 화 속 CG도 애니메이션의 한 범주였던 것이다. 가인은 새삼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고 만화를 무시해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 지구를 침략하는∼ 악의 무리들에게는∼ 언제나 우리가 간다∼ " 하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과 이렇게 무리한 장시간 관람은 관계가 없단 말이지.가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DVD를 바꿔 넣는 시더의 등 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피식 웃어버린다. ' 뭐, 어때. 오늘 하루 쯤은.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주말이었는데. ' 그리고 누굴 만나거나 밖에 나갈 기분도 아니었고……. 가인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DVD 메뉴 화면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때 막 DVD 리모콘을 만지작 거리던 시더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 ……가인. " " 응? " " 학교에서는……별 일 없었어? " 잠깐의 침묵. 시더는 일부러 가인을 돌아보지 않으며 그의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가인은 앞과 변함 없이 느슨한 목소리로 답했다. " ……으응. 별로. "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특별한 말은 없었다. 시더는 그가 학교에서 있 었던 일을 얘기하기 싫어한다는 걸 느끼고 리모콘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 러자 강렬한 사운드와 함께 엑스 카이저의 2기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Burning Fire! 마음 속에 있는 불꽃을 뿜어내라! 거침없이! 후회없이!》 " 불꽃은 불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리! " 환호를 내지르며 주제가를 따라부르는 시더. 그녀는 멍하니 앉아 있는 가인 을 향해 주먹을 쥐어 올리며 소리쳤다. " 뭐하고 있는 거야, 가인! 엑스 카이저의 명곡 Buring Fire야!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엑스 카이저의 이름이 운다고! 자, 따라 외쳐! Buring Fir e에서 주먹을 들어올리며 외치는 거야! 어서 빨리! " " 자, 잠깐만 시더……. 난 괜찮아. 난 보는 걸로 만족한다고. " " 노! 노! 노! 전혀 괜찮치 않아! 이 정도의 열정도 없이 엑스 카이저를 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건 이미 팬으로서의 자격을 시험당하는 시련의 무대인 거야! 이 순간을 극복해내지 못하면 너에게 미래란 없어! 앞으로 도 영원히 제 자리에서 머무르게 될 거야! " 아니, 그……머물러도 그다지 상관은 없다만……. 가인은 한 숨을 푹푹 내쉬다가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에라, 모르겠다! 《Buring Fire! 하늘 높이 날아라! 두려움 없이! 자신을 믿고!》 "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라! " " Buring Fire! " " Buring Fire! " " Buring Fire! " 가인과 시더의 기합 소리는 오프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학교에서는 그다지 별 일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없었다. 단지 예전의 생활 과 조금……달라졌을 뿐이다. 2학년 1반. 가인이 속해있는 학급. 그 곳에는 지난 1년간 같은 교실 속에서 같은 시간 을 보내온 친구들이 있었다. 여느때와 다름 없이 과제 걱정으로 고민하고,연 예인 얘기로 웃고 떠드는.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 너무나도 당연한 풍경. 하지만……. ' 괴물. ' 그 사건 이후로 가인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변함 없는 풍경 속에서, 변함 없는 교실 속에서 그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아무도. 아무도. 단지 그것만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교실은 여전히 평화로웠고 여전히 시끄러웠고, 여전히 활기찼다. 그저 가인만이 그 속에서 떨어져 나왔을 뿐이 다. 단지 그것 뿐. 그 외에는 별 일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없었다. ' 이제는……모르겠어. ' 오라 능력자니, 피스메이커니, 몬스터니. 잠시라도 좋으니까 잊고 싶었다.힘이 있는 이와 없는 이의 차이 같은 건 생 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였다면 지금과 같은 고민 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 지킬 거야.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 솔직히 회의감이 들었다.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 었다. 오라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힘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자신은 모두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 괴물이란 말은 다른 걸 뜻한는 게 아냐! 자신들과는 다르다! 우리와 넌 틀리다! 그걸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표현한 이기적인 말에 불과해! ' 문득 카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의 말을 절실히 공감하게 된다. ' 다른……걸까? ' 나와 그들은 서로 다른 건가.난 더 이상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인 건 가. 인간이……아닌 걸까? ' 그렇다면 나도 틀리다는 거야? 여기 있는 시민 씨와 유리도 인간이 아니 라는 거야? 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마리의 꾸짖음이 생각났다. 미안해요, 선배.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하지만……. ' 괴물! ' 그 말이 잊혀지지를 않아! 날 바라보던 모두의 눈빛이 잊혀지지를 않아! 그 눈빛 속에서 느껴지던 공포와 두려움! 뒷걸음질 치던 그 모습들! 그 모든 걸 어떻게 잊을 수 있냔 말이야! 그 후로 모두가 보여주는 행동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거지? 모두가 얘기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인은 느낄 수 있었다. 괴물. 괴물이라 고. 건드리면 잡아먹힐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그 태도들이라니! ' 싫다. 정말……. ' 혹시 피해망상증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너무 예민해진 거 아냐? 하지만 분명 뭔가가 바뀌었다.그것만은 확실하다.더 이상 예전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다. ' 생각하고 싶지 않아. ' 학교도, 친구들도, 괴물 취급을 받는 것도. 그리고 오라 능력에 관한 것도. 이런 마음으로 시민 씨와 마리 선배, 진우 씨와 유리, 브루스를 마주할 자 신이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재영과 테레이아, 지연 선생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모두를 피하며 오게된 곳이 다름 아닌 여기였다. 시더의 골방. 오라 능력자가 아니면서도 자신을 친구로 맞이해줬던 그녀. 그렇게 주말 아 침부터 시더를 찾아온 가인은 지금 이렇듯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 었다. 《으으으, 으아아아악!》 화면에서는 한 남자가 그레이트카이저의 조종석에서 얼굴이 일그러진채 비 명을 지르고 있었다. 1호기와 2호기에 탑승해 있던 유찬과 진은 다급한 목소 리로 외쳤다. 《찬섭 중위! 속도를 너무 냈다!》 《계기판을 잘 봐!》 하지만 그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찬섭 중위는 가혹한 중력의 압박에 몸을 떨고 있었다.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귓청을 때리는 괴물의 비명 소리같은 굉음이 점점 그의 사고를 마비시킨다. 《손이……안 움직여……. 계기판이 보이질 않아…….》 실성한 것 처럼 중얼거리는 중위의 목소리에 유찬과 진은 이를 악물었다.제 길! 중지시켜야 해! 이대로 합체했다가는 셋 모두가 다 위험해진다! 《안돼. 합체는 당장 중지다! 찬섭 중위, 열 분사로 합체 루트에서 빠져 나 가! 어서!》 《안……돼. 내장이……튀어……나온…….》 《진정해!》 《우, 우우, 우아아아아아!》 쿵! 간신히 유찬과 진이 열분사로 루트에서 빠져나갔지만, 3호기의 찬섭 중 위는 그대로 기체를 조절하지 못하고 맹렬히 지상으로 낙하했다. 찬과 진은 비통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분명 조종사는 그레이트 카이저의 기체와 함께 공중에서 산화될 것이다. " 으음. 그렇지. 역시 그레이트 카이저는 엑스 카이저의 2배에 달하는 능력 인 만큼 평범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기체가 아니지. 고인이 된 김유신과 같은 운동 신경을 겸비한 초인이 아니고서야 무리라고. 절대 무리. " 시더는 안경을 빛내며 당연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도대체 합체에 웬 운동 신경이 필요하다는 건지. ' 애초에 조종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었다는 소리 밖에 안 되잖아. 아니. 그것보다도……과학자로서 저런 설정에 동의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시더 선생님? " 그러니까 여기서 김유신에 버금가는 육체 능력을 지닌 이순신이 등장해야 하는 거야! 그만이 유신의 비기였던 '백두산 메치기'를 계승할 수 있다고! " " ……백두산? " " 응! 백두산! 엑스 카이저, 아니. 이제부터는 그레이트 카이저지. G카이저 의 세번째 타입, G쓰리의 기술이야. 길이 조절이 자유로운 그 팔로 상대 의 몸을 감싼채 메치기를 하면 중심 부근에 100미터퍼섹커 이상의 풍속이 일어나며 중심 진로에 있는 상대를 맹렬한 세력으로 감아올리는 기술이지. 김유신이 백두산에서 터득한 기술이라 백두산이란 지명이 붙게 된 거야. " " ……. " 특훈이라니. 로봇 조종과 산 속에서 하는 훈련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야? 가인은 식은 땀을 흘리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이런 건 진지 하게 고민해봐야 나만 손해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는 이런 로봇 애니메이션 에 빠져있는 시더가 정말 AI 컴플리트 세트를 만든 장본인이란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로봇은 말이야……. " 시더, 내 친구가 말하기를……. " 아니. 정확히는 박재영, 그 인간이 말한 것이지만. " 로봇은 무기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던데. " " 헉! " 순간, 시더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그가 말해서는 안될 금기를 말해버렸다 는 것 처럼 기겁했다. 가인은 그녀의 반응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 뭐지. 이 기분은? 마치 어린애의 꿈을 부숴뜨린 것만 같은……. " 그, 하지만 사실이 그렇잖아? 일단 두 발로 서있는다는 행위도 상당히 그 런데다가……. 그 조종도 레버를 몇 번 당기기만 하면 되는 터무니 없는 구조고. 또 연료 문제에다가, 수리비에다가. " " 으,으으으으음. " 시더는 신음을 흘리며 말 그대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인은 더더욱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 그, 그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모습을 감춰야 되는 게 일반 상식인데 저렇게 거대한 인간형으로 나타나면 '날 쏴 주십쇼'하고 시위하는 것 밖 에 안되잖아? 그리고 들은 말이지만. 저 거대한 로봇이 공격 당하면 안에 타고 있던 조종사도 무사하지 못하다고……. " " 그만! " 시더는 가인의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인은 그녀 의 반응에 움찔 몸을 떨며 입을 다물었다.시더는 어디선가 가져온 마커와 보 드를 그 앞에 내려놓으며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 자! 일단 로봇이라는 개념부터 설명해주지! 로봇이란 말은 체코어의 '일 한다(robota)'라는 뜻으로,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K.차페크가 희 곡 '로섬의 인조인간'을 발표한 이래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된 대명사지. 하지만 로봇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어. " " 훨씬……전부터? " " 그래! 바로 고대부터! 그리스, 로마 시대 및 기원전에서 종교 의식의 도 구로 만들어졌던 거야! 물론 이때의 인조인간은 엑스 카이저와 같은 거대 로봇이 아니라 단순히 문을 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자동인형에 불과했지 만.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로봇의 역사란 이토록 오래되었다는 거야. 예전부터, 그보다 훨씬 예전부터 사람들은 로봇이라는 개념을 생각 하며 살아왔다는 거지. " " ……그렇구나. " 가인은 나지막히 감탄했다. 아니. 잠깐. 하지만 그렇다고 로봇의 실용성이 설명되는 건 아니잖아? 시더도 가인이 그 부분을 궁금해 한다는 걸 알았는지 설명을 재개했다. " 그래. 가인, 너의 말대로 사실 로봇이란 건 사람의 일을 대신해주는 기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반드시 인간형일 필요는 없어. 이족보행보다 는 사족보행이 훨씬 이동에 용이하고 합리적이지. " 시더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TV를 돌아 보았다. TV의 엑스 카이저를 바 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 하지만 말이야. 인간형 로봇이라는 건 어쩌면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거야." " 본능? " " 그래. 사람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후손을 낳고 애정을 쏟 아 기르잖아?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하는 욕구.성경에서 보 면 God은 자신의 모습을 본따 최초의 인간 아담을 만들었다고 하지? 난 그게 인간의 얘기라고 생각해.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뜬 뭔가를 창조해 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는 거야. 그 욕구의 발로 중 하나가 로봇인 거고. " " ……아아. " 가인은 시더의 설명보다도 그녀가 보여주는 분위기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 다. 뭐라고 해야할까……. 마치 아이를 가진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하, 하하하. 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 그렇군. 욕구……인 건가. " " 그래. 아마 인간에게 생식 능력이 없었더라면, 로봇이 그 역할을 대신하 게 되었을걸? 인간의 번식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바퀴벌레의 생명력 만큼 이나 경이로우니까. " ……아니. 어째서 잘 나가다가 그 쪽으로 얘기가 가는 건지! 가인은 혀를 차며 TV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엑스 카이저의 영상에 다시 최 초의 의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묻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라 ……. " 그러니까 거대 로봇은 실용성이 없다는 거지? " " 윽. " 시더는 어깨를 움찔 떨며 한껏 초조한 기색을 띄웠다. 그 모습에 가인은 속 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역시……. 얼렁뚱땅 넘길 생각이었던가. " 응? 시더? 거대 로봇은 실용성이 없는 거지? 그렇지? " " 우우우우. " 시더는 얼굴이 울그락푸르락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가인은 그렇게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 빙글 빙글 웃기만 했다. 아, 시더에게는 미안한 말 이지만 이거 너무 재밌잖아? 하하하. 그렇게 가인이 의기양양해 하자 시더는 분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난 데 없이 눈 앞의 보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 아니! 거대 로봇은 그 존재 차제만으로도 우리 인류에게 크나 큰 도움을 줄 수 있어! 절대로! 반드시 도움이 돼! " " ……어,어떻게? " 가인은 시더의 박력에 주춤 뒤로 물러나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시더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 거대 로봇은! " 바로! " 인류의 꿈이야! " 쿵 순간 할 말을 잊는 가인. 그저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러 다 간신히 입술을 열어 맥 없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 ……꿈? " " 그래! 꿈! " " 꿈……이라고? " " 그래! 이쯤 되면 답변이 되었겠지? 꿈이야! 꿈! Dream! " ……전혀 답변이 안되잖아. 가인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 과학적인 대답을 기대했었는데 뜬금없이 꿈이라니? 그렇게 가인이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시 더는 두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말했다. " 와앗! 그 태도는 도대체 뭐야, 가인! 설마 꿈이라는 말을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 예이. 예이. 꿈 말씀이십니까? 잘 알아들었습니다. " 가인은 피식 피식 웃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더더욱 속이 상 한 시더는 발까지 동동 굴리며 열변을 토해냈다. " 꿈을 우습게 보지 말아! 꿈은! 인간의 상상력은 과학의 원천이야! 상상하 지 않으면 모든 일은 시작되지 않는다고! 인류가 우주 여행을 하게 된 것 도 160년 경의 그리스 작가 루키아노스가 쓴 단편 '이카로메니포스' 에서 발단이 되었고, 20세기의 하늘을 열 수 있었던 것도 하늘을 나는 새들을 꿈꿔왔기에 가능했던 거야! " " ……시더? " 가인은 정색을 하며 소리치는 시더의 반응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녀가 이렇듯 뭔가에 분노하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다. " 꿈은 현실 도피가 아니야!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주는 운명의 바람이야! 만약 인간에게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지금과 같은 문화는 이룩하지 못했을 걸! 꿈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절대 용서받아서는 안돼! 알았지, 가인? 내 말을 알아듣겠냐고! " " 아, 으응. " 가인은 시더의 기분이 더 상하기 전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까지 그녀가 화를 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인은 자신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 깊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 ……미안, 시더. 괜한 소리로 맘 상하게 해서. " " 아……. 그, 별로 사과를 받고 싶어서 한 소리는…… 아니었어. 그러니까 나는 단지, 그냥……. " 시더는 그제서야 자신도 이상하게 열을 냈었다는 걸 깨닫고선 손을 내저었 다. 그녀는 빨갛게 상기된 뺨을 손바닥으로 식히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 하아. 미안해, 가인. 다짜고짜 소리쳐서. 정말…… 정말 미안해. 갑자기 그랜마 생각이 나서 그만……. " " 그랜마? 할머니? " 가인은 시더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시더에게 할머니가 있었나? 시더는 드물게도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으응. 사실 앞에 내가 했던 말은 마이 그랜마가 해줬던 말이었어.꿈은 과 학의 원천이다.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주는 운명의 바람이다. 매일 입버릇 처럼 하셨던 말이거든. " " 그, 그랬구나. " 그래서 그렇게 화를 냈던 거구나. 가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선 머리를 긁적였다. " 미안. 잘 알지도 못하고. " " 으으응! 괜찮다니까! 하지만 꿈은 절대로 무시되어선 안돼, 가인.네가 사 용하는 오라 능력도 이미지 메이킹을 통한 의지의 힘이잖아? 상상을 구 현화시키는 능력! 오라야 말로 꿈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란 말이야. " " 그렇……구나. " 가인은 새삼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놀라워 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인의 힘이야말로 꿈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꿈을 이뤄 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오라 능력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시더는 그렇게 납득해 하는 가인의 모습에 대번에 의기 양양해졌다. 가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 시더는……정말로 할머니를 좋아하는구나? " " 응! 정말 좋아해! 그랜마는 내 자랑이자 우상이라고! 내가 이렇듯 AI슈츠 를 발명해내고 피스메이커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랜마가 오리 하르콘의 제련법을 찾아냈기 때문이야. " " 뭐? " 가인은 지금껏 피스메이커의 모든 발명품은 다 그녀가 만들어 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 놀람이 더욱 컸다. 저 시더가 발명을 하는 데에 있어서 기 초를 쌓아준 사람이라니! " 헤헴. 뭘 그 정도 가지고 놀라시나? 마이 그랜마는 더더욱 굉장하신 분이 라고! 나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위대한 과학자야! " " 그 정도란 말이야? " " 응! " 조금도 지체없이 대답하는 시더. 그 모습에서 가인은 시더가 할머니를 얼마 나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얼마나 존경하는지도. " 그럼 그 위대한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신 거야? " " 어……. " 하지만 가인의 질문에 시더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방금 전까지 기뻐하던 모 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힘 없이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런 시더의 반응에 가인은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아, 혹시……돌아가신 건가? " 마이 그랜마는……. " 시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마이 그랜마는 2020년 대재해 때 실종되셨어. 알고 있지? 그 LA 사건? " " 아, 으응. " 가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시더가 대재해 때 가족을 잃은 피해자였을 줄이야……. " 미, 미안. 나……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 " ……으으응. 왜 자꾸 사과하고 그래, 가인? 괜찮아. 괜찮다고.어쩔 수 없 는 일이었잖아. 그때 가족을 잃은 사람이 나 혼자 뿐이었던 것도 아니고. 워낙에 옛날 일인지라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아. 가인이 사과할 이유는 조금도 없어. " 거짓말. 시더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똑똑히 기억하는 주 제에. 하나도 빠짐 없이 기억하는 주제에. ' 2020년 3월 9일. ' 최초의 게이트가 발생한 날이자, 다른 차원의 존재가 처음으로 삼차원에 모 습을 드러낸 날. 21세기 최악의 재앙일이자 세계 각지가 피로 물든 날.그 사 건의 현장에, 최초로 모든 것이 시작된 미국의 LA 속에……. ' 나도 있었다. ' 그 속에 나도 있었어. 그랜마를 따라서, 그 연구 시설 속에서, 나는……. ' 시더! '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할머니의 비명 소리. 그때 할머니는 왜 나에게 소리 를 질렀던 걸까? 왜 그렇게 다급한 표정을 지으셨던 걸까? 도대체 왜…….그 하얀 공간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 머리가 아파. ' 분명 기억하고 있는데, 알고 있음이 분명한데. 거기에 생각이 미칠 때면 언 제나 지독한 두통과 현기증이 그녀의 사고를 방해한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회상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마치 테이프를 앞으로 되감는 것 처럼. 자신 이 대재해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조차 망각하게 되어버린다. 가인은 갑자기 시더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자 의아함을 느끼며 그 녀를 불렀다. " 시더?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 ……응? 어라? 어? 가인? 에……또, 그러니까……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 뭔가 횡설수설하다가 오히려 자신에게 되묻는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뭘까……? 이 이상한 반응은? 하지만 대재해 때의 안 좋은 기억 때문일 거라 생각하며 가인은 넘어가버렸다. " 아, 그게…… 꿈 얘기였어. 그래. 꿈 얘기. 그러니까……. " 가인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TV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는 엑스카이저 애니메이션을 바라보았다. 그는 씩 웃으며 TV를 손으로 가리켰다. " 그럼 시더는 저런 거대 로봇을 만드는게 꿈인 거야? " " 응? " 시더는 두 눈을 깜빡이며 엑스카이저를 바라보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그녀 는 자신의 골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격납고에 위치한 은색의 거인을 떠 올려 보았다. 만약 그 거인을 보게 된다면 가인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나? " 흐으으음. 뭐, 그것도 꿈이기는 해. " 시더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내 가장 큰 꿈은 바로……. " 서울 시 외곽. 어두운 밤 하늘에서 연푸른 달빛이 한 성당을 내리쬐고 있었다. 이곳은 예 전, 초류향과 리리스, 한시영이 회의를 가졌던 네이 안데르슨의 건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건물을 방문한 세명의 남자들이 있었다. " 여기가 한국인가? " 하얀 바바리 코트에 묵직한 시가(Cigar)를 입에 문 금발 남자가 입을 열었 다. 그는 이 자리의 세 명 중 가장 화려해보이는 남자였다. 손가락 하나 하 나에는 굵은 호박색 다이아가 박힌 금 반지들이 끼워져 있었고,입고 있는 옷 은 하나 같이 수백 달러를 호가하는 명품들이었다. 마치 영국 왕실의 귀족 이라도 되는 것 같은 차림새였다. " 볼 품 없는 나라로군. 이런 나라에서 소멸하다니. 쿠사나기도 운이 없는 녀석이야. 켓. " 그런 바바리 남자의 말을 받은 것은 세 명 중 가장 능글능글해 보이는 인상 의 남자였다. 기본적으로 미남형의 얼굴이지만 그 입가에 자리 잡고 있는 저 열한 미소가 전체적인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있었다. 그는 누추한 밤색 코트 하나 만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로 붕대가 삐져나온 것이 몸 전체를 붕대로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 ……. " 마지막으로 세번째 남자. 그는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있는 러시아 KGB제 복의 남자였는데 전체적으로 과묵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곁에 있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표정. 전반적으로 감돌고 있는 비장미와 금욕적인 분위기. 그 모든 것이 이 남자를 굳건히 보이게 하고 있었다.그는 앞의 남자 들과는 달리 이곳에 오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거기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생김새였다. 그들은 세 쌍둥이라도 되는 건지, 체격 조건이나 얼굴 생김새가 한결같이 닮아 있었다. 단지 그 풍기는 분위기 들이 너무나 이질적이라서 얼핏 봐서는 절대로 동일 인물로 보이지 않았지만. " 그나저나……. " 바바리 코트의 남자는 자신 외의 남자들을 돌아보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 다. " 이렇게 우리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정말 유래가 없는 일이로군. 뭐,어 차피 서로의 사고를 공유할 수 있으니까 굳이 궁금해할 것도 없었지만. " " 켓. 부잣집 도련님은 꽤나 고풍스럽게 말을 돌리시는군. 그냥 솔직히 얘 기하시지 그래? 사실은 너희같은 놈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역겹다고 말 이야. 카카카캇. " 붕대의 남자는 뭐가 그리도 웃긴 건지 연신 웃음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며 바바리 남자를 비웃었다. 바바리 코트의 남자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싸늘 하게 대꾸했다. " 그래. 인정하지. 솔직히 네 녀석의 기억 만큼은 메스껍더군, 스머그(Smou g).가만히 있어도 너의 그 추잡스런 행위가 내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은 다시 없을 고문이야. " " 케켓. 뭐, 도련님의 성교육으로는 좀 자극이 심했을려나? " " 불결하다. 네 놈과 내가 한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 " 켓. 나도 너 같이 겉으로만 순둥이 흉내를 내는 녀석을 보면 강간해 버리 고 싶어진다고, 레비아탄(Leviathan). " 붕대의 남자, 스머그의 말에 바바리 코트의 남자, 레비아탄은 입에 물고 있 던 시가를 분질러 버렸다. 그렇게 둘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그 사이를 과 묵한 KGB 제복의 남자가 가로막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둘을 노려 만 보았지만 그것 만으로도 싸움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 ……그래. 이런 일로 내 기품이 상하는 게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겠군. 파 프니르(Fernir), 너의 의도는 확실히 이해한다. " " 젠장. 비린내나는 도련님에다가 벙어리 새끼라. 정말이지 끔찍하군. 최악 이야. 네 놈들과 면상을 맞대기 보다는 차라리 죽은 쿠사나기나 초류향과 키스하는게 천만배는 나아. " " 후. 후하하하. 그 얘기를 그들이 들을 수 있었다면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하하하하. 저급하지만 꽤 간만에 우스운 농담이었다, 스머그! " " ……켓. " 스머그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이 상황이 너무나 맘에 들지 않았다. 이 좁아터진 동방의 나라에 오게 된 것도. 다시는 마주 치기 싫었던 얼굴들을 보게 된 것도. 거기다 안을 수 있는 여자조차 없다니! " 빌어먹을! 쿠사나기, 이 망할 자식은 도대체 어떻게 되버린 거야? 죽을 때 죽더라도 확실히 인수인계는 해놓고 뒈져야 할 거 아냐! 카칵! " 스머그는 애꿎은 쿠사나기를 욕하며 진저리를 쳤다. 그의 말에 레비아탄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말에는 특별히 동의해주지. 테라의 애완견들에게 당한 것도 모자라 죽 어서 까지 이런 수고를 끼치는 건 확실히 좋게 봐줄 수 없어. 어째서 그 가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 인격의 자리가 비어있는 거지? " " 켓. 모르지. 혹시 어디선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지도. " " 아니. 그건 아닐 거다.일단 그의 기억은 저번 오라 능력자들에게 당한 이 후로 멈춰진 상태다. 기억 공유가 두절되었을 경우는 본체로 돌아갔을 때 와 소멸되었을 때 둘뿐이지 않은가. 메두사에게 연락이 없는 걸로 봐서는 분명 쿠사나기가 소멸된 건 확실해. " 슥 그때 KGB제복의 남자, 파프니르가 그들에게 손짓을 하며 성당의 한 어둠 속 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파프니르의 손가락을 따라 레베이탄과 스머그가 돌 아본 방향에는 달빛을 등진 한 인영이 서있었다. " 하하하하, 동방예의지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낭랑한 웃음 소리.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한성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 은 평범한 인상의 한 소년이었다.하지만 그 소년의 눈동자는 범상치 않은 초 록빛을 띄고 있었다. 소년, 카이 브릿드는 세 명의 남자들을 돌아보며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 만나서 반가워요, 요르문간드의 화신 분들. " 요르문간드의 화신은 대재해 이후 총 여덟 명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2020년 대재해 때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화신, 브리트라.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세계 각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화신들.피스메이커는 그 들을 용마인이라는 코드 네임(Code Name)으로 칭했다. 중국의 초류향. 일본의 쿠사나기. 미국의 스머그. 영국의 레비아탄. 러시아의 파프니르. 이상이 삼차원에서 목격된 화신들의 전부다.그 중 메두사(Medusa)라는 화신 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단지 이 일곱 명의 화신을 티아마트(Tiamat) 라는 화신이 제어한다고 한다. " 티아……마트라. " 키보드 앞에서 정보를 정리하고 있던 닥터는 잠시 손을 멈췄다.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 앉으며 자신의 개인 사무실을 돌아보았다. 이렇다할 취미가 없던 닥터는 틈틈히 몬스터와 피스메이커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해 왔었고, 그러던 것이 어느덧 5년. 자료 정리는 어느새 그의 취미가 되어 있었다. " 뭔가 의미심장하군. " 에누마 엘리쉬 제 1점토판 135행에서 136행을 찾아보면, 티아마트는 '일곱 갈래의 큰 뱀을 낳고 무수한 무기를 더했다. 이빨은 날카롭고 가차없으며 그 녀는 피 대신 독액을 그 몸에 가득 채웠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덟개의 화신을 가진 요르문간드에게서 나머지 일곱 명의 화신들을 관리하 는 주 인격의 이름이 티아마트라.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닥터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 첫번째 화신 브리트라는 피스 그레이에 의해 소멸되었다. ' LA를 쑥대밭으로 만든 그 장본인은 다른 화신들과는 달리 D타입의 형태로 나타났었다. 드래곤(Dragon). SA급으로 분류되는 최악의 몬스터. 작년 북경 의 용장호 사건도 이 드래곤을 B급 몬스터 와이번과 착각하는 바람에 생겨났 던 일이다. ' 브리트라의 죽음 후, 영국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 일본 각지에서는 속속 들이 새로운 화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하지만 그 수는 다섯. 죽은 브리트라를 합쳐도 여덟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나머지 두명의 화신들은 게이트를 넘어오지 못한 것 같다. ' 그들 용마인들은 어떤 일관된 목적 아래 움직이는 것으로 보여지며 그 목 적이란 세계 각지에 위치한 가이아의 탐색으로 추측된다. ' 가이아. 오라의 성지. 다른 말로 내룡이라고도 하며,용맥의 흐름이 모인 곳 이라 그런지 번화가, 각 나라의 수도가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영국의 런던 과 중국의 북경, 일본의 동경과 통일 한국의 서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 국과 러시아가 예외적으로 LA와 시베리아였지만, 이는 풍수지리학의 유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 가이아의 탐색. ' 그 중에서도 가이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옴팔로스. 그것이 그들의 탐색 대상 임이 분명했다. 그러던 중 초류향이 자신의 구역 을 벗어나 새로운 탐색지로 통일 한국을 지목했다. 현재 한국의 몬스터 발생 율은 세계 전역과 비교해 볼 때 80%라는 높은 수치를 자랑한다. 용마인들은 가이아의 옴팔로스가 한국에 위치한다고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 하지만 그런 초류향 역시 피스 그레이에 의해 소멸되었다. ' 그것이 촉진제가 되어 일본의 쿠사나기를 서울로 불러들이게 된다. 아마도 삼차원에 구현된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에게는 티아마트와는 독립적으로 메인 퍼스널러티(Main Personality)가 존재하는 듯 하다. 처음은 브리트라, 두번 째는 초류향, 세번째는 쿠사나기. 이들 세 용마인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이드 퍼스널러티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메인 퍼스널러티로 선정된 화신은 자신의 의사로 행동할 수 있는 것 같다. ' 메인 퍼스널러티는 계승된다. ' 아마도 메인 퍼스널러티의 화신이 죽으면 나머지 화신들 사이에서 새로운 주 인격이 선정되는듯 하다. 그 계승이 어떤 특별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지 는 알려진 바 없다. ' 그리고 세번째 주 인격 쿠사나기 역시 피스 그레이에 의해 소멸. ' 그렇다면 다음 메인 퍼스널러티는? 하지만 이에 관한 새로운 정보는 아직까지 없다. 단지……. " 으음. " 닥터는 신음을 흘리며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그의 손을 멈추게 했다. 그는 차를 들이키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랬다. 탁탁 머뭇거리던 닥터의 손가락이 빠르게 다음 내용을 기록한다. '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던 용마인들이 자취를 감췄다. '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그리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쿠사나기, 날 도와주지 않겠어? ' 네크로맨서는 그렇게 접근해왔다. 그는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정확한 방법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아마, 노아의 연구는 거기까지 진척이 된 모양이 었다. 어쨌든, 본체의 메두사를 통해 들은 카이의 전언은 다음과 같았다. ' 차원 왜곡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기상 변화를 일으켜라.너는 피스 그레이 와 그 일행들을, 나는 오라의 주인을 맡는 거다. ' 그때 쿠사나기는 피스 그레이와의 승부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안을 승낙한 결과, 쿠사나기는 소멸하고 말았다. " 켓. 이제야 행차시로군. 잘도 그 뻔뻔스런 낯짝으로 웃고 있어. 어이, 빌 어먹을 꼬맹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해보실까? " 스머그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카이 브릿드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그는 이 애송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리스의 보호 속에서 벌벌 떨기나 하던 겁쟁 가……. 무엇보다 놈은 쿠사나기를 부추겨 그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다. 레비아탄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카이를 쏘아 보았다. " 그래. 변명이라도 해보시지. 감히 요르문간드의 화신을 이용해먹은 그 이 유란 걸 말이야. " " 이런. 이용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 카이는 여전히 싱긋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겉으로는 공손한 것 같지만 속으 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파프니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 없이 카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 그럼 변명을 시작해 보죠. 일단 쿠사나기는 피스 그레이의 목숨을 취하고 싶어했지만 마정의 핵을 무리하게 남용한 결과 정이 고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도약에 필요한 차원 왜곡 현상이 필요했고요.여기서 그와 저 의 이해 관계가 성립합니다. 전 그에게 창생의 술로 미약하나마 대신할 육체를 마련해 주었고, 그는 절 여기로 넘어오게 해주었습니다.공평한 교 섭이었죠. " " 공평하다고? 꽤나 시건방진 소리를 입에 담는군. 감히 요르문간드의 화신 을 상대로 조건을 제시하다니. 네 놈은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 모양이지? " 레비아탄이 분노하자 그 주위의 대기가 무겁게 진동하기 시작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과장되게 손 을 흔들며 고개를 낮췄다. " 그럴 리가요. 제가 입을 잘못 놀렸군요. 사과드립니다. " " 사과따윈 때려치우고. 켓! 누가 너에게서 쿠사나기와의 계약 따위를 듣고 싶었는 줄 알아? 그건 이미 우리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야! " 기억 공유로 인해 그들은 쿠사나기가 오라 능력자들에게 어떤 죽음을 맞이 했는지 조차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마치 자신의 죽음 처럼. 스머그는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기분이 더러워졌는지 욕지거리를 내뱉었 다. 그는 카이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 저 망할 자식! 분명 우리가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고의로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거야. 저 빌어먹을 꼬맹이가! " 켁!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은 주 인격의 계승에 관한 것이다! 쿠사나기 녀 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선 주 인격이 나오지 않았어! 나도! 레비아탄도! 저기 보이는 파프니르에게서도! 이에 대해서 설명해 보시지! 우리가 납득할 수 있도록 말이야! " " 흐으음. 역시 그랬군요. ……주 인격이 계승되지 않았어. " 카이는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뭔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는 거냐? 아니 그것보다도……. " 레비아탄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카이를 쏘아보았다. " ……쿠사나기는 정말 죽은 것인가? " " ……! " 그 말에 스머그와 파프니르가 눈을 부릅 뜨며 레비아탄을 돌아보았다. 스머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듯 물었다. " 켓! 그게 웬 헛소리야? 네가 앞서 말했다시피 쿠사나기의 기억은 멈춰져 있었다. 거기다 메두사에게서도 별 다른 소식이 없었고. 네 자신이 가장 먼저 그 녀석의 소멸을 확신했잖아? " " ……. " 하지만 레비아탄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줄곧 카이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조용히 받아내던 카이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 레비아탄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쿠사나기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 " ……! " 카이의 말에 질문을 던졌던 레비아탄 조차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스머그 는 대번에 불같이 화를 내며 카이에게 소리쳤다. " 칵! 이 망할 새끼가! 어디까지 우릴 속이려고! 뜨거운 맛을 보여주기 전 에 네 놈이 알고 있는 사실을 불어! 하나도 빠짐없이! " " 아아아. 진정하십시오, 스머그 님. 전 한번도 여러분을 속인 적이 없습니 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 카이는 스머그의 분노가 대수롭지 않다는듯 대충 손을 저으며 말했다. " 쿠사나기는 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살아있다고도 할 수 없죠. " " ……뭐? " 스머그가 맥 없이 되물었고 조용히 있던 파프니르도 눈썹을 꿈틀거렸다. 레 비아탄은 카이의 얘기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 죽지 않았지만 살아있지도 않다? " " 예. 일단 이것을 주목해주시지요. " 카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자를 모두에게 들어 보였다. 상자는 스티로폼 으로 만들어진 직육면체 모양의 단열 상자였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개봉하 고 그 안의 내용물을 모두에게 꺼내보였다. 그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요르 문간드의 화신들은 모두들 할 말을 잃어버렸다. " 쿠……사나기? " 제일 먼저 냉정을 되찾은 레비아탄이 중얼거렸다.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쿠사나기입니다. " 카이의 손에 들려있던 내용물. 그것은 다름 아닌 해저 터널 속에서 소멸되 었다고 여겨졌던 쿠사나기의 머리였다. 두개골이 처참하게 함몰된채 머리의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채 마르지 않는 녹색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나 마 쿠사나기의 시신이 썩지 않고 지금껏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것은 그 존재 가 본래 뼈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머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 이, 이게……살아있다고? " " 살아있는 것도 죽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 카이는 차갑게 그의 말을 수정해주며 쿠사나기의 머리를 다시 상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머리를 잡은 자신의 손을 불쾌하다는듯 바라보며 말을 이 었다. " 제가 그의 조각을 회수했을 때는 이미 정의 수명이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 다. 무리하게 마정의 핵을 남용한 결과 자신의 형체조차 수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간신히 창생의 술로 숨이 끊어지지 않게는 만들 수 있었지 만…… 그것이 한계였습니다. "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 아마도 주 인격이 계승되지 않은 것은 쿠사나기가 이런 상태로도 숨이 붙 어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생각 같아서는 편안히 그를 보내주고 싶었지만 …… 왠지 제가 결정할 사안은 아닌 것 같아서 보류해 두고 있었죠. " " 과연……우리를 부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던가. " 레비아탄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네크로맨서가 자 신들을 이 동방의 조그만 나라로 불러들였을 때, 그에 합당하는 이유가 없을 경우 자신은 카이를 가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죽은 초류향이 명예 욕을 추구했던 것 처럼 레비아탄은 재욕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한다. 눈 앞의 쿠사나기라는 재욕이 그의 눈을 어둡게 만든 것이다. 그때 스머그가 흥분한 어조로 카이에게 소리쳤다. " 켓! 케켓! 그,그럼……그 쿠사나기의 목을 취하는 자가…… 다음 주 인격 이 될 수 있단 말이지! 계승자가! " 스머그의 떨리는 손이 카이가 들고 있던 상자로 향했다. 하지만 카이는 재 빨리 상자를 뒤로 감추며 혀를 찼다. " 이런. 이런.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스머그 님. 마치 발정난 개 처럼 너 무 서두르시는군요. " " 칵! 뭣이! " 스머그는 분노하며 카이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올렸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그의 안광이 광기에 찬 노란빛을 흘렸지만 카이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 아아. 쿠사나기의 머리를 넘겨드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그 리고 요르문간드의 화신 중 한 분이신 스머그 님이라면 인수받을 자격도 충분히 있고요. 하지만……. " 카이는 레비아탄과 파프니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스머그에게 웃어보였다. " 과연 저 분들은 스머그 님이 주 인격의 자리를 차지하시는 걸 어떻게 생 각할까요? " " ……! " 스머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레비아탄과 파프니르를 돌아보았다. 레비아탄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고, 파프니르는 팔짱을 낀채 침묵하고 있었다. 스머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카이를 돌아보았다. " 너, 이자식……! " " 흥! " 카이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스머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자신의 흐트러 진 옷깃을 바로 하며 레비아탄과 파프니르를 향해 걸어갔다. 스머그는 망연 자실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자자. 어쨌든 이 자리의 세 분에게는 쿠사나기의 머리를 인수 받을 정당 한 권리가 있습니다. 대신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군요. 중간에 끼여 있는 저로서는 곤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느 분에게 쿠사나기의 머리를 넘겨야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 레비아탄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카이를 냉정하게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 뜨렸다. " 훗. 어렵게 말을 돌리는군.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쿠사나기의 목은 넘겨 줄 수 없다……. 이것 아닌가? " "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여러분들을 여기로 부 르지도 않았겠죠. " 카이는 히줏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성당의 그림자 속에서 무거운 굉음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위로 만들어진 두 마리의 거인들이었다. 레비아탄은 그 거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 네크로맨서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항상 두 마리의 골렘들을 대동한 다던데……. 이것들이 바로 그것인가? " " 예. 비프론즈(Bifrons)와 네비로스(Nebiros)라고 합니다. 제가 아끼는 라 무의 아이들이죠. " 카이는 자신에게 걸어오는 골렘들을 환한 미소로 반기며 그들의 바위로 이 루어진 몸체를 쓰다듬었다. 스머그는 초조한 눈빛으로 골렘들을 노려보다가 카이에게 소리쳤다. " 큭! 그런 녀석들의 이름따윈 알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 무슨 이유로 이 녀석들을 불러낸 거지! " " 아아. 그야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죠. 만약 쿠사나기의 목을 차지하기 위해 스머그 님이 이성이라도 잃을 시에는 전 꼼짝 없이 죽는 수 밖에 없 지 않습니까? " " 칵! 뭣! " 스머그는 분노하며 몸에서 은은한 자색의 기운을 뿜어냈다. 하지만 레비아 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의 말에 동의했다. " 흠. 일리가 있는 말이야. 확실히 스머그, 네 녀석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 을 녀석이지. " " 크으으윽. 해보자는 거냐, 도련님? " 스머그와 레비아탄이 흉흉한 기세를 서로에게 내뿜으며 자신의 기운을 전개 시켰다. 그러자 성당 안의 공기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카 이는 골렘의 어깨에 올라타며 그 광경을 재미있다는듯 바라보았다. " 어쨌든 잠시동안만 쿠사나기의 머리는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까 여러분들은 가려주십시오. " " ……가려? 가려달라니? " 레비아탄이 눈쌀을 찌푸리며 되묻자 카이는 자신의 손에 들린 상자를 흔들 어 보이며 답했다. " 쿠사나기의 머리를 가질 정당한 계승자를 가려달란 말입니다. 제가 마음 놓고 이것을 넘겨드릴 수 있게. " " ……! " 스머그와 레비아탄, 파프니르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그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듯 서로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자식은 우리에게……. " 자해하라는 건가? 쿠사나기의 목을 넘겨받고 싶으면 서로 싸우라는? "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레비아탄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지압하며 살 며시 고개를 저었다. " 어리석은 녀석.누가 그런 바보같은 짓을 벌인다는 거냐? 아무리 네 녀석 이 우리와 같은 바르의 별이라고는 하나 오만함도 정도가 있다. 지금 너 혼자서 우리 세 명을 다 감당해낼 수 있다는 소리인 건가? " 마음만 먹으면 네 녀석에게서 쿠사나기의 목 쯤은 언제든지 받아낼 수 있다. 레비아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요르문간드는 바르의 별들 중 최 강을 자랑한다. 그에게 있어서 창생의 술이나 주물럭거리는 네크로맨서의 협 박 따위는 우습지도 않은 것이다. 카이는 용마인들의 분노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쓴 웃음을 지었다. " 제 말을 어떻게 들으신 겁니까? 전 단지 계승자를 가려달라고 했을 뿐입 니다. 제가 쿠사나기의 목을 여러분에게 넘겨드리는 건 일도 아니에요.하 지만 넘겨드린 이후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 카이는 용마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 제가 어느 분에게 이것을 넘겨드리는게 옳은 걸까요? 스머그 님께? 레비 아탄 님께? 아니면 파프니르 님께?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머지 분들에게 선 불만이 생길 겁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저에게로 향하겠죠. 아시다시 피 전 여러분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이 약한 존재입니다. 도저히 그 분노 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어요. " " 으음. " 모두는 침음했다. 카이의 말에서 틀린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솔직히 그의 말대로 지금 자신들은 쿠사나기의 목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 지 않은가? 이런 자신들에게 쿠사나기의 목을 던져준다면 피바람이 일 건 눈 에 보듯 훤한 일이었다. 그렇게 레비아탄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무렵 참다 못한 스머그가 소리쳤다. " 칵! 그래! 결국 강한 자가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건 당연한 이치! 복잡하 게 생각할 것도 없군! " " 스머그? " 레비아탄은 표정을 굳히며 그를 노려보았다.스머그는 이미 결론을 내렸는지 망설임 없이 힘을 개방시켰다. 그는 레비아탄을 돌아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 카카카! 이제 그만 위선의 가면은 벗지 그래, 도련님? 우리 솔직해지자고! 난 어떻게 해서든 주 인격이 되야겠어! 티아매트의 지긋지긋한 수발 노릇 도! 의미 없는 꼭두각시 노릇도 이젠 질려버렸다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 칠 수야 없지! " " 너……! " 레비아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은 녀석. 이미 투쟁 본능으로 몸이 달아올랐어. 무슨 말을 한다해도 들어먹히지 않겠군! 그는 이 싸움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뭔가가 찝찝했다.마치 네크로맨서 의 장단에 놀아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망설이는 레 비아탄에게 스머그가 조소를 흘렸다. " 켓! 무엇보다도 주 인격이 된다면 좋은 점이 있지. 예를 들자면…… 순둥 이 같은 네 녀석을 내 맘대로 짓밟아버린다던가…… 티아마트에게서 메두 사를 빼앗아온다던가……. " " ……! " 그 말이 레비아탄의 고민을 사라지게 했다. 레비아탄은 반지로 감싸인 자신 의 손을 들어올리며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 그렇군.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내 위에 네 놈이 올라서는 것 만큼은 두고 볼 수가 없군. " " 켓! 사실 메두사, 그 년을 네가 따먹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 " ……대화의 질이 떨어진다. 그 추잡스런 입은 다물어라. " " 흥! 내숭 떠시네, 닳아빠진 갈보가. " 스머그가 코트를 좌우로 열어젖히자 그 안에서부터 보랏빛의 독기가 스며나 왔다. 그 독기는 주위에 닿는 모든 것을 녹여버렸다. 그에 발 맞춰서 레비아 탄도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그 손가락에 끼여 있던 금반지가 물방울로 변하 며 그 주위를 멤돌았다. 스머그는 레비아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 뒤의 파프니르에게 물었다. " 어이, 벙어리! 네 놈은 어떻게 할 거야? 낄 거야? 안 낄 거야? " " ……. " " 얼른 대답하지 못해! " 파프니르는 대답대신 고개를 좌우로 살며시 저으며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싸움에 끼지 않겠다는 표시였다.그는 아무래도 주인격이니 계승이니에 별 관 심이 없는 듯 했다. 그도 당연한 것이, 파프니르가 추구하는 것은 다른 화신 들과는 달리 금욕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가 계승 자격을 포기한다고 해 도 레비아탄과 스머그는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파프니르는 원래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 카이 브릿드. " 레비아탄은 골렘의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네크로맨서에게 경고했다. " 네 놈이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일단 너의 장단에는 맞춰주지.하 지만……. " 촤아아아악 순간, 그의 몸 주위를 돌고 있던 물방울들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하나 의 채찍을 만들어냈다. 물에 수만 기압의 압력을 가한 초고압 물줄기였다.그 위력은 강철도 젤리처럼 잘라낼 정도다. " 모든 것이 네 뜻대로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마라. 나, 레비아탄이 절대로 그렇게는 놔두지 않을테니까. " " 하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 카이는 웃으면서 자신을 태운 골렘을 뒤로 물렸다.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이 본격적으로 맞붙는다면 이런 장소 쯤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될 것이다. 관전 할 생각이라면 일단 둘에게서 거리를 둬야만 했다. 카이는 제왕의 상이 늘어선 가로가 긴 중간대까지 물러난 뒤 소리쳤다. " 자! 그럼 시작해주십시오! " 퍼어어어엉! 카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 뜬 장미의 창들이 폭죽 처럼 터져나갔다. 용마인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시작했군. " 오낭식 구조물의 지붕에 몸을 걸터 앉은 두 남자가 있었다.한 쪽은 검은 신 부복을 입은 은발 장신의 남자. 그리고 나머지 한 쪽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멜빵 바지 차림의 소년이었다. 신부, 라트 발렌시아의 중얼거림에 소년, 마유빈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 꾸했다. " 흥. 만족이라는 걸 모르는 녀석들이야. 애초에 욕망으로 구현된 녀석들이 다 보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하여간 제 버릇 남 못준다니까. " 유빈은 지붕에 엎드린채 턱을 괴며 밑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성당의 밑에 서는 막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이 주 인격의 자리를 놓고 싸움을 준비하고 있 었다. 밤하늘이 레비아탄과 스머그의 기세로 인해 급격히 어두워져 갔다. 그 들의 본체가 차원 너머에 있는 만큼 그 힘을 끌어다 쓰자, 차원 왜곡 현상으 로 인한 기상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라트는 다리를 흔들며 빈둥거리는 유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낮 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 ……좀 더 진지해져라. 저들에게 발각되었다간 마스터의 임무는 고사하고 우리도 무사하지 못한다. " " 헤에. 겁이 나세요, 신부 님? " 유빈은 일부러 크게 놀라는 척 말꼬리를 늘렸다. 그 모습에 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적어도 너의 무모한 짓에 개죽음 당하고 싶지는 않다. " " 하. 설마 당신에게서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 걸. 일단 조금 이라도 자신을 돌아본 다음에 남에게 충고하시지 그래? " 유빈은 삐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빈정거렸다. 라트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아버린다. " ……역시 어린애인가. 마스터가 오냐 오냐하며 받아주니까 버르장 머리가 없어지는군. " " 우, 웃기지마! 거기서 왜 마스터가! " 순간 유빈은 발작처럼 소리지르려다가 라트의 제지에 입을 다물었다. 라트 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힐책했다. " 네 녀석은 상황 판단도 못하는 건가. 네 바보 짓에 일이 수포로 돌아 갈 뻔했다. 멍청한 짓도 정도껏 하라! " " 쳇! " 유빈은 아랫 입술을 깨물며 라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투덜거리기는 하 지만 그도 반성을 하는지 이후부터는 현저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라트는 그 런 유빈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불안정하기 짝이 없어. ' 그는 시영의 얘기만 나오면 과민 반응을 보이는 유빈이 불안했다.패턴 카민 의 특성 상, 이 소년은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한 지식과 지능을 겸비하고 있 다. 그런 그가 시영의 일에는 평범한 아이들 처럼 단순해진다. 마치 부모 욕 에 흥분하는 아이 같다고 할까. 그 정도로 유빈은 시영을 따르고 있었다. ' 타인에게 이 정도로 맹목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 ' 유빈은 시영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무엇이 그리도 이 소년의 눈을 멀게 한 거지? 라트는 새삼 시영의 수완에 감탄했다. 분명 한시영,그 남자에게는 타인을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있다.그 때문에 자신도 그를 따르는 것이겠지만. ' 그나저나……. ' 라트는 자신들을 여기로 보낼 때 시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오늘 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네크로맨서의 행동을 주시하십 시오. 블러디 노블맨 님은 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 블러디 노블맨, 네이 안데르슨. 그는 유일하게 시영과 손을 잡은 바르의 별 이었다. 서로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해야하나. 라트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 었지만, 바르의 별들은 서로에게 협조하는 동시에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라고 한다. 그런 그물같은 구조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영과 네이 같이 비공식적 으로 서로를 돕는 이들이 생긴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 꾸미고 있다고? ' 라트는 골렘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네크로맨서를 녹색 안광으로 주시했다. 그도 시영과 네이 처럼 다른 바르의 별들과 암묵적인 협약을 맺고 있음이 분 명했다. 저렇듯 용마인들의 싸움을 부추긴 것도 다 협약자와의 계약 때문일 것이다. '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용마인들의 싸움에 그가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 다는 거지? ' 그것을 알아내는 게 지금부터 자신들이 해야할 일이었다. 스머그와 레비아탄의 관계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에 비유될 수 있다.한 인격 에서 파생된 존재들이건만 성격은 극과 극. 한 군데의 유사점도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스머그가 요르문간드의 노악(露惡)적인 부인격이기 때문에 과시 욕의 부인격, 레비아탄과 마찰을 일으키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대립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레비아탄이 스머그가 맡고 있는 가이아 를 양분했기 때문이다. " 켓! 켓! 드디어 이런 날이 오고 말았군! 뒤늦게 미국으로 넘어왔으면서 사사건건 내 일을 훼방놓던 너! 정말이지 죽이고 싶었다! 그 약삭빠른 상 판을 뭉개버리고 싶었다고! " 스머그는 레비아탄과 싸우게 된 것에 흥분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레비아탄은 그런 스머그와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기운을 가다듬었다. " 지금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는 건가? 내가 빠른 게 아니라 네 녀석이 너무 굼떴던 거다. 자신이 맡은 구역 하나 쉽사리 정리하지 못하고 그렇 게 시간을 낭비하다니……. 보고 있던 내가 다 답답하더군. " " 크으으윽! 잘도 지껄이는데! " 레비아탄은 요르문간드의 화신들 중에서 가장 유능한 인격이었다.그는 자신 이 맡고 있던 가이아,영국을 가장 먼저 정리하고 미국으로 넘어온 유일한 용 마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단기간의 수행이 가능했던 것은 다 영국이 오 라 능력자를 보유하지 못했던 탓이었지만, 레비아탄은 화신들 중에서도 가 장 먼저 테라 사회의 구조와 삼차원의 법칙을 깨우친 실력자였다. 만약 그에 게서 기억 공유로 건네 받은 막대한 정보가 없었더라면 용마인들은 지금과 같은 자유 침공을 감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 크랴아아앗! " 순간, 스머그는 레비아탄과의 대화 도중 난데 없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 다. 그러자 휘감겨 있던 붕대가 풀리며 그곳에서부터 짙은 노란색의 액체가 소화기처럼 터져나왔다. 푸화아아아악! 액체에 닿는 모든 것들이 녹아들어간다! 바위마저 물로 만드는, 그 물 마저 도 기화시켜버리는 강력한 산성 액체였다. 초류향이 불을 조종하고,쿠사나기 가 먹구름을 조종했던 것처럼, 스머그는 산성 증기를 조종할 수 있었다. " 카카카캇! 어때? 오리하르콘도 녹여버리는 액시드 브레스(Acid Breath)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라! " " ……예고도 없이 공격이라. 네 녀석 다운 치졸한 수법이군. " 산성 증기에 시야가 가려서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레비아탄의 비아 냥거림이 똑똑히 스머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스머 그는 주저 없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촤악 그러자 날카로운 단절음과 함께 대지가 반으로 잘려 나갔다.산성 액체를 피 해 어느샌가 성당의 외벽으로 올라선 레비아탄이 수압 채찍을 휘둘렀던 것이 다. " 겨우 그 정도 기습으로 이 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꽤나 얕잡아 보였나 본데. " " 시끄러! 선수필승이라는 거다! " 스머그는 공중에서 몸을 틀며 레비아탄의 맞은 편 벽 위로 올라섰다.그리고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던지자 그 몸을 감싸고 있던 붕대가 살아있는 뱀 처 럼 풀려났다. " 켓! 닿으면 죽는 독! 맡으면 죽는 독! 스치면 죽는 독! 취향 따라 골라잡 아라! " 촤아아아악 스머그의 붕대가 벽에 박히자, 벽은 빠른 속도로 그 몸을 노란빛으로 물들 였다. 그리고 물들이는 것 뿐만이 아니라 강한 산성 증기까지 내뿜는다.증기 자체가 하나의 공격이었던 것이다. 레비아탄은 인상을 찌푸리며 재빨리 증기 의 영향권에서 몸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스머그가 노리고 있던 수 였다. " 크랴아아아앗! " 괴성을 내지르며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스머그. 산성 증기에 영향을 받지 않 는 그는 되려 증기 속으로 녹아들듯 기화하며 순식간에 레비아탄의 앞으로 이동했다. 레비아탄의 코 앞까지 도달한 스머그는 짙은 녹색으로 물든 자신 의 손을 속사포처럼 그에게 휘둘렀다. " ……! " 채찍은 근접전에서 위력이 감소한다.레비아탄은 스머그의 손을 비껴내며 채 찍의 수압을 풀어 물방울 째로 스머그에게 난사했다.하지만 수탄(水彈)은 채 스머그에게 닿기도 전에 그 주위에 서려있던 산성 증기로 기화되고 말았다. 스머그는 광소를 터뜨리며 독무가 피어오르는 손을 연신 레비아탄에게 휘둘 렀다. " 쿠하하하하핫! 어떻게 된 거야, 도련님? 앙탈이라도 부려보시지! 흥이 떨 어지잖아! " " 그 요청은 기각하지. " 레비아탄은 그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며 냉정히 두번째 반지를 물 방 울로 변화시켰다. 그러자 물방울들은 그의 손가락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회전 하여 하나의 방패를 만들어냈다. 수압 쉴드였다. 그는 그것으로 스머그의 손 을 좌우로 털어내며 재빠르게 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앞의 수탄 난사 와 마찬가지로 스머그가 만들어낸 증기는 수압 쉴드의 물마저 증발시켰다. " 켓! 형편 없군! 형편 없어! 지루하다 못해 돌아가실 지경이다! " 레비아탄을 뒤따라 지상으로 내려온 스머그는 싸움이 장기전으로 돌입하려 하자 불평을 터뜨렸다. 일단 장소가 장소인 만큼 레비아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정된 양의 물로만 싸워야 했기에 최대의 방어에 최소의 공격 만을 펼 치고 있었다. 성격이 급한 스머그로서는 그런 레비아탄의 전법이 답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비아탄은 양쪽의 검지를 치켜 올리며 두개의 반지를 사용했다. " 그럼 재미있게 만들어주지! " 촤아아아악 검지의 반지들이 세차게 회전하며 하얀 수압 원반을 만들어냈다. 원반은 세 차게 회전하다가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스머그에게 날아들었다. 스 머그는 코웃음을 치며 원반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산성 증기를 끌어 모았다. " 켓! 도련 님도 의외로 머리가 나쁘군! 아니면 고집이 세신건가! " 어차피 네 녀석의 공격은 나에게 통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스머그의 판단은 섣부른 것이었다.원반은 증기에 닿기 직전 마 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기이하게 방향을 비틀어 스머그의 배후를 노렸던 것 이다.스머그는 당황하여 째빨리 뒤로 증기를 쌓아올렸지만 간신히 하나의 원 반을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츠컥! 날카롭게 스머그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가는 두번째 원반! 붕대가 찢겨져 나 가며 스머그의 오른 팔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스머그는 멍하니 그런 자 신의 팔을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인상을 일그러 뜨렸다. 그런 그에게 레비아탄은 미소지었다. " 재미있었나? " " ……켓. 그래. 꽤 느껴버렸어. " 잘려나간 팔로부터 짙은 노란색의 증기가 피어올라 잘려나간 팔과 연결되었 다.그러자 그 위로 붕대가 덩쿨처럼 휘감겨 오르며 금새 원 상태를 찾아간다. 스머그는 가슴 한 켠으로 느껴지는 서늘함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역시……. 유능하시구만, 도련님. 과연 최강의 화신다워……. "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 스머그는 고함을 내지르며 전신의 붕대를 개방시켰다. 그러자 가슴 아래의 몸이 노란빛 증기를 피워내며 스모그 처럼 퍼져나갔다. 지금껏 억눌러 왔던 육체 능력을 모조리 사용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레비아탄은 그런 스머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다가 양 손을 들어올렸다. " 좋아. 그럼 이건 어떤가? " 촤아아아악 레비아탄은 앞의 수압 원반들을 세 개 만들어내고 양 손으로 초고압 물줄 기들까지 뽑아냈다. 그 모습에 스머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입꼬리를 들어올 렸다. " ……땡기는데. " 촤라라라락 수압 원반들은 각자가 가늠할 수 없는 호선을 그리며 스머그에게 쇄도해왔 다. 스머그는 일단 전신으로 산성 증기를 끌어올려 완벽히 자신의 몸을 감쌌 지만 원반들은 영악하게도 곧바로 달려들지 않고 그 주위를 멤돌기만 했다. 레비아탄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스머그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 을 옮겼다. " 물은 말이야……. 양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 순간, 원반들은 선회하는 것을 멈추고,일제히 스머그를 향해 달려들었다.그 리고 회전이 멈춘 원반은 물로 변해 그를 뒤덮었다. 스머그는 당황하며 재빨 리 물들을 증발시키려고 했지만,압축되어있던 물들은 예상 외로 불어나서 막 기화하려던 산성 액체를 용질로 삼아 액화시켜버렸다. 그것을 레비아탄은 흔 들림 없는 눈동자로 주시했다. " ……강해지거든? " " 칵! " 잠시나마 산성 증기를 잃어버린 스머그는 재빨리 증기를 생성시키려고 노력 했다. 그러나 그 잠시가 승부를 결정지었다. 핏 날카로운 파육음. 레비아탄의 수압 채찍이 번개같이 스머그의 가슴 윗 부분 을 가르며 낸 소리였다. 레비아탄은 무감각하게 몇 번 더 채찍을 휘둘러 스 머그의 머리까지 수십조각으로 토막냈다. 푸화아아악 잘린 단면적에서 산성 액체와 증기를 내뿜으며 스머그의 시체가 볼품 없이 땅바닥을 굴렀다. 레비아탄은 증기와 충돌할 때 기화된 수압 채찍을 털어내 며 자신의 손에 남아있던 마지막 반지를 바라보았다. " 흠. 어디까지나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 레비아탄은 차갑게 웃으며 손가락에서 반지를 뽑아 스머그의 시체 위로 떨 어 뜨렸다. 떨어진 반지는 수십 리터의 물로 변해 그 몸을 적셨다. 산성 액체 의 기화 상태로 존재하던 스머그의 육신은 그대로 용액으로 변해 땅바닥에 흩어졌다. " 잠시만 그 상태로 기다려라. 금방이면 끝날테니까. " 요르문간드의 화신을 요르문간드의 화신이 죽일 수는 없다.그리고 죽여서도 곤란하다.레비아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단지 스머그를 무력화시킨 것 에서 만족했다. 그는 액화 상태로 변한 스머그에게 유감을 표하며 저편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네크로맨서를 돌아보았다. " 자, 승자는 결정됐다! 이 몸에게 쿠사나기의 머리를 넘겨라! " 레비아탄의 외침에 카이는 조용히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 ……아직 승리를 장담하기에는 이르신 것 같습니다만? " " ……? " 그 알 수 없는 말에 레비아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산성 증기들이 그의 주위를 물 샘틈 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노란빛의 장막 사이로 스머그의 음산한 목소 리가 울려퍼졌다. " 케케켓. 이를 어쩌시려나, 도련님? 기분 내신다고 가진 걸 전부 써버리셨 네? " " ……! " 레비아탄은 텅빈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이 놈! 설마 내가 비 축해둔 물을 모두 쓰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스머그는 천천히 증기 사이 로 얼굴을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 카카카캇! 빈털터리가 됐으면 몸으로 갚아야지! " 푸화아아아악 순간 레비아탄을 뒤덮던 증기가 모조리 산성 액체로 변하여 폭포처럼 그에 게로 떨어져 내렸다. 사방이 증기로 막혀있던 레비아탄은 꼼짝없이 그 액시 드 브레스를 덮어쓰는 수 밖에 없었다. " 크헉! " 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레비아탄은 피 한방울 조차 남기지 않으며 녹아버 렸다. 스머그는 그야말로 레비아탄을 죽이기로 작정했는지 손속을 두지 않고 그를 소멸시켰다. 쉬어버린 웃음 소리와 함께 스머그는 산성 증기를 모아 자 신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 카카카카캇! 꼴좋다! 뒈져버려, 비린내나는 자식! 언제나 깔보듯 남을 내 려다보더니 이제는 네 자신이 영원히 올려다보게 됐구나! 카카카캇! " 탁 그때 잠자코 싸움을 지켜보던 파프니르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스머그에게 다 가왔다. 아무래도 레비아탄이 완전히 소멸해버리자 당황하는 모양이었다.스 머그는 그런 그가 귀찮았는지 손을 내저으며 히죽 웃었다. " 뭐, 잘 됐잖아? 셋에서 둘로 줄어들었으니 나눠먹을 양도 더 많아지고. " " ……. " 그 말에 파프니르는 최초로 얼굴에 분노라는 감정을 떠올렸다. 스머그는 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 켓! 뭐야, 벙어리? 꼽냐? 꼬우면 너도 덤비라고! 가뿐하게 짓밟아줄테니까! " " ……. " 파프니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동안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 다. 어차피 싸워봤자 공멸 혹은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어딜 보나 요르문간드 에게는 손해만 보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파프니르가 물러나자 스머그는 득의양양해져 카이를 돌아보았다. " 켓! 어이, 꼬마! 봤겠지? 내가 계승자가 되는데 불만인 놈은 없어! 그러 니까 쿠사나기를 넘겨라! 어서! " " ……그것 알고 있나? " 그러나 스머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그의 뒤편에 있던 레비아탄이었다. 분명 소멸했어야할 그는 옷자락 하나 구겨지지 않은채 멀쩡하게 살아서 스머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머그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했다. " 뭐, 뭣! 이런 말도 안되는! " " 대기 중에 있는 물의 양은 얼마나 될까? 일단 구름 입자나 비를 제외한 대기 전체에 포함된 수증기의 평균량을 물로 환산하면, 두께가 약 26밀리 미터가 되지. " 레비아탄은 태연하게 웃으며 천천히 스머그에게로 걸어왔다. 스머그는 자신 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산성 증기를 생성시키려 했다. 하지만 레비아탄은 그 부질없는 저항을 비웃었다. " 즉, 지구의 표면은 2.6센티미터 깊이의 물로 덮여 있는 셈이라는 거야. " 촤아아아아악! 느린 중얼거림과는 대조적으로 대기 중의 수증기는 순식간에 스머그의 몸을 난도질했다. 스머그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도 자각하지 못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 케, 켓. 어, 어라? " 털썩 무릎을 꿇은 스머그의 육신이 연기처럼 사라지며 그를 거꾸러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미처 땅바닥에 얼굴이 부딪히기도 전에 그의 남은 육신은 얇게 썬 쇠 고기처럼 조각 조각났다. 레비아탄은 그렇게 다진 고기가 된 스머그를 내려 다보다가 가볍게 손짓했다.그러자 대기 중의 수증기가 액화되어 거대한 구슬 모양으로 스머그를 감쌌다. " 이러면 뒷통수를 칠 염려는 없겠지. " 그렇게 완벽히 스머그를 제압한 레비아탄은 자신의 앞 머리를 쓸어 올리며 카이를 돌아보았다.카이는 미처 레비아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에게 다가 와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를 건네주었다. " 축하드립니다, 레비아탄 님. 역시 요르문간드의 최강 화신답군요. " " ……흥.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아첨조차 되지 않는구나. " 카이는 레비아탄의 냉소에 쓴 웃음을 지었다. 정신체의 구현만으로 저 정도 의 물리력을 발휘하는데 만약 본체가 강림한다면 그 위력은 얼마나 될 것인 가. 카이는 진정 요르문간드야말로 괴물이라는 칭호에 걸맞다고 생각했다. 레비아탄은 상자 속에서 쿠사나기의 머리를 꺼내 들며 중얼거렸다. " 역시 하나의 몸에 여덟개의 정신이란 건 혼돈, 그 자체지. " 노아의 실험에는 감사한다. 만약 이렇게나마 서로를 분열시켜주지 않았더라 면 요르문간드는 결국 자살하거나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분열의 댓가로 우리는 스스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 해야했다.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 게 되었다. 레비아탄은 푸른 보름달을 향해 쿠사나기의 머리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 하지만 나, 레비아탄이 주 인격이 됨으로서 더 이상의 싸움은 없을 것이 다!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지배할 것이 기에! 내가 모두를 조율할 것이기에! 난 티아매트와 다르다! 그처럼 방관 하지 않겠어! 우리가 잃어버렸던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찾아보이겠다! 스스로를 사랑하게 만들겠어! 누구보다도 자부심이 있는! 누구도 우리를 무시할 수 없는! 요르문간드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보이겠어! " 브리트라도! 초류향도! 쿠사나기도!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 나, 레비아탄이 해내고 만다! " 그러자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나왔다. 레비아탄은 그야말로 환희에 찬 웃음 을 터뜨렸다. 달빛에 진 그의 그림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기쁨을 참지 못했다. 나는 승리자다! 나는 해내고 말았다! 드디어 얻고 말았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얻게 된 레비아탄의 재욕은 그에게 정신적인 포만감을 안겨주었다. 정념이 형태로 순화되는 순간, 정신적인 승화 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들어올린 쿠사나기의 머리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하나 흘러나왔다. " ……아니. 그건 너의 허울좋은 변명일 뿐이야. " " ……! " 순간, 번쩍 뜨이는 쿠사나기의 눈꺼풀. 그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짙은 붉은 빛의 홍채가 레비아탄을 쏘아보았다.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 나올 장면이었다. 하지만 쿠사나기는 더 이상 놀랄 틈도 주지 않으며 주저없이 레 비아탄의 목을 물어뜯었다. " 크아아아앗! " 레비아탄의 비명소리가 우뢰처럼 성당에 울려퍼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파프 니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카이를 돌아보았다. 그 그로테스크한 상황 속에 서 네크로맨서는 웃고 있었다. " 쿠쿠쿡. 하하하하! 멋져! 최고야! 저 기겁하는 표정이라니! " " ……너! " 파프니르가 드물게도 카이를 향해 소리쳤다. 카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 이런. 벙어리가 아니셨던가요, 파프니르 님? 놀랄 일이 또 있었군? " " 무슨…… 짓을……한 건가? " 파프니르는 말하는 것이 괴로운지 한자 한자 힘주어서 말했다.그가 입을 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나타났다 사라져 간다. 카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 다. " 보시는 데로 입니다. 쿠사나기가 레비아탄의 목을 물어뜯었군요? " " 크으으윽! 이 몸을 속이다니! 건방진 녀석! " 레비아탄은 쿠사나기의 머리가 불러들이는 먹구름에 전신이 휘감기며 분노 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그 말에 카이는 진정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속이다뇨?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전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쿠사 나기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그 말대로 입니다. 창 생의 술로 대신할 육체를 마련해준 거죠. " " 크크크큭! 그러니까 이제 나, 쿠사나기는 더 이상 요르문간드에 묶여있는 노예가 아니란 말이지. " 후우우우우웅 하늘의 먹구름이 지상으로 회오리쳐 모이며 쿠사나기와 레비아탄을 감쌌다. 그 회오리의 중심 속에서 레비아탄은 이를 갈며 쿠사나기를 노려보았다. " 그래서 기억 공유가 끊겼던 건가! 꽤나 잔머리를 쓰셨군! " " 아, 뭐. 너희들 보다 조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때마침 주인격이 되 어 있었고, 때마침 네크로맨서의 연락도 받을 수 있었고. 크크. 억울하다 면 내세에는 네가 주인격으로 태어나라고. 물론 우리에게 내세라는 게 있 다면 말이지. 크크크, 크하하하하핫! " " 이 놈! " 레비아탄은 급격히 대기중으로부터 수증기를 끌어모았다. 앞의 스머그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둘러싼 쿠사나기를 난도질해버릴 셈이었다. 더 이상 쿠사 나기와 접촉하고 있다간 되려 자신이 그에게로 흡수당할 판이다. " 소용없다니까. " 하지만 쿠사나기는 여유로웠다. 과연 그의 말대로 레비아탄의 공격은 쿠사 나기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안색이 흑색으로 변한 레비아탄에게 쿠사나기는 속삭였다. " 구름도 엄연히 작은 물방울들이 모인 거라고. 네가 아무리 발악해봤자 내 힘을 보태주는 것 밖에 되지 않아.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영락없는 형제 인 걸까? 응? " " 흐억! " 레비아탄은 자신의 몸이 분해되어 먹구름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원래의 상성대로 라면 오히려 이런 융합은 쿠사나기에게 불리했지만,그는 지 금 주인격인 상태였다. 정신 용량에서는 레비아탄이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 다. 레비아탄은 자신의 상성과 모든 것을 고려한 쿠사나기의 함정에 치를 떨 었다. ' 악마같은……. ' 스스로를 먹는다. 이것은 식인보다도 더한 패륜적인 행위였다. 주인격이 되 기 위한 것도 아니고,그렇다고 자신의 몸을 수복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그 저 먹을 뿐이었다. 레비아탄은 쿠사나기에게 먹혀들어가는 자신의 몸을 대책 없이 바라 보기만 해야 했다. " 크크크. 더 이상의 싸움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의외로 로맨티스트인데 도련님? 하지만 말이야……. " 쿠사나기는 뱀처럼 아랫턱을 늘어뜨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 애초에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가련 한 존재들이라고! " 콰직 그는 그대로 레비아탄의 머리를 자신의 입 안으로 삼켜버렸다. 그러자 뼈와 살이 씹히는 소리가 그 속에서 울려퍼졌다. 그 소름끼치는 장면에 숨어서 지 켜보던 라트와 유빈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으적 으적 으적 으적 침묵. 방금전까지 사투의 현장이었던 성당은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단지 쿠사나기가 허기를 채우는 소리만이 울려퍼질 뿐이었다. 푸른 달빛이 쿠사나 기와 레비아탄을 비추자 그들은 무대의 빛나는 주연으로, 카이와 다른 이들 은 어둠의 관객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차갑게 식은 등 뒤로 마치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다. 더욱이 마인드 브레 이커인 유빈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전황을 살피기 위해 화신들의 사념을 읽어들이던 그는 쿠사나기의 집념과 광기, 레비아탄의 생째로 씹어먹히는 고 통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정신 오염이었다.유빈은 감당하기 힘든 혐 오감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 으, 으으윽! 아,안돼! 그만둬! 으윽! 아아악! " " ……! " 라트는 다급히 유빈의 입을 틀어 막았지만 이미 비명은 새어나간 뒤였다.네 크로맨서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들켜버렸다! ' 빌어먹을! ' 라트는 발광하는 유빈을 옆구리에 낀채 서둘러 자리를 이탈했다. 네크로맨 서라면 모르겠지만 솔직히 요르문간드까지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둘이 동시 에 덤벼든다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쿠사나기는 레비아탄을 먹는데 여념이 없었고, 파프니 르는 패닉이라도 일으켰는지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더구나 네크로맨서, 그에 게서도 자신들을 쫓을 의욕이 보이지 않는다. ' 보내주겠다는 건가? ' 라트는 의문을 느꼈지만 마음을 놓치 않으며 재빨리 수인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다리가 은색 갈퀴로 뒤덮이며 테트러파드(Tetrapod)형의 역각으 로 변해갔다. 그는 무시무시한 각력으로 지붕을 박차며 유빈과 함께 어둠 속 으로 사라져 갔다. 그 뒷 모습을 바라보며 카이는 식사 중인 쿠사나기에게 물었다. " 이런. 놓쳐버렸는걸. 그냥 보내줘도 상관없겠지? " " 크크. 상관 없고 말고. 이제와서 이 사실을 알아봤자 한시영, 그 테라 인 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 " 그래도 네이 안데르슨의 귀에는 들어갈텐데. " 쿠사나기가 완벽히 레비아탄을 흡수하자 그의 흑발 사이로 옅은 금발이 자 라났다. 그리고 목 아래의 육신도 먹구름이 뭉쳐져 붉은 색의 히토에기누를 만들어냈다. " 녀석은 어차피 방관자야.내가 오라 능력자들과 결판내는 걸 바라면 바랐 지 방해하지는 않는다고. " 쿠사나기는 코웃음을 치며, 쓰러져 있던 스머그에게 자신의 먹구름을 뻗었 다.그러자 레비아탄에게 제압당했던 그는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흡수당했다. 쿠사나기는 자신의 몸 속에서 솟아나는 힘을 느끼며 두 눈을 붉게 물들였다. " 크크크큭. 좋아. 아주 좋아! 이거라면 해볼 만해! 이 힘이라면 녀석을 꺽 을 수 있어! " 그는 자신을 패배의 수렁텅이에 빠뜨렸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눈을 감고도 그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 해저터널에서 생사를 오가면서도 그에 대한 생각 을 멈추지 않았다. 복수. 아니 그런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녀석을 확실히 망가뜨려야 한다.압도 적인 힘 앞에 무릎 꿇게 만들어야 한다. 녀석에게도 나와 같은 절망을 심어 줘야 한다. 녀석이 피를 토하며 울부짖는 꼴을 봐야만 한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그것만이 쿠사나기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피스 그레이! 그는 이제 자신 의 삶이자 생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 쿠사나기의 욕망은 활동욕. ' 그렇기에 자신의 활동을 억제당하면 참을 수 없게 된다. 또한 부족한 활동 욕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저 비정상적인 승부욕 도, 피스 그레이에 대한 광적인 집착도 다 활동욕의 결여에서 파생된 또 다 른 욕망이었다. ' 그래. 더욱 증오하라고. 더욱 미쳐달라고. ' 카이는 자신이 부추긴 욕망의 화신을 향해 마음 속으로 환호했다. ' 그리고 오라의 주인을 죽여버려! ' 유가인! 그 건방진 테라 인을 말살하는 거다! 옴팔로스의 열쇠도! 가이아도! 노아도! 다 필요 없어! 내게서 리리스를 빼앗아가려는 놈은 그 누구라도! ' 죽여버린다! ' 카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의 분노를 네크로맨시된 육체가 받 아들이지 못하는지 심장이 터질 것 처럼 두근거렸다. 카이는 촉진 중추로 늘 어난 심박수를 억제중추로 조절하며 애써 마음을 비워냈다. ' 응? ' 그때 카이는 자신의 시야에서 파프니르가 사라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벙어 리처럼 말도 없는 화신이다 보니 그 존재감이 워낙에 희미해서 감빡 잊고 있 었던 것이다. ' 이런 말도 안되는 실수를! 여기서 그를 놓쳐버렸다간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 " 쿠사나기! 파프니르가 도망쳤다! " 카이는 다급히 쿠사나기에게 소리쳤다.하지만 쿠사나기는 여유롭게 스머그 의 힘을 자신과 융합시키며 대답했다. " 훗. 이봐, 네크로맨서. 도망쳤다는 건 말이야. 상대방을 잡지 못하는 녀 석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 딱 가볍게 튕겨지는 손가락. 쿠사나기는 단지 손가락을 튕겼을 뿐이건만 카이 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격통을 느꼈다. 대기의 진동수가 급격하게 상승했다가 하강하는 느낌. 이것은 그가 차원을 도약할 때 통각(痛覺)으로 느꼈던 불쾌 감각과 비슷한 아픔이었다. " 무슨……짓을 한 거냐? " " 파프니르에게 금제(禁制)를 가했다.녀석은 앞으로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지정된 구역, 한국의 가이아에서 벗어나지 못해. 크, 크크크큭. 대단하 지 않아? 레비아탄과 파프니르를 흡수한 주 인격의 힘은 이런 일도 가능 하게 한다고! 티아마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통제력이야! 크하하하핫! " 쿠사나기는 새로운 자신의 힘에 감탄하며 미친듯이 웃어제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는 가슴 한켠이 싸늘해졌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후회했다.혹시 자신은 터무니 없는 괴물을 방치시킨 게 아닐까…… 하는. " 그래! 서두를 필요는 없지! 즐기면서 하자고! " 쿠사나기의 머리 사이로 이번에는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돋아났다. 그것은 스머그의 힘을 완전히 흡수했다는 증거였다. 화신의 머리카락은 용염(龍髥) 이라 하여 그들이 가진 힘을 상징한다. 흑(黑)은 쿠사나기를, 황(黃)은 레비 아탄을, 적(赤)은 스머그를. 청(靑)은 아쉽게도 초류향이 소멸했기에 얻을 수 없었지만 도망친 파프니르를 흡수한다면 백(白)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쿠사나기는 혀로 붉은 입술을 적시며 미소지었다. " 그럼 이제부터 용 사냥을 시작해볼까! ' " 아……. " 가인은 망연자실하게 떨어진 신발을 내려다 보았다.지금 그가 있는 곳은 한 성 고교의 신발장. 막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려던 그는 사소한 시비에 휘말리고 말았다. " 아,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 " 가인과 부딪혔던 남학생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투덜거렸다. 가인의 발 밑에 떨어져 있던 신발은 그의 것이었다. 막 신발장을 돌아나오던 참에 멍하 니 있던 가인과 부딪히고 만 것이다. ' ……정말 되는 일이 없군. ' 가인은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하며 재빨리 떨어진 신발을 줏어 들었다.도대 체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 건지……. 평소라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 척을 놓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오감이 둔해져 있었다. 아니. 오감이 둔해진 건 아니다. 둔해진 건 자신의 정신이었다.묘하게 넋이 빠져 있다고 해야 하나 긴장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하루 내내 딴 생각이나 하고 있고, 덕분에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가인은 학생에게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다. " 미안. 내 실수……. " " 하. 피스메이커는 이렇게 사람을 마구 쳐도 되는 건가. " 순간, 남학생의 말에 가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제 보니 그는 가인과 같은 2학년 1반의 학생이었다. 뒤로도 몇몇 클래스메이트들의 얼굴도 보였다. 학생은 빼앗듯이 가인의 손에서 신발을 낚아 채며 자신의 친구들에게로 돌 아갔다. " 야, 저것 봐라. 잠깐 부딪힌 거 가지고 사람을 죽일 것 처럼 노려보는데? " " 냅둬. 괜히 기분 건드리지마.매일 몬스터나 상대하는 녀석인데 우리가 얼 마나 우습게 보이겠냐. 마음 내키지 않으면 다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고. " " 나,참. 무서워서 살겠나. 쳇. " 학생들의 속삭임에 가인은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어처구니가 없어 서 화도 나지 않았다. 이건 뭐 노골적인 괴물 취급이지 않는가. 가인의 정체를 안 2학년 1반의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태도를 취했 는데, 그 첫번째가 그를 없는 사람인양 무시하는 것이었고 그 두 번째가 지 금과 같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인이 가진 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그들이지만, 이내 그가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되려 분풀이를 해오기 시작 한 것이다. 물론 팔라딘 대에 의해 통제되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화를 내는 것도 당연 하다. 그들의 사정을 가인도 이해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인간적으로 힘이 빠졌다. 분명 친구들의 기억을 지워버리지 말 라고 한 건 자신이었지만…… 그렇기에 이런 일이 생겨도 그는 어느 누구에 게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다.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시 학교에 나온 걸까? 나는 그대로 안 나올 줄 알았는데. " " 그러게. 피스메이커라면 좀 더 바빠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한가하게 학교 나올 틈이 있으려나. " " 솔직히 고등학교도 다닐 필요 없지.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으니까 대우도 좋을 테고…… 아마 생명 수당까지 합하면 수입이 천문학적인 액수일 걸. 장래가 보장되는 직업이라고. " " 햐. 부럽구만. 그러면서 학교는 왜 계속 나오는 거람.반겨주는 사람이 누 가 있다고. " 친구들의 속삭임이 계속될 수록 가인의 고개는 점점 떨어졌다.화를 낼 기분 도 들지 않았다. 단지 무력감만 느낄 뿐이었다. '결국 너와 난 다를 게 없어! 저들의 눈에는 똑같은 괴물로 비춰질 뿐이다!' 왜 이렇게 서글픈 기분이 드는 걸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 걸까. 나도 내 자신이 저들과 틀리다고, 그렇게 무의식 중에 생각하고 있었 던 걸까. 카이가 했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자꾸만 그의 말이 진실 이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 그렇게 괴물 취급 받으면서 화도 나지 않아? 회의감은 들지 않아? 이후로 도 넌 변함 없이 저들을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어? ' 가인은 카이의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답하길 회피했다. 그 것은 일단 자신이 괴물이라는 걸, 저들과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인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휙 그때 신발장의 위에서부터 한 검은 인영이 번개같이 가인과 학생들의 사이 로 뛰어내렸다.인영으로부터 흘러나온 긴 회색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춤을 추 듯 나풀거리며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학생들은 당황하여 뒷걸음질 쳤다. 누, 누구지? " ……브루스? " 뒤늦게 괴인의 정체를 알아본 가인이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소리쳤다. 난 데없이 등장한 괴인. 그는 다름 아닌 가인의 동거인이자 그와 같은 피스메이 커, 브루스 류였다. 브루스는 땅에 끌리는 자신의 땋은 머리를 가볍게 목에 둘러 메며 학생들을 돌아 보았다. 학생들은 아직도 그의 등장에 얼떨떨한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파파팍 그때 브루스가 번개같이 학생들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찍어 눌렀다.학생들은 화들짝 놀라 자신들의 이마를 감싸며 소리쳤다. " 으앗! 뭐야? " " 무슨 짓이야! " 그런 그들에게 브루스는 싸늘하게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 너희들은 지금 나에게 비공이 찔렸다. 그토록 경고했건만 감히 피스메이 커에 대한 사항을 발설하다니.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앞으로 피 스메이커의 피자라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내가 찌른 비공은 네놈들의 뇌 세포를 파괴할 것이다. 누워서 대소변을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 입 을 놀려보도록. " " 거, 거짓말! " 학생들은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비공을 찔렀다느니, 뇌세포를 파괴 시킨 다느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브루스는 비공을 찌른 자신의 손을 들어보였다.유달리도 하얀 그 손 은 왠지 모를 요사함까지 띄고 있었다. " 거짓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고 싶다는 거냐? " " 히익! " " 괴, 괴물! " 그 으름짱에 학생들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정체를 알 수 없는 중국인인데 다가 평소의 기이한 행동, 가인과 더불어 피스메이커라는 점 등이 학생들의 공포를 부추겼던 것이다. 브루스는 도망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 흥. 어이가 없군. 이런 허황된 말을 믿어버리다니. " 그 정도로 그들의 마음이 흉흉해졌다는 증거였다. 아마 저들이 가인을 괴롭 혔던 것도 다 마음 속의 불안함을 달랠 길이 없어서 인지도 모른다. 그 만큼 몬스터란, 피스메이커란, 미지의 존재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브루스는 침울해져 있는 가인을 돌아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 뭘, 그렇게 의기소침해져 있는 거냐? 저런 철 없는 것들의 말을 곧이 곧 대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겠지? " " 아, 아뇨……. " 가인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그 모습에 브루스는 낮게 한 숨을 쉬었다. " 힘을 가진 이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 경계하는 거지. 그건 일 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자면 직장 내에서 능력이 좋은 사람은 다른 이들의 경외를 받으면서 동시에 시기와 질투도 받게 되지 않나. " " 그렇죠. " " 그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어. 뭐,네 녀석과 같은 경우에는 그 능력이란 게 좀 더 눈에 보이는, 인간의 폭력성을 자극시키는 부분이라서 정도가 심할지는 모르겠지만……. 속편하게 생각하도록. 그냥 네가 공부를 잘해 서 저들이 부러워하는 거라 생각해. " " 하하하. 뭐에요. 그 비유는? " 가인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브루스도 자신이 조악한 비유를 했다는 걸 깨 달았는지 인상을 구겼다.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쳇. 어울리지 않는 위로를 하려니까 말이 다 헛 나오는군……. 가인은 그런 브루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고마워요, 브루스. 걱정해줘서. " " ……흥. 누가 너 같은 놈을 걱정했다는 거냐? " 브루스는 가당치도 않다는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뺨이 상기된 것처럼 보였던 것은 가인의 착각이었을까? 브루스는 팔짱을 끼며 나 지막이 말을 이었다. " 인간의 한 단면만 보고 실망하지 말아라. 지킨다는 건 그 실망감마저도 포용해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 그는 턱으로 가인의 뒷편을 가리켰다. " 너무 저 녀석들에게 걱정을 끼치지는 말도록. " " 예? " 가인은 브루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막 유리와 테레이 아, 재영이 그를 발견하고선 뛰어오고 있었다. 서둘러 다가온 유리는 행여나 가인을 놓칠 새라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 오빠, 왜 그렇게 먼저 가버린 거야? 같이 가지 않고……. " 유리는 서운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을 마주하자 가인은 가 슴 한 구석이 아파왔다.사실 그는 일부러 모두를 피해 혼자서 귀가하려고 했 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자신이 싫었기 때문이다. 사실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사실 자신들과 내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바보같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했다. 그들은 예전과 변 함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모습마저 의심하게 된다. 가인은 그런 자신이 싫었다. " 최근 들어 이상해, 가인. 잠깐만 눈을 떼면 사라져 버리고. " 테레이아가 가인의 팔짱을 끼면서 칭얼거렸다.여느때 처럼 장난스러운 태도 였지만 가인을 바라보는 그 눈빛 속에서 그녀가 정말로 서운해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재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래. 정말 뭔가 이상하다고. 마치 바람 난 사람처럼……. " 퍽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테레이아와 유리의 이문정주 합격에 배를 부여잡고 땅바닥을 뒹굴어야만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우리 오랜만에 노래방이나 갈까? " " ……? " 갑자기 웬 노래방? 테레이아와 유리, 재영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 보았다. 그러자 가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적게 말했다. " 그, 괜스레 걱정을 끼친 거 같아서……. 대신 노래방 비는 내가 낼테니까. " 그제야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재영은 대번에 가인이 어깨에 손을 두 르며 소리쳤다. " 오오! 좋은 선택이다!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데에는 소리지르는 것 만큼 좋은 것도 없지! 우리 같이 잡혀사는 남자들의 설움을 한껏 풀어보자고! " 퍽 이번에도 강한 타격음과 함께 재영은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대신 앞의 상황 과 다른 점은 어느 샌가 나타난 유시내와 성마리까지 유리와 테레이아의 공 격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시내는 쓰러진 재영에게 쪼그려 앉으며 방긋 웃어보였다. " 잡혀사는 남자의 설움이 어떻다고, 재영 군? " " 아, 아니……. 그게 저, 이건 남자라면 한 번 씩 겪어하는 번뇌의 충돌이 라고나 할까……. 그, 그래. 과도기인 거지. 우리에 갇혀 있는 짐승이 한 번 씩 산책을 해야하는 것처럼……. " 우득 매를 벌어라, 인간아. 시내는 가차 없이 재영의 팔을 역십자로 꺽어버렸고, 재영의 처절한 비명이 그 뒤를 따랐다. 가인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훈훈한 미소를 머금었다. ' 잃고 싶지 않아. ' 유리를, 테레이아를, 재영이를, 마리 선배를, 브루스를. 이 즐거운 순간을 잃고 싶지 않아. 이들과 언제나 함께 있고 싶어. ' 하지만……. ' 오라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자신은 그들에게서 멀어진다는 느낌 을 받게 되었다.더 이상 그들과 같은 범주 속에 포함되지 못하게 된다. 그들 과 달라져 버린다. ' 괴물이……되어버려……. ' 가인은 두려웠다. 문득 시민이 예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는데 어째서……. ' 가인 씨는 그 힘에 잠식당하고 말 거에요! ' 참을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든다. 마음 한 구석에서 차갑게 머물러 있던 두려 움.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히 정제되어 가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 만 꾸준하게 그 몸을 키워나간다. 언젠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그것에게 자신은 먹혀버릴 것이다. 힘을 쓰면 쓸 수록, 오라 능력을 사용하면 할 수록…… 나는 모두에게서 멀 어져 버린다. ' 싫어. 그런 건……. ' 시끌벅적한 일행 속에서 가인은 자신의 고민을 마음 깊은 곳에 가두고 웃었 다. 웃고 즐겼다. 그럴려고 노력했다. 여느 때와 같이 태연한 척. 아무렇지 도 않은 척. 그렇게 자신을 숨겼다. " ……. " 그리고 그런 가인을 브루스 만이 근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 이대로는 안돼. "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에서 신체 검사를 받고 있던 브루스는 나지막이 중얼 거렸다. 그는 지금 오라 수치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하여 맨 몸으로 검사에 임하고 있었다. 계측기가 달린 그의 몸은 지금껏 몬스터를 상대해온 게 거 짓말인 것처럼 여리고 가늘었다. " 애송이가 자신의 힘을 경계하기 시작했어. 이 상태로는 성육신의 단계에 접어들더라도 육신의 죄를 정화하지 못해. 각성은 무리다. " " ……하는 수 없죠. 그 모든 일을 견뎌내기엔 가인 군이 아직 어려요. 지 금 처럼 참고 있는 것만 해도 대견하지 않습니까. " 유리관 밖에서 계측기의 정보를 기록하던 닥터가 가볍게 대꾸했다. 브루스 는 풀려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한탄했다. 검사실의 형광등 탓인지 그의 회색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유독 하얗게 보였다. " 마음에 안들어,한심한 놈. 겨우 그런 꼬마의 궤변에 흔들리기나 하고. " " 네크로맨서 말씀이십니까? " " 그래. 어차피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삶의 주체는 바로 자기 자신이 다. 세상에는 수 많은 신념들이 있고,그 중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 해서는 반드시 타인의 신념과 부딪혀야 한다. 지킨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 야. 지킨다는 것은 상대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 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위다. 이타적인 행위가 아니란 말이지. 자신이 지 키겠다고 결심한 거다.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거기에 무슨 회의감을 느끼고 자시고 할 게 있단 말인가. " 확고한 브루스의 말에 닥터는 쓴 웃음을 지었다. " 그 말을 가인 군에게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이렇게 답답해 하실 거라면……. " " 아니. 어차피 이건 녀석이 스스로 깨닫고 납득해야할 문제다. 내가 아무 리 옆에서 얘기해봤자 애송이에게는 뜬 구름 잡는 소리 밖에 되지 않아. 노인의 충고는 젊은이에게 잔소리로 들리는 법이지. " " 브루스 님은……가인 군을 정말 걱정하고 계시는 군요. " " 흥. 슬슬 쓸데 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검사가 끝난 모양이군. " 과연 그의 말대로 패턴 그레이의 수치 측정은 종료되어 있었다.브루스는 한 켠에 벗어둔 자신의 권복을 걸쳐 입으며 뒷머리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러 자 그의 회색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재빨리 서로의 몸을 땋아내렸다. 인계에 저장시켜둔 자신의 육체 기록을 불러들이는 것이었다.이 기록은 그가 삼계로 떨어질 때 다시 인계로 돌아오기 위한 하나의 피드백(fe edback)으로서 사실 의복을 벗고 입는 행위조차 이 피드백을 수동적으로 행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브루스가 의복을 갖춰입고 유리관 밖으로 나오자 닥터는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 뭐, 가인 군을 걱정하시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은 브루스 님의 몸을 더 걱 정하시는게 좋겠습니다. " " ……안 좋은가? " " 예. 그것도 상당히. " 닥터는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 담담하게 스 크린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그의 오라 수치와 그 외의 신체 수치들이 그래 프로 분석되어 있었다. 분명 저번 달보다 모든 면에서 수치들이 떨어져 있었다. " 육체의 노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포 내의 DNA분자 절단이 증가하고 있 고 DNA분자 장애의 회복 능력도 감퇴하고 있어요. 지금이야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지만……조만간 본격적으로 시작될 겁니다. " " ……. " " 역시……저번의 그 일이 원인인 거겠죠? " 닥터의 질문에 브루스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의 그 일이란 182구 역의 태풍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브루스는 해저 터널에 고립된 피스 대원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봉인된 힘을 사용하고 말았다. ' 칠성권 제 1의 발경 탐랑. ' 그가 가진 극대소멸권(極大掃滅拳). 탐랑은 삼차원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아 포칼립스 제너레이터(Apocalypse Generator)인 만큼 막대한 생명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브루스는 역천(逆天)의 대가로 자신의 무한에 가까운 삶을 단 축시킨 것이다. 선인의 경지에 접어들면서 노화가 멈춘 그라도 이 탐랑 만큼은 시전자에게 도 똑같은 아포칼립스가 일어나기에 그 혼돈을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인계와 단절하고 삼계 사이에서 몸의 정기를 보충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랑으로 소비된 정기는 턱없이 모자랐다. 선기 로 정기를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노화가 된 부분은 되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브루스의 머리카락에서 색소가 침착(沈着)된 게 그 증거였다. 그렇게 그는 2020년 이후로 다시 한번 나이를 먹고 말았다. '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 다음 번 탐랑을 쓸 때가 마지막이다.그때가 인계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 전에 만날 수 있을까? 그 전에 천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 니. 그것보다도……. ' 그때까지 오라의 주인이 각성할 수 있을까? ' 그것이 가장 큰 대 명제였다.그의 각성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고픈 생각은 없었지만 상황은 숨막히게 돌아가고 있었다.자의든 타의든 조만간 오라의 주 인은 각성하게 된다. 반드시. 브루스는 아무 것도 모르는 가인을 떠올리며 낮게 탄식했다.그가 예정된 미 래 속에서 괴로워할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디 그 순간, 그 가 예정된 운명의 시험을 당하는 순간, 그저 자신이 그의 곁에 있을 수 있기 만을 바랄 뿐이었다. "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 그때 닥터의 목소리가 브루스의 상념을 일깨웠다. 브루스는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 ……큰일이라니? " " 이런 때에 남은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이 총 공세를 펼친다면 우리로선 대 책이 없지 않습니까. 가인 군이 각성하지 않는 한 머신 아더는 무용지물 일 뿐이고, 브루스 님의 극대소멸권도 당분간 사용할 수 없으니. " " ……! " 브루스는 두 눈을 부릅 떴다. 닥터가 의외의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하 지만 그는 놀람을 표하지 않으며 태연하게 닥터의 말을 받았다. " 그렇군. 거인은 움직일 수 없겠어. " " 예. 브리트라 때처럼 요르문간드의 본체가 구현이라도 되는 날에는 잘못 하다간 제 2차 대재해가 일어납니다. 아마 이번에는 도시 하나로 끝나지 않겠죠. 그 전에 가인 군이 각성을 해주면 좋겠지만……. "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닥터를 브루스는 조용한 눈으로 응시했다. 분명 닥 터는 대재해와 관련된 인물이 아니다. 그런 그가 어째서 극대소멸권의 존재 와 브리트라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 브루스는 그의 속내를 떠볼 셈으로 말을 꺼냈다. " 브리트라 때는 운이 좋았어. 적어도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은 살아남았으니 까. " " ……예? 세 명이라니? 여섯 명 아니었습니까? " 걸렸다. 브루스는 이 질문 하나로 닥터가 알고 있는 정보의 내용과 그 한계를 파악 해냈다. 닥터의 코리 안겔리(Chori angeli)는 중급 버추즈(Virtues)의 바르 비엘(Barbiel). 그에게 허용된 정보를 볼 때 여기서는 세 명이라고 답해야만 했다. 피스 블랙 한시영.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피스 카민 마유빈. 그 이상을 알고 있다면 그는 분명 다른 루트로 정보를 입수했다는 말이 된 다. 하지만 닥터가 말한 여섯도 정답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가진 정 보의 한계를 말해주고 있었다. " 아……. " 그제야 닥터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브루스가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자 이내 한숨을 쉬며 솔 직하게 얘기했다. "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조사했었습니다. " " 무슨 이유로? " 차가운 브루스의 질문에 닥터는 애써 침착히 말을 이었다. " 제가 여기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로 근무한지도 어느덧 5년입니다. 그 기 간 동안 제게 허용된 정보가 터무니 없이 작았기 때문입니다. 피스 관계 자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이상, 신상 명세를 작성하다 보니 이것 저 것 모르던 사항들을 알게 되더군요. 뭐, 그러던 것이 어느덧 취미가 되 어버려서……. " 닥터는 브루스의 눈초리가 무안해선지 연신 그 답지 않게 식은 땀을 흘렸 다. 그 모습에서 거짓은 보이지 않았기에 브루스는 천천히 경계심을 거뒀다. " 대재해에 관해서는 얼마만큼 알고 있지? " " 아, 예. 대재해를 일으킨 게 요르문간드의 화신 브리트라라는 것과,본체 로 구현된 그를 브루스님이 극대소멸권으로 소멸시켰다는 것. 그리고 그 때의 생존자가 배신자 한시영과 마인드 브레이커 마유빈,그리고 진 사령 관님과 수정 양, 시더 양이라는 정도……. " " 호오. 그래서 생존자를 여섯이라고 한 건가? " " 예.시더 양과 같은 경우는 그녀의 정신 분석 자료에 대재해 때의 생존자 기록이 남아 있더군요. 그리고 진 사령관 님과 수정 양은……뭐, 그때의 일로 지금의 한국 지부를 맡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어서. " " 소문? " " ……5년간 그분들을 대하다 보니 꽤 여러가지 얘기들을 들을 수 있더군요. " 브루스의 취조 아닌 취조에 닥터는 긴장하면서도 성심성의껏 답했다.솔직 히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라면 이 정도 조사 쯤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에게 맡겨진 책임과 의무만 해도 준 사령관 급에 달하는데 주어진 정보 는 소량으로 제한되어 있으니, 그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는가. 닥터가 권위 를 내세우지 않는 인격자였기에 망정이지 어지간한 국회의원이었다면 진 즉에 두 팔 걷어부치고 일어났을 것이다. 브루스는 헛기침을 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 흠. 내가 좀 예민했군. 요즘 꽤 뒤숭숭한 일들이 겹치다 보니. " " 아닙니다. 제가 주제 넘게 굴었을 뿐이죠. 아,그런데……궁금한 게 한 가 지 있습니다. " 닥터는 안경을 쓸어올리며 차분한 어조로 브루스에게 물었다. " 시더 양의 조모(祖母) 노엘 웰리스 님 말입니다. 그 분의 행방을 혹 아십 니까? 대재해 때의 LA 사망자 기록에서 그 분의 성함을 찾아볼 수 없던 데. 앞에 생존자 수가 여섯이 아닌 건 그 때문 아닌가요? " " ……. " 브루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그는 닥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입 을 열었다. " 나이에 걸맞지 않게 호기심이 많군? " " 호기심을 업으로 삼는 학자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군요. " 닥터는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으며 미소까지 짓는 여유를 보였다. 브루스는 웃음을 거두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지. 적당히 자제할 줄 아는 법도 배워두는 게 좋을 거야. " " 하하. 충고 감사드립니다. " 닥터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대로 찬 바람이 나게 검 사실을 나가버렸다. 닥터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안경을 쓸어 올렸다. " 노인의 충고는 젊은이에게 잔소리로 들린다……라. "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브루스가 했던 말을 되씹었다. 깨어났을 때 그녀가 처음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하얀 병실의 커튼이었다. 깨어났을 때 그녀가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머리가 타버릴 것 처럼 아픈, 눈 조차 멀어버릴 것 같은 고열이었다. 깨어났을 때 그녀가 처음으로 볼 수 있었던 사람은, ' 할아버지는……누구……? ' ' ……그랜파(Grandfa)라고 부르거라. 오늘부터 내가 네 할아버지란다. ' 기억 속에는 없던 그녀의 할아버지였다. ' 이, 이런 일이……. ' 코리 안겔리 상급 케루빔(Cherubim)의 일원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완벽히 디 멘션 트랜스퍼 이론과 초대칭 입자 와프(Waff)의 존재를 설명해낸 여덟 살 소녀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들의 시선에 불안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 ' ' 믿을 수 없어. 난 납득 못해! 지금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제대로 배 우지도 못한 아이가 스스로 이런 지식을 깨우쳤다고! ' ' 그 지능 지수라는 것도 의심스럽군! 요피엘(Jophiel) 의장, 그 210이라 는 수치는 무슨 근거로 나온 것인가? 혹 유전자 조작을 가한 실험체를 데 리고 와서는 오파니엘(Ophaniel)의 손녀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 회의장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그만큼 수 많은 과학자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들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케루빔의 요피엘, 제이스컬 드리스덴은 차분한 표정을 일관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오파니엘, 노엘 웰리스의 친우로서 소 문이 자자했는데 그런 그가 난데 없이 노엘의 손녀라면서 지금의 소녀를 데 려온 것이다. 소녀는 놀라웠다. 그들, 케루빔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확실히 이해하 고 있었다. 물론 요피엘이 손수 삼년 동안 그녀를 보살펴왔으니 뭔가 가르침 이 없었던 건 아니겠지만, 차원 이동은 하루 아침에 깨우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가 케루빔의 일원도 아닌 외부 소녀에게 자신들의 지식을 가르쳤 다는 건 커다란 중죄에 해당했다. 정보를 외부로 유출시킨 자의 말로는 기 억을 조작 당해 유폐되는 것이다. 그것은 케루빔들 사이에서는 추방(banishm ent)이라고 불리우는, 차라리 자살을 택하게 만드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하지만 제이스컬은 추방이 두렵지도 않은지 너무나도 태연스러웠다.그는 두 려움에 몸을 떠는 소녀를 달래며 말했다. ' 시더야, 이 사람들에게 오리하르콘의 제련 공식을 설명해주거라. ' ' ……예에. ' 소녀, 시더는 사전에 제이스컬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설 명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 자리의 모두를 납득시키지 않으면 자신을 거둬준 제이스컬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느낄 수 있었다. 시더는 최대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 오리하르콘은 자기수복 기능을 가진 살아있는 금속입니다. 거기다 높은 정신 감응력을 가져서 사용자의 정신을 물리적으로 구현화시키는 이미지 메이킹이 가능하죠. 하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특성은 바로 높은 온도에서 초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고온초전도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오리하 르콘을 제련하려면 특정한 화학 공식을 만족시켜줘야 합니다. 이 화학 공 식이 오리하르콘의 주기적인 흐름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이 자리의 모든 분들도 알고 계시죠? ' ' 으,으음……. ' 케루빔의 과학자들은 신음했다. 그리고 소녀가 오리하르콘의 암호 형 제련 공식을 열 개가 넘는 보드에 걸쳐 완성해내는 것을 보고 마침내 인정해야만 했다. 이 아이는 노엘의 혈육이라는 것을. 아니, 혈육은 아닐지라도 그녀의 연구를 물려받은 것만은 분명했다. 거기다 여덟살의 나이에 이 모든 것을 이해하다니! 천재라는 말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에게 주어져야할 호칭이었다. 하지만 시더는 그 선망과 시기심에 불타는 시선들을 대하면서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자신이 이런 공식을 설명해낸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단지 알 수 있었을 뿐이다.제이스컬이 건네주는 어려운 용어의 논문들을 읽는 것만으 로도,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이론들을 흘려듣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정답을 알고 컨닝을 하는 학생의 기분이었다. 제이스컬은 그런 시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모두에게 말했다. ' 그럼 이 아이를 케루빔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는 없겠지? ' ' ……. ' 물론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케루빔의 일원이 된 시더는 한동안 그들이 운영하는 영재 교육기관 EOE(Ea st of Eden)의 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말이 학생이지, 그녀는 매일 EOE의 교 수들에게 불려나가 자신이 가진 지식들을 검토 당해야만 했다. 확인 작업이었다. 그녀의 효용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당연히 시더에게 그런 학교 생활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 저 아이, 대재해 때의 생존자라지? ' ' 노엘 웰리스의 손녀래.아마 여기의 교수님들도 저 아이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걸? ' ' 하지만 지능지수 210이라니. DNA조작으로 나온 돌연변이가 아닐까? 거기 다 그만한 지능이라면 지적 능력이나 감성도 변해야 하는 거라고.저 아이, 매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애니메이션만 본다며? ' ' 하여간 이상해. 정상이 아냐. ' 친구도 없었다.교수도 학생들도 모두 그녀를 기분 나쁜 존재로 취급했다.자 신들이 평생에 걸쳐 깨우쳐야할 것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알고 있는 그녀가 그들의 눈에 좋게 비칠 리가 없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 도로 그녀가 미웠을 것이다. 그래서 시더는 언제나 마음에 무거운 짐을 안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만 했 다.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고, 그랬기에 언제나 방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기 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요피엘을 후견인으로 두었다는 사실 이었다. 케루빔 내에서 의장, 제이스컬 드리스덴을 적으로 두려는 어리석은 이들은 없었으니까. ' 흑, 그랜마아……. ' 하지만 가끔가다가 이 모든 현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질 때가 있 었다. 그럴 때면 시더는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에서 서럽게 할머니를 찾으며 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억나지 않는다.어느날 문득 주위에 눈을 돌렸을 때 할 머니 만이 곁에 있었을 뿐이다. 시더는 외로움보다도 견디기 힘든 그리움에 하염없이 울었다. 아무리 세계 를 움직일 수 있는 지식을 가졌더라도, 그 당시의 그녀는 열살도 채 되지 않 은 어린애였다. 누군가에게 떼를 쓰며 할머니를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어린애. ' 시더야, 할머니가 보고 싶니? '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손길이 있었다. 케루빔의 의장 요피엘. 시더의 후견인이자 노엘의 친우 제이스컬 드리스덴 이었다. 그는 자신을 그랜파라고 자칭했던 것처럼 정성스레 시더를 보살펴 주었다. ' 흑, 그랜파아, 그랜마 어디갔어? 응? 응? ' ' 으음……. 그건 말이지. 할머니는 항상 시더를 지켜주려고 무겁던 육체의 껍질을 벗고 진정한 수호령으로 거듭났단다. 에,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엘리멘탈라이제이션(Elementalization;정령화)? 염체(念體)? ' ' ……OOBE? ' ' 아! 그래! 유체이탈 현상! 그랜마는 에테르 체가 된 거야! ' ' 우웅. 안돼요, 그랜파. 근거는 감정적으로 말해서는 안돼.근거가 없는 이 론은 원숭이라도 말할 수 있으니까. ' ' 아, 미안. ' 제이스컬은 케루빔의 모두가 귀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철혈 의장이었지만,시 더 에게만큼은 인자한 할아버지였다.어쩌면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그에게 있 어서 시더는 느즈막에 얻은 자식이었는지도 모른다. ' 하지만 시더야. 이 할아버지의 말은 거짓이 아니야. 비록 지금은 서로를 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지만…… 할머니는 항상 곁에서 시더를 지켜주 고 있어요. ' ' 에에, 정말? ' ' 응. 이것만큼은 만유인력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단다. ' 시더는 그렇게 제이스컬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조금씩 슬픔을 잊어나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에 대해 모르고 있던 사실들 도 하나 하나 알 수 있었다. ' 그랜파, 그랜파는 그랜마를 사랑하지? ' ' 풉! '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당황해 하던 그의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제이스컬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얼굴을 붉혔다. ' 어,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냐? ' ' 애들이 그러는데…… 그랜파는 내 친 할아버지가 아니래. ' ' ……! ' ' 그런데도 친구의 손녀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렇게까지 나에게 잘해주잖 아. 그랜파가 그랜마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날 이렇게 보살펴 줄 리가 없지. ' ' 아무런 상관이 없다니……. ' 제이스컬은 어이가 없다는듯 혀를 차다가 시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시 더는 그 커다란 손의 감촉을 즐기면서도 불안한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 그래. 이 할애비는 네 할머니를 사랑했단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 를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시더도 사랑하거든? 그러니까 친구의 손녀라느 니, 친 할아버지가 아니라느니 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단다. 아니면 시더가 신경쓰이는 건가? 내가 친 할아버지가 아니라서 싫은 거니? ' ' 으으으응! 전혀! ' 시더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제이스컬은 그런 손녀의 모습에 껄껄 웃으면 서도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 허허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단다. 시더가 친 할아버지와 사는 걸 원한다 면 언제든지 돌려 보내줄테니까. ' ' 으앙! 싫어! 난 그랜파와 사는 게 더 좋아! 절대로 안 갈 거야! 절대로! ' ' 흐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그렇게 나와 떨어지길 싫어한다면 앞으로 도 계속 데리고 살아주는 수 밖에. ' ' 응! 앞으로도 쭈우욱! 계속 데리고 살아줘! ' 정말로 그를 좋아했었다. 제이스컬. 그가 있었기에 시더는 각박한 현실로부 터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리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미움을 받더라 도, 아무리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그녀는 있는 힘껏 이겨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시더는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 시더야, 우주에 가보는 건 어떠냐? ' ' 예? ' 그리고 시더가 열 세살이 되던 어느 날. 제이스컬은 그녀에게 우주개발 본 부의 팀원으로 현장에 가보기를 권했다. 시더는 어느덧 얼굴의 반을 가릴 정 도로 큰 돋보기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시력은 지속적으로 나빠져서 지금은 안경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굴절력 이 1디옵터 이내로 심한 근시였기에 노안교정수술(SRP)조차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더 이상의 시력 저하가 없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 고인 물은 썩는 법이지. 한번쯤 세상 밖으로 나가 새로운 걸 배워보는 것 도 좋을 거야. 가거라.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연구를 직접 찾아보거라. ' ' ……그랜파. ' 제이스컬은 그녀가 EOE에서 고립되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지식들을 반복적으로 확인만 당하는 무미건조한 매일. 그 속에서 시더를 빼 내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연구하는 기쁨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제이스컬의 의도를 깨달은 시더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엘이 없는 지금, 그녀를 걱정해주는 건 오직 그 뿐이었다. ' 가겠어요. ' 우주로. ' 그곳에서 나만의 연구를 찾아내겠어요. ' 그런 시더의 말에 제이스컬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잔주름이 서려있는 미소. 그 주름 하나 하나가 그와 시더의 지난 날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결국 시더는 스페이스 셔틀을 타기 직전, 제이스컬에게 있는 힘껏 손을 흔 들며 눈물을 터뜨려야 했다. ' 다녀올게요, 그랜파! ' 반드시 돌아올게요! 그러니까……. '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꼭! ' 우주 개발 본부에서의 현장 근무는 시더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굉장히 보람 찬 일이었다. 그곳에서 시더는 발명의 기쁨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거추장스럽고 죄스럽기만 하던 자신의 지식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랜파……. 잘 있을까? ' 시더는 지구행 스페이스 셔틀 속에서 창 밖의 푸른 지구를 바라보며 미소지 었다. 그녀가 우주에 올라온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갑작스레 휴가를 얻어 제이스컬을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 의 변한 모습을. 자신의 성장한 모습을. 그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칭찬받고 싶었다. 노엘이 그녀와 피가 이어진 할머니였다면, 제이스컬은 그녀와 정신으로 이 어진 할아버지였다.시더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할아버지와의 재회에 들뜬 마 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흥분했다. 하지만. ' ……. ' 지구로 돌아온 그녀를 반긴 것은 한 장의 서류뭉치가 전부였다. 사망 신고서. 거기에는 시더를 우주에 올려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둔 제이스컬 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사인은 뇌종양 시더를 받아들일 때 이미 그는 뇌암 수술을 끝낸 뒤였다. 종양을 제거하고 9년이나 버텨냈으니 오랫동안 버틴 거라고 할 수 있었다. ' 앞으로도 계속……데리고 살아준댔으면서……. ' 시더는 가방을 떨어뜨리고 제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오열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자신이 조만간 죽을 거라는 걸.그녀 가 혼자 남게 된다는 걸.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우주로 보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르도 록, 그녀가 삶의 목표를 찾아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안배하고 나서야 편안 히 눈을 감은 것이다. ' 그렇게 웃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듯 웃었으면서……. ' 아픈 기색도 없이, 그렇게……. ' 최소한, 최소한 편지라도 남겼어야죠……. ' 너무해요, 그랜파. 너무해요……. 시더는 안경이 눈물로 얼룩져 간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며 그 말만을 되풀이 했다. 사망 신고서에 동봉된 제이스컬의 사진에는 그녀가 알고 있던 인자한 할아버지가 아닌 케루빔의 철혈 의장이 찍혀 있었다. 그 후, 시더는 자신을 방문한 한 여인에 의해 통일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민수정. 한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부 사령관이었다. 원래 대로 라면 시더는 다시 우주 개발 본부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 한번 쯤 세상 밖으로 나가 새로운 걸 배워보는 것도 좋을 거야. ' 제이스컬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시더는 과감히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그 것도 그녀의 할머니, 노엘 웰리스가 연구해오던 오리하르콘 개발 분야로. 시더는 할머니의 과업을 잇기로 결심한 것이다. " ……그러던 것이 어느덧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 " 시더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신장 40미터의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저 은색의 거인은 그녀의 피땀 어린 노력이 들어간 오리하르콘의 정수였다. 노엘이 오리하르콘의 제련 공식을 발견해냈고,시더가 그 공식에 따라 오리하 르콘을 제련해냈다. 할머니의 뒤를 잇게된 그녀의 모습에 제이스컬은 하늘 나라에서 어떤 반응 을 보이고 있을까? 잘 했다고 칭찬하고 있을까? 아니면 위험한 일을 하게 되 었다며 걱정하고 있을까? " 그랜파. ' 나……찾아냈어요. 나만의 연구. 칭찬해줄 거죠? 게으름 피우지 않고 줄곧 노력해왔단 말이에요. " 그랜마. "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거인은 반드시 움직일 거에요. 그리고 그때와 같 은 슬픈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어요. 시더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노엘 웰리스. 그녀는 언제나 시더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연구에만 몰 두한 채 손녀를 돌아봐주지 않았다. 제이스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손녀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주지 못 하고 작별 인사도 없이 먼저 가버렸다. ' 그러니까 지켜봐줘요. 이번 만큼은 반드시……. ' 제 모습을, 두 분의 손녀가 해내는 모습을……. ' ……반드시 지켜봐주세요. ' " 후. 정말 이게 무슨 꼴인지. " 11구역의 지하철 역. 막 아침 통근 시간이 끝난 지하철 역은 한산함 그 자 체였다. 눈에 띄는 이들이라고는 쓰레기를 줍는 환경 미화원들이나 외출하는 가정 주부들 정도. 가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한산함 속에 그가 있었다. 마인드 브레이커 마유빈. 그는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줄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검푸른 머리 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뚜렷한 이목구비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 시켰다. 하지만 그 외에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초등학생,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 다. 이렇듯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 ……. "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바로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건장한 체구의 두 남자 때문. 앞서 빠른 걸음으로 걷던 유빈은 이내 한숨을 쉬며 문제의 이인조를 돌아보 았다. 묵묵히 그를 따르고 있던 두 남자들은 유빈이 멈춰서자 덩달아 발걸음 을 멈췄다. 그 모습에 유빈의 인상은 절로 찡그려졌다. " 이봐. 당신들 말이야……. " " 무슨 문제라도 있나? " 긴 은발을 늘어뜨린 신부복의 남자가 물었다.유빈은 코방귀를 뀌며 입을 삐 쭉였다. " 아아. 문제라면 산더미 처럼 쌓이고 쌓였지. 근데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 다는 걸 자각하고 있기는 해? " " ……그다지. " 신부, 라트 발렌시아는 표정만큼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유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지금까지 쌓아놓은 불만들을 하나 하나 터뜨렸다. " 신부님, 지금 우리 처지는 아주 아주 비참하다고. 도망자야. 굶주린 고양 이에게 쫓기는 먹음직스런 쥐새끼들이지. " " 표현이 자학적이군. " " 그래! 자학적이든 해학적이든 간에! 우리는 좋든 싫든 도망자로서 최선을 다해야해! 필사적으로 몸을 숨겨야 한다고! " " 그 말에는 동감한다. " " ……하아. " 뭘 동감한다는 거야, 이 꼰대는? 하나도 못 알아먹으면서. 유빈은 애써 치밀어오르는 성질을 죽이며 라트와 그 옆의 남자를 가리켰다. " 좋아. 좋아.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주위의 이목을 피해보는 건 어때? 가뜩 이나 당신들은 존재 그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최소한 옷차림이라도 평범 하게 할 것이지. " " ……이 옷차림이 어때서? "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는 라트와 남자의 모습에 유빈은 분통을 터뜨렸다. " 지금 여기가 코스프레 장인 줄 알아! 한 쪽은 신부복! 한쪽은 KGB 군복! 거기다 댁들은 외국인이야! 눈에 띄어도 한참을 띄어! 후광에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다고! " " ……흐음. " 라트와 KGB군복의 남자는 유빈의 지적에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기 시 작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차림새에 의문을 가진다기 보다는 코스프레가 무엇인지 더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유빈은 진저리를 치며 시영이 내렸던 명령을 떠올렸다. ' 유빈, 지금부터 너와 라트는 파프니르를 보호하거라. 아니.보호라고 하기 에는 거창하군. 그냥 한동안 쿠사나기의 눈을 피해다니기만 해. ' 명령이라고 해도 단지 유빈의 마음 속에 그의 목소리만이 들려왔을 뿐이다. 시영은 최근 들어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 다. 블러디 노블맨과 관련된 일을 수행 중이라는 것만은 분명한데 자세한 사 항은 자신들도 알 수가 없다. 유빈은 내심 자신들에게도 그 사정을 얘기해주지 않는 시영이 야속했지만, 그럴수록 그가 내린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려 노력했다. 열심히 그를 위해 일 하다 보면 언젠가 더더욱 그의 신임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 하지만 이건 아니야! ' 유빈은 라트와 그의 옆에 있는 KGB군복의 남자, 파프니르를 겹눈질 하며 작 게 한 숨을 쉬었다. ' 도대체 마스터는 무슨 생각이신 거람. 이런 밥통 같은 자식들과 함께 일 을 하라니……. ' 손발이 맞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최소한 상식대로 행동은 해야할 것 아닌가! 라트는 라이컨슬로프일 때는 그나마 상황 판단이라도 빨랐건만 인간일 때는 그야말로 고지식함 그 자체였다. 물론 십여년 동안 죽어있었고 기껏 깨어나 보니 언어도 문화도 다른 동양권, 충분히 적응하기 힘든 요소들 뿐이었지만 저 생활감 없는 태도는 분명 선천적인 거였다. 살아 생전 신부였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긴 사실이었나 보다. 게다가 저 파프니르 같은 경우는 한 술 더 떴다. 있는듯 없는듯한 존재감에 벙어리같은 저 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 들에게 합류한 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면 말 다 했을까. 같은 요르문 간드의 화신들 중에서도 어떻게 저런 얼빠진 인격이 나올 수 있는 건지……. 거기다 묘하게도 라트와 세트로 노는 것이 도통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결국 이래저래 마음 고생을 하는 건 유빈 혼자 뿐이었다는 것이다. " 아, 몰라. 몰라. 쿠사나기에게 발각되는 건 이제 시간 문제야. 모처럼 인 파 속에 숨어들었건만 이래서야 무용지물이지. " " 하지만 이렇게 서울 시를 숨어다닐 바에는 저 자가 한국을 떠나는 게 낫 지 않을까? " 라트는 슬쩍 파프니르를 돌아보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런 소 국의 수도에서 도망다니는 것도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쿠사나기와 파 프니르는 같은 요르문간드의 화신이기에 상호 간의 성격이나 습성 등을 파악 하여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뚱한 눈으로 파프니르를 노려보았다. " 어쩌시겠나. 지금 저 분은 이 곳에 묶여있는 몸인데. " 그 비난에 파프니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금 그는 마유빈의 말대로 한국 의 가이아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다. 주인격의 힘이 강해진 쿠사나기는 티 아마트나 가능한 인격 금제로 그의 발을 묶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유빈의 머리 속으로 파프니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금제를 가한 것 까지가 쿠사나기의 한계다.주 인격의 목적은 부 인 격들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지 통솔이 아니니까. 이대로 숨어있기만 한다 면 그도 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 쳇. "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만 말하는 건 무슨 심보인지. 유빈이 딱하다는듯 혀를 차자 라트는 영문을 몰라 물었다. " 왜 그러는 거냐? " " 아니. 그냥 잘 숨어있으면 된다나 봐.주 인격이라고 해서 부 인격들의 위 치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래. " " 음? 하지만 이상하군.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은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렇다면 진작에 우리의 위치도 쿠사나기에게 노출되었어 야 할텐데. " 라트는 그런 섬뜩한 소리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말했다. 그 질문에 파 프니르는 유빈의 머리 속으로 대답했다. -기억 공유란 의식 공유와는 틀린 개념이다. 주기적으로 기록된 정보를 들 춰보는 거라고 해야겠지.우리의 기억은 하루 간격으로 저장되기 때문에 그 가 당장 기억을 검색한다고 해도 어제까지의 일 밖에 알아내지 못한다. 지 금 당장 우리를 찾아낼 순 없어. 젠장. 그러니까 직접 말을 하라고. 직접. 유빈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파프니르의 말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과연. 저장한 정보를 검색하는 개념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상대의 행동을 예측할 순 없나? 서로에게 저장된 기억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상대의 성격 이나 사고 방식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렇다.나도 쿠사나기도 이런 때에 서로가 무슨 행동을 취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아마 지금 그는 내 행동 패턴을 바탕으로 우리를 뒤쫓고 있을 것 이다. " 어이! 그런 사항을 왜 이제서야! 그렇다면 이렇게 한가롭게 돌아다닐 때가 아니잖아! " 유빈은 기겁을 하며 주위에 있을지도 모를 쿠사나기의 사념을 경계했다. 그 러자 라트까지 덩달아 전투 태세에 돌입! 하지만 파프니르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걸 예상하고 있기에 이렇듯 너희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다. 난 이곳 의 지리를 모르기에 무작정 너희를 따라 이동하고만 있다. 내 사고가 아닌 너희의 사고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제야 유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군. " 좋아. 그렇다면 이 상황은 우리가 유리해. 녀석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도 망칠지 모르지만, 우리는 녀석이 어떤 식으로 추적해올지 알 수 있으니까. " -꼭 그렇지만도 않아. 지금의 쿠사나기는 미쳐버렸기에, 예전과는 다른 인격 체라고 봐야한다.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못하겠어. " ……도대체 댁이 할 수 있는 건 뭐유? " 유빈은 낙담하며 승강장으로 향했다.어쨌든 결론은 이대로 계속 끊임없는 숨 바꼭질을 해야한다는 거였다. 쿠사나기로부터 도망친지 어느덧 삼일 째. 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계속하 려면 끊임 없이 장소를 바꿔야만 했다. 다음 날이 되면 어김 없이 파프니르의 기억은 쿠사나기에게 읽혀질테니까. 더구나 쿠사나기는 네크로맨서의 도움을 받아 요르문간드에게서 독립되었다. 파프니르로서는 그의 기억을 읽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 반칙이야. 독립한 주제에 챙길 건 다 챙기다니. ' 유빈은 앞으로의 일들이 깜깜하여 가볍게 푸념했다.일단 시영이 자신들을 찾 아올 때까지는 이대로 아무 대책없이 도망만 쳐야했다. 유빈은 라트와 파프니 르를 이끌고 아무 전동차에나 올라탔다. 라트는 털썩 자리에 걸터 앉는 유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 어쩔 셈이지? " " 글쎄. 오늘은 이대로 지하철 노선이나 빙빙 돌아볼까? 내일 일은 내일 생 각하고……. 아! 뭐. 더 좋은 의견 있어?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하고. " " 흠. 그것과 이것은 상관 없는 의견이지만……. " 라트는 유빈이 앉은 자리를 가리키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 ……여긴 노인석이다. " " 뭐? " " 노인석. " " ……. " 유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라트를 멀뚱히 올려다 보았다. 라트는 감았는지 떴는지 모를 눈빛으로 유빈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묘한 중 압감을 느낀 유빈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아니,이 자식이 언제부터 공중 도덕을 지켰다고……. 라이컨슬로프로 변하 면 고삐 풀린 망아지 처럼 날뛰는 주제에……. 슥 그때 유빈이 일어난 자리로 파프니르가 재빨리 다가가 앉았다. 그는 다소곳 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유빈과 라트의 시선에 다음 과 같이 대꾸했다. -난 인간이 아니니까 상관 없겠지. " ……. " 유빈은 짧게 한 숨을 쉬며,멀뚱히 서있는 라트를 이끌고 노인석이 아닌 다른 자리로 가 앉았다. 그렇게 그들이 한 자리 씩 꿰차자 전차칸은 금세 조용해졌 다. ' 뭐, 뭐야, 이 사람들은? ' 전차칸의 사람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 괴상한 삼인조를 겹눈질했다. 은발의 외국인 신부와 KGB제복의 러시아인, 거기다 초등학생이라는 조합은 아무리 봐 도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유빈은 애써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 역시 코스프레로 보이고 있어……. ' 아, 귀찮은데 그냥 확 이 칸에 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세뇌시켜버릴까? 유빈은 패턴 카민의 능력을 사용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옆자리에서 그의 행동을 예측한 라트가 노기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 빌어먹을 꼰대. 더럽게 깐깐하단 말이야. ' 유빈은 턱을 괴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 며칠간의 도주에 스트레스가 쌓일대로 쌓인 그는 어떻게든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함부로 오라능력을 사용했다간 한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감시망에 걸릴 위험 이 있다. 일정 수위 이상의 오라를 사용했다간 피스메이커의 우주수 위그드 라실이 오라 능력자의 위치를 포착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감시망이 항상 가동되는 것은 아니고, 스캔 지역도 일부 지역으 로만 한정되기에 피스 대원의 작전 수행지에서 얼쩡거리지만 않으면 발견 확 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이렇듯 조심스러워할 필요는 없단 얘기지. 철컹철컹철컹 그때 누군가 다른 칸에서 넘어오는지 전동차의 차륜과 레일이 마찰하는 소 리가 크게 들려왔다. 유빈은 슬쩍 시선을 들어 좌측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 에는 한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막 옆 차량에서 그들이 탄 차량으로 건너 오 고 있었다. 손에 성서를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지하철에서 포교 활동을 하는 개신교 신자인 것 같았다. 유빈은 옆의 라트를 돌아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 어이, 신부님. 신교와 구교의 만남이잖아? 저 치한테 한 수 가르쳐주지 그래? " " ……교리는 자신이 믿는 바를 따르는 것. 쓸데없는 분쟁을 부추기지마라. " " 헤에. 하지만 자신이 믿는 바를 남에게 권하는 것도 성직자의 의무 아냐? 분쟁이 무서워서 의무를 포기하다니. " " 권해서 될 일이었다면 신교와 구교로 갈라지는 일도 없었겠지. " 쳇. 재미없어. 유빈은 시시하다는듯 크게 하품을 하며 좌석에 등을 기댔다. 그러다 문득 장 난기가 발동했는지 포교 신자에게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그의 사념을 조작해 서 라트를 마귀라고 매도해볼 생각이었다. 그때도 이 무뚝뚝한 신부 양반이 포커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으려나? 파칭! 그러나 유빈은 신자의 정신과 접속하기도 전에 강한 반탄력으로 튕겨나가야 만 했다. 유빈은 믿을 수 없다는듯 두 눈을 부릅 떴다. 어라? 내 마인드 브레이크를 튕겨냈어? 이런 경우는 상대가 가사 상태에 빠져 있거나, 자신보다 더 강한 의식의 흐 름에 붙잡여 있을 경우 뿐이었다. 이번 상대와 같은 경우는 후자……인가? [찾았다.] 신자의 입에서 낯익은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유 빈과 라트, 파프니르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신자는 그들을 향 해 웃고 있었는데, 그 미소가 누군가를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군가란 바로! " 쿠사나기! "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 순간 신자의 몸으로부터 짙은 먹구름이 피어나왔다. " 유빈! 네 녀석, 무슨 짓을 한 거냐! " 유빈에게서 오라의 흐름을 느낀 라트가 분노하며 소리쳤다. 그런 그에게 유 빈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쿠사나기를 가리켰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저 녀석을 불러들인게 아니라고! " 내가 오라 능력을 사용하기도 전에 저 개신교 신자는 쿠사나기의 힘에 붙들 려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렇게 그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신자의 몸으로부터 나온 먹구름은 이윽고 하나의 인간 형상을 만들어냈다. 붉은 히토에기누에 적색과 흑색, 황색의 뒤섞인 머리카락들.뱀의 비늘이 떠 오른 그 얼굴은 분명 요르문간드의 화신 쿠사나기였다! 그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신자를 내려다보며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 크크크, 크크크크. 머리를 쓰는 건 네 녀석들 만이 아니지. 설마 파프니 르가 하는 생각을 나라고 못했을 줄 알았나? 미안하지만 이 쪽도 꽤 머리 를 굴릴 줄 아는 녀석이 있어서 말이야. " " 으음. 네크로맨서인가? " 라트는 삼일 전에 자신들이 도망치는 것을 유유히 방관하던 그를 떠올렸다. 카이 브릿드, 그는 그때부터 뭔가를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자신들을 보내준 거였군. 쿠사나기는 히죽 웃으며 쓰러진 신자에게서 먹구름이 피어나는 검은 구슬을 회수해냈다. 그것은 그가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를 만들어낼 때 사용했던 마정의 핵이었다. " 어차피 금제를 가한 너희들은 서울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그렇다면 사용 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지하철 뿐이다……라고 녀석이 귀뜸해주더군. 그 래서 마정의 핵을 이용한 감시자들을 각 지하철 구간 마다 하나 씩 배치 시켜뒀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대어를 낚게 되는군. 네크로맨서…… 꽤나 똑똑한 녀석이야. 크크크크. " " 똑똑한 자녀 님을 두셔서 퍽이나 좋으시겠수. " 유빈은 완전히 자신들의 허를 찌른 네크로맨서에게 욕지기를 내뱉었다.자신 들 쪽의 파프니르가 인간 사회에 전혀 적응을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쿠사 나기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아마 강령술로 삼차원 의 인간과 동화된 카이 브릿드는 몸 뿐만이 아니라 그 지식까지 마음대로 사 용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 으, 으아아아. 사, 사람이! " " 말도 안돼! " 갑작스레 나타난 쿠사나기의 모습에 차량의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아이들 도 그 험악한 분위기에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고,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 던 학생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렇게 삽시간에 차량이 시끄러워지자 쿠사나기는 인상을 찡그리며 손가락 을 들어올렸다. " 시끄럽군. 조용히들 못하겠냐, 버러지들아? " 슥 그렇게 그가 좌우로 손가락을 긋자 순간 차량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 처럼 동시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뚝 멈춘 것이다. 단지 부모의 품에 안겨 울고 있던 아이들만이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 거 렸다. 그때. 스르륵 그런 아이들의 머리 위로 검붉은 핏방울들이 흘러 내렸다.그리고 일시에 좌 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쿠사나기는 레비아탄이 가지고 있던 수압 능력으로 수증기를 칼날처럼 전방으로 휘둘렀 던 것이다. 그 수압 칼날은 닿는 족족 모든 것을 베어냈고, 심지어는 전동차 의 차량마저 반으로 갈라버렸다. " 이, 이런 미친! " 대기의 진동수가 급격하게 변하는 걸 느낀 유빈은 라트와 파프니르를 간신 히 오라 쉴드로 보호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외에는 모두가 죽어 버렸 다. 신장 차로 베이퍼 커팅(Vapor Cutting)의 범위에서 벗어난 어린 아이들 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목이 떨어져나간 부모의 모습에 거품을 물며 경기를 일으켰다. -쿠사나기! 너는……! 파프니르의 악다문 목소리가 유빈의 마음 속으로 들려왔다. -삼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테라인들은 가이아의 동력원이다! 그들의 개체수 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옴팔로스에 접속하겠다는 우리의 계획도 물거품이 된다는 걸 잊어버린 거냐! " 크크크크. 이제는 내 알 바 아니지.어차피 저번 태풍 때도 셀 수 없이 죽 였는데 이제와서 한 둘을 더 죽인들 무슨 상관이야? " 주 인격의 힘이 강해진 쿠사나기는 파프니르가 하는 마음의 말까지 모두 알 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빈은 안색을 굳히며 중얼거렸 다. 테라 인? 가이아의 동력원이라니? 이것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원로회에서 우리를 제어할 수 없다는 걸 눈치챈다면 본체가 제거당할 위험 이 있다. 그때는 너도 나도 모두 끝장이야! 그런데도 네 마음대로 행동하 겠다고? " 어차피 우리가 없으면 녀석들은 목적을 이루지 못해! 더 이상 늙은이들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건 질색이다! 그렇게 녀석들의 개가 되고 싶다면 네 녀석 혼자나 되어버렷! " 푸화아아악 쿠사나기의 괴성과 함께 그의 몸으로부터 노란색의 산성 증기가 터져나왔다. 예의 스머그가 사용했던 액시드 브레스였다. 파프니르는 유빈과 라트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마음 속으로 외쳤다. -다음 차량으로 몸을 피하라! 어서! " 아, 으응! " 유빈은 투쟁 본능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라트를 이끌고 옆 차량으로 몸 을 피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막 차량을 건너려던 파프니르는, 쿠사나기 를 돌아보며 처음으로 입을 벌렸다. 촤자자자자작 순간, 그가 입을 벌리자 주위의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며 대기 중의 수증 기가 얼어버렸다. 그의 능력인 프리징(Freezing), 결빙(結氷)이었다. 초류향 과 상극인 이 능력은 타 물체의 열을 입으로 흡수하여 상대를 얼리기 때문에, 파프니르는 평소에도 개구(開口)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큭! " 쿠사나기는 자신이 뿜어낸 산성증기가 되려 응결되어 빙무(氷霧)가 되어버 리자 당황하며 힘을 거뒀다. 그대로 힘을 계속 사용했더라면 증기를 내뿜던 자신의 몸까지 얼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쿠사나기를 제지한 파프니르는 재빨리 연결막을 넘어 전동차의 앞 차량으로 달려나갔다. 쿠사나기는 그 뜻 밖의 반격에 멍하니 서있다가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 크, 크크크, 크히히히히! 멋져! 탐이 나! 너의 그 힘! 내가 접수해주마! " 푸화아아악 순간, 그의 몸은 검은 먹구름이 되어 파프니르 일행의 뒤를 쫓았다. 연결막 너머에 있던 사람들은 난데없이 신부와 KGB군인, 초등학생이 자신들의 앞을 지나가자 의아해하다가 뒤이어 자신들을 덮치는 먹구름에 비명을 질렀다. " 으, 으아아아악! " " 꺄악! 살려줘! " " 쿠엑! " 쿠사나기의 먹구름은 스머그의 산성 증기화되어 그 몸에 닿는 모든 것을 녹 여버렸다. 증기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피를 토하며 들끓는 몸을 쥐어뜯다 가 이내 한줌의 핏덩어리가 되었다. 그 모습에 유빈은 치를 떨며 파프니르에 게 소리쳤다. " 아니 뭐 저런 막가는 새끼가 다 있어? 아무리 인간이 개미만도 못해 보여 도 최소한 가려가면서 죽여야 할 거 아냐! " -그러니까 완전히 미쳐버렸다고 하지 않았나! 거기까지 말한 파프니르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며 재빨리 자신들이 지나온 차량 간 연결막을 노려보았다. 그 돌발행동에 라트와 유빈은 영문을 몰라 엉 거주춤 발걸음을 멈췄다. " 뭘 하려는 거야? " 후우우우우우 그러나 파프니르는 유빈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재빨리 연결막을 프리징으로 얼려버렸다. 그제야 그의 의도를 깨달은 라트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 크럇! " 촤앙 칼을 가는듯한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라트의 야수화된 팔이 서로 교차되 어 반원을 그렸다.그러자 강철 같은 열 개의 손톱들이 얼어버린 연결막을 그 대로 양단해버렸다. 이러한 절단은 실내측의 아라미드(Aramid)직포와 염화비 닐 수지,실외측의 폴리에스터 난연재 등이 얼어버리면서 결정 구조가 엔트 로피를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철커덩 철커덩 철커덩 절단된 연결막으로부터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며 그들이 있던 차량과 쿠사나 기가 있던 차량이 떨어져 나갔다. 유빈은 멀어져가는 차량을 바라보며 안도 의 숨을 내쉬었지만, 라트는 쉼 없이 그의 허리를 잡아챘다. " 안심할 때가 아니다. 금세 따라잡힐테니 이쯤에서 장소를 옮기는게 좋겠 어. 장소가 협소할수록 우리가 불리하다. " -음. 동감이로다. " 어, 어이! 잠깐만……! " 라트와 파프니르는 재빨리 잘려나간 연결막을 통해 전동차의 위로 뛰어올랐 다.덕분에 덩달아 예고도 없이 밖으로 나오게 된 유빈은 전동차에 최대한 몸 을 붙이면서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거센 돌풍과 함께 지하 터널의 천장이 무 서운 속도로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 으악! 내가 너희 같은 괴물인 줄 알아! 무식한 짓도 정도껏 해야지! " " 괴물이라니……. 실례로군. " -그렇다. 전혀 귀엽지 않아. 그대야말로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어리광을 부리도록. 이, 이 녀석들이! 잘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저따위 소리를! 유빈은 이마에 핏줄을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평범한 인간인 그가 이런 괴 물 이인조를 따라가려니 여러모로 심신이 벅찰 수 밖에 없었다. ' 마스터! 원망할 겁니다! ' 유빈은 한 숨을 쉬며 손을 반원으로 휘둘렀다. " 변신! 피스 카민! " 그러자 그의 음성에 반응한 손목 시계가 일정 주파를 흘리며 에테르 성질을 띈 AI컴플리트 세트를 불러냈다. 셀프 라이팅 기능을 멈춘 AI슈츠는 유빈의 전신을 조여왔고, 그의 오라 패턴에 반응하여 곧 양홍색의 빛을 흘렸다. -흠. 그것이 그대들의 오라를 강화시켜주는 물건인가? 꽤 파격적인 디자인 이군. " 시끄러! 허튼 소리 말고 앞장 서기나 해! " 유빈은 파프니르의 지적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고, 일행은 재빨리 전동차 의 운전실 쪽으로 달려나갔다. 일단 다음 역에 정차하자 마자 지상으로 빠져 나갈 생각이었다.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두번 다시 우리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꽁꽁 숨어주지! 쉬익 그때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막 운전실 쪽에 다다른 라트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고 파프니르가 전동차의 밑을 내려다 보았다. -이런……! 달리는 전동차의 밑으로 검은 먹구름이 차오르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스스 로의 몸을 먹구름으로 변화시켜 대기를 타고 그들을 쫓아왔던 것이다. 피식 문득 파프니르가 바라보고 있던 먹구름의 한 부분이 꿈틀거리며 웃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 뒤를 잇는 불길함! 끼이이이이이익 순간, 지독한 소음과 함께 바퀴를 잃은 전동차가 레일을 긁으며 미끄러져나 갔다.먹구름의 몸체를 날카로운 수압 칼날로 바꾼 쿠사나기가 베이퍼 커팅으 로 전동차의 바퀴들을 일제히 잘라버린 것이다. 바퀴를 잃은 전동차는 그 동 체가 흔들리더니 이윽고 지하 터널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콰지지지직 " 크으으윽! " 라트는 손톱을 전동차에 찍어 고정하며, 떨어지려는 유빈을 붙잡았다. 충격 으로 전동차의 유리창이 터져나가며 차체에 불이 붙자 안에서는 수 많은 사 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쿠사나기의 공격이 그들을 압박해왔다. 쿠사 나기는 수압 칼날의 몸을 산성증기로 변화시켜 전동차를 밑에서부터 녹이기 시작한 것이다. 후우우우우 파프니르는 자신들에게로 피어오르는 유독가스를 결빙시키며 재빨리 전동차 의 앞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산성증기들이 전동차를 떠나 파프니르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 크크크크. 계속 도망치지 않고 왜 멈췄지? 지쳤어? 포기한 거야? " -천만에. " 그래. 그래. 쉽게 먹히면 재미없으니까 좀 더 버둥거려 보라고. " 쿠사나기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파프니르를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스머그 와 레비아탄을 먹고나서 정신체에 맛이라도 들린 모양이었다. 파프니르는 소 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입으로 빙무를 전개했다. 하지만 언안개가 자 신을 덮쳐옴에도 불구하고 쿠사나기는 여유로웠다. " 잘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스머그의 힘은 산성 증기, 산의 무수물(無水物) 을 이용하는 거지만 정확히는 천연가스를 원료로 하여 유기화학원료를 합 성해내는 힘이더라고.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동결 방지제 같은 이소프로 판올도 만들 수 있지. " -……! 과연 그의 말대로 쿠사나기는 이소프로판올의 피막(被膜)으로 자신의 몸과 외기(外氣)를 차단하여 완벽히 빙결을 막아내고 있었다. 점점 흡수한 스머그 의 힘에 적응해 나간다는 증거였다. 파프니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호흡을 끌 어모았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촤자자자자작 순간 빙무가 옅어진다 싶더니 날카로운 얼음의 화살들이 생겨나 쿠사나기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빙무의 얼음 결정들을 끌어모아 만든 얼음 바늘로 상대 를 공격하는 다이아몬드 더스트(Diamond Dust)였다. 아무리 이소프로판올의 피막이라도 직접적인 물리 공격은 막아낼 수 없었기에 쿠사나기는 춤을 추듯 세빙(細氷)에 두들겨 맞았다. " 크억! " 대단해! 쿠사나기는 자신을 상대로 선전하는 파프니르의 모습에 솔직히 감탄했다.지 금의 그는 스머그와 레비아탄, 세 명분의 힘을 가지고 있건만 파프니르는 그 런 자신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쿠사나기가 흡수한 힘들을 완벽히 사용해내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 그동안 내숭을 떠셨단 말이지! " 쿠사나기는 순간 자신의 앞으로 먹구름을 끌어모아 수십가닥의 번개들을 파 프니르에게 흩뿌렸다. 파프니르도 재빨리 자신의 앞으로 얼음 결정들을 끌어 모아 빙무의 벽을 만들어냈다. 파파파파팍 -음……! 불꽃이 튀기며 어두운 터널 사이로 번개가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갔다.파프니 르는 인상을 찡그리며 재빨리 얼음의 안개 사이로 몸을 숨겼다. 뇌전이 얼음 을 타고 방전되면서 그에게도 미약하나마 충격을 주고 있었다.계속되는 번개 를 정면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쿠사나기는 번개가 파프니르에게 통하자 아예 터널 상공에 뇌운을 생성시켜 서 본격적으로 선도뇌격(先導雷擊)을 퍼부었다. 그러자 얼음과 번개의 향연 이 그들의 앞에 펼쳐졌다. "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군. " 유빈은 전동차의 위에서 용마인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그의 옆에 있던 라트는 두 눈을 짙은 녹색으로 물들이며 연신 헐떡이고 있었는데 아무 래도 눈 앞의 전장이 그의 야수욕을 자극시키는 모양이었다. 라트는 불만에 찬 목소리로 유빈에게 물었다. " 후우. 후우. 그래서 이대로 계속 구경만 하고 있을 셈인가? 우리가 마스 터에게 받은 명령은 분명 쿠사나기의 보호였을텐데. " " 그래. 그래. 하지만 뭐, 저치도 우리의 도움을 그다지 필요로 하는 것 같 지는 않고……. 굳이 도울 필요 있을까? 잘 하고 있잖아? " 유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용마인들에게서 긴장의 눈을 떼지 않았다. 얼핏 보면 파프니르가 싸움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공격보다 방어에 치중하고 있었다. 흡수한 힘들에 익숙해진 쿠사나기가 점점 여유를 찾아가는 반면, 파프니르는 지친 기색이 완연했던 것이다. ' 제길. 하지만 저 싸움의 어디에 끼어들라는 거야? ' 유빈은 몇번인가 쿠사나기의 정신에 재핑을 걸어보려고도 해봤지만,이미 그 는 하나인 동시에 세 명의 인격, 삼인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의 인격이 해킹되어도 나머지 두 인격이 금세 방어 체제를 회복시켜 정신 공격은 씨도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 ' 한 순간의 틈이라도 돼. 그 틈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파프니르가 녀석을 해치울 거야. ' 그렇게 유빈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전동차의 문이 열리며 탑승객들이 밖 으로 뛰쳐나왔다. 차량에 불이 붙고 유독가스가 발생하자 승객들이 수동으로 문을 열고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유빈은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차에서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 그래.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 딱 그의 손가락이 튕겨지자 도망치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유빈의 마인드 브레이크가 그들의 정신을 지배한 것이다. 유빈은 한창 파프니르와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는 쿠사나기를 돌아보며 손을 내뻗었다. " ……우리를 위해 죽어라! " 그와 동시에 정신을 지배당한 사람들이 쿠사나기를 향해 달려들었다.쿠사나 기는 그 난데 없는 돌격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 뭐야, 이것들은? 갑자기 돌아버렸나? " 그는 재빨리 자신의 앞으로 산성 증기를 생성시켜 사람들이 자신에게 접근 하지 못하도록 제지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은 거대한 사념의 힘 앞에 의지 를 잃어버린 꼭두각시였다. 그들은 산성 증기에 자신들의 몸이 녹는 것도 느 끼지 못하며 맹목적으로 쿠사나기의 몸을 붙들었다. " 큭! 놔라! 놓치 못해! " 쿠사나기는 자신의 팔과 다리에 매달려오는 인간들을 뿌리치며 유빈을 노려 보았다. 그에게서 이들을 조종하는 의지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 저 꼬마! 오라 능력자였군! ' 쿠사나기는 이를 갈며 손을 유빈에게로 들어 올렸다. 한시영, 오라능력자인 그가 오라 능력자인 수하를 두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다만 화가 났을 뿐이다. 오라 능력자와 연관되는 쿠사나기의 기억이 한순간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그에게 있어서 오 라 능력자란 자신을 무릎 꿇린 패턴 그레이, 브루스 류 그 자체였기에! " 죽여버린다! " 그의 손으로부터 강력한 번개가 유빈을 향해 발사되려고 했다. 하지만 분노 에 사로잡힌 그는 파프니르를 망각하는 커다란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 잠깐 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프니르의 결빙이 그의 몸을 얼려버린 것이다. " 카아아악! " 쿠사나기는 두 눈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얼음을 수증기로 전환시켰다. 그 는 어느샌가 자신의 코 앞까지 다가온 파프니르를 노려보았다. 겨우 이 까짓 걸로 날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네 놈의 힘은 나에게 통하질 않는단 말 이다! " ……흡! " 그러나 파프니르는 난데 없이 쿠사나기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춰버렸다. 그 의외의 행동에 쿠사나기도, 지켜보던 라트와 유빈도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지금 저게 뭐하는 짓거리래? 쩌저저저저적 그러나 그들의 의문은 얼어버리는 쿠사나기의 모습이 해결해주었다. 파프니 르는 쿠사나기의 입을 통해 그의 체내에 존재하는 모든 수분을 얼려버린 것 이다. 물은 액체에서 고체가 되면 그 부피가 증가한다. 체내의 부피가 증가 하는 것을 감당못한 쿠사나기의 육신은 안에서부터 폭발하듯 깨져버렸다. 촤아아앙 파편들이 유리조각처럼 부숴지며 지하 터널을 두들겼다.유빈은 휘파람을 불 며 라트와 함께 파프니르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 휘익! 키스 한 번 강렬한데. 터져 죽을 정도로 기분 좋았던 모양이지? " -궁금하면 그대도 받아보겠나? " ……싫어. " 유빈은 질린 표정으로 몸을 물렸고,파프니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부서 진 쿠사나기의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라트는 경계심을 풀지 않으며 파프니르 에게 물었다. "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뭐! " 라트는 펄쩍 뛰는 유빈의 반응으로 파프니르의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파 프니르는 침중한 표정으로 터널의 위쪽을 가리켰다.그곳에서는 대기 중의 수 증기와 빙정들이 모여서 예의 먹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만간 다시 재생할 거야.스머그와 레비아탄의 힘이 합쳐지니 재생력도 배 로 빨라졌군. " 그럼 재생하기 전에 없애버려! " -……. 하지만 파프니르는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쿠사나기를 소멸시 키는 데에 회의적이었다. 금욕의 화신인 그로서는 쿠사나기 처럼 상대를 흡 수하겠다는 욕심도 없었고, 이 이상 화신들의 수를 줄여서 요르문간드의 힘 을 약화시키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유빈은 그런 파프니르의 마음을 읽었는지 신경질적으로 땅을 걷어찼다. 제길! 우리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건데! -재생할 때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 사이에 몸을 피하자. 파프니르는 도망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는지 주저없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 무책임한 모습에 유빈은 인상을 찡그렸다. 저 꼰대, 그냥 곱게 죽어버리던가 하지 되게 성가시게 하네, 젠장. " 어이, 신부님! " 유빈은 라트를 돌아보았다. 이 늑대인간은 그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여전 히 숨만 거칠게 헐떡이고 있었다. 마치 욕구 불만에 가득차서 금방이라도 펑 하니 터질 듯한 모습이었다. " 발정났냐! 빨리 안 도망치고 뭘하는 거야! " " 후우. 후우. 마음에 안들어. " 낮게 으르렁 거리며 중얼거리는 라트. 유빈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 물었다. " 응? 뭐가 마음에 안들어? " " ……아니. 아무 것도. " 라트는 혀를 차며 유빈의 허리를 잡아올렸다. 그는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터 널 상공에 떠있는 먹구름을 노려보다가 이내 야수화 된 다리로 파프니르를 뒤쫓아 달려나갔다. 그렇게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먹구름 속에서 희미한 쿠사나기의 중얼거림 이 들려왔다. " 크크크크. 역시 파프니르. 욕심이 없는 아이네∼ " 크르르르르 그와 동시에 전동차의 안에서도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쿠사 나기의 손을 떠난 마정의 핵들이 승객들의 몸과 융합하여 수 많은 아메노무 라쿠모노 츠루기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먹구름 사이에서 얼굴을 드러낸 쿠사나기는 히죽 미소를 지었다. " 하지만 가르쳐주지! 욕심은 곧 힘이다! " 삐삐삐삐삐 가인의 손에서 흘러나온 신호음이 2학년 1반 교실에 울려퍼졌다. 가인은 당 황하며 신호음을 꺼버렸지만, 그 신호음은 옆에 있던 유리와 브루스에게서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용해지는 교실. 수업 중이었던 학생들이 모두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그 시선의 집중에 가인 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스크린 에 자료를 올리던 사회 선생이 영문을 몰라 소리쳤다. " 어이, 유가인. 낮잠이라도 잔 거냐?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 " ……. " 그의 물음에 가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가인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마 치 보이지 않는 실처럼 그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 드리워 진 차가움이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출동이신가 보지? -그래. 우리의 용사 님이 나갈 차례잖아. -나가서 싸우라고. -우리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나가서 싸워. -싸우다 죽어버려. 이건……뭐지? 가인은 자신의 머리 속에 들려오는 환청에 현기증을 느꼈다. 학생들은 무표 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을 대할 때마다 마치 그들의 생각인 듯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 었다. 그 소리들은 끊일 생각을 하지 않고 연신 가인을 괴롭혔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 그만해. 어째서 이런 소리들이 들리는 거야? ' 가인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에게 사회 선생이 인상을 찡그리 며 다가왔다. " 이 녀석이! 선생님이 묻고 있는데 대답도 하지 않고! 태도가 그게 뭐야?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잖아! " -싸우다 죽어버려! " 인석이……. 정말 대답 안해! " -괴물들 끼리 싸우다 죽어! " 지금 반항하는 거냐! " -서로 물어뜯고 죽어버려! " 유가인! " -어차피 넌 우리와……! 턱 그때 뒷걸음질 치는 가인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가인이 황망히 돌 아보니 브루스가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정신 차려라. 본부로부터의 호출이다. " " ……아. " 그제야 가인은 무전기를 돌아보며 정신을 수습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의 환청이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사라졌다. 가인은 이마를 되짚으며 중얼거렸다. 뭐였지……그건? 헛거라도 들은 건가? " 얼른 따라오지 못해! " " 아…… 예, 옛! " 가인은 브루스의 호통에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유리와 함께 교실 뒷문으 로 빠져나갔다. 그들의 뒤를 따르며 브루스는 가인의 등을 노려보았다. ' 심마(心魔)로군. 요요심(了了心)과 상상지(上上智)를 찾을 수가 없어. 환 마경(幻魔鏡)에 빠진 건가? ' 환마경은 신인양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나쳐야할 관문이었다. 지금 의 이 현상은 그가 육신의 죄를 정화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하지만……. ' 하필 이런 시기에……. 시간은 충분했건만 어째서 지금에서야……. ' 신의 일을 사람이 주관할 수는 없다는 건가. 브루스는 탄식하며 복도를 달려나갔다. 그렇게 가인과 유리, 브루스가 일언 반구도 없이 교실을 뛰쳐나가자 사회 선생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 아니, 이 녀석들이 정말! 선생 알기를 우습게 알고! " " 아아아아∼ 선생님! 진정하세요! " 그때 재영이 눈치 빠르게 그를 말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 사실 지금 저 녀석들 동거인이 꽤 위급해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있거든요? 방금 전의 호출도 병원에서 온 거에요.그래서 여차하면 바로 병원으로 달 려 갈 수 있도록 하지연 선생님께 허락을 받아놨었는데……. 아무런 말씀 도 못 들으셨어요? " " 으흠! 으흠! 아무 것도! " " 이런! 그럼 하지연 선생님이 잘못하셨네! 어쨌든 집안 사람이 다쳐서 저러 는 거니까 선생님이 좀 이해해주세요.아까 가인이 녀석 얼굴 봤잖아요? 사 색이 된 거? 얼마나 걱정이 되었으면 저렇게 정신도 못 차렸겠어요? " " ……하긴. " 사회 선생은 그럭저럭 재영의 말을 납득한 모양이었다. 재영은 속으로 가슴 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뛰어난 언변에 찬사를 보냈다. 훗. 이 몸은 물에 빠져 죽어도 입만은 떠오를 거란 말씀이야! " 자자자. 그럼 다들 제 자리에 앉아라. 수업 재개할테니. " 사회 선생의 말에 어수선하던 반의 분위기가 정리되었다.그리고 언제 소란스 러웠냐는듯 수업을 진행하는 2학년 1반. 마치 방금 전에 나간 가인 일행과 자 신들은 관계가 없다는듯한 모습이었다. 재영은 그런 친구들의 무관심한 태도에 한숨을 쉬며 가인이 나간 교실 뒷문 을 돌아보았다. 역시나라고 해야할까 당연하다고 해야할까.막 교실을 나간 그 들이 몬스터와 싸우러 나갔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 괜찮으려나, 녀석들……. ' 실감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인 일행을 걱정하는 재영의 마음도 막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는 씁쓸함을 금치 못하며 이번에는 비어있는 가인의 자리 쪽을 돌아보았다.그 곳에는 주인을 잃은 4개의 자리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4개? ' 아니. 잠깐……. 분명 가인과 유리, 브루스가 나갔으니까 비어있어야 할 자 리는 3개여야 하는데……. 4개? 4개라고? 어째서……. ' 아, 테레이아……. ' 그러고 보니까 아까 전부터 가인의 옆 자리에 앉아있어야 할 그녀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테레이아 민체스터. 그녀는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촤아아아악 막 12구역의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 유빈을 덮치는 검은 구름의 마수가 있었 다.하지만 채 마수의 이빨이 소년에게 닿기도 전에 날카로운 은색 섬광이 마 수의 몸을 찢어 발겼다. 라트는 신부복을 찢고 드러난 은색 갈퀴의 손을 거두며 숨을 몰아쉬었다. " 후우. 후우. 이것들은 뭐지? " 라트의 발 밑에 쓰러진 마수는 먹구름이 걷혀나가자 피투성이가 된 사람의 모습을 드러냈다.그 사람은 이미 라트의 손에 의해 숨이 끊어진 뒤였다. 유빈은 인상을 찡그리며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 으윽. 아무래도 기생형 정신체들인 모양인데?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만든 괴물인가봐. 쿠사나기 녀석, 인간의 목숨을 뭘로 아는 거야? " " 후우. 후우. 그 질문은 나도 너에게 똑같이 해주고 싶군. " " 나, 참. 모처럼 정의의 사도인 척 기분내고 있었는데 초 치지 말라고. " 유빈은 코웃음을 치며 라트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의 등장으로 12구역의 승강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을 피해 계단으로 도망치던 사람들은 서로를 밀쳐 내기에 바빴고, 그 와중에 넘어진 사람들은 인정사정 없이 뒤에서 올라오던 사람들에게 짓밟혀 나갔다. 비명과 울부짖음이 한데 어우러진 그 모습은 어떻게 보면 라트와 유빈이 연 출해낸 괴물들과의 싸움보다 더 잔인해 보였다. 유빈은 그렇게 도망치는 사람들을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비웃었다. " 하지만 신부님. 저런 꼴들을 볼 때마다 하찮게 여겨지지 않아, 인간의 목 숨이란 거? 지켜줄 가치도 없는 것들이야. 저것 봐.서로 자신이 먼저 살려 고 남을 짓밟고 있잖아? 저게 인간의 본성이지. 과거에도 그래왔고 현재에 도 그래왔고 미래에도 계속 그럴테지. 언젠가 인간은 스스로를 죽이게 될 거야.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 쿠사나기의 손에 죽게 내버려두는 게 더 자 비롭지 않겠어? " " 후우. 후우.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군.그런 말을 하는 너도 네가 그 렇게 경멸하는 인간 암컷의 배를 빌어 태어나지 않았나? " " 아아. 그래. 수치스러운 과거지.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가 없는. " 유빈은 산통을 깨는 라트의 말에 입을 한 움큼이나 내밀며 투덜거렸다.그렇 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파프니르는 어두운 터널 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나지막이 경고했다. -거의 다 따라잡혔다. 여유부릴 때가 아니야. " 예이. 예이. 그럼 슬슬 가보실까나. " 유빈은 터널에서 피어나오는 먹구름을 바라보며 서둘러 위층으로 향하려 했 다. 하지만 한 발 먼저 인파 속에서 검은 먹구름이 피어났다. 크르르르르르 " 어, 어라라? " 막 AI부츠에 오라를 끌어모아 인파를 뛰어넘으려던 유빈은 당황하며 발걸음 을 멈췄다. 도망치려던 승객들이 마정의 핵에 붙잡힌채 아메노무라쿠모노 츠 루기들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계단이란 계단에서는 새로운 검은 마수들이 그들이 있는 층으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유빈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뭐야, 이거……. 설마 이 지하철 역에 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괴물로 만든 건 아니겠지? " 크왕 컹 컹 순식간에 백마리가 넘는 마수들이 그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라트와 유빈, 파프니르는 서로의 등을 맞댄채 전방을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어느 샌가 나 타난 쿠사나기가 붉은 히토에기누를 펄럭이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눈웃음을 쳤다. " 자아, 여러분. 술래잡기는 여기까지. 너무 오랫동안 술래를 하고 있으면 게임이 재미 없어진단 말이야. " " 그럼 이번엔 우리가 술래를 할테니 댁이 도망쳐 볼테요? " " 프하하하하핫! 당돌한 꼬마 녀석!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해. 고양이가 쥐 새끼를 쫓을 수는 있지만 너희 쥐 새끼가 고양이를 쫓을 수는 없지 않나. " 쳇! 누가 쥐 새끼라는 거야? 망할 자식이! 유빈은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도망은 물 건너 가버린 뒤였다. 그들을 포위한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은 마치 수 십개의 격벽 처럼 지하 철 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무리 유빈이 마인드 브레이크로 융합 형 몬 스터들의 사념을 해킹한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수를 상대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뚫지 못할 거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만. ' 다소의 희생을 감소해야 한단 말이지. 희생이라…….전혀 익숙한 말이 아 닌데. ' 유빈은 슬쩍 자신의 옆에 있는 파프니르를 올려다보았다. 문제는 다름 아닌 그였다. 쿠사나기의 소멸을 망설이는 걸로 봐서는 살겠다 는 의지가 썩 강한 것 같지도 않고. 이런 타입은 여차할 때 자포자기를 해버 리기 때문에 철썩같이 믿고 있다간 되려 뒤통수를 맞을 위험이 있다. 더구나 그는 저 쿠사나기와 같은 요르문간드의 화신이지 않은가? 유빈은 처음부터 그를 믿지 않았다. ' 이건 뭐, 자살 미수자를 살인마로부터 지켜내는 꼴이니. ' 유빈은 이 막막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시작되기가 무섭게 자신의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한 신부에 의해 종결되어야만 했다. " 크, 크크크, 크카카카카캇! 쥐 새끼, 쥐 새끼라고! " 라트는 그야말로 실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몸을 들썩이며 웃고 있 었다. 그 모습에 유빈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낙담했다. ' 결국 깨어나셨군, 짐승 씨! ' 라트는 흐트러진 은발 사이로 녹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마치 쿠사나기를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것은 차분한 신부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 후우! 후우! 마음에 안들어! 네 녀석의 그 자기 과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터무니 없을 정도로 가소로워! 가소롭다 못해 화가 나! 그런 가소 로운 놈을 피해 달아나려니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을 수 밖에! " " 호오? " 쿠사나기는 라트를 노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그 눈은 웃고 있었지만 붉게 물든 안광 사이로는 활화산 같은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라트는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자신의 힘을 개방시켰다. 그러자 옷을 찢어발 기며 비정상적으로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근육들이 활성화되며 기형 적으로 이두근과 삼두근이 거대해졌다. 뒤틀린 안면은 하나의 늑대가 되었고 전신은 은색의 갈퀴들로 덮여져 나갔다. 라트는 자신의 길게 뽑아낸 손톱을 혀로 핥아내며 웃었다. " 크크크큭! 자신을 고양이라고 칭했었나? 그렇다면 가르쳐주지! 고양이는 늑대에게 물려죽는다! 그리고 네 놈의 앞에 있는 난! 고양이에 굶주린 늑 대야! " " 그래. 그래. 그럼 한 번 물·어·보·시·지, 늑·대. " 그와 동시에 라트는 백 마리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에게로 뛰어들었다! [키아아아악!] 라트는 번개같이 강철의 손톱으로 정면을 그어버리고선 뒤이어 달려드는 마 수들에게로 주먹을 휘둘렀다. 손에 잡히는 것이 있으면 닥치는데로 짓이기고 강철 손톱에 걸리는 것이 있 으면 닥치는데로 그어버리고 자신의 앞을 막는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두들겨 부쉈다. " 크카카카카카! " 라트는 휘두르던 손톱에 검은 마수의 몸이 걸리자, 그 몸째 들어올려 다른 마수들에게 팔을 휘둘렀다. 전혀 괴물의 무게따위는 느끼지 못한다는 모습이 었다. 그는 다른 마수들의 공격에 그 마수를 방패로 삼으며 앞으로 달려나갔 다. " Break their teeth, O God, in their mouth(하느님, 그들의 이빨을 그 입 안에서 부수소서)! " 그리고 섬광같이 피어나는 은색의 궤적! " Break out the great teeth of the young lions, O Lord(야훼여, 저 사자 들의 송곳니를 부러뜨리소서)! " 촤자자자자작 순간 꿰여 있던 검은 마수가 라트의 손톱에 산산조각이 나며 덩달아 주위의 마수들까지 토막내었다. 라트는 그것을 시작으로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 처 럼 치고 부수고 베어내고 걷어차며 마수들을 유린했다. 그의 앞에서는 이 먹 구름의 마수들도 무력한 어린애들에 불과했다. 그는 정확하게 마수들의 숙주 인 인간들의 몸체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 츠랴아아앗! " 퍼억 라트의 기합과 함께 그의 쌍수가 정확하게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의 속에 숨어있던 숙주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는 잔인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대로 꿰 뚫린 손을 움켜쥐자 숙주의 머리가 폭발하듯 터지며 먹구름 사이로 뇌수를 흩뿌렸다. " 저들을 물이 흘러 없어지듯이! 풀이 밟혀 시들듯이! 유산하는 여인의 몸 에서 핏덩이가 쏟아지듯이! 달팽이의 진액이 말라 버리듯이! " 라트는 날카로운 발톱이 번뜩이는 다리로 좌우의 마수들을 번개같이 걷어차 고서는 팔꿈치로 뽑아낸 기형 칼날들로 선풍처럼 몸을 회전하여 피보라를 일 으켰다. 그런 그에게로 사마귀 형태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가 그 거대한 낫을 휘둘러왔지만 라트는 되려 자신의 손톱으로 그 낫을 부숴버리며 괴물을 양단했다. 우오오오오오오 라트의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던 울부짖음이 입 밖으로 터져나 왔다. 섬뜩한 장송곡. 그와 동시에 라트는 최대한 몸을 동그랗게 말며 팽이 처럼 회전하여 몬스터들을 중심으로 쳐들어갔다. 그의 롤링 어택에 닿는 모 든 것들이 가루처럼 부서졌다. " 난데 없이 불어 닥친 회리바람에……. " 괴물들의 한 가운데로 들어온 라트는 감았던 몸을 풀며 자신의 털들을 꽂꽂 히 일으켜세웠다 " 싱싱하던 가시덤불 말라 버리듯이 만드소서! " 파파파파팍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발사되는 은빛의 창들! 그 창들에 꿰인 마수들은 뒤 의 마수들과 한덩이가 되어 지하철 역의 벽에 핏덩이처럼 늘어 붙었다. 먹구름이 걷히자 라트의 은빛 털에 꿰인 사람들이 도처에서 드러났다. 마정 의 핵에 붙들려 미처 도망치지 못했던 그들은 정육점에 걸린 고깃 덩어리처 럼 뼈와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독한 피비린내에 도저히 맨정신을 차릴 수 없는 살육의 현장. 그 속에서 라트는 붉게 물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 카카카카캇! 최고야! 머리가 새하얗게 타버릴 정도로 기분 좋아! 진작에 이랬어야지! 이런 즐거운 일을 놔두고 꽁무니를 빼라고? 웃기지 마! 다 죽여주겠어! 네 놈들은 내 거다! 내가 다 죽여버릴 거야! " " ……나, 참. 신났어. 저 바보. " 저 바보의 어디가 아까의 신부님이라는 거야? 유빈은 무차별로 날뛰는 라트를 바라보며 작게 푸념했다. 그는 정신을 집중 하여 주위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의 정신을 해킹했다. 그러자 쿠사나 기의 지배를 벗어난 검은 마수들이 유빈의 명령을 따라 주위의 동료 마수들 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에에에엑!] 서로를 필사적으로 물어뜯으며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마수들. 그들의 가운데 에서 유빈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뒤에서 상황을 관전하는 쿠사나기를 돌 아보았다. 그는 전황이 불리해져가는 이 시점에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이대로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라트도 유빈과 마찬가지인 생각을 했는지 낮게 으르렁거리며 쿠사나기를 노 려보았다. " 크르르르! 뭐야!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지 결국 네 놈도 허울 좋은 겁쟁이 였던 거냐! 우릴 쥐새끼라고 부르던 그 오만함은 어디로 갔나! " " 아, 뭐. 좋을 데로 생각하라고. 그 녀석들로도 머리가 식혀지지 않는다면 이 녀석들까지 상대해보는 건 어때? " 그 말과 함께 지하철의 위층에서 지금까지 라트와 유빈이 죽인 수를 뛰어넘 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 수에 유빈은 질린 표 정으로 중얼거렸다. " 맙소사. 저 괴물 녀석, 정신 용량이 어느 정도나 되는 거야? 아무리 자유 사고에 의지한 세뇌라지만 이 많은 수를 자신의 지배 하에 두다니. " " 크크크.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그에게 밀린다는 걸 인정하겠다는 거냐? " 라트는 흥분한 숨을 몰아 쉬며 빈정거리듯 유빈에게 물었다.그 말에 유빈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통제 하에 있던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에게 손짓했다. " 밀린다니……. 말했잖아? 자유 사고에 의지한 세뇌라고. 진정한 세뇌란 그 사고마저 빼앗는 것. 이제부터는 내가 그것을 몸소 보여주지. " " 크크크크. 네 놈도 괴물이군? " " 아아. 댁도. 그러니까 우리 괴물들끼리 어디 한 번 날뛰어 보자고. " " 크카카카카카! " 라트는 광소를 터뜨리며 망설임 없이 마수의 대군들에게 뛰어들었고, 그 뒤 를 유빈의 마수들이 뒤따랐다. 라트는 전신의 털을 곤두세워 하나의 칼날로 만든 뒤 마수들의 먹구름을 흩어버리고 그 안의 민간인들을 찍어 죽였다. 가인을 비롯한 피스 대원들이라면 민간인의 생명을 우선시하여 마정의 핵을 제거하기 위해 고전을 면치 못했겠지만 라트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기에 마음 내키는 데로 적의 취약점만 공격하고 있었다. 약한 부분을 공격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전투 상식 아닌가? " 그 당연한 것을 망설이지 않고 해낼 수 있어야 승리하는 거라고! " 유빈은 마수들과 마수들의 싸움을 붙이는 한편, 끊임없이 또 다른 마수들을 조종하여 싸움터로 내몰았다. 일단 사람의 사념을 조종하는데에 있어서 그를 따를 수 있는 이는 없다. 애초에 이런 피동적인 양산형 정신체들은 그의 유 희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쿠사나기는 라트와 유빈에 의해 무너져 가는 진영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 후. 역시 한시영의 수하들 답군. 조금은 고전해주길 바랐건만 이건 뭐,시 간끌기 용도 되지 않으니……. ' 아무래도 이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의 공격은 타인의 생명에 집착하는 피스 대원들에게나 통용되는듯 했다. 같은 인간이건만 그들과 시영의 수하들 은 별개의 생물체였던 것이다. 이타적인 인간과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별개의 생물체. " 아쉽군. 모처럼 맘에 드는 인간들이었는데. " 계속 놀아주고는 싶지만……. 쿠사나기는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지하철의 위층을 올려다 보았다.그러자 천 장이 투명해지는 것 처럼 옅어지며 자신이 찾고 있던 먹이감이 눈에 들어왔다. " 그것은 식후의 즐거움으로 미뤄두도록 하지. " 푸확 순간 그는 자신의 몸을 먹구름으로 변화시켜 재빨리 지하철의 상층부로 올 라갔다. 그 모습에 라트와 유빈은 달려드는 마수들을 뿌리치며 혀를 찼다. 아뿔사! 눈치 챈 건가! " 제길! 비키지 못해! " 유빈은 노호성을 내지르며 쿠사나기를 뒤쫓으려고 했지만 밀려드는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이 끊이지를 않았다. 라트도 정신 없이 마수들을 베어냈 지만 베어낸 만큼 마수들이 들어찼기에 당분간 이 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을 떼어놓으며 쿠사나기는 한창 지상으로 도망치고 있던 자신의 형제를 찾아냈다. " 허니∼ 그냥 이대로 가버리면 섭섭하지∼ " -누가 네 녀석의 허니라는 건가? 차갑게 대꾸하며 자리에 멈춰서는 KGB군복의 남자. 용마인 파프니르였다. 그는 한창 라트가 쿠사나기를 도발하여 싸움을 벌리고 있을 무렵 사전에 유 빈과 짠 계획대로 모습을 감추려고 했지만, 역시 주 인격의 감시망을 벗어날 순 없었다. 쿠사나기는 파프니르의 냉담한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매 만졌다. " 흑. 파렴치하기는.내 첫키스까지 빼앗아간 주제에 이제와서 모르는 척 하 기야? " -아, 그건 좀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 무책임한 남자의 표본이로군.구차하게 변명하기 보다는 조용히 상대를 감 싸주는 포용력을 베풀어봐. " -그 포용력을 네 녀석에게 베푸는 게 아까워서 이러는 것 아닌가. " 하아. 그렇게 내가 부담스러워? " -음. 어째 대화가 묘한 쪽으로 빠지는데……. 쿠사나기는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며 투덜거렸다. " 나,참. 도대체 뭐가 불만이라는 거야? 원래 하나여야 했던 이가 여덟개로 나누어져 있던 것부터가 비정상이었어. 하나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고. 다 들 우유부단한 녀석들이라서 뒤로 미뤄오기만 했던 일을 내가 추진하겠다 는데 왜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못할 망정 반대만 하는 거야? " -원래부터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여덟개의 영혼이었어. 그렇게 태어난 거지. 그걸 네 멋대로 굴복시키고 억압시켜서 하나가 된다한들 무 슨 의미가 있는가? " 더 이상 자아의 충돌로 인한 고민이 사라져. 자신을 떳떳하게 자신이라고 밝힐 수 있게 돼. 무슨 일을 하든 주체는 내가 되고,책임도 내가 지게 되 는 거야.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어디 있어? 이건 우리 모두가 바래왔던 일 아냐? " -그래. 모두가 바래왔던 일이지. 하지만……. 파프니르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초리로 쿠사나기를 노려보았 다. -네가 바라는 일은 아니야. 넌 이미 요르문간드의 지배를 벗어난 독립된 인 격이니까. 넌 더 이상 네 자신을 요르문간드라 칭할 수 없어. 스스로가 원 해서 떠난 주제에 우리라고? 우리라고 칭했던 레비아탄과 스머그를 너는 어떻게 했지? " ……. " 쿠사나기는 허를 찔린듯 할 말을 찾지 못했다.파프니르는 그런 그에게 일침 을 놓았다. -네가 지금 하는 행위는 약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크,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 " 쿠사나기는 문득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파프니르의 지적에 깨달을 수 있었 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이미 요르문간드가 아니라는 것을. 요르문간드에 기 생하여 그 힘을 빨아먹기만 하는 배신자일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미 부정해버렸다는 것을……. " 약탈? 약탈이 뭐가 어때서! " 그러나 쿠사나기는 두 눈을 붉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 그래! 나는 스스로 떠났다! 너희 모두를 버렸어! 내 자신까지도 버렸다! 단지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 스스로에게 부정당한 그 아픔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쿠사나기는 피 눈물을 흘리면서도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피스 그레이! 그에게 나는 이미 죽었다! 초류향 때도! 브리트라 때도! 무 력하게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버렸어! 억울해! 참을 수가 없어! 그렇 다고 복수하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그를 능가하고 싶다! 그를 이기고 싶 어! 이처럼 누군가에게 집착하고 누군가를 목표로 삼은 적이 우리에게 있 었던가? 파프니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든 적이 너에게는 있었나! 이 마음을 너는 이해할 수 있어? " -……! " 모르겠지! 당연해! 너는 금욕의 화신이니까! 집착할 줄 모르니까! 욕심을 낼 줄 모르니까! 단지 요르문간드의 생존 본능만을 우선시하는 꼭두각시 에 불과하니까! " 순간 그와 파프니르의 주위가 검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지금껏 쿠사나기가 피스 그레이와 맞닥뜨렸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곳곳에 펼쳐졌다. 파프니르 는 그 압도적인 집념의 소용돌이에 동화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자신을 부여 잡았다. " 하지만 나는 다르다! 너희 꼭두각시와는 달리 나는 나만의 목적을 가졌어!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아니! 얼마든지 욕해다오! 욕을 먹는 것도 나 고, 손가락질 받는 것도 나다! 살육을 자행하는 것도 나고 가이아를 유린 하는 것도 나다! 피스 그레이를 쓰러뜨리는 건 요르문간드가 아닌 바로 나, 쿠사나기란 말이다! " 그제서야 파프니르는 쿠사나기가 지금껏 저지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파프니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 가련한 자신의 형제를 바라보았다. -쿠사나기, 너는…… 그렇게 까지 피스 그레이라는 남자를 원하는 것인가? 그렇게 까지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나? 쿠사나기라는 하나의 인격을? " ……! " 쿠사나기는 두 눈을 부릅뜨며 파프니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부 정하지는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리고 피 스 그레이와 마주쳤을 때의 영상들이 그들의 앞으로 펼쳐졌다. ' 네 놈은 쓰레기야. ' ' 쓰레기. ' ' 형편 없군. ' ' 말 뿐인 녀석. ' ' 그래! 네 말 대로 난 쓰레기다! 그렇다면 쓰레기의 방식을 보여주지! ' ' 어째서 녀석과 나는 이렇게나……! ' ' 분하다! ' ' 분하다! ' ' 나는! 질 수 없어! ' ' 패배는! 실패는! ' ' 나는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단 말이다아아아앗! ' 그때 느꼈던 쿠사나기의 분노와 슬픔, 오열. 그 모든 감정들이 어느 때보다 도 절실하게 파프니르의 마음 속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기억 공유로는 알 수 없었던 쿠사나기의 한(恨)이었다. 분명 요르문간드의 화신들 중에서 무언가에 이처럼 집착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쿠사나기는 완벽히 자신들을 뛰어넘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이 라고 할 수 있었다. 파프니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나를 먹어라, 쿠사나기. " 의식이 공유된 세계 속에서 더 이상 마음으로 얘기할 필요가 없게 된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얘기했다. " 나를 먹고 그에게 도전하라. 네가 말했다시피 나는 금욕의 화신. 나에게 욕심이란 없다. 하지만……. " 파프니르는 쿠사나기의 앞으로 다가와 미소지었다. " 처음으로 너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 " ……. " 여전히 침묵하는 쿠사나기. 하지만 파프니르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붉 게 충혈되어 있었다. 안타까움과 슬픔, 미련, 그리움이 교차하는 순간. 그리 고 쿠사나기는 선택했다. 퍽 쿠사나기의 손이 파프니르의 등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검은 공간이 하얗게 돌변하며, 그 하얀 여백에 붉은 핏자국이 스며들기 시작했다.그 핏자국의 중 심에서 파프니르는 손을 벌려 쿠사나기를 껴안았다. " 반드시……이겨라. 형, 제여. " 챙그랑 유리창이 깨지듯 파프니르는 전신이 조각조각나며 허공에 은빛의 안개를 수 놓았다. 그리고 빛은 쿠사나기의 전신으로 스며들듯 사라져갔다. 쿠사나기는 눈을 감은채 파프니르의 축성을 마음 한 가득 받아들였다. 자신 을 인정해준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그의 힘이 몸 구석 구석에 스며드는 감각 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 ……형제여, 편안히 눈 감으라. " 쿠사나기는 두 눈을 뜨며 다짐하듯 소리쳤다. " 나는 이긴다! 반·드·시! " " 빌어먹을……. 역시나 했더니 적시나야! 파프니르, 이 바보같은 자식이 포기해버렸어! " 촤아아아악 유빈의 대답에 라트는 세 마리가 엉겨붙은 거대한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 를 손톱으로 그어버렸다. 그러자 허리가 토막난 세 개의 시체들이 피바다가 된 승강장의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 크르르르르! 포기? 포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 " 쿠사나기에게 먹혀버렸단 말이야! 이 힘이 느껴지지 않아? " 쿠구구구구구구 그 말과 동시에 12구역의 지하철 역이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로 흔들리기 시 작했다. 그 바람에 승강장에 널려 있던 시체의 바다가 출렁이며 연신 파도를 일으켰다. 이제는 수십 마리 밖에 남지 않은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도 자신들의 조정자에게 이변이 생기자 그 몸을 부들부들 떨며 먹구름을 붉게 물들였다. 라트는 진동에 휩쓸리지 않도록 몸을 지면에 낮추며 소리쳤다. " 무시무시한 기운이군! 차원 왜곡 현상인가! " " 요르문간드의 인격을 과반수 이상 통제하게 된 쿠사나기가 차원 너머에 있는 본체의 힘을 끌어다 쓰기 시작한 거야! 으아! 마스터에게 뭐라고 변 명해야 하지? " 유빈은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렸다.그에게는 파프니르의 생사보다도 그를 지 키라고 명했던 시영의 말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어울리지도 않게 이런 소모 전까지 감수하며 녀석을 도망시키려고 했던 건데 스스로가 먹혀버리다니! 라트는 꽂꽂히 세웠던 털들을 가라앉히며 어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마스터도 우리가 끝까지 파프니르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거다. 이 정도로 시간을 끈 것으로 만족하시겠 지. " " 젠장! 젠장! 웃기지마! 반드시 완수하고 싶었단 말이야! " 유빈은 짜증을 내며 원통해 했다. 아무리 불가능한 임무라도 성공해내서 마 스터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싶었건만 졸지에 계획이 무산되어 버렸다. 유빈 은 멋대로 죽어버린 파프니르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발밑의 시체를 걷어찼다. 라트는 예의 인간 모습으로 돌아와 주위의 시체들 중에서 자신의 체구에 걸 맞는 옷 크기의 남자를 찾았다. " 이제부터 어떡할 거냐? 이대로 여기에 있다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 은데. " " 아아. 남겨놓은 우리 쥐새끼들을 잡수시러 위의 고양이 님이 내려오시겠지. " 유빈은 투덜거리면서 주위의 시체들 중에서 한 남자의 바지를 벗겨 라트에 게 던져 주었다. 라트는 바지를 받아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 ……작잖아? " " 그냥 껴 입으라고. 그러게 누가 앞뒤 생각없이 옷을 찢어버리래? 변신할 때마다 좀 벗어두면 얼마나 좋아? 옷감도 절약되고. " " 흠. 앞으로 고려해 보도록 하지. " 라트는 진지하게 유빈의 의견을 수렴하며 바지를 억지로 껴입었다. 그 우스 꽝스러운 몰골에 유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킥! 영락없는 헐크로군! " 푸흡……! 어쨌든 임무도 실패했는데 여기서 더 뭉기적거리고 있을 필요 는 없겠군. 도망치자고. " " 쿠사나기가 우리를 순순히 보내줄까? " " 아, 뭐……. 순순히 보내주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못 빠져나갈까봐? " 유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걱정이 되는지 쿠사나기가 있는 위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파프니르를 흡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고전했었는데, 흡수 한 지금의 그를 자신들이 과연 떨쳐낼 수 있을까? 거기다 쿠사나기는 막 새 로운 힘까지 얻은 상태였다. 그 힘을 시험하기에 자신들만큼 좋은 스파링 상 대가 또 없을 것이다. 파칭 그때 유빈의 뇌리를 파고드는 낯익은 느낌이 하나 있었다.유빈은 자신도 모 르게 지하 터널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 ……유리? " " 음? " 그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라트는 유빈의 시선을 따라 지하 터널 쪽을 바라 보았다.인간의 청력을 능가하는 라트의 귀로도 고속으로 움직이는 전동차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다. 유빈은 히죽 웃으며 라트의 어깨를 두들겼다. " 하. 정말 나이스 타이밍이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저 괴물의 스파링 상 대가 되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 " 흠? " " 우리를 대신해줄 고마우신 분들이 오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고양이 걱 정일랑 하지 말고 잽싸게 몸을 피하자고. " " ……알겠다. " 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퇴로를 가로막는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 기들을 향해서 다시 강철의 손톱을 뽑아들었다. 큐우우우우웅 피스메이커의 광속 전차가 지하 터널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로지르고 있 었다.그 안에는 언더 시티 유레카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피스 대원들이 AI슈 츠를 장착하고 자신들의 장비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피스 블루 유가인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피스 핑크 이유리 에게서 이상한 징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유리야, 무슨 일이야? " 그녀의 몸에서는 전시도 아니건만 옅은 핑크빛의 오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리는 침중한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하며 가인에게 말했다. " 공명이야. 내 오라가 누군가의 오라에 반응하고 있어.상당히 낯익은 느낌 이야. " " 낯익다고? 거기다 오라라니? 상대가 오라 능력자라는 거야? " " 오빠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 " 유리의 말에 가인이 안색을 굳혔다. 그의 앞에 앉아 있던 피스 레드 성마리 도 유리가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짐작하고서는 놀람을 금지 못했다. " 마인드 브레이커! 그를 말하는 건가! " 유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말에 피스 그린 정진우는 긴장한 표정을 풀지 않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 지금 12구역의 지하철 역에서는 요르문간드의 화신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한창 서로를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지하철 역의 감시 카메라에 찍힌 영 상으로는 그들 외에도 제 3의 인물들이 발견되었는데……. 그들이 아마도 피스 블랙, 그와 관계된 인물들일 거라 추정됩니다. " 그 말에 피스 옐로우 한시민이 아랫 입술을 깨물며 차가운 눈빛으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진우의 말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된 가인은 두 눈을 휘 둥그래 뜨며 반문했다. " 피스……블랙? 누, 누구죠? 그 사람은? " 마리와 유리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피스 그 레이 브루스 류가 인상을 구기며 진우를 돌아보았다. " 이 아이들은 모르고 있었던 건가? " " 아, 예……. 일단 피스 블랙, 그의 입장은 상당히 미묘하니까요. 되도록 함구하라는 사령관 님의 명령이 있었던지라. " 진우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의 대화에 더더 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된 가인이 당황하며 물었다. "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에요? 피스 블랙이라니! 상대도 오라 능력자인 거 에요? " " 아아. 너희들의 선배라고 한다면 선배라고 할 수 있는 피스 대원인데……. " 진우는 그에 대한 사항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어 뒷말을 흐렸다.그때 누군가가 진우의 말을 대신했다. " 배신자에요. " " ……? "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에는 시민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전방에서 눈을 떼 지 않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피스메이커를 배신한, 인류를 저버린 오라 능력자죠. 그는 현재 몬스터들 에게 가담한 것으로 확인되며 지속적으로 피스메이커의 일을 방해하고 있 어요. " " 시, 시민 씨. " 그 차가운 반응에 가인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고,사정을 알고 있는 진우 와 브루스 만이 잠자코 있었다. 그때 시민의 설명을 듣고 있던 유리가 뭔가를 납득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 과연.그런 남자라면 마유빈,그 같은 오라능력자를 자신의 부하로 거둘 수 있겠네. 기억하고 있어, 오빠? 그때 유빈을 데리러 온 늑대 인간이 했던 말? " '오늘은 단지 그 분의 명으로 이 바보 녀석을 데려가기 위해 왔을 뿐이니까.' " 아……. " 가인은 라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쓰러진 마유빈과 자신들의 사이를 가로막던 그는 분명……. ' 크크크큭. 그렇게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조만간 너희들의 앞에 직접 모 습을 드러낼 테니까, 그 분이! ' " 직접……모습을 드러낸다고 했어. 라트가 말했던 그 분이란 피스 블랙.그 를 가리키는 거였나? " 가인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아마도 틀림없어. 그리고 오빠와 마리가 유빈의 정신 세계에 사로 잡 혔을 때 유빈이 이런 말도 했었어. " '그 분이 말씀하셨어. 우리 오라 능력자는 인간들과 다르다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 우리는 인간이면서도 이런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지? 인간이란 거 약해빠졌잖아? 이런 이상한 힘 같은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 다고.' " 인간들과……다르다고? " 가인은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피스 블랙,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인간과는 다른 존재지!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를 핍박하고 배척해왔던 거야! 본능적으로 자신들과 다른 종이라는 걸 느꼈던 거지! 그 분은 말씀하셨 어. 오라 능력자는 인간들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고!' ' 그 분……이라니? ' ' 우리 오라 능력자를 언제나 걱정하시는 분. 우리 오라 능력자들의 유토피 아를 재건하실 분! 유리야, 난 그 분의 명을 받들어 널 데리러 온 거야! ' 오라 능력자들의……유토피아……라니. 유리의 설명을 듣고 있던 시민이 점점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금발에 가려 져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그녀의 무릎 께에 올 려져 있던 주먹이 사시나무 떨리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리는 유리의 말에 혀를 차며 가인의 동의를 구하듯 그를 돌아보았다. " 미쳤군…….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 오 라 능력자는 인간들에게서 파생된 존재다. 남들과 다른 힘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 힘을 사용하는 건 우리 인간이라고! " " ……. " 하지만 가인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니, 동의할 수 없었다.그는 처음부터 유리가 말해준 피스 블랙의 사상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말한 다른 의견들은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지만……. ' 오라 능력자와……인간은 다르다. ' 그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왜 우리는 인간이면서도 이런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오라 능력자는 인간들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고? ' 그는……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 피스 블랙, 그라면 지금의 내 고민에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가인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전동차의 창 밖을 바라보았다.한치 앞도 보이 지 않는 암흑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그 바람에 그는 평상시와 다 른 시민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피스 블랙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부터 줄곧 침착함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브루스는 그렇게 어수선해진 대원들의 분위기를 경계하며 카랑카랑한 목소 리로 소리쳤다. " 다들 정신 차려라! 지금 12구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태껏 상대해왔던 몬스터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괴물이다! 이런 헤이해진 정신 상태로 뭘 하겠다는 거야! " 브루스만은 느낄 수 있었다. 대기 속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힘의 꿈틀거림을. 분명 저번 태풍 때보다 녀석의 힘은 강해져 있었다.13년 전의 브리트라와 동 급, 아니 그 이상이다! ' 하필이면 극대소멸권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 극대소멸권 탐랑은 적어도 다음 삼계의 주기에 접어들 때까지 사용할 수 없 었다. 짧아도 2년? 아니, 완벽한 아포칼립스를 일으키려면 적어도 3년 이상 은 선기를 회복시키는데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이런 일이 있을까봐 그렇게 사용을 자제해왔건만! ' 그렇다고 저 녀석에게 기대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니. ' 브루스는 뭔가를 고심하고 있는 가인을 돌아보았다. 환마경에 접어든 오라 의 주인은 이제 막 각성의 초기 단계에 접어들었을 뿐이었다. 스스로의 힘으 로 심마를 이겨낸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저 상태로는 각 성은 커녕 되려 입마(入魔)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 부딪쳐 보는 수 밖에 없나! ' 브루스는 표정을 굳히며 전신의 투기를 끌어올렸다. 그런 걱정의 뒷편에는 지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상대에 대한 기대감이 깔려 있었다. 그는 상황이 어찌되었든 간에 자신을 천계로 끌어 올려줄 강한 호적수를 갈망하고 있었다. 끝없는 승부.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한 반드시 추구해야할 지상 과제였 다. 철컹! 그때 광속전차가 12구역에 도착했다는 신호음과 함께 기관실 한 칸으로 이 루어진 증기 기관차의 옆 문이 열렸다. 진우는 가인의 어깨를 두들기며 기운 찬 목소리로 모두에게 소리쳤다. " 자! 그럼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가보도록 합시다! " " 피스! " 구호를 붙이며 플랫 홈에 내려선 일행. 하지만 기세 좋게 내딛은 발걸음은 채 서너걸음을 떼기도 전에 제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마리는 플랫 홈에 펼쳐진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새파랗게 질린 입 술을 달싹였다. " 이, 이건 대체……? " -쿠사나기. 흑색과 황색, 적색과 백색이 어우러지는 공간.그 속에서 쿠사나기를 부르는 한 여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쿠사나기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며 눈 을 가늘게 떴다. -……메두사냐? 그곳에는 옅은 하늘색의 머리를 길게 풀어내린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한 여 인이 있었다.여인의 얼굴은 여타의 용마인들과 같은 요르문간드의 얼굴을 닮 아 있었지만 감히 바라보지 못할 신성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메두사. 요르문간드의 여덟 화신 중 하나이자 티아마트를 곁에서 보필하는 대리인이 었다. 그녀는 티아마트와 부인격들을 이어주는 존재이며 쿠사나기들과는 달 리 게이트를 넘어오지 않고 본국에서 기억 공유로 인한 정보를 원로회에 보 고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렇듯 그녀와 쿠사나기가 접촉할 수 있었던 것도, 주 인격의 힘이 강해짐 으로서 서로의 정신 공유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메두사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군요.레비아탄도, 스머그도, 파프니르도…….모 두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군요. -크크. 그래서? 그들을 차지한 내가 원망스러운가? 내가 증오스러워? -……. 메두사는 힘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애의 화신. 요르문간드를 너무 나 사랑하는 그녀는 용마인들 중 그 누구 하나 미워할 수 없었다. 비록 지금 은 자신들에게서 독립해 약탈을 감행하고 있는 쿠사나기라 할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메두사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누구지, 메두사? -……당신은 쿠사나기. 우리들의 주인격이에요. 메두사가 눈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피하자, 쿠사나기는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는 집요하게 물었다. -주인격은 무엇이지? -우리를 이끌어줄…… 지도자. 우리가 따라야할 마음의 지주. 쿠사나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지도자로서 명령한다! 요르문간드의 힘을 나에게 넘겨 라! 본체를 구현하겠다! -쿠사나기! 메두사는 애처롭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쿠사나기는 그녀의 어깨를 으스러져 라 움켜쥐며 안광을 번뜩였다. -왜? 티아마트의 명령이 아니라서 못 따르겠다는 건가? 금방 네 입으로 나 를 주인격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본체 구현은 뭐라고 해도 무리에요. 예전 브리트라 때 이미 육 체의 30%가 소실되었어요. 그 이후 무리한 힘의 남용은 원로회에서도 억제 시키고 있고요. 무엇보다 지금 당신의 반란을 원로회에서 모르고 있어요. -호오. 보고하지 않았던 건가? 기특한데. -그러니까 만약 본체 구현을 위해 도약을 하게 된다면 원로회의 눈을 피할 수 없게 되요. 잘못하다간 당신의 기능이 정지당한다고요! 메두사는 정말로 쿠사나기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를 붙잡았다. 그 헌신적인 사랑 앞에 쿠사나기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모의 사랑은 맹목적이지. 삼차원에 파견된 나와 브리트라,스머그와 파프 니르, 레비아탄은 티아마트와 당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나 마찬가 지야. 하지만 이제 당신의 자식들은 홀로 설 수 있게 됐어.부모의 밑을 떠 나게 된 거지. 완벽한 주인격이 됨으로서 쿠사나기는 자신들의 근원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었다. 삼차원에 파견된 용마인들은 본국에 남아있는 티아마트와 메두사의 분열된 인격들이라는 것을. 결국 쿠사나기의 말이 옳았다. 처음부터 여덟 개 의 영혼이 아니었던 것이다. 쿠사나기는 소리 없이 흐느끼는 메두사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고마워요, 어머니. 당신의 사랑을 내 어찌 갚을 수 있을까. 요르문간드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신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니까 지켜봐주세요, 당신의 장성한 아들이 지금부터 행할 일들을. -……그런가요. 메두사는 눈물을 훔쳐내며 미소지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부모된 도리로서 마지막 사랑을 베풀 겠습니다. 당신에게 요르문간드의 힘을 전면 개방하겠어요. -고맙습니다. 하지만……도약을 할 필요는 없어. -예? 그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메두사는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깜빡였다.쿠사 나기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육체는 이미 내 쪽에서 마련했으니까. 마침 네크로맨서가 내 육체를 대신 할 재료들을 찾아냈다고 하거든. 차단된 요르문간드의 회로만 열어준다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겠어. -쿠사나기, 당신은……. 메두사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끝까지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질 생각이군요……. -떠나는 마당에 부모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서. 쿠사나기는 씩 웃으며 메두사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의식의 공간이 사 라지며 그는 12구역의 지하철 역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잠 시나마 볼 수 있었던 메두사의 얼굴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았다. 안녕히. 나의……어머니. " 쿠사나기, 작별 인사는 끝낸 거냐? " 그때 그의 뒤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 쿠사나기가 돌아보니 네크로맨서 카 이 브릿드가 모든 준비를 끝내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그답지 않게 숙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네크로맨서는 피식 웃으며 수중의 검은 피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삐이이이이이……. 울려퍼지는 피리 소리. 그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생의 술이 쿠사나기의 육체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 이, 이건 대체……. " 마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이 붉게 변해 있었다. 12구역의 지하철 역은 지옥 그 자체였다. 모두 죽어 있었다. 살아 있는 생물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활기 로 가득 찼을 이 공간은 지금 죽음의 냄새만 피워대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피비린내. 갈기 갈기 찢겨져 곳곳에 널려 있는 사람들. 벽이며 천장이며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에 피스 대원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 으으으윽! 누가 이런 짓을! 대체 누가! " 침묵을 깨뜨리며 진우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 지만 뒤에 있던 마리와 시민은 그처럼 분노를 표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 다.저번 태풍 때도 해저 터널에서 수 많은 시체들을 목격했었지만 이와 같이 피가 튀고 살이 튀는 살육의 현장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발을 디딜곳 조차 보이지 않는 시체의 산이라니! " 오, 오빠……. " 유리는 신음을 흘리며 뒤에 있을 가인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밀려드는 사념들을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죽은 민간인들의 원망과 분노,비명 소리가 끊이지를 않고 그녀의 머리 속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가인은 그런 유리를 끌어안아주면서도 발 밑에서 굴러다니는 시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 저들은 아무 것도 모른채 지하철 역을 지나가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학교를 가려던 대학생들도 있을 것이고,잠시 회사에서 빠져나온 직장인들,장 을 보러 집을 나선 주부들과 아이들, 노숙자들과 지하철 직원들……. 그 모두가 죽고 말았다. 가인은 그 수 많은 죽음들이 실감나지 않았다. 직접 두 눈으로 처참한 시체 들을 확인하면서도 리얼리티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한, 다른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 같았다. 지금껏 몬스터를 상대해오면서 여러 죽음들을 목격했었지만…… 이건, 이건 아니었다. 도대체 저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저들이 왜 죽어야 하는 거지? 무슨 이유로? 그저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자 신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 그런데 어째서……. -너희들 때문이야. 그때 또 다시 환청이 들렸다. 가인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 때 발 밑에 있던 시체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가인의 다리를 붙잡았다. -너희들 때문이야. -힘을 가진 너희들 때문에……. -너희 괴물 놈들이 날뛰는 바람에…….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가인은 자신의 발을 붙잡은 시체의 손을 뿌리치려 고 했지만 시체는 요지부동이었다. 도리어 주위의 시체들까지 일어나 그에게 손을 뻗기 시작했다. ' 시민 씨! 마리 선배! 유리야! 진우 씨! ' 가인은 자신의 동료들을 목 놓아 불렀지만, 그들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시체들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붙드는 것을 두 손 놓고 지켜보아야 만 했다. 가인의 손을 붙든 어린 아이의 시체가 말했다. -내 몸을 봐. 괴물에게 찢겨진 나의 몸을 봐. 가인의 목을 조르던 노인의 시체가 말했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거지? 왜 우리를 죽이는 거야? 가인의 허리를 붙든 학생의 시체가 말했다. -우리는 무력하게 죽어야 했어. 너희 힘을 가진 괴물들의 횡포에. ' 아니야! 우리가 아니야! 내가 아니야! ' 가인은 시체들에게 있는 힘껏 반박했다. 몬스터다. 이들을 죽인 건 몬스터야! 난 몬스터로부터 이들을 지키는 피스 메이커! 오라능력자라고! 몬스터와는 달라! 괴물이 아니란 말이야! -같아. 그때 시체들의 산 한 가운데에서 흑백의 영상이 나타났다.라트와 마유빈.그 들이 아메노무라쿠모노 츠루기들을 상대로 살육을 벌이던 모습이 그대로 재 현되고 있었다.잔인하게 사람들을 찢어죽이고 그 피로 목욕을 하면서도 그들 은 웃고 있었다. 마유빈이 입고 있는 AI슈츠는 흑백의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선명한 붉 은 빛을 띄고 있었다. 피였다. 민간인들을 죽이면서 묻힌 피. 가인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저들과 난 틀려! 틀리다고! ' -부정하지마! -괴물! -우리를 살려내! -살려내! ' 으, 으아아아! ' 짝 그때 가인의 눈 앞으로 불똥이 튀었다. 그의 곁에 있던 브루스가 가인의 상 태가 이상함을 깨닫고선 그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그 난데 없는 행동에 마리 와 유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 무슨 짓입니까, 브루스! " " 오빠! " 가인은 멍하니 서있다가 천천히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샌가 그를 붙잡고 있던 시체들이 거짓말 처럼 사라져 있었다. 이, 이제는 환청에 이어서 환영인 건가……? 가인은 안도와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런 그를 다급히 부축하는 마리와 유리. 브루스는 비틀거리는 가인의 앞으로 다가와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 멍청한 놈! 헛거라도 본 거냐! 계속 정신 못 차릴 거야! " " 브, 브루스. 하지만……. " 가인은 자신을 붙잡은 시체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했지만 이미 브루스는 냉 정하게 몸을 돌린 뒤였다. 브루스는 시체들을 헤쳐 나가며 마음 속으로 가인 에게 소리쳤다. ' 바보 녀석! 나는 도와줄 수 없어! 이제부터는 네 스스로 이겨내야 한단 말이다! 심마 따위에 휘둘리지 않도록 단단히 마음 먹어! ' 환마경에는 어떠한 충고도 조언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브루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가인을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환마 경이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누가 도와주고 자시고 할 수준의 일이 아닌 것이다. 육체의 죄를 정화시키려면 스스로를 먼저 이겨내야만 했다. ' 브루스……. ' 그런 속뜻을 모르던 가인으로서는 그저 난폭한 질타에 의기 소침할 뿐이었다. 우우우우우우 그때 일행의 위층에서부터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단지 기지개 를 켜는듯한 소리였지만 그 울림은 지하철 역을 송두리째 뒤흔들 정도로 강 했다. 진우는 진동에 쓰러지지 않도록 벽에 몸을 지탱하며 소리쳤다. " 맙소사! 뭐야, 이 소리는? " " 진우 씨! 저길 봐요! " 그의 곁에 있던 시민이 시체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승강장에 널려있던 시 체들이 하나 둘 씩 붉은 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는 순간,시 체들도 땅에 꺼지듯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시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낯 익은 검은 구체가 사악한 기운을 풍기며 떠오르고 있었다. " 마정의 핵! " 구슬을 알아본 브루스가 소리쳤다. 숙주인 인간의 정을 흡수하여 융합형 몬 스터를 만들어내는 영자 변환기! 그 영자 변환기들이 지금 수 십 수 백의 시 체들로부터 생겨나서 그 힘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러자 강력한 차원 왜 곡 현상과 함께 거대한 지진파가 지하철을 덮쳤다. 쿠구구구구구 무너지기 시작하는 천장! 하지만 놀랍게도 밑으로 떨어져야할 콘크리트 더 미들이 거꾸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역 중력이었다. 차원 왜곡 현상으로 인해 공간이 비틀어지는 것이었다. 이 상태가 지속되다가 와프 입자의 수치가 상승한다면 게이트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아마 지상에서는 현재 지독한 폭풍우와 번개가 휘몰아치고 있을 것 이다. 우우우우우우 하지만 게이트는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앞의 짐승 소리와 함께 마정의 핵 들이 짙은 먹구름이 되어 거대한 무언가를 형성해내기 시작했다. 가인과 피 스 대원들은 AI슈츠의 중력장을 조절하여 차원 왜곡 현상을 버텨내며 경악에 찬 눈으로 눈 앞의 생물체를 올려다 보았다. ' ……와이번? ' 생물체를 보던 가인은 문득 예전에 중국에서 조우했던 B급 몬스터 와이번 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눈 앞의 괴물은 그 것보다 서너배는 더 거대했다. 천천히 일으키는 그 몸은 지하 5층에서 지상 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고, 그 목을 빼어드니 가볍게 지상을 넘어서는 것이었 다.거기다 먹구름이 피어나는 날개를 펼쳐들자 중력장에 변화가 일어나며 지 하철 내부가 뽑혀나갔다. " 우와아아아앗! " 거대한 용권풍이 지하철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브루스는 재빨 리 일행들의 앞으로 내려서며 모두에게 소리쳤다. " 오라 쉴드 전개다! 빨려들어가면 끝장이야! " 부우우우웅 패턴 그레이의 힘이 주위의 중력 붕괴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중력장을 형성 해냈다. 회색의 오라가 휘몰아치며 일행들을 보호하자, 패닉에서 벗어난 대 원들도 서둘러 오라 쉴드를 전개했다. 무너진 하늘로부터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차원 왜곡 현상으로 인한 기상 변 화였다. 지상에서는 이미 갑작스런 몬스터의 등장으로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 었다. 지반 붕괴로 교통이 마비되었으며 건물이 무너지고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후우우우우] 하늘로 치솟은 괴물의 머리로부터 가벼운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 한숨 만으로도 강력한 소용돌이가 발생하여 빌딩의 유리창들이 박살났다. 먹구름이 걷혀 나간 괴물의 몸체는 짙은 흑색의 비늘로 덮여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비늘의 배열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재구성되었다. 괴물은 한동안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내다가 곧 등 뒤의 먹 구름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쳐들었다. 그러자 빗방울들이 그의 몸을 비껴나 가며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것 아닌가! 괴물은 완벽히 비구름을 조종해내는 자신의 능력에 웃음을 터뜨렸다. [후우, 후하하하, 하하하하하핫! 이것이 요르문간드의 힘인가! 이것이 녀석 을 쓰러뜨릴 힘!] 정신체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쿠사나기는 완벽한 해방감에 도 취되어 소리쳤다. [피스 그레이! 때가 왔다! 네가 만들어낸 분노의 힘을 돌려 받을 시간이다!] ~~~~~~~~~~~~~~~~~~~~~~~~~~~~~~~~~~~~~~~~~~~~~ <오랜만의 오라전대 단막극> 메두사: 쿠사나기, 당신은……. 끝까지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질 생각 이군요. 쿠사나기: 떠나는 마당에 부모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서. -여기서 잠시 고인이 된 용마인 삼인방들의 얘기를 들어봅시다.- 레비아탄: 이미 충분히 폐를 끼쳤지 않나, 네 놈? 스머그: 켓. 패륜아 중에서도 쌍 패륜아 주제에 당치도 않기는. 파프니르: .........(너희들도 그다지 다를 바는 없어.) -아, 그런데 누구를 잊어버린 것 같은데- 초류향: 잊어버리지마! 이 차원의 힘을 좀 먹는 기생충들! -하지만 이미 죽었답니다∼- <끝> ~~~~~~~~~~~~~~~~~~~~~~~~~~~~~~~~~~~~~~~~~~~~~~ 《위그드라실 가동 완료! 12구역을 스캔합니다!》 《열원 입력 완료! 알파 판으로 전송!》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윤채영과 오퍼레이터 팀은 다급하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델타 위성에 서 보내오는 자료들은 그녀들의 손을 거쳐 체계적으로 화면을 수놓게 된다. 그리고 지금, 12구역의 영상들이 어지럽게 펼쳐진 가운데 모든 것을 압도하 는 한 영상이 있었다. 괴수. 메인 스크린에 떠오른 몬스터는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짙은 먹구름 이 피어나는 날개,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비늘, 무엇보다 100미터 를 가볍게 넘길듯한 저 신장이라니! 진 사령관의 옆에서 스크린의 몬스터를 주시하고 있던 닥터는 벌린 입을 다 물지 못하고 경악했다. " 저것이 바로 드래곤(Dragon)! 13년 전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던 SA급 몬스 터란 말입니까! "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2020년 3월 9일. 삼차원의 인류가 처음으로 이계의 존재, 몬스터와 대면한 날이 있었다. 대재해. 최초의 게이트 발생일이기도 한 이 날은 21세기 최악의 재앙일로 기록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한국, 미국, 영국, 러시아가 피로 물든 날이다. 그 중 미국의 LA사건은 대재해로도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었는데,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불명. 생존자 또한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도시의 한복판에 핵 폭발의 잔해인듯한 거대한 크레이터가 남아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LA를 죽음의 황무지로 만든 것이 최초의 몬스터, 요르문간드의 본체 로 구현한 브리트라였다고 한다. " 그래요.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D타입은 브리트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 을 정도로 거대하군요.거기다 역중력이 발생할 정도의 왜곡 현상이라니……. " 애써 냉정하게 말을 받은 수정은 떨리는 눈초리로 화면의 괴물을 바라 보았 다.지금껏 잊고 있었지만, 그녀의 기억 한켠에 남아있던 과거의 악몽들이 다 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가는 현장. 그 속에서 울부짖고 있던 거대한 마수. 그리고 사라져 갔던 자신의 소중한……. " 민간인의 대피 상황은? " 수정이 돌아본 진 사령관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냉정하게 상황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채영은 12구역의 부분 영상들을 스크린에 띄우며 보고 했다. 《12구역의 쉘터 자체가 D타입의 등장으로 파손되었습니다! 사망자 속출! 파견된 팔라딘 대와도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채영의 다급한 외침에 진 사령관은 스크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 ABF 가동! 그리고 위그드라실의 락을 가동시켜라. 범위는 12구역 상에 있 는 사인 파와 펄스 파! " 《미, 민간인의 구조는…….》 " 이 이상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게 급선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12구역의 영상이 노출되기라도 한다면 대혼란이 발생한다! 거주민의 대 이동으로 교통이 마비된다면 12구역의 민간인들이 피신할 수 없어! " 《피, 피스! ABF 가동! 반송파 발생시킵니다. 간섭잡음 발생! 12 구역의 모 든 반송파는 앞으로 1시간 동안 그 기능을 상실합니다! >> 채영은 창백한 표정으로 명령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12구역의 영 상에서는 끊임 없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무너지는 건물들과 함께 매 장되는 사람들, 지진파에 휩쓸려 내장이 터져 죽는 사람들. 그 모든 광경은 채영이 피스메이커에 근무한 이래 최악의 참사였다. 채영은 그들을 방관하기만 해야하는 자신의 처지에 한 없는 무력감을 느꼈 다. 옆을 돌아보니 문세희를 비롯한 신입 오퍼레이터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 로 몸을 떨고 있었다.비위가 약한 몇몇 오퍼레이터들은 헛구역질까지 해대고 있었다. 《지구 방위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 쓸데 없는 짓을 하지 않도록 PM조약에 의거한 24시간 작전 연기를 요구하 라. " 어떻게 보면 낙천적이기 까지 한 진 사령관의 작전 처리에 수정이 걱정스러 운 표정으로 물었다. " 그들이 납득할까요? 아무리 PM조약을 내세운 지연 통보라고 해도……. " " 어차피 목청만 큰 녀석들이야. 그들이 관심있는 건 우리의 실패지 몬스터 의 퇴치가 아니다. " " ……이미 12구역의 피해만으로도 청문회는 확정적이군요. " 수정은 작게 푸념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번 사태를 막아내지 못하면 지구방위군이 투덜거리는 것도, 그 불평을 자신들이 받아주는 것도 모두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닥터도 그 점을 염두에 뒀는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 방법은 있습니까? 지연 시간 안에 몬스터를 제거할 수 있는……? " " 없으면 만들어야겠지. 일단 현장의 피스 대원들을 귀환시켜라. 지금의 전 력으로는 D타입을 상대할 수 없다. " " 귀환……이라니? 설마……! " 닥터는 뜻 밖의 명령에 당황하며 언성을 높였다. " 거인을 깨우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피스 블루의 각성이 없는 한 가동은 무리라고……! " " 거인의 가동에 대해서는……. " 진 사령관은 무심히 자신의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내 뒤의 분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 " ……? " 뒤의 분? 뒤의 분이라니? ' 작전 본부실에 우리들 말고 또 누가 있다고? ' 사령관의 시선을 따라 닥터가 고개를 돌린 곳에서는 낯 익은 연구복을 입은 한 여인이 서있었다. 닥터는 여전히 사령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인 과 그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수정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닥터에게 여인을 소개했다. " 이 분이 바로 오리하르콘을 최초로 제련해낸 스멜팅 마스터,케루빔의 3대 의원 중 한 분이신 노엘 웰리스 님이에요. " " ……예? " 그 난데 없는 소개에 어안이 벙벙해진 닥터. 여인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에게 직접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 반가워요, 닥터. 평소 제 손녀, 시더가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 " 신세……라니……? " 닥터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며 공허한 질문을 던졌다. 생각지도 못 했던 곳에서 뒷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노엘……웰리스. 이 사람이…… 노엘 웰리스 라고? '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 " 하하하하! 멋진데! " 카이는 12구역의 전망이 한 눈에 들어오는 빌딩 옥상에서 크게 소리내 웃 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마수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비 바람과 함 께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 마수는 다름 아닌 요르문간드의 본체로 구현된 쿠사나기였다. 카이는 자신의 역작인 이 최강의 생물에게 찬사를 보냈다. " 마음껏 날뛰라고! 테라도! 노아도! 그 잘난 오라 능력자들도! 누구 하나 널 막을 순 없어! 진정한 자유라고!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 쿠사나기 씨? " [크크크, 쿠하하하하! 기분이 어떠냐고?] 카이의 질문에 쿠사나기는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발밑에서 개미 떼처럼 도망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등 뒤 의 날개를 펼쳐 들었다. [……끝내주는데!] 푸화아아아아악 대답과 동시에 쿠사나기의 날개가 지면을 가볍게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자 날개의 먹구름이 수압 칼날로 변해 사정 거리 내의 빌딩들과 가로수,심지어 는 사람들까지 두토막내었다. 쿠구구구구구 굉음과 함께 건물들이 도미노 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사람들은 자 신들을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의 행렬을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쳐야할 자신 의 두다리가 허리째 잘려 나가 있었던 것이다.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떨어져 나간 하체들을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하기 바빴다. 쿠우우우웅 비명도 없었다. 고통도 없었다. 도심의 한복판이 민둥산이라도 된 것 처럼 벌거 벗겨졌고, 지독한 먼지의 안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에서 거침없이 쏟아지는 빗물들로 인해 먼지 가 가신 도심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무너진 건물더미 밑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 " 하하하! 그래! 죽어버려! 다 죽어버려! 가이아의 힘을 좀 먹는 기생충들! 네 놈들이 그 동안 당연하다 생각해왔던 특혜의 댓가를 마음껏 맛보라고! 이건 네 놈들이 자처한 결과니까! " 카이는 분노한 목소리로 죽은 이들에게 조소를 흘렸다.그와 동시에 하늘의 먹구름이 점점 노란빛으로 변해가더니 이윽고 지독한 산성 비를 지상으로 떨어뜨렸다. 쿠사나기가 먹구름의 수증기를 산성화시킨 것이다. [자, 그럼 어디 기생충들에게 좀 먹힌 차원을 소독시켜볼까!] 쿠사나기가 비구름을 흩뿌리자 폐허의 현장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물이 들끓는듯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빗줄기를 따라 노란색 증기가 피어올랐다.그 리고 건물의 붕괴 속에서 살아남았던 생존자들이 자신의 녹아내리는 몸을 부여잡고 발광하다가 죽어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휙 그때 카이의 뒷편으로부터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떨 어져 내렸다.검은 가죽 재질의 옷을 입은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의 여인, 테 레이아 민체스터였다. 그녀는 리리스의 증표인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빌딩 의 옥상에 사뿐히 내려섰다. " 멈춰! 무슨 짓이야, 카이! " 테레이아는 자신을 돌아보는 카이를 향해 날카롭게 호통쳤다. 그 꾸짖음에 카이는 반사적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 삼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테라인들은 약하든 강하든 모두 가이아의 의식 과 이어져 있어! 테라 인들의 수가 줄어들수록 가이아도 쇠약해진다고! " 가이아의 의식과 이어진 것은 비단 오라 능력자 뿐만이 아니다. 삼차원의 인류는 모두 가이아의 비호 아래에서 그 힘을 무의식 중에 사용할 수 있었 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인류의 문명 창조였다.가이아의 의식과 접속하여 그 방대한 정보를 조금씩 읽어드린 인류는 서서히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꾸려나갈 수 있었다. 인류는 미약하나마 가이아의 힘을 먼 옛날부터 사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 테라 인들을 이렇게 죽여버려서 어쩌자는 거야! 옴팔로스의 열쇠를 이용 하기로 한 시점에서 가이아를 상하게 만들다니! 더구나 쿠사나기, 저 녀 석은 저번 태풍 사건 때에도 수 많은 테라 인들을 죽여버린 미치광이야! 그런 녀석과 손을 잡고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 " ……. " 카이는 연이은 테레이아의 꾸지람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테레이아는 노기 가 서린 목소리로 재차 소리쳤다. " 이건 명백한 반란이야. 너희 둘은 원로회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겨버렸어. 어떻게 그들의 눈을 피했는지는 모르겠지만,이 사태가 그들의 귀에 들어 가는 건 시간 문제야. 자칫 잘못하다간 징계에서 끝나지 않아! 소멸이라 고! " " ……. " " 그렇게 잠자코만 있지 말고 대답 해봐, 카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른 거니? 원로회의 명령을 어기고서도 유메의 신병을 넘겨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를 정말 구해낼 생각은 있는 거야? " 그때……. 유메의 가석방 조건을 들었을 때……. " 셋이서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며 가장 기뻐했던 건 대체 누구였지! 유 메의 일 따윈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거야! " " ……! " 순간 테레이아의 입에서 유메의 이름이 연거푸 언급되자 카이는 버럭 소리 질렀다. " 누가 구해낼 생각이 없다는 거야! 누가 아무래도 좋다는 거야! 유메를 잊어버린 건 내가 아닌 바로 너잖아, 리리스! " 그 외침에 테레이아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호되게 두 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유메를…… 잊어버렸다고? " 내가…… 잊어버렸다고? " " 그래! 오라의 주인! 그 얄팍한 테라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유메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 " 그녀를 향해 소리치는 카이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외쳤다. " 도대체 그를 감싸고 돌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는 우리의 적이야! 이용 해야할 대상일 뿐이라고! 고작 그런 녀석이 우리보다도 소중해? 나보다 도! 유메보다도! 그런 테라인이 더 마음에 걸리는 거야! " " 난……. " 테레이아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그제야 카이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맹목적으로 좋아하기에, 그녀와 유메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는 사 람이 없었기에……. " 어때! 지금 내 모습을 봐!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미쳐버린 내 모습을 보라고! 유메를 잊어버리고, 노아를 잊어버리고, 너마저도 잊어버린 내 모습을 보라고! " 그는 깨우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라의 주인에 빠져 자신과 유메를 잊어 버린 그녀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의 카이에게 서 테레이아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거의 맹세를 잊어버리고, 무엇이 소중한지를 잊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이토록 초라했던가. 이토록 무모했던가. 이토록……. ' 상처 밖에 주지 못했던가……. ' 유메와 카이를. 내 가족이었던 사람들에게 이런 몹쓸 짓을 해왔단 말인가. 그녀는 카이가 변했다고 생각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착한 동생 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틀렸다. 변한 것은 그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더욱 맹목적이고, 더 욱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 변한 것은 나. ' 모두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이기적인 생활을 해온 것은 다름 아닌……자신이었던 것이다. ' 아……. ' 그것을 깨닫자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이 그녀를 엄습해왔다. 눈물이 한 방 울 두 방울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무슨 말이라도 해봐, 리리스! 변명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어서! " 카이는 넋이 빠진 테레이아의 모습에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저 자존심 강한 그녀가 울고 있다. 언제나 당당하고 굽힐 줄 모르던 그녀가 ……, 자신의 우상이었던 그녀가 지금 한 남자의 일로……. ' 리리스, 넌 그렇게나……. ' 그렇게나 그 녀석을……. 카이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그는 테레이아에게서 고개를 돌려 파 괴를 자행하는 쿠사나기를 바라보았다. 힘에 도취되어 흉폭하게 날뛰는 그는 이미 파괴의 화신 그 자체였다. " ……돌이킬 수 없어. " 모든 것을 파괴하기 전까지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이미 늦었다고. " 카이는 공허한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무모한 행동을 후회했다. 그의 귓가로 는 연신 테레이아의 흐느낌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최초로 요르문간드의 육체를 구현시키는데 필요한 정을 끌어모은 것은 182 구역의 태풍 사건 때부터였다. 그때 쿠사나기는 네크로맨서를 도약시켜주는 조건으로 그에게서 정이 고갈된 자신의 육체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창생의 술을 부여 받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182구역의 사망자 수가 설명되지 않는다. 아무리 와프 입자의 수치를 변화시켜 차원 왜곡 현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창생의 술로 쿠사나기의 육신을 재구성한다 하더라도, 수 만명 분에 달하는 영자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영자 에너지는? 그때 모아두었던 정들이 지금 요르문간드의 본체를 구성하는데 남김없이 사 용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2구역의 희생된 민간인들 또한 그 정을 요르문 간드에게 바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노아에게 있어서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될 금기였다. 원로 회의 방침에도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삼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테라 인들은 약하거나 강하거나 모두 가이아와 정 신적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 의식의 힘이 줄어들수록 덩달아 가이아의 힘까지 약해지게 된다.옴팔로스의 열쇠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은 노아에게 있 어서 가이아의 쇠약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마정의 핵을 최초로 사용한 이는 리리스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 영자 변환기로 테라 인의 의식을 증폭시켜 보다 많은 정 을 추출,가이아를 상하게 하지 않고 자신들의 활동은 원활히 할 수 있는 수 단으로서만 사용해왔다. 그 수단이 변질된 것은 쿠사나기가 마정의 핵에 손을 대면서 부터였다. 그가 마정의 핵을 사용할 때마다 테라 인들은 수 십, 수 백, 수 천,아니 수 만명이 넘게 죽어나갔고 마침내는 가이아의 옴팔로스에까지 그 영향을 미칠 정도로 타격을 주게 되었다. 거기다 마정의 핵에 창생의 술까지 더해지자 의식의 힘은 형체를 지닐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차원의 도약 없이도 요르문간드의 본체가 삼차원에 구 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크크크크! 어디 있나, 피스 그레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있는가! 힘을 손에 넣은 내 모습이 똑똑히 보여! 그렇다면 당장 나와라! 내 앞에 나타나 그때처럼 내 도전을 받아보시지!] 하늘에서 내리던 산성 비는 어느새 눈이 되어 폐허가 된 대지를 새하얗게 뒤덮었다. 주위의 기온이 극도로 떨어지며 모든 것이 얼어붙고 있었다. 쿠사 나기는 얼음 동상이 된 사람들을 발로 짓밟아 부수며 포효했다. [나오란 말이다, 어서! 겁을 먹은 거냐? 이 내가 두려워진 거야! 언제나 자 신만만했던 네 놈의 태도는 어디로 간 거지? 결국 네 녀석도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소인배에 불과했나!] 후우우우우우 그때 쿠사나기의 머리 위로 몰려있던 검은 먹구름들이 회오리치며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괴상한 전조에 쿠사나기는 인상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 려다 보았다. 뭐지, 이건! 부우우우우웅 순간 구름이 퍼진 하늘로부터 거대한 기류가 지표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거대한 섬광은 쿠사나기를 포함한 반경 5킬로미터까지 퍼져나가다가 이윽고 보이지 않는 하나의 벽을 만들어냈다. 몬스터의 활동 범위를 제약하는 피스 메이커의 오라 배틀 필드가 전개된 것이다. [예의 공간 차단인가? 대기의 움직임이 멈췄군.] 무형의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쿠사나기의 목소리에서는 그다 지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거기에는 알 수 없는 여유까지 엿보 이고 있었다. 그때 쿠사나기의 뒤로부터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제멋대로 말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누가 겁을 먹었다는 거냐? " [……!] 그 목소리에 쿠사나기는 안광을 불태우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 보았 다. 그 곳에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피스 그레이,브루스 류가 무너진 빌 딩의 첨탑에 홀연히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그의 등장에 흥 분했는지 전신의 비늘을 꿈틀거렸다. [크크크, 크하하하하! 드디어 나타나셨군, 공주님!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 았지 뭐야!] " ……어째서 내가 공주님인 거지? " [옛날 이야기를 보면 으례히 용이 원하는 건 산처럼 쌓인 보물들과 가련한 공주님이라고 하잖아. 뭐, 너 같은 경우는 좀 기가 드센 공주님이지만.] " 호오라. 그럼 어디 기가 드센 공주님의 주먹을 받아볼테냐. " 브루스는 싸늘하게 대꾸하며 전신의 기를 끌어올렸다.그러자 회색의 오라가 소용돌이 치며 대기를 뒤흔들었다.그 모습에 쿠사나기는 감탄하며 어린 아이 처럼 기뻐했다. [굉장한데! 대기의 진동수가 올라가며 차원의 문마저 열 기세야! 과연 이 정도의 힘이라면 그동안 날 쓰러뜨린 것도 이상할 게 없겠군!] " ……. " 쿠사나기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브루스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저 칭 찬은 자신이 사용하는 힘의 경로가 보여야만 할 수 있는 칭찬인 것이다. 그 만큼 쿠사나기의 능력이 차원의 힘에 근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 아니, 잠깐……. ' 차원의 힘에 근접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브루스는 다급하게 소리지르려고 했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쿠사나기가 등 뒤의 날개를 움직였다. [그나저나 공주님을 호위할 기사단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촤촤촤촤촤촤촤 먹구름의 날개는 순식간에 여덟개로 갈라지면서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숨 어있던 피스 대원들을 공격했다. 브루스를 제외한 나머지 피스 대원들은 브 루스가 쿠사나기의 이목을 끌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하려고 했지만, 채 나서 기도 전에 발각되고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드래곤의 공간지각능력,드레이카닉 아이(Draconic Eye)였다.차 원의 힘에 근접한 쿠사나기는 자신의 공간 지각 범위 내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다. " 쳇! " 아파트 단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진우는 혀를 차며 재빨리 옆의 유리를 붙 잡고 가속을 전개했다. 예전 울트라맨을 기습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마 리가 쿠사나기의 다리를 슈팅스타와 단공으로 봉쇄하고, 유리와 시민이 보조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한 뒤 브루스와 가인이 마무리를 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상대가 너무도 빨리 눈치 채고 말았다. 스컹 스컹 스컹 진우의 뒤를 쫓아 수압 칼날이 놀이터의 기구들을 양단하며 뒤쫓아왔다. 유 리를 안고 뛰어야 하는 그로서는 마음껏 가속할 수 없었기에 간신히 칼날에 뒤처지지 않도록 달리는게 고작이었다. 무엇보다 쿠사나기는 진우보다 50배 에 달하는 체구이다 보니 그 속도는 느리더라도 리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 로 길었던 것이다. 휙 그때 진우 일행을 뒤쫓던 수압 칼날을 향해 수직으로 뛰어내리는 한 여인이 있었다. 붉은 AI슈츠의 피스 대원 성마리였다.그녀는 그대로 오라 소드의 검 날을 한계까지 늘여뜨려 수압 칼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하아아아앗! " 촤앙 하지만 오라 소드의 붉은 검날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가로질러 지면에 내리꽂혀야 했다. 수압 칼날은 마리의 검날에 닿기 직전 수증기로 변해 대기 속으로 숨어든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마리의 목적은 쿠사나기의 추적을 견 제하는 것이었기에, 견제에 성공하자 그녀는 재빨리 오라 소드를 거두며 쿠 사나기의 사정권 내에서 몸을 빼냈다. [후하핫! 이런 쥐새끼 같은 놈들!] 쿠사나기는 흥에 겨운지 코웃음까지 치며 대기 속의 수증기를 조절하여 수 십개의 수압 칼날들을 생성시켰다. 그 칼날들은 진우 일행의 도주로를 가로 막으며 사정없이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라아아아아 라아아아아 그때 진우 일행의 앞을 가로 막으며 피스 옐로우 한시민이 에코를 이용한 공명음을 전개했다. 그녀는 한번에 여러개의 공명음을 전개하여 일행을 완벽 히 수압 칼날들로부터 보호해냈다. [흠? 수압 칼날을 분쇄시킬 정도의 음파라니……. 꽤 상상력이 풍부하시군? 아무리 이미지 메이킹을 통한 구현화 능력이라도 물리 법칙 정도는 지켜 주시지?] " 제길! " 진우는 힘겹게 공명음을 전개하는 시민의 뒤에서 이를 갈았다. 그녀가 전개 한 음파의 벽을 쿠사나기의 수압 칼날들이 쉴 새 없이 강타하고 있었기에 도 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쿠사나기는 그렇게 일행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 들어 놓으며 브루스에게 미소지었다. [자, 잔재주는 부리지 말고 있는 힘껏 부딪혀 와라.언제까지 잔챙이들의 뒤 에서 구경만 할 셈이야?] " 후, 건방지기는. " 브루스는 코웃음을 치며 전사경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그가 밟고 있던 첨탑 이 강한 진각으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브루스는 무너지는 첨탑을 박차 며 쿠사나기의 정면을 향해 뛰어올랐다. " 잔챙이를 우습게 보지 말아라! " [……!] 그의 외침에서 이상한 기미를 느낀 쿠사나기는 안색을 굳히며 드레이카닉 아이를 전개했다. 그러고 보니 한 녀석이 보이지를 않았다! 패턴 블루의 오 라 능력자! 피스 그레이가 애지중지 감싸고 도는 오라의 주인! [……거기 있었나, 왕자님!] 쿠사나기는 자신의 세 블럭 뒤 건물 옥상에서 오라를 전개하고 있던 유가인 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가인이 오른손의 헤븐 스매쉬를 앞으로 내찔렀다. 天천 空공 主주 心심 拳권 적의 주심부터 파괴해내는 천공권의 최종 진화! 칠성권의 심경과도 맞먹는 그 절명기가 쿠사나기의 내부에서부터 오라의 토네이도들을 만들어냈다.가인 의 고뇌와는 상관 없이 이미 패턴 블루의 능력은 그 한계까지 다다라 있었기 에 그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적의 주심을 세 군데 이상 찾아내 열 개가 넘 는 토네이도들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투카카카카카칵 [크헉!] 쿠사나기의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이 십여 개의 토네이도들로 인해 내부부터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그 몸체가 워낙에 커서 절명하지는 않았지만 육체의 50퍼센트가 이번 공격으로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 대단해! 저번보다 더 강해졌군, 오라의 주인! ' 쿠사나기는 천공주심권의 위력에 경의를 표하며 재빨리 몸을 수복시켰다.자 신이 열세에 빠졌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의 동요는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기대감이 샘솟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아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 쿠사나기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며 자신의 전방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힘의 근원지를 돌아보았다. 천공주심권이 발동함과 동시에 그를 향해 뛰어오른 브루스가 어느새 쿠사나기의 코 앞까지 날아들고 있었다. [크크크, 크하하하하하!] 더! 더! [더 공격해봐! 더!] " 칠성권 녹존! " 검은 폭풍과도 같이 몸을 회전하며 끌어모은 전사경의 일격! 브루스의 주먹 이 정확히 쿠사나기의 미간을 꿰뚫고 지나갔다! 투아아아앙 폭발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경기의 충돌! 브루스는 그대로 쿠사나기의 머리를 박살내며 그 반대편의 건물로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섰다.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삼계에 들어설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기를 끌어올린 회심의 일격이었다. 천공주심권에 치명상을 입은 지금의 쿠사나기 라면 이 녹존으로도 충분히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가인은 그렇게 쿠사나기의 대파된 모습에 혀를 차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통하는……건가? 이런 괴물에게도……. ' 나의 힘은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마저도 죽여버릴 정도인가……. 가인은 천공주심권을 날린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쿠사나기를 쓰러뜨렸건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혐오에 가까운 자괴감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이런 대살육을 자행한, 이런 대파괴를 일으킨 괴물이 자신의 주먹 한 방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괴물을 쓰러뜨린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괴물보다 더한…… 괴물인 건가? ' 싫어……! ' 가인은 지긋이 헤븐스매쉬의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의 힘 은 필요 없었다. 이 이상 강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 었을 뿐이다. ' 지옥 대원수 유가인! 네 녀석은 어디까지 그 검은 마수를 뻗쳐야 만족을 하겠단 말이냐! ' ' 용서할 수 없어! 우리의 마리 양에게 손을 대는 너만은 절대! ' ' 유가인! 그래도! 그래도 너만은 끝까지 그 문란하기 짝이 없는 수컷으로 서의 정체성을 지킬 거라 믿었는데! ' ' 역시 최종병기! ' 함께 웃고, 함께 즐기며, 영원히 계속될 줄로만 알았던, 너무나도 당연했던 순간들. 하지만 그 순간들은 이제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영영 자신을 떠나버렸다. 힘을 얻었기에. 이 괴물과도 같은 힘을 얻어버렸기에. 그랬기에 모두가……. ' 모두가……떠나버렸다. ' 이제 그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커져가는 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려진 힘. 더 이상 자신이 없었다. 이 힘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이 이상 힘이 커져버렸다간 남아있는 사람들마저 언젠가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이다.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며 멀리하게 될 것이다. ' 싫어! ' 가인은 피투성이가 되어 폐허 속에 쓰러진 쿠사나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의 미래인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 괴물 이라 불리며 결국에는 홀로 죽어버린,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그런 쓸쓸한 최 후……. 그 최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싫어! 괴물따윈 싫어! 난 사람이야! 어쩌다가 우연히 이런 상황에 말려들 었지만…… 원래대로라면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을 텐데! ' 운이 없었을 뿐이야. 이런 힘 따위 원하지도 않았고 필요로 하지도 않았어! 난 그저 모두와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서 몬스터로부터 모두를 지켜 내겠다고 다짐했던 건데! 그래서 힘이 필요했던 건데!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 지키기 위해 필요로 했던 힘이 모두를 떠나게 만든다면……. ' 그런 힘은…… 필요 없어. 날 고립시키게 만드는 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모두가 떠나버리면, 모 두가 날 외면한다면 더 이상 지킨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 잃고 싶지 않아. ' 더 이상 남은 사람들마저 잃고 싶지는 않아! 우우우우우 그때 쓰러진 쿠사나기의 육체로부터 거대한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피투성 이가 된 검은 용염들 사이로 황색과 적색,백색의 용염들이 마치 타오르는 것 처럼 그 몸을 휘날리기 시작했다. 이미 사위일체가 된 쿠사나기에게 있어서 그는 레비아탄인 동시에 스머그인 동시에 파프니르였다.그 네 개의 심장은 서로를 보완해주며 수복시키기에 하 나가 움직임을 멈추더라도 나머지 세 개의 활동으로 평소의 주기를 회복해내 는 것이다. " 제길! 성가신 녀석이로군! " 네 개의 심장을 동시에 파괴해야만 활동을 멈추는 건가! 브루스는 재차 녹존을 전개할 준비를 하며 가인에게 소리쳤다. " 애송이! 뭘 하고 있는 거냐! 어서 천공주심권을 사용해! 녀석이 재생하지 못하도록 막으란 말이다! " " 아……아, 예! " 가인은 당황하며 서둘러 헤븐 스매쉬를 들어올렸지만 이미 쿠사나기는 상처 를 완전히 회복시킨 뒤였다. 그 거구의 생명체가 몸을 일으키자 도시 전체가 지진파로 인해 뒤흔들렸다. 그 압도적인 거대함에 숨 막히는 답답함마저 느껴진다. ' 조, 좋아……. 한번 더……! ' 가인은 떨리는 마음을 바로 잡으며 오라를 끌어 모았다.하지만 자신의 힘을 부정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자꾸만 패턴 블루의 힘을 억누르고 있었다. 천공 주심권은 강대한 오라를 필요로 하는 만큼 오라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사용 하기가 힘든 기술이다. 그렇게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쿠사나기의 입으로부터 강한 중력장의 변화 가 발생했다. 위이이이이이잉 대기의 기압이 낮아지며 쿠사나기의 주변에 널려있던 폐허들이 바스러져갔 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압력이 콘크리트 더미와 철근들을 가루 로 만들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중력장의 집중에 피스 대원들의 AI 슈츠가 착용자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동으로 독립된 중력장들을 만들어냈다. 그 런 대원들과는 달리 AI슈츠를 착용하지 않은 브루스는 흔들리는 대기 속에서 도 용케 몸을 가누며 일행에게 소리쳤다. " 늦었어! 살고 싶으면 막을 생각하지 말고 모두 피햇! " " ……! " 드카아아아앙! 순간 지축을 울리는 폭음! 그리고 쿠사나기의 입으로부터 모인 중력장들이 연쇄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며 하나의 중력파를 만들어냈다. 그 중력파는 쿠사 나기의 거구가 뒤로 밀려날 정도로 강한 반동을 일으키며 앞으로 터져나갔다. 콰지지지지직 무형의 중력파는 마치 공간을 집어 삼키는 포식자처럼 모든 것을 파괴해갔 다. 그것은 브루스의 극대소멸권 탐랑과도 맞먹을 정도의 아포칼립스 제너레 이터였다. 피스 대원들은 중력장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전신의 피부가 찢어 지는듯한 공간 마찰을 느꼈다. 그 마찰에 주위의 대기가 타버리기라도 했는 지 숨을 내쉬자 매캐한 탄내가 기도를 가득 채웠다. 치이이이잉 그때 가인 일행의 AI슈츠가 크게 박동하며 빛을 발했다.그들의 오라와 연결 되어 있던 뭔가가 강한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파괴되고 있었다. 진우는 반 사적으로 자신들의 뒤를 돌아보며 신음했다. " 맙소사…….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 오라 배틀 필드가 쿠사나기의 중력파로 인해 산산히 흩어지고 있었다.그 증 거로 ABF가 펼쳐져 있을 전방 5킬로미터 이내의 건물들이 거대한 원을 그리 며 차례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계속되는 지진파에 정신을 하나도 차릴 수가 없었다. 폐허더미가 휩쓸려 오 는 것을 시민이 공명음으로 막아내며 가인이 있을 방향을 돌아보았다. 자신 들은 그나마 네 명이 함께 있었기에 서로의 오라를 감응시켜 중력파의 여파 를 막아냈다지만, 혼자서 중력파의 발생지에 있었을 가인은……. 마리도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창백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 가인! " 다행스럽게도 그는 무사했다. 강해진 패턴 블루의 힘이 ABF마저도 부숴버리 는 중력파에게서 그의 몸을 지켜준 것이다. 하지만 금새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것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 오빠! " 유리는 가인이 쿠사나기의 면전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피할 생각도 하 지 않자 비명을 질렀다. 브루스는 혀를 차며 그를 향해 신속히 몸을 날렸다. 저 바보 녀석이! 죽고 싶어 환장한 거냐! 위이이이이잉 그때 다시 한번 쿠사나기의 입으로부터 중력장의 변화가 일어났다.이번에는 정확히 가인을 표적으로 삼은 공격이었다. 브루스가 그를 구하려고 뛰쳐나가 자 기다렸다는듯이 가인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후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핫!] 지키려고 했던 이가 눈 앞에서 사라진다. 자신은 무력하게 그것을 지켜봐야 만 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무 것도! 쿠사나기는 희열을 느꼈다. 가인이 죽었을 때 브루스가 보여줄 분노와 절망, 비탄과 슬픔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극상의 카타르시스가 그를 지배했다. [카카카카카캇!] 울어라! 마음껏 슬퍼해라! 마음껏 자괴해! 그것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기 쁨을 주게 될테니! 드카아아아아앙 그리고 터져나오는 중력파! 그 강맹한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가 브루스의 곁을 지나쳐 가인을 향해 날아들었다.브루스는 중력파의 공간 마찰이 만들어 내는 후폭풍에 사정 없이 뒤로 튕겨나갔다. " 크핫! " 쩍 콘크리트 벽에 볼 품 없이 처박히는 육체. 그와 동시에 브루스의 몸이 손끝 에서부터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간접적으로나마 아포칼립스 제너레이 터에 충격을 입은 그의 육체가 손상된 선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반사적으로 삼계 사이에 진입한 것이다. " 트아아아앗! " 심신이 지친 가인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르며 날아드는 중력파를 향 해 있는 힘껏 오라 쉴드를 전개했다. 그러자 지금껏 전개해왔던 쉴드 중 비 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쉴드가 생성되었다. 그토록 사용하려고 해도 사용할 수 없었던 질풍의 힘! 질풍의 벽이었다! 예전 와이번의 공격마저 받아넘길 수 있었던 그 철벽의 방어가 지금 유가인 의 앞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아마도 압도적인 위기에 처하자 그의 생존 본능 이 패턴 블루의 힘을 최대로 끌어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트트트트트트 오라 쉴드로 보호받는 가인의 주변이 급속도로 일그러지며 압축되기 시작했 다. 그 현세를 초월한 대 파괴에 맞서는 질풍의 벽은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 크헉, 흐헉, 헉, 헉! " 가인은 급속도로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거칠게 신음을 흘렸다. 마치 심 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오라 쉴드 를 풀어버렸다간 쿠사나기의 중력파가 흔적도 없이 그를 소멸시킬 것이다. 우우우우우우 주위의 중력이 급속도로 내려가자 가인의 주변에서 다운 버스터 현상이 일 어났다. 지면이 굉음을 내며 가라앉자 가인도 한쪽 무릎을 꿇게 되었다.지독 한 중력의 압박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실제로도 가인의 두 눈에서는 모세 혈관이 터졌는지 시뻘겋게 핏물이 고이고 있었다. 악다문 이빨 사이로도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압력에 내장 기관이 상했다는 증거였다. " 유가인! " " 오빠! " 중력파의 범위 밖에서 마리와 유리가 가인을 목놓아 부르짖었지만, 그 소리 는 가인에게 닿지 않았다.시민과 진우는 속수무책으로 그가 중력파에 깔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 안돼! 가인 씨! " " 빌어먹을! 사부님! " 진우는 자신의 사부를 간곡한 눈빛으로 돌아보았지만, 이미 인계를 벗어난 브루스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다 중력장의 대치가 한계에 다다르면 차원 왜곡 현상이 발생하여 다운 버스터 현상과 같은 공간 파괴가 일어난다. 그 공간 파괴는 극대소멸권과 같은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이기에 차원에 존재하는 생명체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 애송이……! " 브루스는 최초로 절망에 가까운 무력감을 느꼈다. 완벽히 자신의 능력을 벗 어난 이 상황에 비애감마저 느꼈다. 중력파에 피를 토하는 저 녀석을 지켜보기만 해야하다니! " 으, 으으으으, 아아아아아아! "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다. 중력파를 막고 있던 질풍의 벽이 새하얗게 백열하며 소용돌이쳤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단지 한가지 생각 밖 에 할 수 없었다. ' 살고 싶어! ' 가인은 그 하나만을 바랐다. ' 죽고 싶지 않아! '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살고 싶어! " ……! " 하지만 그런 바램과는 달리 힘이 빠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탈진! 콰지지지지직 그렇게 오라 쉴드가 사라져버리자 지금껏 막아내던 중력파가 한꺼번에 가인 을 뒤덮었다. 붉게 물든 세상 속으로 수 많은 비명들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무릎까지 느껴지는 질척거림. 붉은 강이었다. 그 강속에서 셀 수도 없이 많 은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무언가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가인은 망연자실하게 그 광경을 응시하다가 곧 자신의 옆으로 스쳐 지나가 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저……. ' 퍼걱 하지만 사람은 그의 손이 닿자마자 폭죽처럼 터져나갔다.튀어오르는 육편과 피의 폭발.가인은 그제서야 이 붉은 강이 모두 사람들의 피로 이루어져 있다 는 걸 깨달았다. 붉은색을 피로 인식하게 되자,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피비 린내가 한꺼번에 후각을 자극시켰다. ' 으, 아아……. ' 가인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토할 것 만 같았다. 자신이 피 웅덩이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끝이 보 이지 않는 피의 강 밖에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 뭐야……. 어째서 이런……. 왜 내가 이런 곳에……. ' 가인은 신음처럼 중얼거리다가 도망치는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모두가 가인에게서 등을 돌린채 강 밖으로 뜀박질 치고 있었다. 가인은 영문 을 묻기 위해 허겁지겁 그들의 뒤를 쫓았다. ' 이, 이봐요! 잠시만요! 잠시만! ' ' 끄아아아악! ' ' 끼아악! ' 혼신의 힘을 다해 내달리는 사람들.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 중 한 사람 의 어깨를 붙잡았다.하지만 그 행위는 앞의 상황을 반복하는 꼴이 되고 말았 다. 퍼억 퍽 붙잡히는 족족 사람들은 피를 뿌리며 피의 강 속으로 쓰러져 갔다. 가인은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며 치를 떨었다. 왜 이러는 거지!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왜 사람들이 죽어버리는 거냐고! ' 괴물! 괴물이다! ' ' 사람 살려! ' 가인은 이를 악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이제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 내게서……도망치는 거야? ' 그런 거야? 가인은 지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계속되는 피 냄새에 숨쉬는 것조차 곤란해졌다. 가인은 금새라도 질식할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피의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마치 거울처럼 모든 것 을 반사해내고 있었다. 가인은 그 피의 거울 속에서 자신의 투영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그곳에는 전신이 털로 뒤덮인 흉칙한 짐승이 한 마리 있었다. 그 짐승은 피 에 젖은 손을 들어 죄인처럼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가인은 그 짐승의 얼굴 을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수면으로 가까이 했다. 짐승의 손가락 사이로 드러나는 이목구비. 그 이목구비는 다름아닌……. ' ……나? ' 촤악 순간 수면에 비친 짐승의 손이 밖으로 튀어나와 가인의 얼굴을 피 속으로 잡아 당겼다. " 커억! " 가인은 거센 기침을 토해내며 물 속에 잠겨있던 몸을 일으켰다.전신을 무언 가가 옭아매고 있었다. 거기다 어둠 속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첨벙거리는 물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기분 나쁜 질척거림이 방금 전의 꿈을 연상 시켰다. " 허억, 허억, 헉, 헉! " 가인은 두눈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터뜨렸다. 알 수 없는 격 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며 그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 윽! " 순간 귀를 찌르는듯한 이명과 함께 가인의 머리 속으로 수 많은 영상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전신을 억누르던 중력파의 압박. 그 속에서 안간 힘 을 다해 버텨내던 자신. ……그리고 폭발. ' 나……살아있는 건가? ' 가인은 믿을 수 없다는듯 몇번이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어 루만졌다. 물 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인지, 식은땀을 흘렸기 때문인지 오한으 로 몸이 떨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어느 정도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주변을 파악할 여유가 생겼다. " 여긴……어디지? " 어두운 방 안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검은 물로 가득 찬 수조가 하나 놓여있 었고,그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었다.전신에는 가느다란 링겔들이 꽂혀 있었 고 입에는 산소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 ' 그 곳의 집중 치료실인듯 했다.PET용액을 이용한 전신 포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장소였기에 종종 넝마가 된 가인이 신세를 졌던 곳이기도 했다. 가인은 숨 쉬는데 불편한 산소 마스크를 벗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 아니, 그것보다도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이번에야말로 꼼짝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인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살피기 위해 인상을 찡그렸다. 희 미한 생명 유지 장치의 불빛 만이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 불빛에 의지 해서 방 안을 살피던 중 입구의 윤곽을 가리는 한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 누구지? ' 누군가 벽에 등을 기댄채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그림자. 아 마도 여자인 것 같았다. 그녀는 가인이 자신을 경계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일어났어, 가인? " 이 목소리는……. " 시더? " 희미한 불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다름 아닌 피스메이커의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였다. 그녀가 가인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자 한층 더 그 모 습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낡은 연구복 차림에 돋보기를 쓴 모습. 가인은 그제서야 긴장을 풀며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 뭐야. 있었으면 인기척이라도 낼 것이지. 갑자기 말을 거니까 깜짝 놀랐 잖아? " " 음? 그랬던가. 미안하게 됐어. " 시더는 평소와는 달리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 반 응이 묘하게 무거웠던지라 가인은 웃음을 거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아,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전투 는? 시민 씨나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있어? " " 피스 레드와 피스 옐로우, 그린과 핑크는 다들 무사해. 오히려 가인, 너 가 가장 심하게 다쳤던 거야. 그들은 지금 네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 " 그, 그래? " 모두 무사했었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 가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쓰러진 자신을 그들이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하하, 잘도 그 괴물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군. ' 응? 잠깐. ' 가인은 순간, 시더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스……그레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어? " 브루스는? 브루스도 시민 씨들과 함께 있는 거야? " "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인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시더를 응시하며 점점 불길함에 빠졌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시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응? 시더는 그런 가인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 ……옷 걸치고 이리로 와. 보여줄게 있어. " " 뭐? " 시더는 그 말을 끝으로 냉정히 몸을 돌려 집중 치료실의 데스크 톱 컴퓨터 쪽으로 걸어갔다.가인은 그 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엉거주춤 수조관에서 몸 을 일으켰다. 거치적 거리는 링겔들을 뽑아내자 바늘이 꽂혀 있던 자리가 급 속도로 아물어져 갔다. 세포분열촉진제에 맞먹는 PET용액의 효과였다. " 보여줄게 있다니……. 뭐가? " 가인은 치료실 한 켠에 놓여있던 환자복을 걸쳐 입으며 데스크 톱 컴퓨터로 다가갔다. 시더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기며 하드 안의 폴더들을 뒤지고 있 었다. " 네가 집중 치료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은지 벌써 여덟 시간이나 지났어. " 시더는 그렇게 말하며 찾고 있던 파일을 마우스로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의 중앙으로 동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 그리고 이건 그 여덟 시간 전의 영상이야. " " ……! " 《유가인!》 폐허가 된 12구역의 모습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그 흔들림 사이로 처절 한 진우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진다. 아무래도 지금의 영상은 피스 그린의 AI 헬맷에 장착된 소형 카메라로부터 전송되고 있는 듯 했다. 《사부님! 녀석이, 녀석이!》 《가인 씨!》 《오빠!》 응축된 중력파의 후폭풍을 견뎌내며 대원들이 저마다 가인을 목놓아 부르고 있었다. 마리는 날아드는 폐허 더미를 닥치는데로 베어내며 가인이 있는 방 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우가 혀를 차며 몸을 움직 였다. 《가인! 무사하면 대답해! 어서!》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는 마리의 목소리. 피어나는 연기를 걷어내며 정 신없이 주위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냉정하던 피스 레드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리는 마리의 곁에서 필사적으로 가인의 마음 속을 향해 목소리를 던지며 안절부절했다. 《제발 대답해! 제발!》 하지만 조금도 가인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12구역의 절반을 날려 버리는 위력의 중력파. 그것을 정통으로 얻어맞고서도 그가 무사하리라는 생 각은 할 수 없었다. 아마 흔적도 없이 소멸했던가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던 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포칼립스의 폐허 속에서 살아있는 생물체란 존 재하지 않는다. 《가인 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인을 찾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생사 와는 관계 없었다. 그는 당연히 살아있어야 했다.절대로 죽을 리가 없다. 절 대로 죽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찾아야 한다. 반드시 그를 찾아서! 찾아서 다 함께 돌아가 야 한다! 반드시! 《여기다!》 그때 연기 속에서 그들을 부르는 브루스의 목소리가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전신이 투명해진 브루스가 중력파로 생성된 크레이터의 한 가 운데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 밑으로 흙더미에 몸이 반쯤 파묻힌 가인이 있었다! 《가인!》 크레이터의 암벽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오며 마리가 가인을 향해 달려갔다. 브루스는 삼계로 접어든 상태였기에 직접 가인에게 손을 대지 못하는지 답답 한 표정으로 일행을 기다렸다. 《가인! 살아있는 거냐? 응? 정신 차려!》 마리는 가인을 끌어 안으며 그의 AI헬맷을 해제시켰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유리와 시민이 다급히 그의 상태를 물었다. 《마리 양! 가인 씨는 괜찮아요?》 《오빠! 눈 좀 떠봐! 제발!》 마리는 애써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재빨리 가인의 손목에 달린 무전기를 조작했다. 그러자 AI슈츠의 센서로 착용자의 신진대사를 측정하는 수치가 액정으로 떠올랐다.평균치보다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분명 생명에 위 협을 줄 정도의 저하는 아니었다. 진우는 안도하는 한편 믿을 수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하, 하하. 대단해. 그 속에서도 살아남다니……. 정말……대단해!》 어떻게 중력파의 충격을 피해낼 수 있었던 거지? 이건 경악을 넘어서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그의 곁에서 가인을 내려다보 던 브루스가 희미하게 이를 드러내며 어깨를 흔들었다. 《아포칼립스조차 견뎌냈단 말이지……. 후후후, 하하하하!》 갑작스레 소리내 웃는 그의 모습에 일행은 영문을 몰라 브루스를 돌아 보았 다. 그는 진정으로 기쁜듯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그 를 불렀다. 《사, 사부님?》 《더 없이 확실한 증거야! 이 놈은 진짜다! 좋아! 목숨을 걸어볼만 하겠어!》 브루스는 흥분한듯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못하며 모두에게 소리쳤다. 《네 녀석들은 이 놈을 데리고 유레카로 돌아가라! 사령관의 후퇴 명령은 진작에 들었겠지?》 《예? 하, 하지만!》 일행은 당황하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난데 없이 후퇴하라니.그것도 저 괴물 을 놔두고서? 아니,그 이전에 쿠사나기가 순순히 자신들이 도망치는 것을 지 켜보고 있을까? 브루스는 그들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저편에서 자신들을 찾고 있는 쿠사나기 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는 두 번까지가 한계였을 거다.삼계의 균형 을 깨뜨리는 극대 소멸기를 그렇게 자주 사용할 수는 없을 터. 아마 지금 의 것으로 저번 태풍 사건 때부터 모아두었던 정들은 바닥을 드러냈을 거 야.》 《그렇지만 저 녀석을 저대로 방치시켜뒀다간 또 다른 피해가……. 》 《그래서 지금 내가 남겠다고 하는 것 아니냐?》 《……!》 순간 일행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브루스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 서도 태연하게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이 유레카로 돌아갈 때쯤 사령관이 저 괴물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 해놓고 있을 거다. 시기상조지만 어쩔 수 없어. 거인을 움직이려면 너희 들 중 누구 하나 빠져서는 안된다. 특히 애송이는 더더욱.》 《하지만 사부님! 그래서 지금 혼자 여기에 남으시겠다는 겁니까! 아무리 사부님이라고 해도 그건 무리에요! 사부님도 저 괴물을 상대할 방법을 찾 지 못하셨기에 우리를 유레카로 돌려 보내려는 것 아닙니까!》 《…….》 진우의 항의에 브루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리와 시민도 가인을 부축하 며 소리쳤다. 《당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목숨을 연명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건 저번 터널 때 한번이면 충분해요! 만약 저 괴물을 쓰러뜨릴 방법이 있다면 우리도 힘을 합치겠습니다!》 《그래요, 브루스 님! 다시는 브루스 님을 홀로 두고 가지 않겠어요! 돌아 간다면 모두 함께 돌아가는 거에요!》 유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말했잖아? 그런 말은 함부로 입에 담는게 아니라고. 브루스가 우리 를 버리지 않았듯이 우리도 브루스를 버리지 않을 거야.》 《설마 저에게 사부를 내치는 제자가 되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진우는 씨익 웃으며 주먹을 쥐어보였다.브루스는 그런 일행을 아무 말 없이 바라 보다가 이내 피식 미소지었다. 《흥. 누가 네 녀석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거냐? 웃기지 말아라.》 《예?》 일행은 어리둥절해진 표정으로 할 말을 잊었다. 브루스는 여전히 그들을 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여기에 있으면 거추장스러워.귀찮아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한 단 말이다. 알아듣겠냐? 네놈들을 지키면서 까지 저 괴물 놈을 상대하는 건 여러모로 피곤하다고.》 《…….》 마리와 유리는 변함 없는 브루스의 태도에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저 인간을 자신들이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 넘은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 만 진우와 시민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풀지 않으며 그를 응시했다. 브 루스는 그 근심 어린 시선들을 향해 혀를 찼다. 《정 그렇게 내가 걱정된다면 얼른 돌아갔다 오면 될 일이지 뭘 그리들 수 선이야? 설마 그 사이에 내가 녀석에게 당할 것 같으냐! 그리고 건방지게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거기까지 외치던 그는 마리와 시민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가인을 돌아보았 다. 브루스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진우에게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남는 건…… 애송이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서다.》 보여줄 것? 모두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브루스는 가인을 뒤로 하며 저편에서 자신들을 찾고 있는 쿠사나기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샌가 인 계로 돌아온 그의 육체는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시민과 마리는 다급히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옆의 진우가 그녀들을 제지했 다. 진우는 결단을 내렸는지 단호한 목소리로 일행에게 소리쳤다. 《모두……퇴각합시다! 몬스터의 엄호는 피스 그레이에게 맡깁니다!》 《진우 씨!》 마리는 깜짝 놀라 항의했지만 진우는 그녀에게서 가인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퇴각해서……최대한 빨리 돌아오는 겁니다. 최대한 빨리…….》 《…….》 진우의 표정에 서린 비통함을 읽은 마리는 힘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시민도 마음을 굳혔는지 유리의 손을 붙잡고 몸을 움직였다. 진우는 가인을 들쳐 업 으며 자신의 사부를 돌아보았다. 뒤 돌아 있어서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분 명 그의 얼굴은 웃고 있으리라. 《애송아…….》 그때 모두의 귀로 브루스의 목소리가 희미하지만 똑똑하게 들려왔다. 《잘 보고 있어라.》 우오오오오오 쿠사나기가 브루스를 발견했는지 괴성을 터뜨리며 날개를 휘둘렀다. 그러자 반경 1킬로미터 내의 잔해들이 폭발하듯 휘날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돌풍 속에서도 일행은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브루스의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거다!》 " ……. " 20분에 가까운 동영상이 끝났다. 시더는 동영상 프로그램의 위로 폴더 안 에 저장된 사진 파일을 하나 펼쳐냈다. " 그리고 이건 현재 12구역의 영상. 피스 대원들이 퇴각하고 나서 줄곧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 사진에는 크레이터가 생성된 도심의 한 가운데로 마치 토네이도와 같은 거 대한 용권풍(龍捲風)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늘의 먹구름이 용권풍을 중심으 로 모여 들었으며, 그 사이 사이로 기이하게도 물체들이 비틀려 있었다. " 차원 왜곡 현상이야. 저 용권풍은 왜곡 현상이 물질적으로 구현화된 하 나의 아공간(亞空間)이지. 아마 저 용오름 안에는 삼차원과는 다른 하나 의 독립된 차원이 생성되어 있을 거야. " 시더는 흥미롭다는듯 모니터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 바로 이 아공간 속에 있는 거지, 요르문간드와 브루스 류는. 솔직히 패 턴 그레이의 힘에는 놀랐어.인체의 기를 이용하는 경기공의 증폭이 전부 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공간 왜곡을 야기시키는 시공의 꼬임, 차원 진 동이 그 힘의 정체였다니……. 하긴 차원 진동을 사용하지 않고서야 일 개 삼차원의 인간이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를 다룰 리는 없었겠지만. 저 아공간은 패턴 그레이가 전개하는 공간의 휘어짐인 거야. 덕분에 그는 D 타입의 요르문간드를 붙잡아둘 수 있었고 지금까지 피해를 확산시키지 않고 있었지. 저 아공간 속에서 요르문간드를 상대로 잘 버텨내고 있다 는 거야. " 거기까지 말하던 시더는 슬쩍 뒤의 가인을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가인은 그녀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서 모니터의 동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모니터의 동영상은 브루스의 뒷모습에서 멈춰져 있었다. " ……가인? " 시더는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조심스레 입을 다물었다. 가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가는 빛의 궤적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울고 있었다. 그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며 브루스의 뒷모 습을 바라보고만 보았다. 그의 시야에는 여전히 앞의 영상들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 애송아……. '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 잘 보고 있어라. '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거다! '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가인은 그런 브루스를 향해 천천히 미소지었 다. 화면에 보이는 브루스의 등이 그렇게도 커보일 수가 없었다. ' 저것이……내가 목표로 삼았던 남자다. ' 저것이 바로 내가 뒤쫓고 있던 모습이었다. 어째서 그는 저리도 당당할 수 가 있을까? 어째서 고민도, 걱정도, 의심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 시킬 수 있는 거지? 어째서 그는 저리도……. ' 망설이지마. ' 화면 속의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내가 결심했던 각오다. 내가 지키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 그러니까 후회하지마라. 당당하게 자신을 가져라. 그리고 모두에게 보여줘! ' 자신의…… 신념을! ' 가인은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하지만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끝까지 자신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브루스의 모습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울 수 가 없었다. 나는 저런 남자를 목표로 삼고 있었던 거다. 그가 바로 자신의 스승이었던 거다.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이보다 더 자신을 생각해주 는 이가 또 어디있을까? ' 나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어. '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매번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왔으면서 어째서 그가 보여주기 전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던 걸까. ' 괴물. ' 모두에게 따돌림 받으며, 모두에게 외면받을 때도,자신은 그들의 시선을 신 경쓰기에 급급했다.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 지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 친구들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던 것도……. ' 그들을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마음 한켠에서 그들에게 인정 받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모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 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던 거다. ' 이기적일 뿐이었어. ' 너무나도 이기적이었던 거야. 남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주제에, 남을 위해 살겠다고 각오했던 주제에 이런 이기심 하나 떨쳐내지를 못하다니. 휘둘리고 만 있었다니. ' 지킨다는 것은 바로 나. '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지키는 것이다. 누구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누군가 가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다. 지키겠다고 다짐한 것도 나.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나. 결국 신경써야 했던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남들에게 어떻게 보 이건, 괴물 취급을 당하건 그런 건 상관 없었다.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신 념을 관철시켜 나가는 것.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것. 망설이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지킨다 라는 것이었다! ' 똑똑히 봤어요, 브루스. 똑똑히……. 당신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을 두 눈 똑똑히 뜨고 확인했다고요. ' 어째서 나는 매번 이렇게 느린 걸까? 왜 누가 가르쳐주기 전에는 깨닫지도 못하는 걸까?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어도! 조금만 더 눈치가 빨랐더라도! 그 랬더라면! ' 아직……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는데……. ' 가인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쿠사나기와 브루스가 있을 아공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저 거대한 용권풍 속에서 그는 지금도 싸우고 있을 것이다.자신 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모두를 지키기 위해 그 거대한 괴물과 끊임 없이 싸 우고 있을 것이다. 시더는 그런 가인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어떻게 할 거야, 가인? " 그 질문에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아니,적어도 가인은 한 가지 대답 밖에 알지 못했다. " ……가겠어. " 고개를 들어 시더를 바라본 그는 웃고 있었다. 눈물로 붉게 물든 눈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 그가 우리를 지켜줬으니까 이번에는 우리가 그를 지켜줘야 돼. " 저 용권풍 속에서 브루스는 기다리고 있다.자신들이 돌아오기를. 마음의 결 정을 내린 그가 찾아와주기를 바라고 있다. " 반드시 브루스를 구해내고 말겠어! " " 좋았어! 바로 그 자세야! " 시더는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인을 향해 손을 뻗으며 묘한 위압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 힘을 원한다면 주겠어! 저 요르문간드를 쓰러뜨릴, 자신의 결심마저 관철 시킬 수 있는 힘을! 하지만 그 주체가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힘은 아무 런 위력도 발휘하지 못해! 마음이 없는 힘은 방황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넌 결단을 내렸어! 힘을 얻을 자격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 " 시, 시더? " 아까부터 웬 알 수 없는 소리들을……. 가인은 시더에게서 이상함을 느끼며 몸을 물렸다. 집중 치료실에서 깨어났 을 때부터 뭔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그녀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시더는 그 런 가인의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코 앞까지 자신의 얼굴을 들이 밀었다. " 흐음. 역시 이 아이가 좋아할 만한 남자야. 시더도 꽤 눈이 높은 걸? " " ……? " 그러니까 대체 무슨 소리냐고! 가인은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빛내는 시더는 왠지 모를 낯설음까지 풍기고 있었다. 삑 그때 신호음과 함께 집중 치료실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 닥터였다. 그는 가인이 서있는 모습을 보자 기뻐하며 다가왔다. " 이런, 일어났군요, 가인 군. 몸의 상태는 진작에 회복되었지만 정작 의식 을 차리지 못해 뇌에 이상이 있는 걸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 그렇게 가인의 상태를 말해주던 닥터는 곧 그의 옆에 시더가 서있는 걸 발 견하자 뒷 말을 흐렸다. 그는 덜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조심스럽게 그 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 ……어디 계셨나 했더니 여기에 계셨군요. 진 사령관 님이 아까부터 찾고 계십니다. " " 아, 그래요? 그보다 아더의 P.E.T 용액 주입은 완료 되었나요? " " 예. 19시 30분까지 모든 정비가 끝날 예정입니다. " " 흐음. 좋아요.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죠. " 가인은 시더와 닥터의 대화를 들으며 여전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엉 거주춤 서있기만 했다. 평소 시더를 대하던 닥터의 모습이 아니었다. 왜 저 렇게 낯선 사람 대하듯 하시는 거지? 시더는 닥터의 보고가 끝나자 서둘러 작전 본부실로 향했다. 그렇게 막 출 입문을 나서려는 도중 그녀는 뭔가가 생각났는지 가인을 돌아 보았다. " 참, 그 전에 유가인. 넌 잠시 나를 따라와줘야겠어. 닥터도 동행하세요. " " ……어? " 그 말을 끝으로 훵하니 밖으로 나가버리는 시더를 가인은 멍청한 표정으로 응시해야만 했다. 그때 닥터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 자, 이만 가보도록 하죠, 가인 군. 성격이 화통하신 분이니, 늦장이라도 부렸다간 대번에 불벼락이 떨어질 겁니다. " " 다, 닥터? 잠깐만요. 도대체 뭐에요, 아까부터? 시더는 또 왜 저러는 거 에요? " " 아, 가인 군은 아직 모르고 있었군요.선생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나 요? " 닥터는 의외라는듯 안경을 쓸어올리다가 가인이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 자 이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 지금 저 분은 시더 웰리스가 아닌 노엘 웰리스. " 그는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 믿기지는 않겠지만……. 시더 양의 조모……되십니다. " ' 시더! ' 붉게 타오르는 LA의 연구소. 그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속에 한 소녀가 쓰러 져 있었다. 이제 막 다섯 살 정도된듯한 여자아이는 앞의 폭발 때 파편을 얻 어맞았는지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노엘은 전신이 그을린 상태에서도 자신의 손녀를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 시더! 정신차려! 눈을 떠봐! ' 나때문이야! 나때문이다! 내 욕심때문에 이 애꿎은 아이까지 말려들게 하고 말았어! 그녀는 끝없이 스스로를 자책하며 시더의 머리를 지혈했다. 하지만 출혈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상처를 누르고 있어봤자 상태만 악화시킬 뿐. ' 반드시 살려내겠어! ' 노엘은 절망하지 않으며 시더의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해서든 머 리의 상처를 치료해야만 했다. 파편이 뇌를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구해낼 여 지는 남아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연구시설에는 앞의 실험 때 사용했던 약 품들을 모아놓은 창고가 있었다. 방호벽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었을테니,잘 만 하면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아……. ' 그러나 그녀의 바램과는 달리, 창고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위층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콘크리트 더미가 밑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노엘은 허겁지겁 돌 더미를 헤치며 그나마 쓸 수 있는 약품들을 찾았다. ' 있어! ' 다행스럽게도 부숴진 라커 속에서 비상용 포션 상자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 다. PET 용액을 정제한 실험 단계의 약품이었지만, 그 효과는 총상도 단시간 에 아물게 할 정도로 탁월했다. 푹 노엘은 상자 속에서 고압주사기 형식의 포션을 꺼내 시더에게 주사했다.그 러자 시더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던 출혈이 멈추며 거짓말처럼 상처가 아 물어져갔다. 노엘은 시더의 상처에 균이 감염되지 않도록 항생제를 투여하 며 손목의 시계를 바라 보았다. 사고가 일어난지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케루빔에서 사고 소식을 접한 제이스컬이 구조팀을 LA로 파견했을 것이다. ' 하지만……늦어. '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간 시더가 죽어버릴 것이다. 포션으로 상처는 치료했 다고 하더라도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거기다 다친 부위가 머리라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재생력을 30퍼센트 이상 올려주는 포션이라도 만능은 아니었기에 신경계를 통합하는 최고의 중추, 뇌와 같은 기관은 완벽한 재생 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거기다 머리 속의 파편마저도 제대로 제거하질 못했으니……. 뇌사일 가능 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 방법이…….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텨낼 수 있는 방법이……. ' 뇌파가 정지하기 전까지 시더의 정신을 붙들고 있어야만 했다.흔히들 치명 상을 입었을 때 죽게되는 가장 큰 이유는 고통으로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의식이 있어야 생존욕도 생기며, 생존욕이 생겨야 몸의 기능도 멈추지를 않는다. ' 마이네르트 기저핵을 전기로 자극시키려고 해도 도구가 없으니……. ' 하다못해 뇌전위파를 증폭시킬 앰프(amplifier)라도 있었으면……. 노엘은 시더의 뇌를 깨우기 위해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한 가 지 방법에 생각이 미쳤다. ' 아, 혹시 이거라면! ' 노엘은 자신의 품에서 검은색의 금속 조각을 꺼내들었다.그것은 그녀가 스 멜팅 마스터로서 처음으로 제련해낸 오리하르콘 조각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시더의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대며 의식을 집중했다. ' 정신감응 금속 오리하르콘이라면……. ' 미약하나마 노엘의 정신에 오리하르콘이 반응한다면 물리 접촉을 통한 가 벼운 의식 전달도 가능해질 것이다. 아니, 가능해야만 한다. 갑작스레 떠오 른 방법이지만 이론 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오리하르콘이 인간의 정신을 물질적으로 구현화 시킬 수 있다면,정신적으로 구현화 시키는 건 더더욱 간 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남은 문제는 오라 능력자들에게만 반응하는 오리하 르콘이 그녀의 의식에도 반응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노엘은 절박한 목소리로 자신의 손녀를 불렀다. ' 시더! ' 기원해. 시더에게 내 목소리가 들리기만을 간절히, 간절히 기원하고 또 기 원하는 거야. ' 시더! ' 오라 능력이란 인간의 염원이 불러내는 것. 그리고 손녀를 살리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염원이 오리하르콘에게서 빛을 이끌어냈다. " 오리하르콘이……오라 능력자 이외의 인간에게도 반응했단 말입니까? " 노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닥터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노엘은 메디 컬 센터에서 예전 시더의 방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으며 미소지 었다. " 그래. 결국 오라 능력자도 인간이니까. 오리하르콘이 반응하는 건 오라능 력자……라기 보다는 강렬한 염원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게 더 맞을 거야.물론 그렇게 강하게 염원할 수 있는 인간들은 극 소수에 불과하지만. " " 그럼 선생님도 오라 능력자였다는 말씀이십니까? " " 아니.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리하르콘이 내 염원에 반응했 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아마도…… 신의 변덕같은 거였을 려나. " 노엘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닥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딱 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가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한때 시더였던, 자신의 친구였던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노엘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얘기를 재개했다. " 그래. 어쨌든 내가 왜 이런 상태로 존재하게 된 건지 궁금하다고 했지……. " ' 추방……이라고요? ' 노엘은 인공호흡장치에 의지한 채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시더를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시더는 그때 이후로 뇌수술까지 받았건만 여전히 의식을 되 찾지 못하고 있었다. 노엘이 걱정했던 데로 뇌사 상태에 빠진 것이다. 노엘의 곁에는 케루빔의 의장, 제이스컬 드리스덴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상 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 비숍은 모든 실수를 자네에게 덮어 씌울 셈이야.이미 케루빔 내에서도 단 독으로 행동한 오파니엘을 추방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분분하네. ' ' ……후후. 틀린 말은 아니군요. 분명 제가 아니었으면 그런 일 또한 일어 나지 않았을테니까. 하지만 추방이라니……. 그건 요피엘 의장, 당신의 의견인가요? ' ' 그럴 리가 없잖은가, 노엘! ' 자조섞인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제이스컬은 버럭 소리질렀다.그런 그의 반 응에 노엘은 눈시울을 붉혔다. ' 미안해요, 제이. 당신에게는 여러모로 감사하고 있어요. ' ' ……. ' 사고 현장에서 그녀와 시더를 빼낸 것은 그녀의 단 하나 뿐인 친우 제이스 컬 드리스덴이었다. 사건 당시에는 왜 그가 그렇게도 남들의 이목을 피해 자 신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노엘 웰리스는 사회적으로 말살당한 것이다.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는, 심지어는 대재해를 일으킨 주범으로까지 지목되고 있었다. 아마도 케루빔은 LA에서 생존한 그녀의 존재가 여러모로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제이스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노엘은 그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자신의 손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슬 퍼하는 옆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스컬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 이제부터 어쩔 셈인가? 이렇게 몸을 숨기고 있는 것도 점점 한계야. 어디 에 숨어있던 그들의 눈을 피해내기란 불가능해. ' ' 그건 곤란하네요. 케루빔의 의장이 반역자를 숨겨주고 있었다는 게 발각 되기라도 한다면 당신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에요. ' ' 이 사람이! 그런 건 관계 없다고 하질 않았어! 나보다는 자네와 자네 손 녀의 안위를 더 걱정해야지! ' 제이스컬은 답답하다는듯 가슴을 쳤다.그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던 여인이 계 속되는 사고와 배신으로 지쳐있었다. 그는 이대로 노엘이 자포자기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 그래! 내가 도와주겠네! 지금까지 발각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아직까지 내부 조사가 진행되지는 않았을 거야. 내 재량껏 비숍의 손이 닿지 않는 제 3국으로 빼내주겠어. 아무리 성당 기사단이라도 동남아까지는 아직 그 세력이 미치지를 못하니. ' ' 아뇨. 아마 그들은 우리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어쩌면 당신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눈치 채고 있을지도 몰라요. ' ' 그래서 이대로 두 손 놓고 가만히 있겠다는 건가!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야! ' 노엘은 제이스컬의 재촉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손녀를 내려 다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시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자신의 품 속에 들어있던 예의 오리하르콘 조각을 꺼내 보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정신 감응이라면……. ' ' 뭐? ' 그 중얼거림에 제이스컬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엘 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 제이, 날 좀 도와주겠어요?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 ' 방법이라고? 그래! 말만 하게나! 뭐든지 돕겠네! ' 제이스컬은 화색을 띠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채 노엘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 인격을……옮긴다고? ' " 오리하르콘은 서로에게 강한 감응력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그 감응력은 물리적인 접촉이 있을 시에는 더더욱 강해져. 더구나 정신 감응이라는 건 결국 뇌의 전기 신호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텔레키네시스(Telekinesis; 염동 작용)라는 거야. 나는 시더를 구할 때 사용했던 방법을 응용해서 직 접 나의 뇌와 시더의 뇌에 오리하르콘 금속을 이식했지. " " 이식……이라니. " 닥터와 가인은 망연자실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왠지 아까부터 등골이 오 싹해지며 소름이 돋고 있었다.노엘은 그들의 눈빛을 무심하게 받아들이며 설 명을 계속했다. " 그러니까 이 아이의 대뇌 반구 피질 속에 오리하르콘 조각을 집어넣었다 는 거야. 오리하르콘은 일단 정제되어 형상을 갖추게 되면 셀프 라이팅으 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가지게 되지. 나는 시더와 그 정제 된 오리하르콘을 둘로 나누어 오리하르콘이 자기 복구를 못하게 하는 대 신 강한 정신 감응을 일으켜 실시간 텔레파시를 나누게 되었어. " 노엘은 안경을 빛내며 그제서야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 그래. 이거야말로 완벽한 정신 감응.진정한 오리하르콘의 사용법이지. 오 라 능력자 처럼 오라를 사용할 필요도 없어. 사실 의식을 증폭시키는 건 오라의 힘이지 오리하르콘의 능력은 아니거든? 오리하르콘은 단지 정신 감응을 통해 착용자의 의식을 물리적으로 구현시켜줄 뿐이야. " " 미, 믿을 수가 없군요. 이건 정말이지……. " 닥터는 말까지 더듬으며 혼란스러워했다.만약 노엘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녀야말로 진정한 스멜팅 마스터라 할만했다. 오리하르콘을 이용해 인격을 옮기는게 가능하다니, 그야말로 진정한 연금술사! 이것이 바로 케루빔의 3대 의원 중 하나인 오파니엘의 능력! " 하지만, 그렇다면 실제…… 선생님은 어디에? " " 아, 내 몸 말이지? 내 몸은 지금 냉동 보존술로 12년 동안 잘 보관해오고 있어.정확한 위치는 사정 상 말해줄 수 없지만 말이야. 어때? 이제야 좀 궁금증이 풀리시나, 호기심 많은 양반? " " 하, 하하. " 닥터는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최근들어 피스메이커의 기밀 을 이곳 저곳에서 알아보고 다닌 것을 꼬집고 있는 것이었다.이를 미루어 보 아 노엘은 평소 시더가 보고 들은 것도 모두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곧 가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되물었다. " 그 쪽의 도련님은 어때?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 " ……모, 모르겠어요. " 가인은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는 갑작스런 노엘의 얘기에 혼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케루빔이라느니, 오파니엘이라느니 하는 얘기들도 알 수 없었고, 더 욱이 왜 대재해 때 그녀가 시더와 함께 LA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하겠냐니!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 그러니까, 지금 시더의 몸에는 할머니의 의식이 들어가 있다는 거잖아요? " " 그래. 잘 이해하고 있네. " 가인의 대답에 노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이 너무나 시 더와 이질적이었던지라 가인은 순간 욱 하는 성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 너, 너무해요! 뭐가 잘 이해하고 있다는 거에요? " 가인은 노엘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그의 반응이 흥미로웠는지 관심을 표했다. " 흐음. 너무해? 대체 뭐가 너무하다는 거지? " " 시더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모든 것을 정한 거잖아요! 아무리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이건 아니에요! 시더는 자신의 할머니를 그렇 게나 그리워 했는데…….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는데……. " 가인은 며칠 전 시더가 했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 응! 정말 좋아해! 그랜마는 내 자랑이자 우상이라고! ' ' 헤헴. 뭘 그 정도 가지고 놀라시나? 마이 그랜마는 더더욱 굉장하신 분이 라고! 나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위대한 과학자야! '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 적어도! 적어도 시더에게 만큼은 귀뜸을 해줬어야줘! " " 하지만 이렇게 내 의식이 시더의 자의식 위로 떠오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야. 그동안 나는 시더의 무의식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덕분에 이 아이는 내 모든 지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어. 의식 의 혼합으로 내가 아는 것은 이 아이도 알 수 있게 된 거야. 그랬기에 피 스메이커의 기술부 치프 자리에 채택되어 연구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지만. " 노엘은 두 눈을 부릅 뜨는 가인의 표정이 재미있다는듯 연신 싱글거렸다. " 뭐, 시더에게는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아 있어. 내 의식이 투영되면서 덩달 아 이 아이까지 지독한 원시가 되어버린데다가 한창 놀고 싶은 나이 때부 터 복잡한 공식에 시달리게 되었거든. 이 아이, 아직도 로봇 물의 애니메 이션을 보고 있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니? 물리 법칙과 전혀 맞지 도 않는 그런 사이언스 픽션 물에 이상할 정도로 심취했던 모습이? 아마 도 그건 내 의식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시더의 보호 본능 같은 거였을 거야. 애니메이션은 노엘 웰리스라는 의식에게서 시더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던 거지. " 가인은 스스로를, 자신의 손녀마저 저렇게 냉철하게 분석하는 노엘에게 두 려움마저 느꼈다. 그는 애써 주먹을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니……. " 저게 손녀의 몸을 빼앗은 할머니가 할 말이란 말인가? 손녀의 인생을 송두 리째 바꿔 버린 주제에, 시더의 삶을 빼앗은 주제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질렀다. " 시더를 위해서라니……그런 거 거짓말이야! 결국 당신은 도피처가 필요했 을 뿐이잖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남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단지 그런 장소를 원했을 뿐이라고! " " 가인 군! " 닥터가 흥분한 그를 만류했지만 가인은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시더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기다려왔는지 알고 있어? 얼마나 당신을 사 랑해왔는지 알고 있어! " 나에게……. " 당신의 얘기를 할 때마다…… 시더가, 시더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당 신의 손녀가 얼마만큼 기뻐했는지……알고는 있느냔 말이야! " 가인은 하루 종일 골방에서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하는 시더의 모습을 떠올 리자 가슴이 찢어질 것 처럼 아팠다.자신에게 발명품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 하던 그녀가, 연구가 즐겁다고 말하던 그녀가……. " 그 모든 게……거짓이었다니……. " 이보다 더 비참한 삶이 어디 있을까? 자신이 좋아한다고 생각해왔던 일이, 자부심을 가졌던 행동들이 실은 타의에 의해 의도되어진 것이라니.그것도 그 렇게나 철썩같이 믿어왔던 자신의 할머니에게서……. " 그래. 얼마든지 비난해. " 노엘은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 을 꾸짖는게 더 없이 기쁘다는듯 웃고 있었다. " 어디 기분이 풀릴 때까지 욕을 해봐. 나도 내 자신이 한 행위를 용서할 생각은 없으니까. 아마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황불이 들끓는 지옥일 테지. 손녀의 인생을 망쳐가면서까지 연구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으니……. " 에스컬레이터는 어느덧 가인이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지하 터널로 연결되고 있었다. 노엘은 가인에게서 등을 돌려 지하 터널의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 겼다. " 나는 예전에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어. " 노엘은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이 말했다. "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그런 죄악을 저지르고 말 았지. " 죄악……? 가인과 닥터는 어림 짐작으로 그것이 대재해와 관련된 일일 거라 생각했다. 도대체 대재해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저토록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 나는 단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을 뿐이야. 내가 저지른 일은 내 손 으로 수습하고 싶었어.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떠맡기는 건 내 자존심이 용 납 못 해. " " 그것이 시더를 희생시킨 이유인가요? 하하, 퍽이나 대단한 자존심이군요. " 가인은 그녀의 이기심에 치를 떨었다. 저런 걸 변명이라고 하고 있다니! 노 엘은 그런 가인을 돌아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 그래. 대단한 자존심이지.그 알량한 감정 하나로 12년간을 버텨왔으니까. " 삑 그녀는 품에서 꺼낸 ID카드로 입구의 문을 열었다.그러자 차가운 공기가 개 방된 입구로부터 무겁게 흘러나왔다. 가인은 그 알 수 없는 중압감에 마른침 을 삼켰다. 터널 안에는 그를 압도하는 뭔가가 있었다. 거대한, 상상도 할 수 없을 그런 존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자, 너에게 보여주겠어. 내 자존심의 결정체를.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계속해온 내 연구의 성과를. " 우우우우우우 가인은 오라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끌려가듯 터널의 입 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거대한 격납고 속으로 새하얀 광채를 발 하고 있는 한 거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림 잡아 40미터가 넘을듯한 신장이었다.거기다 마치 중세 기사와 같은 컴 포지트 아머(Composite armor) 스타일의 장갑들이 한층 더 그 체구를 커보이 게 하고 있었다. 은색의 기사.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착 각을 일으킬 정도로 그 존재감은 뚜렷하게 가인에게 각인되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오라의 박동 소리가 멈추지를 않는다. 가인의 AI슈츠를 타고 연푸른빛의 기 운이 계속해서 커졌다가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느낌을 그는 과거 에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예전, 북경에서의 일이 있은 후 급속도로 오 라 능력이 높아졌을 때. 그 힘을 메디컬 센터에서 조사받을 때 단 한 번 이 박동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 그 때의 박동 소리는……이 거인에게서 들려오던 것이었나? ' 그렇게 넋을 잃고 거인을 바라보던 가인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 뭐, 뭐죠? 이건? " 이 말도 안되는 괴물은 뭐지? 로봇?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 이 녀석의 이름은 MS01 머신 아더(Machine Arthur). " 노엘은 그런 그에게 못을 박듯 대답해주었다. " 괴물을 사냥하는 몬스터 슬레이어(Monster Slayer)지. " " 작전 수행까지는 앞으로 30분 남았다. 이후의 모든 지시는 나, 노엘 웰리 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일단 탑승에 앞서 다시 한번 머신 아더에 대 한 주의사항을 설명하겠다. " 격납고 안에서는 한창 노엘 웰리스의 브리핑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의 앞 으로는 머신 아더를 조종해야할 다섯 명의 피스 대원들이 그녀의 얘기를 경 청하고 있었다.그 중 피스 블루 유가인은 채 동료들과의 재회를 기뻐하지도 못하고 설명에 집중해야만 했다.그는 난데 없는 거인의 등장과 그 거인에 자 신들이 탑승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얼이 빠져 있었다. 노엘은 그런 가인에게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 피스 블루! 이 브리핑은 다른 대원들도 이미 모두 숙지한 사항이다! 굳이 설명을 반복하는 건 지금껏 정신을 잃고 있던 너를 위해서란 말이야! 정 신 차리고 집중해! " " 아……예. " 가인은 노엘에게 어색한 존칭을 쓰며 자세를 바로했다. 노엘은 안경을 쓸어 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 머신 아더는 예전 대재해 때 나타난 SA급 몬스터 드래곤을 대비한 D 타입 대응 결전 병기다. 신장 40미터, 무게 9백톤. 기본 바탕은 오리하르콘 골 격 위에 오리하르콘 근육을 덧씌운 사람과 유사한 배형 구조를 가지고 있 으며 그 외에도 대요격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인공 근 육은 평소 대원들이 사용해왔던 AI슈츠의 오리하르콘 근육을 단면적으로 550배 확대한 거니 부가 설명은 필요 없겠지. " 가인은 한 숨을 내쉬었다. 사람과 유사한 배형 구조라니……. 노엘 정도나 되는 과학자가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만들어내다니. 이족 보행이라는 것 자 체가 전투에 비효율적이었다. 굳이 사람 형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걸까? 그런 가인의 마음을 표정에서 읽어냈던 건지 노엘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 머신 아더가 인간형인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굳이 질문은 받 지 않겠어.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졌던 거고, 인간형이어야 조종하는 너희 들도 혼란스럽지 않을 테니까. " 인간형이어야……혼란스럽지 않다고? 더욱 궁금증만 늘어나는 그를 내버려두고 노엘은 다음 설명으로 들어갔다. " 머신 아더는 작전 본부실과 탑승자, 쌍방의 컨트롤이 필요하다.일단 머리 부터 발끝까지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머신 아더는 그 동력원으로 피스 대원들의 오라를 사용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머신 아더의 심장인 셈이 지. 심장인 없는 육체는 움직일 수 없잖아? 그럼 구체적으로 여러분이 맡 아야할 역할을 가르쳐주지. " 노엘은 가인의 옆에서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피스 핑크 이유리를 돌아보 았다. " 피스 대원 여러분은 피스 핑크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다. 패턴 핑크의 능 력은 여러분이 쓴 AI헬맷의 감응력을 증폭시켜 다섯 명의 의식을 하나로 통합시키게 될 거야. 그 의식 자체가 머신 아더의 뇌가 되는 거지.심장과 뇌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거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의식을 덧씌우는 것 에 불과하기에 실제로 머신 아더가 부서져도 고통이나 피해 상황은 전혀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어. 그렇기에 여기서 외부 조종이 필요해지는 거야. 피스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AI헬맷의 사념파로 실시간 피해 상황을 보고해 주며 기관부의 수치들을 측정하는 제 3의 존재. 그 역할은 피스메이커의 오퍼레이터 팀이 맡게 된다. " 오퍼레이터 팀?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치프 윤채영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었다. 만약 오퍼레이터 팀에서 머신 아더의 서포트를 맡게 된다면 그녀가 주축으로 활동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가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 AI 헬맷으로 증폭된 사념파를 실시간으로 공유한다는 건 보통 사람의 정 신 용량으로는 따라갈 수 없어. 그 때문에 한동안 이 방법은 논란의 여지 가 많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 건 5년 전 지금의 치프 윤채영이 두각을 드러내면서 부터였지. 그녀는 놀랍게도 패턴 핑크의 운산 능력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고속 처리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거야. 그녀가 있음 으로 해서 패턴 핑크를 이용한 지금의 컨트롤 시스템이 완성된 거지. " " 하지만 저런 로봇 안에 탑승한다니……. 조종사가 무사할 리가 없잖아요? 아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릴 거 같은데. " 가인은 여전히 회의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반박했다. 그러나 노엘은 되 려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해주길 기다렸다는듯이 대답했다. " 흐음. 그래. 날카로운 질문이야. 사람의 귀 안쪽에는 중력이나 가속도를 느끼는 기관이 있는데, 40미터 로봇이 격렬히 움직였다간 현기증이나 구 토 정도로 피해가 끝나지는 않겠지. 거기다 적의 공격을 제대로 얻어 맞 기라도하는 날에는 그대로 콕피트 안에서 한 줌의 핏덩어리가 되어버릴걸. " " 그런 걸 어떻게 탄단 말이에요! " 우리보고 죽으라는 소리야 뭐야? 가인은 기가 막혀 버럭 소리지르고 말았다. 그는 주위의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아니,왜 다들 가만히 있는 거지? 시민 씨! 진우 씨!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저 무모한 여자 좀 다들 말려보라고요! 몬스 터가 우릴 죽이기 전에 저 여자가 먼저 우리를 죽이겠어! " 자, 자. 흥분하지 말고 얘기를 계속 들어. 이에 대한 설명은 닥터가 해줄 테니까. " 노엘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면서 닥터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닥터는 헛기침 을 하며 달래듯이 가인에게 얘기했다. " 노엘 선생님이 얘기하신 데로 머신 아더의 탑승자는 외부의 충격에 무방 비로 노출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머신 아더에 동력원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라 능력자가 탑승해야만 하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개발되어진 것이 PET용액입니다. " " PET용액이라면……. " 방금 전만 해도 가인이 집중 치료실에서 신세를 졌던 약품이다. 트롤이라고 하는 자기 복원 능력이 강한 몬스터에게서 유출(溜出)해낸 세포 재생 촉진제. 그 용액을 정제해서 안정화시킨 약품이 평소 가인 일행이 애용해오던 포션이 었다. 분명 북경에서 와이번을 부활시킬 때도 중화인민군들이 이 PET 용액을 사용 했었지. " 어차피 머신 아더는 패턴 핑크에 의한 통합된 사념파로 움직이고,그 외의 세부 조종은 작전 본부실에서 이루어지기에 탑승자들이 별도로 행할 조작 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이미지 메이킹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육체 를 가사 상태로 빠뜨릴 필요가 있죠. 그리고 그 가사 상태에 빠진 육체에 지속적으로 PET용액을 공급합니다. 그렇다면 PET용액의 양이 다하는 시간 까지는 대원들의 데미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죠.오리하르콘의 오 라 쉴드도 어느 정도 외부의 충격을 막아줄 테고. " " 결국 PET용액의 양이 머신 아더의 기동 시간을 결정한다는 거지. 죽기 싫 다면 용액이 남아있는 동안에 몬스터를 격퇴하는 것이 좋을 거야. " 노엘의 뒷 설명에 대원들의 안색이 다들 창백해졌다. 가인은 머리를 감싸며 힘겹게 물었다. " ……그럼 그……기동 시간이란 건 몇 시간 정도에요? " " 30분. " " ……! " 너무 짧아! 가인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동료들을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들도 처음 노엘의 설명을 들었을 때는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반응들을 보였다.단 지 지금 이렇듯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닥쳐온 현실에 익숙해졌기 때문 이다. 노엘은 작전 수행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손목 시계를 바라보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 어쨌든 머신 아더에 관한 구체적인 조종술은 피스 그린과 피스 옐로우, 피 스 레드가 예전부터 훈련을 받아왔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 " ……일단 메뉴얼은 외웠습니다만. "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고, 마리와 진우는 근심 어린 표정을 버리 지 못했다. 그들과 같은 경우는 피스메이커 가입 당시부터 진 사령관의 명령 으로 머신 아더의 조종을 염두에 둔 훈련을 틈틈히 받아왔었다. 하지만 이론 으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조종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법. 거기다 제 대로 된 시뮬레이션 조차 받지 못했으니 불안해 하는 건 당연했다. 가인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노엘을 통해 알게 되자 깜짝 놀라 소리 쳤다. " 예전부터라니? 예전부터 다들 이런 로봇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에 요? 저만 몰랐던 거에요? " " 유리 양도 모르고 있었어. 일단 패턴 핑크가 각성한 건 작년 말이었잖아? 그리고 우리도 정말 이런 걸 조종해야될 때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 진우는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물론 가인에게 얘기하지 않은 것은 진 사령관 의 엄명이 있었던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굳이 그 얘기를 여기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시민은 당황하는 가인에게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 가인 씨, 머신 아더는 피스메이커가 대재해 이후부터 준비해온 최후의 결 전 병기에요. 피스 대원들의 AI 컴플리트 세트도, 포션도 모두 머신 아더 의 개발과 관련된 연구들이죠. 게다가 피스 대원들의 신체 검사만 하더라 도 오라 수치를 안정시킨다는 명목 하에 다섯 대원들의 오라를 측정하고 비교하여 머신 아더의 스펙을 재조정하는 작업이었잖아요. " " ……! " 가인은 반사적으로 닥터를 돌아보자,그는 너털 웃으며 시민의 말을 인정했다. 노엘은 그런 가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 그러니까 오늘의 일은 예전부터,아주 예전부터 준비해온 일들이란 말이지. " " 손녀를 희생시킨 12년 간 말이죠. " 가인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비꼬았고, 노엘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그 비난을 받아넘겼다. 노엘은 손뼉을 치며 브리핑을 마무리지었다. " 자, 자. 어쨌든 대충 궁금한 사항은 다 풀어졌겠지? 머신 아더의 동력원 은 너희들, 그리고 피스 핑크가 너희들의 의식을 하나로 끌어 모은다. 외 부 사항은 모두 오퍼레이터 팀에서 서포트 할테니 전투는 피스 레드와 피 스 그린, 피스 옐로우가 담당. 이상 끝! 별도의 지시 사항이 내려질 때까 지 머신 아더 안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브리핑을 종료했다. 가인은 그녀가 격납고를 나서려 고 하자 당황하며 노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 자, 잠깐만요! 그냥 가면 어떡해요? 저는요? 저는 뭘 해야 하는 거에요? 저 로봇을 조종하라고 해도 아무 것도 모르는데! " " 응? 말하지 않았던가? 조종은 피스 레드와 그린, 옐로우가 맡는다고. " 노엘은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가인의 귓가에 얼굴 을 가져가며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 넌 그냥 타기만 하면 돼.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어. " 그 속삭임에 가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붙잡고 있던 노엘의 어깨를 놓아버 렸다. 아무 것도……할 필요가 없다고? ' 이건 또 무슨 의미야? ' 위이이이이잉 귓청을 때리는 거대한 기계음에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머신 아더의 콕피 트 안으로 들어갔다. 콕피트는 거인의 좌측 가슴 부위에 위치했는데, 노엘의 말대로 오라 능력자들이 심장의 기능을 한다면, 그 탑승 위치도 심장 부위에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탑승자의 입장에서는 악취미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 이렇게 까지 사람과 유사하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 ' 가인은 투덜거리며 콕피트의 내부를 둘러 보았다. 콕피트는 의외로 단순하 기 그지 없었다. 기계 장치나 버튼 같은, 조작에 관련된 기구들은 조금도 보 이지 않았고 단지 다섯 개의 금속 관들이 있었을 뿐이다. 가인은 덜떠름한 눈으로 그 금속 관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 설마 여기에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 물론 들어가야 했다. 진우는 입구에 멍청히 서있는 가인의 등을 떠다밀며 말했다. " 내키지는 않겠지만 꾸물거리지 말고 타라고.나도 사부님만 아니었으면 이 런 장난감 같은 것에 올라타지는 않았을 테니까. " " 아, 그렇죠. " 가인은 브루스를 구해내야 한다는 각오를 새삼 되새기며 몸을 움직였다. 그 뒤를 따라온 시민이 메뉴얼대로 금속관에 손을 가져가자 오라에 반응한 해치 가 상하로 갈라지듯 열렸다. 금속관에는 대원들의 신체 사이즈에 딱 맞는 시트와 집중 치료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산소 마스크와 링겔들이 들어 있었다. 마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시트에 몸을 앉히며 가인에게 링겔들을 들어보였다. " 이걸 평소 포션을 주사하는 AI슈츠의 투입구에 꽂아. 총 8군데에 꽂아야 하니까 빼먹지 않도록 조심하고. " " ……이게 우리의 생명줄이군요. " 가인은 금속관의 끝부분과 연결된 링겔들을 AI슈츠의 투입구들에 꽂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이 링겔들이 머신 아더의 어딘가에 위치한 저장 탱크로부터 PET용액들을 흘려보낼테지. 그렇게 대원들이 모든 준비를 끝내자 유리가 말했다. " 지금부터 의식을 나에게 집중해줘. 마인드 키핑으로 모두의 정신을 하나 로 통합시키겠어. 나도 한번도 시도한 적 없는 이색적인 방법이지만 개인 의 인격을 무시한 통합이 아니니까,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거 야. 그냥 가상의 공간에 인격을 모으는 거라고 생각해. " 촤자자자자작 그 말을 끝으로 유리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핑크 빛이 콕피트 안을 뒤덮기 시작했다. 예전 마리를 구하기 위해 타인의 의식을 자신이 만든 의식의 세계 로 끌어들이던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그때와 사정이 약간 다른 것이,이 통합된 의식을 머신 아더라고 하는 사물에 투영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머신 아더가 곧 가인이 되고, 마리가 되고, 시민이 되고, 진우가 되고,유리 가 되는. 하나이자 다섯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진우는 마인드 키핑이 발동하자 산소 마스크를 착용하며 다른 대원들에게도 말했다. " 자, 그럼 모두 좋은 꿈을 꾸자고요.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사부님이 곁에 계시도록. " " 피스. " 가인 일행은 산소 마스크를 끼며 그에게 경례했다.곧이어 그들이 시트 위로 몸을 눕히자 금속관이 자동으로 닫히며 PET용액이라 여겨지는 차가운 액체가 금속 관 안으로 밀려들어왔다.가인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두 눈을 질 끈 감았다.산소 마스크 때문에 숨이 막히는 일은 없겠지만 정체 불명의 액체 속에 몸이 잠기자니 그리 유쾌한 기분도 아니었다. 푸쉭 그리고 시트에 눕힌 목 뒤로 포션을 주사할 때와 비슷한 고압 주사의 따끔 함이 느껴졌다.그러자 이내 전신에서 힘이 빠지며 의식이 희미해졌다. 무력 함이라고 해야할까 나른함이라고 해야할까. 그냥 만사가 귀찮아지며 잠이 쏟 아져 내렸다. ' 어라……. 이, 이대로 잠들어도 되는 걸까? ' 조종은? 의식이 통합되느니 어쩌니 하는 건 어떻게 된 거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브루스를, 브루스를 구하러 가야하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내 가인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 하는 가사 상태로 접어들었다. 어둠. 어둠. 어둠.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편안한 안식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 편안히, 맡기기만 한다면 ……. - 오빠. 그때 유리의 목소리가 그를 모두가 있는 곳으로 불러들였다. 《PET용액 주입 완료. 피스 레드, 그린, 블루, 옐로우, 핑크 모두 가사 상 태에 접어 들었습니다. 패턴 핑크의 오라 수치 상승, 마인드 키핑이 발동 되었습니다.》 유레카의 작전 본부실에서 채영이 희미하게 빛나는 핑크색의 AI헬맷을 착용 하며 머신 아더의 상태를 보고했다. 그 옆에서 스크린을 주시하던 노엘은 채 영과 마찬가지로 핑크빛의 AI헬맷을 착용한채 미소지었다. " 기분은 어때, 다들? " 그 말은 그녀와 정신이 연결된 피스 대원들을 향한 메세지였다. 패턴 핑크 의 정신 용량을 견뎌낼 수 있는 노엘과 채영은,피스 핑크의 AI헬맷에서 추출 해낸 오리하르콘으로 제조한 AI헬맷으로 실시간 피스 핑크와 사념파로 대화 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들에게로 패턴 핑크를 통한 대원들의 사념파가 되돌아왔다. - 성공……인가요? - 맙소사. 이게 뭐야! 모든 게 작아졌잖아? 아니, 그보다 어째서 격납고같 은 게 내 눈에 보이는 거지? - 머신 아더에 동화된 거야. 침착해라, 가인. - 마리 선배? 선배에요? 어, 어째서 선배 목소리가 내 속에서 들려오는 거 에요 - 지금 다섯이 하나가 된 거라고 했잖아, 오빠. 우리의 의식을 거부하지 말 고 받아들여. 조금만 지나면 적응될 거야. - 본부, 들립니까? 그럭저럭 탑승은 끝낸 것 같습니다만. 진우의 마지막 사념파에 노엘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그녀와 같은 경우는 시 더를 거쳐 사념파를 보내는 것이기에 생각만 하기 보다는 직접 입으로 말하 는 게 더 수월했다. " 좋아. 이제부터 나머지는 모두 우리에게 맡기라고.그 전에 간단한 테스트 부터 시작해볼까? 격납고에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몸을 움직여봐. 손가락부터 천천히. 아, 그리고 앞에서도 얘기한 거지만 피스 핑크는 언 제나 피스 그린에게 행동의 우선권을 줘. " 본부실의 스크린에 비춰진 머신 아더가 노엘의 지시를 따라 천천히 몸을 움 직이기 시작했다. 진우의 의식을 따라 머신 아더의 100개가 넘는 가동 가능 관절에 전기 신호가 보내지자, 그에 반응한 인공 근육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 하면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다. - 이거……꽤 힘든데요? 진우의 사념파가 투덜거리며 전해졌다. 노엘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으 며 채영에게 지시를 내렸다. " 관절에 가해지는 압력을 10%정도 떨어뜨려. 인공 근육이 길이 들지 않아 꽤 뻣뻣할테니 오리하르콘의 감응력도 더 올려주고. 평소 피스 그린의 AI 슈츠 파라미터에 가깝도록 조절해봐. " 《기관부 압력 저하. 전기 신호의 파장을 30까지 올리겠습니다.》 " 좋아. 그럼 다음은 걸어봐. 자세 제어는 이쪽에서 해줄 테니까 평소에 걷 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 우우우우우 거대한 은색의 기사가 첫 발을 내딛었다.40미터의 신장을 지탱하기 위해 그 발의 너비가 넓은 만큼 발 소리만으로도 격납고 자체가 진동으로 뒤흔들렸다. 채영은 모니터에 떠오르는 자율 제어 시스템의 수치들을 검토하여 최적의 평 균 수치를 산출해냈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이 평균 수치가 있음으로 해서 다음 번 오차 수정이 더욱 원활해질 터였다. 그렇게 한창 머신 아더의 테스트가 진행되고 있을 때,스크린을 주시하던 닥 터가 노엘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옆의 수정에게 물었다. " 수정 양, 어째서 머신 아더가 움직일 수 있는 겁니까? 분명 피스 블루의 각성은 아직입니다. 오라 수치 또한 저번과 별 다를 게 없어요. 머신 아 더의 기본 동력인 250노트까지는 아직 40노트의 공백이 남아있단 말입니 다.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요. " 수정은 진 사령관의 눈치를 살피다가 짧게 한 숨을 쉬며 닥터의 질문에 대 답했다. " 닥터, 위그드라실이 지구의 오라를 끌어모아 오라 배틀 필드를 사용하는 건 알고 계시죠? ABF의 재 충전 시간까지는 12시간이 소요되고요. " " 그야……당연히……. " " 그렇다면 평소 ABF를 사용하지 않을 때의 충전된 오라는 어디에 사용될까요? " " ……! " 닥터는 이 뜻 밖의 얘기에 인상을 굳혔다. 어디에 사용되냐니……. 충전된 ABF는 다음번 몬스터의 발생 때까지 대기 상태로 남아 있는 것 아니었나? 수 정은 스크린에 비치는 머신 아더를 주시하며 얘기를 계속했다. " 주기적으로 위그드라실에 저장되는 오라는 ABF에 사용될 여분을 남겨두고 는 모두 머신 아더의 동력으로 사용됩니다.미약한 양이니 만큼 비축한 양 이래봤자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만 40노트의 수치 정도는 보충할 수가 있죠. " " 그, 그 정도나 확보해두었단 말입니까? " " 예, 위그드라실이 만들어진 이래로 ABF의 오라는 계속해서 모아왔으니까요. " 수정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웃음 앞에 닥터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위 그드라실은 자신이 피스메이커에 들어오기 전부터 만들어진 다 목적 무인 위 성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결국 머신 아더의 가동은 적어도 5년 전부터 계획 되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 ……두 손 들었군. ' 닥터는 쓴 웃음을 지으며 진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 으로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짙은 선글래스 밑의 두 눈이 왠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아 닥터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 호기심은 여기까지인가. ' 그 이상을 넘보기엔 상대의 격이 틀렸다. 닥터는 지금껏 이 모든 일을 준비 해온 진 사령관과 노엘이 도저히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우 민이 범인의 경지를 넘보는 것 만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막 머신 아더의 최종 테스트를 끝낸 노엘이 소리쳤다. " 좋아, 거기까지! 아쉽지만 나머지 테스트는 실전에서 계속하도록 하자. 개 전(開戰) 준비다! " 《머신 아더, 격납고의 3번 출구 쪽으로 이동해주십시오. 다리 축을 자동 승 강로의 접합 부분에 고정시킵니다.》 《기체의 하중을 무릎까지 낮혀주십시오. 이동시에 리프팅(lifting)이 발생 할지도 모릅니다.》 3번 출구로 이동한 머신 아더를 기다린 것은 다음 목표지까지 직행하는 자동 승강로였다. 노엘과 채영의 머리 속으로 대원들의 사념이 흘러 들어왔다. - 마리 선배, 이 거대한 로봇을 어떻게 지상까지 끌고 올라가죠? - 예전에 내가 얘기 안했던가? 너를 처음 유레카로 데려왔을 때 지상으로 올 라가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지. 하나는 들어왔을 때와 같이 광속전 차를 이용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 ……서, 설마. 가인의 사념파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가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 머 리 속으로 그려졌다. 그런 그에게 노엘이 자랑하듯이 말했다. " 그래. 내 손녀가 우주 개발 본부에서 연구했던 우주 엘리베이터를 개량한 물건이지. " - 그, 로켓이 발사되어 대기권을 뚫고 나가는 기분이라는……. 가인은 마리가 얘기해줬던 대목을 떠올리며 힘 없이 중얼거렸다. 채영은 그 런 그에게 미안함을 가득 표하며 머신 아더의 다음 행선지를 보고했다. 《머신 아더, 궤도 엘리베이터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20초 후면 지상으로 방 출 가능합니다.》 - 자, 잠깐만요! 방출? 방출이라니! 무슨 정부미 방출도 아니고 그게 뭐야! 노엘은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가인의 사념파를 다음과 같이 달래주었다. " 걱정마. 가사 상태에 빠져 있으니까 육체적인 고통은 없을 거야. " - 시, 싫어어어어어! 작전 본부실의 모두는 노엘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건 분명 손자뻘 되는 아이를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악취미도 보통 악취 미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머신 아더가 궤도 엘리베이터에 진입하자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하던 진 사령관이 한 마디했다. " 발진(發進)! " 그리고 스크린의 스피커가 음소거 상태로 전환되었다. 머신 아더를 태운 궤 도 엘리베이터가 무시무시한 굉음을 울리며 지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퍼어어어어엉 수십 톤에 이르는 물들이 한꺼번에 터져오르며 일대 장관을 일으켰다. 때 마침 피난 경고로 강 주위를 거닐던 사람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덮쳐오는 물살에 수 십명의 부상자가 생겨날 뻔했다. 후우우우우우 드러난 강 밑으로는 이미 궤도 엘리베이터의 존재만이 남아있을 뿐, 그 엘 리베이터를 타고온 장본인은 정작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대기를 뒤흔 드는 파공성이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하늘이었다. 엘리베이터로부터 튕겨지다시피 떠오른 거대한 은색의 거신이 어두운 밤하 늘에서부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거인은 마치 살아있는 인간처럼 그 거대한 몸을 웅크리며 지상으로 내리 꽂혔다. 쿠우우우웅 착지! 그 반동으로 강 주변을 감싸고 있던 콘크리트 더미가 진동을 이겨내 지 못하고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강과 강 사이를 잇고 있던 대교 또한 기괴 한 철근 휘어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쏴아아아아 진동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뒤집혔던 강물이 폐허를 휩쓸며 지나갔다.하지만 그 거센 강물조차 굳건히 서있는 은색의 기사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를 못했다. 거인은 마치 대지에 뿌리를 내린 거목 처럼 당당하게 몸을 일으키며 그 위 압감을 과시했다. - 주, 죽는 줄 알았다……. 거인으로부터 가인의 사념파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궤도 엘리베이터의 속력 으로 인한 충격은 받지 않았더라도,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무시무시한 체감 속도가 그의 진을 쏙 빠지게 만들었다. 마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 ……한강? 그렇다. 그들이 나온 곳은 작년 모스맨과의 사투를 벌였던 한강대교 부근이 었다. 유레카의 궤도 엘리베이터는 한강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전 그 녀가 탔던 대인용 궤도 엘리베이터는 인근 빌딩의 중간 부분에 멈춰 서서 그 녀를 황당하게 만들더니 이번 엘리베이터 또한 의외의 장소에서 그녀를 황당 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긴 이런 거대한 로봇을 지상으로 꺼낼려면 지하 터널을 따로 만들기 보다 는 이렇게 강 밑으로 연결하는게 가장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그때 유레카에 있을 노엘의 사념파가 들려왔다. - 역시 거대 로봇의 등장은 물 밑에서 부터지. 풀장이 아닌게 아쉽지만 이 건 이것 나름대로 화려한 걸. - ……그런 이유였나. 피스 대원들은 맥 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시더의 자의식과 동화되어 있 다보니 노엘 또한 손녀의 매니악한 점들을 이어받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 면 방금 전의 말은 시더의 의지가 깃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가인의 사념파가 한껏 씁쓸함을 담으며 흘러나왔다. - 물밑에서 나왔으니 이번에는 12구역까지 날아가는 건 아니겠지……. 분명 한강에서 12구역까지 걸어가기에는 꽤 시간이 소요될듯 싶었다. 그들 로서는 그렇게까지 늦장을 부리면서 돌아갈 여유는 없는 것이다.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날아간다니……. 가인은 자신의 발상을 비웃었다.아무래도 계속되는 비상식적인 상황들에 자 신마저 물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이 거대한 몸체를 어떻게 하늘로 띄운다는 거야? 그것도 9백톤이라는 무게를? - 띄울 건데? 9백톤의 무게. 하지만 가인의 사념을 읽어들인 노엘은 가볍게 그의 생각을 비웃어주었다. 쏴아아아아 12구역과 인접해있는 13구역에서는 지독한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쿠 사나기가 일으킨 기상 변화가 여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거리는 계속되는 피난민들과 대피 경보에 쥐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피스메이커가 매스미디어를 통제했더라도 12구역의 피해 속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입을 타고 12구역의 피해는 인 근의 주민들에게까지 퍼져나갔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기지국과 전신 전화국을 통제해서 전화의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른다. 치이이이이익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미처 가게 문조차 내리지 못했던 한 전자 기기 매장에 서 전시용 텔레비젼들이 노이즈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 텔레비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거리를 조금이나마 밝혀주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그리고 한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비에 젖은 몸을 비틀거리며 TV앞 에 망연자실하게 서있었다. 테레이아 민체스터.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리리스. 노아에서 테라로 파견된 바르의 별들 중 하 나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방황하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 카이 브릿드가 했 던 말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기에. ' 유메를 잊어버린 건 내가 아닌 바로 너잖아, 리리스! ' 그 말이 충격이었다. 자신만은 그녀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는데.유메 를 구해내기 위해서, 카이가 말한대로 언젠가 세명이서 함께 살 날만을 꿈꾸 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 도대체 그를 감싸고 돌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는 우리의 적이야! 이용 해야할 대상일 뿐이라고! 고작 그런 녀석이 우리보다도 소중해? ' 유가인. 그를 만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 자신의 모든 것이 바뀌어져버 렸다. 단지 처음에는 그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데.장난 반 호기심 반으로 접근 했을 뿐이었는데……. ' 테레이아가 슬플 때 내가 같이 슬퍼해줄게. ' ' 테레이아가 힘들 때 같이 힘들어하겠어. ' ' 테레이아가 웃을 때는 반드시 같이 웃어줄 거야.그러니까 더 이상……테 레이아는 혼자가 아니야. ' 언제부터 그에 대한 관심이 호감으로 바뀌게 된 걸까? 언제부터 그에 대 한 마음이 사랑으로 바뀌게 된 거지? 언제부터…… 모든 것을 잊고 그만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 나에게도 테레이아는 소중한, 아니 특별한 친구니까. ' " 그만둬! " 리리스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환영처럼 눈 앞에 떠오르는 가인 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신을 향해 외쳤다. " 바보같이! 뭘 슬퍼해주겠다는 거야? 뭘 힘들어하겠다고! 뭘 웃어주겠다 는 거야!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에 대해,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떤 마음 으로 너에게 접근했었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 그렇게, 그렇게 바보같이 웃고만 있지마! 그렇게 따뜻한 눈빛으로 날 바라 보지마!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마! " 바보구나, 리리스! 그가 했던 말은 너에게 했던 말들이 아니었어! " 리리스는 서글프게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쌌다. ' 나에게도 테레이아는 소중한, 아니 특별한 친구니까. ' " 테레이아잖아! 리리스가 아닌 테레이아! 그는 너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니 야! 네가 몸을 빼앗은 테레이아 민체스터라고 하는 테라 인을 향해 했던 말들일 뿐이야! 그 눈빛도, 그 목소리도, 그 걱정도 모두 너를 향한 게 아니었단 말이야! " 왜 바보같이 그것 하나 구분하지 못했을까? 왜 이제야 그것을 깨달은 걸 까? 달콤한 꿈에 젖어, 눈 앞의 환상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었다. 언제나 환상으로 타인을 농락해왔던 주제에, 정작 자신이 환상에 빠져있다 는 건 깨닫지 못했다니! " 이러면서 뭐가 밤의 여왕이야? 뭐가 꿈을 이뤄줄 수 있다는 거야? " 자신의 꿈 조차……이루지 못하는 주제에! " 흑, 흐흑……. " 리리스는 비통하게 흐느끼며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인에 대한 이루지 못 할 마음 때문에 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메와 카이를 잊어버렸 다는 죄책감 때문에 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한심했기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자신이 바보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어리석음에, 이루지 못할 꿈에 들떠 서 흥분하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바보다. 난 바보다. 혼자서 똑똑한 척 하고 있었을 뿐, 아무 것도 몰랐던, 알려고 하지도 않았 던 어리석은 바보였다. '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뒤엉키고 말았어. '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을까? 리리스는 붉게 물든 눈을 들어 저편의 12구역에서 하늘을 꿰뚫고 있는 검은 용권풍을 바라 보았다. 저 압도적인 왜곡 현상을 앞에 두고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두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 유메가 사라졌을 때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그저 멍하니, 무력한 자 신을 자책하면서……. ' 싫어! 그런 건 더 이상 싫어! 리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움켜쥐며 용권풍을 노려보았다.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더 이상 후회하기 전에,자 신이 할 수 있는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것이 테라를 위한 일이든, 노아를 위한 일이든 그런 건 상관 없었다. 그저 자신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 스스로에게 떳떳한 일을 하고 싶었다! 후우우우우우웅 그때 거대한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리리스는 그 대기를 찢는듯한 소리 에 귀를 틀어막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바라본 하늘의 저편에서 작은 점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그 몸을 부풀리 며 작은 점에서 이윽고 하나의 거대한 인간이 되어갔다. ' 날고……있어? ' 쿠와아아아아아앙 순간 날카로운 충격파가 지상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눈깜짝할 사이에 거인은 푸른 빛의 망토를 펄럭이며 리리스의 위를 지나쳐 용권풍으로 날아갔 다. 얼핏 그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40미터가 거뜬히 넘을듯한 크기의 은색 기사였다. ' 저런 거구가 하늘을 날았다? 그것도 내 머리 위로? ' 리리스는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저 육중한 거인이 마 하에 가까운 속력으로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미친 충격파는 우스울 정도로 극미(極微)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쿠우우우우웅 순간, 대기의 진동수가 급격하게 상승하다가 하강하며 리리스의 가슴에 찌 르는듯한 격통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억누르며 고통스러운 표 정을 지었다. ' 이것은……차원 진동? ' 공간이…… 휘어지고 있는 건가! " 아……! " 순간 리리스는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시야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 을 것 같았던 12구역의 용권풍이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 그런가요……. 가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는 불안한 사념으로 머신 아더의 구 석구석을 돌아보며 유리의 행방을 찾아 보았지만, 시민의 말마따나 자신들과 동화된 그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부디 이 말도 안되는 로봇에서 내렸을 때 유리가 무사하기를 비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찾아오기는 했군. -아……. 진우의 말에 가인의 사념은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집중 치료실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검은 용권풍을. 도시의 절반을 뒤덮는 거대한 토네이도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기둥처럼 몸 을 뒤틀고 있었다.하지만 특이하게도 저토록 격렬한 용권풍이 회오리치고 있 건만 주위의 폐허는 조금도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차원 왜곡 현상……. 이 속에…… 브루스가! 가인과 대원들의 사념은 이를 악물며 용권풍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자세히 보고 있자니, 눈 앞의 용권풍은 12구역의 도시가 비틀리면서 만들어낸, 하나 의 휘어진 공간 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휘어진 공간 사이로는 마치 방전이라 도 되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빛들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때 노엘로부터 사념이 흘러들어왔다. -구경은 거기까지 하고. 이제부터는 이 차원 왜곡 현상을 뚫고 그 안의 아 공간에 진입해야해. -물론 방법은 있는 거겠죠? 가인은 어느 정도 노엘을 겪어보고 나서 그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노엘 웰리스, 그녀는 절대로 가능한 일이 아니면 시도하지 않는다! 노엘은 그런 가인의 사념을 읽어냈는지 피식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주문이 좀 많아질 거야. -피스 핑크, 피그 그린에게 제어권을 넘겨 주세요. 그린 폼(Green Form)으 로 전환합니다. 채영의 사념이 들려오고, 그 직후 머신 아더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노 란색으로 빛나던 오리하르콘 장갑이 예의 은색으로 돌아왔다가 다음 순간,패 턴 그린의 녹색 빛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스 그린에 의한 머신 아더의 제 2형태 그린 폼이었다. 앞에 서 진우가 행동의 우선권 만을 넘겨받은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완벽히 제어 권을 넘겨받았기에, 패턴 그린의 오라가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과 공명하여 전신을 녹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노엘은 머신 아더의 변화가 완벽히 끝나길 기다렸다가 설명을 재개했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 머신 아더의 오른손과 왼손에는 각각 스매셔(S masher)와 버스터(Buster)라고 하는 기관들이 탑재되어 있다.각 기관의 기 능에 대해서는 이미 메뉴얼로 숙지하고 있겠지만,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있 던 사람도 있었을테니 다시 한번 설명해주지. -태평하게 잠이나 자서 미안하네요. 가인의 사념이 뚱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진우는 머신 아더의 육중한 왼손 을 들어올리며 노엘의 설명을 기다렸다. -일단 아공간을 감싼 공간 왜곡을 뚫으려면 그에 달하는 공간 왜곡의 힘이 필요해. 가령 예를 들자면 피스 그레이가 사용했던 극대소멸권과 같은 아 포칼립스 제너레이터가 말이야. 그리고 머신 아더에는 이 아포칼립스 제너 레이터를 발생시킬 수 있는 기관이 있다. 그것이 바로 스매셔와 버스터야. 되도록이면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설명해주고 싶지만, 하나는 뒤에 있을 즐거움으로 남겨두기로 하고…… . 물론 뒤에 있을 즐거움이 남겨지지 않는 쪽이 우리로서도 다행이겠지. 노엘은 뒷 말을 삼키며 머신 아더의 왼손에 대해서 설명했다. -왼손에 장치된 기관은 버스터라는 이름의 상전이(相轉移,phase transition) 엔진이다. 오라 클록과는 달리 순수하게 중력장 만을 집중시켜주는 장치지. 앞에서 피스 그린이 설명했듯이 머신 아더는 AI컴플리트 세트를 장착한 피 스 대원들과는 달리 자체적으로 오라 능력을 발현해내는 능력이 없어.AI슈 트 다루듯이 머신 아더를 다뤘다간 오리하르콘 장갑 속의 인공 근육들과 기계 부품들이 그 힘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그렇기에 인위적으로 중력을 생성시키는 기관들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버스터가 그 중의 하나라는 거야. -머신 아더는 오라 능력을 집중시킬 수는 있지만, AI컴플리트 세트 처럼 전 신으로 오라를 정착시키지는 못한다는 거군요. 진우는 납득이 간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복잡한 조종 계통과 시스템 들도 결국 머신 아더가 오라 능력자가 아니었기에 거쳐야만 했던 과정인 것 이다. -그래. 어쨌든 이 버스터는 꽤 재미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오라 클록이 중력장을 반대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장치였다면, 이 버스터는 중력장을 본 디 방향으로 집중시킬 수 있어. 중력장을 연쇄적으로 부딪히게 만들어서 아포칼립스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거지. 철컹 머신 아더는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지면에 다리를 고정시키고 왼팔을 거세 게 뒤로 잡아 당겼다. 평소 진우가 사용해오던 칠성권 발경의 자세였다. -모든 힘의 원리는 그 근본이 같다! 발경으로 전사경의 기를 발산하듯이 버 스터에 집중된 중력장을 발산한다면 그 연쇄 폭발로 중력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그래비테이셔널 필드 펀치로 상대를 가격하는 거다! 우우우우우웅 머신 아더의 표면을 감싼 녹색의 빛이 한층 진해지면서 왼손의 상전이 엔진 이 가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왼손의 건틀릿(Gauntlet)이 회전하면서 기관이 포효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자세 교정, 기관부 압력 저하, 그래비테이셔널 필드 가동! 채영의 보고가 빠른 속도로 사념을 타고 대원들의 머리 속으로 울려퍼졌다. 진우는 심호흡을 하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와 동화된 머신 아더 가 거세게 진각을 밟으며 하얗게 백열하는 왼쪽 주먹을 용권풍을 향해 내찔 렀다. -G·버스터 펀치(Gravity Buster Punch)! 투와아아아앙 순간 머신 아더의 중력장 펀치가 왜곡된 공간을 꿰뚫었다! 쿠우우우웅 대기의 진동수가 급격하게 상승하다가 하강하며 카이의 가슴에 찌르는 듯한 격통을 안겨주었다.그는 자신의 가슴을 억누르며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 다는 듯 바라보았다. " 이건……말도 안돼. " 그의 앞을 막아섰던 골렘,비프론즈와 네비로스는 아포칼립스의 후폭풍에 휘 말려 가루가 되어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았더라면 네크 로맨시된 그의 육신은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 ……. " 카이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그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차원 왜곡 현상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신장 40미터의 거 인! 그 거인이 바로 용권풍을 소멸시킨 장본인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저 거인이 요르문간드가 사용했던 중력파를 그대로 사용해냈다는 점이다. 바로 삼차원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아포칼립스 제너레 이터를! " 너희들 테라는……! " 우리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던 네 놈들은! " 어디까지 가이아를 유린하겠다는 거냐! " 그것은 절규였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눈 앞의 거인은 테라인들이 만들어낸 욕망의 산물이었다.그 존재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잘도 저렇게 가이아를 이용해냈구나! 잘도! 너희 놈들은! " 그것이 축복받은 차원에서 살고 있는 그들의 특권이지. " 그때 카이의 뒤에서 낯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는 그녀의 등장 에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 리리스? " 휘익 미처 그가 돌아보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검은 날개의 리리스가 소리 없이 내려섰다. 그녀는 전방의 거인을 노려보며 분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저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가이아에게 얼마만큼 사랑받고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그 대가 없는 사랑을 완전히 저버렸다는 것을. " " 리리스……너……. " 카이는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말에 상처입고 눈물을 보이던 그녀를 지금 와서 무슨 얼굴로 마주한단 말인가. 하지만 카이는 자신을 돌아보는 리리스의 얼굴에서 이런 자신의 걱정이 한 낮 기우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유메를 구하자, 카이! 테라도, 노아도, 가이아도 모두 상관 없어. 이렇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 때문에 유메를 잃는다는 건 말도 안 돼! 반드시 그녀를 구해내겠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힘으로! " " 리리스! " 카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덥썩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리리스를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 하, 하하하! 그래! 유메를 구해내는 거야! 하하하! 그거면 충분해! 그거 면! " 꾸욱 리리스는 자신을 끌어안는 카이의 두 손이 연신 격정으로 떨리고 있다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 한때는 어떻게 되나 했지만……. 그래. 그럴리가 없지! 역시 나의 리리스 야! 유메와 나의 리리스! " ' 나의 자랑스러운 딸, 리리스……. ' 그의 말 속에서 자신에게 속삭이던 유메의 목소리를 겹쳐 들을 수 있었다. 리리스는 카이의 어깨를 안아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그래. 이걸로 된 거야.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 스스로에게 떳떳한 일. 이것이 바로……. ' 언젠가는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을 때가 오면……반드시 얘기해줄게. 지 금껏 얘기하지 못했던 일들까지 전부 다. ' 안녕, 가인. 리리스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거인을 바라보았다.저 거인에 그가 타고 있 음이 분명했다. 그의 오라가 다른 어느때보다도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 결국 얘기할 수 없게 되었네, 우리. ' 하다못해 내 진짜 이름 만이라도 가르쳐주고 싶었건만……. 물론 작년 크리스마스 때 가인의 꿈속에서 리리스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적 이 있었지만, 꿈에서 깨어난 가인은 끝내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절 대로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서는 결국…… 잊어버렸다. 어쩌면 그 때가, 그것이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르는데. 리리스는 한 줄기 미련 마저 떨쳐내며 카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 카이, 가자! 쿠사나기를 말려야 해! " " 뭐? " 그녀의 외침에 카이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말려야 한다니? " 이대로 쿠사나기가 날뛰도록 놔둬서는 안돼.오라의 주인이 소멸하는 날에 는 원로회에서 유메를 제거할 거야.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어. 오히려 테라가 감추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끄집어냈으니 공로를 인정받을지도 몰 라. " " 하, 하지만 어떻게? 지금의 쿠사나기는 나의 작품이야. 내가 그를 만들었 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어. 그를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해! " 카이는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리리스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는 성공했지만, 결국에는 유메의 목을 자신이 조르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리리스는 의기소침해진 그를 달래며 말했다. " 아니. 우리가 꼭 그를 소멸시킬 필요야 없지. 그 역할은 저기 보이는 테 라의 작품이 대신해줄 테니까. 단 그러기 위해서는 저들이 마음껏 싸울수 있도록 마음의 짐은 덜어줘야되지 않겠어? " " 마음의……짐? " 카이는 인상을 굳혔다. 어쩌면 리리스는 쿠사나기의 소멸보다도 더 어려운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감은 어김 없이 적중했 다. " 피스 그레이를 요르문간드의 손에서 빼내야 해. 그가 담보로 잡혀있는 한 저 거인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저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들은 그런 사람들이니까. " " ……피스메이커인가? 저것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 오라의 주인과 그 꼭두각시들! 카이는 인상을 구기며 독기가 서린 눈빛으로 거인을 노려보았다. 그는 혹시 나 아직도 리리스가 오라의 주인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걸까 미심 쩍어했다. " 리리스, 너 설마……. " " 이상한 생각하지마.저들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으니까.하 지만 당분간은 싫어도 저들의 힘을 이용하는 수 밖에. 차원 왜곡 현상 마 저 상쇄시키는 저 힘이라면 분명 지금의 쿠사나기를 상대하는데 부족함이 없잖아? " " 으음. 그렇지……. " 카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단 그녀를 믿기로 결심한 이상 어 설픈 의심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믿겠어, 리리스. 너의 말을. ' 그러니까 부디 날 배신하지마. ' 카이는 수중의 검은 피리를 꺼내들며 리리스에게 말했다. " 분명 피스 그레이는 쿠사나기의 화신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을 거야. 아포 칼립스 제너레이터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결코 이쪽도 만만치 않 다고. 가능성은 희박하다 못해 절망적이야. " " 물론 이대로라면 절망적이겠지. " 리리스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앞으로 하나의 원을 그렸다. 그러자 그 원으 로부터 하나의 수정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팔란티어. 실마릴의 유산인 보는 돌이었다. 그녀는 팔란티어로 하나의 영상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 하지만 이들과 함께라면 희박한 가능성도 조금은 올라가려나. " 그녀의 시선을 따라 팔란티어로 눈을 돌린 카이에게 보인 것은 검은 신부복 의 남자와 양홍색의 AI슈츠를 입은 소년이었다. ▶242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8 화 '출동, 머신 아더!' Neo군(nextneo) 04-03-22 :: :: 27599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0 - Ｂy Ｎext Ｎeo =-=-=-=-=-=-=-=-=-=-=-=-=-=-=-=-=-=-=-=-=-=-=-=-=-=-=-=-=-=-=-=-=-=-=-= 위이이이이잉 왜곡된 공간의 휘어짐이 풀어지자 제일 처음 나타난 현상은 머신 아더의 오 리하르콘마저 데울 정도로 뜨거운 열풍의 세례였다. 갑작스런 차원의 복귀로 공간 마찰이 일어나자 그로 인한 열 에너지가 12구역을 휩쓸었던 것이다. 하늘로 솟아오르던 왜곡의 용권풍이 원 상태로 돌아가자 그동안 접혀져있던 유클리드 공간도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머신 아더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건만 늘어나는 차원의 용량에 마치 뒤로 밀려나는 듯한 착시 현상을 보였다. -차원 압축이 풀리면서 공간이 늘어나자,8차원 복소수(複素數)들이 그 정보 를 뒤늦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소립자 와프와 공간은 불가분의 것이니 이제 그 속에 접혀져 있던 아공간이 모습을 드러낼 테지! 노엘의 외침을 뒤로 하며 피스 대원들은 긴장한 눈빛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비틀린 세계가 형체를 잡아가자 그 사이로 숨어있던 제 3의 세계가 나타나고 있었다. 아공간. 사차원 시공 세계라 불리는 공간이 삼차원의 법칙에 따라 구현되면 서 만들어내는 공간의 틈이었다. 브루스는 공간을 진동시켜 이 공간의 틈 속 에 자신과 요르문간드를 유폐시켰던 것이다. 리리리리리링 공간 마찰 소리가 점점 줄어들면서 왜곡 현상도 본디의 모습을 찾아갔다.그 리고 드러난 것은 사라졌던 12구역의 폐허였다. 피스대원들이 불과 몇 시간 전 쿠사나기와 사투를 벌였던 바로 그곳! 여기에 바로 피스 그레이와 쿠사나기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저건……? 가인의 사념이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러난 공간의 틈 속에 존재했 던 것은 브루스도 쿠사나기도 아닌, 검은 반 구형의 물체였던 것이다. 지름 이 50미터는 넘을듯한 그 크기는 40미터인 머신 아더가 다 왜소해 보일 정도 로 거대했다. 머신 아더를 그린 폼으로 제어하고 있던 진우는 맥이 빠진 목소리로 노엘에 게 물었다. -어째 엉뚱한 게 나와버렸군요? -긴장 풀지마! 저 녀석으로부터 머신 아더와 맞먹는 중력장이 전개되고 있다! 트트트트트트 순간 지축이 울리며 반구형의 물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반구형의 표면 에 새겨져 있던 검은 비늘들이 재배열되면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좌우로 몸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자 지표면과 구형의 물체가 닿는 부근이 먼지를 일 으키며 강렬한 지진파를 발생시켰다. -구형의 물체에서 예의 역중력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목표를 D타입으 로 인식합니다! -요르문간드인가! 채영의 보고에 진우가 탄식하듯 외쳤다. 그렇게 구형의 물체가 몸을 일으키 자 하늘의 먹구름이 회오리를 치며 지상으로 몰려들었다.그리고 먹구름은 좌 우로 도시를 감쌀 정도로 거대한 날개 한 쌍을 만들어냈다. [크크크크. 꽤나 기다리게 해주는군.] 구체로부터 흘러나오는 낮은 웃음소리. 피스 대원들로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공간 속에서 그들을 반긴 것은 요르문간드의 본체로 구 현된 쿠사나기였던 것이다! 마리는 쿠사나기의 주위를 살피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브루스는…… 그는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거지? -브루스! 대답해요! 어디 있는 거에요! 가인의 사념이 불안함을 한껏 내포하며 12구역에 울려퍼졌다. 어째서 쿠사 나기만! 브루스는 어디로 가고 저 녀석만 홀로 나타난 거지! 그런 가인 일행의 사념을 읽어들인 쿠사나기는 몸을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 렸다. [카하하하하! 적당히들 해둬라! 녀석을 버리고 간 주제에 지금와서 찾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누가 버리고 갔다는 거냐! 진우가 노호성을 내지르며 머신 아더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패턴 그린의 오라에 반응한 오리하르콘들이 일제히 진동하며 대기를 뒤흔들었다. 진우는 애써 분노를 가다듬으며 절제된 목소리로 쿠사나기에게 질문했다. -사부님을, 피스 그레이를 어떻게 한 거지? 대답해! [크크크, 난 여기 버젓이 살아있고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과연 어떻게 되었으려나?] -말 장난하지맛! 촤아아아아아 진우의 분노에 발맞춰 머신 아더의 정신 감응력 역시 최고조로 높아졌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폭발할 듯한 오라의 충만함이 거인을 감쌌다. 그때 진우의 사념으로 노엘의 외침이 들려왔다. -녀석과 말씨름할 시간이 없다, 피스 그린! 남은 PET용액의 양을 생각해서 라도 여기선 속전속결이다! 녀석이 입을 다물 생각이라면 다물게 내버려둬! 대신 입을 다문 것을 죽도록 후회하게 만들어줘라! -타아아아아아앗! 진우의 기합과 함께 머신 아더가 몸을 낮추며 발을 떼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한발 한발을 옮길 때마다 지축이 터질듯한 폭음과 함께 대기가 뒤흔들렸다. 그나마 900톤의 무게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지반이 내려앉지 않은 것은 다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들이 중력장을 조절하여 거인의 무게를 진우의 이미 지 메이킹에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인의 발걸음은 웅장하게, 그리고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쿵! 도저히 40미터의 거구가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뜀박질! 머신 아더는 마치 사람처럼 전력질주하며 눈 앞의 검은 마수를 향해 달려 들었다. 쿠사나기는 그런 거인의 돌진에 코웃음을 치며 용염을 휘날렸다. [흥. 기껏 도망쳤나 했더니 꽤나 재미난 것을 끌고 와주셨군! 그래! 그걸로 이 몸을 쓰러뜨려보시겠다?] 우습군. 그 가소로움이 치가 떨릴 정도로 우스워! 피스 그레이! 네 놈은 겨우 이런 녀석들을 기다리면서 나를 홀 몸으로 상대했던 거냐! 너의 그 용기 는 대체 무엇을 위한 대가였지? 크롸라라라라라 쿠사나기가 몸을 일으키자 100미터를 넘는 그 체구가 위용을 드러냈다. 드래곤과 드래곤 슬레이어! 그 수 천년을 넘어 계속되는 전설이 지금 여기에서 되풀이 되고 있었다! 인간들이여, 그대들의 역사는 끊임 없이 돌고 도는 운명의 수레바퀴로구나! [그렇게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죽여주마!] " 빌어먹을! 빌어먹을! 바보 늑대같으니! 정말이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망할 놈의 축생! " " 입 한번 걸하군. 적당히 하지 않으면 제재에 들어가겠다. " " 제길! 이 정도 투덜거림은 좀 봐주란 말이야!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한 심한 꼴이 되었는지 알기나 해! " " 그건……그렇군. 솔직히 그 건에 대해서는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 " 그래. 그래. 그러니까 입이 두개고 한 개고 나발이고 간에 제발 닥치고 좀 있어줘! " 양홍색의 AI슈츠를 착용한 유빈은 분을 참지 못하며 라트에게 있는 데로 폭언을 퍼부었다. 어느샌가 단정한 신부복으로 갈아입은 라트는 용케도 유빈의 폭언들을 참아넘기고 있었다. 폭언의 내용이야 어쨌든 간에 지금의 상황은 분명 자신이 초래한 것이었으니까. 그때 씩씩 거리는 유빈의 뒤로 한 소년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이, 꼬맹아. 너야 말로 입을 다무는 게 어떨까?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히스테리를 부리는 게 영 안 되어보이기는 하다만 계속 들어주고 있자니 슬슬 짜증이 나서 말이야. " " ……. " 유빈은 지긋이 입술을 깨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서는 테라인의 육신을 빌린 네크로맨서 카이 브릿드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카이의 시선에 유빈은 애써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 하하. 그럼 하루만 서로의 파트너를 바꿔 보는 게 어떨까요? 분명 제 히스테리의 원인을 절실히 깨닫게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 " 뭐, 그것도 다 네 녀석의 업보라는 거지.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기는 커녕 남에게 떠맡길 생각부터 하다니, 근본이 되먹지를 못했군. " " ……! " 유빈은 이를 갈며 곧바로 카이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한발 먼저 그 기색 을 알아차린 라트가 유빈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라트는 침착하게 마음 속으 로 그에게 말을 건냈다. -참아라. 그와 문제를 일으켰다간 마스터의 입장이 곤란해진다. 녀석이 일부러 우리를 도발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는 거냐? -으으윽. 유빈은 애써 이성으로 감성을 이겨냈다. 마인드 브레이크로 정신 연령은 진즉에 어른들을 뛰어넘고 있었건만 그에 반해 더디기만한 신체 연령이 자꾸만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는 라트의 말이 맞았다. 좀 더 침착해야 한다. 좀 더 냉정해져야 한다. 마스터에게 피해를 끼치느니 약간의 모욕을 당하고 마는 게 천만배 는 낫지 않은가. " 적당히 해, 카이. " 그때 전방에서 일행을 리드하고 있던 리리스가 나지막이 카이에게 경고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카이는 언제 유빈을 골탕먹였냐는듯 바짝 긴장했다. " 지금 우리는 서로 협력해야만 하는 관계야. 채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트러블을 일으키면 어떡하자는 거야? " "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 카이는 쓴 웃음을 지으며 바로 사과했다. 그런 그를 유빈은 겹눈질 하며 속 으로 비웃었다. 흥, 팔푼이 같은 자식. 네 놈의 입장도 뻔할 뻔자잖아? 그런 주제에 지금 누구에게 설교를 하겠다는 거야? 젠장. ' 하지만 저 여자……, 리리스라고 했었나? ' 밤의 여왕, 리리스. 유빈은 그녀에 관한 사항을 자신의 마스터,한시영에게서 익히 들어 알고 있 었다. 바르의 별들 중 유일한 여성이자 옴팔로스의 열쇠를 이용해 가이아와 접속하겠다는 발상을 해낸 장본인. 요르문간드가 돌격 대장이라면 그녀는 작전 참모 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든 계획은 그녀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그녀를 중심으로 완성된다. 저 네크로맨서가 꼼짝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녀가 바르의 별에서 어떠한 위치를 맡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 하지만 저런 거물을 설마 라트가 알고 있었을 줄은……. ' 유빈은 자신의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걷고 있는 라트를 바라보았다. 아홉 시간 전. 라트와 유빈은 피스 대원들이 쿠사나기와 격돌하고 있는 틈을 타서 무사히 전장을 이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빈의 조바심이 이 모든 화근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는 이대로 시영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고는 돌아갈 수 없다며, 전장에 남아 쿠사나기의 동태를 살피기로 고집했던 것이다. 그러다 그만 리리스의 팔란티어에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 거기 너희들, 우리를 좀 도와줘야겠어. ' 다짜고짜 자신들을 부려 먹으려는 그녀에게 유빈은 반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의외로 광분할 거라 생각했던 라트가 순순히 그녀를 따르는 바람에 반항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리리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라트를 설득했었다. ' 라트, 너와 나 사이에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빚이 남아있다.설마 잊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 빚. 그것은 미처 유빈도 모르고 있던 라트의 과거였다.그는 예전에 리리스의 도움으로 한번 되살아난 적이 있었다. 그 부활에 대한 조건이 바로 푸른오라 의 능력자, 피스 블루를 자극시켜 각성을 꾀하게 하는 것. 하지만 그 조건은 피스 그린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리리스는 라트에게는 비밀로 한 채 그를 살라만더의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전적까지 있었다. 오히려 그녀쪽에서 라트에게 빚을 졌으면 졌지, 라트가 그녀에게 빚 을 졌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라트의 행동은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 혹시 이녀석……. ' 유빈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라트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라트 발렌시아, 그는 설마 마스터에게 몸을 담는 척 하면서도 리리스와 이 중으로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닐까? ' 물론 마스터야 녀석의 얕은 속셈따위, 진즉에 꿰뚫어보셨겠지만……. ' 하지만, 하지만 마스터에게 행여나, 조금이라도 놈이 위해를 가하게 된다면 ……. ' ……그때는 내가 네 놈을 죽여줄테다! ' 유빈은 차갑게 눈을 빛내며 각오를 다졌다. 투아아아아앙 그때 그들이 이동하던 12구역의 블럭 저 편에서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폐허의 잔재들이 하늘로 튀어올랐다. 그 폭발의 여파로 강렬한 지진파가 대지를 휩쓸 고 지나갔다. 유빈은 근처에 쓰러져있는 전신주를 부여잡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 휘우! 멋들어지게 해주는군. 괴물 대 괴물의 싸움이야. 저 정도 오라라면 쿠사나기를 해치우는 것도 꿈만은 아니겠어. " "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 거인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위협적인 존 재야. " 라트는 녹색의 눈동자를 번뜩이며 한창 쿠사나기와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 머신 아더를 노려보았다. 설마 오라를 이용하여 저런 말도 안되는 것을 만들 어내다니……. ' 역시 마스터의 말은 옳았다. ' 오라는 인류에게 주어져서는 안되는 힘이다. 그들을 방치시켰다간 가이아의 힘은 끊임없이 농락당하게 될 것이다. 유빈은 입맛을 다시며 리리스와 카이에게 말했다. " 이대로라면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요? 잘들 하고 있잖아요? 저거의 어디를 도와줄 구석이 있단 말입니까? " " 요르문간드를, 아니 쿠사나기를 우습게 보지 말아. " 카이는 유빈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 녀석은 바르의 별들 중 최강이다. 노아의 실험이 만들어낸 최고의 생물체 란 말이야. 적어도 이 삼차원 내에서 그를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어. " 그때 잠자코 카이의 얘기를 듣던 라트가 반문했다. " 불가능하다니? 내가 알기로는 요르문간드가 피스 그레이에게 죽은 것만 해 도 벌써 두 번이 넘는 걸로 알고 있는데? " " 브리트라와 초류향을 말하는 거야?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틀리지. 그들은 요르문간드에게서 분열된 복제 인격체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쿠사나기는 복제들을 끌어모아 스스로 원형을 뛰어넘었다. 거기다 내 창생의 술로 삼차원 유클리드 공간에 실재하는 몸까지 얻게 되었으니……. " " 결국 모든 원흉이 여기 계셨구만. " 유빈은 카이에게 들리지 않게 혼잣말로 투덜거리다가 그가 자신을 돌아보자 재빨리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부렸다. 카이는 그 태도에 불쾌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 어쨌든 저 거인도 요르문간드에 뒤지지 않는 괴물인 것 같으니 승률은 50 대 50이야. 조금만 힘의 균형이 깨져도 순식간에 한쪽이 무너져 내릴 걸. 그러니까 그 균형이 깨질 기회를 이쪽에서 마련해 주자, 이거지. " " 하지만……이상하군.왜 당신들은 그렇게나 요르문간드를 쓰러뜨리려고 하는 거지? 그는 당신들의 동료가 아닌가? " " ……. " 라트의 질문에 카이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리리스를 돌아보았다. 리리스는 짧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 뭐든지 넘치면 탈이 나는 법. 이대로 쿠사나기를 방치시켜뒀다간 우리에게도 해가 미칠거라 판단했을 뿐이다. 일단은 그렇게 알아둬. " " 일단은……이라. " 라트는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서로를 견제하는 바르의 별들에 게 있어서 특정 개인의 힘이 커지는 것은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 이다. 그리고 그건 한시영과 네이 안데르슨의 뜻이기도 했다. 라트가 리리스의 요구를 군 말 없이 받아들인 데에는 그러한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유빈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카이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그……피스 그레이라고 했던가? 고작 그 인간 하나를 구하는 데 우리까지 데려올 필요가 있었어요? " " 그 인간 하나가 쿠사나기를 저렇게나 맹목적으로 만든 거다. 쿠사나기는 꽤나 그 남자에게 집착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그를 빼돌린다면 반드시 동요를 일으킬 거야. 저래 보여도 저 녀석, 꽤 순애보거든? " " 하아. 어째 남의 연애 사업을 훼방놓는 것 같아 영 찜찜한데……. " " 그만큼 이쪽도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거지. 거기다 동료가 무사해야 더욱 힘을 내는 녀석들도 있는지라. " 카이는 성가시다는듯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그는 앞서 걷던 리리스 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어? " " 응. 거의 다 왔어. 이 근방이야. " 리리스는 조심스럽게 건물의 벽에 몸을 숨기며 전방을 살폈다. 그녀를 뒤따 라오던 라트와 유빈도 덩달아 몸을 숨기며 의문을 표했다. " 뭐, 뭐야? 왜들 그러는 거에요? " " 쉿. 조용히 해. 여기서 쿠사나기의 드레이카닉 아이에 노출되었다간 일이 복잡해진다고. " " ……드레이카닉 아이? " 리리스의 대답에 라트가 표정을 굳히며 머신 아더와 쿠사나기가 전투를 벌이고 있을 근방을 돌아보았다. 카이는 창생의 술로 콘크리트 벽에서 예의 골렘 두 마리를 만들어내며 답했다. " 쿠사나기의 초지각능력이야. 다행히도 지금은 거인을 상대하느라 사용할 겨를이 없는 모양이지만. " "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야. 이대로 녀석의 눈에 띄지 않고 아공간으로 진입 한다. " 리리스는 등 뒤로 검은 피막의 날개를 뽑아내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말에 유빈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 아공간? 하지만 그건 이미 거인에 의해 파괴되었잖아요? 지금 여기가 아 공간 아니였어요? " " 틀려. 저 거인이 파괴한 것은 단순히 아공간을 감싸고 있던 공간의 휘어짐 뿐이었어. 아공간은 접혀진 공간의 틈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한정된 공간과 시공만을 인식하는 저들로서는 입자가속기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지 않는한 차원의 내부 구조조차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해. '숨은 변수'를 찾아내려면 기존의 지각 능력에서 벗어난 제 3의 능력, 양자 세계의 밖에 서 접속한 우리들의 눈이 필요하지. " 그렇게 말하며 리리스는 거리의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은 얼핏 보기에는 별 다른 이상한 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 어라? " 위화감. 반대편 건물의 유리창에 유빈 일행의 모습이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달빛에 비친 건물의 그림자들이 일관성 없이 무분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빛의 방향이 틀어져 있다는 증거였다. 차원 왜곡. 기묘하게 어긋난 삼차원의 법칙 사이로 새로운 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리스의 지적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그 현상은 미미했다. 아마 날이 어두워진 탓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 가자! " 휙 리리스는 짧게 소리치며 전방을 향해 날아올랐다. 카이는 골렘의 등에 올라 타 그 뒤를 쫓았고, 라트는 유빈의 허리를 끌어안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그들은 순식간에 아공간으로 돌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푸화아아아악 갑자스레 솟아 오르는 불의 장벽! 그 불기둥들이 일행의 앞을 막아서고 있 었다. 리리스는 그 뜨거운 열기를 견뎌내지 못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 뭐지, 이건! " 분명 쿠사나기의 드레이카닉 아이는 전개되지 않았을 텐데! 거인과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그가 이 쪽으로 신경을 쓸 틈은 없었다! 그렇다면……. ' ……사전에 신경을 써 두었다는 건가? ' 그리고 일행의 머리 위에서부터 낯익은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후하하하핫. 여전히 변함이 없구나, 너희 버러지들은! " 그 목소리에 골렘의 보호를 받고 있던 카이가 믿을 수 없다는듯 소리쳤다. " 말도 안돼! 어째서 네 녀석이! " -차아아아아아앗! 머신 아더의 육중한 거구가 왼발을 축으로 삼으며 뒤돌려 차기를 쿠사나기의 목 부근에 꽂아 넣었다. 그 충격은 인근의 빌딩들까지 휩쓸어 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쿠사나기는 재빨리 머신 아더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등 뒤의 날 개를 휘둘렀다. [이 놈이!] 퍼컹 하지만 그 날개는 머신 아더의 양손에 달린 건틀릿에 빗겨 맞으며 튕겨 나갔다. 진우는 용케도 머신 아더의 몸체에 빠른 적응을 보이며, 거인의 수족을 자신의 수족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해내고 있었다. 물론 사전에 지속적으로 시뮬레이션 훈련을 받아온 성과이기도 했지만, 뒤돌려차기와 같은 기술은 왠만한 균형감각과 타이밍이 없고서야 사념으로 재현해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천부적인 격투 센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피해보실까!] 순간 쿠사나기의 외침에 반응한 그의 날개가 여섯 조각으로 갈라지며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머신 아더를 노렸다. 진우는 인상을 굳히며 거인의 옆에 반쯤 쓰러져 있는 빌딩을 돌아보았다. 저 빌딩을 발판으로 삼아 공중 으로 도약하여 쿠사나기의 사정 거리에서 벗어날 속셈이었다. 진우의 사념에 반응한 머신 아더는 기세 좋게 빌딩으로 발을 들어올렸다. 콰지지지직 -……! 하지만 빌딩을 밟는 것까지가 한계였다. 머신 아더는 도약할 수 없었던 것 이다! 당황하는 진우의 사념으로 가인과 마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피해요, 진우 씨! -뭐하는 겁니까, 피스 그린! 퍼커커커컥 다행스럽게도 쿠사나기의 날개는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건틀릿을 꿰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머신 아더는 육중한 양손으로 몸을 감싼채 미끄러지듯 빌 딩의 숲을 가로질렀다. -너, 넘어진다! 중심을 잃은 머신 아더가 비틀거리며 뒤로 쓰러지려고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쓰러진 빌딩의 폐허가 버팀축이 되어 머신 아더를 지탱해주었다. 빌 딩에 반쯤 파묻힌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머신 아더 속의 진우가 노엘에게 항 의했다. -너무 무겁잖습니까! 점프도 제대로 되지 않는 몸이라니! -아무리 중력장을 조절하더라도 그 무게가 900톤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무거운게 당연하잖아! -그럼 그 오라 클록이란 걸로 반중력을 사용하는 건? -나,참. AC를 전개한 것만으로도 그렇게 힘들어했던 주제에 이런 전시 상황 에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노엘의 사념이 혀를 차며 한탄했다. 지금의 머신 아더는 최적의 오라 수치 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제 기능을 50퍼센트도 채 발휘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움직임만 가능했던 것이다. 이래 가지고서야 D-4시뮬레이션의 최종 레벨을 발동시키는 건 꿈에도 생각 할 수 없었다. -소실된 PET용액의 양이 전체의 2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가동 시간은 15분! 데드 라인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채영의 사념이 다급하게 머신 아더의 상태를 보고해왔다. 역시 정작 문제가 되는 건 머신 아더가 아니라 피스 대원들이었어! 노엘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며 진우에게 소리쳤다. -최대한 적의 공격을 받아들여선 안돼! 공격이란 공격은 모조리 피해낸다! 알겠나! -하아. 그런 건 무리라고요. -너희들의 생사가 달린 일이야! 진우는 노엘의 요구에 한 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기동력 제로인 몸으로는 최대한 지구력으로 버텨내다가 크게 한 방을 노려야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가뜩이나 진우의 전투 방식과 극과 극을 달리는데 한 술 더 떠서 전신 회피라니? 그나마 머신 아더의 동체가 단단하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역시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값어치를 한다는 걸까. -그렇다면……그걸로 가볼까! 진우는 결심을 굳히며 머신 아더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오라에 반응한 거인의 인공근육들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크, 역시 무겁잖아! 진우는 이를 악물며 머신 아더의 움직임을 재촉했다. 머신 아더는 어퍼 비 버 위의 두 눈을 맹렬히 불태우며 쿠사나기에게 달려들었다. 쿠사나기는 그런 거인을 가소롭다는듯 바라보며 날개를 휘둘렀다. [뭐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대포로 밀어붙이겠다는 거냐?] 쩌정 쿠사나기의 날개가 번개같이 머신 아더의 좌우를 번갈아가며 후려쳤다. 다행히도 동체를 가릴 정도로 거대한 건틀릿이 그 공격을 막아주었지만, 그 충격 은 고스란히 콕피트 안의 파일럿들에게로 직결되었다. [후하하하하하! 마치 거북이 같구나! 조금은 고개를 내밀어보는게 어때?] 쩌저저정 [무리인가?] 쩌저저저저정 쿠사나기의 날개는 그야말로 인정사정 없이 머신 아더를 연타했다. 진우는 무슨 생각에선지 건틀릿으로 거인의 몸을 감싸며 그 공격들을 모조리 받아들 이고 있었다. 노엘의 요구와는 정반대의 조종이었다. 그 모습에 채영의 사념이 당황하며 보고했다. -데드 라인까지 앞으로 8분! 아, 아니 7분! PET용액의 총량이 50퍼센트까지 떨어지고 있습니다! 오른손과 왼손 관절 부위에서도 이상 발생! -피스 그린!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어서 명령에 따르십시오! 마리의 사념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진우는 조금도 대꾸하지 않으며 거인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만 전력을 다했다. 그것을 보다 못한 가인이 노엘에게 소리쳤다. -지, 진우 씨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 아니에요? 어떻게 좀 해봐요! -……. -이봐요? 선생님! -……. 가인은 노엘까지 덩달아 대답이 없어지자 안절부절 못하며 그녀를 부르짖었다. 그때 시민의 사념이 당황하는 그와 마리를 달래주었다. -침착해요, 가인 씨, 마리 씨. 진우씨에게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하, 하지만! -기다리자니! 기체가 금새라도 부서질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마리는 시민의 태평함에 기가 질려 이를 악물었다. 그녀와 진우, 시민은 머신 아더의 조종을 위해 사전부터 훈련을 받아왔지만, 머신 아더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서 각자가 맡은 파트 외의 것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한 마디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리는 지금 진우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 일행에게로 노엘의 사념이 들려왔다. -모두 그 상태로 대기!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오라를 한 데 모으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해! 그리고 오퍼레이터 팀! -아, 예! -지금부터 D-4 레벨 3를 수행한다! 대 몬스터 전 시뮬레이션 D-4는 총 4개의 미션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첫번 째 미션, 레벨 1을 시민이 훈련받았고, 레벨 2와 레벨 3를 진우가, 레벨 4를 마리가 훈련받았다. 노엘의 명령에 진우는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생사가 걸린 일이라면서요? -목숨을 걸어볼 가치가 있잖아? 맡길테니 알아서 해봐! -좋아! 진우는 고함을 내지르며 천천히 머신 아더의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거인은 쿠사나기의 날개 세례를 얻어맞으면서도 조금씩 쿠사나기와의 거리를 좁 혀나가기 시작했다. 가인과 마리는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그 상황을 주시했다. 귓가로 채영의 데드 라인 임계 보고를 들으면서도 잠자코 기다리는 건 보통 신경이 두껍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노엘은 들뜬 것인지 긴장한 것인지 모를 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이 최고의 기회야. 녀석은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도, 다른 스피시픽 어빌러티(Specific Ability)도 사용하지 않고 있어. 얕잡아보이고 있는 지도 모르지만, 그래. 얕잡아보이고 있는게 좋아. 그렇게 방심하면서 마음껏 여유나 부리고 있으라고 해. 아무래도 피스 그레이의 말이 맞는듯 했다. 녀석은 앞의 교전에서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를 두번이나 사용하는 바람에 영자 변환기로 모아둔 카르마 에너지(Karma Energy)를 모두 소비했음이 분명했다. 물리적인 공격 밖에 하지 않았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던 거다! -D타입과의 거리 400, 380, 360. 이미 레벨 3의 유효 거리에 도달했습니다. 스매셔 언제든지 사용 가능합니다! -기다려! 좀 더 끌어들여야 해! 이번 한 번으로 완전히 끝장내지 못하면 도리어 이쪽이 당한다! 노엘은 레벨 3의 발동을 지연시키며 초조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현재 머신 아더의 PET용액은 레벨 3의 반동을 막아내는 것 만으로도 바닥을 드러 낼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공격해야만 한다! 그때 머신 아더의 어깨를 쿠사나기가 날개로 짓누르며 소리쳤다. [어디까지 들어올 셈이냐! 이대로 네 녀석들을 지하에 파묻어주마!] 콰지지지직 순간 쿠사나기의 날개로부터 강한 중력장이 발생하며 머신 아더의 주위에 다운 버스터 현상을 발생시켰다. 주위의 공간에 균열이 생기며 머신 아더가 서있던 지반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쿠사나기는 중력째 머신 아더를 깔아뭉갤 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진우가 기다리고 있던 바였다. -보인다……! 날개의 움직임이 멈추자, 그 사이에 가려져 있던 쿠사나기의 본체가 그 모 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머신 아더가 손을 뻗기만 해도 닿을 코 앞에! -지금이다! 진우가 고함을 내지르며 패턴 그린의 힘을 끌어 모으자 머신 아더의 그린 폼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와 피스 대원들의 오라에 반응하여 머신 아더의 등 뒤에 달려있던 오리하르콘 스레드들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예의 오라 클록을 전개했다. 그러자 쿠사나기의 중력장이 오라 클록의 중력장 앞에 서 힘을 잃으며 중화되어갔다. [이, 이건!] 쿠사나기는 당황하며 날개를 거두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라 클록의 중력장이 그의 몸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전세 역전이다! -자세 교정, 기관부 압력 저하! 그래비테이셔널 필드 가동! 오라 크록 전개! 채영의 빠른 보고와 함께 머신 아더가 힘차게 오른 다리를 뒤로 빼내며 오른 주먹을 끌어 당겼다. 그리고 거인의 망토 또한 세차게 펄럭이며 등 뒤로 반중력의 원을 만들어냈다. 노엘은 모든 준비가 끝나자 머신 아더의 시계로 쿠사나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초전도입자가속기(超電導粒子加速器) 시동! 우우우우우웅 머신 아더의 표면을 감싼 녹색의 빛이 한층 더 진해지면서 오른손의 건틀릿이 울음을 터뜨렸다. 거인의 오른손에 달려있던 입자가속기, 스매셔가 작동했던 것이다. 초전도 현상이란 특정 온도 이하에서 전기 저항이 제로가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초전도체인 오리하르콘 또한 예외가 아니었기에 노엘은 오리하르콘의 초전도 현상을 이용하여 패턴 그린에 반응하는 입자가속기 스매셔로 전자 가속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속된 펀치는 오라 클록의 반중력을 이용하여 목표를 향해 마하의 속력으로 날아간다! -체인 스매셔 펀치(Chain Smasher Punch)! 투아아아아아아앙! 순간 머신 아더는 녹색의 잔상을 남기며 하나의 빛이 되었다. 그리고 빛은 눈 앞에 있던 거대한 생물체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패턴 옐로우가 중화시키다 남긴 충격파의 잔해가 사슬 모양처럼 터져나갔다. 그 연쇄적 인 충격파의 폭발에 쿠사나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산산히 분해되었다. 퍼버버버버벅 뼈와 살과 피의 조각들이 폭우처럼 도시에 흩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에는 주먹을 내뻗은 거인이 불꽃을 일으키며 홀로 서있었다. 충격파가 열 에너지로 변하면서 생긴 불꽃이 오리하르콘의 표면을 휩쓸고 있었다. G 버스터 펀치가 중력을 이용한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였다면 체인 스매셔 펀치는 전자 가속을 이용한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였다. 그 위력에 넋을 잃은 피스 대원들에게로 노엘의 사념이 들려왔다. -앞의 AC 비행의 원리를 공격에 응용한 기술이지. 오라 클록 만으로도 최고 마하 3.3까지 가속이 가능한데, 거기다가 오리하르콘을 초전도자석으로 이 용한 전자 가속까지 더해지자 마하 5.0 이상까지 가속 가능! 아, 물론 그 런 속력으로 비행하는 것은 자살 행위니까 AC비행 시에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시험해보고 싶기도 해. 초음속을 뛰어넘는 극초음속(Hypersonic)! 체인 스매셔 펀치는 피스 그린의 슈팅 스타를 케루빔의 과학력으로 재현시 킨 극초음속 펀치였던 것이다! Ｔo Ｂe Ｃontinued…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243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8 화 '출동, 머신 아더!' Neo군(nextneo) 04-03-26 :: :: 23879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1 - Ｂy Ｎext Ｎeo =-=-=-=-=-=-=-=-=-=-=-=-=-=-=-=-=-=-=-=-=-=-=-=-=-=-=-=-=-=-=-=-=-=-=-= 《여분의 PET용액은 전체의 30퍼센트. 데드 라인까지 2분 30초를 남기며 정 지합니다. 》 《ACR 정지. 오라 수치 하강합니다.》 유레카의 작전 본부실. 오퍼레이터들의 보고와 함께 메인 스크린의 머신 아더가 오라 클록을 해제하고 있었다. 거인의 표면을 달리고 있던 불꽃들도 오리하르콘의 강한 내열성을 뚫지 못하고 허공 사이로 사라져갔다. 노엘은 머신 아더의 상태를 스크린으로 살피며 채영에게 물었다. " 버스터와 스매셔의 상태는? " 《둘 다 기능 정지했습니다. 미연의 사고를 대비하여 레벨 2와 레벨 3의 액 세스(Access)를 해제합니다.》 " 역시 개량의 여지가 필요하군. 그나마 전시 상황에서 정지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그 외의 상태 이상은? " 《제 2관절 부위와 그에 부속된 14번, 18번, 21번 기관들이 침묵하고 있습 니다. ACR의 전기 신호로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 흐음, 그 정도면 귀환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겠지. 적어도……. " 노엘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으며 스크린에 잡힌 D타입의 영상을 바라보았다. 체인 스매셔 펀치에 아포칼립스를 일으킨 괴물은 생명체라고 칭하는게 무색할 정도로 분해되어 있었다. 100미터의 거구 중 절반이 원자로 소멸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충격파의 여파에 다진 고기가 되어 있었다. 본래의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처참한 죽음이었다. 노엘은 D타입이 완전히 침묵한 것을 재차 한번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 그래. 쓸데 없는 걱정인가……. 다행이야. 다들 잘해줬어. " 그녀는 돋보기를 벗으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12년 전과 같은 상황 속에서 이렇듯 다른 결말을 보게 될 줄은……. ' 살아있기를……잘 한 걸까. ' 시더의 몸을 빼앗으면서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 던 걸까? 노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여린 손녀의 손. 일찍이 70세가 넘은 할머니의 손이 아니었다. 그리고 안경의 돋보기에 굴절된 소녀의 모습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 시더의 것이었다. 자신에게 인생을 빼앗긴 아이의 것이었다. 물론 손녀의 몸을 빼앗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니, 후회할 수는 없다. 지금와서 후회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파렴치한 짓이기 때문이다. 노엘에게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 이걸로 된 거야. 모든 죄는 내가 짊어지겠어. 그러니까 시더야. 너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는 거야. 지금껏 못해 본 일들도 다 해보고, 그래. 연애도 해봐야지.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잖니? ' 그리고 학교도 다니는 거야. 지금껏 그 조그만 골방 속에서 지내온 모든 시간들을 보상받는 거야. 아니지, 보상받는 게 아니다. 되돌려 받는 거야. 이 할머니가 네게서 빼앗은 모든 것을 되돌려주겠어. 그리고 반드시 널 행복하 게 만들 거야. 제멋대로라고 말해도 좋아. 난 지금껏 이렇게 밖에 살아오지 못했으니까. '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줄게……. ' 그것이 노엘의 새로운 목표였다. 연구 밖에 모르는 자신이었지만, 분명 시더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뭔가가 있을 터였다. 드카아아아앙! 그녀만이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비잉비잉비잉비잉비잉 반드시…… 있었을 텐데. 순간, 작전본부실의 불이 꺼지며 불길한 비상 경보음이 울려퍼졌다. 노엘은 천천히 벗었던 안경을 다시 쓰며 메인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인이…… 쓰러지고 있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매달려온 연구의 성과가 무너지고 있었다. 머신 아더가……산산히……. 《D타입으로부터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 발생! 직격당했습니다!》 《제 3관절 부위와 부스터가 사라졌습니다. 머신 아더, 자세를 제어하지 못 하며 쓰러집니다!》 윤채영과 오퍼레이터 팀의 당황하는 목소리. "맙소사! 체조직 20퍼센트 미만에서 자기 수복을 해낸 건가! 그것도 이런 단 시간 내에! " "사령관 님! " 닥터와 수정의 당황하는 목소리. 그 모든 목소리들이 노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벌어 지는 일들 같은…… 지독한 괴리감이 그녀를 엄습해오고 있었다. 쿠우우우웅 메인 스크린의 머신 아더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의 희망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노엘의 머리 속으로 떠오른 얼굴은……. ' 그랜마. ' ……풀이 죽은 표정으로 그녀의 연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어린 시더의 얼굴이었다. 쿠우우웅 쓰러진 거인의 위로 빌딩의 잔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녹색의 빛을 잃 은 머신 아더는 예의 은빛으로 돌아간채 돌더미들을 사정 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런 거인에게는 응당 달려 있어야 할 왼손이 어깨 째 보이지 않고 있었다. [크크, 크크크크크.] 음산한 웃음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쓰러진 거인을 뒤덮었다. 달빛을 가리는 짐승의 날개. 그 사이로 괴물의 두 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그렇게 비웃음을 띄며 머신 아더를 내려다 보았다. [너희 테라는 정말 놀래키는 재주 하나 만큼은 일품이구나. 차원 왜곡을 무너뜨릴 때 쓴 타흘룸에 이어 설마 두번째 타흘룸까지 준비하고 있었을 줄 은……. 크크크, 보험을 들어두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죽어버렸을 거야. 크크크크, 안타깝게 됐어. 크하하하하하!] 쿠사나기가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를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게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12구역을 차원 왜곡으로 감쌌을 때, 이미 그는 그 안에 있던 민간인들의 시체로부터 카르마 에너지를 끌어 모았던 것이다. 거리에 응당 널려 있어야할 수 많은 시체들이 사라졌던 것을 왜 진즉에 눈치 채지 못했던 걸까! -제길! 쿠사나기의 웃음 소리에 진우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검은 마수는 황색과 적색, 백색의 용염들을 휘날리며 붕괴된 육체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실로 경이적인 회복력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더 이상 회복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부활이다! 쿠르르르르 폐허 더미에 파묻힌 머신 아더가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쿠사나기는 그런 머신 아더를 거칠게 밟아누르며 거인의 왼쪽 가슴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곳에서부터 피스 대원들의 사념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네 놈들의 패배다! 네 놈들은 져버렸다고! 그만 포기하고 지옥 구경이나 하 시지!] 콰지지지직 쿠사나기는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를 입에 물고 그대로 뜯어버렸다. 그러자 콕피트가 있는 왼쪽 가슴 부위가 뜯어지며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승 모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근육 섬유들의 밑으로 피스 대원들이 잠들어 있 을 터였다. 머신 아더는 모든 기능이 정지한듯 무력하게 포식자에게 유린당했다. -비, 빌어먹을! 이대로 끝장인가! 가인은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피스 핑크의 정신이 흐트러지자 사념의 상태 로 존재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자꾸만 눈 앞이 감기며 PET용액 속에 있을 육체의 느낌이 살아나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의 검은 날개를 머신 아더의 목 부위로 가 져갔다. 그는 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거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들은 이것이 어떤 물건인지 알기나 하고서 사용하는 것일까? [……너희나 나나 피차 이용당하는 건 마찬가지.] -뭐? 쿠사나기의 목소리에서 동정의 빛을 느낀 마리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용……당하다니? [그나마 내가 너희들보다 나은 것은 인식하고 있다는 것.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편이 더 행복할 거야. 비록 거짓된 행복일지라도 고통스럽지는 않을 테니까.] -무, 무슨 소리야! 가인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알 수 없는 불쾌함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우리가 너같은 녀석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지? 어째서! 쿠사나기는 그 모습이 딱하다는듯 혀를 찼다. [아니. 그냥 죽어라. 저세상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직접 네 놈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통곡해.] 취이이잉 그 말과 동시에 쿠사나기의 날개가 머신 아더의 목을 후려쳤다. 그러자 흉쇄유돌근이 절반쯤 잘려나가며 거인의 머리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옆으로 늘어졌다. 쿠사나기는 일격에 목이 끊어지지 않자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한번 날개를 들어 올렸다. 목 다음은 심장이다. 인간답게 가공되었으니 인간답게 죽여주마, 가련한 가이아의 자식이여! 휙 하지만 막 거인의 목이 떨어지려는 순간, 뭔가를 감지한 쿠사나기의 날개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자신들에게서 몇 백미터 떨어진 도시의 한 지점을 바라 보며 중얼거렸다. [……호오, 이거 의외인데?] 가인 일행은 갑작스레 그가 출수를 늦추자 의아함을 표했다. 쿠사나기는 키득거리며 머신 아더를 짓누르던 몸을 일으켰다. [양동 작전이었다, 이건가? 나를 상대하면서 기회를 틈 타 피스 그레이를 구할 생각이었군! 크크크크, 하마터면 꼼짝 없이 당할 뻔했어!] -야, 양동 작전이라니. 그게 무슨……. 일행은 영문을 몰라 중얼거렸다. 피스 그레이를 구한다니? 누가? 우리가? [아니었나? 그럼 너희들과는 별개의 세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거로군.] 뭐, 상관 없어.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니까. 지금쯤이면 쿠사나기가 사전에 준비해둔 가디언들이 침입자들을 막아내고 있을 터였다. 그는 거인을 상대하는 한편으로도 줄곧 아공간에 대한 경계를 늦 추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스피시픽 어빌러티없이 무모한 접근전을 벌였던것 도 다 본래의 힘을 분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사나기는 이빨을 드러내며 머신 아더를 내려다 보았다. [좋아. 그럼 일단 네 녀석들부터 끝장내고!] 쿵! 그리고 멈춰있던 날개가 머신 아더의 목을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 넌……초류향?! " 리리스의 외침에 푸른 도포의 남자는 수중의 섭철선을 살며시 부치며 하늘에서 일행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뒤로는 청색의 용염, 초록빛의 머리카락들 이 바람 한점 없는 날씨에도 거칠게 휘날리고 있었다. 초류향은 예의 오만한 표정으로 일행에게 미소지었다. " 꽤 오랜만에 낯익은 얼굴들을 보게 되는군. 이 내가 반가움마저 느낄 정 도야. " " 넌…… 피스 그레이에게 소멸당한 것이 아니었나? 어떻게 지금껏 살아 있 었던 거지? " 카이의 질문에 초류향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섭철선으로 분노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는 마치 타오르는 것 같은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 요르문간드의 제어권을 획득한 쿠사나기는 옛 정보를 토대로 소멸한 화신들까지 복원해낼 수 있게 되었다. 본체를 구현한 그의 능력이라면 이 정도 정신 복제쯤이야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겠지. " " 흐흥.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쿠사나기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거잖아? 주인이 나간 집을 지키는 개 신세로군! " 리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신세를 비웃었다. 그 도발에 초류향은 눈을 가 늘게 뜨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역시 네 년의 존재는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우리의 뒤통수를 칠 거라고 예상했었지. 그렇다면 어디 주인 없는 집에 무단 침입한 도둑 고양이의 말로를 가르쳐주도록 할까! " 후우우우우우우 그와 동시에 주위의 대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초류향의 힘은 불. 그 불꽃이 지금 모든 것을 태워 없앨 것처럼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리리스는 그 기세에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도리어 미소까지 짓는 여 유를 보였다. " 과연 너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해낼 수 있을까? 이쪽은 이래보여도 바르의 별이 두 명 씩이나 있단 말이지. 혼자인 너로는 역부족이야. " ……우리는 언급하지도 않는 겁니까? 유빈과 라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리리스를 불만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때 라트는 자신들의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민감히 반응하며 후방을 경계했다. 어둠 저편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 오고 있었다. " 물론 나 혼자서 너희 모두를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얕잡아본 상대는 피스 그레이, 그 하나로 족하거든. " 절그럭 절그럭 무거운 쇠사슬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서서히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 내는 그림자! 그 그림자는 다름 아닌 전신에 검은 스판덱스(Spandex)를 걸쳐 입은 한 크라운(Clown)이었다. 하얗게 분을 칠한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검은 눈화장과 입술 화장을 한 그는 이상하리 만치 섬뜩한 요사함을 띄고 있었다. 피에로는 금새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도 전신에 무거운 쇠사슬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 이상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은 초류향과 동급, 그 이상이었다. 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피에로의 이름을 속삭였다. " 설마…… 브리트라? " " 크, 크크크큭! 이거 꽤나 재미있어졌는데! " 순간 라트는 예의 침착함을 잃어버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눈 앞의 상대가 그의 야수욕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그 만큼 상대의 강함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라트는 양 손에서 은색의 갈퀴들과 칼날들을 뽑아내며 긴장한 목소리로 자신의 파트너에게 소리쳤다. " 좋아! 그럼 이제부터 여왕님의 빚을 갚아보도록 할까, 유빈! " " ……너무 의욕적인 것도 곤란해.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 " 유빈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패턴 카민을 전개시켰다. 그러자 그들이 서있던 자리가 빠르게 양홍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렇게 둘이 브리트라를 맡게 되자, 초류향을 상대하는 건 자연스럽게 리리스와 카이의 몫이 되었다. 리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듯 초류향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 덤벼. " " ……후! 못본 새에 꽤나 시건방져졌군! " 초류향은 순간 충동적으로 섭철선을 좌에서 우로 그었다. 그러자 그의 등뒤 에 모여있던 불꽃이 부채를 타고 전방으로 날카로운 직선의 폭파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불꽃의 단면은 정확히 리리스의 정면을 후려쳤다! 투화아아악! 하지만 초류향의 불꽃은 조금도 그녀의 몸에 닿지 않았다. 어느샌가 리리스의 앞에 나타난 두 마리의 골렘들이 굳건히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프론즈와 네비로스! 그 둘의 주인인 카이 브릿드는 리리스의 앞으로 나서며 초류향에게 말했다. " 그녀를 태우려면 나부터 먼저 태워야 할 거야, 초류향. " " 그래? 그렇다면 너희 두년놈들을 함께 불 태워주지! " 초류향은 분노하며 재차 섭철선으로 불꽃들을 끌어모았다. '이 아이, 오늘도 당신을 찾으면서 울더군. ' 제이스컬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육각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어두운 방 안을 밝히자, 제일 처음 보인 것은 침대에 걸터 앉은 열 살 남짓의 어린 소녀였다. 시더 웰리스, 하지만 지금은 노엘 웰리스인 그녀가 앳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소하고 있었다. ' 그랬나요? 달래느라 애 먹었겠어요, 제이. ' ' 허허허. 아니야. 오히려 난 기뻤다네. 이렇게 나에게 기대며 응석을 부려 주는게 다 고마울 정도야. 처음에는 그렇게나 낯가림이 심해서 조금도 입 을 열지 않던 아이가……. ' 제이스컬은 진정 기쁘다는듯 환하게 웃으며 노엘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손녀를 자랑하는 친 할아버지 같았기에, 너무나도 눈부셔 보였기에 노엘은 차마 그를 마주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그만큼…… 정에 굶주렸던 거겠죠. 난, 이 아이에게 제대로 된 할머니가 아니었으니까. ' ' ……노엘. ' 제이스컬은 혹 자신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노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에 닿은 소녀의 어깨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 그래요. 제대로 이 아이를 돌아봐주지도 않았죠. ' 언제나 연구에 빠져서, 언제나 눈 앞의 일들에 빠져서, 자신을 애타게 부르 던 시더를 돌아봐주지 않았다. 줄곧 외면하고 있었다. ' 이 아이는…… 내 뒤에서 무슨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을까? ' 쓸쓸한 표정으로? 울면서 떼쓰는 표정으로? 원망하는 표정으로? 아아. 하지만 알 수가 없지. 알 도리가 없었다. 돌아봐주지를 않았으니까. 언제나 등을 돌리고만 있었으니까. ' 후후. 이렇게 몹쓸 할머니가 세상에 또 있을까. ' 노엘은 자조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제이스컬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 어쩔 수가 없었어. 그때의 자네에게는 시간이 없었네. 그렇게 연구에 매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더 큰 후회를 하게 되었을 거야. ' ……그래. 제이스컬이 말한 대로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후회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서 난 선택했다. 좋은 할머니가 되기보다는 좋은 연구자가 되기로. 시더의 곁에 있기보다는 그 아이의 미래를 지켜주기로. 그것만이 유일하게 시더를 방치시킨 것에 대한 노엘의 면죄부였다. 그 알량한 면죄부가 있었기에 그녀는 지금껏 버텨올 수 있었다. " 후, 후후후후. 연구때문이라고? " 노엘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 소리는 작전 본부실의 비상 경보음과 오퍼레이터들의 연이은 보고 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단지 그녀와 사념으로 이어져 있던 채영만이 영문을 몰라 그녀를 돌아볼 뿐 이었다. 《다, 닥터 웰리스?》 "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라고?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 웃기지마! 쾅! 노엘은 자신의 눈 앞에 있던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바람에 상황을 모니터링하던 수정과 닥터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노엘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사실 핑계에 불과했던 주제에! 채영은 들을 수 있었다, 노엘의 사념을. 그리고 머신 아더에 탑승한 피스 대원들 또한 그녀의 사념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나는 시더를 돌아봐주지 않았어. 연구 때문이 아니야. 바빴기 때문도 아니야. 사실은, 사실은……. ' 엄마. ' 노엘에게는 외동 딸이 하나 있었다. 젊은 날의 치기 때문에, 채 결혼조차 하지 않고 가졌던 아이였다. 유독 자존심이 강했던 그녀는 부족한 아버지의 사랑마저도 자신이 채워주리라 다짐하며 정성껏, 혼신의 힘을 다해 딸을 길렀다. 그러던 어느날, 독일로 유학을 보냈던 딸이 한 남자를 데려왔다. 뮌헨에서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검은 머리의 동양인 의사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평범한 남자. 하지만 제대로 된 의학 과정도 밟지 않고 불법 체류자와 불법 입국자들을 상대하는 무보수 돌팔이였다. 그런 남자와 딸 아이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노엘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의 결혼을 축복해줄 수 없었다. 자신은 저런 남자에게 시집보내려고 힘들게 딸 아이를 키워온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회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케루빔의 일원으로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한낱 필부와 합쳐 진다는 게 견딜 수 없이 치욕스러웠다! ' 이제부터 넌 내 딸이 아니다! 네 멋대로 살고 싶다면 어디 네 마음대로 해봐! ' ' 엄마! ' 그렇게 노엘은 딸과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딸 아이는 어미와 남자 중, 남자를 택한 것이다. 태연한 척, 냉정한 척 하려고 애썼지만 딸을 잃은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마치 가슴 한 켠이 뜯어져 나가는듯한 아픔 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 거짓말……. ' 딸이 죽어버렸다. 그 남자도 죽어버렸다. 평소 남자의 진료소에서 아시아인들을 치료해주는 것을 고깝게 보아오던 네오 나치들이 진료소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화재 속에서 살아남은 부부의 아이가 바로 시더였다. 딸과 그 남자의 피가 반반씩 섞여있던 아이. 엉겁결에 시더의 보호자가 된 노엘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손녀를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아야만 했다. 손녀는 영락없이 그녀의 부모님들을 닮아 있었던 것이다. 애지중지하던 딸과 닮은 사랑스러운 아이. 그 딸을 빼앗아간 남자와도 닮은…… 증오스러운 아이. 노엘은 시더를 떠맡으며 그 애증까지도 함께 떠맡게 되었다. 그랬기에 당연히 시더에게도 좋은 할머니가 될 수 없었다. 노엘은 딸을 잃은 슬픔을 연구에 몰두하며 잊어버리려고 했고, 그렇게 손녀에게도 무관심해져 갔다. 뒤에서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시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아이가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외면해버렸다. ' 우리 시더, 착하지?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으렴. 조금만 더……. ' 자신이 그 말을 할 때마다 그 아이는 무슨 생각으로 참고 기다렸을까? 누구보다도 정에 굶주렸을 아이였는데. 누구보다도 정을 갈망하고 있을 아이였 는데…….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토록 등을 돌리고만 있었던 거지? 어째서 단 한번도 돌아봐주지 않았던 걸까? 노엘은 흐느꼈다. 과거의 잘못을 돌이킬 수 없다면, 적어도 시더의 미래만 이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손녀의 불행하기만 했던 시간들을 행복으로 채워주 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껏 발버둥 쳐온 것인데. 몇번이고 절망하면서도 그 하나 만을 위해 살아온 것인데. 시더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면서까지, 그 아이의 몸을 빼앗으면서까지 구차하게 버텨왔던 것인데! -이런 내 노력마저도, 시더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거야? 나는, 끝내, 아무 것도, 아무 것도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없었던 건가? 부서진 머신 아더에게서 노엘은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조차 몰랐던 주제에, 자존심만 높아서 혼자서 모든 것 을 해결하려 했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것이 부서져 있었다. 자신의 딸도, 시더도, 머신 아더도……. 지키려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 " 이제……끝났어. " 노엘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모든 것을 체념해버렸다. -끝나지 않았어요! 그때 노엘의 뇌리 속으로 울려퍼지는 사념! 그리고 눈을 뜬 그녀에게 보인 것은 목을 노리던 쿠사나기의 날개를 오른손으로 움켜쥔 머신 아더의 모습이 었다. 사념은 머신 아더에 탑승한 피스 블루에게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멋대로 포기하지 말아요! 그렇게 견뎌왔으면서! 그렇게 참아왔으면서! 가인은 노엘의 사념으로부터 그녀와 시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자신은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후회하고, 누구보다도 시더의 행복을 바래왔던 것은 다름 아닌 노엘, 그녀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가 여기에서 포기해선 안된다! -혼자서 노력하는 것이 힘들다면 저희가 돕겠어요! 시더가 행복해지기를! 시더가 자신의 인생을 되찾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겠어요! 여기서 포기하 는 건 시더의 지난 12년간을 물거품으로 만들 뿐이잖아요! 키이이이이잉 머신 아더는 거친 굉음을 내며 무서운 힘으로 쿠사나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거기다 반쯤 잘려진 아더의 흉쇄유돌근도 오리하르콘의 셀프 라이팅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그 기세에 당황한 쿠사나기가 소리쳤다. [이, 이 놈이!] -그러니까 절대로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지 말아요! 시더를 지키겠다는 꿈을 버리지 말아요! 선생님 자신이 시더에게 말했잖아요? 꿈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주는 운명의 바람이다! -아……. 노엘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시더가 아주 어릴 적, 그런 얘기를 해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더가 채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해준 얘 기였는데……. 가인은 며칠 전 시더의 골방에서 그녀와 나눴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때의 기억들이 사념이 되어 노엘에게로 흘러들어왔다. -그럼 시더는 저런 거대 로봇을 만드는게 꿈인 거야? -응? 흐으으음. 뭐, 그것도 꿈이기는 해. 하지만 내 가장 큰 꿈은 바로……. 그 다음에 그녀가 했던 말은, -마이 그랜마가 뒤돌아볼 정도로 위대한 과학자가 되는 것! 물론 지금의 나로서는 무리겠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랜마에게 인정받는 과학자가 되고 말겠어! -하하, 결국 할머니가 목표라는 거지? -에, 그런가? 하지만 미묘하게 틀려. 활짝 웃으며 조금도 주저없이 대답하는 모습. 그런 시더의 모습에 노엘은 결국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설마 저 아이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저런 목표를 가지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되어서 손녀에게 질 수는 없잖아요? 손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세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달라고요! -……. 노엘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피식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예의 자신감을 회복해내고 있었다. -……좋아! 그럼 그 기대에 부응해주지! 어디 네 녀석도 큰 소리 친 만큼의 실력을 보여줘봐! -하아아아아앗! 순간, 가인의 기합소리와 함께 머신 아더의 푸른 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그리고 패턴 블루의 오라에 반응한 오리하르콘 스래들이 한 올 한 올 살아있는 것처럼 등 뒤로 떠올랐다. -머신 아더의 ACR이 증폭하고 있습니다! 오라 클록 전개! 코어 내부의 오라 수치 상승! 10! 20! 30! 40! 50! 보고하는 채영의 사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경악하고 있었다. 지금의 머신 아더는 예상 밖의 기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머신 아더의 기본 동력인 250노트가 300노트 가까이 상승하고 있었고, 제어 권은 어느새 피스 블루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거기다 스매셔와 버스터의 반 작용으로 기체가 타격을 입은 지금, 자력으로 오라 클록을 전개해내다니! 이건 시뮬레이션에도 들어있지 않은 레벨이었다!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블루 폼(Blue Form)! 노엘의 외침과 동시에 머신 아더는 오라 클록의 반 중력을 이용하여 그대로 쿠사나기의 몸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그 충격에 100미터의 거구가 거짓말처럼 뒤로 밀려나갔다. 쿠사나기는 간신히 날개로 주위의 건물들을 부숴뜨리며 균형을 잡아냈다. [크윽! 다 죽어가던 주제에 어디서 발악을!] 쿠사나기는 고함을 내지르며 등 뒤의 날개를 칼날 처럼 거인에게로 휘둘렀다. 그러자 반경 50미터 이내의 건물들이 치즈 조각처럼 베이퍼 커팅으로 잘려 나갔다. 쿠구구구구구 [……!] 하지만 무너지는 건물들 속에서 거인은 보이지 않았다. 쿠사나기는 이를 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신 아더는 제 자리에서 400미터 가까이 밤하늘로 뛰어 올랐던 것이다! 진우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점프…… 가능하잖아? 휘이이이이잉 달빛을 등에 진 머신 아더의 등으로부터 반중력의 원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오라 클록이 찢어질 것처럼 휘날리며 거인의 전신을 감쌌다. 가인은 들끓는 오라를 참지 못하며 반사적으로 외쳤다. 질풍(疾風)! -라이징-------------킥! 투화아아아아악 순간 반중력을 등에 업은 거인이 섬광처럼 쿠사나기를 향해 내리 꽂혔다! Ｔo Ｂe Ｃontinued…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244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8 화 '출동, 머신 아더!' Neo군(nextneo) 04-04-20 :: :: 41887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2 - Ｂy Ｎext Ｎeo =-=-=-=-=-=-=-=-=-=-=-=-=-=-=-=-=-=-=-=-=-=-=-=-=-=-=-=-=-=-=-=-=-=-=-= 투카카카카카칵 12구역이 마치 이등분되는 것처럼 폭발하면서 충격파가 도심을 가로 질렀다. 오라 클록의 반중력으로 가속한 머신 아더는 낮은 대지 각도로 낙하하였기에 땅을 파고 들어 크레이터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100미터 거구의 쿠사나기를 낙하지점으로부터 전방 7킬로미터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 하늘이 울고, 땅이 울었다. 반중력을 등에 업은 라이징 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 그 자체! -트앗! 가인은 기합을 내지르며 쿠사나기에게 꽂혀들어간 머신 아더의 다리를 반대편 발로 빼내며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쿠사나기는 머신 아더와 떨어진 상태로도 1킬로미터를 더 밀려나 폐허더미를 뒤집어쓰고서야 정지했다. 머신 아더는 전신을 휘감은 오라 클록을 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끝난 건가? 가인은 무심결에 중얼거리다가 자신의 뒤편에 펼쳐진 어처구니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라이징 킥의 낙하지점으로부터 약 8킬로미터의 불덩이가 생겨나 엄청난 양의 산소를 태우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불덩이는 주위의 산소까지 흡수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폭심지 주변의 건물들이 산소를 빨아들이는 속도를 견뎌내지 못하고 대부분 폭심지 안쪽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뒤이어 시속 350킬로미터의 후폭풍이 12구역 근방의 13구역까지 도달했다. 후폭풍은 약 진도 7정도 되는 지진의 파괴력으로 도시를 덮쳤는데, 그 바람에 90퍼센트 이상의 건물들이 이 충격으로 대파되었다. 만약 13구역의 민간인들이 대피하지 않았더라면,이 후폭풍만으로도 대량 살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진우는 아스팔트 도로들이 후폭풍의 열로 인해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내려다 보며 신음했다. -이건……열 복사만 없다 뿐이지 완전히 핵폭발이잖아? 버스터나 스매셔와 같은 기관으로 힘을 집중시켰더라면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에 맞먹는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극점이 분산된 지금의 라이징 킥은 극대소멸을 일으키지 못하고 피해를 확산시키고 말았다. 즉흥적인 공격의 대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머신 아더에게도 되돌아왔다. 투하아아아앙 쿠사나기에게 킥을 먹였던 머신 아더의 오른발이 폭발을 일으키며 오리하르콘 장갑을 떨어뜨렸다. 더구나 그 안의 오리하르콘 근육까지 붕괴되면서 거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대지에 무릎을 꿇었다. -PET용액의 양이 데드라인을 넘어섰습니다! 기능 종료까지 앞으로 4분! 제 4관절 부위와 그 하위 기관들이 침묵했습니다! 채영의 다급한 보고에 가인은 멍하니 있다가 중얼거렸다. -이거……나 때문에? -당연하잖냐! 노엘의 사념이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반중력으로 상대에게 몸통 박치기 따위를 하니까 그렇지! 그나마 우리쪽에서 머신 아더의 전신을 AC의 공간 압축으로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기체가 가루가 되었을 거다! -미, 미안해요! 그제야 자신의 무모함을 깨달은 가인은 당황하며 사과했다. 그 무모함에 덩 달아 죽을 뻔했던 진우와 마리, 시민은 할 말을 잊고 침묵했다. 설마 이런 말도 안되는 짓을 해버릴 줄이야. 반중력 날라 차기라니! 제 때 본부에서 서포트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은……. -하아∼ 뭐, 무모함의 성과는 있었던 것 같은데. 노엘은 메인 스크린으로 상황을 확인하며 언제 화를 냈냐는듯 흐뭇해 했다. 그 무모함 덕분에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에 맞먹는 위력으로 드래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던 것이다. 상대도 설마 그들 쪽에 극대소멸기가 남아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끝장났을 지도! [크으으으윽!] 하지만 그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폐허에서 피어오르는 과열된 화구(Fire ball)로부터 거대한 짐승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드러난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쿠사나기였다. -뭐야! 어떻게 그 충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거지? 마리는 한탄하며 연기 속에서 걸어나오는 쿠사나기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곧 그의 앞에서 아른거리는 왜곡 현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주위의 공 간이 휘어지는 것처럼 쿠사나기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주시하던 노엘이 알겠다는듯 소리쳤다. -중력장을 끌어모은 공간 압축 현상이야! 머신 아더가 오라 클록으로 동체를 보호했던 것처럼 녀석도 스스로를 보호해냈던 거였어! 그래! 중력장의 연쇄 폭발까지 사용해내는 녀석인데, 제너레이션 쉴드 정도야 문제도 아니었겠지! -설마 그런 재주까지……. 시민이 허탈하다는듯 중얼거렸다. 그때 화구로부터 한쌍의 거대한 날개가 펼 쳐지며 이를 가는 짐승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래! 네 놈들이 해내는 것을 나라고 못해낼 줄 알았나!] 촤아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쿠사나기의 날개가 화구의 대류 상승을 조절하여 마치 회오리 처럼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두 눈을 붉게 물들인 쿠사나기 가 귀신같은 표정으로 머신 아더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징 킥의 충격을 완전히 중화시키지는 못했는지 얼굴의 반쪽이 날아가 있었다. [다 죽어가던 녀석이!] 쿵쿵쿵쿵! 분노의 돌진! 쿠사나기는 괴성을 내지르며 무릎을 꿇고 있는 머신 아더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줄어드는 거리! 가인은 당황하며 머신 아더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재차 무릎만 꿇고 말았다. 라이징 킥의 여파로 뭉개 진 오른발의 근육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노엘이 채영에게 소리쳤다. -방위 시스템 가동 준비! -예? 하, 하지만 그건 레벨 4를 위한……. -여기서 당하면 레벨 4도 뭣도 없잖아!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레벨 4를 전개할 동력도 없어! 사용해! 위이이이잉 순간, 오퍼레이터 팀의 외부 조종으로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와 어깨의 폴드런(pauldron), 그리고 오른손의 카우터(cowter)가 개방되었다. 그리고 그 곳으로부터 수십탄의 미사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채영은 빠르게 시스템을 작동시키며,목표가 머신 아더에게 접근하기만을 기다렸다. -700미터, 650미터! 타켓이 유효 사격 거리 내로 들어왔습니다! 오라 필드 언제든지 발사 가능합니다! -좋아! A.F.S(Aura Field Shrapnel) 발사! 투투투투투투학 노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신 아더의 개방된 해치로부터 총 25발의 AFS가 유산탄처럼 발사되었다. 이 AFS는 평소 피스 대원들이 휴대해오던 오라 필드를 순항 미사일(cruise missile) 식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쾅 쾅 쾅 쾅 제트기 모양의 AFS들이 무인 위성 위그드라실의 TERCOM(Terrain Contour Ma tching) 유동 방식에 따라 백발 백중으로 쿠사나기에게 적중했다. 오라 필드는 ABF와 마찬가지로 이차원 생물체의 신진 대사를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었기에 AFS는 타격을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쿠사나기의 몸에 마비 증상까지 야기시켰다. 쿠사나기는 그 오라의 집합체들에게 쉴틈 없이 두들겨 맞으며 피를 내뿜었다. [크리야아아아압!] 그러나 그것으로도 쿠사나기의 질주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전신이 넝마가 된 상태에서도 폭주 기관차처럼 머신 아더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가인은 다급히 머신 아더의 오른 팔을 들어 동체를 가렸다. 터엉! 육중한 파쇄음과 함께 머신 아더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쿠사나기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거인을 들이받았던 것이다. 휘청거리던 머신 아더는 비정상적인 셀프 라이팅으로 부서진 오른발을 복원해내면서 간신히 중심을 잡아냈다. 하지만 그에 질세라 쿠사나기는 재차 절반이 날아간 머리로 머신 아더의 얼굴을 들이받으며 날개로 오른팔을 두들겼다. -이 자식이! 가인은 이를 갈며 쿠사나기의 목을 잡아채 그대로 수평 방향으로 괴물을 집어던졌다. 40미터의 체구가 자신의 배 이상인 괴물을 집어던지는 것은 이미 물리 법칙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패턴 블루의 힘이 상승함에 따라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근육이 한층 더 가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동화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은 조종사들이 받는 충격 또한 증가함을 의미했다. 기체의 성능 을 따라가지 못하는 피스 대원들의 육체가 PET용액을 더욱 소모시켰던 것이다. -기능 정지까지 앞으로 3분! PET용액이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 오차 는 0.32초! -Snakes! 노엘은 안절부절하지 못하면서도 가인의 행동을 만류하지 못했다. 지금으로 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제와서 적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라고 해도 무리인 주문이었다. 어떻게든 제한 시간 내에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크으으윽!] 한편 쿠사나기도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상대하기에는 거인의 능력이 만만치가 않았다. 지금의 그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힘에 겨웠던 것이다. 그나마 브리트라와 초류향을 거둬들인다면 해볼만 하겠 지만! [큭! 웃기지마! 웃기지 말란 말이닷!] 아직 멀었어! 이 정도로는 날 쓰러뜨릴 수 없어! 촤자자자자작 쿠사나기는 머신 아더의 기세에 압도당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며 거칠게 날개를 방전시켜 뇌격을 내뿜었다. 하지만 머신 아더는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등 뒤의 오라 클록으로 몸을 가리며 뇌격을 빗겨냈다. 그 모습에 쿠사나기는 처음으로 낯선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무섭다, 라는 기분을. ' 안돼! 이대로는 더 이상……! ' 욕심이 너무 과했다. 지금의 그는 이 전투 외에도 너무나 많은 곳에 힘을 분 산시키고 있었다. 때문에 요르문간드에게서 흡수한 힘을 채 사용하지도 못하 고 애를 먹고 있는 것이다. 한심하게도! ' 내 힘을 나눠가진 분신들이여! ' 쿠사나기는 자신의 화신들을 향해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네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 흥! 재촉하지 말아라, 쿠사나기! ' 초류향은 아랫 입술을 깨물며 수중의 섭철선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섭철선이 그려내는 궤적을 따라 공간 마찰이 일어나며 데토네이션들이 연쇄적으로 카이 브릿드를 뒤쫓았다. 하지만 카이는 자신의 골렘, 비프론즈를 앞 세워 그 불꽃들을 막아냈다. 푸화아아악! 거센 폭발과 함께 비프론즈가 불꽃으로 뒤덮였다. 그 모습에 초류향은 코웃음을 치며 골렘을 지나 카이에게로 달려들었다. " 후하하하하! 내 불꽃을 이런 급조된 바위 덩어리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 했나! 큰소리를 친 주제에 수단은 치졸하기 짝이 없구나! " " 하! 여전히 하나 밖에 모르는군, 초류향! " 카이는 되려 초류향의 비웃음을 받아치며 두번째 골렘, 네비로스의 뒤로 몸 을 숨겼다. 그와 동시에 불꽃으로 휘감겼던 비프론즈가 초류향의 뒤에서 부터 주먹을 휘둘러왔다. 덕분에 막 네비로스에게 달려들던 초류향은 돌풍처럼 몸 을 회전시켜 섭철선으로 불꽃의 태풍을 만들어냈다. 퍼엉! 불꽃과 불꽃이 부딪히며 폭음을 터뜨렸다. 초류향은 돌풍을 풀어내며 자신을 기습한 비프론즈를 노려보았다. 불꽃에 녹아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그 골렘은 오히려 불꽃의 마신으로 변한채 더더욱 강력해져 있었다. 초류향은 네비로스의 뒤에 숨어있는 카이를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 시건방진 녀석이! 감히 내 힘을……! " " 이용할 건 이용해 먹는다! 그게 바로 인생의 법칙이지! " 카이는 냉소하며, 폐허가 된 거리로 번져나가는 화염에 창생의 술을 사용 했다. 그러자 그 불꽃에서부터 네 발 달린 불의 짐승들이 튀어 나왔다. 그 짐승들은 카이의 피리 소리에 발 맞춰 일제히 초류향을 적으로 간주하고 달려 들기 시작했다. 촤! 촤악! 초류향은 자신의 불꽃들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자 기가 막히는 심정으로 섭철선을 휘둘러 짐승들을 베어냈다. 하지만 베어낸 만큼 짐승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초류향은 섭철선을 거두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불꽃의 짐승들도 나비 형상으로 변하여 그 뒤를 쫓았다. 화르르르륵 나비 떼들이 초류향의 청포에 달라붙어 그 몸을 불태웠다. 하지만 초류향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도리어 카이를 향해 낙하했다. 불의 힘을 가진 그에게 있어서 불에 의한 공격은 조금도 타격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 쳇! " 카이는 재빨리 네비로스를 뒤로 물리며 불꽃의 거인이 된 비프론즈를 앞으로 내세웠다. 초류향이 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이 불꽃의 거인 또한 불에 영향을 받지 않을 터! 그런 카이의 예상이 적중했는지 초류향은 비프론즈를 공격하지 못하고 방향을 바꿔 네비로스에게로 달려들었다. 초류향은 연거푸 자신의 힘을 이용해먹는 카이에게 화가 났는지, 노호성을 내지르며 네비로스에게 불꽃의 채찍을 휘둘렀다. " 거슬린다, 네 놈! " 촤자자자작! 순식간에 채찍이 네비로스의 목을 쳐버리고, 초류향의 손에서 생겨난 불꽃의 창들이 꼬챙이처럼 골렘의 몸을 꿰뚫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렘이 계속해서 움직이려고 하자 초류향은 네비로스의 배에 자신의 양손을 쑤셔 넣고 소리쳤다. " 이래도 움직일 테냐! " 푸화아아악 순간, 골렘의 전신으로부터 열 개의 불기둥들이 살아있는 뱀처럼 터져나왔다. 초류향은 골렘의 내부에 집어넣은 자신의 열 손가락에서 한꺼번에 불꽃 의 채찍들을 생성시켜 네비로스를 파괴한 것이다. 그렇게 네비로스가 맥없이 소멸하자,카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비프론즈의 뒤 로 몸을 숨겼다. ' 역시 나 혼자로는 역부족인가! ' 그는 자신들에게서 거리를 두고 아공간에 접속하고 있는 리리스를 돌아보았다. 아공간은 차원과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물질계(Physical plane)와 아스트랄계(Astral plane) 사이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아스트랄 계를 통과점으로 삼는 차원 도약보다 아스트랄 계를 유영하는 아공간 접속이 더욱 고차원의 능력을 요하게 된다. 잘못했다간 물질계에 고정시켜둔 영체가 원형계로 빨려 들어가 존재의 계(palne of existence) 사이를 방황하기 때문이다. 차원의 사이를 끝없이 떠도는 것.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최악의 저주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이는 마치 자신이 리리스라도 된 것처럼 등골이 오 싹해졌다. ' 안돼! 지금의 그녀는 내가 지켜줘야 한다! 내 쪽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건 말도 안돼! '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류향이 자신을 상대하느라, 리리스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카이가 필사적으로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초류향의 오만함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입으로는 오만함을 버렸다고 말해도, 명예욕의 화신인 그는 눈앞의 상대를 피한다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네크로맨서를 쓰러뜨리고 리리스를 저지시키면 된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리리스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을 것이다. ' 그 오만함에 감사를 표하지! ' 카이는 피리를 불어 재차 소멸한 네비로스를 생성시켰다. 어차피 초류향을 이길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상대하면서 리리스가 아공간에 접속할 시간을 버는 것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우리 쪽이 아니라 녀석들 쪽인데……. " 크크크, 카카카카! " 하지만 네크로맨서의 예상과는 달리, 라트와 유빈 쪽은 의외로 브리트라를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정신 계열의 능력자인 카이와 리리스에 비해 웨어 울프인 라트와 마인드 브레이커인 유빈은 서로가 무엇을 해야할지 확실히 인 지하고 있었다. 유빈이 마인드 브레이크로 상대의 발을 붙잡고 라트가 접근전을 펼친다. 공수의 전담이 이보다 확실할 순 없는 것이다. " 좀 더 뛰어보시지 그래? 좀 더 반항해봐! 광대면 광대답게 우릴 재밌게 해보라고! " 쉭 쉬시시식 브리트라는 라트의 계속되는 공격을 무표정한 얼굴로 피해내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 검은 스판덱스를 입은 그의 전신이 어둠과 동화되어 마치 창백한 하얀 얼굴만 홀로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은 기묘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라트는 브리트라가 계속 자신의 공격을 피해내기만 하자 코웃음을 치며 그 뒤를 바싹 추격했다. 대재해 때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용마인이라길래 꽤 기대를 했었건만! " ……! " 하지만 브리트라를 두조각 내려고 막 치켜든 라트의 손이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부터 그의 팔을 죄고 있었다. 라트는 당황하여 손을 끌어 당겼지만, 손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 았다. " 뭐, 뭐야! 이건? " 씨익 그때 라트를 바라보던 브리트라의 하얀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단지 입꼬리만 올라간 부자연스러운 미소. 그 미소를 대하는 순간,라트는 손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전신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몸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 사슬! ' 브리트라의 몸에 휘감겨 있던 검은 사슬들이었다. 은은한 달빛에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 사슬들은 어둠 속에서 얽히고 설켜 하나의 거미 집을 형성해 내고 있었다. 라트는 보기 좋게 그 거미 집에 걸려든 것이다. 콰직! 그때 라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지독한 통증이 그를 엄습해왔다. 소리 없이 다가온 브리트라가 그 입을 거미처럼 4부로 벌려 라트의 목을 물어뜯은 것이다. 라트는 자신의 생살이 통 째로 씹혀나가는 고통에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Jesus Christ! Fucking Pierrot! " 키키키키킥 라트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브리트라는 더더욱 큰 턱과 작은 턱, 윗 입술과 아랫 입술을 그의 목 속 깊숙히 쑤셔 넣었다. 마치 목을 통째로 잡아 뜯을 기세였다. 라트는 자신의 면전에서 아른거리는 브리트라의 시선에 가슴이 철렁했다. 브리트라는 라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차갑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이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퍼억 하지만 그것을 잠자코 보고 있을 유빈이 아니었다.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전장에 뛰어들어, 라트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던 브리트라의 머리를 AI슈츠로 걷 어차버렸다. 그 덕에 간신히 브리트라를 떼어낸 라트는 살이 한움큼 뜯겨나간 목을 움켜 쥐며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 죽여버린다! " 라트는 흉폭하게 브리트라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지만, 브리트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 신속하게 어둠 속으로 동화되어 그 공격을 피해냈다. 유빈은 씩씩 거리는 라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멍청이! 그러게 내가 만들어논 정신 공간(Mind space) 안에서 싸웠어야지! 녀석이 유인하는게 뻔히 보이는데도 따라가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 " 빌어먹을! 닥쳐! " 라트는 이를 갈며 손톱을 뽑아내었다.손을 내린 그의 목에서는 라이컨슬로프 특유의 치유력으로 이미 흔적도 없이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그러나 유빈의 손을 빌려 살아났다는 치욕감까지 회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방심했다고는 해도 하마터면 허무하게 죽을 뻔 했던 것이다. 유빈은 그런 파트너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자존심 내세우지마! 지금 우리가 상대해야 할 괴물은 요르문간드가 테라에 가장 먼저 파견했던 화신이야!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 재핑도 먹히지 않고, 마인드 브레이크의 영향 속에서도 자유로이 움직인다. 녀석에게는 사념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유빈은 하얀 분칠을 한 브리트라의 얼굴을 노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저 광대같은 얼굴이 한층 더 그를 의지 없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확실히 최초로 요르문간드가 테라에 자신의 화신을 파견했을 때, 화신에게는 의지란 것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용마인이란 요르문간드가 테라에서 자유로이 활동하기 위해 그 스스로 만들어낸 인형이었으니까. 스스스스스 그때 브리트라의 검은 스판덱스 속에서 은빛의 갈퀴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라트가 얼 빠진 표정을 짓자, 유빈은 채 그가 묻기도 전에 답해주었다. " 브리트라는 식욕의 화신이었다고 하지. 아마도 널 물어뜯으면서 네 유전자 정보까지 복사해낸 모양인데? " " 크……! 누구 마음대로! " 라트는 분노하며 자신과 점점 닮아가는 브리트라를 쏘아보았다. 브리트라는 얼굴을 제외하고서는 라트와 똑같은 웨어 울프로 변해,손톱들을 뽑아내고 있 었다. 입가에는 예의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런 상대의 모습에 라트는 어쩔 수 없다는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 빈에게 말했다. " ……도움이 필요하다, 유빈. 한번 더 부탁하마. " " 쳇, 좋아. 대신 저번처럼 나에게 달려들지는 말라고. " 촤자자자자작 유빈은 작게 한 숨을 쉬며 패턴 카민을 라트에게 전개시켰다. 그러자 라트의 은빛 갈퀴들이 짙은 양홍빛으로 물들며 사방으로 곤두서기 시작했다. 적에게 패턴 카민이 통하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유빈이 준비해둔 최후의 방법이었다. 적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아군에게 사용한다! 우오오오오오 라트의 입으로부터 긴 장송곡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전신의 근육이 팽 창하면서 눈의 흰자위가 검게 물들어갔다. 그에 반하듯 붉게 물드는 눈동자! 라트는 자신의 내부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며 몸을 거 칠게 뒤틀었다. 바로 버서커(Berserker)! 유빈의 패턴 카민이 라트의 잠재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 크우흐으으으! " 라트는 거칠게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자 그의 양손이 지탱 할 곳을 찾지 못하고 시계추 처럼 좌우로 흔들거렸다. 이 버서커는 일시적으로 시전자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파괴 본능을 우선시하게 한다. 또한 평소 무의식 중에 절제하던 힘들을 해방시키고, 고통 또한 느끼지 못하게 한다. 말 그대로 미친 전사가 되는 것이다. 대신 모든 것을 되외시한 대가로 시전자의 육체는 확실히 망가지게 된다. 근육은 찢어지고, 뼈는 부서지고, 정신은 파괴된다. 하지만 상식을 벗어난 재생력의 라이컨슬로프에게 있어서 이 버서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기였다. " 크아아아아아아! " 찢어지는 괴성과 함께 라트가 붉은 잔상을 흘리며 브리트라에게 달려들었다. 브리트라는 그 갑작스런 돌진에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라트는 순식간에 브리트라의 머리를 붙잡고 땅바닥으로 패대기쳤다. 거세게 아스팔트를 구른 브리트라는 돌변한 라트의 공격에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잽 싸게 땅을 박차고 뒤로 몸을 날렸다. 콰지직 그렇게 브리트라가 몸을 피한 자리로 라트의 날카로운 손톱이 광풍을 일으키며 스쳐 지나갔다. 충격만으로도 아스팔트가 갈라지는 무시무시한 올려 베 기였다. 브리트라는 비틀거리면서도 예의 사슬들을 몸에서 내쏘아 라트를 옮아맸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슬들이 사방으로 얽히며 거대한 거미집을 만들어 라트를 허공에 고정시켰다. 브리트라는 왼손으로 사슬들을 끌어당기며 오른손으로 길게 웨어 울프의 손톱들을 뽑아냈다. 이대로 사슬들을 끌어당겨 라트의 배를 꿰뚫을 셈이었다. 키리리리리릭 하지만 라트는 브리트라의 속셈을 따라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엄청난 괴력으로 전신의 사슬을 끌어당겨 브리트라를 자신에게로 잡아 당 긴 것이다. 촤촤촤촤 라트는 허공에서 몸을 웅크려 손톱과 발톱으로 사슬들을 닥치는데로 베어내며 브리트라에게 떨어져내렸다. 브리트라는 사슬에 끌려 올라가면서도 수중의 손톱을 라트에게로 휘둘렀다. 세로로 휘둘러지는 붉은 빛의 궤적과 가로로 휘둘러지는 은빛의 궤적! 퍼걱! 그리고 적은의 십자가는 라트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브리트라는 라트의 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폐허가 된 빌딩 속으로 처박힌 것이다. " 브리트라! " 카이를 상대하던 초류향은 그런 브리트라의 패퇴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카이는 그가 브리트라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 자아! 우리 쪽도 슬슬 결판을 내야지! " " 이 천둥벌거숭이가! " 초류향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골렘을 불꽃의 채찍으로 조각내며 매섭게 카이에게 달려들었다. 그 앞을 불꽃의 골렘이 가로막았지만, 초류향은 망설임 없이 비프론즈에게 손을 뻗어 그 불꽃을 흡수한 후,오른손으로 불꽃의 검을 만들어 거인을 일도양단했다. 그러자 그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카이가 무방비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 이 따위 바위 덩어리로는 날 막을 수 없다고 했지! " 그리고 휘둘러지는 불꽃의 검! 하지만 카이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초류향 에게 소리쳤다. " 그렇다면 이건 어때! " 푸화아아아악 순간 초류향의 발 밑으로부터 거대한 팔이 튀어나와 그를 잡아챘다. 비프론즈와 네비로스의 숙주라고 할 수 있는 무르무르(Murmur)였다. 이 샌드맨(Sand man)이 있었기에 비프론즈와 네비로스는 매번 파괴되어도 샌드맨의 패밀리어(Familiar)로서 소환될 수 있었다. 초류향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무르무르를 노려보았다. " 큭! 이런 것쯤……! " " 그걸로 끝이 아니야! " 카이는 마물의 피리를 불어 무르무르의 형체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러자 무르무르는 거인의 형상을 무너뜨리며 본래의 모래로 되돌아갔다. 그 바람에 수 십 톤의 모래들이 한꺼번에 초류향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쿠르르르르릉 순식간에 폐허를 뒤덮는 모래 더미! 카이는 어느샌가 창생의 술로 만들어낸 익마(翼魔) 안드레알푸스(Andrealphus)에 몸을 의지하여 하늘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모래 사장을 내려다보았다. " 잠시 머리라도 식히시지, 초류향. 산소가 없이는 타오를 수도 없을테니까. " 카이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리리스를 돌아보았다. 모래 사장에 휩쓸리기 직전, 그는 간신히 안드레알푸스로 그녀를 낚아챌 수 있었다. 리리스는 현재 아공간과의 접속이 끝나가는지 테라의 육체를 벗고 물질 계에서 형성계를 거쳐 창조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창조계, 멘탈 플레인(Mental Plane)은 원형계, 붓디 플레인(Buddhic Plane) 과 근접해 있기에 영체로서 접근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육체는 의지를 잃고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 리리스가 깨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접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듯 했다. 쿠웅 그때 지상으로부터 알 수 없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카이는 두 눈을 부릅 뜨고 모래 사장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모래 사장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아마도 근처의 폐허더미가 쓰러지면서 낸 소리일 것이다. 아무리 초류향이라 하더라도 저 모래더미 속에서 이렇게 빨리 빠져 나올 수는 없다. 아니, 절대로 무리다. 불은 물과 상극이기도 하지만, 흙과도 상극인 것이다. 조연성 물질이 없는 가연물은 꺼지기 마련이니까. 쿠구구구구구 그러나 굉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와 더불어 모 래 알갱이들도 마치 불에 가열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칠게 튀어올랐다. 그제 서야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카이는 재빨리 안드레알푸스를 모래 사장으로부터 떨어뜨리려고 했다. 퍼엉!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푸른 불기둥이 모래사장을 꿰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불기둥은 모래마저 녹이고 주위의 대기마저 들끓게 할 정도로 뜨거웠다. 카이는 안드레알푸스의 위에서 리리스를 감싸며 그 뜨거운 열풍을 몸으로 받아내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이 검은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지만, 카이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으며 불기둥을 주시했다. 후우우우우우 불기둥이 걷혀나가자 이번에는 악귀와 같은 형상을 한 초류향이 푸른 불꽃 을 등에 업으며 서있었다. 초록색의 머리카락들이 한올한올 그 분노를 이기 지 못하고 떠있었고, 두 눈은 짙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촤아아아아악 초류향이 손을 휘두르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불꽃의 채찍이 수십미터 상공의 안드레알푸스를 이등분시켰다. 카이는 리리스를 끌어 안고 간발의 차로 다른 익마에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등 뒤를 돌아보니 방금전까지 자신들이 타고있던 안드레알푸스가 검은 숯덩이로 변해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크, 본체가 구현되었으니 화신의 힘은 약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 카이는 혀를 차며 익마의 기수를 돌렸다. 이대로 리리스를 데리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영체가 돌아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이 테라의 육체를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초류향은 그런 카이의 도주를 용납하지 않았다. 큐우우우웅! 불꽃을 내뿜으며 하늘로 날아오른 그는 하나의 푸른 섬광이 되어 순식간에 카이의 익마를 꿰뚫었다. 익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폭발! 카이는 그 여파 속에서도 리리스를 새로이 만든 익마 속으로 던져보냈다. ' 어떻게든 그녀만큼은……! ' 리리스 만은,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퍽 그때 카이는 자신의 가슴을 등에서부터 꿰뚫고 나온 한 손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찾아드는 고통! 순식간에 눈앞이 어두워지고, 숨쉬기가 어려워 졌다. 폐와 폐동맥이 한꺼번에 뜯겨져 나간 모양이었다. " 커, 으, 우아아아아! " 그가 마지막으로 낼 수 있었던 소리는 여리기 짝이 없는 비명소리였다. 초류향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카이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 날 우롱한 대가는 화형이다. 잘 가라, 네크로맨서……! " 푸확! 초류향은 자신의 손에 꿰인 카이를 하늘로 들어올리며 그대로 불꽃을 생성 시켰다. 그러자 푸른 불꽃의 돌풍이 카이의 몸을 휘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불꽃이 떠난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 후. " 초류향은 흔적도 없이 카이를 태워버리고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느 사이 엔가 리리스를 태운 익조가 사라져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녀석은 그녀 만큼은 자신의 눈이 띄지 않는 곳으로 피신시켰던 것일까. ' 아니. ' 어차피 네크로맨서가 죽었다면, 그가 창생의 술로 만들어냈던 라무의 아이 또한 자동으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익조를 잃은 리리스는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졌을 게 분명하다. 그녀의 죽음을 확신한 초류향은 섭철선을 뽑아들며 브리트라가 있는 방향을 내려다 보았다. " ……좋아. 그럼 남은 잔챙이들도 태우러 가보실까. " 존재의 계는 총 7계로 구성되어 있다. 원형계, 혹은 영계라고 불리우는 아디계(Adi plane)와 아누파다카계(Anupad aka plane), 아트마계(Atmic plane)와 붓디계. 그리고 창조계인 멘탈계와 형성계인 아스트랄계, 마지막으로 물질계. 물질계는 현 인류가 살고 있는 삼차원의 공간을 말하며, 아스타랄계는 영계와 물질계 사이를 이어주는 사차원을 말한다. 그리고 이 사차원은 불완전한 시공 변화로 인해 수십, 수백, 수천개 이상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파괴시키는 데, 그러한 아스트랄 계에서 파생되는 것이 바로 창조계인 멘탈계였다. 멘탈계는 인간의 의지 속에도 존재하고, 차원의 틈 사이에도 존재하고, 시간의 경과 사이에도 존재한다. 약간의 인과만 있으면 창조될 수 있는 게 이 멘탈계인 것이다. 그리고 아공간도 이 멘탈계에 속했다. 아아아아아 리리스는 흐느낌과도 비슷한 소리를 들으며 아스트랄계를 유영하고 있었다. 그 흐느낌은 물질계에서 영계로 접어드는 수 많은 혼백들과 영체들의 비명소리들이었다. 만약 물질계에 영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리리스 역시 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제 거의 도착한 것 같은데. 리리스는 물질계에서 저장시켜둔 시공 주소를 따라 멘탈계의 아공간을 찾아가고 있었다. 물질계에서는 바로 코 앞인 거리가 아스트랄 계를 거쳐 지나 가려니 수십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아니, 이 수십 시간도 형성계의 시간일 뿐. 물질계에서는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차원 이동은 제멋대로인 시공 속을 얼마나 빨리 주파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카이…… 무사할까? 리리스는 물질계에 남아있을 자신의 동료를 떠올리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상황이 급박했다고는 하나, 그 아이에게 홀로 요르문간드의 화신을 맡긴 것은 자신의 불찰이었다. 부디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그가 무사하기 만을 바랄 뿐 이었다. -나는…… 카이를 전장에 내몰면서까지, 뭘 하고 있는 걸까? 리리스는 낮게 한탄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지금 자신은 테라의 오라 능력자를 구하러 가고 있었다. 혹시 아직도 테라의 생활에 미련이 남은 것일까. 사실은 유가인,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기껏 카이를 위기에 몰아넣고서 한다는 짓이 그런 짓이라니! -아니야. 이건, 그들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 나를 위한, 카이를 위한, 우리들이 살아 남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우연찮게 그 결과가 그들에게도 도움을 주게 되었 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일 뿐. 더 이상,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 앞으로는 더 이상……. 휘이이이이잉 순간 주위의 아스트랄계가 사라지며, 낯선 건물의 안에 그녀는 들어와 있었다. 아공간이었다. 무사히 시공 세계를 돌파하여 창조계에 들어선 것이다. 리리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질계와는 달리 색상과 채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탁한 회색과 검정색의 명도 세상 뿐이었다. 그녀는 건물 속을 거닐면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영체로 머물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발각될 위험은 없었지만, 요르문간드의 드레이카닉 아이는 주의하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긴장하면서 발을 옮기던 차에 그녀는 곧, 거대한 광장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평범한 빌딩 속에 이 정도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문이었지만 아공간 자체가 공간의 휘어짐으로 생긴 것이기에 그 속에 또 다른 공간의 휘어짐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자연스러운 현상 임에는 분명하다. 창조계에 외적인 힘이 작용되 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외적인 힘이라 하면……. -놓치지 마라! 레비아탄! -칵! 네 놈 쪽에서 계속 놓치고 있는 거잖아! 스머그! -이미 모습을 감췄다.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거야. 파프니르! 놀랍게도 아공간 속에 존재하던 이들은 다름 아닌 쿠사나기에게 흡수당했던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이었다. 초류향과 브리트라가 쿠사나기의 하수인으로서 재구성된 것처럼 저들 역시 충실한 파수꾼으로서 이 아공간 속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 초류향과 브리트라는 아공간에 접근하는 자들을 막기 위한 역할이었어. ' 그렇다면 저들은? -……추적자! 저들의 역할은 추적자였다. 아공간 속에 갇힌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를 제거하기 위한! 그렇다면 쿠사나기는 지금껏 자신의 힘을 이렇게나 분열시켜놓고도 피스메이커의 거인을 상대하고 있었단 말인가. 실로 놀라운 힘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 그렇다면……. ' 저들이 여기에 있다는 건…… 이 근방에 그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피스 그레이!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저기다! 그때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이 그녀보다 먼저 그를 발견해냈다. 그들이 가리킨 방향에는 무채색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 그림자가 있었다. -……브루스? 리리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림자에서 그의 모습을 식별해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힘의 소모가 심했던 것인지 그는 리리스와 마찬가지로 영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어차피 원형계와 창조계, 형성계 사이를 자유자재 로 넘나드는 남자이니 그리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극도로 쇠약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잡앗! 용마인들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스머그와 파프니르는 각각 산성 증기와 빙무를 끓어올려 영체를 몰아넣었고, 레비아탄이 수압 고리들을 만들어서 영체에게 날렸다. 하지만 영체는 재주도 좋게 그들의 합공 사이를 빠져나와 창조계의 그림자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적당히 해둬라, 네 놈! 브리트라와 초류향을 소멸시킬 때의 잘난 체하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거냐! -크으으! 네 녀석은 빠져나가지 못해! 그만 포기하란 말이닷! 레비아탄과 스머그는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광장의 그림자 사이를 샅샅히 탐색했다. 하지만 영체는 또다시 잠적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리리스는 그렇게 브루스를 찾는데 혈안이 된 그들의 모습에서 한 가지 의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저들의 목적은……그를 아공간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었나? ' 그렇다면 어째서 저렇듯 초조해 하고 있는 걸까? 오히려 자신들 쪽이 아공간에 갇힌 것처럼 굴고 있잖아? ' 아! ' 그제서야 리리스는 감이 잡혔다. 피스 그레이와 쿠사나기는 지금 서로를 묶어두고 있는 상태였다. 피스메이커의 거인이 타흘룸으로 부순 아공간의 외벽 은 분명 브루스, 그가 차원 진동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었다. 아마도 피스 대원들이 거인을 끌고 올 때까지 쿠사나기가 멋대로 활개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겠지. 그렇다면 본체가 묶인 쿠사나기는 한시라도 빨리 브루스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대화된 몸으로는 삼계를 넘나드는 그를 따라 잡는 데에 한계가 있었고, 그 때문에 힘을 분배하면서까지 용마인들을 재구성하여 그를 이 아공간 속으로 몰아 넣은 것이다!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리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 그렇다면…… 피스 그레이를 구하지 않는 쪽이 더……. ' 피스메이커의 거인이 쿠사나기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용마인들 을 재구성시킴으로서 쿠사나기의 힘이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피스 그 레이를 구하여 쿠사나기가 본래의 힘을 되찾도록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 만약 거인이 쿠사나기를 소멸시키는데 성공한다면……. ' 쿠사나기가 만들어놓은 이 아공간 또한 힘을 잃고 소멸, ' ……아공간 속에 갇혀 있던 브루스 역시 십중팔구 죽게 되겠지. ' 브루스를 희생시켜 거인이 이길 확률을 높이느냐,아니면 확률이 낮아지더라도 브루스를 구해내느냐. 리리스는 어느 한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이성은 분명 전자를 선택하라 고 강요하고 있었지만, 그녀 안의 뭔가가 선택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순간에서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 전자를 선택했을 때, 가인이 무슨 표정을 지을까……라니. ' 리리스는 이런 자신의 어리석음에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결국 자신은 아무런 각오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서, 스스로에게 떳떳해 지고 싶다면서. 그렇게 한껏 떠들었던 주제에……. 어째서 나는 지금도……! -거긴가! 그때 브루스의 영체를 찾아헤매던 파프니르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리리스가 숨어있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멘탈계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리리스의 영체를 브루스의 영체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이런! 리리스는 혀를 차며 재빨리 장소를 이동했다. 아무리 상념에 빠져 있었다고 는 하지만 이렇듯 쉽게 영기의 꼬리를 잡히다니! 아무래도 드레이카닉 아이의 초지각 탐색에 걸린듯 했다. 어쨌든 여기서 저들에게 잡혔다간 브루스를 구해내는 건 고사하고, 자신 또한 아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반드시 도망쳐야만 해! -잡았다! 그러나 손쉽게 보내줄 용마인들이 아니었다. 레비아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수압 칼날로 리리스의 진로를 막아냈고 순식간에 스머그의 산성 증기가 주변을 압박해왔다. 그리고 파프니르의 빙결이 그 증기를 얼려 얼음의 벽 을 만들어냈다. 리리스의 영체는 꼼짝없이 그 차원 봉쇄 안에 갇히고 만 것이다. -카, 카카카! 잘도 이 몸을 애먹이셨겠다! 지금껏 당한 수모를 백 배 천 배 로 해서 갚아주마! 순순히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스머그는 흥분했는지 거칠게 숨을 헐떡였고, 레비아탄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 으며 영체의 사지를 자르기 위해 수압 칼날들을 끌어올렸다. 단지 파프니르 만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영체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군. 분명 그는 우리를 상대하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었을텐데. 무슨 이유로 내내 도망만 다녔던 거지? -흥. 어차피 녀석은 아공간에 빨려들기 전부터 힘이 약해져 있었어. 시간을 끄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거다. -……. 파프니르는 레비아탄의 말에도 미심쩍은 기색을 떨치지 못하고 고민했다. 레비아탄은 그런 파프니르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다시 영체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간 스머그가 먼저 영체에 손을 댈 것이다. 자신의 먹이를 그가 더럽히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응? 그러나 의외로 스머그는 영체를 앞에 두고도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레비아탄은 그가 뭔가를 주저하자 영문을 몰라 물었다. -왜 그러나, 스머그?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니……. 이것, 뭔가가 이상해서. 스머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차원 감옥 속의 영체를 살펴보았다. 영체에서 풍겨나오는 영기에서 표적과는 다른 이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 없이 뒤쫓 느라 깨닫지 못했는데, 이렇게 천천히 살펴보니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지켜보던 레비아탄도 그 차이를 깨달았는지 천천히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 들킨 건가! ' 리리스는 숨조차 쉬지 못하며 그들의 시선에 몸을 굳혔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그들은 브루스가 아닌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 가! 휙 그때 용마인들의 뒤편에 드리워진 그림자로부터 하나의 그림자가 번개 같이 튀어나왔다. 바로 그들이 뒤쫓고 있던 브루스의 영체였다. 그 영체는 순식간에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여 용마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 채 반응하기도 전에 영체의 그림자가 파프니르에게 선방을 먹이고, 뒤이어 레비아탄과 스머그의 배를 양손으로 가격했다. 그 순간적인 기습에 용마인들의 주의가 분산되자 리리스는 차원 봉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넌……! 리리스가 채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영체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날 렸다. 인간의 형상으로 변했다고 해도 삼차원의 육체를 복원해낸 것은 아니 었기에, 리리스는 자신을 감싼 영체가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단지 상황 상 브루스일 거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브루스? 피스 그레이인 거야! 리리스의 질문에도 영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념파도 구사하지 못할 정도로 영체의 기가 쇠약해진 모양이었다. 리리스는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래서야 이 영체가 정말로 브루스인지조차도 알 수 없지 않은가! -침입자다! -크! 어느 새 숨어들어온 거지? -녀석을 데리고 도망치려는 거냐! 용마인들은 불청객의 등장에 당황하며 리리스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리리스는 그들과 자신의 곁에 있는 영체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브루스가 맞는 걸까? 이 영체를 데려가면 되는 걸까! 기회는 단 한번 뿐이었다. 만약 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 용마인들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 소리. 그 소리에 리리스는 흔들리던 마음을 바로 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곁에 있던 영체를 붙잡고서 그에게 저장해둔 시공 주소를 넘겨주었다. 그가 브루스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제발! ' 그리고 두 영체는 빛과 함께 창조계에서 모습을 감췄다. " 크륵, 크륵, 크륵! " 라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폐허 더미 속에서 넝마가 된 브리트라를 들어 올렸다. 브리트라의 몸은 예의 검은 스판덱스 상태로 돌아간채 힘없이 라트 의 손에 늘어져 있었다. 라트는 두 눈을 광기로 물들이며 연신 브리트라의 배에 자신의 손톱을 찍어 넣었다. " 크크크크. " 콰직 " 크크크크크! " 콰지직 " 크카카카카! " 우드드드득 라트는 어깨를 들썩이며 브리트라의 배에 쑤셔 넣은 팔을 비틀어 허리 자체를 뜯어냈다. 그러나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라트는 브리트라의 목을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었다. 본능 속에서도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겠 다는 심보인 듯 했다. 그런 라트의 모습에 유빈은 작게 한 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 더 이상 못 봐 주겠군. 미쳐 날뛰는 것도 정도가 있지. ' 버서커는 이성을 마비시켜 파괴 본능을 높여주는 대신 이런 퇴행 작용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이대로 계속 내버려뒀다간 아무리 재생력이 높은 라이 컨슬로프라 해도 자아가 붕괴될 것이다. 그렇게 유빈이 라트에게 건 버서커를 풀어주려고 할 때, 뜻 밖의 방문객이 그들을 찾아왔다. " 한창 재미가 좋으시군. " " ……! "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는 유빈. 그렇게 그가 자리를 피한 곳으로부터 푸른 불 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유빈은 재빨리 오라 쉴드로 몸을 감싸며 라트를 향해 소리쳤다. " 조심해! " 츠컥 하지만 그의 경고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불꽃의 채찍이 브리트라를 붙잡던 라트의 팔을 조각냈다. 라트는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유빈의 오라 쉴드로 몸을 피해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푸른 불꽃을 흩뿌리며 브리트라의 앞을 막아서는 한 청포의 남자가 서있었다. 유빈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초류향! 네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 그는 분명 네크로맨서와 밤의 여왕이 상대하고 있었을 텐데! 설마 그 둘이 당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초류향은 그런 유빈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으며 묵묵히 피투성이가 된 브리 트라를 내려다보았다. " 움직일 수 있겠나? " " ……. " 초류향의 질문에 브리트라는 사슬로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대답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스스로 떨어져 나간 하체를 사슬로 끌어당겨 자신의 허리에 이어 붙였다.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유빈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 벌써 라트의 재생력까지 복사해내다니! " 네 놈들……. " 그때 유빈과 라트의 귀로 노기 서린 초류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껏 주제도 모르고 잘도 날뛰어줬구나. 이제부터는 그 대가를 충 분히 치루게 해주지. " 화르르르륵 그와 동시에 초류향의 뒤로부터 무시무시한 기세의 푸른 불꽃들이 소용돌이 치듯 일어났다. 유빈은 마른 침을 삼키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 괴물같은 놈이! ' 도저히 승산이 없잖아. 이대로 내빼버릴까? ' 용마인이 한 명이라면 몰라도 두 명까지 상대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유빈은 속으로 네크로맨서와 리리스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잘난 척 해대면서 자신들을 끌어들일 때는 언제고! 최소한 자신들이 브리트라를 해치 울 때까진 버텼어야 할 거 아냐! 후우우우 초류향의 섭철선이 불꽃을 머금으며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유빈은 오라 능력을 전개하며 긴장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는 상처 입은 라트의 헐떡임이 연신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 외에는 묘한 정적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조금만 움직여도 지금의 대치 상황이 깨져버릴 것만 같았기 에 섣불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을까. 위이이이이잉 정적은 갑작스런 청명음에 의해 깨져버리고 말았다. 대기의 진동수가 급격히 변하며 공간 마찰이 일어나고 있었다. 초류향은 자신과 유빈의 사이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 이건……뭐지? " 불에 면역을 가진 그마저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열풍이었다. 이런 바람은 차원과 차원이 마찰을 일으킬 때 발생하는 열 에너지 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누군가가 압축된 차원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중이란 말인가! " ……! " 열풍, 그 다음은 빛이었다.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밝은 빛이 초류향의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초류향은 열풍에 브리트라가 타버리지 않도록 불꽃의 벽으로 그를 보호해주며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광채가 사라진 다 음에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 너……! " 백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에 검은 권복을 입은 남자. " 피스…… 그레이! " 브루스 류, 분명 아공간에 갇혀 있어야할 그가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Ｔo Ｂe Ｃontinued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245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8 화 '출동, 머신 아더!' Neo군(nextneo) 04-04-22 :: :: 25408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3 - Ｂy Ｎext Ｎeo =-=-=-=-=-=-=-=-=-=-=-=-=-=-=-=-=-=-=-=-=-=-=-=-=-=-=-=-=-=-=-=-=-=-=-= " 피, 피스 그레이? " 유빈은 초류향의 외침에 당황하며 그와 브루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도저히 이 회색머리의 소년과 그 악명 높은 피스 그레이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없었다. 저 소년의 어디가 그 괴물같은 능력자란 말인가? 마스터 한시영에게 들은 바로는,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는 대재해때 본체 로 구현한 브리트라를 홀로 상대한 최강의 피스 대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눈 앞에 나타난 이 소년은 최강은 커녕 아무리 높게 잡아도 자신과 비슷한 연 배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아이였다. 거기다 저 지친 기색이 완연한 모습이라니. 마치 손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해 도 넘어갈 것 같지 않은가. " 끼이이이이……. " 그때 초류향의 곁에 있던 브리트라가 브루스를 목격하자 입에서 기이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몸을 들썩였다. 예전 자신을 소멸시킨 상대와 마주하게 되자 살의가 일어난 모양이다. 라트에게 당하는 와중에도 신음 한번 흘리지 않 던 녀석이, 저렇게나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브리트라는 연신 4부로 된 입들을 달그락 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사념도 감 정도 없는 꼭두각시인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유빈의 예상이 빗나간 모양 이다. " 크르르르르. " 하지만 흥분한 것은 브리트라만이 아니었다. 유빈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버서커에 사로잡힌 라트가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손톱을 뽑아내고 있었다. ' 아니, 이 자식은 또 왜 이러는 거야? '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새로운 상대가 나타났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건가? 하지만 저런 꼬맹이를 상대로? 유빈은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일단 라트가 달려나가는 것은 막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괜시리 저 피스 그레이라는 꼬마에게 달려들었다간 딱 용마인들에게 당하기 쉽상인 것이다. ' 쳇, 이렇게 성가시게 굴 바에는 차라리 버서커를 풀어버리는 게……. ' " 크헝! " 하지만 미처 유빈이 결정하기도 전에 라트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동시에 초류향의 뒤에 있던 브리트라도 행동을 개시! 그 둘의 목표는 전방에 서있는 브루스였다. 유빈은 인상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젠장! 될 대로 되버려라! " 크아아아아! " " 꺄아아아아! " 라트와 브리트라의 살기 등등한 기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브루스는 멍하니 시선을 떨군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정상이 아닌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먼저 도달한 이는 전신의 사슬을 한꺼번에 풀어낸 브리트라였다. " 끼아아아아아! "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브리트라는 사슬에서 칼날을 뽑아냈다. 라트에게서 흡수한 라이컨슬로프의 경질화 능력을 사슬에다가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자 수십 개의 사슬들이 하나 하나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브루스의 전신을 구멍 투성이로 만들기 위해 날아들었다. 촤촤촤촤촤 백색의 섬광들이 브루스를 휩쓸고 지나갔다. 브리트라의 사슬들은 정확히 브루스가 서있던 자리를 물 샐 틈 없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사슬들에 꿰어 있어야할 브루스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스륵 그리고 유빈은 볼 수 있었다. 브리트라의 밑에서부터 유령처럼 떠오르는 한 검은 인영을! 퍼엉 칠성권(七星卷) 승룡퇴(乘龍退)! 그 이름 그대로, 승천하는 용의 발차기가 브리트라의 아래 턱에 작열했다. 각부의 신근(伸筋), 요근(腰筋), 배근(背筋) 에서 전달된 경력이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으로 브리트라의 턱 윗부분을 폭파시킨 것이다. 브리트라는 머리가 날아간 채 비틀거리다가 피를 내뿜으며 무릎을 꿇었다. 쉬이이이익 하지만 쉴틈을 주지 않고 브루스의 뒤통수로 라트의 손톱이 날아들었다. 양 홍색의 궤적조차 보이지 않을 쾌속의 찌르기였다. 하지만 브루스는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고개를 살짝 비틀어 그 공격을 피해냈다. 쾅! 그리고 뒤를 잇는 폭발음.어느새 라트의 배에는 브루스의 어깨가 깊숙히 박 혀 있었다. 칠성권(七星卷) 개산벽(蓋山璧)! 브루스는 라트의 달려드는 기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원인치 카운터를 그에게 꽂아 넣은 것이다. 쿵 충격으로 안구가 터져버린 라트는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조리 피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유빈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단 일격에 버서커상태의 라트를 잠재우다니! 버서커는 통증을 느끼는 뇌 부분의 활동을 둔화 시키기 때문에 사지가 떨어지지 않는 한 시전자는 절대로 쓰러지거나 멈추지 않는다. 하물며 포션에 맞먹는 재생력을 가진 라이컨슬로프라면 더더욱 쓰러 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재생이 힘든 뇌라도 박살나지 않는 한……. ' ……뇌? ' 거기에 생각이 미친 유빈은 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컨슬로프를 상대로 어깨 치기를 해서 내상을 입혔다고? 그것도 AI슈츠도 입 지 않은 인간의 몸으로? ' 괴, 괴물이다. ' 그제서야 유빈은 모두가 피스 그레이를 괴물이라고 칭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라 능력자의 한계를 뛰어넘은 오라 능력자. 그것이 바로 저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였던 것이다. 유빈은 쓰러진 라트의 상태를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한편 초류향은 브루스가 순식간에 라트와 브리트라를 쓰러뜨리자,희열에 찬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 후, 후후후! 대단해.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역시 이 나를 쓰러뜨린 남자 답구나! " 섭철선으로 가린 그의 입가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브루스의 존재를 발 견했을 때부터 등 뒤의 식은땀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예전에 자신을 소멸시킨 그에게 경외심에 가까운 공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초류향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며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이번 만큼은 절대로 그때처럼 허무하게 당할 수 없었다. 아니, 당해서도 안된다! ' 그때의 치욕, 그대로 네놈에게 되돌려주마! ' 초류향은 분노하며 등 뒤의 불꽃을 거세게 끌어모았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조금도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의 세포 하나 하나가 눈 앞의 남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초류향의 공포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숙히 그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핑 그때 초류향의 기억 속으로 수십 가지의 정보들이 밀어닥쳤다. 그것은 아공 간에서 브루스를 상대하고 있던 레비아탄과 스머그, 파프니르의 기억들이었다. 브루스가 아공간을 빠져나가자 역할을 다한 그들은 쿠사나기의 본체로 흡수되면서 초류향에게 자신들의 기억을 넘겨준 것이다. 그들의 기억을 읽어들인 초류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약해져……있다고? ' 초류향은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브루스는 브리트라와 라트를 쓰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속전속결로 자신을 공격하기는 커녕 제 몸 하나 추스리지 못하 고 있었다. 백색에 가깝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이나 빛을 잃은 눈동자. 틀림 없다. 피스 그레이, 그는 아공간에서 용마인들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정기를 거진 소모시 킨게 분명하다. 지금의 그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 아마 필사적으로 정을 회복 시키는게 고작일 것이다. " 후후후…… 후하하하하! " 초류향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섭철선을 들어올렸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저 불구대천의 원수를 자신의 손으로 없앨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브리트라와 라이컨슬로프의 경우,그들은 상대의 처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달려들기 바빴지만 자신은 다르다. 피스 그레이가 약해져 있는 것을 아는 이상 초류향은 확실하게 그를 처치할 자신이 있었다. " 꺼져라! " 푸화아아악 초류향이 섭철선을 좌에서 우로 긋자 직선의 폭파가 일어나며 불꽃이 브루스를 덮쳤다. 브루스는 멍하니 자신에게 날아드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순간, 미끄러지듯 보법을 밟으며 초류향의 시야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 초류향은 그 뜻밖의 회피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 아직도 피할 여력이 남아있었나! " 어디로 사라진 거지? 초류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등 뒤에서 엄 습해오는 오한을 느꼈다. 그 오한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 ……! " 있었다. 사라졌던 브루스가 거짓말처럼 초류향의 등 뒤로 접근하여 진각을 밟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상승하는 지면 반력(反力)! 나선 형태로 폭발하듯 회오리치는 검은 권복! 그 전사경들이 조금도 남김 없이 브루스의 오른 주먹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마치 끌려가는 듯한 주먹이었다. 초류향은 이를 악 물며 간발의 차로 자신의 앞에 푸른 불꽃의 벽을 생성시켰다. 하지만 브루스의 주먹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벽을 향해 내쏘아졌다. ' 어리석은! 이 불꽃을 넘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네 주먹이 먼저 타버릴 거다! 초류향은 브루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불꽃을 노려보았다. 저 불꽃 너머에 있는 그는 계속되는 격전에 생각할 힘마저 잃어버린듯 했다. 이성이 남아있다면 지금이라도 공격 을 거두는게 신상에 좋을 거다! 쿵 하지만 주먹은 거둬지지 않았다. 불꽃의 장벽 또한 뚫리지 않았다. 단지 공허한 충격음 만이 그들의 사이로 울려퍼졌을 뿐이다. 그리고 웃고 있는 초류향의 입가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 ……이런……. " 초류향은 이해할 수 없다는듯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분명 뚫릴리 없어야할 가슴이 나선형태로 함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가슴에서 시작되어 머리 끝, 발 끝까지 번개처럼 퍼져 나갔다. 초류향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힘이 약해지자 생성시켰던 불꽃이 사라지며 주먹을 앞으로 내뻗은 브루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주먹은 분명 불꽃을 지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공격을 받은 것일까? 저 쇠약해진 남자의 주먹을, 어째서……? " ……아. " 브루스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 초류향은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브루스의 눈동자는 언제 빛을 잃었냐는듯 예의 찬란함을 회복해내고 있었다. 쇠약해졌다 느니, 약해졌다느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 눈동자인 것이다. 그런 그의 귓가로 브루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칠성권(七星卷) 거문(巨文). 내부의 진기를 뿜어내 외부의 대기를 진동시켜 상대를 격상시키는 격공장(隔空掌)이다. 애초에 내 공격을 피하지 않고 막으려고 했던 것 자체가 네 놈에게는 무리였던 거다. " " 크, 허……. " 초류향은 무너지듯 땅바닥에 쓰러지며 피를 토해냈다. 그는 힘을 잃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브루스에게 물었다. " 네 녀석은…… 약해진 게……아니……었나? " 그 질문에 브루스는 가당치도 않다는듯 코웃음을 쳤다. " 내 목적은 너희들을 잡아두는 것. 아공간 속에서 몸을 피하는 데 굳이 인계의 육체를 형성하고 있을 필요도 없었지. 최대한 힘의 낭비를 줄이며 삼계 사이에서 몸의 정기를 보충하고 있었을 뿐이다. " " 그……런. " 초류향은 두 눈을 부릅 뜨며 허무한 탄식을 내뱉던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생을 다한 그의 육체는 불꽃으로 화해 본체인 쿠사나기에게로 돌아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브루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편에 우두커니 서있던 유빈을 돌아보았다. 유빈은 그의 시선을 받자 움찔 어깨를 떨며 반사적으로 오라를 전개했다. " 오, 오지마……! " 파칭! 유빈은 있는 힘을 다해 브루스에게 재핑을 걸었다. 하지만 재핑은 거대한 의지의 힘 앞에 맥 없이 소멸하고 말았다. 도리어 상대에게 자신의 능력만 알려 준 꼴이 되어 버렸다. 브루스는 가늘게 미소하며 천천히 유빈에게로 걸어왔다. " 네 녀석이 바로 피스 카민이라는 애송이로군.마인드 브레이커라고 했던가? " " ……으. " 유빈은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마치 그에게서 뻗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운에 전신이 억눌린 듯한 기분이었다. " 으으! " 브루스가 손을 뻗어오자 유빈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 속 으로 처참하게 죽은 브리트라와 초류향의 모습이 멤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의 곁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도 겹쳐지고 있었다. 죽는다. 죽을 거야. 저 남자의 손에…… 자신도 별반 다를 바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 싫어! 마스터! ' 유빈은 속으로 시영을 부르짖으며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이대로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저항해서 이 자리를 빠져 나가야 했다. 아니, 반드시 빠져나가 줄테다! 빠져나가서 다시 마스터를 만나고 말 거야! 반드시! " ……어? " 하지만 눈을 뜬 그에게 보인 것은 아무도 없는 황량한 폐허의 거리 뿐이었다. 그 거리 속에 브루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유빈은 어리둥절 해져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 어디로 사라진 거지? 크롸라라라라라 그때 멀리서 쿠사나기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그곳을 향해 이동하는 강맹한 오라의 기운을 하나 느낄 수 있었다. 피스 그레이였다. 그는 자신을 건드리지도 않고 그냥 자리를 떠나버린 것이다.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건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순 없지만, 덕분에 유빈은 무사할 수 있었다. " 하아아. " ……살았다. 안도하기가 무섭게 다리에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유빈은 허탈한 표정으로 브루스가 떠나간 자리를 응시했다.그로서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 지 않은 순간이었다. -차아아아앗! 퍼엉! 머신 아더의 주먹이 쿠사나기의 얼굴을 후려쳤다. 쿠사나기는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자신의 날개로 거인의 동체를 후려쳤다. 머신 아더는 충격에 허리가 한껏 휘면서도 오라 클록의 반중력으로 중심을 잡아 쿠사나기에게 무릎 차기를 먹였다. [크헉!] 피를 토하면서도 쿠사나기는 자신의 품에 파고든 머신 아더를 머리로 들이 받아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 위를 향해 날개의 중력장을 끌어모아 막 내려찍으려는 찰나, 한발 먼저 튀어오른 머신 아더가 쿠사나기의 목을 손으로 감싸고 밑으로 끌어당겼다. 쿠우우웅 대지가 들썩이며 지진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머신 아더는 비틀거리면서도 재차 쿠사나기에게 일격을 먹이려다가 되려 그의 날개에 두드려 맞고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일절 방어를 무시한 단순한 공방전이 계속되자 참다 못 한 노엘이 소리쳤다. " 적당히 해! 원 포인트 매치도 아니고, 한방씩 사이좋게 주고 받으면 어쩌 자는 거야! 피하면서 때려야 할 거 아냐! "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요! 가인은 그녀에게 대꾸하다가 재차 쿠사나기의 공격을 얻어맞고 폐허더미에 쓰러졌다. 그 모습에 노엘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에 빠졌다. 메인 스크린 으로 떠오른 PET용액의 타임 리미트는 벌써 2분을 채 안남기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싸우다간 그나마 남겨진 시간마저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기능을 정지 할 것이다. -진우 씨로 바꿔줘요! 저로서는 역부족이에요! 가인은 자신이 직접 머신 아더를 움직이고 나서야, 그린 폼의 진우가 얼마나 센스 있게 거인을 움직였는지 통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수족이 아닌 몸을 이미지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짧은 전투 경험을 가진 가인으로서는 더더욱 그 이미지를 잡기 힘 들었다. 지금껏 버텨낸 것만 해도 칭찬받을 일이었다. 그런 가인의 애원에 노엘은 낙담하며 말했다. " 바꿀 수 있었다면 진작에 바꿨지.레벨 체인지는 한 사람에 단 한 번의 기 회 밖에 없다고. 이미 레벨 1과 레벨 2, 3의 액세스도 해제되었고……. " 남은 것이라고는 레벨 4인……. -머신 아더의 제어권을 제게 넘겨 주십시오! 그때 피스 레드 성마리의 사념이 노엘에게로 울려퍼졌다. -남은 방법은 레벨 4인 레드 폼(Red Form) 뿐이지 않습니까! 지금의 오라수 치라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냐. 실패하면 이번에야말로 끝장이라고. " -어차피 이대로는 실패할 시간마저 없어집니다. 더 늦기 전에 레벨 4를 허락해주십시오. 노엘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메인 스크린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타임 리미트는 이제 1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기체의 상태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 었기에 더 이상의 접근전은 무리였다. 마리의 말대로 이제는 실패할 시간 마저 없는 것이다. " ……레벨 4의 사용을 허가한다. " 그때, 레벨 4의 사용을 허가한 것은 뜻 밖에도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진 사령관이었다. 그는 노엘의 당황하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채영에게 재 차 명령을 내렸다. " 피스 레드에게 머신 아더의 모든 제어권을 넘겨주도록. 그리고 엑스칼리 버(Excaliber) 일식(壹式) 스톤 커터(Stone Cutter)의 사용을 허가한다. " 《아, 하지만……. 》 채영은 노엘의 눈치를 살피며 이행을 망설였다. 현재 머신 아더의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는 노엘 웰리스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최고 사령관은 그 주관적인 판단 여부에 따라 머신 아더의 지휘를 대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노엘은 그의 명령을 납득할 수 없다는듯 반박했다. " 사령관!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저 아이들을 위험에 몰아 넣을 생각입니까! 레벨 4가 실패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도……. " " 확률 문제입니다. 어차피 당신도 마음 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내렸을 것 아닙니까?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에 주저하는 건 닥터 웰리스답지 않군요. " 노엘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진 사령관의 태도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 남자 는,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이 순간에도 어떻게 이리도 태연할 수 있 단 말인가! 누구보다도 지금의 피스메이커를 쌓아올리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 으면서, 어째서……. " 실패를 두려워하는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후회를 남기고 실패하는 겁니다. " " ……! " 노엘은 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이지…… 이 남자는 절대로 이겨내지 못하겠군. 멋지게 한방 먹어버렸어. " 그리고……. " 진 사령관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메인 스크린의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 리켰다. " 그 남자가 그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기회는 아직 우리에게 있습니다. " " 그……남자? " 노엘은 영문을 몰라 진 사령관이 가리킨 방향을 돌아 보았다. 그 곳에는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머신 아더와 쿠사나기의 격전지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 다. 회색의 불빛. 우주수 위그드라실이 포착해낸 것은 다름 아닌 오라 능력자 피스 그레이의 오라 패턴이었던 것이다. -피스 핑크, 피스 레드에게 제어권을 넘겨 주세요. 레드 폼으로 전환합니다! 채영의 사념이 들려오고, 그 직후 머신 아더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푸른색으로 빛나던 오리하르콘 장갑이 예의 은색으로 돌아왔다가 다음 순간,패 턴 레드의 붉은 빛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스 레드에 의한 머신 아더의 제 3형태 레드 폼이었다. 가인은 자신의 의식이 뒤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으며 관찰자의 입장에서 머신 아더를 지켜볼 수 있었다. 위이이이잉 머신 아더의 퀴스(Cuisse) 부분이 개방되며 그곳에서 베기를 목적으로 하는 게르만식 칼몸이 튀어나왔다. 가인은 그것이 마치, 자신들이 사용하는 오라 소드와 크게 확대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가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엑스칼리버 일식 스톤 커터 가동. EX에 출력을 집중하기 위해 AC를 해제합 니다. 우우우우우웅 머신 아더의 AC에 서려 있던 오라들이 엑스칼리버에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이동하며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생성해내기 시작했다. 오라 소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늘어나는 블레이드(Blade)! 엑스칼리버의 검날은 25미터 가까이 늘어나서야 곡도(曲刀)의 형태로 그 모습을 정착시켰다. -으으으윽! 순간, 머신 아더의 피스 대원들은 자신들의 사념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저 릿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격통이 시작된 것은 엑스칼리버의 블레이드가 생성되고나서부터였다. 엑스칼리버의 검날에 머신 아더의 오라가 집중되면서 마치 자신들의 혼마저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라 클록을 처음 사용했을 때와도 비슷한 기분이었는데, 이번의 것은 그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했다. 노엘은 피스 대원들의 고통을 사념으로 간접적으로 느끼며 소리쳤다. -참아! 엑스칼리버의 블레이드를 유지하는 건 20초가 한계야! 20초 안에 녀 석을 쓰러뜨러지 못하면 우리가 당한다! 공격해! 위이이잉 머신 아더는 무영신풍류 고유의 검세를 잡으며 쿠사나기에게 달려들었다. 가인은 마리가 지금 당장은 머신 아더를 자신의 몸처럼 움직이는 건 무리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녀는 능숙하게 거인으로 무영신풍류를 구사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 육식(六式) 활강(滑降)과 같이 머신 아더의 대응 용으로 만들어진 검술들을 수련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영신풍류는 피스메이커 의 고문을 맡으면서, 십여 년 동안 계속 오라 능력과 무영신풍류의 검술을 접목시키는 연구를 해왔기에 지금와서 머신 아더의 대응 기술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아아아앗! 일식(一式) 섬광(閃光)에 이은, 이식(二式) 파쇄(破碎)의 연계기! 쿠사나기 는 날개의 베이퍼 커팅으로 머신 아더의 엑스칼리버를 막아내며 소리쳤다. [크윽! 이 놈이…… 아직도 남은 재주를 가지고 있었나!] 그래봤자, 달라질 건, 없어! [여기서 죽는 건 네놈들이다!] 투아앙 쿠사나기는 거세게 엑스칼리버를 오른쪽의 베이퍼 커팅으로 쳐내며 나머지 왼쪽의 베이퍼 커팅으로 머신 아더의 노출된 가슴 부위를 노렸다. 거인을 움직이는 동력원만 없애버리면 승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오히려 거인의 이점을 버리고 인간처럼 어설프게 검술 흉내를 내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들! 휘이이이잉 하지만 그건 쿠사나기의 착각이었다. 머신 아더는 일부러 빈틈을 보인 후 왼발을 축으로 삼아 번개같이 회전하여 베이퍼 커팅을 피함과 동시에 쿠사나기의 안쪽으로 파고든 것이다. 그리고 밑에서부터 위로 올려베기!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삼식(三式) 격멸(擊滅)! 푸화아아아악 녹색의 체액이 직각으로 솟아오르며 엑스칼리버에 세로로 이등분된 쿠사나 기의 몸이 서서히 좌우로 갈라졌다. 그 모습에 가인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좋아! 이 상태로라면 이기는 것도 꿈은 아니겠어! -EX의 가동 완료까지 앞으로 13초 남았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피스 레드! 채영의 보고를 받은 마리는 표정을 굳히며, 머신 아더를 재차 움직였다. 녀석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여기서 완전히 끝장을 봐야 했다. 그녀의 의지를 따른 머신 아더는 엑스칼리버를 좌우로 풍차처럼 돌리다가 그 원심력을 이용하여 그대로 쿠사나기의 목을 수평으로 쳐올렸다. 오식(五式) 요란(搖亂)! 츠컥 날카로운 파육음과 함께 쿠사나기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그 바람에 접합 점을 찾지 못한 머리는 사전에 베어진 데로 이등분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졌 다. 그것을 바라보며 피스메이커의 모두는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쿠사나기의 머리가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순간, 확신은 사실이 될 것이다. 화르르륵 그러나 채 지면에 닿기도 전에 머리는 불꽃으로 변하여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천천히 쿠사나기의 본체가 있는 방향으로 향 했다. 쿠사나기의 머리가 잘려나간 곳에서는 새하얀 빙무가 모여들어 머리를 원 상태로 복원해내고 있었다. 초류향의 힘과 파프니르의 힘이었다. 분할시켰던 용마인들의 힘이 그에게로 되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퍼커커커컥 쿠사나기의 날개가 푸른 불꽃의 채찍으로 변하여 머신 아더를 사정없이 후 려쳤다. 그리고 거인이 중심을 잃은 틈을 타서 쿠사나기는 품에서 검은 쇠사슬들을 풀어내 그의 다리를 잡아 당겼다. 쿠우웅 거의 끌려 올려지다시피 다리가 올라가며 뒤집히는 머신 아더. 그 충격으로 내부의 PET용액이 무리한 정화작용을 일으키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쿠사나 기는 쓰러진 머신 아더의 위에 올라타 근육이 드러난 거인의 왼쪽 가슴 부위 를 향해 자신의 날개를 가져갔다. 파지지지지지직 -으아아아아아악! 쿠사나기의 날개에서부터 스파크가 튀어오르며 1000VG 이상 되는 고압전기가 머신 아더의 내부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 전기 공격에 처음으로 피스 대 원들의 사념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껏 사념의 상태로 존재했기에 어떠한 충격도 받지 않았던 그들이 전기 공격에 영체 자체가 타격을 입자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거기다 머신 아더는 대원들의 사념파를 전기 신호로 바꿔 가동 가능 관절을 움직이고 있었기에, 일렉트릭 쇼크(Electric Shock)가 일어나자 순식간에 기능이 정지되고 말았다. -Holy Jesus! 설마 이런 방법이 있었을 줄은! 노엘은 뜻 밖의 공격에 머신 아더가 타격을 입자 다급히 비명을 질렀다. 머신 아더 최대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전기 신호계를 전기로 공격당한 것이다. 이를 대비하여 오리하르콘 장갑으로 사전에 절연성을 확보해두고 있었지만, 그 장갑 밑의 인공 근육은 오리하르콘의 가공 특성 상 전기 저항이 가장 약했기에 전열(Electro-thermal) 작용과 전리작용(電離作用)을 피할 수가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쿠사나기는 바로 이 부분을 정확하게 공격한 것이다. -으으으, 아아악! [크크크, 더 비명을 질러라! 더 울부짖어봐! 아직 이 정도로는 내 기분이 풀리지 않아! 이대로 숯덩이가 되어버렷!]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쿠사나기는 피스 대원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한층 더 필사적으로 머신 아더에 전기를 흘려보냈다. 그 바람에 머신 아더의 근육이 급격한 변성 을 일으키며, 종래에는 사지마저 괴사를 일으켰다. -10, 9, 8, 7…… 아아, 안돼! 가인 씨! 마리 양! 진우 씨! 엑스칼리버의 타임 리미트를 세던 채영이 당황하며 비명을 질렀다. 머신 아 더의 스펙(spec) 스크린은 그야말로 데미지와 워닝 표시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승패는 결정났던 것이다. 투우우우웅 괴사한 머신 아더의 오른팔이 엑스칼리버를 거머쥔채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썩은 고목과도 같이 타버린 거인은 그렇게 양팔을 잃어버린 채 처참한 모습으로 폐허에 널부러졌다. 그 모습으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승패는……. 인류의 존망을 건 전투는 삼차원 인류의, 패배……로 막을 내린 것이다. 후우우우웅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한 인영이 거인과 쿠사나기의 사이를 가로 질렀다. 그리고 모두는 볼 수 있었다. 머신 아더의 피스대원들도, 그들과 사념으로 연결된 시더와 채영도,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에서 상황을 모니터링 하던 관계자들도. 쿠사나기의 코 앞으로 날아드는 한 줄기의 검은 소용돌이를! " 칠성권(七星卷)…… " 허리를 편다. 가슴을 비튼다. 팔이 내선한다. 손 끝이 원을 그린다! " 녹존(祿存)! " 투아아아아앙 쿠사나기의 미간을 꿰뚫는 권의 폭풍! 순간, 함몰된 쿠사나기의 안면으로 주위의 피부가 빨려들어가며 나선 형의 충격파가 두개골과 그 안의 기관들 을 파괴시켰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체액, 그 체액의 팽창을 막아내기엔 부숴진 두개골들이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폭발! 후두골, 접형골, 측두골, 두정골, 전두골, 사골, 하비갑개, 누골, 비골, 서골이 동시에 부숴지며 끓어오르던 체액들이 밖으로 터져나왔다. 그렇게 터져오르는 체액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권복의 남자는 지상으로 깃털처럼 착지했다. " 후우우우우. " 피스 그레이. 브루스는 녹존으로 흐트러진 진기를 내가심법으로 끌어모으며 침착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뒤편에 쓰러져 있던 머신 아더를 향해, 그 안에 타고 있는 피스 대원들을 향해, 상황을 지켜보는 피스 관계자들을 향 해 거센 일갈을 터뜨렸다. " 포기하지마! " 포기하지마! 포기하지마! 포기하지마! 그 흔하디 흔한 한 마디의 말이 모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메디컬 센터의 집중 치료실에서 깨어났을 때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 때 자신은 무엇을 다짐했던가? 무엇을 깨달았었지? 망설이지마라. 후회하지마라. 자신을 가져라! ' 무엇을? ' 자신의……신념을! -으아아아아아! 순간 머신 아더의 타버린 두 눈동자에서 다시 한 번 오라의 불빛이 스며나 왔다. Ｔo Ｂe Ｃontinued…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246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8 화 '출동, 머신 아더!' Neo군(nextneo) 04-04-25 :: :: 28198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4 - Ｂy Ｎext Ｎeo =-=-=-=-=-=-=-=-=-=-=-=-=-=-=-=-=-=-=-=-=-=-=-=-=-=-=-=-=-=-=-=-=-=-=-= ' 피스……그레이. ' 촤라라라라락 쿠사나기의 폭파된 머리 부근에서 흑색, 적색, 백색, 황색, 청색의 용염들 이 자라나며 부숴진 육체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초류향과 브리트라의 인격마저 복제해낸 그는 스스로 육위일체가 됨으로서 누구보다도 가장 불사에 가까운 몸이 되어 있었다. 떨어져 나간 육체의 파편들과 체액들이 마치 시간 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처럼 그에게로 되돌아와 상처를 메꿨다. [네 놈이……, 네 놈 만큼은……!] 혈관들과 근육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파충류의 눈동자가 자신을 공격한 브루스를 발견해내자 이내 흉흉한 붉은 빛으로 변해갔다. 브루스는 그런 쿠사나기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 정신 구현은 이상(理想)을 육신으로 현현(顯現)시키는 능력. 네 녀석은 스스로 요르문간드의 육체와 정신에서 독립함으로서 존재의 법칙(Law of Ex istence)을 이겨낸 건가? " […….] 그 말에 쿠사나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브루스는 그런 그를 응시하다가 사심 없이 미소지었다. " ……과연 물질계의 힘은 더 이상 네 녀석에게 통용되지 않겠군. 훌륭한 자수성가(自手成家)다. " [……크으!] 하지만 도리어 그런 브루스의 칭찬은 쿠사나기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마치 어미새에게 버림받는 새끼새의 기분이 이러할까! 너의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한 저 말투! 이제는 너 같은 것에게 별 볼 일 없다는 듯 한 저 눈빛! 그 모든 것이 쿠사나기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 너의 모든 것이! 너의 존재 자체가! ' 내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 ' 진심으로 증오한다. 진심으로 저주한다. [피스 그레이, 네 녀석을!] 쿠사나기는 거칠게 포효하며 날개를 좌우로 펼쳐냈다. 흡수한 요르문간드의 힘을 되찾은 이상, 피스 그레이가 눈 앞에 나타난 이상, 더 이상 그에게 망 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저 전력을 다해 눈 앞의 적을 쳐부수는 일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들 준비를 하는 쿠사나기에게 브루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 네 상대는 내가 아니다! " [……!] 그리고 쿠사나기의 뒤편을 가리키는 손가락. 쿠사나기는 인상을 일그러뜨리 며 그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위이이이이잉 분명 기능이 정지되었어야 할 머신 아더가 볼품 없게 그을린 몸을 일으키면서도 푸른빛의 망토를 펄럭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쿠사나기는 자신도 모르 게 뒷걸음질 쳤다. [도, 도대체가 네 놈들은 대체…….] -네 상대는 브루스가 아니야. ……바로 우리다! 가인은 고함을 내지르며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AC의 오리하르콘 스래드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넘실거리며 거인의 발밑으로 움직였다. 그 강철의 실들이 향한 곳에는 괴사되어 떨어져나간 머신 아더의 오른 팔과 그 손에 쥐어진 엑스칼리버의 칼몸이 있었다. -마리 선배! 오라 클록으로 감아쥐듯 엑스 칼리버를 잡아낸 가인은 머신 아더의 본체를 조종하는 마리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가인의 의도를 눈치챈 마리는 진우와 시민, 유리에게 소리쳤다. -모두 오라 클록을 향해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오라 클록을 연결점으로 해 서 엑스칼리버에게 오라를 보내는 겁니다! -아……! 그제야 모두는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오라 클록을 머신 아더의 손 대신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사라진 엑스칼리버의 블레이드 만은 다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거기다 가인은 용케도 오라 클록을 이미지 메이킹으로 움직이겠다는 발상을 해낸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머신 아더의 AC가 엑스칼리버의 칼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붉은빛의 블레이드를 형성해냈다. 그와 동시에 그을린 머신 아더의 장갑으로부터도 희미한 붉 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작전본부실에서 머신 아더의 상태를 체크하던 윤채영은 다급한 사념으로 피 스 대원들에게 보고했다. -머신 아더 재가동! 엑스칼리버 사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EX의 남은 가동 시간은 6초! 앞에서 멈췄던 카운트는 줄어든 상태 그대로에 서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채영이 당황하는 사이에 카운트의 숫자가 한칸 더 내려갔다. 5초! -그 정도면 충분해! 하아아아앗! 채영의 사념으로 상황을 인식한 마리는 기합을 내지르며 머신 아더를 움직 였다. 그러자 엑스칼리버의 블레이드를 짊어진 거인은 재빠르게 몸을 낮추며 쿠사나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길! 이 끈질긴 괴물이!] 쿠사나기는 치를 떨며 전류가 흐르는 날개를 머신 아더에게로 휘둘렀다. 하지만 머신 아더는 몸을 뒤틀어 등 뒤의 블레이드로 날개를 빗겨낸 후, 도리 어 날개에 블레이드를 미끄러뜨리며 쿠사나기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 이번 일격으로 끝을 낸다! ' 할 수 있지, 성마리? 믿어라, 무영신풍류를! 믿어라, 너의 동료들을! 믿어라, ' 네 자신의 검을! ' 휘이이이이잉 쿠사나기에게 근접한 머신 아더는 블레이드로 날개를 쳐내며 그 반동으로 전신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검기와 기력, 그 무엇 하나 충족되지 않은 상황 이었지만 마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EX의 가동시간이 2초 남았다고 보고하는 채영도, 가슴을 졸이며 상황을 지켜 보는 노엘도, 가인도, 진우도, 시민도, 유리도, 그 모두의 사념이 하나가 되어 그녀의 검을 지탱시켜준 것이다.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의(奧義), 단공(斷空)! 순간, 회전하던 아더의 움직임이 대기 속으로 녹아들며 날카로운 붉은 검광이 쿠사나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예전 마리가 스펙터와의 싸움에서 운요 다음으로 선보였던 무영신풍류의 삼대오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의 단공과 지금의 단공에는 그 위력 면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크.] 머신 아더는 어느샌가 쿠사나기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블레이드가 사라진 엑스칼리버를 바닥에 떨구고 있었다. 등 뒤의 오라 클록은 바람 한 점 불 지 않는 날씨에도 찢어질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숨죽여 쿠사나기의 상태를 응시하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마치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날개를 뻗은 자세 그대로에 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는 미소지었다. -……베였다. 칭 순간 날카로운 단절음과 함께 쿠사나기의 동체가 정확히 수평으로 이등분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 거구의 육신이 베어지면서도 주위의 건물들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는 것이다. 단공이라는 이름 그대로 엑스칼리버는 쿠사나기가 있는 '공간'만을 베어냈던 것이다. 그 모습에 피스 대원들과 유레카의 노엘 일행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 질렀다. " 아직 끝나지 않았어! "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브루스가 다급히 모두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의 말대로 쿠사나기는 예의 용염들을 휘날리며 상처들을 수복해내고 있었다. 애초 에 자신의 회복력을 믿고 일부러 머신 아더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던 것 이다. 쿠사나기는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크하하하하하! 아무래도 승리의 여신은 나에게 미소 지은 모양이 구나!] 쿵 그와 동시에 머신 아더가 힘 없이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힘을 모조리 단공 에 쏟아부은 거인은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붉은 빛을 흘리던 오리하르콘 갑주 또한 예의 검게 그을린 상태로 돌아가며 오라의 불빛을 잃어 버 렸다. -안돼! 선배, 일어나요! 움직이라고요! 한 방 더 먹이는 거에요! 이대로 끝 낼 수는 없잖아요! 가인은 다급하게 마리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말에 답한 것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는 시민의 사념이었다. -무리에요, 가인 씨. 머신 아더는……제 역할을 다했어요. 그리고 우리들에 게도 더 이상 그를 움직일 힘이 없어요. -힘이……없다니? 컥. 순간 가인은 사념이 비틀리는듯한 느낌을 받으며 비명을 질렀다. 마치 사지 가 찢겨져 나가는듯한 고통이었다. 아니, 혼 자체가 잡아당겨지면 이런 아픔 을 느낄까. 고통으로 인해 오라를 사용하겠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머신 아더의 PET용액이 제한 시간을 다하자, 더 이상 피스 대원들의 육체가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제, 젠장. 이대로는……! 무리하게 머신 아더에 오라를 불어넣으려던 진우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 틀었다. PET용액이 정화작용을 멈추자 숨쉬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런 대원들의 상태를 깨달은 노엘이 다급히 채영에게 소리쳤다. -콕피트의 2번 출구와 3번 출구를 개방해서 PET용액을 배출해! 어서! 푸확 순간 머신 아더의 왼쪽 가슴 부위에서 인공 근육들이 걷혀나가며, 콕피트의 출구가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그러자 대원들의 몸을 보존하고 있던 다섯 개 의 금속관에서 비린내를 풍기는 PET용액의 노폐물들이 터져나왔다. 그제서야 대원들의 몸에서도 고통이 걷혀나갔지만, 덕분에 머신 아더의 조종은 완전히 물건너 가버렸다. 후우우우우 그리고 들어올려지는 쿠사나기의 날개. 직접 자신의 손으로 머신 아더를 끝 장낼 셈이었다. 그 모습에 가인의 사념은 절망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길……. 정말……이걸로, 끝인가? -걱정하지 말아라, 가인. 그때 마리의 사념이 차분하게 가인을 달랬다. 그녀는 마치 확신한다는듯 쿠 사나기를 올려다보며 뒷 말을 이었다. -녀석은 확실하게 베였으니까. -……예? 쿠구구구구구구 막 가인이 그녀에게 영문을 묻기도 전에 쿠사나기 주변의 지축들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짓눌려지듯 가라앉는 대지. 쿠사나기와 머신 아더는 마치 무형의 기운에 붙들린 것처럼 지축으로 끌려들어갔다. [뭐, 뭐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쿠사나기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 물음에 답한 것은 노엘의 사념이었다. -중력이…… 강해지고 있어. 중력 붕괴가 일어나는 거야. 어째서?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 어째서……. 그러던 중 노엘은 단공에 베여졌던 쿠사나기의 가슴 부위로부터 검은 공동 (空洞)이 점점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검은 공동, 검은 공동이라고? -특이점(singularity)! 머신 아더의 단공은 효과가 없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차원 자체를 베어버리면서 중력이 무한히 강해지는 중력 붕괴를 야기, 공간 왜곡을 일으켰던 것 이다. 그리고 그 공간 왜곡이란 다름 아닌, -블랙홀(Blackhole)! 쿠콰콰콰콰콰 중력 붕괴를 일으킨 공간은 무한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축하는 공 간의 반지름이 중력반지름보다 더 작아지자 검은 구가 형성되며 그 주위의 모든 물질들이 검은 구의 중심에 있는 한 점으로 수축해들어갔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만들어진 것이다. 차원 자체를 베어버리다니! 이런 황당한 괴물이! [으으으으으으!] 쿠사나기는 필사적으로 중력장을 전개하여 블랙홀에 빨려들어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했다. 어차피 지금의 블랙홀은 차원이 균열하면서 일시적으로 만 들어낸 와동(渦動)에 불과했다. 차원이 회복되면, 자연적으로 볼텍스(Vortex)외부의 실수 4차원 시공간과 내부의 허수 4차원 시공간의 경계가 사라질 것 이다. 후우우우웅 그때 쿠사나기의 귓가로 낯익은 파공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시선을 돌린 곳 에는 푸른 오라의 망토를 둘러쓴 머신 아더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마지막 기력을 짜낸 가인이 반파된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을 전개하여 반중력을 등에 업은채 쿠사나기를 향해 몸통 박치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 놈이이이이잇!] 터엉 미약하기 짝이 없는 충격이었다. 더구나 중력장을 몸에 두른 쿠사나기에게 있어서 그 정도의 몸통 박치기로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가인의 목적은 공격이 아닌 떠미는 것에 있었다. 블랙홀의 사건 지평(event hori zon)에 근접해 있던 쿠사나기는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중력장의 균형을 잃고 블랙홀에 빨려든 것이다. [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괴성을 내지르며 쿠사나기의 전신이 일그러져 나갔다. 그 끔찍한 모습에 눈을 돌린 가인은 이를 악물며 쓰러진 머신 아더의 위로 오라 클록을 덮어 씌웠다. 이대로는 머신 아더마저 저 블랙홀로 빨려들고 말 것이다. 최대한 중력장을 전개하여 블랙홀이 사라질 때까지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콰콰콰콰콰콰 1분도 안되는 시간이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블랙홀 은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모습을 감춰버렸다. 가인은 탈진하듯 오라 클록을 해제시키며 힘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녀석은……, 어디로 간 거지? 눈에 보이는 것은 반구 형의 형태로 음푹 파여진 지면 뿐이었다. 고개를 들 어 살펴보니 머신 아더는 지름 500미터의 크레이터 속에 홀로 쓰러져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블랙홀의 영향에 모조리 빨려들어간 것 이었다. 그 장엄하다면 장엄하다고 할 수 있는 장면에 피스 대원들은 마치 자신들이 대재해 때의 현장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입을 열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모두의 가슴으로부터 뜨겁게 치밀어 오르 고 있었다. -12구역의 중력장 반응……사라졌습니다. D타입의 요르문간드……반응, 소멸.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스스로가 믿을 수 없어 띄엄 띄엄 중얼거리는 채영. 하지만 그녀의 보고는 정적을 깨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해, 해냈어! 해냈어어어엇!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해치웠어! 채영과 노엘의 사념으로부터 작전본부실에서 환호성을 내지르는 오퍼레이터들의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채영의 울먹이는 사념도, 멍하니 스크린을 응시하는 노엘의 사념도 느낄 수 있었다. 가인은 왠지 자신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사념의 상태에서 실제로 눈물이 흐를리는 없겠지만, 타인의 감정과 연결된 상태라서 그런지 마치 모두의 감정이 자신의 감정인 것처럼 느껴지고 있 었다. 벅찬 희열과 감동, 안도와 기쁨, 슬픔과 그리움. 혼자만이 느끼는 것이 아닌, 그렇기에 더욱 크게 느껴지는 감정들. 가인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대도시의 하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 로 수 많은 별빛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의식을 통합하고 있던 유리의 자의식이 깨어났다. -오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인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인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훈훈한 미소로 그녀의 의식을 반겼다. -……깨어났구나, 유리야. -오빠! 패턴 핑크의 힘이었을까. 사념이 형체화되며 가인은 자신의 품에 안겨드는 유리를 마주 안아줄 수 있었다. 유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가인의 허리를 부 둥켜 안았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사념들이, 그녀가 얼마나 불안에 떨면서 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의 의식을 통합하고 있던 유리는 아마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요르문간드의 공포와 싸워왔을 것이다. 가인은 있는 힘껏 그녀를 안아주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리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며 그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진우가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웃고 있었다. 시민은 조용한 표정으로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채영이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야말로 엉엉 울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뒤에서 가인을 바라보던 노엘이 천천히 몸을 돌려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도 사념을 연결시켜주는 AI헬맷을 벗어버린듯 했다. 하 지만 가인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라지기 직전 자신을 향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이며 '고맙다'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을. 가인은 환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다행이야. 모두가 무사해서,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는 살아남은 것이다. 다시 한번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이 기쁨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 모두가……무사해서? ' 순간 가인의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한 사람의 모습이 아까부터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그를 잊고 있었던 걸까! " 브루스! " 가인은 두 눈을 번쩍 뜨며 금속관에서 PET용액에 젖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급한 마음에 자력으로 유리와의 정신 공유를 끊고 육체로 되돌아온 것이다. 가인은 허겁지겁 금속관을 열어젖히며 개방된 콕피트의 입구로 몸을 날렸다. " ……! " 어둠이 깔린 드넓은 크레이터의 모습에 가인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참담한 기분이 먼저 들어 어디서부터 브루스를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그라면 무사 할 수 있었을까? " 가인! " 그때 막 정신을 차린 마리 일행들이 금속관을 열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가인은 그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좀 더 생각했어야 했어.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었더라도 함께 보호해냈어야,충분히 그럴 기회가 있었는데, 어째서 나는! 휙 가인은 참지 못하고 머신 아더의 밑으로 뛰어내렸다. 머신 아더가 엎드린 상태로 있었기에 한번에 지상으로 착지할 수 있었다. 가인은 자신의 AI슈츠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여 어두운 암흑 속을 둘러보았다. " 브루스! " 가인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그는 속 으로 끊임 없이 자신을 다그쳤다. ' 무사할 거야. 무사할 게 틀림 없어. 브루스는, 브루스는! 그가 이런 곳에 서 죽을 리가 없잖아! 그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유가인! ' " 브루스! " 하지만 점점 브루스를 부르는 가인의 목소리는 필사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가인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무모하게 그를 찾기 보단, 유레카의 윤채영을 통해 그의 소재를 찾아내는 게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피스 대원들의 오라를 감지하여 탐색하는 방법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 방법이라면 브루스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애송이. " 그때 가인의 뒤로부터 낯 익을 수 밖에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가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며 무전 치는 것을 멈췄다. 브루스는 머신 아더의 무릎에 걸터앉아 여유롭게 곰방대를 피우고 있었다. " 전투 중에 머리라도 잘못 맞은 거 아니냐? 뭘 그렇게 요란법석을 떠는 거야? 방정맞은 것도 정도가 있지, 네 녀석은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 지는구나. " " ……. " " 그런 식이니까 전투 중에도 시야가 좁아지는 거다. 자기 밖에 볼 줄 모 르니까 주위 사람들도 덩달아 위험해지지. 나 정도 되니까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으로 몸을 피할 생각을 다 했지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떡할 뻔 했던 거냐? 또 잃고서 땅만 팔 생각이었냐? " " ……. " " 말 하는 법도 잊어버렸군. 하긴 바보가 더 바보가 되어봤자 바보인 건 변함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인가. 바보라서 아주 잘 됐어. " " 브루스! " 잠자코 등을 돌려 브루스의 말을 듣고 있던 가인은 참다 참다 못참고 소리 질렀다. 브루스는 그런 가인의 역정에 두 눈을 감으며 코웃음쳤다.그래도 화 내는 법은 잊어버리지 않았군. 와락 하지만 계속 소리칠 거라 예상했던 가인은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태클에 가까울 정도로 있는 힘껏 브루스에게 달려와 그를 껴안아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브루스는 가인과 뒤엉켜 머신 아더의 무릎 밑으로 굴러 떨 어졌다. " 큭! " 브루스는 머리가 땅에 부딪히지 않도록 손으로 땅을 짚어내며 자신을 끌어 안은 가인을 어이 없다는듯 내려다 보았다. 아니, 이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 으로 이런 짓을! " 네, 네 녀석! 정말 머리라도 다친 거냐! 왜 이러는 거야! " " ……. " 하지만 가인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더욱 힘주어 그를 끌어 안았다. 그 격렬한 포옹에 브루스는 얼굴을 붉히며 강제로라도 그를 떼어내기 위해 주 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브루스의 귀로 가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 다행이에요, 브루스.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역시 무사할 줄 알았어요. 반드시 무사할 거라……. 난 정말……. " " ……. " 눈물을 글썽이는 가인의 모습에 브루스는 쥐었던 주먹을 내리며 작게 한숨 을 쉬었다. 그는 어색하게 가인의 어깨를 두들기며 미소지었다. " 흥. 건방떨지 마라,애송아. 네 녀석이 날 걱정하는 건 백만년은 이른 일 이다. " " 하, 하하……. 그렇겠죠? " 가인은 변함없는 브루스의 태도에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눈물 자국 밑으로 피어나는 그 미소. 가인의 미소를 보는 순간, 브루스는 알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듯한, 돌이킬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오라의 주인은 나에게 있어서 ' 수단……이 아니었나? ' 언제부터 톱니 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한 거지?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 사부님! " " 브루스! " " 브루스 님! "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피스 대원들. 얼빵한 자신의 제자와, 고지식한 무영신 풍류의 후계자, 날개가 꺽인 상처 입은 아이와 귀엽지 못한 건방진 꼬마. 그 때부터다. 저들을 만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변해버린 것이다. " ……시끄럽단 말이야, 애송이들. " 하지만 브루스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우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 소리에 리리스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힘겹 게 눈을 뜨다가 이내 자신이 거대한 새에 태워진채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리스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여기는? " [깨어났어, 리리스?] 카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그녀를 태운 익조로부터 흘러 나오고 있었다. 리리스는 영문을 몰라 잠시 할 말을 잊다가 곧 상황을 파악하고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 당했……구나. ' 아마도 자신이 아공간에 진입한 사이에, 초류향을 상대하던 그는 네크로맨시로 조종하고 있던 테라의 육체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아마도 치열한 접전 이었을 테지. 하지만 그의 실력이라면 초류향에게 애를 먹을 정도는 아니었 을 텐데……. ' ……나 때문인가. ' 리리스는 카이가 육체를 잃은 것이 무방비한 상태인 자신을 지키려다가 벌어진 일 임을 깨닫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네크로맨시로 육체를 빌리 더라도, 그 육체에 영체를 정착시키고 있는 순간에는 모든 고통도 아픔도 자신의 것이 된다. 비간접적이더라도 죽음을 당하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이 할 경험이 못되는 것이다. 카이는 리리스가 말이 없어지자,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역시 리리스야. 그 어려운 아공간 접속을 무사히 끝내고 봉인된 영체까지 탈출시켜내다니. 덕분에 쿠사나기 녀석은 멋지게 역전패, 테라 녀석들이 정말로 요르문간드의 본체까지 이겨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아아……. 결국.] 리리스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지금은 멀리 떨어진 12구역의 전장 쪽을 돌 아보았다. 어둠에 가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곳에서 그들은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쿠사나기는……. ' 쿠사나기. '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리리스는 비위가 상하는 것을 참아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지독한 현기증 에 정신이 아늑해지고 있었다. '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 어쩔 수가 없었던 거지? 응? 리리스, 그런 거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메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동료마저 배반할 수 있어야 하는 거겠지? 그런 거지? [리리스?] 카이는 리리스의 상태가 이상함을 깨닫고 걱정스레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리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익조에 몸을 눕혔다.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현세의 지옥불이 될 것이다. 리리스는 힘 없이 두눈을 감았다. " ……잠시 눈 좀 붙일 게, 카이. " [아, 그래. 아스트랄 계를 유영했으니 피곤할만도 할 거야.마음 놓고 푹 쉬어. 순식간에 집으로 모셔다 드릴테니.] 카이는 그녀가 잠들기 편하도록 날개의 움직임을 줄이며 최대한 조용히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런 카이의 배려에 리리스는 눈가를 가리며 작게 속삭였다. " ……미안. " […….] 그녀의 사과에 카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익조의 등 뒤로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 방울들을 느낄 뿐이었다. -결국…… 패하고, 말았나. 물질계에서 끝없이 아스트랄계로 뻗어나가는 웜홀(Worm hole). 그곳을 지나 가며 파프니르는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초류향과 레비아탄이 거칠게 항의했다. -흥, 난 인정할 수 없다! 우린 지지않았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어! -비겁한 테라의 오라 능력자들. 애초에 그들과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게 아니 었다. 여러모로 우리에겐 핸디캡이 많은 싸움이었어. 그런 그들의 투덜거림을 듣다 못한 스머그가 비웃음을 흘렸다. -캇. 싸움에 진 개들이 말이 많군.지금와서 떠들어봤자 뭐가 바뀐다는 거야? 그런 식으로 애프터(After)에 궁시렁거렸다간 여자들에게 인기 없다고. -네 놈에게만큼은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동감한다. 동감하고 말고. 초류향과 레비아탄은 되려 그런 스머그를 다그치며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였다. 명예욕과 재욕은 묘한 부분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적어도 성욕 에 대한 입장만큼은 같은 의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용마인들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파프니르는 조용히 뒤에서 걸어오는 쿠 사나기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이걸로 괜찮은 건가? 그 말에 시끄럽게 굴던 레비아탄과 스머그,초류향도 입을 다물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용마인들의 관심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쿠사나기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괜찮다는 거지? -피스 그레이의 일. 파프니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번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언짢은 기색을 보였는데, 아무래도 순순히 힘을 실어준 쿠사나기가 맥없이 당한 것에 불만을 느낀 모양이다. 그런 파프니르의 시선을 쿠사나기 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녀석은……나에게, 훌륭히 자수성가……했다고 말했다. -자수, 성가? 스스로의 힘으로 어엿한 살림을 차렸다고? 초류향과 레비아탄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쿠사나기는 재차 입 을 열었다. -그때 당시에는 단지 날 비웃으려고 했던 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때 녀석이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나를 대하던 태도는 분명, -진지……했었어. 언제나처럼 내려다보던, 날 깔아뭉개던 그런 시선은 적어도 아니었다. 그런 쿠사나기의 말에 파프니르는 굳었던 표정을 풀며 미소지었다. -인정받았구나. 그에게서. -……뭐? 쿠사나기는 움찔 어깨를 떨며 파프니르를 돌아보았다. 스머그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듯 소리쳤다. -큭! 인정받기는 무슨 개뿔을 인정받아! 우리를 제대로 상대도 해주지 않던 녀석 아니었나! 네 상대는 내가 아니다, 라고? 잘도 그 따위 소리를 지껄 여주는군! " -아니, 그는 우리가 존재의 법칙을 넘어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 그가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거인에게 맡긴 것은 어쩌면 우리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같은 존재의 계를 벗어난 괴물들끼리 결판을 내라는. 레비아탄은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 레비아탄의 태도에 스머그는 아니꼽다는듯 소리 없이 입을 삐죽거렸다. 파프니르는 레비아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를 하나의 대등한 인격체로, 인정했다는 말이군? -흥, 그 건방진 놈. 자신이 무엇이라고 우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거야. 초류향은 그에게서 당한 상처를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런 것 치 고서는 의외로 분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개운해졌다는 미소마 저 짓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쿠사나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들이 빨려들어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방금전까지 자신들은 저 너머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와 마주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다시는……만날 일이 없겠지. 블랙홀을 통해 이 기나긴 웜홀을 지나 화이트 홀로 나가면 또 다른 세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자신들은 테라에서도, 노아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였다. 해방이었다. 이후부터는 자신들의 의사로 모든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 졸업, 시켜줬다는 건가. ' 건방지기 짝이 없어! 쿠사나기는 브루스의 모습을 머리 속으로 그리며 코웃음쳤다. 이제 자신은 자신만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지켜볼 수 있다면 똑똑히 지켜보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 펼쳐질 나, 쿠사나기의 일생을! ' 날…… 잊지 마라. ' 쿠사나기는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후, 용마인들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이제부터 이 웜홀의 시공 기하를 계측해볼까. 화이트 홀의 반대 사건지평이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이 안에서 늙어 죽는 일은 없을 거다. -흠. 그 정도는 우리를 맞이할 신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겠군. -크크큭. 신세계라, 거기의 여자들은 무슨 맛일까. 레비아탄과 스머그는 자신들이 도착할 제 2의 물질계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파프니르는 온갖 망상으로 폭주하는 스머그를 향해 따끔히 일침했다. -……의외로 촉수 괴물들이 고등 생물로 진화한 차원일지도. -아, 그거는 그거대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괜찮아. -……. 한편, 그렇게 떠들썩해지는 세 용마인들과는 달리 초류향은 근심 어린 표정 을 풀지 못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쿠사나기는 그의 생각을 읽어낸듯 씨익 미소지으며 말했다. -초류향, 티아마트와 메두사라면 걱정하지 말아라. -큭. 초류향은 정곡을 찔렸는지 그답지 않게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쿠사나기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아무리 네가 주인격이더라도 화신들의 프라이드는 지켜주는 게 어때? -흠, 글쎄. 내 조교 방침은 강하게 키우기, 라서. 초류향은 질린다는듯 혀를 차다가 쿠사나기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라니? 배신한 우리를 감싼 그들이 원로회의 처벌을 받 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아니. 그들은 오히려 공로자다. 배신자는 우리들일 뿐이야. 초류향은 알 수 없는 소리만 계속해대는 쿠사나기에게 인상을 찡그렸다. 쿠사나기는 자신이 보낸 정보체, 브리트라가 무사히 메두사에게 전송된 것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브리트라는 식욕의 화신답게 모든 것을 먹어치울 수 있었는데, 거기다 녀석은 먹어치운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는 능력마저 가지고 있었다. 정보 복사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브리트라는 '처음'으로 파견된 화신이었기에, 그에게서 갈라져 나온 자신들과 메두사는 그를 매개체로 하여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런 그 였기에, 브리트라를 떠나 보낸 지금 쿠사나기는 더 이상 메두사와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배신자들과는 연락이 두절되는 게 그들을 위해 서도 좋다. ' 어머니, 이것이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일입니다. ' 브리트라를 통해 보낸 정보는 분명 피스메이커의 거인을 상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효용 가치가 남아있음이 판명난 요르문간드도 원로회로부터 제거당하지 않을 것이다. 쿠사나기는 대답을 바라는 초류향을 다독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 더 이상 우리들을 가려줄 부모의 그림자는 없어. ' 초류향, 레비아탄, 스머그, 파프니르. ' ……그렇다면 내가 지금부터 너희들을 가려줄 그림자가 되겠다. ' Ｔo Ｂe Ｃontinued…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247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8 화 '출동, 머신 아더!' Neo군(nextneo) 04-04-25 :: :: 20861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5 - Ｂy Ｎext Ｎeo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이번 요르문간드의 피해액은 11조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저번 182구역의 금액을 가볍게 뛰어넘는 액수였다. 거기다 각종 언론 매체에서는 이번 12구역과 13구역의 대파괴에 대한 기사 를 싣는데 여념이 없었다. 기사에는 제 2의 대재해라는 의혹과 피스메이커에 대한 강한 의문이 집중적으로 보도되어지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피스메이커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통제도 넘치는 사람들의 이목을 막아낼 수 없었다. 특히 피해구역의 유가족들은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며 피스메이커의 진상 여부를 들고 있어났다. 이를 막기 위해 군 경찰들이 집회 장소에 투입되었다가 도리어 유가족들을 부상입힘으로서 사건은 더더욱 손쓸 도리가 없이 커져만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 지부 피스 대원들의 신상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았 다는 점이었다. 목격자들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들은 철저히 팔라딘 대에 의해 통제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 통제받고 있는 이들도 인간이고, 통제하는 이들도 인간이었다. 어느 한 순간의 방심이 치명적인 정보 유출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피스메이커와 여론의 대치 상황은 외나무 다리를 타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계 카톨릭의 총본산 바티칸 시국(The Vatican City Stage). 이 서울의 잠실 운동장보다 조금 작은 소국가는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에 위 치하고 있으며, 인구도 약 1천명인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였다. 하지만 이 곳에는 카톨릭 교의 지도자인 교황과 각국에서 파견된 추기경, 외교관, 고위 성직자 및 사제 근위병등이 살고 있다. 더구나 바티칸은 자국의 국기와 법률, 화폐와 우표 등을 가진 세속적 영토 주권 국가인 것이다. 이 소국이 지금껏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전파 와 세계 평화, 인권 수호라는 슬로건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 세계에 퍼진 카톨릭 지부와 10억명이 넘는 신자수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이곳 바티칸에 피스메이커와 모종의 관계 에 있는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동방의 소국은 언제나 떠들썩하군.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나라야. "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설 때 받게 되는 느낌은 처음에는 웅장함 이었다. 하지만 그 웅장함에 익숙해지고 나면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통일성 일 것이다. 지금껏 확장에 확장을 거듭한 베드로 대성당은 수 많은 설계자들의 손을 거쳐 갔는데, 이와 같은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라틴형 십자가 골격을 설계해낸 카를로 마데르노 때문이었다. 그는 확장된 내부 설계에서 전임자 미켈란젤로가 이미 만들어 놓은 설계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미켈란젤로의 풍을 따랐다. 그 결과 현재의 대성당은 어느 한 구석도 조화를 이루지 않는 부분이 없었으며,한 사람의 설 계로 이루어진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런 성당 내부 예배실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쪽은 연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든 노사제였고, 다른 한쪽은 이제 막 마흔 대에 접어든 건장한 체구의 수도사였다. 그들은 제대 뒤편에 만들어진 성 예로니모의 제대라는 모자이크를 응시하며 담담히 대화를 나눴다. " 옴팔로스의 영향일까? 그 나라는 예전부터 분란의 여지가 많았지. " 노사제는 인자한 표정으로 음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발음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수도사는 잘도 그의 말을 알아들으며 미소지었다. 금발의 블론드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라, 미소를 짓자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비숍(Bishop), 그곳에는 12번째의 검, 유다(Judas)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그가 있는 곳은 언제나 떠들썩하지 않았습니까. " " 허허, 그렇군. 그라면 분명 그곳에 적임자일 거라 생각했었지. 아무래도 아포스톨로스(Apostolos)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아이였으니까. " " 속마음도 모를 아이였고 말이죠. " 금발의 수도사는 노사제, 비숍의 말에 빙긋이 미소지었다. 그의 말투가 과거형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그랬을 거라는 말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 하지만 그에게는 정말이지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나 봅니다. 대재해 때도 그러했지만 이번 일도, 말이죠. " 수도사는 품에서 수십장의 사진들을 꺼내 노사제에게 보여주었다. 성당기사 단이 피스메이커의 우주수 위그드라실에 심어놓은 스파이 위성 라다토스크가 보내온 영상이었다. 그 사진에는 MS01호 머신 아더와 D타입의 요르문간드의 전투 장면들이 낱낱히 찍혀 있었다. 비숍은 품에서 안경을 꺼내 쓰며 느긋하게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사진을 응시하는 노인의 벽안(碧眼)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기가스(Gigas)로군. 설마 우리 세기에 이것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정말 놀라운 사내야. " " 감탄만 하실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건 어쩌면 우리에게 있어서 중대한 배신 행위입니다. 그가 피스메이커를 맡게 되었을 때 약조한 사항과 어긋 나지 않습니까? " 수도사는 조바심이 나는 것을 감추려고 애쓰며 차분하게 말했다. 비숍은 사진들을 살펴보다가 그 끝에 찍힌 남자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 사 진에 찍힌 남자는 자신들이 얘기하던 12번째의 검, 이스가리옷 유다(Iscario t Judas)였다. 정말 그 남자에게 그 만큼 어울리는 이름도 또 없을 것이다. 비숍은 유다의 사진을 가리키며 수도사에게 물었다. " 이 사진은 왠 건가? " " 하하, 오랜만에 보실듯해서 그의 최근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옛날과는 꽤 인상이 변했죠. " " 그렇군. 그때는 좀 더 귀염성이 있었는데. 그래, 지금은 뭐라고 불린댔지? " 수도사는 그의 말에 곧바로 답하지 않으며 잠시 입을 닫았다가, 이내 강조하 듯 말했다. " 진(鎭) 사령관이라고 불린다고 하더군요. " " 진? " " 예, 코리언으로는 한 지역을 지키는 군대, 또는 그 군대의 우두머리를 칭 하는 말이랍니다. " " ……우두머리, 라. " 비숍은 인상을 굳히며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수도 사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저 사진을 준비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숍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수도사에게 말했다. " 10번째의 검, 아포스톨로스 타데오(Thaddaeus). 그대에게 검으로서의 사명을 건내 주겠다. " " I can do all things through Him who strengthens me. (저에게 능력을 주 시는 분을 힘입어 저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 수도사, 타데오는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답하며 명을 받들 준비를 마쳤다. 비숍은 그런 그를 벽안으로 싸늘히 훑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대는 지금부터 성당 기사단(The Order of Templars)의 대표로서 한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총 사령관 보좌 임무를 맡는다. " 보좌가 아닌 사찰(査察)……이겠지. 타데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비숍은 그의 속내를 짐작했다는듯 재차 말을 이었다. "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어디까지나 보좌가 목적이다. 그 외의 행동 은 규정 위반으로 여기고 엄중히 처벌하겠다. " " ……예. " 타데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의 말을 승낙했다. 그러자 비숍은 한동안 그 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배실을 나가버렸다. 타데오는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격정을 숨기다가 천천히 어깨 를 들썩였다. " 후후후, 후후후후훗. 그래.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려왔지, 유다! " 그는 비숍이 놓고 간 진 사령관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그의 뒤로 검은 코트를 입은 작은 체구의 소년들이 모습을 드러냈 다. 대략 열 서너살 정도로 보이는 인형과도 같은 생김새의 두 쌍둥이 형제였다. 머리를 깨끗하게 삭발한 쪽이 형, 검은 흑발을 뒤로 길게 땋아내린 쪽이 동생이었다. " 마스터, 뭔가 기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동생 쪽이 차분한 가운데에서도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타데오에게 다가와 물었다. 형 쪽은 동생과 같은 사근사근한 태도가 체질에 맞지 않았는지 애초에 한 걸음 뒤로 떨어져 이죽거리는 얼굴로 코웃음치고 있었다. 동생의 물음에 타데오는 진 사령관의 사진을 들어보이며 예의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단다. " 밤의 항구 도시 부산. 다른 이름으로는 140구역이라 불리는 이곳은 한국 제 2의 도시이자, 제 1의 무역항이었다.그 항구의 한편에는 현재 미국에서 건너 온 특수화물선(Special cargo ship)이 정박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보기 힘 든 10만t 이상의 대형선이었다. 후우우우우우 어둠이 깔린 화물선에는 뜻 밖의 인물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바로 피스메이커를 저버린 인류의 이단자, 피스 블랙 한시영과 그를 따르는 라이컨슬로프 라트 발렌시아, 마인드 브레이커 마유빈. 12구역의 사투가 끝난 후 모습을 감춘 그들은 뜻 밖에도 이런 장소에서 몸 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신부의 모습을 한 라트는 예의 과묵한 모습으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있 었다. 하지만 근근히 명치 부근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보아 피스 그레이에게 당한 상처를 완전히 회복해내지는 못한 모양이다. 전투의 여파가 남은 것은 옆의 유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는데, 시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틈틈히 히스테리를 부릴 정도로 정서가 불안정해져 있었다.거기다 요 며칠간은 시영의 거처를 찾아내기 위해 무리해서 능력을 쓰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다. 시영의 정신 장벽은 유빈의 마인드 브레이크로도 뚫기 역부족이었기에 결국 그들은 시영이 스스로 전언을 보내기 전까지 허탕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시영은 그런 라트와 유빈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 이런, 모습들이 말이 아니군요. 좀 더 일찍 부를 걸 그랬나요? " " ……. " 그 말에 유빈과 라트의 표정이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좀 더 일찍 부를 걸 그랬나요, 라니. 그럼 기간에 여유가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요 일주일간 고생 한 것이 무척이나 억울해진 유빈은 울상을 지으며 항의했다. " 마스터, 저희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기나 하세요? 혹시 신변에 무슨 문제 라도 생긴 건 아닌가 걱정했다고요! " ……저희라니? 난 아니야. 라트는 조용히 그 말을 집어 삼키며 시영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 다음부터는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마스터를 찾는데 쓸데 없는 시간은 낭비하지 않도록. " " 하하하. 그렇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앞으로는 개인 행동을 하게 될 시에 반드시 연락망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 " ……. " 오히려 그렇게 깨끗하게 사과하니 할 말이 없게 된 라트였다. 더구나 유빈이 째려보기까지 하자 영락없이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시영은 유빈을 끌어 안고 따뜻하게 다독여주었다. "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유빈. 내 불찰이 컸다. " " 아, 아니, 아닙니다, 마스터! 오히려 저희들 쪽이 제대로 임무 완수도 해 내지 못하고……. " 유빈은 그의 포옹에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동안 허전했던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시영은 유빈의 머리를 쓰다 듬으 며 미소지었다. " 그걸로 충분해. 너희들이 가져온 얘기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으니까. " 시영은 그들에게서 12구역에서 벌어진 일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들을 수 있 었다. 거인의 등장과 그 능력, 요르문간드를 블랙홀로 날려보낸 그 강력함. 전율이 흐를 정도였다. 설마 그들이 '그런' 것을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 ……깔보고 있었던가. ' 시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선교(Bridge)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거대한 화물을 올려다 보았다. 그것이 요 며칠간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였다. 시영의 뒤에 서있던 라트가 마른 침을 삼키며 화물을 바라보았다. " 이건……대체 무엇입니까? " " 아아, 네이 안데르슨에게서 받은 선물입니다. 어떻게 옮겨와야하니 막막 하던 참에 고맙게도 그가 제 고민을 덜어주더군요. " 질문에 답하며 시영은 손가락을 튕겨보였다.그러자 화물을 뒤덮던 천이 스 스로의 그림자 속에 녹아들듯 사라지며 그 안의 내용물이 밖으로 모습을 드 러냈다. 펄럭 거대한 박쥐의 날개에 감싸인 짙은 검은 색의 거인이었다. 마치 시영의 오라 패턴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깊은 암흑의 존재가 그곳에 웅 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거인을 살펴보던 유빈은 이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 이, 이건 피스메이커 녀석들의! " " 그렇지요? 꽤 닮지 않습니까? 그들의 거인과. " 시영은 천천히 선교의 유리창으로 다가가 거인을 부르듯 유리판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러자 거인은 그에 호응하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오오오오오오 마치 고래가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라트와 유빈은 자신들에게서 등을 돌린 마스터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 가련한 팔라스(Pallas)여, 넌 죽어서까지 인간들에게 이용당하고 있구나. " 시영은 피스메이커의 거인을 동정하며 자신의 거인에게 말했다. " 티폰(Typhon), 친구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너뿐이다. 나를 도와주겠지? " 오오오오오오 앞의 울부짖음보다 한층 더 명확한, 의지가 느껴지는 울부짖음이었다. 그렇게 거인과 대화를 나누는 시영에게 라트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 이 거인의 이름이……티폰, 입니까? " " 아니. 그것보다는…… 아아, 그래. 피스메이커 측의 거인은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 " ……머신 아더, 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 " 하하하, 머신 아더라. 기사 중의 기사란 말인가. " 시영은 넌센스라는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뭔가 재미있는 것을 생각해 낸듯 거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 그럼 우리는 저 거인을 이렇게 부르도록 하죠. " 몬스터 슬레이어, " 블랙 아더(Black Arthur)……라고. " 《해낸다! 반드시 해내고 만다!》 그레이트 카이저의 세번째 조종사, 이순신은 이를 악물며 G머신의 압력을 이겨냈다. 그야말로 며칠전에 토악질을 하며 콕피트를 난장판으로 만들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순신의 분발에 유찬과 진은 마음에 들 었다는 듯 소리쳤다. 《네 녀석이 흘린 피와 땀의 결정체를 보여줘봐라!》 《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거닷!》 《우오오오오!》 철컹 그리고 합체! 순신이 G머신에 탄 이후로 처음으로 성공하는 G쓰리의 합체였다. 또한 김유신을 잃은 유찬과 진에게는 더더욱 의미가 깊은 합체이기도 했다. 그들의 등 뒤로 자폭한 김유신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레이트으으으 쓰리!》 콰쾅 폭발음과 함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G쓰리! 그 모습에 스크린을 지켜보 던 시더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 크으으으! 바로 이거야! 지금까지의 수난과 고통을 이겨내고 처음으로 성 공한 합체 씬! 김유신이 죽은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서 우리를 안타깝게 했던 G쓰리가 바톤을 이어받은 이순신에 의해 다시 모습을 드러 낸 거라고! 몇 번을 봐도 전율이 멈추지 않는 장면이야! " " ……. " 그녀의 곁에 있던 가인은 창백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잠시 시더와 얘기를 나누기 위해 그녀의 골방을 찾은 것이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어째서 저번과 조금도 틀리지 않은 패턴으로 붙잡힐 수 있는 거지? 가인은 시더의 손에 들린 그레이트 카이저의 남은 DVD장수를 확인하며 더욱 어깨를 늘어뜨렸다. 저걸 다 보기 전에는 집에 못 돌아간다고 봐야했다. " 시더, 머신 아더의 수리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 이렇게 은근슬쩍 떠봐도, " 아, 어차피 난 개발 설계 담당이니까. 수리 과정은 수리의 스페셜리스트 들에게 맡기면 되는 거야. " ……하고 넘어가 버리니. 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결국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시더는 그렇게 가인이 낙담한 표정을 짓자, 가늘게 눈을 뜨며 그를 쏘아보았다. " 흐으으음, 그렇게 날 일터로 보내고 싶은 거야? 난 지금 매우 매우 우울 하다고. 흥, 그런 나를 위로해주지는 못할 망정. " " ……아, 으응. 머신 아더를 부순 건 정말 미안. " 가인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녀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쉽게 화를 풀지 않았다. " 으아! 정말 나도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지! 어떻게 머신 아더가 움직이는 순간에 빈혈로 쓰러질 수 있는 거야! 그랬다가 기껏 깨어났더니 머신 아더는 다시 만드는게 나을 정도로 대파되어 있고! 저장된 영상 파일이 남아 있었다지만, 이런 걸로는 절대 납득할 수 없어! 아니, 그 전투 방식부터가 납득 못해! 내가 지휘 계통에 있었더라면 확실한 머신 아더의 낙승이었어! 그런 부전승같은 승리는 인정하지 못한다고! "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는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자신이 만든 기체가 처음으로 움직이는 순간을 놓쳤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그건 그렇고 역시 시더는 자신의 할머니와 인격이 바뀌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과로로 인한 단순한 빈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어째서 기절했던 거야! 어째서 시더 웰리스으으으! " 이제는 스스로 자책까지 하는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한 숨만 내쉬었다. 아아, 이럴 때 노엘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뭐라고 손녀를 달래줬을까? 가인은 며칠 전, 정확히는 대파된 머신 아더를 이끌고 유레카에 귀환했을 때의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유가인, ' 피스메이커의 기술부가 위치한 지하 연구소에 머신 아더를 이송시키며 노엘 은 가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 만나서 반가웠다. ' ' ……예? 반가웠다뇨? ' 노엘은 가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되묻자 악수하려던 손을 대신 바톤 터치 하듯 그의 손에 내리쳤다. ' 한 차례 위기는 넘겼고, 이 뒤는 너희와 시더의 몫이야. 난 오늘 너희가 보여준 모습으로 만족하기로 했어. 역시 미래는 젊은이들의 것이지. ' ' 그게…… 무슨 소리에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재차 되묻는 그에게 노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 둔하기는. 앞으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야. ' ' 예? ' 만날 일이, 없을 거라니? 놀라는 가인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노엘은 난관에 기대 유레카의 인공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서는 처음의 쌀쌀맞던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저 편안한 표정이 그녀의 본래 모습인 것 같았다. ' 오늘을 마지막으로 난 더 이상 시더의 의식 속에서 나오지 않을 거야. 이대로 시더의 자의식과 동화될 셈이지. 솔직히 그동안 자신이 없었거든. 내가 시더 웰리스인 건지 노엘 웰리스인 건지. 지금까지는 무리해서 내 자의식을 분리시켜 두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기로 했어. 이 아이의 몸에 부담을 주기도 싫고, 더 이상 미련도 없으니까. ' ' 그, 그런. 미련이 없다뇨? ' ' 내 지식은 앞으로 이 아이가 살아가는데 여러모로 힘이 될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도 평생 쫓기는 몸으로 살아야 할테고, 그러다 보면 시더에게도 피해가 돌아갈 테지. ' ' 하지만! 그럼 이대로 시더를 안 만나겠다는 거에요? 그걸로 만족하는 거 에요? 그게 정말로 시더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 ' 말했잖아. 내 목표는 시더를,그 아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거라고. 시더에 게는 자신의 연구가 있고, 또 너희들이 있어. ' 그 아이는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었다. ' 그렇기에 결심을 내릴 수 있었던 거야. ' 가인은 그 확고부동한 노엘의 의지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는 서글픈 표 정으로 말을 이었다. ' 선생님이 사라지면……정말로 시더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 절대로 그렇지 않아. 그렇게 할머니를 만나고 싶어했던 아이인데! ' 사라진다니? ' 노엘은 히죽 웃으며 다음과 같이 가인의 말을 받았다. ' 난 그 아이와 하나가 되는 건데. 앞으로도 계속 그 아이의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건데. ' ' 아……. ' 비록, 그 아이는 날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나 역시 그 아이를, 아니 나 자신조차도 인식할 수 없겠지만. ' 난 그걸로 족해. 그걸로 행복하다고. ' ' ……. ' 가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노엘은 붉어진 눈 시울을 감추며 하늘을 올려다본채 말했다. ' 시더가 머신 아더를 만드는 과정을 계속 지켜봐 왔어. 솔직히 감탄했어. 내가 준 소스를 그 정도로 응용해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나로서는 해 낼 수 없는 근사한 응용 과학(applied science)이었어. ' 노엘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미소지었다. ' ……시더에게 말해주겠니? 넌 이미 훌륭한 과학자라고. ' ' 그런 건 직접 자신이 말하라고요. 남에게 떠맡기지말고. ' 가인은 노엘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자신 이 시더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노엘 본인이 해야 할 말이었다. 그녀가 직접, 시더를 만나서, 직접 자신의 입으로 해주지 않으면……. 《타아아아아앗! 백두산 메치기!》 《오오!》 TV에서는 한창 이순신이 G쓰리로 김유신의 필살기인 백두산 메치기를 성공 시키고 있었다. 날카로운 풍속에 휘감겨 하늘로 올라가는 인베이더를 바라보며 유찬과 진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 필살기에서 죽은 자신의 전우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시더는 그 장면에서 언제 떠들었냐는듯 조용히 숨마저 죽이고 TV를 응시하 고 있었다. 《녀석, 정말로 해내다니.》 《이제는 애송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군.》 《그, 그럼!》 놀라는 순신에게 찬과 진은 미소지어보였다. 《앞으로도 내 목숨을 너에게 맡기겠다, 순신.》 《잘 해보자고, G쓰리의 파일럿.》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준 그들의 말에 순신은 뜨거운 감정을 이겨내지 못 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열심히,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열심히!》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가슴이 저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랜마에게 인정받는 과학자가 되고 말겠어! 그녀가 말했던 자신의 목표. 하지만 그녀를 인정해줄 그랜마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시더가 그렇게나 듣고 싶어했던 말을 대신 자신에게 남겨놓은채. 가인은 도저히 그 말을 자신의 입으로 시더에게 전해줄 수 없었다. 아무리 둔하기 짝이 없는 그라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인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시더의 등을 향해 물었다. " 시더……. 할머니, 좋아하지? " 그 말에 시더는 그를 돌아보며 언제나처럼 기운 차게 답했다. " 응! 그랜마는 내 자랑이자 우상이라고! " 듣고 있죠? 노엘 선생님……. <제 18 화 출동, 머신 아더! 完> Ｔo Ｂe Ｃontinued…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249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4-26 :: :: 25408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6 - Ｂy Ｎext Ｎeo =-=-=-=-=-=-=-=-=-=-=-=-=-=-=-=-=-=-=-=-=-=-=-=-=-=-=-=-=-=-=-=-=-=-=-= " 피스메이커의 작전부는 그 자질이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 지구 방위군 소속 하영식 소령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공격적이었다. " 언제나 의문을 표하는 것이지만, 피스메이커는 전술에 관련된 메뉴얼 하나 갖추지 못한 것입니까! 지극히 소모적이며 즉흥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현장 대원들의 판단에 맡긴다니, 이 얼마나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소리입니까! 이번 149번 작전 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 " 현장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저희 피스메이커의 방침일 뿐입니다. PM조약에 의거하여 일절 외부의 간섭이나 항의를 받을 의무가 없습니다. " 피스메이커의 전술 작전과 작전부 제 1과 소속 정진우 대위는 무덤덤하게 답 했다. 그는 생각했다. 어지간히도 피곤한 남자라고. 집요한데다가 다혈질적 이고 게다다 트집잡는 것에 목숨이라도 걸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저런 남자의 밑에서 일하는 부하들은 하루 하루가 죽을 맛일 거다. " 의무? 지금 의무라고 했나! 너희들 피스메이커는 자신들이 세상의 수호자인 양 착각에 빠져 있나본데! 부디 착각하지 말고 똑똑히 들으시지! 너희들이 그렇게 마음껏 몬스터 사냥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우리와 같은 여러 기관들의 협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 하영식 소령의 거침 없는 발언에 진우는 일절 상대해주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을 돌아보았다. " 의장님, 방금 전 하 작전장교님의 발언은 논제에 어긋났다고 생각합니다. 재고를 요청합니다. " " 음. 재고를 받아들이겠소. " 이 회의의 의장을 맡고 있는 노민우 의원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영식은 이를 뿌드득 갈며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진우를 노려보았다. " 좋아! 그렇다면 논제에 부합되는 발언을 해드리지! 바로 너희들이 보유하고 있는 피스 대원들에 대한 사안이다! " 第 19 話 형제(兄弟) " 여기부터는 출입 금지입니다. 다른 길을 사용해주십시오. " " 아, 저…… 그게 지배인 님이 안의 분들에게 커피를……. " " 필요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 " ……예, 예에. " 검은 정장에 선글래스를 쓴 남자들이 호텔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자를 매몰 차게 돌려보냈다. 그 곁을 지나가던 손님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에게 시 선을 보냈지만, 검은 선글래스의 남자들이 하나같이 노려보자 재빨리 자리를 벗어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선글래스의 남자들 중 하나가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 하아. 부대장님.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가 왜 이런 일까지 해 야하는 거에요? " 그 말을 받은 이는 피스메이커 팔라딘 대의 부대장 유한진이었다. " 사령관 님과 피스 대원들이 우리 뒤에 있다. 그 분들을 경호하는 게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는 건가? " "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굳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면서 까지 여기에 와서 회의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죠. 그런 대원의 말에 다른 대원들도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현재 지구 방위군과 피스메이커의 6차 합동 회의를 위해 서울 시 20 구역에 위치한 L호텔에 와 있었다. L호텔은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때 부숴진 스타 사이드 호텔과 더불어 통일 한국 전역에서 무궁화 5개를 보유한 특급 호텔들 중 하나였다. 회의는 현재 이 L호텔의 최고급 VIP 룸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팔라 딘 대는 그런 VIP 룸의 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 괜스레 이런 눈에 띠는 곳에서 회의를 하는 바람에 취재진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잖아요? 더구나 지구 방위군 놈들! 머리 속에 다들 새 대가리라 도 키우고 있는 거야 뭐야? 우리는 어떻게든 경호원 행세라도 하면서 남 들의 이목을 피해보려고 노력하는데 저 자식들은 정말! " 대원들은 창문 밑을 가리키며 분통을 터뜨렸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창 밖에 보이는 호텔 주변에는 지구 방위군으로 보이는 군복을 입은 사단들이 엄중히 호텔을 통제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마치 여기에 중요한 고관들은 다 모여 있습니다 라고 광고라도 하는 것 같다. " 그냥 언더 그라운드로 녀석들의 윗대가리들만 불러서 회의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고. " " 불평은 거기까지 해라. " 한진은 대원들에게 따끔히 일침했지만, 실상 그도 이 상황이 불만인 건 마 찬가지였기에 더 이상 나무랄 수도 없었다. 한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대원들 의 시선에 작게 혀를 찼다. " 언더 그라운드는 피스메이커의 기밀 중의 기밀이다. 그곳에 그들을 들여 보내는 건 고양이를 생선 창고에 들여보내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우리도 좋아서 이곳으로 온 게 아니다. " " 그럼? " " 일종의 텃새인 셈이지.이번 12구역 사건을 빌미로 삼아서 거드름을 피우는 거야. 볼 일이 있으면 너희가 오라는 식의. 어차피 자신들은 아쉬울 게 없으니까. " " 아쉬울 게 없다뇨! 사실 우리가 이런 설명을 그들에게 해줄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기껏 친절을 베풀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거기다 말이 설명회지 이건 순 추궁 뿐이니……. " " 그래. 그래. 네 말이 모두 맞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그렇게 뜻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야. 무엇보다 저 위에서 지시를 내리는 인간들을 상대로는. " " 쳇. 저들 잘난 줄만 알아서는! 현장의 일 같은 건 개미 눈꼽 만큼도 모르는 것들이! " 아까부터 계속 반론을 펴오던 대원 하나가 이를 갈며 씩씩거렸다. 이 신입 대원은 어지간히도 다혈질인 모양이다. 어쨌든 녀석이 납득하자 다른 대원 들도 덩달아 상황을 수응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한진은 한 숨을 돌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팔라딘 대가 아무리 계급이 존재하는 부대라지만 일단 용병 출신인 녀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개개인의 성격이 다들 제멋대로다. 그런 녀석들을 통솔하려면 상관이 배 이상으로 고생하게 되는 것이다. ' 하여간 부대장도 할 게 못되는군. ' 한진은 담배 생각이 간절하여 애꿎은 빈 손만 폈다 쥐었다를 반복했다. 그 때 창 밖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짧은 순간 광원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다. 그 반짝임은 그야말로 한순간이라서 얼핏 햇살로도 착각할 수 있었지만, 한 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귀에 꽂고 있던 무전기로 반대편 건물에 배치한 대원들에게 연락했다. " 아아. 여기는 B1. B4 응답하라. " 《 여기는 B4. 》 " 그쪽 건물에서 카메라로 촬영을 시도하는 겁 없는 쥐새끼가 있는 것 같다. 대략 9층에서 10층 사이인 것 같다. 확인 바란다. " 《 라져. 》 아무래도 호텔로의 침입이 용이하지 못하다고 여긴 취재진이 이번에는 건너 편 건물에서 사진 촬영을 감행하는 모양이었다. 한진은 귀에 꽂은 무전기를 내리며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 아무래도 쉬고 있어서 불만들이 쌓이는 것 같은데, 지금부터 로비에서 최상층까지 올라오며 다시 한번 도청기 탐지를 실시한다. " " 에엑! 그거, 벌써 다섯 번이나 했잖아요, 부대장! " " 도청기 따위는 없다고요! 절대로 없어! " 온갖 불평을 하며 항의하는 대원들. 한진은 그 모습들에 속으로 한탄하면 서도 여전히 직분에 충실했다. " 요즘의 취재진들을 얕봐서는 안된다. 환풍구나 천장, 심지어는……. " " 그 녀석들이 무슨 닌잡니까! " 대원들은 어이가 없어 그가 상관이라는 것도 잊고 버럭 소리질러 버렸다. " 피스 대원, 다른 말로는 오라 능력자라고 하던가? 몬스터에게 맞설 수 있 는 오라인가 뭔가를 사용하는 인간들. " 하영식 소령의 뒤에서 잠자코 있던 라경일 장군이 오라 능력자라는 것에 흥미를 보이며 말을 꺼냈다. 그는 지구 방위군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서 2007 년 한국 통일 때 북한 인민군에서 통합군으로 재편성된 평양 출신의 대장이 었다. 그리고 대부분 TV에서 지구방위군이 성명을 발표할 때 자주 모습을 드러냈기에 꽤 대중의 지지도가 있었다. 군인 출신치고서는 특이하게도 매스컴 타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 소령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 그렇습니다.그들이 저희가 PM조약을 맺게한 가장 큰 이유라고도 할 수 있죠. 이 오라 능력자들을 독점한 피스메이커는 말도 안되는 조약들을 내 걸어 지구방위군의 활동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몬스터의 발견 시,모든 정부 기관은 피스메이커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지지할 것. 군의 개입은 피스 메이커가 물러날 때까지 유보할 것. 도대체가 통일이 되어서 미군이 철수한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이런 횡포에 우리가 휘둘려야만 하는 것입니까? " " PM조약에 대한 불만 사항은 나중에 UN 상임 이사회에 해주시죠. " 진우는 심드렁하게 답하며, 이대로 하 소령을 상대하기보다는 오라 능력자에 관심을 보이는 라경일 장군을 상대하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서 회의를 유리하게 진행시키려면 상대에게 오라 능력자에 관한 사항들을 정확히 인식시키고 피스메이커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강조해야만 했다. 문제는 피스메이커의 기밀 사항에 맞춰, 어떻게 설명의 수위를 낮추느냐 하 는 것인데……. 이에 관련된 문제는 자신의 옆에 있는 여인에게 맡겨두는 편 이 나았다. " 일단 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라도 오라 능력자에 관한 설명이 필요 하겠군요. 설명을 해주시는 것은 저희 피스메이커 측의 사령관 대리 민수정님이 직접 해주시겠습니다. " 지구 방위군들의 시선이 모두 진우가 가리킨 방향의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침묵. 그 어느 누구도 입을 뗄 수 없었다. 진우가 가리킨 곳에는 막 그 들에게 차를 나눠주고 있던 호텔의 여종업원이 있었던 것이다. 영락없이 진우가 피스메이커의 대표인 줄 알았던 그들은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하소령은 자신에게 홍차를 내려다 주는 수정을 가리키며 어이가 없다는 목 소리로 물었다. " 이, 이 여자가 사령관 대리……라고? 어, 어째서 그런 사람이 우리에게 차를 나눠주고 있는 건가? " " 어머, 차가 입맛에 맞지 않으신가요? 오늘 회의를 위해 일부러 직접 따 서 말린 감국(甘菊) 잎으로 국화차를 끓여봤는데. " 수정이 방긋 웃으며 묻자, 하 소령은 자신도 모르게 대꾸했다. " 아, 의외로 봄의 청취가 느껴지는 게 나쁘지는 않았……. " ……이게 아니잖아! 영식은 무의식 중에 수정의 페이스에 말려들 뻔 한 자신을 꾸짖으며 경계의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수정은 회의석에 차를 다 돌리고 나자, 자연스럽게 진우의 옆 자리로 가 앉았다. 진우는 묘한 방법으로 좌중을 휘어잡은 그녀의 모습에 작게 한 숨을 쉬며 물었다. " ……어째 기쁘신 것 같습니다? 사령관 대리? " " 예. 보람찼습니다. " 수정은 방긋 웃으며 그렇게 대꾸했고 진우는 더 이상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수정은 회의석의 모두를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자, 그럼 오라 능력자에 관한 사항을 설명하도록 할까요? 오라란 작게는 최면술부터, 염력, 예언등에 이르기 까지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통 칭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라 능력자란 그 오라를 물리적으로 발현해낼 수 있는 일부의 정신 감응 능력자들만 일컫는 말이죠. " " 정신 감응? 무엇에 반응한다는 건가? " 정 장군이 호기심을 보이자 수정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바로 몬스터들에게, 입니다. 게이트를 넘어오는 몬스터는 분명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정확히는 우리 인류와 분자 구조, 입자 하나 조차 같지 않은 새로운 이성체입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평범한 삼차원의 공격 수단은 통용되지 않습니다. 가까운 예로 5년 전 통일 한국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 냈던 86호 몬스터와 지구 방위군과의 교전을 들 수 있겠죠. 그때 당시 지구방위군은 한국 통합군의 3개 기갑사단을 동원시켰지만 600여 명에 달하 는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해야만 했습니다. " " 크흠! " 하소령은 지구 방위군의 치부가 드러나자 크게 헛기침을 하며 민수정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라 장군은 개의치 않으며 수정의 설명을 종용했다. " 그랬지.그때 자네들의 도움을 받아 전멸당하는 건 간신히 면할 수 있었지. 계속하게. " " 예, 어쨌든 삼차원의 공격이 통용되지 않는 몬스터에게 오라 능력은 유일한 공격수단인 것입니다. 서로의 힘에 반응한다고 해야할까. 이 부분에 대 해서는 저희 쪽에서도 계속 연구를 거듭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저 다른 차원의 힘에는 차원의 힘으로 대항할 수 밖에 없다, 정도일까요. " " 흥! 결국 괴물에는 괴물로서 상대해야 한다는 거잖아! " 하소령은 그녀를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그런 그에게 수정은 입가의 미소를 풀지 않으며 친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그 눈은 은은한 노기를 띄고 있 었다. " 아뇨. 괴물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우리와 같은. " " 하, 포탄이 듣지 않는 상대를 맨몸으로 상대하는 인간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다고 그러는 겁니까! 그들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저능아겠군요. 그들의 도움 없이는 제 밥 숟가락 하나 챙기지 못할테니까. " " ……. " 진우의 표정이 무참하게 굳어졌다. 오라 능력자인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폭 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정은 회의석 밑으로 자신의 손을 가져가 그의 손 을 붙잡았다. 어차피 지구 방위군들은 제대로 된 회의를 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자신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게 이 회의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서도 도발에 말려들 이유는 없었다. 수정은 하 소령을 향해 미소하며 말했다. " 하지만 덕분에 오라 능력자는 현 인류의 천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않을 정 도로 극소수입니다. 능력자가 나타나는 경로도 불분명하며, 그 수도 현재 UN조사에 따르면 11명에서 늘어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 작전장 교님이 상상하시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군요. 어디까지나 오라 능력자들은 인류에게 보호되어야할 존재들입니다. " " 흥. " 하 소령은 혀를 차며 수정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여자였다. 여기서 더 도발을 해봐야 자신들의 이미지만 추락할 뿐이다. 그렇게 그가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라 장군이 말문을 열었다. " 하지만 말이야. 그, 오라 능력자라는 것 말이지. " " 예. " " ……그건 양산할 수 없는 건가? " 순간 수정과 진우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수정이 잡고 있던 진우의 손이 격 정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양산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런 그들의 얼굴에서 분노를 읽은 것일까.라 장군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 을 내저었다. " 허허,아니. 내 말은 그런게 아니라 총이나 탱크처럼 양산해서 만들 순 없을테니 불편하겠다는 소리였어. 병기로서 효율성이 떨어지니 말일세. " "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 수정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한자 한자 힘을 주어 말했다. " 병기처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인류는 새로운 총칼을 가지 게 될 테니까요. " ' 호오. ' 라 장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눈 앞의 수정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꽤 기가 센 아가씨였다. 과연 피스메이커의 사령관 대리로서 이 자리에 참석 하는게 납득이 갈 정도다. 하지만……. ' 아직 어려. ' 이런 계통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너무 순수한 것은 오히려 독이었다. 곧바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유연성이 떨어진다. 가능성이 있는 일들은 모두 고려하 면서 준비하는 것이 처세술의 기본인 것이다. 그녀가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 오라 능력자는 앞서 말했다시피 정신 감응 능력자입니다. 정신력이 강할 수록 그 힘도 강해지죠. 그 예로 강한 능력의 소유자는 어김 없이 비범한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강한 의지에서 그러한 힘이 발휘되는 거 죠. " " 허허, 무슨 열혈 격투기 만화같은 얘기로군. 정신력이 강할수록 강한 힘 을 낸다니. " "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 수정은 다시 미소지으며 라 장군의 말을 받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하 소령 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건 너무 무책임한 소리 아닙니까? 병기는 어디까지나 병기일 뿐, 스스 로 생각하는 군인만큼 위험한 폭탄도 없습니다. 당신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에 지휘 계통도 그렇듯 허술한 거 아니오? " " 앞서 말했다시피 피스메이커의 방침에 관한 지적은 PM조약에 의거하여 받 아들이지 않겠습니다. " 진우는 히죽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고, 그 태도가 하 소령을 다시 분노케 했다. 그는 쌍심지를 돋구며 진우를 노려보다가, 이내 뭔가를 떠올린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후, 그러고 보니 강한 능력자는 어김 없이 비범한 정신 세계를 갖춘다고 했던가? " 수정은 자신이 했던 말을 그가 들먹이자 영문을 몰라 그를 돌아보았다. " 그렇습니다만? " " 하긴 그런 비범한 정신 세계를 갖추고 있기에 그런 인간이 나올 수도 있는 거로군. " " 무슨……. " 진우는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인간은? 하 소령은 그런 그를 힐끔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다는듯 대꾸했다. " 아니. 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몬스터에 가담한 피스 대원이 있다고 해 서 말이지. " " ……! " 수정과 진우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하 소령은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 고 생각했는지 기세좋게 말을 이었다. " 병기가 왜 좋은지 아시오? 방아쇠를 당기는데로 움직여 주기 때문이오. 그 무기 자체는 공평하기 짝이 없지. 하지만 댁들의 오라 능력자는 어떻소? 스스로의 의지로 총구를 겨누는 병기라니.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 지는구만. " " ……. " 여기서 그의 얘기가 나올 줄이야. 수정은 가볍게 한탄했다. 안타깝게도 하소령의 의견을 반박할 말이 없었다. 피스 블랙 한시영. 그는 오라 능력자들이 수면위로 부상하도록 기여한 선구 자적인 존재였지만, 또한 오라 능력자들의 위험을 처음으로 표출한 존재이기 도 했다.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던 것이다. 라 장군은 수정이 나눠 주었던 차를 마시며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 한 번 새기 시작하는 물은 주체없이 불어나는 법이지. 또 다시 배신자가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야. " 그는 찻잔을 내리며 단호한 목소리로 수정에게 말했다. " 현 피스메이커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오라 능력자들의 신상 명세를 우리 쪽에 넘겨주길 바란다. " 창 밖으로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시민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노을 빛에 몸을 물들이며 창가에서 눈을 떼지못 하고 있었다. 노을은 태양광선이 지평선 가까이를 통과하는 동안 파장이 긴 붉은색의 빛만이 공기분자 또는 미립자에 산란되지 않고 관측자가 있는 곳으 로 도달하기에 붉게 보이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시민의 생각은 달랐다. 노을은 하루를 마친 해가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다시 부활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해는 매번 죽음의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밤을 불러낸다. 아마 해는 그 정도로 밤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해는 밤이 떠있는 동안에 죽어있기 때문에 결국 그를 만날 수가 없다. 그런 해를 밤은 자신의 품으로 감싸안으며 자신의 체온으로 그가 부활하기를 기다린다. 해가 부활하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햇빛이 닿으면 그의 몸이 형체도 없이 녹아 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밤의 품안에서 온기를 회복한 해는 다음날 부활하고 어김없이 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해는 또 다시 죽음을 택한다.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끊임 없이 죽음을 바라는 운명이라니.이보 다 더 서글픈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 선생니임-! 시-민 선-생-님-! " " 아, " 시민은 그제야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복도에는 자신의 학생들이 한가득 몰려나와 그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아르센 피아노 학원. 피스 대원으로 활동하지 않을시엔 언제나 그녀는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었다. " 에에에엥! 선생님이 날 무시했어! 대답도 안해줘! 으아아앙! " " 참아, 주인아.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어. " " 그래. 어른 여자의 눈에는 코흘리개 꼬마가 들어오지 않는 법이래. " " 우우우! 누가 코흘리개 꼬마야! " 주인이란 이름의 어린 남학생이 울고 있었고,그 주위로는 또래 친구들이 제 딴에는 위로해준답시고 주인이를 더욱 울리고 있었다.시민은 학원 내에서 가장 자신을 잘 따르던 아이가 울고 있자 당황하며 그를 안아 올렸다. " 주인아, 왜 그래? 왜 우는 거니? 응? " " 흑, 선생님이, 선생님한테 몇번이나 인사했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흑. " 아마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아이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노을에 정신이 팔린 그녀는 아이들이 인사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 했다. 시민은 속으로 그런 자신을 꾸짖었다. 도대체 어디다 정신을 팔고 다니는 건지……. " 미안해. 주인이 인사도 안 받아주고, 선생님이 잘못했어요. " " 흑, 우웅. 아니에요. 선생님은 잘못한 거 없어요. 흑, 앞으로는 내가 더 큰 소리로 인사할 거야……. " 울먹이면서도 용케 의젓하게 말하는 주인이의 모습에 시민은 환하게 웃으며 그 볼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주인이는 언제 울었냐는듯 눈물을 그치며 시뻘겋게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여자애들은 두눈을 가리며 소리질렀다. " 꺅! 난 몰라! 선생님 남자 친구한테 다 일러바쳐야지! " " 남자 친구를 놔두고 다른 남자애와 뽀뽀했어! 이건 바람이야! " "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여자는 바람을 피면 버진(virgin)을 잃어버린대. " " 버진이 뭐야? " " 난 알아. 여자라는 뜻일 걸. " " 에? 그럼 선생님은 여자가 아니라는 소리야? " " 으으응. 그건 아닌데. " " 이상해! 이상해! " 그렇게 자기 맘대로 떠드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 시민은 식은 땀을 흘렸다. 도대체 얘들은 어디서 저런 말들을 배워온 건지……. 그때 레슨 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쌍심지를 돋군 김민경 원장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 이녀석들! 조용히 하지못해! 학원에서는 정숙! 또 정숙이라고 했지! " " 해, 했어요-! " 민경의 엄한 꾸중에 아이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반성했다. 참으로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신속한 처세술이었다. 물론 그런 처세술을 익힌 데에는 이 원장 선생님의 강한 존재감이 무엇보다도 한 몫 하고 있었지만. 민경은 검은 뿔테 안경을 번쩍이며 팔짱을 끼었다. " 자, 자. 얼른 얼른 집에 돌아가렴. 너희들이 집에 늦게 돌아가면 선생님 들도 엄마들한테 혼난단다. 착한 어린이들은 일찍 일찍 집에 가세요. 알 겠습니까? " " 네에에-. " 부지불식 간에 정리되는 상황들. 시민은 엄할 때는 엄하고 풀어줄 때는 확실히 풀어주는 민경의 통솔력에 감탄했다. 역시 이럴 때마다 선생님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통감하게 된다. 시민은 안아 올린 주인이를 내려주며 학원을 나가는 학생들에게 손을 흔들 어주었다. " 선생님, 안녕∼ " " 내일 봐요! " " 응. 내일 보자. 다들 조심해서 가. " 시민은 아이들이 완전히 문을 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조금 기운이 빠져버렸지만, 자신에게 있는 힘껏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자리 잡힌다. 어쩌면 그녀가 여기에 오는 것은 피아노를 가리키기 보다는 저 아이들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일지도. 물론 어느 쪽이 되었든 그녀에게는 보람찬 일이다. 민경은 그렇게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민에게 흐뭇한 시선을 보 내며 물었다. " 그나저나 시민 씨, 무슨 일로 애들이 저렇게 난리법석을 떤 거에요? " " 예? 아,잠시 제가 창밖을 보느라 아이들이 인사하는 걸 못 받아줬거든요.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 " 나, 참. 뭘 그런 거 가지고 사과하고 그래. " 민경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 지 시민이 바라보고 있던 저녁 노을이 한층 더 붉게 빛나고 있었다. " 노을을 보고 있었나 봐요? 그러고 보니 시민 씨는 저녁 노을 보는 게 취미였죠? 매일 이 시간 쯤에 여기서 보고 있던데. " " 아, 아뇨. 취미라뇨……. "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도 민경이 바라보는 노을로 시선을 돌렸다. 민경의 지적에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다. 내가……그렇게 자주 노을을 봤었 던가. 미처 그녀 자신도 깨닫지 못하던 습관이었다. " 노을을 보면……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 시민은 쓸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하지만 노을빛에 그 표정 을 읽지 못한 민경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시민의 옆구리를 찔렀다. " 흐응∼ 그러니까 생각하고 있었던 거구만? 가인 씨를? " " 예? " 그 난데 없는 말에 시민의 얼굴이 노을빛에 지지 않을 정도로 붉어졌다. 어, 어째서 가인 씨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오는 걸까? 그녀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민경을 돌아보았다. " 그런 게 아니에요. 원장 선생님도 참. " " 에이, 너무 그렇게 부정하지 말아요. 자기 애인 생각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 팔불출이라고 흉 안 볼테니 걱정말아요. " " ……. " 그 말에 시민은 입을 다물었다. 애인? 가인 씨가 내…… 애인이라고? 매번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의구심이 들었다. 어째서 자신은 그 말을 부정하 지 않는 걸까, 하고. 사실 가인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 그건 둘째로 치더라 도 그럴 여지 조차 그들의 사이에는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 가능성 조차 없기 때문……인가. ' 이런 몸이 되어버린 자신은 더 이상 남들과 같은 평범한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요리를 하고, 애인을 만들고, 데이트를 하는, 평범한 여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일 들을. 그래서 부정하지 않았던 걸까? 민경은 시민이 대답이 없자 두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 어라? 그럼 다른 사람 생각하고 있었던 거에요? 가인 씨가 아니라? " "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 " 그것봐. 결국 생각한 거 맞으면서∼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아요.연애는 결혼하기 전까진 알콩달콩 행복하게 하는 거야. " 시민은 민경이 결혼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었다. " 그럼 결혼 후에는? " " ……후. 뭐, 누구보다도 강해져야 한다고 할까. 틈만 나면 찾아와서 잔소리하는 시어머니에게도, 술마시고 새벽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남편에게도, 울고 아우성 치는 아이들에게도. 스스로의 몸은 스스로가 지켜야 하 니까. " " ……. " 시민은 그녀의 말에 웃어야 되는 건지 말아야 되는 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민경이 왠지 익숙해졌다는듯 말하면서도 묘한 자포자기식 표정을 짓는지라 극심한 괴리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원장 선생님도 여러모로 힘드시겠구나……. 하지만 시민은 민경의 그런 점마저도 부러웠다. " 어쨌든 오늘 저녁에 약속있다고 했죠? 이제 애들도 대부분 돌려 보냈고 이 다음 파트부터는 저 혼자 가르쳐도 되니까 이만 퇴근하도록 하세요. " " 아, 죄송해요.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 " 그런. 그런. 전혀 신경쓸 거 없다니까. 단 뭔가 보답이라도 하고 싶다면 오늘부터 가인 씨와 좀 더 알콩달콩 연애하세요.그렇게 학원까지 와서 우울한 표정짓지 말고. " " 서, 선생님! " 시민은 못말린다는듯 소리쳤고, 민경은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며 레슨 실로 돌아갔다. 시민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작게 미소하다가 다시 창가로 눈을 돌 렸다. 그 곳에는 방금 전보다 더욱 짙어진 노을 빛이 마치 핏빛처럼 붉게 도 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 마치 그때 보았던 노을 빛과도 흡사하다. -더욱 큰 힘을 가지고 싶지 않아? 잊어버릴 수 없는 그 남자의 환청. 그도 지금 어디에선가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것 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시민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 그래. 그래야지. ' 더욱 분노로 몸을 불태워라, 한시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든 것을 다. 다시 그를 만났을 때, ' 이 불꽃으로 그마저 태워버릴 수 있도록. ' Ｔo Ｂe Ｃontinued…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250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5-04 :: :: 16530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7 - Ｂy Ｎext Ｎeo =-=-=-=-=-=-=-=-=-=-=-=-=-=-=-=-=-=-=-=-=-=-=-=-=-=-=-=-=-=-=-=-=-=-=-= 시민이 아르센 피아노 학원을 나와 바 트레이져에 도착했을 때는 밤 8시가 다 되어서였다. " 시민아! 여기야, 여기! "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민을 바의 안쪽 자리에 앉아있던 유정이 용케도 알아보고 소리쳤다. 하유정, 시민의 고교 동창인 그녀는 현재 S언론사에서 취재 기자를 맡고 있는 케리어 우먼이었다. 그녀는 작년 6월까지 시민과 연락할 방법을 찾지 못 하다가 간신히 동창회 때 재회하여 연락처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이렇듯 틈틈히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던 것이다. " 여기라니까! 어이, 한시민! " 시민은 평소와는 달리 유정이 큰 목소리로 손까지 붕붕 휘두르며 소리치자 당황하며 바를 둘러 보았다. 주위의 시선이 모조리 유정과 자신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시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서둘러 유정 이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 유정아, 왜 그러니? 너무 시끄럽게 굴면 주위에 피해 가잖아? " 하지만 이내 유정의 상태를 파악한 시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유정은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채 이미 얼큰하게 취해있었던 것이다. 테이블 에 굴러다니는 빈 술병들이 그녀의 취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유정은 자신의 앞에 앉는 시민에게 히죽 히죽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 우히히히히! 미안. 미안. 내가 너 오기 전에 이미 한잔 해버렸지 뭐야∼ " " 그렇게 웃지마! 여자애가 웃음이 그게 뭐니? 그리고 왜 벌써부터 마신 거 야? " 시민이 표정을 굳히며 묻자, 유정은 코웃음을 치며 투덜거렸다. " 헹- 그거야 네가 너무 늦게 와서 그런 거잖아? 자고로 이런 미인을 기다리게 만든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흥, 그런 이유로 오늘 술값은 네가 내! " " ……정말. " 애초에 당일 날 막무가내 식으로 약속을 잡은 게 누구였는데. 시민은 그렇게 따지고 싶었으나 지금의 유정에겐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 았기에 그저 순순히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유정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시민에게 난데 없이,'중요한 일이 있으니 오늘밤 만나!' 하고 자기 할 말만 마친채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덕분에 큰일이라도 난 게 아닐까 걱정한 시민은 원장 선생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부랴부랴 조퇴해야만 했다, " 자자, 왔으면 얼렁 얼렁 술 받아야지 뭐하고 있어! " 시민은 유정이 따라주는 술 잔을 받으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웃으며 자신을 보내준 원장 선생님께 사과의 말을 올리며. " 그나저나 정말 섭하다, 한시민∼ " 무슨 일로 부른 거냐고 막 물으려던 찰나, 유정의 한탄 소리가 먼저 시민의 입을 다물게 했다. 유정은 테이블에 엎드리며 서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넌 핸드폰도 가진 애가 어째 전화 한 번을 안 하냐. 내가 연락하지 않으 면 통 연락이 없으니……. 아무리 이번 달 들어 몬스터 습격이다, 유가족 대책위원회다 뭐니 시끄러웠지만 직접 현장에 취재하러 다닌 나도 이렇 게 전화하는데. " " 아, 미안. " 시민은 설마 유정이 그런 일로 서운해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하며 사과했다. 솔직히 그녀도 요 한달 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피아노 학원을 마치면, 곧바로 유레카에서 대파된 머신 아더의 기능 테스트에 임해야만 했던 것이다. 저번 쿠사나기와의 싸움에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술부가 행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의 폭이 상당히 넓어졌기에, 피스메이커는 이것 저것 해볼 수 있는 실험은 다 피스 대원들에게 시키고 있었다. 그런 실험의 나날에서 풀려난 것도 요 며칠 전의 일. 시민으로서는 도저히 시간을 낼래야 낼 수가 없었다. " 그동안 신경쓰지 못해서 미안해. 이런 저런 일들에 정신이 없다보니……. " 유정은 시민의 몇 안되는 소중한 친구였다. 아무리 사정이 힘들었다고는 하나,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은 엄연히 자신의 잘못이다. 시민은 어떻게든 침울 해진 유정을 달래주고 싶었다. " 유정아, 저기……. " " 흥! 그래, 정신이 없었겠지! 없을 수 밖에! " 그때 엎드려 있던 유정이 번쩍 몸을 일으키며 시민을 쏘아보았다. 그 바람 에 유정의 어깨를 짚어주려던 시민의 손이 어색하게 허공을 더듬었다. 시민은 손을 거둘 생각도 하지 못하며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 어, 없을 수 밖에 없다니? " " 역시 시민이 너도 날 무시한다 이거야! 흥! 흥!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봐! 내 이런 기분을 네가 알 리가 없지! 암! 알리가 없어! " 무, 무시한다니∼ 시민은 도저히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되물었다. " 알리가 없다니? 내가 왜 모른다는 거야? " " 왜냐하면! 넌! 커플 부대니까! " 쿵 그 말에 시민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잠시간의 정적 후, 시민은 여전히 자신을 뚱하게 쳐다보는 유정의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 커플 부대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니? " " 후,그래. 너희 커플 부대의 당사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 는 줄은 모르지! 그것은 나같은 솔로들의 눈에만 보이는 세상의 경계선이 니까! 너희들은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언제나 우리들의 가슴에 염장질을 하고 있어! " " ……연장질? " " 염장질! " 버럭 외치는 유정의 말에 시민도 간신히 커플 부대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그러니까 지금 유정이는, 커플인 나는 솔로인 자신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 유정아, 누가 커플이라는 거야. 그건 나도 마찬……. " " 아아아! 이 세상은 삐뚤어져 있어! 이런 미인에게 배짱 좋게 프로포즈해 줄 남자는 없는 거냐! 물론 프로포즈 한다고 다 받아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선택의 기회는 줘야 할 거 아냐! 형평성에 맞게 남들 다 하는 연애, 나도 한 번 해보자고! " " ……. " 이미 내 말은 듣고 있지도 않군. 시민은 움켜쥔 주먹을 떨며 최대한 자신을 자제하려 애썼다. 그리고 인내심 좋게도 다시 한번 유정을 달래기 위해 말했다. " 민성이하고 잘 되어가고 있었잖아? 저번에 몇 번 데이트 하는 것 같더니. " 주민성. 유정이와 마찬가지로 시민의 동창생 중 한명이었다. 그와도 저번 동창회 때 재회할 수 있었다.유정은 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우울한 표정으로 투 덜거렸다. " 하아, 그것도 걔가 한국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지. 미국으로 넘어가고부터는 연락 한번 없는 거 있지? 결국 나 혼자 헛물 켰던 거야. 흥. 뭔가 잘 되어가나 싶더니, 역시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 " 그런, " 시민은 뭐라고 말해줘야할지 몰라 말꼬리를 흐렸다. 결국 유정의 기분이 저 기압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같은 친구들끼리 잘 되어가는 모습에 나름대로 응원하고 있었는데. 유정은 테이블에 엎드리며 중얼거렸다. " 아아, 역시 장거리 연애는 가망이 없어. 나도 멀리서 찾지 말고 주위에서 찾아볼까나. 의외로 멋진 남자들이 있을 지도 모르고. " " 주위에? 마음에 둔 남자라도 있었던 거야? " 시민은 깜짝 놀라 물었다. 언제나 자신의 이상형은 모나코 왕자님이라는 식으로 현실성 없는 농담만 하던 유정이 처음으로 진지한 발언을 한 것이다. 그렇군! 사실 이렇게 축 쳐져 있던 것은 민성이 때문이 아니라 다른 남자때문이었던 거야! 그렇게 기대 반 의문 반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민에게 유정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 그래. 예를 들자면 가까이에 있는 가인 씨라던가. " 퍽 시민은 볼 것도 없이 유정의 머리를 손으로 눌러 테이블에 처박았다. 그 바람에 이마가 빨갛게 부은 유정이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 아, 진짜! 농담이었어! 농담! 되게 민감하게 반응하네! " " ……농담도 할 농담이 있고 안 할 농담이 있단다, 유정아. " " 하- 그래. 결국 자기 남자친구에게 눈독 들이지 말라, 이거지? 어휴. 잘 나셨어∼ 솔로인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어차피 여자들 우정이란게 다 그렇지. 남자 하나 굴러들어오면 풍지박산 나는 건 시간 문제란 말이야. " " ……. " 시민은 또다시 유정이가 빈정 모드로 돌아가자 작게 한탄했다. 아무래도 이 이상 투정을 받아주는 건 그녀로서도 무리일 듯 싶었다. 이건 뭐, 얘기가 들 어 먹혀야 달래주든 위로해주든 보람이 생기지. 이대로는 밑도 끝도 없이 자신만 들볶일 게 뻔하다. 그렇게 시민의 표정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하자 유정은 한 풀 꺾인 목소리로 사과했다. " 아, 미안. 술주정은 여기까지만 할게. 사실 오늘 12구역 구조 현장에 취 재하러 갔다왔거든. 그 뒤부터 영 기분이 우울해져서 그러는 거니까 좀 이 해해줘……. " " 아, " 시민은 입을 다물었다. 유정의 모습에서 지금까지의 장난기 어린 모습을 찾 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유정은 침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사고로부터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가. 그런데 그 동안 구조된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거야. 사망자 수만 늘어날 뿐,거기다 발견되는 시체들도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엉망이고. 덕분에 현장에 진을 치고 있는 유가족들은 하루 하루가 초상집 분위기야. 통곡 소리와 비명 소리가 끊이지를 않아. 죽은 가족들과 연인들,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대성통곡을 해. 그걸,뭐 라고 해야 할까……. 마치 전쟁터 한 가운데에 떨어진 기분이랄까. " 시민은 유정의 말에 동의했다. 그 참상은 전쟁터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인류는 몬스터와의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언제 그런 광경을 보게 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미 다른 여러 나라 들도 몬스터의 피해로 신음하고 있다. 통일 한국과 같은 경우는 피스메이커가 의도적으로 몬스터에 대한 뉴스를 제한시키고 있었지만, 그것도 쿠사나기 의 사건 이후부터 더 이상의 은폐는 무리였다. " 두려워서, 어떻게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어. 아니, 도대체 그렇게 울부짖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인터뷰를 하란 말이야? 무슨 말을 해서? 무슨 얼굴을 하고? 오늘만큼 내가 기자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어.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 아파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들쑤셨던일 뿐이야. 피해자들을 두번 죽이는 행위였어. " " 사고 현황을 시민들에게 보도하는 건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유정이 네가 그렇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이유도 없어. 오히려 그런 소식을 접함으로서 사람들은 다음 사고를 대비할 수 있게 되니까. " 시민은 울먹이는 유정이를 달래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자신도 지금껏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통제를 막아온 피스메이커의 일원이 었다. 소식을 접함으로서 다음 사고를 대비할 수 있다니. 그런 얘기를 자신이 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리가 없는 유정은 시민의 말에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 ……땡큐. 그렇게라도 말해주니 힘이 난다. 역시 시민이, 네 위로는 옛날 부터 효과가 좋아. 뭐랄까, 마음이 놓인달까. 기대고 싶어진달까. " 시민은 아무 말도 없이 미소만 지었다. 사실, 그녀는 유정을 위로할 때 자신의 목소리에 포르만트를 실어 보냈다. 음정의 주파수 세기의 분포를 조정하여 유정의 마음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민간인에게 오라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피스메이커의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시민은 자신을 감시하는 팔라딘 대원이 부디 이 일을 눈 감아주길 바랬다. 유정은 언제 침울했냐는듯 장난기 서린 표정으로 말했다. " 하아. 이래서야 어쩔 수가 없네. 매번 이렇게 저기압일 때마다 네 신세를 지게 되니……. 미안해서라도 빨리 내 짝을 찾아봐야겠다. 너도 허구헌날 내 주정 받아주느니, 조금이라도 더 가인 씨하고 있고 싶을 거 아냐? " " 아니, 그건……. " 시민이 부정하려고 하자 유정은 코웃음을 치며 잽싸게 말을 이었다. " 흥, 너희들을 볼 때마다 솔직히 부럽기는 해. 아니,힘들 때 옆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 그래서 시민이,네가 가인 씨와 잘 해나가는 걸 보면 괜시리 샘이나. 뭐랄까. 나보다 먼저 골인해버렸다는 기분일까. 하하, 우습지? 친구의 행복을 질투하기나 하다니. 나도 아직 멀었구나. 역시 인간이 덜 됐어. " 유정은 자신의 속내를 보인 것이 부끄러웠는지 콧등을 긁적이며 머쓱해 했 다. 아무래도 이런 저런 이유를 다 떠나서 결국 그녀는 시민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성별이 변한 상태에서도 여자의 입장에 적응해, 자신보다 더 여성스 럽게 사는 그녀가. 하지만 그런 부러움을 받아도 시민으로서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 마찬가지야. " 시민의 대꾸에 유정은 웃음을 멈췄다. 그녀는 갑자기 변한 시민의 분위기에 얼떨떨해져 물었다. " 마찬가지라니, 뭐가? " " ……너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소리야. " 시민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그 고개는 점점 테이블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에서 알수 없는 불안함을 느낀 유정은 재촉하듯 시민에게 물었다. " 뭐가 다를게 없다는 거야? 뭐가? " " 가인 씨는 내 과거를 몰라. " 시민은 자신이 매번 말하기 주저했던 말을 결국에는 털어놓고 말았다. 그리고 그 파장은 실로 컸다. 유정은 취했던 술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 어? 시민아, 너…… 그게, 무슨. 그러니까……. 아직, 가인 씨에게? " 유정은 고개를 숙인 시민을 멍하니 바라보며 더듬 더듬 말을 이었다. 시민은 그런 친구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다가 결국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 어 쉬지 않고 잔을 비워냈다. 유정은 그런 시민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몸을 수그렸다. " 그래……. 그랬구나. " 그리고 씁쓸하게 그 말만을 중얼거렸다. " ……그랬구나. " 부모님은 우리를 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아이들을 이런 동양의 외딴 보육원에 맡겨놓고서 3년 씩이나 소식을 끊을리가 없다. 나, 한시민이 여덟살이 된 2014년의 봄. 우리는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시민아, 다시 한 번만 불러줘. ' ' 또? ' 형은 내가 부르는 노래를 좋아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노래야 어렸을적 잠 결에 엄마가 들려줬던 너서리 라임(nursery rhyme)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도 충분했다. 이렇게 보육원 뒤편의 언덕에 누워 그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 그 당시의 내 하루 일과였다. 그렇다고 특별히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거나 즐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노래를 부르면 형이 좋아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동요 부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 네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 나와 한몸에서 태어난, 세상에서 유일한 나의 혈육. 나보다 먼저 엄마의 뱃 속을 나온 나의 쌍둥이 형. 한시영은 부모님이 없는 당시, 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나는 그가 있었기 에 여느 아이들처럼 아빠 엄마를 찾지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난 어쩌면 형이야말로 내 인생의 반려 자가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었다. ' ……형, 이 노래, 좋아해? ' 노래를 마친 뒤, 나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엄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너서리 라임 따위, 부르는 것도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형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부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 속내를 눈치 챈 것일까. 형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아니. 그 노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 ' 그럼 왜? 좋아하지도 않는 노래를 왜 매번 불러달라는 거야? ' 바람이 불어와 그의 검은 머리카락들이 물결치듯 휘날렸다. 하지만 그 밑으 로 보이는 감홍빛 눈동자는 나에게서 줄곧 떠나지 않고 있었다. ' 좋아하지는 않지만……, 네가 불러주는 라임은 좋아하니까. ' ' 어, ' 그 말에 난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할 말을 잊다가 이내 미소지었다. 역시 형한테는 당해낼 수 없었다. 저런 식으로 웃으면서 말해버리면 불평을 할래야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나는 언덕에 누워 바람을 쐬는 형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많은 노래들을 배우겠노라고. 형에게 너서리 라임 외에도 다른 좋은 노래들을 들려주겠노라고. 그리고 그렇게 내가 여러 노래들을 알게 될 때가 오면, ' 지금보다 좀 더…… 노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그런 막연한 기대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나의 이 노래는. 그때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이렇듯 노래하는 것은 결국, ' 여전히 그에게서,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내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 시민아, 한시민! " 유정은 테이블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는 시민의 어깨를 흔들다가 이내 포기해버렸다. 어휴, 이 바보. 그렇게 대책없이 마셔대더니. ' 역시…… 편한 기분은 아니었겠지. ' 마냥 웃고만 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기에, 행복하게 잘 살고 있 는 줄로 알았건만. ' 그럴리가 없잖아. 그렇게 쉽게, 그렇게 평탄한 삶이 아니야. ' 남자에서 여자로 변한 아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하나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 남들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못할 고민들과 싸워왔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헤어져서 재회하기 전까지, 그녀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까? 그 이후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어휴,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 유정은 괜시리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시민의 마음을 헤집은 자신을 꾸짖었다. 고민을 들어주려고 온 아이한테, 되려 고민을 떠넘기기나 하다니. " 아! 그러고 보니 정작 얘기해줘야할 게……. " 술주정을 하느라 그만 깜빡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정은 핸드백에서 꺼낸 청첩장을 들어 보이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질려도 단 단히 질려 버리고 말았다. 유정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시민을 바라보다가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지금 시각은 밤 11시. 아직 그가 자고 있을 시간은 아닐 것이다. 띠리리리 신호음이 울려퍼진다. 그리고 잠시 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가인 씨? 아, 저 기억하죠? 시민이 친구 하유정이에요. " Ｔo Ｂe Ｃontinued…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251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5-12 :: :: 32120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8 - Ｂy Ｎext Ｎeo =-=-=-=-=-=-=-=-=-=-=-=-=-=-=-=-=-=-=-=-=-=-=-=-=-=-=-=-=-=-=-=-=-=-=-= 보육원 생활은 어린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특히 이런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차별 대우는 우리를 더더욱 불편 하게 만들었다. 바코드가 새겨진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우리들. 보호자가 없는 고아, 기아(棄兒), 미아(迷兒)들을 수용하는 시설에 버젓이 부모가 있는 우리들이 들어간 것부터가 이런 상황을 야기한 것이었다.바코드 가 새겨진 고아들의 눈에 우리들이 좋게 보일리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고아들이 직접 숙식을 해결하는 단체 환경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원장 의 눈을 피해 일부러 밥을 안주는 것부터 시작해서,어떤 때는 잠자리마저 빼 앗겨 한밤 중에 밖으로 쫓겨나야만 했다.만약 나 혼자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했다면 도저히 이 보육원 생활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 어이, 쌍둥이들. 또 이런 구석자리에서 밥 먹고 있는 거냐? 음침하게시리. ' 보육원에서도 힘의 논리는 적용된다. 아마 인간이란 동물은 나이가 많든 적 든 이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특히 이런 보호자가 없는 시설 속 에서는 그 논리가 더욱 노골적이고 단순하게 적용된다. 밥을 먹는 우리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이 힘의 논리에 가장 적합한 조건 을 갖춘 열 일곱 살짜리 고아 소년이었다. 그는 보육원의 아이들 중에서 가 장 나이가 많았으며 또한 가장 난폭했다. 우리는 수시로 그의 심심풀이 대상 이 되어야만 했다. ' 하하, 그래도 오늘은 다행이지 않겠어? ' 형은 그의 접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대꾸했다. 난 그런 형의 뒤에 숨어 몸을 떨었다. 언제나 이런 구도였다. 그 당시의 나는 계속되는 보육원 생활에 외부인과의 접촉을 두려워 했고, 그 때문에 형이 나를 대신하여 모두 를 상대하곤 했다. 어린 내가 비정상적으로 형에게 기댔던 데에는 이런 이유 도 있었다. ' 다행이라니……뭐가? ' ' 오늘 밥에는 바퀴벌레도 유리조각도 없잖아? 덕분에 배는 채울 수 있었는 걸. 음침한 우리들은 비열한 누구누구 씨 덕분에 제대로 된 식사도 할 수 없는 지라 이렇게 제대로 먹을 기회가 흔치 않다고. '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하는 형의 모습에 녀석은 할 말을 잊었 다.그러다 곧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해졌는데, 아무래도 형이 말한 비열한 누 구 누구 씨가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형은 내 조마조마한 바램을 무시하며 한차례 더 녀석에게 빈정거렸다. ' 좀 비켜주지 않겠어? 모처럼의 식사라고 했잖아. 눈 앞에서 그렇게 얼쩡 거리고 있으면 먹던 밥도 도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겠다. ' ' 이 새끼가! ' 녀석은 당장에 형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나는 그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르 고 안절부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은 차 갑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몇몇은 웃으면서 즐기고 있었다. 나는 울상이 되어 형을 바라보았다. '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거야? 앙! ' 쿵 ' 부모가 있는 것들은 그렇게 잘난 모양이지? 곧 죽어도 주둥아리만 살아있 어가지고! ' 쿵 ' 어디 더 떠들어봐! 더 받아쳐 보라고! 왜 그래? 맞으니까 정신이 번쩍 드 냐! ' 녀석은 손속을 두지 않고 형을 두들겨 팼다.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 는 형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하지만 그런 소년의 폭행을 말 리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녀석을 더 부추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알고 있었다.이것이 형이 그들에게서 나를 지키는 방 식이라는 것을. 소년의 주의를 모두 자신에게 끌어들여 날 폭행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이다. 형은 결국 내 몫까지 저들에게 맞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겁에 질려 형의 몫을 덜어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비겁한 녀석 이다. ' 퉤! 맞으면 찍소리도 못할 게 매번 깝쭉대고 지랄이야! 에이, 씨! ' 녀석은 형을 눕힌 것에 만족하지 못했는지,쓰러진 형을 수차례나 걷어 차고 도 씩씩 거렸다. 아마도 형이 자신을 도발한 것 치고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 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형의 목적은 그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 뿐이었다. 반항해봐야 폭행만 길어질 뿐, 일만 복잡해질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눈 가림도 오늘까지가 한계였다. 녀석도 그런 형의 방식에 이 상함을 느꼈는지 겁에 질려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나는 바보같 이 어깨를 떨었다. ' 야, 저 새끼 잡아봐. 오늘은 동생까지 한번 족쳐보자. 이제 이 자식은 재 미가 없어. ' 녀석의 부름에 옆에 앉아 있던 고아 두명이 내 양팔을 붙잡았다. 나는 다가 오는 소년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앞으로 다가올 폭행이 무섭기 짝이 없었 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이 편해졌다. 매번 날 대신해서 상처투성이가 되 는 형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형 혼자 다치게 놔두지 않겠어. 유치하지만 내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아, 안돼. 그만둬……. ' 쓰러진 형이 나에게 접근하는 소년의 발목을 움켜잡으며 꿈틀거렸다. 그렇 게 형이 반응을 보이자 녀석은 기다렸다는듯이 형의 머리를 발로 질끈질끈 밟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 주제에 동생이 당하는 건 싫단 말이야? 그럼 진작에 숙이고 들어왔어야지! 어때? 이제 좀 후회가 되냐? 멋 모르고 까분게 후회가 돼? ' ' 으, 아……. ' 형은 만신창이가 되어 신음했다.나는 그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녀석을 노려 보았다. 나쁜 새끼! 죽일 놈! 아마 그렇게 진심으로 누군가를 미워해 본 것 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그런 내 시선에 소년은 내 뺨을 후려갈기며 소 리쳤다. ' 꼽냐? 어딜 노려보고 지랄이야! 형이나 동생이나 건방지기 짝이 없어! 이 걸 어떻게 요리해줘야 버르장머리가 고쳐지려나. ' 그러다 녀석은 곧 무언가 재밌는 것을 생각해낸듯 히죽 히죽 웃으며 날 무 릎 꿇게 만들고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바지 자크를 내렸다. 그 행동 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숨을 삼켰다. 주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고아들 도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들을 터뜨렸다. ' 잘 받아마셔! 한 방울이라도 흘렸다간 오늘 네 형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 려 버릴테니까! ' 녀석은 내 입에 소변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나는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내 손발을 잡은 아이들의 억척스러움을 이길 수 없었다.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 물이 앞을 가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보육원의 선생님들이 원망스러웠다. 우리가 괴롭힘 당하는 것을 방치하는 보육원 아이 들이 원망스러웠다.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 다. ' 입 벌리지 못해! ' 난 쓰러진 형을 바라보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입을 벌렸다. 내 앞에 서 날 내려다보며 새디스틱한 웃음을 흘리는 녀석이 죽기 보다도 더 싫었지 만 녀석의 말을 듣지않다가 형이 험한 꼴을 당하는 게 더 싫었다.난 이 상황 이 지금껏 형에게만 모든 것을 맡겨온 내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벌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층 마음이 편해졌다. ' 그만둬……. 그만둬……. ' 아이들의 아우성 소리에서도 쓰러진 형의 중얼거림만은 똑똑히 들려왔다.그 서글픈 울림에 나는 마음 속으로 형에게 말했다. 괜찮아, 형.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날 지켜 주지 않아도 돼. 제발 그대로 있어줘. 일어나지마. ' 그만둬……. ' 상황이 끝나면 형과 함께 다시 뒷동산으로 올라갈 것이다.그리고 형이 좋아 하는 노래를 불러줘야겠다. 그 노래를 들은 형은 언제나처럼 웃어줄 것이다. 그 미소를 보기만 한다면 이 악몽같은 일들도 잊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 그만둬어어엇! ' 그때 형의 처절한 고함 소리가 내 감았던 두눈을 일깨웠다. 그리고 보인 것 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검은 물체에 온 몸이 죄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림자엿다. 녀석의 그림자가 마치 거대한 구렁이처럼 녀석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에 파묻힌 녀석은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며 두 눈이 금새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붉어지고 있었다. 몸을 조이는 무서운 힘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편에서는 피투성이가 된 형이 몸을 일으 키며 짙은 감(紺)빛의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강렬해지는 만 큼 녀석의 몸을 죄는 그림자의 세기도 한층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림자를 움직인 것은 바로 형이었던 것이다. ' ……형? ' 간신히 입을 열고 형을 불렀다. 내 부름에 그제서야 형은 정신이 돌아온 듯 깜짝 놀라며 날 돌아보았다. 형의 눈동자가 감빛에서 예의 감홍빛으로 돌아 오자 녀석을 묶고 있던 그림자도 다시 지면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림자에 서 풀린 녀석의 몸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사람의 몸 을 꽈배기처럼 비틀었다가 풀면 저런 모습이 될까.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그 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다가 그대로 앞으로 거꾸러졌다. ' 으, 으아아아! ' ' 괴물이다! 괴물! ' 그렇게 녀석이 쓰러지자 식당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도망쳐나갔 다. 나는 그 소란 중에서도 멍하니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닫지 못하며 쓰러진 소년과 나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감홍빛 눈동자가 점점 긴장의 빛을 띄더니 이내 공포로 물들어가기 시 작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런 형을 끌어안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반강제로 보육원을 떠나게 되었다. 보육원의 원장은 양육비도 들어오지 않고, 부모님이 찾으러 오지도 않는 우 리가 내내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그는 말썽을 일으킨 우리를 마치 사전에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듯, 곧바로 한 남자의 양자로 보내버렸다. 부모의 동의도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었지만 원장 선생이 말하길,우리 의 부모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한다.이미 2년째 밀 린 양육비와 계약 파기를 고려하면 우리를 소년원에 보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국적은 현재 영국으로 되어있고, 만약 보호시설로 보내지더라도 한국에서는 머무를 수 없다. 결국, 처리하기가 곤란해졌다는 얘기다. 원장의 눈에는 우리가 눈엣가시처 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우리를 맡겠다고 자진해서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거기다 그는 우리의 밀린 양육비까지 모두 지불했으며, 또한 생부모 에게서 연락이 오는 즉시 우리를 보내주겠다고 했다.원장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친절해 보이는 양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 와아. ' 처음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짤막한 감탄을 터뜨려야만 했다.우리가 3 년 동안 머물렀던 보육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깨끗한 호화주 택이었다. 그 넓이에 순수히 감탄하고 있을 때, 남자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 오늘부터 너희가 살 집이다. 앞으로는 우리 세 명이서 살아가야 하니까 서 로 잘 해보자구나. ' ' ……세 명이라고요? ' 그때 남자의 말을 듣고 있던 형이 딱딱한 목소리로 그렇게 되물었다.형의 얼 굴에서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형은 남자를 따라 오는 내내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그저 형이 낯선 사람을 경계하나 보다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남자는 형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형의 머리 를 쓰다듬어 주었다. ' 그래. 세 명이다. 넌 똑똑해 보이니까 아마도 금새 익숙해질 거야. ' 그 말에 형의 표정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집에 오게 되 었다는 기쁨에 그런 형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우리들을 바 라보며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집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보육원 시절과는 달리 먹거 나 입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학교 또한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보육원의 자 체 교육과는 달리 학교에서의 수업은 나름대로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물론 나 야 낯가림이 심했기에 형의 곁에서 붙어다니는게 고작이었지만, 형은 적극적 으로 반 친구들을 대했고 아이들도 그런 형을 잘 따르게 되었다. 그때서야 안 사실이지만 형은 사람을 사귀는데 있어서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 다. 형이 미소를 지으면 아이들도 미소를 지었고, 형이 말을 걸면 모두가 기 뻐했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형은 사교적이었다. 호의적인 사람들에게서 한없이 호의를 이끌어내고,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에 게서는 한없이 증오를 이끌어낸다. 아마도 그것이 형의 사교 방식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그것 나 름대로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소리 니까. 그렇게 형이 아이들을 사귀는 낙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나는 노래를 배우는 낙으로 학교를 다녔다. 음악 시간에 노래를 부른 것이 발단이 되어 운 좋게도 합창단의 눈에 띈 나는 여러 노래들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그렇게 무언가에 빠져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내 머리는 노래 부르는 일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하루 하루가 꿈결처럼 흘러갔다. 지루 하다고만 생각했던 일상이 이렇게나 재미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노래 를 부른다는 것이 이렇게나 보람찬 일일 줄이야! 내 삶은 그 어느때보다도 충실해졌고,나는 더 이상 형의 뒤에서 숨어있지 않 게 되었다. 내 스스로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고, 스스로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 력했다. 형에게 기대기만 하던 수동적인 삶이 능동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그런 나를 형은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칭찬해주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을 것을. 자신의 삶에 눈을 돌리느라 형에게 무관심해 진 나를 그는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얼마나 서운해 하고 있었을까. 매일마다 자신에게 불러주기로 했던 노래를 내가 다른 이들에게 불러주는 것 을 어떤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는 이기적이었다. 보육원 시절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기적이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형과 얘기했더라면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형이 그 어느때보다도 외로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어느때보다 날 필요로 하고있었다는 것을. 나는 내 생활에 바빠, 그동안 의지하고, 기대고, 매달려왔던 형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형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 ……어. ' 한밤 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디선가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화 장실에서 누군가가 샤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잠이 덜깬 눈으로 일어나 화장 실로 걸어갔다. 이 시간에 누굴까? 형인걸까? ' 형? 뭐하고 있어? ' 내가 화장실 문을 두들기며 묻자, 샤워기 소리가 멈췄다.그리고 잠시 후 형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미안. 내가 깨웠버렸네. 잠깐 날이 더워서 샤워하는 것 뿐이야. 신경 쓰지마. ' 날이 덥다니? 겨울이 다가오느라 아침 저녁 날씨가 얼마나 쌀쌀한데. 나는 조금 이상함을 느꼈지만, 잠이 덜깬 머리로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때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형의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눈 치챌 수도 있었을텐데. 어쨌든 그런 형의 기행은 며칠 후에도 계속되었다. ' 형, 그거 무슨 상처야? ' 합창부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형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형의 목 언저리에는 긁힌듯한 붉은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내 물음에 형은 목 언저리를 감추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모기한테 물렸어. 목 언저리가 가려워서 긁다보니 그만. ' ' 아, 시민이 왔구나. ' 그때 2층 방쪽에서 양아버지가 내려와 날 반겨주었다. 아직 퇴근 시간 까지 두시간이나 남았을텐데. 그가 일찍 귀가한 것에 내가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 자, 형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했다. '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나셨데. 그래서 세명이서 외식이나 할까하고 네가 오 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 ' 그래. 오랜만에 나가서 먹어볼까? 시민이가 좋아하는 불고기 먹으러. ' 날 안아주며 다정하게 말하는 양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 형에 게 미소지었다. 그런 나에게 형은 마주 미소해 주었고, 내 의문은 부지불식 간에 사라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눈 앞의 상황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부족할 게 없는 양아버지와의 생활과 즐거운 학교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생활이 부숴지지 않기를 바랬다. 이대로 안정된 생활이 지속되기 를 바랬다. 부모님께 버림받고 멸시 받으며 살아가던 보육원의 시절로 돌아 가고 싶지 않았다. 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안식인가. 싸구려 안식에 눈이 멀어 진정으로 소중 한 것을 멀리하게 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결국 이 위화감에 가득 찬 줄다리기는 오래갈 수 없었다. 어느날 밤, 차가 운 진실과 함께 위기는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 ' 잠들어 있던 내 몸을 누군가가 누르고 있었다.깜짝 놀란 내가 눈을 뜨니 양 아버지의 얼굴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한번도 본적이 없 던 낯선 표정과 낯선 눈빛이었다. 어둠 속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에 나는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 무,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 그 질문에 돌아온 것은 거칠게 뜯겨져나가는 내 잠옷 소리였다. 나는 비명 을 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신음을 흘리며 쓰러 져 있었다. 형이었다. 형은 아버지에게 구타라도 당했는지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 로 부어있었다. ' 왜 이러는 거에요! 그만해요, 제발! '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치며 저항했다. 뭔가가 잘못된게 분명하다. 언제나 부 드럽고 자상하던 양아버지가 이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말도 안되는 악 몽 임이 분명하다. 깨어나자. 깨어나자! 나는 눈 앞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며 부정했다.하지만 아버지의 따귀에 정 신이 번쩍 들었다. 얻어맞은 뺨이 시뻘겋게 부어오르고 코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나왔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엄연한 현실, 그동안 내가 줄곧 외면해왔 던 진실인 것이다. ' 가만히 있지못해! 팔려왔으면 순순히 말을 들을 것이지, 어디서 반항하는 거야! ' 팔려와? ' 네 녀석들을 내가 뭣 때문에 비싼 돈 주고 데려왔을 것 같냐! 너희들은 원장 선생에게 팔려온 거야! 네 형은 다 알고 있던 것 같더니만 넌 하나 도 몰랐나 보지? ' 형이 알고 있었다고? 내가 놀란 눈으로 형을 돌아보자, 양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 저 녀석, 너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며 그동안 내 상대를 혼자서 다 해왔 었지. 비싼 값어치를 하는 녀석이었어! 너는 네 형이 당하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지금껏 혼자 편하게 지내온 거야. ' ' 혀, 형! ' 내 외침에 형은 힘없이 고개를 들어 벽에 기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 로 흐느끼며 남자에게 말했다. ' 약속……했잖아. 시민이는, 건드리지 않기로……. ' ' 원래 자식들은 공평하게 사랑받아야 하는 거란다. 너 혼자 편애받아서야 이 녀석이 서운해하지 않겠니. 솔직히 너보다는 네 동생이 더 내 취향이 었거든. ' ' 죽여, 버릴 거야. 내 동생, 건드리면……죽여 버린다. ' ' 거기서 그렇게 이갈면서 지켜보고 있어라.구경꾼을 앞에 두고 하는 건 이 번이 처음이라서 흥분되는군. 동생과 멋진 장면을 보여줄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 그는 악귀같은 얼굴로 웃으며 나를 엎어뜨렸다. 내 반항은 무의미한 것이었 다. 너무나 무력하게, 나는 그의 손아귀에 유린당해야 했다.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형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모습에 감당 못할 죄책감을 느 꼈다. 이것은 벌이었다. 이번에도 형에게만 모든 것을 떠맡긴 죄의 대가였다.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형이 나를 위해 얼마나 희생해왔는지,나를 지켜주기 위해 얼마나 애 써왔는지를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벌은 받아도 당연한 것이다. 보육원 시절때와 마찬가지였다.형 이 고통을 받으면 나도 같이 받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형이 나를 지켜줬듯이 나도 형을 지켜주고 싶었다. ' 컥! ' 그때 어두운 방안의 그림자가 일어나며 내 위에 올라탄 남자를 휘감아 올렸 다.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 한구석으로 물러나 두려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 보 았다. 보육원 때와 같은 광경이었다. 형의 눈동자는 예의 감빛으로 물들어 있었고,그 주위로도 은은한 감빛의 광 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신비로운 모습에 남자가 허공에서 숨 넘어 가는 소리를 내지르는 것도 듣지 못하며 멍하니 형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퍽 수박 깨지는듯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액체가 방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액체를 뒤집어 쓰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남자 쪽을 올려다 보았다.허 공에 그림자로 묶여 있던 남자는 전신이 으스러져 죽어 있었다. 그림자가 전 신을 파고 들어 뼈와 근육을 남김 없이 부숴뜨렸던 것이다. 나는 그림자가 그 끔찍한 시체를 침대에 떨어 뜨리고 나서야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방금 전까지 나를 덮치려고 했던 남자였지만,이런 모습이 되기를 바 란 것은 아니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어버렸다. 보육원 시절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로 죽은 것이다. ' 형……. ' 나는 힘없이 형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방 구석에 기대어 고개를 떨어 뜨리고 있었다. 어둠이 그와 나 사이를 가리고 있었지만,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형은 떨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채 주체할 수 없이 떨고 있 었다. 그제서야 나는,지금 누구보다도 이 상황을 무서워하는 이는 바로 형이 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형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떨림이 나에게 옮겨 왔는지 나까지 몸을 떨기 시작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이 눈 앞을 가렸다. 이후의 일들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앞으 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지? ' 시, 민아……. ' 그때 귓가로 형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손길이 너무나 애처로웠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더욱 세게 그 를 끌어안았다. ' 모두가 행복해질 순 없어……. 모두를, 지켜줄 순 없는 거야. ' 그게 무슨 소리일까? 나는 형이 충격으로 횡설수설하는 건가 싶어 걱정스러 레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했다. 차갑게 가라 앉은 얼굴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 그렇다면 나는, 내 주위의, 내 손에 닿는 이들 만큼은…… 확실히 지켜내 겠어. ' ' 형……. ' ' 시민아, 너만은 내가 반드시……. ' 그 잦아드는 목소리에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형은 끝 내 울지 않았다. 단지 떨림이 사라진 손으로 나를 강하게 끌어안아줄 뿐이었 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채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We have a little garden. 우리에겐 조그만 정원이 있답니다. A garden of our own. 우리네 정원요. And every day we water there 우리는 매일 거기에 물을 주지요. The seeds that we have sown. 우리가 뿌린 씨에요. We love our little garden. 우리는 우리의 작은 정원을 사랑하죠. And tend it with such care. 아주 조심스레 돌보죠. You will not find a faded leaf. 정원에는 시든 잎 하나 찾아볼 수 없죠. Or blighted blossom there. 마른 꽃 한송이도요. 학교를 다니며 배운 노래들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작 이 순간에 내가 부른 노래는 엄마가 가르쳐줬던 너서리 라임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형 은 이 노래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내가 노래를 부르고 나자 여느 때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네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 나와 한몸에서 태어난, 세상에서 유일한 나의 혈육. 나보다 먼저 엄마의 뱃 속을 나온 나의 쌍둥이 형. 나는 다시 한번 통감하게 된다. 한시영, 그는 세상에서 다시 없을 내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것을. " ……! " 시민은 두눈을 번쩍 뜨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꿈속에서 자신을 향해 자상하게 미소짓던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참 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 어째서 이런 꿈을 꿔버린 것일까! 지금와서 그때를 떠올려 봐야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어! 모든 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 ……하아. " 마음을 진정시키자 자신이 누워있던 곳이 자신의 방이었다는 사실을 곧 깨 닫게 되었다. 시민은 가벼운 두통에 이마를 감싸며 신음했다. ' 두통이야 어제 술을 마셨기 때문일테고……. ' 유정이와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어진 모양이다. 어째서 그렇게 미련스레 마셨던 것일까. 시민은 자신답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옷을 보 니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를 입고 있었다.아마도 쓰러진 자신을 누군가가 그 대로 집으로 데려와 눕혔던 모양이다. ' 유정이가 데려온 걸까? ' 시민은 가볍게 인상을 쓰며 뒷목을 주물렀다. 그러다 문득 창으로 들어오는 강한 햇살에 생각이 미쳤다. 재빨리 손목 시계를 바라본다. ……8시? 시민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 큰일났네! ' 그녀는 서둘러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재빨리 방문을 나섰다. 숙취에 머리가 지끈 거렸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가인과 브루스, 유리의 아침 식사며, 도시락을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은 주말도 아니건만! ' 왜 다들 날 깨우러 오지 않았을까? 혹시 아직도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시민은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 멍하니 발걸음 을 멈춰야만 했다. 부엌에서는 뜻 밖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 아, 시민 씨. 일어나셨어요? " 상쾌하게 그녀의 기상을 반겨준 이는 다름 아닌 유가인이었다. 그는 가스렌 지 쪽에서 프라이팬에 계란을 풀고 있었는데,앞치마까지 두른 것이 본격적으 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마늘을 빻아 식빵 에 바른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가 4인분으로 차려져 있었다.그 음식들을 앞에 두고 뭔가가 불만인듯 부루퉁한 브루스와 여전히 잠에서 덜깬 유리가 앉아 있었다. 브루스는 시민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 간밤에는 꽤나 과음했던 모양이군. 덕분에 이런 시덥잖은 아침 식사를 먹 게 되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좋지만 그 뒤의 일도 좀 생각해주는게 어떨 까? " " 아, 죄송……합니다. " 시민은 엉겹결에 그에게 사과했고, 요리하던 가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브루 스에게 투덜거렸다. " 시덥잖은 아침식사라 미안하네요. 그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요? 앉아서 불평만 하지 말고! " " 흥. 부엌일은 남자가 하는 게 아니다. " 브루스는 단호하게 답했고, 가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보수적이지 도 않은 주제에 묘한 데에서 고집을 부린다니까, 저 인간은. 가인은 그런 불만을 속으로 삼키며 시민에게 말했다. " 어쨌든, 오늘 아침 식사는 제가 하게 되었으니 시민 씨도 앉아 계세요.아 직 숙취도 풀리지 않았을 텐데. " " ……미안해요, 가인 씨. "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유리의 등을 토닥여주며 브루스에게 물었다. " 저기, 그런데 어제는 어떻게 된 건가요? 제 친구가 절 집까지 데려다 준 건가요? " " 허,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냐? " " ……면목 없게도. " 브루스의 한탄에 시민은 고개를 들지 못하며 힘없이 대꾸했다. 브루스는 가 스렌지 쪽에서 요리를 하는 가인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네 친구라는 아이가 저 애송이에게 전화했었다. " " 가인 씨가요? " 시민은 깜짝 놀라며 가인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가인은 쑥스러운 미 소를 머금으며 자신 몫의 계란 프라이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 유정 씨가 전화해줬어요. 시민 씨가 취해서 일어나질 않으니 당장 데리러 와달라고. " " 걔도 참……. 미안해요, 가인 씨. 제가 어제는 폐란 폐는 다 끼쳐버렸네 요. " 시민이 사과하자, 가인은 대번에 손을 저으며 황급히 답했다. " 아뇨!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맨날 저희 뒷바라지만 해주시느라 쌓이신 것 도 많았을텐데, 그런 기회에 다 풀어버리셔야죠! 그, 저도 그렇게 힘들지 는 않았고, 오히려, 응! 즐거웠죠! 예! 즐거웠어요! " 가인의 횡설수설에 시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즐거웠다니… …뭐가 즐거웠다는 걸까? 그때, 시민에게 빠져서 허우적대는 가인의 모습에 잠이 달아난 유리가 빈컵 을 그에게 내밀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 오빠, 우유! " " 아, 응? 우, 우유 말이지. " 가인은 시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서둘러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왔다. 그 모습에 유리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가뜩이나 저혈압이라 아침 부 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저런 가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브루스는 그런 유리의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인이 우유를 따라주려던 그녀의 컵에 냅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두유를 부어주었다. " 동양인은 동물성 단백질인 우유보다 식물성 단백질인 두유를 섭취하는게 더 몸에 좋다. 키가 크고 싶다면 우유보다는 두유를 마시도록. " " ……. " 유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얘기가 끝났다는 듯 그녀 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며 시민에게 말했다. " 어쨌든, 너도 여러가지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어제 같은 과음은 앞으로 자제하도록 해라. 힘들 때일수록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야 만사가 수월해 지는 법이니까. " " 힘든 일이라뇨? 시민 씨! 무슨 일 있으신 거에요? " 막 시민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가인이 당황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걱정하 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표정에 시민은 손을 저으며 다른 이들을 돌아 보았다. 브루스는 차를 마시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그녀를 신경써주고 있었고 유리 역시 언제 화를 냈냐는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일행의 모습에 시민은 자기도 모르게 살풋 미소를 지었다. " 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 같은 건 없어요. " " 하지만, 그럼 그렇게 술을 마신 건 왜……. " " 그건 그냥 유정이 주량 맞춰주다 보니 취한 거였어요. 가인 씨도 알잖아 요? 유정이 술 버릇 나쁜 거. " 그런 그녀의 말에도 가인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마주하며 말했다. " 설령 힘든 일이 있더라도 전 괜찮아요.이렇게 모두들 절 걱정해주고 있는 걸요. 만약 정말로 고민거리가 생긴다면 반드시 여러분들과 상의할테니까 그때 신경써주세요. "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가인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 시민 씨, 뭔가 고민이 있는 게 분명한데. 하 지만 도통 얘기를 해주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누군가에게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을 가인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 가인은 그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했다. 우리가 마음을 털어놓는 것처럼,시민 씨도 조 금만 더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주면 좋으련만. ' 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지. ' 그녀가 스스로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가인은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분명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해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주자. 그러면 되는 것이다. 가인은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시민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 아, 참. " 가인은 잊고 있었다는듯 서둘러 자신의 품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시민에게 건내주었다. 시민은 엉겹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가인에게 물었다. " 뭐에요? 이건? " " 유정씨가 시민 씨에게 건내주는 걸 깜빡했다고 저에게 부탁했어요. 무슨 결혼 청첩장인 모양인데……. 혹시 그 유정씨가 결혼하는 건 아니겠죠? " " 설마요. " 시민은 말도 안된다는듯 웃음을 터뜨리며 청첩장을 열었다. 거기에는 자신 에게 낯익은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시민은 작년 동창회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들이 있었지……. " 가인 씨, 기억하세요? 동창회에서 만났던 우성이와 수미. " " 아…… 예. 애인 사이였던 두 분 말이죠? " 가인은 흐릿한 두 남녀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민은 청첩 장을 그에게 보여주며 미소지었다. " 이번 6월 초에 결혼한데요, 그 둘. " ' 나를 따라오겠니? ' 두근 ' 솔직히 말할게. 너의 힘이 필요해. ' 두근 ' 하지만 확실히 대가를 지불하겠어. 네가 도와준 만큼 나도 너희를 도와줄 거야. ' 두근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눈 앞의 여자를 노려보았다. 형의 등을 바라보았다. 형이 저 여자의 제안을 거절하길 바랬다. 저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가 계속 그녀를 거부하고 있었다. 본능이 속삭였다. 저 여자는 너에게서 형을 빼앗아 갈 거야, 라고. ' 당신을 따라가면……무엇을 줄 거지? ' ' 뭘 받고 싶어? ' 형의 물음에 여자는 재미있다는듯 미소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매혹적이 었기에 나는 안절부절해야만 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저 여자는 이미 우 리가 양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빌미로 삼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경찰에게서 보호해주겠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아마 우리 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저렇듯 여유로울 수 있 는 것일테지. ' 내 동생의 평범한 생활. ' 하지만 형이 내건 조건은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 ' 우리를 보호해 주는 거야, 당연한 거겠지? 그렇다면 내 동생이 계속 학교 를 다닐 수 있도록 해줘.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도록 보장해줘. ' ' 그럼 그 힘을 빌려주시겠다? ' ' 얼마든지. ' 여인은 형의 대답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반 박하려고 했다.더 이상 나 때문에 형이 희생당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나 도 형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무력하게 보호만 받는 것은 이제 넌더리가 나! 하지만 형은 그런 나를 제지하며 여인에게 재차 소리쳤다. ' 대답해! ' 그런 우리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는듯 여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후후후후. 좋아. 보호해주는게 당연하다면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도 당연하 잖아.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들어줄테니 염려하지마. ' 한 순간 형과 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나는 미심쩍은 태도를 버 리지 못하며 재차 그녀에게 물었다. ' 어, 어떻게 우리가 당신을 믿죠? '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선택의 기회란 게 없었다. 죽이 되 든 밥이 되든 그녀를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내 태도는 그녀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서 나오는 투정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나의 투정마저도 진지하게 받아주었다. ' 나 아포스톨로스 야고보(James),이네스 라비에르가 3번째 검의 이름을 걸 고 너희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 그렇게 우리는 바닥이 없는 늪으로 발을 내딛고 말았다. 형, 알고 있어? " 시민 씨, 다녀올게요! " " 다녀오마. " " ……갈게. " 형이 그렇게나 바래왔던 평범한 생활은 한순간의 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 다녀오세요, 가인 씨. 브루스 님. 유리 양. "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형, 나는 이제 형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수 없어……. Ｔo Ｂe Ｃontinued…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252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5-14 :: :: 20211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199 - Ｂy Ｎext Ｎeo =-=-=-=-=-=-=-=-=-=-=-=-=-=-=-=-=-=-=-=-=-=-=-=-=-=-=-=-=-=-=-=-=-=-=-= " 지구 방위군의 요구는 거절했다. " 언더 시티 유레카의 진 사령관 개인 사무실. 검은 베니션 블라이드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안에 진 사령관은 변함 없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 키고 있었다. 지구방위군과의 4차 합동 회의를 끝내고 막 귀환한 수정은 조금도 주저앉는 그의 대답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솔직히 저도 피스 대원들의 신상명세서를 넘겨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했지만…….그래도 조금 쯤은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하시는 게 어떨까 요? 상대는 지구 방위군의 간부라고요. 요구를 거절했다간 PM조약에 문제 가 생길지도 몰라요. " " 어차피 그들도 우리가 그 요구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고서 그런 요구 를 한 게 아니다. " " ……예? " 수정은 두 눈을 깜빡이며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진 사령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 애초부터 터무니 없는 요구였어. 그들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강요할 입 장이 못된다. 피스메이커라는 방패가 없어지면, 그들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니까. " " 그럼 어째서……? " " PM조약을 깨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던 거겠지. " " ……! " 수정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언성을 높였다. " 맙소사……. 하지만 PM조약을 깬다고 해서 그들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간 다는 거죠? 그들에게는 몬스터를 상대할 수단이 없어요! 우리의 심기를 건드려봐야 그들의 손해일 뿐입니다! " " 그렇다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야. " 진 사령관은 옆에 쌓여있던 프로파일링 중 하나를 꺼내 수정에게 넘겨주었 다. 파일을 펼쳐본 수정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는 생각지도 못 했던 인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 아포스톨로스 요한(John), 파리스 라비에르. 4번째의 검이 며칠 전 한국 으로 입국했다. " " 보아네게, 우뢰의 아들 중 하나로군요! 지구 방위군이 흑심을 품은 것은 그 때문인가요? " " 그것은 알 수 없지. 그는 대리자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예전부터 홀 로 활동해왔으니까. 새삼 그가 성당 기사단의 세력을 업고 왔다고는 보기 힘들 거야. " " 그렇다면……지구 방위군과 성당 기사단이 손을 잡은 것은 아니겠군요. " 수정은 그나마 한시름 놓았다는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진 사령관의 말은 여전히 그녀를 긴장시켰다. " 사도 요한의 목적은 단 하나다. 3번째 검의 복수를 하는 것. " " ……그렇군요. 그녀와 그는 혈육이었지요. " 수정은 새삼 잊고 있었다는듯 탄식했다. 일을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그 여 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19년 전 자신들에게 두 쌍둥이 형제를 데리고 온 3번째의 검, 이네스 라비에르를! " 요한은 누이인 야고보의 죽음을 피스 블랙의 탓으로 보고 있다. 아마 통 일 한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때문일 테지. 그는 예전부터 성당 기사 단이 손을 쓰기 전에, 직접 자신이 피스 블랙의 목숨을 거두는 것을 갈망 하고 있었다. " " ……지구 방위군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일테고요. " 수정은 그 불같은 성격의 남자를 떠올리며 작게 도리질 쳤다. 보아네게, 우 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그 남자 만큼 어울리는 이도 또 없을 것이다. 자정이 넘은 인천항. 5만 톤급 1기, 1만 톤급 1기의 초현대식 갑문이 건설 된 이곳은, 5만 톤급을 비롯하여 대형선박 30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서 해안 최대의 상항(商港)이었다. 인천항의 제 4부두는 컨테이너 취급 전용부두로서 현재 거대한 특수화물선 들이 여럿 정박해 있었다. 그 중에는 일주일 전 부산에서 올라온 10만 톤 대 형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사삭 어둠 속의 부두를 은밀하게 이동하는 검은 군복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적외선 고글에 군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 군복의 견장에는 황금색 지구본 모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지구 방위군의 표시였다. 그들은 잘 훈련된 몸놀림으로 컨테이너에 몸을 숨기며 신속하게 화물선으로 접근해 들어갔다.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한 인물이 부하들에게 손짓하자,군 인들은 화물선의 등록번호를 확인하며 그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자신들이 찾고 있던 배가 틀림없었다. 대장은 모든 확인이 끝나자 부하들에게 대기 명령을 내린 후, 조용히 무전 을 쳤다. " 소령님, 3소대가 목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 " 호오, 정보는 정확했던 모양이군. " 지구방위군의 작전 장교, 하영식 소령은 통신병의 보고에 만족스러운 미소 를 지었다. 그는 지금 인천항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시외곽에 장갑차를 세 워놓고 그 안에서 부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장갑차의 안에는 각종 통신기기 와 영상기기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설치된 적외선 텔레비젼에는 병사들의 고 글이 보내오는 영상들과 인공위성의 영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 1소대와 2소대를 제 4부두로 집결시켜라. 그리고 만약을 대비하여 4소대 는 근방에 대기시켜놓고. " "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굳이 저들을 상대로 지구 방위군의 특수부 대를 절반이나 동원하는 것은 병력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 하영식의 말을 받은 것은 아직 출전하지 않은 4소대의 우성원 소위였다. 그 는 겨우 1명의 인물을 상대로 자신의 소대까지 동원되는 것이 영 마음에 들 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 소령은 그런 소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듯 씁쓸하게 말했다. " 하지만 상대는 그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오라 능력자다. 무리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 " 그도 사람인 이상 총 앞에서는 무력할 겁니다. 저희들의 승리는 확실합니 다. " "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래도……. " 하 소령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을 정리했다.그는 이 자존심 강한 소위를 어 떻게 구슬려야하나 고민했다. 지구방위군의 특수 부대는 통일군의 최정예인 만큼 자신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자신들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 진 만큼 이런 임무에 투입된 것을 불만으로 여겼던 것이다. 솔직히 비무장한 남자 하나에 이렇듯 많은 군인들이 몰려온 것부터가 수치 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오라 능력자라고 해도 같은 인간인 이상, 몬스터들 과 대등한 위치에 놓고 보기는 힘들다. 우 소위는 하 소령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 혹시, 그 외국인 때문이십니까? " " ……부정하지는 않겠네. 이렇게 대대적으로 라 장군님이 부대를 움직인 것은 형식상의 의미가 강하지. 그 남자의 요청에 성의를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 " 도대체 그가 누구길래……. " 우 소위가 이해할 수 없다는듯 말꼬리를 흐리자, 하 소령은 적외선 텔레비 젼으로 눈을 돌렸다. " 소위. 우리는 도구다. 상부의 작전을 실전에서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만 이 우리의 존재 이유다. 그렇다면 주제 넘게 도구가 주인의 생각을 알 필 요가 있을까? " " 죄, 죄송합니다. " 우 소위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하 소령은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 쓸데 없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게. 도구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 는 거야. "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 서둘러라. 즉시 제 4부두로 향한다! " 지휘실의 무전을 받은 1소대는 신속히 수색을 멈추고 제 7부두를 떠나기 시 작했다. 제 4부두가 컨테이너 취급 전용 부두였다면,여기는 우리 나라에 도 입되는 양곡의 70퍼센트를 취급하는 양곡전용 부두였다. 애초부터 수색이 용 이하지 못한 터라 1소대의 소대장은 잘 되었다는듯 미련 없이 병사들을 이끌 고 4부두로 이동했다. " ……! " 그때 선두에서 이동하던 병사의 적외선 고글이 양곡들 사이로 움직이던 한 그림자를 발견해냈다. 병사들은 즉시 호흡을 멈추며 재빠르게 그림자를 포위 해 들어갔다. 그림자는 성인 남성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작고 재빨랐다. 병사 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림자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포위를 끝마친 뒤에야 병사들은 상대를 살펴볼 여유가 생 겼다. 그리고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모두는 할 말을 잊었다. ' ……어린 아이? ' 양곡에 기대어 몸을 떨고 있던 이는 이 항구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 십대 소 년이었다. 적외선 시야에 들어온 소년의 얼굴은 갑작스런 군인들의 등장에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소대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 이상하군. 분명 항구의 민간인들은 모두 철수시켰을 텐데 어째서 이런 아 이가 남아 있는 거지? 거기다 이 한밤 중에 무슨 일로……. ' 아니, 일단 위화감은 둘째로 치더라도 이 꼬마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 인가가 더욱 큰 문제였다. 지금의 작전 상 여기서 머무르고 있을 시간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목격자를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일. 잘못했다간 이 운 없는 아이를 죽이고서 가야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 리 군대에 몸을 담고 있는 그였지만, 어린 아이를 죽이고도 밤에 두 발 뻗고 잘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소대장이 한창 머뭇거리고 있을 무렵 아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 다. 어느 새인가 소년에게서는 앞의 겁에 질린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 이런. 수상한 이를 발견했으면 곧바로 쐈어야지? " " 뭐? " 소대장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멍청히 되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되돌아온 것은 수십발의 거친 총성이었다. 탕, 탕, 탕, 탕 그는 갑작스런 총소리에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거기에는 자신의 부하들 이 서로에게 총을 겨눈채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튀어오르는 탄피와 사방에 뿌려지는 육편들.어둠 속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낮이었다면 분명 세상이 붉 게 물드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부하들이 자결해버리자 소대장은 망연자실하게 자신이 가 지고 있던 총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뒤에서 다시 한번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나,참. 군대에 있으면서 사람 죽는 거 한두번 보나. 이정도 일로 총을 다 떨어뜨리다니. 군인 실격이로군, 당신. " " ……! " 소대장은 화들짝 놀라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 앞에 있던 소년은 두 눈을 짙은 양홍빛으로 물들인채 전신에서 은은한 오라를 피우고 있었다. 그 제서야 그는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자신들이 습격하려고 했던 오라 능력자 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늦은 깨달음은 깨우치지 못하느니만 못한 법이다. " 어, 어어? " 지휘관은 갑자기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떨어뜨린 총을 줍는 자신의 몸에 바보같은 신음을 흘렸다.마치 누군가에게 제어권을 뺏아긴 것처럼 몸이 제멋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타인이 된 몸은 서서히 총을 들어 스스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 으, 으으윽! " 지독한 공포에 소대장은 고개를 비틀며 울먹였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총구 는 정확히 자신의 미간에 그 차가운 촉감을 전하고 있었다. 소대장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소년을 노려 보았다. 소 년은 겁에 질린 그의 모습에 천진난만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천천히 소년의 오른손이 권총 모양을 흉내내며 그에게로 향했다. " 빵! " 탕! 소년이 권총을 쏘는 시늉을 하자,실제로 소대장의 손이 방아쇠를 당겼다.그 러자 소대장은 마치 뒤로 덤블링이라도 하는 것처럼 반원을 그리며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총성이 지나간 자리로 조용한 파도 소리가 밀려들어온다. " 후∼ 한건 해결. " 피스 카민, 마유빈은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총구인양 입으로 불며 다른 부 두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도 희미한 총성과 비명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 고 있었다. 이미 인천항의 적막은 깨진 뒤였다. " 주, 죽어! 이 괴물! " 투타타타타타 2소대의 병사들은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르며 눈 앞의 괴물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다. 하지만 괴물은 빠르고 영리했다. 그는 제 3부두의 크레인과 화물 들 사이로 몸을 움직이며 병사들의 목을 하나 하나 거두어 갔다. " 맙소사!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응답하라, 본부! 응답햇! " 2소대의 소대장은 무전기에 비명을 지르며 두서 없이 어둠 속을 향해 총을 겨눴다. 압도적인 공포에 십여년 동안 받은 훈련도 무용지물이었다. 그저 도 망치지 않고 응전하는 게 한계였다. 휘익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또 하나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방금 전까지 자 신의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부하의 머리였다. 이제 남은 인원은 다섯. 전투에 들어간지 채 5분만에 소대의 전력이 육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정말이지, 악몽이라면 최악의 악몽이었다. 이건 전투가 아 니라 일방적인 학살이다! " 끄아아아악! " 괴물이 병사의 발을 붙잡고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보이지 않는 곳 에서 부하의 숨 넘어가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소대장은 무력하게 듣 기만 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저항할 의욕마저 앗아갔다. 소대장은 적외선 고글을 벗으며 허탈하게 전방을 응시했다. 죽기 전에 마지 막으로 괴물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셈이었다. 괴물은 전신이 빛을 반사 시키기라도 하는지 적외선 고글을 쓰고서는 제대로 된 형상을 확인할 수 없 었다. 마침 달빛도 밝은 것이, 육안으로 녀석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휙 그때 거대한 무언가가 화물들 사이에서 밤 하늘로 뛰어올랐다. 부하들은 여 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녀석에게 총을 쏘았지만, 총알은 녀석의 은빛 터 럭을 뚫지 못했다. 그렇다. 은빛의 털이었다.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괴물은 전신에 은빛의 털이 돋 아난 거대한 늑대 인간이었다. 소대장은 한순간이지만 달빛을 몸에 흡수하는 녀석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껴버렸다. 저렇게 달빛이 어울리는 짐승이 또 있을까! 휙 다가온다. 다가온다. 은빛의 짐승이 다가온다. 서걱 소대장의 머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 1소대 전멸……! 2, 2소대 역시……. " 통신병은 끝까지 상황을 보고할 수 없었다. 적외선 텔레비젼에 보이는 영상 들이 이미 반 수 이상이 꺼져 있었던 것이다. 하영식 소령은 이 어처구니 없 는 전황에 턱 빠진 사람처럼 벌린 입을 다물줄 몰랐다. 믿을 수가 없다. 아니,그 이전에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다른 이들도 아닌 지구 방위군의 특 수 부대 2개 소대가 단 두 명의 비무장인원에게 몰살당하다니! " 소, 소령님, 이를, 이를 대체 어떡해야……. " 통신병은 하 소령을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영식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당장에 쓸어버렷! 4부두에 대기하고 있던 3부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려라! 우두머리부터 제거하는 거다! "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어둠 속 컨베이너에 몸을 숨기고 있던 3소대는 준비하고 있던 데로 눈 앞의 대형선을 향해 들어갔다.목표인 대형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을 싣고 있 었다. 검은 천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거대한 무언가가 갑판에 몸을 웅 크리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전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화물선에 살아있는 생물체는 보이는 즉시 사살 할 것. 그 때문에 이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간단하게 완수할 거라 생각했던 임무는 의외로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부두로 돌아갔던 1소 대와 2소대가 모조리 전멸한 것이다. 만약 그 소식을 전해준 이가 작전 장교 가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그들의 전멸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몬스터 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 정도의 부대가 이런 단 시간 내에 몰살당할 리 가 없다. " ……! " 그때 막 대형선에 올라선 그들은 한 특이한 인영을 발견하고 멈칫해야만 했 다. 일본식 수도승 복장을 한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 만 수도승이라는 게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쓰고 있는 가면이 특이하다 는 것이었다. 붉은 얼굴에 큰 코가 돋보이는 가면. 일본의 민속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 정도로 유명한 텐구(天狗) 가면이었다. 텐구 가면의 남자는 한 눈에 보기에도 190이 넘을듯한 거한이었는데, 그 키 에 지지 않을 정도로 긴 장도가 그의 어깨에 짊어져 있었다.일본의 왜구들이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 노다치 라는 물건인 듯 했다. 남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갑판에 지구 방위군들이 다 올라서자 천 천히 어깨에 짊어진 장도를 늘어뜨렸다. 처처척 병사들은 재빨리 반원 형으로 텐구 가면의 남자를 포위하고 총구를 들이댔 다. 모두가 소대장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대장은 전방의 괴한을 노려 보며 소리쳤다. " 발사! " 투타타타타타 지구 방위군의 기관단총들이 손속을 두지 않고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화약 연기로 뒤덮이는 갑판. 연기에 시야가 가려지자 소대장은 손을 들어 병사들 의 발포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기다렸다. 연기가 사라지고 갑판에 쓰러져 있 을 괴한이 나타나기를.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탄흔에 벌집이 된 갑판 어디에도 괴한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칭 날카로운 단절음 소리가 한번 울려퍼졌다. 그리고 어느 새인가 병사들의 뒤 에서 나타난 텐구의 남자가 늘어뜨린 노다치를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기관단총들이 소리 없이 두조각으로 절단되어 땅바닥에 떨어졌다. 남자의 노다치가 단 일격에 병사들을 무장해제시켰던 것이다. 병사들의 뒤 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소대장은 유일하게 멀쩡한 자신의 기관단총을 두 손으 로 움켜쥐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이해를 벗어난 뜻 밖의 광경에 사고가 멈 춰버렸다. 텐구의 남자는 그런 소대장에게 눈길을 한번 주었다가 짊어진 노다치를 어 깨로 튕겨 반동으로 소대장의 목에 노다치의 날을 들이댔다.목언저리로 느껴 지는 그 서늘한 감촉에 소대장은 힘없이 수중의 총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3소대! 3소대! 무슨 일인가? 왜 움직임을 멈춘 건가!》 소대장의 귓가로 통신병의 다급한 무전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무전기를 빼앗아갔다. 소대장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텐구의 남자 때문에 무전기를 가져간 이가 누구인 지 확인할 수 없었다. " 아아. 들리십니까, 지구 방위군 여러분? " 《……누, 누구냐?》 통신병은 소대장의 목소리 대신 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당황하 며 소리쳤다. 그 고함 소리에 무전기를 든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귀에서 살짝 헤드폰을 떼었다. " 지금부터 당신들과 간단한 협상을 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일단 놀란 가슴 부터 진정시키시죠. 전 당신들의 최고 지휘관과 얘기하고 싶습니다. " 《……내가 최고 지휘관이다. 무엇을 원하나?》 무전기 너머로 지구 방위군 하영식 소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이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도 용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꼬리가 흔 들리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남자는 그런 상대방의 태도에 피식 미소지으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우리는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들만 조용히 물러나준다면 우리도 조용히 사라져줄 용의가 있습니다만……. 어떠십니까? " 《그 요구를 받아드리리라 생각하는가?》 하 소령이 어이 없다는듯 대꾸하자 남자도 순순히 인정했다. " 뭐, 기대했던 대답이군요. 그럼 협상은 결렬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 《잠깐……너!》 하지만 남자는 하 소령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무전기를 꺼버리고 텐구의 남 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노다치가 어둠 속에서 섬광을 번뜩였다. 촤악 벽에 뿌려지는 혈흔들.그리고 목을 잃은 1소대의 병사들이 줄 끊어진 꼭두 각시처럼 땅바닥으로 거꾸러졌다. 무전을 친 남자에게 붙어있느라 홀로 목숨 을 부지할 수 있었던 소대장은 눈 앞의 참상에 몸을 떨었다. 이빨이 딱딱 떨 리고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푸확 순간 소대장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의 몸을 발 밑에 서부터 양쪽으로 잡아뜯었다.그 바람에 소대장은 서있던 상태 그대로에서 이 등분이 되어 절명했다. 눈 앞에서 직각으로 피분수가 치솟아올랐지만 무전기 를 든 남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 당신도 운이 없군요. 좀 더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상관의 밑에 있었더라 면 좋았을 것을. " 그때 갑판으로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방위군의 특수 부대 1소대 와 2소대를 전멸시킨 소년과 늑대인간이었다. 소년, 마유빈은 곧장 남자에게 달려와 칭얼거리듯 말했다. " 마스터, 제가 말했잖아요. 대화로는 씨도 안 먹힐 녀석들이라고. 그냥 다 죽여버리면 될 것을 왜 살려두시려 한 거에요? " " 이런, 이런. 그렇게 생명을 경시해서는 안된단다,유빈.그 나이에는 좀 더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지. " " ……마스터와 함께 다니는 이상, 그건 절대로 불가능할 걸요. " 유빈은 마스터의 농담 아닌 농담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 다 그의 눈이 마스터의 뒤에 있던 텐구 가면의 남자에게로 향했다.소년은 마 스터를 대할 때의 친근함을 버리고, 대번에 그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유빈의 곁에 있던 늑대 인간, 라트 발렌시아도 텐구 가면의 남자를 경계하 며 마스터에게 다가왔다. 그는 어느 새인가 본래의 인간 모습으로 돌아가 있 었다. " 마스터, 전 아직도 저 남자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네이 안데르슨의 소개 라는 것도 의심스러운 부분이지만……. " 무엇보다, " ……그는 평범한 인간이지 않습니까? " 라트의 지적에 텐구 가면의 남자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 대신, 그들의 마스터가 나서서 그를 변호해주었다. " 그의 목적이 어느 정도 우리와 부합된다고 생각했기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일시적이기는 하겠지만, 분명 그는 우리의 커다란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라트, 당신은 제가 선택한 결정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 " ……잠시 제 본분을 잊어 버렸군요. 죄송합니다. " 라트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유빈은 그처럼 쉽 게 납득할 수 없었다. 바보 늑대! 반대할 때는 언제고 저렇게 쉽게 물러나는 거야? 유빈은 마스터가 자기 외의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싫었다.더구나 저 텐쿠 가면의 남자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인간이란 족속이었다. 마스터의 명령만 아니었더라면 대번에 정신 공격을 시도해 폐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유빈의 불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스터, 한시영은 예의 매력적인 미소 를 지으며 자신의 수하들에게 말했다. " 자, 그럼 이제부터 밖의 이들에게 가르쳐주도록 하죠. 자신들이 협상을 거절한 이가 누구인지를. " Ｔo Ｂe Ｃontinued… =-=-=-=-=-=-=-=-=-=-=-=-=-=-=-=-=-=-=-=-=-=-=-=-=-=-=-=-=-=-=-=-=-=-=-= ▶255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02 :: :: 32730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01 - Ｂy Ｎext Ｎeo =-=-=-=-=-=-=-=-=-=-=-=-=-=-=-=-=-=-=-=-=-=-=-=-=-=-=-=-=-=-=-=-=-=-=-= " 역시나……. " 이른 아침의 한성 고등학교. 지연은 자신이 맡은 2학년 1반의 교실에서 여 느 때와 다름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실망의 한숨부터 내쉬었다. 교실의 창가 끝 자리에 위치한 책상과 의자. 거기다 배열에서 혼자 내쫓긴듯한 이탈 감. 38번 유가인의 자리였다. 책상과 의자에는 붉은색 스프레이로 온갖 욕과 낙서들이 적혀 있었다. 죽어 버려 라든지, 괴물이라든지 하는 문구는 그나마 양반이다.그 외에는 차마 보 기 민망한 낙서들 뿐. 지연은 지친 표정으로 옆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이 책상의 주인이 낙서들을 접했을 때 지을 표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한동안은 좀 뜸해졌다 싶었 더니, 저번 12구역의 사건 이후 다시 아이들의 괴롭힘이 시작된 모양이다. ' 어떻게 이리도 잔인해질 수 있을까. ' 지연은 이런 낙서를 한 아이들이 자신이 가리키는 반의 학생들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왕따니, 이지메같은 것은 자신의 반과 관계 없는 일인 줄 로만 알았는데.그 천진난만하고 장난기 있는 녀석들이 누군가를 이렇게나 고 립시킨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반에서는 가인을 향한 이지메가 존재하고 있었다. 엄연한 현실 이다. 그것을 인정할 때마다 지연은 교사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 같았다. " 어쨌든……, 치워보실까. " 지연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가인의 책상에서 데스크 톱 컴퓨터를 떼어낸 후 책상을 들었다. 지금이 7시니까 가인이 오기까지 아직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 아이가 이것을 보기 전에 얼른 다른 책상으로 바꿔올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이렇듯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나온 것이기도 하고. ' 하아. 내 팔자야. ' 지연은 이렇게 소극적으로 밖에 가인을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녀는 가인을 따돌리는 학급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 턱대고 가인을 보호해줄 수도 없는 것이, 담임이라는 직책이 걸림돌이 되었 던 것이다. 물론 그런 것에 구애받고 싶지 않은 그녀였지만, 잘못하다간 더욱 일이 복 잡해진다. 소수가 가인을 고립시키고 있다면 그 소수만 바로 잡아주면 되지 만 문제는 가인을 고립시키는 이들이 다수라는 점이었다. 가인을 눈에 띄게 보호한다든가 편애하는 기색이 보이면 자신마저 학급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고, 그랬다간 담임으로서의 힘마저 상실하게 된다. 그러 면 더더욱 가인을 보호해주는 것이 힘들어질 것이다. ' 권세증후군도 아니고. 나, 참. ' 지연은 무력한 자신에게 회의감을 느꼈다. 학생들의 눈치나 살피는 선생이 라니……. 설마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드륵 그때 막 복도로 지연이 책상을 옮기려던 차에,교실의 뒷문이 스스로 열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돌아보니, 그곳에는 막 등교한 남학생 한 명이 교실로 들 어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 저 녀석이 이 시간에 학교에는 웬 일이래? ' 그 남학생은 다름 아닌 유가인이었던 것이다! 가장 마주쳐서는 안될 시기에 가장 마주쳐서는 안될 녀석과 마주쳐버렸다. 지연은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엉거주춤 책상을 들 고 있기만 했다. 가인은 그런 지연을 발견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어라? 선생님,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오신 거에요? " " 아, 그, 그러는 너야말로 어쩐 일로……? " 지연은 어색하게 답하다가, 가인의 눈이 자신이 들고 있는 책상에게로 향하 자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책상을 등 뒤로 돌렸다. 물론 그렇다고 책상이 안 보일리는 만무하고, 그녀의 꼴만 더욱 우습게 되어버렸다. " 그 책상은……. " 가인은 지연이 숨긴 책상과 자신의 비어있는 자리를 번갈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모습에 지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이럴까봐 잽싸게 바 꿔 놓으려고 했던 건데……. 지연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가인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 얼 굴을 마주하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무력한 담임이라서 미안하다 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별 것 아니니 신경쓰지 말라고 웃어넘길까? 무슨 말을 하든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때 가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책상을 건네받았다. " 나,참. 뭘 그렇게 멍하니 계신 거에요? 그 책상, 옮겨야 되는 거죠? " " 응? 아아. 하지만……. " 지연은 엉겁결에 그에게 책상을 넘겨주며, 가인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책상의 낙서들을 살펴 보고 있었다. " 우와. 이거 심하네. 이렇게 스프레이로 써놓으면 지우기도 힘든데. 이 책 상 가져갔다간 관리인 아저씨한테 무지 혼나는 거 아니에요? " " 그…… 관리인 아저씨한테는 내가 미리 말해놨으니까……. " " 아, 그렇군요. " 가인은 다행이라는듯 미소하며 책상을 들어올렸다. 그 일련의 행동을 지연 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녀석, 저 책상이 자기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을텐데도 저 태도는 뭐야? 혹 시 나한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건가? 그 런 건가? 하지만 가인은 그야말로 콧노래까지 부르며 힘차게 책상을 들고 교실 뒷문 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못한 지연이 가인을 불러 세웠다. " 유가인! " " 예? " 역시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뒤돌아보는 저 모습. 이상해! 이상하다고! " 정말, 괜찮은 거냐? 아무렇지도 않아? " " ……뭐가요? 이 책상요? " 오히려 왜 그런 것을 묻냐는듯 의아해하는 저 모습. 지연은 괜히 자신이 무 안해져 말꼬리를 흐렸다. " 어, 그게…… 그 책상, 옮기는 거, 기분 나쁘지 않은가 해서……. " 그 말에 가인은 잠시 자신이 들고 있던 책상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다시 지연을 바라보며 미소한다. " 괜찮아요. 주번이잖아요. " 아, 그랬구나. 그래서 녀석이 일찍 온 거였어……. 지연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재빨리 도리질을 쳤다. 뭘 납득하고 있 는 거야, 하지연! 그녀는 복도로 나간 가인의 뒤를 쫓아 재빨리 교실 뒷문을 나왔다. 하지만 어느 새인가 가인은 복도 저편으로 그 무거운 책상을 짊어진채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묘하게 활기넘치는 모습에 지연은 참지 못하고 신음했다. ' 뭐야, 이건……. '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저 녀석? 그런 지연의 의문은 조회시간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교무 회의에서 교감 선생의 잔소리가 길어지는 바람에 조회 시간에 늦은 그 녀는 서둘러 2학년 1반의 교실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시간을 맞 춰 교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문에 들어가기 직전, 잠시 숨을 고르며 조회 시 간에 말할 사항들을 머리 속으로 정리했다. 최근 들어 아이들을 대하는데 있 어서 자꾸만 긴장하게 되는지라 이렇듯 사전에 생각하고 말하는게 습관이 되 어버렸다. 물론 그전까지는 너무 편하게만 대해왔으니, 이렇게 긴장하는 것도 나쁘지 는 않다. 하지만 지연은 이런 자신의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들과 거리감을 둔다느니, 말을 조심한다느니……. 이런 건 전혀 자신답지 않았던 것이다. 지연은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어 올라 자신도 모르게 입에 문 담배를 잘근잘 근 씹었다. " ……스메이커는 도대체 뭘 한 거야? " 그때 막 교실 문을 열려던 지연은 안에서 들려온 아이들의 속삭임에 손잡이 로 가져가던 손을 멈췄다. 살짝 벌어진 문 틈 사이로 교실 안의 목소리가 새 어 나오고 있었다. 지연은 슬그머니 문 틈 사이를 들여다 보았다. 목소리의 주인들은 문가의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이었다.그들은 창가쪽의 뒷 자리를 겹눈질하며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 지연은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 이며 학생들이 돌아보는 뒷자리를 바라보았다. " 어제 뉴스 봤어? 드디어 유가족 위원회에서 피스메이커를 상대로 소송을 건 모양이야. " " 법원에서 받아줬대? 매번 무시하기만 하더만. " " 법원 앞에서 사람들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농성해대는데 계속 무시할 수 있겠냐? 결국 두 손 든 거지. " 창가 쪽의 뒷자리에는 테레이아와 유리, 브루스의 모습이 보였다.가인은 보 이지 않았는데, 잠시 밖에라도 나간 모양이다. 그나마 저들 세명은 가인보다 는 학급에서 나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일단 브루스의 경우야,건드리면 배로 되갚아주는 성질머리 때문에 무서워서 건드리지 못하고, 유리와 테레이아의 경우는 여자라는 이유로 심한 해꼬지를 당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을 향한 화살은 모조리 유가인에게로 향했다. 어찌 보면 그가 피 스메이커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지만,그 때는 아이들에게서 장난기를 찾아볼 수 있었다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 어차피 그런 건 다 소용없다고. 피스메이커는 이미 우리 나라에만 국한된 기관이 아니야. UN도 건드리지 못하는 범세계적인 기관이라고. 그런 녀석 들을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처벌하냐? 다 쇼야. 쇼. 지구 방위군이 가 만히 있는게 그 증거잖아? " " 그렇겠지? 에이, 좋다 말았잖아.이제 좀 이 답답한 감시에서 벗어나나 싶 었더니만. 그냥 확 전학이라도 가버릴까? " " 전학간다고 별 수 있을 것 같냐. 아니,아마 전학도 허락되지 않을 걸. 우 리는 평생 이런 신세로 살아야해. 몬스터가 계속 나타나고, 피스메이커가 계속 필요로 되어지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 " 아, 싫다. 싫어. 그냥 콱 몬스터에게 다 당해버려라. " 지연은 아이들의 푸념을 더 듣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 아이들의 심정 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해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 다. 당사자들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알지도 못 하면서, 저 아이들은 어떻게 저리도 혹독한 말들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까. 아마 지연 자신도 피스메이커가 어떤 집단인지,자신의 제자가 그 집단의 일 원이 아니었더라면 저들과 다름 없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저 무관심하 게 타인의 일인냥 입에서 나오는데로 멋대로 지껄였겠지. 저 아이들과 자신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추한 면 또한 인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선생님? 뭐하세요? " 우당탕! 그때 지연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화급히 뒤로 몸 을 물렸다. 그 바람에 큰 소리가 날 정도로 문에 어깨를 찍어,헉 하는 숨 들 이키는 소리를 내지른다. 지연의 뒤에서는 막 화장실에 갔다온 가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서, 선생님? " " 아, 아아아! 잠시! 잠시 오늘 있을 조회 사항을 머리 속으로 정리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는데 갑작스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와서 굉장 히 놀라는 바람에 그만 문에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절대로 교실 안을 엿 봤다든지 얘기를 엿들은 것은 아니니까 부디 이상한 오해하지 말고 얼른 교실로 들어가서 조회할 준비를 하도록! " " 예,옛. " 가인은 폭포수같이 말을 쏟아내는 지연의 외침에 정신이 멍해져 허겁지겁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가인을 들여보내고 나서야 지연은 황급히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한창 교실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가인을 들여보낸 것이다. 그것도 앞문으로! 아마 반 아이들의 주목이 전부 가인에게로 쏠렸을 것이다. " ……. " 역시 예상대로. 지연은 교실로 막 들어오다가 정적에 휩싸인 반의 분위기에 숨이 턱 막혔다. 아이들의 시선은 말 그대로 냉담함 그 자체였다.보고 있기만 해도 적의가 느 껴질 정도. 그 노골적인 시선들 앞에 가인은 정면으로 내던져져 있었다.지연 은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할 새도 없이 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최대한 머리 를 쥐어짜냈다. 그러나 가인은 여전히 태연했다. " 아, 잠깐만 비켜줘! 선생님 들어오셨잖아! 다들 자리에 앉지 않고 뭘하는 거야? " " 어? 으, 으응……. " " 어이, 반장. 선생님 들어오셨어. 인사해야지. " " 아, 그래. " 가인은 서있는 아이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며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다가 잠시 반장에게 조언을 하는 여유마저 보여주었다.그리고 유리와 테레이 아의 사이에 착석. 그와중에도 조금도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2학년 1반의 모두는 그런 가인의 태도에 눈만 깜빡였고, 지연 역시 교탁에 오를 생각도 하지 못하며 가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가인은 그렇게 반의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머리를 긁적이며 앞자리의 친구에 게 물었다. " 내가 잠시 나갔다 온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다들 왜 저러는 거야? " " ……. "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야, 모두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이상해. 이건 결단코 뭔가 이상해. " 방과 후 양호실. 그곳에서 지연은 드물게도 머리를 싸매며 진지하게 고민하 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자리에 핑크 빛 간호 사 복장을 한 박미정 양호 교사가 지연과 똑같은 자세로 고민하는 '척' 하고 있었다. 미정은 과장되게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며 말했다. " 그러니까 하 선생님의 말씀은 오늘 하루 내내 가인 군을 관찰한 결과, 뭔 가 녀석답지 못하다, 이런 뜻인가요? " " 으음. 아니,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뭔가가……. " 지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연신 애꿎은 뒷머리만 긁적였다.이럴 때일수록 자 신의 어휘력이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최근 들어 여러모로 고민할 게 많았던 지연은 대부분의 시간을 양호실에서 박미정 교사와 함께 보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라느니, 감당하기 힘든 중매쟁이라느니, 실은 벌써 마흔을 넘긴 노처녀라느니, 학교 내에서 악성 루 머가 끊이지를 않는 미정이었지만 의외로 지친 지연에게 세심한 충고와 조언 을 해주는 둥 기댈만한 동료 교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지연은 더 이상 미정을 대하는 데 있어서 꺼림칙함을 느끼지 않 게 되었다. ' ……아니. 약간은 느낄지도. ' 지연은 안경을 번쩍이며 연신 의미심장한 미소로 자신을 응시하는 미정에게 서 슬쩍 거리를 벌렸다. 왠지 저 사람과 동류가 되었다간 빼도 박도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본능이 호소하고 있달까. 미정은 그런 지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흐음. 흐음. 그래요. 뭐, 사랑하는 제자의 달라진 점은 애정을 갖고 지켜 보지 않는 한 발견하기가 힘들죠.아마 하 선생님이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 은 그런 담임으로서의 본능이 경고한 것일 거에요. " " 담임으로서의 본능이라니, 그런 건……. " "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제 관계란 말인가! 저는 지금 하 선생님의 섬세함에 감탄하고 있어요! 이미 사랑과 정이라는 것은 떠나버리고 무감 각한 지식의 거래처가 되어버린 학교에 아직까지도 이런 따뜻한 교육열을 가진 교사가 존재하고 있었을 줄은! 그래요!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지더 라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사와 학생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 관계에 있어서 정이 사라지면, 그것은 동물의 무분별한 교배와 조금 도 다를 바가 없어요! " 지연은 미정의 이야기가 점점 인간과 동물의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 차이점 으로 넘어가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음했다.역시 이 사람과 동류로 보 이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냥 당장에 양호실을 뛰쳐 나가버릴까. 그때 미정이 예의 안경을 번뜩이며 지연을 돌아보았다. " 어쨌든, 갑작스레 가인 군의 태도가 바뀐 이유, 알고 싶으신 거죠? " " 예? 아, 예……. 뭐, " 정색하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지연은 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덜떠름하게 답했다. 솔직히 지연도 궁금했다. 가인의 태도는 정말이지 이상하다. 앞의 등교시간 과 조회시간의 일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맡은 체육 수업때도 가인은 적극적 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농구 시합을 즐겼다. 최근 들어 아이들의 이지메로 단 체 운동 같은 것은 꿈에도 꾸지 못했던 그 녀석이 성심성의껏 패스까지 해가 면서 말이다. 거기다 점심 시간에는 도망치듯 옥상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식사를 해결 했던 녀석이 당당하게 교실에서 밥을 먹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사정을 알고 있는 지연에게 이것은 심각한 변화 였다. 물론 저런 변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루 아침 에 인간이 저렇게 안면 몰수하고 태도가 확 바뀔 수 있냐는 것이다. 최소한 유가인이라는 녀석이 어떤 성격의 인간인지 파악하고 있던 그녀로서 는 가인의 저런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동안 그의 문제로 전전 긍긍했던 것이 아까워서라도 절대로 이해 해줄 수 없다! ' 하지만 녀석이 변한 이유를 박 선생님이라고 아실리가……. ' 그렇게 지연이 혀를 찰 무렵, 미정이 양호실을 가로질러 하얀 커튼에 둘러 싸인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쫓는 지연의 의아한 눈빛. 그리고 미정 이 자신만만하게 침대의 커튼을 걷어 젖혔다. " 자! 여기 유가인의 변화를 알려줄 다섯 명의 증인들을 소개합니다! " 쿵 지연은 걷혀진 커튼 안으로 낯익은 학생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만 앉아 있 던 의자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정말이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 새인가 양호실의 침대에는 브루스와 테레이아, 그리고 마리와 유리, 재영이 앉아 있 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녀석들이 어느새 여기를! " 이, 이건……? " 지연은 미정과 브루스 일행을 번갈아 가리키며 입만 벙긋거렸다. 그런 그녀 의 반응에 미정은 만족한듯 한껏 의기양양해 했다. " 뭐든지 신속한게 좋은 거죠. 이런 일이 있을까봐 제가 지연 선생님이 오 시기 전에 미리 학생들을 호출한 거에요. " " ……굳이 호출했으면서 커튼 뒤에 숨겨둔 것은 왜……. " " 임팩트라는 거죠. 연출의 힘! " " ……. "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지연이 학생들을 돌아보니 그들의 표정도 가히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그 중 에서도 특히 브루스는 전신으로 불쾌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화 를 터뜨리지는 않았는데, " ……양호 선생의 부탁이니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지. " 와 같은 말로 지연이 새삼 미정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브루 스는 박미정 교사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비록 그것이 사제 관계로서의 존 경심이라기보다는 같은 괴인으로서의 동질감일지라도. " 자자, 이제 모일 사람은 모였고, 신속하게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죠. " " 회의라니……. " 모두는 낙담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미정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의욕 넘치게 사회를 맡았다. " 토론의 주제는 유가인의 갑작스런 변모, 그 이유와 앞으로의 여파에 관한 것입니다. 일단 유가인의 신변 문제는 앞의 다섯 학생 관계자 분들 만큼 잘 아는 이들이 없을 거라 생각하였기에 여러분을 증인으로 세우게 되었 습니다. 지금부터 학생 여러분은 성심성의껏 유가인의 최근 경황에 대해 서 빠짐없이 보고해주십시오. " " ……. " 뭔가 방을 어둡게 하고 형광등만 들이대면 영락없이 취조할 분위기다. 하지 만 어이 없어하는 학생들과는 대조적으로 지연은 어느 정도 납득한듯 고개 를 끄덕였다. 과연, 이 녀석들이라면 가인이 최근들어 이상해진 이유를 알고 있을지도 모 른다! 미정의 기행은 제껴두더라도 그녀가 이 다섯명을 데려온 근거 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했다. 어쨌든, 미정의 독촉으로 첫번째 증인인 성마리 19세가 얘기를 꺼냈다. " ……그러고 보니 이번 주 들어 가인의 웃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 것 같습 니다. 그전까지는 어딘가 힘이 없는,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는데……. " " 잘 웃게 되었다? " " 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동안 그…… 집단 따돌림으로 마음 고생이 무척이나 심했을텐데도. 하지만, 하지만 그는 정말 장하게도, 대견스럽게 도……. " 마리는 거기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미 정과 모두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가인의 태도가 변한 이유는 모르 겠다는 소리로구만. 그렇게 마리의 다음으로는 두번째 증인 박재영 18세가 발언권을 얻었다. " 글쎄……. 여자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는데……. " 그 말 한마디로 그는 모두의 주먹 세례를 받고 침묵했다. 다음으로 세번째 증인 테레이아 민체스터 19세는 의외로 차분하게 말했다. " 마리 선배의 말대로에요. 이번 주부터 가인의 행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죠. 애들의 비아냥거림도 흘려 넘기고- 예전이라면 분명 민감하게 반응했을텐 데- 무엇보다도 굉장히 여유가 있어요.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생긴게 아 닐까요? 다른 일들이 다 대수롭게 여겨질 정도의? "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브루스와 이유리에게로 향했다. 미정은 팔짱을 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과연. 지금까지의 증인들, 학교 관계자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면 남는 것 은 가인 군과 동거하는 당신들 밖에 없군요. 원인은 학교가 아니라 집에 있었던 건가? " " 후. 과연. " 브루스는 싸늘하게 코웃음 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 왠지모를 박력에 모 두는 긴장했다. 과연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그때문이었는가. 애송이는, " 브루스는 낮게 시선을 내리깔며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모두의 마음을 바싹 오그라들게 했다.브루스는 그렇게 좌중을 휘어잡으며 빠르게 말 을 이어나갔다. " ……최근 들어 집에서도 의욕적이다. 너무나 의욕적인지라 가사까지 자신 이 도맡아할 정도지. 덕분에 맛없는 아침 식사를 이번 주 내내 먹고 있었 다. 과연 집에서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쓸데없이 의욕적인 거였군. " " ……. " 그 말에 브루스를 제외한 모두는 고개를 숙이고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 었다. 결국 참다 못한 유리가 빼액하고 그에게 소리질렀다. "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 무슨 잘난체를 하고 있는 거야,정말! 오빠가 저러 는 건 시민 언니 때문인게 뻔하잖아! " " ……어? " 유리의 입에서 낯익은 이름이 언급되자 지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 민이라면, 한시민. 다름 아닌 가인의 보호자격인 동거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리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듯 긴장하며 유리에게 물었다. " 시민 씨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유리? 가인이 기분 좋아진게 시 민 씨 때문이라고? " " ……그럼 뭣때문일 것 같아? 오빠는 시민 언니 일이라면 캐릭터가 바뀐단 말이야. " 유리는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 가인이 없는 것 도 다 한시민을 만나러 일찌감치 집에 간게 분명했다.그렇게 유리가 속으로 '오빠, 바보!'를 수없이 외치고 있을 때, 지연과 마리가 서로를 돌아보며 고 개를 갸웃했다. 시민 씨 때문이라고 해도,무엇 때문에 가인의 기분이 좋아졌는지는 전혀 설 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시민 씨와 가인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 리인 걸까? 그때, 고심하고 있던 브루스가 알았다는듯 가볍게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 쳤다. " 그렇군! 그것때문이었나! " 그의 감탄사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또 무슨 엉뚱한 소리 를 하려고……. 하지만 이어지는 브루스의 말은 그녀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 시민이, 그 아이가 애송이에게 말하더군. 같이 결·혼·식에 가자고. " 번쩍 한순간 일행의 뒤로 번개가 내리꽂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위의 기 압이 떨어졌다. 미정은 그야말로 두눈을 반짝이며 브루스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고, 지연과 마리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얘진채 말을 더듬거린다. 재 영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흥분하다가 손수 브루스의 주먹을 얻어맞고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 겨, 결혼? 같이 결혼식에 가자고 했단 말이야? " " 후, 그렇다. "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지연에게 브루스는 확인사살을 하며 예의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브루스의 모습에 참다 못한 유리가 다시 한번 버럭 소 리질렀다. " 뭘 잘난듯이 그렇다는 거야? 제발 엉뚱한 소리 좀 하지 말아! 시민 언니 는 친구가 결혼하는데 같이 가자고 한 거였잖아! " " ……. " 안도. 그리고 피어오르는 소리 없는 살의. 지연과 마리, 유리는 그야 말로 잡아먹을 것처럼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저 인간은 분쟁의 씨앗이다! 악의로 똘똘 뭉친 귀신이다! 그런 모두의 분위기를 재미있다는듯 바라보던 미정은 원활한 회의 진행을 위해 그쯤에서 관람을 끝내고 말을 꺼냈다. " 흐음. 그러니까 결국 가인 군은 그 한시민 씨라는 분을 좋아해, 그 좋아 하는 사람과 함께 결혼식을 가게 된 것이 기뻐 지금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거군요? " " 흐음. " " 에이. 뭐, 그럼 그다지 큰 일도 아니었잖아? 다행이긴 다행인데 어딘가 맥이 빠지네. " " ……흐으음. " 일행은 실망했다는듯 어깨를 늘어뜨리는 미정의 모습에 가볍게 탄식하면서 도 저마다 안색을 풀었다. 다만 지연 만은 연태까지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같 아서 쌍심지를 돋구었다. 이렇게 자신을 맘 고생시킨 가인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 별 다른 일이 없었다니……뭐, 다행이려나. ' 그래. 다행이다. 정말로. 지연은 가볍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왠지 앞으로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 상태로 가인과 반 아이들이 예전의 사이좋은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 겠는데. " ……후. 이것으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때 브루스가 세번째로 그 특유의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다시 불안 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이제는 저 미소가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끔찍해 보 인다! 마리는 애써 떨리는 입가를 가라앉히며 차갑게 물었다. " 그건 무슨 뜻입니까? 가인에게 별 일이 없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 " 무르군. " 브루스는 혀를 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 결혼식을 같이 간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건가? 모두의 축복 속에서 한 쌍의 남녀가 행복의 길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연인 미만 친구 이상의 남녀가 그것을 보게 되지. 그 두 남녀는 그 결혼식을 보면서 무엇 을 느끼게 될까? " 번쩍 번개다. 분명히 번개가 모두의 전신을 꿰뚫고 지나갔다.소름끼칠 정도로 차 가운 전율이 여운을 남긴다. 그와 중에도 미정은 브루스에게 지지 않을 정도 로 사악한 기운을 흘리며 말했다. " 결혼이란 저토록 행복한 것인가! 저토록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부부 가 되는 기분이란 어떠할까? 우리도 언젠가는 저들과 같은 기분을 맛볼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연인 미만 친구 이상의 남녀는 더욱 더 서로의 관 계를 돈독히 하게 되고, 망설임이란 두려움은 프로포즈란 용기가 되어 서 로를 향한 마음에 불을 붙이게 되는 겁니다! " " 라는 거지. " 브루스와 미정은 서로의 손을 굳게 맞잡으며 동류로서의 오오라를 불태웠다. 그 모습에 지연과 유리는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꼴보기 싫어 죽겠네. 정말.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성마리는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졌다. " 그런, 그런 것이었습니까!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군요. 정말이지 저는 조금도 몰랐습니다! " ' 동요하고 있어! ' 지연과 유리는 순진한 마리의 태도에 혀를 차며 브루스와 미정을 노려보았 다. 그들은 사악함을 풀풀 풍기며 작정하고 마리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 솔직히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바라지.그것 은 당연한 감정이며 부끄러워할 게 못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지. " " 그래요. 사랑은 쟁취하는 거에요! 무엇보다 손에 넣을 타이밍을 놓치지 말 것! 주저하지 말고 손을 뻗을 것! 망설이지 말것! 이것이야말로 사랑 의 삼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죠! 그 누가 사랑을 인내하는 것이라고 했나 요? 그 누가 사랑을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라고 했나요? 사랑은 전쟁입니 다! 투쟁이에요! " " 혼과 혼의 부딪힘이라는 거다! 그 부딪힘에 손속을 두는 것은 어리석고 교만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전력을 다해라!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을 손에 넣는 거다! "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마리 양. 요는 가인 군과 그 한시민 씨가 같 이 결혼식에 가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것 아닌가요! " " 아, 그런 얘기라면 저도 구미가 당기는 군요. " 막 혼수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재영이 브루스와 미정의 얘기에 감화되어 그 들의 손을 붙잡았다. 삼대 일. 세 명으로 불어난 사악한 악마의 속삭임들에 마리는 갈팡질팡하며 번뇌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보다 못한 지연이 그들을 말리려고 했지만,그보다 한발 앞서 마리가 단호하 게 소리질렀다. " 시, 싫습니다! "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것에 마리는 무안해져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정했는지 그녀는 주저없이 말을 이었다. " ……저는, 쟁취라느니 투쟁이라느니 그런 대담한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 남의 사랑을 방해할 자신조차 제게는 없습니다.하지만,하 지만 제 마음을 그에게 전하는데 있어서, 그것만큼은 결코 주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 그래.무엇보다 오빠가 시민 언니와 결혼식에 가는 것을 말려봤자 되레 원 망만 받을 뿐이잖아. " 유리의 지원 사격에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브루 스와 미정, 재영은 쳇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유리는 그런 그들을 한심하다 는듯 바라보다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 그래……. 원망만 받을 뿐이야. ' 작년 오페라의 유령 공연을 보러 갔을 때가 새삼 떠올랐다. 그때도 가인과 함께하는 시민의 모습에 질투하며 둘을 훼방놓으려다 역효과로 가인과 사이 만 나빠지고 말았다. 그 후로도 몇번이나 같은 일의 반복. 이제는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 오빠의 마음을 방해해봤자 그의 미움만 받 을 뿐이라는 것을. 오빠는 너무나도 시민 언니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 렇기에 지켜만 봐야한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인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그 의 사랑을 이해하면서도 응원해줄 수는 없다. 이 얼마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일까. 유리는 자괴감을 떨쳐내기 위해,옆에서 계속 잠자코 있던 테레이아에게 말 을 걸었다. " 오늘은 웬 일로 이렇게 조용한 거야? " " ……. " 그녀의 말을 테레이아는 평소처럼 되받아치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무관심 한 얼굴로 유리를 바라보다가 곧 지연에게 말했다. " 선생님, 이제 저희에게서 볼 일은 다 보신 건가요? " " 어? 으응. 그래. "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요. " 테레이아는 지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소 란스럽던 양호실이 조용해진다.유리는 이해할 수 없는 테레이아의 행동에 자 신도 모르게 그녀의 치마자락을 붙잡고 말았다. 테레이아의 푸른 빛 눈동자가 유리를 내려다 본다. " 왜 그래, 테레이아? 무슨 일 있는 거야? " 유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이상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테레이 아가 이런 행동을 할리가 없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자신과 말다툼을 하면서 앞의 소란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을 것이다.언제나 자 신이 가인을 가장 좋아한다며 모두를 도발했던 그녀가……. " 아니, 아무 일도. " 테레이아는 차분하게 유리의 손을 떨쳐내며 양호실 문으로 향했다. 그 뒷모 습을 모두가 멍하니 바라본다. 문이 열리자, 곧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한 남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다. 낯선 얼굴의 2학년. 그는 마주 나오는 테레이아 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다 끝났어? " " 응, 많이 기다렸지? " " 아냐. 아냐. 오늘부터 함께 하교 하기로 했잖아. 이정도 기다리는 것쯤이 야 일도 아니지. "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양호실 안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유리와 마리, 브 루스를 힐끔 응시하던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테레이아의 어깨에 손을 올 렸다. 그 모습에 유리와 마리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 자, 갈까? " " 응. " 남학생은 여유롭게 테레이아의 어깨에 손을 둘렀고, 그녀는 순순히 그를 따 라갔다. 그렇게 두 남녀가 문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일행은 누구 하나 말문 을 열지 못했다. " 하하하하. 리리스, 봤어? 그 표정들 봤냔 말이야? 하하하하. " 새로운 테라의 육체를 얻은 카이 브릿드는 뭐가 그리도 유쾌한 건지 연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의 곁에서 조용히 걷고 있던 테레이아, 리리스는 무 표정한 얼굴로 일관할 뿐이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거리를 붉게 물들 인 노을빛을 바라보며 물었다. " ……한시영, 그 남자에 대해서는 알아봤어? " " 흐응. 그런 얘기는 조금 있다가 해도 되지 않아? 집에 가서 밥이라도 먹 으면서 천천히 얘기하자고. 일단 이 테라의 육체를 원활하게 움직이려면 기본적인 영양 공급이 필요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왕 가는 김에 마트 에 들려서 장이라도 볼까? 리리스는 뭐 먹고 싶어? " " 카이. " 리리스는 꾸짖듯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 부름에 카이는 정색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 어젯밤, 시영과 테라의 군대 사이에서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야. " " 테라의 군대? " " 뭐, 지구 방위군이라느니. 피스메이커와는 별개의 기관인 녀석들. 어쨌든 그 지구 방위군과의 싸움 도중, 녀석이 '그것'을 사용했어. " 그 말에 리리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 손을 가 져가며 말했다. " 어젯밤 차원 진동의 격통은 그때문이었던가. 잘도 지금까지 그런 것을 숨 겨두고 있었군. " " 네이 안데르슨도 한몫했겠지. 그 기분 나쁜 테라 녀석과 한통 속이 되어 우리의 눈을 피했던 거야. 흥, 그 자식. 대체 무슨 생각으로……. " 카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 투덜거렸다. 한시영, 그 테라 인은 전부터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자신들과 별개의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마치 요르문간드의 힘이 약해지기를 기다린듯한 활발한 움직임이다. " 쳇, 하이에나 같은 녀석이야! 꼬리를 내린 개처럼 굴때는 언제고 이제와 서 제멋대로 구는 거야? 역시 녀석을 받아들이는게 아니었어. 녀석은 위 험해! " " 진정해, 카이. 어차피 그의 이탈은 예상했던 일이잖아? 그리고 그가 완전 히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도 아니야. 단지 이번에는 자신이 나서겠다 고 하는 거지. " 리리스의 말에 카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나선다고? " " 그래. 그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 드디어 숨겨둔 카드를 꺼내기 시작했단 말이야. 아마 그의 목표는 옴팔로스의 열쇠겠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오 라의 주인을 각성시킬 속셈일 거야. " " 흥. 더딘 각성을 보다 못하고 직접 손을 쓰시겠다? 이거 참 놀라워라. 기 분 나쁠 정도로 능동적이시네? 이제는 아주 대놓고 우리를 무시하는군. " 카이는 비아냥 거리면서 리리스를 돌아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흥분한 자신과는 달리 리리스는 차분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노을 빛에 물든 그 얼굴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카이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 ……괜찮은 거야, 리리스? 이대로 있어도? " " 응? 무슨 소리야? " 리리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날이 선 목소리로 되물었다.그 언짢해 하는 기색에 카이는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 아, 아니. 그러니까∼ 리리스가 예전에 공공연하게 그랬었잖아? 오라의 주인은 내 먹잇감이다. 아무도 건드리지 말아라, 하고. 그런데 한시영,그 인간이 선수를 치겠다는데 괜찮은가 해서. " "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 리리스는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그 모습이 어딘가 자조적이었는지라 카 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리리스는 그렇게 카이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도 느끼 지 못하며 멍하니 대꾸했다. " 그다지 상관 없지 않아? 누가 오라의 주인을 각성시키든. 어쩌면 같은 오 라 능력자끼리는 정신 장벽이 완충 되어서 서로를 각성 시키는데 더 유리 할지도 모르지. 실제로도 오라 능력자의 잦은 접촉으로 각성한 케이스가 있었잖아? 저 마인드 디텍터같은……. " " 흐응. " 카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지 만 굳이 리리스의 속내를 헤집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카이가 납득하는 모 습을 보이자, 리리스는 그에게 들키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 누가 각성을 시키든, 그런 것은 상관없어. ' 어차피 나는……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 가인을 위해, '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되니까. Ｔo Ｂe Ｃontinued… ▶256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03 :: :: 45968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02 - Ｂy Ｎext Ｎeo =-=-=-=-=-=-=-=-=-=-=-=-=-=-=-=-=-=-=-=-=-=-=-=-=-=-=-=-=-=-=-=-=-=-=-= " 이러다 늦는 게 아닐까요? " 화창한 6월의 일요일 아침. 가인은 모처럼만의 정장을 꺼내 입고 시민과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를 몰고 있는 것은 시민의 친구 하유정이었고, 또 차는 교통체증의 한가운데에 놓여있었기에 드라이브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뒷좌석에서 가인이 꼼짝 달싹을 안하는 전방의 차들을 바라보며 푸념하자, 운전석의 유정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 그러게요. 웬 인간들이 이리도 차를 끌고 나왔는지. 주말이면 그냥 집에 처박혀 낮잠이나 잘 것이지. " " 괜히 다른 사람들 탓하지마. 이것도 다 네가 늦장부렸기 때문이잖아. " 보조석에 앉아있던 시민이 노기서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질책에 유정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 뭐, 나는 늦고 싶어서 늦은 줄 알아? 집까지 몸소 데리러 가줬는데 되게 야박하게 구네. " " 애초에 식장으로 바로 가겠다던 우리를 굳이 같이 가자고 붙잡은 게 누구 였더라? " " 우와- 그래서 전부 내 탓이라는 거야? 흑흑, 가인 씨. 이것 봐요. 친구 결혼식 가는데 대충대충 하고 갈수 없어서 치장 좀 하느라 늦은 건데 이 렇게 구박하는 거 있죠? " 유정은 우는 시늉을 하며 가인에게 하소연했고,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시 민을 만류했다. " 화 푸세요, 시민 씨. 유정 씨 덕분에 이렇게 차도 얻어타고 가는 거잖아 요. 고의로 늦은 것도 아닌데. " " ……저 화난 거 아니에요. 단지 친구 결혼식에 초대받은 건 이번이 처음 이었는데 지각하게 될까봐 속 상한 것 뿐이에요. " 시민은 새침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가인과 유정은 고소했 다. 그게 화났다는 거에요, 시민 씨. 어쨌든,그렇게 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차들이 서서히 빠질 기미를 보였고 유정은 잽싸게 빈틈을 놓치지 않고 옆 차선으로 끼어들었다. 덕분에 뒤의 차 가 시끄럽게 클렉션을 울렸고, 유정은 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 레이디 퍼스트도 몰라, 아저씨! " " ……. " 그 후로도 유정의 아슬아슬한 끼어들기는 계속되었고 가인과 시민의 말수는 점점 줄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벨트를 있는 힘껏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 부디……무사히 갈 수 있겠지? ' 형이 그녀를 따라간지도 5년이 지났다. 세월은 흘러 2020년 2월. 나, 한시민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 지난 6년간 여러모로 힘쓴 학생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며, 잠시 후 졸업 장 수여식을 거행하겠습니다. '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귓가로 흘려보내며 나는 학부모들이 앉은 자리를 계 속해서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가 찾는 사람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아니. 발견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어떻게 LA에 있을 형이 내 졸업식에 올 수 있 단 말인가?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창공. 하지만 내 마음은 우 울하기만 했다. 형이 그 여자, 이네스 라비에르를 따라가는 조건으로 나는 계속해서 한국에 머물 수 있었다. 모든 생활비를 지급받으며,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학교에 다 녔다. 처음에는 보호자를 붙여주겠다던 그들의 요구를 한사코 거절했었다.형 을 데려간 이들에게 감시를 받는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싫었던 것이다. 형이 LA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태평하게 학교나 다 녀야한다니. 처음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형과 헤어져 나 혼자 살아가 야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루도 형이 걱정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하지만 매일마다 걸려오는 형의 화상 전화와 이메일에 나는 곧 안심할 수 있었다. 전화로 볼 수 있었던 형에게서는 일부러 밝은 척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지만, 적어도 무사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형은 LA의 연구단지에서 이것저것 의사들에게 검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 무 슨 검사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별 거 아니라며 이런 검사를 하는 것만 으로도 돈을 벌 수 있으니 행운이라고 웃어넘겼다. 그리고 매일 전화를 끊기 전에 형은 다음과 같이 당부했었다. ' 시민아. 나는 여기서 힘낼테니 너도 거기서 힘내는 거야. ' 그 말이 내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원동력이 되 어주었다. 형이 LA에서 고생하면서까지 나를 한국에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니 나에게는 형의 몫까지 생활해야할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형과 있을 때보다 더욱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고,노래를 배 웠다. 언젠가 형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자랑스럽게 그를 맞이하기 위해.형이 고생한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 축하한다! ' ' 졸업 축하해! ' 친구들은 자신의 부모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수많은 꽃다발을 받으며 즐거워 했다. 난 그들의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교문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몇몇 친구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는 것도 거절하며 마치 도 망치듯 교문으로 향했다. 저 행복해 하는 인파 사이에 끼어있을 자신이 없었 던 것이다. 그동안 참아왔던 형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말았다. 집에 가서 형의 전화나 기다릴 생각이었다. ' 여어,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시나? ' 그때 막 교문을 나오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뒤돌아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교문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는 검은 코트의 소년은 나에게 너 무나 낯익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놀란 내 표정을 재미있다는듯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나 에게 건네주었다. ' 졸업 축하한다, 시민아. ' 그 너무나도 부드러운 목소리. 너무나도 따뜻한 눈빛에 나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형의 손을 떠난 꽃다발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 형! ' " 자자! 빨리! 빨리! " 유정의 차가 도착한 곳은 17구역에 위치한 한 천주교 성당이었다.하얀 성모 상이 보이는 성당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유정은 서둘러 시민과 가인을 이끌 고 성당 건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이끌리면서도 가인은 낯선 성 당의 모습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째서 결혼식장에 가지 않고 여기로 온 것일까? 이런 데에서도 결혼식을 할 수 있는 건가? 그런 가인의 궁금증을 눈치챘는지 시민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 우성이와 수미는 천주교 신자에요. 교의 신자들은 본당의 신부님을 찾아 가 필요한 준비와 예식에 대한 지도를 받으면 혼인미사라고 하는 결혼식 을 할 수 있죠. " " 아! 알 것 같아요. 그 외국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결혼식 말이죠? " " 뭘 속삭이는 거야, 두 사람! 지금 그렇게 느긋해 할 때가 아니라고! " 앞서 뛰던 유정이 시민과 가인에게 버럭 소리질렀다. 그 바람에 조용해진 시민과 가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 때문에 늦은 건데, 정말……. 그렇게 성당 건물로 들어서자, 막 예배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그 출입구 근처에서 안절부절하는 신랑, 신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민의 고교 동창이었던 도우성과 이수미였다. 그들은 유정 일행을 발견하 자 다급히 소리쳤다. " 하유정! 왜 이렇게 늦은 거야! " " 하마터면 이대로 미사 시작할 뻔 했잖아! 역시 너에게 맡기는 게 아니었 어!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그렇게 큰 소리 떵떵 치더니! " " 자자자! 야단은 나중에 들을 테니까 얼른 미사 시작해! 시민아, 어서 가 인 씨 데리고 우성이와 수미를 따라 들어가! " " 뭐? " 난데 없는 유정이의 지시에 가인과 시민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 다.어째서 우성이와 수미가 우리를 기다리느라 결혼식을 하지 못한 거지? 그 냥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닌가? 거기다 우리가 왜 저 둘을 따라가야 하는 거 야? 그런 여러 가지 의문을 뒤로 하고, 유정은 가인과 시민을 떠다 밀다시피 예 배실로 밀어넣었다. " 에잇! 뭘 꾸물거리는 거야, 정말! " " 유, 유정아! " 가인과 시민이 예배실로 들어서자 신랑 신부 측의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을 제대 측으로 데려갔다. 가인과 시민은 이 갑작스런 전개에 영문을 모라 유정 을 돌아보았다. 유정은 당황하는 그들에게 넉살 좋은 미소를 보내며 소리없 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 그때 해설자가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 두분이 오늘 신랑 측 신부 측 증인들이시죠? " " 예? " 증인?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안이 벙벙해진 그들을 해설자는 각각 제대 앞에 배치된 의자에 서둘러 앉히며 말을 이었다. " 두 분은 여기 앉아 계시다가 제가 나중에 '이어서 혼인 미사가 거행되겠 습니다. 신랑 신부의 증인되시는 분들께서는 제대 앞까지 나오셔서 신랑 신부 양 옆에 서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 그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 러다 신랑 신부가 예물 교환을 하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 되요. " " 자, 잠깐만요? 증인이라뇨? 그게 무슨 소리에요? " 결국 참다 못한 가인이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에 해설자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듯 인상을 찡그렸다. " 신랑 신부의 혼인 동의 및 서약을 지켜보는 증인 말입니다. 신랑 신부가 각자 당신들을 지목했는데 그런 것도 모르셨습니까? " " ……! " 가인과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식장 입구 쪽에 있는 우성과 수미, 유정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당황한 모습이 재미있어 죽겠다는듯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은 시민이 쓴 웃음을 지으며 가인에게 말했다. " 정말이지 못 말리는 애들이라니까요. 어떻게 자기들 결혼식에 이런 장난 을 할 수 있는 건지. " " 장난……요? " " 예. 아무래도 우리가 우성이와 수미의 결혼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 게 되었네요. " 그 말에 가인은 망연자실하게 식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주목하 는 수 많은 하객들의 시선에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이거 어처구니 없는 일 에 말려들었군……. 그렇게 심란한 마음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해설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예배실에 울려퍼졌다. 《지금부터 신랑 도우성 군과 신부 이수미 양의 혼인미사 및 혼인성사가 거행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혼인성사 를 통해서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제 두 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대전에서 엄숙하고 성스러운 혼인을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가인과 시민은 다급히 각각 신랑 신부 측의 자리에 가 앉았다. 형이 날 찾아온 것은 큰 실험을 앞두고 받은 휴가때문이라고 했다. 때마침 내 초등학교 졸업식을 하는 시기에 휴가라니,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한 마디 얘기도 없이 온 형에게 심통을 부렸다. ' 올 거면 온다고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네. ' ' 하하. 놀래켜주고 싶었던 거야. 덕분에 재밌었지? ' ' 하나도 재미없어. ' 내가 사는 자택에 와서 형과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가벼운 말다툼을 했다.그 것이 너무나 유쾌하고 즐거웠는지라 입가에서 연신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이렇게 형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새삼 그동안 형의 빈 자리가 얼마나 컸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형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 잘 지내고 있었어? 아픈데는 없고? ' ' 뭘, 새삼스럽게 그래? 매일 전화로 얘기했잖아. 아무 일도 없다고. ' ' 그래도 전화만으로는 알 수 없는걸. ' 내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자 형은 어쩔 수 없다는듯 웃으며 내 머리를 쓰 다듬어 주었다. ' 정말로 괜찮았어. 무엇보다 이네스와 함께 있는 걸. 그녀는 세심한 사람 이라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어. 정말 감사하다고 삼만 배를 해도 모자 랄 판이야. ' ' ……. ' 그 말에 내 표정이 잠시 우울해졌다. 이네스 라비에르. 형은 그 여자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사람', '그 여자'라는 식으로 경계하는 기색이 완연했는데. 그러던 것이 어느덧 이리도 친근한 사이로 변해버렸다. 아마 나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형과 그녀의 사 이에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형은 그녀를 좋 아하는게 분명했다. 형이 그녀의 이야기를 할때마다 너무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질투했었다. 나에게서 형을 빼앗아갔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아 그녀를 미워했었다. 하지만 화상 전화를 통해 그녀와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는 형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여자다. 적어도 형을 성심성의껏 보살펴 주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더 형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자 질투는 눈녹은듯이 사라져갔다. ' 그런데 실험이라고? ' 나는 형이 큰 실험을 앞두고 휴가를 받았다는 얘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에대 한 것들을 물었다. 실험이라니. 지금껏 검사라는 말은 했어도 실험이라고 하 는 표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람에게 실험을 한다는 말일까? 형에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 무슨 실험이야? 형, 형은 나에게 LA에서의 일들을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 었지?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응? ' ' 시민아, 노래 불러줘. ' 형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부탁했다. 역시 말하기가 싫다는 걸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렇게 형과 만나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 얘기 돌리지마! ' ' 시민아, 있잖아? 나 말이야. 줄곧 네 노래가 듣고 싶었어. LA에서 생활하 면서도 네 너서리 라임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어. ' ' ……. ' 나는 얼굴을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란 말이야, 형. 결국 나는 형의 부탁을 못 이기고 노래를 부르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런 나를 형은 침대에 엎드려 턱에 손을 괸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형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5년 만이었다. 옛날에는 너무나 당연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노래하려니 쑥스러운 것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실수를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형한테 다시 노래를 불러주 는 날만을 꿈꾸며 그토록 열심히 연습을 해오지 않았던가. 형의 기대에 반드 시 보답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정신을 집중하여 노래에 마음을 담았다. I spy Tom Thumb. 엄지 손가락 톰을 보네. Tom Thumb in the wood. 엄지 손가락 톰은 숲 속에 있네. I spy Robin Hood. 로빈 훗을 보네. Robin Hood in the cellar. 로빈 훗은 지하실에 있네. I spy Cinderella. 신데렐라가 보이네. Cinderella at the ball. 신데렐라는 무도회에 있네. I spy Henry Hall. 헨리 홀이 보이네. Henry Hall at his house. 헨리 홀은 우리 집에 있네. I spy Mickey Mouse. 미키 마우스를 보네. Mickey Mouse in his cradle. 미키 마우스는 요람에 있네. I spy Betty Grable. 베티 그레이블을 보네. Betty Grable is a star. 베티 그레이블은 스타. S-T-A-R ' 시민아? '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져 노래를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신비로운 느낌. 내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조 차 망각해버리고 스스로 내 노래의 청취자가 되어버렸다. 영원토록 이 순간 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노래가 끝나지 않기를……. ' 시민아! ' 하지만 다급히 내 어깨를 흔들며 나를 부르는 형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내 변화에 당황하고 말았다. 내 몸에서 은은한 노란색 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그 빛을 따라 내 금색의 머리카락들이 바 람 한점 없는 방 안에서도 하늘하늘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점점 약해져가는 노란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마치, 마치 형 의 '그것'과 같은……. ' 형, 이게 대체……. ' ' 시민아, 내 얘기 잘 들어! ' 형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하게 나에게 소리쳤다. ' 다시는 그 힘을 쓰지마! 다시는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돼! 알겠니? 그것은 지금까지의 네 평온을 빼앗아 갈거야! 네 생활을 무너뜨리게 될 거야! 절 대로 사용해서는 안돼! 절대로! ' ' 혀, 형……. ' 나는 겁먹은 얼굴로 움츠러들었다. 형에게 붙잡힌 어깨가 아파왔다.이게 그 렇게 잘못한 일인가? 평온을 빼앗아 간다니? 내 생활을 무너뜨리게 될 거라 니?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단지 무서울 뿐이 었다. 그렇게 내가 몸을 떨자 형은 그제서야 흥분한 기색을 가라앉히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고개를 들자 형은 여느 때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미안. 소리쳐서. 그렇다고 형이 시민이를 야단친게 아니야. 단지 조금 놀 랐을 뿐이니까. 네 잘못이 아니니까……. ' ' 으응. ' ' 대신 형하고 약속해줘. 다시는 그 힘을 쓰지 않겠다고. ' ' ……알았어. ' 어차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던 나였다. 나는 형이 이토록 화낼 일이라 면 두번 다시 안하기로 마음먹었다.형이 말한 평온을 빼앗긴다는 게 무슨 뜻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몰라도 상관 없으리라. 그렇게 형의 새끼 손가락에 내 새끼 손가락을 걸자 형은 기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 우리는 정말이지…… 영락 없는 형제구나. ' ' ……? ' 내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이자 형은 부드럽게 날 안아주었다. ' 시민아, 우리 형제는 축복 받았어. 그러니까…… 서로를 소중히 해야 돼. 알겠니? ' ' 그런 건 형이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 나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소중히 해야 한다. 우리는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같은 피를 가진 쌍둥이 형제니까. 유일한 혈육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잠자는 시간마저 줄이며 남 은 휴가를 보냈다. 그리고 형이 LA로 돌아간지 채 한달이 지나지 않은, 3월 9일. 대재해가 일어났다. 《이어서 혼인성사가 거행되겠습니다. 신랑 신부의 증인되시는 분들께서는 제대 앞까지 나오셔서 신랑 신부 양 옆에 서주시기 바랍니다. 신랑 신부 는 일어서십시오.》 긴 혼인 미사가 끝나고 혼인 성사가 시작되었다. 가인과 시민은 해설자의 지시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제대 앞의 신랑 신부에게로 다가갔다. 가인은 그야말로 쿵쾅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우성의 옆에 섰다. 수미의 옆에 선 시민을 힐끔 쳐다보니, 그녀는 자신에 비해 훨씬 차분한 모습으로 예식에 임하고 있었다. ' 으아. 떨린다. 떨려. 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 너무 긴장해선지 앞의 지루했던 혼인 미사도 어떻게 지나갔는지 도통 기억 이 나지 않았다. 증인이라고 해봐야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신랑과 신부가 혼인에 동의하는 것과 서약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지만, 이 특별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 자신과 시민이 대표로 나섰다는 것이 너무나 떨렸다. ' 이건 꼭……. ' 시민 씨와 내가 결혼하는 것 같은…….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앞의 우성과 수미 대신 웨딩 드레스를 입은 자신과 시민을 상상했다. 시민 씨의 웨딩 드레스 차림이라니……. 사,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 안돼! 망상은 금물이다, 유가인! 지금은 예식에 집중해! ' 가인은 상기된 얼굴을 가라앉히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정말이지 이놈의 망 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 신랑 도우성 스테파노와 신부 이수미 실비아는 아무의 강박도 없이 완전 한 자유의사로 서로 혼인하려고 결정하였습니까? " 주례 사제의 질문에 해설자가 먼저 우성에게 마이크를 가져다 주었다. 우성 은 입가에 마이크가 오는 순간, 그야말로 귓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소리쳤 다. 《예, 그렇습니다-!》 ' 으아∼ ' 그 대답이 얼마나 컸던지 예식장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귀를 막을 뻔했다. 하지만 그런 우렁찬 신랑의 대답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시민도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해설자가 이번에는 수미의 입가에 마이크를 가져가자,그녀는 새초롬하게 대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신랑에 비해 너무나 평범한 신부의 태도. 그게 오히려 대조가 되어 웃음을 자아냈다. 사제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주례를 계속했다. " 두 분은 결혼 생활을 통해서 일생 서로 사랑하며 서로 존경하겠습니까? " 다시 마이크가 우성에게로 향한다. 우성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예-엣! 일생 서로 사랑하며 서로 존경하겠습니다앗-!》 하고 전 보다 세 배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신랑의 대답에 하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그 열렬한 반응에 우성 은 의기양양하게 손을 들어 답례했다. 자, 이번에는 신부의 차례. 하지만 수 미는 이번에도 평범하게, 《예, 그렇습니다.》 하고 일관된 자세를 지켜나갔다. 그런 신부의 태도에 사진기사를 따라 다니 며 디지털 카메라로 신랑 신부를 찍어대던 유정이 쓴 웃음을 지었다. 조금쯤 은 신랑의 반응에 호응해줘도 좋으련만……. 그리고 사제의 마지막 질문이 시작되었다. " 두 분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실 자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가 르침과 교회의 법을 따라 그들을 올바로 교육하겠습니까? " 《예에, 그렇습니다…….》 마이크가 오자 대번에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하는 우성. 그 대답에 결국 하 객들은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우성의 모습이 너무 나 해학적이었던 것이다. 수미도 시민도 가인도 유정도,심지어는 근엄한 주례 사제도 웃음을 참지 못 했다. 간신히 웃음을 억누르며 수미가 우성과 동일한 대답을 하자 사제는 헛 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 두 분은 거룩한 혼인의 계약을 맺으려는 것이니, 서로 오른손을 잡고 천 주의 어전과 교회 앞에서 두 분의 합의를 고백하십시오. " 《나 도우성 스테파노는 당신을 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 속합니다.》 《나 이수미 실비아는 당신을 내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 로 약속합니다.》 " 두 분이 교회 안에서 고백한 이 합의를 주님께서 친히 견고케 하시고 풍 부히 강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할 것입 니다. 아멘. " " 아멘- " 사제의 말이 끝나자 하객이 아멘을 복창하며 박수를 쳤다. 가인과 시민, 유 정도 손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런 모두의 축복 속에서 우성과 수미는 서로에게 반지를 축성하며 교환했다.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 소는 그들의 손에 끼워진 반지 만큼이나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민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 행복해야 해, 우성아. 수미야. ' 그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하지만 그 눈물은 그녀의 마음 만큼이나 순수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시민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저들처럼 행복해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동정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시민은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 최저야. 나는……. ' 친구의 행복을 질투하는, 그저 추하고도 더러운 인간일 뿐이었다.그런 인간 에게는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었다. 시민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 를 들어 담담히 우성과 수미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짓고 있는 미소가 이토록 무거울 수가 없었다. " ……. " 그리고 그런 시민을 가인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LA에서 대재해가 일어난 당시,형을 데려갔던 기관의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형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몇 마디의 말로 형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형이 죽다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형이! 노래를 들려 달라고 조르던 형이! 나에게 미 소를 지어주던 형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런 건 납득할 수 없었다. 죽어도 인정 안할 테다! 형의 시체를 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형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서 받은 생활비를 끌어모아 당장에 LA로 날아갔다. 그리고 직 접 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런 생명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벽하게 파괴되어버린 LA의 크레이 터를. 그 대재해의 잔해를 눈 앞에 마주 하고서야 내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이 황량한 대지에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형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느꼈다. 공항에서 나에게 다시 오겠다며 손을 흔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설마, 설마 그것이 형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처음에는 기가 막혔고, 다음에는 분노했으며, 마지막에는 슬픔만 남았다. 형이 더 이상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슬픔! 나는 삶에 의욕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형이 없는 세상 에서, 아무런 미련 조차 없는 세계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쌍둥이는 한쪽이 아프면 다른 한쪽이 아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형이 죽을 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저 폐허 속으로 그가 사라질 때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그런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라고 여 겨졌다. 그것이 불씨가 되어 자살 충동이 샘솟았다. 죽어라. 너는 살 가치가 없어. 죽어도 마땅한 죄인이다. 언제나 형의 희생 으로만 살아온 주제에 이번에도 혼자 살아남았어. 네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형을 만날 수 없다면 저 세상에서 라도 만나고 싶었다. 거기에 가능성이 있다면 거기에 걸어보고 싶었다. 형이 보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살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나는 이토록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는 걸까? -내 동생이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해줘.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생 활을 하도록 보장해줘. 형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바래왔던 소원. 그래. 언제나 형은 내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왔다.내 평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것이 형의 삶이자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내가 자살을 해버리면, 여기서 내 삶을 포기해버린다면…… 이런 보 잘 것 없는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형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형의 노력은 누구에게 보상받는 거지? 형의 삶은, 그냥 헛된 것이 될 뿐 아닌가. ' 으으으, 으아아아아아- ' 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형을 잃은 슬픔에 오열했다. 나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형을 따라갈수도 없었다. 형이 없는 세상에서도 홀로 살아가야 만 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큰 절망이며, 좌절이며, 동시에 형이 나에게 남겨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나는 그 선물을 팽개칠 자신이 없었다. " 아아, 이제야 끝났네요. " " 후후. 수고했어요, 가인 씨. " 26구역의 공원. 결혼식을 무사히 끝내고 신랑 신부를 보낸 가인과 시민은 공원 벤치에 앉아 지친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들과 동행했던 하유정은 우성과 수미를 김포 공항까지 웨딩 차로 데려다 주기 위해 작별을 고했다.아 마도 가인과 시민이 단 둘이 되도록 신경을 써준 것이리라. 가인의 엄살에 시민은 미소하며 근처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그에게 건네 주었다. 가인은 황송스럽다는듯 음료수를 받아 시원스레 그것을 들이켰 다. " 화아- 시원하다! " 하지만 급하게 들이키느라 그만 입고 있던 정장에 살짝 음료수를 흘려 버렸 다. 그것을 본 시민이 자신의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직접 가인의 정장에 묻은 음료수를 닦아주었다. " 가인 씨, 조심해야죠! 아아, 자국 생기면 안되는데. " " 아, 죄, 죄송합니다.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시민이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 다. 시민은 그런 가인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화를 냈다. " 흐응. 결국 빨래하는 사람은 저란 말이죠? 가인 씨야 세탁기 근처는 가지 도 않을테니. " " 아, 아뇨!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에요! 맹세코! 그, 그리고 가사 일을 도우 려고 해도 시민 씨가 손도 못 대게 하니까……. " " 후후. 장난이에요, 정말. 그렇게 대번에 정색해버리니 장난도 못치겠네요. " " ……아아? 자, 장난요? " 가인은 그제야 안도하며 어색하게 웃었다.그런 가인의 모습이 재미있다는듯 시민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가인 은 작게 한숨을 쉬다가 곧 이런 생각을 해버렸다. 왠지 이렇게 그녀와 티격태격하는게 꼭 연인 사이 같다는……. ' 또 망상이냐! 그만두자, 유가인. 연인 사이는 무슨 연인 사이야! ' 괜히 헛된 기대했다가 또 혼자서 실망하려고. 가인은 헛기침을 하며 두근 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는지 시민은 조심스럽게 가인의 표 정을 살폈다. " 가인 씨, 화났어요? 제가 장난쳐서? " " 예? 아, 아뇨. 화는 무슨. " " 에이. 화난 거 같은데요, 뭘? " 시민은 가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하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 다. 그 바람에 애써 가라앉히던 가슴도 도로아미타불.가인은 다시 얼굴이 붉 어졌다. " 사과할테니까 화 풀어요. 예? " " 정말 화 안났어요! 정말! 진짜에요! " " 거짓말. 화난 사람처럼 안색이 붉어졌는 걸요? 가인 씨가 화 안풀면 이렇 게 계속 잡고 있을 거에요? " 으아! 안색이 붉어진 건 시민 씨 때문이잖아요! 가인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며 속으로만 비명을 질렀다. 자꾸만 자신에게 보 채듯이 달라붙는 시민의 태도에 그야말로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러면 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이대로 그녀가 자신을 계속 붙잡아줬으면 하는 바램 도 있었다. 아, 잠깐 자기 혐오. " 와, 저기 두 사람 봐. " 그때 가인과 시민이 앉아 있던 벤치를 지나가는 한 남녀 커플이 그들을 바 라보며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말이 귓속말이지, 가인과 시민에게도 들릴 정도로 그 소리가 컸다. " 찐하다, 정말. 저거 지금 사귄다고 우리에게 과시하는 건가? " "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 뭘. 괜히 심술부리지 말고 우리나 잘 하면 되지. " " 누가 심술 부렸다는 거야? " " 자자. " 그 커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사이좋게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색하게 벤치에서 자리를 띄워 앉은 가인과 시민이 있었 다. 가인은 슬그머니 시민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답지 않게 붉어진 안색이다. 그 바람에 괜시리 가인도 얼굴이 붉어졌다. '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 고맙다, 지나가던 엑스트라 커플! 가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뭔가 결혼식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과 시민을 밀어주는 흐름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쩌면 하늘의 계시가 아닐까? 이대로 시민 씨에게 고백해보라는……. ' 고, 고백이라니! ' 망측한 녀석! 겁도 없는 녀석! 유가인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자신 의 망상에 주먹으로 머리를 두들겼다. 그 난데 없는 자해에 시민이 놀란 눈 으로 그를 돌아보았지만,가인은 그녀의 시선도 느끼지 못하며 고민에 빠졌다. ' 하지만……어쩌면 이건 다시 없을 기회인지도 몰라. ' 최근 들어 시민 씨와의 관계, 느낌이 좋았다. 거기다 예의 길조 사건 때의 어색함도 사라졌고, 무엇보다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간 점점 그녀 에게 고백할 기회가 사라질 것 같았다. 지금이 적정기였다. 더 늦장 부렸다간 시민 씨와 완전히 가족같은 관계가 되어버릴테고. 이르지도 늦지도 않는 타이밍! 문제는, ' 시민 씨는 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데……. ' 그러나 가인이 아는 한도 내에서는 시민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본 적 이 없었다. 그녀는 피스메이커의 일과 집안 일, 거기다 피아노 학원 일 까지 하느라 특별히 연애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누구일까? 그 좋아하는 사람이란 대체……. " 가인씨? " 하, 그렇다면 영원토록 시민 씨에게는 고백하지 못하겠구나, 유가인? 시민 씨가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고백하지 못한다고? 그런 웃기는 말이 어디있냐? 어차피 시민 씨를 좋아하는 건 너의 마음인 거잖아. 네가 시민 씨를 사랑하 잖아? 그렇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니야? 이런 네 마음을 시민 씨에게 고백하지 못한다는 건 결국 두렵기 때문이지. 시민 씨에게 고백해서 차이는 게 두려운 것 뿐이야, 네 녀석은. " 가인 씨. " 그렇지 않아! 부, 분명 두렵기는 해. 만약 고백해서 차인다면 다시는 지금 처럼 시민 씨와 지내지 못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시민 씨와의 동거생 활이 날아가버릴 수도 있지. 하지만 일방적으로 내 마음만 강요해봤자 시민 씨가 부담스러워할 뿐이잖아? 아마 피스메이커 일을 하면서도 내내 마음에 걸려하실 거야. 난 그렇게 시민 씨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게 두려운 거야! 그 편이 차이는 쪽보다 백배는 더 두렵다고! " 가인 씨, 제 말 안 들리세요? " 흥. 가소롭기는. 그건 단지 허울 좋은 변명일 뿐이야. 뭘 거창하게 이것 저 것 들먹이는 거야? 단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게 두려울 뿐이면서. 고백했 다가 차이면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겠지? 시끄러워! 절대로 그렇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그런 거야! 절대로! " 가인 씨! " 그때 가인의 바로 곁에서 터져나오는 시민의 외침에 가인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던 두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였 다. 그곳에는 심통이 난 시민이 팔짱을 끼며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아, 시민 씨. 역시 화난 모습도 예쁘다, 정말로……는 아니고! " 죄,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만.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에요? 바로 곁에서 부르는 목소리도 들 리지 않을 정도라니. " " 아, 그게……그러니까 아까 결혼식을 봤잖아요? 그 우성 씨와 수미 씨, 너 무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서……. 에, 또 그게 과연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 다 보니 그만. " 뭐야, 이거……. 말 되는 건가? 가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이 늘어놓은 허술한 변명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일단 그럴싸하게는 들렸는지 시민은 대번에 화난 표정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 그랬군요. 하긴 그 두 사람, 정말 행복해보였죠? " " 그, 그래요. 하하, 하하하하. " 그럭저럭 넘어갔나. 가인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민은 부러움이 한가득 담긴 표정으 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 과연 어떤 기분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서로의 마음을 약속하는 기 분이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해서 평생을 살 아가는 거에요. 외롭지 않게, 서로를 지켜주고 의지하면서 그렇게 계속……. " " ……. " 가인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얘기를 하고 있는 시민 의 표정이 너무나 쓸쓸해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보여 가 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 시민 씨도, 결혼하시면 되잖아요? " " 예? " "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렇게 평생동안 서로를 아껴주고, " 시민의 손을 잡은 가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민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 보았다. 가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서글픈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 보 고 있었던 것이다. " 시민 씨도 그렇게 될 거에요, 반드시. 어째서 자신은 그리 될 수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 거에요? " " ……! " 그 말이 시민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마치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내가, 그렇게……말했다고? ' 나는 단지 인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지금의 내 처지와 이렇게 변해버린 몸, 나를 바꾼 그를 인정하지 않은 것 뿐이다. 이대로 편한 보금자리에 정착했다간 다시는 떠날 자신이 없었던 것 이다. 남들처럼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을 동경해왔다. 자신의 삶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변해버린 몸일지라도, 인정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다.그 때문에 수십번도 더 노력하고 좌절해왔다. 매번 나타나는 벽을 넘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변해버린 몸을 인정해버리면, 이 변해버린 삶을 인정해버리면, 나를 이 렇게 만든 그 마저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배신한 그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언제나 뒤돌아섰으며, 그에 대한 분노를 잊지 않기 위해 노 력해왔다. 증오로 몸을 불태우는 것. 오직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였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활을 가진 다른 이들은 부러움의 대상 이 될 수 밖에 없었다. '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 그저 동경하는 수 밖에 없었어. ' 그런데 지금 이 눈 앞의 소년은 동경만 하지 말고 자신에게 손을 뻗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 나도……그렇게 될 수 있다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 매번 포기해왔으면서, 왠지 그가 말하니 정말로 그리 될 수 있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만의 행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면 가능하다.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야. " 아, 저! 이상한 말해서 죄송해요. 하, 하지만 분명 시민 씨는 훌륭한 신 부가 되실 거에요! 멋진 결혼식에, 멋진 신랑하고! " 가인은 다급하게 말을 이으며 예의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이 너 무나 진실되 보여서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살풋 미소했다. " 정말요? 그럴까요? " " 그럼요! 그야 시민 씨는 이렇게나 매력적인 걸요! " 그 말에 시민은 두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얼굴을 붉혔다. 가인도 자신이 너 무 낯뜨거운 소리를 한건 아닌가 싶어 우물쭈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 만 시민 씨가 매력적인 건 사실이잖아! 하며 애써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 시킨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시민은 쑥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가인은 그만 그동안 쌓아왔던 그녀에 대한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열이 오른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 시, 시민 씨! " " 예? " 웃으면서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 " 그러니까 저기! 제가 저……! " " 예? " 저 웃음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 시민 씨를! " " 예? "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제 내뱉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기 서도 마지막 제동이 걸렸다. 정말 괜찮은 거냐, 유가인?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거야?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 나왔 다. " ……사랑하는데요? " " ……. " 경직. 가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 행복해질 수 있을까? '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대재해가 일어난지 3년이 지났다. 그리고 형이 사라진지도 3년의 세월이 흘 렀다. 그 3년동안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꽤 여러가지를 생 각해본 끝에 나는 명문이라는 선화 예고로 진학했다. 생활비야 여전히 그 알 수 없는 기관에서 원조받고 있었고, 공부도 신경을 썼기에 무난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형의 부탁대로 나는 내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형이 마련해준 내 인생, 절대로 낭비할 수 없었다.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야만 했다. 예고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노래를 배우고 싶었다. 노래에 대해 서 공부하고 싶었다. 형이 좋아했던 노래를 열심히 배워,언젠가 하늘에서 만 날 형에게 아낌없이 노래해주고 싶었다. 형이 지켜준 삶을 이렇게 가꿔왔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어. 그 말을 형 앞에서 당당하게 하고 싶었다. ' 순수한 천사들이여- 눈부신 천사들이여- 순수한 나의 영혼을 저 하늘나라 로 데려가다오- ' 그렇게 그 날도 후회없이 보내고, 나는 하교길에 올랐다.동아리에서 연습한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고등학교를 올라와 처음으로 해본 동아리 활동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좋은 친구들과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환경.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이 이상 행복해져도 될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 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나 혼자서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걸까? 몇 번이 나 자문하면서도 나는 내 삶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 아, ' 막 집 근처의 공원을 가로 지르던 도중 발걸음을 멈췄다. 아름다운 노을빛이 내 눈을 붙잡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온통 노란색과 붉은빛으로 가득 찬 그 모습이라니. 나는 홀린 사람처럼 그 붉은 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말을 거는 한 사람이 있었다. ' 잘 지내는 모양이구나. '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목 소리의 주인을 돌아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뜻 밖의 상황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의 등장에 나는 아무 것 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말도 안돼. 이건 꿈인가? 깨어나면 허무함에 치를 떨, 그런 꿈인 걸까? ' 오랜만이라 내 얼굴도 잊어버린 거야? ' 재차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내 잠들어 있던 정신을 일깨웠다. 나는 너무나 떨리는, 너무나 벅찬 희열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느새 눈시 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 ……형? ' ' 그래, 동생아. 세상에서 하나뿐인, 너의 쌍둥이 형이야. ' 스스로가 인정했다. 형이라고. 자신을 한시영이라고 눈 앞의 남자가 인정했 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나는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천천히 형에게로 걸어가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 갔다. 만져졌다.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형의 모습과 많이 변해있었지만, 그것은 나를 보는 형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무엇보다 그 존재감이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눈 앞의 남 자는 분명히 한시민의 형, 한시영이라고. 형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으며 살며시 미소지 었다. 내가 너무도 그리워 했던, 바로 그 미소였다. ' 형! '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를 부둥켜안았다.분명히 존재하고 있 었다.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니라고! 눈 앞의 형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따 뜻했다! ' 형! 형! ' 나는 바보같이 형만 부르짖으며 오열했다.그의 손이 내 머리를 예전처럼 쓰 다듬어주었다. 그 손길 하나 하나가 너무나 그리운 것이었다. 나는 어린애처 럼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말해야 하는데, 보고 싶었다고, 너무나 만나고 싶었다고 말해야만 하는데, ' 보고 싶었어. ' 형이 먼저 말해주었다. 그 말에 막혀 있던 내 입의 족쇄가 풀려나갔다.그러자 그동안 마음 속에 묻 어놨던 얘기들이 두서없이 터져나왔다. ' 보고 싶었어, 형! 보고 싶었어! 다들 형이 죽었다고 해서, 그래서 나도 따라 죽으려고 했어! 하지만 약속했기 때문에, 형하고 약속했기 때문에! 살아가기로 약속했으니까, 나는, 나는! ' ' 그래. 너는 내 말을 잘 듣는 동생이었지. ' ' 형- ' 그는 울먹이는 나를 보듬어줄 뿐이었다. 그 편안한 가슴 속에서 나는 마음 놓고 울었다. 다행이다. 나는 아직까지 형과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있었던 거 야. 그것이 너무나 고마워서 또 다시 울었다. 이 눈물이 영원토록 마르지 않 을 것 같았다. ' 그런데 시민아……. ' 그때 내 귓가로 형이 입을 가져가며 속삭였다. ' 더욱 큰 힘을 가지고 싶지 않아? ' ' ……? '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형이 말한 뜻을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했던 거지? ' 그게……무슨……. ' ' 힘 말이야. 너와 내가 가진 힘. 네 몸 속에 잠들어 있는 힘 말이야. ' 순간 예전의 일을 나도 모르게 떠올렸다. 내가 처음으로 노란 빛의 광채를 발했을 때 나를 꾸짖던 형의 모습이 떠올 랐다. 나에게 다시는 그 힘을 쓰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 다. 그때 형이 했던 말이 아직도 내 귓가에 생생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네 평온을 빼앗아 갈 거야. -네 생활을 무너뜨리게 될 거야. 그래. 그랬던 것을……, 형은 지금 그것을, ' 형, 나……약속 지켰어. 그 힘을 쓰지 말라는 약속, 지켰었어……. ' ' 흠. 내가 그랬던가? 굳이 지킬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고지식한 녀석 같으 니라고. ' 형은 짧게 혀를 차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바람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 음질 치고 말았다. 뭔가 알 수 없는 오한이 등 뒤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 다. 이건 무슨 느낌일까? 어째서 형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는 거지? 어째서 나는 형을 무서워하고 있는 걸까? ' 혀, 형? ' 형이 내 이마로 손을 뻗어왔다. 본능적으로 그 손길을 피할 뻔 했지만,나는 그 감정을 억누르고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형을 무서워한다니, 그런 기분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형은 그런 내 모습에 미소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 는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어두운 무언가가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넘실거리고 있었다.형체가 느껴지는 어둠. 살아있는 어둠. 그것이 형의 눈동자 속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나는 홀린 사람처럼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때문에 내 이마에 닿아있는 형의 손에서 짙은 검은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 몸에서 흘 러 나오는 노란 빛 역시……. ' 가지고 싶을 거야, 그렇지? 지금보다 더욱 자유롭게 노래하고 싶지 않아? ' ' ……노래? ' ' 그래. 나에게 불러주었던 노래. ' 형의 말에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노래를 하면 형이 기뻐한다.내 노래를 들 으면 형은 칭찬해준다. -네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형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 그래. 가지고 싶은 거구나. ' ' ……! ' 그 말을 듣는 순간,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위험하다. 형에게 서 떨어져야만 해! 하지만 그것은 늦은 깨달음이었다. ' 아, 아아아, 으으아악! ' 피부가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뼈가 부숴지는 것 같았다. 내장이 부풀어 오르고 혈관이 뒤틀린다! 그 압도적인 고통 앞에 나는 무너져 내렸다.얼굴을 땅에 거칠게 처박았지만 그런 미비한 고통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이 잘게 잘게 잘려 나가고 그 잘려진 파편 또한 용서 없이 잘려나갔다. 눈 앞이 붉어지고 입과 코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피가 역류하고 있었 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도 기절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잔인 하기 짝이 없는 고통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 혀…… 형……. ' 목소리를 쥐어짜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형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고개 가 들어지지 않았다. 단지 피눈물을 흘리는 눈동자로 그의 발언저리를 바라 볼 뿐이었다.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평온을 빼앗긴다고 했지? 힘을 바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만 하 는 거란다. 덕분에 너는 이제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얻었어. ' ' 으으……. ' 형, 대답해줘. 어째서? 어째서……?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질문에 되돌아온 것은 형의 웃음 소리였다. ' 하하하하! 축하한다, 동생아! 넌 오늘 부로 가이아에게 선택받았다! 내 가 일깨워준 힘, 소중히 간직하는 게 좋을 거야! ' 형! ' 하하하하! ' 형! ' 하하하하하! ' 그는 가버렸다. 쓰러진 나를 한번도 돌아보지 않으며,그렇게 웃음만을 남긴 채……. ' 으으으으, 으아아아아아아악! ' 나는 필사적으로 울부짖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점점 더 심해져만 가 는 고통에 결국 의식을 잃어 버렸다. 깨어나 보니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으며, 지켜온 평온은 붕괴되어 있었다. 남자의 혼에 여자의 육신. -카스트라토(Castrato). 나는 그 힘을 얻은 대신 내 소중한 것을 빼앗겨 버렸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었던 형. 그 형을 내 마음 속에서 잃어버렸던 것이다. 시민은 지긋이 감았던 눈을 떴다. 눈 앞에서는 가인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 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민은 결심을 굳혔다.그 리고 영원토록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 가인 씨, 나는……. " Ｔo Ｂe Ｃontinued… ▶257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05 :: :: 11351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03 - Ｂy Ｎext Ｎeo =-=-=-=-=-=-=-=-=-=-=-=-=-=-=-=-=-=-=-=-=-=-=-=-=-=-=-=-=-=-=-=-=-=-=-= 이른 아침의 무영신풍류 도장. 마리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한 채 아무도 없는 도장 한 가운데에 정좌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검도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순백의 빛을 띄었는데, 그것이 마치 지금 그녀의 마음을 나타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새벽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명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제일 처음 보인 것은 전방에 걸려있던 동생, 아인이의 사진이었다. 마리는 그 사진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어쩌면 나는…… 두려웠던 것일지도 몰라. " 혼잣말이었다. 이미 떠나버린 동생을 향한 그녀의 혼잣말. 하지만 오늘만큼 은 마치 아인이가 자신의 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리는 보이지 않 는 동생을 향해 자신이 품어 왔던 고민들을 차분히 털어 놓았다. " 말로는 쟁취라느니, 투쟁이라느니 그런 대담한 행동은 할 수 없다면서 핑 계만 대고 있었던 거야. 가인에게 내 마음을 전할 자신이 없었어. 거절당 하는게 두려웠어. " 마리는 며칠 전 양호실에서 브루스와 미정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주저하지 말고 손을 뻗으라고 했다. 쟁취하라고 했다. 그 말에 완전히 동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계속 두 손 놓고 있다간 가인과 자신 의 사이에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침체된 관계로 만족하는 건가?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해? 이대로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을 내버려둘 셈이냐, 성마리? " 최선을……다하지 않았어. " 마리는 작년 공항에서 연우와 코마히코를 보내며 다짐했던 자신의 각오가 바래졌음을 깨달았다. 안이했음을 깨달았다. 가만히 있어봤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 다녀올게, 아인아. " 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인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하루만큼은 고인 이 된 동생이 자신과 함께 할 것이다.그런 동생에게 누나로서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부디 날 지켜봐줘. "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한성 고등학교의 2학년 1반은 2교시의 화학 수업을 대비하여 곧장 이과 건물로 향해야만 했다. 이번 1학기 기말 고 사에서 화학은 필기 시험 대신 세번에 걸친 실기 평가로 대체된 것이다. 가인은 막 교실을 나서기 전에 자신과 한 조가 된 재영, 유리, 브루스, 테 레이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 다들 빠짐 없이 실험 보고서는 챙겨왔겠지? 오늘 실험을 마지막으로 각 자 자신들이 측정했던 수치들을 비교한 후, 결과를 산출해야만 하니까 한 사람이라도 보고서가 없으면 안돼. " " 오오- 묘하게 의욕적인 걸, 조장? " 재영이 히죽히죽 웃으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태도에 가인은 의 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 의욕적이라니? " " 아니,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요 근래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해서. 마치 즐거운 데이트라도 한 것 처럼……. " 퍽 하지만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리의 주먹이 당겨졌다 튀어오르는 용수철 처럼 그의 복부를 사정 없이 후려쳤다. 그 바람에 재영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자 가인이 당황하여 유리에게 묻는다. " 유, 유리야? 갑자기 왜 그래? 왜 재영이를……. " " 아·무·것·도! " 유리는 단지 그 말만을 하고서는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그런 그녀의 태도 에 가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 으음. 어쨌든 브루스와 유리는 오늘 아침 집에서 체크했으니까 문제 없을 테고. 테레이아, 보고서 가져왔지? " " ……. " " 테레이아? " " 아? 으응. "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테레이아는 가인의 부름에 뒤늦게 반응했다.그 모 습에 가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 무슨 일 있어? 혹시 어디 아픈 거야? " " 아, 아니.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 테레이아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지만, 가인은 스스럼 없이 그녀의 이마에 손 을 가져갔다. 그의 손이 자신의 이마에 닿자 테레이아의 안색이 붉어졌다. " 열은 없는데? 그래도 모르니까 조심해. 테레이아는 혼자 사니까 저번처럼 아프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 일이라고. " " 으응……. 알았어. " 테레이아는 그와 시선을 피하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답했다. 가인의 말에서 그만 예전의 일을 떠올리고 만 것이다. 브루스의 공격에 카르마 에너지를 소 실한 자신이 지독한 열병을 앓고 있을 때 그가 밤을 새워가며 자신을 간호해 주던 기억이. 어째서 그는 이토록 타인에게 헌신적일 수 있을까? 왜 나에게 이런 따뜻한 말을 건네는 거지? 왜 내 마음이 흔들리도록, 자꾸만 약해지도록 만드는 것 일까? 테레이아는 그의 행동 하나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이 싫었다. 마음 의 결정을 내렸으면서, 유메를 구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으면서 도 매번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싫었다. 테레이아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이 엇나가지 않도록 그에게 냉정해져야만 했다. " 늦장부리지 말고 가자. 미리 가서 실험 준비하지 않으면 제 시간 안에 끝 내기 힘들잖아? 거기다 오늘은 보고서까지 마무리 지어야 하고. " " 아, 그렇지……. " 가인은 찬바람나게 자신의 손을 뿌리치는 테레이아의 태도에 당황하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유리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본다. 역시 테레이아는 오빠에게서 마음이 떠나버린 것일까. 몇 번이나 그렇게 되 기를 학수고대해왔던 자신이지만 막상 그 일이 현실이 되자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상실감마저 느껴진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 거기다 오빠도 뭔가 이상해. ' 시민 언니와 결혼식을 갔다온 이후 그 이상함이 한층 더 심해졌다. 분명 겉 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미약하나마 그의 사념이 이질적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예감(銳感)은 최근 들어 그녀의 마인드 키퍼 능력이 강해진 것과 관계 가 있었는데, 유리는 더 이상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상대의 기분 이나 심리를 알 수 있게 되었다.닥터의 말로는 원격감응의 일종인 마인드 리 딩(Mind Reading), 독심술이라고 했다. 어쨌든 그런 제 6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가인의 상태가 변했음을.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연태까지 느낄 수 없었던 트 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인 것만은 분명했다.이 마인드 리딩은 마치 뜬 구름 잡는듯한 능력이었기에 유리는 답답해서 몇번이나 그의 속마음을 들여 다 볼 뻔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충동을 근근히 참아넘겼고, 실제로도 강 해진 그의 정신 장벽 때문에 들여다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 대체 오빠와 시민 언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유리는 테레이아의 일과 가인의 일로 머리가 다 지끈지끈 아팠다.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문에 두렵고 무섭고, 우울했다. 지금의 관계 가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 아, " 그때 앞서 가버렸다고 생각했던 테레이아가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유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니,테레이아의 앞에는 어느 새인가 마리가 나타나 그 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응시 하는 그녀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 어라, 마리 선배? 어쩐 일이에요? " 가인이 여느 때처럼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 마리는 힐끗 테레이아 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녀를 지나쳐 가인에게 다가왔다. 테레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 가인. " 마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브루스와 유리, 재영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며 침착하게 가인을 불렀다. 그 태도가 왠지 모르게 비장했기에 모두는 마른침 을 삼켰다. 마리 자신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숨을 고르다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 ……오늘 나에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 " 예? " 가인은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시간이 있냐는 것 도 아니고 내줄 수 있겠냐고? 가인은 영문을 몰라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예에……. 그야 남는 게 시간이기는 한데……. " " 그렇다면 나의 '데이트'를 받아주기 바란다. " 쿵 단숨에 본론으로 들어가버리는 그녀의 말에 일행은 하나같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데이트? 데이트라고? 지금 그게 누구의 입에서 나 온 말이었지? 설마 저 마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데이트라 는 말과 일억광년 정도는 떨어져 있다고! 그렇게 모두가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정작 당사자인 마리도 자신 의 말에 어색함을 느꼈는지 안절부절 못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가인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초지를 관철시켰다. ' 뭐, 뭐! ' 누, 누구 마음대로 오빠에게 데이트 신청 따위를! 마리를 바라보는 유리의 눈이 점점 사나워졌다. 설마 이런 데에서 마리에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그동안 자신과 테레이아의 사이 에 끼어서 기도 못 펴고 있었던 주제에! 오빠와의 데이트라니 어림 반푼어치 도 없는 소리다! 누가 그런 것을 용납할 줄 알아! 핑 ' ……! ' 그때 유리는 예의 마인드 리딩으로 마리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정확히는 마리의 사념이 전달하는 정보의 파편이었다. 그것을 읽어드리는 순간, 유리 는 허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거……반칙이야. 하필이면, " ……? " 브루스는 갑자기 뛰쳐나갈 것처럼 흥분하던 유리가 침묵하자 의아한 표정으 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막 뭔가를 묻기도 전에 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좋아요. 대신 선배가 제안했으니, 선배에게 다 맡길게요? " " ……! " 그 말에 애써 관심 없다는듯 일행에게서 떨어져 있던 테레이아가 어깨를 움 찔 떨었다. 유리는 고개를 숙인채 입을 다물고만 있었고, 브루스는 흥미진진 하다는듯 상황을 주시, 재영은 유리와 테레이아의 안색을 살피며 긴장한다. 그리고 데이트를 신청한 마리조차 설마 가인이 이렇듯 산뜻하게 수락할 줄 은 몰랐기에 동요하기는 마찬가지. 분명 '데이트'란 자신이 상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었고, 그 표 현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녀의 호감 역시 받아들이겠다는 소리인 것이다.가 인이 이처럼 부담없이 이성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리는 미소짓고 있는 가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벅 차오르는 격정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 그래! 맡겨만 주어라! 최선을 다해 데이트 코스를 선별하겠다! 만족할만 한 결과를 통보하겠다! 반드시! " " 아니, 그럴 필요까지야……. "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이미 마리는 그의 말을 듣지 도 않고서 저편의 복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가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 그, 그럼 방과 후에 데리러 오겠다! 그때까지 기쁘게 기다리겠다! " " 이따가 봐요, 선배! " 가인은 마리에게 마주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렇게 마리가 시야에서 사라 지자 가인은 언제 데이트 신청을 받았냐는듯 담담하게 일행을 돌아보았다. " 자, 그럼 이제 이과실로 가자. 이대로는 준비할 시간도 없겠는 걸. 실험 하면서 동시에 보고서도 정리해야겠어. 서두르자고. " " 어, 응. " 일행은 그런 가인의 태도에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한 후 그 뒤를 따랐다. 테 레이아는 앞서 걷는 가인의 등을 바라보며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 래서는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지 않은가. 알 수 없는 조바심에 몸 이 달아올랐다. 이런 감정따위 무시해버리면 그만인데! 그런 테레이아의 기색을 알아챈 브루스가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옆에서 걷 고 있던 유리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왜 그렇게 조용한 거냐, 꼬마? 나는 네가 한바탕 난리를 칠 줄 알고 내심 기대했었건만. " " ……. " 내가 당신 기대나 충족시켜주려고 이러는 줄 알아? 유리는 힘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작게 투덜거렸다. " 오늘은……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잖아, 정말. " 유리는 마리의 사념이 전해준 정보를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이 지 반칙이다. 화가 나. 눈물이 나올 정도로 분해! 왜 나만 이런 것을 알아야 하는 거냐고! 그녀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브루스에게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은 마리 동생의 기일이야. " Ｔo Ｂe Ｃontinued ▶258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07 :: :: 39424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04 - Ｂy Ｎext Ｎeo =-=-=-=-=-=-=-=-=-=-=-=-=-=-=-=-=-=-=-=-=-=-=-=-=-=-=-=-=-=-=-=-=-=-=-= 방과 후, 가인을 찾아온 마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바람을 밝혔다. " 보고 싶은 공연이…… 하나, 있기는 한데. " 그 말 한마디에서 가인은 마리가 반나절 내내 노심초사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었다. 아마 그녀는 전적으로 데이트를 맡긴다는 자신의 말에, 최대한 머 리를 쥐어짜내며 고민하다가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말을 꺼 내면서도 조심스러운 것이 그녀답다면 그녀다웠다. 물론 가인으로서는 당연히 그녀의 의견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공연이라, 아마 뮤지컬 공연이나 연극 공연 쯤 될 것이다.의외로 무난한 코 스를 선택했는 걸, 선배? " 잘 됐네요. 저도 공연 좋아해요. " " 그, 그런가! 다행이로군……. 의외로 이런 쪽을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했 었는데. " " 에이. 싫어한다뇨. 마리 선배가 결정한 것을 제가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 가인은 화색을 띄는 마리에게 시원스레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도 잠시. 마리를 따라간 가인은 곧 후회하게 되었다. 어째서 그녀의 의견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일까,하고. 아니, 그것보다도 어째서 공연 이라는 것이 뮤지컬과 연극 쪽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일까? 전통문화예술 상설공연장 국립국악원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 때마침 아버님의 아는 지인 분을 통해 구해놓은 표가 있었다. 나 혼자 국 악원에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 내심 안타까워 했었는데 설마 가인도 판소리 공연을 좋아할 줄은……. " 상기된 표정으로 공연 팜플렛을 바라보는 마리와 허망한 표정을 금치 못하 는 가인. 마리가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29구역의 국립국악원 우면당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2033년 판소리 한마당의 6월 공연으로 현재 전북 지정 무형 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기능보유자인 백청자의 춘향가 한마당 무대가 한창이 었다. 그래. 판소리인 것이다. 설마, 설마 했었는데 정말 이런 곳으로 데려올 줄이야. 가인이 알기로 춘향 가나 심청가 같은 판소리는 한 마당을 부르는 데만 해도 네 시간은 넘게 걸 린다고 한다. 거기다 공연 시작 시간은 5시. 가인은 저녁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네 시간 넘게 판소리만 들을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것만은 면하고 싶은데……. " 근 2년만의 판소리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하군. 옛날에는 이 국립국악 원을 아버님, 동생과 함께 일주일이 멀다하고 왔었는데……. " " ……. " 분명 그 2년동안 국악원에 발길이 끊어진 것은 마리 선배의 동생이 죽은 것 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가인은 그리운 눈빛으로 우면당을 돌아보는 마리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렇게 신이 난 선배에게 어떻게 찬물을 끼얹으란 말인가? 결국 가인은 이 흔치 않은 판소리 관람을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내가 언제 또 판소리를 듣겠냐. 이번 기회에 실컷 들어나 두자고. " 그런데 춘향가라고 했죠? 오늘 마당이? " " 음. 12마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소리지.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해서 언 젠가는 꼭 이렇게 듣고 싶었다. " 이렇게 가인, 너와 함께……라는 뒷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마 리였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춘향가를 경청하는 것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소 원해왔던 소박한 꿈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가인은 그렇게 소원을 성취한 그녀가 내심 기뻐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어라? 뜻 밖이네요. 전 선배라면 심청가 쪽을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 " ……어째서? " " 그게, 심청가의 주제는 효잖아요? 눈 먼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삼백석 대 신 인당수로 몸을 던지는 효녀 심청의 이야기니까. 아무래도 춘향가 같은 사랑 이야기보다는 이쪽이 선배와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 " ……. " 그 말에 마리는 남 모르게 상처 받았다. 가, 가인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 이는 걸까? 사랑과 관계 없어 보이는 그런……. 물론 가인이야 평소 철두철미하고 강하고 의지가 되는 그녀의 모습을 동경 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지만, 되레 소녀적 감성을 동경하는 마리에게 있 어서 가인의 말은 좌절감을 주기에 딱 좋았다. " 춘향가는……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과 자유의 숭고함,그리고 조선조 여인의 정절을 계몽하는 것이다. 그, 나는 이사또의 온갖 고문 속 에서도 이몽룡에 대한 마음을 굽히지 않았던 춘향을, 그, 존경한다고 해 야 할까.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해야할까……. " 정확히는 춘향처럼 가인에 대한 마음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코 포 기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리가 쑥스러워하면서도 소신껏 대 답하자 가인은 나지막이 감탄했다. " 하긴.그렇게 초지일관 변하지 않고 노력해온 선배니까 그렇게 강할 수 있 는 것일테죠. 저도 본받아야 겠는 걸요? 춘향의 변치 않는 마음을. " " ……. " 그러니까 나는 사랑에 대해서 말한 거였는데. 마리는 다시 한번 속으로 낙담했다. 그렇게 가인과 마리가 무대 객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곧이어 객석의 불이 꺼지며 소리판이 시작되었다.고수의 흥겨운 장구 반주에 맞춰 소리꾼이 춘향 가의 성대퇴기(聖代退妓)를 창하기 시작했다. " 숙종대왕 즉위 초에 성덕이 넓으시사 성자성손(聖子聖孫)은 계계승승하사, 금고옥적(金鼓玉笛)은 요순(堯舜)의 태평시절이요, 의관과 문물은 우(禹) 임금과 탕(湯) 임금의 버금이라, 좌우 보필은 주석지신(柱石之臣)이요,용 양호위(龍陽虎衛)의 각위(各衛)에는 간성지장(干城之將)이라……. " " 하아암. " 한창 춘향가가 계속되고 있을 무렵, 마리와 가인에게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뒷자리에 눈에 띄는 한 남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가인 일행과 마찬가지로 한성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특히 여자 쪽은 흔치 않은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었다. 남학생,카이 브릿드는 연신 하품을 해대며 졸린 눈으로 소리판의 소리꾼을 바라보았다. " 지겨워 죽겠네. 이걸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리리스? " " 조용히 해. 그렇게 지겨우면 잠이라도 자든가. " " ……. " 여학생, 리리스가 무대에서 눈을 떼지도 않으며 차갑게 답하자 카이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원래의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리셨구만. 어떻 게 저런 이해도 가지 않는 연극을 두시간 넘게 볼 수 있는 거야? 그런 카이의 혼잣말이 리리스에게도 들렸는지,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 를 돌아보았다. " 카이, 이건 연극이 아니라 판소리라고 하는 거야.한국의 민속 음악으로서 창자와 청중이 하나가 되어 이야기와 음악을 즐기는 거지. 상당히 독특하 고 개성적인 종합 예술이야. " " 하- 그래봤자 어차피 노래일 뿐 아니야? 확실히 저 노래부르는 여자는 대 단하기는 해. 혼자서 몇시간 씩 지치지도 않고 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참 으로 대단한 목청이야. " " ……. " 리리스는 짧게 혀를 차고 카이에게 계속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어째서 그는 모르는 걸까? 이 놀라운 문화의 산물을! 리리스에게 있어서 테라인들의 문 화는 놀라운 것 투성이였다. 아마 그들의 의지가 가이아의 의식과 접속되어 무의식 중에 그 정보를 읽어들이는 것일테지만, 그 정보가 테라인들의 이미 지 메이킹과 합쳐지자 이런 독특한 진화를 이룩해낸 것이다. 그것은 가이아의 비호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취였 다. 리리스는 그런 테라인들의 상상력이 부러웠다. 그랬기에 그들을 향한 호 기심이 끊이지를 않았다. 알고 싶다. 더욱 그들에 대해 알고 싶어.그들이 만들어낸 문화라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그랬기에 테레이아 민체스터로 행동할 당시, 그녀는 그토록 한국의 고전 서 적들이나 세계의 문화 유산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카이는 그렇게 리리스가 자신을 무시하고 다시 판소리에 집중하자, 참고 있 던 불만들을 토해냈다. " 그나저나 갑자기 왜 저녀석들의 뒤를 따라오자고 했던거야? " 카이는 그녀가 그 말을 꺼냈을 때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리리스는 자신의 입으로 누가 오라의 주인을 각성시키든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놓고서 어째서 또다시 오라의 주인에게 집착을 보이는 걸까? 리리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카이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 그저, 걱정이 되었을 뿐이야. 불특정 요소로 인해 기껏 각성에 접어든 옴 팔로스의 열쇠가 성육신의 길에서 이탈하게 될까봐. 한시영, 그가 오라의 주인을 각성시키든 어떻게 하든 나와는 관계 없지만, 지금까지의 내 노력 이 무산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 " " ……나,참. 결국 오라의 주인이 자신이 아닌 남의 손에 놀아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거 아냐? "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 그래, 뭐. 그 편이 리리스 답기는 해. 밤의 여왕님이 그렇게 쉽게 자신의 먹잇감을 포기할 리가 없지. 어쩐지 피스 블랙에게 저 녀석을 넘겨준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더라고. 그렇게 순순히 포기할 리리스가 아닌데. " 카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좌석에 등을 기댔다.그렇게 그가 좋은 쪽으로 납득 해주자 리리스는 작게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리고 전방에 앉아있는 가인과 마 리를 우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부디 카이에게 했던 말이 자신의 진심이기를 바라면서. 판소리 마당이 끝난 것은 가인의 예상대로 9시가 넘어서였다.국악원을 나온 마리는 이 근처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음식점이 있다면서 가인을 데리고 갔 다. 가인은 허기 진 배를 달래면서도 그녀가 이번에는 또 어떤 상상 밖의 장 소에 자신을 데려가는 걸까 내심 초조해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끈 곳은 다행 히도 평범한 장어구이 집이었다. ' ……장어구이 집도 그다지 평범한 건 아니라고. ' 어딘가 아저씨 취향이라고 해야할까 나이 들어 보인달까. 가격 면에서나 메 뉴 면에서나 역시 십대 소녀가 고를만한 가게는 아니었다. 케이크 집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분식집은 골랐어야지. " 가족과 판소리 공연을 관람한 뒤에는 꼭 들리는 가게였다.아버님은 이 집 의 장어가 복분자 술과 상성이 좋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지. " ' 그럼 그렇지. ' 이 코스는 결국 성비영 관장 님의 취향이었던 건가. 가인은 속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부인 없이 혼자 자식을 키우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지만, 덕분에 마리 선배는 남자 못지 않은 딸로 자라났으니…….내가 신이를 키울 때는 그 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가인은 엉뚱한 쪽으로 비영과 자신의 양육법을 비교하다가 뒤늦게 마리의 뒤를 쫓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점은 인테리어부터가 중후한 것이 도 저히 선뜻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가로질러 앞이 개방된 주방실에서 회를 뜨는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십니까, 아저씨.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 " 어어? 아니, 이게 누구야? 비영 관장님의 자녀분 아니신가? 하하하, 이게 웬일이야! 그동안 영 들리지를 않길래 우리 가게는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 는데! " " 설마 잊어버릴 리가 있겠습니까.아저씨의 장어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 렇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 " 어이쿠, 그렇다면 맛있게 한상 차려 올려야지! 거기 내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있게! 싱싱한 놈으로 잡아올테니! " 주인은 신이 난다는듯 재빨리 안쪽의 주방실로 들어가 살아있는 장어를 채 에 담아 달려왔다.그러다 그는 멍하니 서있는 가인을 발견하고서는 마리에게 물었다. " 이 친구는 누구야? 마리 아가씨 동생인가? 그때와는 많이 변했는데? " " 아, 아니. 저……이쪽은 제 동생이 아니라, " 마리는 당황하며 가인과 주인을 번갈아보았다. 막상 대답하려니 뭐라고 설 명해야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자친구 라고 소개하는 것은 천부당 만 부당한 일이고, 학교 후배라고 소개하기에는 이 시간에 같이 밥을 먹으러 오 는게 이상했다. 뭔가 다른, 그와 나의 사이를 강조하면서도 가인에게 티나지 않게 어필할수 있는 그런 관계가……. 그때 마리의 머리 속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적절한 말이 하나 생각났다. 그 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 그는 제 동료입니다. " 쿵 그 말에 주인과 가인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동료라니……. 물론 몬스터 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같은 피스메이커의 대원이었으니까 동료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적어도 그것은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통용될 얘기였다.주 인에게는 엉뚱한 얘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 전우라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영 문을 몰라 당황하는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 데이트 신청을 받았어요.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이죠. " " 오, 오오. 그런 거였구만! 이야, 마리 아가씨의 남자 친구 분이셨나! 어 쩐지 둘이 썩 잘 어울린다 했어! " 나, 남자 친구! 주인의 그 말에 마리는 막혀있던 불꽃이 한꺼번에 터져오르는 것처럼 얼굴 이 붉어졌다. 가인을 돌아보니,그는 그저 미소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 었다. 마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으면서도 마음 속으로 남자친구 라 는 말만 연거푸 반복했다. 남자 친구. 남자 친구. 남자 친구. 아아. 몇번을 들어도 이 신선한 울림이 라니! " 으음. 여긴 장어 구이 외에도 이것 저것 메뉴가 많네요. " 가인은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이 가게는 장어 구이 집이라기 보다는 정확히 장어 구이를 중심으로 하는 생선 횟집이었다.거기다 마리의 말대로 맛도 좋았는지 저녁 식사 시간대가 지난 지금도 꽤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마리는 그렇게 가게를 둘러보는 가인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 오늘……괜찮았었나? " " 예? " " 아니. 데이트는, 처음이라서. 뭔가 내가 실수한 것이 있지는 않은가 해서. " " 아뇨. 실수라뇨. 물론 판소리 공연을 본다 거나 장어 집에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 " 여, 역시……. " 마리는 대번에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가인은 그런 그녀에게 웃어보 이며 말을 이었다. " 아, 그렇다고 재미없었다는 게 아니에요. 굉장히 재미있어요! 판소리 때 다 함께 추임새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마리 선배가 그렇게 열심히 외치니 저도 따라서 외치게 되더라고요- 내용도 이미 다 알고 있던 춘향가였지만 굉장히 흥겹던 걸요. " " 저, 정말인가? " " 예. 설마 저도 이렇게 판소리를 재밌게 들을 줄은 몰랐어요.물론 저 혼자 서 들었더라면 재미없었겠지만, 선배와 같이라면 다음에도 또 오고 싶내 요. " " ……! " 마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와 같이,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또라 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어올렸다. 가인에게서 저런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랬기에 하마터면 본래의 목적을 잊어 버릴 뻔 했다. ' 아, 잠깐. 이대로 만족해서는 안돼. 차라리 여기서……. ' 다음에도 또 오고 싶다는 가인의 말에 자신이, ' 그렇다면 영원토록 나와 함께 와주겠나. ' 라고 한다면! 이것은 영락없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그래! 기회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바로 눈 앞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마리는 앞뒤 생각할 것 없 이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움켜쥐고 있던 손바닥에 어느 새 식은땀이 흥건하고, 윗입술과 아랫 입술의 감각이 사라져간다. 하지 만! " 자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장어 구이 대령이오! 특별히 아껴두었던 큰 놈이니 많이들 들게나! " " 와, 감사합니다! " " ……. " 가인은 주인이 건네주는 장어의 푸짐함에 감탄하며 소리쳤고, 마리는 허망 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지금 장어를 건네주는 거지! 하 필이면! ' 아니야. 음식점에서, 그것도 장어를 회치는 것을 눈 앞에 두고 고백을 한 다는 건, 그, 역시 분위기가 없는 거겠지. 거기다 영원토록 나와 함께 와 주겠나 라니. 어째서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생각했던 걸까? ' 머리를 식히자 자신이 그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간 담이 다 서늘할 정도였다. 만약 그런 식으로 고백했더라면 두고두고 스스로 를 저주했을 것이다. ' 냉정해져야 한다! 침착해져라, 성마리! ' 마리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가인 에게는 마리가 철판 위에 올려진 장어를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는 것으로 밖 에 보이지를 않았다. 그, 그렇게 먹고 싶은 걸까? 선배? " 이렇게 구우면 되는 건가? " 가인은 집게로 장어를 철판에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장어가 익으 면서 둥글게 휘는 것이 영 굽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것을 보던 마리는 가 인에게서 집게를 건네받아 자신이 대신 철판에 장어를 올렸다. "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장어의 껍질을 밑으로 해서 철판에 올려놔야 장 어가 휘지를 않는다. " " 아, 그렇군요. " " 그리고 구우면서 이렇게 소금도. " 마리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장어를 뒤집으며, 그 위에 맛소금을 뿌렸다.가인 은 그것을 감탄하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리는 그렇게 다 익은 장어부터 가 인의 파 저래기 위에 올려주었다.가인은 그것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마리에게 물었다. " 그냥 이렇게 먹으면 되는 거에요? " " 아니,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 " 마리는 장어를 집어 양념장에 잘 묻힌 후, 상추와 깻잎을 잘 포개어 그 위 에 장어와 마늘, 파를 잘 버무려 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인의 입에 가져다 주었다. 가인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 음……맛있, 네요. " 가인은 입안에서 느껴지는 장어의 쫄깃함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마리가 얼굴 을 붉힌채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는 거지, 선배? " 왜 그래요? 제 입에 뭐 묻었어요? " " 아, 아니. 마, 맛이 있는가 해서! 나도 어서 먹어야……! " 마리는 재빨리 자신도 쌈을 만들어 먹은 후 서둘러 맛있다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가인이 보기에는 제대로 씹지도 않고 넘기는 것이 여간 걱정스러워 보이는게 아니었다. 마리는 가인이 다시 장어로 눈을 돌리자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가인에게 쌈 을 먹여주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아인이에게 쌈을 먹여준 적은 있었지만, 설마 이 손으로 가인까지 쌈을 먹여주게 될 줄은……. 자신에게서 쌈을 받아먹던 가인의 모습이 떠오르자 새삼 알 수 없는 전율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가인, 미안……. 하지만 너무 귀여웠어. 그렇게 마음껏 감동하던 그녀는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웠다. 좋아! " 가, 가인. 쌈을 하나 더 싸봤는데……. " " 예? 아, 고마워요. " 가인은 슬쩍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녀가 건네주는 쌈을 맛있게 받아 먹었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전율!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부지런히 손을 놀려 재차 쌈을 만들었다. " 가인! 하나 더! " " 예에. " " 자! 여기 또! " " 아, 저기……. " " 꼬리다! 남자에게는 장어 꼬리가 좋아! " " 잠깐……. " 그렇게 마리에게서 다섯 번은 족히 쌈을 받아먹고 나서야 가인은 간신히 그 녀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다. " 서, 선배. 전 이제 됐으니까 선배도 좀 드세요. 쌈 싸주시느라 선배는 하 나도 못 먹었잖아요. " " 아, 그래……. " 마리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만족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살며시 가슴 으로 끌어 모았다. 그 모습에 가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째서 선배에게서, 잘 먹는 자식의 모습을 대견스러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걸까? 주인은 그런 마리의 행동에 미소지으며 장어를 꺼내올 때 함께 가져왔던 '그 것'을 둘의 앞에 꺼내놓았다. " 자자, 이건 기분이다! 모처럼 찾아온 마리 아가씨와 남자 친구를 위한 선 물! " " 이, 이건! " 마리는 주인이 꺼내놓은 음식을 바라보며 탄성을 흘렸다. 주인의 선물이란 웬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색빛의 생선회였다.마리의 곁에서 멀거니 그것을 지 켜보던 가인은 생선회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 어라. 뭔가 이상한 냄새가……. " 아니. 이건 썩는 냄새 같은데? 그렇게 가인이 긴장하는 반면 마리는 화색을 띄며 주인에게 말했다. " 삭힌 홍어군요! " " 그렇지! 그것도 흑산도에서 직접 구해온 거라고! 홍어는 많이 삭혀질수록 홍색이 없어지고 회색으로 변하는데 이게 또 맛이 기가 막히지! 이건 특 별히 내가 쏘는 거니까 사양말고 들어! " " 아, 감사합니다. " 마리는 황송하다는듯 연신 주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반면 가인의 표 정은 편치 못했으니. 그는 이 흑산도 홍어라는게 영 꺼림칙했던 것이다. 주 인의 설명을 들으니 그 꺼림칙함이 한층 더 심해진다. 삭힌다니? 쉽게 말해서 썩혔다는 소리 아닌가? 이게 김치 같은 발효 식품도 아니고, 생선회를 삭힌다는 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심하게 말해서 먹을 수 있을지 조차 의문이다! " 자자! 들게! 어서 들어! " 주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인과 마리에게 홍어를 권한다.가인은 곤 란한 표정으로 마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들뜬 표정으로 홍어 를 주인이 건네준 삭힌 김치와 함께 맛있게 먹고 있었다. " 자, 거기 남자 친구 분도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 " 그래. 가인.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별미다. 이런 음식을 접할 기회는 흔치 않아. " 그래요. 분명 흔치는 않겠죠. 다만……. 가인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힘 없이 홍어를 젖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그래. 설마 먹지도 못할 음식을 주인 아저씨가 내주셨으려고. 그렇게 귀한 거라니 성의를 봐서라도 하나는 먹어야겠다. 가인은 두 눈 꼭 감고 홍어 날개 회를 입 안으로 집어 넣었다. " 홍어는 삭혀짐에 따라 암모니아 냄새가 강해지는데, 대신 한번 먹으면 잊 을 수 없는 찰지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지. " 분명 지독한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마비시킨다. " 처음엔 코끝이 징하지만 다음엔 입안이 상쾌해지고 끝맛은 청량해진다. " 분명 처음엔 코끝이 징해지고 다음엔 입안이……. " 컥- " 가인은 순간 참지 못하고 입안의 내용물들을 모조리 쏟아냈다. 그리고 가게 의 구석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이와 리리스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 ……난리도 아니군. " " 하아아- " 가인은 26구역의 지하철 역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공원의 벤치에 흐느적거 리는 몸을 기대며 신음했다.그것을 안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마리는 공원 수 돗가에서 적신 손수건으로 그의 창백한 안색을 닦아주었다. " 면목이 없다, 가인. 설마 홍어가 너의 입맛에 그렇게 까지 안 맞을 줄은 생각치 못했다. " " ……아뇨. 대신 장어는 정말 맛있었으니까. " 마리는 그야말로 죽을 상을 했고,가인은 되려 그런 그녀를 달래주어야 했다. 가인이 홍어를 먹다 기겁하며 거꾸러지자 마리는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아 마 가인이 조금만 늦게 정신을 차렸더라면 마리는 그를 들쳐업고 근처의 병 원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 나는, 도대체, 왜, 어째서, 이렇게 둔하기 짝이 없는 것일까. ' 마리는 가인이 홍어를 싫어한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억지로 권한 자신 을 수 없이 자책했다. 도저히 그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그러고 보 니 판소리 공연도 사실 그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데려갔던 것일지도 모른 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껏 결심해왔던 그녀의 각오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 이래서는 도저히……고백할 수 없어. ' 100퍼센트 퇴짜일게 분명하다. 이렇게 눈치도 없이 상대를 피곤하게만 하는 여자를 누가 좋다고 사귀겠는가. 거기다 당황해서 정신 없이 그를 데려오다 보니 어느 새인가 이런 인적도 드문 밤 공원으로 오고 말았다. 공원은 사람 한 점 보이지가 않는 것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 최악의 장소 선정에, 최악의 타이밍이로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전황을 바꿀만한 계기가. 계기만 있으면……. '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는 바람에 어색한 침묵까지 찾아오고 말았다.마리로서 는 그야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체 데이트란 것이 자꾸 해봐야 요령이 생기는 것일텐데. 무엇보다 첫 데이트에서 고백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녀가 초짜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된다고! 촤아아아악 그때 가인과 마리의 뒤편에서 갑작스레 빛과 함께 물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곳에는 공원의 분수가 붉은색과 푸른색의 빛을 흘리며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공원의 자동 분수 장치가 이제 막 작동된 모 양이었다. 가인은 그것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 와- 대단하네요. 선배, 이것 때문에 절 공원으로 데려온 거였어요? " " 어? 아, 그, 그래. 그렇다. " 마리는 엉겁결에 가인의 말을 인정해버렸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녀의 인생 에 있어서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미처 그녀가 회의감을 느끼기도 전에 가인이 말했다. " 고마워요. 덕분에 멋진 구경하게 되었네요. 매일 지나가면서도 이런 분수 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정말 선배한테는 매번 놀라게 되요. " " 아니, 그런……. " 마리는 그 말 한마디에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이 날아가버렸다. 그녀는 주 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바로 이것이 계기! 한순간의 분위기 역전! 마리는 뒤늦게 분수대를 작동시킨 공원 관리인에게 속으로 백배 천배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녀는 자신도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오색찬란한 빛들이 물줄기에 굴절되면서 아름다운 호선들을 만들어내고 있 었다. 그 호선 속에서 분수대에 조각된 천사들의 양각이 물줄기에 젖어 빛을 반사해낸다. 마리는 자신 역시 탄성을 올리며 그 광경에 빠져들었다. 쏴아아아아아 고요 속에서 울려퍼지는 물 소리. 아까까지만 해도 어색하던 침묵이 지금은 너무도 잔잔하게 여운을 남겨주 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조금도 조급해지지 않는, 그런 편안한 분위기. 마리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런 것이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그 '로맨틱'한 분위기라는 것이 아닐 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대책 없이 미 뤄오기만 했던 고백을 그에게 전할! 마리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약간의 인기척은 느껴졌지만 그건 아마도 자신들과 같이 남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공원을 찾은 사람들일 것이다. 문제 없어! 아무런 방해 요소는 없다! 그저 고백하기만 하면 돼! 그 뒤의 선택은 가인에게 맡길 뿐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여기서 고백할 순간을 놓치는 것이 더 큰 후회가 될 것 이다! 가라, 성마리! 아인이가 지켜보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 선배. " 그때 가인이 한발 먼저 그녀를 부르는 바람에, 마리는 턱까지 올라왔던 말 을 무리하게 집어 삼켰다. 덕분에 제 풀을 못이긴 잔기침이 거칠게 터져 나 온다. 마리는 부디 이런 자신의 바보같은 모습을 그가 눈치 채지 않길 바라 며 서둘러 답했다. " 무, 무슨 일이냐? " " 여기서 고백했었어요. " 뭐? 마리는 그 말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 고백……이라니? " " 저번 결혼식에 갔다오면서 여기, 이 공원에서 시민 씨에게 고백했었어요. " 쿵 마리는 자신의 가슴으로 거대한 추가 떨어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순간 정신이 멍해지고, 머리 속이 새하얘진다. 가인이 고백했다. 가인이 고백했어. 가인이 시민 씨에게 고백을……. 마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텅 하니 빈 기분이었다.왠지 여기서 이러고 있는 자신이 엄청난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애써 그런 동요를 표시하지 않으며 그에게 묻는다.부디 자신의 목소 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 ……그래서? " 가인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시민에게 고백했던 당시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와 나누었던 얘기들이 아직도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를 않았다. ' 가인 씨, 나는……. ' 그렇게 시작한 그녀의 말은, '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믿지 않아요.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느니, 그런 건 한순간의 충동적인 거짓말이에요. ' ' ……예? ' 그 뜻 밖의 말에 가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시민 씨가……어째서 저 런 말을 하시는 걸까?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는 저런 식으로 말할 사람이 절 대로 아닌데…….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가인을 앞에 두고 시민은 냉정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차분하게 잘 생각해보세요. 지금 가인 씨가 말한 사랑이 과연 얼마나 오 래갈런지. 아마 지금은 자신의 마음에 추호도 의심이 없겠죠. 하지만 그 것이 1달이 가고, 2달이 가고,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그렇게 5년,10년 지난 뒤에도 그 마음이 변치 않을까요? 하루에도 수십번 씩 마음이 바뀌 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요? 절대로 불가능해 요. 특히 그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변덕이 더욱 심하죠. 아니, 애초에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뭘까요? 그게 뭘 의미하는 거죠? 좋아한다 는 감정보다는 좀 더 큰,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강조할 때 쓰는 표현 아닐까요? '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거에요, 시민씨? 어째서……. ' 착각인 거에요.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너무 너무 좋아한다.사랑 하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거짓말인 거죠. 그 예로 사 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서 너무나도 쉽게 그 마음을 저버려요. 수십,수백 번도 더 남발하는 그런 사랑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 죠? 단지 지독한 짓일 뿐이잖아요? ' 그 말을 하는 시민에게서는 사랑에 대해 냉소하는 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지독한 불신감 밖에……. 가인은 그런 시민의 말을 듣다 못하고 소리쳤다. ' 그, 그만하세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시민 씨? 그럼 지금까지 저 와 함께 한, 모두와 함께 한 시민 씨의 모습은 뭐란 말이에요? 언제나 우 리를 격려해주고,아껴주고 지켜주던 시민 씨의 태도는 뭐였던 거에요? 그 것도 거짓이었던 거에요? 그것도 착각이었요? ' ' ……. ' 시민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주저 없이 그의 말을 받아쳤 다. ' 가인 씨, 그건 신뢰라는 거에요. 몬스터를 상대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무 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죠. 그 믿음을 높이는 방법으로 서 저는 여러분들의 일상 생활을 보살펴왔던 거에요. 효과적인 사교 방법 이죠. 이 사람이 이 정도의 감정을 보여줬으니, 나도 그에 맞게 상응해야 겠다. 이런 것 말이에요. 가인 씨는 거기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의미를 두 려고 하는 것 같은데,그 기대를 맞춰주지 못해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 어요. 하지만 가인 씨가 더 오해하기 전에 이렇듯 확실하게 밝혀두는 편 이 서로를 위해서도 좋을테니까……. ' ' 거짓말! 거짓말이에요! 전……이런 건, 이런 건 믿을 수 없어요.제, 제가 쓸데 없는 말로 시민 씨를 곤란하게 했다면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 ' 하아. 제 말을 어떻게 이해하든 그건 가인 씨의 자유에요.제 말을 거짓말 이라고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저도 앞으로는 이런 말은 하지 않 을 테니까. ' 시민은 한숨을 쉬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왠지 그 모습이 묘하게 이질적 이었는지라 가인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시민 씨가 맞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았다. 일부러 차갑게, 일부러 어울 리지도 않는 독설을 하면서, 일부러 자신에게서 미움을 받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가인은 시민의 등을 향해 외쳤다. ' 그 남자 때문에 그러시는 거에요? ' 시민의 걸음이 멈췄다. ' 시민 씨가 말하셨던 그 사람,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하다던, 그 사람 때 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 사람을 좋아하는데 제가 고백을 해서, 제 마음을 거절하시려고……. 그,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그 냥 저에게 잘해주시는 시민 씨가 고마워서 그랬던 거였어요. 그러니까 그 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렇게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마 세요. ' 그런 슬픈 얘기는 하지 말아요! 가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시민을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돌 아보면서 자신에게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주길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녀가 다시 웃어주기만 한다면 그녀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일 따위,아무렇지도 않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제발……. ' 그 남자는, ' 시민은 단호하게 그런 가인의 기대를 저버렸다. ' 죽었어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 그렇게 그녀는 떠나갔다. 뒤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그를 내버려두고. " 나는, 어째서……그런 말을 시민 씨에게 했던 걸까요? 어째서…… 바보같 이……. " 가인은 분수대를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한방울, 두방울 흘리기 시작했다. 얘기 도중 그때의 슬픔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하지만 그 눈물은 자신을 위 해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사랑을 불신하는 시민을 향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대체 어떤 아픔이 있었던 걸까?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기에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 거지? 그것을 생각할 때 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받았을 고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녀 는 어떻게 그런 아픈 상처를 간직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웃을 수 있었던 걸까? 어떻게 따뜻하게 대해줄 수 있었던 거지?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줬던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슬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상처를 헤집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 나는 바보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바보, 멍청이……. 어째서 고백 했던 거야? 어째서 고백 따위를 해서 시민 씨의 마음을……. ' 그렇게 슬퍼하는 가인의 곁에서 그 날의 전말을 빠짐없이 들은 마리는 차마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슬퍼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을 뿐이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견딜 수 없이 아프다. " 가인……. 그건, " 마리는 그에게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그를 위로해봤자 주제 넘은 소리 밖에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대로 가인 을 놔둘 수는 없다. 저렇게 울고 있는 가인을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 ……! " 마리는 강하게 가인을 끌어안았다. 그의 목을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그 바 람에 마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된 가인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 녀를 올려다 보았다. " 가인, 넌 잘못되지 않았다. 네 마음을 시민 씨에게 고백한 건 절대로 나 쁜게 아니야. 넌 그저 네 마음에 충실했던 것 뿐이잖아. " 마리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적시는 그의 눈물에 마치 자신이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그의 흐느낌을 멈춰주고 싶었다. 그 때 문에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 네 말이 맞아. 사랑은 착각이 아니다. 거짓말이 아니야. 시민 씨의 말대 로 쉽게 변하는 사랑도 있겠지만 분명 변하지 않는 사랑도 있어. 사랑은 믿을 수 있는 감정이야! " " ……. " " 만약 사랑이 착각에 불과했다면……, 어째서 세상은, 어째서 사람들은 지 금도 이렇듯 사랑을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수 많은 세대에 걸쳐 계속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자연스러 운 감정이다! 하지만 사랑을 유지하는 것은 그들 개개인의 몫, 영원히 사 랑을 하는 것도, 금새 포기해버리는 것도 다 사람의 선택일 뿐이야. 그러 니까 사랑을 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야! 그걸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나쁜 거다! " " ……. " 가인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선배는,이토록 강 할 수가 있는 걸까? 어째서 저토록 흔들림이 없는 거지? 가인은 한 없이 의 지가 되는 그녀의 존재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고마워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 었다. 마리는 그렇게 흐느끼는 가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역시……나는, 안되는 걸까……. ' 내가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갈 틈은, 없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 없었다. 굳이 그가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아도 좋았 다. 단지 이렇게 그가 힘들어 할 때, 그가 슬퍼할 때 그 슬픔을 나눠받는 것 만으로도 그녀는 만족했다. 그래. 나는 그저……. ' 그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 마리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소리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리리스와 카이는 그렇게 공원의 한켠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가인과 마리를 말 없이 지켜보았다. 특히 마리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카이는 이내 이해 할 수 없다는듯 투덜거렸다. " 흥, 이상한 여자야. 왜 기껏 고백할 분위기가 된 것 같은데 잠자코 있는 거지? 저 상황에서 고백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넘어올게 분명한데. " 실연의 상처로 벌어진 허전함을 파고든다면 충분히 그는 그녀에게 넘어올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저 테라의 여자는 바보같이 상대의 마 음을 달래주고만 있었다. 거기다 상대가 다른 이성에게 고백한 것을 잘했다 는 둥 격려까지 해주는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다. 저 테라의 여자는 그런 간단한 이치도 모른단 말인가? " ……모르겠니, 카이? " 리리스는 그런 카이를 딱하다는듯 바라보며 말했다. " 그녀는 그를 생각해주기에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는 거야. " " 어째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도 않으면서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건 이기적이야. " " 그럼 상대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이용해서 고백 하는 것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 윽. " 카이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리리스는 다시 가인과 마리를 돌아 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어딘가 서글픈 빛을 담고 있었다. " 저 아이는 상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존중해주 고 있는 거야. 너라면 이해할 수 있겠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 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을 참을 수 있겠어? " " 당연히 참을 수 없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 건 그저 스스로에게 자 신이 없으니까 방관하는 것일 뿐이야. 상대방을 위해서∼라는 식으로 물러 서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며 발을 빼는 비겁한 행동일 뿐이지. 흥, 바보 같 은게 아니라 정말로 바보로군, 저 여자. " " ……. " 리리스는 마리를 비웃는 카이를 바라보며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아마 자신 에게 집착하고 있는 그로서는 절대로 마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그 렇게 리리스가 낙담하는 기색을 보이자 카이는 괜히 초조해져 속으로 투덜거 렸다. ' 뭐야, 정말……. 도대체 왜……. 저런 식으로 사랑해봤자 스스로만 괴로울 뿐이잖아? ' 사랑은 이타적인 것이다. 그래, 인정한다. 희생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 희생 해야할 상대가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이상, 희생은 자기 만족일 뿐이다. 점 점 지쳐가고, 점점 괴로워하고 끝에 가서는 후회만 남게 된다. 카이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을 돌아 보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그렇기에 저런 자신의 감정을 도외시한 사랑 따위 는 이해하고 싶지도, 동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바보일 뿐이다! " 쳇- 난 이제 갈 거야. 아무리 봐도 오라의 주인에게는 별 다른 이변이 일 어날 것 같지 않군. 리리스도 이 이상 훔쳐보기는 그만두고 따라와. " " ……그래. " 리리스는 쓴 웃음을 지으며 카이의 말에 따랐다. 아니, 따르려고 했다. 하지 만……. " 큭! ' 순간, 그들은 자신들을 속박해오는 의문의 기운에 전신을 긴장시켰다. 주위 에서 옅은 양홍색의 빛이 피어오르며 자신들의 정신 장벽을 공격하고 있었다. 리리스와 카이는 두 눈을 초록색으로 빛내며 이를 갈았다. " 어디서 이런 하찮은 짓을! " 카이가 일갈하자 그들을 휘감던 정신 공격이 튕겨 나갔다. 순간, 그는 반사 적으로 창생의 술을 사용하여 대지에서 비프론즈와 네비로스를 만들어냈다. 이런 정신 공격을 자신들에게 할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던 것이다. 리리스 역시 암흑의 날개를 등 뒤로 뽑아내며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챙 미처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그들의 목을 겨누는 은색의 칼날이 있었다.어 느 새인가 그들의 사이로 눈에 띄는 은발의 신부가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손 톱들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카이와 리리스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자, 그들의 뒤편에서 검은 우 비 차림을 한 초등학생 소년이 환호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 나이스 신부님! 자자, 거기 두 분. 움직이지 마시길. 피를 보고 싶지 않 다면 가만히 있으라고. " " 네 녀석들이! " 리리스는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이들은 다 름 아닌 한시영의 수하, 라트 발렌시아와 마유빈이었던 것이다. " 저……선배? " " 음? " " 그게, 아파서 그러는데요. 잠시만……. " " 아! " 한참동안 가인을 끌어안고 있던 마리는 그의 요청 아닌 요청에 황급히 그에 게서 떨어졌다. 무의식 중에 세게 끌어 안아서 가인이 고통을 호소했던 것이 다.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가인에게서 수십 걸음이나 뒷걸음질 쳐 버렸다. " 미,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 " 아뇨. 제가 오히려 미안하죠. 오랜만에 원 없이 울어봤네요. 하하, 이거 부끄러워서 내일부터 어떻게 선배 얼굴을 봐야할지 모르겠어요. " 가인은 그녀에게 매달려 엉엉 운 것이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시 민 씨와 그런 일이 있은 후, 계속 참아왔던 감정이 하필이면 마리 선배 앞에 서 터져버릴 줄이야. 가인은 그야말로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숨고 싶 었다. 마리는 그렇게 쑥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에 자신도 덩달아 쑥스러워졌다. " 아니, 그, 나도 기뻤다.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솔직한 모습을 나에게 보 여줘서. 그리고 네가 울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하기에…… 너무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 가인은 맥 없이 미소했다. 그 모습에 마리도 살며시 미소지었다. "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기대도록 해라. 네게 힘이 될 수 있 다면 난 최선을 다하겠다. " " ……고, 고마워요. " 마리의 진지하기 짝이 없는 말에 가인은 얼굴을 붉혔다.한결같이 자신을 생 각해주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을 먹었던 것이다. 마리도 그제서야 자신이 얼 마나 대담한 말을 한 건지 깨닫고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게 미묘한 거리 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떨어져 있 건만 가까이에 있을 때보다도 더욱 크게 서로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실로 표 현하기 힘든 신비한 기분이었다. 그때, " 흐음. 한창 좋은 분위기를 망쳐서 죄송하지만……잠시 저를 주목해주실까 요? " " ……! " 갑작스레 들려온 속삭임에 가인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떨어져 있던 마리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이렇게 다가오는 동안 자신들이 조금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대의 접근에 마저 놀라기도 전에 그들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 ……시민 씨? " 상대의 얼굴은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던 피스 옐로우,한시민과도 너무나 흡 사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상대는 여자도 아닌 남자에다가 머리카락도 흑색인 등 여러모로 그녀와는 달랐다.무엇보다 목소리가 확실히 다른 사람이 었다. " 오랜만이에요, 유가인 군.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이후로 처음이죠? " " ……예? "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의 태도에 가인은 영문을 몰라 주춤거렸다. 누 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날 알고 있는 건가? '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만났던 것 같기도……. ' 그때 뒤에 있던 마리가 주변의 변화를 눈치 채고 다급히 가인에게 소리쳤다. " 가인! 조심해! " " ……! " 하지만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가인의 그림자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 에게 달려들었다! Ｔo Ｂe Ｃontinued… TITLE ▶259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08 :: :: 28030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05 - Ｂy Ｎext Ｎeo =-=-=-=-=-=-=-=-=-=-=-=-=-=-=-=-=-=-=-=-=-=-=-=-=-=-=-=-=-=-=-=-=-=-=-= 언더 시티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 집중 검사실의 옆에 위치한 휴게실에서 시민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정기 적인 피스 대원의 신체 검사 날을 맞이하여, 그녀는 막 합성면역물질의 일종 인 모노클로날 항체를 맞은 후 전신 스캔을 하기 위해 약효가 발생하는 30분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번 이 30분을 휴게실에서 피아노 연주 를 하며 보내곤 했다. 평소라면 가볍게 연주할 겸 부드러운 클래식으로 숨을 돌렸겠지만,오늘의 그녀는 난폭하기 그지없는 연주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리가 큰 난폭함이 아니라 쉴 새 없이 연주하는 손가락의 살벌함이었지만. " 후……. " 막 세번째 곡을 끝내고 나서야 시민은 탄식하듯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이마 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지만 닦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피아노의 하얀 건반을 노려볼 뿐이었다. ' 그 남자 때문에 그러시는 거에요? ' 며칠 전 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을 하면서 울먹이던 그의 표정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차갑게 대꾸했던 자신의 목소리 또한……. 시민은 지금에서야 솔직히 가인의 말을 인정할 수 있었다. ' 그 말대로에요, 가인 씨. ' 나는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었던 거에요. 그에 대한 분노를 버 리고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껏, 지금껏 10년의 세월을 그것 하나만 으로 버텨온 나였기에, 지금 와서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 었어요. 시민은 무기력한 자신에게 조소했다. 결국 자신은 겁쟁이에 불과했다. 변화 를 무서워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는 비겁자였다. 그리고 그 비겁함이 가인에게도 상처를 주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에게 했던 자신의 말은 모두 변명이었을 뿐이다.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궤 변에 불과했다. 그렇게 가인 씨에게 상처를 주고 나니 속이 시원한 거야, 한시민? 자신이 원하던 데로 아무 것도 변하지 않게 되었으니 만족하는 거냐고? 한시영, 그를 계속 증오할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구나! " ……! " 시민은 혐오감을 느끼며 다시 피아노 건반으로 손을 올리려고 했다.그때 휴 게실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연주는 거기까지 하도록 해요, 시민 씨. 이제 검사까지 5분도 남지 않았 으니까요. " " ……진우 씨. " 시민은 자신을 찾아온 이를 바라보며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문에는 피스 그린 정진우가 예의 넉살 좋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마 도 시민의 신체 검사날과 팔라딘 대의 잔업날이 맞물린 모양이었다. 진우는 그녀의 곁에 다가와 서며 말했다. " 시민 씨답지 않게 오늘은 꽤 저기압인 거 같네요. 아니, 오늘 뿐만이 아 닌 건가? 요 근래 들어서 계속 그러는 것 같던데. " " 글쎄요.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 시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진우는 그녀가 사정을 얘기해 줄 것 같지 않자 다른 얘기를 꺼냈다. " 흐음. 그래도 좀 웃으라고요. 그렇게 어두운 표정만 짓고 있으니까 꼭 그 때로 돌아간 거 같잖아요? " " 그 때, 라니요? " 시민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묻자, 진우는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답 했다. " 저와 처음 만났을 당시 말입니다.그러고 보니 벌써 5년이나 지났군요. 미 국 지부에서 활동하던 제가 막 한국에 도착했을 때 한국 지부의 피스 대 원은 시민 씨 혼자 밖에 없었죠. " " 아, 그래요. 그때는 공식적으로 한국 지부의 피스메이커가 드러나지도 않 았을 때였죠. 아마 진우 씨는 미연 씨와 결혼하자마자 막 귀국하던 참이 었고. " 시민은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그녀의 말에 맞장 구를 쳤다. " 하하. 맞아요. 장인 장모님이 한시라도 빨리 외가에 들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마지못해서 귀국한 거였죠. 사실 한국 지부 발령은 덤이었던 거에요. 덤. " " 후후. 아직도 기억나네요.막 돌이 지난 하나를 등에 업고 첫 출근했던 진 우 씨의 모습이. 다들 미국 지부의 피스 대원이 누구인가 궁금해하던 참 에 웬 애아빠가 왔으니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 " ……그런 건 좀 잊어주세요. " 진우는 안좋은 추억을 떠올렸다는듯 인상을 찡그렸다. " 어쨌든, 그때는 시민 씨도 지금과는 많이 틀렸죠.머리도 목까지 내려오는 단발이었고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미소년이었어요. 지금이야 맘씨 좋은 주 부처럼 변했지만, 그때는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처럼 날이 서있었죠. " " 그랬던 가요. " 시민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그녀는 진우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그때처럼 예민하게 날이 서있다는 뜻이었다. 진우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시민 씨가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처럼 잘 웃고, 활기차게 살아갔으면 해요. 처 음 봤을 때의 시민 씨는 마치 상처입은 늑대같았죠. " 물론, 지금도 그 상처가 나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우는 끝 말을 삼키며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러고 보니, 시민 씨가 잘 웃게 된 데에는 녀석의 공이 컸어요. 가인이 녀석 말입니다. 그 녀석이 피스 대원이 되면서,시민 씨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고, 그 덕분에 유리 양과 사부님도 같이 살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시 끌벅적해졌잖아요. " " 그 때문에 가인 씨를 제 집으로 데려온 거였어요? " " 아, 뭐. 사령관 님, 수정 씨와 충분히 얘기한 끝에 결정한 사항이었죠.그 때 우리가 얼마나 시민 씨를 걱정했는지 압니까? 당겨진 화살대처럼 꽤 위태위태 했었다고요. 아마 가인 군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시민 씨도 지금 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 거에요. " " 그때는……저도 좀 위험했어요. " 시민은 진우의 말을 인정했다. 자신의 변해버린 몸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적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문에 일부러 여성스럽게 하고 다니려고 애쓰고, 말투나 행동거지도 바꾸려고 노력했었다. 일종의 과도기였다. 그 과도기마다 여러모로 수정의 도움을 받았었는데 번번히 포기하고 원래대로 돌아가기 일 쑤였다. 아마 그때도 적응하는 것에 지쳐서 반쯤 체념하고 있었는데……. ' 오늘부로 피스 대원이 되시는 유가인 씨? ' ' 예? 그, 그렇습니다! ' 유레카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자신을 구경하던 그의 모습. 그것이 가인과 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는 설마 그가 자신에게 있어서 이렇게까지 큰 존재 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래. 그랬는데……. ' 시민 씨를……사랑하는데요? ' 자신에게 고백하던 가인의 모습이 떠오르자 시민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솔직히 그녀는 기뻤다. 그의 고백을 받았을 때 순수하게 기뻐했다.하지만 이 윽고 자신에게는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 지금의 나는…… 진짜가 아니기에……. ' 가인은 자신의 옛모습을 알지 못한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전에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격앙되던 가슴이 차갑게 식어간다.그리고 자신에게 고백을 하던 가인의 모습이 증오스러운 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자신을 배신했던 그 남자의 모습이 연상 되었던 것이다. 그때 가인에게 퍼부었던 독설은 사실 그가 아닌 한시영, 그를 향한 독설이 었다. 그를 믿었던 어리석은 자신을 향한 독설이기도 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를 믿고 사랑했던,그리고 지금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 는 자신을 향한……. " 처음에는 그저 재미 때문이었어요.가인 씨에게 내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 은……. " 시민의 중얼거림에 진우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씁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긴. 꽤 재미있었죠. 그렇게 녀석이 시민 씨를 따르고 좋아하는게 꼭 강 아지 같더라고요, 하하. " " 그래요. 단지 그랬던 건데, 그저 조금만 뒤로 미뤘던 것 뿐인데. " 시민은 고개를 떨구며 어깨를 천천히 떨어뜨렸다. 진우는 그렇게 괴로워 하 는 그녀의 모습에서 가인을 떠올렸다. 작년에 그가 시민의 중상에 괴로워하 며 자책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 설마 그 녀석이 그렇게나 시민 씨에게 진심이 될 줄은……. ' 이것은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잘못이었다.일이 이렇게 돌아가도록 내버려두 는 게 아니었다. 좀 더 진지하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만 하는 것인데 ……. 시민은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가인 씨에게…… 외면 받고 싶지 않아요. 그가 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표정이 변하는 게 두려워요……. " 그에게 진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그와 함께 지내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알리지 않고 지금처럼, 그가 웃는 것에 기뻐하며, 자신을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다면…… 그것으로 나는……. "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지내는 게 아니었는데……. " 그에게 마음을 주는 게 아니였어. 시민은 후회했다. 그를 알게 된 자신을 후회했다.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자 신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형에 이어 그마저도 잃고 싶지 않았다. 사랑 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한번으로 족했던 것이다. ' 이런 건…… 싫어. ' 시민은 환자복에 눈물을 떨구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녀의 태도에서 대충 상황을 짐작한 진우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그리고 힘 없이 올려다 보 는 시민에게 말했다. " 솔직하게 녀석에게 말해봐요. " " ……! " 시선을 피하려는 그녀에게 진우는 보다 뚜렷하게 말했다. " 시민 씨가 알고 있는 유가인은, 진실에서 눈을 돌리는 녀석이었습니까? " " ……. " 시민은 지금껏 가인과 함께 해온 날들을 떠올렸다.가인은 수차례의 죽을 고 비를 넘기면서도, 몇번의 좌절을 겪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 다.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길조와의 싸움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와 자신의 품에 안겨 울음 을 터뜨리던 그를 기억해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길조의 독에 죽어가던 자신을 살리기 위해……. " 녀석을 한번 믿어보자고요. 저는 적어도, 녀석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만족스러운 대답을 줄 거에요. "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시민은 진우의 말대로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하지만 이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면 자신이 이 토록 고민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가인 씨가 내 모습을 인정해준다면. 변해버린 내 모든 것을 알고도…… 나를 받아준다면……. ' 시민 씨를……사랑하는데요? ' 그 말에 솔직하게 기뻐할 수 있을까?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에게, ' 사랑한다고……말할 수 있을까? ' " 이게 무슨 짓이냐! 지금 너희가 누구를 건드린 것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 " 리리스는 이를 갈며 유빈과 라트를 노려보았다. 그 살기어린 태도에 유빈은 살짝 기가 죽어 자신 없게 대꾸했다. " 아아, 어차피 우리도 당신들을 해치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아요. 물 론 그럴 생각도 없고. 다만 이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거라서. " " 만약의 경우? " 카이는 유빈에게 질문하면서 속으로 계산했다. 이대로 네비로스와 비프론즈 의 몸에 영체를 이동시켜 라트를 공격하는 것이 빠를지, 그의 손톱이 리리스 의 목을 가르는 것이 빠를지. 자신이야 강령할 육체가 있는 한 얼마든지 네크로맨시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지만, 리리스의 나이트메어(Nightmare)는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그녀 는 저 테라인의 육체가 죽어버리면 그것으로 이 삼차원에서 활동하는 것도 끝이었다. 아니, 솔직히 노아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시공 주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아스트랄 계로 튕겨나갔다간 영원히 차 원을 떠도는 미아가 되는 것이다! 결국 카이는 저항을 포기했다. 어차피 녀석들도 자신들을 해치는 게 목적이 아닌 것 같았다. " 마스터가 옴팔로스의 열쇠에 접속하는 동안 당신들이 행여나 훼방을 놓치 않을까 해서. " 유빈의 말에 카이는 코웃음을 쳤다. " 흥.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오라의 주 인에 관한 것은 너희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러니 당장에 이 짐 승의 발톱부터 치워라! 어서! " 카이는 리리스의 목에 손톱을 겨눈 라트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하지만 라트 는 손톱을 거두지 않으며 오히려 차분하게 대꾸했다. " 마스터의 일이 끝나면 치우지 말라고 해도 치울 것이다. " " 이 자식이……! 맡긴다고 했잖아! 네놈들이 저 망할 테라 인을 구워먹든 삶아먹든 우리 알 바 아니라고! 우리는 가던데로 갈테니 신경 끄고 네 녀 석들이나 잘 하란 말이다! " " 그건 당신의 생각이고. 밤의 여왕님은 생각이 좀 다르신가 본데. " " ……! " 라트가 리리스를 턱짓으로 가리키자,카이는 당황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리 리스는 유례없이 긴장한 표정으로 가인 일행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 어디에도 카이가 있을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안중에도 없었다! " 제길! " 카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 리리스! 역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거야? ' 그렇게 유가인, 그가 신경 쓰이는 거냐! " 가인! " 마리의 외침에도 가인은 대꾸하지 못했다.자신의 발밑에서부터 그림자가 전 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거대한 뱀에게 몸을 졸리는 기분이었다. 그림자의 압 박에 숨을 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 대, 대체 왜……? 어째서……. " 가인은 자신에게 미소짓는 남자, 시영을 향해 신음처럼 물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왜 시민 씨와 얼굴이 닮았는지는 몰라도, 생판 모르는 자신 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무엇보다 자신을 그림자로 묶은 이 능력! 오라 능력이었다. 피스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이 남자도 오라 능력자였던 것 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왜 자신들을 공격하는 거지? 왜 같은 오라 능력자 를……. 왜? 그런 여러가지 의문을 내포한 가인의 질문에 시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 그거야 가인 군이 너무 늦장을 부려서죠. 아니, 시기 상으로는 늦은게 아 니지만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는지라 더 이상 기다려줄 수가 없게 되었습 니다. 슬슬 당신이 각성해줘야 계획에 차질이 없거든요? " " 계획, 이라니……. " 거기까지 말하던 가인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몸을 조이던 그림자의 힘이 한층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힘이 계속 가해졌다간 전신의 뼈가 남김 없이 으스러질 것이다! 그것을 보다 못한 마리가 고함을 내질렀다. " 그만두지 못해! " 마리는 시영에게 달려들면서 동시에 왼팔로 반원을 그렸다. 그 왼팔의 손목 에는 AI슈츠를 불러낼 수 있는 무전기가 달려 있었다.이 무전기가 그녀의 특 정 음성을 인식하면, " 변신! 피스 레드! " 무전기의 특정 주파수가 작동, 착용자의 몸 주변에 셀프 라이팅 기능을 수 행하며 에테르 상태로 존재하던 AI컴플리트 세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없 이 그녀의 몸을 감싸는 검은색의 AI슈츠. 그리고 슈츠가 패턴 레드의 오라와 반응하자 붉은색을 띄기 시작했다. " 하아아아아-! " 시영의 근저까지 접근한 마리는 어깨 갑주에서 튀어나오는 오라 소드를 물 흐르듯 잡아내며 동시에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만들어 시영에게 휘둘렀다.순 식간의 횡 베기였다. 상대가 인간 임에도 불구하고 적으로 인식한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챙 하지만 돌아온 것은 둔탁한 검울림과 떨어져나갈 것 처럼 아픈 손의 통증이 었다. 마리는 간신히 오라 소드를 놓치지 않으며 튕겨지듯 허공을 날다가 지 상에 착지했다. 그녀가 돌아보니, 어느 새인가 시영의 앞에는 웬 붉은 수도승 복장의 가면 남자가 노다치를 어깨에 둘러멘채 서있었다. 텐구 가면의 남자였다. 그가 시 영을 공격하려던 마리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 너는……! " 마리는 본능적으로 눈 앞의 검사가 뿜어내는 기도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와 자신의 사이에 있는 대기가 회오리치듯 미쳐 날뛰는 기분이었다. 그 대 기의 회오리가 남자 쪽으로 천천히 빨려들어간다. 이것은 상대의 기량이 마 리 자신보다 위임을 의미했다. 이런 압도감을 그녀의 아버지, 성비영 이외의 상대에게서 느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리는 긴장한 눈으로 텐구 가면의 남자가 어깨에 멘 장도를 살펴보았다.고 풍스러워 보이는 것이 유래가 느껴졌지만 신력도,오라 능력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노다치에 불과했다. 어떻게 저 검으로 자신의 오라 소드를 막아낼 수 있었을까? 마리의 오라 패 턴 레드는 무엇이든 베어내는 절단의 능력이기에 같은 절단 계열의 능력자가 아니고서는 그녀의 검을 받아낼 수 없다. ' 아! ' 하지만 그녀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텐구 가면의 남자가 노다치로 자신 의 검을 막아낸 방법,그것은 바로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와 같은 검 기(劍氣)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노다치의 검날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아지 랑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오라 능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텐구 가면의 남자 는 인간이면서도 검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경악할만한 사실 이었다. 피스 버밀리온만 하더라도 신검 도츠카노츠루기의 신력을 빌어 검기 를 발현하는게 고작이었는데! " 마리, 선배……! " 고통에 찬 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모습에 마리는 조급함을 느꼈다.이 렇게 꾸물거릴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저들의 손에서 가인을 구해내 야만 한다! 그렇게 마리가 다시 텐구 가면의 남자와 격돌하려고 하자 가인은 이를 악물 었다. 예민해진 패턴 블루의 감각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들과 붙어서 는 안된다고. 몸을 피해야만 한다고. 자신의 오라가 자꾸만 곁에 있는 시영 의 오라에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시영의 몸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짙은 암흑의 오라를. 그것을 보는 순간, 예전 시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배신자에요. 피스메이커를 배신한, 인류를 저버린 오라 능력자죠. ' 피스 블랙! 가인은 그제서야 상대의 정체를 짐작해내고 몸을 떨었다. 몬스터에게 가담 하여 지속적으로 피스메이커의 일을 방해해온 최초의 피스 대원! 그리고 피 스 카민 마유빈과 라이컨슬로프 라트 발렌시아의 배후! 그런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안돼……! 도망쳐요, 선배……! ' 이 자들을 상대해서는 안돼! 하지만 그런 가인의 마음 속 외침은 마리에게 닿지 않았다. 마리는 가인을 구해내겠다는 일념 하에 맹수처럼 포효를 내지르며 텐구 가면의 남자에게 쇄 도해 들어갔다. ' 일격에 끝을 내야 한다! ' 텐구 가면의 남자는 기검술을 사용하는 고수다. 그렇다면 승부를 오래 끌수 록 그녀가 불리했다. 무엇보다 저 검사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그 뒤에는 가인 을 포박하고 있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텐구 가면의 패배에 남자가 가인의 목숨을 협박이라도 한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가인을 포박한 남자와 텐구 가면. 이 둘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그리고 이들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자신 이 먼저 공격할 수 있는, 그런 신속의 공격을 해야만 한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의(奧義), " 검과 자신을 하나의 번개로 만드는 신검합일술(身劍合一術)! " 운요(雲燿)! " 순간, 마리는 AI슈츠에서 타는 냄새를 흘리며 대기 속으로 녹아들기 시작했 다. 삼대오의 중 신속의 베기라고 불리우는 운요가 시전된 것이다. 이 기술 이라면 눈 앞의 적들은 미처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깨닫기 전 에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이다. 운요를 사용한 뒤 찾아올 치명적인 경직이 걱정되었지만, 그것도 상대할 적 이 사라진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치이이이이잉 하지만 그때, 귓청을 가르는 거센 대기의 진동음이 울려퍼졌다.그리고 대기 속에 녹아들던 마리는 거짓말처럼 텐구 가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오라 소드의 검날은 텐구 가면의 목을 노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기나긴 노다치의 날이 가로막고 있었다. 운요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텐구 가면의 노다치가 기술을 와해한 것이다! ' 깨졌다! ' 무영신풍류의 오의가……깨졌어? 마리가 믿을 수 없다는듯 중얼거릴 때, 그녀의 귓가로 텐구 가면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 분(分)에서 초(炒)와 사(乍), 홀(忽), 호(毫)를 지나는 시간이 너무 길었 다. 운요로 들어가기 전에 검로를 막아버리면 간단하게 멈출 수 있지. 운 요를 시전하기에는 아직 기량이 부족해. " " ……! " 마리는 두 눈을 부릅 떴다. 텐구 가면의 지적이 너무나도 정확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 검사가 무영신풍류의 오의를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펼친 단 한번의 기술로 운요를 완전히 파악했단 말인가?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 큭! " 마리는 재빨리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텐구 가면의 노다치는 마치 오 라 소드의 날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검술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겨눔세의 착(着)이었다.단지 이 기본 기술로 그는 마 리의 검로를 묶어버린 것이다. 그것만 보아도 마리와 텐구 가면의 기량이 얼 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텐구 가면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사흉(四凶), " ' 뭐? ' 순간 마리는 노다치의 날이 수십, 수백, 수천개로 갈라지면서 자신의 몸을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혼돈(渾沌). " 퍼버버버벅 순간, 그녀의 AI슈츠에서 그녀의 것이라고는 생각되기 힘든 파육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슈츠의 안쪽으로 흥건히 젖어드는 몸. 마리는 그것이 곧 자 신의 피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대체 무슨 일이……. " 커……, " 마리는 불신의 표정을 지으며 입에서 한움큼의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한 순 간에 전원이 꺼진 것처럼 의식이 멀어져간다.마리는 필사적으로 쓰러지지 않 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몸은 형체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스스로를 지탱 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그녀의 육체는 노다치의 칼등에 이미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 마리 선배! " 가인은 그렇게 쓰러진 마리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마리는 희미해져가는 의 식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몇번 어깨를 꿈틀거렸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포션을 주사하는 AI슈츠의 구멍 속에서 짙은 붉은색의 액체들이 흘 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몸이 붉은 피의 강에 잠겨드는 것만 같다. " 이것이 오라 능력자였나? 이것이 그들이 선택한 무영신풍류의 후계자란 말인가? " 텐구 가면의 남자는 쓰러진 마리를 내려다보며 음의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 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보면 조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 면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노다치를 다시 어깨에 둘러메며 시영에게 말했다. " 굳이 당신과 손을 잡지 않아도 될 뻔 했군.내 생각대로 검술은 미숙한 주 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힘을 가진 무리들이다. 고작 이 정도의 녀석들에게 무영신풍류를 맡기려고 했다니…….그 늙은이들,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 었군. " " 하하. 일단 좀 기다려 보시죠.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는 그녀보 다 좀 더 당신을 즐겁게 해줄 테니. " " ……즐기는게 아니다.단지 이런 오라 능력자라는 것들에게 가르쳐주고 싶 었을 뿐이다. 자신들이 가진 힘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지를. " 그렇게 말하며 텐구 가면의 남자는 쓰러진 마리의 AI 헬맷을 발로 건드렸다. 그 모습에 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시영은 텐구 가면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흐음. 당신과 손을 잡은 저도 엄연히 보잘 것 없는 오라 능력자 임을 잊 지 말아 주십시오. 제 앞에서는 모르겠지만 특히 유빈과 신부님의 앞에서 는 말 조심을 해주시고요. 그들은 저와 달리 화가 나면 꽤 무섭답니다. " " ……. " 텐구 가면의 남자는 다시 예의 침묵을 고수했다. 아무래도 할 말은 모두 끝 냈다는듯한 태도다. 그 모습에 시영은 생각했다. 어지간히도 말하는 것을 싫 어하는 사람이라고. 그 때 그의 곁에서 분노에 찬 가인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 네 녀석들이 마리 선배를! " " ……! " 갑작스러운 오라의 상승! 시영은 가인이 오라를 사용하려고 하자, 재빨리 그를 휘감던 그림자에 힘을 넣었다. 그러자 고함을 치던 가인의 목소리가 비 명 소리로 바뀌었다. 그림자는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라마저 빨아들이고 있었다. 시영은 친절하게 그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 그대로 그림자에 오라를 계속 빨렸다간 가인 군의 목숨도 위험해질 겁니 다. 그러니 무모한 저항은 하지 마시고 순순히 제 말을 따라주세요. 아직 동료 분도 죽지는 않았을테니 재빨리 치료한다면 살 수 있을 거에요. " 하지만 그런 시영의 말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오라를 전개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리를 저렇게 만든 눈 앞의 적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대로 무력하게 너희들의 말을 따를 성 싶으냐! 지금의 상황에서 그가 펼칠 수 있는 기술은 단 한가지! 天천 空공 主주 心심 拳권 순간, 시영의 중심에서 오라의 토네이도들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적의 주 심부터 파괴해내는 천공권의 최종 진화형태가 사정 없이 시영의 내부에서부 터 생성된 것이다. 투카카카카칵 전력을 다한 가인의 천공주심권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 없는 위력으로 적의 주심부터 파괴해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가인은 뭔가 이상함을 느껴야만 했다. 천공주심권에 형체도 없이 날아가야할 시영이 광풍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멀 쩡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찢어질듯이 펄럭이는 그의 정 장 상의에 눈을 돌린 가인은 곧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쿠콰콰콰콰콰 천공주심권의 토네이도들이 시영의 정장 상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시영의 내부에서 생겨난 거대한 검은 공동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저 공동은 뭐지? 마치 모든 것을 빨아 들이는듯한, 탐욕스러운 검은 악마의 입 같았다. 저런 것도 그림자인가? " 후우. 꽤 위험하군요. 함부로 사람에게 이런 난폭한 짓을 하다니. 하마터 면 죽을 뻔 하지 않았습니까? " " 아, " 가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흥분해서 몬스터도 아닌 사람에게 오라 능력을 사 용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당황하는 것도 잠시,곧 그들이 오라 능력자인데다가 마리 선배를 해쳤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 웃기지마! 네 녀석들이 먼저 우리를……! " " 자, 착한 아이는 일찍 잠드는 겁니다. 좋은 꿈 꾸시길. " 시영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가인을 감싸던 그림자가 그의 남겨진 얼굴 마저 덮어버리며 그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가인을 빨아들인 그림자 는 시영의 그림자와 합쳐져 하나의 그림자가 되었다. " 흠. 그럭저럭 정리는 된 듯하고. " 시영이 피곤하다는듯 목을 주무르며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자, 그림자에 서 하나의 물체가 수면으로 떠오르듯 나타났다. 바로 가인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피스 대원의 무전기였다.그는 그것을 주워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유레카 의 주파수를 찾아내고 무전을 쳤다. 잠시 후 무전기의 액정에서 유레카의 오퍼레이터 치프, 윤채영이 당황한 표 정으로 나타났다. 《가인 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 마리 양의 신진대사 수치가 왜 이렇게…….》 " 피스메이커, 듣고 있습니까? 여기는 당신들의 옛 전우 피스 블랙입니다. " 시영은 채영의 반응을 신경쓰지 않으며 자신이 할 말만 계속했다. " 지금부터 저희는 잠시 당신들의 피스 블루를 데려가겠습니다. 볼 일이 끝 나면 무사히 돌려보낼테니 안심하시고 기다리시길…… 이라고 말해도 분 명 가만 있지는 않으실테죠? 그러니 아예 그의 신병을 인도할 장소와 시 간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장소는 당신들이 폐허로 만든 12구역. 지금이 23시니까 정확히 7시간 뒤, 내일 아침 6시에 보는 것으로 하죠. 아, 그리 고 당신들이 자랑하는 머신 아더는 가지고 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물 론 가인 군이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겠지만 말이죠. " 《아, 잠깐!》 채영이 미처 소리지르기도 전에 시영은 무전기를 꺼버렸다. 그리고 수풀 너 머에 있던 자신의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 자, 그럼 이만 철수합니다! 유빈! 라트! " 휙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트가 유빈을 어깨에 들쳐메고 수풀에서 날듯이 뛰어올라 시영의 곁에 내려섰다. 그 뒤를 이어 수풀에서 허겁지겁 리리스와 카이가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 한시영! " 리리스가 막 그림자에 녹아들어가는 시영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벗어 두었던 선글래스를 다시 쓰며 그녀에게 미소지을 뿐이다. " 걱정마시길, 리리스 님. 저는 단지 가인 군에게 선물을 하나 건네줄 생각 입니다. 그 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어요. " " 선물이라니? " " 뒤늦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남아 있었거든요. " 리리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시영은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수 하들과 함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그렇게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리리스가 멍 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카이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 리리스? " " ……아아. 그보다 그 아이의 상태는 어때? " 리리스는 신음을 흘리며 카이의 곁에 쓰러져있는 마리에게 다가갔다. 카이 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마리의 상태를 살피다가 이내 혀를 찼다. " 지독하군. 이거, 죽은 거 아냐? " " 아니, 다행히도 아직 살아있어. " 리리스는 마리의 AI슈츠에서 오라의 불빛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며, 마리의 가슴 장갑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마 가인의 꿈에서 들여다본 기억이 맞다면 피스 대원들은 여기에 포션이라고 하는 회복 약품들을 소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대로 장갑을 개폐하자 고압 주사기 형식의 포션 들이 나타났다.리리스는 치료가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마리에게 포션을 주사 했다. 그런 리리스의 행동에 카이는 인상을 찡그렸다. ' 적을 살려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 정신이 아니야. ' 보다 못한 그가 소리쳤다. " 리리스, 테라 녀석들이 점점 이 곳으로 다가오고 있어. 빨리 여기를 뜨자! " " 그래. " 리리스는 마지막으로 마리의 상태를 확인한 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카이 를 끌어안으며 자신의 검은 날개를 펼쳤다. 그러자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둘의 몸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 ……. " 적막. 그렇게 리리스 일행마저 떠나버린 공원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적막도 잠 시 후 피스메이커의 팔라딘 대가 혼수 상태인 마리를 발견하면서 다시 소란 스러워진다. 팔라딘 대에 의해 언더 시티로 후송되면서도 마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는 꿈 속에서도 몇번이나, 가인에게 현실에서 자신이 했던 말들을 반복 하고 있었다. '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기대도록 해라. 네게 힘이 될 수 있 다면 난 최선을 다하겠다. '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Ｔo Ｂe Ｃontinued… TITLE ▶260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09 :: :: 17960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06 - Ｂy Ｎext Ｎeo =-=-=-=-=-=-=-=-=-=-=-=-=-=-=-=-=-=-=-=-=-=-=-=-=-=-=-=-=-=-=-=-=-=-=-= 유가인이 납치된 이후로 6시간이 지났다.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멤돌고 있었다. 오퍼레이터 팀의 치프 윤채영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으면서도 조금도 지친 기 색 없이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현재 그녀는 피스메이커의 무인위성 위그드라실을 이용하여 12구역의 지도 를 홀로그라피(holography)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열원의 입력이 끝난 지형 정보를 알파 판으로 보내자 진 사령관의 앞에 있는 투영 장치가 12구역의 입 체 영상을 만들어냈다. 저번 D타입의 요르문간드와 머신 아더의 결전에 12구역은 인적이 없는 폐허 로 변해 있었다.그 후로 1달이 지났건만 한국 정부는 여전히 보수 공사나 피 해 복구 사업을 펼치기는 커녕 구조 작업을 하는데만도 급급했다. 물론 12구 역의 규모를 생각해볼때 이런 느린 진척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지 만, 그 결과를 피해자의 유가족들까지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대대 적인 유가족 대책 위원회의 농성. 그리고 진압. 이 끊임 없는 악순환이 12구 역의 구조 작업을 오늘까지 미루게 하고 있었다. " 오늘처럼 구조 작업이 늦어진 것을 다행이라고 여긴 적이 없군요. " 닥터는 12구역의 열원 감지도를 살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잠시 후 전장이 될 12구역은 차라리 파괴되어 있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이 이상 피해가 늘어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 닥터에게 수정이 커피를 건네주며 진 사령관의 옆으로 다가갔다. " 하긴 더 이상 부서질 건덕지도 없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피스 블랙도 그 것을 염두에 두고 12구역을 선택한 게 아닐까요? " " 그가 민간인들을 피해에 말려들지 않게 배려했다는 것입니까? " 닥터는 말도 안된다는듯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여자의 감수성이란 터무니 없는 방향으로 상황을 해석하는군. " 그는 이미 셀 수도 없이 사람들을 죽이며 자신의 목적을 이뤄온 남자입니 다. 그를 추적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성당 기사단의 크루세이더가 몇 기인 지 아십니까? 그 추적자들 중에는 우리가 보낸 팔라딘 대의 대원들도 속 해 있어요. " " ……저도 그가 민간인들을 배려해서 그곳을 선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요. 다만 뭔가 이상하다는 거죠. 굳이 12구역을 교환처로 지목한 이유가. " " 그런 걸로 치자면 이상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굳이 가인 군을 데려 갔으면서 나중에 돌려주겠다고 한 것도 이상한 일이고, 이렇게 장소와 시 간까지 알려준 것도 모를 일이에요. 처음에는 유치한 눈속임일 거라 생각 했었는데……. " 닥터는 메인 스크린으로 12구역의 한 부분을 확대시킨 영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시영 일행으로 여겨지는 다섯 명의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서 탐지되는 생체반응 또한 실제로 그들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 었다. "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자신들의 위치를 드러내도 우리가 손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 " 그들에게 잡혀있는 인질은 우리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존재니까요. 오라의 주인을 데리고 있는 이상, 우선권은 저들에게 있어요. 무사히 돌 려보내준다는 말이 진실이 되길 비는 수 밖에 없어요. " 수정은 스크린에 잡힌 다섯 명의 남자들 중에서 가인의 모습을 찾았다. 가 인은 다 부서져 가는 철조 건물의 꼭대기에 위태롭게 묶여 있었다.고개를 밑 으로 떨구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의식은 없는 모양이었다. 사람을 저런 식으로 취급하다니……. 수정은 새삼 분노를 느끼며 채영에게 물었다. " 피스 블루의 상태는 어때요? "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 뿐이에요. 맥박수도 심박수도 모두 정상입니다.》 채영은 보고와는 달리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 인이 입고 있는 AI슈츠가 에테르 상태에서 보내오는 정보들은 분명 그의 무 사를 알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수치 상의 데이터일 뿐.실제로 그에게 무슨 일 이 일어났는지는 여기에서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진 사령관이 말을 꺼냈다. " 위그드라실이 측정한 12구역의 오라 수치는 변화가 없는가? " 《예? 아, 예……. 지금까지는 별 다른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채영은 그가 왜 그런 것을 묻나 싶어 의아해 했다. 어차피 지금 시영 일행 은 본격적으로 오라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 수치가 미비하기 짝이 없 었다. 아마 그들이 12구역에 있는 것을 몰랐더라면 민간인들과 비교해도 특 별할 게 없는 수치다. 진 사령관은 여전히 겉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수정은 그가 한창 고 민에 빠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 " ……아니, 아무 것도. 단지 며칠 전에 지구방위군이 인천항으로 출동했었 다는 것이 생각났을 뿐이다. " 수정은 정보부에서 입수한 자료 파일의 내용을 기억해냈다. 거기에는 지구 방위군이 은밀하게 특수 부대 4개 소대를 인천항으로 파견했던 일들이 기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 4개의 소대 중 단 하나 의 소대도 귀환하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 그들이 군대를 파견했을 때 저희 쪽에서도 인천항에서 발생한 비정상적인 오라 수치를 캐치(Catch)할 수 있었어요. 위그드라실의 감시 범위 밖이 라서 미처 영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 사령관 님은 그 오 라 수치가 피스 블랙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서 지금도 12구역의 오라 수치를? " " 일단은……. 그것보다 피스 블랙이 제시한 시간까지 50분 밖에 남지 않았 다. 피스 대원들은 대기시켜놓았는가? " " 예, 피스 레드 외의 대원들은 모두 출동 가능합니다. " 수정은 그 말을 하면서도 메디컬 센터에 입원해있는 마리를 걱정했다. 가인 이 납치될 당시 현장에 있던 그녀는 필사적으로 가인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 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만약 팔라딘 대가 마리를 발견하기 전에 응급 처 지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영원토록 사지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닥터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리의 상태를 보고했다. " 일단 피스 레드의 외상은 PET용액으로 치료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상으로 봐서는 둔탁한 흉기에 의한 구타인 것 같았는데, 영상으로 확인해보니 긴 외날 도였더군요. 그나마 칼등으로 쳐 서 그 정도 선에서 끝난 것 같습니다. " " 어쨌든, 상황 설정은 SA로 지정한다. 5시 30분이 되면 피스 대원들을 12 구역으로 투입시킨다. " 그런 진 사령관의 명령에 새삼 작전본부실의 모두는 긴장했다. 수정은 안타 까움을 금치 못하며, 스크린에 떠오른 한시영을 바라보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결국……. ' 오라 능력자가 오라 능력자를 상대해야만 하는 건가? ' 오라 능력은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힘. 하지만 그 힘이 지금은 같은 인류 에게로 그 칼 끝을 돌리고 있었다. 수정은 지구 방위군의 4차 합동 회의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병기처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인류는 새로운 총칼을 가지 게 될 테니까요. ' 설마 그 말이 자신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줄은 몰랐다. 힘이란 결국 양면 의 날을 가지는 걸까? ' 아니. ' 오라 능력은 애초부터 인류를 구할 힘도 인류를 해할 힘도 아니었다. 그 이분법 속에 오라 능력을 적용시킨 것은 다름 아닌 지금의 인류다! 작전 수행 시간까지 앞으로 10분. 피스 대원들은 언더 시티 유레카의 광속 전차에 앉아 출발 명령이 떨어지기 만을 기다렸다. 대원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어둡기 그지 없었다. 동료 하나 는 반죽음 상태로 되돌아왔고,나머지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납 치당했다. 메디컬 센터에서 신체 검사를 받고 있던 시민은 갑작스레 마리가 응급실로 실려왔을 때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가인이 시영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가 이번에도 역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 어째서 가인 씨를 데려간 거지? 어째서! ' 시민은 마치 가인이 납치당한 것이 모두 자신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 신이 그의 고백을 거절했기 때문에, 자신이 한시영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처럼 여겨졌다. 왜 이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간신히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데, 가인 씨가 돌아오면, 그를 다시 만나면 내 가 지금껏 숨겨왔던 모든 것을 알리기로, 그에게 남김 없이 고백하겠노라고 마음 먹었는데! ' 무사해야 해요, 가인 씨. 제발……. 제발……. ' 시민은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깍지 껴 잡았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의 떨 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서웠다. 가인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 까봐, 그가 자신과 같은 상처를 입을까봐 미칠듯이 두려웠다. 쓰러진 자신을 내버려두고 웃으면서 떠나갔던 시영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충분히 가인을 괴롭히고 괴롭히고 괴롭히다가 결국에는 자신처럼 망가뜨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당장에라도 12구역을 향해 뛰쳐가고 싶었다.도저히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누군가가 상처를 입게 될까봐 두려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어째서 몰랐던 거지. 나는 이렇게나……. 이토록……. '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데. 시민은 뒤늦은 자신의 깨달음을 후회했다. 가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다.이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인가? 이 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인가? 가인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움찔 시민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던 유리의 몸이 꿈틀거렸다. 무의식중에 시민 의 사념에 반응한 것이었다. 시민은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수습하며 그런 유 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유리는 마리의 중태와 가인의 납치에 밤새도록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그 녀는 몇번이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울부짖었다. 어떻게든 가인이 마리와 데이트를 하지 못하도록 잡았어야 했다며, 마리의 사념 따위 는 무시해버렸어야 했다며 자신의 능력을 저주했다. 그건 유리의 탓이 아니 라고 시민이 몇 번이나 달랬지만 소용 없었다. 시민은 유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유리는 가까운 시기에 자신의 능력과 크나 큰 갈등을 겪을 것이다. 부 디 그때 그녀가 올바른 선택을 하길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 그나저나 피스 블랙, 그가 가인을 납치할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 진우가 계속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탄식하듯 말했다. 그 말에 곁에 있 던 브루스가 반응했다. " 뭘 모르겠다는 거냐? " " 하지만, 메리트가 없지 않습니까. 가인이 녀석은 그저 평범한, 아니 오라 능력자이기는 하지만……이제 겨우 18살인 고등학생에 불과해요. 오라 능 력에 눈을 뜬지도 아직 채 2년이 되지 않은, " " 그 2년이 되지 않은 녀석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생각해봐라. " 브루스의 말에 진우는 할 말을 잊었다. 브루스는 팔짱을 낀채 전방을 응시 하다가 말을 이었다. " 녀석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 쿠사나기가 일으킨 저압 폭발 속에서도 살아 남았고 D타입의 아포칼립스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이걸 우연이라고 생각 하나? 단순히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거라 생각해? " " ……! " " 그동안 침묵하던 머신 아더가 움직인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그 녀석이 있을 때에만 계속 일이 터졌던 것은? 몬스터들이 가인을 노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단지 착각이었을까? " " 그, 그래도 그 녀석은……! " " 가이아 애드번트 이펙트는 평범한 오라 능력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 그 외침에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불길한 예감이 몸을 타 고 흘렀다. 브루스가 다음에 할 말이 자신의 상상과는 틀리기를 바랐던 것이 다. 그때, 그녀의 품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게……무슨 소리야? " " 유리 양……. "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유리가 시민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키며 브루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껏 브루스가 했던 말들을 모두 들어버린 모양 이다. 브루스는 그런 유리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마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 녀석은 특별하다는 거지. 녀석은 우리와 틀리다. 같은 오라 능력자이지 만 분명히 틀려. 그래. 차라리 그 피스 블랙이라고 하는 놈과 닮았다고 할 수 있지. " " ……! " 역시!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그녀는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무엇보다 시영에 의해 오라 능력을 각성한 자신으로서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가인의 오라가 시영의 오라와 흡사하다 는 것을. 패턴 블루의 오라가 점점 패턴 블랙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 때문에 그녀는 가인이 힘을 사용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그가 시 영처럼 변할까봐 두려웠기에 그에게 오라를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 었다. 하지만 믿었기에. 자신을 지켜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가인이 시 영처럼 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기에 애써 자신의 느낌을 무시해왔다. 시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우리와 틀리다면, 그럼 가인 씨는 뭐인 거죠? " 그리고 한시영, 그 남자는? 모두가 긴장한 눈으로 브루스를 바라보자 그는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 오라의 주인. 가이아의 의지를 이어받은 자다. " 오라의……주인?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행이 질문하려고 하자 브루스는 기회를 주 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 어쨌든, 피스 블랙도 한때는 이 오라의 주인이었지. 하지만, 그는 무슨 이유에선가 스스로 오라의 주인을 버리고 몬스터들과 손을 잡았다. 그 뒤 가이아가 다시 선택한 오라의 주인이 바로, 지금의 유가인이라는 거다. " " 그가…… 피스 블랙이 오라의 주인이었단 말인가요? " 시민은 하마터면 피스 블랙을 형이라고 칭할 뻔 했다. 그녀는 단순히 시영 이 대재해 속에서 살아남아 자신을 각성시킨 뒤 몬스터에게 가담했던 거라 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전말이 있었다니. 시민은 자신이 모르는 일들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브루스가 계속 그에 관한 설명을 해주길 바랐다. 브루스도 그런 시민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혀를 차며 말했다. " 일단 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 밖에 안된다. 피스 블랙이 어째서 몬스터 에게 가담했는지는 나도 몰라. LA의 대재해 속에서 나는 브리트라에게 극대소멸권을 사용한 후 삼계에 접어들었기에, 그 후의 일들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 브루스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시민을 내버려두고 진우와 유리를 돌아 보았다. " 뭐, 그런 나지만 적어도 피스 블랙이 가인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 것 같군.과거에 오라의 주인이었던 녀석이 지금 오라의 주인을 데려갔다.왜 일 거 같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녀석은 자신이 버린 오라의 주인이라는 것이 필요해진 거야. " " 필요해졌다니……. " 유리가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까부터 자꾸만 무서운 예감 이 들었다. 예의 마인드 리딩과 같은 육감이었다. 그 육감이 브루스의 말에 서 불길한 미래를 예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가인의 미래를. " 애송이가 오라의 주인 몫을 할 수 있도록 각성시키려는 거겠지. 그 방법 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 " 안돼요! " 시민은 브루스가 꺼낸 각성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그 때문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그 시선들을 느끼지 못했다. 본능과도 같은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는, 그 남자는! 나에게 했던 일을 가인 씨에게도 똑같이 저지를 셈이란 말인가! " 가인 씨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돼요! 절대로! 절대로 막아야 만 해요! " " ……동감이다. 아마 오라의 주인이 각성을 하면, 차원을 주관하는 가이 아에도 그 영향이 미칠 거다. 무슨 재앙이 불어닥칠지 몰라. 그 때문에 이렇듯 우리가 그를 저지하려는 것 아닌가? " 그렇게 말하면서도 브루스는 스스로의 말에 냉소했다.동감이라고? 나도 꽤 거짓말이 늘었군. 누구보다도 그 애송이의 각성을 원하는 주제에. ' 피스메이커도 마찬가지다. 밤의 여왕이 오라의 주인에게 접근하도록 내 버려두는 것도, 애송이를 수도에서 떠나지 못하게 잡아두는 것도, 몬스 터들에게 일부러 노출시키는 것도 다 녀석을 각성시키기 위한 걸 거야. ' 브루스는 진 사령관의 얼굴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 남자는 오라의 주인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브루스는 그들의 행동을 맞춰주고 있었다.그의 목적 또 한 오라의 주인이 각성하는 것이었기에. ' ……하지만 이상하군. ' 브루스는 가인을 납치한 피스 블랙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뭣 때문에 그는 이렇듯 여유로운 것일까? 벌써 6시간이나 지났다.그 사이에 가인을 각 성시키려고 했다면 수십번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들과 한 약 속 시간이 다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 마치 우리가 자신에게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군. ' 어째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걸까? 오라의 주인이 각성하는 데에는 뭔 가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는 건가? 그 때문에 우리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 는 걸까? 그런 걸까? 아무리 브루스라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한번 오라의 주인이 된 녀석이었 기에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터였다. 브루스는 갑자기 피스 블랙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기대 되었다. 그는 여러모로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남자였다. ' 브루스! ' 그때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브루스는 자신을 부르며 미소짓던 가인의 얼 굴이 떠올랐다. 그를 떠올리자 가슴 한 구석이 뜨끔해진다. 쿠사나기를 물 리치고 머신 아더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껴안던 녀석이 생각났다. 자신의 무 사함에 눈물을 흘리던 것이 생각났다. 문득 그는 주위의 피스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불안함에 떨고 있었 다. 모두가 가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브루스 는 덜컥 불안해졌다. 처음으로 자신의 결정에 회의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 그럴 리가……. ' 브루스는 재빨리 마음을 비워냈다.언제나 그렇듯 결정을 내린 뒤에는 후회 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 감정 또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 기로 결정했다. 그래야만 한다. " 시간이, 다 됐군요. " 5시 30분. 무전기로 시간을 체크한 진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그를 돌 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표정들에는 저마다의 각오가 새겨져 있었다. 진우 는 하나 하나 그들의 눈과 마주하며 씨익 미소지었다. " 언제나 처럼 무사히 돌아오는 겁니다. 가인이 녀석을 데리고. " " 피스-! " 모두는 경례를 하며 좌석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광속 전차가 출발하기만 을 기다렸다. 이 전차의 속력이라면 12구역까지는 10분 이내에 도착할 것이 다. 일행은 진우가 했던 말을 마음 속으로 되새기며 새삼 각오를 다졌다. 반드시 가인을 구해낸다! 비잉비잉비잉비잉 그때 전차의 불이 꺼지며 붉은 비상 경보등이 울렸다. 피스 대원들은 이 갑 작스러운 상황에 영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진우는 곧바로 유레카의 채영에게 무전을 쳤다. 《지, 진우 씨!》 채 신호가 가기도 전에 당황하는 채영의 얼굴이 액정으로 떠올랐다. 진우는 표정을 굳히며 소리높여 물었다. " 무슨 일입니까? 어째서 1급 경계 태세로 들어간 거죠? " 그때, 액정에서 채영의 모습이 사라지고 대신 그들의 상관인 진 사령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도 분노를 띄고 있었다. 《지구 방위군의 전갈이다. 녀석들은 지금부터 12구역에 융단폭격을 가하겠 다고 한다!》 " ……! " 그 말에 유리와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Ｔo Ｂe Ｃontinued TITLE ▶261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10 :: :: 23426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07 - Ｂy Ｎext Ｎeo =-=-=-=-=-=-=-=-=-=-=-=-=-=-=-=-=-=-=-=-=-=-=-=-=-=-=-=-=-=-=-=-=-=-=-= 날카로운 햇살이 눈을 찔렀다. 가인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며 한동안 멍하니 전방을 응시했다. 지금 자신 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지 도통 인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쇠사슬에 몸이 묶인채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리니, 발 밑으로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지상과의 격 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 높이에 깜짝 놀란 가인이 황급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그를 묶 고있던 쇠사슬이 흔들리며 거칠게 철근을 긁어댔다. 끼익. 끼익. 듣기 싫은 마찰 소리를 귓가로 흘려보내며 가인은 자신이 온통 폐허가 된 도심의 한 가운데에, 그것도 지상에서 수십 미터는 떨어진 높이의 건물 옥상 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어째서 이런 곳에 자신이 있는 거지? " 깨어나셨습니까? " 그때 뒤편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등 골이 싸늘해졌다. 한순간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마리 선배를 쓰러뜨리고 자신을 납치한 피스 블랙!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뒤에 서있었다. 끼익, 끼익 가인은 발버둥을 치며 허공에서 그를 돌아보려고 애썼다. 사슬에 묶여있는 전신이 깎여나가는 것처럼 아팠다.지금까지 기절해 있느라 느끼지 못했던 고 통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었다. 팔과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는지 감각이 없 었고, 사슬에 닿은 피부에서 옅게 피가 배어나왔다. " 이런, 이런.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십시오. 저도 가인 군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고 싶지는 않지만, 피스메이커의 우주수가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서요. 조금만 더 버텨주시길. 이제 시간이 다 되어가니까. " " ……어, 어째서 이런 짓을……아니, 그보다 마리 선배는? " 가인은 말을 하려다가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을 느꼈다.그 러고 보니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오라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마 치 예전에 브루스가 자신에게 황제내경의 침술을 사용했던 것처럼 몸 안이 텅텅 빈 기분이었다. 그렇게 가인이 스스로의 상태에 당황하자 시영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 해주었다. "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지금 가인 군의 오라는 제 그림자에게 한차례 빨려나간 상태입니다. 경고했었죠. 그림자에 오라를 계속 빨리다 간 죽을지도 모른다고. " 가인은 그제서야 그가 왜 자신의 곁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저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힘을 제압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 하지만 정말 대단한 힘이에요. 아마 다른 오라 능력자였다면 빈껍질만 남 아 있었을 텐데, 당신에게서는 벌써 새로운 힘이 샘솟듯이 흘러나오고 있 군요. 이거 방심했다간 정말로 큰일나겠어요. " " 선배를, 선배를 어떻게 했냔 말이야! 마리 선배는 어떻게 되었어! " 가인은 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반사적으로 고함을 내질렀다.그 신경질적인 반응에 시영의 뒤에 있던 유빈이 이죽거리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했냐? 지금 누구에게 큰 소리를 지르는 거야! " " ……! " 가인은 유빈의 접근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 들었다. 그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오라를 사용할 수 없는 무기력함. 지금의 자신은 저들에게 어떤 유 린을 당하더라도 속수무책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참고 있던 공포가 밀려들었 다. " 하? 이 자식, 왜 이렇게 떠는 거야? 하하, 우리가 무섭냐? 우리가 널 잡 아먹기라도 한대? " 유빈은 가인의 겁먹은 모습이 재미있다는듯 키득거렸다. 그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던 라트와 텐구 가면의 남자도 코웃음을 쳤다. 시영은 그런 그들을 제 지하며 가인에게 말했다. " 자자, 가인 군이 놀라지 않습니까? 너도 적당히 해두거라, 유빈. 그리고 가인 군도 진정하고. 당신이 반항하지 않는 한 우리는 조금도 당신을 해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동료 분의 일이라면 걱정마시길. 아마 무사 히 피스메이커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을 테니까요. " 가인은 친절한 그의 태도에 반응을 수그러뜨리며 힘 없이 물었다. " 어째서……이런 일을, 하는 거죠? 어째서 저를……데려온 건가요? " " 이런 잊어버렸습니까?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습니까? " ' 가인 군은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이 진실이라고 믿습니까? ' 그때 시영의 말에서 또 다른 시영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아니, 그렇게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정확히는 가인이 잊고 있던 기억 속에서 시 영이 했던 말이었다. ' 애초에 거짓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 또한 없다고 생각합니 다. 왜냐하면……알 수 없으니까요. ' ' 직관은 현상의 표상일 뿐.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직관해서는 안됩니다.자 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그에 관련된 모든 기억은 강력한 의식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을 겁니다. ' ' 끝까지 믿으십시오. 눈 앞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위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세요. 그러면……당신은 진실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 어, 어째서 이런 말들이……기억나는 거지? 가인은 낯선 기억의 파편들에 혼란스러워 했다. 마치 자신이 예전에 시영을 만나 그에게서 이런 얘기들을 들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기억 나지 않는다. 어째서 그에 대한 것들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걸까? 인식 조차 하지 못했어? 그렇게 가인의 정서가 불안정해지자 시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군. " 흐음. 뭐, 어쨌든지 간에 가인 군은 진실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부탁했었죠. 자신의 진실을 알아봐 달라고. " " ……내가? " 저 남자에게 부탁했다고?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가인이 대꾸하자 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가인 군이. 그래서 저는 당신의 기억을 들여다 보았죠.그리고 발 견해냈습니다. 당신 자신도 모르고 있던 스스로에 대한 기억을. " ' 마음을 편히 먹고 몸에서 힘을 빼도록 하세요.이제부터 제가 당신에게 하 는 건 퇴행 최면이라고 하는 겁니다. ' '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일단 성과는 있었어요. ' ' 하지만 지금은 가인 군에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 마치 잠겨 있던 수도꼭지가 열리는 것처럼 하나 하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 작한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지금은……얘기하지……않는다고……. " " 맞아요. 얘기하지 않았죠. 그 때의 가인 군에게는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 가 되어있지 않았거든요. " 시영은 가인이 자신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리자 기뻐했지만 대신 가인은 점 점 불안해졌다. 뭔가 금지된 장소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듯한 기분이었 다. 이대로 저 남자를 따라갔다간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릴 것 같다. 가인은 필사적으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횡설수설 떠들었다. " 다, 당신은 누구에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왜 피스메이커를 배신했 어요? 왜 몬스터의 편을 드는 거죠? 거, 거기다 어째서 시민 씨와 같은 얼굴인 거에요? " 마지막 질문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궁금해왔던 것이다.하지만 시영 은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예전에 제가 다 했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가인 군의 탓이죠. 잘 생각해보도록 하세요.당신은 이미 그 답 들을 알고 있으니까. " 시영은 더 이상 가인과 할 얘기가 없는지 유빈을 돌아보았다. " 준비는 다 되었겠지, 유빈? 이번 일에는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하단다. 믿 고 있으니까 부디 실수하지 말아라. " " 맡겨만 주세요, 마스터!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완수해 보일테니! " 유빈은 그가 자신을 믿어주는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허리춤에 매 달렸다. 시영은 그런 유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가인에게서 빼앗은 무전기 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약속한 시간까지 앞으로 30분 남았다. 이제 30분 뒤면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준비해왔던 자신의 계획이. " 마스터! " 그때 묵묵히 팔짱을 끼고 있던 라트가 저편의 하늘을 바라보며 긴장한 목소 리로 소리쳤다. " 뭔가가 옵니다! 하나, 둘…… 비행기? 아니, 전투기인가! 어째서 저런 것 들이 오는 거지? " " 뭣! " 시영의 품에 안겨있던 유빈이 마인드 브레이크를 전개하여 허공을 수 놓는 네 개의 점들을 투시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너무 떨어진데다가 상공이었기에 전투기의 조종사들을 투시할 수는 없었지만,유리와 같이 마인드 리딩으로 그 들이 발산해내는 사념의 조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알아냈다. 전투기들의 정체와 그 목적을! " 이런, 미친! 지구 방위군의 전투 폭격기 편대다! 그 망할 녀석들이 12구 역에 융단 폭격을 가할 셈이야! " " 뭐라고! " 라트가 대경실색을 하며 새삼 하늘을 돌아보았다. " 대체 무슨 짓을! 어째서 피스메이커가 나서지 않고 녀석들이 나선 거지? PM조약을 무시하는 건가! 여기에 오라의 주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야? " 당황하는 그들의 모습에 가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전투 폭격 기니 융단 폭격이니, 조금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시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 어설프게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군요. 이런 무모한 대가를 받게 될 줄이 야. " 하지만 그의 입가에서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 ……그렇다면 완벽히 뽑아내주겠습니다. 두번 다시 내세울 자존심조차 없 어지게. " 유레카의 메인 스크린으로 통일 한국군이 보유한 F15 이글 편대가 서울 상 공을 가로 지르는게 떠올랐다. 한국은 짧은 적지 종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미 국이나 러시아, 우크라이나, 중국 같은 대형 폭격기가 필요 없었다. F15정도 의 폭장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12구역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작전 본부실의 모두는 핑거 포(Finger Four) 편대 비행을 하는 전투기들의 모습에 신음을 흘렸다. "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장군님! 고작 다섯 명의 인간을 향해 비행 편대를 움직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처사입니까! " 수정은 스크린에 떠오른 지구 방위군의 핵심 인물, 라경일 장군을 향해 소 리쳤다. 지구 방위군은 피스메이커에게 제대로 된 통보도 없이 비행 편대를 12구역으로 출동시켰다. 이것은 명백히 PM조약을 위반한 것이다. 수정의 질타에 라장군은 예의 유들유들한 태도로 일관했다. 《말이 안 될 것은 또 뭐가 있는가? 어차피 12구역의 민간인들은 모두 자네 들이 대피시켰고, 파괴될 시가지 역시 저번의 전투로 남아 있질 않네. 어 차피 지상 부대를 투입시켜봐야 우리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테고, 그렇 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폭격이지 않은가?》 폭발에 가장 필요한 것은 산소다. 수차례의 폭탄이 순간적으로 폭발하면 폭 발한 곳은 산소가 거의 남아나지 않게 된다. 진공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 면 전쟁에서 효율적인 것이, 직접 폭격 피해를 받지 않은 적도 산소가 사라 지면서 압력이 부족해져 몸이 영겨진다는 것이다. 엄폐물에 몸을 가리고 있 는 적의 몸이 영겨지면서, 효율적으로 적 보병을 제압할 수 있게 된다. 지금껏 지구 방위군이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이 폭격으로 효과를 보지 못했 던 것은, 몬스터들이 차원 구조가 다른 이차원의 생물체였기 때문이었다. 그 들 몬스터에게는 삼차원의 모든 공격이 통용되지 않았고, 오직 차원의 힘 오 라만이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오라 능력자가 대우받았고, 피스메 이커가 대우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오라 능력자, 즉 같은 차원의 존재라면 얘기가 틀려진다. 지 금껏 무용지물이었던 지구 방위군의 화력이 통용되는 것이다.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오라 능력자였다면, 오라 능력자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지구 방위군이다. 설마 이런 사슬 관계가 형성될 줄이야! 수정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하지만 저 안에는 저희 대원이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인질 로 잡은 이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요! 제대로 교섭도 하지 않고 미 사일을 발사하는 것이 지구 방위군의 인도주의란 말입니까? 지구 방위군 은 수치도 모르는 무리였습니까! "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저 녀석들의 어디가 인간이란 말인가! 인도주 의를 베풀 상대를 혼동하지 마!》 라 장군은 거칠게 고함을 내지르며 노기 서린 표정을 지었다. 《녀석들에게 우리의 특수 부대 4개 소대가 전멸했다. 이런 것을 보통 인간 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맨몸으로 아파치 헬기 3대를 고철로 만드는 게 가능하리라고 봐! 녀석들은 몬스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 신 녀석들에게는 우리의 공격이 통용되지! 그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야. 그 때문에 이렇듯 우리가 나선 거다!》 역시 인천항에서의 일들은 한시영의 소행이었군! 수정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분해하는 수정 에게 라장군은 비웃음을 흘리며 얘기를 계속琴다. 《내가 분명히 요구했었지? 너희들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오라 능력자들의 신상 명세를 넘겨달라고. 그 요구를 거절했을 때 이미 PM조약은 깨진 거 나 마찬가지였다.이제부터는 우리가 상황을 수습할테니 너희들은 그저 지 켜보기나 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라 장군에게서의 연락이 끊어졌다. 수정은 그를 상대로 아 무 말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꼈다. 이대로는 라 장군이 말한대 로 가인 일행이 잿더미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할 판이다. 아무리 오라 능력자라고 해도 그들은 인간이었다.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오라 능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해낸다 하더라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계속되는 집중 폭격에 버텨낼 재간은 없다. ' 안돼!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 그렇게 좌절하는 수정의 모습에 반해 채영은 필사적으로 위그드라실의 위성 을 조종해서 어떻게든 비행편대의 전술 전자 전투 시스템에 개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투기가 폭격하기 전에 시스템을 멈추게 할 자신이 없었다. 너무 늦은 것이다! 그때 12구역의 오라 수치가 변하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채영은 그 것을 믿을 수 없다는듯 바라보며 소리쳤다. 《12구역의 오라 수치가 상승합니다. 10, 20, 30…… 머, 멈추지 않고 계속 상승합니다!》 " ……! " 그 보고를 기다렸다는듯이 진 사령관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인천항에 서 발생했던 급격한 오라의 변동, 그 변화를 일으켰던 장본인이 이제서야 모 습을 드러낸 것이다! ' 역시 데려온 건가! 기가스 티폰을! ' 그리고 메인 스크린으로 거대한 암흑의 거인이 나타났다. 목표로 여겨지는 다섯 명의 인간들이 식별될 만큼 가까워졌다. F15의 파일럿들은 각자 타켓을 록온하며 미사일 발사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 다. 명령은 적을 향한 집중 폭격이었다. 하지만 굳이 저런 소수 인원을 향해 F15가 갖춘 공대공 무기들을 전부 사용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오른쪽 날개 덮개 부분의 개틀링 기관포 만으로 도 상대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고민 아닌 고민을 거듭하며 목표를 향해 가까워지던 중, 핑거 포의 제일 전방에 있던 파일럿은 자신의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가 하늘에서 자신을 가리고 있었다. ' ……! ' 하지만 채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콕피트가 우그러들었다.거대한 손이 F15 를 정면에서부터 밀어친 것이다. 콰앙 폭발! 미들 핑거기가 격추당하자, 나머지 F15기들은 황급히 좌우로 산개했 다. 그렇게 정체불명의 적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파일럿들은 자신들 을 기습한 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일럿들 중 누군가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맙소사. " 그곳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전신이 검게 물들어 있었기에 이 아침 햇살 속에서 그 크기가 더욱 부각되고 있었다. 마치 40미터, 아니 족히 50미터는 넘을 듯한 신장의 거인이었다.거기다 동체 의 3배는 될 듯한 검은 날개 한 쌍이 푸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실 로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우우우우우우 사람의 형상을 띈 거인의 얼굴에서 거센 짐승의 포효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러자 F15의 파일럿들은 그 소리에 기체가 흔들리는 착각에 빠졌다. 마치 대 기가 괴물의 울음 소리에 한순간 진동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전의를 상실한 파일럿들은 단숨에 전장을 이탈하려고 했다. 명령 불복종이라고 해도 좋았다. 영창에 들어갔으면 들어갔지 저런 괴물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괴물은 그들의 이탈을 허락하지 않았다. 휘이이이이잉 파일럿들의 뒤로 바람을 베는듯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 워지고 있었다. 참지 못한 파일럿들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 새인가 거인이 검은 날개를 접으며 무서운 속도로 기체의 후미에 접근해오고 있었다. " 악……! " 투아아아앙 거인은 좌우로 산개하려는 F15 2기의 사이를 지나가면서 그대로 자신의 날 개를 펼쳐올렸다. 그러자 F15의 파일럿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폭발과 함 께 12구역의 폐허로 추락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인은 그대로 마지막 남은 F15마저 꿰뚫고 지나갔다. 투아아아앙 거인의 검은 장갑이 폭발의 섬광 속에서 빛을 번쩍였다. " 대단해! 완벽한 형태야! " 언더 시티 유레카의 어두운 지하 골방.그곳에서 시더 웰리스는 모니터를 붙 든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모니터의 푸른 빛이 그녀의 안경을 뒤덮어 그 표정을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분명 지금의 시더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 을 짓고 있을 것이다. " 역시 머신 아더의 불안전한 반중력 비행과는 차원이 달라. 우아하기 짝이 없어! 저 날개는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거지? AC의 한계 속도를 웃돌면 서도 충격파의 영향을 받지 않다니! " 대단하다! 대단해! 이것이 바로 원본, " 이것이 진정한 터미널(Terminal)의 힘! " 작전 본부실의 메인 스크린으로 비행 편대의 전멸을 지켜보던 수정 일행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지금의 경악이 소리로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닥터는 간신히 입을 움직여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표현했다. " 이걸…… 뭐라고 해야할지……. 폭격을 저지시킨 것은 다행이지만, 그것 보다 한층 더…… 위험한 것을 보고만 것 같군요. " " 이래서 그가 머신 아더를 끌고 오지 말라고 한 거였어요. 설마 피스 블랙 이 기가스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은……. " 수정은 허탈하다는듯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머신 아더 없이 피스 대원들을 12구역으로 보내는 것은 자살 행위 밖에 되지 않는다. 한시영,그는 완벽하게 무대를 만들어 놓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닥터가 의문을 제기했다. " 기가스라니, 저것이 머신 아더의 원형이 된 그 기가스란 말입니까? 하지 만 그것은 LA의 대재해 때 소실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 수정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정확히는 한시영, 그와 함께 사라졌던 거였죠.그가 기가스를 데려갔을 가 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 수정은 거기서 말을 끊으며 화면 상의 검은 거인을 바라보았다.그 기가스는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과는 완전히 틀렸다. 저것이 정말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물건'이란 말인가? 저 거인은 오히려 머신 아더를 닮아 있었다. 그때의 기가스와는 조금도 공통점이 없다. 그렇게 수정이 거인의 정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채영이 다급하게 소 리쳤다. 《위그드라실의 감시 위성이 지구 방위군의 순항 미사일(Cruise Missile)을 포착해냈습니다! 동시에 동해와 서해 등 한반도 주변 해역의 미 해군 함 정과 잠수함에서도 토마호크 미사일 300발이 발사되었습니다!》 " 뭐라고! " 수정은 보고의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듯 스크린에 떠오른 미사일의 표시를 확인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라장군이 말했던 융단 폭격의 진정한 의미를 알 아챘다. 앞의 비행 편대는 정찰조였다. 진짜는 이쪽이었던 것이다! 《순항 미사일은 위그드라실의 전파 간섭으로 비행 경로를 변경시켰습니다! 하지만 토마호크 쪽은 무리에요! 아니, 너무 많습니다!》 채영은 비명을 질렀다. 지구 방위군은 피스메이커의 방해를 예상하고서 토 마호크 300발의 비행 경로를 각자 따로 저장시켰던 것이다. 그 저장된 정보 를 해킹하려면 300개와 그에 부속된 수천, 수만개의 경로들을 찾아내고, 각 경로들의 암호를 풀어내야 한다. 그리고 만약 해킹을 해서 비행 경로를 바꾼 다고 한들 이 수 많은 미사일들을 떨어뜨릴 해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 토마호크들은 내버려둔다. " 그때 진 사령관이 무감각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채영과 오퍼레이터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내버려둔다니? " 기가스의 힘을 확인할 기회다. 저것이 정말 기가스라면 저 정도의 폭격쯤 은 문제 없이 막아내겠지. " " 사령관 님! " 수정은 그 비정함에 기가 질려 소리쳤다. 만에 하나 저것이 기가스가 아니 라면 어떡할 셈인가! 그랬다간 시영 일행은 물론,가인마저 재가 되어버릴 것 이다! 《미사일들이 목표에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10초 남았습니다!》 " ……! " 채영의 보고에 수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화면만 바라 보았다. 진사 령관은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담담하게 화면을 응시한다. 메인 스크린으로는 300개의 붉은 점들이 사방에서 12구역을 포위하듯 접근해오고 있었다. 《9! 8! 7! 6! 5! 4!》 내려가는 카운트와 12구역을 붉게 물들이는 토마호크의 표시들. 수정과 닥터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하지만 뒤를 이어 채영의 보고가 그들의 귓청을 두드렸다. 《거인에게서 급격한 오라 반응 확인! 12구역의 중력이 상승합니다!》 " ……! " 화면에서는 막 거인이 자신의 날개 속에서 하나의 날개를 분리해내고 있었 다. 두 손으로 그 날개를 잡자 그것은 이윽고 하나의 거대한 사이드(Scythe) 가 되었다. 마치 머신 아더의 엑스칼리버에 비견되는 반물질 절삭성 커터였다. 거인은 자신의 지천까지 접근한 수백개의 미사일들을 향해 그 사신의 낫을 휘둘렀다. 투바바바바바바바 낫이 그어지는 방향을 따라 미사일들이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 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순수한 에너지의 폭발이 그 미사일들을 집어삼켰다. 무형의 기운이 12구역의 창공으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은 백 색의 빛으로 뒤덮였다. " ……. " 빛이 걷혀나가고, 다시 12구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12구역은 언제 300발의 미사일에 위협을 당했냐는듯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그리고 그 고요한 상공에 서 거인이 낫을 늘어뜨린채 검은 날개를 펼쳐들고 있었다. 수정은 천천히, 자신도 모르게 거인이 일으킨 현상을 중얼거렸다. " 아포칼립스……. " 거인이 미사일들을 일거에 소멸시킨 기술은 다름 아닌 아포칼립스 제너레이 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를 사용한 것이야말로 거인 이 기가스 임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망연자실해하는 모두에게 진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 피스 블랙과의 약속 시간이다. 피스 대원들을 12구역으로 출발시켜라. " " 바, 방금 전의 그것은 뭐였죠, 미스터 뤼멘? " 인천 공항. 중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생체 공학 박사, 주유화는 갑작스레 서울 상공에 서 번쩍인 빛에 당황하며 자신의 동행에게 물었다. 그녀의 동행인 외국인 남 자는 그녀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빛이 나타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곧 자신을 노려보는 유화의 시선에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 아아, 잠시 통역기가 먹통이 되어서 못 알아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 " ……당신의 통역기는 고장이 잦군요. 거기다 수리까지 자유자재고. " 유화는 남자의 귀에 달린 서클렛 모양의 통역기가 멀쩡히 작동하는 것을 확 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남자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 하하, 죄송합니다. 사실은 제 귀가 먹통이었어요. 요즘 들어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는게 영. 역시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겠죠? " " ……. "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건지. 유화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이런 남자의 부탁을 수락하는게 아니었다. 누대인의 명령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저 남자가 자신의 상관이었 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제시한,'통일 한국'이라는 목적지가 그녀의 관 심을 끌었던 것이다. 한국에는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해준 절친한 소년 하나가 있었다. 단지 그와 재회하고 싶다는 마음에 앞뒤 생각 없이 남자와 동행한 것이 잘못이었다. 어 떻게 이런 사람이 미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책임자일 수가 있을까? 유화는 한산한 공항 입구를 둘러보며 남자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시간이 이르기는 하지만, 분명 한국 지부에서 우리 를 마중나와야 할 텐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 " 아, 그건 제가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비밀스럽게 나타나서 왁- 하 고 놀래켜 줄 생각이었거든요. " " 미스터 뤼멘! " " 하하하, 뭐, 그탓도 있겠지만 닥터 주의 말대로 한국 지부에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분명 수백대의 미사일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아포칼립스가 발생하는 일은 흔치 않죠. " 그 말에 유화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아포칼립스라면 극대소멸을 말하는 것입니까? 차원 파괴(Dimension Demol ition)라고 하는……. 그, 그렇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 " 그렇군요. 보통일이 아니죠. 아무래도 우리가 나서야 할 때인 것 같습니 다. " 남자는 당황하는 유화를 뒤로 하며 자신의 뒤편에 서 있던 네 명의 남녀들 을 돌아 보았다. 그들의 믿음직한 모습에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 다. " 자, 그럼 서두르도록 할까요? 피·스·대·원 여러분? " Ｔo Ｂe Ｃontinued… ▶262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12 :: :: 41160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08 - Ｂy Ｎext Ｎeo =-=-=-=-=-=-=-=-=-=-=-=-=-=-=-=-=-=-=-=-=-=-=-=-=-=-=-=-=-=-=-=-=-=-=-= " 가인 군은 무엇을 대가로 오라 능력을 얻었습니까? " 시영의 뜬금없는 질문에 가인은 되물었다. " 대가……라뇨? " " 그러니까 오라 능력자는 가이아의 힘을 건네받은 자입니다. 하지만 대가 없이 힘을 건네받은 것은 아니죠. 무언가 가이아가 당신을 선택한 이유가 있단 말입니다. " 이유라고? 가인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주위에 있는 오라 능력자들 은 각각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리 선배는 동생을 잃었으며,유 리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외면 받았다. 진우 씨야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 이지만 자신과 같은 고아였고, 시민 씨도 숨기고 있는 아픔이 있는듯 했다. 하지만, "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힘을 손에 넣은 대신 소중한 것을 잃 어버렸죠.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여신이 힘과 행복을 저울질하다가 빼앗 아갔단 말입니다. " "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모르겠네요. 소중한 것을, 잃었다니……. " 가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은 그저 친구 재영이의 위험에, 그를 구하 겠다는 일념 하나에 각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마리 선배나, 유리나,시민 씨 나 저들처럼 뭔가를 바친 기억은 없다. 시영은 가인의 그림자를 살피며 입가의 미소를 짙게 했다. "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가인 군의 그림자는 이처럼 똑똑하게도 당신이 한 선택을 기억하고 있는데. 잊어버린 겁니까? 흠, 어쩌면 제 설명이 잘못 되었는지도 모르죠. 대가라기 보다는……, 그래. 계기라고 하는 편이 좀 더 어울리겠어요. 음. 확실히 그 편이 어울려요. " 이 남자는 제 정신이 아니다. 가인은 혼잣말을 하며 고민하는 시영의 모습 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이질적인,주위와 동떨어진 듯한 분 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껍데기만 사람인듯한, 사람과는 다른 그 무엇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트라우마 라는 말은 알고 있겠죠?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일으키는 충격말 입니다. 오라 능력은 사람의 의지를 구현화시키는 것이기에 이 의지에 자 극을 주는 트라우마는 각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죠. 요컨대 트라우마라는 계기가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오라를 증폭시킨다는 겁니다. 스위치가 켜 지는 거죠, 가이아의 선택을 받게 되는. " " 대체 무슨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는 그만해요! 트라우마니 뭐 니 전 아무 것도 모른다고요! " 가인은 심장의 고동이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애써 그의 말을 부정했다. 정 말 자신은 아무 것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 야! " 으음. 역시 당신은 재미있어요. 잊어버린 기억을 알게 되었을 때 가인 군 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심히 기대됩니다.부디 그때 가서 절 실망시키지는 말아주세요. " 가인은 시영의 눈웃음을 외면하며 초조해진 가슴을 억눌렀다. 그의 말이 단 지 자신을 동요시키기 위한 말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기로 결 심했다. 그의 말에 자신이 흔들릴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때, 전방에서 폐허의 거리를 살피던 라트가 시영에게 소리쳤다. " 피스메이커가 왔습니다! " 그 말에 가인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저편의 지상으로 부터 AI슈츠를 입은 피스 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인은 반가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소리쳐 부를 뻔했다. 하지만 이내 뭔가 이상함 을 느끼고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브루스가……없어? ' 12구역에 나타난 이들은 진우와 유리, 시민 이렇게 세 명이었다. 마리야 중 상을 입어서 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가 보이지 않았 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혹시……. 거기까지 생각하던 가인은 황급히 유빈 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생각이 저 마인드 브레이커에게 들켜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 좋아. ' 진우 일행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전선에 나설리가 없다. 뭔가 좋은 수를 준 비해놓고 있음이 분명했다. 가인은 그들과 이 자리에 없는 브루스를 믿으며, 시영 일행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지상에서 접근하는 피 스 대원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 그렇게 여유로운 것도 지금 뿐이야. 반드시 본 때를 보여주마! ' 가인은 사슬에 묶인 손을 움켜쥐며, 체내에서 소량이나마 느껴지는 오라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한발이면 충분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단 한 발의 천공권만 있으면! " 지각이군요. " 시영은 건물의 옥상에서 나지막이 말했지만, 지상의 피스 대원들은 마치 곁 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시민은 자신들 의 그림자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지금의 위스퍼링(Whispering)은 그 가 자신들의 그림자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두에 서있던 진우는 건물의 옥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 아아, 우리 앞의 누군가가 화끈하게 전초전을 치루는 바람에 발걸음이 떨 어지지 않지 뭐야. 그나저나 오랜만이군, 시영. 대재해 전에 1년간 LA의 연구시설에서 함께 생활한 이후로 처음이지? 네 녀석 말고도 꽤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는데. " 그 말에 시영의 곁에 있던 라트가 낮게 으르렁 거리며 반응했다. 그는 금새 라도 뛰쳐나갈 것 처럼 숨을 헐떡였는데 시영은 그의 등을 두들겨 주며 진우 에게 말했다. " 개인적으로 진우 씨가 대재해 때 LA에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 니다. 당신마저 그 아비규환 속에 말려들었더라면 전 그나마 몇 안되는 친우를 잃어버렸을 테니까요. " " ……그러냐. "" 진우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자신을 형 형 거리며 따 르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한층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째서 그때의 녀석이 이렇듯 변해버린 것일까? 지금의 시영에게서는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모 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쨌든 사사로운 감정은 제껴두고 진우는 하늘을 가리키며 시영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그 거인은 어떡한 거지? 아직도 이 근처에 있는 건가? " " 아아, 걱정마시길. 어차피 그를 꺼낼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 습니까? 오늘은 그저 가인 군을 돌려보낼 생각이라고. 단지, " 거기까지 말하던 시영은 자신의 앞에 매달린 가인에게 손을 뻗었다. " 그에게서 볼 일이 끝나면 말이죠. " " 그만둬! " 그때 진우의 옆에 있던 시민이 그녀답지 않게 거칠게 소리쳤다.그제서야 시 영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챘다는듯 반가워하면서도 가인에게서 손을 떼지 않 았다. " 여전히 힘이 넘치는구나, 동생아. 왠지 이렇게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 지 않아? 대재후 이후 처음으로 너와 재회했던 날이 말이야. " " 가인 씨에게 손 하나 까딱했다간 네 녀석을 죽여버리겠어! 당장 밑으로 내려와! 지난 번처럼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마라! 반드 시 결판을 내주겠어! " 시민 씨……. 가인은 시영과 시민의 사이에서 둘의 공방을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역시,예 상대로 한시영과 한시민의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시영이 시민을 동 생이라고 부르는 걸로 봐서는 남매인가? 쌍둥이? 하지만……쌍둥이는 서로의 성별이 다를 수가 없을 텐데……. ' 아까 절 보고 한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 ' 예! 그, 그래요! 한시민! 그렇게 불렀어요! 시영 씨는 시민 씨를 알고 계 시나요? ' ' 물론이에요. 가인 군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 때는 저도 상당히 놀랐 습니다. ' ' 여, 역시……. 그렇다면 시영 씨는 시민 씨의? ' 또 다시 떠오르는 시영과의 옛 기억. 그 기억의 단편에 가인은 인상을 찡그 렸다. 뭔가 생각이 날듯 하면서도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 그때 시영 씨는 뭐 라고 말했었지? 나에게 뭐라고 대답했던 거야? 하지만 채 기억을 떠올리기도 전에 시민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나 거친 그녀의 모습은 가인에게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 내려와! 처음부터 너와 나만의 문제였어! 다른 사람들을, 가인 씨를 끌어 들이지마! " " 하하, 무슨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시민아, 더 이상 너에게서 볼 일은 없 어. 지금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여기의 유가인 군이야. " 그 말에 시민은 시영에 대한 살의를 피워 올렸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주제에,배신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는 더 이상 볼 일 이 없다고? 관심이 없어? 이런 버림 받은 기분이라니! 시민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저주하며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그러자 그녀의 주위에 있던 바위들이 그녀의 패턴 옐로우와 반응하여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네가 볼 일이 없다고 해도, 나에게는 볼 일이 있지. 그렇다면 네가 일깨 워준 이 힘으로 너를 박살내주마. " " 시민 언니! " 유리가 흥분하는 그녀의 허리춤을 붙잡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지금 여기서 시영 일행과 전투를 벌였다간 가인의 목숨이 위험해질 뿐이다. 어째서 그 침 착하던 언니가 이토록 냉정을 잃어버린 거지? 그렇게나 저 남자에 대한 증오 가 깊은 건가? 시영은 미소하며 자신의 뒤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라 트와 텐구 가면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 뭐, 이대로 넘어가는 것도 심심했으니 잠시만 유흥을 즐겨보도록 하죠? " " 크크크크, 바라던 바다! " 라트는 시영이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듯 대번에 신부복을 찢어발기며 예 의 은빛 웨어 울프로 변했다. 옆의 텐구 가면의 남자도 천천히 어깨에 멘 노 다치를 밑으로 늘어뜨린다. 그렇게 한창 피스 대원들과 시영 일행 측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순간, 가인 은 시영 일행의 뒤에서부터 유령처럼 나타나는 검은 폭풍을 볼 수 있었다.그 것은 가인이 익히 알고있던 남자의 전사경이었다. " ……! " 채 라트가 반응하기도 전에 회색 머리의 권사, 브루스의 장저가 그의 턱을 올려치고 재빨리 그 옆의 텐구 가면에게 승룡퇴를 날렸다. 그 갑작스러운 기 습에 텐구 가면의 남자는 간신히 반식(反式) 유수(流水)로 대처했지만, 반 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승룡퇴에 실린 심경에 수십 걸음을 물러나야만 했 다. 그렇게 둘을 뿌리친 브루스는 거기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고, 홀로 남은 시영에게 달려들었다. 시영에게는 그런 그의 움직임이 그저 한줄기 돌풍처럼 보였을 뿐이다. " 칠성권(七星拳) 녹존(祿存)! " 텅 브루스의 진각에 옥상의 바닥 전체가 금이 가며 갈라졌다. 마치 이 폐가 전 체가 뒤흔들리는듯 했다.그렇게 진기를 끌어모은 브루스는 전사경을 통해 자 신의 주먹으로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멸경(滅經)! 투아아아앙 발경이 시영에게 내리 꽂히자 그 여파가 뒤에 있던 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 쳤다. 맙소사, 뒤에 있는 사람 생각도 해줘야 할 것 아냐! 가인의 몸은 브루 스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옥상 밖으로 튕겨나갔다. 만약 몸을 묶은 사슬이 건 물의 철근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졌을 판이다. 가인은 자신의 발밑으로 흔들리는 지상의 풍경에 이를 악물며 브루스에게 온갖 불평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위력을 가진 공격이라면 적중당한 시영도 무사하지는 못하 리라! " ……! " 시영에게 주먹을 뻗고 있던 브루스는 뜻밖이라는듯 눈썹을 꿈틀거렸다.그의 앞에는 의외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피스 블랙이 자신의 발경에 순순 히 떨어져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 맨몸으로…… 막았어? " 뒤에 있던 가인이 브루스의 감상을 대신 중얼거렸다. 시영은 브루스의 멸경 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전사경이 실린 발경을 맨손으로 잡 아냈다는 것은 상대도 똑같은 방향으로 손을 내선시키며 전사경을 끌어올렸 다는 말이 된다. 브루스는 자신의 손을 막아낸 시영의 손을 따라가다가 그의 어깨에서 흩어져 가는 자신의 경기를 발견해냈다. 그 바람에 시영의 정장 어 깨부위가 너덜해졌지만, 브루스의 멸경을 막아낸 것치고서는 너무나 값싼 대 가였다. 브루스는 가늘게 미소를 띄며 시영에게 말했다. " 이거 뜻밖이로군. 피스 블랙은 경기공도 체득하고 있었나? " " ……이게 경기공이라는 겁니까? 흠, 꽤 흥미로운 기술이군요.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에요. " 시영은 브루스에게 마주 미소하며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 을 따라 밑을 내려다본 브루스는 곧 시영의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와 닿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림자는 그 영체가 가진 정보의 저장고입니다. 덕분에 저는 그림자에게 서 그 사람의 일생을 읽어들이죠. 당신의 그림자는 남들의 배 이상을 살 아왔군요. " " 새도우 다이버(Shadow Diver)……! 이 능력이 오라의 주인으로 선택받았 던 이유인가! " 브루스는 가볍게 기합을 내지르며 시영의 그림자를 향해 심경이 실린 진각 을 내리 찍었다. 그 공격에서 시영은 그림자를 거두며 마치 새처럼 날듯이 뛰어 가인의 쇠사슬이 고정된 철근 위로 내려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근 은 조금도 기울어짐 없이 그의 몸을 받아낸다. 이건 철근이 단단해서라기 보 다는 시영이 완벽하게 자신의 무게를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바로 브루스의 그림자에서 읽어들인 철근추를 완벽하게 응용한 것이다. 그 모습에 가인이 경악하며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오히려 기술을 빼앗긴 브 루스는 태연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오히려 입가에는 비웃음마저 흘리며. " 흥, 그래봤자 원숭이 흉내내기로군. 자신의 모습이 없는 광대는 남의 모 습을 따라하는 재주 밖에 없지. " " 뭐, 맞는 말씀입니다만 이왕이면 스크래치(Scratch)라는 이름으로 불러주 시겠습니까? 어릴 때 크레파스로 그림 그리던 동심도 떠올릴 겸. " 여러 가지 색의 크레파스로 밑바탕을 칠한 후, 그 위에 검은 색의 크레파스 를 덧칠한다. 그리고 그 검은 바탕을 못으로 긁으면 밑에 가려져 있던 색들 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영은 이 스크래치를 자신의 기술에 비유하고 있었다. 그는 막 건물 안으로 돌입하려는 피스 대원들을 내려다보며, 몸을 일으키는 라트와 텐구 가면의 남자에게 말했다. " 자자, 늦장 부리지 말고 얼른 얼른 일어나십시오. 아직 준비가 되지도 않 았는데 손님들이 파티장으로 들어오려 합니다.여기는 제가 맡을테니 여러 분들은 저 성급한 손님들을 맞이해주십시오. " " 크르르르……괜찮으시겠습니까? " 라트는 브루스에게 얻어맞은 턱을 어루만지며 시영에게 물었다. 시영은 그 질문에 말 없이 어두운 암흑의 오라를 피워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런 마스터의 모습에 라트는 군말 없이 텐구 가면의 남자와 함께 건물의 밑으 로 뛰어내렸다. 시영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브루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 그럼 어디 원숭이 흉내를 계속 내보기로 할까요? " " 혼이 없는 기술, 얼마나 가는지 지켜봐주지. " 브루스는 코웃음을 치며 본격적으로 오라를 개방했다. " 자! 갑시다! " 진우는 브루스가 기습을 감행하자 주저 없이 시민과 유리를 껴안으며 가속 을 준비했다.피스 옐로우와 핑크가 자신들의 AI슈츠에서 오라를 해제하자 그 녀들의 슈츠가 모두 진우의 패턴 그린으로 통일되었다. 예전 182구역에서 지 하터널을 빠져나갈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 패턴 그린의 가속으로부터 그녀들 을 보호하기 위해, 진우 스스로가 그녀들을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으로 감싼 것이다. 진우의 가속 능력이라면 단번에 건물의 벽을 타고 가인에게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 브루스가 피스 블랙에게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녀석들에 게는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를 사용하는 예의 검은 거인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인을 구출해서 이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치이이이잉 잔향 소리를 일으키며 진우의 가속이 전개되려고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진 우의 몸에서는 거짓말처럼 패턴 그린의 능력이 가라앉았다. 아니, 강제로 풀 려버렸다. 이 뜻밖의 현상에 진우는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유리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예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그 아이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 마인드 스페이스(Mind Space)! 유빈이 만들어놓은 정신 공간이야! " 피스 카민, 마유빈이 인간의 사념과 오감을 조작하여 만든 가상 세계.이 안 에서 그는 가인과 마리의 트라우마를 이용하여 둘을 세뇌시켜 싸우게 만든적 이 있었다. 유리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빨리 자신의 마인드 키핑을 전 개시켜 진우와 시민의 사념이 유빈에게 침투당하지 않도록 그들의 정신 장벽 을 높였다. 그러자 곧 스산한 안개가 그들의 주위에 형체화되며 유빈의 사념이 들려왔 다. -제법인걸? 꽤 실력이 늘었구나, 유리야. 이제는 거의 나와 대등한 수준이 야. 다만 응용력이 부족한게 흠이지만. " 쓸데 없는 소리하지마! 아까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숨어서 이 런 얄팍한 짓이나 준비하고 있었군! " -이런 얄팍한 짓도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니까 너무 비난하지 말아. 나 도 모처럼 너와의 재회를 이렇게 멋 없이 하기는 싫었단 말이야. 유리는 유빈과의 의미 없는 대화를 그만두고 시민과 진우의 주위로 자신의 정신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그들의 주위로 핑크빛이 번져나가며 양홍빛 의 안개가 걷혀나갔다. 하지만 곧 패턴 카민의 능력과 충돌했는지,유리의 정 신 공간은 일정 범위 내에서 멈추고 말았다. 유리는 자신이 만든 공간을 가리키며 진우와 시민에게 말했다. " 절대로 이 안에서 벗어나면 안돼. 벗어났다가는 곧바로 패턴 카민의 능력 에 정신을 오염당할 거야.이대로 나를 따라서 정신 공간의 범위를 조금씩 넓히면서 나아가야 해. " " 이런, 결국 지름길은 저지당한 건가. " 진우는 가속을 쓰지 못하게 한 상대방의 술수에 한탄하며 주위를 경계했다. 안개 너머로 익숙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진우는 곧 그 살기의 주인을 알 아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 나오시지, 라트! 언제부터 숨어서 기회만 엿보는 겁쟁이가 되셨나! 내 손 에 두번이나 당하더니 소심해진 건가! " " 크아아아아아아아! " 순간, 성난 짐승의 포효 소리와 함께 안개 속에서 거대한 웨어울프가 뛰쳐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진우가 알고 있던 라트가 아니었다. 유빈에 의해 버 서커 화 된 라트였다! 진우는 전신이 붉게 물든 그의 모습에 어리둥절해졌다. " 뭐, 뭐야, 이 녀석……. 어떻게 된 거야? " 콰지지직 라트의 발톱이 광풍을 일으키며 진우가 서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러나 진우는 이미 가속으로 녹색의 잔상만을 남기며 그 공격을 피해냈다. 진 우는 예전보다 세배는 빨라지고 세배는 강해진 라트의 돌격에 긴장했다. " 그동안 산속에 들어가서 수련이라도 했나보지? " " 크르르르르. " " ……제대로 된 의사 소통도 못하는 건가. " 진우는 완전히 짐승이 된 웨어울프의 모습에 혀를 찼다. 그런 그에게 유리 가 소리쳤다. " 유빈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파괴 본능을 부풀렸어! 그래서 내 정신 공간 속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거야! 하지만 저래서는 분명 몸이 버텨 내지를 못할텐데! " " 부족한 부분은 라이컨슬로프의 재생력으로 커버했다는 거로군. 라트, 너 는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상대하려는 거냐……! " 진우는 탄식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렇다면 더더욱 완벽하게 녀석을 제압해 야만 했다. 녀석에게 인간의 길을 포기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똑똑히 가르쳐줄테다! 그렇게 진우가 라트와 대치해 서자 유리와 시민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 금은 이런 곳에서 발이 묶일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빠른 시간 내에 가인 을 구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진우도 그 사항을 인식하고 있는지 나지막이 말했다. " 두 사람은 먼저 가도록 하세요. 저는 여기서 녀석을 상대하도록 하죠. 아 마 지금의 녀석은 눈 앞의 적에게만 반응하는듯 하니 제가 녀석을 유인하 는 동안 자리를 빠져나가요. " " 하지만, 내가 만들어 놓은 정신 공간에서 벗어나면 유빈에게……. " " 걱정말아요. 유리 양의 공간이 사라지기 전에 녀석을 해치우고 뒤 따라갈 테니까. 지금은 제 걱정보다는 가인이 녀석을 걱정할 때가 아닙니까? " 진우의 그 말에 유리와 시민은 건물의 옥상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가인을 올려다보았다.그 모습에 새삼 각오를 다졌는지 그녀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 우는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좋아요. 그럼 녀석을 부탁합니다! " " 응! " " 조심하세요, 진우 씨! " 그렇게 진우를 뒤에 남겨두고 시민과 유리는 다시 건물로 나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채 몇 걸음을 가기도 전에 안개 속에서 날카로운 검광이 시민의 다리 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2미터는 됨직한 길이의 장도였다. " ……! " 유리를 안고 제자리에서 번개같이 도약한 시민은 장도의 기습을 피해냄과 동 시에 장도를 든 상대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장도는 횡베기 상태에서 그대로 뚝 끊어지는 것처럼 직각으로 솟구쳐 시민과 유리에게 날아들었다.그 변화무쌍한 올려베기를 피하기 위해 시민은 어쩔 수 없이 유리를 거칠게 밀 어내며 그 반동으로 자신까지 장도를 피해냈다. 유리는 그녀에게 떠밀린 충격으로 땅바닥을 몇 차례 구르다가 정신 없이 일 어나 시민을 돌아보았다. " 시민 언니! " " ……유리 양,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유리 양 혼자 가야할 것 같내요. " 시민은 유리 쪽을 돌아보지도 못하며 긴장한 얼굴로 장도의 주인인 텐구 가 면의 남자를 응시했다.텐구 가면은 놀랍게도 인간의 몸이면서 유리의 마인드 스페이스 안에서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장도, 노다치를 들어올리고 있 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유리가 보기에도 이 텐구 가면의 남자는 보통 실력이 아 닌 것 같았다. 어쩌면 진우가 상대하는 라트보다도 더 위험할지 모른다! " 어서 가세요. 뒤따라갈테니까! " " ……응! " 하지만 이 상황에서 유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민의 다그침에 유리 는 분한듯이 아랫 입술을 깨물며 애써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다행히도 그 런 유리의 앞을 막아서는 존재는 더 이상 없었다. 단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 는 유빈이 마음에 걸렸지만, 계열 특성 상 유리의 패턴 핑크가 유빈의 패턴 카민을 막아내기에는 별 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유리를 떠나보낸 시민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눈 앞의 텐구 가면을 노려보았다. 한시영이 언제 가인에게 손을 쓸지 모르는 이상, 이런 상대에게 오랫동안 붙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개방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가 핏빛 으로 변하고 입술은 검은색으로 물들어간다. 흑성가(黑聖歌) 16장 악검안처(惡劍岸處) " 간다……! " -마스터,마인드 키퍼가 일행과 떨어져서 홀로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 습니다. 막 브루스의 발경을 그림자 넘기로 피한 시영에게 유빈의 사념이 들려왔다. 시영은 그제서야 브루스에게서 떨어져 잠시 한숨을 돌렸다.그 모습에 브루스 가 냉소하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 원숭이라는 말은 정정하마. 지금까지 버틴 것을 칭찬해주지. 하지만 다음 번이 마지막이다. " " 이런, 무섭군요. 슬슬 피하는 것도 한계다 싶었는데. " 시영은 난간에 서서 브루스의 진각으로 무너진 옥상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폐가인 건물은 곳곳이 구멍투성이였고, 심지어는 옥상에서 1층의 로비가 보 일 정도로 구멍이 뚫린 곳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찾던 것이 구멍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분홍빛의 AI슈츠를 입 은 피스 대원, 이유리였다. 브루스는 시영이 싸움 도중 한 눈을 팔자 사정봐주지 않고 몸을 날렸다. " 어딜 한눈 파는 거냐! " 순간, 브루스와 시영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브루스가 진각을 굴리며 그대로 앞발을 차올리듯 내뻗자 그의 몸이 최단 거리로 시영에게 날아든 것 이다. 바로 칠성권의 제 5발경 염정(廉貞)이었다. 시영은 그 비경(飛經)을 감히 정면으로 받아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재빠르 게 예의 그림자 넘기로 피해냈다. 새도우 다이버인 그에게 있어서 모든 그림 자는 영체의 정보로 연결되어 있었고,그 연결 통로를 넘나드는 것은 기본 중 의 기본이었다. 그 기본만으로도 순간적인 공간 전이가 가능하다! 그렇게 여유롭게 그림자를 넘어 다른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영은 곧 자신이 중대한 착각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브루스의 내선하는 주먹이 여 전히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분명히 피했을텐데! " 다음 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지! " 브루스의 외침과 함께 비경이 시영의 몸을 꿰뚫었다.그는 시영이 그림자 넘 기로 피하려는 순간, 그의 회피술이 보이는 일관된 흐름을 읽어내고 대번에 그가 나타날 지점으로 비경의 방향을 돌린 것이다. 그 잠깐의 접전으로 상대의 습관을 읽어낸다는 것은 단지 기술의 습득 만으 로는 불가능하다. 바로 그 기술을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번은 넘게 닦아온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브루스가 시영이 자신의 기술을 흡수해내는 것을 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기술과 경험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아아아앙 경의 폭발! 그와 동시에 가인은 접전을 벌이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뒤로 튕 겨지듯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그리고 그 튕겨나간 인영을 확인하는 순 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경의 충돌 속에서 패배한 이는 다름 아닌 브루스였던 것이다! " 브루스! " 가인의 다급한 외침에 브루스는 쓰러진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며 표정을 굳혔다. 그러다 자신의 입에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리자 대번에 인상이 찡 그려진다. 그런 그의 앞에는 발경에 적중되었던 시영이 조금도 변함 없는 모습으로 웃 고 있었다. 브루스는 어딘가 색이 옅어진듯한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 ……잔재주를 부렸군. " " 저는 당신의 발경을 당신의 그림자로 막아냈을 뿐입니다. 덕분에 당신은 스스로에게 전력을 다해 공격한 셈이 되어버렸죠. 역시 가장 무서운 상대 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입니다. 그렇지요? " 그 말대로였다. 뜻 밖의 술수에 자신을 상처입힌 브루스는 의외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았다. 삼계에 강제로 들어서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영체 의 카르마 에너지가 대번에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이건 순전히 저 새도우 다이버라는 능력을 파악해내지 못한 자신의 탓이었지만, 설마 이런 방식으로 공격을 되돌리는 기술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진지해 진 표정으로 기수식을 취할 뿐이었다. " 어디 이번에도 재주를 부려보시지. 두 번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 " " 저도 두번이나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 무 무섭거든요? 그리고 이제 준비도 다 갖춰진듯 하니 더 이상 무리한 싸 움은 하지 않겠습니다. " " ……뭐? " 브루스는 그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준비가 갖춰졌다니? 도망가겠다는 거냐! 하지만 시영은 브루스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다음 행동을 옮겼다. " 자, 가인 군. 살고 싶다면 지금까지 모아두었던 힘을 모두 사용해야할 겁 니다. 단단히 준비하도록 하세요. " " ……! " 가인은 시영이 자신이 비밀리에 오라를 모으고 있던 것을 알고 있자 깜짝 놀 라 그를 돌아보았다. 거기다 준비하라니? 뭘 준비하라는 거야? 그때 시야에 들어오던 시영의 모습이 출렁이듯 흔들거렸다. 그리고 가인은 시영의 경고가 무엇때문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을 철근에 지탱시 키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진 것이다. " 으, 으아아아! " 가인은 몸의 감각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책없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전장에 있던 피스 대원들도 가인이 처한 상황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 가인 씨! " " 오빠! " 브루스는 난데 없이 시영이 그림자로 가인의 사슬을 끊어버리자, 침착하던 모습을 잃어버리고 떨어지는 가인을 구하기 위해 옥상의 난간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때 자신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끼며 브루스는 시 영을 노려보았다. 시영이 자신의 그림자와 브루스의 그림자를 겹쳐 그의 몸 에서 자유를 빼앗은 것이다. " 이 놈이! " 브루스는 분노하며 옥상의 바닥을 향해 발경을 내찔렀다. 그러자 금이 가있 던 옥상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이미 시영은 그에게서 그림자를 거두고 옆의 건물 옥상으로 몸을 피한 뒤였다. 브루스는 이를 갈며,무너지는 건물의 파편을 날듯이 밟아 오르며 가인이 묶 여있던 철근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막 천공권 을 사용하여 낙하 속도를 줄이고 있는 가인의 모습이 보였다. " 으으으으윽! "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짜 천공권을 발사한 가인은 간신히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낼 수 있었다. 시영의 말대로 모아두었던 힘을 모조리 사용한 것이다. 가인은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숨을 헐떡였다. 사슬에 몸이 묶여 제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아니, 사슬이 없더라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가진 힘을 모조리 사용해버렸다. 탈진이다. " 오빠! " 막 건물의 1층에서 위로 올라가려던 유리는 가인이 지상으로 떨어지자,다급 히 그에게로 달려갔다.가인은 자신을 안아올리는 유리의 모습에도 연신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눈물을 글썽이는 유리를 달래주고 싶었지만 지쳐서 말이 나 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가인이 무사하자 옥상에 있던 브루스는 간신히 안도의 한 숨을 내쉬 었다. 어떻게든 잘 넘어간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가인이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을 때 머리털이 곤두서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그 녀석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자 순간 눈 앞이 깜깜 해졌던 것이다. 브루스는 그런 자신의 변화를 깨닫고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 이렇게 나 소중한 것이 생겨버렸다. 어쩌면 자신은 예전의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 을지도 몰랐다. 약속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이대로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저 녀석들 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접속 완료. 촉매를 가동시킵니다. 그때, 유빈의 사념이 12구역에 있던 모두의 머리 속으로 울려퍼졌다.그리고 다음 순간, 시야의 모든 것이 양홍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주위의 변화에 진우와 시민이 당황할 무렵, 그들을 상대하던 라트와 텐구 가면의 모 습도 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시민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곧 핑크 빛에 둘러쌓인 가인과 유리를 발견해냈다. " 가인 씨! 유리 양! " -아, 아아, 아아아아! 유리의 사념이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울려퍼졌다. 유리는 미쳐 날 뛰기 시작하는 자신의 오라를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패턴 핑크는 주위를 감싼 패턴 카민과 동조하고 있었다. 정신 감응이었다. 예전 유빈과의 접촉으로 유리의 오라가 각성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와의 계통 능력이 충돌하자 강한 감응력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게 유리가 자신의 변화에 당황하고 있을 때, 유빈의 사념이 들려왔다. -걱정하지마. 단지 네 힘을 내 정신 공간과 연결시키고 있을 뿐이니까. 지 금부터 할 일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벅차거든. 그래서 네 힘을 조금 빌리 기로 했어. -무슨,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지금 뭐하는 거야! -우리는 네가 좋아하고 좋아하는 저 오빠 씨의 기억을 끄집어내기로 했거든. 하지만, 무슨 자의식 방어가 저렇게도 강한지 내 힘으로는 도통 무리더란 말이야. 뭐, 그 강한 정신장벽도 옴팔로스의 열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겠지만. 어쨌든 그의 의식과 접속하려면 그와 친분이 있는, 거기다 나보다 좀 더 타인의 의식과 동화가 잘 되는 능력자가 필요했어. 이 조건에 딱 맞 는 게 바로 너, 이유리인 거야. -그, 그럼……너희들은 설마…….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처음부터 이것이 목적이었을 줄 이야……. 그랬기에 저들은 최대한 동화력이 강해지도록, 잔존 사념이 적은 이런 인적 없는 폐허로 자신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유빈은 그녀의 사념을 읽어들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집중력을 높이기에는 조용한 곳이 최고지. 거기다 너의 마인드 키핑 은 타인의 의식과 동화되는 데에는 마인드 브레이크보다 훨씬 효율적이야. 우리는 너를 촉매로 해서 유가인의 의식을 내 정신 세계에 끄집어낼 거야. " 아, 안돼……. 그만둬, 그런 짓을 하면……. "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자신이 가인의 각성을 유발 시키게 된다. 자신의 능력이 오빠를 상처입히게 된다! 이보다 끔찍한 상황은 있을 수 없어! " 유, 리야……? "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가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유리는 몸을 떨었다. 참을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 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에 자신이 가장 큰 공헌자가 되어버리다니, 어째서 이 런 일이 자신에게……. 어째서, 어째서 하필이면……. 그때 유리의 그림자에서 시영이 나타나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부 드러우면서도 잔인한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 자, 그럼 준비가 끝났으니 파티를 시작해볼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 씨. " " ……! " 아니야! 내가 의도한 게 아니야!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제발 멈춰! 유리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 전에 가인의 의식이 유빈의 정신 세계로 펼쳐졌다. 그러자 12구역 자체가 유가인의 의식으로 물들어갔다. -이건……. 사념의 상태로 존재하게 된 가인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인상을 찡 그렸다. 아니,사념이 인상을 찡그릴 수는 없었다.그저 언짢음을 표시하는 것 이었다. 익히 잘 알고 있던 광경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었던 광경이었다. 바로 그와 가족이 헤어지게 된 날의 광경인 것이다. 마지막 여행. 부모님이 모는 차 안에서 옛날의 자신과 어린 신이가 즐거운듯 얘기를 나누 고 있었다.이 광경은 의식 그 자체였기에, 가인은 차 안의 풍경도 밖의 풍경 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가인은 표정을 굳히며, 자신의 뒤에서 웃고 있을 시영의 사념에게 말했다. -이런 것이 당신이 말한 제 잊어버린 기억인가요? 겨우 이런 게? 이런 것은 이미 몇번이고 경험해봤다. 유빈의 정신 공격 속에서도 경험했었 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 비열한 술수! 더 이상 이런 과거의 잔영에 나는 흔들리지 않아! 가인은 경멸에 찬 시선으로 시영을 노려보았다.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고 했죠? 내가 가족들의 목숨을 대가로 오라 능력을 얻은 거라 말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잘못 짚었어요! 무슨 생각인지 는 몰라도 이런 것으로 내게 충격을 줄 생각이라면 헛다리 짚었다고요! 시영의 사념은 그런 가인의 사념을 한차례 바라본 후 다시 상황을 주시했다. -저는 당신의 '잊어버린' 기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 시길. 곧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을테니까. 빠아아아아앙 그때 귓청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큰 클렉션 소리가 울려퍼졌다. 가인이 시영 의 시선을 따라 서둘러 바라본 곳에는 막 그의 가족이 탄 자동차와 거대한 화 물 트럭이 부딪히려고 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몇번을 떠올려도 무섭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생생 하게 눈 앞에서 펼쳐지자 기가 질린 것이다. 콰아아아앙 화물 트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운전석의 아버지가 핸들을 옆으로 꺽었다. 보조석의 어머니가 비명을 지른다. 뒷좌석의 나는 여동생을 껴안은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마치 그 모든 광경이 한순간 늘어난 테이프처럼, 너 무나도 확실하게 보였다. 가인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가족들의 겁에 질 린 표정에 몸을 떨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절망감에 고개를 돌리고만 싶 었다. 그때, 그들에게서 한 사념이 들려왔다. 바로 과거의 유가인. 자신에게서 들려오는 사념이었다. -살고 싶어……. -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은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죽기 싫어! 이대로 죽기는 싫어! 제발! 그 절박한 호소. 모든 것을 도외시한 생존에 대한 본능. 가인은 귀를 틀어 막고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념은 더욱 뚜렷하게, 사고의 순간은 더욱 뚜렷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이것은 오감에 의존하지 않는 사념으로 구 현된 과거인 것이다. 가인은 결국 이를 악물고 과거의 자신을 응시했다. 아무리 과거의 일이었다 고 해도, 죽음의 공포에 질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맨 정신으로 할 게 못 되었다. 지독한 혐오감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제발……살려줘! 그때, 가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부분부터가 시영이 말했 던 잊어버린 기억이라는 게 분명했다. 화물트럭을 옆으로 비낀 자동차는 운 전석부터 찌그러지면서 아버지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리고 튀어오르는 차체. 차가 허공을 회전하며 천천히 아스팔트 도로 위로 추락한다. 유리 파편이 부 서지며 어머니와 동생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나는, 살거야……! 뒷좌석에 있던 자신의 몸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푸른 색의 빛. 바로 오라 능력이었다. 저때부터 자신은 오라를 각성했던 것이다. 몸을 뒤덮던 오라의 빛이 점점 환해졌다가 수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수축이 끝났을 때, 차 안에서 자신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콰아아앙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을 태운 차는 폭발했다. 그 폭발에서 그리 멀 리 떨어지지 않은 곳. 그 곳에서 섬광과 함께 자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폭발 의 여파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전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었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 시영의 사념이 넋이 빠진 가인에게 들려왔다. -가이아가 받아간 것은 가족들의 목숨이었을까요? 아니면, 가인 군이 홀로 도망치면서 남겨두고 간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었을까요? " 도망쳐……? 내가……혼자서……? " 유빈의 마인드 스페이스는 사라져 있었다. 가인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12구역의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었다.그의 중얼거림에 시영이 고개를 끄 덕였다. " 그렇습니다. 가인 군은 도망쳤어요.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서 살아남기를 택한 거였죠. " 그 말에 가인의 마음 속에 있던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져 나갔다.가인의 곁 에 있던 유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인은 촛점 없는 눈으 로 전방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 유리야……. 이거……거짓말이지? 환영이었던 거지? 마유빈,그 녀석이 날 혼란스럽게 하려고 보여준 거짓 기억이었던 거지? " " 오, 오빠……. " 유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울상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인은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말하지 않는 걸까? 왜 거짓이었 다고 말해주지 않는 거지? 설마 이런 게 정말 내가 잊고 있던 과거였단 말인 가? 그런 건가? 그런 건가? " 뭐,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사람은 저마다 살고 싶어하는 본능 이 있으니까. 가인 군은 그저 본능에 충실했던 것 뿐이에요. 어쩌면 가이 아는 그런 솔직한 가인 군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던 것일지도 모 르죠. " " 닥쳐, 한시영! 입 닥치고 있어! 가인 씨에게 허튼 수작 부리지마! " 그런 시영의 위로 아닌 위로에 가인에게 달려온 시민이 소리질렀다. 그녀도 진우도 모두 유빈의 정신 공간 안에 있었기에 방금 전의 영상을 볼 수 있었 던 것이다. 시민은 가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지독한 불신감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망 가지기 일보 직전의 인형인 것 같다.시민은 그의 어깨를 붙들며 단호하게 소 리쳤다. " 가인 씨! 마음 단단히 먹어요! 저 녀석의 말에 흔들려서는 안되요! 저 녀 석은 단지 가인 씨의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저러는 것 뿐이에요! " " 그래! 저런 악질적인 장난에 넘어갈 필요 없어! 무시해! " 진우 역시 가인에게 소리쳤다.하지만 그들 누구도 가인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거짓이라는, 방금 전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시영은 진우와 시민의 말에 불만의 표정을 지으며 가인에게 말했다. " 두 사람은 어떻게든 절 3류 악당으로 만들고 싶은가 본데……. 지금의 그 것은 조금도 꾸미지 않은 사실입니다. 진실이에요. 오히려 전 그 동안 가 인 군이 모르던 기억을 되살려준 것 뿐이란 말입니다. " 진실. 나는 부모님과 신이를 버리고, 혼자서 도망쳤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살고 싶었기에,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기에, 나 혼자서만……. " 거짓말……. " 이것이 진실이란 말인가? 이런 것이 진실……? " 거짓말……. " 이것이 정말 내가 잊어버린 기억이란 말인가? " 거짓말이야! " 가인은 거칠게 쉰 목소리로 고함을 내지르며 시영에게 걸어갔다. 당황한 유 리와 시민이 그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가인은 사정없이 뿌리치며 시영에게 다 가갔다. 시영은 그런 그를 진지하게 응시하다가 그에게서 빼앗은 피스 블루 의 무전기를 그 발 밑에 던져주었다. 가인은 걸음을 멈추고 그 무전기를 내려다보았다. " 그럼 어디 확인해보시죠. 그 무전기로 AI슈츠를 입어보세요.그럼 제 말이 거짓말인지,아니면 가인 군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 을 겁니다. " " ……! " 내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가인은 이를 갈며 무전기를 들어올렸다. 무전기를 손목에 끼며 시영을 노려 보았다.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절대로 저 남자의 말을 인정할 수 없어! 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보일테다! " 변신! 피스 블루! " 가인은 손으로 반원을 그리며 음성 인식 장치로 에테르 상태의 AI슈츠를 불 러냈다. 그러자 평소와 같이 그의 몸을 검은 AI컴플리트 세트가 감싸 안는다. 봐라! 이 AI슈츠의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지? 어디에 내 거짓말이 나타난다 는 거야? 헛 소리였어. 네 녀석의 말은 모두 다 거짓이다! 내가 혼자서 도망 쳤다느니 가족들을 버렸다느니! 말도 안되는 거짓말 투성이야! " ……. " 하지만 가인은 곧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잊었다. AI슈츠는 여전 히 검은색이었다. 자신의 패턴 블루에 반응하여 푸른빛을 발해야 할 슈츠가 침묵하고 있었다. 어, 어째서지? 아까 시영에게 붙잡혀 있을 때 오라를 많이 소모해서 그런가? 지쳐서 그런 걸까? 그렇게 의아해 하는 그에게 시영이 말했다. " 당신 스스로가 오라를 사용하길 거부한 거에요. 외면해버렸죠. 가족을 버 리고 혼자서 살아남게 도와준 자신의 힘을. " " 아니야! 나는……! " 내가 오라를 각성한 것은 분명, 재영이가 위험에 빠졌을 때……! "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당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라를 각성한 것은 그 날의 사고 때문이라고! 그렇게 혼자서 살아남은 거라고! 가족을 버리게 한 힘에 불신을 품었지요? 오라는 스스로 를 불신하는 사람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 시영의 외침이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가인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 아버……지, 엄……마? '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간신히 머리의 방향을 틀자 희미한 시 야 사이로 가족의 모습이 보여왔다. 자신이 타고 왔던 차가 전복된 채, 연 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안에서 불길과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그 모습에 그저 멍할 뿐이다. 그때 내 앞에 드러누워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여왔다. 작은 체구에 창백 한 피부. ' 신……아? ' 신이인가? 어, 얼굴이 보이질 않아. 그 아이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 어서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없었다. 하하. 그래. 아닐 거야. 신이가 아닐 거야.저기 타오르고 있는 사람들도 아 버지 어머니가 아닐 거야. 아, 이거 꿈인가? 거, 참. 묘하게 박진감이 넘치 는 꿈이구만. 심장이 다 벌렁벌렁 거리네. 으으……. ' 으으으…. '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괴로웠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이런 꿈은 얼른 깨버려야지! 젠장! 젠장! 아,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왜 이 렇게 가슴이 아픈 거야? ' ……. ' 그런 내 눈으로 저편에서 화재의 불빛에 비춰 번쩍이는 물건 하나가 보여왔 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머리핀이었다. 어? 저건 내가 신이 생일 때 선물했 던 머리핀하고 똑같네? 하하, 누구야? 저런 것을 떨어뜨린 사람은? 내가 신 이에게 선물해 준 것은 그 아이의 머리에 곱게 잘 달려 있다고……. 후후……후. ' 흐……. ' 입가가 잔뜩 일그러졌다. 두 눈에서 핏발이 잔뜩 서며 빨갛게 부어 올랐다. 아, 안 돼. 이런 거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나는 힘겹게 손을 뻗어 머리핀으로 손을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내 손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움직여. 왜 그러는 거야? 왜 안 움직이는 거야! 지독한 절망감이 전신으로 밀려들었다. 덩달아 밀려드는 공포감. 그리고 슬 픔. 아스팔트 바닥으로 뜨거운 액체가 한 방울 두 방울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 '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단지 몸을 웅크려 들썩이며 이를 악물 뿐.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어. 이런 것은. 왜, 왜 이런 일이……. 어째서 이런 일이……. ' 크, 크흐……흐흐, 흐흐흑……크흐흐흐흐흐흑! ' 나는 그렇게 오열하며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부디 깨어나면 자신이 집의 침 대에 누워있기를 바라며. 모든 것이 꿈이었기를 바라며. 그렇게 정신을 잃은 가인의 손에서 옅은 푸른빛의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리 고 그의 손에서 떨어져 있던 신이의 머리핀이 형체를 띈 돌풍을 타고 천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바람을 탄 머리핀은, 아스팔트에 늘어진 가인의 손바닥 위로 소리없 이 내려앉았다. " 아니야! 아니야아아아앗-------------------! "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가인은 눈물을 흩뿌리며 눈 앞의 시영에게 주먹을 내뻗었다. 하지만 천공권 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침묵으로 그에게 진실을 종용할 뿐이었다. " 으으으, 으아아아아아악! " 가인의 울부짖음이 바람을 타고 12구역으로 퍼져나갔다. Ｔo Ｂe Ｃontinued… ▶264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16 :: :: 30037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09 - Ｂy Ｎext Ｎeo =-=-=-=-=-=-=-=-=-=-=-=-=-=-=-=-=-=-=-=-=-=-=-=-=-=-=-=-=-=-=-=-=-=-=-= " 대체 무슨 짓을! " 유빈의 마인드 스페이스가 미치지 않는 12구역의 외곽. 그 곳에서 피스 대원들과 시영 일행의 접전을 팔란티어로 지켜보던 리리스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그녀는 한시영에게 가인을 빼앗긴 이후로 줄곧 그 들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시영이 자신이 하지 못한 옴팔로스의 열쇠를 대신 각성시켜주리라 생각했기 에,그가 오라의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 판단했기에 잠자코 있었던 것 이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은 틀렸다. 오히려 그는, " 옴팔로스의 열쇠를 부서뜨릴 생각인가? 애초부터 그게 목적이었던 거야! " 광분하는 리리스의 모습에 곁에 있던 카이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 부서뜨린다니? 녀석이 말한대로 각성에는 트라우마를 건드릴 필요가 있댔 잖아? 거칠기는 하지만 정석인 방법 아냐? " " 문제는 그 방법이 거칠다 못해 날카롭다는 거지! 영체가 그 날카로움에 잘 려나가면 각성은 커녕 이성조차 상실하게 된다고! " 리리스는 팔란티어로 보이는 가인의 오열하는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몇 번이 나 그의 정신 세계로 다이브했던 그녀로서는 가인의 정신 구조가 모두 가족의 희생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사고로 혼자 살아남은 그는, 그 살아남았다는 것에 마음의 짐을 지고 있었다. 죽은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들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다. 오라 능 력을 자각했던 것도, 주위의 친구들을 지켰던 것도, 피스 메이커로 활약해왔 던 것도, 모두 자신의 삶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죽은 가 족들에게 떳떳해지기 위한 일종의 결벽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삶이 지금 부정되었다. 혼자 살아남았던 것이 아니라, 혼자 살아남기 위해 도망쳤던 것이다. 가족과 함께 죽는 대신 자신만은 살아남기로 결심하고 오라를 각성해냈다. 그것이 아 무리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다고 하더라도, 가인에게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선택지였다. 가족들과 함께 죽을 지언정, 두려움에 몸을 피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 이런 방법은 나도 할 수 있었어! 나도 그의 과거를 알고 있었으니까! " 한시영, 그가 영체의 정보를 담고 있는 그림자를 읽어들이는 새도우 다이버 라면 리리스, 그녀는 영체의 정보를 피드백하는 꿈을 읽어들이는 드림 다이버 (Dream Diver)였다. 시영은 그림자를 통해 영체의 바다,아스트랄 게이트를 통 과할 수 있었고, 리리스는 꿈을 통해 접속할 수 있었다. 결국 시영이 알 수 있는 사실은 리리스도 알 수 있다. 하지만! " 내가 왜 저 방법을 택하지 않았는지 알아? 영체에게는 정신적 피드백의 한 계가 존재하기 때문이야.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영체가 파괴되기 전에 정 신이 미치는 것으로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그렇게 되면 결국 의식의 힘은 끊기게 되고, 의식을 구현화시키는(Image Making) 오라 능력은 더 이상 사 용할 수 없게 되지! 오라의 주인이 오라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각성 시킬 수 있냔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지금껏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해 왔던 건데, 녀석은! " 리리스는 자신의 고생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시영을 진심으로 증오했다. 아니, 그 증오는 어쩌면 가인의 상처를 헤집은 것에 대한 분노였는 지도 모른다. 오라의 주인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보다도 가인이 저토록 비통해 하는 모습이 더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리리스의 설명을 듣고 있던 카이도 그제서야 분개했다. " 빌어먹을! 일을 망치려고 작정했군! 오라의 주인을 스스로 못 쓰게 만들다 니, 대체…….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할 말을 잊었다. 시영의 진정 한 목적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짐작되었던 것이다. ' 설마, 녀석은 우리 노아를 제거하려고……! ' 요르문간드가 삼차원에서 추방된 이상, 더 이상 그를 위협할 요소는 사라졌 다. 만약 시영이 진정으로 자신들에게 힘을 보태줄 생각이었다면 피스메이 커의 거인과 쿠사나기가 전투를 벌일 때, 사전에 자신의 거인을 등장시켜 쿠 사나기를 지원했어야 옳다. 어쩌면 녀석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신들을 향해 갈던 칼을 꺼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오라의 주인이 사라지면 자신들은 몇 년, 아니 몇 십 년, 어쩌 면 몇 백년을 기약없이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노아의 멸 망을 의미했다. 노아의 생존에 오라의 주인은 필요 불가결이다! " 몰라. 모르겠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대체 저 테라 인은! " 리리스는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정말 한시영은 우리를 배신할 셈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네이 안데르슨과 손을 잡았던 거지? 어째서 테라마저 적으 로 돌렸던 것일까? 도대체 왜! " ……! " 그때, 카이는 자신이 준비해놓은 감시 영역으로 누군가의 침입을 느꼈다.샌 드맨 무르무르의 경고였다. 상대는 최대한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지 않도록 힘을 거두고 있었지만, 그것은 보통의 시가지에서나 통할 방법이었지 이렇게 인적이 없는 장소에서는 효과가 없었다. 카이는 리리스에게 팔란티어의 사용 을 중지할 것을 손짓하며, 조심스럽게 무르무르에게 네크로맨시를 걸었다. 그러자 그는 무르무르의 시선을 통해 침입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 사이로 신속하게 이동하는 네 명의 인영들이 보였다. 그 인영 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카이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 ……요르문간드의 공백이란 말이지, 녀석들. " 요르문간드의 퇴각. 그것은 각 나라를 침공하고 있던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이 사라졌음을 의미했 다. 그리고 그 화신들을 상대해오던 각 나라의 피스메이커 역시 더 이상 싸 울 대상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 좋지 않아, 리리스. 일단 몸을 피하자. 이 일대로 테라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고 있어. 잠시 후면 발각될 거야. " 카이의 말에 리리스는 고심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 아니. 일단은……시영에게로 가보자. " " 뭐? " 카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영에게 가보자니! 지금 그곳에 자신들 이 가봤자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기회다 싶어 녀석들에게 제거당 할지도 몰라! 더구나 그곳에는 지구 방위군의 공격을 막아냈던 무시무시한 거인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 이대로 오라의 주인을 내버려두었다간 영영 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될 거 야. 그 전에 손을 써야만 해. 그의 기억을 지우든 세뇌시키든……저 상태 로 방치시켜둬서는 안돼. " 리리스는 결심한듯 날개를 펼쳐올렸다. 하지만 카이는 그녀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결국 오라의 주인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소리 아닌가? 의식하는 건지 의식을 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리리스는 그를 도가 지나칠 정도 로 신경쓰고 있었다. 이런 건 리리스가 아니야. 평소의 냉정한 그녀가 아니라고! 카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막 날아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된 리리스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 카, 카이? 무슨 짓이야? " " 이제 그만하자, 리리스. 오라의 주인은 그만 포기해! " 그 말에 리리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품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 둥쳤지만 카이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 왜 그런 테라 인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거야? 어차피 가이아는 반드시 오 라의 주인을 선택하게 되어 있어. 지금 오라의 주인이 없어져도 조만간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나타난단 말이야. 뭣 때문에 저런 녀석을 위해 사 지로 뛰어들겠다는 거야? 조금만 냉정해져 봐! 리리스는 언제나 의지가 되는,무슨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않는 여자였잖아? 왜 그렇게 억지를 쓰 는 거야? " " 이거 놔, 카이! 나는……! " 카이는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만 하는 리리스의 모습에 결국 참고 있 던 울분을 터뜨렸다. " 그만하랬잖아! 이런 건 내가 아는 리리스가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리리 스가 아니라고! " " ……! " 그 외침에 리리스의 반항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순종의 의 미가 아니라 분노의 표시였다. 카이는 자신을 싸늘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리 리스의 얼굴에 그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그는 그녀의 표정에서 경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 ……멋대로 정하지마. " " 뭐? " " 더 이상 네 잣대를 나에게 강요하지마. " 그것은 카이가 연태까지 들어왔던 그녀의 목소리 중 가장 차갑고도,가장 감 정이 실려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리리스는 그렇게 굳어버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주저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 아, " 카이는 손을 뻗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그저 가인이 있 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카이는 고개를 숙이며 이 를 악물었다. 저 바보가……. 저대로 가서 뭘 어떡하겠다고. 자신이 뭘 할 수 있다고. 어 째서……. 어째서 저렇게도 바보같이……. " 빌어먹을! " 카이는 이를 갈며 익마 안드레알푸스를 창생의 술로 만들어냈다. 그 익마의 등에 올라타며 그는 끊임 없이 속으로 불평했다. ' 바보야. 바보! 제 정신이 아니야! 어째서 모르는 거지? 조금만 생각해 봐 도 알 수 있잖아!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한다고 해서 좋을 게 뭐가 있어? ' 카이는 자괴했다. 결국 그녀나 그녀를 따라가려는 자신이나, 모두가 바보인 것이다. 모두가 멍청이다! " ……? " 그때 막 날아오르려는 카이는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결정 같은 것들이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서리였다. 주위의 기온이 내려가며 대기가 얼어 붙고 있었다. ' 이런 시기에 눈이라고? ' 카이는 자신의 입에서 새하얀 김이 나오자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더 의 문을 표하기도 전에 그의 뒤에서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Если хвост длинный, " 마치 남자같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카이가 돌아본 뒤편에는 눈처럼 새하 얀 AI슈츠를 입은, 붉은 빛이 감도는 금발의 여인이 서있었다. 카이가 무르 무르의 눈을 통해서 보았던 네 명의 침입자들 중 한 명이었다. 피스메이커의 오라 능력자인가? " то на него когда-нибудь обязательно наступят." 네크로맨시로 조종하는 인간의 기억 속에서 그녀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가 러시아 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영체로 삼차원에 구현해 있는 카이는 차원 의 언어에 구해받지 않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방금 전 의 러시아 어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역시 팔란티어의 사용을 그만두는 게 늦었던 모양이다. " ……네 녀석은 뭐냐! " 카이는 검은 피리를 입으로 가져가며 여자에게 소리쳤다. 한국어였지만 통 역기를 끼고 있던 그녀는 정확히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인은 감 았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그러자 눈처럼 투명한 백색의 눈동자 한쌍이 그곳 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PEACE WHITE. " 대답과 동시에 얼어붙던 대기가 날카로운 진공파로 변해 카이를 덮쳤다! " 자, 가인 군. 보여줘 봐요! 실망시키지 말고! 어디 멋들어지게 일어나 보 란 말입니다! " 시영은 자신의 발 밑에 주저 앉은 가인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그 는 기대에 찬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 모처럼 진실을 알았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렇게나 갈망해왔던 진실을! 예 전에 말했다시피 주위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 신까지 의심하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될 겁니다. 또 한 발자 국 나갈 수 있어요! " 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인 가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마주 했다. 가인의 얼굴은 그야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었다. 깨달음, 슬픔, 허무, 비통, 절망, 자조, 후회, 애원, 갈망, 망각, 기원……. 시영은 그런 가인의 표정이 더 없이 마음에 들었다. " 이대로 주저앉지 마십시오. 아직 가인 군의 한계는 멀었습니다. 조금 더 분발해봐요. 좀 더 노력해야죠. 가족들을 버리고 살아난 목숨, 가치 있게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 " 그만해! 오빠를 괴롭히지마! 제발 그만둬! " 멍하니 있는 가인 대신 유리가 울부짖으며 시영에게 달려들었다. 용서할 수 없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오빠에게 저런 잔인한 짓을 저 지른 주제에,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마인드 키퍼인 그녀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가인의 사념에 동화되어 그의 비통함을 잘 알 수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 인의 사념에 영향을 받은 것만으로도 끝없이 진흙탕을 구르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유리가 시영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유빈이 그 앞을 가로 막 으며 그녀를 떠밀었다. 가인의 곁에 쓰러진 유리는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유 빈을 노려보았다. " 기운도 좋구나, 유리야. 아직도 저 녀석을 변호해주고픈 마음이 있는 거 야? 녀석은 가족을 버렸어. 자기 한 목숨 살리려고 평소 소중하다 소중하 다 노래부르던 사람들까지 버리는 녀석이라고. 저런 녀석의 곁에 있다간 너도 언제 버려질지 몰라. " " 닥쳐! 나쁜 자식! 오빠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 더 이상 그런 말로 오빠 를 괴롭히지마! " " 하. 계속 괴롭힌다, 괴롭힌다 해서 하는 말인데……. 이 자리에서 네 오 빠를 가장 많이 괴롭힌 사람이 누구인지나 알아? 바로 너야, 이유리! 너 만 없었더라면 나는 저 녀석의 기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끄집어내지 못 했을 거고, 녀석도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계속 살아갔을 거야. 녀석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건 순전히 너의 힘이라는 거지. 네 덕이 가장 컸던 거야. " " ……! " 그 말에 유리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이를 악물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소리 없이 흐느꼈다. 유빈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자 신의 오라 능력이 있었기에, 자신이 피스 대원이었기에, 자신이 가인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이 자리에 있었기에. 그랬기에 가인에게 다시 없을 고통을 주고 말았다. 뭐가 마인드 키퍼고, 뭐가 사람의 마음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정작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버렸으면서, 지키기는 커녕 상처입히는데 일조했으면서, 나는, 나는……. " ……. " 그렇게 자신의 눈 앞에서 유리가 슬퍼하는데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무런 반 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이 멀고, 귀가 멀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 모습이 더욱 유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흠. 이대로는 곤란한데. " 시영은 그렇게 괴로워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가인 군, 그렇게 마냥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곤란해요. 어서 털고 일어나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도 여건이 된다면 느긋하게 기다려주고 싶지만 꽤 시간이 촉박한지라.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진우와 시민을 돌아본다. " 그러니 좀 거친 방법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멍하게 있다간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또 사라져 버릴 거에요. 그러면 당신은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하 게 되는 거죠. 가족들의 죽음을 외면했던 것처럼, 동료 분들의 죽음 역시 외면하게 되는 거니까. " " ……! " 그 말에 진우와 시민이 이를 악물고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시영이 가인의 각성을 위해 자신들에게로 화살을 돌린 것이다.과연 그 말이 먹혀 들었던 것 인지 가인은 힘 없이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절망 속에서 도 또 다시 어리석은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이다. 분명 예전의 그였다면 하염없이 슬퍼하기만 했겠지만……. 그렇게 슬픔을 이겨내려는 가인의 모습에 시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좋아요. 그래야죠. 그래야 제가 기대하는 사람답지요. " " 건드리지마……. 내가 목적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 가인은 점점 잠겨드는 목소리로 애써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신에서 확연히 타오르는 투지를 느낄 수 있었다. 시영은 그런 악받친 가인의 태도에 어깨를 으쓱했다. " 뭐, 정확히는 가인 군의 각성이 목적이지만. 그런데 어떻게 저를 막을 생 각입니까? 여전히 오라를 불신하는 모양인데, 막겠다는 것은 말 뿐인가요? " 그 말에 가인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여전히 AI슈츠는 빛나지 않았고 오라 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전신이 무거운 것이 예전만도 못했다. 가인은 마음 속으로 자신의 오라를 향해 외쳤다. ' 왜 그러는 거야? 정작 필요 없을 때는 언제나 쓸 수 있었으면서……제 멋 대로 날 살려놓고서는! 정작 내가 필요로 할 때는 나오지 않는 거지? 네 가 어떤 존재든 난 상관 없어! 네 힘이 필요할 뿐이야! 나와! 언제나처럼 빛을 발해! 나오란 말이야! ' 하지만 오라는 끝내 침묵했다. 아무리 가인이 닥달해도 그의 불신감이 존재 하는한 오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오라를 믿지 않는 한, 오 라는 가인을 믿어주지 않는다. " 젠장! " 가인은 결국 나오지 않는 오라를 포기하고,무모하게 맨 몸으로 시영에게 달 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탈진에 다다른 그의 몸이 채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꼴사납게 앞으로 거꾸러진 것이다. " 가인 씨! " 놀란 시민의 외침이 들려왔다.그 목소리에 가인은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우 려고 했지만 의지뿐이었다. 여전히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토록 정신이 뚜렷한데도, 이토록 각오를 다지는데도, " 으으으으윽! "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야! 가인은 오라에 이어 자신의 몸에게서도 배신감을 느꼈다. 이렇게 도움이 안 될 수가 있다니! 이렇게 무력할 수가 있다니!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아무리 각오를 다져도, 아무 것도 따라주지를 않는다.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이래 서야 가족들을 버리면서까지 살아있는 면목이 없지 않은가? 나는 왜 살아있는 거지! 가인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절망하며, 눈 앞에 서있는 시영의 검은 구두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 검은색이 흐려지고 있었다. 자신의 한심함에 눈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 그대로 있어요, 가인 씨! 지금 도우러 갈테니까! " 시민은 진우와 자신을 도외시한 시영의 태도에 분노하며 흑성가를 준비했다. 이번만큼은 진우도 그녀를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세를 갖췄다. 그 도 가인을 괴롭히는 시영의 모습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던 것이다. 시영은 팔짱을 끼며 잠시 브루스가 있을 건물의 옥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서는 막 선기를 회복해낸 그가 전투에 개입하기 위해 지상으로 뛰어내릴 준 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끼어들면 일이 복잡해진다. " 뭐, 그렇다면 시작 종을 울려보도록 할까요? " 시영은 장난을 치듯 손으로 종을 치는 흉내를 냈다. 그러자 정말로 종이 울 렸다. 비록 그것이 콘크리트를 박살내는 소리였다고 할 지라도. 콰아아아앙 " ……! " 막 시영에게 달려들려던 시민과 진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 아보았다. 소리는 브루스가 있던 폐허 건물의 옥상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어 느 새인가 나타난 예의 검은 거인이 건물의 옥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던 것 이다. 폭음과 함께 옥상이 거대한 주먹을 따라 휩쓸려 나갔고,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옥상에 있던 브루스 역시……. " 사부님! " " 자, 갑니다. " 시영은 진우가 미처 브루스의 생사를 확인하기도 전에, 그림자 넘기로 그에 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시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진우의 그림자에서 나타 나는 시영에게 날카로운 돌려차기를 넣으며 입으로 암흑의 노래를 불렀다.시 영은 그 공격을 피해내며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표정을 굳혔다. " 흑성가인가! 위험한 노래를 배웠구나! " 네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노래다! 시민의 눈동자가 핏빛을 띄며 입술이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흑성가 11장 흑사현현(黑沙顯現)! 라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시민의 주위에 있던 콘크리트들이 열풍이 불어대는 검은 모래 로 변해갔다.죄인의 몸에 들러붙어서 까맣게 태워버리는 소지옥의 모래가 지 상으로 현현된 것이다. 그 흑사는 죄인의 피부와 살, 뼈를 하나도 남김 없이 태워버리고, 심지어는 그 몸속에서도 불길이 일어나게 할 정도로 뜨겁다! 흑사가 무서운 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하자, 유빈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 뭐, 뭐야! 이건! 이런 것도 오라 능력인가? " 흑사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대지를 뒤덮으며 시영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주위에서 증기가 끓어오르며 흑사에 닿는 모든 것들이 녹아내렸다.유빈은 자 신의 발밑에서도 흑사가 퍼져나오자 황급히 허공으로 뛰어오르다가, 곧 밑의 대지가 모두 흑사로 뒤덮인 것을 깨닫자 짧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이대로 내 려섰다가는 저 뜨겁기 그지 없는 흑사 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된다! ' 이, 이런 건 말도 안돼. 환각인가? 하지만 내 정신 공간에서는 조금도 이 상이 느껴지지 않는데, 환각이라면 응당 느껴져야할 정신 침범이……! ' 마인드 브레이커조차 느낄 수 없는 환각이라니! 유빈은 경악하며 결국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는 흑사의 바다 속으로 떨어졌 다. 그러자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칠흑의 세상 속에는 시 민 혼자만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검은 세계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점점 그 몸을 부풀려간다.이대로는 그녀 자신마저 그 어둠 속에 먹혀버릴 판이었다.하지만 시민은 마치 홀린 사 람처럼 노래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녀의 노래는 끊이지 않을 것 같았다. " 시민 씨! " 확 그때 진우의 목소리가 시민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렇게 그녀가 정신을 차리 자 주위를 가득 채운 암흑도 순식간에 걷혀나간다. 시민은 창백한 안색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진우의 제지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자신마저 흑사현현에 말려들었을 것이다.시영을 반드시 없애겠다 는 집념이 흑성가의 마성마저 강하게 부추긴 것이다. 시민은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진우에게 손을 저으며 힘겹게 말했다. " 저는 괜찮으니, 일단……가인 씨를, " " 아, 예. " 진우는 그녀의 말에 재빨리 가인에게 걸어가면서도 속으로 혀를 찼다. 흑성 가가 지나간 12구역에서는 시영 일행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가 없어진 탓인지 거인 또한 움직이지 않는다. 평소 시민의 흑성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 일 줄이야……. " 역시 흑성모가 지아비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노래답군요. " " ……! " 진우는 믿을 수 없다는듯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시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초췌해진 안색으로 눈 앞에 나타난 남자와 그 일당들을 바라보았다. " ……어떻게, " 시민의 그림자에서 영체의 정보를 읽어들인 시영이 태연하게 답했다. " 흑성가의 정체는 영체 자체를 음파로 현혹시키는 기술. 그 죽음의 암시는 삼차원의 생명체라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더구나. 덕분에 네 암시 가 풀릴 때까지 그림자를 통해 아스트랄 계로 피해있는게 고작이었다. 우 리 쪽의 마인드 브레이커로도 막을 수 없는 환각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 랐어. 새삼 감탄했다, 동생아. " 그 말에 옆에 있던 유빈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시민을 노려보았다. 타인의 정신을 농락해왔던 자신이 설마 타인에게 농락당할 줄은 몰랐기에 그 자존심 이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하지만 시민은 그저 흑성가가 시영에게 통하지 않 았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을 뿐이다. 시영과 함께 몸을 피할 수 있었던 라트는 새삼 시민을 경계하며 유빈에게 물었다. 아스트랄 계로 넘어가면서 그의 버서커는 자동으로 풀려있었다. " 정말 저 여자의 공격은 막을 수 없는 거냐? " " ……없어. 정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영체 자체를 공격하는 기술을 무 슨 수로 막아내란 말이야! 저기 저 녀석이 저런 꼴이 된 걸 보면 모르겠 어! " 유빈은 신경질적으로 라트의 옆에 있던 텐구 가면의 남자를 가리켰다. 텐구 가면의 남자는 앞의 시민과의 접전에서 흑성가의 악검악처를 받아낸 후, 전 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상처는 하나같이 자신이 직접 자해한 것이었는 데, 환각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력하게 흑성가에게 유린당했던 것이다. 유빈은 그런 텐구 가면의 모습을 딱하게 여겼는지 품에서 포션을 꺼내 그 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다시 시민을 돌아본다. " 역시 마스터의 동생다워. 하지만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영체 를 현혹시키는 기술은 자신의 영체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여러번 쓸 게 못 돼. 벌써 두 번이나 사용했으니 오늘은 이제 무리일 걸. " " 크크크. 그럼 문제 없군. " 라트는 안심했다는듯 다시 손톱을 뽑아내며 달려들 준비를 했다. 그 모습에 진우는 자신의 동료들을 돌아보고 한 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거 의가 전투 불능인 상태였다. 가인은 오라를 사용할 수 없었고, 유리는 넋이 나가 있었고, 시민은 흑성가의 역 데미지에 계속해서 오라를 사용할 처지가 아니었다. ' 거기다 사부님도……. ' 진우는 그의 생사를 걱정하며 승산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회의감을 느꼈다. 이대로 녀석들과 홀로 싸운다고 해도 처절하게 농락 당할 뿐이다. 지금의 상 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한 동료들을 데리고 가속으로 12구역을 빠져나가는 것. 하지만 가인이 오라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니, 그 방법도 무 리였다. 맨몸으로는 자신의 가속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대로 쓰러질 것을 알면서도 싸우는 수 밖에 없었다. " 좋아. 어쩔 수 없나! " 진우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얼핏 무모해 보였지만, 한가닥 희망은 남아 있었다. 분명 그 브루스가 이대로 끝날리는 없다는 것! 어떻게 든 자신이 버텨낸다면 반드시 그가 와줄 것이다. 진우는 그렇게 자신의 사부 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투지를 불태웠다. 라트는 포기할 줄 모르는 그의 모습에 비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 카하하하, 설마 우리를 혼자서 상대할 생각은 아니겠지? 걱정마라. 네 녀 석을 다른 이의 손에 넘겨줄 수야 없지. 나 혼자서 상대해주마. " " 아하하, 그건 고마운 얘기인데……. " 진우는 얼빠진 사람마냥 웃음을 터뜨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몸이 녹색의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퍼엉 육중한 파열음과 함께 라트의 상체와 하체가 따로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음속의 벽으로 가속한 진우가 쇼크웨이브를 만들어 라트의 몸을 꿰뚫고 지나 간 것이다. 말 그대로 유성과도 같은 빠르기, 슈팅 스타였다! 버서커를 풀고 있던 라트로서는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 좋아. 좋아……! 컨디션은 최고다! ' 진우는 순간 가속으로 몸에 이상이 생겼는지를 확인하고 힘차게 주먹을 움 켜 쥐었다. 세포가 하나 하나 깨어나고, 전신으로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이 상태라면 적어도 30초는 거뜬히 가속이 가능할듯 했다. 그는 눈깜짝할 새 벌어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영 일행을 앞에 두고 소리쳤다. " 긴장해라. 지금부터는 더더욱 빨라질테니까! " 1초. 진우의 몸이 가속으로 사라지며 유빈에게 달려들었다. 그 빠르기에 유 빈의 마인드 스페이스가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2초. 진우의 인정 사정 없는 발경이 유빈의 오라 쉴드를 후려쳤다. 3초. 떨어져 나가는 유빈에게 결정타를 먹이려던 중, 날카로운 검광이 진우 의 앞을 가로 막았다. 4초. 텐구 가면의 노다치가 운요로 접어들면서 그를 공격해왔다. 5초. 물샐 틈 없이 퇴로를 막아내는 노다치의 검막을 간신히 가속으로 빠져 나온다. 6초.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7초. 돌아보지도 않고 상대를 잡아채 운요의 검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8초. 막 재생력으로 몸을 회복해낸 라트가 다시 텐구 가면의 노다치에 난도 질당했다. 그와 동시에 운요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9초. 진우는 노다치를 벽경으로 후려치며 텐구 가면의 남자에게 칠성권 연 환칠격을 먹였다. 10초. 불현듯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다시 가속한다. 11초. 유빈의 마인드 스페이스를 피해내며 시영을 돌아보았다. 그는 무방비 상태였다. ' 간다……! ' 순간, 단숨에 최고조로 가속! 진우는 아껴두었던 힘을 개방하여 음속의 벽 에 접어들었다. 시영에게 접근하는데 0.00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대로 녀석 을 꿰뚫는다! 촤아아아아아악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지고, 내장이 터졌다. 안구가 충격으로 터지고 척추가 끊어져나간다. ' 어라……. ' 12초. 세상이, 붉게 물든다. 가속이 풀린 진우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어째서 자신이 쓰러지는 거지? 어 째서 자신이 이런 꼴이 되어버린 건가? 하지만 채 다음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의식이 멀어져 갔다. 이대로…… 죽는 건가? " 진우 씨! " 시민이 AI슈츠를 붉게 물들인 진우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림자의 공간 전이로 진우의 돌격을 피해낸 시영은 진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그림자 묶기의 응용입니다. 진우 씨의 그림자로 몸을 피한 후, 당신의 그 림자를 고정시키자, 가속된 육체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스스로 부서진 거죠. 그래도 무의식 중에 오라의 이미지 메이킹을 조절했는지, 그 정도 에서 피해가 그친 겁니다. 좋은 판단이었어요. " 진우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쓰러져 있던 가인은 그 광 경을 바라보며 치를 떨었다. 마리 선배에 이어 진우 씨까지! 그리고 그것을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하는 자신이라니! 그때 시민이 무리하게 다시 흑성가를 불렀다. 자신들을 가지고 노는 시영의 모습에 분노를 금치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노래를 부르자 재생하던 라트와 유빈, 텐구 가면의 남자는 사색이 되었다. 그녀의 흑성가만큼은 자신 들도 막을 자신이 없었다. " 컥- " 하지만 노래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빈의 말대로 시민의 영체는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기에 무리하게 노래를 부르자 카르마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 다. 시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며 입과 코로 검붉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줄 끊어진 인형처럼 뒤로 넘어갔다. 쿵 둔탁한 소리를 흘리며 황량한 폐허에 몸을 눕힌다.가인은 여전히 엎드린 상 태에서 꿈틀거리면서도 시민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동료들이 하나 둘 씩 쓰러져가는 상황에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오 라를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이 이토록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었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마음이 점점 부서져 가는 게 느껴진다. " 으음, 아직도 모자른 건가요? 이 정도로는 안된다는 건가. " 시영은 여전히 별 다른 징조가 보이지 않는 가인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림자로 이동했다. 그러자 다음 순간, 그는 유리의 그림자에서 나타났다. 유리는 여전히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시영의 그림자가 그런 유리의 몸을 잡아올렸다. " 자, 가인 군.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설마 이 귀여운 아가씨가 눈 앞에서 두조각으로 찢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겠죠? " " 으, 으으……. " 그만둬! 제발! 제발! 가인은 잇몸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 리는 나오지 않는다. 제대로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 핍박하 는 시영에 대한 분노보다도 여전히 무기력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머리 속을 가득 채운다. 힘이 필요하다! 그 어느때보다도 힘이 필요하다! 제발 내게 힘을 빌려줘! ' 제발! ' 제발! 제발! 가인은 애원했다. 자신의 오라에게 애원했다.가족을 버리고 도망치게 한 힘 에게 애원했다.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했다. 애원했다. 애원했다. 애원했다. " ……. " 하지만, 오라는 그의 애원에 답해주지 않았다. 외면했다.가인이 외면했던 것처럼 오 라 역시 철저히 그를 외면했다. 단지 그것 뿐이다. " 으으으……. " 가인은 간신히 손을 뻗어 시영의 발을 붙잡았다.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그의 발에 매달렸다. 그리고 흐느꼈다. 온몸으로 호소했다. 제발 이런 짓은 그만해달라고. 그렇게만 하면 뭐든지 하겠다고 애원했다. 그가 적이라는 인 식도 사라졌다. 평생 그의 종이 되라고 해도 될테고, 그가 죽으라고 해도 죽 을 자신이 있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겠다. 그러니 제발! 제발 더 이상은 그만해! 그만! 시영도 그런 가인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 가인 군, 저도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마음이 아파요. 이쯤에서 끝 내고 싶습니다. " 가인은 그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영은 부 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 제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겠습니까? " 끄덕 " 뭐든지 할 수 있겠어요? " 끄덕끄덕 가인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마냥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 그것밖에 없다는듯. 처절하게 고개만 끄덕인다. 시영은 그런 그가 기특하다는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 그렇다면 각성하십시오. " 따뜻한 표정, 자상한 목소리. 하지만 그 내용은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 말 한 마디가 남아있던 가인의 마음을 끝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 속으 로 떠밀었다. 시영의 발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 나는…… 왜, '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왜 그때 가족들과 죽지 않고, 대체, 무엇을 위해서, ' ……혼자 살아남았던 거지? ' 가인의 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Ｔo Ｂe Ｃontinued… TITLE ▶265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22 :: :: 28128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0 - Ｂy Ｎext Ｎeo =-=-=-=-=-=-=-=-=-=-=-=-=-=-=-=-=-=-=-=-=-=-=-=-=-=-=-=-=-=-=-=-=-=-=-= " FREEZE-----! " 그때 앳된 소년의 외침이 전장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허공에서부터 가인과 시영의 앞으로 한 붉은 AI슈츠 차림의 소년이 내려섰다. 그 갑작스러운 등장 에 지켜보던 유빈이 소리쳤다. " 마스터! " 쾅쾅쾅 하지만 상대의 손속이 더 빨랐다. AI슈츠의 소년은 양 손에 쥐고 있던 6연 발 리볼버(Revolver) 한 쌍을 시영에게 난사한 것이다. 울려퍼지는 총성! 하 지만 시영은 그림자 넘기로 총탄을 피해내며 유빈의 뒤로 나타났다. 덕분에 유리를 붙들고 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 Wow, What a fast man! " 소년은 시영의 회피에 감탄했다는듯 깔깔거리며 들고 있던 리볼버의 총신을 혓바닥으로 핥았다.투명한 검은색을 띤 리볼버는 동체의 서너배가 될 정도로 긴 총신을 가지고 있었다. 라트와 유빈은 그런 소년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 오라 능력자가……, " " ……총을 사용해? " 총을 사용하는 오라 능력자라니. 그런 건 금시초문이다. 애초에 이차원의 생물 몬스터에게 차원 구조가 틀린 총화기는 통용되지 않 았고, 그 때문에 같은 차원의 힘을 가진 피스 대원, 오라 능력자들이 몬스터 를 상대해왔다. 탄환에 오라능력이라도 싣지 않는 한 몬스터와의 싸움에 총 화기가 사용될 일은 없는 것이다. ' 오라능력을 싣는다니……그런 게 가능할리가 없잖아! ' 오라 능력에 물리력을 부여하는 방법은 두가지다. 오라 자체가 물리력을 띄 고 있든지, 차원 촉매, 오파츠(OUT OF PLACE ARTIFACTS)를 이용하여 물리력 을 이끌어내든지. 전자는 선천적인 이미지 메이킹의 영향이 크고,원소계 능력자들이 그 주를 이룬다. 후자는 오파츠, 오리하르콘을 이용하여 이미지 메이킹의 물리화가 가능하며 이를 연구한 끝에 만들어진 것이 AI컴플리트 세트와 오라 소드였다. 하지만 이 후자에서 주목할 점이 바로 이 오리하르콘이라는 정신감응금속이 다. 이 희귀한 금속은 지구의 몇 안되는 가이아에서 발굴해내는 게 고작이며, 그 양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다. 피스메이커는 이 양을 조절하여, 최대한 효 율적으로 오리하르콘을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오리하르콘을 이용한 무기는 오라 소드나 나르키소스 같이, 영구 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에 한해서만 제작되었다. 당연히 탄환의 소비가 심한 총화기는 제외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피스메이커는 머신 아더를 만드 는 데에만 해도 지구 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오리하르콘을 사용했던 것이다. ' 아마, 저 총은 우리를 사냥하기 위해 가져온 것일 테지.같은 차원 구조를 가진 오라 능력자라면 통하리라 생각하고. ' 유빈은 그들의 조악한 생각을 비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라트도 유빈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 크크크크, 오라 능력자 주제에 오라로 승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런 어 설픈 인간 흉내나 내기냐. 피스메이커도 결국 지구방위군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군. 똑같이 어리석어. " " 흥, 꼴을 보아하니 바다 건너 온 양키인가 본데.카우보이 흉내는 너희 나 라에서나 하라고. 여기는 황야도, 목장도, 인디언도 없는 외딴 한반도니 까. " 유빈은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상대를 도발했다.그의 말 속에는 사념도 함 께 포함되어 있었기에,외국인 소년이 의사를 받아들이는데 조금도 무리가 없 었다. 유빈의 노골적인 비웃음에 소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 ……이래서 동양의 원숭이들은 질색이란 말이야. 하나같이 미개하기 짝이 없으니, 원. " 쾅 순간, 전광석화같이 소년의 리볼버가 유빈에게 불을 뿜었다.유빈은 내심 그 럴 줄 알았다는듯 준비하고 있던 오라 쉴드를 펼쳤다. 아무리 오라 능력자가 탄환에 무력한 인간이라 할 지라도 오라 쉴드를 뚫지 못하는 한 탄환은 그 무력한 인간에게 닿지 않는다! 퍽 하지만 예상은 틀렸다. 리볼버의 탄환은 마치 허깨비처럼 오라 쉴드를 지나 그의 가슴 한복판을 피로 물들인 것이다. 그 모습에 라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 유빈! " " ……어, 어라……. " 유빈은 뒤에 있던 시영의 품으로 쓰러지며 입에서 피거품을 흘렸다.가슴 한 복판이 뜨거워지며 점점 목 아래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자신의 오라쉴드가 뚫린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다. 시영은 굳은 표정으로 유빈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그러자 탄환이 박힌 자리 로부터 피가 솟아오르며 그림자가 몸 속에 있던 탄환을 밖으로 밀어냈다. 자신의 손바닥에 떨어진 피 묻은 탄환을 바라보며 시영은 눈꼬리를 흔들었다. " ……아켄석이로군. 대 오라 능력자 살상용인가! " 가이아의 성지에서 오리하르콘과 함께 인류가 발견해낸 또 하나의 오파츠. 오라를 담는 용기이자, 오라를 무력화시키는 귀석. 저 외국인 소년은 그것을 탄환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분명 아켄석이라면 오리하르콘 처럼 양에 구해받지 않고 사용이 가능하다. 그리고 오라 쉴드를 무력화시킨 것 또한……. 휭 그때 시영의 곁에 있던 라트는 미세하게 바람을 가르는 탄환의 파공성을 들 을 수 있었다. 그는 볼 것 없이 시영의 미간 쪽으로 자신의 경질화 된 오른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라트의 오른팔이 떨어져나갔 다. " 크헉- " 시영의 눈 앞으로 라트의 붉은 피가 터져올랐다. 라트는 비명을 집어삼키며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저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력으로도 저 격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빈이 사전에 습격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 아 그의 정신공간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서부터 사격을 했던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먼 거리에서부터 저격을 했단 말인가? " Hey! 여기도 잊어서는 안되지! " 쾅쾅 저격수에 정신이 팔린 라트에게 다시 한번 소년의 리볼버가 불을 뿜었다.하 지만 그 사이로 텐구 가면의 남자가 번개같이 뛰어들며 날아오는 탄환들을 향해 노다치를 휘둘렀다. 일식(一式) 섬광(蟾光)! 물 흐르듯 허공을 가르는 검광이 탄환들을 소리 없이 긋고 지나가자 궤도가 빗나간 아켄석들이 시영 일행의 좌우로 튕겨나갔다. 그런 텐구 가면의 신기 에 소년이 믿을 수 없다는듯 소리쳤다. " Crazy! Is this Oriental fantasy? " 퍽 하지만 소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텐구 가면의 뒤에서 뇌수 터지는 소 리가 울려퍼졌다. 라트였다. 그가 머리가 날아간 채 무겁게 땅바닥으로 주저앉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에 게 주의가 쏠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저격수가 라트를 노렸던 모양이 다. 앞의 저격과는 달리 이번에는 탄환의 파공성이 들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저 격수가 눈 앞의 소년과 동시에 발포를 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이런 시간 차 가 생긴 것은 저격수의 사격 거리가 최소 2킬로미터 밖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붉은 AI슈츠의 소년은 저격수가 계속해서 자신의 타겟을 노리자 인상을 구 기며 무전기에 소리쳤다. " 크리스! 계속 선수 칠 거야? 내 눈으로 보는 주제에 주제 넘게 나서지마! " 《속전속결로 끝내라는 마스터의 명령이야. 그람도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임해.》 " ……흥. 그렇게나 그 꼰대에게 잘 보이고 싶단 말이지? 아예 꼬리까지 만 들어서 살랑 살랑 흔들어보시지 그래? 혹시 알아? Pet으로 삼아줄지. " 《그람!》 소년은 상대의 과잉충성을 비웃으며 시영 일행을 돌아보았다.겁을 집어먹었 으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눈 앞의 타겟들은 의외로 담담했다. 시영은 유 빈에게 포션을 놓아주며 동요 없는 목소리로 외국인 소년에게 말했다. " 들은 적이 있죠. 미국 지부의 피스메이커에는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라 고 하는 어린 쌍둥이 형제들이 있다고. 붉은 형제(Red Brothers) 라는 이 름으로 더욱 유명하던데. " " 으흠! 용케도 알고 있군. 맞아. 내가 붉은 형제의 형, 피스 알리자린(PEA CE ALIZARIN) 그람드링 뤼멘이다. 저기 겁쟁이처럼 멀리서 저격이나 하는 녀석이 내 동생 피스 푸르푸린(PEACE PURPURIN) 오르크리스트 뤼멘이지. "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은 과장되게 코를 세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머리 를 깨끗하게 삭발한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또래의 개구장이,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시영은 저격수가 두렵지도 않은지 피스 알리자린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 그나저나 당신들이 여기에 와있다는 것은,피스메이커가 옴팔로스 외의 가 이아는 방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거군요. 아마 러시아와 일본 지부의 피스 대원들도 함께 온 거겠죠? " " 그렇다. "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뜻 밖의 인물이 대신했다. 시영이 돌아보니 어느 새인가 가인과 유리의 앞에는 주홍빛의 피스 대원이 그들을 보호하듯 서있었다.그의 등에는 특이하게도 자루가 십악이나 하는 긴 외날 직도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 직도를 보는 순간 시영의 곁에 있던 텐구 가면의 남자가 날카로운 예기를 발했다.기다리고 있던 상대가 나타나자 환희 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영은 그런 텐구 가면의 모습에 미소하며 주홍빛의 피스 대원에게 말했다. " 도츠카노츠루기(十握劍)의 주인. 이름을 밝혀주시겠습니까? " " ……. " 피스 대원은 대답 대신 묵묵히 등 뒤의 검집으로부터 십악검을 뽑아냈다.그 러자 패턴 버밀리온의 오라에 반응하여 검날이 울기 시작한다. 검명이었다. 그는 직도로 발도세를 취하며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 " " 어째서 저들이 한국에 있는 거지!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던 수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메인 스크린에는 네 명의 낯선 피스 대원들의 영상과 그들의 신 상명세가 떠오르고 있었다. 러시아의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 일본의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쿠라. 미국의 레드 브라더스, 그람드링 뤼멘과 오르크리스트 뤼멘. 수정은 그 미국 지부의 피스 대원들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저 형제가 한국 에 넘어왔다는 것은 그 남자 역시 동행했음을 의미한다. 현 미국 지부 피스 메이커의 책임자이자, 10번째의 검! 진 사령관은 수정이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 였다. " 손님을 맞이해야겠군. " 메인 스크린의 한구석에는 언더 시티로 접근해오는 광속전차의 모습이 떠오 르고 있었다. 진 사령관은 그 영상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 피스 블랙이 움직이자, 옴팔로스로 파견되는 성당 기사단의 파견인이라. ' 기막힌 타이밍이군. 이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포스톨로스 타데오? 쾅쾅쾅쾅 귓청이 떠나갈듯한 총성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그람드링은 마치 춤이라도 추듯 신들린 사람처럼 양 손의 리볼버를 시영에게 쏘았다. 아켄석 제 대구경 탄환을 담은 원형탄창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시영은 정면으로 그것을 받지 않고, 침착하게 그림자 사이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마치 그가 나타날 장소를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듯 피스 알리자린 의 총신이 시영을 따라온다. 패턴 블랙의 그림자 넘기는 엄연한 공간 전이이 기에 기척이나 예감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쾅쾅쾅쾅 그렇다면 이 무섭도록 정확한 사격술은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시영 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그람드링의 그림자로 이동했다. 그의 그림자에 접 속하여 영체의 정보를 읽어들이면 패턴 알리자린의 능력을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 ……! " 그러나 그람드링의 그림자와 접속하는 순간, 시영은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이 소년의 영체에서는 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 연히 느껴져야할 생명체, 고유의 빛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 루미네선스(Luminescence)? ' 설마 그런 짓을! 시영은 믿을 수 없다는듯 눈 앞의 소년을 노려보았다.그 존재가 참을 수 없 이 혐오스러웠다. 모욕감과 동시에 살의가 일어난다. " 뭐하는 짓이야! " 그람드링은 자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시영에게 리볼버를 겨눴지만, 시영 은 순식간에 그를 그림자로 감아올렸다.엄청난 압력으로 전신이 조여오자 그 람드링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시영은 냉혹하게 그것을 바라보며 유례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 ……너희의 마스터는 그인가? " " 커, 커헉……. " " 이네스의 연구를 가로 챈 거로군, 쥐새끼 같은 놈. 너희의 마스터는 파리 스를 타락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 남매를 완벽히 능욕시켰다. " " 끄아아아악! " 우드드드득 그림자로 감싸인 그람드링의 몸에서 뼈와 근육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그가 완전히 으스러져 죽으려는 찰나, 시영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탄 환의 존재를 느끼고 어쩔 수 없이 몸을 이동시켰다. 그러자 그람드링의 몸을 감싼 그림자가 사라졌다. " 크헉, 허……. 제, 젠장. 죽을 뻔 했잖아! " 그람드링은 자신의 몸에 포션을 주사하며 리볼버를 들어올렸다. 시영은 계 속되는 저격수의 공격에 그림자 사이로 몸을 이동하다가, 곧 무슨 생각에선 지 자신의 그림자에 어깨까지 손을 집어넣었다.그러자 곧 그가 찾고 있던 것 이 손에 잡혔다. " 여기 있었군! " " 으앗! " 시영의 손에 이끌려 그림자에서 나온 것은 그람드링과 같은 차림에 군용 대 전차 라이플을 가진 소년이었다. 바로 피스 푸르푸린, 오르크리스트였다. 저 격을 하던 그는 난데없이 그림자로부터 나온 시영의 손에 덜미를 붙잡혀,2킬 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거리를 강제로 공간전이 당한 것이다. 그람드링과는 달리 검은 흑발을 길게 땋아내린 오르크리스트는 자신의 앞 에 갑자기 나타난 형과 시영의 모습에 영문을 몰라 소리쳤다. " 뭐, 뭐야? 이건! 그람, 어떻게 된 거야! " " 쳇- 바보같으니! 멍청하게 굴다가 잡힌 거잖아! " 그람드링은 투덜거리면서도 재빠르게 리볼버의 빈 탄창에 탄을 채워넣고 시 영에게 총신을 겨눴다. 쾅쾅쾅 인질로 잡힌 오르크리스트는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없다는듯한 무자비한 사 격! 시영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림자로 몸을 피해야만 했다. 덕분에 그림자 에서 풀려난 오르크리스트는 자신의 배는 넘을 듯한 대전차 라이플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그람드링에게 이를 갈았다. " 이 자식! 누굴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 " 아아, 그대로 죽어버리지 그랬냐? 얼간이 짓 그만하고 지원이나 똑바로해! " 그 말을 끝으로 그람드링이 시영에게 달려나가며 리볼버를 쏘았고, 오르크 리스트는 뒤로 도약하여 저격 지점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서로에게 티격태격 하면서도 호흡은 척척 맞는 형제들이었다. 그렇게 시영과 레드 브라더스의 접전이 총성과 욕설로 시끄러운 반면, 코마 히코와 텐구 가면의 접전은 정적 그 자체였다. 그들은 서로의 도를 늘어뜨린채 기도로 치열하게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다.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함. 텐구 가면의 남자는 어깨를 흔들며 천천히 웃 음을 터뜨렸다. 과연 시영의 말대로 이번의 상대는 어제의 오라 능력자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듯 했다. 도츠카노츠루기의 주인이라면 자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코마히코는 텐구 가면의 노다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신을 죽이는 횡도(橫刀) 후츠노미타마(布都御魂).삼령검(三靈劍) 중 하나 를 훔쳐서 달아나더니, 고작 이런 일에 사용할 생각이었습니까, 유평? " " ……후, 네 녀석이 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니,무영신풍류의 늙은이들 은 날 파문시키기로 결정했나보군. 어리석은 것들! " 텐구 가면의 남자, 유평은 이를 갈며 분노했다.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지 켜보던 코마히코는 천천히 자신의 뒤편에 있던 가인과 유리, 진우와 시민을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처참한 모습들이었다.진우와 시민에게는 자신이 각각 포션을 주사해주었지만, 이대로 방치시켜둘 형편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피스메이커의 치료를 받아야만 한다. 무엇보다 유가인. 자신에게 패배를 가르쳐준 남자. 그가 쓰러져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새삼 코마히코의 가슴으로 불이 붙 었다. " 당신들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습니까? " " 후, 후후, 후후후후. 물론! 저 녀석들 뿐만이 아니다! 너와 같은 무영신 풍류의 오라 능력자도 똑같이 만들어주었지! " " ……! " 유평의 그 말에 코마히코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순간, 그의 몸에서 무시 무시한 살기가 주위의 대기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 황유평! 너는 너를 키워준 무영신풍류를 스스로 배신하고, 그것도 모자라 서 가족에게 검을 들이댔다! 나,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코마히코 카구라는 더 이상 네 녀석의 만행을 용서치 않겠다! " " 어린 녀석이 시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누가 누굴 용서하지 않는단 말이냐! 너희 오라 능력자들은 모두 죽는다! 모두 내 검에 무릎 꿇는다! 네 녀석 의 도츠카노츠루기가 신검이라면, 내 후츠노미타마는 그 신을 죽여버리는 검이다! " 유평은 노호성을 내지르며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코마히코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코마히코 역시 도츠카노츠루기를 바닥에 낮게 내리깔며 유평에 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섬광! 코마히코의 장기인 발도술이 일식 섬광의 흐름을 타고, 유평의 목을 쳐올렸 다. 하지만 유평은 이미 운요에 몸을 맡기며 십악검의 칼날을 피해냄과 동시 에 코마히코의 허리를 베어갔다. 코마히코는 그의 후츠노미타마를 완전히 피 해내지 못할 거라 직감하며 살을 주고 뼈를 깍기로 결심했다. 츠컥 후츠노미타마의 날이 AI슈츠를 찢으며 코마히코의 옆구리를 피투성이로 만 들었다. 하지만 그 즉시 코마히코는 섬광에 이어 파쇄, 격멸로 이어지는 연 쇄기를 넣다가 다시 한번 등을 베였다. 자연스럽게 오의 운요를 몸에 배게하 는 유평의 움직임에 자신의 몸이 따라가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코마히코도 예상한 바였다. 유평은 자신의 대선배 격인 인물인 만큼 그와 자신의 수련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 하하하하! 그래! 그것이 너의 분노인가! 도츠카노츠루기의 힘은 고작 그 정도인 건가! " " 연우 님이……당신의 매씨(妹氏)가 슬퍼하고 계신다! " 코마히코는 도츠카노츠루기의 신력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 그 슬픔의 무게를, 당신이 알고 있는가! "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영식(零式) 찰나(刹那)! 촤아아아악 도츠카노츠루기의 양홍빛 선들이 격자격세를 만들어내며 유평을 세 방향에 서 노려왔다. 유평은 후츠노미타마로 뒤늦게 영식 찰나를 전개했지만, 도츠 카노츠루기의 신력이 그의 검기를 상쇄하며 무서운 힘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유평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배어 물며 미친듯이 검무를 췄다. ' 인정할 수 없어! 이런 신력 따위! ' 내 지난 시간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오라 능력 따위! " 굴복할 성 싶으냐! " 반식(反式) 유수(流水)! 도츠카노츠루기의 날에 부딪힌 후츠노미타마가 순간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는 물고기처럼 십악검의 자루를 타고, 코마히코의 손을 지나 어깨를 베어냈다. 푸와아아아악 터져오르는 피의 분수. 코마히코는 고통에 혼절할 것만 같은 정신을 붙들며 재차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모습에 솔직히 감탄했다는듯 유평은 탄식했다. " 확실히 네 녀석은 그 아이와 틀리군. 역시 남녀의 차이인가. 오라 능력자 만 아니었다면 꽤 훌륭한 검사가 될 수 있었을 거다. " " ……오라가 내 앞길을 막고 있다는 건가? " " 대가 없는 힘은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법이다. 자신의 주제에 맞지 않는 힘을 가진 것을 부끄러워 해라. 네 검을 녹슬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이라는 것을 수치스러워 해라! " 유평의 말에 코마히코는 피투성이가 된 왼팔 대신 오른팔 만으로 발도 자세 를 취했다. 코마히코의 정신이 집중되자, 도츠카노츠루기가 백열하듯 주황빛 을 피워올렸다. 코마히코는 유평을 노려보며 한자 한자 힘주어서 말했다. " 이 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오라는 나의 긍지다……! " " 그럼 그 보잘 것 없는 긍지와 함께 죽어라, 어리석은 놈! " 코마히코와 유평의 사이에 있던 대기가 휘몰아치며 그 대기를 따라 도츠카 노츠루기와 후츠노미타마가 움직였다. 검기가 대기를 얼어붙이고 검광이 시 야를 멀게 한다!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의(奧義) 발파(發破)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사흉(四凶) 궁기(窮奇) 쩍 마치 지상에 벼락이라도 떨어지는듯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코마히코와 유평 의 자리가 서로 뒤바뀌었다. 그 한순간에 운요에 접어들었던 그들은 자신들 이 가진 기량을 마음껏 펼쳐 승부를 겨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코마히 코는 결정적인 한수를 뛰어넘지 못했다. 촤아아아아악 " ……! " 코마히코는 도츠카노츠루기를 땅에 꽂고서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면했다.사 흉 궁기의 신묘함은 '거스름'에 있었다.상대가 공격을 해오면 방어하거나 공 격하는게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이 궁기는 그 방법 자체를 거스르고 상대의 공격을 되돌릴 수 있었다. 후츠노미타마는 도츠카노츠루기의 검세를 어그러 뜨리고, 발파의 검광 자체를 코마히코에게 되돌린 것이다. 고도의 반격술. 궁기는 반식 유수를 오의로 승화시킨 무영신풍류의 흉기 중 하나였다. 유평은 후츠노미타마에 묻은 피를 좌로 털어내며 비웃음을 흘렸다. " 봤느냐.같은 신검으로 상대한다면 난 결코 너희 오라 능력자들에게 지지 않는다. 신검합일의 경지는 오라 능력 따위가 넘볼 수 있는 게 아니다! " " ……벗어라. " 코마히코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이미 반식 유수와 사흉 궁기로 AI슈츠가 무색할 만큼 난도질 되어 있었다. 어디를 보더 라도 폐색이 짙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평을 바라보는 그 의 눈동자는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유평은 코마히코의 말에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 뭐라고? " " 벗으라고 했다. " 슥 그와 동시에 유평이 쓰고 있던 텐구 가면이 소리 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 러자 선이 가는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날카로운 눈빛에 단아한 얼굴선 이 어딘가 연우와 마리를 닮아 있었다. 유평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텐구 가면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코마히코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는 핏줄기가 그의 이마에서 코를 타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코마히코는 다시 도츠카노츠루기로 발도세를 취하며 말했다. " 표정은 마음의 거울이다. 스스로가 떳떳하다면 그런 가면으로 얼굴을 가 릴 필요는 없겠지. " " ……. " 유평은 표정을 굳히며 천천히 후츠노미타마를 들어올렸다. ' 지금이라면……. ' 폐허의 건물 속에 숨어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리리스는 줄곧 가인에게 접 근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마침 시영 일행도 새로 나타난 피스 대원들과의 전투에 정신이 팔린지라 가인을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 틈에 가인에게 접근해서 드림 다이브로 그의 의식과 접속한다면, 충분히 성육신을 각성시킬 수 있었다. 만약 지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가인의 의식은 강한 트라우마 에 현혹되어 스스로를 정신 장벽 속으로 가둘 것이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 하지만, ' 리리스는 새로 나타난 피스 대원들을 바라보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저들의 사이에 뛰어든다는 것은 카이의 말대로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 다. 오히려 시영 일행보다 저들이 더 위험했다. 시영은 한때나마 같은 목적 으로 활동한 동료였기에 교섭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피스 대원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자신은 몬스터, 그 이상 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더욱이 오라의 주인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가장 주의해야할 제거 대상이었다. 아마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눈 에 불을 켜고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어. ' 이대로 가인을 놔두고 가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그가 오라의 주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를 이런 곳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은, 유메와 헤어졌을 때와……. '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 그런 경험은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해! 유메를 잃은 후, 그녀를 되찾기 위해 자신은 얼마만큼의 피와 땀을 흘려왔던가! 얼마나 후회해왔던가! ' 기다려, 가인! ' 반드시 구해줄테니! 리리스는 각오를 굳히며 등 뒤의 날개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막 가인에게 뛰어들려는 찰나, 콰아아아아아아앙 무시무시한 폭음이 12구역에 울려퍼졌다. 단순한 폭음이 아니다. 가슴을 찌르는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이 느낌을 잘 알고있던 리리스는 폭음의 근원지를 돌아보며 신음했다. " 맙소사! 저 녀석들……! " " ……. " 시영은 그림자 넘기로 피하기 전에 자신이 있었던 자리를 돌아보며 표정을 굳혔다. 그곳은 마치 거대한 굴착기가 지나간 것처럼 땅이 패여 있었고, 그 패인 자국을 따라간 곳에는 폐허 건물이 거대한 구멍으로 뚫려 있었다. 시영은 그람드링을 돌아보았다. 소년이 양손에 움켜쥐고 있는 리볼버는 어 느새인가 그가 입고 있는 AI슈츠와 같은 붉은 빛을 흘리고 있었다. " 어린애에게 어처구니 없는 장난감을 쥐어주었군.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 로……. " " 헷, 내가 유일하게 그 꼰대에게 감사하는 점이지. " 그람드링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양손은 자신의 주인에게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그는 방금 전의 일격을 쏜 것으로 수십미터나 뒤로 밀 려나야만 했다. 무시무시한 반동때문이었다.AI슈츠의 힘이 없었더라면 아마 두 팔이 형체도 없이 날아갔을 것이다. 시영은 초연(硝煙)이 감도는 리볼버의 긴 총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 초전도 입자 가속기로군.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총신에 그런 것을 달아놓 았나? " " 이거면 보통 총알도 전자 가속으로 마하 5.0까지 날려보내는 게 가능하지. 특별히 오라능력을 쓰지 않아도, 오라능력자든 몬스터든 한방에 날려보낼 수 있다고. " " 아포칼립스, 인가. " 시영은 그 악마스러운 발상에 한탄했다. 그람드링의 리볼버는 소형의 입자 가속기로 탄환을 가속시켜 아포칼립스에 이르게 하는 소차원병기였다. 아포칼립스의 반동을 AI슈츠의 힘으로 버텨내 고, 총신은 오라가 실린 오리하르콘으로 보호한다. 그야말로 오라 능력자가 사용할 수 있는 최적의 무기였다. 이거라면 분명,오리하르콘으로 만들지 않 은 평범한 탄환도 차원의 힘에 이를 수 있다! " ……이거이거. 위험하군요. " 시영의 얼굴에서 예의 분노가 사라지고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폐허의 한 지점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막 저격 준비 를 하고 있던 오르크리스트가 한 번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내는 시영의 모 습에 놀라고 있었다. 아마 오르크리스트가 들고 있는 대전차 라이플도 그람드링의 리볼버와 마찬 가지인 소형의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시영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상대의 전력을 알 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쪽은 부상자까지 있으니, 이제는 철수할 시기 였다. " 파티는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 " 누구 마음대로! " 그람드링은 시영이 물러날 기색을 보이자 재빨리 리볼버를 난사했지만, 시 영은 이미 유빈과 라트가 있는 그림자로 몸을 피한 뒤였다.시영은 날아간 머 리를 막 재생시키는 라트를 일으켜세우며, 유빈을 안아올렸다. 그렇게 그가 떠날 준비를 하자, 코마히코와 검을 겨루던 유평도 아쉬운 기색을 뒤로 하고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람드링은 지친 목소리로 자신의 동생에게 소리쳤다. " 뭘 하고 있는 거야! 저 녀석들 다 도망친 다음에 쏠 거냐! 얼른 해치우지 못해, 이 굼벵이 자식! " 그가 지닌 리볼버의 소형 입자 가속기로는 아포칼립스를 일으키는 게 한번 이 한계였다. 거기다 시영의 그림자에 공격당한 몸으로 무리해서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를 사용해선지, 남은 리볼버로 아포칼립스를 일으키겠다는 건 엄 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르크리스트가 가진 입자 가속기는 최소 다섯 번 이상의 연사가 가 능하다! " ……서두르지 말라고, 그람. " 오르크리스트는 폐허의 옥상에서 시영 일행을 겨누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 었다. 그렇게 피스 푸르푸린이 저격 준비를 갖추자,시영은 주저 없이 자신의 거인을 불렀다. " 티폰! " 우우우우우우우 거인의 괴성이 울려퍼지자, 오르크리스트는 깜짝 놀라며 반대편 건물로 몸 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거인의 주먹이 그가 있던 건물을 통째로 박살냈다. 오르크리스트는 거인을 향해 대전차 라이플을 발포했지만, 아포칼립스를 일 으키지 않은 보통의 아켄석 탄은 조금도 통용되지 않았다. ' 제길! 어차피 이 녀석에게는 이런 소형의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로는 씨 도 먹히지 않을텐데! ' 그는 혀를 차며 그람드링이 있는 곳까지 몸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 오 르크리스트가 건물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리려고 할 때, 거인이 체구에 걸맞지 않은 움직임으로 그의 몸을 잡아챘다. " 컥- " " 크리스! " 그람드링은 거인의 손에 잡힌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며 리볼버를 들어올렸다. 무리해서라도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를 사용할 셈이었다. 하지만 시영이 막 발포하려는 그람드링의 그림자를 움직여 그를 잡아 던졌다. " 이 자식이! "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착지한 그람드링은 또 다시 그림자가 자신을 잡아채 려고 하자, 리볼버를 땅에 난사하며 이를 갈았다.덕분에 탄창이 완전히 비어 버렸다. 시영은 미소하며 그런 그에게 말했다. " 동생쪽의 소차원병기는 연발이 가능한가 보더군요. 이대로 방치하고 가기 에는 후일이 걱정되서 말이죠.적어도 당신 동생은 다시는 총을 잡지 못하 게 해야겠습니다. " " 그만둬! " 보다 못한 코마히코가 시영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유평이 그를 막아섰다. 시영은 거인을 바라보며 지시했다. " 그럼 안식을. " 우우우우우우 거인은 소년을 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퍼엉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오르크리스트를 쥐고 있던 거인의 오른손 어깨 쪽에서 폭음이 일어난 것이 다. 그리고 서서히 그 오른팔 전체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쿠우우우우웅 흙먼지가 일어나며 땅이 진동했다. 난데없이 한쪽 팔을 잃은 거인은 당황하 며 괴성을 올렸다. 하지만 채 괴성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의 왼쪽 다 리에서 폭음이 일어났다. 퍼엉 떨어져나가는 다리! 시영은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그런 그의 당황함을 뒤로 하며 거인의 몸은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거인은 건물을 붙잡고 몸을 지탱하려고 했지만, 폐허가 된 건물이 거인의 무게를 견 뎌낼리 없었다. 거인은 허무하게 그 거대한 몸을 지상으로 곤두박질시켰다. " 안돼! "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리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하필 거인이 쓰러지는 방 향에 가인 일행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민과 진우는 혼수 상태였고,가인 과 유리도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치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리리스는 앞뒤 생각않고 날개를 펼쳐들었다.그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의 속력으로 가인에게 날아갔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풍압에 그녀의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 날리며 시야를 가렸지만 그녀의 눈은 오직 가인의 모습만을 뒤쫓고 있었다. 리리스는 지척까지 가까워진 가인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 제발……! ' 제발, 닿아줘--------!! 쿠우우우우웅 하지만 그녀의 바램과는 달리 거인의 몸은 사정없이 리리스와 가인 일행을 내리찍었다. Ｔo Ｂe Ｃontinued… TITLE ▶266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19 화 '형제' Neo군(nextneo) 04-06-23 :: :: 19010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1 - Ｂy Ｎext Ｎeo =-=-=-=-=-=-=-=-=-=-=-=-=-=-=-=-=-=-=-=-=-=-=-=-=-=-=-=-=-=-=-=-=-=-=-= " ……. " 리리스는 가인을 끌어안은채 있는 힘껏 몸을 움츠렸다. 그 한 순간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져 간다.이대로 유메도 구해내지 못하고 죽는 자신에 대한 어리석음, 후회, 경솔함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품에는 가인이 있었다. 그의 온기가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 온기에 몸을 맡 기고 있자니, 모든 후회와 걱정들이 사라져 간다.자신들을 향해 떨어지는 거 인의 몸도 두렵지 않았다. 이 온기만 있다면 죽음조차 무시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낯설은, 하지만 기분좋은 느낌이었다. ' 그래.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 후회하지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리리스는 죽음에 몸을 맡겼다. 눈을 감고 기다렸다. 수만톤의 몸이 자신을 내리누르는 것을! " ……. " 하지만, 이상하다. ' 왜……? '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거지? 혹시 자신은 이미 죽어버린 게 아닐까? 이미 거 인의 몸에 산산조각이 나서 폐허 더미를 뒹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눈을 뜨기가 무서워졌다. 전신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손과 발이 아직도 제대로 붙어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 어버렸다. 단순한 착각인건지, 실제로도 그러한 건지 눈을 감고서는 알 도리 가 없었다. 눈을 떠야 한다. 눈을 떠서 확인해야 한다. 그래. 그래야만 하는데, " 후, 뭘 그렇게 떨고 있는 거냐? " 그녀의 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같이 낮고 퉁명스러운 목소 리였지만 리리스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목소리 의 주인을 소리내 불렀다. " 브루, 스? " 쿠구구구구구구 거인의 몸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일대가 그 그림자로 어둡게 뒤덮여 있었 다. 하지만 리리스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 앞에는 회색머리의 권복 소년 이 한 손으로 거인의 몸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리리스가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벌린 입을 다물지를 못하자, 브루스는 그녀 를 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후후, 네 녀석도 무모하기 짝이 없구나. 그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뛰 어들어서 동반자살이라도 할 셈이었나? " " 무, 무모하다니……. 당신도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니잖아요! " 리리스는 마치 그가 자신의 속마음을 전부 꿰뚫어보고 웃는 것 같아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하지만 그 모습마저 브루스에게는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그 는 자신이 떠받치고 있던 거인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 외침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타오르듯 회색빛의 오라가 터져나왔다! 패턴 그 레이의 빛이었다. 브루스의 영체가 발하는 의지의 힘! " 하아아아아아- " 기합과 함께 거인을 떠받치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오라의 회오리가 모여 들 었다. 그것은 차원 진동파가 집약된 경기의 소용돌이였다. 시발점은 발과 땅바닥의 접점. 진각으로 높인 지면 반력이 순간 체중을 증가시키고,그 각력이 신장성의 힘 으로 땅바닥과 대항하여 섬으로서 허리에 전해진다. 허리를 편다. 팔이 펴진다. 팔이 나선형태로 외선한다. 허리의 신축 운동이 손끝으로 전달되는 것, 이것이 경력! 이것이 합경! 이 것이 전사경! 투아아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일대로 지진파가 퍼져나간다. 칠성권(七星拳) 파군(破軍)! 브루스의 중경(重經)이 거인의 몸을 하늘로 띄운 것이다. 거대한 날개를 가 진 거인이 무방비 상태로 허공에 몸을 맡기는 모습은 일견 장엄해 보이기까 지 했다. 모두는 그 광경에 할 말을 잊었다. 투우우우우웅 거인이 떨어진 곳은 브루스가 있는 곳으로부터 꽤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폐허더미 위였다. 폭음과 함께 거인은 폐허더미 속에 반쯤 몸이 파묻혀 침묵 했다. 거인의 떨어져 나간 팔에서 동생을 빼내기 위해 안간 힘을 쓰던 그람 드링은, 오르크리스트에게 포션을 놓아주는 것도 잊어버리고 브루스를 바라 보았다. ' 뭐야, 저거……. '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괴상한 동양인 꼬마가, 저 보잘 것 없는 주먹 하나로, ' ……거인을 날렸어? ' 그람드링은 싸한 오한이 전신으로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가슴의 떨림이 멈 추지를 않는다. 목까지 치밀어오른 떨림은 이윽고 어색한 웃음으로 흘러나왔 다. " 하……. 괴물, 이잖아? 저 자식. " 그 말에 침묵하던 시영 일행도 마음 속으로 동의했다. 시영은 옆의 유평에 게 유빈을 맡기며 브루스를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영의 시선은 처음 으로 경외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스스로 아스트랄계에 몸을 피했던 것입 니까? " " 단지 피한 것으로만 보였나? " 시영의 말에 브루스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 네 녀석의 술수에 소비한 선기를 회복하기 위해 삼계에 접어든 나는 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지. 네 녀석의 거인은 영체를 가지고 있더 군? 마치 살아있는 인간처럼. " " ……티폰의 영체를 공격했던 것입니까? 터무니 없는 짓을 하셨군요. " 시영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 시공 세계의 흐름을 어지럽혔다간, 그대로 시공 주소를 잃어버린채 존재 의 계 사이를 방황할지도 모르는 것을. 아무리 당신이 아스트랄 유영에 능하다고 하더라도 방금의 행동은 어리석었습니다. 영체 접속을 하는 저 도 아스트랄 계의 영체를 건드리는 것만은 피하고 있었는데. " " 후, 그게 너와 나의 차이다. 목숨을 걸 각오도 없이 그런 짓을 했으리라 생각하는가. " 브루스의 거침없는 말에 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렇다.자신은 그 만한 각오가 없었기에 시도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하지만 아스트랄 유영의 위험을 알면서도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우우우우우우 폐허 속에서 티폰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체를 직접 공격당한 것만으 로도 전체 기능의 70퍼센트가 마비되어버렸다. 오리하르콘의 셀프 라이팅 기 능이라면 자체 복구가 가능하겠지만, 지금 당장 사용하는 것은 무리다. 시영은 허탈한 미소를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인정하겠습니다. 오늘은 저희의 패배입니다. " " 도망칠 셈이냐! " 브루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세를 낮췄다.폐허 속에 쓰러져 있던 거인이 점 점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시영은 저런 식 으로 티폰을 아스트랄계에 저장시켰다가 물질계로 전이시키는 방법을 사용해 온 모양이다. 거인의 신출귀몰함은 다 그런 이유에서였군! " ……! " 그때 막 시영에게 돌진하려던 브루스는 자신을 엄습해오는 살기를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질감이 느껴졌다.주위의 대기가 차가워지며 급격히 기온 이 내려가는게 느껴진다. 그의 뒤에 있던 리리스도 공간의 변화를 감지하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들이 서있는 자리로 새하얀 결정들이 한송이 한송이 떨어지고 있었다. 시영은 그렇게 긴장하는 브루스 일행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했다. " 새로운 손님이 오시는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좋은 시간되시길. " " 기다려! " 브루스는 이를 갈며 소리쳤지만 눈깜짝할 사이에 시영 일행은 흔적도 없이 12구역에서 사라졌다. 그림자를 통해 아스트랄계로 빠져나간 모양이다. 브루 스는 그들을 추적할까 했지만,자신의 뒤에 있는 리리스와 가인을 이 살기 속 에 남겨두고 갈 수는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코마히코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급히 아무도 없는 허공 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잠깐! 에레노아 씨……! " 촤촤촤촤촤촤 하지만 채 그가 마저 외치기도 전에 브루스와 리리스를 감싼 대기가 날카로 운 진공파로 변해 그들을 덮쳤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리리스는 미 처 대응도 하지 못하고 진공파에 몸을 노출시켰다. 그러나 브루스는 검은 폭 풍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사방에서 날아드는 진공파를 벽경으로 상쇄시켰다. 리리스는 가인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 뭐지, 이건? 바람? " 오라 능력인가! 리리스는 여전히 서리가 맺히는 대기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를 악물 었다. 퇴로가 막혀 있었다. 빠져나가려고 해도 저 대기에 접근하는 순간, 진 공파에 몸이 토막날 것이다. 브루스는 그런 리리스의 앞을 막아서며 자신들을 공격한 인물에게 소리쳤다. " 무슨 짓이냐! 적과 아군도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 하지만 상대는 진공파를 날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브루스는 벽경으 로 진공파를 부서버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버릇을 고쳐줄 필요가 있겠군! 촤촤촤촤촤 그는 날아드는 진공파를 무시하며 심경으로 상대의 주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상대는 세세한 오라의 컨트롤에 미숙한지라 오라를 사용할 때마다 어김 없 이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브루스는 상대의 위치를 파악해내자 예고 동작도 없이 진기를 끌어올렸다. " 거기냐! " 콰쾅 심경(心經) 문곡(文曲)으로 상대의 주심을 파악한 후, 비경(飛經) 염정(廉 貞)으로 공격! 가인의 천공주심권과도 같은 원리의 속공이었다. 과연 브루스 의 공격이 먹혀들었는지 그들을 감싸던 서리가 풀어지며 새하얀 AI슈츠를 입 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 브릿드를 공격했던 러시아 지부의 피스 대원이었다. " 자, 어디 계속 까불어보시지. 밑천이 벌써 다 떨어진 거냐! " 브루스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마도 그녀는 AI슈츠를 입지 않은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는 모양이었다.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패 턴 그레이의 오라를 보여주면 오해를 풀 수 있겠지만, 브루스는 일부러 그러 지 않았다. 말 그대로 버릇을 고쳐줄 생각이었다.거기다 시영을 놓치게 한 대가도 톡톡 히 받아낼테다! " Простите, " 그러나 그녀, 피스 화이트는 이미 브루스가 오라 능력자라는 것을 눈치챘는 지 그와 더 이상 상대할 마음이 없었다. 대신,오라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 른 상대에게 손을 뻗쳤다. 위이이이이이잉 브루스는 갑자기 자신의 뒤에서부터 진동음이 울려퍼지자 아차 하는 기분이 었다. 상대는 자신에게서 리리스로 타겟을 옮긴 것이다. " 이런……! " 브루스가 돌아본 곳에는 형체가 보일 정도로 물리화된 바람의 소용돌이가 리리스와 가인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끝자락은 길게 늘어 나서 마치 채찍처럼 피스 화이트의 손과 연결되어 있었다. 피스 화이트는 양 손으로 그 바람의 채찍들을 붙잡고 뒤로 돌며 그것들을 좌우로 끌어 당겼다. " The Canine of A north wind! " 카카카카카칵 리리스와 가인을 감싼 회오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며 그 안의 것들을 형체도 없이 난도질했다.그 광경에 그녀를 말리려던 코마히코가 허탈한 표정으로 손 을 떨어뜨렸다. 도저히 저 바람의 채찍 속에서 빠져나올 구석이 보이지 않았 던 것이다. 공격의 중심에 있었던 가인과 여자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하다. 코마히코는 경솔한 피스 화이트의 행동에 분노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 지만 곧 그녀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재빨리 가인이 있 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 ……! " 그곳에는 거대한 골렘 두마리가 가인과 리리스를 감싸듯이 보호하고 있었다. 저 돌거인들이 피스 화이트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리리스는 다 부서져가는 골렘들을 바라보며 한 동료의 이름을 떠올렸다. " 카이? " 쿠구구구구구구 순간, 지축이 울리며 땅으로부터 거대한 팔이 튀어나와 피스 화이트와 브루 스, 코마히코와 붉은 형제들을 공격했다. 네크로맨서 카이 브릿드의 샌드맨, 무르무르였다. 그렇게 무르무르가 피스 대원들을 정신없이 공격하고 있는 틈 을 타서 하늘로부터 거대한 익마가 리리스에게 내려섰다. 익마 안드레알푸스는 카이의 목소리로 그녀에게 외쳤다. [리리스! 어서 타! 저 녀석들 보통이 아니야!] " 아, 응! " 카이는 갑작스런 피스 화이트의 기습으로 숙주인 테라인의 몸을 잃어버렸다. 그 후, 무르무르에게 네크로맨시로 옮겨간 그는 창생의 술로 익마를 만들어, 다시 그 익마에 옮겨간채 눈치 채이지 않도록 피스 화이트의 뒤를 쫓아 날아 왔던 것이다. 초류향 때에 이어 두번째로 숙주의 몸을 잃어버린 카이는 말할 수 없이 신 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의 재촉에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을 잃은 가인의 몸을 부축하여 익마의 등에 올라타려고 했다. 카이는 그녀가 이 바쁜 와중에도 가인을 챙기 려고 하자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그 테라인도 데려갈 생각이야?] " 불평하지마! 말했잖아! 지금 그의 의식과 반드시 접속해야만 한다고! " [쳇!] 카이는 혀를 차며 리리스와 가인을 태운채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했다. 하지 만 그런 그를 노리는 총신이 있었다. 쾅 총성과 함께 익마의 몸을 두드리는 아켄석 제 대공탄! 바로 그람드링의 리 볼버였다. 차원 구조가 틀린 탓에 아켄석 탄은 카이에게 별 다른 영향을 줄 수 없었지만, 대신 뒤에 타고 있던 리리스는 테라인의 육체를 빌리고 있었기 에 질량 무기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리리스는 계속되는 리볼버의 사격에 어깨를 총탄으로 스치며 그만 가인과 함 께 익마의 등에서 떨어졌다. [이런!] 카이는 당황하며 재빨리 떨어지는 리리스를 다리로 잡아냈다. 하지만 집요 한 그람드링의 사격에 가인까지 잡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행여나 리리스가 총탄에 맞을까 걱정하며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 가인! " [크윽! 꽉 잡아, 리리스!] 카이는 주저 없이 격전지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리리스는 멀어져가는 가인 을 내려다보며 카이에게 소리쳤다. " 무슨 짓이야, 카이! 당장 기수를 돌려! 가인을 데리고 가야만 해! " […….] " 카이! " 하지만 카이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으며 묵묵히 계속 비행만 할 뿐이었다. 리리스는 자신을 붙잡은 익마의 발을 뿌리치려고 애쓰며 연신 소리질렀다. " 놔! 이거 놓지 못해! 제발 풀어줘! " 이대로 그를 놔두고 가서는 안돼! " 제발! " 그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카이는 요지부동이었다.리리스는 떨리는 눈으 로 이제는 보이지 않게된 격전지를 바라보았다.저 곳에 가인을 두고 온 것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르는데, 그를 구할 수 있는,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르는데, ' 테레이아는 소중한, 아니 특별한 친구니까. ' ' 나의 자랑스러운 딸, 리리스……. ' 다시는……잃고 싶지 않았는데. " 흐음. 모처럼 친구가 왔는데도 차 한잔 주지 않을 셈인가? 여전히 무정한 사람이구만. " 유레카의 진사령관 개인 사무실. 그 어둠침침한 방 안을 거닐던 금발의 외 국인, 시폰 뤼멘은 베니션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며 진 사령관에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베니션 블라인드를 걷어올리기가 무섭게 곁에 있던 수정이 다시 블 라인드를 내리며 그에게 차를 건네준다. " 차·한·잔 여기 있습니다, 뤼멘 사령관 님. " " 오, 고마워요, 수정 양. 하지만 이 블라인드는 좀 걷어버리자고. 이렇게 방이 햇볕을 쬐지 못하면 조만간 곰팡이로 가득 뒤덮일 거야. " " 어차피 인공 조명이라 살균 효과도 없답니다. " 수정은 방긋방긋 웃으면서도 어딘가 뼈 있는 목소리로 시폰의 말을 되 받아 쳤다. 그 사람 좋던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눈 앞의 외 국인이 어지간히도 싫었던 모양이다. 시폰은 그녀의 쌀쌀맞은 태도를 모르는 척 하며 능청스럽게 차를 음미했다. " 으음. 수정 양의 차맛은 역시 일품이야.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건만 아직 도 그때 당신이 타주었던 차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 " 그때 제가 타주었던 것은 커피였습니다. " " ……. " 시폰은 씁쓸하게 웃으며 진사령관을 돌아보았다. " 내가 딱히 수정 양에게 미움 받을 짓을 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데……. 혹 시 자네가 그녀에게 내 험담이라도 했던 건가? " " 나는 단지 알고 있던 사실들을 말해주었을 뿐이다. " 진 사령관은 무뚝뚝하게 답하며 언제나처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 그나저나 성당 기사단은 어째서 너를 여기로 파견한 거지? " " 그 말은 좀 어폐가 있는데. 마치 파견된게 나라서 불만이라는 것처럼 들 리잖아. " " 대답해. " 진 사령관의 종용에 시폰은 서두르지 않으며 차를 음미하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 자네는 지금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어. 성당 기사단은 자네의 행위 에 분노하고 있네. 여차하면 자네를 지금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기세야. 나는 오히려 그런 자네를 보호하고자 직접 파견인을 자청해서 온 거네. " 그 말에 수정은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아무리 대비책을 세워도 자신들의 행동은 속속들이 저들에게 노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인드 브레이커 사건 때도 그랬지만 어디선가 정보가 유출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시폰은 자신의 말에 진사령관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했으나, 그 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실망하며 말을 이었다. " 어쨌든, 그런 이유로 한동안 자네의 곁에서 보좌 임무를 맡게 되었네. 뭐, 순수한 의미로서의 서포트니까 너무 신경쓰지는 말고. 물론 수정 양의 직 무를 빼앗을 생각도 없어. 자네들은 그저 평소 하던데로 행동하기만 하면 돼. 자연스럽게 말이야. 알겠나? " " ……그 말이 진담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데. " " 진담이 아니면? " " 내가 아는 아포스톨로스 타데오는 웃으면서도 능숙하게 상대의 등에 비수 를 꽂는 남자지. " " 이런.이런. 그런 소리를 자꾸 하니까 수정양이 오해하는 것 아닌가? " 시폰은 씨익 웃으며 수정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뱀처럼 느껴졌는지 라 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진 사령관의 뒤로 몸을 피했다. 시폰은 그 모습에 고소를 금치 못하며 다시 진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 자아- 그럼 일단 임무에 충실할까 하는데 말이야. " " 사령관 보좌에 명령권은 없는 걸로 아는데. " " 명령이 아니라 서포트일세. 실제로 자네도 절실히 내 도움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 시폰은 진 사령관의 선글래스를 꿰뚫어 보기라도 할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하며 미소했다. " 필요한 거지? 내 밑의 피스 대원들이. " " 아아, 정말 엉망진창이야. Target은 놓쳐버렸고,남아있던 잔챙이들도 놓쳐 버렸으니. 꼰대에게 깨져도 왕창 깨지겠구만. " 그람드링은 12구역의 폐허에 앉아 자신의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며 푸념했다. 그의 앞에는 현재 피스메이커의 팔라딘 대와 의무대원들이 동분서주하며 상 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국지부의 피스대원들은 각자 응급 치료를 받은 뒤 신속하게 응급 차량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그람드링의 뒤에서 막 포션으로 회복된 몸을 풀고 있던 오르크리스트는 작 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오라의 주인을 피스 블랙의 손에서 탈취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번만큼은 마스터도 조용히 넘어가주지 않을까. " " 크- 넌 그렇게 당해놓고도 아직도 그런 태평한 소리가 나오냐? 그 자식은 악마라고! 사람의 탈을 쓴 DEMON이야! 젠장, 나도 참 불쌍한 인생이지.어 쩌자고 그런 인간에게 걸려서는……. " 그때 그들의 저편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스 화이트라고 하는 여자와 피스 그레이라고 하는 꼬마였다. 그들은 앞의 전투로 인해 서로 에게 상당히 골이 패인 상태였는데, 솔직히 잘못은 피스 화이트가 했지만 그 녀는 웬만큼 무뚝뚝한게 아닌지라 조금도 사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그 피스 버밀리온이 피스 그레이를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재차 싸움이 벌어졌 을지도 모른다. 그람드링은 피스 버밀리온 때문에 좋은 구경을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오르 크리스트에게 말했다. " 그나저나 오라의 주인, 그 자식은 어때? " " 글쎄……. 자기 동료들에 비해서는 별 다른 부상도 없던데. 아, 저기 오 는군.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 " 오르크리스트는 의무대원들이 간이 침대로 싣고 오는 가인을 가리켰다. 그 람드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가인을 바라보았다. 간이 침대에 누운 그는 동공이 풀린 상태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가벼운 쇼크 상태일테니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정신이 돌아올테지만……. 그람드링은 실망했다는듯 혀를 찼다. " 뭐야, 저게? 저런게 오라의 주인이란 말이야? 아까도 보니까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널부러져 있더만. " " 마스터에게 들은 바로는 가장 늦게 피스메이커에 들어온 오라 능력자래. 아마 그 때문에 여러모로 미숙한 점이 많겠지. " " 흐응∼ 그랬구만. 그럼 격려나 좀 해주고 올까나∼ " "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 그람드링은 오르크리스트의 걱정을 뒤로 하고 응급차로 옮겨지려는 가인에 게 다가갔다. 그런 그의 행동에 의무대원들이 의아해했지만, 그람드링은 개 의치 않으며 가인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가져갔다. " Hey, Congratulations. " 그는 가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너는 오늘부터 패배자야. " <제 19 화 형제(兄弟) 完>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2 - Ｂy Ｎext Ｎeo =-=-=-=-=-=-=-=-=-=-=-=-=-=-=-=-=-=-=-=-=-=-=-=-=-=-=-=-=-=-=-=-=-=-=-= 비잉비잉비잉비잉 날카로운 경보음이 귀청을 두드린다. 그 경보음 사이로 자신의 것이라 생각 되는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오퍼레이터 팀의 치프 윤채영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듯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상황을 보고했다. 《41구역의 B구간에서도 몬스터의 생체 반응 확인! 타입은 역시나 동일합니 다! C급 몬스터 머맨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작전 본부실의 메인 스크린에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수의 머 맨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위그드라실의 열원 탐지에 의하면 그 개 체수는 무려 오십! 이런 것들이 적어도 세 구간을 더 포진하고 있다고 생각 하니 눈 앞이 깜깜해진다. 채영의 보고에 피스메이커 한국 지부의 민수정 사령관 대리는 평소답지 않 게 짜증을 부렸다. " 인어면 인어답게 바다에서나 살 것이지. 육지에 무슨 볼 일이 있다고 한 무더기 씩 기어나온 걸까. " " 비 때문이 아닐까요? 가뜩이나 계속되는 장마에 서울시 곳곳이 물에 잠겼 으니까……. 어쩌면 이번 이상 기후도 몬스터들과 관련된 것인지도 모르죠. " 수정의 곁에 있던 닥터는 안경을 쓸어 올리며 푸념했다. 그의 말대로 스크 린의 41구역에서는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태풍 야기에 이어 12구 역의 크레이터 사건, 거기다 이번 장마까지 더해 통일 한국은 유례없는 재난 의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마 슬슬 바닥을 드러내는 국고에 통일 한국의 재경부는 하루도 근심 걱정이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시야가 가릴 정도로 비가 내리면 임무를 수행하는데 차질 이 생길텐데……. 그런 수정의 걱정대로 곧 무전에서 한 피스 대원의 불평이 들려왔다. 《Fuck! 뭐, 이런 개 같은 날씨가 다 있어! 이런 날에도 일을 시키는 건 엄 연히 노동법 위반이라고! Shit!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어이, Korean! 듣 고 있는 거냐고!》 ' 꼬마 녀석이 입 한번 걸하기는. ' 수정은 불평을 하는 피스 대원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보고는 인상을 찡그 렸다. 그리고 무전을 받아야만 하는 채영을 동정했다. 매번 그의 시비 상대 가 되는 것은 그녀였기 때문이다. 채영은 그야말로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피스 알리자린, 임무에 집중해주세요. 그리고 개인 잡담에 무전기를 사용 하지 말아주세요.》 《체- 딱딱하게 굴기는. 우린 현장에서 뛰고 있다고. 위로의 한마디는 못해 줄 망정 의욕이나 저하시키기야? 이렇게 애교 없는 여자가 담당 오퍼레이 터라니. 아∼ 최악이야. 밥맛 떨어져. 한국 지부는 이렇게나 인재가 없는 걸까.》 《…….》 치, 치프. 채영의 곁에서 무전을 듣고 있던 오퍼레이터 삼인방과 주세희는 피스 알리 자린의 폭언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치프의 안색을 살폈다. 지금까지는 채영 이 그녀답지 않게 잘 참아오고 있었지만, 그 인내심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불안은 채영의 직업 의식을 과소평가하는 것이었다. 채영 은 별 다른 동요 없이 피스 알리자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잠시 후면 C구간의 머맨들과 조우하게 됩니다. 개체 수는 총 오십 여섯. 피스 푸르푸린의 저격 포인트도 고려해야 하므로, 최대한 장소를 벗어나 지 말고 싸워주십시오.》 《……흥.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피스 알리자린은 무뚝뚝한 그녀의 반응에 흥이 식었다는듯 투덜대면서도 지 시대로 행동했다. 그렇게 아무 탈 없이 상황이 지나가자 지켜보던 작전 본부 실의 사람들은 작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만 삼인방과 세희의 시선은 여전히 자신들의 치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들로서는 뭔가 달갑지 않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무표정하게 작업에 임하는 채영의 모습은 분명 피스메이커 오퍼레이터 팀의 치프에 걸맞는 모습이지만, 자신들이 알고 있던 윤채영의 모습은 아니다. 그녀들은 그런 채영의 변화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곧 밀려드는 41구역의 정보 에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피스 화이트, B구간에 도착했습니다. 피스 버밀리온, A구간에 도착했습니 다. 피스 푸르푸린, 저격 포인트에 도착했습니다.》 메인 스크린에서는 처음의 지시대로 각 피스 대원들이 지정된 장소로 이동 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수정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자신의 뒤 에 서있던 한 남자를 돌아보았다. " 사령관 님, 지시를. " 그녀의 말에 사령관, 시폰 뤼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비어 있는 진 사령관의 자리를 돌아본 후 장난스럽게 말했다. " 자아- 그럼 해충 박멸을 시작해봅시다, 여러분. " 2033년 8월 1일. 13시 23분. 피스메이커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다. 第 20 話 강림(降臨) 쏴아아아아 전기가 나간 41구역의 거리는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 득 차 있고, 쉴 새 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거리를 물바다로 만든다.이렇게 거 리에 물이 빠지지 않는 것에는 41구역의 지반이 서울 시에서 가장 낮은 탓도 있었지만, 서울시의 하수도 공사가 잘못된 탓이 더 컸다. 평소 수해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범람한 물의 양을 하수도가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카이는 그렇게 물에 잠겨들어가는 도시를 백화점의 창밖으로 무표정하게 내 려다 보았다. " 흑, 흑……. " 그때 뒷편에서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카이는 창문에서 홀 안으로 시 선을 돌렸다. 어두운 백화점의 휴게실에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웅크리 고 앉아있었다. 흐느낌은 그들 중 한 어린 아이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아이의 어머니로 생각되는 여자가 다급히 아이를 달랬다. " 울지마. 얼른 그쳐. 뚝! " " 으아아아앙! " 하지만 아이는 되려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해서 울 뿐이다. 홀 안의 사람들은 아이의 울음 소리에 점점 불안해하며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 이가 계속 울다가는 간신히 조용해진 '그들'이 다시 자신들을 찾아올 것이다. 결국 한 남자가 막 아이에게 윽박지르려는 차에 그들이 찾아왔다. [킷킷킷킷킷!] " 으앗! " 사람들은 갑작스레 들려온 기괴한 웃음 소리에 질겁하며 벽으로 몸을 붙였 다.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들이 여럿 나타나며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창 가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방문자들의 모습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볼 수 없는 편이 좋았을 것을. 방문자들의 전신에 돋아난 비늘들과 손과 발에 달린 날카로운 물갈퀴들은 사 람들의 공포심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신음에 가까운 비명을 흘리며 흐느낀다. 그렇게 겁에 질린 사람들의 모습에 머맨들은 특유의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 우힛. 우힛. 정말이지 너희 인간들은 말귀를 못알아먹는군. " 머맨들 중 유독 덩치가 크고 생김새가 다른 한 머맨이 입을 열었다. 그 머 맨은 물고기 같은 얼굴로 사람의 말을 하고 있었다. " 우힛. 이 해양공작(海洋公爵) 베팔(Vepal)님이 분명히 얘기했었지? 입을 연 녀석들은 내 수하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우힛. 이미 너희 인간들로 인 해 병력은 충분히 갖춰진 상태다. 하지만 굳이 자청해서 내 부하가 되겠 다고 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 어디 보자……. 네 녀석인가? " 스스로를 베팔이라고 밝힌 머맨은 사람들 중 여전히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잡아 올렸다.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베팔의 발을 끌어 안았 다. " 아, 아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사과드릴테니 제발 아이만은! " " 엄마아아! "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베팔의 손에서 발버둥을 쳤다. 그 모습에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연신 베팔에게 소리쳤다. " 차라리 저를 잡아가세요! 이 아이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부탁드립니다! 저를 잡아가세요! 제발! " " 우히히. 어쩔까나? " 베팔은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사람들 사이 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이는 작게 혀를 내둘렀다. 사실 저 머맨은 그가 만 든 작품이었던 것이다. 작년 이맘 때쯤 리리스에게 건내준 다곤이라는 머맨 의 원형으로서, 카이가 자주 애용하는 무르무르나 안드레알푸스와 같은 네크 로 크리쳐(Necro Creature)의 일종이었다. 단지 무르무르나 안드레알푸스가 자신이 직접 네크로맨시로 조종할 수 있도 록 자아가 없는 인형으로 창생시킨 거라면, 이 베팔은 마정의 핵으로 테라인 을 촉매 삼아 창생시킨 것이었다. 저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은 아마 촉매가 된 인간의 영향일 것이다. " 우힛. 뭐, 그 성의를 봐서 특별히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 베팔은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아이를 놓아주었고, 어머니는 풀려 난 아이를 끌어안은채 몇번이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 우히히히. 감사할 필요 없어. 어차피 마찬가지일테니까. " 베팔의 말에 여인은 영문을 몰라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찬가지라니? 푹 하지만 채 그녀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베팔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정의 핵을 찔러 넣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저 괴물이 또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 이다! " 아, 아아아악! " 마정의 핵에 사로잡힌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런 엄마 의 모습에 아이는 울부짖었고 반대로 베팔은 웃음을 터뜨렸다. " 우히히히히! 부탁대로 너를 잡아가도록 하지! 어차피 네 아이는 작아서 별 쓸모도 없었다고! " " 엄마! " 아이는 비늘이 돋아나는 자신의 어머니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여인의 귀 밑 에서 아가미가 돋아나고,손과 발에서는 물갈퀴가 돋아나며 이빨은 맹수의 그 것처럼 날카로워진다. 이윽고 그녀는 완벽한 하나의 머맨이 되었다. [킷킷킷킷…….]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낯설은 웃음 소리. 그리고 다음 순간, 텅 아이의 목은 허공을 날았다. 머맨으로 변한 그녀가 본능적으로 눈 앞의 생 물체를 공격한 것이다. 이미 이성을 상실한 그녀는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베팔은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 했다. " 우힛! 훌륭해! 그래! 전쟁에 아이는 쓸모 없어! 쓰레기야! 쓰레기는 과감 히 버려야지! 훌륭해! 우히히힛! " " 으, 으으으……. "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그 참상에 사람들은 행여나 비명이 새어 나올까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흐느꼈다. 완벽한 머맨이 된 여인은 곧 베팔의 뒤에 늘 어선 다른 머맨들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그 머맨들은 모두 지금과 같은 방식 으로 베팔이 만들어낸 마정의 숙주들이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백화 점에 쇼핑하러 온 가족들과 친구들……. " 우히히힛! 잘 봤겠지? 다시 돌아왔을때도 소란스러우면 여기 있는 전원에 게 내 병사가 될 수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마. 히히, 히히힛! 자, 그럼 다 시 나가볼까. 다들 오금 저리면서 기다리고 있어라. 우히히히!" 베팔은 자기가 한 말이 뭐가 그리도 우스웠는지 연신 웃음을 참지 못하며 머맨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진 것을 몇번이고 확인하 뒤에야 남겨진 사람들은 참고 있던 울분을 터뜨렸다. 하지만 행여나 머맨들 이 돌아올까봐 소리조차 내지 못한 흐느낌이었다. " 어째서……. 어째서……. " " 싫어. 더 이상은……흐흑……. " 그렇게 절망하는 사람들 속에서 카이는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로 한 방향을 주시했다. 그 곳에는 어미의 손에 목이 날아간 아이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카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이의 시신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내려다 보 았다. 자신이 만든 괴물에게 죽은 그 아이를. 사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동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신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영자 변환기로 테라인의 의 식을 증폭시켜 보다 많은 정을 추출, 영자 에너지를 끌어모을 것. 그 때문에 이렇듯 인간들을 잡아들여 마정의 숙주로 만들고,만들고 또 만들었을 뿐이다. 문제될 것은 없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단지, ' 리리스라면……지금의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 카이는 그 날 이후 자신에게서 모습을 감춘 리리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떨어 뜨렸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그녀를 데리고 그 자리를 피한 것은 현명 한 처사였다.비록 그것이 그녀의 의사를, 울부짖음을 무시했던 것일지라도. ' 나는 바르의 별. ' 노아가 파견한 라무의 아이. 반드시 일을 성사시켜 유메를 구해내야할 사명 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리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하나를 위해서 지금껏 노력해왔다. 혼신의 힘을 다해왔어. 그것은 리리스 역시 마찬가지 였 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녀는…… ' 나를……떠난 걸까? ' 카이는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없는 자리가 이토록 허전할 줄은 몰랐다. 아니, 몰랐기에 이토록 외로운 것이리라.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 리리스, 네가 없이는……아무런 의미가 없어. ' 이렇게 원로회의 말을 따르는 것도, 유메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리 리스, 네가 없으면 난……. 카이는 울적한 표정으로 창틀을 부여잡았다.그 모습은 주위의 겁에 질린 사 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키키킷] 베팔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머맨들은 카이가 있는 41구역의 백화점을 중 심으로 그 일대에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베팔이 무분별하게 마정의 핵을 남발하여 수를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카이에 의해 만들어 지면서 받았던 명령은 단 하나. '번식하라' ,였다. 어차피 카이는 쿠사나기와 같이 자신의 정을 나누어서 마정의 핵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듯 자유로이 숙주를 만들 수 있었다. 창생의 술을 사용하 는 그 스스로가 하나의 생체 영자 변환기였기에 영자 보존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 때문에 바르의 별들 중에서 네크로맨서 카이의 역할 은 가장 중요했고, 그 때문에 원로회는 그를 가장 늦게 테라로 보냈다. 디멘 션 트랜스퍼의 불완전함이 3차에 걸친 실험으로 완전해질 때까지. 푸확 머맨들은 거리에 가득 찬 물바다를 자유로이 헤엄쳐 다음 목표인 건물로 이 동했다. 그러다 건물의 외벽 유리창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자, 순간 날치처 럼 수면 위로 튀어올라 2층 유리벽에 달라붙는다. 건물 안에서 상황을 지켜 보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검은 그림자들이 유리창을 뒤덮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머맨들은 공포에 젖어든 사람들의 모습에 기괴한 웃음을 터뜨린다. [키키키키킷!] 그리고 막 유리창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쾅! 단발의 총성이 울려퍼지며 유리창에 붙어 있던 머맨의 머리가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그 관통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몸통만 남은 머맨의 시신은 유리창 을 부수고 안으로 튕겨 들어갔다. " 꺄악! " " 으앗! 뭐야! " 안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괴물의 시체로부터 도망쳤다. 머리가 사라진 괴물의 육신은 죽어서까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신의 곁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죽은 머맨을 내려다보았다. " 주, 죽은 건가? " " Hey! Away with you! " 남자의 말에 답한 것은 한 외국인 소년이었다.그 소년은 머맨이 부순 창문 밖에서 날듯이 안으로 들어왔는데, 전신이 붉은 타이즈로 된 특이한 차림새 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차림새가 대 몬스터 특무기관의 에이젼트들 만이 입을 수 있는 AI컴플리트 세트라는 것을 남자가 알 리 없었다. " He is pretending to have died. " 외국인 소년은 귀찮다는듯이 남자를 떠다밀며 머맨을 내려다보았다. 남자 는 소년이 하는 말을 대충 알아듣고 중얼거렸다. ' 죽은 체…… 하고 있다고? ' [카앗!] 순간, 머리가 날아간 머맨이 거짓말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년에게 달 려들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살짝 몸을 비틀어 괴물의 공격 을 피해냈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으로 연신 돌리고 있던 리볼버를 낚아채 괴 물의 등짝에 총신을 꽂아 넣는다. " 아마 여기 쯤이었지? " 쾅! 주저 없이 당겨지는 방아쇠! 리볼버의 총탄이 불꽃과 함께 머맨을 관통했고, 그 관통된 뒷면에서 붉은 체액이 나선 모양으로 흩뿌려졌다. " 으앗! " 괴물의 앞에 서있는 바람에 체액을 정통으로 뒤집어쓴 남자는 여전히 상황 을 파악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그러다 불현듯 찾아드는 어색함에 자신의 가 슴을 어루만진다. " ……? " 없었다. 자신의 가슴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목 아래의 감 각이 급속도로 사라져간다.머맨을 꿰뚫은 총탄이 덩달아 남자의 가슴마저 관 통했던 것이다. 남자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며 앞으로 거꾸러졌다.그 와중에 볼 수 있었던 것은 쓰러진 머맨의 육편 사이로 드러난 사람의 시체였다. " Shit……. 그러게 떨어지라고 했잖아. 병신같이. " 소년은 죽은 남자를 향해 혀를 차며 버릇처럼 리볼버를 손가락으로 돌렸다. 그러다 번개같이 손잡이를 낚아채며 창 밖으로 총신을 겨눈다. 그리고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퀵 앤 데드! 쾅쾅쾅쾅 막 부서진 창을 통해 건물로 들어오던 머맨들은 사정없이 날아드는 리볼버 의 총탄에 가슴을 꿰뚫렸다.앞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확히 몸 속의 숙주를 노 린 사격이었기에, 머맨들은 두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키이이이…….] 창 밖의 머맨들은 순식간에 다섯 명의 동족들이 죽어나가자 돌입을 망설였 다. 정전이 된 어두운 건물의 복도에선 전신을 붉게 물들인 학살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살자의 이름은 그람드링 뤼멘. 대 몬스터 특무기관 피스메이커의 피스 대원. 하지만 이 자리의 머맨들에게 있어서 그는 그저 악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왜 그래? 덤빌 생각 아니었냐? 뭘 망설이는 거야, 괴물 주제에? " 그람드링은 허리춤의 리볼버를 마저 뽑아들며 이를 드러냈다.머맨들을 바라 보는 그의 눈동자는 짙은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 놀아보자고, Mr! "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3 - Ｂy Ｎext Ｎeo =-=-=-=-=-=-=-=-=-=-=-=-=-=-=-=-=-=-=-=-=-=-=-=-=-=-=-=-=-=-=-=-=-=-=-= 언더 시티 유레카의 광속 전차 안. 한창 41구역에서 몬스터와 피스메이커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무렵, 이 곳 에서는 임무에서 제외된 두 명의 피스 대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명의 피스 대원은 음파를 조절하는 패턴 옐로우의 소유자, 한시민. 그리 고 나머지 한 쪽은 차원 진동을 조절하는 패턴 그레이의 소유자, 브루스 류. 그들은 좌석에 앉아 그저 눈 앞의 스크린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스크린에서 는 위그드라실의 델타 위성이 보내오는 41구역의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 ……이번에도 저희가 나갈 일은 없을 것 같네요. " 상황을 지켜보던 시민이 작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브루스는 그런 그녀 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 흥. 우리가 나가지 않고 끝나면 그것으로 좋은 것 아니냐? 아니면 그동안 몬스터를 상대하지 못해 욕구불만이라도 쌓인 거냐? " " ……아뇨. 그럴리가요. " 욕구 불만이 쌓인 건 다름 아닌 브루스 님이겠죠.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런 속마음을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화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시민은 스크린을 손으로 가리키며 나지막이 감탄했다. " 그나저나 코마히코 분들, 정말로 강하네요. 어쩌면 저희가 빠진 것이 나 았을 수도 있어요. 이런 신속한 소탕이라니. " 스크린에는 41구역의 지도와 수많은 몬스터들의 불빛, 그리고 피스 대원의 오라 패턴을 표시하는 불빛들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오라 패턴의 불빛들과 맞닿은 몬스터의 불빛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간다. 분명 시민의 말대로 놀 랄 만큼 빠른 소탕력이었다. 하지만 시민의 말에 브루스는 코웃음을 쳤다. " 당연히 빠를 수 밖에. 녀석들은 우리들처럼 번거롭게 돌아갈 생각은 없는 듯 하니. "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시민이 재차 물었지만, 브루스는 대답해주지 않았 다. 사실대로 얘기해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분명 진실을 알 게 된다면 지금처럼 속 편한 감상은 하지 못하게 될 테니. " 이 놈이나 저 놈이나……마음에 안드는 녀석들 투성이야. " 브루스는 진 사령관의 자리를 대신한 미국 지부의 사령관과 그가 데리고 온 아이들, 그리고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현 한국 지부의 피스메이커들을 떠올렸 다. 모든 이들이 시폰 뤼멘,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렇게 투덜거리는 자신마저도. '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건가……. ' 한심하기 짝이 없군! 브루스는 거칠게 좌석에 몸을 눕히며 눈을 감았다.그런 그의 신경질적인 태 도에 옆 자리의 시민은 아무 말 없이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41구역의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며. 《피스 알리자린! 멈춰요! 멈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람드링은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채영의 무전에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이지 이 오퍼레이터는 사사건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그래. 그래. 멈췄으니까 이제 그만 좀 닥쳐줘. " 《대체, 대체 무슨 짓을……. 》 작전 본부실의 채영은 그람드링의 AI헬맷이 보내오는 영상에 치를 떨고 있 었다. 그람드링은 일부러 그녀에게 41구역의 상황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위 해서 더더욱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주위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굴러다니는 사람들의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바로 머맨들의 숙주가 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람드링은 이 숙주가 된 사람들 을 차원 촉매인 아켄석 탄으로 죽임으로서 몬스터를 제거했던 것이다. " 하지만 말이야. 어쩔 수가 없잖아? 몬스터와 융합된 인간들의 사정까지 봐주며 싸우기엔 나는 너무 연약해서. " 《그렇지만 이렇게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요! 예전만 해도 융합 형 몬스터를 숙주에게서 분리해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예전의 피스 대원들은 절대로 이러지 않았다고요!》 " 어허- 그러셨어? 그래도 이미 죽은 건 죽은 거잖아? 어차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뭘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 《그람드링 씨!》 무전에서 들려오는 채영의 목소리가 울먹이기 시작하자, 그람드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 감정도 없이 무뚝뚝한 여자는 자신이 몬스터를 죽이기만 하 면 금새 무너져 내린다. 아무리 냉정한 척 행동하려고 해도 그 마음은 여리 기 짝이 없다. 약해빠졌어! 그렇게 채영이 무너지는 모습이 너무나 유쾌해서 그람드링은 더더욱 살육을 자제할 수 없었다. 《가인 씨라면……모두가 있었더라면 절대로 당신들 처럼,그렇게 쉽게 죽이 지는 않았을 텐데……. 반드시 다른 방법이 있었을텐데…….》 " 아아, 시끄럽구만. 그렇게 옛날 놈들이 그리우면 그 놈들에게로 가버리란 말이야! 지금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우리들이지 녀석들이 아니야! 언제까지 아무 것도 못하는 병신들 타령만 하고 있을 셈이야! " 그람드링은 버럭 짜증을 내며 신경질적으로 발 밑의 시체를 걷어찼다.더 이 상 이 여자와 얘기했다간 유쾌한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그람드링은 일방적 으로 무전을 끊고 장소를 이동하려고 했다. 그때, 콰장창 그람드링의 뒤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건물의 유리창을 부수고 날아들었다. 그람드링이 슬며시 돌아보니 거기에는 가슴이 꿰뚫린 머맨 두마리가 벽에 처 박혀 사지를 떨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머맨들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쳇, 또 쓸데 없는 짓을……. " " 그람, 여자를 울리면 안되지. " 그람드링이 있는 건물로부터 1킬로미터는 떨어진 마천루의 옥상. 그곳에는 그람드링과 같은 붉은 빛의 AI슈츠를 입은 흑발의 소년이 바닥에 업드렸던 몸 을 막 일으키고 있었다. 소년의 손에는 자신의 배가 넘는 크기의 대전차 라이 플이 들려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오르크리스트 뤼멘. 대 몬스터 특무기관 피스메이커의 피스 대원. 그리고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 링의 쌍둥이 형제였다. 물론 그 쌍둥이라는 부분이 그리 달가운 사실은 아니지만……. 철컹 당겨 열려진 볼트에서 발사가 끝난 공약협이 튕겨나왔다.오르크리스트는 차 분하게 제 2탄을 장전하며 스코프도 없는 라이플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에게 있어서 스코프는 필요 없었다. 그의 오라 패턴,푸르푸린은 타인의 시야로 저 격 대상을 노리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른 바 원격 투시(Remote clairvoyance). 그것이 바로 오르크리스트의 능 력이었다. 그리고 그의 능력은 패턴 알리자린의 시야로 적을 노릴 때 그 진 가를 발휘한다. 띠띠띠띠 그때 피스 알리자린으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하지만 오르크리스트는 일부 러 무전을 받지 않았다. 아마 또 자신의 눈으로 보는 주제에 나서지 말라고 할 게 뻔하다. " 나도 더 이상 도울 생각 없다고. " 오르크리스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그람드링과 싱크로 되어 있던 패턴 푸 르푸린의 능력을 거둬 들였다. 확실히 패턴 알리자린의 '순간 예지(Instant precognition)'라면 자신이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적이 공격하기도 전에 상 대를 이미 공격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니까. 하지만 이 능력에도 한 가지 약점은 존재했는데, 그것은 순간 예지가 시전 자의 시각 범위에 한해서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사각에서 오는 공격은 예지 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 때문에 오르크리스트, 자신이 그람의 백업을 해야만 했다. 패턴 푸르푸 린이 그람의 순간 예지안과 싱크로 되면,원격 투시의 한 단계 위인 천리안의 능력을 갖게 된다. 사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개개인의 능력으로서는 불완전하지만, 단체로서는 완전해지는 것.그것이 붉 은 형제가 언제나 함께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 그럼 다른 쪽도 살펴보도록 할까. " 오르크리스트는 피스 화이트의 시각으로 패턴 푸르푸린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키잇! 키잇!] 41구역의 외곽에 위치한 거리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분명 지금은 시기 상 여름. 그리고 장마가 일어날 정도로 고온다습한 날씨다.하지 만 이 거리 만큼은 그런 상식 속에서 벗어나 있었다. 얼고 있었다. 거리를 휩쓸고 있던 물바다가 싸늘한 얼음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단순히 수면에 살얼음이 어는 것이 아닌 완전한 고체화였다. 한창 물 속을 이동하고 있던 머맨들의 대다수가 이 고체화를 피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얼어죽었다.물 이 얼어 부피가 늘어나자, 주변의 가로등들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휘어져 간 다. [키킷!] 건물 위로 이동하고 있었기에 간신히 얼어죽는 것을 피한 머맨들은 이 갑작 스러운 기상 변화에 당황했다. 하늘에서 내리던 비는 어느샌가 얼어붙어 송 곳처럼 지상에 내리꽂혔고, 기온은 끝도 없이 내려가 머맨들의 체온마저 앗 아간다. 몸에 살얼음이 덮힌 머맨들은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들의 머리로도 이 기상 변화가 부자연스럽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인위 적인, 누군가의 조작 임이 분명했다. 휘오오오오오 그리고 발견했다. 자신들이 있는 건물의 옥상으로 눈보라를 휘감으며 나타 나는 한 여성의 모습을! " 드브뤼제니? " 메마른 저음의 목소리. 여자는 그렇게 러시아 어로 인사하며 머맨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머맨들은 일제히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런 기압의 변화로 외이와 중이의 기압이 달라져서 고막이 비틀어진 것 이다. 그리고 곧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마치 소리가 차단된 것처럼. [……!] 순간 시야가 어둠으로 물든다.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볼 수 없 게 된 것이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진공파가 건물의 옥상에 있던 열여 마리 의 머맨들을 순식간에 난도질했다. 푸화아아아악 기압이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가자 머맨들이 육편을 뿌리며 터져나가는 소리 가 울려퍼졌다. 숙주와 기생체가 뒤범벅이 된 고깃덩어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그 고깃덩어리로부터 흘러나온 붉은 피들이 마치 자신들을 죽인 장본 인을 찾아헤매는 것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그 중 한 핏줄기가 여 인의 발 밑으로 흘러왔다. 하지만 채 여인에게 닿기도 전에 핏방울은 차갑게 얼어붙는다. " ……. " 여인은 그 핏줄기를 내려다 보다 천천히 자신의 능력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몸 주위를 감고 있던 눈보라가 사라지며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적색에 가까운 금발과 눈처럼 하얀 AI슈츠가 극명한 대조를 일으키고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류바 에레노아. 대 몬스터 특무기관 피스메이커의 피스 대원, 대기를 조절하는 패턴 화이트 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그 능력으로 한정된 공간 내에서 기압과 기온을 자유 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키잇!] 막 적들의 제거를 확인한 후 몸을 돌리려던 류바는 낮은 머맨의 괴성에 재 빨리 능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녀를 향해 날아들던 작살들이 급격한 기 온의 하강에 그대로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류바는 다시 몸에 눈보라를 휘감으며 작살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자신들의 공격이 통용되지 않는 상대에게 당황하는 머맨들의 모습이 보였다. " 아직도 남아있었나. " 류바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하지만 머맨 들도 앞의 동족들이 저 의미없는 손짓 하나에 당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에 이번에는 능력이 채 전개되기도 전에 류바에게 달려들었다. 류바는 그런 머맨들의 돌격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우연일지는 몰라도 녀 석들이 패턴 화이트의 약점을 노려왔던 것이다. 기압을 낮춰 진공을 만들 때 생기는 딜레이를! [키아아앗!] 류바는 날아드는 머맨들의 공격을 피해내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머맨들은 그녀가 별 다른 저항 없이 피하기만 하자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상대가 접 근전에 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류바는 머맨들이 마음놓고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낮게 읊조렸다. " ……불쾌하군. " 촤악 순간 류바에게 근접해있던 머맨의 허리가 끊어져나갔다. 머맨은 미처 자신에 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거꾸러졌다. [키잇?] " 불쾌해. " 촤악 다시 류바에게 접근해 있던 머맨이 두동강났다. 머맨들은 이 알 수 없는 상 황에 당황하다가 곧 이유를 눈치챘다. 동족들을 두동강 내던 것은 다름 아닌 류바의 양손에 들려있던 채찍들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채찍이 아니다. 물리적인 형체를 띈 바람의 줄기들이었다. " 불쾌해. " 촤악 " 불쾌해. " 촤악 불쾌해. 불쾌해. 불쾌해. 불쾌해. [키, 키아아아앗!]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류바는 천천히 머맨들을 향해 걸어오며 별 감흥없이 몇번 채찍질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채찍이 한번 휘둘 러질 때마다 머맨들은 하나같이 숙주와 함께 두동강이 났다. 접근전에 약한 패턴 화이트의 능력을 보강하기 위해 피스메이커는 반물질 절삭성 커터인 오라소드를 그녀에게도 장비해주었다. 하지만 류바의 손에서 사용될 때 이 오라 소드는 개발 목적을 뛰어넘은 제 2의 병기로 재탄생된다. 오라 소드의 ACR이 패턴 화이트의 능력을 증폭시켜 반물질 절삭성 커터 자 체를 초고진공(Ultra-high vacuum)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이 초고진공이라면 딜레이 없이 진공파를 생성시켜 상대를 박막(薄膜)으로 만들 수 있다. 피스 버밀리온은 이것을 보고 카마이타치라고 불렀다. 촤촤촤촤 막 류바에게 달려들던 머맨 두 마리가 채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전신이 토 막났다. 그렇게 절반 가까이 동족들을 잃고나서야 머맨들은 자신들의 착오를 깨닫고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거리를 벌리는 거야 말로 스스로를 죽음에 몰아넣는 행위였다. 이미 머맨들의 주위로는 류바가 펼쳐놓은 덫이 그들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 The Canine of a north wind! "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머맨들의 주위로 거대한 용권풍이 치솟아 올랐다. 접 근전을 펼치면서 준비해두던 진공파의 소용돌이가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류바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 소용돌이와 연결된 양 손의 오라 소드를 잡 아당겼다. 카카카카칵 좁혀진 소용돌이는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난도질했다.그리고 걷혀나간 소 용돌이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머맨들은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그대로 소 멸한 것이다. 류바는 검날이 사라진 오라 소드를 품에 집어넣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누 군가가 아까부터 자신의 눈을 빌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오라에 간섭하는 이 불쾌한 감각이 그 증거였다. 이런 짓을 할 녀석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피스 푸르푸린이라고 하는 그 꼬 마……. 류바는 그에게 들릴 리 없겠지만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Испортить кровь кому. " " 우힛! 뭐라고! 2소대와 3소대가 전멸했단 말이냐! " 인질들을 붙잡은 백화점의 1층 홀에서 베팔은 괴성을 내질렀다. 이 몬스터 는 마치 자신이 군인인 마냥 생소한 용어들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숙주가 된 인간의 취향 탓이 컸다. 베팔의 꾸짖음에 보고를 해온 머맨은 기가 죽은 모습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 우힛! 우힛! 말도 안돼! 허약한 인간 따위가 무슨 수로! 녀석들보다 우 리의 전력이 몇 배로 강하단 말이다! " 베팔은 초조한듯,줄을 맞춰선 머맨들의 앞을 서성이며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머맨들의 푸른색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인다. " 우힛! 안돼……. 이럴 수는 없어! 여기서 밀렸다간 봇물 터지듯 돌파당할 거야! 우힛! 전황을 바꿀 계기가 필요해. 어떡하면……, 어떻게 해야……. " 순간, 베팔은 백화점의 안쪽에 가둬두고 있는 인질들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그 입가로 교활한 미소가 머금어진다. " 우힛! 우힛! 그래! 바로 그거야! 인질이다! 어차피 녀석들은 허약하기 짝 이 없는 인간! 같은 동족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흔들릴게 뻔하지! 우힛! 우 힛! 그래! 바로 그거야! 난 역시 똑똑해! " " ばかもの. " 그때 백화점의 어두운 홀에서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베팔의 웃음 소리 를 끊었다. 그리고 베팔이 채 놀라기도 전에 홀의 위쪽에서 한 그림자가 베 팔을 향해 뛰어내렸다. " 인질에 구애받을 정도라면 어떻게 융합형을 해치웠으리라 생각하나! " " 뭐……! " 하지만 베팔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이미 자신의 몸이 정수리 에서 부터 두조각이 나 있었던 것이다. 베팔을 베어낸 것은 손잡이가 십악이 나 하는 긴 외날 직도였다.그리고 그 직도를 휘두른 이는 주황빛의 AI슈츠를 입은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코마히코 카구라. 대 몬스터 특무기관 피스메이커의 피스 대원. 검기를 사용하는 패턴 버밀리 온의 소유자이자 신검 도츠카노츠기를 사용해내는 유일무이한 기검술사였다. 베팔은 도츠카노츠루기에게 베어진 상태로 눈을 좌우로 굴리며 신음했다. " 우힛? 우힛? " " ……편하게 해주지. さようなら! " 촤아아아악 신검의 주홍빛 선들이 격자격세를 만들어내며 베팔을 가로로 삼등분시켰다. 무영신풍류 영식 찰나였다. 그러자 베팔은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체액을 터 뜨리며 여섯 조각으로 떨어져나갔다. 그렇게 마정의 핵을 뿌린 장본인이 죽어버리자,곧 주위에 있던 머맨들도 숙 주에게서 분리된채 신기루처럼 사라져갔다. 수요가 중단된 영자 변환기는 스 스로 영자의 공급을 끊고 사멸한 것이다. 코마히코는 심호흡을 고른 후, 원상태로 돌아간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마 정의 핵에 영자를 빼앗긴 것 외에는 그다지 이상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코 마히코는 사람들의 무사함에 안도하다가 천천히 자신의 발밑으로 눈길을 돌 렸다. 그곳에는 자신이 베어버린 베팔의 숙주가 쓰러져 있었다. 수십조각으 로 난도질 된 그 모습에 가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 ' 이번에도 역시……죽이고 말았는가. ' 코마히코는 도츠카노츠루기를 거두며 어두운 안색을 금치 못했다.융합형 몬 스터들을 상대로 매번 자신들은 민간인들을 희생시켜왔다. 아무리 자신이 속 전속결로 몬스터들의 숙주만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희생은 늘어가기만 했다. 자신과 팀을 이룬 다른 대원들이 민간인들의 생사에 관심을 두지 않은 탓도 컸지만, 그것을 방치하는 시폰 사령관의 탓이 더 컸다. 그는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피스메이커의 사명은 몬스터의 제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그래. 분명 그의 말은 옳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들이 가진 능력으로는 융합 형 몬 스터에게서 숙주를 분리해낼 방법이 없다. 머뭇거리다간 되려 자신들만 당할 뿐이다. 하지만 코마히코는 전투를 거듭할수록 회의감을 금치 못했다. 분명 시폰 사 령관의 말대로라면,몬스터의 제거가 전부라면……그렇다면 어째서 한국 지부 의 대원들은 지금껏 융합형 몬스터들을 상대로 숙주들을 구해왔단 말인가! 결국 변명일 뿐이다. 효율적이라는 명목 하에, 민간인들의 목숨에서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분명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휘우- 언제나처럼 빠른 걸,Samurai? " 그렇게 하염없이 시체의 앞에서 떠나질 못하는 코마히코의 뒤로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람드링 뤼멘이었다. 그는 코마히코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휘파람을 불며 홀 안으로 걸어왔다. " 이번에도 Boss는 네가 차지했어. 좀 다른 사람의 몫도 남겨두지 그래? " " ……남겨두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그쪽은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뭘 남겨두라는 말입니까! " 코마히코의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람드링은 장난스러운 눈초리로 주위를 살필 뿐이다. 그러다 이내 주위에 쓰러진 머맨들의 숙주가 살아있음 을 발견하고 소리없이 웃었다. 크크크. 그럼 그렇지, 저 샌님! " 어라? 이 사람들 살아있네? 안 죽였던 거야? " " ……! " 그람드링의 물음에 순간 코마히코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 기세가 얼마나 살벌했던지 그람드링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애 써 태연한척 농담을 건넨다. " 뭐,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어차피 거기에 있는 인간도 죽였잖 아? 하나를 죽이나 둘을 죽이나 마찬가지 아냐? " ' 제길! ' 코마히코는 고개를 떨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저 짓굳 은 꼬마 놈은 베팔의 숙주만 죽인 자신이나 머맨의 숙주들을 죽인 그나 마찬 가지라고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살인자라고! ' 나에게는……저들을 비난할 자격조차, 없다. ' 그렇게 의기소침해진 코마히코의 모습에 그람드링은 기세가 등등해졌다. 크 크크. 그래. 아무리 네놈이 깨끗한척 해봐야 피 냄새가 질척질척 한단 말이 지. 피 한방울 묻히기 싫다면 집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지 그래? 그람드링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듯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코마히코에게 물었 다. " 왜 그래? 이제는 사람을 죽이기 싫어졌어? " " ……저는, " 그때 코마히코는 자신의 발밑에 여섯 조각으로 널부러진 숙주의 시체를 천천 히 안아 올렸다. 그 바람에 AI슈츠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 치 않으며 그람드링에게로 걸어갔다.코마히코는 그람드링의 곁을 지나치며 나 지막이 말했다. " 저는…… 앞으로도 계속 검을 휘두를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 스스로의 손을 더럽히는 것일지라도. 코마히코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그렇게 시체를 끌어안은채 백화점을 나 가버렸다. 그람드링은 그런 코마히코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 쳇, 잘난척은 혼자서 다 하고 있네. 그래봤자 계속 죽이겠단 소리 아냐? " 그런 대의명분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으면 사람 하나 죽일 수 없는 거냐,위 선자? 그람드링은 매번 시체 하나에 연연하는 코마히코를 비웃으며 백화점의 안쪽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베팔이 코마히코에게 당하기 전에 인질 운운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람드링은 무전기를 켜서 윤채영과 연락을 재개했다. " 어이, Korean. 아무래도 건물 내에 인질들이 있는 모양인데 귀찮으니까 열 원 추적해봐. " 《……알겠습니다.》 곧 윤채영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무전기의 액정으로 백화점의 내부 투 시도가 떠올랐다. 그리고 인질들이 있는 지점이 붉은색으로 표시된다. 2층의 휴게실이었다. 그람드링은 휘파람을 불며 움직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갔다. 그는 뭐 가 그리도 흥겨운지 어두운 복도를 춤추듯 거닐면서 2층의 휴게실로 향했다. 그리고 휴게실의 앞에 다다르자, 휘파람을 멈추고 천천히 문을 열어제꼈다. 끼이이이 " 으……! " 휴게실에는 겁에 질린 사람들이 또 다시 베팔이 찾아온 건가 지레 겁먹고 몸 을 움츠리고 있었다.하지만 들어온 이가 이상한 복장을 한 어린 소년 임을 깨 닫자 곧 영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본다. 그람드링은 그런 그들에게 미소하며 친절히 말했다. " 자자- 걱정마세요, 여러분. 피스메이커입니다. 아랫층의 몬스터들은 모두 정리했으니 마음 푹 놓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살았어요! 축하드립니 다! " " ……? " 사람들은 소년의 영어에 자신들이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가 고민했다. 하 지만 피스메이커라는 단어만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내 환호 하며 기뻐하기 시작했다. 그람드링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팔짱을 끼며 비웃 음을 흘렸다. 한편 사람들의 사이에 앉아있던 카이 브릿드는 그런 그람드링의 태도에 인 상을 굳히며 그를 노려보았다. ' 뭐야, 저 녀석? ' 뭔가가 이상하다? 카이는 지금껏 봐온 피스 대원들과 이 눈 앞의 피스 대원이 뭔가가 틀리다 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시영의 납치 사건이 있은 후, 피스 대원들과는 처음으로 조우하는 것이지만 대충 지금까지의 멤버들이 교체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이질감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좀 더 근본적인 데에서 오는 이 질감이었다. 뭐랄까, 자신이 봐오던 피스 대원, 예를 들자면 유가인과 이 눈 앞의 피스 대원은 분위기 자체가 틀렸다. 유가인, 그 테라인이라면 가지고 있을 뭔가가 이 테라인에게는 없다……. ' 그래. ' 눈이 다르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다. 눈 앞의 꼬마는 마치 자신들 을 우리에 갇힌 동물이라도 보는듯 하고 있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마치 한시영, 그 패거리와 같은……. ' 설마. ' 카이는 자신의 예민함을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베팔을 이용한 테 라인의 영자 공급은 무사히 끝난 상태다.이제는 이 테라인들 사이에 끼어 이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쿵 그때, 그람드링이 거칠게 휴게실의 문에 발을 걸쳤다. 그 난데 없는 행동에 카이와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람드링은 허리 춤의 리볼 버를 뽑아 손가락으로 솜씨 좋게 돌리며 말했다. " 자- 그럼 잠시 검문이 있겠는데, " " ……뭐? " 그람드링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살펴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상관 없이. " 우리가 여기에 온 이후 치룬 전투는 총 네 번. 모두 다 융합형 타입의 몬 스터들이었지. 하지만 꼰대의 말에 의하면 이 사람들을 숙주로 삼는 기생 체들은 누군가가 '심어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일이 가 능한 것은 몬스터들의 5대 간부 뿐이라고 했지. " 그 말에 숨어있던 카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테라 녀석들은, 벌써 자신들에 대한 것을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저 꼬마 는 왜 저런 얘기를 지금 여기서 하는 걸까? " 그리고 그 5대 간부들 중에는 몬스터를 만드는게 특기인 녀석이 하나 있 다고 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 녀석이 지금 이 나라에 와있다는 거야. " 철컥 리볼버를 돌리던 것을 멈추고 그람드링은 천천히 원형 탄창을 열어 아켄석 탄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그 행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조금씩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그람드링은 장전을 끝내고 폐쇄된 원형 탄창을 빙빙 돌린 후, 만족한듯 말 했다. " 거기다 더 놀라운 사실은 녀석이 바로 여기, 이 자리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 녀석은 재주 좋게도 괴물이 아닌, 우리와 비슷한 모 습으로 있을 수 있다나봐. 그렇게 사람으로 변해서 우리가 몬스터와 싸 우는 모습을 시치미 뚝 떼고 지켜볼 수도 있다는 거지. 바로 우리의 곁 에서. " " 으앗! " 사람들은 갑자기 그람드링이 자신들에게로 총구를 들이대자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그 사람들 속에서 카이는 이를 악물며 식은땀이 나는 주먹을 움 켜쥐었다. 설마……. 설마 저 녀석, 진심으로……. " 아아, 왜들 그렇게 겁을 먹으시나? 어디까지나 가정이라고. 가정.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실제로 그렇다는 건 아니잖아? " ' 후우. ' 카이는 속으로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 피스메이 커 녀석들이 그렇게 막 나가는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렇게 보여도 녀석들, 테라 인들의 보호 기관이 아닌가? 쾅 그때 총성과 함께 카이의 곁에 있던 한 남자가 미간이 꿰뚫려 쓰러졌다.카 이는 두 눈을 부릅뜨며 그람드링을 노려 보았다. 자신을 노리고서 쏜 것은 아니었지만 대상을 정하지 않은 무차별 사격이었다. " 하지만 예방이란 게 다 가정에서 시작하는 거라서. " 그람드링은 히죽 웃으며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손목에 있던 무전기 가 연신 애처로운 신호음을 울렸지만 그는 끝까지 무시했다. 2033년 8월 1일. 15시. 몬스터와의 전투가 끝나고 자료를 정리한 오퍼레이터 팀은 여느때처럼 유 레카의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테이블에 둘러 앉은 뒤, 오늘 있었던 전투에 대한 일들을 얘기하며……. " ……. " 하지만 테이블에 앉은 그녀들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입을 열 수 없었다. 그녀들은 전투의 모든 것을 지켜본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남김 없이. " 우리는……뭘 하고 있는 거지……? " 그때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채영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엎 드려 있었기에 그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자리의 모두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심정은 곧 자신들의 심정이었으니까. " 웃……! " 그때 창백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희가 헛구역질을 하며 재빨리 휴게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마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경험이 적은 그녀로 서는 방금 전의 일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곧 삼인방들 중 한 명 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희미하게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바보 같이. 경험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그런 건! " 흑, 흐흑……. " 울음은 번져, 이내 삼인방 모두가 울음을 터뜨렸다.그들의 울음 소리에 엎 드려 있던 채영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선 뜨거 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우리는……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 물론 그 질문에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4 - Ｂy Ｎext Ｎeo =-=-=-=-=-=-=-=-=-=-=-=-=-=-=-=-=-=-=-=-=-=-=-=-=-=-=-=-=-=-=-=-=-=-=-= 철컹 철컹 전차가 흔들리면서 내는 쇳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밖은 이미 어둠으 로 물들어 있다. 카이는 힘없이 전차의 좌석에 걸터앉아 그런 창문을 응시한 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고개가 떨어진다. " 크……. " 메마른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의 카이는 41구역에서 지 니고 있던 테라인의 몸을 버리고 새로운 테라인의 몸으로 네크로맨시된 상태 였다. 그람드링의 무차별 사격 속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의 영체는 심각 한 타격을 입은 뒤였다. ' 빌어먹을……. ' 그 꼬마 놈이 사용한 리볼버를 평범한 삼차원의 질량 무기로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아마도 그 리볼버의 총탄은 오리하르콘과 같은 차원 촉매였으리 라. ' 오라를 증폭시키는 오리하르콘과는 달리 오라를 중화시키는 금속같았어. 그게 메두사가 얘기했던 아켄석인가? ' 카이는 예전 노아에서 초류향이 수집한 정보를 원로회에 보고하던 메두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미스릴(Mithril), 아다만티움(Adamantium), 오리하르 콘과 함께 아스트랄 계의 카르마 에너지를 물질계로 구현화시키는 삼대 금속 에 이은 새로운 차원 촉매의 발견이라고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존재의 법칙에 따라 존재의 계를 벗어나는 힘의 불균형적인 집중을 막기 위 해 삼계의 피드백이 만들어낸 산물. 그렇다면 어째서 오라 능력자의 천적인 이 금속이 자신들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일까? " ……설마, " 반발력인가. 카이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내고 쓴웃음을 지었다. 오라를 무효화시키는 아켄석은 테라보다 노아의 생명체에 파장이 더 맞는 촉매다.그 것을 이용하여 녀석들은 자신의 카르마 에너지에 아켄석의 카르마 에너지를 덧씌워 에너지의 역류를 유도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정의 핵들이 당한 이유도 설명이 가능하다. 파장이 맞는 노아의 생명체는 아켄석 탄을 막을 수 없고, 그 안의 숙주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테니. ' 쳇, 적당히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영자 자체를 공격하 는 무기라니. ' 카이는 계속해서 감겨지는 눈을 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영체가 받은 타격 은 정신체로 존재하는 그에게 있어서 육체의 타격보다 더욱 치명적이었다.정 신체가 소멸했다간, 자신은 이대로 노아에 강제 귀환되는 것이다. ' 그것만은 안돼! 아직, 아직 아무 것도 하지 못했는데……! ' 이대로 리리스를 테라에 남겨두고 귀환이라니! 웃기지마! 카이는 식은땀이 흐르는 몸으로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전 차가 끊길 시간이었다. 종착역으로 향하는 전차 안에서 카이 외의 다른 사람 은 보이지 않았다. 쿠당탕 그때 열차가 종착역에 멈춰서자 균형을 잃은 카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 닥에 쓰러졌다. 삐이이익 안내 방송과 함께 전차의 문이 열린다. 카이는 쓰러진 상태로 열려진 문을 향해 기어나갔다. 하지만 의미 없는 몸짓이었다. 쇠약해질 데로 쇠약해진 카 이의 영체는 제대로 네크로맨시를 발휘할 수 없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의 식이 멀어져간다. 뚜벅 뚜벅 그때 차분한 구두굽 소리가 울려퍼지며 카이가 탄 전차 칸으로 누군가가 들 어왔다. 긴 검은 머리를 풀어내린 창백한 얼굴의 남자였다. 그는 곧장 카이 에게 다가와 그를 안아올렸다.카이는 힘없는 눈초리로 자신을 안아올린 상대 를 올려다 보았다. " 누, 누구……. " 하지만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눈 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깨닫자 희미해져 가던 정신이 번쩍 뜨여진 것이다. 예전과 같은 우스운 광대 분장은 사라졌지만……, 분명 이 남자는……. " 수고했어요, 네크로맨서. 지금부터는 제가 모든 지휘를 맡겠어요. " ' 나는 왜……. '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왜 그때 가족들과 죽지 않고, 대체, 무엇을 위해……. " 가인 씨, 준비 다 됐어요? " 다음날 아침. 문 밖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자신의 방에서 멍하니 서있기만 하 던 가인은 곧 마저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선 동거인인 한시민과 브루스 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인은 그들을 향해 수척해진 얼굴로 미소했다. " 늦어서 미안해요. " 가인 일행은 언제나처럼 언더 시티 유레카로 향했다. 그리고 유레카에서 가 장 먼저 한 일은 부상당한 동료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 이야- 하하하. 잘 왔어. 잘 왔어. 안그래도 따분해서 죽으려던 참이야. " 메디컬 센터의 한 병실에선 피스 그린 정진우가 병문안 온 그들을 열렬히 환 영하고 있었다. 그는 예전과 조금도 변함 없는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단지, " 하여간 뭐가 보여야 TV를 보든 책을 읽든 할텐데. 이건 뭐, 아무것도 보이 지를 않으니 답답해서 참기 힘들다고. " 진우의 양 눈은 붕대로 단단히 감싸여 있었다. 예전 시민의 납치극 때 당했 던 부상들은 대부분 PET용액으로 치료가 가능했지만, 부서져 버린 안구만큼은 재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시민은 가인이 그런 진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진우에게 가지고 온 병문안 선물을 내밀었다. " 자, 진우 씨. 여기 부탁했던 수박이에요. " " 역시 시민 씨!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하하하, 여기에 갇혀 지내면 서 이 녀석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 진우는 시민이 건네준 수박을 볼에 부비며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그 모 습에 일행들은 자신도 모르게 너털 웃음을 터뜨린다. 브루스는 침대의 곁에 앉 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흥, 이 정도로 갇혀지낸다고 생각하다니. 제대로 된 병원 생활은 절대로 하 지 못할 녀석이군. 이래뵈도 피스메이커의 의료 시설은 세계 제일이란 말이 다. 지상의 VIP병실하고는 차원이 틀리지. " 분명 브루스의 말대로 메디컬 센터의 의료 시설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 아마 입원한 내내 진우는 최고급 호텔에 투숙한 것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우는 그런 브루스에게 히죽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 헤- 사부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병원 근처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사 부님이 병원에 입원해보셨어요? 아니,그 이전에 주사는 맞아봤나 몰라? " " ……큭. " 브루스는 이마에 핏줄을 돋우며 이를 갈았지만,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선인의 경지에 접어들면서 만병불침지체(萬病不侵之體)가 된 그는 병원 신세 를 질래야 질 수 없는 몸인 것이다. 거기다 예전 진우를 가르치면서 '자신이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 섣불리 말하는 우를 범하지 마라.' 라고 가르치기까지 했으니. 그렇게 브루스가 얼굴을 붉히며 토라지자, 시민은 참지 못하고 실소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가인이 진우에게 물었다. " 진우 씨. 눈은……어때요? " " ……. " 그 말에 한순간 병실이 조용해졌다.일부러 그 화제를 꺼내지 않으려고 웃고 떠든 것인데, 가인이 눈치 없게도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진우는 붕대에 감 긴 자신의 눈을 매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닥터와 시더 양의 말로는 전자 의안이 시신경 에 정착될 때까지는 좀 시일이 걸린다고 하는데. 뭐,일단 눈이 보여야 재 활 치료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대. " " ……그렇군요. " 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그 모습에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이내 자신의 치맛자락을 움켜잡는다. 브루스는 그런 시민의 태도에 작게 혀를 차면서 진우에게 말했다. " 이게 다 네 녀석의 멍청함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도 파악하지 못하고 무모 하게 오라를 남발하니 이 꼴이 된 거잖아? " " 그건 사부님도 마찬가지겠죠. " " ……이 놈이. " 주저없이 맞받아치는 진우의 말에 브루스는 살며시 이를 갈았다. 기껏 평소 의 자신답지 않게 분위기를 쇄신해보려고 했더니 이렇게 죽이 안 맞아서야! 하지만 자신의 반투명해진 몸을 보고 있자니 진우에게 화를 낼 기분도 들 지 않는다. 진우의 말대로 자신 역시 멍청한 짓을 해버렸으니까. '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스스로 아스트랄계에 몸을 피했던 겁니 까? ' ' 단지 피한 것으로만 보였나? ' 그때 시영의 납치극에서 브루스는 아포칼립스를 사용하는 검은 거인을 막기 위해 아스트랄 계에서 거인의 영체를 공격했었다. 당시에는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 시공 세계의 흐름을 어지럽혔다간 그대로 시공 주소를 잃어버린 채 존재 의 계 사이를 방황할지도 모르는 것을. 아무리 당신이 아스트랄 유영에 능하다고 해도 방금 전의 행동은 어리석었습니다. ' 그렇다. 피스 블랙, 그의 말대로 지금 브루스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거 인의 영체를 공격하고 무사히 물질계로 귀환하는 대신,멈춰두었던 노화가 다 시 진행된 것이다. 거기다 정을 담은 그릇에도 균열이 생기는 바람에 삼계로 접어들지 않으면 시시각각 정이 새어나가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그는 그 날 이후로 제대로 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브루스는 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무시무시한 눈초리 로 그를 노려보았다.그 바람에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가인이 애써 고개를 돌 리자 브루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정말이지……. 남 걱정할 때가 아니로군. " 아, 저기 지금 몇 시야? " 진우가 가인을 향해 시간을 묻자 가인은 손목에 찬 무전기로 시간을 확인하 며 답했다. " 12시가 다 되어가는데……. 갑자기 시간은 왜? 무슨 일 있어요? " " 아니, 그게……. " 진우는 가인의 물음에 주저하다가 머쓱하게 말했다. " ……좀 있으면 미연이와 하나가 올 거라서. " " 아, " 가인과 모두는 그제서야 사정을 깨닫고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들을 향해 진우는 면목없다는듯 사과했다. " 다들 미안. 마누라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서. " " 그게 어디 진우 씨가 미안해 할 일인가요. 어쩔 수 없잖아요. " 시민은 쓴 웃음을 지으며 수박을 병실의 냉장고에 넣고 나갈 준비를 했다.가 인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순간 비틀거리며 몸의 균형을 잃었다. 그런 그를 시민이 재빠르게 부축하며 걱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 조심해야죠, 가인 씨. " " 미, 미안해요. 그, 그럼 진우 씨, 내일 또 찾아올게요. " 가인은 그녀에게 부축받은 손을 슬그머니 풀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마 치 도망치듯 병실 문으로 걸어간다. 그런 가인의 발걸음은 묘하게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오른 발을 절고 있었던 것이다. 피스 블루 유가인은 그 날 이후, 자신의 오라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오른발에 이식된 오리하르콘 근육마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여 이 렇듯 절름발이 신세가 된 것이다.물론 AI컴플리트 세트의 동화 작용 역시 사 라졌기에 가인은 더더욱 몸이 둔해진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 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민과 브루스는 저마다 한숨을 내쉬며 진 우에게 작별을 고했다. " 어-? 오빠다! 오빠! " 그때 가인이 나온 복도 쪽에서 한 소녀가 그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진우의 딸 하나였다.가인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곳에는 하나의 손을 잡고 있던 미 연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인은 미연 모녀를 만나자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어 주춤거렸다. " 엄마! 오빠야! 오빠! 오빠도 아빠 찾아왔나봐! " " ……. " " 엄마! 오빠라니까? " 하지만 하나의 보챔에도 불구하고 미연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딸의 손 을 잡고 가인을 지나쳐버렸다. 하지만 가인은 미연의 행동을 이해했다. 지금 의 그녀는 피스메이커와 관련된 사람들이 꼴도 보기 싫은 것이다. 가인은 진우의 사고 소식에 미연이 혼절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이를 악물었다. 위잉 진우의 병실 문이 차가운 기계음을 내며 닫혔다. 그 뒤로도 하나의 울음 소 리가 계속되었지만, 미연의 호통소리가 몇번 들리자 이내 잠잠해진다. 시민은 진우의 병실 문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 아마 미연 씨는 지금껏 진우 씨가 무슨 일을 해왔는지 대충이나마 알고있 었을 거에요. 자기 남편에 대한 일이라면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으니까. " 가인은 예전 진우 일행이 자신만 남겨두고 182구역으로 출동했을 때,미연이 진우를 걱정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일을 기억해냈다. 아마 그렇게 쭉 쌓아오던 감정들이 이번 일로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리라. 가인은 힘없이 몸을 돌려 옆의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브루스는 그가 향 하는 병실의 문패를 바라보고는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오늘도 들릴 셈이냐? 어차피 만나주지도 않을 텐데. " " ……. " 그 말에 가인은 잠자코 병실 문 앞에서 멈춰섰다. 문패에는 성마리라는 이 름 석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똑똑 가인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가인은 작게 심호흡 을 한 후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 선배, 방에 있는 거 다 알고 왔어요. 브루스와 시민 씨와 함께 병문안 온 거에요. 밥은 잘 먹고 있어요? 몸은 많이 나았고요? 아, 닥터한테 얘기를 들어보니 이제는 회복 단계라고 하던데……. " 가인은 문득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하지만 상관하 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 다행이네요. 건강해져서. 정말……다행이에요. 저 걱정 많이 했다고요.그 때 선배를 그렇게 남겨두고 끌려가서. " 그러니까, " 그러니까……. " 가인은 순간 목으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두눈이 뜨거워지고 인상이 일그러진다. 가인은 입을 열지 못하고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바보같이……. 왜 갑자기……. ' 모두가 뿔뿔히 헤어졌어. '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 생각했던 생활들이 깨지고 말았다. 무너져 버렸다. 그것이 모두 자신이 납치된 그 날로부터 비롯된 거라 생각하니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혐오감이 밀려든다. 아니. 그런 감정은 집어치우자. 이미 수십, 수백, 수천번 씩 자책해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으니까. 단지, " 나는 단지……. " 마리 선배의 얼굴이 보고 싶을 뿐인데. 모두의 웃는 얼굴이, 다시……모두와 함께 하고 싶을 뿐인데. 가인은 알 수 없는 서러움에 눈물을 뚝 뚝 흘렸다. 하지만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에 시민은 눈시울 을 붉히며 조용히 그를 지켜본다. 가인은 애써 오열을 삼키며 밝은 목소리로 문 너머의 마리에게 말했다. " 그럼……내일 또 찾아올게요. 내일은 꼭 보는 거에요. 알았죠? " " ……. " 알았죠, 선배? 가인은 여전히 침묵하는 그녀에게 마음 속으로 되물으며 힘겹게 일행과 발 걸음을 돌렸다.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생각한다. ' 내가 오라만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힘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 몇번이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 왔던 소망.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아무 것도. " 정말 만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 마리의 병실에는 가인 일행 보다 한발 먼저 마리를 찾아온 방문객이 있었다. 그는 마리와 같은 무영신풍류의 동문이자 패턴 버밀리온의 소유자 코마히코 카구라였다. " ……. " 코마히코의 물음에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쓴채 미동 조차 하지 않았는데, 코마히코가 처음 찾아왔을 때부터 줄곧 이런 상태였다. 단지 가인이 찾아왔을 때만은 예외였다. 가인이 문을 두드리자 마리는 코마히코가 깜짝 놀랄 정도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문의 인식 코드를 잠궈버리고 다시 눕는 기행을 보였다. 코마히코는 작년에 가인을 감싸며 얼굴을 붉히던 마리의 모습을 기억해내고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런 딸의 모습을 연우가 보게 된다면 얼 마나 가슴 아파 할까. " 아가씨, 이렇게 무작정 방안에만 틀어박혀 지내시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 습니다. 몸 생각을 하셔야죠. " 마리를 부르는 코마히코의 호칭은 달라져 있었다. 작년에야 마리를 약혼녀 로 받아들이기 위해 온 것이니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지만,지금은 정식으로 사부님의 자녀로 대하고 있었다. 코마히코는 연신 마리를 달래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 다. 어차피 이렇게 구구절히 충고하더라도 마리,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면 잔소리 밖에 되지 않는다. 적어도 그녀가 상대방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상태라면 좋으련만……. ' 아가씨의 병은 육체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는 모양이군. ' 코마히코는 표정을 굳히며 신중하게 마리에게 말했다. " 아무도 아가씨를 탓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 이불에 감겨 있던 마리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하지만 코마히코는 그것을 못 본 척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 그때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가인 씨도 구해 낼 수 있었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없이 모두 무사하게 돌아오지 않았습 니까? 가인 씨도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내려 한 아가씨에게 고마워하 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런 상태인 아가씨를 걱정하고 있지요. 그러니 쓸 데없는 자책은 그만두십시오. " " ……. " 그렇게 코마히코가 한참을 얘기했지만, 마리는 끝까지 침묵을 고수했다. 코 마히코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런 몇 마디의 말로 아가 씨를 위로하는 것은 무리란 말인가……. 그때 코마히코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던 마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코마히코 씨. " " 아, 말씀하십시오. " 코마히코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말문을 열자, 정색하고 마리의 말 에 귀 기울였다. 마리는 어딘가 비어버린듯한, 그런 허무함이 담긴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 저는……약속 했었습니다. 가인에게…….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기 대라고. 힘이 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 " ……. " "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을 한 주제에……. 약속한 주제에……. 저 는……저는 가인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무력하게…… 가인이 끌려 가는 것을 그저……. " " 아가씨. " 코마히코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한마디 하려고 했다. 그러다 이내 마리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다시 입을 다문다. " 그런데 코마히코 씨……. 저는 웃기게도, 가인을 지켜내지도 못했으면서 ……. " 감정이 격해진 마리의 말꼬리가 흔들린다. 그녀는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 ……아직도 가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가…… 보고 싶어요. 여전히 그를 좋아합니다……. " 그제서야 코마히코는 마리가 무엇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마리는 가인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은 가인을 만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인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 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고지식하고 순수한 것일까. 코마히코는 문득 그렇게 요령없는 마리의 모습에서 연우의 모습을 발견해내 고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녀는 사부님의 딸이다. 코마히코는 한층 따뜻해진 목소리로 마리에게 말했다. " 아가씨, 이것만은 알아두십시오.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당 연한 감정이라는 것을. 거기에 자격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 " ……. " 코마히코는 더 이상 마리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자 천천히 자리에서 몸 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오늘의 병문안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아가씨. " 코마히코는 정중히 마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마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단지 베개 시트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뿐이 었다. ' 그래. 그때도 그랬어……. ' 작년, 그녀가 쿠사나기의 꾐에 빠져 융합형 몬스터가 되었을 때. 그때도 마 리는 자신이 가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며 스스로를 비관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런 자신에게 마음 속으로 단호하게 일갈하던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 나도 알고 있어! 나도 오빠가 시민 언니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고! 하지만 난 포기 안 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겠어! ' 중요한 건, ' 중요한 건 내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난 내 마음에 충실 할 수 밖에 없어! ' 그 말을 떠올리자 다시 뜨거운 눈물이 마리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녀 는 당차게 자신을 꾸짖던 여자아이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유리……. 마리보다 5살이나 어리지만, 그녀와 같은 오라 능력자.그 아이가 오히려 마 리 자신보다 나았다.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언제나 떳떳하게 행동하 던 그 아이를 그녀는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랬기에 언제나 마리는 유리의 앞 에서 주눅 들 수 밖에 없었다. 유리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 유리, 너는 이런 나를 보고…… 한심하다고 비웃을 테지. ' 하지만 마리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떠올리는 이유리가 이미 가인의 집을 떠나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 잘 먹었습니다……. " 26구역 유리의 집. 점심 식사를 마친 유리는 테이블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런 그녀에게 유리의 엄마는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 그래. 더 먹지는 않고? " " 아뇨. 괜찮아요. " 유리는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부엌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의 마인드 리딩은 여지 없이 엄마의 사념을 그녀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이이도 참. 나 혼자 저 아이와 집에 남겨두면 어떡하자는 거야? -무서워 죽겠네. 저 말도 안하고 노려보기만 하는 것 좀 봐. -우리끼리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다시 돌아와서는……. 그것은 너무나도 노골적인 속마음이었다.양심이나 도덕에 여과되지 않고 나 온 순수한 감정의 집합체. 물론 유리도 그것이 엄마의 진실된 마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무시할 수도 없었을 뿐이다. " 으아아아아앙- " 그때 방 쪽에서 왠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소리에 부엌에 있던 엄마가 헐레벌떡 유리의 곁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간다. " 어이구. 우리 유성이 깼구나? 울지마. 울지마. " 유리가 슬그머니 방 안을 들여다 보니, 그곳에는 엄마가 울고 있는 아기를 달래고 있었다. 유리는 잠시 아기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기는 자신을 안아 주는 사람이 엄마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금새 눈물을 그치고 있었다. 아기는 올 6월에 태어난 유리의 동생이었다. 이름은 이유성이라고 한다. ' 전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딸이라면 왠지……자신이 없내요. ' 작년 유리가 자신의 집을 다시 찾아왔을 때, 유성이를 임신한 엄마는 그렇 게 말했었다. 그런 엄마의 바램대로 유성이는 건강한 남자 아이였다. 거기다 유리와는 달리, 이상한 힘도 가지지 않은 평범한……. " 배고파서 그랬구나?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렴. 맘마 줄게. " 엄마는 행복한 표정으로 아기에게 속삭였다. 유리는 그 모습에서 문득 이곳 에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유리는 엄마가 유성이를 데리고 방 에서 나오려고 하자,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쾅 방으로 들어와 거칠게 문을 닫고 거기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 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자신을 반겨주던 모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과 함 께 했던 지난 날들이 마치 꿈만 같다. ' 유리야- ' 자신을 웃으면서 불러주던 가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자신의 머리를 쓰다듬 어주던 그 따뜻한 손길이 생각난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예전처럼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 이 자리에서 네 오빠를 가장 많이 괴롭힌 사람이 누군지나 알아? ' 하지만……, ' 바로 너야, 이유리! '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Ｔo Ｂe Ｃontinued… =-=-=-=-=-=-=-=-=-=-=-=-=-=-=-=-=-=-=-=-=-=-=-=-=-=-=-=-=-=-=-=-=-=-=-= 자- 본편의 암울한 분위기를 쇄신할 겸, 현재 진행중인 '오라전대 2차 인기투표'의 중간 집계를 내볼까 합니다. 예전 1차 인기투표 때는 표 수도 적었지만, 뭐랄까 투표 방법이 체계적이지 가 않아서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하 지 만! 이번 2차 투표는 오라전대 카페의 운영자 분들이 여러모로 신경써주신 결과, 상당히 재밌는(거기다 약간의 의외성이 섞인)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중간 집계 결과 남자 부문을 밝히겠습니다. １위 " 브루스 류 " 22표! ━━━━━━━━━━━━━━━━━━━━━━━━━━━━━━━━━━━ 쑥스러워하는 것이 귀엽다. 강하다! 그가 애송이라고 말할 때 나는 아아… (이하 생략) 왕자회가 있는 한 브루스 사수는 맡겨둬라! ━━━━━━━━━━━━━━━━━━━━━━━━━━━━━━━━━━━ Neo군: 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예상을 깨지 않고 당연히 1등을 차 지한 브루스 류.하지만 중반까지 그의 아성을 위협한 한 남자가 있 었으니……. 조금 위험했으려나? 브루스: 흥, 언제든지 덤벼라. 나는 피하지 않는다. Neo군: 그래도 1등이잖아. 기쁘지? 브루스: ……. Neo군: (여기서 '볼이 빨개졌네'하고 놀렸다간……죽겠지. 아마도…….) ２위 " 한시영 " 18표! ━━━━━━━━━━━━━━━━━━━━━━━━━━━━━━━━━━━ 어딘가 모르게 멋있다. 악인이여서 더욱 돋보인다. 동생만을 위하는 아웃 사이더. 로드 오브 오라. 시니컬한 미소가 멋있다. ━━━━━━━━━━━━━━━━━━━━━━━━━━━━━━━━━━━ Neo군: 그렇습니다. 중반까지 브루스를 압도했던 그 남자! 그의 이름은 피스 블랙 한시영! 마유빈: 역시 마스터-!(빠돌이 모드 돌입) Neo군: 으음; 하지만 시영을 뽑으신 분들의 대표적인 이유가, '당신이 있기에 지금의 시민 씨가 있는 것! 고맙다!' ,였다는; 한시영: 뭐, 잘 키운 남동생, 열 여동생 안 부럽다……라는 거죠. Neo군: 시, 시너지 효과인가……!(틀려-_-) ３위 " 정진우 " 8표! ━━━━━━━━━━━━━━━━━━━━━━━━━━━━━━━━━━━ 단무지 근육맨. 타이거 마스크.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과 특유의 능글능글함. 유가인을 위기의 구석탱이로 밀어넣는 것이 좋다! ━━━━━━━━━━━━━━━━━━━━━━━━━━━━━━━━━━━ Neo군: 이거봐.이거봐. '유가인에게 가족을 빼앗긴, 바퀴벌레, 타이거마스크, 팔불출 아빠'……라는데? 정진우: 괜찮아. 다 필요 없어! 3위라는 것이 중요한 거다! 아아! 지금까지 고생해온 것은 다 이 때를 위해서였단 말인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 더욱 열심히 할게요! Neo군: (저번투표에서 무득표라서……라는 동정표가 많았다는 건, 얘기하지 말자) 정진우: 역시 내일의 태양은 뜬다! ４위 " 유가인 " 7표! ━━━━━━━━━━━━━━━━━━━━━━━━━━━━━━━━━━━ 주인공이니까. 어벙하다. 마음에 안드는 새끼. 죽어버려. 마리 선배의 곁에 서 떠나라. 쌀이 아까워. 유리를 과보호하지마. 시민 씨 앞에서 알짱거리지 마. ━━━━━━━━━━━━━━━━━━━━━━━━━━━━━━━━━━━ Neo군: ……어째서 이번에도 4위인 거야? 거기다 저런 이유로? 유가인: 그걸 나에게 물어봤자……. Neo군: 이번에도 WORST제가 없었던게 다행이야. 그치? 유가인: (끄덕끄덕ㅠ.ㅠ) ※하지만 여러분은 아시는가! 카페의 등업신청란에 좋아하는 캐릭터 베스트 1위가 대부분 유가인이라 는 것을! 그것도 가뜩이나 희귀한 여성 회원 분들이 다 이 녀석을 지지하고 있다 는 것을! 나는 한때,'유가인의 페로몬 분비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진심 으로 고민했던 적이 있다.(바보) 유가인: ……?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거에요? Neo군: 아니. 아무 것도.(네깟 녀석에게 이런 사실, 가르쳐줄성 싶으냐;) ５위 " 박재영 " 5표! ━━━━━━━━━━━━━━━━━━━━━━━━━━━━━━━━━━━ 경박함, 경솔함, 팔불출 내지는 잡혀사는 불쌍한 인생. 회장님 만세! 반 가 인회여, 영원하라! ━━━━━━━━━━━━━━━━━━━━━━━━━━━━━━━━━━━ Neo군: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저 뒤의 만세니 뭐니하는 문구는 뭐야? 박재영: 아니, 저, 그게……. Neo군: 뭐- 뒷공작도 하나의 능력이긴 하니까. 유시내: 꺄∼ 재영 군, 멋있어! 그래도 여자 표는 없었지? 다행이야. 다행. 박재영: 이, 이……! 어째서 "박재영군은 학교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정신적 지주이자 최강의 개그 캐릭터입니다!" 라거나 "조직 - 반 가인회의 회장이 라는 직위와 그가 보여주는 카리스마, 분석력, 행동력, 통솔력을 생각한다면 그의 능력이 브루스에 못 미칠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 다"와 같은 주옥같은 멘트들을 빼버린 거야! Neo군: 아, 그런게 있었던가? 유시내: ……그래도 달라질 건 없잖아? 박재영: ……(ㅠ.ㅠ) 그 뒤로는 머신 아더와 코마히코가 각각 4표씩 공동 6위. 그 외의 잔표들 은 생략. 참고로 한때나마 절정의 인기를 구사했던 쿠사나기가 단 한권만에 잊혀져 버린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쿠사나기: 우릴 이계로 날려보낸게 누군데? 스머그: 젠장- 이계진입깽판칠까 보다. 자자∼ 어쨌든 이제는 여성부문으로 넘어가봅시다; 중간 집계 여성 부문은……. １위 " 성마리 " 31표! ━━━━━━━━━━━━━━━━━━━━━━━━━━━━━━━━━━━ 강한 여자는 아름답다. 가인 군의 페로몬을 이겨내십시오, 제발! 순수하고 깨끗한 그 마음에 올인. 여자가 봐도 멋있어요. 우리의 영원한 누님! ━━━━━━━━━━━━━━━━━━━━━━━━━━━━━━━━━━━ Neo군: 이건……이후의 투표 재개가 무모할 정도로 일방적인 몰표.(부들부들) 남자, 여자 회원분 할 것 없이 일방적으로 표를 받아내는군요. 게다가 이런 편지까지 하나 있었는데, 이것만 봐도 말 다한듯. 제목하여 '성마리. 그녀에게 보내는 작은 편지.' 역사아래 탄생이다. 그이름도 찬란하다. 현모양처 성마리양. 붉은빛의 그대머리. 선홍색의 그대입술. 선혈빛의 그대오라. 하늘조차 시샘하는. 아름다운 그외모여. 찬란하게 빛을내어. 후대에게 길이남을. 미소녀가 될분이여. 유가인만 없었다면. 정말이지 좋을텐데. 성마리: (화끈) 저, 정말이지……. 가, 감사합니다. 저, 저는 그저, 아,앞으 로도 최선을 다해 여러분의 관심에 보답하겠습니다. Neo군: 그런데 그거 알아? 네가 사랑받는 만큼 유가인, 그 녀석은 더더욱 욕 을 먹는다는 것을. 성마리: 그런-! 가인! 나는 결국 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여자란 말인가! 여, 역시 나에게는 너를 좋아할 자격이……. Neo군: (또 땅 파고 있네. 이 여자…….) ２위 " 한시민 " 11표! ━━━━━━━━━━━━━━━━━━━━━━━━━━━━━━━━━━━ 흠모합니다. 사랑합니다. 제 한표를 받아주세요. 이제는 여자에요. 오라전 대의 빛이자 희망. 유가인 놈을 통쾌하게 잘 차셨습니다. 최고에요! ━━━━━━━━━━━━━━━━━━━━━━━━━━━━━━━━━━━ Neo군: 뭐랄까. 성별이 확실히 밝혀진 후로 과연 어찌될까 했었는데. 의외로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는 시민 씨였습니다. 성마리라는 진공청소기(…)가 없었더라면 충분히 1위를 노려볼만 했을텐데. 한시민: 하지만……이렇게 제가 표를 받을 자격이 있는건가 모르겠네요. 저는, 아무래도 그…… 제 자신에게 솔직하지도 못하고, 많은 분들 에게 폐만 끼쳐서……. 유가인: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시민 씨가 있었기에 지금의 오라전대가 있고 제가 있을 수 있는 걸요! 그, 그리고 사실은 저도 투표에서 시민 씨를 뽑았어요! 한시민: 가인 씨……. Neo군: (차인 주제에 저 놈은 존심도 없는 건가;) 共同 ３위 " 이유리 " 6표! ━━━━━━━━━━━━━━━━━━━━━━━━━━━━━━━━━━━ 때로는 어리지만 때로는 누구보다도 성숙한 그녀. 동생으로 삼을수만 있다 면.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는게 안쓰러워 죽겠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둔한 가인 놈이 밉다, 죽어버려라. ━━━━━━━━━━━━━━━━━━━━━━━━━━━━━━━━━━━ Neo군: 1차 투표 때에 비해 한 순위 밀려난 유리 양. 한때는 당당히 한 에피소드의 주연을 꿰차기도 하고, 절대 지존 로 리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건만……. 이유리: 그래도 오빠의 곁에서 최후에 웃는 건 나야. Neo군: ……그 얘기는 아직 밝히지 말자고. 이유리: 흥. 共同 ３위 " 테레이아 민체스터 " 6표! ━━━━━━━━━━━━━━━━━━━━━━━━━━━━━━━━━━━ 이루어질 수 없는 그녀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다. 도발적인 그녀의 매력에 묻히고 싶다. 테레이아가 없는 한성 고등학교는 생각하기 싫다. ━━━━━━━━━━━━━━━━━━━━━━━━━━━━━━━━━━━ Neo군: 이것으로 1차 때의 수치는 씻겨진 건가? 하지만 예상보다 표가 적 었는데. 카이: 납득할 수 없어! 나의 리리스가 어째서 이런 테라 여자들을 앞지르 지 못한 거지! 그렇게나 네 놈들에게는 여자 보는 눈이 없단 말인가! 사실 너희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노아에서의 그녀는 정말이지…… 섹·시·다·이·너·마·이……. -퍽- 테레이아: (화끈)……그쯤해둬, 바보. 共同 ３위 " 유신 " 6표! ━━━━━━━━━━━━━━━━━━━━━━━━━━━━━━━━━━━ 오라전대의 변치 않는 히로인. 신이 같은 동생 하나 있었으면. 작가는 신이 를 살려내라. ━━━━━━━━━━━━━━━━━━━━━━━━━━━━━━━━━━━ 테레이아: 그래. 사실 여기서 약간의 불만이 있는데, 분명 10권에서의 신이는 다름 아닌 나였단 말이지! 어떤 때는 노아에서 파견된 밤의 여왕! 어떤 때는 훌쩍커버린 가인의 여동생! 어떤 때는 잘나가는 한성고등학교의 꽃! 하지만 그 실체는! Neo군: ……제발 거기서 플래쉬라고만 하지 말아줘.(-_-) 유신: 오빠, 언제까지나 함께……. Neo군: 그러니까 그건 지박령! ４위 " 하지연 " 5표! ━━━━━━━━━━━━━━━━━━━━━━━━━━━━━━━━━━━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 교육자로서의 정신. 담배 박멸. 열혈 교사. 무엇 보다……가슴이 크다! ━━━━━━━━━━━━━━━━━━━━━━━━━━━━━━━━━━━ Neo군: 사실, 하지연의 실존 모델이 제 주위에 있다죠. 직업도 교사! 가슴도 글래머! 성격도 흉신악살! ……단지 담당 과목은 체육이 아니지만. 하지연: 그 분이 이거 보시고 뭐라 하시든? Neo군: ……보여줬을리가 없잖아……. 보여줬을리가…….(ㅠ.ㅠ) 그 외에도 자신들의 치프를 뛰어넘은 삼인방이 5위를 차지했고, 이후로는 오라전대의 여자 캐릭터들이 사이좋게 한표씩 나눠가졌습니다. 단지, 12권과 13권에서 맹활약한 시더가 한표에서 머물렀다는 게 의외였지 만……. 시더: ……훌쩍. 어쨌든, 자신이 지지하는 캐릭터의 순위가 불만이신 당신! 그들을 위해 적극 한표 던져주시길! 유가인: 투표는 여기, http://cafe.daum.net/auracrops 오라전대 팬카페에서. 브루스: 사실은 이게 목적이었지? ……당연한 거 아냐?(;;)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5 - Ｂy Ｎext Ｎeo =-=-=-=-=-=-=-=-=-=-=-=-=-=-=-=-=-=-=-=-=-=-=-=-=-=-=-=-=-=-=-=-=-=-=-= " 하아아아압-! " 언더 시티 유레카의 연무장. 이곳에서 지금 가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수련 에 임하고 있었다. AI슈츠 대신 보호구를 찬 가인은 눈 앞의 브루스를 향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날카로운 공격을 찔러 넣었다.주먹을 내뻗자 가인의 팔 에 맺힌 땀들이 당겨치는 힘에 이끌려 허공으로 치솟는다. 탁 그러나 브루스는 그런 가인의 주먹을 마치 빨아들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내며, 대수롭지 않은 동작으로 손을 튕겨내자 가인은 크게 원을 그리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 크헉! " 가인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브루스는 그가 일어 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카랑 카랑한 목소리로 외친다. " 매번 말하는 거지만 네 놈은 너무 쓸데 없는 동작이 많아. 대체 내 말을 뭘로 알아듣는 거냐, 흐름을 읽으라고 했잖아! 적어도 네 녀석에게 상대 의 기로(氣路)를 읽는 수준까지는 바라지도 않을테니 최대한 머리 굴려서 공격해봐! " " ……! " 순간 가인은 브루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상대가 숨 을 내쉬고 들이쉬는 순간! 이때가 흐름이 끊기는 순간이다! 가인은 브루스의 턱을 향해 군더더기 없는 하이킥을 날렸다. 그리고 막 정강이의 보호구가 브 루스의 턱에 닿으려는 순간, 휙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듯 브루스는 가인의 발차기 안쪽으로 몸을 날려, 공 격을 피해냄과 동시에 어깨로 가인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칠성권 개산벽! 그대로 가인의 쇄골을 부숴뜨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속을 둔 공격이었다. 가인은 숨도 쉬지 못하고 다시 뒤로 튕겨나갔다. " 컥! 커억! " 가인은 바닥에 쓰러져 헛구역질을 하며 잔기침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브루스 는 그런 가인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한다. 가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안 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하지만 그런 눈빛과는 반대로 입에서 는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우습지도 않구나. 지금 그걸 기습이라고 한 거냐? 일부러 틈을 보여줬더 니 얼씨구나 하고 달려드는 꼴이란……. " " 크으……. " " 일어나! 이 정도로 끝낼거냐! 네 놈의 끝은 겨우 이런 곳이었나! " " 설마……. 아직 멀었다고요, 브루스. " 가인은 꺽이지 않은 눈으로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모습에 브루스는 희 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드물게도 기수식을 취해주었다. 가인의 기백에 진지하 게 임해주겠다는 태도였다. ' 그래.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 ' 어차피 지금 네 녀석과 내가 하고 있는 수련에는 별 의미가 없으니까. 가인의 상태는 곁에서 수련을 지켜보는 시민의 눈에도 확연히 나빠보였다.AI 슈츠의 동화 작용이 사라진데다가 오른쪽 다리마저 절고 있었기에 그에게서는 예전의 민첩한 움직임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그 날 이후로 매일 이 의미도 없는 수련을 계속해 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시민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인은 잃어버린 오라를 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해왔다. 매일 같이 브루스의 고문에 가까운 수련을 이겨내며 메디컬 센터의 닥터에게 장시간에 걸친 의식다원검사를 받았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라진 오라가 나타날 징조를 보이지는 않았다. 다 만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이 일과를 반복할 뿐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지금 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이것 밖에 없었기에. 퍽 다시 한번 가인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며 브루스의 주먹이 사정없이 그를 후려쳤다. 가인은 크게 고개를 꺽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에 브루스 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매번 수련을 할때마다 자신이 이 렇듯 가인을 내동댕이치면 시끄럽게 떠들던 꼬마 아이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 그쯤해둬! 도대체 수련을 하려는 거야 아니면 오빠를 괴롭히려는 거야? ' 평소에는 아무런 소리도 못하던 주제에 행여나 가인이 다치기라도 하면 울 상이 되어 소리치던 유리의 모습. 하지만 지금 브루스가 바라보는 장소에는 유리가 없었다. " ……. " 브루스는 자신들을 지켜보던 시민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 다. 그 모습에서 그가 유리를 찾고 있었음을 깨달은 시민은 작게 한 숨을 내 쉬었다. 분명 브루스 님과 가인 씨가 수련할 때면 언제나 따라다녔었지, 그 아이……. ' 유리 양. ' 예전 가인의 납치 사건 때, 마인드 브레이커 마유빈의 꾐에 빠져 능력을 이 용당한 유리는 더 이상 오라를 사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좋아 하는 오빠를 상처입히는데 자신의 능력이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이다. 평소 비 정상적으로 가인에게 의존해왔던 유리였기에, 그녀가 받은 죄책감은 더욱 컸 으리라. 결국 유리는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길 거부했고,한 사람의 피스 대원 으로서도 제 몫을 할 수 없게 되었다. ' 하지만……집을 나갈 필요는 없었는데. ' 시민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유리에게 서운함을 느꼈 다. 그렇다고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유리가 가인을 좋 아했던 만큼, 누구보다도 소중히 했던 만큼, 그런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랬 기에 가인의 곁에 머무를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린 만큼, 시민은 떠나가는 유리를 붙잡을 수 없었다. " 하아아아앗- " 멀리서 가인의 기합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그 기합 소리만큼이나 땀을 흘 리는 그의 모습은 필사적이다. 아니, 필사적이라기 보다는 처절하다. 마치 자신을 혹사시켜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적어도 시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문득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다. 집에 있는 부엌에서의 풍경이 생각났다.시민이 아침 일찍 일어나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면, 시간에 맞춰 하나 둘 씩 잠에서 깨어나고, 그리고 부엌으로 하나 둘 씩 모여들며, 가인은 요리를 하는 시민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테이블로 접시를 나 른다. 유리는 잠이 덜깬 눈으로 그의 모습을 뒤쫓고 브루스는 언제나처럼 테 이블에 앉아 투덜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풍경들이, ' 이제는……당연하지 않아. ' 가슴이 아프다. 이제는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시민은 그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이 싫었다.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껴온 평온을 깨뜨린 원흉을 다시 한번 증오하게 된 다. 어째서 그는 매번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가기만 하는 걸까? 삐삐삐삐 그때 시민의 손목에 있던 무전기가 신호음을 울렸다.그것은 브루스와 가인 의 무전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신호음. 피스 대원의 호출 신호음이었 다. 브루스는 기수식을 풀며 시민에게 말했다. " 또 그 녀석인가.어차피 우리를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생각하는 주제에 귀 찮게도 불러대는군. " " 너무 그러시지 마세요. 이렇게 호출이라도 해주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는 우리를 대우해주겠다는 뜻일테니. " 시민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며 가인과 브루스에게 가지고 있던 타올을 건네 주었다.브루스는 처음부터 땀이라고는 조금도 흘리지 않았기에 타올을 거절 했고, 가인만 시민에게서 타올을 건네받았다. 가인은 타올로 땀을 닦으며 브루스에게 물었다. " 무슨 이유로 부르는 걸까요? 어제의 전투 때문일까요? " " 글쎄- 이번에 우리의 상관이 된 그 남자는 진 사령관보다 더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라서. " 브루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팔짱을 끼었다. 그 모습에서 그가 지금 자 신들의 책임자인 시폰 뤼멘, 그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민도 직접 그에 대한 험담은 하지 않았으나 표정에서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진 사령관 님은……겉으로는 냉정해 보일지라도 그 행동 하나 하나가 우 리를 위하는 경우가 많았죠. 아, 그러고 보니 가인 씨는 진 사령관 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죠? " " ……아뇨. 그다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죠, 뭐……. " 시민의 질문에 가인은 특별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녀의 말 대로 가인은 진 사령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매번 남의 기분을 건드 리는 말이나 하고, 개인을 생각하지 않는 명령에 자주 대립했었던 것이다. ' 하지만, ' 과연 그 사람이 진정 냉혹한 사람이었다면 이처럼 피스메이커의 많은 사람 들이 그를 따랐을까? 가인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진 사령관의 말투나 행동에 더 이상 악 의를 느끼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히려 무뚝뚝하고, 차갑고,싫 은 소리나 해대는 그 한결 같은 태도에 안심하기까지 했다. 그건 비단 가인 뿐만이 아니라 피스메이커의 모두가 느껴왔던 감정일 것이다. '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의지해왔던 걸까. ' 가인은 의외로 진 사령관에 대한 자신의 인상이 나쁘지 않음을 깨닫고 고소 했다.그러고 보니 그 남자와 말싸움을 하지 않게 된 것도 어느덧 한 달이 넘 어간다. ' 시폰 뤼멘. ' 미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사령관. 그가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그가 데려온 피스 대원들이 기존의 멤버들을 대신하였고, 그들을 관 리한다는 명목 하에 시폰이 진 사령관의 자리를 대신했다. 여기서 의문이었던 것은 진 사령관이 너무도 순순히 자리를 양보했다는 점 인데. 물론 이 결정에 수정을 비롯한 대다수의 한국 지부 사람들이 반발했지 만 정작 당사자인 진 사령관이 침묵하고 있으니 반발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 었다. 삐삐삐삐 브루스는 무전기에서 신호음이 끊길 생각을 하지 않자, 인상을 구기며 연무 장의 입구로 발걸음을 돌렸다. " 흥,가자! 한시라도 빨리 녀석의 면상을 보고 오는게 낫겠지. 어차피 늦게 가봐야 들볶이는 건 우리니까. " " 그렇군요. 수정 씨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니. " 시민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브루스의 뒤를 쫓아가다가 곧 가인이 자신 들을 따라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브루스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가인을 돌아보 았다. " 이번에도 불참할 셈이냐? " " ……예. 전 그냥 이대로 메디컬 센터에 들릴까 해서요. " 가인은 브루스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시민은 걱정스 러운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브루스가 제지했다. 어설프게 동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 어차피 오라를 사용하지 못하는 내가……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없 으니까요. ' 예전 가인이 피스 대원들의 회의에 빠지면서 했던 말이었다.시민은 그 말을 하면서 고개를 떨어뜨리던 가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 ……그래. 몸 관리나 잘하고 있도록. 우리는 이만 가보겠다. " 걱정하는 시민과는 달리 브루스는 냉정하게 몸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 거침없는 태도에 시민은 머뭇거려야 했지만, 자신에게 걱정하지 말라는듯 미소하는 가인의 모습에 결국 몸을 돌려 연무장을 나간다. 가인은 그렇게 둘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입가의 무거운 미소를 지울 수 있 었다. 그리고 힘 없이 오른 발을 절며 샤워실로 향했다. 왜 오라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걸까……하고 수백번도 더 생각해봤다. 한시영, 그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스스로를 불신하는 이에게 오라는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 그 말대로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오라 같은 건 전혀 모른다며, 교통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은 것은 단지 우연 이었다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오라의 힘으로 살아남은 주제에. 살고 싶어서, 죽는 것이 싫어서 오라로 도망친 주제에.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가족들의 몫까지 살겠다는 둥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결국 그런 거짓된 시간을 보내오다가 나는 진실을 알게 되었고, 오라는 더 이상 나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 왜 오라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걸까? ' 뻔뻔한 내 자신에게 정이라도 떨어진 걸까. 그런 걸까? 연무장을 나선 가인은 곧장 메디컬 센터로 향했다. 오른쪽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기에, 언더 시티의 무인 렌트카의 신세를 져야만 했다. 정 해준 위치대로 달려가는 차 속에서 가인은 힘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브루 스와의 수련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육체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 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그런 고통을 느낄 자격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 힘이 필요해. ' 가인은 절실히 바랐다. 힘이 필요하다. 오라 능력이 필요하다. 그 힘만 있었더라면, 그때 오라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모두는 무사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과 같이 뿔 뿔히 흩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리 선배가 날 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진우 씨가 실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리가 집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나에게 힘만 있었더라면! ' 나를 도망치게 한 힘이라도 좋아. 가족들을 버리게 만든 힘일지라도 좋아. 나에게는 오라가 필요해. 오라를 사용하지 못하는 유가인은 필요 없어.제 몫 을 못하는, 모두에게 폐만 끼치는 나는 싫어. 모두가 힘들어 할 때,모두가 괴로워 할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나는 싫어! ' 무력한 건 싫어! ' 끼익 거기까지 생각할 무렵 렌트카가 메디컬 센터의 입구에 도착했다.가인은 멍 하니 있다가 뒤늦게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깨닫고 차에서 내렸다.가인은 심 호흡을 한 후, 두손으로 짝 소리가 나게 뺨을 두들겼다. ' 그래. 이렇게 멍하게 있을 틈도 없어. ' 오직 오라를 되찾을 것만 생각해라, 유가인! 가인은 새삼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 잡고 메디컬 센터에 들어가려고 했다.하 지만 그런 가인의 발걸음은 채 몇 발자국을 내딛기도 전에 멈춰져야만 했다. 막 메디컬 센터의 입구 쪽에서 낯익은 세 명의 남녀가 걸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 이야- 이게 누구야? " 피스 알리자린과 피스 푸르푸린이라는 쌍둥이 형제! 거기다 러시아 지부의 피스 대원, 피스 화이트! 바로 시폰 뤼멘이 데려온 피스 대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가인이 가장 만나기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쌍둥이 형제의 형 쪽은 더더욱. 호출이라고 해서 다들 작전 본부실에 간 줄로만 알았는데. " 최근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이런 곳에 있었네? 뭐야?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 형인 그람드링 뤼멘은 깨끗히 삭발한 머리에 동생과 세트인 듯한 검은 코트 를 입고 있었다. 여름철이라 코트 차림이 더워 보일만도 했지만, 언더 시티 의 기온 조절 때문인지 그다지 더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람드링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가인에게 다가와 그의 이모저모를 살펴 보며 과장되게 말했다. 가인은 자신보다 어린 이 외국인 소년을 상대하는 것 이 싫었다. 그와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마주 친 적 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만날 때 마다 그는 자신을 잡아먹지 못 해 안달난 사람처럼 굴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곁에 브루스가 있었기에 별 다른 일은 없었지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과 상대 하는 일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동생인 오르크리스트 뤼멘은 형과는 반대로 긴 검은 머리를 차분하게 묶어 내린 모습이었는데, 형보다 더 점잖은 것이 어떻게 보면 이쪽이 더 형 같아 보였다. " 그람, 마스터가 부르고 계셔. 지체할 시간 없다고. " " 나,참- 지체할 시간이 없는 건 너겠지. 나는 쌓이고 쌓인게 시간이야.그 렇게 급하면 너 혼자 꼰대에게 부리나케 달려가 봐. " 그람드링은 오르크리스트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으며 다시 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서 이상한 장난기를 느낀 가인은 표정을 굳히며 자리를 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곁을 지나치려는 가인을 그람드링은 그냥 보내주지 않 았다. " Hey. 사람이 얘길하면 사람을 봐야할 거 아냐? 지금 무시하냐? " 서클렛을 낀 가인의 귀로 한국어로 인식된 그람드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언짢은 기색이 섞여 있다.그제서야 가인은 그람드링에게 어색한 미 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 아, 미안……. 하지만 지금 나, 바빠서……. " " 바쁘긴 뭐가 바빠? 오라도 사용하지 못해서 한가하잖아? " " ……! " 그 말에 가인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화 를 내지 않았다. 그래. 그의 말대로 자신은 오라를 사용하지 못해 너무나 한 가해진 몸이다. 그람드링은 가인의 안색이 울그락불그락 변해가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이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다고. 너희 Korean 대신해서 몬스터와 싸우는 거. 이 게 다 네 녀석들이 제 밥그릇 하나 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알아? " " 그람- " 오르크리스트가 혀를 차며 그를 말렸지만, 굳이 말린다기 보다는 반쯤 체념 에 가까운 태도였다. 그들의 뒤에 있던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는 차가운 눈으로 내내 가인을 주시한다. " 알겠냐고? 우리는 너희를 대신해서 싸워주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 좀 더 고마워 해보는 게 어때? 응? " 가인은 그람드링의 말에 몇번이고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여기서 그의 말에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시비에 휘말려 봐야 자신만 손해였기 때문이다. 가인은 미소하며 그람드링에게 대꾸했다. " 응. 그래. 고맙다. 그러니 이만 가봐도 되지? " " ……흥. " 그람드링은 재미없다는듯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가인 은 속으로 안도하며 재빨리 그를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그람드링의 볼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 어라? 그거 뭐야? 목에 걸고 있는 거? " 그람드링은 가인의 목을 가리키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가리며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목에 걸고 있는 거라니…… 뭘 말하는 거지? ' 아, ' 마리 선배가 준 목걸이! 가인은 그람드링이 마리 선배의 동생, 아인이의 유품에 관심을 보이자 대 번에 그를 경계했다. 그 모습에 그람드링은 흥미가 동한듯 성큼 성큼 가인 에게 다가왔다. " 뭐야? 좀 보여줘 봐. 잠시만 보자고. " " 아, 아니……. 이건, " 가인은 자신의 목에 손을 뻗치는 그람드링의 손길을 뿌리치며 목걸이를 움 켜쥐었다. 지금은 자신이 오라를 잃어버렸기에 탁한 검은 빛을 띄고 있었지 만, 원래는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던 목걸이였다. 다시 빛이 돌아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이 목걸이를 건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람드링은 가인이 자신에게 목걸이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자, 슬그머니 입 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크크, 그렇게 중요한 거란 말이지? 휙 순간, 그람드링은 눈깜짝할 사이에 가인의 코앞으로 몸을 날렸다. AI슈츠 의 동화 작용이 실린 움직임이었다. 양 발의 정강이가 걷어차이고 어느 사 이엔가 가인은 넘어져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그에게 그람드링의 웃음소리 가 들려온다. " 하하, Get- " " ……! " 그람드링의 손가락에는 가인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호선을 그리며 빙 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무리 AI슈츠의 동화작용이 사라졌다고 해도 가인으 로서는 너무나 맥 없이 뺏겨버린 꼴이다. 그람드링은 목걸이를 들어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뭐야- 이거? 애지중지하길래 뭔가 싶었더니 웬 허접한 목걸이야? " " 도, 돌려줘! " 가인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람드 링은 들은체도 하지 않으며 여전히 목걸이를 만지작 거릴 뿐이다. 가인은 이를 악물고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람드링은 힐끗 돌아본 것만으로도 간 단히 가인의 태클을 피해버렸다. 패턴 알리자린의 순간 예지로 가인의 움직 임을 사전에 읽어낸 것이다. 그람드링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노는 것처럼 가인의 공격을 피해 내며 유유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 모습에 오르크리스트는 더 이상 말릴 생 각도 하지 못하고 푸념했고,류바는 별 감흥 없는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 돌려달란 말이야! " " 자자- 가져 갈 수 있다면 가져가 보라고. " " 이 자식이! " 가인은 몇 번이고 목걸이를 빼앗기 위해 그람드링에게 달려들었으나 번번히 허탕만 칠 뿐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그람드링의 옷깃 조차 스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이 전부 그에게 읽혀지고 있는 것 같다. " 헉, 헉……. " 호흡이 가빠진 가인은 허리를 굽히며 숨을 토해냈다.오른 다리를 절며 그람 드링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거 기다 그 비참함에 지지 않을 정도로 무력감이 밀려든다. 사지만 멀쩡했더라도, 오라만 사용할 수 있었더라도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았 을텐데! " Wow! Great- " 그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람드링이 낮게 탄성을 터뜨렸다. 목걸이가 그의 오라에 반응하여 옅은 붉은색을 띄었던 것이다. 고개를 들던 가인도 목걸이가 빛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지니고 있는 오라에 따라 빛깔이 변하는 목걸이야. ' 자신이 가지고 있을 때는 조금도 빛나지 않던 목걸이였다. ' 걸고 있는 사람을 지켜줄 거야. ' 하지만 그 목걸이가 지금, 다른 사람의 손에서 빛나고 있다. ' 집들이 선물. '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서, 마리 선배의 목걸이가……. " 으아아아아아앗-! " 순간 머리 속에서 뭔가가 뚝 끊어진 가인은 괴성을 내지르며 그람드링에게 달려들었다. 그람드링은 그 난데없는 괴성에 코웃음을 치며 가인을 돌아보 았다. 멍청한 자식. 아직도 모르겠냐? 아무리 달려들어봐야 넌 안된단 말이야! 퍽 원래는 피하려고 했다. 아니, 피한다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람 드링의 몸은 공격이 오기 전에 순간 예지를 읽어들이고, 반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되어져 있으니까. 어느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 다. 그것이 그람드링의 자랑이자 자존심이었다. 털썩 하지만 그 자존심이 깨져버렸다. 지금 바닥에 누워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람드링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람 드링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어라? 무슨 일이 일 어났던 거지? 어떻게 된 거야? " 그, 그람? " 오르크리스트는 당황하며 자신의 형을 불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본적이 없던 생소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얻어 맞고 쓰러진 그람드링이라니!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선 적어도 그런 형의 모습을 본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람드링은 시야 내에 보이는 모 든 상황을 예지할 수 있는 순간 예지자가 아닌가! " 허억……. 허억……. " 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무서운 눈으로 그람드링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연신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다. 오르크리스트는 저렇게 허약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형을 쓰러뜨린 건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람! 괜찮아? " 오르크리스트는 쓰러진 그람드링을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하지만 그람 드링은 아무 말 없이 떨어진 목걸이를 줍는 가인만 노려볼 뿐이다. 손으로 왼쪽 뺨을 문질러 보았다. 부어있었다. 아마도 주먹으로 얻어맞았던 모양 이다. ' 날 때렸어……. ' 저 오라도 사용하지 못하는 얼간이가, 저런 형편 없는 쓰레기가 나를……. 어째서 보이지 않았던 거지? 어째서 피할 수 없었던 거야? 저런 솜방망이 주먹 따위, 몇 번이고 피할 수 있었을 텐데! ' 크윽, ' 설마, 내 순간 예지가 녀석의 움직임을 예지하지 못한 것일까? 그런 일이 가능한가? 말도 안돼. 인정할 수 없어. 분명 녀석은 내 시야 안에 있었다. 절대로 녀석의 움직임은 예지되었어야 해. 내 눈이 예지하지 못하는 것은 없어! 절대로! " ……! " 그때 가인이 그람드링에게서 몸을 돌렸다. 목걸이도 되찾았고, 더 이상 말 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람드링에게는 철저히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시건방진 동양인이! " 죽여버릴테다! " 순간, 그람드링은 마치 포효하듯 소리지르며 가인에게 달려들었다.워낙 순 식간에 뛰쳐나간 거라 오르크리스트가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그람 드링은 채 가인이 뒤 돌아보기도 전에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헉- " 난데 없는 기습에 가인은 제대로 신음조차 내지 못하며 앞으로 거꾸러졌다. 하지만 그람드링은 그가 쓰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가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채 소리질렀다. " Fuck! 날 무시했냐? 네깟 놈이 지금 날 무시해! " 퍽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람드링의 주먹이 가인의 안면을 후려쳤다.그 바 람에 코와 입에서 피가 튀어올랐지만, 그람드링은 여전히 그의 멱살을 잡 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 누구 앞에서 잘난 체야! 어쩌다 한방 먹인 걸로 이긴 거라 생각했냐! " 퍽 "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오라의 주인이니 뭐니 해서 봐줬더니 같 잖지도 않아서! " 퍽 " 쓰레기면 쓰레기답게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어디서 기어오르는 거야! " 퍽 인정사정없이 주먹질을 하던 그람드링은 분을 참지 못하고 가인을 땅바닥 에 패대기쳤다. 쓰러진 가인이 피 거품을 흘리며 꿈틀대자, 이번에는 쉴새 없이 그를 걷어차기 시작한다. " 덤벼봐! 일어나지 못하겠냐, 오라의 주인!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간 거야! 잘난 척 날 내려다보던 그 태도는 어디간 거냐고! " " 크으……, " " 아프냐? 이 정도로는 멀었어! 날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야지! 어 디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봐! 어서! " " 아아아악! " 그람드링은 가인의 목을 구두굽으로 밟아 비틀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자신이 가하는 폭력에 스스로가 취해 버린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오르크 리스트는 차마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안았다. " 아아- 완전히 feel 받았어. 저렇게 되면 아무도 못 말린다고. " 저러다 오라의 주인이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스터에게서 불벼락이 떨어 질텐데. 부디 그렇게 되기 전에 그람드링이 스스로 정신을 차려줬으면 좋 겠지만 그건 희망사항이었다. " 형편 없군. " 그때 오르크리스트의 곁에 있던 류바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 섰다. 오르크리스트는 엉겁결에 그녀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 말릴 생각이에요? " " ……무슨 이유로. " 류바는 싸늘하게 대꾸하며 그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가인과 그람드링의 곁을 태연하게 지나갔다. 그들의 싸움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그 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타인의 일 따위는 관심 밖의 일 이었다. 단지 그들을 지나칠 때 류바는 잠시 가인에게 눈길을 주었는데, 그 눈빛에 서는 경멸에 가까운 감정 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럼 그렇지. 저 얼음 덩어리가. ' 오르크리스트는 그렇게 혼자서 가버리는 류바의 뒷모습에 푸념하며 다시 그람드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골칫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그런 그의 고민은 뜻 밖의 사람이 나타남으로서 해결되었다. 챙 청명한 검명. 정신 없이 가인을 짓밟고 있던 그람드링은 자신의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소리없이 그의 뒤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람드링의 목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 대면서. 그람드링은 오르크리스트의 놀란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헤에- 이제보니 Samurai가 아니라 Ninja였나? 발 소리도 없이 다니는 걸 보니. " "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 그람드링의 장난기 어린 말을 남자는 노기 서린 목소리로 받아냈다. 그 목 소리에 그람드링은 소리 죽여 웃으며 자신의 목에 닿은 칼날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 자자- 이거부터 치우고 얘기하자고. 분위기 살벌해지잖아? " " 제 질문에 대답부터 하십시오. " 남자, 코마히코 카구라는 조금도 수중의 도츠카노츠루기를 움직이지 않으 며 그람드링에게 말했다.그에게서는 몬스터와 싸울 때 못지 않은 살기가 흘 러나오고 있었다. 더욱이 지금도 그람드링의 발에 밟혀 있는 가인을 보고있 자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람드링은 목의 칼날이 위협적이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가인의 머리를 발 로 두들겼다. " 무슨 짓이냐고 물었지? 그저 버릇을 고쳐주고 있었을 뿐이야. 주제도 모 르는 원숭이가 자꾸만 사람 흉내를 내려고 해서. " " 그렇다면 네 버릇은 내가 고쳐줘야겠군. " 코마히코는 더 이상 그람드링에게 존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의 분노에 반응하여 도츠카노츠루기의 주황빛 예기가 한층 더 강렬해진다. 한편 그람드링은 코트 속에 감춰둔 리볼버에 손을 가져가며 도츠카노츠루기 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패턴 알리자린의 순간 예지가 있는 한 사 무라이의 칼질 따위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풍전등화!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 지금 같은 피스 대원들끼리 뭣들 하는 겁니까! " 그때 메디컬 센터의 입구 쪽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일련의 간 호사들과 함께 나타났다. 메디컬 센터의 총 책임자인 닥터였다. 그의 등장 에 분위기가 깨지자 그람드링은 코마히코를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 체- 운이 좋구만, Samurai. 본 때를 보여주려고 했더니만. " " 자신의 운을 과소평가하고 있군. 동양에 구사일생이라는 말이 있는 건 알고 있나? " " 뭣하면 지금 죽여줄까? 앙! " " 죽어줄까를 잘못 말한 거겠지. " " 이 자식이! " 한치의 양보도 없이 적의를 드러내던 그람드링과 코마히코는 다시 불이 붙어 서로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때 보다 못한 오르크리스트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우격다짐으로 그람드링을 잡아 끌었다. " 자자! 우리 이러고 있을 시간 없잖아! 마스터가 호출한지 30분이나 지 났다고! 다들 자신의 손목에 찬 무전기에서 불 나고 있는 거 안보여! " " ……. " 그러고보니 흥분해서 깨닫지 못했는데, 무전기의 신호음이 아까부터 계 속해서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싸움을 그만둘 마음이 생겼는지 그람드링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리며 오르크리스트에게 소리쳤다. " 젠장, 또 꼰대에게 깨지겠구만! 어서 가자! " " ……덩달아 깨지는 내 생각도 좀 해. " 오르크리스트는 지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그람드링의 뒤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붉은 형제가 사라지자 코마히코는 침중한 안색으로 쓰러 진 가인을 안아올렸다. 가인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채 정신을 잃고 있었 다. 그 모습에 코마히코는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한때나마 자신과 맞대결을 펼치던 호적수가 이렇듯 무뢰배들에게 농락당 하는 모습이라니! " 코마히코 씨! 가인 군은 괜찮습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 " 사정은 잠시 후에 말할테니 일단은 가인 씨부터 부탁드립니다. " 닥터의 질문에 코마히코는 침중한 목소리로 답하며 품의 가인을 그에게 건네주었다.닥터는 신속히 의료진들을 불러 가인을 간이 침대에 싣기 시 작했다. 코마히코는 그런 가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그의 손에서 뭔 가가 반짝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목걸이였다. 코마히코로서는 무슨 목걸이인지 알 수 없었으나 가인이 기절한 상태에 서도 놓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 매우 중요한 물건 임을 알 수 있었다. " ……? " 그때 목걸이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아주 잠시였지만 목걸이의 흑 빛 수정에서 옅은 푸른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다. 코마히코는 두 눈 을 몇번 감았다 뜨며 다시 목걸이를 바라보았지만, 수정은 언제 빛났냐는 듯 다시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 뭐였지? 잘못 본 거였나? ' 분명 빛이 났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코마히코의 의문도 곧 가인이 메디컬 센터에 실려 가면서 그 끝을 고해야만 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6 - Ｂy Ｎext Ｎeo =-=-=-=-=-=-=-=-=-=-=-=-=-=-=-=-=-=-=-=-=-=-=-=-=-=-=-=-=-=-=-=-=-=-=-= 그리고 밤. 닥터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메디컬 센터의 개인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 었다. 낮에 검사한 피스 대원들의 오라 측정 수치들을 산출해야 했기 때문이 다. 개개인의 오라는 그 날의 감정이나 신체 변화에 따라 수치들이 미묘하게 변한다. 특히 전투가 끝난 직후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타 지 부에서 온 피스 대원들은 그간의 기록들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닥터는 최근 한달 동안 2기 피스 대원들의 신체 검사 기록서를 재 작성하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닥터는 이 밑도 끝도 없는 작업으로부터 한 숨 돌릴겸 잠시 검사실의 창 밖 을 바라보았다.언더 시티 유레카에는 태양이 없었기에 당연히 밤이라는 것도 없었다. 단지 인공 조명을 조절하여, 거주자들이 시간 개념을 잃어버리지 않 도록 밤과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할 뿐이다. 닥터는 그 인공으로 만들어진 밤 의 풍경을 바라보며 수중의 커피를 들이켰다. 낮의 소란이 무색할 정도로 평온한 밤이다. 쾅 " 닥터! 미국 지부 대원이 가인에게 린치를 가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에 요! " " ……. " 하지만 평온은 이 갑작스런 난입자의 등장으로 깨져버렸다. 닥터는 용케도 커피를 쏟지 않은 자신에게 감탄하며 난입자를 돌아보았다. 역시 발 없는 말 은 천리까지 가는 모양이다. " 나름대로 간호사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그 얘긴 어디서 들은 겁니까, 시더 양? " 닥터의 질문에 피스메이커의 기술 부 치프 시더 웰리스는 흘러내리는 안경 을 쓸어 올리며 가쁘게 숨을 골랐다.아무래도 소식을 접하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닥터에게 달려온 모양이다. 시더는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곧 기관총 처럼 말을 쏟아냈다. " 지금 언더 시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미스터 알리자린이 가인에게 시비를 걸어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고! 참고로 저는 연구실로 찾 아온 수정에게 들었지만, 아마도 언더 시티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본 오 퍼레이터 팀이 본 출처일 거에요! " ' ……본 출처랄 거 까지야. ' 닥터는 시더의 설명에 이마를 감싸안으며 한탄했다. " 하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이 메디컬 센터에도 감시 카메라가 있었지. " 아마 수정이 알고 있다는 건, 사령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말이 될텐데.그렇게 된다면 이건 더 이상 그람드링과 가인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피스메이커 내의 미묘한 대립 분위기가 다시 기승을 부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뜩이나 파견 대원들에게 불만이 쌓인 한국 지부였다. 아마 가인이 일방적 으로 린치를 당한 사실이 알려지면 쌓였던 불만들이 한꺼번에 폭발할 것이다. 시더는 닥터가 소문의 진위를 인정하자 대번에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 아니! 대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환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거래! 닥터! 가 인은 얼마나 다친 거에요? 왜 가인이 맞도록 내버려둔 거에요! " " 저도 갑자기 소란스러워져서 나가봤더니 벌어진 일이라. 그나마 코마히 코 군이 말려줬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방치했더라면 큰 일이 났을 겁니다. " " 그러니까 가인은 어떻게 됐냐고요! " " 뭐,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닥터는 시더를 달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메디컬 센터의 PET 치료라 면 무슨 상처든 치료를 못하겠냐만은. 솔직히 가인의 부상은 한 사람에게 맞은 것치고서는 그 정도가 심했다.코 뼈 가 내려앉고 갈비 뼈가 부러지고 척추에도 무리가 갔던 것이다.처음에 닥터는 열 세살 밖에 안된 소년이 무저항의 사람을 이토록 악랄하게 구타할 수 있다 는 것에 치를 떨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시더에게 말하지 않을 셈이다. 가뜩이나 불안해 하는 그 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았고, 가인에게 부탁받은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치료를 마치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가인은 닥터에게 이 일을 누구에게도 알 리지 말 것을 부탁했었다. 특히 브루스에게 알리지 말 것을 강조했는데. 그 의견에는 닥터도 동감이었다. 브루스의 성격 상, 이런 일을 알게 된다면 분명 그람드링을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결국 가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막 신체검사를 마친 것처럼 브루스와 시민을 반겼다. 정황을 다 알고 있던 닥터로서는 태연하게 행동하는 가인의 모습에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속이 깊다면 깊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딘가 가인에게서는 자포자기한 인상이 강했던 것이다. 마치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 정말 그 쌍둥이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오퍼레이터 팀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전투 때도 사사건건 말썽이나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 래요! 대체 그 아이들 책임자가 누구에요? 어디서 뭘하고 있는 거에요! " 시더는 분해 죽겠다는듯 발을 동동 구르며 닥터에게 따졌다. 닥터로서는 그 저 쓴 웃음을 짓는 수 밖에 없었다. 뤼멘 형제들은 그 성에서 알 수 있듯이 현 미국 지부 사령관인 시폰 뤼멘의 양 아들들이었다. 굳이 책임자를 따지자 면 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아, 그러고 보니……. 그녀도 책임자라고 볼 수 있을까? ' 닥터는 시폰 뤼멘과 함께 한국 지부로 넘어온 한 중국인 여성을 떠올렸다. 아마 그녀가 현 뤼멘 형제들의 담당의였을 것이다. 시폰 사령관은 특이하게 도 자신의 양아들들에게만 따로 개인 담당의를 두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아마 담당의의 전공이 생물 공학이라는 것에 실마리가 있을 듯 했다. " 지금 레드 브라더스의 책임자를 찾고 계셨나요? " " ……! " 그때 시더의 불평을 끊는 한 목소리가 있었다. 닥터는 어느 새인가 사무실 의 입구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호랑 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시더는 이 갑작스런 불청객의 등장에 당황하며 닥터에게 물었다. " 누, 누구에요? 닥터? 저 사람? " " 아직 서로 모르고 있었겠군요. 저 쪽의 여성 분은……. " " 아- 제 소개는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 여인은 닥터의 말을 끊으며 시더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170을 넘는 장신에 검은 단발의 미인이었다.나이에 비해 묘하게 성숙한 인상이 다 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 제 이름은 주유화. 중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생물공학부 소속이며 당신이 말한 트러블 메이커들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죠. " " 아……저, 그게- 하하하.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흥분하다 보면 세포의 정지전위가 감소되어 거꾸로 세포 내부는 +로 분극하니까 말이 헛 나올 수도 있죠. 에- 단지 그런 거였으니까. " 시더는 자신이 험담한 장본인과 이렇게 대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당황하여 횡설수설했다. 유화는 그런 시더의 반응에 가볍게 인상을 쓰며 말 했다. " 아뇨. 확실히 그 아이들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할 말 이 없군요. 간수라고 해도 저는 그 아이들의 담당의일 뿐이라서. 그나저 나 제가 찾고 있는 분들이 이렇듯 한자리에 모여계시니 찾는 수고를 덜 었군요, 닥터 웰리스. " " 에? " 시더는 유화가 자신을 정확하게 지칭하자 영문을 몰라 닥터와 그녀를 두리 번거렸다. 알기 쉬운 사람이군. 유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 저는 닥터와 당신,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에게 볼 일이 있습니다. 물 론 레드 브라더스에 관한 일로 말이죠. " " ……당신은 시폰 사령관 쪽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 닥터는 표정을 굳히며 유화를 노려보았다. 주유화. 그녀는 시폰 사령관이 자신의 양아들을 맡기기 위해 일부러 중국지부에서 한국 지부까지 불러들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이렇듯 자신들에게 레드 브라더스에 관한 내용을 알 려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유화는 닥터가 경계하는 기색이 완연하자 쓴웃음을 지었다. " 죄송하지만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저는 시폰 사령관에게 일절의 호감도 없으며, 그의 사람으로 일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국 지부 쪽의 편을 들어주고 싶지도 않군요. " " 그럼? " 유화는 어리둥절해 하며 되묻는 시더에게 도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굳이 편을 들자면 유가인의 아군이라고 할까요? " " ……! " " 이 약품을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닥터? " 유화가 닥터와 시더를 데리고 간 장소는 메디컬 센터의 한 연구실이었다.시 폰 사령관의 명령으로 닥터가 유화에게 개인 진료실을 내주었던 곳이다. 그 리고 이곳에서 레드 브라더스의 검사가 행해진다. 그 검사는 닥터 자신은 물 론, 메디컬 센터의 어느 누구도 참관할 수 없었다. 닥터는 생소한 연구실의 풍경을 살펴보다가 유화의 질문에,그녀가 내보이는 약품으로 눈을 돌렸다. 약품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캡슐용 알약이었다. " 뭐라고 생각하냐고 해도……, 이런 것만으로는 알 수 없지 않습니까? " " 힌트를 드리죠. 허드슨의 전위궤도단원자원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 " 아! " 유화의 힌트에 반응한 것은 시더였다. 그녀는 새삼 놀랐다는 눈으로 캡슐용 알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 화이트 파우더(White Powder)! 이게 정말 그 물질이란 말이에요? " " 시더 양, 화이트 파우더라니……. 그게 뭡니까? " 닥터의 질문에 시더는 두 눈을 빛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 미세소관 내의 보즈-아인슈타인 응축물을 제외하고서 상온초전도를 설명 할 수 있는 물질이에요. 허드슨이 송아지와 돼지의 뇌조직을 검사한 결과 약 5퍼센트가 하이스핀 상태의 로듐과 이리듐으로, 즉 로듐과 이리듐의 전위궤도단원자원소 상태로 있는 것을 발견했죠. 이 전위궤도단원자원소 가 바로 화이트 파우더에요! " " 하아, " " 닥터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거에요. 화이트 파우더는 의학적으로 매우 뛰 어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AIDS환자와 말기 암환자에게 탁월한 치료 효 과를 보이며, 손상된 DNA 사슬을 복구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죠. 또한 화 이트 파우더를 복용한 즉시 백혈구가 증가하는 현상이 있으며,루게릭 병 과 관절염 등에도 효과가 있어요. " " 그건 마치……PET용액의 세포복원 능력과 흡사하군요. " " 그렇죠. 하지만 화이트 파우더가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이 육체의 치 료 뿐 아니라 의식의 고양이나 영적인 변화까지 일으키기 때문이에요! 한 예로 허드슨은 각 원소의 전위궤도단원자원소가 인체 내의 서로 다른 내 분비선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도 금의 전위궤도단원자원소 는 송과선(pineal gland)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죠! " " 송과선이라면 뇌하수체 밑에 있는 기관 아닙니까? " " 예로부터는 제 3의 눈, 또는 영혼의 자리로 지목받아온 기관이기도 해요. " 닥터는 시더의 말에서 영적인 부분까지 언급되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는 유화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 그러니까…… 맞습니까? 그, 화이트 파우더? " " 예, 닥터 웰리스의 말대로에요. 역시 케루빔의 오파니엘, 노엘 웰리스 님 의 손녀군요. " 유화는 미소하며 시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더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몸 을 물려야만 했다.자신을 바라보는 유화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적개심을 느 꼈기 때문이다. 유화는 시더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 그럼 뒤는 제가 이어서 설명하죠. 화이트 파우더를 복용했을 때 어떤 현 상이 일어나느냐? 화이트 파우더를 의학적인 목적이 아닌 영적인 목적으 로 복용한 사람의 경우, 복용을 시작한지 5, 6일이 지나서 머리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그 소리가 날이 갈수록 커진다고 합니 다. 그 소리는 매우 높은 주파수의 소리로 귀를 통해서 들리는 것이 아 니라 뇌로 직접 들리는 사념파의 일종이라고 하죠. 그렇다고 듣기 괴로 운 소음이 아니라 넥타르(nectar)와 같은 감미로운 소리라고 하는데,깊 은 명상이나 쿤달리니 각성 중에 들리는 소리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됩 니다. 더 많은 날이 지나면 이번에는 꿈과 계시, 그리고 비전(vision)이 시작 되죠. 더욱 놀라운 것은 빛의 존재들이 나타나서 텔레파시로 교신을 하 고 접촉을 가졌다는 겁니다. 잠은 하루에 두 시간으로 충분하며, " 거기서 잠시 유화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 ……성적 접촉 없이도, 흠! 온몸으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일도 일어났다 고 합니다. " " 그게 무슨……. " 닥터가 어이가 없다는듯 혀를 차자, 시더가 말을 받았다. " 인간의 몸이 점점 초전도체로 변화되어감에 따라 인체 주위에 형성되 어 있던 마이너스장이 강화되어가는 거에요. 이것은 도가(道家)에서 열 달의 잉태과정을 거쳐 양신(陽神)을 이루는 과정을 연상케 하는데. 즉 이러한 과정은 인간에게 육체 외에도 빛의 몸이 있으며, 이 빛의 몸에 충분한 영향을 공급함으로서 드디어 빛의 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거라고 볼 수 있죠. 내가 몸 담았던 케루빔에서는 오라란 전위궤도단원자원소의 상온 초전 도체 특성과 우리 몸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초전도 현상의 연관성에 서 찾을 수 있다고 분석하는데. 초전도 현상이 인체 내에서도 일어나 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현대 사회에서 공인되지 않았고, 과학계나 의 료계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미 케루빔은 21세기 이전부터 의식 현상을 물리적으로 해명하려는 프로젝트에 착수해왔어요. " " 아니, 잠깐! 잠깐! 그렇다면 화이트 파우더라는 것이 오라 능력을 발 생시키기라도 하는 약품이라는 겁니까? 지금! " 닥터는 그제서야 설명을 이해한듯 경악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라 능력자를 인위적으로 만든다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시더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 그러니까 그런 '실험'이었다는 거죠.분명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현상 은 발생했지만 대부분 부작용으로 미쳐버리거나 정신이 붕괴되는 경우 가 허다했어요. 허드슨의 실험은 오라의 발현과 초전도체인 오리하르 콘이 왜 오라 능력자에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오라 의 진정한 현상, 의식 구현화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죠. 즉 반쪽짜 리 실험이었던 거에요. 역시 오라 능력이란 현 케루빔의 과학력으로도 분석할 수 없는 신비의 힘인 거죠. " " 으음…….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요. " 닥터는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며 어렵게 한마디 했다. 오 라라는 것이 분명 케루빔에게 매력적인 소재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벌 써부터 그런 식의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나 놀랐냐고 하면 아직도 등에 돋은 소름이 가라앉지 않을 정도다. 닥터는 유화의 손에 들린 화이트 파우더를 새삼 주의깊게 바라보며 그 녀에게 물었다. " 그렇다면 그 화이트 파우더를 주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이유는 뭡니까? " " ……매 전투 때마다 레드 브라더스에게 투여하고 있으니까요, 이 화 이트 파우더를. " 유화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대답했지만, 그 대답의 파장은 훨씬 더 컸다. 그녀의 말은 시더와 닥터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건, 지금 뤼멘 형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오라 능력자라는 뜻입니 까? " " 닥터 웰리스가 말했듯이 인위적으로 오라 능력자를 만드는 것은 케루 빔에서조차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저는 단지 화이트 파우더 를 레드 브라더스가 복용한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 " 하지만 그런게 아니라면 그들이 화이트 파우더를 복용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입니까? " " 저도 거기에 의문을 가지고 요 며칠간 미국 지부에서 보내온 레드 브 라더스에 관한 기록들을 조사해봤어요. " 유화는 수중에 들린 화이트 파우더를 고뇌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힘 겹게 말을 이었다. " 아마 닥터도 알고 계시겠지만…… 레드 브라더스에 관한 기록들은 대 충 성의없이 짜맞춘듯한 신상 명세 밖에 없더군요. 그 동안 미국 지 부에서 활동한 기록들도, 신체 검사 수치들도……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요. 이에 대해서 시폰 사령관에게 따져봤지만, 돌아온 것은 '현 임무에 충실하십시오' 라는 대답 뿐이더군요. " " 으음……. " 닥터와 시더는 신음에 가까운 탄식을 흘렸다. 뭔가 말도 안되는 얘기를 들어버린 기분이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끝은 불길한 상상만 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는 문득 유화가 왜 이런 얘기를 자신들에게 하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얘기를 해봐야 그녀에게는 조금도 이로울 게 없을 텐데. " 주 선생님, 어째서 그 얘기를 저희들에게 해주시는 겁니까? " " 말했었죠. 저는 가인의 편이라고. " 유화는 작년 북경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 저는 가인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그는 제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친구가 이런 약을 사용하는 무리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어요. " " 아니, 이용이라니……. " 닥터는 말도 안된다는듯 손을 내저었지만, 유화는 한번 드러낸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노기가 서린 눈으로 시더를 노려보았다. " 분명 이 화이트 파우더는 케루빔이 행한 연구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닥터 웰리스가 스스로 말했었죠. 이 약을 사용한 이들은 그 부작용으 로 대부분 미쳐버리거나 정신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 " 그, 그건 단지 케루빔의 논문을 살펴본 것 뿐이에요! 나는 조금도 그 런 실험에……, " " 알고 있어요. 지금의 닥터 웰리스는 케루빔의 일원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런 사실을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그리고 케루빔은 여전히 피스메이커와 협력 관계에 있습니다. 완전히 무관하 다고 할 수 있나요? " 쾅 유화는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박력에 시더는 할 말을 잊고 어 깨를 움찔 떨었다. " 당신들은 결국 오라 능력자를 한낮 모르모트로 밖에 보지 않고 있었던 거에요. 당신들을 위해, 자신의 몸도 아끼지 않고 전투에 뛰어드는 그 들을! 이런 약품을 써가면서 실험하고 있었던 거죠. " " 주 선생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 닥터가 터무니 없다는듯 반박했지만, 유화는 냉정하게 코웃음쳤다. " 아니. 지나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닥터도 마찬가지니까요. 평 소 피스 대원들의 오라 수치를 측정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죠? 전 신 스캔까지 할 정도로 신체 검사를 매번 하는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 고요? 단지 피스 대원들의 몸 상태가 걱정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는 설명이 안되죠. " 유화는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 뭉치를 집어들어 닥터에게 떠밀듯이 건네 주었다. 닥터가 엉겁결에 받아든 서류에는 케루빔의 오라 능력자에 관한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 케루빔의 연구에 당신들이 측정해온 자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참고된 것은 단지 우연입니까? 아무리 당신들이 몰랐다고 하더라도, 당신들은 오라 능력자들에 관한 정보를 케루빔에게 팔고 있었던 겁니다. 가인과 그의 친구들을 팔고 있었다고요! 케루빔의 힘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십니까? 하지만 그 어떤 이 유에서건 친구를 팔아넘기는 행위는 죄악입니다! 배신이에요! " 유화는 터져나오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참아왔던 말들이 오늘 가인이 린치를 당한 사건을 기점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오라 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대번에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돌변 하다니! " 오라를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가인은 가인입니다. 그 아이가 인류를 대 신하여 몬스터와 싸워온 일들은 변하지 않아요! 그렇게 고생하고 애써 온 아이를! 그렇게 헌신짝 취급하듯 버리는 게 당신들 피스메이커의 방식입니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런게 피스메이커였더라면 저는 절 대로 피스메이커에 몸을 담지 않았을 겁니다! " 내가 환멸을 느낀 인민해방군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유화가 군을 그만두고 피스메이커에 들어온 것은 가인의 신념과 그 행 동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가인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단지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 하지만 아무리 오라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몬스터와 싸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나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유화는 가족들을 눈 앞에서 몬스 터에게 잃은 당사자였기에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그 공포를 잘 알고 있었 다. 그랬기에 더더욱 가인이 홀로 몬스터와 싸우는 모습을 믿을 수가 없 었다. 아마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믿을 수 없었 을 것이다. ' 그런 가인이 몸을 담은 피스메이커라는 기관이 궁금했었어. ' 그들이 하는 일에 자신도 동참하고 싶었다. 가인과 같은 길을 걷고 싶었 다. 그래서 군을 나온 것인데, 이제야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 는데. 유화는 울분을 삭히려 애쓰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 ……어쨌든, 오라 능력자를 상품 취급하는 피스메이커의 방침에는 동 참할 수 없습니다. 가인을,그 아이를 더 이상 당신들 멋대로 하게 내 버려두지 않겠어요. 제 친구는 제가 지킵니다. " " 그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 그때 유화의 말을 듣다 못한 시더가 버럭 소리질렀다. 유화가 돌아보니 시더가 울상이 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더는 김이 서린 안 경을 벗어 소매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소리쳤다. " 당신만 가인의 친구가 아니야! 나도! 여기 있는 닥터도! 그리고 한국 지부의 모두가 가인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정말 계속 듣고 있으니 꼭 우리를 악당 취급하기나 하고! 당시만 가인을 걱정하는 게 아니야! 나도 걱정하고 있다고! 너무 걱정되서!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은데! " 거기까지 말하던 시더는 그만 흐느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소리내 울었다. 닥터는 그런 시더의 등을 두들기며 유화에게 쓴 웃음을 지었다. " 시더 양의 말대로 입니다. 가인 군을 이용한다느니, 어쩐다느니. 우리 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행해진다면 만사 제쳐 놓고 막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과 마찬가지로 가인 군은 우리 의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죠. " " ……. " 유화는 그런 닥터와 시더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미 소하며 시더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심하게 했군요.잠시나마 두 분을 몰아붙였 던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 " 흥! " 하지만 시더는 그녀에게서 빼앗듯이 손수건을 낚아채 크게 소리내 코를 풀어버렸다.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분풀이였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어 이없다는듯 바라보던 닥터와 유화는 그만 소리내 웃음을 터뜨렸다. 시더는 시뻘개진 얼굴로 그들에게 소리질렀다. " 웃지 말아요! 지금 사람을 울리고선 웃음이 나와! " " 크흠! 아, 실례. 어쩔 수 없는 생리 작용이었다고 생각하시길. " 유화는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능청스럽게 웃음을 참아냈다. 시더는 그 모습에 쌍심지를 돋구며 코를 푼 손수건을 유화에게 내밀었으나, 그녀는 정중히 그것을 거절했다. " 아, 그건 닥터 웰리스에게 드린 것이니 그냥 가지도록 하세요. " ' 우우- 마음에 들지 않아, 이 여자. ' 시더는 속으로 이를 바득 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본능적으로 유화와 상성 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걸까. 어쨌든 앞으로도 그녀와 사이가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두 여자 사이의 공기가 불온해지자 닥터는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 뭐, 이제 서로의 마음은 그럭저럭 파악한 것 같으니. 이쯤해서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주 선생님? " " 에- 이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닥터? " 시더가 영문을 몰라 되묻자, 닥터는 그녀에게 가볍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와서, 화이트 파우더의 존재를 가르쳐준 이유 말 입니다. 싫든 좋든 우리는 앞으로 그녀와 같은 배를 타게 될 것 같으니. " 그 말에 유화는 가볍게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의 도박 은 성공한듯 했다. " 거기까지 파악하셨다면 얘기가 빠르겠군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이 자리의 모두가 가인의 친구라고 믿기에 하는 것입니다.부디 이 믿음 을 지속시킬 자신이 없으신 분은 즉각 방에서 나가주십시오. 일단 얘기 를 듣게 된다면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될테니까요. " 그렇게 말하며 유화는 슬쩍 시더에게 눈길을 주었다. 은근슬쩍 자신을 지 적하는 듯한 그 태도에 시더는 열이 받아 소리쳤다. " 거기서 날 보지마! 난 절대 이 방을 안 나갈테니까! 무엇보다 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 내가 빠질리가 없잖아! 어림도 없지! 흥! 흥! " " 나중에 우는 소리해도 모르는 척 할 겁니다? " " 할 성 싶으냐! " 으으. 마음에 안 들어 죽겠네, 이 여자! 시더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렸다. 그 모습에 닥터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화에게 말했다. " 자자, 이러다간 날이 새겠군요. 저 역시 가인 군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라면 빠질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계속 말씀하시죠. " " ……예. 그럼 이제부터 제가 알고 있는 얘기들을 모두 여러분에게 하겠 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신다면 두 분은 자신들이 속한 이 기관에게 극 심한 혐오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피스메이커에 있는 것 자체 가 위험해질지도 모르죠. " 거기서 잠시 얘기를 끊고 유화는 시더와 닥터의 분위기를 살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유화는 부디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 레드 브라더스의 몸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 " 역시. 여자란 입이 가벼운 생물이지. 그래도 이 정도면 오래 참은 건가? " 작전 사령부 쪽에 위치한 사무실. 그곳은 현 한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사 령관 직을 대행하고 있는 시폰 뤼멘의 거처였다. 시폰은 쇼파에 걸쳐 앉아 여유롭게 와인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두 눈동자를 붉게 물들인 오르크리스트가 서있었다. 오르크리스트는 현재 자신의 능력인 원격 투시를 전개하여 한 사람과 시야를 공유하고 있 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상대방의 동의를 얻지 않았기에 공유보다는 훔쳐 보기에 가까웠지만. 그때 사무실의 문가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던 그람드링이 입을 열었다. " 흥- 그러길래 내가 뭐랬어. 그런 계집, 믿을게 못된다고 했었지? " " 계집이라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람. 그래뵈도 네 담당 선생님이 아니냐? " 시폰은 투덜거리는 그람드링을 타이르며 오르크리스트에게 말했다. " 자- 거기까지 해둬라, 크리스. 더 이상 엿보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 " 예, 마스터. 주유화의 원격 투시를 끝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 께 있었던 사람은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 닥터와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 스였습니다. " 오르크리스트는 전개했던 오라 능력을 거둬들이며, 마치 칭찬받길 원하는 아이처럼 시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기대대로 그의 마스터는 오르크리스트 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 모습에 문가의 그람드링은 소리없 이 동생을 향해 이기죽거렸다. 저런 쓸개빠진 자식 같으니라고. " 어쨌든, 마스터. 주유화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대로 내버려두실 생각 인가요? " " 흐음- 글쎄. 어떡할까나? " 시폰은 오르크리스트의 질문에 쇼파에 몸을 묻으며 다시 와인을 들이켰다. 그람드링은 몸이 근질근질거리는지 코트 안의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며 소리 질렀다. " 어떡하긴 뭘 어떡해! 죽여버리면 그만이잖아! 마스터! 내가 죽이게 해 줘! 그 입 싼 년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넣겠어! " " 하아- 그람, 사람의 목숨은 귀한 거란다. 그렇게 쉽게 죽여버린다 죽여 버린다 하면 못 쓰지. 좀 더 평화적인 방법을 생각해봐라. 우리는 평화 를 사랑하는 사람들, 피스메이커잖아? " " 헤. 설마 마스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 그거 웃으라고 하는 얘기야? " 그람드링은 시폰의 말에 어김 없이 빈정거렸고, 그런 형을 오르크리스트 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시폰은 그람드링의 불손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죽이는 건 너무 쉬우니까. " 파괴의 미학은 붕괴의 과정에 있다. 그리고 시폰은 그 과정을 조율하는 것 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오히려 자비에 가까 운 것이다. " 크리스. 그러고 보니 닥터 주는 뭣때문에 우리를 따라 한국에 왔었지? " " 아, 예. 그게……피스 블루 유가인, 그를 만나러 온 거라고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 " 마스터의 질문에 오르크리스트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에게서 유가인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그람드링은 낮의 일이 생각났는지 대번에 인 상을 일그러뜨렸다. 시폰은 그런 그람드링의 태도에 빙긋 미소지었다. " 유가인. 피스 블루 유가인이라. 정말이지 인기인이군. 매번 오르내리는 이름이야. 어딜가나 유가인. 유가인. 유가인. 하하하.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군. " 시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그람드링은 갑자기 마스터가 자 신에게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뒤는 막혀있다. 그람드 링은 마스터의 그림자가 자신을 뒤덮자 질끈 눈을 감았다. 리볼버를 움켜쥔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 하지만 너무 자주 들리면 지겨워지는 법이지. " 시폰은 떨고 있는 그람드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에게 속삭였다. " 그람, 내가 보여주마. 평화적인 방법이란 무엇인지. " 그람드링은 절대로 눈을 뜨지 않았다.눈을 뜨면 자신의 코 앞에서 웃고 있 을 악마를 목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7 - Ｂy Ｎext Ｎeo =-=-=-=-=-=-=-=-=-=-=-=-=-=-=-=-=-=-=-=-=-=-=-=-=-=-=-=-=-=-=-=-=-=-=-= 그 날 아침의 작전 본부실은 유래 없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적어도 오퍼레이터 팀의 막내 문세희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최근들어 사 령부와의 불화가 깊어진 채영 치프와 선배들은 공적인 업무가 있지 않으면, 대부분 휴게실로 가버리기 일쑤였다. 일종의 시위였던 셈이다. 덕분에 본업 무 외의 잔업들은 모두 세희와 같은 후기 오퍼레이터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녀들도 선배들과 같이 스트라이크에 들어가도 상관 없었지만, 세희 의 성격 상 그런 막무가내 식의 일처리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 날도 어김 없이 선배들의 잔업을 처리하던 중, 위잉 의외의 인물들이 작전 본부실을 찾아왔다. 세희는 자동 문으로 들어오는 일 련의 인물들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라? 가인 씨? 거기다 시민 씨와 브루스 씨도? " " ……오랜만이에요, 세희 씨. " 앞장 서 들어오던 시민이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시민을 뒤 따라오는 이 들은 한동안 본부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피스 블루 유가인과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였다. 특히 유가인과 같은 경우는 오라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이후 실질적인 활동이 전혀 없었기에 제대로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치프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희는 잠적해있던 그가 다시 본부실을 찾아온 것에 의 아함을 느꼈다. " 가인 씨, 어쩐 일로 본부실에 온 거에요? " 그렇게 묻고 난 후, 뒤늦게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꼭 자신의 물음이 볼 일 도 없는 사람이 왜 작전본부실에 왔냐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가인 은 신경쓰지 않으며 그저 힘 없는 미소만 지었다. " 글쎄요. 저도 갑자기 시폰 사령관 님에게 불려온 거라서……. " " 아- " 혹시 그 일때문일까? 세희는 반사적으로 어제 가인과 피스 알리자린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그 러고 보니 피스 대원들끼리 그렇게 난투극을 벌인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분명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바로 다음 날 이렇게 당사자를 호출할 줄이야. 세희는 가인이 그람드링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당한 것에 생각이 미치자 걱정 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요? 어제 많이 다쳤던 것 같은데……. " " 예? 예, 예에- 아뇨. 뭐, 보시다시피 아무렇지도 않아요. 예! 아무렇지도! " 그녀의 질문에 가인은 이상하게도 당황하며 답했다.세희는 영문을 몰라 인상 을 찡그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그러고 보니 가인이 입가에 손가락을 대 며 그녀에게 무언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 말하지 말라는 뜻인가? ' 하지만 왜? 여전히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세희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인의 뒤에 있던 브루스가 대번에 수상한 기미를 느끼고 그녀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 ……다치다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여자? " ' 이, 이거였나- ' 세희는 바위처럼 굳어가는 브루스의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제스처의 의미를 깨달았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뒤늦게 가인을 돌아보니 그도 만사가 글렀다는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동거인들에게 어제의 일들 을 얘기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 가인 씨?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에요? " 결국 시민까지 정색을 하며 물어오자, 가인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 다. " 아니……. 그냥 잠시 애들끼리 싸운 거라서……. 별 일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 " 거기의 여자! 무슨 소리냐고 묻지않았나! " 그러나 브루스는 가인의 말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으며 재차 세희에게만 소리 쳤다. 세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다들 알고 있 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하여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 그게, 어제 메디컬 센터에서 가인 군과 피스 알리자린이 시비가 붙어서……. " " 시비가 붙어서? " " 소동이 일어났는데……. " " 말을 똑바로 해라, 여자. 그 소동이 무슨 소동이냔 말이다! " 계속해서 브루스가 세희를 추궁하자 보다못한 가인이 그를 말렸다. " 그만해요, 브루스! 정말 별 일 아니었다고요! " " 시끄러! 이 바보 얼간이 같은 게! " 브루스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가인의 멱살을 잡아 자신의 코 앞으로 끌어당겼 다. 그는 가인의 눈을 직시하며 노기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 아무 힘도 없는 네 녀석이 그 외국인 꼬마 놈과 붙었다면 십중팔구 엉망으 로 깨졌겠지! 닥터가 치료해준 거냐? 그래놓고서 우리에게는 얼빠진 웃음 이나 지으며 없었던 일로 넘기려고 했던 거냐! " 가인은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으나 멱살을 쥔 브루스의 힘이 너무나 강했기에 신음소리나 흘리는게 고작이었다. 결국 시민이 가인의 멱살을 쥔 브루스의 손 에 매달리다시피하여 그를 말렸다. " 브루스 님! 왜 이러시는 거에요! 일단 놓고 얘기하세요! 그러다 가인 씨 숨 넘어가겠어요! " " 흥! " 브루스는 코웃음을 치며 멱살을 쥔 가인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 에 둘을 말리던 시민까지 덩달아 떠밀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오퍼레이터들 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인은 테이블에 찍힌 머리를 어루만지다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브루스의 눈빛에 안색 이 창백해졌다. " 왜 얘기하지 않았냐?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 쪽팔리든? 네 녀석 혼자서 알 아서 하리라 생각했냐! 입 다물고 있으면 모를 줄 알았어! " 브루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자신들을 배려한답시고 거짓말이 나 한 가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그런 거짓말 하나 눈치 채지 못한 자 신에게도 화가 났다. 분명 혼자서 끙끙 앓았을 테지, 저 바보 멍청이가! ' 제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스승이라니! 이보다 한심 한 노릇이 어디있단 말인가! ' " 잘도 날 욕보였겠다. 아니, 남에게 의존하지 않겠다는 그 생각부터가 글러 먹었어. 아직도 내세울 자존심이 남아있다 이거냐! 그런 알량한 자존심 따 위! 적어도 내 앞에서는 보이지 말았어야지! " 자존심! 그 말에 가인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존심이라니! 이미 추 락할 데로 추락한 자신에게 그런 감정같은 것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가인은 쓰러진 몸을 일으켜세우며 브루스에게 버럭 소리질렀다. " 누가 자존심을 내세웠다고 그러는 거에요! 그냥 말하기 싫었어요! 말해봤 자 뭐가 달라진다고! 오히려 더 소동이 일어날게 뻔하잖아요! 기껏 배려한 답시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데! " 그런데 그걸! ' 그런 식으로 말할 것까지는 없잖아! ' " 나는 그 날 있었던 일은 하나도 빠짐 없이 꼬박꼬박 브루스에게 보고해야 만 하는 거에요? 브루스가 제 부모라도 되요? 그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화내는 거에요! " " 누, 누가 네 녀석의 부모 노릇 따위 할 성 싶으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여대지마라! " 브루스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가인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기껏 진심으로 걱 정해줬더니, 이 얼간이가! "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좀 얻어맞은 것 뿐이라고요! 그런 걸 일일히 얘 기할 수도 없잖아요? " " 그 얻어맞았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내 제자라는 녀석이 칠칠치 못하게 어중이 떠중이에게 맞고 다니기나 하고! 대체 그 꼬락서니가 뭐야! 그래 가지고서도 내 제자란 말이냐! 너같은 녀석을 받아들인 건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이자 최악의 결과다! " " 아아- 결국 날 걱정한게 아니라 자기 걱정이었어! 최대의 오점이고 최악의 결과라서 미안하네요! 지금껏 잘도 이런 녀석 가르치시느라 고생하셨어! " " 말 다 했냐! " 결국 폭발한 브루스가 가인을 후려치려고 할 때,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시 민과 세희가 그들을 뜯어말렸다. 브루스는 이를 갈며 그녀들을 뿌리치려고 했 지만 뒤를 이어 달려드는 오퍼레이터 걸들의 공세에 꼼짝없이 사지를 붙들려 뒤로 밀려났다. 가인과 브루스는 본부실의 끝과 끝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서 로에게 악담 퍼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브루스가 화난 이유 맞춰 볼까요? 자기 샌드백을 남이 치니까 열 받은 거! " " 샌드백인줄은 알고 있었냐? 그거 참 기특하군! 주제 파악을 아주 잘 해! " " 우와- 그래 놓고선 무슨 '내 제자'야! 결국 앞에서 말했던 것도 다 거짓말 이었어! " " 나에게는 제자가 곧 샌드백이다. 그렇게 맞고서도 여태 모르고 있었냐! " " 다 필요없어! 제자고 스승이고 다 필요 없다고요!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테니까 브루스는 일체 신경 꺼요! 알았어요? 신경 끄라고요! " " 흥! 누가 신경 써줄 줄이나 아냐! 나도 내 맘대로 할테니 네 놈도 신경 꺼 라, 얼- 간아! " " 누가 얼간이야! " " 얼간이를 얼간이라고 하지 그럼 바보라고 하더냐? 바보가 들으면 피 눈물 을 흘리며 통곡하겠군! 너에게는 바보란 말도 아까워! " " 내가 얼간이라면 브루스는 애늙은이에요! 나하고 이렇게 말 싸움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요?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 " 나, 나잇살? 이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가! " 그렇게 자꾸만 싸움이 원색적으로 변해가자 둘을 말리던 시민과 세희 일행 도 급속도로 심신이 지쳐갔다.그녀들은 브루스의 괴력에 떠밀리지 않도록 안 간 힘을 다하며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소동이 끝나기를! " 파문이다! 너 같은 녀석은 파문이야! " " 저야 샌드백 신세를 면하니 좋기만 하네요! " 하지만 그들의 바램은 수정과 닥터가 오고 나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모든 소동이 진정된 것은 그들을 소집한 장본인이 직접 작전 본부실 에 모습을 드러내고 난 뒤였다. " 자자- 두 사람 다 진정되었습니까? 진정되었다면 슬슬 회의를 진행하고 싶은데. " 시폰 뤼멘은 자신의 앞에 미묘한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 브루스와 가인을 바 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시폰이 자신의 양아들들을 이끌고 본부실에 들어와서 맨 처음 볼 수 있었던 것은 마치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브루스와 가인, 양 패로 나뉘어 서로를 잡아끄는 오퍼레이터 팀의 모습이었다. 시폰의 말에 수정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가뜩이나 마음이 들지 않는 타지부 사람에게 한국 지부의 치부를 보여준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심정을 알기나 하는 건지 여전히 브루스와 가인 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풀지 않았다. 정확히는 풀 죽은 가인보다 이를 갈고 있는 브루스 쪽이 문제였다. ' 제발 제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주세요. 스승님. ' 이런 수정의 희망사항은 브루스의 다음 말에 대번에 박살났다. " 흥- 그래. 과연 이 이른 시각에 우리를 불러낸 용무가 무엇인지 한번 들 어보기나 할까, 코쟁이. " ' 코, 코쟁이! ' 그 말에 작전 본부실의 모두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브루스를 돌아보았 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지부의 사령관을 저런 호칭으로 부를 수 있다 는 게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듣고 있던 수정으로서는 그야말로 기절하고 픈 심정이었다. " 크, 크크크. 코쟁이라고! " 시폰의 옆에 있던 그람드링은 설마 자신의 마스터에게 저런 말을 하는 인 간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그에 반하여 동 생인 오르크리스트는 마치 자신이 욕을 먹은 것처럼 분개했다. " 웃지마, 그람! 그리고 피스 그레이! 너, 감히 마스터에게! " " 아아- 그만두거라, 크리스. 조용히 있어. " 시폰은 흥분한 오르크리스트를 달래며 브루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마치 어린 아이를 꾸짖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 지금은 공적인 일로 모인 것입니다, 피스 그레이. 사적인 일로 마음이 상 했겠지만 그 감정을 회의실까지 가져오지는 말아주세요. " " ……네 녀석, 지금 나에게 훈계하는 거냐? " " 그럴 리가요. 노파심에서 나온 부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른 시각에 불 러낸 용무라는 것도 얘기하고 싶고 말이죠. " " 흥. " 브루스는 좋을데로 해보라는듯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가인 일행은 감탄 의 눈초리로 시폰을 바라보았다.설마 저 브루스를 말로서 타이를 수 있는 인 간이 있을 줄이야. 과연 사령관…… 이라는 걸까? " 피스 블루 유가인 씨. " 그때 딴 생각에 빠져 있던 가인을 시폰이 정확하게 호명했다. 가인은 아침에 작전 본부실로 호출되었을 때의 긴장감을 떠올리며 자세를 바로했다. " 아, 예. 말씀하십시오. " " 난데 없이 불려와서 당황했었죠? 대체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하고요. " " ……예. " " 제가 대략 무슨 일로 당신을 부른 거라 생각합니까? " 시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가인을 대했다.하지만 가인은 그 얼굴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표정만 웃고 있을 뿐이지 아무런 감정도 서려있지 않은 껍데 기 뿐인 웃음이었던 것이다. " 아무래도 역시……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겠죠. " 가인은 그렇게 말하며 힐끗 시폰의 옆에 있는 그람드링을 노려보았다. 그람 드링은 가인과 눈이 마주치자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엄지 손가락을 밑으 로 내렸다. 그 모습에 가인은 애써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 을 느꼈다. " 흐음. 그래요. 그 일 때문입니다. 자초지종은 어제 감시 카메라에 찍힌 영 상을 봐서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스 알리자린과 푸르푸린에게 들 은 바도 있고요. " 시폰의 말에 가인과 모두는 내내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아무래도 피스 알리자린과 푸르푸린이 그의 사람인 만큼 그쪽 편을 들어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모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 잘못은 모두 피스 알리자린에게 있더군요. " " ……예? " 그 의외의 말에 세희와 수정, 닥터는 모두 눈만 깜짝이며 서로를 돌아보았 다. 물론 당사자인 가인도 얼이 빠지기는 마찬가지.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시폰의 옆에 있던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를 바라 보았다. 그들은 무엇이 불만인지 저마다 시큰둥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 뭐야, 이거……. ' 별 일 없이 넘어가는 건가? 그람드링에게 주의나 주고서? 겨우 그런 일 때문 에 자신들을 이 아침부터 소집한 거란 말인가? 가인은 오히려 일이 쉽게 풀려나가자 허탈함마저 들었다. 뭔가 맥이 빠진다 고 해야하나……. 호출을 받고서 지금껏 긴장해왔던 자신이 다 바보같다. 옆을 돌아보니 시민이 다행이라는듯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인도 힘 없는 미소를 보낸다. 하지만 시폰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 피스 알리자린의 일방적인 시비와 일방적인 구타. 예, 가인 씨는 피해자 입니다. 닥터에게 들은 바로는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다는 것 같은데 이렇 게 건강해 보여서 마음이 놓입니다. 다행이에요.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가인을 직시했다. " 그런데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아십니까? " " 예? " 무엇을, 뜻하냐니? " 무력하게 당했단 말입니다.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같은 능력 자 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형편없이 당했어요. " " 그, 그게 무슨 뜻이죠? " 가인은 목소리를 떨며 되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폰의 눈빛이 마치 속마 음마저 들여보는 것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시선을 피할 수 가 없다. " 오라 능력자로서의 당신은 무능력하다는 겁니다. 마치 아무 힘도 없는 민 간인처럼. " 무능력? 내가? " 거기다 사사건건 말썽만 일으킵니다. 어제와 같은 경우도 그래요. 분명 피스 알리자린이 시비를 건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당신이 참기만 했으 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주먹을 휘둘렀죠. 그 주 먹을 휘두른 상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의 소중한 전력입니다. 당신과는 다르죠. 만약 그가 어제의 일로 상심이라도 하면 어떡하겠습니 까? 그래서 전투에 차질이 생기면? 더구나 당신은 오늘 아침도 멋지게 한 건 해주시더군요. 본부실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난투극- 과연 트러블 메이커다워요. " "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사령관 님? " 시폰의 노골적인 비난에 수정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짤랐다. 시폰은 긴장 하는 한국 지부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씩 훑어보다가 이내 가인에게 다시 눈 을 돌렸다. 그리고 말한다. " 그러니까 요는 오라 능력자가 아닌 당신은 필요 없습니다. 유가인 씨, 당 신은 해고에요. " 해고. 해고. ' 해고라고? ' 침묵. 방금 전까지 소란스럽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조용해진다. 세희와 오퍼 레이터들은 숨도 쉬지 못하며 상황을 응시, 닥터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 팔 짱을 낀채 고개를 돌리고 있던 브루스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리고, 쿵 " 해고라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설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씀을 하 시는 건 아니겠죠! 누구 멋대로 가인 씨를 해고시키겠다는 겁니까! "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쳐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는 다름아닌 한시민이 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좀처럼 보기 드문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얼마나 살벌했던지 아무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였다. 시민이 이런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녀의 동거인들 외에는 처음이었기에 작전 본부실의 모두는 식은 땀을 흘리며 한결 같이 생각했다. ' 역시 온순한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서워……. ' 그렇게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고만 있자, 시민은 곧 제 정신을 차리고 얼굴 을 붉혔다. " 아, 저…… 지금 제가 무슨 말을……. 소, 소리질러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방금 전 사령관 님의 말씀은 부조리하다고 생각하기에……재고, 해주시기 를 바랍니다. "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 다시 앉았다. 시민은 옆에서 가인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가뜩이나 붉어진 얼굴을 더욱 붉혔다. 브루스의 혀를 차는 소리도 수치심을 자극하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수정이 입을 열었다. "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시민 씨. 옳은 말씀 하셨어요. " 수정은 냉정한 눈으로 시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 시폰 사령관 님. 아니, 정확히는 한국 지부 대리 사령관 님이라고 해야겠 군요. 대리 사령관 님은 어디까지나 진 사령관 님의 대신으로 한국 지부의 일을 맡고 계십니다. 대리 사유는 휘하의 피스 대원들은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개성이 강하기에 대리 사령관 님이 맡는 쪽이 더 효율적이다, 라는 것이었죠. " " 어이-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니, 그게 뭔 뜻이야? " 수정의 말을 듣던 그람드링이 발끈하며 소리쳤지만 시폰은 손짓으로 그를 제 지하며 재미있다는듯 수정을 바라 보았다.수정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거 침없이 말했다. " 결국 대리 사령관님에게는 피스 알리자린과 푸르푸린, 화이트와 버밀리온 에 대한 지휘권만 있을 뿐, 그 외의 권리는 모두 전시 상황에 한해 제한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피스 블루를 해고시킬 수 있는 권한도 대리 사령관 님에게는 없고요. 그러니 경솔한 발언으로 대원들 사이에 불신감을 조성시 키지는 말아주십시오. " 사정없이 시폰을 몰아세우는 수정의 언변에 작전 본부실의 모두는 소리 없 이 그녀에게 응원을 보냈다. 평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코스츔 비서 아가 씨였지만 이럴 때의 그녀는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수정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에 조금도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 으음.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 결국 시폰도 자신의 말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지! 시민과 수 정 일행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시폰의 악의적인 장난에 놀아난 기 분도 들었지만, 그래도 장난으로 끝난게 천만다행이다. 위잉 하지만 긴장을 풀기에는 너무 일렀던 것일까? 모두가 채 마음을 추스리기 도 전에 시폰은 작전 본부실의 통신 스크린을 열었다. 그러자 스크린에는 이 자리의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폰은 술렁이는 좌중의 반응을 즐기며 새로운 안건을 제시했다. " 그럼 이번에는 그 권리를 가지신 분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할까요? " 화면 속의 남자. 그는 근 한달 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진 사령관이었던 것이다! " 아아- 오늘부터 또 그 얼굴을 봐야만 하는 건가. " 채영과 삼인방은 여느 때처럼 작전 본부실 밖의 휴게실에서 푸념하고 있었 다.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쇼파에 몸을 쓰러뜨리고, 빈 종이컵을 입에 물고 칭얼거리는 것이 어지간히들 작전 본부실에 들어가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아니, 정확히는 한 사람을 만나는게 싫은 것이었다. 시폰 뤼멘. 자신들의 상관인 그는 여러모로 호감이 가지 않는 남자였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얼핏 쾌활하고 밝은 둥, 진 사령관보다 인간미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객관적인, 겉으로만 보이는 기준에서였다. 실제로 그는 사람 목숨 쯤은 파리 목숨보다도 쉽게 여기며, 효율적인 방법 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시체의 산을 쌓는 학살자였다. 그의 진면목을 뼈저리 게 알고 있는 채영 일행으로서는 그런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고 문이었던 셈이다. " 하지만……이대로 있을 수만도 없지. " 채영은 늘어진 삼인방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녀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삼인방들에게 소리쳤다. " 궁상은 거기까지만 떨고 다들 일어나! 후배들한테 모두 맡겨두고 언제 까지 농땡이칠 셈이야! 세희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아! " " 우리의 귀염둥이는 강해. 그치? " " 맞아. 우리 없이도 혼자서 잘 해낼 거야. " " 이제 노장은 물러날 때인가. " 삼인방은 채영의 손에 몸을 흔들면서도 여전히 의욕없이 중얼거렸다. 하 지만 웃을 수도 없는 것이, 실제로 그것이 그녀들의 심정인 것이다. 계속 되는 도리를 벗어난 상부의 명령에 그녀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피스메이커 를 그만둘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지금껏 피 스메이커의 일을 해오면서 가졌던 자부심과 책임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제와서 나 몰라라 하고 무책임하게 이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채영이기에, 그녀는 더 이상 늘어 진 삼인방들을 몰아세울 수 없었다. 거는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니 까. 채영은 삼인방에게서 피스메이커에 좌절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서 글픔을 느꼈다. 또각 또각 그때 휴게실의 복도 쪽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채영이 돌 아보니 그곳에는 뤼멘 형제들의 담당의라는 중국인 여자가 그녀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름이 주유화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녀는 시폰 사령관 쪽의 사람이다. 채영은 내키지 않지만 유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메디컬 센터에 계실 분이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 " 아, 오퍼레이터 팀의 치프시군요. 이름이……. " " 윤채영입니다. " " 맞아요, 채영 치프. 저번 작전 본부실에서 뵌 후 한달 만이죠? " 유화는 채영이 자신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든 말든 웃으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채영은 덜떠름하게 유화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 본부실에 일이 있으신가요? 그런 것치고서는 길을 빙 둘러오셨네요.엘 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그대로 복도를 따라가면 바로 본부실인데. " " 역시 그랬군요. 어쩐지 저번에 왔을 때 보다 오래 걸린다 했더니. " 지금 채영 일행이 쉬고 있는 휴게실은 평소와 달리 본부실의 뒤편에 위치 한 휴게실이었다. 행여나 출근하는 시폰과 서로 마주칠까봐 자리를 옮긴 것인데, 그 옮긴 자리로 유화가 찾아온 것이다. 유화는 채영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닫고 그녀에게 물었다. " 그나저나 채영 치프는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 거죠? 휴게실이라면 입구 쪽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굳이 왜 이런 반대편까지? " 뜨끔. 채영은 유화의 지적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떨어뜨렸다. 가뜩이나 떳떳하지 못하게 쉬고 있어서 양심이 찔리는데, 이 눈치 빠른 여자가 대번에 그 부 분을 지적한 것이다. 채영은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 아니- 하, 하하. 때로는 반대편 휴게실도 애용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서 말이죠. " " 그렇다고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말인가요? 그러다 급한 호출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요? 너무 직무에 소홀한 것 아닌가요? " 전직 군인이었던 유화는 채영의 태만함에 자신도 모르게 옛 버릇이 튀어 나와 그녀를 꾸짖었다. 난데없이 꾸중을 들은 채영은 자신도 모르게 유화 에게 사과할뻔하다가 곧 그녀가 자신의 상관이 아님을 깨닫고 인상을 찡 그렸다. ' 뭐, 뭐야. 이 여자. 분명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렇다고 내가 자기 부하인줄 아나? ' 거기다 채영은 피스메이커의 한 부서를 책임지는 치프다.그런 치프에게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도 아닌 일개 담당의가 질책을 하다니.이건 엄연히 하극상인 것이다. 채영은 쌍심지를 돋구며 유화에게 한소리 하려고 했지 만, 그 전에 유화가 먼저 말했다. " 그럼 지금 본부실에 소집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겠군요? " " 소집? " 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다가 유화가 한심하다는듯 자신을 바 라보자 곧 얼굴을 붉혔다. 아, 그래. 어차피 땡땡이 치고 있던 건데 알 게 뭐야. 흉을 볼테면 얼마든지 보라고! " 소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 " ……하아, 정말 모르고 있었군요. 저도 닥터에게 연락을 받고 알았지 만, 현재 피스 블루 유가인과 그의 동거인들이 시폰 사령관에게 호출 되었다고 하더군요. " " 예? 가인 씨가요? 아니! 대체 무슨 일로? " 채영은 유화의 입에서 가인의 이름이 언급되자 대번에 정색하며 소리쳤 다. 유화는 그 반응이 의외였는지 새삼 채영을 살펴보았다. " 아마도 어제의 난투극이 발단이었겠죠. " " 난투극? " " ……설마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 겁니까? " " ……. " 채영은 다시 한번 얼굴을 붉혔다. 분명 어제라면 휴가를 써서 자신의 방 에 틀어박힌 기억 밖에 없었다. 전날의 전투에서 시폰과 그람드링의 만행 에 도저히 정상적인 업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핸드폰이고 무전기고 다 꺼놓고 지냈으니 당연히 가인에 대한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유화는 기가 막히다는듯 혀를 찼다. " 대체 아는게 뭐가 있는건지. 치프로서 자각은 있는 겁니까? " " 면목, 없습니다……. " 채영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유화는 어쩔 수 없다는듯 한 숨을 쉬며 말했다. " 최근 어수선한 일들이 많다지만 그럴수록 본분에 충실해야하는 겁니다. 당신이 넋을 놓고 있으니 밑의 직원들도 덩달아 늘어지는 것 아니겠습 니까? " " 예에……. " 채영은 휴게실에서 여전히 빈둥거리고 있는 삼인방들을 돌아보며 힘없이 고 개를 떨구었다. 저것들이……. 아직도 저러고 있단 말이지. 어쨌든 이 유화라는 여자는 이상하게도 고압적인 부분이 있었다. 채영은 본 능적으로 그녀와 자신의 상성이 맞지 않음을 느꼈다. " 그나저나 난투극이라니. 그게 오늘 소집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죠? " " 보통 난투극이 아니니까 그렇죠. 피스 대원들끼리 싸움을 벌인 거니까. " " 예? " 채영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피스 대원들끼리의 싸움이라니! 그것은 그녀가 5년 여 동안 일해오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최근 들어 피스 블 랙과 같은 능력자가 나타나면서 생긴 일들이 자대 내에서도 일어났단 말인가! 채영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급하게 물었다. " 가인 씨는? 가인 씨는 어떻게 됐나요? 설마 그 피스 대원과 싸웠다는 사 람이 가인 씨라는 건 아니겠죠? 가인 씨는 현재 오라도 사용하지 못할텐 데! " " 정말이지, 당신들 한국 지부 사람들은 끝내주게 무심하군요. 자신들의 동 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니! 당연히 피스 알리자린 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당했지요! 아마 닥터가 빨리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거라고요! " " 아, " 유화는 자신의 말에 충격을 받는 채영의 모습에서 역시 가인을 챙겨 줄 사람 은 자신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닥터에게서 가인이 시폰에게 호출당 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부리나케 작전 본부실로 달려왔다. 적어도 시폰 사 령관 쪽의 사람인 자신이 가인의 편을 들어준다면 그가 부당한 처사를 당하 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뤼멘 형제들의 비밀을 그녀 가 알고 있는 이상, 시폰이 유화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 터였다. ' 그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 회의가 끝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작전 본부실로 가야만 한다. 유화는 안 절부절하는 채영을 내버려두고 휴게실을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 휴게 실 입구로 막 들어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유화를 황급히 지나치는 그녀는 채영과 같은 오퍼레이터 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 저 사람……혹시 본부실에서 온 건가? ' 설마 회의가 이미 끝났다는 것은 아니겠지! 유화는 불길한 생각을 금치 못하며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생 각대로 여인은 방금 전까지 회의에 참석해 있던 문세희였다. " 치프!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었던 거에요! 큰일 났어요! 큰일! " 세희는 다짜고짜 채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끄며 외쳤다. " 가인 씨가 해고당했어요! 피스 대원에서 제외되었다고요! "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8 - Ｂy Ｎext Ｎeo =-=-=-=-=-=-=-=-=-=-=-=-=-=-=-=-=-=-=-=-=-=-=-=-=-=-=-=-=-=-=-=-=-=-=-= " 마스터- 어제 말한 평화적인 방법이란 게 고작 그런 거였어? " 그람드링은 코웃음을 치며 시폰에게 빈정거렸다.그는 회의를 끝내고 시폰의 개인 사무실로 돌아온 내내 이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작전 본부 실에서 취한 마스터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껏 큰소리 쳐놓고 한다는 방법이 병신의 해고라니. 애초에 오라도 사용하지 못하고 밥만 축내는 병신의 해고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녀석을 이 제 와서 해고시킨다고 해도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것이다. 평소라면 마스터에게 불손하게 구는 그람드링을 꾸짖었을 오르크리스트지만, 그도 이번만큼은 형과 의견이 같았는지 침묵하고 있었다. 시폰은 지쳤다는듯 풀썩 쇼파에 몸을 눕히며 말했다. " 그람- 내가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너는 좀 더 인내가 필요하겠다. 그렇게 급해서야 어디 열매가 익기도 전에 남아나겠느냐? " " 체- 기다리고 있는 건 나하고 안 맞아. 어차피 승자는 빨라야해.누구보다 도 빨리! 굼벵이같이 느려봤자 죽는 건 이쪽이라고. " 시폰은 당연하다는듯 대답하는 그람드링의 모습에 혀를 찼다.그람드링은 동 생인 오르크리스트와는 달리 유난히 다혈질적인 면이 많았는데, 시폰은 그것 이 패턴 알리자린의 능력인 순간 예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의 미래를 알 수 있는 그람드링으로서는 몬스터와의 싸움 시 상 대보다 빠르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왔던 것이다. 그에 반하여 오르크리스트는 타인의 시야를 훔쳐보는 원격 투시의 영향으로 인해 어딘가 방관자같은 경향이 있었다. " 마스터, 열매가 익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 " 그때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오르크리스트가 반문했다. 시폰은 핵심을 짚 어내는 그가 기특했던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좋은 지적이구나, 크리스. 익지 않은 열매는 시지. 맛이 없단 말이다. 그 런 맛 없는 열매를 따먹어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어요. " " ……그러니까 열매가 익든 말든 그게 이번 일과 뭔 상관이냐고. " 그람드링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시폰에게 쓰다듬을 당하는 동생의 모습에 작게 투덜거렸다. 도대체 저 녀석은 뭐가 좋다고 저런 인간에게 엉겨붙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저런 표정이나 짓다니! 이건 불쾌감을 넘어서 혐오감까지 들 정도다. 시폰은 그람드링의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쇼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상관은 있지. 그게 바로 파괴의 미학이니까. " 그 말을 하는 시폰의 얼굴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그람드링 은 행여나 그가 또 자신에게 다가올까봐 일찌감치 벽쪽으로 물러섰다. 시폰은 그에게 신경쓰지 않으며 오르크리스트에게 물었다. " 크리스, 아까 본부실에서 피스 블루의 해고가 결정되었을 때 모두의 반 응이 어떻더냐? " " 가관이더군요. 그렇게 격렬하게 항의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째서 해고당 한 본인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성화인지……. " " 그거야 그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처럼 여길줄 아는 사람들이지. 그런 의미에서 피스 블루는 꽤 인복이 많은 편이야. " 시폰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일인 마냥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 하지만 그럴수록 부숴뜨리는 보람은 더욱 커지는 법. 절망이란 적정선이 있는 거라서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곧 파멸이 되고 말지. 절망하고 있 는 인간들에게 더욱 큰 절망을 안겨줄 때! 과연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 이려나? 후후후,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지 않느냐? " " ……. " 낮게 웃음을 흘리는 시폰의 모습에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는 안색이 창 백해졌다. 아무리 십년이 넘게 그를 섬겨온 그들이지만 저 웃음 소리만큼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시폰은 곁에 있는 오르크리스트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 될 수 있으면 빠르고 조용하게. 내 말 알아듣겠지? " " 마스터, 그 말씀은? " 오르크리스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시폰이 말한 바를 알아듣기는 했지만, 과연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 건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그런 명령을 내린다는 건, " 오라의 주인을…… 죽여라. " 하지만 시폰은 주저없이 오르크리스트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그는 소년에 게 유가인의 암살을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마스터의 의도를 알아 차린 그람드링이 감탄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 하- 하하하. 과연! 그거야말로 기 막히군! 대단해, 마스터! " 그람드링은 자신도 모르게 상상하고 말았다.유가인이 해고를 당했다고 야 단법석을 피우던 그들에게 유가인의 사망 소식을 통보한다! 그때 그들이 보일 표정이란! 그 순간을 생각하자 알 수 없는 흥분에 전신이 짜릿해지는 느낌이었다.이 것이 바로 마스터가 말한 파괴의 미학이라는 건가! 시폰은 몸이 달아오른 그람드링을 바라보며 미소했다. " 이해하겠느냐, 그람? " " 응! 최고야! 언제부터 시작하면 돼? " " 글쎄……. 그람은 언제부터 시작하고 싶어? " 도리어 자신에게 되묻는 그에게 그람드링은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 지금 당장! " 그 꼴보기 싫은 병신을 없애버릴 수 있다니! 그런 일에 시간을 길게 들일 필요도 없다! 지금 당장 죽여주마! 그람드링은 그야말로 흥이나서 오르크리스트를 억척스럽게 끌고 사무실밖 으로 나갔다. 그에게 끌려가는 오르크리스트는 어딘가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었는데, 아무래도 형처럼 아버지의 미학에 공감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쌍둥이 형제들을 내보내고 시폰은 쇼파에 앉아 앞의 회의 때 있었 던 일들을 회상했다. 그의 오랜 악우(惡友)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좋을 데로 하도록. ' 유가인의 해고에 그는, 지금은 진 사령관이라는 이름을 쓰는 그 남자는 대 수롭지 않다는듯 시폰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다. 그렇게 쉽게 그가 오라의 주인을 방치시킬 줄은 몰랐기에 솔직히 시폰은 실망스러웠다. 좀 더 고민하고, 좀 더 곤란스러워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싶었건만. " 그래……. 너는 예전부터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지. " 그렇기에 더더욱 보고 싶다! ' 유다, 네 녀석이 절망하는 모습을! ' 오라의 주인이 죽었을때, 네 녀석이 걸어온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때도 너는 그 무심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진 사령관의 포커 페이스가 깨졌을 때, 그때가 바로 시폰이 바라는 파괴의 미학이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삐삐삐삐 그때 희미한 무전기의 신호음이 시폰의 고양된 기분을 깨뜨렸다. 시폰은 쇼파 에 기댔던 머리를 일으켜 세우며 왼손에 찬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무전기의 액 정에는 그가 비밀 리에 파견했던 수행원이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메세지가 적혀 있었다. 검은 고양이, 나타나지 않다. 시폰은 그 메세지를 확인하고 미소지었다. " 슬슬 나타날 때가 되셨을 텐데. 숨바꼭질은 질리지 않았나,피스 블랙? "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지루했다. 가인은 26구역의 거리를 걸으며 내내 생각했다. 가족들을 내버려두고 오라 를 각성하면서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뭐냐고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지금까지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책해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 것 도 없으니까. 그렇게 자책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힘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라고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피스 대원이 아닌 유가인은 더 이상 오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 었다. 더 이상 마리 선배와 유리와 진우 씨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 었다. 유가인은 더 이상 피스메이커가 아니다. ' 퇴직금은 아마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나올 겁니다.그러니 너무 걱 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충분히 수고했습니다. ' AI슈츠를 불러낼 수 있는 무전기와 피스 카드를 반납하는 가인에게 시폰은 그렇게 말했었다. 웃으면서, 지금까지 수고했다고, 더 이상 몬스터들과 싸울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축하해주듯이 말했다. ' 나는……빈 껍데기야. '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오라 능력으로 살아남은 주제에 오라 능력도 사용 하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에는 피스메이커에서도 쫓겨난,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인간이다. 가인에게 있어서 피스메이커란 곳은 죄를 씻을 수 있는 장소였다. 혼자 살 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자신도 누군가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그 래서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도 된다는, 그런 희망을 얻는 장소였다. 어쩌면 면죄부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 는 수단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벌이었던 걸까? 피스메이커를 그런 식으로 생각했기에 나는 쫓겨난 걸까? 그래서 오라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걸까? ' 나는 왜……. '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왜 그때 가족들과 죽지 않고, 대체, 무엇을 위해……. ' 혼자 살아남은 거지? ' 피스메이커가 아닌 유가인은 더 이상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 가인 씨. ' 오른발을 절면서 걸어가는 가인의 등은 어딘가 왜소해 보였다. 시민은 브루 스와 함께 가인의 뒤를 따르며 그의 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언제나 넓었던 등이었다. 언제나 믿음직했던 등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영에게 납치된 날을 기점으로 차츰 차츰 본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그리고 오늘, 피스메이커에서 해고 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시민은 그것이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그가 저렇게 변한 것이 다 자신 의 탓인 것만 같았다. ' 시민 씨를……사랑하는데요? ' 몇 번이나 가인이 자신에게 고백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때 그의 고백을 받 아들였더라면, 그래서 한시영의 손에서 그를 지켜낼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 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막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어째서 지켜줄 수 있을 때 지켜주지 못한걸까? 어째서 그의 마음을 의심했던 걸까? 왜 그를 믿지 못하고! 왜! 왜! ' 왜 그렇게 겁을 냈던 걸까? ' 그 결과가 이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눈 앞에서 가인이 좌절하고 있어도,슬퍼 하고 있어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손을 뻗으면 그에게 닿을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는 그 손을 뻗을 자격도 없다. 그렇게 시민이 눈시울을 붉히며 전전긍긍하고 있자, 그 옆에서 걷고 있던 브루스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직도 가인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았다. 아니, 풀리기는 커녕 녀석이 앞으로 무슨 궁상을 떨든 일체 모르는 척 할 셈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자꾸만 시민이 울상을 짓고 있으니 도저히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얼간아. " 브루스는 애송이에서 한단계 내려간 호칭으로 가인을 불렀다. 가인은 자신 을 부르는 목소리에 비틀거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 이 완전히 죽을 상이었던지라 브루스는 인상을 푸욱 찡그리며 한 소리했다. " 세상이 망하기라도 했냐? 보고 있는 내가 한심해서 더 못 봐주겠다. 어 차피 오라 능력도 사용하지 못하는 네가 피스메이커가 아닌들 무슨 상관 이냐?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잖아? " " ……그렇네요.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죠. " 가인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브루스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 이게 아닌데. 위로를 해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거지? 옆을 돌아보니 여지껏 본 적 없던 시민의 도끼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브 루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이를 갈았다. ' 크으. 어쩔 수 없지. 녀석은 나에게 있어서 세 끼 식사를 책임져주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비위를 맞춰주는 수 밖에.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유가인, 저 얼간이를 걱정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저 밥을 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다.' 브루스는 스스로를 억지로 납득시키며 가인에게 말했다. " 어차피 언더 시티에 들락날락거려봐야 네 녀석의 마음만 뒤숭숭해질 뿐이다. 잠시 오라를 되찾을 때까지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해. 그 증거로 네 녀석을 따라다니던 팔라딘 대도 아직 철수하지 않았잖나. 그리고 네 녀석의 기억도 지우지 않았고. " " 아, " 그제야 시민은 짤막한 탄성을 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브루스의 말대로 피스 대원들에게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팔라딘 대원들이 비밀리 에 붙어 있었다. 지금 시민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브루스의 말대로라면 분명 어딘가에서 가인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피스메이커에서는 가인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만약 그가 완전 히 해고당한 것이라면 기억을 지울 뿐만 아니라 피스 관계자들과의 접촉도 일 체 단절시키려고 했을텐데, "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가인 씨에게는 특별히 주거지를 옮기라는 얘기도 없었어요! 아직 해고당한 게 아니군요! " " 글쎄. 뭐, 어쨌든 그런 이유에서 진 사령관도 그 코쟁이 놈의 제의를 승 락한 게 아닐까. 오라를 되찾은 다음에 돌아오라는 의미에서. " " 역시! 그래서 아까 브루스 님도 가인 씨의 해고에 반대하지 않았던 거군 요! 그럼 그렇지! 브루스 님이 조용히 계시길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 어요! " " ……흥. 그저 반대해줄 의리가 없었을 뿐이다. " 눈에 띄게 기뻐하는 시민을 내버려두고 브루스는 뚱한 표정으로 슬쩍 가인 을 바라보았다. 가인은 진상을 안 것 치고서는 의외로 기뻐하는 구석이 없었 다. 오히려 더욱 의기소침해진 모습이다. 시민도 그런 가인의 기색을 눈치챘 는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 가인 씨? " " 찾을 수…… 있을까요? " 가인은 힘 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상황에 비관적이었다. "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지금껏 되찾지 못했는데……그런 제가 오라를 다 시 사용할 수 있을까요? " 그 비통하면서도 어딘가 절박한 물음에 시민은 답해주지 못했다.그녀도 확 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가는데 가인의 오라는 여전 히 침묵하고 있다. 옆에서 그를 줄곧 지켜봐왔던 그녀로서도 답답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때 브루스가 코웃음을 치며 가인에게 소리쳤다. " 그런 어리석은 질문이나 하니까 네 놈이 얼간이라는 거다! 여기서 우리 가 오라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해주면 네 녀석이 정말로 오라를 찾을 수 있 다고 생각하냐! 누구도 널 도와주지 못해! 패턴 블루의 오라를 일깨울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유가인, 너 자신 뿐이란 말이다! " 도와줄 수 있었다면 진작에 내가 도왔을 거다! 브루스는 거기까지 말하려다가 서둘러 입을 닫았다. 하마터면 속이 상해서 본심이 드러날 뻔 한 것이다. ' 아니지. 본심이랄 것도 없지. 내가 저런 멍청이를 돕기는 왜 도와! ' 브루스는 애써 본부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고집스럽게 가인을 외면 했다. 그래. 애송이 뒤치닥거리는 이제 사양이다. 나도 할 만큼은 했어.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 테다. 녀석도 자기 입으로 신경 끄라고 했어! 그렇게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중얼거리는 그에게 가인은 멍하니 시선을 보내다가 곧 입을 열었다. " ……그렇군요. 결국 오라를 깨울 수 있는 건 저 자신 뿐이죠. " " ……? " 그 중얼거림을 들은 시민과 브루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가인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가인은 어느새 입가의 미소를 되찾고 있었다. " 맞아요.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결국 제 자신이 노력하는 수 밖에 없는데.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했어요. 그렇게 또 쉽게 포기하려고 했어……. " 더 이상 나에게 포기하겠다 란 선택지는 없다. 오로지 오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 밖에 없었다. 여기서 주저 앉고 포기해버리면, 그거야말로 자신을 해고 시킨 시폰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 아직은 포기할 수 없어요.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는 한! " 그런 가인의 결정에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소중 한 것을 하나 하나 잃어가는 지금의 상황은 얼핏 그녀의 과거와도 닮아 있었 다. 하지만 같은 상황 속에서 가인은 엄연히 시민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몇 번 씩이나 체념하고 포기했던 그녀와는 달리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것 이다. ' 그런 가인 씨니까……나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 그와 함께 살게 되면서, 그의 포기하지 않는 모습들을 접하게 되면서, 시민 은 무작정 과거를 체념하기 보다는 끌어안고 나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알게 되었다. 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그 녀는 엄연히 유가인이라는 지표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민은 어쩌면 자신이 이 아홉 살이나 어린 소년을 동경하고 있는 건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다. " 브루스. " 가인은 팔짱을 낀채 여전히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 언제나 고마워요. 제 어리광을 받아줘서. " " ……! " 그 뜻밖의 기습에 브루스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숨기지 못하며 가인에 게 한소리하려고 했다. 누, 누가 네깟 놈의 어리광을 받아줬다고! 하지만 열린 입에서는 의외로 아까와 같은 쌀쌀맞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어리광이라는 것을 알면 됐다. " 잠깐.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어리광을 받아준 것처럼 되잖아! 브루스는 쓸데 없는 말을 한 자신의 입을 저주했지만 이미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는 가인과 시민의 웃음 소리가 들려오자 신경이 쓰여 속으로 끙끙 앓았다. 하지만 우거지상이었던 가인이 저렇게 기운을 차린 모 습을 보니 그리 나쁜 기분인 것만도 아니다. ' 뭐, 때로는……. 이런 것도 괜찮겠지. ' 브루스는 혀를 차며 새삼 가인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저 어리버리한 녀석 에게는 아직 내가 필요하다. 내버려두기가 두려울 정도로 약해빠진 녀석. 하지만, ' 지켜주지. 네 녀석이 내 눈에 뜨인 이상. ' 그것이 비록 옛 맹세를 깨뜨리는 일이 될지라도. 삐삐삐삐 그때 브루스의 왼쪽 손목에 찬 무전기에서 미약한 신호음이 흘러 나왔다. 브루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 터 무전이 오는 둥, 달갑지 않은 일 투성이였다. 이제 막 언더 시티에서 돌아왔는데 또 사람을 오라가라 하는 건 아니겠지? " ……! " 하지만 무전의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브루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감각을 넓혀 주위의 차원 진동을 조사해 보았다. 별 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발신자는 26구역에서 무전을 치 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브루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앞서 걷던 가인과 시민에게 말했다. " 잠깐 볼 일이 생각났다. 너희들은 먼저 집에 가있도록. " " 예? " 채 시민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브루스의 몸은 이미 자리에서 사라져 있 었다. 그 난데없는 증발에 시민과 가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돌 아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렇듯 급하게……. 시민은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가인에게 말했다. " 조금 있으면 점심 식사를 준비할건데. 제 때에는 돌아오시겠죠? " " ……그런 걱정이셨어요? " 가인은 왠지 맥이 빠져 중얼거렸다. 하긴 걱정할 사람이 따로 있지. 저 브루스를 자기들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민은 브루스가 늦게 올 기미를 보이자 차라리 잘됐다는듯 가인에게 말했다. " 아, 그럼 오늘은 모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해볼까요? 아마 브루 스 님이 오실 때쯤이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에요. 전 장 보러 갔다 올테니까 가인 씨는 먼저 집에 가 있어요. " " 잠깐, 저도 같이……. " 그녀를 따라가려던 가인은 곧 자신의 오른 발을 내려다보고 뒷 말을 흐렸 다. 이렇게 절름발이가 따라가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다고. 오히려 사람들 이목만 끌어 시민 씨를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 가인 씨? " " 아, 아뇨. 그럼 저는 집에 가 있을 게요. " " 후훗. 예- 오늘 점심 기대하고 있어요. " 시민은 웃으면서 역 앞의 마트로 발 걸음을 돌렸다.가인은 그 묘하게 들 뜬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곧 자신도 발을 절며 집으로 향했다. 《그람, 준비는 끝났어?》 무전으로 들려오는 오르크리스트의 목소리에 그람드링은 자신의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기이하게 목이 비틀린 세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 었다. 그들은 피스 블루 유가인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던 팔라딘의 대원들 이었다. 3인 1조로 활동하는 그들은 비밀 리에 피스 대원들의 신상을 관 찰하고 그것을 상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람드링은 AI슈츠의 힘으로 간단하게 그들의 목을 꺽어버리고 그들의 감 시 겸 대기 용 세이프 하우스를 확보했다.팔라딘 대원들이 세이프 하우스 로 삼고 있던 곳은 다름 아닌, 26구역에 위치한 유가인의 집 바로 앞 집 이었다. " 헤에- 이런 곳에 숨어 있었단 말이지? 이건 완전히 사생활 침해잖아? 스토커가 따로 없구만. " 그람드링은 방 안에 설치된 각종 도청 기구들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자 신들에게 이런 녀석들이 안 붙어 있기를 다행이지,만약 감시자 따위가 있 었더라면 진즉에 이 녀석들처럼 죽여버렸을 것이다. 《그람! 대답해! 뭐하고 있는 거야?》 계속되는 오르크리스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람드링은 조금도 신경쓰 지 않으며 감시 도구들을 발로 으깨버렸다.감시 도구들이 인원에 비해 많 은 것으로 보아 자신이 죽인 녀석들 외에도 또 다른 대원들이 여기를 사 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가인 녀석이 살고 있는 집만 해도 피스 대원들이 네 명이나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12명은 넘는 인 원이 이 방을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개미떼도 아니면서 뭉쳐 살기는. 《그람! 피스 블루가 오고 있어! 빨리 대답해!》 " 아- 되게 쨍쨍 거리네. 자자, 준비 오케이. 마음껏 쏴도 좋아∼ " 그람드링은 오르크리스트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입을 삐죽거렸다.그는 오르크리스트가 저격을 한다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병신 놈은 자신 이 처리하고 싶었는데, 시폰은 동생에게 그 기회를 넘겨준 것이다. 물론 오르크리스트의 특기가 저격인 만큼 당연한 역할 배분이었지만,내키지 않 는 것은 내키지 않는 것이다. ' 제길. 이런 뒤처리나 맡기고. ' 그람드링은 신경질 적으로 바닥의 시체를 걷어차며 2층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골목의 저편에서 자신들의 타킷인 유가인이 미적미적 모습을 드 러내고 있었다. 역시 급하게 언더 시티에서 나온 보람이 있었는지 자신들은 녀석들보다 한발 먼저 이곳에 도착해 있을 수 있었다. " 헤에- 다른 녀석들은 어디다 두고 혼자 오시나? " 아예 죽여달라고 용을 쓰는군. 그람드링은 혼자 뿐인 유가인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저건 자신 의 먹이다. 그 먹이를 오르크리스트 같은 멍청이에게 넘겨줘야 한다니, 분 통 터지는 일이다. 마스터의 명령만 아니라면, 당장! 《그람-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조금만 참고 있으라고. 한방에 격추시켜줄 테니까.》 ' 제길. 이 자식이 지금 날 놀리나. ' 그람드링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오르크리스트에게 소리없이 투덜거렸 다. 지금 녀석은 26구역의 거리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옥상에서 저 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녀석이 사용하는 것은 보통의 저격용 라이플. 일반 군인들이 흔히 쓰는 무기니까 자신들이 저격했다는 증거는 남지 않을 것이다. 아마 마스터는 유가인의 저격을 지구 방위군의 소행 쯤으로 돌릴 생각인가 보다. 그람드링은 유가인이 자신의 집으로 점점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병신이 자신의 집 대문을 여는 순간, 그때가 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아 마 한 방에 격추시킨다는 둥 했으니 십중팔구 헤드 샷(Head shot)일테지. 《그런데 정말 눈 안 빌려줄 거야?》 오르크리스트가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그람드링은 꼴좋다는듯 비웃음을 흘렸다. " 왜?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 새 한마리도 못 맞출 것 같냐? 그거 밖에 안 되면서 무슨 저격이야? " 《쳇. 관둬. 필요 없으니까.》 오르크리스트는 마음이 상했는지 대번에 무전을 끊어버렸다. 아마 저격에 집중하기 위해 연락을 끊은 것일 테지만,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오르크리스트는 오라 능력 없이도 프로 스나이퍼에 맞먹는 저격술을 가졌 지만, 아무래도 의지해오던 천리안의 능력이 없으니 좀 불안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자신의 먹이를 빼앗긴 그람드링이 제대로 그에게 협력해줄 리가 없 었다. 결국 오르크리스트는 이번 미션을 자신의 힘만으로 클리어해야 한다. " 자- 어디 솜씨 좀 볼까, 크리스? " 그람드링은 분해하고 있을 동생을 떠올리며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 았다. 창 밖에서는 유가인이 아무 것도 모른채 자신의 집 대문에 다다르고 있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19 - Ｂy Ｎext Ｎeo =-=-=-=-=-=-=-=-=-=-=-=-=-=-=-=-=-=-=-=-=-=-=-=-=-=-=-=-=-=-=-=-=-=-=-= 오르크리스트가 들고 있는 라이플은 평소와 같은 대전차용 라이플이 아니라 블레이저(Blaser) 저격 라이플이었다. 게다가 그람드링의 눈을 원격 투시할 수 없다는 조건마저 붙었기에 익숙치 않은 망원저격 스코프까지 사용해야 했 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그람드링이 있는 곳에서부터 50미터 쯤 뒤편에 있는 아 파트의 옥상이었다. 옥상까지의 높이를 고려해보면 100미터가 조금 못 되는 거 리였다. 평소 2킬로미터 저격을 행해왔던 오르크리스트에게 있어서 이 정도 거 리에서의 저격은 어린애 손목 비트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다. 모든 것은 완벽하다. 여기서 실수를 할 건덕지는 조금도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다……라는 건 역시 오라 능력을 사용하지 못해 서겠지. ' 그람, 이 고집불통! 오르크리스트는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 형을 속으로 욕하며 스코프의 불소 가공 렌즈로 목표를 찾았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장시간 엎드려 있자니 어 깨가 다 결린다. 거기다 방열성이 좋은 AI슈츠까지 입었건만 무슨 놈의 날씨 가 이렇게 더운가? ' 안되지. 안돼. 이렇게 불평불만이 많아서야 일류 스나이퍼가 될 수 없는 법. ' 오르크리스트는 머리 속을 냉정하게 비우며 다시 목표를 눈으로 쫓았다. 렌 즈에는 옅은 갈색 빛의 대문이 보이고 있었다.언더 시티에서 대충 훑어본 자 료 대로라면 저기가 목표인 피스 블루의 거주지였다. 이제 저 곳으로 목표가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솜씨 좋게 녀석의 머리에 매치 M852 특수탄을 박 아넣으면 된다. 그러면 여느 때와 같이 미션 컴플리트! ' ……왔다. ' 피스 블루 유가인! 녀석이 저격 범위에 들어왔다. 오르크리스트는 차분하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고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기 다렸다. 녀석이 대문을 열기를. 어떠한 생물이든 한 가지 고정된 행동을 이루 고 난 뒤에는 약간의 텀이 생긴다. 그 행동이 어떤 사소한 일일지라도 -예를 들면 문을 여는 행위일지라도- 그 행동을 이룬 순간 두뇌 속의 신체 이미지를 주관하는 신경지도가 재배치되기 때문에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기까지 미세한 딜레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오르크리스트는 그 딜레이가 생기는 순간을 기다렸다. " ……. " 유가인이 대문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 ……. " 약간의 힘과 함께 문이 열린다. " ……. " 그리고 대문을 넘어가는 순간, 바로 그때가 정지의 시간! 탕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 오르크리스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자신은 방아 쇠를 당긴 뒤였다. 블레이저 라이플에서 발사된 탄은 정확하게 그가 노린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그람드링은 2층에서 저격이 끝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뱉은 말은, " 멍청한 자식. " 그것은 오르크리스트의 저격술에 대한 감상이었다. 그의 바보같은 동생은 멍 청하게도 설마, 설마 하더니 정말로 저격을 실패한 것이다! 표적은 엄연히, 그것도 멀쩡하게 살아있다! " 쳇- " 이제보니 오르크리스트가 저격을 실패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라이플 탄이 저 병신의 후두부를 꿰뚫었겠지만, " 우라지게도 운이 좋군. " 놈은 문을 지나면서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져 있었다.그 바람에 총탄은 어이 없게도 녀석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거고. 어떻게 저리도 타이밍 좋게 넘어질 수가 있는 거지? ' 그건가. ' 그러고 보니 녀석은 오른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녀석을 병 신이라고 불렀던 게 아닌가. 그런데 설마 그 절뚝거리던 오른발이 녀석을 살 릴 줄이야. 정말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다. 그나저나 넘어져 있던 녀석도 자신을 노린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라이플 탄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나 보다. ' 병신. 저렇게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으면 죽여달라는 얘기 밖에 더 되냐? ' 저 꼴을 보아하니 오르크리스트의 2탄이 빗나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런데……. " ……! "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람드링은 오르크리스트가 2차 저격을 시도하기 전에 재빨리 그에게 무전을 쳤다. 그러자 곧 히스테릭한 오르크리스트의 목소 리가 무전기에서 터져나왔다. 《뭐야, 그람! 지금 저격 중이라는 거 몰라?》 " 저격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저격. 한 번 실패했으면 그걸로 게임 오버지. 이제부터는 내 차례니까 넌 쉬고 있어! " 《……뭐?》 오르크리스트가 채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람드링은 창틀을 붙잡고 밖으로 뛰 어내렸다. 그리고 가인이 있는 대문 앞에 표범처럼 착지했다. " ……! " 가인은 갑작스레 하늘에서 떨어진 그람드링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아침까지 언더 시티에 있던 그가 느닷없이 AI슈츠를 입고 26구역에 나타났으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람드링은 가인이 자신을 보고 놀라든 말든 무전기에 대고 오르크리스트에 게 소리쳤다. " 알겠냐, 크리스? 내 차례라고! 그러니까 넌 손 댈 생각하지 말고 거기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 혹시 수상한 녀석이 나타났다 싶으면 곧바로 내게 연락하고! " 《뭐, 뭐야? 말도 안돼! 무슨 짓을 하려는……. 》 그람드링은 용건이 끝나자 대번에 무전기를 꺼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가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 Hi- 좋은 오후야. 그렇게 생각하지? " " ……무슨 일로 온 거야? " 가인은 경계하는 빛을 늦추지 않으며 그람드링을 노려보았다. 그람드링은 가 인과 눈이 마주 치자 입가의 미소를 짙게 하며 흔들던 손을 내렸다. " 무슨 일이긴. 가정 방문이지. " 퍽 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가인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람 드링의 앞꿈치 차기가 번개같이 가인의 명치를 후려쳤던 것이다. 가인은 숨 도 쉬지 못하고 대문을 지나 집 정원의 나무 기둥까지 날아가 부딪혔다. " 컥- " 가인은 신음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엎어지기가 무 섭게 피를 토해낸다. 피를 토한 목이 타고 얻어맞은 가슴이 뜨거웠다. 한순간 눈 앞이 핑 돌아 눈물샘을 자극한다. 아마 귓가로 들려오는 그람드링의 목소리가 없었더라면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쳐버렸을 것이다. " 이야- 꽤 좋은 집에서 살고 있는 걸? 정원 관리도 잘 되어있고. 분명 네가 관리하는 것은 아닐테고, 그 피스 옐로우라는 여자의 솜씨인가? " 그람드링은 마치 집들이라도 하는 것처럼 정원을 둘러보며 가인에게 다가왔 다. 가인은 기둥에 몸을 기대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그는 도통 막무가내 식 으로 처들어온 그람드링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왜……. 어째서, 이런 짓을……. " " 왜냐고 물어봐도……. " 그람드링은 곤란하다는듯 히죽 웃다가 가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 ……그냥? " 와장창 가인은 마치 무게가 없는 풍선 처럼 허공을 날아 이번에는 담쪽에 놓인 화 분 더미에 처박혔다. 앗-하는 순간에 내동댕이 쳐진 거라 제대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람드링은 화분 깨지는 소리가 의외로 컸던지라 이크 하며 조심스럽게 이웃집을 돌아보았다. " shhhhhhh- 조심해야지. 목격자가 생기면 이 재밌는 가정방문도 끝나버리 는데. 야, 병신. 뭣하면 비명이라도 질러서 사람들 불러보지 그래? 혹시 알아? 내가 엄마야∼하고 도망가줄지? " " 크으으. " 가인은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등은 이미 부숴진 화분 조각들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람드링의 말대로 사람을 불러볼 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포기해버렸다. 저 방문자의 성격 상 불려나온 사 람들이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던 것이다. 혹시나 옆 집의 미연이 누나라도 나오는 날에는 큰일이다. " 호오. 그 근성! 마음에 들었어. 적어도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란 거 지? 아니면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내가 얕보인 건가? " 그람드링은 목에서 소리가 나도록 몇번 고개를 좌우로 꺽다가 이내 허벅 지 쪽의 갑주를 열고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그가 애용하는 오리하 르콘 제 리볼버였다. 가인은 그람드링이 총을 뽑아들자 움찔 몸을 떨었다. "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 총으로 뭘 하려고! " "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 총으로 뭘 하려고! ……라니.당연히 써 먹으려고 꺼낸 거지. " 그람드링은 가인의 말이 재미있다는듯 흉내내며 곧 그에게 총신을 겨누었 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설마, 저 자식……. 진짜 총을 쏘 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가인이 몸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자, 그람드링이 어이없다는듯 말 했다. " 너 바보냐? 총을 봤으면 도망쳐야 할 거 아냐?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거 로 보여? " " 하, 하지만……. " 가인은 반신반의하다가 곧 자신이 대문 앞에서 뭔가를 맞을 뻔 했다는 것 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대문 쪽을 바라보니, 과연 문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 은 바닥에 뭔가가 음푹 패여들어간 자국이 있었다. 설마, 설마 저게 정말 탄흔이란 말인가……. 정말 나에게 총을 쐈던 거란 말이야? 그람드링은 가인이 문쪽의 탄흔을 바라보고 굳어있자 씨익 미소지었다. " 이제 감 잡았냐? " 휙 순간, 가인은 집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동작이 얼마나 날쌨던지 방 금 전까지 오른 발을 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가인은 곧바로 그람드링의 리볼버에서 사각인 틈으로 돌아가 그대로 집의 뒤쪽 정원까지 내달렸다. 곧 담이 보였다. 그대로 삼각 뛰기로 넘어갈 셈이었다. ' 일단 26구역 거리까지만 도망치면 녀석도 함부로 총질은 못 할테지! 제 아무리 사이코래도 일단은 피스메이커잖아! 아니, 그런데 왜 같은 피스 메이커끼리 날 죽이려고 하는 거지? 단순한 보복치고는 너무 심해! 제 정 신이 아냐! ' 그런 여러 생각들을 하면서 담에 다다른 순간, " ……! " 단단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불쑥 가인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이 리 볼버의 총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어느샌가 자신의 앞에 서있는 그람드링 을 발견하고 난 뒤였다. 녀석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져내려 가인의 입 에 리볼버의 총신을 찔러넣었던 것이다. 가인은 입에 총신을 문채 그람드링에게 붙잡혀 그대로 담에 등을 부딪혔다. " Checkmate. 도망치느라 애썼다만, 미안하게도 내 눈에 보인 이상 도망치 는 건 무리란다. " 그람드링은 자신의 순간예지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가인은 입에 문 총신의 서늘함에 진저리를 치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식은땀에 전신 이 젖어들기 시작한다. 총신이 입 안에 들어오면서 성대를 찔렀는지 목이 따 끔거렸다. " 자자, 헐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봤었지? 이렇게 목에 총 찔러넣고 자살하는 거? 이대로 쏘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 되지만 뭐, 상관 없겠지. 네가 죽 는다는 건 매 한가지니까. " " 으……. " 가인은 그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신경은 모두 자신의 입 에 들어온 리볼버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실감나게 죽음이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피스 대원으로서 몬 스터들과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싸워왔지만 이렇게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죽는다. 죽는다. 오직 그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 오, 좋아. 좋아. 바로 그 표정. 파랗게 질린 게 Good-이야. 이대로 쏴버 리기에는 좀 아까워지네. 더 리얼하게 해봐. 눈물도 글썽거리면서 저 좀 살려주세요∼하고 빌어봐. 혹시 알아? 정말 쏘는 게 아까워서 살려주게 될지? 자자! 분발해봐,Boy! " 그람드링은 겁에 질린 가인을 보면서 어린애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가인은 느끼지 못했지만, 그의 팔 다리 어깨 무릎은 학질 걸린 사람처럼 우스꽝스 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에 눈 앞이 아득해져 간다. 공포심만으로 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게 허언은 아닌 모양이었다. 귀가 뜨거워지고 세 상의 온갖 소리들이 자신의 심장 소리로 변해간다. " 뭐하고 있어? 지금 내가 기회를 주고 있잖아! 표정 연기 한번 잘하면 살 수 있단 말이야! 어서 해봐! 어서! " 입속에 들어와있는 총구의 움직임이 거칠어진다. " 구걸해봐! 살려달라고 빌어보란 말이야, 병신아! " 눈 앞의 상대에게서는 일체의 자비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대는 진정으 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본능은 가인에게 자꾸만 상대의 말을 따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구걸을 해 서 살 수만 있다면 당연히 구걸해야하는 거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그 말 한마디만 내뱉으면 된다. 입가의 근육은 금새라도 실룩거리며 말을 내뱉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더 늦으면 정말로 끝이다. 한시라도 빨리, 녀석이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기 전에, 어서 살려달라고 녀석에게 빌어야만 한다. " 응? 뭐라고? 안들리는데? " 가인의 웅얼거리는 소리에 그람드링이 귀를 그에게 가져가며 되물었다. 가 인이 좀 더 말하기 편하도록 리볼버의 총구를 물려주는 아량마저 베풀어준다. 그람드링은 가인의 입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기대에 찬 눈으로 지켜보았 다. " 엿…… 먹어. " 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구걸이 아니었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 으로 코 앞의 그람드링을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금새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눈. 하지만 거기에는 뭔가를 초월한듯한 공허함마저 있었다. 그람드링 은 그 독오른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물리며 생각했다. ' 뭐야? 이 자식? 어째서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 거지? ' 이해할 수가 없다.무섭지 않은 건가?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 그게 아 니라면 사는 걸 포기했나? 이왕 죽을 거 같으니까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 거야? 그렇게 그람드링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때 가인이 다시 한번 말했다. " 죽일테면 죽여봐. " 그러면서 입 안의 총구를 이빨로 물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그람드링은 곧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하항. 그래. 이 녀석은……. " 그럼 못 죽여줄 것도 없지. " 끼릭 리볼버의 격철(擊鐵)이 뒤로 당겨지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린다. 그람드링 은 리볼버를 다시 가인의 입에 밀어넣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 왜 네 녀석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난 말이지. 너처럼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입만 나불대는 녀석이 제일 싫어.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니까 쓸데없는 고집을 피울 수 있는 거지. " " ……! " " 지금 네 처지를 알기는 하냐? 그렇게 고집 피우면서 자존심 세우면 멋있 어 보일 줄 알아? 살려달라고 빌기보다는 죽음을 택하시겠다? 하! 정말이 지 멋져서 돌아가시겠군! 그 대가리 속에 뭘 키우고 있는지 뜯어보고 싶을 정도야! " " ……! " " 그래! 네 소원대로 죽여주마! 죽어서까지 계속 잘난체 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해보시지! " 그리고 그람드링은 방아쇠를 당겼다. 원형 탄창이 회전하면서 다음에 발사 될 탄환이 총신과 직선 상의 사격 위치에 오고, 뒤에서 격침이 뇌관을 쳐서 발사된다. 그 발사된 탄환은 가인의 입천장을 뚫고 그 머리 속을 헤집은 다 음에 뇌수를 뿌리며 튀어나올 것이다. 그 다음은 모든 게 끝. 두려움도 고 통도 느끼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게 된다. " ……. " 그렇게 유가인은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그람드링의 리볼버에는 탄환이 장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 " 가인의 입에서 리볼버의 총구가 빠져나왔다. 하지만 가인은 느끼지 못했 다. 그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을 뿐이다. 다리에서 힘이 빠진다. 그러자 마치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가인은 땅바닥 에 주저 앉았다. 머리 속은 백지처럼 하얗게 변했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살아있다는 안도감도 없었고, 죽을 뻔했다는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가인은 분명히 죽음을 경험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체처럼 늘어진 가인에게 그람드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녀석은 죽일 가치도 없어. " 그를 내려다보는 그람드링의 눈은 경멸의 빛을 담고 있었다. " 자기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는 병신 같은 놈. 네 녀석에게는 총알을 쓰는 것도 아깝다. 내가 살려준 목숨, 어디 평생 수치스럽게 살아봐라, 이 패 배자야. " 패배자. 그것은 그람드링이 처음 가인을 만났을 때부터 했던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서도 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몸도 마음도 석상 이 된양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람드링은 그런 가인에게 침을 뱉으며 몸을 돌렸다.그러다 잠시, 뭔가가 생각났는지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경고한다. " 아- 행여나 누군가에게 고자질 할 생각이라면 하지마라. 그때는 제대로 탄창을 채워서 머리통을 쏴줄테니까. 그리고 내가 찾아온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아도 짐작하겠지? 앞으로 피스메이커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 라. 아무도 네 녀석이 돌아오는 걸 원치 않으니까. " " ……. " " 내 말 알아먹었냐? " " ……. " " Okay. 그렇게 계속 입다물고 있으면 돼. " 그람드링은 거기까지 말하고 아까부터 계속 시끄럽게 울리던 무전기를 켰 다. 그러자 대번에 오르크리스트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어떻게 된 거야, 그람? 죽였어? 죽인 거야?》 " 시끄러. 철수한다. " 《확실히 말해! 죽인 거지?》 "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 꺼. " 《바보! 그렇게 제멋대로 하다간 마스터에게…….》 그람드링은 동생의 잔소리가 길어지려고 하자, 진저리를 치며 무전기를 꺼버 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AI부츠의 힘으로 지붕 위를 훌쩍 날아 오른 다. 그렇게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인도 천천히 웅크리고 있던 양 무릎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모았다. 거기에 얼굴을 파묻자 막혀있던 수도꼭지가 열 리는 것처럼 전신으로 떨림이 번져나간다. 두려움이 남아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안도하고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담함, 절망감에 가슴이 짓눌렸을 뿐이다. 무엇을 해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아무 것도 모르는, 그렇기에 너무나 답답한, 그런 상실감에서 오는 소외감이었다. '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입만 나불대는 녀석……. ' 그람드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 었다.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다. 모든 건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포기하 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 자신을 채찍질해나가면, 그러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고. 그러면 모두가 다 행복해질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 ……. " 하지만 그건, ' 내 착각이었나? ' 가인은 소리 없이 오열했다. D타입의 쿠사나기와 머신 아더가 사투를 벌인 12구역은 3개월에 걸친 보수 공사로 어느 정도 원래의 기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래봐야 여전히 전쟁 난민터 같은 모습이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다시 거주하고 교통 시설도 차 츰차츰 회복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상의 사정이었고, 지하의 사정은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다. 특히 쿠사나기가 처음 본체를 드러낸 장소가 지하철 역이기에, 12구역의 지 하철 역은 보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무너져 있었다. 아마 보수를 하기 보다는 새로운 지하철 역을 만드는 게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12구역의 지하철 역은 몇 개월째 방치되어 있었고, 자연히 사람들 의 발길도 끊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폐기된 12구역도 유용하게 사용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 마스터, 다녀왔어요∼ " 바로 피스 블랙 한시영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유빈은 밖에서 사온 식료품들 을 양손 가득히 들고 못쓰는 전차 안으로 들어왔다. 전기가 나간 전차 안은 어두워야 했지만,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촛불들이 일대를 환하게 밝히 고 있었기에 조금도 어둡지가 않았다. 그 음산한 촛불들의 향연 속에서 피스 블랙 한시영은 시트에 앉아 유빈을 반겼다. " 수고했다, 유빈. 그동안 별 일 없었지? " " 예- 뭐, 이틀 전에 네크로맨서와 피스메이커가 한바탕 난리친 거 외에는 그다지. " 유빈은 식료품을 보급하기 위해 요 며칠간 밖에 나갔다 왔었다. 물론 아스 트랄 유영을 할 수 있는 시영이라면 굳이 유빈에게 심부름을 시킬 필요도 없 었지만 그는 최근 이 지하철 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빈은 슬쩍 전차 밖의 승강장 쪽에 드리워진 어둠을 바라보며 시영에게 물었다. " 아직도 멀었나요? 티폰의 재생은? 대체 저 거인은 덩치는 산만 해서 뭐 가 저리 굼뜬 거에요? " 그의 말대로 승강장에는 거대한 암흑의 거인이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 아 있었다. 그 크기가 얼마나 컸던지 거인은 무려 지하 1층, 2층, 3층의 외 벽을 다 부수고, 그 3층의 공간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만약 거인이 일 어서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 폐 지하철 역도 붕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시영은 유빈의 말에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을 찾았는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 티폰이 아니라 블랙 아더. " " 아…… 예. 그랬죠. 블랙 아더. 흠! 어쨌든 블랙 아더의 경과는 좀 어때 요? " 유빈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거인에 대한 호칭을 교정했다. 시영은 그제야 만족한듯 질문에 답해주었다. " 떨어져 나간 오른팔과 왼쪽 다리는 복구시켰지만 역시 피스 그레이에게 손상당한 영체의 수복이 가장 큰 문제지. 블랙 아더는 내 영적 교감에 반 응하기 때문에, 일단 그 교감 통로와 아스트랄 계의 시공 주소를 연결시 켜두면 카르마 에너지가 손상된 영체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단다. 대신 이 방법은 좀처럼 시간을 잡아먹는지라 꽤 시일이 지나봐야 결과를 알 수 있 다는게 흠이지만. " " 그럼 결과를 알 수 있을 때까지는? " " 이곳에서 나갈 수 없겠지. " 시영은 현재 블랙 아더와 아스트랄 계를 연결시켜주는 접속자 구실을 하고 있었기에 블랙 아더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블 랙 아더의 수복이 빨라지려면 거인을 아스트랄 계에 저장시켜두는 것보다 물 질계에 현현시켜두는 편이 존재의 법칙 상 용이한 것이다. 유빈은 시영의 말에 거인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 보았다. 마스터와의 외 출을 저런 거인 때문에 방해받다니……. 그때 전차의 옆칸에서 2미터 장신의 신부가 불쑥 그들의 칸으로 넘어왔다. " 유빈, 내가 적어준 물품들은 빠짐 없이 챙겨왔겠지? " 신부, 라트 발렌시아의 물음에 유빈은 들고 있던 봉지를 그에게 떠넘기며 투덜거렸다. " 으씨. 짐이 한보따리라서 가져오는데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아! 자기가 심부름하는 거 아니라고 무식하게 주문 좀 하지마! 여기는 마트에서도 택배 안부쳐준다고! " " 어쨌든 물건은? " " 아, 몰라. 몰라. 알아서 확인해 보셔. 일단 적어준 데로는 사왔으니까. " 라트는 봉지 안을 확인하고서는 곧 다시 옆 칸으로 넘어갔다. 유빈이 슬쩍 바라 보니, 옆 칸은 이미 12구역에서 줏어온 온갖 주방기구들로 가득 차 있 었다. 식수가 없다는 게 흠이었지만, 라트는 또 어디서 줏어온 건지 모를 식 수통을 이미 수 십 박스나 들여놓은 뒤였다. 그러면서도 한다는 소리가 '전 기만 들어오면 정수기도 가져올텐데' 란다. 그러고 보니 냉장고와 전자 레인지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던 것 같 은데. ' ……생활력이 강하긴 강해. 역시 라이컨슬로프인가. ' 유빈은 LPG가스까지 가져와 가스 레인지를 사용하는 라트의 모습에 터무니 없다는듯 혀를 찼다. 뭐, 어쨌든 이런 은둔 생활을 하면서 살림 잘하는 인간 한둘쯤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냉장고가 없기에 대부분 라트가 주문한 식 료품들은 죄다 통조림 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그럴싸한 식단을 만들어 낼 것이다. " 그럼 신부님은 식사 준비를 하고……. 어라? 마스터, 그 남자는요? " 유빈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시영에게 물었다. 시 영은 말없이 라트의 부엌과는 반대편에 있는 전차 칸을 손으로 가리켰다.유 빈은 영문을 몰라 그곳으로 걸어갔다. ' 촛불도 없이 이런 캄캄한 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 유빈은 조심스럽게 닫힌 전차 칸 너머의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전차 칸은 짙은 어둠으로 감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 깊은 곳에서 유령과도 같 은 한줄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들여다 보던 유빈은 곧 그것이 자신이 찾고 있던 그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황유평. 마스터에게 들은 바로는 피스메이커의 피스 레드와 같은 검술을 익힌 무 영신풍류의 검사라고 했다. 그는 자신들과는 달리 오라 능력자가 아닌 평 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두달 전. 그는 12구역의 전투에서 인간의 것 이라고는 볼 수 없는 능력을 보여줬다. 우우우우 그때 유평이 들고 있던 긴 노다치에서 기이한 울음 소리가 터져나왔다.어 둠을 밝히던 아지랑이도 저 노다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마치 검 자 체가 살아있는 것 같다. 저 노다치가 바로 유평을 초인의 반열에 올려주는 신검 후츠노미타마였다. 피스 버밀리온이 가진 도츠카노츠루기에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신을 죽 이는 횡도! 유평은 그 검의 힘을 빌어 오라 능력자들과 대등한 결투를 벌일 수 있었다. -이 검은……조금 씩 나를 잠식해들어오고 있어. ' 응? ' 유빈은 난데없이 자신의 머리 속으로 들려오는 사념에 주위를 두리번 거 렸다. 그러다 곧 사념의 주인이 유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들여 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렇듯 강하게 마인드 리딩이 전달된다는 것은 그만큼 유평의 고뇌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검이 잠식해들어온다고? 유빈은 흥미를 느끼며 유평의 사념에 마인드 브레이크를 전개했다. -그건 분명히 인간의 힘이 아니었어. 유평은 두달 전 12구역에서의 전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전투에서 그는 피 스 알리자린의 아켄석 탄을 후츠노미타마로 막아내는 신기를 보였다. 말이 검 으로 막아낸다지, 200미터도 채 되지 않은 거리에서 속력이 500미터 퍼 섹커인 총알을 막아낸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의 반응 속도로는 무리였다. 유평도 자신이 어떻게 음속보다도 빠른 총알을 막아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예지에 가까운 속삭임과, 육체가 시공을 초월했었던 기이한 감각만이 남 아있을 뿐이다. 그것은 분명 후츠노미타마의 힘이었다. -무섭다. 내 힘이 내 것이 아니게 됨을. -신력은 사람이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후츠노미타마의 힘은 언젠가 나마저 멸하고 말 것이다. 유평은 신검의 힘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힘에 잠식당했다간 그의 목표도 퇴 색되고 말 것이다. 자신은 도츠카노츠루기의 주인, 코마히코 카구라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대가 없는 힘은 스스로를 타락시킨다고 했다. 주제에 맞지 않는 힘을 가진 것 을 부끄러워하라고 했다. 그런 주제에 이제와서 자신이 신검의 힘에 타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신검에 잠식당하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매듭지어야할 일이 있다. -오라 능력에 지지 않을, 그들과 대등하게 싸울 힘이 필요하다. 한쪽에서는 신검의 사용에 긍정하는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어떤 불평을 하 든지 간에 유평은 끝까지 후츠노미타마와 함께 해야할 운명이었다. 그 결과가 비록 파멸일지라도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무를 추구하는 것은 강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더욱 강해진다고 한들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강해지는 거다.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힘을 가지는 거다. 그래서 나를 경시했던 자들에게 복수하는 거다. 나를 무시했던 모든 것들에게 응징을 가하는 거다! 그것은 쾌감이었다. 힘이란 마약과도 같은 거라서 그 쾌감에는 한계가 없었다.그리고 쾌감은 자 꾸만 신검의 힘을 사용하도록 유평을 부추긴다. -강해져! 강해지기위해서라면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상관없다! -강함에 절차가 있다는 것만큼 웃긴 소리가 어디있단 말인가! 그렇게 시간 을 들여서 얻는 강함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당장 힘이 필 요해! 지금 당장 강해져야만 한단 말이다! -오라 능력자 따위에게 질 수 없어!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집념의 소용돌이였다. 유빈은 그 사념에 빨려들어가기 전 에 재빨리 마인드 브레이크를 멈췄다. 어느샌가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유빈은 새삼 두려운 눈으로 유평이 들고 있는 후츠노미타마를 바라보았다. 얼핏 유평은 신검을 두려워하는 자신과 신검을 환영하는 자신 사이에서 고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검을 환영하고 있는 유평의 사념은 사실 후츠노미타마의 목소리였던 것이 다! 인간을 유혹하는 검이라니! 이 무슨 음침하고 흉악한 귀물이란 말인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유평이 후츠노미타마의 유혹을 잘 뿌리치고 있는 것 같 았지만, 의식의 흐름으로 보아 점점 후츠노미타마에게 먹혀들어갈게 분명했 다. 유빈은 그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질린 표정으로 신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 마치 후츠노미타마의 음산한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는 재 빨리 마스터에게 달려갔다. 시영은 유평의 사념을 읽고 겁에 질린 그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었다. " 세상에는 알아도 될 일이 있고, 몰라도 될 일이 있는 거다. 호기심을 자 제할 줄도 알아야지. " " 예-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마스터. " 유빈은 시영의 품에 안겨 마음껏 응석을 부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스스 로도 오늘과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능력 인 마인드 브레이크는 언제나 끝없는 호기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유빈도 유평과 마찬가지로 힘이라는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할 운명이었 다. " ……이런. 손님이 오셨구나, 유빈. " 그때 유빈의 등을 토닥여주던 시영의 손이 멈췄다.유빈은 영문을 몰라 전차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 손님이라니? 이런 폐 지하철 역에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 하지만 입구를 응시하던 그는 곧 할 말을 잊었다. 그곳에는 낯익은, 그러나 결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와있었던 것이다. " 찾아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피스 그레이. " 시영은 반갑게 브루스를 맞이해주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20 - Ｂy Ｎext Ｎeo =-=-=-=-=-=-=-=-=-=-=-=-=-=-=-=-=-=-=-=-=-=-=-=-=-=-=-=-=-=-=-=-=-=-=-= 시민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처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어색함이었다. 그녀는 열려져 있는 대문을 이상하게 여기며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인 씨, 문 닫는 걸 잊어버렸나? " ……! " 하지만 곧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대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땅바닥 에 선명한 탄흔 자국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무슨 난투라도 벌였는 지 정원 곳곳에 있는 화분들이 부서지고 나무들도 상해 있었다. 시민은 손에 들고 있던 장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두고, 그 난투의 흔적들을 뒤쫓았다. 흔 적은 집 뒤의 담까지 이어져 있었다. " 아, "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집 뒤의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가인의 모습 을. 그는 입고 있는 옷이 먼지 투성이가 된 채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거 기다 등 뒤에서는 피마저 배여나오고 있다. 시민은 그런 가인의 모습에 망연자실해져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 가인 씨? 이게……어떻게 된 일이에요? " " ……! " 갑작스레 들려온 시민의 목소리에 웅크리고 있던 가인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 얼굴은 좋게 말해도 양호하다고 할 수 없었다. 줄곧 울고 있었는지 눈가가 심하게 부어 있었고, 입술도 찢어져 있었다. 시민은 그런 가인의 얼굴을 매만 지며 소리쳤다. " 세상에! 얼굴이 왜 이렇게 된 거에요? 무슨 일 있었어요? " " ……. " " 가인 씨! 얘기해봐요! 대체 무슨 일이냐고요!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에요? " " ……. " " 가인 씨! " 그러나 가인은 넋이 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눈 앞의 시민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곧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민은 그제야 가인의 등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그를 부축했다. " 괜찮아요? 등에 난 상처가 심해요.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큰일나겠어요. " " ……. " 가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시민은 그에게서 사정을 듣고 싶었지만, 일단 가인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조용히 그를 부축했다. 가인은 비틀 거리면서도 정원으로 걸어나와 현관으로 들어갔다. " 가인 씨, 잠깐만요. 신발 벗어야죠. " 시민은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가려는 가인을 제지하며, 그의 신발을 벗겨 주 었다. 가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신발이 벗겨지자 거실로 올라 갔다. 시민은 그 뒤를 따르다가 일단 먼지투성이가 된 가인의 몸을 씻겨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 가인 씨, 아무 생각하지 말고 샤워하고 올래요? 상처는 그 뒤에 치료하기 로 하고. 그 동안 저는 식사 준비하고 있을게요. 배 많이 고팠죠? " " ……. " 가인은 그녀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다가, 곧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 민은 그 뒤를 향해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 갈아입을 옷은 화장실 문 앞에다가 놔둘게요! 상처에 물들어가지 않게 조 심해서 씻으세요! 알았죠? " " ……. " 역시나 대답이 없다. 가인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고, 시민은 작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그녀는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황을 미루어 보아 분명히 누군가가 이 집에 방문했었다. 하지만 가인의 모습이나 정 원의 상태, 바닥의 탄흔을 고려해보면 절대로 호의적인 방문객은 아니었을 것 이다. 무엇보다 탄흔이 가장 신경 쓰였다. 도대체 어느 누가 저런 총을 가인에게 사 용할 수 있단 말인가? 탄흔은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범인이 일부러 총을 바닥 에 대고 쏘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 위에서부터의 저격이었으리라. ' 저격! ' 그렇다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닌, 계획적인 범행이란 말인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시민은 짧게 도리질을 쳤다. 뭔가 터무니 없이 비약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 아- 혹시 그들이라면. ' 시민은 가인에게 붙어있을 팔라딘 대원들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그들이라면 24시간 내내 가인을 감시하고 있었을 테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고 있으리라. 그녀는 팔라딘 대에게 정황을 물어보기 위해 왼손에 찬 무전 기를 들어올렸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팔라딘 대에 연락을 취할 방법이라고 해도 팔라딘 대의 대장인 진우의 연락 처 밖에 몰랐던 데다가 아무래도 병상에 있는 환자에게 이런 일을 얘기한다 는 건 꺼림칙했다. 시민은 닫혀진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 하아. 가인 씨가 얘기해주면 좋을텐데. " 일단은 가인 씨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사정을 듣는 건 그 다음으로. 시민은 잠정적으로 그렇게 결론내리며, 현관 밖으로 나갔다. 요리를 하려면 정원에 던져둔 장 바구니가 필요했던 것이다. " 피, 피스 그레이-? " 유빈은 눈 앞에 나타난 브루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는 예전에 쿠사나기와의 결전에서 차원이 다른 능력을 보여준 브루스에게 공포에 가까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경외의 대상이 지금 자신의 앞 에 나타나다니! 브루스는 눈에 띄게 자신을 겁내는 유빈에게 한심하다는듯 말했다. " 무례한 꼬마로군. 사람을 무슨 전쟁, 호환마마 보듯 꺼리다니. " " 네, 네 녀석이 대체 여길 어떻게! 아, 아니지. 무슨 일로 나타난 거야! " 유빈은 애써 마스터의 앞으로 나서며 브루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본능적 인 공포 앞에 몸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인드 브레이커인 유빈 은 브루스의 사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의 강함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십, 수백, 수천번도 더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 느낌이라니! 휙 하지만 그런 브루스의 강함은 유빈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전차의 양 옆 칸에 있던 라트와 유평도 어느 새인가 모습을 드러내,긴장한 얼굴로 침 입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브루스는 재미있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 쥐새끼들답게 숨어있는 장소도 어울리는군. 그동안 어디에 있을까 했더니 이런 지하 구석에 숨어있었나? " " 이……. " 유빈은 이를 갈며 은은한 양홍빛의 오라를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라트도 날카로운 손톱을 뽑아내고, 유평도 후츠노미타마를 들어올린다. 하지만 시영은 유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수하들을 제지했다. " 거기까지만 해두도록 하세요. 모처럼 오신 손님에게 예의가 아니지 않습 니까? 더구나 제가 초대한 손님입니다. 반갑게 맞이해주세요. " " 마, 마스터? " 유빈은 시영이 직접 피스 그레이를 초대했다고 밝히자 영문을 몰라 그와 브 루스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라트와 유평은 마스터의 말을 납득했는지 저 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라트는 부엌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시영에 게 물었다. " ……차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 ' 역시나. ' 유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질렸다는 표정으로 라트를 바라보았다. 아마 저 신부의 머리 속에는 그동안 가져다 놓고 쓰지도 못한 티 세트에 대한 활용으 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어째서 축생으로 변하기 전과 후가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 흠- 제 취향은 아니지만, 손님의 취향에 맞춰서 보이차 두 잔으로 부탁해 요. " 시영은 동의를 구하듯 브루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예전 일전에서 브루스의 영체 정보를 읽어들였기에, 그가 무슨 차를 좋아하는지 조차 꿰뚫어 보고 있 었다. 그 모습에 브루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 차같은 건 필요 없다! 어차피 오래 앉아 있을 생각도 없으니까! " " ……그럼 마스터에게만 홍차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본 차이나 세트에 보이 차는 어울리지 않았는데 잘 됐군요. " 라트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그대로 부엌으로 사라졌다. 시영은 쓴웃 음을 지으며 브루스에게 말했다. " 섭섭하군요. 모처럼 브루스 님과 진지하게 얘기를 해볼까 했더니. " " 언제부터 알았다고 친한 척이냐? 그건 그렇고 내 무전기의 주파수를 어떻게 네 놈이 알고 있는 거지? " 브루스는 한 시간 전, 가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중 불현듯 발신자 불명의 메세지를 받을 수 있었다. 무전기의 액정에는 용건이 있으니 12구역의 폐 지하 철 역으로 와달라는 피스 블랙의 전갈이 적혀 있었다. 브루스의 물음에 시영은 별 것 아니라는 듯 품 안에서 무전기를 꺼내 보였다. " 가인 군을 납치하면서 잠시 피스 블루의 무전기를 맡아둔 적이 있었죠. 그 때 오늘과 같은 날이 있을까봐 미리 주소록을 복사시켜둔 겁니다. " 브루스는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시영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 눈 앞의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그 무전을 받고 피스메이커를 대동한 채 여 기에 나타났으면 어떡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성격상 반드시 혼자서 오리라고 예측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 피스메이커 내의 불화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일지도. ' 시폰 사령관과 대립하고 있는 자신이 그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루트를 통해 그 정보들을 다 입수하고 있는 것일까? 성당 기사단의 아포스톨로스에 대한 사항이라면 극비 중의 극비일 텐데. " ……그래서? 날 부른 용건이라는 게 뭐냐? " 브루스는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있었지만, 시영과 오래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 에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시영도 못내 그것이 아쉽다는듯 멋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끝내도록 하죠. 용건은 다름이 아니라, " 그는 제안했다. " 저희와 함께 해주십시오. " " ……! " 그 말이 가진 여파는 컸다. 전차가 기분 나쁜 침묵으로 휩싸인다. 소리라고는 부엌 쪽에서 희미하게 들 려오는 접시 닦는 소리와 초가 타는 소리 밖에 없었다. 그 침묵을 참지 못하고 깨뜨린 건 시영의 앞에 있던 유빈이었다. " 마, 마스터!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유빈은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함께 하자니? 저 피스 그레이에게 함께 하 자고? 그게 무슨 뜻이지? " 들은 그대로의 뜻이란다.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에게, 피스메이커를 그 만두고, 우리와 손을 잡으라고, 그렇게 말한 거다. " 시영은 브루스에게 들으라는듯 그의 얼굴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 표정이 일고의 여지도 없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기에, 브루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물었다.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아니, 그 전에 제 정신이기는 한 건지 묻 고 싶군. " 피스메이커를 배신하라니. 그런 짓을 내가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브루스는 너무 화가 나서 오히려 웃음만 나왔다. 마스터를 비웃는 그의 태 도에 유빈은 한소리를 해주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잠자코 있을 수 밖 에 없었다. 시영은 브루스가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야 물론 저는 제 정신입니다. 제 정신이니까 이런 제안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 하! 그렇다면 네 녀석은 평소부터 제 정신이 아니었나 보군! 하긴 그러니 까 그런 터무니 없는 짓거리도 계속 해올 수 있었던 거야! " 브루스는 웃음을 멈추고 시영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나를 농락 하기위해 불러낸 것임이 틀림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 저는 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왔습니다. 그건 브루스 님도 마찬가지였을 텐데요? " " ……! " 브루스는 참을 수 없다는듯 이를 드러내며 분개했다. 그러자 분노가 살의를 일으키고, 살의가 대기를 가열시킨다. 그 숨막히는 살기에, 아무 것도 모르는 유빈조차 짓눌리는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도대체 저런 남자를 말 한마디로 화 나게 하다니! 마스터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브루스는 스산한 바람이 깔리는 전차에 발을 내딛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 네 녀석. 그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 잘도 여기 저기에 기웃거렸겠다……. 고작 훔쳐보는 정도로 나를 다 알았다고 생각한 거냐? 그렇다면 그 말을 들은 내가 널 어떻게 요리할지도 잘 알고 있겠군? " " 마, 마스터! " 유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시영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의 마스터는 조 금도 브루스의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 당신은 지금 이대로 만족하는 겁니까? 당신이 바란 것은 겨우 이런 것이 었습니까? " " 허튼소리 하지 마라! " 브루스의 외침에 시영도 화가 난듯 그를 꾸짖었다. " 가인 군에게 당신이 붙어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과보호가 그의 각성을 늦추고 있다는 걸 왜 모르고 있습니까! " " ……! " 순간, 주위를 가득 채우던 살기가 눈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그리고 거기에 는 두 눈을 부릅 뜨고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브루스가 남아 있었다. 그는 믿 을 수 없다는듯 시영에게 말했다. " 내가, 애송이의 각성을 늦추고 있었다고? " " 예, 그렇습니다. 그랬기에 제가 무리하게 손을 써야 했지요. " 시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듯 되물었다. " 브루스 님. 당신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입니다. 당신의 목적은 오라의 주 인이 각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평생을 떠돌며 오라의 주인을 찾아헤맸고요. 그런데 왜 이제와서 망설이는 것입니까? " 망설였다고! 브루스는 시영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망설이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 은가! 누구보다도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왔다! 한 순간도 그 때의 맹세를 잊어본 적이 없어! 그런 내게 망설임이라고? ' 브루스! ' 문득 자신을 부르며 한점 사심 없이 웃는 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브루스 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 하나 되씹어 보았 다. ' 난폭하기 그지 없는 녀석이군. 네 녀석은 오라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도 모르는 애송이다. ' ' 소중한 이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라. 너는 오라의 주인이니까. ' ' 어디 있는 거냐, 애송아! 어서 나오지 못해, 오라의 주인! ' ' 잘도 비웃어주었구나, 내 제자를. ' ' ……여전히 늦어, 빌어먹을 애송이. ' ' 흥, 누가 너 같은 놈을 걱정했다는 거냐? ' ' 잘 보고 있어라.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거다! ' ' 흥! 건방떨지 마라, 애송이. 네 녀석이 날 걱정하는 것은 백만 년은 이른 일이다. ' ' 지켜주지. 네 녀석이 내 눈에 뜨인 이상. '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그 기간 동안 녀석과 지내오면서 여러 가지 일들 이 있었다.아마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낸 적은 이번 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즐거웠다. 그건 솔직한 심정이었다. 언제나 혼자 떠돌아다니던 그는, 유가인과 피스메 이커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이대로 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이대 로 그들의 곁에 남아, 녀석을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유가인. 그 애송이는 허약해빠진 주제에, 어리버리하기 짝이 없고, 또 얼간 이에다가 바보 멍청이다. 울기도 잘 울고, 틈만 나면 궁상 떨고, 자신감은 지 지리도 없어서 소심남 그 자체다. 그 녀석을 보고 있으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되어서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내가 챙겨줘야 한다. 내가 지켜줘야 한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 브루스. ' 불현듯 생각났다. 여기에 오기 전에, 애송이와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녀석이 나에게 했던 말. 그때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듣고 넘겼지만, 사실 그 말은, ' 언제나 고마워요. 제 어리광을 받아줘서. ' 그렇다.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 웃기지마. ' 과보호라니! 당치도 않다. 지켜줄 필요가 있었으니 지켜줬을 뿐이다.만약 자 신이 없었더라면 유가인, 그 애송이는 진즉에 죽어 나자빠졌을 것이다. 녀석 은 아직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 몫을 다할 때까지, 녀석 이 강해질 때까지, 녀석을 내가 지켜주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 마스터, 드십시오. " 그렇게 브루스가 말이 없어진 동안, 라트는 홍차를 끓여서 시영에게 가져왔 다. 시영은 그것을 건네받으며 씁쓸한 표정으로 브루스에게 말했다. " 아무래도 제 얘기가 일렀던 모양이군요. 좀 더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 다.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납득을 하신 다음에 다시 찾아와주십 시오. " " 아니, 다시 찾아오고 말고 할 것도 없다. " 브루스는 단호하게 거부하며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시영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 " 아- 가시기 전에 한가지 또 말씀드릴게 있는데. " 브루스는 전차 입구로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 쌍둥이들과 그들의 마스터를 조심하십시오. 아포스톨로스 타데오는 오라 의 주인을 이용한다기보다는 제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 ……뭣! " 브루스는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시영은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가볍게 윙크해보였다. " 몬스터나 저희에게 이용당할 소지가 있으니 그 쪽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 겠지만……. 아마도 성당기사단의 결정이 아닌 그 혼자만의 독단일 겁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포스톨로스 유다가 타데오를 방치하는 것은 피 스 그레이가 유가인에게 붙어있는 한 타데오가 손을 쓰지는 못할 거다, 그렇게 생각해서겠죠. " " ……! " " 어서 빨리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 분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 " 크- " 브루스는 죽일듯이 시영을 노려보다가 곧 번개같이 전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영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유쾌하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하, 정말 제자 사랑이 지극한 사부님이군! 가인 군이 부러워지는데? " " ……마스터, 괜찮겠어요? " 유빈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브루스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시영은 걱정 말라는듯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 괜찮고 말고. 피스 그레이도 조만간 깨닫게 될 거다. 가인 군에게 자신이 붙어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싫어도 우리를 찾게 될 거다. 무엇보다 그 와 난 동류거든. " " 마스터와 녀석이 동류라고요? " 유빈이 이해할 수 없다는듯 인상을 찌푸리자 시영은 미소하며 전차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승강장을 가득 채운 블랙 아더를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 그래. 그와 난 꿈을 쫓는 인간이니까. "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말이야. 시영은 적어도 자신은 그렇다고 생각하며 유빈이 있는 전차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어둠에 감싸인 전차의 지붕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지금까지 재밌게 들으셨나요? 이제부터는 청취료를 받을 시간입니다. " " ……! " 순간, 전차의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누군가가 움찔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하지만 곧 양 옆에서 자신을 공격해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번개같이 몸을 날려 승강장에 내려선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하얀 AI슈츠를 입은 적금발의 여성이었다. 시영 은 한번도 그녀를 만난적이 없었지만 마치 예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던 것 처럼 인사했다. " 누군가 했더니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 씨군요. 언젠가 만나보고 싶다 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 " ……! " 류바는 한번에 자신의 정체를 간파해내는 시영의 말에 긴장하며 주위를 둘 러보았다. 전차의 지붕에서는 자신을 공격했던 두 남자, 라트 발렌시아와 황 유평이 있었고 전차의 안쪽에서는 마유빈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류바는 자신이 완전히 포위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시영에게 고개를 돌 렸다. " 내가 숨어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지? 패턴 화이트의 능력으로 완 벽히 기척을 죽이고 있었을텐데. " 패턴 화이트의 능력은 기온과 기압을 조절하는 것이기에, 진공 기류를 몸 주위에 형성시켜 소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 그랬기에 그녀는 시폰 뤼멘에게서 유가인 일행의 미행을 명령받을 수 있었다. 시폰은 애초부터 한시영이 유가인 일행에게 접근해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피스 블랙이 피스 블루의 각성 의식을 중도에서 방해받은 이상 반 드시 재접촉을 시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시영이 한층 더 접근하기 쉽도록 유가인 일행을 전선에서 배제시켜 보란듯이 경계를 소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피스 화이트를 잠복 시켜, 미끼가 먹이를 물도록 기다린 것이다. 어쨌든 시폰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지만 피스 블랙은 초기의 계획대로 피스 그레이에게 접촉을 시도했고, 류바는 그 뒤를 쫓아 시영 일행의 아지트를 발 견할 수 있었다. 시영은 류바의 물음에 안타깝다는듯 말했다. " 류바 씨의 미행술은 완벽했어요. 우리들이 오라 능력자라는 것도 고려했 으면 더 완벽했겠지만. " " ……오라의 기척을 숨기지 못한 건가. " 류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양 손으로 오라 소드를 뽑아들었다. 패턴 화 이트의 능력은 범위가 넓은 만큼 미세한 컨트롤이 어려웠기에, 아마도 오라 능력자의 정신감응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윙 두 정의 오라 소드에 패턴 화이트의 능력을 전개하자, 그녀의 오라를 증폭 시킨 ACR이 초고진공 커터를 생성시켰다. 류바는 그렇게 만든 진공 채찍으로 당장에라도 시영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 그녀의 반응에 발맞춰 라트와 유 평, 유빈도 공격 태세를 갖춘다. 그때, 불현듯 시영이 수하들을 제지했다. " 잠깐! 이렇게 수동적으로 청취료를 걷는 건 의미가 없지! " 그리고 무슨 생각에선지 류바를 돌아보며 미소한다. " 류바 씨, 제 얘기를 좀 더 들어보시겠습니까? 아마 얘기가 끝날 때쯤이면 능동적으로 바뀌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 ……! " 류바는 마른 침을 삼키며 채찍을 쥔 양 손에 힘을 주었다. 가인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시민도 요리를 끝마친 뒤였다.멍하 니 물 속에 잠겨 있다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나 보다. 가인이 시계를 확 인해보니 어느샌가 30분이 흘러가 있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차리던 시민이 가인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 가인 씨, 딱 맞춰 나왔네요? 조금만 더 늦게 나왔으면 내가 직접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후훗, 큰일 날 뻔 했죠? " " ……. " " 자자, 배고플텐데 어서 자리에 앉아요. " 시민은 여전히 말이 없는 가인을 이끌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를 자 리에 앉히고 자신도 맞은 편에 앉았다. 식탁의 음식을 바라보던 가인은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 ……이건, " " 가인 씨가 좋아하는 거에요. 맞죠? " 시민은 쑥스러운지 볼을 살짝 붉혔다. 그녀가 준비한 음식은 다름 아닌 하이 라이스였던 것이다. 가인은 그녀가 하이라이스를 준비한 게 의아했는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 장……봐오신 거 아니에요? " " 아, 장 봐둔 건 이따 밤에 요리하려고요. 브루스 님도 어디 가셨는지 오시 지도 않고. 또……. " 시민은 조심스럽게 가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 아무래도 가인 씨 기운차리게 하려면 하이라이스가 좋겠다 싶어서……. " 그 말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었지 만, 그와중에도 시민이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에 감동받았던 것이다. 시민은 가인이 다시 말을 잃자 걱정하며 말했다. " 그냥 원래 준비했던데로 요리할 걸 그랬나요? " " ……아, 아뇨. 충분해요. 저도 하이라이스가 먹고 싶었어요. " 가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은 후 숟가락을 들어 눈 앞의 하이라이스를 비볐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행여나 시민이 비벼주겠다고 할까봐 억지로 다 비볐다. " 잘 먹을게요. " " 예, 맛있게 먹어요. " 가인의 인사에 시민은 여느 때처럼 푸근한 미소로 답했다. 가인은 그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하이라이스를 한숟가락 퍼올린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 간다. 익숙한 하이스 향이 코로 퍼지며, 따뜻한 재료와 밥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가인은 천천히, 그리고 일정하게 그것을 씹어갔다. " ……. " 삼켰다. 요리한 사람이 시민인 만큼 맛은 보증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도 이 맛은 어딘가 그리운 맛이다. 그래. 꼭 신이와 같이 먹었던 하이라이스 를 다시 먹는 것 같다. 가인에게 있어서 하이라이스라는 음식은 먼저 간 가족 들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鄕愁)의 음식이었다. 가인은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 숟가락을 퍼 입에 가져갔다. " ……. " 그때, 문득 뜨거운게 눈에서 흘러내렸다. 가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입 안의 음식을 계속 씹어갔다. 그러나 넘길 수가 없었다. 그는 몇번이고 씹 었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하다가 간신히 입 안의 음식을 삼킨다. 그러자 눈물이 한층 더 진하게 쏟아져나왔다. 그는 코가 시큰거리는 것을 참아내며 아랫 입 술을 깨물었다. " 가인 씨? " 시민은 가인이 말도 하고 음식도 먹자 마음을 놓았는데, 곧 그가 눈물을 흘 리자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가인은 그녀의 부름에 그제서야 자신이 눈물을 흘 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아- 미, 미안해요. 죄송해요. 밥상 앞에서 이게 뭐하는 건지……. "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한층 더 격하게 슬픔이 밀려온다. 지금껏 쌓여있던 울분이 이것을 계기로 한번에 폭발하고 말았다. 도저히 감정을 억누 를 수가 없었다. 시민은 가인의 손을 잡으며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가인 씨, " " 나는……나는……. " 가인은 흐느끼며 말했다. " 나는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대체 뭘 해야 하 는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 시민은 가인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 오라를 찾고 싶어요. 찾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어요. 아무 리 힘들더라도, 아무리 괴롭더라도, 그런 건 상관 없어요. 얼마든지 대가 를 치루겠어요. 내 목숨을 바치라면 바치겠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마리 선 배를 도울 수 있다면, 유리를 도울 수 있다면, 진우 씨를 도울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저 같은 건 상관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 그것은 공허함이었다. "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요! 대체 왜! 어째서! 어째서 오라를 사용할 수 없는 거죠? 왜 전 이 모양이에요! 알기만 한다면! 찾을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얼마든지 노력할텐데!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찾아낼텐데! 어째서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거죠! " 그것은 애원이었다. " 내가 쓸모 없는 인간이라서 그런건가요? 혼자 도망친 주제에! 가족들도 내 버려두고 혼자 살아남은 주제에! 그렇게 까지 해서 얻어낸 오라를! 나는! 나는! 제대로 지켜내지도 못했어요! " 그것은 비탄이었다. 가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오열했다. 그람드링의 말대로 자신은 죽일 가치도 없는 인간일까? 그래서 살려준 걸까? 녀석은 날 동 정한 거야? " 어째서 난 살아있는 거지? 왜 혼자서 살아남아서! 차라리 그때 가족들과 같 이 죽어버렸으면……그랬다면 모든 것이 끝났을텐데! 왜! 왜 살아남아서! " 짝 그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가인의 얼굴이 돌아갔다. 가인은 얻어맞은 뺨을 손 으로 감싸며 망연자실하게 시민을 바라보았다. 뺨을 때린 것은 그녀였던 것이다. 시민은 가인의 뺨을 때린 손을 거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가인 씨가 그런 말을 하면……난 어떡하란 말이에요? " " ……! " 가인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눈물을 보자 정신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뒤를 잇는 비참함. 자기 혐오. 결국 자신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한테서도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이다. " 죄, 죄송해요! 시민 씨! 죄송해요! " 가인은 허겁지겁 몸을 돌려 부엌을 뛰쳐나갔다. 도저히 시민을 볼 낯이 없었 다. 마음이 놓이기가 무섭게 전혀 상관도 없는 그녀에게 화풀이나 해대고, 그 러다 그녀를 울리기까지 하다니! 수치심과 자괴감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 " 그때 그를 뒤에서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시민이었다. 그녀가 가인을 쫓아와 그대로 그를 껴안은 것이다. 가인은 그 난데없는 포옹에 얼이 빠져 그녀를 바라보았다. " 시, 시민 씨? " 시민은 그의 부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 다. 마치 힘을 풀면 그가 어딘가로 사라질 것만 같다는듯이. 시민은 지금이 야말로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실수를 반 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 가인 씨, 우리 둘이서……이대로 어딘가로 가버릴래요? " " 예? " 품에서 들려오는 시민의 속삭임에 가인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시민을 내려 다 보았으나, 그녀는 표정을 보이기 싫었는지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만 있었다. " 피스메이커도, 오라도, 다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까요? " 시민은 그제서야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을 바 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수채꽃이 핀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얼 굴을 봐도, 그 애절한 눈빛만 봐도, 지금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 내가 평생 가인 씨의 곁에 있을 게요. 언제나……가인 씨를 위해 요리할게 요. 그걸로는……안 될까요?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도리질을 쳤다. 시민은 눈에 맺힌 눈물을 떨구며 고개 를 숙였다. " 더 이상……가인 씨가 힘들어 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 그 말에, 시민의 그 말에 가인은 지금까지 힘들었던 모든 것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를 괴롭히던 자격지심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야말로 가인이 바래왔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절실히 바래왔던 구원이었던 것이다. 한줄기의 빛이다! ' 시민 씨, 저도……. ' 가인은 시민의 어깨에 손을 가져가며 그녀를 마주 안으려고 했다.지금 이 순 간만큼은 피스메이커도, 오라도,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잊을 수 있어! 그래. 시민 씨만 있으면 난, ' 안돼! ' 경고였다. 가인은 순간,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시민을 밀어냈다. 갑작스레 그에게서 밀 려난 시민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가인 씨? " 그 눈빛도, 그 얼굴도, 그 목소리도! 너무나! 너무나 가인에게는 평온을 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잊게 해줄 망각의 샘이었다! 망각은! 망각은 안된다! 이대로 자신은 평온해져서는 안된다!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면, 이대로 자신을 결정지어버리면! ' 유가인은 두번 다시 오라를 찾지 못해! ' 그것은 사라진 오라가 보내오는 경고였다. 가인은 시민에게서 뒷걸음질쳤다. 시민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지금 이 순간을! 이 순간은 그야말로 그가 바래왔던 꿈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그 꿈이! 그 행복이! 왜 하필 이럴 때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 이대로……끝낼 수는 없어. ' 이대로 모든 것을 덮고, 나 혼자 행복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 ……그렇게 살 수는 없어! ' 가인은 시민을 외면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집을 뛰쳐나갔다. 더 이상 그 곳에 머물러있다가는, 그 대로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은, 다시는 오라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뛰었다.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렇게 시민은 혼자 남겨졌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시민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아 눈가에 손을 가져갔다. 방금 전까지 흐르고 있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말라 있었다. 어째서? 지금 더 눈물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다지 슬픈 상황이 아닌 건가? ' 시민 씨를……사랑하는데요? ' 문득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을 떠올리자, 마치 그 때를 기 다렸다는듯이 시민의 눈가가 흐려졌다. 시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솔직하게 말했다. 용기를 내서 말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거절이었다. " 하아. 하아. 하아. 하아. " 가인은 눈물을 흩뿌리며 정신 없이 뛰어 다녔다. 시간 감각과 공간 감각은 예 전에 사라져있었다. 집을 나온 순간부터 그런 감각은 버린지 오래였다. 가인은 오른 발을 절면서도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 만 멈추지 않았다. 뛰는 것을 멈췄다가는 머리 속이 뒤엉켜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뛰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뛰었는지 모른다. " 하아. 하아. 하아. 하아. " 그리고 도착한 곳은 22구역의 한 주택가였다. 그곳은 예전, 가인의 가족들이 사고를 당하기 전에 모두가 함께 살았던 집이었다. 사고가 난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옛 집이다. 갈 곳이 없어진 가인은 본능적으로 이곳에 돌아 온 것이다. " 하아. 하아. 하……. " 하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집 자체가 사라져 있었다. 찾아오지 않은 2년 여의 시간. 그 사이에 집 주인이 집을 허물어뜨린 모양이다. 하긴 형편이 어려 운 가인의 가족이 간신히 살았던 골방이다. 건물 자체도 낡았기에 언제 무너뜨 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마치 가족들과 함께했던 추억마저 사라져버린 것 같아 공허함 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옆의 전신주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 아, "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인은 부딪힌 머리를 감싸다가 문득 자신의 꼴이 우스워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신주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 보았다. ' 맞을 짓을 하니까 때린 거야! ' 누가 했는지 몰라도 그런 말이 생각났다. 마치 전신주에 머리를 박은 것이 그 사람에게 혼난 것처럼 느껴진다. 가인은 잠시 머리를 쓰다듬다가 중얼거렸다. " 누구였지? 그 말한 사람……. " 뭔가가 어렴풋이 기억나다가 사라졌다.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집이 있었던 공터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또 다른 말이 생각났다. ' 잔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해! '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어떤 여자아이였다. 그 여자아이가 자신 을 끌어당기며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가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말을 들었던 곳이 왠지 여기였던 것 같은 기 분이 든다. ' 그럴리가. ' 가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뭔가가 점점 확실해져가고 있었다. 거리의 모습 하나 하나가, 자신이 걷고 있는 길 목 자체가 확신을 주고 있었다. ' 아, 저 골목에서 왼쪽으로 들어가. ' ' 여기서 오른쪽! ' 그때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내가 자전거를 몰고 있었고, 그 뒤에는 누군 가가 타고 있었다. 그래. 그 여자아이다. 그 아이가 등 뒤에 매달려 방향을 지시해주고 있었다. 가인은 마치 귀신들린 사람마냥 멍하니 기억의 단편들을 쫓아 걸어갔다. 그리고 도착했다. 가파른 경사가 돋보이는 언덕. 가인은 그 언덕을 깎아만든 S자 형 오르막길 을 따라 올라갔다. 발이 무거웠다. 숨쉬는게 힘들었다.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 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올라갔었다. 그리고 저 언덕 위에서 뭔가 를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뭐였더라. 뭘 봤었지? " ……. " 보였다. 언덕을 오르자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연보라색 으로 물든 세상. 그때와 마찬가지로 태양이 저물어가고, 노을 빛과 수은등이 조화를 이뤄 색을 만들어낸다. ' 나……이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항상 궁금했었어. ' 또 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그 여자아이는 이 풍경을 나와 함께 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 오빠가 깨어나면 이곳에 꼭 들르겠다고. 오빠와 함께 언덕 위의 풍경을 보러 오겠다고. ' ' 헤헤, 내 소원 한 가지가 이루어졌네. ' 누구였지? 어째서 그 아이가 생각나지 않는 걸까? ' 너와 함께했던 이 1년간을……절대로 잊지 않을게. ' ' 바보! 뭘 잊지 않겠다는 거야! 어차피 모두 잊어버릴 거면서! ' 잊어? 나는 잊어버린 건가? 그 아이에 대한 일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소한 단편들은 떠올라도 정작 중요한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인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기억이 뭔가 뒤죽박죽 이었다. 가족들이 죽은 후, 그는 홀로 자취 생활을 하다가 피스메이커에 가 입했었다. 그 2년 여의 시간동안 방금 전과 같은 기억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 이다. ' 어지러워. ' 가인은 이마에 손을 대며 가드레일에 몸을 기댔다. 오늘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었다. 이미 그 일들만으로도 쓰러지기에는 충분하 다. 여기서 더 뭔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 ……가인? " 하지만 그런 바램은 불가능했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던 것 이다. 가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 테레, 이아? "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휘날리는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 사이로 의아한 표정을 짓고있 던 이는 다름아닌 테레이아 민체스터였던 것이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21 - Ｂy Ｎext Ｎeo =-=-=-=-=-=-=-=-=-=-=-=-=-=-=-=-=-=-=-=-=-=-=-=-=-=-=-=-=-=-=-=-=-=-=-= 다음날 아침. 언더 시티 유레카의 메인 센터. 시폰 사령관의 개인 사무실은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센터의 40층에 위 치해 있었다. 워낙 인적이 드문 층이었는지라 사무실 밖의 홀은 기이한 적막 으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면 희미한 귀곡성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얼핏 들으면 건물 내에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소리처럼 들 렸으나, 그것은 분명 어린 아이의 비명 소리였다. 비명은 시폰의 사무실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끼아아아아아아악! " 사무실로 다가갈수록 소리는 한층 더 뚜렷해져 간다. 그리고 사무실의 문을 넘어서는 순간, 마치 우뢰와도 같은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것은 한 사람 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의 울음 소리였다. 비명을 지르는 이는 그람드링이었다. 그는 금새라도 혈관이 터져나올 것처럼 붉어진 머리를 붙잡고 방안을 뒹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은 현재 상상을 초 월하는 고통으로 짓뭉개지고 있었다. " 끄아아아아- 카아아악! " 그람드링은 땅바닥을 손톱으로 긁다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해했다. 그 바람에 손이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머리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악을 하고 애를 써도 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차라리 머리가 터져 죽는 편이 나았다. 이 두통 은 그가 체력이 바닥나서 죽든지, 머리에 총을 쏴서 죽던지, 어쨌든 죽지 않 으면 멈추지 않을 그런 형벌이었다. " 그람- 왜 죽이지 않았지? "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그에게 음산한 시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람드링은 코와 눈물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구둣발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이 구둣발의 주인이 저 위에서부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 이다. 그람드링은 애써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을 띄우려고 했지만, 계속되는 두통에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시폰은 쓰러진 그람드링에게 몸을 낮춰, 그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얼굴을 들 어올렸다. 그리고 울고있는 양아들과 눈을 맞췄다. " 나는 실망했다. 기껏 너를 믿고 일을 맡겼건만, 오르크리스트를 방해한 것 도 모자라 오라의 주인까지 살려주다니. 설마 네가 그렇게 오라의 주인에 게 애정을 쏟고 있는지 몰랐구나. " 그람드링은 흐릿해진 시야로 시폰의 등 너머에 있는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 다. 오르크리스트는 눈 앞의 가혹한 고문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 떨고 있었다. 그러다 형과 눈이 마주 치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린다. 오르크리스트는 입으 로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그람이 나쁜 거야. 그람이 나쁜 거야'라는 말 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쿵 시폰은 들고 있던 그람의 머리를 땅바닥에 팽겨쳤다. 그리고 수중에 들고 있 던 제어기의 스위치를 껐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람드링의 두통이 사라진다. 그 제어기는 그람드링의 뇌하수체 밑에 장착된 소형의 오라제어정류기(ACR; Aura controlled rectifier)에 전기 신호를 보내는 발신기였다. 그 ACR은 뇌 의 활동에서 일어나는 전류를 공급원으로 하며, 제어기의 신호에 따라 내부의 게이트 회로에 신호를 인가(認可)시키는데, 일단 게이트에 신호가 인가되면 사 이리스터(thyrister)의 원리에 따라 양극과 음극 사이로 오라가 흐르게 된다. 뇌속에서부터 오라를 증폭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ACR은 AI슈츠나 헤븐 스매쉬의 ACR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기에, 오라의 증폭량도 얼마되지 않았다. 그저 체내의 온도가 약간 상승 하는 초전도 현상을 일으킬 뿐이다. 하지만 그 초전도 현상이 뇌하수체 밑의 송과선에서 일어나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송과선은 제3의 눈, 영혼의 자리라고도 일컫어지는 영체의 출입구였다. 그 통 로로 미약한 오라를, 체내에서 생성시킨 것도 아닌 이물질을 투입시키게 된다 면 영체를 오라로 직접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효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영체란 곧 카르마 에너지의 집합체이자 생물체의 핵, 오라의 근원이었다.그 근원을 아무런 여과도 없이 공격당하면 사람은 현세에서 느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흔히들 사후에 지옥으로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 도 다 이 영체가 소멸되어갈 때 느껴지는 고통에서 비롯된 말이다. 시폰은 뤼멘 형제들을 관리하기 위해 이런 반인륜적인 행위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남자였다. " 끄극- 컥, 하, 학……. " 그람드링은 간신히 고통에서 해방되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새된 숨을 몰아 쉬었다.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전신의 근육이 너덜해져 있었고, 뼈가 욱신 거린다. 또 이는 얼마나 악물었는지, 어금니가 잇몸을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매번 임무를 실패할 때마다 받아온 형벌이지만, 그는 절대로 이 고통에 익 숙해질 수가 없었다. " 자- 얘기해봐라, 그람. 왜 오라의 주인을 죽이지 않았지? " 시폰은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저 인간의 무서운 점은 평소 때나 화날 때 나 똑같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몸서리 쳐지게 싫어서, 그 람드링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절대로 이 악독한 마스 터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쉽게……죽일 수는, 없어……. " 그람드링은 신음과도 같이 중얼거리며 시폰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애써 오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 죽이는 건…… 너무 쉬우니까. " " ……. " 그 말에 시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람드링이 한 말은 며칠 전 자신이 그 에게 해주었던 말인 것이다. 시폰은 한방 먹었다는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자 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하하하하- 그래! 그런 이유였단 말이지! 아직은 죽일 때가 아니란 말이지! " 그는 감탄하며 그람드링에게 말했다. " 역시 넌 내 아들이다. 그래! 그대로 죽이기에는 아까워! 좀 더 효용 가치 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는 것도 재미있겠어! " 무엇보다 오라의 주인은 잠시 제껴둘 필요가 있었다. 녀석보다는 먼저 손을 봐줄 먹이감이 생겨난 것이다. 시폰은 어젯 밤에 귀환한 수행원의 보고를 떠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공들였던 계획이 마침내 결실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는 오르크리스트가 건네주는 정장 상의를 입으며 입구 쪽으로 향했다. " 크리스, 그람을 치료해준 뒤 둘이서 같이 작전 본부실로 오너라. 아무래도 약간의 소동이 있을듯 하니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 " 아, 알겠습니다, 마스터. " 시폰은 문을 나서기 전에 그렇게 말했고, 오르크리스트는 앞의 형벌 때문인 지 평소보다 더욱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폰이 완전히 방을 나간 뒤에야 서둘러 그람드링에게 다가갔다. 오르크리스트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형을 부축하며 그에게 포션을 주 사했다. " 바보. 그러게 내가 뭐랬어? 제멋대로 하다간 혼난댔잖아! 잘 알면서도 왜 매번 그래! " 고압주사기의 총구를 그람드링의 목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포션 이 강하게 분사되며 피부 내로 침투되는 것이 느껴진다. 포션은 체내의 재생 력을 30퍼센트 증가시키는 것 외에도 떨어진 체력을 보충시키고, 혼미해진 정 신을 일깨우는 효과가 있었다. " ……. " 그람드링은 ACR로 거덜났던 정신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갑자기 곁에 있던 오르크리스트를 거칠게 밀어버린다. 오 르크리스트는 영문도 모른채 바닥에 엉덩이를 찍었다. " 윽- 무, 무슨 짓이야? " " 제길……. 시끄러! 쥐죽은듯 구경하고 있던 주제에 이제와서 엉겨붙지마! " 그람드링은 괜히 동생에게 화풀이를 하며 신경질적으로 쇼파를 걷어찼다.에 테르 상태인 AI슈츠와의 연동 때문인지 그 발길질은 가볍게 쇼파를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쿠당탕. 거칠게 벽과 부딪혀 쇼파가 부서진다. 오르크리스트는 어쩔 줄을 모 르고 안절부절했지만, 이럴 때의 형은 가만 내버려두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 기에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그람드링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 빌어먹을! 역시 그때 그 병신을 죽여버리는 거였어! 대체 이게 무슨 꼴이 야! " 아무리 생각해봐도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녀석을 살려줄 필요가 없었다. 왜 하필 그런 변덕을 부렸던 걸까? 죽일 맛도 나지 않는 얼간이라서? 차라리 살 려두는 편이 녀석에게 가혹하리라고 생각해서? ' 어차피 그 정도 협박에 도망친 놈이다. 평생 그렇게 도망이나 치며 살아라. 내 눈에 띄면 죽여버릴 테니! ' 그람드링은 유가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애써 끓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가 작전 본부실로 들어갔을 때, 이미 회의는 진행되 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어제보다 많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제는 시폰이 특정 인원만 소집한 회의였지만, 오늘은 반대로 시폰이 불려나 온 회의였기 때문이다. 시폰의 앞에 앉아있는 이들은 오퍼레이터 팀의 치프 윤채영, 기술부 치프인 시더 웰리스,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인 닥터였다. 그리고 진 사령관의 대리자 라고 할 수 있는 민수정과 그 휘하의 피스 대원들! 팔라딘 대의 대장인 정진우가 빠져있었지만 한국 지부의 중책을 맡고 있는 모든 책임자가 이 한 자리에 모여있었다. 과연 이들 멤버라면 총사령관을 소 집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대표자 격인 인물은, ' 피스 그레이. ' 바로 그였다. 그람드링은 시폰의 정면에 앉아 있는 브루스 류와 한시민을 바라보았다. 저 들이 오늘의 회의를 주최한 장본인들이었다. 유가인의 동거인인 그들은 누구 보다도 유가인의 신변 문제에 민감했기에, 어제의 일들을 그냥 넘길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들에게서 사정을 듣고 모인 좌중은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 지구 방위군의 짓이 아닐까요? " 채영은 가인의 암살범으로 지구 방위군을 지목했다. 일단 피스메이커와 표면 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기관이 그들이었고, 총기류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 혐의가 컸다. 이 통일한국이라는 나라는 20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총화기 의 개인 소지가 불법이었기에 범인이 총을 사용했다는 점만으로도 대상의 범위 가 대폭 좁혀지는 것이다. 거기다 그 총기가 저격용 라이플이라면 더더욱 대상 이 한정된다. 하지만 수정은 채영의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 아무리 PM조약이 깨졌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뒷일도 생각하지 않고 그런 일 을 벌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무엇보다 가인 군에게 붙어있던 팔라딘 대원들은 엄선된 용병들이었습니다. 그들 같은 정예가 무방비 상태로 기습 당한 것도 그렇지만 제대로 총격전 한번 벌이지 않고 당한 것은 더더욱 이 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솜씨 좋은 클리너(Cleaner)라고 하더라도, 지구방 위군의 특수 부대가 투입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의 제압은 불가능해요. " " 하긴. 팔라딘 대원들의 사인에는 의문이 많습니다. 총이나 칼에 의한 살인 도 아니고. 단지 목이 비틀려 죽은 거니까요. 그것도 공업용 모터 같은 무 지막지한 괴력에의한……. 아, 실례. 여성 분들 앞에서 할 얘기가 아니군요. " 닥터는 얘기를 하다가 채영과 시더의 안색을 살피고 서둘러 말을 끊었다. 수 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죠. 그러니까 지구 방위군의 행동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라는 거에요. 그런 식의 수법은 프로 클리너들의 수법이 아니죠. 그냥 소음총을 사용해 도 될 것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육탄전을 벌이는 건 이쪽 세계의 정석 이 아니에요. " " 하지만! 그럼 대체 누가 가인 씨를 노린 거란 말이에요? 도대체 누가! " 채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해고 사건에 이어 암살이라니! 어째서 자꾸만 그런 일들이 가인 씨에게 생기는 걸까! 그녀는 화가 났다. 가인을 괴 롭히는 무리들에게도 화가 났고,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다. 채영의 곁에 있던 시더도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약속했는데……. 엑스카이저……가인과 마저 보기로. " 이런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시더로서는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무엇보다 사라진 가인이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지 못한지도 어느덧 이주일이 되어간다. 해고니 암살이니 그런 걸 떠나서, 단지 그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녀만의 이기심이었을까? 어쨌든 그녀도 무력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 다. 그때 브루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외부인의 소행이 아니라면 내부인의 소행으로 볼 수 있지. " " ……! " 모두가 경악하며 그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런 시선의 집중에도 아랑곳 하 지 않고 브루스는 말을 이어나간다. 줄곧 맞은 편에 있는 시폰에게서 눈을 떼 지 않은 채. " 가인을 암살하는 시기가 너무 시기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마치 그 녀 석이 해고당하기만을 기다려왔다는듯이. 그리고 만약 내부인이 범인이라 면 팔라딘 대가 그렇게 쉽게 당한 것도 이해가 간다. 같은 동료니까 경계 하지 않았던 거지. 무엇보다 나는 피스메이커의 기밀이 그렇게 쉽게 유출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지구 방위군이 PM조약을 깬 명분도 다 피스 대원들의 신상 명세를 요구했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런 녀석들이 피스 블 루가 누구인지 알고 유가인을 저격했단 말이냐? " " 아, " 그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기에, 좌중은 자신도 모르게 시폰을 돌아보았다. 지금 브루스는 마치 시폰이 범인이라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 만 반신반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대체 총사령관인 그가 휘하의 피스 대원을 무슨 이유로 제거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시폰이 가인의 처사에 매정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 그를 범인 으로 지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오르크리스트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버럭 소리질렀다. " 뭐야, 그 말은! 마스터가 암살을 시주하기라도 했단 말이야! " ' ……멍청이. ' 곁에 있던 그람드링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바보같은 동생이 가만 있어도 될 것을, 스스로 의심받을 행동을 자처한 것이다. 그렇게 반응하면 '우리가 범인 이오' 하고 말하는 것 밖에 더 돼? 어차피 아무런 증거도 없다. 우리가 입 다 물고 있으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런 반응을 기다려왔다는듯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르크 리스트를 몰아붙였다. " 나는 내부인이라고 했을 뿐이지 특별히 누군가를 지적한 적은 없다. 그런데 정확하게도 한 사람을 짚어내는 것을 보면 뭔가 짐작가는 구석이 있나보군. " " 누, 누가! 말도 안돼! 나는 아무 것도 몰라! 아무 것도! " 역시 피스 대원이라고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인 것이다. 그 너무나 솔직한 반 응에 그람드링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탄했고, 브루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 었다. 오르크리스트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좌중의 분위기는 험악 해지고 있었다. 브루스는 얄밉게도 계속 그를 몰아 붙였다. " 팔라딘 대원의 사유도 원인 모를 괴력이었다지? 마치 AI슈츠를 입은 누군 가에게 당한 것 처럼? 거기다 저격이라는 것도 뭔가 묘하군. 피스 대원 중 에 저격이 특기인 녀석이 있지 않았던가? " " ……! "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채영과 시더는 대번에 감잡았다는듯 시폰에게 소리 쳤다. " 지금 이 말이 사실입니까, 사령관! 암살을 시주한게 당신이었습니까! " " 가인을 왜 죽이려고 했어! " 그 모습에 닥터와 수정은 속으로 신음했다. 아직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대 번에 시폰을 범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것도 부하가 상관에게! 그만큼 그녀들이 평소 사령관에게 불만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지만, 적어 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만큼은 말을 가려해야 했다. 닥터는 만약 주유화까지 이 자리에 데리고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 각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 대답해요! 가인 씨를 암살한 건 당신이지! " 다혈질적인 채영의 외침에 모두가 시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람드링은 이를 갈며 여차하면 품속의 리볼버를 뽑아들 준비를 했다. 마스터는 사전에 이런 일 이 있을 줄 알고 있었던 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던 건 이걸 말하는 거였어? 그렇게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가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그들의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 글쎄요. 외부인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 " ……! " 시폰은 웃고 있었다. 그는 좌중의 반응을 살피며 재미있다는듯 웃고 있었는 데, 그 모습이 너무나 태연자약한지라 채영과 일행은 할 말을 잊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가인에 대한 일을 단순한 외부인 일로 치부 하는 그의 태도에 채영과 시더가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당신이란 사람은! " 끼릭 하지만 그녀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람드 링이 리볼버의 격철을 당겨서 그녀들에게 겨눴던 것이다. 그는 안색이 창백해 진 채영에게 히죽 웃어보였다. " 종알종알 말 되게 많네. 마스터가 외부인의 일이라잖아? 사장이 해고당한 놈 뒤처리까지 해주는 거 봤어? 퇴직금 넉넉히 주고 보냈으면 됐지 뭘 더 바래? " " ……! " " 자자- 마스터 얘기 안 끝났잖아? 서있지 말고 다들 자리에 엉덩이 붙여. " 그람드링은 서있는 채영과 시더에게 총구를 까딱였고, 그녀들은 이를 갈며 자리에 앉았다. 시폰은 그제서야 상황이 정리되었는지, 준비하고 있던 본론 을 꺼냈다. " 일단 그런 얘기는 접어두기로 하고, 좀 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회의하 도록 합시다. " 그는 사람들이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작전 본부실의 입구 쪽으로 손을 들 어보였다. 그곳에는 어느새 온 건지 모를 남녀 한 쌍이 서있었다. 그들은 시 폰에게 다가오며 경례했다. " 피스!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 호출에 응했습니다. " " 피스!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 호출에 응했습니다. " 그들은 뤼멘 형제에 이은 시폰 휘하의 나머지 피스 대원들이었다. 그들을 보 던 한국 지부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피스 대원들을 모두 소집한 시폰의 의도가 심히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류바에게 물었다. " 피스 화이트. 손이 왜 그렇게 된 건가요? " 그 물음대로 류바는 오른쪽 손 전체를 압박 붕대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어제 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대원이 갑자기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수정의 질문에 대답한 이는 류바가 아닌 시폰이었다. " 아- 놀라실 것 없습니다. 단지 비밀 임무 중에 약간의 트러블이 있어서. 상 처도 포션으로 치료해놓았으니 문제 될 건 없어요. " " 아니, 문제 될 게 없다니요! 어째서 상처를 입은 즉시 메디컬 센터로 오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포션으로 치료했다면서 저 붕대는 뭐고요? " 시폰의 말에 닥터가 보기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피스메이커의 가장 중추라 고 할 수 있는 피스 대원은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피 스 화이트는 저런 중상을 입고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시폰은 어깨를 으쓱하며 닥터에게 말했다. " 비밀 임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밀 임무 중에 다쳤으니 비밀로 하는 거 야 당연한 거죠. 그리고 저 붕대는 만약을 대비해 그녀에게 하고 있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포션이라고 해도 떨어졌던 팔을 붙이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겠어요? " " ……! " 팔이 떨어졌다고! 모두가 놀라서 류바를 바라보았지만, 당사자인 그녀는 정작 아무 일도 없었 다는듯 무표정했다. 수정은 무섭게 굳은 표정으로 시폰을 노려보았다. " 대체 피스 대원의 팔이 잘려나갈 정도의 비밀 임무가 뭐였는지 궁금하군 요. 얘기해보시겠습니까? " " 물론! 그것을 위해 이렇듯 여러분들의 호출에 응한 것 아닙니까. " 시폰의 그 말은 곧 피스 화이트의 일이 없었다면, 당신들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었다. 가인의 암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의 태도에 일동은 분노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일단 피스 화이트에 대한 일부터 듣기로 했다. " 제가 피스 화이트에게 맡긴 비밀 임무란 바로 피스 블루와 피스 옐로우에 대한 감시였습니다. " " 감시…… 라고요? 가인 씨와 시민 씨를? " " 예. 왜냐하면 그들은 피스 블랙과 가장 관련이 있는 용의자들이었기 때문 이죠. 일단 피스 옐로우로 말할 것 같으면 피스 블랙의 하나 뿐인 혈연이 니까. " 그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시민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이 고만 있었다. " 그리고 피스 블루는 피스 블랙이 납치극까지 벌일 정도로 애착을 가진 인 물입니다. 피스 블랙이 피스 블루에게서 무엇을 바라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저번 전투에서 그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에 언젠가 다시 접근해 올 거라 생각했죠. " 그때 시폰이 브루스를 돌아보았다. " 하지만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더군요.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피스 블랙이 접촉을 시도한 이는 다름 아닌 당신이었던 겁니다. " 거기서 말을 끊자, 그 뒤는 류바가 이었다. " 사령관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저는 피스 그레이의 뒤를 따라 12구역의 폐 지하철 역에서 피스 블랙과 그 일행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피스 그레이는 장시간 피스 블랙과 얘기를 하다가 돌아가더군요. " " 스, 스승 님. 그게 사실인가요? " 수정이 류바의 말에 당황하며 브루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 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피스 블랙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 같아 사람들은 대경실색했다. 브루스는 류바를 바라보았다. 그는 애초에 그녀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오라 컨트롤이 미숙했기에 패턴 화이트의 정신 감응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녀의 미행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돌리 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아지트를 들킨 피스 블랙이 그녀를 내버려둘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피스 블랙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돌려보내준 거지? ' 아니면 피스 화이트가 피스 블랙의 손에서 빠져나올 정도로 능력이 고강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자신의 판단 미스였다. 일이 최악의 상황으로 돌아가려니 이렇게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시폰은 대번에 브루스를 형세 역전시키며 미소지었다. " 결국 당신이 말한 내부인이란 바로 당신 자신이었군요. 피스 블랙이 뭐라 고 얘기하던가요? 자신과 손을 잡자고 하던가요? 그래서 같이 피스메이커 를 일망타진시키자, 그렇게 말하던가요? " 그는 미소를 거두며 본부실의 출구 쪽을 가리켰다. " 당신에게는 더 이상 피스 그레이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피스메이 커에서 받았던 모든 것을 반납하시고, 여기서 나가십시오. 그나마 지금껏 함께 해온 정을 생각해서라도 손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 그것은 유가인에 이은 두번째 피스 대원의 해고였다. 브루스는 시폰의 말에 실소를 터뜨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 함께 해온 정이라……. 후, 그래.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도 그냥 물러나 주지. 하지만 네 놈과 나 사이에 정 같은 게 있었는가 의문이군. " 브루스는 자신의 손목에 찬 무전기와 피스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몸을 돌 렸다. 그리고 회의장을 나가기 전 잠시 시폰에게 경고했다. "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라의 주인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유가인을 건드리는 녀석들은 모조리 내 '적'으로 간주한다. 그게 지구 방위대든 피스메이커든 상관 없어. 박살을 내주지. " " 이런.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람들, 무서운 사람을 적으로 돌렸군요? " 시폰은 여전히 능청스럽게 웃으며 브루스의 말을 되받았다. 브루스는 마지막 으로 그를 노려본 후, 천천히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그 의 앞을 막아서는 인원이 있었다. " 잠깐-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가시는 경우가 어디있나? "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였다. 그람드링은 어느새 시폰의 곁에서 브루스에게 다가와 그의 머리에 리볼버를 겨누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오르크리스트가 그람드링의 리볼버 한정을 건네받아 브루스를 겨누고 있다. " 우리는 마스터처럼 적에게 아량을 베풀지 않아서. 적이 되기 전에 이 자리 에서 죽여주지. " 오르크리스트는 격철을 당기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 갑작스러운 대치 상황에 수정도, 닥터도, 채영과 시더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마른 침만 삼켰다. 도저히 자신들이 끼어들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피스 화이트도 뤼멘 형제를 지원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으나, 그 앞을 코마히 코가 가로 막았다. " 가만히 계시는게 다친 몸에도 좋을 겁니다. " " ……! " 브루스는 양쪽에서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쌍둥이 형제를 바라보며 작 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쩍 어깨를 한번 흔들었다. 순간, 마치 바위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가 브루스에게서 사라져 있었다. 적어도 지켜보던 일행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쌍둥이 형제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브루스의 개산벽에 양 가슴을 얻어맞고 어느 샌가 작전 본부실의 벽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코마히코와 류바였다. " 말한대로죠? " " ……. " 코마히코의 낮은 물음에 류바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상황을 방치하고 있던 시폰도, 설마 자신의 양아들들이 이렇게 손쉽게 격퇴당할 줄은 몰랐기에 처음 으로 입가의 미소를 무너뜨렸다. 무엇보다 그람드링이 당한 것이 쇼크였다. 순 간 예지안으로도 공격을 예지하지 못했단 말인가! 브루스는 그런 시폰을 향해 낮게 경고했다. " 아량을 베푼 건 내 쪽이다. 다시 한번 내 앞을 가로막으면 죽여버린다. "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미련 없이 본부실을 나가버렸다. 그 뒤를 재빨리 시민 이 뒤따른다. 수정도 자신의 스승을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곧 자신의 중책 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망연자실해져 있는 시폰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 대리 사령관 님! 그 중요한 사안이라는 게 이걸로 끝입니까? " " ……예? 아아- 그럴리가요.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입니다." 시폰은 쓰러진 양아들들에게 잠시 시선을 두다가 곧 정신을 수습하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역시 대단하군, 브루스 류. 루미네센스로는 상대가 안된다는 건가. " 피스 화이트가 수고해준 덕분에 피스 블랙의 아지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 기가스의 복구로 그 곳을 떠날 수 없는 모양이더군요. " 시폰은 수정을 돌아보며 한국 지부의 사령관으로서 명령했다. " 앞으로 2시간 후, 정확히 13시 정각. 피스메이커는 피스 블랙의 본거지인 폐 지하철 역을 습격합니다. 이 습격 작전은 피스메이커와 지구 방위군의 연합 작전이 될 것이며 피스메이커가 뿌린 과오를 스스로 거두는 수확이 될 겁니다. " " 브루스 님,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 메인 센터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시민은 브루스에게 물었다. 브루 스는 엘리베이터의 유리 벽에 비친 언더 시티를 내려다보며 퉁명스럽게 답했 다. " 내가 뭘? " " ……왜 사실대로 말씀하시지 않았냐고요. 브루스 님이 그를 만나러 간 건 가인 씨의 상태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잖아요. " " ……. " 어제 한 밤에 돌아온 브루스는 혼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시민에게 피스 블랙과 만난 일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일단 그녀가 한시영의 동생이기도 했고, 유가인의 실종에 상심하고 있는 모습도 보기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브루스는 시민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 나는 단순히 호기심으로 녀석을 만나러 갔던 것 뿐이다. 그리고 코쟁이의 말대로 녀석에게서 손을 잡자는 제의를 받았지. 결코 애송이를 걱정해서 간 게 아니야. 사실대로 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않느냐? " " 후후. 그런 것 치고서는 얼굴이 우거지 상이신데요? " " ……! " 브루스는 살짝 웃음을 터뜨리는 시민의 모습에 말 그대로 우거지 상을 지었 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시민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 흥. 그러는 너야말로 우거지 상이로군. 남에게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자신 의 얼굴부터 살펴보지 그러냐? " " ……. " 시민은 대번에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그녀가 의기소침해지자 브루스는 낮 게 탄식했다. 좀 기운을 차렸나 했더니 역시나로군. 그가 어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민은 그야말로 울다가 지쳐 쓰러져 있었 다. 피폐해진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브루스는 자신이 피스 블랙과 만났 던 얘기를 해주고 부랴부랴 오늘 아침의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 그때 내가 자리를 지켰어야하는데. ' 브루스는 성급하게 피스 블랙을 만나러 간 자신을 탓하며 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책한다고 해서 변할 것은 없었다. 브루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에 시민이 이대로 전전긍긍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 아무 말도 없었다고 했지? " " 예? " 갑작스런 브루스의 질문에 시민이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브루스는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말했다. " 그, 네 녀석이 그……크흠! 고백했을 때! 그때 애송이가 아무런 대답도 없 이 뛰쳐나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 " ……예. " 시민은 그제야 질문의 요지를 알아듣고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외면하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가인의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서 선했다. 어째서 자신은 그에게 고백했던 것일까? 고백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마 음 속에 묻어두고만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이렇게 마음이 아플 일도, 가 인이 떠날 일도 없었을 텐데. 후회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게 눈시울을 붉히는 그녀에게 브루스는 재차 물었다. "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이른 것 아니냐? " " 예? "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되물었다. 브루스는 차마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 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낯뜨거운 소리를 해대려니 얼굴이 화끈거려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 애송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너 혼자 어림짐작한 것일 수도 있단 말 이다. 좋다느니 싫다느니, 본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 고 거절이라고 단정짓느냐? " " 하, 하지만……. " "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대답을 뒤로 미룬 것이라고. " 대답을…… 뒤로 미뤘다고? 시민은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브루스를 가만히 쳐다 보기만 했다. 브루스는 담담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 지금 애송이에게는 여러모로 힘든 시기다. 녀석은 그야말로 이 악물고 버 티고 있지. 그건 네가 옆에서 지켜봐왔으니 잘 알고 있겠지? " " 예……. " " 녀석은 뭔가 나름대로 매듭을 짓고 싶은 거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가려는 거야. 그런 순간에 난데없이 고백을 받았으니 덜컥 겁이 났겠지. " " 겁이, 났다고요? " " 이대로 너에게 의지하게 될까봐,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게 될까봐, 그게 겁 이 났단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부리나케 도망친 거 아니겠냐. 뭐, 도망칠 필요까지는 없었겠지만. " 시민은 뒷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은 그저 그의 힘이 되고 싶 었을 뿐, 가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브루스에게 물었다. " 그, 그럼……가인 씨는, 가인 씨는 절 거부한게 아닌가요? 절, " " 그것까지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녀석이 대답할 때까지는 단정 지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 브루스는 귀찮다는듯 머리를 긁적였다. 제길, 빌어먹을 애송이. 사라진 뒤에 도 사람 애 먹이고 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 녀석이 스스로 일어섰을 때, 그리고 혼자 힘으로 돌아왔을 때. 그 때 녀석 이 대답하는 것을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떠냐? 설마 고백한 주제에 대답 듣 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겠지? " " 그, 그럴리가요. " 시민은 짧게 고개를 저은후,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그 미소가 예전 과 같이 환해 보였는지라 브루스는 위로한 보람을 느끼며 엘리베이터의 문을 바라보았다. 얘기하고 있는 사이에 1층에 도착했는지 자동문이 열리고 있었다. 브루스는 턱으로 문 밖을 가리키며 시민에게 말했다. " 기운 차렸으면 어서 집으로 돌아가봐! 혹시나 애송이가 돌아와서 면목 없 다는듯 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 아마 어제 점심 때부터 내내 굶었을텐 데 밥이라도 해줘야하지 않겠냐! " " ……예! " 시민은 힘차게 대답하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 그러다 문득 브루스가 엘리 베이터 안에서 나오지 않자 그를 돌아보았다. " 브루스 님? " " 먼저 가봐라. 난 마저 해치울 일이 있으니까. " " 아, 예……. 그럼 먼저 가있을게요. " 하지만 시민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브루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는 것을. 브루스는 메인 센터를 나가는 시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 다. ' 이제 너희들 차례다. 성마리, 정진우, 이유리. 지금 일어서지 않으면 너희 들은 앞으로도 영영 일어설 수 없다. 부디 더 늦기 전에 깨달아라. 자신들 의 신념을! '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가인을 떠올렸다. ' ……애송아. 네가 찾아낸 답. 기다리고 있으마. ' 위잉 엘리베이터의 자동문이 닫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 어디에도 브루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증발 한 것처럼 언더 시티에서 사라진 것이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22 - Ｂy Ｎext Ｎeo =-=-=-=-=-=-=-=-=-=-=-=-=-=-=-=-=-=-=-=-=-=-=-=-=-=-=-=-=-=-=-=-=-=-=-= 작전 본부실에서 브리핑을 마친 코마히코는 곧장 메디컬 센터로 향했다. 결국 회의는 시폰의 의도 대로 끝을 맺었다. 오늘 13시가 되는데로 피스메이 커는 지구 방위군과 연합 전선을 펴서 피스 블랙의 아지트를 습격하기로 한 것이다. 시폰은 여느 때의 몬스터 전(戰)과는 달리 이번의 상대는 총화기가 통용되는 인간이기에 지구 방위군도 제 몫을 다 하리라 생각하고 그들의 협조 를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코마히코는 그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 아무리 차원 구조가 같은 삼차원의 존재라 하더라도, 피스 블랙과 그 일행 은 오라 능력자다. 같은 오라 능력자가 아닌 이상 피해만 늘어날 뿐이야. ' 무엇보다 예전의 급습에서도 자신들은 그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무리 지구 방위군의 병력이 투입된다고 한들 전황에는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시폰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닐텐데 어째서 지구 방위군을 끌어들인 것일까? ' ……설마. ' 코마히코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시폰이 대 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격의 지휘자라고 하더라도 코마히코의 이유대로 지구 방위군을 끌어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지구 방위군의 부대에 아켄석 탄을 지급해서 승률을 올릴 생각이었겠지. 그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며 코마히코는 메디컬 센터로 들어갔다. 13시까지는 아직 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 사이에 마리의 병문안을 하고 갈 셈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 가인의 실종은 알려줘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코마히코는 마리의 병실 앞에 도착하자 전자 지문 데스크에 자신의 인식 코 드를 통과시키고 자동문을 열었다. 위잉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자신보다 먼저 마리를 찾아온 방문객이 있음을 깨 달았다. 방문객은 무영신풍류의 현 계승자이자, 마리의 아버지인 성비영이었 다.그는 코마히코의 사부(師父)인 황연우의 부군(夫君)이었으니 코마히코에게 는 사부(師夫)가 되는 셈이다. 코마히코는 비영에게 깊게 목례했다. " 비영 사부,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 " 아- 코마히코 군. 오늘은 운이 좋아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매번 우리 마 리의 병문안을 와주느라 수고가 많네. " " 당연한 일입니다. 수고라니요. " 코마히코는 비영의 웃음짓는 얼굴에 작게 미소하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 다. 마리를 바라보니, 그녀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 의 상태에는 진전이 없었던 모양이다. 비영은 코마히코를 만난 것이 반가웠는지 얼굴에서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 한국 생활에는 좀 익숙해졌는가? " " 그럭저럭 적응하고 있는 편입니다. 아직도 김치는 잘 먹지 못하지만……. " 그 대목에서 코마히코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짜장면은 좋아하지만 김치는 몇 번을 노력해도 잘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원체 매운 음식을 못 먹 기도 했지만, 싱거운 일본 음식에 입맛이 적응된 탓이 더 컸다. 어렸을 때부터 연우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한국에 대한 것은 닥치는데로 배워 온 그였지만, 이 김치만큼은 두 손 들 수 밖에 없었다. 비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코마히코에게 충고했다. "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김치를 억지로 먹다가 기도가 막혀 죽은 일본인의 사례도 있으니까. " " ……그, 그게 정말입니까? " " 물론 거짓말일세. " " ……. "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농담을 하는 그의 모습에 코마히코는 작게 한 숨을 쉬 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 사부는 의외로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그 렇기에 냉정한 황연우와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코마히코는 잠시 질투심에 가까운 부러움을 느꼈다. " 그동안 도장에 들리지 않아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린 줄 알았네. 아무 리 피스메이커의 일이 바빠도 그렇지. 일주일에 한번은 찾아와야 하지 않 는가. " " 아, 죄송합니다……. 매번 가겠다고 생각하고서 그만. " 비영의 말에 코마히코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사과했다. 사실 코마히코가 도 장에 들리지 않는 데에는 사정이 있었다. 비영에게는 나쁜 감정이 없었으나 연우의 남편인 그를 대할 때면 왠지 심란해지는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래서는 안된다며 스스로를 꾸짖는 코마히코였지만 이것만 큼은 그도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되도록이면 비영과 마주 치 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도장으로 가는 발걸음도 뜸해진 모양이다. 비영은 푸념하듯 말했다. " 아니. 자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지. 다만 매일 같이 걸려오는 안 사람의 전 화가 좀 고달픈지라. 자네에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면 될 것을, 코마히코 는 잘 지내고 있느냐, 밥은 어떻게 먹고 있느냐, 어디 다친데는 없느냐. 그러다가 내가 조금이라도 대답하는 것이 늦으면 대번에, 어떻게 내 제자 의 일도 모르느냐, 남편으로서의 자각은 있느냐, 등등. 아주 죽을 맛이네. " " ……죄, 죄송합니다. " 코마히코는 얼굴이 시뻘개져 재차 사과했다. 연우가 비영에게서 자신의 안부 를 묻는다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것이다. 비영의 말대로 코마 히코에게 직접 전화를 하면 될 것을 그러지 못하는 게 역시 연우다웠다. ' 사부님도 참…….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만 하시려는 건지. ' 코마히코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마리의 안색을 살폈다. 뭔가 아까부터 이야 기가 헛도는 게, 이러다간 13시가 되어도 본론을 꺼내지 못할 것 같았다. 비 영도 코마히코가 마리에게 용건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이런. 혹시 마리에게 할 말이 있었나? 내가 자리를 비켜주는 편이 좋겠나? " " 아, 아닙니다. 아가씨에게 전할 말이 있기는 하지만, 사부가 자리를 피하 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가씨와 함께 들어주십시오. " 코마히코는 비영을 자리에 앉히고, 침대에 누워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 리는 여전히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다만 코마히코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할 때부터 숨소리가 조용해진다. 코마히코는 마리가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얘기를 꺼냈다. " 아가씨. 가인 씨가 목숨을 위협당했습니다. " " ……! " 마리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코마히코는 그것을 모르는체 하며 연거푸 말을 이었다. " 그것도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습니다. 믿기는 힘들지만……누군가가 암살을 시도했다고 하는군요. 그 때문에 방금 전까지 브루스 님과 시폰 사령관님 의 사이에 격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 " 암살……이라고? 가인 군에게? " 비영이 믿을 수 없다는듯 되묻자 코마히코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예. 가장 의심스러운 것이 지구 방위군이나, 브루스 님은 외부인보다 내부 인의 소행이 크다며 은연 중에 시폰 사령관님을 지목하는듯한 얘기를 했습 니다. 덕분에 소동이 크게 일어났고, 브루스 님은 피스메이커에서 해고를 당하셨습니다. " " ……! " 브루스의 해고에 마리도 결국 코마히코를 바라보며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어제 들은 가인의 해고도 충격적이었지만, 브루스가 해고되었다는 사실도 믿 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브루스……, 그 사람이 해고되었다고요? 어, 어째서? 그는 누구보다도 강 한, 그야말로……. " 그야말로 피스메이커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마리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있자, 코마히코도 동감한다는듯 고 개를 끄덕였다. " 그렇죠. 누구보다도 강하신 분이죠. 하지만 피스 블랙과 접촉했다는 혐의 가 드러나면서 스스로 피스메이커를 그만두시게 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시폰 사령관님의 사람인 류바 에레노아 씨의 증언이었기에, 의심가는 구 석이 없는 것은 아니나……그래도 그녀가 피스 블랙의 아지트를 발견한 것 으로 보아 완전한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브루스 님도 피스 블랙 과 만났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으셨고요. " " ……. " 마리는 심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브루스의 강함에 외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동경이라면 동경이라고 도 할 수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 키는 브루스의 모습은 마리가 추구했던 무인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브루스는 가장 믿음직한 동료이자 의지가 되는 선배였던 셈이다. 그건 마리에게만 국한된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인도, 진우도, 유리도, 시민도. 그와 함께 지내왔던 동료들이라면 모두가 다 브루스를 믿고 따랐을 것이다. 모두가 다 그를 좋아했었다. 그런 그가 피스메이커를 떠나다니! 비영은 나직하게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 진 사령관님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부터 정말 말도 안되는 일만 계속되는 군. 그 시폰 뤼멘이라고 하는 외국인은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니, 그것보다도 진 사령관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권한을 위임했는지 모르겠군. " " 진 사령관님은 시폰 사령관님께 권한을 위임한 후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그 모습을 봤다고 하는 사람들도 없고요. 과연 언더 시티에 체류 중인지도 의문입니다. " " 허어……. " 코마히코는 비영에게서 다시 마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저는 잠시 후, 13시 정각이 되면 작전에 투입됩니다. 피스 블랙의 아지트 를 습격하기 위해 지구 방위군과 연합 전선을 펴는 작전이죠. 그 전에 잠 시 아가씨에게 상황을 보고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들렸습니다. " " ……. " 코마히코는 자신의 말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마리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끝 내 전전긍긍하기만 한다. 도대체 자신은 뭘 기대했던 걸까? 아가씨에게 가인 씨와 브루스 님에 관한 일을 말씀드리면, 그녀가 병상을 털고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던 걸까? 코마히코는 가벼운 실망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짧게 목례했다. " 그럼 제 용무는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비영 사부도 조심해서 돌아 가십시오. " " 알겠네. 자네도 부디 몸 조심하게. " 비영의 인사를 받으며 코마히코는 병실의 자동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자동 문 앞에 섰을 때. 그때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마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 었다. " 코마히코 씨! " 코마히코가 돌아보니 마리는 처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다급한 표정으로 그 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마히코는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하며 물었다. " 왜 그러십니까? " " 아, 저……. 가인은, 가인은……괜찮은 겁니까? 암살을 당할 뻔 했다면서, 어디……다친 데는 없는 건가요? " 그 질문을 하는 마리는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애처로웠다. 가인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려고 노력해왔음에도 불 구하도, 정작 그가 위험하다는 말에 예전과 조금도 변함 없는 모습을 보이는 자신이 한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심한 것을 떠나서 가인의 안위가 걱정되었 다. 걱정되어서. 너무너무 걱정되어서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코마히코는 그런 마리의 심란한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로 실종되었으니까요. " " ……! " 마리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리다가 침상에 주저앉았다. 옆에서 비영이 황급하게 그녀를 부축했지만, 마리를 바라보는 코마히코의 시선은 냉 랭하기 그지 없었다. 마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 어째서…… 어쩌다가! 가인은, 찾지 못한 건가요? 대체 어디에……! " " 모릅니다. " 코마히코는 마리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차갑게 끊어버렸다. 놀란 눈으로 자 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코마히코는 그답지 않게 빈정거렸다. " 궁금하시다면 직접 찾아보시죠. 아가씨가 직·접 말입니다. " " ……. " 마리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모습에 코마히코는 한 층 더 인상을 찌푸렸다. " 가인 씨를 찾을 용기도 없습니까? 그러면서 그의 행방은 왜 궁금해 하십 니까? 그렇게 병실 안에만 틀어 박혀서 몇번이고 찾아온 가인 씨를 외면 했으면서! 이제와서 무슨 염치로 궁금해하는 겁니까? " " ……! " " 직접 자신이 찾아나설 용기는 없는 겁니까! 그렇게 자격지심에 빠져서 아 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방 안에서 울기만 하는게 아가씨의 마음입니까? " " ……! " 마리는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단지 무릎 위에 움켜쥔 주먹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딸이 수치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비영은 코마히코를 말리지 않았다. 그는 단지 무거운 안색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 을 뿐이다. 코마히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마리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 후. 아가씨의 마음은 결국 그 정도였던 거군요. 비영 사부에게서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와 가인 씨의 약혼은 가짜였다고. 거짓으로 맺었던 관계인 만큼, 역시나 오래가지를 못하는군요. " 마리는 거짓 약혼에 대해 그가 알고 있자 깜짝 놀라며 비영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비영은 그녀와 눈을 맞춰주지 않는다. 코마히코의 비웃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 당연히 그때 아가씨가 했던 말도 거짓말이었겠지요. 유가인, 그도 한 순간 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술수나 부린 소인배에 불과합니다. " 코마히코가 가인까지 욕하기 시작하자, 마리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붉어진 눈시울로 코마히코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 아니야……. " 가인은……소인배가 아니야. 그는 나를 위해 목숨까지 걸고 진검 승부에 응 해줬었다. 나쁜 건 나지 가인이 아니다. 거짓말한 것도 나고, 한심한 것도 나 고, 소인배란 것도 나니까……, 그러니까 가인을 욕하지마! 하지만 코마히코는 그녀에게 똑똑히 들으라는듯 한 자 한 자 힘주어서 말했 다. " 유가인은. 신념도 없는. 그리고 맹세라는 것도 알지 못하는 소인배입니다. 그와 한때나마 진지하게 승부를 겨뤘던 자신이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 " 아니야! " 마리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그녀는 비영의 부축을 뿌리치고 코마 히코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키가 178이나 되는 그녀가 무시무시하게 눈을 빛 내며 다가오는 것이 왠만한 남자라면 기가 질릴 모습이었다. 마리는 코마히코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 취소해. 당장 가인에게 했던 말을 취소해. 그러지 않으면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 " " 용서라니? 제가 어째서 아가씨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고한 것도 죄가 됩니까? " " 취·소·햇! " 마리는 금새라도 코마히코에게 달려들듯이 외쳤다. 아니, 실제로 주먹을 날 릴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마히코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좋습니다. 저도 이런 우격다짐에 응해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지만, 특별히 아가씨의 장단을 맞춰주도록 하죠. 마침 작전 수행 시까지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 그리고 마리의 뒤에 있던 비영에게 말한다. " 아무래도 검사들끼리 이렇게 입만으로 싸우는 것도 우습군요. 비영 사부, 무영신풍류의 방식에 따라 아가씨와 검을 겨뤄보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 겠습니까? " " ……그렇게 하게. " 비영은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다지 둘의 싸움을 말리고 싶 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비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코마히코는 마리를 돌아 보며 경고했다. " 기권하고 싶으시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 " ……. " 하지만 마리는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병실 문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코마히코에 대한 분노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마리가 앞장 서자 코마히코와 비영도 곧 그 뒤를 따랐다. 유리는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가인의 얼굴을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주 잠시라도 좋았다. 제대로 만나보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목소리를 살짝 듣는 것만으로도, 먼 발치에서라도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하루 하루를 버텨나가지 못할 정 도로 정신적인 궁지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26구역의 집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유리는 잠시 그 향수에 젖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담 너머에 귀 를 기울여 보았지만 조용한 것이 다들 외출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유리는 안도 반 실망 반의 심정으로 작게 한 숨을 쉬었다. ' 나……뭘 하고 있는 거지? ' 이러면 집을 나온 의미가 없잖아. 유리는 제대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이렇게 집 밖에서 기웃거리기나 하는 자 신이 한심해졌다. 기껏 마음을 결정한 주제에. 오빠에게 상처를 준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아가기로 했으면서. 그렇게 결정을 한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마음이 약해지는 걸까? 유리는 대문에 살짝 손을 대어 그리운 기분에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매일 아 침 학교에 등교하면서 가인과 대문을 지나갔던 것이 생각났다. 대부분 잠이 덜 깬 그녀를 가인이 손을 잡고 데려갔었지. 그때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자신이 그리움을 느끼게 될 줄 은. '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 가인이 곁에 있고, 그와 같이 다니고, 그와 얘기할 수 있고. 그 모든 게 너 무나 자연스러웠기에,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다시 없을 행복을 자신의 손으로 부셔버리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 ……. " 모든 것은 자신의 오라 때문이었다. 자신의 오라 능력이 유빈의 손에 휘둘려 서 오빠의 과거를 들춰내고 말았다. 가인의 절망을 마인드 디텍트로 읽어들였던 유리는 도저히 가인의 곁에 머물 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차라리 뻔뻔하게라도 그 의 곁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의 오라능력인 마인드 디텍트는 철저히 그녀를 유가인에게서 배제시켰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만약 가인이 마음 속으로 그녀를 미워하고 있다면, 진심으로 자신의 과거를 들춰낸 그녀를 원망하고 있다면! 그녀의 부모님들처럼 그녀를 싫어하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마인드 디텍트인 것이다. 유리는 가인 이 정말로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아니, 미워하는 것은 당연했 다. 하지만 그 미워하는 마음을 실제로 자신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읽히는 게 두려운 것처럼, 그 반대도 얼마든지 공포를 주는 것이다. '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해도……. 결국 난 두려운 것 뿐이야. 오빠의 진심 을 알게 되는게, 미움 받는 게 두려울 뿐이야. ' 유리는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훌쩍거렸다. 어쩌면 자 신은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가인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보다도 그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두려워 집을 나왔던 것이다. 이건 속죄도 아니고 단순한 도피였을 뿐이다. 자기 만족일 뿐이다. 유리는 이런 자신의 본심마저 뚜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오라가 그야말로 저 주스러웠다. " 아, " 감정이 격해지자 오라의 컨트롤이 흔들렸던 모양이다. 유리는 무의식 중에 자신의 몸에서 옅은 핑크 빛이 흘러나오자 서둘러 마음 을 가라앉혔다. 얄궂게도 그녀의 능력은 그녀가 고뇌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그 위력도 강해졌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오라 능력을 미워하고 저 주해도, 가인과 같이 오라를 상실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탕 그때 유리의 머리 속으로 한 가닥의 사념이 밀려들어왔다. 대문에 남아있던 잔존사념이 유리와 물리 접촉을 함으로써 품고 있던 정보를 건네준 것이다. 그 잔존사념은 마치 지금 당장 들렸던 것만 같은 리얼한 총성과 격하게 변해 가는 가인의 사념들을 품고 있었다. 사념을 읽어들인 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져 중얼거렸다. " ……총? 총을 쐈어? " 믿을 수 없지만, 누군가가 대문 앞에서 가인에게 총을 쐈던 것이다. 유리는 급하게 주머니에서 스페어 키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바닥에 선명하게 찍힌 탄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다 정원을 둘러보 니 곳곳에 화분과 나무가 부서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유리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정원의 사념들부터 조사해보기 시작했다. 나 무 기둥에서는 가인의 고통과 분노가 느껴졌고, 부서진 화분에서는 침입자를 두려워하는 그의 사념이 느껴졌다. 유리는 그 사념의 흔적을 따라 서둘러 집 뒤의 담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난투의 마지막 흔적이라 생각되는 담의 검은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 다. 자국은 당시 가인의 어깨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담에 묻어 응고된 것이었 다. 유리는 떨리는 손을 그 자국에 가져갔다. -……. 볼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남겨진 가인의 사념을. 침입자에게 쫓겨 막 다른 곳에 몰린 그의 울부짖음을. 유리는 더 이상 사념을 읽지 못하고 자리 에 주저앉았다. 채 마르지도 않은 눈물이 다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은 가인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혼자 집을 떠나 있었다. 혼자 달아나 있었다. 모두가 괴로웠을 때, 모두가 힘들었을 때 나는, " 유리 양? " 그때 뒤에서 그녀를 불러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 지 유리는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가인과 함께 지낼 때 언제 나 세심하게 그들을 보살펴줬던, " 시민 언니……. " 마리는 언더 시티의 연무장에서 하얀 검도복을 갖춰 입은채 수중의 죽도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맞은편에서는 코마히코가 마찬가지로 검은 검도복을 입고 죽도를 들어올린다. 평소 메고 있던 도츠카노츠루기는 비영에게 맡겨둔 상태 였다. 코마히코는 마리의 상태를 살피며 그녀에게 물었다. " 호구는 착용하지 않으실 겁니까? 그동안 병석에만 누워계시느라 움직임도 둔해졌을텐데. " "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 마리는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죽도를 들어 무영신풍류의 지검대적세를 취했다. 코마히코도 겨눔세를 취하며 냉소했다. " 좋습니다. 부디 후회는 마시길. 사정은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 " 누가 할 소리! " 마리는 자꾸만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코마히코의 태도에 집중력이 흐트러 지는 것을 느끼고 비영을 돌아보았다. 이럴 바에는 한시라도 빨리 결투에 들 어가는 편이 나았다. " 아버님, 시작해주십시오! " " 서로 동문이니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 시작해라. " 비영이 담담히 결투의 서막을 열자, 순식간에 연무장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공기가 차가워지고, 발밑이 서늘해지는 이 감각은 서로의 몸이 상대방의 검기 에 반응한다는 증거였다. 마리는 이 감각을 오랜만에 느끼며 새삼 자신이 두달 가까이 검을 잡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검을 잡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무영신풍류에 입문한 이후 처음이었다. ' 내가……이길 수 있을까? ' 일단 결투를 시작하자, 지금껏 가인에 대해 고민해왔던 감정들이 머리 속에 서 사라졌다. 그리고 빈 자리를 채운 것은 코마히코에 대한 호승심 뿐이었다. 뼛속까지 검사인 마리는 검을 든 순간, 필연적으로 검에 대한 생각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 속에서 어떻게 하면 코마히코의 검을 피하고 찌를 수 있을지, 수 많은 검초들의 향연이 피어오른다. 틈을 만들어 상대를 유인하려고도 해보고, 선제 공격으로 상대의 검로를 막아보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눈 앞의 검사는 자신을 뛰어넘는 고수였다. 섣부른 도발이나 유인책 은 않하니만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장기전으로 넘어가면 그동안 수행이 부족 했던 자신이 불리해진다. 그렇게 마리가 여러가지를 고려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코마히코 쪽에서 선 제 공격에 나섰다. " 검끝을 망설이시다니! 언제부터 그렇게 소심해진 겁니까! " " ……! " 번개같은 일검. 발도술이 특기인 코마히코답게 그의 죽도는 최단거리의 직 선을 타고 마리에게 뻗어나왔다. 예전의 가인은 이 일격을 제대로 간파도 못 하고 어림짐작으로 피했지만, 마리의 눈에는 엄연히 죽도가 그리는 궤적이 보 이고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병상에 누워있던 기간이 길어서인지,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는 피하는 것을 포기하고, 코마히코의 검로를 끊기 위해 그의 죽도에 자 신의 죽도를 가져갔다. 따악 죽도의 호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것은 죽도와 죽도가 부딪혀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엄연히 대나무가 살가죽을 두들겨서 낸 소리다. 코마 히코의 죽도는 마리의 죽도를 반식(反式) 유수(流水)로 타고 올라가 그녀의 아랫배를 사정없이 후려친 것이다. 코마히코는 그야말로 뼈와 살을 끊을 생각이었는지, 마리는 실제로 허리가 부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연무장의 바닥을 나뒹굴었다. " ……! " 마리는 비명이 새어나오는 것을 참으며 죽도로 몸을 지탱했다. 단 일격을 허 용한 것만으로도 전신이 후들거렸다. 그렇게 몸을 떠는 마리에게 코마히코가 낮게 되물었다. " 이번 일격으로 아가씨는 저에게 목숨을 빚지신 겁니다. 연습은 실전같이. 실전은 연습같이. 아가씨의 입버릇 아니셨습니까? " " 크윽- " 마리는 이를 갈며 재차 겨눔세를 취했다. 이 결투를 자신이 쓰러지기 전까지 끝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코마히코도 그녀의 의지를 받아들였는지 다시 겨눔세를 취했다. " 하아아아아-! " 전신을 억누르는 코마히코의 검기를 떨쳐내기 위해 마리는 거센 기합을 내지 르며 코마히코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한층 살아나자 코마히코는 표정을 굳히며 마리의 공세에 뛰어들었다. 마리의 주특기인 일식(一式) 섬광(蟾光)과 이식(二式) 파쇄(波殺), 삼식(三式) 격멸(擊滅)로 이어지는 연쇄기가 코마히코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코마히코 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 수식(守式) 파란(波蘭)으로 세 개의 검로를 끊어버리 고 날카롭게 사식(四式) 단월(斷月)로 반격했다. 마리는 코마히코가 했듯이 단월을 반식 유수로 되받아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코마히코에게 읽혔는지 단월은 이형(異形) 잔월(殘月)로 순식간에 변화했다. " 윽-! " 코마히코의 죽도가 마리의 왼쪽 어깨죽지를 내찔렀다. 원래대로라면 왼쪽 심 장 부위에 찌르기가 들어갔어야 했지만, 코마히코는 엄연히 사정을 봐줬던 것 이다. 하지만 그 찌르기 한방에 삼각극이 마비되어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마리의 입장에서는 사정을 봐준 것도 메리트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연거푸 코마히코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 렀다.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호소했지만, 마리의 죽도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몇번이고 코마히코에게 반격을 당해 쓰러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마다 그녀는 용수철처럼 일어나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마리의 전신은 타박상으로 보기 흉하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코마히코는 숨 한번 흐트리지 않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 무의미하군요. 아무리 그동안 검을 쥐지 않았다지만 기본조차 잊어버리신 겁니까? 아가씨의 검에는 형(形)만 존재하고 있을 뿐, 의(義)가 없군요. 그런 껍데기 뿐인 검으로 제가 용서를 구하길 바라셨습니까? " " 크윽! " 텅 코마히코에게 달려들기가 무섭게 다시 마리는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힘이 다 한 그녀는 코마히코가 죽도를 빗겨낸 것만으로도 몸의 균형을 잃어버렸던 것 이다. 코마히코는 쓰러진 마리를 꾸짖었다. " 신념이 없는 검은 누구도 지킬 수 없습니다! 아가씨의 신념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검을 휘둘러왔던 겁니까? " 나의 신념……. 그런 것은 모르겠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 백지 상태에서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은, '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기대도록 해라. ' 이미 지켜내지 못한 약속일지라도, 이미 깨져버린 맹세일지라도, ' 네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난 최선을 다하겠다. ' 나에게는 그것 밖에……없어! 탕 마리는 죽도로 바닥을 거세게 내려찍으며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 동 작이 굼벵이처럼 느렸지만, 코마히코는 그녀가 몸을 완전히 세울 때까지 기다 렸다가 다시 겨눔세를 취했다. 마리는 거세게 숨을 몰아쉬며 죽도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없 는 가인에게 마음 속으로 말했다. ' 가인, 나는 너를 지켜주지 못했어. ' 그녀의 죽도를 따라 은은한 붉은 검광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 의 투기에 따라 체내의 오라가 반응한 것이었다. 자신의 힘에 의문을 가졌던 그녀가 자신의 힘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오라는 의지의 힘. 의지가 강해질수록 그 힘은 더욱 견고해진다! ' 하지만 나는, ' 탁 순간, 마리의 신형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앞으로 쓰러지다가 번개같이 코마 히코에게 돌진했다. 그녀의 신형은 섬광처럼! 그 죽도는 불꽃처럼! 마치 꺼 지기 직전의 횃불이 스스로를 강하게 태우는 것처럼 타올랐다. 이것이 바로 기검체일체(氣劍體一體)! ' 나는 너를! ' " 으아아아아앗! " 쩍 거친 파쇄음과 함께 마리의 죽도가 코마히코에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그 앞 은 이미 그의 죽도로 막혀있었다. 코마히코의 죽도는 짙은 주황빛을 피워올리 며 마리의 검광을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패턴 레드와 버밀리온의 힘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 대치했다. 그리고, 퉁 곧 연무장의 바닥으로 동강난 죽도의 파편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코마히코의 것이었다. 마리의 죽도가 코마히코의 죽도를 그대로 일 도양단하고 지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죽도는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리의 오라가 코마히코의 오라를 이겨냈다는 증거였다. 방금 전의 격돌은 의지가 강했던 마리의 승리였다! " 하- " 마리는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기력이 다하여 앞으로 거꾸러졌다. 하지 만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코마히코가 그 어깨를 잡아주었다. 그는 마리를 부 축해 바닥에 앉히며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앞의 냉소와는 달리 여느때의 따 스함을 지니고 있었다. " 가인 씨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드시 지켜야할 약속이 있다고. 아 가씨와의 약속이, 아가씨의 무영신풍류를 지켜주겠다고. 그러니 자신은 절 대로 물러나서는 안된다고. " " 아, " 그 말을 들은 마리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죽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코마히코는 그 떨리는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주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자신의 사정이 힘들다고 해서 물러나는 것은 지키는 게 아니라고도 말했습니다. " 그 순간, 마리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녀는 죽도를 떨어뜨 리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가인이 말한대로 자신은 스스로 힘들었기 때문에 물러났던 것이다. 정말 그를 지키기로 마음 먹었다면, 맹세 했었더라면, 그렇게 그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외면해서는 안되 는 거였다. 어째서 이런 당연한 것을 이제야, 이렇게 늦게서야 깨닫는단 말인가. 비영은 그렇게 서럽게 우는 딸의 어깨를 안아주며 미소지었다. " ……기다려보자구나. 네가 반한 사내가 되돌아오는 것을. " 코마히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과 눈을 마주하는 성마리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저도 가인 군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그에게 반했으니까요. " " ……. " 그 말에 순간, 성마리와 성비영, 두 부녀가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코마히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의 꺽이지 않는 신념에 반했다 는 것입니다! " " 후후후, 후하하하하! " 결국 코마히코가 앞에서 했던 말도, 행동도 모두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 이다. 그렇게 모처럼 당황하는 코마히코의 모습에 비영이 웃음을 터뜨리자, 마리도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따라 웃었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 가인, 나는 너를 지켜주지 못했어.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는 않겠다. 너에 대한 마음을 다시는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더욱! 더욱 강해지겠어! ' 그게 바로 네가 말한 '물러나지 않는다' 라는 거겠지? " 유리 양! " 유리는 시민과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시민은 그 녀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유리는 그야말로 팔 다리를 휘저으며 시 민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 놔! 놔앗-! " " 유리 양! 잠시만요! 저하고 얘기 좀 해요! " " 싫어! 이 손 놔! " " 유리 양! " 유리는 울면서 마구잡이로 소리쳤다. 이기적인 자신이 부끄러웠기에 도저히 시민과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역시 돌아와서는 안되는 거였어! 시민은 버둥거리는 유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 유리 양!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제 말 좀 들어줘요! " " 몰라! 듣고 싶지 않아! 얘기하기 싫어! "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계속 앙탈만 부리는 유리의 모습에 시민은 그만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 가인 씨가 사라졌단 말이에요! " 그제야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에게, 시민은 간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유리 양이 없는 사이에……가인 씨에게, 가인 씨에게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힘들고 괴로운, 옆에서 지켜보기 안쓰러운 일들만 있었어요. " 마인드 리딩으로 시민에게서 지난 날의 일들이 단편적으로 유리에게 전해졌 다. 시민의 말대로 가인에게는 정말 많은 시련이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오라를 되찾으려고 했던 일, 그람드링과 시비에 휘말렸던 일, 그 일로 피스메 이커에서의 해고를 당했던 일, 암살자의 협박. 그 모든 일을 알게 되자 유리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이번에는 우리가 가인 씨를 도울 차례에요. 우리가 가인 씨를 찾아야 할 때 라고요. 바로 우리가. " " ……. " 유리는 시민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많은 일 들이 있었던 동안, 가인이 그렇게 힘들었던 동안 그녀는 그의 곁에 있지 못했 다. 자신만 불행한 척, 자신만 힘든 척, 자신만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주 제에 이제와서 무슨 염치로 그를 도우란 말인가? " 나는……, 나는 오빠를 만날 자격이 없어. 오빠를 상처입힌 것도, 오빠가 괴로워했던 것도, 다, 다 나 때문이었는걸. 내가 오빠에게 있어봤자 오빠 만 힘들어질게 분명해. 또……같은 일을 반복하기는 싫어. " ' 이 자리에서 네 오빠를 가장 많이 괴롭힌 사람이 누군지나 알아? 바로 너 야, 이유리! ' " 그런 일은, 이제 다시는……. " 유리는 유빈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몸서리 쳤다. 그때의 일이 다시 반복될 거라고 생각하니 자신의 존재가 끔찍히도 싫어진다. 모두가 자신을 불 길한 아이라고 했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주위의 사람을 불행하게만 만드는 존재일 뿐이다. 그때 유리의 얘기를 듣고 있던 시민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 틀렸어요. 지금의 유리 양은 가인 씨를 진정으로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 그녀는 허리를 숙여 유리와 눈을 마주했다. " 유리 양도 사실은 알고 있잖아요? 자신이 지금 도망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가인 씨를 외면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렇게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 으면 과연 모든 일이 끝날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 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 " 나, 나는……. " " 유리 양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어요. 유리 양은 가인 씨를 좋아했으니까. 누구보다도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가인 씨를 잃고 싶지 않았겠죠. " 거기까지 말하던 시민은 잠시 한숨을 쉰 후, 곧 단호하게 말했다. " 하지만 그렇게 피하기만 하다간 정말로 가인 씨를 잃고 말 거에요. " " ……! " 그 말은 비수처럼 유리의 가슴에 내리꽂혔다. 유리는 몸을 떨며 고개를 떨어 뜨렸다. 자신은 가인에게 미움받기 싫었다. 그가 남들처럼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하 고, 원망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서 도망쳤다. 아무리 그 를 위해서라느니, 자신이 불행한 존재라느니, 이것 저것 이유를 늘어놓아도 결국 유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인의 곁을 떠났던 것이다. 그를 자신의 기억 속에서 좋은 오빠로 남겨두기 위해서. 그를 좋아하는 가족으로서 남겨두기 위해서. ' 하지만, ' 하지만 그 행동이야말로 그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길이라는 것 을 왜 모르고 있었던 걸까? " 맞아……. 오빠가 나를 꾸짖는 게 당연해. 나를 원망하는 것도 당연해. " 유리는 눈물을 떨구며 흐느꼈다. " 내가 잘못했으니까. 처음부터 다 내 잘못이었으니까. " " 그렇지 않아요, 유리양. 가인 씨는 그런 생각하지 않아요. " 시민은 스스로를 자책하는 유리의 모습에 안타까워하며 위로했으나, 그녀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눈물을 그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도망치려고도 하 지 않았다. " 그러니까 더 이상 피하지 않겠어. 원망받는 것이 싫다고 오빠를 피할 자격 같은 것은 내게 없어. 날 미워하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모두 오빠의 몫이 야. 그게 당연한 거야. " 사실 오빠에게 미움받는 것은 싫지만……. 오빠가 날 원망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지만, " 오빠를 기다리겠어. 그리고 오빠와 만나서, 그래서 오빠가 나같은 것은 꼴 도 보기 싫다고, 눈 앞에서 사라지라고 말해도, 나는 계속 오빠의 곁에 있 을 거야. 그리고 계속 원망 받겠어. 오빠의 화가 영원토록 풀리지 않는다면 영원토록 원망받을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속죄니까. 그게 지금의 내 가 오빠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오빠의 곁에 머무르고 싶으니까. " 유리 양. " 시민은 흐느끼는 유리를 껴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유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애처롭게 몸을 떨며 울었다. 지금까 지 모두와 떨어져서, 혼자 자책하고 고민해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 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는 이런 일로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유리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으니까. 언더 시티의 메인 센터. 최상층에 있는 그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평소도 검은색 베니션 블라인드로 조명을 차단시키고 있었지만, 오늘은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더더욱 어두워 보 였다. 어느 정도로 어두웠냐 하면 한치 앞도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수정은 그런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 포트에 물을 끓 여서 블랙 커피를 탔다. 하필 블랙 커피를 탄 이유는 마시는 이가 무설탕을 선호해서가 아니라, 커피와 함께 먹을 쿠키의 단맛을 더욱 강하게 해달라는 조 건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그'는 간식 먹을 방법만 연구했는지 유난히 이런 조건에 까다로 웠다. 수정은 블랙 커피와 선반 위에서 꺼낸 쿠키를 테이블에 가져다 주었다. 그제 서야 그는 어둠 속에서 입을 열었다. " 13시 정각이군. " " 예, 아마 지금쯤이면 피스 대원들이 광속전차로 12구역에 향하고 있겠군요. 지구 방위군과의 랑데뷰는 아마 13시 30분 쯤에 이루어질 거에요. " 수정은 그가 앞에 놓인 간식들에 눈을 빛내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소리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고저 변화 없는 목소리는, 그녀에게 상상의 여지 를 남겨주지 않았다. " 작전이 수행되고 있는데, 민 군이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건가? " " 저야 애초에 타데오의 비서도 아니었는 걸요. " " ……어쨌든 늦지 않게 돌아가도록.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챌지도 모르 니까. " " 아, 예- 그리고, " 수정은 뭔가가 생각났다는듯 함박 미소지었다. " 마리 양과 유리 양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메디컬 센터에서도 연락이 왔고 요. 다들 건강해보이던걸요? " " 그럼 슬슬 준비해도 되겠군. 만약을 위해 그들을 언더 시티에 대기시켜놓 도록. " " 그나저나 이제 가인 씨만 준비되면 만사 오케이겠군요? 물론 쉽사리 해결 되지는 않겠지만. " 수정은 그것이 못내 아쉬운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할 것 없다는듯 말했다. " 그에게는 밤의 여왕이 붙어있다. 어떻게든 해줄테지. 문제는 제때 시간이 닿느냐는 거다. " " 흐음- 보기보다 꽤 그녀를 신뢰하시네요? 무슨 비즈니스 파트너라도 되세요? " 수정은 유독 그가 밤의 여왕을 편애하는 모습에 살짝 삐친듯이 물었다. 그러 나 그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으며 그녀에게 찻잔과 접시를 돌려주었다. 어느새 인가 접시의 쿠키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 신뢰가 아니라 확신이지. 오라의 주인이 절실한 것은 우리보다 그들이니까. " 수정은 그 말을 되씹으며 찻잔과 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곧 찻잔을 살펴 보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 커피……남기셨잖아요? " " ……. " 그러나 그의 입은 이미 걸어잠긴 뒤였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23 - Ｂy Ｎext Ｎeo =-=-=-=-=-=-=-=-=-=-=-=-=-=-=-=-=-=-=-=-=-=-=-=-=-=-=-=-=-=-=-=-=-=-=-= 팔라딘 4소대의 일원인 천요원은 현재 한국형 고속전철 G7에 몸을 싣고 있 었다. 올해로 24살인 그녀는 팔라딘 대에서는 보기 드문 한국통합군 출신으로, 몬 스터에게 언제나 무기력한 군의 모습에 실망을 느끼고 피스메이커로 넘어온 케이스였다. 물론 말이 쉬워 넘어온다지 정식으로 피스메이커의 팔라딘 대에 입대하려면 여타의 특수부대를 초월하는 입대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입대 시험을 A클래스로 통과했던 여장부였다. 참고로 S클래스를 받았던 인물 은 팔라딘 대의 대장인 정진우와 부대장 인 유한진 뿐이었다고 한다. 요원은 자신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은 두 남녀를 바라보 았다. 그 남녀는 그녀가 어제부터 뒤를 쫓고 있던 호위 대상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남자 쪽만 호위 대상이었지만 그 남자 쪽도 원래는 그녀의 호위 대 상이 아니었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는 건지.' 요원은 대상들이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작게 푸념했다. 그녀가 속한 팔라딘 4소대는 피스 대원들을 비밀리에 호위하는 시크릿 가드 (Secret Guard)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요원은 그 중 피스 옐로우 한 시민의 호위를 맡은 SG의 일원이었다. 그렇게 어제도 여느 때처럼 한시민을 호위하던 중, '맙소사!' 그 사건이 터졌다. 시민이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가자 안심하고 세이프 하우스로 돌아온 요 원 일행은, 방에서 처참하게 죽어있는 동료들의 시체를 발견해야만 했던 것이 다. 그 시체들은 피스 블루 유가인의 SG들로서, 요원에게는 모두 하늘과 같은 고참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채 고참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전에 다음 사건이 터졌다. 한 시민과 접촉한 유가인이 무슨 이유에서인가 갑자기 집을 뛰쳐나간 것이다. 요 원과 한 조인 고참들은 서둘러 그녀에게 가인의 뒤를 쫓으라고 명령했고, 그 녀는 영문도 모른 채 지금까지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유가인……. 정말이지 골치 아픈 녀석이야.' 요원은 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호위 대상으로서의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피스 블루의 호위를 맡고 있던 SG조는 불귀의 객이 되 기 일쑤였던 것이다. 원래 SP라는 것이 그런 임무이기는 했지만, 피스 블루의 SG는 그 경우가 너무 심했다. 유가인의 SG조는 요원이 아는 것만 해도 벌써 3번이나 교체되었다. 첫 번째 교체는 작년 6월 한성 고교의 운동회 날 때. 두 번 째 교체는 올해 3 월 네크로맨서의 습격 때. 그리고 세 번째 교체가 바로 어제 오후. 총 3개의 SG조가, 9명의 팔라딘 대원이 희생되었다. 이 정도면 거의 유가인의 SG조는 죽음의 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구나 피스 블루에게 습격이 잦았던 이유도 그가 오라의 주인이라고 하는 몬스터들의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호위 대상에게 밤의 여왕이 접근하는 것을 방치 시켜두라는 상부의 명령도 한 몫 해서 미션을 어렵게 만들었다. 어쨌든 자의든 타의든 고참들을 죽음으로 내몬 유가인이 요원의 눈에는 좋게 비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집을 나와 어디로 가나 했더니.' 요원은 자신의 옆에 앉은 탑승객이 잠든 것을 확인하며 다시 남녀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남자, 유가인은 한시민의 집을 뛰쳐나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거리를 떠 돌아다녔다. 목적지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단순히 방황하는 것 같지도 않 았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살던 22구역의 옛 집에 들리더니, 갑자기 무슨 생 각에선가 외곽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요원은 목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밤의 여왕과 접촉하는 유가인의 모습을! 요원은 가인의 곁에 앉아 있는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테레이아 민체스터.' 가인의 클래스메이트이자 2032년 4월 5일, 패턴 블루 습격 사건의 주요 관계 자. 2015년 5월 1일생, 캐나다 출신이며 아버지의 잦은 출장으로 미국과 프랑 스, 영국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2032년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라는 것이 그녀의 공식 상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테레이아 민체스터인 동시에 몬스터들 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밤의 여왕이었던 것이다. 피스메이커는 애초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가인에게 접촉하는 것을 제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미행을 붙이지도 않았다. 완벽한 방치였다. 오히려 밤의 여왕이 접근하기 쉽도록 때로는 피스 블루에게서 SG들을 물리기 까지도 했었다. 아마 테레이아 민체스터도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 다. 하지만 굳이 그녀가 팔라딘 대에게 손을 쓰지 않았던 것은, 피스메이커의 호의라면 호의랄 수 있는 이 고착 상태를 깨뜨리기 싫었기 때문이리라. 피스메이커가 밤의 여왕에게 바라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 때문에 그녀의 행 동을 용인하고 있다. 그리고 밤의 여왕은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으니 그 녀와 피스메이커 사이에는 암묵적인 휴정이 맺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 휴정도 몇 주 전 시폰 뤼멘이 진 사령관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그 끝을 고했다. 시폰은 오라의 주인에게 밤의 여왕이 접근하는 것을 완벽히 배 제시키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그 후로 견고해진 팔라딘 대의 감시망을 뚫지 못 한 밤의 여왕은 어느 순간, 그들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런 여자가 이제야 나타났단 말이지.' 그것도 때마침 유가인의 SG들이 제거된 틈을 타서! 요원은 테레이아를 노려보며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마치 그녀가 이 모든 일을 꾸민 것만 같았다. 고참들을 죽이고, 피스 블루를 모종의 방법으로 자신 에게 끌어들인 원흉! 테레이아는 가인에게 붙어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그것이 너무나 가증스러워 보였는지라 요원은 인상이 일그러지려는 것 을 간신히 참았다. SG들은 누가 봐도 평범한 시민으로 보여야만 한다. 그 때문에 SG는 반드시 아시아 계, 그것도 한국 출신의 대원들이 선출되며 그 외모는 주위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수수해야만 했다. 요원은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가인과 테레이아가 틈을 보이기를 기다렸다. 일단 상부에게서 받은 명령은 둘의 미행뿐이었지만, 얘기를 도청할 수만 있다 면 사전에 그들의 목적지도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이렇게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요원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일어났다!' 그때 가인과 테레이아가 요원의 기대대로 좌석에서 일어났다. 둘이 같이 일 어난 것으로 보아 자판기에서 음료수라도 뽑아먹을 생각인 것 같았다. 아무래 도 남녀가 같이 화장실에 들어갈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요원은 주머니에 있는 소형 도청기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둘의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창 밖의 풍경은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가인은 멍하니 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기차를 타는 것 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무엇보다 고속철도의 속력 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시속 300킬로미터의 속력이라니! 새마을호의 최고 시속보다 두 배나 빠르지 않은가? '기차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빨랐던 가?' 가인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고속전철과 기차의 차이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기차 여행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구분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기차를 타본 적이 있었던 사람처럼 그때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시감에 가까운 체 감 속도였다. 가인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창 밖에서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자 신의 옆에 앉아있던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테레이아.' 낯익은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의 그녀. 가인은 자신과 동행하고 있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제 테레이아를 22구역의 고개에서 만났을 때 가인은 놀랍다기보다도 의아 함이 먼저 들었다. 희미한 기억을 쫓아 도착한 장소.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그녀라는 것이 단순한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인은 그녀를 만났던 당시를 떠올려 보았다. "정말 가인이야? 가인 맞니?" 자신을 돌아보는 가인의 모습에 테레이아는 반색하며 그에게 달려왔다. 가인 은 멍하니 있다가 있는 힘껏 자신에게 안겨드는 테레이아의 모습에 그제야 제 정신을 차렸다. "테레이아?" "그래! 바보! 오랜만에 보니까 내 얼굴도 잊어버린 거야? 방학 이후 처음 보 는 거잖아!" 테레이아의 말에 가인은 그때서야 자신의 학교가 방학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동안 정신적으로 지쳐있다 보니 학교에 대한 일들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 던 모양이다. 가인은 여느 때처럼 자신을 반겨주는 테레이아의 모습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 며 미소했다. "응. 그러게. 방학 이후 처음이구나." "정말! 나 실망했어. 어떻게 연락 한 번 안 할 수가 있어? 내가 그동안 얼마 나 가인에게 연락했는지 알아? 핸드폰은 받지도 않고!" "……응. 미안. 미안해." 가인이 씁쓸하게 사과만 하자, 새침해 하던 테레이아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 고 그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다 곧 그가 다리를 절고 있음을 발견했다. "가인? 발이 왜 이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은 또 왜 이렇고?" "그게……어쩌다 보니까 그만." "어쩌다 보니까 라니! 제대로 얘기를 해봐!" 가인은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테레이아에게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씀씀이가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었 다. 시민의 집을 뛰쳐나온 이후, 다시는 누군가에게서 이런 걱정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그러니까." 가인은 거듭 말을 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 다. 테레이아도 그제야 재촉하던 손길을 멈추고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테레이아는 갈 곳이 없어진 가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몸도 마음도 지친 가인은 그녀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다 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 새인가 날이 밝아 있었다. "일어났어?" 잠에서 깨어난 그를 테레이아는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익숙 하게 느껴졌는지라 가인은 채 어색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아침 식사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준비해놓은 음식들이 너무나 그립게 느껴졌다. 테레이아의 행동 하나 하나가 가인에게 예전의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고, 잊 혀진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불쾌하다거나 거북한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쁨에 가까웠다. 반가움이었다. 그리움이었다. 즐거움이었다. "가인, 밥 다 먹었으면 좀 있다 나갈 준비해." 식사 후 그녀는 서둘러 가인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가인을 데려간 곳이 다름 아닌 KTX 서울역이었다. 그곳에서 테레이아 는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10시 반 행 경부선 열차에 주저 없이 몸을 실 었다. 그리고 덩달아 동승하게된 가인은 영문도 모르고 줄곧 지금까지 그녀를 따라오게 된 것이다. "가인?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테레이아는 가인이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고개를 갸웃하 며 물었다. 가인은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나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냥 멀미가 조금 나는 것 같아서." "그래?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까? 혹시 허기가 져서 멀미가 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먹을 것도 좀 사든지." "응. 그게 좋겠다." 테레이아는 가인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승강문 근처의 자판기로 걸어갔다. 그러던 중 한 여성이 통로를 지나가면서 가인과 어깨를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여성은 짧게 사과를 하며 가인이 채 뭐라고 하기도 전에 호실 밖의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테레이아는 부딪힌 어깨를 두들기는 가인에게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저 사람? 부딪혔으면 제대로 사과를 해야지.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그냥 가버리네?" "……뭐, 그만큼 화장실이 급했나 보지." 가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판기로 눈을 돌렸다. 테레이아는 여자가 간 화장 실 방향을 노려보다가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가인의 어깨를 살펴보았다. 여자 와 부딪혔던 그의 어깨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 못할 좁쌀 만한 쇳덩어 리가 붙어 있었다. 테레이아는 말 없이 그것을 응시하다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판기를 돌아보았다. "이거 맛있겠다! 가인! 포테이토 칩 좋아하지? 포테이토 칩 먹자!" "……나보다는 테레이아가 더 좋아하는 거 아냐? 포테이토 칩?" "앗. 들켜버렸네?" 테레이아는 가인의 지적에 웃으며 스낵 자판기에 지폐를 넣었다. 가인은 그 녀가 포테이토 칩을 뽑는 것을 지켜보다가 곧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레이아.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 그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몸을 숙여 자판기에서 과자를 꺼냈다. 그리 고 과자 봉지를 가인에게 건네주며 미소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그녀는 이미 여덟번이나 똑같은 대답을 그에게 하고 있었다. 《설마 피스메이커 쪽에서 우리에게 협조를 구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군.》 언더 시티 유레카의 작전 본부실. 그리고 본부실의 메인 스크린에는 지구방위군의 라경일 장군이 모습을 드러 내고 있었다. 시폰은 반신반의하는 라 장군에게 미소하며 말했다. "제 앞의 책임자는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독불장군이었 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특히 제가 좋아하는 말이죠. 억척스럽게 혼자 살기보다는 힘을 합쳐 살아가는 게 순리 아닐까요?" 《옳은 말이네. 하지만 자네가 순리를 따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후." 그 말에 시폰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런 그를 메인 스크린의 라 장군 은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다른 꿍꿍이셈이 있다면 지금 당장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적어도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이상은 말이지.》 "그 말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사소한 다툼으로 지구 방위군의 전 력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군요." 《……흥.》 라경일은 코웃음을 치며 통신을 끊어버렸고, 그제야 시폰은 피곤하다는 듯 한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군인들 상대하는 일은 피곤해. 거기다가 자존심은 또 어지간히 세야지. 일일이 비위맞춰주는 것도 못해먹을 짓이군.' 하지만 그 못해먹을 짓도 잠시 뿐이다. 잠시 후면 더 이상 지구 방위군에게 볼 일은 없어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시폰은 다시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채영에게 물었다. "12구역에서의 랑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하영식 작전장교로부터 팔라딘 대와 합류했다는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지 구 방위군에게 대 피스 블랙 용 장비도 지급 완료했습니다.》 "Okay. 그럼 준비는 이걸로 끝이로군요. 이제는 폭죽 터뜨릴 일만 남았나." 시폰은 그렇게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사령관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때 작전 본부실의 자동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진 사령관의 비서인 민수정이었다. 시폰은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는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딜 갔다 오는 겁니까? 13시부터 작전이 시작된다고 말하지 않았던 가요?" "아, 죄송합니다. 잠시 일이 생겨서 그만." "흠. 일이라고……." 시폰은 대충 짐작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유다에게 내가 한 일을 일러바치기라도 했나보지. '하지만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수정 양. 녀석이 등장할 무대는 이미 사라 졌다는 것을.' 내가 그의 배역을 맡고있는 이상, 성당기사단은 진 사령관이라는 존재를 용 납하지 않아! 시폰은 그렇게 마음 속으로 말하며 채영에게 지시했다. "자아- 그럼 오늘도 해충 박멸을 시작해봅시다." 그것도 성당기사단이 만들어낸 구제불능의 해충을! 12구역에서 피스메이커와 합류한 지구 방위군은 총 70명의 특수부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70명이라고 하면 왠지 적은 수처럼 들리지만 지구 방위군은 지난 인천항에서의 작전 실패로 절반에 가까운 특수부대원들을 잃어버린 뒤였 다. 이 70명은 그야말로 지구 방위군의 핵심 병력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 핵심 병력을 그들이 아낌없이 투입시킨 이유는 지난 작전 실패의 설욕전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들이 노리는 사냥감들은 분명 지난번의 그 사냥감들이었 으니까. 무엇보다 지구 방위군은 저번과 같은 패배를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피 스메이커의 팔라딘 대에서 지급해준 이 대 피스 블랙 용 장비들이 있는 한! "좋아. 이거라면 그 괴물 같은 녀석들도 죽일 수 있단 말이지." "복수해주마!" 장비는 총 세 가지였다. 오라 능력자의 오라를 무효화시키는 아켄석 탄과 그 탄을 사용할 수 있는 총 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체불명의 알약이었다. 대원들은 저마다 총 기구들을 장비하면서 흥분했지만, 마지막 알약에서는 미 심쩍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알약이 전투 시에 뭐가 도움이 된다고 그들에게 지급한단 말인가? 진정 제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통증을 억제시키는 모르핀(MS Contina)? 그렇게 대원들이 약을 먹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자, 그람드링은 한심하 다는 듯 소리쳤다. "어이! 다 너희들 생각해서 준거니까 투정부리지 말고 알아서 처먹어! 그건 너희들의 생명줄이란 말이다!" "하, 하지만 먹으라고 해도." 대원들이 자세한 설명을 바라자 그람드링의 곁에 있던 오르크리스트가 그들 에게 말했다. "피스 블랙에게는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강력한 마인드 컨트롤러가 붙어 있습니다. 그 마인드 컨트롤러의 공격을 피하려면 당신들의 정신장벽을 높 이는 수밖에 없는데, 여러분에게 나누어준 그 화이트 파우더는 일시적이지 만 인간의 의지력을 오라 능력자만큼 강화시켜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즉 적 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거죠." "그, 그렇군." 그제야 대원들은 약에 대한 불신감이 걷혔는지, 지급 받은 알약을 먹기 시작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람드링은 소리 죽여 웃었다. 크크크. 역시 무지는 죄란 말이지! "자! 그럼 앞서 말했다시피 4개의 조로 나뉘어서 행동하겠습니다." 오르크리스트는 대원들이 약을 모두 먹은 것을 확인한 후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는 자신의 뒤에 있던 피스 대원들을 하나 하나 가리키며 말했 다. "지구 방위군의 A조는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 씨와 함께 입구 쪽으 로 들어갑니다." 그 말에 도츠카노츠루기를 손질하던 코마히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B조는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 씨와 함께 12구역 홀의 오른쪽으로 들어 가주세요." 그 말에 수중에서 작은 눈발을 만들어 휘날리던 류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C조는 저, 피스 푸르푸린 오르크리스트 뤼멘과 홀의 왼쪽으로. D조는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과 지하 수로로 들어갑니다. 각 조의 대 원들은 반드시 피스 대원들의 말을 따라주시고, 행여나 단독으로 움직일 생 각은 하지 말아주세요." "단독으로 움직인다면?" 특수부대원들 중 한 명이 오르크리스트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반문했다. 그러자 오르크리스트는 짧은 한마디로 그의 말을 끊었다. "죽습니다." "……!" 그렇게 간단히 브리핑을 마친 후 오르크리스트는 코마히코에게 눈짓했다. 그 러자 코마히코는 도츠카노츠루기를 뽑아들며 앞으로 나섰다. 그가 입구로 향 하자 17명의 특수부대원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류바 에레노아마저 대원들을 이끌고 홀의 오른쪽으로 가버리자, 자리 에는 뤼멘 형제들과 C조와 D조의 대원들만 남게 되었다. 그람드링은 D조의 대원들을 데리고 출발하기 전에, 잠시 오르크리스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명연기던데, 크리스? 100점 만점에 90점 주도록 하지. 적의 손에서 놀아나 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거죠∼라니. 크크큭." "웃지마, 그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그리고 나는 거짓말한 거 하나도 없어." 오르크리스트는 그람드링의 키득거림에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 했다. 그람드링은 그런 동생이 뻔뻔하다는 듯 혀를 차다가 품에서 알약을 꺼 내들었다. 그것은 특수부대원들이 복용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동일 한 화이트 파우더였다. 그는 그것을 가볍게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오르크리스트에게 말했다. "그럼 어디 나도 적의 손에 놀아나는 것을 막아보도록 할까? 크크크! 나 먼 저 출발할 테니 천천히 따라오시게나, 결백한 동생 님." "비꼬지 말고 얼른 가버려." 오르크리스트는 수로 쪽으로 사라지는 그람드링과 대원들의 뒷모습을 바라 보다가 자신도 품에서 화이트 파우더를 꺼내들었다. 그는 잠시 이 알약을 노 려보다가 성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흥. 난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곧 C조의 대원들을 이끌고 홀의 왼쪽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가인과 테레이아가 고속 전철에서 내렸을 때는 13시 30분이 지나 있었다. 서 울역에서부터 장장 3시간이나 걸려 국토의 반을 종단한 것이다. 가인은 생소한 역의 풍경을 돌아보며 얼빠진 목소리로 테레이아에게 물었다. "어,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거야?" "왜? 뭐, 문제 될 거 있어?"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테레이아에게 가인은 잠시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래. 분명 그녀의 말대로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하지만 여긴 부산이잖아!" 가인은 건물의 외벽 유리창에 붙어있는 역의 이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곳에는 선명한 고딕체로 부산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리 방학이라지만 서 울에서 부산까지, 그것도 이렇게 예고도 없이 내려오다니! 영문도 모르고 끌 려온 그로서는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테레이아는 당황하는 가인의 모습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부산이야. 가인은 부산 처음 와보지? 나도 처음 와봐." "으, 응." 그야 부산은커녕 제대로 서울을 떠난 적도 없는 몸이지만. 아니, 그래도 작 년에는 블루 섬머 비치도 가보고 북경에도 가봤으니 이미 서울은 졸업한 셈 인가? "아니! 이게 아니지! 그러니까 내 말은! 어째서 우리가 부산에 왔느냔 말이 야? 무슨 일로?" "한 사람을 만나러 온 거야." 테레이아는 심각한 가인과는 대조적으로 가볍게 그의 말을 받았다. "한 사람을 만나러 왔다니? 부산에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었어?" "응. 아마 가인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거야." 나도 잘 알고 있다고? 가인은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대체 누군데? 난 부산에 아는 사람 없어." "가보면 알아. 가보면." 테레이아는 마치 이벤트라도 준비하고 있는 사람처럼 들뜬 얼굴로 가인의 팔 을 잡아끌었다. 가인은 발을 절뚝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 다. 도저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니……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테레이아?'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25 - Ｂy Ｎext Ｎeo =-=-=-=-=-=-=-=-=-=-=-=-=-=-=-=-=-=-=-=-=-=-=-=-=-=-=-=-=-=-=-=-=-=-=-= 2020년부터 실시된 지하국토개발은 제5차 국토계획의 일안으로서, 전국 어디 에서나 30분 내에 고속 도로망에 접근할 수 있도록 구역형 고속도로망 골격을 완성시켰다. 그 개발의 이면에는 대재해 이후 출범한 피스메이커의 입김이 작 용했다는 후문도 있지만, 10년에 걸친 대대적인 개발은 한국의 진정한 일일생 활권을 가능케 했고 고속철도와 지하철도의 전국화는 물류비를 절감시켰다. 각 지역은 구역으로 세분화되었고 그로 인해 대도시의 과밀화 현상과 국토의 양극화 현상은 시정되었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바로 통합 국토로서의 기능은 갖추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지역간 통합이 당초의 예상보 다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통합은 획일화가 되어버렸고 획일화는 개성을 상실시켰다. 국민 생활의 편익성은 제공되었지만 지역의 문화성을 도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 무분별한 통합은 당연히 지역 시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지방색 찾기 운동이 벌어지는 등 한때나마 국토개발이 중단되기에 이르지만 애초부터 실보 다 득이 많은 개발이었다. 국민들은 점차적으로 개발이 주는 혜택과 편익성에 익숙해져갔고 종래에는 언제 개발에 반대했냐는듯 안주하게 된다. " 아아- 실망이야, 가인. 나는 너무너무 실망했어. " 부산역을 나와 복잡하게 지하철을 바꿔타던 가인은 거듭되는 테레이아의 불 평에 그 이유를 물어봐야만 했다. " 대체 뭘 실망했다는 거야, 테레이아? " " 아무도 사투리를 안 써! " 그 대답에 가인 뿐만 아니라 전차 칸에 동승했던 사람들까지 어이없다는 표 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인은 모여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 고 재빨리 테레이아의 손을 붙잡고 전차에서 내렸다. "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사투리라니? " " 하지만 내심 기대했는 걸. TV 드라마를 보면 부산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 가 굉장히 재미있단 말이야. 현지인의 목소리로 직접 사투리를 들어보고 싶었는데. " " ……하긴. " 가인도 내심 테레이아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부산 의 모습에 안도했다고 해야하나 실망했다고 해야하나. 물론 국토개발 이후 지 역 문화가 통일되면서 대부분의 방언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역 시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뭐, 사람 사는데가 다 거기서 거기지. 너무 달라도 부담스럽잖아? " " 그런 건 좋지 않아, 가인. 통일과 획일을 혼동해서는 안돼. 개성이 사라 진 세계에는 발전이 없다고. 발전이 없으면 찾아오는 것은 몰락 뿐이야. " " ……. " 가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처음에는 사투리에 대한 얘기였던 거 같은데 어느새 세계 안보까지 거론하게 된 걸까? 그는 이대로 계속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다간 긴 설교를 듣게 될 것 같아서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 아- 그런데 그 아는 사람이 있다는 데는 아직 멀은 거야? " " 응? 궁금해?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한 거야? " " ……어. " 눈까지 반짝이며 되묻는 테레이아의 모습에 가인은 말꼬리를 흐렸다. 뭐랄까. 그렇게 의도대로 움직여주면 또 마음의 가책이……. " 흐흥. 그래도 아직은 알려줄 수 없지. 좀 더 궁금해하도록 해. " ' ……들 리가 있겠냐. ' 가인은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잠자코 테레이아의 뒤만 따라가기 로 했다. 테레이아는 발을 저는 가인의 부축도 해줄겸 그의 팔짱을 끼며 지 하철 역에서 나왔다. ' 응? ' 막 바깥으로 나온 가인은 자신의 코끝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냄새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 어딘가에서 서울에서는 맡아보기 힘든 독특한 내음이 나고 있었다. 비린내, 바람 속에서 소금기가 느껴지는 냄새랄 까. 가인은 여기가 부산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 ' 이런게 바다 냄새인가. ' 아마도 멀지 않은 곳에 바닷가가 있는 모양이다. ' ……정말 바닷가네. ' 가인은 설마 테레이아가 바닷가로 자신을 데려올 줄은 몰랐기에 멍하니 눈 앞에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닷가에 온 것은 작년 블루 섬머 비치 이후로 두번째였기에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뭔가 여러가지 일 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이렇게 바다를 보고 있자니 수 많은 만감이 교차한다. 지금 그들이 온 바닷가는 8월의 바다치고는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수영 단 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피서객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간간히 지나가는 갈매 기와 어선들이 여름 바다의 새로운 면모를 가인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방파제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걷고 있던 테레이아는 뭐가 그리도 흥이 나는 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닷 바람에 그녀는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방파제 밑에서 그녀를 따르던 가인은 멍하니 그런 테레이아 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 이러고 있어도……괜찮은 걸까?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인은 서울에 남아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떠올려 보았다. 병실에 입원한 진우 씨, 자신을 만나주지 않던 마리 선배, 집을 나 간 유리, 그리고……. ' 가인 씨, 우리 둘이서……이대로 어딘가로 가버릴래요? '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시민 씨. 그녀를 떠올리자 가인은 가슴 한 켠이 짓눌리는 것처럼 아팠다. 바닷 바람 때문인지 눈가가 따끔거리고 자꾸만 코끝이 찡해졌다. 그래. 바닷 바람 때문 일 것이다. 가인은 애써 시민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하며 테레이아를 다시 바라보았다.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 하지만 그녀의 모습에 자꾸만 시민을 대입시키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그때 시민이 뻗은 손길을 받아들였더라면, 지금 테레이아의 자리에서 웃고 있는 것은 그녀가 되었을까? " 가인! " 그때 상념에 빠져있던 가인을 테레이아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테레이아는 어 느새인가 방파제에서 내려와 가인의 정면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 이 마치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화내는 것만 같아 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 응? 왜, 왜그래? " " 정말- 여기까지 와서도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야? 기분이 안좋은 것 은 알겠지만 같이 온 사람도 생각해줘야지! " " 아, 미안. " " 그-러-니-까. 그렇게 맥빠지는 사과만 하지 말고! 나처럼 웃어보란 말이야. 이렇게. 응? " 그렇게 말하며 테레이아는 정말이지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가인은 어색하 게나마 그녀의 미소를 따라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포기 하고 말았다. 지금의 자신이 따라하기에는 테레이아의 미소가 너무도 고결해 보였다. 너무나 찬란해서, 그래서 자신은 그 미소를 따라할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았다. 테레이아는 그런 가인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의 팔짱을 끼고 그를 이끌었다. " ……미안, 가인. 미소라는 것은 저절로 생겨나야 하는 건데. 그만 강요하 고 말았네. " " 아니……. 그런 건, " " 하지만 지금 만날 사람 앞에서는 싫어도 웃어줬으면 해. 이렇게 말하면 또 강요가 되어버리는 걸까? " 그 말에 가인은 다시 한번 테레이아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 ……그 사람이 대체 누구야? " 테레이아는 대답 대신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가 인의 눈이 그녀의 손가락을 뒤쫓는다. 그곳에는 이런 바닷가에 어울리지 않은 건물이 하나 서있었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학교? " 바닷가가 보이는, 고등학교? 고등학교는 여름 방학이었다. 여름 합숙을 하는 운동부 학생들이 운동장을 사용하고 있었고, 교실에서도 부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한성 고등학교에 비하면 소박할 정도로 작은 고등학교였다. 하긴. 운동장만 해도 4개나 있는 한성고와 비교하면 어느 학교인들 소박하지 않겠느냐만은. " 테레이아, 괜찮을까? 이렇게 외부인이 마음대로 학교에 들어와도? " " 괜찮아. 괜찮아. 학생들도 많지 않잖아? 몰래 들어가면 아무도 모를 거야. " " 아무도 모른다니……. " 가인은 운동장에 있는 학생들의 시선이 전부 자신들에게로 쏠리고 있는 것 을 확인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이야 그럭저럭 넘어간다지만 역시 외국인 인 테레이아가 너무 눈에 띄었다. 아니, 외국인의 차원을 넘어서 저 에메랄 드 빛 머리카락과 번쩍이는 미모는 반칙일 정도로 이목을 집중시킨다. 가인 은 그저 타올을 어깨에 둘러멘 수위 아저씨만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서둘 러 테레이아와 교사로 들어갔다. 가인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테레이아의 모습에 의문을 품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 여기……. 알고 있는 건가, 테레이아? ' 부산 고속철도역에서부터 곧장 이 학교를 찾아온 것만 해도 그렇고. 아무래 도 그녀에게 이 학교는 초행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테레이아가 자신의 입 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부산은 처음이라고. 그런데 이 능숙한 길 찾기는 뭐지? " 여기야, 가인. " 그런 가인의 의문은 테레이아가 한 교실 앞에 멈춰서면서 또다른 난관에 부 딪혀야 했다. 테레이아가 이 교사에서 그를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가정 실습 실이었던 것이다. ' 가정 실습실? 어째서 여기에……. ' 문패의 옆에는 또 다른 작은 문패가 달려 있었다. 거기에는 '한국전통요리 연구부'라는 알 수 없는 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국 전통 요리. 한국 전통 요리. 거기다 바닷가가 보이는 학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테레이아를 돌아보았다. 테레이 아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대충 감이 잡힌 것이다. 하지만 가인 은 여전히 반신반의할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정말 그 사람이……. 테레이아는 그런 가인에게 미소하며 조리실의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잠시 후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 누구세요? " 조리실의 문을 열고 나온 한 소녀. 그녀를 바라본 순간, 가인은 자신도 모르 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 반장? " 아니, 이건 이름이 아닌데! 어쨌든 검은 뿔테안경을 쓴 그녀는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는 반장 안 지혜였다. " 와- 정말 가인이와 테레이아야? 진짜 부산에 온 거 맞지? " " 응. 조만간 둘이서 찾아간다고 했잖아. " 실습실의 의자에 앉아 믿을 수 없다는듯 몇번이고 되묻는 지혜에게 테레이아 는 친근한 미소로 답했다. 반면 가인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눈 앞의 지혜 를 바라보기에 바쁘다. 도대체 그녀를 만나는게 얼마만일까? 가인에게 있어서 지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친구였다. 자신이 피스메이커가 된지 얼마되지 않아서 맞이한 운동회, 그 운동회에서 그는 몬스터와 융합된 그녀를 상대해야만 했다.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기는 했지만 그건 피차간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으리라. 가인은 테레이아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 찾아간다고 했다고? 테레이아, 따로 지혜와 연락했던거야? " 그 질문에 지혜와 테레이아는 서로 눈을 맞추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테레이아는 짐짓 가인을 꾸짖듯이 말했다. " 따로 연락했던 거야, 라니? 정말∼ 그럼 못써, 가인. 지혜가 얼마 전에 편 지 했었잖아? 그때 답장을 한거지 뭐긴 뭐겠어? " " 아, " 맞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지혜에게서 편지가 왔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전학을 간 이후 지혜는 틈틈히 편지로 가인과 테레이아에게 안부를 묻곤 했 다. 전자 메일이나 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손으로 편지를 쓰는게 그녀답 다면 그녀다웠지만. 요 한달 간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가인은 지혜에 게 편지를 쓸 여력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편지가 온 줄도 까맣게 잊고 있 었다. 지혜도 테레이아를 흉내내듯 엄하게 가인에게 말했다. " 그러고 보니 가인이는 답장을 해준 적도 몇 번 없었지. 좀 테레이아를 본 받는 게 어때? 전학 간 친구는 친구도 아닌가? " " 미, 미안. 미안해.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만……. 아니, 그게 아니라…….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 사과했다. 지혜에게 답장을 하는건 고사하고 자신의 일에 빠져서 제대로 그녀를 생각하지도 않았다는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런 주제에 뭐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친구인가? 지혜는 그의 솔직한 반응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 뭘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농담이야. 농담. 너무 그러면 내가 미안해지잖 아.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장난 좀 친거야. " " 하지만 그토록 진지하게 반응한다는 건 역시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 는 거겠지? " 테레이아가 팔짱을 끼며 장난스레 윙크를 하자, 가인은 저도 모르게 너털 웃 음을 터뜨렸다. 그는 새삼 지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척 보기에도 생기가 넘 쳐 흘렀다. 예전에는 좀 더 조용하고 말수도 적은, 그래서 먼저 손을 뻗어줘 야만 할 것 같은 아이였는데……. ' 밝아졌어. ' 지금의 지혜는 자연스레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며 자신의 감정을 거리낌 없 이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의 언행에서 자신감이 느껴진다. 부산에 오면서 밝 아지게 된걸까? 아니면 이것이 본래 그녀의 성격인 걸까? 가인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 많이 좋아보인다, 반장. 훨씬 예뻐졌는걸. " " 뭐-? " 가인의 눈치 없는 칭찬에 지혜가 깜짝 놀라며 새된 목소리를 내질렀다. 하지 만 그녀보다도 더 놀란 것은 그 주위에 있던 실습실의 학생들이었다. 가인은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영문을 몰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지혜와 같은 부 친구들이랬지? 그러고 보니 여기, 한국전통요리 연구부인가 뭔가였던가. 그때 여자 부원들 몇명이 지혜와 가인, 테레이아가 있는 자리로 조심스레 다 가왔다. 그들 중 한 여학생이 차가 든 종이컵을 가인의 앞에 내려다주며 말했 다. " 저기- 차라도 마실래요? 대추차 밖에 없지만. " " 예? 아, 예……. 고맙습니다. " 얼떨결에 차를 받아든 가인은 멋쩍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여학생은 그런 그를 주의깊게 살펴보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혹시 유가인 씨 맞으세요? " " 예?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어째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질문들을 비슷 한 상황에서 받았던 것 같은데……. " 예에. 유가인, 맞는데요. " " 역시! " 순간 주위에 있던 여자 부원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그 함성에 깜짝 놀란 가 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으며 지혜에게 다짜고짜 소리쳤다. " 부장, 이 사람이었어? 이 사람이 유가인이야? " " 부장이 매달마다 꼬박꼬박 러브레터를 써보내는 게 누구일까 했더니. 이런 사람이었구나? 흐응- " 러, 러브레터? 가인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지혜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가인보다 더 당 황하며 친구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부장이라니? 지혜가 이 한국전통 요리 연구부의 부장이란 거야? " 가, 갑자기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러브레터라니! " 지혜는 모처럼 언성을 높이며 항의했지만 이미 학생들은 그녀에게 신경도 쓰 지 않았다. 되레 가인을 품평이라도 하듯이 진지한 눈길로 바라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 회장, 그렇게 안봤는데 말이야. 의외로 얼굴을 따지네- " " 그러게. 꽤나 여자들 울렸을 얼굴이야.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업보가 물씬 물씬 느껴져. " " 하지만 여자에게는 꽤 다정스러울 것 같기도. " " 으음. 그런데 그 다정함이 과연 한 여자에게 국한된 것일까? " ' 이 사람들이……. ' 그들이 하는 말들을 듣고 있던 가인은 살며시 눈꼬리를 떨었다. 어째 이 부의 상관 관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게, 어딘가 피스메이커의 오퍼레이터 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가인은 지혜가 좀 부원들을 말려주길 바 랐지만 울쌍이 되어 부원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이 영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 다들 그만두지 못해! 사부가 곤란해 하고 있잖아! " 그때 기세 좋게 외치며 부원들의 앞으로 나서는 한 남학생이 있었다. 그 남 학생은 마치 자신이 지혜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 부원들을 막아섰는 데 앳되어 보이는 얼굴답지 않게 어딘가 강압적인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래 도 역시 남자는 남자! 순식간에 여학생들의 기를 죽이고 소란을 진정시킨다. 다만 '요리연구부에 웬 남자?'라는 의문을 가인에게 남기고. 거기다 사부라니? " 무엇보다 난 인정 못해! 저런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에게 사부를 맡긴다니! 네 녀석! 당장에 나와 요리로 승부를 겨루자! " ' ……이런 거였냐. ' 가인은 남학생에게 멱살을 붙잡혀서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다. 더구나 이번 난 관은 그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모 집단을 생각나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주위의 여자 부원들도 언제 기가 죽었냐는듯 흥미진진한 눈으로 사태를 관망하 고, 심지어는 곁에 있던 테레이아조차 팔짱을 낀채 침묵을 고수한다. 아무도 그 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때 구원의 손길을 뻗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 너 때문에 곤란한 거야. 너 때문에. " 지금껏 부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않고 있던 안지혜였다. 그녀는 여자 부원들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강경하게 남학생의 머리를 수도로 두들겨서 가 인을 풀어주게 했다. " 아까부터 보자 보자하니까 다들 너무하는 거 아냐? 모처럼 서울에서 내 친 구들이 내려왔는데 잘해주지는 못할 망정 장난이나 치고! " " 사, 사부! 나는 다만 사부가 걱정되서! " 남학생은 언제 가인의 멱살을 잡았냐는듯 순한 양으로 돌변했다. 그 모습에 지혜는 못말린다는듯 한숨을 쉬며 가인에게 사과했다. " 가인아, 미안해. 많이 놀랐지? 평소에는 얌전한 애들인데 오늘따라 왜 이 러는 건지 모르겠네. " " 아니……. 다들 기운이 넘쳐서 보기 좋네……. " 가인은 지혜의 뒤에서 여전히 도끼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남학생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었다. 뭔가 짓굳은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괜찮은 아 이들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혜와 허물 없이 지내는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그래. 이 아이들이 지혜가 부산에 와서 사귄 친구들이란 말이지……. 가인은 미소하며 지혜에게 말했다. " 지혜야,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구나. " " 응. 그렇지? " 지혜는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사람인양 활짝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너 무나 눈부셔 보여 가인은 새삼 잊으려고 했던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지혜 가 행복해 보이면 보일수록 형편 없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 확연히 비교되고 있었다. 그러자 입에 걸고 있던 미소를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이러면 안되는 데. 적어도 지혜의 앞에서만큼은 웃고 있기로 약속했잖아? 웃자, 유가인. 웃어. 웃어. " 합격! " 응? 그때 상념에 빠져 있던 가인에게 여자 부원들이 덥썩 손을 잡아왔다. 그녀들 은 눈을 빛내며 가인을 바라보았는데, 그 돌변한 태도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는 지라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 얼굴 뿐인줄로만 알았는데 제법 괜찮은 말도 할 줄 알잖아? " " 그럼! 우리는 부장의 좋은 친구들이지! " " 부장의 친구는 우리의 친구. 그런 의미에서 말 놓아도 되지? " 대번에 호의적인 분위기. 아마도 가인이 말한 '좋은 친구들'이라는 부분이 뜻밖에도 호감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가인은 왠지 마음이 복잡해져 중얼거렸 다. 이거. 아까부터 계속 뭔가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어. 그렇지? " 아니야, 얘들아. 오해하지마. " 그때 곤란한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지혜에 의해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 나, 가인이와 사귀는 거 아냐. 가인이와 사귀는 애는 저기 있잖아? " 그렇게 말하며 지혜가 가리킨 방향에는 가인의 곁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테레 이아가 있었다. 그녀는 모두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주목되자 기다리고 있었다 는듯 가인의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듯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 그럼 누구라고 생각했어? " 그 한마디에 여자 부원들은 놀랍다는듯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 양다리? " " 아니야! " 지혜와 가인은 기가 막혀 버럭 소리질렀다. 그러나 오해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 결국에는 예의 남학생이 다시 가인의 멱살을 붙잡게 만들었다. " 네 녀석! 요리 승부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사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회 떠주마! " " 아니라니까! " 그 순간만큼은 가인도 모든 것을 잊고 온몸으로 억울함을 호소해야 했다. " 하아- 그 녀석 대체 뭐야? " 간신히 실습실에서의 소동이 진정되고,가인과 지혜는 학교의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테레이아는 무슨 생각에선지 전통요리에 대해 배워보고 싶다며 둘을 옥상으로 올려보내고 자신은 다른 부원들과 실습실에 남았다. 가인의 푸념에 지혜는 그가 앞의 남학생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 으응. 되게 재미있는 애지? " " 제자라느니, 요리 승부라느니. 아니, 그 전에 요리 연구부에 남자 녀석이 왜 들어가 있는 거야? " 가인은 자신과 지혜가 옥상에 올라가려고 할 때도 끈질기게 따라붙던 남학생 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아마 테레이아가 그 덜미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지 금도 가인과 지혜의 사이에서 연신 훼방을 놓고 있었을 것이다. " 그래도 걔가 있었기에 지금의 동아리를 만들 수 있었어. 전진홍이라고, 1 학년생인데 올해 초에 내가 만든 음식을 한번 먹은 이후로 줄곧 사부로 부 르게 해달라며 쫓아다니지 뭐야. " 지혜는 그때의 일이 떠올랐는지 훈훈한 미소를 머금었다. " 요리하는 법이 배우고 싶다 해서 재미삼아 가르쳐주기 시작했는데. 뭔가 진 홍이 혼자만 가르치기도 허전하고 해서 다른 아이들을 끌어들이다 보니 어 느 새인가 부가 만들어져버렸어. " " 그게 한국전통요리 연구부? " " 응. " 가인은 새삼 눈 앞의 지혜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요리를 잘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요리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부까지 만들어낼 정도라니. 아니, 그 것보다도 지혜 자신이 직접 부를 창설했다는게 더 놀라웠다. 예전의 그녀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행동이다. " 더 이상……망설이지 않게 되었구나. " 가인은 지혜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중얼거렸 다. 예전의 그녀는 사람 사귀는 일을 망설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 로 전학을 자주 가는 바람에 그녀 스스로 친구 만드는 것을 피했던 것이다. 지혜는 가인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 응. 가인이 때문에 알게 됐는걸. 아무리 헤어지고 떨어지게 되더라도 그때 그 순간 친구들과 함께했던 추억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거라고. " 그래.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부산에 내려와서 직접 그 녀를 만나보니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지혜는 변했다. 자신의 결점을 이겨내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었다. 그 한 발을 내딛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갖은 노력을 다 했을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녀는 가인의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가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그녀의 힘이다. 그 증거로 그 녀는 변했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 가지고 있던 오라마저……잃어버렸지. ' 자괴감이 들었다. 오라를 되찾을 수 있는 건 유가인 자신 뿐이다. 어느 누구 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을 그도 잘 알고 있 다. 하지만 가인은 지혜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나아가지 못하고 되레 주 저앉고 말았다. ' 도망치고 말았어. ' 그래서 지혜를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다. 가인은 지혜에게서 등을 돌린채 옥상의 철창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오른발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 오른발은 그가 주저앉은 댓가였다. 가인은 철 창을 움켜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 ……. " 가인의 뒤에서 그가 발을 저는 것을 바라보던 지혜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처 음 가인을 만났을 때부터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 었다. 자신의 앞에서 웃고는 있었지만 그 웃음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가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가 애써 숨기려고 하는 일을 굳이 자신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다만, " 가인아, 기억해? " 지혜는 가인의 곁으로 다가와 철창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가인은 고개 를 들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 그때 말이야. 내가 몬스터에게 붙들렸을 때. " 지혜는 작년 운동회 때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트린트라고 하 는 몬스터에게 기생당해 가인을 공격했었다. 끔찍한 경험. 아마 두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 혜는 지금 그 일을 스스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 중간에 정신을 차려보니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내 앞에 쓰러져 있었어. 그 리고 그것이 내가 한 짓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무섭기는 했지만 그 보 다 죄책감이 먼저 눈앞을 가렸지. 내가 가인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구나. 나 때문에 가인이가 위험해졌어. 그렇게 나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를 입는다는 게 너무나 두려웠어. " 거기까지 말하던 지혜는 가인을 돌아보며 힘없이 말했다. " 그래서 너에게 부탁했었지……. 날, 죽여달라고. " " 지혜야. " 가인은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고 철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혜는 다 시 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하지만 말이야. 그때 그대로 죽었더라면, 그래서 지금의 내가 없었더라면 ……. 아마 난 굉장히 후회했을 거야.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을 거고, 아 무런 추억도 없이…….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런 수 많은 일들 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그렇게 빈껍데기가 되어 사라졌을 거야. " 지혜는 어느 새인가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 상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무서웠던 것이다. " 고마워, 가인아. 날 구해줘서. " 가인은 차마 그녀를 더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지혜야. 넌 아무 것도 몰라. 나는, 나는 그런 감사를 받을 만한 놈 이 아니야. 나는 나 하나 살겠다고 가족들을 버린 파렴치한 놈이야. 그걸 대 가로 받은 힘조차 지켜내지 못한, 그래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그런 형편 없는 녀석이야. " 고마워. 그때 날 포기하지 않아줘서. " 말 하지마. 말 하지마.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어! " 그러니까 포기하지마." 철창을 잡은 가인의 손 위로 지혜의 손이 포개어졌다. 가인은 자신도 모르 게 지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친 한 소년을 발 견해냈다. 상처 입고, 피폐해진, 그래서 더 이상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게 된 한 소년이 그 안에 있었다. 소년은 유가인이었다. " 그런 자포자기한 표정을 짓지마.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겨줘. " 아아.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이었나? 이토록 엉망이었나? 이토록…… 방치되어 있었나?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도, 어떻게 변해버렸는지 도,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 부탁이야. "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슬퍼하는 이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 가인, 얘기는 잘 했어? " 지혜와 헤어진 후 학교를 나온 가인은 방파제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편에서 들려온 테레이아의 물음에 가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응. " " 무슨 얘기했어? " " ……옛날 얘기. " 가인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왜 자신을 여기로 데려온 건지. 왜 자신을 지혜와 만나게 한 건지. 그때 22구역에 있던 자신을 그녀가 어떻게 찾 아낸 건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었다. 가인은 그녀가 한 일련의 행동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왜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게 되 었다. 자신은 진즉에 이곳을 들려야만 했다. 그래서 지혜와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채 줄곧 제자리만 멤 돌고 있었을 것이다. " 옛날 얘기라- " 테레이아가 다가오는게 느껴졌다. 그녀는 방파제에 올라와 가인의 곁에 서며 말했다. " 나도 옛날 얘기를 하나 해볼까?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야. 아무런 기쁨도 없이 무의미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여자가 있었어. 그 여자는 누구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을 받을 줄도 몰랐지. 그래서 생각했어. 아, 나는 혼자구나. 앞으로도 계속 이대로 혼자서 살아가야만 하는구나. 그렇게 스 스로를 납득시키고 여자는 자신의 외로움과 타협해갔어. "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구슬픈 울림을 흘리고 있었다. " 그러던 차에 여자는 한 왕자님을 만났어. 왕자님은 그녀를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해주었지. 위험에서 구해주기도 하고, 병간호를 해주기도 하고, 알 면서도 거짓말에 속아주는 등…….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어주었어. 하지 만 혼자였던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여자는 쉽사리 왕자님을 받아들이지 못 했지. 언제나 마음 속에 그가 들어오려는 것을 거부했어.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뒤를 돌아본 여자는 알게 되었어. " 테레이아는 잠시 말을 끊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 어느틈엔가 그녀의 뒤에는 왕자님과 함께 했던 나날들이 추억이 되어 따라 오고 있었던 거야. 언제나 자신은 혼자라고, 그러니 걱정을 해주는 사람은 없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던 여자는 그 추억 속에서 실은 자신이 왕자님 과 함께 했던 시간을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겨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여 자는 마침내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했어. 그리고 왕자님을 찾아갔지. 하지만 왕자님은 이미 여자의 진심을 받아들일 겨를이 없었어. 언제나 남 을 돌보는데 전념하던 왕자님은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그만 병 이 나고 말았던 거야. 그래서 여자는 결심했어. 이번엔 자신이 왕자님을 낫게 해줄 차례라고. " 그것으로 테레이아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얘기를 듣고 있던 가인은 바닷 바 람 때문인지 눈가가 자꾸 따끔거리고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바닷 바람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런 건 모두 바닷 바람 때문이야. ' 나는 왜……. '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나는 왜 그때 가족들과 죽지 않고, 대체, 무엇을 위해……. " 나, 살아가도 되는 걸까? " 가인은 테레이아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뜨거운 눈물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은 결코 슬픔에 의한 것이 아니었 다. " 이 모양이지만……. 형편없고 엉망진창인 녀석이지만, " 변하고 싶어. 나아가고 싶어. " 좋아해도 되는 걸까? 이런 나라도……좋아해도 되는 걸까? " 테레이아는 그렇게 되묻는 가인을 끌어안았다. "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가인.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살아있어서 다행이 야. " 그러니 좀 더 자신을 사랑해줘. 좀 더 자신을 끌어안아줘. ' 이건 나만이 아닌……널 좋아하는 모든 이들의 바램이기도 하니까. ' 오라는 스스로를 불신하는 사람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유가인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스스로를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자 세계는 옴팔로스의 열쇠를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 모두에게 돌아가겠어. " 가인은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여지껏 테레이아가 보아 온 미소들 중 가장 눈부신 것이었다. " 나는 아직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어. " 14시. 언더 시티 유레카의 광속 전차 승강장. 레일에는 한대의 광속 전차가 막 12구역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차에 올라타기 위해 승강장으로 모여드는 세 명의 피스 대원들이 있었다. " 오랜만이네요. " 피스 옐로우 한시민은 한달 여만에 돌아온 소감을 그렇게 짤막히 표현했다. 하지만 그 말만큼 지금의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피스 레드 성마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 여러 일들이 있었다. 포기하려고도 했었고 도망치려고도 했었다. 아직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 하지만 돌아왔죠. " 시민은 마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미소했고, 마리도 감상에서 깨어나 미소 했다. 그래. 우리는 돌아온 거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어. 남은 것은 앞 으로 나아가는 일 뿐이다. " 그래도 모두가 돌아온 것은 아니야. " 그때 그녀들의 뒤에 있던 피스 핑크 이유리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 에 시민과 마리는 쓴 웃음을 지었다. 가뜩이나 모두가 덮어두고 있던 사항을 유리가 대놓고 끄집어낸 것이다. 일단 결원이 상기되기 시작하자 동료들의 빈 자리가 주체할 수 없이 크게 느껴진다. 시민은 유리의 등을 토닥이며 허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어쩔 수 없죠. 진우 씨는 아직 재활치료도 시작하지 않았고, 가족들의 반 대도 있으니까……. " " 오빠와 브루스는? " " ……. " " 왜 그 두사람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아? " 유리는 시민이 일부러 가인과 브루스에 대한 언급을 피하자 따지듯이 물었다. 그 물음에 시민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가인이 집을 나간 것 은 자신의 무리한 고백 때문인 것 같았고, 브루스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두 사람의 실종이 모두 자신과 관련된 것 같아 그녀로서는 마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마리는 시민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애써 둘 사이를 중재하며 나섰다. " 지금은 남아있는 사람들만이라도 단결해야 합니다. 동료들끼리 서로 다투 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 " ……그렇군요. " 시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 유리 양, 이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될까요? 전투가 끝나면 하나도 빠짐없 이 얘기해줄게요. 대신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기로 하고요, 예? " " ……응. " 유리는 자신이 너무 시민에게 날카롭게 반응한 것 같아 애써 기분을 가라앉 혔다. 시민 언니가 말하지 않은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게 분명한데. 역시 자신은 가인의 일이라면 너무 예민해져서 탈이다. 그렇게 어느정도 분위기가 원만해지자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빨리 광 속 전차에 올랐다. 더 심란해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는게 나을 것 같 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가인과 브루스의 실종에 마음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대로 자신들끼리만 전투에 투입되는 것도 영 불안했고……. " ……! " 그때 전차의 입구로 막 들어가던 마리는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뒤따라 들 어오던 시민과 유리는 갑자기 마리가 멈춰서자 영문을 몰라 그녀에게 물었다. " 무슨 일이에요, 마리 양? " " 나- 참! 이거 오랜만의 호출인데 다들 왜 이렇게 늑장입니까? " 시민의 말에 답한 것은 마리가 아닌 웬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시민과 유 리는 광속 전차 안에 자신들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외치고 말았다. " 진우 씨! " " 와하하하하! 그렇게 열렬히 환호해주니 이 정진우, 기뻐 몸둘 바를 모르겠 습니다! 다들 더 놀라도록 하세요! 더! 더! " 전차의 좌석에 앉아 시민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피스 그린 정진우였다. 그는 여느 때처럼 변함 없는 모습으로 너스레를 떨었는데, 진우의 상태가 어땠는지 잘 알고 있던 시민으로서는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게 그렇게 놀라울 수 없었다. " 다 나은 건가요? 눈은? 아직 재활 치료도 하지 않았으면서? " " 닥터도 놀라기는 하더군요. 이렇게 빨리 전자의안에 적응한 인간은 제가 처음이라면서. 뭐, 약간 눈 주위가 뻑뻑한 것을 빼면 완벽 이식입니다. 시 력도 더 좋아진 것 같고요. " 진우의 말에 마리와 유리는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마초. 저 인간은 시신경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작게 중얼거렸다. " 역시 바퀴벌레……. " " 응? 지금 무슨 말했습니까? 유리 양? " " ……아무 것도. " 유리는 슬그머니 창밖을 돌아보며 모르는 척 했다. 아무래도 한국지부 피스 대원들의 리더는 완벽하게 부활한 모양이다. 다만 시민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는데, 그녀는 십중팔구 진우가 무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그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지 않은가? " 진우 씨, 괜찮은 건가요? 미연 씨는, " " ……. " 진우는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역시 시민 씨. 이런 때에도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군. 그는 여기로 나오기 전 병실에서 미연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 뭐하는 거에요, 지금? 당신 제정신이에요! 이제 막 붕대를 풀었으면서 어 디로 가려는 거에요! ' 그동안 벗어두었던 AI슈츠를 착용하는 진우에게 미연은 그야말로 머리 끝까 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진우는 이럴 때의 그녀가 정말이지 무서웠기에 평소 라면 만사 제쳐두고 그녀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진우는 AI슈츠를 완전히 착용하고 손목 의 무전기를 조작하여 슈츠를 에테르 화시켰다. 그러자 슈츠가 사라지는 모습 을 옆에서 지켜보던 하나가 짧은 감탄사를 터뜨린다. 진우는 그런 딸을 안아 올리며 빙긋 웃었다. ' 신기하지, 하나야? 이게 아빠의 작업복이야. 멋있지? ' ' 아빠, 또……일 나가는 거야? ' 하나는 미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우는 일부러 미연에게 들으라는듯 하나에게 크게 물었다. ' 왜? 아빠가 일 나가는거 싫어? ' ' 으응. 하지만……엄마가 슬퍼하는 걸. 아빠가 없을 때 엄마가 걱정하는 거 난 보기 싫단 말이야. ' 진우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일을 한답시고 가정에 소홀했던 것을 딸에게 지적당하니 회의감이 들었다. 곁에서 부녀를 지켜보던 미연도 안색이 어두워진다. 진우는 하나를 꼬옥 품에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아빠의 턱수염이 까끌거린다 며 그에게서 벗어났을 딸이지만 이번만큼은 잠자코 그에게 안겨주었다. ' 하나야. 하나는 가인이 오빠 좋아하지? ' ' 응! 하늘 땅 별 땅만큼 좋아해! ' ' 그럼 유리 언니는? ' ' 응! 언니도 좋아! ' ' 시민 언니도 좋아하지? ' ' 응! 응! ' ' 그래. 착하다, 우리 딸. 이런 착한 딸이 있어서 이 아빠는 너무너무 행복 해요∼ ' 진우는 꾸밈없이 답하는 하나의 모습에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 아빠는 말이야. 우리 하나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나가는 거야. 그래서 하나가 앞으로도 계속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어. 그러니 이 아빠가 일하는 것을 좀 허락해주면 안될까? 응? ' ' 당신……. ' 미연이 한숨을 내쉬며 충혈된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그런 아내 에게 히죽 웃으며 하나에게 보채듯이 계속 물었다. ' 응? 응? ' ' 응! 아빠! 잘 다녀와! 하지만 조심해야돼? ' 하나는 웃으면서 진우의 뺨에 입을 맞췄다. ' 엄마와 내가 계속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 그 말에 더 이상 미연도 진우를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은 이런 바보같은 남자 를 좋아했기에 그와 한평생을 같이 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 진우 씨? " 시민은 진우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재차 그를 불렀다. 그제야 상념 에서 깨어난 진우는 히죽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하하! 제가 누굽니까? 정씨 집안의 모범 가장! 사랑받는 남편! 존경받는 아 빠! 제 말 한마디면 모든게 오케이죠! 문제 없습니다! 하하하하! " ' 무릎 꿇고 싹싹 빌었군. ' ' 아니면 몰래 도망쳐 나왔거나. ' 시민과 마리, 유리는 진우의 말을 동시에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만큼 그녀들 에게 있어서 가장으로서의 진우는 그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진우는 그런 동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세 좋게 말을 이어나갔다. " 자, 어쨌든-! 드디어 손꼽아 기다려온 리벤지의 시간입니다! " 진우는 마리와 시민, 유리와 한번씩 눈을 마주치며 씨익 미소지었다. " 이번에는 우리가 녀석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한국 지부 피스메이커의 힘 을! 이자까지 합쳐서 멋지게 한방 먹여줍시다!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곧 한가지 말할 것이 더 남았다는듯 주의를 끌어모았 다. 그리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던 바램을 끄집어냈다. " 그런 뒤 유가인과 사부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립시다. 아시겠습니까? " " 피스! " 마리와 유리, 시민은 환해진 얼굴로 진우에게 경례를 붙였다. 그렇게 그들은 격전의 12구역으로 출발했다.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26 - Ｂy Ｎext Ｎeo =-=-=-=-=-=-=-=-=-=-=-=-=-=-=-=-=-=-=-=-=-=-=-=-=-=-=-=-=-=-=-=-=-=-=-= ' 어째서 제가 아닌 그 아이입니까? 그 아이는 황씨 일족의 아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 황유평은 무영신풍류의 후계자 자리에 카구라 일족의 속가 제자가 선정되었 다는 얘기를 듣고 원로들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것은 그가 전대에 이어 두 번째로 맞게되는 좌절이었다. 전대의 당주는 무영신풍류의 검을 아들인 유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굴러들어온지도 모를 데릴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그때의 일로 인해 유평은 무 영신풍류 내의 가속들에게 그 자질을 의심 받았으며 한동안 모욕적인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기를 수십년. 어처구니 없는 인계로 가문의 계승을 끊어버린 전대의 당 주가 죽고, 일족의 원로들은 마침내 잘못된 계승을 바로 잡기로 결심한다. 그 것은 유평과 유평의 누이동생인 연우의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 무영신풍류의 발전에 카구라 일족의 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코마 히코는 신검 도츠카노츠루기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오라 능력자, 오라 능 력과 무영신풍류의 만남은 무영신풍류에게 새로운 부흥을 가져다 줄 것입 니다. " 연우가 자신의 제자인 코마히코를 내세우면서 일은 틀어졌다. 그 바보같은 원로회 늙은이들은 도츠카노츠루기라는 이름에 넘어가 전대와 같은 과오를 또 범했던 것이다. ' 바보같으니! 뭐가 신검이고 뭐가 오라 능력자란 말이냐! 그런것이 진정 무영 신풍류에 부흥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무영신풍류는 무영신 풍류로서 강해져야 하는 거다. 그런 신력에 의지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몰락 뿐이다! ' ' 인간의 이치로 잴 수 없는 것이 신력입니다. 신기와 신력이 이렇게 우리들 의 앞에 나타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십니까? 저는 필연이라고 생각합 니다. 신풍(神風)입니다! 그리고 무영신풍류는 절대로 이 신풍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 연우는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주장했고, 결국 원로들도 그 신풍이라는 것에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그때 유평이 느꼈던 것은 상실과 비탄, 그리고 절망에 가까운 분노였다. ' 오라 능력자! 도츠카노츠루기! 그것들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그렇다 면 내가 보여주지! 그 신력의 부질 없음을! ' 그 외침을 남기고 유평은 무영신풍류에서 모습을 감췄다. 횡도 후츠노미타마 와 함께. " 후후후후. 그래. 연우, 네가 말했던 신풍도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 유평은 자신의 앞에 무릎꿇은 혈인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12구역의 폐역사에는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와 그를 따라 들어온 A조의 특수부 대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코마히코는 간신히 도츠카노츠루기로 지금껏 후츠 노미타마의 검강을 막아내왔지만, 다른 대원들은 애초에 후츠노미타가 뿌려낸 일격을 막지 못하고 모두들 숨을 거둔 것이다. 코마히코는 너무나 허무하게 대원들을 잃은 나머지 평소의 침착함을 유지하 지 못했고, 그것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 아니……. 그것만이 아니야. ' 코마히코는 흐릿해져가는 시야로 유평의 손에 들린 후츠노미타마를 노려보았 다. 그 노다치는 예전에 자신이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귀기를 진하게 뿜어내 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기 속에 잠들어있던 원령이 사용자의 의식에 반응하여 점점 제 힘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츠카노츠루기를 든 자신이 이토록 일방적으로 밀릴 리가 없다. 코마히코는 확신했다. 저번의 전투 때 이후로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 후츠노미타마의 잠식이! ' 유평은 코마히코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드러나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결국 강한 힘은 더 강한 힘에 제압당하는 법이지. 오라 능력도 신력도 여 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이런 것이 네 사부가 그토록 떠들어댔던 부흥의 실체인 거야. 하! 정말이지 허무하군. 그 늙은이들에게 지금의 네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겠지? " " ……! " 순간, 코마히코는 이를 악물며 도츠카노츠루기를 있는 힘껏 유평에게 휘둘렀 다. 자신이 모욕을 당하는 것은 참아도, 사부의 모욕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다. 하지만 유평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제자리에서 후츠노미타마를 가볍게 휘 둘러 도츠카노츠루기를 빗겨냈다. " 큭! " 코마히코는 수중에 쥔 도츠카노츠루기를 따라 비틀거리며 유평에게 등을 보 였다. 하지만 유평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방치함으로서 코마 히코를 더욱 조소할 뿐이다. " 오라 능력을 제한 네 녀석은 겨우 그 정도 수준인 거지. 무영신풍류의 후 계자로 선정되었던 것도, 일족의 눈에 들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놈의 오 라 능력이 있었기 때문. 오라 능력이란 이점이 없는 너는 단순한 애송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유평은 공허함을 참지 못하고 수중의 후츠노미타마를 성의없이 코마히코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 일격 하나 하나에 코마히코는 몸이 허공에 뜰 정도의 충 격을 받으며 도츠카노츠루기로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촹- " 나는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지푸라기조차 들 힘이 없어질 정도로 검을 휘둘렀어. 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지. 진정 으로 즐거웠으니까. 내가 강해져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힘든 줄도 모르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그렇게 나는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이 넘도록 검만을 휘둘러왔다. 길다면 길고 짧 다면 짧은 세월이지. 하지만 너에게는 아늑할 정도로 긴 시간일 거다. " 촹- " 그 정도로 검을 휘둘러온 나도 내가 강하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지. 이 정도가 내 한계일리가 없어. 좀 더 강해지고 싶다. 더! 더! 만족하는 순간, 주저앉을 것을 알기에 나는 언 제나 목마른 사람처럼 갈망해야만 했다. 강함을! " 촹- " 그런데 너희 놈들은 뭐냐? 오라 능력자라고 하는 너희는? 복권에 당첨된 것 처럼 한순간에 힘을 얻은 애송이들! 남들이 피땀흘려 이루어낸 것을 한순간 에 강탈해낸 도둑 놈들! 그런 주제에 네 놈들은 그것이 당연하다는양 으시대 며 자랑이나 해대지! 파렴치하기 짝이 없어! " 촹- " 부끄럽지도 않느냐? 주제에 맞지도 않는 힘을 가진 자신이 부끄럽지도 않아? 대등한 힘을 가지자 대번에 나에게 농락당하는 네 모습이 수치스럽지도 않느 냔 말이다! " " 크헉! " 촤앙- 코마히코는 마지막 후츠노미타마의 일격에 신음을 내지르며 폐역사의 저편으 로 주르륵 밀려났다. 도츠카노츠루기를 쥔 그의 손바닥은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어져 있었다. 그나마 그와중에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이 기적 이었다. 코마히코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퀭해진 두 눈으로 유평을 바라보았다. 유평 이 말하는 바를 그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절실히 동감한다. 코마히코도 유평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10여년이 넘도록 수련에 전념해온 몸 이었다. 그랬기에 검을 쥔 손의 굳은 살이 몇번이고 찢어졌다 박히는 감각을 잘 알고 있었고 검로 하나를 더 깨닫기 위해 흘리는 땀과 노력, 그리고 그것 을 이루어냈을 때의 기쁨과 성취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뼈저리게 느끼 고 있다. 하지만 코마히코는 결코 유평을 동정하지 않았다. 이해는 할지언정 연민하지 는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한 후, 도리어 유평에게 질문을 던졌다. "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는 알고 있나? " " ……? " 유평은 난데없는 그 물음에 코마히코에게 휘두르려던 후츠노미타마를 멈췄 다. " 그게 무슨 소리냐? " " 당신과 내가 사용하는 검은 알다시피 신대부터 내려온 영검들이다. 이 삼 령검은 그 속에 각자의 원령을 내재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스스로 판단하 고 선택하는 의지를 가졌지. " 유평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 어린 녀석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무 엇일까? " 오랜 세월 동안 주인 없이 지내온 영검들은 잠들어 있었다. 원령이 잠든 영검은 단순한 쇠붙이에 불과하지. 하지만 원령이 깨어났을때, 영검은 신 검으로서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현세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 한다. " 코마히코의 말을 듣던 유평이 안색을 굳혔다. 코마히코는 수중의 도츠카노츠 루기를 등의 검집에 집어넣은 뒤 허리춤으로 바꿔차며 말을 이었다. " 그렇다면 원령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 다. 바로 사용자의 영체다. 원령은 사용자의 영체를 취해 신검의 힘을 끄 집어낼 수 있었던 거다. 힘을 주는 댓가로 사용자의 영체를 받아가는 거지. " " 그건……나도 알고 있는 바다. " " 그래. 셀 수도 없는 세월동안 검을 거쳐갔던 수 많은 사람들의 영체가 집약 된 것. 그것이 바로 원령이고, 그것이 바로 신력이다. 신검은 처음부터 신 검이 아니었어. 사람이 만들어낸 원념의 덩어리일 뿐이야. " 유평은 새삼 자신의 손에 들린 후츠노미타마를 바라보았다. 푸른 귀기를 흘 리며 울고 있는 검이 마치 그의 영혼을 달라며 재촉하는 망자들처럼 보였다. 코마히코는 담담한 눈으로 그런 유평을 바라보았다. " 내가 사용하는 도츠카노츠루기 또한 마찬가지다. 시시때때로 내 영체를 노 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지. 만약 영체를 보호하는 오라 능력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생기를 빼앗겼을 거다. 덕분에 지금 이 순간에도 난 신검을 제압하 기 위해 전력으로 오라 능력을 전개해야만 하지.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 우웅- 코마히코의 몸에서 흐르는 패턴 버밀리온의 빛이 도츠카노츠루기를 타고 흐 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기에 유평은 긴장을 곤두세웠다. 유평을 바라보는 코마히코의 눈동자가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 그러니 내가 싸워야할 적은 네가 아니다. " " 으음……! " " 내 적은 바로 나 자신! 그리고 도츠카노츠루기다! " 그 말을 끝으로 코마히코의 몸이 운요에 접어들었다. 그의 몸은 이미 한계 에 도달해 있었다. 이번 일격으로 모든 것을 끝내야만 한다! " 이 놈이! " 유평도 이를 갈며 운요에 접어들었다. 아마도 이번이 녀석의 마지막 발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자신있어 하는 장기로 승부해오겠지. 그리고 그는 코마히코의 장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 또 예의 발파(發破)를 펼칠 셈이냐! 몇번이고 깨주도록 하마! ' 코마히코에게 발도술의 오의 발파가 있다면 유평에게는 거스름의 극의 궁기 (窮奇)가 있었다. 반식 유수를 사법으로 승화시킨 사흉(四凶)의 반격술! 유평 은 이미 이 궁기로 코마히코의 발파를 파해한 전적이 있다. 코마히코는 자신의 기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상대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 다. 유평과 그의 기량 차가 심한 것에는 공부(功夫)의 부족도 있었지만, 무엇 보다 유평이 코마히코의 기술을 모두 아는 것에 비해 코마히코는 그렇지 않다 는데 있었다. 유평이 쓰는 사흉은 그가 일족에게서 파문된 후, 그 나름대로 무영신풍류의 오의를 재정립하여 만든 사법이었다. 하지만 사법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활법에서 임의로 제한시켜둔 정도(正道)를 완전히 배제시킨 살수이기에 검의 정명함은 찾아볼 수 없어도 위력만큼은 경천동지였던 것이다. ' 무서운 재능이다. 아무리 무영신풍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오의 를 뛰어넘는 사법을 스스로 고안해내다니. ' 하지만 코마히코도 유평의 사법 중 딱 한가지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예전 그가 발파를 썼을때 당했던 궁기라는 반격술!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발 도술을 사용한다면 그는 궁기로 반격해올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코마히코의 승산이 있었다. ' 간다! ' 검을 빼서 내찌른다. 이 행위는 단순한 만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상대와의 최단 거리로 내달리는 검기는 소리보다 빠르고 빛보다도 빨랐다. 코마히코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발도술이었다. 그야말로 신속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 ……! " 하지만 이미 유평은 후츠노미타마의 속삭임을 듣고 발도술에 반응하고 있었다. 유평의 푸른빛에 휩싸인 횡도가 주황빛의 검로로 접어든다. 이후 사흉 궁기는 발파의 검기를 어그러뜨리고 그 검광 자체를 코마히코에게 되돌릴 터였다. ' 이건! ' 그때 유평은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궁기의 거스름 속에 있어야할 도 츠카노츠루기의 검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사라진게 아니다. 거두어지고 있었다. 변화하고 있었다. 그제야 유평은 코마히코가 단순한 발도술을 펼쳐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녀석의 발도술은 오의 발파가 아닌 사식(四式) 단월(斷月)! 그것도 두번의 변 화를 내포한 이형(異形) 잔월(殘月)이었다. 발도술로 찌르기를 행하다니! 그야말로 발도술에 특화된 코마히코만이 해낼 수 있는 발상이었다. 처음부터 잔월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유평도 무리없 이 검식을 파해할 수 있었을 테지만, 심리적인 헛점을 찔린 댓가로 그는 도츠 카노츠루기에게 가슴을 꿰뚫렸다. 퍼엉- 도츠카노츠루기에 실린 신력이 유평의 육체를 이끌고 그 뒤편의 벽까지 박살 내며 돌진했다. 마지막 일격이라는 생각에 과도하게 신력을 끌어모으다 보니 고검원인(孤劍遠引)이 발생한 것이다. 덕분에 코마히코는 유평과 한데 뒤섞여 터널의 반대편을 뚫고 튕겨나갔다. " 크흑-! " 코마히코는 억눌린 신음을 내지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의 충격 으로 그만 도츠카노츠루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검을 찾기 위해 어두운 터 널을 둘러보다가 곧 도츠카노츠루기가 유평을 꿴 채로 벽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처참한 모습에 코마히코는 두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려버 렸다. 파문을 당했다고는 하나 한때나마 동문이었던 선배를 죽이고 만 것이 다. 무엇보다 그는 코마히코의 사부인 황연우의 오빠였다. 오빠가 자신의 제자 에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거기에 생 각이 미친 코마히코는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같은 검을 배우던 이들 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게 되다니. ' 감상에 빠질 때가……아니다. ' 코마히코는 이를 악물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 자신에게 맡겨진 임 무는 끝나지 않았다. 고민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나중의 일이었다. 임무에 집중해야만 한다. 코마히코는 만신창이가 된 몸에 포션을 투여하며 일단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그는 처음에 A조와 입구를 통해 홀의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기서 유평과 대치하면서 한참을 오른쪽으로 밀려왔으니……. 아마 피스 화이트와 B조가 예정대로 진입 중이라면 이 근방에서 조우하게 될 터였다. ' 다들 무사해야할텐데. ' 코마히코는 그들에게 별일이 없기를 바라며 도츠카노츠루기를 회수하기 위해 유평에게 다가갔다. 그는 되도록이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유평에게 짧게 목례했다. ' 죄송합니다. ……사숙(師叔).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우웅 그때 코마히코의 발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 않은 곳에 푸른 빛이 터져나왔다. 그 빛은 다름 아닌 횡도 후츠노미타마의 귀기였다. 아마 앞의 고검원인으로 인 해 유평에게서부터 떨어져 나온 모양이다. 코마히코는 그 저주받은 영검을 노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저 귀검으 로인해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 ……? " 그렇게 검을 노려보던 중. 코마히코는 후츠노미타마의 귀기로 밝아진 터널 한 켠에서 무언가를 발견해냈다. 그것은 거울처럼 횡도의 귀기를 반사해내고 있었 다. 게다가 하나가 아닌 여럿. 얼핏보면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정체불명의 물체를 유심히 살펴보던 코마히코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 이건, " 얼음이었다. 18개의 얼음. 그리고 그 얼음 속에는 낯익은 복장의 사람들이 마 네킹처럼 굳어져 있었다. 바로, " ……B조? " 그때였다. 코마히코의 오른쪽 가슴에서 주황빛의 검날이 튀어나온 것은. " 하하하하! 분발해보시지! 이래서야 배덕자란 이름이 울잖아? 응? " 쾅쾅쾅쾅 그람드링은 양손의 리볼버를 시영에게 연사하며 흥에 겨워 소리쳤다. 시영은 그런 상대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림자 사이로 몸을 이동시켰다. 공간 전이에 가까운 패턴 블랙의 그림자 넘기는 음속보다 빠른 총탄도 피해낼 수 있 는 무적의 회피술이었다. 분명 반칙에 가까운 능력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총탄을 날리는 이도 반칙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패턴 알리자린의 순간 예지안은 시영이 어느 방향으로 피할지, 어느 곳에서 나타날지,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그람드링에게 알려주었던 것이 다. 일단 예지가 시전되면 남은 것은 공격 뿐이다. 그람드링은 마치 여우를 굴 속에 몰아 넣는 사냥꾼처럼 천천히 시영의 회피 반경을 줄여갔다. 미처 시영이 그림자로 이동하기도 전에 그가 피할 방향들을 예지하고 그 방향들 을 향해 시기적절한 타이밍으로 견제 사격을 날린다. 그람드링이 양손에 든 리볼버의 탄창은 육연발이었기에 총 12곳의 방향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었 다. 그리고 탄창이 비는 순간, 인터벌(Interval)이 느껴지지 않게 탄알을 장 전하고 다시 사격! 그람드링은 이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으로 확실히 시영의 움직임을 봉 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쉬워 단순한 것이지 저 신속하고 정확한 대처 는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치의 실수도 없이 기계처럼 장전 하고 사격을 하는 그람드링의 모습은 분명 이런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훈련 을 받아왔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 자자, 좀 더 춤쳐보라고! 더! 더! 춤을 멈추는 순간이 네 녀석의 마지막 이다! 벌집이 되고 싶지않으면 열심히 버둥대봐! 어서! " 쾅쾅쾅쾅 끊이지 않는 리볼버의 포효에 그람드링의 귀는 이미 멍해졌다. 묘하게 소리 가 멀어지는 느낌과 이명. 그 감각의 괴리가 그에게서 현실감을 앗아가고 몽 환감을 불러일으킨다. 몸은 격렬히 움직이지만 머리 속은 점점 차가워진다고 해야할까. 그것이 알 수 없는 쾌감이 되어 그람드링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매번 전투때 마다 찾아드는 이 쾌감이 언제나 그를 승리로 이끌어주었다. 필승의 감각! 그람드링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 크크크. 역시 그랬던 거야. 저번의 전투에서는 녀석에 대한 사항을 아무 것도 몰랐기에 고전했던 거였어. 패턴 매저린이라고 했던가? 그림자를 조 종하는 능력! 꽤 까다로운 능력이지만 패턴만 알고 있으면 대응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지! ' 그람드링은 수십번도 더 시뮬레이트(simulate)한 한시영의 자료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최초의 피스 대원이니 전 오라의 주인이니 해도 녀석은 어 차피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한물간 능력자다! 네 놈의 능력은 이미 전부 까발려졌어! 쾅 그람드링은 한시영이 자신에게 그림자 묶기를 시도하려고 하자, 재빨리 발밑 의 그림자에 아켄석 탄을 먹이며 시영에게 달려들었다. 시영의 패턴 매저린은 영체가 가진 정보의 저장고, 그림자를 통해 아스트랄계를 유영하는 섀도우 다 이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성당기사단의 연구를 통해 패턴 매저린의 능력은 얼핏 전지전능해 보일 정도로 개발되었지만, 그 능력에도 엄연한 한계는 존재 했으니. 그것은 바로 시전자가 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스트랄계로 접속해 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결통로인 그림자로 한가지 일을 수행할 경 우 다음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물질계로 빠져나와 다시 아스트랄계에 접속해 야한다는 맹점이 있었다. 그람드링은 이 맹점을 노려서 그림자 묶기가 끝나기 전에 시영에게 접근전을 시도한 것이다. " 하핫! 뭐가 블랙이냐! 뭐가 오라의 주인이야! " 쾅 총은 원거리용 무기다. 하지만 그람드링은 마치 리볼버의 총구를 자신의 주 먹처럼 내뻗어 시영의 미간에 닿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이 터지며 시 영의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시영은 간발의 차로 리볼버의 총신을 손바닥으로 밀어내 아켄석 탄을 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예지안으로 지금의 상황을 읽 어들인 그람드링은 첫탄을 발포하기가 무섭게 다른 손의 리볼버로 시영의 배 를 겨누었다. "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 쾅 두번째 발포! 시영은 산보하는 사람처럼 몸을 옆으로 물려 이번에도 아켄석 탄을 피해냈다. 예전 브루스의 영체에서 읽어들인 칠성권의 보법을 사용한 것 이었다. 그러나 채 총성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다른 손의 리볼버가 시 영을 겨누고 있다. 아무리 그가 발포를 피해낸다고한들 그람드링의 순간예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한 악순환의 연속일 뿐이었다. 더구나 이런 근접거리 에서 저토록 효율적인 권총술을 펼쳐내다니! " 그 잘난 그림자 넘기로 도망가보시지! 어서! " 쾅 쾅 쾅 쾅 순식간에 수 차례의 총격이 지나갔다. 시영은 언뜻 수세에 몰리는 것처럼 보 였지만 차분하게 사기종인(舍己從人)의 수로 총격을 피해냈다. 애초에 그림자 넘기를 사용하거나 아스트랄계로 몸을 피했더라면 이런 근접전을 펼칠 필요도 없었겠지만, 지금 그들이 싸우는 장소는 기가스 티폰에 의해 아스트랄계로 침 식당해있었다. 같은 영계 내에서, 그것도 이런 근접거리에서 그림자 넘기를 사 용했다간 영체의 기척이 단숨에 예지안에 간파당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아까부터 그람드링이 시영을 앞도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철컥 하지만 육연발 리볼버 한 쌍의 공격은 결국 12번이 한계다. 그람드링은 설마 시영이 이 12번의 총격을 모두 다 피해낼 줄은 몰랐기에 혀를 찼다. 제길! 단 순히 능력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의 재주가 있었군! 그 사이에 쿵푸라도 배 워오셨나! " ……! " 그때 그람드링의 순간예지안이 위험을 경고해왔다. 뭔가 거대한, 전신이 꿰뚫 리는 충격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그리고 시영이 진각을 밟았다. 투앙- 전사경의 호쾌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그람드링이 허리를 꺽인 채 튕겨나갔다. 시영의 손바닥이 정확하게 그람드링의 복부를 가격한 것이다. 그 공격이 워낙 에 전광석화같았기에 그람드링은 공격을 예지하고서도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 했다. 이것은 예전, 그가 작전본부실에서 피스 그레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 던 경우와도 흡사했다. 예지보다도 빠른 공격! 브루스의 발경을 스크래치로 완 벽히 구사해낸 발경이었다. 그러나 시영은 공격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휘우-! " 순간 쓰러졌던 그람드링이 휘파람을 불며 거침없이 몸을 회전시켜 일어났다. 그 모습에서는 발경에 대한 충격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영은 진각을 밟았던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 과연 순간예지안……. 대단한 능력이로군. ' 시영은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그가 진각을 밟으려는 찰나 그 발 등을 향해 그람드링의 AI슈츠가 내려찍혔고, 그 공격을 피하려다 보니 진각으 로 제대로 된 경력을 끌어모으지 못했다. 거기다 그람드링은 스스로 뒤로 몸 을 날림으로서 완전히 발경을 피해낸 것이다. 순간 예지안도 대단했지만 그 예지에 즉각 대처한 그람드링의 반응 속도가 더 놀라웠다. 아마 자신의 능력 을 완전히 활용하기 위해 피나는 개발 훈련을 거듭했을 것이다. ' 쳇- 감질맛나게. 역시 이대로는 잡을 수 없으려나. ' 그람드링은 기껏 좁혀놓은 시영과의 거리가 다시 벌어지자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준비해둔 그 방법을 사용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리볼버의 탄창을 채워넣으며 시영에게 총신을 겨누었다. 그 한 결같은 모습에 시영은 미소지었다. " 또 총알 낭비입니까? 피해주는 것도 슬슬 지루해지는군요. " " 그래? 그래서 이번에는 좀 다양한 것을 준비해봤어. " 그람드링은 해맑게 웃으며 시영에게 겨누던 리볼버를 갑자기 땅으로 가리켰 다. " Do you like a sun-bath? " 쾅 그 말과 동시에 리볼버의 총신이 불꽃을 내뿜었다. 그러자 폐역사의 어둠이 단숨에 거대한 빛으로 뒤덮여 사라진다. 그람드링이 발포한 것은 플래쉬뱅(F lashbang), 즉 섬광탄이었던 것이다. 강한 조도의 빛이 총탄에서 발산되어 한순간에 시야를 멀게 한다. 그람드링 은 그 백색의 공간 속에서 AI헬맷의 시야를 자외선 차단 모드로 바꿔 타겟의 모습을 찾았다. 한시영은 이 상황에서도 무슨 여유에선지 품에서 예의 선글래스를 꺼내 쓰고 있었다. 그림자가 사라진 패턴 매저린은 무용지물이거늘! 그람드링은 섬광탄을 쏜 리볼버를 허벅지에 꽂으며 남은 리볼버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두 다리를 벌려 앞으로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 Hey, Betrayer- " 그람드링은 순간예지안으로 시영이 자신의 이번 공격을 피하지 않음을 예지 하고 실소했다. 크크. 끝까지 도도한 놈이군. 추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느니 깨 끗하게 포기하고 죽으시겠다? " 난 말이야∼ 저번부터 네 놈의 그 선택받았다는듯한 면상이 마음에 안들 었어. " 그러니까 날려주지. " 형체도 남기지 말고 꺼져버렷-! " 투아아아앙- 순간 리볼버의 총신에 달린 초전도입자가속기가 전자가속을 일으켰다. 초음 속을 뛰어넘는 극초음속! 바로 삼차원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아포칼립스가 전 자가속이 된 아켄석탄에서 일어난 것이다! 콰지지지직 무형의 충격파는 공간을 집어삼키는 포식자처럼 눈 앞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 다. 그리고 삼차원의 존재인 한시영도 그 충격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27 - Ｂy Ｎext Ｎeo =-=-=-=-=-=-=-=-=-=-=-=-=-=-=-=-=-=-=-=-=-=-=-=-=-=-=-=-=-=-=-=-=-=-=-= 섬광탄의 빛이 사라진 그람드링의 앞은 그가 예상한대로 변해 있었다. 리볼 버의 전자가속으로 아포칼립스 현상을 일으킨 아켄석탄은 자신의 범위 내에 있 는 모든 삼차원 입자들을 소멸시킨 것이다. 아포칼립스란 존재의 계를 벗어난 비선형 방정식의 산물, 카오스(Chaos) 현 상의 일종이었다. 이 코스모스(Cosmos)에 반하는 현상은 삼차원의 존재라면 반드시 따라야할 존재의 법칙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있으며, 되레 그것에 역천 하는 힘마저 가지고 있었다. 바로 유(有)를 무(無)로 되돌리는 것. 존재의 소멸이었다. 이 소멸에 휘말린 존재는 육체와 영체, 그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카오스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어쩌면 힘의 불균형적인 집중을 막기 위한 또 다른 존재의 법칙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는 존재의 계를 주관하는 삼계의 피드백조차 절대적인 것이 아닌, 그 위에 새로운 질서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 크으- " 그람드링은 양손에 움켜쥐고 있던 리볼버를 힘없이 아래로 늘어뜨렸다. 아포 칼립스의 반탄력을 몸으로 받아낸 댓가로 AI슈츠 밑의 육체가 너덜해져 있었다. 그는 포션을 자신에게 주사하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 크크크……, 크크크크. 그래. 역시나 가이아에 선택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그런 건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 " 줄곧 그를 고민케 해왔던 것. 줄곧 그를 분노케 해왔던 것. 그 중 하나를 지 금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렸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 크흐흐흐흐! 눈에 거슬리면 치워버리면 그만이지! Fuck! 네 놈의 꼴을 봐라, 피스 블랙! 아니. 볼 수도 없으려나? 내가 이렇게 떠드는 말도 들을 수 없 겠지? 결국 진짜든 가짜든 그런 건 중요한게 아니었어. 남아있는 녀석이 승 리하는 거다! 끝까지 존재하는 놈이 Winner야! 카하하하하핫! 역시 네 놈 도 지금껏 상대해온 놈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어! 똑같은 패배자다! 크 크크크! 지옥에나 떨어져라? 아니지. 아니지. 지옥에 떨어질 영체도 없어졌 겠지? 크크크크! 그건 좀 부럽군! " 아포칼립스에 의한 소멸이란 그런 것이다. 영체가 사라진 시영은 완벽히 존재 의 계에서 배제된채 카오스가 되었을 것이다. 사후세계니 환생이니 같은 삼계의 피드백과도 무관해졌다. 그람드링은 유쾌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콤 플렉스가 컸던 만큼 시영의 소멸은 더 없는 환희와 기쁨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이 루미네선스라는 것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더 이상 대용품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 ……정말 부럽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때 들리지 말아야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람드링은 연기가 걷혀나가는 전방을 바라 보다가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 부러우면 당신에게도 경험시켜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 피스 블랙, 한시영. 아포칼립스에 휘말려 소멸했으리라 생각했던 그가 여전히 태연스러운 모습으 로 그람드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시영은 아포칼립스의 사정 범위 내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정면으로 아포칼립스를 받아냈음을 의미한다. 우우우우 시영이 앞으로 내뻗은 손에는 거대한 카오스의 흐름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바 로 그람드링이 리볼버로 발생시킨 아켄석 탄의 아포칼립스였다. 시영은 자신에 게 날아드는 아포칼립스를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인양 자신의 손으로 끌어모았던 것이다. 툭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그람드링은 자신도 모르게 수중의 리볼버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전후사정을 묻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도저히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아포칼립스를 막아내는 인간이라니! 아 니, 막아낸다는 발상부터가 말이 안된다. 아포칼립스는 일개 삼차원의 존재가 막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막아낼 수 없다! 막아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 간신히 꺼낸 그람드링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그 질문에 시 영은 아포칼립스가 휘몰아치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미소했다. " 보시는데로 입니다. 당신이 만들어낸 아포칼립스를 제어하고 있는 거죠. " 제어, 한다고? " 아, 일단 설명을 해드리기 전에 잠시 이 처치 곤란한 녀석부터 날려보내겠 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포칼립스를 제어하는 것은 아무래도 익숙치 않아서. " 그 말을 하며 시영은 아포칼립스가 응축된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수 중의 제어를 풀자, " ……! " 한순간 섬광이 주위를 뒤덮었다. 그 섬광 앞에서는 자외선 차단 모드의 시야 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람드링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그 렇게 어느 정도 섬광이 가시자 그람드링은 다시 눈을 떠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 헉- " 위를 올려다본 그는 짧게 숨을 들이켜야 했다. 시영이 아포칼립스를 해방시 킨 폐역사의 천장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반경 5미터에 가까운 그 구 멍은 단면이 두부를 자른 것처럼 깨끗했고, 안으로는 폐역사 밖의 하늘이 거짓 말처럼 드러나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아포칼립스다. 그것도 그람드링 자신이 시영에게 일으켰던 아포칼립스! " 흐음. 생각보다 아포칼립스의 범위가 크지 않군요. 구멍이 좀 더 넓게 뚫 렸더라면 블랙 아더를 폐역사에서 꺼낼 때의 수고도 줄어들텐데. " 구멍을 통해 내려오는 빛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받으며 시영은 아쉽다는듯 말 했다. 그는 구멍에서 시선을 내려 다시 그람드링을 바라보았다. " 자, 그러면 무엇부터 설명해볼까요? 일단 어떻게 아포칼립스를 제어했는지 부터 얘기하면 될까요? " 시영은 선그래스를 벗어 품에 갈무리하며 천천히 그람드링을 향해 걸어갔다. "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아포칼립스는 존재의 법칙에 반하는 혼돈, 카오스 입니다. 우주개벽설(kosmogonia)에 의하면 만물발생 이전의 원초상태라고 도 하죠. 그 말대로 혼돈은 존재의 법칙보다 상위에 있는 질서이기에 존재 의 계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자신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 이 카오 스는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 시영은 문득 몸을 굽혀 자신의 그림자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으로부 터 리볼버 하나가 들려나왔다. 바로 그람드링이 아포칼립스를 쓰고나서 떨어뜨 린 리볼버였다. 시영은 그림자를 통해 떨어진 리볼버를 주워든 후 그것을 그람 드링의 앞으로 들어보였다. " 존재의 법칙이 존재의 법칙 안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듯, 카오스는 카오스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럼 정답은? 바로 아포칼립스 는 아포칼립스를 통해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그 말과 동시에 시영의 손에 들려있던 리볼버가 검은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어둠이 수축되자 그 안의 리볼버도 따라 수축된다. 그것은 소멸이었다.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리볼버의 소멸. 그 현상은 의심할 바없이 완벽한 아 포칼립스였다. 그것도 차원촉매를 통해 끌어내는 방출형 타입이 아닌 수축형! 시영은 그 아포칼립스로 그람드링의 아포칼립스를 막아냈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람드링은 믿을 수 없다는듯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 거, 거짓말! 거짓말이야! 말도 안돼! 차원 촉매도 없이 아포칼립스를 생성 시켰다고? 자신도 삼차원의 존재인 주제에? 그럴 리가 없잖아! "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시영은 그런 그람드링의 외침에서 뭐가 우스웠는지 실소를 터뜨렸다. " 하하하. 뭐가 말도 안된다는 것입니까? 애초에 당신이나 내가 사용하는 오 라능력조차 삼차원에서 일어나서는 안될 카오스 현상입니다. 그런 혼돈 속 에서 또 다른 예측 불능의 혼돈이 일어난들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죠. " 그람드링은 문득 자신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영이 도저히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람드링은 어리석은 자신을 꾸짖었다. 어째서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한건지 후회했다. 한시영, 그는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다른 차원의 존재였던 것 이다. " 저는 예전에 간절히 바라왔던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 시영은 발이 굳은 그람드링의 앞에 서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람드링 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 당신과 당신의 마스터 같은 존재들로 인해 진정으로 바라게 됐죠. 이런 세 상은 존속할 가치가 없다고, 더 이상 존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세계가 소멸하길 진심으로 바랐죠. 그 소멸을 하는 주체가 나였으면 더더욱 바랄 게 없었고요. " 시영의 손에서 검은 어둠이 흘러나왔다. 그 어둠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 틀거리며 그람드링의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 그리고 제 바램은 그 날,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는 힘. 바로 이 패턴 블랙을 얻게 된거죠. " ' 프뤄러리스트(Pluralist)! ' 복수 능력자! 그람드링은 그제야 패턴 블랙이 패턴 매저린과 별개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 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이미 그의 전신은 어둠으로 뒤덮여간 것이다. 파싯 시영이 양손을 교차시키자 그람드링을 뒤덮던 어둠이 수축했다. 그리고 어둠 이 걷혀나간 자리에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 그람드링만이 남아있었다. 시영 의 어둠은 그람드링이 입고 있던 AI슈츠만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다. " 아, " 그람드링은 그만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직 죽지않았다는 안도감보다도 AI슈츠의 오리하르콘마저 소멸시키는 시영의 힘 이 더 두려웠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했던 지독한 공포감이 그를 엄습해온다. 시영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다시 손을 뻗었다. " 평소 루미네선스에게도 소멸할 영체가 있는 걸까 궁금했는데. 오늘 그 궁금 증을 풀게되는군요. " " 아, 아아! 저, 저리가! 다가오지마! " 그람드링은 시영의 손길을 피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물렸다. 하지만 그를 붙 잡은 것은 시영의 손이 아닌 그의 그림자였다. 시영은 그림자 묶기로 그람드링 을 들어올리며 빙긋 미소지었다. " 너무 겁먹지 마십시오. 아직 당신'들'을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 ' 당신들? ' 그람드링은 그 말에 문득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빛이 비치는 근저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붉은 수도 승 복장을 한 산발의 괴인이었다. 자신의 키보다도 큰 노다치를 든 무영신풍 류의 파문 검사! 황유평은 노다치를 들지 않은 다른쪽 손으로 한 인영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 인영을 바라보던 시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제가 분명 죽여서는 안된다고 부탁하지 않았던가요? " " ……죽이지는 않았다. " 유평은 그 말을 하면서 들고 있던 인영을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 피투성 이의 인영은 다름아닌 코마히코였다. 거기다 그의 오른쪽 가슴에 관통되어있 던 것은 다름 아닌 도츠카노츠루기였다. 후츠노미타마에 의해 이미 잠식이 상당수 진행되어 있던 유평은 신검이 무사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신력으로 몸을 회복해낼 수 있는 불사지체가 되어있었 다. 그랬기에 그는 도츠카노츠루기에 몸을 꿰뚫리고서도 되레 그 검을 뽑아 방 심하고 있던 코마히코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하……. 하……. " 유평은 자신의 발밑에 쓰러진 코마히코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것을 확 인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코마히코의 상처가 재생되지 않는 것은 그가 아 직 도츠카노츠루기의 원령에게서 영체를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 츠노미타마를 사용하는 유평은 이미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이는 같은 신검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평의 잠식도가 훨씬 더 진행되었 음을 의미했다. 그것이 마치 코마히코가 유평 자신보다 더 강한 정신력을 가지 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유평은 수치심을 느꼈다. ' 신력을 경멸한 주제에 정작 신력의 힘을 빌어 녀석을 이겨내다니……. ' 그 본말전도된 상황에 이를 악물었다. 코마히코를 쓰려뜨려도 조금도 자신이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유평이 자괴감에 빠져있는 사이에 어둠 속에서 또다른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나타난 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트 발렌시아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마유빈이었다. 시영은 라트에게서 유빈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 유빈은 어떻습니까? " " ……포션을 투여해봤지만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 라트는 무거운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시영은 그런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듯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유빈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 일단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유빈을 아스트랄계에 머무르도록 하겠습니다. 적 어도 영계 내에서는 상태가 악화되지 않을테니까. 아마 블랙 아더처럼 시간 을 가지고 유빈의 영체를 회복시켜야 할 겁니다. " " 크- " 라트는 새삼 유빈을 저렇게 만든 그람드링을 노려보며 분노했다. 평소 티격태 격하던 사이라서 깨닫지 못했지만 라트는 유빈을 나름대로 자신의 파트너로 인 정하고 있었다. 그런 파트너가 저 가증스런 꼬마의 술수에 줄 끊어진 인형처럼 망가진 것이다. 시영은 라트가 손톱을 빼드는 것을 보고 그와 그람드링의 사이를 막아섰다. " 자자, 손을 대는 것은 형제끼리 상봉이라도 시켜준 다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저 역시 동생이 있는 몸이다 보니 매정하게 굴기가 힘들군요. 조 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 " ……마스터의 분부대로. " 라트는 분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시영의 뒤로 물러났다. 그람드링은 시영의 말 에서 자신의 동생이 언급되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 제길……. 크리스도 당한 건가? 어쩐지 아까부터 녀석이 싱크로를 해오지 않 더라니. 그런데 누구에게 당한 거야? 블랙과 그 수하들은 모두 다 이 자리에 모인 것 같은데……. ' 휘이이이이 그때 어둠 저편에서부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더운 여름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냉풍이었는데, 그 바람 사이로 얼핏 하얀 눈발까지 섞여 있는 것이 정상적 인 바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한 새하얀 인영이 무언가를 땅에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그 인영의 윤곽이 파악되자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질렀다. " 너……! " 그 인영은 다름 아닌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발을 붙잡혀 끌려오고 있던 물체는 다름 아닌 피스 푸르푸린 오르크리스트, 바로 그 람의 쌍둥이 동생이었다. 그람드링은 그녀에게 끌려오는 동생이 AI슈츠를 검게 물들인채 두 팔이 잘려 나가 있자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 크,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 오르크리스트는 형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희미한 정신 공명이 느 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람드링은 동생의 목숨이 붙어있는 것에 안도하며 이번에는 류바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 이 개같은 년! 네 년이 크리스를 저렇게 만든 거냐? 그런 거야? 죽여버린다! 죽여버릴테다! 너만은 내가 반드시 죽여버린다! " " ……. " 류바는 그람드링의 폭언에 걸음을 멈추고, 수중의 오라 소드에서 초고진공 커터를 생성시켰다. 시영은 채찍을 휘두르려는 그녀를 제지하며 그람드링에게 말했다. " 그다지 형제애가 두터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의외로군요. " " Fuck you! 뒈져버려, 망할 새끼! 같잖은 소리 집어치워! " 그람드링은 독이 오른 눈빛으로 류바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협박했다. " 멍청한 년!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후회 해도 늦었어! 네 년의 배신 행위는 내 아이 카메라를 통해 마스터도 전부 보고 있을테니까! " " ……. " 그람드링은 자신을 노려보는 류바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웃음을 던 졌다. " 뇌수를 뿌리며 죽어버려라! 미치도록 발광하며 죽엇! 마스터! 어서 이 년 의 머리속을 헤집어버려! 스위치를 누르라고! 어서! " " 그 스위치라는 것이……이 ACR을 말하는 것입니까? " 시영은 고래 고래 고함을 내지르는 그람드링에게 손에 쥐고 있던 한 코어를 들어보였다. 그 코어는 얼핏 보면 놓치기 쉬울 정도로 작은 좁쌀만한 크기의 물건이었는데, 코어 자체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 었다. 그람드링은 홀린 사람처럼 시영의 손에 들린 코어를 바라보다가, 곧 류바에 게서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음을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어, 어째서? 어떻게 된 거야? " 그람드링은 신음을 흘렸다. 분명 시영의 손에 들린 소형의 오라제어정류기는 그의 마스터, 시폰 뤼멘이 피스 화이트의 뇌하수체 밑에 심어놓은 것이었다. 그것은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에게도 심어져 있었는데, 시폰은 이를 작동 시켜 자신의 명령을 어기거나 이상 행동을 하는 대원의 머리 속에 초전도 현 상을 일으켜 영체를 고문해왔다. 시영은 자신의 손에 들린 코어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 정말이지 악취미로군요. 이런 발상을 해내다니 추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 파싯 코어가 어둠에 물들어 사라져갔다. " 당신들의 마스터는 예전부터 그랬어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모르모 트로 밖에 보지 않았죠.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동료도.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밖에 사람을 통제할줄 모르는 겁니다. 자기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 하는 불쌍한 인간이죠. " 그는 류바를 돌아보며 미소했다. " 이제 당신은 자유입니다, 에레노아 양. 에레노아 양의 충성은 당신이 스스 로 자신의 팔을 잘라냈을 때부터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묻고 싶군요. 절 따르겠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 없습니까? " " ……없습니다. " 류바는 나지막이 답하며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다.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태 도였지만 시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한점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강한 신뢰마저 엿보인다. 시영은 류바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람드링을 붙잡고 있던 그림자가 풀려나갔다. " 자- 피스 알리자린. 상처입은 동생을 보듬어주십시오. 어서. " 얼떨결에 자유를 되찾은 그람드링은 자신을 둘러싼 시영과 그 패거리들을 혼 란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풀어준 시영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 다. 만약 이대로 자신이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제길.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그람드링은 자신의 순간예지안으로 몇번이고 찾아드는 시영의 어둠을 예지해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패턴 블랙의 소멸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 는 무력함이라는 생소한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동생에게 다가갔다. " 크리스……. " 양 팔이 잘려나간 오르크리스트의 모습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AI슈츠의 빛마저 사라져있는 것이, 만약 그에게서 미약한 정신 감응이라도 느껴지지 않 았다면 진즉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람드링은 그런 동생을 어색하게 바라보며 망설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어 떻게 대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으, " 그때 오르크리스트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 신음에 정 신이 번쩍 든 그람드링은 서둘러 오르크리스트의 상체를 안아 올렸다. " 크리스! 정신이 드냐? 날 알아보겠어! " " 그, 그람……. " 오르크리스트가 그를 알아보고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그람 드링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 빌어먹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이 망할 자식! " " 그람……. 나, 나……. " " 시끄럿! 닥치고 가만 있어! 지금 당장 포션을 놓아줄테니까! " 그람드링은 자신의 품을 뒤져 여유분의 포션을 꺼내려고 했다. 이상하게 손 끝이 떨리고 침착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 왜 이러는 거지? 어째서 이렇게 내 가슴이 뛰는 거야? 두려운 건가? 흥분 하는 거야? 아니면 기뻐하고……있는 건가? 어째서? ' 그람드링은 오르크리스트의 상처 부위에 포션의 고압주사기를 대고 당겼다. 이대로 포션을 투여하면 손이 떨어져나간채로 회복되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 으리라 생각했다. 그람드링은 초조한 눈으로 동생의 안색을 살피며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서 회복의 기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 왜, 왜 이러는 거야? " 오르크리스트의 안색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아니, 분명 육체가 회복되 는 것은 느껴졌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느껴지는 정신 감응은 희미하기 짝이 없 었다. 오히려 점점 쇠약해져간다. 그제서야 그람드링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시영과 류바를 돌아 보았다. " 너희들……! 무슨 짓을 한 거지? 크리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상처가 낫지 않지? 왜! " 그런 그에게 시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 으음. 블랙 아더의 영체를 조금이나마 더 빨리 회복시키려다보니 피스 푸 르푸린의 그림자에서 오라를 과도하게 빼내버렸어요. 아마 영체의 그릇에 균열이 가서 카르마에너지가 바닥났을 겁니다. " " 그, 그럼……. " " 예, 같은 오라 능력자는 되도록이면 죽이지 않는다는게 제 원칙이지만 이 번만큼은 예외가 될 것 같군요. 뭐, 어차피 루미네선스니까 그다지 예외일 것은 없겠지만요. " 그 말에 그람드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로 복잡한 감정은 결국 무성의하게 동생의 죽음을 결정내린 시영에게 표출되 었다. " 되도록 죽이지 않는게 원칙이라고? 이번만큼은 예외라고? 이런 빌어먹을! 개자식! 망할 자식! 엿이나 먹어! Fuck you-! " " 그 기분을 잘 새겨두시길. 그것이 바로 당신들의 손에 죽은 사람들의 기분 일테니까. " 몰라! 그런 건 몰라! 단지 크리스가 죽는다는게 참을 수 없을 뿐이야! 다른 녀석들이 얼마나 뒈지든 그런 건 내 알바 아니야! 크리스! 크리스! 그때 혼란스러워하는 그람드링에게 오르크리스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해줘. 그람……. 나……, " " 뭐? 뭐라고 했어, 크리스? " 그람드링은 황급히 오르크리스트의 입에 자신의 귀를 가져갔다. 그리고 신경 을 곤두세워 오르크리스트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 나……얘기하고 싶어……. 마스터와, 마스터와 얘기……. " " 아,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금방 얘기하게 해줄테니까! " 그람드링은 이런 상황에서도 마스터를 찾는 오르크리스트에게 답답함을 느꼈 지만 내색하지 않고 무전기로 본부실과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손목의 액정에 곧바로 사령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람드링의 아이 카메라로 상황을 파악하 던 오퍼레이터 팀이 즉각 시폰 뤼멘을 연결시켜준 것이다. 그람드링은 다급히 무전기를 벗어 오르크리스트의 앞에 대주며 소리쳤다. " 자! 크리스! 마스터야! 보이지? 마스터라고! " " 마스……터. " 오르크리스트는 흐릿해져가는 눈으로 무전기에 떠오른 시폰을 바라보았다. 액정에 떠오른 시폰의 얼굴은 그가 한번도 본적 없는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그 얼굴에 오르크리스트는 왠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 마스터……, 부탁이……있어요……. " 모든 감각이 꺼져간다. 이미 목 아래 쪽의 감각은 느껴지지도 않았고 눈동자 에서도 힘이 풀려가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저에게……, " 오르크리스트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 한마디만……, 아들이라고 한마디만……. " 그 말을 듣고 있던 그람드링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바보같은 자식! 멍청한 자식! 크리스, 이 머저리같은 놈! 그게 뭐가 부탁이야? 어째서 마지막까지 그런 인간에게 그 따위 부탁을 하는 거야? 그람드링은 알고 있었다. 부모가 없던 그들 형제는 실험과 훈련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마음을 기댈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었다. 특히 오르크리스트는 그 정도가 심했는데, 이 나약하기만 하던 동생은 결국 자신을 모르모트로 취급하 는 마스터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던 것이다. 동생은 마스터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노력과 정성을 다했다. 그람드링은 그 런 바보같고 솔직한 동생의 모습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워했 다. 동생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마스터가 부러웠다. 마스터에 대한 사랑을 솔직 하게 표현하는 동생이 부러웠다. 그래서 시기했다. 질투했다. 비웃는 것으로 외면해왔다! " 마스터……, 마스터……. " 마스터를 애타게 부르는 오르크리스트의 모습에 그람드링은 느꼈다. 이것이 동생의 마지막이라고. 더 이상 녀석을 볼 수 없게 된다고. 그는 간절히 바랐다. 제발 그의 마스터가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를. 빈 말 이라도 좋으니 오르크리스트를 아들이라고 불러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쓸모 없는 녀석.》 " ……! " 하지만 마스터는 그의 소망을 너무나 가볍게 저버렸다. 너무나 냉정하게 외 면했다. 원래부터 그런 인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발 이번만큼은! 제 발 이 순간 만큼은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랐건만! 《그람, 듣고 있나? 너만이라도 당장 전선에서 이탈하도록 해라.》 소름이 끼치도록 차분하고,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시폰 은 이미 죽어가는 오르크리스트에게 관심도 보이지 않으며 그람드링에게 명 령하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주먹을 쥐며 이를 악물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슴을 칼로 긁어내리는 기분은, 이토록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이 기분은? 무엇일까? 무엇일까? " 크리스……. " 순간 동생을 내려다보던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르크리스트에게 서 더 이상 어떠한 정신 감응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 의 뇌리에 새겨진 것은, 동생의 얼굴이었다. 오르크리스트는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는 조금도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을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그 입가에는 알고 있었다는듯, 마스터가 자신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듯, 그렇게 체념한 듯한 미소. 그 미소가 너무나 크게 그람드링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 이런. 먼저 간 동생 분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죽음이란 아무래도 외롭고 쓸 쓸한 것이겠죠. 그러니 동생 분이 외로워하지 않도록 형님도 따라가주는 것 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시영은 오르크리스트의 시체를 두고 엎드린 그람드링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너무나 천연덕스럽다 못해 증오스러운 목소리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그람드 링의 이성을 무너뜨렸다. " 으아아아아앗-! 죽어어어어엇! " 죽어! 죽어! 죽어! 쾅 그람드링은 괴성을 내지르며 번개같이 리볼버를 시영에게 겨누고 발포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퀵 앤 데드였다. 하지만 애초에 그 리볼버에 들어 있던 것은 섬광탄 뿐이었다. 시영은 섬광탄의 빛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허무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람 드링에게 검지 손가락을 내뻗었다. " 다음에는 동생 분과 함께 좋은 부모님의 밑에서 태어나기를. " 퍽 손가락에서 뻗어나온 그림자는 화살처럼 그람드링의 얼굴을 꿰뚫었다. " ……어쩔 수 없군. " 언더 시티 유레카의 작전 본부실에서 메인 스크린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시폰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양아들들의 아이 카메라가 모두 꺼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수많은 대원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채영에 게 명령했다. " 지금 당장 지구 방위군에게 연락을 취하십시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그 들에게 융단 폭격을 준비시켜두었습니다. 대원들과의 전투로 지친 피스 블 랙 일당을 전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에요. 기가스 티폰도 움직이지 못하 는 것을 확인했으니 저번처럼 폭격을 막아내지는 못할 겁니다. " 그 명령에 채영과 오퍼레이터 팀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인간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피스 대원들 을 폐역사에 투입시킨 목적 자체가 기가스 티폰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것 뿐 이었다면……. 비약일지는 몰라도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폰이라는 남 자는 분명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일 것이다. 시폰은 창백한 안색으로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는 채영에게 인상을 찡그렸다. " 제 명령을 듣지 못했습니까? 아니면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까? " 그 말에 채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껏 참고 참아왔지만 도저히 지금만 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현장에 투입된 피스 대원들이 보내오는 영상과 무전을 빠짐없이 보 고 들으며 모든 정황을 알 수 있었다. 윤채영, 자신이 인간 임이 분명하다면, 앞으로도 계속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싶다면 절대로 이런 남자의 명령에 따라 서는 안되었다. 진즉에 거부했어야만 했다. 채영은 머리에 끼고 있던 헤드셋을 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폰 에게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 따를 수 없습니다. 아니, 따르지 않겠어요! 저는 이 자리에 몬스터로부터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위한 피스메이커이고요! 그 생각은 저뿐만이 아닌 이 자리의 모든 대원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저 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 피스메이커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것 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명령은 따르지 않습니다. 제가 인간인 이상! 인 간으로 살아갈 이상! 인간이길 포기한 당신의 방식에는 따를 수 없어요! " " 맞아요, 치프! " " 말 잘했어요! " 그녀의 말에 뒤따라 삼인방과 오퍼레이터 대원들이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녀들은 그야말로 시폰에게 덤벼들 것처럼 적의를 불태웠다. 더 이상 작전 본부실에서 시폰의 명령을 따르는 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시폰은 자신을 둘러싼 채영 일행의 모습에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 모두들 화가 단단히 나셨군요. 아무래도 제 방식이 여러분들과 여러모로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 당연하지! 일행은 조금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는듯 더더욱 그에게 다가왔다. 그때 시폰 이 품안에서 난데없이 권총을 꺼내 자신에게 다가오던 한 여대원을 겨누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 악! " 총성과 함께 대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돌아본 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어깨를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한 여성이 있었다. 그 대원은 다름 아 닌 오퍼레이터 팀의 막내, 문세희였다. 그 모습에 모두들 사색이 되어 물러나자 시폰은 차분하게 말했다. " 자, 모두들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리고 제 명령에 따르도록 하세요. 아시 겠습니까? " " 아아아악- " 한순간의 총격에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닥터와 대원들은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세희를 지혈하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시폰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이 다음에 총구가 노릴 방향은 어깨가 아닌 머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대원이 겁없이 시폰의 앞으로 걸어갔다. 바로 윤채영이었다. 삼인방 과 닥터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 치프! " " 그만두십시오, 채영 씨! " 시폰은 총구를 채영의 이마에 겨누며 혀를 찼다. " 이런. 윤채영 치프는 역시 제 말을 따를 생각이 없나 보군요. " " 어디 한번 나도 쏴보시지. " " 뭐, 그게 소원이라면. " 쾅 시폰은 별 감흥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미처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는 순 간이었다. 그렇게 채영은 머리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져야 했다. " ……. " 하지만 총알은 채영의 위에서 한참을 벗어난 작전 본부실의 천장에 박혀 있 었다. 그리고 초연이 감도는 시폰의 권총은 한 여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시 폰은 자신의 사격을 빗나가게 한 장본인을 바라보며 인상을 굳혔다. " ……거기까지 해두시죠, 뤼멘 대리 사령관. 더 이상의 난사는 월권 행위로 간주되어 신병을 구속시키게 될 테니까. " 그렇게 말한 이는 한국지부 피스메이커의 부사령관 민수정이었다. 지금껏 기 척을 죽이고 다가온 그녀는 단숨에 시폰을 제압한 것이다. 수정의 덕분으로 간 신히 목숨을 모면한 채영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정이 막는 것이 조금 만 늦었더라면 총알은 천장이 아닌 채영의 머리를 관통했을 것이다. " 후. 지금 수정 양의 행동이야말로 월권 행위이지 않습니까? 저는 엄연히 아 직도 대리를 임명받은 사령관입니다. 대리 사령관의 권한은 모두 전시상황 에 있다고 말한 것은 분명 당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 그 권한이라면 지금 회수하도록 하지. " 시폰의 말에 답한 것은 낯익은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채영과 대원들은 자신 들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약 한달 여만에 보 게 되는 자신들의 상관에게 놀람과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 진 사령관 님! " 작전 본부실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는 모습 의 진 사령관이었던 것이다. 검은 제복을 입고 선글래스를 쓰고 있는 진 사령 관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두에게 수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시폰은 그런 진 사령관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군. " " 대리를 맡긴 남자가 유능했더라면 좀 더 휴가를 즐길 생각이었다. "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능력자로 만드는 진 사령관의 말투에 시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애초에 진 사령관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려왔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시폰은 메인 스크린을 가리키며 짐짓 장난스럽 게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 분명 내가 대리를 맡은 이유는 내 휘하의 피스 대원들이 나 이외의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지. 그리고 그 피스 대원들이 전멸한 지금 내가 대 리를 맡아야할 이유는 사라졌어.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언제 낙담했냐는듯 여유있게 진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 하지만 말이야. 지금와서 자네가 나선다고 한들 특별히 달라질 일은 없네. 아직 자네 휘하의 피스 대원들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으니 말이야. 자네가 진정 유능하다면 이 상황에서 지구 방위군에게 융단 폭격을 요청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수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걸세. " 그 말에 채영과 일행은 신음을 흘렸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시폰의 말에서 부정할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 사령관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다 음과 같이 시폰의 말을 일축했다. " 한국 지부의 피스 대원들을 얕보지마라. " " ……! " 그 말과 동시에 메인스크린의 내부 투시도로 새로운 네 개의 불빛들이 나타 났다. 화면에 떠오른 불빛들은 각각 녹색과 붉은색, 노란색과 핑크색을 띄고 있었다. 그 불빛들을 바라보던 대원들의 얼굴은 점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채영은 믿을 수 없다는듯 자신의 자리에 앉아 모니터링을 한후 환호성을 터 뜨렸다. " 맙소사! 진우씨? 거기다 마리 양에 시민 씨, 유리 양까지! 모, 모두들 어 떻게 된 거야? " 순간, 다른 대원들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재빨리 채영의 말을 확인하고 나서야 환호성을 터뜨렸다. 분명 피스 그린을 포함한 한국 지부 피스 대원들 의 아이 카메라에 잡힌 것은 예전과 변함 없는 모습으로 적진에 돌진하는 한 국 지부의 피스 대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떠들썩해지는 대원들에 반해 시폰의 얼굴은 점점 무표정해지고 있었 다. 시폰은 잠시 진 사령관을 노려보다가 그의 곁을 지나쳤다. 진 사령관은 그런 시폰에게 한마디 했다. " 이 한달간의 대리 기간.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에 대한 대접으로는 부족함이 없었겠지? " " ……. " 시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거 였나? 아포스톨로스 유다. 그는 내가 성당기사단의 파견인으로서 줄곧 자신을 감시하게 하는 것보단 실권을 맡겨 스스로 실각하기만을 기다려왔던 건 가? 파견인으로서의 권리를 잃어버리도록 유도한 거였어? 그는 새삼 진 사령관의 대담함에 감탄했다. 불확실한 도박에 자신의 모든 직 위를 걸 수 있다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 후후후. 대단하군. 대단한 친구야. 이번에도 한방 먹었어. " 시폰은 웃음을 터뜨리며 작전 본부실을 나섰다. 패배자의 퇴장이었다. 하지 만 시폰은 자신의 우세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승리를 장담하고 있 었다. 비장의 수를 준비해둔 것은 진 사령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정은 입구로 사라지는 시폰의 자취를 눈으로 쫓으며 진 사령관에게 물었다. " 그가 이대로 물러날까요? " "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겠지. 하지만 결과를 번복할 생각은 없다. 패배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 " ……옳으신 말씀이에요. " 수정은 당연하다는듯 불끈 주먹을 쥐어올렸다. 그때와 같은 패배는 더 이상 자신들에게 있을 수 없었다. 어떤 적이 찾아오든 전심전력을 다해 쳐부술 뿐!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28 - Ｂy Ｎext Ｎeo =-=-=-=-=-=-=-=-=-=-=-=-=-=-=-=-=-=-=-=-=-=-=-=-=-=-=-=-=-=-=-=-=-=-=-= " 가인! 같이 가! " 가인은 뒤에서 들려오는 테레이아의 외침에 그제야 뜀박질을 멈췄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KTX 부산역을 올려다보며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언제부 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더 이상 발을 절지 않았다. 가인은 자신의 오른쪽 무릎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 되돌아온 건가? 오라가……. '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직 그가 걸고 있는 목걸이에서 빛이 나지 않 았다. 분명 오라가 돌아왔더라면 진즉에 목걸이의 수정이 푸른빛으로 변했을 것이다. 역시 오라가 돌아온 것은 아닌가? ' ……뭐, 상관없어. ' 가인은 오라의 유무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잃어버린 오라에 그렇게나 집착해온 주제에 갑자기 이런 기 분이 드는 것은 우습지만……. 단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오라는 그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 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확신했다. 어째서 이런 맹신을 하게 되는 것 인지는 모르겠다. " 하아, 하아……. 갑자기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 힘겹게 가인을 따라와 숨을 몰아쉬던 테레이아가 물었다. 그 물음에 가인은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 앞의 그건……. ' 가인은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을 찌르는듯한 격통을. 그 통증을 느끼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수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모두의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들이 그의 발걸음 을 서두르게 만들더니 급기야 그를 역까지 뛰어오게 만들었다. 테레이아는 그렇게 어리둥절해 하는 가인의 모습에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 가인도 느꼈던 거야. 대기의 진동수가 변화했던 것을. 누군가 타흘룬을 사 용한 것이 분명해. 하지만 대체 누가? ' 짐작가는 사람이 없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가 타흘룬을 사용 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었다. 만약 그녀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 다면 더 이상 그 남자는 노아와 테라로서도 막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있는 곳으로 가인을 보낼 수는 없었다. " 난……가야돼. " 가인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테레이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돼. 늦어서는 안돼……. 왠지, 왠지 그런 기 분이 들어. " 각성에 따른 예지인가. 테레이아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분명 오라의 주인이 각성하는 것은 그녀가 바라마지 않던 일이다. 그러나 그때문에 가인이 위험해진다면 얘기가 달랐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인의 무사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런 테레이아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건지 성큼성큼 역으로 들어갔다. " 가, 가인! " 테레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가인의 손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그를 말리고 싶 었다. 아니, 적어도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는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 있잖아, 테레이아. " 가인은 그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손 을 붙든 테레이아의 손을 힘있게 마주 잡을 뿐이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 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 아까 네가 한 옛날 얘기 말이야. " " 응? " 테레이아는 그 의외의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반문했다. " 그 얘기에서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받아들였다고 했지? " " 으, 응. " " 그래서 이번에는 아픈 왕자님을 자신이 낫게 해주겠다고 결심했고? " " ……으응. " 테레이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얘기라고 해봤자 그건 자 신의 형편을 빗대어 말한 것일 뿐이다. 가인은 그걸 알고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걸까? " 얘기는 거기서 끝이야? 왕자님은? 여자의 병간호를 받은 왕자님은 어떻게 된 거야? " " ……. " 그 물음에 테레이아는 잠시 할 말을 잊고 가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왕자님. 그 왕자님은……어느 새인가 병석을 털고 일어나 믿음직하게 그녀의 손을 이끌고 있었다. 가인은 그런 테레이아를 돌아보며 미소했다. " 왕자님은 결국 일어나지 못했어? " " ……아니. " 테레이아는 희미하게 미소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잡고 있던 가 인의 손에 힘을 주었다. ' 믿을게, 가인. 믿을테니까. ' 이제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일테니까. 그것을 깨달은 테레이아는 더 이상 가인을 말리지 않았다. " 예? "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KTX의 매표소에서 가장 빨리 출발하 는 서울행 고속전철을 타려던 그들은 정작 표조차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표 를 팔 수 없다는 여직원의 말에 가인과 테레이아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 죄송합니다, 손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현재 서울로 향하는 모든 고속 전철은 운영이 중지되었습니다. " " 어, 어째서요? " 따지듯이 묻는 가인에게 직원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운영이 중지된 것은 고속전철만이 아닙니다. 항공 편도 정지되었고 고속버 스도 출발하지 않을 거에요. ……경비 계엄령이 떨어졌거든요. " " 계엄령? " 가인과 테레이아는 그 생소한 단어를 되새김질했다. 계엄령이라니. 그, 전쟁 영화에서나 나오는 그걸 말하는 건가? 직원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는지 어색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 예. 지구방위군이 수도로 향하는 모든 교통 시설을 중지시켰습니다. 아무 래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봐요. 어쨌든 불편을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 " 아, 아뇨. " 가인과 테레이아는 연신 고개를 숙이는 여직원의 태도에 도망치듯이 매표소에 서 물러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곳곳에 보 이고 있었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직원들에게 짜증을 부리거나 역내의 TV앞에 모여앉아 불평을 터뜨리고 있었다. TV에서는 계엄령에 관한 뉴스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뉴스 관계자들도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 이번 계엄령은 대통령이 아닌 군사 책임자가 선포했다느니 소요 사태나 대규모 살인 및 테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등등. 다들 어림짐작이 나 하고 있는 내용들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 어떡하지, 가인? " 테레이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인에게 물었다. 가인은 초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계엄령이 떨어지다니. 아니, 그보 다도 계엄령이 떨어진 이유는 뭘까? 지금껏 몬스터가 수차례 습격을 해왔어도 이렇게 시 전체의 기본권을 통제시킨 적은 없었다. 대체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 제길,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해야……. ' 가인은 서울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아무리 그가 오라 능력을 되찾아 날고 뛴다고 해도 교통편 없이 서울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혹시 막연히 느껴왔던 불안감도 다 이것 때문이었을까? " 유가인 씨 되십니까? " 그때 가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생각에 잠겨 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모르고 있던 가인은 갑작스런 여인의 등장에 화들짝 뒤로 물러났 다. 그에게 말을 건 이는 그다지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단 지 눈빛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 었다. 하지만 가인은 그녀가 정확하게 자신의 이름을 호명했다는 것을 깨닫고 경계의 기색을 보였다. " 누구시죠? " 여인은 잠시 가인의 곁에 있던 테레이아를 바라보다가, 곧 결정을 내린듯 자 신의 정체를 밝혔다. " 피스메이커의 팔라딘 4소대 대원 천요원입니다. 현재 제가 명 받은 임무는 피스 블루 유가인의 시크릿 가드입니다. " " 예? " 가인은 그녀의 정체에 크게 반문하다가 곧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다물 었다.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천요원을 살펴보았다. " 팔라딘 대원이라고요? 거기다 시크릿 가드라니? 그, 그런 건 금시초문인데 ……. " " 피스 대원들에게는 각각 비밀리에 그들을 호위하는 SG조가 붙어있습니다. 비밀 호위인 만큼 당사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호위하는 것이 원칙이죠. 이 런 비상시가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호위 대상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 요원의 말에 가인은 신음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브루스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브루스는 해고당한 가인에게 아직 피스 대원을 따라다니는 팔라딘 대가 철수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한 적이 있다. 요원은 가인이 대충 자신의 존재를 납득한 것 같자 빠르게 말을 이었다. " 어쨌든,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도로 귀환하는데 어려움이 생기신 것 같더 군요. 맞습니까? " " 아, 예……. " " 그렇다면 저를 따라오시길. 이동 수단을 확보해놓았습니다. " 그 말에 가인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이동 수단을……확보해놓았다고? " 그, 그게 정말인가요? " " 예. 이쪽으로. " 앞장서는 요원의 뒤를 가인은 반색하며 뒤따랐다. 테레이아는 그런 가인의 손에 이끌려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녀의 시선은 요 원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요원이 가인과 테레이아를 이끌고 간 곳은 폐쇄된 KTX의 승강장이었다. 사람 한점 보이지 않는 승강장은 완벽히 통제되어 있었다. 아마도 서울 뿐만이 아 니라 다른 지역으로의 교통까지 제한된 모양이다. 그런 한적한 승강장의 레일 위에는 낯익은 전차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 이건……!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전차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 전차는 다름 아닌 피스 대원들의 이동 수단인 자기 부상 열차였던 것이다. 외양이 조금 달라져 있기는 했지만 저 클래식한 증기 기관차는 분명 피스메이커의 광속 전차였다. 요원은 기뻐하는 가인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했다. " 간신히 시간에 맞출 수 있었습니다. 이 전차라면 적어도 고속 전철보다는 빠르게 수도로 돌아갈 것입니다. " " 고,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 가인은 감격에 젖어 요원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요원은 그 뜻밖의 행동에 당황하여 손을 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 아니……, 고맙다니. 저는 그저 명령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 " 그래도 요원 씨가 명령받은 것은 제 호위였지 이동수단을 수배하는게 아니 었잖아요? " " 아, 그……그렇기는 하지만, " " 그러니까 요원 씨의 배려에 감사드리는 거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 " ……. " 가인의 진심 어린 감사에 결국 요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이건 분명 자신의 임무 이외의 일이었다. 어디 임무 이외의 일이다 뿐이겠는가. 애 초에 호위 대상 앞에 자신을 드러낸 것부터가 명백히 명령 위반이다. SG에 서 제명될 것을 각오한 행동이다. 그녀가 이런 부담을 지면서까지 가인을 도와줄 이유는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인에게 호의를 베풀기는 커녕 적의마저 품고있던 그녀 였다. 자신의 고참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단지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 나, 살아가도 되는 걸까? ' 도청기를 통해 들은 유가인의 말은 요원이 언제나 자신에게 되묻던 말이었다. 그녀는 팔라딘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한국 통합군에서 지독한 무력감을 맛봐야 했다. 언제나 몬스터를 방관한채 뒤켠에서 사태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 아 무 것도 하지 못하는 정체 속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몇번이고 똑같은 질문을 던 졌다. 난 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쓸모 없이? 도저히 스스로를 좋아할 수 없었다. 좋아하기는 커녕 주저앉은 자신의 모습에 환멸마저 느꼈다. 어떻게든 변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나아가고 싶었다. 단순한 자기 만족이라고 해도 좋아. 좀 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 싶었다. 그런 요원의 고민은 결국 지옥같은 입대 시험을 통과해 팔라딘 대에 들어옴으 로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지금도 그 무력감을 잊은 것은 아니다. ' 좋아해도 되는 걸까? 이런 나라도……좋아해도 되는 걸까? ' 울면서 흐느끼던 유가인. 경우는 달랐지만 요원은 그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리고 동질감을 느꼈다. 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버 둥치는 동료였던 것이다. 그러자 가인에 대한 앙금은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 제게 고마워하지 마십시오. " 요원은 애써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가인에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그리고 이 번에는 자신이 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 대신 보여주십시오, 유가인 씨.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전 그것이 그 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 그 말에 가인은 미소지었다. 그는 요원의 악수를 받아들이며 있는 힘껏 고개 를 끄덕였다. " 예! " " 좋습니다. 그럼 어서 전차에 오르시길. " 요원의 안내에 따라 가인은 전차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다 곧 자신의 곁에 있 던 테레이아에게 생각이 미쳤다. " 아, 테레이아……. " " 먼저 가, 가인. 난 이분과 함께 뒤따라갈테니까. " 테레이아는 요원을 가리키며 걱정하지말라는듯 미소지었다. 가인이 요원을 돌아보니 그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가인은 쉽사리 테레이아의 곁을 떠 나지 못했다. 테레이아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떻게 22구역에 있던 자신을 발견했는지, 어떻게 자신의 고민을 알고 있었는지. 또 왜 그녀의 행동 에서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떠오르는 건지. 단지 그것 뿐만이 아니다. 가인은 아직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어제 자신이 테레이 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지혜를 만나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따뜻한 말을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테레이아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없다. 그것을 알기에 가인은 도저히 테레이아를 놔두고 혼자 갈 수 없었다.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 테레이아, 나……. " " 가인, 예전에 했던 약속 기억나? " 테레이아의 질문에 가인은 의아해졌다. 약속? 약속이라니? " 언젠가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을 때가 오면 반드시 내게 얘기해준다는 거. " " 아, " 2학년 1학기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때 그녀와 방과 후에 그런 약속 을 했던 기억이 있다. 가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기억나. " " 날 소중한……특별한 친구라고도 말해주었지? " " 으응. " 가인은 쑥스러움을 느끼며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테레이아는 결 심이 섰다. 그녀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 그럼 나도 한 가지 약속할게. 가인이 얘기할 때가 오면 나도 말못했던 얘 기들을 털어놓기로. 나만 얘기를 듣는 건 왠지 불공평한 것 같으니까. " 그 약속에 가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테레이아, 나에게 숨기는 것 있었어? " " 응. 너무 많아서 이런 약속조차 하지 않으면 절대로 얘기할 수 없을 정도 로. " 가인은 테레이아의 말에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아무래도 테레이아의 말 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 하하. 응. 그럼 꼭 들어야겠네.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되면 그때 얘기하는 것으로 하자. 알았지? " " 응. 기다리고 있을게, ……오빠. " 오빠라니. 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작년 병석에서 테레이아가 농담삼아 자신을 그렇 게 불렀던 것이 기억났다. 역시 그녀는 내가 오빠같이 느껴지는 걸까? 위잉 가인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 전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전차의 자 동문이 소리를 내며 닫힌다. 가인은 서둘러 창가로 다가가 테레이아를 찾았다. 그녀는 요원과 함께 플랫 홈에 서서 가인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인은 마주 손을 흔들며 자리에 앉 았다. 창 너머에서 그를 바라보는 테레이아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어딘가 처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기분탓일까. ' 뭔가……. ' 뭔가 개운하지 않아. 뭘까? 뭐가 마음에 걸리는 거지? ' 오빠. ' 그때 자신을 정겹게 부르던 한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방금 전 그를 부르던 테레이아의 목소리와 겹치는 것도……. " 아, " 테레이아! 가인은 서둘러 창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전차는 승강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가인. ' 테레이아는 사라져가는 전차에게서 줄곧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전차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자신을 바라보던 가인의 표정에서 크리스마스 때의 기억을 되찾은 기색이 느껴졌던 것이다. 결국 잊지 않고 있어줬구나, 하고 기뻐하는 자신과. 결국 기억하고 말았구나, 하고 슬퍼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 가인이 그때의 일을 기억해낸 이상,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없었다. 가인은 앞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정체와. 그녀의 목적과. 그녀의 가식까지. ' ……가인? ' 하지만 어제. 가인을 22구역의 언덕에서 만났던 것만큼은 그녀가 의도한 것 이 아니었다. 우연이었다. 팔라딘 대의 강화된 경계로 인해 가인에게 접근하 지 못하던 그녀는 상심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중 그녀는 가인과 꿈 속에서 있었던 일들을 더듬으며 22구역의 언덕을 찾아갔다. 그리고, ' 테레……이아? ' 거짓말처럼 가인과 만나게 되었다. 설마 그가 그곳에 있을 줄은 몰랐기에 테 레이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가 그 장소를 찾아왔다는 것에 진 심으로 기뻐했다. 그것은 가인이 아직도 그녀와 함께 했던 나날들을 기억하고 있음을 의미했으니까. 재회한 가인의 상태는 그녀의 예상보다도 훨씬 좋지 않았다. 시영의 계략으 로 영체의 정신적 피드백에 한계를 맞이한 가인은 폐인이 되어 있었다. 엉망 이 된 그는 정신 장벽조차 허술하게 무너져 있었기에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드림 다이브로 접속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상처 입은 정신에 환각을 덧씌우고 크리스마스 때와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원하 던 바를 이룰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테레이아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서 지친듯이 잠들어 있던 가인에게 도저히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강제로 가인의 영체를 들쑤신 시영과 조금도 다 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 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드림 다이브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직접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그가 입은 상처를 어루만져주기로 마음 먹었다. 가인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이겨내도록 길잡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사항을 가인 본인보다도 더 잘 아는 그녀이기에 가능했던 방법이다. 그녀가 가인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드림 다이브 때문만은 아 니다. 가인의 곁에 있으면서, 그의 말과 행동, 생각들을 하나 하나 자신의 눈 과 귀에 빠짐없이 담아왔기에. 언제나 그에 대한 것들을 생각해왔기에 가능했 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영과 그녀의 차이였다. 시영의 섀도우 다이브는 해내지 못했던 일을 그녀의 드림 다이브는 가능케 했다. ' 가인, 아무래도 틀린가봐. 옛날 얘기와 현실은……. ' 그녀가 가인에게 들려준 옛날 얘기는 분명 모두가 소망하던 바를 이루고 행복 하게 끝을 맺었을 것이다. 여자와 왕자는 서로를 사랑하여 미래를 꿈꾸며 살아 가게 되겠지.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실은. 옛날 얘기처럼 행복해질 수는 없어. '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몇번이고 같은 선택을 하 게 될 거야. '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가인.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지금껏 너를 속여만 왔던 나지만 적어도 오늘 너에게 했던 말들은 꾸밈 없는 내 진심이야. 줄곧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야. 그러니 부디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내가 오늘 했던 말들 만큼은 믿어줘. 오늘 나와 있었던 일들을 전부 부정하지는 말아줘. ' 하지만……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은 역시 내 욕심이겠지? ' 좋아해, 가인. 좋아해……. 좋아해……. 테레이아는 차마 그에게 할 수 없었던 말들을 속으로 되뇌이며 눈물을 흘렸 다. 가인을 태운 전차는 이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철컥 그때 차가운 금속음이 그녀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리리스. ……맞지? " 요원은 어느새인가 품속의 권총을 뽑아들어 테레이아의 머리에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테레이아는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던 테라에서의 역할에 안녕을 고 했다. 리리스는 여전히 눈물에 젖은 눈으로 요원을 돌아보았다. 그 물기 어린 눈동 자를 마주하자 요원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 왜……우는 거지? " 요원의 물음에 리리스는 그제야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누군가를 이렇게나 좋아하고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우스웠 다. 하지만 비웃음인 것은 아니다. 반가움이었다. 유메를 잃고 난 이후 다시 한번 자신을 찾아온 이 감정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감정을 되찾게 해준 그가 고마웠다. 가인을 더더욱 사랑하게 된다. " ……. " 요원은 말 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리리스를 잠자코 노려보았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쉬며 겨누던 총을 밑으로 내렸다. 그 모습에 리리스는 의아한 눈으로 요원을 바라보았다. " 가라. " 요원은 권총을 품에 집어넣으며 리리스를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행 동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녀석은 고참들의 원수다. 인류의 적이다. 그 적의 수괴 중 하나다. ' 그런 적을 지금 놓아주려고 하고 있다니! ' 혹시 내가 저 몬스터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이 아닐까? " 눈 앞에서 사라져라. 내가 피스 블루 유가인을 수도로 보내는 사이에 밤의 여왕은 종적을 감춘 거야. 상부에는 그렇게 보고하겠어. " " ……. " " 그러니까 어서 가라. 어서! 다음에 만나면 주저하지 않고 죽인다! 반드시 죽일테니까! " 요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분노를 금치 못하며 그렇게 소리질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권총을 빼들어 리리스를 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 제길. 저런 눈을 한 녀석을 어떻게 죽이란 말이야! ' 그녀는 도청기로 가인에게 하는 리리스의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말 속 에서 가인을 위하는 리리스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 가인을 보내며 우는 그녀의 모습에 도저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 저 녀석의 어디가 몬스터고 어디가 인류의 적이지? ' 똑같잖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잖아?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녀잖아! 요원은 이를 악물며 리리스에게서 몸을 돌렸다. 마음 속으로 죽은 고참들에 게 끊임 없이 사과하고 또 사과하며. 리리스는 그런 요원의 심정을 눈치 챘는 지 조용히 그녀의 등에 목례를 하는 것으로 무언의 감사를 표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노아와 테라도 그녀들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믿 고 싶었다. " ……? " 그때 요원은 자신의 눈 앞으로 걸어오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긴 검 은 머리를 풀어내린 창백한 얼굴의 남자였다. 그는 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 고 칠흑과도 같은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분명 이 승강장 쪽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시켰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요원은 다음 순간, 번개같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리 고 거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눈 앞의 남자를 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 ……! " 하지만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다. 아니, 당긴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요 원은 마치 스위치가 꺼진 인형처럼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의식이 날아간 그녀의 육체에는 또 다른 정신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테레이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 네크로맨시? " 요원의 육체를 빼앗은 이는 다름 아닌 그녀의 동료, 카이 브릿드였던 것이다! 요원의 두눈에서 강령술의 특징인 푸른빛이 흘러나오며 그 얼굴에선 리리스에 게 익숙한 동료의 표정이 떠올랐다. 요원의 몸을 장악한 카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리리스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리리스.] " 너……, 대체 무슨 짓을.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날 찾아낸 거야? " 리리스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검은 코트의 남자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질렀다. " 거기다 저 남자는 또 누구고! 저번처럼 이상한 녀석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니 겠지! " " 이상한 녀석이라는 건……절 말하는 건가요? " 남자는 자신을 가리키며 그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그 목소리와 얼굴에, 리리 스는 새삼 그를 살펴보다가 곧 두 눈을 크게 떴다. " 너, 아니……당신은……. "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저번에 대면했을 때와는 달리 그에게선 우 스꽝스런 광대 분장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맨 얼굴을 드러낸 그는, " 브리트라? " 바로 요르문간드의 화신들 중 하나이자 최초의 용마인 브리트라였던 것이다! 그녀의 지적에 브리트라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이 몸은 브리트라의 것이 틀림 없지만, 이 정신 은 브리트라가 아닙니다. 애초에 브리트라를 테라로 파견할 당시에는 우리 가 직접 조종할 인형이 필요했기에 그에게는 자유의지를 구성시키지 않았 거든요. " 그 말에 리리스는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카이를 돌아보 자 요원의 몸을 빌린 그도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녀는 브리트라의 몸을 빌린 메두사야.] 메두사! 요르문간드의 화신들 중 유일한 여자의 인격이자 자애의 화신. 그녀는 다른 용마인들과는 달리 육체를 가지지 않고 요르문간드의 정신 속에서 주인격인 티 아마트를 보필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정신체에 가까운 존재가 지금 리리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브리트라, 아니 메두사는 자신의 손을 마치 타인의 것인양 어루만지며 말했다. " 쿠사나기, 그는 테라의 잔당들에게 당하기 전에 저에게 자신이 입수한 정보 를 브리트라와 함께 넘겨주었어요. 덕분에 브리트라의 몸을 빌린 저는 이렇 듯 테라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지요. " 메두사의 말투는 온화하기 그지 없었지만, 리리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는 살의로 들끓고 있었다. " 쿠사나기가 보낸 정보를 통해 리리스, 당신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이 훼방을 놓치만 않았어도 우리는 쿠사나기와 초류향, 스머그와 파프니르를 잃지 않았겠죠. " " 하,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어. 쿠사나기가 오라의 주인을 그대로 해치워 버렸더라면……. " " 그 가증스러운 입! 다물도록 하세요! " 메두사는 리리스의 말을 날카롭게 끊어버리며 두 눈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자 주위의 대기가 거세게 흔들리며 차원이 진동한다. 카이와 리리스는 가슴의 격통 을 느끼며 신음했다. 아무리 대부분의 용마인들을 잃어버렸더라도 역시 요르문 간드는 요르문간드, 노아의 최강자다웠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메두사는 간신히 분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 여기서 당신을 소멸시켜봤자 잃어버린 제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겠죠.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티아마트, 오직 그 사람 하나 뿐이에요. 그 사람만큼은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합니다. 당신들이 지켜내려는 유메 크라이시스, 그녀와 마찬가지로. " 카이도 메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리리스에게 말했다. [리리스. 이번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 메두사를 통해 원로회가 최 후의 통첩을 내렸어. 우리가 이번 사명을 완수하지 못할 경우 유메는 그 즉 시 처형될 거야.] " ……! " 리리스는 그 말에 질끈 두눈을 감았다. 결국 언젠가는 오리라 생각했던 그 순 간이 이제는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 상황을 초래한 이는 다름 아닌 리리스 본인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다른 동료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죄책감에 전신이 짓눌리는 기분이다. 메두사는 그런 리리스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가인이 떠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 어쨌든 지금은 우리가 나설 차례가 아니군요. 일단 오라의 주인이 전 오라 의 주인을 상대로 얼마나 분발하는지 지켜보도록 할까요? " 아마 그들의 어머니인 가이아도 그 둘의 승부만큼은 쉽게 점치지 못하리라. 큐우우우우웅 서울로 출발한 광속전차의 좌석에 앉아 가인은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본 테레이아의 표정이 잊혀지지를 않았다. 왜 그녀에게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일까? 아니, 그 기억이라는 것 자체도 실제로 존재했던 것 인지 의문이다. 뭔가 뒤죽박죽이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니 마음도 진정되지를 않는다. 가인은 애써 창밖을 바라보며 머리 속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차라리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걱정해라, 유가인! 덜컹 그때 미세한 진동과 함께 전차의 방향이 바뀌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가인은 전차가 원래의 노선에서 빠져나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 어떻게 된 거지? " 가인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차는 줄곧 내리막길로 향하더니 이내 는 어두운 터널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창밖이 어두워지자 전차의 비상등이 켜 지며 내부가 붉은빛으로 물들어간다. 가인은 불안한 마음에 좌석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야호∼》 그때 가인의 앞에 있던 스크린이 켜지며 한 여인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 바람에 가인은 그대로 뒤의 좌석에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 왓! 뭐, 뭐야? " 《엥-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나야 나, 가인.》 화면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피스메이커의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였다. 그녀를 확인한 가인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 난 또……. 시더구나. " 《응! 오랜만이야! 이렇게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거 거진 2주만이지? 어어엄청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 가인은 안 그래?》 " ……그러게. 정말 간만이네. " 가인은 조금도 변함 없는 시더의 모습에 미소지었다. 이렇게 시더를 보는 것 만으로도 그녀의 유쾌함이 스크린을 넘어 그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와의 재회를 즐기는 것도 잠시. 일단 자신이 처한 상황부터 물어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 시더, 그나저나 지금 이 전차가 가는 곳이 어디야? 이상한 지하 터널로 들 어온 것 같은데……. " 《Oh- 지하터널로 들어왔다고? 그럼 나라카(naraka)에 접어든 거구나.》 " 나라카? " 《언더 그라운드의 수맥을 5차 국토계획 때 개조한 종단 터널이야. 한국의 가 이아, 즉 서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400킬로미터 길이의 지하터널이지.》 400킬로미터? 가인은 그 어마어마한 길이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대략 서울에서 부 산까지의 거리가 그 정도일까. 가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고속 도로 이용시 서울 에서 부산까지가 428킬로미터 정도였다. 시더는 그렇게 놀라는 가인이 재미있다는듯 키득거렸다. 《그 정도로 놀라는건 이르지. 넌 이제부터 이 터널을 마하1로 돌파하게 된 단 말이야.》 " 뭣! " 가인은 시더가 언급한 마하라는 소리에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분 명 그 마하 라는 건 음속의 단위……. 그, 콩코드인가 뭔가하는 제트기나 낼 수 있는 속력 아닌가? 가인은 시더가 또 뭔가 말도 안되는 짓을 꾸미는 것 같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더? 이 전차가 어떻게 마하로 달린다고……. 아니, 그보다도 마하로 갈 필요가 뭐가 있어? " 제발 평범하게 가자. 평범하게! 가인은 애절한 눈빛으로 시더에게 자신의 의도가 전해지기를 바랐지만, 시더 는 되레 무슨 소리를 하냐는듯 코웃음 쳤다. 《에-? 가인,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최대한 빨리 서울로 가 도 모자랄 판에. 아직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 지금 12구역에서는 미스터 블랙과 미국 지부 대원들간의 전투가 한창이라고! 아니, 듣기로는 미국 지 부 대원들이 참패했다고 하던가…….》 " 뭐? " 가인은 그제야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감을 깨달았다. 미국 지부 대원들이 참패 했다니? 한시영,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가인은 새삼 한달 전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시영을 떠올리고 치를 떨었다. 그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분노가 한데 어우러져 가인의 가슴 속에 휘몰아쳤다. 《어쨌든 서둘러야 될 이유는 충분히 납득했겠지? 거기다 지금 12구역으로 한 국 지부대원들도 파견되었다고 하니까 서두르지 않으면 합류하지 못하게 될 거야.》 " 한국 지부 대원들이라면……. " 《답답하긴! 자기 동료들도 잊어버렸어? 피스 그린! 레드! 옐로우! 핑크!》 " ……! " 가인은 동료들이 적진에 뛰어들었다는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분명 다들 전 투에 투입될 여건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사이에 상황이 좋아 지기라도 한 건가? 그게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가인은 재빨리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둘렀다. 그는 스 크린의 시더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 시더, 가자! 마하든 뭐든 좋으니까 최대한 나를 빨리 서울로 보내줘! " 《오케이- 이 시더 웰리스에게만 맡겨 달라고.》 위이이이잉 그말과 동시에 광속전차에서 굉음이 연신 울려퍼졌다. 기계음이 들리는 것으 로 보아 뭔가 변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가인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지만 역 시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라 시더에게 상황을 물어보기로 했다. " 시더……, 그, 설명해줘도 잘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떻게 이 전차를 마하로 달리게 할 건지 좀 가르쳐주지 않을래? " 《Oh! 좋은 태도야, 가인! 그렇게 알고자 하는 욕구! 그 욕구야말로 과학을 발전시키는 원천이지! 좋아. 그럼 알기 쉽게 설명해줄게.》 시더는 뱅뱅이 안경을 번쩍이며 예의 설명 모드로 들어갔다. 와- 눈에서 생 기가 넘쳐흐르다 못해 쏟아져 나오고 있어……. 《자, 마하1은 초속 340미터 퍼 섹크. 한 시간에 약 1200킬로미터를 갈 수 있는 속력이지. 이 속력이면 400킬로미터의 거리도 20분 안에 주파하는 게 가능해.》 20분. 20분이라고……. 가인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올 때 탔던 고속전철도 2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을 기억해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역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런 속력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천음속(遷音速) 주파를 위해 특별히 머신 아더의 파츠를 빌려왔 어. 가인, 저번에 머신 아더를 탔을 때 반중력으로 비행했던 것 기억나?》 가인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전차에 그 반중력을 가능케 하는 오라 클록을 달아놓은 거야. 동력이야 머 신 아더를 날리는 것도 아니니 우주수 위그드라실에서 충전시킨 오라면 충 분할테고. 에, 또- 충격파의 각도는 AC의 공간 압축이면 해결될 거라고 생 각해.》 " 될 거라고 생각해? 될 거라고 생각해? 그거 확실치 않단 소리잖아? 가, 가 능하기는 한 거야? 마하? " 가인의 다급한 항의에 시더는 히죽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물론! 서울에서 부산으로 전차를 보내는 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었잖아? 가 인이 봤을 때 도착한 전차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보였어?》 " 아,아니……. 그렇지는……않았는데. " 이 전차, 처음부터 부산에 있던 것이 아니었나. 가인은 핼쓱하게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시더는 그런 가인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저 혼자 신나서 소리쳤다. 《자! 드디어 광속전차는 그 이름에 걸맞는 속력을 가지게 된 거야! 물론 광 속에는 아직 한참 모자른 감이 있지만 아쉬운데로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아, 그럼 이제 이름을 뭘로 정할까? 광속 전차 개(改)? 하이뉴 광속전차? 으음- 그래도 정식 후계기가 아니라 외장장갑 강화 쪽이니까 풀아머(Full armor) 광속 전차, 줄여서 파브렉(FAVLEC)?》 ' 제발 그런 걸로 고민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될지나 고민해줘- ' 부우우우우웅 전차의 앞에서 흘러나오던 오리하르콘 스래드들이 오라의 빛을 받으며 푸른 빛의 망토가 되었다. 망토는 마치 광속 전차를 감싸는 형세로 퍼져나간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 시더는 피가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파이널 랩이다! 간다! 부스터어어어- 온!》 핏 순간 스크린이 음소거 상태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이후 20분동안 가인은 생사를 초월한 질주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29 - Ｂy Ｎext Ｎeo =-=-=-=-=-=-=-=-=-=-=-=-=-=-=-=-=-=-=-=-=-=-=-=-=-=-=-=-=-=-=-=-=-=-=-= " 그럼 상황도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까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볼까요? " 그람드링을 쓰러뜨린 시영은 그렇게 운을 떼며 폐역사에 있는 일행을 돌아보 았다. 그리고 그중 황유평에게 다가가 그의 발밑에 쓰러진 코마히코의 상태를 살폈다. " 정말이지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군요, 당신은. 한때나마 같이 수학(修學)한 동문일텐데. " 시영의 핀잔 아닌 핀잔에 유평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는 애써 코마히코의 가슴을 관통한 도츠카노츠루기를 외면하며 말했다. " ……손속을 두었더라면 누워있는 것은 나였을 것이다. 녀석은 신검의 주인 다운 실력자였어. " " 흐음. 그건 칭찬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증오해마지 않던 오라 능력자를? " 시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 짓굳은 질문에 유평은 이를 갈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분명 코마히코가 실력자 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를 상대한 유평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라 능력자는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가진 애송이다……라고 생각했었다. 오라란 허울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닌,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거라고. 그렇게 무시해왔다. 그래서 그들과 같은 힘을 사용하면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간단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내가 싸워야할 적은 네가 아니다. ' 하지만 적어도 유평이 상대한 코마히코는 달랐다. 코마히코는 오라 능력이란 이점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쉽사리 포기하지도 않 았다. 애송이 임에는 분명했지만 그의 검술 속에서는 무영신풍류에 대한 사랑 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공부를 느낄 수 있었다. 코마히코 정도의 수준은 분명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내 적은 바로 나 자신! ' 그 말을 하던 코마히코의 결의에 찬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그가 그만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오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유평과 마찬가지로 강 함에 대해 끝없이 갈망하고 수련을 거듭해온 검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평은 수중의 후츠노미타마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러 자 그의 심기에 반응하여 신검의 귀기가 한층 짙게 피어오른다. ' 마찬가지라고? 저런 오라 능력자 나부랭이와 내가? 하! 웃기지도 않는군! 아직도 각오가 모자란 거냐, 황유평! 무영신풍류를 떠날 때 넌 무어라 다 짐했었지? ' 오라 능력을 깨부수기로! 날 끌어내린 오라 능력자들에게 복수하기로! '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결심했었지! 신력에는 신 력으로 대항하기로! 내 자신이 수라(修羅)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오라 능력자들을 무릎 꿇리기로 결심했었지! 그런 주제에 이제와서 웬 감상이냐! 웬 웃기지도 않은 동정이야! ' 그래. 이건 애초에 녀석들이 자초한 응보(應報)다. 인간의 힘이 아닌 신력을 사용한 대가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던 천둥벌거숭이들. 네 녀석들의 기 고만장함을 내가 심판해주마. 아무도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내가 벌을 내려주 겠어! 깨달아라! 오라 능력의 허무함을! 네 녀석들이 가진 힘의 보잘 것 없음을! 그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검을 휘둘러주마! ' 후후, 후후후, 후후후후. ' 유평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흔들었다. 이미 그의 손에 들려있던 후 츠노미타마의 귀기는 그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신검에 잠식 되어가는 모습을 시영은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마치 유평의 최후를 예상하고 있다는듯이. 촤악 시영이 손을 뻗자 코마히코에게 박힌 도츠카노츠루기가 그의 손으로 튕겨나 왔다. 그러자 대번에 상처에서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시영은 코 마히코의 몸속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조종하여 그를 지혈시킨 후, 품 속에서 포 션을 꺼내 그에게 주사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유평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어째서 녀석을 치료해주는 거냐? " "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라 능력자는 되도록이면 죽이지 않는다'가 제 원칙 이라고. " " 하-! 그 원칙 한번 무의미하군! " 시영의 대답에 유평은 코웃음을 쳤다. 한시영, 그가 지금껏 병신으로 만든 오 라 능력자가 몇명인데 대체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방 금 전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한 명을 죽이지 않았던가? 시영은 유평이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자, 어깨를 으 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했다. " 저 쌍둥이 형제들은 예외입니다. 루미네선스는 저희들의 동족이 아니니까요. " " 루미네선스? 그러고 보니 넌 저 녀석들을 계속 그렇게 불렀지. 대체 그 루 미네선스라고 하는 것은 뭐냐? " 시영은 유평에 말에 대답하지 않고 수중의 도츠카노츠루기를 몇번 허공으로 휘둘렀다. 그 검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유평은 서서히 안색이 굳어졌다. 시영 이 장난스레 휘두르는 도츠카노츠루기는 무영신풍류의 검식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새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영은 유평이나 코마히코의 영체 를 통해 무영신풍류마저 체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영은 놀라고 있는 유평에게 도츠카노츠루기를 건네주며 미소지었다. " 루미네선스라……. 굳이 말하자면 666의 낙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인류 가 자초한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뭐, 일단은 그렇게만 알아두시 길. 오라 능력을 적대하는 당신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저 그런 것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하시길. " " ……. " 유평은 도츠카노츠루기를 건네받으며 시영을 노려보았다. 역시 이것으로 한 시영, 그가 자신을 아군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물론 시영 을 아군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유평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유평은 도츠카노츠루기의 신력이 자신의 몸 속으로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미 소지었다. ' 흥. 한시영. 무슨 생각으로 날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껏 주의하고 있는게 좋을 거야. ' 네가 적으로 돌아서는 순간, 내 손에 들린 신검들이 용서없이 네 목을 꿰뚫 을테니까. 그런 유평의 생각이 반영이라도 된 것인지 그의 양손에 들린 신검들이 푸른 귀기를 뿜어낸다. 하지만 시영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저 웃으면서 그를 바라 볼 뿐이다. " 마스터! " 그때 붉은 형제들의 시신을 살펴보던 라트가 시영을 불렀다. " 왜 그러십니까, 라트? " " 이 녀석이……. " 라트는 말꼬리를 흐리며 오르크리스트의 옆에 쓰러져 있는 그람드링을 가리 켰다. 시영은 라트에게 다가가 발밑의 그람드링을 내려다보더니, 곧 의외라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 이런 이런! 아직 살아있었군요? " " 크……, 으……. " 시영의 말대로 그람드링은 자신의 오른쪽 얼굴 부위를 움켜쥔채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이제보니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고 생각했던 그림자가 그람 드링의 오른쪽 눈만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아마도 그 짧은 찰나에 예지에 반응한 몸이 그림자를 피해내게 한 모양이다. 시영은 몸을 굽혀, 고통에 일그러진 그람드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역시 당신의 순간예지안은 대단한 능력입니다. 이걸로 더더욱 아까워졌어 요. 당신의 목숨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루미네선스만 아니었더라면 좋았 을 것을. " " 엿……먹어……. 죽일테면…… 어서, 죽여. " 그람드링은 피에 물든 눈동자로 시영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 악에 받친 얼굴에 시영은 미소했다. " 그 말은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그 누군가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죠. " 아, 그람드링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리볼버의 총구를 입에 물고 자신을 노려보던 유가인을 생각해냈다. " 어떻습니까? 당신이 패배자라고 경멸했던 상대의 말을 스스로가 하게 되는 기분은? " " ……. " " 지금도 패배자라는 말을 쉽게 올릴 수 있겠습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 " 크, 크으으으-! " 그람드링은 시영의 말에 발작처럼 몸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 러나 그의 왼손이 시영의 옷깃을 붙잡기도 전에 날카로운 진공파가 그 손을 손 가락 끝부터 팔꿈치까지 박막으로 만들었다. " 크, 크아아아앗! 아아아아악! " 그람드링은 비명을 지르며 나노미터로 분해된 자신의 왼팔을 감싸안았다. 시 영은 재차 그람드링에게 진공파를 날리려는 류바를 제지하며 말했다. " 그냥 제 손에 곱게 죽었더라면 편안했을 것을. 뭐, 당신의 끈질긴 생명력 에는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중책을 맡길까 하는데……. 당신의 동 생이 그러했듯 그 미약한 카르마 에너지, 블랙 아더의 양분으로 잘 사용하 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자 그람드링의 그림자가 그 주인의 몸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그를 감싼 그림자는 그람드링의 몸 속에 있는 오라를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영체를 쥐어짜내는 고통에 그람드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눈을 뒤집었다. 시영은 그에 개의치 않으며 유유히 천장에 뚫린 구멍을 올려다 보았다. " 그나저나 블랙 아더의 힘으로 형성시킨 아스트랄 렐름(Astral Realm)이 와 해(瓦解)되다니. 아포칼립스의 위력은 언제나 절 놀라게 하는군요. 카오스 의 생성 그 자체가 블랙 아더의 아스트랄 바디에 연결된 아리아드네(Ariad ne)의 실을 끊어버릴 줄은. " 시영은 새삼 그람드링과 오르크리스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사용하 는 순간예지와 원격투시, 그리고 천리안의 능력은 사람의 의식과 신체를 분리 시키는 아스트랄 프로젝션(Astral projection)의 응용이었다. 거기다 카오스 의 생성을 유발시키는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라……. ' 그들이 존재의 법칙에 점점 더 접근해간다는 증거로군. 그렇게나 세계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건가? ' 그렇다면 세계를 대신해서 내가 벌을 내려주지. 바로 네 놈들의 원죄를! " 아스트랄 렐름이 사라졌다면 우주수 위그드라실이 저희와 블랙 아더의 위 치를 파악해낼 겁니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류바는 자신이 피스메이커였던만큼 우주수의 위치 탐색을 경계하며 시영에게 조언했다. 그 말에 라트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 피스 대원들이 전멸한 지금 뭐가 그리도 걱정인가? 피스메이커는 더 이상 우리들을 저지할 수단이 없을 텐데. " " 그건 그렇지만, " 류바는 한국 지부 피스 대원들의 망가진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라 트의 말대로 더 이상 피스메이커는 그들의 적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한 남 자의 존재가 걱정되었을 뿐이다. 시폰 뤼멘. 그녀의 전직 상관이었던 남자. 류바가 아는 바로는 그가 이렇게 쉽게 승부를 양보할리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남자의 성격상 반드시 노림수가 있을 터였다. 시영은 그런 류바의 속내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에레노아 양의 말이 맞아요. 더 이상 블랙 아더의 복구로 눌러앉을 생각은 없습니다. 슬슬 자리를 옮겨야할 시기죠. ……다만, " 다만? 라트와 류바, 유평은 의아한 표정으로 시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이번 손님들을 마지막으로 접대한 후에 말이죠. " " ……! " 순간, 시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폐역사 속으로 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아아아아 라아아아아 기이한 울림이었다. 하나의 목소리에 두가지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탄성파. 얼핏 듣기에는 산에서나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메아리 같았다. 하지만 그 메아 리는 단순히 여러 소리에서 울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갔다. " 크, 이건? " 라트는 반사적으로 수인변화를 일으키며 이를 갈았다. 그는 이 능력의 사용 자가 누구인지 대번에 파악해냈다. 음파를 사용하는 오라 능력자는 그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던 것이다! 투학 그러나 미처 대응을 하기도 전에 늑대로 변한 라트의 얼굴에서 피가 튀어올 랐다.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그의 살을 찢고 얼굴 뼈를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충격파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삽시간에 라트의 전신을 두들겨 부쉈다. " 커- " 그렇게 순식간에 라트가 허물어지자 진공기류를 형성시켜 음파를 막아내던 류바는 수중의 초고진공 커터를 라트의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라트의 앞에 서 아른거리던 녹색의 잔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바람의 채찍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물러난다. 류바는 곧 라트의 곁에 쓰러져있던 오르크리스트와 그림자에 묶여있던 그람 드링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반사적으로 유평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촤아아아아앙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유평을 몰아붙이는 붉은빛의 섬광이 있었다. 유평은 그 섬광을 양손의 신검으로 받아냈지만, 섬광은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수 십개의 변화를 만들어냈다. 아니, 그건 변화가 아니었다. 본질이었다. 붉은 빛의 섬광은 끊임없이 축폐션을 만들어냈고, 그 축폐선은 섬광의 향연을 일 으켰다. 유평은 이 생소한 검식에 반식 유수로 대응하지 못하고 일단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잠시 여유가 생기자 유평은 비로소 상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몰아붙인 이가 구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저번의 미숙아로군. 겁도 없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나다니. 아무래도 매 가 부족했던 모양이지? " 유평의 말에 붉은 AI슈츠를 입은 피스 대원이 수중의 오라 소드로 지검대적 세를 취하며 대꾸했다. " 그때는 본의 아니게 신세를 졌습니다. " " 후후, 후후후후! 그래. 얼마든지 쓰러뜨려주지! 얼마든지 때려눕혀주마! 너희 오라 능력자들은 손이 많이 가서 탈이야! " 류바는 유평을 물러나게한 피스 대원의 뒤로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 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붉은 형제들을 내려 놓는 세명의 피스 대원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피스 대원들은 각각 녹색과 노 란색, 분홍색의 AI슈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깨닫고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저들이 한국 지부의 피스 대원들……. " 피스 레드 성마리. 피스 그린 정진우. 피스 옐로우 한시민. 피스 핑크 이유리. 마스터가 말한 손님들이란 그녀가 재기 불능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들인 것 이다! 시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이 새롭게 등장한 손님들을 반겼다. " 하하하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이대로 여러분들이 오지 않을까봐 꽤나 걱정했어요. 이렇게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어도 되는 겁니까? " " 아아- 파티의 주인공은 원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 한국 지부 피스 대원들의 리더 정진우는 넉살좋게 시영의 말을 받으며 주먹 을 쥐어올렸다. 그는 내심 눈 앞의 상대와 재회하자 자신의 전자의안이 저릿 저릿하는 느낌을 받았다. 진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통증을 호소하는 의안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 그래. 그래.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고. 한방이 아니라 두 방, 세 방……몇 번이고 녀석에게 먹여주지! ' 그러니까 잠자코 날 따라오기나 해! 진우는 끌어오르는 투기를 진정시키며 시영에게 말을 건냈다. " 여전히 화끈하게 해주시는군, 시영. 넌 정도라는 것도 모르는 거냐? " " 감정이입을 잘 한다는 얘기는 듣곤 하죠. 이번에도 저 형제들을 상대하다 보니 그만 울컥 해버려서. " " 호오. 시니컬한 줄로만 알았더니 의외로 그런 면도 있었군. 두번만 감정이 입하면 순간 온수기도 저리가라겠는걸? " 진우는 자신이 확보해낸 붉은 형제들을 돌아보며 노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르크리스트는 양팔이 잘린 처잠한 모습으로 죽어있었고, 그람드링도 얼굴의 절반이 피로 물들어 신음하고 있었다. 시민은 살아남은 그람에게만이라도 포션을 투여하며 새삼 시영을 노려보았다. " 여전히 네 녀석은 변한게 없군. 도대체 몇 사람의 인생을 짓밟아야 만족할 셈이냐? " " 하하. 너무하는구나, 동생아. 정 이 형이 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가 한번 막아보려무나. 너에게는 영체마저 현혹시키는 목소리를 내가 물 려주지 않았더냐? " " ……! " 그 말에 시민의 두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시영은 지금 그녀에게 예의 흑성가 를 사용해보라며 도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 뭘 망설이는 거지? 분명 날 상대하기 위해 어렵사리 익힌 암흑의 노래일텐 데? 흑성모의 노래는 나조차도 막을 수 없어! 자, 어디 한번 들려줘 봐라! 이 형에게 옛날처럼 노래를 불러줘봐! " 시영의 외침에 라트와 유평은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한달 전 시민의 흑성가 에 홀려 지옥을 경험한 기억이 있었다. 그 암흑의 노래는 유빈의 마인드 브레 이크로도 막을 수 없는 환술이며, 영체 자체를 음파로 현혹시키는 죽음의 암 시이다. 그때도 시영의 섀도우 다이브가 아니었더라면 전멸당하는 것은 그들 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스터는 그 흑성가를 지금 아스트랄계로 피해도 모자랄 판에 상대에 게 사용해보라며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지? " ……. " 시민은 그런 시영을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분명 지금의 그에게 흑성가를 사 용한다면 확실히 그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변수로 그를 제압하지 못 할지라도 라트를 비롯한 다른 수하들은 제거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 언니. " 곁에 있던 유리가 시민의 손을 붙잡으며 불안함을 드러냈다. 시민은 그 모습 에 미소하며 유리를 돌아보았다. " 걱정말아요, 유리 양. 저번과 같은 실수는 이제 반복하지 않을테니까. " 형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두겠어……. 왜냐하면 지금의 난, " 피스메이커니까요. 우리의 싸움은 지키기 위한 것이잖아요? " " 응! "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핑 크빛의 공간이 펼쳐져 나간다. 바로 유빈도 사용했던 능력, 마인드 스페이스 였다. 마인드 키핑으로 만들어낸 그 정신 공간은 유리와 일행을 큰 원으로 감 싸 안았다. 아직 유리는 유빈처럼 완벽하게 마인드 스페이스를 구사해내지 못했기에 폐 역사 전체를 정신 공간으로 감싸안을 수는 없었지만, 공간이 작은만큼 완벽한 정신 장벽으로 일행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 밀집된 장벽의 보호라면 시영의 섀도우 다이브라도 함부로 공간 안의 영체들을 읽어내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공간 내에 들어오는 능력자들 역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 터였다. 그야마로 완벽한 절대 방어였다. 진우와 마리는 그 정신 방어 속에서 유리와 시민, 붉은 형제와 코마히코를 남겨두고 스스로 밖으로 걸어나왔다. 아무래도 시영 일행을 상대하려면 공격 을 전담한 그들은 마인드 스페이스의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 차피 유리와 시민의 경우는 원거리에서도 보조가 가능했기에 차라리 이렇듯 방어진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편이 나았다. 진우는 몇번 목을 좌우로 흔들며 시영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 자자, 그럼 어디 한번 맞장떠보실까? 오늘의 우리는 저번과는 틀릴거다. " " 호오- 어떻게 말입니까? " 시영이 두 눈을 가늘게 하며 되묻자 마리는 오라 소드를 들어올리며 소리쳤 다. " 직접 판단해보시지! " 그 외침과 동시에 마리와 진우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곧바로 시영에게 달려 드리라 생각했던 그들은 의외로 각자의 상대를 점찍어 개별적으로 승부를 걸 어왔다. 진우는 막 상처를 수복시키던 라트에게 칠성권 승룡퇴를 날리는 것으로 그를 시영에게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 자- 라트! 오늘은 네 녀석을 광폭하게 만들어줄 마인드 브레이커도 없겠다. 어디 제대로 된 승부를 내보도록 할까! " " 크, 크크큭!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다! 어디 그 잘난 패턴 그린의 힘을 써 보도록 하시지! 저번과 같은 꼴이 되고 싶다면 말이야! " 라트는 진우가 시영의 섀도우 다이브에 가속의 역데미지를 입었던 것을 지적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우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처음의 기습 이 후로는 가속을 자제하고 있었다. " 사나이답게 맨몸으로 겨뤄보자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말이야! " " 크카카카캇! 그때처럼 갈가리 네놈을 찢어주마! " 라트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흥분하며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한편, 오라소드를 휘둘러 유평에게 도전장을 던진 마리는 신중하게 기수식을 잡으며 자신에게 유리한 간격을 점했다. 그러나 유평은 간격같은 것은 어찌되 든 상관없었는지 조용히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 너의 어머니는 오라 능력이 무영신풍류에 부흥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더군. 그 말을 딸인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 ……. " 마리는 말없이 유평을 응시했다. 그가 자신의 외삼촌이라는 것은 자료를 통 해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 있던 그녀로서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의 남형제. 그리고 무영신풍류에서 파문된 남자. 마리는 지금 유평이 하는 질문이 그가 무영신풍류에서 나온 이유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무영신풍류는……무영신풍류로서 강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마리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대답에 유평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 하하하하핫! 설마 오라능력자인 네가 그런 대답을 할 줄이야! 후 후후후! 그래! 오라 능력이 다 무어란 말이냐! 네 말대로 무영신풍류는 무 영신풍류 그 자체로 강해져야 하는 거다! 신풍따위는 필요 없어! 황연우! 네 생각은 네 딸에게마저 외면당하고 있구나! 하하하핫! " " 하지만, " 마리는 자신의 뒤편에 쓰러진 코마히코를 생각하며 표정을 굳혔다. " 동문에게마저 검을 들이댄 당신은 무영신풍류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습니 다. " " ……! " 그 말에 유평은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두 눈에서 푸른 귀광을 흘리며 양손 의 신검들로 이검이도(二劍二刀)의 형을 취했다. " 역시 모녀는 모녀로군. 그 건방진 말버릇은 분명 연우의 말버릇이야. 너희 오라 능력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내 적인가 보군. " " 오라 능력자가 아닙니다. " 마리는 오라 소드를 늘어뜨리며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그 기 울어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 제 이름은 성마리! 무영신풍류의 사람입니다! " 마리의 몸은 번개처럼 유평에게 쏘아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앞으로 무 영신풍류의 오의, 운요가 펼쳐졌다. 라아아아아 마리가 유평을 맡고, 진우가 라트를 맡았을 무렵 류바를 맡은 이들은 다름 아 닌 시민과 유리였다. 시민은 끊임 없이 AI헬맷의 나르키소스를 사용하여 공명음 을 에코로 연거푸 류바에게 퍼부었고, 류바는 그 음파 공격을 모조리 자신의 진 공기류로 막아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패턴 옐로우에게 있어서 패턴 화이트는 천 적이었던 것이다. 시민이 본격적으로 흑성가를 사용하지 않는한 이대로 그녀는 류바에게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터였다. 류바는 시민의 무의미한 공격에 비웃음을 흘리며 오라소드의 초고진공커터를 시민에게 휘둘렀다. 제 아무리 시민이 마인드 스페이스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 다 하더라도 그 밖에서 공격을 시도하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류바는 진공기류 속에서도 제한을 받지 않을만큼 자신의 이미지 메 이킹을 완벽히 구현해고 있었다. 정신 공간 안에서라면 모를까, 밖에서 휘두르 는 그녀의 채찍에 유리의 마인드 스페이스가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 사라져라. " 류바가 낮게 읊조리자 시민과 유리를 보호하는 정신 공간 주위로 거대한 용권 풍이 치솟아 올랐다. 류바는 그 용권풍에 연결된 자신의 채찍들을 양손으로 잡 아당겼다. 이 진공파의 소용돌이는 그 안의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삭풍 (朔風)의 어금니였다. " The Canine of a north wind! "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소용돌이가 좁혀졌다.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은 사라 져야 했다.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완전히! 화아아아악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갔다. 류바가 만들어낸 진공파의 소용돌이는 채 시민과 유리에게 닿기도 전에 뜨거운 열기로 변해 사라진 것이다. 그 난데없는 조화에 류바는 무표정을 깨뜨리는 것으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 이건……! " " 당신이 진공으로 제 음파를 막아낼 수 있듯이 저 역시 당신의 기술을 제 음 파로 막아낼 수 있어요. 진공파란 충격파. 충격파란 수많은 음파가 압축되어 만들어지는 진동 에너지죠. 일단 대상이 음파인 이상, 충격파의 각도를 조절 하여 열에너지로 전환시키는게 가능해요. " 시민은 진공파가 전환된 열에너지의 증기 속에서 그렇게 차분하게 말했다. 패 턴 화이트는 패턴 옐로우의 천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화이트 그 자신이 옐로 우의 천적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상극! 서로의 장단점을 알게된 이상 그녀들의 승부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시민은 류바를 바라보며 물었다. " 에레노아 양. 솔직히 전 아직도 당신이 피스메이커를 저버리고 시영에게 가 담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과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눠볼 기회는 없었지만, 전 그래도 믿고 있었어요. 당신이 고국을 지키기 위해 홀로 분 투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피스메이커라는 것을. 그런 당신이 어째서 저런 남자를 따르게 된 건가요? " " ……. " 류바는 입을 다물었다. 시민은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 지 재차 간절하게 말했다. " 제발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세요. 저 남자는 언젠가 당신마저 저버리고 모두를 배신할 사람이에요.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에요! " " 배신에 이용이라니……. 그렇게 얘기하면 이 형의 마음이 아프지. " 잠자코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시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탄했다. 하지만 시 민은 그를 무시하고 재차 류바에게 소리쳤다. " 혹시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에게 약점이나 인질이 라도 잡혀있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정신 조작에……. " " 마스터를 따르는 것은 내 의지다! " 류바는 싸늘하게 일갈하며 시민의 말을 끊었다. 류바는 서서히 무표정을 깨 뜨리며 독기 어린 눈초리로 시민을 노려보았다. " 듣자 듣자 하니까 도저히 못 들어주겠군. 내가 고국을 지키기 위해 홀로 분투해왔다고? 그러니 내가 피스메이커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나에대 해서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드는 거냐! 내가 어떤 꼴을 당해왔는지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류바는 그녀답지 않게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시민의 뒤에 있는 유리를 노려 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칼날과도 같아서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시민의 뒤로 몸을 숨겼다. " 저 꼬마와 같은 나이였을까. 아니, 더 어렸을 때였겠군. 동양인은 나이보 다 더 동안이니까. 그래. 내가 일곱살 때였다. 그때의 난 부모님에게 버려 져 홀로 시베리아의 냉기 속에서 떨고 있었다. 버려진 이유는 간단해. 가 난해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러시아는 세계에 서 가장 넓은 농경지를 가졌으면서도 식량 자급이 되지 못하는 나라다. 한 국이 통일되면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국 종단 철도가 연결되는 것으로 많은 물품들이 시장에 들어왔지만, 그중에서 러시아 제품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지. 국산 공장은 폐쇄되고 실업자는 늘어만 갔기에 사람들은 결국 외국 상품에 기댈 수 밖에 없었고, 그것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 들은 배급에 의존하다가 굶어죽어갔다. 이건 시베리아 부근에 사는 마을일 수록 그 정도가 심했어. 내가 사는 마을에서는 가정에서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아이들을 버리는 일도 허다했지. 그렇게 난 시베리아의 한복판에 버려져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차츰 차츰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의욕도, 죽는다는 공포도 나에게는 없었어. 부모님에게 버려지는 순간, 삶에 대한 미련같은 건 남김 없이 버 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러시아 같은 나라를 사랑? 흐! 웃기는 소리! 증오하고 있다! 원망하고 있다! 저주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포 기하고 한시라도 빨리 얼어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 추위에 녹아들기 를 바랐어. 그런데 인생이란 것은 웃기게도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 새 로운 기회를 내게 부여하더군. 추위에 녹아들고 싶다는 바람이 그렇게나 간절했던지 난 패턴 화이트를 각성하게 된 거였어. 영혼마저 얼어붙을 그 추위 속에서 오라 능력자가 된 거다. " 류바는 얘기를 하면서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표정이 말 하는 내용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서 지독한 이질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 하지만 오라 능력자가 된 나를 기다린 것은 지옥과도 같은 나날의 시작이 었어. 추위를 느끼지 않게된 대신 이번에는 러시아 지부의 피스메이커가 날 붙잡아 각종 실험대에 올리기 시작한 거야. 그 실험 끝에 날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몬스터와의 전투에 투입시키더군. 더구나 내가 반항할 것을 두려워해선지 내 머리 속에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는 오라제어 정류기를 집어넣고, 너희들이 입고 있는 AI슈츠도 지급해주지 않은채. 그래. 난 한국에 오게 되면서 처음으로 이 AI슈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희 한국 지부와는 너무나도 틀린 대접이지? 너희들은 오라능력이 무슨 혜 택인양 우대받으며 자라왔을지 몰라도 내게 있어서 오라능력이란 강제로 건 내받은 의무일 뿐이다. 내게서 자유를 빼앗아간 저주받을 족쇄일 뿐이야! 수십, 수백, 수천번도 더 오라 능력을 저주했고, 날 전투에 내몬 피스메이 커를 저주해왔다. 내가 몬스터와 싸우는 것으로 연명하는 주제에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도 모르는 무관심한 국민들이 싫었어! 모조리 죽이고 싶은 놈들 뿐이었다! " 류바는 자신의 뒤편에 서있는 시영을 새삼 고마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이런 나를 마스터는 해방시켜주셨고, 내가 짐이라고만 여겼던 오라 능력 의 진실한 목적도 가르쳐주셨다. 나는 이런 지금, 처음으로 내 자신이 태 어난 것에 기쁨을 느끼고 내가 오라 능력을 가졌다는 것에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마스터의 이상은 나의 이상, 마스터의 바램은 나의 바램.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더 이상 내 목숨도 아까운 것이 아니다.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겠어! 그리고 방해하는 녀석들이 있다면 가차없이 내 삭풍의 어금니로 찢어 버리겠다! " 류바의 마음을 마인드 리드로 읽어들인 유리는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시민의 손을 붙잡았다. 류바 자신이 말한대로, 그녀에게서는 영혼마저 얼어버릴 사념 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민은 그런 유리의 손을 붙잡아주며 씁쓸하게 말했다. "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적입니다. " " ……. " 류바는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었는지 양 손의 채찍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자 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 모습에 시민은 망설임없이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그러자 음파와 진공파 가 재격돌하여 폐역사의 대기를 찢어발긴다. 지키기 위해. 파괴하기 위해. 이 자리의 모두는 지금, 이 이분법을 따르기 시작했다.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35 - Ｂy Ｎext Ｎeo =-=-=-=-=-=-=-=-=-=-=-=-=-=-=-=-=-=-=-=-=-=-=-=-=-=-=-=-=-=-=-=-=-=-=-= 고백(告白) " ……. " 눈 앞의 환상이 사라지고. 자리에 남겨진 것은 나와 그녀, 그리고 옴팔로스의 전경 뿐이었다. 나는 지 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녀가 보여준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 실들을 접했기 때문일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감당할 수가 없다. 마치 바닥 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다. 우우우우우 옴팔로스의 제단이 외부의 충격으로 거칠게 뒤흔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도 개의치 않으며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눈으로 서 로의 감정을 상대에게 드러낼 뿐이다. " ……봤지? " 그녀 쪽에서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 이게 지금껏 내가 숨겨온 '진실'이야. " 진실. 그녀는 그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듯, 그렇게……. ' 아니야. ' 담담한게, 아니야. 그런게 아니다. 지금의 그녀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억누 르고 있었다. 수많은 고뇌를 담담함이라는 종이 한장으로 가려두고 있었다. 여지껏 그녀에 대해 무지하기 짝이 없던 나였지만……그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최후의 최후까지 스스로를 자제해오던 그녀는, 내가 테레이아 민체스터로 알고 있던 그녀는, " 가인, 우리는……친구지? " 이 상황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弟 21 話 Sacrament of Penance 고백, 17시간 전 " 자자! 방학 끝! 개학이다! " 9 월 2일은 한성 고등학교의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한성고의 2학년 1반 담임이자 체육 교사인 하지연은 여느 때처럼 기운 찬 목 소리로 2학기의 시작을 선포했다. " ……. "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선포에 맞장구 칠 학생들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애 초에 몇번이고 환영받는 날이 방학식이지만 몇번이고 거절당하는 날이 개학 식이니까. 그렇기에 이럴 때의 교사들은 학생들의 반응에 일일히 대응하지 않는 둔감 함을 필요로 한다. 지연은 뚱한 표정의 학생들에게 마찬가지로 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나도 너희들 못지 않게 다시 학교로 나와야되는 현실이 싫거든? 원망은 방 학을 보충 수업이니 뭐니 해서 채 2달도 주지 않는 교육부 장관에게 하려 무나. 물론 나야 방학이 길어지면 일하지도 않고 월급 받을 수 있으니 좋 기야 하다만. " ……그 말은 교사인 당신이 하기엔 좀 위험하지 않아? " 뭐- 요즘은 전교조가 많이 쇠약해져서 교육부도 방학 때 교사들이 숙직 서 는 것을 없애버리고 월급도 주지 않는다는 분위기로 가고 있으니까. 잘만 하면 보충 수업을 폐지시키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지. " 어이. 어이. 진짜냐, 그거? " 그렇다고 해서 정말 보충 수업이 없어지는 거에요, 하고 물으면 곤란해. 설마 한두해 이 나라에서 살아본 것도 아니고 그런 순진한 질문을 받게 되면 이 선생님,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니까. " " ……. " 가책 받을 양심이 있기나 한건지. 2 학년 1반의 학생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새삼 하지 연의 건재(?)한 모습에 새학기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더더욱 뼈저리게 느꼈 던 것이다. 과연 하지연! 과연 흉신악살! ' ……지연 선생님 완전 부활, 이라는 느낌인가? ' 자칭 2학년 1반의 분위기 메이커, 박재영은 예전과 조금도 변함 없는 태도로 돌아온 담임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래야 자신들의 담임인 하지연이지! ' 솔직히 학생들 눈치 살피는 지연 선생님은 지연 선생님답지 않았다고. ' 재영은 2학년 1학기 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학기 초때 있었던 사건 하나. 그 사건으로 인해 그가 속한 2학년 1반은 실질 적으로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자신들의 클래스메이트 중에 피스 대원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대원들이 몬스 터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들이 밝혀 지면서 학생들은 더 이상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신뢰가 깨진 학급 속에서 사제 관계 역시 제대로 유지될리가 없었고, 서로를 불신하게된 그들은 형식적인 태도로 서로를 대해오기만 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지나고 2학기로 접어든 지금 그것이, '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간다는 거겠지. ' 두달이 안되는 짧은 휴식 시간이었지만 각자 여러가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현재의 상황에 자포자기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느 정도 납득한 사람, 체념한 사람들도 있겠지. '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더라도……적어도 더 이상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 재영은 1학기 때와 달라진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나마 희망을 가졌 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재영 뿐만 아니라 교단의 지연 선생님도, 사 건의 당사자들이었던 가인과 테레이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아, 그러고 보니……. ' 재영은 자신의 뒤를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마음에 걸린다. ' 테레이아……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 언제나 가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의 유학생. 한성 고의 모두에게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던 테레이아 민체스터. 그녀가 아침부터 보이지를 않았다. 그저 늦게 등교하는 건가 싶었지만……. ' 개학날이라도 착각한 걸까? ' 아니. 그 빠릿빠릿한 테레이아가 그런 실수를 할리가 없다. 무엇보다 학교에 오면 그녀는 그를 만날 수 있다. 유가인. 재영의 9년지기 친구. 테레이아 민 체스터가 유가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한성고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 도로 유명한 사실이었다. 방학 전에 뭔가 둘 사이에 사소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 그 정도로 틀어질 만큼 얄팍한 관계가 아니지. 그 녀석들은. ' 1 년이 넘도록 그들을 지켜봐왔던 재영이다. 가인과 테레이아의 관계에 대해 서라면 누구보다도 확실히 장담할 수 있었다. 유가인, 그 녀석이 태도만 확 실히 했더라면 그 둘은 진즉에 연인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방 학동안 만나지 못했던 유가인과 재회하는 개학식을 테레이아가 착각했을리가 없다. ' 하지만……. ' 뭘까? 이 위화감은? 재영은 테레이아의 빈 자리에서 알 수 없는 어색함을 느꼈다. 물론 그럴 수 밖에. 결석을 한 것은 비단 테레이아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브루스 류. 테레이아에 이은 또 한명의 유학생. 그 역시 개학식에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 두 유학생의 결석을 그저 단순히 우연으로 봐야 할까? 무엇보다 가장 어색한 것은, ' 그래. 저 표정. ' 바로 유가인의 얼굴. 자신의 친우들이 결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딱딱한 표 정이라니. 어째서 저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가인의 저 태도 야말로 재영이 어색함을 느껴야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가인의 곁에 앉아있는 유리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테레이아와 브루스의 결석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뭐, 평소부터 감정을 잘 보이지 않는 아이였으니 그저 재영이 예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 아, 그리고 이건 갑작스러운 얘기지만 오늘부로 너희들과 함께 했던 두 유학생들이 자신들의 모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 불행히도 재영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하지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 다. " 다들 알고있다시피 요즘 우리 나라가 좀 뒤숭숭하지? 저번 12구역 사건 때부터 해서 연달아 재해가 계속되다 보니 타국에 있는 부모님들로서는 자녀들이 많이 걱정되었던 모양이야. 솔직히 우리 나라에서도 이민을 고 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고……. " " 그, 그러니까 그 유학생들이 대체 누구라는 겁니까! " 지연의 말을 듣다못한 재영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다른 학생들도 선뜻 질문하지는 못했지만 다들 이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 누구냐니……. 우리 반에서 유학생들이라고 해봐야 그녀석들 밖에 없잖아? " " 하, 하지만 선생님……! " 재영은 애원하듯 재차 대답을 촉구했다. 지연의 입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자신은 그들의 전학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다. 그 모습에 지연은 작게 혀를 찼다. ' 녀석.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지만……. ' 지연은 교무실에서 가라앉힌 기분이 다시 심란해지는 것을 느끼며 애써 퉁명 스레 답했다. " 테레이아 민체스터와 브루스 류. 이제 됐냐? " " 야! 유가인! 너 알고 있었지? " 재영은 조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가인에게 달려와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재 영의 흥분된 외침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 알고 있었다니? " " 테레이아와 브루스가 전학가는 거 말이야! 걔들한테서 무슨 얘기라도 들었 을 거 아니야? " " ……나야말로 너한테 묻고 싶다. 내가 왜 걔들한테서 얘기를 들었을 거라 고 생각하는 거야? " " 뭐? " 차분하다 못해 차가운 가인의 반응에 재영은 일순 할 말을 잊었다. 뭐야? 이 녀석……. " 가인아, 너……왜 그래? " " 뭘? " " 뭐냐니! 어째서 그렇게 태연한 거야? " 재영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가인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 가인의 얼굴. 그 얼굴이 재영의 울분을 터뜨렸다. " 너, 넌 아무렇지도 않아? 테레이아와 브루스가 전학을 가버렸다고! 우리에 게 아무런 말도 없이! 작별 인사도 건네지 않고! 이건 좀 너무하잖아? 그래 도 친구였는데! " " ……글쎄. " 가인은 씁쓸하게 대꾸했다. " 과연……친구였을까? " 뭐, 라고? " 알 수 없잖아, 그런 거? 아무리 이쪽에서 친구라고 믿고 있어도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나름이고. 오히려 친한체하며 이쪽을 비웃고 있었는지도 모르 지. " " 너……? " " 진지한 녀석이 손해보는 거야. 어차피 그런 거 아니겠어? 친구라는 말 자 체가 자기 만족일 뿐인데. 그런 거에 열 올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잖아. " " ……! " 순간, 재영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 이 자식―! " 참다못한 재영이 가인의 멱살을 잡아올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뻑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거짓말처럼 통쾌하게 가인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 모습에 재영은 깜짝 놀라며 주먹을 거둬 들였다. 처음이었다. 가인과 친구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그에게 주먹을 날린 것이다. " 오빠! " 유리가 비명을 지르며 가인을 부축했다. 그제야 머리가 식은 재영도 당황하 며 가인에게 사과했다. " 아, 가, 가인아. 미안……. 나도 모르게……그만, " " ……. " 가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리고 담담한 눈으 로 재영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재영은 깨달았다. 가인 이 결코 태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앞에서 했던 말도 진담이 아니었다 는 것을. 뚜벅 뚜벅 가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교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재영과 유리는 차마 그 뒤를 따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그렇게 가인이 시야에서 사라 지자, 재영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분한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 뭐야, 대체……. 뭐냐고……. " 갑자기 테레이아와 브루스가 전학을 가버리질 않나. 가인이 녀석이 저 모양 이 되질 않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거 야! 왜! 재영은 답답한 마음에 유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 유리야, 무슨 일 있었던 거 맞지? 그렇지? 알면 좀 대답해봐! 응? " " 그런거, 나한테 묻지마. " 유리는 예의 쌀쌀맞은 목소리로 재영의 말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그 얼굴 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 누구보다 알고 싶은 건…… 나란 말이야. ' 유리는 더 이상 가인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그전까지는 마인드 리 딩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최근들어 완전히 그와의 정신적 교감이 끊어져버렸다. ' 오라의 주인. '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가인이 그 오라의 주인이라는 것으로 발탁되고나서 부터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강해진 오라 능력만큼이나 강해진 정신 장벽은 완벽히 그녀의 마인드 키핑을 차단시켰고 물리 접촉으로도 꿰뚫을 수 없는 단 단한 페르소나(Persona)를 구성해냈다. 마치 사념의 주파수가 달라져버린 것 처럼 유리는 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아니. 잘된 일이다. 유리는 언제나 가인의 마 음을 읽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려 왔으니까. 그때문에 항상 고통받아야만 했으 니까. 하지만 정작 이렇게 가인의 마음을 읽지 못하게 된 지금. 유리는 그 어느때 보다도 강한 서글픔을 느꼈다.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된 것이 자신 이 그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인 것처럼 여겨졌다. 허락도 없이 그의 마음을 들쑤셨기 때문에……그랬기에 가인이 그녀에게 마 음을 열어주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 벌인가, 이건. ' 유리는 충혈된 눈으로 가인이 사라진 교실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 오빠…….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 ' 덜컹 교실을 나온 가인이 향한 곳은 학교의 옥상이었다. 가인은 옥상의 철제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막 1교시가 시작될 시점이었기에 옥상에는 가인 외 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조용하다 못해 서늘한 적막함만이 깔려있을 뿐. 가인은 옥상의 난간에 쳐진 철조망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철조망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문득 재영에게 맞은 부위가 아파왔다. 찢어진 입가를 어루만져 보았다. 피가 한움큼씩 묻어나왔다. 재영이 녀석. 있는 힘껏 후려치셨구만……. " 하아― " 가인은 상처를 치료할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눈을 감았다. 9월 의 햇살이 아직 뜨거웠지만 가인은 그 뜨거움 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메마르게만 느껴진다. ' 가인. '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목소리. 눈을 감으면 보이는 에메랄드 빛. ' 가인. ' 웃고 있는 그녀. 화내는 그녀. 슬퍼하는 그녀. ' 그 모든 것이 다……. ' 가인은 참지 못하고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36 - Ｂy Ｎext Ｎeo =-=-=-=-=-=-=-=-=-=-=-=-=-=-=-=-=-=-=-=-=-=-=-=-=-=-=-=-=-=-=-=-=-=-=-= 고백, 9시간 전. " 어떻습니까, 진우씨? " " 흐음― " 언더 시티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 피스 그린 정진우는 눈의 붕대를 풀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녹색의 매 트릭스가 깔린 바닥과 벽 거울. 재활 치료실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돌려 자신의 곁에 서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붕대를 들고 있는 닥 터와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연, 천연덕스레 진우를 올려다보는 하나. 보인다. 보여. 모두의 얼굴이 확연히……. 휙 순간, 진우의 몸이 거짓말처럼 땅으로 꺼지며 미연 일행의 눈 앞에서 사라졌 다. 하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패턴 그린의 가속을 사용하여 허공으로 뛰 어올랐던 것이다. AI슈츠를 입고 있지 않았기에 음속을 돌파하는 가속은 사용 할 수 없었지만 삼할의 오라전개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인간의 동체시력보다 빠 른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었다. 탕 진우는 손에 쥐고 있던 재활 치료용 정구공을 허공에 날려 그대로 인터벌 없 이 돌려차기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정구공은 총알같이 바닥에서 벽으로 튕겨나가 멍하니 서있는 하나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정구공이 채 하나의 몸에 닿기도 전에 진우는 잔상을 흘리며 그 앞에 나타나 공을 잡아챈다. 이 모든 행동이 그야말로 한순간에 이루어졌기에 닥터 와 미연은 제대로 된 반응조차 보일 수 없었다. " 휘우∼ 약간 쏠리는 느낌만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데? 이 정도 가속에도 이 미지가 깨지지 않고 말이야. " 진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모두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제야 일행 은 방금 전 그가 보여준 기행이 이식된 전자 의안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서라 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하나만이 진우의 묘기에 박수를 치며 좋아할 뿐, 닥터와 미연의 표정 은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 다, 당신은 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이에요, 없는 사람이에요! " 먼저 폭발한 이는 미연이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진우의 멱살을 잡아흔들며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살벌했던지 닥터는 화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상황을 주시해야만 했다. " 저번에도 그 난리를 쳐서 눈을 부셔먹은 주제에 이번에도 또 부셔먹을 생 각이에요? 나은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장난질이에요! " " 아- 하하하. 여보. 왜 그래……. 하나도 좋아하잖아……. " " 당신도 한번 지켜보는 사람 입장이 되봐요! 낫기가 무섭게 원상태로 돌아 오는 남편이라니. 어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때 제가 어떤 심정이었 을 것 같아요? 거짓말 하나 안보태서 죽고 싶었다고요! " " 하, 하하. 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여보……. " " 사과하면 끝인 줄 알아요! " ' 그럼 대체 날더러 어떡하라고―! ' 진우는 그야말로 눈물을 삼키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또 빌었다. 그 리고 그런 부모의 모습에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딸 정하나에게서 우 리는 오늘날 고개 숙인 가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을 성리학적 가 족제도의 철폐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시대의 아픔이라고 해야할까. 결국 보다못한 닥터가 진우에게서 미연을 떼어주었다. " 자자. 미연 씨. 그러다 사람 하나 잡겠습니다. 아무리 진우 씨가 '쓸데 없 이 팔팔하기만 한' 남자더라도 퇴원 소속을 밟기 전까진 아직 메디컬 센터 의 환자이지 않습니까? " " 어머. 그렇네요. 실례했습니다, 선생님. " 미연은 언제 맹수처럼 굴었냐는듯 온순하게 진우에게서 떨어졌다. 진우는 구 겨진 환자복을 바로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려준 건 고맙지만, 닥터. 쓸데 없이 팔팔하기만 한 남자라니. 묘하게 말 속에 뼈가 있는걸. 그런 진우의 예감이 적중했는지 그를 돌아보는 닥터의 표정도 가히 좋아 보 이지는 않았다. " 그리고 진우 씨. 무모한 짓도 한두번이지. 세번까지는 저도 사양하겠습니 다. 진우 씨가 아무리 전자의안에 적응하기 쉬운 체질이라지만 시신경이 아물기도 전에 그렇게 가속해버리면 오리하르콘이라도 배겨낼 재간이 없 어요. 아시겠습니까? 한동안 오라를 사용하는건 금물이란 말입니다. 이건 당신의 담당의이자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가 하는 명령이니 반드시 따라주 시기를 바랍니다. " " ……예. " 차분하지만 다분히 강압적인 닥터의 지시에 진우는 기가 죽어 고개를 끄덕였 다. 이건 뭐, 붕대를 풀어서 축하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아까부터 야단과 꾸 지람만 듣고 있으니, 원……. 그때 그들의 뒤편에서 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후후. 다들 너무 진우 씨를 몰아세우는 것 아닙니까? " 모두가 돌아본 그곳에는 휠체어를 타고 막 재활 훈련실로 들어오는 한 여성 이 있었다. 바로 피스 레드 성마리! 그녀의 등장에 진우는 화색을 띄며 닥터 와 미연에게서 도망치듯 마리에게로 다가갔다. " 여∼ 마리 양! 역시 동료 밖에 없다니까! 흑흑. 다들 너무한 거 있죠? 모 처럼 앞을 볼 수 있어서 조금 들뜬것 뿐인데 야단만 치고들 말이야. " " ……서운하셨겠군요. " 마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쳐주자 진우는 더더욱 기고만장해졌다. " 그래! 서운했지! 그래도 이렇게 마리 양이 찾아와주니까 좀 힘이 나는걸? 누구에게 들은 겁니까? 제가 오늘 붕대 푸는 날이라는 걸? " " ……아뇨.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전 그저 재활 치료를 받으러 온 것 뿐이라서. " 마리는 곤란해 하면서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굳어버린 진우를 뒤로 한채 미연과 닥터에게 목례한다. "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미연 씨. 마침 함께 계셨군요. " " 오랜만이에요, 마리 양. 몸은 좀 괜찮아진 거에요? " " 예. 아직 휠체어 없이 다니는건 무리지만……. 통증도 거의 없어졌고. 이 제 재활 훈련만 꾸준히 받으면 됩니다. " " 후후. 서로 고생이네요. " " ……그렇군요. " 미연과 마리는 재활 훈련실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하나에게 위로 받는 진 우를 바라보며 소리없이 웃었다. 한때나마 진우의 부상에 피스메이커를 불신 했던 미연이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편안하게 마리를 대 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낀 닥터는 만면에 미소를 띄 우며 마리에게 말했다. " 마리 양. 오늘은 코마히코 군이 보이지를 않는군요. 언제나 재활치료를 할 때면 그가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 " 아, 예. 코마히코 씨는 오늘 제 아버님께 볼 일이 있다며 무영신풍류 도장 에 갔습니다. 그동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줄곧 도장에 가는 것을 피해 왔던 사람인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선지……. " 거기까지 말하던 마리는 뒷말을 흐렸다. 사실 그녀는 대충 코마히코가 비영 을 만나러간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마 무영신풍류의 파문자, 황유평에 대한 일들을 논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유평은 무영신풍류의 일원이기 이전에 황 씨 일족의 사손(祀孫)이었다. 그 사손이 지금 피스 블랙과 함께 반 피스메이 커 활동을 벌이고 있으니 일본의 본가에서는 난리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닥터도 대충 그런 사정을 눈치챘는지 화제를 돌렸다. " 으음.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제가 마리 양의 재활 치료를 도와야겠군요. 양하지보조기는 가져오셨습니까? " 마리는 갑자기 닥터가 두팔을 걷어붙이며 다가오자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 아, 아뇨! 괜찮습니다, 닥터! 저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 " 흐음? 하긴 기본적인 것은 다 알고 있을테니. 그래도 보조사가 있는 편이 수월할텐데요? " " 평소에도 줄곧 혼자서 해왔습니다! 코마히코 씨의 도움 없이! " " 그래도……. " " 괜찮습니다! 절대로! " " 으음. 뭐- 그럼 어쩔 수 없군요. " 닥터는 완강히 거절하는 마리의 모습에 유감이라는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 래도 자립심이 강한 그녀이다보니 이런 부분에서도 남에게 도움 받는것을 용 납하지 못하는듯 했다. 뭐랄까. 저렇게 환자가 건강하면 의사가 할일이 없어 지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섭섭하다고 해야하나. 그때 닥터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다는듯 장난스레 미소했다. " 그럼 마리 양. 정말 보조사가 필요없는 거겠죠? " " 예? " 마리는 영문을 몰라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새삼스레 다시 묻는 거 지? 난 분명 거절했을텐데? 닥터는 재활 치료실의 입구쪽을 가리키며 능청스레 말했다. " 아니∼ 혹시 마리 양이 제가 도와주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거라면 지금 들어오는 분한테 마리 양의 보조를 부탁할까 했었거든요. " 지금 들어오는 분? 그렇게 의아해하며 닥터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던 마리는 순간, 돌처럼 굳 어버렸다. 재활 치료실의 입구로 들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유가인! 바로 그였 던 것이다! " 마리 선배? 선배도 있었군요? " 막 학교에서 온건지 교복 차림인 가인은 휠체어에 앉아있는 마리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마리는 망연자실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떠듬 떠듬 말을 이었다. " 가, 가인. 너, 너가 웬일로 메디컬 센터에……. " " 닥터에게 연락받았거든요. 진우 씨가 오늘 붕대를 푼다고 해서. 마리 선배 도 그래서 온 거 아니에요? " " 아! 그, 그렇지! 그래. 그래서 들린 거다. " 마리는 생각을 하고 대답이나 하는건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방구석에서 지켜보던 진우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봐요. 아까는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면서? 닥터는 흥분하는 마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짓굳게 물었다. " 그래서? 가인 군의 보조는 필요 없는 겁니까? " " ……! " 마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인과 닥터를 번갈아보았다. 그러다 곧 마음의 결 정을 내렸는지, 가인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 미, 미천한 몸이지만……잘, 부탁한다. " " 하하하! 뭐, 그런 이유로 마리 양의 재활 보조를 부탁드립니다, 가인 군. " " 예? 예에……. " 가인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닥터의 제의를 수락할 뿐이었다. 뭔가 오 자마자 엉뚱한 일에 휘말려든 기분이…….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하나가 환호를 하며 달려들었다. " 와아―오빠다! 오빠!" " 하나야? " 가인은 달려드는 하나를 엉겹결에 안아올렸다. 그러다 곧 하나의 뒤에서 자 신을 응시하는 미연을 발견해내고 표정이 굳어졌다. 예전 진우의 병실에서 그녀가 차갑게 자신을 외면했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하지만 미연은 그런 가 인의 걱정이 기우라는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 어머, 가인이 눈에는 우리 하나 밖에 보이질 않나 보네? 간만인데 섭섭한 걸. 나도 좀 아는척 해주지 않을래? " " 아, 미연이 누나……. " 가인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미연의 태도에 떨떠름히 답했다. 분명 저번 에 마주쳤을 때는 다시는 안볼 것처럼 행동하더니.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태 도가 돌변해버리면……. " 정말. 뭘 그렇게 어색해 하고 그래? 아! 알았다. 오랜만에 보게 되니까 쑥 쓰러워서 그러는거지? 우후후후. 가인이도 참. 남자가 그렇게 부끄럼이 많 으면 못써요. 나중에 큰일을 못한다구. " '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 거야. 갑자기 돌변한게 아니라고. ' 가인은 자신의 팔짱을 끼고 흔드는 미연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건 미연이 누나 나름대로의 배려인 걸까. 확실히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먼 저 누나에게 말을 걸기는 힘들었으니. 가인은 애써 평소와 같이 자신을 대해주는 미연에게 일말의 감사를 느꼈다. 역시 연장자……라는 거군. 딱 그때 미연과 하나에게 안겨있던 가인에게로 분노의 철권이 작열했다. 그 난 데없는 일격에 머리를 얻어맞은 가인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 지, 진우씨! 갑자기 왜 사람을 때리는 거에요? " 주먹을 날린 이는 바로 정진우였다. 그는 가인의 억울해 하는 외침에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 그냥. 열받으니까. " " ……. " 가인으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찌 그가 알 수 있겠는가? 언제나 쌀쌀맞은 아내와 딸이 외간 남자 에게만 웃어주는 그 상실감을! 그 분노를! 이렇게 네녀석에게 한대라도 먹이 지 않으면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단 말이다. 아― 이 얼마나 서글픈 주먹질이란 말인가. 여기서는 이 악과 깡 밖에 남지 않은 유부남을 이해해줘야 했다. 동정해줘야 한다!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허나 그다지 이해해주고픈 생각이 없는 가인이었다. 평소같으면 어리숙한 태 도로 그냥저냥 넘어갔겠지만 최근의 그는 여러모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렇게 가인이 정색을 하며 치료실을 나가려고 하자, 진우가 재빨리 그의 목 에 팔을 둘러 붙잡았다. " 에이, 소년! 이제는 장난도 안 통하는군. 왜 그렇게 속이 좁아진 거야? 오 늘은 나 축하해주려고 온 거 아니었어? " " 아니. 하지만……. " 막 진우에게 말을 꺼내려던 가인은 입을 닫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우가 필 사적인 표정으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 이 자식아. 여기서 이대로 가버리면 난 어떡하라고. 날 장기 입원이라도 시킬 셈이야? ' 장기 입원? 가인이 슬그머니 바라보니, 진우의 등 너머에서 미연과 하나 그리고 마리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과연 이대로 진우를 놔두고 가버 리면 그건 훌륭한 살인방조죄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가인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진우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 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 그래그래. 얘기라도 나누고 가야지. 암! 잘 생각했어! " " ……진우씨. 그럼 이대로 퇴원하는 거에요? 오늘 진우씨가 붕대 푼다고 해 서 시민 씨가 축하도 해줄겸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자던데. 지금 집에서 유 리도 같이 저녁 식사 준비하고 있어요. " 가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진우는 감격했다는듯 쾌재를 불렀다. " 오! 진짜? 이야아∼ 역시 시민 씨! 그동안 영 맛 없는 병원식사만 하느라 집에서 먹는 밥이 그리웠는데. 이거 오랜만에 포식하겠는걸. " " 당신. 그동안 점심 식사는 제가 싸온 도시락으로 해결했잖아요? " 미연의 싸늘한 되물음에 진우는 쾌재를 부르던 자세 그대로에서 굳어버렸다. 아무래도 오늘의 그에게는 재앙을 불러들이는 뭔가가 있나 보다. 그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닥터가 끼어들었다. " 이런 가인 군. 아무래도 오늘의 그 약속, 취소시켜야겠군요. " " 예? " 그 말에 가인과 진우, 미연이 동시에 닥터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닥터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아직 진우 군의 상태가 완전히 좋아진게 아니거든요. 경솔하게 나갔다간 또 의안의 신경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니 좀 거추장스럽더라 도 내일 한번 더 정밀 검사를 받아야합니다. " " 하, 하지만 닥터! 이제는 다 나았다구요∼ 저번에야 이식한 직후에 무리 하게 오라 능력을 사용하느라 그렇게 된거지……. " " 진우 군.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세번은 사양한다고. 그리고 분명 명령 이라고도 말했습니다? " " ……예. " 진우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힘없이 답했다. 그는 가인을 돌아보며 쓰디쓴 미 소를 지었다. " 그런 이유로 오늘까지는 병원 신세라는군. 시민 씨에게는 다음에 반드시 얻어먹겠다고 전해줘. " " 그래요. 제대로 치료받고 퇴원하도록 하세요. 더 이상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 " 아아. " 진우는 자신의 곁에 있는 미연과 하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도 더 이상의 실명은 사양하고 싶었다.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그동안 내색하 지는 않았지만, 하루 왼종일 아무 것도 보지 않고서 지내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다시 시력을 찾은 지금은 잠시라도 눈을 감는 게 다 아까울 정도였다. " 아, 그럼 이건 지금 주는 편이 좋겠군. " 진우는 환자복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내 가인에게 건네주었다. 가 인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뭐지, 이건? " ……. " 진우가 넘겨준 물건은 뭔가 고풍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호롱 모양의 머리 장 식이었다. 머리 장식은 어디에 심하게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군데 군데 금이 가있었고, 색도 벗겨져 있었지만……. " 이건, " 머리장식을 바라보던 가인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 머리 장식의 주인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브루스! ' 브루스의 것이다. 언제나 그가 머리에 매고다니던 그 장식이다! 그 긴머리 를 땋아서 고정시킬 때 사용했던! 가인은 진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 진우 씨! 브루스를, 브루스를 찾은 거에요? 찾았어요? " 가인의 외침에 놀란 마리도 휠체어를 끌고 다가와 장식을 살펴보았다.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가인의 손에 들린 머리 장식은 분명 실종된 동료의 것이 확실했다! 진우는 자신을 절박하게 바라보는 가인과 마리의 시선에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 ……아니. 사부님을 찾아낸 것은 아니야. 그저 12구역의 뒷정리를 하던 팔라딘 대원이 격전지 근처에서 발견해낸 거지. " " ……. " 그 말에 모두는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특히 가인과 같은 경우는 지금까지 차분했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 굴을 떨어뜨린채 수중의 머리 장식을 있는 힘껏 움켜쥔다. 역시……. 역시 브루스는, 브루스는 그때……. ' 건방떨지마라, 애송아! ' 8 월 4일. 12구역의 폭격을 막아내기 위해 하늘로 날아오른 그때. 그때 자신 을 만류하던 브루스의 모습. 가인은 정녕 알지 못했다. 그 뒤로 영영 그와 만 나지 못하게 될 줄은.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 브루스, 저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에요. 돌아오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더라면, 알았더라면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 건데. 좀 더 다른 얘기를, 그렇게 가버릴 줄 았았더라면, 사라질 줄 알았더라면, 지금껏 하지 못한 얘기를 그에게……마음 속에 담아뒀던 얘기를 좀 더……. ' ……. '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그 순간을 떠올리기만 하면 타오 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게 된다. 벌써 몇번이나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브루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슬퍼했는지 모른다. 오열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렇게 슬퍼하고도 슬픔은 조금도 무뎌지지가 않았다. 몇번이고 더한 슬픔만이 찾아올 뿐이다. 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야가 흐릿해지려는 것을 참았다. 브루스. 브루스. " 녀석. 왜 그렇게 울것 같은 표정이야? 사부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했어? 왜 오버하고 난리야? " 진우는 씩 웃으며 그런 가인의 어깨를 두들겼다. 가인은 고개를 들어 충혈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하지만 진우 씨도 봤잖아요? 그때 브루스의 몸이 소멸하기 직 전이었다는 걸. 스스로도 회복해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는 걸. " 가인은 그때, 진우가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브루스를 찾아헤매며 울부짖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 그때 브루스의 실종에 누구보다도 슬퍼했던 사람은 진우 씨였잖아요? " 이제는 실종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울 정도다. 벌써 그가 사라진지 한달 이 다 되어간다. 그 기간동안 피스메이커는 브루스에 관한 어떠한 소식도, 어떠한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오직 실날 같은 희망만을 안고 지금껏 그의 소멸을 부정해왔다. 하지만 그 기다림 끝에 돌아온 것은 이렇듯 다부서진 그의 머리 장식 뿐인 것이다. " 사부님은 살아있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확신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는 가인의 손에 들린 머리장식을 집어올리며 미소했다. " 사부님이 소멸되었으면 이 머리 장식도 그때 사라졌어야만 해. 칠성권을 탐랑의 경지까지 익힌 권사(拳士)는 몸의 구성이 선기로 대체되어 삼계 의 피드백에 녹아들게 되거든? 그렇게 되면 현세에 있는 권사의 모든 정 보는 인계에 저장되어 영구 보존된다고. 그러니 사부님이 소멸되었다면 그 정보도 함께 사라졌다는 말이 되는데…… 그럼 지금 남아있는 그 머 리장식은 뭐라고 설명해야하는 거냐? " " ……! " 그 말에 가인과 마리는 믿을 수 없다는듯 새삼 브루스의 머리 장식을 바라 보았다. 브루스가, 브루스가 죽지 않았다고? 소멸된게…… 아니라고? " 저, 정말입니까, 진우씨? 정말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것입니까? "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몇번이나 되물었지만, 진우는 그때마다 웃음을 잃 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염없이 머리 장식을 바라보는 가인에 게 말했다. " 그러니 그만 얼굴 펴라고, 소년. 그렇게 계속 우거지상을 짓고 있으면 내 딸도 슬퍼하잖아. " " 아, " 그 말에 밑을 내려다보니 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인의 옷자락을 부 여잡고 있었다. 진우는 가인의 손에 다시 머리장식을 쥐어주었다. " 잘 가지고 있다가 사부님이 돌아오면 직접 돌려드리라고. 알았지? 이건 사형으로서의 부탁이기도 하니까. " " ……예. " 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안의 머리 장식을 움켜쥐었다. 소중하게.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듯. 살아있었어. 살아있었던 거야. 브루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37 - Ｂy Ｎext Ｎeo =-=-=-=-=-=-=-=-=-=-=-=-=-=-=-=-=-=-=-=-=-=-=-=-=-=-=-=-=-=-=-=-=-=-=-= 고백 7시간 전. " 결국 내일로 미뤄진 거네요, 퇴원. " " 예. 그래도 특별히 진우씨한테 문제가 있어서 미뤄진 건 아니니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자. 뭐, 이런 거겠죠. " 가인이 언더 시티 유레카에서 12구역의 자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밤 7시가 넘 어서고 있었다. 퇴원이 늦어진다는 얘기를 들었을때 곧바로 돌아올 예정인 그 였지만, 브루스에 대한 희소식과 마리의 재활 치료를 돕다 보니 그만 어영부 영 시간을 보내고만 것이다. 덕분에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한창 시민이 취 소된 저녁 식사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가인은 재빨리 두손을 걷어붙이고 싱크대의 시민에게로 다가갔다. " 아, 가인 씨는 저기 랩으로 싸둔 음식들을 냉장고로 넣어주세요. 전 설거 지를 할테니까. " " 아, 예. " 가인은 부엌의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테이블에는 진우의 퇴원 기념을 위해 준비된 음식들이 한껏 차려져 있었다. 이 테이블이 이렇게 호화찬란해 보이 는건 꽤 오랜만인데……. ' 그래. 오랜만이야. ' 그도 그럴 것이 최근의 며칠간은 쓸쓸한 저녁 식사의 연속이었다. 피스 블 랙의 일들과 시폰 뤼멘과의 마찰. 자주 놀러오던 미연이 누나와 하나도 진우 씨의 부상으로 보기 힘들었고. 또 한때지만 유리도 집을 나간적이 있지 않은 가? 여러모로 왁자지껄할 새가 없었다. 이번 여름은……. ' 작년에는 그렇게나 소란스러웠는데. ' 가인은 접시를 들어올리다 문득 테이블의 한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곳은 지금은 사라진 동거인의 지정석이었다. 그래. 테이블이 그토록 쓸쓸하게 보 였던 이유. 그것은 저 빈 자리의 무게가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가인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진우가 건네준 브루스의 머리 장식을 만지작 거렸다. 이 장식의 감촉만이 저 빈자리의 주인이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였 다. 그것만이 위안이었다. 그래. 돌아올 거다, 브루스는.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듯한 얼굴로, 그동안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능청스럽게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퉁 명스럽게 한마디하겠지. 자기를 걱정하는 것은 백년은 멀었다고. 애송이 주 제에 누굴 걱정하는 거냐고 호통을 칠 것이다. 그런 브루스의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상상되었기에 가인은 자신도 모 르게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그가 정리를 하다말고 웃음을 터뜨리자 시민이 의아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 가인 씨? 왜 그러는 거에요? " " 예? 아, 아뇨.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그보다 유리는 어디로 갔어요? "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집에 돌아왔을때 부터 유리가 보이지를 않았다. 분명 시민 씨를 도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 리라 생각했는데. 시민은 가인의 질문에 화장실 쪽을 가리키며 미소지었다. " 샤워하고 있을 거에요. 한창 이것저것 요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진우씨의 퇴원이 미뤄졌다고 하니까 잔뜩 화가 나서는. '이거 다 그 인간보고 치우 라고 그래! 난 몰라!'라며 가버렸어요. " " ……유리답네요. " 가인이 어쩔 수 없다는듯 혀를 내두르자 시민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 하지만 유리 양, 오늘 저녁 식사 기대하고 있었는걸요. 저랑 같이 음식 만 들면서도 내내 들떠있었고요. " " 유리가요? " " 예, 그 유리 양이. 그렇게 모처럼 기합 넣어서 잔뜩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 었는데 갑자기 못온다고 하니까 화가 날만도 하죠. 의외로 유리 양, 그런 부분에선 솔직하잖아요?" 유리가 그렇게 해서라도 감정을 드러내주는 것이 기쁘다는듯 시민의 얼굴에 선 연신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 모습에 가인도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렇 게 말하는 시민 씨도 꽤 기합이 들어갔던 것 아니에요? " 잠깐. 잠깐. 가인 씨, 그렇게 물기가 묻은 찬통을 냉장고에 넣으면 안되 죠. 행주로 한번 닦아서 넣지 않으면 습기 때문에 냉장고가 더러워진다고 요. " " 아, 그래요? " " 그런 거에요. " 시민은 재빨리 가인의 손에 들린 찬통을 빼앗으며 미소했다. 가인은 허전해 진 손을 몇번 쥐었다 폈다하며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똑부러진 시민의 모습을 보고있자면 묘하게 안 도감이 드는 그였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은 평정심을 잃어가 고만 있는데 그녀만큼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안심시켜준달까. 가인은 새삼 시민이 자신보다 연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아니, 시민 씨 뿐만이 아니지. 앞에서 만났던 진우 씨도, 미연이 누나도, 심지어는 한살 연상 인 마리 선배까지도 평소와 같은 여유를 보여주고 있었다. 무신경에서 비롯된 여유가 아닌,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는데에서 비롯된 여유. 가인은 그들에 비해 자신이 아직도 어린애일 뿐이라는 것을 통감했다. 자신은 그들처럼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남을 배려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아픔에 도취되어만 있었다. 언제나, 언제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기만 한다. ' 어른이 되고 싶어. ' 어른이 되면, 지금의 아픔에 좀 더 무덤덤해질 수 있을까? 지금보다 좀 더… …웃을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그때가 되봐야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리 는 것이 가인은 못내 답답했다. " 가인 씨? " " ……! " 그때 가인의 코 앞으로 시민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한창 생각에 빠져있 던 가인은 깜짝 놀라며 뒤로 몸을 물려야 했다. " 예, 예? " " 정말. 제 얘기 하나도 안 듣고 있었죠?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에 요? 아까부터 계속. " " 아- 그, 그러게 말이에요. 아까부터 왜 이럴까나. 하, 하하. " 가인은 난처하게 웃으며 재빨리 테이블의 식기구와 찬통들을 냉장고로 날랐다. 아, 잠깐. 이렇게 물기가 묻은채로 넣으면 안된댔지. 행주. 행주가 어딨더라. 그렇게 수선을 떨며 행주를 찾는 가인의 모습에 시민은 작게 한숨을 쉬며 들 고 있던 행주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 가인 씨, 피곤해서 그래요? 무리해서 도와줄 필요 없어요. 뒷정리는 저 혼 자서 할 수 있으니까. " " 아, 아뇨. 피곤하기는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진짜로! " "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제 눈은 못 속여요. 얼른 올라가서 쉬도록 하세요. 어서요. " " 하지만, " " 어서요∼ " 시민은 가인의 팔짱을 잡아끌며 그를 부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엉겁결에 팔짱을 끼인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시민을 바라보았다. 금빛 단발 밑으로 드 러난 그녀의 얼굴도 가인 못지 않게 붉어져 있었다. 시민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와서야 슬며시 붙잡고 있던 가인의 팔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못내 아쉬운지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가인은 묘하게 어색해지려는 분위기에 조심스레 시민을 불렀다. " 저……시민 씨. " " 예. " " 저기……그, 그럼 올라갈테니까. " " 예. " " 뒷정리……잘하세요. " " 예. " " 저, 정말 도와주지 않아도 되요? " " 예. " 시민은 상기된 얼굴로 그저 줄창 '예'만 대답할 뿐이었다. 할말이 없어진 가 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시민의 시선 이 따끔할정도로 느껴진다. 뭘까. 이런 분위기는. 어색하다기 보다는 낯이 간 지러웠다. 왜 이렇게 쑥쓰러운거지? 이럴 이유가 없을텐데……. 그때 그렇게 계단으로 올라가는 그를 시민이 불러세웠다. " 저기, 가인 씨! " " 예? " 가인이 돌아보니 시민은 두손을 움켜쥔채 뭔가를 바라는 사람처럼 그를 올려 다보고 있었다. 시민은 용기를 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가인 씨, 저한테 무슨 할 말 없어요?" " ……! " 그 뜨거운 갈망이 느껴지는 질문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 켰다. 할 말이 없냐니……. 그게 무슨 소리지? " 시민 씨? " " 무슨 할 말이 있을텐데. 분명. " 시민은 시선을 피하려는 가인에게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한번 말문을 연 이상 더 이상 가릴 것이 없다는듯한 태도였다. 가인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 는 것도 느끼지를 못하며 고민했다. 그러다 뭔가를 하나 떠올렸는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 안녕히……주무세요? " " ……. " 갑자기 웬 취침인사. 그것도 의문형? 시민은 그녀답지 않게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하지만 참을 성도 좋 지. 애써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다시 한번 되묻는다. " 그 말 뿐이에요? 다른 할 말은 없고요? " " 예? 예에……. 저기, 역시 도와드릴까요? 뒷정리? " " ……. " 결국 시민의 입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싸늘하게 몸을 돌리며 가인 에게 말했다. " 쓸데없는 걱정말고 잠이나 자요.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 " ……예. " 그 냉기가 흐르다 못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가인은 차마 시민을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2층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그렇게 가인이 사라 질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던 시민은, 2층에서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거칠게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뭐야, 정말. 가인 씨 바보. 바보. 바보. 바보―! '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건데! 그동안 얼마나 참아오고 참아오고 또 참아오다가!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했던 건데!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두 눈 딱 감고서 물어봤던 건데!(뜨고 있었으면서) ' 가인 씨, 우리 둘이서……이대로 어딘가로 가버릴래요? ' 그 사이에 잊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때 내가 했던 고백. 잊어버린 거에요? 그렇게 대수롭지 않았던 거에요? 시민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던 가인이 떠오르자 우울해졌다. 그가 돌아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 생각했었다. 그때 듣지 못했던 대답도 들을 수 있으 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 정말 바보! " 시민은 다시 한번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 오던 중, " ……. " 젖은 머리를 늘어뜨린채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한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소녀는 다름 아닌, " 유, 유리 양? " 어느새 목욕탕에서 나와있었던 거지! 시민은 신음을 삼키며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의 시선이 하나의 잘 제련된 칼날과도 같았다. 다……들었을까? ' 들었겠지? 그렇겠지? ' 잠옷 차림을 한 유리는 막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를 유리잔에 따르려고 하고 있 었다. 시민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애써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 유리양……. 우유, 데워줄까요? " 벌컥벌컥벌컥벌컥 시민의 질문에 유리는 잔에 따른 우유를 원샷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민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들은 거 맞구나. 역시……. 휙 유리는 테이블에 빈 우유꽉을 놓은 후 그야말로 찬바람 나게 시민의 곁을 지 나쳤다. 시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오늘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저 녁 식사는 취소되고, 가인 씨는 나몰라라 하고. 더구나 유리 양한테도 미움 받 았으니……. 그때 막 부엌을 나가려던 유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 시민 언니……. 오빠 좋아하지? " " ……! " 그 물음에 시민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간신히 용기를 내어 고개를 끄덕인다. " ……예. " 예상하고 있던 대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유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 역시……시민 언니도 오빠를. ' 요 한달간 둘 사이의 공기가 뭔가 달라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당사 자에게서 직접 얘기를 듣게되니 그 충격이 더 컸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집을 나간 이후부터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유리는 더더욱 가인의 곁을 떠 났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왜 그때 자신은 도망쳤을까? 왜 가인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지? ' 오빠가 가장 힘들어할 때 왜 나는……. ' 결국 벌이야. 이렇게 된 것도 다 자업자득인 거야. ' 결심했잖아, 이유리? ' 더 이상 오빠에게 뭔가를 바래서는 안된다고. 아무 것도, 그저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겠다고. 그렇게, 그렇게 결심했는데. 마음 먹었는데. ' 유리 양. ' 시민은 그렇게 희미하게 떠는 유리의 등에 손을 가져가려다가 이내 그만두었 다. 그녀에게 사과해서는 안된다. 가인에 대한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이 상, 유리에게 미안하다는 말 따위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하아. ' 시민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시선은 가인이 있는 위층에서 줄곧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에 들어온 가인은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하늘치고서는 유독 어둡다고 생각했더니 결국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군. 가인은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대답을 구했던 시민이 떠오르자 고개를 들 수 가 없었다. 시민 씨, 서운해하고 계셨어. 슬퍼하고 계셨지……. ' 하지만. ' 가인은 우울한 눈을 들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하늘. 뿌려대 는 빗줄기. 그리고 그 빗줄기 사이로 그려지는 한 여인의 얼굴. 그 모습은, ' 기다리고 있을게……. ' 헤어지는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던 모습. 그때의 그 웃음이 어딘가 처연해 보였던 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어. 그때부터 그녀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야. 알고 있었어. 가인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그리고 자신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만나고……싶어. " 만나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어. " 약속했잖아? " 얘기하기로……약속했잖아? " 테레이아……. " 가인은 마음 속에 묻어뒀던 그 이름을 다시 소리내 불렀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38 - Ｂy Ｎext Ｎeo =-=-=-=-=-=-=-=-=-=-=-=-=-=-=-=-=-=-=-=-=-=-=-=-=-=-=-=-=-=-=-=-=-=-=-= 고백 4시간 전. 언더 시티 유레카의 메디컬 센터. 밤 10시가 지난 이 곳은 야간 근무를 서는 당직 간호사들과 몇몇의 환자들을 제외하면 외부인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피스메이커 의 메디컬 센터는 전적으로 피스 대원들을 위해 만들어진 의료기관이었다. 대 원들의 오라 수치를 측정하는 것과 전투에서의 부상을 치료하는 것. 이 두 가 지 일을 제외하면 업무 상 외부인이 올 일은 전무한 것이다. 가끔 언더 시티 관계자들이 치료를 받으러 오기도 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 이야. 정말 힘들었어― " " 힘들었죠. " 일주일에 한번 있는 이 날만큼은 예외였다.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 닥터의 개인 사무실에서는 지금 센터의 일원이 아닌 외부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메 디컬 센터의 경비 시스템에 그들의 ID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것 은 엄연히 비공식 출입이라 할 수 있겠지만, 불법 침입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방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 이 자리에 있 었다. 정식적인 만남이 아닌 비밀 리의 만남.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는가? " 자자. 하루의 피곤을 잊게 해줄 커피 한잔. 다들 어떠십니까? " 책상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앉은 그들에게 방의 주인, 닥터가 웃으면서 다가 와 커피를 건네주었다. 한창 푸념하던 그들, 시더 웰리스와 주유화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잔을 건네받는다. 닥터는 그녀들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갖다대며 윙크했다. " 그럼 건배라도 할까요? 길었던 환자들의 퇴원을 축하하며. " " Oh― To our patients! " " 飮盡. " 시더는 언제 기운이 빠졌냐는듯 과장되게 잔을 들어올렸고, 유화는 못말린다 는듯 혀를 차며 건배했다. 그렇게 서로의 잔을 맞춘 그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커피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닥터는 카페인의 쓴맛과 타닌 특유의 떫은 맛에 심취해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에 가 앉았다. " 그럼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회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해볼까요, 시더 양. 주 선생님. " " 그래요.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미뤄오기만 했으니까요. " 유화는 기다렸다는듯 닥터의 말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8월 4일의 전투가 끝난 이후 피스메이커에서 가장 바빴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피스 블랙과 의 접전은 유례없이 많은 피스 대원 부상자들을 남겼는데, 그 부상이란 것이 하나같이 손발이 떨어져나가고 실명이 되고 척추가 부러지는 등 치명적인 것 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피스메이커의 의료진들은 근 한달간 수차례 의 외과 수술과 인공 수족의 이식, 재활 치료를 병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빛을 발했던 것이 시더 웰리스의 생체 공학과 주유화의 생물 공학 기술이었다. 사라진 의족을 대신할 오리하르콘 인공 의족을 시더 웰 리스가 제작해내고, 그 위에 입힐 인공 피부를 유화가 이식자의 피부줄기 세 포와 콜라겐으로부터 증식시킨다. 덕분에 이식자들은 보다 완벽하고 보다 뛰어난 신체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 었다. " 가인 군의 다리야 이미 일상 생활에서도 무리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회복 되었고, 진우 군도 내일이면 퇴원. 마리 양도 순조롭게 회복 중. 그리고… …, " 닥터는 말꼬리를 흐리며 대신 주유화를 돌아보았다. 유화는 그 시선에 팔짱 을 끼며 푸념했다. " 뭐, 그 아이도 문제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퇴원하겠다고 자청하지도 않았겠죠. " " 다행이군요. 수술 경과가 좋은 것 같으니. " 닥터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시더는 대번에 그의 말을 받아쳤다. " 다행은 무슨 놈의 다행이에요! 그런 성질 사나운 인간 말종! 애초에 수술 해주는게 아니었어요! 피스 대원만 아니었더라면 누가 그런 녀석의 팔따위 만들었을까봐! " " 그래도 그러는게 아닙니다, 시더 양. 그는 그 전투에서 동생까지 잃지 않았 습니까? " " 우……. " 닥터의 말에 시더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 미션이 끝난 후 죽은 동생의 시체를 끌어안은채 넋이 나가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람드링 뤼멘. 피스 알리자린의 모습이. " 어쨌든 맡은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했다는 건 우리 의사들에게 있어서 좋은 일입니다. 오늘만큼은 그의 퇴원도 진심으로 축하해주자고요. " " 예에― " 시더는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잠자코 있던 유화가 냉랭하 게 입을 열었다. " 그건 그렇고 축하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 " 예? " " 저번 전투에서 피스메이커는 상당한 수확을 얻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 그 말에 닥터와 시더의 표정이 굳어졌다. 닥터는 유화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 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피스 블루의 각성을 말하시는거군요. " " 시폰 뤼멘이 미처 처분하지 못한 자료 속에서 여러가지 사실들을 알 수 있 었습니다. 그 자료에는 성당기사단이 작년 용장호에서 피스 블루에게 일어 난 괴현상을 가이아 애드번트 이펙트로 명명, 유가인을 오라의 주인으로 단정짓고 있더군요. 그리고 오라의 주인으로 확정된 그를 '옴팔로스'라는 곳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제재하는 부분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겠습니다, 닥터. 피스메이커가 칭하는 오라의 주인이 라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옴팔로스란 무엇이죠? 만약 앞으로도 제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면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한 설명을 부탁드립 니다. " " 으음. " 닥터는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의 곁에 앉아있는 시더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곧 서로 마음을 굳혔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 중급 버추즈(Virtues)의 바르비엘(Barbiel)인 저로서는 그다지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엄연히 성당 기사단의 내부에서는 코리 안겔리(Chor i angeli)라는 서열로 정보를 제한시키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라면 뭐든지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일단 오라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의 의식, 가이아의 대행자로 알려 져 있습니다. 주 선생님, 가이아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 " 예? 아, 예. 세계 각지에 분포된 용맥(龍脈)의 흐름이 모인 곳, 이라고. " 유화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2020년 대재해 이후 몬스터가 주로 출몰했던 지역들로 알고 있습니다. 그 리고 각 나라의 수도들이 대부분 이 가이아라고. " " 그렇습니다. 내룡(來龍)이라고도 불리우며 오라의 성지라고도 불려지는 곳. 그것이 가이아며 세계의 의지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 오라의 성지? 세계의 의지라니? 유화가 그런 추상적인 표현들에 감을 잡지 못하자, 보다 못한 시더가 설명에 끼어들었다. " 존재의 계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물질계. 소 울 에너지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스트랄 계, 또 거기서 파생된 세계가 멘탈 계. 쉽게 말해서 가이아란 우리의 물질계로 아스트랄계의 정보가 흘러들어 오는 장소를 말하는 거야. 소립자 와프의 포지티브 네가티브 작용과 마찬 가지로 세계가 나선 운동을 하는 거지. " " ……! " " 여기서 한가지 가설. 영적 정보의 집합체가 끊임없이 순환하여 사람들의 의식과 공유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리고 그 자체가 하나의 의지를 가진다면? 케루빔은 이를 호아(HOA)라고 명명짓고 세계를 관리하 는 시스템, 태고의 존재(Ancient of Days)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어. 그리고 이 가설은 결국 그들이 나타남으로서 증명되었지. " " 그들, 이라니? " " 오라 능력자 말이야. 의식의 힘을 물질계에 현현시키는 사람들! 그들의 존 재야말로 인간의 의식 속에 현현성이 존재한다는 증거야. 이 현현성이 아스 트랄계에 내포된 세계의 의지 속에서 드러날 때, 의지는 물질계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이 바로 오라의 성지 가이아가 된다∼라는 말씀이지. " 유화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이들은, 아니 피스메이커는 절대자가 실재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건 가? 그게 가이아라는 거야? " 믿기, 힘든 얘기로군요. 정말……감당이 안되는 얘기에요. " " 하하. 반신반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저같은 경우도 아직 완전하게 납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오라 능력자라는 이들이 우리의 곁 에 실재하는 이상, 그 존재가 단순히 우연의 산물은 아닐 거다, 그렇게 생 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을테니까요. ……아마도. " 닥터는 쓴웃음을 지으며 뒷말을 흐렸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라. 과 연 그럴까? 우리들은 그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 아닌 걸까? 유화는 복잡한 머리 속을 정리하다가 이내 포기했는지 다음 질문을 던졌다. " 어, 어쨌든. 가이아가 대충 그런 것이라면 그 대행자라는 것은 뭘 뜻하는 겁니까? " " 아스트랄계의 의지가 물질계에 현현된 것이 가이아라면, 그 가이아가 물질 계의 생명체에게 현현되는 것을 대행자, 오라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강림 인 거죠.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인류는 이 강림이라는 것을 벌써 수차례에 걸쳐 받아왔다고 합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거죠. " "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인을 오라의 주인이라고 하기에 부족한 것 아닙니 까? 다른 오라 능력자들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를……. " 유화의 반론에 시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우리도 가인이 가이아의 대행자로 선택받았는지에 대해서 그동안 확 신할 수 없었어. 아무리 가이아 애드번트 이펙트를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예전 피스 블랙의 사례도 있고 하니까 말이지. 하지만, " " 하지만? " " 가인의 패턴 블루가 소립자 와프를 현현시키는 능력이라고 밝혀지면서 더 이상 의심의 여지는 사라졌어. 피스 블루 유가인은 2033년에 강림된 오라 의 주인이야. " 그 확신에 찬 대답에 유화는 되레 의아해져야만 했다. 소립자 와프를 현현 시킨다는 것이……오라의 주인이라는 증거? 닥터는 신중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오라의 주인은 가이아와 의식을 공유할 정도로 강한 감응력을 가집니다. 그 말인 즉슨 아스트랄 계에 있는 의식의 흐름마저도 끌어당길 정도로 강 한 영적 인력(引力)을 가졌다는 뜻이 되죠. " " 오라 능력자에게서 인력이라는 것은 절대로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이야. 오라 능력자는 오리하르콘과 반응하여 지구의 중력을 조절해내지? 오리 하르콘의 중력장 현상은 물질계로 파생되는 인력의 한 모습인 거야. 인간이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것도 이와 일맥 상통해. 인간의 의식은 강 하든 약하든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 거기까지 말하던 시더는 목이 탔는지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키며 재차 말했 다. " 그렇다면 오라의 주인이 아스트랄 계를 떠도는 가이아의 의식과 접속하려 면 무엇을 매개체로 삼아야할까? 바로 소립자 와프인 거야. 물질계에서 중력을 발하기 위해 오리하르콘을 매개체로 삼았던 것처럼, 오라의 주인은 와프 입자를 매개체로 삼아 인력 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지. 오라의 주인은 그 영적 인력, 즉 차원 진동으 로 하여금 가이아의 의식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길 수 있어. " " 차원, 진동! " 유화는 신음처럼 그 이름을 되뇌였다. 바로 디멘션 데몰리션을 일으킬 수 있는 원초적 질료! 그 질료를 현현시키는 능력이야말로 가인이 오라의 주인 으로 선택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던 것이다.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의지를 끌어들일 정도로 강한 영적 인력이라니……. 유화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의 얘기였다.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 지조차 의문이다. 그 가인이……,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아이가……. '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의지를…… 끌어들인다고? ' 순간, 유화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뭔가 터무니 없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닥터는 천천히 자신의 안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 차원 진동. 이 영계의 인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계에 영향을 미 치기도 합니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일지라 도 말이죠. " " 이것이 바로 오라의 주인이 가진 진면목인 거야. 존재의 계를 뿌리째 뒤 흔드는 궁극의 카오스……. " 시더는 짙은 수심이 깔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 디멘션 트랜스퍼(Dimension Transfer)의 가능성이. " 위이이이잉 언더 시티 유레카의 광속 전차 승강장으로 한 전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 시각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전차라니. 분명 흔치 않은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 다고 특별히 수상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차에 탑승하고 있는 이는 엄연히 피스메이커의 감시 시스템에 언더 시티 로의 출입을 허가받은 인물이었으니까. 철컹 전차의 자동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밤 체 제로 전환된 어두운 언더 시티의 조명이 인영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 었다. 뚜벅 뚜벅 인적이 없어서 그런지 유독 인영의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그러나 인영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조금의 지체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간이 조명등이 있는 곳까지 걸어나온 그는 손목에 찬 무전기를 내려 다보며 미소했다. " ……자. 그럼 어디 한번 가보실까? 도우미 씨. " 무전기의 액정에 비친 인영의 모습. 그 모습은 다름아닌 팔라딘 4소대의 일원 천요원이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39 - Ｂy Ｎext Ｎeo =-=-=-=-=-=-=-=-=-=-=-=-=-=-=-=-=-=-=-=-=-=-=-=-=-=-=-=-=-=-=-=-=-=-=-= " 그러니까……차원 진동이라는 것이 다른 차원의 존재를 끌어들이는 인력 이다, 이런 겁니까? " " 그래. 존재의 법칙을 구성하는 시공조차 무너뜨릴 수 있으니 어쩌면 카오 스(혼돈)라기 보다 아비스(Abyss;심연)에 더 가까울지도 몰라. 한층 호아 에 근접한 네거티브지. " 혼란스러워하는 유화의 모습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시더는 무덤덤하게 답했 다. 하지만 유화에게는 그 무덤덤함이 그토록 답답할 수가 없었다. 이미 정해진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는 바꿀 도리가 없다. 그렇게 말 하는 것처럼 느껴져 더욱 반발심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유화는 왠지 모를 초조함에 재차 반박했다.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차원 이동이라는 것은! " " 터무니가 없다고? 그래. 나도 믿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이미 피스메이커 는 오라 능력자와 오리하르콘을 이용하여 소립자의 반입자로 구성되는 반 물질(Antimatter)마저 만들어내고 있어. 피스 레드와 버밀리온에게 지급된 반물질 절삭성 커터, 오라 소드 말이야! " 시더는 말하면서 점점 감정이 격앙됐는지 언성을 높였다. " 반물질이 탄생되는 순간 그 물질의 중심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홀(hall)은 무한(無限), 무지(無地)에서 비롯된 순수한 Z에너지일 뿐 아니라 모든 양 성을 빨아 들이는 블랙홀의 견본이야! 보통의 물질에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핵과 전자, 양성자마저 들어있지 않은 무(無)의 아공간이라고! 이미 차원 이동이라는 것은 그리 먼 미래의 테크놀로지가 아니야. 바로 우리 눈 앞에까지 닥쳐와 있어! 그리고 그 비밀이 지금 가인에게 있는 거고! " 거기까지 소리치던 시더는 억누르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 뭐가 성당 기사단이고 뭐가 몬스터야? 어차피 다 똑같은 녀석들일 뿐이 야!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 유가인이 아니라 차원 이동의 열쇠를 쥔 오라의 주인이지. 그리고 가인은 여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이 대로는 영문도 모른채 이용만 당하게 될 거야! " 시더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두려웠다. 가인이 점점 오라의 주인으로 각성함 에 따라 주위의 상황은 그를 희생양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를 이용하기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유가인을 기다리는 것은 인간적인 삶 의 종말 밖에 없겠지. 닥터는 불안해하는 시더를 타일렀다. " 시더 양. 가인 군이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렇듯 우리가 모 인 것 아닙니까? 고작 우리 세 명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겠냐고 회의적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인 군에게 닥치는 불의만큼은 분명 줄일 수 있 을 겁니다. 또 줄이도록 노력해야하고요. 그러니 이렇게 울고 있을 틈은 없지 않습니까? " " 흑……. " 시더는 훌쩍이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냈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에게 가인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도록 만들었을까. 그건 아마도 가인을 불 행으로 빠뜨릴지도 모르는 일에 자신이 협조해 왔다는 것에서 기인했을 것 이다. 이런 결과를 예측하고 연구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만든 오리하르콘 발명품들은 가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오라의 주인에 대 한 기초 연구 자료를 성당 기사단에 제공한 꼴인 것이다. 유화는 슬퍼하는 시더의 모습에 의기소침해져 힘없이 중얼거렸다. " ……닥터 웰리스의 말이 맞군요. 하긴. 몬스터들의 존재 자체가 차원 이 동이 가능하다는 증거일테니. " " 그들도 완벽한 차원 이동에 대한 비밀은 풀지 못했을 겁니다. 언제나 소 수로 공격해오는 것도 그렇고, 게이트의 뜸한 사용도 그렇고. 만약 차원 이동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진즉에 총공세를 펼쳤겠죠. " 닥터의 말에 시더가 동의했다. " 아마……차원을 이동하는 방법은 우리보다 먼저 발견했겠지만 그것을 시행 에 옮길 에너지가 없는걸 거에요. 단순히 반물질과 물질의 접촉만으로도 E c-200,000,000 이상의 에너지가 발생하니까. 그때문에 그들도 차원 진동을 현현시키는 오라의 주인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테고. " " 지키느냐 뺏기느냐. 공성전과 비슷한 양상이군요. 하지만, " 하지만 그렇다면……. 유화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몬스터의 최종 목표가 오라의 주인이라면, 어째서 피스메이커는 오라의 주인 을 몬스터와의 전면전에 내세웠단 말인가? 그리고 왜 성당기사단은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거지? 가인이 오라의 주인이 된 이유를 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점은 풀리지 않 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의문들만 떠오를 뿐이다. 유화는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 일단 오라의 주인이 대한 사항은 여기까지만 묻겠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 옴팔로스란 무엇입니까? " 옴팔로스. 유화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계의 중심을 지 칭하는 말로서, 올림포스의 신 제우스가 두 마리의 비둘기를 세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날려보내 그 비둘기들이 만난 지점을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비 둘기들이 만난 장소는 신탁으로 유명한 아폴론의 신전이 있는 고대도시, 델포 이(Delphoe). ' 델포이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성소라고도 하지. ' 가이아라. 그 가이아가 피스메이커가 언급하는 가이아와 연관이 있는게 아 닐까? 그렇다면 옴팔로스라는 것은 델포이? 하지만 시폰 뤼멘이 남긴 자료 에는 오라의 주인을 옴팔로스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럼 이건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 유가인은 줄곧 서울에 체류하고 있었어. 델포이를 가본 적도 없단 말이야. ' 유화가 조사한 자료로는 그 정도의 추측이 한계였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닥터가 설명을 시작했다. " 옴팔로스는 가이아의 배꼽입니다. 삼차원에 현존하는 가이아들의 중심이 자 파생점이죠. 옴팔로스에서 시작된 용맥의 줄기들, 이것을 나라카라고 부르는데 이 나라카가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 뿌리를 내린 곳. 그것이 다른 가이아들인 거죠. 옴팔로스는 액시스(Axis)라고도 불리며, 축으로 성스러운 에너지가 현현 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라의 근원지이자 세계의 의지가 시작되는 곳 이죠. " " 그렇다는 얘기는…… 옴팔로스라는 것은 현존하는 가이아들 중 하나란 것입니까? " " 예. 아마도. " 닥터는 아리송하게 말을 맺었다. 아마도라니? 확실한 것은 자신도 모른다 는 건가? 유화는 혹시나하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 " 옴팔로스의 위치는, 당연히 모르시겠지요? " " 옴팔로스의 위치는 피스메이커의 극비 중의 극비입니다. 당연히 저희같 은 말단에게 알려줄 리가 없죠. " 닥터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가려진 그 의 눈빛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하지만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 " 예―? " 유화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나 시더는 대략 닥터가 말하려는 바를 알고 있었는지 그에게 긍정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도 옴팔로스에 대한 사항들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닥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사무실의 유리창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유리창에 비친 언더 시티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유화에게 물었다. " 주 선생님, 선생님은 처음 여기에 왔을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 습니까? " " 예? " " 이 언더 그라운드 말입니다. 언더 시티 유레카야 인위적인 증축물이라고 해도, 이 서울 수도만한 크기의 지하 세계를 과연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요? " " 그건, " 유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그건 자신도 이상하다고 여겨왔던 바다. 이 정도의 지하 시설을 만들려 했다면 분명 세간의 이목을 피할 수 없었을텐데… …. 무엇보다 다른 지부의 피스메이커는 자신들의 가이아에 이런 시설을 두고 있 지 않았다. 유독 한국지부만, 이 동방의 소국만 이런 공간을……. " 설마……. " 유화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 설마 이 언더 그라운드라는 것이……. " " 그렇습니다. 유레카(Eureka)라니……. 정말이지 그 말만큼 이 도시에 어울 리는 이름이 없죠. " 닥터는 유화를 돌아보며 미소했다. " 몬스터들이 오라의 주인과 더불어 혈안이 되어 찾아다니던 성지. 옴팔로스 는 바로 이곳이었던 겁니다. " " 후아암―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격일에 한번씩 돌아오는 야간 근무를 서게된 오퍼레이터 삼인방은 저마다 늘 어진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 긴장을 풀지 않으며 몬스터의 발생을 체크하는 것이 피스 오퍼레이터의 바람직한 자세겠지만……. 최근 한 달 동안은 와프 입자의 수치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몬스터의 출현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들이 이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 었으리라. 물론 치프 윤채영이 있었더라면 '이런 것이 바로 폭풍 전야'라며 한층 기합 을 불어 넣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오늘 이 자리에 없었다. 아마 이 시각이면 언더 시티의 자택에서 샤워라도 하고 있을 것이다. " 아아. 한산하다. 한산해. " 삼인방들 중 가장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윤연정은 연신 쏟아 지는 잠을 몰아내기 위해 일부러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녀는 탁상에 턱을 괴며 자신의 데스크 컴퓨터를 촛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 역시 야간 근무는 심심해. 인터넷 하는 것도 한두시간이지. 아무 생각도 없이 갔던 게시판 또 가고 또 가고. 쇼핑몰 구경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 정말. " " 게임이라도 하는게 어때? " 삼인방들 중 가장 연장자이지만 가장 어려보이는 김성은은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킨채 재빠르게 타블렛을 사용하며 말했다. 참고로 그녀가 현재 컴퓨 터로 작업하고 있는 것은 이달 말까지 동인 작가 연맹 사이트에 올려야할 Y 물 동인지의 원고였다. 연정은 근무 중에도 꿋꿋하게 원고를 하는 성은의 모습에 징하다는듯 혀를 찼다. " 됐네요. 게임도 한두번이지. 아들 육성 게임은 벌써 족보까지 만들 수 있 을 정도로 육성했고, 심장박동연대기G도 숨은 캐릭터까지 다 찾아가며 엔 딩 봤단 말이야. " " 어? 숨은 캐릭터라면 혹시 이사장? 그거 무진장 어렵던데. 좀 분위기가 좋 아진다 싶으면 이사장 마누라가 자꾸 들이닥쳐서 말이야. " " 그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식하게 공략만 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일단 사장 실 비서와 친해져야 돼. 그럼 마누라가 나타났을때 미리 사장실로 신호를 보내주거든. " " 아차― 그걸 몰랐잖아. 어쩐지 난공불략이다 했어. " " 후후후. 아직 멀었군, 자네. 연애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책상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거야. 경험을 살려야한다고. 경험을. " 연정은 기세 등등하게 웃으며 한껏 고수로서의 승리감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러고 있기가 무색하게 금새 또 어깨를 늘어뜨린다. 하아. 이런 걸로 기고만장해져서 뭘 어쩌자는 거지……. " 응? 주연아. 뭐하는 거야? " 연정은 아까부터 내내 조용하던 삼인방의 마지막 여성, 김주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주연은 헤드폰을 낀채 연신 어깨를 떨고 있었 던 것이다. 마치 울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 ……어라? 잠깐. ' 운다고? 연정은 깜짝 놀라며 주연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 주, 주연아. 우는 거야? 얘! " " 무슨 일이야? " 원고작업하던 성은도 깜짝 놀라 주연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이 본 주연 은, 《레이 올드맨! 드디어 해냈습니다! 타이틀을 거머쥔 저 위풍당당한 모습! 피 말리는 접전 속에서 자신의 모든 기력을 짜낸 마지막 다이아몬드 커터! 결국 스타치카 맨의 벨트가 올드맨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올드맨,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울먹이는군요! 15년이 넘도록 레슬링 계에 몸담아 왔으면서도 스포트라이트 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비운의 선수가 드디어 자신의 꿈을 이뤄냈습니다!》 《스타치카맨, 올드맨에게 직접 벨트를 건내줍니다! 서로 피땀 흘리며 싸운 선수들의 뜨거운 포옹!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에요!》 " ……. " 주연은 자신의 데스크 컴퓨터에서 레슬링을 틀어놓은채 훌쩍이고 있었다. 컴퓨터의 모니터에서는 땀범벅이된 두 선수들이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같이 챔피언 벨트를 들어올린다. 그런 주연의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연 정과 성은은 조용히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저번에 주연이가 채영 치프에게서 뭔가를 빌려간다 싶더니 바로 저거였구만……. ' 내가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좀 더 진지하게 일해주면 안될까. ' 연정은 새삼 자신의 근무태도를 반성하며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이런 기 분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집중할 수 있을때 집중하는 편이 좋 을 것 같았다. 일단 미뤄오던 데이터 베이스부터 정리해보도록 할까. " 음? " 그때 그녀의 모니터로 한 영상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것은 언더 시티의 감 시 시스템이 보내오는 자동 감지 영상이었다. 언더 시티에는 구역별로 다섯 대 이상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카메라는 시간대 별로 등록 되어있지 않은 외부인이 포착되면 자동으로 경보 시스템이 울리도록 설정되 어 있었다. 연정은 안색을 굳히며 재빨리 영상에 잡힌 인물의 신상명세를 살펴보았다. 야간 시간대에 등록되어있지 않은 인물일지라도 피스메이커 내에 ID를 가진 관계자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정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곧 영상에는 감시 시스템이 조회 한 인물의 ID가 떠올랐다. ID는 팔라딘 소속인 천요원이라는 대원의 것이 었다. " 하아……. 십년감수했네. 난 또 누구라고. " 연정은 긴장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연태까지 외부 로부터의 잠입 전례가 없었던 만큼 이번과 같은 감시 시스템의 발동은 충 분히 그녀를 놀라게 했다. 정말이지……봐달라고, 이런 건. " 왜 그래? 귀신이라도 봤어? " " 귀신은 무슨.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 성은의 물음에 연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젓다가 곧 고개를 갸우뚱했 다. 그리고 다시 영상을 돌아본다. 모니터에 비친 영상에서는 어느샌가 요 원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벌써 다른 곳으로 가버린걸까. ' 하지만……이런 시각에 어째서……. 피스 옐로우의 SG가 예정에도 없이 이렇게 언더 시티로 올 이유가 없는데. ' 알 수 없는 의혹. 그러나 연정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뭐, 고참들 심부름 때문에 들린걸 지도 모르고……. 천요원은 팔라딘 대원들 중 유일한 여성 대원이라고 하니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타 부서의 일에 섣불리 끼어 들었다간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 그건 지금까지의 경험상 잘 알고 있지 않 은가? ' 에이― 모르겠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 연정은 입맛을 다시며 모니터에 뜬 감시 창을 지워버렸다. 그렇게 언더 시티로의 첫 외부 침입은 시작되고 있었다. " 피스메이커는 대체……뭘 꾸미는 겁니까? " 유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닥터와 시더가 풀어준 의문은 그녀에게 한 층 더 커다란 의문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차원 이동의 비밀을 품은 오라의 주인. 그리고 정체 불명의 지하도시 옴팔로스. 피스메이커와 몬스터는 이 두 가지를 이용해 무엇을 이루려는 걸까? 닥터는 그런 유화를 조용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 글쎄요. 다만 옴팔로스가 서울의 지하에 있었기에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는 사항들이 있습니다. 일단 한국 지부가 가장 많은 수의 오라 능력자들 을 보유한 이유. 그리고 몬스터들의 5대 간부가 점점 서울로 모여드는 이 유. 성당 기사단이 한국 지부의 진 사령관에게 피스메이커의 총 사령관 직 을 내준 이유. 이런 것들이 다 옴팔로스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이 어떤 힘을 가지는지는 미지수지만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이렇듯 세계가 좌지우지 되고 있으니. 그리고 오라의 주인이 통일 한국의 오라 능력자에게서 나타난 이유. 이것 이 가장 큰 옴팔로스의 힘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진 사령관은 북경에서 가 인 군이 가이아 애드번트 이펙트를 일으킨 이후 줄곧 그의 행동반경을 옴 팔로스로 한정시켜왔습니다. 그건 어쩌면 가인 군을 옴팔로스의 힘으로 완 전히 각성시키기 위한 의식이 아니었을까요? " " 의식이라고요? " " 실제로 가이아를 벗어난 오라 능력자들은 그 능력이 감쇄되는 경향을 보 이기도 합니다. 수도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무력감을 느끼고 피곤함을 느끼죠. 이것만 봐도 오라 능력자가 크든 작든 가이아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가이아의 중심인 옴팔로스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이곳은 오라의 주인이 태어나기에는 충분한 모태(母胎)에요. " 모태……! 유화는 그것이야말로 옴팔로스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했 다. 가이아라는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모신(地母神)의 이름. 그 여신 의 배꼽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생명의 입구이지 않은가? ' 하지만……과연 모태일 뿐인걸까, 옴팔로스는? ' 시더는 조용히 입을 다문채 생각에 잠겼다. 닥터가 그에게 허용된 정보만으 로 저기까지 상황을 파악해낸 것은 솔직히 뜻밖이었다.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여기서는 말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진 사령관이 닥터에게 비 밀로 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테니까. 시더는 닥터의 말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 오라 능력자의 의식 구현화는……그 능력자의 의식에서 한정되는 것이 아 닐 거야. 그런 사유(私有) 형식이라면 굳이 가이아의 영향을 받을 이유도 없겠지. ' 그렇다면, ' 오라 능력자는 가이아의 의식과 접속함으로서 그 힘을 자신의 의식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걸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오라 능력자 특유의 정신 감응 력도 설명이 가능해. 그리고 차원 진동을 현현하는 오라의 주인이라면 그 감응력도 여타의 능력자들과 차원을 달리할터. ' 결국, ' 결국 그것을 위한 터미널(Terminal)인가……. 내가 만든 머신 아더는? ' 시더는 밀려드는 자괴감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새삼 깨달았다고는 하지 않겠 다.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다만……이 운명을 이끌고 나갈 사람이 유가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그 소년을 이토록 좋아하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자신은. ' 가이아와 의식을 공유하게된 지금의 가인이라면 충분히 혼자만의 힘으로 머신 아더를 움직일 수 있을거야. 더구나 요르문간드까지 제거한 지금, 방 해받을 요소는 모두 사라졌어. 조만간 할 생각인가, 진 사령관은? ' 그가 성당 기사단의 아포스톨로스인 이상 비숍의 말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시더가 본 진 사령관은 뭔가 성당기사단과 다른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만약 단순한 성당기사단의 대리인이라면 시폰 뤼멘과 그렇게 대립을 할 이유도 없 었고 머신 아더의 제작을 비숍에게 숨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시더는 오직 그 하나에만 희망을 걸며 마음을 졸였다. 부디 진사령관의 의 도가 가인에게 해가 되지 않기를. 가인이 위험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간절히 바랐다. " 자, 궁금증은 어느 정도 풀리셨습니까? 그럼 이제 저희 쪽에서 주 선생님 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로군요. " 닥터는 기다렸다는듯 신중하게 말했다. " 저번 회의에서 주 선생님은 레드 브라더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오라 능 력자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화이트 파우더 였었죠. 하지만 알다시피 화이트 파우더만으로 오라 능력을 재현해내기란 무리입니다. " 그 다음말은 시더가 받았다. " 맞아.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에게는 생체 내의 초전도 현상을 억제할 정신 감응력이 없으니까. 그래서 주유화, 당신이 말했지. 후천적인 오라 능력 의 개발이 불가능하다면 애초부터 만들어진 오라 능력자, " 피스 알리자과 피스 푸르푸린은, " 레드 브라더스는 오라 능력자의 세포를 이용한 복제인간들일지도 모른다고. " 그 말에 사무실의 분위기가 한순간 싸해졌다. 이미 한달 전부터 유화에게 들 어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새삼 언급하게 되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복제인 간은 인간복제금지협정이 맺어지는 등 2033년 오늘까지 문제시 되고 있는 비윤 리적 기술이었다. 물론 이건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고 그 뒷면에는 조직 공학이 나 재생 기술, 심지어는 고위 관료 층의 생명 연장을 위한 연구로도 인간 복제 는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닌 것이다. 다만 시더가 이렇게 분노하는 것은, 그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이 오라 능력자에게도 행해졌다는 점에 있었다. 닥터도 내심 편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 오라 능력자를 복제한다, 라. 오라 능력의 비밀을 밝히는데 혈안이 된 그들 이라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발상입니다. 지금껏 케루빔에서 그런 움직임 이 없었기에 눈치를 못챘을 뿐이지. 겉으로는 케루빔에게 오라 능력의 외적 요인을 연구시키며, 뒷편으로는 오라 능력자를 배양하는 연구를 해왔던 거 에요. " " 만약 그 더러운 연구의 산물이 레드 브라더스라면, 이건 성당 기사단의 덜 미를 붙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 " 최소한 현존하는 오라 능력자들만큼은 지켜낼 수 있겠죠. " 닥터와 시더는 서로를 바라보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 능력자를 성 당기사단의 손으로부터 지켜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모인 이유이며 목 적이었다. 그런만큼 레드 브라더스의 정체를 파해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 요했다. " 주 선생님. 그들이 누군가의 복제인간이라면 그 DNA에는 오리지널의 정보 가 담겨있을 겁니다. 그 정보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라 능력자들의 정보 와 대조해보면 금새 레드 브라더스의 DNA 도너(donor)를 찾을 수 있을 거 에요. " " 이 한달간 그들의 DNA를 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구해온 거야? 구 해왔겠지? " 닥터와 시더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며 유화를 직시했다. 그 시선을 받은 유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구하지 못했어요. " " 에에? 어째서―? " 시더는 노골적으로 불신감을 드러냈다. 아니. 언제나 레드 브라더스의 상 태를 체크하는 주치의가 DNA를 구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그건 말이 안되었 다. DNA를 채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떨어진 머리카락에서 추출해낼 수 있고, 검사를 핑계삼아 뽑아낸 혈액에서도 추출해낼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못했다고? 유화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 그때 봤잖아요? 피스 알리자린, 그 아이가 인공 팔을 이식하면서도 우 리를 감시하고 있던 거. 수술 뒤의 혈액도 그 아이가 직접 처분했으니 말 다했죠. 아마 시폰 뤼멘의 지시일 거에요. 자신의 정보를 외부로 노 출시키지 말라는……. " "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기회는, " " 피스 알리자린은 순간 예지능력자에요. 몇번이고 저도 시도해봤지만 사 전에 제 행동을 눈치채버려서 손도 댈 수 없었어요. 무리해서 채취하려 했다간 되레 의심만 받게 될 거에요. " 닥터와 시더는 할 말을 잊었다. 의외로 쉽게 풀려나간다 했더니 이런 난관 에 부딪힐 줄이야……. 닥터는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 그렇다면 동생 쪽은? 피스 푸르푸린의 시신에서 채취하는 방법도 있지 않 습니까? 분명 간단한 부검이라도 했을테니 샘플을 얻는 것쯤이야……, " " 부검도……할 수 없었어요.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 유화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가를 가렸다. " 그람드링……. 그 아이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에요. " 《그람. 사정이 생겼다. 한동안 너 혼자서 지내야 할 것 같구나. 잘 해낼 수 있겠지? 적당히 유다의 비위를 맞춰주며 생활하도록 해. 내 일이 끝 나면 조만간 데리러가겠다.》 삑 《그람. 사정이 생겼다. 한동안 너 혼자서 지내야 할 것 같구나. 잘 해낼 수 있겠지? 적당히 유다의 비위를 맞춰주며 생활하도록 해. 내 일이 끝 나면 조만간 데리러가겠다.》 삑 《그람. 사정이 생겼다. 한동안 너 혼자서 지내야 할 것 같구나. 잘 해낼 수 있겠지? 적당히 유다의 비위를 맞춰주며 생활하도록 해. 내 일이 끝 나면 조만간 데리러가겠다.》 어두운 방안에서 스크린의 영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영상에는 미국 지부 피 스메이커의 사령관이자 지금은 한국 지부에서 모습을 감춘 시폰 뤼멘이 나타 나 있었다. 아마도 전화로 온 영상을 녹음해둔 모양이다. 그렇게 무한 반복되는 영상을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그람드링 뤼멘. 시폰 뤼멘의 양아들이자 피스 알리자린이라는 코드 네임을 가진 소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영상 속의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주위를 두리 번거렸다. 그리고 곧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한 소년을 발견해낸다. 그러자 무 표정했던 그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올랐다. " 어이∼ 크리스. 네가 좋아하는 꼰대의 얼굴이라고. 봐. 봐. 한동안 보지 못하게 될까봐 내가 미리 녹화해뒀지. " 그는 자신의 쌍둥이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히 돌아올리가 없지. 그의 동생인 오르크리스트 뤼멘은 한달 전의 전투 에서 사망했으니까. 지금 그람드링의 곁에 앉아있는 것은 오르크리스트의 시 체였던 것이다. 부폐가 되지 않도록 몸 속의 모든 혈액을 빼내고 약품 처리 를 한 박제였다. 그람드링은 그렇게 박제가 된 동생을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어루만졌다. " 어때? 이제부터는 질리도록 마스터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좋지? 응? 크 크크. 그래.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이제부터는 네가 마스터를 좋아한다고 티내도 화내지 않을테니까. 형님으로서의 아량을 베풀기로 했거든? 크크 크, 흐흐흐흐. " 그람드링은 키득거리며 다시 영상으로 눈을 돌렸다. 영상을 바라보는 그의 오른쪽 눈은 오른팔과 마찬가지로 복원되어 있었다. 다만 그 눈은 오른팔의 오리하르콘 의수처럼 인공으로 만들어진 의안이 아니었다. 엄연히 도너가 있 는 눈이었다. 바로 동생의 눈, 오르크리스트의 눈이다. ' 이식해! 의안따위는 필요 없어! 크리스의 눈을 내게 이식해! 어서 이식하 란 말이다아아앗―! ' 한달전 수술실에서 동생의 시신을 부여잡고 그람드링은 자신의 상처입은 오 른쪽 눈을 스스로 적출해냈다. 그 모습에 질려버린 유화와 스탭들은 그람드 링의 소원대로 오르크리스트의 오른쪽 눈을 그에게 이식해주는 수밖에 없었 다. 다행히도 쌍둥이의 눈이어서 그런지 수술후의 부작용은 없었지만. 그람드링은 자신의 오른쪽 눈 부위를 쓰다듬으며 영상의 시폰을 노려보았다. " 크크크. 참으로 잘나신 아버님이야. 크리스에 대해서는 일언 반절도 언급 하지 않는군. 한때나마 유용하게 부려먹은 아들이면서. " 그래. 그런 거겠지. 어차피 너라는 인간에게 우리들은 소모품에 불과했겠지. 언제든지 쓰고 버려도 아쉬울게 없는, 그런 도구에 불과했던 거야. 그런……. " 크리스,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응? 마스터란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마스터. 뭐라고 말 좀 해봐. 응? " 그람드링은 동생의 어깨를 흔들며 연신 말을 건넸다. 그러다 곧 어깨를 흔 들며 웃음을 터뜨린다. " 흐흐흐, 흐흐흐흐! 아∼ 그래. 미안. 미안. 깜빡했어. 넌 이제 앞을 못 보지? 잠깐 잊어버렸지 뭐야. 미안해, 크리스. " 그는 동생의 시신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그리고 오르크리스트의 차가 운 뺨에 자신의 뺨을 갖다대며 속삭였다. " 그렇게 슬퍼하지마. 이제는 이 형이 네 몫까지 다 봐줄테니까. " 오라의 주인. 피스 블랙. 마스터 시폰 뤼멘. " 넌 그저 내 눈을 통해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리를 이렇게 만든 녀 석들의 최후를. 놈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줄게. 내가 보게 해줄 게야. " 그러기 위한 이식이었으니까. " 크크, 크크크, 크크크크. " 어두운 방안으로 음산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팔라딘 대의 주둔지는 언더 시티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어차피 팔라딘 대 원들은 의무병이라기 보다는 직업군인에 가까웠기에 다들 언더 시티에 자신들 만의 숙소를 가지고 있었고, 그때문에 주둔지는 무기고를 지키거나 순찰을 하 는 대원들의 간이 숙소로 밖에 사용되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 언더시 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주둔지였던 것이다. 위이이잉 그 주둔지로 한 쌍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더 시티의 무인 렌트카였다. 렌트카가 주둔지의 위병소로 다가오자, 보초를 서던 두 초병들은 재빨리 총구를 겨누며 소리쳤다. "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대장! " " 팔불출! " 알 수 없는 암구호가 오가고, 렌트카의 탑승자가 같은 소속이라는 것을 확인 한 초병들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 누구냐! " " 팔라딘 4소대 소속 천요원 중사입니다. " " 용무는? " " SG임무를 마치고 부대로 귀환하기 위해섭니다. " " 천천히 앞으로! 정지! " 초병들은 렌트카에 타고 있던 요원을 확인한 뒤 저마다 굳어있던 표정을 풀 었다. 초병들 중 요원을 알고 있던 선임은 위병소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 어이, 예쁜이. 웬 일로 이 시각에 복귀냐? 평소라면 집에 가서 자기 바쁠 녀석이. " 예쁜이라는 말에 요원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부대 내에서 하나 뿐인 여 성대원이다 보니 선임들에게는 늘상 이런 대접을 받기 일쑤였던 것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투덜거리며 항의했겠지만……. 오늘의 그녀는 금새 표정을 바꾸며 사근사근하게 답했다. " 부대에 볼 일이 있어서요. 그리고 도움받을 일도 있고. " " 도움? 무슨 도움? " 선임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요원은 손가락을 튕기는 것 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이런 신세 말이죠. " " 억- " 순간, 초병들은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그러기가 잠 시. 경련이 지나간 그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천천히 요원의 곁에 다가와 선다. 초병들의 눈은 어느새인가 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네크로맨시. 사람의 의식을 빼앗는 강령술이 그들의 몸을 지배한 것이다. " 이봐! 무슨 일이야? " 위병소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머지 초병들이 영문을 몰라 달려나왔지만 요 원이 시선 한번 주자 그들도 곧 앞의 초병들과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요원은 렌트카에서 내려 자신의 꼭두각시가 된 초병들을 둘러 보았다. 그리 고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 어이. 이제 나와도 돼. 여기라면 피스메이커의 감시망도 닿지 않아.] 그러자 소리 없이 요원의 그림자로부터 검은 물체가 솟아오른다. 그것은 서 서히 검은 코트를 걸친 흑발의 미남자로 변해갔다. 바로 요르문간드의 화신인 브리트라! 정확히는 브리트라의 육신을 가진 메두사였다. 메두사는 자신의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세차게 코트를 펼쳐들었다. 그러자 그 안으로부터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몬스터들의 5대 간부 중 하나인 리리스였다. 그녀는 붉은 기가 감도는 검은 가죽 옷차림을 한채 등뒤의 검은 날개를 펼쳐 올렸다. " 카이. 여기가 확실한 거겠지? " " 아아. 걱정마. 요 한달간 내가 뭘 했다고 생각해? " 리리스의 물음에 천요원의 몸을 숙주로 삼은 카이 브릿드가 자신만만하게 답 했다. 그는 한달 전 부산역에서 요원의 몸을 빼앗은 이후 줄곧 그녀의 모습으 로 행동해왔다. 그렇게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피스메이커로 잠입한 그는 어렵지 않게 언더 시티의 존재를 발견해냈고, 리리스의 명에 따라 조사에 착 수해왔다. 메두사는 새삼 놀랍다는듯 유레카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 설마 지하에 이런 시설을 만들어놓고 있었다니. 그동안 우리가 발견하지 못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에요. 다른 가이아들은 전부 외부로 노출되어 있었으니 까. " " 우주축(Axis mundi)이 관통하는 지역인 만큼 지대(地帶)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했던 거겠지. 그리고 아까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이 밑으로 모여드는 카르마의 기운이 범상치 않아. 이 밑 어딘가에 인력을 발생시키는 차원 촉 매의 광산이 있을 거야. " 리리스가 동의를 구하듯 카이를 돌아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이 언더 시티에는 지상으로 사출되는 궤도 엘리베이터 외에도 용도 불명의 궤도 엘리베이터들이 있어. 그리고 그 중 나라카를 통해 지하로 내 려가는 루트들이 있지. " " 나락을 통해 심연으로, 라는 건가. 과연 있는 거로군. 타르타로스(Tartaro s) 가. " 리리스의 말에 메두사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2020년 이후로 줄곧 용마인들이 찾아헤맨 세계의 중심. 그 미지의 장소에 드디어 다다른 것이다. 자신들은. 카이도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 어쨌든 내가 조사한 바로는 이 팔라딘 주둔지에도 그 궤도 엘리베이터가 존 재하고 있어. 대대 내라서 감시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지. 다만 궤도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키면 곧바로 경보가 울린다는게 문제지만. " " 상관 없습니다. 입구를 알게된 이상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 니까요. 어차피 이 정도의 카르마 현상이 집약된 장소라면 아스트랄 계의 침 식이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힘을 사용해도 노출되지 않을 거에요. " 메두사는 단호한 의지가 깃든 얼굴로 리리스와 카이를 바라보았다. " 리리스. 카이 브릿드.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용납되 지 않아요. 오늘의 작전을 성공시켜서 그동안 우리들을 속박해온 원로회의 사명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 그리고 리리스에게 명령했다. " 지금 당장 옴팔로스의 열쇠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도록 하세요. 테라가 만든 터미널과 그를 이용하여 가이아와 접속하는 겁니다. " 리리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40 - Ｂy Ｎext Ｎeo =-=-=-=-=-=-=-=-=-=-=-=-=-=-=-=-=-=-=-=-=-=-=-=-=-=-=-=-=-=-=-=-=-=-=-= 고백, 3시간 전. 가인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적한 교실. 한성 고등학교의 2학년 1반 교실이었다. 깨끗하게 닦인 칠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비어있는 책상. 책상. 책상… …. 어디에도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교실에는 가인 혼자만 남아 있었 다.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학교 전체가 텅 비어있는 것 같다. ' 내가 왜 여기에……. ' 가인은 천천히 복도로 걸어나왔다. 역시나 인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 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짙은 노을빛이 건물을 붉게 물들인다. 아늑하다기보 다는 을씨년스러운 모습, 황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가인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 나는 분명……집에서 시민 씨와……. ' 시민 씨와 뒷정리를 하다가 방으로 돌아와……, 그리고 침대에 누운 뒤……. ―가인.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인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낯익은 목소리. 너무나 기다려왔던 목소리! 가인은 자 신이 처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 테레이아! " 테레이아 민체스터! 그녀다! 그녀가 여기 있는 건가! 가인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온 거지? " 어디야! 테레이아―! " 나와! 당장 나와! ' 나와서 나와 얘기해! ' 가인은 정처 없이 복도를 달리며 테레이아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녀 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초조해져만 가는 마음. 가인은 층에 있던 교실들을 모두 둘러보고 복도 끝 계단에 다다랐다. 어디야! 어디야! ' 어디 있는 거야, 테레이아! ' ―여기야, 가인.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느껴졌다. 위다. 위층에서 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인은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인가 전신이 땀으로 젖어있었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테레이아와 만나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여기야, 가인. 옥상인가! 가인은 4층에서 멈춰서려던 것을 그만두고 재빨리 옥상으로 향했다. 이렇게 학교의 계단이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가인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 길을 달리고 또 내달렸다. 쾅 그리고 도착했다. 거세게 옥상의 철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가 인은 새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핏빛처럼 물든 노을. 난관에 쳐 진 철창.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 ……. " 아무리 기다려도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가인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여기가 자신의 꿈 속임을 깨달았다. 그 날 이후로 매번 꾸게 된 꿈. 테레이아와 만나지 못한 그 날로부터 매일같이 꾸게 된……. 언제나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그녀를 찾아헤매는 꿈. 그것을 알면서도 가인은 매번 꿈속에서 테레이아를 찾아헤맸다.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 포기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포기할 수 있을리가……. ' 가인은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가인.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살아 있어서 다행 이야. ' 나 자신마저 나를 포기하고 있을때. 그렇게 모든 것에서부터 도망치려고 했 을때. 그때 포기해주지 않은 사람. 끝까지 나를 믿고 함께 해준 사람. '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얘기하는 것으로 하자. 알았지? ' 바보같으니! 그때 그렇게 그녀와 헤어지는게 아니었어! 좀 더, 좀 더 얘기를! 그녀의 얘 기를 들어줬어야 했던 건데! 그녀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어! 함께 있어줘야 했던건데! ' 어째서 나는 매번! ' 매번 후회하기만 하는 걸까!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거지? 그때 날 바라보던 테레이아의 눈빛, 표정, 행동. 그 모든게 확연히 말하고 있 었잖아? 가지말라고. 제발 함께 있어달라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잖아? 애원하고 있었잖아? ' 그런데 나는, 바보같이 나는, ' 끝내 그녀의 애원을 알아주지 못했다. 다음이면 되겠지, 하며 넘어가고 말았 어. 바보같으니. 다음이란 없는 건데! 가인은 충혈된 눈을 들어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테레이아가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때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전에도. 또 그전에도. 언제나 그녀는 뭔가를 그에게 말하려다가 끝내 미소짓는 것으로 얼버무리곤 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인은 더더욱 자신의 둔감함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 ……! " 그때 노을을 응시하던 가인의 눈으로 낯익은 사람의 인영이 보여왔다. 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확실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저 철창에 기대어 서있는 여인 은, " 테레……이아? " 가인은 신음처럼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여인 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 아니, 내 이름은 테레이아가 아니야. " 붉은 노을빛이 여인의 에메랄드 머리빛을 레몬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레몬빛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가인이 한번도 본적이 없는 차 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인의 등 뒤로 한쌍의 검은 날개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 내 이름은 리리스. 너희들이 몬스터라고 부르는 이들을 이끄는 존재지. " 리리스! 가인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그 이름에 몸을 떨었다. 아니, 그보다도 그녀 가 자신을 몬스터라고 단정짓는 것에 더 놀랐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입 을 통해 듣게되자 막연했던 상황이 현실감을 띄기 시작한 것이다. 가인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 무슨……아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응? 내,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 해봐. "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검은 가죽 옷차림과 녹색의 눈동자. 모든 것이 그가 알고 있던 테레이아와는 달랐다. 그 이질감에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고 눈 앞이 아늑해진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테레이아의 모습. 그가 알고 있던 테레이아가 아닌, 이 전혀 다른 사람같은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이건 테레이아가 아니야. 이런 건……. " 테레이아……, 몬스터라니? 그런 건 거짓말이지? 응? 네가 몬스터일리가 없잖아? " " ……. " " 뭔가가 잘못된게 분명해. 뭔가가……. 테레이아가 몬스터라니. 뭔가가 잘 못됐어! " 그 말에 여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가인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 나는……테레이아가 아니라고 말했지―! " 트트트트트 순간, 학교의 건물이 원인 모를 진동으로 뒤흔들렸다. 가인은 미처 테레이아 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뭐야? 이건! 푸화아악― 테레이아의 발밑이 갑자기 솟아오르며 옥상이 붕괴되었다. 그 난데 없는 재해 에 가인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건물을 반으로 가르며 나타나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은색의 광채가 노을빛에 뒤섞여 황금색으로 물들어 간다. 그리고 그 뒤로 펼 쳐지는 세찬 망토의 펄럭임! 그 망토가 가인에게서 하늘을 빼앗아갔다. 그 무시무시한 위용에 가인은 숨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이건! " 머신, 아더! " 요르문간드와 싸울때 그와 동료들이 탔던 피스메이커의 로봇! 어째서 이 녀석이 여기에! " 유가인, 아니 오라의 주인이라고 하지. " 리리스는 머신 아더의 어깨에 걸터앉아 가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나와의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진실을 알고 싶다면 이제부터 내 지시를 따 르도록 해. " 쿠르르르르 머신 아더의 출현에 학교의 나머지 부분도 붕괴되기 시작했다. 가인은 금이 가는 옥상의 타일에 비명을 지르며 곁에 있는 철창을 움켜잡았다. 그렇게 위 태위태한 가인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리스는 계속 말했다. " 하나, 지금 당장 언더 시티로 달려올 것. 둘, 그때는 이 거인을 함께 대동 해올 것. " " 으으으! " 가인은 필사적으로 철창에 매달려서 이를 악물고 리리스를 노려보았다. 이미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거짓말처럼 그가 매달린 철창을 제외하고 학교의 건 물이 사라져있었다. 철창을 부여잡은 손에서 피가 배여나왔다. 점점 힘이 빠져나간다. " 테레, 이아! " " 셋, 더 이상 날 테레이아라고 부르지 말 것. " 리리스는 안타까운 눈으로 가인을 내려다보았다. " 그럼 심연의 지하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가인. 잠시 후에 봐. " " 으, 으아앗― " 그 비명을 끝으로 가인은 끊어진 철창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 헉! " 가인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방안. 낯익은 풍경.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 꿈이었다. 묘하게 현실감이 있던 꿈. 하지만 허황되기 짝이 없던, " 후……. " 가인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웃기지도 않은 악몽을 꿀 줄이야. 아무 래도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진 모양이다. 난데 없이 머신 아더가 나타나지를 않 나, 언더 시티로 오라고 하지를 않나. 꿈이라는게 원래 생뚱맞기는 했지만 이 건 좀 정도가 심했다. 무엇보다 그런 테레이아의 모습이라니……. " 나도 참. " 가인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트고 옷이고 땀으로 모두 흠뻑 젖어있었다. 이 상태로 다시 잠들기엔 여러모로 무리다. 가인은 축축해진 셔츠를 벗으며 방금 전의 악몽을 떨쳐내기 위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젠장. 어째서 그런 꿈을 꾼거야? " ……? " 그때 셔츠를 쥐고 있던 부위가 검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인을 영문을 몰라 셔츠를 살펴보았다. 뭐가 묻은 거지? " 윽― " 피였다. 가인은 깜짝 놀라 셔츠를 쥐고 있던 손바닥을 살펴보았다. 피는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흐르고 있었다. " 어, 어디서 이런 상처를 입은 거지? " 가인은 당황하며 셔츠로 손바닥을 지혈했다. 손바닥에는 깊게 패인 그물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뭔가를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움켜쥔 모양이다. ' 아. ' 가인은 순간 꿈속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철창에 매달렸던 일을 기억해냈다. 그거……꿈이 아니었어? " 제길!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들고 있던 셔츠를 내팽개쳤다. 그 리고 서둘러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하나 꺼내입었다. 제길! 제길! 제길! ' 꿈이 아니었어. 꿈이 아니었던 거야! ' 꿈 속에서 보았던 테레이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꿈이 아니라고! " 젠장! " 가인은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히며 1층으로 뛰어내려갔다. 그러다 현관으로 나가기 전. 잠시 시민의 방쪽을 살펴보았다. ' 시민 씨와 유리에게…… 알리는 편이 좋을까? ' 테레이아는 그에게 언더 시티로 오라고 말했다. 특별히 혼자서 오라고 한건 아니지만 왠지 다른 이를 대동해서 가는건 내키지가 않았다. 이 시각에 언터 시티로, 그것도 머신 아더를 이끌고 오라니! 불길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위험한 느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 약속했던 사람은……나와 그녀, 둘이었으니까. ' 한달 전 부산역에서 헤어지기 전에 했던 약속. 가인은 그것을 상기시키며 조용히 현관문으로 걸어나왔다. 자고 있을 유리와 시민에게 연신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끼익 그렇게 정원을 지나 대문을 나서던 중, " 어디 가는 거야, 오빠? " 한 목소리가 가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가인은 굳어진 표정으로 천천히 대 문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한 소녀가 담에 기대 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유리야? " 어, 어째서 유리가 이 시간에……. 시민 씨와 같이 자고 있는 거 아니었나? 가인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유리의 시선에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 안 자고 뭐하고 있었어? 밖에는 또 왜 나왔고? " " 그러니까 오빠는? " " 어? 나, 나야 잠도 안오고 해서 잠시 산책이나 하려고……. " " 그래? 그럼 나도 그런 이유라고 해둬. " 유리의 무신경한 대꾸에 가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이유라고 해둬……라 니.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리잖아, 그건? 가인은 유리를 돌려보내기가 힘들어질거 같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아니, 그래도 남자하고 여자는 틀리지……. 이런 밤늦은 시간에 여자애 혼 자서 산책하는 건 좀……. " " 오빠하고 같이 다닐 거야. 그럼 문제 없지? " " 시, 시민 씨가 걱정하지 않을까? 자다가 일어났는데 곁에 유리가 없으면? " " 핸드폰 가지고 나왔어. " " ……. " 바로 할 말 없게 만드는군.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유리의 모습에 가인은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럴 때의 그녀는 정말이지 쇠고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하나……. 가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여기선 강경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 유리야. 지금 오빠가 별로 기분이 좋지 않거든? 그래서 좀 혼자 생각할게 있어서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도록 그냥 들어가주지 않을래? " " ……. " 너무 심했나. 가인은 조용해진 유리의 모습에 미안함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유리를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아. 가인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그렇게 바로 잡 으며 모질게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골목길로 걸어나갔다. 등으로 꽂히는 유리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면서. 그때 잠자코 있던 유리가 입을 열었다. " 오빠 혼자서는 무리야. " " ……뭐? " 가인은 뜨끔해진 기분으로 유리를 돌아보았다. 유리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 오빠 혼자서는 머신 아더를 움직이지 못해. 내가 반드시 필요할 걸? " " ……! " 어떻게 그걸!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 혹시 내 마음을 읽은 거야? " " 난 한번도 오빠 마음 읽은 적 없어! " 유리는 반사적으로 소리치다가 곧 서글퍼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 오빠와 약속했는데……들여다보지 않기로 약속했는데……내가 읽을 리가 없잖아. " 무엇보다 이제는, ' 읽고 싶어도……읽을 수가 없단 말이야. ' 그렇게 유리가 뒷말을 흐리자 가인은 아차하는 심정이었다. 홧김에 한 말이 그녀를 상처입힌 것이다. 분명 유리도 개인적으로 신경 써오던 부분이었을텐 데. 그걸 자신이……. " 미안……. " " 으응. " 가인의 사과에 유리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 ……나도 꿨었어. 테레이아의 꿈. " 그 말에 가인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 뭐? " " 나보고 오빠와 함께 자신을 찾아오랬어. 오빠도 꿈에서 테레이아를 만난 거지? 그래서 지금 언더 시티로 가려는거고. " " 으음……. " 가인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유리의 꿈에서도……나타났다고. 나만 부른게 아니었나? 왜 유리도 함께 부 른거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가인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유리가 재빠르게 말했다. " 머신 아더 때문일 거야. 머신 아더의 동력은 오빠의 오라로 감당한다 치더 라도 정작 거인을 움직이는데 필요한건 내 패턴 핑크잖아? 내가 사념을 덧 씌우지 않는한 머신 아더는 꼼짝할 수 없다고. " 아! 가인은 혀를 찼다. 다급한 마음에 깜빡 잊고 있었지만, 머신 아더는 그 혼자 서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힘을 되찾은 이후 오라의 사용에 여러모로 자신이 붙은 그였지만, 거인에 필요한 오라를 자신이 공급할 수 있 을지는 의문이었다. 하물며 사념파로 거인을 움직이는 것은 더더욱……. 그렇게 가인이 고민에 빠지자 유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말했다. " 분명 그 때문에 테레이아도 날 부른 걸 거야. 그러니까 날 데려가, 오빠. 절대로 방해가 되지 않을게. 응? 응? " " 하지만…… 위험할 거야. 느낌이 좋지 않다고. " " 그럼 그 위험한 데를 오빠 혼자서 가겠다는 소리야! 그걸 내가 지켜보기 만 할 거 같아! " 유리는 답답한 마음에 가인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버럭 소리질렀다. " 만약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기면 오빠는 잠자코 구경만 하겠어? 안 그럴 거 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절대로 오빠 혼자 보내지 않겠어! 나도 함께 갈거 야! " " 유, 유리야……. " " 그리고, " 유리는 가인을 직시한채 단호하게 말했다. " 테레이아는……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 그 말에 가인은 더 이상 유리의 동행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다. 친구. 테레이아는 가인 뿐만 아니라 유리와도 1년이 넘도록 함께 지내온 친구인 것 이다. 진상을 알고 싶은 것은 유리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그것을 막을 권리 는 가인에게 없었다. " 그래……. 같이 가자, 유리야……. " 가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옷자락을 쥔 유리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 우리 둘이서 테레이아와 만나는 거야. " " 응! " 유리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리리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아스트랄 유영을 통해 드림 다이브를 지속하고 있었기에, 영체가 육체로 돌아오자 마비되었던 오감들도 되돌아왔다. 밑에서부터 위로 불어오는 강풍에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린다. 리리스는 그 바람을 얼굴로 받으며 몽롱한 정신을 수습했다. " 접속에 성공했나요? " 뒤에서부터 메두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리스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바 람이 불어오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거대한 원홀이 펼쳐져 있었다. 밑 도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 그 나락의 통로를 그녀들은 내려가고 있었다. 네 크로맨서 카이 브릿드가 만들어낸 마수 안드레알푸스에 몸을 실은채. " 성공했어. 잠시 후면 이 언더 시티에 도착할 거야. " 돌아보지 않으며 대꾸하는 리리스의 모습에 메두사는 코웃음을 쳤다. 죄책감 이라도 느끼고 있는 걸까. 어리석기는. " 일단 오라의 주인과 교감은 계속 유지하세요. 그가 거인을 끌고 오려면 우 리 쪽의 도움이 필요할테니까요. " " ……알았어. " 리리스는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으며 대꾸했다. 메두사는 그런 리리스의 등 을 잠시 노려보다가 곧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곳에는 궤도 엘리베이터에서부 터 자신들이 내려왔던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그들은 피스메이커의 보안 시스 템을 피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키는 대신 이렇듯 수동으로 내려오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어차피 어둠과 동화하는 힘을 지닌 브리트라의 스피시픽 어빌리티라면 궤도 엘리베이터를 건드리지 않고 그 통로로 진입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 리고 그 방법이 있었기에 지금껏 요원의 ID로 통과할 수 없는 지역들도 통과 해 올 수 있었고. 메두사는 자신의 옆에서 마수를 조종하는 카이에게 물었다. "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습니까? 꽤나 긴 시간동안 내려온 것 같은데. " [ 타르타로스는 지상에서 떨어뜨린 철판이 9일 낮 9일 밤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래잖아. 적어도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까지는 내려가야할걸.] " 그럼 속력을 늘리면? " [ 이 이상 어떻게 빨리 가라는 거야! 피스메이커의 궤도 엘리베이터를 사용하 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는 이게 한계야.] 카이는 속 편한 메두사의 말에 잔뜩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때 밑을 내려다보던 리리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 아니. 꼭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은데. " " ……? " 메두사와 카이는 영문을 몰라 밑을 내려다 보았다. 그 순간, 그들의 앞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 우왓! 뭐야, 이건!] 카이가 놀라자 그가 네크로맨시로 조종하던 마수도 덩달아 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메두사는 개의치 않으며 눈 앞의 광경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전경. 그것은 거대한 돌로 조각해낸듯한 거인들의 형상들이었다. 돌거인들은 저마 다 부조처럼 홀의 벽에 파묻혀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캄보디아의 앙코르 톰(Angkor Thom)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거신상을 닮아 있었다. 오오오오오 일행은 거인들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그 40미터가 육박할듯한 크기에 압도당 했다. 그들이 탄 마수가 바람을 가르며 파공성을 냈지만 그 소리가 마치 무표 정한 거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카이는 소름이 끼친다는듯 거신상들을 바라보았다. [ 기분……나빠. 이것들은 대체 뭐야?] 마치, 마치 시체같은……. [ 꼭 공동묘지에 온 것 같잖아?] 거인들의 모습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밑으로 내려갈수록 벽에 파묻힌 거인들 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어떤 곳은 기이한 형상으로 뒤틀린 거인들이 서로 뒤엉켜서 분간도 할 수 없을만큼 가득찬 곳도 있었다. 그것은 카타콤(Catacomb)이라기 보다는 홀로코스트(Holocaust)에 가까운 모 습이었다. " 여기가……타르타로스. " 리리스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계속되는 거신상들의 행렬을 노려보았다. " 기간테스(Gigantes)의 고향이자 세계의 의지가 시작되는 곳. " 옴팔로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41 - Ｂy Ｎext Ｎeo =-=-=-=-=-=-=-=-=-=-=-=-=-=-=-=-=-=-=-=-=-=-=-=-=-=-=-=-=-=-=-=-=-=-=-= 고백, 2시간 전. " 내 이럴 줄 알았지! " 피스 오퍼레이터 팀의 치프 윤채영은 어이가 없다는듯 눈 앞의 부하들을 노 려보았다. 그 불꽃이라도 튀어나올것 같은 눈초리에 삼인방들은 그저 찍소리 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설마 이렇게 불시에 작전 본부실을 찾아올 줄이야……. " 몬스터들의 습격이 뜸하다고 해도 그렇지. 벌써 한달 전에 있었던 일들을 다 잊어버렸단 말이야? 내가 매번 뭐라고 말했어! " " 주의 또 주의. " " 그리고! " " ……불철주야 분골쇄신. " 채영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대답하는 삼인방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져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기 그지 없던 작전 본부실이 채영의 등장으로 인해 한순간 단테스 피크(Dante's peak)가 되어버렸다. 채영은 삼인방들을 하나 하나 쏘아보며 본격적으로 설교에 들어갔다. " 김성은! 내가 뭐라고 말했지? 취미활동을 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게 업무 에 지장을 줘선 안된댔지! 대체 근무 중에 동인지 원고를 해대는 오퍼레이 터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다는 거야? 그것도 다름 아닌 이 피스메이커에서! " " ……. " 성은은 슬그머니 책상 위의 타블렛을 등 뒤로 숨기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김주연! 휴일에 그토록 할 일이 없다고 징징거려서 아끼던 비장의 머슬매 니아 챔피언쉽을 빌려줬더니만 그걸 근무 시간에 봐? 남의 호의를 저버려 도 유분수지! 아니, 이건 레슬링에 대한 배신이고 모독이다. 레이 올드맨 의 노력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 레이 올드맨이라면 아까 챔피온 벨트를 끌어안고 울던 그……. 주연은 그 때의 여운이 떠올랐는지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흐뭇한 미소를 머 금었다. 그 모습에서는 조금도 반성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채영은 그런 두 명의 태도에 한숨을 쉬며 마지막 한 명을 돌아보았다. " 그리고 윤연정! " " 예! 여기 그동안 정리해왔던 데이터 베이스 대령입니다! " " ……. " 부르기가 무섭게 자신의 테스크 컴퓨터를 가리키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연정. 그나마 삼인방들 중 자신이 가장 직무에 충실했다고 어필이라도 하려는듯한 태도다. 채영은 그런 연정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 네 녀석은 꼬리 자르는 도마뱀이냐……. " " 그저 열심히 한 것 뿐이잖아요, 치프∼ " 연정은 억울하다는듯 과장되게 울상지었다. 하지만 이 자리의 모두는 그 '열 심히' 라는 것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열심히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 혼자 살아보겠다와 자력갱생(自力更生)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 다. 어쨌든 채영은 다시 설교 모드로 돌아갔다. " 네 녀석들에게는 피스메이커로서의 자각이 부족해. 아무리 현장에서 뛰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몬스터와의 싸우는 사람들이다. 직접 피를 흘리지는 않을지언정 우리가 실수함으로서 현장의 피스 대원들이 피를 흘 리게 되는 거야. 그걸 알고서도 이렇게 방만하게 근무할 수 있겠어? 그런 우리들에게 피스 대원들이 안심하고 등을 맡길 수 있겠냐고! " " ……맡길 수 없습니다. " 삼인방은 잔뜩 주눅이 들어 힘없이 답했다. 채영은 계속 소리치는 것이 힘들 었는지 자신의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 그런 이유로 오늘 하루는 내가 너희들과 같이 밤을 새며 근무해주마. 진정 한 직업 자세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조교해줄테니까 다들 각오해두라고. " " 에엑― " 삼인방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같이 밤을 샌다고? 내일 아침까지? 채영은 그녀들의 비명에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보았다. " 불만 있어? " " ……아, 아뇨. 하지만 굳이 치프까지 밤을 새실 필요는……. " " 그래요. 그런다고 해서 야근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 " 무엇보다 다음 날 근무에 지장이 생기면 저희들이 곤란해진다고요. 치프는 내일 아침도 근무하잖아요? " 연정과 성은, 주연은 필사적으로 웃는 낯을 유지하며 채영을 돌려보내기 위 해 애썼다. 분명 치프의 성격 상 같이 야간 근무를 서게 되면 자신들을 한 잠 도 재우지 않을게 분명했다. 사실 야간 근무라는게 말이 야간 근무지 완전히 밤을 새며 근무하는 것은 아니다. 순번을 정해서 중간에 번갈아가며 요령껏 잠을 취해 줘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채영이 같이 근무를 서게되면 한숨도 재 우지 않고 자신들을 F.M(Filed manual)으로 근무세울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게임도 하지 못할테고 인터넷도 하지 못하고 DVD 시청도 하지 못하고 만화 원 고 작업은 더더욱……. ' 아, 안돼. 최악이다! ' 삼인방은 창백해진 표정으로 머리를 감쌌다. 느슨하게 근무했던 것은 반성하 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성실하게 근무할 만큼 그녀들이 행동파인 것 은 아니었다. 애당초 그런 행동력이 있었더라면 이런 상황에 처할 이유도 없 는 것이다. 채영은 자기를 보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듯 모니터링에 들어갔다. " 자자. 일단 네 녀석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었는지 체크해볼까. 내가 오기 전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겠지? " " ……예에. 그럼은요. " " 그럼은요는 무슨. 한창 여가 생활 즐기시느라 바쁘셨던 분들이. " " ……. " 삼인방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텄어. 이미 눌러앉을 생각이야, 이 사람은. 밤새도록 우릴 괴롭힐 심보라고! 아아∼ 이대로 철야 확정이란 말인가. ' 아, 그러고 보니. ' 연정은 채영이 오기 전 감시 시스템에 걸렸던 한 팔라딘 대원이 있었음을 기 억해냈다. 하지만 그다지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고. 신원도 확실한데……. ' 굳이 보고를 해서 불난집에 기름을 부울 필요야 없지. ' 연정은 채영의 원성을 또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잠정적으로 이 건 에 대해서 침묵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모 정당의 간판 멘트도 있지 않은가? 검찰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도 아 니니 이 정도는 눈 감아주도록 하자. 제발 눈 감아 달라고! " 어라? 뭐야, 이건? " 그때 모니터링을 하던 채영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그 모습 에 연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채영의 데스크 모니터에 뜬 것은 다름 아 닌 당일 날의 감시 영상이었던 것이다. 설마 그새 발견해낸 건가―! " 이 사람은……. " 그러나 연정의 걱정과는 달리 모니터에 뜬 영상은 요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영상은 저장된 자료가 아니라 현재 찍히고 있는 라이 브 영상이었다. 천요원 때와 같이, 시스템의 야간 시간대에 등록되어있지 않은 누군가가 무 단으로 언더 시티에 잠입한 것이다. 그리고 감시 시스템에서 조회한 침입자의 ID는, " 피스 블루……유가인? " 채영의 뒤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삼인방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 거렸다. " 이쪽이야, 유리야. " 가인은 AI헬맷의 적외선 시각에 의존하여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야간 조명으로 바뀐 언더 시티를 돌아다니기 위해 사전에 AI슈츠를 착용한게 도움 이 되고 있었다. 유리는 가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 오빠……. 괜찮을까? 아무래도 우리 들켰을 것 같은데. " " 글쎄. 하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경고도 없고. 또 들키지 않도록 궤도 엘리 베이터를 사용해서 들어왔잖아. 궤도 엘리베이터는 우리 뿐만 아니라 간부 급 인물들도 자주 이용하니까 광속 전차 쪽 보단 경계가 허술할 거야. " 물론 그렇다고 해서 궤도 엘리베이터 쪽의 감시 시스템이 완전히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외부의 감시망을 피해 곧장 언더 시티 의 중심부로 도착할 수 있었다. 가인과 유리가 타고온 궤도 엘리베이터는 유 레카의 메인 센터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 아, 잠깐. 조심해, 오빠. " 유리는 앞장 서는 가인의 팔을 잡아 끌며 주의를 줬다. 가인은 긴장된 표정 으로 즉각 유리와 함께 복도의 벽에 몸을 기댔다. " 왜? 또 감시 카메라야? " " 응. 왼쪽 위에 금속구처럼 보이는 거 있지? 이대로 벽에 붙어서 지나가면 문제 없지만 그대로 지나칠 경우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어있어. 잘못 하다간 머신 건에 벌집이 될 거야. " " 뭐― " 가인은 머신 건이라는 말에 기겁을 하며 새삼 전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일 리가 없지. 유리는 마인드 키핑의 부가 능력인 사이코 메트리를 통해 복도에 장치된 트랩들을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체의 잔존 사념을 통해 정보를 읽어들이는 것이기에 가인으로서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유리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가인은 자신이 유리 없이 혼자서 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문해보았다. 아마 십중팔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감시 카메라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같이 오기로 한게 천만다행이지……. " 그나저나 갑자기 왜 이렇게 살벌해지는 거야? 실수로 걸리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떡하려고? " "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지켜야할 물건이라는 거지. 머신 아더라는게. " 가인의 투덜거림에 유리가 냉정히 답했다. 확실히 머신 아더의 격납고에 까워질수록 방어 시스템의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 철저한 보안은 단 순히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로서의 중요성 때문일까 아니면……. 가인은 침울한 눈으로 어두운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왜 테레이아는 자신에게 그런 머신 아더를 끌고 찾아오라 한걸까? 머신 아 더를 어디에 사용하려고? 그리고 왜 이제야, ' 날……불러들인 걸까? ' 그건 나와의 약속 때문일까? 아니면 여전히 날 이용하기 위해서? ' 모르겠어. '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야 하 는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모습들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까지 가 거짓인지. 테레이아 민체스터가 아직도 내 친구인지 아닌지. 그것을 알기 위해 가인은 지금 여기에 와 있었다. 그것을 위해 머신 아더가 필요한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피스메이커에 반하는 행동일지라도! 단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게 있다면, " 유리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넌 이대로……. " " 오빠, 다음 감시 카메라는 오른쪽 위야. " " ……. 가인은 자신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앞장서는 유리의 태도에 작게 한숨을 쉬 었다. 유리가 아무리 자신의 의사로 따라왔다고 해도 가인으로서는 그녀를 자 신의 독단에 끌어들인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유리의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머신 아더의 격납고에 다다르면 다다를 수록 그 죄책감은 커져만 갔다.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기분이다. '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이미 저질러 버린 거야. ' 테레이아의 말대로 이 언더 시티에 왔을 때부터 이미 그는 물러설 수 없게 되 었다. 지금은 후회를 한다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할지 생각하는게 급 선무였다. 가인은 애써 냉정해지려고 노력하며 유리와 함께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머신 아더의 격납고는 가인이 알고 있는한 언더 시티의 지하에 있는 시더의 골방 바 로 옆에 있었다. 아마 격납고 근처의 골방을 시더가 연구실로 사용했던 것일 테지만……. 가인은 최근 머신 아더의 조정과 시뮬레이션을 위해 몇 번 이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작동되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소리나지 않게 밟고 내려가 그들은 격납고의 입구에 다다랐다. " 이걸……어떻게 열어야 하나. " 가인은 격납고의 좌우개폐형 철문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평소라면 소지하고 있는 피스 카드로 가볍게 통과할 수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 그런 짓을 해 버리면 즉각 감시 시스템에 발각될 것이다. 유리는 ID감식기에 손을 대어 사이코메트리를 전개한 후 말했다. " 자동으로 열든 수동으로 열든 지금 시각에는 경보가 울리게 설정되어 있어. 몰래 숨어드는 건 이 이상 무리야. " " 그런가……. 조용히 온 것도 여기까진가. " 가인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문을 노려보았다. 역시 강행돌파를 하는 수 밖에 없나! 가인은 유리를 문에서 떨어지게 한 후 오른손의 헤븐 스매쉬를 뒤로 당 겼다. 천공권으로 문을 부수고 재빠르게 머신 아더에 올라탈 생각이었다. 그리 고 경비들이 몰려들기 전에 궤도 엘리베이터를 작동, 언더 시티의 최하층부로 향한다! " 그럼―! " 가인은 기합을 내지르며 오른 손으로 오라를 끌어모았다. 그러자 헤븐 스매쉬 의 코어가 발광하며 연푸른빛의 토네이도가 모여든다. 지금의 그라면 천공권의 시작점과 끝점을 조종하여 아무런 피해 없이 문만을 소멸시키는게 가능했다. 그래. 아무런 피해도 없이! 삐삐삐삐삐 그러나 막 주먹을 문으로 내찌르려는 순간 가인의 왼손에 찬 무전기에서 신호 음이 울려왔다. 이 난데없는 신호음에 가인은 깜짝 놀라 오라를 풀어버렸다. 아니! 어째서 이런 순간에 신호가? ' 자, 작전 본부실― ' 채영 씨인가! 무전기의 액정에는 윤채영이 무전을 보낼때 뜨는 주파수 번호가 떠올라 있었 다. 가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유리를 돌아보았다. " 어, 어떡하지, 유리야? 들켰나? 들킨 거야? " " 그, 글쎄. 감시망에 걸린 것 같지는 않은데……. " 유리도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경보가 울리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확 실히 보안 시스템을 건드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시각에 채 영에게서 무전이 온 걸까? 개인적인 용무로 야밤에 무전을 칠 리가 없는 사람 인데! 가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무전기를 노려보았다. "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 신호음은 도무지 끊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안절부절하던 가인 은 결국 두눈 딱 감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에라, 모르겠다! 《가인 씨? 지금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에요!》 무전이 연결되자마자 대번에 액정으로 채영의 당황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 표정에 확신했다. 우리들……이미 발각되었구나. 가인은 자포자기하며 어설프게 운을 뗐다. " 아니, 저……. 안녕하세요, 채영 씨. 아직 주무시지 않았네요? " 《예? 아, 네에- 아직 잔업이 남아서……. 시,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채영은 얼굴을 붉히며 되레 감사의 인사를 하다가 곧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쌍심지를 돋구었다. 《으흠! 그러는 가인 씨야말로 왜 아직도 주무시지 않고 거기에 있는거죠? 그 것도 머신 아더의 격납고에서!》 " 그, 그게 말이죠……. " 가인은 차마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유리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유리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다는듯 매정하게 등을 돌릴 뿐이었다. 가인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액정의 채영을 내려다보았다. 심호흡도 몇번 해보았다. 자아, 하나 둘. 하나 둘.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채영 씨. 잠깐 저희가 머신 아더를 빌려가면 안될까요? " 《…….》 침묵. 채영은 그 질문에 말 그대로 얼어버렸다. 가인도 웃는 표정에서 얼어버린다.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침묵이 깨지는 순간, 《예에에에에엣―?》 " 죄, 죄송합니다아아앗―! " 가인은 불에 대인 사람처럼 화들짝 자신의 무전기를 꺼버렸다. 워낙에 반사 적으로 저지른 행동이라 자신이 뭘 했는지도 자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꺼진 액정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그는, 곧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해, 해버렸나……. " 삐삐삐삐삐 순간, 다시 울려오는 신호음. 그 신호음이 마치 채영의 포효소리처럼 들려온 것은 그저 가인의 기분 탓일까. 가인은 도무지 무전을 받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유리는 격납고 문의 반대편 벽을 살펴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 마지막 카메라는 천장이 아니라 벽에 있었던 거네. 애초에 문 앞에 사람이 서면 센서가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거야. 이러니 사이코 메트리로도 발견할 수가 없지. " 사이코메트리는 물질적 대상을 시발점으로 하는 투시 능력인 만큼 그 물질의 객관적인 상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유리는 방금전까지 작동되는 물건에 한해서 사이코메트리를 행하고 있었기에 센서에 따라 작동되는 카메라는 대상 외의 물건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뜻밖의 곳에서 사이코메트리의 맹점을 찔 렸다고 할까. 하지만 그런 설명도 가인에게는 별 다른 위로가 되지 못했다. 제발 일이 터 지기 전에 미리 미리 알려달라고, 그런 건! 가인은 어쩔 수 없다는듯 헤븐 스매쉬를 들어올렸다. " 제길. 속전속결이다, 유리야! " 오오오오오 아까부터 귀곡성이 멈추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바람 소리일 거라 생 각했지만 소리는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카이는 옴팔로스 의 밑바닥에 안드레알푸스를 착지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생각보다 깊지는 않아서 다행이군. 한참을 내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 그만큼 테라의 지하 도시가 깊었던 거겠죠. 해양의 경우 모호면 위에 위치 하는 지각 두께가 약 5킬로미터 정도라고 하니 딱 그 정도인가? " 메두사는 자신의 펄럭이는 코트를 가누며 마수에서 뛰어내려왔다. 대충 지표 에서 35킬로미터 깊이까지 내려왔건만 여전히 충분한 양의 공기와 바람이 존 재하고 있었다. 거기다 별다른 온도 변화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메두사 는 실체가 없는 현현체이기에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인간의 몸을 빌 린 카이는 이 기묘한 장소에 민감히 반응했다. [ 그래도 이상해, 여기. 지하 내부에 들어왔건만 조금도 온도 변화가 없어. 맨 틀에 근접한 위치일테니 최소 800도까지는 올라가야 할텐데.] " 증온율이라는 건가요? 어차피 들어가보지도 않고 지진파의 속력과 지하 압 력으로 추측한 결과일 뿐이에요. 지하에서 깊이 100킬로미터 마다 온도가 3 도씩 올라간다면 맨틀에서는 6000도가 되고, 지구 내핵의 중심부 온도는 20 만도가 되야할텐데 태양의 표면 온도가 6000도인 이상 타당성이 없죠. 차라리 지구 공동(空洞)설이 더 타당성 있지 않아요?] [ 지구 안에 또다른 지구가 있다는 이론 말이야? 하지만 그건 중력 법칙에 위 배된다고. 오리하르콘의 인력을 이탈하는 존재는 타흘룸과 오라 능력자들 뿐 이야. 그 이상으로 카오스 인자가 늘어나면 애초에 물질계가 유지될리 없잖 아.] " 그렇죠. 우스운 이론이죠. 하지만 허구 속에 진실이 있다고 했던가. 실제 로 우리는 이렇게 지구 속 공동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해줄만한 가설이에요. " [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할리 없는 곳. 그게 옴팔로스라는 건가.] 카이는 혀를 차며 안드레알푸스를 창생의 술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토록 찾아헤맨 장소를 간단히 평했다. [ 지옥, 이군.] 이 공동 자체가 거인들의 유골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크 기의 두개골들이 지면을 만들고 그 빗장뼈들이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무엇보 다 하늘. 지하로 막혀있어야할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피의 강과도 같은 그 하늘은 스스로 발광하며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 하늘의 정체가 바로 물질계를 침식한 아스트랄계의 모습이었다. 과도한 카 르마 현상이 불러들인 아스트랄 라인의 파편, 현현된 태고의 존재. 가이아의 의식……이라는 것! 오오오오오 아까부터 계속되었던 귀곡성은 저 아스트랄 라인이 꿈틀거리며 일으키는 영체 의 비명소리들이었다. 결국 이 옴팔로스라는 것은 저 영체의 흐름을 불러들이기 위한 그릇, 아스트랄 렐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아스트랄 렐름을 형성시킬 정 도로 강한 인력을 끌어모은 것은, " ……강이군요. " 은빛의 강. 옴팔로스를 둘러싸듯 거대한 강 줄기들이 원으로 휘몰아치고 있었 다. 그것은 아직 액상(液狀)을 유지하고 있는 오리하르콘 강이었다. 지구의 외 핵에 존재하고 있는 오리하르콘의 분출지! 이 차원 촉매들이 지표 밖의 의식들 과 결합하여 강한 인력을 형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 명계의 강 스틱스(Styx)인가. 여기가 테라 녀석들의 광산이었군. 잘도 가이 아의 유산을 독점해왔어.] " 그 독점의 결과가 이 풍경인 것입니다. 선경(仙境) 엘리시온(Elysion)이 사 라지고 지옥 타르타로스만 남아버렸죠. 물론 이건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겠 지만……. 쌓여내려온 카르마가 옴팔로스를 타락시켰어요. 이래서야 오라의 주인이 나타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요. " 메두사는 황폐해진 옴팔로스가 딱하다는듯 진심으로 유감을 표했다. 그때 잠 자코 의식을 집중하던 리리스가 입을 열었다. " 오라의 주인이 테라의 기가스와 접속했어. 그런데……아무래도 문제가 생 긴 것 같아. 테라의 감시망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 " " 이런. 꽤나 요령이 없는 도련님이네요. 더불어서 손도 많이 가고 말이죠. " 메두사는 씨익 웃으며 카이에게 말했다. " 네크로맨서. 역시 우리 쪽에서 손을 써줘야할 것 같습니다. 제 말대로 보 험에 들어두길 잘했죠? " [ 흥. 어차피 고생하는건 나잖아?] " 잔소리 말고 실행에 옮기세요. 오라의 주인이 기가스와 접촉하기 쉽도록 테라의 감시망을 흔드는 겁니다. " 카이는 투덜거리면서 네크로맨시를 전개했다. 언더 시티에 남겨두고 온 자신 의 보험들을 향해. 위잉위잉위잉위잉 비상경보등 소리가 시끄럽게 귓청을 두드렸다. 채영은 붉게 물든 작전 본부 실에서 메인 스크린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 머신 아더의 레벨 2와 레벨 3, 레벨 4까지의 액세스를 해제한다! 그리고 PET 용액의 공급을 중단해! 애초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우리쪽에서 손을 쓰 는 거야! " 《버스터, 스매셔 기능 정지!》 《엑스칼리버 동결합니다!》 삼인방의 보고를 들으며 채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자신들 쪽에 서 머신 아더를 정지시키려고 해도 외부 조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어디까 지나 머신 아더의 동력원은 탑승한 오라 능력자들의 몫이기에 주 조종은 전 부 내부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스크린에서는 머신 아더의 콕피트에 탑승하는 가인과 유리의 모습이 보였다. 채영은 왜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짓굳은 악 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다. " 궤도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켜! 절대로 머신 아더를 외부에 내보내서는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 《머신 아더의 콕피트 닫혔습니다. 피스 블루와 핑크, 탑승 완료했습니다!》 《머신 아더의 내부에서 강한 정신 감응 발생! 패턴 핑크의 마인드 키핑이 전개됩니다!》 《치, 치프. 이대로 움직일 생각인가봐요!》 삼인방의 보고에 채영은 일순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녀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PET용액도 없이 머신 아더를 움직이다니! 대체 무 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 자살행위다. 저대로 아무런 방비도 없이 데미지를 입었다간 콕피트 안에서 탈진하거나 죽어버린다고! " 사령관 님은……. 사령관 님에게 연락은 어떻게 된 거야? " 《지금 작전 본부실로 오시는 중입니다. 각 부서의 치프들도 호출했습니다.》 채영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 일단 머신 아더의 초기 개발 멤버인 진 사령관과 닥터 웰리스가 오면 무언가 수가 날 것도 같았다.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들이 머신 아 더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채영은 책상에 놓아둔 머신 아더 대응 용 AI헬맷을 썼다. 피스 핑크 이유리 의 운산 능력을 따라갈 자신은 없었지만 미약하나마 이것으로 머신 아더의 조 종에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리가 자신의 개입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시도하는 방법이지만……. ' 어쩔 수 없어. 머신 아더를 멈출 방법은! ' 패턴 핑크의 마인드 키핑이 위일지 내 고속 처리 능력이 위일지, ' 승부다! ' 시냅스(synapses) 싸움에서 져버리면 과부하가 걸린 쪽은 뇌가 타버릴 것이다. 혹은 기억 장애로 평생을 알츠하이머 환자처럼 살아갈테지. 하지만 그것을 각 오하고서라도 채영은 머신 아더에 접속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무모한 시도를 단행하려는 찰나, 위잉위잉위잉위잉 새로운 경보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채영은 놀란 눈으로 다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 《D구역의 4번 궤도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상승, 아니. 하강합니 다! 최하층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뭣! " 최하층이라면! 채영은 움직이는 궤도 엘리베이터에 관한 사항을 재빨리 조사했다. D구역의 4 번이라면 분명 언더 시티 외곽에 위치한 팔라딘 주둔지! 언더 시티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의 장소였다. 그런 곳에 위치한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고 있다고? 하지만 4번 궤도 엘리베이터의 감시 카메라가 켜지는 순간, 채영은 자신의 생 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깨달았다. 팔라딘 주둔지의 궤도 엘리베이터를 움직인 이들. 그들은 다름 아닌 주둔지의 팔라딘 대원들이었던 것이다! 쿠우우우웅 머신 아더가 발을 내딛자 그 진동이 격납고를 뒤흔들었다. 가인은 유리의 의 식과 싱크로 하여 머신 아더의 육체를 움직여냈다. 그 증거로 거인의 몸은 가 인의 패턴 블루와 반응하여 연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좋아. 움직이는 건가! 가인은 자신의 의지대로 따라주는 머신 아더의 움직임에 안도했다. 역시 지난 번의 각성 이후로 가인의 오라는 그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게 발현(app arition) 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최저 250노트의 머신 아더가 그 혼자만의 힘 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지금의 상태라면 오라 클록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 을 정도였다. 문제는 피스메이커의 서포트를 받지 못함으로서 PET용액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괜찮아. 이 정도의 충격이라면……. 충분히 견뎌낼 수 있어! 가인은 콕피트 내에서 유리를 끌어안은채 오라 쉴드를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 만 단순한 오라 쉴드가 아니었다. 차원 진동이 집약된 공간 압축이었다. 이 공 간 압축이 있는한 2차원적 표면파는 위상공간의 비선형 법칙에 따라 그들의 몸 에 닿기도 전에 타원 궤도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PET용액의 사용보다 더 효율적인 충격 보호였다. 그렇게 머신 아더의 동화 상태를 체크하던 가인에게로 유리의 사념이 들려왔 다. ―오빠. 준비는 끝났어? ―응. 출발하자, 유리야! 가인은 힘차게 대답하며 머신 아더의 시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격납고에 는 세 개의 거대한 출구가 있었다. 그 중 우측의 3번 출구는 분명, 지난번 지 상으로 방출되는 궤도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통로였다. 그렇다는 얘기는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1번과 2번,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인데. ―1번이야. 1번쪽 자동승강로의 바인딩(Binding) 각도가 제일 깊어. 유리의 지시에 따라 가인은 거인을 움직여 1번 출구로 향했다. 오랜만의 조종 이라 그런지 아직까지는 영 감이 잡히지를 않고 있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신체 이미지가 한박자 늦게 거인의 수족에서 나타난다고 할까. 그 묘하게 엇갈리는 움직임에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도 했다. 그런 가인의 고생을 눈치챘는지 유리가 말했다. ―약간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줘. 아직 내가 완전히 머신 아더와 동화되 지 않아서 그래. 감각을 주관하는 신경 지도가 정착되지 않아서 그런걸 거 야. ―아, 어쩐지……. 그런데 왜 아직까지 동화하지 않은 거야? ―그게 조금, 신경 쓰이는 구석이 있어서. 유리의 사념이 흐려졌다. 그녀는 자신과 머신 아더의 의식 속으로 개입해오 는 한 이질적인 사념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작전 본부실에서 머신 아더와 접 속하는 채영의 사념이었다. 아마도 머신 아더의 조종권을 빼앗기 위해 침입한 것일테지만……. ' 기다리는 건가. 내가 머신 아더와 완전히 동화되는 틈을 노리고 있는 거야. 일단은 지켜봐야겠어. ' 유리는 행여나 채영이 무모한 짓을 하지 않기를 바라며 가인에게 말했다. ―오빠. 저기봐. 유리의 사념이 가리킨 곳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가인은 작동하지 않는 자동 승강기를 밟고 내려가 천천히 머신 아더를 궤도 엘리베이터에 세웠다. ―어떻게 작동시키지? 역시 오퍼레이터 팀의 도움 없이는 무린가. ―그렇겠지. 수동으로 작동시킬 수도 있겠지만 꽤 시간이 걸릴 거야. 잘못했 다간 순식간에 팔라딘 대원들에게 둘러 싸일걸. ―그건……곤란하지. 가인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머신 아더를 무단으로 움직이고 테레이 아를 만나러 간다지만 더 이상 피스메이커에 피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 물며 같은 대원들끼리 다투는 것은 더더욱 피하고 싶다. ―좋아. 그렇다면! 가인은 기합을 내지르며 머신 아더에 오라를 전개했다. 그러자 머신 아더의 푸른빛이 한층 진해지더니, 곧이어 백플레이트가 부서지듯 열리며 오리하르콘 스래드가 튀어나온다. 외부의 도움 없이 오라 클록을 전개하려고 스래드에 힘 을 실어 억지로 백플레이트를 개방한 것이었다. 그렇게 흘러나온 은빛의 실들은 가인의 오라와 동조하여 천천히 하나의 망토 로 변해갔다. ―오빠, 어떻게 하려고? 유리가 불안해하는 사념으로 묻자 가인은 오히려 그녀에게 되물었다. ―유리야, 궤도 엘리베이터 밑은 비어있겠지? 엘리베이터가 지나가려면 공간 이 있어야하니까. ―응. 아마도……. 한층 더 불안해하는 유리. 그런 유리의 불안은 어김 없이 적중했다. ―그럼 부수고 내려가자! 오라 클록이라면 반중력 비행도 가능할테니 문제 없을 거야! 가인은 그 말과 동시에 오라 클록으로 머신 아더를 감쌌다. 그리고 오라 클 록의 중력장을 조절하여 공간 압축을 형성해낸다. ―잠깐, 오빠! 유리가 뒤늦게 그를 만류했지만, 이미 머신 아더의 거구는 공중으로 떠오르 고 있었다. 그리고, ―간다! 라이징― 머신 아더의 등 뒤로 떠오르는 반중력의 원! ―킥! 투화아아아악 순간 무시무시한 추진력을 등에 업은 거인은 그대로 궤도 엘리베이터를 꿰뚫 고서 나라카에 진입했다. 그 나락의 끝에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 인지도 알지 못한채. Ｔo Ｂe Ｃontinued… =-=-=-=-=-=-=-=-=-=-=-=-=-=-=-=-=-=-=-=-=-=-=-=-=-=-=-=-=-=-=-=-=-=-=-= =-=-=-=-=-=-=-=-=-=-=-=-=-=-=-=-=-=-=-=-=-=-=-=-=-=-=-=-=-=-=-=-=-=-=-= 고백, 1시간 전. " 상황을 보고하라. " 작전 본부실로 온 진 사령관은 한치의 동요 없이 사건의 전말부터 물었다. 그 침착하다 못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채영은 기가 질려 답 했다. 《현재 피스 블루와 피스 핑크가 머신 아더를 탈취, 언더 시티의 최하층부 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작스레 주둔지의 팔라딘 대도 궤도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습니다.》 그 보고에 진 사령관과 함께 달려온 민수정, 닥터와 시더 웰리스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할 말을 잊었다. 간략한 보고에 비해 그 내용이 터무니 없이 심 각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수정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안색까지 붉히며 소리쳤다. " 대체……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윤채영 치프!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당신은 뭘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팔라딘 대의 궤도 엘리베이터 작 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머신 아더를 피스 대원들에게 뺏긴 것은 도저히 납 득할 수 없군요! " 《죄, 죄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확실히 가인 일행이 머신 아더에 타는 것을 막지 못한 건 전적으로 채영의 책임이었다. 무리하게 트랩을 작동시켰더라면, 하다못해 무인 방어 시스템이 라도 작동시켰더라면 머신 아더의 기동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단 지 그 경우, 가인과 유리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채영의 무른 판단이 상황을 이지경으로 악화시킨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채영은 수정의 비난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 자자.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죠. 그보단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부터 생각해봅시다. " 수정과 채영의 사이를 닥터가 중재하고 나섰다. 그의 말에 수정도 힘겹게 고 개를 끄덕인다. 이대로 계속 채영을 야단쳐 봤자 오퍼레이터 팀의 사기만 떨 어질 뿐이다. 수정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 ……일단 팔라딘 대의 돌발 행동에는 이상한 점이 많아요. 그들이 누군가 에게 매수되었다고 해도 이렇듯 무계획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퇴로도 확보해놓지 않았고 마치 우리에게 보란듯이 궤도 엘리베 이터를 작동시키고 있어요. " " 유인책, 이라는 겁니까? " " 그래요. 가인 군과 머신 아더를 조인트 시키기 위한 목적이 크겠죠. 그리 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향하는 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듯한 인상이 들어요. 그렇지 않다면 저런 무모한 퍼포먼스는 말이 안되죠. " 그때 잠자코 수정의 말을 듣고있던 진 사령관이 불쑥 채영에게 말했다. " 4번 궤도 엘리베이터에서 몬스터의 반응은? " 《예? 아……그게, 반응을 체크할 수 없습니다. 언더 시티의 아스트랄 수치 가 우주수의 초전도 탐지를 방해할 정도로 높습니다.》 수정은 진사령관이 질문을 한 의도를 눈치채고 그에게 물었다. " 사령관님은 이게 몬스터의 소행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 가능성을 생각한 것 뿐이다. 지금 팔라딘대가 향하는 최하층부를 노릴만 한 세력은 몬스터와 피스 블랙, 크게 그 둘로 볼 수 있지. 그리고 그들에 게는 각각 사람의 의식을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 있다. " 네크로맨서와 피스 카민! " 하긴! 그렇게 보면 팔라딘대의 이상 행동도 이해가 되는군요! 아귀가 들어 맞아요! " " 그리고 피스 블랙의 경우, 그가 소유하고 있는 기가스가 있으니 특별히 우 리 쪽의 기가스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그러니 적은……. " 몬스터! " 최하층에……머신 아더인 건가요? 그것도 오라의 주인을 포함한? " 수정은 20년 전의 악몽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때의 악몽 을 재현할 모든 조건들이 지금 자신들의 발밑에서 갖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 본부실의 분위기에 시더와 닥터는 말없이 서로를 겹눈질했다. 수정이 언급 한 '최하층'이 옴팔로스와 관계되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 머신 아더와 옴팔로스라. 그러고 보니 기가스라는건 가이아의 자식, 즉 가 이아의 모태인 옴팔로스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군.' 닥터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지난번까지 머신 아더가 단순히 D타입의 요르문간드를 상대하기 위한 결전병기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뭔가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이 있었다. 결전병기가 굳이 인간의 형태를 취할 필요도 없었고 하물며 오라 능력자들을 동력으로 이용하는 불완전성까지 띄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오라 능력자를 위해 개발한 병기가 아니라 머신 아더에 오라 능 력자들을 끼워맞춘듯한 시스템.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병기였다. 그런 닥터의 의문은 피스 블랙이 이끌고 온 기가스 티폰이라는 존재에 의해 어느 정도 해소 되었다. 기가스 티폰은 자체적으로 오라를 생성시켜 활동하는 독립된 하나의 생명체 였다. 거기다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입자가속기나 상전이 엔진의 도 움 없이도 아포칼립스를 생성시킨다. 그런 티폰을 완전체라고 본다면 머신 아더는 미완품. 부족한 부분을 오라 능 력자로 보완하는 불완전체라고 할 수 있었다. ' 어쩌면 피스메이커는 다른 용도로 머신 아더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 그리고 그 용도의 비밀이 지금의 사건을 일으켰다면……. 뭔가 가닥이 잡힐듯도 했다. 오라의 주인과 기가스. 오라의 성지. ' 그리고 붕괴된 LA. ' 이와 비슷한 상황은 20년 전에도 일어났었다? " 머신 아더를 막는게 급선무에요. 시더 양,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 수정의 다급한 질문에 시더는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 그건 무리에요.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의 동결은 가능하지만 머신 아더의 자체 기능은 파일럿들이 내리지 않는한 멈추지 않아요. 유일하게 그것을 제한시켜주는 것이 PET용액이었지만……. " 현재 나라카로 내려간 머신 아더는 PET용액의 공급이 일체 중단된 상태로 움 직이고 있었다. 그걸로 미루어 보아, 가인은 차원 진동을 이용한 공간 압축으 로 제한 시간의 문제를 해결해낸 모양이다. 머신 아더의 결점이 하나 사라졌으니 이건 기뻐해야 할 일인가? " 어쨌든 지금의 우리로선 머신 아더를 막을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거죠. 그 러니까. " 시더는 채영이 쓰고 있던 AI헬맷을 두들긴 후 말했다. " 쓸데 없는 짓은 하지 말길 바래요, 윤채영. 행여나 당신이 머신 아더에 개 입하려 했다간 정신이 나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 《 아, 》 채영은 자신의 의도가 시더에게 들키자 당황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 패턴 핑크의 운산 능력은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라고. 그런 불확실한 방법 에 당신을 잃어버리면 앞으로 있을 머신 아더의 서포트는 어떡하려는 거야? 자신의 실수에 책임을 지려는 자세는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걸 필 요까지는 없어. " " ……! " 그제야 작전 본부실의 모두는 놀란 눈으로 채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얼마 나 위험한 짓을 하려 했던건지 깨달은 것이다. 수정은 자신의 질책이 과했음 을 깨닫고 서둘러 채영에게 사과했다. " 소리친 건 미안해요, 채영 씨. 그러니까 부디 쓸데 없는 생각은 하지 마세 요. 절대로! " 《……예.》 채영은 잠긴 목소리로 힘 없이 답했다. 삼인방은 그런 치프의 모습에 숙연해 져 고개를 숙였다. 나태하게 직무에 임한 자신들이 부끄러웠다. 누구보다 열 심히 일한 사람이 치프이건만……. 닥터는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메인 스크린을 주시했다. " 답답하군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볼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나라카 와 최하층에는 설치된 카메라가 없습니까? " " 지상에서 30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지하에요. 그런 불감 지대에 감시 카메라 를 설치할 리 없잖아요. " 시더의 대답에 모두는 한탄했다. 결국 지하의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채 사태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하는 건가. " 볼 수 없다면 보러가는 수밖에 없겠군. " 하지만 그들의 사령관은 기다리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진사령관 은 결정을 내렸는지 신속하게 명령했다. " 나라카로 피스 대원들을 투입한다. 현재 언더 시티에 거주하고 있는 피스 대원들이 있을 거다. 그들부터 호출해! " " 하여간 역마살이 끼었나! 왜 퇴원하는 당일에만 꼭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 메디컬 센터에서 본부의 호출을 받은 진우는 AI슈츠를 착용하며 한탄했다. 대체 붕대를 푼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작전 투입이란 말인가. 저번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실명한 진우로서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번에는 퇴원 기간이 늘어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 ……이럴 때 미연이가 없으니 다행이지. ' 아마 그녀가 곁에 있었더라면 또 노발대발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진우는 묘한 곳에서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나란 녀석은……. 뼛속까지 잡혀살고 있구만. " 좋아! 쌈박하게 끝내주고 돌아와주지! 퇴원 기념으로 딱인 시츄에이션이 야! " 진우는 기운 차게 소리치며 병실에서 뛰쳐나갔다. 언더 시티의 건축물들은 모두 메인 센터와 연결된 자동 승강로가 존재하기에 그곳을 통해 곧장 메인 센터의 궤도 엘리베이터로 갈 생각이었다. ' 궤도 엘리베이터라……. ' 진우는 사령부의 지령을 되새기며 안색을 굳혔다. 채영이 건네준 정보에 따 르면 현재 유가인과 이유리가 머신 아더를 탈취해 최하층부로 향했고 주둔지 의 팔라딘대도 궤도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내막에는 몬 스터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 나, 참―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녀석? ' 낮에 병문안을 왔던 가인이 떠올랐다. 적어도 그때는 녀석에게 이런 짓을 저 지를 기미가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 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최소한 진 우가 아는 범위 내에서 유가인은 이런 짓을 저지를 녀석은 아니었다. 뭔가 사 정이 있을게 분명하다. " 아, 진우 씨! " 그때 복도를 돌아나오던 그는 성마리와 마주쳤다. 그녀에게도 본부실의 무전 이 갔던 모양이다. 마리는 휠체어를 끌고 다가와 다급하게 소리쳤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가인과 유리가 머신 아더를 탈취했다뇨? " " 글쎄. 지금부터 그걸 물으러 가는 거 아닙니까? 일단 마리 양은 작전 본부 실로 가 있으세요. 그런 몸으로 무리할 생각하지말고. " " 하지만! " 마리는 분한듯 휠체어에서 일어나려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도로 주저앉았다. 역시 아직은 보행에 무리가 있었다. 하물며 전투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무리. 진우는 그런 마리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 일단 저에게 맡겨둬요. 반드시 녀석들을 데려올테니까. 그 동안 마리 양은 녀석들을 어떻게 야단칠지부터 생각해두세요! " " 으음. "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진우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그녀라도 하반신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어쩔 도 리가 없는 것이다. 마리는 힘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 ……부탁드립니다. " " 좋아요! " 진우는 마리의 어깨를 두들기고 그대로 자동 승강로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 을 바라보는 마리의 눈동자는 어딘가 처연한 빛을 띄고 있었다. ' 이번에도……지켜봐야하는 건가. ' 가인, 역시 나는 너에게. '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거야? ' 마리는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다리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다 고 해서 무언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괴감만 깊어질 뿐이다. 한편 진우는 순식간에 승강로를 지나 메인 센터의 궤도 엘리베이터에 다다랐 다. 승강로를 지나오는 동안 가볍게 가속을 사용해보았지만 눈에는 아무런 이 상도 없었다. 저번과 같이 체감 시간을 늘리는 등의 무모한 짓만 하지 않는다 면 의안이 터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 휘우― 그렇게 생각대로 되어준다면 말이지. " 진우는 작게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메인 센터 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엘리베이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진사 령관의 개인 사무실이 있는데, 이 위치 선정만으로도 메인 센터의 궤도 엘리 베이터가 사령관 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진우는 진사령관과 민수정 외에 아무도 이용한 적 없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묘한 긴장감이 그를 엄습해온다. 한번도 내려가본 적이 없는 언더 시티의 최하층부. 지금부터 자신은 그곳으 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진우의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늦었어― " " ……! " 진우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인기척은 느끼지 못했는데! 목소 리는 어두운 복도의 그림자 속에서 들려온 것이다. 누군가가 계단에 주저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진우는 천천히 인상을 찡그렸다. " 같이 내려가야 하는게……너였냐? " " 크크, 크크크크. 내가 상대라서 유감이야? " 계단에 앉아있던 소년, 그람드링 뤼멘은 키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진우에게 혓바닥을 내밀었다. "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자고, 파트너. " 위잉 그와 동시에 궤도 엘리베이터의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옴팔로스로 내려온 리리스 일행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동의 구조를 파악하 는 일이었다. 옴팔로스는 직경이 긴 쪽은 2킬로미터, 짧은 쪽은 1.5킬로미터, 둘레가 5킬로미터나 하는 거대한 타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외곽으로 오리하르콘의 강이 회오리를 치며 돌고 있었고, 그 강에서 솟아오르는 증기가 공동의 벽을 만들어낸다. 마치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을 확대해놓은 듯 한 크기였다. 사람들의 콜로세움이 아닌 거인들의 콜로세움, 그런 느낌이다. 옴팔로스의 외곽 부분에는 지상과 연결된 궤도 엘리베이터의 나라카들이 일 정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었다. 밑에서는 알 수 없겠지만 위에서는 이 나라카 가 정확히 펜타그람(pentagram)의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 나라카로부터 옴팔로스의 중심까지는 거인들의 석상이 뒤엉켜 하나의 미 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어디선가 미노타우르스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 상하지 않을 라비린토스(Labyrinthos)다. 만약 리리스에게 드림 다이브로 구 현시킨 날개가 없었더라면 한참을 저 미궁 속에서 헤맸을 것이다. 리리스는 하늘을 날아 가볍게 옴팔로스의 중심부에 내려서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 여기가……. " 중심부에는 거인들의 손들이 튀어나와 하나의 제단을 형성해내고 있었다. 위 를 올려다보니 허공의 붉은 하늘도 이 장소를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여기다. 여기가 틀림 없었다. 여기가 창조가 시작되는 점. 세계의 의지가 시작되는 장소. " 여기가 세례(Baptism)의 장소로군요. " 리리스의 그림자에서 메두사가 나타나며 그녀의 말을 덧붙였다. 그 바람에 흥이 식었는지 리리스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 카이는? " " 궤도 엘리베이터로 내려온 테라 인들의 부대를 맞이하고 있어요. 또 혹시 나 있을지 모를 습격에 대비해서, " " 카이 혼자에게 떠맡기기 보단 당신도 남아있는 편이 좋지 않아? " " 후후, 그야 그렇죠. 저는 다만……. " 순간 웃고 있던 메두사의 두눈이 붉게 물들었다. " 의식이 치뤄지기 전까지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 갑자기 뻗어나오는 살기에 리리스는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어느 새 인가 다가온 메두사의 새하얀 손길이 리리스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 윽! " " 리리스. 당신은 영악한 여자죠. 상황 판단도 빠르고, 머리도 제법 굴릴줄 알아요. 그런 당신의 간교에 넘어가 초류향도 쿠사나기도 몇번이고 위험 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전 당신을 신용하지 않아요. 아군으로 보지 않죠. " " 으으윽! " 목을 조르는 힘이 한층 강해지자 리리스는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고통스러 워하는 리리스를 바라보며 메두사는 웃고 있었다. 한점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 는 웃음. 그렇기에 진정 무서운 웃음이다. 리리스는 그런 메두사에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비아냥거렸다. " 크……. 이, 이러고서도 잘도, 자신을 자애의 화신이라 칭하는군……. " " 후후. 그 자애(慈愛)가 아니라 그 자애(自愛)거든요. 제 애정은 요르문간 드에 한해서만 베풀어진답니다. 그렇기에 요르문간드에 이빨을 들이댄 당 신, 리리스는 미운 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혔죠. " 거기까지 말하고 메두사는 잡고 있던 리리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리리스 는 볼품없이 땅바닥을 굴러 거칠게 기침했다. " 커헉― 컥! 컥! " "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주의하도록 하세요. 한번만 더 요르문간드의 눈에 거스른다면 바르의 별 취급도 못받을테니까. " " 후, 후후……. 꽤나……무서우셔라. " 리리스는 힘들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메두사의 협박에 비웃음을 흘렸다. 그 러자 메두사의 미소가 한층 짙어진다. " 까불지마. " 퍽 메두사의 구두굽이 가볍게 리리스의 아랫배를 가격하자, 리리스는 인형처럼 허공을 날아 땅바닥에 처박혔다. 호흡이 끊길듯한 충격이었다. 리리스는 입술 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배를 부여잡았다. 고통으로 눈가가 젖어들고 있었다. 역시 테라인의 몸은 약하기 그지 없다. 이 정도의 충격만으로도 자칫하면 죽어버린다. 그렇게 몸을 떠는 리리스에게 메두사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 지금껏 다른 바르의 별들이 널 동격 취급한건 네가 유일하게 옴팔로스의 열쇠와 접촉할 수있는 호문클루스(Homonculous)였기 때문이야. 결코 네가 강해서라거나 무서워서가 아니란 말이다. 알겠어, 밤의 여왕? 기고만장하 지 말라고. "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리리스의 고통이 가라앉았다. 메두사가 복제해둔 리 리스의 상태를 지금의 그녀에게 덮어씌웠던 것이다. 바로 브리트라의 스피시 픽 어빌리티 중 하나인 정보 복제였다. 메두사는 눈물로 얼룩진 리리스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언제 화를 냈냐는듯 미소지었다. "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주세요. 이번 일을 성사시켜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 는 겁니다. " " ……. " 리리스는 말없이 메두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메두사의 말대로 리리스가 바르의 별로 인정받아온 것은 결코 무력이 강해서가 아니었으니까. 드드드드드 그때 미약한 진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이 는 드레이카닉 아이를 가진 메두사였다. 그녀는 옴팔로스의 하늘을 올려다보 며 리리스에게 물었다. " 오는 겁니까? " " ……오고 있어. " 쿠구구구구 한층 더 소리가 강해진다. 그리고 이내는 옴팔로스 자체가 뒤흔들렸다. 이 아스트랄 렐름을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카르마 에너지의 집합체. 그들이 알 고 있는한 이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밖에 없었다. 붉은 하늘이 회오리치고 스틱스 강이 들끓었다. 우주축이 움직인다. 옴팔로스가 울부짖는다! 퍼어어어엉― 그리고 푸른빛의 거인이 나라카를 붕괴시키며 공동에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앗! 가인은 반중력 브레이크를 걸며 필사적으로 머신 아더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애썼다. 충격파를 조절하는 피스 옐로우 한시민이 부재 중이었기에 가인은 머 신 아더의 반중력 비행을 위해 오라 클록으로 공간 압축을 형성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오라 클록이 수축형일때와 확산형일때 현저한 차이를 보인 다는 것에 있었다. 공간 압축에 주력한 수축형 오라 클록은 음속을 뛰어넘지 못했고 게다가 분할하던 조종을 가인 혼자서 떠맡아야 했기에 제대로 된 비행 이 가능할리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시간은 시간대로 잡아먹으면서 머신 아더는 나라카를 파괴하다시피 옴팔로스로 떨어졌다. ―머, 멈춰라! 제발! 가인은 머신 아더의 발밑에 반중력의 원을 생성시키며 최대한 가속도를 줄 이기 위해 애썼다. 초음속에는 못미치는 천음속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혼이 빠져나갈듯한 빠르기였다. 가인은 어느 정도 속력이 줄어들자 전신을 감싼 오라 클록을 걷어내고 머신 아더의 사지를 뻗었다. 콰과과과과과 40 미터가 넘는 거인이 손과 발을 펴자 나라카의 거대한 홀이 비좁게 느껴졌 다. 머신 아더는 그렇게 나라카의 외벽을 긁어대며 사방으로 불꽃을 튀겼다. 다행히도 가인과 머신 아더 사이에는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오감이 차단되어 있었기에 고통은 없었지만, 그 시각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공포를 맛볼 수 있 었다. 터엉 충격으로 벽을 짚고 있던 머신 아더의 오른팔이 바깥쪽으로 부러졌다. 아무 리 오리하르콘이 단단하다지만 관절 부위의 ACR과 세부적인 기계 장치들까지 보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가인은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끼며 이 를 악물었다. 멈춰! 멈춰! 멈춰! 멈춰! ―……! 순간, 외벽이 사라지고 거대한 거신상들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난 데없는 변화에 가인은 당황하며 머신 아더의 몸을 물렸다. ―뭐, 뭐야! 이건! 재빨리 오라 클록을 전개하여 다시 반중력의 원을 발생시켰다. 떨어지는 속력 은 현저하게 줄었지만, 덕분에 주위의 풍경이 확실하게 보여왔다. 그로테스크한 거인들의 부조가 가인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현재 그는 머신 아더와 동화되어 있었기에 특별히 거인들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거인들의 고통스런 표정이나 몸의 뒤틀림이 한층 더 리얼하게 느껴졌다. 단순한 조각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등골이 서늘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파. ―응? 그때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파? 아프다니? ―유리야? 가인은 유리가 속삭이는줄 알고 그녀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리는 이미 머신 아더와 완전히 동화되어버린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대체……. 아파……. 이번에는 한층 더 뚜렷하게 속삭임이 들려왔다. 유리의 목소리같은 것이 아니 었다. 거친 쇳소리가 섞인, 도저히 사람의 음성이라 생각할 수 없는, 그러면서 도 명확한 감정이 실려있는 목소리였다. 바로 고통, 이라고 하는 감정이. 죽여……. ―윽! 다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속삭임이 어디서 들려왔는지 알 수 있었 다. 하지만 가인은 믿을 수 없었다. 속삭임은 일그러진 거신상들의 입에서부 터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죽여. 죽여라. 싫어. 살려줘. 아파. 무서워. 깨닫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쏟아져나오는 거인들의 아우성. 가인은 비명을 지 르며 머신 아더의 손발을 내저었다. 보이는 거신상들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발 로 걷어찼다. 하지만 아우성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오오오오오 보였다. 피로 물든 세상이. 하늘도 땅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 이로 거인들의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로를 물어뜯고 죽이는 싸움. 원시 적이게 그 무엇보다도 처절할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거인들의 피가 대지를 적시고 하늘로 뿌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인들은 싸움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살의에 젖어있으며, 목숨을 구걸하면서도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그 끔찍하다 못해 구역질이 나는 장면에 고개를 돌리던 가인은 대지의 한편 에 서있는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은 마치 방관자인 것처럼 거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입가 에는 저마다 저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인은 그들이 짓는 미소가 그렇게 추악해 보일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를 죽이는 거인들 쪽이 더 고귀해 보였다. 피를 흘리는 그들보다 깨끗한 모양새 로 물러나 있는 인간들 쪽이 더 혐오스럽다. ―그, 그만둬. 뭐야? 어째서 이런게 보이는 거야? 어째서? ―제발……. 보고 싶지 않아. 이런 건 더 이상,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아―! 가인의 사념이 울려퍼지자 눈 앞의 세상이 종이조각처럼 구겨져 사라졌다. 그리고 보인 것은 예의 돌로 된 거신상들의 행렬이었다. 가인은 눈물로 흐려 진 시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상, 환상인가! 고오오오오 미처 환상에 대한 여운을 깨기도 전에 또 다른 난관이 가인에게 들이닥쳤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나라카의 출구가 보이고 있었다. 밝은 저편이 보이고 있다. 최하층에, 도달한 건가! 퍼어어어엉― 순간 머신 아더는 나라카의 출구를 박살내며 밑으로 떨어져내렸다. 그 충돌 에 가인은 영체가 흔들리는 고통을 받으며 간신히 오라 클록을 펼쳐올렸다. 그러자 반중력의 원이 떨어지던 머신 아더를 허공에 고정시킨다. 쿠구구구구 머신 아더가 부수면서 내려온 나라카의 파편들이 연신 밑으로 떨어져내렸다. 하지만 가인은 그것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며 정신을 수습하기에 바빴다. ―어떻게……도착하기는 한 건가……. 가인은 신음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앞에서 보았던 환상의 연속 을 볼 수 있었다. 붉은 하늘. 핏빛 대지. 거기다 늘어진 수 많은 거인들의 시체! ―아, 아니야. 이건, 환상이……아니다? 가인은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오라 클록을 조종하여 천천히 머신 아 더를 하강시켰다. 환상에서 보았던 곳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장소였다. 아까와 같은 죽음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 여기가 언더 시티의 최하층. ' 꿈속에서 테레이아가 말했던 심연의 지하……라는 곳인가? ―이곳 어딘가에 테레이아가……. 가인은 부디 여기가 그녀가 말한 장소이기를 바라며 앞으로 나아갔다. 꽤 넓 은 공동이기에 테레이아 한 사람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더구나 거인들의 뼈와 시체가 복잡하게 널려 있어서 한층 탐색을 어렵게 했다. 발견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아, 그러나 그런 가인의 걱정은 기우였다. 공동의 중앙에 돌출된 제단. 그곳에는 에메랄드 빛의 여인이 보란듯이 그를 향해 서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가 인이 꿈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 ―테, 테레이아……. 가인은 꺼질 것 같은 사념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 지만 그녀의 표정 하나 하나가 확연히 가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테레이아, 그녀는 뭐라고 가인에게 말해오고 있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뚫어져라 그녀의 입술을 주시하던 가인은 곧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는 테레이아가 아니야. 라고― ―으, 으으으윽! 아니야. 아니야. 넌 테레이아야! 한성 고등학교 2학년 1반! 내 옆자리의! ' 가인……날 혼자 두지마. ' 때론 외로움을 타고, ' 날 구해준 보답이에요, 기사님. ' 때론 두근거릴 정도로 예쁘게 웃으며, ' 기다리고 있을게……. ' 때론 비밀스러운 구석도 있는, 내……친구……. ―테레이아아아앗―! 분노에 찬 가인의 사념이 울려퍼지며 머신 아더는 폭발하듯 공동의 제단으 로 날아들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43 - Ｂy Ｎext Ｎeo =-=-=-=-=-=-=-=-=-=-=-=-=-=-=-=-=-=-=-=-=-=-=-=-=-=-=-=-=-=-=-=-=-=-=-= '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가인. ' 왜 그랬어! '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 친구였잖아? '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 살아가라고 말해줬잖아? 그런데 왜! ―왜 배신한 거야? 왜 날 속인 거야? 왜 거짓말을 했지! ―왜! 왜! 왜! 왜! 가인의 격한 감정에 반응한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이 찢어질 것처럼 펄럭이 며 폭발음을 일으켰다. 반중력의 원이 무분별하게 생성되어 연쇄 폭발을 일으 키는 것이었다. 전신을 검푸른빛으로 물들인 거인은 눈 앞에 닥치는 모든 거신상들을 박살내 며 제단으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분노의 질주. 파괴왕의 돌진이다! 반면 거인의 태풍 같은 기세에 맞서는 여인의 몸은 갸날프기 그지 없었다. 맹렬한 강풍에 거칠게 휘날리는 머리카락도. 금새 날아가버릴듯한 가녀린 육 체도. 형체도 없이 바스러질 것 같은 위태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자 신에게 닥쳐오는 거인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노려본다. 그렇게 머신 아더의 손이 여인에게 닿으려는 찰나! 촤촤촤촤촤 제단에 드리워진 수십개의 그림자들로부터 검은 사슬들이 튀어나왔다. 그것 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머신 아더에 휘감겨 반중력 비행을 멈춰세운다. ―크헉! 돌진하던 반동이 되돌아오자 가인은 영체에 충격을 입고 비명을 질렀다. 하 지만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머신 아더를 휘감은 사슬들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를 지면에 끌어당겼다. 투아아앙 ―커, 바닥의 거신상들을 부수며 머신 아더가 지면에 처박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머신 아더가 막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다시 한번 사슬이 그 를 허공으로 띄운 것이다. 그리고 재차 지면으로 끌어당긴다. 투아아아앙 두번째 충돌! 충격으로 머신 아더의 브래스트 아머가 튕겨나갔다. 백플레이 트와 고정된 접합 부위가 박살나버렸다. 계속되는 공격에 가인은 이를 갈며 신음했다. ―크……! 이게 대체, 뒷 말은 이을 수 없었다. 머신 아더의 몸이 다시 한번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 었다. 대체 900톤이나 되는 거인을 자유자재로 농락하는 사슬이라니! 이런 건 말도 안돼! 촤라라라락 다행스럽게도 세 번째 내동댕이치기는 없었다. 대신 이번에는 사슬들이 외벽 의 거신상들과 연결되어 머신 아더의 몸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거인의 양 손과 양 발에서 자유를 빼앗고 그를 허공으로 들어올린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이 같은 모습이었다. 덩달아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조차 원래의 오리하르콘 스래드 상태로 돌아가 바렸다. 연거푸 계속된 기습에 가인의 정신이 흐트러졌다는 증거였다. 가인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머신 아더의 손에 힘을 주었다. ―이까짓 것! 퍽 저항에 돌아온 것은 둔탁한 파쇄음이었다. 미처 거인이 팔을 잡아당기기도 전에 사슬이 살아있는 뱀처럼 거인의 왼팔을 타고 올라가 팔꿈치를 반대 방향 으로 꺽어올린 것이다. 그러자 나라카에서 내려올때 부러진 오른팔과 마찬가 지로 거인의 왼팔은 너무나 맥없이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차례대로 사슬들은, 퍽 퍽 머신 아더의 오른발과 왼발을 부러뜨렸다. ―크으! 가인은 당황했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곤 하지만 머신 아더가 이토록 무력 하게 제압당하다니! 서포트를 받지 못하는 머신 아더가 파워 다운이 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상상을 뛰어넘는 사슬의 구속력 탓이 더 컸다. 이 힘만 주 면 끊어질 것 같은게! 촤르르르륵 머신 아더의 몸을 감싼 사슬들이 회전하며 천천히 지상의 그림자에서 한 인 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영은 거인의 등장과 동시에 몸을 숨기고 있던 메 두사였다. ―너는……! [ 요르문간드의 마지막 화신, 메두사. 당신들에게 자식들을 잃어버린 어머니 입니다. 잘도 제 아이들을 혼내주셨더군요.] 콰지지지직 오리하르콘의 자기 수복과 사슬들의 악력이 부딪히며 듣기 싫은 쇳소리를 울 렸다. 머신 아더를 구속하는 사슬들이 한층 더 강한 힘으로 전신을 조여온다. 메두사는 그렇게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머신 아더를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 겼다. 쿠사나기. 초류향. 파프니르. 레비아탄. 스머그. ' 당신들을 고작 이런 상대에게……. ' 테라의 꼭두각시에게 내 소중한 아이들을―! [ 대가는 죽음이다, 거인. 네 목을 내놔라! 지금 당장―!] 자식들의 원수를 눈앞에 두자 간신히 유지하던 이성이 단숨에 날아가버렸다. 메두사는 맹수처럼 포효하며 머신 아더의 목에 감긴 사슬을 끌어당겼다. 그러 자 머신 아더의 목이 뽑혀나갈 것처럼 늘어난다. 더불어 사슬을 지탱하던 거 신상들도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메두사는 브리트라의 몸을 빌린 아바타였지만 대신 직접 티아마트로부터 힘 을 빌려올 수 있는 정신체였다. 용마인 상태라 하더라도 쿠사나기나 여타의 화신들과는 질적으로 틀린 것이다. [ 죽여주마!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그 찢어진 조각을 테라 놈들의 마당에 뿌려주겠어! 네 놈들의 희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닫게 해주마!] 그걸로는 부족해! 네 녀석의 죽음따위로는, [ 내게서 아이들을 빼앗아간 죄! 갚을 수 없어!] ―으아아아아앗! 콰지지지직 소름끼치는 파육음이 들리며 머신 아더의 목이 뜯겨져나갔다. 오리하르콘 근 육은 찢어지지 않았지만 그 내부의 프레임이 박살난 것이다. 그러자 머신 아 더와 동화되어있던 유리의 사념이 충격으로 자아를 되찾았다. 그대로 거인과 싱크로 된 상태였다면 목이 부러지는 환지통(幻肢痛)에 그녀의 신체마저 타격 을 입었을 것이다. 유리는 비명을 지르며 가인의 사념에 매달렸다. ―오, 오빠! ―유리야! 가인은 유리의 공포를 같이 느끼며 몸을 떨었다. 이렇게 일방적이라니! 이건 요르문간드의 D타입보다 더한 괴물이잖아! 머신 아더의 장갑이 연신 비명을 질 러대고 있었다. 오리하르콘의 자기 수복으로도 사슬의 괴력을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이제 한계다! " 거기까지 해둬, 메두사! " 그때 제단에서 잠자코 있던 리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한창 거인을 짓밟 는데 여념이 없던 메두사가 붉은 안광을 빛내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 지금 나에게 명령하는 겁니까!] " 이성을 되찾으라는 거야! 그정도 했으면 충분하잖아? " [ 웃기지마! 충분하지 못해! 이 정도로는 그들이 받았던 고통의 만분지의 일 에도 미치지 못해!] " 그렇게 멋대로 하다가 마지막 아이마저 잃어버리고 싶어! " [ ―!]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메두사는 머신 아더를 구속하던 사슬을 풀어냈다. 쿠우우웅 지축을 울리며 망신창이가 된 거인이 대지에 쓰러진다. 그것을 미련이 남은 눈으로 바라보던 메두사는 곧 몸을 날려 제단의 리리스에게로 다가갔다. 메두 사는 리리스의 턱을 잡아올리며 미소했다. " 잘도 말하는군요.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리리스. 이 뒤부터는 당신 에게 맡기죠. 당신이 얼마나 공적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보고 싶어졌어요. " " ……당연한 소리하지마. " 리리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머신 아더를 내려다보았다. 목이 사라진 처참한 몰 골의 거인은 죽지도 못하는지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러진 사지를 자기 수 복해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테, 테레이아……! 거인에게서 가인의 것으로 여겨지는 사념이 들려왔다. 그가 언급한 이름에 리 리스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역시 그는 자신을 테레이아 민체스터로 보고 있었 다. 자신의 거짓된 모습. 지금 와서 그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일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진실된 모습을 그가 보아주기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뭘까. 그에게서 테레이아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리리스는 쓸데 없는 감상에 젖어드는 자신을 꾸짖으며 냉정하게 소리쳤다. " 가인! 다시 만나게 되면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기로 약속했었지? 지금이 바 로 그때야! 그 안에 숨어있지말고 나와!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머신 아더의 콕피트가 열리며 그 안에서 두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인과 유리였다. 그들은 저마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몸을 비틀거렸는데, 공 간 압축으로 물리적인 충격은 막아낼 수 있었지만 정신적인 타격까지는 막아 내지 못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머신 아더를 수족처럼 부릴 정도로 강한 정신 동화였다. 그 상태에서 사지가 뜯겨나가는 경험을 했으니 멀쩡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인은 필사적으로 몸을 가누며 리리스를 노려보았다. 유리를 끌어안은 팔이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네 말대로……찾아왔어. " 가인은 치밀어오르는 울분을 참아내며 힘겹게 말했다. "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어째서……어째서 네가 몬스터인 거야? " 어째서, " 우리가…… 이렇게 만나야 하는 거지? 왜? " 눈물이 흘러내렸다. " 우린, 친구잖아? " 그 말에, 그 목소리에, 그 표정에 리리스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도 저히 가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 얼굴을 그대로 계속 보고 있다간 가슴 속에 담아둔 얘기들이 남김없이 터져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머뭇거리는 리리스를 대신하여 메두사가 가인의 질문에 답했다. " 그건 말이죠. 그 친구라는게 애초부터 거짓이기 때문이죠. " " ……! " 가인은 두눈을 부릅 뜨며 메두사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메두사는 비웃음 을 흘렸다. " 당신이 친구라고 믿었던 이 여자는 우리의 동료이자 당신들 인류의 적입니 다. 그런 그녀가 왜 당신에게 접근했을까요? " " 그건, " " 당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라의 주인. 우리의 사명을 이루는데 반드 시 필요한 열쇠. 그것이 당신이기 때문이죠. 잘 생각해보세요. 지금껏 당 신의 주위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그건 단지 우연이었을 뿐일까 요? 인위적인 냄새는 느껴지지 않아요? " 가인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 그만해! 듣고 싶지 않아! " " 그 모든게 이 여자가 꾸민 일이에요. 언제나 당신의 곁에 붙어서 정보를 얻어내고, 기회를 틈타 당신들을 위기에 빠뜨렸죠. 그 모든게 이 여자의 기지 덕분이에요. 든든한 우리의 아군이죠. " 메두사는 리리스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동의를 구했다. " 제 말이 틀렸나요, 리리스? " " ……. " 리리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침묵함으로서 메두사의 말을 인정하 고 있었다. 메두사는 무표정한 리리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소했다. 딱한 아이 같으니. 하지만 동정하지는 않겠어요. 모든 건 애초부터 정해진 일 이었으니까. 리리스, 당신의 소꿉 놀이는 이것으로 끝이야. 휙 그때 잠자코 있던 리리스가 날개를 펼쳐올리며 가인에게로 뛰어내렸다. 그녀 는 서서히 날개를 펄럭이며 가인의 앞으로 내려섰다. 그것을 가인은 허망한 표 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긴 유리도 숨죽여 리리스를 바라본다. " 그말대로야, 가인. " 리리스는 서글프게 웃었다. " 넌 속은 거야. " " ―! " 가인은 유리를 뿌리치고 리리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스위치가 꺼지는 것처럼 의식이 날아갔다. 서로의 몸이 닿는 순간, 리리스의 드림 다이 브가 물리 접촉을 통해 가인의 의식으로 침투한 것이다. 리리스는 자신의 품 에 쓰러지는 가인을 끌어안고 날개를 펼쳐 그를 감싸 안았다. 가인에게 떠밀려 쓰러진 유리는 그 광경을 보고 소리쳤다. " 오빠! " 손대지마! 오빠에게 손대지마, 테레이아! 유리는 그 즉시 마인드 스페이스를 펼쳐 가인에게 개입하려는 리리스를 저지 하려고 했다. 리리스의 능력이 원격감응에 바탕을 둔 정신 조작이라면 유리는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져서는 안된다! 이대로 오빠를 빼앗 길순 없어! ―날 믿어줘. 그때 유리에게로 한 사념이 들려왔다. 리리스의 사념이었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인드 스페이스를 중단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믿어달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 다음 순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리리스의 감정들이 유리에게로 쏟아져 들 어왔다. 너무나 단시간의 의사 소통이었는지라 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리리스가 하려는 일. 그 의도를! ―테레이아, 설마 너……. 유리의 사념에 리리스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마저 자신의 날개 속 으로 끌어들였다. 유리는 무슨 생각에선지 반항도 하지 않으며 그대로 드림 다 이브에 동화되어갔다. 그 모습을 위에서 지켜보던 메두사는 의외라는듯 감탄했다. ' 좀 더 고민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정사정 보지 않는군. ' 역시 밤의 여왕. 스스로의 힘으로 바르의 별에 오른 여성이라는 건가. 우우우우우 리리스가 오라의 주인과 접속하자 기다리던 반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오라의 주인, 유가인의 몸에서부터 기이한 푸른빛이 구현되었다. 그것 은 여느때와 같은 패턴 블루의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인체 내의 초전도 현 상이 폭주라도 하는듯한 반응, 리미터가 해제된 오라의 발현이었다. 오오오오오 다음은 머신 아더였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가인의 정신 감응이 이 오리하르 콘으로 된 거인과 반응하고 있었다. 거인의 전신이 푸른빛으로 둘러싸이며 그 가동기능관절 속에 장착된 100개의 ACR들이 초전도 현상을 증폭시킨다. ―! 순간, 하늘로부터 붉은 섬광이 머신 아더에 내리꽂혔다. 끝없이 상승하는 가 인의 정신 감응과 머신 아더의 초전도 현상이 세계의 의지마저 끌어들일 정도 로 강한 영적 인력을 발생시킨 것이다! 옴팔로스의 붉은 하늘, 물질계로 침식한 아스트랄 라인이 회오리치며 머신 아더를 향해 끌려내려오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오라의 주인이 가진 힘! 그가 열쇠라고 불리우는 이유! 아아아아아― 세계는 그렇게 깨어난다! [ 시, 시작된 건가!] 옴팔로스의 외곽 엘리베이터 부근에 있던 카이는 갑작스레 제단에서 형성되 는 붉은 용권풍에 넋을 빼앗겼다. 예전 피스 그레이가 쿠사나기의 본체를 묶 기 위해 만든 아공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차원 마찰이었다. 저 용권풍 자체가 아스트랄 라인의 파편이자 세계의 흐름! 오라의 주인은 태고의 존재마저 끌어들일 감응력을 가졌단 말인가! " 장관이지 않아요, 네크로맨서? 기가스와 오라의 주인이 만들어낸 저 데우 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 그때 카이의 그림자에서 메두사가 미끄러져 나오며 말을 걸었다. 그녀의 등 장에 카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 리리스는? 그녀는 어떻게 하고 혼자 온 거야?] "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는 순조롭게 작업에 들어갔으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나기만 기다리면 되는 거에요. " 메두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이가 경계를 서고 있던 곳 은 외곽의 궤도 엘리베이터에서 조금 떨어진 거신상의 근처였다. 그 외에도 카이의 네크로맨시에 조종당하는 팔라딘 대원들이 스무 명 남짓 사각 지대에 몸을 숨기고 있다. " 적의 증원군은 없습니까? " [ 아직까지는. 어차피 다섯 개 중 우리와 거인이 두 개의 엘리베이터를 사용 했으니까 온다고 해도 나머지 세 개 중 한 개야.] " 이상하네요. 분명 이대로 가만히 있을 녀석들이 아닐텐데. " 메두사는 의아하다는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허를 찔러 옴팔로스와 오라의 주 인, 기가스를 확보했지만 그 테라의 기관이 대응하는 것치고서는 너무나 굼뜨 기 짝이 없다. 카이는 괜한 걱정이라는듯 손을 내저었다. [ 뭐, 녀석들도 별 수 없는 거겠지. 이 상황에서 우리를 막을 방법이라고는 그 놈의 오라 능력자들을 투입하거나 물량 공세 밖에 없을텐데. 더구나 아직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고 말이야. 그만큼 우리의 기습이 멋들어지게 성 공한 거라고.] "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 메두사는 뒷말을 늘어뜨리며 궤도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나라카를 올려다 보 았다. 그리고 곧 빙그레 미소짓는다. " ……뜻대로 되어주진 않을 것 같네요. " [ 뭐?] " 옵니다. 오라 능력자들이. 2번 엘리베이터에요. " 그 말을 남기고 메두사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카이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내 혀를 찼다. 메두사의 공간지각 능력, 드 레이카닉 아이라면 여기의 누구보다도 먼저 적의 접근을 눈치챌 수 있는 것이 다. [ 제길! 2번 엘리베이터라고?] 카이는 네크로맨시로 팔라딘 대원들을 조종하여 재빨리 2번 엘리베이터의 출 구로 달려갔다. 메두사의 말대로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고 있었다. 나라카의 홀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로 미루어 보아 조만간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것 같았다. 카이는 즉각 병사들을 엘리베이터 근처에 잠복시키며 자신도 거신상의 뒤로 몸을 숨겼다. [ 좋아. 도착하기가 무섭게 벌집으로 만들어주마!]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주둔지의 무기고에서 아켄석 탄을 가져온게 천만 다 행이었다. 카이는 예전 이 아켄석 탄에 직접 당해본 경험까지 있었기에 누구보 다 그 위력을 절감하고 있었다. 영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아켄석 탄이라면 충 분히 오라 능력자들에게도 효과가 있을 터! 철컥 철컥 팔라딘 대원들이 자신들의 총기구에 아켄석 탄을 장전했다. 스무개의 총구들 이 일제히 엘리베이터의 입구로 향한다. 만약 상대가 멋모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수십발의 아켄석 탄들이 그를 꿰뚫을 것이다. 아무리 오라 쉴드 로 몸을 보호한다 하더라도, 오리하르콘 슈츠를 입고 있다 하더라도! ' 절대로 막을 수 없어! ' 위이이이잉 2 번 궤도 엘리베이터의 케이지(Cage)가 나라카를 통해 옴팔로스로 모습을 드 러냈다. 반중력을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이기에 와이어 로프나 가이드 레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입구에 다다르자 서서히 감속을 하며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띵 그리고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투타타타타 기다리고 있던 대원들의 집중 발포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탄막이 쳐질 정도 로 수많은 아켄석탄들이 일제히 엘리베이터를 꿰뚫고 지나간다. 그 뒤를 잇는 것은 불꽃과 건파우더(Gunpowder)! 폭음! 총성 뿐이었다! 위이이이잉 발포가 끝나자 열렸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르 닫혔다. 그러나 방금 전의 사격으로 고장이라도 났는지 채 맞물리기도 전에 다시 문이 열린다. 카이는 구멍 투성이가 된 엘리베이터의 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렇게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던 그는, [ ……빌어먹을.]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엘리베이터의 안에는 무수한 탄흔 자국만 남아있 을 뿐, 정작 쓰러져 있어야할 시신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뭐야! 빈 엘리베이터를 내려보낸 건가? 속임수? [ 그럼 다른 쪽 엘리베이터로……!] 쾅 그러나 채 카이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쪽에서 총성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숨어있던 팔라딘 대원들 중 하나가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 카이는 그 난데 없는 공격에 황급히 사각으로 몸을 피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쾅 쾅 쾅 쾅 쾅 순간, 총성이 연달아 울려퍼지며 팔라딘 대원들이 거푸 쓰러져나갔다. 카이 는 네크로맨시 된 다른 대원들의 눈을 통해 엘리베이터 안을 노려보았다. 그 곳에는 천장에 거꾸러 매달려 리볼버를 연사하는 피스 대원이 있었다. 그 피 스 대원이 입은 AI슈츠를 확인하는 순간― 카이는 이를 갈았다. 저 자식은! [ 피스 알리자린!] 쾅 쾅 쾅 쾅 쾅 쾅 카이의 외침에 돌아온 것은 여섯 발의 총성이었다. 총성이 한번 울릴 때마다 정확히 한사람씩 죽어나간다. 그야말로 백발 백중의 사격 솜씨였다. 카이는 이대로 맞사격을 하는것은 전력 낭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대원들을 사각 으로 물렸다. 그제야 피스 알리자린은 엘리베이터에 거꾸러 매달렸던 몸을 바 로하며 혓바닥을 내밀었다. " 크크크. 네크로맨서! 변함 없이 겁 많은 녀석! 이번에도 숨어서 떨고 계시 나? " ' 개 자식! ' 카이는 예전의 일을 떠올리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의 가슴에 아켄석 탄을 박아넣은 이는 다름 아닌 저 건방진 꼬마였던 것이다. 그 분노가 카이의 눈을 멀게 했다. 덕분에 그는 피스 알리자린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도 깨닫지 못했다. ' 죽여주마! ' 카이는 피스 알리자린이 대전차용 라이플만 등에 맨채 무방비 상태로 엘리베 이터에서 나오자, 엘리베이터 좌측에 숨겨둔 대원을 조종하여 사격을 지시했다. 하지만 대원의 손가락이 채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알리자린의 리볼버가 불을 내뿜었다. 쾅 제대로 상대를 보지도 않고 한 사격이었다. 그러나 대원의 미간은 정확히 리볼버의 탄환에 꿰뚫려 있었다. 피스 알리자린은 킥킥 웃으며 음산하게 중 얼거렸다. " 꼭꼭 숨어있으라고∼ 머리카락이라도 보이면 죽일테니∼ " ' 순간예지안! ' 카이는 뒤늦게 패턴 알리자린의 능력을 깨닫고 혀를 찼다. 저 꼬마의 능력은 시야 내에 있는 모든 상황을 순간 예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반칙같은 능력! 이쪽에서 선제 공격을 해봐야 모두 간파당할 것이다! ' 잠깐. 방금 전은 사각에서 공격하지 않았나? ' 제길. 모르겠어! 카이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알리자린의 동태를 살폈다. 녀 석은 마치 공격해볼테면 해보라는듯 거리낌 없이 활보하고 있었다. 아니, 무 작정 걷는 것이 아니다. 아까부터 줄곧 카이가 숨어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오 고 있었다. ' 내가 있는 곳을 눈치챈 건가? 어떻게? 순간예지는 그런 것도 가능한 건가? 시야 내에 있는 상황만 예지하는게 아니었어? ' 카이는 피스 알리자린이 점점 다가올수록 초조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안돼. 이대로는 당한다. 내 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카이는 남아있는 팔라딘 대원들을 추슬려 한꺼번에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 ……!] 그러나 상황은 그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분명 네크로맨시로 움직여야할 대원들이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 쓸데 없는 짓 하지마. " 순간 노기가 서린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카이가 미 처 돌아보기도 전에 그의 팔을 꺽으며 간단히 그를 넘어뜨렸다. 카이는 몸부림 치며 자신을 포박한 이를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녹색의 AI슈츠를 입은 피스 대 원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넌…….] " 요원의 몸에 들어간 건가……. 잘도 내 대원들을 가지고 놀아줬구나. " 피스 그린 정진우는 드물게 살기를 드러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 흉흉한 기 세에 카이는 위축되어 입을 다물었다. 숙주로 삼은 요원의 기억 속에서 눈앞 의 남자가 팔라딘 대의 대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뇌의 시계 주 파수를 조종하는 음속의 오라 능력자! 아마도 그가 남은 대원들을 무력화시 킨 모양이다. 그렇게 카이가 진우에게 붙잡힌 사이,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이 그들 이 있는 장소로 걸어왔다. " 에에― 이미 다른 술래에게 잡혀 있었네? 내가 잡으려고 했는데! " 그람드링은 카이의 상태에 진심으로 분개하며 혀를 찼다. 뭔가 상황에 걸맞 지 않은 반응이었다. 어딘가 나사가 빠졌다고 해야하나 망가졌다고 해야하나. 그는 들리지 않게 혼잣말로 중얼중얼거리더니 곧 카이의 머리에 리볼버를 겨누었다. " 뭐, 대신 내가 죽여주면 되니까∼ " 탁 참다못한 진우가 신경질적으로 리볼버의 총구를 쳐냈다. 그는 의아한 눈으 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람드링에게 버럭 소리질렀다. " 적당히 해둬! 얼마나 죽여야 만족할 셈이냐! 엉? " " 헤. 화나셨나 봐, 우리 대장 님? " 그람드링이 재미있다는듯 킬킬거리자 진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말이지 이놈의 자식은! " 아무도 죽이지 않고 끝낼 수 있었어! 왜 죽인 거야! 왜! " " 이거 참. 나도 댁의 부하들 죽인 거, 유감스럽게 생각해.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죽어버렸잖아? " " 너! " 진우가 참지 못하고 그의 멱살을 잡아채려 하자 그람드링은 순간예지로 피해 내며 비아냥거렸다. " 쿨하지 못하네. 정 뭐하면 same-same으로 하자고.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적 의 습격을 예지해줬었지? 내 도움이 없었더라면 댁은 그토록 사랑하는 부하 들 손에 죽었을 거야. " " ……! " " 알아들었지? 자∼ 그러면 감정 싸움은 이쯤해두고 지금부터는 직무에 충실 하자고. 자자∼ " 진우는 귀찮다는듯 뒤돌아 서는 그람드링을 기가 막힌 눈으로 노려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휙 그때 등을 돌렸다고 생각한 그람드링이 전광석화처럼 리볼버를 빼들며 진우 에게 발포했다. 진우는 반사적으로 가속을 이용해 아켄석 탄을 피해내며 소 리쳤다. 이자식! 지금 정말로 쐈어? " 무슨 짓이야! " 그러나 진우는 자신이 피했던 자리를 돌아보는 순간, 그람드링이 발포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가 있던 자리의 그림자로 흑빛의 사슬들이 튀어나와 거신 상들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대로 있었더라면 저 사슬들에 꿰이는 것은 그였을 것이다. 촤르르르륵 거신상에 박힌 사슬들이 수축되며 천천히 그림자로부터 검은 코트의 남자가 떠올랐다. 메두사였다. 그녀는 쓰러진 카이를 안아올리며 그람드링에게 미소 했다. " 꽤나 재미있는 능력자군요. 아스트랄계를 거점으로 시작되는 제 공격을 간 파해내다니……. 단순한 예지 능력자가 아니야. " " 칭찬 해봤자 나오는건 없어, Madam! " 쾅 쾅 그람드링은 말하기가 무섭게 방아쇠를 당겼지만, 그전에 메두사는 거신상에 박힌 사슬을 타고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진우는 요원의 몸에 유탄이 맞을까봐 황급히 그람드링을 만류했다. " 조심하지 못해! 한번만 더 내 부하를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알겠어? " " 쳇― 그러면 여기서 찢어지도록 하지. 당신이 부하를 맡으셔! 내가 우두머 리를 맡을테니까! " 그람드링은 성가시다는듯 소리치며 재빨리 거신상들을 삼각뛰기로 밟고 올라 갔다. 그는 옴팔로스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장소로 이동하여 등 뒤에 매고 있던 대전차 라이플을 꺼내들었다. " 좋아……. 해볼까! " 그람드링은 입술을 혓바닥으로 축이며 능력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의 왼쪽 눈 과 오르크리스로부터 이식받은 오른쪽 눈이 싱크로 효과를 일으켰다. 바로 패턴 알리자린과 패턴 푸르푸린의 복수 능력, 천리안이었다! ' 크리스, 내가 함께라고 했지? ' 그람드링은 소리 없이 웃으며 목표를 추적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44 - Ｂy Ｎext Ｎeo =-=-=-=-=-=-=-=-=-=-=-=-=-=-=-=-=-=-=-=-=-=-=-=-=-=-=-=-=-=-=-=-=-=-=-= ―또 여긴가. 가인은 한성 고등학교의 교실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앞의 꿈에서 테레이아와 만났을 때도 여기였던 것 같은데. ―가인, 여기는 네 무의식의 표상이 만든 이드(id)의 영역이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인가 교실의 창가 쪽 자리에 에메랄드 빛 머리카 락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이 그녀의 몸을 밝혀 주 고 있었다. ―한성고등학교라는 곳은 유가인에게 있어서 테레이아 민체스터라는 여자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인 거지. ―내가, 가인은 여인의 말에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한가지 사실을 깨달 았다. 여기는 자신이 알고 있던 2학년 1반의 교실이 아닌 것이다. 고등학교 교실이 다 똑같이 생기다 보니 잠시 착각했었는데, 여기는……. ―내가 테레이아와 처음 만난 장소. 1 학년 2반의 교실이었다. 그날, 한밤에 테레이아의 부름을 받고 찾아온 그때의 그 교실. 가인이 그렇게 인식하는 순간, 창밖으로 어둠이 찾아온다. 대번에 교실이 어 두워지고 어슴프레한 달빛이 주위를 밝혀왔다. 그리고 여전히 앉아있는 여인. 그것은 영락없이 그 날의 모습이었다. 교사에서 도펠갱어에게 습격받았던 그 때의 그 모습! ' 날 구해준 보답이에요, 기사님. ' 가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역시……거짓이었나……. 처음부터. 친구였다는건, ―날……속인 거였어. 그 말에 여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가인의 말을 부인하지 않 았다. ―그래.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어차피 내가 노아이고, 네가 테라인 이상. 처음부터 우린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가인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운명이라니!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핑계라고 생각했다. 왜 자신이 지금껏 해온 일들을 운명의 탓으 로 돌린단 말인가! ―그런 거 난 모르겠어! 노아니 테아니 그게 다 뭐야? 같은 사람이잖아? 이 렇게 얘기할 수 있잖아? 서로 마주 볼 수 있잖아? 가인은 여인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이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도! 날 바라보는 눈동자도! 그 새하얀 얼굴도! 모두, 모두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확연히 내 앞에서! ―이 몸은 내 것이 아니야. 그 말에 가인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뭐? ―잦은 심장 통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아이가 있었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상에 누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지 여인은 자신이 지닌 육체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이의 소원은 언젠가 병에서 나아 다시 학교를 다니는 거였어. 예전처럼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고, 친구들을 사귀고, 그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그것이 아이의 꿈이었지. 하지만 애초에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었어. 아이의 몸은 이미 돌이 킬 수 없을만큼 망가져 있었거든. 그런 병이야. 회복이 불가능한 병이지. 그것도 모르고 아이는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날만을 기다렸어. 간절히. 간절히. ―그것만을 기원했지. ―……그게 테레이아, 라는 거야?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그런 아이의 몸을 빼앗아 이 땅에 올 수 있었어.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그 아이의 일생을 갖기로 하고서. 그제야 가인은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인정해야 했다. 눈 앞의 여자는 테레이아가 아니다. 그녀의 몸을 빌린 다른 무언가다. 진짜 테레이아는 이미……, ' 예전부터……없었던 거야. ' ―……. 가인은 그 처참한 진실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자신이 테레이아라고 믿어왔던 것. 그녀와 함께 보내온 시간. 그녀와 나눈 말과 행동, 손짓 하나까 지. 그 모든게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니. 너무하다. 너무해. 이런 건 알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건 내가 알고 싶었던 진실이 아니야. ……아니라고. ―넌 대체 누구야? 가인은 더 이상 그녀를 테레이아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녀를 자신이 알고 있 던 친구로도 여기지 않았다. 그런 그의 생각과 사념들이 한치의 꾸밈도 없이 전해졌기에. 눈 앞의 여인에게 확실히 전해졌기에. 가인이 자신을 증오하고 경멸하더라도, 원망하더라도. 그 대상이 테레이아 민 체스터가 아닌 리리스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비로소 진실을 얘기할 결심이 섰다. ―가르쳐줄게, 가인. 네가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약속했으니까. 이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 될테니까. 리리스는 가인의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드림 다이브에 말려들어 온 유리가 조용히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리리스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는……끝났어. 촤자자자작 그러자 유리의 마인드 스페이스가 리리스의 드림 다이브와 융화되어 한 사람 의 기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르의 별, 리리스의 기억이었다. 고백 내가 처음 자아를 가지게 된 것은 실험실의 한 유리관 안에서였어. 어느날 문득 생각이 들었지. 나는 누구인가. 왜 이런 장소에 있는 거지? 지금까지 한번도 가지지 않았던 의문들이 하나 하나 늘어나며 날 괴롭히기 시작했어. 제대로 손조차 뻗지 못하는 유리관. 이 좁은 공간이 내가 아는 모든 것이 될까봐 두려웠지. 유리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세가지였어. 깨어있는 것. 생각하는 것. 꿈꾸는 것. 음식은 유리관을 채운 재생액이 해결해줬고, 밀폐된 생활로 인한 근위축(at rophy) 은 전기 자극이 해결해줬지. 신체 부위가 짧게는 24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면 근육 무게의 상실이 빠르게 진행되거든. 하지만 그런 신체의 부동화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역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 의미도 없이 하루 하루가 지나가고, 시간 감각과 공간 감각이 사라지며, 내 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알 수 없는 무력감, 고립감, 외로움. 나는 오직 여기서 나가는 일만을 꿈꿨어. 필사적으로 그것만을 꿈꿨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명 미쳐버렸을테니까. " NP3223의 동결을 해지한다. "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나는 유리관에서 나올 수 있었어. 가끔 내 상태를 보 러오던 하얀 가운의 사람들이 유리관의 재생액을 빼고 날 바깥으로 끄집어낸 거야.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간신히 눈동자를 굴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지만. 공기를 폐속으로 들이키는 그 기분.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 동을 받았지. 눈물을 흘렸어. 순수히 기뻐했지. 그런 나를 내려다 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주고 받았어. " 자아가 확립된 건가? 눈물을 흘리는군. " " 이례적인 경우야. 그래봤자 경험이 없으니 단순한 이드의 응용일 뿐이겠지 만 " " 혼자서 살아남을만해. 눈동자를 봐. 상황을 인지하고 있잖아? " " 결국 서큐버스(SUCCUBUS) 타입은 이 개체만 살아남았군. 다른 개체는 전부 자살하거나 미쳐버렸으니까. " 이게 무슨 소릴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밖으로 실려나가면서 볼 수 있었지. 내가 갖혀 있던 유리관의 전경들을. 그동 안 몰랐지만 내 유리관의 옆에는 수많은 유리관들이 있었던 거야. 지금은 비 어있었지만 거기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있었겠지. 혼자서 살아남았다는 건……그런 뜻인가? 어쩌면 유리관에서 나온 건 그다지 기뻐할 일이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그런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았어. 밖으로 나온 나는 한동안 공동 생활을 하게 되었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동이었는데, 이 안에서 오십여 명의 아이들과 한데 어우려 생활해야 했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아이들이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유리관을 나온 아 이들이고, 이 공동은 그런 아이들을 모아 키우는 일종의 양육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이곳을 관리하는 이들은 예의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자 신들을 관찰자라고 칭했어. 그들의 감시 속에서 우리들은 하나 하나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아가기 시작했지. 일단 우리가 호문클루스라고 불리우며 정상적인 순리로 태어난 아이들이 아 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관찰자들이 서로를 대할 때와 우리를 대할 때는 그 눈빛부터가 틀렸거든. 직접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명체로 보는 눈 이 아니었어. 일정한 선을 가르고 있었지. 이건 눈치가 빠른 아이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던 사실이야. 왜 그럴까? 그들과 우리는 외양상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어. 물론 그들 은 어른이고 우리는 아이지만 그게 차별을 하는 이유가 될 순 없었지. 왜 관찰자들은 우리를 호문클루스라고 부를까? 왜 우리를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지? 호문클루스란 뭘까? 인간과는 틀린 거야? 그런 우리의 의문은 양육소 생활을 한지 한달이 지나서야 풀리게 되었어. " 너희들은 이제부터 자신들에게 주어진 능력을 개발해야한다. 제한 시간은 한달. 매달마다 우리는 너희들의 능력 변화를 체크하고 시험한다. 그 기 간 안에 결과를 내지 못하면 너희들에게 가치란 없다. 가치가 없는 개체 는 폐기될 것이다. " 그래. 호문클루스와 인간의 차이점. 그건 능력을 소유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였어. 인간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는 있는 이상 능력. 이 능력을 위해 우리는 만들어진 거였어. 인간 들처럼 서로 수정(受精)하여 태어난 것이 아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 능력을 개발해내지 못하면 가차없이 버려지는 운명. 관찰자가 선포한데로 우리는 매달마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당했어. 능력이란 인간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손을 대지 않고 물건 을 들어올린다거나 부서뜨리는 일이었어. 염동력이라고 하는 것인데 공동의 아이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었지. 관찰자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개체에 맞는 특수 능력이었어. 다른 아이들의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서큐버스 타입이라고 불리며 드 림 다이브라고 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했지. 드림 다이브란 생물체의 뇌수 활동이 가라앉을때 일어나는 표상(表象)의 과 정, 즉 꿈의식 속에 접속하는 것을 말하며 나아가서는 그것을 물질로 구현시 키는 능력이야. 석화 작용을 일으키는 바질리스크(Basilisk) 타입이나 불꽃을 일으키는 샐 러맨더(Salamander) 타입은 이미지를 잡기가 용이해서 개발이 수월하지만 내 드림 다이브와 같은 경우는 너무나 추상적이라 가장 개발하기 어려운 능력이 라고 하더군. 하지만 그런 관찰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개발에 가장 진전을 보인 것은 바로 나였어. 아마도 유리관 생활을 할때 진절머리가 나도록 꿈을 꿔왔던게 도움이 됐던 것인지……. 어쨌든 어렵지 않게 능력을 개발할 수 있었지. 그렇게 한달 동안 능력을 개발하고 월말에 시험을 받는 나날이 계속 되었어. 그리고 석달이 지날 무렵, 이 시험이라는 것이 공동의 분위기를 바꿔가기 시 작했지. 차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거야. 능력을 인정받는 자와 인정받지 못하는 자. 진보하는 자. 낙오하는 자. 공동의 아이들은 더 이상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 아니게 된 거야. 서 로를 경계하며 뒤처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게 되었지. 시험에 통과하면 할수 록 표면적으로나마 관찰자들의 대우가 좋아졌으니까. 그것이 우리를 부추기기 위한 관찰자들의 안배라는 것도 알지 못한채 우리는 어느샌가 서로를 미워하 며 자신들을 챙기기에 바빴어. 낙오하는 자가 생기면 사정없이 짓밟으며, 진보하는 자가 생기면 왕이라도 되 는 것처럼 떠받들었지. 능력의 진척도가 우리들의 계급장이 되어버린 거야.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란, 이 작은 공동 내에서의 생활이 전부였으니까. " AN4230, CU5407, RZ5598. 이상 세 명은 오늘부로 공동을 나간다! " 그리고 결국 탈락자가 나왔어. 예정된 일이었지만 가장 뒤처져 있던 세 명이 탈락하게 되었지. 관찰자에 의해 끌려나온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떨고 있었 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한층 더 무서웠겠지. 관찰자들은 세 아이의 목에 알 수 없는 금속 목띠를 채우고 그들을 끌다시피 데리고 나갔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목띠는 도주를 방지하는 제어구였지. 아이들은 공동 밖으로 끌려나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우리들을 돌아보았어. 겁에 질린 얼굴들로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 그 시선들은 말하고 있었어.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제발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하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었어. 그저 망연자실하게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 뿐. 그렇게 세 명의 동거인들이 떠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는 변함없이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 했지. 다만 한가지 변한 것은.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야. " SG7332, HJ1004, KN6211, FJ1190. 이상 네 명은 오늘부로 공동을 나간다! " 그 이후로도 탈락자는 계속 나왔어. 오십 명이 넘던 공동의 아이들은 어느새 인가 반수 이상으로 줄어있었고, 우리들은 언제 끌려나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 잡혔어. 관찰자들은 행여나 우리 중 반항하는 이들이 나올까봐 예의 제어구를 우리에 게도 장치했지. 실제로 반항하던 이들은 무력하게 관찰자들에게 끌려나갔어. 계속되는 시험에 노이로제가 걸린 아이. 자포자기하며 그대로 끌려나간 아이. 밤마다 흐느끼는 아이. 말없이 능력 개발에 몰두하는 아이. 여기서 나는 후자에 속했지. 유리관 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이 공동을 벗어 날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며 악착같이 버텨나갔어. 그리고 공동의 아이들이 딱 스무명으로 줄었을 때, " 이제부터 너희들을 라무의 아이로 임명한다. " 내 꿈은 이루어졌어. 라무의 아이란 공동에서 일정 수준까지 능력 개발에 성공한 호문클루스들에 게 주어지는 칭호야. 단순한 칭호일 뿐 아니라 좀 더 인간다운 혜택도 누릴 수 있게 되지. 일단 기숙사에 자신의 방을 가질 수 있고, 제대로 된 의복이 주어지고, 공동 시절에는 꿈도 못 꿨던 영양식들을 제공받을 수 있지. 제한되기는 하지만 공 동 밖의 연구 시설을 활보할 수도 있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 있어. 물론 인간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기에 혜택이라고도 볼 수 없는 소소한 것들 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지. 나는 이 생활이 마음에 들었어. " 안녕? 내 이름은 유메 크라이시스. 오늘부터 널 담당할 관찰자야. 잘 부탁 해. " 단지 이 여자를 제외하면……이겠지만. 자신을 유메 크라이시스라고 밝힌 그녀는 내가 지금껏 만나온 관찰자들과는 여러면에서 달랐어. 관찰자들은 언제나 딱딱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 일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 여자는 그렇지가 않았어. 관찰자답지 않게 어수룩 하고 위태위태 하다고 해야하나. 그래. 선이 없었어. 관찰자와 호문클루스 사이에 그어진 선.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이의 차이. 공 동에서는 이 선을 기준으로 하여 관찰자와 이해 관계를 일치시켜왔지만 이 여 자는 그 선이 너무나 모호했던 거야. 아니, 선이라는게 있기나 한건지 모르겠 네. 당연히 나는 그녀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어. 그녀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을 잡아오는 것 도, 웃음을 보이는 것도. 무엇 하나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 내가 지금껏 이해 해왔던 인간이란 개념이 뿌리째 뒤흔들렸어. 인간이란 좀 더 차가운게 아닌가? 인간이란 좀 더 가혹한게 아닌가? 그런데 이 여자는 같은 인간이면서 왜 이런 거지?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곁에 있으면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고 안절부절 못하게 돼. 가슴이 두근거려! 난 그 두근거림이 너무나 괴로웠기에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해다녔어. " 어디가는 거야? 같이가! " " 밥은 먹었어? 잘 챙겨먹지 않으면 네 나이엔 키가 안 커요. 그럼 나처럼 조그마해진다고. 그래도 좋아? " " 우. 맨날 나만 말한다. 그렇게 음침해져선 안돼! 여자애는 좀 더 활발해 야 한다고! " 그녀는 질리지도 않고 날 쫓아다녔어. 그런 그녀가 난 귀찮으면서도 그다지 싫지는 않았지. 오히려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는 습관이 생겼어. 그리고 찾지 못하면 허전해지는 거야. 그런 주제에도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솔직할 수 없었어. 어쩌면 그녀가 동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기에. 날 다루기 편하도 록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라고, 뒤로는 다른 관찰자들과 같은 눈으로 날 보 고 있을 거라고 매번 의심했던 거야. 누군가를 믿는다 라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지. 난 그녀가 따뜻하게 대해주 면 대해줄수록 점점 더 차갑고 삐뚤어져야 했어. 그리고 자기 혐오에 빠졌지. " 읏차. " 그러던 어느날 밤. 그녀가 기숙사의 내 방으로 찾아왔어. 그것도 짐을 한가득씩 가지고서. 나는 그것을 어처구니가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지. " 뭐……하는 거야? " " 뭐하는 거긴. 같이 자려고 왔지. 명색이 담당인데 낮에만 붙어다니는건 이상하잖아? " 난 기가 막혔어. 호문클루스와 같이 자는 관찰자라니. 그런건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어. 가뜩이나 실험체와 같이 밥을 먹고 얘기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 람인데 이제는 같은 방까지 쓰겠다니! " 다른 사람들이……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다들 이상하게 볼 거라고. " " 이상하게 보면 어때? 내가 좋으면 된 거지. " 너무나 시원스레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난 기운이 빠졌어. 매번 그녀를 대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고민하는 내 쪽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야. 난 왠지 분통이 터져 외쳤어. " 쓸데없는 짓하지마! 자꾸 이러면 곤란해진단 말이야! 뭐야, 정말? 고작 실 험체잖아? 호문클루스잖아? 왜 친하게 구는 거야? " 왜 나같은 걸……. ' 따뜻하게 대해주는 거냐고! ' 나는 어느샌가 울먹이고 있었어. 태어나서 한번도 남에게 받아본 적이 없는 애정. 그 애정을 외면하기가 더 이상 무리였어. 한계였던 거야. 그런 내 모습에 그녀, 유메 크라이시스는 오히려 이상하다는듯 나에게 질문 을 던졌어. " 우리, 친해지면……안되는 거야? " 바보다. 이 여자는 왕 바보야! 그런 마음속의 외침과는 달리 나는 울고 있었어. 그리고 자문했지. 이 사람이라면 한번,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 오늘부터 네 이름은 리리스. 리리스야. " 그로부터는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시작되었어. " 그 이름은 모든 데몬족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밤의 여왕을 뜻하지. 넌 앞으 로 우리의 여왕이 되는 거야. " 유메는 내가 실험체 번호로 불리우는게 싫었는지 이름을 지어주었어. 리리스. 리리스. 그 이름을 받고서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유메는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그녀의 앞에서 난 언제나 무뚝뚝하게 굴기만 했으니까. " 유메, 무사(Musa)에 늦겠어! 좀 깨워달랬잖아! " " 으응……. 응. 뭐……? " " ……됐네요. 나중에 잠 깨거든 와! 먼저 가있을게! " 같이 살게 되면서 유메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어. 그녀가 아침 잠에 약 하다는 것. 잔 실수가 많다는 것. 어리광이 심하다는 것. 우와. 그전까지는 순전히 연장자인 것처럼 행동하더니 이건 완전히 속았지 뭐야! 오히려 더 내가 그녀를 챙겨줘야하고, 야단을 쳐야하고, 걱정을 해줘야 하니……. 그래도, " 리리스― " 언제나 웃으면서 날 반겨주는 그녀의 모습이 그 불만들 마저 즐거움으로 바 꿔주었어. 내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지. 아, 그리고 이 시기 쯤에 카이도 만나게 되었어. TU2307이라는 번호의 그는 샤먼(Shaman) 타입의 남자애로서 라무의 아이들 중 가장 능력 개발에 뒤쳐진 아이였는데, 간신히 공동 생활을 패스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줄곧 제 자리 걸음만 하고 있었지. 오죽 했으면 그의 관찰자도 포기를 하고 손을 뗀 정도였어. 그래서 관찰자들 사이에서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는데, 그것을 보다못한 유메가 우리의 방으 로 데려온 거야. " 리리스, 오늘부터 이 아이가 네 남동생이야. 이름은 카이 브릿드. " " 카이 브릿드? " 그건 무슨 뜻? " 내가 좋아했던 남자애 이름이야∼ " " ……. " 유메가 이름을 지어주는건……큰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어쨌든 나는 카이라 불리워진 아이를 바라보았어. 아이는 유메의 뒤에 꽁꽁 숨어서 내가 무서운 동물이라도 되는듯 떨고 있었지. 그것만 봐도 그가 얼마 나 핍박 받으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어. 여전히 능력에 대한 차별은 아이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고 그는 철저히 괴롭힘을 당해왔겠지. ' 나도 그다지 다를 바는 없지만. ' 나는 공동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어. 그때의 죄책 감 때문일까. 아니면 유메의 부탁 때문이었을까. 나는 군소리 없이 그를 동생 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지.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어. " 카이. 카이라고 불러도 되지? " 내 질문에 카이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내 손을 맞잡았어. 그런 우 리의 모습에 유메는 싱글벙글거리며 즐거워 했지. 뭘 히죽대는 거야, 이 어리버리 씨? 그런 내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가족은 세 명으로 늘어났어. ' 가족. 가족이라― ' 나와 유메, 카이. 우리 셋은 같이 산다는 것을 제외하면 혈연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인 관 계인 것도 아니지. 하지만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제일 적합한 말 은 역시 가족이라고 생각해. 다른 관찰자들은 그런 우리를 별종 취급하며, 한 낮 실험체에게 애정을 쏟는 유메를 비웃었지만. 같이 있으면 웃음이 나오고, 즐거워지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며 화내기도 하 고. 상대가 내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지는.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는 그 안도감. 이런게 가족이 아니라면 뭐가 가족이겠어? 아니, 적어도 나는 가족이라 믿고 싶어. 그게 나만의 생각이 아니길 믿고 싶어. 믿고 싶어. " 으아아앙― 리리스. " " 뭐야? 또 누구한테 맞은 거야, 카이? 대체 누구야! " " 으아아앙― " " 내가 해결하러 갈테니까 유메는 가만히 있어! 저번처럼 또 담당 관찰자들 에게 따지러 가지말고! " " 그, 그래도! " " 가만 있어! " " ……그, 그래. 힘내! 리리스! " 믿고 싶어― 유메와 카이와 보내는 시간은 정신 없이 즐거웠어. 하지만 그 즐거움은 어디 까지나 집에서 끝내야 했지. 밖에서는 라무의 아이로서 맡은 바 사명에 최선 을 다해야 했어. 어디까지나 능력 개발 판정은 끝난 것이 아니고, 수치가 멈 추는 순간 지금의 즐거움은 깡그리 사라져버릴테니까. 라무의 아이는 공동 생활 때와 마찬가지로 능력 개발에 힘쓰는 한편 의무 교 육도 소홀히 할 수 없었어. 우리는 무세이온(Museion)이라는 연구 기관에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여러가 지 지식들을 배울 수 있었는데. 클레이오, 에우테르페, 탈레이아, 멜포메네, 테르프시코라, 에라토, 폴리힘니아, 우라니아, 칼리오페의 9년 무사이(Musai) 연수 과정을 거쳐야 했지. 기초적인 언어, 산수부터 시작해서 수학, 물리, 화학, 사회까지. 그리고 초기부터 연속성을 가지고 사상교육을 반복 실시하여 교육단계가 높 아짐에 따라 체계적으로 사상을 심화 발전시키도록 학습받았어. 호문클루스인 우리들에게 애국심 같은게 있을리가 없었으니 그만큼 사상 교육에 공을 들인 거겠지. 덕분에 우리는 세뇌에 가까운 충성심을 가지도록(보여지도록) 훈련되었어. 아마 호문클루스의 제 1교육 목적은 이 사상 훈련이었을 거야. 하지만 이런 사상에 감화되는 머저리 따위가 과연 있을까……. 아마 관찰자들도 기대하고 있지 않겠지. 차라리 목띠 같은 제재를 가하는 쪽이 더 나을 거야. 결국 아무런 재미도 없는 무미건조한 수업의 연속이었어. 단지 내 흥미를 끄는게 있다면 사회, 즉 바깥 세상의 소식 뿐이었지. 그렇다고 해서 바깥 세상이 내가 꿈꿔온 것처럼 낙원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 낙원은 없었어. 낙원을 향한 꿈만이 있을 뿐인 거야. ―여기서 내가 속한 세상, 노아(Noah)에 대해 설명하려면 한참을 거슬러 올 라가야 돼. 먼 옛날. 있었을지 없었을지도 모를 과거의 일. 하늘에는 달이 없었던 시대의 이야기. ―판게아(Pan-gaia)라는 대륙이 있었어. 세계의 의지, 가이아의 비호를 받는 광대한 단일 대륙. 그 위에는 모든 문명 의 시초가 살고 있었지. 그 인류의 이름은, ―에덴(EDEN). 가이아에게 영원 불멸을 약속받은 그들은 지상의 온갖 혜택을 누리며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지만, 가이아가 금지한 선악과에 손을 대는 바람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게 되지. 그리고 잃어버린 번영을 되찾았을 때에는 이미 수 세 기가 흐르고 수 많은 세대가 교체한 뒤였어. 판게아를 다시 지배한 인류는 에덴의 후손들 중 하나인 올림포스(Olympus)였 어. 그들은 선조 때의 영광을 다시 누리며 확고한 지상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인류 티탄(Titan)과 나머지 인류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지. 하지만 그것이 다시 가이아의 분노를 사게 될 줄이야. 가이아는 인류 올림포스의 만행을 보다 못하고 새 인류를 잉태하게 돼. ―바로 기가스(Gigas)의 탄생이야. 기가스, 네피림(Nephilim)이라고도 하며 복수로는 기간테스(Gigantes)라 불 리우는 그들은 가이아의 명을 받아 올림포스와의 전쟁을 선포했어. 기간토마키아(Giganthomachia)라 불리우는 이 전쟁은 세계를 다시 한번 카오 스로 몰아가고, 결국엔 기간테스와 올림포스 양 측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되지. 치열한 접전 끝에 기가스는 모두 죽어버리지만 최후의 기가스, 사나운 격풍 ( 激風)이 사신의 낫으로 낮과 밤을 갈라버렸던 거야. 올림포스는 간신히 이 거인마저 패퇴시킴으로서 낮과 밤을 원상태로 돌리는 데 성공하지만, 대신 상승할 때로 상승한 기온이 빙하를 녹이고 수온이 내려 간 해류는 교차되지 않아 사상 최대의 기상 이변이 일어나게 되지. 세계가 빙 하로 뒤덮였던 거야! 그렇게 판게아는 빙하기를 맞음으로서 어떠한 생물도 살 수 없는 불모의 땅 이 되어버렸어. ―하지만 이번에도 인류는 살아남았다. 거인들과의 전쟁 중 방주(ark)로 몸을 피한 올림포스의 후손들이 남아 있었어. 그들은 물에 잠긴 대지가 떠오를 때까지 악착같이 버텨내다가 마침내 다시 지상 을 밟게 되는데, 그들은 방주 속에서 자신들을 이끈 지도자를 앞세워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였 고. 스스로를, ―노아라고 칭했지. 우리들의 역사도 그때부터 시작되었어.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45 - Ｂy Ｎext Ｎeo =-=-=-=-=-=-=-=-=-=-=-=-=-=-=-=-=-=-=-=-=-=-=-=-=-=-=-=-=-=-=-=-=-=-=-= 방주의 리더 노아 아라라트의 이름을 딴 신 인류, 노아는 빠른 속도로 판게 아에 뿌리를 내렸어. 방주의 DNA데이터 뱅크에 저장시킨 192종의 동물 개체를 지상에 부활시키고 사라진 문명을 복구해냈지. 노아는 앞의 인류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화해와 공존을 모토로 내세워 번영해나갔어. 아무래도 가이아는 인류의 일탈에 반응하는 것 같았으니까. ―이런 우리를 너희는 무(MU)라고 부르더군. 아틀란티스라고 하는 것도 노아 문명의 한 단편이야. 어쨌든 노아는 순조롭게 발전해나갔어. 방주의 후손들은 착실히 수를 불려 나가 열 명의 후손은 어느덧 열 개의 민족이 되었고, 한 명의 왕 밑에 하나의 정부로 통치되었지. 왕은 노아의 직계 후손, 아라라트 가(家)가 세습해나갔어. 원래 하나의 혈통 이 왕권을 독점하면 약속이라도 하듯 분란이 일어나지만 노아는 그렇지 않았 지. 왜냐하면 아라라트 왕가에는 다른 10개의 민족을 제압할 정도로 막강한 '능 력'이 있었던 거야. 노아 아라라트는 최초의 인류 에덴의 후계자이자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실질 적인 후손이었어. 이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 나베인(Vana-vain)이라고 하는 정신구현 능력이었지. 바나베인은 가이아가 에덴에게서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은총의 파편이라는 설 도 있고 에덴과 결별한 인류 다이몬(Daimon)의 능력이라는 설도 있어.(에덴의 지도자 아담의 첫번째 부인인 리리스가 바로 이 다이몬의 여왕이었지) 아라라트 왕가는 이 바나베인을 이어받아 노아를 통치했지. 바나베인은 형체가 없는 능력으로, 그 능력을 각성한 개인의 소망이나 갈망에 따라 천차만별로 구현되게 돼. 그런 이유로 같은 바나베인을 가진 능력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어. ―비슷하지? 너희 테라가 가진 능력, 오라(AURA)와 말이야. 노아는 우수한 학문과 문화를 가졌고 특히 건축술과 항해술이 발달했지. 항해 술이 발달한 거야 우리가 방주의 후손인 탓도 있었지만 판게아 이외의 대륙을 찾아보려는 정치적 일환인 탓이 컸고, 건축술은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 해 지하 공간을 개척하면서 자연스레 발달하게 되었지. 하지만 이 순조로운 발달은 판게아 밑에 숨겨진 가이아의 비밀을 발견하면서 왜곡되기 시작했어. ―옴팔로스. 가이아의 배꼽이자 세계의 중심이 되는 장소. 지금껏 수차례에 걸쳐 인류를 심 판해온 세계의 의지가 잠든 곳. 그곳을 발견하면서 노아는 가이아의 정체를 알게 된 거야. 가이아는 단순한 세 계의 시스템일 뿐이며 인류의 의지에 반응한 파생물이라는 것을. 노아는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고, 나아가 세계의 의지마 저 수족으로 삼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지. 옴팔로스와 연결된 나라카를 통해 다른 내룡들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힘이 될만한 오파츠(Out of Place Artifacts) 들을 발견해나갔어. 차원 촉매인 액체 금속, 오리하르콘도 그 중 하나였어. 옴팔로스의 스틱스 외에도 아케론(acheron), 플레게톤(Phlegethon), 레테(le tte), 코퀴토스(Cocytos)가 바로 이 액체 금속의 강이었는데, 그 강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 없이 내룡들이 존재했지. 노아는 이 오리하르콘에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해내는데, 하나는 이 금속이 아라라트 왕가의 바나 베인과 반응을 한다는 것. 둘은 바나 베인과 반응하여 그 힘을 한 차원 더 높게 증폭시켜준다는 것. 셋은 체내의 초전도 현상과 반응하여 무지개 빛의 색으로 변한다는 거였어. 당연히 자신들의 힘을 높여주는 이 신비의 금속을 아라라트 왕가가 내버려 둘 리 없었지. 노아는 대대적인 오리하르콘 발굴을 감행하는 한편, 본격적인 바나 베인의 연구에 들어가게 돼. 한정된 혈통들만이 쓸 수 있는 바나 베인. 이 능력을 소수의 인원으로 제한시 키기엔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특히나 이런 생각은 노아의 방계(傍系) 후손들인 샘족과 함족, 야벳족이 심했 어. 그들은 가뜩이나 직계 혈통이 아니란 이유로 왕가의 대접도 받지 못했으며 바나베인도 가지지 못했지. 그 쌓여오던 불만이 오리하르콘의 등장과 함께 폭 발해버린 거야. 세 민족은 단합하여 왕가에 저항했고, 결국에는 아라라트 왕조를 무너뜨리기 에 이르러. 새로운 왕조로 등극한 세 민족은 자신들을 라무라 칭하고, 자신들 역시 노아 의 후계자임을 주장했어. ―그리고 아라라트의 후손들은 바나베인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라무 왕조는 바나베인을 양산할 방법에 몰두했어. 이를 위해 수많은 아라라트 족들이 모르모트가 되었지. 그리고 수많은 희생 끝에 한가지 방법을 찾아내게 되는데. ―바로 바나 베인을 소유한 인자들을 복제하는 것. 당시 노아의 기술력은 인간이 가진 모든 유전자의 위치와 염기서열을 밝힐 정 도로 발달했기에 이를 행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어. 인간 게놈(Genome) 프로젝트 는 완성한지 오래였으니까. 실험은 성공했어. 바나 베인을 가진 제 3의 인자들이 탄생한 거야. 노아는 이 인자들에게 호문 클루스라 이름 붙이고 좀 더 자신들의 필요성에 맞는 인자들을 얻기 위해 개 량에 개량을 거듭하지. 능력을 다양화시키고, 능력을 고차원시키고, 능력을 상품화시키고. 그렇게 완성되어진 인자들에게 왕조는 라무의 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어. 말 그대로 자신들, 라무 왕조가 만든 아이들이란 뜻이지. 그리고 그 실험 과 정에서 얻게 된 바나 베인의 본질과 오리하르콘의 연구, 가이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노아는 세계의 의지마저 제어할 방법을 찾아냈어.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거대한 제어 구와 정신 감응력을 높인 라무의 아이들 을 이용하여 강한 영적 인력을 발생, 옴팔로스에 있는 가이아의 의지를 끌어 들일 수 있게 된 거야. ―그것이 바르의 별. 인류 노아가 가이아에게 걸어둔 족쇄. 그렇게 가이아마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노아는 더 이상 거 칠 것이 없었어. 자신들의 정복욕을 마음껏 드러내어 이내는 미지의 영역, 존재의 계마저 손대게 되지. 그런 인류에게선 더 이상 신을 경외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 방주로 살아남은 선조들의 기상은 사라진지 오래였어. 바르의 별로 제압당한 가이아는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되는 영역까지 그들 에게 가르쳐주고 말지. 바로 차원 도약. 디멘션 트랜스퍼(Dimension Transfer)의 비밀마저. 그들이 살고 있는 물질계 밖에는 영적의 세계, 아스트랄 계가 존재하고 거 기서 파생된 수 많은 평행 우주, 멘탈 계에는 노아 외의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된 거야. 당연히 노아의 다음 목표는 이 차원 너머의 인류들이 되었고, 존재의 계는 유래없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돼. ―노아의 차원 침공, 라그나뢰크(Ragnark)가 시작되었어. 더 이상 신은 없고, 인간을 막을 절대자는 없었어. 그야말로 신들의 황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전쟁이었지. 수 많은 차원의 인류들이 라무의 아이들과 가이아의 힘을 앞세운 노아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들의 식민지가 되었어. 그렇게 노아는 판게아 뿐 아니라 전 차원의 지배자가 되어갔지. 약탈하고, 겁탈하고, 유린하고. 식민지의 인류를 노예로 삼아 자신들의 전쟁에 끌어들이는 등, 정복자에게 주어진 권리를 아낌없이 누렸어. 그런 노아의 만행을 저지할 존재는 어디에 도 없었지. 유일하게 그들을 막을 존재인 가이아는 여전히 바르의 별에 붙잡혀 침묵하 고 있었어. ―그러나 문명은 피고 지는 법. 타락한 부귀영화는 결코 영원할 수가 없는 법이지. 노아의 멸망은 뜻 밖의 곳에서 찾아왔어. 노아는 끊임 없이 차원 침공을 행하는 한편, 판게아에 식민지의 인류들을 종으로 데려와 부역(賦役)을 시켰는데 그 종들 중에는 테라(Terra)라고 불 리는 인류도 섞여 있었어. 그들은 노아가 다섯번 째로 침공한 차원의 주인들이었는데, 가장 보잘 것 없 고 바나베인같은 힘도 가지지 못한 약소 민족이었지. 노아는 그런 테라의 무력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판게아의 오리하 르콘 채굴 작업을 시켰어. 어차피 반항을 해봤자 제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라고 생각해서였겠지. ―하지만 노아를 멸망시킨 이는 바로 이 약소 민족이었다. 잠들어 있던 가이아.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잠들어 있던게 아니었어. 노아의 만행을 저지할 방법 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결정했지. 자신이 나서지 못한다면 대 행자들을 내세우기로. 가이아는 자신과 가장 근접해 있던 인류 테라에게 세례(baptism)를 내려주었 어. 노아의 바나베인과 마찬가지로 테라에게도 의식을 구현시킬 수 있는 힘을 부여해준 거야. ―그게 바로 오라. 가인, 너와 네 동족들이 사용하는 능력이지. 테라라는 이름이 그들 인류의 언어로 여성형 명사, 대지를 뜻한다는 것은 알 고 있었어?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 세례를 받은 사도들로서는 손색이 없는 이름이었지. 가이아는 열 세명의 테라 인들에게 오라 능력을 건네주었어. 그들은 그리스 도(기름을 부음 받은자)와 그의 열 두 동료들이었지. 이들이 너희가 알고 있 는 예수와 12제자들이야. 그들은 노아의 병력들이 대부분 판게아를 떠나있는 틈을 타서 옴팔로스에 기 습을 감행했고. 노아의 방어진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에게 길을 내어주었지. 뒤 늦게 테라의 반란을 눈치챈 노아는 잔류하고 있던 라무의 아이들을 옴팔로스 에 투입시키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어. 테라는 가이아를 구속하던 바르의 별을 떼내는데 성공하고, 힘을 되찾은 가이아는 그 오리하르콘 제어 구를 영원히 자기에게 닿지 않도 록 하늘로 띄워보냈어. ―그리하여 아무 것도 없던 하늘에 달이 생겨났다. 옴팔로스의 지하에 있던 바르의 별이 떠오르자, 그 인력에 의해 발생한 지각 변화는 하나였던 판게아의 지괴(地塊)를 5개로 갈라버렸지. ―그리하여 세계는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가이아는 곧이어 그리스도와 오라 능력자들의 힘을 빌려 그동안 방관해왔던 노아에게 철퇴를 내렸어. 차원의 문을 열고, 판게아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노 아인들을 물질계 밖으로 추방했던 거야. 인류 노아는 그렇게 한순간에 몰락해버렸고 그동안 신을 농락했던 대가를 달 게 받아야 했지. 하지만 죄인들을 위한 가이아의 마지막 안배였을까. 쫓겨난 노아인들은 길고 긴 방랑 끝에 간신히 한 차원에 정착할 수 있었어. 하지만 방주에서 내린 그들은 절망해야 했지. 그들이 도착한 차원은 멘탈계 에서 파생된 불완전한 세계. 시간과 공간의 불균형이 가속화되면서 점차적으 로 소멸에 접어들고 있는 차원이었던 거야. 노아는 즉각 판게아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어.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지. 한 때나마 모든 것을 가졌던 그들은 이런 초라한 최후를 순순히 납득할 리가 없 었어. 하지만 돌아가는 것은 역시 무리. 가이아의 힘이 있었기에 차원을 제패한 그들이지. 가이아가 등을 돌린 지금, 노아에게는 차원을 뛰어넘을 여력이 없었어. 점점 다가오는 소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판게아로 돌아가는 시공 주소 뿐! 돌아가야해! 노아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것 밖에 없었어. 어떻게 해서든 돌아가야해. 그 리고 복수하겠다. 이런 불모의 땅에 우리들을 추방시킨 가이아와 테라, 너희 들에게 복수하고 말겠어! 노아는 그것만을 꿈꾸며 라무의 아이들을 개량하는 한편, 가이아의 힘 없이 차원 이동을 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 잃어버린 옛 영화를 되찾기위해. 잃어버린 고향 땅을 다시 밟기위해. 그리고 내가 바르의 별로 선정될 무렵, 노아는 판게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냈지. Interlude 천리안. 그것은 패턴 알리자린과 패턴 푸르푸린이 만들어낸 싱크로 현상이었다. 왼쪽 의 순간예지안과 오른쪽의 원격투시안이 서로를 보완함으로서 사각이 사라지 고 반경 2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공간을 투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람드링이 처음부터 이것을 알고서 오르크리스트의 눈을 이식한 것은 아니었다. 동생의 눈을 이식한채 실의에 빠져있던 중. 무의식중에 전개한 오 라 능력이 그의 안에 동생이 살아있음을 증명해준 것이다. 단순한 각성일지도 모른다. 순간 예지안의 다른 특성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람드링은 이식받은 동생의 눈이 자신에게 원격 투시의 힘을 준 것 이라고 생각했다. 오르크리스트는 죽었을지언정 그의 오라는 자신의 몸에 남 아 계속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 이상 동생의 죽음이 슬퍼지지 않았다. " 크크크. 어디 나타나 보시지. 그 전에 내 라이플이 불을 뿜을테니까. " 그람드링은 키득거리며 오른손 하나로 무거운 대전차 라이플을 받쳤다. 피스 화이트에게 잃어버린 오른손을 대신하여 이식한 오리하르콘 의수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방금전 대치했던 메두사의 이미지를 떠올리자 그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이듯 훤하게 잡혔다. 사실 천리안은 시야가 넓어지는 만큼 받 아 들이는 정보도 많아지기 때문에, 그 정보를 소화해내려면 부분별로 공간감 과 거리감을 제한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 사람을 추적하는데 있어서는 최고의 효과를 자랑하는 탐지기였다. 무엇보다 그람드링이 사용하는 천리안에게는 오르크리스트의 천리안과는 다 른 점이 하나 있었다. " 단순히 보는게 아니야. " 나는 예지하며 볼 수가 있다고! 천리안에 순간 예지가 합쳐진 것. 그동안 순간 예지안의 맹점인 사각에서 완 전히 해방된 것이다. 이건 천리안을 펼치는 주체가 그람드링이기 때문에 가능 한 일이었다. 오르크리스트는 해낼 수 없었던 완벽한 퓨전(Fusion)이다! " 거기냐! " 순간, 그람드링은 제대로 스코프를 보지도 않으며 저격에 들어갔다. 투앙― 대전차용 라이플의 총구가 불꽃을 튀기며 무지막지한 반동으로 흔들렸다. 하 지만 그람드링은 마치 리볼버라도 쏘는 것처럼 오른손 하나로 반동을 제어해 내며 숨쉴 틈 없이 제 2탄을 날렸다. 투앙― ' 쳇. 피했나. ' 그람드링은 상대가 총탄에 맞기도 전에 피한다는 것을 예지하고 혀를 찼다. 그의 상대인 요르문간드 메두사는 낯익은 방법으로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로 움직이는 공간 도약. 그래, 피스 블랙 한시영의 섀 도우 다이브와 흡사하다. ' 아니. 그것과는 틀려. ' 천리안의 능력을 가짐으로서 한층 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 그람드링은 메두사의 이동과 섀도우 다이브의 차이점을 파악해냈다. 메두사 의 움직임은 완전한 아스트랄 게이트를 통한 이동이 아니었다. 그저 어둠에 동화되어 표면을 멤도는 이동, 단순히 섀도우 다이브의 뼈대를 응용한 잔재 주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아까부터 줄곧 순간예지안에 그녀의 위치가 읽히고 있었다. 확실 한 공간 도약이라면 예지는 중간에 끊겨야만 했다. 촤르르르륵 그때 그람드링의 뒤편에 있던 그림자에서 검은 사슬들이 튀어나왔다. 그람 드링은 사전에 공격을 예지하고 이미 앞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쾅쾅쾅쾅 사슬을 피해 지면을 구르는 와중, 뒤를 향하여 왼손의 리볼버를 난사한다. 막 그림자에서 사슬을 날렸던 메두사는 재빨리 다른 그림자로 이동하여 아 켄석탄을 피해냈다. 메두사는 그림자에서 뛰쳐나와 그람드링에게 달려들었다. " 성가신 능력이군요! " 촤앙 메두사의 오른손이 은색의 갈퀴로 덮이며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왔다. 그 손톱 공격을 오리하르콘 라이플로 막아낸 그람드링은 비아냥 거렸다. " 언제는 재미있는 능력이라고 하지 않았냐! " 그람드링은 라이플의 밑으로 리볼버를 교차시키며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메두사는 놀라운 반응속도로 총구의 방향에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어느 새인가 그녀의 검은 코트는 은빛 갈퀴로 뒤덮여 있었다. 예전 브리트라가 복 사해냈던 라트 발렌시아의 육체 변환인 것이다. 그람드링은 그런 메두사의 모습을 관찰하며 생각에 잠겼다. 사슬은 날아오지 않는군? ' 하, 그런 거였나. ' 그람드링은 알았다는듯 코웃음치며 뒤로 몸을 날렸다. 예지대로 몸을 움직이 기가 무섭게 메두사의 크로우(Crow)가 허공을 가른다. ' 사슬은 그림자와 접속되어 있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건가. ' 쾅쾅 그람드링은 뒤로 쓰러지면서 리볼버를 난사했다. 한발은 빗나갔지만 나머지 한발은 메두사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람드링은 몸을 굴려 일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지면을 박차고 다른 거신상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는 능숙하게 한손으로 리볼버의 공약협을 비워내며 탄환을 장전했다. " 크크크. 이를 어쩌나, Madam. 댁의 바닥이 보이는걸? " " 어디 한번 보여보시지! 그 바닥이란 걸! " 그람드링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그림자에서 검은 사슬들이 튀 어나왔다. 하지만 그람드링은 아슬아슬하게 사슬의 궤도를 피해내며 라이플을 놓은 오른손으로 사슬을 붙잡았다. " 맞을까보냐! " 촤아아악 괴성과 함께 사슬을 끌어당기자,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메두사가 밖으로 끌 려나왔다. 오른쪽 의수의 힘에 AI글러브의 힘까지 더해지자 상상도 못할 괴 력이 발휘된 것이다. 어처구니 없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 메두사는 이를 갈며 사슬을 날렸다. 그러나 예지로 공격을 읽어낸 그람드링은 몸을 굴려서 사슬을 피해냄과 동 시에 바닥에 있던 라이플을 주워 메두사의 턱밑에 총구를 찔러넣었다. " Triple Demoliton! One―! " 투아아아아앙 순간 라이플의 총신에 달린 초전도입자 가속기가 전자 가속을 일으켰다. 극 초음속의 아켄석탄이 아포칼립스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 카오스의 섬광은 그 대로 메두사의 머리를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지! 그람드링은 아포칼립스의 반동에 지면에 꽂혀버리다시피한 라이플을 내버려 두고 쓰러진 몸을 스핀 어 루니(Spin a looney)로 일으켜세웠다. 일어선 그의 양손에는 어느새 꺼내든 리볼버가 한정씩 들려있었다. " Two! " 투아아아아앙 오른손의 리볼버가 일으킨 아포칼립스가 메두사의 심장 부위를 소멸시켰다. 그 반동에 그람드링의 몸이 뒤로 튕겨지듯 떠올랐지만, 그는 그대로 튀어오 른 방향의 반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나머지 왼손의 리볼버를 발포했다. " Three! " 투아아아아앙 그 마지막 아포칼립스가 남아있던 메두사의 상체마저 완전히 날려버린다. 순식간에 일어난 아포칼립스 삼연발이었다. 그람드링은 반동으로 떠오른 몸을 착지시키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우. 멋들어지게 날아가셨군, Madam. 그러게 바닥이 보였다니까! " 크- " 하지만 좋아하는 것도 잠시. 그람드링은 왼쪽 어깨를 감싸며 신음해야 했다. 첫번째 아포칼립스야 애초에 지면에 라이플을 고정시키고 방아쇠만 당겼고, 두번째 아포칼립스는 오리하르콘 의수로 받아냈지만, 세번째 아포칼립스는 겁 도 없이 왼손 하나로 반동을 받아낸 것이다. 평소 몸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쏴도 몸이 거덜나는 기술이었으니 왼쪽 어깨가 으스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람드링은 총신이 타버린 양손의 리볼버를 내던지며 포션을 자신에게 주사 했다. " 쳇. 뒷끝이 안좋은 기술인걸. " 어차피 피니쉬로 사용한다면 별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그때 그는 자신의 발밑으로 검은 사슬들이 늘어진 것을 발견했다. 앞에 아포 칼립스에 얻어맞기 직전 메두사가 그를 조르려고 했던 사슬이다. 그람드링은 피식 웃으며 발목을 감싼 사슬들을 걷어차려고 했다. 그러나, [ 이제야……잡았다.] 들릴 리가 없는 메두사의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며 사슬이 그람 드링의 발목을 힘있게 움켜잡았다. 당황한 그람드링이 메두사를 돌아보자, 거 기에는 하반신만 남은 그녀의 육체가 사슬들을 조종해내고 있었다. " ……Damn it. " 욕지거리를 내뱉기가 무섭게 그람드링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발목을 붙잡은 사슬들이 그의 몸을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거신상에 휘두른 것이다. 아무리 예 지를 한다고 해도, 몸이 반응해주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다! 콰아아아앙 그람드링은 그대로 거신상을 때려부수며 돌더미 속에 깔렸다. 그것을 바라보 던 메두사의 하반신이 천천히 재생을 시작했다. 척추가 위로 자라나며 뼈와 혈관, 근육들이 몸을 재구성해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이 입혀지자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진 브리트라의 상반신이 완성되었다. 메두사는 설마 이정도로 타격을 입을 줄은 몰랐기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티아마트의 심장이 없었더라면 영락 없이 소멸할뻔 했군. 역시 오라 능력 자는 오라 능력자인 건가. ' 예전 쿠사나기가 D타입으로 현현될때 티아마트의 육체를 빌리지 않고 물질 계에서 육체를 구한 것이 다행이었다. 12 년 전, 브리트라가 D타입으로 구현하면서 티아마트의 육체를 30퍼센트 소 실하였고 남은 70퍼센트마저 쿠사나기에게 주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재생은 불 가능했을 것이다. ―……. 그때 티아마트로부터의 의사가 들려왔다. 그 의사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기색 을 느낄 수 있었기에 메두사는 은은히 미소지었다. ―걱정말아요. 절 위해서라도,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라도 무사히 돌아갈테 니까. 사명을 마치고 돌아갈게요. 티아마트, 당신의 곁으로 반드시……. " 응? " 그때 메두사의 눈썹이 흠칫 떨렸다. 그람드링을 집어던진 사슬 쪽에서 반응 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드레이카닉 아이로 그람드링의 위치를 찾아내고 소 리쳤다. " 그렇게 도망만 다녀서야 제 바닥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 " ……흥. 그런 무식한 재생력은 반칙이라고. 아포칼립스를 세번이나 얻어 맞았으면서 멀쩡한 괴물을 날 더러 어떡하란 거야? " 목소리는 메두사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신상 위에서 들려왔다. 그곳에는 너덜너덜한 오른손을 달고 있는 그람드링이 혀를 차며 쪼그리고 있 었다. 메두사는 의외로 멀쩡한 그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 그 오른손.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의수였군요? 그것도 오리하르콘의. " 메두사의 사슬에 묶여 거신상에 내던져졌던 그람드링. 그는 속수무책으로 부딪히기 직전, 자신의 오른손을 희생시켜 거신상을 부셔버리고 충격을 줄 였던 것이다. 덕분에 왼쪽 어깨가 포션으로 회복되기도 전에 오른팔도 박살 났지만. ' 수지가 안맞아. ' 그람드링은 혀를 차며 메두사에게 장난스레 건의했다. " 저기∼ Madam? " " 왜 그러시죠? " " 그게 말이야. 이대로는 내쪽이 불리한 것 같고, 그쪽도 재미 없을 것 같 아서 하는 말인데. 그러니 페널티라 생각하고 거기 떨어진 내 라이플 좀 건네주지 않겠어? " " ……. " 메두사는 그람드링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앞의 아포칼립스 로 지면에 꽂혀진 대전차 라이플이 있었다. 아마 저게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무기일테지……. 메두사는 사슬로 라이플을 들어올린 후, 그람드링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너무나 자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콰직 대번에 사슬의 괴력으로 총구가 으스러지는 라이플. 그 모습에 그람드링은 혀를 찼다. 제길. 성격 한번 끝내주는군, 저 여자! 촤라라라라락 수십개의 사슬들이 일제히 뱀처럼 메두사에게서 풀려나왔다. 그람드링은 그 모습에 기겁을 하며 재빨리 반대편으로 뛰어내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 대체 뭐야, 이 녀석은!] 한편 네크로맨서 카이 브릿드는 경이적인 상대의 능력에 당황하고 있었다. 일단 카이의 전법은 창생의 술이 특기인 만큼 본체는 숨기고, 네크로 크리쳐 를 앞세워 승부하는 것이었다. 본체만 들키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크리쳐를 소환하여 싸울 수 있기에 가히 필승법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카이의 네크로 크리쳐들은 제 대로 적을 막아내지도 못하고 거푸 쓰러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 이건, 이건 말도 안돼! ' 카이는 하늘에 띄운 마수 안드레알푸스의 눈으로 사태를 지켜보며 신음했다. 본체에서 떨어진 옴팔로스의 격전지. 그곳에서는 녹색의 잔상이 휘날리며 카 이가 만들어낸 네크로 크리쳐들을 파하고 있었다. 골렘 타입의 네크로 크리쳐, 비프론즈와 네비로스. 그리핀 타입의 네크로 크리쳐, 자간(Zagan). 레오파드 타입의 네크로 크리쳐, 오세(Ose). 플레임 타입의 네크로 크리쳐, 아미(Amy). 이 모든 크리쳐들이 채 1분을 버티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피스 그린 정진우! ' 이 정도의 능력자였단 말인가! ' 칭― 칭― 칭― 녹색의 잔상이 마수의 육체를 꿰뚫고, 번개같은 주먹이 마수의 주심을 쳐부 순다. 한 발 한 발의 공격이 군더더기가 없고 신속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 지는 쓰러진 마수들만큼 계속 마수를 투입시켰기에 그의 돌진을 막아낼 수 있 었지만, 그것도 저장시켜둔 카르마 에너지가 다하면 끝이었다. 조만간 돌파당 한다! [ 키에에에엑] 팬타곤형 크리쳐, 데카라비아(Decarabia)가 괴성을 내지르며 그 오망성 모양 의 몸을 회전시켜 진우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레드아머형 크리쳐, 세에레(S eere) 가 진우의 뒤에서 불이 붙은 손을 휘둘러온다. 진우는 사기종인의 수로 세에레의 팔을 잡아 앞으로 당기며 그대로 날아드는 데카라비아의 턱을 승룡퇴로 올려찼다. 그리고 물흐르듯 칠성권 개산벽으로 세에레의 가슴을 박살낸다. 그의 일격 하나 하나에는 심경의 진수가 담겨 있었기에, 공격을 당한 네크로 크리쳐들은 저마다 폭발하며 소멸해갔다. 세에레는 사라지기 직전 진우에게 불꽃을 뿌려댔지만, 음속의 세계에 있는 그에게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 그 모습에 카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 어차피 의식이 끝날 때까지 녀석을 붙들고 있기만 하면 돼. 쓰러 뜨릴 필 요는 없는 거야. ' 좋아. 그렇다면 이대로 마수들을 불러내서……. 카이는 마물의 피리에 입을 가져갔다. 장기전으로 가는 거다! [ 엇―] 그러나 피리는 입술에 닿지 않았다. 카이가 막 피리를 물기 전에 누군가가 그것을 낚아채간 것이다. " 어디 이번에도 몬스터를 불러내 보시지. " 그렇게 말하며 피리를 들고 있는 이는 격전지에 있어야할 진우였다. 카이 가 몬스터를 소환하기 위해 잠시 눈을 돌린 사이.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 고 진우가 순식간에 카이의 위치를 발견해낸 것이다. 대체 얼마나 빨리 움 직여야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퍽 진우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자 피리는 모래처럼 흩날리며 사라져갔다. 그 것을 바라보며 카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마물의 피리야 다시 만들어내면 그 만이지만, 그럴 틈을 저 남자가 줄 것 같지는 않았다. 허튼 짓을 하다간 순 식간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 진우는 카이가 본체로 삼은 요원의 멱살을 잡아올리며 이를 갈았다. " 그 몸에서 나와라, 네크로맨서. 네 녀석의 상대는 내가 얼마든지 해주지. 그러니까 숨어있지 말고 나와! 어서! " [ 크.] 목이 졸린 카이는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의 문을 가졌다. 이 녀석, 왜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구는 거지? 그냥 해치워버리 면 그만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 아하. ' 카이는 진우의 속내를 간파하고 히죽 웃었다. 그랬지. 이 녀석은 그런 인간이었지. 쿠르르르르릉 순간, 카이와 진우의 발밑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런 지진에 진우 는 카이의 멱살을 놓치고 뒤로 물러났다. 이런! [ 후하하하하! 맞아. 너나 유가인이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순해빠진 녀석들 이었지!] 카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에게 비호같이 날아드는 익마 안드레알푸스에게 낚아채여지듯 하늘로 올랐다. 밑으로는 수 많은 모래더미 속으로 파묻히는 진 우의 모습이 보였다. 샌드맨 타입의 네크로 크리쳐 무르무르였다. 비프론즈와 네비로스의 본체! 진우는 자신을 모래 지옥으로 빨아들이는 무르무르의 손들을 뿌리치며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이 자식이―! 투바바바바바 순간, 진우의 몸이 푸른 잔상을 남기며 모래 지옥을 나선 모양으로 가속하 여 빠져나왔다. 가속이 남긴 충격파에 무르무르는 마치 달팽이 집처럼 갈라 지며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익마에 탄 카이는 자신의 마수가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저 음속의 남자에게 대항할 적절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뭘 고민하는 거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터! 하지만 녀석은 그러지 못 했다. 유가인을 비롯한 테라의 오라 능력자들은 자신들의 동료를 쉽게 내치지 못하는 것이다. 바보같으니! ' 우리들은, 우리들은 자기 몸 하나 지키는 것도 힘들었어! 타인을 신경 써 줄 여유따위는 없었지. 그야말로 서로를 죽이면서 살아남았다! 그렇게 해 서 힘을 키워왔단 말이다! ' 그런데 너희들은 뭐냐? 너희 테라의 녀석들은? 카이는 그 알 수 없는 부당함에 버럭 소리질렀다. [ 어디까지 그런 가식을 부릴 수 있을지 한번 볼까! 결국에는 넌 네 손으로 동료들을 죽이게 될 거다! 내가 죽이게 만들어주지!] 카이의 네크로맨시가 발동하자, 곧 진우가 있는 거신상 근처로 여덟명의 인 영이 다가왔다. 진우가 앞에서 제압했다고 생각했던 팔라딘 대원들이었다. 그 들은 네크로맨시에 홀린 눈으로 진우를 발견하자마자 대번에 들고 있던 총기 들을 난사하려 했다. 칭 그러나 진우는 미처 발포가 시작되기도 전에 가속하여 여덟명의 팔라딘 대원 들에게서 총기들을 빼앗았다. 그는 다시는 총기를 사용할 수 없도록 악력으로 부서뜨린 후, 상공의 카이를 노려보았다. 저 자식! 또 이런 비겁한 짓을! [ 맘 놓고 있지 말라고, 피스 그린.] 그때 대원들의 입에서 카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그들이 맨몸으로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진우는 일견 무모해보이는 그 공격들을 피해내며 반사적으로 발 경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다 황급히 손을 멈추며 대원들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 후후후후. 그래. 너의 그 잘난 오라 능력을 써보시지. 가속이 실린 펀치가 닿기만 해도 이 녀석들의 몸은 가루가 될 걸? 어차피 난 이 녀석들이 죽지 않는한 의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지. 손해볼게 없다고!] " 빌어먹을 자식이! " 진우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주먹질을 휘두르는 대원들의 모습에 치를 떨며 피해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가 그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이상, 조종당하는 이들을 멈출 방법은 오직 생체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 뿐! 하지만 그런 짓은 절대로할 수 없었다. 이 녀석들을 단 한명도 희생시키지 않고 데려나간다. 반드시! ' 그게 대장인 내가 해야 할 일이야! '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앞뒤 가리지 않는 진우였기에 잠시 잊어버리 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가 투입된 목적은 유가인과 가이아의 접속을 막아 내는 일이었다. 적을 쓰러뜨리는게 아닌! 키릭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의 동료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 고 있었다. 탕 총소리와 함께 진우에게 달려들려던 대원 하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진 우는 총탄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 하지맛―! " 탕 탕 탕 탕 탕 그러나 총성은 멈추지 않고 다시 다섯명의 대원들을 차례로 앗아갔다. 그나 마 진우가 가속으로 상대의 총을 후려쳤기에 다섯에서 끝난 것이었다. 대원들에게 총을 발포한 이는 그람드링이었다. 그는 메두사와의 싸움에서 후 퇴하다가 죽은 팔라딘 대원들의 총기를 가지고 진우가 있는 쪽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람드링은 진우에 의해 총신이 휘어버린 총을 내버리며 한탄했다. " 정말 똥 오줌 못가리는 녀석이네! 언제까지 이딴 곳에서 머뭇거릴 거야! 뭐가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냐! " " 내가, 내가 건드리지 말랬지! 내 부하들을! 내 부하들을― " 진우는 쓰러진 부하들의 모습을 돌아보다가 뒷 말을 잇지 못하고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또 죽였어! 또! 이자식이 내 부하들을 또! 그렇게 괴로워하는 진우의 모습에 그람드링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듯 히죽 웃었다. " 어라? 뭐야. 우는 거야? 정말 울어? 고작 이런 거로? " " ―! " 순간 진우의 눈 앞이 살의로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있는 힘껏 그람드링의 AI헬맷을 후려친 뒤였다. 콰지직― 간발의 차였다. 그람드링이 몸을 피하는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부서지는 것은 그의 AI헬맷이 아닌 두개골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순간적으로 예지 했다지만 진우의 가속이 실린 주먹은 그것을 초월하여 그람드링의 AI헬맷을 꿰뚫었던 것이다. 그 느닷없는 전개에 상공에서 네크로 크리쳐를 만들던 카이는 숨을 죽이며 상황을 응시했다. ' 뭐야?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어? ' 그람드링은 벗겨진 자신의 헬맷이 진우의 오른손에 꿰여있는 것을 바라보 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이자식……. 정말로 날 죽이려고 했어. " 미, 미친 거냐? 미쳐버렸어?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 " ……. " 그렇게 악을 쓰던 그람드링은 자신을 바라보는 진우의 얼굴에 할 말을 잊어 버렸다. 진우의 두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의 무 리한 가속으로 또다시 전자의안의 시신경이 끊어진 모양이다. 시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의 가속은 금물이다! 진우는 마치 악귀와도 같은 얼굴로 천천히 그람드링에게 걸어왔다. 그람드 링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 아, 아니. 이봐……. 지금 우리 전투 중이라고. 왜 이러는 거야? " 그람드링은 여전히 진우의 오른팔에 꿰여있는 자신의 AI헬맷을 바라보았다. 오리하르콘으로 된 헬맷을 저런식으로 만들어버리다니……. 내 리볼버의 탄 두를 주먹만하게 해서 쏘면 저렇게 될까.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초음속 펀치 였다. " 명령이야. 명령을 생각해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우리! " 그람드링은 그답지 않게 애원조로 얘기하다가 진우에게 씨도 먹히지 않자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에게 수중의 총을 겨누며 소리쳤 다. " Fuck! 네가 죽이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니까 내가 대신 죽여준 거잖아! 좋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라의 주인이고 몬스터고 다 잊어버리고 한 판 붙어보자고! 앙? 그게 네가 원하는 거지! " " ……. " 진우는 그런 그람드링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주먹을 움켜쥐고 냉정하게 머리를 식히려고 노력했다. 분명 지금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쪽은 진우 자신이었다. 피스 대원의 리더로서, 팔라딘 대의 대장으로서. 여기서는 사적인 감정보다 공적인 명령을 우선시 해야 한다. 그런 상황의 중요성을 모 르는 것도 아니다. 그래. 안다. 다 알아. 알지만……! ' 저 자식은 용서할 수 없어! ' 이 세상에는 지켜야할게 있는 법이다! 아무리 세상이 지금 당장 멸망한다해 도! 모든 것이 끝장난다 해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켜야할게 있는 법이다! 그런데 저 녀석은 그걸!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 내분입니까? " 촤르르르륵 순간, 그들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로부터 사슬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진우 와 그람드링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듯 너무나 가뿐하게 공격을 피해냈다. 사슬의 주인은 도망친 그람드링을 쫓아온 메두사였다. 그녀는 자신이 풀 수 있는 가장 많은 사슬들을 끄집어내며 눈을 가늘게 떴 다. " 당신들의 상대는 우리입니다. 얕잡아 보는 것도 정도껏 해주세요. " " 쳇! " 진우와 그람드링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혀를 차며 오라를 전개했다. 그런 바깥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붉은 용권풍은 더더욱 거세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옴팔로스의 의식은 끝나가고 있었다. Interlude out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46 - Ｂy Ｎext Ｎeo =-=-=-=-=-=-=-=-=-=-=-=-=-=-=-=-=-=-=-=-=-=-=-=-=-=-=-=-=-=-=-=-=-=-=-= 라무의 아이로 생활한지도 어느덧 9년. 내가 무사이 연수 과정을 다 마칠 무렵, 한가지 희보가 찾아왔어. " 리리스! 리리스! " 무세이온의 개인 능력 개발실에서 드림 다이브를 전개하던 나는 갑작스런 방 문자의 등장에 놀라야 했어. 능력 개발이란 어디까지나 우리 호문클루스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절 대로 그 진척도를 타인에게 보여줘서는 안되거든. 더군다나 그것이 같은 라무 의 아이라면 더더욱 들켜서는 안되지. 그리 오래 지난 일은 아니지만, 한 아이가 진척도를 동기들에게 유출당해 따 라 잡힌 일이 있었어. 뒤처진 그 아이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연거푸 시험을 패스하지 못하다가 결국 엔 폐기되고 말았지. 그 이후로 가뜩이나 조심해진 아이들은 무세이온의 폐쇄된 독방에서만 안심 하고 능력 개발에 몰두했어. 누군가가 능력 개발을 훔쳐보기라도 한다면 그를 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기로 암묵하고서. 그런 장소에 누군가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으니 당연히 놀랄 수 밖에! 하지만 방문자를 알아본 나는 즉각 경계를 풀었어. " 유메? 무슨 일이야? " " 하아. 하아. 그게……잠깐……. 하아. " 유메는 무리하게 달려왔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어. 나는 그 모습에 가볍 게 한숨을 쉬었지. 대체 무슨 바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능력 개발실로 들어오다니. 내가 확인도 않고 손을 썼더라면 대체 어떡 할 뻔 한 거야! 그런 내 불만을 뒤로 하고 유메는 저 혼자 신이 나서 소리쳤어. " 기뻐해! 리리스! 오늘 원로회에서 널 바르의 별로 임명했어! 라무의 아이 들 중에서는 네 명만을 선출하는 그 자리에 네가 오르게 되었다고! " " ……. " 바르의 별. 그 이름은 한때 판게아의 가이아를 속박했던 오리하르콘 제어구의 이름이야. 그러나 지금은 라무의 아이들 중 디멘션 트랜스퍼 프로젝트, 즉 DT 연구에 참 여할 자격을 얻은 아이들을 부르는 이름이었지. 정식으로 노아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칭호이기도 했어. 노아는 내가 앞에서 말했다시피 안과 밖으로 나뉘어져 있어. 안은 바로 우리 같은 호문클루스들, 라무의 아이들을 생산하고 개량하는 공장 지역. 밖은 일반 시민들, 즉 노아의 시민들이 거주하는 테라포밍(지구환경화) 지역. 한번도 나가본 적은 없지만 바깥 세상의 시민들은 우리와 달리 좀 더 여유있는 생활을 누리는 모양이야. 적어도 능력 개발에 목을 맬 필요는 없고 실험체 취 급도 당하지 않았겠지. 무사이에서 배운 바로는 현재 바깥 사회는 판게아 때와 같은 군주제가 아니 라 원로회를 앞세운 공화제라고 해. 하지만 그 원로회의 멤버들은 몇몇을 제 외하고는 여전히 라무 왕권 시절의 후계들이었지. 원로회는 왕국 시절부터 자신들을 수호해온 융족의 후손들에게 도사(都寺)의 직위를 수여, 휴거나 종말론을 펼치는 신흥 종교자들과 범죄자들을 잡아들였 어. 차원의 소멸이 다가오는데 사회 분위기나 치안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 었지. 그렇기에 원로회는 더욱 DT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해야만 했던 것이고. " 응? 아아, 그렇게 되었구나. " 나는 유메의 말에 별 감흥없이 답했어. 어차피 바르의 별로 뽑히는 이들은 라무의 아이들 중 상위권에 드는 네 명. 수석을 언제나 놓치지 않던 내가 새 삼 선출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지. 단지 의외라면 아직 무사이 연수가 끝 나지도 않았는데 합격 통지가 날라왔다는 정도? 그런 내 담담한 반응에 유메는 답답해 하며 소리쳤어. " 기쁘지 않은 거야? 난 소식을 듣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려 혼났는데! 어떻 게든 빨리 이 소식을 알리려고 쉬지도 않고 뛰어왔다고. " " 그래……. " 난 쓴 웃음을 지었어. 솔직히 유메처럼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지. 분명 지금 까지의 노력을 인정받았다는 거니까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어차피 우리는 바깥 세상의 시민들을 위한 '희생양'이라는 거지. 인권도 제대 로 보장받지 못하고 실험체로 취급받는, 노아를 판게아로 귀환시키기 위한 도 구에 불과해. 물론 나와 카이는 유메를 만났다는 점에서 예외인 케이스이기는 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인식이 변하는 건 아니지. 결국 바르의 별로 선출되어 시민권을 보장받는다 해도 차별은 계속된다는 거 야. 좀 더 특별한 도구로서 인정받기는 하겠지만. " 잘 됐어! " 유메는 내가 바르의 별이 된게 그토록 감격스러웠는지 날 껴안으며 연신 잘 됐어만 연발했어. 아마 내가 생각하는 바를 그녀도 모르는건 아닐 거야. 어디 까지나 그녀는 원로회가 파견한 관찰자였으니까. 다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인정받았다는게 기뻤던 거겠지. 나는 괜히 코 끝이 징해져서 서둘러 그녀를 달래주었어. " 잊은 거야? 난 유메의 아이라고. 바르의 별쯤이야 당연히 되고도 남을 만 큼 뛰어나단 말이야. " " 그래! 그래! 잘됐어! 정말! 정말 잘됐어! ' 또 그 소리만……. 난 바보같다는듯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어. 처음 만났을 때는 한참을 올려다 볼 정도로 컸던 그녀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작아졌을까. 9 년이 지나는 동안 유메는 내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아져 있었어. 아니, 그만큼 내가 큰 것일테지. 내 작은 키가 유메를 넘어서는 세월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결코 짧은 시 간도 아니었어. 그래. 결코 짧은게 아니야. 셀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 시간을 나는 그녀와 함께, " 나의 자랑스러운 딸, 리리스……. " 내 품에서 들려오는 유메의 속삭임.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감에 나는 조 용히 눈시울을 붉혔어. 마음 속으로 몇번이고 유메의 말을 되씹으며. 자랑스러운 딸. 자랑스러운 딸. 그날 밤. " 어휴. 이를 어쩌지. " 기숙사로 돌아온 나와 유메는 당면한 사태에 고민하고 있었어. 우리가 잊어 버리고 있던게 하나 있었지. 바로 카이 브릿드. 그가 내 합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거였어. 유메야 내가 바르의 별이 되어 DT연구시설로 이동하더라도 내 담당 관찰자이 기에 따라올 수 있지만, 카이는 줄곧 여기를 떠날 수 없었지. 무사이 연수 과정동안 바르의 별에 선택된 호문클루스들은 무세이온을 나갈 수 있지만 나머지 라무의 아이들은 계속 이곳에 체류해야했던 거야. 그 중 능력이 고착화되었다고 판명되는 아이들은 바깥으로 보내져 융족의 도 사들에게 배치되고, 능력의 개선 여지가 있는 아이들은 바르의 별이 될 때까 지 연수 과정을 계속받아야 해. 한 해에 4명 밖에 뽑지 않는 바르의 별이니까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이 넘 도록 연수 과정을 밟아야 하지. 다음해에 가볍게 합격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 면 재수에 삼수를 거듭하다가 결국엔 융족의 도사로 끌려가는 아이들도 태반 이야. 올해 바르의 별로 합격된 아이들은 나와 상위권의 세명. 나까지 포함해서 다 들 정신 구현 계통의 아이들이었어. 최근 들어 느낀 거지만, 관찰자들이 능력 개발 점수를 높게 주는 아이들은 대부분 이 구현 계통이었지. 어쨌든 카이도 구현 계통이기는 하지만 매번 간신히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바르의 별이 될 수는 없었어. " 언젠가 이런 날이 올거라고는 생각했지만……. " 유메는 기숙사 밖의 정원에서 우두커니 벤치에 앉아있는 카이를 보며 안타까 워 했어. 그녀는 카이도 나와 같이 바르의 별이 되기를 바랐겠지만 세상 일이 란게 그렇게 수월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 유메의 욕심 같아서는 앞으로도 계 속 우리 모두의 관찰자로 남고 싶겠지만 어디까지나 원로회가 정해준 담당은 나 하나였던 거야. 나는 내 합격 통지를 전했을 때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렸던 카이를 떠올리며 마음이 무거워졌어. 그는 예전보다 밝아지기는 했지만 그만큼 우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어. 도 무지 나와 같은 나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어리광이 심했지. 내가 너무 동생같 이 여겨왔기 때문일까. 걱정이 앞섰어. 이대로 우리가 떠나버리면 카이는 어떻게 될까. 지금도 동기 들에게 무시 받으며 관찰자들에게 모자란 아이 취급을 받는데. 그 괴롭힘들을 혼자서 감당해낼 수 있을까? 이겨낼 수 있을까? ' 혹시 충격으로 능력 시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저 카이의 성격이라면 자포자기해버릴 수 있어. 가뜩 이나 외로움을 타는 아이잖아! 그때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유메가 떠밀었어. " 카이에게 갔다 와, 리리스. 아무래도 저 아이가 슬퍼하는건……혼자가 된 다는게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닐 거야. " " 뭐? " 난 영문을 몰라 되물었어.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그런 나에게 유메는 미소를 지으며 더더욱 알 수 없는 소리를 했지. " 아무래도 카이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은 어른스러울지도? " " ……? " 나는 그녀의 말대로 정원의 벤치에 앉아있는 카이에게 다가갔어. 카이는 어 깨를 떨며 흐느끼고 있었지. 얼마나 울었던지 눈가가 잔뜩 부어있었어. 그 모습에 더더욱 카이와 헤어져야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어. 나는 그의 곁에 앉아 조용히 그를 달래주었어. " ……카이. 울지마. 잠시동안만 헤어져 있는 거잖아? " " ……. " " 유메도 매일은 힘들겠지만 자주 너한테 들린 댔어. 그러니까 생각보단 외 롭지 않을 거야. 지금 하고 크게 다르지 않아. " " ……우― " 카이는 내 말에 오히려 더 울음을 터뜨렸어. 더 서럽게 울었지. 내,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그렇게 당황하는 나에게 카이는 울먹이며 말했어. " 달라……. 흑. 다르단 말이야……. " 다르다니? " 헤어지기 싫어……. 리리스, 헤어지기 싫어……. " 카이는 내 옷소매를 붙잡으며 흐느꼈어. 그제야 난 깨달았지. 카이는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웠던게 아니었어. 이 아이는 나와……, " 리리스, 좋아해……. 좋아해……. 으흑. " 카이는 어린 아이처럼 나를 끌어안고 소리내 울었어. 지금껏 날 잘 따르는 아이였지만 이렇게 직접 좋아한다고 말해주는건 이번이 처음이었어. 언제나 조용히 나를 따라다니며 가끔 수줍게 웃기만 했던 아이가……. ' 같이 가자, 카이. ' 어쩌다 손을 잡아주면 얼굴을 붉히고. ' 리리스― ' 괴롭힘을 당하다가 나를 만나면 울음을 터뜨리고. ' 먼저 먹지 왜 그랬어? ' 내가 늦는 줄도 모르고 같이 식사를 하겠다고 기다리던 카이. 언제나 내가 곁에 없으면 잠들지 못했던 카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한 칭찬에 미안할 정도로 좋아해주던 카이. 그 지난 날들이 떠오르자 나는 눈물로 얼룩진 그의 눈가를 닦아주며 미소했 어. " 카이, 열심히 해서 바르의 별이 되는 거야. 예전에는 유메가 널 데려왔으 니까 이번에는 네가 우리를 찾아 오는 거야. 알았지? " " 리리스……. " " 약속해. 반드시 만나러 오겠다고. 그리고 또다시 셋이서 함께 지내는 거 야. " " 으응― "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울음을 터뜨렸어. 정말 눈물이 많기도 하지. 하지만 그러는 나도 울고 있었기에 카이를 뭐라고 할 순 없었어. 나는 힘껏 카이를 끌어안으며 속삭였어. " 즐거울 거야. 분명……. " 셋이서 다시 함께 살 수 있다면. ' 정말 즐거울 거야. ' 다음날. 나와 유메는 카이에게 작별을 고하고 9년간 시간을 보낸 메사이온을 떠났어. 그리고 처음으로 호문클루스 공장을 나오게 되었지. 나는 셔틀(shuttle) 밖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에 넋을 빼앗겼어. 처음으로 보게 된 바깥 세상. 아무리 메사이온에서 무사를 받으며 공부했다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천양지 차였지. 바깥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어. 테라포밍으로 만들어진 대지는 차원이 소멸하고 있다는 것을 잊게할만큼 푸 르렀고, 그 위에 형성된 노아의 돔(dome)은 그야말로 별천지로 가득차 있었지. 바깥 세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나와 함께 온 다른 바르의 별들도 마찬 가지였어. 그 순간만큼은 다들 한 마음이 되어 눈 앞의 낙원에 도취되었지. 유메는 그런 우리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듯 웃음을 터뜨렸어. " 무사의 암울한 내용에 비해 훨씬 아름다운 곳이지? 세계의 멸망이 정해져 있다 해도 생명은 계속 살아가는 거야. 차원의 소멸이니, 판게아로 돌아간다느니. 그런 사실들만 몰랐더라면 한층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겠지만. " " 으응……. " " DT연구실은 돔 바깥에 있어. 안타깝게도 도시 구경은 못하게 될 거야. " " 으응……. " 상관 없어. 이렇게 돔을 보고 있기만 해도. 나는 멍하니 같은 대답만 반복하며 조금이라도 더 바깥의 풍경을 뇌리에 새 기려고 노력했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 끝이 있기 때문에……. " " 응? " 갑작스런 내 중얼거림에 유메가 되물었어. 난 뒷말을 이으려다가 곧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어. " 아무 것도 아니야. " 첫 외출이라서 감상에 빠졌던 걸까. ' 끝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게 아닐까…… 라니. '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셔틀이 연구시설에 도착하기를 기다렸어. 더 이상 바 깥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 대신 나와 카이, 유메 셋이서 생활하던 시절의 모습들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 거렸어. 태어나서 줄곧 지내온 보금자리를 떠나왔기 때문일까. ' 이런 기분이 드는 건……. ' DT 연구시설에 도착한 우리는 낯선 환경에 적응할 틈도 없이 소장실로 향했지. 연구단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조용했어. 돔에서 떨어져 있기도 했고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세워진 탓도 있었지만, ' 사람이 안보여. ' 드문 드문 보이는 관찰자들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았지. 바로 라무의 아이들. 우리들보다 한발 먼저 바르의 별이 된 선배들이 보이지 않았던 거야. 우리가 네자리 숫자의 코드 네임이니 적어도 세자리 수 이상의 선배들이 우 리 앞에 있었겠지? 그리고 그들 중 적어도 열 자리 이상의 선배들이 바르의 별 이 되었을 거야. 그렇다면 DT연구를 하고 있을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왜 보이지를 않는 거지? " 이상하네. 다들 지하 연구실에 있는 건가? " 내 곁을 따라오던 유메도 의문을 표했어.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 " 환영한다, 바르의 별 제군들. 자네들은 오늘부터 우리 연구시설의 일원이 되어 함께 디멘션 트랜스퍼를 연구하게 된다. 이런 귀중한 기회를 준 원로 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에, 또 그리고― " 연구소의 소장은 푸근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었어. 덕분에 소장실로 오기 전까지의 불안함을 떨쳐낼 수 있었어. 아아. 역시 괜한 걱정이었나? " 우리의 디멘션 트랜스퍼 실험에 적극 동참해주도록. " " 아아악―! " 목에 맨 제어끈이 신체의 자유를 빼앗고 바나 베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의 식에 노이즈를 일으키기 시작했어. 나와 나머지 세 아이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어. 남이 당하 는 것을 보아오기만 했지 한번도 당해본 적은 없던 끔찍한 고통! 제어끈의 성분은 노아가 이 차원에서 발견해낸 아다만티움(Adamantium)이라 는 금속으로, 이는 오리하르콘과 마찬가지로 삼계의 피드백이 만들어낸 차원 촉매들 중 하나였어. 문제는 이 차원 촉매는 평소에는 바나베인과 아무런 마찰을 일으키지 않지 만 특정한 조작이 가해지면 착용자의 정신 감응력을 흡수한다는 거였지. 오 리하르콘과는 반대의 성질을 띈 차원 촉매였던 거야! 바나베인이 빨려나가는 고통이란 전신의 수분이 사라지고 빈 껍데기만 남은 육체를 쥐어짜는 고통과 비슷해. 도저히 제정신으로 견뎌낼 수 있는 고통이 아니야. 그렇게 끊이질 않는 고통에 휩싸여 울부짖는 우리들을 연구소의 가드들이 옮 겨가기 시작했어. 우리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끌려나갔 지. 나는 눈물로 일그러진 시야 속에서 유메를 찾았어. 유메! 어디 있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거야? 유메! 어디 있어? 제발 우리를 구해줘! 어떻게든 도와줘! 유메! 어디 있는 거야! " 이게 무슨 짓이에요! 리리스! 리리스! " 그녀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어. 아아. 유메. 거기 있구나. 날 부르고 있어. " 내 리리스를 돌려줘―! " 날 구해주려 하고 있구나……. 필사적인 유메의 목소리에 안도한 나는 그만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어. 그래. 어떻게든 그녀가 날 구해줄 거야. 이대로 끌려가는 걸 유메가 지켜볼 리 없으니까. 그렇지? ' 그렇지, 유메? ' 촤아악― 차가운 물이 전신에 쏟아지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그리고 눈을 뜬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에 경악해야만 했지. 여기는! 여기는! ' 어째서 다시 여기에! ' 유리관이었어! 어린 시절의 나를 가두고 있었던 유리관! 숨이 막힐 것 같이 좁고 단단한 유리관! 그 안에 나는 의복이 벗겨지고 손발이 쇠고리로 구속되 어 있었어. 발 밑에서부터 재생액이 차오르고 있었어!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누가 날 이런 곳에 집어넣은 거야? ' 하아! 하아! 하아! ' 숨이 가빠지고 있었어. 이성이 마비되고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가 날 찾아들었 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고 했던 유리관 속의 기억들이 되살아났 어. 그때의 감정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외로움! 무력감! 답답함! 고립감! 잊어버리고 싶었던 그 악몽같은 순간들! 너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던 유리 관 속의 생활! 싫어! 싫어! 구해줘! 살려줘! ' 하아! 하아! 하아! '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유리관에 몸을 기댔어. 맨살에 닿는 그 차가움. 몸 이 기억하고 있었어. 소름이 끼치도록 기억하고 있어! 유리벽에 매달려 바깥을 둘러보았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하 지만 옆을 돌아보는 순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아이들을 볼 수 있었 어. 그들도 유리관에 갇혀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 그리고 곧 유리관에 갇힌 이들이 우리들 뿐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건너편의 어둠속. 그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수많은 유리관들이 보여왔어. 너무나 많았기에 세는 것조차 포기해야 했지. 그 유리관의 안에는 재생액에 잠겨있는 아이들이 있었어. 음산한 초록빛깔 의 물 속에 가라앉아 조용히 우리들을 응시하는 아이들이 있었어. 그 눈들을 마주하자 나는 알게 되었지. 저 아이들이 바로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온 바르의 별들이라는 것을! ' 어째서? ' 바르의 별은 DT프로젝트의 연구원을 뜻하는게 아니었나? 노아의 시민으로 대 우받는게 아니었어? 이건 호문클루스 때와 하나도 다를게 없잖아? 그저 실험체일 뿐이잖아? 뭐가 바르의 별이야? 뭐가 선택받았다는 거야? 대체 뭐가! ' 아! ' 그때 유리관 저편에 서있는 하얀 인영의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어. 처음엔 어두워서 뭐가 뭔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곧 하얀 가운을 입은 관찰자 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 유메! 유메는? ' 나는 그녀를 황급히 찾았어. 유메! 내 관찰자! 내 보호자! 내 어머니! ' 있다! ' 관찰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어. 나는 다급하게 유리관을 두들기며 소리쳤지. 어느 새인가 재생액이 허리까지 차오르고 있었어. " 꺼내줘! 제발 날 꺼내줘! " 쾅― 쾅― " 유메! 여길봐! 나 여기 있어! 여기 있다고! " 쾅 쾅 쾅 두손이 부서져라 유리를 두들기며 소리쳤어. 안 들리는 건가? 내 목소리가 안들리는 거야? 유메! 안 들려? " 유메! 제발 날 여기서 꺼내줘! " 쾅 쾅 쾅 쾅 " 구해줘! "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것도 느끼지 못하며 애원했어. 지금 당장이라도 유메가 날 구해줄거라고, 그녀가 내 목소리를 듣기만 한다면, 내가 갇혀있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반드시 구해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 유메! 나를 봐! 내가 있는 쪽을 봐! 리리스가 여기 있다고! 쾅― 그러나 곧 나는 알 수 있었어. 유메가 날 못본게 아니야. 내 목소리가 들리 지 않았던게 아니야. 그 증거로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채 내가 있는 유리관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 그녀는 떨고 있었어.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유메에게 도움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녀 의 힘으로는 날 구해줄 수 없었던 거야. 유메는 그저 노아의 명령을 따르는 관찰자일 뿐. 이 실험을 막을 여력이 없 었지. 눈앞이 깜깜해졌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지. 현기증이 나고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았어. " ―! " 재생액이 목 위까지 차오르고 있었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어. 어떻게 든 탈출해야한다는 생각 밖에 할 수 없었어. 능력을! 드림 다이브를 사용한다면! 와그르르르― 재생액이 얼굴을 뒤덮자 나는 입에서 거품을 내뿜으며 발버둥쳤어. 손과 발 에 묶인 쇠고리가 내 바나베인을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있었지. 예의 아다만 티움 제어기였어!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올 리 없는 목소리를 내질렀어. ' 꺼내줘! ' 꺼내줘! ' 유메 크라이시스―! ' 바르의 별로 생활한지 한 달.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가 시작되었어. 감았던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 은 어두운 연구실의 전경. 드문 드문 보이는 유리관들. 그 안에서 나처럼 눈 을 떠 주위를 둘러보는 아이들. 눈과 눈을 마주 치는 것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어. 안녕하세요. 좋은 꿈 꾸셨어요?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후후, 후후후, 후후후후― 유쾌한 것 같기도 하고 몽롱한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머리 속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 간지러움. 고통. 쾌감. 번갈아가며 계속되는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에 웃기도 하다가 울기도 하다가 화내기도 하다가 슬퍼하기도 하다가. 그러다 지치면 잠시 눈을 붙이고. 그러다 깨어나면 다시 감정에 시달리고. 시간과 공간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나는 정신이 나갔다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 고 있었어. 어디까지가 제 정신이고 어디까지가 제 정신이 아닌지 이제는 나도 모르겠어. 이런게 바로 미쳐간다는 건가? 이대로 나는 돌아버리는 건가?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해. 무슨 생각이든 좋으니까 어쨌든 생각을 해. 일단 지금의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야. 아, 이건 어제도 생각했던 건가? 모 르겠어. 기억이 안나. 어쨌든 이렇게 정신이 들쭉날쭉한 건 그 약 때문일 거야. 넥타르(Nectar)라는 이름이었던가? 재생액에 그 약을 타면서부터 줄곧 이런 상태야. 처음에는 별 다른 이상이 없 었어. 하지만 5, 6일 정도 지나면서부터 머리 속에서 내내 목소리가 울려퍼지 더군. 귀를 통해서 들리는건 아니었어. 뇌로 직접 들려오는 목소리였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와 얘기를 나눠보았어. 유리관 속에서 아 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무료함을 달랠겸 재미 삼아 이것저것 선문답을 주 고 받았지. 그런데, 그런데. 모르겠어. 그게 정말 목소리였던 걸까? 아니, 그 목소리는 내 목소리였어. 그래. 내 목소리. 목소리 따위가 아니야. 내 생각이었던 거야. 내 생각.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그게 입밖으로 나온 걸 거야. 후후후. 스스로 묻고 답하다니.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건가, 나? 더 많은 날들이 지나자 이번에는 빛의 덩어리들을 볼 수 있었어. 환청 다음 에는 환각이기라도 한 건지. 어쨌든 너무나 밝은 빛의 줄기들이었지. 그 줄기들이 내 몸을 감싸며 주위를 밝혀주었어. 그 빛이 너무 밝았는지라 덕분에 잠을 잘 수 없었지. 몇날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하고, 그러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났다가. 그러던 중 점점 깨달을 수 있었어. 재생액에 섞어넣은 그 넥타르라는 건, 아마도 복용자의 정신 감응력을 높여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는 약품이었을 거야. 그 증거로 내가 정신을 집중하면 환청과 환각이 가라앉기 시작했지. 대신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거나 집중을 풀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그야말 로 고문이 따로 없었지. 아마도 이건, 육체의 초전도 현상을 강제로 높여 그 것을 제어함으로서 바나 베인을 강화시키기 위한 실험이었나 봐. 덕분에 정신감응력은 이 한달간 상당히 높아진 것 같지만……. 대신 심신을 무리하게 몰아부친 덕분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달해 있었어. 몇번이고 각혈하고, 코피를 흘리고, 귀에서 피를 나오고. 월경 주기도 엉망이 되어 자궁에서 피가 멈추지를 않았지. 그때문에 관찰자 들이 재생액을 몇번이나 갈아주어야 했어. 잔손이 많이 간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지. 하지만 이런 내 상태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나은 거였어. 태반의 아이들은 넥타르의 투여로 활성화된 초전도 현상을 이기지 못하고 발광하다 죽어갔어. 나와 함께 들어온 세 아이들도 그렇게 괴로워하며 죽었지. 아, 방금 내 앞 유리관에 있던 아이가 죽어버렸다. 전신의 구멍에서 흘러나 온 피가 유리관 안의 재생액을 붉게 물들였어. ' 축하해……. 잘가. ' 난 아이의 죽음을 오히려 축하해주었어. 죽는건 안되 보였지만, 이런 괴로움 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거든. 실제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아이들이 많았어. 단단한 유리벽에 뼈가 드러날 때까지 머리를 박다가 죽는 거야. 그 외에도 혀를 깨문다든지 스스로의 목을 조른다든지……. 나도 고통을 견디다 못하고 몇번이고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에는 포기하고 말았지. 왜냐하면, ' 나의 자랑스러운 딸, 리리스. ' ' 리리스, 좋아해……. ' 유메와 카이와 함께 했던 나날. 그 나날의 기억들이 너무나 뚜렷해서, 죽으려 할 때마다 눈앞을 아른거려서, 도저히, 도저히 죽을 수 없었던 거야.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어. 아무런 희 망이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살을 포기한 날이면 하루 종일 쉼없이 울었어. 너무나 서러워서, 너무나 그리워서 울고 또 울었지. ' 끝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웠던 거야. ' 우리 셋이 함께 했던 순간들은. ' 그렇기에 이토록…….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 아니, 상관 없나? 이제 시간 따위는. 어쨌든 이 유리관 속에서의 생활도 어느 정도는 할만 해졌어. 역시 사람의 적 응력은 참 대단해. 아, 난 사람이 아니었지. 그래. 호문클루스의 적응력이라고 해두자. 넥타르가 주는 고통에도 익숙해졌어. 그만큼 내 정신감응력이 높아졌단 증거 겠지. 수많은 바르의 별들이 죽고, 또 수많은 바르의 별들이 다시 유리관으로 들어 왔어. 나는 유리관 한편에 기대앉아 퀭한 눈으로 그것들을 지켜보았지. 별다른 감 흥은 생기지 않았어. 너무나 많이 봐왔기에 무감각해졌달까.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이제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았어. 악착같이 살려는 것도 우습고, 죽으려고 기를 쓰는 것도 우스워.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있었어. 즐거움도 슬픔도……, 사랑도 기 억도……. 그리고 한때는 내 가족이었던 그들까지도……. 그러던 어느날, " 리리스……. " 뜻밖의 방문객이 날 찾아왔어. 재생액을 교체할 시간도 아닌데 재생액이 빠 지고, 한번도 듣지 못했던 외부에서의 소리가 들려온 거야.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가슴은 지금까지 무감각했던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뛰어올랐어. 거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유리관 밖에서 날 응시하는 낯익은 얼굴의 여인. 수천번도 더 머리속에서 그 려왔던 그 얼굴. 내 관찰자. 내 보호자. 내 어머니! 유메……크라이시스……! ' 꺼내줘! ' 순간 그때의 기억이 뇌리에서 떠올랐어. 내가 이 유리관에서 울부짖던 것을 방관했던 그녀. 내 애원을 무시했던 그녀. 결국엔 날 버리고 돌아가버렸던, " 미안해. 미안해, 리리스. 미안해……. " 유메는 내가 있는 유리관으로 다가와 날 올려다보며 흐느꼈어. 그것을 보자 머리 속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지. 그 울고 있는 모습에 가슴에 쌓아둔 무언가 가 타오르는 것 같았어. 미안해? 미안해라고? 이제와서 고작 한다는 말이 그것 밖에 안되는 거야? 날, 날 이런 곳에 팽개쳐둔 주제에……. 오랫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던 주제에, " 꺼져. "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비해 너무나도 냉정한 목소리. 내가 생각해도 놀랄 만 큼 차가운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어. 유메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지. " ……리리스. " " 꺼져버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 이번에는 내가 거절하겠어. 내가 외면해주겠어! 그때 네가 내 애원을 저버렸 던 것처럼! 날 무시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 쪽에서 부정해주겠어! 어차피 날 꺼내주지도 못하면서! 날 이런곳에 처넣은 노아의 하수인에 불과하면서! 뭐가 가족이야? 뭐가 어머니야? 뭐가 보호자야? 허울 뿐인 주제에. 가식이었던 주제에! 이 위선자! " ……. " 나는 상처받은 유메의 얼굴을 피하지 않으며 노려보았어.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증오를 두 눈에 가득 담아서. 그런 내 모습에 유메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어. 그러다 힘없이 몸을 돌려 연 구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지. 그 사라지는 뒷모습이 마치 신기루와 같았기에 난 그녀가 떠난 뒤에도 한동 안 그녀의 자취를 뒤쫓아야 했어. 어둠 저편에서 유메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 위이이이잉 다시 유리관 속으로 재생액이 들어차기 시작했어. 재생액에 잠기는 내 눈꺼 풀 사이로 작은 거품 방울들이 소리없이 흘러 나왔지. 나는 유메가 사라진 어둠 저편을 향해 속삭였어. ' 미안해요. ' 미안해요. ' 미안해, 유메……. '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메에게 부린 나의 어리광이었어. 그날 이후로 유메는 더 이상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어차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 ……. " 매일같이 그녀의 안부에 대해서만 걱정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어. 쓸 쓸히 사리지던 그녀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지. 결국 나는 내 실험 결과를 체크하러온 연구소의 소장과 관찰자들에게 유메의 소식을 물어보기로 했어. " 유메……크라이시스는? 그녀는 어디에……? " 관찰자들은 바르의 별에 접근할때 행여나 그들이 날뛰지 못하도록 언제나 마 취제를 사용하지. 그 효과에 몽롱해지는 의식을 바로 잡으며 유리관 너머의 관찰자들을 노려보았어. 그들은 마취 도중에 내가 말을 걸자 꽤나 놀란듯 했 지만. 곧 별 다른 문제가 없을거라 생각했는지 순순히 답해주었어. " 그녀는 감금당했다. " 감금? 흐릿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어. 감금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 그녀는 원로회의 방침을 무시하고 너를 불법으로 빼돌리려고 했지. " 원로회의 방침을……무시? 유메가? " 하지만 결국 웅족의 도사들에게 붙잡혀 사태가 커지는 것은 조기에 수습할 수 있었다. " 어째서? 어째서 유메가! 어째서 그런 짓을! 나는 다급한 마음에 비틀거리며 유리관으로 다가가, 관찰자에게 추궁하듯 물 었어. " 그, 그렇다면 유메는? 유메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녀는! " " 그녀는 원로회를 거역한 위험 분자로 판명되었다. 더구나 바르의 별로 채 택된 라무의 아이를 빼돌리려고 했으니……아마도 무기 징역을 피할 수 없 을 거다. " " 아, " 순간 힘이 빠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어. 유메, 어째서 그런 짓을 해버린 거야? 어째서……. ' 어째서 나 같은 것을 위해서……. '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지. 내가 원망을 해서, 그녀에게 소리쳐 서, 그녀를 외면해서! 바보같이 어리광을 부려서……!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했어. 입에서 흐느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억눌 린 소리가 흘러나왔지. 이제 다시는……유메를 볼 수 없는 건가? 그 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던 거야? ' 오늘부터 네 이름은 리리스, 리리스야. ' 나에게 이름을 주었던 그녀. ' 그 이름은 모든 데몬족의 어머니이자 위대한 밤의 여왕을 뜻하지. 넌 앞으 로 우리의 여왕이 되는 거야! ' 나에게 언제나 미소를 보여주었던 그녀. 언제나 날 지켜주었던 그녀. 볼 수 없게 되었어. 볼 수 없게 되었어. 이제 두번 다시는……. " 아, 아아아아아. " 약에 취했기 때문이 아니었어. 감정이 고조되었기 때문도 아니었어. 그냥 눈물이 흘러나왔어. 그럴 뿐인데……그럴 뿐인데.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어. 멈추지를 않아. 나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그녀의 이름을 연신 목놓아 불렀어. " 유메……. 유메……. " 난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녀가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 유메― " 바보같이 그것을 너무 늦게 기억해내고 말았어. ' 살아가자. ' 슬프고 힘들더라도. ' 살아가자. ' 아프고 괴롭더라도. ' 살아가자. '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도. ' 살아가자. ' 가슴 속 추억을 끌어안고서……. " NP3223의 동결을 해지한다. 축하한다, 바르의 별. " 내가 다시 유리관을 나왔을 때는 5년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할렘(Harlem). 미국 뉴욕시에 있는 이 지구는 주택 지구 전체가 노후화되고 과밀 주거 형 태를 취한 업타운 흑인 거주지였다. 그리고 사회적 낙후자나 반사회적 행위 자들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슬럼(slum)가이기도 하다. " 싫어! 데려가지마! 미연이 데려가지마! " 그리고 이 으쓱한 골목 한켠에 세워진 낡은 고딕풍의 성당. 가톨릭 교회의 후원을 받는 이 곳은 슬럼가로 버려진 아이들을 수용하는 고 아원이었는데, 그 이름을 누가복음 10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사마리아라 부르 고 있었다. 선한 사마리아(Samaria of sincerity)원. 한 번이 아닌 삶 속에서 지속적으 로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의 이름. 갓 수녀원을 나온 사라 아미타, 아가다(Agatha)란 세례명을 가진 그녀는 현 재 2년이 안되는 기간동안 이 선한 사마리아 원에서 선생님을 맡고 있었다. " 으앙! 진우 오빠! " 한 소녀가 성당의 입구에서 동양인 부부에게 끌려가며 울고 있었다. 이제 막 대여섯 살 쯤 되었을까. 그 맞은편에서는 소녀와 크게 나이 차가 나지 않는 소 년이 아가다 수녀에게 붙들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서미연. 소년의 이름은 정진우. 뉴욕의 슬럼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동양계 고아들이었다. 간혹 가다 뉴욕으로 유학온 동양인 학생들이 실수로 만든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슬럼가에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미연과 진우도 그런 케이스로 고아가 된 아이들이었다. 아마 아이들에게 이름 을 붙여준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버릴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 도미니꼬(Dominic). 그러면 안돼. 안젤라(Angela)는 이제부터 좋은 부모님 들을 만나 모국으로 가는 거란 말이야. 웃으면서 보내줘야지. " 아가다 수녀는 막무가내로 미연에게 달려가려는 진우를 뜯어말리며 힘겹게 타일렀다. 도미니꼬란 진우의 세례명, 안젤라는 미연의 세례명이었다. 진우는 독이 오른 눈빛으로 아가다 수녀를 노려보았다. " 내 이름은 도미니꼬가 아니야! 그리고 좋은 부모 같은게 어디 있어! 어차 피 자기들 사정이 조금만 안 좋아지면 금새 버림받을게 뻔해! 그럴 바에는 내가 지켜줄 거야! 다른 사람에게 미연이를 맡길 순 없어! " " 도미니꼬……. " 아가다 수녀는 어린애답지 않게 냉소적인 진우의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 었다. 진우가 선한 사마리아원에 온 것은 다섯 살 때. 사리를 분별할 줄 아 는 나이에 버림받았으니 이 어린 소년이 부모에게 받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 진우가 선한 사마리아원에서 줄곧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같 은 한국계 고아인 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우와 미연은 정말 친 오누이 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를 끔찍하게 아껴주었다. 그건 옆에서 지켜봐왔던 아 가다 수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둘을 갈라놔야 하는 그 녀도 마음이 아팠다. " 도미니꼬, 안젤라를 맡아주시기로 한 분들은 너희들과 같은 한국인이야. 그 분들은 사정으로 아이를 낳을수 없기에 대신 안젤라를 친딸로 맞이하 려는 거야. 설마 못되게 굴려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안젤라를 보내는 거 겠니? " " 도미니꼬라고 부르지마! 미연이도 안젤라가 아니야! 왜 다들 자기 멋대 로 정해? 왜 멋대로 정해서 멋대로 헤어지게 만드는 거야! 우릴 버린 사 람들도! 아가다 수녀님도! 다들 자기 멋대로야! 이기적인 어른이야! " 진우는 거기까지 소리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자 신이 떼를 써봤자 미연이와 헤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 던 것이다. " 오빠! 오빠! 진우 오빠―! " 진우는 자신을 목놓아 부르는 미연을 흐려져가는 시야로 바라보았다. 미연 은 억지로 차에 태워지면서도 열려진 차창 밖으로 진우에게 손을 내밀고 있 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아가다 수녀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으며 더욱 세 게 품 안의 진우를 끌어안았다. 부우우웅 미연을 태운 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진우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 도 하지 못하며 멍하니 멀어져가는 차를 응시하기만 했다. 차 안에서는 미연 이가 차창에 달라붙어 연신 진우를 찾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우는 차마 표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힘이 없기에 부모에게 버려질 수 밖에 없었다. 힘이 없기에 미연이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힘이 없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애이기에 자신은……. " 도미니꼬! " 진우는 자신을 붙잡은 아가다 수녀의 손을 뿌리치며 자동차가 출발한 방향으 로 뛰어나갔다. 이미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미연이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저 달리고 싶었을 뿐이다. 이 미칠듯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 괴로운 기억들을 떨쳐낼 수만 있다면……. " 미연아아앗! " 진우는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자동차를 향해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하지만 미연을 태운 자동차는 조금도 지체 없이 골목을 돌아 사라져갔다. 2011년의 봄. 어느 고아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이별이었다. Ｖolume.12 " Ｓhooting star in Ｎewyork " 2018년 5월. 《쿵― 쿵―》 TV에서 특이한 리듬을 탄 북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참 사마리아원의 복도를 청소하던 아가다 수녀는 소리에 이끌려 걸레질을 멈췄다. TV가 있는 곳을 돌 아보니, 거기에는 고아원의 아이들이 한가득 몰려나와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 다. 화면에서는 특이한 복장을 한 동양인 댄서들이 수백명 몰려나와 현란한 춤을 추고 있었다. 파란색과 붉은색의 두 가지 색상으로 옷을 나눠 입은 댄서들은 처음에는 대립하는 것처럼 나뉘어 춤을 추다가, 곧 한데 어우러져 손에 들고 있던 하얀색 천들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운동장 크기만한 무대가 동 시에 하얀 파도에 뒤덮이는 것처럼 출렁인다. 그리고 떠오르는 문구. 'Korean colour kicks off Cup as Blatter booed.(한 국의 색채, 월드컵을 킥 오프하다)' 그제야 아가다 수녀는 TV의 춤시위가 무엇인지 깨닫고 반색했다. " 시작했구나? " 아가다 수녀의 물음에 TV앞에 모여있던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인 열 일곱살 토마스(Thomas)가 답했다. " 예! 이제 막 시작했어요, 월드컵 개회식. 해설자가 그러는데, 저 파란색 이 사우스 코리아를 뜻하는 거고, 붉은색이 노스 코리아를 뜻한데요. 그 리고 저렇게 파란색과 붉은색이 흰색으로 통일되는 건 이번 개최국인 한 국이 분단 국가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하고요. " " 분명 통일 한국이라면……통일 전에도 월드컵을 유치(誘致)했던 나라지? " " 예. 그때는 일본과 동시에 유치한 모양이지만. " 토마스는 주근깨가 난 얼굴로 사심 없이 웃었다. " 그래도 개최한지 20년도 되지 않아서 또 월드컵을 유치하는 걸 보면 대단 한 나라긴 한가 봐요. 2018년 월드컵은 오세아니아에서 열릴 거라고 생각 했는데. 아마도 통일이 되었다는게 어필된 건가? " " 그렇겠지. 독일의 경우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 " 저도 알아요. 제가 여섯살 때 통일 독일이 32년만에 다시 월드컵을 개최 했잖아요! " 아가다 수녀는 축구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는 토마스의 모습에 쓴웃 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축구라면 사족을 못 썼지. 오죽했으면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적어낸 소원이 축구공이었을까. " 엇! 사무엘 회장이다! " 토마스는 세러머니가 끝나고 피파의 수장이 연단으로 오르자 다시 TV로 눈 을 돌렸다. 아가다 수녀는 그런 토마스의 등을 두들겨주며 자신도 TV를 바라 보았다. TV화면 상단에 떠오르는 2018 통일 한국 월드컵이라는 글자가 유난 히도 크게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 통일 한국. ' 그 이름을 되뇌이니 자연스레 연상되는 한국인 소년이 하나 있었다. 7년 전 이 맘때 쯤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 도미니꼬. 이 아이는 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는건지……. " 아가다 수녀는 고아원에 없는 진우를 떠올리며 작게 탄식했다. 정진우. 그 아이는 미연과 헤어진 후로 점점 삐뚤어져갔다. 수시로 고아원을 나가기 일쑤였고 제대로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나 소식이 없 어서 걱정한 수녀들이 실종 신고를 할라치면 어느날인가 불쑥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되돌아온다. 무슨 일이냐고 추궁해본 적도 있지만 진우는 도통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런 일이 7년간 반복되어왔고 지금은 다들 그의 방랑벽에 익숙해진 상 태였다. 그나마 경찰에서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니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것 은 아니겠지……. ' 이번에는 언제쯤 돌아오려나. ' 아가다 수녀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추위때문에 얼어죽는 일은 없겠지만 진우가 어디서 기거하는지도 모르는 이상 걱정을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번에 돌아오면 단단히 야단을 치 든가 해야겠다. 부아아아앙 그때 고아원 밖에서 거친 오토바이의 엔진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TV 에 붙어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아는 한 이런 식으로 성당에 오토바이를 몰고올 사람이 딱 한 명 밖에 없었던 것이다. " 도미니꼬다! " 아이들 중 여덟살 시메온(Simeon)이 가장 먼저 반색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갔 다. 그러자 그 뒤를 따라 수십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몰려나간다. 토마스는 그 런 아이들이 못마땅한지 내심 투덜거리다가 곧 뒤를 쫓았다. 와― 아가다 수녀가 마당에 나와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한 오토바이의 소년이었다. 할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힙후퍼(h iphooper)들의 복장에 갈색으로 물들인 삐죽 머리, 귀에 달은 피어싱은 동양 인이라기보다는 흑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 소년은 올해로 열네살이 되는 정진우였다. " 도미니꼬,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 " 맞아! 월드컵 같이 보기로 약속했잖아! " 진우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리는 시메온과 아이들의 모습에 씨익 웃으며 그 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미안. 미안.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했지? 그걸로 봐주라고. " " 이번에는 오래있다 갈거지? 응? " " 글쎄∼ " 진우는 시메온의 물음에 시선을 돌리며 딴청 부렸다. 그 모습에 아이들이 실 망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진우는 재빨리 오토바이 뒷좌석에 묶어둔 짐들을 풀었 다. 풀려나온 짐 속에는 각종 인형과 장난감, 과자들이 들어 있었다. 진우는 놀라는 아이들에게 물건들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 자자. 우리 프란체스카(Francesca)는 전부터 가지고 싶어했던 바비 인형! 멜키오르(Melchior)는 대합금 엑스카이저! 빈첸시오(Vincentius)는 야구 글 러브! 맞지? " " 와! " " 다들 가지고 싶어하는 거 빠짐없이 사왔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한 사람씩 가 져가. 내가 산타 몫까지 챙겨주는 거니까 대신 크리스마스때는 선물 바라지 않는 거다? " " 응! " 아이들은 저마다 신이 나서 힘껏 소리질렀다. 그렇게 선물을 받으며 좋아하 는 아이들의 모습에 진우가 흐뭇해 할 때, 시메온이 혼자서 침울해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진우는 볼을 긁적이며 조심스레 시메온에게 물었다. " 시메온. 내가 오래있다 가지 않는다고 화난 거야? " " ……. " 긍정의 무언. 시메온은 눈시울을 붉힌채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진우 가 자세를 낮춰 눈을 마주하자, 그제서야 시메온은 울먹이며 입을 연다. " 거짓말쟁이. " " ……. " " 약속했으면서.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우리랑……. " " 미안. " 진우는 시메온을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그리고 시메온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주었다. " 조금만 기다려봐. 이 형이 조만간 크게 돈 벌어서 저―어기 맨하튼의 엠파 이어 빌딩 보다 높은 집을 지을테니까. 그럼 거기서 다들 평생동안 함께 사 는 거야. 어때? " 그 말에 시메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 엠파이어 빌딩보다 높게? " " 응. " " 102층이나 되는데? " " 103층으로 짓지, 뭐. " " 우와……. " 시메온은 감탄했다는듯 탄성을 흘렸다. 그러다 천천히 뒷 말을 잇는다. " 지금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어느 세월에 103층 빌딩을 지어? 농담도 그럴듯하게 해야 속아주지. " " ……꿈을 잃어버렸구나, 시메온. " 진우는 유감이라는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메온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 Boys be ambitious도 몰라? 목표가 높아야 그만큼 성취가 있는 거라고. " " 목표가 너무 높으니까 그러지. 그리고 도미니꼬가 무슨 재주로 그런 목돈 을 모아? " " 그건 어린애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란다∼ " " 자기도 어린애면서! " " 너보다는 여섯살이나 많지. " 진우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시메온을 선물 꾸러미 쪽으로 밀어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가방을 챙겨 고아원 쪽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맞이한 것은 뚱 한 표정의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팔짱을 낀채 턱으로 진우의 오토바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 도미니꼬. 너 또 오토바이 바꼈다? " " 응? 아아. 저번 건 연비가 안좋아서. 그리고 몇 년을 타고 다닌 건데. 이 제는 바꿀 때도 됐지. " 진우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토마스의 곁을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자 토마스는 쌍심지를 돋구며 진우의 곁에 따라붙었다. " 그럼 애들 선물 사온건? 저것도 한두푼이 아닐텐데 무리한 거 아냐? " " 무리한 거 아냐. " " 하! 정말 대단하네. 열 네살짜리가 돈이 넘치는가 보지?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그렇게 갑부가 된 거야? 어디서 금광이라도 캐내는 거야? " " 엇. 맞았어. 어떻게 안 거야? 내가 금광 캔다는 거? " " 도미니꼬! " 토마스는 계속대는 진우의 농담에 거칠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진 지한 어조로 호소했다. " 사마리아원의 맞형으로 부탁할게. 절대로 나쁜 짓하고 다니지마. 절대로. 아가다 수녀님이 얼마나 네 걱정하는지 알지? " " ……. " 그 말에 진우는 고아원의 출입구 쪽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아가다 수녀를 발 견해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곧 씩 웃으며 토마스의 어 깨를 두들겼다. " 걱정마. 걱정마. 적어도 나쁜 짓해서 돈 버는건 아니니까. " " 나쁜 짓이 아니라면 왜 말을 못하는 거야? " " 예수님 가라사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 뭐? " 토마스가 영문을 몰라 되물었지만 진우는 손을 휘적이며 그대로 가버릴 뿐 이었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났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토마스에게 말한다. " 아, 그리고 토마스. 네 선물도 사왔으니까 얼른 가봐. 가만히 있다간 애 들한테 다 뺏긴다? " 선물? 토마스는 자기도 모르게 오토바이 쪽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이 뒤적이는 선 물 꾸러미 사이로 축구공이 하나 떨어지는게 보였다. 아마 저 축구공이 토마 스를 위한 선물이었나 보다. ' 도미니꼬 자식……. 아직 안 잊어버렸구나. '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축구공을 적어냈던 것. 토마스는 멋쩍은 표정으로 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곧 오토바이의 선물 꾸러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선물을 놓고 다투는 아이들에 게 버럭 소리질렀다. " 야! 내 축구공이야! 다들 건드리지마! " 아가다 수녀는 진우의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몇번이고 노크를 해보 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손이 굳어버린다.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가버린 진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차가운 태도에 새삼 그녀는 진우가 자신을 원망 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아이의 마음은 그때 이후로 줄곧 닫혀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 때, 7년전의 이별 이후로 줄곧……. ' 어쩔 수 없지. ' 아가다 수녀는 노크하길 포기하고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험 상 이럴 때의 진우를 닥달해봐야 더욱 사이가 벌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그렇게 멋대로 굴거면 당장 나가렴, 도미니꼬! 다른 사람의 마음도 헤아 릴 줄 알아야지! 정말 못되 먹었구나! ' 예전에 그녀도 몇번인가 진우의 외출에 대해서 화를 낸 적이 있었다. 하지 만 그때마다 상황은 악화되기 일쑤였고. ' 누가 못나갈 줄 알아요! 저도 수녀님 잔소리 없는 곳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고요! ' 결국에는 진우가 사마리아원을 나가버린 일도 있었다. 물론 한달 뒤에 다시 돌아왔기에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어쨌든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아가다 수녀는 더 이상 진우의 외출에 관해 언 급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원의 어느 누구도 진우를 추궁하지 않았다. 괜히 아 이를 자극시켰다가 정말 뒷세계에 발이라도 들여놓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나이가 어리기에 갱(Gang)에서는 받아주지 않겠지만 소매치기나 마약 상인 들이라면 바람잡이를 위해 어린애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 는 얘기였다. ' 하지만 이대로 저 아이를 놔둘수만도 없는 노릇인데……. ' 아가다 수녀는 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에 관한 일이라면 하루에도 수십번씩 한숨 쉬는 그녀였다. 도미니꼬는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 이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걸까. " 아가다 수녀! " 그때 막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를 누군가가 불러세웠다. 돌아보니 아가다 수녀보다 배로 나이를 먹은듯한 수녀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 다. 선한 사마리아원의 원장 수녀였다. " 원장 수녀님……. " 반갑게 인사하려던 아가다 수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렸다. 원장 수 녀의 뒤편에 웬 낯설은 남자가 서있었던 것이다. 검은 수단에 목에 두른 로만칼러(Roman Collar). 남자는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톨릭 신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가다 수녀는 그가 신부였기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남자의 생김새 때문이었다. 2미터가 넘는 장신에 푸른 빛이 서린 은발 머리 라니! 거기다, ' 녹색……눈동자? ' 눈동자가 은은한 녹색빛을 띄고 있었다. 홍채에 멜라닌 색소가 적으면 저런 빛을 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렇게 아가다 수녀가 신부의 외모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원장 수녀는 웃음 을 터뜨리며 말했다. " 아가다 수녀. 뭘 그렇게 멍하니 보는 겁니까? 혹시 신부님에게 한눈에 반 하기라도 하셨어요? " " 예? 아, 아니!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원장 수녀님! " 아가다 수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일생을 하느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맺기 때문에 남녀 문제에 관 해서는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서슴없이 반했다느니 어쨌 다느니 하는 말을 하면! " 호호호호. 진정하세요, 아가다 수녀. 사람에게 반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 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게 반하지 않고서야 진심이 될 수 없죠. 마음껏 반하고 마음껏 사랑하도록 하세요.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해야할 우리들, 사제들의 의무랍니다. " " ……예. " 아가다 수녀는 맥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어차피 매번 저런 식으로 교묘하게 농담을 수습하는 원장 수녀였다. 물론 그것을 알면서도 매번 당하는 것이 자 신이었지만……. 그때, 두 수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아가다 수녀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어쩐지 아까부터 표정이 안좋아보 이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 " 예? 아뇨. 그게……. " 아가다 수녀가 대답하기를 주저하자, 원장 수녀가 대신 답했다. " 아가다 수녀의 근심덩어리는 언제나 하나 밖에 없죠. 선한 사마리아원의 한 말썽꾸러기 때문이랍니다. " " 원장 수녀님……! " 아가다 수녀는 불편한 얼굴로 원장 수녀를 불렀다. 고아원의 사정을 외부인 에게 함부로 발설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원장 수녀는 그런 아가다 수 녀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빙그레 미소지었다. " 괜찮아요, 아가다 수녀. 여기 신부님은 오늘부로 우리와 한 식구가 될 분 이시니까. " 한 식구? 아가다 수녀는 영문을 몰라 원장 수녀와 신부를 번갈아 보았다. 신부는 그런 그녀에게 예의 가라앉은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 선한 사마리아원으로 부임받은 라트 발렌시아 펠릭스(Flix)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2018년 월드컵 개막식으로부터 일주일째. 본선 티켓을 따기 위한 각 나라의 지역조별 리그전이 시작되었다. TV와 라디오 등의 각종 방송 매체들은 이 세 계의 경합을 쉴 틈 없이 방송했고 전 세계인들은 그 경과를 주목했다. 그것 은 비록 뉴욕의 빈민가에 거주하는 갱스터(gangster)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 제길! 거기서 치고 들어가야지! 볼을 돌리지 않고 뭘 하는 거야? " 하울링(howling)은 뉴욕의 할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소 갱 조직 중 하 나였다. 갱은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시카고의 암흑 가를 주름잡던 카포네라든지 뉴욕에서 매춘업이나 마약밀매로 이익을 본 럭키 루시아노 같은 기업형 갱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델린저를 예로 들 수 있는 독 불장군 형 갱들이었다. 하울링은 후자에 속하는 소규모 갱이었다. 제대로 된 조직 하나 갖추지 못 하고 유괴와 은행 강도를 반복하는, 그러면서 기업형 갱들의 눈치나 살펴야 하는 슬럼가의 밑바닥 집단. 하지만 이 밑바닥 집단은 최근 모종의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 어이, 레비. 좀 긴장하지 못하겠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르겠어? " 하울링의 행동 대장인 케이시는 라디오에 열중하는 레비의 태도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 호통에 레비는 기가 죽었는지 슬그머니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긴장하고 있어……. 나는 그저 라디오나 들 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힐까 하고……. " " 그럼 좀 조용히 듣던가. 대체 미식 축구도 아닌 스포츠에 그렇게 열광하는 것부터 이해가 안돼. 또 오늘은 우리 나라 시합도 아니잖아? " " 케이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니까 미국의 축구가 발전이 없는 거야. 이미 축구는 전 세계적인……. " " 시끄러! 그딴 유럽인의 공놀이를 변호할 시간 있으면 가서 망이나 보고와! " 케이시는 더 듣기 싫다는듯 거칠게 레비를 건물 밖으로 떠밀었다. 그들이 현재 있는 곳은 철거 중인 할렘가의 주택 단지. 더구나 자정이 다 될 무렵이었기에 공터에는 그들의 목소리만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케이시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며 곁에 있는 부하들에게 물었다. " 약속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냐? " " 예, 한……2분 정도. " 부하는 케이시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조심스레 답했다. 오늘따라 하울링의 행동 대장은 유난히도 초조해져 있었다. " 제길. 이 새끼들, 우리를 기다리게 할 셈인가. 어지간히도 얕보였던 모양 이군. " " 어쩔 수 없죠. 우리가 마약 사업에 손을 댄 것은 얼마되지 않았으니까. " 부하는 케이시를 달래며 자신의 손에 들린 아타셰 케이스를 주의깊게 내려다 보았다. 이 사각형의 서류 가방에는 그들에게 7억 달러라는 목돈을 쥐게 해줄 물건이 들어있었다. 마약이었다. 1Kg에 2000만 달러나 하는 신종 마약. 이것이 바로 일개 소규모 갱단이었던 하울링을 최근 맨해튼의 주요세력으로 급부상시켜준 황금알이었다. 하울링은 모종의 방법을 통해 코카인보다도 강한 중추신경 흥분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하는 케이시에게 아타셰 케이스를 들어보이며 물었다. " 소마(soma:神酒)……라는 이름이었죠, 이거? 대체 보스는 어디서 이런 듣 도 보도 못한 마약을 구해온 걸까요? " " 글쎄. 나라고 알리 없잖아. 그런 걸. " " 그래도, " " 보스 스타일 몰라? 어차피 그 사람 눈에는 나나 너희들이나 다 똑같은 피 라미들일 뿐이야. 그런 우리에게 해줄 말 따위는 없다는 거겠지. " 케이시는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는양 무덤덤했고, 그 태도에 오히려 부하들 이 분통을 터뜨렸다. " 아니.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사람을 따르는 겁니까? 애초에 우리들의 보 스는 케이시였잖아요!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녀석이……. " " 그만해. " " 다들 보스의 독단에 불만이 많아요. 케이시만 괜찮다면 언제든지 녀석을 끌어내릴 수 있다고요! 뭘 망설이는 거에요? 그런 자식, 당장에……! " " 그만하라는 말 안들리냐―! " 케이시는 노기 서린 목소리로 일거에 부하들의 항의를 잠재웠다. 케이시는 이를 갈며 부하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 아무리 족보 없는 깡패 새끼들이라도 위계 질서는 지켜줘야 할 거 아냐! 그리고 그런 보스라도 없었다면? 그랬다면 우리 조직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을 것 같냐? 슬럼가의 거지들을 때깔나게 만들어줬더니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되레 기어오르려고 해! " " 케, 케이시……. " 부하들은 그가 이렇듯 강경하게 보스를 변호할 줄 몰랐기에 저마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케이시는 혀를 찼다. 이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들이! ' 언제든지 끌어낼 수 있다고? 그 자식을? ' 케이시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던 보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소름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절망감 에 가까웠다. 굶주린 사자의 우리 안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평소 보스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케이시를 통해서만 명령을 내렸다. 그 때문에 부하들은 자신들의 보스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 강하지 못하면 강한 녀석의 밑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그게 이 바닥의 법칙 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 피라미 취급이 어쨌다느니 독단이 어쨌다느니 해도 하울링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보스의 공이다. 케이시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부 하들에게 나지막이 충고했다. " 다들 정신들 차려라. 오늘 우리가 맞이할 손님은 그 유명한 갬비노 패밀리 니까. 뉴욕의 5대 패밀리인 녀석들과 이번 거래를 성사시키면 녀석들의 이 사회인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와 연줄이 닿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 니라고. 알겠어? 일개 뒷골목 건달패인 우리가 마피아의 본가와 당당히 마 주할 수 있는 기회란 말이다. " 부하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케이시의 말이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번 거래만 성공시키면 제 2의 카포네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 케이시! " 그때 밖에서 망을 보던 레비가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확히 자정. 갬비노 패밀리가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릿조 고티는 갬비노 패밀리의 보스인 존 고티의 조카이자 맨해튼의 마약 거 래를 담당하는 대리인이었다. 아직 마흔살도 안된 그가 조직의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인의 피가 반드시 섞여 있어야 한다는 계보(La Cosa Nostra) 덕이 컸지만, 그만한 수완도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덜컹 릿조는 검은 정장을 갖춰입은 다섯 명의 조직원들과 함께 차례대로 리무진에 서 내려섰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묘한 박력이 있었기에 케이시와 하울링의 멤 버들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 침착해라. 침착해. 슬럼가의 촌놈들이라고 비웃음당하고 싶으냐. 평소처럼 만 행동해! ' 케이시는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부하들에게 말하는건지 모를 혼잣말을 하며 릿조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 늦었습니다, 미스터 고티. 갬비노 패밀리는 시간을 엄수하는게 철칙 아니 었습니까? " " 아아. 미안하게 됐소. 하지만 이런 지저분한 뒷골목에 오는 건 처음인지라 영 길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 릿조는 시가를 꺼내 물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울링의 태생이 할렘가라는 것 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것이었다. 그런 릿조의 거만함에 레비와 하울링의 멤 버들이 언짢은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막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케이 시가 화제를 돌렸다. " 그래도 설마 대부(Godfather)의 손자가 직접 일선에 나올 줄은 몰랐군요. 매 거래 때마다 이렇듯 모습을 드러내면 그만큼 다른 조직의 표적이 되기 쉬울텐데. " " 위원회에서 발언권을 얻으려면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 그리고 그 쪽에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 거기까지 말하던 릿조는 슬쩍 손을 들어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 있 던 조직원들이 번개같이 총을 꺼내 케이시 일행을 겨눈다. 그 갑작스런 조준 에 하울링의 멤버들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충분히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맥없이 제압당한 것이다. 케이시는 불안한 표정으로 릿조를 바라보았다. ' 이, 이대로 녀석들이 방아쇠를 당겨버리면……. ' 솔직히 갬비노 패밀리 같은 거대 조직이 자신들과 같은 소규모 갱을 상대해 줄 이유따위는 없다. 정글의 법칙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집어 삼키는 건 당연 한 일. 저들의 목적이 하울링의 마약이라면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 자리의 모 두를 죽이고 돈과 마약을 회수하는 것이다. 그때, 당황하는 케이시의 귓가로 릿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하하하하. 다들 귀신이라도 본듯한 표정이군. 자자. 어쨌든 이 정도의 가 드들이 있으니 이제 마음이 놓이십니까? 제 신변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요? " " 아, 예……. " 얼떨결에 케이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릿조는 손을 들어 부하들의 총을 거두게 했다. 그제야 레비와 하울링의 멤버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자식. 괜히 놀라게 하고 있어……. ' 경고인가? ' 다만 케이시만은 릿조가 보여준 제스처를 이해하고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방금 전 릿조는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은 언제든지 해치울 수 있으니 알아서 기어라'고 협박했던 것이다. 그 행동이 괴씸하기 짝이 없었지만 케이시는 아 무런 불만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릿조의 수행원들은 대단한 스위퍼(Sw eeper)들이었다. 그 실력은 일개 뒷골목 건달패인 하울링과 비교할 바가 아 니다. ' 칼자루를 뺏겼군. ' 거래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이렇게 상대에게 기선 을 제압당해서야 제 값에 마약을 팔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릿조는 여전히 미소로 일관한채 거래를 진행시켰다. " 상품을 확인하고 싶군요. " " 돈은? " " 3억 달러 준비해왔습니다. " " ―! " 케이시는 두 눈을 부릅 떴다. 3억 달러라니? 애초 자신들이 제시한 가격의 절반도 못되는 가격이었다. 그렇게 흉흉해지는 케이시의 기세를 아는지 모르 는지 릿조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 그게……. 저희들의 시장 조사에 따르면 댁들의 소마는 좀 과대평가 되는 경향이 있더군요. 무엇보다 출처가 불확실한게 마음에 걸려서요. 아무래 도 언노운(The Unknown;미지수)을 처리하다 보면 여러 위험들이 따르지 않 겠습니까? " " 그래서 위험 수당을 제하시겠다? " " 그렇지요. " 케이시는 한탄했다. 역시나 예상대로구만. 무엇보다 릿조는 이 거래를 받아 들이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하울링은 먼 관점에서 볼때 그들의 라이벌인 셈이었고, 그 라이벌에게 일부러 사업 자금을 대 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갬비노 패밀리가 이번 거래를 받아들인 것은 순전히 강자 로서의 여유 때문이리라. ' 어쩔 수 없지. ' 케이시는 릿조의 부당한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들의 보스 는 물건을 처분하라고만 했지 특별히 가격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사 실 뉴욕의 5대 패밀리 외에 소마를 처분할 상대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 설프게 어중이 떠중이들과 교섭했다간 괜히 다른 조직들의 표적만 될 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막강한 힘을 가진 갬비노 패밀리와 손을 잡는 쪽이 나았 다. " 물건을 가져와! " 케이시가 소리치자 부하들은 소마가 든 아타셰 케이스를 가져왔다. 레비는 케이스를 열어 물건을 릿조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새하얀 가루 분말들을 바라 보는 릿조의 눈은 탐욕스러운 빛을 띄고 있었다. 릿조는 포장된 분말 봉지를 하나 뜯어 그 맛을 보았다. 눈 앞이 밝아지며 스트레스가 일제히 사라지는 쾌감. 기분좋은 이명 소리와 전신의 모공이 열 리는 시원함. 활력이 돋아나는 육체. 그 느낌은 분명 그가 시중에서 회수했 던 소마와 동일한 효과였다. ' 코카인보다 쾌적한 환각에 부작용도 찾아볼 수 없어. 녀석들은 대체 어디 서 이런 고품질의 마약을 구한 거지? ' 릿조는 하울링과 같은 건달패들이 소마를 보유한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 는 거래를 하기 전 나름대로 하울링의 뒷조사를 해보았지만 소마의 원 출처 만큼은 알아낼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마약이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개발 단계에서 정보가 커넥션(Connection)에 돌았어야 정상인데. 결국 릿조가 이렇게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하울링과 거래하게된 것도 다 소 마의 유통 루트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소마의 출처만 알게 된다면 이런 건 달패들에게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 '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녀석들을 상대해줄 필요가 있겠지. 느긋하게 가자 고. 어차피 놈들이 가진 소마는 모두 우리의 차지가 될테니까. ' 릿조는 그렇게 조급함을 달래며 케이시와 물건을 교환했다. 서로의 가방을 건네는 것만으로 3억 달러의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이다. 그때, 우우우우웅 희미한 바이크 소리가 바깥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케이시 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철거지에 오토바이 소리라니? 일부러 인적이 드문 장소를 고른 보람이 없잖아? 그런 의문을 뒤로 하고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 다. " ― " 순간 앞의 소음이 거짓말인 것처럼 사라진다. 그 난데없는 정적에 릿조와 케이시는 영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대체 뭐지? 방금 전의 그건? 투아아아앙 마음을 놓기가 무섭게 그들이 있는 건물 안으로 한 검은색의 물체가 비호처 럼 날아들었다. 전신을 검은색으로 도장한 오토바이였다. 그 위에는 검은색 레이싱 슈츠를 입은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 얼굴마저 레이싱 헬맷으로 가 리고 있었기에 도저히 용모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갑작스런 괴인의 등장에 케이시가 놀라 소리쳤다. " 뭐야, 저 자식! " 부아아아앙― 외침에 돌아온 것은 거센 오토바이의 엔진음이었다. 레이싱 슈트의 괴인은 오토바이의 기어를 1단으로 넣으며 클러치를 잡은 상태에서 스내칭을 주었 다. 그렇게 알피엠이 어느 정도 올라가자, 순간 클러치를 놓으며 엑셀을 당 긴다. 그러자 오토바이가 앞바퀴를 들어올리며 튕겨지듯 케이시와 릿조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 우왓! " 케이시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몸을 굴렸다. 릿조도 부하들이 몸을 당겨주 는 덕분에 간신히 오토바이의 돌진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각 자 수중에 들고 있던 아타셰 케이프들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괴인은 기 다렸다는듯 브레이크를 잡았다. 끼이이이익 괴인이 무게 중심을 앞으로 하여 오토바이의 앞 바퀴를 내렸다. 그와 동시 에 앞 브레이크를 잡고 회전하는 방향으로 바이크를 눕혀 급가속하자 뒷바 퀴가 휠 스핀을 일으킨다. 괴인은 그대로 오토바이를 미끄러뜨려 퀵 턴하며 바닥에 떨어진 아타셰 케 이프들을 회수해냈다. 휠스핀 도중 핸들에서 손을 떼고 바닥의 물건을 낚아 채다니! 미친 짓도 보통 미친 짓이 아니었지만 괴인은 너무나도 수월하게 일련의 행동들을 완수하며 그대로 다시 엑셀을 당겼다. 그러자 오토바이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번개같이 건물 밖으로 튀어나갔다. " 뭐,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잡아! 죽엿! " 투타타타타 케이시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비와 부하들이 소형 기관총을 꺼내 오토바이를 향해 난사했다. 하지만 이미 괴인은 그들의 앞에서 홀연히 모습 을 감춘 뒤였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히트 앤 런이다. 그렇게 어이 없이 돈과 마약을 강탈당한 일동은 일순 망연자실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 이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척 그때 갬비노 패밀리의 스위퍼들이 총을 꺼내 케이시 일행을 겨눴다. 그들의 수장인 릿조는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미소를 지우고 차가운 표정으로 케이시 를 노려보고 있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실까? " 릿조의 물음에 케이시는 그제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갬비노 패 밀리는 앞의 해프닝을 하울링의 짓으로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갬비노 패밀리의 돈과 하울링의 마약을 챙긴 괴인은 줄곧 어둠 속의 도시를 달려 이내 맨해튼의 전경이 보이는 브루클린 교에 도착했다. 맨해튼과 브루 클린을 이어주는 이 다리는 19세기 토목 공사의 경이적인 성과물로서 최초로 강철 케이블을 사용한 교량이었다. 괴인은 그 다리의 한 가운데 멈춰서서 우측으로 오토바이를 붙였다. 그리고 머리에 쓴 헬맷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은채 멍하니 도시의 야경을 감상했다. 그런 그의 뒤편으로는 한밤 중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빛이 번갈아 지나가고 있었다. 끼익 그러던 중 한 헤드라이트 빛이 괴인의 뒤에서 멈춰섰다. 헤드라이트 빛의 주 인은 뉴욕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허름한 트럭이었다. 트럭에서 내려선 운전수는 차의 외양과 그리 다르지 않은 분위기의 노인이었 다. 어울리지 않게 멜빵바지 차림을 한 노인은 터덜 터덜 괴인의 곁으로 다가 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괴인은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던 아타셰 케이스들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 클클……. 정확하군. " 노인은 주름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케이스 안의 물건들을 살 피기 시작했다. 괴인은 애초부터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노인의 트럭으로 걸어가 입고 있던 레이싱 슈트를 갈아입었다. " 후우― " 괴인은 트럭의 보조석에 헬멧을 벗어던지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낯익은 얼 굴. 헬멧의 밑으로 드러난 얼굴은 이제 막 십대 중반에 들어서는 소년의 얼굴 이었다. 더구나 동양인. 괴인의 정체는 다름아닌 선한 사마리아원의 정진우였다. 진우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레이싱 슈트를 벗고 예의 힙후퍼 차림으로 갈아 입은 뒤 오토바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보조석에서 꺼낸 스프레이 타입의 냉 각제를 오토바이 표면에 뿌리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 그러자 놀랍게도 검은색으로 도장된 오토바이의 색깔이 변하는게 아닌가. 검은색이 사라지고 그 밑에 숨어있던 본래의 색깔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 은 애초에 진우가 온도 감응 변색 도료로 오토바이를 도장했기 때문이었다. 냉각제에 의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오토바이는 진우가 사마리아원을 갈 때 타고다녔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갈 채비를 모두 마치자 노인이 진우를 불렀다. " 수고했다. 이번에도 잘 해줬어. " " 뭘요. 어차피 가지고 튀는 것 뿐인데. 소매치기 때와 다를게 없는 일이라 고요. " 진우는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 클클클. 여전히 입담이 좋구나, 꼬마 녀석. 하긴 내 지갑을 훔칠 때만 해 도 범상치 않은 솜씨였지. " " ……지나간 얘기는 하지 말아요. 곰팡내 나니까. " 진우는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에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노인을 만난 것도 어언 2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홉살에 고아원을 나온 진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성년 자인 그를 써줄 일자리는 전무했고 결국 할렘가의 부랑아들이 그렇듯, 진우 도 소매치기를 전업으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진우에게는 특출난 재주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천부적일 정도로 뛰 어난 민첩함이었다. 아무리 깊숙히 숨긴 지갑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의 손에 걸렸다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주인이 바껴버린다. 단순히 사람의 사각을 잘 파고드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진우는 이 소질이라면 소질이랄 수 있는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소매치기를 계속해왔다. 다른 소매치기단들이 전례행사처럼 수시로 경찰서와 소년원을 들락거릴때 진우는 그들의 몫까지 대신하여 남의 지갑을 털었다. 아홉살 때부터 열두살 때까지 줄곧, 마치 누군가의 부추김이라도 받은 것처럼……. " 그때의 소매치기 꼬마가 어느새 제 몫을 다 하게 된 거야. 지켜봐온 내 입장에선 감개가 무량해지는군. " " 쳇. " 그런 진우의 운도 노인의 지갑을 훔치면서 그 끝을 고하게 되었다. 하필 소 매치기를 하다가 처음으로 걸린 사람이 뒷 세계의 커넥션을 봐주는 운반책이 었을 줄이야. 노인은 진우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운반책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일선에서 물러나려던 그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는 데 그 계획에는 솜씨 좋은 스내쳐(Snatcher)가 필요했던 것이다. 진우의 입장에선 리스크가 커진 셈이지만 그만큼 보수가 좋아졌기에 불만은 없었다. 무엇보다 노인의 운반책이 특이하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노인의 운반책은 단순히 범죄 조직의 마약을 운반해주는 일이 아닌, 마약을 탈취하여 운반하는 쪽에 가까웠다. 같은 오퍼상이지만 좀 더 개인적으로 움 직이는 중개상이라고 해야할까. 의뢰주가 있는 청부 마약 탈취였다. 물론 그때문에 항시 보복이 따를 수밖에 없었고 대상은 소규모 갱들이 가진 마약으로만 한정되었다. 거기다 신상을 완벽하게 숨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에 진우의 어린 나이가 도움이 되었다. 설마 열 다섯도 안된 어린아이가 그런 대담무쌍한 짓을 벌이리라고는 경찰도 갱들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훔친다는 행위는 소매치기 때와 변함이 없었지만, 진우로서는 좀 더 부담없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어차피 양아치 놈들의 배나 살찌울 돈. 차라리 내가 가로채서 사마리아원 의 아이들에게 쓰는 편이 낫잖아? ' 실제로도 진우는 운반책으로 번 돈을 전부 고아원을 위해 사용해왔다. 물론 갑자기 거금을 들고 찾아가면 아가다 수녀나 다른 사람들이 놀랄게 분명했기 에 아이들의 선물을 사는 정도에서 자제해왔지만. 대신 나머지 돈은 진우 자 신만이 아는 장소에 숨겨놓았다. 그렇게 2년 동안 꾸준히 모아온 돈도 어느 덧 5만 달러에 달하고 있었다. " 쓸데 없는 소리말고 돈이나 줘요. " " 클클……. 성질머리하고는. 어린 녀석이 그렇게 돈을 밝혀서 대체 어디에 쓰려고? " " 남이사. 내가 언제 영감님이 맡기는 일에 군소리한적 있어요? " " 클클. 그렇군. 나야 일만 잘해주면 아무런 불만도 없지. " 진우는 노인이 건네주는 돈뭉치를 제대로 세지도 않고 품에 집어넣었다. 어 차피 노인과 한두번 일하는 것도 아니니 이제와서 자질구레하게 액수를 확인 할 필요는 없었다. 진우는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는지 노인에게 물었다. " 아, 그런데……이번 의뢰주는 누구였어요? " " 그건 왜? " " 아까 물건을 회수할 때 보니까 단순한 건달패들 같지 않아서. 한쪽은 슬럼 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갱들이었는데, 다른 한쪽은 범상치가 않더라고요. 리무진에다 차림새하며……. 들고 있던 무기도 싸구려 토미건이 아니고. " " 호오. 그 와중에 잘도 한 눈 팔 틈이 있었구나. 네 말대로라면 아마도 그 범상치 않은 쪽이 갬비노 패밀리의 릿조 고티였을 거다. " " 뭣! " 진우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뻔 했다. 갬비노 패밀리? 릿조 고티라고? " 서, 설마 그 말쑥하게 차려 입은 녀석이 존 고티의 손자였단 말이에요? 맨해튼의 유명 인사? " " 클클. 잘 알고 있구나. " 태연하게 웃는 노인의 모습에 진우는 어이가 없어 버럭 소리쳤다. " 웃을 얘기가 아니잖아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단순한 갱도 아니고 릿조 고 티라고? 오, 맙소사. 우리는 녀석의 돈과 마약을 훔쳤다고요! " 앞에서 말했다시피 여지껏 진우와 노인이 이 일을 해오면서 무사할 수 있었 던 것은 소규모 갱들의 마약만 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욕의 5대 패밀리 를 건드렸다간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란다. 뉴욕을 빠 져나가기도 전에 살해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껏 그들이 회수해온 마약을 처분해주던 이가 누구겠는가? 바로 이 5대 패밀리였다. 갬비노, 제노베세, 보난노, 콜롬보, 루스체세! 날치기가 장물아비를 건드려서야 대체 어쩌자는 건가? " 걱정마라. 다 계획대로니까. " " 계획대로라니! " 진우는 거기까지 외치다 입을 다물었다. 잠깐. 역시 장물아비의 물건을 빼돌린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아. 노인이 노 망이 나지 않는 이상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리가 없다. 그렇다면? " 설마……의뢰주라는 게 바로……. " " 그래. 이번 의뢰는 애초에 릿조 고티가 부탁했던 거야. " 역시!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할렘가에서 마주쳤던 릿조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방을 강탈당할때 당황하던 그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 하……. 오스카 남우주연상 감이구만. 다 연극이었던 거야? 그 능구렁이? " 진우는 기가 막혀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노인은 예의 가래 섞인 웃 음을 터뜨렸다. " 클클클. 그런 연극을 감수할 정도로 돈을 주기가 싫었던 거겠지, 그 구두 쇠. 하긴. 릿조 고티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하류잡배들을 상대하겠냐만은. " " ……그 하류잡배란 녀석들은 뭐하는 놈들이에요? " " 하울링이라는 할렘가 출신 갱들이야. 별 볼일 없는 놈들이지. 넌 할렘가 에 살면서 녀석들의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거냐? " " 몰라요. 그런 녀석들. " " ……정말 별 볼일 없는 놈들인가 보군. " 그렇다면 릿조 고티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하울링이 아니라 녀석들이 가진 마약 쪽이었단 얘기인데……. 진우도 새삼 흥미가 동한다는듯 자신이 가져온 마약을 바라보았다. " 이 마약이 그렇게 특별한 건가요? 릿조 고티가 혈안이 될 정도로? " " 풍문에 의하면 코카인보다도 서너배는 뛰어난 물건인가봐. 시중에 풀리자 마자 모든 마약들의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을 정도지. 소마라는 이름이 었던가……. 어쨌든 이 소마 때문에 그 제조 공장이 인도에 있다는 루머 가 한동안 돌았었어. " " 소마? " " 인도 신화에 나오는 불로불사의 약 이름이야. 뭐,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전설이지. 그리스 신화의 넥타르라던가 페르시아 신화의 하오마 라던가. " " 그런 마약을 어째서 하울링같은 갱들이 가지고 있었던 거죠? " " 그래. 그게 가장 큰 의문이란 말이야. 아마 하울링 녀석들도 누군가에게서 소마를 받았던게 분명할텐데 그 출처가 분명치를 않아. 아마 릿조가 관심 을 보였던 것도 그때문이겠지.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간 언제 자신들의 마약 사업을 위협할지 모르니까. 그 전에 소마를 확실히 회수하겠다는 심보겠지. " 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갬비노 패밀리를 직접 움직이게 만든 신종 마약이 라니. 그런 어마어마한 물건을 진정 자신이 빼돌렸단 말인가? ' 겉보기에는 다른 마약들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 진우는 슬쩍 노인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노인은 막 담배를 꺼내기 위해선지 아타셰 케이스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진우는 소리없이 소 마 한봉지를 가방에서 끄집어냈다. ' 뭐, 기념으로 하나 가져가볼까. ' 진우는 휘파람을 불며 주머니에 소마를 쑤셔넣었다. 그렇게 유명한 마약이라 니 왠지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복용하겠다는 건 아니고. 단 지 신기한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말마따나 그저 기념품으로 챙긴 것 뿐이다. 진우는 담배를 무는 노인에게 능청스럽게 말했다. " 영감, 웬만하면 끊지 그래요? 가래 때문에 고생하는 일도 없고 좋을텐데. " " 클클. 네놈은 이 좋은 걸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 그렇게 좋아요, 담배가? " " 왜? 한대 피워보리? " " ……잘 하는 짓입니다. 어른이 애한테 담배나 권하고. " 진우는 피식 웃으며 노인이 건네주는 담배를 받았다.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 이었는지 다시 담배를 돌려준다. " 됐어요. 담배 냄새 풍기고 들어가면 싫어할 사람 있어요. " " 클클. 그 싫어할 사람이라는게 혹시 그 수녀를 말하는 거냐? 아가다라는? " " ……." " 의외구만. 평소 네 녀석 말하는 걸로 봐서는 틀림 없이 싫어하는 거라 생 각했는데. 꽤 이것저것 신경 써주잖아? " 그 말에 진우의 안색이 굳어졌다. 진우는 잠시 노인을 노려보다가 거칠게 오 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바이크의 시동을 걸자 시원스러운 배기음이 울려퍼진 다. ' 싫어한다고? ' 진우는 노인의 말을 곱씹다가 이내 코웃음 쳤다. 그리고 소리쳤다. " 맞아요, 영감님! 그런 잔소리꾼 따위 정말 질색이라니까! " 부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진우를 태운 오토바이가 브루클린 교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오토바이의 폭음. 미칠듯한 스피드. 이 모든 것들이 진우의 머리 속에서 잡념들을 지워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하나 지워지지 않는 목소리가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얼굴이 있었다. ' 진우 오빠! ' 제길. 진우는 인상을 찡그리며 엑셀을 당겼다. 괴로움도 슬픔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그 모든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달 렸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렸다. 쫓기는 사람처럼 달렸다. 그렇기에 그의 질주에서는 서글픔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Ｔo Ｂe Ｃontinued…-=-=-=-=-=-=-=-=-=-=-=-=-=-=-=-=-=-=-=-=-=-=-=-=-=-=-=-=-=-=-=-=-=-=-=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2018년 월드컵 개막식으로부터 일주일째. 본선 티켓을 따기 위한 각 나라의 지역조별 리그전이 시작되었다. TV와 라디오 등의 각종 방송 매체들은 이 세 계의 경합을 쉴 틈 없이 방송했고 전 세계인들은 그 경과를 주목했다. 그것 은 비록 뉴욕의 빈민가에 거주하는 갱스터(gangster)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 제길! 거기서 치고 들어가야지! 볼을 돌리지 않고 뭘 하는 거야? " 하울링(howling)은 뉴욕의 할렘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소 갱 조직 중 하 나였다. 갱은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시카고의 암흑 가를 주름잡던 카포네라든지 뉴욕에서 매춘업이나 마약밀매로 이익을 본 럭키 루시아노 같은 기업형 갱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델린저를 예로 들 수 있는 독 불장군 형 갱들이었다. 하울링은 후자에 속하는 소규모 갱이었다. 제대로 된 조직 하나 갖추지 못 하고 유괴와 은행 강도를 반복하는, 그러면서 기업형 갱들의 눈치나 살펴야 하는 슬럼가의 밑바닥 집단. 하지만 이 밑바닥 집단은 최근 모종의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 어이, 레비. 좀 긴장하지 못하겠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르겠어? " 하울링의 행동 대장인 케이시는 라디오에 열중하는 레비의 태도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 호통에 레비는 기가 죽었는지 슬그머니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긴장하고 있어……. 나는 그저 라디오나 들 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힐까 하고……. " " 그럼 좀 조용히 듣던가. 대체 미식 축구도 아닌 스포츠에 그렇게 열광하는 것부터 이해가 안돼. 또 오늘은 우리 나라 시합도 아니잖아? " " 케이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니까 미국의 축구가 발전이 없는 거야. 이미 축구는 전 세계적인……. " " 시끄러! 그딴 유럽인의 공놀이를 변호할 시간 있으면 가서 망이나 보고와! " 케이시는 더 듣기 싫다는듯 거칠게 레비를 건물 밖으로 떠밀었다. 그들이 현재 있는 곳은 철거 중인 할렘가의 주택 단지. 더구나 자정이 다 될 무렵이었기에 공터에는 그들의 목소리만 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케이시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며 곁에 있는 부하들에게 물었다. " 약속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냐? " " 예, 한……2분 정도. " 부하는 케이시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조심스레 답했다. 오늘따라 하울링의 행동 대장은 유난히도 초조해져 있었다. " 제길. 이 새끼들, 우리를 기다리게 할 셈인가. 어지간히도 얕보였던 모양 이군. " " 어쩔 수 없죠. 우리가 마약 사업에 손을 댄 것은 얼마되지 않았으니까. " 부하는 케이시를 달래며 자신의 손에 들린 아타셰 케이스를 주의깊게 내려다 보았다. 이 사각형의 서류 가방에는 그들에게 7억 달러라는 목돈을 쥐게 해줄 물건이 들어있었다. 마약이었다. 1Kg에 2000만 달러나 하는 신종 마약. 이것이 바로 일개 소규모 갱단이었던 하울링을 최근 맨해튼의 주요세력으로 급부상시켜준 황금알이었다. 하울링은 모종의 방법을 통해 코카인보다도 강한 중추신경 흥분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하는 케이시에게 아타셰 케이스를 들어보이며 물었다. " 소마(soma:神酒)……라는 이름이었죠, 이거? 대체 보스는 어디서 이런 듣 도 보도 못한 마약을 구해온 걸까요? " " 글쎄. 나라고 알리 없잖아. 그런 걸. " " 그래도, " " 보스 스타일 몰라? 어차피 그 사람 눈에는 나나 너희들이나 다 똑같은 피 라미들일 뿐이야. 그런 우리에게 해줄 말 따위는 없다는 거겠지. " 케이시는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는양 무덤덤했고, 그 태도에 오히려 부하들 이 분통을 터뜨렸다. " 아니.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사람을 따르는 겁니까? 애초에 우리들의 보 스는 케이시였잖아요!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녀석이……. " " 그만해. " " 다들 보스의 독단에 불만이 많아요. 케이시만 괜찮다면 언제든지 녀석을 끌어내릴 수 있다고요! 뭘 망설이는 거에요? 그런 자식, 당장에……! " " 그만하라는 말 안들리냐―! " 케이시는 노기 서린 목소리로 일거에 부하들의 항의를 잠재웠다. 케이시는 이를 갈며 부하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 아무리 족보 없는 깡패 새끼들이라도 위계 질서는 지켜줘야 할 거 아냐! 그리고 그런 보스라도 없었다면? 그랬다면 우리 조직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을 것 같냐? 슬럼가의 거지들을 때깔나게 만들어줬더니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되레 기어오르려고 해! " " 케, 케이시……. " 부하들은 그가 이렇듯 강경하게 보스를 변호할 줄 몰랐기에 저마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케이시는 혀를 찼다. 이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들이! ' 언제든지 끌어낼 수 있다고? 그 자식을? ' 케이시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던 보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소름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절망감 에 가까웠다. 굶주린 사자의 우리 안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평소 보스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케이시를 통해서만 명령을 내렸다. 그 때문에 부하들은 자신들의 보스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 강하지 못하면 강한 녀석의 밑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그게 이 바닥의 법칙 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 피라미 취급이 어쨌다느니 독단이 어쨌다느니 해도 하울링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보스의 공이다. 케이시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부 하들에게 나지막이 충고했다. " 다들 정신들 차려라. 오늘 우리가 맞이할 손님은 그 유명한 갬비노 패밀리 니까. 뉴욕의 5대 패밀리인 녀석들과 이번 거래를 성사시키면 녀석들의 이 사회인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와 연줄이 닿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 니라고. 알겠어? 일개 뒷골목 건달패인 우리가 마피아의 본가와 당당히 마 주할 수 있는 기회란 말이다. " 부하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케이시의 말이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번 거래만 성공시키면 제 2의 카포네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 케이시! " 그때 밖에서 망을 보던 레비가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확히 자정. 갬비노 패밀리가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릿조 고티는 갬비노 패밀리의 보스인 존 고티의 조카이자 맨해튼의 마약 거 래를 담당하는 대리인이었다. 아직 마흔살도 안된 그가 조직의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인의 피가 반드시 섞여 있어야 한다는 계보(La Cosa Nostra) 덕이 컸지만, 그만한 수완도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덜컹 릿조는 검은 정장을 갖춰입은 다섯 명의 조직원들과 함께 차례대로 리무진에 서 내려섰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묘한 박력이 있었기에 케이시와 하울링의 멤 버들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 침착해라. 침착해. 슬럼가의 촌놈들이라고 비웃음당하고 싶으냐. 평소처럼 만 행동해! ' 케이시는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부하들에게 말하는건지 모를 혼잣말을 하며 릿조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 늦었습니다, 미스터 고티. 갬비노 패밀리는 시간을 엄수하는게 철칙 아니 었습니까? " " 아아. 미안하게 됐소. 하지만 이런 지저분한 뒷골목에 오는 건 처음인지라 영 길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 릿조는 시가를 꺼내 물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울링의 태생이 할렘가라는 것 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것이었다. 그런 릿조의 거만함에 레비와 하울링의 멤 버들이 언짢은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막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케이 시가 화제를 돌렸다. " 그래도 설마 대부(Godfather)의 손자가 직접 일선에 나올 줄은 몰랐군요. 매 거래 때마다 이렇듯 모습을 드러내면 그만큼 다른 조직의 표적이 되기 쉬울텐데. " " 위원회에서 발언권을 얻으려면 이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 그리고 그 쪽에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 거기까지 말하던 릿조는 슬쩍 손을 들어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 있 던 조직원들이 번개같이 총을 꺼내 케이시 일행을 겨눈다. 그 갑작스런 조준 에 하울링의 멤버들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충분히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맥없이 제압당한 것이다. 케이시는 불안한 표정으로 릿조를 바라보았다. ' 이, 이대로 녀석들이 방아쇠를 당겨버리면……. ' 솔직히 갬비노 패밀리 같은 거대 조직이 자신들과 같은 소규모 갱을 상대해 줄 이유따위는 없다. 정글의 법칙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집어 삼키는 건 당연 한 일. 저들의 목적이 하울링의 마약이라면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 자리의 모 두를 죽이고 돈과 마약을 회수하는 것이다. 그때, 당황하는 케이시의 귓가로 릿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하하하하. 다들 귀신이라도 본듯한 표정이군. 자자. 어쨌든 이 정도의 가 드들이 있으니 이제 마음이 놓이십니까? 제 신변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요? " " 아, 예……. " 얼떨결에 케이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릿조는 손을 들어 부하들의 총을 거두게 했다. 그제야 레비와 하울링의 멤버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자식. 괜히 놀라게 하고 있어……. ' 경고인가? ' 다만 케이시만은 릿조가 보여준 제스처를 이해하고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방금 전 릿조는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은 언제든지 해치울 수 있으니 알아서 기어라'고 협박했던 것이다. 그 행동이 괴씸하기 짝이 없었지만 케이시는 아 무런 불만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릿조의 수행원들은 대단한 스위퍼(Sw eeper)들이었다. 그 실력은 일개 뒷골목 건달패인 하울링과 비교할 바가 아 니다. ' 칼자루를 뺏겼군. ' 거래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이렇게 상대에게 기선 을 제압당해서야 제 값에 마약을 팔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릿조는 여전히 미소로 일관한채 거래를 진행시켰다. " 상품을 확인하고 싶군요. " " 돈은? " " 3억 달러 준비해왔습니다. " " ―! " 케이시는 두 눈을 부릅 떴다. 3억 달러라니? 애초 자신들이 제시한 가격의 절반도 못되는 가격이었다. 그렇게 흉흉해지는 케이시의 기세를 아는지 모르 는지 릿조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 그게……. 저희들의 시장 조사에 따르면 댁들의 소마는 좀 과대평가 되는 경향이 있더군요. 무엇보다 출처가 불확실한게 마음에 걸려서요. 아무래 도 언노운(The Unknown;미지수)을 처리하다 보면 여러 위험들이 따르지 않 겠습니까? " " 그래서 위험 수당을 제하시겠다? " " 그렇지요. " 케이시는 한탄했다. 역시나 예상대로구만. 무엇보다 릿조는 이 거래를 받아 들이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하울링은 먼 관점에서 볼때 그들의 라이벌인 셈이었고, 그 라이벌에게 일부러 사업 자금을 대 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갬비노 패밀리가 이번 거래를 받아들인 것은 순전히 강자 로서의 여유 때문이리라. ' 어쩔 수 없지. ' 케이시는 릿조의 부당한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들의 보스 는 물건을 처분하라고만 했지 특별히 가격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사 실 뉴욕의 5대 패밀리 외에 소마를 처분할 상대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 설프게 어중이 떠중이들과 교섭했다간 괜히 다른 조직들의 표적만 될 뿐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막강한 힘을 가진 갬비노 패밀리와 손을 잡는 쪽이 나았 다. " 물건을 가져와! " 케이시가 소리치자 부하들은 소마가 든 아타셰 케이스를 가져왔다. 레비는 케이스를 열어 물건을 릿조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새하얀 가루 분말들을 바라 보는 릿조의 눈은 탐욕스러운 빛을 띄고 있었다. 릿조는 포장된 분말 봉지를 하나 뜯어 그 맛을 보았다. 눈 앞이 밝아지며 스트레스가 일제히 사라지는 쾌감. 기분좋은 이명 소리와 전신의 모공이 열 리는 시원함. 활력이 돋아나는 육체. 그 느낌은 분명 그가 시중에서 회수했 던 소마와 동일한 효과였다. ' 코카인보다 쾌적한 환각에 부작용도 찾아볼 수 없어. 녀석들은 대체 어디 서 이런 고품질의 마약을 구한 거지? ' 릿조는 하울링과 같은 건달패들이 소마를 보유한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 는 거래를 하기 전 나름대로 하울링의 뒷조사를 해보았지만 소마의 원 출처 만큼은 알아낼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마약이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개발 단계에서 정보가 커넥션(Connection)에 돌았어야 정상인데. 결국 릿조가 이렇게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하울링과 거래하게된 것도 다 소 마의 유통 루트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소마의 출처만 알게 된다면 이런 건 달패들에게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 '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녀석들을 상대해줄 필요가 있겠지. 느긋하게 가자 고. 어차피 놈들이 가진 소마는 모두 우리의 차지가 될테니까. ' 릿조는 그렇게 조급함을 달래며 케이시와 물건을 교환했다. 서로의 가방을 건네는 것만으로 3억 달러의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이다. 그때, 우우우우웅 희미한 바이크 소리가 바깥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케이시 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철거지에 오토바이 소리라니? 일부러 인적이 드문 장소를 고른 보람이 없잖아? 그런 의문을 뒤로 하고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 다. " ― " 순간 앞의 소음이 거짓말인 것처럼 사라진다. 그 난데없는 정적에 릿조와 케이시는 영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대체 뭐지? 방금 전의 그건? 투아아아앙 마음을 놓기가 무섭게 그들이 있는 건물 안으로 한 검은색의 물체가 비호처 럼 날아들었다. 전신을 검은색으로 도장한 오토바이였다. 그 위에는 검은색 레이싱 슈츠를 입은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 얼굴마저 레이싱 헬맷으로 가 리고 있었기에 도저히 용모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갑작스런 괴인의 등장에 케이시가 놀라 소리쳤다. " 뭐야, 저 자식! " 부아아아앙― 외침에 돌아온 것은 거센 오토바이의 엔진음이었다. 레이싱 슈트의 괴인은 오토바이의 기어를 1단으로 넣으며 클러치를 잡은 상태에서 스내칭을 주었 다. 그렇게 알피엠이 어느 정도 올라가자, 순간 클러치를 놓으며 엑셀을 당 긴다. 그러자 오토바이가 앞바퀴를 들어올리며 튕겨지듯 케이시와 릿조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 우왓! " 케이시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몸을 굴렸다. 릿조도 부하들이 몸을 당겨주 는 덕분에 간신히 오토바이의 돌진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각 자 수중에 들고 있던 아타셰 케이프들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괴인은 기 다렸다는듯 브레이크를 잡았다. 끼이이이익 괴인이 무게 중심을 앞으로 하여 오토바이의 앞 바퀴를 내렸다. 그와 동시 에 앞 브레이크를 잡고 회전하는 방향으로 바이크를 눕혀 급가속하자 뒷바 퀴가 휠 스핀을 일으킨다. 괴인은 그대로 오토바이를 미끄러뜨려 퀵 턴하며 바닥에 떨어진 아타셰 케 이프들을 회수해냈다. 휠스핀 도중 핸들에서 손을 떼고 바닥의 물건을 낚아 채다니! 미친 짓도 보통 미친 짓이 아니었지만 괴인은 너무나도 수월하게 일련의 행동들을 완수하며 그대로 다시 엑셀을 당겼다. 그러자 오토바이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번개같이 건물 밖으로 튀어나갔다. " 뭐,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잡아! 죽엿! " 투타타타타 케이시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비와 부하들이 소형 기관총을 꺼내 오토바이를 향해 난사했다. 하지만 이미 괴인은 그들의 앞에서 홀연히 모습 을 감춘 뒤였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히트 앤 런이다. 그렇게 어이 없이 돈과 마약을 강탈당한 일동은 일순 망연자실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 이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척 그때 갬비노 패밀리의 스위퍼들이 총을 꺼내 케이시 일행을 겨눴다. 그들의 수장인 릿조는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미소를 지우고 차가운 표정으로 케이시 를 노려보고 있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실까? " 릿조의 물음에 케이시는 그제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갬비노 패 밀리는 앞의 해프닝을 하울링의 짓으로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갬비노 패밀리의 돈과 하울링의 마약을 챙긴 괴인은 줄곧 어둠 속의 도시를 달려 이내 맨해튼의 전경이 보이는 브루클린 교에 도착했다. 맨해튼과 브루 클린을 이어주는 이 다리는 19세기 토목 공사의 경이적인 성과물로서 최초로 강철 케이블을 사용한 교량이었다. 괴인은 그 다리의 한 가운데 멈춰서서 우측으로 오토바이를 붙였다. 그리고 머리에 쓴 헬맷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은채 멍하니 도시의 야경을 감상했다. 그런 그의 뒤편으로는 한밤 중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빛이 번갈아 지나가고 있었다. 끼익 그러던 중 한 헤드라이트 빛이 괴인의 뒤에서 멈춰섰다. 헤드라이트 빛의 주 인은 뉴욕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허름한 트럭이었다. 트럭에서 내려선 운전수는 차의 외양과 그리 다르지 않은 분위기의 노인이었 다. 어울리지 않게 멜빵바지 차림을 한 노인은 터덜 터덜 괴인의 곁으로 다가 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괴인은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던 아타셰 케이스들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 클클……. 정확하군. " 노인은 주름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케이스 안의 물건들을 살 피기 시작했다. 괴인은 애초부터 물건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노인의 트럭으로 걸어가 입고 있던 레이싱 슈트를 갈아입었다. " 후우― " 괴인은 트럭의 보조석에 헬멧을 벗어던지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낯익은 얼 굴. 헬멧의 밑으로 드러난 얼굴은 이제 막 십대 중반에 들어서는 소년의 얼굴 이었다. 더구나 동양인. 괴인의 정체는 다름아닌 선한 사마리아원의 정진우였다. 진우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레이싱 슈트를 벗고 예의 힙후퍼 차림으로 갈아 입은 뒤 오토바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보조석에서 꺼낸 스프레이 타입의 냉 각제를 오토바이 표면에 뿌리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 그러자 놀랍게도 검은색으로 도장된 오토바이의 색깔이 변하는게 아닌가. 검은색이 사라지고 그 밑에 숨어있던 본래의 색깔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 은 애초에 진우가 온도 감응 변색 도료로 오토바이를 도장했기 때문이었다. 냉각제에 의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오토바이는 진우가 사마리아원을 갈 때 타고다녔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갈 채비를 모두 마치자 노인이 진우를 불렀다. " 수고했다. 이번에도 잘 해줬어. " " 뭘요. 어차피 가지고 튀는 것 뿐인데. 소매치기 때와 다를게 없는 일이라 고요. " 진우는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 클클클. 여전히 입담이 좋구나, 꼬마 녀석. 하긴 내 지갑을 훔칠 때만 해 도 범상치 않은 솜씨였지. " " ……지나간 얘기는 하지 말아요. 곰팡내 나니까. " 진우는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에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노인을 만난 것도 어언 2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홉살에 고아원을 나온 진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성년 자인 그를 써줄 일자리는 전무했고 결국 할렘가의 부랑아들이 그렇듯, 진우 도 소매치기를 전업으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진우에게는 특출난 재주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천부적일 정도로 뛰 어난 민첩함이었다. 아무리 깊숙히 숨긴 지갑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의 손에 걸렸다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주인이 바껴버린다. 단순히 사람의 사각을 잘 파고드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진우는 이 소질이라면 소질이랄 수 있는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소매치기를 계속해왔다. 다른 소매치기단들이 전례행사처럼 수시로 경찰서와 소년원을 들락거릴때 진우는 그들의 몫까지 대신하여 남의 지갑을 털었다. 아홉살 때부터 열두살 때까지 줄곧, 마치 누군가의 부추김이라도 받은 것처럼……. " 그때의 소매치기 꼬마가 어느새 제 몫을 다 하게 된 거야. 지켜봐온 내 입장에선 감개가 무량해지는군. " " 쳇. " 그런 진우의 운도 노인의 지갑을 훔치면서 그 끝을 고하게 되었다. 하필 소 매치기를 하다가 처음으로 걸린 사람이 뒷 세계의 커넥션을 봐주는 운반책이 었을 줄이야. 노인은 진우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운반책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일선에서 물러나려던 그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는 데 그 계획에는 솜씨 좋은 스내쳐(Snatcher)가 필요했던 것이다. 진우의 입장에선 리스크가 커진 셈이지만 그만큼 보수가 좋아졌기에 불만은 없었다. 무엇보다 노인의 운반책이 특이하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노인의 운반책은 단순히 범죄 조직의 마약을 운반해주는 일이 아닌, 마약을 탈취하여 운반하는 쪽에 가까웠다. 같은 오퍼상이지만 좀 더 개인적으로 움 직이는 중개상이라고 해야할까. 의뢰주가 있는 청부 마약 탈취였다. 물론 그때문에 항시 보복이 따를 수밖에 없었고 대상은 소규모 갱들이 가진 마약으로만 한정되었다. 거기다 신상을 완벽하게 숨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에 진우의 어린 나이가 도움이 되었다. 설마 열 다섯도 안된 어린아이가 그런 대담무쌍한 짓을 벌이리라고는 경찰도 갱들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훔친다는 행위는 소매치기 때와 변함이 없었지만, 진우로서는 좀 더 부담없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어차피 양아치 놈들의 배나 살찌울 돈. 차라리 내가 가로채서 사마리아원 의 아이들에게 쓰는 편이 낫잖아? ' 실제로도 진우는 운반책으로 번 돈을 전부 고아원을 위해 사용해왔다. 물론 갑자기 거금을 들고 찾아가면 아가다 수녀나 다른 사람들이 놀랄게 분명했기 에 아이들의 선물을 사는 정도에서 자제해왔지만. 대신 나머지 돈은 진우 자 신만이 아는 장소에 숨겨놓았다. 그렇게 2년 동안 꾸준히 모아온 돈도 어느 덧 5만 달러에 달하고 있었다. " 쓸데 없는 소리말고 돈이나 줘요. " " 클클……. 성질머리하고는. 어린 녀석이 그렇게 돈을 밝혀서 대체 어디에 쓰려고? " " 남이사. 내가 언제 영감님이 맡기는 일에 군소리한적 있어요? " " 클클. 그렇군. 나야 일만 잘해주면 아무런 불만도 없지. " 진우는 노인이 건네주는 돈뭉치를 제대로 세지도 않고 품에 집어넣었다. 어 차피 노인과 한두번 일하는 것도 아니니 이제와서 자질구레하게 액수를 확인 할 필요는 없었다. 진우는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는지 노인에게 물었다. " 아, 그런데……이번 의뢰주는 누구였어요? " " 그건 왜? " " 아까 물건을 회수할 때 보니까 단순한 건달패들 같지 않아서. 한쪽은 슬럼 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갱들이었는데, 다른 한쪽은 범상치가 않더라고요. 리무진에다 차림새하며……. 들고 있던 무기도 싸구려 토미건이 아니고. " " 호오. 그 와중에 잘도 한 눈 팔 틈이 있었구나. 네 말대로라면 아마도 그 범상치 않은 쪽이 갬비노 패밀리의 릿조 고티였을 거다. " " 뭣! " 진우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뻔 했다. 갬비노 패밀리? 릿조 고티라고? " 서, 설마 그 말쑥하게 차려 입은 녀석이 존 고티의 손자였단 말이에요? 맨해튼의 유명 인사? " " 클클. 잘 알고 있구나. " 태연하게 웃는 노인의 모습에 진우는 어이가 없어 버럭 소리쳤다. " 웃을 얘기가 아니잖아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단순한 갱도 아니고 릿조 고 티라고? 오, 맙소사. 우리는 녀석의 돈과 마약을 훔쳤다고요! " 앞에서 말했다시피 여지껏 진우와 노인이 이 일을 해오면서 무사할 수 있었 던 것은 소규모 갱들의 마약만 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욕의 5대 패밀리 를 건드렸다간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란다. 뉴욕을 빠 져나가기도 전에 살해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껏 그들이 회수해온 마약을 처분해주던 이가 누구겠는가? 바로 이 5대 패밀리였다. 갬비노, 제노베세, 보난노, 콜롬보, 루스체세! 날치기가 장물아비를 건드려서야 대체 어쩌자는 건가? " 걱정마라. 다 계획대로니까. " " 계획대로라니! " 진우는 거기까지 외치다 입을 다물었다. 잠깐. 역시 장물아비의 물건을 빼돌린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아. 노인이 노 망이 나지 않는 이상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리가 없다. 그렇다면? " 설마……의뢰주라는 게 바로……. " " 그래. 이번 의뢰는 애초에 릿조 고티가 부탁했던 거야. " 역시!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할렘가에서 마주쳤던 릿조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방을 강탈당할때 당황하던 그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 하……. 오스카 남우주연상 감이구만. 다 연극이었던 거야? 그 능구렁이? " 진우는 기가 막혀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노인은 예의 가래 섞인 웃 음을 터뜨렸다. " 클클클. 그런 연극을 감수할 정도로 돈을 주기가 싫었던 거겠지, 그 구두 쇠. 하긴. 릿조 고티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하류잡배들을 상대하겠냐만은. " " ……그 하류잡배란 녀석들은 뭐하는 놈들이에요? " " 하울링이라는 할렘가 출신 갱들이야. 별 볼일 없는 놈들이지. 넌 할렘가 에 살면서 녀석들의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거냐? " " 몰라요. 그런 녀석들. " " ……정말 별 볼일 없는 놈들인가 보군. " 그렇다면 릿조 고티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하울링이 아니라 녀석들이 가진 마약 쪽이었단 얘기인데……. 진우도 새삼 흥미가 동한다는듯 자신이 가져온 마약을 바라보았다. " 이 마약이 그렇게 특별한 건가요? 릿조 고티가 혈안이 될 정도로? " " 풍문에 의하면 코카인보다도 서너배는 뛰어난 물건인가봐. 시중에 풀리자 마자 모든 마약들의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을 정도지. 소마라는 이름이 었던가……. 어쨌든 이 소마 때문에 그 제조 공장이 인도에 있다는 루머 가 한동안 돌았었어. " " 소마? " " 인도 신화에 나오는 불로불사의 약 이름이야. 뭐,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전설이지. 그리스 신화의 넥타르라던가 페르시아 신화의 하오마 라던가. " " 그런 마약을 어째서 하울링같은 갱들이 가지고 있었던 거죠? " " 그래. 그게 가장 큰 의문이란 말이야. 아마 하울링 녀석들도 누군가에게서 소마를 받았던게 분명할텐데 그 출처가 분명치를 않아. 아마 릿조가 관심 을 보였던 것도 그때문이겠지.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간 언제 자신들의 마약 사업을 위협할지 모르니까. 그 전에 소마를 확실히 회수하겠다는 심보겠지. " 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갬비노 패밀리를 직접 움직이게 만든 신종 마약이 라니. 그런 어마어마한 물건을 진정 자신이 빼돌렸단 말인가? ' 겉보기에는 다른 마약들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 진우는 슬쩍 노인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노인은 막 담배를 꺼내기 위해선지 아타셰 케이스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진우는 소리없이 소 마 한봉지를 가방에서 끄집어냈다. ' 뭐, 기념으로 하나 가져가볼까. ' 진우는 휘파람을 불며 주머니에 소마를 쑤셔넣었다. 그렇게 유명한 마약이라 니 왠지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복용하겠다는 건 아니고. 단 지 신기한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말마따나 그저 기념품으로 챙긴 것 뿐이다. 진우는 담배를 무는 노인에게 능청스럽게 말했다. " 영감, 웬만하면 끊지 그래요? 가래 때문에 고생하는 일도 없고 좋을텐데. " " 클클. 네놈은 이 좋은 걸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 그렇게 좋아요, 담배가? " " 왜? 한대 피워보리? " " ……잘 하는 짓입니다. 어른이 애한테 담배나 권하고. " 진우는 피식 웃으며 노인이 건네주는 담배를 받았다.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 이었는지 다시 담배를 돌려준다. " 됐어요. 담배 냄새 풍기고 들어가면 싫어할 사람 있어요. " " 클클. 그 싫어할 사람이라는게 혹시 그 수녀를 말하는 거냐? 아가다라는? " " ……." " 의외구만. 평소 네 녀석 말하는 걸로 봐서는 틀림 없이 싫어하는 거라 생 각했는데. 꽤 이것저것 신경 써주잖아? " 그 말에 진우의 안색이 굳어졌다. 진우는 잠시 노인을 노려보다가 거칠게 오 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바이크의 시동을 걸자 시원스러운 배기음이 울려퍼진 다. ' 싫어한다고? ' 진우는 노인의 말을 곱씹다가 이내 코웃음 쳤다. 그리고 소리쳤다. " 맞아요, 영감님! 그런 잔소리꾼 따위 정말 질색이라니까! " 부아아아앙 그와 동시에 진우를 태운 오토바이가 브루클린 교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오토바이의 폭음. 미칠듯한 스피드. 이 모든 것들이 진우의 머리 속에서 잡념들을 지워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하나 지워지지 않는 목소리가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얼굴이 있었다. ' 진우 오빠! ' 제길. 진우는 인상을 찡그리며 엑셀을 당겼다. 괴로움도 슬픔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그 모든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달 렸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렸다. 쫓기는 사람처럼 달렸다. 그렇기에 그의 질주에서는 서글픔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다음날 아침. 뉴욕 맨해튼 남쪽에 위치한 리틀 이탈리아. 남쪽 차이나 타운이 세를 넓히면서 쇠락한 이 거리는 멜베리가 두 블록에 한 줄로 늘어선 이탈리아 음식점과 식료품, 기념품 가게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여러 카페들과 이탈리아 식당들이 멜베리가의 좁은 인도에 양산을 받친 노천 좌석들을 줄지어 내어놓고 있었다. 그 사이로 머릿 기름을 잔뜩 바른 웨이터 들이 '본 조르노'와 '곤니치와'를 번갈아 외치며 호객한다. " 흐음. " 출근 시간이 지난 아침이건만 사람들은 여전히 노천 카페의 좌석들을 채우고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 티라미수와 함께 늦은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사 람들 속에서 유난히도 눈에 띄는 두 남자가 있었다. 한쪽은 커피를 마시는 남자. 한쪽은 신문을 읽는 남자. 그 중 커피를 마시던 외알 안경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역시 이 가게의 커피는 향이 좋군요. 브루스 님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 촤악― 남자의 청에 신문을 읽던 쪽이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접었다. 신문을 읽던 이는 차이나 타운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검은 권복 차림의 소 년이었다. 붉은 용이 새겨진 옷의 문양과 길게 땋아내린 검은 머리는 옛 중국 의 고풍스러움을 그대로 옮겨놓은듯한 모습이다. 외알 안경의 남자에게 브루스라고 불린 소년은 대뜸 그에게 으름장부터 놓기 시작했다. " 네 녀석, 지금 나에게 그런 카페니즘이나 유발하는 음료를 권하는 거냐? " " 예? 그럼……, " " 푸얼 차부터 내와. 얘기는 그 다음이다. " " ……하아. " 남자는 푸얼 차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웨이터에게 주문을 시켰다. 다 행히도 이 리틀 이탈리아는 차이나 타운과 근접해 있는 거리였기에 가게에는 중국인들을 위한 메뉴도 준비되어 있었다. " 자, 그래서……. " 웨이터가 푸얼차를 가져오고나서야 열려지는 입. " 성당기사단의 열번째 검이 날 부른 이유는 뭐지? " 브루스는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질문에 외알 안경의 남자는 못말린다는듯 쓴웃음을 지었다. " 신문의 기사는 읽어보셨습니까? " " 미국이 월드컵 A조 예선에서 떨어졌더군. " " ……아니. 사회면 말이죠. " 남자의 지적에 따라 브루스는 신문의 사회면을 펴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한 기사의 제목을 읽어보았다. " 신종 마약의 출현. 그 이름은 소마? " " 예. 일단은 그 소마가 브루스 님을 뉴욕으로 초빙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 마약 때문에 저희의 마스터, 아포스톨로스 타데오 님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라서요. " " 후. 정말 걱정거리도 많은 사도로군. 언제부터 성당기사단의 대리인이 도 시의 치안 문제까지 걱정하게 되었지? " 브루스의 비웃음에 남자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 그 소마라는게 생각보다 성가신 녀석이라서요. 걱정을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게 되었죠. " " 왜? 정말 불로불사의 약이기라도 하던가? " 하지만 그런 농담은 남자의 다음 말에 그 색을 잃어버렸다. " 소마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케루빔의 화이트 파우더와 99%의 유사성을 발 견할 수 있었습니다. " " ……! " 브루스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 돌려서 말하지마. 결국 소마가 화이트 파우더라는 소리잖아? " " 그렇죠. 그 때문에 저희 크루세이더가 한때 소마의 조사에 착수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 " 조사가 순조로웠다면 날 부를 이유가 없었겠지. " " ……예. 소마의 출처를 발견하는 것은 고사하고 저희 요원들만 다섯 명이 전사했습니다. 그것도 도저히 인간의 힘이라고는 볼 수 없는 괴력에 전신 이 으스러져서. " 요원들의 사인에 브루스의 안색이 굳어졌다. " 17년 전에 있었던 솔로몬 프로젝트 때와 비슷한 상황이군. 그때도 담당자 가 타데오였던 걸로 아는데. " " 하하. 듣고 보니 그렇군요. 묘한 우연의 일치에요. " " 시치미 떼지 마라. 우연도 삼세번이면 필연이다. " " 아직 세번은 아니지 않습니까? " 브루스는 짧게 코웃음 쳤다. 그럼 세번째 사건이 터지면 이실직고라도 하겠 다는 건가? " 뻔뻔한 녀석. 혀 굴리는 솜씨는 영락없이 제 상관을 쏙 빼닮았군. 그 코 쟁이가 부하 입담 하나는 잘 가르쳤어. " " 후후.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 어쨌든 이대로 저희가 조사에 임해봤자 피해자만 속출할 것이라 판단, 교구에 지원을 요청했고 그 요청에 응해주 신 분이 바로 브루스 님이었다는 거죠. " " 흥. 난 응한 기억 없다. 자운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이 오기는 왔다만… …. " 브루스는 내키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단 이 일의 책임자가 아포스톨 로스 타데오라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폰 뤼멘. 그는 아포스톨로스들 사이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로 유명 했다. 그런 미심쩍은 인물과 얽혀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그런 브루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로 일관했다. " 아포스톨로스 바르톨로메오(Bartholomaeus) 님은 정이 많으신 분이었죠. 누 대인은 아마 같은 사도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실 수 없었을 겁니다. " " 그래서 매번 손해보는 성격이지. 나도 어쩌자고 그런 늙은이를 벗으로 삼았는지. " 브루스는 터무니 없이 사람 좋은 자신의 친우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인상만 구기고 있어봐야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그렇 다면 더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상황을 정리하고 뜨는 것이 최선이다. 그는 이 상황을 진심으로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 후. 모처럼 뉴욕까지 왔으니 관광이나 해야겠군. 소마 건은 그 겸사겸사니 까 그렇게만 알아둬. " " 잘 생각하셨습니다! " 브루스의 수락에 남자는 화색을 띄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 크루세이더의 제 10기사단장인 빈센트 데이먼입니다. 브루스 님이 뉴욕에 체류하시는 동안 모든 편의는 저희가 봐드리겠습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다 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 " ……. " 브루스는 그의 악수를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다른 볼 일이 생각났는지 자리 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명령했다. " 안내해. " " 예? " " 나에게 뉴욕의 명소들을 안내해라. 조사는 밤부터 시작한다. " " ……. " 빈센트의 외알 안경이 힘없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눈 앞의 관광 중독자는 한껏 짓굳은 미소로 응해보였다. " 말뿐이었냐? 전력을 다해 돕겠다면서? " 그 날 선한 사마리아원에는 뜻 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이 찾아온 것은 정오가 지나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정원 손질을 끝낸 아가다 수녀는 고아원의 앞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들을 걷 고 있었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한두명이 아니기에 그 아이들의 옷을 하나씩 빠는 것만으로도 빨래감이 한무더기다. 만약 초등부라서 일찍 하교한 시메온 과 몇몇의 아이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전까지 일 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 얘들아. 어느 옷이 누구 건지 다들 알고 있겠지? 잘 개어서 주인 방에 갔다 놓는 거야. 알았지? " " 예에―! " 아가다 수녀의 말에 아이들은 힘차게 소리지르며 빨래들을 들고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아 원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도 몇번씩이나 입구쪽을 돌아보았는지 모 르겠다. ' ……이번에는 늦는구나, 도미니꼬. ' 대략 5일 간격으로 모습을 보이던 진우가 이번에는 일주일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뭐, 그렇다고 그 아이가 매번 시간 지켜가며 다녔다는 것은 아니지 만……. 하지만 이렇게 가끔씩 귀가가 늦어지거나 하면 아가다 수녀는 어김 없이 불 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위험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닐까. 너무나 걱정되서 그가 돌아올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 다. 그만큼 이 할렘가는 어린 아이 혼자서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한 동네였다. 언제 어디서 변사체가 발견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 오늘 밤에라도 돌아와주면 좋겠는데……. " 아가다 수녀는 애써 근심을 삭히며 고아원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전 에 입구 쪽으로 들어오는 한 쌍의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우가 온 것일까? " 아, " 진우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문객이 전혀 낯선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분 명 오랜만의 재회이기는 하지만……. " 안녕하세요, 수녀님. " 방문객은 한 동양인 모녀였다. 그리고 어머니 쪽에서 먼저 차분하게 아가다 수녀에게 인사해왔다. 어머니를 보자 확신할 수 있었다. 아가다 수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 아이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이 아이는 틀림 없이! " 안젤라? " 수녀가 기억 속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아이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선한 사 마리아원을 찾아온 뜻밖의 손님. 그들은 다름 아닌 7년 전에 고아원을 떠난 서미연과 그녀의 양모(養母)였던 것이다. " 시메온. 네가 가. " " 차를 접대하자고 한 건 너였잖아, 프란체스카? " " 그, 그래도! " " 나, 참……. " 울쌍을 하며 도리질 치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에 시메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몇번의 심호흡 끝에 자신이 차를 가지고 부엌에서 나왔다. 거실에서 는 낯선 한쌍의 모녀가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메온은 부엌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외부인이 왔다하면 다들 저 모양이라니까. 아무래도 고아원은 폐쇄된 경향이 강하기에 원생들은 외부인의 출입에 민감 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학교를 다니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그 정도가 심했 는데, 언제 양육될지 모르는 만큼 그 불안감이 더 컸던 것이다. " 수녀님. 차 드시면서 얘기하세요. " " 신경 써줘서 고맙구나, 시메온. " 아가다 수녀는 어린 나이에도 배려심이 강한 시메온의 태도에 활짝 웃어보 였다. 그 때문에 괜히 쑥스러워진 시메온은 손님들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 었다. " 이 분들은 누구세요? " " 아, 시메온은 잘 모르겠지. 하긴. 그때는 토마스나 도미니꼬 밖에 없었으 니까. " 아가다 수녀는 어머니의 옆에 앉아있는 여자 아이를 소개했다. " 이 아이는 예전에 2년동안 우리 고아원에 머물렀던 원생이란다. 시메온, 너한테는 그러니까 선배가 되겠지. 이름은 안젤라……아니. 한국 이름이 었지? 서미연……. " 거기까지 말하다 그녀는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고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 아니. 지금은 윤미연이겠구나. " " 그냥 안젤라라고 부르세요. 저도 그게 편해요. " 여자 아이, 윤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지었다.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 지만 그 미소는 7년전의 어린아이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가다 수 녀는 새삼 미연을 떠나보냈던 때가 생각났다. " 정말……다 컸구나. 이렇게 다시 안젤라와 만나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 데. " " 죄송해요. 그동안 찾아뵙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제가 어리다며 통 보 내줄 생각을 하지 않아서요. " 미연은 자신의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미연의 어 머니는 이마의 주름을 깊게 하며 한탄했다. " 결국 네 황소 고집에 이렇게 두손 들었잖니. 뭐, 덕분에 이 엄마는 모처럼 뉴욕 구경도 하고 좋기는 하다만. " " 그 말 들으면 한국에 혼자 있는 아빠가 슬퍼하시겠네∼ " " 흥. 네 아빠는 좀 슬퍼해 봐야돼. 혼자 지내봐야 아내 자식도 고마운 줄 알지. 이참에 그냥 한 달간 푹 쉬다가 돌아갈까? " " 그럼 쓰레기장으로 변할 걸요. 우리 집. " " 어휴. 그 사람, 제대로 밥이나 챙겨먹는지 모르겠네. 냉장고에 반찬거리를 한가득 만들어놨는데 찾아서 먹을 수나 있을런지. " " 그렇게 걱정되시면 엄마도 한국에 남지 그랬어요? 뉴욕은 저 혼자 와도 되 는데. " " 시끄러! 이제 막 열살 넘은 꼬맹이가 겁도 없이! 너 혼자 외국에 보내면 아 빠 엄마가 잠이나 잘 수 있을 것 같아! " 그렇게 버럭 소리지르던 어머니는 맞은편 소파에서 멀뚱멀뚱하게 자신을 바라 보는 아가다 수녀를 깨닫고서 재빨리 몸가짐을 바로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 에 미연은 소리 죽여 웃었다. 어차피 방금 전에 그들이 나눈 대화는 한국어였다. 아가다 수녀가 그 내용 을 알아들을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뭘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바보 엄 마? " 후후. " 하지만 미연의 생각과는 달리 아가다 수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미 연은 당황하며 물었다. 아, 알아들으신 건가? " 수녀님, 한국어 하실 줄 아세요? " " 응? 아니. 그냥 화기애애한게 보기 좋아서. 안젤라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 은 모양이구나? " " 에. 뭐……그렇, 지요. " 미연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다 수녀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양육된 고아들 중 양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아이들은 극소수다. 더구나 먼 타 지로 간 안젤라는 그 소식조차 알 수 없었기에 언제나 마음 한켠으로는 걱정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훌륭한 모녀가 되어 돌아왔으니 아가다 수녀가 받은 기쁨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의 곁에 있던 시메온이 조심스레 미연에게 말했다. " 저기……. 정말로 한국인이에요? 도미니꼬와 같은? " " 어? 으응. 그런데? " 미연이 얼떨결에 답하자, 순간 부엌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그녀의 앞에 섰다. 그 난데없는 아이들의 등장에 미연과 어머니는 어안이 벙 벙해졌다. " 진짜 한국인이야? 진짜? " " TV에선 봤어도 실제로 보는건 처음이야! " " 바보. 뭐가 처음이야? 도미니꼬도 한국인이잖아? " " 그래도……. 도미니꼬는 매일 보는 얼굴이잖아? 신선함이 틀려. " " 저기! 저기! 한국인들은 전부 축구 잘 한다면서? " " 어릴 때부터 젖병 대신 축구공을 잡는다던데! " 아이들의 질문 공세에 미연과 어머니는 쓴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통일이 니 월드컵이니 해서 한국이 정말 유명해지긴 유명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 들이 이토록 관심을 보였던 것은 단순히 한국이 월드컵 개최국이라서가 아니 었다. 바로, " 도미니꼬가 오면 좋아하겠네∼ " " 자기와 같은 한국인 보면 무지 무지 기뻐할 거야. 그치? " 그 한국이 자신들의 친구가 그리워하는 모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메온과 아이들의 말에 소란스럽다고 야단을 치려던 아가다 수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연은 아이들이 언급하는 도미니꼬라는 이름에 새삼 가슴이 떨리는 것을 참 을 수 없었다. " 저기, 얘들아. 그 도미니꼬라는 사람이 한국 얘기……자주해? " 미연의 질문에 시메온이 답했다. " 글쎄. 도미니꼬가 직접 얘기한 적은 없었어. 우리가 물어봐도 맨날 딴청만 부리고. 사실 한국 얘기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 그 말에 미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머니와 아가다 수녀도 씁쓸함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시메온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 하지만, " 응? " 하지만 도미니꼬가 딱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어. 좋아했던 한국인 여자애 가 있는데 어렸을 때 헤어졌다고. 도미니꼬……그 얘기 하면서 굉장히 쓸 쓸한 표정 지었어. 그 후에도 가끔씩 그런 표정 지을 때가 있었는데, 아마 그때마다 그 여자애 생각하느라 그랬을 거야. " 거기까지 말하던 시메온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어렸을때 헤어졌던 한국인 여자애……. 그리고 사마리아 원에 머물렀던 한국인 원생이라고? 그제야 시메온은 눈앞의 한국인이 진우가 말했던 여자애와 동일 인물임을 깨 달았다. 그리고 미연의 얼굴을 바라봤을때,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연이 울고 있었던 것이다. " 그래……. 그랬구나……. " 미연은 작게 흐느끼며 모국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입가에서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 다행이야, 진우 오빠……. " 아직도 날 기억해주고 있었어. 아직도. 아직도. " 정말……다행이야. " 미연은 진심으로 신께 감사드렸다. " 벌써 가시려고요, 안젤라 어머님? " " 예. 시간도 늦었고 그만 돌아가봐야죠. " 막 고아원을 나서려는 미연 모녀를 아가다 수녀와 아이들이 배웅했다. 서운 해하는 기색이 완연한 아이들의 모습에 아가다 수녀는 모녀에게 쉬고갈 것을 권유했지만 어머니 쪽에서 거절했다. " 저희들이 찾아와서 제대로 볼 일도 못보신 거 같은데……. 거기다 저녁밥 까지 얻어먹었고. 이 이상 폐를 끼치면 안될 것 같아서요. " " 아뇨. 폐라뇨. 안젤라가 남도 아니고. 더구나……. " 더구나 아직 도미니꼬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아가다 수녀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조심스레 미연의 눈치를 살폈다. 미연도 내심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리 아원의 아이들도 그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미연의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 엄마, 나……. 오늘 하루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 " 호텔 예약까지 해놨잖니? 거기서 엄마 혼자 자라고? " " 그럼 엄마도 여기서 자고 가면 되잖아……. " " 수녀님한테 폐가 된다고 그랬지? 가뜩이나 많은 아이들에게 신경 쓰시는 분 이야. 돕지는 못할 망정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 " 그래도……. " 미연은 울먹이며 말을 흐렸다. 내심 어머니도 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미연이가 그녀의 딸이 된지 어언 7년이다. 그 7년동안 하 루도 빠짐 없이 진우를 만나기만을 꿈꿔왔던 아이였다. 그런데 정작 뉴욕까지 와서 당사자를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생겼으니 얼마나 애가 탈 것인가. 시메온과 아이들도 미연의 편을 들고 나섰다. " 자고 가라고 하세요, 아줌마! " " 아가다 수녀님은 원래 근심 걱정이 많아서 이제 와서 한명 더 늘어도 문제 될 것 없어요! " 이 녀석들이……. 아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아가다 수녀가 희미하게 눈꼬리를 떨었다. 그렇게 근심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녀석들이 어디의 누구였더라? " 도미니꼬도 자기가 없을 때 안젤라가 온 걸 알면 크게 상심할 거에요. 그 녀석,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도 반드시 돌아올테니까 꼭 서로 만나게 해주 세요. " 뒤늦게 학교에서 돌아온 토마스는 진우와 미연의 관계를 아는만큼 더욱 간절 하게 부탁했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미연의 어머니는 쓴웃 음을 지었다. 이대로 미연이를 데리고 갔다간 영락없이 악당이 되겠네. 그녀는 자신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미연에게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미연아. 엄마는 말이지. 7년전에 너와 그 아이를 떼어놨던 것을 두고 두고 후회해왔단다. 아무리 서로가 친하다고한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겠지 하 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래서 아빠와 다짐했지. 꼭 너희 둘을 다시 만나게 해주겠노라고. 그러니 까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시간을 갖자구나. 오늘 보지 못하면 내일 보면 되는 거고 내일 보지 못하면 모레 보면되는 거야. 우리 미연이가 왕자 님을 만날 때까지 이 엄마가 최선을 다해 도울테니까. 응? " " ……. " " 응?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시간은 충분하잖니? " " ……예. " 미연은 애써 미련을 떨쳐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7년을 기다려왔는데 하루를 더 못 기다리겠는가? 거기다 이 이상 떼를 쓰는 것도 어머니에게 미안하던 참 이었다. 아쉽지만 내일을 기약하도록 하자. " 괜찮겠니, 안젤라? 이대로 가버려도? " 아가다 수녀가 걱정스레 묻자 미연은 언제 침울했냐는듯 밝게 미소했다. " 내일 다시 올게요, 수녀님. 그러니까 그때까지 진우 오빠, 어디에도 못가 게 붙잡아둬야 해요? " " 아아! 그건 나에게 맡겨둬! 밧줄로 꽁꽁 묶어서 안겨줄테니까! " 토마스가 아가다 수녀를 대신하여 호언장담했다. 그 모습이 익살스럽기 짝이 없어서 다들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미연 모녀는 모두의 웃음을 뒤로 하고 고아원을 떠나갔다. 그 뒷 모 습을 바라보며 시메온과 아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 내일이면 꼭……서로 만날 수 있겠지? 도미니꼬와 안젤라? " " 그럼. " " 만나야지. " " 그치? " 토마스는 그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투덜거렸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바보 자식은? " 빨리 오란 말이야, 도미니꼬……! " 그것은 비단 토마스 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바램이기도 했다. 아가다 수녀는 기도했다. 부디 한시라도 빨리 안젤라와 도미니꼬가 재회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재회가 두 아이의 마음 속에 남겨진 상처를 아물게 해 주기를. ' 부탁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 하지만 그런 기도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그날 밤, 고아원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울링의 아지트는 할렘가의 폐주자창에 위치해 있었다. 솔직히 아지트라고 할 것도 없는 간단한 집합소였다. 어차피 하울링은 할렘 가 출신의 어중이 떠중이들을 모여 만든 갱단이었기에 아지트를 가질 자금력 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금력이 있다고 한들, 할렘가의 사정은 서로가 잘 알고 있었기에 대놓고 아지트를 만들 수도 없었다. 거창하게 만들어봤자 다른 갱들의 표적이 될 뿐이니까. 뭐, 애초에 슬럼가에서 제대로 된 갱 생활을 바라는 것부터가 무리였지만……. 뚜벅 뚜벅 뚜벅 뚜벅 케이시와 일당들은 폐주차장에 늘어선채 긴장된 눈으로 자신들의 보스를 바 라보았다. 여지껏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하울링의 보스가 그들의 앞에 지금 나 타나 있었다. 그만큼 이번의 실수가 타격이 컸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뚜벅 뚜벅……. 보스의 구두굽 소리가 케이시의 앞에서 멈췄다. 케이시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손을 움켜쥐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서있는 보스 를 바라보았다. " 보, 보스……. 면목, 없습니다……. " 케이시의 사과에 보스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보스는 폐주차장의 그림자에 가려져 전신을 알아볼 수 없었는데 그 안광만큼은 뚜렷한 녹색빛을 흘리고 있 었다. 마주 치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런 눈빛이다. " 일단 여분의 소마를 건네주는 것으로 릿조 고티를 진정시켰습니다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들을 내걸더군요. 앞으로 있 을 소마의 거래를 독점하고 싶다느니 가격을 좀 더 낮춰달라느니. 우선 보스에게 여쭤본 다음 답변해주기로, " "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아냈습니까? " 보스는 케이시의 보고에 별 흥미가 없었는지 대뜸 그의 말을 짤랐다. 케이시 는 차마 보스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았다. " 나, 나이트 라이더(Night Rider)라는 전문 탈취범이었습니다. 할렘가의 갱 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녀석이더군요.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근 2년간 뉴 욕의 마약 거래처에 나타나 상습적으로 마약을 날치기해왔다고 합니다. 우 리와 같은 소규모 갱들을 상대로만 날치기해왔기에 5대 패밀리 쪽에서는 녀 석의 존재를 모르더군요. " " 그래서? 그 날치기 꾼의 정체를 알아냈단 말입니까 알아내지 못했단 말입니 까? " " 그건……. " 케이시는 숨이 덜컥 막혔다. 보스가 그림자에서 나와 천천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달빛 아래 드러난 보스의 모습은 2미터가 넘는 장신의 거구였 다. " 알아내지 못했단 말이군요? " " ……예. " " 별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나 무능하군요. " 그런 계속대는 폭언에 결국 참다 못한 케이시의 부하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 제길! 그렇게 빈정거리기나 할 거면 댁이 직접 거래하지 그랬어! " " 당신이라고 별 수 있었을 것 같아! " "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주제에 이제와서 웬 추궁이야! " 레비와 다른 멤버들은 애초에 케이시를 보스로 모시던 일당들이었다. 하지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지금의 보스가 딱 그 격이었다. 케이시가 굽히고만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굴러온 돌 따위를 보스로 모시지는 않았 을 것이다. " 이, 이 바보 녀석들이! " 하지만 부하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줌에도 불구하고 케이시의 안색은 점점 창 백해져갔다. 그리고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보스가 먼저 움직였다. 크왕― 짐승의 포효소리였다. 그 포효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보스는 마치 육식동물 이라도 되는 것처럼 레비의 목을 입으로 물어뜯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막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 으, 으아아아앗! " 콰지직 처절한 비명 소리에 섞여 뼈와 살이 찢뭉개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러나 비명도 잠시. 보스는 거짓말처럼 레비의 목을 물어뜯은 자세에서 턱 힘만으로 그를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 목이 절반이 날아간 레비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채 허공을 날았다. 쿠웅― 레비가 떨어진 곳은 케이시 일행이 있는 곳에서 한참을 떨어진 폐주차장의 자동차 위였다. " ……. "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일동은 한순간 얼어붙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 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무엇보다도 확연히 느껴지는 공포. 두려움. 그제야 부하들은 왜 케이시가 보스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지레 겁을 먹었는지 깨달았다. 케이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눈 앞의 보스가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는 것을. " 후― 크크, 크크크크. " 보스는 입가에 묻은 레비의 피를 혀로 핥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 광 기가 서린 웃음이 그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인간같던 모습마저 앗아가 버린다. 보스의 머리카락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한층 더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리고 한올 한올 일어서는 연푸른빛의 은발! " 찾아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쥐새끼를 찾아내라! 겁없이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놈에게 대가를 치루게 해주는 거다! "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지! " But if he be found, he shall restore sevenfold, he shall give all th e substance of his house(만일 훔치다 들키면 일곱 갑절, 아니 집에 있 는 재물을 다 털어내어 갚아야 한다)! " 하울링의 보스, 라트 발렌시아는 그렇게 늑대의 이빨을 드러냈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뉴욕 관광 이틀째. 첫째날 센트럴 파크에 있는 모든 박물관들을 둘러본 브루스는 지치지도 않 는지 연 이틀째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빈센트는 그의 탐욕 스러운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고군분투해야 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31년에 40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진 현대의 바벨탑이었다. 하늘까지 닿을 듯한 그 높이는 381미터. 한때 세계 1위의 마 천루로서 가장 유명했던 빌딩이지만 2017년 현재는 그 자리를 시카고의 시 어스 타워에게 뺏기고, 뉴욕의 1위 자리도 세계무역 센터에 내주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파이어 빌딩은 여전히 뉴욕의 상징으로서 많은 사람들 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 ……최고야. 이 이동 상자는. " 브루스는 엘리베이터의 창밖을 내다보며 묘하게 홍조 어린 얼굴로 중얼거 렸다. 지하 매표소에서 86층 전망대까지 단 1분만에 올라가는 초고속 엘리 베이터는 그의 마음에 쏙드는 유희물이었다. 이런 브루스의 취미를 알 리가 없는 빈센트는 그저 빌딩의 전경이 마음에 들었는가 싶어 웃으면서 말했다. " 남쪽으로 보이는 것이 다운타운 금융가의 고층 빌딩 숲과 자유의 여신 상입니다. 그리고 북쪽에 보이는 것이 록펠러 센터와 센트럴 파크. 서 쪽으로는 허드슨 강과 뉴저지가 보이는 군요. 아, 오늘은 날씨가 맑은 지라 뉴욕의 5개 구역뿐만 아니라 뉴저지 해변, 펜실바니아 포코노스, 코네티컷 호수와 메사츄세스까지 볼 수 있어요. " " 시끄러. 내 눈으로 다 보고 있으니 그냥 입 다물고 있어라. 아니면 날 눈 뜬 장님 취급하는 거냐? " " ……다물겠습니다. " 빈센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전에 마스터에게서 언질 받기는 했지만 이 중국인 손님을 대하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종 잡을 수 없는 성격도 성격이었지만 제대로 조사에도 착수하지 않고 관광에만 치중 하는 것이 영 미심쩍었던 것이다. 빈센트로서는 이 어리게만 보이는 소년 이 정말로 바로톨로메오의 에이젼트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 너, 지금 의심하고 있지? 과연 이런 꼬마가 제 몫을 다할 수 있을까, 하고. " ……거기다 이 중국인은 눈치도 비상하게 빨랐다. 빈센트는 자신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는 브루스의 물음에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 그,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 "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너희 크루세이더가 조사의 바 탕이 될 정보를 모아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일단 소마가 어디서 유통되 었는지부터 알아내야 돼. 그래야 움직일 수 있어. " 여기서 그의 말이 조사하기 귀찮다는 핑계로 들렸던 것은 단순히 빈센트의 피해 망상이었을까. " 소마를 커넥션에 유포한 것은 하울링이라는 할렘가의 소규모 갱단이었 습니다. " " 갱단? " " 예. 그게 맹점이었지요. 뉴욕 5대 패밀리나 범죄 신디게이트(syndicate) 도 아닌 잔챙이들이 분에 넘치는 사업에 손을 대었고, 그 때문에 정상적 인 커넥션 기록이 남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어제 저녁, 녀석들이 갬 비노 패밀리와 접촉하면서 꼬리를 드러낸 거죠. " 소마와 같은 마약을 제대로 기반조차 다지지 못한 갱단이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당연히 빈센트로서는 거대 조직들을 주시할 수 밖 에 없었고 그 중 갬비노 패밀리가 움직임으로서 단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빈센트의 보고에 브루스는 여전히 창가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 그렇다면 그 잔챙이들은 무슨 수로 소마를 손에 넣은 거지? " " 최근 하울링을 장악한 새 보스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마는 그가 가져온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 " 새 보스? " " 신원 미상의 남자입니다. 하울링의 멤버들도 자신들의 보스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 그 보스란 작자는 소마를 시중에 유통시키기 위 해 하울링을 발판으로 삼았던 모양입니다. " 브루스는 그제야 흥미가 동한다는듯 빈센트를 돌아보며 웃었다. " 하! 영악한 녀석이군. 커넥션에 띄지 않기 위해 소규모 갱단을 이용한 것도 그렇고 부하들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도 그렇고. 제법 머리를 잘 굴렸어. 이래서야 하울링을 뒤져봤자 아무 것도 나오지 않겠군. " " 그렇죠. 아마 어젯밤 갬비노 패밀리와의 거래가 예정대로 성사되었더라 면, 말이죠. " " 성사되었더라면? 그건 또 무슨 소리지? " " 거래를 하는 도중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중간에 누군가가 소마 를 가로챘다고 하더군요. 그때문에 하울링은 잃어버린 마약을 되찾기 위 해 혈안이 된 상태입니다. 갬비노 패밀리와의 신용을 회복하기 위해서라 도 빠른 시일 내에 거래를 재개시킬 필요가 있겠죠. " " 덕분에 발이 묶였다는 건가? 우리로서는 절호의 기회로군. " 브루스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층에서 보는 뉴욕의 전경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황홀했다. ' 야경이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 그런 아쉬움을 달래며 브루스는 넌지시 빈센트에게 운을 띄웠다. " 아, 그런데……두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 " 예? 뭐가? " 빈센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브루스는 그를 돌아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 첫째. 그 하울링의 보스라는 녀석, 커넥션을 피하는 것도 그렇고 필요 이 상으로 신비주의인 것도 그렇고. 꼭 성당기사단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 지 않아? " " ……! " 등 뒤에서 긴장하는 빈센트의 기색이 느껴졌다. 브루스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역시 나에게 얘기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거 야. " 둘째. 시중의 소마. 즉 화이트 파우더는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약 인가? 내가 아는 바로는 케루빔에서도 이 초전도 각성제가 만들어진 것은 근래의 일이었을텐데. " "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십니까? " 빈센트의 되물음에 브루스는 그를 돌아보았다. 외알 안경 밑에 드러난 빈센 트의 얼굴은 한점의 동요 없이 웃고 있었다. 마치 가면과도 같은 얼굴처럼. " 이번 사태는 성당 기사단 내부인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거지. 혹시 시폰 뤼멘의 소지품 항목란에 화이트 파우더가 비어있지 않던가? " 빈센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브루스도 애초에 대답이 돌아올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미련 없이 말을 돌렸다. " 어쨌든 범인의 윤곽이 잡혔다면 녀석의 소재지만 파악해내면 되겠군. 이에 대해서 뭔가 알아낸 것은 없는 거냐? " " ……면목 없습니다. 크루세이더의 정보망으로도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신출 귀몰한 녀석이었습니다. " " 제대로 할 줄 아는게 하나도 없군. " 브루스는 빈센트가 무안해질 정도로 크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내 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크루세이더의 정보수집 능력은 미국의 CIA와 이스 라엘의 모사드, 중국의 국가안전부를 뛰어넘을 정도다. 그런 거미줄 정보망을 피해낼 정도라니! 인간의 사회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잠깐, ' 생각해 보니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정보망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면 정보망의 사각 안에 있으면 된다. 그리고 성당 기사단에게 있어서 사각이란……. " 뉴욕에 거주 중인 모든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를 조사해봐. " 이어지는 브루스의 말에 빈센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 ……천사를 가장한 악마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 진우가 선한 사마리아원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지난 무렵이었다. 예정대로 라면 늦어도 어제 밤에 돌아왔어야 했지만, 전날 마신 술이 과했는지 그는 하 루 내내 숙취로 여관(inn)에 쓰러져 있었다. ' 제길. 속 쓰려 돌아가시겠네. 너무 무식하게 퍼마셨나……. ' 진우는 오토바이를 고아원 앞마당에 세우고 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머리 가 아프고 속이 울렁이는게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역시 즐기지도 못하는 술을 그렇게 마시는게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도 왜 갑자기 술 마실 생각을 다 했던 걸까? 자신은? ' 꽤 이것저것 신경 써주잖아? ' 문득 브루클린 교에서 노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 그 말을 듣고나서 부터였다.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은 것은. 언짢음이라고 해야할까 죄책감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그 알 수 없는 감정 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우는 밤새도록 도시의 뒷 거리를 헤매다녔고 결국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폭음을 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와중에도 용쾌 여관을 찾아가 쓰러졌다는 것인데. 행 여나 거리에서 인사불성이 되었더라면 할렘가의 흑인들에게 무슨 꼴을 당했 을지 모른다. ' 제길. 그 영감은 왜 그런 말을 해가지고선. 신경을 쓰긴 누가 썼다고 그 러는 거야? ' 진우는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그러다 고아원에 들어가기 직전 조심스레 안의 분위기를 살폈다. " ……. " 다들 성당에 낮 기도라도 드리러 갔는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우는 그제야 안심하고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술냄새를 풍기면서 아가다 수녀와 마주치기라도 했다간 무슨 일이 벌 어질지 안봐도 눈에 훤하다. 그 전에 얼른 방으로 돌아가 숙취 흔적을 지워야 만 했다. 하다못해 샤워라도 하지 않으면……. " ……나란 녀석도 참 웃긴 놈일세. " 진우는 무의식중에 또 자신이 아가다 수녀를 신경쓰고 있자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이건 정말로 그 영감 말 대로잖아? ' 도미니꼬! ' 진우는 8년을 넘게 들어온 목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리질을 쳤다. 특별히 아가다 수녀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를 싫어하냐고 묻 는다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자신의 일에 신경 쓰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 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미워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원없이 원망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마음껏 욕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 진우 오빠! ' 그랬다면 적어도……이런 답답한 기분은 아니었을텐데. 이런 막연한 기분 은 아니었을 거야. 진우는 짧게 혀를 차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같은 방을 쓰는 토마스는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 녀석은 자신과 달리 성 실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지금쯤이면 9학년이 됐을려나? ' 나도 그대로 계속 학교를 다녔더라면……몇 학년이지? '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피식 웃었다. 아서라, 정진우. 스스로 때려치운 주 제에 뭔가 아쉬움이라도 남은 거야? 아니면 불안하기라도 해?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수 있을까, 하고? ' 앞 일따위, 언제부터 걱정했다고. ' 진우는 자켓과 면티를 침대에 벗어던지고 타올을 목에 둘렀다. 아무 생각 없 이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술 기운이 빠지면 이 찝찝한 기분도 어느 정도 가라앉지 않을까? 낮 기도를 마치고 고아원에 돌아온 아가다 수녀는 앞마당에 세워진 진우의 오토바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걸어오던 시메온과 아이들도 진 우의 오토바이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 아, 도미니꼬다! " " 방금 왔나봐! " 아가다 수녀는 그의 방문에 여느때와 달리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도미니꼬가 안젤라의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 진우의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거짓말 보태지 않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들뜨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 얘들아. 너희들은 점심 식사 해야지? 다들 배고플텐데 먼저 부엌에 가 있 으렴. 수녀님은 도미니꼬를 데리고 갈테니. " " 에에―? 우리가 가면 안되요? " " 우리가 데리고 올게요! " " 도미니꼬한테 안젤라가 찾아왔다고 어서 빨리 얘기해주고 싶단 말이에요! " 프란체스카와 아이들은 부엌으로 자신들을 내모는 수녀님의 행동에 영문을 몰 라 소리쳤다. 그렇게 아이들의 항의가 거세자 아가다 수녀는 조바심을 느꼈다. 이, 이 녀석들이 내 맘도 모르고! 도미니꼬에게 안젤라의 소식을 전해주는 건 내가 직접 하고 싶단 말이야! 절대로 양보 못해! " 자자. 우리가 한데 모여서 우르르 찾아가면 도미니꼬가 얼마나 피곤해 하겠 니? 가뜩이나 밖에서 일하고 온 아이잖아. 귀찮게 하면 안되겠지? " " 싫어! 그래도 갈거에요! " " 도미니꼬는 한번도 우릴 귀찮아 한 적 없단 말이에요! " " 평소에는 맨날 우리보고 데려오라 그랬으면서! " " 오늘 수녀님 이상해요! " 애써 웃는 얼굴로 달래보았지만 교섭은 결렬. 그도 그럴 것이 서로가 양보할 생각이 없는데 처음부터 협상이 성립될 리 없지 않은가. 아가다 수녀는 나이 에 걸맞지 않게 고집을 부리며 아이들과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렇게 상황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잠자코 있던 시메온이 중재에 나섰다. " 얘들아. 아무래도 수녀님이 따로 도미니꼬에게 긴히 할 말이 있으신가봐. 방해하면 안되지. " 시메온의 제지에 아이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무슨 할 말? " " 으음. 그러니까 그게……. 너희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수녀님이 도미니꼬 와 잘 지내지 못하시잖아. 저번에도 그렇게 서로 싸우기만 했고. " " 응! 맞아. 맨날 싸워! " 아가다 수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자주 싸운 것 같지는 않은데……. " 그래서 오늘은 모처럼 용기를 내서 도미니꼬와 화해하시려는 걸 거야. 그 런데 우리가 옆에서 빤히 지켜보고 있어봐. 어떻겠어? 굉장히 부끄럽겠지? " " 으응― 그렇겠네. " " 그러니까 우리가 잠시 자리를 비켜주자. 수녀님과 도미니꼬가 앞으로 잘 지내도록 우리가 도와주는 거야. " " 응. 알았어! " " 수녀님, 파이팅! " " 힘내세요! " 아이들의 격려 아닌 격려에 아가다 수녀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시메온은 아이 답지 않게 어깨를 으쓱 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영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아가다 수녀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애인지……. " 그, 그럼 수녀님은 이만 가볼테니까. " " 꼭 화해하셔야 해요! " " ……응. " 아이들의 전송을 받으며 아가다 수녀는 떨떠름하게 진우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진우의 방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다시 얼굴에 홍조가 어린다. 그 아이에게 안젤라의 소식을 전해주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반 응을 보일까? 환하게 웃을까? 하지만 그런 진우의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 예전에는 그 아이도 자주 웃곤 했는데……. ' 언제부턴가 진우의 표정에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다른 아이들 에게 웃어보이기는 했지만 그 웃음에서는 진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공허한 미소만이 남아있었을 뿐이다. 아가다 수녀는 이제 겨우 열 네살인 아이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 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그리고 그가 진실하게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 그 때의 이별 때문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약 안젤라가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두 아이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랬다면, ' 그랬다면……. ' 하루에도 몇번 씩이나 떠올리는 부질 없는 생각.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아가다 수녀가 진우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에게 신경을 쓸 때마다 상황은 악화되기 일쑤였다. 그저 잘해주고 싶을 뿐인 데, 그저 미소를 찾아주고 싶을 뿐인데. 그렇게 그녀가 애를 쓸 때마다 마치 누군가가 훼방을 놓는 것처럼 그와의 관계는 자꾸만 틀어져 갔다. ' 되돌릴 수 있을까……. ' 다시 안젤라를 만나게 된다면, 그러면 도미니꼬도……. ' 다시 웃어줄 수 있을까? '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여전히 자신에게 냉담해도 좋았다. 단지 그 아 이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상처. 모든 것을 불신하는 그 마음에 한 조각의 믿 음만이라도 줄 수 있다면, ' 그것만으로도 나는……. ' 아가다 수녀는 닫혀진 진우의 방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노크하기 시작했 다. 똑똑 유난히도 조용한 복도로 거친 나무 울림이 뚜렷하게 울려퍼진다. 아가다 수 녀는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이토록 길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재차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가다 수녀는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에도 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그제야 아가다 수녀는 실망을 금치 못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곧 침대에 제멋대로 널려진 진우의 옷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돌아오기는 했구나……. ' 화장실에라도 간 걸까? ' 아가다 수녀는 진우가 벗어둔 옷가지를 집어들다가 이내 실소했다. 진우가 방안에 없다는 것도 모르고 문 앞에서 안절부절했던 자신이 우스웠던 것이다. 덕분에 두근거리던 가슴도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종신서원을 다시 받는 것도 아니었는데 뭘 그렇게 긴장했던 건지……. " 어휴. 하여간 도미니꼬. 이 녀석은 끝까지 사람 애를 태운다니까. " 아가다 수녀는 미소하며 진우의 옷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물건을 어지르고 다니는 모습은 영락 없이 고아원의 아이들과 똑같았다. 어쩌면 도미 니꼬는 생각만큼 대하기 어려운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아이에게 거리를 뒀던 것은 오히려 자신 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툭 그때 정리하던 옷가지에서 뭔가가 떨어져내렸다. 아가다 수녀는 침대의 시트 에 떨어진 물건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머니에 뭘 넣어놨던 걸까? " ……! " 하지만 떨어진 물건을 바라본 순간,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진 우의 옷가지에서 나온 물건. 그것은 다름 아닌, " 어라? 수녀님. " 때마침 샤워를 끝낸 진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가다 수녀가 자신의 방을 찾아온게 뜻밖이었는지 인상을 찡그렸지만, 곧 그녀의 손에 자신의 옷이 들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멋쩍어했다. 그러고 보니 피곤해서 방안을 엉망으로 해놓고 나왔었지……. 대신 정리해주 고 계셨던 건가? " 저기……. 방 청소는 제가 할테니까 그냥 놔두고 가보세요. " 진우는 어색하게 한마디 하며 그녀에게서 옷을 건네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가다 수녀는 옷을 돌려주는 대신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 왜? 나에게 뭔가 보여주면 안될 거라도 있는 거니? " " ……예? 아, 뭐. 그런 것도 있죠. 이제 저도 열네살이니까. " 진우는 왜 그런 걸 묻나 싶어 엉겁결에 답했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이러시는 거지, 수녀님? 아까부터 날 돌아보지도 않으시고? 그런 진우의 의문은 아가다 수녀가 들어올리는 한 물건에 의해 해소되었다. " 보여주면 안될 거라는게……이런 거야? " " ……! " 아가다 수녀가 진우의 코앞에 들이민 물건. 그것은 바로 하얀 가루가 채워진 비닐 봉지였다. 바로 브루클린 교에서 진우가 노인 몰래 가져왔던 소마! 어떻게 이걸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아무리 피곤하다고는 했지만 마약을 주머 니에 넣고 그냥 나오다니! 진우는 차마 아가다 수녀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 그동안 왠지……뭔가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어. 미성년자인 널 받아줄 직장이 정말로 있었던 건지……. 매주 아이들에게 비싼 선물을 사주는 것 도 그랬고……. 뭔가가, 뭔가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어. 생각했었지만 ……. " 아가다 수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마약 봉지를 가져오는게 아니었는데!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지만, 사태는 이미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수, 수녀님. 저기……무슨 오해를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제 설명부터 들어보실래요? 예? 에이∼ 자꾸 그렇게 무서운 표정만 지으시지 말고……. " 진우는 애써 장난스럽게 운을 떼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이 상황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자신의 주머니에 마약 봉지가 들어있던 것을 대체, 대체 어떻게 하면……. ' 생각해봐, 정진우! 생각해내! ' 진우는 무겁게 달아오른 두 눈으로 아가다 수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을 꺼내야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방금 전 샤워를 했던 것이 무색하게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어든다. " 수녀……. " 간신히 열린 진우의 말문. 그러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짝―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짝― 대신 날카로운 따귀음이 방안에 울려퍼졌다. 진우는 자신의 왼쪽 뺨을 부여 잡으며 놀란 눈으로 아가다 수녀를 바라보았다. 따귀를 날린 것은 그녀였던 것이다. " ……. " 뺨은 아프지 않았다. 단지 소리가 크게 났을 뿐. 제대로 자국조차 남지 않 는 따귀질이었다. 힘없는 손짓이다. 하지만 진우는 가슴을 송곳으로 찔리는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은 아가 다 수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 나는……믿고 있었어. 네가 어디를 가든. 몇날 며칠 소식 없이 지내더라 도. 아무리 우리 속을 태우더라도……. 절대로, 절대로 나쁜 짓만은 하지 않을 거라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만은 하지 않을 거라고! " 아가다 수녀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하지만 노기가 서린 표정으로 진우에게 소리쳤다. 연태껏 그녀에게 여러번 호통을 들어왔던 진우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지금의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 정말로 그에게 실망하고 있 었다. 그것이 너무나 확연하게……느껴진다. " 너에게 고마워하기도 했었어. 일하느라 바쁠텐데도 꼬박꼬박 고아원을 찾 아와줘서……. 동생들을 챙겨줘서……. 우리들을 잊지 않아줘서 너무나, 너무나 고마웠어. 감사했지. 그런 네 모습 때문에 난 널 믿을 수 있었어. 비록 너에게 제대로 된 격려 한마디도 해주지 못했지만, 제대로 해준 것도 없이 고생만 시켰지만. 그래도, 그래도 훌륭하게 자라주는 것 같아……그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워서. 고마워서 울면서 감사 기도를 드렸어. 주님께 몇번이고 네가 무사하기를! 네가 앞으로도 자기 자신을 잘 지켜나갈 수 있 도록! 그렇게 기도 드렸어! " " ……. " " 그런데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이 이거였니? 이렇게 널 걱정해준 사람들을 배 신해도 되는 거야? " 아가다 수녀는 들고 있던 소마 봉지를 진우의 발치에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 차라리 이런 일을 할 거였으면! 남에게 피해를 주고 살 거였으면! 그럴 거 였으면 고아원으로 돌아오지 그랬어! 왜 나갔던 거야! 그런 마약 판 돈으 로 동생들에게 선물을 사주면 누가 좋아할 줄 알아? 누가 기뻐할 줄 아니? 아무도 없어! 이 선한 사마리아원에서 네가 그런 짓을 해서 번 돈으로 기뻐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 진우는 두눈을 질끈 감았다. 아가다 수녀의 말이 너무나 정곡을 찔러오고 있 었다. 아무리 마약 커넥션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스내쳐라지만, 엄연히 그가 해온 일은 범죄였다. 아무리 도둑 놈들의 것만 훔쳐왔더라도 도둑질은 도둑질! 변명의 여지는 없다. " ……하. " 진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가다 수녀에게 가장 먼저 들킬 줄이야. 그 전에 갱단이나 마피아들의 손에 걸려 죽 을거라 생각했건만. 가장……가장 들키기 싫은 사람에게 들켜버렸다. 제길. 제길. 제길. " 하하하하. " 갑작스런 진우의 웃음 소리에 울고 있던 아가다 수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프고, 답답하다. " 도미니꼬? " " 그 이름으로……날 부르지 말아요. " 진우는 아가다 수녀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한가지 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가끔씩 선한 사마리아원을 생각할때마다 느껴지던 답답 함. 아가다 수녀를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던 언짢음, 죄책감. 그 기분들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정진우야. 도미니꼬 따위가 아니야! " 진우는 한껏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했다. 웃을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의 얼굴은 자꾸만 일그러지고 있었다. " 제발 잔소리는 그만해! 날 걱정하는 척도 하지마! 어차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꼬마였잖아? 갈곳 없어 굶어죽으려던 걸 데려와준 거잖아? 그래서 더 이상 신세지기 싫었어! 고아원 사정 어려운 것도 잘 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데려와 준 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 하지만! " 그렇다고 내 부모 노릇까지 하려들지마! 나에게 부모같은 건 없어! 만약 있 다고 해도 그건 날 슬럼가에 내다버린 남자와 여자지 수녀님이 아니야! " " 도미니꼬……! " 창백하게 질린 아가다 수녀의 얼굴. 진우는 그녀를 외면하며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줏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 어차피 남이었잖아? 그러니 내가 마약을 팔든 사람을 찌르든 상관하지마! 쓸데없이 간섭하면 괜한 불똥이 튈 테니까! 나도 더 이상 이런 후줄근한 고아원 따위 찾아오지 않겠어! " 그렇게 막 방을 나서려던 진우는 문 밖에서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 메온과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흥분해서 소리치다 보니 부엌에 있는 아 이들에게까지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진우는 이를 악물고 거칠게 아이들을 뿌리쳤다. " 비켜! " " 도미니꼬! " 등뒤로 울부짖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특히 진우를 누구보다 따랐던 시메온은 평소 조숙했던 모습답지 않게 울음을 터뜨리며 그를 쫓아오고 있었 다.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고아원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마당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마치 도망치는 사람처럼 급하게 시동을 켜 고 엑셀을 당겼다. 그러자 거친 엔진음이 진우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삼켜버린다. 부아아아아앙― 진우는 그대로 선한 사마리아원을 떠나 맨해튼으로 달려나갔다. 거센 맞바 람이 그의 볼에 흐르던 눈물을 뒤로 날려보낸다. 아가다 수녀와 아이들 앞에 서 나오지 않던 눈물이 이제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진우는 흐느끼면서도 웃었다. 그 웃음은 바보같은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었 다. " 하하하하하. " 알고 있었어. 나는 사실 누구보다 가족이 갖고 싶었던 거야. 부모님이 갖고 싶었어! ' 한껏 부정했던 주제에, 날 버린 부모따위 죽기보다도 싫었던 주제에. ' 그런 주제에 가장 가까이에 있어준 사람들에게서 가족을 느꼈다. 아가다 수 녀님이 내 엄마가 되어주길 바랐어. 사마리아원의 아이들이 내 가족이 되어 주길 바랐어! 그들이 날 버린 가족을 대신해주길 바랐어! " 하하하하하. " 그때문에 도미니꼬라 불리기를 거부했다. 선한 사마리아원에 있기를 거부했 다. 아가다 수녀님을 외면해왔다. 그러면서도 미련은 남아 꼴사납게 고아원 주위를 기웃거렸어! ' 어쩌면 나는 이렇게……, 이렇게도……. ' 진우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껏 숨겨왔던 추악한 속내 가 한번에 드러나자 도저히 정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달렸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때까지. 몸과 머리가 녹아내릴 때 까지 달리고 또 달 렸다. 그를 태운 오토바이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며 뉴욕의 거리를 헤쳐나간 다. 그러자 주위의 모든 풍경이 어둡게 물들며 속도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 으아아아앙. " 진우가 고아원을 나간지 몇시간이 지났건만 시메온과 아이들을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토마스는 그런 고아원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연신 울고 있는 아이들을 달랬다. " 도, 도대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왜들 울고만 있는 거야? " 하지만 그의 물음에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한편 아가다 수녀는 잔뜩 수척해진 표정으로 성당의 예배실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 돌려보낸 미연과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 다. 한껏 진우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미연은 아가다 수녀가 건네 준 진우의 소식에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가다 수녀는 그런 미연에 게 미안하다는 말만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다시 안젤라와 도미니꼬가 만나서 ……그래서 모든게 다 잘 풀릴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갑자 기 이런……. '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었건만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는지 연신 멈추지를 않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흐느 끼며 얼굴을 감쌌다. 만약 이 모든게 하느님이 정한 운명이라면, 그런 하느님을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녀인 그녀로서는 원망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 차라리 그때 내가 몰랐더라면……. 마약같은거 보지 못했더라면……. ' 그랬다면 안젤라와 도미니꼬는 아무 일 없이 재회를 즐겼을지 모른다. 아무 도 슬퍼하지 않고 넘어갔을지 몰라. 그렇다면 역시 이번에도 자신 탓인가? 일 이 틀어진 것은 모두 자신 때문이야? ' 모르겠어. 아무 것도 모르겠어……. 이제 어떡해야하지? 어떻게 하면 좋 아? ' 진우는 완전히 사마리아원을 나가버렸고, 그로 인해 미연이 그와 만날 기회 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마약 봉지. 아가다 수녀는 원망서린 눈으로 수중의 마약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 친 마약은 악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작은 봉지 하나 때문에 선한 사마리아원의 모든 것이 부서져 버렸다. 모든 행복이 떠나버렸어. 생각같아서는 이 재앙덩어리를 당장에 경찰서로 넘겨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간 진우가 구속당할 위험이 있었다. 물론 그가 자초(自招)한 일이니 그 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옳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끝내 경찰에게 신고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다른 수녀님들에 게 알려지지 않도록 마약을 숨기기까지 했다. 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린 것인지……. " 왜 그러십니까, 수녀님? " 그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아가다 수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그녀의 앞에는 은발의 신부가 나타나 있었다. " 페, 펠릭스 신부님……. " 아가다 수녀는 신부의 이름을 부르다가 곧 그의 눈이 자신의 손에 들린 마약 봉지를 주시하자 다급히 등뒤로 그것을 감췄다. 하지만 이미 보일건 다 보인 뒤였다. 펠릭스 신부는 인상을 굳히며 아가다 수녀의 앞 자리에 몸을 앉혔다. " ……아가다 수녀님. 제 눈이 잘못된게 아니라면 방금 전 수상한 약을 감추 시지 않았습니까? " " 예? 아, 예……. 그게 말이죠. " 갑작스런 신부의 질문에 아가다 수녀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가뜩이나 솔 직한 성격에 앞의 일들로 심신이 지쳐있다보니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펠릭스 신부는 그런 수녀의 곤란함을 눈치 챘는지 차분하게 말했다. " 뭔가 난처한 일에 말려드신 모양이군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힘이 되 어드리고 싶습니다만……. " " 예? " " 일단……주위의 눈도 있으니 고해소로 들어가시죠. 이참에 고해 성사도 받 으시겠습니까? 만약 비밀로 하시고 싶으시다면 이편이 좋을 거라 생각하는 데 말이죠. " " 아, 예……. 예! " 아가다 수녀는 자신의 사정을 헤아려주는 신부의 모습에 절박한 심정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그녀는 그와 같은 조언자가 필요했다. 고해소는 가톨릭의 7성사 중 하나인 고해 성사를 집행하는 장소로서, 신자가 알게 모르게 범한 죄를 성찰, 통회, 고백, 보속 등의 절차를 통하여 죄를 용 서받는 성소였다. 아가다 수녀는 참회자가 죄를 고백하기 쉽도록 서로의 얼굴을 보이지 않게 쳐 둔 칸막이를 앞에 두고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칸막이 뒤편에서 신부는 참 회자의 목소리만을 들으며 성사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이 고해소에서 고백한 죄를 신부가 누설할 시에는 성직자 면직은 물론 자동적으로 파문당한다. 진우의 일을 상담하기에는 이곳만큼 좋은 장소도 없을 터였다. " 흐음. 과연 그렇게 된 거였군요. " 아가다 수녀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펠릭스 신부는 작게 한탄했다. 고백을 하다 보니 어느샌가 긴장이 풀린 아가다 수녀는 작게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 신부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대체 제가 어떻게 하면……. " " 글쎄요. 일단 도미니꼬를 찾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욕 경찰(NY PD)에 실종 신고를 넣고 우리도 직접 찾아보는게 좋을 것 같군요. " " 겨, 경찰요? 하지만 그럼……. " 아가다 수녀는 뉴욕 경찰이라는 말에 불안함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며칠전 뉴스에서 뉴욕 경찰 마약반이 범법자를 체포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곳에 진우의 실종 신고를 넣어도 되는 것일까? 펠릭스 신부는 그런 수녀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신중하게 말했다. " 우리가 도미니꼬의 마약 건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뉴욕 경찰도 단순한 실종 신고로 조사할 겁니다. 어차피 열 네살 아이가 마약 거래를 돕는다고 해도 바람잡이 일을 하는게 고작일테니 경찰들에게 얼굴이 알려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레 겁 먹을 필요는 없어요. " " 그, 그렇겠죠? 그럼 다행이고요. " 아가다 수녀는 한시름 놓았다는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펠릭스 신부 에게 털어놓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끙끙 앓기보단 이렇게 믿 을 수 있는 사람과 얘기를 공유하는 편이 마음도 편한 것이다. 하지만, " 하지만 과연……이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요. 분명 우리가 그 아이를 감싸줘야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 안도하는 한편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일. 그것은 이대로 진우의 죄를 무턱 대고 덮어줘서는 안된다는 거였다. 아무리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 한들 그가 가진 마약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아가다 수녀의 심정같아서는 진우만 돌아와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지만, 그녀가 성직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완전히 그의 죄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 릇이었다. 그런 수녀의 고민을 신부는 간단히 풀어주었다. " 도미니꼬가 돌아오면 시간을 가지고 그 아이를 설득 시켜봅시다. 분명 우 리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힘든 일이 되겠지만……. 도미니꼬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한다면 자진해서 자수하려고 들지 않겠습니까? " " 네, 네! 도미니꼬는, 도미니꼬는 근본이 착한 아이니까……. 알아듣게만 잘 설명한다면 마음을 돌릴 거에요. 분명히! " 아가다 수녀는 두손을 움켜쥐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진우가 험 한 소리를 하고 고아원을 뛰쳐나갔다지만 그녀는 절대로 그를 포기할 수 없 었다. 쓸데 없는 참견이라고 해도 좋다. 단순한 자기 만족이라고 해도 좋아. 그는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소중한 가족이었다. " 고맙습니다, 신부님. 힘이 됐어요. 제 말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힘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 아가다 수녀의 진심 어린 감사에 펠릭스 신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칸막이 로 가려져 있었기에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순 없었지만, 그녀는 분명 펠릭스 신 부가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 아, 그런데. " 문득 펠릭스 신부가 말을 꺼냈다. " 수녀님이 가지신 마약……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 " 아, 그러네요. 이걸 어떻게 해야할지……. " 아까처럼 들춰보다가 누군가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펠릭스 신부님 때처럼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 행여나 원장 수녀님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 " 만약 처치하기가 곤란하시다면 제가 맡아두고 싶습니다만. " 펠릭스 신부가 뜻 밖의 제안을 하자 아가다 수녀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 시, 신부님이요? " " 예. 아무래도 제가 묵는 사제관은 특별히 용무가 없는 한 누군가가 찾아 오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수녀실은 다른 수녀님들도 함께 머무르고 계실 테니 여러모로 보관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 " 그렇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저, 폐가 되지는, 않을런지. " " 그럴리가요. 수녀님께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 아가다 수녀는 펠릭스 신부의 자상함에 가슴이 찡해졌다. 정말이지 이토록 고마운 분도 있을 수 있는 거구나. 그녀는 몇번이고 그에게 감사를 표하며 칸 막이의 구멍으로 지니고 있던 마약 봉지를 넘겨주었다. " 음……! " 그때 마약을 받은 펠릭스 신부에게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다 수녀는 영문을 몰라 물었다. " 신부님? 왜 그러세요? " "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수녀님은 이만 고아원에 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아이들이 도미니꼬의 일로 혼란스러워 하 고 있을 것 같은데. " " 아, 맞아. 그랬지! 내 정신도 참! 저기, 신부님!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 겠습니다. 상담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아가다 수녀는 울고 있는 아이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서둘러 신부에게 인사 를 하고 고해소를 나섰다. 그렇게 그녀가 나가자 짙은 침묵이 고해소에 깔리 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침묵을 깨뜨리는 한 웃음소리가 칸막이 너머에 서 흘러나왔다. " 크크크크……. 역시 인생은 재미있어. 재미있는 일의 연속이야. " 역시 성서의 말씀은 틀린 게 하나도 없군. " So is the man that deceiveth his neighbour, and saith, Am not I in s port?(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 하리라). " 자, 그럼 겁없는 쥐새끼를 희롱해보도록 할까.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뉴욕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그리고 밤이 된 도시에는 이색(異色)의 활기가 넘쳐난다. 술, 음식, 마약, 연극, 춤, 재즈, 강도, 살인. 뉴욕 경찰이 강화된 이후 살인을 비롯한 범죄 는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호텔 인근의 뒷골목에는 매춘부들이 들끓고 있었고, 더 깊숙한 골목에는 마 약을 매매하는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그 사이 사이로 경찰의 패트롤 카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것은 맨해튼 남단의 골목에 있는 노인과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 웬일로 네 녀석이 먼저 연락을 다 해온 거냐? 평소 같으면 내 쪽에서 연락 을 해도 시큰둥했을 녀석이. " 치이이익 진우는 커넥션 노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오토바이에 예의 온도 감응 변색 도료를 뿌렸다. 그렇게 묵묵히 작업하는 소년의 모습에 노인 은 가래가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 클클.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거냐? 이제 본격적으로 일해볼 생각이 들었나 보군. " " 흥. 시끄러워요, 영감. 누가 이딴 일 본직으로 삼을까봐. 어디까지나 이건 아르바이트일 뿐이라고요. 아·르·바·이·트. " 진우는 웃기지 말라는듯 노인에게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갈아입은 레이싱 슈트를 정검하며 헬맷을 챙겼다. " 그냥 몸을 놀리고 싶을 뿐이에요. 잡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 " 뭐, 네 녀석이 열심히 일해준다면 나야 바랄 게 없지. 손 하나 까딱 안하 고 주머니를 채울 수 있으니까. " " 쳇. 손주뻘 되는 애 부려먹어서 퍽이나 좋으시겠수다. " 진우는 투덜거렸지만 더 이상 항의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의 계약대로 노인과 자신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였다. 노인이 진우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진 자의 유희였을 뿐, 결코 진우를 신용해서가 아니다. 노인이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도박을 걸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노인은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였던 것일까? 그것은 줄타기의 모든 리스크를 진우 혼자만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우는 노인의 인적 사항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고, 그가 건네주는 일거리의 전후 사 정도 알지 못했다. 그저 정해준 물건을 매번 훔쳐올 뿐이었다. 그러다 자칫 실패할 경우 모든 갱들의 보복은 진우에게로 향하게 될테고 그 의 선에서 일은 마무리 된다. 행여나 진우가 노인에 대한 사항을 발설하더라 도, 노인이 남긴 정보는 아무 것도 없었기에 꼬리가 잡힐 이유도 없다. 그렇기에 이런 위험한 도박이 성립되는 것이다. 노인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었고 진우가 성공할 시에는 이득을, 실패할 시에는 자취를 감추면 그만이었 다. 말 그대로 가진 자의 유희. 바로 그것이다. " 아무래도 수지가 안맞단 말이야. 이런 위험한 일은. " 진우의 중얼거림에 노인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꾸했다. " 클클. 그 위험한 일이라도 달라고 했던 건 너야. 잊지는 않았겠지? " " 잊지 않았기에 계속 하고 있잖아요? " " 그래. 이건 너와 나의 내기인 거야. 네가 실수하지 않고 일을 완수할 때 마다 난 대가를 지불하고 더 비싼 일거리를 넘겨주지. " " 그럼 내가 실수한다면? " " 그 날로 해고인 거고. " " ……흥! " 진우는 코웃음을 치며 헬맷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도료가 마른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 마음 놓으쇼, 영감. 오늘도 해고 당하는 일은 없을테니까! " " 그러면 더 바랄게 없지. " 노인은 능청스럽게 말하다가 뭔가가 생각났는지 뒷말을 덧붙였다. " 아,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도움은 바 라지 마라. 네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난 주저없이 몸을 숨길 거야. " 그 말에 진우는 기가 막혔다. 이 노인네가 정말! " 일 나가려는 사람에게 아까부터 왜 자꾸 재수 없는 소리만 하는 거에요! 망령이라도 들었어요? " " 노파심이라고 했잖아. 노파심. " "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한이 있더라도 영감은 찾지않지. 이러면 됐습니까? " " Okay. Good luck, Night rider! " 진우는 더 이상 노인과 얘기하기 싫었는지 거칠게 오토바이를 몰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노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 리고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 그래. 네 말대로 수지가 안맞는 일이야. 이건……. " " 움직인다. " 낯익은 검은 오토바이와 낯익은 레이싱 슈트. 며칠전 하울링의 거래를 엉망 으로 만들었던 오토바이의 괴인이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케이시는 차안의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 들키지 않게 따라가. 대기 중인 애들에게도 연락 돌리고. " " 아, 예! " 부하는 사전에 짜둔 연락망으로 동료들을 호출했다. 하울링의 정예 멤버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신 보스에게서 받은 돈으로 인근의 폭주족들을 매수할 수 있었다. 폭주족은 갱 보다 격이 낮고 젊은 애송이들이 대부분이기에 언제나 자금난 에 허덕이는 서브 컬쳐(Sub Culture)였다. 덕분에 이런 앞뒤 가리지 않는 청 부 폭력에는 안성 맞춤인 집단이다. " 그나저나 재주도 좋네요. " 그때 연락을 돌리던 부하가 엉뚱하게 감탄을 터뜨렸다. 케이시는 전방에서 일정한 거리로 달리고 있는 괴인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 뭐가? " " 그, 보스……말이에요. " 부하는 보스라는 단어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주저없이 말을 이었다. " 우리가 이틀 밤낮으로 거리를 뒤져도 찾아내지 못한 녀석을 어떻게 단숨 에 알아냈을까요? 보스는 여기 출신도 아니잖아요? " " 글쎄……. " 케이시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도 내심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낮, 보스는 그동안 케이시 일행이 찾아헤맨 나이트 라이더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이곳 토박이인 자신들도 알아내지 못한 사항을 그는 어떻게 그리도 쉽게 알 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케이시는 짜증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 궁금한게 어디 그것 하나 뿐이겠냐. 보스에 대해 너무 알려고 하지마라. 알아봤자 좋을 것 하나 없을테니. " " 예에……. " 부하도 이틀 전에 보았던 보스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그 즉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다른 부하들도 침묵하기 시작했다. 차안의 공기 가 그들이 내뿜는 공포로 탁해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 ……무리도 아니지. '그런' 걸 봐버렸으니. ' 보스에게 목이 물어뜯겨 하늘로 날아오르던 레비의 모습. 그 비현실적인 광 경에 그 자리의 모두는 혼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예전 프랑스 혁명 때 자코뱅 당이 기요틴(guillotine)을 앞세워 행한 공포 정치가 그러했을까. 언제 자신에게 죽음의 칼날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보스는 공포로 사람을 부리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레비……. ' 하지만 진정 두려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케이시는 자신의 옆을 떨리는 눈 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 그는 다름 아닌 죽었다고 생각 했던 레비였다. ■ " 후우……. 후우……. " 레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틀전 보스에게 목 이 뜯겨나가 죽을 뻔 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는 멀쩡해 보였다. 실 제로도 그의 목에서는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에게선 예전의 모습도 사라져 있었다. 평소의 어리숙한 모습 대신 말을 잊어버리기라도 한것처럼 조용해지고 과묵해져버렸다. 레비와 어릴 때 부터 할렘가에서 지내온 케이시는 그 누구보다도 친구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 었다. 이건 마치 레비의 탈을 쓴 다른 사람 같다. ' 제길.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 케이시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암담함에 치를 떨었다. 이미 벗어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애초에 그런 괴물과 손을 잡는 것이 아니었어! 뭐가 강한 녀석 의 밑으로 들어가는 거야? 뭐가 이 바닥의 법칙이란 거야? 그저 힘을 키우고 싶었을 뿐이잖아. 강해지고 싶었을 뿐이잖아!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도록, 그냥, 그냥……! ' 제길. 제길. 제길! ' 케이시는 이를 갈며 전방의 나이트 라이더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이 저놈 때 문이었다. 일이 틀어진 것도. 레비가 변해버린 것도. 갬비노 패밀리와의 일이 성사되었더라면 그들의 보스는 조용히 자신들을 떠나갔을 것이다. 그 괴물에게 서 벗어날 수 있었어! 하지만 그것을……저 놈이 망쳐버렸다! '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주지. ' 네 녀석을 제물로 받치는 한이 있더라도! 케이시는 각오를 다지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 지옥의 천사들(Hell's Angels)에게 연락해. 녀석을 사정봐주지 말고 덮치 라고! " 끼이이이익 한창 맨해튼의 도로를 달리던 진우는 신호등에 걸려 오토바이를 세워야 했다. 아직 자정이 넘지 않은 시각이라 교통 법규를 무시하고 달리기엔 주위의 눈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게 남은터라 서둘러 갈 필요도 없었 다. ' 거,참. 왜 마약 거래하는 놈들은 꼭 자정에만 만나는 걸까? 뭐, 나야 알기 쉬워 좋기는 하다만. ' 진우는 거리 전광판에 떠오르는 시간을 체크하며 피식 웃었다. 낮에 그런 일 이 있고서도 여전히 웃을 기력이 남아 있다니……. 나란 녀석, 어지간히도 뻔 뻔스러운 놈이구나. 진우는 자괴감이 들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모든 것이 허무해질 뿐이었다. 이 제 자신은 무엇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걸까? 대체 누구를 위해서? ' 수녀님. 토마스. 시메온. 프란체스카. 모두들……. ' 진우는 자신에게 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닥치는데로 살아도, 무슨 짓 을 하더라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인생따위 알 바 없다고. 그렇게 미 친 망아지 마냥 제멋대로 날뛰었다. ' 하지만……아니었어. ' 꿈이 없었던게 아니다. 목표가 없었던게 아니야.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자신 이었다면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조금만 기다려봐. 이 형이 조만간 크게 돈 벌어서 저―어기 맨하튼의 엠파 이어 빌딩 보다 높은 집을 지을테니까. 그럼 거기서 다들 평생동안 함께 사 는 거야. 어때? ' 시메온에게 농담 삼아 말했던 포부.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데로 지껄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거야말로 진우가 꿈꿔왔던, 남 몰래 바래왔던 소망이었다. 시메온 조차도 비웃었던, 그런 허황되기 짝이 없는 말이 사실은 그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 모두와 함께 있고 싶었어. ' 앞으로도 계속. 계속……. ' 가족이 갖고 싶었던 거야. ' 나만의 진짜, 가족이……. 진우는 눈시울이 붉어지자 가볍게 주먹으로 헬맷을 두들겼다. 제길. 진정하자, 정진우. 일하기 전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좋지 않아. 실수 라도 했다간 그대로 끝장이라고. ' 어차피…… 상관없지 않나? 이렇게 된 거. ' 실수를 저지르든 갱들에게 붙잡히든. 이제 와서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진우가 노인에게 사정하여 이 일 에 뛰어든 것은 사마리아원의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목돈이 필요했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난 지금, 그가 이 일에 더 이상 매달릴 필요는 없 었다. 오히려 범죄자가 되어 고아원에 피해를 줄 바에는 당장에 손 씻는 편이 나았다. ' 그래. 이참에 정말 그만둬 버릴까? 수녀님을 화나게 해버린 이런 일 따위 ……. ' 멍청이― 그만둘 거였으면 좀 더 일찍 그만둘 것이지.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좀 더, 좀 더 일찍 그만뒀더라면. 그랬다면……, 부우우우웅― 그때 시끄러운 오토바이의 엔진음이 진우의 옆에서 터져나왔다. 진우는 숙 였던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새인가 그의 주위로는 검은 쟈 켓에 스킨 헤드를 한 폭주족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진우는 헬맷 안의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 녀석들? " 이히! " 거친 엔진음들 사이로 얼굴에 해골 분장을 한 몇몇 무리가 괴상한 고함을 내지른다. 주위의 승용차들은 그런 그들을 피해 일찌감치 물러나고 있었다. 진우는 자신의 곁에서 체인 사슬을 돌리는 폭주족을 경계하며 분위기를 살 폈다. 굳이 자신이 움직이지 않아도 저쪽에서 먼저 접근해 올 것 같았다. 그런 예상이 들어맞았는지 폭주족의 리더로 보이는 한 덩치가 알루미늄 배 트를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 이봐. 너. 누구 허락 받고 이 도로에서 달리는 거냐? " ' 거, 참……. ' 참으로 고전적인 시비로군. 진우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대꾸했다. " ……도로세라도 내야하는 거였나? 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 " 그야 들어본 적 없겠지. 지금 너에게 처음으로 말한 거니까. " " WOW! " 리더의 맞받아침에 주위의 무리들이 시끄럽게 환호를 울렸다. 진우는 그런 분위기에 개의치 않으며 조심스레 정황을 살폈다. 폭주족들은 그를 감싸듯이 크게 원을 그리며 오토바이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자기들 딴에는 포위했다 고 한 것일테지만……. 진우는 그들의 오토바이에 일정하게 붙어져있는 조악한 스티커를 보고서야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 이제 보니 유명인사들이었군. 최근 거리에 60년대 샌프란시스코 폭주족 을 흉내낸 시대착오적인 양아치들이 있다고 하더니만……. 그게 너희들 이었냐? " " Son of Bitch! 우리가 누군지 알고서 그딴 소리를 해! " " 간덩어리가 부었군! " 뉴욕의 하이 웨이를 점거한 폭주족, 지옥의 천사들은 저마다 흥분하며 욕 설을 내뱉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흉흉해짐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웃음을 참 을 수 없었다. 그래. 그래. 역시 이 편이 나한테는 어울리지……. 뭘 센티해져 있었던 거 야? " 건방진 새끼, 남의 부탁받고 조져버리자니 뭔가 찝찝했는데 말 한번 잘해 줬다. 이제 거리낄 것 없이 죽여주지! " 리더는 고함을 내지르며 들고 있던 알루미늄 배트를 진우에게 있는 힘껏 휘 둘렀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진우의 오토바이가 거짓말처럼 땅으로 꺼져 내렸다. 부아아아앙― " 으앗! " 진우를 감싸고 있던 폭주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알루미늄 배 트에 맞기 직전 진우의 오토바이가 제자리에서 휠스핀을 했던 것이다. 앞바퀴 의 브레이크를 잡은채 뒷바퀴의 출력을 높여주자 진우의 오토바이는 지면에 달라붙듯 원을 그리며 주위의 폭주족들을 위협했다. 그 바람에 배트를 휘두 르던 리더가 헛손질을 하는 것은 물론, 휠스핀에 겁 먹은 폭주족들도 자신들 의 오토바이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쿠당탕탕 " 왁! " 도로 한복판에서 오토바이가 쓰러지는 소리와 폭주족들의 비명이 한데 어울 려퍼진다. 밀집해있던 오토바이 한대가 쓰러지자 나머지 오토바이들은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차례대로 쓰러져갔다. 그 모습에 진우는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나 어중이 떠중이들은 어쩔 수 없군! " 이, 이 바보 같은 자식들! 당장 일어서지 못해! " 리더는 부하들이 추태를 보이자 얼굴이 붉어진채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그나 마 진우를 공격하기 위해 오토바이에서 내렸던 그는 도미노 사태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혼자만 추태를 면하도록 내버려둘 진우가 아니었다. 그는 휠스핀 을 하는 상태에서 그대로 앞바퀴의 브레이크를 놔버렸다. 그러자 진우의 오토 바이는 마치 튕겨나가는 것처럼 앞바퀴를 들고 리더에게 돌진했다. " 악! " 그 갑작스런 윌리에 리더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비명을 지르는 것 뿐이었 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가속해오는 오토바이를 무슨 재주로 피한단 말인가! 거 기다 진우가 탄 오토바이는 족히 잡아도 200킬로그램이 넘는 쇳덩어리였다. 그 런 것에 정면으로 부딪혔다간 죽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사람의 형상도 유 지하지 못할 것이다. " ―! " 그러나 진우의 목적은 애초에 리더를 들이받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 목적은 바로, " 으앗! " 폭주족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것 뿐! 진우의 오토바이가 리더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쓰러진 오토바이 더미로 달 려들자 근처의 폭주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휠스핀 시 윌리로 전 환할 경우 바이크가 뒤집어지기 일쑤였지만, 진우는 재주도 좋게 균형을 잡아 앞 바퀴를 쓰러진 폭주족의 오토바이에 올린 후 그대로 잭 나이프로 전환했다. 그러자 가속이 실린 진우의 오토바이는 대번에 폭주족들의 오토바이를 타고 넘어갔다. 타당! 그렇게 여유있게 폭주족들의 포위망을 빠져나온 진우는 퀵턴하며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남겨진 폭주족들을 바라보았다. 폭주족들은 진우의 대담한 바이크 솜씨에 다들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 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그들의 리더는 여전히 눈을 감은채 몸을 떨다가 뒤 늦게 자신의 무사함을 깨닫고서 맥없이 졸도한다. 진우는 헬맷 속의 입꼬리를 올리며 엄지 손가락을 그들에게 들어 보였다. " Hey. 지옥의 천사들이 추락하면 어디로 가는지 알아? "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폭주족은 없었다. 그러자 진우는 주저 없이 손 가락을 밑으로 내렸다. " 답을 알때까지 그 이름은 보류해두라고. Hell's Angels! " " 저― 머저리 같은 것들이! " 진우가 유유히 폭주족들에게서 벗어나자 케이시는 주먹으로 보조석을 후려쳤 다. 그 바람에 보조석에 탄 부하가 혼미백산하여 그를 돌아보았지만 케이시는 되레 호통을 쳤다. " 뭐하고 있어! 당장 쫓지 않고! " " 예, 옛! " " 그리고 다들 토미 건(Tommy gun) 꺼내! 녀석은 우리가 요절낸다! " 부아아아앙 그들을 태운 차가 진우를 쫓아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케이시는 부하가 넘 겨주는 소형 기관단총을 받아들며 이를 갈았다. 건방진 꼬마놈! 반드시 죽여버릴테다! 반드시! " 크르르르……. " 덕분에 그는 눈치 채지 못했다.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레비가 아까부터 낮게 목을 울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눈동자가 녹색으로 물들고 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 브루스 님! 나타났습니다! " 빈센트는 그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극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러자 한창 공연에 몰입하던 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한다. 그 시 선의 집중에 빈센트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Metropolitan Opera Association). 뉴욕시 링컨 센터에 있는 이 세계 굴지의 오페라 극장에서 자신은 공연의 흐 름을 끊는 최저의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공연이 시작된 시점에 서 극장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지만, 빈센트는 메트로폴리탄이 인정하는 귀 족 회원이었기에 그러한 제한을 받지 않았다. 아마 오페라단의 극장주는 지금, 그를 VIP로 승격시켜줬던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빈센트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관객들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고 도망치 듯 플래티늄 석으로 걸어갔다. " ……멍청한 놈. 성당기사단에서 내려준 기사의 칭호가 다 아까울 지경이군. 네 녀석은 기본적인 에티켓도 모르는 거냐? " 플래티늄 석에서 여유있게 공연을 감상하던 브루스는 빈센트에게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빈센트는 그런 브루스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애써 분을 삭히며 말했다. " 지금 이렇게 오페라 감상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 " 왜? 하울링의 보스라도 찾아낸 거냐? " "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 " 그럼? " 브루스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여전히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 이 너무나 성의 없어 보여서 빈센트는 가슴을 두드렸다. 대체 이 사람은 정말! " 보스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대신 하울링의 잔당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지금 맨해튼 남단의 도로에서 추격전이 벌이지고 있다더군요. " " 추격? 누구를? " " 아마 갬비노 패밀리와의 거래에서 중간에 소마를 날치기한 범인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그의 신변을 우리 쪽에서 확보하기만 한다면……. " " 소마의 회수는 물론, 하울링의 우두머리도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겠군. " 브루스는 재미있게 되었다는듯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 밖으로 향했다. 빈센트 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 제 휘하의 크루세이더에게 도로를 봉쇄하도록 명해놓았습니다. 지금 당장 에라도 진압할 수 있습니다만……. 어떡할까요? " " 내버려둬. 그러면 우두머리가 눈치채고서 다시 숨어버리잖겠냐. 다 된 밥 에 재 뿌리고 싶어? " " 그럼……? " 입구를 지키던 직원들은 공연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그들이 나오자 저 마다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브루스와 빈센트는 개의치 않으며 그들을 지나 친다. 오페라단 밖으로 나오자 입구의 분수대 쪽에는 이미 일련의 크루세이더 들이 리무진을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브루스는 빈센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 너희는 일단 상황을 계속 주시하도록 해. 혹여 민간인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치안 유지에 전념하고. " " 예에……. 하지만, " 빈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브루스의 말투가 마치 자신은 따로 행동하겠다 는듯이 들렸던 것이다. " 브루스 님은 저희와 함께 가시지 않을 겁니까? " 빈센트의 질문에 브루스는 힐끗 눈 앞의 리무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코웃음을 터뜨렸다. " ……이런 걸로 움직이면 늦는단 말이다. " " 예? " 대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던 빈센트는 크게 숨을 들이켜야 했다. 자신의 옆 에 있던 브루스가 마치 연기처럼 투명해지며 공기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피가 사라지고 색감이 사라진다. 마치 3차원의 존재가 2차원에서 1차원으로 역행하는 것처럼! ―먼저 가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브루스는 완전히 빈센트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빈센트와 대기중이던 크루세이더들은 일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빈센트의 곁에 있던 단원이 신음을 흘리며 그에게 물었다. " 다, 단장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 " 후……. " 빈센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과연……이런 것이 바르톨로메오의 에이젼트란 말인가. 이게 진면목이란 말 이지! " 부탁하는데로 따라주는 수밖에. " 빈센트는 외알 안경을 고쳐쓰며 리무진에 올라탔다. 그와중에도 그의 눈은 브루스가 사라진 자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 얼마나 재주가 좋은지 한번 지켜볼까, 브루스 류. ' 폭주족들을 따돌리고 이스트 강 방면으로 달려가던 도중, 진우는 두번째 트 러블의 징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 뭐지……. 저 차는? ' 주위에서 달리는 차들과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이는 승용차. 그 승용차가 아까 부터 줄곧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단지 예민하게 반응하는건가 싶어 몇번이고 길을 바꿔 봤지만 차는 떨어질 생 각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렇게 시간을 끄는 바람에 쫓아오는 차의 수도 세 대나 더 불어나버렸다. 총 네 대의 차가 진우를 미행하고 있다! ' 앞의 폭주족들과 관계 있는 건가? ' 폭주족의 리더는 분명 남의 부탁이 어쩌고 운운 했었다. 아마도 그들에게 자 신을 린치하도록 청탁했던 이들이 지금의 녀석들인 모양이다. 진우는 그제야 슬슬 자신의 위기를 인식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가 이 일을 해오면서 가장 경계했던 것이 바로 자신의 신변을 노출시키지 않 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추적자들이 본격적으로 따라붙었다는 것은……. ' 일단 어디의 뭐하는 놈들인지 확인해볼까! ' 진우는 순간, 오토바이의 브레이크를 잡으며 급정거해버렸다. 그러자 그의 뒤를 쫓던 자동차들이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하지만 너무 근접해 있던 터라 그들은 진우의 오토바이를 지나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로가 교차하는 도중 진우가 볼 수 있었던 것은, ' 저 녀석들은! ' 차안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케이시와 레비의 모습. 분명 저들은 일전 그에게 마약을 빼앗겼던 하울링의 멤버들이었다. 그제야 전후 사정을 깨달은 진우는 혀를 찼다. 제길! 그런거였나! 부아아아앙― 진우는 순식간에 속도를 높여, 멈춰서는 하울링의 차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케이시 일행은 그렇게 미행이 들통나자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다는듯 노골적 으로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진우는 사이드 미러로 케이시 일행의 동태를 살피며 생각했다. 일단 녀석들도 마피아가 아닌 이상 이런 대로에서 자신을 어쩌지는 못할 것 이다. 그 전에 녀석들을 잘 따돌리기만 한다면, 투타타타타타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총성이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차창 밖으로 몸을 꺼낸 갱들은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토미건을 난사했던 것이다. 당황한 진우는 반사적으로 핸들을 꺽었다. 그러자 그의 오토바이가 위태롭게 지면을 붙어 인도로 치닫는다. 촤아아아악 진우는 오토바이가 인도로 튕겨나가기 직전, 원심력의 밖으로 브레이크를 잡 아 드리프트를 넣었다. 그러자 오토바이는 크게 에스자를 그리며 마치 묘기라 도 부리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인도를 스쳐 지나갔다. " 미친 녀석들! 제 정신이야! " 진우는 사이드 미러를 노려보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리 마약을 빼 앗겨 필사적이라고는 하지만 대놓고 총질이라니! 이러다간 뉴욕 경찰이 출동 하는건 시간 문제란 말이다! 탕― 그러나 욕설에 돌아온 것은 사이드 미러를 부셔버린 총격이었다. 진우는 사 이드 미러의 유리 파편들이 헬맷을 두드리자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래. 좋아……. " 해보잔 말이지! " 그는 이를 갈며 그대로 무게중심을 앞으로 하여 오토바이의 브레이크를 잡았 다. 그러자 뒷타이어가 들리며 무게 중심이 쏠리는 방향으로 커브가 되는 것이 아닌가! 진우는 이 위험천만한 기술을 성공시키며 그대로 90도에 가까운 코너링으로 옆 골목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오토바이가 자동차를 따돌리려면 차폭이 좁다는 점 을 살리는 수밖에 없었다. " 헤헹. 너무 쉽잖아! " 과연 케이시 일행의 자동차는 오토바이 한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골목을 통과할 수 없었다. 진우는 반대편 거리로 뛰쳐나오며 골목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쳐 들었다. 악착같이 따라오던 것 치고서는 너무나 맥없이 떨어져나가는군! 부아아아앙 그때 반대편 차선에서 마치 튀어나오는 것처럼 승용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길 주행이 불가능하자 그 즉시 옆 블럭을 돌아 반대편 골목으로 돌아나온 케이시 일행이었다. 설마 그들이 이렇게 빨리 길을 찾아 나올 줄은 몰랐기에 진우는 신음을 흘렸 다. 제길. 그러고 보니 녀석들도 뉴욕 토박이들이지! 투타타타타 하울링의 토미건들이 불을 뿜자 진우는 재빨리 가로수 쪽으로 오토바이를 몰 아 공격을 피해냈다. 그 때문에 재수 없이 밤길을 거닐던 행인들은 비명을 지 르며 몸을 숙인다. 진우는 그 무분별한 난사에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인도에서 차도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역시 피해를 주는건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투웅 차도로 나오자 대번에 하울링의 승용차가 진우의 오토바이를 뒤에서 들이받 는다. 다행히도 받히는 힘이 약했기에 넘어지지는 않을 수 있었지만 대신 눈 에 띄게 속력이 줄어버렸다. 균형을 잡기 위해 브레이크를 잡은 것이 화근이 었다. 투웅 " 큭! " 재차 승용차가 오토바이를 들이받자 진우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핸들 을 쥔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오토바이에 걸친 하체가 욱씬거린다. 한순간이 라도 정신을 놓쳤다간 대번에 아스팔트 위를 뒹구를 판이었다. 진우는 필사적으로 침착하려고 했다. 필사적으로 집중하려고 했다. ' 언제나 그래왔잖아! 한두번 위험했던게 아니잖아! '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 했었지? 어떻게 헤쳐나왔지? 일단 숨을……들이키자. 그리고 몸의 떨림을 가라앉히는 거야. 이건 소매치기를 할 때와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들키느냐 들키지 않느냐. 죽 느냐 살아남느냐. 언제나 극단적인 상황이었다. 지금과 크게 다를바가 없는 나날이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어떻게 해왔지? 어떻게 이겨왔던가? ' 침착해라. ' 그래. 바로 그거였다. 침착해지는 것. 냉정해지는 것. 싸움을 하든 뭐를 하든 머리가 차갑게 식은 쪽이 유리한 거다. 냉정하게 주위를 살피는 쪽이 이기는 거야! 적어도 나는 그러해왔다. 그렇게 위기를 넘겨왔다. ' 적어도 나, 정진우는……! ' 그러자 예의 익숙한 감각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주위가 느려지는 이 느낌. 앞이 밝아지고 뒤가 어두워지는 이 기묘한 풍경. 어느새 시끄럽던 주위가 조 용해지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동요했던 자신이 거짓말인 것처럼 차분해진다. ' 좋아. ' 진우는 뒤에서 다시 승용차가 돌진해오자, 그 헤드라이트 빛만으로 방향을 파악해서 몸을 피해냈다. 뒤이어 사이드 미러로 그를 가리키는 토미건의 총 구가 보여왔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며 되레 승용차의 정면쪽 으로 오토바이를 몰아 총구의 사각에서 몸을 피해냈다. 마치 등 뒤에 눈이라 도 달린듯한 주행법이었다. 그 모습에 뒤를 쫓던 케이시 일행은 자신들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 이 도로를 계속 타고 가면 브루클린교 쪽이야. ' 진우는 자신의 진로를 확인하며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무의식중에 노인과 의 접선지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게 몸에 배였다고 하는 걸 까? 어쨌든 그 생각 없이 한 행동이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 분명 이 시간대라면……. ' 진우는 위기를 헤쳐나갈 한가닥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대 로 라면 분명 이 시간대에는 '그것'이 브루클린교를 지나갈 터였다. ' 어디냐? 이미 지나간 건 아니겠지? ' 진우는 계속되는 케이시 일행의 공격을 피해내며 초조한 눈으로 그것을 찾았 다. 어디냐? 어디 있어? ' ……찾았다! ' 대형 화물을 수송하는 세미 트레일러(semi-trailer). 그 트레일러가 전방의 교차로에서 막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브루클린교를 지나기 전이었나 보다. 트레일러는 브루클린구(區) 남부의 해군 공장으로 자재를 운반하는 과적 차 량이었다. 이런 차량들은 축당 무게가 5톤이 넘기에 다리를 지나려면 여러가 지 절차를 거쳐야만 했는데, 그 때문에 이런 야간 시간대를 틈타 대로를 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우는 매번 브루클린교를 이용하면서 이 트레일러의 시간대를 파악해 두고 있었다. 부아아아앙 진우는 속력을 높여 트레일러를 향해 돌진했다. 교차로의 붉은 신호등이 켜 졌지만 그는 깨끗하게 무시해버렸다. 덕분에 뒤를 쫓아오던 케이시 일행은 울 며겨자 먹기로 그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저 꼬마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 뭘 하려는 거야? " 케이시는 불안한 심정으로 진우의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이, 이대로 계속 가다간 트레일러에 부딪힐텐데……? ' ……설마! ' 진우의 의도를 파악한 케이시는 다급히 부하에게 소리지르려고 했다. 이대로 녀석을 따라가서는 안돼! 하지만 그렇게 제지하기에는 이미 그들의 차가 너무 진우의 오토바이에 붙어 있었다. " Hasta La Vista, Baby! " 진우는 케이시 일행의 명복을 빌어주며 최대한 몸을 숙인채 드리프트를 했다. 그러자 진우의 오토바이는 거의 지면에 눕다시피 하여 끌려나갔고, 아슬아슬하 게 트레일러의 밑을 통과해나갔다. 물론 그 뒤를 따르던 케이시 일행은 당연히 그런 곡예를 부릴 수 없었다. 콰아아아앙― 뒤의 두 대는 어떻게나마 사고를 피할 수 있었지만, 케이시 일행을 태운 차와 또 한대는 트레일러에 본넷트가 박살난채 허공을 날았다. 트레일러는 그 충격 으로 차도를 벗어나 인도를 들이받았고 뒤따르던 승용차들도 잇다른 연쇄 충 돌을 일으킨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하이웨이였다. " 케, 케이시! " 무사했던 부하들은 차에서 내려 서둘러 전복된 케이시의 자동차로 달려갔다. 케이시 일행을 태운 차는 뒤집어진 상태에서 한참을 가다가 가로등에 부딪혀 서야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부하들은 피투성이가 된 케이시를 차 안에서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 커, 커어― " 케이시는 제대로 안전벨트도 매고 있지 않았기에, 충돌시 장이라도 터졌는지 배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그나마 에어백이 터지는 운전석 뒷 자리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보조석에 있던 녀석은 앞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 다. " 괜찮아요, 케이시? " " 다, 다른 녀석들부터 꺼내……. 빨리……! 병원에도, 연락……하고. " 케이시는 쥐어짜는 목소리로 간신히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피로 물든 눈동 자로 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멍한 정신 속에서도 실패했다는 사실 만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 크으……. 이게 대체 무슨 꼴이지? 그깟 애송이 하나 때문에……. '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포자기 했기 때문일까. 자꾸만 눈앞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추적은 무리였다. 아무리 보스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한들 이 이상 은 그도 부하들도 무리다. 무리. " 케이시! " 그때 차안을 뒤지던 부하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케이시는 고통을 참으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 ……뭐야? " "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 그러니까…… 뭐가? " 레비 말이에요! 레비! 동승했던 것 아니었어요? 그 녀석, 차 안에 없다고 요! " 부르르르릉 진우가 오토바이를 멈춘 것은 브루클린교 중반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평소 일을 끝내면 언제나 노인과 접선할 수 있었던 장소. 하지만 오늘의 브 루클린교에서는 노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맨해튼 섬과 브루클린 을 왕복하는 차들이 띄엄 띄엄 보여올 뿐. 노인이 몰고 다니던 허름한 트럭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진우는 앞에서 노인과 헤어질 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도움은 바라지 마라. 네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난 주저없이 몸을 숨길 거야. ' 그 영감…….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어차피 서로가 합의하고 있던 사항이었다. 굳이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될 내 용이었어. 지금 생각해보니 어색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때 진우가 불쾌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은 노인의 낯설은 태도에 경각심을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 르겠다. ' 뭔가 알고 있었던게 분명해, 그 영감탱이. ' 분명 하울링 녀석들이 날 찾아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 때 그 런 말을! 거기까지 생각하자 진우는 왠지 모든게 다 허탈해져버렸다. 노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와 자신은 애당초 서로 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이용했던 사이였다. 노인은 진우를 밑져야 본전으로 써먹었던 셈이고, 진우는 그것을 알고서도 노인에게 빌붙어왔다. 노인은 오직 자신의 안목만을 믿었고, 진우 역시 자신 의 실력만을 믿었다. 신뢰가 없는 관계. 그 관계에 이런 결말이 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 다. ' 단지 그 결말이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 진우는 피식 웃으며 쓰고 있던 헬맷을 벗어던졌다. 앞으로 이런 헬맷을 쓰 고 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한밤에 누군가의 물건을 훔치려고 돌아다 닐 일도 없을 거야. 그렇게 되뇌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 속이 후련해지리 라 생각했건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엉망으로 꼬여버린 자신의 모습 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올 뿐이다.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 막막함이라니……. " 아아― 모르겠다! 젠장! " 진우는 있는 힘껏 이스트 강을 향해 소리질렀다. 밤 바람에 실린 그의 목소 리가 에코처럼 울려퍼졌지만 곧 어둠 속에 묻혀버린다. 진우는 그런 어둠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문득 찾아드는 한기에 몸이 떨렸다. [헉. 헉. 헉. 헉…….]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옷깃을 여미던 진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 희미하게나 마 누군가의 헐떡임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다리를 지나는 차들만이 있을 뿐. 헐떡임을 들려줄 사람도 생물도, 아무 것도 없었다. 환청이었던 걸까? [헉! 헉! 헉! 헉!] 그러나 이번에는 좀 더 뚜렷한 헐떡임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앞의 소리보 다 한층 커진 채. ' 가까워지고 있어! ' 진우는 불길함을 느끼며 재빨리 세워둔 오토바이를 향해 뛰어갔다. 귓가로는 여전히 그 기분나쁜 헐떡임이 계속대고 있었다. 이렇게 듣고 있자니 이건 사 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짐승, 그것도 육식 동물이나 낼 법한 그런……. 휙 그때 진우의 머리 위로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떨어졌다. 현수교의 강철선을 타고오던 그림자가 비호처럼 진우를 향해 달려든 것이었다. 스컹― 진우의 몸이 위기를 감지했던 것일까. 막 오토바이에 다가가려던 그는 갑자 기 무릎에서 힘이 빠져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잠깐의 틈 사이!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거대한 갈고리가 진우의 앞을 스 쳐 지나갔다. 아니, 갈고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무언가에 의해 그의 앞머리카락이 잘려나간다. " ……. "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다만 진우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앞에서 웅크렸던 몸을 펴는 거대한 덩치 의 짐승이었다. 갈색의 털. 타오르는 녹색 안광. 터질듯한 근육. 그리고 예의 헐떡임이 새어나오는 날카로운 이빨들. 그 모든 것이 다, " 아, 아아……. " 그 모든 것이 다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져서, 생리적으로 견딜 수 없이 무서 워서 진우는 신음을 흘리며 뒤걸음질 쳐야 했다. 당장이라도 이 눈앞의 존재 에게서 떨어지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 뭐, 뭐야……? 뭐냐고 이건? " 진우는 필사적으로 공포를 억누르며 소리쳤다. " 대체 뭐냔 말이야! " 우오오오오오오―! 그의 외침에 대답한 것은 거센 늑대의 포효소리였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크르르르.] 그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사자 같은 늑대, 라고 할 수 있었다. 2미터를 넘어 서는 덩치에 총검(bayonet)을 연상시키는 발톱. 쇠창살같은 이빨. 물론 이 정도였다면 어느 동물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맹수 쯤으로 치부했 을지도 모른다. 위험하기는 매 한가지겠지만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진우가 진짜 기겁해야 했던 이유. 그것은, ' 서 있어……. ' 이 짐승이 인간과 같은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늑대……인간? " 영화로 본적이 있는 것 같다. 울프 맨이라는 알기 쉬운 타이틀의 영화. 조잡 한 분장에 지루하기 짝이 없던 연출. 진우는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설마 이 녀석이 지금 그거라는 거야? 퍽 그의 웃음은 옆구리에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과 함께 도로 들어가버렸다. 괴 물의 손톱이 살짝 스친 것만으로도 레이싱 슈트가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나 갔던 것이다. 순식간에 피로 물드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진우는 뒤늦게 비명을 내질렀다. 아프다. 뜨겁다. 옆구리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아! [크르르르.] 그제야 현실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영화 따위가 아니다. 이건 현실이야. 눈 앞의 괴물은 진짜라고! 크왕― 피해야해! 그런 생각과 달리 진우의 몸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괴물의 포 효 소리만으로도 발이 얼어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진우는 재차 가슴과 허벅지 를 괴물의 손톱에 노출시켰다. 손톱이 지나간 자리로는 어김없이 피 보라가 일 어난다. " 아아, 아아아, " 마치 심장이 터질것처럼 뛰며 호흡을 방해한다. 귓가가 멍해지며 눈앞이 아 늑해졌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확연히 느껴지는 고통. 그리고 공포. 진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떠는 일 밖에 없었다. " 아아아악―! " 괴물의 손톱이 이번에는 진우의 오른쪽 어깨를 찢어발겼다. 강철같은 칼날이 피부를 꿰뚫고 그 안의 근육을 끊어버린다. 진우는 계속대는 출혈에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괴물에게 대항해야 겠다는 생각은 할 수 조차 없었다. 필사적으로 괴물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노력 했다. 볼썽 사납게 땅바닥을 기면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도 악착같이 살아 남으려고 노력했다. 그 행동에서는 이미 그의 의사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 무서워. 무서워! ' 괴물은 먹이를 가지고 장난치는 조련사처럼 진우를 농락했다. 자신에게서 조 금이라도 멀어지려는 그에게 간간히 손톱을 휘두르며 낮게 조소한다. 그 기분 나쁜 웃음 소리에 진우는 피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괴물 을 바라보았다. ' 죽는다. 죽을 거야. 이대로는 정말 죽어! ' 죽음 따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언젠가 죽으니까. 그게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죽으니까.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다. 대수롭지 않은 목숨, 이왕이면 선한 사마 리아원을 위해 쓰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총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갱들의 마약을 훔칠 수 있었다. 그건 진우가 겁이 없었기 때문에도 용감했기 때문에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할렘가에 버려졌을 때부터……줄곧 그렇게 생각해왔어. 줄곧, 줄곧……. ' 내 목숨은 가치가 없다고. 부모마저 저버린 목숨, 소중히 할 이유가 없다고. 그렇게 자포자기해왔다. 스스로를 내팽개쳐왔다. ' 하지만! '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무섭다. 너무나도 무서워. 이대로 저 괴물의 손에 죽는다는 것이, 저 날카로 운 손톱에 갈기 갈기 찢겨진다는 것이! 살고 싶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 왜? ' 의문이 들었다. 왜 집착하는가? 왜 안타까워 하는 거지? 뭘 그렇게 두려워하 는 거야? ' 이번에는 오래있다 갈거지? ' 문득 고아원의 시메온이 생각났다. 저번에 만났을 때 그 아이는 기대하는 눈 으로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 아가다 수녀님이 얼마나 네 걱정하는지 알아? ' 토마스. 사마리아원의 맏형인 그는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끝끝내 진우를 걱정 해주고 있었다. ' 주님께 몇번이고 네가 무사하기를! 네가 앞으로도 자기 자신을 잘 지켜나 갈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 드렸어! ' 아가다 수녀님……. 마지막에 울려버리고 말았지. 실망시켜드리고 말았어. 그 고마우신 분께 자 신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 도미니꼬. ' ' 도미니꼬. ' 고아원의 모두는 언제나 그를 반겨주었다. 진심으로 환영해주었다. 그 변함없는 모습들이 좋아서, 그 변함없는 미소들이 좋아서, 그래서 진우는 제 발로 뛰쳐나간 주제에도 매 번 고아원을 찾아갔다. 뻔뻔스럽게도 매주마다 그들을 만나러 가곤 했다. 뻔뻔스럽게도. 뻔뻔스럽게도. 누구보다 그들을 그리워했기에. 누구보다 그들을 좋아했기에. ' 죽으면, 죽으면……어떻게 될까? 여기서 죽어버리면……? ' 더 이상 볼 수 없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 진우 오빠! ' 내― 가족들을! [크륵?] 괴물은 진우가 도망치는 행동을 멈추자 의아해 했다. 이 당장에 죽을 것만 같던 인간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잔뜩 피냄새를 풍기면서도, 위태롭게 휘청거리면서도, 힘겹게 일어서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 살아서 돌아갈테다. 죽을 수는 없어. 이대로 죽어줄성 싶으냐. ' 진우는 언제 괴물의 손톱이 날아올지 모르건만 겁도 없이 그의 앞에 마주 섰 다. 그리고 괴물을 노려보았다. 몸의 떨림은 가라앉은지 오래였다. 두려움을 이겨낸 그의 전신에선 희미한 녹 색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범상치 않은 기운에 괴물은 낮게 목울림을 터뜨렸다. [크르르르!] ' 와라. 얼마든지 공격해봐! 얼마든지 물어뜯어봐! ' 더 이상 맞아주지는 않을테니까! " 죽일 수 있다면 어디 한번 죽여봐―! " 크왕― 진우와 괴물의 포효가 교차하며 그들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괴물은 이번 에야말로 눈앞의 인간을 죽여버리겠다는듯 전심전력을 다해 손톱을 휘둘렀다. 몸이 성할 때에도 공격을 피하지 못했던 진우였다.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라면 대번에 목이 날아갈게 분명하다! 투앙 그러나 괴물의 손톱이 자른 것은 현수교를 지탱시켜주던 강삭들이었다. 강철 선을 여러개 꼰 강삭을 대번에 자른 괴물의 손톱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대 단한 것이 공격을 피해낸 진우였다. 진우는 옆으로 한걸음 물러선 것만으로 완벽하게 손톱의 궤적에서 벗어난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움직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우연이었을까? [크아아아!] 괴물은 분노하며 재차 진우에게 손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진우는 이번에도 가볍게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공격을 피해냈다. 마치 처음부터 공격이 어디에 서 날아올지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 보인다. ' 진우는 낮게 읊조리며 계속해서 괴물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것은 결코 그의 몸이 빨라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우의 몸은 앞의 부상으로 인해 제 대로 걸을 수 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런 그가 괴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리라. 때때로 진우를 찾아오던 이상할 정도의 침착함. 그 침착함이 주위의 사물을 느리게 만들고 그에게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느려진 세계 속에서 진우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느려. 그렇게 느려터져서 누굴 죽이겠다는 거야. 그런 움직임으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 공기가 시멘트처럼 무거웠다. 이 정체(停滯)된 상태에서는 사물이 느려지는 것 뿐만 아니라 숨을 쉬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 다. 감각에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걸까? 진우는 이유모를 답답함을 느끼며 몸부림 쳤다. 이대로 괴물의 공격을 피해 내는 것은 쉬웠지만 그래서는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어떻게든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 내 주먹으로는 씨도 먹히지 않을게 분명해.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 정체에 익숙해진 그는 괴물의 팔이 움직이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리며 주 위를 살폈다. 녀석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뭔가를 찾아야 했다. 저 강철 같 은 근육을 꿰뚫고 그 안의 육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 좋아. ' 진우는 한가지 방법을 떠올리고 그 즉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정신 없이 손톱을 휘두르던 괴물은 갑자기 눈앞에서 진우가 사라지자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진우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괴물의 사각으로 돌 아나와 자신의 오토바이를 향해 달려갔을 뿐, 그 움직임이 너무나 신속하여 한순간 착시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크왕!] 괴물은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진우를 발견하고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진우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엑셀을 당긴 뒤였다. 그러자 강 렬한 엔진음이 울려퍼지며 한쌍의 헤드라이트 빛이 괴물의 시야를 멀게 한다. 부아아아앙 급가속한 오토바이는 앞바퀴를 들어올리며 괴물에게 돌진했다. 튕겨나가는 힘 을 이용한 윌리였다. 진우는 악에 받친 얼굴로 소리쳤다. " 200Kg이 넘는 투포환이다! 막을 수 있으면 어디 한번 막아봐! " [―!] 오토바이의 앞바퀴는 정확히 괴물의 앞가슴을 후려쳤다. 달리는 거리가 짧았 기에 최고 속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52마력 엔진을 풀로 돌린 몸통 박치기 였다. 가슴 뼈를 박살내기에는 충분한 힘이라고! " ……! " 그러나 상황은 진우의 예상을 빗나갔다. 오토바이의 돌진은 괴물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괴물은 가슴뼈가 부러지지도, 뒷걸음을 치지도 않 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 으앗! " 진우는 오토바이가 점점 허공으로 떠오르자 비명을 질렀다. 괴물은 오토바이 와 충돌하기 직전, 그 무지막지한 힘으로 차체를 붙잡아 세웠던 것이다. [크르르르르] 괴물은 오토바이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흉폭한 눈으로 진우를 올려다 보았 다. 이대로 다리 밑으로 던져버릴 셈인가? 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엑셀을 잡아당겼다. 제길! 놓으란 말이야, 괴물! 그 손 놓지 못해! [켕!] 그때 때마침 이스트강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진우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었다. 앞에서 괴물의 손톱에 잘려나간 브루클린교의 강삭이 바람에 실려 괴물 의 눈가를 후려쳤던 것이다. 그 바람에 오토바이를 붙잡던 괴물의 손이 미끄러졌고, 오토바이의 앞바퀴가 괴물의 어깨에 걸쳐졌다. " 지금이다! " 투카카카카칵 진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가속했다. 그러자 오토바이는 괴물의 어 깨를 바퀴로 긁어내리며 그대로 등을 타고 지면에 내려섰다. 어깨와 상반신이 피투성이가 된 괴물은 연신 비명을 지르며 손톱을 휘둘렀지만 이미 진우는 그 에게서 멀어진 뒤였다. 진우는 그대로 줄행랑을 쳐도 상관 없었지만 무슨 생각에선지 퀵 턴하여 다 시 괴물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클러치를 잡은 상태에서 스내칭을 주었다. 다시 윌리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 이번에도 막아보시지! " 진우는 그 말을 끝으로 클러치를 놓으며 엑셀을 당겼다. 그러자 오토바이는 튕겨나가는 것처럼 앞바퀴를 들며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무모함의 극치였다. 한번 실패한 기술이 두번이나 통할 거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끼이이이익 그러나 오토바이는 채 앞바퀴가 괴물에게 닿기도 전에 다시 지면에 내려섰다. 윌리는 페인트였다. 진우는 그대로 괴물의 목전에서 휠스핀을 넣으며 제자리 에서 360도로 회전했다. 그리고 뒷바퀴가 괴물에게 향하려는 찰나, 무게 중심 을 앞으로 하며 잭나이프를 시전했다. 그러자 급가속에, 원심력까지 실린 뒷 바퀴는 보기 좋게 괴물의 안면을 후려쳤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울리며 괴물은 보기 좋게 차도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물론 그런 무모한 기술을 쓴 탓에 오토바이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괴물의 두 개골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뒷 바퀴의 휠이 나가버린 것이다. 진우는 그대로 오토바이에서 튕겨나갔고, 주인을 잃은 오토바이도 지나친 원심력을 감당하 지 못하고 가드레일에 충돌했다. [크르르, 크아아아악!] 차도에 쓰러진 괴물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진우가 혼 신을 다한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던 모양이다. 괴물은 당장에라도 진우에게 달려들 것처럼 분노했는데, 그런 것치고서는 엉 뚱한 방향으로 두 팔을 내젓고만 있었다. 진우의 잭 나이프가 그의 숨통을 끊 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의 두 눈을 뭉개버렸던 것이다. 진우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피를 토하면서도, 그런 괴물의 모습에 미소를 지 었다. " 거기가……네, 지옥이다. " 꺼져라, 괴물―! 쾅 마치 천둥이 내리꽂히는 소리가 차도에서 터져나왔다. 막 브루클린에서 넘어 오던 대형 트럭이 미처 도로에서 서성거리던 괴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받았던 것이다. 애초부터 진우가 노렸던 바가 바로 이거였다. 괴물의 강철 같은 육체를 부서뜨릴 방법! 진우는 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을 정체 속에서 발견하고, 괴물을 차도에 밀어넣 었던 것이다. 끼이이이이익 트럭은 그대로 괴물을 으스러뜨리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리를 왕복하는 차 들이 적었기에 대형 사고는 면할 수 있었지만, 운전수가 정신을 잃었는지 트럭 은 아스팔트에 뒤집어지고 말았다. 트럭이 도로를 긁고 지나가자, 그 자리로 시뻘건 불꽃이 일어났다. " 끝났……겠지? " 진우는 그 사고의 현장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괴 물의 죽음에 긴장이라도 풀렸는지 잊고 있던 아픔이 몰려왔다. 그제야 진우는 자신의 몰골을 깨닫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입고 있던 레이싱 슈트는 넝마가 되어 있었고 오른쪽 어깨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오른손이 움직이지를 않더라니……. 진우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힘겹게 차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걷는 것만으로 도 신발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동맥이 끊어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출혈이 계속 되는 게 영 불안했다. ' 제길. 일단……운전수부터 구해내지 않으면. ' 진우는 혼미해진 정신으로도 애써 트럭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리 괴물을 쓰 러뜨리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애꿎은 사람을 말려들게 하고 말았다. 트럭의 연료 탱크에는 불이 붙기 전에 운전수를 구해내지 않으면……. [크르르르…….] 그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진우는 등골이 서 늘해져 그만 제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거짓말. 설마……. 어떻게 녀석이, " 앗! " 순간, 억센 짐승의 손아귀가 진우의 발목을 잡아챘다. 트럭에 부딪혀 즉사했 을 거라고 생각했던 괴물이 마치 악귀와도 같은 형상으로 그를 들어올렸던 것 이다! 퍽 진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괴물은 그를 아스팔트 위로 내동댕이쳤다. 그러 자 뼈가 깍여나가며 진우의 얼굴에서 피가 튀어오른다. 이마가 깨졌는지 피가 한움큼씩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는듯 재차 진우를 땅바닥에 휘둘렀다. " 으앗! 칵! 크억! 아악! " 한번씩 휘둘러질때마다 진우의 입에서는 비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신음이 터 져나왔다. 그와중에도 그는 목이 부러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몸을 웅크렸지만, 대신 머리를 보호하던 팔이 부서지고 노출된 갈비뼈가 모조리 박살났다. 폐에 부러진 갈비뼈라도 박혔는지 입에서 피거품이 뿜어져나온다. [크르르르.] 괴물은 진우가 다진 고기처럼 변하자 그제야 손속을 두고 그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진우의 코앞에 자신의 손톱을 가져갔다. 진우는 보기 흉하게 부어오른 얼굴로 힘 없이 괴물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여기까지인듯 했다. 간신히 의식은 놓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 이상 살아남을 방법이 보이지를 않았다. 예의 감각을 끌어올린다고한들 이런 몸으 로는 괴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제길. ' 진우의 눈가로 눈물이 맺혀올랐다. 이대로 끝인 건가, 나는? 결국 선한 사 마리아원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거야? 괴물은 핏줄이 선 눈으로 진우를 내려다보았다. 그 숨결이 거친 것이, 곧 보 게 될 진우의 피에 흥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괴물의 손톱은 천천히 진우의 목을 긋기 시작했다. 쉭 그때 괴물의 얼굴로 날카로운 실선이 그려졌다. 그 선은 단지 얼굴에서 그칠 뿐 아니라 정확히 괴물의 몸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진우는 괴물의 손톱 이 자신의 목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의아해졌다.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촤아아아아악― 다음 순간, 실선이 어긋나며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날카로 운 뭔가가 소리 없이 괴물을 이등분시켰던 것이다. 진우는 괴물의 피를 한데 뒤집어쓰며 그대로 지면에 거꾸러졌다. 유난히도 적막해지는 다리. 아무리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지만 이런 대형 사고 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그 흔한 클렉션 소리조차 들려 오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주위를 살펴볼 여력이 없었다. 그저 죽어가는 몸을 늘어뜨린채 힘 없이 두 눈만 감빡일 뿐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그에게서 멀어 지고 있었다. 점점, 점점……멀어져, 간다. " 아직 잠을 자기에는 이르지 않나. " 문득 낯설은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진우는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의 시야로 검은 신부복을 입은 한 은발의 남자 가 들어왔다. 뭐지, 이 녀석?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 내 부하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지. 아무래도 급조한 패밀리어(Familiar)다 보니 여러모로 문제가 많아서.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는 녀석들이지. 아마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자네를 죽여버렸을 거야. " 부하? 패밀리어라니? 진우는 영문을 몰라 힘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바닥에 널브러진 괴물 의 사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반토막이 난 괴물은 천천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 가고 있었다. 괴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 그것은 앞의 추격전에서 하울링의 차안에 타고 있 던 갱의 모습이었다. 진우는 몰랐지만, 괴물의 정체는 케이시의 옆자리를 지키 고 있던 레비였었다. " 역병은 퍼뜨리기에는 좋지만 제어하기가 힘들지. 순순히 잡혀줬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으련만. 역시 아가다 수녀에게 듣던대로군. 대단한 말썽꾸 러기야, 도미니꼬. " " ……! " 신부의 말을 듣고 있던 진우는 그의 입에서 낯익은 이름들이 튀어나오자 두눈 을 부릅 떴다. 아가다 수녀? 아가다 수녀라니! 거기다 저 자식, 내 본명을 알 고 있어? " 너……, 누구야? " 진우의 신음 섞인 질문에 신부는 조용한 미소로 답해보였다. 이 피비린내 나 는 장소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미소였다. 그렇기에 눈 앞의 신부에게서 현실감 이 느껴지지를 않았다. 신부는 천천히 품안에서 뭔가를 꺼내 진우의 코앞에 흔들어보였다. 그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하던 진우의 동공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 이런 건 좀 더 잘 보관해뒀어야지. 하다못해 빨리 처분을 해버리던가. " 하얀 가루가 든 비닐 봉지. 그것은 분명 진우가 아가다 수녀에게 들켜버린 소마 봉지였다. 어째서, 어째서 녀석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어째서? " 너……! " " 아가다 수녀가 걱정을 많이 하더군. 그 모습이 딱해 보여서 잠시 위로를 해드렸는데 이건 뜻 밖의 수확을 얻게 되었어. Where there is a will, t here is a way. 딱 그 말대로이지 않은가? " " 너, 너―! " 진우는 순간, 움직이는 왼손을 들어 신부의 멱살을 잡았다. 신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괴물을 상대할때도 보이지 않던 무시무시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 수녀님, 수녀님에게 손을 댄 것은 아니겠지? 선한 사마리아원에 손을 댄 것 은 아니겠지! " " ……아무렴 발령받은 본당에 피해를 입히겠는가. 이래 보여도 난 신부라네. 그런 짓은 하지 않으니 안심하도록. " 발령받은……본당? 신부라고? 진우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 자식,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거지? 지금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원에 부임한 신부님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 그러고 보니 분명 저번에 고아원을 찾아갔을때 새 신부님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우연이……. 녀석은 마약거래를 지시했던 범죄자라고! 갱들을 부리는 악당 중의 악당! 그 런 녀석이 신부라니? 그것도 선한 사마리아원의……, " 아윽! " 진우의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부가 자신의 멱살을 쥔 진우의 왼손을 그 대로 움켜잡은 것이다. 그러자 너무나 맥없이 진우의 손가락뼈, 손바닥뼈, 손 목뼈가 통째로 으스러졌다. 도저히 사람의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괴력이 었다. " 아아, 으으, 아아아악! " " 문제는 고아원의 사람들이 아니라 자네라네, 도미니꼬. 자네는 말이야 내 계획을 망쳐버리고 말았어. 내가 몇 년동안 공들여 세운 계획을 깡그리 망 쳐버렸어. " 신부는 너덜해진 진우의 왼손을 놓아주며 차분하게 말했다. " 그 때문에 난 지금 매우 화가 나있네. 대답 여하에 따라 자네를 죽여버릴 지도 몰라. " " 으으……. " 진우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신부를 노려보았다. 그 당돌한 모습에 신부는 소리 없이 미소했다. 어지간히도 겁 없는 꼬마로군. " 어디있나? 자네가 훔친 소마는? " 그 질문에 진우는 도리어 질문으로 답했다. " 대답을 하면……난, 살려주는 거냐? " 신부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멍한 얼굴로 진우를 응시하다가 곧 포복절도하기 시작했다. " 크, 크크, 크크크크큭! 프하하하하핫! " " 크! " 신부는 그대로 진우의 목을 붙잡고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 에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은발 사이로 드러난 한 쌍의 녹색 눈동자가 광기 를 드러낸다. 신부는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 주제 파악을 못하는군! 어차피 네 녀석은 여기서 조금만 힘을 줘도 죽여버 릴 수 있어. 협상을 할 가치도 없단 말이다! 짜증나게 굴지말고 어서 말해 라. 소마는 어·디·있·는·거·지? " " 아, 아아, 으아아아악! " 진우는 목을 조르는 힘이 한층 강해지자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다. 빌어먹 을 자식! 어차피 대답해도 죽일 거잖아! 진우는 발로 신부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악을 썼다. " 죽여! 개자식, 어디 한번 죽여봐! 절대로 말 안할테다! 너같은 놈에게는 죽어도 안 알려줘! " 신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예의 늑대 괴물처럼 오른손으로 거대한 강철 손톱을 뽑아냈다. 아마도 앞의 괴물을 이등분시킨 것이 저 손톱이었던 모양이 다. " 겁이 없는게 아니라 철이 없는거였군. 뭐, 일단 팔 한쪽부터 떼어내도록 할까. 사지가 다 떨어질 때쯤이면 싫어도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거야. " " 으윽! "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제길! 뭐, 이런 자식이 다 있는 거지? 사람 몸이 마네 킹도 아니고 사지를 잘라낸다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모두 말해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후회하려는 찰나, 제 3의 목소리가 진우의 귀에 들려왔다. ―말 한번 잘 하는군, 애송이. " ……뭐? " 지금 이 목소리는? 진우는 갑자기 들려온 환청에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중얼거렸다. 신부 는 그런 진우의 반응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 녀석, 자기 팔이 잘리려는 게 무 섭지도 않은 건가? " ……七星拳, " 그때 신부의 귀로도 진우가 듣던 환청이 울려퍼졌다. " 蓋山璧! " 퍼엉― 마치 거대한 쇠망치에 온몸이 산산조각나는듯한 충격! 신부는 자신의 가슴을 후려치는 그 뜻밖의 공격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뒤로 튕겨나가야 했다. 그 바람에 간신히 신부의 손에서 벗어난 진우는 목을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쿨럭! 쿨럭! " 진우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연신 기침을 토해냈다. 얼마나 신부의 악력이 강 했던지 목 언저리가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다. 조금만 더 그 상태로 있었더라 면 사지가 잘리기 전에 질식사 했을 것이다. " ……? " 그렇게 가슴을 가라앉히던 진우는 곧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음을 깨달 았다. 마치 중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검은 권복의 소년이었다. 진우는 소년의 검 은 폭포수와도 같은 긴 흑발에 넋을 빼앗겼다. 그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긴 머 리를 땋아내린 사람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소년은 진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를 돌아보며 가늘게 미소했다. " 재미있는 애송이로군. 설마 이런 곳에서 또 한 명을 발견할 줄이야. " " ……? " " 올해만 해도 벌써 두 명째로군. 뉴욕에 온 것도 헛 일이 아니었어. " 그 영문 모를 말에 진우는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 다 한발 앞서 신부쪽에서 소년에게 소리쳤다. " 네 녀석! 뭐하는 놈이냐! 왜 내 일을 방해하는 거지! " " 이래서 코쟁이들이란…….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엔 자신의 이름부터 밝히는 것도 모르는 거냐? " 소년은 불쾌하다는듯 투덜거리며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 내 이름은 브루스 류. " 브루스 류? " 네 놈 때문에 귀중한 휴가를 망친 관광객이다! " 그 말과 동시에 소년은 거세게 진각을 밟았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미연은 불이 꺼진 방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머무르는 호텔은 미드 타운에서도 50층이 넘는 초고층 건물이었기에 뉴욕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거대한 빌딩의 숲들이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도시를 밝혀주고 있다. 자정이 넘었건만 그 불빛은 사그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네온 사인에 비친 미연의 얼굴은 묘한 서글픈 빛을 띄고 있었다. " 미연아, 안자고 뭐하니? " 침대에 누워있던 어머니가 잠에서 깬 목소리로 물어왔다. 미연은 여전히 창 밖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답했다. " 그냥……. 잠이 안와서. " 어머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미연의 곁으로 다 가갔다. 그녀는 딸의 어깨를 감싸주며 조용히 말했다. " 내일 다시 한번 고아원에 가보자. 가서 여전히 그 아이가 없으면……. 그 러면 그때는 고아원의 모두와 함께 찾아보는 거야. 그래도 못 찾으면 경찰 서에 부탁해보고. " " ……. " " 어쩌면 벌써 돌아왔을지도 모르지. 아가다 수녀님도 그랬잖아? 진우와는 예전부터 자주 다퉈왔다고. 이번 가출도 그런 것일지 몰라. 그러니까, " " ……. "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렴, 미연아.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 " 미연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창밖의 야경 을 바라보았다. 저 어두운 도시 어딘가에 진우가 있을 터였다. 분명 저 어딘가 에……. 어딘가……. 미연은 참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 오빠……, 지금 어디 있어? ' 나 지금 뉴욕에 와 있어. 오빠와 같은 도시. 오빠를 만나러 왔단 말이야. 바보. 알고 있기는 한 거야? 응? 알고 있다면 제발 만나러 와줘. ' 제발. ' 제발……. 진우의 눈에 보였던 것은 거세게 발을 구르며 앞으로 쏘아져나가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자신을 브루스 류라고 밝힌 그는 한순간에 신부와의 거리를 좁 혀, 전신에 회오리를 휘감아 주먹을 내찌른 것이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일권(一拳)! 창룡출두(蒼龍出頭)! 퍼엉 주먹으로 때렸건만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랫배에 브루스의 주 먹을 격중당한 신부는 그대로 주먹이 그리는 궤도를 따라 줄 끊어진 인형처럼 허공을 날았다. 진우는 자신의 배 이상이 되는 거구를 날려버리는 소년의 모습에 아픔도 잊어 버리고 경악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七星拳 廉貞. " 브루스는 호흡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차분하게 뻗었던 주먹을 거둬들였 다. 그리고 10미터 가까이 날아간 신부를 향해 소리쳤다. " 엄살 피우지 마라. 죽지 않을 정도로 때렸으니 얼른 일어나! 어차피 패밀 리어까지 부리는 라이컨슬로프 아니냐? " " 크으, " 신부는 쓰러진 몸을 일으켜세우며 천천히 양 손의 크로우를 뽑아들었다. " 네 녀석……. 평범한 인간이 아니군. 성단 기사단의 이단 심문관이냐? " 신부는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잔뜩 경각심을 곤두세웠다. 브루스는 그의 말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는지 퉁명스럽게 답했다. " 성당 기사단에서 나온 건 맞지만 이단 심문관 따위는 아니다. " " 그럼, " 신부는 말을 잊지 못했다. 그의 앞에 있던 브루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 을 감춘 것이다. 하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림자에 녹아들듯 지면 을 달려 어느 샌가 신부의 앞으로 쇄도해오고 있었다. 신부는 반사적으로 손톱을 휘둘렀다. 너무 빨라! 투앙 신부의 크로우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브루스의 다리가 신부의 양손 을 지나 그의 턱을 올려찬 것이다. 지면 반력을 이용한 발경 중심의 칠성권 에서 유일하게 다리를 사용하는 기술인 승룡퇴(乘龍退)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승룡퇴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뇌졸중을 일으켜 의식 장애 와 운동마비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신부는 마치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마 비된 것처럼 더욱 광폭하게 손톱을 휘둘렀다. 촤자자자작 브루스를 놓친 신부의 손톱은 아스팔트를 굴착기로 가르듯 부수고 지나갔다. 그런 무시무시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조금도 신부에게서 거리를 벌리 지 않으며 더더욱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 이 거머리같은 자식이! " 신부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브루스가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 의 거리에서 화경(化經)을 펼쳐내자 제대로 손톱을 휘두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인간 나부랭이가! " 잔재주 피우지마랏! " 신부의 구두가 찢어지며 그 안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톱을 세울 수 있다면 발톱을 세울 수 있는 것도 당연한 이치. 신부는 자라난 발톱으 로 그대로 자신의 앞에 있는 브루스를 올려찼다. 이대로 반토막이나 나버려라! " ―! " 그러나 브루스는 이미 알고있었다는듯 오히려 신부의 발을 밟으며 그대로 신 부의 안면에 팔꿈치를 먹였다. 그리고 밑으로 떨어지면서 목과 가슴과 배에 여 섯번의 팔꿈치 공격을 펼쳤다. " 七星拳 連環七擊. " " 크아아아아악! " 단순한 팔꿈치 치기이건만 맞은 부위는 어김 없이 뼈가 부서졌다. 신부는 그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지만 브루스는 아직 놓아줄 생각이 없었는지 그 뒤를 따랐다. " 七星拳……, " 진각을 밟자 시멘트가 부서지며 지면 반력이 상승한다. 그 기운을 전사경으로 끌어모으자 브루스의 권복이 터질듯이 부풀어 오르며 검은 회오리를 만들어냈 다. 브루스는 그 경력을 그대로 자신의 오른 주먹에 집중시켰다. " 破軍! " 투아아아아앙 주먹이 만들어내는 나선 운동의 회전 앞에 모든 것이 바스러졌다. 신부의 육 체는 물론 그 사이를 꿰뚫는 대기 조차 이 경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린다. 신부의 두 팔이 간신히 브루스의 주먹을 가로막았지만, 막기가 무색하게 그 팔 은 폭죽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무거움의 진수, 중경(重經)의 위력이다! 털썩 거듭되는 공격에 신부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양팔을 잃고 가슴이 나선 모양으로 함몰된 것이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진우는 자신이 애를 먹은 상대를 저토록 간단하게 제압하는 브루스의 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이 녀석! 이 녀석이야말로 진짜 괴물이다! 위잉 위잉 위잉 위잉 그때 브루클린교의 저편에서 싸이렌 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진우가 힘겹 게 돌아보니 다리 양쪽에서 웬 경광등을 번쩍이는 패트롤 카들이 몰려오고 있 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브루스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 굼벵이같은 것들. 이제서야 미적 미적 나타나는군. " 성당 기사단의 빈센트 데이먼이 이끄는 제 10기사단이었다. 어쩐지 브루클린 교를 지나는 차들이 없다했더니 저들이 통행을 제한시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신부는 브루스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움찔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 네 녀석에게는 몇가지 물어볼 말들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해두마. 얌전히 따라와준다면 상처도 치료해주지. " 신부는 자신을 달래는 브루스를 피가 흐르는 얼굴로 노려보았다. " 투항하라는 거냐? 성당 기사단에게? " " 죽고 싶지 않다면. " " 크크, 크크크, 크크크크. " 신부는 자포자기한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리고 한 마디. " 웃기는 소리! " 파파파파팍 순간 신부의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일어나며 수십발의 은빛 침들을 내쏘았다. 그 갑작스러운 기습에 브루스는 몸을 피해내려고 했지만 자신의 뒤 에 진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이를 악물었다. 이놈! 처음부터 이것을 노렸군! " 쓸데 없는 짓을! " 브루스는 검은 폭풍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날아드는 침들을 벽경으로 상쇄시 켰다. 그리고 일부 회수한 침들을 다시 신부에게 날려보내려 했지만 침들은 어느샌가 힘을 잃어버리고 예의 머리카락으로 돌아갔다. 괴상한 술수로군! " 아악! " 그때 브루스의 뒤에서 소년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브루스가 침들을 방어 하는 사이에 신부가 비호처럼 몸을 날려 그의 뒤에 있던 진우를 머리카락으로 잡아챈 것이다. 신부가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고 방심했던게 화근이었다. 브루스는 뜻밖의 허 를 찔리자 노기가 서린 표정으로 신부를 노려보았다. " 뭐하는 거냐, 지금? 인질극이라도 벌이겠다는 거냐? " " 다가오지마. " 신부는 식은 땀을 흘리며 재빨리 다리의 인도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강 을 등진채, 머리카락에 쥐고 있던 진우를 자신의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 모습 에 브루스는 코웃음을 쳤다. " 어디 멋대로 해보시지. 인질을 죽이는 순간, 네 녀석도 나에게 죽는다. " " 다가오지말랬지! " 브루스가 개의치 않고 다가오려고 하자, 신부는 버럭 소리지르며 진우를 쥔 머리카락에 힘을 주었다. " 끄아아아아악! " 진우는 몸을 쥐어짜이는 고통에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 모습에 브 루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결국 발걸음을 멈췄다. 신부는 반신반의하던 인질극 이 먹혀들자 속으로 쾌지를 불렀다. 설마 성당 기사단의 이단 심문관이 인질에 구애될 줄이야! " 크크크큭! 그래. 그래야지. 이 꼬마의 머리가 부서지는게 보고 싶지 않다면 그 자리에서 꼼짝말고 있어라. 절대로 다가오지마. " 신부는 천천히 다리의 난관에 올라섰다. 이대로 이스트 강에 뛰어내릴 셈이었 다. 보통 사람이라면 브루클린교의 높이에서 떨어지면 십중팔구 죽겠지만 그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다가가지만 않으면 되는 거냐? " 그때 불쑥 브루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 난데없는 질문에 신부는 영문을 몰라 물었다. " 뭐? " " 그래. 다가가지만 않으면 되나 보군. " 그 말을 끝으로 브루스는 기수식을 취하며 진각을 밟기 시작했다. 어이! 어이! 뭘 혼자서 납득하고 넘어가는 거야! " 七星拳 巨文. " 브루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천천히 주먹을 내 찔렀다. 그 주먹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진각과 전사경으로 끌어올린 경력의 진 수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상대에게 맞추지 못하면 무용지물. 닿지도 않는 거 리에서 주먹을 휘둘러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쿵 ……아니. 없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신부는 배에 무형의 기운을 얻어맞으며 허리가 분질러졌다. 브루스는 내부의 진기를 뿜어내 외부의 대기를 진동시켜 상대를 격상시키는 격공장(隔 空掌)을 사용했던 것이다. 주심(主心)을 정통으로 관통하는 그 공격에 신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그 덕분에 머리카락에서 힘이 풀려나가자 진우는 간신 히 다리 안 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풍덩 뒤늦게 희미한 물소리가 강 쪽에서 울려퍼졌다. 진우를 놓친 신부가 그대로 다리 위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진우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채 힘 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전신에 젖어든 피 의 감촉도, 부러진 뼈의 고통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무감각함이 오히려 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고 있었다. 죽는다. 이대로 의식을 잃었다간 죽을 거야. 정말 죽어……. " 어이, 애송아. 살아있는 거냐? " 마치 안부를 묻는양 태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런 브루스의 물음에 진 우는 기가 막혀 입을 뻐끔거렸다. 보면 모르겠냐! ' 대답할 힘 따위! 남아있을 리가……, ' 없……잖아. 진우는 결국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짙은 어둠 속. 그 사이를 진우는 유령처럼 거닐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는 수 많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도움은 바라지 마라. 네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난 주저 없이 몸을 숨길 거야. ' 언제나 벅찬 일만 골라 떠넘겼던 커넥션 노인. ' 어디있나? 자네가 훔친 소마는? ' 겉모습과 달리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던 괴물 신부. ' 재미있는 애송이로군. ' 그리고 그 신부보다 더한 괴물인 중국인 꼬마. 진우는 그제야 앞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하울링 녀석들에게 쫓 겨 간신히 브루클린교로 몸을 피했건만 그때부터 뭔가 말도 안되는 일에 휘말 려버렸지. 늑대 인간에게 죽을 뻔하지를 않나. 갑자기 은발의 신부와 쿵푸 소년이 등장 하지를 않나. 개연성도 없고 뒤죽박죽인 것이 한편의 엉터리 꿈이라도 꾼 것 같다. ' 어쩌면 정말 꿈을 꾼 것일지도. ' 사실 자신은 선한 사마리아원의 방에서 기분좋게 잠이 들었던게 아닐까? 소 마를 훔쳤던 것도, 그 때문에 갱들에게 쫓겼던 것도 사실은 모두 꿈이었던 거 야! ' 그래. 꿈이 분명해. 꿈. ' 진우는 그렇게 납득하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그의 코앞으로 낯익 은 그림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 마약 판 돈으로 동생들에게 선물을 사주면 누가 좋아할 줄 알아? ' 수녀님! 진우는 화를 내는 아가다 수녀가 보이자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 누가 기뻐할 줄 아니? 아무도 없어! 이 선한 사마리아원에는 네가 그런 짓 을 해서 번 돈으로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 계속대는 아가다 수녀의 호통. 그 호통에 진우는 자신의 안이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꿈이라니……. 멍청한 생각도 정도껏 해야지. 단지 꿈이라고 믿고 싶 었을 뿐이잖아? ' 제발 잔소리는 그만해! 날 걱정하는 척도 하지마! 어차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꼬마였잖아? 갈곳 없어 굶어죽으려던 걸 데려와준 거잖아? ' 아니야! 아니야! 이런 건 내 진심이 아니야! 이런 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 이 아니었어! 진우는 과거의 자신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며 저항했지만 아무런 소 용도 없었다. 목소리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더 이상 신세지기 싫었어! 고아원 사정 어려운 것도 잘 알고 있고,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날 데려와 준 건 고맙게 생각해! ' 그만둬! ' 어차피 남이었잖아? 그러니 내가 마약을 팔든 사람을 찌르든 상관하지마! 쓸데없이 간섭하면 괜한 불똥이 튈 테니까! '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거야? 제발 그만둬! ' 나도 더 이상 이런 후줄근한 고아원 따위 찾아오지 않겠어! '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진우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외침은 한자 틀림 없이 똑같은 내용을 반 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과거의 외침에 아가다 수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 도미니꼬! ' 그녀뿐만이 아니다. 시메온도. 프란체스카도. 고아원 아이들의 표정까지 슬 픔으로 물들어갔다. 진우는 끊임 없이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그의 외침은 그 들에게 닿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그들과의 거리가 멀어지기만 했다. ' 기다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나쁜 놈이니까! 모두 내 잘못이니까! 그러 니까 날 버리지마! 제발 날 떠나지마! ' 진우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한심할정 도로 느렸다. 예의 정체 현상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번 정체는 평소와는 반대로 주위의 모든 것들이 진우보다 빨라지는 역 정체였다. 진우는 숨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점점 시간에서 고립되어갔다. ' 크크크크. ' 그때 아가다 수녀와 아이들이 멀어지는 방향에서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그 웃음 소리에 진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둠 저편에서 예의 신부가 날카로운 손톱을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선한 사 마리아원의 모두는 아무 것도 모른채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 안돼! 그쪽으로 가면 안돼! 돌아와! ' 진우는 이를 악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자 전신이 부서지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진우는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 으며 한발, 또 한발을 계속해서 내딛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점점 원래의 속 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시간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가속해 나간다. ' 수녀님! 얘들아! ' 진우는 가까워지는 모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절대로 저런 신부 녀석에게 가족을 빼앗길 순 없었다! 내가 지켜낼 테다! 내가! 여지껏 폐만 끼쳐왔던 자 신이지만, 걱정만 끼쳐왔던 자신이지만! ' 내가 반드시……! ' 그러나 진우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속을 이겨내지 못한 그의 몸이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가루로 변해갔 던 것이다! " 으아아아앗―! " 진우는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떴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몸을 더듬어보았다. 있다. 존재하고 있다. 가루로 변하지 않았어. 꿈이다. 가루로 변했던건 꿈이 었던 거야. 그렇게 몇번이고 확인한 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 를 둘러보았다. " ……여기는? " 창백한 조명빛이 비춰진 간이 침대와 의료기구들. 앰뷸런스 안이었다. 그러고 보니 피투성이였던 그의 몸도 어느새인가 깨끗하 게 붕대로 감겨 있었다. 누군가가 911에 연락한 건가? " 이제야 깨어났군. " " ……! " 그때 진우의 뒤에서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우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의 중국인 소년이 유유자적하게 곰방대를 피워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 넌……. " " 포션으로 외상은 치료되었지만 수혈량은 아직 부족할 거다. 괜히 비실거리 지 말고 자리에 누워 있어라. " 소년, 브루스의 말에 진우는 일으키려던 몸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덜떠름 하게 손으로 브루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 상처는……네가 치료해준 거야? " 쾅― 브루스는 냅다 진우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 갑작스러운 일격에 진우는 머 리를 감싸며 신음했다. " 버르장머리 없이 어디서 삿대질이냐? 앞으로 이 몸을 부를 때는 브루스 사 부님이라고 불러라. " " ……엥? " 브루스의 어이 없는 요구에 진우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사부님이라고 부 르라니…….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야? 진우는 브루스의 고압적인 태도 보다 도 그 진의가 더 궁금했다. " 무슨 쿵푸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사부는 무슨 놈의 사부? " 쾅― 진우의 빈정거림에 브루스는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번 일격 은 앞의 것보다 한층 더 아팠기에 진우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 이 꼬마가 보자 보자하니까! " 휙 그러나 그의 주먹은 브루스에게 닿지 않았다. 브루스는 물고 있던 곰방대로 가볍게 진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브루스는 재차 곰 방대로 진우의 손목과 허벅지를 두들긴 다음, 그의 발목을 곰방대로 걷어올 렸다. " 헉! " 일순간 앰뷸런스의 배경이 위 아래로 뒤집힌다. 진우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 지도 깨닫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아 간이 침대에 다시 주저앉았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우는 그제야 눈 앞의 중국인이 그 괴물같은 신부를 물리친 장본인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 한번만 더 버릇 없이 굴면 상처가 벌어지든 피가 모자라든 개의치 않고 정신 개조부터 시켜주마. 알겠냐, 애송아? " " 그, 그러니까 내가 왜 당신을……. " " ……. " " ……아, 알았어요. 사부라고 부르면 되잖아요. " 진우는 브루스의 살기 어린 눈빛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영문도 모르고 이게 뭐하는 짓이람……. 일단 물어볼 것은 물어봐야 했기에 진우는 조심스레 브루스를 불렀다. " 저기……. 사부. " " 왜, 애송아? " 누구는 사부고 누구는 애송이야? 진우는 내심 불만이었지만 애써 표내지 않 으며 말을 이었다. " 아까 그거……말이에요. 그 이상한 괴물에다가, 신부에다가 또……. " 진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마터면 그 뒤로 브루스의 이름까지 언급할 뻔 했던 것이다. " 또 뭐? " " 아, 아뇨. 어쨌든 그것들이 다 뭐였죠? 거기다 왜 그런 일들이 나에게, " " 그건 당신이 그들의 마약을 훔쳤기 때문입니다, 도미니꼬. " 진우의 질문에 답한 것은 브루스가 아니었다. 앰뷸런스의 열려진 뒷문으로 들어오던 한 남자였다. 진우는 그가 자신의 세례명을 알고 있자 인상을 찡그 렸다. " 당신은……. " " 당신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나름대로 뒷조사를 해보았습니다. 다섯 살 때 할렘가에 버려져 있던 것을 선한 사마리아원에서 거둬들였더군요. 본 명은 정진우.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 한국인. " 진우는 자신의 과거를 빈센트가 들춰내자 주먹을 움켜쥐었다. " 뉴욕 맨해튼에서 소매치기를 하던 중 어느 날부턴가 마약을 날치기하는 스냅쳐로 전직, 줄곧 중소 갱들의 마약을 날치기해옴. 뒷세계에서는 나이 트 라이더라고 불림. 뭐……. 이 정도군요. 뉴욕 경찰의 리스트에도 이름 이 오르지 않아 조회를 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꽤 솜씨가 좋았던 모양이에요. " " 날 어떻게 할 셈이지! 경찰에 넘길 셈이야? " 진우는 긴장하며 빈센트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에게 빈센트는 미소로 답했다. " 그럴리가요. 당신은 우리에게 있어서 귀중한 단서입니다. 거칠게 대할 이 유는 없지요. " " 귀중한 단서? " " 소마의 루트 말입니다. 어린 당신이 그동안 훔쳐온 마약을 커넥션의 도움 없이는 처분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신의 중개인이 누구입니까? " 진우는 그제야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 브루스라고 했던가? 이 중국인과 저 외알 안경 남자는 뉴욕 경찰은 아냐. 하지만 공권력은 사용할 수 있는 것 같고……. ' 진우는 엠뷸런스 밖에서 늑대 괴물의 시신과 파손된 도로를 수습하는 일련 의 무리들을 겹눈질했다. 그 중에는 경찰들도 끼어있었는데, 거기다 이런 앰 뷸런스까지 불러들인 것으로 보아 범죄 집단과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 다. ' 그럼 FBI쪽인가? 아니면 DEA(마약 수사)? ' 그렇게 생각하기엔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 괴 물들은 뭐란 말인가? 마약 수사하는데 그런 괴물들까지 상대해야 하나? 그것 도 저런 쿵푸 괴인까지 데리고서? ' 차라리 엑스 파일이라고 하는 쪽이 더 그럴싸하겠다. ' 어쨌든 계속 생각해본다고 해서 답이 나올리 없다. 진우는 대답을 재촉하 는 빈센트의 눈빛에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나도 잘은 몰라. 소매치기를 하던 중 만난 노인이었는데 자기에 대한 사 항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어. 언제나 불현듯 연락해서 일을 떠맡기기 만 할 뿐이었고. " " 사실입니까? " " 숨길 이유가 뭐가 있어? 그런 능구렁이 영감, 감싸줄 정도의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잡힐 것을 염두해두고 있었을걸? " " 하아. 역시나. " 빈센트는 실망한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브루스를 돌 아보았다. " ……역시 그 신부 쪽을 잡았어야 했습니다. 브루스 님이라면 충분히 포획 하실 수 있었잖습니까? " " 그랬다면 이 애송이가 죽었겠지. " 브루스는 내 알 바 아니라는듯 진우를 턱으로 가리키며 곰방대를 물었다. 그 무책임한 태도에 빈센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낙담한 모습 에 진우는 괜히 가슴이 찔렸다. 쳇. 누가 나같은 녀석 구해주랬나……. ' 아, 잠깐. ' 그때 뭔가가 떠오른 진우는 빈센트에게 물었다. " 저기. 당신들이 찾는 마약, 소마라는 거지? 내가 며칠전에 훔친? " " ……예. 그렇습니다만? " " 노인에 대한 것은 모르지만, 그래도 소마 건 의뢰주는 누군지 알고 있어. " " ……! " 빈센트의 외알 안경이 빛을 발했다. " 노인이 그랬어. 소마를 빼앗아달라고 한건 갬비노 패밀리의 릿조 고티라 고. " " 릿조 고티! 그는 하울링과 거래를 했던 당사자가 아닙니까! 그런 그가 왜? " 빈센트는 뜻밖의 인물이 물망에 오르자 의아해했지만, 브루스는 감 잡았다는 듯 미소했다. " 그런 갱들에게는 돈을 주는 것조차 아까웠던 거겠지. 생각해보면 그리 뜻 밖의 일도 아니야. 욕심 많은 녀석들이 생각하는건 다 거기서 거기거든. " 어쨌든 소마는 릿조 고티가 가지고 있단 건가! 결론이 나자 빈센트는 재빨리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 지금부터 곧바로 소마의 회수에 들어가겠습니다. 릿조 고티의 저택과 맨해 튼의 사업체부터 뒤져보도록 하죠. 브루스 님도 저희와 동행해 주시기 바 랍니다. " " ……실컷 부려먹는군. " " 요 이틀간의 가이드 비라고 생각해주시길. " 브루스의 투덜거림에 빈센트는 능숙하게 대꾸하며 앰뷸런스에서 내렸다. 브 루스도 막 그를 따라 내리려는 찰나, 진우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 자, 잠깐만요! 제 질문에도 답해주세요! 절 습격했던 녀석들은 뭐였죠? 또 그 괴물들은 뭐였던 거에요! " " 왜? 네 놈이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 브루스가 뚱한 표정으로 되묻자 진우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 그 신부 녀석이 제 고아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제 세례명도, 아가다 수녀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어요! 또 그 자식은, " 분명 발령받은 본당이 어쩌느니 하는 말을……! 진우가 불안함에 말을 잇지 못하자 브루스와 빈센트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빈센트는 브루스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 신부의 이름은 라트 발렌시아. 세례명은 펠릭스. 선한 사마리아원에 부임 받은 신부님이 맞습니다. 아니, 모든게 들통난 이상 이제 신부도 뭣도 아 니겠군요. 그동안 저지른 죄가 있으니. " " 죄라니? " " 당신이 훔친 소마. 그 소마를 하울링을 이용해 커넥션에 퍼뜨린 이가 바 로 그이니까요. 라트 발렌시아. 파문당한 펠릭스 신부가 이 모든 일의 주 범이란 말입니다. " " ……! " 진우는 그제야 정황을 깨닫고 할 말을 잊었다. 우연이 아니었어. 녀석이 자신을 발견해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거야! 그 렇다면……. " 녀석은! 그 신부는 어떻게 된 거야? 죽었어? 죽은 거야? " " 다리 밑으로 떨어졌습니다만…….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며 칠 후, 이스트 강 어딘가에서 떠오르겠지요. " " 살아있을 가능성은! 녀석이 살아있으면 어떡하려고! " 계속대는 진우의 물음에 빈센트는 되레 브루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 죽은 것……확실하겠죠? " " 녀석에게 플라나리아 같은 재생력이 없다면. " 빈센트는 이제 되었냐는듯 진우를 돌아보았다. 플라나리아는 머리에 칼집을 내면 두개의 머리가 재생되고, 두 조각을 내면 두개의 개체로 분열되는 편형 동물이다. 이 정도의 무지막지한 재생력을 가진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 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생체공학이 발달한들 인공적으로 사람의 재생력을 그 만큼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 라이컨슬로프는 은에 의한 상처가 아니면 어떤 상처든 금방 회복된다고 하지. ' 어차피 구전 설화의 내용이니 신빙성은 없겠지만……. 브루스는 소리 없이 혀를 차며 빈센트의 안색을 살폈다. 시폰 뤼멘이 거두어 들인 솔로몬 프로젝트도 결국은 미완의 연구였다. 완벽한 불사의 인간이란 존 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브루스는 빈센트에게 지 시했다. " 애송이의 고아원에 크루세이더를 보내주도록해. " " 예? " 빈센트의 안색이 굳어졌다. 언제나 브루스에게는 한수 접고 들어간 그도 이 번 사안에 대해서만큼은 예민한 기색을 보였다. " 브루스 님. 아무리 브루스 님이라고 하시더라도 크루세이더의 병력을 임 무 외의 사항에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소마를 회수해야할 시기입니다. 쓸데 없는 일에 병력을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 그 말에 진우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뭐! 쓸데 없는 일이라고! " 쓸데없는 일이라……. " 그런 진우의 불만을 브루스가 대신 풀어주었다. " 내 제자의 신변을 보호해주는 것도 쓸데 없는 일이라는 거냐? 지금? " " ―! " 빈센트는 두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브루스와 진우를 번갈아보았다. 제자라고? " 저 소년이……브루스 님의 제자라는 말씀이십니까? " " 그렇다. " " 억지이십니다. 브루스 님이 저 아이와 만난 것은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았 잖습니까? " " 제자를 삼는데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안 그러냐, 애송아? " 브루스는 멍하니 있는 진우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진우는 선한 사마리 아원을 걱정하는 마음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 그, 그럼요! 사부님! 사람이 반하는데 시간이 중요한건 아니잖아요! " " ……. " 그 비유는 뭔가 아닌 것 같다만. 어쨌든 브루스와 진우가 사제 지간임을 주장하자 빈센트는 힘 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 알겠습니다. 그럼 제 휘하의 기사들을 다섯명, 선한 사마리아원으로 파견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브루스님의 제자 분이 안심하실 수 있다면 말이죠. 물론 소재지를 파악당한 시점에서 라트 발렌시아가 고아원에 돌아오는 바 보짓은 하지 않겠지만. " 그 말을 끝으로 빈센트는 찬바람이 나게 앰뷸런스에서 나가버렸다. 그 뒷모 습을 바라보며 진우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쳇. 고작 다섯명 파견해주는 주제에 더럽게 생색내는군. " 아, 저기. " 진우는 브루스도 나가려고 하자 그에게 말을 걸었다. " 고마워요. 저 때문에 괜히 동료분과……. " " 신경쓰지마라. 저녀석은 동료같은게 아니니까. " 브루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 시 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 그나저나 네놈, 스스로 인정했겠다? " " 예? " 뭘 인정해? " 날 사부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냐? " " 아! " 진우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니, 그건 상황이 급하다 보니! 그저! " 일이 끝나면 네놈을 데리러오지. 그때까지 병원에서 몸 조리나 잘 하고 있 어라. 네 놈을 치료한 건 임상 실험 중인 약품이지만 효과는 탁월하니까 다 음 날이면 움직이는데 지장은 없을 거다. " " 자, 잠깐만요! " 탕 그러나 브루스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듯 앰뷸런스의 뒷문을 닫아버렸다. 그 러자 진우를 태운 앰뷸런스는 브루클린교를 떠나기 시작했다. 진우는 브루스 를 부르던 자세 그대로에서 굳어버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빌어먹을. 뭔가 끔찍한 인간에게 코를 꿰여버린 느낌인데. ' 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간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당장에라도 선한 사 마리아원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아무리 그 외알 안경이 부하 들을 파견해준다고 한들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말도 안되는 광경들을 목격하고 말았으니……. ' 제길. 내 몸만 괜찮다면! ' 진우는 앞의 사투로 엉망이 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며 오른 주먹을 움켜쥐 었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테지만 도저히 이대로 드러누워있을 수만 은 없었다. 무엇보다 죽다 살아나서인지 선한 사마리아원의 모두가 너무나 보 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 어라? " 진우는 붕대에 감긴 오른 주먹을 몇번 쥐었다 펴보았다. 그러고 보니……오 른 팔이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오른쪽 어깨가 반쯤 잘려나가 제대로 움직이 지도 않았는데……. ' 오른팔 뿐만이 아니야. ' 부러진 갈비뼈도, 박살난 가슴뼈도! 부어올랐던 목도, 다리도! 자잘하게 나있 던 외상들까지! 모두, 모두 회복되어 있었다. 조금도 아프지가 않아. 완전히 나아있다고! " 이, 이러면 다음 날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잖아. " 진우는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회복력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조화인 지 몰라도 죽기 직전의 중상들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이건 신기하다 못해 요사스러울 정도다. ' 뭐……. 좋아. 상처가 다 나았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 진우는 몸의 붕대를 풀어내며 앰뷸런스의 운전석 쪽을 돌아보았다. " ……가볼까. 선한 사마리아원으로! "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맨해튼의 파크 애버뉴 변에 위치한 메트라이프 빌딩. 미국 부동산 거래 역사상 최고가인 이 건물은 연면적 26만 제곱 미터로 수 많은 TV 프로그램과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 세계 최대의 업무용 빌딩이었 다. 그리고 이 메트라이프 빌딩이 바로 릿조 고티의 사업체였다. 맨해튼의 모든 마약을 통괄하는 그는 이미 19억 5000만 달러짜리 빌딩도 가볍게 인수할 정도 로 막강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역시 뉴욕의 마약왕답군요. 맨해튼의 스카이 라인을 대표하는 이 곳을 거 처로 삼다니. 제왕이라도 될 셈인 걸까요? " 메트라이프 빌딩의 밖에서 크루세이더들을 잠복시킨 빈센트는 끝이 보이지 않는 빌딩의 높이에 감탄하며 말했다. 그 옆에 있던 브루스는 곰방대를 피워 물며 퉁명스레 답한다. " 제왕은 무슨. 그냥 높은 곳을 좋아하는 바보이겠지. " " 하하하. 릿조 고티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브루스 님 뿐일 겁니다. 이미 그는 뉴욕 경찰들도 건드리지 못하는 암흑가의 거물이에요.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군대라고 봐도 무방할 개인 사병들까지 거느리고 있다더군요. " " 개인 사병? 용병이라도 고용했다는 거냐? " " 예. 물론 갬비노 패밀리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겠지만, 문제는 그 런 병력의 소유를 조직에서도 허용할 정도로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겁 니다. 그야말로 암흑가에 떠오르는 새로운 프린스죠. 갬비노 패밀리의 차기 대부가 그라는 소문도 무리가 아닙니다. " 브루스는 빈센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성당 기사단의 크루세이더도 릿조 고티는 건드 릴 수 없다는 거냐? " " 건드릴 수는 있지만 저희 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크루세이더라 고 해봐야 저들과 크게 다를바가 없는 인간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잘 훈련 된 병사들일지라도 빗발치는 총알 앞에서는 장사가 없죠. " 빈센트는 외알 안경을 고쳐쓰며 본심을 드러냈다. " 그러니 브루스 님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앞에서 보여준 브루스 님의 무 용이라면 충분히 저들을 제압하고 남으시겠죠. " " 하! 이젠 아주 대놓고 부려먹으려고 하는군. " " 부하들을 아끼는 상관의 이기심이라고 해주십시오. " 브루스가 기가 막혀 하자 빈센트는 뻔뻔스럽게 미소로 일관했다. 지금 빈센 트는 브루스 혼자서 릿조 고티의 부하들을 상대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아무 리 부하들의 희생을 줄이고 싶었다고 한들 이런 요구는 어불성설이다. " 그러니 브루스님.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 " 부탁같은 소리하고 있네. Please가 들어간다고 해서 다 부탁인 줄 알아? " 브루스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천천히 메트라이프 빌딩으로 발걸음을 옮 겼다. 빈센트는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듯 미소를 지었다. 이 바르톨로메오의 대리인은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주제에 그 마음씀씀이가 너무나 이타적이었던 것이다. 앞의 브루클린교에서 한국인 꼬마를 살려준 것도 그렇고, 그 때문에 신부를 놓친 것도 그렇다. 의외로 인정이 많은 그라면 자신의 힘이 닿는 한도 내에서 희생을 줄이려고 할 것이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브루스 류, 당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만. ' " 어이, 너. " 그때 앞으로 나서던 브루스가 걸음을 멈추고 빈센트를 돌아보았다. 그 바람 에 빈센트는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가슴을 졸였다. " 예? 왜 그러십니까? " " ……. " 브루스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빈센트를 아무 말 없이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빈센트의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저 인간, 독심술이라던가 그런 희안한 재주까지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이걸로 가이드 비는 완전히 갚은 거다. "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독심술은 무슨 놈의 독심술. 빈센트는 쓴웃음 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확실히 접수했습니다. " 메트라이프 빌딩은 오전 4시가 넘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한층도 불이 꺼져있 지 않았다. 그 빌딩 한층 한층마다 릿조 고티의 사병들이 무장을 한채 대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상 대기 명령이 떨어진 것은 최근 그들의 보스 가 큰 건수를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릿조 고티는 예전부터 사업의 호기가 보 인다 싶으면 언제나 자신의 거처를 내버려두고 메트라이프 빌딩의 최정상에 서 사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다른 패밀리들의 습 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용의주도한 면이 어쩌면 그를 지금까지 승승 장구하게 만든 원인일런지도 모른다. " 제길. 다 좋기는 한데. 부대를 나와서까지 이런 야간 경비를 서는 건 정 말 최악이야. " 메트라이프 빌딩의 입구를 지키던 검은 정장의 경비원들 중 하나가 투덜거렸 다. 그 투덜거림에 옆의 경비원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 어쩔 도리가 있겠냐.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를 전쟁터보다 이런 빌딩 경비 일이 나아. 보수도 훨씬 세고 폼도 나고 말이야. " " 그래. 안전하기야 안전하지. 어느 간뎅이가 부은 놈이 갬비노 패밀리에게 덤벼들겠어? 사실 말이 5대 패밀리지 보난노도 제노베세도, 콜롬보와 루스 체세도 다 갬비노 패밀리의 눈치나 살피기 바쁘다고. " " 그럼 뭐가 불만이야? " "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한밤중에 경비를 설 이유가 없단 말이지. 쳐들어 올 녀석들이 없는데 뭐하러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 " "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래도 오늘 밤까지는 좀 신경써야할 거야. 지금 저 위에는 보스 뿐만 아니라 보스의 보스까지 찾아와 있다고. " 동료의 말에 불평만 늘어놓던 경비원도 그제야 몸가짐을 바로했다. " 하긴. 설마 그 분이 찾아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 그러고 보면 역시 우 리 보스가 총애를 받기는 확실히 받는 가봐? 대부가 몸소 찾아주기까지 하고. " " 괜히 그런 소문이 도는 거겠어? 조직의 차기 대부는 릿조 고티가 분명해. " " 후후. 그렇게 생각하니까 의욕이 좀 생기는구만. 보스가 대부가 되면 우 리도 자동적으로 대부의 가드가 되는 거잖아? 이야. 팔자 한번 고치기 시 간 문제구만. " " 역시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한다니까. " 경비원들은 히히덕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던 중 그들의 눈에 막 빌딩 으로 다가오는 한 인영이 보였다. 그러자 언제 떠들었냐는듯 신속하게 품에서 권총을 뽑아든다. " 어이, 거기! 움직이지마! " 총구를 인영에게 겨누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영의 발걸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경비원들은 자신들의 경고가 무시당하자 방아쇠에 건 손 가락에 힘을 주었다. 저 녀석이 죽고 싶어 환장한 건가! ' ……어라? ' 하지만 그들은 잠시 총을 쏘는 것을 주저해야 했다. 빌딩의 불빛에 드러난 인 영은 너무나 뜻밖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뭐야, 이건? ' 그들에게 다가오는 이는 검은 권복을 걸쳐입은 한 중국인이었다. 거기다 키가 그들의 반밖에 되지 않는게 이제 막 열살을 넘긴 소년 같았다. 물론 서양인이 본 동양인은 흔히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고들 하지만 이 챠이니즈는 확실히 어 린 게 분명했다. 이런 어린 아이가 대체 메트라이프에는 무슨 볼일일까? 그것도 이런 시각에? " 잠깐, 너……. " 경비원은 무턱대고 입구에 다다르는 소년을 손으로 제지했다. 그제야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매가 가늘게 찢어진 것이 여간 성질머리 가 있어보이는게 아니었다. 경비원은 소년을 돌려보내기 위해 어설픈 중국어를 구사했다. 분명 그가 예 전 용병 생활을 하며 돌아다닌 나라에는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 에, 아노……. 나니까? " " 병신. 그건 일본어다. " 순간, 소년은 영어로 그렇게 대꾸하며 경비원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소소한 발길질이었다. 하지만 그 한방이 경비원의 경골(脛骨)과 비골(骨)을 수수깡처럼 부러뜨린다. 소년은 자신에게 쓰러지는 경비원의 턱을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쩍 손바닥으로 때렸건만 무슨 시멘트에 금이 가는 소리가 울리며 경비원은 허공 을 날았다. 허공에서 서너바퀴를 돈 그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입구의 유리벽 쪽으로 굴러갔다. " 이, 이 Asian이 묘한 재주를! " 그렇게 동료를 패대기 치는 소년의 모습에 남은 경비원은 안색이 창백해져 총을 겨눴다. 그러나 겨누기가 무색하게 소년은 권총의 슬라이드와 노리쇠뭉 치를 손으로 잡아 번개같이 뒤로 뽑아낸다. 경비원은 손잡이만 남은 권총을 쥐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말도 안되는……. 퍽 다음 순간, 소년은 경비의 무릎을 밟고 뛰어오르며 정확하게 경비의 관자놀 이에 선풍각을 꽂아넣었다. 경비원은 그대로 머리와 다리의 위치가 바뀌며 바 닥에 몸을 처박았고, 소년은 그 위로 사뿐히 내려섰다. " 이런 식으로 가면 되겠지. " 소년, 브루스 류는 쓰러진 경비원들의 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내키는데로 힘을 써버리면 차라리 나을 것을. 그는 아무리 마 피아라고 한들 아무 능력도 없는 인간을 상대로 목숨을 거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손속을 두다보니 이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힘을 줘버리다간 이런 덩치만 큰 녀석들은 픽픽 죽어나갈테니. " 하여간 누자운, 그 입만 번지르르한 녀석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 브루스는 자신을 뉴욕에 파견한 아포스톨로스 바르톨로메오를 떠올리며 투덜 거렸다. 성당기사단의 이단 심문관이 되면 세계의 이상 현상들과 조우할 일이 많아진다. 그렇게 되면 그의 힘에 적합한 상대들과 마주치게 되고 실력을 겨 뤄볼 기회 또한 많아지지. 그것이 바로 브루스가 누대인을 따라 성당 기사단 에 몸을 담은 이유였다. 혼신을 다해 겨룰 수 있는 호적수를 찾기 위해. 브루스가 터득한 경기공 칠성권은 강한 상대를 만나 기량을 펼칠수록 그 경 지가 높아진다. 이것은 삼계의 피드백 작용과도 관계가 있는데, 선도 수련자 인 브루스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면 싫든 좋든 이 호적수를 찾아다녀야만 했 던 것이다. ' 성당 기사단의 정보망이 도움이 될 줄 알았건만. 이래서야 형편 좋을데로 이용만 당할 뿐이잖아. ' 브루스는 한숨을 쉬며 빌딩의 회전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빌딩의 접수 처와 휴게실에 앉아있던 정장의 사내들은 그런 브루스의 등장에 영문을 몰라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브 루스는 자조(自嘲)했다. ' 정녕 만날 수 있을까? ' 날 천계로 보내줄 수 있는 녀석을? '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진, ' 오라 능력자. 그들의 중심인 오라의 주인을? " Hey! Stop! Don't move! " " Who are you? " 확실한 것은,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녀석들 중에는 그가 찾는 호적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브루스는 자신을 향해 권총을 겨누는 마피아들을 향해 기수식을 취했다. " 죽이지는 않으마. " 대신, " 두 발로 걸어나갈 생각은 하지마라, 네 놈들. " 그 말을 끝으로 브루스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그리고 로비에서는 총 성과 비명의 하모니(harmony)가 울려퍼졌다. 쨍 메트라이프의 최정상에 위치한 릿조 고티의 개인 휴게실. 말이 휴게실이지 이 방의 인테리어는 웬만한 호텔의 VIP룸 부럽지 않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 호사스러운 방에서 릿조 고티와 한 노인은 소파에 앉아 서로의 술잔을 부딪 히고 있었다. " 갬비노 패밀리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며. " " 또한 다음 고티 가(家)의 당주에게도 축복이 따르기를. " 그들은 술을 들이킨 후 기분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릿조 고티는 얼큰하게 취 한 얼굴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노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 었다. " 클클. 릿조. 이번 일도 잘 해줬다. 일선에서 물러난 내가 이렇게 유유자 적하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것도 다 네 녀석 덕분이야. " "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매번 숙부님의 조언에 귀를 기 울였을 뿐인 걸요. " 릿조는 노인을 An uncle이라고 칭했다. 바로 이 노인이 릿조 고티의 작은 아 버지이자 갬비노 패밀리의 대부인 존 고티였던 것이다. 암흑가에서 존 고티는 베일 속의 대부로 통했다. 그는 대부 등극 후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아방궁에 거처하며 조직 활동을 지휘했는데, 이는 자신의 존 재를 신비스러운 인물로 부각시킴과 동시에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서였 다. 그 때문에 그는 72세인 현재까지 단 한번도 감옥에 가지 않고 부와 권세 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이런 블라인드(Blind) 통치는 조직원의 이탈을 부추길 여지가 많았다. 실제 예로도 1976년 갬비노 파의 대부 카스텔라노도 이 블라인드 통치를 하다 가 부두목 아리엘로 델라르세의 배신에 조직이 공중 분해될 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존 고티는 영리하게도 릿조 고티라는 이인자를 내세워 조직원의 이탈 방지는 물론 차기 보스의 상속 문제까지 해결해버렸다. 조직원들에게서 반대 의 여지가 없도록 조카를 실력자로 키워내고, 그 조카로 하여금 조직을 번영 시켜 다음 보스의 자리까지 세습시켰던 것이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이번 소마 건도 숙부님이 아니었다면 성사시킬 수 없었을 겁니다. 설마 갬 비노 패밀리의 대부가 뉴욕 커넥션 밑바닥에서 중개인을 하고 있으리라고 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겠죠. " " 클클클. 뭐, 옛날 생각도 나고 꽤 재미있었지. 처음에는 반 장난 삼아 시 작했던 일인데 설마 이렇게까지 열중하게 될 줄은 몰랐어. " 존 고티는 예의 가래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렇다. 그는 갬비노 패밀리의 대부인 동시에 진우에게 일을 맡겼던 커넥션 노인이기도 했 던 것이다! " 숙부님이 열중하신 이유는…… 역시 그 한국인 아이 때문입니까? " " 클클. 꽤 쓸만한 녀석이었지. 그렇게 버리기에는 아까웠어. 처음에는 어 디까지 해낼 수 있나 지켜볼 심산이었는데. " " 오래 버텼죠. 한 2년 되지 않았습니까? " " 아아. 그래. 잘도 버텨줬어. 고 녀석 덕분에 뉴욕의 마약 시장을 우리가 완전히 접수할 수 있었지. 네가 뉴욕의 마약왕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 도 그 아이의 힘이 없었더라면 힘들었을 거야. " " 5대 패밀리 간의 거래는 저희 수중에서 이뤄지지만 자질구레한 뒷골목의 거래까지 신경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덕분에 하울링같은 하류 잡배 들이 소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보난노 녀석들보다 빨리 알아낼 수 있었 습니다. " " 그래. 그랬지. 그래서 아까운 게야. " 존 고티는 혀를 차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릿조는 그런 노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하울링 녀석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는데다. 또 언젠가는 버릴 장기말이었으니까요. " " 그렇지. 무엇보다 하울링의 보스라는 녀석이 그런 괴물일 줄은 꿈에도 생 각치 못했어. 소마의 재거래 건에 대해서 얘기한답시고 찾아와 네 수행원 을 조각 냈을 때에는 그야말로 죽는구나 싶었다. " " 저도 그때는 섬뜩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소마를 빼돌렸다는 것을 모르 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자정 무렵에 하울링을 미행시켰던 조직원의 보고 에 의하면 그 아이와 하울링 간의 추격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 쯤이면 십중팔구 잡혔거나 죽었겠지요. " " 클클. 그 아이를 아무리 닥달한들 우리에 대한 것은 조금도 알아낼 수 없 을게야. 행여나 조직의 이름이 거론된다고 해도 중개인도 제대로 대지 못 하는 꼬마의 말을 누가 믿어줄 것 같은가. 그 꼬마 하나 때문에 우리가 피 해를 입는대서야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지. " " 하하. 그 아이의 편안한 죽음을 위해! " 릿조는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고 존 고티도 따라 웃으며 그 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 " 그동안 수고해준 녀석의 명복을 빌며. 클클. " 그렇게 술을 들이킨 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한국인 소년의 생사따위, 처음부터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소년이 빼돌려준 소마로 인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부 와 영화 뿐이었던 것이다. 삐리리리리 그때 거실의 인터폰이 울렸다. 릿조는 이 한밤중에 인터폰이 터지자 의아함 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이 회선은 긴급한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말라고 일렀 을 텐데. " 무슨 일이냐? " 릿조가 인터폰을 받아들자 그 수화기 안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보, 보스……. 피하, 십시오…….》 " 뭐? "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부하의 목소리에 릿조는 인상을 찡그렸다. 수화기 너머의 부하는 계속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만 중얼거렸다. 《그 녀석이……. 그 괴물이 올라갔습니다……. 괴물……,》 " Monster라니? 알아듣게 얘기해봐! " 릿조는 답답한 마음에 버럭 소리질렀다. 하지만 부하는 그만 정신을 잃었는 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릿조는 거칠게 인터폰을 끊으며 재빨리 거실 의 벽에 걸어둔 일본도를 뽑아들었다. 예전 일본의 야쿠자와 거래를 할때 선 물로 받은 진검이었다. 존 고티는 조카의 행동에 영문을 몰라 물었다. " 왜 그러는 거냐? " " 아무래도 습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직접 내려가봐야 알 것 같군요. 숙부님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혹시나 몸을 피해야 할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니 제 경호원들을 붙여드리겠습니다. " 릿조는 긴장한 표정으로 테이블의 호출벨을 눌렀다. 이 호출벨이 울리면 밖 에서 대기하고 있던 열 명의 경호원들이 안으로 들어올 터였다. 그러나 벨이 울린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밖에서는 사람이 들어올 기미가 보이 지 않았다. 릿조는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 " 어떻게 된 일인지 가르쳐줄까? " 그때 거실의 사무용 책상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릿조와 존은 이 난데없는 외부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책상 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의자 에 앉아 다리를 꼰채 그들을 노려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바로 브루스 류. 그가 소리 소문 없이 방안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2 Ｂy Ｎext Ｎeo =-=-=-=-=-=-=-=-=-=-=-=-=-=-=-=-=-=-=-=-=-=-=-=-=-=-=-=-=-=-=-=-=-=-=-= " 대체 어느 새에……. " " 들어오기는 한참 전부터 들어왔었지. 단지 네 놈들이 얘기하는 꼴을 듣고 있자니 가관이라서……. 과연 어디까지 가관일까 지켜보고 싶었는데 아쉽 게도 네 부하 녀석이 흥을 끊어버리더군. 분명 빠짐없이 때려눕혔다고 생 각했는데 말이야. "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브루스의 말에 릿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도 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저 동양인 꼬마가 빌딩에 포진한 자신의 부하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쓰러뜨리고 올라왔다, 이 말인가? 그게 말이 돼? 분명 엘리베이터도 작동을 시키지 않았을테니 한층 한층을 거쳐 올라와야 했을테고, 각층에는 오십명이 넘는 용병들이 무장을 한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걸 뚫고 올라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해야만 한다! " 마……말도 안돼. 대체, 대체 이게 무슨. " " 말이 되건 안되건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할 문제고, " 브루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존과 릿조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숙부와 조카는 반사적으로 벽에 뒷걸음질 쳤다. " 일단 우리 사이의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 " 우리 사이라니……? 릿조가 덜떠름하게 되묻자 브루스는 싱긋 미소지었다. " 네놈들이 좋을데로 이용해먹고 버린 아이가 오늘부로 내 제자가 되었거든. " 쫙― 순간, 릿조의 몸이 팽이처럼 허공에서 회전했다. 다가오던 브루스가 그대로 릿조의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릿조는 입으로 피거품을 뿜어내며 부러진 이빨들을 우수수 쏟 아냈다. 브루스에게 얻어맞은 뺨이 거의 머리통 크기만큼이나 부어오르고 광대 뼈도 형편없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단 한방에 조카를 병신으로 만드는 브루스 의 모습에 존 고티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 너, 늙은 인간. " 브루스는 존에게 그런 호칭을 부여하며 말을 이었다. " 네가 내 제자를 부려먹은 그 늙은이냐? " " 아, 그……그렇소. " 존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꾸했다. 그는 언제 브루스의 주먹이 날아올 지 몰라 노심초사했는데, 브루스는 당장에 그를 어떻게 할 생각이 없었는지 계속 질문만 던졌다. " 내 제자가 네 놈의 일을 하게 된 이유가 뭐냐? " " 그, 글쎄……. 아마도, 돈 때문이었던 걸로……. " " 돈? 돈이라고? " " 그, 그렇소. " " 흐음. " 브루스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팔짱을 끼며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존 은 그런 브루스를 이해할 수 없다는듯 바라보다가 곧 그의 뒤로 시선을 돌렸 다. 쓰러졌던 릿조가 천천히 브루스의 뒤에서 일어나 일본도를 들어올리고 있 었던 것이다. 존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죽여버려! " 그럴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 브루스는 낮게 중얼거리며 그대로 자신의 어깨에 떨어지는 일본도를 뒤도 돌 아보지 않고 손가락으로 잡아냈다. 그 귀신이 곡할 재주에 릿조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머리 속으로는 앞에서 부하가 말한 '괴물'이라는 말이 끊 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쩍 브루스가 어깨를 한번 흔들자, 릿조는 일본도를 놓치고 거실의 가장 자리까 지 날아가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브루스는 애초에 릿조 의 기습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는지 손가락에 낀 일본도를 천장에 다트처럼 꽂아버리며 다시 존에게 물었다. " 돈은 왜 벌어야 한다더냐? " " ……고아원, " " 응? " " 고아원의 수녀와 아이들, 때문이라고. 얼핏 그렇게 들었던 것 같소만……. " 순간, 브루스의 얼굴에 서렸던 노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는 크게 웃 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 하하하하! 과연! 개선의 여지는 있지만 의외로 올곧은 구석이 있었군! 거 둬들인 보람이 있겠어! " " ……? " 존은 도무지 이 눈앞의 상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화내기가 무섭게 다시 웃음을 터뜨리지를 않나. 어린애 같으면서도 그 행동거지는 고압적이지를 않 나. 그렇게 불안에 떠는 노인에게 브루스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얘기는 잘 들었다, 늙은 인간. " " 그, 그럼? " 존은 브루스가 의외로 조용히 넘어갈 것 같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브루스는 웃는 얼굴과 달리 천천히 주먹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 이제부터는 고아를 다시 한번 버린 이유에 대해서 들어보기로 할까. " 그리고 거세게 진각을 밟으며 노인에게 발경을 날렸다. " 이건 대체……. " 릿조 고티의 휴게실에 들어온 빈센트는 기가 막히다는듯 뒷 말을 잇지 못했 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브루스는 소파에 앉아 천연덕스레 곰방대를 피워물 었다. " 왜? 기대 이상으로 해주니까 감격이라도 한 거냐? " " ……기대 이상이다 못해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이건. " 빈센트는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 가 메트라이프 빌딩을 올라오면서 내내 볼 수 있었던 것은 마치 전차가 지나 간듯한 폐허의 잔재 뿐이었다. 릿조 고티의 사병들은 하나 같이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건 물의 벽과 천장도 성한 곳보다는 무너진 곳을 찾는게 더 빠를 정도였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최정상의 이 휴게실이었다. 릿조 고티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기절해 있었고, 존 고티는 대부답지 않게 벽에 주저앉아 치매 걸린 노인처럼 바닥에 소변을 흘리 고 있었다. 그런 존 고티의 뒤로는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브루스가 칠성권의 제 2발경인 격공장 거문을 날린 흔적이었다. " 어쨌든 수고하셨습니다, 브루스 님. 브루스 님 덕분에 아무런 희생자도 없 이 소마를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까요? " 빈센트는 크루세이더 단원들이 릿조 고티의 방에서 아타셰 케이프를 찾아내 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가방에는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되었던 소 마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브루스는 빈센트의 감사에 피식 코웃음을 쳤다. " 어차피 가이드 비 아니었냐? 새삼스레 감사는 무슨 놈의 감사? " " 그랬던가요? " " 징그러운 자식. 네 녀석한테는 두번 다시 가이드 안시켜. " 브루스는 치가 떨린다는듯 빈센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빈센 트는 고소를 금치 못하며 물었다. " 이제부터는 어떡하실 겁니까? 며칠 더 뉴욕에 머무르시며 관광을 즐기시겠 습니까? 아니면, " " 관광 소리는 집어치우고. 내 제자가 회복되는 즉시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 이다. " " 제자……말씀이십니까. " 빈센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 브루스 님. 한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 묻지마. " 브루스는 귀찮다는듯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빈센트는 집요하게 물었다. " 브루스 님이 제자로 삼은 그 소년. 혹시 오라 능력자가 아닌지요? " " ……. " 브루스는 작게 눈썹을 흔들었다. 이 눈치만 빠른 녀석이……. " 만약 오라 능력자가 분명하다면 일단 성당 기사단에 보고를 하는 것이 순 서라고 생각합니다. 성당 기사단의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오라 능력자들은 빠르든 늦든 이단 심문관에게 사냥당할 운명이니까요. 차라리 그렇게 될 바에는 성당 기사단의 비호 아래 이단 심문관이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 " ……. " " 사냥당하는 쪽보다, 사냥하는 쪽이 나을 테니까요. " " 건방진 놈. 그건 나더라 들으라는 소리냐? " 브루스는 참지 못하고 노기를 드러냈다. 그 무시무시한 기색에 빈센트는 언 제 그랬냐는듯 예의 웃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 설마 그럴리가요. 저는 그저 소년의 앞날이 걱정되었을 뿐입니다. " " 흥! " 브루스는 이를 갈며 빈센트를 노려보았지만 곧 부질 없는 짓이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 쓸데 없는 걱정이나 할 거면 차라리 내 제자의 신변이나 걱정해주지 그래? 고아원에 보낸 네 부하 놈들은 제대로 일하고 있는 거겠지? " " 물론이고 말고요. 마음에 걸리신다면 지금 당장 연락해보겠습니다. " " 해봐. " 빈센트는 브루스의 요구에 재빨리 손목의 무전기로 선한 사마리아원에 파견 한 기사단원들과 연락을 재개했다. 삐삐삐삐 그래. 재개되어야 하는데……. " ……. "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단원들 쪽에서 그의 무전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제 야 뭔가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는지 빈센트와 브루스의 표정이 굳어졌 다. " ……살아있었나. " 브루스는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곧바로 휴게실의 베란다 쪽으로 달려갔다. 그 리고 볼 것 없이 베란다의 유리창으로 뛰어들었다. " 브루스 님! " 빈센트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챙그랑! 이미 브루스는 유리창을 부수고 건물의 밖으로 뛰어내린 뒤였다. 빈센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베란다의 밑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브루스가 58층의 높이에서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빈센트가 그를 걱 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브루스의 몸은 오페라 극장 때와 마찬가지로 밤하늘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끼이이이익 경광등을 끈 앰뷸런스가 할렘가의 선한 사마리아원 입구에 멈춰섰다. 그리 고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찢어진 레이싱 슈트 사이로 붕대를 걸친 소년, 정진우였다. " 후우. 오토바이만 몰다 차를 몰려니 왜 이렇게 힘든 거야? " 진우는 핸들을 잡았던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흐르자 옷에다가 손을 문질렀다. 그는 병원으로 호송되던 도중 운전석의 응급대원을 쫓아내고 자신이 직접 앰 뷸런스를 몰아왔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진우가 그 상황에서 가장 빨리 선 한 사마리아원으로 올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었다. ' 제길. 이런 것도 절도죄에 들어가겠지? 나중에 사과하면서 돌려주면 어떻 게 안되려나. ' 진우는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행동해버렸나 후회했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 을 감수하고서라도 선한 사마리아원의 일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그래. 이왕 저질러버린 것, 이제와서 어쩔 수 있나. 진우는 속 편하게 생각 하기로 마음먹으며 조심스레 선한 사마리아원으로 들어갔다. ' ……조용하네. ' 불이 꺼진 고아원은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진우는 새삼 여기가 자신이 지 내왔던 그곳이 맞는걸까 의아해하며 천천히 마당을 지나 고아원의 대문으로 향했다. 이 시각에 고아원이 조용한 거야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왠지 모 르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진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거실. 어두운 복도. 어두운 계단. 진우는 일부러 불을 켜지 않으며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불을 켰다가 다른 이들의 잠을 깨우기도 싫었고, 이제와서 어둡다고 한들 몇년이나 지내온 고아원의 구조를 잊어먹을리도 없 었다. 진우는 소리내지 않고 근처의 방으로 걸어갔다. 너무나 조용한 것이 이상했 다. 일단 아이들이 무사한지부터 살펴보고 싶었다. 진우가 처음으로 문을 열 고 들어간 곳은 시메온을 비롯한 초등부 아이들이 머무는 방이었다. " ……. " 진우는 주위를 더듬거리며 아이들의 모습을 찾았다.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하지만, ' 아무도……없어? ' 그럴리가! 진우는 서둘러 다른쪽 침대도 찾아보았다. 없다. 없어. 어디에도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이 시간에 얘들이 어디로 간거지? ' 화장실에라도 간건가? ' 진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재빨리 다른 방으로 가보았다. 프란체 스카! 실비아! 멜키오르! 빈첸시오! 스테파노! 야고보! ' 다들 어디 간 거야! ' 어느 방을 들어가든 모두 다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진우는 거칠게 숨을 몰 아쉬며 2층으로 올라갔다. 쿵쾅쿵쾅. 나무로 만든 계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퍼진다. 평소라면 이 소리에 놀란 수녀님들이 방에서 나와 그에게 주의를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 수녀님들마저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 아가다 수녀님! ' 진우는 평상 시라면 절대로 찾아가지 않을 수녀님들의 방문을 열어제꼈다. 역시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우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두손 으로 얼굴을 감쌌다.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일단 이 상 황이 어떻게 된 건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벌컥 진우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고아원의 맏형인 토마스와 함께 지냈던 방. 그 방은 주인 없이 싸늘한 공기만을 흘리고 있었다. 진우는 불안함에 미칠것만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그때 숨을 들이키던 진우는 희미한 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이 냄새는! 진우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문가에 있는 스위치를 찾았다. 불을, 불을 켜야해……. 불을 켜서 확인을 해야……. 달칵 스위치가 올라가자 유독스레 새하얀 백열등이 방안을 밝게 비췄다. 갑작스레 불이 켜지자 진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눈을 뜨자, " 하. " 방안에, 방안의 바닥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붉게. 붉게. 그 사이로 마치 정 육점의 고기처럼 잘려나간 살점들이 벽과 천장에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창가에는 무참하게 짓이겨진― " 우웩―! " 진우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벽을 부여잡은채 오바이트를 했다. 입으로 토해 내며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입과 코로 신맛이 올라오고 가슴이 뒤흔들렸다. 다리에서 힘이 빠 져나가자 진우는 스르륵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죽었어! 죽었어! ' 사람이……죽었다! 사람이! 사람이! 진우는 한참을 토해내며 울었다. 그러다 문득 흐릿해진 시야로 창가 쪽을 바 라보았다. 그 참상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절대로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 시체가 누군지는 확인해야 했다. 누군지……. 내가 알고 있는 누구인지, 확인을, 확인을 해야……. " 아! "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올렸다. 죽어있는 시체는 총 다섯명이었다. 다 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자되어있었지만 그 옷차림은 그럭저럭 알 아볼 수 있었다. 동일한 모양의 군복. 브루스 류. 그 괴상한 중국인과 함께 다니던 병사들의 옷차림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원의 사람들이 아니었어! " 하, 하아아아― "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죽 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빠져나온 기분이 이러할까! ' 다행이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 진우는 눈물을 흘리며 연신 속으로 다행이라고만 되뇌였다. 그리고 소매로 엉망이된 얼굴을 닦아낸 후 심호흡을 했다. 아까보다는 확실하게 침착함을 유 지할 수 있었다. ' 이, 이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 여전히 고아원의 사람들은 사라져 있었고, 그 고아원을 보호하고 있어야 할 군인들은 처참하게 죽어있다. 이건 결국 고아원에 뭔가 이변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 어디로 간걸까? ' 진우는 이를 악물며 창가에 걸린 시체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에게서 조금이 라도 눈을 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시신에서 뭔가 작은 단서라도 발 견할 수 있다면. 수녀님과 아이들의 행방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 ……! 하지만 진우에게 단서를 준 것은 시체가 아니라 창가의 풍경이었다. 고아원의 뒤쪽에 있는 성당. 그 성당에서 지금, 새빨간 불꽃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4 - Ｂy Ｎext Ｎeo =-=-=-=-=-=-=-=-=-=-=-=-=-=-=-=-=-=-=-=-=-=-=-=-=-=-=-=-=-=-=-=-=-=-=-= 다음날 아침. " 당신 대체 무슨 바람이에요? " 미연은 현관에서 하나의 신발을 신켜주는 남편의 모습에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아내의 질문에 진우는 천역덕스레 되물었다. " 무슨 바람이라니? " " 하나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준다니. 당신, 연태껏 한번도 그런 적 없었잖아 요? " " 그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딸을 오랫동안 방치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 " 방치한 것 맞잖아요? " " 이봐요, 하나 엄마∼ " 진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항의했다. " 하나가 유치원을 다닌 건 올해부터라고? 그 전에 학원을 다녔던 것도 아니 고 내내 집에만 있었잖아? 배웅을 한다던가 마중을 간다던가 건수가 없었을 뿐이야. " " 그러는 당신이 말하는 올해도 벌써 10월에 접어들었네요. 3월달부터 장장 7개월이나 지났으니 이만하면 훌륭히 방치한 거에요. " " 그건! " 진우는 거기서 자신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접었다. " ……할 말이 없습니다. " " 꺄하하하하! 아빠, 방치 플레이했구나! " " ― " 곁에서 천진난만하게 부모를 지켜보던 하나는 그런 엄청난 말을 함으로서 진 우와 미연을 경악시켰다. 방치 플레이라니! 알고서 하는 말인가, 지금? " 어, 어쨌든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요. 갑자기 모범 아빠라도 되고 싶어 졌어요?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 미연이 애써 마음을 추스리고 묻자 진우는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 그냥……이라기 보단. 역시 마음에 걸려서겠지. 아무래도 당신 말마따나 그동안 쭉 불량 아빠였던듯 하고……. "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올해의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로 한동안 능력 개발과 브루스의 훈련에 정신 없는 나 날을 보내던 중 3월 달에 지방으로 파견되어 부상, 이후 끊임없이 메디컬 센 터의 신세를 지다가 8월달 이후에는 세번이나 실명하기에 이르른다. 그 때문에 그는 당연히 가족의 일에 신경쓸 수 없었고, 하나 뿐인 딸이 유치 원에 다니게 된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우는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것을 자신의 사정으로 돌 리고 싶지는 않았다.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 뭐, 반성했다고 할까. 내 일 때문에 당신이나 하나에게 걱정 끼쳤던 것도 면목 없고. 좀 정신을 차려볼까― 해서 말이야. " 진우는 언제나처럼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와 벌써 6 년이 넘게 지내온 미연은 남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 당신 정말……. " " 응? " 막 하나를 목말 태우던 진우는 미연의 속삭임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연은 그런 부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갑자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 왜 그래? " 진우는 미연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미연 은 몇번인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곧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걱정이 되서. " " 무슨 걱정? " " 당신이 무사히 하나를 바래다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 " ……. " 진우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렴 자신이 딸 하나 유치원에 데려다주지를 못하겠는가? 오늘부터 새 마음 새 뜻으로 봉사하기로 마음 먹었건만 정말 따라주지 않는 군……. " 자자. 이러고 있다간 하나, 유치원에 늦겠어요. 얼른 출발하세요. " 미연은 우울해하는 그의 등을 떠다밀며 쓴 웃음을 지었다. 진우는 한숨을 쉬 며 털레털레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 예이. 예이. 당신의 믿음을 사기 위해서라도 분발해보도록 하지. 하나야, 엄마에게 다녀온다고 인사해야지. " "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 하나의 밝은 목소리에 미연은 손을 흔들며 부녀를 전송했다. 그러던 중 그 녀는 잠시 눈을 찡그려야 했다. 진우가 현관문을 열자 그 사이로 아침 햇살 이 들어와 그녀의 눈을 찔렀던 것이다. 철컹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현관문이 닫힌 뒤였다. 미연의 앞에는 아무도 남 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남편과 아이를 떠나보낸게 마음에 걸 려 재빨리 뒤를 쫓았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이미 그들은 저편 의 골목으로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미연은 입구에서 서서 우두커니 부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괜찮은 거죠? 하나 아빠? " 정말……괜찮은 거죠? " 휘― 휘― 휘휘휘― " 언더 시티의 메인 센터. 주유화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자신의 직무에 임하고 있었다. 생물 공학이 전공인 그녀는 시폰 뤼멘의 양 아들들인 레드 브라더스의 담당의였는데, 현 재 쌍둥이 동생 쪽이 사망한 관계로 형의 치료에만 전념해야 했다. " 휘― 휘― 휘휘휘― " 쌍둥이 형의 이름은 그람드링 뤼멘. 피스메이커가 그에게 부여한 코드 네임 은 피스 알리자린. 시야에 보이는 모든 상황의 미래를 잠깐이나마 엿볼 수 있 는 순간 예지 능력자. 유화는 그람드링의 오른손을 대체한 오리하르콘 인공 의수를 정비하며 간간 히 주위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한 치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시폰 뤼멘이 피스메이커를 떠난 이후, 줄곧 그람드링이 사용해온 메인 센터의 사무실이었 다. 그람드링은 사령부의 호출이 없는한 언제나 이 방에서 떠나지를 않았기에 유화는 하는 수 없이 직접 그를 찾아와야 했다. 하지만 몇번을 찾아와도 이 방의 음침한 분위기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 ……. " 유화는 방 한구석에서 소파에 앉아있는 한 인영을 발견해냈다. 그람드링의 쌍둥이 동생인 오르크리스트 뤼멘이었다. 저번 전투에서 사망한 그는 그람드 링의 요구에 따라 시체 안치소에도 가지 못하고 박제되어 있었다. 그런 시체 를 마치 살아있는양 옷까지 입혀 방 안에 놔두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휘― 휘― 휘휘휘― " 무엇보다 가장 기분 나쁜 것은 그런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천연덕스럽게 그 녀의 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유화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응시하는 그람드 링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렸다. ' 뭐야. 아까부터 계속……. ' 아무리 담력이 큰 그녀라도 그람드링과 눈을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그 붉 은 빛이 감도는 눈동자는 마치 유화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것처럼 이채를 띄 고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가뜩이나 레드 브라더스의 DNA를 채취하 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그녀로서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기분이다. 결국 계속되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유화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지? 콧노래를 다 부르고. " 그녀의 질문에 그람드링는 콧노래를 멈췄다. 그람드링은 여전히 유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 크크. 그렇게 티가 나? "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음산했는지라 유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 좋은 일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지. 응! 정말 고대해왔던 일이 야! 크크크크. " " 무슨 일인지는……말해주지 없겠지? " " Oh. 이제야 제법 내 주치의다운걸. 눈치가 빨라졌어. " " ……. " 유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굳어진 표정으로 그람드링을 노려보았 다. "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가인이 만큼은 건드리지마. 그 아이를 건드렸다간 앞으로 나 없이 메인테넌스(maintenance)를 해야될 거야. 그건 너도 곤란하겠지? " " 호오. " 그람드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유화의 반응이 재미있다는듯 킥 킥거렸다. " 의외로 성질 있으시네? 크크. 뭐, 그런 면도 나쁘지는 않아. 매력 있어. " " ……. " " 하지만 말이야. 나는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성미인지 라. 으음∼ 어떻게 할까나? " 그람드링은 팔짱을 끼며 고민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모습에 유화는 의수 를 손보던 기구들을 챙기며 찬바람나게 몸을 일으켰다. " 네 마스터가 메디컬 센터가 아닌 나에게 너희들의 조정을 맡긴 건 다 이유 가 있어서겠지? 피스메이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무언가라던가, 말이야. " " 헤에.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잖아? " " 사람 우습게 보지마. 이래 뵈도 용장호의 와이번 프로젝트까지 담당했던 나야. 적어도 너희들이 정상적인 오라 능력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 어! " " ……. " 유화의 호통에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대기가 피부 를 찌르는 이 느낌! 살기였다. 그 살기가 눈 앞의 그람드링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람드링 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유화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벌써 수십번도 더 그녀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화에게 다가왔다. 유화는 자신도 모르 게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곧 닫혀진 방문에 등을 부딪힌다.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저항은 그저 그람드링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 뿐이었다. " 까불지마, Yellow bitch. " 그람드링은 유화의 코 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이를 드러냈다. " 그동안 오냐 오냐 해주니까 자신이 뭐라도 된 줄 착각한 거야? 그렇다면 가르쳐주지. 너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눈에 거슬리면 죽여버리면 그 만이라고. " " ―! " 유화는 그람드링이 오리하르콘 의수로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자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람드링에게 잡힌 손목이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으스러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가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그람드링에게 얕보 이지 않겠다는 오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 네가 하이에나처럼 우리 뒤를 캐고 있다는걸 몰랐을 거 같냐? 천만의 말 씀. 네 년의 행동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버려뒀 던건 왜였을 거 같냐? 그저 귀찮았기 때문이라고. 네 년의 피를 보는 것 조차 짜증날 정도로 귀찮았다고! "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며 유화는 방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람드링에게 붙잡 혔던 그녀의 손목은 보기 흉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그렇게 복도에 웅크리고 몸을 떠는 유화를 향해 그람드링은 싸늘히 조소했다. " 어디까지 까불 수 있나 지켜보겠어. 대신 그때는 지금처럼 손목 하나로 끝 내지는 않을 거야. Okay, doctor? " 그 말을 끝으로 방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유화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방문 을 노려보았지만 곧 힘 없이 혼절하고 말았다. 거기까지 버티는게 그녀의 한 계였던 것이다. " 휘― 휘― 휘휘휘― " 한편 방문을 닫고 소파로 돌아온 그람드링은 언제 광폭했냐는듯 다시 휘파람 을 불었다. 그는 느긋한 손놀림으로 소파 뒤에 놔둔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 에는 몇 주 전 그가 사용했던 플라스마 도끼 한 쌍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리모 콘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스터인 시폰 뤼멘이 보내준 물건들이었다. 그람드링은 그 중 도끼를 하나 꺼내들고 오르크리스트에게 다가갔다. 도끼의 스위치를 올리자 새파란 불꽃이 일며 플라스마 커터가 생성되었다. ' 그람. 선물을 보냈다. 이번에는 날 실망시키지 말아라. ' 오늘 아침 시폰 뤼멘에게서 걸려온 전화의 내용이 생각났다. 그람드링은 그 짧은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양 아버지가 보내온 선물의 용도를 깨달을 수 있 었다. 그람드링은 입꼬리를 올리며 오르크리스트의 머리카락를 쓰다듬었다. "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크리스. 어차피 넌 내 안에 있잖아. 그렇지? " 눈 앞의 시체는 동생이 아니다. 눈 앞의 시체는 단순한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그람드링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이며 도끼를 들어올렸다. " 자― 시작해볼까! " 그와 동시에 도끼의 플라스마 날이 오르크리스트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어. 메두사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티아마트가 소멸된 이후부터 그녀의 눈에 서는 눈물이 마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슬픔을 억제하는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슬퍼하고 또 슬퍼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다간 극단적으로 치달은 감정 이 그녀의 정신을 붕괴시킬 것이다. 가뜩이나 8개로 분열되었던 불안정한 인격이다. 카르마 에너지가 단기간에 증폭되면 영체의 유동성이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 때문에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은 극단적인 감정의 소유자들이 많았다. 그나마 화신들 중 메두사가 가장 안정적인 인격체였으나, 그것은 주인격인 티아마트를 구심 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지 결코 그녀의 인격이 완성되었기 때문은 아니었 다. 오히려 그만큼 의존하는 인격체였기에 티아마트가 사라진 지금의 그녀는 자 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푸드드드득 그때 쓰러진 메두사의 머릿가로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내려섰다. 까마귀는 붉 게 물든 눈동자로 메두사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며칠동안 연락이 없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대체 지금 이런 곳에서 뭘하고 있는 건가?] 까마귀의 입에서는 놀랍게도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메두사에 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까마귀는 매번 자신의 동료가 연락을 전할 때 사용했던 사이코포모스(傳令)였던 것이다. " ……네이 안데르슨인가요? 날 내버려둬요.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 [끝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블러디 노블맨, 네이 안데르슨의 되물음에 메두사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비통해하는 동료의 모습에 까마귀는 낮게 탄식했다. [티아마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나 보군. 하긴. 지금의 원로회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밖에 없겠지. 단 하나 남은 판게아의 게이트를 그냥 내버려 둘리 없으니까.] " 마치……이렇게 될 것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말투군요? " 메두사는 원망스레 까마귀를 노려보았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리리스와 카이가 퇴장한 지금, 테라 인코그니트에는 비상이 걸렸을 거야. 또 다른 호문클루스들을 파견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그렇다면 남아있는 호문클루스에게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겠 지.] " 그렇다고 그들에게 티아마트를 해부할 권리는 없어요―! " 메두사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주위의 대기가 뒤흔들리며 차원이 진동한다. 요르문간드의 모든 힘을 거두어들인 그녀는 감 정의 기복만으로도 차원 진동을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까마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런 메두사를 바라보았다. " 그 사람은! 티아마트는! 일평생 노아를 위해 살았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희 생해가며 그들을 따랐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그 결과가 겨우 이런 건가요? 충성의 대가가, 헌신의 대가가 고작……! " [원로회에게 뭘 바라는 건가? 어차피 우리는 그들에게 한번 쓰고 버려질 소 모품이었다. 도구일 뿐이었어. 도구의 마음을 헤아려줄 주인따위, 있을 턱 이 없지.] " 입닥쳐! " 촤촤촤촤촤 메두사의 두눈이 붉어지며 그녀의 그림자에서 수십개의 사슬들이 튀어나와 까마귀를 꿰뚫었다. 그걸로 까마귀는 즉사했지만, 네이 안데르슨의 목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진정해라, 메두사. 분노를 토해낼 상대는 내가 아니지 않나?] " 시끄러워! 시끄러워! 너나 원로회나 다 똑같은 놈들이야! 애초에 타인을 믿는게 아니었어! 나와 티아마트, 내 자식들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적이야! " 메두사는 두서없이 증오를 발산했다. 그녀는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멋대로 만들어내고 멋대로 이용해먹다 버려버린 노아도! 쿠사나기와 초류향 일행을 추방시킨 테라도! 또 그런 자신들을 방관하기만 했 던 네이 안데르슨도! 모두 용서할 수 없었다. 모두 적일 뿐이다. 티아마트를 죽게 만든 원수들! [이런. 그렇게 말하니 섭섭하군.] 그때 막 까마귀를 사슬로 박살내려던 메두사는 네이의 말에 손속을 멈춰야 했다. [너의 반려자를 구할 방법이 하나 생각났는데.] " ……뭐? " 메두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이 안데르슨, 지금 뭐라고 했지? " 구할……방법이라니? " [후후. 이제야 내 말이 귀에 들어오나? 그럼 말해줄테니 똑똑히 들어보라고.] 네이 안데르슨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원로회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판게아로의 귀환이다. 그 때문에 너의 반려자 를 해부해서 시공주소의 현현성을 밝혀내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이건 그들 로서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리리스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최강의 호문 클루스가 실험 재료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겠지.] 메두사는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 나와 티아마트의 처지를 요약해줄 필요는 없어! 어서 본론이나 말해! " [자자. 그렇다면 리리스의 계획이란 뭐였나? 바로 테라가 만든 바르의 별, 머신 아더와 오라의 주인을 동조시켜 노아의 인류를 판게아로 차원 이동 시키는 거였지?] 네이는 메두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맹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미 답은 나오지 않았나. 메두사, 너가 머신 아더와 오라의 주인을 포획하는 거다. 그리고 노아와 흥정하는 거야. 티아마트의 안전과 머신 아더의 유무를 걸고서.] " ……! " 메두사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과연! 노아가 판게아 원정대를 포기한 이유는 오라의 주인을 세뇌할 리리스 가 로스트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라의 주인을 세뇌하지 못한다고 해서 테라가 만든 바르의 별이 그 효용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었다. 차원의 문을 열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그런 머신 아더를 수중에 넣기만 한다면 노아가 티아마트를 해부할 이유도 당연히 없어지지 않는가! " 그, 그렇지만 이제와서 그래봤자……이미 티아마트는……. " [잊어버렸는가? 테라 인코그니트와 판게아 사이에는 타임 패러독스가 존재 한다는 걸. 티아마트가 해부당한다고 해도, 여기의 시간으로는 아직 하루 정도의 여유가 있을 거다. 그 사이에 머신 아더를 테라에게서 탈취한다면 원로회의 실험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렇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타임 패러독스! 어느새 메두사의 눈물은 그쳐있었다. 이렇게 슬픔에 도취되어있을 때가 아 니었다. " 끝이……끝이 아닌 거군요? 아직 끝난 게 아니었어요. " 메두사는 두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안도했다.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 가 남아있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안심하기에는 이른 것 아닌가? 그 피스메이커에게서 기가스를 빼앗는 거 라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야.] " 걱정하지 말아요. " 메두사는 자신의 몸안에서 들끓는 혼돈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그것은 티아 마트가 건네준 모든 것이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강의 힘이었다. 이 힘이 있는한 그녀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 어차피 녀석들의 거인에게는 갚아줘야 할 빛이 있었어요. 반드시 손에 넣 어보이죠. 반드시! " 그녀의 의지에 발맞춰 갈색과 하늘색, 검은색의 용염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네이 안데르슨은 속으로 미소지었다. '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용의 여왕님? '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5 - Ｂy Ｎext Ｎeo =-=-=-=-=-=-=-=-=-=-=-=-=-=-=-=-=-=-=-=-=-=-=-=-=-=-=-=-=-=-=-=-=-=-=-= 시민은 언제나처럼 가인의 도시락을 싸들고 언더 시티의 교도소를 방문했다. 언제나처럼 초병들에게 피스 카드를 제시하고, 언제나처럼 위병소를 지난 다 음, " ……. " 언제나와 같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렌트카에서 내리던 시민은 교도소의 입구에 서있는 한 낯익은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도소의 대원들에게 면회 절차를 밟고 있던 그녀는, " 마리 양? " 여자답지 않게 훤칠한 키에 포니 테일로 가지런히 묶어내린 흑발. 무영신풍 류의 후계자이자 시민의 동료인 성마리였다. 시민의 부름에 마리는 천천히 그녀 쪽을 돌아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 아, 시민 씨……. " " 여긴 어쩐 일이에요? 가인 씨 면회하러 온거에요? " " 예? 그, 그렇습니다. 토요일이라 오전 수업 밖에 없어서 잠시……. " 시민이 살갑게 구는 것에 비해 마리는 어딘가 뻣뻣하기 그지 없었다. 뭔가 안절부절 못하다고 해야하나. 평소의 그녀답지 않다고 해야하나. 시민은 그 런 마리의 태도에 의아해하며 웃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네요. 그랬으면 마리 양 도시락도 싸 왔을텐데. " " 도, 도시락 말씀이십니까! " " 예? " 마리는 순간 뭔가를 뒤로 감추며 얼굴을 붉혔다. 그 태도에 더욱 의아해진 시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왜 저러는 거지, 마리 양? 그런 시민의 의문을 뒤로 하고 마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 그, 그렇군요. 시민 씨가 이 시간에 가인을 면회오는 건 당연히……. 마, 맞습니다. 시민 씨라면 응당 신경쓰고 있었겠죠. 예. 그럴 거라고는 생각 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래. 그런게 당연한데……. " " 예? " 그때 마리의 횡설수설을 듣다못한 교도소의 대원들이 히죽 웃으며 대화에 끼 어들었다. "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러십니까? 그냥 솔직하게 나도 도시락 싸왔다고 하 면 되는 거 아닙니까? " " ―! " 그 말에 마리는 대원을 노려보며 몇번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힘 없이 고개 를 떨어뜨렸다. 시민은 그런 마리와 대원들을 돌아보다가 그제야 어떻게 된 상 황인지 깨닫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 아, 그러면 마리 양도? " " ……예. 면목, 없습니다. " 마리는 슬그머니 뒤로 감췄던 도시락통을 들어올리며 시민의 시선을 피했다. " 어제 면회왔을 때 가인의 안색이 초췌해 보이길래 그만. 그, 왠지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 " ……. " 마리가 서투르게 변명했지만 그녀의 말은 이미 시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민의 눈은 마리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지 요리하는 것 과 인연이 없는 마리가 손수 만든 도시락.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애정이 도시락 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저런 도시락을 받는 남자라면 누구나 다 기뻐 하겠지. 더구나 마리같은 아가씨가 주는 것이라면 더더욱……. ' 가인 씨도 분명. ' 시민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뜨끔거렸다. 왜 가슴이 아픈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꾸만 머리 속으로 자신과 마리를 비교하게 된다. 자신을 싸늘하게 대하던 가인이 마리를 대할 때도 과연 그런 태도를 고수할까? 혹시 마리의 도시락을 받고 그가 기뻐한다면?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던 웃음 을 그녀에게 보여준다면? ' 나는……. 나는……. ' 마리는 시민이 아무런 말도 없이 입을 닫고만 있자 더욱 불안해졌다.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후회스러웠다. 역시 안하던 짓을 하니까 이런 낭패를 보는 거다, 성마리! ' 하지만 그저 도시락을 싼 것 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일일까? ' 마리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저 시민 씨라 면 이 정도의 일에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상냥하게 웃 으면서 다 함께 도시락을 먹자고 하겠지. 그래. 내가 이렇듯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거야. 난 잘못한게 없어. 음. 음. " 그럼 다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 것 봐! 마리는 시민의 말에 굳었던 표정을 풀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민의 얼굴 을 바라본 순간, " …….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시민은 언제나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그 웃음에서 지독 한 위화감을 느껴야만 했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활화산을 종이 한장 으로 가려놓은 형세라고 해야할까. 마리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시민의 태도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저, 시, 시민 씨? " " 저와 가인 씨 둘이서 식사하는 것도 좋지만 때론 이렇게 셋이서 식사하는 것도 좋겠네요. 그래도 마리 양은 가인 씨 입맛을 잘 모르죠? 도시락 싸느 라 수고하셨지만 아무래도 가인 씨에게는 제 도시락을 주는게 나을듯 싶 네요. 가인 씨가 식사하는 동안 마냥 지켜보는 것도 실례니까 마리 양은 자기가 싸온 도시락을 먹고요. " " 자, 잠깐만요, 시민 씨!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마리는 기가 막혀 버럭 소리질렀다. 방금 말한 사람이 정말 시민이 맞단 말 인가? 그 자상하고 천사같기만 하던 시민 씨가 맞는 거야? " 어머, 무슨 말이라뇨? 그러니까 지금 셋이서 식사하자고 하는 거잖아요. " 시민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여전히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 투에 가시가 돋아있다는 것은 아무리 둔한 마리라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마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 아까부터 듣자하니 꼭 제가 불청객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왜 가인을 위해 만든 도시락을 제가 먹어야 합니까? 아무리 제 요리 솜씨가 미천하 더라도 거부하는 것은 가인이지 시민 씨가 아닙니다. 그런 부당한 요구 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 " 마리 양. 좀 더 가인 씨를 생각해주는게 어때요? 가인 씨는 요 근래 계 속 감옥에서만 생활했어요. 또 식사도 제대로 못해 몸도 많이 약해졌고 요. 그러니 영양을 고려해서 만든 제 도시락을 먹이는 편이 낫지 않겠어 요? 마리 양이 가인 씨에게 솜씨 자랑하고픈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게 자 기 생각만 해서는 안되죠. " " 누, 누가 솜씨 자랑을 하고 싶었다는 겁니까! 그리고 제 도시락도 충분 히 영양을 생각해서 만들었습니다. 아니, 시민 씨의 도시락 보다 더 가 인의 몸에 좋다고 자부합니다! " " 흐응. 굉장한 자신이네요. 무영신풍류에서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말 라는 덕목이 있는 걸로 아는데. 지금의 마리 양을 보니 꼭 그런 것도 아 닌 것 같네요. " " 무영신풍류와 도시락 만드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오늘은 제가 먼저 왔으니 가인의 점심 식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늦게 오신 분은 차례를 기다리시죠! " " 저는 2주 전부터 매일 이 시간에 왔어요! 이제 와서 끼어든 건 마리 양이 잖아요! " 마리와 시민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치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 搏)! 얌전했던 그녀들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집착과 투지의 부딪 힘이었다. 아마 평소의 그녀들을 알고있는 사람들이 지금의 광경을 보았더라 면 절대로 자신들의 두눈을 믿지 못했으리라. 물론 그것은 당사자들인 시민과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 마리 양……. 그저 외곬수에 순진한 아가씨인줄로만 알았는데. ' ' 시민 씨……. 그저 현모양처의 모범이신 분이라고만 알았는데. ' 그리고 동시에 결론. ' 설마 이런 성격이었을 줄이야! ' 쿠궁 만약 기분에 따라 날씨가 변화했다면 지금쯤 그녀들의 뒷편에서는 강렬한 번 개가 내리꽂혔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주위의 기압을 낮추며 살벌한 분위기 를 풍기는 여인들의 모습에, 보다 못한 대원들이 중재에 나섰다. " 저기. 한창 피크를 올리시는 와중에 죄송하지만……. 싸움은 다른 곳에서 하시는게 어떨까요? " " 교도소 앞에서 싸우는 건 모양새도 나지 않고 말이죠. " 그제야 자신들의 행동을 깨달은 시민과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대원들에게 고 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 " 면목 없습니다. " 시민은 설마 자신이 이런 유치한 행동을 할 줄은 몰랐기에 놀랍기도 하고 부 끄럽기도 했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마리와 말다툼을 하다 니. 잠깐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 나는 애초에……. ' ● 시민은 조소했다. 자신의 질투가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시영에 의해 뒤바뀐 지금의 모습은 그녀의 진실된 모습이 아니다. 거짓된 모습이다. 환상이다. 이런 자신이 가인을 솔직하게 좋아할 자격이 있는 걸까? 그녀는 내내 고민 하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진실이 밝혀졌을때 가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두 려우면서도 그를 좋아하기에 곁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마리는 어떠한가? 그녀는 언제나 가인의 앞에서 솔직했고, 자신의 마음에 충실했다. 그녀에게 는 일절의 거짓도 없다. 또한 가인을 기만하지도 않는다. 그 너무나도 자신과 다른 모습에 시민은 부러움과 질시를 동시에 느꼈던 것 이다. 그렇게 질투의 정체를 깨닫게 되자 시민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참지 못했다. 이대로 가인을 계속 좋아하게된다면 언젠가 그에게 크나 큰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를 향한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이라니! 시민은 차마 마리와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 그나저나 오늘은 유달리 인기가 많군, 유가인 씨. " 그때 방문 절차를 작성하던 대원이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시민과 마리 는 그에게서 가인의 이름이 언급되자 두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 예? 아, 아뇨. 딴게 아니라. 두 분이 오시기 전에도 유가인 씨를 면회하고 간 사람이 있었거든요. " " 면회라면……여자? " 마리의 표정이 날카롭게 굳어졌다. 대원들은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또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남자였어요. 가인 씨와 비슷한 연배의 외국인 아이였는데. 그, 이름이 뭐였더라? " 대원은 자신의 동료를 돌아보며 물었다. 동료는 방문 기록을 조회한 후 다 음과 같이 답했다. "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 " " 어이. 예쁜아. 오늘도 수고해라. 난 이만 들어가보마. " 26구역의 2층 가옥. 이곳은 팔라딘대의 SG들이 감시 겸 대기 용으로 사용하 는 세이프 하우스였다. 창문의 커튼 사이로는 진우와 시민의 집이 정원 안쪽 까지 훤히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이프 하우스는 피스 그린과 피스 옐 로우, 피스 블루와 피스 핑크를 감시하는 SG들의 거주지였다. 최대한 피스 대원들을 감시하기에 용이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예.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 팔라딘 4소대의 대원이자 '전' 피스 블루의 시크릿 가드였던 천요원은 고참 의 인사에 힘없이 대꾸했다. 그 맥빠지는 인사에 막 세이프 하우스를 나서려 던 고참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 임마. 억지로라도 힘 좀 내서 배웅해주면 안되겠냐? 힘든 하루 일을 끝내 고 돌아가는 고참에게 의욕을 복돋아주지는 못할 망정. " " 윽! 자, 장 고참님! " 요원은 장 고참의 우락부락한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자 불만에 찬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 요원의 태도에 장 고참은 킥킥 거렸다. " 그래. 그래. 그렇게 화내는 모습이 차라리 낫다. 앞으로도 비리비리하게 군다면 그때마다 부비부비 해줄테니까 어디 계속 뚱하게 있어보려무나. " " ……죄송합니다. " 요원은 표정을 풀고 고참에게 사과했다. 그녀도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성의 없는 태도가 조원들의 사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장 고참은 풀이 죽은 자신의 후임을 다독거렸다. " 죄송할 건 없고. 뭐, 그런 일이 있었으니 갑자기 힘을 내는건 무리겠지. 그래도 어쩌겠냐.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되지 않겠냐? " " ……. " 요원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고참들을 볼 면목 이 없었다. 한달 전, 몬스터들의 5대 간부인 네크로맨서에게 조종당한 그녀는 피스메이 커의 최고 기밀 중 하나인 옴팔로스에 몬스터를 들이는 최악의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어디 그것 뿐인가? 그녀 때문에 수십명의 팔라딘 대원들이 죽고 부상 을 입었다. 그런 주제에도 자신은 정진우 대장의 손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구해졌으니…….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요원은 몬스터에게 좋을데로 이용당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팔라딘대에 남아있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렇듯 그녀가 계속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책감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고참들의 충고와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이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고참들은 예전과 변함 없이 그녀를 자신들의 동료로 대해주 고 있었다. 요원은 그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여 몇번이나 남 몰래 울었는 지 모른다. 그리고 결심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만큼 동료들의 도움이 되겠노라고. " 피스 블루의 SG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너무 기죽지마라. 오히려 휴가 받 은 셈치고 한동안 푹 쉬라고. 그 동안은 이 고참들이 열심히 뛰어줄테니까. " 물론 그만한 미스를 저지르고서 요원이 계속 피스 블루의 가드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현 호위 대상은 진우의 가족인 윤미연으로 교체되어 있 었다. 피스 대원의 SG에서 한단계 밀려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좌천이라던가 보직이 변경된 것은 아니었다. 장 고참의 말대로 일 종의 휴가였던 셈이다. 원래대로라면 요원은 장기 휴가로 심신을 진정시킨 다 음 현장에 복귀해야 했지만, 그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결국 우격다짐으로 복귀하려는 그녀에게 팔라딘대의 간부들은 수행 레벨을 낮추는 형식으로 휴가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모처럼 분발하려던 요원에게 맥이 빠지는 처사였을 것이다. " 그래도 너무 빠져있는건 곤란해. " 그때 방안에서 장비를 점검하던 한 대원이 장 고참의 말에 반박했다. 그는 요원과 같이 미연을 가드하는 조의 조장인 서 고참이었다. " 호위 대상이 누가 됐든간에 임무는 임무니까.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줘야지. 안이한 생각으로 있다간 또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될 거 다. " " 어이. 어이. 그렇게 말할 건 없잖아? " 딱딱한 서 고참의 말에 장 고참은 요원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나무랐다. 사 실 서 고참의 말이야 틀리진 점은 없었지만, 가뜩이나 죽어있는 신병의 기를 더 죽여서 어쩌자는 건가? 하지만 그런 염려와 달리 요원은 반듯하게 거수 경례를 붙였다. "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스스로에게 충실해야겠지요. 제 생각이 짧아서 고참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 " 나, 참. 하여간 조장이나 조원이나. 같은 녀석들끼리 잘도 뭉쳤다니까. " 장 고참은 그것 보라는듯 자신에게 으시대는 서 고참의 모습에 한탄했다. 요 원은 그제서야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했다. " 장 고참님의 배려에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힘이 났습니다. " " 그래. 그럼 그 힘으로 분골쇄신하라고. 내일 교대 시간에 보도록 하지. " 장 고참은 등 너머로 손을 흔들며 세이프 하우스를 나섰다. 그런 동료의 모 습에 서 고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하여간 자기 조원 관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의 조원 신경 쓰기는. 쓸데 없이 잔정만 많아가지고. " " 후후. 그때문에 후임들이 다들 장 고참님을 따르는것 아닙니까. " " 흥. 남자 녀석들이 줄줄히 따르는게 뭐가 좋다는 거야? 징그럽기만 하지. " " ……저도 일단은 여자입니다만. " " 불만 있으면 다음 회식때 치마라도 입고 와보시지, 천 중사? 그러면 두 팔 걷고서 융숭하게 여자 대접을 해드릴테니. " " 사양하도록 하죠.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겠습니다. " " 쳇. 역시 안되나. " 서 고참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팔라딘 대에서 유일한 여자 대원인 천요 원은 그 희소성만큼이나 여자로서의 치장과도 거리가 멀었기에, 그녀가 치마 를 입고 다니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풍문이지만, 팔라딘대 내에서는 요원에게 먼저 치마를 입히는 대원에게 그 달의 월급을 모두 몰아주는 내기가 성행 중이라고……. " ……. " ◎ 물론 풍문일 뿐이다. 만약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진즉에 요원이 대대를 들고 엎었겠지. " 그나저나 오늘은 늦는군요. " 서 고참은 창 밖을 감시하고 있던 요원의 말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 뭐가? " " 정 대위님의 딸 말입니다. 평소라면 벌써 귀가했어야 할 시간인데. 그리고 그쪽의 SG조들에게서도 연락이 없고. " 요원의 말대로 벌써 시간은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유치원이 마칠 시간은 진즉에 지나있다. 서 고참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글쎄. 꼭 귀가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번 연락해 볼까? 이러다 우리의 호위 대상이 아이를 찾으러 돌발 행동을 할지도 모르 니까. " " 예. " 요원은 손목에 찬 무전기로 정하나의 호위조를 향해 무전을 치려고 했다. 그때, 똑 똑 똑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두드리는 한 소리가 있었다. 요원과 서 고참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우리를 방문할 사람이라고는……. " 기우였나 보군. 녀석들, 이제야 돌아온 모양인데. " 서 고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문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정하나의 호위조가 돌아온 모양이다. 요원도 긴장을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거, 참. 오시기 전 에 연락이라도 주실 것이지. ' ……. ' 그러나 마음을 놓기 전에 한 가지 이질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크게 신경쓰이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저 사소한 의혹이었을 뿐이다. 과연, ' 팔라딘대의 SG들이, '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 두드릴 필요가 있을까? ' ……라는. " 어이. 왔으면 얼른 얼른 들어올 것이지. 뭘 노크하고 그러는 거야? 열쇠 는 엿바꿔 먹었냐? " 문을 열려던 서 고참은 그렇게 농담 조로 소리쳤다. 그러다 그 역시 자신의 말에서 어색함을 느꼈다. 팔라딘대의 SG조가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두드린다? 열쇠가 없어서? ' 그럴 리가! ' 순간, 서 고참은 신속하게 품 안의 권총을 뽑아들며 문 바로 옆에 몸을 붙 였다. 그리고 요원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춤의 쌍 권총을 뽑아든다. 그렇게 의문의 방문객을 환영할 준비가 끝나자 서 고참은 문의 손잡이를 움 켜쥐며 태연하게 소리쳤다. " 잠깐만 기다려봐. 지금 열어줄테니까― " 그리고 손잡이를 돌리려는 찰나! 쉭 서 고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몇번인가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벽에 등을 붙 인 그의 가슴 밖으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삐져나와 있었다. 마치 총검과도 같은 발톱. 짐승의 발톱이었다. 그것이 벽을 뚫고서 정확하게 서 고참의 심장을 관통했던 것이다! " 서 고참님! " 요원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양손이 불꽃을 일으키며 문을 벌집으로 만들기 시작 한다. 콰앙― 그러나 문밖의 상대는 요원의 총격에도 끄떡 없었는지 대번에 벌집이 된 문 을 잡아뜯어서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요원은 그 상식 밖의 대응에 뒤로 쓰러 지듯 몸을 날리며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탕 그녀의 총탄은 정확하게 표적을 맞췄다. 느낌이 왔어! 그 뒤를 이어 유리창 이 깨지는 소리가 뒤를 잇는다. 요원이 피한 방문이 그대로 뒤편의 유리창을 꿰부수고 밖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요원은 거칠게 뒷구르기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쓰러졌을 표적을 향 해 다시 총을 겨눴다. " ―! " 순간, 요원은 짧게 숨을 들이켜야 했다. 없다. 그녀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총탄에 맞았을 텐데! " 여기다. " 콰직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늘과 땅의 위치가 교차했다. 요원은 옆구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에 피를 토해내며 그대로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천장에 등을 찍힌 그녀는 힘 없이 권총을 떨어뜨리며 자 신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썩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요원은 아픔도 고통도 느끼지를 못하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공격당한 건가? 하지만 뭘로? 뭐에 얻어맞았길래 사람의 몸이 이렇듯 인형처 럼 날아갈 수 있는 거지? 달려오는 자동차에 부딪히면 이렇게 될까? " 아직 살아있었나? 다행이군. 다 죽여버렸으면 녀석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 었을텐데. " 요원은 자신을 공격한 이로 추측되는 한 남자의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들 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장신의 신부가 한 사람 있었다. 푸른 빛이 흐르는 은발과 고요한 녹색의 눈동자. 요원은 그런 신부의 모습을 팔라딘대의 블랙 리스트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그 이름이, ' 라트……발렌시아. ' 피스 블랙 한시영의 수하인 라이컨슬로프! 그렇게 요원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자 라트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 흥분하지 않는 편이 상처에 좋을 거야.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서 내 소식을 피스 그린에게 전해야지. " 소식이라니? 의아해하던 요원은 자꾸만 눈꺼풀이 감기려고 하자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 다. 지금 여기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죽는 건 둘째치고, 최대한 정보를 끌어모으지 않으면……. " 엄마! 나 왔어! " 그때 부서진 창 밖에서 어린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정하나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이제야 유치원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잠시 후 딸을 반기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아! ' 요원은 라트가 창밖을 바라보며 웃고 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녀석, 여기에 나타난 이유가 설마! " 크크크크. 여자, 피스 그린에게 전해라. 네 녀석의 가족은 내가 데려간다 고. 가족들을 되찾고 싶으면 혼자서 날 찾아오라고. " " 크, 으으……. " " 시간과 장소는 차후에 통보하도록 하지. 그때까지 피를 말리며 기다리고 있어라, 피스 그린! 크크크, 크카카카카캇―! " 라트는 광소를 터뜨리며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요원은 그런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도 없는 허공을 되짚어야 했다. 그녀는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중얼거렸다. ' 안돼. 어떻게든, 막지……않으면. ' 하지만 생각과 달리 몸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공포에 질린 모녀의 비명 소리 였다. " 결국 그만두기로 정한 겁니까. " 닥터는 메디컬 센터의 개인 사무실에서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에게 안도의 표 정을 지어보였다. 방문객, 정진우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어제 가족들을 만나보고 결심했습니다. 더 이상 아내와 딸이 저 때문에 슬 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 어차피 지금와서 제가 일선에서 빠진다 고 한들 머신 아더의 조종에는 지장이 없을테고. " " 그렇기는 하죠. 각성한 가인 군 만으로도 이미 머신 아더의 동력 문제가 해 결되니까. 문제는…… 그 가인 군이 머신 아더를 탈 마음이 있느냐는 건데. " 닥터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곧 진우의 표정을 살피며 빙긋 웃었다. " 어차피 코마히코 군도 있고 그람드링 군도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군요. 오 히려 이쯤에서 진우 씨가 물러나는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바이오 닉스의 불일치로 위태롭기도 하고. 종내에는 아군마저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르니까요. " " 그건 그렇지만……. 어째 그 유달리도 시원스러워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걸립니다? " " 하하. 그만큼 제가 평소에 진우 씨를 걱정해왔다는 겁니다. 언제 실명할지 도 모르는 사람을 전장으로 내보내는게 마음 편한 일이었겠습니까? 사실 지 금에서야 밝히는 거지만, 진우 씨가 한번 출동할때마다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고요. " " 그러니까 그렇게 상쾌한 미소를 지으면서 걱정했다고 말해봤자……. " 진우는 닥터가 이렇듯 자신의 의견을 쾌히 따라주자 괜히 심통이 났다. 그래도 십년이 넘게 피스 대원으로 활동해왔는데. 섭섭해한다거나 안타까워 한다거나. 뭐랄까. 좀 더 잡아주기를 바랬다고……. " 진우 씨,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 닥터는 진우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진우는 툴툴거리며 그것을 무 시하려다가, 곧 닥터의 표정이 너무나 정중한 것을 깨닫고서 쓰게 웃었다. " 수고하긴요. 제값도 못하고 떨어져나간 녀석한테. " "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우 씨는 진우 씨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우리를 지켜온 겁니다. 피스메이커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 은 인생을 살아왔어요. " 닥터는 진우의 손을 굳건히 잡고 고개를 숙였다. " 모두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진우 씨. 모두를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 드립니다. " " ……. "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닥터도 참……. 뭘 이렇게 야 단스럽게 구시는 건지. " 에이. 감사는 무슨 놈의 감사에요. 마치 앞으로 안보실 것처럼 얘기하시네. 제가 피스 대원을 그만둔댔지 피스메이커를 그만둔다고 했습니까? 저는 앞 으로도 계속 팔라딘대에서 현역으로 뛸 거라고요. " " 아, 그렇군요. 제가 너무 앞서 나갔군요. 하하. " " 앞서나가다니……. " 역시 닥터. 그렇게 날 빨리 제대시키고 싶은건가. 진우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다. ' 정말 이대로 피스 대원을 그만둬도 되는 걸까? ' 시기상조인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무리하지만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동료 들의 힘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 리리스―! ' 피투성이가 된 친구의 시신을 끌어안으며 오열하던 가인의 모습. 그런 일이 또 다시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아니, 반드시 생겨날 것이다. 닥터의 말대로 그 때는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르지. 거기에 생각이 미 치자 진우는 오한이 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테레이아의 육체를 산산히 부 숴버렸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눈 앞이 깜깜해지는 그 절망감이라니― ' 그런 일이……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돼. ' 지금 피스 대원을 그만두는 것은 어쩌면 도망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서라느니, 동료를 위해서라느니. 다 허울좋은 변명일지도 모른다. 하지 만 진우는 더 이상 피스 대원으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어쨌든 닥터, 제 차트를 사령부에 보내주세요. 그만두겠다는 말은 제가 직접 가서 할테니까. " " 괜찮겠습니까? 혼자서? " " 예. 이런 건 혼자서 하지 않으면 폼이 나지 않잖아요? " 진우는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닥터의 눈에는 그 모습이 그토 록 서글퍼보일 수가 없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자신을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저 웃음이라니……. " 알겠습니다. 건투를 빌겠어요, 피스 그린. " 닥터는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진우의 등을 떠밀어줄 뿐이었다. 부디 진우가 한 선택이 그와 그의 가족, 모두를 위한 길이 되기를 바라면서. 쾅 그때 사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 닥터! 유화가 입원했다는게 사실이에요? " 그렇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불청객은 다름 아닌 기술부의 치프 시더 웰리스였다. 닥터는 그녀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듯 태연하게 응 수했다. " 늦었군요, 시더 양. 주 선생님이 입원한 것은 오전 중의 일이었어요. " " 아, 오늘은 언더 시티의 데이터 베이스를 늦게 갈무리해서. " 시더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런 무지막지한 소리를 했다. 언더 시티의 데이터 베이스는 그 방대한 양도 양이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엿볼 수 없는 기밀 사항이었다. 그런 정보를 시더는 지금 주기적으로 체크해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해킹에, 기밀 유포에, 불법 저장까지. 만약 이자리에 오퍼레이터 팀의 윤채영 치프가 있었더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서 툼 스톤 파일 드라이버를 시전했을 것이다. " 어쨌든! 뭣때문에 입원한거에요? 어쩌다가? " " ……글쎄요. 주 선생님이 입을 다물고만 있어서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그 람드링 뤼멘의 메인테넌스를 마친 직후 오른 손목이 부러졌으니. 뭐, 어렵 지 않게 짐작가지 않습니까? " " 그 인간 말종! " 시더는 전후 사정을 깨닫자 이를 부드득 갈며 분노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진 우는 영문을 몰라 닥터에게 물었다. " 주유화라면 피스 알리자린의 주치의 아닙니까? 그런 분이 어쩌다……. " " 일단 주 선생님을 찾아가보면 알게 됩니다. " 닥터는 시더와 진우를 이끌고 유화가 입원한 병실로 향했다. " 어떻게 된 거야? 응? 그 인간 말종이 이렇게 만들었지? 그치? " 유화의 병실로 찾아간 시더는 줄곧 그녀를 추궁했다. 그러나 시더의 질문 에 답할 유화는 오른 손목을 붕대로 감은채 그저 잠자코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유화의 태도에 결국 시더는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 쳤다. "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야? 말을 좀 해봐! 말을! 그래야 어떻게 돌아가 는지 알거 아냐! " " 시더 양, 환자에게 소리지르는건……. " " 환자는 무슨 놈의 환자! 이미 상처는 포션으로 다 나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늘어져있다는건 역시 속으로 끙끙 앓는 뭔가가 있다는 거지! " 닥터는 시더가 자신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치자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유화에게 물었다. " 주 선생님. 저도 시더 양과 같은 생각입니다. 일단 그렇게 혼자 고민해봤 자 상처에는 좋지 않을 것 같군요. 저희가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 지만 한번 털어놔보세요. 성심성의껏 선생님을 돕겠습니다. " " ……. " " 그래! 얘기해봐, 유화! " " ……. " 시더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유화는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닥터와 시더, 진우는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라고 해도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나름대로 유화와 티격태격하며 정이 든 시더로서는 그런 유화의 냉담한 태 도가 섭섭하기 그지 없었다. 그때, 열리지 않을 것같던 유화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잠시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 " ……! "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 그람드링, 그 아이가 뭘 꾸미고 있는 것 같아요. " " 꾸며? 뭘? " 시더가 영문을 몰라 되묻자, 유화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유달리 들떠 있는 것 같았어요. 뭔가 좋은 일이 있다고만 하던데……. 제 생각이지만 그 일이 가인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 " 가인이와? " 모두의 인상이 딱딱해졌다. 그러고 보니 물증은 없었지만, 그람드링은 예전 에 가인을 암살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시폰 뤼멘의 사주였지만 그것을 제하고서라도 그는 언제나 노골적으로 가인을 적대해왔다. 저번 머신 아더 탈취 건 때만 해도 그렇다. 만약 그때 가인이 차원 진동으 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그람드링의 아켄석 탄이 그의 목숨을 앗아 갔을지도 모른다. " 정진우 대위님, 이시랬죠? 정보부 소속의. " 진우는 유화가 자신을 향해 묻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 예. 그렇습니다. " " 최근 그람드링에게 온 시폰 뤼멘의 통화 중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 " 이상한 점이라. 저도 오퍼레이터 팀의 윤 치프에게서 보고받는 입장이라 자 세히는 잘……. 그래도 특별한 내용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 그럼 그람드링에게 온 물품이라던가 하는 것은? 저번의 이상한 도끼도 그렇 고 시폰 뤼멘이 주기적으로 뭔가를 보내오는 것 같던데. " " 아, 있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무기 조달이 있었군요. 아마 물품 체크는 시더 양이 직접 하지 않았습니까? " " 맞아요. 내가 분해해서 다시 재 조립까지 했었죠. " 시더는 안경을 번뜩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 시폰 뤼멘이 보내온 건 플라스마를 이용한 아켄석제 도끼였어요. 패턴 레 드나 패턴 버밀리온같이 반물질 커터를 만들지 못하는 능력자들을 위한 절 삭성 무장인데, 저도 예전에 한번 시도해보려고 했던 응용 과학이죠. 다만 차원 구조가 다른 몬스터에게는 별 소용이 없는지라 개발 단계에서 탈락되 었지만. " " 그건 꼭………마치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오라 능력자를 상대하기 위한 무기같군요? 예의 아켄석탄 같은? " " 맞아요. 정말 기분 나쁘다니까요. " 시더는 닥터의 말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유화는 재차 시더에게 물었다. " 그 무기 외에 다른 것은? 또 뭔가 없었나요? " " 으음. 다른 거라고 해도 딱히……. " 시더는 잠시 고민하다가 성과가 있었는지 손뼉을 마주쳤다. " 아! 이번에 보내온 물품들 중에 플라스마 도끼 말고도 이상한 리모콘이 들 어있었어. 아마 뭔가를 작동시키는 발신기 같았는데. " " 발신기? " " 응. 그러니까 사이리스터의 원리를 따르는 게이트 회로에 신호를 인가시 키는 장치였어. 뭐랄까. 비슷한 방식으로는 오라제어정류기(ACR)가 있는 데…. 아, 맞아! 그래. ACR이다! 그거였어! 오라제어정류기를 원격으로 조 종하는 발신기 타입이야.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 " ACR을 작동시키는 발신기……. ACR은 따로 들어있지 않았고? " " 들어있을리가 없지. 그런 걸 아무 생각도 없이 통과시켰을 것 같아? 오라 제어정류기는 엄연히 초전도 현상을 야기시키는 증폭기라고. 오리하르콘이 없는 상태로는 반쪽짜리 역할 밖에 못하지만 엄연한 폭약의 일종이야. 그 런 위험한 물건을 그 인간 말종에게 쥐어주다니,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지. "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진우가 이의를 제기했다. " 그건 이상한데요. ACR도 없는 제어기라니. 왜 그런 물건을 피스 알리자린 에게 보낸 걸까요? 뭣때문에? 따로 ACR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 " 그게 나도 의아하지만……. 으음∼ " 피스메이커는 AI 컴플리트 세트와 머신 아더에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엄 격히 ACR의 반출을 금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미 오리하르콘과 접목시킨 ACR 은 하나의 회로로 안착되기 때문에 따로 떼어내봤자 사용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결국 이 언더 시티 내에서 제어기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다. " 잠깐……! " 유화의 외침에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유화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기억을 더듬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 한 가지……있어요. 구할 수 있는 방법이, ACR을 구할 수 있는 데가. " " 뭐라고! " 일동의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 레드 브라더스, 그람드링 뤼멘과 오르크리스트 뤼멘의 뇌 CT를 찍으면서… …. 그래요. 그 아이들의 뇌하수체 밑에 소형의 오라제어정류기가 박혀 있 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알고 있었는데……. " " 뇌하수체 밑에 ACR을 박아넣었다고? 맙소사. 그랬다간 송과선에 초전도 현상이 들어가서 끔찍한 고통을 유발시킨다고! 미쳐버리는건 일도 아니야! 그런걸 사람의 머리 속에 집어넣는다니, 대체 무슨 짓을……! " 시더의 경악에, 진우는 시폰 뤼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분노했다. " 아마 그걸로 레드 브라더스를 관리해왔던 거겠죠. 고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고통을 주면서……. 시폰 뤼멘, 그 남자가 생각할만한 방법입 니다. " 진우의 말에 듣고 있던 모두는 기가 질렸다. 그런 반인륜적인 행위를 서슴없 이 할 정도라니. 새삼 시폰 뤼멘의 악독함에 치가 떨린다. 그에게는 인정이란 것이 없단 말인가? 닥터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 하, 하지만 말입니다. 그 ACR을 어떻게 꺼낸다는 거죠? 뇌하수체 밑에 있 는 물건을? 외과 수술을 하더라도 족히 다섯 시간이 걸릴 수술인데. 하물 며 메디컬 센터의 도움 없이……. " " 이미 오르크리스트, 그 아이가 죽어버렸잖아요. 우리에게 해부를 맡기지 않고 동생을 박제시킨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거에요. "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는 유화의 말에 시더가 헛구역질을 일으켰다. 그녀로 서는 제어기를 보낸 시폰 뤼멘이나, 오르크리스트의 머리에서 ACR을 꺼내려 고 하는 그람드링이나 다들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들 미쳐있는게 분 명하다! " 그래. 그럼 ACR을 그렇게 구한다치고……. 그럼 그 ACR을 어디에 사용하 려는 거지? " 유화는 손톱을 깨물며 고심했다. 닥터와 시더, 진우도 각자 머리를 굴리며 ACR의 용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는 ACR. 그래봤자 일반 사람들에게는 허열이나 일으킬 정도의 효과 밖에 주지 못한다. 초전도 현상은 오라 능력자들에게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ACR이 오라 능력자에게 위험한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초전도 현상이 오라 능력자의 체내에서 초전도 현상을 유발시켜 오라를 증폭 시킬지라도, 오라 능력자는 이 초전도 현상을 제어함으로서 초전도 폭발을 방 지할 수 있다. 유익하면 유익했지 유해한 물건이 아닌 것이다. ' 그래. 그런 ACR로 가인을 대체 어떻게 하겠다고……. ' 그러나 가인과 오라제어정류기를 결부시키는 순간 모두의 의문은 해소되었다. 지금의 가인은……, ' 오라 능력을 봉인하기 위해, ' 오리하르콘 감응용 폭탄을 목에 달고서……. " 이런 빌어먹을―! "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정진우였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곧바로 가인 이 수감된 형무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닥터와 시더, 유화는 그렇게 녹색의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진우의 모습에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 았다. " 어, 어서 사령부에 연락하지 않으면! " " 아니, 그 전에 교도소를! 팔라딘대에게 먼저 연락하는 편이! " " 오퍼레이터 팀에 연락해요! 그쪽이 제일 빨라요! " 만약 아무 것도 모르는 가인이 ACR과 접촉할 시에는, 그의 의도에 상관없이 ACR이 패턴 블루의 오라를 증폭시킬 것이다. 그리고 증폭된 오라는 오리하르콘 감응용 폭탄의 타이머를 작동시켜서……. " 그람드링 뤼멘. 그 아이가 가인 씨를 면회왔다고요? " " 예. 뭔가 선물을 건네주고 가는 것 같았는데. " 한편 그 시각, 시민과 마리는 이러한 일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6 - Ｂy Ｎext Ｎeo =-=-=-=-=-=-=-=-=-=-=-=-=-=-=-=-=-=-=-=-=-=-=-=-=-=-=-=-=-=-=-=-=-=-=-= 63빌딩이 한눈에 들어오는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재영은 영문도 모르고 여자 친구에게 이끌려 이 곳 으로 와야 했다. 그런 그에게 시내가 내민 것은 커플 전용의 2인승 자전거였 다. " 재영 군, 페달 밟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어. 방금 지나간 여자한테 한 눈 팔았지? " " 그, 그럴 리가. " 뒤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시내의 목소리. 재영은 안색이 창백해져 열심히 커 플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항의했다. ' 제발 한눈 팔 겨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무슨 여자애가 지치지도 않고 이렇게 줄창 내달리는 거야? 벌써 난지 지구까지 전력질주로 왕복했잖아! ' 시내는 저 가녀린 몸에는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체력과 근력을 보유하고 있 었다. 재영으로서는 그녀의 페이스에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솔 직히 그가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는 거침없이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 또 느려진다, 또! 정말∼ 할 마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 " 우오오오오―! " 재영은 이를 악물고 젖먹던 힘까지 짜내 페달링했다. 달려라, 박재영! 발이 으스러져라 밟고 또 밟아! 여자 친구 앞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여줄소냐! 쓰러지더라도 하얗게 불 태운 끝에 쓰러져! ' 흐, 흐에엑. ' 그러나 사람의 몸이란 엄연히 한계가 정해져 있고 가진 만큼만 연소할 수 있 는 법이다. 산소 결핍으로 얼굴이 청색으로 변한 재영은 쥐어짜는 목소리로 시 내에게 하소연했다. " 시, 시내야……. 우리 잠시만 쉬자……. 잠시만……. " " 응? 그럴까? 그럼 저 벤치에서 멈추자. " " ……. " 어이. 그렇게 쉽게 승낙해주는 거였어? 재영은 괜히 지금까지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같아서 허탈한 심정을 금치 못했 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체면이고 나발이고 진즉에 쉬는 거였는데! " 으그그∼ 나 죽는다! " 재영은 쓰러지듯 자전거에서 내려 벤치에 드러누웠다. 시내는 그런 남자친구 를 못말린다는듯 바라보다가 2인승 자전거를 세우고 사뿐하게 재영의 곁에 앉 는다. 땀 하나 흘리지 않고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여자 친구의 모습에 재영은 혀를 내둘렀다. ' 강해……. 너무나 강해. ' 어쨌든 이대로 계속 달리다간 집에 걸어서 못돌아가리라는 예감이 팍팍 들 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 이 지옥 레이스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재영은 모처럼의 데이트에서도 생존 본능을 따라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진 심으로 유감을 표했다. ' 어휴. 그러게 시내는 왜 갑자기 자전거를 타러 가자고 해서. ' 아니. 처음에는 인라인이었지. ' 만약 그대로 인라인을 탔더라면……죽었겠군. 그나마 2인용 자전거였기에 망정이지. ' 재영은 서늘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슬쩍 시내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그들의 데이트는 시내가 우격다짐으로 이끌고, 재영이 뒤를 따르는 형 국이었다. 별반 오늘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 뭔가 무리하는 것 같은데. ' 재영은 시내가 왠지 억지로 활발하게 구는 것 같아 위화감을 느꼈다. 뭐, 그 렇다고 해서 평소에는 그녀가 조용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의 시내에게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 그것만은 그녀의 남자 친구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 시내야, 무슨 일 있어? " 시내는 벤치에 누운 재영이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묻자 당황했다. " 무, 무슨 일이라니?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 " 아니. 그냥. 없으면 말고. 좀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 " ……. " 시내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재영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둔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이럴 때에만 유독 날카롭다니까……. 그녀는 재영이 자신을 신경써주고 있다는 것이 기뻐서 살포시 미소지었다. " 표정이 어두운 건 내가 아니라 재영 군이겠지. " " 내가? " 시내가 뜻밖의 말을 하자 재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요 근래 계속 어두웠어. 가인 군의 일이 걱정되었던 거지? " " 어……으응. " 그랬구나. 재영은 그제야 자신이 느낀 위화감을 깨닫고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시내의 표정이 어두웠던 게 아니다. 그녀를 어둡게 봤던 자신이 어두운 거였다. 시 내는 그런 재영이 걱정되어서 열심히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의 가혹함이 고의적이었던 건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 미안. 신경 쓰이게 했나보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 재영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내에게 사과했다. 시내는 고개를 저으며 그 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 괜찮아. 가인 군은 재영 군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친구잖아. 나라도 그런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가만있지 못할 걸. " " 시내야. " " 그래도 한 가지 서운한게 있다면……. 재영 군이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 지 않는다는 거겠지. 가인 군과 유리 양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민체 스터 양과 류 군이 왜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지. " " ……. " 재영은 시내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했다. 어떻게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가인이가 피스메이커라고. 유리도, 브루스도 모두 그 일로 인해 학교를 나오 지 못한다고. 그 얘기를 시내에게 털어놓는 순간, 시내 역시 피스메이커의 감 시 대상에 들어갈 것이다. 재영은 자신의 여자 친구를 그런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 나도 정확하게는…… 무슨 일인지 몰라. " " 정확하게 모른다, 라는 건 대충은 알고 있다는 뜻이네? " " 어, 아니, 그게 그런 건 아니지만. " 재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반응을 보이고서도 시내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길 바라는 것은 그의 욕심일 것이다. " 됐어. 재영 군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 그러나 시내는 의외로 깨끗하게 물러났다. 그녀는 더 이상 재영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거기서 일단락을 지었다. "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거지? 재영 군이 가인 군의 일에 대해서 모를리 가 없잖아. 그래도 말하지 않는다는건 분명 말하면 누군가가 곤란해지기 때 문이니까. " " ……. " " 재영 군이 배려심이 많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걸. 그러니까 괜찮 아. 나중에 말해줄 수 있을 때 말해줘. 그때까지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 지 않을게. " " 시, 시내야. " 재영은 시내의 배려에 가슴이 찡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그녀와 같은 여자 친구를 사귄 것은 자신의 인생 중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물론 그녀의 힘이 약간 줄어든다던가 아무 때나 메치기를 하지 않는다던 가, 아쉬운 점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 자! 그럼 다시 한번 타볼까! 시내는 이번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운전 은 모두 이 박 기사에게 맡겨두시라! " 재영은 기운차게 몸을 일으키며 2인승 자전거에 올라탔다. 시내는 고소하며 그의 뒤편에 몸을 실었다. " 의욕이 넘치는 건 좋지만∼ 괜찮겠어, 재영 군? 이 앞부터는 은근히 오르 막 길인데? " " ……. " 재영은 결국 집에 걸어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울상을 지으며 페달을 밟으려는 중, 재영은 전방에서 걸어오는 한 괴 이쩍은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인영을 가리키며 시내에게 말했다. " 시내야, 저기 저 사람 좀 봐봐. 외국인인가? 되게 특이하게 생겼다, 그치? " " 어디 어디? " 시내는 재영의 등 너머로 목을 빼내며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과연 재영의 말대로 전방의 외국인은 주위의 이목을 한데 끌어모으는 묘한 분위기 를 풍기고 있었다. 하늘색과 갈색의 브릿지가 들어간 긴 흑발,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검 은 코트. 그리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중성적인 이목구비. 그야말로 일상에서 볼 수 없는 비현실을 한데 끌어모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재영은 그런 외국인의 모습에 정신을 빼앗겼다가 그만 자전거의 중심을 잃어 버렸다. " 엇! " 하마터면 넘어질뻔한 그는 재빨리 발로 자전거를 받치며 뒤에 타고 있던 시 내에게 사과했다. " 미안, 시내야. 괜찮아? " 툭 그러나 그의 사과에 돌아온 것은 무언가가 도로에 쓰러지는 소리였다. 도로에 쓰러진 것은 시내였다. " 시내야? 시내야! 왜 그러는 거야? 유시내! " 재영은 당황하며 자전거에서 내려 시내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를 살 피던 그는 흠칫 몸을 떨어야만 했다. 시내는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마치 마네킹이라도 된 것처럼 사 지가 굳어 있었다. 얼굴은 앞의 놀라는 표정에서 멈춰 있었고, 몸도 자전거를 타던 자세 그대로에서 굳어 있다. " ……. " 그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고, 온기도 느 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게 대체……. " 그녀의 몸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영은 울상이 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 다. 누군가에게,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 ……! "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방금전까지 인파로 시끄럽던 공원이 완벽하게 침묵하 고 있었다. 인라인을 타던 남녀들이 달리던 자세 그대로에서 땅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잔디 밭에서 동아리 모임을 가지던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에서 멈춰 있 었다. 매점에서 물건을 사고팔던 사람들도, 자동차를 주차하던 사람들도, 모두, 모두 멈춰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 으, 아아. " 재영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뭔가에 등 을 부딪히고 말았다. 그의 등 뒤에는 어느새 다가온 건지 검은 코트의 외국인 이 서있었다. 이 사람은……움직일 수 있는 건가? " ―! " 그러다 외국인과 눈이 마주친 재영은 곧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음을 깨달 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입을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주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이 굳어진 것이다! " 후. " 외국인은 재영에게서 눈길을 거두어 들이며 가볍게 코웃음쳤다. 그리고 그를 지나쳐 계속 고수부지를 따라 걸어간다. 그렇게 외국인이 지나간 자리로는 수십, 수백의 살아있는 마네킹들이 즐비하 기 시작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어김 없이 재영의 전철을 밟아야 했 다. 거기에 예외는 없었다. " 이 정도라면……. " 여의도 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른 외국인은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 이 만든 정체의 현장을 돌아보았다. " 슬슬 교섭을 시작해도 되겠군. " 스스스스스 무미건조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반응하여 메두사의 그림자로부터 검은 사슬들이 뱀처럼 기어나 왔다. AI슈츠를 장착한 진우는 패턴 그린의 힘을 사용하여 언더 시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메디컬 센터에서 팔라딘대의 주둔지까지 최단 거리로 내달렸다. 피할 수 있는 장애물은 뛰어넘고, 그렇지 못할 경우는 충격파로 부서뜨리며 전진한다. 최근 세번이나 실명한 그는 자신의 전자 의안이 어느 정도 가속에 견뎌낼 수 있는가 대략 파악한 뒤였다. 진우는 아슬아슬하게 의안의 한계까지 가속하여 렌트카로 20분이 걸릴 거리 를 단 1분만에 주파했다. ' 크― 또 눈이! ' 진우는 팔라딘대의 주둔지가 보이자 재빨리 가속을 줄였다. 하마터면 또 다 시 의안의 시신경이 끊어질 뻔 했던 것이다. 위병소에 있던 초병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녹색의 잔상을 발견하자 비명 을 내질렀다. " 머, 멈춰―! " " 진우 대위님? " 주둔지의 철창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진우는 놀라는 초병들 을 뒤로 하며 그대로 AI슈츠의 각력으로 철조망을 뛰어넘었다. " 지나간다! " 콰드드드득 속도를 줄였건만 여파가 남아있었는지, 진우가 뛰어넘은 철조망이 가속의 후 폭풍에 뒤흔들렸다. 그 바람에 초소의 유리창까지 덩달아 깨지자 위병소에서 는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진우는 자신의 난입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부하들에게 양해를 구할 틈도 없이 곧장 교도소로 향했다.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절차 같은 것을 밟고 있을 틈 이 없었다! 촤아아아악 진우는 마치 오토바이로 휠스핀을 하는 것처럼 교도소의 입구에 멈춰섰다. 그리고 자신을 황당하다는듯 바라보는 대원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AI 슈츠를 해제시켰다. 행여나 교도소 안에 있는 가인의 오라가 패턴 그린의 오 라에 반응하여 깨어난다면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이 터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 대위 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 " 설명하고 있을 시간 없어! 어서 유가인에게 안내해! " 진우는 어리둥절해 하는 대원들의 등을 떠다밀며 교도소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달리는 와중에 대원들에게 물었다. " 오늘 유가인을 면회온 사람이 누구 누구 있지? " " 아, 예. 그게 지금 막 피스 옐로우 한시민 씨와 피스 레드 성마리 씨가… …. " " 제길. 하필이면! 그리고 또? " " 오전 중에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이 방문했습니다. " " ―! " 진우는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그람드링이 이미 가인을 면회왔다니! 그래 서야 이렇게 부리나케 달려온 보람이 없지 않은가? 벌써 상황이 끝나버린 것 은 아니겠지? 가인의 목에 채워진 오리하르콘 감응 용 폭탄은 작년, 진 사령관이 북경에서 인민 해방군에게 착용당했던 제어구를 다운 그레이드시킨 인원살상용(細裂手榴 彈)이었다. 폭파 범위는 반경 2미터도 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착용 자의 목숨은 앗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사람들 또한 폭발에 휘말 릴 위험이……. " 시민 씨! 마리 양! 다들 괜찮습니까! " 유가인, 무사한 거겠지! 진우는 다급히 가인이 갇힌 감금 시설을 찾았다. 특별 수감자용 감금 시설은 이미 앞의 면회자들을 들여보내기 위해 강철문을 개폐하고 있었다. 진우는 감 금 시설 앞에서 자신을 제지하려는 대원을 밀쳐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 진우 씨? " 방탄 유리 앞에서 가인을 면회하던 시민이 가장 먼저 진우를 발견했다. 그녀 의 부름에 발맞춰 가인과 마리도 그를 돌아본다. 시민은 설마 진우가 교도소 로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반사적으로 가인의 눈치를 살폈다. ' 지금 가인 씨와 진우 씨를 만나게 하면 안되는데! ' 그런 그녀의 걱정대로 진우를 발견한 가인의 표정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분노가 얼마나 확연했던지 방탄 유리 밖의 사람들에게조차 가인의 살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적개심이라니! 이건 도저히 동료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진우는 노골적인 가인의 적의에 씁쓸함을 금치 못했지만, 곧 마음을 추스리 며 일행에게 다가갔다. " 아직까지는 별 다른 일이 없었던 것 같군요. 모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 " 별 다른 일이라뇨? " 시민은 진우에게서 초조한 기색이 보이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진우 는 그녀에 대한 대답을 미루며 천천히 가인에게 말했다. " 유가인. 아마 오전 쯤에 피스 알리자린이 널 면회오지 않았나? " " ……그런데요? " 가인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으며 진우를 노려보았다. 진우는 그 시선을 피 하지 않으며 똑바로 마주했다. " 그와 무슨 얘기를 나눴지? 아니. 너에게 건네준 물건이라던가……. 그런건 없었던 거야? " " 물건이라면……. " 가인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침대에 아무렇게나 팽개쳐둔 작은 금속구를 가리켰다. " 저것 말이에요? " " ……! " 진우는 그 금속구를 보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것이다! 저것이 바로 주 유화가 말했던 오라제어정류기! 진우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 그래. 그거야! 당장 이쪽으로 넘겨라! 어서! " " 진우 씨? 대체 아까부터 왜 그러는 겁니까! " 보다못한 마리가 그에게 소리쳤다. 진우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상황을 얘기해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 피스 알리자린이 가인에게 건내준 물건은 아무래도 마이크로 타입의 오라 제어정류기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가인에게 ACR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는 다들 알고 있겠죠. " " ACR! " 마리와 시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째서 그런 물건이 가인에게 있는 거지? 아니, 그 이전에 그람드링이 ACR을 가지고 어떻게 가인을 면회할 수 있었던 걸까? 그녀들이 진우를 따라 들어온 팔라딘 대원들을 노려보자 그들은 당황하며 손 을 내저었다. "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희는 확실하게 몸 수색을 했습니다. 물론 저 금속구의 오라 반응도 체크했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고요! " " 그거야 저 ACR이 원격 조작으로 게이트 신호를 인가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지. 신호가 없이는 단순한 금속일 뿐이야.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무 리가 아니야. " 진우는 침중하게 답하며 다시 가인을 돌아보았다. " 어쨌든 그 ACR이 작동하는 순간, 네 목에 걸린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이 작 동하게 될 거다. 그 전에 ACR을 오라가 미치지 않는 범위로 떨어뜨려야해. 그러니 어서 개폐구로 ACR을 넘겨. 이렇게 꾸물거릴 틈이 없다고! " " 그래요. 가인 씨! 빨리 이쪽으로 보내세요! " " 가인! " 시민과 마리도 방탄 유리에 붙어 소리쳤다. 하지만 이런 모두의 재촉에도 불 구하고 가인은 별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침대로 걸어가 금 속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선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마치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는듯한 태도, 태연함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들로 서는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 왜 그러는 거야, 가인? 뭐하고 있어! 어서 보내지 않고! " 마리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방탄 유리를 두들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인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그는 금속구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천장의 CCTV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마 침내 입을 열었다. "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 짐작하고……있었다니? " 그람드링 뤼멘이 나에게 이 물건을 준 의도. 이게 ACR인줄은 몰랐지만 대 충 내 목숨을 노리는 뭔가라고 생각했죠. " " 아, 알고 있었단 말이야? " 마리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도 별반 그녀와 다르지 않은 표정이 다. 모두들 기가 막혀하고 있었다. " 예. 그 녀석은 예전부터 절 노리고 있었으니까요. " 가인은 8월 달, 자신이 오라를 상실했을 때 집으로 쳐들어와 자신을 죽이려 고 했던 그람드링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그때 녀석의 리볼버가 입 안으로 들 어오던 느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 알고 있었다니……. 그럼! 그럼 어째서 그런 물건을 받은 거에요? 알고 있 었으면서! " 시민은 속이 상해 버럭 소리질렀다. 그녀는 도무지 가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부러 위험을 자처하다니!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한단 말인가? "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듣겠다. 빨리 ACR부터 넘겨. " 진우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가인에게서 ACR을 회수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요구에 가인은 여전히 CCTV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꾸했다. " 소용없을 거에요. 이 ACR은 원격 조작으로 작동하는 거랬죠? 아마 녀석은 저 카메라로 여기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거에요. 그러다 내가 ACR을 넘 겨주려 할 때 작동시킬 셈이겠죠. " " 모두가 안도하는 순간 폭발시키겠다는 건가. 확실히 녀석다운 수법이군. 악질적이기 짝이 없어. " 진우는 그람드링과 직접 페어를 짜봤기에 그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 그럼 방법은……없는 건가. ' 진우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고 한 탄했다. 그의 가속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람드링이 스위치를 넣기 전에 폭탄 의 범위 밖으로 ACR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패턴 그린이 패턴 블루와 감응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모든 것이 물거품 된다. 아 무리 ACR을 떨어뜨리더라도 오라가 폭탄을 작동시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라를 사용할 수 있어야 뭘 하든 할텐데! " 바보같은 자식!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면 좀 더 신중했어야지! 왜! 왜! " 진우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유리창을 두들겼다. 그런 그에게 가인은 냉정하 게 말했다. " 뭘 그렇게 걱정하는 척 하는 거에요? " " 뭐? " 진우는 기가 막혔다. 걱정하는 척이라니! " 더 이상 오라의 주인을 이용하지 못하니까 아까워진 거에요? 성당 기사단 의 계획과 어긋났나 보죠? " " ―! " 성당 기사단! 그 이름이 생소했던 마리와 대원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 보았다. 반면 진우와 시민의 안색은 어두워진다. ' 가인 씨, 성당 기사단에 대해서……알고 있었던 건가? ' 시민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성당 기사단이 가인을 이용하려 한다 는 것을. 그 때문에 그녀는 그에게 피스메이커를 그만두라고 만류한 적도 있 었다. 가인이 시영과 같은 길을 걷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제지하기에는 가인의 의지가 너무나 확고했고, 또한 진 사령 관이 성당 기사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하에 그의 잔류를 인 정해야 했다. " 가인 씨, 그렇지 않아요. 성당 기사단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피스 메이커는, " " 이제는 지긋지긋해요! 이용당하는 것도! 목숨을 위협받는 것도! 의지에 상 관없이 놀아나는 것도! 더 이상 그런 꼭두각시 놀음은 사양이야! " 가인은 시민의 설득에 아랑곳하지 않고 울분을 토해냈다. 그것은 리리스의 죽음 이후 줄곧 그의 가슴에 쌓여왔던 분노이자 증오이자 슬픔이었다. " 그런 꼭두각시 놀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 거죠? 얼마나 더 슬퍼해야 하는 거죠! 왜 자기들 좋을데로 타인의 인생을 가지고 노는 거에요! 대체 무슨 권리로! " 쾅― 가인은 방탄 유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 그런 제멋대로인 녀석들한테! 그런 제멋대로인 녀석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 리리스는―! 가인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그녀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보여줬 던 과거를 떠올렸다. 한평생 노아의 원로회에게 이용만 당해왔던 그녀. 인간 으로서 응당 누려야할 기쁨도 즐거움도 받지 못했던 그녀. 그러다 테라에게 이용당하려는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런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그녀는……. ' 리리스를 돌려줘! ' 가인은 이 자리에 테라와 노아의 흉수들이 있다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내 친구를 돌려달라고! 내 소중한 사람을, 내 사랑하는 사람을! 너희들의 욕 심 때문에 희생된 그녀를 살려내라고! ' 가인 씨……. ' 시민은 가인이 분노하는 이유가 리리스, 테레이아 때문임을 깨닫고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새삼 그의 상실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 가인 씨는 그토록 그녀를……. ' 시민은 아련히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참으며 조심스레 진우를 바라보았다. 이런 가인의 비통한 모습에 진우가 얼마나 죄책감을 받을지 걱정스러웠던 것 이다. 하지만, " 그래서? 그렇게 고민한 끝에 네가 생각해낸 방법이 고작 이런 거였냐? " 시민의 걱정과 달리 진우는 차갑게 가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진우 씨? " 이용당하기는 싫다. 그러니 녀석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으로 복수하겠다?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서? " 진우는 방탄 유리에 기댄 가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조소했다. " 아주 제대로 웃겨주는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녀석들이 눈 하나 깜빡할 거 같냐? " " ……! " " 무엇보다 자기 목숨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는 것부터가 글러먹었어.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자신의 소중한 사람 하나 지켜내지를 못하는 거다. " " 뭣! " 그 말에 가인은 더 이상 진우에 대한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내 소중한 사람을 앗아간게 대체 누군데! 바로 당신이잖아! 그러나 가인이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진우의 호통이 그를 두드렸다. " 죽는다고?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고 그런 소리를 해! " 남겨진 사람들의……슬픔? " 테레이아를 잃었을 때 넌 어땠지? 네가 느낀 상실감과 고통은 어느 정도였 냐?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야! " 리리스를 잃은 슬픔. 그걸,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얼마나 슬퍼하고 울었는지 모른 다. 몇날며칠 그녀만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여전히 그녀에 대한 감정들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기억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져서 가인의 가슴 깊이 자리 잡는다. ' 아무렇지도 않았을리가 없잖아. ' 그녀를 좋아했던 만큼……. 그녀를 잃은 슬픔 또한……. ' 아무렇지도 않았을리가 없어. ' 가인은 복받쳐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에게 진우 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런 슬픔을……우리에게도 주고 싶은 거냐? " 그 질문에는 수십, 수백 번도 더 후회하며 자신을 탓해왔던 상처 투성이의 남자가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실을 수 있는 아 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가인은 애써 그런 진우를 외면했다. " 정 대위님! " 진우는 교도소의 대원들에게서 특별 수감소의 열쇠를 빼앗듯이 건네받아 방 탄 유리 옆벽의 개폐구를 열고, 그 안의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기계음과 함 께 방탄 유리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가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 뭐하는 거에요! 지금? " " 뭐하기는. 네 녀석이 있는 쪽으로 가려면 이 유리를 열어야 할 거 아냐. " 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인이 있는 수감소로 발을 내딛었다. 가인은 자신 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손으로 목의 폭탄을 감쌌다. " 어쩌려는 거에요!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고요? 제 정신이에요, 지금! " " 제 정신이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을 하려는 거 아냐. " 진우는 히죽 웃으며 가인의 앞에 섰다. "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가속으로 너에게서 ACR을 떨어뜨리겠어. 오리 하르콘 감응 폭탄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속력이라면, " " 무리에요! 그런게 가능할리 없잖아요! 더구나 진우 씨, AI슈츠조차 입지 않았는데! 그런 상태로 가속했다간! " " 그만큼 이미지 메이킹을 완벽하게 하면 되지. " " 그게 안되서 지금까지 메디컬 센터의 신세를 진 거잖아요! " " 뭐야? 뭘 그렇게 걱정하는 '척'하는 거에요? " " ……! " 가인은 진우가 자신이 했던 말을 토시하나 바꾸지 않고 써먹자 얼굴이 붉어 졌다. 지, 진짜 이 사람은 정말! " 자자. 어쨌든 방법은 정해졌으니 실행으로 옮길 일만 남았군. 다들 제가 한 말은 알아들었겠죠? 그래도 위험할지 모르니까 수감소 밖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행여나 폭발에 휘말릴지도 모르니까요. " 진우는 그렇게 주위를 환기시키며 방탄 유리 밖의 시민 일행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느새인가 시민과 마리는 방탄 유리를 지나 그의 뒷편에 다가와 있었 다. " 계속하세요, 진우 씨. " " 리더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 진우는 무모한 그녀들의 행동에 한 소리를 하려고 했지만, 곧 소용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편의 가인에게 미소했다. " 어때? 이런 사람들을 놔두고 혼자 죽을 수 있겠어? " " ……. " 가인은 그런 동료들의 모습에 웃어야될지 울어야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 다. " 참으로 눈물 겨운 동료애로군. " 그람드링은 어두운 자신의 방에서 눈 앞의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TV에는 가 인의 예상대로 특별 수감소의 CCTV영상이 비춰지고 있었다. 무음 영상이었기 에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상황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진우와 시민, 마리가 모두 가인의 수감소 안으로 들어오자 킥킥거렸다. " 크크크. 정말이지 세상은 불공평해. 뭐야, 이건? 왜 다들 이런 자식만 감 싸주는 거야? 응? " 그람드링은 자신의 뒤편에서 머리가 으깨진채 뇌수를 흘리고 있는 동생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치밀어올랐다. 이걸 분노 라고 해야할까 서글픔이라고 해야할까. 단지 그가 한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오라의 주인, 유가인을 진 심으로 증오한다는 거였다. " 나는 크리스 뿐이었어. 내 동생. 하지만 그 녀석마저 이제는 내 곁을 떠 나버렸지. 난 혼자야. 언제나 혼자. 앞으로도 혼자. 죽을 때까지 혼자. " 외로움. 고립감. 그러나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 내가 이런 것이……우리가 이런 것이 루미네선스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빌어먹을 여신의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 선택받지 못했다는 절망. 선택받은 녀석들에 대한 시기! 질투! 선망! " 우리의 행복을 네 놈들이 전부 가져갔기 때문이라면! 그래! 하나도 남김 없이 죽여주지! 모두 빼앗아 주겠어! 네놈들의 잘난 여신을 범하고 또 범 해주마! " 오라의 주인! 오라 능력자! "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라! " 그람드링은 광소를 터뜨리며 ACR 리모콘의 스위치를 눌렀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7 - Ｂy Ｎext Ｎeo =-=-=-=-=-=-=-=-=-=-=-=-=-=-=-=-=-=-=-=-=-=-=-=-=-=-=-=-=-=-=-=-=-=-=-=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의 작동 원리는 AI슈츠와 흡사하다고 보면 돼. 착용 자의 체내에서 반응하는 초전도 현상이 오리하르콘을 공명시키고, 공명된 오리하르콘이 폭탄의 기폭 장치를 가동시키는 거지.》 진우와 일행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시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대로라면 액화질소로 냉동시키거나 폭탄처리 로봇을 이용, 안전한 장 소까지 옮긴후 물대포나 산탄총으로 날려버리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 " 그렇게 느긋하게 공략할 여유가 없단 말이죠. " 진우는 탄식하며 수용 시설의 CCTV를 노려보았다. 아마 이 모든 일을 꾸민 장본인은 저 TV를 통해 희희낙낙거리며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행 여나 폭발물 처리반이 몰려온다던가 폭탄을 해제할 기미가 보이면 대번에 스 위치를 누를지도 모른다. ' 아니. 꼭 그런 것도 아니군. ' 사실 그람드링이 ACR을 작동시키는 데에는 특별한 기준이 없었다. 그저 자 신의 마음이 내킬때 스위치를 눌러버리면 그만이다. 일부러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기다려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렇게 신중을 기하는 것이 다 부질 없는 일인 것처럼 느 껴졌다. ' 제길. 그 자식, 조롱하고 있어. ' 그래. 일단은 녀석이 이렇게 당황하는 우리의 모습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 자. 그래서 여지껏 ACR을 작동시키지 않는 거야. 그렇다면 아직 우리에게 기 회는 남아있어! ' 좋아. 네녀석은 계속 웃고만 있어라. 그러는 사이에 멋지게 한방 먹여주 지! ' 진우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시더에게 물었다. " 시더 양. 제 계획은 가망성이 있습니까? " 《ACR의 사이리스터가 오리하르콘으로 보내는 인가 신호, 즉 이온(ion)의 전 달 속도보다 빨리 움직인다면……가능해요. 그 사이에 매체가 되는 증폭기 를 가인의 반경 50미터 이상 떨어뜨린다면.》 이온이란 양 또는 음 전기를 띠는 원자나 원자단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결 국 ACR의 인가 신호는 전기 신호라는 것이었고, 그 인가 신호를 발생시키는 것은 전파. 즉 폭발을 저지하려면 진우가 광속을 뛰어넘어야한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간신히 초음속에 달하는 진우로서는 불가능한 미션이다. 《하지만 가인이 갇힌 수감 시설은 외부의 전자파를 차단하기 위해 도전 성분 을 바른 도료로 칠해져 있어. ACR과 같은 고속 SCR의 전파를 완전히 차단하 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2초 정도 인터벌(interval)을 버는 것은 가능해. 거 기다 전파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시간 차가 발생하니까. " 그 정도의 조건이라면 충분히 시도할 가치가 있었다. 패턴 그린의 소유자, 정 진우에게 2초란 2분보다도 더 긴 시간이다. ACR이 작동하기 전에 가인에게서 5 0미터를 떨어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인 것이다. 단지 문제는, 《괜찮겠어요, 미스터 그린? AI슈츠 없이 가속했다간 저번처럼 실명하는 것 으로 끝나지 않을 거에요.》 시더의 말에 듣고 있던 가인과 마리, 시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다. 진우가 AI슈츠를 착용하는 순간, 그람드링은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ACR을 작동시킬 것이다. 그러니 상대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우는 AI 슈츠 없이 가속을 전개해야 했다. 《패턴 그린의 이미지 메이킹이 구현시킨 충격파가 육체를……,》 " 아아.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요. 옛날에 한번 된통 당해본 적이 있으니까. " 진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오라 능력을 각성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라트 발렌시아를 쓰러뜨릴 때 사용했던 슈팅스타. 맨몸으로 가속의 세계에 접어든 진우는 그 대가로 자신의 육체를 한번 잃어 야 했다. 그때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브루스의 신속한 응급 처치와 성당 기사단의 PET 치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가루가 되어 사라져가는 느낌. 그 느낌이 되살아 나자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 진우 씨. " 시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우는 애써 창백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 뭐, 벌써 십년도 더 된 일이에요. 그 사이에 죽어라 수련해왔으니 뭔가 발 전이 있지 않겠습니까. " 적어도 죽지는 않겠지……. 진우는 그 뒷말을 일부러 붙이지 않았다. 괜히 동료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 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불완전한 능력에 언제나 불만을 품어왔던 자신 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자신의 한계를 넘을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래. 좋게 생각하기로 하자! " 진우 씨. " 가인은 복잡한 심정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도박마 저 감행하는 그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테레이아를 죽인 일 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 진우를 자신은 무슨 마음으로 대해야 한단 말인가? " 유가인. "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가인에게 진우는 말했다. " 우선은 살아남는 거다. 생각하는 것은 그 뒤에 해도 충분해. 알겠지? " " ……예. " 가인은 눈앞의 그를 바라보다가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오직 이 상황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모두가 무사하기만을 기원하도록 하자. 그렇게 모두가 각오를 굳히자 진우는 심호흡을 하며 CCTV의 눈치를 살폈다. 패턴 그린의 가속을 카메라의 프레임이 따라올리 없었다. 아마 그가 전력으로 가속하는 순간, 화면 상에서는 이미 그의 모습이 사라져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TV를 뚫어져라 응시해도, 눈으로 진우의 움직임을 쫓다간 제때에 ACR 을 작동시키지 못한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패턴 그린의 이미지 메이킹만 완벽하다면 분명……! ' 응? 잠깐……. ' 나, 지금. ' 뭔가를 잊어버리고 있지 않나? ' 진우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옴팔로스에서 자신을 부르 던 그람드링의 호칭이 생각났다. ' 어이, Flash man! '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람드링은 진우의 오라 능력이 가속이라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진우가 가인의 수용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하 고 있었을까? 왜 미리 ACR을 작동시키지 않았을까? 진우가 패턴 그린의 가속을 사용하여 ACR을 빼내겠다는 생각을……정녕 하지 못했을까? ' 그럴리가 없어. ' 그렇다면 이쪽의 계획을 눈치채고서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인데. ' 순간 예지! ' 진우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기가 반사적으로 가속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하고나서 행동했다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증거였다. 가인의 손에 들려있 던 ACR은 진우의 손이 닿기도 전에 변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고 있어! 우우우우우 ACR이 가동하자 가인의 몸 속에 잠들어있던 오라가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타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가인의 목에 걸려있던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도 반응을 일으킨다. 마리는 가인의 몸에서 끓어오르는 섬광에 두눈을 가리며 소리쳤다. " 신중하게 능력을 전개해도 모자랄 판에! 진우 씨, 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 겁니까! " " 내 오라에 반응한게 아니에요! 그람드링, 그 빌어먹을 녀석이 순간 예지로 내 움직임을 예지한 거에요! " 진우는 분개하면서도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녀석의 순간예지안은 직접 사물을 맞닥뜨려야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었나? TV의 영상으로 예지해봤자 TV 그 자체에 대한 미래밖에 보지 못할텐데! 그런 이유로 진우는 그람드링의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이건 차 라리 그의 동생이었던 오르크리스트의 원격 투시에 가까운 능력이다. 하지만 어찌 진우가 알았겠는가? 지금의 그람드링이 동생의 능력마저 손에 넣었다는 것을. 그람드링은 애초에 패턴 알리자린과 패턴 푸르푸린의 복수 능력, 천리안으로 수용 시설을 감시하고 있었다. CCTV의 영상같은 것은 참고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 안돼! 이대로는 가인 씨가! " 시민이 비명을 지르며 가인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진우는 그녀와 마리의 손을 낚아채서 벽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그녀들을 감싸안는다. 피해를 줄이려면 이 수밖에는―! 우우우우우 귓가로는 오라의 박동소리가 연신 끊이지를 않았다. 수용 시설은 가인의 몸 에서 백열하는 오라의 빛으로 번쩍인다. 그리고, " 폭발은……? " 떨리는 마리의 중얼거림이 상황을 대변했다. 질끈 두눈을 감고 있던 시민과 진우도, 수용 시설의 바깥에 있던 대원들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가인의 모습 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보인 가인은 찬란한 오라의 후광 속에서 멀쩡하게 서있 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 폭탄이, 폭발하지 않았다? " Fuck! 왜 폭발하지 않는 거야? 왜! " 그람드링은 이를 갈며 CCTV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ACR을 오라의 주인에게 넘겨주는 것도. 천리안으로 녀석들의 움직임을 예지하는 것도. 실패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일처리는 완벽했다! ' 그렇다면……. ' 실패할 이유는 단 한가지. " 빌어먹을! 처음부터 Bluffing이었나! 폭탄 자체가 속임수였던 거야? "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오라의 주인에게 폭탄 같은 것을 채울 때부터 뭔가 이 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뇌관도 오리하르콘 감응 장치도 모두가 진짜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확인하지 않고서 그람드링이 일을 꾸몄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유가인은 피스메이커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머신 아더를 훔 치려 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위험 인물을 제어할 수단으로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을 장치했던 것은 어느모로 보나 타당한 처사였다. 가까운 예로 배신자 한시영이 있지 않은가? 피스메이커에게 적의를 가진 오 라의 주인만큼 인류를 위협할 천적(natural enemy)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단 자체가 속임수였다고? 만약 중반에 오라의 주인이 눈치채기 라도 했다면 어떻게 할 셈이었나! " Bull shit! " 진 사령관! 어떻게 그런 도박을 할 수 있는 거지! " 이것으로 시폰 뤼멘의 의도는 확실해졌군. " 언더 시티의 작전본부실. 메인 스크린으로 가인 일행의 무사함을 확인한 진 사령관은 아무 일도 없었 다는듯 그렇게 한 마디했다. 그런 그를 수정을 제외한 닥터와 시더, 유화는 어이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오퍼레이터 팀을 지휘하던 윤채영 치프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말 한마디 안할 수 있단 말인가? 덕분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다. " 그렇군요. 이번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의 행동은 엄연히 성당 기사단에 대한 배신 행위에요. 이로서 그를 견제할 수단이 확실하게 생긴 거네요. 비숍이 그의 대리인 자격을 박탈하는 것도 시간 문제에요. " " 자, 잠깐만요!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계신 겁니까! " 할 말을 잃은 일동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닥터였다. 그의 외침에 수정 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지금까지 잠자코 있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보안이 필요했던 사항인지라. " " 보안이라니? " " 미국 지부의 사령관, 시폰 뤼멘이 유가인을 암살하려 했던 일은 다들 알고 계시겠죠? 하지만 이는 심증만 있었을 뿐 물증이 없었어요. 무엇보다 오라 의 주인을 암살하려는 것은 상층부의 의도에 반하는 일입니다. " 상층부라 함은 성당 기사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 이름을 수정 이 꺼내지 않았던 것은 채영을 비롯한 다른 대원들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령관 님은 가인 씨가 머신 아더를 탈취하려 했던 건을 이용하여 그대로 이번 함정을 팠죠. 게이트 회로가 연결되지 않은 감응 폭탄을 명목 상 가인 씨의 목에 달고 시폰 뤼멘이 걸려들기를 기다린 거에요. 그리고 그 결과,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고요. " " 하아아아아― " 시더와 유화는 다리에 힘이 빠져 그만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 자신들이 고민했던 것은 다 뭐였단 말인가? 더구나 그 녀들은 폭탄이 작동할때 그대로 가인이 죽는구나 싶어 비명을 지르고 울고 불 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를 놀라게 한 책임은 대체 어떻게 질 거냔 말이야! ' 다행이다. ' 그래도 마음 한켠으로는 모두들 가인 일행의 무사함에 안도하고 있었다. 특 히 윤채영은 저번 머신 아더의 사태 때부터 가인에 대한 가혹한 처사에 실망 을 금치 못했으나, 이번과 같은 속뜻을 알게되자 사령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 할 수 있었다. 역시 아무 이유도 없이 행동하실 분들이 아니지! " 수정 양. 그렇다면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의 처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도의 지위에서 축출되는 건가요? " 닥터는 시끌벅적해지는 대원들에게서 거리를 두며 수정에게 조용히 물었다. 수정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지는 않을 거에요. 우리 쪽에서 먼저 회로가 없는 폭탄으로 속임수를 썼으니 그 쪽에서도 발뺌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죠. 아마 그람드링 뤼멘도 특별히 처분을 받지는 않을 거에요. 다만…… 이후부터는 적어도 우리의 일을 훼방놓지는 못하겠죠. " " 임시방편이라는 거군요. " 닥터는 이번 비밀 작전의 성과에 회의적이었다. 과연 성당 기사단의 제지가 있다고 해서 시폰 뤼멘, 그가 순순히 물러날까? 그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독 자적으로 행동해온 그 남자가? " 하지만 시폰 뤼멘의 뒤를 봐주는 누군가가 있다, 그것을 알아낸 것만으로 도 모험을 한 수확이 있었어. " 진 사령관은 낮게 중얼거리며 선글래스 안의 눈을 빛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라의 주인을 두번씩이나 암살하려고는 할 수 없겠지. 어 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야……. ' 성당 기사단에게 이단자로 찍히는 것도 두렵지 않을, 그런 후원자를 찾아 낸 거냐, 타데오? ' 《보기 좋게 실패했군, 미스터 뤼멘.》 시폰은 스크린에 떠오른 동업자의 말에 눈꼬리를 흔들었다. 그의 동업자는 새하얀 백발에 검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젊은 외국인이었다. 하지 만 스크린 너머에서 시폰을 바라보는 한쌍의 붉은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는 세월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 보기 좋게라니? 유감스럽게를 잘못 말한 것 아닙니까? " 시폰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어느 때라도 미소를 유지했던 그답지 않게 유독 감정적인 모습이다. 그것만 봐도 이번 암살 시도의 실패가 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후후. 같은 유다라도 그쪽이 한수 위인 모양이야. 왜 당신이 그 남자에게 이름을 빼앗겼는지 알 것도 같군.》 " ―! " 시폰은 순간, 무시무시한 눈으로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만약 눈빛만으로 사 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시폰은 스크린의 남자를 수십번도 더 죽였을 것이다. 스크린 너머로도 그의 살의가 전해졌던 것일까. 동업자는 더 이상의 농담은 좋지 않다고 느꼈는지 웃음을 거둬들였다. 《어차피 이번 일은 자네의 단독 행동이었어. 동업자인 나에게도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은……. 하지만 책임은 묻지 않겠네. 대신 지금부터는 내 계 획에 전면 협조해줘야겠어.》 " ……알겠습니다. 어차피 성당 기사단의 눈 밖에 나버린 이상 싫어도 이단 의 길을 걸어야겠지요. 뭐, 슬슬 솔로몬의 열쇠인 레메게톤(Lemegeton)의 해석도 끝난 참이었고. 사제의 옷을 벗기에는 적절한 시기군요." 시폰의 말에 동업자의 표정이 변했다. 《Bestoarius Fantastica……. 연구의 성과가 있었던 건가.》 " 아아. 제 아들들이 열심히 해준 덕분에 간신히. " 시폰은 천연덕스레 웃었다. " 어쨌든 내숭을 떨 필요가 없어진 것 뿐 입니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 그래서? 이제부터는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네이 안데르슨? " 동업자, 네이 안데르슨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조소했다. 《TV를 틀어 뉴스를 보면 알게 될 거야.》 " 예? " 그 말을 끝으로 네이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시폰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지만 곧 누군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 다. 네이 안데르슨과의 연락은 되도록이면 은밀한 편이 그나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이다. ★ " 마스터. 지구 방위군의 라경일 장군이 지금 마스터를 뵙길 요구하고 있습 니다. " 방안으로 들어온 것은 시폰 뤼멘을 수십년간 보좌해온 외알 안경의 남자, 빈 센트 데이먼이었다. 그는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의 크루세이더이자 제10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했다. 시폰은 빈센트의 보고에 귀찮다는듯 손을 내저었다. " 또? 하여간 신병을 보호해준답시고 굉장히 생색내는군. 이왕이면 좀 좋은 호텔 방이나 잡아주고서 그럴 것이지. " " 지구방위군의 사령부(headquarters)에 개인실을 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인 대우 아닙니까? " " 그들로선, 말이겠지. " 시폰과 빈센트는 코웃음을 쳤다. 방금 나눈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의정부에 위치한 지구방위군의 사령부였다. 피스메이커를 나온 시폰이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의외로 피스메이커의 앙숙인 지구방위군이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피스메이커의 기밀을 건네주는 조건으로 신병을 보호받고 있었던 것이다. " 어쨌든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게, 데이먼 경. 그 전에 확인할게 있어서. " " 확인이라니. 뭘 말씀이십니까? " 시폰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리모콘으로 스크린의 TV회선을 열었다. " 뭔가 재미난 뉴스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누군가가 반드시 보라고 귀뜸 해줬거든. " " ……? " 빈센트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였다. 시폰은 그렇게 몇번 채널을 돌리다가 곧 자신이 찾는 뉴스를 발견해냈다. 그리고 지켜보던 도중, 감탄을 터뜨리며 뉴스의 내용에 빠져들었다. " 호오. 과연……. "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지, 블러디 노블맨? 두두두두두 헬리곱터의 로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진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현장 기자의 보도는 계속대고 있었다. 카메라는 하늘에서 여의도 광장 을 내려다보며 주위를 촬영한다. 《지금 거리는 침묵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시민공원에 여가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은 단체로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게 대 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출동한 구조대와 경찰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아직 까지 사건의 진상은 밝혀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기자의 목소리에 발맞춰 공원에 굳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진 다. 클로즈업된 사람들은 각각 시간이라도 멈춰진 것처럼 같은 자세, 같은 표 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정지된 영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그 있을 수 없는 광경이 묘하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돋게 만들고 있었다. 《현재 이런 정체 현상은 1시간 전부터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좀 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지면에 접근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도 헬기는 공중을 선회하며 63빌딩을 축으로 해서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그림자가 진 건물의 반대편으로 돌아 나오던 중, 덜컹 갑자기 헬기가 뒤흔들렸다. 그 바람에 헬기 내부에 있던 기자재가 무너져내 리며 기자와 방송 관계자들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뭐야! 무슨 일이야!》 《기장!》 생방송 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한순간에 아우성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곧 카메라의 영상으로 헬기가 멈춘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63빌딩의 그늘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검은 사슬들. 그 사슬들이 헬기를 꼼 짝도 못하게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공포에 질린 기자의 비명 소리가 계속되었다. 쇠가 으스러지는 소리. 사슬들이 무서운 힘으로 헬기를 끌어당긴다. 그 바람 에 헬기가 제멋대로 흔들려서 도저히 카메라의 영상으로는 상황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어렴풋하게나마 63빌딩의 그림자 쪽에서 사람의 인영같은 검은 물체가 보였을 뿐이다. 우우우우웅 그때 사슬들이 진동하며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소리는 잠시 후, 인 간 여성의 목소리로 다듬어져 허공에 울려퍼진다. [들어라. 테라여. 들어라, 가이아의 종놈들아.] 놀라운 일이었다. 사슬의 진동 소리가 사람의 언어로 말을 하다니! 더구나 목소리는 듣는 상대에게 확연히 전해질 정도로 강렬한 증오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내 말이 들리나, 피스메이커! 지금 이 구역의 인간들은 모두 내 수중에 들 어와 있다. 적게 잡아 2000명쯤 되겠지. 너희들이 진정 테라의 보호기관임 을 자청한다면! 우리를 몬스터라고 부르며 매도해왔다면! 그렇다면 나의 도 전을 받아들여라!] 그것은 요르문간드의 마지막 화신, 메두사의 선전 포고였다. [네놈들이 자랑하는 거인을 끌고 나와라! 그러지 않을시엔 이 구역에 있는 인간들을 포기한다 간주하고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 그리고 또 반복해주지. 네놈들이 나올 때까지 얼마든지 죽이고 또 죽여주겠어!] ' 티아마트,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 당신은 제가 반드시……! [한시간의 여유를 주겠다. 어서 나왓, 머신 아더―!] 그와 동시에 거대한 어둠이 하늘을 뒤덮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8 - Ｂy Ｎext Ｎeo =-=-=-=-=-=-=-=-=-=-=-=-=-=-=-=-=-=-=-=-=-=-=-=-=-=-=-=-=-=-=-=-=-=-=-= " 상황은 보는 바와 같아요. 현재 SA급 몬스터 용마인 메두사는 한강 시민 공원에서 머신 아더의 출격을 조건으로 저희와 인질극을 벌이고 있어요. 메두사가 삼은 인질들의 수는 위그드라실의 감시 영상만으로도 2758명. 대략 영상의 사각 지대에 있는 사람들까지 고려하면 3000명이 넘는다고 봐야해요. " 메두사가 공원을 점거한 시간으로부터 20분이 지났다. 현재 언더 시티 내에 체류중인 모든 피스 대원들은 사령부의 호출로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작전본부 실에 집합한 상태였다. 피스 그린 정진우. 피스 레드 성마리. 피스 옐로우 한시민.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 " ……. " 이 멤버 외에도 세 명의 피스 대원들이 더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피스 블루 유가인과 피스 핑크 이유리,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이었다. 말 그대로 사령부는 투옥 중인 대원이건 입원 중인 대원이건 상 관하지 않고 모두를 불러들인 것이다. 덕분에 대원들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유가인을 폭사시키려고 했던 그람드링. 그런 그를 앞에 두고 사건의 당사자 들이 분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령부의 처사였다. 아무리 폭탄이 가짜였다고는 하지만 그람드링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 고 넘어가다니? ' 눈 가리고 아웅다웅하는 것도 아니고! ' 만약 메두사에 의한 긴급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작전 본부실은 피스 대원들의 항의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시더와 닥터, 채영을 비롯한 각 부서의 치프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런 사령부와 대원들 간의 대립을 지켜보았다. " 시더 양, 인질들의 상태를 설명해주세요. " " 아, 예. " 수정의 부름에 시더는 회의석에서 일어나 브리핑을 이어받았다. " 위그드라실이 계측한 공원의 열원 분포도와 영상으로 미루어볼때 인질들의 생명은 그렇게 위험한 상태가 아니에요. 하지만 강한 사념파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메두사는 인질들의 대뇌반구에 암시를 걸어 감각신경로와 운동신경로를 마비시킨 것 같아요. " " 최면이란 말인가요? 예전에 피스 카민이 보여줬던 그런 식의? " 마리는 작년 사람들을 뜻대로 조종하던 마유빈을 떠올리고 표정을 굳혔다. 그 말에 잠자코 있던 가인도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능력 을 가졌던 것은 피스 카민 뿐만 아니라 노아 측의 네크로맨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 그 정도의 강력한 암시는 아닐 거야. 메두사의 암시는 단지 인질들을 구속 시키는 정도니까. 아,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대단한 능력이네. 무려 3000 명이 넘는 사람들을 혼자서 붙잡고 있는 거니……. 인간으로서는 엄두도 내 지 못할 정신 용량이야. " 시더는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 굳이 비슷한 예를 들자면 영국에 나타났던 B급 몬스터 바실리스크(basilisk)? 그 괴물도 지금과 같은 강한 암시를 시각에 투영시켜 상대를 석화시키는 타 입이었지. " " 석화……란 말입니까. 과연. 왜 저 용마인에게 메두사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 것도 같군요. " 진우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기억해내며 휘파람을 불었다. 수정은 시더의 설명이 대략 끝나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 어쨌든 적어도 아직까지 인질들은 무사하다는 겁니다. 구할 여지는 충분히 있어요. 물론 메두사의 요구대로 한 시간 내에 머신 아더를 출동시킨다는 조건 하에서지만. " " 어째서 몬스터가 머신 아더를 요구하는 겁니까? 일부러 자신의 위치를 우리 에게 노출시키면서까지? " 코마히코의 의문은 다른 대원들의 의문이기도 했다. 차라리 메두사가 인질들 의 목숨을 담보로 머신 아더의 파괴를 원했다면 더 납득이 갔을 것이다. 하지 만 그녀는 단지 제 시간 내에 머신 아더를 끌고 나오라고만 했다. 그래서야 마치 정면 대결을 펼치자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 D타입의 쿠사나기가 머신 아더에게 당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거에요. 자신 의 동료를 없앤 장본인을 자신이 직접 쓰러뜨리겠다는 복수심같은? " 사정을 잘 모르는 코마히코는 그런 수정의 답변에 순순히 납득했지만, 가인을 비롯한 옴팔로스의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머신 아 더가 오라의 주인과 반응하여 세계의 의지에 접속하는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 머신 아더는 역시 단순한 D타입 대응 결전병기가 아니었어. 몬스터도 결국 그것을 눈치챈 모양이군. ' 닥터는 초조해하는 기색이 완연한 시더의 표정을 살피며 확신했다. 그녀나 진 사령관이 자신에게 암묵해오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머신 아더의 원형이 되는 기가스는 가이아의 자식이자 그녀의 의지를 이어받 은 대행자였다. 그렇다면 역으로 기가스를 통해 가이아와 접속하는 수단, 즉 터 미널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 터무니 없는 비약인가? ' ……비약이 아니야. 가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리리스에게서 진실을 전해들은 그는 충분히 이런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다. 머신 아더는 테라가 만들어낸 바르의 별. 가이아에 접속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결국 그것이 지금과 같은 사태를 불러들이고 말았다. 또 다시 분쟁을 일으키 고 있어. 또! ' 리리스가 그런 희생을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 여전히 사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테라와 노아는 이대로 계속 대립해야 할 운명인가? 한쪽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그런 피 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것일까? " 사령관 님. 결단을. " 수정은 브리핑이 끝나자 진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모든 대원들의 시 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진 사령관은 묵묵히 그들의 시선들을 받다가 입을 열었다. " MS01 머신 아더의 사용을 승인한다. 파일럿은 피스 그린 정진우, 피스 레 드 성마리, 피스 옐로우 한시민, 피스 핑크 이유리, " " ―! " 파일럿의 발표를 듣고 있던 일행은 이유리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자신들 도 모르게 작전 본부실의 한켠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메디컬 센터의 응급 치료원들이 들고 온 간이 침대가 있었고, 그 침대 위에는 한 어린 소녀가 잠 들어 있었다. 바로 이유리였다. " 말도 안됩니다! 아직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한 아이에요! 그런 아이를 전장에 내보내겠다니 어불성설입니다! " 마리는 화가 난 표정으로 사령관에게 일갈했다. 그건 진우와 시민, 코마히 코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혼수상태인 유리를 작전본부실까지 불러 들였나 했더니! 그런 일행의 반응에 수정은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 물론 저희도 유리 양을 머신 아더에 태우는 건 탐탁치 않아요. 하지만 머 신 아더를 움직이는 사념파를 통합하는 건 누구의 몫이죠? " " 그건……. " 마리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머신 아더의 조종에 유리의 패턴 핑크가 필수 불가결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 그래도 유리는 2주가 넘도록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몸도 약해질 데로 약해져 있고……. 또 마인드 키핑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 고 있어요. 그런 아이를 무리해서 태워봤자 머신 아더가 제대로 움직이지 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유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잖아요? " " 유리 양의 의식은 머신 아더 내에서 오라 능력자들간의 정신 감응을 이용 하면 깨울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죠, 시더 양? " 수정이 동의를 구하자 시더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동조 현상으로 패턴 핑크를 각성시킬 수는 있을 거에요. 오라는 의지 의 힘인 만큼 의지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반대로 오라를 일깨움으로서 의 지도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죠. 즉 역행 각성이에요. " " 역행 각성이라니……. 정말 그런게 괜찮은 거에요? " 시민이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시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괜찮을 거에요. 문제는 그 이후겠죠. 아무리 정신을 일깨운다 한들 약해진 유리의 몸이 격렬한 전투에서도 버텨낼 수 있을까, 그게 더 걱정이죠. PET 용액으로 탑승자를 보호한다 한들 데미지를 입었다 회복하는 과정에서 체력 이 소모되는 것은 막을 수 없으니까. " 시더는 슬그머니 가인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뒷말을 덧붙였다. " 대신 피스 블루가 머신 아더에 탑승 해준다면……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 어지지만. " 그 말에 가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진우는 두눈을 크게 뜨며 가인과 시더 를 번갈아보았다. " 가인이 머신 아더에 탄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요? 어째서 그렇죠? " " 가인의 패턴 블루는 차원진동을 현현시키는 힘이에요. 그때문에 2차원적 표면파를 위상공간의 비선형 법칙에 따라 타원 궤도로 돌려보내는 것이 가 능하죠. 만약 가인의 공간 압축이 콕피트를 보호한다면 PET용액을 사용할 필요도 없어지고 머신 아더가 제한 시간에 쫓길 일도 없어질 거에요. " 모두가 놀란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시더의 말대로 가인은 제대 로 오퍼레이터 팀의 서포트 없이 유리와 단둘이서 머신 아더를 움직인 전적이 있었다. 가인은 그런 일행의 시선을 피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그람드링 은 냉소를, 시더와 수정은 유감을 드러냈다. ' 가인이 머신 아더를 조종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야. 하지만 본인 이 그럴 의사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지. ' 더구나 그는 머신 아더를 탈취하려한 전과가 있다. 사령부로서는 일부러 리 스크를 지면서까지 가인을 복귀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진 사령관이 호명한 파일럿은 총 네 명. 네 명으로는 머신 아더를 움직일 최적정 오라 수치에 도달하지 못해. ' 그렇다면 마지막 한명은? 진 사령관은 과연 누구를 호명할 셈이지? ' 가인인가? ' 그렇지않다면……. 그렇게 모두가 숨 죽여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진 사령관이 마지막 피스 대 원을 호명했다. " 파일럿은 피스 그린 정진우, 피스 레드 성마리, 피스 옐로우 한시민, 피 스 핑크 이유리. " 그리고? "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 이상이다. " " ―! " 역시나! 마리와 시민은 파일럿에서 제명된 가인을 돌아보며 안타까움을 내비췄다. 내 심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진우는 담담한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 그래. 어쩌면. ' 어쩌면 이게 나을 수도 있겠지. 더 이상 가인을 전장으로 몰아넣는 것은 그 에게 가혹한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들의 선에서 일을 끝내버리는 것이, 그것만이 하다못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진우는 그렇게 속으로 결정을 내리며 진 사령관에게 말했다. " 파일럿이 정해졌다면 지금 바로 격납고로 향하겠습니다. 피스 버밀리온은 이번 출동이 처음일테니 한시라도 빨리 머신 아더와 동화하여 감각을 익혀 야 할테고요. " " 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코마히코도 내심 그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진우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그 렇게 회의를 서둘러 마치고 일어나려는 일행. 수정은 그런 진우를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 피스 그린, 아니 정진우 씨. 잠시만요. 아직 말씀 드리지 않은게 하나 있 어요. " " ……예? " 진우는 수정의 정색에 어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시민과 마리, 코마히코도 의아한 표정으로 수정을 돌아본다. 수정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사항을 진우에게 말해줘야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 분명 통보해주는 쪽이 그를 위한 일일 거야. 하지만 그래서는……. ' 그렇게 수정이 말을 잇지 못하자 일행은 한층 더 의아해졌다. 대체 무슨 이 야기이길래 저토록 뜸을 들이는 거지? 그때 수정을 대신하여 진 사령관이 말했다. " 피스 그린. 자네의 가족들이 납치당했다. " " ―! "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 그 진실에 진우는 채 현실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반 문했다. " 납치? 가족이라니? " " 두 시간 전의 일이다. 라이컨슬로프 라트 발렌시아가 26구역에 있는 자네 의 자택에 침입, 윤미연과 정하나를 데리고 갔다. "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 " 목격자는 팔라딘 4소대의 천요원 중사. 그녀 외의 SG조 대원들은 모두 라 트 발렌시아에게 죽음을 당했다. 목격자인 천 중사도 중태에 빠져……. " " 무슨 소리냐고! 그게 대체! " 진우는 진사령관이 자신의 상관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며 분노에 찬 고함을 내 질렀다. 그 모습에 수정은 진심으로 이 말재주 없는 사령관을 원망했다. 어떻 게 같은 얘기를 해도 이렇게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타이밍으로 던져줄 수 있 는 것일까? 이래서야 꼭 악의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 진우 씨, 진정하세요. 저희가 천 중사의 보고를 받은 것은 회의를 시작하 기 바로 전이었어요. 사실 곧바로 알려드릴 생각이었지만 너무나 경황이 없어서……. 그래서 묻고 싶었던 거에요. 진우 씨의 선택을. " " 선택이라니? " 진우는 냉정함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수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이대로 머신 아더에 탑승할 것인지. 아니면 가족들을 구하러 갈 것인지. " " 천 중사의 보고로는 라트 발렌시아는 자네에게 전언을 남겼다고 하더군. 가족들을 되찾고 싶으면 혼자서 자신을 찾아오라고. 자세한 사항은 차후에 연락하겠다는 말도 함께. " 진우는 질끈 두눈을 감았다. 지독한 현기증과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그러던 중 문득 그의 사부가 처음으로 했던 충고가 기억났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제 한 목숨 보존하는 것조 차 힘든데, 하물며 남까지 생각해줄 여유는 없는 노릇이지.' 통감했다. 절감했다. '사부님, 역시 나는…….' 진우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행은 그런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지독한 이분법이라니! 3000명의 목숨과 2명의 목숨. 하지 만 그 목숨의 가치는 서로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아니, 비교해서는 안된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 둘 다 선택할 수 없었다. ' 피스메이커란 뭐지? ' 평화를 지키는 것. ' 그렇다면 평화란? '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 ' 그 모두란? '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 나와……. ' 내……가족. 가족! 가족! 진우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수 많은 얼굴들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 갔다. 그중에는 그가 지켜줄 수 있던 사람들도 있었고, 지켜주지 못했던 사람 들도 있었다. ' ……아니야. ' 틀려. 지켜주지 못했던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 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오만이다. 언제나 수 많은 희생들이 있었다. 수 많은 희생 끝에 남겨진 사람들.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자신은 지켜줬다고 착각했던게 아닐 까? 사실 자신의 힘으로 해낼 수 있었던 일은 아무 것도 없었던게 아닐까? ' 애초부터, '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지켜낸다는 것은, '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 그 증거로 지금 진우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지켜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켜내지 못했던 사람들의 얼굴만이 뚜렷하게 각인된다. 그리고 이제 막 또 다시 희생되려는 사람들의 얼굴이……. ' 미연아. 하나야. ' 그들을 떠올리자 진우는 자신의 신념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 한계를 뛰어넘은 녀석들은 강해진다. 희생을 강요받아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지. '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 바보 제자,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지? 한계를 넘으려고 발버둥치겠느 냐, 아니면 한계를 그어놓고 안주하겠느냐. 그 어느쪽도 잘못된 방법은 아니야. ' 그 사람을 내 인생의 목표로 삼아왔다. 어떠한 희생을 강요받더라도 이겨 내고 싶었어. 다시는 내 가족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역시……! ' 사부님,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바보제자인가 봅니다. ' 진우는 선택해야 했다. " ……전, 가족들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 예상하고 있었다. 진우가 그런 말을 하리라는 것을.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피스메이커라도,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라도 그 개인 에게는 더 소중한 것이 있는 법. 그 소중한 것을 지켜내고 싶은 법이다. 하지만 진우의 대답을 듣는 순간, 일행은 저도 모르게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 분이었다. 그의 대답이 마치 피스메이커의 존재 의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것 같 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타인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스메이커라는 것은 신기루일 뿐이다, 라고. " 라트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부디……선처해주시기 바랍니다. " 진우는 진 사령관과 수정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 사령관은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듯 지체없이 다음 사항으로 넘어갔다. " 그렇다면 남은 대원들 중에서 파일럿을 선출해야겠군. " 남은 대원이라면……. '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과 피스 블루 유가인! ' 그리고 그 중에서 진 사령관이 호명한 대원은, "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 " "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 " 호명됨과 동시에 그람드링의 웃음소리가 작전본부실에 울려퍼진다. 시민과 마리는 여전히 가인을 제외시키는 진 사령관에게 한껏 섭섭함을 드러냈다. 닥 터와 시더, 채영도 실망을 숨기지 못한다. 그람드링은 의기양양하게 그런 일행을 조소했다. " 이야∼ 이거. 이거. 부담스러운 걸? 생각지도 않은 로봇 조종이라니. 잘 해낼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 시민 일행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가인을 암살하려고 했던 주제에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 동료의 목숨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녀석과 팀을 짜라고? 대체 진 사령관 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크크크크. 확실히 현명한 판단입니다, Sir.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Stray cat 보다 차라리 제가 백배 낫죠. " 그람드링은 노골적으로 가인을 조롱했다. 그 말에 시민과 마리가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람드링은 개의치 않으며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람드링의 웃음을 멈추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진 사령관이었다. " 그람드링 뤼멘. 자네는 이대로 언더 시티 내에 대기하고 있어주길 바란다. 머신 아더의 마지막 파일럿은 피스 블루 유가인이다. " " ―! " 순간, 그람드링과 일행의 얼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그람드링은 무시무시하 게 표정을 일그러 뜨리며 진 사령관에게 소리쳤다. " Fuck! 내가 아니라 저 병신이라고? 이유가 뭐야! 저 자식은 언제 머신 아 더를 탈취할지 모르는 배신자야! 피스 블랙과 다를 바 없는 놈이라고! 그 런 녀석에게 거인을 맡기겠다니 대체 무슨 속셈이야! " " 그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 " 다른 사람이 없다니! 그럼 나는? 난 뭐야! 내가 저 자식보다 못하단 말이 야? 웃기지마! 오라 능력자로서의 능력은 내가 위야! 내가 Winner라고! " " 자네의 빛에는 여신의 따스함이 없다(Luminescence). 냉광(冷光)으로는 머 신 아더를 움직일 수 없어. " " 뭐― " " 이게 자네를 거인에게 탑승시키지 않는 이유다. 납득하겠나? " " ……크! " 그람드링은 지독한 수치심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 도 없었다. 진 사령관의 말은 한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 빌어먹을 오라 능력자! 빌어먹을 오라의 주인! '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여신의 축복따위, 내가 반드시 깨뜨려주마. 반드 시 없애주겠어! ' 언제까지 그런 잘난 얼굴로 날 내려다볼 수 있는가, 두고보겠어! 그렇게 그람드링이 진 사령관과 알 수 없는 선문답을 주고받은 후 조용해지 자 일행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닥터와 시더만이 그람드링의 안색을 살피며 자신들의 가설에 확신을 얻을 뿐이다. " 유가인. " 진 사령관은 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 모든 것은 자네에게 달려 있다. 머신 아더에 탑승하든 거부하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네의 자유다. " " ……. " " 어떻게 할 건가? 다시 한번 싸우겠는가? 아니면 포기하겠는가? " 가인은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서 자신에게 선택을 강 요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 머신 아더에 탑승하든 거부하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라고? ' 웃기지마. 당신은, 당신은 언제나 그래. 언제나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곳으 로 날 몰아넣은 후 한 가지 길만을 강요했어. 자신의 뜻대로 날 움직여왔어. ' 그래도……이렇게 내 의견을 물어봐준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 가인은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진 사령관에게서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 라보았다. 진우는 침중해진 안색으로 말 없이 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 빛에서는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일말의 기대가 담겨 있었다. 가인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 진우 씨,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 그 말에 지켜보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단지 진우만이 아무런 표정 변화 없 이 가인을 응시할 뿐이다. " 앞으로도, 아마 평생동안 당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에요. " 시민은 애가 타는 심정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 씨, 제발……! " 하지만 해야하는 거죠? " 가인!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인은 뜨겁게 달아오른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며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내 뱉었다. "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 " 아아. " 진우는 잠겨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꾸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진우 씨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미연이 누나와 하나를 위해서에요. " 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진우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작전본부실의 출구로 걸어나갔다. " 그러니까 반드시 구해내세요. 가족들과 함께 돌아오세요. " " ……. " " 그러지 않으면……절대로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 " ……그래. " 진우는 피스 대원들과 함께 머신 아더의 격납고로 향하는 가인을 눈으로 배 웅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맙다. 고맙다, 유가인. ' 고맙다……. ' ―유리야. 내 목소리가 들리니? ―…….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 ―난 리리스를 잃은 후, 아무 것도 믿을 수 없었어. 지금껏 내가 믿어온 모 든 것이 거짓이라니. 낯설게만 느껴졌지. 두려웠어. 누군가를 믿는다는게.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게. ―……. ―또다시 누군가를 믿다가 상처받을까봐 두려웠어. 그래서 나 혼자 감싸 안 을려고 했어. 혼자서 고민하려고 했지.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 도 이제는 지긋지긋했으니까.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모두는 여전히 날 걱정해주고 있었어. 기다려주고 있었어. 내가 리리스의 일로 가슴 아파하고 슬퍼했던 것 처럼 모두도 내 일로 가슴 아파하고 슬퍼했던 거야. ―…….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싫어서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건 더 큰 상처를 주는 행위였어. 자기 밖에 생각하지 못한 행동이었어. 진정 상처를 받는 것이 싫었다면, 진정 상처를 주는 것이 무서웠다면, 그 랬다면 더더욱 믿어야만 했던 거야. 리리스가 우리를 믿어줬던 것처럼! 그녀가 우리를 믿고 진심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 ―리리스가 우리에게 보여줬던 용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만 모두를 믿어보자, 유리야. ―……. ―그러니 더 이상 혼자 슬퍼하지마. 혼자서 감싸안으려고 하지마. ―……. ―기쁨도 슬픔도, 모두와 함께 짊어지는 거야. ―……응. 《PET용액 주입 완료. 피스 레드, 블루, 옐로우, 버밀리온 모두 가사 상태 에 접어들었습니다. 패턴 핑크의 오라 수치 상승, 마인드 키핑이 발동되 었습니다.》 작전본부실에서 채영이 희미하게 빛나는 핑크색의 AI헬맷을 착용하며 머신 아더의 상태를 보고했다. 그 옆에서 스크린을 주시하던 시더는 채영과 마찬 가지로 핑크빛의 AI헬맷을 착용한 채 가슴을 쓸어내렸다. " 수고했어, 가인. 어떻게든 역행 각성에 성공한 모양이네. " 그 말은 그녀와 정신이 연결된 피스 대원들을 향한 메세지였다. 패턴 핑크의 운산 능력을 견뎌낼 수 있는 시더와 채영은 피스 핑크의 AI헬 맷에서 추출해낸 오리하르콘으로 제조한 AI헬맷으로 실시간 피스 핑크와 사 념파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그녀들에게로 패턴 핑크를 통한 가인의 사념이 들려왔다. ―응. 준비는 모두 끝났어. 부탁할게, 시더. " 좋아. 피스 그린이 없는 만큼 이번 조종의 우선권은 가인이 가지게 될 거 야. 여러모로 부담이 크겠지만 힘내줘. ―알았어. 본부실의 스크린에 비친 머신 아더는 블루 폼을 띈채 시더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전 쿠사나기 때의 전투와 몇번의 출격을 바탕으로 이미 머신 아더의 자율 제어 시스템은 완성이 된 상태였다. 특별 히 오차 테스트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 개전 준비! " 《머신 아더, 격납고의 3번 출구 쪽으로 이동해주십시오. 다리 축을 자동 승강로의 접합 부분에 고정시킵니다.》 《기체의 하중을 무릎까지 낮추어 주십시오. 이동시에 리프팅이 발생할지 도 모릅니다.》 3번 출구로 이동한 머신 아더는 자동 승강로를 타고 곧장 궤도 엘리베이터 로 직행했다. 그 모습을 스크린으로 지켜보며 진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부탁한다, 유가인! 부탁합니다, 모두들! ' 《머신 아더, 궤도 엘리베이터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20초 후면 지상으로 방출 가능합니다.》 채영의 보고에 진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친다. " 발진! " 그와 동시에 스크린의 스피커가 음소거 상태로 전환되었다. 머신 아더를 태 운 궤도 엘리베이터가 무시무시한 굉음을 울리며 지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퍼어어어엉 수십 톤에 이르는 물들이 한꺼번에 터져오르며 주위를 뒤덮었다. 머신 아더 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한강 대교 부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우우우우 대기를 뒤흔드는 파공성과 함께 머신 아더는 곧장 오라 클록을 펼쳐 허공에 서 몸을 고정시켰다. 푸른 망토를 펄럭이며 육중한 거구를 자랑하는 거인의 모 습은 몇번이고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비현실의 정점이었다. 만약 피난 경고로 강 주위의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았더라면 그 모습에 한 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여기가 아닌가? 가인은 한강 대교 부근을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주위의 시민 공원에서 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메두사가 있는 곳과는 조금 떨어진 곳 으로 나오게 된 모양이다. ―가인, 그 부근을 잘 돌아봐. 63빌딩이 보이는 쪽이야. 유레카에 있는 시더의 사념이 들려오자 가인은 오라 클록의 반중력을 끌어올 려 주의깊게 머신 아더를 63빌딩으로 비행시켰다. 오라의 주인으로 각성한 그 는 예전과는 달리 머신 아더를 자신의 수족처럼 조종해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오퍼레이터 팀은 머신 아더의 조종은 전부 파일럿들에게 맡겨두고 기체의 서포 트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런데……꽤나 어두운 걸. 63빌딩으로 향하던 중, 마리는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코마히코의 사념이 대꾸했다. ―예전 D타입이 발생했을 때와 같은 차원 왜곡 현상이 아닐까요? 와프 입자가 상승하면 먹구름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치며, 일대에 역중력이 발생하는 왜곡 현상이 속출한다. 이는 쿠사나기 때와 마찬가지로 차원의 힘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막강한 존재가 삼차원에 강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이상하네요. 아직 5시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어두워지는 건 좀……. 시민의 사념대로 한강 일대는 그야말로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 깜했다. 만약 머신 아더에게서 흘러나오는 오라의 불빛이 없었더라면 63빌딩 조차 찾지 못하고 헤맸을 것이다. 계속되는 대원들의 이의에 오퍼레이터팀이 현장의 와프 입자를 분석하고 보 고했다. ―확실히 와프 입자의 변동은 있었어요. 하지만 저번 D타입의 출현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약한 수치입니다. ―그렇다면 D타입은 현현되지 않은 건가. 시더의 사념은 그나마 다행이라는듯 안도했다. 그래도 가인은 긴장을 풀지 않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의 오라는 아까부터 연신 거칠게 박동하고 있었다. 주변에 퍼져있는 거대한 존재의 흐름과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어! ―오, 오빠. 그때 유리의 사념이 표면 의식 위로 떠올랐다. 일행은 그녀가 완전히 자신 들의 의식과 동화되어있을 줄로 알았기에 깜짝 놀랐다. ―유리야? ―미, 밑을 봐. 사람들, 사람들이……. 유리의 떨리는 사념에 가인은 천천히 머신 아더의 발밑에 펼쳐진 지상을 내 려다 보았다. 오라의 불빛에 의지하여 내려다본 공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 림자가 늘어지고 있었다. ―이건! 바로 메두사가 인질로 잡은 공원의 여가객들이었다. 어둠 속이라 깨닫지 못 하고 있었는데, 가장 사념 상태에 익숙한 유리가 먼저 인질들을 발견해낸 것 이다. 피스 대원들은 마네킹처럼 굳어있는 을씨년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켰다. ―제길……. 어, 어떻게 이런 짓을. 가인은 실감했다. 역시 노아는, 몬스터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다른 인 류라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해낼 수 있 을리가 없다. ' 리리스. ' 가인은 노아였던 그녀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노아와 테라는 같은 사람 이었다. 같은 생명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가인은 노아와 싸우는 것을 주저 해왔다. 두 인류가 싸우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런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해왔다. 우우우우우 하지만 이런 광경을 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고 만다. ' 과연 테라와 노아, ' 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 라고. 우우우우우 순간 알 수 없는 굉음이 공원 일대에 울려퍼졌다. 마리와 시민, 코마히 코는 사념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신음을 흘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포효라도 내지르는 것 같았다. 더구나 그 포효소리 는 영체 상태인 피스 대원들에게도 격통을 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아스트 랄 컨덕션(Astral conduction)을 띄고 있었다. ―맙소사! 이 정도로 무지막지한 Conductive power라니! 피스 대원들과 사념이 공유되어 있던 시더도 덩달아 격통을 느꼈는지 비 명을 내질렀다. 가인은 이를 악물고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 보았 다. 위다! 포효소리는 위에서 들려온 거야! [후우우우우―] 거대한 한숨 소리가 공원을 뒤흔들며 하늘에 있던 먹구름들을 걷어낸다. 그렇게 개벽하는 하늘을 바라보던 피스 대원들은 하나 둘 숨을 죽이기 시 작했다. 그리고 구름들이 완전히 걷혀나가자, ―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모두의 사념이 부르르 떨린다. 하늘에는 거대한 팔두룡(八頭龍)이 있었다. 열 두 쌍의 날개에 여덟개의 머리. 그 크기는 자그마치 공원 일대의 하늘을 뒤덮을 정도. 40미터에 육박하는 머 신 아더가 다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해가 일찍 진 것이 아니었다. 하늘이 어두웠던 것은 순전히 이 존재가, 이 거대한 짐승이 그들에게서 하늘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후후후후. 왔느냐? 피스메이커!] 여덟 개의 머리들 중 하나가 입을 열어 말했다. 짐승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 는 분명 요르문간드의 화신인 메두사의 목소리였다. 그 웃음 소리는 광풍을 만 들어내고 그 격앙된 어조는 방전을 일으켜서 대기를 뒤흔든다. 그 압도적으로 거대한 모습에 가인 일행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이, 이것이 요르문간드……. 대지를 둘러싼 뱀……. 시더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요르문간드라는 이름에서부터 불길함이 흘러 넘쳤지만, 설마 그 이름이 D타입으로 구현한 크기를 말하는 것일 줄이야! ―이건, 이건 말도 안돼. 아무런 징조도 없이, 아무런 왜곡 현상도 없이 이 정도 크기의 본체를 구현해낸다는 건, 말도, 말도 안돼! 그것은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시더의 허탈한 외침에 가인은 사념이 떨리 는 것을 참아내며 애써 메두사를 향해 소리쳤다. ―약속대로 거인을 이끌고 찾아왔다! 이제는 네가 약속을 지킬 때야! [후후. 떨리는 목소리로 잘도 말하는군요. 그리고 약속이라니? 전 그저 당신 들이 제 시간에 오지 않으면 인질들을 죽이겠다고 했을 뿐인데?] 메두사로 추정되는 짐승의 머리가 가볍게 코웃음쳤다. 나머지 일곱개의 머 리들은 두눈을 감고서 그저 침묵하기만 했는데, 아무래도 티아마트를 비롯한 나머지 인격들이 부재 중이기 때문인듯 했다. [그러니까 제 시간에 온다 한들 인질들을 살려주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자식! 가인과 대원들은 이를 갈며 메두사를 노려보았다. 그때 지상을 살펴보던 유 리의 사념이 무언가를 발견해내고 소리쳤다. ―오빠! 저 사람들! ―……?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밑을 내려다보다가 곧 두눈을 크게 떴다. 유리의 사 념이 가리킨 곳에는 낯이 익은 두 인영이 보였던 것이다. 어째서 저들이 여기 에 있는 거지! ―재영아! 시내야! ―뭣! 가인의 외침에 마리도 그들을 확인하고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메두사가 붙잡 은 인질들 중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질의 비중이 달라졌 던 것이다. 반드시 인질을 구해내야한다는 절박함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뭐, 이번만큼은 특별히 장단을 맞춰주도록 할까요?] 순간, 메두사의 석화가 풀리며 지상의 인질들이 자유를 되찾았다. 갑작스레 몸을 움직일 수 있게된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곧 머신 아더와 메두사의 존재를 발견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 저, 저게 대체 뭐야? " " 괴물? 어째서? " " 으아아아아― " " 괴물이다! 괴물! " 눈 깜짝할 새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리는 공원. 메두사가 가린 어둠 속에서 사 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밀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것은 재영과 시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 하여간 인간들이란.]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비웃음을 흘리던 메두사는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자아―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죽이는건 상관 없겠지!] ―뭐? 메두사의 외침에 가인은 불길함을 느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메두사의 벌려 진 입으로부터 강한 중력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대기의 기압이 낮아지며 상공의 먹구름들이 소리 없이 바스러진다. 이것은 분명! ―그, 그만두지 못해! 가인은 절규하며 머신 아더에 오라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휘날리던 오라 클 록에서 반중력의 원이 폭발하듯 불을 내뿜으며 머신 아더를 메두사에게로 날 려보낸다. 가인은 전력으로 질풍의 벽을 전개하며 메두사의 머리를 향해 달 려들었다. 늦지 않았어! 차원 진동 쉴드라면 충분히 녀석의 공격 따윈! ―막아낼 수 있다! 드카아아아앙 가인의 외침은 뒤이어 들려온 폭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메두사의 입으 로 모인 중력장들이 연쇄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며 하나의 중력파를 만들어낸다. 바로 아포칼립스!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궁극의 카오스! ―크아아아아앗! 머신 아더는 백열하는 질풍의 벽을 앞세워 메두사의 중력파를 정면으로부터 받아냈다. 가인 일행은 사념 상태에서도 전신의 피부가 찢어지는듯한 공간 마 찰을 체감할 수 있었다. 트트트트트트 차원 진동 쉴드로 보호받는 머신 아더의 주변이 급속도로 일그러지며 압축되 어간다. 아무리 아포칼립스 마저 막아낼 수 있는 차원 진동 쉴드라지만 머신 아더와 메두사는 서로가 가진 카르마 에너지의 차이가 극명했다. 동일한 아포 칼립스라면 승부수는 갈래질의 차이. 대지를 둘러싼 뱀에 비해 머신 아더는 너무나 초라했던 것이다. ' 질 수 없어! 절대로! 절대로! ' 가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포칼립스를 막아내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지상의 공원에서는 머신 아더와 메두사의 공방을 멍하니 지켜보는 수 많은 사 람들이 있었다. 가인은 머신 아더의 눈으로 재영과 시내를 발견하고 이를 악 물었다. ' 여기서 내가 물러난다면! 내가 쓰러진다면! ' 모두가 죽는다! 그런 걸, 그런 걸 내가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앗―! ―으아아아아아아앗! 가인의 사념이 기합을 내지르자 머신 아더를 감싸던 질풍의 벽이 한층 더 강 맹하게 회전하며 중력파를 밀어냈다. 그것은 갈래질의 차이마저 극복해내는 의지의 힘이었다. 오라는 의지의 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힘에는 한계 가 없어지는 것이다! 위이이이잉 그때 믿을 수 없는 굉음이 가인의 귓가로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던 코마히코의 사념이 경악하며 일행에게 소리쳤다. " ―! " 드카아아아아앙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공간을 가르는 폭음이 울려퍼진다. 메두사의 머리 옆에 있던 또 하나의 머리가 두눈을 뜨고 아포칼립스를 지상에 방출했던 것이 다. 그것은 바로 브리트라의 머리. 메두사가 소유한 또 하나의 인격이었다! 콰콰콰콰콰콰 중력파에 직격당한 지상은 거대한 다운 버스터 현상을 일으키며 짓뭉개진다. 중력파의 범위에 포함된 모든 것들이 일그러지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수 많은 사람들.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재영과 시내 또한 어김 없이, ―아, 아아, 아아아아아! 가인은 그 참혹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절망했다. 그러자 질풍의 벽을 강화 시키던 그의 의지가 약해지며 대번에 메두사의 중력파가 머신 아더의 전신을 육박한다. 코마히코는 지옥도로 변한 지상의 모습에 애써 고개를 돌리며 가인에게 소리 쳤다. ―정신 차리십시오, 가인 씨! 이대로는 우리마저 당하고 맙니다! 위이이이이잉 그러나 이미 제 3의 중력파는 그들을 향해 겨냥되고 있었다. 메두사가 소유한 마지막 인격, 티아마트의 머리가 좌측에서부터 그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 던 것이다. ―가인 씨! 시민의 사념이 가인을 부르짖었다. 가인은 반사적으로 오라 클록을 조종하여 거인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대의 공간 압축을 전 개했다. 드카아아아아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력파는 용서 없이 머신 아더를 휩쓸고 지나갔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9 - Ｂy Ｎext Ｎeo =-=-=-=-=-=-=-=-=-=-=-=-=-=-=-=-=-=-=-=-=-=-=-=-=-=-=-=-=-=-=-=-=-=-=-= 비잉비잉비잉비잉 작전 본부실의 불이 꺼지며 불길한 비상경보음이 울려퍼진다. 메인 스크린 에서는 머신 아더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져 아포칼립스에 휘말리고 있었다. 《D타입으로부터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 발생! 동체에 직격당했습니다!》 《제2관절 부위와 제3관절 부위가 사라졌습니다. 버스터와 스매셔 대파. 머 신 아더, 지상으로 추락합니다!》 채영과 오퍼레이터 팀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머신 아더의 상태를 보고했다. 간신히 오라 클록의 공간 압축이 아포칼립스를 중화시켰기에 기체가 카오스화 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머신 아더의 양팔이 무로 돌아가야 했다. " 이런건……이런건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시더는 머신 아더의 대파에 실성한 사람처럼 그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그녀 의 꿈이자 희망이었던 거인은 사지가 사라진채 거대한 크레이터 속으로 곤두 박질치고 있었다. 쿠우우우우웅 피스 대원들과 연결된 사념으로 머신 아더의 추락음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시 더는 그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채영에게 소리쳤다. " 피스 대원들의 상태는! 모두들 무사해? " 《패턴 블루의 공간 압축이 충격을 차단, 콕피트를 보호해냈습니다. 대원들 은 모두 무사합니다!》 채영의 보고에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파일럿이 무사하다고 해서 사태에 진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강시민공원에 있던 인질들은 모두 사망. 머신 아더는 전투력 상실. D타입으로 현현된 메두사는 건재 그 자체. 그야말로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13년간 계속된 몬스터와 의 싸움 중 최고의 위기! " 제길! 어떻게 저런 괴물이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유가인! 시민 씨! 마리 양! 모두들 무사합니까? 유리 양! 코마히코 씨! " 진우는 채영의 곁에서 무전을 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스크린에 잡힌 D타 입은 저번 쿠사나기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몬스터였다. 아니, 그야말로 세계를 집어삼키는 악마다! ' 적어도……적어도 내가 머신 아더에 탑승했더라면! ' 진우는 위기에 빠진 동료들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린 폼이 없는 머신 아더는 레벨2 G버스터 펀치와 레벨3 체인 스매셔 펀치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들만 제대로 사용해냈더라도 머신 아더가 저렇게 맥 없이 당하지는 않았을텐데! 삐삐삐삐삐 그때 진우의 무전기가 신호음을 울렸다. 이 긴급 상황에 무전이라니……. 대체 누구지? 인상을 찡그리며 무전의 내용을 확인하던 그는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전기에는 하나의 메세지가 들어와 있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주파수. 당연히 발신자도 찍혀 있지 않았다. 다만 메세 지에는 시간과 장소만이 적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우는 메세지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당 연하다. 이런 내용을 지금 자신에게 보낼 사람은 그 녀석 밖에 없는 것이다! ' 하지만! ' 진우는 스크린을 돌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무력화된 머신 아더를 향해 거대 한 팔두룡이 내려서고 있었다. 저런 동료들을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만 가족들을 구하겠다니! 진우는 자신의 이기심에 진저리가 났다. 길게는 5년, 짧게는 2년동안 함께 싸워온 동료들이다. 서로의 등을 맡기며 피를 흘려온 전우들이다. 한시민! 성마리! 이유리! 유가인! 카구라 코마히코! 어떻게 저들을 자신이 모르는척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저들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 미연아……. 하나야……. ' 난, 난 어떻게 해야하지? 난 어떻게 하면 좋지? 가족들을 구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그래도 난 동료들을 저버릴 순 없어! 이대 로 저들을 떠나보낼 수는 없어! 그건 불가능해!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 바보 제자,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지? ' 사부님! 사부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런 선택을 강요 받아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십니까?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그 강함이란 대체 뭡니까! 전 얼마만큼 강해져야 사부님처럼 될 수 있는 거죠? 얼마만큼 강해져야, 어느 정도의 힘을 손에 넣어야, ' ……모두를 지켜낼 수 있죠? ' 진우는 부재 중인 브루스를 향해 수 많은 질문을 던지며 고뇌했다. 제발 그 가 예전처럼 자신의 앞길을 제시해주길 바랐다. 물론 그것이 도피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진우가 유일 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브루스 류, 그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진우의 우상이자 영웅이었다. 그의 목표이자 희망이다! 그렇기에 브루스의 부재는 진우에게 더 없는 절망으로 다가왔다. " 자네의 동료들을 믿어라. " 그때 진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충고하는 사람이 있었다. 진 사령관이었다. 그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 가족들을 구하겠다고 동료들과 약속하지 않았나? 자네가 저들을 걱정하듯 저들도 자네를 걱정하고 있다. 서있는 장소가 다르다고 해서 자네들의 관 계가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야. " " 그러나 사령관 님, " " 저들은 자네를 믿고 있기에 목숨을 걸고 전장으로 향한 거다. 그러니 자네 도 저들을 믿어라. 동료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반드시 가족들을 구 해내는 거다. " " ……. " " 그리고 나도 약속하지. 저들 중 한사람도 빠짐 없이 무사 귀환시키겠노라고. " 그 말을 끝으로 진 사령관은 진우에게서 몸을 돌려 시더와 채영에게로 걸어 갔다. 그런 상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 시 스크린을 바라본다. 동료들을 믿으라고? ' 반드시 구해내세요. ' 떠나기 전 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 가족들과 함께 돌아오세요. 그러지 않으면……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 까……. ' ……그래. 그런 약속이었다. 그런 약속이었어. 진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약하게 사부님에게 의지하려고 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앞길을 제시해달라고 소원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 이렇게나, ' 이렇게나 그의 앞길을 제시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건만. 이렇게나 그를 믿어주 는 동료들이 있었건만. 어째서 자신은 고민하고 있었던 거지? 왜 주저하고 있 었던 걸까? ' 맡기겠어요, 모두들. ' 나는……녀석과 결판을 내고 오겠습니다. 진우는 각오를 다지며 작전본부실의 출구로 향했다. 출구 쪽에서는 어느 새 인가 수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정은 자신의 곁을 지나치려는 진우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 정말 혼자서 가실 건가요? 아무런 지원도 없이? " " 가족의 목숨이 걸린 만큼 녀석이 원하는대로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 장소를 말해달라고 해도……말해주시지 않을테죠. " " 아쉽게도. " 진우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수정은 작게 한숨을 쉬며 진우 에게 포권지례(抱券之禮)했다. " 그럼 다녀오세요, 사형.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 " 고마워, 사매(師妹). " 그렇게 칠성권으로 맺어진 두 남녀는 조용히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다. 머신 아더의 위기에 혈안이 된 시더 일행이 진우의 부재를 눈치채는 것은 그 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 안돼, 가인! 정신 차려! 머신 아더가 셀프 라이팅으로 몸을 수복하는 동안 시간을 벌어야해! 빨리 오라 클록을 가동시켜! 어서! " 시더는 D타입의 메두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기는 머신 아더의 모습에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사념이 들리지 않는건지, 머신 아 더는 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면 가인 일행의 사념에도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머신 아더가 파괴되었던가……. " 당황하지마라. "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시더와 채영에게로 진 사령관이 명령했다. " 와프 입자의 수치와 전투 지역의 열원반응을 다시 체크하라. 지금 즉시. " 《예?》 채영은 왜 그가 그런 명령을 내리는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신속하게 정보 수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도출된 자료를 살펴보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 식하고 말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와프 입자의 수치, 변동 없습니다. 열원 반응 역시…….》 " 뭐? " 시더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반문하고 말았다. 진 사령관은 무표정하게 스크 린의 다두룡을 노려보았다. " 닥터 웰리스. 메두사가 인질로 잡은 수단이 바실리스크 타입과 흡사하다 고 했던가. 사념파를 이용한. " " 아……! " " 작년 10월 달의 일이 생각나는군. 그렇지 않나. " " That's right! 바로 그거야! " 시더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는듯 탄성했다. 차원 왜곡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 와프 입자 수치! 인질들이 소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지되는 열원 반응! 눈 앞의 현상에 현혹되지마라! 객곽전인 수치로 상황을 분석하는 거야! 그 거야말로 우리 서포터 팀이 현장의 동료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 " 가인, 천공뇌정권이야! " 갑작스런 시더의 지시에 만신창이가 된 가인의 사념이 의아함을 표시했다. 하지만 시더는 개의치않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 아무 생각하지 말고 천공뇌정권! " ―처, 천공뇌정권이라니……. 가인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메두사를 노려보았다. 메두사는 눈을 감은 다섯 개의 머리를 마치 팔 처럼 사용하여 머신 아더의 동체를 짓누르고 인격을 가진 세 개의 머리로 머신 아더의 콕피트를 내려다 보았다. 마치 그대로 밤하늘에 먹혀버릴 것만 같은 위압감이다. 가인은 필사적으로 메두사의 위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두사의 아포칼립스에 황무지가 되어버린 공원에서는 어떠한 사람의 흔적 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훵하니 패인 크레이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가인은 카오스 속으로 사라져간 재영과 시내를 떠올리며 슬픔을 참지 못했 다. 그 슬픔은 곧 메두사를 향한 분노로 변해갔다. '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 노아도 테라도. 아무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호문클루스일지라도 같은 생명 을 가진 인격체라고 생각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고, 나름대로 소 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운이 나쁜 것이라고. 서로를 싸우게 만든 운명이 나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그들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 '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대가가 이것인가! 자기의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주제 에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방심한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건가! '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 브루스의 말. 그것만이 오직 진실이란 말인가! ―좋아. 그렇다면 버려주지! 네놈들이 몬스터 임을 자처한다면, 나도! ' 네 놈들을 몬스터로 여겨주마! ' 우우우우우 가인이 세계의 의지에서 오라를 불러들이자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이 찢어지 듯 펄럭이며 중력을 조정했다. 그러자 사지가 떨어져 나간 머신 아더는 반중 력의 힘을 등에 엎고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 놈이 어딜!] 메두사는 머신 아더가 재기할 기미를 보이자 노호성을 내지르며 다섯 개의 머리로 거인을 압박했다. 머신 아더가 발생시키는 중력장과 메두사가 발생시 키는 중력장이 맞부딪히자 고막을 찢는 마찰음이 울려퍼지며 공간을 일그러 뜨린다. 가인과 피스 대원들은 이를 악물며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콰지지지직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장갑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아무리 가인 일행이 안간 힘을 쓴다해도 메두사와는 5대 1의 상황이었다. 다섯 개의 머리에서 발 생하는 중력장을 견뎌낼 재간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저 중력장들이 연쇄 충돌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다섯 개의 아포칼 립스가 머신 아더를 카오스로 되돌릴 터였다.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임에는 변화가 없다. ―가인! 그때 시더의 사념이 외치는 소리가 가인의 영체를 꿰뚫었다. 그리고 그녀가 품고 있던 생각들이 하나도 빠짐 없이 가인에게로 전달된다. 급박한 상황 속 에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시더가 그대로 자신의 사념을 가 인에게 투영한 것이다. 그제야 가인은 왜 시더가 자신에게 천공뇌정권을 사용하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 과연! ' 그런 것이었단 말이지! 가인은 순간 무슨 생각에선지 머신 아더에서 자신의 오라 능력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아앗! 우드드드득 머신 아더의 동력원에서 가인의 오라만큼 공백이 생겨나자 대번에 거인을 짓 누르던 중력파가 오리하르콘 장갑을 깨부순다. 그 바람에 혼미백산한 마리가 가인에게 소리쳤다. ―무슨 생각이냐, 가인! 갑자기 왜 오라를 전개하지 않는 거야! ―가인 씨! 시민과 코마히코의 당황하는 목소리에 가인은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외쳤다. ―제가 오라를 모으는 동안 잠시만 버텨주세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냈 어요! ―버, 버텨달라니! 코마히코는 당장에라도 자신들을 압사사킬 것 같은 중력파의 흉흉함에 신음 했다. 그런 일행에게로 가인의 간곡한 사념이 퍼져나갔다. ―제발 절 믿어주세요! 마리 선배! 시민 씨! 코마히코 씨! 유리야! 반드시 모두를 구해 보이겠어! 반드시! '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제 한 목숨 보존하는 것조 차 힘든데, 하물며 남까지 생각해줄 여유는 없는 노릇이지. ' 분명 브루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뒤에, ' 하지만 너는 모두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다. 너에게는 무한한 오라의 가 능성이 있으니까. 오라를 믿어라. 그리고……. ' 브루스! 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 소중한 이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라. ' 넌……, ―나는……오라의 주인이니까! 오오오오오오 머신 아더의 두눈에서 푸른빛이 폭사되며 전신을 짓누르던 메두사의 중력장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다섯 개의 중력장들을 향해 오색의 빛이 휘몰아치는 오라 쉴드가 대항하고 있었다. 바로 시민과 마리, 유리와 코마히코가 전력을 다해 전개한 오라 쉴드였다. ―버텨주마, 가인! 마리 선배!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코마히코 씨! ―난 오빠를 믿어! 유리야! ―힘내세요, 가인 씨……! 시민 씨! ―하아아아아아앗! 가인은 기합을 내지르며 부서져나간 머신 아더의 오른팔을 움직여 메두사를 향해 내찔렀다. 상대의 주심을 느끼고 그 주심을 향해 모든 것을 쏟아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천공권! 天천 空공 雷뇌 霆정 拳권 투카카카칵 팔두룡의 내부에서부터 발생한 차원진동의 줄기들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밖으 로 터져나왔다. 세인트 엘모의 불을 방불케하는 방전 폭발은 암흑으로 뒤덮인 공간을 거침없이 파괴해간다. [크아아아앗!] 그 세상을 감싼 어둠 속에서 가녀린 메두사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 고 거짓 속에 가려진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촤자자자자작 공간이 부서지고 어둠이 물러간다. 천공을 밝히는 힘에 의해 격퇴당한 괴물 은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사슬로 만들어진 거대한 높이의 탑이었다. 탑의 정체는 63빌딩이었는데, 그림자에서부터 수백개의 사슬들이 튀어나와 건물을 촘촘히 휘감고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가인은 곧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변을 발견했다. ―다들……무사했어! 지상에는 분명 아포칼립스의 여파로 생성되었을 크레이터가 흔적도 없이 사 라져 있었다. 공원은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 없이 멀쩡했고 응당 소멸되었어야 할 수천명의 사람들도 제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죽은 사람은 없다. 아무도 죽지 않았어! 가인은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재영과 시내가 무사한 것을 발견하고서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리의 질문에 답한 것은 시더의 사념이었다. ―일루젼이야! 와프 입자의 수치도 변하지 않았고, 열원 분포도도 그대로인 데 갑자기 그런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 메두사는 그저 사람의 대뇌반구에 강한 암시를 걸어 최면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졌을 뿐이야. C+급 몬스터 스펙터처럼 사람의 공포를 이용한 환상을 보여준 거 지! 그제야 대원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방 금 전까지의 절체절명은 모두 피스 대원들이 품고 있던 공포가 현실로 투영되 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대파되었음이 분명한 머신 아더는 아무런 상처도 없이 그저 검은 사슬에 묶여 있었다.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도 원상태로 돌아가 짙은 노을빛을 흩뿌리고 있다. [잘도 눈치챘구나…….] 끼기기기기긱 그때 원통해하는 메두사의 목소리와 함께 머신 아더에 감긴 사슬들이 무시무 시한 힘으로 전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설마 외부와의 교신이 가능한 몸이었다니. 미처 고려하지 못했어. 이렇게 쉽게 내 환상을 깨뜨릴 줄이야.] 우드드드드득 ―크윽!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장갑이 구겨지자 가인은 신음을 흘렸다. 제길! 이번 에는 환상이 아닌 건가! ' 분명 천공뇌정권에 적중당했는데! ' 기가스 티폰마저 쓰러뜨린 기술이건만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거지? 주심 에서 빗나간 건가! 가인은 곧 사슬로 감긴 63빌딩의 옥상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한 검은 인 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브리트라의 몸을 빌린 메두사였다. 그녀는 D타 입으로 구현하지 않고 여지껏 용마인의 모습으로 자신들을 상대해왔던 것이다. ○ [하지만 어차피 늦었어. 이제와서 환상을 깨뜨린다 한들 네놈들이 할 수 있 는 일이란 없다! 잠자코 쓰러지도록 해!] 퍽 퍽 퍽 순간, 연달아 세번의 파쇄음이 울리며 머신 아더의 왼팔과 두 다리가 반대 방향으로 꺽여나갔다. 거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사슬들이 살아있는 뱀처럼 각 사지의 관절들을 부러뜨린 것이다. 가인은 그제야 예전 옴팔로스에서 머신 아더가 그녀에게 무력하게 당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때와는 틀려! 가인의 외침과 동시에 무사하던 머신 아더의 오른손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오른손의 카우터(Cowter)가 개방되며 그 안에서 다섯 발의 미사일들이 모습 을 드러낸 것이다. 바로 가인의 사념을 읽어들인 시더가 오퍼레이터 팀을 향 해 지시한 AFS(Aura Filed Shrapnel)였다. ―발사! 투투투투투학 시더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신 아더의 개방된 해치로부터 다섯 발 의 AFS가 유산탄처럼 발사되었다. 피스 대원들이 휴대해오던 오라 필드를 순 항미사일 식으로 개조시킨 이 무장들은 원래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와 양 어깨의 폴드런(Pauldron), 양 손의 카우터까지 해서 총 30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사슬에 의해 오른손을 제한 사지가 결박당한 머신 아더는 다섯 발의 유도탄 밖에 날릴 수 없었다. [어디서 잔재주를!] 메두사는 기합을 내지르며 63빌딩을 감싼 사슬들을 풀어내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AFS들을 후려쳤다. 그러자 미사일들은 채 메두사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AFS를 사용한 대가는 충분했다. 메두사가 자신을 방 어하는데 사슬을 사용하자 머신 아더를 결박하던 사슬 쪽이 허술해진 것이 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인은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을 전개했다. ―차아아아앗! 투화아아아악 AC의 반중력들이 연쇄 충돌을 일으키며 점화했다. 그 반동으로 메두사를 향 해 달려든 머신 아더는 그대로 옥상의 메두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휙 그러나 메두사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오히려 머신 아더의 손에 올라탔다. 그 리고 그림자에서 사슬들을 뽑아내어 다시 머신 아더의 전신을 옭아맨다. 그러 자 63빌딩을 감싸던 사슬들이 마치 메두사를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머신 아더 를 향해 옮겨붙었다. 수십 수백개의 사슬에 휘감긴 머신 아더는 거대한 털뭉치처럼 변하여 허공으 로 치솟았다. [놓치지 않는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어! 도망가게 내버려둘성 싶으냐!] ―누가 도망을 간다는 거냐! 오히려 이거야말로 우리가 바라던 바다! 가인은 그대로 머신 아더를 결박한 메두사를 이끌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 상에서 자신들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들은 자신 들이 한번 죽다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걸까? ' 절대로 반복할 수 없어! ' 아포칼립스에 휘말려 소멸했던 사람들의 환상. 그것이야말로 가인이 가장 끔 찍하게 여겨왔던 공포였다. 재영과 시내의 사라지는 모습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환상은 환상으로만 끝내야 해! 여기서 전투를 계속하다간 또 다시 모두를 말려들게 한다! ―시더! ―12구역의 민간인들을 대피시켜 놓았어! 채영의 사념을 따라가도록 해! 가인의 생각을 읽은 시더는 미리 손을 써서 머신 아더가 마음껏 싸울 수 있 는 격전지를 만들어주었다. 바로 예전 D타입 쿠사나기와 머신 아더가 사투를 벌였던 12구역. 그곳이라면 아직 보수 작업이 한창이었기에 거주하는 주민들 도 적었고 대피 작업도 용이했다. 가인은 채영의 사념이 보내오는 12구역까지의 루트를 되새기며 그대로 대류 권계면까지 날아올랐다. 쿠구구구구 공기의 저항을 뚫고 올라가자 기체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고기압과 저기압의 왕래로 권계면이 수면의 파도처럼 물결치자 그 흔들림은 한층 더 심해진다. 머신 아더에게 매달려 덩달아 대류권과 성층권의 경계면까지 오게된 메두사 는 이를 갈며 사슬들을 움직였다. [크으으―! 네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메두사는 사전에 쿠사나기가 브리트라와 함께 보내온 정보를 통해 머신 아더 의 약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콕피트 안의 피스 대원들을 제거하 면 거인은 빈껍데기나 마찬가지! 그리고 콕피트는 왼쪽 가슴 부근이렷다! [심장을 도려내주지!] 메두사의 처절한 고함소리와 함께 그녀의 사슬들이 드릴 모양으로 뭉쳐 회전 했다. 강렬한 스핀을 먹은 사슬들은 그대로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를 찢어 발기며 오리하르콘 인공 근육을 파고든다. 가인은 귓청을 때리는 시끄러운 드릴 소리에 사념 상태에서도 메스꺼움을 느 꼈다. 하지만 애써 그것을 억누르며 시민에게 소리친다. ―시민 씨! 철컹 순간, 머신 아더의 투구 부위에 있던 어퍼 비버가 내려가며 사람의 안면 형 상을 한 미디엄 제너레이터 나르키소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푸른 색을 띄고 있던 오리하르콘 장갑들이 노란색으로 변색한다. ―옐로우 폼 체인지! 공명음 발파! 라아아아아 시더의 지시에 따라 나르키소스의 입에서 패턴 옐로우 특유의 공명음이 전개 되었다. 그러자 머신 아더를 뒤덮고 있던 사슬들이 부르르 몸을 떨며 미세하 게 들썩인다. 시민의 음파가 사슬들과 공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사슬들은 점점 거칠게 진동한다 싶더니 이윽고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머신 아더에게서 튕겨나갔다. [피스메이커어어어어엇!] 사슬들과 함께 튕겨나간 메두사는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머신 아더의 다음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녀의 앞에서는 거인이 푸른 망토로 몸을 감싸다가 세차게 거둬내며 다시 예 의 블루 폼으로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 쿠사나기 전(戰) 이후 줄곧 널 위해 머신 아더의 오른쪽 다리를 개 량해왔어! 더 이상 극점이 분산되어 피해를 확산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 마음껏 녀석을 날려버리도록 해! ―좋아! 간닷! 가인은 오라 클록으로 반중력의 원을 생성시키며 머신 아더의 오른쪽 다리에 차원 진동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차원 진동의 소용돌이가 백열하며 물질계로 혼돈의 문을 개방해낸다! 질풍(疾風)! ―라이징----------킥! 투화아아아악 반중력의 폭발을 등에 엎은 머신 아더는 그대로 메두사를 후려치며 17킬로미 터의 상공에서 섬광처럼 12구역으로 내리꽂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로는 아포 칼립스가 일으킨 공간 마찰이 눈으로도 쫓을 수 없는 긴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한편 지상에서 하늘의 궤적을 바라보던 시영은 쓰고 있던 선글래스를 벗으며 미소했다. " 화려한 스타시몬(stasimon)이군. 그렇다면 슬슬 블랙 아더의 엑소도스(exo dos)도 들려줘볼까. "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0 - Ｂy Ｎext Ｎeo =-=-=-=-=-=-=-=-=-=-=-=-=-=-=-=-=-=-=-=-=-=-=-=-=-=-=-=-=-=-=-=-=-=-=-= [카하, 하― 으아―] 메두사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폐허가 된 12구역의 잔해에서 기어나왔다. 대 류권 계면에서부터 머신 아더의 라이징 킥에 적중당한 그녀는 하마터면 존재 의 의미를 잃고 혼돈으로 돌아갈 뻔 했다. 하지만 라이징 킥의 극점이 생각보다 작았던 것이 행운이었다. 극점을 줄임 으로서 라이징 킥은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가 될 수 있었지만 대신 메두사의 육체를 완전히 날려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메두사는 간신히 브리트라의 능력인 정보 복제를 통해 5퍼센트 미만 의 육체를 복구해낼 수 있었다. [하― 하― 아아―] 메두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복원된 몸을 힘겹게 일으켜세웠다. 육체의 타격 은 경미했지만 문제는 정신적인 타격이었다. 유가인이 발휘한 질풍의 힘은 차 원 진동을 촉매로 끌어내는 혼돈의 힘이었기에 중력파나 전자 가속을 이용한 아포칼립스와 달리 영체에도 충격을 주고 있었다. 만약 요르문간드의 방대한 정신 용량이 없었더라면 대번에 절명했을 것이다. ' 역시 본체를 현현시켰어야 했나? 환술로 녀석들을 제압하려고 했던 것은 내 욕심이었나? ' 메두사는 자신의 행동에 회의를 느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 아니야. 어쩔 수 없어. 본체를 현현시켰다간 테라 인코그니트에 있는 요르 문간드의 몸이 버티지를 못할 거야. ' 그녀는 사전에 티아마트에게서 요르문간드의 모든 힘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힘과 본체의 현현은 별개의 것이다. 화신의 힘은 용염, 즉 인격이 분 열되면서 파생된 이드(id)의 힘이기에 통합될수록 개체의 독립성과 영향력은 강해지지만 존재의 법칙, 즉 엔트로피의 흐름을 역행시키지는 못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현현성을 발휘하려면 요르문간드의 정신 용량을 직접 물질계 에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화신으로서 발휘하는 힘은 정신의 힘이기에 인격의 독립을 이 룬 메두사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지만, 본체의 현현은 요르문간드의 육체 에 구애된다는 것이었다. ' 안돼. 그것만은 절대로 안돼! ' 가뜩이나 실험대에 올라 해부당하고 있을지 모를 육체다. 그런 상태의 요르 문간드에게 본체의 현현을 강요했다간 그 몸에 잔류하고 있을 티아마트의 인 격이 위험해질 터였다. 티아마트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인데, 그 싸움에서 티아마트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래서야 아무리 요르문간드의 힘을 모두 물려받았다고 한들 빛 좋은 개살 구에 불과했다. ' 웃기지마. 나는 절대로 지지 않아. 절대로 질 수 없어! ' 메두사는 이를 악물며 수천개의 사슬을 펼쳐냈다. 본체의 부재로 아포칼립 스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크게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의 목표는 머신 아더의 탈취, 머신 아더의 소멸이 아니었기 때 문이다. ' 몇번이고 소멸시킬 수 있으면 소멸시켜봐라. 몇번이고 살아나서 네 놈들 을 쓰러뜨려주마. ' 모든 건 티아마트……당신을 위해서! 촤촤촤촤촤 흙먼지로 뒤덮인 12구역의 폐허 속으로 메두사의 사슬들이 퍼져나간다. 라이 징 킥의 후폭풍으로 시야가 가려져 있었기에 시각에 의지해서는 머신 아더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 드레이카닉 아이. ' 요르문간드의 공간지각 능력! 차원의 힘에 근접한 그녀는 자신의 지각 범위 내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에 의지한다면 40미 터의 거인 쯤 발견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내 쪽에서 선방을 날려주지! 촤라라라라락 순간 흙먼지 속에서 치열한 쇳소리가 울려퍼진다. 먹이를 발견한 뱀처럼 사 슬들이 일제히 머신 아더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천공뇌정권이라고 했던가? 그런 위험한 것을 사용할 여유도 없이 몰아붙여주 마! 챙― 챙― 챙― 챙―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네 번의 파쇄음이 그녀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머신 아더에게 다다르기도 전에 무언가가 브리트라의 사슬들을 튕겨내고 있었다. 뭐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우우우우우웅 거센 오라의 흐름이 흙먼지 너머에서 느껴졌다. 얼마나 강한 영적 인력인지 주위의 대기가 다 들끓고 있었다. 와프 입자가 머신 아더의 오라에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후오오오오오 흙먼지가 대기의 움직임을 따라 한 방향으로 걷혀나간다. 그렇게 먼지가 사 라진 자리로 드러난 것은 거대한 붉은색의 검을 들어올리는 붉은 거인의 모 습이었다. 바로 레드 폼으로 변한 머신 아더! ―엑스칼리버 일식(一式) 스톤 커터 가동. EX에 출력을 집중하기 위해 AC를 해제합니다. 피스 레드 성마리가 주도하는 궁극의 레벨 4. 머신 아더는 25미터 가까이 늘어난 대형 오라 소드로 무영신풍류의 지검대적 세를 취했다. 아마 방금 전의 사슬 공격을 쳐낸 것은 저 반물질 절삭성 커터 였을 것이다. 메두사는 그런 거인의 박력에 생리적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 쿠사나기, 당신은 이런 괴물과 싸웠던 건가요? ' 그렇게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그녀는 새삼 쿠사나기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각오를 다졌다. [하―!] 촤촤촤촤촤 메두사의 기합에 발 맞춰 폐허의 그림자란 그림자에서 일제히 사슬들이 튀 어나왔다. 그 수는 족히 잡아 오천! 본체를 현현시키지 못하는 대신 그녀는 소유한 용염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촤아아아아악 그러나 혼신을 다한 그녀의 공격은 생각처럼 기세를 펼치지 못했다. 머신 아 더는 좌우로 풍차처럼 검을 돌려 사슬들을 빗겨내더니 그대로 크게 발을 내딛 으며 전방을 횡으로 베어낸다. 수식(守式) 파란(波蘭)에 이은 이식(二式) 파쇄(波殺)! 두가지 검세를 연달아 시전한 것 뿐이지만, 이 단순한 검진은 흉흉하게 달려 들던 사슬들을 효과적으로 차단해냈다. 자잘한 사슬들의 움직임에 현혹되지 않 고 공격의 큰 줄기, 검로를 꿰뚫어보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는 마리가 지난 번 유평과의 결투에서 깨달은 이화접목(梨花接木)의 묘수였 다. 메두사의 사슬에서 느껴지는 진기를 통해 공격의 허와 실을 꿰뚫어보고, 사슬 하나 하나의 엔트로피를 감소시켜 궁극에는 공세의 리던던시(redundancy) 를 높여 1차 근사를 이루어낸 것이다. 공격 또한 정보의 집합체. 마리는 이 정보를 자신의 감각으로 최대한 걸러내 어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고 필요적절하게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다. ' 크으으으으. ' 메두사는 머리가 타버릴 것만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용염의 힘을 한계 까지 끌어올린 그녀는 뇌의 운산작용에 과부하가 걸려 극심한 두통을 느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슬의 출수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 었다. 잠깐이라도 공격을 늦췄다간 대번에 거인의 검이 그녀를 내려칠 것이다. 촤촤촤촤촤 머신 아더는 수많은 사슬들의 세례를 정적으로 와해시키며 천천히 메두사를 향해 다가갔다. 어느 새인가 메두사의 공격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만큼 거인을 접근시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 질 수 없어. 질 수 없어! ' 메두사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머신 아더를 노려보았다. 거인과 그녀 의 거리는 이제 채 30미터도 남지 않았다. 거인이 한발만 더 내딪으면 메두사 는 영락 없이 오라 소드의 사정 거리에 들어갈 판이었다. ―크! 그러나 그 한발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서로의 거리가 줄어든 만큼 사슬들의 인터벌이 짧아져서 공격의 궤적을 파악 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슬들은 그야말로 폭풍우처럼 쏟아지며 쉴새 없이 머신 아더를 후려쳤고, 그 바람에 드디어 거인의 동체에도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슬이 장갑에 스치 는 것만으로도 폭발이 일어나며 충격이 마리 일행의 영체를 뒤흔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다는 각오로 더더욱 메두사를 향해 다가간다. [오지마! 오지 말란 말이야!] 메두사는 마치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처절하게 절규했다. 너무나 괴로웠다. 능력을 전개하는 몸도 마음도, 그리고 이 숨 막히는 대치 상황도. 반드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데, 이겨서 티아마트를 구해내야 하는데, 바라 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인데. 그것을 이루기가 왜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왜 다들 우리를 방해하기만 하는가? 왜? 왜? [죽어! 제발 죽어버렷!] 메두사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고통의 눈물이기도 했고 슬픔의 눈물이기도 했고 분노의 눈물이기도 했다.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 대한 원망의 눈물이다. [쓰러져! 쓰러져! 쓰러져어어어어엇―!] 티아마트, ' 난 메두사를 좋아해. 메두사를 아껴주고 싶어. 위해주고 싶어. 사랑하고 있어. '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작은 연인. ' 그래서 난 메두사가 앞으로도 계속 살아줬으면 좋겠어. ' 쑥스럽게 웃으면서 건네던 그 한마디. 메두사는 오열하며 소리쳤다. 웃기지 말라고. 그런 건 날 아껴주는 것도 위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아니 라고! 그저 바보같은 자기 만족일 뿐이라고! '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그저― ' 치이이이이잉 그때 머신 아더의 등 뒤로 푸른색의 망토가 뻗어나와 동체를 보호해냈다. 이 대로는 싸움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가인이 AC를 자력으로 움직여 공간 압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공간 압축이 한순간 모든 사슬들을 빗겨내자, 마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사식(四式), 그리고 거침 없이 쏘아지는 엑스칼리버! ―단월(斷月)! 츠칵 날카로운 파육음과 함께 거대한 거인의 검이 메두사의 사슬과 몸을 통째로 관통했다. 메두사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몸에 파고든 엑스칼리버를 바라보다 가 천천히 눈 앞의 거인을 올려다본다. ' 내가 바라는 것은― ' 그녀의 힘없는 손짓에 바닥에 널려있던 사슬들이 머신 아더의 발을 타고 올 라갔다. 마리는 황급히 머신 아더의 발을 빼내려 했지만 갑자기 들려온 사념에 행동 을 멈췄다. ―티아……마트. 가인을 비롯한 다른 대원들도 깜짝 놀랐다. 이 목소리는……메두사? 메두사 의 사념이 사슬을 타고 전해져 오는 건가? 화악 순간 일행의 눈앞으로 새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메두사가 엑스칼리버에 당한 상처를 자기 복제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사념이 피스 대원들에게도 흘 러들어온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하얀 공간. 그 공간에 한 어린 소년과 메두사로 추정되는 여 인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웃고 떠들며, 때로는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그야말로 너무나 행복하게……그렇기에 깨뜨리는 것조차 용납되어지지 않는, 그런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이런 걸 보여주는 거야? 가인은 당혹스러워하며 그런 남녀의 모습을 외면했다. 애써 메두사의 사념을 떨쳐냈다. 그러자 엑스칼리버에 꿰뚫려 처참하게 피로 물든 메두사의 모습이 보여온다. 그녀는 피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가인 일행의 사념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끝나지 않았어. 이렇게 끝낼 수는…….] ―테라여, 진심으로 너희를 증오한다! 메두사의 목소리에 그녀의 사념이 겹쳐져 들려왔다. 가인 일행은 숨 죽여 그 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구할 거야……. 살려낼 거야. 반드시……. 반드시…….]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너희를 증오한다! 사슬을 타고 메두사의 의지와 기억들이 일행에게로 전해졌다. 그러자 엑스칼 리버를 잡고 있던 머신 아더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코마히코는 거인의 주도권을 잡은 마리에게 이변이 생겼음을 느끼고 소리쳤 다. ―아가씨? 그런 일행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볼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티아마트를 향한 메두사의 헌신을. 또 그녀를 위해 희생한 티아마트의 사랑 을. 그것은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한……, 그렇기에 그토록 간절할 수 밖에 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기다려요……티아마트……. 내가, 내가 지금 곧 당신을……!] ―이번에는 내게서 티아마트 마저 빼앗아갈 셈이냐―! ' 으으, 으으으으! '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엑스칼리버를 잡은 머신 아더의 양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나는―! ―으아아아아앗! 촤악 머신 아더는 그대로 뒤로 돌면서 메두사에게 박혀있던 엑스칼리버를 위로 쳐 올렸다.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삼식(三式) 격멸(擊滅)! 마리는 그대로 메두사를 일도양단한 것이다. 반면 그녀의 사념은 정신이 공유 된 다른 대원들에게도 영향을 줄 정도로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나는, 나는 대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뭐와 싸운 거지? 내가 싸 운 상대는 대체 뭐야? 난 뭘 베어버린 거냐고? ―나는……! ―진정해요, 마리 선배! 가인은 패닉 상태에 빠지려는 마리의 사념을 진정시키며 다시 머신 아더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그러자 거인의 오리하르콘 장갑이 붉은색에서 예의 푸 른색으로 돌아간다. 가인은 언제나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던 마리가 이토록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무리도 아니지. 선배는 노아와 테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 비단 마리 뿐만이 아니다. 시민과 코마히코가 받은 충격도 그녀 못지 않게 컸다. 그만큼 몬스터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는 것은 피스메이커에게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가인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메두사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그 모습 위로 리리스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 리리스―! ' 피투성이가 된 테레이아를 끌어안으며 울부짖던 자신. 결국, 결국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자신은 아무 것도……. ―뭐가…… 피스메이커고 뭐가 몬스터란 말이야? 가인은 흐느끼며 소리쳤다. ―우리는 그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을 뿐이잖아! 그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진우를 원망할 자격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음을. 자신이 여전히 피스메이커의 피스 대원으로 남아있는한, 그래서 노아와 싸우 는 이상, 리리스가 목숨을 걸고 얘기해준 진실들은 그 의미를 잃어버림을. '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어. ' 그것이 옳은 일이라 믿어왔다. ' 하지만……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면? ' 그래서 그 사람들의 소중한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면? ' 그래도 그것이 진정 올바른 일인 걸까? ' 지킨다라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평화라는 것은, '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었단 말인가? ' [크―아, 아…….] 그때 한 신음소리가 회의에 빠진 일행의 사념을 일깨웠다. 모두가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거기에는 메두사가 자기 복제로 힘겹게 두동강이 난 몸을 복구해 내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피웅덩이에 잠긴 반신을 끌어안으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이, 일어나지마. 가인 일행 중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사념이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두사는 일어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미 그녀의 카 르마 에너지는 계속되는 전투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쿠사나기처럼 테라 인의 영체에서 정을 끌어 모았던 것도 아니고, D타입으로 구현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연달아 아포칼립스 급의 공격을 얻어맞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 티아마트, ' 메두사는 비척거리는 몸으로 머신 아더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 은 이 자리에 없는 자신의 연인을 찾고 있었다. ' 당신은 내가 당신의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죠? ' 바보같으니…….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에요? '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머무르는 건……당연한 거잖아요. ' 그런 당연한 것을 고맙다고 해버리면,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얼마나 고맙다고 해야하죠? '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해준 당신에게, ' 메두사는 이 순간, 테라도 노아도 잊어버리고 웃었다. 진정으로 행복하기에 웃었다. 아늑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이토록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행복함이란, ' 분명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 느낄 수 없었을 거야……. ' 메두사는 머신 아더의 발을 붙잡은 사슬에 힘을 주었다. 그래. 나는 돌아갈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티아마트의 곁에 머무를 것이다. 이 행복을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절대로! ' 계속 싸울 셈인가? 가인은 검날이 푸른빛으로 변한 엑스칼리버를 들어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메두사를 내려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금의 내가 나 자신과 일행을 지키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체크메이트. 그렇다면 제가 가르쳐 드리죠, 유가인 씨. 당신의 고민에 대한 해답. 당신이 바라는 방법이라는 것을! 콰지지지직 모두가 행복해질 순 없습니다. 모두를 지켜낼 순 없습니다. [카아아아아앗!] 그러니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지켜내십시오. 자신의 손에 닿는 이들만 확실하게 지켜내십시오. ―뭐, 뭐지? 그것이, 평화― 라는 것입니다. 우우우우우우 가인 일행은 갑자기 일어난 눈 앞의 광경에 넋을 빼앗겼다. 그들의 앞에는 어디에서 날아온 건지 모를 거대한 사이드가 메두사의 몸에 박혀 있었다. 사신의 낫에 꿰인 메두사는 피분수를 뿜어내며 처참한 비명을 내지른다. [으아, 아아아아아아!] ―그림 리퍼(Grim Reaper)! 사나운 격풍의 그라비티 블래스터다! 사이드의 정체를 알아본 시더의 사념이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그와 동시에 메두사에 박힌 사이드의 반물질 절삭성 커터가 진동하며 백열하기 시작한다. 가인은 그것이 아포칼립스를 유발하는 연쇄 중력파라는 것을 깨닫고 재빨 리 오라 클록으로 머신 아더를 보호해냈다. 투아아아아아앙 ―크핫! 단지 폭심지의 근처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 머신 아더를 뒤흔들 었다. 공간 압축의 반탄력에 떠밀려 뒤로 튕겨난 머신 아더는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망토를 걷어냈다. 그리고 일행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아…….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긴 지면의 모습이었다. 아포칼립스의 여파에 휩쓸린 모든 것은 완벽하게 혼돈으로 돌아가 있었다. 거기에는 메두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티아마트와 브리트라의 힘을 흡수하여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을 가지게 된 그녀라도 극점이 높은 아포칼립 스 앞에서는 카오스 화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말의 여지 없이 소멸된 메두사의 모습에 가인은 분노했다. ―대체, 대체 왜 이런 짓을……! 왜! 가인은 이를 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창 싸움 중이라 몰랐지만 어느새 인가 하늘에서는 해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선명한 핏 빛의 보름달. 우우우우우 그 보름달을 등에 지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서는 한 검은 거인이 있었다. 자신의 배 이상 되는 피막의 날개를 퍼덕이며 크레이터에 꽂힌 사이드를 회수 해내는 그것은, ―티폰! 현세에 부활한 기가스! 가이아가 만들어낸 최강의 자식! 그 거인을 수족처럼 부리는 남자는 분명, ―한시영, 너냐! 시민의 외침에 검은 거인은 시영의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후.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피스메이커 여러분. 이제부터는 그동 안 미뤄왔던 삼차전을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 음! " 막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며 자리에서 내리던 진우는 가슴을 엄습하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 격통은 분명 아포칼립스의 차원 파괴가 물질계에 행해졌 을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그는 서울시가 있을법할 방향을 돌아보며 낮게 중 얼거렸다. 다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진우는 심란해려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눈 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시 외곽에 위치한 한 폐성당이었다. ' 하필이면. 또 성당인가. ' 진우는 라트가 약속 장소로 성당을 고른 것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성당과 관련된 안 좋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타는 성당. 그 속에서 죽어간 수 많은 가족들. 언제나 꿈 속에서 되풀이되는 그 날의 기억. 진우는 주먹을 움켜쥐며 천천히 폐 성당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당은 인 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 며칠전만 해도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데. ' 진우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듯한 정원과 건물의 상태에 의혹을 가졌다. 하지 만 어찌 그가 알 수 있겠는가? 이곳의 소유주가 네이 안데르슨이라는 것과 어 제까지만 해도 시영 일행이 이곳을 아지트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진우는 조심스럽게 성당의 벽에 몸을 기대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그의 왼손에는 언제나 차고 다니던 피스메이커의 무전기 대신 결혼기념일로 미연에 게 받은 손목 시계가 차여져 있었다. ' 5시 50분. ' 라트가 그의 무전기로 보낸 약속 시간까지 앞으로 10분! 그 녀석, 정확하게 6시에 맞춰 나타날 셈인가? 진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라트의 행동에 조바심을 느꼈다. 제길. 설마 장 소를 잘못 찾았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 " 생각보다 일찍 왔군. 기다리는 수고를 덜었어, 피스 그린. " 그때 예배당의 문이 열리며 어둠 속에서 한 신부가 걸어나왔다. 긴 은발에 타오르는 것 같은 녹색의 눈동자. 검은 신부복! 변하지 않았다. 그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라트 발렌시아. 팰릭스 신부! 그는 2018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진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연태 까지 수인화된 라트만 보아오던 진우로서는 그의 신부 차림에 전율이 일어났 다. 새삼 17년 전의 비극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런 진우의 살기에 라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 크크크. 그 표정을 보아하니 특별히 신경을 써서 무대를 준비한 보람이 있 군. 어때?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지 않나, 도미니꼬? " 도미니꼬. 그 세례명이 라트에게서 언급되자 진우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 꼈다. 그는 이를 갈며 낮게 소리질렀다. "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말아라. 아니, 넌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어! " " 호오. 꽤나 섭섭한 소리로군. 이래뵈도 반가움의 표시였는데 말이야. 뭐, 좋아. 그렇다면 계속 피스 그린이라고 불러주지. " 라트의 태도 하나 하나가 진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예전 그가 수인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의 저 모습은, 아니 신부 복장을 한 것부터가 진우를 우롱하기 위해서라 고 밖에 볼 수 없었다. " 네 녀석의 요구대로 혼자서 찾아왔다! 내 가족들은 어디있지? " " 그렇게 서두를 것 없지 않나? 천천히 시작하자고. 오늘 밤은 꽤 길어질 것 같으니까. " 라트는 진우의 다급해하는 모습을 음미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 일단은…… 그래. 자네의 성의가 얼마나 되는지부터 확인해 보지. 내 요구 는 분명 혼자서 찾아오라는 것만이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 " AI컴플리트 세트와 무전기는 모두 언더 시티에 반납하고 왔다. 피스메이커 에서 내 위치를 역탐지하는 일은 없을 거야. 물론 발신기나 도청기도 하지 않았지만. 정 의심 나면 몸 수색을 해보던가. " 진우의 비아냥에 라트는 킬킬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 그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네 패턴 그린의 능력만 봉할 생 각이었다. 그 가속이라는 것은 여러모로 반칙같아서 말이야. " 라이컨슬로프의 능력도 충분히 반칙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우는 그런 뒷말을 삼키며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 라트, 그렇게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굳이 나와 승부를 가리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냐? " " 글쎄……. 이유라? 굳이 말하자면― " 라트는 순간, 오른팔의 손톱을 뽑아내며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그 갑작스러 운 돌진에 진우는 황급히 칠성권 사기종인의 수로 손톱을 받아넘기며 기수식 을 취했다. " 살기 위해서랄까? " " 너! " 입꼬리를 올리며 살기를 흘리는 라트의 모습에 진우는 표정을 굳혔다. AI슈 츠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라트와 정면 대결을 펼쳐봤자 승산이 없었다. 그렇 다면 화경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압하며 발경을 날리는 수밖에! " 살기 위해서라니! " " 살아가려면 목표가 필요하잖아? 목표가 없는 삶이란 무의미해지지. 무의미 한 삶은 곧 죽음이다! " " 그래서? 네 삶의 목표라는게 날 죽인다는 거냐! " " 왜? 너무 소박한 꿈인가? " 휙 진우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의 가속으로 라트의 손톱을 피해내며 재 빨리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라트는 굳이 혈안이 되서 싸울 생각은 없었는지 그런 진우를 추격하지는 않 았다. 대신 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한탄하듯 얘기를 꺼냈다. " 내가 처음으로 자신이 라이컨슬로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늘과 같은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한밤에 뜨거워지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울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웬 괴물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더군. " " ……. " " 놀라서 울고 있는 나를 의외로 부모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달래주었어. 아마 내가 그렇게 될 줄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거야. " " 그럼……. " " 그래. 내 부모님 또한 라이컨슬로프였지. 정확히는 아버지만 웨어울프. 어 머니는 그것을 알고서도 결혼하신 거고. 뭐, 그렇게 내가 괴물의 자식이라 는 것을 알고난 뒤에도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어. 어린 내가 라이컨슬로프 의 힘을 조절하지 못해 몇번 만월밤에 날뛴 것을 제외하면 무난하게 평화 로운 나날이었지. " 하지만 모든 불행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 그런데 이 만월밤에 날뛴 것이 문제가 되었어. 그 작은 시골 마을에서 어 떻게 얘기가 퍼진건지…… Fucking Temple Knights! 그 저주받을 녀석들이 이단의 냄새를 맡았던 거야! 인간이 아닌 이능력자들이 마을에 있다는 것 을 알아냈어! 그리고 녀석들이 파견한 이단 심문관에 의해 난 아버지와 어 머니를 잃어버렸다. " 라트는 그때의 분노가 되살아나는지 두눈에 흉흉한 녹색빛을 띄었다. " 어머니는 라이컨슬로프도 뭣도 아닌 보통 사람이었어. 그런데 녀석들은 단 지 라이컨슬로프의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어 머니를 처리하더군. 난 간신히 아버지의 도움으로 녀석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날 살리기 위해 내 친구였던 옆집 꼬마를 패밀리어로 삼 아 나인 것처럼 꾸몄지. 그렇게 모두의 희생을 발판 삼아 난 간신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을 당해야 했 다. " 살아남은 나를 지탱해준 것은 오로지 성당 기사단에 대한 복수심 뿐이었다. 그 복수심만이 내 삶을 움직여주는 원동력이었지. 그래서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나갔다. 성당 기사단에 대해 알아내고, 녀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지. 그러던 중, 뜻밖에도 나는 나와 아버지 같은 라이컨슬 로프들의 기원을 알아낼 수 있었어. " " 기원? " " 솔로몬 프로젝트라고 알고 있나? 72기둥의 마신이라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비술인데, 쉽게 말해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유전변이(genetic variation) 기술이지. 인위적인 조작을 일으켜 인간을 72개체의 이능력자들로 개량해 내는 실험인 거야. " " 뭣! " 진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전변이 기술? 72개체의 이능력자들로 개 량해낸다니! 라트는 그렇게 놀라는 진우를 비웃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 아버지는 그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진 실험체였다. 하지만 중반에 실험체 들이 탈주하는 일이 벌어졌고 아버지도 그때 탈주하신 거였어. 아마도 성 당 기사단이 솔로몬 프로젝트를 거두어들이는 과정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 겼던 모양인데……. " " 성당 기사단이 솔로몬 프로젝트를 거두어들였다고? " " 몰랐나? 녀석들은 자신들 외의 다른 세력이 힘을 얻는 것을 용납치 않아. 인류의 지배기관이라 자칭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자신들이 통솔할 수 있어 야 안심하는 족속들이지. " " ……. " " 어쨌든 그 탈주 과정에서 아버지는 화이트 파우더라는 물건을 녀석들에게 서 빼돌리셨다. 아무래도 그 약이 시중에 배포되면 여러모로 성당 기사단 이 곤란해지는 모양이더군. 기억하나? 자네가 나에게서 훔쳤던 마약을? 그것이 바로 화이트 파우더다. " " 소마가? " " 그래. 그런 이름으로 유포시키려고 했지. 화이트 파우더로 성당 기사단의 정보망을 교란시키고, 동시에 미국의 마약 신디케이트를 접수할 생각이었 다. 성당 기사단에 대항할 기반을 닦을 생각이었어! " 진우는 마른 침을 삼켰다. 라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 그런데 그런 내 계획을 깡그리 망쳐버린 꼬마가 하나 있었지. 내 복수를 엉망으로 만들고, 거기다 날 성당 기사단에게 넘겨 실험대까지 오르게 만 든 너! 피스 그린! 네 녀석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나버렸다. 복수는 커녕 녀석들에게 실컷 농락당하기만 했지! 그야말로 넌 나를 지옥에 떨어 뜨린 거야! " 라트는 점점 광기를 띄며 흉폭해져갔다. 그 감정 변화에 이끌려 그의 육체도 인간의 껍질을 벗기 시작한다. " 지옥같은 14년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목숨만을 보존해야 했 던 14년이었어! 그 14년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무슨 꿈을 꾸 어왔는지 아나? 언제나 너만을 생각했다, 피스 그린! 날 이런 꼴로 만든 너! 너만은 내가 반드시 죽여버리겠노라고! 너에게만큼은 내가 당한 고통 을 그대로 돌려주겠노라고! 셀수도 없이 각오했다! 셀 수도 없이 다짐했어! " 그리고 깨어난 지금! " 내 삶의 목표가 네 녀석의 말살로 변해버린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 내 모든 것을 빼앗고 내 복수심마저 앗아간 너! 그렇다면 너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주겠다. 똑같이 모든 것을 빼앗아주겠어! " 화르르르륵 라트의 등 뒤에 있던 폐성당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사전에 설치해둔 점화 장치가 건물 도처에 뿌려둔 기름 위로 불꽃을 일으킨 것이다. 라트는 불을 등진채 어둡게 물든 얼굴로 진우에게 물었다. " 자, 피스 그린. 예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겠지? 그때와 마찬가지로 너에게 다시 한번 묻겠다! 궁금하지 않나? 저 불 타는 건물 안에 뭐가 들 어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 " 설마! " 진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성당을 바라보다가 라트를 노려보았다. " 설마, 설마 저 안에! " 미연이와 하나가, 내 가족들이……! " 크크크크. 확인하고 싶다면 이번에는 날 쓰러뜨리고 가야할 걸. 빨리 쓰 러뜨리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다 타버릴 거다. " 조롱하는 라트의 웃음 소리도 진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기억하는 것은 예배당에 쌓여있던 가족들의 시신. 그리고 그 시신들을 앞에 두고 오열하던 자신의 모습. ' 그런데 그때와 같은 일이 또 다시, ' 또 다시 일·어·난·다·고? " 라트으으으으―! " 순간, 진우는 노호성을 내지르며 가속을 전개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1 - Ｂy Ｎext Ｎeo =-=-=-=-=-=-=-=-=-=-=-=-=-=-=-=-=-=-=-=-=-=-=-=-=-=-=-=-=-=-=-=-=-=-=-= ―왜 죽였어! 어차피 메두사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었어! 그런데 왜! ―그렇다고 살려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퍼어어어엉 엑스칼리버와 그림 리퍼가 부딪히자 공간 마찰이 일어나며 대기 중의 수소가 반 수소를 형성시켰다. 반물질 절삭성 커터의 잦은 충돌이 반상상 에너지를 유발시켰던 것이다. 이대로 반상상의 폭주가 계속될 경우 자칫 잘못했다간 12 구역을 뒤덮는 거대한 블랙홀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차아앗! 그러나 가인은 티폰에게 맞서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소멸되기 직전 메두사 가 보였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가차없이 소멸시킨 너, 한시영! ―분명 싸우지 않고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거야! 이렇게 서로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리리스처럼 그녀가 죽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거야! ―하하하. 밤의 여왕 님이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 테라와 노아의 관계에 대 해서? 그 관계의 어디에 타협할 구석이 있단 말입니까? 두 인류의 원한은 수십 세기가 넘도록 계속되어 왔어요. 이미 어느 누가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입니다! 퍼어어어엉 티폰의 그림 리퍼가 갈고리처럼 휘어지며 머신 아더를 내리찍었다. 머신 아 더는 간신히 엑스칼리버를 들어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충돌로 발생 하는 반상상의 여파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크윽! ―가인 군, 당신은 이 상황에 와서 까지 너무나 안이하군요. 동정을 베풀 상 대를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 메두사는 마음만 먹으면 테라를 멸종시킬 수 있는 강대한 힘의 소유자입니다. D타입으로 구현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완전체의 모습으로 나타났더라면 앞에서 당신들이 본 환상이 현실이 되었을 거에요. 그런데도 그녀가 당신의 걱정을 받아야할 군번이라고 생 각합니까? 그대로 그녀를 살려둔다고 해서 사태의 진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우우우우우 엑스칼리버에 맞닿은 그림 리퍼의 절삭성 커터가 백열하기 시작했다. 예의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인가! 가인은 이를 악물며 자신도 엑스칼리버의 검날에 차원 진동을 끌어모았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누군가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기적인 개념이죠! 절대로 이타적이 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오만이자 거짓입니다! 당신들의 피스메이커가 주장하는 평화란 한낮 허구에 불과해요!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애처롭군요. 사실 가인 군은 안도하고 있는게 아닙니까? 처치 곤란한 메 두사를 제가 처리해줘서? 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안도했다고? ―어차피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겁니다. 그러다 목숨을 잃었으니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모르죠. 자신의 삶에 충실했으니까. 후후. 저야 덕분에 손쉽게 장애물을 처리할 수 있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지 만. ◆ ―으으으! ―그러니까 말입니다……. 평화를 지키겠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면, 순간, 그림 리퍼의 절삭성 커터가 무형의 중력파를 뿜어냈다.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해지란 말입니다! ―으아아아아앗! 드카아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폭음이 터지며 차원 파괴가 일어났다. 질풍의 검으로 티폰의 아포칼립스 제네레이터를 받아치려던 가인은 본능적으로 머신 아더의 갈래질 이 티폰에게 못 미침을 깨닫고 오라 클록을 전개했다. 그 덕분에 머신 아더는 엑스칼리버를 든 왼손만 잃어버린채 간신히 몸을 피 해낼 수 있었다. 오라 클록으로 차원 파괴의 범위 밖까지 후퇴한 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 며 애써 정신을 수습했다. ―제길, 이제 어떡하지? 티폰의 압도적인 위력도 위력이지만, 왼손과 함께 엑스칼리버를 잃어버린 것 이 치명적이었다. 맨손인 상태로는 지구의 공전주기마저 늦추는 그라비티 블 래스터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당황하는 그에게로 시더의 사념이 들려왔다. ―걱정하기는 일러, 가인! 아직 머신 아더는 제 힘의 반도 보여주지 않았어! 스펙만으로는 절대로 녀석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철컹 그와 동시에 머신 아더의 퀴스 부분이 개방되며 또 하나의 엑스칼리버가 모 습을 드러냈다. 시더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칭했다. ―엑스칼리버 이식(貳式), 일식 스톤 커터와 한쌍을 이루는 제 2의 엑스칼리버! 아더왕의 전설에서 영웅왕은 아무도 뽑지 못한 검을 바위에서 뽑아냄으로서 브리튼의 진정한 지배자 임을 증명해보였다. 흔히 이때 뽑아낸 검을 사람들은 엑스칼리버라고 칭했지만 다른 전설에서는 멀린이 호수의 요정에게 부탁하여 건네받은 마법검을 엑스칼리버라고도 한다. 어쨌든 이 마법검은 후에 베디비어 경에 의해 다시 호수로 반납되어지는데. 노을이 져서 붉게 물든 호수 속에 가라앉은 이 엑스칼리버를 붉게 물든 호수 의 이름을 따서, ―크림슨 리버(Crimson River)! 머신 아더의 손에 들린 엑스칼리버는 또 다시 찬란한 푸른빛의 검날을 생성 시키며 그 위용을 자랑했다. 가인은 줄곧 좌수검을 사용해왔기에 어색하게 오른손으로 몇번 엑스칼리버를 쥐다가 일행에게 물었다. ―이 상태로는 녀석을 상대하기 힘들 것 같아요. 차라리 검이라면 마리 선 배의 레드 폼이 낫지 않을까요? ―그건……무리야, 가인. 시더의 답변에 가인은 어리둥절해졌다. 무리라니? ―너야 오라의 제한이 없어졌기에 어느때라도 제어권을 잡을 수 있지만 다 른 대원들은 그렇지 않아. 레벨 체인지는 원래 한 사람에게 단 한번의 기 회밖에 없다고. ―아, 그러고 보니 쿠사나기 전때도 노엘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미 옐로우 폼과 레드 폼은 한번 씩 사용했으니……. 일행은 혀를 찼다. 저런 최강의 상대를 앞에 두고서 속수무책이라니! ' 이럴때 진우 씨가 있었더라면. ' ―그럼 제가 제어권을 잡으면 되겠군요. 그때 모두의 고민을 해결해준 이가 있었다. 그래. 아직 그가 남아있었지! '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 ' 마리는 근심스러운 사념으로 코마히코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지껏 한번도 머신 아더를 조종해보지 않았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 보여도 수십번도 더 마징가를 시청해온 저입니다.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 아니, 잠깐. 방금 발언의 어디에 문제가 없다는 거야? 어째서 머신 아더의 조종에 마징가가……. 아니, 그보다도 코마히코가 그런 고전 중의 고전을 시청해왔다는게 더 의외이려나? 절대로 그럴 사람처럼 보이 지 않더니만. 가인 일행은 그야말로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어버렸다. 다만 그 중에는 코마 히코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That's right!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야, Mr.samurai! 그 정도의 각오도 없 으면 로봇 파일럿이라고 할 수 없지! 어이. 어이, 시더 선생님. 머신 아더의 총 지휘를 맡은 사람이 맞장구를 쳐 서 어쩌자는 겁니까?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닥터 웰리스. 코마히코 당신! 그 말 진심이야? 그렇게 모두의 불안을 한가득 안고서 코마히코는 가인에게 말했다. ―가인 씨, 그럼 머신 아더의 제어권을. ―아, 예에……. 정말……괜찮으려나. 가인은 걱정 반 근심 반으로 코마히코에게 제어권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머 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장갑이 주황빛으로 변하며 엑스칼리버의 검신 역시 주 황색으로 변한다. 바로 패턴 버밀리온. 버밀리온 폼이다! ―후우. 코마히코는 머신 아더와 동화되는 이질감에 작게 호흡을 고르며 오른손에 쥔 엑스칼리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패턴 버밀리온은 신검 도츠카노츠루기의 덕 을 보기는 했지만 근본은 검기를 발생시키는 절단의 능력이다.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만들어내는데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모두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코마히코는 일행의 불안해하는 사념을 느꼈는지 그렇게 말했다. ―머신 아더는 저 혼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을 믿고 여기 에 탑승했듯이 여러분도 절 믿어주십시오. 믿으라고? 그 말에 일행은 비로소 불안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코마히코의 말대로 지금 껏 머신 아더를 움직여온 것은 그들 개인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라도 없었더라면 머신 아더는 여기까지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좋아요. 믿겠어요, 코마히코 씨! 가인의 외침에 코마히코는 빙긋이 웃으며 발도세를 취했다. 같은 무영신풍류 이건만 마리가 조종했을 때와는 달리 코마히코의 머신 아더는 지극히 낮은 자 세로 상대를 위협하고 있었다. 크레이터의 건너편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시영은 천천히 티폰의 그림 리퍼를 회전시키며 말했다. ―자아. 그럼 어디 얼마나 달라졌는가 확인해볼까요? ―ばかやるう(바보 같은 놈). 코마히코는 그런 시영의 여유를 질타하며 금새라도 쓰러질 것처럼 머신 아더 의 동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기울임이 정점에 달했을 때! 투아아아아앙 마치 탄환처럼 앞으로 쏘아져나간다. 가인이 AC의 반중력을 조절해내자 머신 아더는 크레이터를 가로지르며 그대로 티폰에게 돌진했다. 티폰 역시 등 뒤의 날개를 펼쳐올리며 머신 아더에게 달려든다. 우우우우우우 티폰의 그림 리퍼는 아포칼립스를 머금은채 머신 아더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 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머신 아더는 아포칼립스를 향해 스스로 뛰어드는 형국 이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돌진이다! ―하아아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마히코는 별 동요 없이 운요의 내가심법으로 진기를 끌 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믿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들을!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이때다! AFS 발사! 그때 시더의 외침과 함께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와 폴드런, 카우터가 일 제히 개방되며 남아있던 25발의 AFS가 티폰에게 발사되었다. 원래 AFS는 머신 아더가 엑스칼리버를 사용할 시 상대의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장착한 견제용 미사일이었다. 그런 AFS가 지금껏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다가 이번에야말로 시기적절한 때에 사용된 것이다. 콰콰콰콰콰쾅 티폰은 AFS를 모조리 두드려 맞으면서도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같은 오 라 능력자끼리의 대결이었기에 몬스터를 제압하는 오라 필드는 티폰에게도 무 용지물이다. 대신 미사일의 물리적인 타격만으로도 AFS는 충분히 진가를 보여주었다. 바 로 그림 리퍼의 움직임을 지연시켰던 것! ―차앗! 가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을 전개해 차원 진동을 이용한 공간 압축을 형성해냈다. 질풍의 벽! 그 차원진동 쉴드가 뒤늦게 떨어진 그림 리퍼의 아포칼립스를 중 화시킨다. 그리고 머신 아더는 완벽하게 티폰의 정면을 파고들었다. 코마히코는 엑스칼리버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한시영! 혼자인 너로서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일격을 먹여주마!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의(奧義), ―발파(發破)! 퍽 단 한번의 파쇄음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머신 아더와 티폰은 서로를 지나쳐 크레이터의 반대편으로 내려선다. 하지만 코마히코는 자신할 수 있었다. 발파 는 신속의 발도술. 그 앞에서 베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이 비록, ' 기가스 티폰이라 할지라도! ' 코마히코는 엑스칼리버를 가볍게 좌우로 돌리다가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갈 무리하며 칼몸을 퀴스 부분에 집어넣었다. 티폰의 허리를 벤 감촉이 뚜렷하게 그의 사념에 느껴지고 있었다. ―切られられなさい(베어져라). 쿵 나지막한 중얼거림. 동시에 티폰은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 이것이 너와 함께하는 마지막 춤이로군! 어디 멋지게 시작해볼까, 피스 그 린! " 수인화를 끝낸 라트는 은색의 털로 뒤덮인 웨어울프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 신을 향해 달려드는 녹색의 잔상에게 다섯개의 손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잔상 은 어림도 없다는듯 완벽하게 손톱을 피해낸다. ' 여전히 빠르군! 여전히 빨라! ' 라트는 감탄했다. 이것은 도저히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이래 서야 AI슈츠를 탈착시켜 가속을 봉쇄시키겠다는 계획이 의미가 없지 않은가? ' 의미가 없다고? 꼭 그렇지만도 않지! ' 라트는 입꼬리를 올리며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근육이 급속도로 팽창하며 부풀어오른다. 근육의 단면적을 넓혀 한순간에 폭발적인 힘을 내기 위해서였다. 라트의 눈동자는 잔상의 움직임을 쉼 없이 따라가다가 곧 동공을 넓히며 고 정되었다. " 거기냐! " 퍼억 라트의 주먹이 전광석화처럼 잔상의 한 부분을 후려치자 거짓말처럼 그 장소 에 진우가 나타난다. 진우는 설마 가속 중인 자신이 따라잡힐 줄은 몰랐기에 미처 사기종인의 수로 받아내지도 못하고 간신히 라트의 주먹을 벽경으로 빗 겨냈다. 진우는 화경으로 라트가 주먹을 거둬들이지 못하도록 붙잡으며 인상을 찡그 렸다. 역시 이 정도의 가속으로는……. " 크크크. 왜 그러나? 마음껏 달리지 못해서 답답한가? " 라트는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녀석은 AI슈츠가 없으면 패턴 그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저 정도의 움직임이라면 충분히 라이 컨슬로프의 동체 시력으로도 쫓아갈 수 있다! " 크크크크! 뭘 머뭇거리고 있지? 타버린다고! 저대로 내버려둘 셈이야? " " 네놈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 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불타오르는 성당을 곁눈질했다. 한시라도 빨리 미 연과 하나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저 불길 속에서 그녀들을 구해주 고 싶었다. 하지만 자꾸만 의문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정말 저 불길 속에 그의 가족들이 있는 것일까? 사실은 다른 곳에 있다거나 아니면 이미 죽음을 당했다거나……. ' 크으으윽! ' 후자는 생각하기 싫었다. 아니, 생각해서도 안된다. 어차피 진우에게 선택이 란 없었다. 성당 안에 미연과 하나가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중요한게 아니다. 라트의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 가족을 구해내는 것. '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뭐든지 해야만 한다!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이든! 괴물과 맨몸으로 싸우는 것이든! ' 할 수 밖에 없단 말이다! ' 진우는 이를 악물며 다시 한번 가속했다. 라트에게 움직임을 따라잡히는 이 상, 그를 따돌리고 예배당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또 애써 들 어간다고 해도 미연과 하나를 구하도록 그가 자신을 방치할리도 없다. 그렇다면 가장 빨리 가족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녀석이 말한대로다.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는한 가장 빨리 쓰러뜨리고 가족을 구해내는 것! 그것만이 최선이다! 그 방법 밖에 없어! " 좋아! 그렇게 나와 싸우고 싶다면 얼마든지 싸워주지! " 진우는 결정을 내리고 번개같이 라트에게 달려들었다. 망설임을 떨쳐낸 것만 으로도 그의 움직임은 한층 빨라지고 있었다. 오라는 의지의 힘. 의지가 굳건 해질수록 그 힘은 거푸 한계를 뛰어넘는다! 투학 가속이 실린 진우의 발경이 연속으로 라트의 배를 두들겼다. 가속이 완벽하 게 실렸을 때와는 위력이 천지 차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뼈와 살을 가 진 육체에게는 효과를 주고 있었다. 발경이란 경력의 전달, 즉 파동의 힘이기에 아무리 단단한 갑옷으로 몸을 보 호한들 충격을 완전히 차단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 크―! 하찮은 짓을! ' 자잘한 충격이 겹쳐서 데미지가 쌓이자 라트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맨몸으 로도 내가 녀석에게 밀린단 말인가? 이 라이컨슬로프의 육체가 고작 저런 인 간의 주먹질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 웃기지마랏! " 뭣때문에 내가 괴로워 했나? 뭣때문에 내가 쫓겨다녀야 했나? 다 이 라이컨슬로프의 힘 때문이었다. 이 힘때문에, 인간보다 월등한 이 힘 때문에 나는 여기까지 몰려와야 했다! ' 그런데 이런 약해빠진 인간에게도 이기지 못한다면, 이런 인간 녀석에게 쓰러진다면! ' 그럼 살해당한 내 가족들은? 엉망이 되어버린 내 인생은 뭐란 말인가? 괴물 로 평생동안 살아온 나는? '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 " 크랴아아아앗! " 라트는 괴성을 내지르며 진우를 향해 폭풍처럼 양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톱 에 닿는 모든 것들은 마치 폭발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산산조각났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부서져나간다. 그야말로 괴물의 힘이었다. 인간을 뛰어넘는 힘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콰직 진우의 승룡퇴가 라트의 턱을 차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개산벽을 쓰려던 그 는 대신 중경 파군과 풍경 무곡을 연달아 내찌른다. 가속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몸통 박치기를 해봤자 라트와의 무게 차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확실한 공격 방법은? 역시 발경을 이용한 연속기였다. 차근 차근 데미지를 쌓아올려서 녀석을 무 력화시킨다! " 크으―! " 라트는 다시 화경을 펼치려는 진우에게 재빨리 리버스 킥을 먹여서 뒤로 물 러나게 했다. 아무래도 브루스 류, 그가 자신의 제자 하나는 확실하게 단련시켜왔던 모양 이다. 라트는 16년 전, 처음으로 브루스에게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 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상대를 인간이라고 얕잡아봤던 것이 패배의 원인이 었다. ' 그렇다면 인간의 방식으로 싸워서는 안되겠지! ' 라트는 혀를 차며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몸을 감싸던 은색의 털 들이 꼿꼿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막 라트에게 달려들려던 진우는 그것을 눈치채고 오라 쉴드를 펼치려고 했 지만 곧 자신이 AI슈츠를 착용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탄식한다. AI슈츠의 도움 없이 오라 쉴드를 펼칠 수 있는 능력자는 유가인이나 브루스 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피할 수 있다면 피해봐라! " 파파파파팍 라트의 외침을 뒤로하며 수 많은 은빛의 창들이 진우에게 발사되었다. 진우는 이를 악물고 가속을 전개했다. 다 피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퍼퍽 진우의 오른쪽 어깨와 허벅지가 은빛의 창들에 꿰뚫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최소한의 피해로 니들 공격을 우회한 진우는 그대로 라트에게 쏘 아져나간다. 라트는 그런 진우의 회피를 예상하고 있었다는듯 달려오는 그를 향해 손톱 을 내찔렀다. 네 놈의 움직임은 이미 나에게 똑똑히 보인단 말이다! 서걱 뚫렸다! 라트의 손톱은 정확하게 진우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진 우의 고통에 찬 표정과 몸짓이 늘어지는 테이프마냥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라트는 그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며 희열을 느꼈다. 해냈다. 해냈어. 나는 드디어 녀석을―! 퍼어어어엉 희열은 오래가지 않았다. 라트의 손톱에 꿰인 상태에서 진우는 자신의 오른 주먹을 라트의 가슴에 내 뻗었던 것이다. 힘도 없는, 그야말로 갖다댄듯한 주먹질이었다. 하지만 그 주먹질은 무시무시한 폭음을 일으키며 라트의 몸을 뒤로 날려보 낸다. 콰지지지직 수십미터를 날아간 라트는 성당의 신랑을 부수고 장미 정원까지 뒤엎은 끝 에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야말로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한순간에 벌어진 일 이다. 진우는 라트의 손톱이 빠져나간 어깨를 움켜쥐며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 었다. 그의 두눈은 금새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전자 의안에 연결된 시신경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다. 진우는 두눈을 손으로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고통에 찬 신음을 흘 렸다. ' 제길! 제길! 문제는 없겠지? 또 나가버린 건 아니겠지? ' 그는 부디 실명이 되지 않았기를 바라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역시 무 리해서 그때의 기술을 쓰는게 아니었다. 진우는 라트의 니들 공격을 피한 순간, 그 즉시 싸움을 끝내기 위해 일부러 라트의 손톱에 몸을 허용하면서까지 예의 펀치를 사용했던 것이다. 슬로우 임펄스 펀치(Slow Impulse punch). 뇌의 시계주파수로 늘어난 체감 속도를 이미지메이킹시켜 충격량을 극대화시 킨 끝에 충격력까지 높이는 기술! 이 기술은 특별히 AI슈츠 없이도 진우가 구사해낼 수 있었다. 슈팅스타 같은 기술은 가속을 이미지메이킹시켜 충격파를 발생시키는 것이기에 AI슈츠가 없 이는 몸이 버텨내지를 못했지만 슬로우 임펄스 펀치는 그럴 위험이 없었던 것 이다. 그런 이유로 진우는 처음부터 이 펀치를 피니쉬 어택으로 사용할 생각 이었다. 대신 문제는 무리하게 뇌의 시계주파수를 끌어올리는 기술이기에 실명할 위 험이 있다는 건데……. " ―! " 뜨여진 시야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진우는 또 다시 시신경이 끊어진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다행히도 눈의 모세혈관이 터진 것 뿐이었다. 약간 상이 일그러져 보이기는 했지만 사물을 분간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 으윽. " 진우는 허벅지와 어깨에 꽂힌 라트의 침들을 빼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세웠 다. 아직 마음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미연과 하 나는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 어서 빨리, 어서 빨리 구해내지 않으면! ' 기다려, 미연아……. 하나야……. 내가 구해줄게……. 내가, ' 제발 무사히만 있어줘. 살아만 있어줘. 그러면 내가 반드시, ' 반드시 구해낼테니까. ' 진우는 라트의 손톱에 짓이겨진 왼쪽 어깨를 감싸며 절뚝 절뚝 예배실의 문 으로 걸어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가속을 써서 달려가고 싶었지만 라트에 게 당한 상처가 치명상이었는지 뜻대로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하긴. 이 정도로 당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틈을 내주지 도 않았겠지만. ' 으. 포션 정도는 챙겨올 걸 그랬나……. ' 진우는 눈 안쪽에 맺힌 피가 자꾸만 시야를 어둡게 만들자, 손바닥으로 눈가 를 세게 찍어눌렀다. 그러자 맺혀있던 피가 볼을 타고 흐르며 그나마 상태를 호전시킨다. ' 어라? ' 피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던 진우는 곧 피가 코와 귀에서도 흘러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의아해졌다. 뭐야……. 괜찮은 거 아니었나? 눈도 멀쩡하잖아? 그런데 왜……. ' 어라? 어라라? ' 이, 이러면 안되는데……. 이러면……. 진우는 다리에서 힘이 풀리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듯 벽에 기 댔다. 코에서는 뜨거운 피가 숨쉬기 조차 힘들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가에 서도 역한 피비린내가 느껴진다. 진우는 자신의 몸에 생기는 이변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이러지 말라고. 조금만 버텨줘. 조금만……. 미연이와 하나가 기다리고 있 단 말이야. ' 이런 그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붕괴는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진우는 이를 악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쓰러질까 보냐. 쓰러질까 보냐. 여기서 이렇게, 이런 식으로, ' 개죽음 당할 수는……! ' 투두두두둑 그때 엉망이 된 장미 정원으로부터 한 그림자가 흙더미를 헤치고 몸을 일으 켰다. 그 그림자에서는 옅은 은빛의 기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라트? " " 후우우― 어딜 가시나, 피스 그린. 설마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 거기에는 전신의 은빛 털을 번쩍이며 육체를 복원해내는 라이컨슬로프가 있 었다. 그 등뒤로는 마치 핏빛의 보름달이 라트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빛을 흩 뿌리고 있다. 만월! ' 그래. 만월날 녀석의 회복력은 평소를 뛰어넘었지! ' 하지만 진우는 곧 그것이 단순한 재생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어 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라트의 몸에서는 은색의 광원이 흘러나오며 달빛과 반응하고 있었다. 저 빛은 마치, 마치― " 오라 패턴? " 진우는 자신이 중얼거린 말에 스스로가 놀라고 말았다. 오라 패턴이라니? 녀석이 오라 능력자라고? " 말도 안돼! " " 크크크크. 말이 안될 거야 없지. 한시영, 그 남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날 거뒀을 것 같나. " 라트의 몸에서는 한층 더 강한 섬광이 피어나왔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확연한 오라의 빛이었다. 가이아가 선택한 대행자의 증거다! " 뭐, 놀라는 것도 당연해. 이 힘은 작년 너에게 죽을 뻔한 이후로 얻게 된 것이니까. 아니, 정확히는 각성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군. 너와 유가인의 오라가 내 오라를 감응시켜 일깨워준 거야. " 라트의 두 눈동자가 오라 패턴 고유의 빛을 투영해냈다. " 내 오라 능력은 육체의 강화. 스스로의 몸을 오리하르콘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 그때문에 달의 인력이 강해질수록 내 육체도 무한히 강해진다. " 진우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라트 발렌시아의 오라 패턴. 그 악몽의 이름은, " 패턴……실버(Silver)! " ―과연. 혼자였다면 영락없이 당했겠어요. 머신 아더의 등 뒤에서 들릴 리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 미션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코마히코는 믿을 수 없다는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럴 리가! 분명히 느낌이 있었는데! 촤악 그러나 머신 아더가 채 몸을 돌리기도 전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엑스칼리버를 든 오른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스쳐 지나간 것이 채찍처럼 긴 무언가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절단 된 오른손이 지면을 울리고 난 뒤였다. 쿵 코마히코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머신 아더의 등 뒤에는 크레이 터의 반대편에 있을 것이 분명한 티폰이 천연덕스레 다가와 있었다. 크레이터의 지름은 적게 잡아도 500미터. 이 거리를 어떻게 기척도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거지? ―이게 대체, 촤촤촤악 그가 채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머신 아더의 머리와 두 발이 떨어져 나갔다. 채찍으로 변한 사신의 낫이었다. 티폰의 그림 리퍼가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초고진공 상태로 만들어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근육을 박막시킨 것이다. 쿠우우우우웅 오체를 완전히 잃은 머신 아더는 지축을 울리며 쓰러졌다. 그 충격으로 레 벨 체인지가 일어나며 다시 머신 아더의 제어권이 가인에게로 돌아온다. 시영은 그런 거인을 내려다보며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쪽도 혼자가 아니거든요?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2 - Ｂy Ｎext Ｎeo =-=-=-=-=-=-=-=-=-=-=-=-=-=-=-=-=-=-=-=-=-=-=-=-=-=-=-=-=-=-=-=-=-=-=-= ―저건 피스 화이트의 초고진공 커터! 어떻게 녀석이 저것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시더의 사념이 채찍으로 변한 사이드의 모습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 질문 에 답한 것은 유리의 사념이었다. ―거인의 사념이……바뀌었어. 마치, 마치 우리가 머신 아더의 제어권을 교 체하는 것처럼, ―뭐라고! 코마히코와 마리의 사념이 새삼 티폰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 친 티폰은 예전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티폰을 움 직이는 사념은 마인드 브레이커인 유빈의 것이었다. 같은 초심리 능력자인 유 리만이 유빈의 원격감응을 투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저들도 우리처럼 티폰에게? ―티폰의 파일럿으로 오라 능력자들이 탑승한 거야! 피스 블랙과 피스 화이 트 그리고 피스 카민인가! 시더는 설마 자아를 가진 티폰의 몸에 시영 일행이 탑승할 줄은 몰랐기에 혀 를 내둘렀다. 하긴. 오라 클록이 없는 티폰이 코마히코의 발파를 맞고 멀쩡할 때부터 예상해야 했지만. ' 피스 화이트의 진공 기류로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중화시킨 거야? 그렇다 면 머신 아더의 뒤로 순간 이동한 것은? 설마 피스 블랙의 섀도우 다이브? ' 말도 안돼! 레벨 체인지도 없이 두가지 능력을 동시에 사용했다고? 시더는 분한듯이 외쳤다. ―이쪽의 방법을 흉내내다니! 치사해! 비겁해! ―하하. 흉내내다니요? 잊고 계신가 본데 이쪽이 '원조'입니다. 그쪽의 불완 전한 어시머레이션(assimilation;동화)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시영은 시더의 억지에 코웃음을 쳤다. 그의 말대로 티폰은 머신 아더와 달리 탑승자들의 능력을 완벽히 구사하고 또, 동시에 사용해내고 있었다. 이는 검은 거인이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오 라를 가이아로부터 끌어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머신 아더와 달리 동력의 문제로 파일럿의 오라 능력을 제한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시영은 쓰러진 머신 아더를 내려다보며 노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당신들의 뻔뻔함에는 치가 떨립니다. 지금껏 가이아의 도움으로 연명해온 주제에 이런 역천(逆天)을 저지르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가 이아의 자식인 기간테스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인의 시 신을 모욕하다니! ―그건! 시더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분명 시영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류는……! ―더 이상 자신들을 가이아의 대행자라고 착각하지마십시오. 가이아가 당신 들을 버린게 아니라 당신들이 가이아를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대재해가 일어났겠습니까? 설마 아직도 노아의 침공이 우연이었다고 생각 하십니까! ―……! 시영의 말에 가인 일행은 숨을 죽였다. 노아의 침공이……우연이 아니라고? 가인은 한순간 리리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시영에게 소리쳤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고 싶습니까, 가인 군? 하긴. 당신이라면 알 권리가 있지요. 엄연히 가 이아에게 선택받은 열쇠니까. 열쇠? ―후후. 저와 당신의 관계는 정말이지 묘합니다.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언 제나 저에게 진실을 갈구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저는 좋든 싫든 그런 당 신의 의문을 해소시켜줘야 하죠. 그래서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 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란, 처음부터 당신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만 준비된 것이 아닐까, 라는. 시영은 자조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듣고 있는 가인으로서는 소 름이 끼치는 내용이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들의 운명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 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기대가 되는군요. 진실을 알게된 가인 군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그 말에 가인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예전 시영이 진실을 강요했 던 일이 생각났다. 놈이 강요했던 진실! 그 진실을 알게됨으로서 자신은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 던가? 또 얼마나 슬퍼했던가? 그런데 녀석은 그걸 또 다시……! ―하하하하. 자, 단단히 마음 먹으십시오. 이번에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을테니까. 어디 제 얘기를 듣고나서도 당신들이 계속 그 꿈 같은 평화 타령을 할 수 있나 지켜볼까요? ―……! 이 자식―! 가인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웃기지마! 웃기지마! ' 더 이상 네 녀석에게 농락당하지는 않아! ' 순간, 몸뚱아리만 남은 머신 아더의 등 뒤로 오라 클록이 전개되었다. 그 푸 른색의 망토는 거인의 몸을 감싸며 그대로 티폰을 향해 질풍의 힘을 내뿜는다. 먹어라! 天천 空공 雷뇌 霆정 拳권 투카카카칵 적의 주심에서부터 가인이 만들어낸 차원진동의 줄기들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뻗어나왔다. 머신 아더에 타고 있던 대원들의 사념은 저마다 그 엄청난 빛의 폭발에 시선을 돌린다. 머신 아더에 장착된 수십개의 ACR들이 일제히 증폭시킨 천공의 힘이었다. 이 힘을 네 녀석이 받아낼 수 있을까! 콰지지지직 그러나 혼신을 다한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티폰은 시영의 섀도우 다이브로 천 공뇌정권의 주심에서 간단히 몸을 피했다. 또 거기서 그치지 않고 티폰은 AC 에 휘감긴 머신 아더의 동체를 발로 찍어 누른다. ―으앗! AC의 공간 압축조차 밀어낼 정도의 강력한 중력장이 티폰에게서 전개되었다. 티폰의 등 뒤에 달린 반중력 추진기, 가고일의 날개가 머신 아더를 속박했던 것이다. 그렇게 머신 아더를 꼼짝 달싹도 못하게 만든 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담화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은 날이군요. 카타스트로피 (catastrophe)는 뒤에 있을 즐거움으로 미뤄두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소기의 목적? 그런 일행의 의문을 뒤로 하고 티폰은 제 길이로 돌아간 사이드를 역수로 잡 아 오라 클록으로 감싸인 머신 아더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가고일의 날개가 펼치는 중력장에 의해 공간 압축이 중화된 오라 클록은 맥없이 반물질 커터에 잘려나간다. 그렇게 머신 아더의 모든 방어를 해지한 티폰은 가인 일행이 타고 있는 콕 피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맙소사! 패턴 핑크의 싱크로를 풀어야 해! 강제 차단 실시! 시더의 사념이 비명처럼 채영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직후, 간발의 차로 오 퍼레이터 팀이 잠들어 있는 피스 대원들의 육체에 전기 충격을 보낸다. 그러자 티폰은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듯 무자비하게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와 왼쪽 승모근을 찢어발겼다. 우드드드득 ―아악! 육체가 깨어남으로서 자아를 되찾은 유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만약 그녀가 싱크로를 풀지 않고 그대로 머신 아더와 동화되어 있었더라면 방금 전의 환 지통으로 쇼크사를 일으켰을 것이다. 가인은 어둠 속의 콕피트에서 눈을 뜨며 떨리는 이빨을 악다물었다. 다시 한번 천공뇌정권을 사용하려 했지만 그전에 콕피트가 파괴될 것 같아 엄두 를 낼 수 없었다. 한시영! 이대로 우리를 콕피트 채 제거할 셈인가! 촤아아아악 티폰은 근육 섬유 밑에 가려져 있던 콕피트를 손으로 잡아 그대로 밖으로 뜯어냈다. 저마다 정신을 차린 피스 대원들은 PET용액에 잠긴 몸을 일으키 며 금속관에서 빠져나온다. 가인과 코마히코는 중심을 잃는 마리를 붙잡고 시민은 유리를 감싸안았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은채 그저 몸을 떠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 들의 생사는 콕피트를 쥔 티폰의 손에 달려 있었다. " 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 가인은 행여나 콕피트가 으스러질까봐 질풍의 벽을 일행의 주위로 전개했다. 하지만 공간 압축마저 중화시키는 가고일의 날개가 상대에게 있는한 차원진 동 쉴드라 한들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티폰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든지 자신들을 압사시킬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우 티폰은 콕피트의 일행을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들을 바닥에 내려놓았 다. 뜻밖에도 시영은 가인 일행을 순순히 풀어주었던 것이다. 살려주는 건가? " 한시영, 대체 너는……! " 시민은 유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티폰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도통 자 신의 형제였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는 머신 아더가 목표였던 걸까? 우리는 안중에도 없이? ―후. 시영은 지상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민의 눈길을 느꼈는지 작게 웃음을 터 뜨렸다. 그리고 티폰을 조종하여 볼품없이 망가진 머신 아더의 동체를 들어올 린다. ' 이것으로 끝이다, 피스메이커. 이제 너희에게는 추락하는 일만 남았어. 밀 랖으로 만든 날개로 얼마나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냐! ' 시영은 피스 카민 마유빈을 통해 공유된 피스 화이트의 사념에게 지시했다. ―에레노아 양. 마무리를 부탁드립니다. ―예, 마스터. 류바 에레노아는 언제나처럼 짧게 답하며 자신의 능력을 전개했다. 그러자 패턴 화이트에 반응한 티폰의 그림 리퍼가 다시 한번 초고진공 커터를 생성해 낸다. ―생전에도 올림포스에게 이용당했던 팔라스여! 네가 잃어버린 안식을 지금 너의 혈육이 되찾아주마! 시영의 외침에 티폰이 들고 있던 머신 아더의 동체를 하늘로 집어던졌다. 그 리고 늘어난 사신의 채찍을 그대로 자신의 형제에게 휘두른다. ―The Canine of a north wind! 패턴 화이트가 만들어낸 용권풍이 머신 아더의 동체를 휘감는다. 그 용권풍 의 끝자락으로 티폰의 초고진공 커터가 연결되더니 이윽고 모든 것을 갈가리 찢는 진공파의 소용돌이가 완성되었다. 거기에 그림 리퍼 본래의 능력인 연쇄 중력파가 초고진공 커터를 타고 흐르 자 이 삭풍(朔風)의 어금니는 훌륭한 하나의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로 탈바 꿈하게 된다. 카카카카카칵 아포칼립스의 소용돌이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혼돈으로 되돌리며 그 부 피를 줄여갔다. 그렇게 소용돌이가 사라질 때까지 가인 일행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 다. 아니, 열 수 없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지켜볼 뿐이었다. ' 아아. ' 지금껏 그들과 함께 싸워온 피스메이커의 거인, 그들의 전우였던 몬스터 슬레이어, 머신 아더의 최후를. ―그럼 대단원 때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검은 거인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갔다. 가인은 그런 시영의 퇴장을 허탈하게 바라보다가 중얼거린다. " 대단원……이라고. "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지금의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며칠 뒤 가인은 알게 된다. 시영이 언급한 대단원. 그것이 세계의 존망을 결정하는 최후의 시(時)를 말했던 것임을. 먼 옛날, 인류가 지금의 테라가 아닌 노아였을때. 존재의 법칙을 깨달은 인류 노아는 범해서는 안될 원죄를 범하게 된다. 바로 신의 영역을 넘본 것. 차원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을 낳아준 대지의 여신을 유린했 던 것이다. ' 바르의 별. ' 세계의 의지 가이아마저 속박시킬 수 있는 거대한 오리하르콘 제어구. 이것 을 이용해 노아는 금지된 차원 도약의 비밀을 깨닫고 신들의 황혼, 라그나뢰 크를 일으키기에 이르른다. ' 그러나 문명은 피고 지는 법. ' 노아의 만행을 보다 못한 가이아는 새 인류 테라에게 자신의 힘, 오라를 내 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흐트러진 법칙을 바로 세우게 한다. 그리고 자유를 되찾은 가이아는 그동안 자신을 구속해온 오리하르콘 제어구 를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하늘로 띄워 보냈다. ' 그리하여 아무 것도 없던 하늘에 달이 생겨나게 된다. ' 노아가 판게아에 남긴 몇 안되는 유물 중 하나, 바르의 별은 그렇게 수십 세 기가 넘는 세월동안 줄곧 하늘에서 테라의 주위를 멤돌고 있었던 것이다. " 크카카카― 카카카카캇! " 라트는 달의 정기를 끌어모으며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은빛의 털은 날카로운 오리하르콘 칼날로 변해간다. 그렇게 변화된 육체는 그 의 오라를 끝없이 상승시켜주었다. AI컴플리트 세트가 피스 대원들의 오라를 증폭시켜주는 매개체였다면 라트의 오리하르콘 육체 또한 그의 오라를 증폭시켜주는 훌륭한 매개체였다. 거기다 오늘은 바르의 별이 판게아에 근접한 만월날. 라트의 육체는 이 강해진 만월의 인력에 힘입어 오리하르콘 특유의 셀프 라 이팅과 견고해진 오라 쉴드로 최강의 방어력을, 활발해진 중력장 컨트롤로 최 강의 공격력을 가지게 된다. " 끝내주는군! 이렇게 모든 힘을 개방해낸 것은 이번이 두번째야! " 첫번째는 작년 진우와의 싸움 때! 하지만 그때는 아직 오라 능력을 각성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만월의 힘에도 불구하고 완패당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 이런 상태에서 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지! " 포효하듯 소리지르며 라트는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진우는 피투성이가 된 몸 을 끌어안고 간신히 기수식을 취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라트의 움직임은 그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제길. 몸 상태가 엉망이지만 어떻게든 상대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우우우웅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되는 착각이었다. 진우를 향해 찔러오는 라트의 주먹,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중력장의 집합체가 응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콰지지지직 진우가 몸을 피한 자리로 라트의 주먹이 내리꽂히자 소형의 크레이터가 생겨 난다. 그 무지막지한 위력에 진우는 혼미백산하며 라트에게서 몸을 물렸다. 저 정도의 중력장이라면 아무리 공격을 피한다고 한들 그 여파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만신창이가 된 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중력장 에 스치기만 해도 내장이 뒤흔들릴 것이다. 이래서야 화경을 통한 접근전도 펼칠 수 없잖아! " 크크크크! 왜 그러나! 아까 날 때려눕힌 기세는 어디로 갔지! " 우웅― 우우우웅― 라트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듣기만 해도 섬뜩한 중력장의 공명음이 울 려퍼진다. 진우는 가속으로 간신히 공격을 피해내며 식은땀을 흘렸다. 단지 피하는 것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한 이 기분이라니! 같은 공격이지만 위력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긴장의 격 또한 달라진다. ' 우욱! ' 순간 진우는 가속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머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며 목과 코로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올랐다. " 우웩― " 참지 못하고 피를 한움큼 토해낸다. 진우의 코에서도 핏줄기들이 뿜어져나왔 다. 피의 색깔은 선홍색. 죽어버린 피도 아니고 깨끗한 피가 몸속에서 역류하 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었다. 뭔가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고 있다고! " 크악. 컥. 카아아악! " 진우는 정신 없이 피를 쏟아내며 눈물을 흘렸다. 라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다시 가속을 사용했던 것이 상태를 악화시킨 모양이다.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 만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두통이 무엇보다 심각했다. 정말 뇌가 녹고 있는 것이 아닐까? 뇌의 시계주파수가 다 타버린게 아닐까? " ……뭐야. 거기까진가? " 라트는 진우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실망했다는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녀석에게서 AI슈츠를 빼앗지 않는건데. 이렇게 싱겁 게 결판이 나버릴 줄은……. " 크― 뭐냐, 피스 그린? 네 녀석은 겨우 그정도인 거냐? 그 정도로 쓰러지 겠다는 거냐? "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화가 났다. 라트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진우에게 다가갔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해진 힘을 써볼 기회도 없이 싸움이 끝나버려서? 그래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멋대로 녀석이 쓰러지려 하니까 맥이 빠져서? 그런건가? " 네놈이 자랑하던 가족애는 어디로 갔나? 지켜내겠다고 큰 소리를 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쓰러지려는 거야! " 라트는 이를 갈며 진우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그리고 예배당의 문 앞으로 그 를 거칠게 집어던진다. 그 바람에 진우는 피로 물든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다 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라트는 그 앞에서 예배당의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 자! 보라고! 저 안에 네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 던 아내와 딸이 있다고! 불꽃 속에 갇힌채 서로를 부둥켜 안고 떨고 있을 모습이 보이지 않나? 살려달려고 울부짖는 가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 진우는 동공이 풀린 눈으로 예배당의 문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저 안에 미연이와 하나가……. 저 안에……. " 보여봐라! 네 녀석의 가족애라는 것을! 그 가족애 때문에 내 모든 것을 빼 앗아가지 않았나! 내 인생을 망쳐버리지 않았나! 그래놓고서 이런 식으로 포기하겠다고? 편해지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 라트는 신경질적으로 옆의 벽을 후려쳤다. 그리고 마치 애원이라도 하는 것 처럼 호통을 친다. " 일어나! 당장에 일어나! 일어나서 구해보란 말이다! 네 가족들을 구해내! 네 눈 앞에 있는 날 쓰러뜨려봐! 어서! " 무력하게 가족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것을 지켜보기만 해야했던, 도망치는데 전력을 다해야 했던, " 어서! " 너도 그런 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거냐, 피스 그린! " 으으으……! " 진우는 이를 악물며 라트를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로 녹색의 빛이 섬광 처럼 피어올랐다. 좋아, 라트. 내 모든 것을 걸어주마. 내 모든 것을 걸고 널, ' 쓰러뜨려주겠어! ' 치이이이― 치이이이잉― 순간, 진우의 몸이 제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에 라트는 환희하며 소리 쳤다. " 과연! 그래야 피스 그린이지! " ―으우아아아아압! 진우의 처절한 기합 소리가 공간을 타고 울려퍼진다. 그는 녹색의 섬광이 되 어 그대로 라트에게 달려들었다. 라트는 그대로 직진해오는 녹색의 섬광에게 중력장이 실린 주먹을 휘두른다. 쩌저저저저정 마치 공간이 찢어지는 것처럼 왜곡되며 대기를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진 우는 라트에게서 튕겨지듯 뒤로 물러나 성당의 정원에 내려선다. 정면으로 중 력장에 뛰어든 것치고서는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반면 라트는 진우를 향 해 휘둘렀던 오른손이 어깨까지 날아간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진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런 라트를 노려보았다. ' 뭐지? 어떻게 된 거지? ' 방금 내가……AI슈츠 없이 슈팅스타를 사용해낸 건가? 가속의 충격파로 중력 장을 막아낸 거야? 그렇게 놀라워 하는 진우에게 라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예배당의 문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날아간 오른손은 놀라운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바르의 별과 공명하는 오리하르콘 육체가 체내에 기록된 정보를 토대로 순식간에 셀프 라 이팅을 일으켰던 것이다. " 크크크크! 이제야 좀 할 마음이 생긴건가! 기쁘다, 피스 그린! " " 큭. " 진우는 라트의 회복력에 인상을 찡그리며 칠성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방금 전 어떻게 슈팅스타를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사용해보라면 사용 할 자신이 없었다. 가뜩이나 몸의 붕괴도 심화되는 판에 그런 위험한 도박에 또 목숨을 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눈 앞의 라트에게서는 슈팅스타의 데미지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 다. 만월의 오라 능력자인 그에게는 어쩌면 물리적인 타격이 조금도 통용되 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 진우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제 그 방법에 모든 것을 걸어볼 셈이 었다. ' 제발……그때까지만 버텨다오! ' 그는 자신의 몸에게 부탁하며 라트에게 소리쳤다. " 덤벼라, 라트! 너에게는 일분 일초가 아깝다! 당장에 쓰러뜨려주마! " " 켓! 다 죽어가던 녀석이 건방진 소리를! " 다음 순간, 다시 한번 녹색과 은색의 섬광이 격돌한다. 앞의 접전에서 라트의 주먹이 내포한 중력장의 피해 범위를 몸으로 깨달은 진우는 최대한 라트와의 거리를 벌리지 않으며 화경을 펼쳐냈다. 어차피 화 경이란 상대의 투기를 오감으로 느끼는 수 읽기 전법. 상대의 수를 알아낸 이상 거기에 맞춰서 대처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진우는 아슬아슬하게 중력장의 폭풍 속을 헤쳐가며 기회를 노렸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올라갔다고 해도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 그대로인 이상, " 무용지물이라고! " 퍼어어엉 진우는 비어있는 라트의 배에 가차없이 발경을 내찔렀다. 맞는 이의 영체마 저 화끈해지는 슬로우 임펄스 펀치였다. 아무리 오리하르콘으로 겉을 단단하 게 보호해낸들 그 안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 경력의 전달을 막을 수 없 다! " 크핫! 소용 없어! " 하지만 라트는 내부의 폭발을 오리하르콘의 셀프 라이팅으로 순식간에 잠재 우며 진우를 향해 중력장을 내찔렀다. 진우는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해내며 재차 주먹을 라트의 가슴에 쑤셔넣는다. 퍼어어엉 폭음! 또 폭음! 진우는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지 연달아 슬로우 임펄스 펀치 를 사용했다. 그런 오라의 남용에도 불구하고 진우의 두 눈은 실명되지 않았 다. 앞에서 슈팅스타를 사용할 때 뭔가가 변해버린 건지 패턴 그린의 오라는 지극히 안정화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든지 뇌의 시계주파수를 늘려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진우는 그야말로 라트의 공격을 신들린 것처럼 피해내며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어어엉 몇번이나 슬로우 임펄스 펀치를 얻어맞았는지 모른다. 라트는 그때마다 정신 이 아찔해지는 충격을 느끼며 감탄했다. 피스 그린, 이놈은 도대체 불사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떻게 죽기 직전의 몸으로 여기까지 해낼 수 있지! " 크랴아아아앗! " 라트의 오리하르콘 발톱을 세운 뒤돌려차기가 날카롭게 진우를 후려친다. 그 러나 후려치는 것은 눈의 착각. 진우는 녹색의 잔상만을 남긴채 어느새인가 다시 라트의 정면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의 주먹은 여전히 라트의 배만을 노리고 있었다. 같은 곳을 대체 몇번씩이나 공격할 셈이냐! 오오오오오 라트는 진우의 수법을 눈치채고 미리 체내에 중력장을 응축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진우의 주먹이 다시 자신의 배에 닿으려는 찰나, 투하아아아악 모아두었던 중력장을 일제히 입으로 쏘아낸다. 그러자 사람의 몸 하나는 통 째로 삼킬듯한 크기의 입자포가 진우에게 내리꽂혔다. " ……! " 그러나 입자포는 진우의 몸을 스치지도 못했다. 진우는 한발 먼저 칠성권 승 룡퇴로 라트의 턱을 가격하여 입자포의 방향을 돌려냈던 것이다. 라트는 돌아 가는 얼굴로 진우를 노려보았다. 아직이다! 아직이야! '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 ' 퍼어어엉 라트의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진우의 혼신을 다한 슬로우 임펄스 펀치가 또 다시 라트의 배를 후려친 것이다. 이번만큼은 라트도 펀치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 허어, 허억……. 으으, 아아, 아아아악! " 진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하늘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마치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려는양 목이 떨어져라 울부짖었다. 그러다 힘이 다했는지 털썩 제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크으윽. 반면 슬로우 임펄스 펀치에 난타당한 라트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우의 사력을 다한 연타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처는 너무나 손쉽게 아물고 있 었다. 역시 바르의 별로 강화된 지금의 그는 불사신에 가까웠다. " 크후― 후우― " 그래도 역시 충격이 크기는 컸는지 라트는 현기증에 머리를 감싸안는다. 아 무래도 오리하르콘의 셀프 라이팅으로도 미처 중화시키지 못한 충격이 있었나 보다. " 크크크. 역시 대단하군, 피스 그린. 하지만 날 쓰러뜨리기에는 부족해! 네 놈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한들 내 철벽의 갑옷은 부서지지 않아! " 라트는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여전히 인상을 찡그렸다. 크으.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거지? 아직 회복이 덜 된 건가? 그럴리는 없을 텐데……. " 아니. 네가 자신하는 갑옷은 이미 부서졌어. " 진우는 현기증으로 괴로워하는 라트에게 그렇게 단언했다. 라트는 무슨 소리 를 하느냐고 반박하려다가 자신의 칠공(七孔)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깨닫 고 안색이 굳어졌다. 이건! " 칠성권(七星拳) 제 4의 발경, 문곡(文曲). 상대의 주심을 공격하는 심경 (心經)이지. " 진우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그는 라트에게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음을 깨닫자 그 즉시 슬로우 임펄 스 펀치에 심경을 실어 라트의 영체를 줄곧 공격해왔던 것이다. 라트는 설마 진우의 공격이 영체를 공격하는 것일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기 에 자신의 재생력을 믿고 모든 펀치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영체의 카르마 에 너지가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다. " 영체까지 오리하르콘으로 되어있는 것은 아니겠지? 내 승리다, 라트. " " 크, 크흐흐, 흐흐흐흐! 설마, 설마 이 육체에 그런 약점이 있었을 줄은… …. " 라트는 기가 막히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정이 고갈된 그의 육체는 급속도 로 죽어가고 있었다. 생명은 단순히 육체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육체를 움직이는 정 신. 그 정신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자,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 정신의 생명이 다한 이상 육체가 그 뒤를 잇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 대단한……녀석. 멋지다, 피스……그린. " 그 말을 끝으로 라트의 몸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수인화가 풀린 그의 육체는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진우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순간, 미연과 하나에게 생각이 미치자 다 급히 성당을 돌아보았다. 이런. 늦은 것은 아니겠지! 쿠구구구구 그때 불타오르던 성당이 소리를 내며 밑으로 꺼져내렸다. 미연과 하나가 있 는 예배당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진우는 그 광경에 안색이 새파래졌다. 맙소사! " 미, 미연아! 하나야! " 그는 비명처럼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당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고 했다. 그러나 앞의 전투에서 한계에 이른 그의 육체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 고 있었다. 특히 슬로우 임펄스 펀치를 남발한 그의 오른손은 뼈가 남김 없이 으스러졌는지 연체 동물처럼 덜렁거린다. 진우는 거의 굴러가다시피하여 예배당의 문에 다다랐다. 아직 늦지 않았어! 아직! ' 지금이라도 구해낸다면! ' 진우는 뜨겁게 달아오른 문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려고 했다. 그때 그런 그 의 행동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 쓸데없는 짓……하지 마라. " 라트였다. 그는 은발을 땅에 늘어뜨린채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진우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의 말에 진우는 버럭 소리쳤다. " 쓸데 없는 짓이라니! " " 그 안에는……아무도, 없단……말이다. 들어가봤자 헛수고……라는 거지. 크크, 크크크크. " 라트는 다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진우는 그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뭐라고……. " 아, 아무도 없다고? 저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거야! " " 크크크, 크크크크크. " 진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라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모습에 답답함을 느 낀 진우는 비틀거리면서도 라트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 대답해! 미연이와 하나는, 내 가족들은 어떻게 했어! " " 흐, 흐흐……. 데리고…… 있자니 너무, 시끄럽게 굴길래……. " " 뭐, 뭐라고! " 진우는 일순 눈 앞이 깜깜해졌다. 벌써, 벌써 죽여버렸단 말이냐! " 자동차 트렁크에……가둬두었지. 성당 입구에, 주차해놓은……. " 진우는 반사적으로 성당의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성당에 들어 오기 전에 검은색 승용차를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진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재차 물었다. " 살아는, 있는 거냐? " " 아아……. 내일 아침까지 꺼내주지 않으면……질식해서 죽겠지만. " " ―! " 진우는 너무나 안도해서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야말로 구사일생.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다.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17년전부터 찾지 않 았던, 아니 찾을 수 없었던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가족들을 살려주셔서. ' 진심으로……감사드립니다. ' 선한 사마리아원의 가족이 죽었을 때, 진우는 신을 부정했었다. 신 같은 건 없다고, 그런 건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울 좋은 우상일 뿐이라고. 그렇게 줄곧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족의 무사함을 알게되자 대번에 다시 신을 찾는 간사함이라니! ' 아니. ' 간사하다고 해도 좋았다. 변덕스럽다고 해도 좋았다. 알량한 종교관이라고 해도 좋아! 어쨌든 감사드리고 싶었다. 가족들을 무사하게 지켜준 그 누군가에게 감사 를 드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도무지 발산해낼 수 가 없다! " ……. " 그러다 정작 가족을 죽이지 않은 이가 라트라는 것을 깨닫고 진우는 곤혹스 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족을 납치한 장본인에게 감사를 표할 수는 없지 않은 가? 진우는 다만 라트에게 물었다. " 어째서……죽이지 않은 거지? " " 크, 크크크! 웃기지도 않는 질문이군. 그럼 내가……죽이기를 바랬나? " " 그, 그럴리가 없잖아! " 진우는 붉어진 얼굴로 라트를 쏘아보았다. 라트는 그런 진우의 모습에 정신 없이 킬킬대다가 곧 상념에 빠졌다. 한 소년이 있었다. 자신의 가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가족을 너무나 소중히 여겼기에, 그랬기에 그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았던 소년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행복은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산산히 부서 져나갔다. 너무나 손쉽게 빼앗겨 버렸다. 그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한 소년은 결국 복수에 매달리기로 결심했다. 복수만이 그의 상실감을 채워줄 유일한 탈출구임을 의심치 않으며,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갔다. 그렇게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여갔다. ' 왜 죽였어! 왜 죽였어! 왜! '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던 것은 그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자신의 일을 방해한 인간의 가족을 죽였을 때, 그리고 그런 가족들의 시신 앞에서 울부짖는 소년의 모습을 보았을 때, ' 살려내! 살려내란 말이야! 모두를 살려내―! ' 가슴이 내려앉았다.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어디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거냐고? 왜 저 소년이 자신을 향해 분노하는 거냐고? ' 으아아아아―! ' 저 모습은, 저 아이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바로 나다.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서 비통해하던, 무력하기 짝이 없던 어린 시절의 나. ' 네 말대로야. 신은 없어. 어려울 때 부르짖는 신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거 야. ' 그러나 녀석은 달랐다. ' 하지만 신을 믿었던 마음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지. ' 나와는 확실히 달랐다. 가족을 잃고서 힘없이 도망쳤던 나와는 달리, ' 주위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 자신의 꿈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 그 모든 것을 바래왔던 마음까지 거짓인 것은 아니야. 의미가 없었 던게 아니라고. ' 녀석은 나를 쓰러뜨렸던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나를 쓰러뜨렸 어! 나처럼 주저앉지 않고, 나처럼 자포자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 아무리 신이 없다 해도……네놈에게 그걸 깨뜨릴 권리는 없단 말이닷! '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내가 할 수 없던 일을 녀석은 해냈어! ' 피스 그린. ' 행복을 빼앗기고 그대로 절망에 빠졌던 나. 행복을 빼앗기고 다시 한번 행복을 찾아낸 녀석. ' 넌 예전에도 졌어! '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어. 나와 다를 바가 없는 구렁텅이에서 왜 녀석은 빠져나올 수 있었고 왜 나는 빠져나오지 못했는가? 어째서 녀석은 웃을 수 있고 난 웃을 수 없는 거야? 왜 나는 행복을 되찾지 못했지? ' 왜! ' 인정할 수 없었다. 녀석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다. 나와는 다른 길을 찾아낸 녀석을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해서도 안돼! ' 만약 녀석을 인정해버리면, ' 그러면, 그러면 내 인생은 뭐란 말인가? 망가질 때로 망가져버린 내 인생은? 복수만이 내 상실에 대한 보상이라고 믿어온, 그래서 또 다른 행복을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 녀석을 쓰러뜨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의 내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기 위해, ' 너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주겠다. 똑같이 모든 것을 빼앗아주겠어! ' 다시 한번 네 행복을 빼앗아주지! 그때도 넌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까? 또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어! ' 지켜보겠다. ' 네가 옳았던 건지, 내가 옳았던 건지, ' 지켜보겠어! ' 반드시……증명해보이겠다. " 크크. "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녀석이 날 이해해줄리는 없겠지. 어차피 이해 받을 생각도 없었고. 라트는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진우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 죽이는 것조차……귀찮았던 것 뿐이다. 어차피 내 목표는……처음부터 네 놈의 목……숨. " 뭐, 이 말도 사실이긴 하지. 라트는 진우의 구겨지는 표정에 더욱 크게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웃음 소리 가 나오지를 않았다. 웃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죽어가고 있었다. ' 어쩌면 나는……. ' 라트는 희미해져가는 의식 사이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진우에게서 눈을 떼 지 않았다. ' 녀석이 날……쓰러뜨려주기를……기대했던 것이 아닐까? '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가능성, 또 다른 나의 모습. 그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 행복을 지켜나가는 것을……, ' 단지 그것이 보고 싶었던게 아닐까? '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라트는 두 눈을 감았다. 패턴 실버의 오라 능력자 라트 발렌시아는 그렇게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 야 간신히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다만 그가 그런 생각을 품고 죽었다는 것은 그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 ……알 수 없는 녀석. " 진우는 천천히 라트에게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싸움은 끝났지만 이대로 계속 있다간 그도 라트의 뒤를 따라가 버릴 것 같았다. 라트의 죽음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진우의 몸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던 것이다. 여전히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라트에게 당한 상처에서도 출혈이 계 속되고 있었다. ' 포션만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이런 상처쯤은……. ' 진우는 다시 한번 포션의 절실함을 느끼며 힘겹게 성당의 입구로 걸어갔다. 라트의 말대로라면 그의 가족은 입구에 주차된 차의 트렁크에 있을 터였다. 다들 목숨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이런 무서운 일을 당해버렸으니 얼마나 겁 에 질렸겠는가? 특히 나이 어린 하나는? 진우는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안심시켜주고 싶었기에 자신의 몸도 생각하지 않고서 걸음을 서둘렀다. 후우우우우 그때 죽어버린 라트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차갑게 굳은 라트의 시신, 그 시신에서 뜨거운 불꽃이 치솟았던 것이다! 푸화아아아아악 마치 폭죽처럼 화려하게 터져오르는 불기둥에 진우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 보았다. 폐성당의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정원의 모든 식물들이 불꽃에 닿지 도 않았건만 일제히 불타오른다. 불바다가 되어버리는 풍경. 진우는 자신을 포위하듯 번져가는 불꽃의 세례에 몸을 떨었다. 그는 이미 이 불꽃을 한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바로 작년, 라트를 쓰러뜨렸을때 퍼져나온 살라만더의 불꽃! 리리스가 라트의 패배를 염두에 두고 그의 몸속에 심어뒀던 카르마 에너지의 집합체! 시영이 라트를 부활시켰을때 덩달아 이 불꽃의 심지도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우우우우우 불꽃은 빠른 속도로 성당을 뒤덮어갔다. 진우는 그 지독한 열기에 제대로 눈 도 뜨지 못하면서 불꽃의 범위를 확인했다. 불꽃은 다행히 성당을 둘러싼 상태에서 멈춰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 이 폐성당은 산지 근처에 있었기에 불꽃의 열기가 더 거세지다간 대번에 산불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다간, ' 어째서 다 끝난 마당에 이런 일이! ' 성당 입구 쪽에 있는 미연과 하나도 영락없이 타죽을 것이다. 그전에 어떻게 든 해야한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 가속으로 불길을 뚫고나가 미연과 하나를 구한다면? '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허나 진우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이 불길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 이 불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진우와 가인의 오라 쉴 드로도 그 열기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뒤늦게 마리와 시 민, 유리가 달려와줬기에 망정이지……. 아마 저 불꽃은 단순히 물리적인 열기 뿐만이 아니라 영체에까지 영향을 미 치는 것 같았다. 쿠구구구구 그때 불꽃에 뒤덮였던 성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열기가 성당을 지탱시켜주 던 구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초읽기! 진우는 튀어오르는 불꽃과 연기에 몸을 낮추며 힘겹게 숨을 몰아 쉬었다. 불 꽃에 산소가 타고 있는지 호흡하기가 힘들어졌다. ' 빌어먹을. 내가 입에서 바람을 내뿜는 강철의 성도 아니고. 이런 불꽃을 무슨 수로 끄라는 거야? ' 진우는 이런 상황에서도 실없는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기가 막혔다. 자연적 으로 불이 꺼질 방법을 생각하다보니 비에 이어 바람에까지 생각이 미쳤던 것 이다. 여유도 보통 여유가 아니로군. 하필이면 바람이라니……. 그러다 숲에 불이 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바람? ' 바람으로……불을 끈다? ' 그것이 꼭, 그렇게 불가능한 일일까? ' 진우는 문득 활로를 찾아낸 것 같았다. 그래. 바람이다! 바로 그거야! ' 토네이도(Tornado)! ' 회오리 바람! 큰 파괴력을 가졌으면서도 피해폭은 넓지 않은 선형풍(旋衡風). 바람의 기압 차로 바깥쪽 진로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상승 기류로 날려보내는 회오리 라면 확실히 이 화재를 제압할 수 있다. 주위에 불이 번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어! 그리고 진우의 가속이라면 인위적으로 전향력이 없는 회오리를 일으키는 것 이 가능했다. ' 단지, ' 문제는 두가지. 토네이도의 풍속은 대략 초속 100미터. 이는 음속보다는 못하지만 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위력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회오리를 일으키려 면 진우의 가속이 그 정도는 넘어야 한다는 건데……. 이는 AI슈츠를 착용하 지 않은 그로서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회오리를 만들려면 장시간의 가속이 필요했다. 슈츠를 착용한 상태에서도 패턴 그린의 지속 시간은 30초 정도. 하물며 미착 용 상태에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장시간의 가속은 절대로 무리다! " ……. " 그리고 두번째 문제. 회오리 바람은 내부의 공기가 팽창하는 압력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하늘로 날려보낸다. 그것은 곧 성당 밖에 있는 미연과 하나도 회오리에 휩쓸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십중팔구 휩쓸려 올라갈 것이다.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 화재를 진압하려는 것인데 정작 그녀들이 위험에 빠져 서야 의미가 없지 않은가? ' 아니. 방법은 있어. ' 오라의 완벽한 이미지메이킹. 능력자의 의지로 이미지메이킹이 영향을 미칠 대상을 제한해낸다면 미연과 하나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 어차피 오라란 의지의 힘이기에 의지에 반하는 일은 투영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 결국 이 난관을 헤쳐가려면, ' AI슈츠도 없는 상태에서 장시간에 걸쳐 가속을 해야 한다……라는 건가. 그 것도 미연과 하나에게는 오라의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진우는 앞에서 자신이 한 말을 취소했다. 패턴 그린은 현존하는 오라 능력들 중에서도 가장 불완전한 능력이었다. 그 런 패턴의 소유자에게 이런 세세한 오라 컨트롤을 바라다니. 이거야말로 불가능이 아니면 뭐가 불가능이라는 거야? ' 안돼. 역시 이 방법도 아니야. 뭔가 더 좋은 수를, 더 가능한 방법을 찾 지 않으면. ' 치이이이익 " 으윽! " 진우는 자신의 옷과 머리카락이 타기 시작하자 황급히 생각을 멈췄다. 가능 이고 불가능이고 이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쪽에 모든 것을 거는 수밖에! ' 어쩔 수 없나! ' 진우는 쫓기듯이 몸을 낮춰 크라우칭 스타트를 취했다. 체중의 절반을 두손 에 걸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앞다리에 두어, 언제든지 앞으로 튕겨나갈 수 있 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진우는 이글거리는 불꽃 너머로 보이는 성당의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미연아……. 하나야……. ' 해낼 수 밖에 없어! ' 비록 내 몸이 부서진다 해도!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해도! " 지킨다! 반드시! 반드시! " 진우는 약해지려는 자신을 다그치는 것처럼 몇번이고 소리쳤다. 지금 이 순 간, 그의 뇌리에는 그의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하나 하나 스쳐가고 있었다. 아가다 수녀님. 토마스. 시메온. 선한 사마리아원의 모두들. 그리고……, " 이번에야말로 나는―! " 그 외침과 동시에 진우는 불꽃의 근원지인 라트를 중심 삼아 반시계방향으로 내달렸다. 처음에는 제대로 중심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그의 몸은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는 녹색의 잔상을 흘리며 음속으로 접어든다. 그러자 녹색의 토네이도가 형성되며 일대에 사이펀(siphon)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회오리가 주변에서 끌어들인 공기를 위쪽으로 분출시킨 것이다. 우오오오오 음속의 바람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사납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서서히 토 네이도의 근처에 있던 불길들이 대기의 흐름을 따라 빨려들어간다. 화재로 무 너진 건물의 파편들도 그 뒤를 따랐다. 심지어는 정원에 심어진 나무들까지 뿌 리를 들썩이며 꺽여나갈 정도. 옮겨 심은지 얼마 안된 묘목들은 진즉에 바람에 몸을 싣고 있었다. 가속 중에 그것을 지켜보던 진우는 자신의 생각대로 화재가 진압되어가자 속 으로 안도했다. 무엇보다 가장 신경쓰고 있던 대상의 제어가 확실히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미연과 하나가 타고있는 자동차는 토네이도의 여파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편 AI슈츠 없는 가속 임에도 불구하고 진우의 몸은 아직까지 별 다른 이상 을 보이지 않았다. 라트와의 전투 때 슈팅스타를 사용했던 것도 그렇고 지금 의 가속도 그렇고……. 혹시 패턴 그린의 이미지 메이킹은 벌써 완성된 것이 아닐까? ' 그래. 어쩌면 나는 드디어, ' 내 오라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치이이이잉 그때 불길한 공간 마찰음이 진우의 귓청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들리기 무섭 게 진우는 예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두통!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가루로 변해가는 감각! 진우는 불길함에 사로잡혔다. 설마, 설마 가속의 부작용이 이제서야! ―으으으윽! 진우는 영체를 쥐어짜이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가속 중의 비명이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공간의 틈 사이로 울려퍼진다. 뼈와 근육이 부서지는 물리적인 아픔과는 달랐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은 위태함, 세상에서 도태되어 간다는 두려움. ―끄아아아악! 소멸의 느낌이었다. 죽음의 느낌이다! 이토록 확연하게 느껴지는 '종말'이라 니! 진우는 붉은 색에서 점점 검은 색으로 변해가가는 세상의 모습에 예감했다. 이대로 실명이 되는 순간, 시야가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이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크헉, 카아― 가아아악! 진우는 당장에라도 오라 능력의 전개를 멈추고 싶었다. 너무도 괴로웠다. 이 아픔은 현세의 것을 초월한 지옥의 그것에 가까웠다.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치이이이잉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오라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직 불길이 거둬지지 않은 것이다. 미연과 하나를 구해내지 못했어! 진우는 말 그대로 피가 거꾸로 솟는 아픔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가속을 전개 했다. 그러자 가속에 대한 환상인지 수 많은 옛 기억들이 눈 앞으로 펼쳐진다. 어쩌면 이것이 사람이 죽기 직전에 볼 수 있다는 인생의 플래시백 현상……. 그 과거 속에서 진우는 언제나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던 자신의 모 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얻고, 때로는 슬퍼하다가 때로는 기뻐하다가, 그렇게 똑같은 일을 질리지도 않고 반복해온 자신. 지킨다라는 것에 병적으 로 집착해온 남자의 최후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 나는 결국……이루지도 못할 꿈을 꾸면서, ' 미안. 미연아, 하나야. 나는…… 이 정도가 한계인 놈인가 보다. ' 한계를 뛰어넘은 녀석들은 강해진다. 희생을 강요받아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지. ' 역시 사부님처럼 될 수는 없었어. ' 바보제자,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지? 한계를 넘으려 발버둥치겠느냐, 아니면 한계를 그어놓고 안주하겠느냐? '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가진 한계를. 모두를 지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을. 그러면서 고집을 부렸어. 철 없는 꼬마가 히어로를 동경하는 것처럼, ' 그렇게 줄곧……사부님을 흉내내오기만 했어. ' 진우는 눈물을 흘렸다. 아니,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 다. 음속의 세계에서는 육체의 반응이 감정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니까. 아 무리 슬퍼도 눈물샘이 자극되는 것은 가속이 끝난 뒤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우는 분명 서럽게 울고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어린 아이마냥 소 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또 그것을 넘지 못함을 알았기에 흘리는 설 움의 눈물이었다. 회한의 눈물이다. ' 내가 지켜줄 거야! 다른 사람에게 미연이를 맡길 순 없어! ' 그래도, ' 이제와서 포기할 수는……없어. ' 흉내내기에 불과할지라도, 어리석은 자기 만족에 불과할지라도, '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아. '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어. 이제와서 나는……. 나에게는……. ' 미연아. 하나야. ' 내 소중한 가족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들만큼은, ' 너희들만큼은 반드시― ' 가족들과 함께 돌아오세요.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속에 녹아들려는 순간, 이미지메이킹에 동화되려는 순 간, 기억해냈다. 헤어지기 직전 그 녀석이 자신에게 남겼던 말을. 그 녀석과 했던 마지막 약속을. ' 가족들과 함께 돌아오세요. 그러지 않으면……절대로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 ' 돌아오라고, 함께 돌아오라고 했다. 구해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함께 돌아오라고……. ' 죽는다고?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고 그런 소리를 해! ' 그래. 그런 말도 했었지. 녀석에게 그런 말도 했었어. 그런 주제에 나는, ―끄으으으, 뭘……포기하려는 거냐. 뭘 절망하려고 했던 거야? '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 녀석이 말한대로잖아. 할 수 밖에 없는 거잖아! 한계를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력하 는 것 뿐이었어. 그저 앞으로 달리는 것 뿐이었어. 그런데 이제와서 뭘 따지는 거야? 뭘 계산하고 있는 거야? ' 유가인……! ' 그 녀석을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는 거냐? 이대로 이렇게 꼴사나운 최후를 보여줄 거야? ―으으으으, 정진우! 넌 그것밖에 안되는 녀석이었어―? ―으아아아아압! 순간, 꺼져가던 진우의 의식이 되살아났다. 그러자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녹색의 빛이 세상을 밝혀낸다. 콰콰콰콰콰 어쩌면 기적이라는 것은 의지가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찰나, 그 한 순간을 일컫는 말일지도. 진우는 그렇게 자신을 감싼 기적 속에서 끝까지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그리고 토네이도가 모습을 감춘 것은 모든 불꽃이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녹색의 토네이도가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신선로 같은 지형이 남아있을 뿐, 그 주위에 있던 성당은 허허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지면에 깊게 파여진 검은 소용돌이 자국만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하아……! 하아……! " 그 폐허의 잔해 위로 한 남자가 서있었다. 남자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불꽃에 뛰어들기라도 했는지 전신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그 사이 사이로 선명한 핏자국들이 번들거린다. 만약 숨소리라도 들리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불에 탄 시체로 알았을 것이다. " 하아……! 하아……! " 남자는 정진우였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금새라도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럽 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무리한 오라의 남용이 영체의 카르마 에너지를 고갈 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호흡하고 있다! " 하아……! 하아……! " 이것은 진우의 오라 패턴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패턴 그린의 힘이 완벽하게 발휘되었기에, 그 이미지 메이킹이 독립적인 현현성을 띄었기 에, 오라가 진우의 의지를 인정했기에! " 하아―! " 그 때문에 이렇듯 그는 존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있 다! " 미연아……! 하나야……! 나는……! 나는……! " 진우는 거친 호흡 속에서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영체의 힘이 바닥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몸이 움직이는 것은, 순전히 그의 의지가 육체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가족애만이 지금의 그를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 ―! " 하지만 그가 향하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 미연과 하나가 타고 있 어야할 자동차가, 성당의 입구쪽에 주차되어있어야할 자동차가, " 하아! " 없다! 어디로 간거지? ' 앞의 토네이도 속에 말려들어간 걸까? 제어의 대상이 불완전했던 거야? '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진우는 그만 다리의 힘이 풀려버렸다. 간신히 해냈다 고 생각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지켜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 여전히 마무리가 미숙해. 모처럼 칭찬해줄까 했는데 역시나 어쩔 수가 없 어, 바보 제자. " 이 목소리는! 진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황망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너무나 눈에 익은, 그렇기에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한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네놈의 가족은 바람에 휘말리기 직전 내가 구해냈다. 근처의 숲속에 눕혀 놓고 팔라딘대를 호출했으니 조만간 구조될 거야. 걱정하지마라. " 새하얗게 변한 백발.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오른쪽 소매자락. " 사……. " 분명 변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는 달라져 있었지만, " 사부님……! " 진우는 흐느끼듯 그의 이름을 소리내 불렀다. 진우의 두 눈에서는 안도 때문 인지 감격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힘을 짜내어 자신의 스승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사부님! " 사부……님! " 진우는 사부의 앞에 도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기력이 다했는지 앞으로 거꾸러졌다. 그런 그를 사부, 브루스 류는 마주 끌어안으며 미소했다. " 네놈이 보여준 의지, 잘 보았다. 한계를 넘어서느냐 마느냐는 처음부터 중 요했던 게 아니었어. 중요한 것은 각오. 신념을 관철(貫徹)시키겠다는 각오 였던 건가. " " ……. " " 이제는 더 이상 바보제자라고도 부르지 못하겠군. 내가 백여년 동안 찾아 헤맨 대답을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이야. " " ……. " 바보제자로 충분해요. 바보제자로……. 진우는 흐느끼며 브루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품안에 있는 사부가 신기루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몇번이고 힘을 주었다. 그렇기에 모르고 있었다. 그의 가슴으로 뻗어나오는 한 주먹의 존재를. " 경의를 표한다, 정진우. 그렇기에……. " 브루스는 망설임없이 진각을 내딛었다. 터엉―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진우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브루스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눈과 코, 입, 귀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브루스의 옷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털썩 손에서 힘이 풀리자 진우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뒤로 넘어갔다. 브루스의 주 먹이 닿았던 그의 왼쪽 가슴은 처참하게 으깨져 있었다. 그대로 심장이 부서 졌던 것이다. 그렇게 차가워진 제자의 몸을 내려다보며 브루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다. " 정진우. 그리고 오라의 주인. ' 이것이 내 선택이다. ' 바보제자,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지? 한계를 넘으려 발버둥치겠느냐, 아니면 한계를 그어놓고 안주하겠느냐? ' 이것이 너희의 각오에 대한 내 대답이다. ' 그 어느 쪽도 잘못된 방법은 아니야……. <제 22 화 머신 아더 VS 블랙 아더 完> Ｔo Ｂe Ｃontinued… =-=-=-=-=-=-=-=-=-=-=-=-=-=-=-=-=-=-=-=-=-=-=-=-=-=-=-=-=-=-=-=-=-=-=-=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제갈영: 약속대로 돌아왔다, 제군! 그럼 이 몸의 부활을 알리는 서막을 열도록 하지! 부용제다! 세상은 변함 없이 돌아간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살아간다. 하지연: 이번에야말로 작년의 치욕을 씻어낼 기회다! 각오는 된 거냐, 녀석 들아! 박재영: 오오오오오! 그것이 일상. 그것이 평화. 유가인: 거짓말! 믿을 수 없어! 브루스가, 브루스가 어째서 그런 짓을! 왜 진우 씨를! 우리가 지키려 했던 것은 정녕 이런 무심함이었던 걸까? 우리가 지켜야 하는 평화라는 것은, 이유리: 언제나 내가 곁에 있을게. 언제나 오빠 곁에 있을테니까…….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었단 말인가? 弟 23 話 Goodbye to Romance 성마리: 좋아해, 가인. 널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유가인: 마리 선배…….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학창 시절이 되리라는 것을.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3 - Ｂy Ｎext Ｎeo =-=-=-=-=-=-=-=-=-=-=-=-=-=-=-=-=-=-=-=-=-=-=-=-=-=-=-=-=-=-=-=-=-=-=-= 피스 그린 정진우의 장례미사는 26구역의 한 성당에서 행해졌다. " 주여. 정진우 도미니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장례미사에는 수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와 있었다. 진우의 유족인 미연과 하나. 그리고 그의 이웃이자 동료였던 가인과 시민, 유리. 또 이웃은 아니었지만 마리를 비롯한 비영과 코마히코의 무영신풍류 지 인들. 언더 시티의 관계자들도 있었다. 오늘만큼은 유레카의 관련 업무를 중단하고 장례식에 참석한 윤채영과 오퍼 레이터 팀. 기술부 치프인 시더 웰리스와 메디컬 센터의 닥터. 진우와 생사고 락을 함께 했던 유한진 중위와 휘하의 팔라딘 대원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이들을 통솔해온 민수정이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평소 와 달리 진 사령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오늘 우리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정진우 도미니꼬의 죽음을 유족들과 함께 슬퍼하면서 그에게 주님의 무한한 자비가 내리기를 빌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 소리 죽여 흐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채영과 오퍼레이터 삼인방은 입으로 손 을 가리며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키고 있었고, 시더는 안경을 쓰지도 못할 정 도로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있다. " 삶과 죽음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고, 주께서 그를 위하시는 사랑이 우리 인간의 정보다 무한히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남은 유족을 위로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너그러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 닥터는 자신에게 치료를 받던 진우의 모습이 생각나자 연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한진과 팔라딘 대원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특히 미연과 하나의 납치를 막아내지 못했던 천요원 중사는 전신에 깁스를 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 참석하여 눈물을 떨군다. " 그의 청춘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와 함께 있기 를 빌면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 그들은 모두 진우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동료이자 믿음직한 전우, 때로는 실없는 행동으로 웃음을 자아냈지만 그 누구보다 용감했던 대장 의 부재를 믿을 수 없었다. ' 진우 씨. ' 민수정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조용히 손수건으로 훔쳐냈다. 자신의 사형이었던 남자의 마지막이 잊혀지지를 않았다. 그때 그가 사지로 향하는 줄 알았더라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말렸어 야 했다. 절대로 가지 못하게 붙잡아야 했는데……. ' 여∼ 다들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 금방이라도 그가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 그렇게 말을 걸 것 같았다. 평소와 다 름 없이 익살스럽게, 너스레를 떨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불쑥 나타나 모 두를 놀래킬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은 진우의 사인이었다. 진우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나선 자국. 그것은 분명 칠성권 제 7의 발경 파 군에 당한 흔적이다. " ……. " 수정은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맨 앞줄에 미연 일행과 동석한 가인을 바라보 았다. 전투에서 귀환한 대원들에게 진우의 죽음을 통보했을 때. 또 그의 살해범이 누구인지 밝혀졌을 때. 그때 얼어버리던 가인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 결국 스승님은 결정을 내리신 건가. '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은 아니다. 오히려 수정과 진 사령관이 브루스를 통일 한국으로 불러들인 구실이 구실이었던 만큼 이런 사태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정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녀의 스승이 가진 집착. 그 끝없는 갈망이 오라의 주인과 만나면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기를. 과거에 구애받지 않고 이제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 기를.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의 스승은 기대대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 이어서 우리 신자들의 풍습대로 고인과 고별식을 거행합니다. 우리는 고 인을 떠나보내지만, 고인은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고 또 우리 가 현세를 떠난 후에는 하느님 대전에서 다시 상봉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고인을 전송합시다. " ' 모든 것이 다……나만의 착각이었던 거야. ' 수정은 자조하며 해설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성찬 전례가 끝나자 다음은 고별식이 거행되었다. 영정(零丁)을 진심으로 애도하기 위해 각자가 준비한 헌화를 시신에게 바치는 의식. 유족의 부모들이 먼저 헌화를 바치도록 되어 있는데, 진우는 부모도 형제도 아무도 없었기에 미연의 양부모들이 대신 그들의 몫까지 헌화해야 했다. " 이 못난 사람 같으니라고……. " 미연의 아버지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제단의 관에 누워있는 사위를 바라보 았다. 열려진 관 안으로 보이는 진우는 드라이아이스로 생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것만 같다. " 평소에도 제멋대로 굴더니 끝까지 제멋대로 떠나버렸어. 내 이럴 줄 알았 지. 처음 미연이가 자네를 데려왔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고. " 그는 처음 진우와 대면했던 날을 회상했다. 2027년의 가을. 뉴욕에서 유학 중이던 그의 딸이 난데없이 결혼할 상대라며 웬 보도못한 시시껄렁한 잡배를 데리고 귀국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당연히 미연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둘의 결혼을 반대했었고, 그러자 그 잡배 놈이 꺼낸 말이 가관이었지. ' 미연이의 뱃속에는 이미 제 딸이 있습니다! 책임지게 해주십시오! ' ……그 말을 들을 직후, 미연의 아버지가 이 파렴치한 잡배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고 했던 것은 딸을 가진 부모로서 너무나 당연하고 지고지순한 섭리였 으리라. 다음날, 소동은 간신히 아내와 미연에 의해 진정되었지만 그의 노기가 풀린 것은 정작 다음해, 손녀 정하나가 태어났을 때였다. 손녀가 미연을 닮아 눈에 아프지도 않게 귀여웠으니 망정이지 만약 저 잡배 놈의 털끝 하나라도 닮았더라면 결코 그는 둘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 다. ' 그런 자네가 10여년 전의 그 아이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 ' 미연의 아버지는 딸을 뉴욕에서 입양해올 때 울며불며 소리치던 남자 아이를 떠올리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이렇게 기구한 인연이 있었을 줄이야. 아내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구나 하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렇게……그렇게 힘들게 만났으면서. 간신히 서로들 만났으면서 어째서… …. 왜,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차마 더 이상 진우의 시신을 볼 수가 없었다. 미연의 어머니 역시 아까부터 줄곧 흐느끼며 관을 붙 들고 있다. 그런 부모님들의 모습에 미연은 천천히 하나의 손을 이끌고 관으로 다가갔 다. 그리고 수척해진 얼굴로 조용히 자신의 남편을 응시했다. 의외로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 ……엄마. " 하나는 눈물을 흘리는 예배당의 분위기에 불안해하며 미연을 불렀다. 미연은 하나를 안아올리며 관속의 진우를 가리켰다. " 하나야. 아빠에게 인사해야지. " " 아빠? " 하나는 아빠라는 말에 두눈을 크게 뜨며 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안 에서 며칠동안 보지 못했던 진우를 발견하고 반갑게 소리친다. " 아빠! 아빠! " 하나는 미연의 손에서 벗어나 진우에게 다가가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그 녀를 끌어안은 미연의 손이 도무지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미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관속의 진우를 돌 아본다. 하나는 왜 엄마가 저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건지, 또 아빠가 왜 저 런 곳에 누워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며칠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빠였다. 그러다 불쑥 불쑥 나타나서 그녀를 끌어안던 아빠였다. 어린 하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며칠동안 아빠를 만나지 못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슬퍼하는 사람들 쪽이 이상한 것이다. " 엄마. 아빠가 안 일어나. " 하나는 아무리 자신이 불러도 진우의 눈이 떠지지를 않자 이상하다는듯 미연 에게 물었다. 단지 그렇게 물어본 것 뿐인데……. 그런데 갑자기 주변에서 울음 소리가 늘 어나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도 외할머니도. 곁에 있던 시민 언니와 유리 언니도. 다들 고개를 숙인채 몸을 떨고 있었다. 울고 있다. 하나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건가 싶어 괜시리 겁이 났다. 그래서 불안 한 얼굴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엄마는 하나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 하나야, 아빠는 말이야. 엄마와 우리 하나를 위해…… 너무 열심히 일하셔 서, 그래서 깊이 잠이 드신 것 뿐이야. 왜 있잖니? 예전에도 가끔씩 집에 돌아오면 피곤하다고 쿨쿨 잠만 잤잖아? " " 응! 아빤 잠꾸러기야. 맨날 늦게 일어나. " " 그치? 그러니까 지금은 편히 주무시게 내버려두자. 깨우면 못 써요. " " 으응. " 하나는 이해했다는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연은 그런 딸이 기특했는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헌화를 하나의 몫까지 진우의 가 슴에 내려놓는다. " 당신, " 미연은 마치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다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 기억하고 있어요? 예전에 저에게 했던 말. 당신은 우리 하나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댔죠? 그래서 하나가 앞으로도 계속 좋아하는 사람들 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고. " 그 말에 곁에 있던 가인과 마리의 표정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진우 씨,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 솔직히 전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이 원망스러웠어요. 그렇게 말로는 모두 를 지킨다 지킨다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지키지 않는 것 같아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화가 났어요. 매번 상처투성이가 되서 남을 지키면 뭘해요? 그러다 당신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 와 하나는? 소중한 남편과 아빠를 잃은 우리는? 우리의 슬픔은 누가 보상 해주죠? 그래서 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남겨지는 우리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나가는 당신이 야속했어요. " 거기서 미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던 모양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계속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요. 조금이지만……그래도 당신이 지키려고 했던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요. 당신에게 지켜지고 나서야 이렇게……. " 미연은 라트에게 붙잡혔을때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한치 앞도 보이 지 않는 절망에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것은 상관 없었다. 무섭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두렵 지만 참아낼 수 있어. 하지만 같이 잡혀온 하나는 아니었다. 자신의 딸이, 그 아무 것도 모르는 아 이가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미래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무서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제발 누군가에게 사정하고 싶었다. 애원하고 싶었다. 내 딸만은 살려달라고. 자신은 상관 없으니 내 딸의 미래만큼은 지켜달라고. 구해달라고! 그 어두운 차 트렁크 속에서 몇번이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야 말로 정신이 아늑해질때까지 딸의 무사함을 신께 빌었다. 그리고 마침내 구해졌을때. 무사한 하나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때 느꼈던 안도감. 그때 느꼈던 기쁨. 그때 느꼈던 감사.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망이었다. ' 지금껏 당신이 지켜왔던 사람들은 모두 이런 희망을 건네받았던 거겠죠? ' 미연은 누워있는 진우의 얼굴을 살며시 매만지며 속삭였다. " 그래서 지금은 그런 당신이……자랑스러워요. " 그래서 살아갈 거에요. 당신이 말한대로. 당신이 지켜낸 사람들과 행복하게.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계속……살아가겠어요. ' 그러니까 울면 안되겠죠? 슬퍼하면 안되겠죠? ' 진우 오빠. 전 행복한 거겠죠?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줬으니까. 웃어야 하는 거겠죠? 미연은 진우에게 자신의 웃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진정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만이 자신과 하나를 지켜준 진우에 대한 보답이 라고 생각했다. ' 내가 지켜줄 거야! ' 하지만 기억하고 말았다. 떠올리고 말았다. ' 내가 지켜줄 거야! 다른 사람에게 미연이를 맡길 순 없어! ' 먼 옛날. 그녀를 향해 외치던 그의 모습을. 떠나가던 그녀를 지쳐 쓰러질때 까지 쫓아오던 그의 모습을. 미연은 그제야 진우의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 바보같이……. 정말이지, 그때와 하나도……안 변했다니까. " 그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한계였다. 미연은 쓰러지듯 진우의 관 앞에 주저앉으며 소리내어 울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끝까지 웃으려고 했는데. ' 그런건……불가능해. ' 어떻게, 어떻게 웃을 수 있단 말이야. 더 이상 당신은 없는데.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는데. " 오빠― " 그렇게 서럽게 울부짖는 미연의 모습에 시민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끌어안 았다. 영문을 모르던 하나도 그제서야 예배당의 슬픔을 이해했는지 훌쩍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곁에 있던 유리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다. 유리는 그런 하나보다도 더 심하게 몸을 떨며 흐느낀다. " ……. " 가인은 다시 한번 예배당이 눈물 바다로 잠겨가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 쥐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모두의 슬픔이 비수처럼 변해 그의 가 슴을 찌르고 있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리면 나으련만. 하지만 그것은 가인의 희망일뿐. 그의 눈물샘은 마치 말라버린 것처럼 건조 하기 짝이 없다. 그런 자신의 무정함이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마치 슬퍼할 자격조차 박 탈당한 기분이다. 눈물마저 빼앗긴듯한 상실감, 허탈함. 갈 곳을 잃은 분노, 혐오. ' 2033년 10월 4일 18시 50분. 피스 그린 정진우가 전사했습니다. 사인은 심 장 파열에 의한 뇌조직 사멸. 그리고 심장을 파열시킨 것은…… 피스 그레 이 브루스 류의 발경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 그 날의 보고를 떠올리는 순간,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는 순간, 가인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미칠듯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머 리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예배당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그를 부르는 마리와 몇몇 사 람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가인은 듣지 못했다. '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 정신 없이 뛰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무의식 중에 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달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뚜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 피스 그린 정진우가 전사…… 사인은……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 거짓말! 믿을 수 없어! " 가인은 걸음을 멈추고 버럭 소리질렀다. 그 바람에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지만 가인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느낄 수 없 었다. " 브루스가, 브루스가 어째서 그런 짓을! 왜 진우 씨를! "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이유가 없잖아? 브루스는 진우 씨의 사부님인데, 그토록 허물없던 사이였는데, 그런데 그런 브루스가 진우 씨를 죽였다고? " 웃기지마!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지껄이지마! "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돼! 브루스와 진우 씨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헛소리다! ' 그런 거죠? 다 거짓말인 거죠, 브루스? 대답해봐요. 나타나서 대답해봐요! 당장 내 앞에 나타나요! 당장! ' 가인은 품에서 꺼낸 머리장식을 마치 브루스인양 노려보았다. 그러나 머리장 식은 머리장식일 뿐. 가인의 물음에 응해줄리가 없다. ' 잘 가지고 있다가 사부님이 돌아오면 직접 돌려 드리라고. 알았지? 이건 사형으로서의 부탁이기도 하니까. ' 문득 브루스의 머리장식을 그에게 건네줬던 진우가 생각났다. 그때 그가 짓 던 표정이, 그 미소가, 그 목소리가. 이토록 생생한데. 이토록 확연한데. 금방이라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 아, " 혼란스러워하던 가인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 황 망히 주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찾는 이는 없었다. 어디에도, 어디에도 진우 씨는……. " ―! " 순간 가인은 머리를 감싸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러자 뜨거운 눈물 줄기가 쉴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는 목놓아 진우의 이름을 불렀다. " 진우 씨. 진우 씨! "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렇게 화내고 그렇게 소리쳐서, ' 뭘 그렇게 걱정하는 척 하는 거에요? ' 진우 씨도 괴로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앞으로도, 아마 평생동안 당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에요. ' 왜 차갑게 굴었던 걸까? 왜 그런 식으로 밖에 말해주지 못했던 걸까? 왜 진즉에 진우 씨에게 잘해주지 못했지? 왜? " 진우 씨― " 미안해요. 죄송해요. 그러니 돌아와줘요. 돌아와서 예전처럼 꾸짖어줘요. 장 난쳐주세요. 웃어주세요! 그때의 그 순간처럼― ' 너도 내 가족이다. ' ' 맘에 쏙 들진 않지만 여기서 살아나가 내 딸도 책임져야 될 거 아냐? 응? 사위. ' ' 이로써 네 녀석이 나의 사제가 되는구나. 내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왠지 감개가 무량해지네. ' ' 그러니 그만 얼굴 펴라고, 소년. 그렇게 계속 우거지상을 짓고 있으면 내 딸도 슬퍼하잖아. ' ' 어때? 이런 사람들을 놔두고 혼자 죽을 수 있겠어? ' 그때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되돌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할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다할 거에요. 진짜에요! 정말이에요! " 크흑, 흐, 아흐흐흑― " 하지만 가인은 이런 후회가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신이와 부모님을 떠나보낼 때도 이와 같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뼈저리게 후회했는데,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 는 이런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 허어어어엉― " 나는 또, ' 너도 내 가족이다. ' 내 소중한 가족을……잃어버렸어. 弟 23 話 Goodbye to Romance 11월이 되었다. " 이번에야말로 작년의 치욕을 씻어낼 기회다! 각오는 된 거냐, 녀석들아! " " 오오오오오! " 한성고 2학년 1반의 담임, 하지연의 목소리에 재영을 위시한 교실의 학생들 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그들이 이렇게 떠들썩해진 이유는 한 남자의 복귀와도 관계가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바로, " 하하하하하! 좋은 각오입니다. 그 정도는 해주셔야 돌아온 보람이 있지요! 과연 그래야 내가 인정한 호적수! " 안경을 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지연의 곁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2학년 1반 일동은 언제 환호했냐는듯 대번에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남자는 모두가 인정한 최대 최악의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 ……저기. 제갈영 교생 선생님. 일단은 제 조례 시간입니다만. " 지연은 구겨지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간신히 억누른 어조로 말했다. 그녀 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놀랍게도 이 남자는 올해 초에 졸업한 것이 분명한 대원 그룹의 후계자, 제갈영이었다. 'I shall return'이라는 말을 끝으로 사라졌던 그는 정말로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다시 한성고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것도 교생이라는 신분으로! ' 말도 안돼. 대학에 들어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교생실습을……. ' 아니. 그보다 저 놈이 사범대를 지망했다는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명색이 대원 그룹의 후계자란 녀석이 설마 교사가 꿈이었단 말인가? 그것도 담당 과 목은 도덕? 후계자 자리는 어따 팔아먹고! ' 약속대로 돌아왔다, 제군! ' 어쨌든 그가 교장 선생의 소개로 강당의 조례시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전교생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현 학생회장이었던 호일준은 그 자리에 서 졸도해버렸는데, 나름대로 철권 통치를 펼치며 충실한 나날을 보내던 그 로서는 공든 300만 도미노가 일시에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 그럼 이 몸의 부활을 알리는 서막을 열도록 하지! 부용제다! ' 그리고 예상대로 제갈영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복귀하기가 무 섭게 다시 학생회를 장악한 그는 이번에도 터무니 없는 이벤트를 열었는데, '부용 리그 파이트, 제 2차 스페이스 오딧세이.' 작년 부용제에서 승자가 가려지지 않은 것을 빌미로 삼아 또 다시 스페이스 콜로니를 상품으로 걸고 전학급의 배틀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제갈영이 배틀제에 집착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렇다 치고, 그가 교생으로 발령받자마자 부용제가 열렸다는게 너무나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부용제를 위해 모든 일정을 맞춰왔던게 아닐까……하 는 두려움마저 들기도 한다. " 이런 하지연 선생님. 이해할 수 없군요. 분명 저는 2학년 1반의 부 담임. 충분히 조례에 참가할 자격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제갈영은 지연의 제지를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 말에 지연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어쭈? 벌써부터 맞먹는다, 이거냐? " ……분명 저희 학교가 이번에 교생을 모집한 것은 젊은 선생님이 필요해서 라는 이유였죠. 요즘 애들과 나이 차가 많은 우리는 대화가 안된다나 뭐래 나. " 라는 것이 교장 선생님의 말. 그러나 작위적인 변명일게 뻔하다. 한성고에 20대 교사가 얼마나 많은데 학생들과 세대 차를 느낀단 말인가? " 하지만 정식 채용도 되지 않은 분이 벌써부터 자격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 군요. 지금의 선생님은 아직 지도 교사의 말에 절·대·복·종 해야 할 교 생일 뿐이랍니다. '사복'만 입는다고 해서 다 선생님이 아니에요. " 그야말로 가시가 돋힌 지연의 반격.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와 2년동안 함께 학급을 꾸려온 재영 일행은 언제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지 몰라 안절부절했다. 그들은 창백해진 표정으로 연신 속으로 제갈영에게 소리쳤다. ' 야! 그만 가라! 제발 가, 이 화상아! ' 그러나 제갈영은 그런 학생들의 제스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더욱 기고만 장해졌다. " 훗. 그거야말로 납득할 수 없는 요구입니다. 교사라는 것이 언제부터 그런 권위의 대명사가 되었던가요? 저는 그저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생 활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겁니다. 하 선생님이 바라시는 교사 상에는 응 해드릴 수가 없어요. " " ……. " 하지연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게 교무회의를 주무르며 자기 좋을데 로 하던 네가 할 소리냐, 지금! " 후. 어쨌든 정진정명 교사의 길이란 너무도 험난하군. 뭐, 그 때문에 더더 욱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시련이 없는 히어로는 사랑받지 못한다 는 말도 있지 않는가! 하하하하! " " Pain is my pleasure! My load, My prince! " 제갈영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 뒤로 웬 정장 차림의 여성들이 한가득 몰려나 와 뿔테 안경을 번쩍이며 맞장구를 쳤다. 예의 제갈 가문 전속 치어 리더인 크라운 프린스였다. 한동안 제갈영을 따라 학교를 떠났다 했더니 이번에는 어째 다들 복장이 바 뀌어서 돌아왔다? ' 오오. 저것이 말로만 듣던 OL(Office Lady)! ' 재영은 눈을 번쩍이며 크라운 프린스의 새 복장을 분석했다. 오피스 레이디. 즉 사무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커리어 우먼을 일컫는 말. 단지 여기서는 사장실 전속 비서에 정장 스커트와 뿔테 안경을 지참해야한다 는 편협된 개념이 섞여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복귀한 크라운 프린스들은 교생이 된 제갈영에 발맞춰 그 자신들도 업그레이드를 했던 것이다. " 회장님, 일정이 많이 밀렸습니다. 어서 서두르지 않으면. " 그때 제갈영의 뒤에 있던 호일준이 잽싸게 그를 잡아 끌었다. 호일준은 요 며칠간 모든 것을 해탈했는지 예의 충실한 종으로 돌아가 있었다. 참 여러모 로 성실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 아, 그런가? 후하하하하. 역시 이놈의 인기는 한시도 날 내버려두지 않는 군. 그래도 뭐 어쩌겠나? 모두의 기대에 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사 의 길! 얼마든지 응해주도록 하지! " 대체 저 교사라는 말이 학생 때 부르짖던 황태자란 말과 어디가 다른걸까? " 그런 이유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 선생님! 부용제를 기대하겠다, 2학 년 1반 제군들! " 그렇게 자기 할말만 해버리고 제갈영은 미련 없이 교실을 떠나갔다. 그 뒤로 는 호일준과 크라운 프린스의 행렬이 이어진다. 재영 일행은 그런 제갈영의 퇴장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 들의 담임을 돌아보았다. 돌아본 지연의 얼굴은 차마 두번 보기가 겁날 정도로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 다. 그 입에 물린 담배들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허리들이 분질러지고 있다. 여, 연속 동강내기! 재영 일행은 마른 침을 삼켰다.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은 먼 곳에 있는게 아 니었다. 바로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다! " ……그럼 지금부터 부용제 필승 전략을 논의하도록 한다. 이상. " ' 엥? ' 하지만 지연은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교단을 내려갔다. 재영과 학생들은 영 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본다. 뭐야? 우리 담임 왜 저래? 이렇게 쉽게 물러나도 되는 거야? 응? ' 이런 건 우리가 알고 있는 흉신악살이 아니야! ' 그런 모두의 마음 속 외침이 통했던 것일까? 지연은 교실 문을 나서기 전, 학생들을 돌아보며 뒷말을 덧붙였다. " 오늘 종례 시간까지 좋은 의견이 나오지 않을 경우, 각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 " 예? " ……힘든 시간이 될 거야. "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마음의 준비? 힘든 시간이라니!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 는 거야? 그렇게 함부로 명사를 생략하지 말아요, 선생님! 탕― 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율성 강조. 지연은 그런 교훈을 학생들의 가슴에 던져주고 무심하게 교실을 나가버렸다. 재영과 학생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앉아있다가 곧 하나 둘 씩 현실을 깨 닫기 시작했다. " 시, 싫어. 이런 건 싫어―! " " 아아아! 시간이 모자라! 시간이! " " 어서 안건을! 아니, 학급 회의부터 시작해야! " 결국 불똥이 튀는 것은 우리들이잖아! 재영과 2학년 1반 일동은 진심으로 제갈영을 저주했다. " 안돼! 그런 것으로는 어림도 없어! 그런 무난한 기획이 통할 것 같아! " " 이미 통계로 검증된 방법이야! 원래 무난한 것일수록 기본에 충실한 법! 그쪽의 무대포적인 안건이야말로 지나가는 개에게 운명을 맡기는 격이다! " " 아직도 우리 처지를 모르겠어? 우리는 좋든 싫든 모험을 해야한다고. 소소 한 성공으로는 누구 하나 살릴 수 없어! 이겨도 크게 이겨야 하고 져도 크 게 져야 한단 말이다! " 2학년 1반의 부용제 대책 회의는 점심시간에도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점심 식사를 하는 것조차 잊고서 열정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토록 학급의 일에 매진하는 현 고교 생들이라니!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성행하는 이때에 공공의 운명을 우 선시하는 그들의 모습은 진정 어지러운 현세를 밝혀주는 한줄기 등불이다! 물론, " 코스프레 카페! " " 머드팩 레슬링! " " 코스프레 카페라니까! " " 모르는 거야? 머드팩이라고! 더 말할게 뭐가 있냔 말이야! "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고 싶다면 때때로 눈을 감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 코스프레 카페라니. 그런거 너무 통속적이다! 메리트가 없다고! " " 머드팩이나 생각하는 이상 변질자들에게나 통속적이겠지! 대중이 알아주지 않는 취향은 그저 위행위자일 뿐! " " 변질자라니……! 말 다 했냐? " " 코스프레를 통속적이라고 한 네놈들이 나쁜 거야! " 그렇게 코스프레 카페 파와 머드팩 레슬링 파가 금새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것 처럼 으르렁거리는 한편, 지켜보던 여학생들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그런 거 누가 해준대? " 하긴. 주체가 동의하지 않는 코스프레 카페나 머드팩 레슬링따위, 의미가 없 는 것이다. 어느 누가 남학생들이 하는 코스프레 카페와 머드팩 레슬링을 보러 온단 말인가? " 으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소재의 빈곤인가. 아무리 좋은 기획이 있어도 그 주체가 따라주지 않으면. " 회의를 지켜보던 재영은 나지막하게 한탄했다. 사실 그의 한탄이 2학년 1반 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바로 소재의 빈곤. 올 1학기 때까지만 해도 2학년 1반은 그 어느 학급보다 소재에 있어서는 풍 족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왕자회의 브루스 류. 만인의 연인 테레이아 민체스터. 대파란을 불러들이는 남자 유가인. 한성고의 꽃 이유리. 이들만 있었으면 아무리 시덥잖은 카페를 차릴지라도 문제 없이 부용제의 우승을 노려볼 수 있었다. 그만큼 이런 막강한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 나의 힘이었던 것이다! ' 그런데 그 중 교환 학생들이 전부 모국으로 귀국해버렸으니……. ' 2학년 1반의 전력은 크게 감소하고 말았다. 브루스와 테레이아의 부재는 뼈 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니야. ' 아직 2학년 1반에게는 유가인과 이유리라는 남녀 양쪽을 공략할 수 있는 카 드가 남아있었다. 이 카드를 적극 활용하기만 한다면 부용제의 우승도 무리는 아니다! 단지, ' ……저 녀석들에게 할 맘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지만. ' 재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교실의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가의 끝자리 책상 쪽 에는 가인과 유리가 학급 회의에서 동떨어진채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 이게 문제란 말이지. '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점점 어두워지네, 저 녀석들. ' 재영은 가인과 유리의 안색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저번 한 강 시민공원 때의 일이 생각난다. ' 괴물이다! 괴물! ' 시내와 함께 놀러간 그곳에서 재영은 몬스터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는 그 일이 있기 전부터 팔라딘 대의 감시 대상자였기에 다행히 기억이 지워 지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만난 시내는 이미 공원에서의 일을 완전히 잊고 있 었다. ' 그런 일을 매일 겪으면……어쩔 수 없는 걸까. ' 재영은 점점 웃음을 잃어가는 가인과 유리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평상시와 다름 없는 모습으로 그들을 대 하는 것 뿐이다. 벌떡 그때 식사를 끝낸 가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그대로 교실 을 나가려는게 아닌가? 재영은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 야, 가인아. 어디가? 회의도 안 끝났는데? " " ……아, 난 그냥 너희들이 결정한데로 따를게. 다 정해지면 얘기해줘. " 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고서 주저없이 문을 나섰다. 그러자 반 아이 들이 대번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다. 가뜩이나 가인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 진 그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이와 같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너그럽게 봐줄 이 유가 없는 것이다. " 아, 저 자식이― " " 잠깐잠깐! 가인이 녀석은 내가 데리고 올게!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어 딨냐? 부용제 때 뭐할건지 빨리 정해야할 거 아냐? 응? " 재영은 다급히 친구들을 진정시키며 가인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그때 그런 재영을 유리가 붙잡는다. " 됐어. 오빠한테는 내가 가볼게. " " 어? 아니, 그래도. " " 종례까지 얼마 안남았잖아? 오빠는 내가 데리고 올테니까 계속 회의나 하 고 있어. " " ……으응. " 재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그런 그를 남겨두고 가인의 뒤를 쫓아 복도로 사라져간다. 재영은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끼며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이럴 때는 싫어도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 점점……멀어지고만 있어. 가인은 옥상의 철창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사이로 새 하얀 구름들이 노닐듯 유영하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로는 수많은 건물들과 사람들 이 펼쳐져 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풍경. 정말이지 무심할정도로 변함없는 세상이다. ' 나도 알고 있어. ' 재영이네가 나쁜게 아니라는 걸. 축제 준비로 떠들썩한 학교가 나쁜게 아니 라는 걸. 그게 정상이라는 걸. 그게 당연하다는 걸. ' 잘……알고 있어. ' 그렇기에 견딜 수 없었다.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만약 그대로 계속 교실에 있었더라면 웃고 떠드는 친구들이 진심으로 미워졌 을 것이다.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 하아. " 가인은 낮게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바로 코앞 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유리였다. 언제 올라와 있었던 거지? " ……무슨 일이야? " 가인의 질문에 유리는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이내 그의 옆 자리로 다가와 철창에 기댄다. " 그냥. 걱정되서. " " 걱정? 왜? " " 그냥. " " ……무슨 대답이 그래? " " 내가 오빠 걱정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해? " " 아니.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 유리와 가인은 그렇게 의미도 없는 잡담을 주고 받았다. 왠지 이런 식으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요 몇달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기 에 이런 느긋함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언제부터 어색해진 걸까? 언제부터 이런 시간을 보내는게 낯설어진 걸까? ' 우리에게…… 이런 시간을 누릴 자격이 있는 걸까. '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평화롭다고 느낀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예전에는 그저 당연다고만 생각했던 평화였는데. 매일 매일이 똑같아서 지루 하기 짝이 없던 일상이었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당연하게 아니었어. 지루하다고 여겨서는 안되는 거였어. 절대로. 절대로. ' 평화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어. 자신들이 모르는 곳에서 그들을 지키다 죽어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또 그 죽어간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 수 많은 희생들이 있다는 것도 모른채 사람들은 계속 평화를 누리며 살 아갈 것이다. 당연하다는듯 일상을 살아가겠지. ' 너무해. ' 단지 잊혀질 뿐이라는 건가? 그토록 노력했는데.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지켜냈는데. 연명시킨 평화였는데. 그런데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면! ' 우리는 대체 뭘 위해 피를 흘렸던 거지? 뭘 지키기 위해 죽어간 거야? '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 유가인 자신도 오 라 능력을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피스메이커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지금의 평화에 무 감각해져 있을 것이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이토록 마음이 답답한 것이리라. ' 진우 씨, 진우 씨는 후회한 적 없었어요? 단 한번도 자신이 피스메이커라 는 것을 후회해본 적 없었어요? ' 전 모르겠어요. 우리가 지켜야 하는 평화라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정작 우리 자신도 행복해질 수 없는 평화라니! 평화라는 건 좀 더……좀 더 좋은게 아니었어요? 모두가 행복해지는게 아니었던 거에요? ' 모두가 행복해질 순 없습니다. 모두를 지켜낼 순 없습니다. ' 정말……그 말대로인 거에요? ' 그러니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지켜내십시오. 자신의 손에 닿는 이들 만 확실하게 지켜내십시오. ' 정말 그가 말한 대로인 건가요? 가인은 피스 블랙 한시영,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의 언변에 농 락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뭘까? 어째서 그가 하는 말은 이리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거지? 어째서 매번 마 음을 동하게 하는 걸까? ' 그것이, 평화― 라는 것입니다. ' 그가 주장하는 평화는 가인이 생각하는 평화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뜬 구 름잡는 소리가 아닌, 불가능한 이상이 아닌, 그렇기에 훨씬 마음에 와닿는 목 소리다. 어쩔 수 없잖아? 사람인 이상 자기의 행복을 먼저 찾게 되는 법이다. 자신이 평화로워지길 바 라는 법이야. 스스로도 행복하지 못하면서 남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건 언어도단. 위선이다. 거짓이야! 가인은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 이래서는 그 남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잖아. " 뭐? " 이대로는 우리도……언젠가 잊혀지겠지. " 유리는 깜짝 놀라며 가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공허한 미소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오빠?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그러자 가인도 방금 자신 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서 입을 가린다. 이런!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 아, 미안.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자자. 그만 내려가자. 지금쯤이 면 회의도 다 끝났겠지? " 가인은 서둘러 말을 얼버무리고 옥상의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는 그 런 가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곧 그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가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 ……유리야? " " 내가 기억할 거야. " 의아해하던 가인은 그녀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유리는 붉게 물든 얼굴을 가 인의 허리에 묻으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절대로 오빠를 기억할 거야. 절대로. " " ……. " " 절대로 기억할테니까. " 가인은 그런 유리를 내려다보다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고마워. 안심했어. " 언제나 내가 곁에 있을게. 언제나 오빠 곁에 있을테니까……. ' 이 정도는 괜찮은 거지, 테레이아? ' 말하지는 못할지라도. 표현하지는 못할지라도. ' 마음 속으로는 계속 좋아해도 되는 거지? ' 응? 리리스? 유리는 자신의 친구를 향해 그렇게 몇 번이고 되묻고 있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4 - Ｂy Ｎext Ｎeo =-=-=-=-=-=-=-=-=-=-=-=-=-=-=-=-=-=-=-=-=-=-=-=-=-=-=-=-=-=-=-=-=-=-=-= " 마리 양네 반은 이번에도 연극을 하는 건가요? " 26구역 한시민의 집. 시민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가인과 유리, 마리에게 차를 내주며 물었다. 마리는 차를 건네받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예. 저번 부용제 때는 몬스터의 출현으로 흐지부지된 감도 있었고. " " 하긴. 그 뒤로 원인 규명이니 위험 방지라느니 해서 한동안 휴교했었죠. " " 휴교가 끝난 다음은 곧바로 기말 시험이었고. " 시민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탄했다. 결국 그 뒤로 언급되지 않았던 부용제의 전말은 실상 이러했던 것이다. 부 용제 자체가 무기한 연기되었으니 당연히 우승 학급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우승 상품도 공중으로 증발되어 버렸다. 이때문에 전교생들 사이에서는 한때, 몬스터의 출현이 제갈영의 음모였다는 설이 유력했었다. " 어쨌든 선배, 이번에는 무슨 연극이에요? 작년과 같은 캡틴 실버? " 가인의 질문에 마리는 손에 쥔 대본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 아니. 다른 연극이다. " " 다른 연극이라면? " " ……다. " " 예? " " ……라고. " 연극의 제목을 말하는 부분에서 계속 마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기에 일행 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연극을 한다는 거야? " ……시, 신데렐라. " 간신히 마리의 입에서 나온 제목은 그와 같았다. 그 말을 하는 그녀는 막다 른 골목에 내몰린 어린 양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일행은 본의 아니게 죄책감을 느꼈다. 뭘까? 이 어린 아이에게서 사탕을 빼앗아버린듯한 기분은? " 신데렐라라면 분명 마법사의 도움으로 왕자님과 맺어지는 아가씨의 이름이 었죠? " 시민은 마리의 무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그 의도가 통 했는지 마리는 얼굴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예. 12시가 지나면 마법이 풀리기에 무도회장을 서둘러 빠져나오던 신 데렐라가 유리구두 한짝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왕자님이 찾아주게 되는 이 야기지요. " " 가난한 여자가 대기업 사장님과 맺어진다거나 평범한 여고생이 얼짱 싸움 짱 일진과 맺어진다거나 하는 트렌디 드라마의 전형이네. 백마탄 왕자를 꿈꾸는 여성들의 심리를 겨냥한. " 유리는 그렇게 어린애답지 않은 혹평으로 회복되던 마리의 기세를 다시 꺽 어버렸다. 시민과 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신데렐라는 고전 동화인데……. " 어머! 그거 진짜 멋진데요! 너무 로맨스적이야! " " ―! " 그때 일행의 뒤에서 한 여성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가인 일행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언제 현관으로 들어왔는지 모를 한 모녀가 장난스 러운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미연이 누나? 하나야! " 모녀를 알아본 가인은 당황하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일행의 반응에 만족한 미연은 웃으면서 거실로 들어온다. 하나는 엄마보다 먼저 거실의 소파 로 달려와 가인에게 매달렸다. " 와, 오빠! 안아줘! 안아줘! " " 어? 으응……. " 가인은 어색하게 그런 하나를 들어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혀주었다. 유리는 그런 하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시민은 미소하며 미연을 반겼다. " 미연 씨는 신데렐라를 좋아하나 봐요? " " 그럼요∼ 유리 구두 한짝만 남기고 간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하 는 왕자님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이에요? 사랑을 쟁취하려면 그 정도의 열 정은 보여줘야죠! " 미연은 시민의 옆자리에 앉으며 맞은편의 유리에게 빙긋 미소지었다. " 그러니까 신데렐라는 백마탄 왕자와는 전혀 상관 없는 얘기랍니다. 노력하 는 사람만이 승리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 아시겠어요, 유리 양? " " ……그것도 좀 미묘하게 어긋난 것 같은데. " 유리는 투덜거렸지만 그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미연은 마리를 돌아보 며 주먹을 불끈 쥐어올렸다. " 확실히 저번 해적 역보다는 신데렐라 쪽이 더 마리 양에게 어울려요. 마 리 양이라면 분명 잘 해낼 거에요, 파이팅! " " 아, 감사합니다. 분발하겠습니다. " 마리는 미연의 격려에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가인은 잠시 고 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왜 해적 역보다 신데렐라가 더 마리 선배에게 어울린 다는 거지? ' 신데렐라같은 소극적인 캐릭터보다는 강인한 캡틴 실버 쪽이 어울리는게 당연하잖아? ' 신데렐라는 계모와 언니들에게 시달리며 무도회에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 는 소녀다. 언니들처럼 드레스를 입고 왕자님에게 춤을 청하는 것이 소원인 소녀. 갈망하는 소녀. ' 아……. 그런가? ' 가인은 납득했다. 여성스러움에 대한 동경! 마리는 무영신풍류의 고수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는 19살 여고생이기도 했다. 평소에 잘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 나이 또 래의 아이들처럼 꾸며도 보고 싶고 놀러도 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줄곧 무영신풍류에 전념하기 위해 억눌러왔으니……. ' 나에게 어울리는 건 검밖에 없어! 그래, 알고 있다고, 그런 건! 그런 건… …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단 말이다! ' 문득 작년의 일이 생각났다. 그래. 그런 말을 하기도 했었지, 마리 선배. 가인은 울면서 화를 내던 마리의 모습이 생각나자 고소를 머금었다. 그때 자 신은 그녀가 단순히 속상해서 우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어설픈 위로를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녀가 뭣때문에 속상했는지는 알지도 못한채. ' 그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 정말이지 눈치가 없구나, 유가인. 가인은 자신의 둔함을 꾸짖으며 미연과 얘기 중인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힘내세요, 선배. 선배라면 꼭 잘 해낼 수 있을거에요. " 아, 그런데. " 그때 시민이 뭔가 생각났다는듯 가인에게 물었다. " 가인 씨네 반은 뭘하는 거에요? " " ……. " 그 순간, 가인과 유리의 표정이 뭐라고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어둠으로 뒤덮 여갔다. 그 뜻 밖의 반응에 시민은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뭔가 물어서는 안될 것을 물어버린 걸까? " 응? 왜 그러는 거야, 둘 다? 왜 말을 못하고 그래? " 마리와 얘기를 나누던 미연도 그들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관심을 보여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 으로 파묻혀가기만 한다. " ……카페. " 그나마 가인보다 상태가 나은 유리가 질문에 답했다.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 는듯 되물었다. " 카페? 작년과 같은 거잖아? 그런데 그게 뭐가, " " ……같지 않아. " " 뭐? " " 같지 않다고. " 유리의 말에 시민과 마리, 미연은 더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같지가 않다니? 그런 의문은 유리가 덧붙인 뒷말에 의해 해소되었다. " 성전환 카페야. " " 풋―! " 보기 드물게도 시민이 마시던 차를 입으로 내뿜고 말았다. 그녀는 마리와 미 연이 놀랄 정도로 안색이 창백해져 더듬거렸다. " 서, 서, 성전환이라니……! " " 여자는 남장, 남자는 여장. " " 아, 아아아∼? 그, 그런거군요∼ " 그제야 시민은 말귀를 알아듣고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한번 놀란 가슴은 쉽 게 진정되지를 않는다. 하필이면 성전환이라니!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과거에 남자였던 전적이 있는 시민으로서는 도저히 웃고 넘길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마리와 미연도 시민과는 다른 의미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남장……, " " 여장이라니. " " 그럼? "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가인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완전 히 암흑 그 자체인 가인을 대신하여 유리가 말했다. " 오빠는 우리 카페의 간판 마담이야. " " 우왓! 왓! 어머! 이건 정말! " 미연은 흥분했는지 연신 어머, 어머 거리기만 했고 마리는 컬쳐 쇼크를 받았 는지 넋이 나가 있었다. 시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묘하게 가인을 힐끔 거렸고 유리도 내키지 않아 했던 것과는 달리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인 을 응시한다. 하나는 주위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가인을 올려다보며 물었 다. " 오빠? 마담이 뭐야? " ' 빌어먹을― ' 가인은 진심으로 학급 회의에 불참했던 자신을 저주했다. 설마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녀석들이 이따위 안건을 통과시킬 줄이야. 혹시 재영이 녀석들, 처음부터 보복할 속셈이었나? 무엇보다 그걸 만족스럽 게 채택한 하지연 선생님은 또 뭐지? 그렇게 흡족해하던 선생님의 표정은 본 적이 없다고! " 이렇게 되면 반드시 보러가는 수밖에! 아아∼ 벌써부터 기대되는 걸∼! " " 기대하지 말아요! " 미연의 말에 가인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그러다 곧 그녀의 말에서 마음이 걸리는 부분이 있었는지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 보러……오실 거에요? 부용제? " " 응? 그럼. 작년에도 갔으니 올해도 갈 생각인데? " " 하지만, " 거기까지 말하던 가인은 말 꼬리를 흐렸다. 차마 '진우 씨도 없는데'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연은 그런 가인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살며시 미소지으며 그의 무릎에 앉 아있는 하나에게 물었다. " 하나야. 하나도 놀러가고 싶지? 언니 오빠들 학교 축제에? " " 응! 간판 마담 보고 싶어! " " ……. " 하나야, 제발 모르는 단어를 그렇게 시의(時宜) 적절하게 사용하지마. 가인은 미연 모녀의 변함 없는 태도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도통 그 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야 어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미연이 누나는 어떻게 저리도 아무 일 없 었다는듯 행동할 수 있는 거지? ' 이젠 진우 씨도 없는데……. 그런데, 그런데……. ' 그때 가인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사심도 없는 커다란 눈동자. 그 눈동자 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거기에는 슬픔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하나의 표정이 자신의 얼굴 표정을 따라 점점 변해간다는 것을. 미소가 깨어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그 비어버린 자리로 대신 슬픔이 들어서려 한다는 것을. " 하나야, 오빠 힘들게 하지말고 엄마한테 와. " 미연의 부름에 하나는 가인에게서 내려와 자신의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그리 고 자신을 안아올린 엄마의 미소를 보는 순간, 다시 예의 웃음을 되찾는다. ' 아. ' 그제야 가인은 깨달았다. 미연의 웃음은 그녀 자신을 위한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를 위한, 다른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한 웃음이라는 것을. 결코 진우 씨의 죽음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는 것을! ' 그런데 나는……. ' 가인은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잠깐이나마 미연의 웃음을 비난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생각이 짧은 걸까? 왜 이렇게 어린 거지? 언제나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녀석! 이기적인 녀석! " 그, 그럼 전 이만 도장에 가볼게요. 마리 선배! 오늘도 수련해야죠? " 가인은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미연과 하나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진우의 죽음을 구실 삼아 자 아도취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그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려고 하자, 여자들이 당황하며 뒤를 따라나 왔다. " 가인, 지금 수련하려고? " 마리는 시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수련이야 매일 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너무 시간이 일렀다. 좀 있으면 시민 씨가 저녁 식사를 차릴텐데……. 가인은 그런 마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나갈 채비를 차린다. " 저녁 식사 후에는 아무래도 몸이 둔해져서. 그냥 이제부터는 저녁 먹지 않 고 바로 수련하려고요. " " 예? 저녁을 안 먹는다니? 굶겠다는 거에요? " 시민이 당황하며 물었다. 지금껏 그들이 함께 살아오면서 가인이 자진해서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특별한 약속이 없는한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 예에……. 아무래도 수련이 끝나면 늦게 돌아올 것 같아서. 또 최근 들어 별로 식욕도 없고요. " " 그런 때일수록 더 잘 챙겨먹어야죠. 시간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나중에 가 인 씨가 돌아와도 먹을수 있도록 준비해놓을테니까……. " " 그러면 너무 폐를 끼치잖아요. 또 시민 씨도 자기 일이 있으실텐데. 저 때 문에 괜히 시간 뺏길 것 없어요. " "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 시민은 가인의 무신경한 말투에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폐를 끼친다니? 시간을 뺏길 것 없다니? 그렇게 말하면 너무 서운하지 않은 가! 꼭 남남처럼! 하지만 가인은 그런 시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문을 열고 현관 을 나섰다. " 어쨌든 신경쓰지 마세요. 정 배가 고프다 싶으면 제가 알아서 해결하고 올 게요. " " 가인 씨! " " 가요, 마리 선배. 다녀오겠습니다! " " 자, 잠깐 가인! " 가인은 그 말을 끝으로 나가버렸고, 마리는 그와 시민을 번갈아보다가 꾸벅 인사하고서 서둘러 가인의 뒤를 쫓는다. 탕― 현관문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시민은 가인을 붙잡으려고 했던 손을 내리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별 일도 아니건만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 다. 그저 앞으로는 저녁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는데. 단지 그것 뿐이었는 데…….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 언니. " 유리는 그런 시민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인이 왜 저런 식 으로 밖에 행동하지 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기에……그랬기에 슬퍼하는 시민을 위로해줄 수 없었다. 유리는 조심스레 자신들의 눈치를 살피는 미연과 하나를 돌아보았다. " 오늘 저녁 식사는 우리끼리 해요. " " 아……그래. 오늘'은' 그렇게 할까? " 미연은 유리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분주한 척 하나를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 다. 유리는 그런 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자신도 시민의 손을 잡고 끌 어당긴다. " 언니. 오늘은 우리끼리. 응? " " ……예. 오늘, 은. " 시민은 눈시울을 붉히며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가인. 왜 그랬던 거냐? " 집을 나와 무영신풍류로 향하던 길목에서 마리가 물었다. 가인은 그녀를 돌 아보지 않으며 되묻는다. " 뭐가요? " " ……평소와는 좀 다른 것 같아서. " " 그래요? 평소에는 어땠는데요? " " 응? 아, 그게, 그러니까…….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시민 씨에게는 언제나 다정스럽지 않았나'라는 말이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또 그런 말을 입에 담자니 뭔가 우울해질 것 같기도 하고. 가인은 그렇게 마리가 말을 잇지 못하자 자신이 먼저 답했다. " 시민 씨가 매번 우리들 때문에 자기 일도 못하시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 랬던 거에요. 별 뜻은 없었어요. " " ……그런가. " 마리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납득했다.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런 것 치고서는 태도가 너무 쌀쌀했는데……. " 뭐, 정 배가 고프면 마리 선배네 집에서 얻어먹어도 되는 거고. " " 음―! " 가인의 지나가는 말에 마리는 귀가 번쩍 뜨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얻어먹는다고? 가인이? 우리 집에서? 그녀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큰 목소리로 반문했다. " 가, 가인!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겠다고? 정말이냐? " " 예. 도장에서 늦게까지 수련하니까 그럴 바에는 선배네 집에서 식사를 하 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왜요? 역시 실례이려나? " " 아, 아니―! 실례라니! 그럴 리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응! 아버님도 기 뻐하실 거다! " 마리는 그야말로 사생결단을 낼 기세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열정적인 반응 에 가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미소했다.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가끔가다가 신세질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잘 부탁드 릴게요. " " 가끔이라니! 매일 신세져도 좋다!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한다! " 우와아아― 마리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가인이 저 시민 씨의 식 사를 거절하고 내게……. 이, 이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역시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으려나? 그렇겠지? 언제나처럼 별 뜻 없이 한 얘 기일 거야. " 하지만 내 요리는……시민 씨가 만든 것보다 훨씬 못할텐데……. " 마리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인이 자신의 요리를 선택해준 것 은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시민 씨의 요리 실력에 맞춰진 그의 입맛을 만족시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지 않아요. 마리 선배의 요리는 충분히 맛있으니까. 저번에 먹은 나물 무침과 생선찌게는 정말 좋았다고요? " " 그, 그래? " " 예. 그러니까 좀 더 자랑스러워하세요. 선배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멋진 사람이니까. " " ―! " 그 말이 결정타였다. 마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붉어진채 어쩔 줄을 몰랐 다. 때마침 해가 지는 시간이라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꽤나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대체 오늘따라 가인이 왜 이러는 거지? 내 심장을 터뜨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건가? " 어쨌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수련하자고요. " " 어, 그래. " 마리는 심호흡을 하며 애써 가인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혼자서 들뜨는 건 좋지 않아. 좀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해져야… …. " 아, 그런데 선배― " 그때 가인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마리를 뒤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마리 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 왜, 왜 그러나? " " 아뇨. 다른게 아니라……오늘부터 선배는 연극 연습해야하잖아요? 그런데 저 하고 따로 수련할 시간이 있겠어요? " " 아, " 그러고 보니 그랬다. 부용제까지 채 이주일도 남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연극 준비를 하려면 꽤나 빠듯했던 것이다. 일단 이번주 내에 대본을 완벽하게 외운다쳐도 다음주까지는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봐야할테고. 또 거기에 무대 장치나 소도구, 의상을 만드는 일도 도와야 하니……. 마리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서둘러 말했다. " 신경쓸 것 없다. 저번 연극때도 어떻게든 했으니 이번에도……. " " 무리하실 것 없어요. 저야 코마히코 씨와 수련을 해도 되는 거고. " 가인의 입에서 동문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마리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뭣? 코마히코라니! " 당치도 않은 소리! 아무리 바쁘다고한들 자기 제자 하나 책임질 수 없을 것 같나! 애초에 그럴거였으면 제자를 받지도 않았어! " " 예?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 " 역시는 무슨 역시! 남 생각해줄 여유가 있으면 한번이라도 더 죽도를 휘두 르도록! 다른 생각하지 못하도록 오늘부터 철저히 수련시켜주겠다! 따라와! " 마리는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가인을 지나쳐 앞장서기 시작했다. 가인은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마히코 씨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선배? " 가인. " 그때 마리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그녀는 가인을 돌아보지 않은 채 쭈뼛거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 너는 나와……수련하는것이 내키지 않는 거냐? 가르치는 사람이 내가 아니 어도……다른 누구였더라도 상관이 없었던 거야? " " ……! " 그제야 가인은 마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마리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긋 웃었다. " 그럴리가요. 그렇다면 사정봐주지 않고 가르침 받겠어요. 단단히 각오하라 고요, 선배? " " ……으응. 각오, 하겠다.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날 밤. 언더 시티의 메인 센터. 주유화는 한숨을 내쉬며 그람드링의 방 앞에서 서성거렸다. 오늘은 한 달에 한번 있는 피스 알리자린의 메인테넌스 날.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그를 찾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화는 저번 메인테넌스 때 그람드링 에게 손목이 부러지는 호된 꼴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난 뒤, 그녀가 한번도 그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것은 아니 었지만, 그것은 다른 피스 관계자들도 동석한 자리에서의 일. 이렇게 단 둘이 서 만나는 것은 여전히 꺼림칙한 일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두렵다. 그 아이와 만나는 건 무서워! ' 그래도……가야해. '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떠올리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 레드 브라더스는 오라 능력자의 세포를 이용한 복제인간. ' 그것이 아마도 루미네선스. ' 주 선생님, 그들이 누군가의 복제인간이라면 그 DNA에는 오리지널의 정보 가 담겨 있을 겁니다. 그 정보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라 능력자들의 정 보와 대조해보면 금세 레드 브라더스의 DNA 도너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그래. 닥터의 말대로 그 도너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성당기사단의 만행을 공 표할 수 있다. 적어도 현존하는 오라 능력자들은 지켜낼 수 있다고. ' 그리고 가인이 또한……. '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리며 그람드링의 방문에 손을 가져갔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틈이 없었다. DNA 도너를 밝혀내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친 구들의 안전은 보장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람드링과 접촉해서 DNA를 채취할 단서를 찾아내야 하는데 ……. 위이이잉 자동문이 열리고 방안의 전경이 드러났다. 그리고 거기에는 유화가 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를 향해 웃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바로 그람드링 뤼멘이다. " Good evening, Doctor? " 소파에 앉아 여느때처럼 음산하게 인사하는 그는 꽤 모습이 변해 있었다. 그 동안 줄곧 머리를 길러왔기 때문일까? 긴 스포츠 머리를 한 그람드링은 오르 크리스트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그동안 이미지가 너무 틀려서 잊고 있 었지만, 그들 형제는 분명 일란성 쌍둥이였던 것이다. 서로의 외양이 닮은 것은 당연하다. " 크크크. 그동안 한번도 찾아와주지 않다니.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니야? " 그람드링의 말에 유화는 대꾸하지 않으며 가지고 온 가방을 테이블에 풀었다. 그리고 사무적인 손놀림으로 그람드링의 의수를 손볼 장비들을 꺼내기 시작한 다. " 이런. 이런. 역시 저번에 거칠게 다뤘던게 문제였나? 아직도 화가 안 풀리 셨군. " " 손이나 내밀어. " 유화는 차갑게 쏘아붙이며 그람드링의 의수에 손을 내밀었다. 그람드링은 그 런 주치의의 반응이 재미있던지 히죽 웃으면서 순순하게 오른팔을 내민다. " 흐응……. 그런데 오늘은 안 물어보는 거야? " " 뭐가? " " 뭘 꾸미고 있냐느니, 우리의 정체가 뭐냐느니. " " ―! " 순간, 의수를 만지던 유화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 앞의 그람드링을 노려보았다. " ……까불지 말라고 했잖아? 그때는 손목 하나로 끝내지 않겠다고. " 유화는 예전 그람드링에게 부서졌던 오른쪽 손목 부위를 어루만졌다. 메디컬 센터의 치료로 상처는 흉터도 없이 나았지만 왠지 지금도 그때의 아픔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람드링은 킥킥 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 크크크. 이야∼ 이거 참 영광인걸? 나 같은 녀석의 말을 이토록 귀담아 들 어주실 줄이야! 크크크크! 정말 착해! 우리 선생님은 정말 착하신 분이군! " " 흥! " 유화는 치를 떨며 몸을 돌렸다. 역시 상대할 가치가 없는 꼬마 녀석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방을 나가고 싶어! 그람드링은 그런 그녀를 만류하며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 자자. 그렇게 외면하지 말라고. 이래뵈도 난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그런데 이렇게 나오면 섭하지. " " 뭐? " 유화는 기가 막혔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날 좋아한다고? " 당신이 마음에 들어. 그렇게 표독스러운 눈초리도 내 취향이고, 쉽게 꺽여 나가지 않는 성격도 나에겐 딱이야. 괴롭히는 보람이 있겠어. " " 하, 하하……. 그것 참……영광이로구나. " 유화는 몰골이 송연해졌다. 단순히 괴롭힐 장난감으로 자신이 마음에 든다는 것 뿐이잖아? 그람드링은 그런 유화를 뒤로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쨌든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대가 필요하지 않겠어? 적어도 지금처럼 으르렁거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 " ……결국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피스 알리자린? " 유화는 팔짱을 끼며 일부러 존칭까지 써가며 물었다. 그런 정색하는 반응에 도 불구하고 그람드링은 흥이 나는지 경쾌한 발걸음으로 침대에 걸어간다. 침 대의 이불 안에는 뭔가가 들어있는지 가장자리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람드링은 이불을 잡아 흔들며 마치 마술하기 직전의 마술사처럼 유화의 이 목을 집중시켰다. " 그래서 말이야……준비했어. 우리의 사이를 개선시킬 present를. " " 선물? " " 아마 선생님이 줄곧 원해왔던 걸 거야. " 내가 줄곧 원해왔던 거라고? 유화는 마른 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매번 방안에 놓여 져 있던 오르크리스트 뤼멘의 박제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펄럭 순간, 그람드링은 침대를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자 거기에는 처참 하게 두개골이 부서진 오르크리스트의 박제가 눕혀져 있었다. " 우욱― " 유화는 입을 가리며 치미는 구역질을 필사적으로 참아넘겼다. 유가인의 암살 때 그가 ACR을 꺼내기 위해 직접 동생의 머리를 갈랐다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 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 혐오감을 참을 수가 없다. 어떻게, 어떻게 동생의 시체를 이런 식으로! " 왜? 가지고 싶지 않았어? 매번 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 못했던게 이것 때문 아니었어? " " 악! " 유화는 그람드링이 오르크리스트의 시신을 자신의 발밑으로 집어던지자 비명 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그람드링은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크크크크. 크크크크크크. " 카하하하하하! " 미, 미쳤어. 유화는 벽에 등을 기대어 사시나물 떨듯 몸을 떨었다. 도저히 눈 앞의 소년 을 제 정신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오르크리스트가 죽었을때부터 그는 미쳐버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 하―하하하하핫! " 그렇게 겁에 질렸기에, 그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혔기에, ' Bye. Bye, Chris. ' 그녀는 볼 수 없었다. 알 수 없었다. ' ……네 소원은 내가 이뤄줄게. '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두 눈이 실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5 - Ｂy Ｎext Ｎeo =-=-=-=-=-=-=-=-=-=-=-=-=-=-=-=-=-=-=-=-=-=-=-=-=-=-=-=-=-=-=-=-=-=-=-= 푸르스름한 동녘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피어난다. 해가 뜨고 있었다. 어느 때와 다름 없는 일출. 하지만 그것이 그 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임을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2033년 11월 15일. 카타스트로피의 날. 그리고 이 날은 공교롭게도 한성 고교의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피스 카민 마유빈은 초췌한 눈으로 해돋이를 바라보았다. 사전에 마스터에게서 귀뜸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에게 오늘의 태양은 평소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줄곧 마음의 준비를 해오기는 했지만 막상 당 일날이 되니 흥분에 몸이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 때문에 어제 밤에는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마스터는……아직이신가. " 유빈은 자신들이 머무른 12구역의 폐허를 돌아보았다. 어디에도 마스터, 한 시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제밤, 오늘을 위해 준비할 것이 있다며 외출한 이후 도통 연락이 없었다. 물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테지 만……. " 후우. " 유빈은 불길한 상상을 떨쳐내며 세차게 도리질 쳤다. 그리고 숨을 고른다. 아 무래도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잔뜩 흥분해 있다간 정작 일을 그르칠 위험이 있었다. 절대로 마스터를 실망시킬 순 없지! 유빈은 긴장을 풀기 위해 자신의 옆에 있는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 아아∼ 지루해 죽겠네. 왜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거야? 안 그래, 신 부―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옆에서는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 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래. 그 녀석은 이제 없었지. ' 유빈은 류바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침울하게 중얼거린다. 갑자기 쓸쓸함이 물 밀듯이 밀려들었다. 뭔가 외로워지는 기분. 이런 고독함은 예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안주할 곳 하나 없이 거리를 헤맸을 때. 사람들을 세뇌시켜 하루 하루를 그들의 집에서 보냈을 때. 떠돌아 다녔을 때. 자신은 혼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스터를 만나서, 그의 일을 돕게 되면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 만 유빈은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고독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배신당할 걱정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 그동안 재미있었다, 파트너. ' 파트너. 파트너? ' 제길! ' 유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바보같은 자식! 왜 죽어버린 거야? 왜? 좀 더 살 수 있었잖아.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걸 어째서, 왜 그런 식으로! ' ……혹시 저 자식이? ' 유빈은 자신의 앞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는 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오른팔 소매가 비어있는 권복을 휘날리며 곰방대를 문 채 일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마치 그의 상태를 대변하는 것처럼 창백한 빛을 띈다.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그가 바로 라트와 피스 그린의 사투를 매듭짓고 돌아온 장본인이었다. 사건 의 전말은 알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 ' 저 자식이 라트를 죽였을지도 몰라. ' 유빈은 그런 의심을 풀 수가 없었다. 솔직히 생각해봐도 그렇다. 피스 그린 은 브루스의 제자이자 동료였다. 아무리 자기 목숨이 걸려있다고 한들 저 피 스 그레이가 갑자기 변심해서 아군을 공격했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던 것 이다. 만약 그때 한시영의 말이 없었더라면, ' 정말이지 브루스 님은……언제나 제 상상을 뛰어 넘는군요. 라트의 죽음이 야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고 또 그가 바랐던 것이니 그렇다고 치지만. ' ' ……. ' ' 설마 자신의 제자를 손수 파문시킬 줄이야. 아무리 제가 은혜니 시험이니 강요하기는 했지만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우 씨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어요. ' ' ……. ' ' 뭐, 그만큼 각오를 굳히기 위해서입니까? 앞으로의 일을 받아들이기 위한? ' ' ……. ' 브루스는 끝까지 침묵하기만 했다. 그러나 시영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유 빈은 라트가 죽었고, 피스 그린이 피스 그레이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꽤나 의외이자 놀라운 사실이었다. ' 쳇. 이제와서 누가 누굴 죽였든 무슨 상관이야. ' 유빈은 우울한 눈으로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차분히 마스터를 기다리 고 있는 류바 에레노아. 여전히 곰방대만 물고 있는 브루스 류. 마지막으로 후츠노미타마를 끌어안은채 상념에 잠겨있는 황유평. 이 인원이 대단원을 수행할 최종 멤버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피스 실버 라트 발렌시아도 끼어있어야 했지만……. 유빈은 그의 빈자리를 확인하자 더욱 허전함을 느껴야 했다. " 자― 날이 밝았군요. " 그때 유빈 일행의 뒤에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일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빈은 반색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피스 블랙 한시영이 유유히 그림자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 마스터! " " 갔다 오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 시영은 자신을 끌어안는 유빈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류바의 질문에 답했다. " 일단 대단원의 결행 시각을 늦춰야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쪽의 준비 가 준비인 만큼. 일이 수월해지려면 저희가 맞춰주는 수밖에 없더군요. " " 저쪽이라면……블러디 노블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 그렇죠. 거기에 달갑지 않은 손님도 끼어들었지만. " " ……? " 류바와 유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달갑지 않은 손님이라니? 블러디 노블 맨 외에도 다른 조력자가 있다는 건가? " 성당기사단의 타락한 사도……! " 잠자코 있던 브루스가 시영의 말을 알아듣고 한탄했다. 시영은 고개를 끄덕 였다. " 아무래도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을 모양입니다. 대단원이 이렇게 사리사 욕으로 들끓는 무대가 되어버릴 줄은……. 후. 어쩔 수가 없군요. 저부터 가 이미 욕심이 많은 남자이니. "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네이 안데르슨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는 여 기까지 버텨올 수 없었을 것이다. 14년 전의 그 날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을 것이다. 블러디 노블맨과 손을 잡았던 것은 타당했다. 합리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마지막 순간에 그의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 어차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영의 입가에서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그는 불안해하는 일행에게 말했다. " 걱정마십시오. 의식이 끝나면 웃는 것은 저희들입니다. "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왜냐하면, ' 애초부터 가이아에게 선택된 것은 우리니까. ' 세계의 의지가 고른 대행자. 그 대행을 위해 건네받은 힘! ' 그것이 바로 오라(AURA)이니까. ' " 가인! 아직 멀었나? " 마리는 26구역 시민의 집 정원에서 서성거리며 외쳤다. 그녀는 초조한 표정 을 지으며 왼손의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무전기의 액정에 떠오른 시간은 어느 덧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선배,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세요! 빨리 가서 공연 준비해야죠! " 가인은 잠이 덜깬 유리를 어르랴 가방을 챙기랴 정신 없이 현관으로 나왔다. 마리는 그런 그에게서 유리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 내 사정 때문에 새벽에 수련을 하게 된 거다. 그래놓고서 나 먼저 학교로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 " 도리라뇨……. 그냥 저도 아침 시간이 편하고 선배 연습 시간도 피할겸 그 랬던 것뿐인데. " 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요 이주간, 그들은 마리의 연극 연습 을 위해 수련 시간을 아침 새벽 시간대로 변경했던 것이다. 그렇게 새벽에 수 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면 그럭저럭 등교 시간에 맞출 수는 있 었다. 물론 지금의 도리가 어쩌고 하는 것은 그저 마리의 핑계였을 뿐이다. 평소 그녀는 학년도 다르고 반도 다르고 이웃도 아닌 가인과 등교할 구실이 없었기 에 은근히 유리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런 기회가 생겼으니 반드시 성사시키는 수밖에! " 어, 어쨌든 사부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 검을 배우는 것만이 가르침 이 아니야. 사소한 일상의 가르침이 더 중요한 거다! " " 으― 요즘따라 선배, 은근히 강압적인 거 알아요? 맨날 뭐만 하면 사부, 사부. 그러다간 오는 남자들도 따 떠나겠네. " " 뭐, 뭐? " 마리는 가인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는 남자들이 다 떠난다니! " 그게 무슨 소리냐, 가인? 내, 내가 그렇게 강압적이라는 거냐? " " 아, 그게……. 꼭 선배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대부분 남자들이 강압적인 여자를 대하기 어려워하더라. 뭐, 이런 거죠. " 가인은 마리가 정색하며 자신을 바라보자 식은땀을 흘렸다. 하여간 선배한 테는 무슨 농담을 못 하겠다니까. 뭐만 말하면 바로 이렇게 진지해져가지고. " 으음……. 그렇다면 가인은? 가인도 그런 여자는 싫은 건가? " " 싫어한다기보다는……. 아무래도 대하기가 좀 껄끄럽겠죠. " 쿵 마리의 HP는 치사량까지 떨어졌다. " 며, 명심하겠다. 앞으로는 절대로 강압적으로 굴지 않겠다. 절대로. " " 예? 아니 뭐, 저한테 그러실 것 까지야…….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부 드럽게 대해주면 되는 거지. 저에게는 앞으로도 계속 엄하게 다그쳐주세요. 선배의 호통은 꽤 효과가 좋으니까요. 하하하. " " ……. " 가인은 그렇게 최고의 둔감함을 과시함으로서 마리에게 크리티컬 히트를 넣 었다. 정말이지 어쩌다 이런 형광등 같은 남자에게 반해버린 건지 모르겠다. 한편 가인의 품에서 이미 정신을 차린 유리는 그런 마리를 딱하다는듯 바라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진즉에 마리의 연애 전선을 훼방놓을 셈이었지 만, ' 이건 뭐, 내가 나설 필요도 없군. ' 어쩌면 가인의 정조 관념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난공불략일지도. 유리는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어머. 아직도 다들 학교에 안 간 거야? 안 늦었어? " 그때 일행의 옆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이었다. 그녀가 담벼 락 너머에서 가인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아, 지금 막 갈려고요. 그보다 누나야말로 안 늦었어요? 하나 유치원에 보 낼 시간이잖아요? " 가인은 미연의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렇게 물었다. 하나가 보이질 않는게 아 무래도 먼저 유치원에 보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뒤엎고 미연은 태평하게 웃으며 말했다. " 하나 지금 자고 있어. 좀 늦게 깨울려고. " " 예―? " 가인과 마리, 유리는 영문을 알 수 없어 크게 반문했다. 자고 있다니? " 오늘 하나네 유치원 쉬는 날이에요? " " 아니. 내가 오늘 못 간다고 유치원에 전화해놨거든. 이따가 부용제에 갈건 데 하나가 유치원에 가버리면 안되잖아? " " ……. " 저기, 뭔가 우선 사항이 바뀐 것 같은데. 부용제 보다 유치원이 더 중요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인은 설마 이 정도로 미연이 부용제에 집착을 보이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미연이 누나. 누나는 그토록……. " 가인이네 반 간판 마담이 너무너무 궁금해서 어제 한숨도 못잤지 뭐야! 아 아∼ 이토록 두근거려본 것이 대체 몇년만일까? 신혼 여행 때도 이런 기분 은 아니었는데∼ " ' 대체 여자들은 왜 이렇게 남자의 여장을 좋아하는 거야? ' 가인은 도무지 미연의 격렬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미소년 여장시키기와 야오이 독서는 여자들에 게 있어서 식음도 전폐시킬 정도로 매력적인 유흥거리라는 것을.(물론 이것은 아주 편협된 지식이다.) " 그러고 보니 여장 준비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준비물은 안 가져가도 돼? " 미연은 가인이 맨숭하게 책가방만 매고 있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인은 그 녀가 자꾸 그쪽으로만 관심을 가지자 일부러 심술궂게 말했다. " 왜요? 없으면 속옷이라도 빌려주시게요? " " 으응! 마침 어제 쇼핑을 나갔다가 가인이 생각나서 패드 브라(Pad Bra)를 몇개 사봤어. 하나는 실리콘 패드지만 다른 하나는 베이비 오일을 넣어 만 든 밀크 패드니까 감촉이 진짜 같을 거야. 그거라면 빵이나 신문지로 가슴 만들 필요도 없고 좋을걸? " 패, 패드 브라― 가인은 결국 본전도 찾지 못하고 찌그러져야 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중 얼거렸다. 여, 역시 미연이 누나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무언 가 격이 틀려……. 유리는 그렇게 몸을 떠는 가인을 마음 속으로 위로하며 미연에게 말했다. " 오빠 여장은 하지연 선생님이 전적으로 맡으신댔는데. " " 지연 선생님이? 어떻게? " " 글쎄. 이 방면에 정통한 지인이 있다나 뭐래나. 적어도 자기같은 체육복 코스프레는 안 시키겠지. " " 그렇게 말하니까 더 기대되네∼ 빨리 빨리 보러갔으면 좋겠다아∼ " 그렇게 황홀해하는 미연의 모습에 가인은 이를 갈았다. 일부러 저러시는 거야. 일부러 저러시는게 분명해! 마리는 그렇게 여러가지 의미에서 떠들썩해지는 일행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 다. 그러다 곧 시간이 10분이나 지났음을 깨닫고서 화들짝 놀라 소리친다. " 잠깐. 다들 서두르지 않으면!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고! " " 아, 그렇죠! 그런데……. " 가인은 현관을 돌아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까부터 계속 시민이 집에서 나 오지를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바쁘다고 바쁘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잡담을 나누 고 있었던 것은 반쯤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는데. 가인은 현관을 나오기 직전, 시민이 전화를 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고 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전화길래 이렇게 오랫동안 통화하시는거지? 철컹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시민이 정원으로 나왔다. 가인은 그녀에게 늦게 나온 이유를 물으려다가 곧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다 른 일행들도 그런 시민의 모습에 의아해한다. " 무슨 일이에요, 시민 씨? 무슨 일 있었어요? " 미연이 시민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질문에 시민은 한껏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피아노 학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원장 선생님이 아프시다고……. " 원장 선생님 전화였군. 가인은 그제야 납득을 하면서도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원장 선생님이 얼마 나 아프시기에 시민 씨가 저리도 비통해하시는 거지? " 많이 아프시대요? " " 아뇨. 그냥 감기래요. 하지만……. " 하지만? " 오늘이 콩쿨에 나가는 초등학생들 레슨을 봐주는 날이라고……. 저보고 대 신 레슨을 봐주면 안되겠냐고 하시네요……. " " 예에―? " 가인과 일행은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렇다면, " 부용제에……못 오시겠네요? " 그 말에 시민은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 아뇨! 축제에는 반드시 갈 거에요. 늦더라도 갈 게요! 레슨을 빨리 끝내면 적어도 3시까지는 갈 수 있으니까! " " 예? 콩쿨에 나가는 학생이라면서요? 레슨을 빨리 끝내도 되는 거에요? " 가인의 질문에 시민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재차 조급한 목소리로 말을 잇 는다. " 빨리 끝내도 확실하게는 가르칠 거에요. 어차피 콩쿨을 앞둔 학생들은 악 보도 다 외웠고 연습도 꾸준히 해왔으니까 특별히 제가 가르칠 건 없어요. 마지막 마무리만 해주면 되요. " " 그래도 마지막 마무리가 제일 중요한거 아니에요? " " 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 시민은 자꾸만 말꼬리를 붙잡는 가인의 태도에 속이 탔다. 정말 가인 씨는!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 가인 씨는 제가 축제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거에요? " " 아뇨. 전 그냥……무리하지 마시라고. " 가인은 시민의 태도에 당황했는지 씁쓸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대번에 그들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깔린다. 마리와 유리, 미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인과 시민의 눈치를 살폈다. " 전 정말이지……어떻게 해서든 가인 씨를 보려고 하는데. 보고 싶은데. 가 인 씨는 왜 매번……. " " ……. " 울먹이는 시민의 목소리에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 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끝내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것을 지켜보던 마리는 갑자기 기분이 울쩍해졌다. ' 가인……. '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 어쨌든 전 갈 거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라고요! " 시민은 가인을 응시하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 눈빛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가인은 냉정하게 몸을 돌리며 한마디했다. " 마음대로 하세요. " 그리고 곧장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서기 시작한다. 마리와 유리는 어찌할 바 를 모르고 망설이다가, 이내 시민과 미연에게 인사를 건네고 가인을 쫓았다. 시민은 그렇게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움직일 줄 몰랐다. 고개를 떨어뜨리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시민 씨. " 미연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아무런 문제도 없겠지? " " 네에― 걱정마세요∼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사복을 갖춰입은 윤채영의 질문에 삼인방은 똑같 은 말투에, 똑같은 억양으로 답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미심쩍어 보였기에 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 역시 이런 때에 휴가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지금이라도 반납 하고 근무하는 편이, " "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치프! 이런 때야말로 적극 휴가를 사용해서 업무에 지친 심신을 풀어줘야죠! " " 요 근래 너무 열심히 일했다고요! 치프는 충분히 휴가를 쓸 자격이 있어요! 내가 인정한다! " " 무엇보다 가인 군의 여장이라고요? 이런 기회는 두번 다시 없을 지도 몰라 요! 놓치면 두고 두고 후회할 거에요! " 치프가 휴가를 물리려고 하자 삼인방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 '필사적'이라는 부분이 역효과였는지 채영은 대번에 인상을 구긴다. " 너희들이 그러니까 더 걱정이 되는 거야! 솔직히 말해! 그동안 나 때문에 땡땡이 치지 못해서 몸이 근질근질거리지? 내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대 번에 놀자판을 벌일 셈이지! " " 그, 그럴리가∼ " " 너무해요, 치프! 우리들의 정성어린 진심을 그렇게 받아들이다니! " " 아, 전공을 세우고도 핍박받아야했던 모 장군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억울 하도다! 원통하도다! " 그렇게 변함없이 티격태격하는 치프와 삼인방의 모습에 오퍼레이터 팀의 막 내 문세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 정말이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에 슬픈 사람들이여. ' " 어쨌든! 아무리 상부의 명령이라도 안되는건 안되는 거야! 난 남는다! " 채영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듯 자신의 말에 못을 박았다. 그런 완강한 치프 의 태도에 삼인방은 회유가 물 건너 갔음을 깨달았는지 단숨에 태도가 돌변 하기 시작한다. " ……쳇.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나 했더니. " " 하여간 어제 꿈자리가 사나웠어. 왠지 이럴 것 같더라고. " " 인생 별 거 있어? 깨지면 깨지는데로 살라지. 에라이. " " 네놈들이……! " 채영은 이를 갈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한동안 관대했었지. 너무나 길고도 긴 관용의 시간이었어. 결국 그 무분별한 관용이 여기까지 부하들을 타락시킨 거다. 훌륭하게 방치시킨 거라고! ' 좋아. 오늘부터 다시 오퍼레이터 팀을 새 마음 새 뜻으로 바로 잡아주지! 첫째도 군기, 둘째도 군기인 청렴결백 근면성실의 신(新) 오퍼레이터 팀으 로 만들어주마! ' 그렇게 막 채영의 분노가 터지려는 순간, " 어머. 윤채영 치프. 정말 명령에 불복종할 생각인가요? " 채영에게는 악마, 삼인방에게는 천사인 여인이 작전 본부실에 들어왔다. 바 로 진 사령관의 직속 비서인 민수정!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삼인방은 속으로 만세삼창을 외쳤고, 채영은 480여자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다. 아아 분하도다! 윤채영, 권력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피 스메이커 입사 이래 5년 근면 정신이 상사의 명령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 것 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 ……뭔가가 다른데. ' " 오, 오셨습니까. 수정 씨. " 채영은 삼인방을 대할 때와는 달리 식은땀을 흘리며 뻣뻣하게 굳었다. 수정 은 그런 그녀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에요. 쉴때는 충분히 쉬어 줘야 전시 상황에서도 능률이 올라가지 않겠어요? 이번 채영 씨의 포상 휴 가는 그러한 의미에서 내린 거니까 부디 상부의 뜻을 헤아려주기 바래요. " " 물론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 채영은 말을 흐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의 모두는 그녀가 무슨 말 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 피스 그린 정진우의 죽음이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런 식으로 들떠버리는 건……. " 그래서 더더욱 휴가를 받아야하는 거에요. " 수정은 그런 말로 채영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 평화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있듯. 우리는 그 평화를 충실하게 보 내야할 의무가 있는 거에요. 한 시도 낭비할 틈이 없어요. 소중한 평화인 거에요. 그런데 정작 힘겹게 지켜낸 평화를 방치해버린다면, 그거야말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죠. 그들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거라고 요. " " ……. " 채영도, 삼인방도, 작전 본부실의 모두가 수정의 말에 숙연해졌다. 그녀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에……그랬기에 오히려 떠올릴 수 없었던 생각이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수정 씨.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피스― " 채영은 희미하게 미소하며 거수경례를 했고, 수정도 그 경례를 받아들였다. " 피스― 어쨌든 모처럼만의 동시 휴가네요. 이렇게 유레카의 각 부서 치프 들이 동시에 휴가를 쓰는 것은 작년 블루 썸머 비치 이후로 처음이죠? " " 예? " 채영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곧 수정의 뒤편에서 어설프게 손을 흔들고 있는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시더 양도 가는 겁니까? " " 에헤. 어쩌다 보니까 그만. " 시더는 앞에서 채영의 고뇌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멋쩍게 미소하며 혀 를 내밀었다. 그녀는 아주 단단히 휴가를 즐기기로 마음 먹었는지 예의 외출용 원피스를 갖춰입고 있었다. 거기에 안경을 벗고 콘택트 렌즈를 끼자 아예 사람 이 달라 보일 정도다. 그런 시더의 모습에 채영은 다시 한번 회의를 느꼈다. 도대체 앞에서 내가 했 던 고민은 뭐였던 거지? ' 여, 역시 나는 남는 편이……. ' 그렇게 채영이 말을 꺼내려는 찰나, 수정이 그녀의 변심을 눈치채고 그 귓가 에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 가인 씨의 여장 복장, 궁금하지 않아요? "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모두 채영에게 알려주었다. 그것을 듣 는 순간, 채영은 얼굴이 시뻘개진채 전율해야 했다. " 수, 수정 씨! 대, 대체,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 " 후후후. 과연 어디서일까요? " " 저, 정보는 확실한 거겠죠? " " 절 잘 아시는 분이 새삼 그런 질문을. " 그걸로 항복. 채영은 완벽하게 한성고교 행에 마음을 굳혔다. 삼인방은 '살 아있길 잘 했다'만 중얼거리는 치프의 모습에 경이로운 눈으로 수정을 바라보 았다. 역시 부 사령관! 피스메이커의 최고령 여성! ' ……아, 마지막은 빼자. ' 그 말이 수정의 귀에 들어갔다간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 이걸로 언더 시티의 각 부서를 대표하는 여성들이 다 모인 건가요? " 수정의 질문에 시더가 손을 내저었다. " 메디컬센터의 유화가 빠졌어요. " " 아, 그랬죠. 주유화 씨도 같이 가면 좋을텐데. " " 그러게 말이에요. 뭐가 그리도 바쁜 건지. 흥! " 나름대로 유화와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시더는 냉정하게 동행을 거절했던 유 화가 떠오르자 서운함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수정은 그런 시더의 내심을 읽었는지 그녀의 어깨를 두들기며 일행에게 말했 다. " 자아. 자아. 슬슬 출발하도록 하죠. 지금 가면 축제가 시작하기 전에는 도 착할 수 있을 거에요. " " 저기.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 채영은 여전히 휴가를 쓰는게 찜찜했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수정 은 작전 본부실의 한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괜찮은 거죠, 진 사령관 님? " " ―! " 일동은 깜짝 놀라며 수정이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들 어온 건지 모를 진 사령관이 사령관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 문제 없다. " 수정의 질문에 진사령관은 예의 선글라스를 번쩍이며 짧게 한마디 했다. 그 것만으로도 일행의 근심 걱정은 모두 사라져버린다. ' 하긴. 저 분이 계시는 언더 시티를 우리가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 넘 는 짓일지도. ' 채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수정의 곁에 섰다. 그렇게 시더와 채영이 대열을 갖추자 수정은 진 사령관에게 거수 경례를 하며 말했다. " 피스! 그럼 민수정 외 2명. 이대로 휴가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 " ……잘 다녀오도록. " 진 사령관은 가볍게 손을 들어올리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그 들은 잠시간의 이별을 고했다. 몇 시간 뒤, 이곳에서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는 까맣게 알지도 못한채. 유전자 감식이란, 사람이 가지고 있는 DNA중 다형성이 심한 초변이성 일부만 을 DNA 증폭 기술로 선택 증폭시켜 개인간의 유전자형 차이를 알아내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이는 손가락 지문처럼 사람마다 서로 다른 DNA 모양을 형상화시키는 기술로 서 일란성 쌍둥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유일한 DNA 염기서열을 갖고 있기에 신원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 탁탁탁탁 유화는 자신의 개인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며 초조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지금 모니터에서는 한창 개인식별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개인식별검사는 친자확인검사와는 달리 특정 사람과 해당자 간의 DNA 타입이 일치하는지를 검증하는 방법이다. 대부분 성범죄때 사용되는 방법이기는 했지 만, 개인식별에 있어 Y염색체의 DNA 정보는 이러한 문제 해결에 매우 적절한 마커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사람의 게놈(genome) 내에 2-6 염기단위로 반복된 특징을 지닌 마커(ST Rs) 중에서 Y염색체 특이 STRs 마커는 이러한 문제 해결에 매우 유용하게 사 용된다. 이 STRs는 개인에 따라 반복된 수가 서로 다른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에 개인 식별에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다. ' 설마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은……. 식별할 마커가 오라능력자들 뿐이라고 해서 너무 쉽게 봤어. ' 유화는 2주 전, 그람드링에게서 오르크리스트의 시신을 건네받은 직후 줄곧 그의 DNA 도너를 밝히는데 전념해왔다. 하지만 쉽게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 했던 도너는 의외의 밝혀내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그녀는 성당 기사단의 STRs 마커 시스템에 저장된 오라 능력자들의 유전자 정보부터 해킹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시더에게 부탁하면 금새 해결될 문제였지만 유화는 왠지 결과를 알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이 건에 대해서 발설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흔히 말하 는 여자의 직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이 직감에 따른 것은 확실히 현 명한 처사였다. 피스메이커 내에는 아직 유화가 모르는 비밀들이 너무 많다. 적어도 닥터와 시더가 믿을만한 협력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 었다. ' 무엇보다 이런걸 보면 믿을래야 믿을 수가 없지. ' 해킹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코리 앙겔리로는 성 당기사단의 DB 자체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폰 뤼멘. 10번째의 검이었던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의 코리 앙겔리라 면 얘기가 다르다. 유화는 언더 시티에 그가 놓고 간 물건들을 정리하던 중 타 데오의 접속 코드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코드를 남겨두고 간 것이 그의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 써먹을 수 있는 건 써먹어봐야지. ' 문제는 해킹을 한 이후부터였다. 성당 기사단의 STRs 마커 시스템에 저장된 오라 능력자들의 정보량은 채 스 무명이 넘지 않을 거라는 그녀의 예상을 우습게 뛰어넘었다. 현존하는 오라 능력자들 외에도 그 전대, 전전대, 훨씬 이전 까지의 기록들 을 합치면 족히 1000명을 웃돌았던 것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숫자였다. 그토록 극소수라고 밝혀왔던 오 라능력자들인데. 그 때문에 수 많은 인명들이 희생되었는데. 그런데 성당 기 사단은 그런 능력자들의 정보를 이 만큼이나 보유하고 있었다고? 결국 이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성당기사단은 훨씬 옛날부터 오라 능력자들의 존재를 알고 그들을 찾아왔다는 것이 된다. 대재해가 일어나기 수십 세기 전부터! ' 후우― ' 왠지 소름이 돋았다. 유화는 식은땀이 맺힌 손바닥을 입고 있는 가운에 닦아 내었다. 그리고 조용히 모니터의 결과가 산출되기를 기다렸다. 요 2주간 1000 명분의 DNA를 대조한 결과 슬슬 감식 대상은 10명 안팎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유화는 모니터에 떠오른 10이라는 숫자를 노려보며 숨을 죽였다. 숫자는 점 점 9에서 8로. 7에서 6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 나와라. 어서 나와. ' 일반인에게 화이트 파우더를 복용시키는 것은 목재로 만든 용광로에 석탄을 쏟아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초전도 현상을 제어할 정신 감응력이 없는한 화 이트 파우더는 독극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라 능력자를 복제한 클론(clone)에게 화이트 파우더를 복용시킨 다면? 유화는 그것이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레드 브라더스라고 생각했다. 바로 복제된 오라 능력자, ' 루미네선스! ' 그 순간, 숫자가 2에서 멈췄다. 유화는 의아한 눈으로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 이 가져갔다. 어째서 2에서 멈췄지? 도너가 두 명이라는 건가? ' 그럴 리가! 유전자가 같은 인간이 또 있을 리가 없잖아? ' ……아니. 있기는 하다. 그런 경우가 분명 한 가지 있기는 해! " 맙소사. " 유화는 화면에 뜬 일련의 사진들에 신음을 흘렸다. 설마 이 사람들이 레드 브라더스의 DNA 도너? " 이제 알았겠지? " 그때 유화의 귓가로 음산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람드링 뤼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한발 앞서 그람드 링이 그녀의 어깨를 찍어눌러 다시 자리에 앉힌다. 철컥 귓가로 리볼버의 격철이 당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통수로 느껴지 는 차가운 총구의 느낌. 유화는 몸을 덜덜덜 떨면서도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 날……어떻게 할 셈이지? " " 글쎄∼ 어떻게 할까나? " 그람드링은 킥킥 웃으며 방아쇠에 건 검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 일단 대가부터 받아내야지. Give and take! " 쾅― 직후, 단발의 총성이 방안에 울려 퍼진다. Ｔo Ｂe Ｃontinued…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23화 "Goodbye to Romance"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6 - Ｂy Ｎext Ｎeo =-=-=-=-=-=-=-=-=-=-=-=-=-=-=-=-=-=-=-=-=-=-=-=-=-=-=-=-=-=-=-=-=-=-=-= " 풋! " " 크큭! " " 푸하하하핫! " 한성고 2학년 1반의 교실에서는 연신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담임인 하지 연을 위시한 여학생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몇몇 학생들은 아예 땅바닥에 쓰러져 배를 잡고 뒹굴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 의 앞에 서있는 남학생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 카하하하하―! 그게 대체 뭐야! 그게―! " 지연은 눈물까지 쏟으며 낄낄거렸다. 그런 담임의 무례한 모습에 재영은 인 상을 찡그렸다. " 아, 진짜. 그만 좀 웃으세요! 반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한 건데 너무하지 않으세요? " " 하지만! 힉― 이건 정말이지, 힉힉힉힉! " " 제, 제발 나 좀 살려줘. 너무 웃겨서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 지연은 재영의 어깨를 두들기다가 그의 차림새에 다시 한번 뒤집어졌고, 덩 달아 여학생들도 한층 격렬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이지 저렇게 웃다가 심 장이라도 멈추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뭐야? 그렇게 이상한가? 난 꽤 괜찮다고 보는데. " 재영은 투덜거리며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가 한 복장 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애니메이션, '엔젤 프린세스, 검은 날개의 리리스' 라는 변신 소녀물의 주인공 코스튬이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살아 숨쉬는 천상계. 그리고 그 천상계를 살아가는 천 족들. 엔젤 프린세스란, 이 천족들을 다스리는 천왕족의 후계자 후보를 말한 다. 그런 엔젤 프린세스 중에서도 유일하게 검은 날개족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 기에 백색의 날개를 가지지 못한 주인공. 그러면서도 천왕족 서열 2위였기에 궁 내에서는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다 당해야 했고 끝내는 천왕이 강제로 정해 준 약혼자를 피해 지상계로 도망치게 된다. 그러던 차에 부모를 잃고 홀로 살아가던 남주인공을 사고로 죽이게 되고, 결 국 자신의 생명을 그에게 불어 넣어 공존하게 되는데……. " 그, 그만해! 이히히히히힛! " ,라는 설정은 제껴두고. 재영이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코스츔을 휘날려보이자 주위 사람들은 박 장대소하며 뒤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재영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 는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 변신 포즈를 취했다. " 세계수의 축복으로 태어난 우리 날개의 후손들이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진심을 전해야 할 때! 그러니 깨어나라, 엔젤 리리스∼! " " 허억― 흐후허헛! 그만하라니까! ' " 아르멘시아! 아무리 하얀 날개족의 너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한다 면 용서하지 않겠어! 각오해라, 하늘을 울리는 세계의 빛! 오메가 선샤인! " " 그만햇! " 콰직 웃다가 웃다가 도저히 참지 못한 지연이 그만 재영을 때려눕혔다. 재영은 지 연에게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훌쩍인다. " 흑― 저는 그냥 보다 제 역할에 충실하고 싶었을 뿐인데. " " 웃기지마! 한껏 즐기고 있었던 주제에! " 지연은 코웃음을 치며 다른 학생들의 복장도 살펴보았다. 남학생들은 저마다 화려한 코스튬으로 교실을 빛내고 있었다. 간호사에 레이싱 퀸에, 세일러 교 복에 레오타드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시는군. 개인 취향대로 준비해오랬더니 정말 욕구에 충실하 셨어들. 그보다 저쪽의 비키니 껴입은 녀석은 뭐야? 숨겨진 리비도에 눈을 뜬 거냐? 지연은 자체적으로 검열할 필요성을 느끼며 한탄했다. 의욕적인건 좋지만 이 건 너무 제멋대로잖아. 그때 남학생들의 복장을 둘러보던 유리가 감상을 표했다. 그녀는 단발머리를 꽁지로 묶은채 안경을 끼고 반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붉은 리본과 어린이 책가방을 맨 것이 꼭 옆나라의 모 명탐정을 떠올리게 한다. " 아무래도 이걸로는 약해. 뭔가가 부족해. " " 그렇지? 역시 이걸로는 부족하겠지? " 지연은 맞장구를 치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서는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녀에게는 비장의 카드들이 남아있었던 것이 다. 그 비장의 카드란 바로……. " 이런! 이런! 도대체 당신들은 할 맘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이래서야 당신들을 호적수로 인정한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 ' 나왔다― ' 2학년 1반의 일동은 난데 없이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지연 은 입에 문 담배를 질끈 질끈 씹으며 교실의 문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역시 나 모두의 예상대로 제갈영 교생이 프라운 크린스들을 이끌고 나타나 있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제갈영 교생 선생님? 적지 탐색입니까? " " 후. 탐색이라.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지만 기대에 어긋난 당신들의 작태에 김이 빠졌습니다. 이건 실망이라기 보단 차라리 배신감에 가깝군요. " 팔짱을 끼며 응수하는 하지연에게 제갈영은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 저런. 배신감이라니. 어째서요? " " 저는 오늘을 위해 지난 이 2주간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왔습니다. 왜냐? 당 신들에게 절대로 부끄럽지 않은 라이벌이 되기 위해서! 교무실에 메이드 카 페를 차리기 위해 평소의 배나 되는 시간을 이사장에게 투자했고, 이번 연 극을 성사시키기 위해 헐리우드의 SFX팀까지 초청해야 했습니다! " ……어이. 그건 이미 교생의 권한을 넘어선 행동 아니야? 무엇보다 당신, 2 학년 1반의 부담임이잖아? 그런 사람이 2학년 1반에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서 어쩌겠다는 거야! " 하지만 당신들은 이런 조촐하기 짝이 없는 대응으로 제 지난 시간을 무의 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기대를 저버렸다고요! 이걸 배신이라고 하지 않 는다면 무엇을 배신이라 한단 말입니까! 정말이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 니다. 당신들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을 과대평가한 제 자신의 안 목이 실망스럽다는 것입니다! 고작! 고작 이런 사람들을 한때나마 내 인생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니! " " ……. " 거, 참. 실례되는 녀석이다. 면전에 대놓고 인생 최대의 걸림돌이니 뭐니 하 다니. 제갈영의 폭언에 학생들은 긴장하며 지연의 동태를 살폈다. 자신들의 담임을 잘 아는 그들로서는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날,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모 고등학교 교사, 대한 그룹 후계자를 린 치하다' 같은 기사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다고! " 훗, 후후후. " 그러나 이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지연은 단지 고개를 숙여 웃기만 했다. 그 의외의 모습에 학생들은, 심지어 그녀를 도발했던 제갈영마저도 당황을 금치 못한다. 왜, 왜 저러는 거지, 하지연 선생님? 짝짝 지연은 모두의 의문을 해소시켜주려는듯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 소리에 발맞춰 교실 뒷편의 간이 탈의실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온다. 그 누군가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일동은 1947년 세계 최초로 미확인 비행 물체를 목격한 미국의 케네스 아놀드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게 대체 누구래? ' 설마― ' 2학년 1반 학생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를 떠올리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아무리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많다손 치더라도 허용해선 될 게 있고 안될게 있는 법이야. 지켜줘야할 건 지 켜줘야지! 그런데 이건, 스르르르 그것은 순백의 웨딩 드레스였다. 장식이나 절개선에 의한 모양보다 전체적인 실루엣의 아름다움에 중점을 둔 결혼 의상. 하지만 흔히 식장에서 볼 수 있는, 트레인(train)이 바닥에 끌리는 긴 원피스가 아니었다. 미니! 그것도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로 짧은 초미니 웨딩 드레스다! 꿀꺽 면사포 사이로 신부의 얼굴이 드러나자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검은 폭포수와도 같은 긴 흑발이었다. 허나 그 흑발로도 신부의 미모는 가려 지지 않았다. 옅은 화장기를 머금은 얼굴은 수줍은듯 양볼을 붉히고 있다. 거기에 도도하면서도 풋풋함이 느껴지는 상반된 카리스마라니! 그야말로 천 사의! 아니, 너무나 황홀하기에 되레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아름다움이다! " ……. " 신부는 사람들이 할 말도 잊고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자 고운 아미를 찡그렸 다. 아, 찡그리는 것조차 매력적인 그 모습이라니! " 저기. 그렇게 이상한 거야? " 신부는 조심스럽게 곁에 있던 재영에게 물었다. 그러다 그의 표정을 바라보 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긴. 이상한게 당연하겠지……. ' 남자가 이런 차림을 하고 있는데 그게 제대로 된 꼴이겠냐! ' 신부는 다름아닌 유가인이었다. 특별히 그의 여장만은 하지연이 전적으로 담 당했는데, 처음 그녀가 건네준 옷과 분장 도구를 보았을 때 가인이 느낀 심정 은 그야말로 망연자실이었다. 드레스! 그것도 순백! 초미니 웨딩 드레스라니! 탈의실에서 드레스를 입고 나오기까지 그가 얼마나 고뇌했을지는 새삼 설명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편 지연은 초조한 눈빛으로 제갈영의 동태를 살폈다. 제갈영은 신부 복장 을 한 가인을 무섭게 노려본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연은 속으로 소리쳤다. 어떠냐, 내 비장의 카드가! " 나……. " 제갈영이 가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 나와 결혼해줘! " 대번에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프로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지연은 두눈을 지긋이 감으며 주먹을 쥐어올렸다. 나이스―! " 자, 잠깐! 당신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 가인은 난데없이 자신의 손을 붙잡는 제갈영에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제갈영에게 닿지 않았다. 제갈영은 이미 눈 앞의 신부에게 확률 300퍼센트의 매혹(Charm)을 걸린 뒤였다. " 회장님? " 제갈영의 심복 호일준은 처음으로 보는 주인의 모습에 경악했다. 저 자기밖 에 모르던 나르시스트 환자가 타인에게 반했다? 그것도 첫눈에 가버렸어? 이것은 아이덴티티의 상실! 궁극의 안티테제다! " 자, 모든 스케쥴을 변경한다! 당장에 결혼식 거행이다! 부용제에 온 사람 들의 축복을 받으며 허니문으로 골인하는 거다! " ' 빨라! ' 제갈영은 20년동안 자아 도취에 빠져있던 반동인지 사랑을 하는 기세도 우뢰 와 같았다. 가인은 제갈영이 자신을 번쩍 안아올리자 비명을 지르며 그의 턱 을 밀어냈다. " 야, 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허니문이라니! 농담도 정도껏 해! " " 후하하하하! 신부여, 농담이라니! 나, 제갈영은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하다! 너무나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있어! 그대와 맺어지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대원 그룹의 후계자 자리 마저 마다할 수 있어! 그대 의 눈에는 이러한 내 사랑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 " ―! " 두눈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제갈영의 모습에 가인은 기겁했다. 이 자식, 진심 이다. 지금 진심으로 이러고 있어! "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주마! 그러니 날 따라오기만 해라! 그대의 앞길은 내가 제시한다! " " 으아아아. " "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아! 절대로! 그대의 몸과 마음은 이 순간부터 내가 접수한다! 내 소유야! 후후후후― 후하하하하! " 사, 살려줘! 가인은 몬스터와 싸울 때에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정조의 위기를 느끼며 두 려움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가 입은 순백의 드레스와 여장을 통 해 한층 더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연출해낸다. 그야말로 마왕의 손에 붙잡힌 공주님이라고 해야할까. " 거기까지만 해라. " 퍽 그때 제갈영의 뒤에서 지연이 수도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제갈영은 마치 퓨즈가 나간 가전제품처럼 발라당 앞으로 거꾸러진다. 지연은 그 틈에 겁에 질린 가인을 건네받으며 그를 위로했다. " 음. 이걸로 효과는 확인했다. " " 효과는 무슨 놈의 효과! " 가인은 울상을 지으며 버럭 소리질렀다. 허나 이를 어쩌나. 그 모습마저도 이토록 아름다운걸. 그런 가인의 자태에 재영과 남학생들은 깊이 탄식했다. " 어째서 신은 그를 남자로 태어나게 했단 말인가. " " 혼란스럽군.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야. " " 아직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많군. " " 삼라만상의 섭리를 일개 인간이 파악했다고 자부하는 것부터가 오만이야. " 웨딩 드레스 하나에 참으로 거창한 반응들이다. 유리는 한숨을 쉬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살며시 얼굴을 붉힌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가인은 호일준과 크라운 프린스에 의해 실려나가는 제갈영을 치가 떨리는 표 정으로 바라보았다. " 대체 이런 옷은 또 어디서 빌려온 거에요? " " 정통한 지인이 있다고 했잖아? " 가인의 질문에 지연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답했다. " 어떤 지인? " " 네 녀석도 알고 있는 사람. " " 예? " 내가……알고 있다고? 가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이런 옷을 자신에게 입힐만 한 위인은 분명, " 어머나∼ 잘 어울려요, 가인 씨! " 그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교실에 들어오는 한 여성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이 사람 밖에 없다고. 가인은 그녀가 지연의 지인 임을 확신하고 원망스레 말했다. " 어울리긴 뭐가 어울린다는 거에요, 수정 씨……. " " 후후. 너무 쑥스러워하시네. 역시 가인 씨는 꾸미는 보람이 있는 피사체에 요. 이건 뭐, 여자인 내가 봐도 시샘이 날 정도이니. " 그렇게 말하는 이는 역시나 민수정이었다. 그녀는 가인의 드레스 차림을 바 라보며 연신 황홀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가인 은 차마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지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 그나저나 수정 씨와 선생님은 어떻게 연락이 되신 거에요? " " 평소에 알고 지냈으니까. 작년, 블루 섬머 비치에서 친해진 후, 휴일날 틈 틈히 만나서 술도 마시고 놀러다녔거든. " " ……의외네. " 가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수정을 바라보았다. 거, 참. 부사령관 직까지 수행 하면서 언제 그렇게 시간이 나셨담. 때때로 우리보다 한성고의 일과를 더 잘 알고 있었던 이유가 다 있었군. " What? really? 진짜 가인이야? " " 가, 가가가― 가인 씨! 굉장해요! " 그때 수정의 뒤에 있던 여성들이 가인의 눈에 들어왔다. 시더와 채영이었다. 시더는 연신 디지털 캠코터로 가인을 찍으며 감탄했고, 채영은 얼굴이 시뻘개 진채 웨딩 드레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가인은 시더에게서 냉큼 캠코터를 빼앗아 녹화된 영상을 삭제하며 채영에게 미소했다. " 으앗! 너무해, 가인! 이건 인권 침해야! 난 오늘의 네 모습을 유레카의 사 람들에게 알려야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 " 그래서 내 인권은 무시하기냐……. 그나저나 두 사람, 일은 어쩌고 온 거 에요?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요? " " 아, 그, 그렇죠! 저도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하지만 그게, 아무래도 상부 의 명령인지라. " " 상부의 명령? " 채영의 말에 가인은 수정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하지연과 잡담을 나 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말이지 진사령관이나 수정씨나…….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가 없으니, 원. 그렇게 투덜거리는 가인의 모습에 채영은 숨을 죽이며 속으로 감탄했다. 지 금의 그는 작은 손짓, 표정 하나만으로도 모든게 다 예술로 승화되고 있었다. ' 대단해……. 대체 여자인 우리보다 더 예쁘면 어떡하라는 거야? ' 감탄은 곧 자신감의 상실로 연결된다. 채영은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시더는 영상이 지워진 캠코터를 가인에게서 건네받으며 훌쩍였다. 그때 지연과 얘기를 끝낸 수정이 그녀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 그럼 우리도 슬슬 갈아입어 볼까요. " " 예? " 뭘 갈아입어? " 한성고에 왔으니 한성고의 법을 따라야죠. " 수정의 말을 듣는 순간, 시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작년의 악몽이 기억났던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그러니 한성고에서는 한 성고의……. 시더는 떨리는 손으로 수정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가리켰다. " 그, 그게 설마? " " 예. 바로 '그거'에요. " 단지 채영만이 영문을 몰라 수정과 시더를 번갈아 보았다. 한성고의 법? 그 거라니? 저 쇼핑백 안에 대체 뭐가 들어있기에 저러는 거야? " 자자자. 일단 절 따라오도록 하세요, 채영 씨. 채영 씨라면 분명 잘 어울 릴거라고 생각해요∼ " " 아니. 잘 어울린다니……. " 채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수정의 손에 이끌려 탈의실로 들어갔고, 그 뒤를 힘 없이 시더가 뒤따른다. 그런 여성들의 모습에 가인과 유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거라면 분명……그거겠지? " 자, 잠깐만! 아니 잠깐!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왜들 이러는 거에요! " 역시나 예상대로. 잠시 후 탈의실 안쪽에서 채영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완 강한 저항과 소란이 계속되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동정을 금치 못했다. 아무 래도 오늘 이곳에 코스튬의 마귀가 강림한 이상, 다들 험한 꼴은 피해가지 못 하는듯 했다. " 짜잔― 이것이야 말로 학교방위대! 한성전대 등장이오! " 소동이 끝나고, 탈의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민수정은 부끄러움은 저 달나라로 던져버렸는지 포메이션 포즈를 취하며 그렇게 외쳤다. 그녀의 뒤에서는 시더 가 어설픈 몸짓으로 포메이션 포즈의 한축을 맡고 있었고, 채영은 엄두도 내 지 못하며 시더의 뒤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그런 그녀들의 몸에는 각자 한성고의 여자 교복이 착용되어 있었다. " 오오오오오! " 재영과 남학생들은 수정의 포메이션 포즈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 를 쳤다. 그 모습에 여학생들은 감탄한다. 너희들, 잘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욕망에 충실할 수 있구나……. " 좋아. 유가인의 팜므파탈(femme fatale)! 거기에 한성전대의 힘이 있다면 우승도 무리가 아니지! " 지연의 탄성에 가인이 기가 막혀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왜 팜므 파탈……아니! 그보다 한성전대가 뭐 어쨌다고? " 선생님. 그래도 수정 씨 일행은 손님인데……. 외부인이 축제를 도와도 되 는 거에요? " " 스폐셜 게스트라는 거지. 뭐, 특별히 수정 씨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아 니야. 하지만 그녀들이 그저 우리 카페에 손님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손님들은 자연스레 몰려들기 마련! " 과연 지연의 말대로 어느새 2학년 1반의 교실에는 외부 손님들로 가득차 있 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팜므파탈 유가인과 수정 일행이라는 불꽃에 이끌려온 불나방들이다. 2학년 1반 일동은 새삼 이번 부용제를 위해 지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를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무섭다, 저 승리에 대한 집착! " 잘 부탁드립니다, 수정 씨. " " 반드시 이깁시다, 하 선생님! " 지연과 악수를 나누는 수정은 의욕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외침에 발맞춰 재영과 학생들의 의욕도 덩달아 고무된다. 이기자! 이기자! 드르륵 그때 교실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박재영의 동생인 박재민 과 유시내, 윤미연과 정하나 모녀였다. " 형아, 나 왔……. " 재민은 시내보다 한발 먼저 재영의 품에 달려들기 위해 나오다가 그만 보고 말았다. 엔젤 프린세스의 코스튬을 한 형의 모습을! 그리고 다음 순간, 푸확― 마치 분수처럼 코피를 뿜어냈다. 강렬한 자극에 코의 모세혈관으로 혈류가 역류했던 것이다. 혀, 형아가! 형아가 저런 모습을! ' 나……이제 여한이 없어. ' " 재민아! " " 도련님! " 절정의 행복을 끌어안고 재민은 실신했고, 그런 그를 재영과 시내가 다급히 부축했다. 의외로 일부 한정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절정의 위력을 발휘하는 재 영의 코스튬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대 박재민 용 절명의(衣)라고 할까. " 꺄! 어떡해! 어떡해! 기대한 보람이 있었어! 이건 기대 이상이야! 가인아, 너무 너무 예쁘다∼ 하나야, 너도 어서 오빠에게 인사해야지? " 미연은 가인의 여장에 박장대소하며 그의 앞으로 하나를 떠밀었다. 그러나 하나는 평소와 달리 자꾸만 얼굴을 붉히며 엄마의 다리 뒤로 몸을 숨긴다. 그 리고 홍조가 어린 얼굴로 힐끔 힐끔 가인을 훔쳐보았다. " 어머 얘가? 뭘 새삼스럽게 부끄러워 하니? 후후. " " ……. " 가인은 더 이상 상처받을 마음도 없었기에 그저 지친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 었다. 허나 그 지친 표정마저도 아름다운 그는 진정 팜므파탈이었다.(…) 하지연은 그런 미연 일행의 반응에 만족하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 웃샤―! 이번 부용제야말로 우리 2학년 1반이 접수하는 거다! 알겠냐, 자 식들아! " " 오오오오! " 재영을 비롯한 학생들, 심지어는 손님들까지 한마음이 되어 그녀의 외침에 응 했다. 지금의 2학년 1반은 그 어느때보다도 힘껏 불타오르고 있었다. ' ……우린 빼줘. '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 하여간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정말이지 최악이었어요. 이보다 더할 수 없 는 최악. " " 고생이었겠군. " 공연을 앞두고 무대 대기실에 있던 마리는 자신을 찾아와 푸념하는 가인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미 모든 분장을 지우고 원래의 교복 차림으로 돌아 와 있었다. 그것이 꽤나 아쉬웠던지 유리와 수정, 채영과 시더, 미연 모녀와 재영 일행 은 저마다 한마디 씩 한다. " 오빠같은 언니라면……목걸이를 교환해도 좋아. " " 마리아 님도 인정하실 거에요. " " 하,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 " 어떤 의미로 위험하다는 거야? " " 아마 자매 쟁탈전만 해도 만만치 않을걸? 우리 하나도 도전할 거지? " " 으응! " " 역시 유가인. 넌 어쩌면 지구의 생태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남자로 태어났 던 것일지도 모른다. " " 재영 군이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 " 난……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어느쪽이든 상관 없이 좋아해, 형아. " 그렇게 일행이 또다시 가인의 여장을 화제로 삼기 시작하자, 가인은 버럭 소 리질렀다. " 알 수 없는 얘기들은 거기까지만 해! " " 포기해, 오빠. 적어도 이 얘기는 앞으로 2대까지는 계속 전설로 이어질 거 야. " " ……. " 왜 하필 2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리의 말이 가인을 넉다운 시키기엔 충분했 다. 마리는 그런 시끌벅적해지는 일행의 모습에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 나도 공연 준비만 아니었더라면……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텐데. ' 그렇게 그녀가 가인의 여장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자 재영이 은밀하게 다가 와 속삭였다. " 걱정마세요, 선배. 유가인 팜므 파탈의 사진이 시중에 유포되는 것은 그야 말로 시간 문제니까요. 아마 단가가 좀 쎄기는 할테지만 구입하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을 거에요. " " 으음. " 마리는 귀가 솔깃해져 자세하게 사진의 유통 경로를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 만 그전에 가인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마리와 재영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 박재영. 부디 그 사진의 출처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또 내 가 아는 사람 중에 그 사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난 믿어. 그렇죠, 선배? " " 하, 하하. " " 그, 그래. 믿어라. " 재영과 마리는 진한 아쉬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들에 가인은 혀를 찼다. 정말이지 여장 한번 잘못했다고 이런 사이클이 진짜 2대까지 계속 되는 것은 아니겠지? " 어쨌든 이번에는 그다지 긴장하는 것 같지 않네요, 선배? " 가인은 마리가 작년과는 달리 비교적 여유있게 공연을 기다리고 있자 미소하 며 물었다. 그 말에 마리는 쑥스러웠는지 헛기침을 했다. " 흠! 꼭……그런 것도 아니다. 여전히 공연을 앞두고 긴장하는 것은 마찬가 지야. 단지 그 중압감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야할지. 각오를 해두고 있었 다고 해야할지. " " 그만큼 열심히 연습한 걸요? 문제 없을 거에요. 작년의 몫까지 더해서 멋지 게 연극하는 거에요! " " 음……. 고맙다. 기대에 보답하겠다. " 마리는 가인의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가인은 별 의미 없이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마리는 늘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원동력이 되었다. 분명 이번 연극도 그의 말처럼 자신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 시 해내고야 말겠다! 벌컥 그때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연극부 고문 선 생이자 양호 교사인 박미정과 마리의 동급생인 유미미였다. 그녀들은 사람들 에게 둘러싸인 마리를 발견하자 얼른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성마리, 각오하도록 하세요! 제갈영 측의 천매희가 꽤나 놀라운 연기를 보여줬어요. 지난번 연기 때부터 무언가 범상치 않음을 느끼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 수준까지 도달했을 줄이야! " " 마리 양, 이제는 할 수 밖에 없어요! 저희 스텝들도 전력을 다해 마리 양 을 돕겠어요! " 박미정과 유미미의 긴장된 목소리에 덩달아 가인 일행도 긴장한다. 천매희라 면 분명 작년에 제갈영이 영입해온 연극계의 고귀한 혈통! 그러고 보니 그녀의 무대가 마리 선배의 앞 순번이었지. 뭔가 대단한 연기라 도 보여줬던 걸까? " 적어도 천매희를 뛰어넘으려면 지금까지의 배 이상으로 연기해야 해요! 할 수 있겠죠! " " 마리 양! " 미정과 미미의 외침에 마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에게서는 앞에서 가인 일행과 얘기할 때의 느슨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그녀는 가인이 피스메이커에서 내내 보아왔던 전장에서의 그녀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가인 일행은 마리에게 잘 하라는 말조차 붙일 수 없었다. 어설픈 응원을 했다간 오히려 그녀의 고양된 집중을 방해할 것 같 았기 때문이다. " 가인. " 막 문을 나서기 직전, 마리가 가인을 돌아보았다. 몸을 돌린 그녀는 일행의 예상과 달리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예, 선배. 말씀하세요. " 가인은 그녀가 긴장하지 않고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마주 미소를 보냈다. 그런 그를 잠깐이지만 깊게 응시하던 마리는 곧 마음을 정했는지 뒷말을 잇 는다. " 무대에서의 날, 잘 지켜봐라. " 그게 무슨 소리지? 가인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이죠! " 그리고 잠시 후, 연극 신데렐라가 개막되었다. 가인 일행은 강당의 어두운 관객석에서 마리의 연극을 감상하고 있었다. 환 한 무대의 조명빛 속에서 마리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채 한창 계모와 언니 역 을 맡은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 신데렐라! 넌 어떻게 된 애가 이리도 둔해빠진 거니? 청소를 시켜도 제대 로 하기를 해! 빨래를 시켜도 제대로 하기를 해! " "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너, 엄마와 우리가 만만해 보이지? 그래서 맞 먹 으려는 거지! " " 계집애, 주제에 반항할 자존심은 있나봐? " " 아, 아니요……. 제가 어떻게 엄마와 언니들에게……. " 마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 모습이 평소의 마리와는 영 딴판이 었기에 가인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작년보다 더 능숙해진 거 맞지? 그치? " 안되겠다. 신데렐라, 넌 오늘부터 다락방에서 지내거라! " " 시, 싫어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 빨리 빨리 행동할게요! 화내시지 않도록 잘 할게요! 진짜에요! 그러니까 제발 이 추운 다락방에서 저 혼자 자라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 " 흥. 멍청한게 자기 입으로 그동안 게으름 피웠다고 고백을 하네. 고백을 해. " " 신데렐라∼ 그러니까 이렇게 되기 전에 잘 했어야지?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얌전히 다락방에 들어가렴. " " 아, 안돼! 안돼! " 마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계모와 언니들은 냉정하게 다락방의 문을 닫아버 렸다. 마리는 그 앞에서 두들기며 소리치며 목이 쉬어라 용서를 구했지만 문 은 조금도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 흑, 흐흑……. 아버지……. 아버지……. " 마리는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떨며 울기 시작했다. 신데렐라가 돌아가 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설움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리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우는 건가? " 신데렐라! 내 리본 좀 묶어줘! " " 내 구두부터 닦아놔! 얼른! " " 엄마가 뭐랬니? 접시부터 닦으랬잖아! 다락방에서 재워도 여전히 말을 안 듣는 아이구나, 너는! " 그 후로도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은 계속되었다. 신데렐라에 대한 그들의 괴 롭힘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관객들은 저마다 이를 갈고 있었다. 아마 원작에서 도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을텐데. 각색을 한 각본가의 힘이 컸던 탓일까? 묘하게 내용이 하드해져 있었다. ' 우우우. 저희도 이런 역할은 싫어요. ' 계모와 언니 역의 학생들은 관객들이 보내오는 원념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녀들은 성마리 추종회에서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배역을 추첨으로 떠 맡은 운 없는 케이스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 도시에서 왕자님이 무도회를 열었습니다.》 사회자의 나레이션과 함께 장면이 전환되었다. 계모와 언니들은 무도회에 참 석하기 위해 저마다 드레스를 입고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신데렐라는 그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나도 가고 싶어. " 잠시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지고 마리에게로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신데렐라의 독백 부분이었다. " 나도 무도회장에 참석하고 싶어. 왕자님을 만나보고 싶어. 하지만…… 하 지만 어머니가 허락해줄까? 언니들이 반대하진 않을까? " ' 응? ' 가인은 마리의 독백을 듣던 중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독백 씬이 시작되면 서부터 마리가 자신을 계속 응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설마…….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알아본다고. 기분 탓이겠지. ' 하지만 기분 탓 치고서는 마리의 시선이 줄곧 그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심 지어는 무대 앞으로 걸어나오면서까지 여전히 가인을 바라보고 있다. ' 정말……날, 보는 거야? '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마리의 독백이 모두 유가인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처 럼 느껴졌다. " 두려워. 거절당할까봐 두려워. 아니, 분명히 거절할게 뻔해. 아무리 내가 바란다고 한들, 아무리 절실히 원한다고 한들 거절당할게 뻔하잖아! " 마리는 두손을 모으고 슬픈 어조로 외쳤다. " 그럴 바에는 그냥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나아. 차라 리 그편이 상처도 덜 받고 괴롭지 않아. 슬프지 않아. 실망하지 않아! " 거기서 마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렇게 감정을 추스리던 그녀는 다시 독백 을 시작한다. "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러면 상대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을까? 눈치채줄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 " 마리는 가인을 바라보며 애절하게 말을 이었다. " 날 알아주길 바라는 건……내 욕심이 아닐까? " 마리 선배? 가인은 가슴이 싸늘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뭔가 지금 부분 은 연극이 아닌 것 같았다. 연기가 아닌, 좀 더 마음에 와닿는, 그런……그런 얘기인 것 같은데. 확― 그때 조명이 다시 켜지며 계모와 언니들이 신데렐라에게 소리쳤다. " 리본 묶어달라니까 뭐하고 있어? 빨리 빨리 안 움직여! " " 대체 뭘 멍하니 있는 건지, 원. " " 혹시 너……무도회장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 " ……. " 신데렐라는 언니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녀는 끝내 우유부단 하게도 말하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 어머나∼ 그래도 자기 주제를 알기는 아는가봐? 가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 는 걸 보니. " " 그래. 그래. 너같이 천한 애가 무도회장에 가봐야 분위기만 망치지. 집이 나 잘 지키고 있으렴. " " 그래도 혹시나 가고 싶다고 말했으면 데려가주려고 했는데. 에이. 그만둬 야겠다∼ " " 아, " 마지막 말에 신데렐라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당황하며 언니를 부르려 고 했지만 이미 그들은 신데렐라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얘기는 끝난 것이 다. " 자, 넌 다락방에나 다시 들어가 있어! " " 집안일 시키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운줄 알아! " " 안녕, 신데렐라. 재밌게 놀다올게∼ " 계모와 언니들은 다시 신데렐라를 다락방에 가두고 무도회장으로 떠났고, 마 리는 서럽게 울었다. " 흑, 나는……. 나는……. 왜 말하지 못했던 거야. 뭘 그렇게 두려워했던 거야. " 그 대사에 지켜보던 가인도 가슴이 아파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의 옷 자락을 움켜쥐었다. 울고 있는 그녀가 꼭 자신인 것만 같았다. 후회하는 모습 이 남 같지 않았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얘기하는 거였는데. 가고 싶다고, 나도 가고 싶다고 얘 기하는 거였는데. 흐흐흐흑― " ' 전 정말이지……어떻게 해서든 가인 씨를 보려고 하는데. 보고 싶은데. 가 인 씨는 왜 매번……. ' 순간, 시민이 생각났다. 울먹이며 자신을 원망스레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 다. 슬픈 표정, 눈빛이 생각났다. ' 사랑해……가인. ' 하지만 뒤를 잇는 한 여인의 그림자. 눈물을 흘리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보여 주었던 그 마지막 모습. 그녀를 떠올리자 가인은 갑자기 숨이 막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두눈이 흐려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 가인, 우리는……친구지? ' 언제나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 그때의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절실함. 애절함. 간절함. 가인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아, ' 넌 내 소중한 친구야.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 그 뒤로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무도회장에 가게 되지만, 이 미 그의 눈에는 연극이 들어오지 않았다. " ……. " 마리가 열연을 펼친 신데렐라가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구라 코 마히코는 객석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평소와 다르게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 은 그는 여전히 연극의 여흥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마리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검에만 출중한 줄 알았더니 설마 연극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이야. ' 아가씨의 또다른 면을 보게 되었군. ' 코마히코는 괜히 자신이 뿌듯해져서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오 늘 아침에 도장에서 자신과 비영을 향해 소리치던 마리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마 발단은 비영이 그가 만든 플랜카드를 그녀에게 보여주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 그게 뭡니까, 아버님? ' ' 하하하. 어떠냐. 역작이지 않느냐. 작년에 네 연극을 구경가지도 못해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를 해봤지. 도장의 단원들과 틈틈히 만든 현수막 이다. ' ' 현수막? ' 비영이 펼쳐보인 플랜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무영신풍류의 장녀, 성마리. 연극계를 비추는 찬란한 샛별이 되리!' 그 문귀를 보는 순간, 마리는 정확히 분홍색 돌이 되었다. ' 뭐에요, 선배? ' 막 수련을 마치던 가인이 그녀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다가왔다. 그러자 마리 는 전광석화같이 플랜카드를 접어 등 뒤로 감춘 뒤 도리질을 쳤다. ' 아무 것도 아니니 신경쓰지마라! 절대로 신경써서는 안된다! ' ' ……예? ' 가인은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등교 시간도 빠듯하고 해서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때서야 마리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비영을 노려보았다. ' 이 어이없는 물건은 제가 거두도록 하겠습니다. ' ' 아니! 그것은 우리가 혼신을 기울인……! ' ' 그리고 절대로 제 연극을 보러오지 마십시오. 그때는 의절입니다. ' ' 하, 하하……. ' ' 아시겠습니까! ' 결국 일이 그렇게 되어버려서 비영을 비롯한 단원들은 성마리의 응원을 중도 하차해야 했다. 대신 플랜카드 건과 무관한 코마히코만이 무영신풍류의 모두 를 대표하여 마리를 응원 오게 된 것이다. 코마히코는 자신의 사부가 딸의 의절 협박에 끙끙거리던 것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연우 사부님이나 비영 사부나……자기 자식에게 극 진한 부분은 똑같으시군. ' 어쨌든 공연 전에 찾아뵙지 못했으니 공연 뒤라도 축하드려야할텐데. ' 그는 사전에 준비한 축하 꽃다발을 안고서 마리를 찾았다. 공연이 끝났으니 대기실에 계시려나? 툭 그렇게 무대의 뒤쪽으로 돌아가던 코마히코는 막 통로에서 나오던 한 여성과 부딪히고 말았다. 성마리 추종회의 회장 유미미였다. 그는 쓰러지려는 그녀를 재빨리 부축하며 말했다. " 이런 실례를. 괜찮으십니까? " " 예? 아……예! 예!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유미미는 코마히코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를 뒤따라나오던 성마리 추종회의 학생들이 경악을 금치못한다. 아니! 골수까지 마리 님에 대한 사랑으로 차있는 회장이 외부 남자에게 고개 를 숙였어? " 아니.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그나저나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혹시 성마리 아가씨가 안쪽의 대기실에 계십니까? " " 예? 아, 마리 양은 아까 해충― 아니! 아니! 유가인 씨와 할 얘기가 있다 며 같이 옥상으로 가는 것 같았는데. " " 그렇습니까. 옥상이란 말이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친절한 아가씨. " 코마히코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마리를 찾아 옥상으로 떠났다. 그 뒷모 습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미미는 곧 성마리 추종회가 뚱한 눈으로 자신 을 바라보고 있자 화들짝 놀라 소리친다. " 뭐, 뭡니까! 여러분! 왜 이러시는 거죠? " " 회장님. 방금전의 남자에게 한눈 파신거 맞죠? " " 이실직고하시죠. 앞의 남자는 누구입니까? 누군데 우리의 마리 님을 찾는 겁니까? " " 수상합니다! 위험한 냄새가 느껴져요! " 그런 회원들의 반응에 미미는 말도 안된다는듯 버럭 소리쳤다. " 수상하다니!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을! 저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리 양의 무영신풍류에 머물고 계신 카구라 코마히코 사범님이십니다! 일본의 본가 쪽에서 파견된 속가 제자로서 그 검술 실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 거기다 예의를 중시하며 경박하지도 않은, 또 청렴결백하기까지 한 검사의 표본입 니다! 나이는 올해로 24세! 현재 애인 없음! " " ……어떻게 그리도 잘 아십니까? " 회원들은 한층 더 눈을 부라리며 물었고 유미미는 하던 말을 집어삼켰다. " 그, 글쎄요. 그냥 어쩌다 보니……. " " 흐응. 관심이 있으신 건 아니고요? " " 그러니까 그런 실례되는 말은 하지 말라니까요! 저는 그저, " 미미는 거기서 손으로 볼을 감싸며 홍조를 띄었다. " 저런 멋진 분이 우리의 마리 양 곁에 계시다면 얼마나 멋진 그림이 될까 해서. " " 하? " " 그렇지 않나요? 다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유가인같은 해충이 아닌 저런 분이야말로 마리 양을 더욱 빛내줄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같은 무 영신풍류에, 스타일까지 발군! 아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흡족하기 그지 없어요! 그야말로 마리 양의 천생배필입니다! 무엇보다 여자 관계가 문란 하지 않다는게 딱 좋아요! 저런 분이야말로 우리의 마리 양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란 말입니다! " " ……. " 회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저 골수까지 지크 마리로 가득찬 분이 어딜 가시겠나. ' 역시 우리의 회장은 믿음직해! ' 성마리 추종회는 한때나마 자신들의 회장을 의심한 것을 반성했다. 그리고 더욱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녀들의 단결력은 한층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 지크 마리! " 덕분에 그녀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던 성마리. 그녀가 지금, 옥상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었는지를. " 연극 무사히 끝낸 거 축하해요, 선배. " " 응. 고맙다. " 가인과 마리는 옥상의 철창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 자 어느덧 시간은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간을 잘 맞춘 건지 아니면 다들 축제에 여념이 없는 건지. 옥 상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 정말 연극 쪽으로 나가보는게 어때요? 마리 선배라면 잘 해낼 것 같은데. " " 어림도 없는 소리. 나같은 어중이떠중이가 넘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렇게 고교 시절에 연극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무엇보다 나에 게는, " " 나에게는 무영신풍류가 있다― 이 말이죠? " " ……그렇다. " 가인이 대신 말을 가로채자 마리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생 각했다. 역시 마리 선배가 웃을 때는……. " 역시 선배는 웃고 있을 때가 좋아요. " " 뭐? " 마리는 난데없는 가인의 기습에 얼굴을 붉혔다. 그, 그게 무슨 뜻이지? " 무슨……뜻이냐, 가인? " " 마리 선배가 웃고 있을 때는 언제나 무영신풍류 얘기를 할 때잖아요. 그렇 게 무영신풍류를 좋아하는 선배의 모습이 보기 좋다, 뭐, 이런 말이죠. " " 아, 아아. 그런가. "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그냥 이럴 때에는, '웃고 있을 때가 좋다'에서만 끝내줘도 좋을텐데. " 선배. " 가인의 부름에 마리는 그를 돌아보았다. " 공연 전에 말이에요……. 왜 그런 말을 했어요? " " 응? 그런 말이라니? " " 무대에서의 날 지켜봐라, 라고 했잖아요. " " 아아. 그거. " 마리는 쑥스러웠는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 그냥. 왠지 처음 신데렐라 대본을 받았을때. 대본을 읽다보니 네 생각이 났다. " " 제 생각요? " " 응.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 " ……. " 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왜 마리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얼핏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던 신데렐라. 용기를 내지 못하던 신데렐라. 그래 서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던 신데렐라. 그 모습이 어딘가, ' 지금의 날 닮았기 때문이겠지. ' 가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철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한성 고교의 운동장에는 축제로 떠들썩한 사람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눈으로 쫓던 가인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성고의 입구 를 응시한다. 마치 누군가가 그곳에서 나타나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 나란 녀석은……. ' 가인은 자신이 찾고 있는 이가 한시민이라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찼다. 그러자 자괴감이 밀려든다. 나란 녀석은 정말이지 구제불능이구나……하는 자괴감이. ' 그렇게 모진 소리만 했던 주제에. 차갑게만 굴었던 주제에. 그러면서 정작 와주기를 바랬던 건 아니겠지? 뻔뻔하게시리. ' 가인은 철창을 세게 움켜잡았다. 오늘 아침, 시민이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슬퍼하던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아. ' 잘됐어. 잘 된 거야. 아마 시민 씨도 나 같은 녀석에게 정이 떨어졌을 걸. 그걸로 된 거야. 그걸로 충분해. ' 충분해. 충분해. 가인은 자기 자신에게 몇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치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처럼. 다른 방법은 자기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완강하게 다그쳤다. 완강하게. 완강하게……. " ……. " 그런 가인을 바라보던 마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또 그가 무엇때문에 고민하는지도. 무 엇때문에 망설이는지도. 다……알 수 있었다. " 어? " 그렇기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가인은 갑자기 마리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돌아본 그곳에는 마리의 얼굴이 그의 얼굴을 향해 가까이 다 가오고 있었다. ' 어어? ' 가인의 두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부드럽고 달콤 한 느낌. 그것은 예전에도 그가 느껴볼 수 있었던 감촉이었다. " ―! " 입술. 마리 선배의 입술. 그 입술이 지금 나에게……. " ……. " 키스는 마리의 볼에 서린 수줍음만큼이나 빨리 끝나버렸다. 가인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저 어안 이 벙벙해져 있을뿐이다. 하지만 곧 그의 몸을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는 마리의 모습에서 실감하 게 된다. ……그녀가 자신에게 키스 했다는 사실을. " 서, 선배. " 가인의 당황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그의 품에서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울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모든 것을 억눌러 참으며 마리는 필사적으로 한발을 내딛었다. 필사적으 로 용기를 쥐어짜냈다. ' 각오했잖아? ' 이번 연극을 시작하면서 줄곧 정해왔던 것. ' 스스로에게 약속했잖아? ' 공연이 끝나면. " 좋아해, 가인. " 그와 단 둘이 있게 된다면. " 널 사랑하고 있어……. " 그러면 그에게, " 정말로……사랑해. "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로.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7 - Ｂy Ｎext Ｎeo =-=-=-=-=-=-=-=-=-=-=-=-=-=-=-=-=-=-=-=-=-=-=-=-=-=-=-=-=-=-=-=-=-=-=-= " 후우. " 아르센 피아노 학원. 시민은 레슨 도중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 다. 그런 선생님의 한숨에 피아노를 치던 초등학생은 자신이 뭔가를 실수했 나 싶어 화들짝 손을 멈춘다. 그렇게 피아노 소리가 끊기자 시민은 아차하며 미소 지었다. " 아니야. 잘 하고 있으니까 계속 해요. " " ……예. " 초등학생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조심스레 건반을 누른다. 그 모습 에 시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마음이 콩밭에 있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콩쿨에 나갈 학생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한시민? '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3시인데. ' 시민은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며 오늘따라 유독 빨리 지나가는 시간을 원망 했다. 그녀는 근심스러운 눈으로 피아노를 치는 학생을 바라보았다. 학생은 콩쿨 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신감 이 결여되어 있었다. 아마 원장 선생님이 당일 날 이 학생의 레슨을 고집했던 것은 다 저 긴장감 을 풀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이래서야 끝이 없겠는데. '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레슨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런 흐름으로는 도 저히 가인과 약속했던 3시까지 한성고로 갈 수 없을 것이다. 시민은 초조함을 느끼며 방 안을 서성거렸다. 가뜩이나 최근들어 사이가 벌 어졌던 가인이었다. 이번 부용제 때 어떻게든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으면 앞 으로도 친밀해질 기회는 없을 것이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딸랑 그때 피아노 학원의 현관 쪽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군가가 학원으로 들어오면서 문에 달린 종을 울린 모양이다. 누구지?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없을텐데? 시민은 의아함을 느끼며 복도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방 문객이 레슨실로 불쑥 들어온다. " 원장 선생님? " 시민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방문객을 불렀다. 방문객은 다름 아닌 아 르센 피아노 학원의 원장 김민경이었던 것이다. 민경은 예의 뿔테 안경을 쓴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다. " 워, 원장 선생님! 어떻게 되신 거에요? 아프신 거 아니었어요? " " ……. " 시민의 당황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민경은 아무런 말 없이 레슨실을 가로 질 렀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원생을 살펴본 후 작게 한탄한다. " 내 이럴 줄 알았지∼ 아침에 전화했을 때부터 목소리가 우울하길래 걱정이 되더니만. " " 선생님? " " 그렇게 우거지상을 짓고 애를 가르치는데 어떻게 원생이 긴장을 풀겠어요? 이건 뭐, 어제보다 더 얼어버렸잖아? " 민경의 지적에 시민은 얼굴이 붉어졌다. 되도록 티를 안낼려고 노력했지만 잠깐 살펴본 민경의 눈에도 다 보일 정도로 자신이 초조해하고 있었던 모양 이다. " 죄, 죄송합니다. " " 어휴. 바쁜 일이 있으면 있다고 진즉에 말할 것이지. 하여간 좀 거절할 줄 도 알란 말이에요. 이래서야 부탁한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 " 예? " 민경의 말에 시민은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그런 그녀에게 민경은 의미심장 한 눈웃음을 쳤다. " 오늘 한성고에서 축제가 있는 날이죠? 이웃 집 아이가 한성고에 다니고 있 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그만 열 때문에 깜빡했지 뭐야. " " ……. " " 그나저나 너무한 거 아니에요? 사전에 귀뜸이라도 해줬으면 이런 날 내가 시민 씨를 부르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어쩜 아무런 얘기도 없이 있을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인 씨를 만나러가는 거면서. " " 그, 그게. " 시민은 민경의 말에 점점 얼굴이 빨개지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 원래 비번이기도 했고……. 또 가인 씨를 만나러간다기보다는, 그냥 축제 에 유리 양도 있고 가족으로서 놀러가는 거라서……. " " 에엥―? 가인 씨하고 단 둘이 데이트 하는 거 아니었어? " " ……아니에요. " 시민은 민경이 한심하다는듯 되묻자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이럴까봐 내가 부용제에 간다고 얘기하지 않았던 건데……. " 나, 참. 이럴 때 만큼은 좀 단 둘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꼭 이런 날에도 그렇게 보호자 티를 내야겠어요? 으아∼ 가인 씨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영 실망했겠는걸. " " 그, 그런 건 저도 알고 있어요. " " 알고 있기는 뭘 알아? 하나도 모르고 있구만. 그렇게 태평하게 굴다간 쥐 도 새도 모르게 빼앗긴다고. " " 빼앗긴다니, 뭘……. " " 뭐긴 뭐야! 다른 여자가 가인 씨를 채가 버린다 이 말이지! 어휴. 그런걸 되묻는다는 것 자체가 태평하다는 거에요! " " 우― " 계속되는 민경의 다그침에 시민은 심통이 났는지 볼을 부풀린다. 아, 놀려먹는 건 여기까지. 민경은 시민이 진짜 화를 내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 흠. 흠. 어쨌든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시민 씨는 그만 퇴근하도록 하세요. " " 예? 하지만 그럼 레슨은 누가……. " " 내가 하면 되지. 오전 내내 푹 잤더니 열도 내리고 몸도 가뿐해졌거든! " 민경은 팔을 좌우로 흔들어보이며 문제 없다는듯 자신의 상태를 과시했다. 하지만 시민은 안쓰러운 눈으로 민경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 민 경은 조금도 좋아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여전히 열로 달아오른 얼굴에 마스크 사이로 새어나오는 거친 숨소리. 거기 다 코맹맹이 목소리까지 더해 뭐 하나 나아진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 해졌으면 심해졌을까. " 무리에요, 원장 선생님. 더 쉬셔야해요. " " 허허어∼ 또 그런다. 그럼 직접 원생에게 물어보도록 할까요? 순영아, 넌 누가 가르쳐줬으면 좋겠니? 원장 선생님이? 아니면 시민 선생님이? " 민경이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멀뚱히 바라보는 원생에게 물었다. 원생은 그 녀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민경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렸다고는 하지만 민경 쪽이 더 편안하게 자신을 가르쳐줄 것 같았기 때문이 다. " 원장 선생님요. " " 것 봐요! 이제 알겠죠? 시민 씨는 아무―런 걱정할 거 없으니까 이대로 가 인 씨를 만나러 가세요. 제가 저번에 얘기 안했던가? 학원에서 우울한 표 정 짓지 않도록 가인 씨랑 알콩달콩 연애하라고. " " ……알콩달콩이라뇨. " 시민은 새침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민경이 이렇게까지 신경써주는데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그녀 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 언제나 죄송해요, 원장 선생님. 그리고……감사합니다. " " 그래요. 얼른 가인 씨한테 달려가는 거에요? " " 후후. 예에― " 시민은 민경의 말을 부인하지 않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레슨 실을 나왔다. 나갈 채비를 하고 현관으로 향하는 그 녀의 발걸음은 예의 우울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인을 만난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렇듯 그녀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뛰었 던 것이다. ' 이제 오시지 않아도 되요. ' 그때 현관 문의 손잡이로 향하던 시민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 신경쓰지 마세요. ' ' 마음대로 하세요. ' 무신경한 말투. 냉정한 태도. 요 몇달간 가인이 보여주던 모습들이 떠오르자 들뜨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가 라앉는다.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리 이렇게 혼자서 열을 낸다고 한들 가인과 자신 사이에 생긴 골이 메워질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 등을 돌리고 있는 그 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두려웠다. ' 또 다시 외면당하면, 또 다시 거절당하면, ' 그때는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 나는 아직 아무 것도 얘기하지 못했는데. '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딸랑 하지만 그런 고민들과 달리 시민의 손은 이미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문에 달린 종소리가 그녀의 흐릿한 정신을 일깨운다. ' 가인 씨, 우리 둘이서…… 이대로 어딘가로 가버릴래요? ' ……그래. 고민해봤자 어쩔 수 없어. 두려워하고 망설여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은 아직 그때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가인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 끝낼 수 없는 것이다. ' 분명 가인 씨도. ' 그때의 그라면, ' 시민 씨를……사랑하는데요? ' 그 말을 했던 그라면, 그 말이 진심이었더라면, ' 분명 대답해줄 거야. ' 반드시. 그때가 언제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시민은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 기다릴 거에요, 가인 씨. ' 열려진 문 밖으로는 눈부신 햇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민은 그 기분 좋은 환함에 눈을 감으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 여어― " 그녀는 잊고 있었던 과거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아. " 시영은 예전과 변함 없는 미소로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반겨주었다. " 마리 선배……. " 가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마리를 불렀다. 선배가 방금 뭐라고 했지? 좋아한다고? 날? ' 사랑한다고? ' 믿기지 않는다. 설마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단 한번도 생각 해본 적이 없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 그런 기미는 조금도 없었으면서……. ' 아니. ' ……없었던 게 아니다. 갑작스러운게 아니야. 마리 선배는 예전부터, ' 내 낭군이 되어줘! ' ' 넌 시민 씨를 좋아하잖아! ' ' 항상 너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 ' 나의 데이트를 받아주기 바란다. ' '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기대도록 해라. ' ' 네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난 최선을 다하겠다. ' ' 내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상관이 없었던 건가? ' 언제나 그랬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아무런 말도 없이 항상, '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어. '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랬기에 깨닫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는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을텐데. 조금만 더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렇게 뒤늦게서야 눈치 채지는……. '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 ' 문득 든 자문. 가인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진심. 마음 한켠에 숨겨두고 있던 의구심이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 정말 마리 선배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던 거냐, 유가인? 사실은 알고 있 지 않았어? 그 정도로 둔한 녀석이 아니잖아, 넌? ' 맞다. 사실 난……. ' 넌 진즉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거야. 그러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둔감한 척 스스로를 속여왔던 거고. ' 그래. 그 말대로일지도 몰라. 아니, 그 말대로야. 사실 난, ' 마리 선배 뿐만이 아니지.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보내오는 감정들도 줄곧 외면해왔다. 왜? 그야 책임질 수 없었으니까. 지금의 관계가 변치 않기를 바랐으니까. ' 나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 거절해야만 하니까. 상처주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런 혼자만의 이유로 혼 자만의 감정을 지키기 위해, '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 자신도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남의 좋아하는 감정은 일절 배제해왔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 이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인가? 가인은 자신을 끌어안은 마리를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했을 마음 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 떨고 있어. ' 마리의 애처로운 떨림이 닿아있는 몸을 타고 가인에게 전해진다. 그것만 봐 도 그녀가 지금의 고백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용기를 쥐어짰는지 알 수 있 었다. 진심이라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여기서 자신은……. ' 나는, ' 가인은 마리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가져가다가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왠 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두눈이 뜨겁게 달아오 른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 거지? 왜? ' 시민 씨를……사랑하는데요? ' 그 말을 했던 자신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째서 마리 선배는 그때의 자신 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 그때의 시민 씨도…… 지금의 나처럼, '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이런 마음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가인은 자신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와서 까지도 나란 녀석은 여전히……. " 선배. " 가인은 힘겹게 마리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찰나, " ……. " 마리가 먼저 그의 품에서 벗어난다. 그의 가슴을 손으로 떠밀며 뒤로 물러났 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인은 당황하며 마리의 얼굴을 살폈다.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뜻밖에도 웃고 있었다. " 이제서야 말하게 되다니. 나도 참……. 이렇게나 오래 끌게 될 줄은 꿈 에도 몰랐다. 꼴 사납기 그지 없군. " " 꼴 사납다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절대로! " 마리의 말에 가인은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에 마리는 힘 없이 미 소지었다. " 충분히 꼴 사나워. 봐라, 지금도 이렇게 몸을 떨고 있지 않나. 조금만 다 리에서 힘을 풀어도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 같아. " 그 말에 가인이 재빨리 손을 내밀었지만 마리는 그의 부축을 제지했다. " 괜찮다. 그보다 내 말은 똑똑히 들었겠지? " " 예? 무슨 말을……? " " 널 좋아한다는 말. " " 아, " 가인은 새삼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마리의 눈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또, 똑똑히 들었어요. " " 그래. 다행이다. "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 기쁘다는듯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가인 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행이라뇨, 선배……. 아직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죠? 어째서? " 그러니 너도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마. " " ―! " 가슴을 꿰뚫는 마리의 한 마디. 가인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속이다니? 그런 그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가인, 너는 시민 씨를 좋아하지? 네가 아무리 아닌 척, 시민 씨에게 차갑 게 굴더라도 본심을 숨기지는 못해. 난 알 수 있어. 너의 곁에서 쭉 너만 을 바라봐 왔기에. 그랬기에 알 수 있다. 다 알 수가 있는 거야. 넌 지금 이 순간에도 시민 씨를 좋아해. " " 난, " " 그리고 네가 진정 시민 씨를 좋아한다면……그 마음을 좀 더 소중히 여겨 야 한다고 생각한다. " "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선배. " 가인은 말문이 막혔다. 애써 고집스럽게 그녀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리의 계속되는 말이 가인의 고집을 무너뜨린다. " 리리스도 네가 이러는 것은 바라지 않을 거다. " 가인은 부릅뜬 눈으로 마리를 노려보았다. 마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 며 재차 말했다. " 난 그녀가 무슨 이유로 너를 찾아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알고 있지. 그녀가 널 위해 모든 것을 감수했다는 것. 그리고 네가 그것에 크게 얽매여 있다는 것. " " ……. " " 유가인, 넌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모든 것에서 멀어지는게 리리스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널 생각하며, 널 위해 사라져간 그녀 때문에 자기 자 신은 행복해져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면 내가 말해주지. 그건 틀렸어. 그녀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저버려서는 안돼. 그거야말로 리리스의 희생을 의미없게 만드는 짓이다. " " 의미 없게……만든다고? " " 그래. 의미가 없지. 그녀는 널 위해 죽음마저 불사했건만 정작 너는 네 자 신을 조금도 위하고 있지 않으니까. 지금의 네 모습은 그저 리리스를 단순 한 빚쟁이로 만드는 것에 불과해. 그녀가 너를 사랑했으니까 너도 그녀만 을 생각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녀가 정말 그런 것을 바라고 사라 졌다고 생각해? "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어요. 그런건 나도 알고 있다고요! 하지만―! " 무엇보다 넌 중요한 걸 잊고 있어. " 마리는 가인의 손을 자신의 양 손으로 단단히 움켜 잡았다. 마치 자신의 온 기가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듯이. 서로의 마음이 통하기를 바라듯이. 실제로도 그녀의 손은 너무나 따뜻했다. 그렇기에 가인은 손을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숨 죽여 그녀의 목소 리에 귀를 기울였다. " 사랑에 대가는 필요없다는 것.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전해야 한 다는 것. " '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 같은 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데, 일단 좋아하 게 됐으면 노력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 " 이건 네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나? " '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이 전해지도록. 시민 씨가 날 바라봐주도록…… 최선 을 다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 작년 마리가 융합형 몬스터에게 의지를 빼앗겼을 때. 그때 번민에 빠졌던 그녀를 일깨워준 목소리. 그녀의 정신 세계 속으로 들어 와 필사적으로 전해진 유가인의 마음. 가인은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하며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의 모습에. 그녀의 당당함에. 그녀의 확고부동함에. " 선배, 나는……, " " 아마 너도 잊어버렸던 것은 아닐 거야. 그렇기에 최선을 다한 리리스의 사 랑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그녀의 사랑에 보답하려고 애 썼던 거겠지. " 마리는 혼란스러워하는 가인을 진정시키듯 달래주었다. " 하지만 그 보답하는 방법이 틀렸어. 리리스의 사랑이 그토록 소중했던 거 라면. 그녀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너 자 신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보여준 사랑에 부끄럽지 않 도록, 너 자신도 노력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마음에 충실해지는 것. 그것이 리리스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그녀의 사랑을 존중해주는 길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 " ' 가인, 우리는…… 친구지? ' 리리스의 절박한 질문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했던 자신의 목소 리도. ' 친구야, 리리스. 넌 내 소중한 친구야.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 그렇게 자신이 말했을 때 그녀는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래서 그 행복을 지켜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여준 마지막 미소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절대로 깨뜨려서는 안된다고, 그렇게……생각했다. ' 전 정말이지……어떻게 해서든 가인 씨를 보려고 하는데. 보고 싶은데. 가 인 씨는 왜 매번……. ' 슬퍼하던 시민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녀를 외면해버리던 자신의 모습 도. ' 가인 씨, 우리 둘이서…… 이대로 어딘가로 가버릴래요? ' 만약 그때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였더라면, 그랬다면 그녀도 리리스처럼 기뻐 했을까? 리리스처럼 행복하게 웃어줬을까? ' 시민 씨를…… 사랑하는데요? ' 다를 것이 없었다. 리리스나 시민 씨나. 그리고 자신이나 마리 선배나. 모두가 다를 바 없었다. 모두들 똑같았다.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은……. ' 모두가 같았던 거야. ' 자신의 마음이 전해지면 기뻐하고, 거절당하면 슬퍼하고. 하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그 진심마저 상대에게 전할 수 없을 때. 무시 당할 때. 외면당할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며 슬픔이다. 그리고 사랑을 받아들일 여지마저 상대에게 주지 않는 것. 상대의 불행을 방 치하는 것이야말로 무거운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이다. 나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랑까지 모욕해왔던 거야! ' 사랑해…… 가인. ' 리리스도! ' 내가 평생 가인 씨의 곁에 있을게요. ' 시민 씨도! ' 정말로……사랑해. ' 심지어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마리 선배도! 모두들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자신 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품어왔어. ' 그런데 나는 뭐야? '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리고, 무감각한 척, 스스로를 속여왔던 나는 뭐지? 사랑 이라는 것에서 도망치기만 했던 내가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지켜주겠다니! 그 런 자격이 나에게 있기는 하단 말인가? 자신의 사랑조차 지키지 못했던 주제 에? ' 내……사랑은……. ' 처음에는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내 곁에서 웃어주며 반겨주는 그녀가 좋아서, 하루 하루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서, 그렇게 나는 주체할 수 없이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아무리 의미 없는 말일지라도, 아무리 사소한 몸동작일지라도, 나는 그녀의 모든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면 모두 사 랑하게 되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 그녀가 나같은 녀석을 좋아할 리가 없지. ' 몇번이고 그녀와 나를 비교하면서 의기소침해지고, 몇 번이고 포기하기를 반 복. 하지만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좋아한다. 너무나 좋아한다. 정말 좋아해. 이 마음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수십번도 더 고 민해봤지만 결국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라는 것 뿐이었다. ' 시민 씨. 시민 씨. '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이 마음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 잊어버리려고 했을까? 가인은 통감했다. 자신이 해야했던 일은 처음부터 하나 밖에 없었노라고. 리리스를 위해서라도. 시민 씨를 위해서라도. 마리 선배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 다. " 선배, 전…… 시민 씨를 사랑해요. " 자신의 사랑에 충실해지는 것. " 응. 알고 있어. " 그리고 그런 가인의 고백에 마리는 빙긋 미소지었다. 흡족하게. 그리고 쓸쓸 하게. " 잘……알고 있어. " 왜냐하면, ' ……그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유가인이니까. '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8 - Ｂy Ｎext Ｎeo =-=-=-=-=-=-=-=-=-=-=-=-=-=-=-=-=-=-=-=-=-=-=-=-=-=-=-=-=-=-=-=-=-=-=-= " 네가…… 어떻게 여기에? " 시민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형의 모습에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딸랑 뒷편에 있던 현관문이 닫히며 예의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시영은 시민의 어 깨 너머로 학원의 전경을 살피며 미소했다. "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었구나. 피아노 학원이라……. 내가 준 목소리를 이 용하지 않고서 악기로 노래한다고? 과연 너다운 직장이구나. 바보같은 성 실함도 여전해. " " ……! " 내가 준 목소리? 그 기분 나쁜 울림이 시민을 분노케 했다. 새하얀 먹지 위로 검은 잉크가 떨 어지듯이, 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추악한 어둠이 끓어오른다. 번져나간다. 시민은 시영의 눈에서 피아노 학원의 입구를 가리며 낮게 소리쳤다. " 왜 여길 찾아온 거지? " " 왜라니. 동생이 일하는 곳에 형이 찾아오는 건 당연하잖아? " " 이 뻔뻔한―! " 당연하다니! 뭐가 당연하다는 거야? 뭐가! 시민은 이를 갈며 오라 능력을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피 아노 학원의 식구들에게로 생각이 미친다. 원장 선생님! 학생들! 시영은 그런 시민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후. 왜 그래? 평소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간 거야? " " 이 자식! " 시민은 소리치며 시영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영의 입가 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시민이 보여주는 감정 하나 하 나를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 그래. 그래. 오라 능력은 쓰지 않는게 좋을 거다, 동생아. 너도 알다시피 이 일대의 그림자들은 모두 내 수중에 있어.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충 짐작하겠지? " " 크……! " 시민은 치를 떨며 시영의 멱살을 풀어주었다. 시영은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바로 잡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 자.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모처럼 얘기를 나눠보자고. 우리 형제는 꽤 오 랫동안 요원했잖아? 내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그건 역시 대화가 부족하 기 때문인 것 같아. " " 흥! 이제와서 너같은 녀석과 나눌 얘기따위는 없어! " " 없을리가 없지. 넌 궁금하지도 않은 거냐? 내가 왜 너에게 힘을 주었을까, 라든가? " " ―! " 시민은 허를 찔린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궁금하지 않냐고?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엎은 사건. 절망을 안겨준 그 날의 기억! 하루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언제나 궁금해왔다. ' 날 지켜준댔잖아? 약속했잖아? ' 묻고 싶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왜 날 배신했냐고? ' 세상에서 둘 뿐인 형제였잖아? ' 너무나……묻고 싶었다! " 아, 잠깐. 지금 여기서 얘기하겠다는건 아니야. " 시영은 대답을 바라는 시민의 열망을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그렇게 동생의 얼굴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떠오르자 그는 실소한 다. " 나도 거추장스러운 건 싫어하지만 어차피 말로 해서 풀어낼 수 있는 얘기 가 아니거든? 만약 여기서 이유를 말 한다손치더라도 네가 곧이곧대로 믿 어줄 아이도 아니고. " " ……장소를 바꾸겠다는 거냐? " 시민이 냉정하게 쏘아붙이자 시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영락없이 반항적인 동생과 인자한 형이로군. " 그래. 모든 것을 가르쳐줄 장소로 안내해주마. " " 모든 것을 가르쳐줄 장소? " " 옴팔로스. 너도 한번 가본 적이 있겠지? 언더 시티의 최하층에 위치한 신 전 말이다. "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저번 리리스의 언더 시티 침공 때 방문했던 거인들의 무덤이 생각났다. 그리고 무덤의 상공에 펼쳐진 붉은 하늘, 그 인지를 벗어난 의지의 집합체도……. " 우리 형제의 오해를 푸는데 그곳의 하늘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겠지. 모든 것은 그 붉은 노을 아래서 시작되었으니까 말이야. " 그 말과 동시에 시영의 몸이 어두운 벽의 그림자 사이로 녹아들어간다. 시민 은 깜짝 놀라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자, 잠깐! " " 나는 지금부터 그곳으로 향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서둘러 따라오도록.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 " 제길! 가지맛―! " 시민은 시영이 사라진 벽을 맨손으로 후려치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끝까지! 끝까지 저 녀석은 날 농락할 셈이란 말인가! 끝까지! ―아, 한가지 얘기해주는 걸 깜빡했군. 그렇게 분노하는 시민의 귀로 시영의 위스퍼링이 들려왔다. ―서둘러서 따라오라는 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게 좋을 거야. 잠시 후면 너 희들의 피스메이커는 제 구실을 못하게 될 거거든? " 뭐? " 제 구실을 못하게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글쎄. 과연 무슨 소리일까나? 후후. 아무튼 카타스트로피는 이미 시작됐다. 서둘러라, 한시민! 그것을 마지막으로 시영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시민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형의 뒤를 쫓을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것인가. 과거에 집착할 것인가. 미래를 꿈꿀 것인가. 모든 것은 그녀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정말 묘한 힘이 있다. 혹자는 착각이라고도 하고 자기 암 시, 망상이라고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사람을 맹목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가인도 그랬다. 그저 입 밖으로 시민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 뿐인데. 망설 임을 버린 것 뿐인데, 단지 그것만으로도 시민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을 가 득 채웠다. 당장에 만나고 싶다. 보고 싶어! 지금껏 무리해서 자신의 마음을 억누른 탓일까. 그 반동 때문인지 가인은 진심을 털어놓은 지금, 시민에 대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초조함 같기도 했다. ' 초조하다고? 왜? ' 이유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냉대로 상처받던 시민 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슬퍼하던 그녀가 생 각나니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 어떻게든 시민 씨를 만나야 해. 만나서 사과하지 않으면! ' 어째서 그런 모진 말만 골라서 했던 거냐?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거지, 유가인? 가인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리리스를 위한답시 고 시민 씨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야말로 구제 불 능이다! ' 왜 나는 언제나 이 모양인 거야? 왜 매번 후회하기만 하는 거지! ' ……물론 그런 삽질하는 점이 유가인 답다는 말은 여기서 생략하도록 하자. 어쨌든 후회가 있기에 반성이 있고, 반성이 있기에 성찰이 있는 법. 가인은 당장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고 싶었다. 문제는 시간이 너무 지났다는 점. 과연 지금 와서 모든 것을 되돌릴 기회가 자신에게 남아있기는 한 걸까? 가인의 초조함은 여기서 비롯되고 있었다. ' 어디로 가야 시민 씨를 만날 수 있지? 역시 학원일까? 아니면 집? ' 만나서 사과를 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 시민은 절대로 자신을 용 서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걱정해도 될 일이었다. 일단은 시민 씨와 만나야 한다. 만나서 무슨 얘기라도 나누지 않으면 안돼!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가인은 허둥지둥 옥상을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다, " 아, " 눈 앞에 서있는 마리의 모습에 깨닫게 된다. 자신이 아직 그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 저기. 선배. 저는……. " 가인은 말문을 열어보았지만 차마 뒷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안하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고맙다고 해야할까? 어떻게 운을 떼든 간에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절 뿐이었다. 그가 시 민을 사랑하고 있는 이상, 마리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저는……. " 가인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의 감촉을 깨닫고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다. 마리 선배. 언제나 자신이 힘들때면 힘이 되어준 사람.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싸워준 사람. 곁에 있어준 사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로 많은 도움을 그녀에게 받았다. 아마 그녀가 없 었더라면 자신은 여기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진즉에 떨어져나갔을 거야. 버 텨낼 수 없었어. 선배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 " ……. " 그렇게 고민하는 가인을 마리는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그의 모습을 두 눈에 새겨넣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유심히.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가봐라. " " 예? " 가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하지만 마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곁을 지나쳐 옥상의 철창으로 걸어간다. " 대답은 아까 네가 했던 말로 충분하다. " 아까 내가 했던 말이라면……. 가인은 곧 자신이 시민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것을 떠올리고 얼굴이 붉어졌 다. 결국 그 고백이 거절의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 이제는 네가 네 마음에 충실해져야 할 때다. 어서 빨리 시민 씨를 만나러 가봐. 시민 씨……, 그동안 많이 슬퍼하셨으니까. " " 하지만 선배, " 이런 선배를 놔두고 제가 어떻게 혼자 갈 수 있겠어요? 등을 돌리고 있는 마리의 모습은 너무나 쓸쓸해보였다. 가인은 도저히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떠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가인의 성격 상 이런 자신 을 홀로 두고 떠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서글프도록, 잘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외쳐야만 했다. " 유가인! " " 아, 옛! " 마리의 호명에 가인은 반사적으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녀와 함께 해온 수련 때의 버릇이 나온 것이다. " 사부의 명령이다. 당장 시민 씨에게 고백하고 오도록! " " ……아니. 그래도 명령이라니. " " 내가 말하지 않았나! 검을 배우는 것만이 가르침이 아니라고! 사소한 일 상의 가르침이 더 중요한 거다! " 또 이런 억지를. 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마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그녀의 등이 쓸쓸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등은 여전히 단단하고 자신따위는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 보였다. 그래. 바로 이런 강인함이다. 언제나 남을 위해 힘을 내는 저 모습이야말로 내가 존경해오던 마리 선배의 모습이야. 분명 자기 자신이 더 힘들텐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저런 말을 ……. " 선배도 참. 아침에 분명 다시는 강압적으로 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 " 으음……. " 가인의 지적에 마리는 할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강압 적인 여자는 싫다고 하는 바람에 호들갑을 떨었던 일이 생각났다. 마리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투덜거렸다. 이제와서 고쳐봤자……. 어차피 나란 아이,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고. 또 더 이상 그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어졌으니……. " 사실 말이에요, 선배. " 그런 마리를 향해 가인은 조용히 말을 건넸다. " 강압적인 여자는 싫어하지만. 저…… 선배의 그런 모습은 좋아해요. " " ―! " 그 말에 마리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무렇지도 않 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말을 듣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가인을 좋 아했던 지난 날들이 저 말 한마디에 모두 다 떠올라 버린 것이다. 그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남 몰래 가슴을 졸이며 두근거리던 나날이, 그때 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이토록. 이토록 좋아하는데. 이토록 나는 그를……. " ……. " 가인은 마리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민을 좋아하 는 자신이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니. 단 한가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저 그녀를 혼자 있게 해주는 것.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마리에 대한 주제 넘은 동정과 연민이 될 뿐이다.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무분별한 자상함은 조금도 상대를 위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가인은 옥상의 입구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 었다. " 가인. " 그때 그런 그를 마리가 불러세웠다. 가인이 돌아보자 그곳에는 여전히 마리 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다만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는……. " 다음에 볼 때는 서로 웃으면서 보는 거다. " 따뜻하다. 그 말에 가인의 입가로도 미소가 번져나갔다. 가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 며 소리쳤다. " 예. 반드시! " 그리고 그는 옥상을 떠났다. 마리는 가인이 건물을 내려가 운동장을 가로질 러 교문을 나설 때까지 줄곧 철창 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무렵. 마리는 나직히 아무도 없는 옥상을 향해 말했다. " 지켜보고 있었던 것. 다 알고 있습니다. 그만 나오십시오. " 슥 그러자 옥상의 입구 쪽 사각 지대에서 한 인영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영은 다름 아닌 카구라 코마히코였다. 마리를 찾아 옥상에 올라왔던 그는 진즉에 가인과 마리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색해진 표정으로 마리에게 다가왔다. " 고의는……아니었습니다. 다만 나오기가 어려워서. " 나오기가 어려웠다면 자리를 피할 것이지. 굳이 숨어서 지켜볼 필요는 없었 을텐데(…….) 하지만 마리는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마찬가지로 철창 밖을 계속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코마히코는 그런 마리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자신도 철창 밖을 바라보 았다. 그러자 기묘한 침묵이 그들의 주위로 멤돌기 시작한다. " ……. " 코마히코는 자신이 들고 있던 축하 꽃다발을 마리에게 건네줄까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대신 축하의 말만큼은 전해주었다. " 훌륭하셨습니다. " " ……. " 그것이 마리의 연기에 대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가인에게 용기있게 고백한 것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리도 굳이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코마히코는 잠자코 그녀를 지켜보다가 곧 철창을 쥔 마리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의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버텨 내는 마리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 아가씨. " 코마히코는 자신도 모르게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슬퍼하는 그 녀를 달래주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의 품 안에서 울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잠깐의 고민 끝에 그러지 않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그의 아가씨는 남에게 의존하는 슬픔 보다 혼자서 끌어안는 슬픔 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 그녀는 저렇게나 꽂꽂하게 서있다. 주위의 도움은 절대로 허용하 지 않겠다는듯 완강하게 스스로를 지탱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 아가씨는 그야말로 사부님의 딸이로군. ' 이토록 고고(孤高)한 모녀라니. 코마히코는 자신의 고국에 있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담담하게 미소지 었다. 그리고 마리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쭉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 으음. 너무 늦는데요. 가인 씨랑 마리 양. " 한성고의 무대 대기실. 시간을 확인하던 수정이 의아함을 표시하자 하나를 돌보고 있던 미연도 맞장구를 쳤다. " 그러게요. '잠깐 볼 일이 있다며' 가인이를 데리고 가고선……. 도대체 무 슨 일일까나? " 꿀꺽 일행 중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볼 일이 있다며.' 사실 이것은 별반 대수롭지 않은 대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볼 일이라는 불 특정 다수 의미 명사에 약간의 강세를 주는 것만으로도 그 뜻은 무궁무진하게 위험해질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명사의 주체가 남녀 단 둘일 경우에는 더더욱! 특히 채영과 시더는 수정이 말을 꺼내기 전부터 내내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 었는지 가장 큰 동요를 보였다. " 그, 글쎄요∼ 이왕 나간 김에 축제 구경을 하고 있다든가. " " 아니면 마리의 팬들에게 둘러싸였다든지. " " 아! 혹시 길을 잃어버린 것은? " " 그래! 머리를 다친 거야. 그래서 기억을 잃어버린 거다.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인 거야! " " 어쩌면 외계인들에게 납치당했을 수도! " 어이. 점점 현실을 도피하고 있는데 말이야, 당신들……. 결국 보다 못한 재영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질렀다. " 무릅니다! 너무도 물러요! 당신들은 아직도 유가인 녀석의 본질을 파악하 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녀석은 페르몬의 화신입니다! 낙타가 바늘 구 멍을 통과하지는 못할 지언정, 녀석의 페르몬은 바늘 구멍을 통과해서 상 대를 부지불식간에 감염시킨단 말입니다! 정신들 차리세요. 이제는 깨어나 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녀석의 거짓된 모습에 현혹되어서는― " 퍽 재영의 호소는 거기서 끝을 맺어야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여성 일동이 마치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처럼 동시 전방위에서 재영의 머리를 향해 하이킥 을 꽂아넣었던 것이다. ' 진실은……통하지 않는 것일까? ' 재영은 눈물을 흩뿌리며 널브러졌고, 그런 남자 친구를 시내는 씁쓸하게 웃 으며, 재민은 오열하며 끌어안았다. " 후후. 바보 재영 군. 이제는 그만 포기할 때도 됐잖아? " " 형아의 목이! 형아의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 여기서의 교훈은 '사람따라 장소따라 가려가면서 말하자' 가 되려나. 어쨌든 그렇게 재영이 희생한 보람은 있었는지, 진실의 한 가닥은 여성 일동 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가인의 페르몬을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던 이들이 바로 그녀들인 것이다. 수정과 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자신들의 소견을 밝혔다. " 하긴. 의미심장하긴 했지요?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고. 그 가장 빛나는 순 간에 연모하는 남자에게 개인 면담을 청하다니. " " 의도한 것인지 의도하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절호의 타이밍이라고 밖에 할 수 없군. 마리도 참∼ 할 때는 하는 아이잖아? " " 우우우우우― " 시더와 채영은 듣기 싫다는듯 귀를 막으며 울먹였다. 그런 피스메이커 관계 자들의 모습에 유리는 한심하다는듯 푸념했다. 놀리는 사람들이나 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 유리 양은 괜찮아요? " 그때 수정이 불쑥 유리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 물음에 유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선다. 저 두사람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나까지 끌어들일 속셈? " 괜찮다니……. 뭐가? " " 가인 씨가 마리 양이랑 단 둘이 있잖아요? 평소같으면 가장 노발대발할 사 람이 유리 양이면서. 오늘은 너무 조용하네요? " " ……. " 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수정의 시선을 피했다. 수정의 지적은 누구보다도 그 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왜요? 가인 씨랑 무슨 일 있었어요? " " 그런거 아냐. " " 그럼 왜 그러는데요? " 계속되는 수정의 질문에 유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분 탓일까? 왠지 수정 의 한마디 한마디가 꼭 자신을 꾸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꼭…… 표현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 유리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냥……. 그냥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곁에서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그런 것만으로도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거 잖아? 그런 것도 사랑이잖아? " 그것은 수정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말들이었다. 표현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깊이 깊이 감춰버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오빠의 곁에 머무 를 수 있어. ' 가인. 우리는……친구지? ' 그것이 유리가 자신의 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리리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할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아마, ' 오빠도 마찬가지일 거야. ' 오빠도 계속 나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숨기면서, 그렇게 어느 누구의 마음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프다.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지켜야할 마음이라니! 오빠는 정말 앞으로도 계속 그런 길을 걸어갈 셈인 걸까? ' 나도…… 마찬가지야? ' 오빠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그에게 닿는 일도 없이. 계속 계속, 그렇게 정처없이 떠돌기만 해야 하는 걸까? " 그래요, 유리 양.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사랑이에요. " 수정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하지만 그런 사랑은 반드시 후회하게 되요. " " ―! " 유리는 깜짝 놀라며 수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수정의 얼굴은 짙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 처음에는……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저 그와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죠. " 수정? " 그렇기에 모르고 있었어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슬픔을.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할 수 없게 된 마음을. 너무 늦어버렸다는……후회를. " 유리는 수정에게서 느껴지는 마인드 리딩으로, 그것이 그녀의 진심 임을 알 수 있었다. 또 수정 자신이 직접 겪어 보았기에 할 수 있는 고백이라는 것도. ' 어쩌면 수정은……. ' 유리는 애써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그녀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 만 그보다 한발 앞서, 수정이 빙긋 미소지으며 유리의 어깨를 두들긴다. " 전해지지 않는 사랑은 슬픈 거에요. 그러니까 전 유리 양이 그러지 않았으 면 좋겠어요. 언제까지나 최선을 다하도록……. 알겠죠? " " ……. " 유리는 그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하지만 진심은 전해졌을 거 라고, 수정은 그렇게 확신하며 입가에 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삐삐삐삐 그때, 대기실로 일련의 기계음이 울려퍼진다. 바로 피스메이커 관계자들의 손목에 채워진 무전기의 신호음이었다. 수정은 재영과 시내, 재민이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들을 쳐다보자 쓴 웃음을 지었다. 분명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뭐라고 둘러댄다지? " ―! " 하지만 무전기의 액정을 바라 본 순간, 그녀의 머리 속은 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언더 시티에서 보내온 메세지. 그것은 바로― ' 또 다시 외면당하면, 또 다시 거절당하면, ' 그때는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 나는 아직 아무 것도 얘기하지 못했는데. '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 가인 씨, 날 바라봐요! 제발 내 얘기를 들어줘요! ' 시민은 등을 돌린 가인을 향해 몇번이고 마음 속으로 외쳤는지 모른다. 몇번 이고 사정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매정하게도 그녀를 따라주지 않았다. 마치 얘기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처럼 수 많은 고난들이 연달아 몰아닥쳤고. 그 결과, 가인은 시 민의 얘기를 들어줄 일말의 여유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테레이아와 진우의 죽음. 브루스의 배신. 시민은 그런 일들로 슬퍼하는 그에게 또 다른 고뇌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진실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참기로 했다. 그의 마음이 진정되기만을 기다려왔어. ' 하지만, ' 날이 갈수록 진실은 점점 무거워지고, 고백은 점점 힘들어져갔다. 거기에 가인은 여전히 냉담하기만 하고……. ' 다 내 잘못인가? 줄곧 거짓말을 해온 대가를 받는 거야? ' 시민은 자조했다. ' 애시당초 나 같은 사람에게는……. ' 누구를 좋아할 자격같은 건 없었을지도 몰라. 그러자 시야가 흐려진다. 시민은 소리 없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내며 스 스로를 꾸짖었다. 언제부터 자신은 이렇게 약해진 걸까? 언제부터 이렇게 눈 물이 해퍼진 거지? 한시영. 그를 쫓을 때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다. 슬퍼할 여유조차 없이 자신 을 몰아붙였는데. 그런데……. ' 가인 씨를 만나면서부터…… 모든게 엉망이 되어버렸어. ' 웃게 되었다. 울게 되었다. 화내게 되었다. 기뻐하게 되었다. ' 더 이상 형의 일로 분노하지 않게 되었어. ' 언제나 시민의 머리 속에는 시영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 대 한 복수심만이 그녀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원동력이었다. 분명 그래야만 하는데, 그것이 언제부턴가……. ' 가인 씨 때문이야. 그 사람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만 만나지 않 았더라도. '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텐데!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텐데! 시민은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속이 상했다. 자신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버 린 가인이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 아니에요! 미안해요, 가인 씨. 그렇지 않아요. 가인 씨는 나쁘지 않아요. 다 내가 나쁜 거에요. 다 내가 나쁜 거니까! ' 당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언제까지나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었을 거에 요. 여전히 과거에만 집착한채, 미래를 꿈꿀 생각도 하지 않으며, 그렇게 줄곧 자포자기 해왔을 거에요. ' 그러니 제발 날 미워하지 말아요. 다시 돌아봐주세요. 내 얘기를 들어줘 요. 부탁이에요! ' 부탁이에요! 부탁이에요! 시민은 이 자리에 없는 가인을 애타게 찾으며 소원했다. 그가 나타나 흔들 리는 자신을 잡아주길 바랐다. 그 어느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 ……. " 하지만 그렇게 뜻대로 따라줄 리가 없다. 모든 것이 어긋난 상황에서 어긋 난 기대를 해봤자 이루어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허황된 기대다. 도피인 것이다. " ……좋아. " 결국 시민은 결정을 내렸다. " 따라오라고? 그래. 얼마든지 따라가주지. 지옥 끝까지 따라가주겠어. " 눈물로 젖은 그녀의 얼굴에서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 네 녀석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난 아무 것도 필요 없어. " 미안해요, 가인 씨. 미안해요. 미안해요……. ' 나는 역시― ' " 헉! 헉! 헉! 헉! " 역시나 생각대로, 집에는 시민이 없었다. 가인은 그녀의 부재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아르센 피아노 학원으로 향 했다. 학교에서부터 내내 쉬지도 않고 달렸더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조금도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차 게 두 발을 교차할 뿐이었다. ' 시민 씨. 시민 씨. ' 보고 싶다. 만나고 싶어! 조금이라도 빨리! 더! 더! " 헉! 헉! 헉! 헉! " 익숙한 골목과 건물들이 보여왔다. 아르센 피아노 학원은 26구역의 지하철 역 주변에 있었다. 집에서 달리면 얼마 걸리지도 않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며 건물의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일층. 이층. 삼층. 삼층으로 올라가자 낯익은 피아노 학원의 현관문이 보였다. 분명 저 문 너 머에 시민 씨가 있을 터! 가인은 초인종을 누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벌컥 문을 열어제꼈다. 그러자 현 관문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 시민 씨! " 시끄러운 종 소리도 가인의 외침을 가리지는 못했다. 가인은 신발을 벗고 그 대로 학원의 복도로 걸어들어갔다. 학원은 그가 예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피아노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사람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 학원, 쉬는 날인가? ' 그럴 리 없을텐데……. 의아해하며 복도를 둘러보던 중, 가인은 곧 복도의 끝방이 시끄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무슨 소리지? 아나운서? TV소리인가? 가인은 조심스레 소리가 나는 방으로 걸어가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스크를 쓴채 담요로 몸을 둘러 맨 그녀는 다름 아닌 김민경 원장이었다. " 어라, 이게 누구야? 가인 씨? " " 아, 안녕하세요. " 가인은 김민경 원장의 차림새에 얼이 빠져있다가 뒤늦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민경의 뒤편으로는 원장실인듯한 방안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중앙에서 는 TV가 한창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민경은 손에 든 리모콘으로 TV의 볼륨을 줄이며 가인을 방안으로 안내했다. " 어서 들어와요. 방이 엉망이죠? 제가 감기에 걸려서 영 청소를 못했으니 이해해주세요. " " ……그러고 보니 아프시댔죠. 이렇게 학원에 나와 계셔도 되는 거에요? " 가인은 아침에 시민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민경이 아프기에 시민이 대신 학원에 나와야 했던게 아닌가? " 아, 그게……. 미안하게 됐지 뭐에요. 제가 눈치도 없이 이런 날 시민 씨 를 붙잡아둬서. 그래도 좀 쉬니까 나아져서 얼른 시민 씨와 교체해줬는데. " " 그럼……? " " 만나지 못한 거에요? 시민 씨, 곧바로 한성고에 갔을텐데. " 이런! 가인은 허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닭 쫓던 개도 아니고. 기껏 달려왔더니 시민 씨는 한성고로 가버렸다고? 아무래도 중반에 서로 길이 엇갈렸던 모양이다. ' 그래도 시민 씨……. 정말로 오실 생각이셨구나. ' 오지 않으시길래 영락없이 화가 나신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가인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여기에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기만 한다면! " 시민 씨는 언제쯤 나가셨어요? " " 에, 한 30분 전쯤? 레슨 끝나고 20분 정도 지났으니까 그쯤 되겠네요. " 민경의 말에 가인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민 씨, 벌써 한성고에 도착해서 날 찾고 있는 것은……. 가인은 한시라도 빨리 학교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기다림은 이제……충분했다. " 아,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프신데 갑자기 찾아와서 정말 죄송해요. " " 이런.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려고?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떨어 진 모양이네. 그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 민경은 가인의 전신이 땀에 젖어있는 걸 보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 눈앞 의 소년은 어지간히도 빨리 시민을 만나고 싶은 모양이다. " 그럼 얼른 가보세요. 시민 선생님, 하루 종일 울상만 짓다가 떠났으니까 만나면 좀 잘 해주시고. " " 아, 예! " 민경의 말에 가인은 쑥스러워하면서도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작 별을 고하려고 할 때, 《피스메이커는…….》 TV에서 들린 한 목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가인은 민경에게 숙이 던 고개를 들어 TV를 바라보았다. 뭐? 피스메이커가 뭐가 어쨌다고? " 응? 왜 그래요, 가인 씨? " " 저기……. TV 소리 좀 키워주시면 안될까요? " 가인의 부탁에 민경은 의아해하면서도 리모콘을 조작했다. 그러자 TV 소리가 한층 뚜렷하게 그들의 귀로 들려온다. TV에서는 한창 지구 방위군의 성명(聲明)이 생방송으로 중개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29년 1월. 통일 한국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86호 몬스터에게 우리 지구 방위군은 한국 통합군의 3개 기갑사단을 동원 했지만 역부족으로 퇴각해야만 했습니다.》 성명을 발표하는 사람의 밑으로 라경일 장군이라는 자막이 떠오른다. 그는 2007년 한국 통일 때 북한 인민군에서 통합군으로 재평성된 평양 출신의 대 장으로서 대부분 지구방위군의 성명 발표 때면 언론에 얼굴을 비췄기에 가인 과 민경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라 장군은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쓰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때마침 대 몬스터 특무기관 피스메이커의 도움으로 사태는 호전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한국 통합군은 피스메이커의 존재를 인정, 적극 그들 과 협조하겠다는 PM조약을 체결하게 되죠. 몬스터는 이(異) 차원의 존재로서 우리 인류와는 분자 구조, 입자 하나조 차 같지 않은 새로운 이성체. 그런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은 오직 피스메이커 뿐이었으며, 실제로도 그들은 지금까지 잘 해주었습니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던 몬스터를 2033년이 끝나가는 오늘날, 박멸시키 기에 이르르니까요.》 박멸? 몬스터를 박멸시키다니? 그것은 피스메이커의 일원인 가인조차 금시 초문인 내용이었다. 물론 노아가 판게아에 침입할 수단을 잃어버린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후 의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저렇게 단정지어 서 얘기하다니! 《박멸이라니? 몬스터가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올 5월달부터 몬스터의 출현은 급속도로 잦아졌고, 실제로 통일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몬스터를 찾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입니다. 또 현당국에서도 10월 4일 이후로 몬스터의 침공은 중단 된 상태입니다.》 기자와 라 장군의 문답에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마 세계에서 몬스터를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은 각 용맥에서 라무의 아이 들을 더미로 만들어내던 용마인들이 쿠사나기에 의해 한 개체로 통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런 통합된 D타입들조차 머신 아더에 의해 판게아 밖으 로 추방당했으니……. 《그렇다면 왜 피스메이커는 이러한 중대한 사실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째서 매번 지구방위군의 입으로 상황을 전달받아야하는 거죠?》 《……그것은 말입니다.》 기자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라 장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 피스메이커가 자신들의 기관을 앞으로도 계속 존속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현장에서 질문하던 기자들도, 뉴스를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다들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피스메이커의 존재의의는 몬스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상 대할 수 없는 괴물들에게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기관. 그 때문에 우리 들은 피스메이커의 모든 부당한 요구들을 들어줘야 했습니다. 일방적인 대피 방송으로 사회 업무를 마비시키지 않나, 몬스터와의 싸움으로 시민들의 주거지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론을 통한 제대로 된 양해조차 구하지 않습니 다. 세계 각국의 공권력을 멋대로 행사하면서도 처음부터 그것이 자신들의 힘인양 으시대죠. 그런 그들에게서 몬스터가 사라진다고 보십시오. 더 이상 상대할 적이 없 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명목으로 그러한 힘들을 유지한단 말입니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피스메이커가 몬스터의 소멸을 공표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 뭐라고!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S언론사의 하유정 기자입니다. 피스메이커의 언론 통제는 예전부터 있어왔 던 일입니다. 단지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서 피스메이커 전체의 의지를 파 악하는 것은 억측이 아닐까요?》 《물론 그 이유 하나 뿐이었다면 저희도 이런 자리에서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 여기를 봐주십시오.》 라 장군이 자신의 뒤편에 있는 스크린을 가리키자 거기로는 하나의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영상으로 각 방송국의 카메라들이 집중되고, 언론사의 카메라들이 플래쉬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TV의 영상을 주시하던 가인은 점점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영상에서는 지금껏 피스메이커가 통제해왔던 모든 몬스터와의 전투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가인 자신을 비롯한 피스 대원들이 오라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 몬스터와의 전투로 파괴되어가는 시가지. 죽어가는 시민들. 무엇보다 가관인 것은 12구역을 폐허로 만드는 D타입과 그 D타입에 맞서는 머신 아더의 모습이었다. 두 거대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현상(現象)은 모든 환상과 이상을 무너뜨리는 비상식의 절정이었다. 재앙이다! 가인은 자신이 직접 그 참상을 겪었지만 이렇게 제3의 관점으로 그때의 광경 을 보게 되니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꼈다. 객관적인 혐오감이라고 해야하나?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처참함이 깨끗한 영상을 통해 여과없이 눈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추악한 기분이었다. 《이, 이건 대체……. 진짜, 인 겁니까?》 하유정 기자의 떨리는 목소리에 라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그들이 감춰왔던 진실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족 들이 죽고, 생활터가 사라져간 이유입니다.》 화면에서는 계속해서 기가스 티폰과 머신 아더의 전투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힘들을 보유해온 그들이, 이러한 진실들을 은폐해온 그들이, 과연 순순히 누려온 통수권(統帥權)을 포기할 것 같습니까? 몬스 터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을 끝낼 것 같습니까?》 천만에― 성명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장담하지요. 몬스터를 향한 그들의 힘은, 자신들의 야욕을 지키는데 사용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위치를 빼앗으려는 모든 것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 낼테지요. 이것이 몬스터와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몬스터가 사라진 대신 그들은 제 2의 몬스터가 되어 우리들을 위협할 것입니다. 그런 위험한 미래를 여러분들은 그저 지켜보시기만 하겠습니까!》 화면에 새로운 장면들이 나타났다.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은빛 늑대 와 붉은 AI슈츠의 소년, 피스메이커와 대립하는 검은 정장 남자의 모습. 그것은 피스 블랙 한시영과 그 일당들이었다. 《그들의 힘은 명실공히 우리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피스메이커 내에서는 이미 인류의 적으로 돌아선 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죠. 그 중에서는 몬스터 측에 가담한 자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라경일 장군은 회장을 둘러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지구 방위군은 피스메이커와의 결별을 선언하겠습 니다. 그들과 맺은 모든 협정들은 의미를 잃을 것이며 이는 각국의 수뇌부 들도 공인한 사항입니다. 피스메이커! 우리가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단 하나다.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순순히 자신들의 무력을 인류에게 반납할 것! 만약 이 통보를 무 시할 시에는 우리 인류에게 협력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 즉각 그대들을 인 류의 적으로 규명짓겠다.》 인류의 적. 인류의 적. 가인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도저히 TV에서 나오는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 사람은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왜 우리에게 인류의 적이니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거지? 어째서? 삐삐삐삐 그때 가인의 손목에 찬 무전기가 신호음을 울렸다. 언더 시티의 오퍼레이터 팀이 보내오는 메세지였다. 무전기의 액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레카 급습. 모든 피스 대원들은 신속히 언더 시티로 귀환바람. 《처음이자 마지막 권고다. 투항해라, 피스메이커!》 그렇게 현 인류의 카타스트로피는 시작되었다. <제 23 화 Goodbye to Romance 完> Ｔo Ｂe Ｃontinued… =-=-=-=-=-=-=-=-=-=-=-=-=-=-=-=-=-=-=-=-=-=-=-=-=-=-=-=-=-=-=-=-=-=-=-= 次回豫告 피스메이커의 마지막 싸움. 그들의 마지막 상대는 얄궂게도 몬스터가 아닌 그들의 동족이었다. 하 소령: 이건……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에르체베트: 틀리지 않습니다. 지켜보고만 있으시지, 무력한 인간들. 드디어 드러나는 이단자의 송곳니! 한시영: 얼마든지 욕해라. 이기적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거부하더라도 난― 한시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카타스트로피를 꿈꾸는 그림자의 사도들! 그람드링: ……마스터. 이 녀석들은? 시폰: 후후.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Ignite). 네 동생들이란다, 그람. 모든 것을 파멸시킬 인류의 선악과! 이 수 많은 사리와 사욕들이 얽히고 얽혀서 만들어낸 최후의 무대. 그 무대 위에서 일어날 대단원이란 과연, 구원인 것일까 아니면 파멸인 것일까? 第 24 話 SHOWDOWN! 브루스: 성가셨어. 그래서 끊어버린 거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제 거리낄 것은 없다. 어차피 2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어. 그런 얄팍한 정 따위에 백 여년이 넘도록 추구해온 목표를 놓 칠성 싶으냐! 유가인: 그런 건……진우 씨를 죽인 이유가 되지 못해! 지금, 21세기 최후의 만찬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24화 "SHOWDOWN!"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9 - Ｂy Ｎext Ｎeo =-=-=-=-=-=-=-=-=-=-=-=-=-=-=-=-=-=-=-=-=-=-=-=-=-=-=-=-=-=-=-=-=-=-=-=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지구 방위군은 피스메이커와의 결별을 선언하겠습 니다. 그들과 맺은 모든 협정들은 의미를 잃을 것이며 이는 각국의 수뇌부 들도 공인한 사항입니다.》 인천 국제 공항의 로비. 한창 비행기에 오르 내려야 할 탑승객들은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한채 TV앞에 모여있었다. 그 비정상적인 인파의 집중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하나 하나 합세하기 시작한다. 《피스메이커! 우리가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단 하나다.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순순히 자신들의 무력을 인류에게 반납할 것! 만약 이 통보를 무 시할 시에는 우리 인류에게 협력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 즉각 그대들을 인 류의 적으로 규명짓겠다.》 TV를 응시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변해갔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중얼거린 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지구 방위군의 성명 발표에 왜 이런 내용이 나오 는 거야? " 피스메이커가……적이라고? " 어떤 사람의 중얼거림에 마치 확답이라도 해주려는 것처럼 TV속의 라장군이 소리쳤다. 《처음이자 마지막 권고다. 투항해라, 피스메이커!》 그리고 이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올 8월달에 이어 두번째로 서울시의 기본권이 통제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계엄령의 선포는 지구 방위군이 피스메 이커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거 아냐? " " 설마……. 아무렴 그럴려고. " " 지구 방위군이 피스메이커와 한두번 으르렁 거린 것도 아니고. 저러다 또 며칠 뒤면 잠잠해지겠지. " " 그런 것 치고서는 너무 요란한데. " 사람들은 저마다 TV의 내용에 불안해 하면서도 여전히 농담조로 말을 주고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과 북이 통일된 이래로 어떠한 전쟁의 위협도 받 지 않았던 그들이다. 이제와서 전쟁이 터진다고 한들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 이다. 무엇보다 2019년부터 계속된 피스메이커의 매스 미디어 통제는 국민들의 위 기 의식을 떨어뜨릴 때까지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름밖에 접하지 못한 조직의 일 따위, 그들에게 있어서는 타인의 일이나 마찬가지다. "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 한 검은 한복의 남자가 TV에서 시선을 거두며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무영신 풍류의 관장이자 피스 레드 성마리의 아버지인 성비영. 그는 누군가를 마중하 기 위해 공항을 방문하고 있었다. 딸의 연극 공연을 자신의 제자에게 맡기면 서까지. " 그 사람의 말대로군요. 그는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에요. " 비영의 뒤편에 있던 군청색 한복의 여인이 작게 속삭였다. 비영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 그렇다 하더라도……이 위험한 때에 굳이 당신까지 귀국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 " 어차피 일본 지부도 여기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 전 세계의 피스 메이커가 탄압당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한국 지부가 무너진다면 다른 지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 무영신풍류의 현 당주, 황연우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으며 남편의 말을 되 받았다. 그런 아내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 본가 쪽은 어떡하려고? 일본 지부의 피스메이커가 함락되면 그들에게 협 조했던 황씨 일족도 무사하지 못할텐데. " " 그래서 저 혼자 한국으로 넘어오지 않았습니까? 쓸데 없는 걱정입니다. " " 아니. 하지만, " " 다들 제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를 위한 무영 신풍류이고요. 그들의 강함은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알지 않습니까? " " ……그렇군. 미안하오. " 비영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어찌 연우라고 해서 자신의 일가가 걱정되지 않았겠는가. 다만 그녀는 남편과 딸, 그리고 수제자의 곁을 선택한 것 뿐이 다. 그들과 함께 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더 이상은 아인이 때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 비영은 연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 미안하오. 그리고……고맙소. " 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살며시 미소했다. " 어디든 끝까지 따르기로. 그렇게 약속했었지요? " " 아아. 그랬지. " 비영은 수십년 전의 혼례 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너털 웃음을 터뜨렸 다. 그래.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것이면 충분히 감사할 수 있어. 고마워할 수 있 어. 충분히. 충분히― " 갑시다. 우리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 " 예. " 비영과 연우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항의 입구를 나섰다. 그들 부부의 뒷모 습은 주위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달리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다. 第 24 話 SHOWDOWN! 《긴급 상황입니다. 학교 내의 모든 분들께 알립니다. 당황하지 말고 저희의 지시를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의무전투경찰들이 한성고를 포위한 것은 지구 방위군의 성명 발표가 채 끝나 기도 전의 일이었다. 의경들은 사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두고 있었는지 신속하게 기동대 버스로 입 구와 뒷문을 막고, FRP와 진압봉을 든 순경들을 울타리 밖으로 배치시켰다. 그 야말로 한성고를 인간의 벽으로 완전히 둘러싼 형국이다. 그것을 옥상의 사각 지대에서 내려다보던 마리는 낮게 신음했다. " 단순한 진압 부대가……아니군요. 장갑차들도 있어요. 저건 아무리 봐도 지 구 방위군 같은데. " " 지구 방위군 맞습니다. 의경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들이군요. " 손목의 무전기를 조작하던 코마히코가 마리의 의문에 쐐기를 박았다. 마리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 다른 이들과 연락은 해보셨습니까? " " 유레카 쪽은 불통입니다. 아무래도 전파 방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 " 전파 방해라니……. 언더 시티에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 " 그거야 알 수 없죠. 다만 오퍼레이터 팀의 무전이나 민수정 씨와의 연락으 로 미루어 봐서는 지구 방위군과 트러블이 생긴 것 같습니다. " TV로 지구 방위군의 성명 발표를 보지 못한 그들은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피스메이커와 지구 방위군의 사이에 무슨 문제 가 생겼다는 것만을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한성고를 포위한 지구 방위군의 병력이 자신들을 상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것도……. " 수정 씨는 뭐라고 하던가?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됐죠? " 마리의 질문에 코마히코는 침착한 표정으로 답했다. " 잠시 후면 교내 검문이 있을 것 같다고. 학교를 포위한 지구 방위군의 목 적은 어디까지나 저희들의 색출인 모양이더군요. 일단 상황을 지켜보다가 연락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 " ―! " 순간, 마리는 다리에서 힘이 빠졌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자리에 주저 앉았다. 코마히코가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마리가 그것을 거절 한다. "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 " 아니. 그냥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서. 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 마리는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인의 일들로도 정신이 없는 판국에 갑 자기 지구 방위군들이 들이닥치자 현기증이 났던 모양이다. 코마히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살피다가 다시 옥상 밖으로 시선을 돌 렸다. 한창 한성고의 운동장에는 의경들과 군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법적인 이탈과 변수를 막기 위해 차벽으로 행사장 주위를 둘러싼다. 무엇보다 군인들이 총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이 코마히코의 마음에 걸렸다. 과연 저것은 위협용인 걸까 아니면 사살용인 걸까? 후자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것은 훈련 상황이 아닙니다. 지시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모두 무사히 집 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방송실을 점거한 군인들의 방송에 코마히코는 표정을 굳혔다. 저것은 실상 학생들 사이에 섞여있을 자신들, 피스메이커 관계자들을 향한 일종의 경고였 다. 반항할 시에는 민간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협박이다. 《지금부터 교내에 있는 모든 교사 학생 시민 여러분들은 솔선하여 운동장으 로 집합해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시에 따라 한 분도 빠짐없 이 운동장으로 나와주십시오. 만약 운동장에 나오지 않고 교내에 잔류할 시에는, 그 분들은 저희 지구 방위군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책임 지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코마히코는 짧게 혀를 차며 마리에게 다가갔다. 마리는 그가 자신의 곁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자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 일단 수정 씨와 합류하는 편이 좋을까요? " " ……아뇨. 수정 씨 일행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따로 행동하도록 하죠. 어차 피 교내에 우리들만 남게 된다면 민간인들이 다칠 위험도 적어지고 탈출하 기에도 용이해집니다. 또 양동작전을 펼칠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 " 응……. 그렇군요. "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철창 밑으로 보 이는 학교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의경들과 버스로 가득 차 있는 입구였지만, 아까 전만 해도 저 입구 를 통해 달려나간 한 소년이 있었다. ' 가인. ' 마리는 그가 이런 소동에 휘말리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는 한창 시민 씨를 만나러 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절대로. 가인이 반드시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를 바랐다. 그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루지 못했을 때의 슬픔은…… 그녀 혼자만으로 충분하니까. " 아, " 하지만 마리는 곧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지구 방위군은 마리 일행이 한성고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 그렇다면 ……. ' 가인과 시민 씨의 행방도 찾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 한성고에 그들이 없다고 해서 꼭 그들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벌써 지구 방위군에게 신병이 구속되었을지도 모른다! " 아가씨! " 코마히코는 서둘러 옥상에서 내려가려는 마리의 팔을 붙잡았다. 마리는 당황 하며 소리쳤다. " 이, 이거 놓으십시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 "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일단 수정 씨의 연락을 기다리자고 하지 않았습니 까? " " 하지만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다간 가인이!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지도 몰 라요! 도와줘야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해요! " 코마히코는 그제야 마리가 무엇때문에 이러는지를 깨닫고 탄식했다. 정말이 지 아가씨는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는군! " 이대로 내려가서 어쩌시려고요? 강행돌파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 " 못 할 것도 없지요! " " 제발 침착해지십시오.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 "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해결책이 되지는 않아요! " 코마히코는 마리가 조금도 꺽일 기세를 보이지 않자 되레 기가 막혔다. 아까 까지만 해도 무방비 상태로 늘어져 있던 사람이 갑자기 어디서 이런 힘이 생 겨났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팔을 뿌리치려는 마리를 재차 붙들어매며 소리쳤다. " 가인 씨라면 분명 괜찮을 겁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진즉에 무전 기로 연락이 왔겠죠! " " 그러니까 그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도와줘야하는 것 아닙니까! " " 가인 씨는 강합니다! 굳이 아가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 " 모르는 소리! 제 제자의 실력은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하니 약하니를 떠나서 제자가 위험에 빠졌는데 가만히 있을 사부가 어디 있습 니까! " 이 고집불통! 코마히코는 말이 안 통하는 마리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왜 이렇게 답답 한 걸까? 왜 이렇게 맹목적인 그녀를 보면 화가 나는 거지? 왜? 코마히코는 인상을 찡그리며 마리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 강인한 남자의 완 력에 마리는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벽에 등을 붙였다. 아니, 그보다 는 이렇게 억척스러운 코마히코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놀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리는 자신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에 주춤 어깨를 움 츠렸다. " 그래요! 가인 씨가 아가씨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는 잘 알았습니다! 너무나 잘 알았다고요! 그러니까 이제 좀 그만하십시오. 그렇게 자신의 마 음을 증명하려는 것인양, 자신에게 남은 것은 그 하나 뿐이양 집착하지 마 세요! " 그렇게 외치던 중, 코마히코는 자신이 마리의 무엇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기란 말입니다! 아가씨가 가인 씨를 아끼고 사랑하 는 것처럼 아가씨 자신도 스스로를 사랑하도록 하세요! 자기 자신도 돌보 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겠단 말입니까? 희생하고 헌신하 는 것만이 사랑인줄 아세요! "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었기에. 언제나 바라보기만 하는 마리의 사랑은 곧 자신의 사랑이었기에. 연우를 멀 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다가가지는 못하던 자신과 마찬가지였기에. 그랬기에 답답했다. 그랬기에 화가 났다. 그랬기에 이토록 그녀의 사랑에 공 감하며 안타까워하게 된다. 그녀가 안쓰러웠다. 지켜주고 싶다! " 유가인. 그는 제가 지켜내겠습니다! 아가씨의 소중한 사람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켜내겠어요! " 코마히코는 마리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그의 기세에 마리는 숨도 쉬지 못하고 압도당했다.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이 뜨거워진다. " 그러니까 더 이상 무모한 고집은 부리지 마십시오! 더 이상 가인 씨를 지 키기 위해 안달하지도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아가씨는 좀 더 아가씨의 일만 걱정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 " ……. " " 왜 대답이 없습니까? 아시겠습니까, 아가씨! " " ……아, 예! " 마리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코마히코는 표정을 풀 며 마리를 놓아주었다. 속에 쌓아뒀던 얘기를 남김 없이 쏟아내서 그런지 통쾌한 감도 있었고 쑥스 러운 감도 있었다. 코마히코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마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숨 쉬는게 벅찰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이래서야 마치 처음 연우를 만났을 때와 같 지 않은가? ' 설마 내가― ' 코마히코는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럴리가……. 나는 분명 사부님을, 오직 사부님 만을 생각해왔는데.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 ……코마히코 씨. " 그때 마리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코마히코는 그답지 않게 바싹 긴장하 며 소리쳤다. " 옛? 왜,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 " 혹시 코마히코 씨는…….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뒷말을 흐렸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코마히코는 심 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근거림을 주체할 수가 없다! 아가씨,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코마히코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리가 뒷말을 잇기만을 기다렸다. " 코마히코 씨는, " 그리고 이어진 뒷말은! " 역시 가인을……좋아하시는 겁니까? " " ― " 순간, 코마히코는 이탈리아의 피사에 있는 기울어진 종탑이 결국엔 쓰러지는 것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마리는 뭔가를 더 오해했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린다. " 그, 그런 겁니까? 사, 사실 예전부터 조금 그런 기미를 눈치채기는 했지만 설마설마 했었는데……. 죄,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코마히코 씨는 그 정 도로 가인을 소중하게 여겨오셨던 거군요. " " 아, 아가씨……. " " 저는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코마히코 씨의 속 깊은 사랑에 비하면 제 가 한 사랑따위는 어린애 투정에 불과했어요. 아, 그동안 얼마나 괴로우셨 습니까……. 그러면서도 제 푸념을 일일히 다 들어주시다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오늘처럼 둔한 제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 " ……. " 아니. 그 정도에 당신의 둔함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코마히코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한숨 을 내뱉었다. 뭐랄까.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 해명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다고 해야할까. " 하지만 코마히코 씨, " 코마히코는 마리의 부름에 힘 없이 고개를 들었다. 마리는 그런 그를 향해 빙 긋 미소짓고 있었다. " 좀 더 제 자신을 걱정하라는 말……. 힘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 뜻 밖의 감사에 코마히코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곧 그는 마주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힘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가장 빨리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생각해보도록 하죠. "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0 - Ｂy Ｎext Ｎeo =-=-=-=-=-=-=-=-=-=-=-=-=-=-=-=-=-=-=-=-=-=-=-=-=-=-=-=-=-=-=-=-=-=-=-= 2학년 1반 교실. 그 뒤편에 커튼으로 쳐진 간이탈의실에 시더를 비롯해 피스 메이커의 여자일동이 모여 있었다. "언더 시티로의 모든 통신망이 차단되어 있어. 유레카의 공성방벽이 외부의 침입에 작동한 거야." 교실의 데스크톱 컴퓨터를 조작하여 유레카의 중추 시스템에 접속, 피스메이 커의 현 상황을 알아보려던 시더는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자 혀를 찼다. 그녀의 뒤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채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묻는다. "외부의 침입이라면 해킹(Hacking)?" "저런 짓거리가 무슨 해킹이야! 놈들은 그저 크래커(Cracker), 데커(Decker) 일 뿐이라고!" 시더는 괜히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묘하게 자기변호적인 모습에 일행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역시 평 소에도 자주 해킹해왔던 거야, 이 사람……. "해커나 크래커나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닌가?" "해킹은 작업과정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는 데 의의가 있 어! 이런 파괴적인 행위와는 근본부터가 달라!" "그래봤자 범죄인 건 마찬가지지. 쓸데없이 해커들 변호하는 데 힘 빼지 말 고 다른 방법이나 모색하도록 해." 유리는 단호하게 시더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시더는 꿍얼거리면서도 다 시 컴퓨터 앞에 달라붙었고, 채영도 오퍼레이터팀의 치프로서 그녀의 작업을 도왔다. 채영은 손톱을 깨물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오퍼레이터팀의 서포 트로 이런 공성방벽쯤이야 문제도 없이 돌파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 랐다. 자신들이 시스템에 접속하기 위해 방화벽을 해지시켰다가는 순식간에 외부 공격자들에게 중추를 점령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도 오퍼레이터팀과 연락할 수단이 없다는 거지.' 채영은 손목에 찬 무전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언더 시티의 연 락은 앞의 문자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모두 두절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ECCM을 통한 통신방해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정도로 피스메이커를 몰아붙일 수 있는 상대라면 역시……. "역시 지구방위군일까요?" "그렇겠죠. 하지만 그들만으로 이런 기도비닉(企圖秘匿)은 불가능해요. 아마 도 언더 시티의 내부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들을……." 거기까지 말하던 수정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유리는 눈치 빠르게 그녀의 뒷말을 대신했다. "스파이가 있다는 거지? 지구방위군에게 언더 시티를 안내한." 스파이! 시더와 채영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수정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도 그 남자겠죠. 미국지부의 사령관 시폰 뤼멘. 8월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다 싶더니만 뒤에서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사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왜 같은 피스메이커에게 이런 짓을!" 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탄했다. 하지만 시폰의 배신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배신한 이유는 모를지라도 그전부터 그가 보여 온 행동들은 하나같이 피스메이커의 이념과 어긋나 있었던 것이다. 민간인의 생사는 고려하지도 않고 작전을 수행시키질 않나, 같은 동료들에게 총기를 난사하질 않나. 어쩌면 그는 그때부터 이런 결과를 준비해놓은 채 피스메이커를 떠났던 것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신자가 과연 그 혼자뿐인 걸까?' 시폰은 어디까지나 비숍의 명으로 파견된 성당기사단의 대리인이다. 그가 미 국지부의 사령관이었다고 한들 한국지부의 사정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 다. 하물며 언더 시티에 관한 정보는 한국지부 사이에도 기밀 중의 기밀사항! 그렇다면 역시. '……또 다른 배신자가 있었던 거야.' 수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피스 대원들의 신상명세를 지구방위군에 넘기고 언더 시티의 시스템을 마비 시킨 사람. 거기다 피스메이커의 치프들이 자리를 비움과 동시에 시작된 습격. 너무도 절묘하지 않은가? 이 정도로 기관의 내부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한국지부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수정은 어렵지 않게 배신자의 정체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배신자 시폰 뤼멘의 앞잡이. 그는 아마도……. '안 돼. 어떻게든 빨리 유레카로 돌아가지 않으면……!' 수정은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지구방위군과 의경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천천히 학교 본관을 향해 전진해오고 있었다. 한편 언더 시티 유레카에서는 시더의 예상대로 대대적인 해커의 침입이 시작 되고 있었다. 위잉위잉위잉위잉 《시스템 재기동 종료. 시큐리티 레벨 2!》 《침입자에게 우회로를 설정. 논리방벽 재구축!》 《백신 로드. 바이러스 검색 진행 중!》 《역탐지팀, 디코이(Decoy)를 장비하세요!》 오퍼레이터 삼인방을 위시한 15명의 오퍼레이터들은 비상경보등이 켜진 작전 본부실에서 분주하게 공성방벽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런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 하고 방화벽은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방벽에 잠복형 바이러스! 전종 전개!》 《방벽 027, 돌파당했습니다!》 《방벽 044, 타입 340 에러 발생!》 《환부격리 개시. 외주방벽 레벨 1로 재구축!》 삼인방은 자신들의 능력부족을 여실히 깨달아야만 했다. 아무리 고속처리 능 력을 가진 윤채영 치프가 빠졌다지만 이렇게나 해크(Hack) 싸움에서 맥을 못 추다니! 이래서야 나중에 치프의 얼굴을 볼 낯이 없잖아! 치이 치이이이 메인 스크린에 펼쳐진 수많은 스크린 창들이 블록 아웃하기 시작했다. 그렇 게 잡음으로 뒤덮여가는 영상을 노려보며 진 사령관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깍지를 낀 그의 양손은 어느 때보다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위잉 그때 비상경보음이 중단되면서 메인 스크린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경보등 과 컴퓨터들의 전원까지 일제히 꺼져버렸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오퍼레이터팀의 막내 문세희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전 시스템 다운! 통신도 모두 끊겼습니다!" "돌입할 생각인가!" 결국 보다 못한 진 사령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비상전원을 켜라! 옴팔로스의 스틱스 광산에서 전력을 끌어올려!" "하지만 오리하르콘의 초전도 현상만으로는 언더 시티의 전력을 충당하기가……!" 삼인방이 곤란한 표정으로 돌아보았지만 진 사령관은 가차 없이 명령했다. "중추 시스템으로 향하는 부 정규 접속만 막아내면 돼! 어디까지나 우리의 목적은 시간끌기다. 당황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도록!" 잠시 후 붉은색 경보등이 다시 켜지면서 예의 방벽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 했다. 진 사령관은 그제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 혔다. 그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시간싸움인가." 분명 그녀가 있다면 또 무모한 도박이라며 잔소리를 했겠지. 진 사령관은 이제는 웃을 수도 없게 된 입가를 매만지며 마음속으로나마 미 소했다. '부디 늦지 말아라, 수정.' "소령님, 언더 시티의 외부 전력을 차단시켰습니다." "좋아, 각 부대에게 전달. 강행돌입 개시!" 지구방위군의 작전장교 하영식 소령은 통신병의 보고에 즉각 돌입명령을 내 렸다. 그러자 120명의 특임대 요원들이 열 개의 작전소대로 나뉘어 어두운 언 더 시티의 거리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유레카의 광속전차 승강장에 주차된 장갑차. 그 안에서 적외선 텔레비전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하 소령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여기까지 는 '그'가 건네준 정보대로였다. '아니지.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냐, 하영식.' 하 소령은 느슨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는 지난 두 번의 작전실패로 140명에 가까운 특수부대원을 잃은 것을 절대 로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때와 같은 수모는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도, 당해 서도 안 된다. 사정 좋게 이용당하는 것은 더 이상 사절이었다. '시폰 뤼멘.' 이미 그에게서는 지난 8월의 협조로 희생을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솔직히 하 소령의 마음 같아서는 그런 미심쩍은 남자와 손을 잡는 일은 피하고 싶었 지만, 어차피 그도 군인인 이상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상 관인 라경일 장군은 이번에야말로 피스메이커를 소탕해버리겠다고 혈안이 되 어 있었다. "후후, 연기를 하는 건 정치가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의 장군님을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군요. 대단한 능구렁이야." 하 소령은 옆에서 들려온 가냘픈 웃음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돌아본 곳에는 그의 동행인 한 여성이 TV에서 한창 방영 중인 지구방위군의 성명을 시청하고 있었다. 여성은 고딕풍의 검은 드레스를 걸친 범상치 않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거기 에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한층 더 그녀를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 게 만든다. "능구렁이라니. 지금 라경일 장군님을 모욕하시는 겁니까?" "어머,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그만큼 노련하신 분이구나 하고 감탄한 것 뿐이에요." 하 소령의 말에 여성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더욱 기분이 나빠진 하 소령은 여전히 언짢은 기색을 풀지 않았다. "명분이 필요하다고 했던 건 그쪽 아니었습니까? 솔직히 저희도 이런 우스꽝 스러운 짓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명발표와 동시에 기습이라니.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 건에 관해서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저희의 언론통제는 피스메이커보다 한 수 위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하 소령은 답답하다는 듯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더 말해봐야 자 기 얼굴에 먹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그가 몸담은 기관에게 순수란 남아 있지 않았다. 지구방위군은 지구 를 방위하기에 지구방위군인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권리를 방위하기에 지구 방위군인 것이다. 초기의 이념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이념이 있기 는 했던 것일까도 의문이다. '지구를 방위한다니, 어린애조차도 웃을 얘기지. 낯 뜨거운 소리야.'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차라리 피스메이커야말로 순수한 이념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멋대로에 정체불명의 녀석들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구방위 군이나 세간의 어떠한 방위단체보다도 가장 인류를 위해온 자들이다. 가장 헌 신적인 지킴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과연 우리가 이렇게 매도하고 굴복시켜도 되는 것일까? 무너뜨 려도 되는 것일까? 하 소령은 회의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어차피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이타심이 아닌 이기심이니 까. 적어도 그가 보고 살아온 세계는 그러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세상 탓으로 돌 리며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충분히 성의를 보였소. 이제는 당신들 차례라고 생각하는데 ……." 하 소령의 말에 여성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온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하지만 다른 병력은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데……."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죠. 온 것은 저 혼자뿐이니까." "뭣!" 여성의 답변에 하 소령은 기가 막혔다. 혼자? 혼자라니! "지금 나하고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요!" "후후, 그런 것 같아요?" 여성은 하 소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거리기만 했다. 하 소령은 열이 받아 홧김에 여성의 멱살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대체 이게 무슨 짓거리야! 너희 연놈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하는 거냐고! 시폰 뤼멘 그 개자식이 우리를 엿 먹이려고 작정했군! 너 같은 계 집애를 보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 순간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하 소령 의 몸이 장갑차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하 소령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어깨가 탈골되어 있었다. 여성이 자신의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을 잡아 비틀어 그대로 바닥에 내 동댕이친 것이다. "소령님!" 뒤에서 들려온 소란에 깜짝 놀란 통신병이 품속의 권총을 뽑아들었다. 하지 만 채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날카로운 뭔가가 그의 움직임을 제지한다. 손톱이었다. 붉게 물든 여성의 손톱이 줄자처럼 늘어나 통신병의 미간을 관 통했던 것이다. 통신병은 눈을 까뒤집으며 빨랫줄에 걸린 빨랫감처럼 여성의 손톱에서 대롱 거렸고, 그 모습에 하 소령은 비명을 지르며 장갑차 끝자락으로 뒷걸음쳤다. "괴, 괴물! 괴물!" "아무래도 그 미개한 입을 찢어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군요. 레이디를 괴물 이라고 하질 않나, 시폰 뤼멘 그 역겨운 남자와 한데 묶어서 취급하질 않나." 여성은 주저앉은 하 소령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조소했다. 그러자 붉은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 소령은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떨며 더듬더듬 말했다. "트, 틀려! 이런 건! 이런 건!" "틀리다니? 뭐가요?" "이건……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감당 못할 공포로 비굴해진 하 소령의 태도에 여성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하 소령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입가의 미소를 한 층 짙게 했다. "틀리지 않습니다. 지켜보고만 있으시지, 무력한 인간들." 콰직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성의 입이 하 소령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이빨을 통 해 생명의 근원이 되는 붉은 액체가 그녀의 체내로 들어왔다. 피란 육체를 이 루는 기원, 그림자와 더불어 영체의 정보를 간직한 아스트랄 바디의 파편이다. 여성이 자신의 마스터를 통해 계승받은 능력, 블러디 인펙션은 이 피에 내재된 영체의 정보를 읽어 들여 상대를 해석 또는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물질변형. 영체에 기록된 정보를 재작성하여 육체를 강화시키고, 그 위에 우선순위를 덮어씌운다. 그럼으로써 변형된 상대는 그녀와 마스터의 충 실한 종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카르마의 흐름을 역행시키고 영체의 구조를 어긋나 게 만드는 행위였다. 때문에 빛에 대한 면역이 떨어지고 적혈구의 구조가 불완 전해서 점조도가 하강, 흡혈을 갈구하는 부작용이 뒤따르는 것이다. '혈족으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 주인님께 부담을 드려서는 안 되니까.' 여성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 소령의 목덜미에서 입을 뗐다. 피의 계승은 그 최초의 근원에서 시작되어 점점 늘어나는 가지와도 같다. 무 분별한 개체수의 증가는 마스터의 힘을 고갈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정보를 흡혈 대상과 교환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면 상대는 정보의 불완전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단순한 사이코포모스가 되어버린 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어차피 오늘만 지나면 더 이상 너희들에게 볼일은 없을 테니까. 여성은 충혈된 눈으로 거칠게 호흡하는 하 소령에게 물었다. "네 주인의 이름을 말해라." "에르체베트…… 바토리." "너의 사명은?"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 여성,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하 소령에게 덮어씌운 우선순위의 정보를 확인한 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로써 지구방위군의 병력은 그녀의 주인인 네 이 안데르슨의 소유가 되었다. 그야말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피스메이커를 공격할 수단을 확보한 것이다. 그들 블러디 노블맨의 방식은 언제나 이러했다. 각국의 수뇌들을 혈족으로 삼은 그들은 줄곧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어올 수 있었다. 이번 지구방위군의 성명 또한 마찬가지다. 피스메이커와 전면전을 유발시킨 것도 결국 네이 안데르슨의 공작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배후에 그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무서운 점이었다. "자아, 그렇다면……." 에르체베트는 하 소령이 앉았던 의자에 사뿐히 몸을 앉히며 미소지었다. 옆 에서는 하 소령이 통신병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물어뜯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서는 이미 자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기다려 보도록 할까."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전력이 나간 언더 시티는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그나마 비상전원으로 유지 되는 인공조명만이 희미하게 주위를 밝혀줄 뿐이다. 그 어둠 속을 가로지르며 언더 시티의 외곽으로 향하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람드링 뤼멘. 시폰 뤼멘의 양아들인 그는 착용한 AI 슈츠의 적외선 시각에 의지하여 어두운 거리를 달려 나갔다. "멈춰! 움직이면 쏜다!" 그때 반대편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남자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령부의 데 프콘 1 발령으로 전시상태에 돌입한 팔라딘 대원들이었다. "쳇." 그람드링은 발걸음을 멈추고 낮게 혀를 찼다. 어째 마주치지 않는다 했더니 하필이면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Hey, It's me. I'm PEACE ALIZARIN." 그람드링은 대답을 하면서도 적외선 시각으로 전방을 확인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다섯 명의 팔라딘 대원들이 잠복한 채 그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양쪽 눈 은 짙은 선홍색 빛을 흘리며 예의 고유 능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피스 알리자린? 어째서 당신이 여기로 온 겁니까? 피스 대원들에게는 대기 명령이 떨어졌을 텐데." 앞에서 그람드링에게 질문했던 대원이 경계의 빛을 거두지 않으며 소리쳤다. 그람드링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에게 접근했다. "응? 아아, 그랬지. 그래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내 체질에 안 맞아서.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있어야지."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원은 총구를 바싹 들이대며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피스 알리자린은 상부가 지정한 팔라딘대의 주요 감시대상자였다. 실제로도 그를 뒤쫓다가 연락이 끊긴 대원들이 부지기수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방심 할 팔라딘 대원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람드링은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진 대원의 총을 바라보며 낮게 휘파람을 불 었다. "휘우, 이거 좀 기분이 상하려고 하는데? 같은 동료들끼리 정말 이러기야?"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이 앞은 출입금지입니다!" 대원의 경고에 그람드링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개폐문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지었다. 옳아, 제대로 찾아오기는 한 거군. "Okay. Okay. 알았으니까 그만 표정 풀라고. 얼른 도망가든가 해야지, 원." 그람드링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여전히 대원들의 총구는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 그런데 말이야." 순간 그람드링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를 드러냈다. "나에게 총을 겨눈 대가…… 지불할 수 있어?" 휙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대원은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재빨리 방아쇠를 당 기려고 했다. 하지만 총구는 불을 뿜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총을 붙잡고 있던 그의 양손은 이미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잘려나가 있었던 것이다. "으, 으아아앗!" 대원은 손목째 사라진 자신의 양손을 들어 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다만 그 비명 소리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그람드링의 손에 들려진 플라스마 도끼가 정확히 대원의 머리를 정수리부터 아래턱까지 2등분하고 있었다. "이 개자식!"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광분한 팔라딘 대원들이 총기를 난사하려고 했다. 그보다 한발 앞서서 그람드링은 양손의 도끼를 앞으로 내던진다. 퍽 퍽 두 명의 대원이 도끼에 머리가 쪼개진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남은 두 대원은 고함을 지르며 총기를 난사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순간 예지안으로 상황을 예측한 그람드링은 거짓말처럼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어디야! 어디로 가버린 거야!" 대원들은 적외선 스코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거칠게 소리쳤다. "헉, 헉!" 숨소리가 점점 가빠진다. 패턴 알리자린의 능력은 자료상으로 파악하고 있었 지만 직접 이렇게 맞닥뜨리게 되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순간 예지라니! 이런 것을 대체 어떻게 상대하란 말이야? "늦어." 그때 대원들 뒤에서 그람드링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원들은 당황하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람드링은 그대로 한 대원의 목덜미 를 잡아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침과 동시에 다른 대원의 아래 턱을 AI 슈츠로 올려 찼다. 오른팔의 의수로 바닥에 메다 꽂힌 대원은 머리가 깨져 즉사. AI 슈츠의 각 력에 목이 부러진 대원 역시 즉사. 단순한 두 동작이었지만 확실하게 두 생명은 빛을 잃어버린다. "……쳇, 지지리도 운 없는 녀석들." 그람드링은 피주검이 된 대원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시체에 꽂힌 자신의 도끼들을 회수하여 개폐문에 다가 갔다. "그럭저럭 시간에 맞춘 건가." 그람드링은 손목의 무전기로 시간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리 곤 개폐문의 옆에 있는 수동제어기를 움직여 문을 열기 시작한다. 언더 시티의 외곽에 위치한 이 문은 궤도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몇 안 되는 지상과의 출입구였다. 지구방위군에 의해 언더 시티의 전력이 끊겼더라도 궤 도 엘리베이터는 스틱스 광산의 초전도력과 오리하르콘의 반중력 시스템을 이 용한 것이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지구방위군에 의해 광속전차의 정거장이 점거된 지금, 언더 시티로 출입하려 면 이 궤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구방위군에게 언더 시티 의 정보를 넘겨준 '그'도 이 궤도 엘리베이터의 존재만큼은 그들에게 알려주 지 않았으니까. 키리리리릭 몇 사람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제어기의 레버를 그람드링은 의수와 AI 슈츠의 힘만으로 간단하게 돌려버렸다. 폭발물로 부셔버리는 편이 훨씬 더 손쉽겠지만 의외로 이 개폐문은 외부와의 차단을 위해 두께 50센티미터의 강철문이 4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간단히 파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 거지. 젠장.' 그람드링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마지막까지 레버를 돌렸다. 그러자 4중의 강철문이 완전히 개폐되며 내부의 전경을 드러냈다. 원래대로라면 수동개폐 시 보안 시스템은 해제되지 않았지만 전력이 나간 지 금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개폐실의 어둠 속에는 그람드링이 마중하려 했던 인물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늦었구나, 그람." 시폰 뤼멘. 피스메이커 미국지부의 사령관이자 성당기사단의 열 번째 검 아포 스톨로스 타데오. 그리고 그람드링의 양아버지인 그가 자신의 아들을 반기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평소와 다름없는 양아버지의 모습에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떠오르던 모든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간다. 그람드링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폰의 말에 답했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잠시 귀찮은 일에 휘말렸던지라……." "킥! 바보 같은 게, 잠시는 무슨 놈의 잠시야? 느려터진 주제에." 그때 어둠 속에서 그람드링의 말을 비꼬는 한 낯선 목소리가 있었다. 그제야 그람드링은 시폰의 뒤에 여섯 명의 인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지? 마스터와 함께 오는 이들이라면 빈센트 데이면과 그 휘하의 크루세 이더들이었을 텐데. "……마스터, 이 녀석들은?" 그람드링은 전방의 여섯 명을 노려보며 시폰에게 물었다. 어둠 속이라 잘 분간이 가지는 않았지만 그들 여섯은 하나같이 그람드링과 같은 AI 슈츠를 착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키나 체격조차 차이가 없었기에 마 치 여섯 쌍둥이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쌍둥이?' 순간 그람드링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독한 혐오감. 마치 피부 밑으로 벌레 가 기어 다니는 느낌! 그렇게 경악하는 그를 여섯 쌍둥이들은 재미있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똑같은 얼굴로 웃으며, 똑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똑같은 모습으로 녀석 들은……. "후후,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Ignite)." 시폰은 얼어버린 양아들을 향해 그의 형제들을 소개시켜주었다. "네 동생들이란다, 그람."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1 - Ｂy Ｎext Ｎeo =-=-=-=-=-=-=-=-=-=-=-=-=-=-=-=-=-=-=-=-=-=-=-=-=-=-=-=-=-=-=-=-=-=-=-= 《교내에 있는 모든 교사, 학생, 시민 여러분은 운동장으로 집합해주시기 바 랍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시에 따라 한 분도 빠짐없이 운동장으로 나와 주십시오.》 지구방위군의 방송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어영부영하던 한 성고의 교사와 학생들도 천천히 그들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역시 너무 느렸는지 군인과 의경들이 직접 교내로 들어와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자자, 어서 나가십시오!" "서둘러주십시오!" 군인들의 재촉에 사람들은 불평을 터뜨리며 운동장으로 향했다. 몇몇 어른들 이 무슨 일로 이러느냐며 군인들에게 항의했지만 그들은 오직 침묵으로 응할 뿐이었다. 완전무장을 한 그들에게 섣불리 반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요." 2학년 1반 교실에서 복도의 상황을 지켜보던 수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군인들은 1학년 교실이 있는 1층과 2층을 단속하고 있었기에 아직 그녀들이 있는 3층으로는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것으로 보아 잠시 후면 이곳도 저들의 단속에 들어갈 것이다. "어떡하지? 이대로는 붙잡힐 거야!" 시더는 울상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유리는 그런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해킹을 하라고 해도 역시 무리겠지." "어차피 이곳의 설비로는 유레카의 공성방어 시스템을 상대하지 못해요. 애 초에 기기의 처리속도부터 따라가질 못하니까." 채영이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결국 그녀의 말은 언더 시티의 시스 템에 접속하려면 직접 언더 시티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수정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역시 어떻게든 지구방위군과의 교전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뭔가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있어, 방법은." 그때 유리가 모두의 마인드 리딩을 느꼈는지 짧게 답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방법이 있다니…… 무슨 방법이죠, 유리 양?" "패턴 핑크의 능력을 사용하면 돼. 예전에 유빈이 사용한 마인드 브레이크처 럼 지구방위군의 정신을 조종한다면……." 순간 수정과 채영, 시더는 할 말을 잊었다. 그렇다. 솔직히 유리의 오라 능력을 십분 활용하기만 한다면 이런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 그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 은 평소 그들이 추구해온 피스메이커의 정도(正道)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조종하여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은 피스 블랙과 그의 수하들이 즐겨 사용해온 방법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 도 마다하지 않는 악의적인 수단! "사, 상황이 상황인데……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시더는 유리와 모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채영도 내심 동감하 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녀들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언더 시티로 돌아가지 않으면 동료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하지만 수정은 단호하게 유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말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 더와 채영도 설마 수정이 이토록 시원스레 거절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다. "아니, 긴급상황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까지 꼭 고지식하게 그래야 하는 거 예요?" "맞아요, 수정 씨! 수정 씨도 진 사령관님이 걱정되실 거 아녜요!" 시더와 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항의했다. 유리는 불안한 눈으로 일행의 안색을 살핀다. 수정은 그런 유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저도 모두가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아마 유리 양도 같 은 마음이었기에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일 테고. 그렇죠?" 수정의 반문에 유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수정은 몸을 숙여 그녀 와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의 신념을." 유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수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지인의 생소한 모습에 채영과 시더는 마른침을 삼켰다. 수정은 몸을 일으키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생각해보세요. 지금껏 우리가 지켜왔던 게 뭔가요? 그저 단순히 몬스터를 해치우고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만이 전부였나요?" 수정은 시더를 돌아보며 물었다. "시더 양, 시더 양이 머신 아더를 만든 이유는 뭔가요?" "예? 어, 저기,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시더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야 D타입과 기가스 티폰에 대항할 수 있는 결전병기를 개발하다보니……." 거기서 말을 끊은 그녀는 곧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다시 말했다. "하지만 실은 그랜마한테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랜마가 물려준 오리하르콘 제련법으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연구를……. 그래서 그랜마가 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그랜마 앞에 떳떳해질 수 있도록. 그런 과학자가 되고 싶었 어요." 수정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채영에게 물었다. "채영 씨는? 채영 씨는 왜 오퍼레이터팀의 치프가 됐나요?" "……선임들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속처리 능력을 가진 저만이 머신 아더 를 다룰 수 있기에."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실은 선임들을 존경했어요. 그래서 꼭 그분들과 같은 오퍼레이 터가 되겠노라고, 현장의 대원들이 무사귀환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며 함께 싸우겠노라고 다짐했죠." 그랬기에 사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업무에 매달릴 수 있었다. 그랬기에 시폰 뤼멘에 의해 변질되어가는 피스메이커의 모습을 참을 수 없었다. 수정은 마지막으로 유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리 양은? 유리 양이 지키고 싶은 건 뭐죠?" 유리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작년에 벌인 유빈과의 일전을 떠 올렸다. 그리고 그때 그에게 소리쳤던 자신의 목소리도. '네가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는 마인드 브레이커라면 난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마인드 키퍼야. 네가 사람들의 마음을 농락하겠다면 난 그런 너에게서 사람 들의 마음을 지켜 보이겠어! 네가 인간을 믿지 못한다면 난 인간을 믿어보겠 어! 난 너와는 달라! 난 마인드 브레이커가 아니야!' 그리고 내가 믿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란……. "나는……." 유리는 지금까지의 근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나는…… 오빠에 대한 마음을 지키고 싶어." 순간 그녀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어째서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어째서 그때의 마음을 떠올리지 못한 거지? 그때의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한 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자신 이 가인을 가장 좋아한다고. 앞으로도 그에 대한 마음은 변치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사랑을 신뢰하고 있었다. '믿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뭐란 말인가? 리리스의 우정을 핑계 삼아 도망쳐오기만 했다. 말할 수 없다느니, 표현할 수 없다느니, 자격이 없다느니 이런저런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줄곧 오빠에 대 한 마음을 외면해왔다. 방치해왔어! '괜찮니, 유리야?' 어두운 밤거리에서 비에 젖어 울고 있는 자신을 불러주었던 자상한 목소리. 그리고 내밀어준 그의 따스한 손길. 아아. 유리는 깨달았다. 그 내밀어준 손을 붙잡은 순간부터, 그 손을 움켜쥐고 함 께 걸어온 나날들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이라는 것을. 자신이 가장 지키고 싶어했던 마음이라는 것을. "그래요. 할머니에게 떳떳해지고 싶은 마음도, 선임들을 존경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그 모든 게 바로 여러분의 신념이 에요. 그 소중한 신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예요." 수정은 흐느끼는 유리를 껴안아주었다. "신념을 잃은 사람은 약해집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는 시점부터 약해지 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적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그들이 지금 이 렇게 우리를 포위하는 것도, 언더 시티를 공격하는 것도 다 우리의 신념을 꺾기 위해서예요. 신념을 잃고 자신들에게 굴복당하길 바라는 거예요. 여러 분들은 그것을 알고도 자진해서 저들 앞에 무릎을 꿇을 건가요? 지금까지 믿 어온 신념을 버리고 앞으로의 싸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들을 상대하는 것도, 몸을 피하는 것 도 아니에요. 신념을 끌어안고서 끝까지 이어가는 거예요. 자신들이 믿어온 마음을 끝까지 믿어주는 거라고요!" 수정은 채영과 시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리의 믿음과 마음, 그 시간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적어도 저는 여러분의 신념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때요?" "……." 채영과 시더는 말없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곧 수정의 손 위로 자신들 의 손을 올리며 미소지었다. "저도 제 동료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I believe PEACE MAKER, too." 수정의 품에서 벗어난 유리도 붉게 달아오른 눈자위를 문지르며 그녀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마음에 대한 얘기라면…… 날 빼놓고 진행하지 마." "역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피스메이커군요?" 수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더 이상 일행의 표 정에서는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큼은 회복 해낸 모양이다. "이제는 이곳을 탈출하는 일만 남았는데……." 수정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복도의 상황을 살폈다. 2층의 수색이 끝났 는지 3층으로 올라오는 군인들이 하나 둘 보였다. 그들이 2학년 1반 교실로 들 이닥치기 전에 뭔가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역시 강행돌파밖에…… 없단 말인가?' 더 늦기 전에 2층의 병력만이라도 제압하지 않으면! "곤란한 거지, 수정 씨?" 그때 뛰쳐나가려는 수정의 어깨를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수정은 깜짝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그녀를 제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2학년 1 반 담임 하지연이었다. "하 선생님!" "저치들한테 붙잡히면 안 된다는 거 아냐? 그럼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지연의 말에 수정과 유리는 긴장하며 딴청을 피웠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나." "어이, 어이. 우리가 다 듣는 데서 그렇게 큰소리로 동료애를 과시하고선 모 르길 바라는 건 무리 아닌가?" 그제야 일행은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일련의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2 학년 1반 학생들. 당연히 이 교실의 주인들인 그들은 아까부터 줄곧 교실에 있었고, 당연히 수정 일행이 하는 얘기도 모두 듣고 있었다. 수정과 유리, 채영과 시더는 얼굴을 붉혔다. 으아, 이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그 낯 뜨거운 모습을 보였단 말야? "어차피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다들 사정을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요. 이제 와서 숨기는 척하지 말고." 지연의 말대로 2학년 1반 관계자들은 예전 네크로맨서의 습격으로 피스메이 커에 대한 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지연의 옆에 있던 재영도 히죽 웃으며 고 개를 끄덕인다. "얼마든지 부탁하세요! 인간 박재영, 미인들의 힘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 한 몸 얼마든지 불사를 수……!" 쿵 그러나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내의 메치기가 그에게 작렬한다. 그녀는 오 열하는 재민에게 안긴 자신의 남자친구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결국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구나, 바보 재영 군." "형아의 목이! 형아의 목이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그런 그들을 내버려두고 지연은 나머지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 이 담임의 결정에 불만은 없겠지?" "……예에." 2학년 1반 학생들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힘없이 답했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재밌 을 것 같다며 지연의 의견에 적극 동참한다. 평소 팔라딘대의 감시로 피스메이커라면 치를 떨던 급우들의 변화에 유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학생들은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저마다 쑥스러운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 사실은 모두…….' 유리는 마인드 리딩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네크로맨서의 습격으 로 줄곧 가인과 자신에게 쌀쌀맞게 굴어온 그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본심 은 아니었다는 것, 악의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죄책감을 받아왔다는 것, 그들 도 화해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는 것. '모두…… 우리와 같았던 거야.'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그에 대해 후회하고, 솔직해지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같았던 거야.' 유리는 이 자리에 지금 가인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만약 그가 이런 급우들의 모습을 봤더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얼마나 감격해했을까? 이 두근거림을 그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이 설렘을 그와 함께 나누고 싶었 다. 만나고 싶어! "다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역시 너무 위험해요." 수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지연 일행의 도움을 받는다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은 한층 쉬워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 누군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러니 여러분의 성의만 받겠습니다." "이봐요, 민수정 씨." 지연은 한숨을 푹 내쉬고 수정의 앞에 섰다. 그리곤 그녀 곁에 서 있던 유리 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저는 말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교사예요. 그리고 교사 인 이상 한번 맡은 제자는 끝까지 돌봐줘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지연은 유리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자 멋쩍어졌는지 괜스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씹어댔다. "아니 뭐, 내 신념이라면 신념이기도 하고." "신념…… 이란 말이군요." 수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지연에게 손을 내밀 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 선생님." "진즉에 그럴 것이지." 지연은 힘 있게 수정의 손을 맞잡았다. "다들 저희의 지시에 따라주십시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2층의 검문을 마친 군인들은 곧바로 3층의 검문을 시작했다. 3층 복도 끝에 서부터 안쪽으로 차근차근 교실을 체크하던 그들은 이윽고 2학년 1반 교실에 다다랐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다섯 명의 군인들은 다른 학급에서와 마찬가지로 형 식적인 양해를 구하고 즉시 통제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 2학년 1반은 앞 의 학급들과 뭔가가 달랐다. "어휴, 많이 힘드시죠?" "수고하십니다∼" 군인들이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생전 보도 못한 웨이트리스 차림을 갖춘 화사한 여학생들의 환영이었다. 그녀들은 마치 손님을 대하기라도 하듯 사근사근하게 군인들의 양쪽에 붙어 그들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자자, 잠시 앉아서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세요." "아, 아니! 이러지 마십시오!" "걱정 마세요. 저희가 서비스로 드리는 거니까 개의치 마시고, 자자!" "에, 저기, 그러니까 저흰……." 군인들은 얼굴이 붉어진 채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그들도 갑작스런 비상과 출동명령에 심신이 지쳤던 터라 여학생들의 권 유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이다. 다만 체벌이 두려워 먼저 나서기가 어렵다는 것 이었는데……. "아앙! 지연이가 따라주는 거 안 마시면 오빠들 미워할 거야!" 한 웨이트리스가 군인의 팔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혔다. 군인은 웨이트리스에게 붙잡힌 팔짱의 감촉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 학생, 가슴이 장난이 아니잖아? 이거 학생 맞아? '학생일 리가 없지.' 웨이트리스 하지연에게 붙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군인을 바라보며 나머 지 여학생 일동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연 본인도 수치심을 억누르고 있는지 양 귓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하지만 그녀는 본연의 임무에 입각하여 충실하게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쭈욱 들이켜세요. 옳지! 잘한다, 오빠!" ……오빠? 짙은 자괴감이 어린 지연의 분투에 힘입어 결국 군인은 주저주저하면서도 음 료수에 입을 가져갔다. 그런 동료의 모습에 다른 군인들도 슬그머니 테이블에 앉아 여학생들에게 음 료를 건네받는다. 그 모습을 교실 뒤편의 간이탈의실에서 훔쳐보던 인영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 렀다. 좋아,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어! 쿵 그때 탈의실의 누군가가 그만 들고 있던 옷걸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바 람에 무시 못할 소리가 울려 퍼지자 쉬고 있던 군인들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 어났다. "뭐지, 이 소린?" "아, 아하하하! 저기,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다가 누가 넘어졌나 보네. 신경 쓰지 말아요!" "가보자!" "아니, 잠깐! 아앙, 이대로 가버리면 지연이 슬프다니까!" "비키십시오!" 약발이 떨어졌는지 지연의 아양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은 신속히 무장을 챙겨 탈의실로 다가갔다. 그들은 포위대형을 짜고 소리 없이 수화를 주고받았다. 탈의실 커튼의 안쪽 에서는 몇몇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대략 네다섯 명 정도의 목소리. 어쩌면 우리가 찾고 있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대형의 앞쪽에 있던 군인들은 표정을 굳히며 커튼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있는 힘껏 커튼을 걷어 올린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군인들은 탈의실 안쪽에 총구를 겨누며 소리쳤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컥!"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탄성을 울렸다. 탈의실에 있던 인영은 다름 아닌 완 전 나체의 남자들이었던 것이다! "꺄!" 끔찍한 나체남들의 선봉에 서 있던 박재영이 사타구니를 가린 채 몸을 배배 꼬며 가냘픈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에 군인들은 기겁하며 뒷걸음쳤다. 그 중 몇몇은 얼마나 놀랐는지 들 고 있던 총까지 바닥에 떨어뜨린다. 휙 그때 천으로 가려진 테이블 밑에서 새하얀 손이 튀어나와 떨어지는 총을 받 아냈다. 그와 동시에 손은 테이블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군인의 발목을 개머 리판으로 낚아채듯 올려쳐 버린다. "으헉!" 난데없이 자신의 총으로 발목을 걷어 채인 군인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 러졌다. 그런 그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개머리판이 군인의 안면을 날카롭게 끊어 친다.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수정은 그렇게 한 명을 행동불능으로 만들어버리며 즉시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군인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뭐, 뭐야?" 군인들이 동료의 이상을 눈치채기도 전에 수정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 는 총검술을 사용하듯 자유자재로 총을 휘둘러 전방의 군인들을 공격했다. 한 명은 총신으로 목을 얻어맞고 쓰러졌고 다른 한 명은 발등을 개머리판으 로 찍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수정은 그의 배에 앞꿈치차기를 먹여 비명을 잠재우고, 곧장 선풍각으로 관자놀이를 후려 찼다. '역시 한 번에 다섯 명은 벅찬데!' 수정은 호흡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남은 두 명의 군인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녀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상대해야 할 군인은 이 교실에 있는 자들이 전부가 아니니까. 행여나 총성이라도 울려 퍼지는 날 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엇!" 수정의 발이 뒤돌아보려는 군인의 허벅지를 밟아 눌렀다. 형의권의 등각(登 脚)이라는 수법이었다. 그 바람에 군인은 자신의 군장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수정은 그렇게 주저앉은 그를 뛰어넘으며 착지와 동시에 튕겨지듯 상대의 안 면에 뒤차기를 꽂아 넣는다. 네 명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명!' 수정은 개머리판을 남은 한 명의 군인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여기서 예상 밖 의 사태가 발생했다. 지레 겁먹은 군인이 다리에서 힘이 풀려 그만 군장의 무게에 쓰러지고 만 것 이다. 덕분에 수정의 공격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후려쳤고, 군인은 기겁하며 재빨리 그녀에게 총을 겨누었다. "우,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마!" "……!" "총 버려! 어서!" 수정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혀를 찼다. 하필이면 마지막 한 명을 남겨놓 고 이런 실수를! 그녀는 겁먹은 군인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을 올렸다. "진정하세요. 지시에 따를 테니까 흥분하지 말고……." "시끄러! 닥쳐! 닥치고 조용히 햇!" 군인은 흥분했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수정은 이를 악물었다. 제길, 자신이나 조용히 할 것이지. 이러다간 밖에 있 는 군인들이 몰려들 텐데! "뒤돌아 서! 빨리!" 수정은 군인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제야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군인이 쓰러졌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수정은 초조한 표정으로 등 뒤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녀석이 지원군을 부 르기 전에 빨리 제압하지 않으면……! 뎅 그때 뒤에서 종이라도 치는 것처럼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난데없 는 소리에 수정이 뒤돌아보자 거기엔 쓰러진 군인과 조리용 프라이팬을 든 지 연이 있었다. 상황을 보다 못한 그녀가 군인의 뒤로 접근해 머리를 프라이팬으 로 내려친 것이다. "하아 !" 지연은 상대가 기절한 것을 확인하자 힘이 빠지는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대담한 행동에 기가 막힌 수정은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하 선생님?" "에? 아, 아아! 그나저나 저 사람…… 죽지는 않았겠죠?" 지연은 창백해진 표정으로 자신이 쓰러뜨린 군인을 바라보았다. 수정은 그녀 대신 군인의 맥과 상처 부위를 짚어본 뒤 빙긋 미소지었다. "걱정 마세요.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까. 대신 이 사람, 며칠간 머리가 무거 워서 고생하겠는걸요? 뒤통수에 축구공만 한 혹이 났어요." "아니 그러면 죽는 거 아녜요?" "괜찮아요. 괜찮아. 어쨌든 덕분에 살았습니다." 수정은 지연을 일으켜주며 새삼 교실을 둘러보았다. 상황이 끝나자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채영과 시더, 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발밑으로는 거짓말처럼 다섯 명의 군인들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재 영과 학생들은 아직도 수정이 그들을 때려눕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힐 끔힐끔 그녀를 훔쳐보았다. "후우! 이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걸." 수정은 복도 쪽에서 다른 군인들이 다가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지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때요, 도움받길 잘했죠?" "그러게요." 수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쓰러진 군인들을 내려다보았다. 1단계는 성공. 그럼 다음은……. "이제부터가 진짜예요. 모두들 단단히 각오하세요." 수정의 말에 지연 일행은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2 - Ｂy Ｎext Ｎeo =-=-=-=-=-=-=-=-=-=-=-=-=-=-=-=-=-=-=-=-=-=-=-=-=-=-=-=-=-=-=-=-=-=-=-= "C구역이 돌파당했습니다. 5소대와 연락 두절. D구역과 E구역도 위험합니다!" "8소대를 C구역으로 증원시켜! 거기를 빼앗기면 메인 센터까지 뚫려버린다!" 언더 시티의 A구역. 즉, 중심부인 메인 센터 앞에 진지를 구축하던 유한진 소위는 통신병의 보고에 조속히 지시를 내렸다. 그는 어두운 지하도시 사이로 들려오는 총성과 비명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팔라딘대의 전투역량이 한국군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지만 역시 인해전술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지구방위군은 국방부의 특수병력을 모조리 끌고 나왔는지 공세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나마 이곳이 지하라서 다행이지 만약 지상이었다면 대 테러 지역대뿐만 아 니라 고공 지역대와 스쿠버 지역대, 심지어는 기갑사단까지 상대해야 했을지 도 모른다. "8소대, C구역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D구역과 E구역은?" "현재 교전 중입니다!" 한진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적 열세인 팔라딘대가 지구방위군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언더 시티의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비트랩으로 부대의 발목을 붙잡고,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법으로 본대를 뒤흔든다. 단순하지만 적의 수를 줄이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물론 단순한 시간끌기일 뿐이지만.'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시간끌기. 진 사령관이 팔라딘대에 명령한 것 은 최대한 지구방위군의 돌입을 저지하라는 것이었지 섬멸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상태로라면 적어도 반나절은 버틸 수 있다. 그렇게 자신들이 대치 하는 사이에 진 사령관이라면 반드시 활로를 열어줄 것이다. 팔라딘대의 모두 는 그렇게 믿고 전력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 한진은 잠시 긴장을 풀 겸 자신과 함께 대기 중인 부대의 인원들을 살펴보았 다. 지금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평소 요인경호를 주로 하던 시크릿 가드들과 비 정규 전투요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팔라딘대의 저격반과 감시반, 돌입반은 모두 최전방에 투입되었기에 남은 병력들로 최후의 보루인 메인 센터를 지켜 야 했다. 부하들의 용태를 확인하던 한진은 곧 눈에 띄는 한 대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팔라딘대의 유일한 여자대원, 천요원 중사였다. 그녀는 바리케이드에 밀착해서 어두운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중의 총을 힘껏 움켜쥔 손.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분간이 갈 정도로 창백했다. 한진은 요원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 "긴장되나?" "예?" 요원은 잠시 주저하다가 나지막이 답했다. "……예, 이번의 적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까요." 그 말에 한진의 가슴도 무거워졌다. "부대장님, 아니…… 대장님." "부대장으로 충분해. 팔라딘대의 대장은 영구 결번이다." "……예, 부대장님." 요원은 한진을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 대위님이 만약 지금의 상황을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요?" 한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요원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팔라딘대에 입대하기 전에 저는 한국통합군 소속이었습니다. 몬스터의 습격 에 무력한 군이 싫어 피스메이커에 들어온 거예요.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 가지겠죠. 모두들 힘이 되고 싶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사람 들을 구하고 싶어서 피스메이커가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뭐죠? 왜 같은 인간들끼리 총을 겨눠야 하는 건가요? 기껏 몬 스터를 해치웠는데. 정 대위님, 선임들과 동기들,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 면서 지켜낸 평화인데! 그런데 그 평화를 얻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요원의 울분에 찬 외침에 진지에 있던 다른 대원들도 숙연해졌다. 모두들 지 금의 상황에 회의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걸고 싸워왔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들의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도리어 이제는 인류의 적이라는 오명마저 씌우고 숙청하 려 들다니! 이런 것이 고작 우리의 피와 땀에 대한 대가란 말인가? 한진은 울먹이는 요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말이야, 대장님께 그런 질문을 했다가 한 대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예?" 요원은 그의 뜬금없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투정부리지 말라더군. 자기가 힘든 것뿐이면서 괜히 남들을 걸고넘어진다고." "투정…… 이라고요?" 한진은 기억을 더듬으며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때 진우가 했던 말이 어 지간히도 인상 깊었던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한 녀석은 없다. 모두들 자신이 선택한 길에 최선을 다하다 가버린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고 자기 앞가림이 나 잘해라…… 라고. 후후, 선임들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드는 건 바로 나 같은 녀석들 때문이라고 하시더군." "……." 요원은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진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아마 대장님이 지금의 상황을 보셨더라면, 나는 내가 좋을 대로 하다가 갔 으니 너희들은 너희 좋을 대로 하면 되는 거라고…… 분명 그분이라면 그렇 게 말씀하셨을 거다." 한진의 말에 다른 대원들이 킥킥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하긴, 그 대장이라면 그렇게 말하고도 남지." "그런 제멋대로인 대장 밑이니까 부하들도 모두 이렇게 제멋대로인 거잖아." "덕분에 고지식한 우리 부대장님만 고생하셨지." 이 녀석들이……. 한진은 부하들의 너스레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래, 그럼 제멋대로인 대장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도 제멋대로 굴어볼까!" "오우!" 한진의 외침에 대원들이 환호하며 수중의 총을 들어올렸다. 요원도 기운을 차렸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환호에 동조했다. 그런 부하들의 모습에 한진은 속으로 이 자리에 없는 대장에게 감사를 보냈 다. 정진우, 그는 죽어서까지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부대장님!" 그때 통신병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대원들의 환호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C구역과 D구역이 돌파당했습니다! E구역도 위험합니다!" "뭣!" 한진은 안색을 굳히며 통신병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방금 전까지 잘 막아내고 있었잖아!" "그게…… 8소대의 마지막 무전에서 이런 말이……." 상관의 다그침에 통신병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타입의…… 피스 대원들이 나타났다고." "……!" "으아아아앗!" 투타타타타타 C구역의 진지를 지키던 팔라딘 대원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수중의 라이플을 난사했다. 하지만 그들의 총알이 꿰뚫는 것은 적이 남긴 녹색의 잔상뿐이었 다. 적은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빠르기로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를 지나 그들에게 돌진했다. "으!" 코앞까지 다다른 녹색 잔상에 혼비백산한 한 대원이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확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요도에서 정수리까지 일도양단해버린다. 그러자 직각 으로 피가 치솟으며 일대에 붉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 난데없는 참상에 진지의 대원들은 미처 응수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상 대를 응시했다. "후우우우우―!" 대원들 앞에 나타난 적은 녹색의 AI 슈츠를 입은 10대 소년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쏟아지는 피의 비를 맞으며 환희에 겨운 신음을 터뜨린다. 소년의 AI 슈츠는 전신이 흉기였다. 양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곡선을 그리는 칼날이 달려 있고, 발 앞꿈치와 뒤꿈치에도 각각 하나씩, 무릎과 어깨에는 한 쌍의 곡도(曲刀)가 달려 있었다. 방금 전의 참상은 소년의 팔꿈치에 달린 곡도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으, 으으읏!" 대원들은 이를 악물고 소년을 향한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때 소 년은 거짓말처럼 땅바닥으로 꺼지며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원들은 저마다 눈을 의심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어디로 간 거지! 촤촤촤촤촤촤 땅 밑에서 끔찍한 파육음이 터져 나오며 세상이 뒤집어졌다. 소년이 마치 팽 이처럼 땅바닥에 붙은 채 회전하면서 대원들의 발목을 절단하고 지나간 것이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원들은 바닥에 쓰러져서도 한동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파파파팍 소년은 마치 춤을 추듯 쓰러진 대원들 사이를 누비며 발 앞꿈치에 달린 곡도 로 그들의 목을 쳐올렸다. 그러자 수십 개의 피분수가 터져 오르며 소년의 모 습이 짙은 피안개 속으로 사라져간다. "루미네선스 오르토스(Orthus). 그의 패턴 알리자린 사피롤 B는 패턴 그린과 마찬가지로 뇌의 시계주파수를 조절하는 가속 능력이지. 다만 개발기간이 짧았던 탓일까? 원하는 만큼의 속도가 나와주질 않아. 지금 정도면 잘해야 인간의 동체시력을 따돌리는 수준? 뭐, 그것만으로도 위력은 충분하지만 말 이야." 한편 D구역의 진지에서는 수십 개의 불꽃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아, 아아아앗!" "으아아악!" 그 불꽃의 정체는 다름 아닌 팔라딘 대원들이었다. 진지를 지키고 있던 그들 은 갑자기 체내에서부터 새빨간 불꽃을 일으키며 발화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꽃은 주위의 진지를 태우지도 않으며 오직 팔라딘 대원 들만 연소시키고 있었다. 불덩어리가 된 대원들은 아우성을 치며 땅바닥을 굴렀지만 불꽃은 조금도 꺼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덩치를 부풀리며 사정없이 인간을 집어삼 킨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는 광경이었다. "뭐야, 이건? 이건 대체 뭐냐고!" 동료들이 만들어낸 불바다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한 대원은 자신의 머리카 락을 쥐어뜯으며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그는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꽃의 열기로 정신이 혼미해 지는 와중에 필사적으로 앞의 일들을 떠올렸다. 분명 그들은 지구방위군의 특 수부대와 한창 총격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홀연히 두 명의 소년이 나타났고 그리고……. "나 참,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간 언제나 마무리가 허술하다고, 넌." 그때 대원의 앞으로 자줏빛에 가까운 푸른 AI 슈츠를 입은 한 소년이 나타났 다. 그 소년의 핀잔에 불꽃 속에서 또 다른 소년이 걸어 나왔다. 뒤늦게 나타난 그는 앞의 소년과 달리 짙은 붉은색의 AI 슈츠를 입고 있었다. "시끄러. 네 몫이 사라질까봐 일부러 남겨준 거야." "흐, 퍽이나 생각해주네. 그럼 다음부터는 좀 더 많이 남겨달라고. 겨우 한 명이 뭐야? 한 명이!" 붉은 AI 슈츠의 소년이 퉁명스럽게 변명하자 푸른 AI 슈츠의 소년이 코웃음 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팔라딘 대원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런 그들을 번갈 아볼 뿐이다. "Hey, Mr. 잠시 이쪽을 봐주세요." 푸른 AI 슈츠의 소년은 손뼉을 쳐서 팔라딘 대원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리곤 과장되게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퉁긴다. "Say Cheese ?" 콰직 순간 소름끼치는 파쇄음이 울리며 대원의 몸이 쓰러졌다. 전신의 뼈와 장기가 일제히 으스러지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실제로도 그의 전신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내부의 팽창을 이기지 못한 살점이 떨어져 나왔고, 그 살가죽 밑의 근육들도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러자 마치 껍데기만 남은 인형처럼 대원은 힘없이 몸 을 떨다가 숨이 끊어졌다. "루미네선스 키마이라(Chimaera). 그의 패턴 알리자린 레드는 인간의 체내에 서 일어나는 초전도 현상을 자의적으로 증폭시키는 감응 능력. 그 덕분에 용마인 초류향의 데토네이션(Detonation)에 비견되는 인체자연발화(Spontan eous Human Combustion)를 일으킬 수 있지. 대신 초류향과 같은 전방위 폭 굉은 불가능하지만 대 생물전에 한해서만큼은 확실한 효과를 발휘한다. 루미네선스 스킬라(Skylla)의 패턴 알리자린 블루는 키마이라와 반대로 인 체의 초전도 현상을 자의적으로 떨어뜨리는 감응 능력이지. 인체의 초전도 현상을 순간적으로 차단시켜 비활성화된 세포가 포도당을 흡수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혈액 내의 농도를 떨어뜨려 혈관을 얼어붙게 만드는 거야. 몸속 의 물 가운데 65퍼센트 정도가 얼음으로 바뀌는 거지. 굳이 이름을 붙이자 면 응고액체 팽창부피 폭발(Solidification Liquid Expanding Volume Expl osion; SLEVE)이라고 해야 할까?" 쉭 E구역을 지키고 있던 팔라딘 대원들의 미간이 날카로운 섬광에 꿰뚫렸다. 화살이었다. 아켄석으로 만든 화살촉이 갈색의 빛을 흩뿌리며 진지의 대원들 을 차례차례 쓰러뜨리고 있었다. 화살은 정확히 한 발에 한 사람씩의 목숨을 앗아간다. "크!" 그 중 우연찮게 화살을 어깨로 빗겨 맞은 한 대원이 신음을 흘리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화살을 날리는 이는 적갈색의 AI 슈츠를 입은 소년이었다. 그는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기지도 않은 채 대담하게 전방에 서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팔라딘 대원은 이를 악물며 소년에게 라이플을 겨누었다. 화살로 총에 대항하다니!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지.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단 말이냐! 투타타타타 라이플의 총구가 불꽃을 내뿜으며 소년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아니,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 소년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총알은 그의 몸을 통과해 그대로 뒤쪽의 콘크리트에 탄흔만 남겼다. 마치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처럼! "으윽!" 대원은 허깨비 같은 소년의 모습에 얼이 빠져 있다가 소년이 천천히 자신에 게 화살을 겨누자 신음을 흘리며 엄폐물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간발의 차 로 갈색의 화살이 그가 피한 엄폐물에 내리꽂힌다. "헉헉!" 대원은 엄폐물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애써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말도 안 돼. 총알이 몸을 통과하다니. 유령이기라도 한 거냐?' "흡!" 그러나 다음 순간 앞을 본 대원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분명 엄폐물 반대편 에 한참을 떨어져 있어야 할 갈색 AI 슈츠의 소년이 어느새 코앞으로 나타나 화살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아!" 대원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며 엄폐물 좌측에 있는 골목으로 내달렸 다. 그러기가 무섭게 날아든 화살이 그의 종아리를 꿰뚫는다. 대원은 앞으로 거꾸러지면서도 도망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정상적인 사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는! "아……." 그런 대원의 의지는 눈앞에 다시 나타난 소년의 모습에 처참히 꺾여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이곳으로 도망치리란 것을 알고 기다렸던 것처럼 소년은 태연스럽게 골목의 끝에서 활시위를 재고 있었다. "The end." 퍽 소년의 중얼거림과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은 정확히 대원의 미간을 꿰뚫었다. 대원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쓰러진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 명의 갈색 AI 슈츠의 소년들이었다. '처음부터…… 세 명이었던 건가?' 그렇게 대원의 숨이 끊어지자 어둠 속에서 검푸른 빛의 AI 슈츠를 입은 소년 이 나타났다. 그는 발밑에 쓰러진 대원의 시체를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별것도 아닌 녀석이 의외로 성가시게 구네. 그러게 처음부터 곱게 뒈질 것 이지." "I couldn't agree with you any more." 동료의 말에 갈색 AI 슈츠의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는 언 제부터인가 세 명에서 한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갈색 AI 슈츠의 소년은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킥! 뭐, 덕분에 재미있기는 했어. 이렇게 놀려먹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안 그럼 죽이는 것도 지겹다고." "Let's go to master." 갈색 슈츠의 소년이 보채듯이 말하자 푸른 AI 슈츠의 소년은 '예이, 예이.'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두 소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전장에 남은 것은 화살에 꿰뚫린 팔라딘 대원들의 시체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년들이 사라진 후 시체들은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 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갈색의 빛을 흘리는 화살들이 전부였다. "루미네선스 히드라. 그의 패턴 안트라센 브라운은 아켄석과 감응하는 유 일한 안티 오리하르콘 능력이다. 아켄석은 오리하르콘의 셀프 라이팅과는 반대되는 어타러시스(Autolysis; 자가분해)를 일으키는데, 히드라는 이 아 켄석의 기능을 증폭시켜 생물체의 구조를 홑원소물질[單體]로 되돌릴 수 있지. 단지 아켄석에 일정시간 물리접촉을 해야만 이 분해작용을 끌어낼 수 있기에 총보다는 활 같은 원시 비상(飛翔) 무기에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루미네선스 케르베로스(Kerberos)는 이런 히드라의 약점을 보완시켜주는 능력자다. 그의 패턴 안트라센 블루는 상대의 대뇌반구에 암시를 걸어 환 각을 보여줄 수 있는데, 광범위한 최면은 무리지만 적어도 아군의 모습을 세 개로 분열시켜 적들을 혼란시킬 수 있지. 덕분에 히드라는 자신의 위치 를 노출시키지 않고도 마음껏 화살을 날릴 수 있게 되는 거다."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들의 활약을 F구역에서 지켜보던 시폰 뤼멘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연이은 설명에 그람드링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힘겹게 말했다. "몰랐습니다……." "음?" "저와 크리스 외에 다른 아이들이 있을 줄은……." 그람드링의 말에 시폰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후하하! 아까부터 묘하게 풀이 죽어 있다 했더니 그런 이유였느냐? 그래, 미리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했구나. 하긴, 놀랄 만도 하지. 갑자기 여섯 명이나 형제들이 늘어났으니까." 어디 놀랐다 뿐이겠는가? 갑자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여럿 나타났 다고 생각해보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심장이 멎을 정도의 공포에 사로잡혔 을 것이다. 유리보다도 약한 것이 인간의 정체성이건만 그것을 희롱하고도 시폰은 아무 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알려줄 수도 없었던 것이…… 저 아이들은 만들어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거든?" "……!" 그람드링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마스터를 노려보았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후, 너와 크리스처럼 인공자궁을 통해 태아 때부터 키워온 아이들이 아니 라는 거다. 저들은 저렇게 보여도 아직 태어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았지." '레프리컨트(Replicant)!' 말 그대로 복제개체를 체세포 제공자와 똑같은 상태, 똑같은 나이로 성장촉 진(Growth Promoting)시켜 만든 클론! 그람드링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하, 하지만…… 그래서는 정신연령이 육체를 따라가지 못하잖아요? 제대로 말도 못할 텐데? 그런데 어째서 저 녀석들은……." 거기까지 말하던 그람드링은 시폰 옆에 있는 한 아이의 존재를 깨닫고 재빨 리 입을 다물었다. 연두색의 AI 슈츠를 입은 한 소년이 두 눈을 감은 채 그들 을 따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복제된 인간, 그것도 레프리컨트라는 것을 녀석들이 듣는 데서 말 해도 되는 건가? 시폰은 그런 그람드링의 걱정을 눈치챘는지 손을 저으며 미소지었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그람. 이 아이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으니까." 그는 연두색 슈츠를 입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소개가 늦었군. 이 아이의 이름은 루미네선스 라돈(Ladon). 언제나 깨어 있 는 자다. 그의 패턴 알리자린 시아닌 그린은 오르크리스트의 패턴 푸르푸린 에 근접한 원격투시 능력이지." "크리스와 같은?" 그람드링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년, 라돈을 돌아보았다. 라돈은 그의 시선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침묵하고 있 었다. "다만 역시 레프리카라고 해야 할까? 크리스의 원격투시에 비하면 라돈의 능 력은 반쪽짜리에 불과해. 그는 남을 투시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만 하니까. 자아를 유지한 상태로는 능력을 전개할 수 없었던 거야. 결국 능력 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라돈은 사고(思考)를 잃어버렸지. 이번 아이들 중에 는 너와 크리스만한 아이가 없구나." 시폰은 그것이 불만이라는 듯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라돈을 바라보았다. 그런 마스터의 모습에 그람드링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지? 레프리컨트들은 기억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태이 기에 정신연령이 육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저와 크리스도 그 때문에 태아에서부터 시작하신 것 아닙니까?" 그람드링은 시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자조 어린 표정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오라 능력을 일깨우려면 그에 상응하는 과거의 기록, 특히 트라우 마가 필요하니까. 아무리 오라 능력자의 인자를 복제하더라도 그 인자를 각성시키지 못한다면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지." 그 인자를 각성시키기 위해 겪어야 했던 13년간의 기억. 그람드링은 그것을 떠올리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차가운 실험실의 독방에 갇혀 꺼내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던 그와 그의 동생. 개발훈련을 빙자한 수많은 실험과 고문 속에서 수천 번도 더 죽음을 생각했었 다. 이런 지옥 같은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죽으 면 편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나마 자살의 유혹을 이겨냈던 것은 혼자가 아닌 둘이었기 때문이다. 자신 에게 매달려 흐느끼는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르크리스트.' 그가 있었기에, 그가 자신에게 의지해주었기에, 그랬기에 그람드링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심약한 동생을 이끌어주는 지표가 되기 위 해 최선을 다했다. 동생 앞에서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그렇게 간신히 버텨온 13년이었다. "확실히 너와 크리스는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내 기대에 충분히 응해주었어."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하지만 말이야.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해. 단기간에 써먹을 수 있는 자식들이 필요하다고. 그도 그럴 것이, 크리스만 해도 그렇게 정성들여 키 웠건만 잃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니까." 시폰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줄곧 생각한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지. 루미네선스는 '예'의 샘플에 레메게톤의 연구를 더해 육체적인 면에서는 완성되어 있었어. 그렇 다면 문제는 정신의 문제. 내재된 오라 인자를 어떻게 각성시키느냐인데, 나는 그것을 블루 브레인(Blue Brain) 프로젝트로 해결해냈지. 초당 최소 22.8테라플롭스에 달하는 블루진 슈퍼컴퓨터로 가상의 두뇌를 시뮬레이션 하여 지각, 기억력, 의식 등 인간의 인지와 관련된 활동 메커니즘을 인간 에게 다운로드시킨 거야. 쉽게 말해서 레플리컨트의 신경회로(Circuit)에 가상의 기억을 덮어씌웠다고나 할까?" "가상의…… 기억?" "예를 들자면 인체자연발화를 사용하는 키마이라의 경우, 어머니가 자신의 눈앞에서 불꽃에 휘감겨 죽는 기억을 덮어씌웠다. 그것이 그의 트라우마가 되어 오라 인자를 각성하게 된 거야. 임의적으로 오라 능력의 이미지 메이 킹마저 조절할 수 있게 된 거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스킬라는 동사 의 가상체험으로 SLEVE를 유도해냈고, 히드라는 산성약품에 빠진 경험으로 자가분해를, 라돈은 사고로 오감을 잃어버리는 경험으로 원격투시의 열망을 이끌어냈지. 거기에 아이들은 나를 철석같이 아버지로 믿고 있다. ACR을 송 과선에 심지 않아도 강한 충성심을 보이고 있어. 정말이지 여러모로 편리한 방법이야." 그래서 이그나이트라는 건가. 의도적으로 사람의 감정을 타오르게 만들다니. 그람드링은 사람의 기억과 감정마저 우습게 이용하는 마스터의 악독함에 치 를 떨었다. 분명 시폰에게 있어 세상이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써먹을 수 있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마스터!" 그때 전장에서 팔라딘대를 전멸시킨 AI 슈츠의 소년들이 하나 둘 귀환했다. 가장 먼저 달려온 키마이라와 스킬라가 시폰의 품에 뛰어들었고, 그 다음으 로 달려온 오르토스와 히드라, 케르베로스는 그런 형제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스터! 마스터가 말한 대로 한 녀석도 남김없이 해치웠어요!" "별것도 아니더라고요! 알아서 죽어주던걸!" "야! 누가 들으면 너희가 다 죽인 줄 알겠네. 죽인 횟수로만 따져도 나와 히드라가 너희보다 위라고!" "웃기지 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키마이라와 스킬라의 아양이 눈꼴시었는지 케르베로스는 코웃음을 쳤고, 히 드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토스는 살육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는 지 아직도 혼자서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 "라돈에게 물어봐. 쭉 지켜봐온 녀석이라면 어느 쪽이 더 많이 죽였는지 알 걸." "라돈! 우리가 많이 죽였지? 응?" "얼른 가르쳐줘!" 케르베로스의 말에 키마이라와 스킬라가 라돈에게 달려들어 다그쳤다. 라돈은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비록 자아는 없 었지만 그나마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수동적으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있 는 그였다. "뭐야! 말도 안 돼!" "거짓말하지 마!" 키마이라와 스킬라는 억울하다는 듯 항의했고 케르베로스는 킥킥거렸다.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정 분하면 다음번에 좀 더 분발해보든가." "쳇! 우리가 맡았던 쪽의 녀석들이 적었기 때문이야." "전멸시키는 건 우리가 더 빨랐어!"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 시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리고 품에 안긴 키마이라와 스킬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자, 말싸움은 거기까지 하려무나. 너희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누구 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형제끼리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예!" 키마이라와 스킬라는 시폰의 손길을 느끼며 홍조 어린 얼굴로 답했다. 그들 의 모습에 케르베로스와 히드라, 오르토스는 저마다 부러움과 시기심을 감추 지 못한다. 그람드링은 그런 이그나이트들을 바라보며 죽은 동생을 떠올렸다. 마스터에 게 칭찬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충성심. 채워지지 않는 애정을 갈구하는 저 눈빛들. 오르크리스트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저들은 시폰 뤼멘에게 길들여진 덩치만 큰 애완견들일 뿐이다. 바보 같은 녀석들! 미련한 녀석들! '어차피 너희도 마찬가지야. 쓰임새가 다하면 너희도 크리스처럼……. 나처 럼…….' 젠장! 그렇게 마음속으로 절망하는 그람드링에게 케르베로스가 다가왔다. 케르베로 스는 침울해져 있는 그람드링의 안색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히죽히죽 웃 으며 말했다. "어이, 잘나신 맏형. 우리에게 활약할 기회를 뺏겼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 고. 지금까지 쭉 수고해왔으니 이제는 쉴 때도 됐잖아? 안 그래?" "……." 그람드링은 담담한 눈으로 케르베로스를 노려보았다. 그 바람에 케르베로스 가 과장되게 뒷걸음치자 그 앞을 히드라가 보호하듯 막아섰다. 케르베로스는 히드라 뒤에 숨어서 키득거렸다. "어이구, 화나셨나봐? 미안해. 미안해.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는 데 그만 깜빡해버렸네. 사과할 테니 용서해달라고. 응? 용서해줄 거지?" 그람드링은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고 무심히 그를 지나쳤다. 그 태도가 신경 을 건드렸는지 케르베로스는 험악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그람드링의 등 뒤 에 대고 말했다. "어이, 혼자서 뤼멘의 성을 가졌다고 특별한 척하지 말라고. 이번 일만 끝나 면 우리도 엄연히 마스터의 아들들이니까. 그렇게 되면 네 녀석이 잘난 체 하는 것도 마지막이야. 알겠어? 더 이상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 그람드링은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지금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케르 베로스에 대한 분노도, 시폰을 향한 증오도 아니었다. 그저 연민일 뿐이다. '크…… 크크, 크크크크.'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가련한 연민. '흐흐흐흐!' 그람드링은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하고 나직이 터뜨렸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3 - Ｂy Ｎext Ｎeo =-=-=-=-=-=-=-=-=-=-=-=-=-=-=-=-=-=-=-=-=-=-=-=-=-=-=-=-=-=-=-=-=-=-=-= "거기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빨리 치우지 못해! 지금 탱크가 들어오지 못 하고 있잖아!" 한성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군인과 의경들을 지휘하던 제4기갑사단 대대 작전 장교 전시홍 소령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지금 운동장에서는 한창 의경들이 민간인들을 통제하면서 학생들이 세운 간 이상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성고에는 50여 개가 넘는 동아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아리 하나하나가 각자 야외에서 상점을 하고 있었으니, 군인들이 치워야 하는 텐트 수만 해도 어마어마할 지경이었다. 그 규모에 일찌감치 질려버린 전 소령은 짜증나는 목소리로 푸념했다. "무슨 놈의 고등학교 축제가 이렇게 거창한 거야? 내 살다살다 학교축제에서 자전거 묘기를 구경하는 건 또 처음이네." 그의 말대로 운동장 한복판에는 자전거부가 마련한 묘기무대가 꾸며져 있었 다. 대리석 묘기 받침대까지 있는 것이 아주 본격적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강당에서는 모 오페라관이 부럽지 않은 연극무대가 꾸며 져 있고, 운동장 한쪽에는 떡하니 콘서트장까지 차려져 있을 정도다. 학생들이 돈이 있어서 저런 걸 준비하지는 않았을 테고, 결국 학교에서 돈을 대줬다는 걸 텐데……. "이 학교의 이사는 돈이 썩어 넘치나?" 그렇습니다. 한성고의 이사는 통일한국의 삼대산맥 중 하나인 대원그룹의 후 계자니까요. 어쨌든 의경과 군인들의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운동장은 어느덧 정리 가 되어갔다. "들어와!" 키리리리리릭 전 소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성고 입구로 FMBT(Future Ma in Battle Tank) 아브라함(Abraham) 두 대가 들어왔다. 재래식 140밀리미터 고체추진제 포가 달린 이 탱크는 현존하는 전차들 중 최고의 화력과 방어력 을 자랑함으로서, 2015년 이래 줄곧 지구방위군의 주력 무기로 채택되어 왔 다. 군인들에 의해 운동장 한쪽에 모여 있던 민간인들은 갑작스런 전차의 등장 에 저마다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전투차량까지 투입 될 정도라면 이번 사태가 단순한 규모의 진압으로 끝날 리 없었던 것이다. 지구방위군은 한성고에서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 건가? '후후, 마음껏 놀라도록 하시지. 좀 더 놀라주지 않으면 이렇게 FMBT를 가져 온 보람이 없다고.' 전 소령은 민간인들의 당황하는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도 이 FMBT를 사용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다만 상부에서 내린 명령이 명령인 만큼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재량껏 방법을 쥐어짜야 했던 것이다. 한성고에 있는 피스메이커를 색출, 검거하라. 그로 인한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생포가 불가능할 시에는 사살해도 좋다.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전 소령의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그 몬스터들을 상대 로 이겨온 피스메이커를 자신들이 무슨 수로 생포할 수 있단 말인가? 사살? 웃기지도 않는 소리. 되레 이쪽이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전 소령은 2029년 86호 몬스터와의 교전에서 패퇴한 기갑사단의 생존자였기 에 누구보다도 몬스터의 무서움과 피스메이커의 대단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렇기에 무력 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구방위군이 피스메이커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최선책이란 과연 무 엇이겠는가? '인질극이지.' 여차하면 민간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피스메이커를 협박할 생각이었다. 만약 피스메이커가 신병을 넘기지 않고 무력항쟁을 펼치면 FMBT 아브라함의 운동 에너지 탄은 민간인들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이는 양심과 도덕상 허용되어서는 안 될 죄악이지만, 차라리 피스메이커에게 괴멸당할 바에는 죄악을 저지르는 편이 낫다. 그만큼 전 소령의 피스메이커에 대한 경각심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진지했 다. 어쩌면 그야말로 현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키릭 키리리릭 아브라함들의 포신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민간인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전 소령은 운동장에 모인 민간인들을 둘러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보이나, 피스메이커? 만약 내 의도를 눈치챘다면 순순히 투항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수백 명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 부디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들지 말자고!' 전 소령은 여유 있는 눈으로 본관에서 군인들의 통제에 따라 나오는 민간인 들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체념한 피스메이커가 저들 사이에 끼어서 나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때마침 본관 3층의 검문도 끝났는지 새로운 인파가 운동장으로 나오기 시작 했다. 그렇게 새로운 인파를 지켜보던 전 /소령은/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거 두려고 했다. 하지만……. '응?' 뭔가 이상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다. 전 소령은 의아함을 느끼며 다시 인파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 이 왜 이상함을 느꼈는지 알아냈다. 민간인들은 아니었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 시민들로 이루어진 집단 속에는 별다른 문제점이 없었다. 문제는 그들을 통솔하는 군인들 쪽에 있었다. 평소 전 소령은 대대 내에 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것을 자 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다른 장교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만큼 자신의 부대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눈에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얼굴의 사병들이 보였다. '윽! 저 사람, 아까부터 계속 우릴 쳐다보는데?' '들킨 거 아닐까요?' '설마……. 당황하지 말고 계속 걸어. 지가 어떻게 우릴 알아봐?' '태연한 척. 태연한 척.' 다섯 명의 사병은 전 소령의 시선이 자신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떨리는 가 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괜스레 머리에 맞지 않는 철모를 눌러쓰고 되도록이 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행동이 오히려 더 어색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그들로서는 그것이 최선이 었다. 만약 자신들이 지구방위군의 옷을 훔쳐 입고 이러고 있다는 것이 발각 되기라도 하는 날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설마 총살이라거나 교도소 행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사병들은 점점 전 소령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들키지만 말아라. 제발…….' 제발! "……!" 그런 그들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전 소령은 아무런 제지도 없이 사 병들을 통과시켜주었다. 그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그들을 몇 번 보다가 시선 을 돌릴 뿐이다. 그 모습에 사병들은 소리 없는 환호성을 울렸다. 살았다! 통과했어! "……잠깐." 그러나 기뻐하기가 무색하게 전 소령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그들을 불러 세웠 다. 마음을 놓고 있었던 사병들로서는 날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사병들 중 가장 연장자인 '그녀'가 전 소령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애써 목소리를 굵직하게 만들어 물어보았지만 어딘가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 다. 전 소령은 그런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어디 소속 누구야?" 이런! 그녀는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럴 때를 대비해 전 투복을 뺏어 입은 사병의 개인정보 정도는 외워두었다. 소속과 관등성명을 대 는 것쯤이야 문제없다! "충성! 2중대 3소대 상병 박재우!" "음." 거수경례를 하며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 전 소령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으면서 손짓했다. "됐어. 그만 가봐." 그녀와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 젠장! 하마 터면 간 떨어질 뻔했네. 그러게 왜 갑자기 소속을 묻고 그러는 거야! 어쨌든 이번에야말로 안심해도 되는 거겠지?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놀란 일행들을 다독거리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 다. 일단 가장 어려운 관문은 통과했으니 이제부터는 기회를 봐서 입구로 빠 져나가기만 하면……. 철컥 그때 날카로운 격철소리가 그녀와 일행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바쁘게 앞 길을 모색하던 사고(思考)가 수십 개의 총구 앞에서 정지해버린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녀와 일행의 주위로는 수십 명의 군인들이 원을 그린 채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총을 바닥에 버려라!" "양손 올려! 움직이면 쏜다!" 군인들의 두서없는 경고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왜 갑자기 이렇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로군."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와 일행에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소령이었다. 그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군인들의 뒤에서 그들을 응 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그녀는 곧 자신들이 그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들켰군. 잘 속여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들키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거지. 흔히들 2021년 지구 방위군 창립 이 후의 군 관련 문외한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인데, 우리는 지구방위군 연합 에 소속된 한국통합군이지. 이렇게 지구방위군으로서 활동할 때는 한국통합 군 소속은 사용하지 않는다네. 다음부터는 유의해두라고." "젠장." 그녀는 이를 갈며 자신에게 보고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한 여인을 원망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만 대답하면 된다고 했으면서! 얘기가 다르잖아! 전 소령은 일행의 인원수를 파악한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흠, 제보대로라면. 민수정, 시더 웰리스, 윤채영, 성마리, 이유리. 이렇게 다섯 명이 전부인가? 하하, 설마 이렇게 손쉽게 체포할 줄이야. 꿈에도 몰 랐군. 아니, 스스로 나와줄 줄 몰랐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하!" 이래서야 모처럼 FMBT를 준비한 것도 헛수고가 되어버렸군. 내가 너무 과대 평가했던 거야. 전 소령은 통신병으로 하여금 본관을 검문 중인 나머지 병력들에게 귀환명령 을 내렸다. 피스메이커의 잔당들을 발견한 이상 최대한 그들의 구류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편이 좋았던 것이다. 피스메이커 놈들은 잡았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FMBT의 포신을 거두는 것 도 아직은 금물이다. 전 소령은 총을 버리고 군인들의 지시에 따르는 그녀와 일행들을 향해 경고 했다. "섣불리 반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애꿎은 사람들까지 다치게 될지 모르니까."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항한다고 그러는 거야?" 그녀가 말도 안 된다며 투덜거렸지만 전 소령은 가볍게 코웃음쳤다. 방심시 켰다가 뒤통수치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라. 특별히 너희들을 위해 준비한 물건 이 있으니까." 본관을 검문하던 군인들이 곧 포위진에 합류했다. 전 소령은 그제야 한결 마 음이 놓이는지 부하가 건네준 가방에서 일련의 수갑을 꺼내 그녀와 일행에게 던져주었다. "한때 자네들의 동료였던 시폰 뤼멘, 그가 우리에게 보내준 구속구다. 오라 능력이라고 했던가? 자네들이 자랑하는 그 힘을 무력화시켜주는 물건이지. 아마 나보다는 자네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알 거 같으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발밑에 떨어진 수갑을 집어들었다. 그 움직임에 따 라 그녀를 겨누던 총구들이 천천히 위아래로 따라 움직인다. 그녀와 일행들은 체념한 듯 저마다 수갑을 자신의 손에 채웠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전 소령은 영문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피스메이 커 일행의 태도가 수상쩍어서? 왠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가만…….' 전 소령은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들이 제보받은 한성고의 피스메 이커는 총 다섯 명. 그리고 그 다섯 명은 전부……. '여자였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눈앞의 일행은 전 소령 자신과 말다툼을 벌이는 여자 를 제외하고는 전부 체격이 건장했다. 건장한 남자들처럼 보인다. '……설마!' 우우우우웅 그때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사나운 엔진음! 소리가 들려온 곳은 한성고 본관 뒤편이었다. 주차장 쪽이다! 부아아아앙 순간 거친 작렬음과 함께 한 대의 검은 스포츠카가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 다. 최고출력 542마력을 자랑하는 V6 3.5리터 트윈 터보엔진! 마치 황량한 사막을 거침없이 누비는 검은 표범과도 같은 그 자태에 사람들 은 이 차에 재규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로 작년 10월에 대파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관심 어린 애정과 노력으 로 되살아난 슈퍼카, 수정의 애차인 재규어 RX78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쪽은!" 전 소령은 이를 악물고 자신들이 포위한 일행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거칠게 일행이 쓰고 있던 철모를 벗겨버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그들의 수배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얼굴의 여 자와 네 명의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2학년 1반 담임 하지연과 박재 영을 비롯해 남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수정 일행 대신 전투복을 걸쳐 입고 지구방위군의 주의를 돌리기 위 해 자진해서 미끼가 되었던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미끼가 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지연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재규어를 쏘아보았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그녀 일행은 무사히 교문을 빠져나가 피스메이커가 거 리로 도망쳤다며 소동을 일으키고, 그 틈에 수정 일행은 학교를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연의 계획이 어설퍼 보였던 수정은 일부러 보고방법을 다 르게 가르쳐줌으로써 지연 일행이 조기에 발각되도록 손을 써놓았던 모양이다. 지연은 말도 없이 계획을 수정한 수정에게 화가 났지만, 이내 그녀가 자신들 을 배려했기에 그랬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풀었다. 만약 애초에 자신의 계획대로 밀어붙였더라면 일행의 위험부담은 더욱 커졌 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교를 빠져나간다고 쳐도 그 뒤에 어떻게 지구방위군의 주의를 돌렸겠는가? 괜히 어설프게 날뛰었다가는 도리어 그녀와 학생들만 다쳤을지도 모른다. 그 럴 바에는 차라리 일찌감치 사로잡히는 편이 나았다고 볼 수 있었다. "제길! 발포해! 저 검은 차를 당장 멈춰 세워!" 전 소령의 외침에 지연 일행을 겨누던 총구들이 재규어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지연과 재영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자식들, 지금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쏘지 맛!" 투타타타타 그러나 뒤를 잇는 건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한 무시무시한 총성의 아우성들이 었다. 직접 총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던 지연 일행은 기겁하며 귀부터 틀어막 았고, 다른 민간인들도 비명을 내질렀다. 타타타타타 '안 돼! 그만둬!' 지연은 귀의 고통에 눈물이 맺힌 눈으로 재규어를 바라보았다. 재규어는 희 뿌연 탄막이 쳐진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수백 발의 총알을 얻어맞았을 게 분명한 차체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심 지어는 차의 유리창조차 새하얀 금이 갔을 뿐, 조금도 부서지지는 않았다. "방탄차인가!" 영화에서나 본 방탄차체의 위력에 지연 일행은 탄성을 터뜨렸다. 전 소령은 이를 갈며 부하들에게 발포를 멈추게 했다. "어차피 학교의 모든 출구는 의경의 기동대 버스가 막고 있어! 녀석들은 독 안에 든 쥐야!" 부르르르릉 그러나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한성고 입구를 막고 있던 기동대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운동장에 있던 의경들 또한 철수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경들의 이탈에 어이가 없어진 전 소령은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한 의 경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왜 허락도 없이 철수하는 거야? 왜!" "그, 그게 갑자기 철수명령이 내려져서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빌어먹을!" 전 소령은 붙잡은 의경을 땅바닥에 팽개치고 발을 동동 굴렸다. 한편 그런 운동장의 상황을 양호실에서 지켜보고 있는 두 남녀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2학년 1반의 부담임 제갈영 교생과 박미정 양호교사였다. 하지만 그 실상은 이 한성고의 이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대한그룹의 차기 후 계자와 그 사촌누이. "누님의 부탁대로 서울경찰청장에게 한성고의 의경들을 철수시키라고 했습니 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호호. 수고하셨어요, 동생님." 제갈영의 말에 미정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제갈영은 그런 사촌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푸념했다. "아무리 저라도 경찰청장에게 압력을 넣는 짓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습 니다. 만약 부탁한 사람이 누님만 아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예요." "흐응, 왜 어울리지도 않게 약한 모습을 보이시나. 이런 일에 쩔쩔매서야 대 원그룹의 후계자 자격이 있겠어?" "나 참, 그나저나 왜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신 겁니까? 누님답지 않게?" 제갈영의 질문에 미정은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 하지연 선생님의 부탁인걸. 자기 제자를 위해서 라면 간도 쓸개도 다 빼줄 사람인데 내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무모한 행동을 도맡아 했을거야." "으음, 확실히 제 모교의 은사님이 위험해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죠." 제갈영은 못마땅해 하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연은 그런 동생의 모습에 빙긋 미소지으며 다시 운동장의 전경을 돌아보았 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의 축제를 이대로 망쳐버릴 수도 없고 말이야?" "당연한 말씀을." "어차피 내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네가 먼저 손을 쓰려고 했지?" "……자꾸 당연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제갈영은 코웃음을 치며 미정의 말을 끊어버렸다. 역시 그들 오누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한성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투앙! 그때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폭음이 울리며 한성고의 입구 쪽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운동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FMBT 아브라함 중 한 대가 발사한 고체추진제 포 였다. 초속 2천2백 미터의 관통형 운동에너지탄이 한성고 입구를 단박에 박살 내버린 것! 그 바람에 입구로 돌진하던 재규어 RX78은 하마터면 폭발에 휘말릴 뻔했지만, 그전에 신기에 가까운 360도 리버스 턴으로 차체를 빼낼 수 있었다. 그렇게 재규어의 탈출이 저지되자 전 소령은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하하하하! 내가 뭐라고 했어? 독 안에 든 쥐라고 했잖아!"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아브라함에게 고체추진제 포의 발사를 명령했다. 목 표는 피스메이커 연놈들이 타고 있는 저 검은 스포츠카! "생포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그대로 날려버려 주지!" 앞의 발포에 넋이 나가 있던 지연과 재영은 전 소령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채 그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군인들의 제지로 발목을 붙잡힌다. 전 소령은 포탄의 위력에 도취되었는지 주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 신 소리를 질렀다. "2발 장전! 발사!" 아브라함의 포신이 멈추어 선 재규어를 조준했다. 그리고 제2탄을 날리려는 찰나! 쉬잉 날카로운 붉은색의 섬광이 포신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발사된 M8 29E3탄은 원래의 목표인 재규어를 잃어버리고 엉뚱하게 운동장 한복판을 두드 린다. 콰아아앙 지축이 뒤흔들리며 폭음이 사람들의 비명과 한데 어우러졌다. 오발로 발을 헛디딘 전 소령은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냐!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 거야! 부르르르릉 그런 그의 앞으로는 한 대의 오토바이가 서 있었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 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그 위의 탑승자들이었다. 선명한 주황빛의 AI 슈츠를 입은 남자와 붉은 AI 슈츠를 입은 여자! 바로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와 피스 레드 성마리였다. 옥상에서 상 황을 지켜보던 그들은 수정의 연락에 발맞춰 제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FMBT의 포신을 절단한 것은 당연히 마리가 들고 있던 오라 소드의 반물질 절 삭성 커터였다. "너, 너희들은……!" 전 소령은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코마히코와 마리를 가리켰다. 그는 예전에도 이런 복장을 한 피스메이커의 에이전트를 목격한 적이 있었다. 86호 몬스터와의 교전에서 전멸당할 뻔한 그의 부대를 구해준 노란색 AI 슈츠 를 입은 여성대원! 분명 피스메이커의 증축이자 유일하게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그들을 상부 에서는 다음과 같이 칭하고 있었다. "피스…… 대원!" 전 소령의 경악에 찬 외침이 신호가 되어 멈추어 섰던 재규어와 오토바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규어 RX78은 운동장까지 돌아 나온다 싶더니 그대 로 핸드브레이크를 잡아 180도 턴을 하면서 다시 입구를 마주한다. 그 모습에 운동장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시 돌파할 셈인가? '저 무너진 입구를?' 포탄에 얻어맞은 한성고 입구는 절반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그나마 아브라 함의 운동에너지탄이 관통형 탄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폭발형 탄이었다면 입 구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절반만 무너졌다 해도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토바이라면 모 를까 자동차가 지나가기엔 터무니없이 입구의 너비가 좁았다. 부아아아앙 사람들의 우려와 기대를 뒤로하고 재규어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동시에 코마 히코와 마리가 탄 오토바이도 남은 한 대의 아브라함을 향해 쏘아져나간다. 막 아브라함에 발포명령을 내리려던 전 소령은 오타바이가 포신의 정면으로 돌진해오자 당황하며 소리쳤다. "바, 발사!" 서겅 채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날카로운 단절음이 먼저 아브라함을 갈랐다. 오 토바이가 전차의 곁을 스쳐지나가면서 코마히코의 뒤에 타고 있던 마리가 오 라 소드의 검신을 한계길이까지 늘어뜨려 그대로 아브라함을 세로로 이등분시 킨 것이다.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육식(六式), 활강(滑降)! 쿠구구구구 고체추진제포가 달린 전차의 선회 포탑이 굉음을 울리며 서서히 동체에서 미 끄러져 내렸다. 그리고 이내 지면을 울리는 둔탁음. 포탑이 떨어져나간 아브라함의 동체에서는 새하얀 표정으로 질린 운전병과 포 병이 고개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칼로 탱크를 가르다니……. 저런 일이 가능하기는 하단 말인가? 터어어어엉 그러나 놀랄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도양단된 탱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람들은 입구에서 들려온 쇳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는 막 또 하나의 신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전거부의 묘기 받침대였다. 앞에서 지구방위군이 치우려다 포기한 대리석 으로 만든 받침대. 그 받침대로 돌진한 재규어가 그대로 우측의 두 바퀴를 들어 올려 좌측 바퀴 로만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투 휠스 드라이브(Two-Wheels Drive)라고 하는 이것은 흔히 영화에서 카 스 턴트맨들이 선보이는 고난이도 묘기였다.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 중심을 잡아내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지만, 그 와중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유지하기란 보통의 평형감각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재규어는 그 흉내도 낼 수 없는 일로 차체를 세로로 일으켜 세워 용케도 중 심을 잃지 않고 무너진 입구를 통과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감탄할 겨를도 없 이 뒤이어 코마히코와 마리의 오토바이도 입구를 빠져나간다. "……." 그렇게 재규어와 오토바이가 한성고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의 사람들 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앞에서 연달아 펼쳐진 신기의 여운이 사라지 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가장 길길이 날뛸 거라고 생각했던 전 소령조차 넋이 나간 채 명령 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뇌리 속으로는 2029년의 악몽이 지금의 상황과 오버랩되고 있었다. "야…… 방금 그거 뭐였냐?" "대체 뭐가 지나간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침묵이 깨지며 사람들이 하나 둘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들은 이윽고 작은 웅성거림으로 변했고, 이내 한성고의 운동장이 떠들썩해질 정도로 혼잡해졌다. 멍하니 입구 쪽을 바라보던 지연과 재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 러보았다. "사람 맞지? 사람이었던 거지?" "으아! 전차가 잘리질 않나, 총을 맞아도 멀쩡하질 않지 않나." "괴물이네, 괴물." "사람이 아냐!" 질린 표정으로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의 반응에 지연과 재영은 마음이 무거워 졌다. 역시 어쩔 수가 없는 걸까? 자신들과 다른 존재에 대한 공포는, 그래서 결국 은 외면하게 되는……. '괴물이란 말은 다른 걸 뜻하는 게 아냐! 자신들과는 다르다! 우리와 넌 다 르다!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표현한 이기적인 말에 불과해!' 결국 그때의 그 말대로란 말인가? 우리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이대로 계속 시기하며 질투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단 말인가? "……캡이다." 그때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연과 재영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전의 그건? "죽인다! 작살이야!" "내 몸에 소름 돋은 거 봐! 아직까지 몸이 떨려!" "진짜 멋졌어! 최고다!"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방금 전의 상황을 화제로 삼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뜻밖의 반응에 지연과 재영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분위기는 뭐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바보! 그러니까 더 굉장한 거지! 저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봤어!" "사람이든 괴물이든 대단한 건 대단한 거야!" "대단한 괴물이라고!" 사람들은 스스로의 격앙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었다. 저마다 신이 나서 어떻게든 서로의 감상을 나누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이 사람들……. "선생님!" 재영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발끝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떨림. 이것을 전율이라고 해야 할까,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사람들은 방금 전의 상황을 축제의 피날레 정도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토록 꾸밈없이 기뻐하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일 테지. 이상(異常)을 즐길 수 있는 거야. '하지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들이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지연은 너무나 기 뻤다.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만약 지금 눈앞에 카이 브릿드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었다. 우리는 네 녀석의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고. 이기적이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 하지는 않는다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네가 말한 것은 틀렸어, 라고! '유가인.' 지연은 이 자리에 없는 자신의 제자를 떠올렸다. 재영 역시 자신의 죽마고우 를 떠올린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힘껏 잡고 수정 일행이 떠나간 입구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모두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기를. 모두가……. '평화로워 질 수 있기를.'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4 - Ｂy Ｎext Ｎeo =-=-=-=-=-=-=-=-=-=-=-=-=-=-=-=-=-=-=-=-=-=-=-=-=-=-=-=-=-=-=-=-=-=-=-= 각 부대는, "각 부대는……." 모두, "모두……." 메인 센터로 향하도록. "메인 센터로 향하도록……." 에르체베트가 입술을 달싹이자 하 소령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녀의 말 을 따라했다. 그렇게 사이코포모스로 대신 부대에 명령을 내리던 에르체베트는 흥미로운 눈으로 적외선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장의 특임대 대원들이 보내오는 영상에는 한창 유레카의 메인 센터가 나 타나고 있었다. 슬슬 지구방위군의 공세에 팔라딘대의 방어가 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방금 전까지 해도 언더 시티의 외곽지역에서 조금도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 이었건만. "역시 시폰 뤼멘. 주인님이 직접 고른 비즈니스 파트너답군." 에르체베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시폰 뤼멘과 그의 아이들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대번에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언더 시티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지구방위군을 농락하던 팔라딘대가 무력하게 전멸 당하고 있었다.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라." 영상으로 보이는 일련의 AI 슈츠 소년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낮게 탄식했다. 단순히 성당기사단의 배신자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었는데 설마 저 정도로 지 독한 인간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폰 뤼멘. 성당기사단의 12세라핌들 중 열 번째의 검을 수여받은 아포스트 롤로스 타데오. 그런 그가 네이 안데르슨과 손을 잡게 된 것은 그리 뜻밖의 일이 아니다. 피스메이커 미국지부의 사령관이었던 그가 미국정계에 심어진 네이 안데르슨 의 혈족들과 만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서로가 같은 목표를 가진 이 상 대립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피스메이커의 타도.' 네이의 경우 정확하게는 피스메이커의 배후에 있는 성당기사단이 목표였고, 시폰은 피스메이커의 우두머리인 진 사령관이 목표였다. 시폰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진 사령관을 증오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 도 그와 협력해서 네이 안데르슨이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시폰은 케루빔의 과학력과 피스메이커의 기밀사항을 네이에게 건네 주는 귀중한 정보책이었다. 때문에 네이는 다른 협력자인 한시영에게 AI 컴플 리트 세트와 오리하르콘 관련 장비들을 공급해줄 수 있었고, 무인위성 위그드 라실을 해킹하여 피스메이커의 정보를 빼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에르체베트는 손톱을 깨물며 영상에 비친 시폰을 노려보았다. 언제나 주인의 신상을 걱정하는 그녀로서는 저런 위험한 남자가 주인 곁에 머무르는 것을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었다. 피스 블랙 한시영도 그렇고……. 어째서 자신의 주인은 매번 정체불명의 인간들만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는 걸 까? '미스터 한은 그 목적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지 않아. 아마도 기가스 티폰을 이용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면 시폰 뤼멘은? '그는 목적을 떠나서 그 존재 자체가 위험해.' 그가 입수한 레메게톤은 노아가 판게아에서 추방되기 전에 남긴 비술이었다. 바나베인의 양산을 목적으로 개발된 유전변이 기술. 그 증거로 네크로맨서 카이 브릿드가 부리는 라무의 아이들, 네크로 크리쳐 들은 모두 이 레메게톤의 72개체 타입을 띠고 있었다. 노아가 테라 인코그니 트로 가서 레메게톤에 여러 가지 개량을 가했겠지만, 실제로 연구는 추방 전 에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폰 뤼멘은 이 기술을 완전히 해독하여 바나베인 능력자를 현세에 양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또 한 차례의 개량을 가했는데 ……. '바로 오라 능력자의 복제.' 오라 능력자의 유전자로 복제인간을 만든 후 거기에 레메게톤의 바나베인을 가미하여 오라와 바나베인 두 개체 능력을 전부 가진 새로운 혼혈종을 만든 것. '그것이 바로 루미네선스!' 그람드링과 오르크리르스트를 비롯한 레드 브라더스였던 것이다.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들은 양산이라는 초기의 목적에 더욱 걸맞은 최종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아와 테라, 양쪽을 적으로 두신 주인님에게 있어 양쪽의 힘을 모두 가진 시폰 뤼멘이야 말로 절대악.' 에르체베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차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시폰 뤼멘과 지 구방위군의 특임대가 향하고 있을 메인 센터를 돌아보았다. 붉게 물든 적외선 시야 사이로 언더 시티의 중앙에 유독 길게 솟아 있는 검 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렇게 방향을 잡은 에르체베트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아직 한시영 그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최후에 웃는 건 나의 주인님이 되실 테니까.' 피스 블랙과 그의 수하들, 시폰 뤼멘과 루미네선스, "이번 기회에 모두 없애주겠어." 불완전한 협력관계는 여기까지다! 콰아아아앙 메인 센터의 입구 주변에 설치해둔 인력 식 부비트랩이 일제히 폭발했다. 메 인 센터의 통로에서 엄폐물로 몸을 가린 한진과 팔라딘 대원들은 폭발이 지나 가기가 무섭게 곧바로 라이플을 들어 사격에 들어갔다. "Fire!" 투타타타타 연막 사이로 수십 발의 총알이 빗발치며 침입자들을 쓰러뜨린다. 연막이 걷 혀나간 뒤 검은 베레모와 얼룩무늬 전투복을 착용한 특임대 대원들의 시신이 보였다. 한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설마 방어선이 여기까지 뚫려버릴 줄이야! '우리 외에 다른 부대는 모두 전멸한 건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침점호 때만 해도 다 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밤이 되면 '오늘도 별일 없었지?'하며 안도 반 웃음 반으로 서로를 반겨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설마 몬스터도 아닌 인간들과 싸우게 될 줄은……! 휙 그때 팔라딘대가 있는 통로 쪽으로 검은 뭔가가 날아들었다. 폭탄이다! 그것을 보자마자 한진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피햇!" 콰아아아앙 뒤늦게 몸을 날린 대원들이 폭발에 휘말려 육편을 흩뿌렸다. 그런 처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한진과 대원들은 충격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다. 입구 쪽에서 다시 지구방위군의 진입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진은 남은 대원들을 추슬러 통로 안쪽으로 후퇴했다. 그리곤 중앙복도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다. "여기서 적의 발목을 붙잡는다. 절대로 녀석들을 위로 올려 보내면 안 돼!" "작전본부실 쪽에서는 엘리베이터를 멈출 수 없을 겁니다. 우리 쪽에서 폭 파시킬까요?" 부하의 질문에 한진은 홀 입구로 대원들을 배치시키며 말했다. "메인 센터의 엘리베이터가 끊기면 사령관님이 메디컬 센터와 연결된 자동 승강로로 탈출하실 수밖에 없어. 일단 사령관님을 탈출시킬 사람이 필요 한데……." 그 말에 대원들이 움직임을 멈추며 한진을 주목했다. 한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그는 이 사지에서 진 사령관을 피신시킬 대 원을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많은 수를 뽑을 수는 없었다. 이곳의 병력과 임무를 생각한다면 단 한 명. 그리고 마침 적임자가 한 사람 있기는 했다. "……저는 죽어도 가지 않을 겁니다." 홀의 벽에 기대어 라이플을 손보고 있던 요원이 한진의 시선을 외면하며 단 호하게 말했다. 그 고집스러운 모습에 한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싸움할 생각은 없다. 지금 이 인원에서 요인경호를 맡은 경험이 있는 사 람은 너뿐이다." "여기에 시크릿 가드였던 사람은 장 상사님과 변 상사님도 있습니다! 왜 하 필 접니까? 제가 여자니 뭐니 해서 그러시는 거라면……." "바보 같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듣다 못한 한진이 버럭 소리지르며 요원의 말을 끊었다. "넌 피스 대원의 SG로서 수차례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다. 무엇보다 몬스터와 두 번이나 교전해서 살아남은 것은 너 혼자뿐이지. 난 너의 그 뛰 어난 생존능력을 고려해 지금의 임무를 부여하는 거란 말이다!" "……." 요원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유한진 부대장이 임무를 내린 것은 말 그대로 자신이 적격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어 명령을 거부하려 했던 것은 동 료들과 헤어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저도 남으면…… 안 되겠습니까? 혼자 가는 것은 죽어도 싫습니다. 더 이상 혼자 살아남는 것은……." 요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한진은 그런 그녀를 다독여주며 미소했다. "멋대로 우리를 죽이지 마라. 우리가 그렇게 쉽게 죽어줄 것 같으냐?" "하지만……." 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위의 부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 주목해봐! 우리 천 중사가 이렇게 말하는군! 자신이 갔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전원이 살아 있을 경우 다음 회식 때는 반드시 치마를 입고 나오겠 다고!" "오오!" "부대장, 멋쟁이!" "역시 남자다!" "반드시 살아남아주지!" 대원들이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환호하자 요원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외쳤 다. "아니! 누가 그런 약속을 한다고 했습니까!" "뭐야, 자신 없어?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까봐 걱정돼?" "그런 건 아니지만……." 요원은 못 말린다는 듯 혀를 찼다. 정말이지 이 사람들은……. 정말……. "알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얼마든지 입어주겠습니다." 요원은 눈물을 닦으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러니……." 닦아내기가 무색하게 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녀는 쓰러지듯 한진의 가슴 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그러니 살아주세요. 반드시, 반드시 모두들…… 살아주세요. 살아주세요." "아아, 반드시 살아주지." 한진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를 힘껏 안아주었다. 대원들은 저마다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그들은 재회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요원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한진과 대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다 가 마지막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한진과 대원들도 정중하게 경례를 받아주었 다. "피스!" 그리고 이별. 한진과 대원들은 요원이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럽게 울고 있을 거란 사실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큰해지는 코를 문지르며 장난 기 서린 목소리로 한진에게 말했다. "에이, 부대장 약았어요. 이런 기회를 틈타서 내기에서 이기다니." "아아, 이번 달 월급은 모두 부대장 차지인가? 부자 되시겠네." 팔라딘대에서 요원에게 먼저 치마를 입히는 대원에게 그 달의 월급을 몰아주 는 내기가 성행한다는 풍문은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한진은 대원들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내기에서 이긴 건 아니라고. 그러니 다들 살아남아서 나 좀 부자 되게 만들어 줘봐. 알겠나?" "아아, 이래서야 앞의 눈물 어린 이별이 의미가 없잖아." "부대장, 절대로 천국에는 못 갈 거야." "예쁜이가 돌아오면 다 일러바쳐야지." "자자, 얼른 얼른 움직여! 엘리베이터에 폭약 설치하고 비상계단으로 올라가! 어서!" 한진은 대원들의 등을 떠밀며 홀의 입구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밖이 이상할 정도로 너무 조용했다. 분명 지금쯤이면 돌입하고도 남아야 될 시간인데……. 한진은 엘리베이터에 C4의 설치가 끝나자 대원들을 비상계단으로 철수시킨 다 음 그 중 한 명에게 홀 밖의 동태를 살피도록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대원은 소리 없이 입구의 벽에 붙어 밖의 사각지대에 핸드 미러(Hand Mirror)를 내밀 었다. 한진은 C4를 설치한 대원에게서 기폭 장치를 건네받으며 비상계단으로 향하 려고 했다. "부, 부대장님!" "……!" 그때 정황을 살피던 대원의 비명이 일행의 발목을 붙잡았다. 한진은 영문을 몰라 입구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의 대 원이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밖에…… 밖에 지구방위군이 전부……." "뭐?" "전부…… 죽어……." 쉭 그러나 대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녹색의 기운을 띤 곡도 하나가 그의 목 한가운데로 삐져나온 것이다. 그 모습에 한진과 대원들은 반사적으로 라이플을 입구에 겨누었다. "제길! Commence Fire!" 한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원들의 총구가 불을 내뿜었다. 하지만 대원을 죽인 정체불명의 적은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사격범위에서 몸 을 피해냈다. 녹색의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적의 모습에 한진은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을 멈추고 말았다. 저 모습은! '……진우 대장님?'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으니. 촤촤촤촤촤 이런 바보…… 같은! 소름끼치는 파육음! 그와 동시에 한진의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고통에 뇌가 시각을 비롯한 오감을 차단시킨 것이다. 그리고 회복되는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 질펀한 액체에 몸을 눕히고 있는 자신의 상태였다. 모든 것이 붕 떠 있는 것 만 같은 부유감. 아늑해져가는 정신.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너무나 냉철하게 돌아가는 사고. 한진은 힘겹게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있던 부하들은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되어 있 었다. 팔다리가 떨어져나가고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는. 너무도 지독한 피비 린내에 후각이 마비되었는지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그런 부하들의 토막 난 시체더미들 위에 한진은 누워 있었다. 그의 몸 상태도 그리 성한 것은 아니었다. 두 다리가 허벅지 밑으로 잘려나 가 있었고, 라이플을 든 오른손도 사라져 있었다. 그나마 쇼크사로 즉사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하아. 하아.' 사지가 떨어져나간 육신을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고통이 눈 물샘을 자극했는지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자신 의 숨소리만이 시끄럽게 머리 속을 가득 채운다. '대장…….' 한진은 자신과 부하들의 시체로 다가오는 한 녹색 AI 슈츠 소년의 모습에 힘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이내 실소했다. 눈앞의 소년은 그의 대장 정진우가 아니었다. 전혀 다 른 사람, 다른 능력자였던 것이다. '하, 하하. 나라는 녀석은 정말이지…….' 한진은 예전에 자신이 팔라딘대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진우가 한 말을 떠올리며 킥킥거렸다. 분명히 그때 그는……. '유한진 소위, 실수를 하는 건 좋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는 대장 은 되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대장님. 역시 저에게 대장이라는 직위는 어울리지 않나 봐 요.' 무엇보다 저의 대장님은 당신 한 분뿐이기에……. 오직……. "후우. 후우, 후우우우." 녹색의 AI 슈츠 소년은 한진 일행의 시체를 둘러보며 황홀하게 호흡하다가 곧 의아함을 느꼈다. 다 죽어가는 주제에도 웃고 있는 한 팔라딘대원이 있었 던 것이다. 소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진의 코앞까지 얼굴을 내려 살펴보았다. 한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씨익 미소지었다. '미안, 천 중사.' 약속…… 지키고 싶었는데. 삑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왼손으로 들고 있던 기폭 장치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엘리베이터에 장치된 C4의 뇌관으로 전기가 흘러 들어간다. "아아, 내 이럴 줄 알았어!" 패턴 안트라센 블루의 오라 능력자 케르베로스는 폭파된 1층 홀을 둘러보다 혀를 찼다. 아무래도 도망치던 적들은 메인 센터의 엘리베이터를 봉쇄시키기 위해 폭탄 을 사용했던 모양이다. 그 폭탄이 터지면서 그의 형제 중 하나가 폭발에 말려 들고 말았다. 형제의 이름은 오르토스. 패턴 알리자린 사피롤 B의 가속 능력자. 그는 폭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미처 오라 쉴드를 전개하지도 못하고 폭발에 전신이 부서져 있었다. 그나마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는 것도 순전히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AI 슈츠의 내구성 덕분이었다. "평소 물불 가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언젠가는 큰코다칠 줄 알았지." "으아! 오르토스, 진짜 죽는 거야?" "바보 같아." 케르베로스 뒤로 다가온 키마이라와 스킬라가 호들갑을 떨며 시커멓게 탄 오 르토스를 내려다보았다. 오르토스의 AI 슈츠는 점점 녹색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차츰 죽어가고 있 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히드라가 자신의 갑주에서 포션을 꺼내 그에게 주사하려 했지만 케르베로스가 제지했다. "그만둬. 어차피 지금 주사해도 살기는 글렀어. PET 치료라도 받지 않는 한 소생은 불가능해. 그냥 죽게 내버려둬." "그래도 내버려두는 건 너무한데?" "흥, 자업자득이야. 그러게 누가 제멋대로 굴래?" 케르베로스의 말에 키마이라와 스킬라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곧 그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있어 형제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적어진 수만큼 양아버 지의 사랑을 더욱 독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스터, 오르토스가 죽어버렸어요." 홀 입구로 시폰 뤼멘과 그람드링, 라돈이 들어오자 키마이라가 쪼르르 달려 가 안기며 보고했다. 그에 질세라 스킬라도 시폰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살리려고 해봤는데 너무 늦었어요!" "아아, 그래. 그거 참 안타깝구나." 스킬라의 등을 두드리며 시폰은 가볍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 표정에서는 조금도 슬픔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차피 그에 게 있어 찍어내듯 만들어낸 레프리컨트의 죽음은 오르크리스트의 죽음보다도 감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람드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구 바깥을 바라보다가 시폰에게 물었다. "마스터, 그런데 왜 지구방위군을 죽인 겁니까? 어차피 제거해야 한다는 것 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홀 바깥쪽에 수많은 특임대 대원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대부 분 선봉에 섰던 오르토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지만, 그 외에 메인 센터 밖에 대기하고 있던 병력은 모두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들의 손에 몰살당한 것이었 다. "그람, 가장 맛있는 메인 디시는 혼자서 먹는 법이란다. 무엇보다 녀석들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 괜히 뒤에 남겨두었다간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 르거든." 메인 디시. 그람드링은 그 말을 낮게 읊조리며 메인 센터의 위층을 바라보았다. 천리안 의 능력을 가진 그는 시각에 구애받지 않고 메인 센터의 내부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최상층의 작전본부실에 있는 진 사령관과 오퍼레이터들의 모 습이 보였다. "후후후후, 그럼 이제부터 천천히 음미해볼까?" 시폰은 들뜬 발걸음을 옮겨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 뒤로 그람드링과 여섯 명의 이그나이트들이 따라붙는다. '유다, 부디 이번에도 날 즐겁게 해달라고.' 너의 딸을 빼앗겼을 때, '그때 네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절망의 표정!' 그 표정을 다시 한 번 짓게 만들어주지. 메인 센터의 상층부. "긴급제어 시스템, 응답 없습니다." "각처에서 분산형 바이러스 합체 진행 중!" "시스템 에어리어의 방벽이 돌파당합니다." "시스템 재기동 준비, 레벨 1로 데이터 격리 개시!" 지상의 방어가 뚫렸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작전본부실의 모두는 해킹을 막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비상전력으로 간신히 중추 시스템만을 살려서 버티고 있는 오퍼레이터팀은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는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 채 공성방벽 하나로 줄다리기를 하는 신세다.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그녀들은 한 시간이 넘게 시스템을 지켜내는 것으로 써 자신들의 유능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마 상대편 해커들은 모두 귀신에 홀린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런 소모전의 문제점은 공격하는 쪽보다 지키는 쪽이 훨씬 더 빨리 지 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반영이라도 하듯 피스 오퍼레이터들은 다들 피를 토 하는 심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그나마 오퍼레이터 삼인방 정도가 평소 채영에게 받아온 모의 시뮬레이션의 성과로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말단의 문세희 같은 경우는 금방이라도 졸 도해버릴 것처럼 비틀거렸다. 삼인방은 초조한 눈으로 뒤에 있는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까지 이런 승산 없는 공성전을 계속할 셈일까? 아무리 목적이 시간 끌기라지만 그 시간끌기조차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데. 유레카의 중추 시스템을 해커들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그야말로 초읽기인 것이다. 우우우웅 그때 작전본부실의 문이 수동으로 열리면서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오퍼레이터팀이 돌아본 곳에서는 평소 그들과 안면이 있던 팔라딘대의 천요원 중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사령관님! 최후방어선이 뚫렸습니다! 금방 메인 센터의 상층부까지 치고 올라올 거예요! 그전에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 요원의 외침에 삼인방과 오퍼레이터팀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한동안 바깥의 상황을 알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요원의 보고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아니, 잠깐! 아직 침입당한 지 채 한 시간도 안 지났잖아?" "그사이에 팔라딘대가 전멸하기라도 했단 말이야!" 그렇게 불안해하는 오퍼레이터팀을 내버려두고 요원은 진 사령관만 바라보았 다. 진 사령관은 그녀의 보고를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 고 있었다. 심지어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그 무심함에 요원은 내심 기가 막혔다. '이 사람은 어떻게 저리도 태연할 수 있지? 자신의 부하들이 죽고, 기지가 점령당하는 이 시점에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단 말인가?' 평소 요원은 진 사령관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냉정한 모습에 나름대로 경외심 을 품고 있었다. 인간미는 없을지라도 그런 비정함이야말로 모두의 운명을 책 임지는 총책임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 사령관은 그녀에게 있어 이상적인 상관이었다. '하지만…….' 혹시 그는 비정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감정이 없었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요원은 새삼 자신이 저 상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진 사령관 자신부터가 타인에게 진면목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당연히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령관님!" 침묵하고만 있는 진 사령관의 모습에 애간장이 탄 오퍼레이터팀이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 사령관은 전혀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남 의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방관자처럼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대기하라." "예?" "자리에 대기하고 있어." "……!" 삼인방은 너무나 기가 차서 입만 뻐끔거렸다. 허탈감이 정도를 넘다보니 화 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반박하려 해도 진 사령관의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말 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녀들은 이런 사령관의 밑에서 줄곧 이와 같은 페이스 로 일을 해온 것이다.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이런 순간까지 지속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 니다! 쾅 그렇게 오퍼레이터팀이 엉거주춤 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참다못한 요원이 진 사령관의 책상을 내리쳤다. 그리곤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받은 명령은 진 사령관님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명령에 대해서는 알 바 없습니다. 당장 일어나 주십시오!"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유한진 소위인가?" "그렇습니다." "……그의 상관은 나다. 계급을 따지는 법도 잊어버린 건가?" "사령관님!" 쾅 요원은 다시 한 번 책상을 내리쳤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진 사령관 을 노려보았다. "제발…… 따라주십시오. 부대장님도 고참님들도 모두, 모두 사령관님을 지 키기 위해 싸우고 있단 말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요." 동료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살아서 재회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분들의 노력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요원은 울먹임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말을 맺었다. 그 모습에 오퍼레이터팀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삼인방은 힘 없이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팔라딘대는, '그녀를 제외하고서 모두…….' 위잉위잉위잉위잉 그때 울릴 리가 없는 비상경보등이 켜지면서 작전본부실의 전력이 들어왔다. 동시에 메인 스크린이 떠오르며 각종 정보들이 허공으로 나열되기 시작한다!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일동은 어리둥절해졌다. 어째서 갑자기 전력이 돌아온 거지? "앗!" 메인 스크린의 정보를 바라보던 삼인방이 다급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들은 창백해진 표정으로 진 사령관에게 소리쳤다. "중추 시스템에 부정규 접속 발생!" "제압…… 당했습니다!" 그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깐 한눈을 팔았다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중추 시스템을 장악당하다니! 방금 전까지 상대하던 해커들의 대처속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새로 운 해커가 투입되었단 말인가! "잠깐! 이건!" 삼인방은 부정규 접속자의 위치를 추적하던 중 뜻밖의 사실을 알아내고 탄성 을 내질렀다. 중추 시스템을 장악한 이의 IPv6어드레스는 다름 아닌 언더 시 티의 주소였던 것이다. 그것도 기술부의 설비가 위치한 장소! 《짜잔!》 순간 메인 스크린의 창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이 자 리의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 그녀는 아침에 외출했을 때의 복장이 아니라 예의 뱅뱅이안경과 연구복을 입 은 채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삼인방은 서둘러 헤드셋을 착용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시더 양? 저, 정말 시더 양인 거예요?》 《어떻게 거기 있는 거예요!》 "궤도 엘리베이터다." 그 질문에 대답한 이는 시더가 아니라 진 사령관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메인 스크린 앞으로 걸어갔다. "언더 시티에는 메인 센터와 기술부가 있는 메카닉 센터, 의료부가 있는 메 디컬 센터, 팔라딘대의 주둔지와 언더 시티의 외곽지역까지 합해서 지상과 연결된 총 다섯 개의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다. 전력이 끊겼더라도 궤도 엘 리베이터는 스틱스 광산의 초전도 현상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그곳으로 내려 왔겠지." 《Bingo! 정답입니다!》 시더는 손가락을 퉁기며 설명을 덧붙였다. 《다행히도 지구방위군에게 궤도 엘리베이터가 노출되지는 않아서 잽싸게 타 고 내려왔지. 원래는 메인 센터 쪽으로 직행하려 했지만 중추 시스템에 초 전도력을 사용하고 있어서인지 궤도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더라고. 그 래서 가장 먼저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메카닉 센터로 온 거야.》 《그렇다면 중추 시스템을 장악한 것은 시더 양인 건가요?》 《하지만…… 아무리 시더 양이라 해도 이런 단 시간 내에 공성방벽을 돌파 하는 건 무리였을 텐데.》 삼인방의 질문에 시더의 창 옆으로 또 다른 스크린 창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그녀들의 치프 윤채영이 헤드셋을 낀 채 자리하고 있었다. 《치프!》 《……늦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모처럼 자리를 비워줬으니 좋았지? 다들 자 유는 만끽한 거냐?》 《치프으으으 !》 채영의 농담에 삼인방은 눈물을 글썽이며 칭얼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그녀들에게 있어 채영은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한 최고의 상관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삼인방은 지금까 지의 고생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피스! 민수정 외 3명,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 창이 열리며 수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뒤로는 아침에 볼 수 없었던 유리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수정은 작전본부실의 진 사령관을 발견하고 거수경례를 한 뒤 미소지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위험했을지도 모르지." 진 사령관은 그렇게 대답하며 옆에 있는 요원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요원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죄송합니다. 한성고에 파견된 지구방위군의 병력을 따돌리느라…….》 "돌아와 줘서 고맙다." 《……예?》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 진 사령관의 솔직한 감사에 수정의 얼굴에서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눈 시울을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뇨, 당연한 일인 걸요.》 "그럼 서두르도록 하지. 지금부터 작전본부실의 모든 데이터를 소거하고 후 퇴한다. 이 명령에 이의는 없겠지, 천요원 중사?" "예, 없습니다!" 진 사령관의 반문에 요원은 방금 전까지의 불손함을 버리고 예의를 갖춰 대 답했다. 그 모습에 진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오퍼레이터팀에게 명령했다. "유레카의 제어권을 모두 메카닉 센터 쪽으로 넘기고 외부접속을 폐쇄한다. 해커들을 따돌리고 스탠드 어론 상태로 이행해!" 《잠깐!》 그때 수정의 스크린 창에서 유리가 고개를 들이밀며 소리쳤다. 《그전에 오빠의, 아니 피스 대원들의 위치부터 알려줘!》 그녀의 다급한 요구에 삼인방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진 사령관을 돌아보 았다. 진 사령관은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ECCM의 전파방해는 피 스 대원들의 AI 슈츠에서 발산되는 오리하르콘 감응탐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다른 오퍼레이터들이 외부접속을 폐쇄하는 사이 삼인방은 우주수 위그드라 실의 탐지기능을 사용하여 피스 대원들의 위치를 추적했다. 그리고 메인 스 크린으로 오라 패턴이 표시된 언더 시티의 내부투시도를 떠올렸다. 메인 센터에는 현재 데이터에 등록되지 않은 다수의 오라 패턴이 나타나 있 었다. 그 중에 패턴 알리자린이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저들이 시폰 뤼멘의 병력일 것이다. 그리고 메카닉 센터 쪽에는 패턴 핑크가, 팔라딘 주둔지의 궤도 엘리베이터 에서는 패턴 버밀리온과 패턴 레드가 표시되고 있었다. 코마히코와 마리가 어 딜 갔나 했더니 수정 일행과는 따로 행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패턴 블루와 패턴 옐로우는?' 유가인과 한시민은 어디 있는 거지? 《아, 설마!》 그때 메카닉 센터 쪽에서 윤채영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당황하며 소리쳤다. 《옴팔로스로 향하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한 대 움직이고 있습니다! 스틱스 광산의 초전도 현상 때문에 패턴의 표시는 뜨지 않지만…… 설마 여기에 가인 씨와 시민 씨가?》 "……!" 순간 진 사령관은 지구방위군과 시폰 뤼멘의 습격으로 간과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피스 블랙!" 한시영,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피스메이커가 아닌 옴팔로스였던 건가!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5 - Ｂy Ｎext Ｎeo =-=-=-=-=-=-=-=-=-=-=-=-=-=-=-=-=-=-=-=-=-=-=-=-=-=-=-=-=-=-=-=-=-=-=-= 후우우우우 붉은 하늘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그 밑으로는 붉게 물든 거인들의 대지가 펼쳐져 있다. 수많은 시체의 산들이 신전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상태 에서 굳어버린 거인들, 괴로운 표정으로 쓰러진 거인들, 육신이 뒤엉켜 결국 한 몸이 되어버린 거인들, 그 모두가 이 옴팔로스의 한 부분들이었다. 기간토 마키아에서 패배한 기간테스의 무덤. 피스 옐로우 한시민은 그 무덤의 중심부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하아." 그녀는 작게 숨을 고르며 긴장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에 내려오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여전히 몸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그녀의 AI 슈츠는 평소와 달리 오라의 빛을 짙게 뿌리고 있었 다. 패턴 옐로우의 힘이 옴팔로스의 가이아와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민은 두려운 눈으로 하늘의 붉은 소용돌이를 올려다보았다. 신전을 중심으 로 회오리치는 하늘은 과도한 카르마 현상이 불러들인 아스트랄의 파편, 현현 된 태고의 존재였다. 현 인류의 기원이자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의사집합체다. 그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시민은 자신의 존재가 너무도 보잘것없음을 깨달았 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가이아를 앞에 두면 마찬가지인 감 정을 느끼리라. 그만큼 이곳의 하늘은 모든 이들의 어머니이자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였다. '모두들…… 괜찮을까?' 시민은 왼손에 찬 무전기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오 기 전에 시영이 한 말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잠시 후면 너희 피스메이커는 제구실을 못하게 될 거거든?' 그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시민은 시영의 뒤를 쫓아 그대로 지상에서부터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옴팔 로스로 내려왔기에 언더 시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때문에 혹시나 싶어서 다른 동료들에게도 무전을 쳐보았지만 누구 하나 응답 하지 않았다. 다들 감감무소식이다. 거기다 궤도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동안 단 한 번의 경고음도 울리지 않았 다. 지금의 그녀는 옴팔로스에 무단침입한 것이기에 적어도 오퍼레이터팀의 제지를 받아야만 했다. 그것이 정상인 반응이다. 실제로 시민은 옴팔로스로 향하는 자신을 누군가 말려주길 바랐다. 무모한 자신을 멈춰주길 바랐다. 시영을 향한 분노는 이미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붙잡아주지 않았다. 마치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수 수방관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민은 거짓말처럼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세상의 끝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그래, 외면하지 말자. 어차피 이건 나와 그 단둘만의 문제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서는 안 돼.' 과거의 악몽을 떨쳐낼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야! 시민은 주먹을 움켜쥐고 크게 소리질렀다. "한시영! 약속대로 찾아왔다! 어디 있는 거냐!" 그녀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붉은 대지로 퍼져나갔다. 시민은 주위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숨죽였다. '얘기해준다고……. 이번에야말로 그때의 이유를 말해준다고……!' 어디 있는 거야? 어서 모습을 드러내란 말야! '……형!' ―호오, 여기가 옴파로스인가? 그때 시민의 귓가로 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며 주위 를 둘러보았다. 어디지? 어디서 소리가 난 거지? "……!" 순간 시민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거대한 거인의 형상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박쥐의 날개를 가진 그것은, "티폰!" 우오오오오 그녀의 외침에 그림자의 존재가 크게 울부짖으며 물질계로 구현되었다. 먼저 거대한 검은 팔 한 쌍이 그림자를 찢어발기듯 뻗어 나오고, 그 후 한 쌍의 날개가 창처럼 붉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렇게 좌우로 펼쳐진 피막 의 날개가 크게 한 번 홰를 치자 그림자에 잠겨 있던 거인의 나머지 육체가 뒤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투아아아아앙 땅을 박차듯 40미터의 검은 거인이 뛰어오르자 옴팔로스 일대로 무시무시한 폭풍이 퍼져나갔다. 마치 거인의 존재가 주위의 공기를 떨게 만드는 것 같았 다. 시민은 거인의 격풍에 휩쓸리지 않도록 신전 기둥을 붙잡은 채 이를 악물었 다. 우우우우우 폭풍이 진정되자 이번에는 옴팔로스의 하늘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날개를 펼쳐든 티폰을 중심으로 붉은 하늘이 원을 그리며 밀려나는 것이 아닌 가? 그러자 하늘에 가려져 있었던 옴팔로스의 어둠이 마치 티폰을 감싸듯 드러났 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암흑의 세례(Baptism)라고 할 수 있었다. 암흑이 티폰에게 내려쬐여 그의 어두운 몸과 차츰 동화해나간다. "역시 가이아도 자신의 자식을 알아보는군. 성대하게 환영해주는데?" 하늘의 광경에 넋을 빼앗겼던 시민은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서는 피스 블랙 한시영이 그녀의 그림자로부터 떠오르고 있었다. 시민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내 뒤를 따라온 거냐? 날…… 이용한 거야!" "으음, 이용이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 아픈걸. 그렇게 가시 돋친 말 하지 말 고 그냥 안내해줬다고 생각하려무나.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옴팔로스의 위치 까지 알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의외로 유레카의 보안이 철통같아서 그 림자의 정보를 읽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개자식! 넌 끝까지 !" 시민은 분노하며 공명음을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 주변으로는 네 명의 무리가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움직이지 마라. 내 진공파에 베이고 싶지 않다면."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 그녀는 양손의 초고진공 커터를 시민의 주위에 늘어뜨리며 삭풍의 어금니를 시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들었지? 마스터의 동생이라 해도 봐주지 않을 거야?" 피스 카민 마유빈. 그는 시민과 눈이 마주치자 히죽 미소지으며 마인드 브레 이크를 끌어올렸다. "……목이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자중해라." 황유평은 신검 후츠노미타마를 시민의 목에 겨눈 채 나지막하게 경고한다. 그리고……. "……."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시민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비 통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브루스 님…… 역시 사실이었던 건가요?" "……." "진우 씨를 죽인 건…… 역시 브루스님이었던 건가요?" "……."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휘날리는 백발 사이로 가면 같은 무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시민은 찬찬히 그런 브루스를 살펴보았다. 팔이 사라진 오른쪽 소매는 티폰 이 일으키는 바람에 흩날렸고, 머리는 새하얀 백발로 변해 있었다. 거기에 금방이라도 조각날 것처럼 금이 간 얼굴. 그 얼굴색조차 변색되어 짙 은 갈색을 띠었다. 시민은 더 이상 그를 응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브 루스는 더 이상 그녀가 알고 있는 그가 아니었다. 지난 1년여를 함께 보낸 그 녀의 동거인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시영, 너는 대체……." 시민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시영을 노려보았다. 브루스가 변한 것도, 진 우가 죽은 것도, 모두 그의 탓인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녀석은 모두의 행복을 빼앗아간다! 모두에게 상처를 주기만 한다! 언제나! 언제나! "흠, 오해받는 건 싫어서 하는 말인데 이 자리의 모두는 스스로가 원해서 나 를 따라온 거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뿐이야. 그러니 너무 비 난하지는 말아라.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했다간 진정 원하는 것을 손에 넣 지 못하거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하나를 이루기 위해 나머지를 포기한다 는 것과 같은 말이야." 시영의 말에 시민은 발작적으로 그에게 달려들 뻔했다. 어디서 그런 궤변을!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게 사실이다. 이렇게 여기 있는 너도 나와 결판을 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 거잖아?" 아! 시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영은 그런 동생의 모습에 미소하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후후, 아마 지금쯤이면 언더 시티는 성명을 발표한 지구방위군의 손에 함락 당하고 있겠지. 네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동료들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 고 말이야. 어때?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다시 위로 올라가 보겠어? 나는 특 별히 제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시민은 그제야 시영이 앞에서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피스메이커가 제구실을 못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뜻이었나! 시민은 길을 물려주는 류바와 유빈의 모습에 미련 없이 궤도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려 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시영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단, 이대로 가버린다면 두 번 다시 나에게서 진실을 들을 순 없을 거야." "……!" "그렇게 해야 역시 공평하겠지? 난 동생을 욕심쟁이로 만들 생각은 없거든. 고를 수 있는 건 언제나 하나뿐! 그렇게 정해뒀다고." 시민은 치를 떨었다. 시영의 말 따위 무시하고 떠나려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 지지 않았다. 올라가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을 도와야만 한다고, 그렇게 머릿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녀의 욕망은 진실을 알고 싶다고 종용하고 있었다. 떠나서는 안 된다며, 제발 이곳에 남으라며 그녀의 발을 붙들어 맸다. 그 극심한 괴리감에 시민은 숨이 턱 막혔다. 어느 쪽이 자신의 의지인지, 자 신은 어느 쪽을 원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둘 중 어느 하나도 선택할 수가 없다! "후하하하하! 좋아! 그럼 남기로 결정한 거군?" "……!" 시영의 결정에 시민은 다급하게 반박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가 없 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실 어느 쪽이 본심인지는 진작부 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은 이곳에 남고 싶었다. 시영에게서 진실을 듣고 싶었다. 왜 그가 자신을 배신했는지, 왜 그가 그래야만 했던 건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미치도록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이 그녀의 본심이다! "어디…… 지금부터 얘기를 시작해볼까?" 시영은 웃으면서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러니 듣고 싶다면 빨리 오는 것이 좋을 거예요, 가인 군." "……뭐?" 시민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가인 군? 가인 군이라니? "잠깐, 너……!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어째서 가인 씨의 이름이 여기서 나 오는 거지?" "아아, 유가인 군? 네가 바라는 진실이란 것을 얘기하려면 그가 반드시 필요 하거든. 그래서 내가 위스퍼링으로 불러들였지. 네가 옴팔로스로 향하고 있 다고 가르쳐줬어. 그의 아리아드네의 실을 이곳으로 연결시켜놓았으니 아마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들도 모두 듣고 있을걸?" "……!" 시민은 황망한 시선을 들어 옴팔로스 외곽에 세워진 다섯 개의 나라카를 바 라보았다. 저 나라카를 통해 궤도 엘리베이터는 언더 시티와 옴팔로스를 왕복 할 수 있다. 그럼 지금 저 다섯 개의 기둥 중 하나로 가인 씨가 내려오고 있다는 건가!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때 잠자코 있던 브루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나라카의 한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 시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브루스님, 부디 그의 목숨만은 빼앗지 마십시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라의 주인, 그 녀석과는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한다고. 그 때문에 네 녀석의 수하 노릇도 마다하지 않은 나다." 브루스의 말에 시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오라의 주인과 결판을 내겠다니! "오라의 주인이라……. 후후. 뭐, 잘해보시길.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겠습 니다." "흥." 브루스는 시영의 격려에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향해 시민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브루스님! 멈추세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설마 가인 씨와 싸 우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예?" "……." "브루스 님!" 시민은 간곡한 어조로 호소했다. "절대로 그러시면 안 돼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왜 브루스님이 가인 씨와 싸워야 하나요? 가인 씨가 얼마나 브루스님을 좋아하는데! 브루스님 이 사라지고 나서 가인 씨가 얼마나 슬퍼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닥쳐!" 브루스는 날카로운 호통으로 시민의 말을 끊어버렸다. 등을 돌린 그의 뒷모 습에서는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새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 었다. 그것이 영체의 그릇에서 새어나오는 카르마에너지라는 것을 깨달은 시민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브루스님, 당신의 몸은 벌써 그 정도로……. "방해하는 녀석은 날려버린다! 죽고 싶지 않다면 날 가로막지 마! 그 자리에 서 똑똑히들 지켜보고 있어라! 칠성권 제28대 계승자가 벌이는 마지막 싸움 을!" 브루스는 그 말을 끝으로 전장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붉은 대기 속에 안개처럼 녹아들어가는 그를 시민은 차마 만류할 수 없었다. 브루스의 거친 호통 속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사자(死者)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시민에게 시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너무 비난하지 말라고." 최선? 최선이라고? 시민은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증오를 드러내 보이며 시영을 돌아보 았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이 검게 변하면서 두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 작했다. 스스로의 영체에 암시를 걸어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흑 성가의 프롤로고스(Prologos)였다. 그렇게 암흑이 된 카스트라토는 어둠의 성모가 되어 지옥의 노래를 입에 담 을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그렇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쓰러뜨려주지." 암흑의 힘이 실린 시민의 목소리가 신전에 울려 퍼졌다. 그런 그녀의 변화에 유빈과 류바, 유평은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저마다 공격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시민은 그런 그들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오직 눈앞의 시영만 을 노려보았다. "최선을 다해 널 쓰러뜨리고 가인 씨와 브루스님, 동료들을 도우러 가겠어. 네 녀석의 입에서 그 잘난 진실이란 것도 다 들어주지." 흑성가 28장 흑염초래! "이것이 나의 최선이다!" 그와 동시에 죽음의 힘누스(Hymnus)가 시작되었다. ―그러니 듣고 싶다면 빨리 오는 것이 좋을 거예요, 가인 군. 시영의 위스퍼링에 가인은 이를 악물고 차원진동의 힘을 끌어올렸다. 현재 그는 AI 슈츠를 착용한 채 차원진동의 기류를 타고 옴팔로스와 연결된 나라카 를 내려가고 있었다. 시민을 찾아 아르센 피아노 학원에 갔던 그는 지구방위군의 성명발표를 본 직후 한시영의 위스퍼링을 들을 수 있었다. 시영은 시민이 자신을 뒤쫓아 옴 팔로스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고, 가인은 즉시 시민의 뒤를 쫓아 지 상의 궤도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궤도 엘리베이터는 오직 머신 아더의 격납고와 연결 된 한강대교 부근의 것밖에 없었고, 하는 수 없이 가인은 그곳에서부터 줄곧 차원진동의 힘을 사용하여 옴팔로스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대략 한 시간이 넘게 오라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조금도 지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진정한 패턴 블루의 힘을 각성했기 때문이다. 각성한 힘, 차원진동의 현현은 옴팔로스에 있는 가이아의 의지와 강한 영적 인력을 발휘하여 지속적으로 카르마에너지를 공유하기에 육체적인 한계는 있 을지언정 정신적 한계는 사라진 상태였다. ―아…… 파. 그렇게 통로를 따라 하강하던 중 가인은 예의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가인은 착잡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주변에는 육중한 거신상 들의 부조가 펼쳐져 있었다. 목소리는 그 부조들의 입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었다. ―아파. ―죽여. ―죽여라. ―싫어. ―살려줘. ―무서워. 예전에 머신 아더로 옴팔로스에 진입할 때도 들을 수 있었던 환청이다. 당시 의 가인은 왜 그런 소리들이 들리는지 이유를 몰라서 당황했지만 지금은 아니 었다. 리리스의 드림 다이브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거인들의 전쟁, 기간토마키아! 이 옴팔로스에 널린 거신상들의 정체는 바로 그 기간토마키아에서 인류에게 패배한 기가스들이었다. 가이아에게 인류 올림포스의 숙청을 명령받고 태어난 그들은 하염없이 인류 와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 이런 세상의 땅 끝까지 몰린 끝에 쓸쓸한 죽음들을 맞이한 것이다. 지금 가인에게 들려오는 환청은 바로 그 거인들의 잔존사념이 차원진동의 힘 을 타고 재현되는 것이었다. 죽기 직전의 그들이 세상에 남긴 한(恨)의 되풀 이다. "……!" 가인은 애써 두 눈을 감고 환청과 환상들을 떨쳐냈다. 그리고 오라를 집중하 여 더욱 쏜살같이 밑으로 내려갔다. 거신상들의 부조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슬슬 옴팔로스가 가까워지고 있는 모 양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시민 씨!' 가인은 먼저 옴팔로스로 내려간 그녀가 걱정되었다. 시민은 시영과 관련된 일이 생기면 너무나 감정적이 된다. 그녀의 실력을 믿 기는 하지만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시민 혼자서 시영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 위 험했다. 어떻게든 자신이 빨리 가서 그녀를 도와줘야만 한다! '제발 늦지 말아라!' 가인의 의지에 발맞춰 그의 이미지 메이킹이 변화를 꾀했다. 패턴 블루의 차 원진동이 그의 AI 슈츠를 뒤덮으며 백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등으로 반중력의 원들이 날개처럼 형성되었다. 그러자 가인은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마치 기류에 녹아드는 것처럼 지하로 꺼 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 나라카의 외벽이 충격파로 폭파되며 푸른 섬광이 유성처럼 옴팔로스에 내리 꽂혔다. 그러자 그 충격에 반경 50미터 가량의 크레이터가 생기며 거신상들이 바스러진다. 그 크레이터의 중앙에서 멀쩡한 모습의 가인이 흙더미를 헤치며 몸을 일으키 고 있었다. 차원진동 쉴드로 육체를 2차원적 표면파에서 보호함과 동시에 오 리하르콘의 중력장을 역행시킨 것이다. 이것 하나만 봐도 차원진동을 다루는 그의 힘이 얼마나 일취월장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대단하군./ 이것이 네 녀석이 찾아낸 힘이냐." 그때 크레이터 위에서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슈츠에 묻은 흙을 털던 가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에 도리어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반가움과 기쁨. 의심과 의혹. 분노와 슬픔. 그리고……. 수많은 감정들이 그를 바라보는 가인의 눈동자에 맴돌고 있었다. 가인은 침묵으로 그에게 묻고 있었다. 왜! 왜냐고!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냐고! "브루스……." 가인의 부름에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는 가볍게 발을 굴러 크레이터 밑으로 내려왔다. 가인은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라진 오른팔 과 백발이 된 머리, 변색된 피부, 무엇보다 예전의 따뜻함을 찾아볼 수 없는 저 얼굴. '건방떨지 마라, 애송이. 네 녀석이 날 걱정하는 것은 100만 년은 이른 일 이다.' 예전에 브루스를 걱정하다가 질타를 당한 일이 생각났다. 가인은 무거워지 는 눈시울을 참지 못하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러자 뜨거운 눈물방울이 볼 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도 브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가인을 꾸 짖지도 않는다. 그것이, 그것이 왜 이렇게 슬프게 느껴지는 걸까? 왜 이토록 서글퍼지는 거지? "왜…… 그랬던 거예요?" 가인은 간신히 흐느낌을 억누르고 물었다. 브루스는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다." 목적? 목적이라고?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슬픔이 지배하던 머릿속으로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오른다. "그게…… 우리를 배신한 이유라고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진우 씨를……." 당신의 제자를……. "그런 이유로 진우 씨를 죽인 거예요?" 가인은 원망 어린 외침을 토해냈다. 한번 시작된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쏟 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목적이기에! 얼마나 대단한 목적이기에 이러는 거예요! 그것이 진우 씨를 죽일 이유가 된단 말이에요? 그런 것이! 그런 것이! 우리가 함 께한 시간들을 저버릴 정도로……!" 가인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머리를 감싸며 흐느 꼈다. 이럴 수는 없어. 절대로 이럴 수는! 절대로 이래서는 안 되는 거야! '오라를 믿어라. 그리고 소중한 이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라.' 그 말을 하던 브루스는, 내가 목표로 삼았던 남자는, 내가 자랑스러워했던 스승은……! "덤벼라, 오라의 주인." 브루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가인의 정신을 일깨웠다. 브루스?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네놈의 힘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쓸데없는 정 따위 는 거추장스러웠다." 거짓말……. 가인은 멍하니 브루스의 말을 실감하지 못하다가 곧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거 세게 도리질을 쳤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아요!" "성가셨어. 그래서 끊어버린 거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브루스는 하나 남은 왼손으로 칠성권의 기수식을 취하며 버럭 소리질렀다. 진기를 끌어 모으는 그의 몸에서는 새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최후의 불 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거리낄 것은 없다. 어차피 2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어. 그런 얄팍한 정 따위에 100여 년이 넘도록 추구해온 목표를 놓칠 성싶으냐!" 목표! 목표! 목표! 가인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브루스를 노려보며 오른손의 헤븐 스매쉬를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차원진동의 줄기들이 그 손 하나에 집중되면서 거센 스파 크를 일으킨다. 그 모습에 브루스는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며/ 보법을 밟았다. "간다!" "……그런 건 대답이 되지 못해." 가인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브루스를 향해 마주 고함을 내질렀다. "그런 건…… 진우 씨를 죽인 이유가 되지 못해!" 그리곤 오른손의 차원진동권을 앞으로 내뻗었다. 천공(天空)―! '강해지고 싶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피스 그레이 브루스가 담담한 눈초리로 가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인은 주저앉은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강해지고 싶냐고? 브루스는 가인이 대답하지 않자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구기며 재차 물었다. '정신이 썩었다고 귀까지 썩었냐? 강해지고 싶지 않냐고!' 동시에 그에게서 숨 막힐 듯한 기도가 느껴졌다. 가인은 그 기세에 눌려 반 쯤 얼이 빠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브루스는 희미하게 미소하며 말했다. '좋아, 그럼 강해지게 해주마.' ―뇌정권(雷霆拳)! 브루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SS Volume.13 "2020년 3월 9일"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3 Ｂy Ｎext Ｎeo =-=-=-=-=-=-=-=-=-=-=-=-=-=-=-=-=-=-=-=-=-=-=-=-=-=-=-=-=-=-=-=-=-=-=-= Prologue " 한때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한 거인이 있었 다. 거인의 이름은 티폰. 그 이름 그대로 신들의 세상을 날려버리기 위해 여신 가이아가 만들어낸 심판의 바람이었지. " 남자의 말에 이제 막 열 일곱살 남짓한 소녀는 응,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 천진난만한 태도가 가뜩이나 어려보이는 소녀를 더욱 어려보이게 만들었다. " 티폰은 여신의 바램대로 올림포스에서 신들을 추방시키고 그들의 우두머리 인 제우스를 포획했다. 하지만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불러들였고, 풀려난 제 우스는 도리어 티폰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끝내는 에트나 화산 밑에 가두는 데 성공하지. " " 에트나라면……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있는 활화산이잖아요? " " 그렇지. 하지만 실제 에트나 화산은 아닐 거야. 기간토마키아는 대륙이 하 나였을 당시에 일어난 전쟁이니까. 아마도 얘기가 되물림되면서 후세에 의 해 각색된 거겠지. 실제로 이탈리아의 에트나 산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 " 역시 전설일 뿐인 걸까요? " 아쉬워하는 소녀의 모습에,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녀는 평소에는 무뚝뚝하기 그지 없지만 가끔씩 보여주는 이런 남자 의 자상함이 너무나 좋았다. " 그래서야 얘기를 꺼낸 보람이 없지 않나. 성당 기사단은 내내 티폰의 탐색 에 몰두해왔다. 세계 각지에 있는 화산이란 화산은 모두 조사하며 기가스 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지. 하지만 역시 거인을 발견할 수는 없었어. 그러자 성당 기사단은 생각을 달 리해야 했다. 어쩌면 '화산'이란 말 자체가 허구는 아니었을까? 다른 무언 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기간토마키아가 있었을 당시의 대륙은 지금과 같은 불완전한 구성이 아닌 하나의 완성된 존재였을 거다. 판의 구조도, 그로 인한 마그마 챔버도 지 금과는 완전히 달랐겠지. 그렇다면 당시의 대륙과 지금의 대륙이 일치하는 부분을 주목해야 돼. 대륙의 이동 속에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본질. 그것은 대륙이 원래부 터 가지고 있던 용맥(龍脈)이었다. 지맥과 수맥을 포함한 대륙의 피가 흐 르는 혈관. 신화의 화산이란, 이 용맥의 흐름이 모여서 솟아오르는 곳. 바로 내룡을 말 하는 거였어. " " 내룡이라면……. " " 그래. 너와 내가 만났던 장소도 그것이지. 무엇보다 나는 오라의 성지, 가 이아를 찾아내는 성당기사단의 탐색대였으니까. 만약 내룡이라는게 없었더 라면 너와도 만나지 못했을 거다. " 소녀는 남자의 말에 조용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노라고. " 그, 그래서 티폰은 내룡에 있었던 건가요? " " 음. 성당 기사단이 찾아낸 성지는 총 다섯 개. 그 중 한 곳에서 우리는 잠 들어있던 거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남자, 아포스톨로스 이스가리옷 유다는 자신들이 걷고 있던 LA의 연구 시설 을 둘러보며 말했다. " 수정아. 지금 우리는 그 사나운 격풍의 레어(Lair) 속에 들어온 거야. " Ｖolume.13 " 2020년 3월 9일. " 미국 LA에 성당기사단의 연구 시설이 들어섰던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한때 오라의 성지, 가이아의 탐색에 열을 올렸던 성당 기사단은 세간에 알려지 지 않은 수 많은 유적들을 발굴해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굴되었던 곳이 바로 이 곳, LA의 지하 공동이었다. " 굉장한 엘리베이터네요. " 수정은 엘리베이터의 유리벽에 붙어 지하 공동의 전경을 살펴보며 감탄을 터 뜨렸다. 그녀의 곁에 있던 유다도 감탄하기는 마찬가지. 다만 그는 자신의 일 행처럼 곧이 곧대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 도시의 지하에 잠겨있던 나라카를 이용한 거다. 반중력을 이용한 궤도 엘 리베이터는 보아하니 닥터 웰리스의 작품이로군. "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케루빔의 스멜팅 마스터, 오파니엘 노엘 웰리 스가 아포스톨로스 야고보의 연구에 가담했다는 것은. 유다는 나지막히 한탄하며 지하 공동을 향해 음울한 눈빛을 던졌다. 그는 애 초에 아포스톨로스 야고보의 연구를 허락한 비숍과 오파님(Ofanim)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폐쇄적인 성당기사단. 그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것이 바로 비숍과 12지파 의 원로들이었다. 아마 야고보의 원로 드미트리가 자신의 후계자를 위해 뒷공 작을 펼쳤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다른 지부의 오파님들까지 감화시키기는 어렵다. ' 그렇다면 역시……비숍이 직접 이번 연구에 손을 들어줬다는 건데. ' 12지파의 우두머리인 비숍. 그가 야고보의 연구를 허락했다면 원로들이 잠잠 해진 것도 이해가 갔다. 어차피 12지파로 나뉘어진 통치 기구라도 그 본질은 비숍에 의한 일인독재 기구니까. 이러한 모순이 나오게 된 데에는 성당기사단의 창립 초기 때 발생했던 '그' 사건 탓이 컸다. 애초에 틀을 만든 원형이 사라져버렸으니, 레프리카(Replic a)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 틀을 유지하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 와∼ 저것 좀 봐! 누 대인도 저희랑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텐데. 그쵸? " 생각에 잠겨있던 유다는 수정의 들뜬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수정은 점점 가까워져오는 현무암 계곡을 가리키며 상기된 얼굴로 소리친다. 그 모습에 유다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군. 하지만 그 분에게는 여덟번째 검으로서의 사명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아포스톨로스 바르톨로메오는 나처럼 허울만 좋은 세라핌(Seraphim) 이 아니라고. " " 허울만 좋다니…….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하지마세요. 유다는 플러벨럼 (Flabellum)을 못 받은 게 아니라 일부러 안 받으신 거잖아요? 누 대인도 매번 말씀하신다고요.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재주를 썩히 기만 하고 있다고. " " 과분한 평가로군. " " 아뇨. 적정한 평가에요. 그러니까 이제 좀 주위의 기대에 부흥해주시죠? " 수정은 유다의 무뚝뚝함에 심통이 났는지 장난스레 혀를 내밀었다. 유다는 중국에 있을 자신의 친우를 떠올리며 속으로 투덜거린다. 누대인, 이제는 이 어린 아이마저도 당신의 대변인으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 그나저나 수행원 하나 없이 오신 건 정말 너무했어요. 다른 사도들은 분명 수십명의 크루세이더들을 대동해서 나타날텐데. 그러니까 시폰 뤼멘 같은 사람이 자꾸 유다를 무시하는 거라고요! 아, 정말∼ 또 그 인간의 빈정거림을 듣는다고 생각하니 내 머리가 다 아 프네! " 유다는 수정이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않아도 누대인께서 붙여주신 실력 좋 은 수행원이 있으니까. " " 예? " 수정은 금시초문이라는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누대인께서 수행원을 붙여줬다니? "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수행원같은 사람은 전혀……. " " 아, 수행원과는 현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침 샌프란시스코로 파견된 바 르톨로메오의 이단 심문관이 있어서 말이야. 겸사겸사 그에게 우리의 신변 을 보호받기로 했지. " " 설마― " 수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대번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아는 바 르톨로메오의 이단 심문관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 잠시 후면 도착하겠군. 모처럼만의 재회일텐데 기쁘지 않은 건가? " " 아앙! 내가 이럴 줄 알았어! " 유다의 말에 수정은 대경실색하며 울상을 지었다. 유다는 내심 그녀가 이 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의아하다는듯 되묻는다. " 음. 왜 그러지? 그 반응은 뭔가? " " 어울리지도 않는 능청 떨지 말아요! 정말 얄미워! 내가 뻔히 그 사람 싫 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 " 이런. 그랬던가? 미처 몰랐다.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어. 다 내 불찰이야. " " 모르는 건 한 번으로 끝내요! " 수정은 씩씩거리며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토라진 어린애라서 유다는 입가의 미소를 숨기지 못한다. 아, 이렇게 자꾸 재미가 들리면 안되는데……. " 어, 웃었다. 웃은 거야. 즐기고 있어! " " 흠! 아니, 그저 약간의 유희라고 해두지. 어쨌든 넌 왜 그렇게 자신의 스 승을 싫어하는 건가? 그가 너에게 무슨 몹쓸 짓이라도 저지른 건가? " " 예?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 수정은 우물거리다가 간신히 뒷말을 이었다. " 하, 하지만 너무한다고요, 그 사람! 여자보고 떨어지라고 하질 않나! 노골 적으로 부정탄다고 그러질 않나! 또 스승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하지! 우와∼ 진짜 심하지 않아요? 완전 성차별이야! 진우 사형과는 그렇게 친하 면서 맨날 나만 구박해! " " ……. " " 거기다 수련할 때는 어떻고요? 간단한 칠성권의 초식조차 가르쳐주지 않고 지겨운 형의권만 반복시킨다고요! 너같은 녀석에게는 그거 하나면 충분해, 라던가? 흥! 그렇게 못되게만 구는 스승, 알게 뭐야! 그런 사람은 제 쪽 에서 거절한다고요! " 열을 올리며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다는 생각했다. 어 지간히도 쌓이신게 많으셨군. ' 그래봤자 정작 그의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하지 못할 거면 서. ' " 유다, 방금 무슨 실례되는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 수정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쏘아붙이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귀 신이다! " ……이제 다 도착한 것 같은데. " " 어휴! 좀 진지하게 들어달라고요! ' 수정은 유다가 말을 돌리자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 이상은 불평하지 않았다. 유다의 말대로 엘리베이터는 어느덧 최하층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하 공동의 최하층은 중간에 거쳐온 어두운 현무암 통로와는 다르게 깨끗한 대리석으로 닦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날짜에 맞춰서 실험을 진행시키다 보니 주위의 나라카까지 보수할 여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유다는 대낮처럼 밝은 인공 조명에 의지한채 최하층 연구시설의 길목을 확인 했다. 하지만 그럴 것도 없이 연구소의 일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먼저 그들에 게로 다가왔다. " 아포스톨로스 이스가리옷 유다이십니까? " " 그렇다. " " 그 쪽의 동행분은……? " 남자가 유다의 곁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수정을 가리켰다. 다른 아포스톨로스들의 경우 각자 자신의 크루세이더들을 수행원으로 데리 고 왔건만, 이번에 방문한 사도는 웬 여자 아이 하나만 달랑 대동하고 있었 던 것이다. 설마 저 아이가 수행원이라는 것은 아니겠지? " 수행원이다. " ……맞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사전에 그는 자신의 마스 터에게서 언급받았던 것이다. 열두번째의 검은 세라핌 최고의 괴짜라는 얘기 를. " 두 분 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 남자의 안내에 유다는 성큼 성큼 그의 뒤를 따라걸었다. 그제야 수정도 구경 하는 것을 그만두고 쪼르르 그들에게 따라붙는다. 우우우우우 그때 연구소의 내부에서부터 기아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공기 중으로 퍼져나 가는 음파의 진동이 아닌, 좀 더 근원적인 세계의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동요되는 의지의 호소. 유다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새삼 자신들이 누구의 보금 자리에 들어왔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 여기에는 그 녀석이……. 저 울림은 바로……. " 아, " 계속되는 소리에 겁을 먹은 수정이 유다의 손을 움켜잡았다. 유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손을 힘 있게 잡아줄 뿐이다. 그런 이질적인 남녀의 모습에 안내하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저 모습의 어디가 수행원이라는 걸까? " 여기입니다. " 남자가 유다와 수정을 데리고 간 곳은 격벽으로 폐쇄된 지하 연구소의 한 실 험실이었다. 울림은 바로 이곳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윙 남자의 조작으로 이중으로 보호된 격벽이 열리자 그 안에서는 일련의 인물 들이 유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은 실험실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물체'였다. 지름 300미터의 유리벽에 감싸인 그것은 어두운 PET용액에 잠겨 제대로 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실험실의 조명에 반사광을 띄는 것으로 보 아 금속으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아닐까 하고 으레 짐작할 뿐이다. 금속의 물체는 앞에서 일행이 들을 수 있었던 신음 소리를 연신 흘리고 있었 다. 그 신음 소리에 발맞춰 PET용액에서는 기포가 줄을 맞춰 솟아오른다. ……마치 호흡이라도 하는 것처럼, ' 잠깐. 호흡을 하는 금속이라니? ' 말도 안되는 소리. 지금 저것이 살아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 하하하. 역시나 눈을 떼지 못하는군. 유다, 자네의 눈에도 이 녀석은 신기 해 보이는가 보지? " 유다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실험실에 있는 누군가의 웃음 소리에 의 해서였다. 그리고 돌아본 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 아포스톨로스 필립보. 아포스톨로스 마태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 유다는 수도복을 입은 두 명의 중년인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바람에 엉겁결에 뒤따라 오던 수정도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유다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흑인 수도사, 아포스톨로스 필립보는 그런 수정 을 귀엽다는듯 바라보며 말했다. " 왠지 유다의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젊은 애인을 사귀다보니 심적으로 여유가 생긴 건가? " " 에엣― " 그 말에 도리어 수정이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다. 저, 젊은 애인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필립보는 그렇게 대경실색하는 수정의 모습에 의아하다는듯 물었다. " 응? 내가 잘못 짚은 건가? " " 아, 아뇨! 아닌 건 아니지만, 또 그게 완전히 그렇지는 않고! 저기, 희망 사항이라고 해야할까, 지원 중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노력하고는 있지 만 그게 여러모로 부족하다 보니 영― " " 후, 후하하하하. 그래. 그래. 알겠네. 그 정도만 얘기해도 충분해요. 충 분히 이해했다고, 귀여운 아가씨! " 필립보는 수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재차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와 악 수했다. 수정은 그 큼직막한 손에 붙잡혀 이리저리 흔들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유다는 그런 필립보의 페이스에 휘말리기 싫었는지 아포스톨로스 마태오에게 먼저 다가갔다. " 변함없군요, 쉐인 씨는. 변함 없이 경박한 필립보에요. " " 후후후. 이해해주십시오. 그도 모처럼 밝아진 당신의 모습에 기뻐서 저러 는 것이니까요. " 마태오, 쟌 메이워드는 유다보다도 수십살이 연상이지만 여전히 그에게 존대 를 하고 있었다. 다섯번째의 검 아포스톨로스 필립보, 쉐인 알렉스와 여섯번째 의 검 아포스톨로스 마태오, 쟌 메이워드는 오파님에 의해 경쟁을 강요받는 세 라핌 중에서도 흔치 않은 유다의 친우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저 다른 세라핌들을 견제하는 차원에서의 협력 관계로도 비춰 질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서로의 관계에 이윤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유다는 쟌의 말에 수정과 떠들고 있는 쉐인을 바라보며 투덜거린다. " 글쎄요. 제 눈에는 단순히 즐기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 " 음. 그 말을 부인하지 못한다는게 그와의 우정을 증명하는 길이라니. 저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쟌은 쓴웃음을 지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유다는 그런 마태오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다. 그나마 바르톨로메오 누대인 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만약 그까지 있었더라면 이 두 명 과 마음이 맞아서 무슨 말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을지 모른다. " 그나저나 야고보의 호출에 응한 세라핌은 우리가 전부입니까? 다른 아포스 톨로스들은? " " 아무래도 당신이 마지막일듯 하군요.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은둔 중, 요한 과 바르톨로메오는 사명 중이니까요. 그 외의 사도들은 뭐, " " 시몬과 토마, 알패오의 아들……. 타데오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 다 불참했 군요. " 유다는 그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특히 그가 언급한 타데오 라는 이름에서는 뿌리 깊은 인과를 느끼게 한다. 쟌은 그러한 유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의 분노를 안타까워 했다. 그때 수정과 얘기를 마친 필립보, 쉐인 알렉스가 그들에게로 다가오며 예의 큰 목소리로 외쳤다. " 그것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녀석들이라고 했잖아! 그 녀석들, 세라핌의 사명에도 별 관심이 없고 그렇다고 승급을 포기한 것도 아니야. 분명 무슨 꿍꿍이들이 있을 거라고! " " 쉐인. 경솔한 발언은 금물입니다. 상급의 세라핌이 다른 아포스톨로스들 을 헐뜯는다니……. 중급3대와 하급3대의 귀에 들어간다면 두고 두고 비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필립보의 명예에 누가 될 거에요. " 쟌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만류했지만, 쉐인은 거리낄 것이 뭐가 있냐는듯 더욱 언성을 높였다. " 나,참. 그렇게 주위 눈치나 살피고 있으니까 우리 세라핌들이 이 모양 이 꼴이지. 문제가 있으면 서로 고치려고 노력해야지 덮어두기만 한다고 해서 무슨 해결책이 되나! 우리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니까 덩달아 오 파님들의 사이까지 악화되잖아! 그렇게 12지파들끼리 치고 박고 싸워봐야 좋아하는건 비숍 뿐이라고! " " 자자. 거기까지만 하세요. 쉐인의 말이 정론이라는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으니까요. " " 그렇게 실실거리면서 알기는 뭘 알아! " " 하지만 그 이상 하게 되면 분명 울리게 될 겁니다? " " 뭐? " " ……거기 옆에 있는 아가씨. " 쟌의 지적에 쉐인은 뜨끔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안색을 살피는 수정이 있었다. 그제야 쉐인은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역시 어린아이 앞에서 계속 할 얘기는 아니로군……. " 수정아. 저기서 실험실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라. 나는 잠시 이분들과 할 얘기가 있다. " 유다의 말에 수정은 머뭇거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인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자신이 유다의 곁에 있어봐야 신경만 쓰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후의 이야기 는 아포스톨로스들 사이의 얘기가 될 터이니 자신은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 았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구경이나 확실히 해보도록 할까? " 와. 정말 크네. " 수정은 유리관 안에 들어있는 검은 물체를 바라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아마 저 검은 물체가 기가스 티폰일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유다가 들어오기 전에 그런 옛날 얘기들을 해줬을 리가 없다. ' 하지만 거인이라고 해도……저것의 어디가 거인이라는 거야? ' 유리관의 티폰은 그저 검은 금속덩어리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인간의 형상 도 갖추지 못한, 어떻게 보면 심장같기도 한 모습. 그렇게 뚫어져라 티폰을 응시하던 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사 실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어딘가 무서워졌던 것이다. 마치 그 검은 쇳덩어리 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아서. 보이지 않는 입으로 말 을 걸어오는 것 같아서. 우우우우우 쇳덩어리의 신음소리에 유리관이 희미하게 진동했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수정은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유리관 맞은편에도 또 하나의 실험실이 있다는 것 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거기뿐만이 아니다. 이제 보니 그녀와 일행이 있는 실험실은 유리벽의 한 귀퉁이에 불과했다. 티 폰을 유리관이 감싼게 아니라 실험실이 유리관으로 감싸여 거인을 볼 수 있게 끔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총 다섯 개의 실험실이 티폰을 에워싸고 있다. 수정은 실험실의 측면에 바싹 붙어서 유리관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자 불투 명한 PET용액 사이로 반대편 실험실의 윤곽이 보여온다. 그리고 수정은 그 반 대편의 실험실에서도 자신과 똑같이 이쪽을 엿보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막 다섯살 정도 되었을까? 아이는 수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 정은 영문도 모른채 마주 손을 흔들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 누구지? 저 아이는? " " 닥터 웰리스의 손녀로군요. " 수정은 갑작스레 들려온 대답에 움찔 몸을 떨었다. 어느새인가 그녀의 뒤쪽 으로는 쟌과 쉐인, 유다가 다가와 있었다. 얘기는 벌써 다 끝낸 건가? " 자신의 손녀를 실험실에 데려오다니. 그야말로 무사태평이로군! 그렇게 실험에 성공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 쟌의 말에 쉐인은 못말린다는듯 혀를 찼다. 수정은 그들의 말에서 이번 실험 을 주도하는 사람이 닥터 웰리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궤도 엘 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도 유다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던 것 같다. " 그나저나 닥터 웰리스의 손녀가 확실하다면, 저쪽이 메인 래버러토리(Main laboratory)겠군. 어쩐지 여기에는 스태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 어. " " 음. 그렇다면 직접 현장을 볼 수는 없는 건가요? 이거, 유감인데요. " 쉐인과 쟌의 말에 유다는 잠자코 유리관 너머의 실험실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조용하게 중얼거린다. " 도착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들이. " 우우우우우 그와 동시에 유리관의 티폰이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음을 터뜨리 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환성에 가까웠다. 이 눈 앞의 검은 물체는 지금, 메인 래버러토리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향해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고 있 었던 것이다. 《환영합니다, 세라핌의 검들이여!》 순간 실험실의 유리관 위로 한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덟번째의 검 타데오와 열두번째의 검 유다를 비롯해 세라핌 내에서도 가 장 최연소로 플러벨럼을 획득한 사도. 바로 아포스톨로스 야고보, 이네스 라 비에르의 영상이었다. 비숍과 오파님들에게 기가스 티폰의 연구를 허락받은 실력자!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듯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 합니다. 아포스톨로스 필립보, 아포스톨로스 마태오, 아포스톨로스 이스가 리옷 유다.》 " 사명을 받지 못한 한가한 사도로서 참석한 것 뿐이니 너무 고마워하지 마 시게나, 야고보. " 쉐인은 코웃음을 치며 이네스의 말을 비꼬았다. 그 모습에 쟌은 못말린다는 듯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저 불같은 성미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아? 하지만 이네스는 쉐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미소지었다. 《후후. 아포스톨로스 필립보는 제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군요. 알 겠습니다. 그렇다면 허례허식 없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스크린에서는 티폰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떠올랐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LA의 지하 공동, 에트나에서 기가스 티폰이 발굴된 것은 2003년도의 일입니다. 당시에 발굴된 티폰은 그저 단순한 암석덩어 리에 불과했으며 조금도 기가스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에트나의 오리하르콘 광산이 그 가치를 더 인정 받았죠. 그렇게 잊혀져가던 티폰의 연구가 다시 속행된 것은, 2005년도 케루빔의 오파니엘, 닥터 웰리스가 오리하르콘 제련법을 발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아, 여기서부터는 그때의 당사자가 직접 설명해주는 편이 낫겠군요.》 이네스가 설명을 떠넘긴 상대는 부시시한 금발을 늘어뜨린 한 중년의 여인 이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돋보기를 쓴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하며 스크린 앞으로 나왔다. 《케루빔의 노엘 웰리스입니다. 2003년도 에트나 탐사대의 일원이었으며, 그때의 경력을 인정받아 이렇듯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단 이 자리를 빌어 선처를 해주신 상급 3대의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 니다.》 《흥. 어울리지 않는 겸손은 그만 떠시지, 닥터 웰리스.》 그때 스크린의 반대편 창이 열리며 한 연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깡마른 체구에 창백한 낯빛의 동양인. 노엘 웰리스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행이 보기에도 그녀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 다. 무엇보다 케루빔의 오파니엘을 대놓고 비꼬다니? 유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쟌에게 물었다. "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 " 케루빔의 삼대의원 중 하나인 라크비엘(Rikbiel), 닥터 챙입니다. 오파 니엘, 닥터 웰리스와 더불어 몇 안되는 오리하르콘 제련이 가능한 스멜 팅 마스터죠. 하지만 실력은 어디까지나 닥터 웰리스의 공식을 응용하는 수준이라서 학회에서는 줄곧 그녀와 비교당해왔던 모양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야고보의 초대를 받아왔군요. " " 이인자의 질투라는 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혈기왕성한 노인네로군. " 쟌의 설명에 쉐인이 그 큰 덩치를 움츠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에 수정은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린다. 스크린에서는 한창 닥터 웰리스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닥터 챙을 상대하 고 있었다. 《닥터 챙,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 것이 그렇게도 불 만입니까?》 《하! 불만입니까? 잘도 말해주는군! 그래. 불만이라면 불만이지. 같은 스 멜팅 마스터로서 내가 아닌 당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순전히 요피엘 의 장의 농간이야! 당신이 의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이번 연구 자리를 따냈다는 것은 케루빔 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런 일방적인 인사가 가능할 것 같은가!》 《……같은 스멜팅 마스터? 지금 나와 당신이 같다고 했나요? 지금?》 노엘은 터무니 없다는듯 실소를 흘렸다. 《내가 던져준 공식을 조금 이해한 것 가지고서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시는 군요. 그렇다면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오리하르콘이란 무엇이며, 왜 세계 각지의 가이아에만 존재하는 것인지, 또 원래의 쓰임새란 무엇이었는지. 당신이 그토록 자부하는 스멜팅 마스터의 견해에서 한 말씀 해보십시오, 닥터 챙.》 《……크. 그건,》 《물론 현상에 급급해온 당신이 본질을 헤아렸다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대답하려 애쓰지 마시길.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 기서 잠자코 구경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보여줄 오리하르콘의 진정한 제련을!》 《―!》 그 말에 닥터 챙은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 해지기를 반복, 결국 수치심을 견 디지 못하고 스크린창을 꺼버렸다. 그 모습에 모두들 닥터 웰리스를 못말린 다는듯 바라본다. 이런 식으로 케루빔의 실력자를 적으로 돌리다니, 너무 경솔한 행동이지 않 은가? 하지만 정작 노엘 본인은 조금도 개념치 않았는지 태평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우를 욕 보이는 사람까지 배려해줄 정도로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흠! 얘기가 좀 빗나갔지만. 어쨌든 방금전의 대화로 이야기의 갈피는 잡 혀졌군요. 닥터 챙에게 말했다시피 이번 실험의 요지는 오리하르콘의 진 정한 제련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몇몇분들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군요. 티폰과 오리하르 콘의 제련에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느냐고. 하지만 상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티폰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바로 이 오리하르콘이 니까요.》 유다 일행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티폰의 구성물질이 오리하르콘이라고? " 티폰은 기가스, 가이아가 만든 거인입니다. 그런데 금속이라니……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 쟌의 질문에 노엘은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마치 그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 다렸다는 것처럼. 《구성물질이 금속이라고 해서 생물이지 말라는 법은 없죠. 기가스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던 영장류. 굳이 이름을 붙 이자면 살아있는 금속, 금속생명체였으니까요. 지구의 외핵이자 중력을 발생시키는 오리하르콘. 그 세계의 양수(羊水) 속 에서 태어난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기간테스, 가이아의 자식들이라는 이름 에 어울리지 않나요?》 " 그렇다면, " 유다와 두 명의 아포스톨로스들은 나지막히 신음했다. 기가스 티폰의 발굴. 그 뒤를 잇는 오리하르콘의 제련, 케루빔의 연구.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 으로 진행되었던 프로젝트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고증대로 에트나의 지하 밑에서 찾아낸 티폰은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유전자의 염기 서열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스스로의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Intron부분에 돌연변이를 일 으킨 상태. 동면이었겠죠.》 " 동면? " 《예. 면역계를 과잉반응시킨 결과라고 해야할까. 면역이 스스로를 지키려 한 나머지 외계를 차단시키고 체내를 폐쇄 생태계화 한 거죠. 보통 일반 적인 생물체라면 이러한 변질에 대사가 불가능해져서 뇌나 내장이 괴사 했겠지만, 티폰은 앞서 말했다시피 살아있는 금속생명체였습니다. 그는 오리하르콘 특유의 정신 감응과 셀프 라이팅으로 이 불가능한 가사 상태 를 지속시켜왔던 거죠. 제가 발견한 오리하르콘 제련법도 실은 이러한 티폰을 해동시키는 과정 에서 얻게된 응용과학(applied science)에 불과합니다.》 일행은 새삼스레 놀란 눈으로 PET용액에 잠긴 티폰을 바라 보았다. 수천년, 아니. 어쩌면 수만년이라는 세월동안 연명해온 이종 생명체라니. 그 경이적인 생명력 하나만으로도 기가스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 었다. 인간을 초월하고 있다! 저러한 생명체가 진정 본래의 모습을 찾게된다면, 그때는 얼마나 강해질 것 인가?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차마……상상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닥터 웰리스.》 노엘이 물러나자 다음은 이네스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노엘이 담당한 티폰의 발굴과 해동 과정이 프로젝트의 초석이었다면, 이네스 가 담당한 이후의 과정은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지금부터의 설명이 진정한 본론인 것이다. 《티폰을 해동시키는 와중에 케루빔에서는 오리하르콘을 이용한 수많은 실험 들이 행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저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오리하르 콘이 인간의 의지에 반응하는 정신 감응 금속, 이미지 메이킹을 사용하는 오라 능력자에게 최대의 상성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기가스에게는?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기가스라면 오라 능력자 와 정신 감응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서로의 의사를 교환하는 것이 가 능하지 않을까? 그러한 취지에서 저는 이번 피스메이커(Peacemaker) 프로젝트를 추진시켰 습니다. 성당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던 세 명의 오라 능력자들을 인수받아 티폰과 교감시켜보았죠.》 거기서 이네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 뒤는 개인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대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실패였습니다. 티폰과 교감한 오라 능력자들은 하나 같이 정신이 붕괴되어 능력을 잃어버렸죠. 교감은 가능했지만 기가스 의 카르마 에너지를 영체가 견뎌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라 능력자가 아무리 영체의 힘을 증폭시켜 아스트랄 바디를 강화시킨다 고 한들, 정작 물질계의 육신은 나약하기 짝이 없었으니. 감당못할 카르마의 파도가 기존의 카르마 에너지들을 삼켜버렸던 거죠.》 그러고 보니 아포스톨로스 야고보의 연구가 2년 전에 한번 중단되었던 일이 있었다. 위의 실패는 아마도 그 시기에 벌어졌던 일이리라. " ……? " 그때 유다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수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손뿐만 아니라 안색까지 창백해진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스 크린의 이네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다는 수정의 손을 힘껏 잡아주며 재차 이네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전 내내 고민했습니다. 과연 티폰의 교감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자는 존 재하지 않는 것인가? 애초에 인간이 기가스와 의사를 나누겠다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었을까? 만약 전자라면 연구를 계속할 명분이라도 있었겠지만, 후자는 그것도 아 닙니다. 당장에 연구를 폐기해야만 했죠.》 하지만, 《그러던 차에……저는 제 연구에 전환을 맞이할 새로운 조력자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네스는 가늘게 눈을 뜨며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한 흑발의 미소년이 스크린의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이네스는 소년의 등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정스레 그의 귓가 에 밀어를 속삭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스크린의 모두를 향해 말했다. 《기가스 티폰과 동조한 오라 능력자. 코드 네임 피스 블랙(Peace Black), 한시영을 소개하겠습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4 - Ｂy Ｎext Ｎeo =-=-=-=-=-=-=-=-=-=-=-=-=-=-=-=-=-=-=-=-=-=-=-=-=-=-=-=-=-=-=-=-=-=-=-= 다음날 아침. " 당신 대체 무슨 바람이에요? " 미연은 현관에서 하나의 신발을 신켜주는 남편의 모습에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아내의 질문에 진우는 천역덕스레 되물었다. " 무슨 바람이라니? " " 하나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준다니. 당신, 연태껏 한번도 그런 적 없었잖아 요? " " 그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딸을 오랫동안 방치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 " 방치한 것 맞잖아요? " " 이봐요, 하나 엄마∼ " 진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항의했다. " 하나가 유치원을 다닌 건 올해부터라고? 그 전에 학원을 다녔던 것도 아니 고 내내 집에만 있었잖아? 배웅을 한다던가 마중을 간다던가 건수가 없었을 뿐이야. " " 그러는 당신이 말하는 올해도 벌써 10월에 접어들었네요. 3월달부터 장장 7개월이나 지났으니 이만하면 훌륭히 방치한 거에요. " " 그건! " 진우는 거기서 자신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접었다. " ……할 말이 없습니다. " " 꺄하하하하! 아빠, 방치 플레이했구나! " " ― " 곁에서 천진난만하게 부모를 지켜보던 하나는 그런 엄청난 말을 함으로서 진 우와 미연을 경악시켰다. 방치 플레이라니! 알고서 하는 말인가, 지금? " 어, 어쨌든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요. 갑자기 모범 아빠라도 되고 싶어 졌어요?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 미연이 애써 마음을 추스리고 묻자 진우는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 그냥……이라기 보단. 역시 마음에 걸려서겠지. 아무래도 당신 말마따나 그동안 쭉 불량 아빠였던듯 하고……. "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올해의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로 한동안 능력 개발과 브루스의 훈련에 정신 없는 나 날을 보내던 중 3월 달에 지방으로 파견되어 부상, 이후 끊임없이 메디컬 센 터의 신세를 지다가 8월달 이후에는 세번이나 실명하기에 이르른다. 그 때문에 그는 당연히 가족의 일에 신경쓸 수 없었고, 하나 뿐인 딸이 유치 원에 다니게 된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우는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것을 자신의 사정으로 돌 리고 싶지는 않았다.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 뭐, 반성했다고 할까. 내 일 때문에 당신이나 하나에게 걱정 끼쳤던 것도 면목 없고. 좀 정신을 차려볼까― 해서 말이야. " 진우는 언제나처럼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와 벌써 6 년이 넘게 지내온 미연은 남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 당신 정말……. " " 응? " 막 하나를 목말 태우던 진우는 미연의 속삭임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연은 그런 부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갑자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 왜 그래? " 진우는 미연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미연 은 몇번인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곧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걱정이 되서. " " 무슨 걱정? " " 당신이 무사히 하나를 바래다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 " ……. " 진우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렴 자신이 딸 하나 유치원에 데려다주지를 못하겠는가? 오늘부터 새 마음 새 뜻으로 봉사하기로 마음 먹었건만 정말 따라주지 않는 군……. " 자자. 이러고 있다간 하나, 유치원에 늦겠어요. 얼른 출발하세요. " 미연은 우울해하는 그의 등을 떠다밀며 쓴 웃음을 지었다. 진우는 한숨을 쉬 며 털레털레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 예이. 예이. 당신의 믿음을 사기 위해서라도 분발해보도록 하지. 하나야, 엄마에게 다녀온다고 인사해야지. " "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 하나의 밝은 목소리에 미연은 손을 흔들며 부녀를 전송했다. 그러던 중 그 녀는 잠시 눈을 찡그려야 했다. 진우가 현관문을 열자 그 사이로 아침 햇살 이 들어와 그녀의 눈을 찔렀던 것이다. 철컹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현관문이 닫힌 뒤였다. 미연의 앞에는 아무도 남 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남편과 아이를 떠나보낸게 마음에 걸 려 재빨리 뒤를 쫓았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이미 그들은 저편 의 골목으로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미연은 입구에서 서서 우두커니 부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괜찮은 거죠? 하나 아빠? " 정말……괜찮은 거죠? " 휘― 휘― 휘휘휘― " 언더 시티의 메인 센터. 주유화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자신의 직무에 임하고 있었다. 생물 공학이 전공인 그녀는 시폰 뤼멘의 양 아들들인 레드 브라더스의 담당의였는데, 현 재 쌍둥이 동생 쪽이 사망한 관계로 형의 치료에만 전념해야 했다. " 휘― 휘― 휘휘휘― " 쌍둥이 형의 이름은 그람드링 뤼멘. 피스메이커가 그에게 부여한 코드 네임 은 피스 알리자린. 시야에 보이는 모든 상황의 미래를 잠깐이나마 엿볼 수 있 는 순간 예지 능력자. 유화는 그람드링의 오른손을 대체한 오리하르콘 인공 의수를 정비하며 간간 히 주위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한 치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시폰 뤼멘이 피스메이커를 떠난 이후, 줄곧 그람드링이 사용해온 메인 센터의 사무실이었 다. 그람드링은 사령부의 호출이 없는한 언제나 이 방에서 떠나지를 않았기에 유화는 하는 수 없이 직접 그를 찾아와야 했다. 하지만 몇번을 찾아와도 이 방의 음침한 분위기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 ……. " 유화는 방 한구석에서 소파에 앉아있는 한 인영을 발견해냈다. 그람드링의 쌍둥이 동생인 오르크리스트 뤼멘이었다. 저번 전투에서 사망한 그는 그람드 링의 요구에 따라 시체 안치소에도 가지 못하고 박제되어 있었다. 그런 시체 를 마치 살아있는양 옷까지 입혀 방 안에 놔두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휘― 휘― 휘휘휘― " 무엇보다 가장 기분 나쁜 것은 그런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천연덕스럽게 그 녀의 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유화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응시하는 그람드 링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렸다. ' 뭐야. 아까부터 계속……. ' 아무리 담력이 큰 그녀라도 그람드링과 눈을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그 붉 은 빛이 감도는 눈동자는 마치 유화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것처럼 이채를 띄 고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가뜩이나 레드 브라더스의 DNA를 채취하 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그녀로서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기분이다. 결국 계속되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유화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지? 콧노래를 다 부르고. " 그녀의 질문에 그람드링는 콧노래를 멈췄다. 그람드링은 여전히 유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 크크. 그렇게 티가 나? "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음산했는지라 유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 좋은 일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지. 응! 정말 고대해왔던 일이 야! 크크크크. " " 무슨 일인지는……말해주지 없겠지? " " Oh. 이제야 제법 내 주치의다운걸. 눈치가 빨라졌어. " " ……. " 유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굳어진 표정으로 그람드링을 노려보았 다. "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가인이 만큼은 건드리지마. 그 아이를 건드렸다간 앞으로 나 없이 메인테넌스(maintenance)를 해야될 거야. 그건 너도 곤란하겠지? " " 호오. " 그람드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유화의 반응이 재미있다는듯 킥 킥거렸다. " 의외로 성질 있으시네? 크크. 뭐, 그런 면도 나쁘지는 않아. 매력 있어. " " ……. " " 하지만 말이야. 나는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성미인지 라. 으음∼ 어떻게 할까나? " 그람드링은 팔짱을 끼며 고민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모습에 유화는 의수 를 손보던 기구들을 챙기며 찬바람나게 몸을 일으켰다. " 네 마스터가 메디컬 센터가 아닌 나에게 너희들의 조정을 맡긴 건 다 이유 가 있어서겠지? 피스메이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무언가라던가, 말이야. " " 헤에.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잖아? " " 사람 우습게 보지마. 이래 뵈도 용장호의 와이번 프로젝트까지 담당했던 나야. 적어도 너희들이 정상적인 오라 능력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 어! " " ……. " 유화의 호통에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대기가 피부 를 찌르는 이 느낌! 살기였다. 그 살기가 눈 앞의 그람드링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람드링 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유화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벌써 수십번도 더 그녀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화에게 다가왔다. 유화는 자신도 모르 게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곧 닫혀진 방문에 등을 부딪힌다.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저항은 그저 그람드링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 뿐이었다. " 까불지마, Yellow bitch. " 그람드링은 유화의 코 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이를 드러냈다. " 그동안 오냐 오냐 해주니까 자신이 뭐라도 된 줄 착각한 거야? 그렇다면 가르쳐주지. 너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눈에 거슬리면 죽여버리면 그 만이라고. " " ―! " 유화는 그람드링이 오리하르콘 의수로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자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람드링에게 잡힌 손목이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으스러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가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그람드링에게 얕보 이지 않겠다는 오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 네가 하이에나처럼 우리 뒤를 캐고 있다는걸 몰랐을 거 같냐? 천만의 말 씀. 네 년의 행동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버려뒀 던건 왜였을 거 같냐? 그저 귀찮았기 때문이라고. 네 년의 피를 보는 것 조차 짜증날 정도로 귀찮았다고! "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며 유화는 방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람드링에게 붙잡 혔던 그녀의 손목은 보기 흉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그렇게 복도에 웅크리고 몸을 떠는 유화를 향해 그람드링은 싸늘히 조소했다. " 어디까지 까불 수 있나 지켜보겠어. 대신 그때는 지금처럼 손목 하나로 끝 내지는 않을 거야. Okay, doctor? " 그 말을 끝으로 방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유화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방문 을 노려보았지만 곧 힘 없이 혼절하고 말았다. 거기까지 버티는게 그녀의 한 계였던 것이다. " 휘― 휘― 휘휘휘― " 한편 방문을 닫고 소파로 돌아온 그람드링은 언제 광폭했냐는듯 다시 휘파람 을 불었다. 그는 느긋한 손놀림으로 소파 뒤에 놔둔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 에는 몇 주 전 그가 사용했던 플라스마 도끼 한 쌍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리모 콘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스터인 시폰 뤼멘이 보내준 물건들이었다. 그람드링은 그 중 도끼를 하나 꺼내들고 오르크리스트에게 다가갔다. 도끼의 스위치를 올리자 새파란 불꽃이 일며 플라스마 커터가 생성되었다. ' 그람. 선물을 보냈다. 이번에는 날 실망시키지 말아라. ' 오늘 아침 시폰 뤼멘에게서 걸려온 전화의 내용이 생각났다. 그람드링은 그 짧은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양 아버지가 보내온 선물의 용도를 깨달을 수 있 었다. 그람드링은 입꼬리를 올리며 오르크리스트의 머리카락를 쓰다듬었다. "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크리스. 어차피 넌 내 안에 있잖아. 그렇지? " 눈 앞의 시체는 동생이 아니다. 눈 앞의 시체는 단순한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그람드링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이며 도끼를 들어올렸다. " 자― 시작해볼까! " 그와 동시에 도끼의 플라스마 날이 오르크리스트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어. 메두사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티아마트가 소멸된 이후부터 그녀의 눈에 서는 눈물이 마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슬픔을 억제하는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슬퍼하고 또 슬퍼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다간 극단적으로 치달은 감정 이 그녀의 정신을 붕괴시킬 것이다. 가뜩이나 8개로 분열되었던 불안정한 인격이다. 카르마 에너지가 단기간에 증폭되면 영체의 유동성이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 때문에 요르문간드의 화신들은 극단적인 감정의 소유자들이 많았다. 그나마 화신들 중 메두사가 가장 안정적인 인격체였으나, 그것은 주인격인 티아마트를 구심 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지 결코 그녀의 인격이 완성되었기 때문은 아니었 다. 오히려 그만큼 의존하는 인격체였기에 티아마트가 사라진 지금의 그녀는 자 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푸드드드득 그때 쓰러진 메두사의 머릿가로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내려섰다. 까마귀는 붉 게 물든 눈동자로 메두사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며칠동안 연락이 없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대체 지금 이런 곳에서 뭘하고 있는 건가?] 까마귀의 입에서는 놀랍게도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메두사에 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까마귀는 매번 자신의 동료가 연락을 전할 때 사용했던 사이코포모스(傳令)였던 것이다. " ……네이 안데르슨인가요? 날 내버려둬요.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 [끝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블러디 노블맨, 네이 안데르슨의 되물음에 메두사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비통해하는 동료의 모습에 까마귀는 낮게 탄식했다. [티아마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나 보군. 하긴. 지금의 원로회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밖에 없겠지. 단 하나 남은 판게아의 게이트를 그냥 내버려 둘리 없으니까.] " 마치……이렇게 될 것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말투군요? " 메두사는 원망스레 까마귀를 노려보았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리리스와 카이가 퇴장한 지금, 테라 인코그니트에는 비상이 걸렸을 거야. 또 다른 호문클루스들을 파견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그렇다면 남아있는 호문클루스에게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겠 지.] " 그렇다고 그들에게 티아마트를 해부할 권리는 없어요―! " 메두사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주위의 대기가 뒤흔들리며 차원이 진동한다. 요르문간드의 모든 힘을 거두어들인 그녀는 감 정의 기복만으로도 차원 진동을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까마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런 메두사를 바라보았다. " 그 사람은! 티아마트는! 일평생 노아를 위해 살았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희 생해가며 그들을 따랐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그 결과가 겨우 이런 건가요? 충성의 대가가, 헌신의 대가가 고작……! " [원로회에게 뭘 바라는 건가? 어차피 우리는 그들에게 한번 쓰고 버려질 소 모품이었다. 도구일 뿐이었어. 도구의 마음을 헤아려줄 주인따위, 있을 턱 이 없지.] " 입닥쳐! " 촤촤촤촤촤 메두사의 두눈이 붉어지며 그녀의 그림자에서 수십개의 사슬들이 튀어나와 까마귀를 꿰뚫었다. 그걸로 까마귀는 즉사했지만, 네이 안데르슨의 목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진정해라, 메두사. 분노를 토해낼 상대는 내가 아니지 않나?] " 시끄러워! 시끄러워! 너나 원로회나 다 똑같은 놈들이야! 애초에 타인을 믿는게 아니었어! 나와 티아마트, 내 자식들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적이야! " 메두사는 두서없이 증오를 발산했다. 그녀는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멋대로 만들어내고 멋대로 이용해먹다 버려버린 노아도! 쿠사나기와 초류향 일행을 추방시킨 테라도! 또 그런 자신들을 방관하기만 했 던 네이 안데르슨도! 모두 용서할 수 없었다. 모두 적일 뿐이다. 티아마트를 죽게 만든 원수들! [이런. 그렇게 말하니 섭섭하군.] 그때 막 까마귀를 사슬로 박살내려던 메두사는 네이의 말에 손속을 멈춰야 했다. [너의 반려자를 구할 방법이 하나 생각났는데.] " ……뭐? " 메두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이 안데르슨, 지금 뭐라고 했지? " 구할……방법이라니? " [후후. 이제야 내 말이 귀에 들어오나? 그럼 말해줄테니 똑똑히 들어보라고.] 네이 안데르슨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원로회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판게아로의 귀환이다. 그 때문에 너의 반려자 를 해부해서 시공주소의 현현성을 밝혀내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이건 그들 로서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리리스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최강의 호문 클루스가 실험 재료로 전락하는 일은 없었겠지.] 메두사는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 나와 티아마트의 처지를 요약해줄 필요는 없어! 어서 본론이나 말해! " [자자. 그렇다면 리리스의 계획이란 뭐였나? 바로 테라가 만든 바르의 별, 머신 아더와 오라의 주인을 동조시켜 노아의 인류를 판게아로 차원 이동 시키는 거였지?] 네이는 메두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맹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미 답은 나오지 않았나. 메두사, 너가 머신 아더와 오라의 주인을 포획하는 거다. 그리고 노아와 흥정하는 거야. 티아마트의 안전과 머신 아더의 유무를 걸고서.] " ……! " 메두사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과연! 노아가 판게아 원정대를 포기한 이유는 오라의 주인을 세뇌할 리리스 가 로스트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라의 주인을 세뇌하지 못한다고 해서 테라가 만든 바르의 별이 그 효용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었다. 차원의 문을 열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그런 머신 아더를 수중에 넣기만 한다면 노아가 티아마트를 해부할 이유도 당연히 없어지지 않는가! " 그, 그렇지만 이제와서 그래봤자……이미 티아마트는……. " [잊어버렸는가? 테라 인코그니트와 판게아 사이에는 타임 패러독스가 존재 한다는 걸. 티아마트가 해부당한다고 해도, 여기의 시간으로는 아직 하루 정도의 여유가 있을 거다. 그 사이에 머신 아더를 테라에게서 탈취한다면 원로회의 실험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렇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타임 패러독스! 어느새 메두사의 눈물은 그쳐있었다. 이렇게 슬픔에 도취되어있을 때가 아 니었다. " 끝이……끝이 아닌 거군요? 아직 끝난 게 아니었어요. " 메두사는 두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안도했다.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 가 남아있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안심하기에는 이른 것 아닌가? 그 피스메이커에게서 기가스를 빼앗는 거 라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야.] " 걱정하지 말아요. " 메두사는 자신의 몸안에서 들끓는 혼돈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그것은 티아 마트가 건네준 모든 것이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강의 힘이었다. 이 힘이 있는한 그녀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 어차피 녀석들의 거인에게는 갚아줘야 할 빛이 있었어요. 반드시 손에 넣 어보이죠. 반드시! " 그녀의 의지에 발맞춰 갈색과 하늘색, 검은색의 용염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네이 안데르슨은 속으로 미소지었다. '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용의 여왕님? '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5 - Ｂy Ｎext Ｎeo =-=-=-=-=-=-=-=-=-=-=-=-=-=-=-=-=-=-=-=-=-=-=-=-=-=-=-=-=-=-=-=-=-=-=-= 시민은 언제나처럼 가인의 도시락을 싸들고 언더 시티의 교도소를 방문했다. 언제나처럼 초병들에게 피스 카드를 제시하고, 언제나처럼 위병소를 지난 다 음, " ……. " 언제나와 같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렌트카에서 내리던 시민은 교도소의 입구에 서있는 한 낯익은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도소의 대원들에게 면회 절차를 밟고 있던 그녀는, " 마리 양? " 여자답지 않게 훤칠한 키에 포니 테일로 가지런히 묶어내린 흑발. 무영신풍 류의 후계자이자 시민의 동료인 성마리였다. 시민의 부름에 마리는 천천히 그녀 쪽을 돌아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 아, 시민 씨……. " " 여긴 어쩐 일이에요? 가인 씨 면회하러 온거에요? " " 예? 그, 그렇습니다. 토요일이라 오전 수업 밖에 없어서 잠시……. " 시민이 살갑게 구는 것에 비해 마리는 어딘가 뻣뻣하기 그지 없었다. 뭔가 안절부절 못하다고 해야하나. 평소의 그녀답지 않다고 해야하나. 시민은 그 런 마리의 태도에 의아해하며 웃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네요. 그랬으면 마리 양 도시락도 싸 왔을텐데. " " 도, 도시락 말씀이십니까! " " 예? " 마리는 순간 뭔가를 뒤로 감추며 얼굴을 붉혔다. 그 태도에 더욱 의아해진 시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왜 저러는 거지, 마리 양? 그런 시민의 의문을 뒤로 하고 마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 그, 그렇군요. 시민 씨가 이 시간에 가인을 면회오는 건 당연히……. 마, 맞습니다. 시민 씨라면 응당 신경쓰고 있었겠죠. 예. 그럴 거라고는 생각 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래. 그런게 당연한데……. " " 예? " 그때 마리의 횡설수설을 듣다못한 교도소의 대원들이 히죽 웃으며 대화에 끼 어들었다. "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러십니까? 그냥 솔직하게 나도 도시락 싸왔다고 하 면 되는 거 아닙니까? " " ―! " 그 말에 마리는 대원을 노려보며 몇번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힘 없이 고개 를 떨어뜨렸다. 시민은 그런 마리와 대원들을 돌아보다가 그제야 어떻게 된 상 황인지 깨닫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 아, 그러면 마리 양도? " " ……예. 면목, 없습니다. " 마리는 슬그머니 뒤로 감췄던 도시락통을 들어올리며 시민의 시선을 피했다. " 어제 면회왔을 때 가인의 안색이 초췌해 보이길래 그만. 그, 왠지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 " ……. " 마리가 서투르게 변명했지만 그녀의 말은 이미 시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민의 눈은 마리의 손에 들린 도시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지 요리하는 것 과 인연이 없는 마리가 손수 만든 도시락.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애정이 도시락 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저런 도시락을 받는 남자라면 누구나 다 기뻐 하겠지. 더구나 마리같은 아가씨가 주는 것이라면 더더욱……. ' 가인 씨도 분명. ' 시민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뜨끔거렸다. 왜 가슴이 아픈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꾸만 머리 속으로 자신과 마리를 비교하게 된다. 자신을 싸늘하게 대하던 가인이 마리를 대할 때도 과연 그런 태도를 고수할까? 혹시 마리의 도시락을 받고 그가 기뻐한다면?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던 웃음 을 그녀에게 보여준다면? ' 나는……. 나는……. ' 마리는 시민이 아무런 말도 없이 입을 닫고만 있자 더욱 불안해졌다.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후회스러웠다. 역시 안하던 짓을 하니까 이런 낭패를 보는 거다, 성마리! ' 하지만 그저 도시락을 싼 것 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일일까? ' 마리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저 시민 씨라 면 이 정도의 일에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상냥하게 웃 으면서 다 함께 도시락을 먹자고 하겠지. 그래. 내가 이렇듯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거야. 난 잘못한게 없어. 음. 음. " 그럼 다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 것 봐! 마리는 시민의 말에 굳었던 표정을 풀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민의 얼굴 을 바라본 순간, " …….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시민은 언제나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그 웃음에서 지독 한 위화감을 느껴야만 했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활화산을 종이 한장 으로 가려놓은 형세라고 해야할까. 마리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시민의 태도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저, 시, 시민 씨? " " 저와 가인 씨 둘이서 식사하는 것도 좋지만 때론 이렇게 셋이서 식사하는 것도 좋겠네요. 그래도 마리 양은 가인 씨 입맛을 잘 모르죠? 도시락 싸느 라 수고하셨지만 아무래도 가인 씨에게는 제 도시락을 주는게 나을듯 싶 네요. 가인 씨가 식사하는 동안 마냥 지켜보는 것도 실례니까 마리 양은 자기가 싸온 도시락을 먹고요. " " 자, 잠깐만요, 시민 씨!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마리는 기가 막혀 버럭 소리질렀다. 방금 말한 사람이 정말 시민이 맞단 말 인가? 그 자상하고 천사같기만 하던 시민 씨가 맞는 거야? " 어머, 무슨 말이라뇨? 그러니까 지금 셋이서 식사하자고 하는 거잖아요. " 시민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여전히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 투에 가시가 돋아있다는 것은 아무리 둔한 마리라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마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 아까부터 듣자하니 꼭 제가 불청객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왜 가인을 위해 만든 도시락을 제가 먹어야 합니까? 아무리 제 요리 솜씨가 미천하 더라도 거부하는 것은 가인이지 시민 씨가 아닙니다. 그런 부당한 요구 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 " 마리 양. 좀 더 가인 씨를 생각해주는게 어때요? 가인 씨는 요 근래 계 속 감옥에서만 생활했어요. 또 식사도 제대로 못해 몸도 많이 약해졌고 요. 그러니 영양을 고려해서 만든 제 도시락을 먹이는 편이 낫지 않겠어 요? 마리 양이 가인 씨에게 솜씨 자랑하고픈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게 자 기 생각만 해서는 안되죠. " " 누, 누가 솜씨 자랑을 하고 싶었다는 겁니까! 그리고 제 도시락도 충분 히 영양을 생각해서 만들었습니다. 아니, 시민 씨의 도시락 보다 더 가 인의 몸에 좋다고 자부합니다! " " 흐응. 굉장한 자신이네요. 무영신풍류에서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말 라는 덕목이 있는 걸로 아는데. 지금의 마리 양을 보니 꼭 그런 것도 아 닌 것 같네요. " " 무영신풍류와 도시락 만드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오늘은 제가 먼저 왔으니 가인의 점심 식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늦게 오신 분은 차례를 기다리시죠! " " 저는 2주 전부터 매일 이 시간에 왔어요! 이제 와서 끼어든 건 마리 양이 잖아요! " 마리와 시민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치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 搏)! 얌전했던 그녀들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집착과 투지의 부딪 힘이었다. 아마 평소의 그녀들을 알고있는 사람들이 지금의 광경을 보았더라 면 절대로 자신들의 두눈을 믿지 못했으리라. 물론 그것은 당사자들인 시민과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 마리 양……. 그저 외곬수에 순진한 아가씨인줄로만 알았는데. ' ' 시민 씨……. 그저 현모양처의 모범이신 분이라고만 알았는데. ' 그리고 동시에 결론. ' 설마 이런 성격이었을 줄이야! ' 쿠궁 만약 기분에 따라 날씨가 변화했다면 지금쯤 그녀들의 뒷편에서는 강렬한 번 개가 내리꽂혔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주위의 기압을 낮추며 살벌한 분위기 를 풍기는 여인들의 모습에, 보다 못한 대원들이 중재에 나섰다. " 저기. 한창 피크를 올리시는 와중에 죄송하지만……. 싸움은 다른 곳에서 하시는게 어떨까요? " " 교도소 앞에서 싸우는 건 모양새도 나지 않고 말이죠. " 그제야 자신들의 행동을 깨달은 시민과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대원들에게 고 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 " 면목 없습니다. " 시민은 설마 자신이 이런 유치한 행동을 할 줄은 몰랐기에 놀랍기도 하고 부 끄럽기도 했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마리와 말다툼을 하다 니. 잠깐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 나는 애초에……. ' 시민은 조소했다. 자신의 질투가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시영에 의해 뒤바뀐 지금의 모습은 그녀의 진실된 모습이 아니다. 거짓된 모습이다. 환상이다. 이런 자신이 가인을 솔직하게 좋아할 자격이 있는 걸까? 그녀는 내내 고민 하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진실이 밝혀졌을때 가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두 려우면서도 그를 좋아하기에 곁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마리는 어떠한가? 그녀는 언제나 가인의 앞에서 솔직했고, 자신의 마음에 충실했다. 그녀에게 는 일절의 거짓도 없다. 또한 가인을 기만하지도 않는다. 그 너무나도 자신과 다른 모습에 시민은 부러움과 질시를 동시에 느꼈던 것 이다. 그렇게 질투의 정체를 깨닫게 되자 시민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참지 못했다. 이대로 가인을 계속 좋아하게된다면 언젠가 그에게 크나 큰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를 향한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이라니! 시민은 차마 마리와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 그나저나 오늘은 유달리 인기가 많군, 유가인 씨. " 그때 방문 절차를 작성하던 대원이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시민과 마리 는 그에게서 가인의 이름이 언급되자 두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 예? 아, 아뇨. 딴게 아니라. 두 분이 오시기 전에도 유가인 씨를 면회하고 간 사람이 있었거든요. " " 면회라면……여자? " 마리의 표정이 날카롭게 굳어졌다. 대원들은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또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남자였어요. 가인 씨와 비슷한 연배의 외국인 아이였는데. 그, 이름이 뭐였더라? " 대원은 자신의 동료를 돌아보며 물었다. 동료는 방문 기록을 조회한 후 다 음과 같이 답했다. "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 " " 어이. 예쁜아. 오늘도 수고해라. 난 이만 들어가보마. " 26구역의 2층 가옥. 이곳은 팔라딘대의 SG들이 감시 겸 대기 용으로 사용하 는 세이프 하우스였다. 창문의 커튼 사이로는 진우와 시민의 집이 정원 안쪽 까지 훤히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이프 하우스는 피스 그린과 피스 옐 로우, 피스 블루와 피스 핑크를 감시하는 SG들의 거주지였다. 최대한 피스 대원들을 감시하기에 용이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예.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 팔라딘 4소대의 대원이자 '전' 피스 블루의 시크릿 가드였던 천요원은 고참 의 인사에 힘없이 대꾸했다. 그 맥빠지는 인사에 막 세이프 하우스를 나서려 던 고참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 임마. 억지로라도 힘 좀 내서 배웅해주면 안되겠냐? 힘든 하루 일을 끝내 고 돌아가는 고참에게 의욕을 복돋아주지는 못할 망정. " " 윽! 자, 장 고참님! " 요원은 장 고참의 우락부락한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자 불만에 찬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 요원의 태도에 장 고참은 킥킥 거렸다. " 그래. 그래. 그렇게 화내는 모습이 차라리 낫다. 앞으로도 비리비리하게 군다면 그때마다 부비부비 해줄테니까 어디 계속 뚱하게 있어보려무나. " " ……죄송합니다. " 요원은 표정을 풀고 고참에게 사과했다. 그녀도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성의 없는 태도가 조원들의 사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장 고참은 풀이 죽은 자신의 후임을 다독거렸다. " 죄송할 건 없고. 뭐, 그런 일이 있었으니 갑자기 힘을 내는건 무리겠지. 그래도 어쩌겠냐.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되지 않겠냐? " " ……. " 요원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고참들을 볼 면목 이 없었다. 한달 전, 몬스터들의 5대 간부인 네크로맨서에게 조종당한 그녀는 피스메이 커의 최고 기밀 중 하나인 옴팔로스에 몬스터를 들이는 최악의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어디 그것 뿐인가? 그녀 때문에 수십명의 팔라딘 대원들이 죽고 부상 을 입었다. 그런 주제에도 자신은 정진우 대장의 손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구해졌으니…….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요원은 몬스터에게 좋을데로 이용당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팔라딘대에 남아있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렇듯 그녀가 계속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책감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고참들의 충고와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이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고참들은 예전과 변함 없이 그녀를 자신들의 동료로 대해주 고 있었다. 요원은 그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여 몇번이나 남 몰래 울었는 지 모른다. 그리고 결심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만큼 동료들의 도움이 되겠노라고. " 피스 블루의 SG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너무 기죽지마라. 오히려 휴가 받 은 셈치고 한동안 푹 쉬라고. 그 동안은 이 고참들이 열심히 뛰어줄테니까. " 물론 그만한 미스를 저지르고서 요원이 계속 피스 블루의 가드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현 호위 대상은 진우의 가족인 윤미연으로 교체되어 있 었다. 피스 대원의 SG에서 한단계 밀려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좌천이라던가 보직이 변경된 것은 아니었다. 장 고참의 말대로 일 종의 휴가였던 셈이다. 원래대로라면 요원은 장기 휴가로 심신을 진정시킨 다 음 현장에 복귀해야 했지만, 그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결국 우격다짐으로 복귀하려는 그녀에게 팔라딘대의 간부들은 수행 레벨을 낮추는 형식으로 휴가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모처럼 분발하려던 요원에게 맥이 빠지는 처사였을 것이다. " 그래도 너무 빠져있는건 곤란해. " 그때 방안에서 장비를 점검하던 한 대원이 장 고참의 말에 반박했다. 그는 요원과 같이 미연을 가드하는 조의 조장인 서 고참이었다. " 호위 대상이 누가 됐든간에 임무는 임무니까.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줘야지. 안이한 생각으로 있다간 또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될 거 다. " " 어이. 어이. 그렇게 말할 건 없잖아? " 딱딱한 서 고참의 말에 장 고참은 요원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나무랐다. 사 실 서 고참의 말이야 틀리진 점은 없었지만, 가뜩이나 죽어있는 신병의 기를 더 죽여서 어쩌자는 건가? 하지만 그런 염려와 달리 요원은 반듯하게 거수 경례를 붙였다. "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스스로에게 충실해야겠지요. 제 생각이 짧아서 고참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 " 나, 참. 하여간 조장이나 조원이나. 같은 녀석들끼리 잘도 뭉쳤다니까. " 장 고참은 그것 보라는듯 자신에게 으시대는 서 고참의 모습에 한탄했다. 요 원은 그제서야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했다. " 장 고참님의 배려에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힘이 났습니다. " " 그래. 그럼 그 힘으로 분골쇄신하라고. 내일 교대 시간에 보도록 하지. " 장 고참은 등 너머로 손을 흔들며 세이프 하우스를 나섰다. 그런 동료의 모 습에 서 고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하여간 자기 조원 관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의 조원 신경 쓰기는. 쓸데 없이 잔정만 많아가지고. " " 후후. 그때문에 후임들이 다들 장 고참님을 따르는것 아닙니까. " " 흥. 남자 녀석들이 줄줄히 따르는게 뭐가 좋다는 거야? 징그럽기만 하지. " " ……저도 일단은 여자입니다만. " " 불만 있으면 다음 회식때 치마라도 입고 와보시지, 천 중사? 그러면 두 팔 걷고서 융숭하게 여자 대접을 해드릴테니. " " 사양하도록 하죠.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겠습니다. " " 쳇. 역시 안되나. " 서 고참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팔라딘 대에서 유일한 여자 대원인 천요 원은 그 희소성만큼이나 여자로서의 치장과도 거리가 멀었기에, 그녀가 치마 를 입고 다니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풍문이지만, 팔라딘대 내에서는 요원에게 먼저 치마를 입히는 대원에게 그 달의 월급을 모두 몰아주는 내기가 성행 중이라고……. " ……. " 물론 풍문일 뿐이다. 만약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진즉에 요원이 대대를 들고 엎었겠지. " 그나저나 오늘은 늦는군요. " 서 고참은 창 밖을 감시하고 있던 요원의 말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 뭐가? " " 정 대위님의 딸 말입니다. 평소라면 벌써 귀가했어야 할 시간인데. 그리고 그쪽의 SG조들에게서도 연락이 없고. " 요원의 말대로 벌써 시간은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유치원이 마칠 시간은 진즉에 지나있다. 서 고참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글쎄. 꼭 귀가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번 연락해 볼까? 이러다 우리의 호위 대상이 아이를 찾으러 돌발 행동을 할지도 모르 니까. " " 예. " 요원은 손목에 찬 무전기로 정하나의 호위조를 향해 무전을 치려고 했다. 그때, 똑 똑 똑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두드리는 한 소리가 있었다. 요원과 서 고참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우리를 방문할 사람이라고는……. " 기우였나 보군. 녀석들, 이제야 돌아온 모양인데. " 서 고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문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정하나의 호위조가 돌아온 모양이다. 요원도 긴장을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거, 참. 오시기 전 에 연락이라도 주실 것이지. ' ……. ' 그러나 마음을 놓기 전에 한 가지 이질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크게 신경쓰이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저 사소한 의혹이었을 뿐이다. 과연, ' 팔라딘대의 SG들이, '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 두드릴 필요가 있을까? ' ……라는. " 어이. 왔으면 얼른 얼른 들어올 것이지. 뭘 노크하고 그러는 거야? 열쇠 는 엿바꿔 먹었냐? " 문을 열려던 서 고참은 그렇게 농담 조로 소리쳤다. 그러다 그 역시 자신의 말에서 어색함을 느꼈다. 팔라딘대의 SG조가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두드린다? 열쇠가 없어서? ' 그럴 리가! ' 순간, 서 고참은 신속하게 품 안의 권총을 뽑아들며 문 바로 옆에 몸을 붙 였다. 그리고 요원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춤의 쌍 권총을 뽑아든다. 그렇게 의문의 방문객을 환영할 준비가 끝나자 서 고참은 문의 손잡이를 움 켜쥐며 태연하게 소리쳤다. " 잠깐만 기다려봐. 지금 열어줄테니까― " 그리고 손잡이를 돌리려는 찰나! 쉭 서 고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몇번인가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벽에 등을 붙 인 그의 가슴 밖으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삐져나와 있었다. 마치 총검과도 같은 발톱. 짐승의 발톱이었다. 그것이 벽을 뚫고서 정확하게 서 고참의 심장을 관통했던 것이다! " 서 고참님! " 요원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양손이 불꽃을 일으키며 문을 벌집으로 만들기 시작 한다. 콰앙― 그러나 문밖의 상대는 요원의 총격에도 끄떡 없었는지 대번에 벌집이 된 문 을 잡아뜯어서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요원은 그 상식 밖의 대응에 뒤로 쓰러 지듯 몸을 날리며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탕 그녀의 총탄은 정확하게 표적을 맞췄다. 느낌이 왔어! 그 뒤를 이어 유리창 이 깨지는 소리가 뒤를 잇는다. 요원이 피한 방문이 그대로 뒤편의 유리창을 꿰부수고 밖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요원은 거칠게 뒷구르기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쓰러졌을 표적을 향 해 다시 총을 겨눴다. " ―! " 순간, 요원은 짧게 숨을 들이켜야 했다. 없다. 그녀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총탄에 맞았을 텐데! " 여기다. " 콰직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늘과 땅의 위치가 교차했다. 요원은 옆구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에 피를 토해내며 그대로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천장에 등을 찍힌 그녀는 힘 없이 권총을 떨어뜨리며 자 신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썩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요원은 아픔도 고통도 느끼지를 못하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공격당한 건가? 하지만 뭘로? 뭐에 얻어맞았길래 사람의 몸이 이렇듯 인형처 럼 날아갈 수 있는 거지? 달려오는 자동차에 부딪히면 이렇게 될까? " 아직 살아있었나? 다행이군. 다 죽여버렸으면 녀석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 었을텐데. " 요원은 자신을 공격한 이로 추측되는 한 남자의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들 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장신의 신부가 한 사람 있었다. 푸른 빛이 흐르는 은발과 고요한 녹색의 눈동자. 요원은 그런 신부의 모습을 팔라딘대의 블랙 리스트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그 이름이, ' 라트……발렌시아. ' 피스 블랙 한시영의 수하인 라이컨슬로프! 그렇게 요원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자 라트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 흥분하지 않는 편이 상처에 좋을 거야.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서 내 소식을 피스 그린에게 전해야지. " 소식이라니? 의아해하던 요원은 자꾸만 눈꺼풀이 감기려고 하자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 다. 지금 여기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죽는 건 둘째치고, 최대한 정보를 끌어모으지 않으면……. " 엄마! 나 왔어! " 그때 부서진 창 밖에서 어린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정하나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이제야 유치원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잠시 후 딸을 반기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 아! ' 요원은 라트가 창밖을 바라보며 웃고 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녀석, 여기에 나타난 이유가 설마! " 크크크크. 여자, 피스 그린에게 전해라. 네 녀석의 가족은 내가 데려간다 고. 가족들을 되찾고 싶으면 혼자서 날 찾아오라고. " " 크, 으으……. " " 시간과 장소는 차후에 통보하도록 하지. 그때까지 피를 말리며 기다리고 있어라, 피스 그린! 크크크, 크카카카카캇―! " 라트는 광소를 터뜨리며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요원은 그런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도 없는 허공을 되짚어야 했다. 그녀는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중얼거렸다. ' 안돼. 어떻게든, 막지……않으면. ' 하지만 생각과 달리 몸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공포에 질린 모녀의 비명 소리 였다. " 결국 그만두기로 정한 겁니까. " 닥터는 메디컬 센터의 개인 사무실에서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에게 안도의 표 정을 지어보였다. 방문객, 정진우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어제 가족들을 만나보고 결심했습니다. 더 이상 아내와 딸이 저 때문에 슬 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 어차피 지금와서 제가 일선에서 빠진다 고 한들 머신 아더의 조종에는 지장이 없을테고. " " 그렇기는 하죠. 각성한 가인 군 만으로도 이미 머신 아더의 동력 문제가 해 결되니까. 문제는…… 그 가인 군이 머신 아더를 탈 마음이 있느냐는 건데. " 닥터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곧 진우의 표정을 살피며 빙긋 웃었다. " 어차피 코마히코 군도 있고 그람드링 군도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군요. 오 히려 이쯤에서 진우 씨가 물러나는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바이오 닉스의 불일치로 위태롭기도 하고. 종내에는 아군마저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르니까요. " " 그건 그렇지만……. 어째 그 유달리도 시원스러워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걸립니다? " " 하하. 그만큼 제가 평소에 진우 씨를 걱정해왔다는 겁니다. 언제 실명할지 도 모르는 사람을 전장으로 내보내는게 마음 편한 일이었겠습니까? 사실 지 금에서야 밝히는 거지만, 진우 씨가 한번 출동할때마다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고요. " " 그러니까 그렇게 상쾌한 미소를 지으면서 걱정했다고 말해봤자……. " 진우는 닥터가 이렇듯 자신의 의견을 쾌히 따라주자 괜히 심통이 났다. 그래도 십년이 넘게 피스 대원으로 활동해왔는데. 섭섭해한다거나 안타까워 한다거나. 뭐랄까. 좀 더 잡아주기를 바랬다고……. " 진우 씨,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 닥터는 진우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진우는 툴툴거리며 그것을 무 시하려다가, 곧 닥터의 표정이 너무나 정중한 것을 깨닫고서 쓰게 웃었다. " 수고하긴요. 제값도 못하고 떨어져나간 녀석한테. " "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우 씨는 진우 씨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우리를 지켜온 겁니다. 피스메이커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 은 인생을 살아왔어요. " 닥터는 진우의 손을 굳건히 잡고 고개를 숙였다. " 모두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진우 씨. 모두를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 드립니다. " " ……. "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닥터도 참……. 뭘 이렇게 야 단스럽게 구시는 건지. " 에이. 감사는 무슨 놈의 감사에요. 마치 앞으로 안보실 것처럼 얘기하시네. 제가 피스 대원을 그만둔댔지 피스메이커를 그만둔다고 했습니까? 저는 앞 으로도 계속 팔라딘대에서 현역으로 뛸 거라고요. " " 아, 그렇군요. 제가 너무 앞서 나갔군요. 하하. " " 앞서나가다니……. " 역시 닥터. 그렇게 날 빨리 제대시키고 싶은건가. 진우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다. ' 정말 이대로 피스 대원을 그만둬도 되는 걸까? ' 시기상조인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무리하지만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동료 들의 힘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 리리스―! ' 피투성이가 된 친구의 시신을 끌어안으며 오열하던 가인의 모습. 그런 일이 또 다시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아니, 반드시 생겨날 것이다. 닥터의 말대로 그 때는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르지. 거기에 생각이 미 치자 진우는 오한이 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테레이아의 육체를 산산히 부 숴버렸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눈 앞이 깜깜해지는 그 절망감이라니― ' 그런 일이……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돼. ' 지금 피스 대원을 그만두는 것은 어쩌면 도망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서라느니, 동료를 위해서라느니. 다 허울좋은 변명일지도 모른다. 하지 만 진우는 더 이상 피스 대원으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어쨌든 닥터, 제 차트를 사령부에 보내주세요. 그만두겠다는 말은 제가 직접 가서 할테니까. " " 괜찮겠습니까? 혼자서? " " 예. 이런 건 혼자서 하지 않으면 폼이 나지 않잖아요? " 진우는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닥터의 눈에는 그 모습이 그토 록 서글퍼보일 수가 없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자신을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저 웃음이라니……. " 알겠습니다. 건투를 빌겠어요, 피스 그린. " 닥터는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진우의 등을 떠밀어줄 뿐이었다. 부디 진우가 한 선택이 그와 그의 가족, 모두를 위한 길이 되기를 바라면서. 쾅 그때 사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 닥터! 유화가 입원했다는게 사실이에요? " 그렇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불청객은 다름 아닌 기술부의 치프 시더 웰리스였다. 닥터는 그녀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듯 태연하게 응 수했다. " 늦었군요, 시더 양. 주 선생님이 입원한 것은 오전 중의 일이었어요. " " 아, 오늘은 언더 시티의 데이터 베이스를 늦게 갈무리해서. " 시더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런 무지막지한 소리를 했다. 언더 시티의 데이터 베이스는 그 방대한 양도 양이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엿볼 수 없는 기밀 사항이었다. 그런 정보를 시더는 지금 주기적으로 체크해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해킹에, 기밀 유포에, 불법 저장까지. 만약 이자리에 오퍼레이터 팀의 윤채영 치프가 있었더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서 툼 스톤 파일 드라이버를 시전했을 것이다. " 어쨌든! 뭣때문에 입원한거에요? 어쩌다가? " " ……글쎄요. 주 선생님이 입을 다물고만 있어서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그 람드링 뤼멘의 메인테넌스를 마친 직후 오른 손목이 부러졌으니. 뭐, 어렵 지 않게 짐작가지 않습니까? " " 그 인간 말종! " 시더는 전후 사정을 깨닫자 이를 부드득 갈며 분노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진 우는 영문을 몰라 닥터에게 물었다. " 주유화라면 피스 알리자린의 주치의 아닙니까? 그런 분이 어쩌다……. " " 일단 주 선생님을 찾아가보면 알게 됩니다. " 닥터는 시더와 진우를 이끌고 유화가 입원한 병실로 향했다. " 어떻게 된 거야? 응? 그 인간 말종이 이렇게 만들었지? 그치? " 유화의 병실로 찾아간 시더는 줄곧 그녀를 추궁했다. 그러나 시더의 질문 에 답할 유화는 오른 손목을 붕대로 감은채 그저 잠자코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유화의 태도에 결국 시더는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 쳤다. "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야? 말을 좀 해봐! 말을! 그래야 어떻게 돌아가 는지 알거 아냐! " " 시더 양, 환자에게 소리지르는건……. " " 환자는 무슨 놈의 환자! 이미 상처는 포션으로 다 나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늘어져있다는건 역시 속으로 끙끙 앓는 뭔가가 있다는 거지! " 닥터는 시더가 자신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치자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유화에게 물었다. " 주 선생님. 저도 시더 양과 같은 생각입니다. 일단 그렇게 혼자 고민해봤 자 상처에는 좋지 않을 것 같군요. 저희가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 지만 한번 털어놔보세요. 성심성의껏 선생님을 돕겠습니다. " " ……. " " 그래! 얘기해봐, 유화! " " ……. " 시더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유화는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닥터와 시더, 진우는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라고 해도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나름대로 유화와 티격태격하며 정이 든 시더로서는 그런 유화의 냉담한 태 도가 섭섭하기 그지 없었다. 그때, 열리지 않을 것같던 유화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잠시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 " ……! "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 그람드링, 그 아이가 뭘 꾸미고 있는 것 같아요. " " 꾸며? 뭘? " 시더가 영문을 몰라 되묻자, 유화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유달리 들떠 있는 것 같았어요. 뭔가 좋은 일이 있다고만 하던데……. 제 생각이지만 그 일이 가인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 " 가인이와? " 모두의 인상이 딱딱해졌다. 그러고 보니 물증은 없었지만, 그람드링은 예전 에 가인을 암살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시폰 뤼멘의 사주였지만 그것을 제하고서라도 그는 언제나 노골적으로 가인을 적대해왔다. 저번 머신 아더 탈취 건 때만 해도 그렇다. 만약 그때 가인이 차원 진동으 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그람드링의 아켄석 탄이 그의 목숨을 앗아 갔을지도 모른다. " 정진우 대위님, 이시랬죠? 정보부 소속의. " 진우는 유화가 자신을 향해 묻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 예. 그렇습니다. " " 최근 그람드링에게 온 시폰 뤼멘의 통화 중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 " 이상한 점이라. 저도 오퍼레이터 팀의 윤 치프에게서 보고받는 입장이라 자 세히는 잘……. 그래도 특별한 내용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 그럼 그람드링에게 온 물품이라던가 하는 것은? 저번의 이상한 도끼도 그렇 고 시폰 뤼멘이 주기적으로 뭔가를 보내오는 것 같던데. " " 아, 있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무기 조달이 있었군요. 아마 물품 체크는 시더 양이 직접 하지 않았습니까? " " 맞아요. 내가 분해해서 다시 재 조립까지 했었죠. " 시더는 안경을 번뜩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 시폰 뤼멘이 보내온 건 플라스마를 이용한 아켄석제 도끼였어요. 패턴 레 드나 패턴 버밀리온같이 반물질 커터를 만들지 못하는 능력자들을 위한 절 삭성 무장인데, 저도 예전에 한번 시도해보려고 했던 응용 과학이죠. 다만 차원 구조가 다른 몬스터에게는 별 소용이 없는지라 개발 단계에서 탈락되 었지만. " " 그건 꼭………마치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오라 능력자를 상대하기 위한 무기같군요? 예의 아켄석탄 같은? " " 맞아요. 정말 기분 나쁘다니까요. " 시더는 닥터의 말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유화는 재차 시더에게 물었다. " 그 무기 외에 다른 것은? 또 뭔가 없었나요? " " 으음. 다른 거라고 해도 딱히……. " 시더는 잠시 고민하다가 성과가 있었는지 손뼉을 마주쳤다. " 아! 이번에 보내온 물품들 중에 플라스마 도끼 말고도 이상한 리모콘이 들 어있었어. 아마 뭔가를 작동시키는 발신기 같았는데. " " 발신기? " " 응. 그러니까 사이리스터의 원리를 따르는 게이트 회로에 신호를 인가시 키는 장치였어. 뭐랄까. 비슷한 방식으로는 오라제어정류기(ACR)가 있는 데…. 아, 맞아! 그래. ACR이다! 그거였어! 오라제어정류기를 원격으로 조 종하는 발신기 타입이야.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 " ACR을 작동시키는 발신기……. ACR은 따로 들어있지 않았고? " " 들어있을리가 없지. 그런 걸 아무 생각도 없이 통과시켰을 것 같아? 오라 제어정류기는 엄연히 초전도 현상을 야기시키는 증폭기라고. 오리하르콘이 없는 상태로는 반쪽짜리 역할 밖에 못하지만 엄연한 폭약의 일종이야. 그 런 위험한 물건을 그 인간 말종에게 쥐어주다니,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지. "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진우가 이의를 제기했다. " 그건 이상한데요. ACR도 없는 제어기라니. 왜 그런 물건을 피스 알리자린 에게 보낸 걸까요? 뭣때문에? 따로 ACR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 " 그게 나도 의아하지만……. 으음∼ " 피스메이커는 AI 컴플리트 세트와 머신 아더에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엄 격히 ACR의 반출을 금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미 오리하르콘과 접목시킨 ACR 은 하나의 회로로 안착되기 때문에 따로 떼어내봤자 사용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결국 이 언더 시티 내에서 제어기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다. " 잠깐……! " 유화의 외침에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유화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기억을 더듬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 한 가지……있어요. 구할 수 있는 방법이, ACR을 구할 수 있는 데가. " " 뭐라고! " 일동의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 레드 브라더스, 그람드링 뤼멘과 오르크리스트 뤼멘의 뇌 CT를 찍으면서… …. 그래요. 그 아이들의 뇌하수체 밑에 소형의 오라제어정류기가 박혀 있 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알고 있었는데……. " " 뇌하수체 밑에 ACR을 박아넣었다고? 맙소사. 그랬다간 송과선에 초전도 현상이 들어가서 끔찍한 고통을 유발시킨다고! 미쳐버리는건 일도 아니야! 그런걸 사람의 머리 속에 집어넣는다니, 대체 무슨 짓을……! " 시더의 경악에, 진우는 시폰 뤼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분노했다. " 아마 그걸로 레드 브라더스를 관리해왔던 거겠죠. 고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고통을 주면서……. 시폰 뤼멘, 그 남자가 생각할만한 방법입 니다. " 진우의 말에 듣고 있던 모두는 기가 질렸다. 그런 반인륜적인 행위를 서슴없 이 할 정도라니. 새삼 시폰 뤼멘의 악독함에 치가 떨린다. 그에게는 인정이란 것이 없단 말인가? 닥터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 하, 하지만 말입니다. 그 ACR을 어떻게 꺼낸다는 거죠? 뇌하수체 밑에 있 는 물건을? 외과 수술을 하더라도 족히 다섯 시간이 걸릴 수술인데. 하물 며 메디컬 센터의 도움 없이……. " " 이미 오르크리스트, 그 아이가 죽어버렸잖아요. 우리에게 해부를 맡기지 않고 동생을 박제시킨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거에요. "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는 유화의 말에 시더가 헛구역질을 일으켰다. 그녀로 서는 제어기를 보낸 시폰 뤼멘이나, 오르크리스트의 머리에서 ACR을 꺼내려 고 하는 그람드링이나 다들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들 미쳐있는게 분 명하다! " 그래. 그럼 ACR을 그렇게 구한다치고……. 그럼 그 ACR을 어디에 사용하 려는 거지? " 유화는 손톱을 깨물며 고심했다. 닥터와 시더, 진우도 각자 머리를 굴리며 ACR의 용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는 ACR. 그래봤자 일반 사람들에게는 허열이나 일으킬 정도의 효과 밖에 주지 못한다. 초전도 현상은 오라 능력자들에게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ACR이 오라 능력자에게 위험한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초전도 현상이 오라 능력자의 체내에서 초전도 현상을 유발시켜 오라를 증폭 시킬지라도, 오라 능력자는 이 초전도 현상을 제어함으로서 초전도 폭발을 방 지할 수 있다. 유익하면 유익했지 유해한 물건이 아닌 것이다. ' 그래. 그런 ACR로 가인을 대체 어떻게 하겠다고……. ' 그러나 가인과 오라제어정류기를 결부시키는 순간 모두의 의문은 해소되었다. 지금의 가인은……, ' 오라 능력을 봉인하기 위해, ' 오리하르콘 감응용 폭탄을 목에 달고서……. " 이런 빌어먹을―! "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정진우였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곧바로 가인 이 수감된 형무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닥터와 시더, 유화는 그렇게 녹색의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진우의 모습에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 았다. " 어, 어서 사령부에 연락하지 않으면! " " 아니, 그 전에 교도소를! 팔라딘대에게 먼저 연락하는 편이! " " 오퍼레이터 팀에 연락해요! 그쪽이 제일 빨라요! " 만약 아무 것도 모르는 가인이 ACR과 접촉할 시에는, 그의 의도에 상관없이 ACR이 패턴 블루의 오라를 증폭시킬 것이다. 그리고 증폭된 오라는 오리하르콘 감응용 폭탄의 타이머를 작동시켜서……. " 그람드링 뤼멘. 그 아이가 가인 씨를 면회왔다고요? " " 예. 뭔가 선물을 건네주고 가는 것 같았는데. " 한편 그 시각, 시민과 마리는 이러한 일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6 - Ｂy Ｎext Ｎeo =-=-=-=-=-=-=-=-=-=-=-=-=-=-=-=-=-=-=-=-=-=-=-=-=-=-=-=-=-=-=-=-=-=-=-= 63빌딩이 한눈에 들어오는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재영은 영문도 모르고 여자 친구에게 이끌려 이 곳 으로 와야 했다. 그런 그에게 시내가 내민 것은 커플 전용의 2인승 자전거였 다. " 재영 군, 페달 밟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어. 방금 지나간 여자한테 한 눈 팔았지? " " 그, 그럴 리가. " 뒤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시내의 목소리. 재영은 안색이 창백해져 열심히 커 플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항의했다. ' 제발 한눈 팔 겨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무슨 여자애가 지치지도 않고 이렇게 줄창 내달리는 거야? 벌써 난지 지구까지 전력질주로 왕복했잖아! ' 시내는 저 가녀린 몸에는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체력과 근력을 보유하고 있 었다. 재영으로서는 그녀의 페이스에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솔 직히 그가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는 거침없이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 또 느려진다, 또! 정말∼ 할 마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 " 우오오오오―! " 재영은 이를 악물고 젖먹던 힘까지 짜내 페달링했다. 달려라, 박재영! 발이 으스러져라 밟고 또 밟아! 여자 친구 앞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여줄소냐! 쓰러지더라도 하얗게 불 태운 끝에 쓰러져! ' 흐, 흐에엑. ' 그러나 사람의 몸이란 엄연히 한계가 정해져 있고 가진 만큼만 연소할 수 있 는 법이다. 산소 결핍으로 얼굴이 청색으로 변한 재영은 쥐어짜는 목소리로 시 내에게 하소연했다. " 시, 시내야……. 우리 잠시만 쉬자……. 잠시만……. " " 응? 그럴까? 그럼 저 벤치에서 멈추자. " " ……. " 어이. 그렇게 쉽게 승낙해주는 거였어? 재영은 괜히 지금까지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같아서 허탈한 심정을 금치 못했 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체면이고 나발이고 진즉에 쉬는 거였는데! " 으그그∼ 나 죽는다! " 재영은 쓰러지듯 자전거에서 내려 벤치에 드러누웠다. 시내는 그런 남자친구 를 못말린다는듯 바라보다가 2인승 자전거를 세우고 사뿐하게 재영의 곁에 앉 는다. 땀 하나 흘리지 않고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여자 친구의 모습에 재영은 혀를 내둘렀다. ' 강해……. 너무나 강해. ' 어쨌든 이대로 계속 달리다간 집에 걸어서 못돌아가리라는 예감이 팍팍 들 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 이 지옥 레이스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재영은 모처럼의 데이트에서도 생존 본능을 따라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진 심으로 유감을 표했다. ' 어휴. 그러게 시내는 왜 갑자기 자전거를 타러 가자고 해서. ' 아니. 처음에는 인라인이었지. ' 만약 그대로 인라인을 탔더라면……죽었겠군. 그나마 2인용 자전거였기에 망정이지. ' 재영은 서늘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슬쩍 시내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그들의 데이트는 시내가 우격다짐으로 이끌고, 재영이 뒤를 따르는 형 국이었다. 별반 오늘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 뭔가 무리하는 것 같은데. ' 재영은 시내가 왠지 억지로 활발하게 구는 것 같아 위화감을 느꼈다. 뭐, 그 렇다고 해서 평소에는 그녀가 조용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의 시내에게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 그것만은 그녀의 남자 친구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 시내야, 무슨 일 있어? " 시내는 벤치에 누운 재영이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묻자 당황했다. " 무, 무슨 일이라니?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 " 아니. 그냥. 없으면 말고. 좀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 " ……. " 시내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재영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둔하기 짝이 없는 주제에 이럴 때에만 유독 날카롭다니까……. 그녀는 재영이 자신을 신경써주고 있다는 것이 기뻐서 살포시 미소지었다. " 표정이 어두운 건 내가 아니라 재영 군이겠지. " " 내가? " 시내가 뜻밖의 말을 하자 재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요 근래 계속 어두웠어. 가인 군의 일이 걱정되었던 거지? " " 어……으응. " 그랬구나. 재영은 그제야 자신이 느낀 위화감을 깨닫고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시내의 표정이 어두웠던 게 아니다. 그녀를 어둡게 봤던 자신이 어두운 거였다. 시 내는 그런 재영이 걱정되어서 열심히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의 가혹함이 고의적이었던 건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 미안. 신경 쓰이게 했나보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 재영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내에게 사과했다. 시내는 고개를 저으며 그 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 괜찮아. 가인 군은 재영 군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친구잖아. 나라도 그런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가만있지 못할 걸. " " 시내야. " " 그래도 한 가지 서운한게 있다면……. 재영 군이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 지 않는다는 거겠지. 가인 군과 유리 양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민체 스터 양과 류 군이 왜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지. " " ……. " 재영은 시내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했다. 어떻게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가인이가 피스메이커라고. 유리도, 브루스도 모두 그 일로 인해 학교를 나오 지 못한다고. 그 얘기를 시내에게 털어놓는 순간, 시내 역시 피스메이커의 감 시 대상에 들어갈 것이다. 재영은 자신의 여자 친구를 그런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 나도 정확하게는…… 무슨 일인지 몰라. " " 정확하게 모른다, 라는 건 대충은 알고 있다는 뜻이네? " " 어, 아니, 그게 그런 건 아니지만. " 재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반응을 보이고서도 시내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길 바라는 것은 그의 욕심일 것이다. " 됐어. 재영 군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 그러나 시내는 의외로 깨끗하게 물러났다. 그녀는 더 이상 재영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거기서 일단락을 지었다. "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거지? 재영 군이 가인 군의 일에 대해서 모를리 가 없잖아. 그래도 말하지 않는다는건 분명 말하면 누군가가 곤란해지기 때 문이니까. " " ……. " " 재영 군이 배려심이 많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걸. 그러니까 괜찮 아. 나중에 말해줄 수 있을 때 말해줘. 그때까지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 지 않을게. " " 시, 시내야. " 재영은 시내의 배려에 가슴이 찡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그녀와 같은 여자 친구를 사귄 것은 자신의 인생 중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물론 그녀의 힘이 약간 줄어든다던가 아무 때나 메치기를 하지 않는다던 가, 아쉬운 점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 자! 그럼 다시 한번 타볼까! 시내는 이번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운전 은 모두 이 박 기사에게 맡겨두시라! " 재영은 기운차게 몸을 일으키며 2인승 자전거에 올라탔다. 시내는 고소하며 그의 뒤편에 몸을 실었다. " 의욕이 넘치는 건 좋지만∼ 괜찮겠어, 재영 군? 이 앞부터는 은근히 오르 막 길인데? " " ……. " 재영은 결국 집에 걸어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울상을 지으며 페달을 밟으려는 중, 재영은 전방에서 걸어오는 한 괴 이쩍은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인영을 가리키며 시내에게 말했다. " 시내야, 저기 저 사람 좀 봐봐. 외국인인가? 되게 특이하게 생겼다, 그치? " " 어디 어디? " 시내는 재영의 등 너머로 목을 빼내며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과연 재영의 말대로 전방의 외국인은 주위의 이목을 한데 끌어모으는 묘한 분위기 를 풍기고 있었다. 하늘색과 갈색의 브릿지가 들어간 긴 흑발,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검 은 코트. 그리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중성적인 이목구비. 그야말로 일상에서 볼 수 없는 비현실을 한데 끌어모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재영은 그런 외국인의 모습에 정신을 빼앗겼다가 그만 자전거의 중심을 잃어 버렸다. " 엇! " 하마터면 넘어질뻔한 그는 재빨리 발로 자전거를 받치며 뒤에 타고 있던 시 내에게 사과했다. " 미안, 시내야. 괜찮아? " 툭 그러나 그의 사과에 돌아온 것은 무언가가 도로에 쓰러지는 소리였다. 도로에 쓰러진 것은 시내였다. " 시내야? 시내야! 왜 그러는 거야? 유시내! " 재영은 당황하며 자전거에서 내려 시내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녀의 상태를 살 피던 그는 흠칫 몸을 떨어야만 했다. 시내는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마치 마네킹이라도 된 것처럼 사 지가 굳어 있었다. 얼굴은 앞의 놀라는 표정에서 멈춰 있었고, 몸도 자전거를 타던 자세 그대로에서 굳어 있다. " ……. " 그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고, 온기도 느 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게 대체……. " 그녀의 몸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영은 울상이 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 다. 누군가에게,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 ……! "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방금전까지 인파로 시끄럽던 공원이 완벽하게 침묵하 고 있었다. 인라인을 타던 남녀들이 달리던 자세 그대로에서 땅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잔디 밭에서 동아리 모임을 가지던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에서 멈춰 있 었다. 매점에서 물건을 사고팔던 사람들도, 자동차를 주차하던 사람들도, 모두, 모두 멈춰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 으, 아아. " 재영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뭔가에 등 을 부딪히고 말았다. 그의 등 뒤에는 어느새 다가온 건지 검은 코트의 외국인 이 서있었다. 이 사람은……움직일 수 있는 건가? " ―! " 그러다 외국인과 눈이 마주친 재영은 곧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음을 깨달 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입을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주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이 굳어진 것이다! " 후. " 외국인은 재영에게서 눈길을 거두어 들이며 가볍게 코웃음쳤다. 그리고 그를 지나쳐 계속 고수부지를 따라 걸어간다. 그렇게 외국인이 지나간 자리로는 수십, 수백의 살아있는 마네킹들이 즐비하 기 시작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어김 없이 재영의 전철을 밟아야 했 다. 거기에 예외는 없었다. " 이 정도라면……. " 여의도 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른 외국인은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 이 만든 정체의 현장을 돌아보았다. " 슬슬 교섭을 시작해도 되겠군. " 스스스스스 무미건조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반응하여 메두사의 그림자로부터 검은 사슬들이 뱀처럼 기어나 왔다. AI슈츠를 장착한 진우는 패턴 그린의 힘을 사용하여 언더 시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메디컬 센터에서 팔라딘대의 주둔지까지 최단 거리로 내달렸다. 피할 수 있는 장애물은 뛰어넘고, 그렇지 못할 경우는 충격파로 부서뜨리며 전진한다. 최근 세번이나 실명한 그는 자신의 전자 의안이 어느 정도 가속에 견뎌낼 수 있는가 대략 파악한 뒤였다. 진우는 아슬아슬하게 의안의 한계까지 가속하여 렌트카로 20분이 걸릴 거리 를 단 1분만에 주파했다. ' 크― 또 눈이! ' 진우는 팔라딘대의 주둔지가 보이자 재빨리 가속을 줄였다. 하마터면 또 다 시 의안의 시신경이 끊어질 뻔 했던 것이다. 위병소에 있던 초병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녹색의 잔상을 발견하자 비명 을 내질렀다. " 머, 멈춰―! " " 진우 대위님? " 주둔지의 철창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진우는 놀라는 초병들 을 뒤로 하며 그대로 AI슈츠의 각력으로 철조망을 뛰어넘었다. " 지나간다! " 콰드드드득 속도를 줄였건만 여파가 남아있었는지, 진우가 뛰어넘은 철조망이 가속의 후 폭풍에 뒤흔들렸다. 그 바람에 초소의 유리창까지 덩달아 깨지자 위병소에서 는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진우는 자신의 난입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부하들에게 양해를 구할 틈도 없이 곧장 교도소로 향했다.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절차 같은 것을 밟고 있을 틈 이 없었다! 촤아아아악 진우는 마치 오토바이로 휠스핀을 하는 것처럼 교도소의 입구에 멈춰섰다. 그리고 자신을 황당하다는듯 바라보는 대원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AI 슈츠를 해제시켰다. 행여나 교도소 안에 있는 가인의 오라가 패턴 그린의 오 라에 반응하여 깨어난다면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이 터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 대위 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 " 설명하고 있을 시간 없어! 어서 유가인에게 안내해! " 진우는 어리둥절해 하는 대원들의 등을 떠다밀며 교도소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달리는 와중에 대원들에게 물었다. " 오늘 유가인을 면회온 사람이 누구 누구 있지? " " 아, 예. 그게 지금 막 피스 옐로우 한시민 씨와 피스 레드 성마리 씨가… …. " " 제길. 하필이면! 그리고 또? " " 오전 중에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이 방문했습니다. " " ―! " 진우는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그람드링이 이미 가인을 면회왔다니! 그래 서야 이렇게 부리나케 달려온 보람이 없지 않은가? 벌써 상황이 끝나버린 것 은 아니겠지? 가인의 목에 채워진 오리하르콘 감응 용 폭탄은 작년, 진 사령관이 북경에서 인민 해방군에게 착용당했던 제어구를 다운 그레이드시킨 인원살상용(細裂手榴 彈)이었다. 폭파 범위는 반경 2미터도 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착용 자의 목숨은 앗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사람들 또한 폭발에 휘말 릴 위험이……. " 시민 씨! 마리 양! 다들 괜찮습니까! " 유가인, 무사한 거겠지! 진우는 다급히 가인이 갇힌 감금 시설을 찾았다. 특별 수감자용 감금 시설은 이미 앞의 면회자들을 들여보내기 위해 강철문을 개폐하고 있었다. 진우는 감 금 시설 앞에서 자신을 제지하려는 대원을 밀쳐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 진우 씨? " 방탄 유리 앞에서 가인을 면회하던 시민이 가장 먼저 진우를 발견했다. 그녀 의 부름에 발맞춰 가인과 마리도 그를 돌아본다. 시민은 설마 진우가 교도소 로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반사적으로 가인의 눈치를 살폈다. ' 지금 가인 씨와 진우 씨를 만나게 하면 안되는데! ' 그런 그녀의 걱정대로 진우를 발견한 가인의 표정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분노가 얼마나 확연했던지 방탄 유리 밖의 사람들에게조차 가인의 살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적개심이라니! 이건 도저히 동료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진우는 노골적인 가인의 적의에 씁쓸함을 금치 못했지만, 곧 마음을 추스리 며 일행에게 다가갔다. " 아직까지는 별 다른 일이 없었던 것 같군요. 모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 " 별 다른 일이라뇨? " 시민은 진우에게서 초조한 기색이 보이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진우 는 그녀에 대한 대답을 미루며 천천히 가인에게 말했다. " 유가인. 아마 오전 쯤에 피스 알리자린이 널 면회오지 않았나? " " ……그런데요? " 가인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으며 진우를 노려보았다. 진우는 그 시선을 피 하지 않으며 똑바로 마주했다. " 그와 무슨 얘기를 나눴지? 아니. 너에게 건네준 물건이라던가……. 그런건 없었던 거야? " " 물건이라면……. " 가인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침대에 아무렇게나 팽개쳐둔 작은 금속구를 가리켰다. " 저것 말이에요? " " ……! " 진우는 그 금속구를 보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저것이다! 저것이 바로 주 유화가 말했던 오라제어정류기! 진우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 그래. 그거야! 당장 이쪽으로 넘겨라! 어서! " " 진우 씨? 대체 아까부터 왜 그러는 겁니까! " 보다못한 마리가 그에게 소리쳤다. 진우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상황을 얘기해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 피스 알리자린이 가인에게 건내준 물건은 아무래도 마이크로 타입의 오라 제어정류기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가인에게 ACR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는 다들 알고 있겠죠. " " ACR! " 마리와 시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째서 그런 물건이 가인에게 있는 거지? 아니, 그 이전에 그람드링이 ACR을 가지고 어떻게 가인을 면회할 수 있었던 걸까? 그녀들이 진우를 따라 들어온 팔라딘 대원들을 노려보자 그들은 당황하며 손 을 내저었다. "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희는 확실하게 몸 수색을 했습니다. 물론 저 금속구의 오라 반응도 체크했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고요! " " 그거야 저 ACR이 원격 조작으로 게이트 신호를 인가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지. 신호가 없이는 단순한 금속일 뿐이야.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무 리가 아니야. " 진우는 침중하게 답하며 다시 가인을 돌아보았다. " 어쨌든 그 ACR이 작동하는 순간, 네 목에 걸린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이 작 동하게 될 거다. 그 전에 ACR을 오라가 미치지 않는 범위로 떨어뜨려야해. 그러니 어서 개폐구로 ACR을 넘겨. 이렇게 꾸물거릴 틈이 없다고! " " 그래요. 가인 씨! 빨리 이쪽으로 보내세요! " " 가인! " 시민과 마리도 방탄 유리에 붙어 소리쳤다. 하지만 이런 모두의 재촉에도 불 구하고 가인은 별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침대로 걸어가 금 속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선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마치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는듯한 태도, 태연함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들로 서는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 왜 그러는 거야, 가인? 뭐하고 있어! 어서 보내지 않고! " 마리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방탄 유리를 두들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인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그는 금속구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천장의 CCTV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마 침내 입을 열었다. "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 짐작하고……있었다니? " 그람드링 뤼멘이 나에게 이 물건을 준 의도. 이게 ACR인줄은 몰랐지만 대 충 내 목숨을 노리는 뭔가라고 생각했죠. " " 아, 알고 있었단 말이야? " 마리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도 별반 그녀와 다르지 않은 표정이 다. 모두들 기가 막혀하고 있었다. " 예. 그 녀석은 예전부터 절 노리고 있었으니까요. " 가인은 8월 달, 자신이 오라를 상실했을 때 집으로 쳐들어와 자신을 죽이려 고 했던 그람드링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그때 녀석의 리볼버가 입 안으로 들 어오던 느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 알고 있었다니……. 그럼! 그럼 어째서 그런 물건을 받은 거에요? 알고 있 었으면서! " 시민은 속이 상해 버럭 소리질렀다. 그녀는 도무지 가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부러 위험을 자처하다니!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한단 말인가? "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듣겠다. 빨리 ACR부터 넘겨. " 진우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가인에게서 ACR을 회수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요구에 가인은 여전히 CCTV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꾸했다. " 소용없을 거에요. 이 ACR은 원격 조작으로 작동하는 거랬죠? 아마 녀석은 저 카메라로 여기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거에요. 그러다 내가 ACR을 넘 겨주려 할 때 작동시킬 셈이겠죠. " " 모두가 안도하는 순간 폭발시키겠다는 건가. 확실히 녀석다운 수법이군. 악질적이기 짝이 없어. " 진우는 그람드링과 직접 페어를 짜봤기에 그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 그럼 방법은……없는 건가. ' 진우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고 한 탄했다. 그의 가속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람드링이 스위치를 넣기 전에 폭탄 의 범위 밖으로 ACR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오히려 패턴 그린이 패턴 블루와 감응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모든 것이 물거품 된다. 아 무리 ACR을 떨어뜨리더라도 오라가 폭탄을 작동시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라를 사용할 수 있어야 뭘 하든 할텐데! " 바보같은 자식!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면 좀 더 신중했어야지! 왜! 왜! " 진우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유리창을 두들겼다. 그런 그에게 가인은 냉정하 게 말했다. " 뭘 그렇게 걱정하는 척 하는 거에요? " " 뭐? " 진우는 기가 막혔다. 걱정하는 척이라니! " 더 이상 오라의 주인을 이용하지 못하니까 아까워진 거에요? 성당 기사단 의 계획과 어긋났나 보죠? " " ―! " 성당 기사단! 그 이름이 생소했던 마리와 대원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 보았다. 반면 진우와 시민의 안색은 어두워진다. ' 가인 씨, 성당 기사단에 대해서……알고 있었던 건가? ' 시민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성당 기사단이 가인을 이용하려 한다 는 것을. 그 때문에 그녀는 그에게 피스메이커를 그만두라고 만류한 적도 있 었다. 가인이 시영과 같은 길을 걷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제지하기에는 가인의 의지가 너무나 확고했고, 또한 진 사령 관이 성당 기사단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하에 그의 잔류를 인 정해야 했다. " 가인 씨, 그렇지 않아요. 성당 기사단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피스 메이커는, " " 이제는 지긋지긋해요! 이용당하는 것도! 목숨을 위협받는 것도! 의지에 상 관없이 놀아나는 것도! 더 이상 그런 꼭두각시 놀음은 사양이야! " 가인은 시민의 설득에 아랑곳하지 않고 울분을 토해냈다. 그것은 리리스의 죽음 이후 줄곧 그의 가슴에 쌓여왔던 분노이자 증오이자 슬픔이었다. " 그런 꼭두각시 놀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 거죠? 얼마나 더 슬퍼해야 하는 거죠! 왜 자기들 좋을데로 타인의 인생을 가지고 노는 거에요! 대체 무슨 권리로! " 쾅― 가인은 방탄 유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 그런 제멋대로인 녀석들한테! 그런 제멋대로인 녀석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 리리스는―! 가인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그녀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보여줬 던 과거를 떠올렸다. 한평생 노아의 원로회에게 이용만 당해왔던 그녀. 인간 으로서 응당 누려야할 기쁨도 즐거움도 받지 못했던 그녀. 그러다 테라에게 이용당하려는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런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그녀는……. ' 리리스를 돌려줘! ' 가인은 이 자리에 테라와 노아의 흉수들이 있다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내 친구를 돌려달라고! 내 소중한 사람을, 내 사랑하는 사람을! 너희들의 욕 심 때문에 희생된 그녀를 살려내라고! ' 가인 씨……. ' 시민은 가인이 분노하는 이유가 리리스, 테레이아 때문임을 깨닫고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새삼 그의 상실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 가인 씨는 그토록 그녀를……. ' 시민은 아련히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참으며 조심스레 진우를 바라보았다. 이런 가인의 비통한 모습에 진우가 얼마나 죄책감을 받을지 걱정스러웠던 것 이다. 하지만, " 그래서? 그렇게 고민한 끝에 네가 생각해낸 방법이 고작 이런 거였냐? " 시민의 걱정과 달리 진우는 차갑게 가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진우 씨? " 이용당하기는 싫다. 그러니 녀석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으로 복수하겠다?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서? " 진우는 방탄 유리에 기댄 가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조소했다. " 아주 제대로 웃겨주는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녀석들이 눈 하나 깜빡할 거 같냐? " " ……! " " 무엇보다 자기 목숨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는 것부터가 글러먹었어.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자신의 소중한 사람 하나 지켜내지를 못하는 거다. " " 뭣! " 그 말에 가인은 더 이상 진우에 대한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내 소중한 사람을 앗아간게 대체 누군데! 바로 당신이잖아! 그러나 가인이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진우의 호통이 그를 두드렸다. " 죽는다고?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고 그런 소리를 해! " 남겨진 사람들의……슬픔? " 테레이아를 잃었을 때 넌 어땠지? 네가 느낀 상실감과 고통은 어느 정도였 냐?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야! " 리리스를 잃은 슬픔. 그걸,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얼마나 슬퍼하고 울었는지 모른 다. 몇날며칠 그녀만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여전히 그녀에 대한 감정들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기억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져서 가인의 가슴 깊이 자리 잡는다. ' 아무렇지도 않았을리가 없잖아. ' 그녀를 좋아했던 만큼……. 그녀를 잃은 슬픔 또한……. ' 아무렇지도 않았을리가 없어. ' 가인은 복받쳐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에게 진우 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런 슬픔을……우리에게도 주고 싶은 거냐? " 그 질문에는 수십, 수백 번도 더 후회하며 자신을 탓해왔던 상처 투성이의 남자가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실을 수 있는 아 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가인은 애써 그런 진우를 외면했다. " 정 대위님! " 진우는 교도소의 대원들에게서 특별 수감소의 열쇠를 빼앗듯이 건네받아 방 탄 유리 옆벽의 개폐구를 열고, 그 안의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기계음과 함 께 방탄 유리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가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 뭐하는 거에요! 지금? " " 뭐하기는. 네 녀석이 있는 쪽으로 가려면 이 유리를 열어야 할 거 아냐. " 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인이 있는 수감소로 발을 내딛었다. 가인은 자신 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손으로 목의 폭탄을 감쌌다. " 어쩌려는 거에요!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고요? 제 정신이에요, 지금! " " 제 정신이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을 하려는 거 아냐. " 진우는 히죽 웃으며 가인의 앞에 섰다. "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가속으로 너에게서 ACR을 떨어뜨리겠어. 오리 하르콘 감응 폭탄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속력이라면, " " 무리에요! 그런게 가능할리 없잖아요! 더구나 진우 씨, AI슈츠조차 입지 않았는데! 그런 상태로 가속했다간! " " 그만큼 이미지 메이킹을 완벽하게 하면 되지. " " 그게 안되서 지금까지 메디컬 센터의 신세를 진 거잖아요! " " 뭐야? 뭘 그렇게 걱정하는 '척'하는 거에요? " " ……! " 가인은 진우가 자신이 했던 말을 토시하나 바꾸지 않고 써먹자 얼굴이 붉어 졌다. 지, 진짜 이 사람은 정말! " 자자. 어쨌든 방법은 정해졌으니 실행으로 옮길 일만 남았군. 다들 제가 한 말은 알아들었겠죠? 그래도 위험할지 모르니까 수감소 밖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행여나 폭발에 휘말릴지도 모르니까요. " 진우는 그렇게 주위를 환기시키며 방탄 유리 밖의 시민 일행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느새인가 시민과 마리는 방탄 유리를 지나 그의 뒷편에 다가와 있었 다. " 계속하세요, 진우 씨. " " 리더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 진우는 무모한 그녀들의 행동에 한 소리를 하려고 했지만, 곧 소용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편의 가인에게 미소했다. " 어때? 이런 사람들을 놔두고 혼자 죽을 수 있겠어? " " ……. " 가인은 그런 동료들의 모습에 웃어야될지 울어야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 다. " 참으로 눈물 겨운 동료애로군. " 그람드링은 어두운 자신의 방에서 눈 앞의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TV에는 가 인의 예상대로 특별 수감소의 CCTV영상이 비춰지고 있었다. 무음 영상이었기 에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상황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진우와 시민, 마리가 모두 가인의 수감소 안으로 들어오자 킥킥거렸다. " 크크크. 정말이지 세상은 불공평해. 뭐야, 이건? 왜 다들 이런 자식만 감 싸주는 거야? 응? " 그람드링은 자신의 뒤편에서 머리가 으깨진채 뇌수를 흘리고 있는 동생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치밀어올랐다. 이걸 분노 라고 해야할까 서글픔이라고 해야할까. 단지 그가 한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오라의 주인, 유가인을 진 심으로 증오한다는 거였다. " 나는 크리스 뿐이었어. 내 동생. 하지만 그 녀석마저 이제는 내 곁을 떠 나버렸지. 난 혼자야. 언제나 혼자. 앞으로도 혼자. 죽을 때까지 혼자. " 외로움. 고립감. 그러나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 내가 이런 것이……우리가 이런 것이 루미네선스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빌어먹을 여신의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 선택받지 못했다는 절망. 선택받은 녀석들에 대한 시기! 질투! 선망! " 우리의 행복을 네 놈들이 전부 가져갔기 때문이라면! 그래! 하나도 남김 없이 죽여주지! 모두 빼앗아 주겠어! 네놈들의 잘난 여신을 범하고 또 범 해주마! " 오라의 주인! 오라 능력자! "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라! " 그람드링은 광소를 터뜨리며 ACR 리모콘의 스위치를 눌렀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7 - Ｂy Ｎext Ｎeo =-=-=-=-=-=-=-=-=-=-=-=-=-=-=-=-=-=-=-=-=-=-=-=-=-=-=-=-=-=-=-=-=-=-=-=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의 작동 원리는 AI슈츠와 흡사하다고 보면 돼. 착용 자의 체내에서 반응하는 초전도 현상이 오리하르콘을 공명시키고, 공명된 오리하르콘이 폭탄의 기폭 장치를 가동시키는 거지.》 진우와 일행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시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대로라면 액화질소로 냉동시키거나 폭탄처리 로봇을 이용, 안전한 장 소까지 옮긴후 물대포나 산탄총으로 날려버리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 " 그렇게 느긋하게 공략할 여유가 없단 말이죠. " 진우는 탄식하며 수용 시설의 CCTV를 노려보았다. 아마 이 모든 일을 꾸민 장본인은 저 TV를 통해 희희낙낙거리며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행 여나 폭발물 처리반이 몰려온다던가 폭탄을 해제할 기미가 보이면 대번에 스 위치를 누를지도 모른다. ' 아니. 꼭 그런 것도 아니군. ' 사실 그람드링이 ACR을 작동시키는 데에는 특별한 기준이 없었다. 그저 자 신의 마음이 내킬때 스위치를 눌러버리면 그만이다. 일부러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기다려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렇게 신중을 기하는 것이 다 부질 없는 일인 것처럼 느 껴졌다. ' 제길. 그 자식, 조롱하고 있어. ' 그래. 일단은 녀석이 이렇게 당황하는 우리의 모습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 자. 그래서 여지껏 ACR을 작동시키지 않는 거야. 그렇다면 아직 우리에게 기 회는 남아있어! ' 좋아. 네녀석은 계속 웃고만 있어라. 그러는 사이에 멋지게 한방 먹여주 지! ' 진우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시더에게 물었다. " 시더 양. 제 계획은 가망성이 있습니까? " 《ACR의 사이리스터가 오리하르콘으로 보내는 인가 신호, 즉 이온(ion)의 전 달 속도보다 빨리 움직인다면……가능해요. 그 사이에 매체가 되는 증폭기 를 가인의 반경 50미터 이상 떨어뜨린다면.》 이온이란 양 또는 음 전기를 띠는 원자나 원자단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결 국 ACR의 인가 신호는 전기 신호라는 것이었고, 그 인가 신호를 발생시키는 것은 전파. 즉 폭발을 저지하려면 진우가 광속을 뛰어넘어야한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간신히 초음속에 달하는 진우로서는 불가능한 미션이다. 《하지만 가인이 갇힌 수감 시설은 외부의 전자파를 차단하기 위해 도전 성분 을 바른 도료로 칠해져 있어. ACR과 같은 고속 SCR의 전파를 완전히 차단하 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2초 정도 인터벌(interval)을 버는 것은 가능해. 거 기다 전파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시간 차가 발생하니까. " 그 정도의 조건이라면 충분히 시도할 가치가 있었다. 패턴 그린의 소유자, 정 진우에게 2초란 2분보다도 더 긴 시간이다. ACR이 작동하기 전에 가인에게서 5 0미터를 떨어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인 것이다. 단지 문제는, 《괜찮겠어요, 미스터 그린? AI슈츠 없이 가속했다간 저번처럼 실명하는 것 으로 끝나지 않을 거에요.》 시더의 말에 듣고 있던 가인과 마리, 시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다. 진우가 AI슈츠를 착용하는 순간, 그람드링은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ACR을 작동시킬 것이다. 그러니 상대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우는 AI 슈츠 없이 가속을 전개해야 했다. 《패턴 그린의 이미지 메이킹이 구현시킨 충격파가 육체를……,》 " 아아.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요. 옛날에 한번 된통 당해본 적이 있으니까. " 진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오라 능력을 각성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라트 발렌시아를 쓰러뜨릴 때 사용했던 슈팅스타. 맨몸으로 가속의 세계에 접어든 진우는 그 대가로 자신의 육체를 한번 잃어 야 했다. 그때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브루스의 신속한 응급 처치와 성당 기사단의 PET 치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가루가 되어 사라져가는 느낌. 그 느낌이 되살아 나자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 진우 씨. " 시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우는 애써 창백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 뭐, 벌써 십년도 더 된 일이에요. 그 사이에 죽어라 수련해왔으니 뭔가 발 전이 있지 않겠습니까. " 적어도 죽지는 않겠지……. 진우는 그 뒷말을 일부러 붙이지 않았다. 괜히 동료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 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불완전한 능력에 언제나 불만을 품어왔던 자신 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자신의 한계를 넘을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래. 좋게 생각하기로 하자! " 진우 씨. " 가인은 복잡한 심정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도박마 저 감행하는 그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테레이아를 죽인 일 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 진우를 자신은 무슨 마음으로 대해야 한단 말인가? " 유가인. "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가인에게 진우는 말했다. " 우선은 살아남는 거다. 생각하는 것은 그 뒤에 해도 충분해. 알겠지? " " ……예. " 가인은 눈앞의 그를 바라보다가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오직 이 상황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모두가 무사하기만을 기원하도록 하자. 그렇게 모두가 각오를 굳히자 진우는 심호흡을 하며 CCTV의 눈치를 살폈다. 패턴 그린의 가속을 카메라의 프레임이 따라올리 없었다. 아마 그가 전력으로 가속하는 순간, 화면 상에서는 이미 그의 모습이 사라져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TV를 뚫어져라 응시해도, 눈으로 진우의 움직임을 쫓다간 제때에 ACR 을 작동시키지 못한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패턴 그린의 이미지 메이킹만 완벽하다면 분명……! ' 응? 잠깐……. ' 나, 지금. ' 뭔가를 잊어버리고 있지 않나? ' 진우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옴팔로스에서 자신을 부르 던 그람드링의 호칭이 생각났다. ' 어이, Flash man! '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람드링은 진우의 오라 능력이 가속이라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진우가 가인의 수용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하 고 있었을까? 왜 미리 ACR을 작동시키지 않았을까? 진우가 패턴 그린의 가속을 사용하여 ACR을 빼내겠다는 생각을……정녕 하지 못했을까? ' 그럴리가 없어. ' 그렇다면 이쪽의 계획을 눈치채고서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인데. ' 순간 예지! ' 진우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기가 반사적으로 가속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하고나서 행동했다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증거였다. 가인의 손에 들려있 던 ACR은 진우의 손이 닿기도 전에 변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고 있어! 우우우우우 ACR이 가동하자 가인의 몸 속에 잠들어있던 오라가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타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가인의 목에 걸려있던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도 반응을 일으킨다. 마리는 가인의 몸에서 끓어오르는 섬광에 두눈을 가리며 소리쳤다. " 신중하게 능력을 전개해도 모자랄 판에! 진우 씨, 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 겁니까! " " 내 오라에 반응한게 아니에요! 그람드링, 그 빌어먹을 녀석이 순간 예지로 내 움직임을 예지한 거에요! " 진우는 분개하면서도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녀석의 순간예지안은 직접 사물을 맞닥뜨려야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었나? TV의 영상으로 예지해봤자 TV 그 자체에 대한 미래밖에 보지 못할텐데! 그런 이유로 진우는 그람드링의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이건 차 라리 그의 동생이었던 오르크리스트의 원격 투시에 가까운 능력이다. 하지만 어찌 진우가 알았겠는가? 지금의 그람드링이 동생의 능력마저 손에 넣었다는 것을. 그람드링은 애초에 패턴 알리자린과 패턴 푸르푸린의 복수 능력, 천리안으로 수용 시설을 감시하고 있었다. CCTV의 영상같은 것은 참고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 안돼! 이대로는 가인 씨가! " 시민이 비명을 지르며 가인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진우는 그녀와 마리의 손을 낚아채서 벽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그녀들을 감싸안는다. 피해를 줄이려면 이 수밖에는―! 우우우우우 귓가로는 오라의 박동소리가 연신 끊이지를 않았다. 수용 시설은 가인의 몸 에서 백열하는 오라의 빛으로 번쩍인다. 그리고, " 폭발은……? " 떨리는 마리의 중얼거림이 상황을 대변했다. 질끈 두눈을 감고 있던 시민과 진우도, 수용 시설의 바깥에 있던 대원들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가인의 모습 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보인 가인은 찬란한 오라의 후광 속에서 멀쩡하게 서있 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 폭탄이, 폭발하지 않았다? " Fuck! 왜 폭발하지 않는 거야? 왜! " 그람드링은 이를 갈며 CCTV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ACR을 오라의 주인에게 넘겨주는 것도. 천리안으로 녀석들의 움직임을 예지하는 것도. 실패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일처리는 완벽했다! ' 그렇다면……. ' 실패할 이유는 단 한가지. " 빌어먹을! 처음부터 Bluffing이었나! 폭탄 자체가 속임수였던 거야? "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오라의 주인에게 폭탄 같은 것을 채울 때부터 뭔가 이 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뇌관도 오리하르콘 감응 장치도 모두가 진짜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확인하지 않고서 그람드링이 일을 꾸몄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유가인은 피스메이커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머신 아더를 훔 치려 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위험 인물을 제어할 수단으로 오리하르콘 감응 폭탄을 장치했던 것은 어느모로 보나 타당한 처사였다. 가까운 예로 배신자 한시영이 있지 않은가? 피스메이커에게 적의를 가진 오 라의 주인만큼 인류를 위협할 천적(natural enemy)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단 자체가 속임수였다고? 만약 중반에 오라의 주인이 눈치채기 라도 했다면 어떻게 할 셈이었나! " Bull shit! " 진 사령관! 어떻게 그런 도박을 할 수 있는 거지! " 이것으로 시폰 뤼멘의 의도는 확실해졌군. " 언더 시티의 작전본부실. 메인 스크린으로 가인 일행의 무사함을 확인한 진 사령관은 아무 일도 없었 다는듯 그렇게 한 마디했다. 그런 그를 수정을 제외한 닥터와 시더, 유화는 어이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오퍼레이터 팀을 지휘하던 윤채영 치프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말 한마디 안할 수 있단 말인가? 덕분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다. " 그렇군요. 이번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의 행동은 엄연히 성당 기사단에 대한 배신 행위에요. 이로서 그를 견제할 수단이 확실하게 생긴 거네요. 비숍이 그의 대리인 자격을 박탈하는 것도 시간 문제에요. " " 자, 잠깐만요!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계신 겁니까! " 할 말을 잃은 일동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닥터였다. 그의 외침에 수정 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지금까지 잠자코 있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보안이 필요했던 사항인지라. " " 보안이라니? " " 미국 지부의 사령관, 시폰 뤼멘이 유가인을 암살하려 했던 일은 다들 알고 계시겠죠? 하지만 이는 심증만 있었을 뿐 물증이 없었어요. 무엇보다 오라 의 주인을 암살하려는 것은 상층부의 의도에 반하는 일입니다. " 상층부라 함은 성당 기사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 이름을 수정 이 꺼내지 않았던 것은 채영을 비롯한 다른 대원들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령관 님은 가인 씨가 머신 아더를 탈취하려 했던 건을 이용하여 그대로 이번 함정을 팠죠. 게이트 회로가 연결되지 않은 감응 폭탄을 명목 상 가인 씨의 목에 달고 시폰 뤼멘이 걸려들기를 기다린 거에요. 그리고 그 결과,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고요. " " 하아아아아― " 시더와 유화는 다리에 힘이 빠져 그만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 자신들이 고민했던 것은 다 뭐였단 말인가? 더구나 그 녀들은 폭탄이 작동할때 그대로 가인이 죽는구나 싶어 비명을 지르고 울고 불 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를 놀라게 한 책임은 대체 어떻게 질 거냔 말이야! ' 다행이다. ' 그래도 마음 한켠으로는 모두들 가인 일행의 무사함에 안도하고 있었다. 특 히 윤채영은 저번 머신 아더의 사태 때부터 가인에 대한 가혹한 처사에 실망 을 금치 못했으나, 이번과 같은 속뜻을 알게되자 사령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 할 수 있었다. 역시 아무 이유도 없이 행동하실 분들이 아니지! " 수정 양. 그렇다면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의 처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도의 지위에서 축출되는 건가요? " 닥터는 시끌벅적해지는 대원들에게서 거리를 두며 수정에게 조용히 물었다. 수정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지는 않을 거에요. 우리 쪽에서 먼저 회로가 없는 폭탄으로 속임수를 썼으니 그 쪽에서도 발뺌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죠. 아마 그람드링 뤼멘도 특별히 처분을 받지는 않을 거에요. 다만…… 이후부터는 적어도 우리의 일을 훼방놓지는 못하겠죠. " " 임시방편이라는 거군요. " 닥터는 이번 비밀 작전의 성과에 회의적이었다. 과연 성당 기사단의 제지가 있다고 해서 시폰 뤼멘, 그가 순순히 물러날까? 그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독 자적으로 행동해온 그 남자가? " 하지만 시폰 뤼멘의 뒤를 봐주는 누군가가 있다, 그것을 알아낸 것만으로 도 모험을 한 수확이 있었어. " 진 사령관은 낮게 중얼거리며 선글래스 안의 눈을 빛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라의 주인을 두번씩이나 암살하려고는 할 수 없겠지. 어 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야……. ' 성당 기사단에게 이단자로 찍히는 것도 두렵지 않을, 그런 후원자를 찾아 낸 거냐, 타데오? ' 《보기 좋게 실패했군, 미스터 뤼멘.》 시폰은 스크린에 떠오른 동업자의 말에 눈꼬리를 흔들었다. 그의 동업자는 새하얀 백발에 검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젊은 외국인이었다. 하지 만 스크린 너머에서 시폰을 바라보는 한쌍의 붉은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는 세월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 보기 좋게라니? 유감스럽게를 잘못 말한 것 아닙니까? " 시폰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어느 때라도 미소를 유지했던 그답지 않게 유독 감정적인 모습이다. 그것만 봐도 이번 암살 시도의 실패가 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후후. 같은 유다라도 그쪽이 한수 위인 모양이야. 왜 당신이 그 남자에게 이름을 빼앗겼는지 알 것도 같군.》 " ―! " 시폰은 순간, 무시무시한 눈으로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만약 눈빛만으로 사 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시폰은 스크린의 남자를 수십번도 더 죽였을 것이다. 스크린 너머로도 그의 살의가 전해졌던 것일까. 동업자는 더 이상의 농담은 좋지 않다고 느꼈는지 웃음을 거둬들였다. 《어차피 이번 일은 자네의 단독 행동이었어. 동업자인 나에게도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은……. 하지만 책임은 묻지 않겠네. 대신 지금부터는 내 계 획에 전면 협조해줘야겠어.》 " ……알겠습니다. 어차피 성당 기사단의 눈 밖에 나버린 이상 싫어도 이단 의 길을 걸어야겠지요. 뭐, 슬슬 솔로몬의 열쇠인 레메게톤(Lemegeton)의 해석도 끝난 참이었고. 사제의 옷을 벗기에는 적절한 시기군요." 시폰의 말에 동업자의 표정이 변했다. 《Bestoarius Fantastica……. 연구의 성과가 있었던 건가.》 " 아아. 제 아들들이 열심히 해준 덕분에 간신히. " 시폰은 천연덕스레 웃었다. " 어쨌든 내숭을 떨 필요가 없어진 것 뿐 입니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 그래서? 이제부터는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네이 안데르슨? " 동업자, 네이 안데르슨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조소했다. 《TV를 틀어 뉴스를 보면 알게 될 거야.》 " 예? " 그 말을 끝으로 네이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시폰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지만 곧 누군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 다. 네이 안데르슨과의 연락은 되도록이면 은밀한 편이 그나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이다. " 마스터. 지구 방위군의 라경일 장군이 지금 마스터를 뵙길 요구하고 있습 니다. " 방안으로 들어온 것은 시폰 뤼멘을 수십년간 보좌해온 외알 안경의 남자, 빈 센트 데이먼이었다. 그는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의 크루세이더이자 제10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했다. 시폰은 빈센트의 보고에 귀찮다는듯 손을 내저었다. " 또? 하여간 신병을 보호해준답시고 굉장히 생색내는군. 이왕이면 좀 좋은 호텔 방이나 잡아주고서 그럴 것이지. " " 지구방위군의 사령부(headquarters)에 개인실을 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인 대우 아닙니까? " " 그들로선, 말이겠지. " 시폰과 빈센트는 코웃음을 쳤다. 방금 나눈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의정부에 위치한 지구방위군의 사령부였다. 피스메이커를 나온 시폰이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의외로 피스메이커의 앙숙인 지구방위군이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피스메이커의 기밀을 건네주는 조건으로 신병을 보호받고 있었던 것이다. " 어쨌든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게, 데이먼 경. 그 전에 확인할게 있어서. " " 확인이라니. 뭘 말씀이십니까? " 시폰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리모콘으로 스크린의 TV회선을 열었다. " 뭔가 재미난 뉴스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누군가가 반드시 보라고 귀뜸 해줬거든. " " ……? " 빈센트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였다. 시폰은 그렇게 몇번 채널을 돌리다가 곧 자신이 찾는 뉴스를 발견해냈다. 그리고 지켜보던 도중, 감탄을 터뜨리며 뉴스의 내용에 빠져들었다. " 호오. 과연……. "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지, 블러디 노블맨? 두두두두두 헬리곱터의 로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진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현장 기자의 보도는 계속대고 있었다. 카메라는 하늘에서 여의도 광장 을 내려다보며 주위를 촬영한다. 《지금 거리는 침묵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시민공원에 여가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은 단체로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게 대 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출동한 구조대와 경찰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아직 까지 사건의 진상은 밝혀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기자의 목소리에 발맞춰 공원에 굳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진 다. 클로즈업된 사람들은 각각 시간이라도 멈춰진 것처럼 같은 자세, 같은 표 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정지된 영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그 있을 수 없는 광경이 묘하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돋게 만들고 있었다. 《현재 이런 정체 현상은 1시간 전부터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좀 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지면에 접근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도 헬기는 공중을 선회하며 63빌딩을 축으로 해서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그림자가 진 건물의 반대편으로 돌아 나오던 중, 덜컹 갑자기 헬기가 뒤흔들렸다. 그 바람에 헬기 내부에 있던 기자재가 무너져내 리며 기자와 방송 관계자들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뭐야! 무슨 일이야!》 《기장!》 생방송 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한순간에 아우성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곧 카메라의 영상으로 헬기가 멈춘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63빌딩의 그늘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검은 사슬들. 그 사슬들이 헬기를 꼼 짝도 못하게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공포에 질린 기자의 비명 소리가 계속되었다. 쇠가 으스러지는 소리. 사슬들이 무서운 힘으로 헬기를 끌어당긴다. 그 바람 에 헬기가 제멋대로 흔들려서 도저히 카메라의 영상으로는 상황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어렴풋하게나마 63빌딩의 그림자 쪽에서 사람의 인영같은 검은 물체가 보였을 뿐이다. 우우우우웅 그때 사슬들이 진동하며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소리는 잠시 후, 인 간 여성의 목소리로 다듬어져 허공에 울려퍼진다. [들어라. 테라여. 들어라, 가이아의 종놈들아.] 놀라운 일이었다. 사슬의 진동 소리가 사람의 언어로 말을 하다니! 더구나 목소리는 듣는 상대에게 확연히 전해질 정도로 강렬한 증오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내 말이 들리나, 피스메이커! 지금 이 구역의 인간들은 모두 내 수중에 들 어와 있다. 적게 잡아 2000명쯤 되겠지. 너희들이 진정 테라의 보호기관임 을 자청한다면! 우리를 몬스터라고 부르며 매도해왔다면! 그렇다면 나의 도 전을 받아들여라!] 그것은 요르문간드의 마지막 화신, 메두사의 선전 포고였다. [네놈들이 자랑하는 거인을 끌고 나와라! 그러지 않을시엔 이 구역에 있는 인간들을 포기한다 간주하고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 그리고 또 반복해주지. 네놈들이 나올 때까지 얼마든지 죽이고 또 죽여주겠어!] ' 티아마트,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 당신은 제가 반드시……! [한시간의 여유를 주겠다. 어서 나왓, 머신 아더―!] 그와 동시에 거대한 어둠이 하늘을 뒤덮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8 - Ｂy Ｎext Ｎeo =-=-=-=-=-=-=-=-=-=-=-=-=-=-=-=-=-=-=-=-=-=-=-=-=-=-=-=-=-=-=-=-=-=-=-= " 상황은 보는 바와 같아요. 현재 SA급 몬스터 용마인 메두사는 한강 시민 공원에서 머신 아더의 출격을 조건으로 저희와 인질극을 벌이고 있어요. 메두사가 삼은 인질들의 수는 위그드라실의 감시 영상만으로도 2758명. 대략 영상의 사각 지대에 있는 사람들까지 고려하면 3000명이 넘는다고 봐야해요. " 메두사가 공원을 점거한 시간으로부터 20분이 지났다. 현재 언더 시티 내에 체류중인 모든 피스 대원들은 사령부의 호출로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작전본부 실에 집합한 상태였다. 피스 그린 정진우. 피스 레드 성마리. 피스 옐로우 한시민.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 " ……. " 이 멤버 외에도 세 명의 피스 대원들이 더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피스 블루 유가인과 피스 핑크 이유리,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이었다. 말 그대로 사령부는 투옥 중인 대원이건 입원 중인 대원이건 상 관하지 않고 모두를 불러들인 것이다. 덕분에 대원들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유가인을 폭사시키려고 했던 그람드링. 그런 그를 앞에 두고 사건의 당사자 들이 분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령부의 처사였다. 아무리 폭탄이 가짜였다고는 하지만 그람드링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 고 넘어가다니? ' 눈 가리고 아웅다웅하는 것도 아니고! ' 만약 메두사에 의한 긴급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작전 본부실은 피스 대원들의 항의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시더와 닥터, 채영을 비롯한 각 부서의 치프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런 사령부와 대원들 간의 대립을 지켜보았다. " 시더 양, 인질들의 상태를 설명해주세요. " " 아, 예. " 수정의 부름에 시더는 회의석에서 일어나 브리핑을 이어받았다. " 위그드라실이 계측한 공원의 열원 분포도와 영상으로 미루어볼때 인질들의 생명은 그렇게 위험한 상태가 아니에요. 하지만 강한 사념파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메두사는 인질들의 대뇌반구에 암시를 걸어 감각신경로와 운동신경로를 마비시킨 것 같아요. " " 최면이란 말인가요? 예전에 피스 카민이 보여줬던 그런 식의? " 마리는 작년 사람들을 뜻대로 조종하던 마유빈을 떠올리고 표정을 굳혔다. 그 말에 잠자코 있던 가인도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능력 을 가졌던 것은 피스 카민 뿐만 아니라 노아 측의 네크로맨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 그 정도의 강력한 암시는 아닐 거야. 메두사의 암시는 단지 인질들을 구속 시키는 정도니까. 아,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대단한 능력이네. 무려 3000 명이 넘는 사람들을 혼자서 붙잡고 있는 거니……. 인간으로서는 엄두도 내 지 못할 정신 용량이야. " 시더는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 굳이 비슷한 예를 들자면 영국에 나타났던 B급 몬스터 바실리스크(basilisk)? 그 괴물도 지금과 같은 강한 암시를 시각에 투영시켜 상대를 석화시키는 타 입이었지. " " 석화……란 말입니까. 과연. 왜 저 용마인에게 메두사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 것도 같군요. " 진우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기억해내며 휘파람을 불었다. 수정은 시더의 설명이 대략 끝나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 어쨌든 적어도 아직까지 인질들은 무사하다는 겁니다. 구할 여지는 충분히 있어요. 물론 메두사의 요구대로 한 시간 내에 머신 아더를 출동시킨다는 조건 하에서지만. " " 어째서 몬스터가 머신 아더를 요구하는 겁니까? 일부러 자신의 위치를 우리 에게 노출시키면서까지? " 코마히코의 의문은 다른 대원들의 의문이기도 했다. 차라리 메두사가 인질들 의 목숨을 담보로 머신 아더의 파괴를 원했다면 더 납득이 갔을 것이다. 하지 만 그녀는 단지 제 시간 내에 머신 아더를 끌고 나오라고만 했다. 그래서야 마치 정면 대결을 펼치자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 D타입의 쿠사나기가 머신 아더에게 당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거에요. 자신 의 동료를 없앤 장본인을 자신이 직접 쓰러뜨리겠다는 복수심같은? " 사정을 잘 모르는 코마히코는 그런 수정의 답변에 순순히 납득했지만, 가인을 비롯한 옴팔로스의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머신 아 더가 오라의 주인과 반응하여 세계의 의지에 접속하는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 머신 아더는 역시 단순한 D타입 대응 결전병기가 아니었어. 몬스터도 결국 그것을 눈치챈 모양이군. ' 닥터는 초조해하는 기색이 완연한 시더의 표정을 살피며 확신했다. 그녀나 진 사령관이 자신에게 암묵해오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머신 아더의 원형이 되는 기가스는 가이아의 자식이자 그녀의 의지를 이어받 은 대행자였다. 그렇다면 역으로 기가스를 통해 가이아와 접속하는 수단, 즉 터 미널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 터무니 없는 비약인가? ' ……비약이 아니야. 가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리리스에게서 진실을 전해들은 그는 충분히 이런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다. 머신 아더는 테라가 만들어낸 바르의 별. 가이아에 접속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결국 그것이 지금과 같은 사태를 불러들이고 말았다. 또 다시 분쟁을 일으키 고 있어. 또! ' 리리스가 그런 희생을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 여전히 사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테라와 노아는 이대로 계속 대립해야 할 운명인가? 한쪽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그런 피 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것일까? " 사령관 님. 결단을. " 수정은 브리핑이 끝나자 진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모든 대원들의 시 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진 사령관은 묵묵히 그들의 시선들을 받다가 입을 열었다. " MS01 머신 아더의 사용을 승인한다. 파일럿은 피스 그린 정진우, 피스 레 드 성마리, 피스 옐로우 한시민, 피스 핑크 이유리, " " ―! " 파일럿의 발표를 듣고 있던 일행은 이유리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자신들 도 모르게 작전 본부실의 한켠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메디컬 센터의 응급 치료원들이 들고 온 간이 침대가 있었고, 그 침대 위에는 한 어린 소녀가 잠 들어 있었다. 바로 이유리였다. " 말도 안됩니다! 아직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한 아이에요! 그런 아이를 전장에 내보내겠다니 어불성설입니다! " 마리는 화가 난 표정으로 사령관에게 일갈했다. 그건 진우와 시민, 코마히 코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혼수상태인 유리를 작전본부실까지 불러 들였나 했더니! 그런 일행의 반응에 수정은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 물론 저희도 유리 양을 머신 아더에 태우는 건 탐탁치 않아요. 하지만 머 신 아더를 움직이는 사념파를 통합하는 건 누구의 몫이죠? " " 그건……. " 마리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머신 아더의 조종에 유리의 패턴 핑크가 필수 불가결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 그래도 유리는 2주가 넘도록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몸도 약해질 데로 약해져 있고……. 또 마인드 키핑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 고 있어요. 그런 아이를 무리해서 태워봤자 머신 아더가 제대로 움직이지 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유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잖아요? " " 유리 양의 의식은 머신 아더 내에서 오라 능력자들간의 정신 감응을 이용 하면 깨울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죠, 시더 양? " 수정이 동의를 구하자 시더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동조 현상으로 패턴 핑크를 각성시킬 수는 있을 거에요. 오라는 의지 의 힘인 만큼 의지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반대로 오라를 일깨움으로서 의 지도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죠. 즉 역행 각성이에요. " " 역행 각성이라니……. 정말 그런게 괜찮은 거에요? " 시민이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시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괜찮을 거에요. 문제는 그 이후겠죠. 아무리 정신을 일깨운다 한들 약해진 유리의 몸이 격렬한 전투에서도 버텨낼 수 있을까, 그게 더 걱정이죠. PET 용액으로 탑승자를 보호한다 한들 데미지를 입었다 회복하는 과정에서 체력 이 소모되는 것은 막을 수 없으니까. " 시더는 슬그머니 가인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뒷말을 덧붙였다. " 대신 피스 블루가 머신 아더에 탑승 해준다면……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 어지지만. " 그 말에 가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진우는 두눈을 크게 뜨며 가인과 시더 를 번갈아보았다. " 가인이 머신 아더에 탄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요? 어째서 그렇죠? " " 가인의 패턴 블루는 차원진동을 현현시키는 힘이에요. 그때문에 2차원적 표면파를 위상공간의 비선형 법칙에 따라 타원 궤도로 돌려보내는 것이 가 능하죠. 만약 가인의 공간 압축이 콕피트를 보호한다면 PET용액을 사용할 필요도 없어지고 머신 아더가 제한 시간에 쫓길 일도 없어질 거에요. " 모두가 놀란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시더의 말대로 가인은 제대 로 오퍼레이터 팀의 서포트 없이 유리와 단둘이서 머신 아더를 움직인 전적이 있었다. 가인은 그런 일행의 시선을 피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그람드링 은 냉소를, 시더와 수정은 유감을 드러냈다. ' 가인이 머신 아더를 조종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야. 하지만 본인 이 그럴 의사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지. ' 더구나 그는 머신 아더를 탈취하려한 전과가 있다. 사령부로서는 일부러 리 스크를 지면서까지 가인을 복귀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진 사령관이 호명한 파일럿은 총 네 명. 네 명으로는 머신 아더를 움직일 최적정 오라 수치에 도달하지 못해. ' 그렇다면 마지막 한명은? 진 사령관은 과연 누구를 호명할 셈이지? ' 가인인가? ' 그렇지않다면……. 그렇게 모두가 숨 죽여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진 사령관이 마지막 피스 대 원을 호명했다. " 파일럿은 피스 그린 정진우, 피스 레드 성마리, 피스 옐로우 한시민, 피 스 핑크 이유리. " 그리고? " ……피스 버밀리온 코마히코 카구라, 이상이다. " " ―! " 역시나! 마리와 시민은 파일럿에서 제명된 가인을 돌아보며 안타까움을 내비췄다. 내 심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진우는 담담한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 그래. 어쩌면. ' 어쩌면 이게 나을 수도 있겠지. 더 이상 가인을 전장으로 몰아넣는 것은 그 에게 가혹한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들의 선에서 일을 끝내버리는 것이, 그것만이 하다못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진우는 그렇게 속으로 결정을 내리며 진 사령관에게 말했다. " 파일럿이 정해졌다면 지금 바로 격납고로 향하겠습니다. 피스 버밀리온은 이번 출동이 처음일테니 한시라도 빨리 머신 아더와 동화하여 감각을 익혀 야 할테고요. " " 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코마히코도 내심 그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진우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그 렇게 회의를 서둘러 마치고 일어나려는 일행. 수정은 그런 진우를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 피스 그린, 아니 정진우 씨. 잠시만요. 아직 말씀 드리지 않은게 하나 있 어요. " " ……예? " 진우는 수정의 정색에 어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시민과 마리, 코마히코도 의아한 표정으로 수정을 돌아본다. 수정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사항을 진우에게 말해줘야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 분명 통보해주는 쪽이 그를 위한 일일 거야. 하지만 그래서는……. ' 그렇게 수정이 말을 잇지 못하자 일행은 한층 더 의아해졌다. 대체 무슨 이 야기이길래 저토록 뜸을 들이는 거지? 그때 수정을 대신하여 진 사령관이 말했다. " 피스 그린. 자네의 가족들이 납치당했다. " " ―! "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 그 진실에 진우는 채 현실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반 문했다. " 납치? 가족이라니? " " 두 시간 전의 일이다. 라이컨슬로프 라트 발렌시아가 26구역에 있는 자네 의 자택에 침입, 윤미연과 정하나를 데리고 갔다. "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 " 목격자는 팔라딘 4소대의 천요원 중사. 그녀 외의 SG조 대원들은 모두 라 트 발렌시아에게 죽음을 당했다. 목격자인 천 중사도 중태에 빠져……. " " 무슨 소리냐고! 그게 대체! " 진우는 진사령관이 자신의 상관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며 분노에 찬 고함을 내 질렀다. 그 모습에 수정은 진심으로 이 말재주 없는 사령관을 원망했다. 어떻 게 같은 얘기를 해도 이렇게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타이밍으로 던져줄 수 있 는 것일까? 이래서야 꼭 악의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 진우 씨, 진정하세요. 저희가 천 중사의 보고를 받은 것은 회의를 시작하 기 바로 전이었어요. 사실 곧바로 알려드릴 생각이었지만 너무나 경황이 없어서……. 그래서 묻고 싶었던 거에요. 진우 씨의 선택을. " " 선택이라니? " 진우는 냉정함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수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이대로 머신 아더에 탑승할 것인지. 아니면 가족들을 구하러 갈 것인지. " " 천 중사의 보고로는 라트 발렌시아는 자네에게 전언을 남겼다고 하더군. 가족들을 되찾고 싶으면 혼자서 자신을 찾아오라고. 자세한 사항은 차후에 연락하겠다는 말도 함께. " 진우는 질끈 두눈을 감았다. 지독한 현기증과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그러던 중 문득 그의 사부가 처음으로 했던 충고가 기억났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제 한 목숨 보존하는 것조 차 힘든데, 하물며 남까지 생각해줄 여유는 없는 노릇이지.' 통감했다. 절감했다. '사부님, 역시 나는…….' 진우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행은 그런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지독한 이분법이라니! 3000명의 목숨과 2명의 목숨. 하지 만 그 목숨의 가치는 서로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아니, 비교해서는 안된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 둘 다 선택할 수 없었다. ' 피스메이커란 뭐지? ' 평화를 지키는 것. ' 그렇다면 평화란? '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 ' 그 모두란? '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 나와……. ' 내……가족. 가족! 가족! 진우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수 많은 얼굴들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 갔다. 그중에는 그가 지켜줄 수 있던 사람들도 있었고, 지켜주지 못했던 사람 들도 있었다. ' ……아니야. ' 틀려. 지켜주지 못했던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 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오만이다. 언제나 수 많은 희생들이 있었다. 수 많은 희생 끝에 남겨진 사람들.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자신은 지켜줬다고 착각했던게 아닐 까? 사실 자신의 힘으로 해낼 수 있었던 일은 아무 것도 없었던게 아닐까? ' 애초부터, '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지켜낸다는 것은, '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 그 증거로 지금 진우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지켜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켜내지 못했던 사람들의 얼굴만이 뚜렷하게 각인된다. 그리고 이제 막 또 다시 희생되려는 사람들의 얼굴이……. ' 미연아. 하나야. ' 그들을 떠올리자 진우는 자신의 신념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 한계를 뛰어넘은 녀석들은 강해진다. 희생을 강요받아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지. '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 바보 제자,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지? 한계를 넘으려고 발버둥치겠느 냐, 아니면 한계를 그어놓고 안주하겠느냐. 그 어느쪽도 잘못된 방법은 아니야. ' 그 사람을 내 인생의 목표로 삼아왔다. 어떠한 희생을 강요받더라도 이겨 내고 싶었어. 다시는 내 가족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역시……! ' 사부님,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바보제자인가 봅니다. ' 진우는 선택해야 했다. " ……전, 가족들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 예상하고 있었다. 진우가 그런 말을 하리라는 것을.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피스메이커라도,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라도 그 개인 에게는 더 소중한 것이 있는 법. 그 소중한 것을 지켜내고 싶은 법이다. 하지만 진우의 대답을 듣는 순간, 일행은 저도 모르게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 분이었다. 그의 대답이 마치 피스메이커의 존재 의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것 같 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타인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스메이커라는 것은 신기루일 뿐이다, 라고. " 라트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부디……선처해주시기 바랍니다. " 진우는 진 사령관과 수정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 사령관은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듯 지체없이 다음 사항으로 넘어갔다. " 그렇다면 남은 대원들 중에서 파일럿을 선출해야겠군. " 남은 대원이라면……. '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과 피스 블루 유가인! ' 그리고 그 중에서 진 사령관이 호명한 대원은, " 피스 알리자린 그람드링 뤼멘. " "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 " 호명됨과 동시에 그람드링의 웃음소리가 작전본부실에 울려퍼진다. 시민과 마리는 여전히 가인을 제외시키는 진 사령관에게 한껏 섭섭함을 드러냈다. 닥 터와 시더, 채영도 실망을 숨기지 못한다. 그람드링은 의기양양하게 그런 일행을 조소했다. " 이야∼ 이거. 이거. 부담스러운 걸? 생각지도 않은 로봇 조종이라니. 잘 해낼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 시민 일행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가인을 암살하려고 했던 주제에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는 거지! 동료의 목숨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녀석과 팀을 짜라고? 대체 진 사령관 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크크크크. 확실히 현명한 판단입니다, Sir.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Stray cat 보다 차라리 제가 백배 낫죠. " 그람드링은 노골적으로 가인을 조롱했다. 그 말에 시민과 마리가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람드링은 개의치 않으며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람드링의 웃음을 멈추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진 사령관이었다. " 그람드링 뤼멘. 자네는 이대로 언더 시티 내에 대기하고 있어주길 바란다. 머신 아더의 마지막 파일럿은 피스 블루 유가인이다. " " ―! " 순간, 그람드링과 일행의 얼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그람드링은 무시무시하 게 표정을 일그러 뜨리며 진 사령관에게 소리쳤다. " Fuck! 내가 아니라 저 병신이라고? 이유가 뭐야! 저 자식은 언제 머신 아 더를 탈취할지 모르는 배신자야! 피스 블랙과 다를 바 없는 놈이라고! 그 런 녀석에게 거인을 맡기겠다니 대체 무슨 속셈이야! " " 그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 " 다른 사람이 없다니! 그럼 나는? 난 뭐야! 내가 저 자식보다 못하단 말이 야? 웃기지마! 오라 능력자로서의 능력은 내가 위야! 내가 Winner라고! " " 자네의 빛에는 여신의 따스함이 없다(Luminescence). 냉광(冷光)으로는 머 신 아더를 움직일 수 없어. " " 뭐― " " 이게 자네를 거인에게 탑승시키지 않는 이유다. 납득하겠나? " " ……크! " 그람드링은 지독한 수치심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 도 없었다. 진 사령관의 말은 한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 빌어먹을 오라 능력자! 빌어먹을 오라의 주인! '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여신의 축복따위, 내가 반드시 깨뜨려주마. 반드 시 없애주겠어! ' 언제까지 그런 잘난 얼굴로 날 내려다볼 수 있는가, 두고보겠어! 그렇게 그람드링이 진 사령관과 알 수 없는 선문답을 주고받은 후 조용해지 자 일행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닥터와 시더만이 그람드링의 안색을 살피며 자신들의 가설에 확신을 얻을 뿐이다. " 유가인. " 진 사령관은 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 모든 것은 자네에게 달려 있다. 머신 아더에 탑승하든 거부하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네의 자유다. " " ……. " " 어떻게 할 건가? 다시 한번 싸우겠는가? 아니면 포기하겠는가? " 가인은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 앞에서 자신에게 선택을 강 요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 머신 아더에 탑승하든 거부하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라고? ' 웃기지마. 당신은, 당신은 언제나 그래. 언제나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곳으 로 날 몰아넣은 후 한 가지 길만을 강요했어. 자신의 뜻대로 날 움직여왔어. ' 그래도……이렇게 내 의견을 물어봐준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 가인은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진 사령관에게서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 라보았다. 진우는 침중해진 안색으로 말 없이 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 빛에서는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일말의 기대가 담겨 있었다. 가인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 진우 씨,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 그 말에 지켜보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단지 진우만이 아무런 표정 변화 없 이 가인을 응시할 뿐이다. " 앞으로도, 아마 평생동안 당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에요. " 시민은 애가 타는 심정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 씨, 제발……! " 하지만 해야하는 거죠? " 가인!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인은 뜨겁게 달아오른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며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내 뱉었다. "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 " 아아. " 진우는 잠겨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꾸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진우 씨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미연이 누나와 하나를 위해서에요. " 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진우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작전본부실의 출구로 걸어나갔다. " 그러니까 반드시 구해내세요. 가족들과 함께 돌아오세요. " " ……. " " 그러지 않으면……절대로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 " ……그래. " 진우는 피스 대원들과 함께 머신 아더의 격납고로 향하는 가인을 눈으로 배 웅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맙다. 고맙다, 유가인. ' 고맙다……. ' ―유리야. 내 목소리가 들리니? ―…….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 ―난 리리스를 잃은 후, 아무 것도 믿을 수 없었어. 지금껏 내가 믿어온 모 든 것이 거짓이라니. 낯설게만 느껴졌지. 두려웠어. 누군가를 믿는다는게.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게. ―……. ―또다시 누군가를 믿다가 상처받을까봐 두려웠어. 그래서 나 혼자 감싸 안 을려고 했어. 혼자서 고민하려고 했지.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 도 이제는 지긋지긋했으니까.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모두는 여전히 날 걱정해주고 있었어. 기다려주고 있었어. 내가 리리스의 일로 가슴 아파하고 슬퍼했던 것 처럼 모두도 내 일로 가슴 아파하고 슬퍼했던 거야. ―…….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싫어서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건 더 큰 상처를 주는 행위였어. 자기 밖에 생각하지 못한 행동이었어. 진정 상처를 받는 것이 싫었다면, 진정 상처를 주는 것이 무서웠다면, 그 랬다면 더더욱 믿어야만 했던 거야. 리리스가 우리를 믿어줬던 것처럼! 그녀가 우리를 믿고 진심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 ―리리스가 우리에게 보여줬던 용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만 모두를 믿어보자, 유리야. ―……. ―그러니 더 이상 혼자 슬퍼하지마. 혼자서 감싸안으려고 하지마. ―……. ―기쁨도 슬픔도, 모두와 함께 짊어지는 거야. ―……응. 《PET용액 주입 완료. 피스 레드, 블루, 옐로우, 버밀리온 모두 가사 상태 에 접어들었습니다. 패턴 핑크의 오라 수치 상승, 마인드 키핑이 발동되 었습니다.》 작전본부실에서 채영이 희미하게 빛나는 핑크색의 AI헬맷을 착용하며 머신 아더의 상태를 보고했다. 그 옆에서 스크린을 주시하던 시더는 채영과 마찬 가지로 핑크빛의 AI헬맷을 착용한 채 가슴을 쓸어내렸다. " 수고했어, 가인. 어떻게든 역행 각성에 성공한 모양이네. " 그 말은 그녀와 정신이 연결된 피스 대원들을 향한 메세지였다. 패턴 핑크의 운산 능력을 견뎌낼 수 있는 시더와 채영은 피스 핑크의 AI헬 맷에서 추출해낸 오리하르콘으로 제조한 AI헬맷으로 실시간 피스 핑크와 사 념파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그녀들에게로 패턴 핑크를 통한 가인의 사념이 들려왔다. ―응. 준비는 모두 끝났어. 부탁할게, 시더. " 좋아. 피스 그린이 없는 만큼 이번 조종의 우선권은 가인이 가지게 될 거 야. 여러모로 부담이 크겠지만 힘내줘. ―알았어. 본부실의 스크린에 비친 머신 아더는 블루 폼을 띈채 시더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전 쿠사나기 때의 전투와 몇번의 출격을 바탕으로 이미 머신 아더의 자율 제어 시스템은 완성이 된 상태였다. 특별 히 오차 테스트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 개전 준비! " 《머신 아더, 격납고의 3번 출구 쪽으로 이동해주십시오. 다리 축을 자동 승강로의 접합 부분에 고정시킵니다.》 《기체의 하중을 무릎까지 낮추어 주십시오. 이동시에 리프팅이 발생할지 도 모릅니다.》 3번 출구로 이동한 머신 아더는 자동 승강로를 타고 곧장 궤도 엘리베이터 로 직행했다. 그 모습을 스크린으로 지켜보며 진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부탁한다, 유가인! 부탁합니다, 모두들! ' 《머신 아더, 궤도 엘리베이터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20초 후면 지상으로 방출 가능합니다.》 채영의 보고에 진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친다. " 발진! " 그와 동시에 스크린의 스피커가 음소거 상태로 전환되었다. 머신 아더를 태 운 궤도 엘리베이터가 무시무시한 굉음을 울리며 지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퍼어어어엉 수십 톤에 이르는 물들이 한꺼번에 터져오르며 주위를 뒤덮었다. 머신 아더 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한강 대교 부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우우우우 대기를 뒤흔드는 파공성과 함께 머신 아더는 곧장 오라 클록을 펼쳐 허공에 서 몸을 고정시켰다. 푸른 망토를 펄럭이며 육중한 거구를 자랑하는 거인의 모 습은 몇번이고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비현실의 정점이었다. 만약 피난 경고로 강 주위의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았더라면 그 모습에 한 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여기가 아닌가? 가인은 한강 대교 부근을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주위의 시민 공원에서 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메두사가 있는 곳과는 조금 떨어진 곳 으로 나오게 된 모양이다. ―가인, 그 부근을 잘 돌아봐. 63빌딩이 보이는 쪽이야. 유레카에 있는 시더의 사념이 들려오자 가인은 오라 클록의 반중력을 끌어올 려 주의깊게 머신 아더를 63빌딩으로 비행시켰다. 오라의 주인으로 각성한 그 는 예전과는 달리 머신 아더를 자신의 수족처럼 조종해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오퍼레이터 팀은 머신 아더의 조종은 전부 파일럿들에게 맡겨두고 기체의 서포 트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런데……꽤나 어두운 걸. 63빌딩으로 향하던 중, 마리는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코마히코의 사념이 대꾸했다. ―예전 D타입이 발생했을 때와 같은 차원 왜곡 현상이 아닐까요? 와프 입자가 상승하면 먹구름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치며, 일대에 역중력이 발생하는 왜곡 현상이 속출한다. 이는 쿠사나기 때와 마찬가지로 차원의 힘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막강한 존재가 삼차원에 강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이상하네요. 아직 5시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어두워지는 건 좀……. 시민의 사념대로 한강 일대는 그야말로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 깜했다. 만약 머신 아더에게서 흘러나오는 오라의 불빛이 없었더라면 63빌딩 조차 찾지 못하고 헤맸을 것이다. 계속되는 대원들의 이의에 오퍼레이터팀이 현장의 와프 입자를 분석하고 보 고했다. ―확실히 와프 입자의 변동은 있었어요. 하지만 저번 D타입의 출현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약한 수치입니다. ―그렇다면 D타입은 현현되지 않은 건가. 시더의 사념은 그나마 다행이라는듯 안도했다. 그래도 가인은 긴장을 풀지 않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의 오라는 아까부터 연신 거칠게 박동하고 있었다. 주변에 퍼져있는 거대한 존재의 흐름과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어! ―오, 오빠. 그때 유리의 사념이 표면 의식 위로 떠올랐다. 일행은 그녀가 완전히 자신 들의 의식과 동화되어있을 줄로 알았기에 깜짝 놀랐다. ―유리야? ―미, 밑을 봐. 사람들, 사람들이……. 유리의 떨리는 사념에 가인은 천천히 머신 아더의 발밑에 펼쳐진 지상을 내 려다 보았다. 오라의 불빛에 의지하여 내려다본 공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 림자가 늘어지고 있었다. ―이건! 바로 메두사가 인질로 잡은 공원의 여가객들이었다. 어둠 속이라 깨닫지 못 하고 있었는데, 가장 사념 상태에 익숙한 유리가 먼저 인질들을 발견해낸 것 이다. 피스 대원들은 마네킹처럼 굳어있는 을씨년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켰다. ―제길……. 어, 어떻게 이런 짓을. 가인은 실감했다. 역시 노아는, 몬스터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다른 인 류라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해낼 수 있 을리가 없다. ' 리리스. ' 가인은 노아였던 그녀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노아와 테라는 같은 사람 이었다. 같은 생명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가인은 노아와 싸우는 것을 주저 해왔다. 두 인류가 싸우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런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해왔다. 우우우우우 하지만 이런 광경을 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고 만다. ' 과연 테라와 노아, ' 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 라고. 우우우우우 순간 알 수 없는 굉음이 공원 일대에 울려퍼졌다. 마리와 시민, 코마히 코는 사념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신음을 흘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포효라도 내지르는 것 같았다. 더구나 그 포효소리 는 영체 상태인 피스 대원들에게도 격통을 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아스트 랄 컨덕션(Astral conduction)을 띄고 있었다. ―맙소사! 이 정도로 무지막지한 Conductive power라니! 피스 대원들과 사념이 공유되어 있던 시더도 덩달아 격통을 느꼈는지 비 명을 내질렀다. 가인은 이를 악물고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 보았 다. 위다! 포효소리는 위에서 들려온 거야! [후우우우우―] 거대한 한숨 소리가 공원을 뒤흔들며 하늘에 있던 먹구름들을 걷어낸다. 그렇게 개벽하는 하늘을 바라보던 피스 대원들은 하나 둘 숨을 죽이기 시 작했다. 그리고 구름들이 완전히 걷혀나가자, ―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모두의 사념이 부르르 떨린다. 하늘에는 거대한 팔두룡(八頭龍)이 있었다. 열 두 쌍의 날개에 여덟개의 머리. 그 크기는 자그마치 공원 일대의 하늘을 뒤덮을 정도. 40미터에 육박하는 머 신 아더가 다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해가 일찍 진 것이 아니었다. 하늘이 어두웠던 것은 순전히 이 존재가, 이 거대한 짐승이 그들에게서 하늘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후후후후. 왔느냐? 피스메이커!] 여덟 개의 머리들 중 하나가 입을 열어 말했다. 짐승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 는 분명 요르문간드의 화신인 메두사의 목소리였다. 그 웃음 소리는 광풍을 만 들어내고 그 격앙된 어조는 방전을 일으켜서 대기를 뒤흔든다. 그 압도적으로 거대한 모습에 가인 일행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이, 이것이 요르문간드……. 대지를 둘러싼 뱀……. 시더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요르문간드라는 이름에서부터 불길함이 흘러 넘쳤지만, 설마 그 이름이 D타입으로 구현한 크기를 말하는 것일 줄이야! ―이건, 이건 말도 안돼. 아무런 징조도 없이, 아무런 왜곡 현상도 없이 이 정도 크기의 본체를 구현해낸다는 건, 말도, 말도 안돼! 그것은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시더의 허탈한 외침에 가인은 사념이 떨리 는 것을 참아내며 애써 메두사를 향해 소리쳤다. ―약속대로 거인을 이끌고 찾아왔다! 이제는 네가 약속을 지킬 때야! [후후. 떨리는 목소리로 잘도 말하는군요. 그리고 약속이라니? 전 그저 당신 들이 제 시간에 오지 않으면 인질들을 죽이겠다고 했을 뿐인데?] 메두사로 추정되는 짐승의 머리가 가볍게 코웃음쳤다. 나머지 일곱개의 머 리들은 두눈을 감고서 그저 침묵하기만 했는데, 아무래도 티아마트를 비롯한 나머지 인격들이 부재 중이기 때문인듯 했다. [그러니까 제 시간에 온다 한들 인질들을 살려주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자식! 가인과 대원들은 이를 갈며 메두사를 노려보았다. 그때 지상을 살펴보던 유 리의 사념이 무언가를 발견해내고 소리쳤다. ―오빠! 저 사람들! ―……? 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밑을 내려다보다가 곧 두눈을 크게 떴다. 유리의 사 념이 가리킨 곳에는 낯이 익은 두 인영이 보였던 것이다. 어째서 저들이 여기 에 있는 거지! ―재영아! 시내야! ―뭣! 가인의 외침에 마리도 그들을 확인하고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메두사가 붙잡 은 인질들 중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질의 비중이 달라졌 던 것이다. 반드시 인질을 구해내야한다는 절박함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뭐, 이번만큼은 특별히 장단을 맞춰주도록 할까요?] 순간, 메두사의 석화가 풀리며 지상의 인질들이 자유를 되찾았다. 갑작스레 몸을 움직일 수 있게된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곧 머신 아더와 메두사의 존재를 발견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 저, 저게 대체 뭐야? " " 괴물? 어째서? " " 으아아아아― " " 괴물이다! 괴물! " 눈 깜짝할 새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리는 공원. 메두사가 가린 어둠 속에서 사 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밀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것은 재영과 시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 하여간 인간들이란.]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비웃음을 흘리던 메두사는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자아―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죽이는건 상관 없겠지!] ―뭐? 메두사의 외침에 가인은 불길함을 느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메두사의 벌려 진 입으로부터 강한 중력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대기의 기압이 낮아지며 상공의 먹구름들이 소리 없이 바스러진다. 이것은 분명! ―그, 그만두지 못해! 가인은 절규하며 머신 아더에 오라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휘날리던 오라 클 록에서 반중력의 원이 폭발하듯 불을 내뿜으며 머신 아더를 메두사에게로 날 려보낸다. 가인은 전력으로 질풍의 벽을 전개하며 메두사의 머리를 향해 달 려들었다. 늦지 않았어! 차원 진동 쉴드라면 충분히 녀석의 공격 따윈! ―막아낼 수 있다! 드카아아아앙 가인의 외침은 뒤이어 들려온 폭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메두사의 입으 로 모인 중력장들이 연쇄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며 하나의 중력파를 만들어낸다. 바로 아포칼립스!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궁극의 카오스! ―크아아아아앗! 머신 아더는 백열하는 질풍의 벽을 앞세워 메두사의 중력파를 정면으로부터 받아냈다. 가인 일행은 사념 상태에서도 전신의 피부가 찢어지는듯한 공간 마 찰을 체감할 수 있었다. 트트트트트트 차원 진동 쉴드로 보호받는 머신 아더의 주변이 급속도로 일그러지며 압축되 어간다. 아무리 아포칼립스 마저 막아낼 수 있는 차원 진동 쉴드라지만 머신 아더와 메두사는 서로가 가진 카르마 에너지의 차이가 극명했다. 동일한 아포 칼립스라면 승부수는 갈래질의 차이. 대지를 둘러싼 뱀에 비해 머신 아더는 너무나 초라했던 것이다. ' 질 수 없어! 절대로! 절대로! ' 가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포칼립스를 막아내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지상의 공원에서는 머신 아더와 메두사의 공방을 멍하니 지켜보는 수 많은 사 람들이 있었다. 가인은 머신 아더의 눈으로 재영과 시내를 발견하고 이를 악 물었다. ' 여기서 내가 물러난다면! 내가 쓰러진다면! ' 모두가 죽는다! 그런 걸, 그런 걸 내가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앗―! ―으아아아아아아앗! 가인의 사념이 기합을 내지르자 머신 아더를 감싸던 질풍의 벽이 한층 더 강 맹하게 회전하며 중력파를 밀어냈다. 그것은 갈래질의 차이마저 극복해내는 의지의 힘이었다. 오라는 의지의 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힘에는 한계 가 없어지는 것이다! 위이이이잉 그때 믿을 수 없는 굉음이 가인의 귓가로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던 코마히코의 사념이 경악하며 일행에게 소리쳤다. " ―! " 드카아아아아앙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공간을 가르는 폭음이 울려퍼진다. 메두사의 머리 옆에 있던 또 하나의 머리가 두눈을 뜨고 아포칼립스를 지상에 방출했던 것이 다. 그것은 바로 브리트라의 머리. 메두사가 소유한 또 하나의 인격이었다! 콰콰콰콰콰콰 중력파에 직격당한 지상은 거대한 다운 버스터 현상을 일으키며 짓뭉개진다. 중력파의 범위에 포함된 모든 것들이 일그러지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수 많은 사람들.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재영과 시내 또한 어김 없이, ―아, 아아, 아아아아아! 가인은 그 참혹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절망했다. 그러자 질풍의 벽을 강화 시키던 그의 의지가 약해지며 대번에 메두사의 중력파가 머신 아더의 전신을 육박한다. 코마히코는 지옥도로 변한 지상의 모습에 애써 고개를 돌리며 가인에게 소리 쳤다. ―정신 차리십시오, 가인 씨! 이대로는 우리마저 당하고 맙니다! 위이이이이잉 그러나 이미 제 3의 중력파는 그들을 향해 겨냥되고 있었다. 메두사가 소유한 마지막 인격, 티아마트의 머리가 좌측에서부터 그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 던 것이다. ―가인 씨! 시민의 사념이 가인을 부르짖었다. 가인은 반사적으로 오라 클록을 조종하여 거인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최대의 공간 압축을 전 개했다. 드카아아아아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력파는 용서 없이 머신 아더를 휩쓸고 지나갔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59 - Ｂy Ｎext Ｎeo =-=-=-=-=-=-=-=-=-=-=-=-=-=-=-=-=-=-=-=-=-=-=-=-=-=-=-=-=-=-=-=-=-=-=-= 비잉비잉비잉비잉 작전 본부실의 불이 꺼지며 불길한 비상경보음이 울려퍼진다. 메인 스크린 에서는 머신 아더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져 아포칼립스에 휘말리고 있었다. 《D타입으로부터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 발생! 동체에 직격당했습니다!》 《제2관절 부위와 제3관절 부위가 사라졌습니다. 버스터와 스매셔 대파. 머 신 아더, 지상으로 추락합니다!》 채영과 오퍼레이터 팀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머신 아더의 상태를 보고했다. 간신히 오라 클록의 공간 압축이 아포칼립스를 중화시켰기에 기체가 카오스화 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머신 아더의 양팔이 무로 돌아가야 했다. " 이런건……이런건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시더는 머신 아더의 대파에 실성한 사람처럼 그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그녀 의 꿈이자 희망이었던 거인은 사지가 사라진채 거대한 크레이터 속으로 곤두 박질치고 있었다. 쿠우우우우웅 피스 대원들과 연결된 사념으로 머신 아더의 추락음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시 더는 그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채영에게 소리쳤다. " 피스 대원들의 상태는! 모두들 무사해? " 《패턴 블루의 공간 압축이 충격을 차단, 콕피트를 보호해냈습니다. 대원들 은 모두 무사합니다!》 채영의 보고에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파일럿이 무사하다고 해서 사태에 진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강시민공원에 있던 인질들은 모두 사망. 머신 아더는 전투력 상실. D타입으로 현현된 메두사는 건재 그 자체. 그야말로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13년간 계속된 몬스터와 의 싸움 중 최고의 위기! " 제길! 어떻게 저런 괴물이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유가인! 시민 씨! 마리 양! 모두들 무사합니까? 유리 양! 코마히코 씨! " 진우는 채영의 곁에서 무전을 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스크린에 잡힌 D타 입은 저번 쿠사나기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몬스터였다. 아니, 그야말로 세계를 집어삼키는 악마다! ' 적어도……적어도 내가 머신 아더에 탑승했더라면! ' 진우는 위기에 빠진 동료들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린 폼이 없는 머신 아더는 레벨2 G버스터 펀치와 레벨3 체인 스매셔 펀치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들만 제대로 사용해냈더라도 머신 아더가 저렇게 맥 없이 당하지는 않았을텐데! 삐삐삐삐삐 그때 진우의 무전기가 신호음을 울렸다. 이 긴급 상황에 무전이라니……. 대체 누구지? 인상을 찡그리며 무전의 내용을 확인하던 그는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전기에는 하나의 메세지가 들어와 있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주파수. 당연히 발신자도 찍혀 있지 않았다. 다만 메세 지에는 시간과 장소만이 적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우는 메세지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당 연하다. 이런 내용을 지금 자신에게 보낼 사람은 그 녀석 밖에 없는 것이다! ' 하지만! ' 진우는 스크린을 돌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무력화된 머신 아더를 향해 거대 한 팔두룡이 내려서고 있었다. 저런 동료들을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만 가족들을 구하겠다니! 진우는 자신의 이기심에 진저리가 났다. 길게는 5년, 짧게는 2년동안 함께 싸워온 동료들이다. 서로의 등을 맡기며 피를 흘려온 전우들이다. 한시민! 성마리! 이유리! 유가인! 카구라 코마히코! 어떻게 저들을 자신이 모르는척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저들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 미연아……. 하나야……. ' 난, 난 어떻게 해야하지? 난 어떻게 하면 좋지? 가족들을 구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그래도 난 동료들을 저버릴 순 없어! 이대 로 저들을 떠나보낼 수는 없어! 그건 불가능해!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 바보 제자,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지? ' 사부님! 사부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런 선택을 강요 받아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십니까?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그 강함이란 대체 뭡니까! 전 얼마만큼 강해져야 사부님처럼 될 수 있는 거죠? 얼마만큼 강해져야, 어느 정도의 힘을 손에 넣어야, ' ……모두를 지켜낼 수 있죠? ' 진우는 부재 중인 브루스를 향해 수 많은 질문을 던지며 고뇌했다. 제발 그 가 예전처럼 자신의 앞길을 제시해주길 바랐다. 물론 그것이 도피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진우가 유일 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브루스 류, 그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진우의 우상이자 영웅이었다. 그의 목표이자 희망이다! 그렇기에 브루스의 부재는 진우에게 더 없는 절망으로 다가왔다. " 자네의 동료들을 믿어라. " 그때 진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충고하는 사람이 있었다. 진 사령관이었다. 그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 가족들을 구하겠다고 동료들과 약속하지 않았나? 자네가 저들을 걱정하듯 저들도 자네를 걱정하고 있다. 서있는 장소가 다르다고 해서 자네들의 관 계가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야. " " 그러나 사령관 님, " " 저들은 자네를 믿고 있기에 목숨을 걸고 전장으로 향한 거다. 그러니 자네 도 저들을 믿어라. 동료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반드시 가족들을 구 해내는 거다. " " ……. " " 그리고 나도 약속하지. 저들 중 한사람도 빠짐 없이 무사 귀환시키겠노라고. " 그 말을 끝으로 진 사령관은 진우에게서 몸을 돌려 시더와 채영에게로 걸어 갔다. 그런 상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 시 스크린을 바라본다. 동료들을 믿으라고? ' 반드시 구해내세요. ' 떠나기 전 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 가족들과 함께 돌아오세요. 그러지 않으면……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 까……. ' ……그래. 그런 약속이었다. 그런 약속이었어. 진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약하게 사부님에게 의지하려고 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앞길을 제시해달라고 소원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 이렇게나, ' 이렇게나 그의 앞길을 제시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건만. 이렇게나 그를 믿어주 는 동료들이 있었건만. 어째서 자신은 고민하고 있었던 거지? 왜 주저하고 있 었던 걸까? ' 맡기겠어요, 모두들. ' 나는……녀석과 결판을 내고 오겠습니다. 진우는 각오를 다지며 작전본부실의 출구로 향했다. 출구 쪽에서는 어느 새 인가 수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정은 자신의 곁을 지나치려는 진우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 정말 혼자서 가실 건가요? 아무런 지원도 없이? " " 가족의 목숨이 걸린 만큼 녀석이 원하는대로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 장소를 말해달라고 해도……말해주시지 않을테죠. " " 아쉽게도. " 진우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수정은 작게 한숨을 쉬며 진우 에게 포권지례(抱券之禮)했다. " 그럼 다녀오세요, 사형.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 " 고마워, 사매(師妹). " 그렇게 칠성권으로 맺어진 두 남녀는 조용히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다. 머신 아더의 위기에 혈안이 된 시더 일행이 진우의 부재를 눈치채는 것은 그 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 안돼, 가인! 정신 차려! 머신 아더가 셀프 라이팅으로 몸을 수복하는 동안 시간을 벌어야해! 빨리 오라 클록을 가동시켜! 어서! " 시더는 D타입의 메두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기는 머신 아더의 모습에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사념이 들리지 않는건지, 머신 아 더는 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면 가인 일행의 사념에도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머신 아더가 파괴되었던가……. " 당황하지마라. "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시더와 채영에게로 진 사령관이 명령했다. " 와프 입자의 수치와 전투 지역의 열원반응을 다시 체크하라. 지금 즉시. " 《예?》 채영은 왜 그가 그런 명령을 내리는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신속하게 정보 수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도출된 자료를 살펴보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 식하고 말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와프 입자의 수치, 변동 없습니다. 열원 반응 역시…….》 " 뭐? " 시더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반문하고 말았다. 진 사령관은 무표정하게 스크 린의 다두룡을 노려보았다. " 닥터 웰리스. 메두사가 인질로 잡은 수단이 바실리스크 타입과 흡사하다 고 했던가. 사념파를 이용한. " " 아……! " " 작년 10월 달의 일이 생각나는군. 그렇지 않나. " " That's right! 바로 그거야! " 시더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는듯 탄성했다. 차원 왜곡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 와프 입자 수치! 인질들이 소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지되는 열원 반응! 눈 앞의 현상에 현혹되지마라! 객곽전인 수치로 상황을 분석하는 거야! 그 거야말로 우리 서포터 팀이 현장의 동료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 " 가인, 천공뇌정권이야! " 갑작스런 시더의 지시에 만신창이가 된 가인의 사념이 의아함을 표시했다. 하지만 시더는 개의치않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 아무 생각하지 말고 천공뇌정권! " ―처, 천공뇌정권이라니……. 가인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메두사를 노려보았다. 메두사는 눈을 감은 다섯 개의 머리를 마치 팔 처럼 사용하여 머신 아더의 동체를 짓누르고 인격을 가진 세 개의 머리로 머신 아더의 콕피트를 내려다 보았다. 마치 그대로 밤하늘에 먹혀버릴 것만 같은 위압감이다. 가인은 필사적으로 메두사의 위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두사의 아포칼립스에 황무지가 되어버린 공원에서는 어떠한 사람의 흔적 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훵하니 패인 크레이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가인은 카오스 속으로 사라져간 재영과 시내를 떠올리며 슬픔을 참지 못했 다. 그 슬픔은 곧 메두사를 향한 분노로 변해갔다. '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 노아도 테라도. 아무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호문클루스일지라도 같은 생명 을 가진 인격체라고 생각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고, 나름대로 소 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운이 나쁜 것이라고. 서로를 싸우게 만든 운명이 나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그들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 '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대가가 이것인가! 자기의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주제 에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방심한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건가! '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 브루스의 말. 그것만이 오직 진실이란 말인가! ―좋아. 그렇다면 버려주지! 네놈들이 몬스터 임을 자처한다면, 나도! ' 네 놈들을 몬스터로 여겨주마! ' 우우우우우 가인이 세계의 의지에서 오라를 불러들이자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이 찢어지 듯 펄럭이며 중력을 조정했다. 그러자 사지가 떨어져 나간 머신 아더는 반중 력의 힘을 등에 엎고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 놈이 어딜!] 메두사는 머신 아더가 재기할 기미를 보이자 노호성을 내지르며 다섯 개의 머리로 거인을 압박했다. 머신 아더가 발생시키는 중력장과 메두사가 발생시 키는 중력장이 맞부딪히자 고막을 찢는 마찰음이 울려퍼지며 공간을 일그러 뜨린다. 가인과 피스 대원들은 이를 악물며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콰지지지직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장갑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아무리 가인 일행이 안간 힘을 쓴다해도 메두사와는 5대 1의 상황이었다. 다섯 개의 머리에서 발 생하는 중력장을 견뎌낼 재간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저 중력장들이 연쇄 충돌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다섯 개의 아포칼 립스가 머신 아더를 카오스로 되돌릴 터였다.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임에는 변화가 없다. ―가인! 그때 시더의 사념이 외치는 소리가 가인의 영체를 꿰뚫었다. 그리고 그녀가 품고 있던 생각들이 하나도 빠짐 없이 가인에게로 전달된다. 급박한 상황 속 에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시더가 그대로 자신의 사념을 가 인에게 투영한 것이다. 그제야 가인은 왜 시더가 자신에게 천공뇌정권을 사용하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 과연! ' 그런 것이었단 말이지! 가인은 순간 무슨 생각에선지 머신 아더에서 자신의 오라 능력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아앗! 우드드드득 머신 아더의 동력원에서 가인의 오라만큼 공백이 생겨나자 대번에 거인을 짓 누르던 중력파가 오리하르콘 장갑을 깨부순다. 그 바람에 혼미백산한 마리가 가인에게 소리쳤다. ―무슨 생각이냐, 가인! 갑자기 왜 오라를 전개하지 않는 거야! ―가인 씨! 시민과 코마히코의 당황하는 목소리에 가인은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외쳤다. ―제가 오라를 모으는 동안 잠시만 버텨주세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냈 어요! ―버, 버텨달라니! 코마히코는 당장에라도 자신들을 압사사킬 것 같은 중력파의 흉흉함에 신음 했다. 그런 일행에게로 가인의 간곡한 사념이 퍼져나갔다. ―제발 절 믿어주세요! 마리 선배! 시민 씨! 코마히코 씨! 유리야! 반드시 모두를 구해 보이겠어! 반드시! '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제 한 목숨 보존하는 것조 차 힘든데, 하물며 남까지 생각해줄 여유는 없는 노릇이지. ' 분명 브루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뒤에, ' 하지만 너는 모두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다. 너에게는 무한한 오라의 가 능성이 있으니까. 오라를 믿어라. 그리고……. ' 브루스! 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 소중한 이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라. ' 넌……, ―나는……오라의 주인이니까! 오오오오오오 머신 아더의 두눈에서 푸른빛이 폭사되며 전신을 짓누르던 메두사의 중력장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다섯 개의 중력장들을 향해 오색의 빛이 휘몰아치는 오라 쉴드가 대항하고 있었다. 바로 시민과 마리, 유리와 코마히코가 전력을 다해 전개한 오라 쉴드였다. ―버텨주마, 가인! 마리 선배!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코마히코 씨! ―난 오빠를 믿어! 유리야! ―힘내세요, 가인 씨……! 시민 씨! ―하아아아아아앗! 가인은 기합을 내지르며 부서져나간 머신 아더의 오른팔을 움직여 메두사를 향해 내찔렀다. 상대의 주심을 느끼고 그 주심을 향해 모든 것을 쏟아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천공권! 天천 空공 雷뇌 霆정 拳권 투카카카칵 팔두룡의 내부에서부터 발생한 차원진동의 줄기들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밖으 로 터져나왔다. 세인트 엘모의 불을 방불케하는 방전 폭발은 암흑으로 뒤덮인 공간을 거침없이 파괴해간다. [크아아아앗!] 그 세상을 감싼 어둠 속에서 가녀린 메두사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 고 거짓 속에 가려진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촤자자자자작 공간이 부서지고 어둠이 물러간다. 천공을 밝히는 힘에 의해 격퇴당한 괴물 은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사슬로 만들어진 거대한 높이의 탑이었다. 탑의 정체는 63빌딩이었는데, 그림자에서부터 수백개의 사슬들이 튀어나와 건물을 촘촘히 휘감고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가인은 곧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변을 발견했다. ―다들……무사했어! 지상에는 분명 아포칼립스의 여파로 생성되었을 크레이터가 흔적도 없이 사 라져 있었다. 공원은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 없이 멀쩡했고 응당 소멸되었어야 할 수천명의 사람들도 제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죽은 사람은 없다. 아무도 죽지 않았어! 가인은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재영과 시내가 무사한 것을 발견하고서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리의 질문에 답한 것은 시더의 사념이었다. ―일루젼이야! 와프 입자의 수치도 변하지 않았고, 열원 분포도도 그대로인 데 갑자기 그런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 메두사는 그저 사람의 대뇌반구에 강한 암시를 걸어 최면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졌을 뿐이야. C+급 몬스터 스펙터처럼 사람의 공포를 이용한 환상을 보여준 거 지! 그제야 대원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방 금 전까지의 절체절명은 모두 피스 대원들이 품고 있던 공포가 현실로 투영되 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대파되었음이 분명한 머신 아더는 아무런 상처도 없이 그저 검은 사슬에 묶여 있었다.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도 원상태로 돌아가 짙은 노을빛을 흩뿌리고 있다. [잘도 눈치챘구나…….] 끼기기기기긱 그때 원통해하는 메두사의 목소리와 함께 머신 아더에 감긴 사슬들이 무시무 시한 힘으로 전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설마 외부와의 교신이 가능한 몸이었다니. 미처 고려하지 못했어. 이렇게 쉽게 내 환상을 깨뜨릴 줄이야.] 우드드드드득 ―크윽!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장갑이 구겨지자 가인은 신음을 흘렸다. 제길! 이번 에는 환상이 아닌 건가! ' 분명 천공뇌정권에 적중당했는데! ' 기가스 티폰마저 쓰러뜨린 기술이건만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거지? 주심 에서 빗나간 건가! 가인은 곧 사슬로 감긴 63빌딩의 옥상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한 검은 인 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브리트라의 몸을 빌린 메두사였다. 그녀는 D타 입으로 구현하지 않고 여지껏 용마인의 모습으로 자신들을 상대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늦었어. 이제와서 환상을 깨뜨린다 한들 네놈들이 할 수 있 는 일이란 없다! 잠자코 쓰러지도록 해!] 퍽 퍽 퍽 순간, 연달아 세번의 파쇄음이 울리며 머신 아더의 왼팔과 두 다리가 반대 방향으로 꺽여나갔다. 거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사슬들이 살아있는 뱀처럼 각 사지의 관절들을 부러뜨린 것이다. 가인은 그제야 예전 옴팔로스에서 머신 아더가 그녀에게 무력하게 당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때와는 틀려! 가인의 외침과 동시에 무사하던 머신 아더의 오른손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오른손의 카우터(Cowter)가 개방되며 그 안에서 다섯 발의 미사일들이 모습 을 드러낸 것이다. 바로 가인의 사념을 읽어들인 시더가 오퍼레이터 팀을 향 해 지시한 AFS(Aura Filed Shrapnel)였다. ―발사! 투투투투투학 시더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신 아더의 개방된 해치로부터 다섯 발 의 AFS가 유산탄처럼 발사되었다. 피스 대원들이 휴대해오던 오라 필드를 순 항미사일 식으로 개조시킨 이 무장들은 원래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와 양 어깨의 폴드런(Pauldron), 양 손의 카우터까지 해서 총 30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사슬에 의해 오른손을 제한 사지가 결박당한 머신 아더는 다섯 발의 유도탄 밖에 날릴 수 없었다. [어디서 잔재주를!] 메두사는 기합을 내지르며 63빌딩을 감싼 사슬들을 풀어내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AFS들을 후려쳤다. 그러자 미사일들은 채 메두사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AFS를 사용한 대가는 충분했다. 메두사가 자신을 방 어하는데 사슬을 사용하자 머신 아더를 결박하던 사슬 쪽이 허술해진 것이 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인은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을 전개했다. ―차아아아앗! 투화아아아악 AC의 반중력들이 연쇄 충돌을 일으키며 점화했다. 그 반동으로 메두사를 향 해 달려든 머신 아더는 그대로 옥상의 메두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휙 그러나 메두사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오히려 머신 아더의 손에 올라탔다. 그 리고 그림자에서 사슬들을 뽑아내어 다시 머신 아더의 전신을 옭아맨다. 그러 자 63빌딩을 감싸던 사슬들이 마치 메두사를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머신 아더 를 향해 옮겨붙었다. 수십 수백개의 사슬에 휘감긴 머신 아더는 거대한 털뭉치처럼 변하여 허공으 로 치솟았다. [놓치지 않는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어! 도망가게 내버려둘성 싶으냐!] ―누가 도망을 간다는 거냐! 오히려 이거야말로 우리가 바라던 바다! 가인은 그대로 머신 아더를 결박한 메두사를 이끌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 상에서 자신들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들은 자신 들이 한번 죽다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걸까? ' 절대로 반복할 수 없어! ' 아포칼립스에 휘말려 소멸했던 사람들의 환상. 그것이야말로 가인이 가장 끔 찍하게 여겨왔던 공포였다. 재영과 시내의 사라지는 모습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환상은 환상으로만 끝내야 해! 여기서 전투를 계속하다간 또 다시 모두를 말려들게 한다! ―시더! ―12구역의 민간인들을 대피시켜 놓았어! 채영의 사념을 따라가도록 해! 가인의 생각을 읽은 시더는 미리 손을 써서 머신 아더가 마음껏 싸울 수 있 는 격전지를 만들어주었다. 바로 예전 D타입 쿠사나기와 머신 아더가 사투를 벌였던 12구역. 그곳이라면 아직 보수 작업이 한창이었기에 거주하는 주민들 도 적었고 대피 작업도 용이했다. 가인은 채영의 사념이 보내오는 12구역까지의 루트를 되새기며 그대로 대류 권계면까지 날아올랐다. 쿠구구구구 공기의 저항을 뚫고 올라가자 기체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고기압과 저기압의 왕래로 권계면이 수면의 파도처럼 물결치자 그 흔들림은 한층 더 심해진다. 머신 아더에게 매달려 덩달아 대류권과 성층권의 경계면까지 오게된 메두사 는 이를 갈며 사슬들을 움직였다. [크으으―! 네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메두사는 사전에 쿠사나기가 브리트라와 함께 보내온 정보를 통해 머신 아더 의 약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콕피트 안의 피스 대원들을 제거하 면 거인은 빈껍데기나 마찬가지! 그리고 콕피트는 왼쪽 가슴 부근이렷다! [심장을 도려내주지!] 메두사의 처절한 고함소리와 함께 그녀의 사슬들이 드릴 모양으로 뭉쳐 회전 했다. 강렬한 스핀을 먹은 사슬들은 그대로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를 찢어 발기며 오리하르콘 인공 근육을 파고든다. 가인은 귓청을 때리는 시끄러운 드릴 소리에 사념 상태에서도 메스꺼움을 느 꼈다. 하지만 애써 그것을 억누르며 시민에게 소리친다. ―시민 씨! 철컹 순간, 머신 아더의 투구 부위에 있던 어퍼 비버가 내려가며 사람의 안면 형 상을 한 미디엄 제너레이터 나르키소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푸른 색을 띄고 있던 오리하르콘 장갑들이 노란색으로 변색한다. ―옐로우 폼 체인지! 공명음 발파! 라아아아아 시더의 지시에 따라 나르키소스의 입에서 패턴 옐로우 특유의 공명음이 전개 되었다. 그러자 머신 아더를 뒤덮고 있던 사슬들이 부르르 몸을 떨며 미세하 게 들썩인다. 시민의 음파가 사슬들과 공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사슬들은 점점 거칠게 진동한다 싶더니 이윽고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머신 아더에게서 튕겨나갔다. [피스메이커어어어어엇!] 사슬들과 함께 튕겨나간 메두사는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머신 아더의 다음 모습을 본 순간, 그녀는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녀의 앞에서는 거인이 푸른 망토로 몸을 감싸다가 세차게 거둬내며 다시 예 의 블루 폼으로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 쿠사나기 전(戰) 이후 줄곧 널 위해 머신 아더의 오른쪽 다리를 개 량해왔어! 더 이상 극점이 분산되어 피해를 확산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 마음껏 녀석을 날려버리도록 해! ―좋아! 간닷! 가인은 오라 클록으로 반중력의 원을 생성시키며 머신 아더의 오른쪽 다리에 차원 진동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차원 진동의 소용돌이가 백열하며 물질계로 혼돈의 문을 개방해낸다! 질풍(疾風)! ―라이징----------킥! 투화아아아악 반중력의 폭발을 등에 엎은 머신 아더는 그대로 메두사를 후려치며 17킬로미 터의 상공에서 섬광처럼 12구역으로 내리꽂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로는 아포 칼립스가 일으킨 공간 마찰이 눈으로도 쫓을 수 없는 긴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한편 지상에서 하늘의 궤적을 바라보던 시영은 쓰고 있던 선글래스를 벗으며 미소했다. " 화려한 스타시몬(stasimon)이군. 그렇다면 슬슬 블랙 아더의 엑소도스(exo dos)도 들려줘볼까. "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0 - Ｂy Ｎext Ｎeo =-=-=-=-=-=-=-=-=-=-=-=-=-=-=-=-=-=-=-=-=-=-=-=-=-=-=-=-=-=-=-=-=-=-=-= [카하, 하― 으아―] 메두사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폐허가 된 12구역의 잔해에서 기어나왔다. 대 류권 계면에서부터 머신 아더의 라이징 킥에 적중당한 그녀는 하마터면 존재 의 의미를 잃고 혼돈으로 돌아갈 뻔 했다. 하지만 라이징 킥의 극점이 생각보다 작았던 것이 행운이었다. 극점을 줄임 으로서 라이징 킥은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가 될 수 있었지만 대신 메두사의 육체를 완전히 날려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메두사는 간신히 브리트라의 능력인 정보 복제를 통해 5퍼센트 미만 의 육체를 복구해낼 수 있었다. [하― 하― 아아―] 메두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복원된 몸을 힘겹게 일으켜세웠다. 육체의 타격 은 경미했지만 문제는 정신적인 타격이었다. 유가인이 발휘한 질풍의 힘은 차 원 진동을 촉매로 끌어내는 혼돈의 힘이었기에 중력파나 전자 가속을 이용한 아포칼립스와 달리 영체에도 충격을 주고 있었다. 만약 요르문간드의 방대한 정신 용량이 없었더라면 대번에 절명했을 것이다. ' 역시 본체를 현현시켰어야 했나? 환술로 녀석들을 제압하려고 했던 것은 내 욕심이었나? ' 메두사는 자신의 행동에 회의를 느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 아니야. 어쩔 수 없어. 본체를 현현시켰다간 테라 인코그니트에 있는 요르 문간드의 몸이 버티지를 못할 거야. ' 그녀는 사전에 티아마트에게서 요르문간드의 모든 힘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힘과 본체의 현현은 별개의 것이다. 화신의 힘은 용염, 즉 인격이 분 열되면서 파생된 이드(id)의 힘이기에 통합될수록 개체의 독립성과 영향력은 강해지지만 존재의 법칙, 즉 엔트로피의 흐름을 역행시키지는 못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현현성을 발휘하려면 요르문간드의 정신 용량을 직접 물질계 에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화신으로서 발휘하는 힘은 정신의 힘이기에 인격의 독립을 이 룬 메두사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지만, 본체의 현현은 요르문간드의 육체 에 구애된다는 것이었다. ' 안돼. 그것만은 절대로 안돼! ' 가뜩이나 실험대에 올라 해부당하고 있을지 모를 육체다. 그런 상태의 요르 문간드에게 본체의 현현을 강요했다간 그 몸에 잔류하고 있을 티아마트의 인 격이 위험해질 터였다. 티아마트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인데, 그 싸움에서 티아마트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래서야 아무리 요르문간드의 힘을 모두 물려받았다고 한들 빛 좋은 개살 구에 불과했다. ' 웃기지마. 나는 절대로 지지 않아. 절대로 질 수 없어! ' 메두사는 이를 악물며 수천개의 사슬을 펼쳐냈다. 본체의 부재로 아포칼립 스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크게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의 목표는 머신 아더의 탈취, 머신 아더의 소멸이 아니었기 때 문이다. ' 몇번이고 소멸시킬 수 있으면 소멸시켜봐라. 몇번이고 살아나서 네 놈들 을 쓰러뜨려주마. ' 모든 건 티아마트……당신을 위해서! 촤촤촤촤촤 흙먼지로 뒤덮인 12구역의 폐허 속으로 메두사의 사슬들이 퍼져나간다. 라이 징 킥의 후폭풍으로 시야가 가려져 있었기에 시각에 의지해서는 머신 아더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 드레이카닉 아이. ' 요르문간드의 공간지각 능력! 차원의 힘에 근접한 그녀는 자신의 지각 범위 내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에 의지한다면 40미 터의 거인 쯤 발견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내 쪽에서 선방을 날려주지! 촤라라라라락 순간 흙먼지 속에서 치열한 쇳소리가 울려퍼진다. 먹이를 발견한 뱀처럼 사 슬들이 일제히 머신 아더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천공뇌정권이라고 했던가? 그런 위험한 것을 사용할 여유도 없이 몰아붙여주 마! 챙― 챙― 챙― 챙―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네 번의 파쇄음이 그녀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머신 아더에게 다다르기도 전에 무언가가 브리트라의 사슬들을 튕겨내고 있었다. 뭐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우우우우우웅 거센 오라의 흐름이 흙먼지 너머에서 느껴졌다. 얼마나 강한 영적 인력인지 주위의 대기가 다 들끓고 있었다. 와프 입자가 머신 아더의 오라에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후오오오오오 흙먼지가 대기의 움직임을 따라 한 방향으로 걷혀나간다. 그렇게 먼지가 사 라진 자리로 드러난 것은 거대한 붉은색의 검을 들어올리는 붉은 거인의 모 습이었다. 바로 레드 폼으로 변한 머신 아더! ―엑스칼리버 일식(一式) 스톤 커터 가동. EX에 출력을 집중하기 위해 AC를 해제합니다. 피스 레드 성마리가 주도하는 궁극의 레벨 4. 머신 아더는 25미터 가까이 늘어난 대형 오라 소드로 무영신풍류의 지검대적 세를 취했다. 아마 방금 전의 사슬 공격을 쳐낸 것은 저 반물질 절삭성 커터 였을 것이다. 메두사는 그런 거인의 박력에 생리적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 쿠사나기, 당신은 이런 괴물과 싸웠던 건가요? ' 그렇게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그녀는 새삼 쿠사나기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각오를 다졌다. [하―!] 촤촤촤촤촤 메두사의 기합에 발 맞춰 폐허의 그림자란 그림자에서 일제히 사슬들이 튀 어나왔다. 그 수는 족히 잡아 오천! 본체를 현현시키지 못하는 대신 그녀는 소유한 용염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촤아아아아악 그러나 혼신을 다한 그녀의 공격은 생각처럼 기세를 펼치지 못했다. 머신 아 더는 좌우로 풍차처럼 검을 돌려 사슬들을 빗겨내더니 그대로 크게 발을 내딛 으며 전방을 횡으로 베어낸다. 수식(守式) 파란(波蘭)에 이은 이식(二式) 파쇄(波殺)! 두가지 검세를 연달아 시전한 것 뿐이지만, 이 단순한 검진은 흉흉하게 달려 들던 사슬들을 효과적으로 차단해냈다. 자잘한 사슬들의 움직임에 현혹되지 않 고 공격의 큰 줄기, 검로를 꿰뚫어보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는 마리가 지난 번 유평과의 결투에서 깨달은 이화접목(梨花接木)의 묘수였 다. 메두사의 사슬에서 느껴지는 진기를 통해 공격의 허와 실을 꿰뚫어보고, 사슬 하나 하나의 엔트로피를 감소시켜 궁극에는 공세의 리던던시(redundancy) 를 높여 1차 근사를 이루어낸 것이다. 공격 또한 정보의 집합체. 마리는 이 정보를 자신의 감각으로 최대한 걸러내 어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고 필요적절하게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다. ' 크으으으으. ' 메두사는 머리가 타버릴 것만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용염의 힘을 한계 까지 끌어올린 그녀는 뇌의 운산작용에 과부하가 걸려 극심한 두통을 느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슬의 출수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 었다. 잠깐이라도 공격을 늦췄다간 대번에 거인의 검이 그녀를 내려칠 것이다. 촤촤촤촤촤 머신 아더는 수많은 사슬들의 세례를 정적으로 와해시키며 천천히 메두사를 향해 다가갔다. 어느 새인가 메두사의 공격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만큼 거인을 접근시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 질 수 없어. 질 수 없어! ' 메두사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머신 아더를 노려보았다. 거인과 그녀 의 거리는 이제 채 30미터도 남지 않았다. 거인이 한발만 더 내딪으면 메두사 는 영락 없이 오라 소드의 사정 거리에 들어갈 판이었다. ―크! 그러나 그 한발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서로의 거리가 줄어든 만큼 사슬들의 인터벌이 짧아져서 공격의 궤적을 파악 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사슬들은 그야말로 폭풍우처럼 쏟아지며 쉴새 없이 머신 아더를 후려쳤고, 그 바람에 드디어 거인의 동체에도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슬이 장갑에 스치 는 것만으로도 폭발이 일어나며 충격이 마리 일행의 영체를 뒤흔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다는 각오로 더더욱 메두사를 향해 다가간다. [오지마! 오지 말란 말이야!] 메두사는 마치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처절하게 절규했다. 너무나 괴로웠다. 능력을 전개하는 몸도 마음도, 그리고 이 숨 막히는 대치 상황도. 반드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데, 이겨서 티아마트를 구해내야 하는데, 바라 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인데. 그것을 이루기가 왜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왜 다들 우리를 방해하기만 하는가? 왜? 왜? [죽어! 제발 죽어버렷!] 메두사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고통의 눈물이기도 했고 슬픔의 눈물이기도 했고 분노의 눈물이기도 했다.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 대한 원망의 눈물이다. [쓰러져! 쓰러져! 쓰러져어어어어엇―!] 티아마트, ' 난 메두사를 좋아해. 메두사를 아껴주고 싶어. 위해주고 싶어. 사랑하고 있어. '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작은 연인. ' 그래서 난 메두사가 앞으로도 계속 살아줬으면 좋겠어. ' 쑥스럽게 웃으면서 건네던 그 한마디. 메두사는 오열하며 소리쳤다. 웃기지 말라고. 그런 건 날 아껴주는 것도 위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아니 라고! 그저 바보같은 자기 만족일 뿐이라고! '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그저― ' 치이이이이잉 그때 머신 아더의 등 뒤로 푸른색의 망토가 뻗어나와 동체를 보호해냈다. 이 대로는 싸움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가인이 AC를 자력으로 움직여 공간 압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공간 압축이 한순간 모든 사슬들을 빗겨내자, 마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사식(四式), 그리고 거침 없이 쏘아지는 엑스칼리버! ―단월(斷月)! 츠칵 날카로운 파육음과 함께 거대한 거인의 검이 메두사의 사슬과 몸을 통째로 관통했다. 메두사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몸에 파고든 엑스칼리버를 바라보다 가 천천히 눈 앞의 거인을 올려다본다. ' 내가 바라는 것은― ' 그녀의 힘없는 손짓에 바닥에 널려있던 사슬들이 머신 아더의 발을 타고 올 라갔다. 마리는 황급히 머신 아더의 발을 빼내려 했지만 갑자기 들려온 사념에 행동 을 멈췄다. ―티아……마트. 가인을 비롯한 다른 대원들도 깜짝 놀랐다. 이 목소리는……메두사? 메두사 의 사념이 사슬을 타고 전해져 오는 건가? 화악 순간 일행의 눈앞으로 새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메두사가 엑스칼리버에 당한 상처를 자기 복제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사념이 피스 대원들에게도 흘 러들어온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하얀 공간. 그 공간에 한 어린 소년과 메두사로 추정되는 여 인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웃고 떠들며, 때로는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그야말로 너무나 행복하게……그렇기에 깨뜨리는 것조차 용납되어지지 않는, 그런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이런 걸 보여주는 거야? 가인은 당혹스러워하며 그런 남녀의 모습을 외면했다. 애써 메두사의 사념을 떨쳐냈다. 그러자 엑스칼리버에 꿰뚫려 처참하게 피로 물든 메두사의 모습이 보여온다. 그녀는 피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가인 일행의 사념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끝나지 않았어. 이렇게 끝낼 수는…….] ―테라여, 진심으로 너희를 증오한다! 메두사의 목소리에 그녀의 사념이 겹쳐져 들려왔다. 가인 일행은 숨 죽여 그 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구할 거야……. 살려낼 거야. 반드시……. 반드시…….]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너희를 증오한다! 사슬을 타고 메두사의 의지와 기억들이 일행에게로 전해졌다. 그러자 엑스칼 리버를 잡고 있던 머신 아더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코마히코는 거인의 주도권을 잡은 마리에게 이변이 생겼음을 느끼고 소리쳤 다. ―아가씨? 그런 일행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볼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티아마트를 향한 메두사의 헌신을. 또 그녀를 위해 희생한 티아마트의 사랑 을. 그것은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한……, 그렇기에 그토록 간절할 수 밖에 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기다려요……티아마트……. 내가, 내가 지금 곧 당신을……!] ―이번에는 내게서 티아마트 마저 빼앗아갈 셈이냐―! ' 으으, 으으으으! ' 마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엑스칼리버를 잡은 머신 아더의 양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나는―! ―으아아아아앗! 촤악 머신 아더는 그대로 뒤로 돌면서 메두사에게 박혀있던 엑스칼리버를 위로 쳐 올렸다.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삼식(三式) 격멸(擊滅)! 마리는 그대로 메두사를 일도양단한 것이다. 반면 그녀의 사념은 정신이 공유 된 다른 대원들에게도 영향을 줄 정도로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나는, 나는 대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뭐와 싸운 거지? 내가 싸 운 상대는 대체 뭐야? 난 뭘 베어버린 거냐고? ―나는……! ―진정해요, 마리 선배! 가인은 패닉 상태에 빠지려는 마리의 사념을 진정시키며 다시 머신 아더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그러자 거인의 오리하르콘 장갑이 붉은색에서 예의 푸 른색으로 돌아간다. 가인은 언제나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던 마리가 이토록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무리도 아니지. 선배는 노아와 테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 비단 마리 뿐만이 아니다. 시민과 코마히코가 받은 충격도 그녀 못지 않게 컸다. 그만큼 몬스터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는 것은 피스메이커에게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가인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메두사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그 모습 위로 리리스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 리리스―! ' 피투성이가 된 테레이아를 끌어안으며 울부짖던 자신. 결국, 결국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자신은 아무 것도……. ―뭐가…… 피스메이커고 뭐가 몬스터란 말이야? 가인은 흐느끼며 소리쳤다. ―우리는 그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을 뿐이잖아! 그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진우를 원망할 자격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음을. 자신이 여전히 피스메이커의 피스 대원으로 남아있는한, 그래서 노아와 싸우 는 이상, 리리스가 목숨을 걸고 얘기해준 진실들은 그 의미를 잃어버림을. '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어. ' 그것이 옳은 일이라 믿어왔다. ' 하지만……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면? ' 그래서 그 사람들의 소중한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면? ' 그래도 그것이 진정 올바른 일인 걸까? ' 지킨다라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평화라는 것은, '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었단 말인가? ' [크―아, 아…….] 그때 한 신음소리가 회의에 빠진 일행의 사념을 일깨웠다. 모두가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거기에는 메두사가 자기 복제로 힘겹게 두동강이 난 몸을 복구해 내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피웅덩이에 잠긴 반신을 끌어안으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이, 일어나지마. 가인 일행 중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사념이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두사는 일어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미 그녀의 카 르마 에너지는 계속되는 전투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쿠사나기처럼 테라 인의 영체에서 정을 끌어 모았던 것도 아니고, D타입으로 구현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연달아 아포칼립스 급의 공격을 얻어맞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 티아마트, ' 메두사는 비척거리는 몸으로 머신 아더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 은 이 자리에 없는 자신의 연인을 찾고 있었다. ' 당신은 내가 당신의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죠? ' 바보같으니…….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에요? '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머무르는 건……당연한 거잖아요. ' 그런 당연한 것을 고맙다고 해버리면,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얼마나 고맙다고 해야하죠? '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해준 당신에게, ' 메두사는 이 순간, 테라도 노아도 잊어버리고 웃었다. 진정으로 행복하기에 웃었다. 아늑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이토록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행복함이란, ' 분명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 느낄 수 없었을 거야……. ' 메두사는 머신 아더의 발을 붙잡은 사슬에 힘을 주었다. 그래. 나는 돌아갈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티아마트의 곁에 머무를 것이다. 이 행복을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절대로! ' 계속 싸울 셈인가? 가인은 검날이 푸른빛으로 변한 엑스칼리버를 들어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메두사를 내려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금의 내가 나 자신과 일행을 지키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체크메이트. 그렇다면 제가 가르쳐 드리죠, 유가인 씨. 당신의 고민에 대한 해답. 당신이 바라는 방법이라는 것을! 콰지지지직 모두가 행복해질 순 없습니다. 모두를 지켜낼 순 없습니다. [카아아아아앗!] 그러니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지켜내십시오. 자신의 손에 닿는 이들만 확실하게 지켜내십시오. ―뭐, 뭐지? 그것이, 평화― 라는 것입니다. 우우우우우우 가인 일행은 갑자기 일어난 눈 앞의 광경에 넋을 빼앗겼다. 그들의 앞에는 어디에서 날아온 건지 모를 거대한 사이드가 메두사의 몸에 박혀 있었다. 사신의 낫에 꿰인 메두사는 피분수를 뿜어내며 처참한 비명을 내지른다. [으아, 아아아아아아!] ―그림 리퍼(Grim Reaper)! 사나운 격풍의 그라비티 블래스터다! 사이드의 정체를 알아본 시더의 사념이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그와 동시에 메두사에 박힌 사이드의 반물질 절삭성 커터가 진동하며 백열하기 시작한다. 가인은 그것이 아포칼립스를 유발하는 연쇄 중력파라는 것을 깨닫고 재빨 리 오라 클록으로 머신 아더를 보호해냈다. 투아아아아아앙 ―크핫! 단지 폭심지의 근처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 머신 아더를 뒤흔들 었다. 공간 압축의 반탄력에 떠밀려 뒤로 튕겨난 머신 아더는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망토를 걷어냈다. 그리고 일행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아…….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긴 지면의 모습이었다. 아포칼립스의 여파에 휩쓸린 모든 것은 완벽하게 혼돈으로 돌아가 있었다. 거기에는 메두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티아마트와 브리트라의 힘을 흡수하여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을 가지게 된 그녀라도 극점이 높은 아포칼립 스 앞에서는 카오스 화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말의 여지 없이 소멸된 메두사의 모습에 가인은 분노했다. ―대체, 대체 왜 이런 짓을……! 왜! 가인은 이를 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창 싸움 중이라 몰랐지만 어느새 인가 하늘에서는 해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선명한 핏 빛의 보름달. 우우우우우 그 보름달을 등에 지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서는 한 검은 거인이 있었다. 자신의 배 이상 되는 피막의 날개를 퍼덕이며 크레이터에 꽂힌 사이드를 회수 해내는 그것은, ―티폰! 현세에 부활한 기가스! 가이아가 만들어낸 최강의 자식! 그 거인을 수족처럼 부리는 남자는 분명, ―한시영, 너냐! 시민의 외침에 검은 거인은 시영의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후.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피스메이커 여러분. 이제부터는 그동 안 미뤄왔던 삼차전을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 음! " 막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며 자리에서 내리던 진우는 가슴을 엄습하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 격통은 분명 아포칼립스의 차원 파괴가 물질계에 행해졌 을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그는 서울시가 있을법할 방향을 돌아보며 낮게 중 얼거렸다. 다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진우는 심란해려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눈 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시 외곽에 위치한 한 폐성당이었다. ' 하필이면. 또 성당인가. ' 진우는 라트가 약속 장소로 성당을 고른 것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성당과 관련된 안 좋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타는 성당. 그 속에서 죽어간 수 많은 가족들. 언제나 꿈 속에서 되풀이되는 그 날의 기억. 진우는 주먹을 움켜쥐며 천천히 폐 성당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당은 인 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 며칠전만 해도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데. ' 진우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듯한 정원과 건물의 상태에 의혹을 가졌다. 하지 만 어찌 그가 알 수 있겠는가? 이곳의 소유주가 네이 안데르슨이라는 것과 어 제까지만 해도 시영 일행이 이곳을 아지트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진우는 조심스럽게 성당의 벽에 몸을 기대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그의 왼손에는 언제나 차고 다니던 피스메이커의 무전기 대신 결혼기념일로 미연에 게 받은 손목 시계가 차여져 있었다. ' 5시 50분. ' 라트가 그의 무전기로 보낸 약속 시간까지 앞으로 10분! 그 녀석, 정확하게 6시에 맞춰 나타날 셈인가? 진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라트의 행동에 조바심을 느꼈다. 제길. 설마 장 소를 잘못 찾았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 " 생각보다 일찍 왔군. 기다리는 수고를 덜었어, 피스 그린. " 그때 예배당의 문이 열리며 어둠 속에서 한 신부가 걸어나왔다. 긴 은발에 타오르는 것 같은 녹색의 눈동자. 검은 신부복! 변하지 않았다. 그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라트 발렌시아. 팰릭스 신부! 그는 2018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진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연태 까지 수인화된 라트만 보아오던 진우로서는 그의 신부 차림에 전율이 일어났 다. 새삼 17년 전의 비극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런 진우의 살기에 라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 크크크. 그 표정을 보아하니 특별히 신경을 써서 무대를 준비한 보람이 있 군. 어때?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지 않나, 도미니꼬? " 도미니꼬. 그 세례명이 라트에게서 언급되자 진우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 꼈다. 그는 이를 갈며 낮게 소리질렀다. "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말아라. 아니, 넌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어! " " 호오. 꽤나 섭섭한 소리로군. 이래뵈도 반가움의 표시였는데 말이야. 뭐, 좋아. 그렇다면 계속 피스 그린이라고 불러주지. " 라트의 태도 하나 하나가 진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예전 그가 수인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의 저 모습은, 아니 신부 복장을 한 것부터가 진우를 우롱하기 위해서라 고 밖에 볼 수 없었다. " 네 녀석의 요구대로 혼자서 찾아왔다! 내 가족들은 어디있지? " " 그렇게 서두를 것 없지 않나? 천천히 시작하자고. 오늘 밤은 꽤 길어질 것 같으니까. " 라트는 진우의 다급해하는 모습을 음미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 일단은…… 그래. 자네의 성의가 얼마나 되는지부터 확인해 보지. 내 요구 는 분명 혼자서 찾아오라는 것만이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 " AI컴플리트 세트와 무전기는 모두 언더 시티에 반납하고 왔다. 피스메이커 에서 내 위치를 역탐지하는 일은 없을 거야. 물론 발신기나 도청기도 하지 않았지만. 정 의심 나면 몸 수색을 해보던가. " 진우의 비아냥에 라트는 킬킬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 그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네 패턴 그린의 능력만 봉할 생 각이었다. 그 가속이라는 것은 여러모로 반칙같아서 말이야. " 라이컨슬로프의 능력도 충분히 반칙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우는 그런 뒷말을 삼키며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 라트, 그렇게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굳이 나와 승부를 가리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냐? " " 글쎄……. 이유라? 굳이 말하자면― " 라트는 순간, 오른팔의 손톱을 뽑아내며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그 갑작스러 운 돌진에 진우는 황급히 칠성권 사기종인의 수로 손톱을 받아넘기며 기수식 을 취했다. " 살기 위해서랄까? " " 너! " 입꼬리를 올리며 살기를 흘리는 라트의 모습에 진우는 표정을 굳혔다. AI슈 츠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라트와 정면 대결을 펼쳐봤자 승산이 없었다. 그렇 다면 화경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압하며 발경을 날리는 수밖에! " 살기 위해서라니! " " 살아가려면 목표가 필요하잖아? 목표가 없는 삶이란 무의미해지지. 무의미 한 삶은 곧 죽음이다! " " 그래서? 네 삶의 목표라는게 날 죽인다는 거냐! " " 왜? 너무 소박한 꿈인가? " 휙 진우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의 가속으로 라트의 손톱을 피해내며 재 빨리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라트는 굳이 혈안이 되서 싸울 생각은 없었는지 그런 진우를 추격하지는 않 았다. 대신 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한탄하듯 얘기를 꺼냈다. " 내가 처음으로 자신이 라이컨슬로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늘과 같은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한밤에 뜨거워지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울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웬 괴물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더군. " " ……. " " 놀라서 울고 있는 나를 의외로 부모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달래주었어. 아마 내가 그렇게 될 줄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거야. " " 그럼……. " " 그래. 내 부모님 또한 라이컨슬로프였지. 정확히는 아버지만 웨어울프. 어 머니는 그것을 알고서도 결혼하신 거고. 뭐, 그렇게 내가 괴물의 자식이라 는 것을 알고난 뒤에도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어. 어린 내가 라이컨슬로프 의 힘을 조절하지 못해 몇번 만월밤에 날뛴 것을 제외하면 무난하게 평화 로운 나날이었지. " 하지만 모든 불행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 그런데 이 만월밤에 날뛴 것이 문제가 되었어. 그 작은 시골 마을에서 어 떻게 얘기가 퍼진건지…… Fucking Temple Knights! 그 저주받을 녀석들이 이단의 냄새를 맡았던 거야! 인간이 아닌 이능력자들이 마을에 있다는 것 을 알아냈어! 그리고 녀석들이 파견한 이단 심문관에 의해 난 아버지와 어 머니를 잃어버렸다. " 라트는 그때의 분노가 되살아나는지 두눈에 흉흉한 녹색빛을 띄었다. " 어머니는 라이컨슬로프도 뭣도 아닌 보통 사람이었어. 그런데 녀석들은 단 지 라이컨슬로프의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어 머니를 처리하더군. 난 간신히 아버지의 도움으로 녀석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날 살리기 위해 내 친구였던 옆집 꼬마를 패밀리어로 삼 아 나인 것처럼 꾸몄지. 그렇게 모두의 희생을 발판 삼아 난 간신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을 당해야 했 다. " 살아남은 나를 지탱해준 것은 오로지 성당 기사단에 대한 복수심 뿐이었다. 그 복수심만이 내 삶을 움직여주는 원동력이었지. 그래서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나갔다. 성당 기사단에 대해 알아내고, 녀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지. 그러던 중, 뜻밖에도 나는 나와 아버지 같은 라이컨슬 로프들의 기원을 알아낼 수 있었어. " " 기원? " " 솔로몬 프로젝트라고 알고 있나? 72기둥의 마신이라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비술인데, 쉽게 말해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유전변이(genetic variation) 기술이지. 인위적인 조작을 일으켜 인간을 72개체의 이능력자들로 개량해 내는 실험인 거야. " " 뭣! " 진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전변이 기술? 72개체의 이능력자들로 개 량해낸다니! 라트는 그렇게 놀라는 진우를 비웃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 아버지는 그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진 실험체였다. 하지만 중반에 실험체 들이 탈주하는 일이 벌어졌고 아버지도 그때 탈주하신 거였어. 아마도 성 당 기사단이 솔로몬 프로젝트를 거두어들이는 과정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 겼던 모양인데……. " " 성당 기사단이 솔로몬 프로젝트를 거두어들였다고? " " 몰랐나? 녀석들은 자신들 외의 다른 세력이 힘을 얻는 것을 용납치 않아. 인류의 지배기관이라 자칭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자신들이 통솔할 수 있어 야 안심하는 족속들이지. " " ……. " " 어쨌든 그 탈주 과정에서 아버지는 화이트 파우더라는 물건을 녀석들에게 서 빼돌리셨다. 아무래도 그 약이 시중에 배포되면 여러모로 성당 기사단 이 곤란해지는 모양이더군. 기억하나? 자네가 나에게서 훔쳤던 마약을? 그것이 바로 화이트 파우더다. " " 소마가? " " 그래. 그런 이름으로 유포시키려고 했지. 화이트 파우더로 성당 기사단의 정보망을 교란시키고, 동시에 미국의 마약 신디케이트를 접수할 생각이었 다. 성당 기사단에 대항할 기반을 닦을 생각이었어! " 진우는 마른 침을 삼켰다. 라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 그런데 그런 내 계획을 깡그리 망쳐버린 꼬마가 하나 있었지. 내 복수를 엉망으로 만들고, 거기다 날 성당 기사단에게 넘겨 실험대까지 오르게 만 든 너! 피스 그린! 네 녀석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나버렸다. 복수는 커녕 녀석들에게 실컷 농락당하기만 했지! 그야말로 넌 나를 지옥에 떨어 뜨린 거야! " 라트는 점점 광기를 띄며 흉폭해져갔다. 그 감정 변화에 이끌려 그의 육체도 인간의 껍질을 벗기 시작한다. " 지옥같은 14년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목숨만을 보존해야 했 던 14년이었어! 그 14년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무슨 꿈을 꾸 어왔는지 아나? 언제나 너만을 생각했다, 피스 그린! 날 이런 꼴로 만든 너! 너만은 내가 반드시 죽여버리겠노라고! 너에게만큼은 내가 당한 고통 을 그대로 돌려주겠노라고! 셀수도 없이 각오했다! 셀 수도 없이 다짐했어! " 그리고 깨어난 지금! " 내 삶의 목표가 네 녀석의 말살로 변해버린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 내 모든 것을 빼앗고 내 복수심마저 앗아간 너! 그렇다면 너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주겠다. 똑같이 모든 것을 빼앗아주겠어! " 화르르르륵 라트의 등 뒤에 있던 폐성당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사전에 설치해둔 점화 장치가 건물 도처에 뿌려둔 기름 위로 불꽃을 일으킨 것이다. 라트는 불을 등진채 어둡게 물든 얼굴로 진우에게 물었다. " 자, 피스 그린. 예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겠지? 그때와 마찬가지로 너에게 다시 한번 묻겠다! 궁금하지 않나? 저 불 타는 건물 안에 뭐가 들 어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 " 설마! " 진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성당을 바라보다가 라트를 노려보았다. " 설마, 설마 저 안에! " 미연이와 하나가, 내 가족들이……! " 크크크크. 확인하고 싶다면 이번에는 날 쓰러뜨리고 가야할 걸. 빨리 쓰 러뜨리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다 타버릴 거다. " 조롱하는 라트의 웃음 소리도 진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기억하는 것은 예배당에 쌓여있던 가족들의 시신. 그리고 그 시신들을 앞에 두고 오열하던 자신의 모습. ' 그런데 그때와 같은 일이 또 다시, ' 또 다시 일·어·난·다·고? " 라트으으으으―! " 순간, 진우는 노호성을 내지르며 가속을 전개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1 - Ｂy Ｎext Ｎeo =-=-=-=-=-=-=-=-=-=-=-=-=-=-=-=-=-=-=-=-=-=-=-=-=-=-=-=-=-=-=-=-=-=-=-= ―왜 죽였어! 어차피 메두사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었어! 그런데 왜! ―그렇다고 살려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퍼어어어엉 엑스칼리버와 그림 리퍼가 부딪히자 공간 마찰이 일어나며 대기 중의 수소가 반 수소를 형성시켰다. 반물질 절삭성 커터의 잦은 충돌이 반상상 에너지를 유발시켰던 것이다. 이대로 반상상의 폭주가 계속될 경우 자칫 잘못했다간 12 구역을 뒤덮는 거대한 블랙홀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차아앗! 그러나 가인은 티폰에게 맞서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소멸되기 직전 메두사 가 보였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가차없이 소멸시킨 너, 한시영! ―분명 싸우지 않고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거야! 이렇게 서로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리리스처럼 그녀가 죽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거야! ―하하하. 밤의 여왕 님이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 테라와 노아의 관계에 대 해서? 그 관계의 어디에 타협할 구석이 있단 말입니까? 두 인류의 원한은 수십 세기가 넘도록 계속되어 왔어요. 이미 어느 누가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입니다! 퍼어어어엉 티폰의 그림 리퍼가 갈고리처럼 휘어지며 머신 아더를 내리찍었다. 머신 아 더는 간신히 엑스칼리버를 들어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충돌로 발생 하는 반상상의 여파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크윽! ―가인 군, 당신은 이 상황에 와서 까지 너무나 안이하군요. 동정을 베풀 상 대를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 메두사는 마음만 먹으면 테라를 멸종시킬 수 있는 강대한 힘의 소유자입니다. D타입으로 구현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완전체의 모습으로 나타났더라면 앞에서 당신들이 본 환상이 현실이 되었을 거에요. 그런데도 그녀가 당신의 걱정을 받아야할 군번이라고 생 각합니까? 그대로 그녀를 살려둔다고 해서 사태의 진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우우우우우 엑스칼리버에 맞닿은 그림 리퍼의 절삭성 커터가 백열하기 시작했다. 예의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인가! 가인은 이를 악물며 자신도 엑스칼리버의 검날에 차원 진동을 끌어모았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누군가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기적인 개념이죠! 절대로 이타적이 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오만이자 거짓입니다! 당신들의 피스메이커가 주장하는 평화란 한낮 허구에 불과해요!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애처롭군요. 사실 가인 군은 안도하고 있는게 아닙니까? 처치 곤란한 메 두사를 제가 처리해줘서? 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안도했다고? ―어차피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겁니다. 그러다 목숨을 잃었으니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모르죠. 자신의 삶에 충실했으니까. 후후. 저야 덕분에 손쉽게 장애물을 처리할 수 있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지 만. ―으으으! ―그러니까 말입니다……. 평화를 지키겠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면, 순간, 그림 리퍼의 절삭성 커터가 무형의 중력파를 뿜어냈다.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해지란 말입니다! ―으아아아아앗! 드카아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폭음이 터지며 차원 파괴가 일어났다. 질풍의 검으로 티폰의 아포칼립스 제네레이터를 받아치려던 가인은 본능적으로 머신 아더의 갈래질 이 티폰에게 못 미침을 깨닫고 오라 클록을 전개했다. 그 덕분에 머신 아더는 엑스칼리버를 든 왼손만 잃어버린채 간신히 몸을 피 해낼 수 있었다. 오라 클록으로 차원 파괴의 범위 밖까지 후퇴한 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 며 애써 정신을 수습했다. ―제길, 이제 어떡하지? 티폰의 압도적인 위력도 위력이지만, 왼손과 함께 엑스칼리버를 잃어버린 것 이 치명적이었다. 맨손인 상태로는 지구의 공전주기마저 늦추는 그라비티 블 래스터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당황하는 그에게로 시더의 사념이 들려왔다. ―걱정하기는 일러, 가인! 아직 머신 아더는 제 힘의 반도 보여주지 않았어! 스펙만으로는 절대로 녀석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철컹 그와 동시에 머신 아더의 퀴스 부분이 개방되며 또 하나의 엑스칼리버가 모 습을 드러냈다. 시더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칭했다. ―엑스칼리버 이식(貳式), 일식 스톤 커터와 한쌍을 이루는 제 2의 엑스칼리버! 아더왕의 전설에서 영웅왕은 아무도 뽑지 못한 검을 바위에서 뽑아냄으로서 브리튼의 진정한 지배자 임을 증명해보였다. 흔히 이때 뽑아낸 검을 사람들은 엑스칼리버라고 칭했지만 다른 전설에서는 멀린이 호수의 요정에게 부탁하여 건네받은 마법검을 엑스칼리버라고도 한다. 어쨌든 이 마법검은 후에 베디비어 경에 의해 다시 호수로 반납되어지는데. 노을이 져서 붉게 물든 호수 속에 가라앉은 이 엑스칼리버를 붉게 물든 호수 의 이름을 따서, ―크림슨 리버(Crimson River)! 머신 아더의 손에 들린 엑스칼리버는 또 다시 찬란한 푸른빛의 검날을 생성 시키며 그 위용을 자랑했다. 가인은 줄곧 좌수검을 사용해왔기에 어색하게 오른손으로 몇번 엑스칼리버를 쥐다가 일행에게 물었다. ―이 상태로는 녀석을 상대하기 힘들 것 같아요. 차라리 검이라면 마리 선 배의 레드 폼이 낫지 않을까요? ―그건……무리야, 가인. 시더의 답변에 가인은 어리둥절해졌다. 무리라니? ―너야 오라의 제한이 없어졌기에 어느때라도 제어권을 잡을 수 있지만 다 른 대원들은 그렇지 않아. 레벨 체인지는 원래 한 사람에게 단 한번의 기 회밖에 없다고. ―아, 그러고 보니 쿠사나기 전때도 노엘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미 옐로우 폼과 레드 폼은 한번 씩 사용했으니……. 일행은 혀를 찼다. 저런 최강의 상대를 앞에 두고서 속수무책이라니! ' 이럴때 진우 씨가 있었더라면. ' ―그럼 제가 제어권을 잡으면 되겠군요. 그때 모두의 고민을 해결해준 이가 있었다. 그래. 아직 그가 남아있었지! '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 ' 마리는 근심스러운 사념으로 코마히코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지껏 한번도 머신 아더를 조종해보지 않았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 보여도 수십번도 더 마징가를 시청해온 저입니다.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 아니, 잠깐. 방금 발언의 어디에 문제가 없다는 거야? 어째서 머신 아더의 조종에 마징가가……. 아니, 그보다도 코마히코가 그런 고전 중의 고전을 시청해왔다는게 더 의외이려나? 절대로 그럴 사람처럼 보이 지 않더니만. 가인 일행은 그야말로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어버렸다. 다만 그 중에는 코마 히코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That's right!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야, Mr.samurai! 그 정도의 각오도 없 으면 로봇 파일럿이라고 할 수 없지! 어이. 어이, 시더 선생님. 머신 아더의 총 지휘를 맡은 사람이 맞장구를 쳐 서 어쩌자는 겁니까?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닥터 웰리스. 코마히코 당신! 그 말 진심이야? 그렇게 모두의 불안을 한가득 안고서 코마히코는 가인에게 말했다. ―가인 씨, 그럼 머신 아더의 제어권을. ―아, 예에……. 정말……괜찮으려나. 가인은 걱정 반 근심 반으로 코마히코에게 제어권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머 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장갑이 주황빛으로 변하며 엑스칼리버의 검신 역시 주 황색으로 변한다. 바로 패턴 버밀리온. 버밀리온 폼이다! ―후우. 코마히코는 머신 아더와 동화되는 이질감에 작게 호흡을 고르며 오른손에 쥔 엑스칼리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패턴 버밀리온은 신검 도츠카노츠루기의 덕 을 보기는 했지만 근본은 검기를 발생시키는 절단의 능력이다.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만들어내는데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모두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코마히코는 일행의 불안해하는 사념을 느꼈는지 그렇게 말했다. ―머신 아더는 저 혼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을 믿고 여기 에 탑승했듯이 여러분도 절 믿어주십시오. 믿으라고? 그 말에 일행은 비로소 불안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코마히코의 말대로 지금 껏 머신 아더를 움직여온 것은 그들 개인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라도 없었더라면 머신 아더는 여기까지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좋아요. 믿겠어요, 코마히코 씨! 가인의 외침에 코마히코는 빙긋이 웃으며 발도세를 취했다. 같은 무영신풍류 이건만 마리가 조종했을 때와는 달리 코마히코의 머신 아더는 지극히 낮은 자 세로 상대를 위협하고 있었다. 크레이터의 건너편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시영은 천천히 티폰의 그림 리퍼를 회전시키며 말했다. ―자아. 그럼 어디 얼마나 달라졌는가 확인해볼까요? ―ばかやるう(바보 같은 놈). 코마히코는 그런 시영의 여유를 질타하며 금새라도 쓰러질 것처럼 머신 아더 의 동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기울임이 정점에 달했을 때! 투아아아아앙 마치 탄환처럼 앞으로 쏘아져나간다. 가인이 AC의 반중력을 조절해내자 머신 아더는 크레이터를 가로지르며 그대로 티폰에게 돌진했다. 티폰 역시 등 뒤의 날개를 펼쳐올리며 머신 아더에게 달려든다. 우우우우우우 티폰의 그림 리퍼는 아포칼립스를 머금은채 머신 아더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 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머신 아더는 아포칼립스를 향해 스스로 뛰어드는 형국 이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돌진이다! ―하아아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마히코는 별 동요 없이 운요의 내가심법으로 진기를 끌 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믿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들을!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이때다! AFS 발사! 그때 시더의 외침과 함께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와 폴드런, 카우터가 일 제히 개방되며 남아있던 25발의 AFS가 티폰에게 발사되었다. 원래 AFS는 머신 아더가 엑스칼리버를 사용할 시 상대의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장착한 견제용 미사일이었다. 그런 AFS가 지금껏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다가 이번에야말로 시기적절한 때에 사용된 것이다. 콰콰콰콰콰쾅 티폰은 AFS를 모조리 두드려 맞으면서도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같은 오 라 능력자끼리의 대결이었기에 몬스터를 제압하는 오라 필드는 티폰에게도 무 용지물이다. 대신 미사일의 물리적인 타격만으로도 AFS는 충분히 진가를 보여주었다. 바 로 그림 리퍼의 움직임을 지연시켰던 것! ―차앗! 가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머신 아더의 오라 클록을 전개해 차원 진동을 이용한 공간 압축을 형성해냈다. 질풍의 벽! 그 차원진동 쉴드가 뒤늦게 떨어진 그림 리퍼의 아포칼립스를 중 화시킨다. 그리고 머신 아더는 완벽하게 티폰의 정면을 파고들었다. 코마히코는 엑스칼리버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한시영! 혼자인 너로서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일격을 먹여주마!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오의(奧義), ―발파(發破)! 퍽 단 한번의 파쇄음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머신 아더와 티폰은 서로를 지나쳐 크레이터의 반대편으로 내려선다. 하지만 코마히코는 자신할 수 있었다. 발파 는 신속의 발도술. 그 앞에서 베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이 비록, ' 기가스 티폰이라 할지라도! ' 코마히코는 엑스칼리버를 가볍게 좌우로 돌리다가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갈 무리하며 칼몸을 퀴스 부분에 집어넣었다. 티폰의 허리를 벤 감촉이 뚜렷하게 그의 사념에 느껴지고 있었다. ―切られられなさい(베어져라). 쿵 나지막한 중얼거림. 동시에 티폰은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 이것이 너와 함께하는 마지막 춤이로군! 어디 멋지게 시작해볼까, 피스 그 린! " 수인화를 끝낸 라트는 은색의 털로 뒤덮인 웨어울프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 신을 향해 달려드는 녹색의 잔상에게 다섯개의 손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잔상 은 어림도 없다는듯 완벽하게 손톱을 피해낸다. ' 여전히 빠르군! 여전히 빨라! ' 라트는 감탄했다. 이것은 도저히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이래 서야 AI슈츠를 탈착시켜 가속을 봉쇄시키겠다는 계획이 의미가 없지 않은가? ' 의미가 없다고? 꼭 그렇지만도 않지! ' 라트는 입꼬리를 올리며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근육이 급속도로 팽창하며 부풀어오른다. 근육의 단면적을 넓혀 한순간에 폭발적인 힘을 내기 위해서였다. 라트의 눈동자는 잔상의 움직임을 쉼 없이 따라가다가 곧 동공을 넓히며 고 정되었다. " 거기냐! " 퍼억 라트의 주먹이 전광석화처럼 잔상의 한 부분을 후려치자 거짓말처럼 그 장소 에 진우가 나타난다. 진우는 설마 가속 중인 자신이 따라잡힐 줄은 몰랐기에 미처 사기종인의 수로 받아내지도 못하고 간신히 라트의 주먹을 벽경으로 빗 겨냈다. 진우는 화경으로 라트가 주먹을 거둬들이지 못하도록 붙잡으며 인상을 찡그 렸다. 역시 이 정도의 가속으로는……. " 크크크. 왜 그러나? 마음껏 달리지 못해서 답답한가? " 라트는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녀석은 AI슈츠가 없으면 패턴 그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저 정도의 움직임이라면 충분히 라이 컨슬로프의 동체 시력으로도 쫓아갈 수 있다! " 크크크크! 뭘 머뭇거리고 있지? 타버린다고! 저대로 내버려둘 셈이야? " " 네놈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 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불타오르는 성당을 곁눈질했다. 한시라도 빨리 미 연과 하나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저 불길 속에서 그녀들을 구해주 고 싶었다. 하지만 자꾸만 의문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정말 저 불길 속에 그의 가족들이 있는 것일까? 사실은 다른 곳에 있다거나 아니면 이미 죽음을 당했다거나……. ' 크으으윽! ' 후자는 생각하기 싫었다. 아니, 생각해서도 안된다. 어차피 진우에게 선택이 란 없었다. 성당 안에 미연과 하나가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중요한게 아니다. 라트의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 가족을 구해내는 것. '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뭐든지 해야만 한다!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이든! 괴물과 맨몸으로 싸우는 것이든! ' 할 수 밖에 없단 말이다! ' 진우는 이를 악물며 다시 한번 가속했다. 라트에게 움직임을 따라잡히는 이 상, 그를 따돌리고 예배당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또 애써 들 어간다고 해도 미연과 하나를 구하도록 그가 자신을 방치할리도 없다. 그렇다면 가장 빨리 가족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녀석이 말한대로다.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는한 가장 빨리 쓰러뜨리고 가족을 구해내는 것! 그것만이 최선이다! 그 방법 밖에 없어! " 좋아! 그렇게 나와 싸우고 싶다면 얼마든지 싸워주지! " 진우는 결정을 내리고 번개같이 라트에게 달려들었다. 망설임을 떨쳐낸 것만 으로도 그의 움직임은 한층 빨라지고 있었다. 오라는 의지의 힘. 의지가 굳건 해질수록 그 힘은 거푸 한계를 뛰어넘는다! 투학 가속이 실린 진우의 발경이 연속으로 라트의 배를 두들겼다. 가속이 완벽하 게 실렸을 때와는 위력이 천지 차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뼈와 살을 가 진 육체에게는 효과를 주고 있었다. 발경이란 경력의 전달, 즉 파동의 힘이기에 아무리 단단한 갑옷으로 몸을 보 호한들 충격을 완전히 차단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 크―! 하찮은 짓을! ' 자잘한 충격이 겹쳐서 데미지가 쌓이자 라트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맨몸으 로도 내가 녀석에게 밀린단 말인가? 이 라이컨슬로프의 육체가 고작 저런 인 간의 주먹질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 웃기지마랏! " 뭣때문에 내가 괴로워 했나? 뭣때문에 내가 쫓겨다녀야 했나? 다 이 라이컨슬로프의 힘 때문이었다. 이 힘때문에, 인간보다 월등한 이 힘 때문에 나는 여기까지 몰려와야 했다! ' 그런데 이런 약해빠진 인간에게도 이기지 못한다면, 이런 인간 녀석에게 쓰러진다면! ' 그럼 살해당한 내 가족들은? 엉망이 되어버린 내 인생은 뭐란 말인가? 괴물 로 평생동안 살아온 나는? '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 " 크랴아아아앗! " 라트는 괴성을 내지르며 진우를 향해 폭풍처럼 양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톱 에 닿는 모든 것들은 마치 폭발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산산조각났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부서져나간다. 그야말로 괴물의 힘이었다. 인간을 뛰어넘는 힘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콰직 진우의 승룡퇴가 라트의 턱을 차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개산벽을 쓰려던 그 는 대신 중경 파군과 풍경 무곡을 연달아 내찌른다. 가속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몸통 박치기를 해봤자 라트와의 무게 차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확실한 공격 방법은? 역시 발경을 이용한 연속기였다. 차근 차근 데미지를 쌓아올려서 녀석을 무 력화시킨다! " 크으―! " 라트는 다시 화경을 펼치려는 진우에게 재빨리 리버스 킥을 먹여서 뒤로 물 러나게 했다. 아무래도 브루스 류, 그가 자신의 제자 하나는 확실하게 단련시켜왔던 모양 이다. 라트는 16년 전, 처음으로 브루스에게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 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상대를 인간이라고 얕잡아봤던 것이 패배의 원인이 었다. ' 그렇다면 인간의 방식으로 싸워서는 안되겠지! ' 라트는 혀를 차며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몸을 감싸던 은색의 털 들이 꼿꼿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막 라트에게 달려들려던 진우는 그것을 눈치채고 오라 쉴드를 펼치려고 했 지만 곧 자신이 AI슈츠를 착용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탄식한다. AI슈츠의 도움 없이 오라 쉴드를 펼칠 수 있는 능력자는 유가인이나 브루스 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피할 수 있다면 피해봐라! " 파파파파팍 라트의 외침을 뒤로하며 수 많은 은빛의 창들이 진우에게 발사되었다. 진우는 이를 악물고 가속을 전개했다. 다 피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퍼퍽 진우의 오른쪽 어깨와 허벅지가 은빛의 창들에 꿰뚫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최소한의 피해로 니들 공격을 우회한 진우는 그대로 라트에게 쏘 아져나간다. 라트는 그런 진우의 회피를 예상하고 있었다는듯 달려오는 그를 향해 손톱 을 내찔렀다. 네 놈의 움직임은 이미 나에게 똑똑히 보인단 말이다! 서걱 뚫렸다! 라트의 손톱은 정확하게 진우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진 우의 고통에 찬 표정과 몸짓이 늘어지는 테이프마냥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라트는 그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며 희열을 느꼈다. 해냈다. 해냈어. 나는 드디어 녀석을―! 퍼어어어엉 희열은 오래가지 않았다. 라트의 손톱에 꿰인 상태에서 진우는 자신의 오른 주먹을 라트의 가슴에 내 뻗었던 것이다. 힘도 없는, 그야말로 갖다댄듯한 주먹질이었다. 하지만 그 주먹질은 무시무시한 폭음을 일으키며 라트의 몸을 뒤로 날려보 낸다. 콰지지지직 수십미터를 날아간 라트는 성당의 신랑을 부수고 장미 정원까지 뒤엎은 끝 에 그 움직임을 멈췄다. 그야말로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한순간에 벌어진 일 이다. 진우는 라트의 손톱이 빠져나간 어깨를 움켜쥐며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 었다. 그의 두눈은 금새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전자 의안에 연결된 시신경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다. 진우는 두눈을 손으로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고통에 찬 신음을 흘 렸다. ' 제길! 제길! 문제는 없겠지? 또 나가버린 건 아니겠지? ' 그는 부디 실명이 되지 않았기를 바라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역시 무 리해서 그때의 기술을 쓰는게 아니었다. 진우는 라트의 니들 공격을 피한 순간, 그 즉시 싸움을 끝내기 위해 일부러 라트의 손톱에 몸을 허용하면서까지 예의 펀치를 사용했던 것이다. 슬로우 임펄스 펀치(Slow Impulse punch). 뇌의 시계주파수로 늘어난 체감 속도를 이미지메이킹시켜 충격량을 극대화시 킨 끝에 충격력까지 높이는 기술! 이 기술은 특별히 AI슈츠 없이도 진우가 구사해낼 수 있었다. 슈팅스타 같은 기술은 가속을 이미지메이킹시켜 충격파를 발생시키는 것이기에 AI슈츠가 없 이는 몸이 버텨내지를 못했지만 슬로우 임펄스 펀치는 그럴 위험이 없었던 것 이다. 그런 이유로 진우는 처음부터 이 펀치를 피니쉬 어택으로 사용할 생각 이었다. 대신 문제는 무리하게 뇌의 시계주파수를 끌어올리는 기술이기에 실명할 위 험이 있다는 건데……. " ―! " 뜨여진 시야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진우는 또 다시 시신경이 끊어진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다행히도 눈의 모세혈관이 터진 것 뿐이었다. 약간 상이 일그러져 보이기는 했지만 사물을 분간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 으윽. " 진우는 허벅지와 어깨에 꽂힌 라트의 침들을 빼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세웠 다. 아직 마음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미연과 하 나는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 어서 빨리, 어서 빨리 구해내지 않으면! ' 기다려, 미연아……. 하나야……. 내가 구해줄게……. 내가, ' 제발 무사히만 있어줘. 살아만 있어줘. 그러면 내가 반드시, ' 반드시 구해낼테니까. ' 진우는 라트의 손톱에 짓이겨진 왼쪽 어깨를 감싸며 절뚝 절뚝 예배실의 문 으로 걸어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가속을 써서 달려가고 싶었지만 라트에 게 당한 상처가 치명상이었는지 뜻대로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하긴. 이 정도로 당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틈을 내주지 도 않았겠지만. ' 으. 포션 정도는 챙겨올 걸 그랬나……. ' 진우는 눈 안쪽에 맺힌 피가 자꾸만 시야를 어둡게 만들자, 손바닥으로 눈가 를 세게 찍어눌렀다. 그러자 맺혀있던 피가 볼을 타고 흐르며 그나마 상태를 호전시킨다. ' 어라? ' 피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던 진우는 곧 피가 코와 귀에서도 흘러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의아해졌다. 뭐야……. 괜찮은 거 아니었나? 눈도 멀쩡하잖아? 그런데 왜……. ' 어라? 어라라? ' 이, 이러면 안되는데……. 이러면……. 진우는 다리에서 힘이 풀리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듯 벽에 기 댔다. 코에서는 뜨거운 피가 숨쉬기 조차 힘들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가에 서도 역한 피비린내가 느껴진다. 진우는 자신의 몸에 생기는 이변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이러지 말라고. 조금만 버텨줘. 조금만……. 미연이와 하나가 기다리고 있 단 말이야. ' 이런 그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붕괴는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진우는 이를 악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쓰러질까 보냐. 쓰러질까 보냐. 여기서 이렇게, 이런 식으로, ' 개죽음 당할 수는……! ' 투두두두둑 그때 엉망이 된 장미 정원으로부터 한 그림자가 흙더미를 헤치고 몸을 일으 켰다. 그 그림자에서는 옅은 은빛의 기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라트? " " 후우우― 어딜 가시나, 피스 그린. 설마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 거기에는 전신의 은빛 털을 번쩍이며 육체를 복원해내는 라이컨슬로프가 있 었다. 그 등뒤로는 마치 핏빛의 보름달이 라트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빛을 흩 뿌리고 있다. 만월! ' 그래. 만월날 녀석의 회복력은 평소를 뛰어넘었지! ' 하지만 진우는 곧 그것이 단순한 재생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어 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라트의 몸에서는 은색의 광원이 흘러나오며 달빛과 반응하고 있었다. 저 빛은 마치, 마치― " 오라 패턴? " 진우는 자신이 중얼거린 말에 스스로가 놀라고 말았다. 오라 패턴이라니? 녀석이 오라 능력자라고? " 말도 안돼! " " 크크크크. 말이 안될 거야 없지. 한시영, 그 남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날 거뒀을 것 같나. " 라트의 몸에서는 한층 더 강한 섬광이 피어나왔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확연한 오라의 빛이었다. 가이아가 선택한 대행자의 증거다! " 뭐, 놀라는 것도 당연해. 이 힘은 작년 너에게 죽을 뻔한 이후로 얻게 된 것이니까. 아니, 정확히는 각성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군. 너와 유가인의 오라가 내 오라를 감응시켜 일깨워준 거야. " 라트의 두 눈동자가 오라 패턴 고유의 빛을 투영해냈다. " 내 오라 능력은 육체의 강화. 스스로의 몸을 오리하르콘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 그때문에 달의 인력이 강해질수록 내 육체도 무한히 강해진다. " 진우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라트 발렌시아의 오라 패턴. 그 악몽의 이름은, " 패턴……실버(Silver)! " ―과연. 혼자였다면 영락없이 당했겠어요. 머신 아더의 등 뒤에서 들릴 리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 미션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코마히코는 믿을 수 없다는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럴 리가! 분명히 느낌이 있었는데! 촤악 그러나 머신 아더가 채 몸을 돌리기도 전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엑스칼리버를 든 오른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스쳐 지나간 것이 채찍처럼 긴 무언가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절단 된 오른손이 지면을 울리고 난 뒤였다. 쿵 코마히코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머신 아더의 등 뒤에는 크레이 터의 반대편에 있을 것이 분명한 티폰이 천연덕스레 다가와 있었다. 크레이터의 지름은 적게 잡아도 500미터. 이 거리를 어떻게 기척도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거지? ―이게 대체, 촤촤촤악 그가 채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머신 아더의 머리와 두 발이 떨어져 나갔다. 채찍으로 변한 사신의 낫이었다. 티폰의 그림 리퍼가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초고진공 상태로 만들어 머신 아더의 오리하르콘 근육을 박막시킨 것이다. 쿠우우우우웅 오체를 완전히 잃은 머신 아더는 지축을 울리며 쓰러졌다. 그 충격으로 레 벨 체인지가 일어나며 다시 머신 아더의 제어권이 가인에게로 돌아온다. 시영은 그런 거인을 내려다보며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쪽도 혼자가 아니거든요?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2 - Ｂy Ｎext Ｎeo =-=-=-=-=-=-=-=-=-=-=-=-=-=-=-=-=-=-=-=-=-=-=-=-=-=-=-=-=-=-=-=-=-=-=-= ―저건 피스 화이트의 초고진공 커터! 어떻게 녀석이 저것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시더의 사념이 채찍으로 변한 사이드의 모습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 질문 에 답한 것은 유리의 사념이었다. ―거인의 사념이……바뀌었어. 마치, 마치 우리가 머신 아더의 제어권을 교 체하는 것처럼, ―뭐라고! 코마히코와 마리의 사념이 새삼 티폰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 친 티폰은 예전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티폰을 움 직이는 사념은 마인드 브레이커인 유빈의 것이었다. 같은 초심리 능력자인 유 리만이 유빈의 원격감응을 투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저들도 우리처럼 티폰에게? ―티폰의 파일럿으로 오라 능력자들이 탑승한 거야! 피스 블랙과 피스 화이 트 그리고 피스 카민인가! 시더는 설마 자아를 가진 티폰의 몸에 시영 일행이 탑승할 줄은 몰랐기에 혀 를 내둘렀다. 하긴. 오라 클록이 없는 티폰이 코마히코의 발파를 맞고 멀쩡할 때부터 예상해야 했지만. ' 피스 화이트의 진공 기류로 반물질 절삭성 커터를 중화시킨 거야? 그렇다 면 머신 아더의 뒤로 순간 이동한 것은? 설마 피스 블랙의 섀도우 다이브? ' 말도 안돼! 레벨 체인지도 없이 두가지 능력을 동시에 사용했다고? 시더는 분한듯이 외쳤다. ―이쪽의 방법을 흉내내다니! 치사해! 비겁해! ―하하. 흉내내다니요? 잊고 계신가 본데 이쪽이 '원조'입니다. 그쪽의 불완 전한 어시머레이션(assimilation;동화)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시영은 시더의 억지에 코웃음을 쳤다. 그의 말대로 티폰은 머신 아더와 달리 탑승자들의 능력을 완벽히 구사하고 또, 동시에 사용해내고 있었다. 이는 검은 거인이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오 라를 가이아로부터 끌어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머신 아더와 달리 동력의 문제로 파일럿의 오라 능력을 제한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시영은 쓰러진 머신 아더를 내려다보며 노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당신들의 뻔뻔함에는 치가 떨립니다. 지금껏 가이아의 도움으로 연명해온 주제에 이런 역천(逆天)을 저지르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가 이아의 자식인 기간테스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인의 시 신을 모욕하다니! ―그건! 시더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분명 시영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류는……! ―더 이상 자신들을 가이아의 대행자라고 착각하지마십시오. 가이아가 당신 들을 버린게 아니라 당신들이 가이아를 버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대재해가 일어났겠습니까? 설마 아직도 노아의 침공이 우연이었다고 생각 하십니까! ―……! 시영의 말에 가인 일행은 숨을 죽였다. 노아의 침공이……우연이 아니라고? 가인은 한순간 리리스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시영에게 소리쳤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고 싶습니까, 가인 군? 하긴. 당신이라면 알 권리가 있지요. 엄연히 가 이아에게 선택받은 열쇠니까. 열쇠? ―후후. 저와 당신의 관계는 정말이지 묘합니다.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언 제나 저에게 진실을 갈구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저는 좋든 싫든 그런 당 신의 의문을 해소시켜줘야 하죠. 그래서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 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란, 처음부터 당신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만 준비된 것이 아닐까, 라는. 시영은 자조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듣고 있는 가인으로서는 소 름이 끼치는 내용이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들의 운명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 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기대가 되는군요. 진실을 알게된 가인 군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그 말에 가인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예전 시영이 진실을 강요했 던 일이 생각났다. 놈이 강요했던 진실! 그 진실을 알게됨으로서 자신은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 던가? 또 얼마나 슬퍼했던가? 그런데 녀석은 그걸 또 다시……! ―하하하하. 자, 단단히 마음 먹으십시오. 이번에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을테니까. 어디 제 얘기를 듣고나서도 당신들이 계속 그 꿈 같은 평화 타령을 할 수 있나 지켜볼까요? ―……! 이 자식―! 가인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웃기지마! 웃기지마! ' 더 이상 네 녀석에게 농락당하지는 않아! ' 순간, 몸뚱아리만 남은 머신 아더의 등 뒤로 오라 클록이 전개되었다. 그 푸 른색의 망토는 거인의 몸을 감싸며 그대로 티폰을 향해 질풍의 힘을 내뿜는다. 먹어라! 天천 空공 雷뇌 霆정 拳권 투카카카칵 적의 주심에서부터 가인이 만들어낸 차원진동의 줄기들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뻗어나왔다. 머신 아더에 타고 있던 대원들의 사념은 저마다 그 엄청난 빛의 폭발에 시선을 돌린다. 머신 아더에 장착된 수십개의 ACR들이 일제히 증폭시킨 천공의 힘이었다. 이 힘을 네 녀석이 받아낼 수 있을까! 콰지지지직 그러나 혼신을 다한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티폰은 시영의 섀도우 다이브로 천 공뇌정권의 주심에서 간단히 몸을 피했다. 또 거기서 그치지 않고 티폰은 AC 에 휘감긴 머신 아더의 동체를 발로 찍어 누른다. ―으앗! AC의 공간 압축조차 밀어낼 정도의 강력한 중력장이 티폰에게서 전개되었다. 티폰의 등 뒤에 달린 반중력 추진기, 가고일의 날개가 머신 아더를 속박했던 것이다. 그렇게 머신 아더를 꼼짝 달싹도 못하게 만든 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담화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은 날이군요. 카타스트로피 (catastrophe)는 뒤에 있을 즐거움으로 미뤄두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소기의 목적? 그런 일행의 의문을 뒤로 하고 티폰은 제 길이로 돌아간 사이드를 역수로 잡 아 오라 클록으로 감싸인 머신 아더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가고일의 날개가 펼치는 중력장에 의해 공간 압축이 중화된 오라 클록은 맥없이 반물질 커터에 잘려나간다. 그렇게 머신 아더의 모든 방어를 해지한 티폰은 가인 일행이 타고 있는 콕 피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맙소사! 패턴 핑크의 싱크로를 풀어야 해! 강제 차단 실시! 시더의 사념이 비명처럼 채영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직후, 간발의 차로 오 퍼레이터 팀이 잠들어 있는 피스 대원들의 육체에 전기 충격을 보낸다. 그러자 티폰은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듯 무자비하게 머신 아더의 브레스트 아머와 왼쪽 승모근을 찢어발겼다. 우드드드득 ―아악! 육체가 깨어남으로서 자아를 되찾은 유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만약 그녀가 싱크로를 풀지 않고 그대로 머신 아더와 동화되어 있었더라면 방금 전의 환 지통으로 쇼크사를 일으켰을 것이다. 가인은 어둠 속의 콕피트에서 눈을 뜨며 떨리는 이빨을 악다물었다. 다시 한번 천공뇌정권을 사용하려 했지만 그전에 콕피트가 파괴될 것 같아 엄두 를 낼 수 없었다. 한시영! 이대로 우리를 콕피트 채 제거할 셈인가! 촤아아아악 티폰은 근육 섬유 밑에 가려져 있던 콕피트를 손으로 잡아 그대로 밖으로 뜯어냈다. 저마다 정신을 차린 피스 대원들은 PET용액에 잠긴 몸을 일으키 며 금속관에서 빠져나온다. 가인과 코마히코는 중심을 잃는 마리를 붙잡고 시민은 유리를 감싸안았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은채 그저 몸을 떠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 들의 생사는 콕피트를 쥔 티폰의 손에 달려 있었다. " 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 가인은 행여나 콕피트가 으스러질까봐 질풍의 벽을 일행의 주위로 전개했다. 하지만 공간 압축마저 중화시키는 가고일의 날개가 상대에게 있는한 차원진 동 쉴드라 한들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티폰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든지 자신들을 압사시킬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우 티폰은 콕피트의 일행을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들을 바닥에 내려놓았 다. 뜻밖에도 시영은 가인 일행을 순순히 풀어주었던 것이다. 살려주는 건가? " 한시영, 대체 너는……! " 시민은 유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티폰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도통 자 신의 형제였던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는 머신 아더가 목표였던 걸까? 우리는 안중에도 없이? ―후. 시영은 지상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민의 눈길을 느꼈는지 작게 웃음을 터 뜨렸다. 그리고 티폰을 조종하여 볼품없이 망가진 머신 아더의 동체를 들어올 린다. ' 이것으로 끝이다, 피스메이커. 이제 너희에게는 추락하는 일만 남았어. 밀 랖으로 만든 날개로 얼마나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냐! ' 시영은 피스 카민 마유빈을 통해 공유된 피스 화이트의 사념에게 지시했다. ―에레노아 양. 마무리를 부탁드립니다. ―예, 마스터. 류바 에레노아는 언제나처럼 짧게 답하며 자신의 능력을 전개했다. 그러자 패턴 화이트에 반응한 티폰의 그림 리퍼가 다시 한번 초고진공 커터를 생성해 낸다. ―생전에도 올림포스에게 이용당했던 팔라스여! 네가 잃어버린 안식을 지금 너의 혈육이 되찾아주마! 시영의 외침에 티폰이 들고 있던 머신 아더의 동체를 하늘로 집어던졌다. 그 리고 늘어난 사신의 채찍을 그대로 자신의 형제에게 휘두른다. ―The Canine of a north wind! 패턴 화이트가 만들어낸 용권풍이 머신 아더의 동체를 휘감는다. 그 용권풍 의 끝자락으로 티폰의 초고진공 커터가 연결되더니 이윽고 모든 것을 갈가리 찢는 진공파의 소용돌이가 완성되었다. 거기에 그림 리퍼 본래의 능력인 연쇄 중력파가 초고진공 커터를 타고 흐르 자 이 삭풍(朔風)의 어금니는 훌륭한 하나의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로 탈바 꿈하게 된다. 카카카카카칵 아포칼립스의 소용돌이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혼돈으로 되돌리며 그 부 피를 줄여갔다. 그렇게 소용돌이가 사라질 때까지 가인 일행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 다. 아니, 열 수 없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지켜볼 뿐이었다. ' 아아. ' 지금껏 그들과 함께 싸워온 피스메이커의 거인, 그들의 전우였던 몬스터 슬레이어, 머신 아더의 최후를. ―그럼 대단원 때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검은 거인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갔다. 가인은 그런 시영의 퇴장을 허탈하게 바라보다가 중얼거린다. " 대단원……이라고. "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지금의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며칠 뒤 가인은 알게 된다. 시영이 언급한 대단원. 그것이 세계의 존망을 결정하는 최후의 시(時)를 말했던 것임을. 먼 옛날, 인류가 지금의 테라가 아닌 노아였을때. 존재의 법칙을 깨달은 인류 노아는 범해서는 안될 원죄를 범하게 된다. 바로 신의 영역을 넘본 것. 차원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을 낳아준 대지의 여신을 유린했 던 것이다. ' 바르의 별. ' 세계의 의지 가이아마저 속박시킬 수 있는 거대한 오리하르콘 제어구. 이것 을 이용해 노아는 금지된 차원 도약의 비밀을 깨닫고 신들의 황혼, 라그나뢰 크를 일으키기에 이르른다. ' 그러나 문명은 피고 지는 법. ' 노아의 만행을 보다 못한 가이아는 새 인류 테라에게 자신의 힘, 오라를 내 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흐트러진 법칙을 바로 세우게 한다. 그리고 자유를 되찾은 가이아는 그동안 자신을 구속해온 오리하르콘 제어구 를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하늘로 띄워 보냈다. ' 그리하여 아무 것도 없던 하늘에 달이 생겨나게 된다. ' 노아가 판게아에 남긴 몇 안되는 유물 중 하나, 바르의 별은 그렇게 수십 세 기가 넘는 세월동안 줄곧 하늘에서 테라의 주위를 멤돌고 있었던 것이다. " 크카카카― 카카카카캇! " 라트는 달의 정기를 끌어모으며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은빛의 털은 날카로운 오리하르콘 칼날로 변해간다. 그렇게 변화된 육체는 그 의 오라를 끝없이 상승시켜주었다. AI컴플리트 세트가 피스 대원들의 오라를 증폭시켜주는 매개체였다면 라트의 오리하르콘 육체 또한 그의 오라를 증폭시켜주는 훌륭한 매개체였다. 거기다 오늘은 바르의 별이 판게아에 근접한 만월날. 라트의 육체는 이 강해진 만월의 인력에 힘입어 오리하르콘 특유의 셀프 라 이팅과 견고해진 오라 쉴드로 최강의 방어력을, 활발해진 중력장 컨트롤로 최 강의 공격력을 가지게 된다. " 끝내주는군! 이렇게 모든 힘을 개방해낸 것은 이번이 두번째야! " 첫번째는 작년 진우와의 싸움 때! 하지만 그때는 아직 오라 능력을 각성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만월의 힘에도 불구하고 완패당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 이런 상태에서 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지! " 포효하듯 소리지르며 라트는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진우는 피투성이가 된 몸 을 끌어안고 간신히 기수식을 취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라트의 움직임은 그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제길. 몸 상태가 엉망이지만 어떻게든 상대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우우우웅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되는 착각이었다. 진우를 향해 찔러오는 라트의 주먹,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중력장의 집합체가 응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콰지지지직 진우가 몸을 피한 자리로 라트의 주먹이 내리꽂히자 소형의 크레이터가 생겨 난다. 그 무지막지한 위력에 진우는 혼미백산하며 라트에게서 몸을 물렸다. 저 정도의 중력장이라면 아무리 공격을 피한다고 한들 그 여파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만신창이가 된 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중력장 에 스치기만 해도 내장이 뒤흔들릴 것이다. 이래서야 화경을 통한 접근전도 펼칠 수 없잖아! " 크크크크! 왜 그러나! 아까 날 때려눕힌 기세는 어디로 갔지! " 우웅― 우우우웅― 라트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듣기만 해도 섬뜩한 중력장의 공명음이 울 려퍼진다. 진우는 가속으로 간신히 공격을 피해내며 식은땀을 흘렸다. 단지 피하는 것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한 이 기분이라니! 같은 공격이지만 위력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긴장의 격 또한 달라진다. ' 우욱! ' 순간 진우는 가속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머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며 목과 코로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올랐다. " 우웩― " 참지 못하고 피를 한움큼 토해낸다. 진우의 코에서도 핏줄기들이 뿜어져나왔 다. 피의 색깔은 선홍색. 죽어버린 피도 아니고 깨끗한 피가 몸속에서 역류하 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었다. 뭔가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고 있다고! " 크악. 컥. 카아아악! " 진우는 정신 없이 피를 쏟아내며 눈물을 흘렸다. 라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다시 가속을 사용했던 것이 상태를 악화시킨 모양이다.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 만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두통이 무엇보다 심각했다. 정말 뇌가 녹고 있는 것이 아닐까? 뇌의 시계주파수가 다 타버린게 아닐까? " ……뭐야. 거기까진가? " 라트는 진우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실망했다는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녀석에게서 AI슈츠를 빼앗지 않는건데. 이렇게 싱겁 게 결판이 나버릴 줄은……. " 크― 뭐냐, 피스 그린? 네 녀석은 겨우 그정도인 거냐? 그 정도로 쓰러지 겠다는 거냐? "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화가 났다. 라트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진우에게 다가갔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해진 힘을 써볼 기회도 없이 싸움이 끝나버려서? 그래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멋대로 녀석이 쓰러지려 하니까 맥이 빠져서? 그런건가? " 네놈이 자랑하던 가족애는 어디로 갔나? 지켜내겠다고 큰 소리를 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쓰러지려는 거야! " 라트는 이를 갈며 진우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그리고 예배당의 문 앞으로 그 를 거칠게 집어던진다. 그 바람에 진우는 피로 물든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다 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라트는 그 앞에서 예배당의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 자! 보라고! 저 안에 네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 던 아내와 딸이 있다고! 불꽃 속에 갇힌채 서로를 부둥켜 안고 떨고 있을 모습이 보이지 않나? 살려달려고 울부짖는 가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 진우는 동공이 풀린 눈으로 예배당의 문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저 안에 미연이와 하나가……. 저 안에……. " 보여봐라! 네 녀석의 가족애라는 것을! 그 가족애 때문에 내 모든 것을 빼 앗아가지 않았나! 내 인생을 망쳐버리지 않았나! 그래놓고서 이런 식으로 포기하겠다고? 편해지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 라트는 신경질적으로 옆의 벽을 후려쳤다. 그리고 마치 애원이라도 하는 것 처럼 호통을 친다. " 일어나! 당장에 일어나! 일어나서 구해보란 말이다! 네 가족들을 구해내! 네 눈 앞에 있는 날 쓰러뜨려봐! 어서! " 무력하게 가족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것을 지켜보기만 해야했던, 도망치는데 전력을 다해야 했던, " 어서! " 너도 그런 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거냐, 피스 그린! " 으으으……! " 진우는 이를 악물며 라트를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로 녹색의 빛이 섬광 처럼 피어올랐다. 좋아, 라트. 내 모든 것을 걸어주마. 내 모든 것을 걸고 널, ' 쓰러뜨려주겠어! ' 치이이이― 치이이이잉― 순간, 진우의 몸이 제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에 라트는 환희하며 소리 쳤다. " 과연! 그래야 피스 그린이지! " ―으우아아아아압! 진우의 처절한 기합 소리가 공간을 타고 울려퍼진다. 그는 녹색의 섬광이 되 어 그대로 라트에게 달려들었다. 라트는 그대로 직진해오는 녹색의 섬광에게 중력장이 실린 주먹을 휘두른다. 쩌저저저저정 마치 공간이 찢어지는 것처럼 왜곡되며 대기를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진 우는 라트에게서 튕겨지듯 뒤로 물러나 성당의 정원에 내려선다. 정면으로 중 력장에 뛰어든 것치고서는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반면 라트는 진우를 향 해 휘둘렀던 오른손이 어깨까지 날아간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진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런 라트를 노려보았다. ' 뭐지? 어떻게 된 거지? ' 방금 내가……AI슈츠 없이 슈팅스타를 사용해낸 건가? 가속의 충격파로 중력 장을 막아낸 거야? 그렇게 놀라워 하는 진우에게 라트는 웃음을 터뜨리며 예배당의 문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날아간 오른손은 놀라운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바르의 별과 공명하는 오리하르콘 육체가 체내에 기록된 정보를 토대로 순식간에 셀프 라 이팅을 일으켰던 것이다. " 크크크크! 이제야 좀 할 마음이 생긴건가! 기쁘다, 피스 그린! " " 큭. " 진우는 라트의 회복력에 인상을 찡그리며 칠성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방금 전 어떻게 슈팅스타를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사용해보라면 사용 할 자신이 없었다. 가뜩이나 몸의 붕괴도 심화되는 판에 그런 위험한 도박에 또 목숨을 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눈 앞의 라트에게서는 슈팅스타의 데미지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 다. 만월의 오라 능력자인 그에게는 어쩌면 물리적인 타격이 조금도 통용되 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 진우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제 그 방법에 모든 것을 걸어볼 셈이 었다. ' 제발……그때까지만 버텨다오! ' 그는 자신의 몸에게 부탁하며 라트에게 소리쳤다. " 덤벼라, 라트! 너에게는 일분 일초가 아깝다! 당장에 쓰러뜨려주마! " " 켓! 다 죽어가던 녀석이 건방진 소리를! " 다음 순간, 다시 한번 녹색과 은색의 섬광이 격돌한다. 앞의 접전에서 라트의 주먹이 내포한 중력장의 피해 범위를 몸으로 깨달은 진우는 최대한 라트와의 거리를 벌리지 않으며 화경을 펼쳐냈다. 어차피 화 경이란 상대의 투기를 오감으로 느끼는 수 읽기 전법. 상대의 수를 알아낸 이상 거기에 맞춰서 대처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진우는 아슬아슬하게 중력장의 폭풍 속을 헤쳐가며 기회를 노렸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올라갔다고 해도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 그대로인 이상, " 무용지물이라고! " 퍼어어엉 진우는 비어있는 라트의 배에 가차없이 발경을 내찔렀다. 맞는 이의 영체마 저 화끈해지는 슬로우 임펄스 펀치였다. 아무리 오리하르콘으로 겉을 단단하 게 보호해낸들 그 안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 경력의 전달을 막을 수 없 다! " 크핫! 소용 없어! " 하지만 라트는 내부의 폭발을 오리하르콘의 셀프 라이팅으로 순식간에 잠재 우며 진우를 향해 중력장을 내찔렀다. 진우는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해내며 재차 주먹을 라트의 가슴에 쑤셔넣는다. 퍼어어엉 폭음! 또 폭음! 진우는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지 연달아 슬로우 임펄스 펀치 를 사용했다. 그런 오라의 남용에도 불구하고 진우의 두 눈은 실명되지 않았 다. 앞에서 슈팅스타를 사용할 때 뭔가가 변해버린 건지 패턴 그린의 오라는 지극히 안정화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든지 뇌의 시계주파수를 늘려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진우는 그야말로 라트의 공격을 신들린 것처럼 피해내며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어어엉 몇번이나 슬로우 임펄스 펀치를 얻어맞았는지 모른다. 라트는 그때마다 정신 이 아찔해지는 충격을 느끼며 감탄했다. 피스 그린, 이놈은 도대체 불사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떻게 죽기 직전의 몸으로 여기까지 해낼 수 있지! " 크랴아아아앗! " 라트의 오리하르콘 발톱을 세운 뒤돌려차기가 날카롭게 진우를 후려친다. 그 러나 후려치는 것은 눈의 착각. 진우는 녹색의 잔상만을 남긴채 어느새인가 다시 라트의 정면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의 주먹은 여전히 라트의 배만을 노리고 있었다. 같은 곳을 대체 몇번씩이나 공격할 셈이냐! 오오오오오 라트는 진우의 수법을 눈치채고 미리 체내에 중력장을 응축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진우의 주먹이 다시 자신의 배에 닿으려는 찰나, 투하아아아악 모아두었던 중력장을 일제히 입으로 쏘아낸다. 그러자 사람의 몸 하나는 통 째로 삼킬듯한 크기의 입자포가 진우에게 내리꽂혔다. " ……! " 그러나 입자포는 진우의 몸을 스치지도 못했다. 진우는 한발 먼저 칠성권 승 룡퇴로 라트의 턱을 가격하여 입자포의 방향을 돌려냈던 것이다. 라트는 돌아 가는 얼굴로 진우를 노려보았다. 아직이다! 아직이야! '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 ' 퍼어어엉 라트의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진우의 혼신을 다한 슬로우 임펄스 펀치가 또 다시 라트의 배를 후려친 것이다. 이번만큼은 라트도 펀치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 허어, 허억……. 으으, 아아, 아아아악! " 진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하늘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마치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려는양 목이 떨어져라 울부짖었다. 그러다 힘이 다했는지 털썩 제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크으윽. 반면 슬로우 임펄스 펀치에 난타당한 라트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우의 사력을 다한 연타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처는 너무나 손쉽게 아물고 있 었다. 역시 바르의 별로 강화된 지금의 그는 불사신에 가까웠다. " 크후― 후우― " 그래도 역시 충격이 크기는 컸는지 라트는 현기증에 머리를 감싸안는다. 아 무래도 오리하르콘의 셀프 라이팅으로도 미처 중화시키지 못한 충격이 있었나 보다. " 크크크. 역시 대단하군, 피스 그린. 하지만 날 쓰러뜨리기에는 부족해! 네 놈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한들 내 철벽의 갑옷은 부서지지 않아! " 라트는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여전히 인상을 찡그렸다. 크으.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거지? 아직 회복이 덜 된 건가? 그럴리는 없을 텐데……. " 아니. 네가 자신하는 갑옷은 이미 부서졌어. " 진우는 현기증으로 괴로워하는 라트에게 그렇게 단언했다. 라트는 무슨 소리 를 하느냐고 반박하려다가 자신의 칠공(七孔)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깨닫 고 안색이 굳어졌다. 이건! " 칠성권(七星拳) 제 4의 발경, 문곡(文曲). 상대의 주심을 공격하는 심경 (心經)이지. " 진우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그는 라트에게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음을 깨닫자 그 즉시 슬로우 임펄 스 펀치에 심경을 실어 라트의 영체를 줄곧 공격해왔던 것이다. 라트는 설마 진우의 공격이 영체를 공격하는 것일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기 에 자신의 재생력을 믿고 모든 펀치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영체의 카르마 에 너지가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다. " 영체까지 오리하르콘으로 되어있는 것은 아니겠지? 내 승리다, 라트. " " 크, 크흐흐, 흐흐흐흐! 설마, 설마 이 육체에 그런 약점이 있었을 줄은… …. " 라트는 기가 막히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정이 고갈된 그의 육체는 급속도 로 죽어가고 있었다. 생명은 단순히 육체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육체를 움직이는 정 신. 그 정신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자,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 정신의 생명이 다한 이상 육체가 그 뒤를 잇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 대단한……녀석. 멋지다, 피스……그린. " 그 말을 끝으로 라트의 몸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수인화가 풀린 그의 육체는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진우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순간, 미연과 하나에게 생각이 미치자 다 급히 성당을 돌아보았다. 이런. 늦은 것은 아니겠지! 쿠구구구구 그때 불타오르던 성당이 소리를 내며 밑으로 꺼져내렸다. 미연과 하나가 있 는 예배당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진우는 그 광경에 안색이 새파래졌다. 맙소사! " 미, 미연아! 하나야! " 그는 비명처럼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당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고 했다. 그러나 앞의 전투에서 한계에 이른 그의 육체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 고 있었다. 특히 슬로우 임펄스 펀치를 남발한 그의 오른손은 뼈가 남김 없이 으스러졌는지 연체 동물처럼 덜렁거린다. 진우는 거의 굴러가다시피하여 예배당의 문에 다다랐다. 아직 늦지 않았어! 아직! ' 지금이라도 구해낸다면! ' 진우는 뜨겁게 달아오른 문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려고 했다. 그때 그런 그 의 행동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 쓸데없는 짓……하지 마라. " 라트였다. 그는 은발을 땅에 늘어뜨린채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진우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의 말에 진우는 버럭 소리쳤다. " 쓸데 없는 짓이라니! " " 그 안에는……아무도, 없단……말이다. 들어가봤자 헛수고……라는 거지. 크크, 크크크크. " 라트는 다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진우는 그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뭐라고……. " 아, 아무도 없다고? 저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거야! " " 크크크, 크크크크크. " 진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라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모습에 답답함을 느 낀 진우는 비틀거리면서도 라트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 대답해! 미연이와 하나는, 내 가족들은 어떻게 했어! " " 흐, 흐흐……. 데리고…… 있자니 너무, 시끄럽게 굴길래……. " " 뭐, 뭐라고! " 진우는 일순 눈 앞이 깜깜해졌다. 벌써, 벌써 죽여버렸단 말이냐! " 자동차 트렁크에……가둬두었지. 성당 입구에, 주차해놓은……. " 진우는 반사적으로 성당의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성당에 들어 오기 전에 검은색 승용차를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진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재차 물었다. " 살아는, 있는 거냐? " " 아아……. 내일 아침까지 꺼내주지 않으면……질식해서 죽겠지만. " " ―! " 진우는 너무나 안도해서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야말로 구사일생.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다.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17년전부터 찾지 않 았던, 아니 찾을 수 없었던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가족들을 살려주셔서. ' 진심으로……감사드립니다. ' 선한 사마리아원의 가족이 죽었을 때, 진우는 신을 부정했었다. 신 같은 건 없다고, 그런 건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울 좋은 우상일 뿐이라고. 그렇게 줄곧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족의 무사함을 알게되자 대번에 다시 신을 찾는 간사함이라니! ' 아니. ' 간사하다고 해도 좋았다. 변덕스럽다고 해도 좋았다. 알량한 종교관이라고 해도 좋아! 어쨌든 감사드리고 싶었다. 가족들을 무사하게 지켜준 그 누군가에게 감사 를 드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도무지 발산해낼 수 가 없다! " ……. " 그러다 정작 가족을 죽이지 않은 이가 라트라는 것을 깨닫고 진우는 곤혹스 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족을 납치한 장본인에게 감사를 표할 수는 없지 않은 가? 진우는 다만 라트에게 물었다. " 어째서……죽이지 않은 거지? " " 크, 크크크! 웃기지도 않는 질문이군. 그럼 내가……죽이기를 바랬나? " " 그, 그럴리가 없잖아! " 진우는 붉어진 얼굴로 라트를 쏘아보았다. 라트는 그런 진우의 모습에 정신 없이 킬킬대다가 곧 상념에 빠졌다. 한 소년이 있었다. 자신의 가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가족을 너무나 소중히 여겼기에, 그랬기에 그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았던 소년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행복은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산산히 부서 져나갔다. 너무나 손쉽게 빼앗겨 버렸다. 그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한 소년은 결국 복수에 매달리기로 결심했다. 복수만이 그의 상실감을 채워줄 유일한 탈출구임을 의심치 않으며,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갔다. 그렇게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여갔다. ' 왜 죽였어! 왜 죽였어! 왜! '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던 것은 그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자신의 일을 방해한 인간의 가족을 죽였을 때, 그리고 그런 가족들의 시신 앞에서 울부짖는 소년의 모습을 보았을 때, ' 살려내! 살려내란 말이야! 모두를 살려내―! ' 가슴이 내려앉았다.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어디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거냐고? 왜 저 소년이 자신을 향해 분노하는 거냐고? ' 으아아아아―! ' 저 모습은, 저 아이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바로 나다.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서 비통해하던, 무력하기 짝이 없던 어린 시절의 나. ' 네 말대로야. 신은 없어. 어려울 때 부르짖는 신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거 야. ' 그러나 녀석은 달랐다. ' 하지만 신을 믿었던 마음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지. ' 나와는 확실히 달랐다. 가족을 잃고서 힘없이 도망쳤던 나와는 달리, ' 주위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 자신의 꿈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 그 모든 것을 바래왔던 마음까지 거짓인 것은 아니야. 의미가 없었 던게 아니라고. ' 녀석은 나를 쓰러뜨렸던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나를 쓰러뜨렸 어! 나처럼 주저앉지 않고, 나처럼 자포자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 아무리 신이 없다 해도……네놈에게 그걸 깨뜨릴 권리는 없단 말이닷! '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내가 할 수 없던 일을 녀석은 해냈어! ' 피스 그린. ' 행복을 빼앗기고 그대로 절망에 빠졌던 나. 행복을 빼앗기고 다시 한번 행복을 찾아낸 녀석. ' 넌 예전에도 졌어! '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어. 나와 다를 바가 없는 구렁텅이에서 왜 녀석은 빠져나올 수 있었고 왜 나는 빠져나오지 못했는가? 어째서 녀석은 웃을 수 있고 난 웃을 수 없는 거야? 왜 나는 행복을 되찾지 못했지? ' 왜! ' 인정할 수 없었다. 녀석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다. 나와는 다른 길을 찾아낸 녀석을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해서도 안돼! ' 만약 녀석을 인정해버리면, ' 그러면, 그러면 내 인생은 뭐란 말인가? 망가질 때로 망가져버린 내 인생은? 복수만이 내 상실에 대한 보상이라고 믿어온, 그래서 또 다른 행복을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 녀석을 쓰러뜨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의 내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기 위해, ' 너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주겠다. 똑같이 모든 것을 빼앗아주겠어! ' 다시 한번 네 행복을 빼앗아주지! 그때도 넌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까? 또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어! ' 지켜보겠다. ' 네가 옳았던 건지, 내가 옳았던 건지, ' 지켜보겠어! ' 반드시……증명해보이겠다. " 크크. "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녀석이 날 이해해줄리는 없겠지. 어차피 이해 받을 생각도 없었고. 라트는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진우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 죽이는 것조차……귀찮았던 것 뿐이다. 어차피 내 목표는……처음부터 네 놈의 목……숨. " 뭐, 이 말도 사실이긴 하지. 라트는 진우의 구겨지는 표정에 더욱 크게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웃음 소리 가 나오지를 않았다. 웃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죽어가고 있었다. ' 어쩌면 나는……. ' 라트는 희미해져가는 의식 사이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진우에게서 눈을 떼 지 않았다. ' 녀석이 날……쓰러뜨려주기를……기대했던 것이 아닐까? '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가능성, 또 다른 나의 모습. 그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 행복을 지켜나가는 것을……, ' 단지 그것이 보고 싶었던게 아닐까? '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라트는 두 눈을 감았다. 패턴 실버의 오라 능력자 라트 발렌시아는 그렇게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 야 간신히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다만 그가 그런 생각을 품고 죽었다는 것은 그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 ……알 수 없는 녀석. " 진우는 천천히 라트에게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싸움은 끝났지만 이대로 계속 있다간 그도 라트의 뒤를 따라가 버릴 것 같았다. 라트의 죽음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진우의 몸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던 것이다. 여전히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라트에게 당한 상처에서도 출혈이 계 속되고 있었다. ' 포션만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이런 상처쯤은……. ' 진우는 다시 한번 포션의 절실함을 느끼며 힘겹게 성당의 입구로 걸어갔다. 라트의 말대로라면 그의 가족은 입구에 주차된 차의 트렁크에 있을 터였다. 다들 목숨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이런 무서운 일을 당해버렸으니 얼마나 겁 에 질렸겠는가? 특히 나이 어린 하나는? 진우는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안심시켜주고 싶었기에 자신의 몸도 생각하지 않고서 걸음을 서둘렀다. 후우우우우 그때 죽어버린 라트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차갑게 굳은 라트의 시신, 그 시신에서 뜨거운 불꽃이 치솟았던 것이다! 푸화아아아아악 마치 폭죽처럼 화려하게 터져오르는 불기둥에 진우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 보았다. 폐성당의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정원의 모든 식물들이 불꽃에 닿지 도 않았건만 일제히 불타오른다. 불바다가 되어버리는 풍경. 진우는 자신을 포위하듯 번져가는 불꽃의 세례에 몸을 떨었다. 그는 이미 이 불꽃을 한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바로 작년, 라트를 쓰러뜨렸을때 퍼져나온 살라만더의 불꽃! 리리스가 라트의 패배를 염두에 두고 그의 몸속에 심어뒀던 카르마 에너지의 집합체! 시영이 라트를 부활시켰을때 덩달아 이 불꽃의 심지도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우우우우우 불꽃은 빠른 속도로 성당을 뒤덮어갔다. 진우는 그 지독한 열기에 제대로 눈 도 뜨지 못하면서 불꽃의 범위를 확인했다. 불꽃은 다행히 성당을 둘러싼 상태에서 멈춰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 이 폐성당은 산지 근처에 있었기에 불꽃의 열기가 더 거세지다간 대번에 산불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다간, ' 어째서 다 끝난 마당에 이런 일이! ' 성당 입구 쪽에 있는 미연과 하나도 영락없이 타죽을 것이다. 그전에 어떻게 든 해야한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 가속으로 불길을 뚫고나가 미연과 하나를 구한다면? '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허나 진우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이 불길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 이 불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진우와 가인의 오라 쉴 드로도 그 열기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뒤늦게 마리와 시 민, 유리가 달려와줬기에 망정이지……. 아마 저 불꽃은 단순히 물리적인 열기 뿐만이 아니라 영체에까지 영향을 미 치는 것 같았다. 쿠구구구구 그때 불꽃에 뒤덮였던 성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열기가 성당을 지탱시켜주 던 구조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초읽기! 진우는 튀어오르는 불꽃과 연기에 몸을 낮추며 힘겹게 숨을 몰아 쉬었다. 불 꽃에 산소가 타고 있는지 호흡하기가 힘들어졌다. ' 빌어먹을. 내가 입에서 바람을 내뿜는 강철의 성도 아니고. 이런 불꽃을 무슨 수로 끄라는 거야? ' 진우는 이런 상황에서도 실없는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기가 막혔다. 자연적 으로 불이 꺼질 방법을 생각하다보니 비에 이어 바람에까지 생각이 미쳤던 것 이다. 여유도 보통 여유가 아니로군. 하필이면 바람이라니……. 그러다 숲에 불이 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바람? ' 바람으로……불을 끈다? ' 그것이 꼭, 그렇게 불가능한 일일까? ' 진우는 문득 활로를 찾아낸 것 같았다. 그래. 바람이다! 바로 그거야! ' 토네이도(Tornado)! ' 회오리 바람! 큰 파괴력을 가졌으면서도 피해폭은 넓지 않은 선형풍(旋衡風). 바람의 기압 차로 바깥쪽 진로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여 상승 기류로 날려보내는 회오리 라면 확실히 이 화재를 제압할 수 있다. 주위에 불이 번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어! 그리고 진우의 가속이라면 인위적으로 전향력이 없는 회오리를 일으키는 것 이 가능했다. ' 단지, ' 문제는 두가지. 토네이도의 풍속은 대략 초속 100미터. 이는 음속보다는 못하지만 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위력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회오리를 일으키려 면 진우의 가속이 그 정도는 넘어야 한다는 건데……. 이는 AI슈츠를 착용하 지 않은 그로서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회오리를 만들려면 장시간의 가속이 필요했다. 슈츠를 착용한 상태에서도 패턴 그린의 지속 시간은 30초 정도. 하물며 미착 용 상태에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장시간의 가속은 절대로 무리다! " ……. " 그리고 두번째 문제. 회오리 바람은 내부의 공기가 팽창하는 압력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하늘로 날려보낸다. 그것은 곧 성당 밖에 있는 미연과 하나도 회오리에 휩쓸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십중팔구 휩쓸려 올라갈 것이다.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 화재를 진압하려는 것인데 정작 그녀들이 위험에 빠져 서야 의미가 없지 않은가? ' 아니. 방법은 있어. ' 오라의 완벽한 이미지메이킹. 능력자의 의지로 이미지메이킹이 영향을 미칠 대상을 제한해낸다면 미연과 하나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 어차피 오라란 의지의 힘이기에 의지에 반하는 일은 투영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 결국 이 난관을 헤쳐가려면, ' AI슈츠도 없는 상태에서 장시간에 걸쳐 가속을 해야 한다……라는 건가. 그 것도 미연과 하나에게는 오라의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진우는 앞에서 자신이 한 말을 취소했다. 패턴 그린은 현존하는 오라 능력들 중에서도 가장 불완전한 능력이었다. 그 런 패턴의 소유자에게 이런 세세한 오라 컨트롤을 바라다니. 이거야말로 불가능이 아니면 뭐가 불가능이라는 거야? ' 안돼. 역시 이 방법도 아니야. 뭔가 더 좋은 수를, 더 가능한 방법을 찾 지 않으면. ' 치이이이익 " 으윽! " 진우는 자신의 옷과 머리카락이 타기 시작하자 황급히 생각을 멈췄다. 가능 이고 불가능이고 이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쪽에 모든 것을 거는 수밖에! ' 어쩔 수 없나! ' 진우는 쫓기듯이 몸을 낮춰 크라우칭 스타트를 취했다. 체중의 절반을 두손 에 걸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앞다리에 두어, 언제든지 앞으로 튕겨나갈 수 있 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진우는 이글거리는 불꽃 너머로 보이는 성당의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미연아……. 하나야……. ' 해낼 수 밖에 없어! ' 비록 내 몸이 부서진다 해도!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해도! " 지킨다! 반드시! 반드시! " 진우는 약해지려는 자신을 다그치는 것처럼 몇번이고 소리쳤다. 지금 이 순 간, 그의 뇌리에는 그의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하나 하나 스쳐가고 있었다. 아가다 수녀님. 토마스. 시메온. 선한 사마리아원의 모두들. 그리고……, " 이번에야말로 나는―! " 그 외침과 동시에 진우는 불꽃의 근원지인 라트를 중심 삼아 반시계방향으로 내달렸다. 처음에는 제대로 중심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그의 몸은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는 녹색의 잔상을 흘리며 음속으로 접어든다. 그러자 녹색의 토네이도가 형성되며 일대에 사이펀(siphon)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회오리가 주변에서 끌어들인 공기를 위쪽으로 분출시킨 것이다. 우오오오오 음속의 바람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사납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서서히 토 네이도의 근처에 있던 불길들이 대기의 흐름을 따라 빨려들어간다. 화재로 무 너진 건물의 파편들도 그 뒤를 따랐다. 심지어는 정원에 심어진 나무들까지 뿌 리를 들썩이며 꺽여나갈 정도. 옮겨 심은지 얼마 안된 묘목들은 진즉에 바람에 몸을 싣고 있었다. 가속 중에 그것을 지켜보던 진우는 자신의 생각대로 화재가 진압되어가자 속 으로 안도했다. 무엇보다 가장 신경쓰고 있던 대상의 제어가 확실히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미연과 하나가 타고있는 자동차는 토네이도의 여파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편 AI슈츠 없는 가속 임에도 불구하고 진우의 몸은 아직까지 별 다른 이상 을 보이지 않았다. 라트와의 전투 때 슈팅스타를 사용했던 것도 그렇고 지금 의 가속도 그렇고……. 혹시 패턴 그린의 이미지 메이킹은 벌써 완성된 것이 아닐까? ' 그래. 어쩌면 나는 드디어, ' 내 오라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치이이이잉 그때 불길한 공간 마찰음이 진우의 귓청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들리기 무섭 게 진우는 예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두통!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가루로 변해가는 감각! 진우는 불길함에 사로잡혔다. 설마, 설마 가속의 부작용이 이제서야! ―으으으윽! 진우는 영체를 쥐어짜이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가속 중의 비명이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공간의 틈 사이로 울려퍼진다. 뼈와 근육이 부서지는 물리적인 아픔과는 달랐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은 위태함, 세상에서 도태되어 간다는 두려움. ―끄아아아악! 소멸의 느낌이었다. 죽음의 느낌이다! 이토록 확연하게 느껴지는 '종말'이라 니! 진우는 붉은 색에서 점점 검은 색으로 변해가가는 세상의 모습에 예감했다. 이대로 실명이 되는 순간, 시야가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이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크헉, 카아― 가아아악! 진우는 당장에라도 오라 능력의 전개를 멈추고 싶었다. 너무도 괴로웠다. 이 아픔은 현세의 것을 초월한 지옥의 그것에 가까웠다.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치이이이잉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오라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직 불길이 거둬지지 않은 것이다. 미연과 하나를 구해내지 못했어! 진우는 말 그대로 피가 거꾸로 솟는 아픔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가속을 전개 했다. 그러자 가속에 대한 환상인지 수 많은 옛 기억들이 눈 앞으로 펼쳐진다. 어쩌면 이것이 사람이 죽기 직전에 볼 수 있다는 인생의 플래시백 현상……. 그 과거 속에서 진우는 언제나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던 자신의 모 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얻고, 때로는 슬퍼하다가 때로는 기뻐하다가, 그렇게 똑같은 일을 질리지도 않고 반복해온 자신. 지킨다라는 것에 병적으 로 집착해온 남자의 최후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 나는 결국……이루지도 못할 꿈을 꾸면서, ' 미안. 미연아, 하나야. 나는…… 이 정도가 한계인 놈인가 보다. ' 한계를 뛰어넘은 녀석들은 강해진다. 희생을 강요받아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지. ' 역시 사부님처럼 될 수는 없었어. ' 바보제자,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지? 한계를 넘으려 발버둥치겠느냐, 아니면 한계를 그어놓고 안주하겠느냐? '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가진 한계를. 모두를 지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을. 그러면서 고집을 부렸어. 철 없는 꼬마가 히어로를 동경하는 것처럼, ' 그렇게 줄곧……사부님을 흉내내오기만 했어. ' 진우는 눈물을 흘렸다. 아니,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 다. 음속의 세계에서는 육체의 반응이 감정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니까. 아 무리 슬퍼도 눈물샘이 자극되는 것은 가속이 끝난 뒤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우는 분명 서럽게 울고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어린 아이마냥 소 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또 그것을 넘지 못함을 알았기에 흘리는 설 움의 눈물이었다. 회한의 눈물이다. ' 내가 지켜줄 거야! 다른 사람에게 미연이를 맡길 순 없어! ' 그래도, ' 이제와서 포기할 수는……없어. ' 흉내내기에 불과할지라도, 어리석은 자기 만족에 불과할지라도, '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아. '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어. 이제와서 나는……. 나에게는……. ' 미연아. 하나야. ' 내 소중한 가족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들만큼은, ' 너희들만큼은 반드시― ' 가족들과 함께 돌아오세요.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속에 녹아들려는 순간, 이미지메이킹에 동화되려는 순 간, 기억해냈다. 헤어지기 직전 그 녀석이 자신에게 남겼던 말을. 그 녀석과 했던 마지막 약속을. ' 가족들과 함께 돌아오세요. 그러지 않으면……절대로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 ' 돌아오라고, 함께 돌아오라고 했다. 구해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함께 돌아오라고……. ' 죽는다고?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보고 그런 소리를 해! ' 그래. 그런 말도 했었지. 녀석에게 그런 말도 했었어. 그런 주제에 나는, ―끄으으으, 뭘……포기하려는 거냐. 뭘 절망하려고 했던 거야? '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 녀석이 말한대로잖아. 할 수 밖에 없는 거잖아! 한계를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력하 는 것 뿐이었어. 그저 앞으로 달리는 것 뿐이었어. 그런데 이제와서 뭘 따지는 거야? 뭘 계산하고 있는 거야? ' 유가인……! ' 그 녀석을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는 거냐? 이대로 이렇게 꼴사나운 최후를 보여줄 거야? ―으으으으, 정진우! 넌 그것밖에 안되는 녀석이었어―? ―으아아아아압! 순간, 꺼져가던 진우의 의식이 되살아났다. 그러자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녹색의 빛이 세상을 밝혀낸다. 콰콰콰콰콰 어쩌면 기적이라는 것은 의지가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찰나, 그 한 순간을 일컫는 말일지도. 진우는 그렇게 자신을 감싼 기적 속에서 끝까지 오라 능력을 전개했다. 그리고 토네이도가 모습을 감춘 것은 모든 불꽃이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녹색의 토네이도가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신선로 같은 지형이 남아있을 뿐, 그 주위에 있던 성당은 허허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지면에 깊게 파여진 검은 소용돌이 자국만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하아……! 하아……! " 그 폐허의 잔해 위로 한 남자가 서있었다. 남자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불꽃에 뛰어들기라도 했는지 전신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그 사이 사이로 선명한 핏자국들이 번들거린다. 만약 숨소리라도 들리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불에 탄 시체로 알았을 것이다. " 하아……! 하아……! " 남자는 정진우였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금새라도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럽 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무리한 오라의 남용이 영체의 카르마 에너지를 고갈 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호흡하고 있다! " 하아……! 하아……! " 이것은 진우의 오라 패턴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패턴 그린의 힘이 완벽하게 발휘되었기에, 그 이미지 메이킹이 독립적인 현현성을 띄었기 에, 오라가 진우의 의지를 인정했기에! " 하아―! " 그 때문에 이렇듯 그는 존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있 다! " 미연아……! 하나야……! 나는……! 나는……! " 진우는 거친 호흡 속에서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영체의 힘이 바닥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몸이 움직이는 것은, 순전히 그의 의지가 육체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가족애만이 지금의 그를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 ―! " 하지만 그가 향하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 미연과 하나가 타고 있 어야할 자동차가, 성당의 입구쪽에 주차되어있어야할 자동차가, " 하아! " 없다! 어디로 간거지? ' 앞의 토네이도 속에 말려들어간 걸까? 제어의 대상이 불완전했던 거야? '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진우는 그만 다리의 힘이 풀려버렸다. 간신히 해냈다 고 생각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지켜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런데― " 여전히 마무리가 미숙해. 모처럼 칭찬해줄까 했는데 역시나 어쩔 수가 없 어, 바보 제자. " 이 목소리는! 진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황망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너무나 눈에 익은, 그렇기에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한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네놈의 가족은 바람에 휘말리기 직전 내가 구해냈다. 근처의 숲속에 눕혀 놓고 팔라딘대를 호출했으니 조만간 구조될 거야. 걱정하지마라. " 새하얗게 변한 백발.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오른쪽 소매자락. " 사……. " 분명 변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는 달라져 있었지만, " 사부님……! " 진우는 흐느끼듯 그의 이름을 소리내 불렀다. 진우의 두 눈에서는 안도 때문 인지 감격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힘을 짜내어 자신의 스승에게 다가갔다. 사부님! 사부님! " 사부……님! " 진우는 사부의 앞에 도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기력이 다했는지 앞으로 거꾸러졌다. 그런 그를 사부, 브루스 류는 마주 끌어안으며 미소했다. " 네놈이 보여준 의지, 잘 보았다. 한계를 넘어서느냐 마느냐는 처음부터 중 요했던 게 아니었어. 중요한 것은 각오. 신념을 관철(貫徹)시키겠다는 각오 였던 건가. " " ……. " " 이제는 더 이상 바보제자라고도 부르지 못하겠군. 내가 백여년 동안 찾아 헤맨 대답을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이야. " " ……. " 바보제자로 충분해요. 바보제자로……. 진우는 흐느끼며 브루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품안에 있는 사부가 신기루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몇번이고 힘을 주었다. 그렇기에 모르고 있었다. 그의 가슴으로 뻗어나오는 한 주먹의 존재를. " 경의를 표한다, 정진우. 그렇기에……. " 브루스는 망설임없이 진각을 내딛었다. 터엉―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진우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브루스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눈과 코, 입, 귀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브루스의 옷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털썩 손에서 힘이 풀리자 진우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뒤로 넘어갔다. 브루스의 주 먹이 닿았던 그의 왼쪽 가슴은 처참하게 으깨져 있었다. 그대로 심장이 부서 졌던 것이다. 그렇게 차가워진 제자의 몸을 내려다보며 브루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다. " 정진우. 그리고 오라의 주인. ' 이것이 내 선택이다. ' 바보제자,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지? 한계를 넘으려 발버둥치겠느냐, 아니면 한계를 그어놓고 안주하겠느냐? ' 이것이 너희의 각오에 대한 내 대답이다. ' 그 어느 쪽도 잘못된 방법은 아니야……. <제 22 화 머신 아더 VS 블랙 아더 完> Ｔo Ｂe Ｃontinued… =-=-=-=-=-=-=-=-=-=-=-=-=-=-=-=-=-=-=-=-=-=-=-=-=-=-=-=-=-=-=-=-=-=-=-=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제갈영: 약속대로 돌아왔다, 제군! 그럼 이 몸의 부활을 알리는 서막을 열도록 하지! 부용제다! 세상은 변함 없이 돌아간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살아간다. 하지연: 이번에야말로 작년의 치욕을 씻어낼 기회다! 각오는 된 거냐, 녀석 들아! 박재영: 오오오오오! 그것이 일상. 그것이 평화. 유가인: 거짓말! 믿을 수 없어! 브루스가, 브루스가 어째서 그런 짓을! 왜 진우 씨를! 우리가 지키려 했던 것은 정녕 이런 무심함이었던 걸까? 우리가 지켜야 하는 평화라는 것은, 이유리: 언제나 내가 곁에 있을게. 언제나 오빠 곁에 있을테니까…….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었단 말인가? 弟 23 話 Goodbye to Romance 성마리: 좋아해, 가인. 널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유가인: 마리 선배…….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학창 시절이 되리라는 것을.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3 - Ｂy Ｎext Ｎeo =-=-=-=-=-=-=-=-=-=-=-=-=-=-=-=-=-=-=-=-=-=-=-=-=-=-=-=-=-=-=-=-=-=-=-= 피스 그린 정진우의 장례미사는 26구역의 한 성당에서 행해졌다. " 주여. 정진우 도미니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장례미사에는 수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와 있었다. 진우의 유족인 미연과 하나. 그리고 그의 이웃이자 동료였던 가인과 시민, 유리. 또 이웃은 아니었지만 마리를 비롯한 비영과 코마히코의 무영신풍류 지 인들. 언더 시티의 관계자들도 있었다. 오늘만큼은 유레카의 관련 업무를 중단하고 장례식에 참석한 윤채영과 오퍼 레이터 팀. 기술부 치프인 시더 웰리스와 메디컬 센터의 닥터. 진우와 생사고 락을 함께 했던 유한진 중위와 휘하의 팔라딘 대원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이들을 통솔해온 민수정이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평소 와 달리 진 사령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오늘 우리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정진우 도미니꼬의 죽음을 유족들과 함께 슬퍼하면서 그에게 주님의 무한한 자비가 내리기를 빌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 소리 죽여 흐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채영과 오퍼레이터 삼인방은 입으로 손 을 가리며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키고 있었고, 시더는 안경을 쓰지도 못할 정 도로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있다. " 삶과 죽음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고, 주께서 그를 위하시는 사랑이 우리 인간의 정보다 무한히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남은 유족을 위로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너그러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 닥터는 자신에게 치료를 받던 진우의 모습이 생각나자 연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한진과 팔라딘 대원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특히 미연과 하나의 납치를 막아내지 못했던 천요원 중사는 전신에 깁스를 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에 참석하여 눈물을 떨군다. " 그의 청춘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와 함께 있기 를 빌면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 그들은 모두 진우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동료이자 믿음직한 전우, 때로는 실없는 행동으로 웃음을 자아냈지만 그 누구보다 용감했던 대장 의 부재를 믿을 수 없었다. ' 진우 씨. ' 민수정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조용히 손수건으로 훔쳐냈다. 자신의 사형이었던 남자의 마지막이 잊혀지지를 않았다. 그때 그가 사지로 향하는 줄 알았더라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말렸어 야 했다. 절대로 가지 못하게 붙잡아야 했는데……. ' 여∼ 다들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 금방이라도 그가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 그렇게 말을 걸 것 같았다. 평소와 다 름 없이 익살스럽게, 너스레를 떨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불쑥 나타나 모 두를 놀래킬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은 진우의 사인이었다. 진우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나선 자국. 그것은 분명 칠성권 제 7의 발경 파 군에 당한 흔적이다. " ……. " 수정은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맨 앞줄에 미연 일행과 동석한 가인을 바라보 았다. 전투에서 귀환한 대원들에게 진우의 죽음을 통보했을 때. 또 그의 살해범이 누구인지 밝혀졌을 때. 그때 얼어버리던 가인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 결국 스승님은 결정을 내리신 건가. '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은 아니다. 오히려 수정과 진 사령관이 브루스를 통일 한국으로 불러들인 구실이 구실이었던 만큼 이런 사태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정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녀의 스승이 가진 집착. 그 끝없는 갈망이 오라의 주인과 만나면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기를. 과거에 구애받지 않고 이제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 기를.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의 스승은 기대대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 이어서 우리 신자들의 풍습대로 고인과 고별식을 거행합니다. 우리는 고 인을 떠나보내지만, 고인은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고 또 우리 가 현세를 떠난 후에는 하느님 대전에서 다시 상봉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고인을 전송합시다. " ' 모든 것이 다……나만의 착각이었던 거야. ' 수정은 자조하며 해설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성찬 전례가 끝나자 다음은 고별식이 거행되었다. 영정(零丁)을 진심으로 애도하기 위해 각자가 준비한 헌화를 시신에게 바치는 의식. 유족의 부모들이 먼저 헌화를 바치도록 되어 있는데, 진우는 부모도 형제도 아무도 없었기에 미연의 양부모들이 대신 그들의 몫까지 헌화해야 했다. " 이 못난 사람 같으니라고……. " 미연의 아버지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제단의 관에 누워있는 사위를 바라보 았다. 열려진 관 안으로 보이는 진우는 드라이아이스로 생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것만 같다. " 평소에도 제멋대로 굴더니 끝까지 제멋대로 떠나버렸어. 내 이럴 줄 알았 지. 처음 미연이가 자네를 데려왔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고. " 그는 처음 진우와 대면했던 날을 회상했다. 2027년의 가을. 뉴욕에서 유학 중이던 그의 딸이 난데없이 결혼할 상대라며 웬 보도못한 시시껄렁한 잡배를 데리고 귀국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당연히 미연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둘의 결혼을 반대했었고, 그러자 그 잡배 놈이 꺼낸 말이 가관이었지. ' 미연이의 뱃속에는 이미 제 딸이 있습니다! 책임지게 해주십시오! ' ……그 말을 들을 직후, 미연의 아버지가 이 파렴치한 잡배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고 했던 것은 딸을 가진 부모로서 너무나 당연하고 지고지순한 섭리였 으리라. 다음날, 소동은 간신히 아내와 미연에 의해 진정되었지만 그의 노기가 풀린 것은 정작 다음해, 손녀 정하나가 태어났을 때였다. 손녀가 미연을 닮아 눈에 아프지도 않게 귀여웠으니 망정이지 만약 저 잡배 놈의 털끝 하나라도 닮았더라면 결코 그는 둘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 다. ' 그런 자네가 10여년 전의 그 아이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 ' 미연의 아버지는 딸을 뉴욕에서 입양해올 때 울며불며 소리치던 남자 아이를 떠올리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이렇게 기구한 인연이 있었을 줄이야. 아내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구나 하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렇게……그렇게 힘들게 만났으면서. 간신히 서로들 만났으면서 어째서… …. 왜,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차마 더 이상 진우의 시신을 볼 수가 없었다. 미연의 어머니 역시 아까부터 줄곧 흐느끼며 관을 붙 들고 있다. 그런 부모님들의 모습에 미연은 천천히 하나의 손을 이끌고 관으로 다가갔 다. 그리고 수척해진 얼굴로 조용히 자신의 남편을 응시했다. 의외로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 ……엄마. " 하나는 눈물을 흘리는 예배당의 분위기에 불안해하며 미연을 불렀다. 미연은 하나를 안아올리며 관속의 진우를 가리켰다. " 하나야. 아빠에게 인사해야지. " " 아빠? " 하나는 아빠라는 말에 두눈을 크게 뜨며 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안 에서 며칠동안 보지 못했던 진우를 발견하고 반갑게 소리친다. " 아빠! 아빠! " 하나는 미연의 손에서 벗어나 진우에게 다가가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그 녀를 끌어안은 미연의 손이 도무지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미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관속의 진우를 돌 아본다. 하나는 왜 엄마가 저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건지, 또 아빠가 왜 저 런 곳에 누워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며칠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빠였다. 그러다 불쑥 불쑥 나타나서 그녀를 끌어안던 아빠였다. 어린 하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며칠동안 아빠를 만나지 못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슬퍼하는 사람들 쪽이 이상한 것이다. " 엄마. 아빠가 안 일어나. " 하나는 아무리 자신이 불러도 진우의 눈이 떠지지를 않자 이상하다는듯 미연 에게 물었다. 단지 그렇게 물어본 것 뿐인데……. 그런데 갑자기 주변에서 울음 소리가 늘 어나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도 외할머니도. 곁에 있던 시민 언니와 유리 언니도. 다들 고개를 숙인채 몸을 떨고 있었다. 울고 있다. 하나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건가 싶어 괜시리 겁이 났다. 그래서 불안 한 얼굴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엄마는 하나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 하나야, 아빠는 말이야. 엄마와 우리 하나를 위해…… 너무 열심히 일하셔 서, 그래서 깊이 잠이 드신 것 뿐이야. 왜 있잖니? 예전에도 가끔씩 집에 돌아오면 피곤하다고 쿨쿨 잠만 잤잖아? " " 응! 아빤 잠꾸러기야. 맨날 늦게 일어나. " " 그치? 그러니까 지금은 편히 주무시게 내버려두자. 깨우면 못 써요. " " 으응. " 하나는 이해했다는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연은 그런 딸이 기특했는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헌화를 하나의 몫까지 진우의 가 슴에 내려놓는다. " 당신, " 미연은 마치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다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 기억하고 있어요? 예전에 저에게 했던 말. 당신은 우리 하나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댔죠? 그래서 하나가 앞으로도 계속 좋아하는 사람들 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고. " 그 말에 곁에 있던 가인과 마리의 표정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진우 씨,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 솔직히 전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이 원망스러웠어요. 그렇게 말로는 모두 를 지킨다 지킨다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지키지 않는 것 같아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화가 났어요. 매번 상처투성이가 되서 남을 지키면 뭘해요? 그러다 당신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 와 하나는? 소중한 남편과 아빠를 잃은 우리는? 우리의 슬픔은 누가 보상 해주죠? 그래서 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남겨지는 우리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나가는 당신이 야속했어요. " 거기서 미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던 모양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계속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요. 조금이지만……그래도 당신이 지키려고 했던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요. 당신에게 지켜지고 나서야 이렇게……. " 미연은 라트에게 붙잡혔을때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한치 앞도 보이 지 않는 절망에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것은 상관 없었다. 무섭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두렵 지만 참아낼 수 있어. 하지만 같이 잡혀온 하나는 아니었다. 자신의 딸이, 그 아무 것도 모르는 아 이가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미래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무서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제발 누군가에게 사정하고 싶었다. 애원하고 싶었다. 내 딸만은 살려달라고. 자신은 상관 없으니 내 딸의 미래만큼은 지켜달라고. 구해달라고! 그 어두운 차 트렁크 속에서 몇번이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야 말로 정신이 아늑해질때까지 딸의 무사함을 신께 빌었다. 그리고 마침내 구해졌을때. 무사한 하나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때 느꼈던 안도감. 그때 느꼈던 기쁨. 그때 느꼈던 감사.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망이었다. ' 지금껏 당신이 지켜왔던 사람들은 모두 이런 희망을 건네받았던 거겠죠? ' 미연은 누워있는 진우의 얼굴을 살며시 매만지며 속삭였다. " 그래서 지금은 그런 당신이……자랑스러워요. " 그래서 살아갈 거에요. 당신이 말한대로. 당신이 지켜낸 사람들과 행복하게.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계속……살아가겠어요. ' 그러니까 울면 안되겠죠? 슬퍼하면 안되겠죠? ' 진우 오빠. 전 행복한 거겠죠?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줬으니까. 웃어야 하는 거겠죠? 미연은 진우에게 자신의 웃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진정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만이 자신과 하나를 지켜준 진우에 대한 보답이 라고 생각했다. ' 내가 지켜줄 거야! ' 하지만 기억하고 말았다. 떠올리고 말았다. ' 내가 지켜줄 거야! 다른 사람에게 미연이를 맡길 순 없어! ' 먼 옛날. 그녀를 향해 외치던 그의 모습을. 떠나가던 그녀를 지쳐 쓰러질때 까지 쫓아오던 그의 모습을. 미연은 그제야 진우의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 바보같이……. 정말이지, 그때와 하나도……안 변했다니까. " 그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한계였다. 미연은 쓰러지듯 진우의 관 앞에 주저앉으며 소리내어 울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끝까지 웃으려고 했는데. ' 그런건……불가능해. ' 어떻게, 어떻게 웃을 수 있단 말이야. 더 이상 당신은 없는데.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는데. " 오빠― " 그렇게 서럽게 울부짖는 미연의 모습에 시민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끌어안 았다. 영문을 모르던 하나도 그제서야 예배당의 슬픔을 이해했는지 훌쩍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곁에 있던 유리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다. 유리는 그런 하나보다도 더 심하게 몸을 떨며 흐느낀다. " ……. " 가인은 다시 한번 예배당이 눈물 바다로 잠겨가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 쥐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모두의 슬픔이 비수처럼 변해 그의 가 슴을 찌르고 있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리면 나으련만. 하지만 그것은 가인의 희망일뿐. 그의 눈물샘은 마치 말라버린 것처럼 건조 하기 짝이 없다. 그런 자신의 무정함이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마치 슬퍼할 자격조차 박 탈당한 기분이다. 눈물마저 빼앗긴듯한 상실감, 허탈함. 갈 곳을 잃은 분노, 혐오. ' 2033년 10월 4일 18시 50분. 피스 그린 정진우가 전사했습니다. 사인은 심 장 파열에 의한 뇌조직 사멸. 그리고 심장을 파열시킨 것은…… 피스 그레 이 브루스 류의 발경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 그 날의 보고를 떠올리는 순간,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는 순간, 가인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미칠듯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머 리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예배당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그를 부르는 마리와 몇몇 사 람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가인은 듣지 못했다. '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 정신 없이 뛰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무의식 중에 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달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뚜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 피스 그린 정진우가 전사…… 사인은……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 거짓말! 믿을 수 없어! " 가인은 걸음을 멈추고 버럭 소리질렀다. 그 바람에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지만 가인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느낄 수 없 었다. " 브루스가, 브루스가 어째서 그런 짓을! 왜 진우 씨를! "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이유가 없잖아? 브루스는 진우 씨의 사부님인데, 그토록 허물없던 사이였는데, 그런데 그런 브루스가 진우 씨를 죽였다고? " 웃기지마!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지껄이지마! "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돼! 브루스와 진우 씨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헛소리다! ' 그런 거죠? 다 거짓말인 거죠, 브루스? 대답해봐요. 나타나서 대답해봐요! 당장 내 앞에 나타나요! 당장! ' 가인은 품에서 꺼낸 머리장식을 마치 브루스인양 노려보았다. 그러나 머리장 식은 머리장식일 뿐. 가인의 물음에 응해줄리가 없다. ' 잘 가지고 있다가 사부님이 돌아오면 직접 돌려 드리라고. 알았지? 이건 사형으로서의 부탁이기도 하니까. ' 문득 브루스의 머리장식을 그에게 건네줬던 진우가 생각났다. 그때 그가 짓 던 표정이, 그 미소가, 그 목소리가. 이토록 생생한데. 이토록 확연한데. 금방이라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 아, " 혼란스러워하던 가인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 황 망히 주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찾는 이는 없었다. 어디에도, 어디에도 진우 씨는……. " ―! " 순간 가인은 머리를 감싸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러자 뜨거운 눈물 줄기가 쉴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는 목놓아 진우의 이름을 불렀다. " 진우 씨. 진우 씨! "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렇게 화내고 그렇게 소리쳐서, ' 뭘 그렇게 걱정하는 척 하는 거에요? ' 진우 씨도 괴로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 저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앞으로도, 아마 평생동안 당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에요. ' 왜 차갑게 굴었던 걸까? 왜 그런 식으로 밖에 말해주지 못했던 걸까? 왜 진즉에 진우 씨에게 잘해주지 못했지? 왜? " 진우 씨― " 미안해요. 죄송해요. 그러니 돌아와줘요. 돌아와서 예전처럼 꾸짖어줘요. 장 난쳐주세요. 웃어주세요! 그때의 그 순간처럼― ' 너도 내 가족이다. ' ' 맘에 쏙 들진 않지만 여기서 살아나가 내 딸도 책임져야 될 거 아냐? 응? 사위. ' ' 이로써 네 녀석이 나의 사제가 되는구나. 내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왠지 감개가 무량해지네. ' ' 그러니 그만 얼굴 펴라고, 소년. 그렇게 계속 우거지상을 짓고 있으면 내 딸도 슬퍼하잖아. ' ' 어때? 이런 사람들을 놔두고 혼자 죽을 수 있겠어? ' 그때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되돌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할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다할 거에요. 진짜에요! 정말이에요! " 크흑, 흐, 아흐흐흑― " 하지만 가인은 이런 후회가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신이와 부모님을 떠나보낼 때도 이와 같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뼈저리게 후회했는데,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 는 이런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 허어어어엉― " 나는 또, ' 너도 내 가족이다. ' 내 소중한 가족을……잃어버렸어. 弟 23 話 Goodbye to Romance 11월이 되었다. " 이번에야말로 작년의 치욕을 씻어낼 기회다! 각오는 된 거냐, 녀석들아! " " 오오오오오! " 한성고 2학년 1반의 담임, 하지연의 목소리에 재영을 위시한 교실의 학생들 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그들이 이렇게 떠들썩해진 이유는 한 남자의 복귀와도 관계가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바로, " 하하하하하! 좋은 각오입니다. 그 정도는 해주셔야 돌아온 보람이 있지요! 과연 그래야 내가 인정한 호적수! " 안경을 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지연의 곁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2학년 1반 일동은 언제 환호했냐는듯 대번에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남자는 모두가 인정한 최대 최악의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 ……저기. 제갈영 교생 선생님. 일단은 제 조례 시간입니다만. " 지연은 구겨지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간신히 억누른 어조로 말했다. 그녀 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놀랍게도 이 남자는 올해 초에 졸업한 것이 분명한 대원 그룹의 후계자, 제갈영이었다. 'I shall return'이라는 말을 끝으로 사라졌던 그는 정말로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다시 한성고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것도 교생이라는 신분으로! ' 말도 안돼. 대학에 들어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교생실습을……. ' 아니. 그보다 저 놈이 사범대를 지망했다는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명색이 대원 그룹의 후계자란 녀석이 설마 교사가 꿈이었단 말인가? 그것도 담당 과 목은 도덕? 후계자 자리는 어따 팔아먹고! ' 약속대로 돌아왔다, 제군! ' 어쨌든 그가 교장 선생의 소개로 강당의 조례시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전교생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현 학생회장이었던 호일준은 그 자리에 서 졸도해버렸는데, 나름대로 철권 통치를 펼치며 충실한 나날을 보내던 그 로서는 공든 300만 도미노가 일시에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 그럼 이 몸의 부활을 알리는 서막을 열도록 하지! 부용제다! ' 그리고 예상대로 제갈영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복귀하기가 무 섭게 다시 학생회를 장악한 그는 이번에도 터무니 없는 이벤트를 열었는데, '부용 리그 파이트, 제 2차 스페이스 오딧세이.' 작년 부용제에서 승자가 가려지지 않은 것을 빌미로 삼아 또 다시 스페이스 콜로니를 상품으로 걸고 전학급의 배틀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제갈영이 배틀제에 집착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렇다 치고, 그가 교생으로 발령받자마자 부용제가 열렸다는게 너무나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부용제를 위해 모든 일정을 맞춰왔던게 아닐까……하 는 두려움마저 들기도 한다. " 이런 하지연 선생님. 이해할 수 없군요. 분명 저는 2학년 1반의 부 담임. 충분히 조례에 참가할 자격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제갈영은 지연의 제지를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 말에 지연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어쭈? 벌써부터 맞먹는다, 이거냐? " ……분명 저희 학교가 이번에 교생을 모집한 것은 젊은 선생님이 필요해서 라는 이유였죠. 요즘 애들과 나이 차가 많은 우리는 대화가 안된다나 뭐래 나. " 라는 것이 교장 선생님의 말. 그러나 작위적인 변명일게 뻔하다. 한성고에 20대 교사가 얼마나 많은데 학생들과 세대 차를 느낀단 말인가? " 하지만 정식 채용도 되지 않은 분이 벌써부터 자격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 군요. 지금의 선생님은 아직 지도 교사의 말에 절·대·복·종 해야 할 교 생일 뿐이랍니다. '사복'만 입는다고 해서 다 선생님이 아니에요. " 그야말로 가시가 돋힌 지연의 반격.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와 2년동안 함께 학급을 꾸려온 재영 일행은 언제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지 몰라 안절부절했다. 그들은 창백해진 표정으로 연신 속으로 제갈영에게 소리쳤다. ' 야! 그만 가라! 제발 가, 이 화상아! ' 그러나 제갈영은 그런 학생들의 제스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더욱 기고만 장해졌다. " 훗. 그거야말로 납득할 수 없는 요구입니다. 교사라는 것이 언제부터 그런 권위의 대명사가 되었던가요? 저는 그저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생 활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겁니다. 하 선생님이 바라시는 교사 상에는 응 해드릴 수가 없어요. " " ……. " 하지연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게 교무회의를 주무르며 자기 좋을데 로 하던 네가 할 소리냐, 지금! " 후. 어쨌든 정진정명 교사의 길이란 너무도 험난하군. 뭐, 그 때문에 더더 욱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시련이 없는 히어로는 사랑받지 못한다 는 말도 있지 않는가! 하하하하! " " Pain is my pleasure! My load, My prince! " 제갈영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 뒤로 웬 정장 차림의 여성들이 한가득 몰려나 와 뿔테 안경을 번쩍이며 맞장구를 쳤다. 예의 제갈 가문 전속 치어 리더인 크라운 프린스였다. 한동안 제갈영을 따라 학교를 떠났다 했더니 이번에는 어째 다들 복장이 바 뀌어서 돌아왔다? ' 오오. 저것이 말로만 듣던 OL(Office Lady)! ' 재영은 눈을 번쩍이며 크라운 프린스의 새 복장을 분석했다. 오피스 레이디. 즉 사무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커리어 우먼을 일컫는 말. 단지 여기서는 사장실 전속 비서에 정장 스커트와 뿔테 안경을 지참해야한다 는 편협된 개념이 섞여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복귀한 크라운 프린스들은 교생이 된 제갈영에 발맞춰 그 자신들도 업그레이드를 했던 것이다. " 회장님, 일정이 많이 밀렸습니다. 어서 서두르지 않으면. " 그때 제갈영의 뒤에 있던 호일준이 잽싸게 그를 잡아 끌었다. 호일준은 요 며칠간 모든 것을 해탈했는지 예의 충실한 종으로 돌아가 있었다. 참 여러모 로 성실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 아, 그런가? 후하하하하. 역시 이놈의 인기는 한시도 날 내버려두지 않는 군. 그래도 뭐 어쩌겠나? 모두의 기대에 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사 의 길! 얼마든지 응해주도록 하지! " 대체 저 교사라는 말이 학생 때 부르짖던 황태자란 말과 어디가 다른걸까? " 그런 이유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 선생님! 부용제를 기대하겠다, 2학 년 1반 제군들! " 그렇게 자기 할말만 해버리고 제갈영은 미련 없이 교실을 떠나갔다. 그 뒤로 는 호일준과 크라운 프린스의 행렬이 이어진다. 재영 일행은 그런 제갈영의 퇴장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 들의 담임을 돌아보았다. 돌아본 지연의 얼굴은 차마 두번 보기가 겁날 정도로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 다. 그 입에 물린 담배들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허리들이 분질러지고 있다. 여, 연속 동강내기! 재영 일행은 마른 침을 삼켰다.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은 먼 곳에 있는게 아 니었다. 바로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다! " ……그럼 지금부터 부용제 필승 전략을 논의하도록 한다. 이상. " ' 엥? ' 하지만 지연은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교단을 내려갔다. 재영과 학생들은 영 문을 몰라 서로를 돌아본다. 뭐야? 우리 담임 왜 저래? 이렇게 쉽게 물러나도 되는 거야? 응? ' 이런 건 우리가 알고 있는 흉신악살이 아니야! ' 그런 모두의 마음 속 외침이 통했던 것일까? 지연은 교실 문을 나서기 전, 학생들을 돌아보며 뒷말을 덧붙였다. " 오늘 종례 시간까지 좋은 의견이 나오지 않을 경우, 각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 " 예? " ……힘든 시간이 될 거야. "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마음의 준비? 힘든 시간이라니!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 는 거야? 그렇게 함부로 명사를 생략하지 말아요, 선생님! 탕― 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율성 강조. 지연은 그런 교훈을 학생들의 가슴에 던져주고 무심하게 교실을 나가버렸다. 재영과 학생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앉아있다가 곧 하나 둘 씩 현실을 깨 닫기 시작했다. " 시, 싫어. 이런 건 싫어―! " " 아아아! 시간이 모자라! 시간이! " " 어서 안건을! 아니, 학급 회의부터 시작해야! " 결국 불똥이 튀는 것은 우리들이잖아! 재영과 2학년 1반 일동은 진심으로 제갈영을 저주했다. " 안돼! 그런 것으로는 어림도 없어! 그런 무난한 기획이 통할 것 같아! " " 이미 통계로 검증된 방법이야! 원래 무난한 것일수록 기본에 충실한 법! 그쪽의 무대포적인 안건이야말로 지나가는 개에게 운명을 맡기는 격이다! " " 아직도 우리 처지를 모르겠어? 우리는 좋든 싫든 모험을 해야한다고. 소소 한 성공으로는 누구 하나 살릴 수 없어! 이겨도 크게 이겨야 하고 져도 크 게 져야 한단 말이다! " 2학년 1반의 부용제 대책 회의는 점심시간에도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점심 식사를 하는 것조차 잊고서 열정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토록 학급의 일에 매진하는 현 고교 생들이라니!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성행하는 이때에 공공의 운명을 우 선시하는 그들의 모습은 진정 어지러운 현세를 밝혀주는 한줄기 등불이다! 물론, " 코스프레 카페! " " 머드팩 레슬링! " " 코스프레 카페라니까! " " 모르는 거야? 머드팩이라고! 더 말할게 뭐가 있냔 말이야! "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고 싶다면 때때로 눈을 감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 코스프레 카페라니. 그런거 너무 통속적이다! 메리트가 없다고! " " 머드팩이나 생각하는 이상 변질자들에게나 통속적이겠지! 대중이 알아주지 않는 취향은 그저 위행위자일 뿐! " " 변질자라니……! 말 다 했냐? " " 코스프레를 통속적이라고 한 네놈들이 나쁜 거야! " 그렇게 코스프레 카페 파와 머드팩 레슬링 파가 금새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것 처럼 으르렁거리는 한편, 지켜보던 여학생들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그런 거 누가 해준대? " 하긴. 주체가 동의하지 않는 코스프레 카페나 머드팩 레슬링따위, 의미가 없 는 것이다. 어느 누가 남학생들이 하는 코스프레 카페와 머드팩 레슬링을 보러 온단 말인가? " 으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소재의 빈곤인가. 아무리 좋은 기획이 있어도 그 주체가 따라주지 않으면. " 회의를 지켜보던 재영은 나지막하게 한탄했다. 사실 그의 한탄이 2학년 1반 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바로 소재의 빈곤. 올 1학기 때까지만 해도 2학년 1반은 그 어느 학급보다 소재에 있어서는 풍 족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왕자회의 브루스 류. 만인의 연인 테레이아 민체스터. 대파란을 불러들이는 남자 유가인. 한성고의 꽃 이유리. 이들만 있었으면 아무리 시덥잖은 카페를 차릴지라도 문제 없이 부용제의 우승을 노려볼 수 있었다. 그만큼 이런 막강한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 나의 힘이었던 것이다! ' 그런데 그 중 교환 학생들이 전부 모국으로 귀국해버렸으니……. ' 2학년 1반의 전력은 크게 감소하고 말았다. 브루스와 테레이아의 부재는 뼈 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니야. ' 아직 2학년 1반에게는 유가인과 이유리라는 남녀 양쪽을 공략할 수 있는 카 드가 남아있었다. 이 카드를 적극 활용하기만 한다면 부용제의 우승도 무리는 아니다! 단지, ' ……저 녀석들에게 할 맘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지만. ' 재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교실의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가의 끝자리 책상 쪽 에는 가인과 유리가 학급 회의에서 동떨어진채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 이게 문제란 말이지. '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점점 어두워지네, 저 녀석들. ' 재영은 가인과 유리의 안색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저번 한 강 시민공원 때의 일이 생각난다. ' 괴물이다! 괴물! ' 시내와 함께 놀러간 그곳에서 재영은 몬스터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는 그 일이 있기 전부터 팔라딘 대의 감시 대상자였기에 다행히 기억이 지워 지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만난 시내는 이미 공원에서의 일을 완전히 잊고 있 었다. ' 그런 일을 매일 겪으면……어쩔 수 없는 걸까. ' 재영은 점점 웃음을 잃어가는 가인과 유리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평상시와 다름 없는 모습으로 그들을 대 하는 것 뿐이다. 벌떡 그때 식사를 끝낸 가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그대로 교실 을 나가려는게 아닌가? 재영은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 야, 가인아. 어디가? 회의도 안 끝났는데? " " ……아, 난 그냥 너희들이 결정한데로 따를게. 다 정해지면 얘기해줘. " 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고서 주저없이 문을 나섰다. 그러자 반 아이 들이 대번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다. 가뜩이나 가인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 진 그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이와 같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너그럽게 봐줄 이 유가 없는 것이다. " 아, 저 자식이― " " 잠깐잠깐! 가인이 녀석은 내가 데리고 올게!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어 딨냐? 부용제 때 뭐할건지 빨리 정해야할 거 아냐? 응? " 재영은 다급히 친구들을 진정시키며 가인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그때 그런 재영을 유리가 붙잡는다. " 됐어. 오빠한테는 내가 가볼게. " " 어? 아니, 그래도. " " 종례까지 얼마 안남았잖아? 오빠는 내가 데리고 올테니까 계속 회의나 하 고 있어. " " ……으응. " 재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그런 그를 남겨두고 가인의 뒤를 쫓아 복도로 사라져간다. 재영은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끼며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이럴 때는 싫어도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 점점……멀어지고만 있어. 가인은 옥상의 철창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사이로 새 하얀 구름들이 노닐듯 유영하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로는 수많은 건물들과 사람들 이 펼쳐져 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풍경. 정말이지 무심할정도로 변함없는 세상이다. ' 나도 알고 있어. ' 재영이네가 나쁜게 아니라는 걸. 축제 준비로 떠들썩한 학교가 나쁜게 아니 라는 걸. 그게 정상이라는 걸. 그게 당연하다는 걸. ' 잘……알고 있어. ' 그렇기에 견딜 수 없었다.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만약 그대로 계속 교실에 있었더라면 웃고 떠드는 친구들이 진심으로 미워졌 을 것이다.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 하아. " 가인은 낮게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바로 코앞 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유리였다. 언제 올라와 있었던 거지? " ……무슨 일이야? " 가인의 질문에 유리는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이내 그의 옆 자리로 다가와 철창에 기댄다. " 그냥. 걱정되서. " " 걱정? 왜? " " 그냥. " " ……무슨 대답이 그래? " " 내가 오빠 걱정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해? " " 아니.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 유리와 가인은 그렇게 의미도 없는 잡담을 주고 받았다. 왠지 이런 식으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요 몇달 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기 에 이런 느긋함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언제부터 어색해진 걸까? 언제부터 이런 시간을 보내는게 낯설어진 걸까? ' 우리에게…… 이런 시간을 누릴 자격이 있는 걸까. '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평화롭다고 느낀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예전에는 그저 당연다고만 생각했던 평화였는데. 매일 매일이 똑같아서 지루 하기 짝이 없던 일상이었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당연하게 아니었어. 지루하다고 여겨서는 안되는 거였어. 절대로. 절대로. ' 평화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어. 자신들이 모르는 곳에서 그들을 지키다 죽어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또 그 죽어간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 수 많은 희생들이 있다는 것도 모른채 사람들은 계속 평화를 누리며 살 아갈 것이다. 당연하다는듯 일상을 살아가겠지. ' 너무해. ' 단지 잊혀질 뿐이라는 건가? 그토록 노력했는데.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지켜냈는데. 연명시킨 평화였는데. 그런데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면! ' 우리는 대체 뭘 위해 피를 흘렸던 거지? 뭘 지키기 위해 죽어간 거야? '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 유가인 자신도 오 라 능력을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피스메이커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지금의 평화에 무 감각해져 있을 것이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이토록 마음이 답답한 것이리라. ' 진우 씨, 진우 씨는 후회한 적 없었어요? 단 한번도 자신이 피스메이커라 는 것을 후회해본 적 없었어요? ' 전 모르겠어요. 우리가 지켜야 하는 평화라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정작 우리 자신도 행복해질 수 없는 평화라니! 평화라는 건 좀 더……좀 더 좋은게 아니었어요? 모두가 행복해지는게 아니었던 거에요? ' 모두가 행복해질 순 없습니다. 모두를 지켜낼 순 없습니다. ' 정말……그 말대로인 거에요? ' 그러니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지켜내십시오. 자신의 손에 닿는 이들 만 확실하게 지켜내십시오. ' 정말 그가 말한 대로인 건가요? 가인은 피스 블랙 한시영,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의 언변에 농 락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뭘까? 어째서 그가 하는 말은 이리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거지? 어째서 매번 마 음을 동하게 하는 걸까? ' 그것이, 평화― 라는 것입니다. ' 그가 주장하는 평화는 가인이 생각하는 평화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뜬 구 름잡는 소리가 아닌, 불가능한 이상이 아닌, 그렇기에 훨씬 마음에 와닿는 목 소리다. 어쩔 수 없잖아? 사람인 이상 자기의 행복을 먼저 찾게 되는 법이다. 자신이 평화로워지길 바 라는 법이야. 스스로도 행복하지 못하면서 남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건 언어도단. 위선이다. 거짓이야! 가인은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 이래서는 그 남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잖아. " 뭐? " 이대로는 우리도……언젠가 잊혀지겠지. " 유리는 깜짝 놀라며 가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공허한 미소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오빠?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그러자 가인도 방금 자신 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서 입을 가린다. 이런!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 아, 미안.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자자. 그만 내려가자. 지금쯤이 면 회의도 다 끝났겠지? " 가인은 서둘러 말을 얼버무리고 옥상의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는 그 런 가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곧 그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가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 ……유리야? " " 내가 기억할 거야. " 의아해하던 가인은 그녀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유리는 붉게 물든 얼굴을 가 인의 허리에 묻으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절대로 오빠를 기억할 거야. 절대로. " " ……. " " 절대로 기억할테니까. " 가인은 그런 유리를 내려다보다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고마워. 안심했어. " 언제나 내가 곁에 있을게. 언제나 오빠 곁에 있을테니까……. ' 이 정도는 괜찮은 거지, 테레이아? ' 말하지는 못할지라도. 표현하지는 못할지라도. ' 마음 속으로는 계속 좋아해도 되는 거지? ' 응? 리리스? 유리는 자신의 친구를 향해 그렇게 몇 번이고 되묻고 있었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4 - Ｂy Ｎext Ｎeo =-=-=-=-=-=-=-=-=-=-=-=-=-=-=-=-=-=-=-=-=-=-=-=-=-=-=-=-=-=-=-=-=-=-=-= " 마리 양네 반은 이번에도 연극을 하는 건가요? " 26구역 한시민의 집. 시민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가인과 유리, 마리에게 차를 내주며 물었다. 마리는 차를 건네받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예. 저번 부용제 때는 몬스터의 출현으로 흐지부지된 감도 있었고. " " 하긴. 그 뒤로 원인 규명이니 위험 방지라느니 해서 한동안 휴교했었죠. " " 휴교가 끝난 다음은 곧바로 기말 시험이었고. " 시민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탄했다. 결국 그 뒤로 언급되지 않았던 부용제의 전말은 실상 이러했던 것이다. 부 용제 자체가 무기한 연기되었으니 당연히 우승 학급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우승 상품도 공중으로 증발되어 버렸다. 이때문에 전교생들 사이에서는 한때, 몬스터의 출현이 제갈영의 음모였다는 설이 유력했었다. " 어쨌든 선배, 이번에는 무슨 연극이에요? 작년과 같은 캡틴 실버? " 가인의 질문에 마리는 손에 쥔 대본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 아니. 다른 연극이다. " " 다른 연극이라면? " " ……다. " " 예? " " ……라고. " 연극의 제목을 말하는 부분에서 계속 마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기에 일행 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연극을 한다는 거야? " ……시, 신데렐라. " 간신히 마리의 입에서 나온 제목은 그와 같았다. 그 말을 하는 그녀는 막다 른 골목에 내몰린 어린 양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일행은 본의 아니게 죄책감을 느꼈다. 뭘까? 이 어린 아이에게서 사탕을 빼앗아버린듯한 기분은? " 신데렐라라면 분명 마법사의 도움으로 왕자님과 맺어지는 아가씨의 이름이 었죠? " 시민은 마리의 무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그 의도가 통 했는지 마리는 얼굴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예. 12시가 지나면 마법이 풀리기에 무도회장을 서둘러 빠져나오던 신 데렐라가 유리구두 한짝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왕자님이 찾아주게 되는 이 야기지요. " " 가난한 여자가 대기업 사장님과 맺어진다거나 평범한 여고생이 얼짱 싸움 짱 일진과 맺어진다거나 하는 트렌디 드라마의 전형이네. 백마탄 왕자를 꿈꾸는 여성들의 심리를 겨냥한. " 유리는 그렇게 어린애답지 않은 혹평으로 회복되던 마리의 기세를 다시 꺽 어버렸다. 시민과 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신데렐라는 고전 동화인데……. " 어머! 그거 진짜 멋진데요! 너무 로맨스적이야! " " ―! " 그때 일행의 뒤에서 한 여성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가인 일행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언제 현관으로 들어왔는지 모를 한 모녀가 장난스 러운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미연이 누나? 하나야! " 모녀를 알아본 가인은 당황하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일행의 반응에 만족한 미연은 웃으면서 거실로 들어온다. 하나는 엄마보다 먼저 거실의 소파 로 달려와 가인에게 매달렸다. " 와, 오빠! 안아줘! 안아줘! " " 어? 으응……. " 가인은 어색하게 그런 하나를 들어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혀주었다. 유리는 그런 하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시민은 미소하며 미연을 반겼다. " 미연 씨는 신데렐라를 좋아하나 봐요? " " 그럼요∼ 유리 구두 한짝만 남기고 간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하 는 왕자님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이에요? 사랑을 쟁취하려면 그 정도의 열 정은 보여줘야죠! " 미연은 시민의 옆자리에 앉으며 맞은편의 유리에게 빙긋 미소지었다. " 그러니까 신데렐라는 백마탄 왕자와는 전혀 상관 없는 얘기랍니다. 노력하 는 사람만이 승리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 아시겠어요, 유리 양? " " ……그것도 좀 미묘하게 어긋난 것 같은데. " 유리는 투덜거렸지만 그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미연은 마리를 돌아보 며 주먹을 불끈 쥐어올렸다. " 확실히 저번 해적 역보다는 신데렐라 쪽이 더 마리 양에게 어울려요. 마 리 양이라면 분명 잘 해낼 거에요, 파이팅! " " 아, 감사합니다. 분발하겠습니다. " 마리는 미연의 격려에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가인은 잠시 고 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왜 해적 역보다 신데렐라가 더 마리 선배에게 어울린 다는 거지? ' 신데렐라같은 소극적인 캐릭터보다는 강인한 캡틴 실버 쪽이 어울리는게 당연하잖아? ' 신데렐라는 계모와 언니들에게 시달리며 무도회에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 는 소녀다. 언니들처럼 드레스를 입고 왕자님에게 춤을 청하는 것이 소원인 소녀. 갈망하는 소녀. ' 아……. 그런가? ' 가인은 납득했다. 여성스러움에 대한 동경! 마리는 무영신풍류의 고수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는 19살 여고생이기도 했다. 평소에 잘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 나이 또 래의 아이들처럼 꾸며도 보고 싶고 놀러도 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줄곧 무영신풍류에 전념하기 위해 억눌러왔으니……. ' 나에게 어울리는 건 검밖에 없어! 그래, 알고 있다고, 그런 건! 그런 건… …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단 말이다! ' 문득 작년의 일이 생각났다. 그래. 그런 말을 하기도 했었지, 마리 선배. 가인은 울면서 화를 내던 마리의 모습이 생각나자 고소를 머금었다. 그때 자 신은 그녀가 단순히 속상해서 우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어설픈 위로를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녀가 뭣때문에 속상했는지는 알지도 못한채. ' 그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 정말이지 눈치가 없구나, 유가인. 가인은 자신의 둔함을 꾸짖으며 미연과 얘기 중인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리 고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힘내세요, 선배. 선배라면 꼭 잘 해낼 수 있을거에요. " 아, 그런데. " 그때 시민이 뭔가 생각났다는듯 가인에게 물었다. " 가인 씨네 반은 뭘하는 거에요? " " ……. " 그 순간, 가인과 유리의 표정이 뭐라고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어둠으로 뒤덮 여갔다. 그 뜻 밖의 반응에 시민은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뭔가 물어서는 안될 것을 물어버린 걸까? " 응? 왜 그러는 거야, 둘 다? 왜 말을 못하고 그래? " 마리와 얘기를 나누던 미연도 그들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관심을 보여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 으로 파묻혀가기만 한다. " ……카페. " 그나마 가인보다 상태가 나은 유리가 질문에 답했다.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 는듯 되물었다. " 카페? 작년과 같은 거잖아? 그런데 그게 뭐가, " " ……같지 않아. " " 뭐? " " 같지 않다고. " 유리의 말에 시민과 마리, 미연은 더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같지가 않다니? 그런 의문은 유리가 덧붙인 뒷말에 의해 해소되었다. " 성전환 카페야. " " 풋―! " 보기 드물게도 시민이 마시던 차를 입으로 내뿜고 말았다. 그녀는 마리와 미 연이 놀랄 정도로 안색이 창백해져 더듬거렸다. " 서, 서, 성전환이라니……! " " 여자는 남장, 남자는 여장. " " 아, 아아아∼? 그, 그런거군요∼ " 그제야 시민은 말귀를 알아듣고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한번 놀란 가슴은 쉽 게 진정되지를 않는다. 하필이면 성전환이라니!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과거에 남자였던 전적이 있는 시민으로서는 도저히 웃고 넘길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마리와 미연도 시민과는 다른 의미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남장……, " " 여장이라니. " " 그럼? "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가인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완전 히 암흑 그 자체인 가인을 대신하여 유리가 말했다. " 오빠는 우리 카페의 간판 마담이야. " " 우왓! 왓! 어머! 이건 정말! " 미연은 흥분했는지 연신 어머, 어머 거리기만 했고 마리는 컬쳐 쇼크를 받았 는지 넋이 나가 있었다. 시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묘하게 가인을 힐끔 거렸고 유리도 내키지 않아 했던 것과는 달리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인 을 응시한다. 하나는 주위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가인을 올려다보며 물었 다. " 오빠? 마담이 뭐야? " ' 빌어먹을― ' 가인은 진심으로 학급 회의에 불참했던 자신을 저주했다. 설마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녀석들이 이따위 안건을 통과시킬 줄이야. 혹시 재영이 녀석들, 처음부터 보복할 속셈이었나? 무엇보다 그걸 만족스럽 게 채택한 하지연 선생님은 또 뭐지? 그렇게 흡족해하던 선생님의 표정은 본 적이 없다고! " 이렇게 되면 반드시 보러가는 수밖에! 아아∼ 벌써부터 기대되는 걸∼! " " 기대하지 말아요! " 미연의 말에 가인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그러다 곧 그녀의 말에서 마음이 걸리는 부분이 있었는지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 보러……오실 거에요? 부용제? " " 응? 그럼. 작년에도 갔으니 올해도 갈 생각인데? " " 하지만, " 거기까지 말하던 가인은 말 꼬리를 흐렸다. 차마 '진우 씨도 없는데'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연은 그런 가인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살며시 미소지으며 그의 무릎에 앉 아있는 하나에게 물었다. " 하나야. 하나도 놀러가고 싶지? 언니 오빠들 학교 축제에? " " 응! 간판 마담 보고 싶어! " " ……. " 하나야, 제발 모르는 단어를 그렇게 시의(時宜) 적절하게 사용하지마. 가인은 미연 모녀의 변함 없는 태도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도통 그 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야 어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미연이 누나는 어떻게 저리도 아무 일 없 었다는듯 행동할 수 있는 거지? ' 이젠 진우 씨도 없는데……. 그런데, 그런데……. ' 그때 가인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사심도 없는 커다란 눈동자. 그 눈동자 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거기에는 슬픔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하나의 표정이 자신의 얼굴 표정을 따라 점점 변해간다는 것을. 미소가 깨어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그 비어버린 자리로 대신 슬픔이 들어서려 한다는 것을. " 하나야, 오빠 힘들게 하지말고 엄마한테 와. " 미연의 부름에 하나는 가인에게서 내려와 자신의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그리 고 자신을 안아올린 엄마의 미소를 보는 순간, 다시 예의 웃음을 되찾는다. ' 아. ' 그제야 가인은 깨달았다. 미연의 웃음은 그녀 자신을 위한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를 위한, 다른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한 웃음이라는 것을. 결코 진우 씨의 죽음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는 것을! ' 그런데 나는……. ' 가인은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잠깐이나마 미연의 웃음을 비난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생각이 짧은 걸까? 왜 이렇게 어린 거지? 언제나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녀석! 이기적인 녀석! " 그, 그럼 전 이만 도장에 가볼게요. 마리 선배! 오늘도 수련해야죠? " 가인은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미연과 하나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진우의 죽음을 구실 삼아 자 아도취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그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려고 하자, 여자들이 당황하며 뒤를 따라나 왔다. " 가인, 지금 수련하려고? " 마리는 시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수련이야 매일 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오늘은 너무 시간이 일렀다. 좀 있으면 시민 씨가 저녁 식사를 차릴텐데……. 가인은 그런 마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나갈 채비를 차린다. " 저녁 식사 후에는 아무래도 몸이 둔해져서. 그냥 이제부터는 저녁 먹지 않 고 바로 수련하려고요. " " 예? 저녁을 안 먹는다니? 굶겠다는 거에요? " 시민이 당황하며 물었다. 지금껏 그들이 함께 살아오면서 가인이 자진해서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특별한 약속이 없는한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 예에……. 아무래도 수련이 끝나면 늦게 돌아올 것 같아서. 또 최근 들어 별로 식욕도 없고요. " " 그런 때일수록 더 잘 챙겨먹어야죠. 시간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나중에 가 인 씨가 돌아와도 먹을수 있도록 준비해놓을테니까……. " " 그러면 너무 폐를 끼치잖아요. 또 시민 씨도 자기 일이 있으실텐데. 저 때 문에 괜히 시간 뺏길 것 없어요. " "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 시민은 가인의 무신경한 말투에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폐를 끼친다니? 시간을 뺏길 것 없다니? 그렇게 말하면 너무 서운하지 않은 가! 꼭 남남처럼! 하지만 가인은 그런 시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문을 열고 현관 을 나섰다. " 어쨌든 신경쓰지 마세요. 정 배가 고프다 싶으면 제가 알아서 해결하고 올 게요. " " 가인 씨! " " 가요, 마리 선배. 다녀오겠습니다! " " 자, 잠깐 가인! " 가인은 그 말을 끝으로 나가버렸고, 마리는 그와 시민을 번갈아보다가 꾸벅 인사하고서 서둘러 가인의 뒤를 쫓는다. 탕― 현관문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시민은 가인을 붙잡으려고 했던 손을 내리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별 일도 아니건만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 다. 그저 앞으로는 저녁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는데. 단지 그것 뿐이었는 데…….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 언니. " 유리는 그런 시민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인이 왜 저런 식 으로 밖에 행동하지 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기에……그랬기에 슬퍼하는 시민을 위로해줄 수 없었다. 유리는 조심스레 자신들의 눈치를 살피는 미연과 하나를 돌아보았다. " 오늘 저녁 식사는 우리끼리 해요. " " 아……그래. 오늘'은' 그렇게 할까? " 미연은 유리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분주한 척 하나를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 다. 유리는 그런 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자신도 시민의 손을 잡고 끌 어당긴다. " 언니. 오늘은 우리끼리. 응? " " ……예. 오늘, 은. " 시민은 눈시울을 붉히며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가인. 왜 그랬던 거냐? " 집을 나와 무영신풍류로 향하던 길목에서 마리가 물었다. 가인은 그녀를 돌 아보지 않으며 되묻는다. " 뭐가요? " " ……평소와는 좀 다른 것 같아서. " " 그래요? 평소에는 어땠는데요? " " 응? 아, 그게, 그러니까…….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시민 씨에게는 언제나 다정스럽지 않았나'라는 말이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또 그런 말을 입에 담자니 뭔가 우울해질 것 같기도 하고. 가인은 그렇게 마리가 말을 잇지 못하자 자신이 먼저 답했다. " 시민 씨가 매번 우리들 때문에 자기 일도 못하시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 랬던 거에요. 별 뜻은 없었어요. " " ……그런가. " 마리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납득했다.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런 것 치고서는 태도가 너무 쌀쌀했는데……. " 뭐, 정 배가 고프면 마리 선배네 집에서 얻어먹어도 되는 거고. " " 음―! " 가인의 지나가는 말에 마리는 귀가 번쩍 뜨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얻어먹는다고? 가인이? 우리 집에서? 그녀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큰 목소리로 반문했다. " 가, 가인!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겠다고? 정말이냐? " " 예. 도장에서 늦게까지 수련하니까 그럴 바에는 선배네 집에서 식사를 하 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왜요? 역시 실례이려나? " " 아, 아니―! 실례라니! 그럴 리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응! 아버님도 기 뻐하실 거다! " 마리는 그야말로 사생결단을 낼 기세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열정적인 반응 에 가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미소했다.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가끔가다가 신세질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잘 부탁드 릴게요. " " 가끔이라니! 매일 신세져도 좋다!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한다! " 우와아아― 마리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가인이 저 시민 씨의 식 사를 거절하고 내게……. 이, 이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역시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으려나? 그렇겠지? 언제나처럼 별 뜻 없이 한 얘 기일 거야. " 하지만 내 요리는……시민 씨가 만든 것보다 훨씬 못할텐데……. " 마리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인이 자신의 요리를 선택해준 것 은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시민 씨의 요리 실력에 맞춰진 그의 입맛을 만족시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지 않아요. 마리 선배의 요리는 충분히 맛있으니까. 저번에 먹은 나물 무침과 생선찌게는 정말 좋았다고요? " " 그, 그래? " " 예. 그러니까 좀 더 자랑스러워하세요. 선배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멋진 사람이니까. " " ―! " 그 말이 결정타였다. 마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붉어진채 어쩔 줄을 몰랐 다. 때마침 해가 지는 시간이라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꽤나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대체 오늘따라 가인이 왜 이러는 거지? 내 심장을 터뜨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건가? " 어쨌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수련하자고요. " " 어, 그래. " 마리는 심호흡을 하며 애써 가인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혼자서 들뜨는 건 좋지 않아. 좀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해져야… …. " 아, 그런데 선배― " 그때 가인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마리를 뒤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마리 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 왜, 왜 그러나? " " 아뇨. 다른게 아니라……오늘부터 선배는 연극 연습해야하잖아요? 그런데 저 하고 따로 수련할 시간이 있겠어요? " " 아, " 그러고 보니 그랬다. 부용제까지 채 이주일도 남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연극 준비를 하려면 꽤나 빠듯했던 것이다. 일단 이번주 내에 대본을 완벽하게 외운다쳐도 다음주까지는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봐야할테고. 또 거기에 무대 장치나 소도구, 의상을 만드는 일도 도와야 하니……. 마리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서둘러 말했다. " 신경쓸 것 없다. 저번 연극때도 어떻게든 했으니 이번에도……. " " 무리하실 것 없어요. 저야 코마히코 씨와 수련을 해도 되는 거고. " 가인의 입에서 동문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마리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뭣? 코마히코라니! " 당치도 않은 소리! 아무리 바쁘다고한들 자기 제자 하나 책임질 수 없을 것 같나! 애초에 그럴거였으면 제자를 받지도 않았어! " " 예?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 " 역시는 무슨 역시! 남 생각해줄 여유가 있으면 한번이라도 더 죽도를 휘두 르도록! 다른 생각하지 못하도록 오늘부터 철저히 수련시켜주겠다! 따라와! " 마리는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가인을 지나쳐 앞장서기 시작했다. 가인은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마히코 씨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선배? " 가인. " 그때 마리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그녀는 가인을 돌아보지 않은 채 쭈뼛거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 너는 나와……수련하는것이 내키지 않는 거냐? 가르치는 사람이 내가 아니 어도……다른 누구였더라도 상관이 없었던 거야? " " ……! " 그제야 가인은 마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마리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긋 웃었다. " 그럴리가요. 그렇다면 사정봐주지 않고 가르침 받겠어요. 단단히 각오하라 고요, 선배? " " ……으응. 각오, 하겠다.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날 밤. 언더 시티의 메인 센터. 주유화는 한숨을 내쉬며 그람드링의 방 앞에서 서성거렸다. 오늘은 한 달에 한번 있는 피스 알리자린의 메인테넌스 날.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그를 찾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화는 저번 메인테넌스 때 그람드링 에게 손목이 부러지는 호된 꼴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난 뒤, 그녀가 한번도 그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것은 아니 었지만, 그것은 다른 피스 관계자들도 동석한 자리에서의 일. 이렇게 단 둘이 서 만나는 것은 여전히 꺼림칙한 일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두렵다. 그 아이와 만나는 건 무서워! ' 그래도……가야해. '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떠올리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 레드 브라더스는 오라 능력자의 세포를 이용한 복제인간. ' 그것이 아마도 루미네선스. ' 주 선생님, 그들이 누군가의 복제인간이라면 그 DNA에는 오리지널의 정보 가 담겨 있을 겁니다. 그 정보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라 능력자들의 정 보와 대조해보면 금세 레드 브라더스의 DNA 도너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그래. 닥터의 말대로 그 도너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성당기사단의 만행을 공 표할 수 있다. 적어도 현존하는 오라 능력자들은 지켜낼 수 있다고. ' 그리고 가인이 또한……. '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리며 그람드링의 방문에 손을 가져갔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틈이 없었다. DNA 도너를 밝혀내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친 구들의 안전은 보장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람드링과 접촉해서 DNA를 채취할 단서를 찾아내야 하는데 ……. 위이이잉 자동문이 열리고 방안의 전경이 드러났다. 그리고 거기에는 유화가 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를 향해 웃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바로 그람드링 뤼멘이다. " Good evening, Doctor? " 소파에 앉아 여느때처럼 음산하게 인사하는 그는 꽤 모습이 변해 있었다. 그 동안 줄곧 머리를 길러왔기 때문일까? 긴 스포츠 머리를 한 그람드링은 오르 크리스트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그동안 이미지가 너무 틀려서 잊고 있 었지만, 그들 형제는 분명 일란성 쌍둥이였던 것이다. 서로의 외양이 닮은 것은 당연하다. " 크크크. 그동안 한번도 찾아와주지 않다니.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니야? " 그람드링의 말에 유화는 대꾸하지 않으며 가지고 온 가방을 테이블에 풀었다. 그리고 사무적인 손놀림으로 그람드링의 의수를 손볼 장비들을 꺼내기 시작한 다. " 이런. 이런. 역시 저번에 거칠게 다뤘던게 문제였나? 아직도 화가 안 풀리 셨군. " " 손이나 내밀어. " 유화는 차갑게 쏘아붙이며 그람드링의 의수에 손을 내밀었다. 그람드링은 그 런 주치의의 반응이 재미있던지 히죽 웃으면서 순순하게 오른팔을 내민다. " 흐응……. 그런데 오늘은 안 물어보는 거야? " " 뭐가? " " 뭘 꾸미고 있냐느니, 우리의 정체가 뭐냐느니. " " ―! " 순간, 의수를 만지던 유화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 앞의 그람드링을 노려보았다. " ……까불지 말라고 했잖아? 그때는 손목 하나로 끝내지 않겠다고. " 유화는 예전 그람드링에게 부서졌던 오른쪽 손목 부위를 어루만졌다. 메디컬 센터의 치료로 상처는 흉터도 없이 나았지만 왠지 지금도 그때의 아픔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람드링은 킥킥 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 크크크. 이야∼ 이거 참 영광인걸? 나 같은 녀석의 말을 이토록 귀담아 들 어주실 줄이야! 크크크크! 정말 착해! 우리 선생님은 정말 착하신 분이군! " " 흥! " 유화는 치를 떨며 몸을 돌렸다. 역시 상대할 가치가 없는 꼬마 녀석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방을 나가고 싶어! 그람드링은 그런 그녀를 만류하며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 자자. 그렇게 외면하지 말라고. 이래뵈도 난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그런데 이렇게 나오면 섭하지. " " 뭐? " 유화는 기가 막혔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날 좋아한다고? " 당신이 마음에 들어. 그렇게 표독스러운 눈초리도 내 취향이고, 쉽게 꺽여 나가지 않는 성격도 나에겐 딱이야. 괴롭히는 보람이 있겠어. " " 하, 하하……. 그것 참……영광이로구나. " 유화는 몰골이 송연해졌다. 단순히 괴롭힐 장난감으로 자신이 마음에 든다는 것 뿐이잖아? 그람드링은 그런 유화를 뒤로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쨌든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대가 필요하지 않겠어? 적어도 지금처럼 으르렁거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 " ……결국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피스 알리자린? " 유화는 팔짱을 끼며 일부러 존칭까지 써가며 물었다. 그런 정색하는 반응에 도 불구하고 그람드링은 흥이 나는지 경쾌한 발걸음으로 침대에 걸어간다. 침 대의 이불 안에는 뭔가가 들어있는지 가장자리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람드링은 이불을 잡아 흔들며 마치 마술하기 직전의 마술사처럼 유화의 이 목을 집중시켰다. " 그래서 말이야……준비했어. 우리의 사이를 개선시킬 present를. " " 선물? " " 아마 선생님이 줄곧 원해왔던 걸 거야. " 내가 줄곧 원해왔던 거라고? 유화는 마른 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매번 방안에 놓여 져 있던 오르크리스트 뤼멘의 박제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펄럭 순간, 그람드링은 침대를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자 거기에는 처참 하게 두개골이 부서진 오르크리스트의 박제가 눕혀져 있었다. " 우욱― " 유화는 입을 가리며 치미는 구역질을 필사적으로 참아넘겼다. 유가인의 암살 때 그가 ACR을 꺼내기 위해 직접 동생의 머리를 갈랐다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 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 혐오감을 참을 수가 없다. 어떻게, 어떻게 동생의 시체를 이런 식으로! " 왜? 가지고 싶지 않았어? 매번 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 못했던게 이것 때문 아니었어? " " 악! " 유화는 그람드링이 오르크리스트의 시신을 자신의 발밑으로 집어던지자 비명 을 지르며 뒷걸음질쳤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그람드링은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크크크크. 크크크크크크. " 카하하하하하! " 미, 미쳤어. 유화는 벽에 등을 기대어 사시나물 떨듯 몸을 떨었다. 도저히 눈 앞의 소년 을 제 정신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오르크리스트가 죽었을때부터 그는 미쳐버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 하―하하하하핫! " 그렇게 겁에 질렸기에, 그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혔기에, ' Bye. Bye, Chris. ' 그녀는 볼 수 없었다. 알 수 없었다. ' ……네 소원은 내가 이뤄줄게. '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두 눈이 실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5 - Ｂy Ｎext Ｎeo =-=-=-=-=-=-=-=-=-=-=-=-=-=-=-=-=-=-=-=-=-=-=-=-=-=-=-=-=-=-=-=-=-=-=-= 푸르스름한 동녘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피어난다. 해가 뜨고 있었다. 어느 때와 다름 없는 일출. 하지만 그것이 그 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임을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2033년 11월 15일. 카타스트로피의 날. 그리고 이 날은 공교롭게도 한성 고교의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피스 카민 마유빈은 초췌한 눈으로 해돋이를 바라보았다. 사전에 마스터에게서 귀뜸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에게 오늘의 태양은 평소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줄곧 마음의 준비를 해오기는 했지만 막상 당 일날이 되니 흥분에 몸이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 때문에 어제 밤에는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마스터는……아직이신가. " 유빈은 자신들이 머무른 12구역의 폐허를 돌아보았다. 어디에도 마스터, 한 시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제밤, 오늘을 위해 준비할 것이 있다며 외출한 이후 도통 연락이 없었다. 물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테지 만……. " 후우. " 유빈은 불길한 상상을 떨쳐내며 세차게 도리질 쳤다. 그리고 숨을 고른다. 아 무래도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잔뜩 흥분해 있다간 정작 일을 그르칠 위험이 있었다. 절대로 마스터를 실망시킬 순 없지! 유빈은 긴장을 풀기 위해 자신의 옆에 있는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 아아∼ 지루해 죽겠네. 왜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거야? 안 그래, 신 부― " 거기까지 말하던 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옆에서는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 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래. 그 녀석은 이제 없었지. ' 유빈은 류바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침울하게 중얼거린다. 갑자기 쓸쓸함이 물 밀듯이 밀려들었다. 뭔가 외로워지는 기분. 이런 고독함은 예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안주할 곳 하나 없이 거리를 헤맸을 때. 사람들을 세뇌시켜 하루 하루를 그들의 집에서 보냈을 때. 떠돌아 다녔을 때. 자신은 혼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스터를 만나서, 그의 일을 돕게 되면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 만 유빈은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고독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배신당할 걱정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 그동안 재미있었다, 파트너. ' 파트너. 파트너? ' 제길! ' 유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바보같은 자식! 왜 죽어버린 거야? 왜? 좀 더 살 수 있었잖아.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걸 어째서, 왜 그런 식으로! ' ……혹시 저 자식이? ' 유빈은 자신의 앞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는 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오른팔 소매가 비어있는 권복을 휘날리며 곰방대를 문 채 일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마치 그의 상태를 대변하는 것처럼 창백한 빛을 띈다.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그가 바로 라트와 피스 그린의 사투를 매듭짓고 돌아온 장본인이었다. 사건 의 전말은 알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 ' 저 자식이 라트를 죽였을지도 몰라. ' 유빈은 그런 의심을 풀 수가 없었다. 솔직히 생각해봐도 그렇다. 피스 그린 은 브루스의 제자이자 동료였다. 아무리 자기 목숨이 걸려있다고 한들 저 피 스 그레이가 갑자기 변심해서 아군을 공격했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던 것 이다. 만약 그때 한시영의 말이 없었더라면, ' 정말이지 브루스 님은……언제나 제 상상을 뛰어 넘는군요. 라트의 죽음이 야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고 또 그가 바랐던 것이니 그렇다고 치지만. ' ' ……. ' ' 설마 자신의 제자를 손수 파문시킬 줄이야. 아무리 제가 은혜니 시험이니 강요하기는 했지만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우 씨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어요. ' ' ……. ' ' 뭐, 그만큼 각오를 굳히기 위해서입니까? 앞으로의 일을 받아들이기 위한? ' ' ……. ' 브루스는 끝까지 침묵하기만 했다. 그러나 시영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유 빈은 라트가 죽었고, 피스 그린이 피스 그레이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꽤나 의외이자 놀라운 사실이었다. ' 쳇. 이제와서 누가 누굴 죽였든 무슨 상관이야. ' 유빈은 우울한 눈으로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차분히 마스터를 기다리 고 있는 류바 에레노아. 여전히 곰방대만 물고 있는 브루스 류. 마지막으로 후츠노미타마를 끌어안은채 상념에 잠겨있는 황유평. 이 인원이 대단원을 수행할 최종 멤버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피스 실버 라트 발렌시아도 끼어있어야 했지만……. 유빈은 그의 빈자리를 확인하자 더욱 허전함을 느껴야 했다. " 자― 날이 밝았군요. " 그때 유빈 일행의 뒤에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일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빈은 반색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피스 블랙 한시영이 유유히 그림자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 마스터! " " 갔다 오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 시영은 자신을 끌어안는 유빈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류바의 질문에 답했다. " 일단 대단원의 결행 시각을 늦춰야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쪽의 준비 가 준비인 만큼. 일이 수월해지려면 저희가 맞춰주는 수밖에 없더군요. " " 저쪽이라면……블러디 노블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 그렇죠. 거기에 달갑지 않은 손님도 끼어들었지만. " " ……? " 류바와 유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달갑지 않은 손님이라니? 블러디 노블 맨 외에도 다른 조력자가 있다는 건가? " 성당기사단의 타락한 사도……! " 잠자코 있던 브루스가 시영의 말을 알아듣고 한탄했다. 시영은 고개를 끄덕 였다. " 아무래도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을 모양입니다. 대단원이 이렇게 사리사 욕으로 들끓는 무대가 되어버릴 줄은……. 후. 어쩔 수가 없군요. 저부터 가 이미 욕심이 많은 남자이니. "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네이 안데르슨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는 여 기까지 버텨올 수 없었을 것이다. 14년 전의 그 날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을 것이다. 블러디 노블맨과 손을 잡았던 것은 타당했다. 합리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마지막 순간에 그의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 어차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영의 입가에서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그는 불안해하는 일행에게 말했다. " 걱정마십시오. 의식이 끝나면 웃는 것은 저희들입니다. "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왜냐하면, ' 애초부터 가이아에게 선택된 것은 우리니까. ' 세계의 의지가 고른 대행자. 그 대행을 위해 건네받은 힘! ' 그것이 바로 오라(AURA)이니까. ' " 가인! 아직 멀었나? " 마리는 26구역 시민의 집 정원에서 서성거리며 외쳤다. 그녀는 초조한 표정 을 지으며 왼손의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무전기의 액정에 떠오른 시간은 어느 덧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선배,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세요! 빨리 가서 공연 준비해야죠! " 가인은 잠이 덜깬 유리를 어르랴 가방을 챙기랴 정신 없이 현관으로 나왔다. 마리는 그런 그에게서 유리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 내 사정 때문에 새벽에 수련을 하게 된 거다. 그래놓고서 나 먼저 학교로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 " 도리라뇨……. 그냥 저도 아침 시간이 편하고 선배 연습 시간도 피할겸 그 랬던 것뿐인데. " 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요 이주간, 그들은 마리의 연극 연습 을 위해 수련 시간을 아침 새벽 시간대로 변경했던 것이다. 그렇게 새벽에 수 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면 그럭저럭 등교 시간에 맞출 수는 있 었다. 물론 지금의 도리가 어쩌고 하는 것은 그저 마리의 핑계였을 뿐이다. 평소 그녀는 학년도 다르고 반도 다르고 이웃도 아닌 가인과 등교할 구실이 없었기 에 은근히 유리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런 기회가 생겼으니 반드시 성사시키는 수밖에! " 어, 어쨌든 사부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 검을 배우는 것만이 가르침 이 아니야. 사소한 일상의 가르침이 더 중요한 거다! " " 으― 요즘따라 선배, 은근히 강압적인 거 알아요? 맨날 뭐만 하면 사부, 사부. 그러다간 오는 남자들도 따 떠나겠네. " " 뭐, 뭐? " 마리는 가인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는 남자들이 다 떠난다니! " 그게 무슨 소리냐, 가인? 내, 내가 그렇게 강압적이라는 거냐? " " 아, 그게……. 꼭 선배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대부분 남자들이 강압적인 여자를 대하기 어려워하더라. 뭐, 이런 거죠. " 가인은 마리가 정색하며 자신을 바라보자 식은땀을 흘렸다. 하여간 선배한 테는 무슨 농담을 못 하겠다니까. 뭐만 말하면 바로 이렇게 진지해져가지고. " 으음……. 그렇다면 가인은? 가인도 그런 여자는 싫은 건가? " " 싫어한다기보다는……. 아무래도 대하기가 좀 껄끄럽겠죠. " 쿵 마리의 HP는 치사량까지 떨어졌다. " 며, 명심하겠다. 앞으로는 절대로 강압적으로 굴지 않겠다. 절대로. " " 예? 아니 뭐, 저한테 그러실 것 까지야…….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부 드럽게 대해주면 되는 거지. 저에게는 앞으로도 계속 엄하게 다그쳐주세요. 선배의 호통은 꽤 효과가 좋으니까요. 하하하. " " ……. " 가인은 그렇게 최고의 둔감함을 과시함으로서 마리에게 크리티컬 히트를 넣 었다. 정말이지 어쩌다 이런 형광등 같은 남자에게 반해버린 건지 모르겠다. 한편 가인의 품에서 이미 정신을 차린 유리는 그런 마리를 딱하다는듯 바라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진즉에 마리의 연애 전선을 훼방놓을 셈이었지 만, ' 이건 뭐, 내가 나설 필요도 없군. ' 어쩌면 가인의 정조 관념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난공불략일지도. 유리는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어머. 아직도 다들 학교에 안 간 거야? 안 늦었어? " 그때 일행의 옆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이었다. 그녀가 담벼 락 너머에서 가인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아, 지금 막 갈려고요. 그보다 누나야말로 안 늦었어요? 하나 유치원에 보 낼 시간이잖아요? " 가인은 미연의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렇게 물었다. 하나가 보이질 않는게 아 무래도 먼저 유치원에 보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뒤엎고 미연은 태평하게 웃으며 말했다. " 하나 지금 자고 있어. 좀 늦게 깨울려고. " " 예―? " 가인과 마리, 유리는 영문을 알 수 없어 크게 반문했다. 자고 있다니? " 오늘 하나네 유치원 쉬는 날이에요? " " 아니. 내가 오늘 못 간다고 유치원에 전화해놨거든. 이따가 부용제에 갈건 데 하나가 유치원에 가버리면 안되잖아? " " ……. " 저기, 뭔가 우선 사항이 바뀐 것 같은데. 부용제 보다 유치원이 더 중요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인은 설마 이 정도로 미연이 부용제에 집착을 보이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일말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미연이 누나. 누나는 그토록……. " 가인이네 반 간판 마담이 너무너무 궁금해서 어제 한숨도 못잤지 뭐야! 아 아∼ 이토록 두근거려본 것이 대체 몇년만일까? 신혼 여행 때도 이런 기분 은 아니었는데∼ " ' 대체 여자들은 왜 이렇게 남자의 여장을 좋아하는 거야? ' 가인은 도무지 미연의 격렬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았겠는가? 미소년 여장시키기와 야오이 독서는 여자들에 게 있어서 식음도 전폐시킬 정도로 매력적인 유흥거리라는 것을.(물론 이것은 아주 편협된 지식이다.) " 그러고 보니 여장 준비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준비물은 안 가져가도 돼? " 미연은 가인이 맨숭하게 책가방만 매고 있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인은 그 녀가 자꾸 그쪽으로만 관심을 가지자 일부러 심술궂게 말했다. " 왜요? 없으면 속옷이라도 빌려주시게요? " " 으응! 마침 어제 쇼핑을 나갔다가 가인이 생각나서 패드 브라(Pad Bra)를 몇개 사봤어. 하나는 실리콘 패드지만 다른 하나는 베이비 오일을 넣어 만 든 밀크 패드니까 감촉이 진짜 같을 거야. 그거라면 빵이나 신문지로 가슴 만들 필요도 없고 좋을걸? " 패, 패드 브라― 가인은 결국 본전도 찾지 못하고 찌그러져야 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중 얼거렸다. 여, 역시 미연이 누나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무언 가 격이 틀려……. 유리는 그렇게 몸을 떠는 가인을 마음 속으로 위로하며 미연에게 말했다. " 오빠 여장은 하지연 선생님이 전적으로 맡으신댔는데. " " 지연 선생님이? 어떻게? " " 글쎄. 이 방면에 정통한 지인이 있다나 뭐래나. 적어도 자기같은 체육복 코스프레는 안 시키겠지. " " 그렇게 말하니까 더 기대되네∼ 빨리 빨리 보러갔으면 좋겠다아∼ " 그렇게 황홀해하는 미연의 모습에 가인은 이를 갈았다. 일부러 저러시는 거야. 일부러 저러시는게 분명해! 마리는 그렇게 여러가지 의미에서 떠들썩해지는 일행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 다. 그러다 곧 시간이 10분이나 지났음을 깨닫고서 화들짝 놀라 소리친다. " 잠깐. 다들 서두르지 않으면!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고! " " 아, 그렇죠! 그런데……. " 가인은 현관을 돌아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까부터 계속 시민이 집에서 나 오지를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바쁘다고 바쁘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잡담을 나누 고 있었던 것은 반쯤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는데. 가인은 현관을 나오기 직전, 시민이 전화를 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고 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전화길래 이렇게 오랫동안 통화하시는거지? 철컹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시민이 정원으로 나왔다. 가인은 그녀에게 늦게 나온 이유를 물으려다가 곧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다 른 일행들도 그런 시민의 모습에 의아해한다. " 무슨 일이에요, 시민 씨? 무슨 일 있었어요? " 미연이 시민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질문에 시민은 한껏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피아노 학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원장 선생님이 아프시다고……. " 원장 선생님 전화였군. 가인은 그제야 납득을 하면서도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원장 선생님이 얼마 나 아프시기에 시민 씨가 저리도 비통해하시는 거지? " 많이 아프시대요? " " 아뇨. 그냥 감기래요. 하지만……. " 하지만? " 오늘이 콩쿨에 나가는 초등학생들 레슨을 봐주는 날이라고……. 저보고 대 신 레슨을 봐주면 안되겠냐고 하시네요……. " " 예에―? " 가인과 일행은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렇다면, " 부용제에……못 오시겠네요? " 그 말에 시민은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 아뇨! 축제에는 반드시 갈 거에요. 늦더라도 갈 게요! 레슨을 빨리 끝내면 적어도 3시까지는 갈 수 있으니까! " " 예? 콩쿨에 나가는 학생이라면서요? 레슨을 빨리 끝내도 되는 거에요? " 가인의 질문에 시민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재차 조급한 목소리로 말을 잇 는다. " 빨리 끝내도 확실하게는 가르칠 거에요. 어차피 콩쿨을 앞둔 학생들은 악 보도 다 외웠고 연습도 꾸준히 해왔으니까 특별히 제가 가르칠 건 없어요. 마지막 마무리만 해주면 되요. " " 그래도 마지막 마무리가 제일 중요한거 아니에요? " " 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 시민은 자꾸만 말꼬리를 붙잡는 가인의 태도에 속이 탔다. 정말 가인 씨는!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 가인 씨는 제가 축제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거에요? " " 아뇨. 전 그냥……무리하지 마시라고. " 가인은 시민의 태도에 당황했는지 씁쓸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대번에 그들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깔린다. 마리와 유리, 미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인과 시민의 눈치를 살폈다. " 전 정말이지……어떻게 해서든 가인 씨를 보려고 하는데. 보고 싶은데. 가 인 씨는 왜 매번……. " " ……. " 울먹이는 시민의 목소리에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 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끝내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것을 지켜보던 마리는 갑자기 기분이 울쩍해졌다. ' 가인……. '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 어쨌든 전 갈 거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라고요! " 시민은 가인을 응시하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 눈빛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가인은 냉정하게 몸을 돌리며 한마디했다. " 마음대로 하세요. " 그리고 곧장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서기 시작한다. 마리와 유리는 어찌할 바 를 모르고 망설이다가, 이내 시민과 미연에게 인사를 건네고 가인을 쫓았다. 시민은 그렇게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움직일 줄 몰랐다. 고개를 떨어뜨리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시민 씨. " 미연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아무런 문제도 없겠지? " " 네에― 걱정마세요∼ " 피스메이커의 작전 본부실. 사복을 갖춰입은 윤채영의 질문에 삼인방은 똑같 은 말투에, 똑같은 억양으로 답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미심쩍어 보였기에 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 역시 이런 때에 휴가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지금이라도 반납 하고 근무하는 편이, " "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치프! 이런 때야말로 적극 휴가를 사용해서 업무에 지친 심신을 풀어줘야죠! " " 요 근래 너무 열심히 일했다고요! 치프는 충분히 휴가를 쓸 자격이 있어요! 내가 인정한다! " " 무엇보다 가인 군의 여장이라고요? 이런 기회는 두번 다시 없을 지도 몰라 요! 놓치면 두고 두고 후회할 거에요! " 치프가 휴가를 물리려고 하자 삼인방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 '필사적'이라는 부분이 역효과였는지 채영은 대번에 인상을 구긴다. " 너희들이 그러니까 더 걱정이 되는 거야! 솔직히 말해! 그동안 나 때문에 땡땡이 치지 못해서 몸이 근질근질거리지? 내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대 번에 놀자판을 벌일 셈이지! " " 그, 그럴리가∼ " " 너무해요, 치프! 우리들의 정성어린 진심을 그렇게 받아들이다니! " " 아, 전공을 세우고도 핍박받아야했던 모 장군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억울 하도다! 원통하도다! " 그렇게 변함없이 티격태격하는 치프와 삼인방의 모습에 오퍼레이터 팀의 막 내 문세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 정말이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에 슬픈 사람들이여. ' " 어쨌든! 아무리 상부의 명령이라도 안되는건 안되는 거야! 난 남는다! " 채영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듯 자신의 말에 못을 박았다. 그런 완강한 치프 의 태도에 삼인방은 회유가 물 건너 갔음을 깨달았는지 단숨에 태도가 돌변 하기 시작한다. " ……쳇.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나 했더니. " " 하여간 어제 꿈자리가 사나웠어. 왠지 이럴 것 같더라고. " " 인생 별 거 있어? 깨지면 깨지는데로 살라지. 에라이. " " 네놈들이……! " 채영은 이를 갈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한동안 관대했었지. 너무나 길고도 긴 관용의 시간이었어. 결국 그 무분별한 관용이 여기까지 부하들을 타락시킨 거다. 훌륭하게 방치시킨 거라고! ' 좋아. 오늘부터 다시 오퍼레이터 팀을 새 마음 새 뜻으로 바로 잡아주지! 첫째도 군기, 둘째도 군기인 청렴결백 근면성실의 신(新) 오퍼레이터 팀으 로 만들어주마! ' 그렇게 막 채영의 분노가 터지려는 순간, " 어머. 윤채영 치프. 정말 명령에 불복종할 생각인가요? " 채영에게는 악마, 삼인방에게는 천사인 여인이 작전 본부실에 들어왔다. 바 로 진 사령관의 직속 비서인 민수정!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삼인방은 속으로 만세삼창을 외쳤고, 채영은 480여자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다. 아아 분하도다! 윤채영, 권력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피 스메이커 입사 이래 5년 근면 정신이 상사의 명령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 것 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 ……뭔가가 다른데. ' " 오, 오셨습니까. 수정 씨. " 채영은 삼인방을 대할 때와는 달리 식은땀을 흘리며 뻣뻣하게 굳었다. 수정 은 그런 그녀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에요. 쉴때는 충분히 쉬어 줘야 전시 상황에서도 능률이 올라가지 않겠어요? 이번 채영 씨의 포상 휴 가는 그러한 의미에서 내린 거니까 부디 상부의 뜻을 헤아려주기 바래요. " " 물론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 채영은 말을 흐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의 모두는 그녀가 무슨 말 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 피스 그린 정진우의 죽음이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런 식으로 들떠버리는 건……. " 그래서 더더욱 휴가를 받아야하는 거에요. " 수정은 그런 말로 채영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 평화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이 있듯. 우리는 그 평화를 충실하게 보 내야할 의무가 있는 거에요. 한 시도 낭비할 틈이 없어요. 소중한 평화인 거에요. 그런데 정작 힘겹게 지켜낸 평화를 방치해버린다면, 그거야말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죠. 그들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거라고 요. " " ……. " 채영도, 삼인방도, 작전 본부실의 모두가 수정의 말에 숙연해졌다. 그녀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에……그랬기에 오히려 떠올릴 수 없었던 생각이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수정 씨.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피스― " 채영은 희미하게 미소하며 거수경례를 했고, 수정도 그 경례를 받아들였다. " 피스― 어쨌든 모처럼만의 동시 휴가네요. 이렇게 유레카의 각 부서 치프 들이 동시에 휴가를 쓰는 것은 작년 블루 썸머 비치 이후로 처음이죠? " " 예? " 채영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곧 수정의 뒤편에서 어설프게 손을 흔들고 있는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시더 양도 가는 겁니까? " " 에헤. 어쩌다 보니까 그만. " 시더는 앞에서 채영의 고뇌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멋쩍게 미소하며 혀 를 내밀었다. 그녀는 아주 단단히 휴가를 즐기기로 마음 먹었는지 예의 외출용 원피스를 갖춰입고 있었다. 거기에 안경을 벗고 콘택트 렌즈를 끼자 아예 사람 이 달라 보일 정도다. 그런 시더의 모습에 채영은 다시 한번 회의를 느꼈다. 도대체 앞에서 내가 했 던 고민은 뭐였던 거지? ' 여, 역시 나는 남는 편이……. ' 그렇게 채영이 말을 꺼내려는 찰나, 수정이 그녀의 변심을 눈치채고 그 귓가 에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 가인 씨의 여장 복장, 궁금하지 않아요? "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모두 채영에게 알려주었다. 그것을 듣 는 순간, 채영은 얼굴이 시뻘개진채 전율해야 했다. " 수, 수정 씨! 대, 대체,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 " 후후후. 과연 어디서일까요? " " 저, 정보는 확실한 거겠죠? " " 절 잘 아시는 분이 새삼 그런 질문을. " 그걸로 항복. 채영은 완벽하게 한성고교 행에 마음을 굳혔다. 삼인방은 '살 아있길 잘 했다'만 중얼거리는 치프의 모습에 경이로운 눈으로 수정을 바라보 았다. 역시 부 사령관! 피스메이커의 최고령 여성! ' ……아, 마지막은 빼자. ' 그 말이 수정의 귀에 들어갔다간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 이걸로 언더 시티의 각 부서를 대표하는 여성들이 다 모인 건가요? " 수정의 질문에 시더가 손을 내저었다. " 메디컬센터의 유화가 빠졌어요. " " 아, 그랬죠. 주유화 씨도 같이 가면 좋을텐데. " " 그러게 말이에요. 뭐가 그리도 바쁜 건지. 흥! " 나름대로 유화와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시더는 냉정하게 동행을 거절했던 유 화가 떠오르자 서운함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수정은 그런 시더의 내심을 읽었는지 그녀의 어깨를 두들기며 일행에게 말했 다. " 자아. 자아. 슬슬 출발하도록 하죠. 지금 가면 축제가 시작하기 전에는 도 착할 수 있을 거에요. " " 저기.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 채영은 여전히 휴가를 쓰는게 찜찜했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수정 은 작전 본부실의 한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괜찮은 거죠, 진 사령관 님? " " ―! " 일동은 깜짝 놀라며 수정이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들 어온 건지 모를 진 사령관이 사령관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 문제 없다. " 수정의 질문에 진사령관은 예의 선글라스를 번쩍이며 짧게 한마디 했다. 그 것만으로도 일행의 근심 걱정은 모두 사라져버린다. ' 하긴. 저 분이 계시는 언더 시티를 우리가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 넘 는 짓일지도. ' 채영은 쓴 웃음을 지으며 수정의 곁에 섰다. 그렇게 시더와 채영이 대열을 갖추자 수정은 진 사령관에게 거수 경례를 하며 말했다. " 피스! 그럼 민수정 외 2명. 이대로 휴가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 " ……잘 다녀오도록. " 진 사령관은 가볍게 손을 들어올리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그 들은 잠시간의 이별을 고했다. 몇 시간 뒤, 이곳에서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는 까맣게 알지도 못한채. 유전자 감식이란, 사람이 가지고 있는 DNA중 다형성이 심한 초변이성 일부만 을 DNA 증폭 기술로 선택 증폭시켜 개인간의 유전자형 차이를 알아내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이는 손가락 지문처럼 사람마다 서로 다른 DNA 모양을 형상화시키는 기술로 서 일란성 쌍둥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유일한 DNA 염기서열을 갖고 있기에 신원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 탁탁탁탁 유화는 자신의 개인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며 초조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지금 모니터에서는 한창 개인식별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개인식별검사는 친자확인검사와는 달리 특정 사람과 해당자 간의 DNA 타입이 일치하는지를 검증하는 방법이다. 대부분 성범죄때 사용되는 방법이기는 했지 만, 개인식별에 있어 Y염색체의 DNA 정보는 이러한 문제 해결에 매우 적절한 마커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사람의 게놈(genome) 내에 2-6 염기단위로 반복된 특징을 지닌 마커(ST Rs) 중에서 Y염색체 특이 STRs 마커는 이러한 문제 해결에 매우 유용하게 사 용된다. 이 STRs는 개인에 따라 반복된 수가 서로 다른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에 개인 식별에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다. ' 설마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은……. 식별할 마커가 오라능력자들 뿐이라고 해서 너무 쉽게 봤어. ' 유화는 2주 전, 그람드링에게서 오르크리스트의 시신을 건네받은 직후 줄곧 그의 DNA 도너를 밝히는데 전념해왔다. 하지만 쉽게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 했던 도너는 의외의 밝혀내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그녀는 성당 기사단의 STRs 마커 시스템에 저장된 오라 능력자들의 유전자 정보부터 해킹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시더에게 부탁하면 금새 해결될 문제였지만 유화는 왠지 결과를 알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이 건에 대해서 발설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흔히 말하 는 여자의 직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이 직감에 따른 것은 확실히 현 명한 처사였다. 피스메이커 내에는 아직 유화가 모르는 비밀들이 너무 많다. 적어도 닥터와 시더가 믿을만한 협력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 었다. ' 무엇보다 이런걸 보면 믿을래야 믿을 수가 없지. ' 해킹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코리 앙겔리로는 성 당기사단의 DB 자체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폰 뤼멘. 10번째의 검이었던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의 코리 앙겔리라 면 얘기가 다르다. 유화는 언더 시티에 그가 놓고 간 물건들을 정리하던 중 타 데오의 접속 코드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코드를 남겨두고 간 것이 그의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 써먹을 수 있는 건 써먹어봐야지. ' 문제는 해킹을 한 이후부터였다. 성당 기사단의 STRs 마커 시스템에 저장된 오라 능력자들의 정보량은 채 스 무명이 넘지 않을 거라는 그녀의 예상을 우습게 뛰어넘었다. 현존하는 오라 능력자들 외에도 그 전대, 전전대, 훨씬 이전 까지의 기록들 을 합치면 족히 1000명을 웃돌았던 것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숫자였다. 그토록 극소수라고 밝혀왔던 오 라능력자들인데. 그 때문에 수 많은 인명들이 희생되었는데. 그런데 성당 기 사단은 그런 능력자들의 정보를 이 만큼이나 보유하고 있었다고? 결국 이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성당기사단은 훨씬 옛날부터 오라 능력자들의 존재를 알고 그들을 찾아왔다는 것이 된다. 대재해가 일어나기 수십 세기 전부터! ' 후우― ' 왠지 소름이 돋았다. 유화는 식은땀이 맺힌 손바닥을 입고 있는 가운에 닦아 내었다. 그리고 조용히 모니터의 결과가 산출되기를 기다렸다. 요 2주간 1000 명분의 DNA를 대조한 결과 슬슬 감식 대상은 10명 안팎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유화는 모니터에 떠오른 10이라는 숫자를 노려보며 숨을 죽였다. 숫자는 점 점 9에서 8로. 7에서 6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 나와라. 어서 나와. ' 일반인에게 화이트 파우더를 복용시키는 것은 목재로 만든 용광로에 석탄을 쏟아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초전도 현상을 제어할 정신 감응력이 없는한 화 이트 파우더는 독극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라 능력자를 복제한 클론(clone)에게 화이트 파우더를 복용시킨 다면? 유화는 그것이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레드 브라더스라고 생각했다. 바로 복제된 오라 능력자, ' 루미네선스! ' 그 순간, 숫자가 2에서 멈췄다. 유화는 의아한 눈으로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 이 가져갔다. 어째서 2에서 멈췄지? 도너가 두 명이라는 건가? ' 그럴 리가! 유전자가 같은 인간이 또 있을 리가 없잖아? ' ……아니. 있기는 하다. 그런 경우가 분명 한 가지 있기는 해! " 맙소사. " 유화는 화면에 뜬 일련의 사진들에 신음을 흘렸다. 설마 이 사람들이 레드 브라더스의 DNA 도너? " 이제 알았겠지? " 그때 유화의 귓가로 음산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람드링 뤼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한발 앞서 그람드 링이 그녀의 어깨를 찍어눌러 다시 자리에 앉힌다. 철컥 귓가로 리볼버의 격철이 당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통수로 느껴지 는 차가운 총구의 느낌. 유화는 몸을 덜덜덜 떨면서도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 날……어떻게 할 셈이지? " " 글쎄∼ 어떻게 할까나? " 그람드링은 킥킥 웃으며 방아쇠에 건 검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 일단 대가부터 받아내야지. Give and take! " 쾅― 직후, 단발의 총성이 방안에 울려 퍼진다. Ｔo Ｂe Ｃontinued… =-=-=-=-=-=-=-=-=-=-=-=-=-=-=-=-=-=-=-=-=-=-=-=-=-=-=-=-=-=-=-=-=-=-=-=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6 - Ｂy Ｎext Ｎeo =-=-=-=-=-=-=-=-=-=-=-=-=-=-=-=-=-=-=-=-=-=-=-=-=-=-=-=-=-=-=-=-=-=-=-= " 풋! " " 크큭! " " 푸하하하핫! " 한성고 2학년 1반의 교실에서는 연신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담임인 하지 연을 위시한 여학생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몇몇 학생들은 아예 땅바닥에 쓰러져 배를 잡고 뒹굴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 의 앞에 서있는 남학생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 카하하하하―! 그게 대체 뭐야! 그게―! " 지연은 눈물까지 쏟으며 낄낄거렸다. 그런 담임의 무례한 모습에 재영은 인 상을 찡그렸다. " 아, 진짜. 그만 좀 웃으세요! 반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한 건데 너무하지 않으세요? " " 하지만! 힉― 이건 정말이지, 힉힉힉힉! " " 제, 제발 나 좀 살려줘. 너무 웃겨서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 지연은 재영의 어깨를 두들기다가 그의 차림새에 다시 한번 뒤집어졌고, 덩 달아 여학생들도 한층 격렬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이지 저렇게 웃다가 심 장이라도 멈추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뭐야? 그렇게 이상한가? 난 꽤 괜찮다고 보는데. " 재영은 투덜거리며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가 한 복장 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애니메이션, '엔젤 프린세스, 검은 날개의 리리스' 라는 변신 소녀물의 주인공 코스튬이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살아 숨쉬는 천상계. 그리고 그 천상계를 살아가는 천 족들. 엔젤 프린세스란, 이 천족들을 다스리는 천왕족의 후계자 후보를 말한 다. 그런 엔젤 프린세스 중에서도 유일하게 검은 날개족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 기에 백색의 날개를 가지지 못한 주인공. 그러면서도 천왕족 서열 2위였기에 궁 내에서는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다 당해야 했고 끝내는 천왕이 강제로 정해 준 약혼자를 피해 지상계로 도망치게 된다. 그러던 차에 부모를 잃고 홀로 살아가던 남주인공을 사고로 죽이게 되고, 결 국 자신의 생명을 그에게 불어 넣어 공존하게 되는데……. " 그, 그만해! 이히히히히힛! " ,라는 설정은 제껴두고. 재영이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코스츔을 휘날려보이자 주위 사람들은 박 장대소하며 뒤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재영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 는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 변신 포즈를 취했다. " 세계수의 축복으로 태어난 우리 날개의 후손들이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진심을 전해야 할 때! 그러니 깨어나라, 엔젤 리리스∼! " " 허억― 흐후허헛! 그만하라니까! ' " 아르멘시아! 아무리 하얀 날개족의 너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한다 면 용서하지 않겠어! 각오해라, 하늘을 울리는 세계의 빛! 오메가 선샤인! " " 그만햇! " 콰직 웃다가 웃다가 도저히 참지 못한 지연이 그만 재영을 때려눕혔다. 재영은 지 연에게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훌쩍인다. " 흑― 저는 그냥 보다 제 역할에 충실하고 싶었을 뿐인데. " " 웃기지마! 한껏 즐기고 있었던 주제에! " 지연은 코웃음을 치며 다른 학생들의 복장도 살펴보았다. 남학생들은 저마다 화려한 코스튬으로 교실을 빛내고 있었다. 간호사에 레이싱 퀸에, 세일러 교 복에 레오타드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시는군. 개인 취향대로 준비해오랬더니 정말 욕구에 충실하 셨어들. 그보다 저쪽의 비키니 껴입은 녀석은 뭐야? 숨겨진 리비도에 눈을 뜬 거냐? 지연은 자체적으로 검열할 필요성을 느끼며 한탄했다. 의욕적인건 좋지만 이 건 너무 제멋대로잖아. 그때 남학생들의 복장을 둘러보던 유리가 감상을 표했다. 그녀는 단발머리를 꽁지로 묶은채 안경을 끼고 반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붉은 리본과 어린이 책가방을 맨 것이 꼭 옆나라의 모 명탐정을 떠올리게 한다. " 아무래도 이걸로는 약해. 뭔가가 부족해. " " 그렇지? 역시 이걸로는 부족하겠지? " 지연은 맞장구를 치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서는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녀에게는 비장의 카드들이 남아있었던 것이 다. 그 비장의 카드란 바로……. " 이런! 이런! 도대체 당신들은 할 맘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이래서야 당신들을 호적수로 인정한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 ' 나왔다― ' 2학년 1반의 일동은 난데 없이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지연 은 입에 문 담배를 질끈 질끈 씹으며 교실의 문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역시 나 모두의 예상대로 제갈영 교생이 프라운 크린스들을 이끌고 나타나 있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제갈영 교생 선생님? 적지 탐색입니까? " " 후. 탐색이라.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지만 기대에 어긋난 당신들의 작태에 김이 빠졌습니다. 이건 실망이라기 보단 차라리 배신감에 가깝군요. " 팔짱을 끼며 응수하는 하지연에게 제갈영은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 저런. 배신감이라니. 어째서요? " " 저는 오늘을 위해 지난 이 2주간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왔습니다. 왜냐? 당 신들에게 절대로 부끄럽지 않은 라이벌이 되기 위해서! 교무실에 메이드 카 페를 차리기 위해 평소의 배나 되는 시간을 이사장에게 투자했고, 이번 연 극을 성사시키기 위해 헐리우드의 SFX팀까지 초청해야 했습니다! " ……어이. 그건 이미 교생의 권한을 넘어선 행동 아니야? 무엇보다 당신, 2 학년 1반의 부담임이잖아? 그런 사람이 2학년 1반에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서 어쩌겠다는 거야! " 하지만 당신들은 이런 조촐하기 짝이 없는 대응으로 제 지난 시간을 무의 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기대를 저버렸다고요! 이걸 배신이라고 하지 않 는다면 무엇을 배신이라 한단 말입니까! 정말이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 니다. 당신들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을 과대평가한 제 자신의 안 목이 실망스럽다는 것입니다! 고작! 고작 이런 사람들을 한때나마 내 인생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니! " " ……. " 거, 참. 실례되는 녀석이다. 면전에 대놓고 인생 최대의 걸림돌이니 뭐니 하 다니. 제갈영의 폭언에 학생들은 긴장하며 지연의 동태를 살폈다. 자신들의 담임을 잘 아는 그들로서는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날,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모 고등학교 교사, 대한 그룹 후계자를 린 치하다' 같은 기사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다고! " 훗, 후후후. " 그러나 이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지연은 단지 고개를 숙여 웃기만 했다. 그 의외의 모습에 학생들은, 심지어 그녀를 도발했던 제갈영마저도 당황을 금치 못한다. 왜, 왜 저러는 거지, 하지연 선생님? 짝짝 지연은 모두의 의문을 해소시켜주려는듯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 소리에 발맞춰 교실 뒷편의 간이 탈의실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온다. 그 누군가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일동은 1947년 세계 최초로 미확인 비행 물체를 목격한 미국의 케네스 아놀드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게 대체 누구래? ' 설마― ' 2학년 1반 학생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를 떠올리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아무리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많다손 치더라도 허용해선 될 게 있고 안될게 있는 법이야. 지켜줘야할 건 지 켜줘야지! 그런데 이건, 스르르르 그것은 순백의 웨딩 드레스였다. 장식이나 절개선에 의한 모양보다 전체적인 실루엣의 아름다움에 중점을 둔 결혼 의상. 하지만 흔히 식장에서 볼 수 있는, 트레인(train)이 바닥에 끌리는 긴 원피스가 아니었다. 미니! 그것도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로 짧은 초미니 웨딩 드레스다! 꿀꺽 면사포 사이로 신부의 얼굴이 드러나자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검은 폭포수와도 같은 긴 흑발이었다. 허나 그 흑발로도 신부의 미모는 가려 지지 않았다. 옅은 화장기를 머금은 얼굴은 수줍은듯 양볼을 붉히고 있다. 거기에 도도하면서도 풋풋함이 느껴지는 상반된 카리스마라니! 그야말로 천 사의! 아니, 너무나 황홀하기에 되레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아름다움이다! " ……. " 신부는 사람들이 할 말도 잊고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자 고운 아미를 찡그렸 다. 아, 찡그리는 것조차 매력적인 그 모습이라니! " 저기. 그렇게 이상한 거야? " 신부는 조심스럽게 곁에 있던 재영에게 물었다. 그러다 그의 표정을 바라보 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긴. 이상한게 당연하겠지……. ' 남자가 이런 차림을 하고 있는데 그게 제대로 된 꼴이겠냐! ' 신부는 다름아닌 유가인이었다. 특별히 그의 여장만은 하지연이 전적으로 담 당했는데, 처음 그녀가 건네준 옷과 분장 도구를 보았을 때 가인이 느낀 심정 은 그야말로 망연자실이었다. 드레스! 그것도 순백! 초미니 웨딩 드레스라니! 탈의실에서 드레스를 입고 나오기까지 그가 얼마나 고뇌했을지는 새삼 설명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편 지연은 초조한 눈빛으로 제갈영의 동태를 살폈다. 제갈영은 신부 복장 을 한 가인을 무섭게 노려본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연은 속으로 소리쳤다. 어떠냐, 내 비장의 카드가! " 나……. " 제갈영이 가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 나와 결혼해줘! " 대번에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프로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지연은 두눈을 지긋이 감으며 주먹을 쥐어올렸다. 나이스―! " 자, 잠깐! 당신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 가인은 난데없이 자신의 손을 붙잡는 제갈영에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제갈영에게 닿지 않았다. 제갈영은 이미 눈 앞의 신부에게 확률 300퍼센트의 매혹(Charm)을 걸린 뒤였다. " 회장님? " 제갈영의 심복 호일준은 처음으로 보는 주인의 모습에 경악했다. 저 자기밖 에 모르던 나르시스트 환자가 타인에게 반했다? 그것도 첫눈에 가버렸어? 이것은 아이덴티티의 상실! 궁극의 안티테제다! " 자, 모든 스케쥴을 변경한다! 당장에 결혼식 거행이다! 부용제에 온 사람 들의 축복을 받으며 허니문으로 골인하는 거다! " ' 빨라! ' 제갈영은 20년동안 자아 도취에 빠져있던 반동인지 사랑을 하는 기세도 우뢰 와 같았다. 가인은 제갈영이 자신을 번쩍 안아올리자 비명을 지르며 그의 턱 을 밀어냈다. " 야, 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허니문이라니! 농담도 정도껏 해! " " 후하하하하! 신부여, 농담이라니! 나, 제갈영은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하다! 너무나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있어! 그대와 맺어지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대원 그룹의 후계자 자리 마저 마다할 수 있어! 그대 의 눈에는 이러한 내 사랑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 " ―! " 두눈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제갈영의 모습에 가인은 기겁했다. 이 자식, 진심 이다. 지금 진심으로 이러고 있어! "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주마! 그러니 날 따라오기만 해라! 그대의 앞길은 내가 제시한다! " " 으아아아. " "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아! 절대로! 그대의 몸과 마음은 이 순간부터 내가 접수한다! 내 소유야! 후후후후― 후하하하하! " 사, 살려줘! 가인은 몬스터와 싸울 때에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정조의 위기를 느끼며 두 려움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가 입은 순백의 드레스와 여장을 통 해 한층 더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연출해낸다. 그야말로 마왕의 손에 붙잡힌 공주님이라고 해야할까. " 거기까지만 해라. " 퍽 그때 제갈영의 뒤에서 지연이 수도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제갈영은 마치 퓨즈가 나간 가전제품처럼 발라당 앞으로 거꾸러진다. 지연은 그 틈에 겁에 질린 가인을 건네받으며 그를 위로했다. " 음. 이걸로 효과는 확인했다. " " 효과는 무슨 놈의 효과! " 가인은 울상을 지으며 버럭 소리질렀다. 허나 이를 어쩌나. 그 모습마저도 이토록 아름다운걸. 그런 가인의 자태에 재영과 남학생들은 깊이 탄식했다. " 어째서 신은 그를 남자로 태어나게 했단 말인가. " " 혼란스럽군.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야. " " 아직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많군. " " 삼라만상의 섭리를 일개 인간이 파악했다고 자부하는 것부터가 오만이야. " 웨딩 드레스 하나에 참으로 거창한 반응들이다. 유리는 한숨을 쉬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살며시 얼굴을 붉힌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가인은 호일준과 크라운 프린스에 의해 실려나가는 제갈영을 치가 떨리는 표 정으로 바라보았다. " 대체 이런 옷은 또 어디서 빌려온 거에요? " " 정통한 지인이 있다고 했잖아? " 가인의 질문에 지연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답했다. " 어떤 지인? " " 네 녀석도 알고 있는 사람. " " 예? " 내가……알고 있다고? 가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이런 옷을 자신에게 입힐만 한 위인은 분명, " 어머나∼ 잘 어울려요, 가인 씨! " 그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교실에 들어오는 한 여성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이 사람 밖에 없다고. 가인은 그녀가 지연의 지인 임을 확신하고 원망스레 말했다. " 어울리긴 뭐가 어울린다는 거에요, 수정 씨……. " " 후후. 너무 쑥스러워하시네. 역시 가인 씨는 꾸미는 보람이 있는 피사체에 요. 이건 뭐, 여자인 내가 봐도 시샘이 날 정도이니. " 그렇게 말하는 이는 역시나 민수정이었다. 그녀는 가인의 드레스 차림을 바 라보며 연신 황홀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가인 은 차마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지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 그나저나 수정 씨와 선생님은 어떻게 연락이 되신 거에요? " " 평소에 알고 지냈으니까. 작년, 블루 섬머 비치에서 친해진 후, 휴일날 틈 틈히 만나서 술도 마시고 놀러다녔거든. " " ……의외네. " 가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수정을 바라보았다. 거, 참. 부사령관 직까지 수행 하면서 언제 그렇게 시간이 나셨담. 때때로 우리보다 한성고의 일과를 더 잘 알고 있었던 이유가 다 있었군. " What? really? 진짜 가인이야? " " 가, 가가가― 가인 씨! 굉장해요! " 그때 수정의 뒤에 있던 여성들이 가인의 눈에 들어왔다. 시더와 채영이었다. 시더는 연신 디지털 캠코터로 가인을 찍으며 감탄했고, 채영은 얼굴이 시뻘개 진채 웨딩 드레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가인은 시더에게서 냉큼 캠코터를 빼앗아 녹화된 영상을 삭제하며 채영에게 미소했다. " 으앗! 너무해, 가인! 이건 인권 침해야! 난 오늘의 네 모습을 유레카의 사 람들에게 알려야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 " 그래서 내 인권은 무시하기냐……. 그나저나 두 사람, 일은 어쩌고 온 거 에요?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요? " " 아, 그, 그렇죠! 저도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하지만 그게, 아무래도 상부 의 명령인지라. " " 상부의 명령? " 채영의 말에 가인은 수정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하지연과 잡담을 나 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말이지 진사령관이나 수정씨나…….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가 없으니, 원. 그렇게 투덜거리는 가인의 모습에 채영은 숨을 죽이며 속으로 감탄했다. 지 금의 그는 작은 손짓, 표정 하나만으로도 모든게 다 예술로 승화되고 있었다. ' 대단해……. 대체 여자인 우리보다 더 예쁘면 어떡하라는 거야? ' 감탄은 곧 자신감의 상실로 연결된다. 채영은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시더는 영상이 지워진 캠코터를 가인에게서 건네받으며 훌쩍였다. 그때 지연과 얘기를 끝낸 수정이 그녀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 그럼 우리도 슬슬 갈아입어 볼까요. " " 예? " 뭘 갈아입어? " 한성고에 왔으니 한성고의 법을 따라야죠. " 수정의 말을 듣는 순간, 시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작년의 악몽이 기억났던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그러니 한성고에서는 한 성고의……. 시더는 떨리는 손으로 수정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가리켰다. " 그, 그게 설마? " " 예. 바로 '그거'에요. " 단지 채영만이 영문을 몰라 수정과 시더를 번갈아 보았다. 한성고의 법? 그 거라니? 저 쇼핑백 안에 대체 뭐가 들어있기에 저러는 거야? " 자자자. 일단 절 따라오도록 하세요, 채영 씨. 채영 씨라면 분명 잘 어울 릴거라고 생각해요∼ " " 아니. 잘 어울린다니……. " 채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수정의 손에 이끌려 탈의실로 들어갔고, 그 뒤를 힘 없이 시더가 뒤따른다. 그런 여성들의 모습에 가인과 유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거라면 분명……그거겠지? " 자, 잠깐만! 아니 잠깐!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왜들 이러는 거에요! " 역시나 예상대로. 잠시 후 탈의실 안쪽에서 채영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완 강한 저항과 소란이 계속되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동정을 금치 못했다. 아무 래도 오늘 이곳에 코스튬의 마귀가 강림한 이상, 다들 험한 꼴은 피해가지 못 하는듯 했다. " 짜잔― 이것이야 말로 학교방위대! 한성전대 등장이오! " 소동이 끝나고, 탈의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민수정은 부끄러움은 저 달나라로 던져버렸는지 포메이션 포즈를 취하며 그렇게 외쳤다. 그녀의 뒤에서는 시더 가 어설픈 몸짓으로 포메이션 포즈의 한축을 맡고 있었고, 채영은 엄두도 내 지 못하며 시더의 뒤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그런 그녀들의 몸에는 각자 한성고의 여자 교복이 착용되어 있었다. " 오오오오오! " 재영과 남학생들은 수정의 포메이션 포즈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 를 쳤다. 그 모습에 여학생들은 감탄한다. 너희들, 잘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욕망에 충실할 수 있구나……. " 좋아. 유가인의 팜므파탈(femme fatale)! 거기에 한성전대의 힘이 있다면 우승도 무리가 아니지! " 지연의 탄성에 가인이 기가 막혀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왜 팜므 파탈……아니! 그보다 한성전대가 뭐 어쨌다고? " 선생님. 그래도 수정 씨 일행은 손님인데……. 외부인이 축제를 도와도 되 는 거에요? " " 스폐셜 게스트라는 거지. 뭐, 특별히 수정 씨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아 니야. 하지만 그녀들이 그저 우리 카페에 손님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손님들은 자연스레 몰려들기 마련! " 과연 지연의 말대로 어느새 2학년 1반의 교실에는 외부 손님들로 가득차 있 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팜므파탈 유가인과 수정 일행이라는 불꽃에 이끌려온 불나방들이다. 2학년 1반 일동은 새삼 이번 부용제를 위해 지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를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무섭다, 저 승리에 대한 집착! " 잘 부탁드립니다, 수정 씨. " " 반드시 이깁시다, 하 선생님! " 지연과 악수를 나누는 수정은 의욕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외침에 발맞춰 재영과 학생들의 의욕도 덩달아 고무된다. 이기자! 이기자! 드르륵 그때 교실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박재영의 동생인 박재민 과 유시내, 윤미연과 정하나 모녀였다. " 형아, 나 왔……. " 재민은 시내보다 한발 먼저 재영의 품에 달려들기 위해 나오다가 그만 보고 말았다. 엔젤 프린세스의 코스튬을 한 형의 모습을! 그리고 다음 순간, 푸확― 마치 분수처럼 코피를 뿜어냈다. 강렬한 자극에 코의 모세혈관으로 혈류가 역류했던 것이다. 혀, 형아가! 형아가 저런 모습을! ' 나……이제 여한이 없어. ' " 재민아! " " 도련님! " 절정의 행복을 끌어안고 재민은 실신했고, 그런 그를 재영과 시내가 다급히 부축했다. 의외로 일부 한정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절정의 위력을 발휘하는 재 영의 코스튬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대 박재민 용 절명의(衣)라고 할까. " 꺄! 어떡해! 어떡해! 기대한 보람이 있었어! 이건 기대 이상이야! 가인아, 너무 너무 예쁘다∼ 하나야, 너도 어서 오빠에게 인사해야지? " 미연은 가인의 여장에 박장대소하며 그의 앞으로 하나를 떠밀었다. 그러나 하나는 평소와 달리 자꾸만 얼굴을 붉히며 엄마의 다리 뒤로 몸을 숨긴다. 그 리고 홍조가 어린 얼굴로 힐끔 힐끔 가인을 훔쳐보았다. " 어머 얘가? 뭘 새삼스럽게 부끄러워 하니? 후후. " " ……. " 가인은 더 이상 상처받을 마음도 없었기에 그저 지친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 었다. 허나 그 지친 표정마저도 아름다운 그는 진정 팜므파탈이었다.(…) 하지연은 그런 미연 일행의 반응에 만족하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 웃샤―! 이번 부용제야말로 우리 2학년 1반이 접수하는 거다! 알겠냐, 자 식들아! " " 오오오오! " 재영을 비롯한 학생들, 심지어는 손님들까지 한마음이 되어 그녀의 외침에 응 했다. 지금의 2학년 1반은 그 어느때보다도 힘껏 불타오르고 있었다. ' ……우린 빼줘. '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 하여간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정말이지 최악이었어요. 이보다 더할 수 없 는 최악. " " 고생이었겠군. " 공연을 앞두고 무대 대기실에 있던 마리는 자신을 찾아와 푸념하는 가인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미 모든 분장을 지우고 원래의 교복 차림으로 돌아 와 있었다. 그것이 꽤나 아쉬웠던지 유리와 수정, 채영과 시더, 미연 모녀와 재영 일행 은 저마다 한마디 씩 한다. " 오빠같은 언니라면……목걸이를 교환해도 좋아. " " 마리아 님도 인정하실 거에요. " " 하,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 " 어떤 의미로 위험하다는 거야? " " 아마 자매 쟁탈전만 해도 만만치 않을걸? 우리 하나도 도전할 거지? " " 으응! " " 역시 유가인. 넌 어쩌면 지구의 생태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남자로 태어났 던 것일지도 모른다. " " 재영 군이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 " 난……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어느쪽이든 상관 없이 좋아해, 형아. " 그렇게 일행이 또다시 가인의 여장을 화제로 삼기 시작하자, 가인은 버럭 소 리질렀다. " 알 수 없는 얘기들은 거기까지만 해! " " 포기해, 오빠. 적어도 이 얘기는 앞으로 2대까지는 계속 전설로 이어질 거 야. " " ……. " 왜 하필 2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리의 말이 가인을 넉다운 시키기엔 충분했 다. 마리는 그런 시끌벅적해지는 일행의 모습에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 나도 공연 준비만 아니었더라면……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텐데. ' 그렇게 그녀가 가인의 여장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자 재영이 은밀하게 다가 와 속삭였다. " 걱정마세요, 선배. 유가인 팜므 파탈의 사진이 시중에 유포되는 것은 그야 말로 시간 문제니까요. 아마 단가가 좀 쎄기는 할테지만 구입하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을 거에요. " " 으음. " 마리는 귀가 솔깃해져 자세하게 사진의 유통 경로를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 만 그전에 가인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마리와 재영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 박재영. 부디 그 사진의 출처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또 내 가 아는 사람 중에 그 사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난 믿어. 그렇죠, 선배? " " 하, 하하. " " 그, 그래. 믿어라. " 재영과 마리는 진한 아쉬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들에 가인은 혀를 찼다. 정말이지 여장 한번 잘못했다고 이런 사이클이 진짜 2대까지 계속 되는 것은 아니겠지? " 어쨌든 이번에는 그다지 긴장하는 것 같지 않네요, 선배? " 가인은 마리가 작년과는 달리 비교적 여유있게 공연을 기다리고 있자 미소하 며 물었다. 그 말에 마리는 쑥스러웠는지 헛기침을 했다. " 흠! 꼭……그런 것도 아니다. 여전히 공연을 앞두고 긴장하는 것은 마찬가 지야. 단지 그 중압감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야할지. 각오를 해두고 있었 다고 해야할지. " " 그만큼 열심히 연습한 걸요? 문제 없을 거에요. 작년의 몫까지 더해서 멋지 게 연극하는 거에요! " " 음……. 고맙다. 기대에 보답하겠다. " 마리는 가인의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가인은 별 의미 없이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마리는 늘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원동력이 되었다. 분명 이번 연극도 그의 말처럼 자신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 시 해내고야 말겠다! 벌컥 그때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연극부 고문 선 생이자 양호 교사인 박미정과 마리의 동급생인 유미미였다. 그녀들은 사람들 에게 둘러싸인 마리를 발견하자 얼른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성마리, 각오하도록 하세요! 제갈영 측의 천매희가 꽤나 놀라운 연기를 보여줬어요. 지난번 연기 때부터 무언가 범상치 않음을 느끼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 수준까지 도달했을 줄이야! " " 마리 양, 이제는 할 수 밖에 없어요! 저희 스텝들도 전력을 다해 마리 양 을 돕겠어요! " 박미정과 유미미의 긴장된 목소리에 덩달아 가인 일행도 긴장한다. 천매희라 면 분명 작년에 제갈영이 영입해온 연극계의 고귀한 혈통! 그러고 보니 그녀의 무대가 마리 선배의 앞 순번이었지. 뭔가 대단한 연기라 도 보여줬던 걸까? " 적어도 천매희를 뛰어넘으려면 지금까지의 배 이상으로 연기해야 해요! 할 수 있겠죠! " " 마리 양! " 미정과 미미의 외침에 마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에게서는 앞에서 가인 일행과 얘기할 때의 느슨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그녀는 가인이 피스메이커에서 내내 보아왔던 전장에서의 그녀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가인 일행은 마리에게 잘 하라는 말조차 붙일 수 없었다. 어설픈 응원을 했다간 오히려 그녀의 고양된 집중을 방해할 것 같 았기 때문이다. " 가인. " 막 문을 나서기 직전, 마리가 가인을 돌아보았다. 몸을 돌린 그녀는 일행의 예상과 달리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예, 선배. 말씀하세요. " 가인은 그녀가 긴장하지 않고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마주 미소를 보냈다. 그런 그를 잠깐이지만 깊게 응시하던 마리는 곧 마음을 정했는지 뒷말을 잇 는다. " 무대에서의 날, 잘 지켜봐라. " 그게 무슨 소리지? 가인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이죠! " 그리고 잠시 후, 연극 신데렐라가 개막되었다. 가인 일행은 강당의 어두운 관객석에서 마리의 연극을 감상하고 있었다. 환 한 무대의 조명빛 속에서 마리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채 한창 계모와 언니 역 을 맡은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 신데렐라! 넌 어떻게 된 애가 이리도 둔해빠진 거니? 청소를 시켜도 제대 로 하기를 해! 빨래를 시켜도 제대로 하기를 해! " "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너, 엄마와 우리가 만만해 보이지? 그래서 맞 먹 으려는 거지! " " 계집애, 주제에 반항할 자존심은 있나봐? " " 아, 아니요……. 제가 어떻게 엄마와 언니들에게……. " 마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 모습이 평소의 마리와는 영 딴판이 었기에 가인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작년보다 더 능숙해진 거 맞지? 그치? " 안되겠다. 신데렐라, 넌 오늘부터 다락방에서 지내거라! " " 시, 싫어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 빨리 빨리 행동할게요! 화내시지 않도록 잘 할게요! 진짜에요! 그러니까 제발 이 추운 다락방에서 저 혼자 자라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 " 흥. 멍청한게 자기 입으로 그동안 게으름 피웠다고 고백을 하네. 고백을 해. " " 신데렐라∼ 그러니까 이렇게 되기 전에 잘 했어야지?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얌전히 다락방에 들어가렴. " " 아, 안돼! 안돼! " 마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계모와 언니들은 냉정하게 다락방의 문을 닫아버 렸다. 마리는 그 앞에서 두들기며 소리치며 목이 쉬어라 용서를 구했지만 문 은 조금도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 흑, 흐흑……. 아버지……. 아버지……. " 마리는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떨며 울기 시작했다. 신데렐라가 돌아가 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설움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리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우는 건가? " 신데렐라! 내 리본 좀 묶어줘! " " 내 구두부터 닦아놔! 얼른! " " 엄마가 뭐랬니? 접시부터 닦으랬잖아! 다락방에서 재워도 여전히 말을 안 듣는 아이구나, 너는! " 그 후로도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은 계속되었다. 신데렐라에 대한 그들의 괴 롭힘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관객들은 저마다 이를 갈고 있었다. 아마 원작에서 도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을텐데. 각색을 한 각본가의 힘이 컸던 탓일까? 묘하게 내용이 하드해져 있었다. ' 우우우. 저희도 이런 역할은 싫어요. ' 계모와 언니 역의 학생들은 관객들이 보내오는 원념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녀들은 성마리 추종회에서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배역을 추첨으로 떠 맡은 운 없는 케이스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 도시에서 왕자님이 무도회를 열었습니다.》 사회자의 나레이션과 함께 장면이 전환되었다. 계모와 언니들은 무도회에 참 석하기 위해 저마다 드레스를 입고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신데렐라는 그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나도 가고 싶어. " 잠시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지고 마리에게로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신데렐라의 독백 부분이었다. " 나도 무도회장에 참석하고 싶어. 왕자님을 만나보고 싶어. 하지만…… 하 지만 어머니가 허락해줄까? 언니들이 반대하진 않을까? " ' 응? ' 가인은 마리의 독백을 듣던 중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독백 씬이 시작되면 서부터 마리가 자신을 계속 응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설마…….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알아본다고. 기분 탓이겠지. ' 하지만 기분 탓 치고서는 마리의 시선이 줄곧 그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심 지어는 무대 앞으로 걸어나오면서까지 여전히 가인을 바라보고 있다. ' 정말……날, 보는 거야? '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마리의 독백이 모두 유가인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처 럼 느껴졌다. " 두려워. 거절당할까봐 두려워. 아니, 분명히 거절할게 뻔해. 아무리 내가 바란다고 한들, 아무리 절실히 원한다고 한들 거절당할게 뻔하잖아! " 마리는 두손을 모으고 슬픈 어조로 외쳤다. " 그럴 바에는 그냥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나아. 차라 리 그편이 상처도 덜 받고 괴롭지 않아. 슬프지 않아. 실망하지 않아! " 거기서 마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렇게 감정을 추스리던 그녀는 다시 독백 을 시작한다. "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러면 상대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을까? 눈치채줄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 " 마리는 가인을 바라보며 애절하게 말을 이었다. " 날 알아주길 바라는 건……내 욕심이 아닐까? " 마리 선배? 가인은 가슴이 싸늘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뭔가 지금 부분 은 연극이 아닌 것 같았다. 연기가 아닌, 좀 더 마음에 와닿는, 그런……그런 얘기인 것 같은데. 확― 그때 조명이 다시 켜지며 계모와 언니들이 신데렐라에게 소리쳤다. " 리본 묶어달라니까 뭐하고 있어? 빨리 빨리 안 움직여! " " 대체 뭘 멍하니 있는 건지, 원. " " 혹시 너……무도회장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 " ……. " 신데렐라는 언니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녀는 끝내 우유부단 하게도 말하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 어머나∼ 그래도 자기 주제를 알기는 아는가봐? 가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 는 걸 보니. " " 그래. 그래. 너같이 천한 애가 무도회장에 가봐야 분위기만 망치지. 집이 나 잘 지키고 있으렴. " " 그래도 혹시나 가고 싶다고 말했으면 데려가주려고 했는데. 에이. 그만둬 야겠다∼ " " 아, " 마지막 말에 신데렐라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당황하며 언니를 부르려 고 했지만 이미 그들은 신데렐라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얘기는 끝난 것이 다. " 자, 넌 다락방에나 다시 들어가 있어! " " 집안일 시키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운줄 알아! " " 안녕, 신데렐라. 재밌게 놀다올게∼ " 계모와 언니들은 다시 신데렐라를 다락방에 가두고 무도회장으로 떠났고, 마 리는 서럽게 울었다. " 흑, 나는……. 나는……. 왜 말하지 못했던 거야. 뭘 그렇게 두려워했던 거야. " 그 대사에 지켜보던 가인도 가슴이 아파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의 옷 자락을 움켜쥐었다. 울고 있는 그녀가 꼭 자신인 것만 같았다. 후회하는 모습 이 남 같지 않았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얘기하는 거였는데. 가고 싶다고, 나도 가고 싶다고 얘 기하는 거였는데. 흐흐흐흑― " ' 전 정말이지……어떻게 해서든 가인 씨를 보려고 하는데. 보고 싶은데. 가 인 씨는 왜 매번……. ' 순간, 시민이 생각났다. 울먹이며 자신을 원망스레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 다. 슬픈 표정, 눈빛이 생각났다. ' 사랑해……가인. ' 하지만 뒤를 잇는 한 여인의 그림자. 눈물을 흘리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보여 주었던 그 마지막 모습. 그녀를 떠올리자 가인은 갑자기 숨이 막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두눈이 흐려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 가인, 우리는……친구지? ' 언제나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 그때의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절실함. 애절함. 간절함. 가인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아, ' 넌 내 소중한 친구야.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 그 뒤로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무도회장에 가게 되지만, 이 미 그의 눈에는 연극이 들어오지 않았다. " ……. " 마리가 열연을 펼친 신데렐라가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구라 코 마히코는 객석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평소와 다르게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 은 그는 여전히 연극의 여흥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마리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검에만 출중한 줄 알았더니 설마 연극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이야. ' 아가씨의 또다른 면을 보게 되었군. ' 코마히코는 괜히 자신이 뿌듯해져서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오 늘 아침에 도장에서 자신과 비영을 향해 소리치던 마리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마 발단은 비영이 그가 만든 플랜카드를 그녀에게 보여주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 그게 뭡니까, 아버님? ' ' 하하하. 어떠냐. 역작이지 않느냐. 작년에 네 연극을 구경가지도 못해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를 해봤지. 도장의 단원들과 틈틈히 만든 현수막 이다. ' ' 현수막? ' 비영이 펼쳐보인 플랜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무영신풍류의 장녀, 성마리. 연극계를 비추는 찬란한 샛별이 되리!' 그 문귀를 보는 순간, 마리는 정확히 분홍색 돌이 되었다. ' 뭐에요, 선배? ' 막 수련을 마치던 가인이 그녀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다가왔다. 그러자 마리 는 전광석화같이 플랜카드를 접어 등 뒤로 감춘 뒤 도리질을 쳤다. ' 아무 것도 아니니 신경쓰지마라! 절대로 신경써서는 안된다! ' ' ……예? ' 가인은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등교 시간도 빠듯하고 해서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때서야 마리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비영을 노려보았다. ' 이 어이없는 물건은 제가 거두도록 하겠습니다. ' ' 아니! 그것은 우리가 혼신을 기울인……! ' ' 그리고 절대로 제 연극을 보러오지 마십시오. 그때는 의절입니다. ' ' 하, 하하……. ' ' 아시겠습니까! ' 결국 일이 그렇게 되어버려서 비영을 비롯한 단원들은 성마리의 응원을 중도 하차해야 했다. 대신 플랜카드 건과 무관한 코마히코만이 무영신풍류의 모두 를 대표하여 마리를 응원 오게 된 것이다. 코마히코는 자신의 사부가 딸의 의절 협박에 끙끙거리던 것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연우 사부님이나 비영 사부나……자기 자식에게 극 진한 부분은 똑같으시군. ' 어쨌든 공연 전에 찾아뵙지 못했으니 공연 뒤라도 축하드려야할텐데. ' 그는 사전에 준비한 축하 꽃다발을 안고서 마리를 찾았다. 공연이 끝났으니 대기실에 계시려나? 툭 그렇게 무대의 뒤쪽으로 돌아가던 코마히코는 막 통로에서 나오던 한 여성과 부딪히고 말았다. 성마리 추종회의 회장 유미미였다. 그는 쓰러지려는 그녀를 재빨리 부축하며 말했다. " 이런 실례를. 괜찮으십니까? " " 예? 아……예! 예!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유미미는 코마히코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를 뒤따라나오던 성마리 추종회의 학생들이 경악을 금치못한다. 아니! 골수까지 마리 님에 대한 사랑으로 차있는 회장이 외부 남자에게 고개 를 숙였어? " 아니.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그나저나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혹시 성마리 아가씨가 안쪽의 대기실에 계십니까? " " 예? 아, 마리 양은 아까 해충― 아니! 아니! 유가인 씨와 할 얘기가 있다 며 같이 옥상으로 가는 것 같았는데. " " 그렇습니까. 옥상이란 말이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친절한 아가씨. " 코마히코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마리를 찾아 옥상으로 떠났다. 그 뒷모 습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미미는 곧 성마리 추종회가 뚱한 눈으로 자신 을 바라보고 있자 화들짝 놀라 소리친다. " 뭐, 뭡니까! 여러분! 왜 이러시는 거죠? " " 회장님. 방금전의 남자에게 한눈 파신거 맞죠? " " 이실직고하시죠. 앞의 남자는 누구입니까? 누군데 우리의 마리 님을 찾는 겁니까? " " 수상합니다! 위험한 냄새가 느껴져요! " 그런 회원들의 반응에 미미는 말도 안된다는듯 버럭 소리쳤다. " 수상하다니!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을! 저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리 양의 무영신풍류에 머물고 계신 카구라 코마히코 사범님이십니다! 일본의 본가 쪽에서 파견된 속가 제자로서 그 검술 실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 거기다 예의를 중시하며 경박하지도 않은, 또 청렴결백하기까지 한 검사의 표본입 니다! 나이는 올해로 24세! 현재 애인 없음! " " ……어떻게 그리도 잘 아십니까? " 회원들은 한층 더 눈을 부라리며 물었고 유미미는 하던 말을 집어삼켰다. " 그, 글쎄요. 그냥 어쩌다 보니……. " " 흐응. 관심이 있으신 건 아니고요? " " 그러니까 그런 실례되는 말은 하지 말라니까요! 저는 그저, " 미미는 거기서 손으로 볼을 감싸며 홍조를 띄었다. " 저런 멋진 분이 우리의 마리 양 곁에 계시다면 얼마나 멋진 그림이 될까 해서. " " 하? " " 그렇지 않나요? 다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유가인같은 해충이 아닌 저런 분이야말로 마리 양을 더욱 빛내줄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같은 무 영신풍류에, 스타일까지 발군! 아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흡족하기 그지 없어요! 그야말로 마리 양의 천생배필입니다! 무엇보다 여자 관계가 문란 하지 않다는게 딱 좋아요! 저런 분이야말로 우리의 마리 양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란 말입니다! " " ……. " 회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저 골수까지 지크 마리로 가득찬 분이 어딜 가시겠나. ' 역시 우리의 회장은 믿음직해! ' 성마리 추종회는 한때나마 자신들의 회장을 의심한 것을 반성했다. 그리고 더욱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녀들의 단결력은 한층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 지크 마리! " 덕분에 그녀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던 성마리. 그녀가 지금, 옥상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었는지를. " 연극 무사히 끝낸 거 축하해요, 선배. " " 응. 고맙다. " 가인과 마리는 옥상의 철창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 자 어느덧 시간은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간을 잘 맞춘 건지 아니면 다들 축제에 여념이 없는 건지. 옥 상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 정말 연극 쪽으로 나가보는게 어때요? 마리 선배라면 잘 해낼 것 같은데. " " 어림도 없는 소리. 나같은 어중이떠중이가 넘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렇게 고교 시절에 연극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무엇보다 나에 게는, " " 나에게는 무영신풍류가 있다― 이 말이죠? " " ……그렇다. " 가인이 대신 말을 가로채자 마리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생 각했다. 역시 마리 선배가 웃을 때는……. " 역시 선배는 웃고 있을 때가 좋아요. " " 뭐? " 마리는 난데없는 가인의 기습에 얼굴을 붉혔다. 그, 그게 무슨 뜻이지? " 무슨……뜻이냐, 가인? " " 마리 선배가 웃고 있을 때는 언제나 무영신풍류 얘기를 할 때잖아요. 그렇 게 무영신풍류를 좋아하는 선배의 모습이 보기 좋다, 뭐, 이런 말이죠. " " 아, 아아. 그런가. "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그냥 이럴 때에는, '웃고 있을 때가 좋다'에서만 끝내줘도 좋을텐데. " 선배. " 가인의 부름에 마리는 그를 돌아보았다. " 공연 전에 말이에요……. 왜 그런 말을 했어요? " " 응? 그런 말이라니? " " 무대에서의 날 지켜봐라, 라고 했잖아요. " " 아아. 그거. " 마리는 쑥스러웠는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 그냥. 왠지 처음 신데렐라 대본을 받았을때. 대본을 읽다보니 네 생각이 났다. " " 제 생각요? " " 응.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 " ……. " 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왜 마리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얼핏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던 신데렐라. 용기를 내지 못하던 신데렐라. 그래 서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던 신데렐라. 그 모습이 어딘가, ' 지금의 날 닮았기 때문이겠지. ' 가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철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한성 고교의 운동장에는 축제로 떠들썩한 사람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눈으로 쫓던 가인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성고의 입구 를 응시한다. 마치 누군가가 그곳에서 나타나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 나란 녀석은……. ' 가인은 자신이 찾고 있는 이가 한시민이라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찼다. 그러자 자괴감이 밀려든다. 나란 녀석은 정말이지 구제불능이구나……하는 자괴감이. ' 그렇게 모진 소리만 했던 주제에. 차갑게만 굴었던 주제에. 그러면서 정작 와주기를 바랬던 건 아니겠지? 뻔뻔하게시리. ' 가인은 철창을 세게 움켜잡았다. 오늘 아침, 시민이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슬퍼하던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아. ' 잘됐어. 잘 된 거야. 아마 시민 씨도 나 같은 녀석에게 정이 떨어졌을 걸. 그걸로 된 거야. 그걸로 충분해. ' 충분해. 충분해. 가인은 자기 자신에게 몇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치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처럼. 다른 방법은 자기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완강하게 다그쳤다. 완강하게. 완강하게……. " ……. " 그런 가인을 바라보던 마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또 그가 무엇때문에 고민하는지도. 무 엇때문에 망설이는지도. 다……알 수 있었다. " 어? " 그렇기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가인은 갑자기 마리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돌아본 그곳에는 마리의 얼굴이 그의 얼굴을 향해 가까이 다 가오고 있었다. ' 어어? ' 가인의 두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부드럽고 달콤 한 느낌. 그것은 예전에도 그가 느껴볼 수 있었던 감촉이었다. " ―! " 입술. 마리 선배의 입술. 그 입술이 지금 나에게……. " ……. " 키스는 마리의 볼에 서린 수줍음만큼이나 빨리 끝나버렸다. 가인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저 어안 이 벙벙해져 있을뿐이다. 하지만 곧 그의 몸을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는 마리의 모습에서 실감하 게 된다. ……그녀가 자신에게 키스 했다는 사실을. " 서, 선배. " 가인의 당황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그의 품에서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울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모든 것을 억눌러 참으며 마리는 필사적으로 한발을 내딛었다. 필사적으 로 용기를 쥐어짜냈다. ' 각오했잖아? ' 이번 연극을 시작하면서 줄곧 정해왔던 것. ' 스스로에게 약속했잖아? ' 공연이 끝나면. " 좋아해, 가인. " 그와 단 둘이 있게 된다면. " 널 사랑하고 있어……. " 그러면 그에게, " 정말로……사랑해. "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로.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23화 "Goodbye to Romance"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6 - Ｂy Ｎext Ｎeo =-=-=-=-=-=-=-=-=-=-=-=-=-=-=-=-=-=-=-=-=-=-=-=-=-=-=-=-=-=-=-=-=-=-=-= " 풋! " " 크큭! " " 푸하하하핫! " 한성고 2학년 1반의 교실에서는 연신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담임인 하지 연을 위시한 여학생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몇몇 학생들은 아예 땅바닥에 쓰러져 배를 잡고 뒹굴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 의 앞에 서있는 남학생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 카하하하하―! 그게 대체 뭐야! 그게―! " 지연은 눈물까지 쏟으며 낄낄거렸다. 그런 담임의 무례한 모습에 재영은 인 상을 찡그렸다. " 아, 진짜. 그만 좀 웃으세요! 반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한 건데 너무하지 않으세요? " " 하지만! 힉― 이건 정말이지, 힉힉힉힉! " " 제, 제발 나 좀 살려줘. 너무 웃겨서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 지연은 재영의 어깨를 두들기다가 그의 차림새에 다시 한번 뒤집어졌고, 덩 달아 여학생들도 한층 격렬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이지 저렇게 웃다가 심 장이라도 멈추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뭐야? 그렇게 이상한가? 난 꽤 괜찮다고 보는데. " 재영은 투덜거리며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가 한 복장 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애니메이션, '엔젤 프린세스, 검은 날개의 리리스' 라는 변신 소녀물의 주인공 코스튬이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살아 숨쉬는 천상계. 그리고 그 천상계를 살아가는 천 족들. 엔젤 프린세스란, 이 천족들을 다스리는 천왕족의 후계자 후보를 말한 다. 그런 엔젤 프린세스 중에서도 유일하게 검은 날개족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 기에 백색의 날개를 가지지 못한 주인공. 그러면서도 천왕족 서열 2위였기에 궁 내에서는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다 당해야 했고 끝내는 천왕이 강제로 정해 준 약혼자를 피해 지상계로 도망치게 된다. 그러던 차에 부모를 잃고 홀로 살아가던 남주인공을 사고로 죽이게 되고, 결 국 자신의 생명을 그에게 불어 넣어 공존하게 되는데……. " 그, 그만해! 이히히히히힛! " ,라는 설정은 제껴두고. 재영이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코스츔을 휘날려보이자 주위 사람들은 박 장대소하며 뒤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재영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 는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 변신 포즈를 취했다. " 세계수의 축복으로 태어난 우리 날개의 후손들이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진심을 전해야 할 때! 그러니 깨어나라, 엔젤 리리스∼! " " 허억― 흐후허헛! 그만하라니까! ' " 아르멘시아! 아무리 하얀 날개족의 너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한다 면 용서하지 않겠어! 각오해라, 하늘을 울리는 세계의 빛! 오메가 선샤인! " " 그만햇! " 콰직 웃다가 웃다가 도저히 참지 못한 지연이 그만 재영을 때려눕혔다. 재영은 지 연에게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훌쩍인다. " 흑― 저는 그냥 보다 제 역할에 충실하고 싶었을 뿐인데. " " 웃기지마! 한껏 즐기고 있었던 주제에! " 지연은 코웃음을 치며 다른 학생들의 복장도 살펴보았다. 남학생들은 저마다 화려한 코스튬으로 교실을 빛내고 있었다. 간호사에 레이싱 퀸에, 세일러 교 복에 레오타드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시는군. 개인 취향대로 준비해오랬더니 정말 욕구에 충실하 셨어들. 그보다 저쪽의 비키니 껴입은 녀석은 뭐야? 숨겨진 리비도에 눈을 뜬 거냐? 지연은 자체적으로 검열할 필요성을 느끼며 한탄했다. 의욕적인건 좋지만 이 건 너무 제멋대로잖아. 그때 남학생들의 복장을 둘러보던 유리가 감상을 표했다. 그녀는 단발머리를 꽁지로 묶은채 안경을 끼고 반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붉은 리본과 어린이 책가방을 맨 것이 꼭 옆나라의 모 명탐정을 떠올리게 한다. " 아무래도 이걸로는 약해. 뭔가가 부족해. " " 그렇지? 역시 이걸로는 부족하겠지? " 지연은 맞장구를 치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서는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녀에게는 비장의 카드들이 남아있었던 것이 다. 그 비장의 카드란 바로……. " 이런! 이런! 도대체 당신들은 할 맘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이래서야 당신들을 호적수로 인정한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 ' 나왔다― ' 2학년 1반의 일동은 난데 없이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지연 은 입에 문 담배를 질끈 질끈 씹으며 교실의 문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역시 나 모두의 예상대로 제갈영 교생이 프라운 크린스들을 이끌고 나타나 있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제갈영 교생 선생님? 적지 탐색입니까? " " 후. 탐색이라.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지만 기대에 어긋난 당신들의 작태에 김이 빠졌습니다. 이건 실망이라기 보단 차라리 배신감에 가깝군요. " 팔짱을 끼며 응수하는 하지연에게 제갈영은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 저런. 배신감이라니. 어째서요? " " 저는 오늘을 위해 지난 이 2주간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왔습니다. 왜냐? 당 신들에게 절대로 부끄럽지 않은 라이벌이 되기 위해서! 교무실에 메이드 카 페를 차리기 위해 평소의 배나 되는 시간을 이사장에게 투자했고, 이번 연 극을 성사시키기 위해 헐리우드의 SFX팀까지 초청해야 했습니다! " ……어이. 그건 이미 교생의 권한을 넘어선 행동 아니야? 무엇보다 당신, 2 학년 1반의 부담임이잖아? 그런 사람이 2학년 1반에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서 어쩌겠다는 거야! " 하지만 당신들은 이런 조촐하기 짝이 없는 대응으로 제 지난 시간을 무의 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기대를 저버렸다고요! 이걸 배신이라고 하지 않 는다면 무엇을 배신이라 한단 말입니까! 정말이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 니다. 당신들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을 과대평가한 제 자신의 안 목이 실망스럽다는 것입니다! 고작! 고작 이런 사람들을 한때나마 내 인생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니! " " ……. " 거, 참. 실례되는 녀석이다. 면전에 대놓고 인생 최대의 걸림돌이니 뭐니 하 다니. 제갈영의 폭언에 학생들은 긴장하며 지연의 동태를 살폈다. 자신들의 담임을 잘 아는 그들로서는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날,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모 고등학교 교사, 대한 그룹 후계자를 린 치하다' 같은 기사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다고! " 훗, 후후후. " 그러나 이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지연은 단지 고개를 숙여 웃기만 했다. 그 의외의 모습에 학생들은, 심지어 그녀를 도발했던 제갈영마저도 당황을 금치 못한다. 왜, 왜 저러는 거지, 하지연 선생님? 짝짝 지연은 모두의 의문을 해소시켜주려는듯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 소리에 발맞춰 교실 뒷편의 간이 탈의실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온다. 그 누군가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일동은 1947년 세계 최초로 미확인 비행 물체를 목격한 미국의 케네스 아놀드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게 대체 누구래? ' 설마― ' 2학년 1반 학생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를 떠올리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아무리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많다손 치더라도 허용해선 될 게 있고 안될게 있는 법이야. 지켜줘야할 건 지 켜줘야지! 그런데 이건, 스르르르 그것은 순백의 웨딩 드레스였다. 장식이나 절개선에 의한 모양보다 전체적인 실루엣의 아름다움에 중점을 둔 결혼 의상. 하지만 흔히 식장에서 볼 수 있는, 트레인(train)이 바닥에 끌리는 긴 원피스가 아니었다. 미니! 그것도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로 짧은 초미니 웨딩 드레스다! 꿀꺽 면사포 사이로 신부의 얼굴이 드러나자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검은 폭포수와도 같은 긴 흑발이었다. 허나 그 흑발로도 신부의 미모는 가려 지지 않았다. 옅은 화장기를 머금은 얼굴은 수줍은듯 양볼을 붉히고 있다. 거기에 도도하면서도 풋풋함이 느껴지는 상반된 카리스마라니! 그야말로 천 사의! 아니, 너무나 황홀하기에 되레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아름다움이다! " ……. " 신부는 사람들이 할 말도 잊고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자 고운 아미를 찡그렸 다. 아, 찡그리는 것조차 매력적인 그 모습이라니! " 저기. 그렇게 이상한 거야? " 신부는 조심스럽게 곁에 있던 재영에게 물었다. 그러다 그의 표정을 바라보 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긴. 이상한게 당연하겠지……. ' 남자가 이런 차림을 하고 있는데 그게 제대로 된 꼴이겠냐! ' 신부는 다름아닌 유가인이었다. 특별히 그의 여장만은 하지연이 전적으로 담 당했는데, 처음 그녀가 건네준 옷과 분장 도구를 보았을 때 가인이 느낀 심정 은 그야말로 망연자실이었다. 드레스! 그것도 순백! 초미니 웨딩 드레스라니! 탈의실에서 드레스를 입고 나오기까지 그가 얼마나 고뇌했을지는 새삼 설명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편 지연은 초조한 눈빛으로 제갈영의 동태를 살폈다. 제갈영은 신부 복장 을 한 가인을 무섭게 노려본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연은 속으로 소리쳤다. 어떠냐, 내 비장의 카드가! " 나……. " 제갈영이 가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 나와 결혼해줘! " 대번에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프로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지연은 두눈을 지긋이 감으며 주먹을 쥐어올렸다. 나이스―! " 자, 잠깐! 당신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 가인은 난데없이 자신의 손을 붙잡는 제갈영에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제갈영에게 닿지 않았다. 제갈영은 이미 눈 앞의 신부에게 확률 300퍼센트의 매혹(Charm)을 걸린 뒤였다. " 회장님? " 제갈영의 심복 호일준은 처음으로 보는 주인의 모습에 경악했다. 저 자기밖 에 모르던 나르시스트 환자가 타인에게 반했다? 그것도 첫눈에 가버렸어? 이것은 아이덴티티의 상실! 궁극의 안티테제다! " 자, 모든 스케쥴을 변경한다! 당장에 결혼식 거행이다! 부용제에 온 사람 들의 축복을 받으며 허니문으로 골인하는 거다! " ' 빨라! ' 제갈영은 20년동안 자아 도취에 빠져있던 반동인지 사랑을 하는 기세도 우뢰 와 같았다. 가인은 제갈영이 자신을 번쩍 안아올리자 비명을 지르며 그의 턱 을 밀어냈다. " 야, 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허니문이라니! 농담도 정도껏 해! " " 후하하하하! 신부여, 농담이라니! 나, 제갈영은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하다! 너무나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있어! 그대와 맺어지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대원 그룹의 후계자 자리 마저 마다할 수 있어! 그대 의 눈에는 이러한 내 사랑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 " ―! " 두눈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제갈영의 모습에 가인은 기겁했다. 이 자식, 진심 이다. 지금 진심으로 이러고 있어! "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주마! 그러니 날 따라오기만 해라! 그대의 앞길은 내가 제시한다! " " 으아아아. " "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아! 절대로! 그대의 몸과 마음은 이 순간부터 내가 접수한다! 내 소유야! 후후후후― 후하하하하! " 사, 살려줘! 가인은 몬스터와 싸울 때에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정조의 위기를 느끼며 두 려움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가 입은 순백의 드레스와 여장을 통 해 한층 더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연출해낸다. 그야말로 마왕의 손에 붙잡힌 공주님이라고 해야할까. " 거기까지만 해라. " 퍽 그때 제갈영의 뒤에서 지연이 수도로 그의 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제갈영은 마치 퓨즈가 나간 가전제품처럼 발라당 앞으로 거꾸러진다. 지연은 그 틈에 겁에 질린 가인을 건네받으며 그를 위로했다. " 음. 이걸로 효과는 확인했다. " " 효과는 무슨 놈의 효과! " 가인은 울상을 지으며 버럭 소리질렀다. 허나 이를 어쩌나. 그 모습마저도 이토록 아름다운걸. 그런 가인의 자태에 재영과 남학생들은 깊이 탄식했다. " 어째서 신은 그를 남자로 태어나게 했단 말인가. " " 혼란스럽군.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야. " " 아직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많군. " " 삼라만상의 섭리를 일개 인간이 파악했다고 자부하는 것부터가 오만이야. " 웨딩 드레스 하나에 참으로 거창한 반응들이다. 유리는 한숨을 쉬며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살며시 얼굴을 붉힌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가인은 호일준과 크라운 프린스에 의해 실려나가는 제갈영을 치가 떨리는 표 정으로 바라보았다. " 대체 이런 옷은 또 어디서 빌려온 거에요? " " 정통한 지인이 있다고 했잖아? " 가인의 질문에 지연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답했다. " 어떤 지인? " " 네 녀석도 알고 있는 사람. " " 예? " 내가……알고 있다고? 가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이런 옷을 자신에게 입힐만 한 위인은 분명, " 어머나∼ 잘 어울려요, 가인 씨! " 그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교실에 들어오는 한 여성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이 사람 밖에 없다고. 가인은 그녀가 지연의 지인 임을 확신하고 원망스레 말했다. " 어울리긴 뭐가 어울린다는 거에요, 수정 씨……. " " 후후. 너무 쑥스러워하시네. 역시 가인 씨는 꾸미는 보람이 있는 피사체에 요. 이건 뭐, 여자인 내가 봐도 시샘이 날 정도이니. " 그렇게 말하는 이는 역시나 민수정이었다. 그녀는 가인의 드레스 차림을 바 라보며 연신 황홀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가인 은 차마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지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 그나저나 수정 씨와 선생님은 어떻게 연락이 되신 거에요? " " 평소에 알고 지냈으니까. 작년, 블루 섬머 비치에서 친해진 후, 휴일날 틈 틈히 만나서 술도 마시고 놀러다녔거든. " " ……의외네. " 가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수정을 바라보았다. 거, 참. 부사령관 직까지 수행 하면서 언제 그렇게 시간이 나셨담. 때때로 우리보다 한성고의 일과를 더 잘 알고 있었던 이유가 다 있었군. " What? really? 진짜 가인이야? " " 가, 가가가― 가인 씨! 굉장해요! " 그때 수정의 뒤에 있던 여성들이 가인의 눈에 들어왔다. 시더와 채영이었다. 시더는 연신 디지털 캠코터로 가인을 찍으며 감탄했고, 채영은 얼굴이 시뻘개 진채 웨딩 드레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가인은 시더에게서 냉큼 캠코터를 빼앗아 녹화된 영상을 삭제하며 채영에게 미소했다. " 으앗! 너무해, 가인! 이건 인권 침해야! 난 오늘의 네 모습을 유레카의 사 람들에게 알려야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 " 그래서 내 인권은 무시하기냐……. 그나저나 두 사람, 일은 어쩌고 온 거 에요?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요? " " 아, 그, 그렇죠! 저도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하지만 그게, 아무래도 상부 의 명령인지라. " " 상부의 명령? " 채영의 말에 가인은 수정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하지연과 잡담을 나 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말이지 진사령관이나 수정씨나…….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가 없으니, 원. 그렇게 투덜거리는 가인의 모습에 채영은 숨을 죽이며 속으로 감탄했다. 지 금의 그는 작은 손짓, 표정 하나만으로도 모든게 다 예술로 승화되고 있었다. ' 대단해……. 대체 여자인 우리보다 더 예쁘면 어떡하라는 거야? ' 감탄은 곧 자신감의 상실로 연결된다. 채영은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시더는 영상이 지워진 캠코터를 가인에게서 건네받으며 훌쩍였다. 그때 지연과 얘기를 끝낸 수정이 그녀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 그럼 우리도 슬슬 갈아입어 볼까요. " " 예? " 뭘 갈아입어? " 한성고에 왔으니 한성고의 법을 따라야죠. " 수정의 말을 듣는 순간, 시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작년의 악몽이 기억났던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그러니 한성고에서는 한 성고의……. 시더는 떨리는 손으로 수정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가리켰다. " 그, 그게 설마? " " 예. 바로 '그거'에요. " 단지 채영만이 영문을 몰라 수정과 시더를 번갈아 보았다. 한성고의 법? 그 거라니? 저 쇼핑백 안에 대체 뭐가 들어있기에 저러는 거야? " 자자자. 일단 절 따라오도록 하세요, 채영 씨. 채영 씨라면 분명 잘 어울 릴거라고 생각해요∼ " " 아니. 잘 어울린다니……. " 채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수정의 손에 이끌려 탈의실로 들어갔고, 그 뒤를 힘 없이 시더가 뒤따른다. 그런 여성들의 모습에 가인과 유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거라면 분명……그거겠지? " 자, 잠깐만! 아니 잠깐!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왜들 이러는 거에요! " 역시나 예상대로. 잠시 후 탈의실 안쪽에서 채영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완 강한 저항과 소란이 계속되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동정을 금치 못했다. 아무 래도 오늘 이곳에 코스튬의 마귀가 강림한 이상, 다들 험한 꼴은 피해가지 못 하는듯 했다. " 짜잔― 이것이야 말로 학교방위대! 한성전대 등장이오! " 소동이 끝나고, 탈의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민수정은 부끄러움은 저 달나라로 던져버렸는지 포메이션 포즈를 취하며 그렇게 외쳤다. 그녀의 뒤에서는 시더 가 어설픈 몸짓으로 포메이션 포즈의 한축을 맡고 있었고, 채영은 엄두도 내 지 못하며 시더의 뒤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그런 그녀들의 몸에는 각자 한성고의 여자 교복이 착용되어 있었다. " 오오오오오! " 재영과 남학생들은 수정의 포메이션 포즈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 를 쳤다. 그 모습에 여학생들은 감탄한다. 너희들, 잘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욕망에 충실할 수 있구나……. " 좋아. 유가인의 팜므파탈(femme fatale)! 거기에 한성전대의 힘이 있다면 우승도 무리가 아니지! " 지연의 탄성에 가인이 기가 막혀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왜 팜므 파탈……아니! 그보다 한성전대가 뭐 어쨌다고? " 선생님. 그래도 수정 씨 일행은 손님인데……. 외부인이 축제를 도와도 되 는 거에요? " " 스폐셜 게스트라는 거지. 뭐, 특별히 수정 씨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아 니야. 하지만 그녀들이 그저 우리 카페에 손님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손님들은 자연스레 몰려들기 마련! " 과연 지연의 말대로 어느새 2학년 1반의 교실에는 외부 손님들로 가득차 있 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팜므파탈 유가인과 수정 일행이라는 불꽃에 이끌려온 불나방들이다. 2학년 1반 일동은 새삼 이번 부용제를 위해 지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를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무섭다, 저 승리에 대한 집착! " 잘 부탁드립니다, 수정 씨. " " 반드시 이깁시다, 하 선생님! " 지연과 악수를 나누는 수정은 의욕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외침에 발맞춰 재영과 학생들의 의욕도 덩달아 고무된다. 이기자! 이기자! 드르륵 그때 교실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박재영의 동생인 박재민 과 유시내, 윤미연과 정하나 모녀였다. " 형아, 나 왔……. " 재민은 시내보다 한발 먼저 재영의 품에 달려들기 위해 나오다가 그만 보고 말았다. 엔젤 프린세스의 코스튬을 한 형의 모습을! 그리고 다음 순간, 푸확― 마치 분수처럼 코피를 뿜어냈다. 강렬한 자극에 코의 모세혈관으로 혈류가 역류했던 것이다. 혀, 형아가! 형아가 저런 모습을! ' 나……이제 여한이 없어. ' " 재민아! " " 도련님! " 절정의 행복을 끌어안고 재민은 실신했고, 그런 그를 재영과 시내가 다급히 부축했다. 의외로 일부 한정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절정의 위력을 발휘하는 재 영의 코스튬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대 박재민 용 절명의(衣)라고 할까. " 꺄! 어떡해! 어떡해! 기대한 보람이 있었어! 이건 기대 이상이야! 가인아, 너무 너무 예쁘다∼ 하나야, 너도 어서 오빠에게 인사해야지? " 미연은 가인의 여장에 박장대소하며 그의 앞으로 하나를 떠밀었다. 그러나 하나는 평소와 달리 자꾸만 얼굴을 붉히며 엄마의 다리 뒤로 몸을 숨긴다. 그 리고 홍조가 어린 얼굴로 힐끔 힐끔 가인을 훔쳐보았다. " 어머 얘가? 뭘 새삼스럽게 부끄러워 하니? 후후. " " ……. " 가인은 더 이상 상처받을 마음도 없었기에 그저 지친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 었다. 허나 그 지친 표정마저도 아름다운 그는 진정 팜므파탈이었다.(…) 하지연은 그런 미연 일행의 반응에 만족하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 웃샤―! 이번 부용제야말로 우리 2학년 1반이 접수하는 거다! 알겠냐, 자 식들아! " " 오오오오! " 재영을 비롯한 학생들, 심지어는 손님들까지 한마음이 되어 그녀의 외침에 응 했다. 지금의 2학년 1반은 그 어느때보다도 힘껏 불타오르고 있었다. ' ……우린 빼줘. '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 하여간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정말이지 최악이었어요. 이보다 더할 수 없 는 최악. " " 고생이었겠군. " 공연을 앞두고 무대 대기실에 있던 마리는 자신을 찾아와 푸념하는 가인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미 모든 분장을 지우고 원래의 교복 차림으로 돌아 와 있었다. 그것이 꽤나 아쉬웠던지 유리와 수정, 채영과 시더, 미연 모녀와 재영 일행 은 저마다 한마디 씩 한다. " 오빠같은 언니라면……목걸이를 교환해도 좋아. " " 마리아 님도 인정하실 거에요. " " 하,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 " 어떤 의미로 위험하다는 거야? " " 아마 자매 쟁탈전만 해도 만만치 않을걸? 우리 하나도 도전할 거지? " " 으응! " " 역시 유가인. 넌 어쩌면 지구의 생태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남자로 태어났 던 것일지도 모른다. " " 재영 군이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 " 난……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어느쪽이든 상관 없이 좋아해, 형아. " 그렇게 일행이 또다시 가인의 여장을 화제로 삼기 시작하자, 가인은 버럭 소 리질렀다. " 알 수 없는 얘기들은 거기까지만 해! " " 포기해, 오빠. 적어도 이 얘기는 앞으로 2대까지는 계속 전설로 이어질 거 야. " " ……. " 왜 하필 2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리의 말이 가인을 넉다운 시키기엔 충분했 다. 마리는 그런 시끌벅적해지는 일행의 모습에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 나도 공연 준비만 아니었더라면……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텐데. ' 그렇게 그녀가 가인의 여장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자 재영이 은밀하게 다가 와 속삭였다. " 걱정마세요, 선배. 유가인 팜므 파탈의 사진이 시중에 유포되는 것은 그야 말로 시간 문제니까요. 아마 단가가 좀 쎄기는 할테지만 구입하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을 거에요. " " 으음. " 마리는 귀가 솔깃해져 자세하게 사진의 유통 경로를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 만 그전에 가인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마리와 재영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 박재영. 부디 그 사진의 출처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또 내 가 아는 사람 중에 그 사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난 믿어. 그렇죠, 선배? " " 하, 하하. " " 그, 그래. 믿어라. " 재영과 마리는 진한 아쉬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들에 가인은 혀를 찼다. 정말이지 여장 한번 잘못했다고 이런 사이클이 진짜 2대까지 계속 되는 것은 아니겠지? " 어쨌든 이번에는 그다지 긴장하는 것 같지 않네요, 선배? " 가인은 마리가 작년과는 달리 비교적 여유있게 공연을 기다리고 있자 미소하 며 물었다. 그 말에 마리는 쑥스러웠는지 헛기침을 했다. " 흠! 꼭……그런 것도 아니다. 여전히 공연을 앞두고 긴장하는 것은 마찬가 지야. 단지 그 중압감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해야할지. 각오를 해두고 있었 다고 해야할지. " " 그만큼 열심히 연습한 걸요? 문제 없을 거에요. 작년의 몫까지 더해서 멋지 게 연극하는 거에요! " " 음……. 고맙다. 기대에 보답하겠다. " 마리는 가인의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가인은 별 의미 없이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마리는 늘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원동력이 되었다. 분명 이번 연극도 그의 말처럼 자신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 시 해내고야 말겠다! 벌컥 그때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연극부 고문 선 생이자 양호 교사인 박미정과 마리의 동급생인 유미미였다. 그녀들은 사람들 에게 둘러싸인 마리를 발견하자 얼른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성마리, 각오하도록 하세요! 제갈영 측의 천매희가 꽤나 놀라운 연기를 보여줬어요. 지난번 연기 때부터 무언가 범상치 않음을 느끼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 수준까지 도달했을 줄이야! " " 마리 양, 이제는 할 수 밖에 없어요! 저희 스텝들도 전력을 다해 마리 양 을 돕겠어요! " 박미정과 유미미의 긴장된 목소리에 덩달아 가인 일행도 긴장한다. 천매희라 면 분명 작년에 제갈영이 영입해온 연극계의 고귀한 혈통! 그러고 보니 그녀의 무대가 마리 선배의 앞 순번이었지. 뭔가 대단한 연기라 도 보여줬던 걸까? " 적어도 천매희를 뛰어넘으려면 지금까지의 배 이상으로 연기해야 해요! 할 수 있겠죠! " " 마리 양! " 미정과 미미의 외침에 마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에게서는 앞에서 가인 일행과 얘기할 때의 느슨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그녀는 가인이 피스메이커에서 내내 보아왔던 전장에서의 그녀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가인 일행은 마리에게 잘 하라는 말조차 붙일 수 없었다. 어설픈 응원을 했다간 오히려 그녀의 고양된 집중을 방해할 것 같 았기 때문이다. " 가인. " 막 문을 나서기 직전, 마리가 가인을 돌아보았다. 몸을 돌린 그녀는 일행의 예상과 달리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예, 선배. 말씀하세요. " 가인은 그녀가 긴장하지 않고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마주 미소를 보냈다. 그런 그를 잠깐이지만 깊게 응시하던 마리는 곧 마음을 정했는지 뒷말을 잇 는다. " 무대에서의 날, 잘 지켜봐라. " 그게 무슨 소리지? 가인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이죠! " 그리고 잠시 후, 연극 신데렐라가 개막되었다. 가인 일행은 강당의 어두운 관객석에서 마리의 연극을 감상하고 있었다. 환 한 무대의 조명빛 속에서 마리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채 한창 계모와 언니 역 을 맡은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 신데렐라! 넌 어떻게 된 애가 이리도 둔해빠진 거니? 청소를 시켜도 제대 로 하기를 해! 빨래를 시켜도 제대로 하기를 해! " "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너, 엄마와 우리가 만만해 보이지? 그래서 맞 먹 으려는 거지! " " 계집애, 주제에 반항할 자존심은 있나봐? " " 아, 아니요……. 제가 어떻게 엄마와 언니들에게……. " 마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 모습이 평소의 마리와는 영 딴판이 었기에 가인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작년보다 더 능숙해진 거 맞지? 그치? " 안되겠다. 신데렐라, 넌 오늘부터 다락방에서 지내거라! " " 시, 싫어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 빨리 빨리 행동할게요! 화내시지 않도록 잘 할게요! 진짜에요! 그러니까 제발 이 추운 다락방에서 저 혼자 자라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 " 흥. 멍청한게 자기 입으로 그동안 게으름 피웠다고 고백을 하네. 고백을 해. " " 신데렐라∼ 그러니까 이렇게 되기 전에 잘 했어야지?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얌전히 다락방에 들어가렴. " " 아, 안돼! 안돼! " 마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계모와 언니들은 냉정하게 다락방의 문을 닫아버 렸다. 마리는 그 앞에서 두들기며 소리치며 목이 쉬어라 용서를 구했지만 문 은 조금도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 흑, 흐흑……. 아버지……. 아버지……. " 마리는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떨며 울기 시작했다. 신데렐라가 돌아가 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설움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리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우는 건가? " 신데렐라! 내 리본 좀 묶어줘! " " 내 구두부터 닦아놔! 얼른! " " 엄마가 뭐랬니? 접시부터 닦으랬잖아! 다락방에서 재워도 여전히 말을 안 듣는 아이구나, 너는! " 그 후로도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은 계속되었다. 신데렐라에 대한 그들의 괴 롭힘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관객들은 저마다 이를 갈고 있었다. 아마 원작에서 도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을텐데. 각색을 한 각본가의 힘이 컸던 탓일까? 묘하게 내용이 하드해져 있었다. ' 우우우. 저희도 이런 역할은 싫어요. ' 계모와 언니 역의 학생들은 관객들이 보내오는 원념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녀들은 성마리 추종회에서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배역을 추첨으로 떠 맡은 운 없는 케이스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 도시에서 왕자님이 무도회를 열었습니다.》 사회자의 나레이션과 함께 장면이 전환되었다. 계모와 언니들은 무도회에 참 석하기 위해 저마다 드레스를 입고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신데렐라는 그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나도 가고 싶어. " 잠시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지고 마리에게로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신데렐라의 독백 부분이었다. " 나도 무도회장에 참석하고 싶어. 왕자님을 만나보고 싶어. 하지만…… 하 지만 어머니가 허락해줄까? 언니들이 반대하진 않을까? " ' 응? ' 가인은 마리의 독백을 듣던 중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독백 씬이 시작되면 서부터 마리가 자신을 계속 응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설마…….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알아본다고. 기분 탓이겠지. ' 하지만 기분 탓 치고서는 마리의 시선이 줄곧 그에게서 떠나지를 않았다. 심 지어는 무대 앞으로 걸어나오면서까지 여전히 가인을 바라보고 있다. ' 정말……날, 보는 거야? '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마리의 독백이 모두 유가인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처 럼 느껴졌다. " 두려워. 거절당할까봐 두려워. 아니, 분명히 거절할게 뻔해. 아무리 내가 바란다고 한들, 아무리 절실히 원한다고 한들 거절당할게 뻔하잖아! " 마리는 두손을 모으고 슬픈 어조로 외쳤다. " 그럴 바에는 그냥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나아. 차라 리 그편이 상처도 덜 받고 괴롭지 않아. 슬프지 않아. 실망하지 않아! " 거기서 마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렇게 감정을 추스리던 그녀는 다시 독백 을 시작한다. "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러면 상대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을까? 눈치채줄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 " 마리는 가인을 바라보며 애절하게 말을 이었다. " 날 알아주길 바라는 건……내 욕심이 아닐까? " 마리 선배? 가인은 가슴이 싸늘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뭔가 지금 부분 은 연극이 아닌 것 같았다. 연기가 아닌, 좀 더 마음에 와닿는, 그런……그런 얘기인 것 같은데. 확― 그때 조명이 다시 켜지며 계모와 언니들이 신데렐라에게 소리쳤다. " 리본 묶어달라니까 뭐하고 있어? 빨리 빨리 안 움직여! " " 대체 뭘 멍하니 있는 건지, 원. " " 혹시 너……무도회장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 " ……. " 신데렐라는 언니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녀는 끝내 우유부단 하게도 말하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 어머나∼ 그래도 자기 주제를 알기는 아는가봐? 가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 는 걸 보니. " " 그래. 그래. 너같이 천한 애가 무도회장에 가봐야 분위기만 망치지. 집이 나 잘 지키고 있으렴. " " 그래도 혹시나 가고 싶다고 말했으면 데려가주려고 했는데. 에이. 그만둬 야겠다∼ " " 아, " 마지막 말에 신데렐라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당황하며 언니를 부르려 고 했지만 이미 그들은 신데렐라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얘기는 끝난 것이 다. " 자, 넌 다락방에나 다시 들어가 있어! " " 집안일 시키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운줄 알아! " " 안녕, 신데렐라. 재밌게 놀다올게∼ " 계모와 언니들은 다시 신데렐라를 다락방에 가두고 무도회장으로 떠났고, 마 리는 서럽게 울었다. " 흑, 나는……. 나는……. 왜 말하지 못했던 거야. 뭘 그렇게 두려워했던 거야. " 그 대사에 지켜보던 가인도 가슴이 아파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의 옷 자락을 움켜쥐었다. 울고 있는 그녀가 꼭 자신인 것만 같았다. 후회하는 모습 이 남 같지 않았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얘기하는 거였는데. 가고 싶다고, 나도 가고 싶다고 얘 기하는 거였는데. 흐흐흐흑― " ' 전 정말이지……어떻게 해서든 가인 씨를 보려고 하는데. 보고 싶은데. 가 인 씨는 왜 매번……. ' 순간, 시민이 생각났다. 울먹이며 자신을 원망스레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 다. 슬픈 표정, 눈빛이 생각났다. ' 사랑해……가인. ' 하지만 뒤를 잇는 한 여인의 그림자. 눈물을 흘리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보여 주었던 그 마지막 모습. 그녀를 떠올리자 가인은 갑자기 숨이 막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두눈이 흐려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 가인, 우리는……친구지? ' 언제나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 그때의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절실함. 애절함. 간절함. 가인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아, ' 넌 내 소중한 친구야.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 그 뒤로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무도회장에 가게 되지만, 이 미 그의 눈에는 연극이 들어오지 않았다. " ……. " 마리가 열연을 펼친 신데렐라가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구라 코 마히코는 객석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평소와 다르게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 은 그는 여전히 연극의 여흥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마리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검에만 출중한 줄 알았더니 설마 연극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이야. ' 아가씨의 또다른 면을 보게 되었군. ' 코마히코는 괜히 자신이 뿌듯해져서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오 늘 아침에 도장에서 자신과 비영을 향해 소리치던 마리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마 발단은 비영이 그가 만든 플랜카드를 그녀에게 보여주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 그게 뭡니까, 아버님? ' ' 하하하. 어떠냐. 역작이지 않느냐. 작년에 네 연극을 구경가지도 못해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를 해봤지. 도장의 단원들과 틈틈히 만든 현수막 이다. ' ' 현수막? ' 비영이 펼쳐보인 플랜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무영신풍류의 장녀, 성마리. 연극계를 비추는 찬란한 샛별이 되리!' 그 문귀를 보는 순간, 마리는 정확히 분홍색 돌이 되었다. ' 뭐에요, 선배? ' 막 수련을 마치던 가인이 그녀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다가왔다. 그러자 마리 는 전광석화같이 플랜카드를 접어 등 뒤로 감춘 뒤 도리질을 쳤다. ' 아무 것도 아니니 신경쓰지마라! 절대로 신경써서는 안된다! ' ' ……예? ' 가인은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등교 시간도 빠듯하고 해서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때서야 마리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비영을 노려보았다. ' 이 어이없는 물건은 제가 거두도록 하겠습니다. ' ' 아니! 그것은 우리가 혼신을 기울인……! ' ' 그리고 절대로 제 연극을 보러오지 마십시오. 그때는 의절입니다. ' ' 하, 하하……. ' ' 아시겠습니까! ' 결국 일이 그렇게 되어버려서 비영을 비롯한 단원들은 성마리의 응원을 중도 하차해야 했다. 대신 플랜카드 건과 무관한 코마히코만이 무영신풍류의 모두 를 대표하여 마리를 응원 오게 된 것이다. 코마히코는 자신의 사부가 딸의 의절 협박에 끙끙거리던 것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연우 사부님이나 비영 사부나……자기 자식에게 극 진한 부분은 똑같으시군. ' 어쨌든 공연 전에 찾아뵙지 못했으니 공연 뒤라도 축하드려야할텐데. ' 그는 사전에 준비한 축하 꽃다발을 안고서 마리를 찾았다. 공연이 끝났으니 대기실에 계시려나? 툭 그렇게 무대의 뒤쪽으로 돌아가던 코마히코는 막 통로에서 나오던 한 여성과 부딪히고 말았다. 성마리 추종회의 회장 유미미였다. 그는 쓰러지려는 그녀를 재빨리 부축하며 말했다. " 이런 실례를. 괜찮으십니까? " " 예? 아……예! 예!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유미미는 코마히코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를 뒤따라나오던 성마리 추종회의 학생들이 경악을 금치못한다. 아니! 골수까지 마리 님에 대한 사랑으로 차있는 회장이 외부 남자에게 고개 를 숙였어? " 아니.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그나저나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혹시 성마리 아가씨가 안쪽의 대기실에 계십니까? " " 예? 아, 마리 양은 아까 해충― 아니! 아니! 유가인 씨와 할 얘기가 있다 며 같이 옥상으로 가는 것 같았는데. " " 그렇습니까. 옥상이란 말이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친절한 아가씨. " 코마히코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마리를 찾아 옥상으로 떠났다. 그 뒷모 습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미미는 곧 성마리 추종회가 뚱한 눈으로 자신 을 바라보고 있자 화들짝 놀라 소리친다. " 뭐, 뭡니까! 여러분! 왜 이러시는 거죠? " " 회장님. 방금전의 남자에게 한눈 파신거 맞죠? " " 이실직고하시죠. 앞의 남자는 누구입니까? 누군데 우리의 마리 님을 찾는 겁니까? " " 수상합니다! 위험한 냄새가 느껴져요! " 그런 회원들의 반응에 미미는 말도 안된다는듯 버럭 소리쳤다. " 수상하다니!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을! 저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리 양의 무영신풍류에 머물고 계신 카구라 코마히코 사범님이십니다! 일본의 본가 쪽에서 파견된 속가 제자로서 그 검술 실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 거기다 예의를 중시하며 경박하지도 않은, 또 청렴결백하기까지 한 검사의 표본입 니다! 나이는 올해로 24세! 현재 애인 없음! " " ……어떻게 그리도 잘 아십니까? " 회원들은 한층 더 눈을 부라리며 물었고 유미미는 하던 말을 집어삼켰다. " 그, 글쎄요. 그냥 어쩌다 보니……. " " 흐응. 관심이 있으신 건 아니고요? " " 그러니까 그런 실례되는 말은 하지 말라니까요! 저는 그저, " 미미는 거기서 손으로 볼을 감싸며 홍조를 띄었다. " 저런 멋진 분이 우리의 마리 양 곁에 계시다면 얼마나 멋진 그림이 될까 해서. " " 하? " " 그렇지 않나요? 다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유가인같은 해충이 아닌 저런 분이야말로 마리 양을 더욱 빛내줄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같은 무 영신풍류에, 스타일까지 발군! 아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흡족하기 그지 없어요! 그야말로 마리 양의 천생배필입니다! 무엇보다 여자 관계가 문란 하지 않다는게 딱 좋아요! 저런 분이야말로 우리의 마리 양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란 말입니다! " " ……. " 회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저 골수까지 지크 마리로 가득찬 분이 어딜 가시겠나. ' 역시 우리의 회장은 믿음직해! ' 성마리 추종회는 한때나마 자신들의 회장을 의심한 것을 반성했다. 그리고 더욱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녀들의 단결력은 한층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 지크 마리! " 덕분에 그녀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동경해마지 않던 성마리. 그녀가 지금, 옥상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었는지를. " 연극 무사히 끝낸 거 축하해요, 선배. " " 응. 고맙다. " 가인과 마리는 옥상의 철창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 자 어느덧 시간은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간을 잘 맞춘 건지 아니면 다들 축제에 여념이 없는 건지. 옥 상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 정말 연극 쪽으로 나가보는게 어때요? 마리 선배라면 잘 해낼 것 같은데. " " 어림도 없는 소리. 나같은 어중이떠중이가 넘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렇게 고교 시절에 연극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무엇보다 나에 게는, " " 나에게는 무영신풍류가 있다― 이 말이죠? " " ……그렇다. " 가인이 대신 말을 가로채자 마리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생 각했다. 역시 마리 선배가 웃을 때는……. " 역시 선배는 웃고 있을 때가 좋아요. " " 뭐? " 마리는 난데없는 가인의 기습에 얼굴을 붉혔다. 그, 그게 무슨 뜻이지? " 무슨……뜻이냐, 가인? " " 마리 선배가 웃고 있을 때는 언제나 무영신풍류 얘기를 할 때잖아요. 그렇 게 무영신풍류를 좋아하는 선배의 모습이 보기 좋다, 뭐, 이런 말이죠. " " 아, 아아. 그런가. "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그냥 이럴 때에는, '웃고 있을 때가 좋다'에서만 끝내줘도 좋을텐데. " 선배. " 가인의 부름에 마리는 그를 돌아보았다. " 공연 전에 말이에요……. 왜 그런 말을 했어요? " " 응? 그런 말이라니? " " 무대에서의 날 지켜봐라, 라고 했잖아요. " " 아아. 그거. " 마리는 쑥스러웠는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 그냥. 왠지 처음 신데렐라 대본을 받았을때. 대본을 읽다보니 네 생각이 났다. " " 제 생각요? " " 응.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 " ……. " 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왜 마리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얼핏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던 신데렐라. 용기를 내지 못하던 신데렐라. 그래 서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던 신데렐라. 그 모습이 어딘가, ' 지금의 날 닮았기 때문이겠지. ' 가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철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한성 고교의 운동장에는 축제로 떠들썩한 사람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눈으로 쫓던 가인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성고의 입구 를 응시한다. 마치 누군가가 그곳에서 나타나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 나란 녀석은……. ' 가인은 자신이 찾고 있는 이가 한시민이라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찼다. 그러자 자괴감이 밀려든다. 나란 녀석은 정말이지 구제불능이구나……하는 자괴감이. ' 그렇게 모진 소리만 했던 주제에. 차갑게만 굴었던 주제에. 그러면서 정작 와주기를 바랬던 건 아니겠지? 뻔뻔하게시리. ' 가인은 철창을 세게 움켜잡았다. 오늘 아침, 시민이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녀의 슬퍼하던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아. ' 잘됐어. 잘 된 거야. 아마 시민 씨도 나 같은 녀석에게 정이 떨어졌을 걸. 그걸로 된 거야. 그걸로 충분해. ' 충분해. 충분해. 가인은 자기 자신에게 몇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치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처럼. 다른 방법은 자기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완강하게 다그쳤다. 완강하게. 완강하게……. " ……. " 그런 가인을 바라보던 마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또 그가 무엇때문에 고민하는지도. 무 엇때문에 망설이는지도. 다……알 수 있었다. " 어? " 그렇기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가인은 갑자기 마리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돌아본 그곳에는 마리의 얼굴이 그의 얼굴을 향해 가까이 다 가오고 있었다. ' 어어? ' 가인의 두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부드럽고 달콤 한 느낌. 그것은 예전에도 그가 느껴볼 수 있었던 감촉이었다. " ―! " 입술. 마리 선배의 입술. 그 입술이 지금 나에게……. " ……. " 키스는 마리의 볼에 서린 수줍음만큼이나 빨리 끝나버렸다. 가인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저 어안 이 벙벙해져 있을뿐이다. 하지만 곧 그의 몸을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는 마리의 모습에서 실감하 게 된다. ……그녀가 자신에게 키스 했다는 사실을. " 서, 선배. " 가인의 당황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그의 품에서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울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모든 것을 억눌러 참으며 마리는 필사적으로 한발을 내딛었다. 필사적으 로 용기를 쥐어짜냈다. ' 각오했잖아? ' 이번 연극을 시작하면서 줄곧 정해왔던 것. ' 스스로에게 약속했잖아? ' 공연이 끝나면. " 좋아해, 가인. " 그와 단 둘이 있게 된다면. " 널 사랑하고 있어……. " 그러면 그에게, " 정말로……사랑해. "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로.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7 - Ｂy Ｎext Ｎeo =-=-=-=-=-=-=-=-=-=-=-=-=-=-=-=-=-=-=-=-=-=-=-=-=-=-=-=-=-=-=-=-=-=-=-= " 후우. " 아르센 피아노 학원. 시민은 레슨 도중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 다. 그런 선생님의 한숨에 피아노를 치던 초등학생은 자신이 뭔가를 실수했 나 싶어 화들짝 손을 멈춘다. 그렇게 피아노 소리가 끊기자 시민은 아차하며 미소 지었다. " 아니야. 잘 하고 있으니까 계속 해요. " " ……예. " 초등학생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조심스레 건반을 누른다. 그 모습 에 시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마음이 콩밭에 있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콩쿨에 나갈 학생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한시민? '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3시인데. ' 시민은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며 오늘따라 유독 빨리 지나가는 시간을 원망 했다. 그녀는 근심스러운 눈으로 피아노를 치는 학생을 바라보았다. 학생은 콩쿨 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신감 이 결여되어 있었다. 아마 원장 선생님이 당일 날 이 학생의 레슨을 고집했던 것은 다 저 긴장감 을 풀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이래서야 끝이 없겠는데. '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레슨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런 흐름으로는 도 저히 가인과 약속했던 3시까지 한성고로 갈 수 없을 것이다. 시민은 초조함을 느끼며 방 안을 서성거렸다. 가뜩이나 최근들어 사이가 벌 어졌던 가인이었다. 이번 부용제 때 어떻게든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으면 앞 으로도 친밀해질 기회는 없을 것이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딸랑 그때 피아노 학원의 현관 쪽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군가가 학원으로 들어오면서 문에 달린 종을 울린 모양이다. 누구지?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없을텐데? 시민은 의아함을 느끼며 복도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방 문객이 레슨실로 불쑥 들어온다. " 원장 선생님? " 시민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방문객을 불렀다. 방문객은 다름 아닌 아 르센 피아노 학원의 원장 김민경이었던 것이다. 민경은 예의 뿔테 안경을 쓴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다. " 워, 원장 선생님! 어떻게 되신 거에요? 아프신 거 아니었어요? " " ……. " 시민의 당황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민경은 아무런 말 없이 레슨실을 가로 질 렀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원생을 살펴본 후 작게 한탄한다. " 내 이럴 줄 알았지∼ 아침에 전화했을 때부터 목소리가 우울하길래 걱정이 되더니만. " " 선생님? " " 그렇게 우거지상을 짓고 애를 가르치는데 어떻게 원생이 긴장을 풀겠어요? 이건 뭐, 어제보다 더 얼어버렸잖아? " 민경의 지적에 시민은 얼굴이 붉어졌다. 되도록 티를 안낼려고 노력했지만 잠깐 살펴본 민경의 눈에도 다 보일 정도로 자신이 초조해하고 있었던 모양 이다. " 죄, 죄송합니다. " " 어휴. 바쁜 일이 있으면 있다고 진즉에 말할 것이지. 하여간 좀 거절할 줄 도 알란 말이에요. 이래서야 부탁한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 " 예? " 민경의 말에 시민은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그런 그녀에게 민경은 의미심장 한 눈웃음을 쳤다. " 오늘 한성고에서 축제가 있는 날이죠? 이웃 집 아이가 한성고에 다니고 있 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그만 열 때문에 깜빡했지 뭐야. " " ……. " " 그나저나 너무한 거 아니에요? 사전에 귀뜸이라도 해줬으면 이런 날 내가 시민 씨를 부르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어쩜 아무런 얘기도 없이 있을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인 씨를 만나러가는 거면서. " " 그, 그게. " 시민은 민경의 말에 점점 얼굴이 빨개지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 원래 비번이기도 했고……. 또 가인 씨를 만나러간다기보다는, 그냥 축제 에 유리 양도 있고 가족으로서 놀러가는 거라서……. " " 에엥―? 가인 씨하고 단 둘이 데이트 하는 거 아니었어? " " ……아니에요. " 시민은 민경이 한심하다는듯 되묻자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이럴까봐 내가 부용제에 간다고 얘기하지 않았던 건데……. " 나, 참. 이럴 때 만큼은 좀 단 둘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꼭 이런 날에도 그렇게 보호자 티를 내야겠어요? 으아∼ 가인 씨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영 실망했겠는걸. " " 그, 그런 건 저도 알고 있어요. " " 알고 있기는 뭘 알아? 하나도 모르고 있구만. 그렇게 태평하게 굴다간 쥐 도 새도 모르게 빼앗긴다고. " " 빼앗긴다니, 뭘……. " " 뭐긴 뭐야! 다른 여자가 가인 씨를 채가 버린다 이 말이지! 어휴. 그런걸 되묻는다는 것 자체가 태평하다는 거에요! " " 우― " 계속되는 민경의 다그침에 시민은 심통이 났는지 볼을 부풀린다. 아, 놀려먹는 건 여기까지. 민경은 시민이 진짜 화를 내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 흠. 흠. 어쨌든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시민 씨는 그만 퇴근하도록 하세요. " " 예? 하지만 그럼 레슨은 누가……. " " 내가 하면 되지. 오전 내내 푹 잤더니 열도 내리고 몸도 가뿐해졌거든! " 민경은 팔을 좌우로 흔들어보이며 문제 없다는듯 자신의 상태를 과시했다. 하지만 시민은 안쓰러운 눈으로 민경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 민 경은 조금도 좋아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여전히 열로 달아오른 얼굴에 마스크 사이로 새어나오는 거친 숨소리. 거기 다 코맹맹이 목소리까지 더해 뭐 하나 나아진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 해졌으면 심해졌을까. " 무리에요, 원장 선생님. 더 쉬셔야해요. " " 허허어∼ 또 그런다. 그럼 직접 원생에게 물어보도록 할까요? 순영아, 넌 누가 가르쳐줬으면 좋겠니? 원장 선생님이? 아니면 시민 선생님이? " 민경이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멀뚱히 바라보는 원생에게 물었다. 원생은 그 녀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민경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렸다고는 하지만 민경 쪽이 더 편안하게 자신을 가르쳐줄 것 같았기 때문이 다. " 원장 선생님요. " " 것 봐요! 이제 알겠죠? 시민 씨는 아무―런 걱정할 거 없으니까 이대로 가 인 씨를 만나러 가세요. 제가 저번에 얘기 안했던가? 학원에서 우울한 표 정 짓지 않도록 가인 씨랑 알콩달콩 연애하라고. " " ……알콩달콩이라뇨. " 시민은 새침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민경이 이렇게까지 신경써주는데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그녀 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 언제나 죄송해요, 원장 선생님. 그리고……감사합니다. " " 그래요. 얼른 가인 씨한테 달려가는 거에요? " " 후후. 예에― " 시민은 민경의 말을 부인하지 않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레슨 실을 나왔다. 나갈 채비를 하고 현관으로 향하는 그 녀의 발걸음은 예의 우울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인을 만난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렇듯 그녀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뛰었 던 것이다. ' 이제 오시지 않아도 되요. ' 그때 현관 문의 손잡이로 향하던 시민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 신경쓰지 마세요. ' ' 마음대로 하세요. ' 무신경한 말투. 냉정한 태도. 요 몇달간 가인이 보여주던 모습들이 떠오르자 들뜨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가 라앉는다.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리 이렇게 혼자서 열을 낸다고 한들 가인과 자신 사이에 생긴 골이 메워질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 등을 돌리고 있는 그 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두려웠다. ' 또 다시 외면당하면, 또 다시 거절당하면, ' 그때는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 나는 아직 아무 것도 얘기하지 못했는데. '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딸랑 하지만 그런 고민들과 달리 시민의 손은 이미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문에 달린 종소리가 그녀의 흐릿한 정신을 일깨운다. ' 가인 씨, 우리 둘이서…… 이대로 어딘가로 가버릴래요? ' ……그래. 고민해봤자 어쩔 수 없어. 두려워하고 망설여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은 아직 그때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가인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 끝낼 수 없는 것이다. ' 분명 가인 씨도. ' 그때의 그라면, ' 시민 씨를……사랑하는데요? ' 그 말을 했던 그라면, 그 말이 진심이었더라면, ' 분명 대답해줄 거야. ' 반드시. 그때가 언제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시민은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 기다릴 거에요, 가인 씨. ' 열려진 문 밖으로는 눈부신 햇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민은 그 기분 좋은 환함에 눈을 감으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 여어― " 그녀는 잊고 있었던 과거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아. " 시영은 예전과 변함 없는 미소로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반겨주었다. " 마리 선배……. " 가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마리를 불렀다. 선배가 방금 뭐라고 했지? 좋아한다고? 날? ' 사랑한다고? ' 믿기지 않는다. 설마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단 한번도 생각 해본 적이 없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 그런 기미는 조금도 없었으면서……. ' 아니. ' ……없었던 게 아니다. 갑작스러운게 아니야. 마리 선배는 예전부터, ' 내 낭군이 되어줘! ' ' 넌 시민 씨를 좋아하잖아! ' ' 항상 너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 ' 나의 데이트를 받아주기 바란다. ' '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기대도록 해라. ' ' 네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난 최선을 다하겠다. ' ' 내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상관이 없었던 건가? ' 언제나 그랬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아무런 말도 없이 항상, '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어. '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랬기에 깨닫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는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을텐데. 조금만 더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렇게 뒤늦게서야 눈치 채지는……. '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 ' 문득 든 자문. 가인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진심. 마음 한켠에 숨겨두고 있던 의구심이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 정말 마리 선배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던 거냐, 유가인? 사실은 알고 있 지 않았어? 그 정도로 둔한 녀석이 아니잖아, 넌? ' 맞다. 사실 난……. ' 넌 진즉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거야. 그러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둔감한 척 스스로를 속여왔던 거고. ' 그래. 그 말대로일지도 몰라. 아니, 그 말대로야. 사실 난, ' 마리 선배 뿐만이 아니지.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보내오는 감정들도 줄곧 외면해왔다. 왜? 그야 책임질 수 없었으니까. 지금의 관계가 변치 않기를 바랐으니까. ' 나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 거절해야만 하니까. 상처주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런 혼자만의 이유로 혼 자만의 감정을 지키기 위해, '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 자신도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남의 좋아하는 감정은 일절 배제해왔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 이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인가? 가인은 자신을 끌어안은 마리를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했을 마음 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 떨고 있어. ' 마리의 애처로운 떨림이 닿아있는 몸을 타고 가인에게 전해진다. 그것만 봐 도 그녀가 지금의 고백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용기를 쥐어짰는지 알 수 있 었다. 진심이라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여기서 자신은……. ' 나는, ' 가인은 마리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가져가다가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왠 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두눈이 뜨겁게 달아오 른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 거지? 왜? ' 시민 씨를……사랑하는데요? ' 그 말을 했던 자신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째서 마리 선배는 그때의 자신 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 그때의 시민 씨도…… 지금의 나처럼, '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이런 마음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가인은 자신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 와서 까지도 나란 녀석은 여전히……. " 선배. " 가인은 힘겹게 마리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찰나, " ……. " 마리가 먼저 그의 품에서 벗어난다. 그의 가슴을 손으로 떠밀며 뒤로 물러났 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인은 당황하며 마리의 얼굴을 살폈다.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뜻밖에도 웃고 있었다. " 이제서야 말하게 되다니. 나도 참……. 이렇게나 오래 끌게 될 줄은 꿈 에도 몰랐다. 꼴 사납기 그지 없군. " " 꼴 사납다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절대로! " 마리의 말에 가인은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에 마리는 힘 없이 미 소지었다. " 충분히 꼴 사나워. 봐라, 지금도 이렇게 몸을 떨고 있지 않나. 조금만 다 리에서 힘을 풀어도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 같아. " 그 말에 가인이 재빨리 손을 내밀었지만 마리는 그의 부축을 제지했다. " 괜찮다. 그보다 내 말은 똑똑히 들었겠지? " " 예? 무슨 말을……? " " 널 좋아한다는 말. " " 아, " 가인은 새삼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마리의 눈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또, 똑똑히 들었어요. " " 그래. 다행이다. " 마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 기쁘다는듯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가인 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행이라뇨, 선배……. 아직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죠? 어째서? " 그러니 너도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마. " " ―! " 가슴을 꿰뚫는 마리의 한 마디. 가인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속이다니? 그런 그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가인, 너는 시민 씨를 좋아하지? 네가 아무리 아닌 척, 시민 씨에게 차갑 게 굴더라도 본심을 숨기지는 못해. 난 알 수 있어. 너의 곁에서 쭉 너만 을 바라봐 왔기에. 그랬기에 알 수 있다. 다 알 수가 있는 거야. 넌 지금 이 순간에도 시민 씨를 좋아해. " " 난, " " 그리고 네가 진정 시민 씨를 좋아한다면……그 마음을 좀 더 소중히 여겨 야 한다고 생각한다. " "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선배. " 가인은 말문이 막혔다. 애써 고집스럽게 그녀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리의 계속되는 말이 가인의 고집을 무너뜨린다. " 리리스도 네가 이러는 것은 바라지 않을 거다. " 가인은 부릅뜬 눈으로 마리를 노려보았다. 마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 며 재차 말했다. " 난 그녀가 무슨 이유로 너를 찾아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알고 있지. 그녀가 널 위해 모든 것을 감수했다는 것. 그리고 네가 그것에 크게 얽매여 있다는 것. " " ……. " " 유가인, 넌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모든 것에서 멀어지는게 리리스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널 생각하며, 널 위해 사라져간 그녀 때문에 자기 자 신은 행복해져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면 내가 말해주지. 그건 틀렸어. 그녀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저버려서는 안돼. 그거야말로 리리스의 희생을 의미없게 만드는 짓이다. " " 의미 없게……만든다고? " " 그래. 의미가 없지. 그녀는 널 위해 죽음마저 불사했건만 정작 너는 네 자 신을 조금도 위하고 있지 않으니까. 지금의 네 모습은 그저 리리스를 단순 한 빚쟁이로 만드는 것에 불과해. 그녀가 너를 사랑했으니까 너도 그녀만 을 생각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녀가 정말 그런 것을 바라고 사라 졌다고 생각해? "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어요. 그런건 나도 알고 있다고요! 하지만―! " 무엇보다 넌 중요한 걸 잊고 있어. " 마리는 가인의 손을 자신의 양 손으로 단단히 움켜 잡았다. 마치 자신의 온 기가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듯이. 서로의 마음이 통하기를 바라듯이. 실제로도 그녀의 손은 너무나 따뜻했다. 그렇기에 가인은 손을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숨 죽여 그녀의 목소 리에 귀를 기울였다. " 사랑에 대가는 필요없다는 것.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전해야 한 다는 것. " '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 같은 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데, 일단 좋아하 게 됐으면 노력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 " 이건 네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나? " '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이 전해지도록. 시민 씨가 날 바라봐주도록…… 최선 을 다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 작년 마리가 융합형 몬스터에게 의지를 빼앗겼을 때. 그때 번민에 빠졌던 그녀를 일깨워준 목소리. 그녀의 정신 세계 속으로 들어 와 필사적으로 전해진 유가인의 마음. 가인은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하며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의 모습에. 그녀의 당당함에. 그녀의 확고부동함에. " 선배, 나는……, " " 아마 너도 잊어버렸던 것은 아닐 거야. 그렇기에 최선을 다한 리리스의 사 랑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그녀의 사랑에 보답하려고 애 썼던 거겠지. " 마리는 혼란스러워하는 가인을 진정시키듯 달래주었다. " 하지만 그 보답하는 방법이 틀렸어. 리리스의 사랑이 그토록 소중했던 거 라면. 그녀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너 자 신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보여준 사랑에 부끄럽지 않 도록, 너 자신도 노력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마음에 충실해지는 것. 그것이 리리스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그녀의 사랑을 존중해주는 길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 " ' 가인, 우리는…… 친구지? ' 리리스의 절박한 질문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했던 자신의 목소 리도. ' 친구야, 리리스. 넌 내 소중한 친구야.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 그렇게 자신이 말했을 때 그녀는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래서 그 행복을 지켜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여준 마지막 미소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절대로 깨뜨려서는 안된다고, 그렇게……생각했다. ' 전 정말이지……어떻게 해서든 가인 씨를 보려고 하는데. 보고 싶은데. 가 인 씨는 왜 매번……. ' 슬퍼하던 시민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녀를 외면해버리던 자신의 모습 도. ' 가인 씨, 우리 둘이서…… 이대로 어딘가로 가버릴래요? ' 만약 그때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였더라면, 그랬다면 그녀도 리리스처럼 기뻐 했을까? 리리스처럼 행복하게 웃어줬을까? ' 시민 씨를…… 사랑하는데요? ' 다를 것이 없었다. 리리스나 시민 씨나. 그리고 자신이나 마리 선배나. 모두가 다를 바 없었다. 모두들 똑같았다.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은……. ' 모두가 같았던 거야. ' 자신의 마음이 전해지면 기뻐하고, 거절당하면 슬퍼하고. 하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그 진심마저 상대에게 전할 수 없을 때. 무시 당할 때. 외면당할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며 슬픔이다. 그리고 사랑을 받아들일 여지마저 상대에게 주지 않는 것. 상대의 불행을 방 치하는 것이야말로 무거운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이다. 나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랑까지 모욕해왔던 거야! ' 사랑해…… 가인. ' 리리스도! ' 내가 평생 가인 씨의 곁에 있을게요. ' 시민 씨도! ' 정말로……사랑해. ' 심지어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마리 선배도! 모두들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자신 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품어왔어. ' 그런데 나는 뭐야? '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리고, 무감각한 척, 스스로를 속여왔던 나는 뭐지? 사랑 이라는 것에서 도망치기만 했던 내가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지켜주겠다니! 그 런 자격이 나에게 있기는 하단 말인가? 자신의 사랑조차 지키지 못했던 주제 에? ' 내……사랑은……. ' 처음에는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내 곁에서 웃어주며 반겨주는 그녀가 좋아서, 하루 하루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서, 그렇게 나는 주체할 수 없이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아무리 의미 없는 말일지라도, 아무리 사소한 몸동작일지라도, 나는 그녀의 모든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면 모두 사 랑하게 되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 그녀가 나같은 녀석을 좋아할 리가 없지. ' 몇번이고 그녀와 나를 비교하면서 의기소침해지고, 몇 번이고 포기하기를 반 복. 하지만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좋아한다. 너무나 좋아한다. 정말 좋아해. 이 마음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수십번도 더 고 민해봤지만 결국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라는 것 뿐이었다. ' 시민 씨. 시민 씨. '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이 마음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 잊어버리려고 했을까? 가인은 통감했다. 자신이 해야했던 일은 처음부터 하나 밖에 없었노라고. 리리스를 위해서라도. 시민 씨를 위해서라도. 마리 선배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 다. " 선배, 전…… 시민 씨를 사랑해요. " 자신의 사랑에 충실해지는 것. " 응. 알고 있어. " 그리고 그런 가인의 고백에 마리는 빙긋 미소지었다. 흡족하게. 그리고 쓸쓸 하게. " 잘……알고 있어. " 왜냐하면, ' ……그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유가인이니까. '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8 - Ｂy Ｎext Ｎeo =-=-=-=-=-=-=-=-=-=-=-=-=-=-=-=-=-=-=-=-=-=-=-=-=-=-=-=-=-=-=-=-=-=-=-= " 네가…… 어떻게 여기에? " 시민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형의 모습에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딸랑 뒷편에 있던 현관문이 닫히며 예의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시영은 시민의 어 깨 너머로 학원의 전경을 살피며 미소했다. "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었구나. 피아노 학원이라……. 내가 준 목소리를 이 용하지 않고서 악기로 노래한다고? 과연 너다운 직장이구나. 바보같은 성 실함도 여전해. " " ……! " 내가 준 목소리? 그 기분 나쁜 울림이 시민을 분노케 했다. 새하얀 먹지 위로 검은 잉크가 떨 어지듯이, 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추악한 어둠이 끓어오른다. 번져나간다. 시민은 시영의 눈에서 피아노 학원의 입구를 가리며 낮게 소리쳤다. " 왜 여길 찾아온 거지? " " 왜라니. 동생이 일하는 곳에 형이 찾아오는 건 당연하잖아? " " 이 뻔뻔한―! " 당연하다니! 뭐가 당연하다는 거야? 뭐가! 시민은 이를 갈며 오라 능력을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피 아노 학원의 식구들에게로 생각이 미친다. 원장 선생님! 학생들! 시영은 그런 시민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 후후. 왜 그래? 평소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간 거야? " " 이 자식! " 시민은 소리치며 시영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영의 입가 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시민이 보여주는 감정 하나 하 나를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 그래. 그래. 오라 능력은 쓰지 않는게 좋을 거다, 동생아. 너도 알다시피 이 일대의 그림자들은 모두 내 수중에 있어.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충 짐작하겠지? " " 크……! " 시민은 치를 떨며 시영의 멱살을 풀어주었다. 시영은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바로 잡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 자.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모처럼 얘기를 나눠보자고. 우리 형제는 꽤 오 랫동안 요원했잖아? 내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그건 역시 대화가 부족하 기 때문인 것 같아. " " 흥! 이제와서 너같은 녀석과 나눌 얘기따위는 없어! " " 없을리가 없지. 넌 궁금하지도 않은 거냐? 내가 왜 너에게 힘을 주었을까, 라든가? " " ―! " 시민은 허를 찔린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궁금하지 않냐고?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엎은 사건. 절망을 안겨준 그 날의 기억! 하루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언제나 궁금해왔다. ' 날 지켜준댔잖아? 약속했잖아? ' 묻고 싶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왜 날 배신했냐고? ' 세상에서 둘 뿐인 형제였잖아? ' 너무나……묻고 싶었다! " 아, 잠깐. 지금 여기서 얘기하겠다는건 아니야. " 시영은 대답을 바라는 시민의 열망을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그렇게 동생의 얼굴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떠오르자 그는 실소한 다. " 나도 거추장스러운 건 싫어하지만 어차피 말로 해서 풀어낼 수 있는 얘기 가 아니거든? 만약 여기서 이유를 말 한다손치더라도 네가 곧이곧대로 믿 어줄 아이도 아니고. " " ……장소를 바꾸겠다는 거냐? " 시민이 냉정하게 쏘아붙이자 시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영락없이 반항적인 동생과 인자한 형이로군. " 그래. 모든 것을 가르쳐줄 장소로 안내해주마. " " 모든 것을 가르쳐줄 장소? " " 옴팔로스. 너도 한번 가본 적이 있겠지? 언더 시티의 최하층에 위치한 신 전 말이다. "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저번 리리스의 언더 시티 침공 때 방문했던 거인들의 무덤이 생각났다. 그리고 무덤의 상공에 펼쳐진 붉은 하늘, 그 인지를 벗어난 의지의 집합체도……. " 우리 형제의 오해를 푸는데 그곳의 하늘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겠지. 모든 것은 그 붉은 노을 아래서 시작되었으니까 말이야. " 그 말과 동시에 시영의 몸이 어두운 벽의 그림자 사이로 녹아들어간다. 시민 은 깜짝 놀라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자, 잠깐! " " 나는 지금부터 그곳으로 향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서둘러 따라오도록.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 " 제길! 가지맛―! " 시민은 시영이 사라진 벽을 맨손으로 후려치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끝까지! 끝까지 저 녀석은 날 농락할 셈이란 말인가! 끝까지! ―아, 한가지 얘기해주는 걸 깜빡했군. 그렇게 분노하는 시민의 귀로 시영의 위스퍼링이 들려왔다. ―서둘러서 따라오라는 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게 좋을 거야. 잠시 후면 너 희들의 피스메이커는 제 구실을 못하게 될 거거든? " 뭐? " 제 구실을 못하게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글쎄. 과연 무슨 소리일까나? 후후. 아무튼 카타스트로피는 이미 시작됐다. 서둘러라, 한시민! 그것을 마지막으로 시영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시민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형의 뒤를 쫓을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것인가. 과거에 집착할 것인가. 미래를 꿈꿀 것인가. 모든 것은 그녀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정말 묘한 힘이 있다. 혹자는 착각이라고도 하고 자기 암 시, 망상이라고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사람을 맹목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가인도 그랬다. 그저 입 밖으로 시민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 뿐인데. 망설 임을 버린 것 뿐인데, 단지 그것만으로도 시민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을 가 득 채웠다. 당장에 만나고 싶다. 보고 싶어! 지금껏 무리해서 자신의 마음을 억누른 탓일까. 그 반동 때문인지 가인은 진심을 털어놓은 지금, 시민에 대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초조함 같기도 했다. ' 초조하다고? 왜? ' 이유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냉대로 상처받던 시민 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슬퍼하던 그녀가 생 각나니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 어떻게든 시민 씨를 만나야 해. 만나서 사과하지 않으면! ' 어째서 그런 모진 말만 골라서 했던 거냐?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거지, 유가인? 가인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리리스를 위한답시 고 시민 씨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야말로 구제 불 능이다! ' 왜 나는 언제나 이 모양인 거야? 왜 매번 후회하기만 하는 거지! ' ……물론 그런 삽질하는 점이 유가인 답다는 말은 여기서 생략하도록 하자. 어쨌든 후회가 있기에 반성이 있고, 반성이 있기에 성찰이 있는 법. 가인은 당장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고 싶었다. 문제는 시간이 너무 지났다는 점. 과연 지금 와서 모든 것을 되돌릴 기회가 자신에게 남아있기는 한 걸까? 가인의 초조함은 여기서 비롯되고 있었다. ' 어디로 가야 시민 씨를 만날 수 있지? 역시 학원일까? 아니면 집? ' 만나서 사과를 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 시민은 절대로 자신을 용 서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걱정해도 될 일이었다. 일단은 시민 씨와 만나야 한다. 만나서 무슨 얘기라도 나누지 않으면 안돼!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가인은 허둥지둥 옥상을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다, " 아, " 눈 앞에 서있는 마리의 모습에 깨닫게 된다. 자신이 아직 그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 저기. 선배. 저는……. " 가인은 말문을 열어보았지만 차마 뒷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안하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고맙다고 해야할까? 어떻게 운을 떼든 간에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절 뿐이었다. 그가 시 민을 사랑하고 있는 이상, 마리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저는……. " 가인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의 감촉을 깨닫고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다. 마리 선배. 언제나 자신이 힘들때면 힘이 되어준 사람.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싸워준 사람. 곁에 있어준 사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로 많은 도움을 그녀에게 받았다. 아마 그녀가 없 었더라면 자신은 여기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진즉에 떨어져나갔을 거야. 버 텨낼 수 없었어. 선배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 " ……. " 그렇게 고민하는 가인을 마리는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그의 모습을 두 눈에 새겨넣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유심히.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가봐라. " " 예? " 가인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하지만 마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곁을 지나쳐 옥상의 철창으로 걸어간다. " 대답은 아까 네가 했던 말로 충분하다. " 아까 내가 했던 말이라면……. 가인은 곧 자신이 시민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것을 떠올리고 얼굴이 붉어졌 다. 결국 그 고백이 거절의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 이제는 네가 네 마음에 충실해져야 할 때다. 어서 빨리 시민 씨를 만나러 가봐. 시민 씨……, 그동안 많이 슬퍼하셨으니까. " " 하지만 선배, " 이런 선배를 놔두고 제가 어떻게 혼자 갈 수 있겠어요? 등을 돌리고 있는 마리의 모습은 너무나 쓸쓸해보였다. 가인은 도저히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떠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가인의 성격 상 이런 자신 을 홀로 두고 떠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서글프도록, 잘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외쳐야만 했다. " 유가인! " " 아, 옛! " 마리의 호명에 가인은 반사적으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녀와 함께 해온 수련 때의 버릇이 나온 것이다. " 사부의 명령이다. 당장 시민 씨에게 고백하고 오도록! " " ……아니. 그래도 명령이라니. " " 내가 말하지 않았나! 검을 배우는 것만이 가르침이 아니라고! 사소한 일 상의 가르침이 더 중요한 거다! " 또 이런 억지를. 가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마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그녀의 등이 쓸쓸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등은 여전히 단단하고 자신따위는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 보였다. 그래. 바로 이런 강인함이다. 언제나 남을 위해 힘을 내는 저 모습이야말로 내가 존경해오던 마리 선배의 모습이야. 분명 자기 자신이 더 힘들텐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저런 말을 ……. " 선배도 참. 아침에 분명 다시는 강압적으로 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 " 으음……. " 가인의 지적에 마리는 할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강압 적인 여자는 싫다고 하는 바람에 호들갑을 떨었던 일이 생각났다. 마리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투덜거렸다. 이제와서 고쳐봤자……. 어차피 나란 아이,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고. 또 더 이상 그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어졌으니……. " 사실 말이에요, 선배. " 그런 마리를 향해 가인은 조용히 말을 건넸다. " 강압적인 여자는 싫어하지만. 저…… 선배의 그런 모습은 좋아해요. " " ―! " 그 말에 마리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무렇지도 않 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말을 듣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가인을 좋 아했던 지난 날들이 저 말 한마디에 모두 다 떠올라 버린 것이다. 그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남 몰래 가슴을 졸이며 두근거리던 나날이, 그때 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이토록. 이토록 좋아하는데. 이토록 나는 그를……. " ……. " 가인은 마리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민을 좋아하 는 자신이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니. 단 한가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저 그녀를 혼자 있게 해주는 것.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마리에 대한 주제 넘은 동정과 연민이 될 뿐이다.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무분별한 자상함은 조금도 상대를 위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가인은 옥상의 입구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 었다. " 가인. " 그때 그런 그를 마리가 불러세웠다. 가인이 돌아보자 그곳에는 여전히 마리 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다만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는……. " 다음에 볼 때는 서로 웃으면서 보는 거다. " 따뜻하다. 그 말에 가인의 입가로도 미소가 번져나갔다. 가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 며 소리쳤다. " 예. 반드시! " 그리고 그는 옥상을 떠났다. 마리는 가인이 건물을 내려가 운동장을 가로질 러 교문을 나설 때까지 줄곧 철창 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무렵. 마리는 나직히 아무도 없는 옥상을 향해 말했다. " 지켜보고 있었던 것. 다 알고 있습니다. 그만 나오십시오. " 슥 그러자 옥상의 입구 쪽 사각 지대에서 한 인영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영은 다름 아닌 카구라 코마히코였다. 마리를 찾아 옥상에 올라왔던 그는 진즉에 가인과 마리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색해진 표정으로 마리에게 다가왔다. " 고의는……아니었습니다. 다만 나오기가 어려워서. " 나오기가 어려웠다면 자리를 피할 것이지. 굳이 숨어서 지켜볼 필요는 없었 을텐데(…….) 하지만 마리는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마찬가지로 철창 밖을 계속 응시하기만 할 뿐이었다. 코마히코는 그런 마리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자신도 철창 밖을 바라보 았다. 그러자 기묘한 침묵이 그들의 주위로 멤돌기 시작한다. " ……. " 코마히코는 자신이 들고 있던 축하 꽃다발을 마리에게 건네줄까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대신 축하의 말만큼은 전해주었다. " 훌륭하셨습니다. " " ……. " 그것이 마리의 연기에 대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가인에게 용기있게 고백한 것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리도 굳이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코마히코는 잠자코 그녀를 지켜보다가 곧 철창을 쥔 마리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의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버텨 내는 마리의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 아가씨. " 코마히코는 자신도 모르게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슬퍼하는 그 녀를 달래주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의 품 안에서 울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잠깐의 고민 끝에 그러지 않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그의 아가씨는 남에게 의존하는 슬픔 보다 혼자서 끌어안는 슬픔 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 그녀는 저렇게나 꽂꽂하게 서있다. 주위의 도움은 절대로 허용하 지 않겠다는듯 완강하게 스스로를 지탱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 아가씨는 그야말로 사부님의 딸이로군. ' 이토록 고고(孤高)한 모녀라니. 코마히코는 자신의 고국에 있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담담하게 미소지 었다. 그리고 마리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쭉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 으음. 너무 늦는데요. 가인 씨랑 마리 양. " 한성고의 무대 대기실. 시간을 확인하던 수정이 의아함을 표시하자 하나를 돌보고 있던 미연도 맞장구를 쳤다. " 그러게요. '잠깐 볼 일이 있다며' 가인이를 데리고 가고선……. 도대체 무 슨 일일까나? " 꿀꺽 일행 중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볼 일이 있다며.' 사실 이것은 별반 대수롭지 않은 대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볼 일이라는 불 특정 다수 의미 명사에 약간의 강세를 주는 것만으로도 그 뜻은 무궁무진하게 위험해질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명사의 주체가 남녀 단 둘일 경우에는 더더욱! 특히 채영과 시더는 수정이 말을 꺼내기 전부터 내내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 었는지 가장 큰 동요를 보였다. " 그, 글쎄요∼ 이왕 나간 김에 축제 구경을 하고 있다든가. " " 아니면 마리의 팬들에게 둘러싸였다든지. " " 아! 혹시 길을 잃어버린 것은? " " 그래! 머리를 다친 거야. 그래서 기억을 잃어버린 거다.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인 거야! " " 어쩌면 외계인들에게 납치당했을 수도! " 어이. 점점 현실을 도피하고 있는데 말이야, 당신들……. 결국 보다 못한 재영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질렀다. " 무릅니다! 너무도 물러요! 당신들은 아직도 유가인 녀석의 본질을 파악하 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녀석은 페르몬의 화신입니다! 낙타가 바늘 구 멍을 통과하지는 못할 지언정, 녀석의 페르몬은 바늘 구멍을 통과해서 상 대를 부지불식간에 감염시킨단 말입니다! 정신들 차리세요. 이제는 깨어나 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녀석의 거짓된 모습에 현혹되어서는― " 퍽 재영의 호소는 거기서 끝을 맺어야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여성 일동이 마치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처럼 동시 전방위에서 재영의 머리를 향해 하이킥 을 꽂아넣었던 것이다. ' 진실은……통하지 않는 것일까? ' 재영은 눈물을 흩뿌리며 널브러졌고, 그런 남자 친구를 시내는 씁쓸하게 웃 으며, 재민은 오열하며 끌어안았다. " 후후. 바보 재영 군. 이제는 그만 포기할 때도 됐잖아? " " 형아의 목이! 형아의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 여기서의 교훈은 '사람따라 장소따라 가려가면서 말하자' 가 되려나. 어쨌든 그렇게 재영이 희생한 보람은 있었는지, 진실의 한 가닥은 여성 일동 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가인의 페르몬을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던 이들이 바로 그녀들인 것이다. 수정과 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자신들의 소견을 밝혔다. " 하긴. 의미심장하긴 했지요?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고. 그 가장 빛나는 순 간에 연모하는 남자에게 개인 면담을 청하다니. " " 의도한 것인지 의도하지 않은 것인지는 몰라도 절호의 타이밍이라고 밖에 할 수 없군. 마리도 참∼ 할 때는 하는 아이잖아? " " 우우우우우― " 시더와 채영은 듣기 싫다는듯 귀를 막으며 울먹였다. 그런 피스메이커 관계 자들의 모습에 유리는 한심하다는듯 푸념했다. 놀리는 사람들이나 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 유리 양은 괜찮아요? " 그때 수정이 불쑥 유리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 물음에 유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선다. 저 두사람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나까지 끌어들일 속셈? " 괜찮다니……. 뭐가? " " 가인 씨가 마리 양이랑 단 둘이 있잖아요? 평소같으면 가장 노발대발할 사 람이 유리 양이면서. 오늘은 너무 조용하네요? " " ……. " 유리는 얼굴을 붉히며 수정의 시선을 피했다. 수정의 지적은 누구보다도 그 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왜요? 가인 씨랑 무슨 일 있었어요? " " 그런거 아냐. " " 그럼 왜 그러는데요? " 계속되는 수정의 질문에 유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분 탓일까? 왠지 수정 의 한마디 한마디가 꼭 자신을 꾸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꼭…… 표현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 유리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냥……. 그냥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곁에서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그런 것만으로도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거 잖아? 그런 것도 사랑이잖아? " 그것은 수정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말들이었다. 표현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깊이 깊이 감춰버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오빠의 곁에 머무 를 수 있어. ' 가인. 우리는……친구지? ' 그것이 유리가 자신의 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리리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할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아마, ' 오빠도 마찬가지일 거야. ' 오빠도 계속 나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숨기면서, 그렇게 어느 누구의 마음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프다.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지켜야할 마음이라니! 오빠는 정말 앞으로도 계속 그런 길을 걸어갈 셈인 걸까? ' 나도…… 마찬가지야? ' 오빠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그에게 닿는 일도 없이. 계속 계속, 그렇게 정처없이 떠돌기만 해야 하는 걸까? " 그래요, 유리 양.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사랑이에요. " 수정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하지만 그런 사랑은 반드시 후회하게 되요. " " ―! " 유리는 깜짝 놀라며 수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수정의 얼굴은 짙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 처음에는……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저 그와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죠. " 수정? " 그렇기에 모르고 있었어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슬픔을.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할 수 없게 된 마음을. 너무 늦어버렸다는……후회를. " 유리는 수정에게서 느껴지는 마인드 리딩으로, 그것이 그녀의 진심 임을 알 수 있었다. 또 수정 자신이 직접 겪어 보았기에 할 수 있는 고백이라는 것도. ' 어쩌면 수정은……. ' 유리는 애써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그녀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 만 그보다 한발 앞서, 수정이 빙긋 미소지으며 유리의 어깨를 두들긴다. " 전해지지 않는 사랑은 슬픈 거에요. 그러니까 전 유리 양이 그러지 않았으 면 좋겠어요. 언제까지나 최선을 다하도록……. 알겠죠? " " ……. " 유리는 그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하지만 진심은 전해졌을 거 라고, 수정은 그렇게 확신하며 입가에 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삐삐삐삐 그때, 대기실로 일련의 기계음이 울려퍼진다. 바로 피스메이커 관계자들의 손목에 채워진 무전기의 신호음이었다. 수정은 재영과 시내, 재민이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들을 쳐다보자 쓴 웃음을 지었다. 분명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뭐라고 둘러댄다지? " ―! " 하지만 무전기의 액정을 바라 본 순간, 그녀의 머리 속은 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언더 시티에서 보내온 메세지. 그것은 바로― ' 또 다시 외면당하면, 또 다시 거절당하면, ' 그때는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 나는 아직 아무 것도 얘기하지 못했는데. '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 가인 씨, 날 바라봐요! 제발 내 얘기를 들어줘요! ' 시민은 등을 돌린 가인을 향해 몇번이고 마음 속으로 외쳤는지 모른다. 몇번 이고 사정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매정하게도 그녀를 따라주지 않았다. 마치 얘기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처럼 수 많은 고난들이 연달아 몰아닥쳤고. 그 결과, 가인은 시 민의 얘기를 들어줄 일말의 여유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테레이아와 진우의 죽음. 브루스의 배신. 시민은 그런 일들로 슬퍼하는 그에게 또 다른 고뇌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진실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참기로 했다. 그의 마음이 진정되기만을 기다려왔어. ' 하지만, ' 날이 갈수록 진실은 점점 무거워지고, 고백은 점점 힘들어져갔다. 거기에 가인은 여전히 냉담하기만 하고……. ' 다 내 잘못인가? 줄곧 거짓말을 해온 대가를 받는 거야? ' 시민은 자조했다. ' 애시당초 나 같은 사람에게는……. ' 누구를 좋아할 자격같은 건 없었을지도 몰라. 그러자 시야가 흐려진다. 시민은 소리 없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내며 스 스로를 꾸짖었다. 언제부터 자신은 이렇게 약해진 걸까? 언제부터 이렇게 눈 물이 해퍼진 거지? 한시영. 그를 쫓을 때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다. 슬퍼할 여유조차 없이 자신 을 몰아붙였는데. 그런데……. ' 가인 씨를 만나면서부터…… 모든게 엉망이 되어버렸어. ' 웃게 되었다. 울게 되었다. 화내게 되었다. 기뻐하게 되었다. ' 더 이상 형의 일로 분노하지 않게 되었어. ' 언제나 시민의 머리 속에는 시영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 대 한 복수심만이 그녀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원동력이었다. 분명 그래야만 하는데, 그것이 언제부턴가……. ' 가인 씨 때문이야. 그 사람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만 만나지 않 았더라도. '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텐데!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텐데! 시민은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속이 상했다. 자신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버 린 가인이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 아니에요! 미안해요, 가인 씨. 그렇지 않아요. 가인 씨는 나쁘지 않아요. 다 내가 나쁜 거에요. 다 내가 나쁜 거니까! ' 당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언제까지나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었을 거에 요. 여전히 과거에만 집착한채, 미래를 꿈꿀 생각도 하지 않으며, 그렇게 줄곧 자포자기 해왔을 거에요. ' 그러니 제발 날 미워하지 말아요. 다시 돌아봐주세요. 내 얘기를 들어줘 요. 부탁이에요! ' 부탁이에요! 부탁이에요! 시민은 이 자리에 없는 가인을 애타게 찾으며 소원했다. 그가 나타나 흔들 리는 자신을 잡아주길 바랐다. 그 어느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 ……. " 하지만 그렇게 뜻대로 따라줄 리가 없다. 모든 것이 어긋난 상황에서 어긋 난 기대를 해봤자 이루어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허황된 기대다. 도피인 것이다. " ……좋아. " 결국 시민은 결정을 내렸다. " 따라오라고? 그래. 얼마든지 따라가주지. 지옥 끝까지 따라가주겠어. " 눈물로 젖은 그녀의 얼굴에서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 네 녀석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난 아무 것도 필요 없어. " 미안해요, 가인 씨. 미안해요. 미안해요……. ' 나는 역시― ' " 헉! 헉! 헉! 헉! " 역시나 생각대로, 집에는 시민이 없었다. 가인은 그녀의 부재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아르센 피아노 학원으로 향 했다. 학교에서부터 내내 쉬지도 않고 달렸더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조금도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차 게 두 발을 교차할 뿐이었다. ' 시민 씨. 시민 씨. ' 보고 싶다. 만나고 싶어! 조금이라도 빨리! 더! 더! " 헉! 헉! 헉! 헉! " 익숙한 골목과 건물들이 보여왔다. 아르센 피아노 학원은 26구역의 지하철 역 주변에 있었다. 집에서 달리면 얼마 걸리지도 않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며 건물의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일층. 이층. 삼층. 삼층으로 올라가자 낯익은 피아노 학원의 현관문이 보였다. 분명 저 문 너 머에 시민 씨가 있을 터! 가인은 초인종을 누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벌컥 문을 열어제꼈다. 그러자 현 관문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 시민 씨! " 시끄러운 종 소리도 가인의 외침을 가리지는 못했다. 가인은 신발을 벗고 그 대로 학원의 복도로 걸어들어갔다. 학원은 그가 예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피아노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사람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 학원, 쉬는 날인가? ' 그럴 리 없을텐데……. 의아해하며 복도를 둘러보던 중, 가인은 곧 복도의 끝방이 시끄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무슨 소리지? 아나운서? TV소리인가? 가인은 조심스레 소리가 나는 방으로 걸어가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스크를 쓴채 담요로 몸을 둘러 맨 그녀는 다름 아닌 김민경 원장이었다. " 어라, 이게 누구야? 가인 씨? " " 아, 안녕하세요. " 가인은 김민경 원장의 차림새에 얼이 빠져있다가 뒤늦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민경의 뒤편으로는 원장실인듯한 방안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중앙에서 는 TV가 한창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민경은 손에 든 리모콘으로 TV의 볼륨을 줄이며 가인을 방안으로 안내했다. " 어서 들어와요. 방이 엉망이죠? 제가 감기에 걸려서 영 청소를 못했으니 이해해주세요. " " ……그러고 보니 아프시댔죠. 이렇게 학원에 나와 계셔도 되는 거에요? " 가인은 아침에 시민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민경이 아프기에 시민이 대신 학원에 나와야 했던게 아닌가? " 아, 그게……. 미안하게 됐지 뭐에요. 제가 눈치도 없이 이런 날 시민 씨 를 붙잡아둬서. 그래도 좀 쉬니까 나아져서 얼른 시민 씨와 교체해줬는데. " " 그럼……? " " 만나지 못한 거에요? 시민 씨, 곧바로 한성고에 갔을텐데. " 이런! 가인은 허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닭 쫓던 개도 아니고. 기껏 달려왔더니 시민 씨는 한성고로 가버렸다고? 아무래도 중반에 서로 길이 엇갈렸던 모양이다. ' 그래도 시민 씨……. 정말로 오실 생각이셨구나. ' 오지 않으시길래 영락없이 화가 나신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가인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여기에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기만 한다면! " 시민 씨는 언제쯤 나가셨어요? " " 에, 한 30분 전쯤? 레슨 끝나고 20분 정도 지났으니까 그쯤 되겠네요. " 민경의 말에 가인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민 씨, 벌써 한성고에 도착해서 날 찾고 있는 것은……. 가인은 한시라도 빨리 학교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기다림은 이제……충분했다. " 아,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프신데 갑자기 찾아와서 정말 죄송해요. " " 이런.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려고?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떨어 진 모양이네. 그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 민경은 가인의 전신이 땀에 젖어있는 걸 보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 눈앞 의 소년은 어지간히도 빨리 시민을 만나고 싶은 모양이다. " 그럼 얼른 가보세요. 시민 선생님, 하루 종일 울상만 짓다가 떠났으니까 만나면 좀 잘 해주시고. " " 아, 예! " 민경의 말에 가인은 쑥스러워하면서도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작 별을 고하려고 할 때, 《피스메이커는…….》 TV에서 들린 한 목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가인은 민경에게 숙이 던 고개를 들어 TV를 바라보았다. 뭐? 피스메이커가 뭐가 어쨌다고? " 응? 왜 그래요, 가인 씨? " " 저기……. TV 소리 좀 키워주시면 안될까요? " 가인의 부탁에 민경은 의아해하면서도 리모콘을 조작했다. 그러자 TV 소리가 한층 뚜렷하게 그들의 귀로 들려온다. TV에서는 한창 지구 방위군의 성명(聲明)이 생방송으로 중개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29년 1월. 통일 한국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86호 몬스터에게 우리 지구 방위군은 한국 통합군의 3개 기갑사단을 동원 했지만 역부족으로 퇴각해야만 했습니다.》 성명을 발표하는 사람의 밑으로 라경일 장군이라는 자막이 떠오른다. 그는 2007년 한국 통일 때 북한 인민군에서 통합군으로 재평성된 평양 출신의 대 장으로서 대부분 지구방위군의 성명 발표 때면 언론에 얼굴을 비췄기에 가인 과 민경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라 장군은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쓰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때마침 대 몬스터 특무기관 피스메이커의 도움으로 사태는 호전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한국 통합군은 피스메이커의 존재를 인정, 적극 그들 과 협조하겠다는 PM조약을 체결하게 되죠. 몬스터는 이(異) 차원의 존재로서 우리 인류와는 분자 구조, 입자 하나조 차 같지 않은 새로운 이성체. 그런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은 오직 피스메이커 뿐이었으며, 실제로도 그들은 지금까지 잘 해주었습니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던 몬스터를 2033년이 끝나가는 오늘날, 박멸시키 기에 이르르니까요.》 박멸? 몬스터를 박멸시키다니? 그것은 피스메이커의 일원인 가인조차 금시 초문인 내용이었다. 물론 노아가 판게아에 침입할 수단을 잃어버린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후 의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저렇게 단정지어 서 얘기하다니! 《박멸이라니? 몬스터가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올 5월달부터 몬스터의 출현은 급속도로 잦아졌고, 실제로 통일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몬스터를 찾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입니다. 또 현당국에서도 10월 4일 이후로 몬스터의 침공은 중단 된 상태입니다.》 기자와 라 장군의 문답에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마 세계에서 몬스터를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은 각 용맥에서 라무의 아이 들을 더미로 만들어내던 용마인들이 쿠사나기에 의해 한 개체로 통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런 통합된 D타입들조차 머신 아더에 의해 판게아 밖으 로 추방당했으니……. 《그렇다면 왜 피스메이커는 이러한 중대한 사실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째서 매번 지구방위군의 입으로 상황을 전달받아야하는 거죠?》 《……그것은 말입니다.》 기자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라 장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 피스메이커가 자신들의 기관을 앞으로도 계속 존속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현장에서 질문하던 기자들도, 뉴스를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다들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피스메이커의 존재의의는 몬스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상 대할 수 없는 괴물들에게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기관. 그 때문에 우리 들은 피스메이커의 모든 부당한 요구들을 들어줘야 했습니다. 일방적인 대피 방송으로 사회 업무를 마비시키지 않나, 몬스터와의 싸움으로 시민들의 주거지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론을 통한 제대로 된 양해조차 구하지 않습니 다. 세계 각국의 공권력을 멋대로 행사하면서도 처음부터 그것이 자신들의 힘인양 으시대죠. 그런 그들에게서 몬스터가 사라진다고 보십시오. 더 이상 상대할 적이 없 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명목으로 그러한 힘들을 유지한단 말입니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피스메이커가 몬스터의 소멸을 공표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 뭐라고! "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S언론사의 하유정 기자입니다. 피스메이커의 언론 통제는 예전부터 있어왔 던 일입니다. 단지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서 피스메이커 전체의 의지를 파 악하는 것은 억측이 아닐까요?》 《물론 그 이유 하나 뿐이었다면 저희도 이런 자리에서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 여기를 봐주십시오.》 라 장군이 자신의 뒤편에 있는 스크린을 가리키자 거기로는 하나의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영상으로 각 방송국의 카메라들이 집중되고, 언론사의 카메라들이 플래쉬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TV의 영상을 주시하던 가인은 점점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영상에서는 지금껏 피스메이커가 통제해왔던 모든 몬스터와의 전투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유가인 자신을 비롯한 피스 대원들이 오라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 몬스터와의 전투로 파괴되어가는 시가지. 죽어가는 시민들. 무엇보다 가관인 것은 12구역을 폐허로 만드는 D타입과 그 D타입에 맞서는 머신 아더의 모습이었다. 두 거대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현상(現象)은 모든 환상과 이상을 무너뜨리는 비상식의 절정이었다. 재앙이다! 가인은 자신이 직접 그 참상을 겪었지만 이렇게 제3의 관점으로 그때의 광경 을 보게 되니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꼈다. 객관적인 혐오감이라고 해야하나?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처참함이 깨끗한 영상을 통해 여과없이 눈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추악한 기분이었다. 《이, 이건 대체……. 진짜, 인 겁니까?》 하유정 기자의 떨리는 목소리에 라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그들이 감춰왔던 진실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족 들이 죽고, 생활터가 사라져간 이유입니다.》 화면에서는 계속해서 기가스 티폰과 머신 아더의 전투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힘들을 보유해온 그들이, 이러한 진실들을 은폐해온 그들이, 과연 순순히 누려온 통수권(統帥權)을 포기할 것 같습니까? 몬스 터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을 끝낼 것 같습니까?》 천만에― 성명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장담하지요. 몬스터를 향한 그들의 힘은, 자신들의 야욕을 지키는데 사용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위치를 빼앗으려는 모든 것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 낼테지요. 이것이 몬스터와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몬스터가 사라진 대신 그들은 제 2의 몬스터가 되어 우리들을 위협할 것입니다. 그런 위험한 미래를 여러분들은 그저 지켜보시기만 하겠습니까!》 화면에 새로운 장면들이 나타났다.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은빛 늑대 와 붉은 AI슈츠의 소년, 피스메이커와 대립하는 검은 정장 남자의 모습. 그것은 피스 블랙 한시영과 그 일당들이었다. 《그들의 힘은 명실공히 우리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피스메이커 내에서는 이미 인류의 적으로 돌아선 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죠. 그 중에서는 몬스터 측에 가담한 자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라경일 장군은 회장을 둘러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지구 방위군은 피스메이커와의 결별을 선언하겠습 니다. 그들과 맺은 모든 협정들은 의미를 잃을 것이며 이는 각국의 수뇌부 들도 공인한 사항입니다. 피스메이커! 우리가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단 하나다.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순순히 자신들의 무력을 인류에게 반납할 것! 만약 이 통보를 무 시할 시에는 우리 인류에게 협력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 즉각 그대들을 인 류의 적으로 규명짓겠다.》 인류의 적. 인류의 적. 가인은 다리에서 힘이 빠져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도저히 TV에서 나오는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 사람은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왜 우리에게 인류의 적이니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거지? 어째서? 삐삐삐삐 그때 가인의 손목에 찬 무전기가 신호음을 울렸다. 언더 시티의 오퍼레이터 팀이 보내오는 메세지였다. 무전기의 액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레카 급습. 모든 피스 대원들은 신속히 언더 시티로 귀환바람. 《처음이자 마지막 권고다. 투항해라, 피스메이커!》 그렇게 현 인류의 카타스트로피는 시작되었다. <제 23 화 Goodbye to Romance 完> Ｔo Ｂe Ｃontinued… =-=-=-=-=-=-=-=-=-=-=-=-=-=-=-=-=-=-=-=-=-=-=-=-=-=-=-=-=-=-=-=-=-=-=-= 次回豫告 피스메이커의 마지막 싸움. 그들의 마지막 상대는 얄궂게도 몬스터가 아닌 그들의 동족이었다. 하 소령: 이건……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에르체베트: 틀리지 않습니다. 지켜보고만 있으시지, 무력한 인간들. 드디어 드러나는 이단자의 송곳니! 한시영: 얼마든지 욕해라. 이기적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거부하더라도 난― 한시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카타스트로피를 꿈꾸는 그림자의 사도들! 그람드링: ……마스터. 이 녀석들은? 시폰: 후후.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Ignite). 네 동생들이란다, 그람. 모든 것을 파멸시킬 인류의 선악과! 이 수 많은 사리와 사욕들이 얽히고 얽혀서 만들어낸 최후의 무대. 그 무대 위에서 일어날 대단원이란 과연, 구원인 것일까 아니면 파멸인 것일까? 第 24 話 SHOWDOWN! 브루스: 성가셨어. 그래서 끊어버린 거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제 거리낄 것은 없다. 어차피 2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어. 그런 얄팍한 정 따위에 백 여년이 넘도록 추구해온 목표를 놓 칠성 싶으냐! 유가인: 그런 건……진우 씨를 죽인 이유가 되지 못해! 지금, 21세기 최후의 만찬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제 24화 "SHOWDOWN!"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69 - Ｂy Ｎext Ｎeo =-=-=-=-=-=-=-=-=-=-=-=-=-=-=-=-=-=-=-=-=-=-=-=-=-=-=-=-=-=-=-=-=-=-=-=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지구 방위군은 피스메이커와의 결별을 선언하겠습 니다. 그들과 맺은 모든 협정들은 의미를 잃을 것이며 이는 각국의 수뇌부 들도 공인한 사항입니다.》 인천 국제 공항의 로비. 한창 비행기에 오르 내려야 할 탑승객들은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한채 TV앞에 모여있었다. 그 비정상적인 인파의 집중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하나 하나 합세하기 시작한다. 《피스메이커! 우리가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단 하나다.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순순히 자신들의 무력을 인류에게 반납할 것! 만약 이 통보를 무 시할 시에는 우리 인류에게 협력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 즉각 그대들을 인 류의 적으로 규명짓겠다.》 TV를 응시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변해갔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중얼거린 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지구 방위군의 성명 발표에 왜 이런 내용이 나오 는 거야? " 피스메이커가……적이라고? " 어떤 사람의 중얼거림에 마치 확답이라도 해주려는 것처럼 TV속의 라장군이 소리쳤다. 《처음이자 마지막 권고다. 투항해라, 피스메이커!》 그리고 이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올 8월달에 이어 두번째로 서울시의 기본권이 통제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계엄령의 선포는 지구 방위군이 피스메 이커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거 아냐? " " 설마……. 아무렴 그럴려고. " " 지구 방위군이 피스메이커와 한두번 으르렁 거린 것도 아니고. 저러다 또 며칠 뒤면 잠잠해지겠지. " " 그런 것 치고서는 너무 요란한데. " 사람들은 저마다 TV의 내용에 불안해 하면서도 여전히 농담조로 말을 주고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과 북이 통일된 이래로 어떠한 전쟁의 위협도 받 지 않았던 그들이다. 이제와서 전쟁이 터진다고 한들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 이다. 무엇보다 2019년부터 계속된 피스메이커의 매스 미디어 통제는 국민들의 위 기 의식을 떨어뜨릴 때까지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름밖에 접하지 못한 조직의 일 따위, 그들에게 있어서는 타인의 일이나 마찬가지다. "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 한 검은 한복의 남자가 TV에서 시선을 거두며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무영신 풍류의 관장이자 피스 레드 성마리의 아버지인 성비영. 그는 누군가를 마중하 기 위해 공항을 방문하고 있었다. 딸의 연극 공연을 자신의 제자에게 맡기면 서까지. " 그 사람의 말대로군요. 그는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에요. " 비영의 뒤편에 있던 군청색 한복의 여인이 작게 속삭였다. 비영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 그렇다 하더라도……이 위험한 때에 굳이 당신까지 귀국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 " 어차피 일본 지부도 여기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 전 세계의 피스 메이커가 탄압당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한국 지부가 무너진다면 다른 지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 무영신풍류의 현 당주, 황연우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으며 남편의 말을 되 받았다. 그런 아내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 본가 쪽은 어떡하려고? 일본 지부의 피스메이커가 함락되면 그들에게 협 조했던 황씨 일족도 무사하지 못할텐데. " " 그래서 저 혼자 한국으로 넘어오지 않았습니까? 쓸데 없는 걱정입니다. " " 아니. 하지만, " " 다들 제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를 위한 무영 신풍류이고요. 그들의 강함은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알지 않습니까? " " ……그렇군. 미안하오. " 비영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어찌 연우라고 해서 자신의 일가가 걱정되지 않았겠는가. 다만 그녀는 남편과 딸, 그리고 수제자의 곁을 선택한 것 뿐이 다. 그들과 함께 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더 이상은 아인이 때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 비영은 연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 미안하오. 그리고……고맙소. " 연우는 고개를 저으며 살며시 미소했다. " 어디든 끝까지 따르기로. 그렇게 약속했었지요? " " 아아. 그랬지. " 비영은 수십년 전의 혼례 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너털 웃음을 터뜨렸 다. 그래.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것이면 충분히 감사할 수 있어. 고마워할 수 있 어. 충분히. 충분히― " 갑시다. 우리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 " 예. " 비영과 연우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항의 입구를 나섰다. 그들 부부의 뒷모 습은 주위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달리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다. 第 24 話 SHOWDOWN! 《긴급 상황입니다. 학교 내의 모든 분들께 알립니다. 당황하지 말고 저희의 지시를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의무전투경찰들이 한성고를 포위한 것은 지구 방위군의 성명 발표가 채 끝나 기도 전의 일이었다. 의경들은 사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두고 있었는지 신속하게 기동대 버스로 입 구와 뒷문을 막고, FRP와 진압봉을 든 순경들을 울타리 밖으로 배치시켰다. 그 야말로 한성고를 인간의 벽으로 완전히 둘러싼 형국이다. 그것을 옥상의 사각 지대에서 내려다보던 마리는 낮게 신음했다. " 단순한 진압 부대가……아니군요. 장갑차들도 있어요. 저건 아무리 봐도 지 구 방위군 같은데. " " 지구 방위군 맞습니다. 의경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그들이군요. " 손목의 무전기를 조작하던 코마히코가 마리의 의문에 쐐기를 박았다. 마리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 다른 이들과 연락은 해보셨습니까? " " 유레카 쪽은 불통입니다. 아무래도 전파 방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 " 전파 방해라니……. 언더 시티에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 " 그거야 알 수 없죠. 다만 오퍼레이터 팀의 무전이나 민수정 씨와의 연락으 로 미루어 봐서는 지구 방위군과 트러블이 생긴 것 같습니다. " TV로 지구 방위군의 성명 발표를 보지 못한 그들은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피스메이커와 지구 방위군의 사이에 무슨 문제 가 생겼다는 것만을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한성고를 포위한 지구 방위군의 병력이 자신들을 상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것도……. " 수정 씨는 뭐라고 하던가?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됐죠? " 마리의 질문에 코마히코는 침착한 표정으로 답했다. " 잠시 후면 교내 검문이 있을 것 같다고. 학교를 포위한 지구 방위군의 목 적은 어디까지나 저희들의 색출인 모양이더군요. 일단 상황을 지켜보다가 연락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 " ―! " 순간, 마리는 다리에서 힘이 빠졌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자리에 주저 앉았다. 코마히코가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마리가 그것을 거절 한다. "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 " 아니. 그냥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서. 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 마리는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인의 일들로도 정신이 없는 판국에 갑 자기 지구 방위군들이 들이닥치자 현기증이 났던 모양이다. 코마히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살피다가 다시 옥상 밖으로 시선을 돌 렸다. 한창 한성고의 운동장에는 의경들과 군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법적인 이탈과 변수를 막기 위해 차벽으로 행사장 주위를 둘러싼다. 무엇보다 군인들이 총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이 코마히코의 마음에 걸렸다. 과연 저것은 위협용인 걸까 아니면 사살용인 걸까? 후자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것은 훈련 상황이 아닙니다. 지시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모두 무사히 집 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방송실을 점거한 군인들의 방송에 코마히코는 표정을 굳혔다. 저것은 실상 학생들 사이에 섞여있을 자신들, 피스메이커 관계자들을 향한 일종의 경고였 다. 반항할 시에는 민간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협박이다. 《지금부터 교내에 있는 모든 교사 학생 시민 여러분들은 솔선하여 운동장으 로 집합해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시에 따라 한 분도 빠짐없 이 운동장으로 나와주십시오. 만약 운동장에 나오지 않고 교내에 잔류할 시에는, 그 분들은 저희 지구 방위군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책임 지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코마히코는 짧게 혀를 차며 마리에게 다가갔다. 마리는 그가 자신의 곁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자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 일단 수정 씨와 합류하는 편이 좋을까요? " " ……아뇨. 수정 씨 일행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따로 행동하도록 하죠. 어차 피 교내에 우리들만 남게 된다면 민간인들이 다칠 위험도 적어지고 탈출하 기에도 용이해집니다. 또 양동작전을 펼칠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 " 응……. 그렇군요. "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철창 밑으로 보 이는 학교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의경들과 버스로 가득 차 있는 입구였지만, 아까 전만 해도 저 입구 를 통해 달려나간 한 소년이 있었다. ' 가인. ' 마리는 그가 이런 소동에 휘말리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는 한창 시민 씨를 만나러 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절대로. 가인이 반드시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를 바랐다. 그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루지 못했을 때의 슬픔은…… 그녀 혼자만으로 충분하니까. " 아, " 하지만 마리는 곧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지구 방위군은 마리 일행이 한성고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 그렇다면 ……. ' 가인과 시민 씨의 행방도 찾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 한성고에 그들이 없다고 해서 꼭 그들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벌써 지구 방위군에게 신병이 구속되었을지도 모른다! " 아가씨! " 코마히코는 서둘러 옥상에서 내려가려는 마리의 팔을 붙잡았다. 마리는 당황 하며 소리쳤다. " 이, 이거 놓으십시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 "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일단 수정 씨의 연락을 기다리자고 하지 않았습니 까? " " 하지만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다간 가인이!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지도 몰 라요! 도와줘야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해요! " 코마히코는 그제야 마리가 무엇때문에 이러는지를 깨닫고 탄식했다. 정말이 지 아가씨는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는군! " 이대로 내려가서 어쩌시려고요? 강행돌파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 " 못 할 것도 없지요! " " 제발 침착해지십시오.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 "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해결책이 되지는 않아요! " 코마히코는 마리가 조금도 꺽일 기세를 보이지 않자 되레 기가 막혔다. 아까 까지만 해도 무방비 상태로 늘어져 있던 사람이 갑자기 어디서 이런 힘이 생 겨났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팔을 뿌리치려는 마리를 재차 붙들어매며 소리쳤다. " 가인 씨라면 분명 괜찮을 겁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진즉에 무전 기로 연락이 왔겠죠! " " 그러니까 그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도와줘야하는 것 아닙니까! " " 가인 씨는 강합니다! 굳이 아가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 " 모르는 소리! 제 제자의 실력은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하니 약하니를 떠나서 제자가 위험에 빠졌는데 가만히 있을 사부가 어디 있습 니까! " 이 고집불통! 코마히코는 말이 안 통하는 마리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왜 이렇게 답답 한 걸까? 왜 이렇게 맹목적인 그녀를 보면 화가 나는 거지? 왜? 코마히코는 인상을 찡그리며 마리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 강인한 남자의 완 력에 마리는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벽에 등을 붙였다. 아니, 그보다 는 이렇게 억척스러운 코마히코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놀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리는 자신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에 주춤 어깨를 움 츠렸다. " 그래요! 가인 씨가 아가씨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는 잘 알았습니다! 너무나 잘 알았다고요! 그러니까 이제 좀 그만하십시오. 그렇게 자신의 마 음을 증명하려는 것인양, 자신에게 남은 것은 그 하나 뿐이양 집착하지 마 세요! " 그렇게 외치던 중, 코마히코는 자신이 마리의 무엇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기란 말입니다! 아가씨가 가인 씨를 아끼고 사랑하 는 것처럼 아가씨 자신도 스스로를 사랑하도록 하세요! 자기 자신도 돌보 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겠단 말입니까? 희생하고 헌신하 는 것만이 사랑인줄 아세요! "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었기에. 언제나 바라보기만 하는 마리의 사랑은 곧 자신의 사랑이었기에. 연우를 멀 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다가가지는 못하던 자신과 마찬가지였기에. 그랬기에 답답했다. 그랬기에 화가 났다. 그랬기에 이토록 그녀의 사랑에 공 감하며 안타까워하게 된다. 그녀가 안쓰러웠다. 지켜주고 싶다! " 유가인. 그는 제가 지켜내겠습니다! 아가씨의 소중한 사람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켜내겠어요! " 코마히코는 마리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그의 기세에 마리는 숨도 쉬지 못하고 압도당했다.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이 뜨거워진다. " 그러니까 더 이상 무모한 고집은 부리지 마십시오! 더 이상 가인 씨를 지 키기 위해 안달하지도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아가씨는 좀 더 아가씨의 일만 걱정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 " ……. " " 왜 대답이 없습니까? 아시겠습니까, 아가씨! " " ……아, 예! " 마리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코마히코는 표정을 풀 며 마리를 놓아주었다. 속에 쌓아뒀던 얘기를 남김 없이 쏟아내서 그런지 통쾌한 감도 있었고 쑥스 러운 감도 있었다. 코마히코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마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숨 쉬는게 벅찰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이래서야 마치 처음 연우를 만났을 때와 같 지 않은가? ' 설마 내가― ' 코마히코는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럴리가……. 나는 분명 사부님을, 오직 사부님 만을 생각해왔는데.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 ……코마히코 씨. " 그때 마리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코마히코는 그답지 않게 바싹 긴장하 며 소리쳤다. " 옛? 왜,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 " 혹시 코마히코 씨는……. "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뒷말을 흐렸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코마히코는 심 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근거림을 주체할 수가 없다! 아가씨,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코마히코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리가 뒷말을 잇기만을 기다렸다. " 코마히코 씨는, " 그리고 이어진 뒷말은! " 역시 가인을……좋아하시는 겁니까? " " ― " 순간, 코마히코는 이탈리아의 피사에 있는 기울어진 종탑이 결국엔 쓰러지는 것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마리는 뭔가를 더 오해했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린다. " 그, 그런 겁니까? 사, 사실 예전부터 조금 그런 기미를 눈치채기는 했지만 설마설마 했었는데……. 죄,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코마히코 씨는 그 정 도로 가인을 소중하게 여겨오셨던 거군요. " " 아, 아가씨……. " " 저는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코마히코 씨의 속 깊은 사랑에 비하면 제 가 한 사랑따위는 어린애 투정에 불과했어요. 아, 그동안 얼마나 괴로우셨 습니까……. 그러면서도 제 푸념을 일일히 다 들어주시다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오늘처럼 둔한 제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 " ……. " 아니. 그 정도에 당신의 둔함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코마히코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한숨 을 내뱉었다. 뭐랄까.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 해명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다고 해야할까. " 하지만 코마히코 씨, " 코마히코는 마리의 부름에 힘 없이 고개를 들었다. 마리는 그런 그를 향해 빙 긋 미소짓고 있었다. " 좀 더 제 자신을 걱정하라는 말……. 힘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 뜻 밖의 감사에 코마히코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곧 그는 마주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힘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가장 빨리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생각해보도록 하죠. "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0 - Ｂy Ｎext Ｎeo =-=-=-=-=-=-=-=-=-=-=-=-=-=-=-=-=-=-=-=-=-=-=-=-=-=-=-=-=-=-=-=-=-=-=-= 2학년 1반 교실. 그 뒤편에 커튼으로 쳐진 간이탈의실에 시더를 비롯해 피스 메이커의 여자일동이 모여 있었다. "언더 시티로의 모든 통신망이 차단되어 있어. 유레카의 공성방벽이 외부의 침입에 작동한 거야." 교실의 데스크톱 컴퓨터를 조작하여 유레카의 중추 시스템에 접속, 피스메이 커의 현 상황을 알아보려던 시더는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자 혀를 찼다. 그녀의 뒤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채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묻는다. "외부의 침입이라면 해킹(Hacking)?" "저런 짓거리가 무슨 해킹이야! 놈들은 그저 크래커(Cracker), 데커(Decker) 일 뿐이라고!" 시더는 괜히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묘하게 자기변호적인 모습에 일행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역시 평 소에도 자주 해킹해왔던 거야, 이 사람……. "해커나 크래커나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닌가?" "해킹은 작업과정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는 데 의의가 있 어! 이런 파괴적인 행위와는 근본부터가 달라!" "그래봤자 범죄인 건 마찬가지지. 쓸데없이 해커들 변호하는 데 힘 빼지 말 고 다른 방법이나 모색하도록 해." 유리는 단호하게 시더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시더는 꿍얼거리면서도 다 시 컴퓨터 앞에 달라붙었고, 채영도 오퍼레이터팀의 치프로서 그녀의 작업을 도왔다. 채영은 손톱을 깨물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오퍼레이터팀의 서포 트로 이런 공성방벽쯤이야 문제도 없이 돌파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 랐다. 자신들이 시스템에 접속하기 위해 방화벽을 해지시켰다가는 순식간에 외부 공격자들에게 중추를 점령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도 오퍼레이터팀과 연락할 수단이 없다는 거지.' 채영은 손목에 찬 무전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언더 시티의 연 락은 앞의 문자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모두 두절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ECCM을 통한 통신방해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정도로 피스메이커를 몰아붙일 수 있는 상대라면 역시……. "역시 지구방위군일까요?" "그렇겠죠. 하지만 그들만으로 이런 기도비닉(企圖秘匿)은 불가능해요. 아마 도 언더 시티의 내부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들을……." 거기까지 말하던 수정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유리는 눈치 빠르게 그녀의 뒷말을 대신했다. "스파이가 있다는 거지? 지구방위군에게 언더 시티를 안내한." 스파이! 시더와 채영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수정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도 그 남자겠죠. 미국지부의 사령관 시폰 뤼멘. 8월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다 싶더니만 뒤에서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사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왜 같은 피스메이커에게 이런 짓을!" 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탄했다. 하지만 시폰의 배신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배신한 이유는 모를지라도 그전부터 그가 보여 온 행동들은 하나같이 피스메이커의 이념과 어긋나 있었던 것이다. 민간인의 생사는 고려하지도 않고 작전을 수행시키질 않나, 같은 동료들에게 총기를 난사하질 않나. 어쩌면 그는 그때부터 이런 결과를 준비해놓은 채 피스메이커를 떠났던 것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신자가 과연 그 혼자뿐인 걸까?' 시폰은 어디까지나 비숍의 명으로 파견된 성당기사단의 대리인이다. 그가 미 국지부의 사령관이었다고 한들 한국지부의 사정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 다. 하물며 언더 시티에 관한 정보는 한국지부 사이에도 기밀 중의 기밀사항! 그렇다면 역시. '……또 다른 배신자가 있었던 거야.' 수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피스 대원들의 신상명세를 지구방위군에 넘기고 언더 시티의 시스템을 마비 시킨 사람. 거기다 피스메이커의 치프들이 자리를 비움과 동시에 시작된 습격. 너무도 절묘하지 않은가? 이 정도로 기관의 내부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한국지부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수정은 어렵지 않게 배신자의 정체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배신자 시폰 뤼멘의 앞잡이. 그는 아마도……. '안 돼. 어떻게든 빨리 유레카로 돌아가지 않으면……!' 수정은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지구방위군과 의경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천천히 학교 본관을 향해 전진해오고 있었다. 한편 언더 시티 유레카에서는 시더의 예상대로 대대적인 해커의 침입이 시작 되고 있었다. 위잉위잉위잉위잉 《시스템 재기동 종료. 시큐리티 레벨 2!》 《침입자에게 우회로를 설정. 논리방벽 재구축!》 《백신 로드. 바이러스 검색 진행 중!》 《역탐지팀, 디코이(Decoy)를 장비하세요!》 오퍼레이터 삼인방을 위시한 15명의 오퍼레이터들은 비상경보등이 켜진 작전 본부실에서 분주하게 공성방벽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런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 하고 방화벽은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방벽에 잠복형 바이러스! 전종 전개!》 《방벽 027, 돌파당했습니다!》 《방벽 044, 타입 340 에러 발생!》 《환부격리 개시. 외주방벽 레벨 1로 재구축!》 삼인방은 자신들의 능력부족을 여실히 깨달아야만 했다. 아무리 고속처리 능 력을 가진 윤채영 치프가 빠졌다지만 이렇게나 해크(Hack) 싸움에서 맥을 못 추다니! 이래서야 나중에 치프의 얼굴을 볼 낯이 없잖아! 치이 치이이이 메인 스크린에 펼쳐진 수많은 스크린 창들이 블록 아웃하기 시작했다. 그렇 게 잡음으로 뒤덮여가는 영상을 노려보며 진 사령관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깍지를 낀 그의 양손은 어느 때보다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위잉 그때 비상경보음이 중단되면서 메인 스크린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경보등 과 컴퓨터들의 전원까지 일제히 꺼져버렸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오퍼레이터팀의 막내 문세희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전 시스템 다운! 통신도 모두 끊겼습니다!" "돌입할 생각인가!" 결국 보다 못한 진 사령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비상전원을 켜라! 옴팔로스의 스틱스 광산에서 전력을 끌어올려!" "하지만 오리하르콘의 초전도 현상만으로는 언더 시티의 전력을 충당하기가……!" 삼인방이 곤란한 표정으로 돌아보았지만 진 사령관은 가차 없이 명령했다. "중추 시스템으로 향하는 부 정규 접속만 막아내면 돼! 어디까지나 우리의 목적은 시간끌기다. 당황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도록!" 잠시 후 붉은색 경보등이 다시 켜지면서 예의 방벽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 했다. 진 사령관은 그제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 혔다. 그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시간싸움인가." 분명 그녀가 있다면 또 무모한 도박이라며 잔소리를 했겠지. 진 사령관은 이제는 웃을 수도 없게 된 입가를 매만지며 마음속으로나마 미 소했다. '부디 늦지 말아라, 수정.' "소령님, 언더 시티의 외부 전력을 차단시켰습니다." "좋아, 각 부대에게 전달. 강행돌입 개시!" 지구방위군의 작전장교 하영식 소령은 통신병의 보고에 즉각 돌입명령을 내 렸다. 그러자 120명의 특임대 요원들이 열 개의 작전소대로 나뉘어 어두운 언 더 시티의 거리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유레카의 광속전차 승강장에 주차된 장갑차. 그 안에서 적외선 텔레비전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하 소령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여기까지 는 '그'가 건네준 정보대로였다. '아니지.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냐, 하영식.' 하 소령은 느슨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는 지난 두 번의 작전실패로 140명에 가까운 특수부대원을 잃은 것을 절대 로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때와 같은 수모는 두 번 다시 당하고 싶지도, 당해 서도 안 된다. 사정 좋게 이용당하는 것은 더 이상 사절이었다. '시폰 뤼멘.' 이미 그에게서는 지난 8월의 협조로 희생을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솔직히 하 소령의 마음 같아서는 그런 미심쩍은 남자와 손을 잡는 일은 피하고 싶었 지만, 어차피 그도 군인인 이상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상 관인 라경일 장군은 이번에야말로 피스메이커를 소탕해버리겠다고 혈안이 되 어 있었다. "후후, 연기를 하는 건 정치가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의 장군님을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군요. 대단한 능구렁이야." 하 소령은 옆에서 들려온 가냘픈 웃음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돌아본 곳에는 그의 동행인 한 여성이 TV에서 한창 방영 중인 지구방위군의 성명을 시청하고 있었다. 여성은 고딕풍의 검은 드레스를 걸친 범상치 않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거기 에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한층 더 그녀를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 게 만든다. "능구렁이라니. 지금 라경일 장군님을 모욕하시는 겁니까?" "어머,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그만큼 노련하신 분이구나 하고 감탄한 것 뿐이에요." 하 소령의 말에 여성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더욱 기분이 나빠진 하 소령은 여전히 언짢은 기색을 풀지 않았다. "명분이 필요하다고 했던 건 그쪽 아니었습니까? 솔직히 저희도 이런 우스꽝 스러운 짓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명발표와 동시에 기습이라니.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 건에 관해서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저희의 언론통제는 피스메이커보다 한 수 위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하 소령은 답답하다는 듯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더 말해봐야 자 기 얼굴에 먹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그가 몸담은 기관에게 순수란 남아 있지 않았다. 지구방위군은 지구 를 방위하기에 지구방위군인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권리를 방위하기에 지구 방위군인 것이다. 초기의 이념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이념이 있기 는 했던 것일까도 의문이다. '지구를 방위한다니, 어린애조차도 웃을 얘기지. 낯 뜨거운 소리야.'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차라리 피스메이커야말로 순수한 이념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멋대로에 정체불명의 녀석들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구방위 군이나 세간의 어떠한 방위단체보다도 가장 인류를 위해온 자들이다. 가장 헌 신적인 지킴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과연 우리가 이렇게 매도하고 굴복시켜도 되는 것일까? 무너뜨 려도 되는 것일까? 하 소령은 회의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어차피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이타심이 아닌 이기심이니 까. 적어도 그가 보고 살아온 세계는 그러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세상 탓으로 돌 리며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충분히 성의를 보였소. 이제는 당신들 차례라고 생각하는데 ……." 하 소령의 말에 여성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온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하지만 다른 병력은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데……."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죠. 온 것은 저 혼자뿐이니까." "뭣!" 여성의 답변에 하 소령은 기가 막혔다. 혼자? 혼자라니! "지금 나하고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요!" "후후, 그런 것 같아요?" 여성은 하 소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거리기만 했다. 하 소령은 열이 받아 홧김에 여성의 멱살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대체 이게 무슨 짓거리야! 너희 연놈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하는 거냐고! 시폰 뤼멘 그 개자식이 우리를 엿 먹이려고 작정했군! 너 같은 계 집애를 보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 순간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하 소령 의 몸이 장갑차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하 소령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어깨가 탈골되어 있었다. 여성이 자신의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을 잡아 비틀어 그대로 바닥에 내 동댕이친 것이다. "소령님!" 뒤에서 들려온 소란에 깜짝 놀란 통신병이 품속의 권총을 뽑아들었다. 하지 만 채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날카로운 뭔가가 그의 움직임을 제지한다. 손톱이었다. 붉게 물든 여성의 손톱이 줄자처럼 늘어나 통신병의 미간을 관 통했던 것이다. 통신병은 눈을 까뒤집으며 빨랫줄에 걸린 빨랫감처럼 여성의 손톱에서 대롱 거렸고, 그 모습에 하 소령은 비명을 지르며 장갑차 끝자락으로 뒷걸음쳤다. "괴, 괴물! 괴물!" "아무래도 그 미개한 입을 찢어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군요. 레이디를 괴물 이라고 하질 않나, 시폰 뤼멘 그 역겨운 남자와 한데 묶어서 취급하질 않나." 여성은 주저앉은 하 소령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며 조소했다. 그러자 붉은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 소령은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떨며 더듬더듬 말했다. "트, 틀려! 이런 건! 이런 건!" "틀리다니? 뭐가요?" "이건……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감당 못할 공포로 비굴해진 하 소령의 태도에 여성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하 소령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입가의 미소를 한 층 짙게 했다. "틀리지 않습니다. 지켜보고만 있으시지, 무력한 인간들." 콰직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성의 입이 하 소령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이빨을 통 해 생명의 근원이 되는 붉은 액체가 그녀의 체내로 들어왔다. 피란 육체를 이 루는 기원, 그림자와 더불어 영체의 정보를 간직한 아스트랄 바디의 파편이다. 여성이 자신의 마스터를 통해 계승받은 능력, 블러디 인펙션은 이 피에 내재된 영체의 정보를 읽어 들여 상대를 해석 또는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물질변형. 영체에 기록된 정보를 재작성하여 육체를 강화시키고, 그 위에 우선순위를 덮어씌운다. 그럼으로써 변형된 상대는 그녀와 마스터의 충 실한 종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카르마의 흐름을 역행시키고 영체의 구조를 어긋나 게 만드는 행위였다. 때문에 빛에 대한 면역이 떨어지고 적혈구의 구조가 불완 전해서 점조도가 하강, 흡혈을 갈구하는 부작용이 뒤따르는 것이다. '혈족으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 주인님께 부담을 드려서는 안 되니까.' 여성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 소령의 목덜미에서 입을 뗐다. 피의 계승은 그 최초의 근원에서 시작되어 점점 늘어나는 가지와도 같다. 무 분별한 개체수의 증가는 마스터의 힘을 고갈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정보를 흡혈 대상과 교환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면 상대는 정보의 불완전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단순한 사이코포모스가 되어버린 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어차피 오늘만 지나면 더 이상 너희들에게 볼일은 없을 테니까. 여성은 충혈된 눈으로 거칠게 호흡하는 하 소령에게 물었다. "네 주인의 이름을 말해라." "에르체베트…… 바토리." "너의 사명은?"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 여성,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하 소령에게 덮어씌운 우선순위의 정보를 확인한 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로써 지구방위군의 병력은 그녀의 주인인 네 이 안데르슨의 소유가 되었다. 그야말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피스메이커를 공격할 수단을 확보한 것이다. 그들 블러디 노블맨의 방식은 언제나 이러했다. 각국의 수뇌들을 혈족으로 삼은 그들은 줄곧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어올 수 있었다. 이번 지구방위군의 성명 또한 마찬가지다. 피스메이커와 전면전을 유발시킨 것도 결국 네이 안데르슨의 공작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배후에 그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무서운 점이었다. "자아, 그렇다면……." 에르체베트는 하 소령이 앉았던 의자에 사뿐히 몸을 앉히며 미소지었다. 옆 에서는 하 소령이 통신병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물어뜯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서는 이미 자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기다려 보도록 할까."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전력이 나간 언더 시티는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그나마 비상전원으로 유지 되는 인공조명만이 희미하게 주위를 밝혀줄 뿐이다. 그 어둠 속을 가로지르며 언더 시티의 외곽으로 향하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람드링 뤼멘. 시폰 뤼멘의 양아들인 그는 착용한 AI 슈츠의 적외선 시각에 의지하여 어두운 거리를 달려 나갔다. "멈춰! 움직이면 쏜다!" 그때 반대편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남자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령부의 데 프콘 1 발령으로 전시상태에 돌입한 팔라딘 대원들이었다. "쳇." 그람드링은 발걸음을 멈추고 낮게 혀를 찼다. 어째 마주치지 않는다 했더니 하필이면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Hey, It's me. I'm PEACE ALIZARIN." 그람드링은 대답을 하면서도 적외선 시각으로 전방을 확인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다섯 명의 팔라딘 대원들이 잠복한 채 그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양쪽 눈 은 짙은 선홍색 빛을 흘리며 예의 고유 능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피스 알리자린? 어째서 당신이 여기로 온 겁니까? 피스 대원들에게는 대기 명령이 떨어졌을 텐데." 앞에서 그람드링에게 질문했던 대원이 경계의 빛을 거두지 않으며 소리쳤다. 그람드링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에게 접근했다. "응? 아아, 그랬지. 그래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내 체질에 안 맞아서.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있어야지."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원은 총구를 바싹 들이대며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피스 알리자린은 상부가 지정한 팔라딘대의 주요 감시대상자였다. 실제로도 그를 뒤쫓다가 연락이 끊긴 대원들이 부지기수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방심 할 팔라딘 대원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람드링은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진 대원의 총을 바라보며 낮게 휘파람을 불 었다. "휘우, 이거 좀 기분이 상하려고 하는데? 같은 동료들끼리 정말 이러기야?"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이 앞은 출입금지입니다!" 대원의 경고에 그람드링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개폐문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지었다. 옳아, 제대로 찾아오기는 한 거군. "Okay. Okay. 알았으니까 그만 표정 풀라고. 얼른 도망가든가 해야지, 원." 그람드링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여전히 대원들의 총구는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 그런데 말이야." 순간 그람드링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를 드러냈다. "나에게 총을 겨눈 대가…… 지불할 수 있어?" 휙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대원은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재빨리 방아쇠를 당 기려고 했다. 하지만 총구는 불을 뿜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총을 붙잡고 있던 그의 양손은 이미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잘려나가 있었던 것이다. "으, 으아아앗!" 대원은 손목째 사라진 자신의 양손을 들어 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다만 그 비명 소리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그람드링의 손에 들려진 플라스마 도끼가 정확히 대원의 머리를 정수리부터 아래턱까지 2등분하고 있었다. "이 개자식!"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광분한 팔라딘 대원들이 총기를 난사하려고 했다. 그보다 한발 앞서서 그람드링은 양손의 도끼를 앞으로 내던진다. 퍽 퍽 두 명의 대원이 도끼에 머리가 쪼개진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남은 두 대원은 고함을 지르며 총기를 난사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순간 예지안으로 상황을 예측한 그람드링은 거짓말처럼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어디야! 어디로 가버린 거야!" 대원들은 적외선 스코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거칠게 소리쳤다. "헉, 헉!" 숨소리가 점점 가빠진다. 패턴 알리자린의 능력은 자료상으로 파악하고 있었 지만 직접 이렇게 맞닥뜨리게 되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순간 예지라니! 이런 것을 대체 어떻게 상대하란 말이야? "늦어." 그때 대원들 뒤에서 그람드링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원들은 당황하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람드링은 그대로 한 대원의 목덜미 를 잡아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침과 동시에 다른 대원의 아래 턱을 AI 슈츠로 올려 찼다. 오른팔의 의수로 바닥에 메다 꽂힌 대원은 머리가 깨져 즉사. AI 슈츠의 각 력에 목이 부러진 대원 역시 즉사. 단순한 두 동작이었지만 확실하게 두 생명은 빛을 잃어버린다. "……쳇, 지지리도 운 없는 녀석들." 그람드링은 피주검이 된 대원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시체에 꽂힌 자신의 도끼들을 회수하여 개폐문에 다가 갔다. "그럭저럭 시간에 맞춘 건가." 그람드링은 손목의 무전기로 시간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리 곤 개폐문의 옆에 있는 수동제어기를 움직여 문을 열기 시작한다. 언더 시티의 외곽에 위치한 이 문은 궤도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몇 안 되는 지상과의 출입구였다. 지구방위군에 의해 언더 시티의 전력이 끊겼더라도 궤 도 엘리베이터는 스틱스 광산의 초전도력과 오리하르콘의 반중력 시스템을 이 용한 것이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지구방위군에 의해 광속전차의 정거장이 점거된 지금, 언더 시티로 출입하려 면 이 궤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구방위군에게 언더 시티 의 정보를 넘겨준 '그'도 이 궤도 엘리베이터의 존재만큼은 그들에게 알려주 지 않았으니까. 키리리리릭 몇 사람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제어기의 레버를 그람드링은 의수와 AI 슈츠의 힘만으로 간단하게 돌려버렸다. 폭발물로 부셔버리는 편이 훨씬 더 손쉽겠지만 의외로 이 개폐문은 외부와의 차단을 위해 두께 50센티미터의 강철문이 4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간단히 파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 거지. 젠장.' 그람드링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마지막까지 레버를 돌렸다. 그러자 4중의 강철문이 완전히 개폐되며 내부의 전경을 드러냈다. 원래대로라면 수동개폐 시 보안 시스템은 해제되지 않았지만 전력이 나간 지 금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개폐실의 어둠 속에는 그람드링이 마중하려 했던 인물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늦었구나, 그람." 시폰 뤼멘. 피스메이커 미국지부의 사령관이자 성당기사단의 열 번째 검 아포 스톨로스 타데오. 그리고 그람드링의 양아버지인 그가 자신의 아들을 반기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평소와 다름없는 양아버지의 모습에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떠오르던 모든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간다. 그람드링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폰의 말에 답했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잠시 귀찮은 일에 휘말렸던지라……." "킥! 바보 같은 게, 잠시는 무슨 놈의 잠시야? 느려터진 주제에." 그때 어둠 속에서 그람드링의 말을 비꼬는 한 낯선 목소리가 있었다. 그제야 그람드링은 시폰의 뒤에 여섯 명의 인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지? 마스터와 함께 오는 이들이라면 빈센트 데이면과 그 휘하의 크루세 이더들이었을 텐데. "……마스터, 이 녀석들은?" 그람드링은 전방의 여섯 명을 노려보며 시폰에게 물었다. 어둠 속이라 잘 분간이 가지는 않았지만 그들 여섯은 하나같이 그람드링과 같은 AI 슈츠를 착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키나 체격조차 차이가 없었기에 마 치 여섯 쌍둥이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쌍둥이?' 순간 그람드링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독한 혐오감. 마치 피부 밑으로 벌레 가 기어 다니는 느낌! 그렇게 경악하는 그를 여섯 쌍둥이들은 재미있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똑같은 얼굴로 웃으며, 똑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똑같은 모습으로 녀석 들은……. "후후,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Ignite)." 시폰은 얼어버린 양아들을 향해 그의 형제들을 소개시켜주었다. "네 동생들이란다, 그람."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1 - Ｂy Ｎext Ｎeo =-=-=-=-=-=-=-=-=-=-=-=-=-=-=-=-=-=-=-=-=-=-=-=-=-=-=-=-=-=-=-=-=-=-=-= 《교내에 있는 모든 교사, 학생, 시민 여러분은 운동장으로 집합해주시기 바 랍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시에 따라 한 분도 빠짐없이 운동장으로 나와 주십시오.》 지구방위군의 방송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어영부영하던 한 성고의 교사와 학생들도 천천히 그들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역시 너무 느렸는지 군인과 의경들이 직접 교내로 들어와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자자, 어서 나가십시오!" "서둘러주십시오!" 군인들의 재촉에 사람들은 불평을 터뜨리며 운동장으로 향했다. 몇몇 어른들 이 무슨 일로 이러느냐며 군인들에게 항의했지만 그들은 오직 침묵으로 응할 뿐이었다. 완전무장을 한 그들에게 섣불리 반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요." 2학년 1반 교실에서 복도의 상황을 지켜보던 수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군인들은 1학년 교실이 있는 1층과 2층을 단속하고 있었기에 아직 그녀들이 있는 3층으로는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것으로 보아 잠시 후면 이곳도 저들의 단속에 들어갈 것이다. "어떡하지? 이대로는 붙잡힐 거야!" 시더는 울상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유리는 그런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해킹을 하라고 해도 역시 무리겠지." "어차피 이곳의 설비로는 유레카의 공성방어 시스템을 상대하지 못해요. 애 초에 기기의 처리속도부터 따라가질 못하니까." 채영이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결국 그녀의 말은 언더 시티의 시스 템에 접속하려면 직접 언더 시티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수정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역시 어떻게든 지구방위군과의 교전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뭔가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있어, 방법은." 그때 유리가 모두의 마인드 리딩을 느꼈는지 짧게 답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방법이 있다니…… 무슨 방법이죠, 유리 양?" "패턴 핑크의 능력을 사용하면 돼. 예전에 유빈이 사용한 마인드 브레이크처 럼 지구방위군의 정신을 조종한다면……." 순간 수정과 채영, 시더는 할 말을 잊었다. 그렇다. 솔직히 유리의 오라 능력을 십분 활용하기만 한다면 이런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역시 그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 은 평소 그들이 추구해온 피스메이커의 정도(正道)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조종하여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은 피스 블랙과 그의 수하들이 즐겨 사용해온 방법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 도 마다하지 않는 악의적인 수단! "사, 상황이 상황인데……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시더는 유리와 모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채영도 내심 동감하 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녀들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언더 시티로 돌아가지 않으면 동료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하지만 수정은 단호하게 유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말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 더와 채영도 설마 수정이 이토록 시원스레 거절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다. "아니, 긴급상황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까지 꼭 고지식하게 그래야 하는 거 예요?" "맞아요, 수정 씨! 수정 씨도 진 사령관님이 걱정되실 거 아녜요!" 시더와 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항의했다. 유리는 불안한 눈으로 일행의 안색을 살핀다. 수정은 그런 유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저도 모두가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아마 유리 양도 같 은 마음이었기에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일 테고. 그렇죠?" 수정의 반문에 유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수정은 몸을 숙여 그녀 와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의 신념을." 유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수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지인의 생소한 모습에 채영과 시더는 마른침을 삼켰다. 수정은 몸을 일으키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생각해보세요. 지금껏 우리가 지켜왔던 게 뭔가요? 그저 단순히 몬스터를 해치우고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만이 전부였나요?" 수정은 시더를 돌아보며 물었다. "시더 양, 시더 양이 머신 아더를 만든 이유는 뭔가요?" "예? 어, 저기,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시더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야 D타입과 기가스 티폰에 대항할 수 있는 결전병기를 개발하다보니……." 거기서 말을 끊은 그녀는 곧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다시 말했다. "하지만 실은 그랜마한테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랜마가 물려준 오리하르콘 제련법으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연구를……. 그래서 그랜마가 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그랜마 앞에 떳떳해질 수 있도록. 그런 과학자가 되고 싶었 어요." 수정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채영에게 물었다. "채영 씨는? 채영 씨는 왜 오퍼레이터팀의 치프가 됐나요?" "……선임들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속처리 능력을 가진 저만이 머신 아더 를 다룰 수 있기에."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실은 선임들을 존경했어요. 그래서 꼭 그분들과 같은 오퍼레이 터가 되겠노라고, 현장의 대원들이 무사귀환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며 함께 싸우겠노라고 다짐했죠." 그랬기에 사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업무에 매달릴 수 있었다. 그랬기에 시폰 뤼멘에 의해 변질되어가는 피스메이커의 모습을 참을 수 없었다. 수정은 마지막으로 유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리 양은? 유리 양이 지키고 싶은 건 뭐죠?" 유리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작년에 벌인 유빈과의 일전을 떠 올렸다. 그리고 그때 그에게 소리쳤던 자신의 목소리도. '네가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는 마인드 브레이커라면 난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마인드 키퍼야. 네가 사람들의 마음을 농락하겠다면 난 그런 너에게서 사람 들의 마음을 지켜 보이겠어! 네가 인간을 믿지 못한다면 난 인간을 믿어보겠 어! 난 너와는 달라! 난 마인드 브레이커가 아니야!' 그리고 내가 믿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란……. "나는……." 유리는 지금까지의 근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나는…… 오빠에 대한 마음을 지키고 싶어." 순간 그녀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어째서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어째서 그때의 마음을 떠올리지 못한 거지? 그때의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한 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자신 이 가인을 가장 좋아한다고. 앞으로도 그에 대한 마음은 변치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사랑을 신뢰하고 있었다. '믿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뭐란 말인가? 리리스의 우정을 핑계 삼아 도망쳐오기만 했다. 말할 수 없다느니, 표현할 수 없다느니, 자격이 없다느니 이런저런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줄곧 오빠에 대 한 마음을 외면해왔다. 방치해왔어! '괜찮니, 유리야?' 어두운 밤거리에서 비에 젖어 울고 있는 자신을 불러주었던 자상한 목소리. 그리고 내밀어준 그의 따스한 손길. 아아. 유리는 깨달았다. 그 내밀어준 손을 붙잡은 순간부터, 그 손을 움켜쥐고 함 께 걸어온 나날들이야말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이라는 것을. 자신이 가장 지키고 싶어했던 마음이라는 것을. "그래요. 할머니에게 떳떳해지고 싶은 마음도, 선임들을 존경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그 모든 게 바로 여러분의 신념이 에요. 그 소중한 신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예요." 수정은 흐느끼는 유리를 껴안아주었다. "신념을 잃은 사람은 약해집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는 시점부터 약해지 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적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그들이 지금 이 렇게 우리를 포위하는 것도, 언더 시티를 공격하는 것도 다 우리의 신념을 꺾기 위해서예요. 신념을 잃고 자신들에게 굴복당하길 바라는 거예요. 여러 분들은 그것을 알고도 자진해서 저들 앞에 무릎을 꿇을 건가요? 지금까지 믿 어온 신념을 버리고 앞으로의 싸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들을 상대하는 것도, 몸을 피하는 것 도 아니에요. 신념을 끌어안고서 끝까지 이어가는 거예요. 자신들이 믿어온 마음을 끝까지 믿어주는 거라고요!" 수정은 채영과 시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리의 믿음과 마음, 그 시간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적어도 저는 여러분의 신념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때요?" "……." 채영과 시더는 말없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곧 수정의 손 위로 자신들 의 손을 올리며 미소지었다. "저도 제 동료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I believe PEACE MAKER, too." 수정의 품에서 벗어난 유리도 붉게 달아오른 눈자위를 문지르며 그녀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마음에 대한 얘기라면…… 날 빼놓고 진행하지 마." "역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피스메이커군요?" 수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더 이상 일행의 표 정에서는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큼은 회복 해낸 모양이다. "이제는 이곳을 탈출하는 일만 남았는데……." 수정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복도의 상황을 살폈다. 2층의 수색이 끝났 는지 3층으로 올라오는 군인들이 하나 둘 보였다. 그들이 2학년 1반 교실로 들 이닥치기 전에 뭔가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역시 강행돌파밖에…… 없단 말인가?' 더 늦기 전에 2층의 병력만이라도 제압하지 않으면! "곤란한 거지, 수정 씨?" 그때 뛰쳐나가려는 수정의 어깨를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수정은 깜짝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그녀를 제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2학년 1 반 담임 하지연이었다. "하 선생님!" "저치들한테 붙잡히면 안 된다는 거 아냐? 그럼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는데." 지연의 말에 수정과 유리는 긴장하며 딴청을 피웠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나." "어이, 어이. 우리가 다 듣는 데서 그렇게 큰소리로 동료애를 과시하고선 모 르길 바라는 건 무리 아닌가?" 그제야 일행은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일련의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2 학년 1반 학생들. 당연히 이 교실의 주인들인 그들은 아까부터 줄곧 교실에 있었고, 당연히 수정 일행이 하는 얘기도 모두 듣고 있었다. 수정과 유리, 채영과 시더는 얼굴을 붉혔다. 으아, 이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그 낯 뜨거운 모습을 보였단 말야? "어차피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다들 사정을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요. 이제 와서 숨기는 척하지 말고." 지연의 말대로 2학년 1반 관계자들은 예전 네크로맨서의 습격으로 피스메이 커에 대한 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지연의 옆에 있던 재영도 히죽 웃으며 고 개를 끄덕인다. "얼마든지 부탁하세요! 인간 박재영, 미인들의 힘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 한 몸 얼마든지 불사를 수……!" 쿵 그러나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내의 메치기가 그에게 작렬한다. 그녀는 오 열하는 재민에게 안긴 자신의 남자친구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결국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구나, 바보 재영 군." "형아의 목이! 형아의 목이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그런 그들을 내버려두고 지연은 나머지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 이 담임의 결정에 불만은 없겠지?" "……예에." 2학년 1반 학생들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힘없이 답했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재밌 을 것 같다며 지연의 의견에 적극 동참한다. 평소 팔라딘대의 감시로 피스메이커라면 치를 떨던 급우들의 변화에 유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학생들은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저마다 쑥스러운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 사실은 모두…….' 유리는 마인드 리딩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네크로맨서의 습격으 로 줄곧 가인과 자신에게 쌀쌀맞게 굴어온 그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본심 은 아니었다는 것, 악의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죄책감을 받아왔다는 것, 그들 도 화해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는 것. '모두…… 우리와 같았던 거야.'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그에 대해 후회하고, 솔직해지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같았던 거야.' 유리는 이 자리에 지금 가인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만약 그가 이런 급우들의 모습을 봤더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얼마나 감격해했을까? 이 두근거림을 그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이 설렘을 그와 함께 나누고 싶었 다. 만나고 싶어! "다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역시 너무 위험해요." 수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지연 일행의 도움을 받는다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은 한층 쉬워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 누군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러니 여러분의 성의만 받겠습니다." "이봐요, 민수정 씨." 지연은 한숨을 푹 내쉬고 수정의 앞에 섰다. 그리곤 그녀 곁에 서 있던 유리 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저는 말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교사예요. 그리고 교사 인 이상 한번 맡은 제자는 끝까지 돌봐줘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지연은 유리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자 멋쩍어졌는지 괜스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씹어댔다. "아니 뭐, 내 신념이라면 신념이기도 하고." "신념…… 이란 말이군요." 수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지연에게 손을 내밀 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 선생님." "진즉에 그럴 것이지." 지연은 힘 있게 수정의 손을 맞잡았다. "다들 저희의 지시에 따라주십시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2층의 검문을 마친 군인들은 곧바로 3층의 검문을 시작했다. 3층 복도 끝에 서부터 안쪽으로 차근차근 교실을 체크하던 그들은 이윽고 2학년 1반 교실에 다다랐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다섯 명의 군인들은 다른 학급에서와 마찬가지로 형 식적인 양해를 구하고 즉시 통제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 2학년 1반은 앞 의 학급들과 뭔가가 달랐다. "어휴, 많이 힘드시죠?" "수고하십니다∼" 군인들이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생전 보도 못한 웨이트리스 차림을 갖춘 화사한 여학생들의 환영이었다. 그녀들은 마치 손님을 대하기라도 하듯 사근사근하게 군인들의 양쪽에 붙어 그들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자자, 잠시 앉아서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세요." "아, 아니! 이러지 마십시오!" "걱정 마세요. 저희가 서비스로 드리는 거니까 개의치 마시고, 자자!" "에, 저기, 그러니까 저흰……." 군인들은 얼굴이 붉어진 채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그들도 갑작스런 비상과 출동명령에 심신이 지쳤던 터라 여학생들의 권 유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이다. 다만 체벌이 두려워 먼저 나서기가 어렵다는 것 이었는데……. "아앙! 지연이가 따라주는 거 안 마시면 오빠들 미워할 거야!" 한 웨이트리스가 군인의 팔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혔다. 군인은 웨이트리스에게 붙잡힌 팔짱의 감촉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 학생, 가슴이 장난이 아니잖아? 이거 학생 맞아? '학생일 리가 없지.' 웨이트리스 하지연에게 붙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군인을 바라보며 나머 지 여학생 일동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연 본인도 수치심을 억누르고 있는지 양 귓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하지만 그녀는 본연의 임무에 입각하여 충실하게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쭈욱 들이켜세요. 옳지! 잘한다, 오빠!" ……오빠? 짙은 자괴감이 어린 지연의 분투에 힘입어 결국 군인은 주저주저하면서도 음 료수에 입을 가져갔다. 그런 동료의 모습에 다른 군인들도 슬그머니 테이블에 앉아 여학생들에게 음 료를 건네받는다. 그 모습을 교실 뒤편의 간이탈의실에서 훔쳐보던 인영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 렀다. 좋아,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어! 쿵 그때 탈의실의 누군가가 그만 들고 있던 옷걸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바 람에 무시 못할 소리가 울려 퍼지자 쉬고 있던 군인들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 어났다. "뭐지, 이 소린?" "아, 아하하하! 저기,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다가 누가 넘어졌나 보네. 신경 쓰지 말아요!" "가보자!" "아니, 잠깐! 아앙, 이대로 가버리면 지연이 슬프다니까!" "비키십시오!" 약발이 떨어졌는지 지연의 아양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은 신속히 무장을 챙겨 탈의실로 다가갔다. 그들은 포위대형을 짜고 소리 없이 수화를 주고받았다. 탈의실 커튼의 안쪽 에서는 몇몇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대략 네다섯 명 정도의 목소리. 어쩌면 우리가 찾고 있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대형의 앞쪽에 있던 군인들은 표정을 굳히며 커튼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있는 힘껏 커튼을 걷어 올린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군인들은 탈의실 안쪽에 총구를 겨누며 소리쳤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컥!"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탄성을 울렸다. 탈의실에 있던 인영은 다름 아닌 완 전 나체의 남자들이었던 것이다! "꺄!" 끔찍한 나체남들의 선봉에 서 있던 박재영이 사타구니를 가린 채 몸을 배배 꼬며 가냘픈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에 군인들은 기겁하며 뒷걸음쳤다. 그 중 몇몇은 얼마나 놀랐는지 들 고 있던 총까지 바닥에 떨어뜨린다. 휙 그때 천으로 가려진 테이블 밑에서 새하얀 손이 튀어나와 떨어지는 총을 받 아냈다. 그와 동시에 손은 테이블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군인의 발목을 개머 리판으로 낚아채듯 올려쳐 버린다. "으헉!" 난데없이 자신의 총으로 발목을 걷어 채인 군인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 러졌다. 그런 그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개머리판이 군인의 안면을 날카롭게 끊어 친다.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수정은 그렇게 한 명을 행동불능으로 만들어버리며 즉시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군인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뭐, 뭐야?" 군인들이 동료의 이상을 눈치채기도 전에 수정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 는 총검술을 사용하듯 자유자재로 총을 휘둘러 전방의 군인들을 공격했다. 한 명은 총신으로 목을 얻어맞고 쓰러졌고 다른 한 명은 발등을 개머리판으 로 찍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수정은 그의 배에 앞꿈치차기를 먹여 비명을 잠재우고, 곧장 선풍각으로 관자놀이를 후려 찼다. '역시 한 번에 다섯 명은 벅찬데!' 수정은 호흡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남은 두 명의 군인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녀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상대해야 할 군인은 이 교실에 있는 자들이 전부가 아니니까. 행여나 총성이라도 울려 퍼지는 날 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엇!" 수정의 발이 뒤돌아보려는 군인의 허벅지를 밟아 눌렀다. 형의권의 등각(登 脚)이라는 수법이었다. 그 바람에 군인은 자신의 군장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수정은 그렇게 주저앉은 그를 뛰어넘으며 착지와 동시에 튕겨지듯 상대의 안 면에 뒤차기를 꽂아 넣는다. 네 명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명!' 수정은 개머리판을 남은 한 명의 군인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여기서 예상 밖 의 사태가 발생했다. 지레 겁먹은 군인이 다리에서 힘이 풀려 그만 군장의 무게에 쓰러지고 만 것 이다. 덕분에 수정의 공격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후려쳤고, 군인은 기겁하며 재빨리 그녀에게 총을 겨누었다. "우,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마!" "……!" "총 버려! 어서!" 수정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혀를 찼다. 하필이면 마지막 한 명을 남겨놓 고 이런 실수를! 그녀는 겁먹은 군인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을 올렸다. "진정하세요. 지시에 따를 테니까 흥분하지 말고……." "시끄러! 닥쳐! 닥치고 조용히 햇!" 군인은 흥분했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수정은 이를 악물었다. 제길, 자신이나 조용히 할 것이지. 이러다간 밖에 있 는 군인들이 몰려들 텐데! "뒤돌아 서! 빨리!" 수정은 군인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제야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군인이 쓰러졌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수정은 초조한 표정으로 등 뒤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녀석이 지원군을 부 르기 전에 빨리 제압하지 않으면……! 뎅 그때 뒤에서 종이라도 치는 것처럼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난데없 는 소리에 수정이 뒤돌아보자 거기엔 쓰러진 군인과 조리용 프라이팬을 든 지 연이 있었다. 상황을 보다 못한 그녀가 군인의 뒤로 접근해 머리를 프라이팬으 로 내려친 것이다. "하아 !" 지연은 상대가 기절한 것을 확인하자 힘이 빠지는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대담한 행동에 기가 막힌 수정은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하 선생님?" "에? 아, 아아! 그나저나 저 사람…… 죽지는 않았겠죠?" 지연은 창백해진 표정으로 자신이 쓰러뜨린 군인을 바라보았다. 수정은 그녀 대신 군인의 맥과 상처 부위를 짚어본 뒤 빙긋 미소지었다. "걱정 마세요.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까. 대신 이 사람, 며칠간 머리가 무거 워서 고생하겠는걸요? 뒤통수에 축구공만 한 혹이 났어요." "아니 그러면 죽는 거 아녜요?" "괜찮아요. 괜찮아. 어쨌든 덕분에 살았습니다." 수정은 지연을 일으켜주며 새삼 교실을 둘러보았다. 상황이 끝나자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채영과 시더, 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발밑으로는 거짓말처럼 다섯 명의 군인들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재 영과 학생들은 아직도 수정이 그들을 때려눕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힐 끔힐끔 그녀를 훔쳐보았다. "후우! 이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걸." 수정은 복도 쪽에서 다른 군인들이 다가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지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때요, 도움받길 잘했죠?" "그러게요." 수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쓰러진 군인들을 내려다보았다. 1단계는 성공. 그럼 다음은……. "이제부터가 진짜예요. 모두들 단단히 각오하세요." 수정의 말에 지연 일행은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2 - Ｂy Ｎext Ｎeo =-=-=-=-=-=-=-=-=-=-=-=-=-=-=-=-=-=-=-=-=-=-=-=-=-=-=-=-=-=-=-=-=-=-=-= "C구역이 돌파당했습니다. 5소대와 연락 두절. D구역과 E구역도 위험합니다!" "8소대를 C구역으로 증원시켜! 거기를 빼앗기면 메인 센터까지 뚫려버린다!" 언더 시티의 A구역. 즉, 중심부인 메인 센터 앞에 진지를 구축하던 유한진 소위는 통신병의 보고에 조속히 지시를 내렸다. 그는 어두운 지하도시 사이로 들려오는 총성과 비명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팔라딘대의 전투역량이 한국군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지만 역시 인해전술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지구방위군은 국방부의 특수병력을 모조리 끌고 나왔는지 공세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나마 이곳이 지하라서 다행이지 만약 지상이었다면 대 테러 지역대뿐만 아 니라 고공 지역대와 스쿠버 지역대, 심지어는 기갑사단까지 상대해야 했을지 도 모른다. "8소대, C구역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D구역과 E구역은?" "현재 교전 중입니다!" 한진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적 열세인 팔라딘대가 지구방위군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언더 시티의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비트랩으로 부대의 발목을 붙잡고,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법으로 본대를 뒤흔든다. 단순하지만 적의 수를 줄이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물론 단순한 시간끌기일 뿐이지만.'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시간끌기. 진 사령관이 팔라딘대에 명령한 것 은 최대한 지구방위군의 돌입을 저지하라는 것이었지 섬멸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상태로라면 적어도 반나절은 버틸 수 있다. 그렇게 자신들이 대치 하는 사이에 진 사령관이라면 반드시 활로를 열어줄 것이다. 팔라딘대의 모두 는 그렇게 믿고 전력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 한진은 잠시 긴장을 풀 겸 자신과 함께 대기 중인 부대의 인원들을 살펴보았 다. 지금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평소 요인경호를 주로 하던 시크릿 가드들과 비 정규 전투요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팔라딘대의 저격반과 감시반, 돌입반은 모두 최전방에 투입되었기에 남은 병력들로 최후의 보루인 메인 센터를 지켜 야 했다. 부하들의 용태를 확인하던 한진은 곧 눈에 띄는 한 대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팔라딘대의 유일한 여자대원, 천요원 중사였다. 그녀는 바리케이드에 밀착해서 어두운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중의 총을 힘껏 움켜쥔 손.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분간이 갈 정도로 창백했다. 한진은 요원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 "긴장되나?" "예?" 요원은 잠시 주저하다가 나지막이 답했다. "……예, 이번의 적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까요." 그 말에 한진의 가슴도 무거워졌다. "부대장님, 아니…… 대장님." "부대장으로 충분해. 팔라딘대의 대장은 영구 결번이다." "……예, 부대장님." 요원은 한진을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 대위님이 만약 지금의 상황을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요?" 한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요원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팔라딘대에 입대하기 전에 저는 한국통합군 소속이었습니다. 몬스터의 습격 에 무력한 군이 싫어 피스메이커에 들어온 거예요.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 가지겠죠. 모두들 힘이 되고 싶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사람 들을 구하고 싶어서 피스메이커가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뭐죠? 왜 같은 인간들끼리 총을 겨눠야 하는 건가요? 기껏 몬 스터를 해치웠는데. 정 대위님, 선임들과 동기들,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 면서 지켜낸 평화인데! 그런데 그 평화를 얻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요원의 울분에 찬 외침에 진지에 있던 다른 대원들도 숙연해졌다. 모두들 지 금의 상황에 회의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걸고 싸워왔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들의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도리어 이제는 인류의 적이라는 오명마저 씌우고 숙청하 려 들다니! 이런 것이 고작 우리의 피와 땀에 대한 대가란 말인가? 한진은 울먹이는 요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말이야, 대장님께 그런 질문을 했다가 한 대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예?" 요원은 그의 뜬금없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투정부리지 말라더군. 자기가 힘든 것뿐이면서 괜히 남들을 걸고넘어진다고." "투정…… 이라고요?" 한진은 기억을 더듬으며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때 진우가 했던 말이 어 지간히도 인상 깊었던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한 녀석은 없다. 모두들 자신이 선택한 길에 최선을 다하다 가버린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고 자기 앞가림이 나 잘해라…… 라고. 후후, 선임들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드는 건 바로 나 같은 녀석들 때문이라고 하시더군." "……." 요원은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진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아마 대장님이 지금의 상황을 보셨더라면, 나는 내가 좋을 대로 하다가 갔 으니 너희들은 너희 좋을 대로 하면 되는 거라고…… 분명 그분이라면 그렇 게 말씀하셨을 거다." 한진의 말에 다른 대원들이 킥킥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하긴, 그 대장이라면 그렇게 말하고도 남지." "그런 제멋대로인 대장 밑이니까 부하들도 모두 이렇게 제멋대로인 거잖아." "덕분에 고지식한 우리 부대장님만 고생하셨지." 이 녀석들이……. 한진은 부하들의 너스레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래, 그럼 제멋대로인 대장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도 제멋대로 굴어볼까!" "오우!" 한진의 외침에 대원들이 환호하며 수중의 총을 들어올렸다. 요원도 기운을 차렸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환호에 동조했다. 그런 부하들의 모습에 한진은 속으로 이 자리에 없는 대장에게 감사를 보냈 다. 정진우, 그는 죽어서까지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부대장님!" 그때 통신병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대원들의 환호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C구역과 D구역이 돌파당했습니다! E구역도 위험합니다!" "뭣!" 한진은 안색을 굳히며 통신병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방금 전까지 잘 막아내고 있었잖아!" "그게…… 8소대의 마지막 무전에서 이런 말이……." 상관의 다그침에 통신병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처음 보는 타입의…… 피스 대원들이 나타났다고." "……!" "으아아아앗!" 투타타타타타 C구역의 진지를 지키던 팔라딘 대원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수중의 라이플을 난사했다. 하지만 그들의 총알이 꿰뚫는 것은 적이 남긴 녹색의 잔상뿐이었 다. 적은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빠르기로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를 지나 그들에게 돌진했다. "으!" 코앞까지 다다른 녹색 잔상에 혼비백산한 한 대원이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확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요도에서 정수리까지 일도양단해버린다. 그러자 직각 으로 피가 치솟으며 일대에 붉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 난데없는 참상에 진지의 대원들은 미처 응수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상 대를 응시했다. "후우우우우―!" 대원들 앞에 나타난 적은 녹색의 AI 슈츠를 입은 10대 소년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쏟아지는 피의 비를 맞으며 환희에 겨운 신음을 터뜨린다. 소년의 AI 슈츠는 전신이 흉기였다. 양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곡선을 그리는 칼날이 달려 있고, 발 앞꿈치와 뒤꿈치에도 각각 하나씩, 무릎과 어깨에는 한 쌍의 곡도(曲刀)가 달려 있었다. 방금 전의 참상은 소년의 팔꿈치에 달린 곡도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으, 으으읏!" 대원들은 이를 악물고 소년을 향한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때 소 년은 거짓말처럼 땅바닥으로 꺼지며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원들은 저마다 눈을 의심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어디로 간 거지! 촤촤촤촤촤촤 땅 밑에서 끔찍한 파육음이 터져 나오며 세상이 뒤집어졌다. 소년이 마치 팽 이처럼 땅바닥에 붙은 채 회전하면서 대원들의 발목을 절단하고 지나간 것이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원들은 바닥에 쓰러져서도 한동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파파파팍 소년은 마치 춤을 추듯 쓰러진 대원들 사이를 누비며 발 앞꿈치에 달린 곡도 로 그들의 목을 쳐올렸다. 그러자 수십 개의 피분수가 터져 오르며 소년의 모 습이 짙은 피안개 속으로 사라져간다. "루미네선스 오르토스(Orthus). 그의 패턴 알리자린 사피롤 B는 패턴 그린과 마찬가지로 뇌의 시계주파수를 조절하는 가속 능력이지. 다만 개발기간이 짧았던 탓일까? 원하는 만큼의 속도가 나와주질 않아. 지금 정도면 잘해야 인간의 동체시력을 따돌리는 수준? 뭐, 그것만으로도 위력은 충분하지만 말 이야." 한편 D구역의 진지에서는 수십 개의 불꽃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아, 아아아앗!" "으아아악!" 그 불꽃의 정체는 다름 아닌 팔라딘 대원들이었다. 진지를 지키고 있던 그들 은 갑자기 체내에서부터 새빨간 불꽃을 일으키며 발화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꽃은 주위의 진지를 태우지도 않으며 오직 팔라딘 대원 들만 연소시키고 있었다. 불덩어리가 된 대원들은 아우성을 치며 땅바닥을 굴렀지만 불꽃은 조금도 꺼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덩치를 부풀리며 사정없이 인간을 집어삼 킨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는 광경이었다. "뭐야, 이건? 이건 대체 뭐냐고!" 동료들이 만들어낸 불바다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한 대원은 자신의 머리카 락을 쥐어뜯으며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그는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꽃의 열기로 정신이 혼미해 지는 와중에 필사적으로 앞의 일들을 떠올렸다. 분명 그들은 지구방위군의 특 수부대와 한창 총격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홀연히 두 명의 소년이 나타났고 그리고……. "나 참,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간 언제나 마무리가 허술하다고, 넌." 그때 대원의 앞으로 자줏빛에 가까운 푸른 AI 슈츠를 입은 한 소년이 나타났 다. 그 소년의 핀잔에 불꽃 속에서 또 다른 소년이 걸어 나왔다. 뒤늦게 나타난 그는 앞의 소년과 달리 짙은 붉은색의 AI 슈츠를 입고 있었다. "시끄러. 네 몫이 사라질까봐 일부러 남겨준 거야." "흐, 퍽이나 생각해주네. 그럼 다음부터는 좀 더 많이 남겨달라고. 겨우 한 명이 뭐야? 한 명이!" 붉은 AI 슈츠의 소년이 퉁명스럽게 변명하자 푸른 AI 슈츠의 소년이 코웃음 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팔라딘 대원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런 그들을 번갈 아볼 뿐이다. "Hey, Mr. 잠시 이쪽을 봐주세요." 푸른 AI 슈츠의 소년은 손뼉을 쳐서 팔라딘 대원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리곤 과장되게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퉁긴다. "Say Cheese ?" 콰직 순간 소름끼치는 파쇄음이 울리며 대원의 몸이 쓰러졌다. 전신의 뼈와 장기가 일제히 으스러지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실제로도 그의 전신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내부의 팽창을 이기지 못한 살점이 떨어져 나왔고, 그 살가죽 밑의 근육들도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러자 마치 껍데기만 남은 인형처럼 대원은 힘없이 몸 을 떨다가 숨이 끊어졌다. "루미네선스 키마이라(Chimaera). 그의 패턴 알리자린 레드는 인간의 체내에 서 일어나는 초전도 현상을 자의적으로 증폭시키는 감응 능력. 그 덕분에 용마인 초류향의 데토네이션(Detonation)에 비견되는 인체자연발화(Spontan eous Human Combustion)를 일으킬 수 있지. 대신 초류향과 같은 전방위 폭 굉은 불가능하지만 대 생물전에 한해서만큼은 확실한 효과를 발휘한다. 루미네선스 스킬라(Skylla)의 패턴 알리자린 블루는 키마이라와 반대로 인 체의 초전도 현상을 자의적으로 떨어뜨리는 감응 능력이지. 인체의 초전도 현상을 순간적으로 차단시켜 비활성화된 세포가 포도당을 흡수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혈액 내의 농도를 떨어뜨려 혈관을 얼어붙게 만드는 거야. 몸속 의 물 가운데 65퍼센트 정도가 얼음으로 바뀌는 거지. 굳이 이름을 붙이자 면 응고액체 팽창부피 폭발(Solidification Liquid Expanding Volume Expl osion; SLEVE)이라고 해야 할까?" 쉭 E구역을 지키고 있던 팔라딘 대원들의 미간이 날카로운 섬광에 꿰뚫렸다. 화살이었다. 아켄석으로 만든 화살촉이 갈색의 빛을 흩뿌리며 진지의 대원들 을 차례차례 쓰러뜨리고 있었다. 화살은 정확히 한 발에 한 사람씩의 목숨을 앗아간다. "크!" 그 중 우연찮게 화살을 어깨로 빗겨 맞은 한 대원이 신음을 흘리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화살을 날리는 이는 적갈색의 AI 슈츠를 입은 소년이었다. 그는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기지도 않은 채 대담하게 전방에 서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팔라딘 대원은 이를 악물며 소년에게 라이플을 겨누었다. 화살로 총에 대항하다니!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지.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단 말이냐! 투타타타타 라이플의 총구가 불꽃을 내뿜으며 소년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아니,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 소년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총알은 그의 몸을 통과해 그대로 뒤쪽의 콘크리트에 탄흔만 남겼다. 마치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처럼! "으윽!" 대원은 허깨비 같은 소년의 모습에 얼이 빠져 있다가 소년이 천천히 자신에 게 화살을 겨누자 신음을 흘리며 엄폐물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간발의 차 로 갈색의 화살이 그가 피한 엄폐물에 내리꽂힌다. "헉헉!" 대원은 엄폐물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애써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말도 안 돼. 총알이 몸을 통과하다니. 유령이기라도 한 거냐?' "흡!" 그러나 다음 순간 앞을 본 대원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분명 엄폐물 반대편 에 한참을 떨어져 있어야 할 갈색 AI 슈츠의 소년이 어느새 코앞으로 나타나 화살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아!" 대원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며 엄폐물 좌측에 있는 골목으로 내달렸 다. 그러기가 무섭게 날아든 화살이 그의 종아리를 꿰뚫는다. 대원은 앞으로 거꾸러지면서도 도망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정상적인 사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는! "아……." 그런 대원의 의지는 눈앞에 다시 나타난 소년의 모습에 처참히 꺾여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이곳으로 도망치리란 것을 알고 기다렸던 것처럼 소년은 태연스럽게 골목의 끝에서 활시위를 재고 있었다. "The end." 퍽 소년의 중얼거림과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은 정확히 대원의 미간을 꿰뚫었다. 대원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쓰러진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 명의 갈색 AI 슈츠의 소년들이었다. '처음부터…… 세 명이었던 건가?' 그렇게 대원의 숨이 끊어지자 어둠 속에서 검푸른 빛의 AI 슈츠를 입은 소년 이 나타났다. 그는 발밑에 쓰러진 대원의 시체를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별것도 아닌 녀석이 의외로 성가시게 구네. 그러게 처음부터 곱게 뒈질 것 이지." "I couldn't agree with you any more." 동료의 말에 갈색 AI 슈츠의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는 언 제부터인가 세 명에서 한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갈색 AI 슈츠의 소년은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킥! 뭐, 덕분에 재미있기는 했어. 이렇게 놀려먹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안 그럼 죽이는 것도 지겹다고." "Let's go to master." 갈색 슈츠의 소년이 보채듯이 말하자 푸른 AI 슈츠의 소년은 '예이, 예이.'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두 소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전장에 남은 것은 화살에 꿰뚫린 팔라딘 대원들의 시체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년들이 사라진 후 시체들은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 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갈색의 빛을 흘리는 화살들이 전부였다. "루미네선스 히드라. 그의 패턴 안트라센 브라운은 아켄석과 감응하는 유 일한 안티 오리하르콘 능력이다. 아켄석은 오리하르콘의 셀프 라이팅과는 반대되는 어타러시스(Autolysis; 자가분해)를 일으키는데, 히드라는 이 아 켄석의 기능을 증폭시켜 생물체의 구조를 홑원소물질[單體]로 되돌릴 수 있지. 단지 아켄석에 일정시간 물리접촉을 해야만 이 분해작용을 끌어낼 수 있기에 총보다는 활 같은 원시 비상(飛翔) 무기에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루미네선스 케르베로스(Kerberos)는 이런 히드라의 약점을 보완시켜주는 능력자다. 그의 패턴 안트라센 블루는 상대의 대뇌반구에 암시를 걸어 환 각을 보여줄 수 있는데, 광범위한 최면은 무리지만 적어도 아군의 모습을 세 개로 분열시켜 적들을 혼란시킬 수 있지. 덕분에 히드라는 자신의 위치 를 노출시키지 않고도 마음껏 화살을 날릴 수 있게 되는 거다."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들의 활약을 F구역에서 지켜보던 시폰 뤼멘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연이은 설명에 그람드링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힘겹게 말했다. "몰랐습니다……." "음?" "저와 크리스 외에 다른 아이들이 있을 줄은……." 그람드링의 말에 시폰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후하하! 아까부터 묘하게 풀이 죽어 있다 했더니 그런 이유였느냐? 그래, 미리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했구나. 하긴, 놀랄 만도 하지. 갑자기 여섯 명이나 형제들이 늘어났으니까." 어디 놀랐다 뿐이겠는가? 갑자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여럿 나타났 다고 생각해보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심장이 멎을 정도의 공포에 사로잡혔 을 것이다. 유리보다도 약한 것이 인간의 정체성이건만 그것을 희롱하고도 시폰은 아무 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알려줄 수도 없었던 것이…… 저 아이들은 만들어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거든?" "……!" 그람드링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마스터를 노려보았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후, 너와 크리스처럼 인공자궁을 통해 태아 때부터 키워온 아이들이 아니 라는 거다. 저들은 저렇게 보여도 아직 태어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았지." '레프리컨트(Replicant)!' 말 그대로 복제개체를 체세포 제공자와 똑같은 상태, 똑같은 나이로 성장촉 진(Growth Promoting)시켜 만든 클론! 그람드링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하, 하지만…… 그래서는 정신연령이 육체를 따라가지 못하잖아요? 제대로 말도 못할 텐데? 그런데 어째서 저 녀석들은……." 거기까지 말하던 그람드링은 시폰 옆에 있는 한 아이의 존재를 깨닫고 재빨 리 입을 다물었다. 연두색의 AI 슈츠를 입은 한 소년이 두 눈을 감은 채 그들 을 따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복제된 인간, 그것도 레프리컨트라는 것을 녀석들이 듣는 데서 말 해도 되는 건가? 시폰은 그런 그람드링의 걱정을 눈치챘는지 손을 저으며 미소지었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그람. 이 아이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으니까." 그는 연두색 슈츠를 입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소개가 늦었군. 이 아이의 이름은 루미네선스 라돈(Ladon). 언제나 깨어 있 는 자다. 그의 패턴 알리자린 시아닌 그린은 오르크리스트의 패턴 푸르푸린 에 근접한 원격투시 능력이지." "크리스와 같은?" 그람드링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년, 라돈을 돌아보았다. 라돈은 그의 시선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침묵하고 있 었다. "다만 역시 레프리카라고 해야 할까? 크리스의 원격투시에 비하면 라돈의 능 력은 반쪽짜리에 불과해. 그는 남을 투시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만 하니까. 자아를 유지한 상태로는 능력을 전개할 수 없었던 거야. 결국 능력 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라돈은 사고(思考)를 잃어버렸지. 이번 아이들 중에 는 너와 크리스만한 아이가 없구나." 시폰은 그것이 불만이라는 듯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라돈을 바라보았다. 그런 마스터의 모습에 그람드링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지? 레프리컨트들은 기억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태이 기에 정신연령이 육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저와 크리스도 그 때문에 태아에서부터 시작하신 것 아닙니까?" 그람드링은 시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자조 어린 표정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오라 능력을 일깨우려면 그에 상응하는 과거의 기록, 특히 트라우 마가 필요하니까. 아무리 오라 능력자의 인자를 복제하더라도 그 인자를 각성시키지 못한다면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지." 그 인자를 각성시키기 위해 겪어야 했던 13년간의 기억. 그람드링은 그것을 떠올리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차가운 실험실의 독방에 갇혀 꺼내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던 그와 그의 동생. 개발훈련을 빙자한 수많은 실험과 고문 속에서 수천 번도 더 죽음을 생각했었 다. 이런 지옥 같은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죽으 면 편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나마 자살의 유혹을 이겨냈던 것은 혼자가 아닌 둘이었기 때문이다. 자신 에게 매달려 흐느끼는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르크리스트.' 그가 있었기에, 그가 자신에게 의지해주었기에, 그랬기에 그람드링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심약한 동생을 이끌어주는 지표가 되기 위 해 최선을 다했다. 동생 앞에서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그렇게 간신히 버텨온 13년이었다. "확실히 너와 크리스는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내 기대에 충분히 응해주었어."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하지만 말이야.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해. 단기간에 써먹을 수 있는 자식들이 필요하다고. 그도 그럴 것이, 크리스만 해도 그렇게 정성들여 키 웠건만 잃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니까." 시폰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줄곧 생각한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지. 루미네선스는 '예'의 샘플에 레메게톤의 연구를 더해 육체적인 면에서는 완성되어 있었어. 그렇 다면 문제는 정신의 문제. 내재된 오라 인자를 어떻게 각성시키느냐인데, 나는 그것을 블루 브레인(Blue Brain) 프로젝트로 해결해냈지. 초당 최소 22.8테라플롭스에 달하는 블루진 슈퍼컴퓨터로 가상의 두뇌를 시뮬레이션 하여 지각, 기억력, 의식 등 인간의 인지와 관련된 활동 메커니즘을 인간 에게 다운로드시킨 거야. 쉽게 말해서 레플리컨트의 신경회로(Circuit)에 가상의 기억을 덮어씌웠다고나 할까?" "가상의…… 기억?" "예를 들자면 인체자연발화를 사용하는 키마이라의 경우, 어머니가 자신의 눈앞에서 불꽃에 휘감겨 죽는 기억을 덮어씌웠다. 그것이 그의 트라우마가 되어 오라 인자를 각성하게 된 거야. 임의적으로 오라 능력의 이미지 메이 킹마저 조절할 수 있게 된 거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스킬라는 동사 의 가상체험으로 SLEVE를 유도해냈고, 히드라는 산성약품에 빠진 경험으로 자가분해를, 라돈은 사고로 오감을 잃어버리는 경험으로 원격투시의 열망을 이끌어냈지. 거기에 아이들은 나를 철석같이 아버지로 믿고 있다. ACR을 송 과선에 심지 않아도 강한 충성심을 보이고 있어. 정말이지 여러모로 편리한 방법이야." 그래서 이그나이트라는 건가. 의도적으로 사람의 감정을 타오르게 만들다니. 그람드링은 사람의 기억과 감정마저 우습게 이용하는 마스터의 악독함에 치 를 떨었다. 분명 시폰에게 있어 세상이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써먹을 수 있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마스터!" 그때 전장에서 팔라딘대를 전멸시킨 AI 슈츠의 소년들이 하나 둘 귀환했다. 가장 먼저 달려온 키마이라와 스킬라가 시폰의 품에 뛰어들었고, 그 다음으 로 달려온 오르토스와 히드라, 케르베로스는 그런 형제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스터! 마스터가 말한 대로 한 녀석도 남김없이 해치웠어요!" "별것도 아니더라고요! 알아서 죽어주던걸!" "야! 누가 들으면 너희가 다 죽인 줄 알겠네. 죽인 횟수로만 따져도 나와 히드라가 너희보다 위라고!" "웃기지 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키마이라와 스킬라의 아양이 눈꼴시었는지 케르베로스는 코웃음을 쳤고, 히 드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토스는 살육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는 지 아직도 혼자서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 "라돈에게 물어봐. 쭉 지켜봐온 녀석이라면 어느 쪽이 더 많이 죽였는지 알 걸." "라돈! 우리가 많이 죽였지? 응?" "얼른 가르쳐줘!" 케르베로스의 말에 키마이라와 스킬라가 라돈에게 달려들어 다그쳤다. 라돈은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비록 자아는 없 었지만 그나마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수동적으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있 는 그였다. "뭐야! 말도 안 돼!" "거짓말하지 마!" 키마이라와 스킬라는 억울하다는 듯 항의했고 케르베로스는 킥킥거렸다.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정 분하면 다음번에 좀 더 분발해보든가." "쳇! 우리가 맡았던 쪽의 녀석들이 적었기 때문이야." "전멸시키는 건 우리가 더 빨랐어!"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 시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리고 품에 안긴 키마이라와 스킬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자, 말싸움은 거기까지 하려무나. 너희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누구 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형제끼리는 사이좋게 지내야지?" "예!" 키마이라와 스킬라는 시폰의 손길을 느끼며 홍조 어린 얼굴로 답했다. 그들 의 모습에 케르베로스와 히드라, 오르토스는 저마다 부러움과 시기심을 감추 지 못한다. 그람드링은 그런 이그나이트들을 바라보며 죽은 동생을 떠올렸다. 마스터에 게 칭찬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충성심. 채워지지 않는 애정을 갈구하는 저 눈빛들. 오르크리스트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저들은 시폰 뤼멘에게 길들여진 덩치만 큰 애완견들일 뿐이다. 바보 같은 녀석들! 미련한 녀석들! '어차피 너희도 마찬가지야. 쓰임새가 다하면 너희도 크리스처럼……. 나처 럼…….' 젠장! 그렇게 마음속으로 절망하는 그람드링에게 케르베로스가 다가왔다. 케르베로 스는 침울해져 있는 그람드링의 안색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히죽히죽 웃 으며 말했다. "어이, 잘나신 맏형. 우리에게 활약할 기회를 뺏겼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 고. 지금까지 쭉 수고해왔으니 이제는 쉴 때도 됐잖아? 안 그래?" "……." 그람드링은 담담한 눈으로 케르베로스를 노려보았다. 그 바람에 케르베로스 가 과장되게 뒷걸음치자 그 앞을 히드라가 보호하듯 막아섰다. 케르베로스는 히드라 뒤에 숨어서 키득거렸다. "어이구, 화나셨나봐? 미안해. 미안해.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는 데 그만 깜빡해버렸네. 사과할 테니 용서해달라고. 응? 용서해줄 거지?" 그람드링은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고 무심히 그를 지나쳤다. 그 태도가 신경 을 건드렸는지 케르베로스는 험악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그람드링의 등 뒤 에 대고 말했다. "어이, 혼자서 뤼멘의 성을 가졌다고 특별한 척하지 말라고. 이번 일만 끝나 면 우리도 엄연히 마스터의 아들들이니까. 그렇게 되면 네 녀석이 잘난 체 하는 것도 마지막이야. 알겠어? 더 이상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 그람드링은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지금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케르 베로스에 대한 분노도, 시폰을 향한 증오도 아니었다. 그저 연민일 뿐이다. '크…… 크크, 크크크크.'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가련한 연민. '흐흐흐흐!' 그람드링은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하고 나직이 터뜨렸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3 - Ｂy Ｎext Ｎeo =-=-=-=-=-=-=-=-=-=-=-=-=-=-=-=-=-=-=-=-=-=-=-=-=-=-=-=-=-=-=-=-=-=-=-= "거기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빨리 치우지 못해! 지금 탱크가 들어오지 못 하고 있잖아!" 한성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군인과 의경들을 지휘하던 제4기갑사단 대대 작전 장교 전시홍 소령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지금 운동장에서는 한창 의경들이 민간인들을 통제하면서 학생들이 세운 간 이상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성고에는 50여 개가 넘는 동아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아리 하나하나가 각자 야외에서 상점을 하고 있었으니, 군인들이 치워야 하는 텐트 수만 해도 어마어마할 지경이었다. 그 규모에 일찌감치 질려버린 전 소령은 짜증나는 목소리로 푸념했다. "무슨 놈의 고등학교 축제가 이렇게 거창한 거야? 내 살다살다 학교축제에서 자전거 묘기를 구경하는 건 또 처음이네." 그의 말대로 운동장 한복판에는 자전거부가 마련한 묘기무대가 꾸며져 있었 다. 대리석 묘기 받침대까지 있는 것이 아주 본격적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강당에서는 모 오페라관이 부럽지 않은 연극무대가 꾸며 져 있고, 운동장 한쪽에는 떡하니 콘서트장까지 차려져 있을 정도다. 학생들이 돈이 있어서 저런 걸 준비하지는 않았을 테고, 결국 학교에서 돈을 대줬다는 걸 텐데……. "이 학교의 이사는 돈이 썩어 넘치나?" 그렇습니다. 한성고의 이사는 통일한국의 삼대산맥 중 하나인 대원그룹의 후 계자니까요. 어쨌든 의경과 군인들의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운동장은 어느덧 정리 가 되어갔다. "들어와!" 키리리리리릭 전 소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성고 입구로 FMBT(Future Ma in Battle Tank) 아브라함(Abraham) 두 대가 들어왔다. 재래식 140밀리미터 고체추진제 포가 달린 이 탱크는 현존하는 전차들 중 최고의 화력과 방어력 을 자랑함으로서, 2015년 이래 줄곧 지구방위군의 주력 무기로 채택되어 왔 다. 군인들에 의해 운동장 한쪽에 모여 있던 민간인들은 갑작스런 전차의 등장 에 저마다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전투차량까지 투입 될 정도라면 이번 사태가 단순한 규모의 진압으로 끝날 리 없었던 것이다. 지구방위군은 한성고에서 전쟁이라도 벌일 셈인 건가? '후후, 마음껏 놀라도록 하시지. 좀 더 놀라주지 않으면 이렇게 FMBT를 가져 온 보람이 없다고.' 전 소령은 민간인들의 당황하는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도 이 FMBT를 사용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다만 상부에서 내린 명령이 명령인 만큼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재량껏 방법을 쥐어짜야 했던 것이다. 한성고에 있는 피스메이커를 색출, 검거하라. 그로 인한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생포가 불가능할 시에는 사살해도 좋다.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전 소령의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그 몬스터들을 상대 로 이겨온 피스메이커를 자신들이 무슨 수로 생포할 수 있단 말인가? 사살? 웃기지도 않는 소리. 되레 이쪽이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전 소령은 2029년 86호 몬스터와의 교전에서 패퇴한 기갑사단의 생존자였기 에 누구보다도 몬스터의 무서움과 피스메이커의 대단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렇기에 무력 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구방위군이 피스메이커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최선책이란 과연 무 엇이겠는가? '인질극이지.' 여차하면 민간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피스메이커를 협박할 생각이었다. 만약 피스메이커가 신병을 넘기지 않고 무력항쟁을 펼치면 FMBT 아브라함의 운동 에너지 탄은 민간인들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이는 양심과 도덕상 허용되어서는 안 될 죄악이지만, 차라리 피스메이커에게 괴멸당할 바에는 죄악을 저지르는 편이 낫다. 그만큼 전 소령의 피스메이커에 대한 경각심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진지했 다. 어쩌면 그야말로 현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키릭 키리리릭 아브라함들의 포신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민간인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전 소령은 운동장에 모인 민간인들을 둘러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보이나, 피스메이커? 만약 내 의도를 눈치챘다면 순순히 투항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수백 명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 부디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들지 말자고!' 전 소령은 여유 있는 눈으로 본관에서 군인들의 통제에 따라 나오는 민간인 들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체념한 피스메이커가 저들 사이에 끼어서 나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때마침 본관 3층의 검문도 끝났는지 새로운 인파가 운동장으로 나오기 시작 했다. 그렇게 새로운 인파를 지켜보던 전 /소령은/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거 두려고 했다. 하지만……. '응?' 뭔가 이상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다. 전 소령은 의아함을 느끼며 다시 인파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 이 왜 이상함을 느꼈는지 알아냈다. 민간인들은 아니었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 시민들로 이루어진 집단 속에는 별다른 문제점이 없었다. 문제는 그들을 통솔하는 군인들 쪽에 있었다. 평소 전 소령은 대대 내에 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파악하는 것을 자 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다른 장교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만큼 자신의 부대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눈에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얼굴의 사병들이 보였다. '윽! 저 사람, 아까부터 계속 우릴 쳐다보는데?' '들킨 거 아닐까요?' '설마……. 당황하지 말고 계속 걸어. 지가 어떻게 우릴 알아봐?' '태연한 척. 태연한 척.' 다섯 명의 사병은 전 소령의 시선이 자신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떨리는 가 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괜스레 머리에 맞지 않는 철모를 눌러쓰고 되도록이 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행동이 오히려 더 어색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그들로서는 그것이 최선이 었다. 만약 자신들이 지구방위군의 옷을 훔쳐 입고 이러고 있다는 것이 발각 되기라도 하는 날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설마 총살이라거나 교도소 행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사병들은 점점 전 소령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들키지만 말아라. 제발…….' 제발! "……!" 그런 그들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전 소령은 아무런 제지도 없이 사 병들을 통과시켜주었다. 그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그들을 몇 번 보다가 시선 을 돌릴 뿐이다. 그 모습에 사병들은 소리 없는 환호성을 울렸다. 살았다! 통과했어! "……잠깐." 그러나 기뻐하기가 무색하게 전 소령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그들을 불러 세웠 다. 마음을 놓고 있었던 사병들로서는 날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사병들 중 가장 연장자인 '그녀'가 전 소령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애써 목소리를 굵직하게 만들어 물어보았지만 어딘가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 다. 전 소령은 그런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어디 소속 누구야?" 이런! 그녀는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럴 때를 대비해 전 투복을 뺏어 입은 사병의 개인정보 정도는 외워두었다. 소속과 관등성명을 대 는 것쯤이야 문제없다! "충성! 2중대 3소대 상병 박재우!" "음." 거수경례를 하며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 전 소령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으면서 손짓했다. "됐어. 그만 가봐." 그녀와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 젠장! 하마 터면 간 떨어질 뻔했네. 그러게 왜 갑자기 소속을 묻고 그러는 거야! 어쨌든 이번에야말로 안심해도 되는 거겠지?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놀란 일행들을 다독거리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 다. 일단 가장 어려운 관문은 통과했으니 이제부터는 기회를 봐서 입구로 빠 져나가기만 하면……. 철컥 그때 날카로운 격철소리가 그녀와 일행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바쁘게 앞 길을 모색하던 사고(思考)가 수십 개의 총구 앞에서 정지해버린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녀와 일행의 주위로는 수십 명의 군인들이 원을 그린 채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총을 바닥에 버려라!" "양손 올려! 움직이면 쏜다!" 군인들의 두서없는 경고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왜 갑자기 이렇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로군."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와 일행에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소령이었다. 그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군인들의 뒤에서 그들을 응 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그녀는 곧 자신들이 그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들켰군. 잘 속여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들키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거지. 흔히들 2021년 지구 방위군 창립 이 후의 군 관련 문외한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인데, 우리는 지구방위군 연합 에 소속된 한국통합군이지. 이렇게 지구방위군으로서 활동할 때는 한국통합 군 소속은 사용하지 않는다네. 다음부터는 유의해두라고." "젠장." 그녀는 이를 갈며 자신에게 보고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한 여인을 원망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만 대답하면 된다고 했으면서! 얘기가 다르잖아! 전 소령은 일행의 인원수를 파악한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흠, 제보대로라면. 민수정, 시더 웰리스, 윤채영, 성마리, 이유리. 이렇게 다섯 명이 전부인가? 하하, 설마 이렇게 손쉽게 체포할 줄이야. 꿈에도 몰 랐군. 아니, 스스로 나와줄 줄 몰랐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하!" 이래서야 모처럼 FMBT를 준비한 것도 헛수고가 되어버렸군. 내가 너무 과대 평가했던 거야. 전 소령은 통신병으로 하여금 본관을 검문 중인 나머지 병력들에게 귀환명령 을 내렸다. 피스메이커의 잔당들을 발견한 이상 최대한 그들의 구류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편이 좋았던 것이다. 피스메이커 놈들은 잡았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FMBT의 포신을 거두는 것 도 아직은 금물이다. 전 소령은 총을 버리고 군인들의 지시에 따르는 그녀와 일행들을 향해 경고 했다. "섣불리 반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애꿎은 사람들까지 다치게 될지 모르니까."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항한다고 그러는 거야?" 그녀가 말도 안 된다며 투덜거렸지만 전 소령은 가볍게 코웃음쳤다. 방심시 켰다가 뒤통수치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라. 특별히 너희들을 위해 준비한 물건 이 있으니까." 본관을 검문하던 군인들이 곧 포위진에 합류했다. 전 소령은 그제야 한결 마 음이 놓이는지 부하가 건네준 가방에서 일련의 수갑을 꺼내 그녀와 일행에게 던져주었다. "한때 자네들의 동료였던 시폰 뤼멘, 그가 우리에게 보내준 구속구다. 오라 능력이라고 했던가? 자네들이 자랑하는 그 힘을 무력화시켜주는 물건이지. 아마 나보다는 자네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알 거 같으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발밑에 떨어진 수갑을 집어들었다. 그 움직임에 따 라 그녀를 겨누던 총구들이 천천히 위아래로 따라 움직인다. 그녀와 일행들은 체념한 듯 저마다 수갑을 자신의 손에 채웠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전 소령은 영문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피스메이 커 일행의 태도가 수상쩍어서? 왠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가만…….' 전 소령은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들이 제보받은 한성고의 피스메 이커는 총 다섯 명. 그리고 그 다섯 명은 전부……. '여자였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눈앞의 일행은 전 소령 자신과 말다툼을 벌이는 여자 를 제외하고는 전부 체격이 건장했다. 건장한 남자들처럼 보인다. '……설마!' 우우우우웅 그때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사나운 엔진음! 소리가 들려온 곳은 한성고 본관 뒤편이었다. 주차장 쪽이다! 부아아아앙 순간 거친 작렬음과 함께 한 대의 검은 스포츠카가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 다. 최고출력 542마력을 자랑하는 V6 3.5리터 트윈 터보엔진! 마치 황량한 사막을 거침없이 누비는 검은 표범과도 같은 그 자태에 사람들 은 이 차에 재규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로 작년 10월에 대파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관심 어린 애정과 노력으 로 되살아난 슈퍼카, 수정의 애차인 재규어 RX78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쪽은!" 전 소령은 이를 악물고 자신들이 포위한 일행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거칠게 일행이 쓰고 있던 철모를 벗겨버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그들의 수배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얼굴의 여 자와 네 명의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2학년 1반 담임 하지연과 박재 영을 비롯해 남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수정 일행 대신 전투복을 걸쳐 입고 지구방위군의 주의를 돌리기 위 해 자진해서 미끼가 되었던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미끼가 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지연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재규어를 쏘아보았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그녀 일행은 무사히 교문을 빠져나가 피스메이커가 거 리로 도망쳤다며 소동을 일으키고, 그 틈에 수정 일행은 학교를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연의 계획이 어설퍼 보였던 수정은 일부러 보고방법을 다 르게 가르쳐줌으로써 지연 일행이 조기에 발각되도록 손을 써놓았던 모양이다. 지연은 말도 없이 계획을 수정한 수정에게 화가 났지만, 이내 그녀가 자신들 을 배려했기에 그랬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풀었다. 만약 애초에 자신의 계획대로 밀어붙였더라면 일행의 위험부담은 더욱 커졌 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교를 빠져나간다고 쳐도 그 뒤에 어떻게 지구방위군의 주의를 돌렸겠는가? 괜히 어설프게 날뛰었다가는 도리어 그녀와 학생들만 다쳤을지도 모른다. 그 럴 바에는 차라리 일찌감치 사로잡히는 편이 나았다고 볼 수 있었다. "제길! 발포해! 저 검은 차를 당장 멈춰 세워!" 전 소령의 외침에 지연 일행을 겨누던 총구들이 재규어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지연과 재영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자식들, 지금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쏘지 맛!" 투타타타타 그러나 뒤를 잇는 건 귀청이 떨어져나갈 듯한 무시무시한 총성의 아우성들이 었다. 직접 총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던 지연 일행은 기겁하며 귀부터 틀어막 았고, 다른 민간인들도 비명을 내질렀다. 타타타타타 '안 돼! 그만둬!' 지연은 귀의 고통에 눈물이 맺힌 눈으로 재규어를 바라보았다. 재규어는 희 뿌연 탄막이 쳐진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수백 발의 총알을 얻어맞았을 게 분명한 차체는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심 지어는 차의 유리창조차 새하얀 금이 갔을 뿐, 조금도 부서지지는 않았다. "방탄차인가!" 영화에서나 본 방탄차체의 위력에 지연 일행은 탄성을 터뜨렸다. 전 소령은 이를 갈며 부하들에게 발포를 멈추게 했다. "어차피 학교의 모든 출구는 의경의 기동대 버스가 막고 있어! 녀석들은 독 안에 든 쥐야!" 부르르르릉 그러나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한성고 입구를 막고 있던 기동대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운동장에 있던 의경들 또한 철수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경들의 이탈에 어이가 없어진 전 소령은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한 의 경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왜 허락도 없이 철수하는 거야? 왜!" "그, 그게 갑자기 철수명령이 내려져서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빌어먹을!" 전 소령은 붙잡은 의경을 땅바닥에 팽개치고 발을 동동 굴렸다. 한편 그런 운동장의 상황을 양호실에서 지켜보고 있는 두 남녀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2학년 1반의 부담임 제갈영 교생과 박미정 양호교사였다. 하지만 그 실상은 이 한성고의 이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대한그룹의 차기 후 계자와 그 사촌누이. "누님의 부탁대로 서울경찰청장에게 한성고의 의경들을 철수시키라고 했습니 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호호. 수고하셨어요, 동생님." 제갈영의 말에 미정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제갈영은 그런 사촌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푸념했다. "아무리 저라도 경찰청장에게 압력을 넣는 짓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습 니다. 만약 부탁한 사람이 누님만 아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예요." "흐응, 왜 어울리지도 않게 약한 모습을 보이시나. 이런 일에 쩔쩔매서야 대 원그룹의 후계자 자격이 있겠어?" "나 참, 그나저나 왜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신 겁니까? 누님답지 않게?" 제갈영의 질문에 미정은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 하지연 선생님의 부탁인걸. 자기 제자를 위해서 라면 간도 쓸개도 다 빼줄 사람인데 내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무모한 행동을 도맡아 했을거야." "으음, 확실히 제 모교의 은사님이 위험해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죠." 제갈영은 못마땅해 하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연은 그런 동생의 모습에 빙긋 미소지으며 다시 운동장의 전경을 돌아보았 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의 축제를 이대로 망쳐버릴 수도 없고 말이야?" "당연한 말씀을." "어차피 내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네가 먼저 손을 쓰려고 했지?" "……자꾸 당연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제갈영은 코웃음을 치며 미정의 말을 끊어버렸다. 역시 그들 오누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한성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투앙! 그때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폭음이 울리며 한성고의 입구 쪽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운동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FMBT 아브라함 중 한 대가 발사한 고체추진제 포 였다. 초속 2천2백 미터의 관통형 운동에너지탄이 한성고 입구를 단박에 박살 내버린 것! 그 바람에 입구로 돌진하던 재규어 RX78은 하마터면 폭발에 휘말릴 뻔했지만, 그전에 신기에 가까운 360도 리버스 턴으로 차체를 빼낼 수 있었다. 그렇게 재규어의 탈출이 저지되자 전 소령은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하하하하! 내가 뭐라고 했어? 독 안에 든 쥐라고 했잖아!"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아브라함에게 고체추진제 포의 발사를 명령했다. 목 표는 피스메이커 연놈들이 타고 있는 저 검은 스포츠카! "생포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그대로 날려버려 주지!" 앞의 발포에 넋이 나가 있던 지연과 재영은 전 소령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채 그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군인들의 제지로 발목을 붙잡힌다. 전 소령은 포탄의 위력에 도취되었는지 주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 신 소리를 질렀다. "2발 장전! 발사!" 아브라함의 포신이 멈추어 선 재규어를 조준했다. 그리고 제2탄을 날리려는 찰나! 쉬잉 날카로운 붉은색의 섬광이 포신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발사된 M8 29E3탄은 원래의 목표인 재규어를 잃어버리고 엉뚱하게 운동장 한복판을 두드 린다. 콰아아앙 지축이 뒤흔들리며 폭음이 사람들의 비명과 한데 어우러졌다. 오발로 발을 헛디딘 전 소령은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냐!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 거야! 부르르르릉 그런 그의 앞으로는 한 대의 오토바이가 서 있었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 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그 위의 탑승자들이었다. 선명한 주황빛의 AI 슈츠를 입은 남자와 붉은 AI 슈츠를 입은 여자! 바로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와 피스 레드 성마리였다. 옥상에서 상 황을 지켜보던 그들은 수정의 연락에 발맞춰 제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FMBT의 포신을 절단한 것은 당연히 마리가 들고 있던 오라 소드의 반물질 절 삭성 커터였다. "너, 너희들은……!" 전 소령은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코마히코와 마리를 가리켰다. 그는 예전에도 이런 복장을 한 피스메이커의 에이전트를 목격한 적이 있었다. 86호 몬스터와의 교전에서 전멸당할 뻔한 그의 부대를 구해준 노란색 AI 슈츠 를 입은 여성대원! 분명 피스메이커의 증축이자 유일하게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그들을 상부 에서는 다음과 같이 칭하고 있었다. "피스…… 대원!" 전 소령의 경악에 찬 외침이 신호가 되어 멈추어 섰던 재규어와 오토바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규어 RX78은 운동장까지 돌아 나온다 싶더니 그대 로 핸드브레이크를 잡아 180도 턴을 하면서 다시 입구를 마주한다. 그 모습에 운동장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시 돌파할 셈인가? '저 무너진 입구를?' 포탄에 얻어맞은 한성고 입구는 절반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그나마 아브라 함의 운동에너지탄이 관통형 탄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폭발형 탄이었다면 입 구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절반만 무너졌다 해도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토바이라면 모 를까 자동차가 지나가기엔 터무니없이 입구의 너비가 좁았다. 부아아아앙 사람들의 우려와 기대를 뒤로하고 재규어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동시에 코마 히코와 마리가 탄 오토바이도 남은 한 대의 아브라함을 향해 쏘아져나간다. 막 아브라함에 발포명령을 내리려던 전 소령은 오타바이가 포신의 정면으로 돌진해오자 당황하며 소리쳤다. "바, 발사!" 서겅 채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날카로운 단절음이 먼저 아브라함을 갈랐다. 오 토바이가 전차의 곁을 스쳐지나가면서 코마히코의 뒤에 타고 있던 마리가 오 라 소드의 검신을 한계길이까지 늘어뜨려 그대로 아브라함을 세로로 이등분시 킨 것이다. 무영신풍류(無影神風流) 육식(六式), 활강(滑降)! 쿠구구구구 고체추진제포가 달린 전차의 선회 포탑이 굉음을 울리며 서서히 동체에서 미 끄러져 내렸다. 그리고 이내 지면을 울리는 둔탁음. 포탑이 떨어져나간 아브라함의 동체에서는 새하얀 표정으로 질린 운전병과 포 병이 고개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칼로 탱크를 가르다니……. 저런 일이 가능하기는 하단 말인가? 터어어어엉 그러나 놀랄 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도양단된 탱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람들은 입구에서 들려온 쇳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는 막 또 하나의 신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전거부의 묘기 받침대였다. 앞에서 지구방위군이 치우려다 포기한 대리석 으로 만든 받침대. 그 받침대로 돌진한 재규어가 그대로 우측의 두 바퀴를 들어 올려 좌측 바퀴 로만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투 휠스 드라이브(Two-Wheels Drive)라고 하는 이것은 흔히 영화에서 카 스 턴트맨들이 선보이는 고난이도 묘기였다.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 중심을 잡아내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지만, 그 와중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유지하기란 보통의 평형감각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재규어는 그 흉내도 낼 수 없는 일로 차체를 세로로 일으켜 세워 용케도 중 심을 잃지 않고 무너진 입구를 통과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감탄할 겨를도 없 이 뒤이어 코마히코와 마리의 오토바이도 입구를 빠져나간다. "……." 그렇게 재규어와 오토바이가 한성고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의 사람들 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앞에서 연달아 펼쳐진 신기의 여운이 사라지 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가장 길길이 날뛸 거라고 생각했던 전 소령조차 넋이 나간 채 명령 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뇌리 속으로는 2029년의 악몽이 지금의 상황과 오버랩되고 있었다. "야…… 방금 그거 뭐였냐?" "대체 뭐가 지나간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침묵이 깨지며 사람들이 하나 둘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들은 이윽고 작은 웅성거림으로 변했고, 이내 한성고의 운동장이 떠들썩해질 정도로 혼잡해졌다. 멍하니 입구 쪽을 바라보던 지연과 재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 러보았다. "사람 맞지? 사람이었던 거지?" "으아! 전차가 잘리질 않나, 총을 맞아도 멀쩡하질 않지 않나." "괴물이네, 괴물." "사람이 아냐!" 질린 표정으로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의 반응에 지연과 재영은 마음이 무거워 졌다. 역시 어쩔 수가 없는 걸까? 자신들과 다른 존재에 대한 공포는, 그래서 결국 은 외면하게 되는……. '괴물이란 말은 다른 걸 뜻하는 게 아냐! 자신들과는 다르다! 우리와 넌 다 르다!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표현한 이기적인 말에 불과해!' 결국 그때의 그 말대로란 말인가? 우리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이대로 계속 시기하며 질투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단 말인가? "……캡이다." 그때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연과 재영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전의 그건? "죽인다! 작살이야!" "내 몸에 소름 돋은 거 봐! 아직까지 몸이 떨려!" "진짜 멋졌어! 최고다!"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방금 전의 상황을 화제로 삼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뜻밖의 반응에 지연과 재영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분위기는 뭐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바보! 그러니까 더 굉장한 거지! 저런 건 태어나서 처음 봤어!" "사람이든 괴물이든 대단한 건 대단한 거야!" "대단한 괴물이라고!" 사람들은 스스로의 격앙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었다. 저마다 신이 나서 어떻게든 서로의 감상을 나누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이 사람들……. "선생님!" 재영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발끝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떨림. 이것을 전율이라고 해야 할까,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사람들은 방금 전의 상황을 축제의 피날레 정도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토록 꾸밈없이 기뻐하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일 테지. 이상(異常)을 즐길 수 있는 거야. '하지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들이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지연은 너무나 기 뻤다.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만약 지금 눈앞에 카이 브릿드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었다. 우리는 네 녀석의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고. 이기적이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 하지는 않는다고!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네가 말한 것은 틀렸어, 라고! '유가인.' 지연은 이 자리에 없는 자신의 제자를 떠올렸다. 재영 역시 자신의 죽마고우 를 떠올린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힘껏 잡고 수정 일행이 떠나간 입구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모두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기를. 모두가……. '평화로워 질 수 있기를.'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4 - Ｂy Ｎext Ｎeo =-=-=-=-=-=-=-=-=-=-=-=-=-=-=-=-=-=-=-=-=-=-=-=-=-=-=-=-=-=-=-=-=-=-=-= 각 부대는, "각 부대는……." 모두, "모두……." 메인 센터로 향하도록. "메인 센터로 향하도록……." 에르체베트가 입술을 달싹이자 하 소령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녀의 말 을 따라했다. 그렇게 사이코포모스로 대신 부대에 명령을 내리던 에르체베트는 흥미로운 눈으로 적외선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장의 특임대 대원들이 보내오는 영상에는 한창 유레카의 메인 센터가 나 타나고 있었다. 슬슬 지구방위군의 공세에 팔라딘대의 방어가 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방금 전까지 해도 언더 시티의 외곽지역에서 조금도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 이었건만. "역시 시폰 뤼멘. 주인님이 직접 고른 비즈니스 파트너답군." 에르체베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시폰 뤼멘과 그의 아이들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대번에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언더 시티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지구방위군을 농락하던 팔라딘대가 무력하게 전멸 당하고 있었다.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라." 영상으로 보이는 일련의 AI 슈츠 소년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낮게 탄식했다. 단순히 성당기사단의 배신자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었는데 설마 저 정도로 지 독한 인간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폰 뤼멘. 성당기사단의 12세라핌들 중 열 번째의 검을 수여받은 아포스트 롤로스 타데오. 그런 그가 네이 안데르슨과 손을 잡게 된 것은 그리 뜻밖의 일이 아니다. 피스메이커 미국지부의 사령관이었던 그가 미국정계에 심어진 네이 안데르슨 의 혈족들과 만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서로가 같은 목표를 가진 이 상 대립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피스메이커의 타도.' 네이의 경우 정확하게는 피스메이커의 배후에 있는 성당기사단이 목표였고, 시폰은 피스메이커의 우두머리인 진 사령관이 목표였다. 시폰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진 사령관을 증오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 도 그와 협력해서 네이 안데르슨이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시폰은 케루빔의 과학력과 피스메이커의 기밀사항을 네이에게 건네 주는 귀중한 정보책이었다. 때문에 네이는 다른 협력자인 한시영에게 AI 컴플 리트 세트와 오리하르콘 관련 장비들을 공급해줄 수 있었고, 무인위성 위그드 라실을 해킹하여 피스메이커의 정보를 빼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에르체베트는 손톱을 깨물며 영상에 비친 시폰을 노려보았다. 언제나 주인의 신상을 걱정하는 그녀로서는 저런 위험한 남자가 주인 곁에 머무르는 것을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었다. 피스 블랙 한시영도 그렇고……. 어째서 자신의 주인은 매번 정체불명의 인간들만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는 걸 까? '미스터 한은 그 목적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지 않아. 아마도 기가스 티폰을 이용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면 시폰 뤼멘은? '그는 목적을 떠나서 그 존재 자체가 위험해.' 그가 입수한 레메게톤은 노아가 판게아에서 추방되기 전에 남긴 비술이었다. 바나베인의 양산을 목적으로 개발된 유전변이 기술. 그 증거로 네크로맨서 카이 브릿드가 부리는 라무의 아이들, 네크로 크리쳐 들은 모두 이 레메게톤의 72개체 타입을 띠고 있었다. 노아가 테라 인코그니 트로 가서 레메게톤에 여러 가지 개량을 가했겠지만, 실제로 연구는 추방 전 에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폰 뤼멘은 이 기술을 완전히 해독하여 바나베인 능력자를 현세에 양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또 한 차례의 개량을 가했는데 ……. '바로 오라 능력자의 복제.' 오라 능력자의 유전자로 복제인간을 만든 후 거기에 레메게톤의 바나베인을 가미하여 오라와 바나베인 두 개체 능력을 전부 가진 새로운 혼혈종을 만든 것. '그것이 바로 루미네선스!' 그람드링과 오르크리르스트를 비롯한 레드 브라더스였던 것이다.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들은 양산이라는 초기의 목적에 더욱 걸맞은 최종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아와 테라, 양쪽을 적으로 두신 주인님에게 있어 양쪽의 힘을 모두 가진 시폰 뤼멘이야 말로 절대악.' 에르체베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차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시폰 뤼멘과 지 구방위군의 특임대가 향하고 있을 메인 센터를 돌아보았다. 붉게 물든 적외선 시야 사이로 언더 시티의 중앙에 유독 길게 솟아 있는 검 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렇게 방향을 잡은 에르체베트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아직 한시영 그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최후에 웃는 건 나의 주인님이 되실 테니까.' 피스 블랙과 그의 수하들, 시폰 뤼멘과 루미네선스, "이번 기회에 모두 없애주겠어." 불완전한 협력관계는 여기까지다! 콰아아아앙 메인 센터의 입구 주변에 설치해둔 인력 식 부비트랩이 일제히 폭발했다. 메 인 센터의 통로에서 엄폐물로 몸을 가린 한진과 팔라딘 대원들은 폭발이 지나 가기가 무섭게 곧바로 라이플을 들어 사격에 들어갔다. "Fire!" 투타타타타 연막 사이로 수십 발의 총알이 빗발치며 침입자들을 쓰러뜨린다. 연막이 걷 혀나간 뒤 검은 베레모와 얼룩무늬 전투복을 착용한 특임대 대원들의 시신이 보였다. 한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설마 방어선이 여기까지 뚫려버릴 줄이야! '우리 외에 다른 부대는 모두 전멸한 건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침점호 때만 해도 다 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밤이 되면 '오늘도 별일 없었지?'하며 안도 반 웃음 반으로 서로를 반겨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설마 몬스터도 아닌 인간들과 싸우게 될 줄은……! 휙 그때 팔라딘대가 있는 통로 쪽으로 검은 뭔가가 날아들었다. 폭탄이다! 그것을 보자마자 한진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피햇!" 콰아아아앙 뒤늦게 몸을 날린 대원들이 폭발에 휘말려 육편을 흩뿌렸다. 그런 처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한진과 대원들은 충격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다. 입구 쪽에서 다시 지구방위군의 진입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진은 남은 대원들을 추슬러 통로 안쪽으로 후퇴했다. 그리곤 중앙복도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다. "여기서 적의 발목을 붙잡는다. 절대로 녀석들을 위로 올려 보내면 안 돼!" "작전본부실 쪽에서는 엘리베이터를 멈출 수 없을 겁니다. 우리 쪽에서 폭 파시킬까요?" 부하의 질문에 한진은 홀 입구로 대원들을 배치시키며 말했다. "메인 센터의 엘리베이터가 끊기면 사령관님이 메디컬 센터와 연결된 자동 승강로로 탈출하실 수밖에 없어. 일단 사령관님을 탈출시킬 사람이 필요 한데……." 그 말에 대원들이 움직임을 멈추며 한진을 주목했다. 한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그는 이 사지에서 진 사령관을 피신시킬 대 원을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많은 수를 뽑을 수는 없었다. 이곳의 병력과 임무를 생각한다면 단 한 명. 그리고 마침 적임자가 한 사람 있기는 했다. "……저는 죽어도 가지 않을 겁니다." 홀의 벽에 기대어 라이플을 손보고 있던 요원이 한진의 시선을 외면하며 단 호하게 말했다. 그 고집스러운 모습에 한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싸움할 생각은 없다. 지금 이 인원에서 요인경호를 맡은 경험이 있는 사 람은 너뿐이다." "여기에 시크릿 가드였던 사람은 장 상사님과 변 상사님도 있습니다! 왜 하 필 접니까? 제가 여자니 뭐니 해서 그러시는 거라면……." "바보 같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듣다 못한 한진이 버럭 소리지르며 요원의 말을 끊었다. "넌 피스 대원의 SG로서 수차례의 위험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다. 무엇보다 몬스터와 두 번이나 교전해서 살아남은 것은 너 혼자뿐이지. 난 너의 그 뛰 어난 생존능력을 고려해 지금의 임무를 부여하는 거란 말이다!" "……." 요원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유한진 부대장이 임무를 내린 것은 말 그대로 자신이 적격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어 명령을 거부하려 했던 것은 동 료들과 헤어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저도 남으면…… 안 되겠습니까? 혼자 가는 것은 죽어도 싫습니다. 더 이상 혼자 살아남는 것은……." 요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한진은 그런 그녀를 다독여주며 미소했다. "멋대로 우리를 죽이지 마라. 우리가 그렇게 쉽게 죽어줄 것 같으냐?" "하지만……." 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위의 부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 주목해봐! 우리 천 중사가 이렇게 말하는군! 자신이 갔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전원이 살아 있을 경우 다음 회식 때는 반드시 치마를 입고 나오겠 다고!" "오오!" "부대장, 멋쟁이!" "역시 남자다!" "반드시 살아남아주지!" 대원들이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환호하자 요원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외쳤 다. "아니! 누가 그런 약속을 한다고 했습니까!" "뭐야, 자신 없어?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까봐 걱정돼?" "그런 건 아니지만……." 요원은 못 말린다는 듯 혀를 찼다. 정말이지 이 사람들은……. 정말……. "알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얼마든지 입어주겠습니다." 요원은 눈물을 닦으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러니……." 닦아내기가 무색하게 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녀는 쓰러지듯 한진의 가슴 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그러니 살아주세요. 반드시, 반드시 모두들…… 살아주세요. 살아주세요." "아아, 반드시 살아주지." 한진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를 힘껏 안아주었다. 대원들은 저마다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그들은 재회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요원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한진과 대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다 가 마지막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한진과 대원들도 정중하게 경례를 받아주었 다. "피스!" 그리고 이별. 한진과 대원들은 요원이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럽게 울고 있을 거란 사실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큰해지는 코를 문지르며 장난 기 서린 목소리로 한진에게 말했다. "에이, 부대장 약았어요. 이런 기회를 틈타서 내기에서 이기다니." "아아, 이번 달 월급은 모두 부대장 차지인가? 부자 되시겠네." 팔라딘대에서 요원에게 먼저 치마를 입히는 대원에게 그 달의 월급을 몰아주 는 내기가 성행한다는 풍문은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한진은 대원들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내기에서 이긴 건 아니라고. 그러니 다들 살아남아서 나 좀 부자 되게 만들어 줘봐. 알겠나?" "아아, 이래서야 앞의 눈물 어린 이별이 의미가 없잖아." "부대장, 절대로 천국에는 못 갈 거야." "예쁜이가 돌아오면 다 일러바쳐야지." "자자, 얼른 얼른 움직여! 엘리베이터에 폭약 설치하고 비상계단으로 올라가! 어서!" 한진은 대원들의 등을 떠밀며 홀의 입구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밖이 이상할 정도로 너무 조용했다. 분명 지금쯤이면 돌입하고도 남아야 될 시간인데……. 한진은 엘리베이터에 C4의 설치가 끝나자 대원들을 비상계단으로 철수시킨 다 음 그 중 한 명에게 홀 밖의 동태를 살피도록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대원은 소리 없이 입구의 벽에 붙어 밖의 사각지대에 핸드 미러(Hand Mirror)를 내밀 었다. 한진은 C4를 설치한 대원에게서 기폭 장치를 건네받으며 비상계단으로 향하 려고 했다. "부, 부대장님!" "……!" 그때 정황을 살피던 대원의 비명이 일행의 발목을 붙잡았다. 한진은 영문을 몰라 입구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의 대 원이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밖에…… 밖에 지구방위군이 전부……." "뭐?" "전부…… 죽어……." 쉭 그러나 대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녹색의 기운을 띤 곡도 하나가 그의 목 한가운데로 삐져나온 것이다. 그 모습에 한진과 대원들은 반사적으로 라이플을 입구에 겨누었다. "제길! Commence Fire!" 한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원들의 총구가 불을 내뿜었다. 하지만 대원을 죽인 정체불명의 적은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사격범위에서 몸 을 피해냈다. 녹색의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적의 모습에 한진은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을 멈추고 말았다. 저 모습은! '……진우 대장님?' 하지만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으니. 촤촤촤촤촤 이런 바보…… 같은! 소름끼치는 파육음! 그와 동시에 한진의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고통에 뇌가 시각을 비롯한 오감을 차단시킨 것이다. 그리고 회복되는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 질펀한 액체에 몸을 눕히고 있는 자신의 상태였다. 모든 것이 붕 떠 있는 것 만 같은 부유감. 아늑해져가는 정신.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너무나 냉철하게 돌아가는 사고. 한진은 힘겹게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있던 부하들은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되어 있 었다. 팔다리가 떨어져나가고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는. 너무도 지독한 피비 린내에 후각이 마비되었는지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그런 부하들의 토막 난 시체더미들 위에 한진은 누워 있었다. 그의 몸 상태도 그리 성한 것은 아니었다. 두 다리가 허벅지 밑으로 잘려나 가 있었고, 라이플을 든 오른손도 사라져 있었다. 그나마 쇼크사로 즉사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하아. 하아.' 사지가 떨어져나간 육신을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고통이 눈 물샘을 자극했는지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자신 의 숨소리만이 시끄럽게 머리 속을 가득 채운다. '대장…….' 한진은 자신과 부하들의 시체로 다가오는 한 녹색 AI 슈츠 소년의 모습에 힘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이내 실소했다. 눈앞의 소년은 그의 대장 정진우가 아니었다. 전혀 다 른 사람, 다른 능력자였던 것이다. '하, 하하. 나라는 녀석은 정말이지…….' 한진은 예전에 자신이 팔라딘대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진우가 한 말을 떠올리며 킥킥거렸다. 분명히 그때 그는……. '유한진 소위, 실수를 하는 건 좋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는 대장 은 되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대장님. 역시 저에게 대장이라는 직위는 어울리지 않나 봐 요.' 무엇보다 저의 대장님은 당신 한 분뿐이기에……. 오직……. "후우. 후우, 후우우우." 녹색의 AI 슈츠 소년은 한진 일행의 시체를 둘러보며 황홀하게 호흡하다가 곧 의아함을 느꼈다. 다 죽어가는 주제에도 웃고 있는 한 팔라딘대원이 있었 던 것이다. 소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진의 코앞까지 얼굴을 내려 살펴보았다. 한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씨익 미소지었다. '미안, 천 중사.' 약속…… 지키고 싶었는데. 삑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왼손으로 들고 있던 기폭 장치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엘리베이터에 장치된 C4의 뇌관으로 전기가 흘러 들어간다. "아아, 내 이럴 줄 알았어!" 패턴 안트라센 블루의 오라 능력자 케르베로스는 폭파된 1층 홀을 둘러보다 혀를 찼다. 아무래도 도망치던 적들은 메인 센터의 엘리베이터를 봉쇄시키기 위해 폭탄 을 사용했던 모양이다. 그 폭탄이 터지면서 그의 형제 중 하나가 폭발에 말려 들고 말았다. 형제의 이름은 오르토스. 패턴 알리자린 사피롤 B의 가속 능력자. 그는 폭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미처 오라 쉴드를 전개하지도 못하고 폭발에 전신이 부서져 있었다. 그나마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는 것도 순전히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AI 슈츠의 내구성 덕분이었다. "평소 물불 가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언젠가는 큰코다칠 줄 알았지." "으아! 오르토스, 진짜 죽는 거야?" "바보 같아." 케르베로스 뒤로 다가온 키마이라와 스킬라가 호들갑을 떨며 시커멓게 탄 오 르토스를 내려다보았다. 오르토스의 AI 슈츠는 점점 녹색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차츰 죽어가고 있 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히드라가 자신의 갑주에서 포션을 꺼내 그에게 주사하려 했지만 케르베로스가 제지했다. "그만둬. 어차피 지금 주사해도 살기는 글렀어. PET 치료라도 받지 않는 한 소생은 불가능해. 그냥 죽게 내버려둬." "그래도 내버려두는 건 너무한데?" "흥, 자업자득이야. 그러게 누가 제멋대로 굴래?" 케르베로스의 말에 키마이라와 스킬라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곧 그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있어 형제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적어진 수만큼 양아버 지의 사랑을 더욱 독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스터, 오르토스가 죽어버렸어요." 홀 입구로 시폰 뤼멘과 그람드링, 라돈이 들어오자 키마이라가 쪼르르 달려 가 안기며 보고했다. 그에 질세라 스킬라도 시폰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살리려고 해봤는데 너무 늦었어요!" "아아, 그래. 그거 참 안타깝구나." 스킬라의 등을 두드리며 시폰은 가볍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 표정에서는 조금도 슬픔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차피 그에 게 있어 찍어내듯 만들어낸 레프리컨트의 죽음은 오르크리스트의 죽음보다도 감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람드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구 바깥을 바라보다가 시폰에게 물었다. "마스터, 그런데 왜 지구방위군을 죽인 겁니까? 어차피 제거해야 한다는 것 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홀 바깥쪽에 수많은 특임대 대원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대부 분 선봉에 섰던 오르토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지만, 그 외에 메인 센터 밖에 대기하고 있던 병력은 모두 피스메이커 이그나이트들의 손에 몰살당한 것이었 다. "그람, 가장 맛있는 메인 디시는 혼자서 먹는 법이란다. 무엇보다 녀석들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 괜히 뒤에 남겨두었다간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 르거든." 메인 디시. 그람드링은 그 말을 낮게 읊조리며 메인 센터의 위층을 바라보았다. 천리안 의 능력을 가진 그는 시각에 구애받지 않고 메인 센터의 내부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최상층의 작전본부실에 있는 진 사령관과 오퍼레이터들의 모 습이 보였다. "후후후후, 그럼 이제부터 천천히 음미해볼까?" 시폰은 들뜬 발걸음을 옮겨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 뒤로 그람드링과 여섯 명의 이그나이트들이 따라붙는다. '유다, 부디 이번에도 날 즐겁게 해달라고.' 너의 딸을 빼앗겼을 때, '그때 네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절망의 표정!' 그 표정을 다시 한 번 짓게 만들어주지. 메인 센터의 상층부. "긴급제어 시스템, 응답 없습니다." "각처에서 분산형 바이러스 합체 진행 중!" "시스템 에어리어의 방벽이 돌파당합니다." "시스템 재기동 준비, 레벨 1로 데이터 격리 개시!" 지상의 방어가 뚫렸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작전본부실의 모두는 해킹을 막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비상전력으로 간신히 중추 시스템만을 살려서 버티고 있는 오퍼레이터팀은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는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 채 공성방벽 하나로 줄다리기를 하는 신세다.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그녀들은 한 시간이 넘게 시스템을 지켜내는 것으로 써 자신들의 유능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마 상대편 해커들은 모두 귀신에 홀린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런 소모전의 문제점은 공격하는 쪽보다 지키는 쪽이 훨씬 더 빨리 지 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반영이라도 하듯 피스 오퍼레이터들은 다들 피를 토 하는 심정으로 자리를 지킨다. 그나마 오퍼레이터 삼인방 정도가 평소 채영에게 받아온 모의 시뮬레이션의 성과로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말단의 문세희 같은 경우는 금방이라도 졸 도해버릴 것처럼 비틀거렸다. 삼인방은 초조한 눈으로 뒤에 있는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까지 이런 승산 없는 공성전을 계속할 셈일까? 아무리 목적이 시간 끌기라지만 그 시간끌기조차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데. 유레카의 중추 시스템을 해커들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그야말로 초읽기인 것이다. 우우우웅 그때 작전본부실의 문이 수동으로 열리면서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오퍼레이터팀이 돌아본 곳에서는 평소 그들과 안면이 있던 팔라딘대의 천요원 중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사령관님! 최후방어선이 뚫렸습니다! 금방 메인 센터의 상층부까지 치고 올라올 거예요! 그전에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 요원의 외침에 삼인방과 오퍼레이터팀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한동안 바깥의 상황을 알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요원의 보고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아니, 잠깐! 아직 침입당한 지 채 한 시간도 안 지났잖아?" "그사이에 팔라딘대가 전멸하기라도 했단 말이야!" 그렇게 불안해하는 오퍼레이터팀을 내버려두고 요원은 진 사령관만 바라보았 다. 진 사령관은 그녀의 보고를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 고 있었다. 심지어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그 무심함에 요원은 내심 기가 막혔다. '이 사람은 어떻게 저리도 태연할 수 있지? 자신의 부하들이 죽고, 기지가 점령당하는 이 시점에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단 말인가?' 평소 요원은 진 사령관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냉정한 모습에 나름대로 경외심 을 품고 있었다. 인간미는 없을지라도 그런 비정함이야말로 모두의 운명을 책 임지는 총책임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 사령관은 그녀에게 있어 이상적인 상관이었다. '하지만…….' 혹시 그는 비정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감정이 없었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요원은 새삼 자신이 저 상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진 사령관 자신부터가 타인에게 진면목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당연히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령관님!" 침묵하고만 있는 진 사령관의 모습에 애간장이 탄 오퍼레이터팀이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 사령관은 전혀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남 의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방관자처럼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대기하라." "예?" "자리에 대기하고 있어." "……!" 삼인방은 너무나 기가 차서 입만 뻐끔거렸다. 허탈감이 정도를 넘다보니 화 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반박하려 해도 진 사령관의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말 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녀들은 이런 사령관의 밑에서 줄곧 이와 같은 페이스 로 일을 해온 것이다.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이런 순간까지 지속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 니다! 쾅 그렇게 오퍼레이터팀이 엉거주춤 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참다못한 요원이 진 사령관의 책상을 내리쳤다. 그리곤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받은 명령은 진 사령관님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명령에 대해서는 알 바 없습니다. 당장 일어나 주십시오!"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유한진 소위인가?" "그렇습니다." "……그의 상관은 나다. 계급을 따지는 법도 잊어버린 건가?" "사령관님!" 쾅 요원은 다시 한 번 책상을 내리쳤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진 사령관 을 노려보았다. "제발…… 따라주십시오. 부대장님도 고참님들도 모두, 모두 사령관님을 지 키기 위해 싸우고 있단 말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요." 동료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살아서 재회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분들의 노력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요원은 울먹임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말을 맺었다. 그 모습에 오퍼레이터팀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삼인방은 힘 없이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팔라딘대는, '그녀를 제외하고서 모두…….' 위잉위잉위잉위잉 그때 울릴 리가 없는 비상경보등이 켜지면서 작전본부실의 전력이 들어왔다. 동시에 메인 스크린이 떠오르며 각종 정보들이 허공으로 나열되기 시작한다!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일동은 어리둥절해졌다. 어째서 갑자기 전력이 돌아온 거지? "앗!" 메인 스크린의 정보를 바라보던 삼인방이 다급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들은 창백해진 표정으로 진 사령관에게 소리쳤다. "중추 시스템에 부정규 접속 발생!" "제압…… 당했습니다!" 그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깐 한눈을 팔았다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중추 시스템을 장악당하다니! 방금 전까지 상대하던 해커들의 대처속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새로 운 해커가 투입되었단 말인가! "잠깐! 이건!" 삼인방은 부정규 접속자의 위치를 추적하던 중 뜻밖의 사실을 알아내고 탄성 을 내질렀다. 중추 시스템을 장악한 이의 IPv6어드레스는 다름 아닌 언더 시 티의 주소였던 것이다. 그것도 기술부의 설비가 위치한 장소! 《짜잔!》 순간 메인 스크린의 창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이 자 리의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 그녀는 아침에 외출했을 때의 복장이 아니라 예의 뱅뱅이안경과 연구복을 입 은 채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삼인방은 서둘러 헤드셋을 착용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시더 양? 저, 정말 시더 양인 거예요?》 《어떻게 거기 있는 거예요!》 "궤도 엘리베이터다." 그 질문에 대답한 이는 시더가 아니라 진 사령관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메인 스크린 앞으로 걸어갔다. "언더 시티에는 메인 센터와 기술부가 있는 메카닉 센터, 의료부가 있는 메 디컬 센터, 팔라딘대의 주둔지와 언더 시티의 외곽지역까지 합해서 지상과 연결된 총 다섯 개의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다. 전력이 끊겼더라도 궤도 엘 리베이터는 스틱스 광산의 초전도 현상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그곳으로 내려 왔겠지." 《Bingo! 정답입니다!》 시더는 손가락을 퉁기며 설명을 덧붙였다. 《다행히도 지구방위군에게 궤도 엘리베이터가 노출되지는 않아서 잽싸게 타 고 내려왔지. 원래는 메인 센터 쪽으로 직행하려 했지만 중추 시스템에 초 전도력을 사용하고 있어서인지 궤도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더라고. 그 래서 가장 먼저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메카닉 센터로 온 거야.》 《그렇다면 중추 시스템을 장악한 것은 시더 양인 건가요?》 《하지만…… 아무리 시더 양이라 해도 이런 단 시간 내에 공성방벽을 돌파 하는 건 무리였을 텐데.》 삼인방의 질문에 시더의 창 옆으로 또 다른 스크린 창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그녀들의 치프 윤채영이 헤드셋을 낀 채 자리하고 있었다. 《치프!》 《……늦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모처럼 자리를 비워줬으니 좋았지? 다들 자 유는 만끽한 거냐?》 《치프으으으 !》 채영의 농담에 삼인방은 눈물을 글썽이며 칭얼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그녀들에게 있어 채영은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한 최고의 상관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삼인방은 지금까 지의 고생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피스! 민수정 외 3명,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 창이 열리며 수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뒤로는 아침에 볼 수 없었던 유리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수정은 작전본부실의 진 사령관을 발견하고 거수경례를 한 뒤 미소지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위험했을지도 모르지." 진 사령관은 그렇게 대답하며 옆에 있는 요원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요원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죄송합니다. 한성고에 파견된 지구방위군의 병력을 따돌리느라…….》 "돌아와 줘서 고맙다." 《……예?》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 진 사령관의 솔직한 감사에 수정의 얼굴에서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눈 시울을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뇨, 당연한 일인 걸요.》 "그럼 서두르도록 하지. 지금부터 작전본부실의 모든 데이터를 소거하고 후 퇴한다. 이 명령에 이의는 없겠지, 천요원 중사?" "예, 없습니다!" 진 사령관의 반문에 요원은 방금 전까지의 불손함을 버리고 예의를 갖춰 대 답했다. 그 모습에 진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오퍼레이터팀에게 명령했다. "유레카의 제어권을 모두 메카닉 센터 쪽으로 넘기고 외부접속을 폐쇄한다. 해커들을 따돌리고 스탠드 어론 상태로 이행해!" 《잠깐!》 그때 수정의 스크린 창에서 유리가 고개를 들이밀며 소리쳤다. 《그전에 오빠의, 아니 피스 대원들의 위치부터 알려줘!》 그녀의 다급한 요구에 삼인방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진 사령관을 돌아보 았다. 진 사령관은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ECCM의 전파방해는 피 스 대원들의 AI 슈츠에서 발산되는 오리하르콘 감응탐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다른 오퍼레이터들이 외부접속을 폐쇄하는 사이 삼인방은 우주수 위그드라 실의 탐지기능을 사용하여 피스 대원들의 위치를 추적했다. 그리고 메인 스 크린으로 오라 패턴이 표시된 언더 시티의 내부투시도를 떠올렸다. 메인 센터에는 현재 데이터에 등록되지 않은 다수의 오라 패턴이 나타나 있 었다. 그 중에 패턴 알리자린이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저들이 시폰 뤼멘의 병력일 것이다. 그리고 메카닉 센터 쪽에는 패턴 핑크가, 팔라딘 주둔지의 궤도 엘리베이터 에서는 패턴 버밀리온과 패턴 레드가 표시되고 있었다. 코마히코와 마리가 어 딜 갔나 했더니 수정 일행과는 따로 행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패턴 블루와 패턴 옐로우는?' 유가인과 한시민은 어디 있는 거지? 《아, 설마!》 그때 메카닉 센터 쪽에서 윤채영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당황하며 소리쳤다. 《옴팔로스로 향하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한 대 움직이고 있습니다! 스틱스 광산의 초전도 현상 때문에 패턴의 표시는 뜨지 않지만…… 설마 여기에 가인 씨와 시민 씨가?》 "……!" 순간 진 사령관은 지구방위군과 시폰 뤼멘의 습격으로 간과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피스 블랙!" 한시영,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피스메이커가 아닌 옴팔로스였던 건가!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 275 - Ｂy Ｎext Ｎeo =-=-=-=-=-=-=-=-=-=-=-=-=-=-=-=-=-=-=-=-=-=-=-=-=-=-=-=-=-=-=-=-=-=-=-= 후우우우우 붉은 하늘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그 밑으로는 붉게 물든 거인들의 대지가 펼쳐져 있다. 수많은 시체의 산들이 신전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상태 에서 굳어버린 거인들, 괴로운 표정으로 쓰러진 거인들, 육신이 뒤엉켜 결국 한 몸이 되어버린 거인들, 그 모두가 이 옴팔로스의 한 부분들이었다. 기간토 마키아에서 패배한 기간테스의 무덤. 피스 옐로우 한시민은 그 무덤의 중심부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하아." 그녀는 작게 숨을 고르며 긴장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에 내려오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여전히 몸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그녀의 AI 슈츠는 평소와 달리 오라의 빛을 짙게 뿌리고 있었 다. 패턴 옐로우의 힘이 옴팔로스의 가이아와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민은 두려운 눈으로 하늘의 붉은 소용돌이를 올려다보았다. 신전을 중심으 로 회오리치는 하늘은 과도한 카르마 현상이 불러들인 아스트랄의 파편, 현현 된 태고의 존재였다. 현 인류의 기원이자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의사집합체다. 그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시민은 자신의 존재가 너무도 보잘것없음을 깨달았 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가이아를 앞에 두면 마찬가지인 감 정을 느끼리라. 그만큼 이곳의 하늘은 모든 이들의 어머니이자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였다. '모두들…… 괜찮을까?' 시민은 왼손에 찬 무전기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오 기 전에 시영이 한 말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잠시 후면 너희 피스메이커는 제구실을 못하게 될 거거든?' 그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시민은 시영의 뒤를 쫓아 그대로 지상에서부터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옴팔 로스로 내려왔기에 언더 시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때문에 혹시나 싶어서 다른 동료들에게도 무전을 쳐보았지만 누구 하나 응답 하지 않았다. 다들 감감무소식이다. 거기다 궤도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동안 단 한 번의 경고음도 울리지 않았 다. 지금의 그녀는 옴팔로스에 무단침입한 것이기에 적어도 오퍼레이터팀의 제지를 받아야만 했다. 그것이 정상인 반응이다. 실제로 시민은 옴팔로스로 향하는 자신을 누군가 말려주길 바랐다. 무모한 자신을 멈춰주길 바랐다. 시영을 향한 분노는 이미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붙잡아주지 않았다. 마치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수 수방관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민은 거짓말처럼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세상의 끝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그래, 외면하지 말자. 어차피 이건 나와 그 단둘만의 문제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서는 안 돼.' 과거의 악몽을 떨쳐낼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야! 시민은 주먹을 움켜쥐고 크게 소리질렀다. "한시영! 약속대로 찾아왔다! 어디 있는 거냐!" 그녀의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붉은 대지로 퍼져나갔다. 시민은 주위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숨죽였다. '얘기해준다고……. 이번에야말로 그때의 이유를 말해준다고……!' 어디 있는 거야? 어서 모습을 드러내란 말야! '……형!' ―호오, 여기가 옴파로스인가? 그때 시민의 귓가로 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며 주위 를 둘러보았다. 어디지? 어디서 소리가 난 거지? "……!" 순간 시민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발밑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거대한 거인의 형상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박쥐의 날개를 가진 그것은, "티폰!" 우오오오오 그녀의 외침에 그림자의 존재가 크게 울부짖으며 물질계로 구현되었다. 먼저 거대한 검은 팔 한 쌍이 그림자를 찢어발기듯 뻗어 나오고, 그 후 한 쌍의 날개가 창처럼 붉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렇게 좌우로 펼쳐진 피막 의 날개가 크게 한 번 홰를 치자 그림자에 잠겨 있던 거인의 나머지 육체가 뒤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투아아아아앙 땅을 박차듯 40미터의 검은 거인이 뛰어오르자 옴팔로스 일대로 무시무시한 폭풍이 퍼져나갔다. 마치 거인의 존재가 주위의 공기를 떨게 만드는 것 같았 다. 시민은 거인의 격풍에 휩쓸리지 않도록 신전 기둥을 붙잡은 채 이를 악물었 다. 우우우우우 폭풍이 진정되자 이번에는 옴팔로스의 하늘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날개를 펼쳐든 티폰을 중심으로 붉은 하늘이 원을 그리며 밀려나는 것이 아닌 가? 그러자 하늘에 가려져 있었던 옴팔로스의 어둠이 마치 티폰을 감싸듯 드러났 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암흑의 세례(Baptism)라고 할 수 있었다. 암흑이 티폰에게 내려쬐여 그의 어두운 몸과 차츰 동화해나간다. "역시 가이아도 자신의 자식을 알아보는군. 성대하게 환영해주는데?" 하늘의 광경에 넋을 빼앗겼던 시민은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서는 피스 블랙 한시영이 그녀의 그림자로부터 떠오르고 있었다. 시민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내 뒤를 따라온 거냐? 날…… 이용한 거야!" "으음, 이용이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 아픈걸. 그렇게 가시 돋친 말 하지 말 고 그냥 안내해줬다고 생각하려무나.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옴팔로스의 위치 까지 알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의외로 유레카의 보안이 철통같아서 그 림자의 정보를 읽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개자식! 넌 끝까지 !" 시민은 분노하며 공명음을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 주변으로는 네 명의 무리가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움직이지 마라. 내 진공파에 베이고 싶지 않다면."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 그녀는 양손의 초고진공 커터를 시민의 주위에 늘어뜨리며 삭풍의 어금니를 시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들었지? 마스터의 동생이라 해도 봐주지 않을 거야?" 피스 카민 마유빈. 그는 시민과 눈이 마주치자 히죽 미소지으며 마인드 브레 이크를 끌어올렸다. "……목이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자중해라." 황유평은 신검 후츠노미타마를 시민의 목에 겨눈 채 나지막하게 경고한다. 그리고……. "……."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시민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비 통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브루스 님…… 역시 사실이었던 건가요?" "……." "진우 씨를 죽인 건…… 역시 브루스님이었던 건가요?" "……."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휘날리는 백발 사이로 가면 같은 무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시민은 찬찬히 그런 브루스를 살펴보았다. 팔이 사라진 오른쪽 소매는 티폰 이 일으키는 바람에 흩날렸고, 머리는 새하얀 백발로 변해 있었다. 거기에 금방이라도 조각날 것처럼 금이 간 얼굴. 그 얼굴색조차 변색되어 짙 은 갈색을 띠었다. 시민은 더 이상 그를 응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브 루스는 더 이상 그녀가 알고 있는 그가 아니었다. 지난 1년여를 함께 보낸 그 녀의 동거인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시영, 너는 대체……." 시민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시영을 노려보았다. 브루스가 변한 것도, 진 우가 죽은 것도, 모두 그의 탓인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녀석은 모두의 행복을 빼앗아간다! 모두에게 상처를 주기만 한다! 언제나! 언제나! "흠, 오해받는 건 싫어서 하는 말인데 이 자리의 모두는 스스로가 원해서 나 를 따라온 거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뿐이야. 그러니 너무 비 난하지는 말아라.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했다간 진정 원하는 것을 손에 넣 지 못하거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하나를 이루기 위해 나머지를 포기한다 는 것과 같은 말이야." 시영의 말에 시민은 발작적으로 그에게 달려들 뻔했다. 어디서 그런 궤변을!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게 사실이다. 이렇게 여기 있는 너도 나와 결판을 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 거잖아?" 아! 시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영은 그런 동생의 모습에 미소하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후후, 아마 지금쯤이면 언더 시티는 성명을 발표한 지구방위군의 손에 함락 당하고 있겠지. 네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동료들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 고 말이야. 어때?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다시 위로 올라가 보겠어? 나는 특 별히 제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시민은 그제야 시영이 앞에서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피스메이커가 제구실을 못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뜻이었나! 시민은 길을 물려주는 류바와 유빈의 모습에 미련 없이 궤도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려 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시영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단, 이대로 가버린다면 두 번 다시 나에게서 진실을 들을 순 없을 거야." "……!" "그렇게 해야 역시 공평하겠지? 난 동생을 욕심쟁이로 만들 생각은 없거든. 고를 수 있는 건 언제나 하나뿐! 그렇게 정해뒀다고." 시민은 치를 떨었다. 시영의 말 따위 무시하고 떠나려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 지지 않았다. 올라가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을 도와야만 한다고, 그렇게 머릿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녀의 욕망은 진실을 알고 싶다고 종용하고 있었다. 떠나서는 안 된다며, 제발 이곳에 남으라며 그녀의 발을 붙들어 맸다. 그 극심한 괴리감에 시민은 숨이 턱 막혔다. 어느 쪽이 자신의 의지인지, 자 신은 어느 쪽을 원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둘 중 어느 하나도 선택할 수가 없다! "후하하하하! 좋아! 그럼 남기로 결정한 거군?" "……!" 시영의 결정에 시민은 다급하게 반박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가 없 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실 어느 쪽이 본심인지는 진작부 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은 이곳에 남고 싶었다. 시영에게서 진실을 듣고 싶었다. 왜 그가 자신을 배신했는지, 왜 그가 그래야만 했던 건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미치도록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이 그녀의 본심이다! "어디…… 지금부터 얘기를 시작해볼까?" 시영은 웃으면서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러니 듣고 싶다면 빨리 오는 것이 좋을 거예요, 가인 군." "……뭐?" 시민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가인 군? 가인 군이라니? "잠깐, 너……!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어째서 가인 씨의 이름이 여기서 나 오는 거지?" "아아, 유가인 군? 네가 바라는 진실이란 것을 얘기하려면 그가 반드시 필요 하거든. 그래서 내가 위스퍼링으로 불러들였지. 네가 옴팔로스로 향하고 있 다고 가르쳐줬어. 그의 아리아드네의 실을 이곳으로 연결시켜놓았으니 아마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들도 모두 듣고 있을걸?" "……!" 시민은 황망한 시선을 들어 옴팔로스 외곽에 세워진 다섯 개의 나라카를 바 라보았다. 저 나라카를 통해 궤도 엘리베이터는 언더 시티와 옴팔로스를 왕복 할 수 있다. 그럼 지금 저 다섯 개의 기둥 중 하나로 가인 씨가 내려오고 있다는 건가!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때 잠자코 있던 브루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나라카의 한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 시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브루스님, 부디 그의 목숨만은 빼앗지 마십시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라의 주인, 그 녀석과는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한다고. 그 때문에 네 녀석의 수하 노릇도 마다하지 않은 나다." 브루스의 말에 시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오라의 주인과 결판을 내겠다니! "오라의 주인이라……. 후후. 뭐, 잘해보시길.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겠습 니다." "흥." 브루스는 시영의 격려에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향해 시민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브루스님! 멈추세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설마 가인 씨와 싸 우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예?" "……." "브루스 님!" 시민은 간곡한 어조로 호소했다. "절대로 그러시면 안 돼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왜 브루스님이 가인 씨와 싸워야 하나요? 가인 씨가 얼마나 브루스님을 좋아하는데! 브루스님 이 사라지고 나서 가인 씨가 얼마나 슬퍼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닥쳐!" 브루스는 날카로운 호통으로 시민의 말을 끊어버렸다. 등을 돌린 그의 뒷모 습에서는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새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 었다. 그것이 영체의 그릇에서 새어나오는 카르마에너지라는 것을 깨달은 시민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브루스님, 당신의 몸은 벌써 그 정도로……. "방해하는 녀석은 날려버린다! 죽고 싶지 않다면 날 가로막지 마! 그 자리에 서 똑똑히들 지켜보고 있어라! 칠성권 제28대 계승자가 벌이는 마지막 싸움 을!" 브루스는 그 말을 끝으로 전장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붉은 대기 속에 안개처럼 녹아들어가는 그를 시민은 차마 만류할 수 없었다. 브루스의 거친 호통 속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사자(死者)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시민에게 시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너무 비난하지 말라고." 최선? 최선이라고? 시민은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증오를 드러내 보이며 시영을 돌아보 았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이 검게 변하면서 두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 작했다. 스스로의 영체에 암시를 걸어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흑 성가의 프롤로고스(Prologos)였다. 그렇게 암흑이 된 카스트라토는 어둠의 성모가 되어 지옥의 노래를 입에 담 을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그렇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쓰러뜨려주지." 암흑의 힘이 실린 시민의 목소리가 신전에 울려 퍼졌다. 그런 그녀의 변화에 유빈과 류바, 유평은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저마다 공격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시민은 그런 그들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오직 눈앞의 시영만 을 노려보았다. "최선을 다해 널 쓰러뜨리고 가인 씨와 브루스님, 동료들을 도우러 가겠어. 네 녀석의 입에서 그 잘난 진실이란 것도 다 들어주지." 흑성가 28장 흑염초래! "이것이 나의 최선이다!" 그와 동시에 죽음의 힘누스(Hymnus)가 시작되었다. ―그러니 듣고 싶다면 빨리 오는 것이 좋을 거예요, 가인 군. 시영의 위스퍼링에 가인은 이를 악물고 차원진동의 힘을 끌어올렸다. 현재 그는 AI 슈츠를 착용한 채 차원진동의 기류를 타고 옴팔로스와 연결된 나라카 를 내려가고 있었다. 시민을 찾아 아르센 피아노 학원에 갔던 그는 지구방위군의 성명발표를 본 직후 한시영의 위스퍼링을 들을 수 있었다. 시영은 시민이 자신을 뒤쫓아 옴 팔로스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고, 가인은 즉시 시민의 뒤를 쫓아 지 상의 궤도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궤도 엘리베이터는 오직 머신 아더의 격납고와 연결 된 한강대교 부근의 것밖에 없었고, 하는 수 없이 가인은 그곳에서부터 줄곧 차원진동의 힘을 사용하여 옴팔로스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대략 한 시간이 넘게 오라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조금도 지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진정한 패턴 블루의 힘을 각성했기 때문이다. 각성한 힘, 차원진동의 현현은 옴팔로스에 있는 가이아의 의지와 강한 영적 인력을 발휘하여 지속적으로 카르마에너지를 공유하기에 육체적인 한계는 있 을지언정 정신적 한계는 사라진 상태였다. ―아…… 파. 그렇게 통로를 따라 하강하던 중 가인은 예의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가인은 착잡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주변에는 육중한 거신상 들의 부조가 펼쳐져 있었다. 목소리는 그 부조들의 입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었다. ―아파. ―죽여. ―죽여라. ―싫어. ―살려줘. ―무서워. 예전에 머신 아더로 옴팔로스에 진입할 때도 들을 수 있었던 환청이다. 당시 의 가인은 왜 그런 소리들이 들리는지 이유를 몰라서 당황했지만 지금은 아니 었다. 리리스의 드림 다이브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거인들의 전쟁, 기간토마키아! 이 옴팔로스에 널린 거신상들의 정체는 바로 그 기간토마키아에서 인류에게 패배한 기가스들이었다. 가이아에게 인류 올림포스의 숙청을 명령받고 태어난 그들은 하염없이 인류 와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 이런 세상의 땅 끝까지 몰린 끝에 쓸쓸한 죽음들을 맞이한 것이다. 지금 가인에게 들려오는 환청은 바로 그 거인들의 잔존사념이 차원진동의 힘 을 타고 재현되는 것이었다. 죽기 직전의 그들이 세상에 남긴 한(恨)의 되풀 이다. "……!" 가인은 애써 두 눈을 감고 환청과 환상들을 떨쳐냈다. 그리고 오라를 집중하 여 더욱 쏜살같이 밑으로 내려갔다. 거신상들의 부조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슬슬 옴팔로스가 가까워지고 있는 모 양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시민 씨!' 가인은 먼저 옴팔로스로 내려간 그녀가 걱정되었다. 시민은 시영과 관련된 일이 생기면 너무나 감정적이 된다. 그녀의 실력을 믿 기는 하지만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시민 혼자서 시영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 위 험했다. 어떻게든 자신이 빨리 가서 그녀를 도와줘야만 한다! '제발 늦지 말아라!' 가인의 의지에 발맞춰 그의 이미지 메이킹이 변화를 꾀했다. 패턴 블루의 차 원진동이 그의 AI 슈츠를 뒤덮으며 백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등으로 반중력의 원들이 날개처럼 형성되었다. 그러자 가인은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마치 기류에 녹아드는 것처럼 지하로 꺼 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 나라카의 외벽이 충격파로 폭파되며 푸른 섬광이 유성처럼 옴팔로스에 내리 꽂혔다. 그러자 그 충격에 반경 50미터 가량의 크레이터가 생기며 거신상들이 바스러진다. 그 크레이터의 중앙에서 멀쩡한 모습의 가인이 흙더미를 헤치며 몸을 일으키 고 있었다. 차원진동 쉴드로 육체를 2차원적 표면파에서 보호함과 동시에 오 리하르콘의 중력장을 역행시킨 것이다. 이것 하나만 봐도 차원진동을 다루는 그의 힘이 얼마나 일취월장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대단하군./ 이것이 네 녀석이 찾아낸 힘이냐." 그때 크레이터 위에서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슈츠에 묻은 흙을 털던 가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에 도리어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반가움과 기쁨. 의심과 의혹. 분노와 슬픔. 그리고……. 수많은 감정들이 그를 바라보는 가인의 눈동자에 맴돌고 있었다. 가인은 침묵으로 그에게 묻고 있었다. 왜! 왜냐고!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냐고! "브루스……." 가인의 부름에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는 가볍게 발을 굴러 크레이터 밑으로 내려왔다. 가인은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라진 오른팔 과 백발이 된 머리, 변색된 피부, 무엇보다 예전의 따뜻함을 찾아볼 수 없는 저 얼굴. '건방떨지 마라, 애송이. 네 녀석이 날 걱정하는 것은 100만 년은 이른 일 이다.' 예전에 브루스를 걱정하다가 질타를 당한 일이 생각났다. 가인은 무거워지 는 눈시울을 참지 못하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러자 뜨거운 눈물방울이 볼 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도 브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가인을 꾸 짖지도 않는다. 그것이, 그것이 왜 이렇게 슬프게 느껴지는 걸까? 왜 이토록 서글퍼지는 거지? "왜…… 그랬던 거예요?" 가인은 간신히 흐느낌을 억누르고 물었다. 브루스는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다." 목적? 목적이라고? 가인은 이를 악물었다. 슬픔이 지배하던 머릿속으로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오른다. "그게…… 우리를 배신한 이유라고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진우 씨를……." 당신의 제자를……. "그런 이유로 진우 씨를 죽인 거예요?" 가인은 원망 어린 외침을 토해냈다. 한번 시작된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쏟 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목적이기에! 얼마나 대단한 목적이기에 이러는 거예요! 그것이 진우 씨를 죽일 이유가 된단 말이에요? 그런 것이! 그런 것이! 우리가 함 께한 시간들을 저버릴 정도로……!" 가인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머리를 감싸며 흐느 꼈다. 이럴 수는 없어. 절대로 이럴 수는! 절대로 이래서는 안 되는 거야! '오라를 믿어라. 그리고 소중한 이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라.' 그 말을 하던 브루스는, 내가 목표로 삼았던 남자는, 내가 자랑스러워했던 스승은……! "덤벼라, 오라의 주인." 브루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가인의 정신을 일깨웠다. 브루스? "어차피 나는 처음부터 네놈의 힘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쓸데없는 정 따위 는 거추장스러웠다." 거짓말……. 가인은 멍하니 브루스의 말을 실감하지 못하다가 곧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거 세게 도리질을 쳤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아요!" "성가셨어. 그래서 끊어버린 거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브루스는 하나 남은 왼손으로 칠성권의 기수식을 취하며 버럭 소리질렀다. 진기를 끌어 모으는 그의 몸에서는 새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최후의 불 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거리낄 것은 없다. 어차피 2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어. 그런 얄팍한 정 따위에 100여 년이 넘도록 추구해온 목표를 놓칠 성싶으냐!" 목표! 목표! 목표! 가인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브루스를 노려보며 오른손의 헤븐 스매쉬를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차원진동의 줄기들이 그 손 하나에 집중되면서 거센 스파 크를 일으킨다. 그 모습에 브루스는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며/ 보법을 밟았다. "간다!" "……그런 건 대답이 되지 못해." 가인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브루스를 향해 마주 고함을 내질렀다. "그런 건…… 진우 씨를 죽인 이유가 되지 못해!" 그리곤 오른손의 차원진동권을 앞으로 내뻗었다. 천공(天空)―! '강해지고 싶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피스 그레이 브루스가 담담한 눈초리로 가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인은 주저앉은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강해지고 싶냐고? 브루스는 가인이 대답하지 않자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구기며 재차 물었다. '정신이 썩었다고 귀까지 썩었냐? 강해지고 싶지 않냐고!' 동시에 그에게서 숨 막힐 듯한 기도가 느껴졌다. 가인은 그 기세에 눌려 반 쯤 얼이 빠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브루스는 희미하게 미소하며 말했다. '좋아, 그럼 강해지게 해주마.' ―뇌정권(雷霆拳)! 브루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SS Volume.13 "2020년 3월 9일" -=-=-=-=-=-=-=-=-=-=-=-=-=-=-=-=-=-=-=-=-=-=-=-=-=-=-=-=-=-=-=-=-=-=-= 오라전대 ＰＥＡＣＥ ＭＡＫＥＲ -Ｓide Ｓtory - volume.13 Ｂy Ｎext Ｎeo =-=-=-=-=-=-=-=-=-=-=-=-=-=-=-=-=-=-=-=-=-=-=-=-=-=-=-=-=-=-=-=-=-=-=-= Prologue " 한때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한 거인이 있었 다. 거인의 이름은 티폰. 그 이름 그대로 신들의 세상을 날려버리기 위해 여신 가이아가 만들어낸 심판의 바람이었지. " 남자의 말에 이제 막 열 일곱살 남짓한 소녀는 응,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 천진난만한 태도가 가뜩이나 어려보이는 소녀를 더욱 어려보이게 만들었다. " 티폰은 여신의 바램대로 올림포스에서 신들을 추방시키고 그들의 우두머리 인 제우스를 포획했다. 하지만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불러들였고, 풀려난 제 우스는 도리어 티폰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끝내는 에트나 화산 밑에 가두는 데 성공하지. " " 에트나라면……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있는 활화산이잖아요? " " 그렇지. 하지만 실제 에트나 화산은 아닐 거야. 기간토마키아는 대륙이 하 나였을 당시에 일어난 전쟁이니까. 아마도 얘기가 되물림되면서 후세에 의 해 각색된 거겠지. 실제로 이탈리아의 에트나 산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 " 역시 전설일 뿐인 걸까요? " 아쉬워하는 소녀의 모습에,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녀는 평소에는 무뚝뚝하기 그지 없지만 가끔씩 보여주는 이런 남자 의 자상함이 너무나 좋았다. " 그래서야 얘기를 꺼낸 보람이 없지 않나. 성당 기사단은 내내 티폰의 탐색 에 몰두해왔다. 세계 각지에 있는 화산이란 화산은 모두 조사하며 기가스 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지. 하지만 역시 거인을 발견할 수는 없었어. 그러자 성당 기사단은 생각을 달 리해야 했다. 어쩌면 '화산'이란 말 자체가 허구는 아니었을까? 다른 무언 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기간토마키아가 있었을 당시의 대륙은 지금과 같은 불완전한 구성이 아닌 하나의 완성된 존재였을 거다. 판의 구조도, 그로 인한 마그마 챔버도 지 금과는 완전히 달랐겠지. 그렇다면 당시의 대륙과 지금의 대륙이 일치하는 부분을 주목해야 돼. 대륙의 이동 속에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본질. 그것은 대륙이 원래부 터 가지고 있던 용맥(龍脈)이었다. 지맥과 수맥을 포함한 대륙의 피가 흐 르는 혈관. 신화의 화산이란, 이 용맥의 흐름이 모여서 솟아오르는 곳. 바로 내룡을 말 하는 거였어. " " 내룡이라면……. " " 그래. 너와 내가 만났던 장소도 그것이지. 무엇보다 나는 오라의 성지, 가 이아를 찾아내는 성당기사단의 탐색대였으니까. 만약 내룡이라는게 없었더 라면 너와도 만나지 못했을 거다. " 소녀는 남자의 말에 조용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노라고. " 그, 그래서 티폰은 내룡에 있었던 건가요? " " 음. 성당 기사단이 찾아낸 성지는 총 다섯 개. 그 중 한 곳에서 우리는 잠 들어있던 거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남자, 아포스톨로스 이스가리옷 유다는 자신들이 걷고 있던 LA의 연구 시설 을 둘러보며 말했다. " 수정아. 지금 우리는 그 사나운 격풍의 레어(Lair) 속에 들어온 거야. " Ｖolume.13 " 2020년 3월 9일. " 미국 LA에 성당기사단의 연구 시설이 들어섰던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한때 오라의 성지, 가이아의 탐색에 열을 올렸던 성당 기사단은 세간에 알려지 지 않은 수 많은 유적들을 발굴해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굴되었던 곳이 바로 이 곳, LA의 지하 공동이었다. " 굉장한 엘리베이터네요. " 수정은 엘리베이터의 유리벽에 붙어 지하 공동의 전경을 살펴보며 감탄을 터 뜨렸다. 그녀의 곁에 있던 유다도 감탄하기는 마찬가지. 다만 그는 자신의 일 행처럼 곧이 곧대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 도시의 지하에 잠겨있던 나라카를 이용한 거다. 반중력을 이용한 궤도 엘 리베이터는 보아하니 닥터 웰리스의 작품이로군. "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케루빔의 스멜팅 마스터, 오파니엘 노엘 웰리 스가 아포스톨로스 야고보의 연구에 가담했다는 것은. 유다는 나지막히 한탄하며 지하 공동을 향해 음울한 눈빛을 던졌다. 그는 애 초에 아포스톨로스 야고보의 연구를 허락한 비숍과 오파님(Ofanim)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폐쇄적인 성당기사단. 그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것이 바로 비숍과 12지파 의 원로들이었다. 아마 야고보의 원로 드미트리가 자신의 후계자를 위해 뒷공 작을 펼쳤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다른 지부의 오파님들까지 감화시키기는 어렵다. ' 그렇다면 역시……비숍이 직접 이번 연구에 손을 들어줬다는 건데. ' 12지파의 우두머리인 비숍. 그가 야고보의 연구를 허락했다면 원로들이 잠잠 해진 것도 이해가 갔다. 어차피 12지파로 나뉘어진 통치 기구라도 그 본질은 비숍에 의한 일인독재 기구니까. 이러한 모순이 나오게 된 데에는 성당기사단의 창립 초기 때 발생했던 '그' 사건 탓이 컸다. 애초에 틀을 만든 원형이 사라져버렸으니, 레프리카(Replic a)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 틀을 유지하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 와∼ 저것 좀 봐! 누 대인도 저희랑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텐데. 그쵸? " 생각에 잠겨있던 유다는 수정의 들뜬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수정은 점점 가까워져오는 현무암 계곡을 가리키며 상기된 얼굴로 소리친다. 그 모습에 유다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군. 하지만 그 분에게는 여덟번째 검으로서의 사명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아포스톨로스 바르톨로메오는 나처럼 허울만 좋은 세라핌(Seraphim) 이 아니라고. " " 허울만 좋다니…….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하지마세요. 유다는 플러벨럼 (Flabellum)을 못 받은 게 아니라 일부러 안 받으신 거잖아요? 누 대인도 매번 말씀하신다고요.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재주를 썩히 기만 하고 있다고. " " 과분한 평가로군. " " 아뇨. 적정한 평가에요. 그러니까 이제 좀 주위의 기대에 부흥해주시죠? " 수정은 유다의 무뚝뚝함에 심통이 났는지 장난스레 혀를 내밀었다. 유다는 중국에 있을 자신의 친우를 떠올리며 속으로 투덜거린다. 누대인, 이제는 이 어린 아이마저도 당신의 대변인으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 그나저나 수행원 하나 없이 오신 건 정말 너무했어요. 다른 사도들은 분명 수십명의 크루세이더들을 대동해서 나타날텐데. 그러니까 시폰 뤼멘 같은 사람이 자꾸 유다를 무시하는 거라고요! 아, 정말∼ 또 그 인간의 빈정거림을 듣는다고 생각하니 내 머리가 다 아 프네! " 유다는 수정이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않아도 누대인께서 붙여주신 실력 좋 은 수행원이 있으니까. " " 예? " 수정은 금시초문이라는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누대인께서 수행원을 붙여줬다니? "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수행원같은 사람은 전혀……. " " 아, 수행원과는 현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침 샌프란시스코로 파견된 바 르톨로메오의 이단 심문관이 있어서 말이야. 겸사겸사 그에게 우리의 신변 을 보호받기로 했지. " " 설마― " 수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대번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아는 바 르톨로메오의 이단 심문관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 잠시 후면 도착하겠군. 모처럼만의 재회일텐데 기쁘지 않은 건가? " " 아앙! 내가 이럴 줄 알았어! " 유다의 말에 수정은 대경실색하며 울상을 지었다. 유다는 내심 그녀가 이 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의아하다는듯 되묻는다. " 음. 왜 그러지? 그 반응은 뭔가? " " 어울리지도 않는 능청 떨지 말아요! 정말 얄미워! 내가 뻔히 그 사람 싫 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 " 이런. 그랬던가? 미처 몰랐다.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어. 다 내 불찰이야. " " 모르는 건 한 번으로 끝내요! " 수정은 씩씩거리며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토라진 어린애라서 유다는 입가의 미소를 숨기지 못한다. 아, 이렇게 자꾸 재미가 들리면 안되는데……. " 어, 웃었다. 웃은 거야. 즐기고 있어! " " 흠! 아니, 그저 약간의 유희라고 해두지. 어쨌든 넌 왜 그렇게 자신의 스 승을 싫어하는 건가? 그가 너에게 무슨 몹쓸 짓이라도 저지른 건가? " " 예?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 수정은 우물거리다가 간신히 뒷말을 이었다. " 하, 하지만 너무한다고요, 그 사람! 여자보고 떨어지라고 하질 않나! 노골 적으로 부정탄다고 그러질 않나! 또 스승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하지! 우와∼ 진짜 심하지 않아요? 완전 성차별이야! 진우 사형과는 그렇게 친하 면서 맨날 나만 구박해! " " ……. " " 거기다 수련할 때는 어떻고요? 간단한 칠성권의 초식조차 가르쳐주지 않고 지겨운 형의권만 반복시킨다고요! 너같은 녀석에게는 그거 하나면 충분해, 라던가? 흥! 그렇게 못되게만 구는 스승, 알게 뭐야! 그런 사람은 제 쪽 에서 거절한다고요! " 열을 올리며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다는 생각했다. 어 지간히도 쌓이신게 많으셨군. ' 그래봤자 정작 그의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하지 못할 거면 서. ' " 유다, 방금 무슨 실례되는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 수정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쏘아붙이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귀 신이다! " ……이제 다 도착한 것 같은데. " " 어휴! 좀 진지하게 들어달라고요! ' 수정은 유다가 말을 돌리자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 이상은 불평하지 않았다. 유다의 말대로 엘리베이터는 어느덧 최하층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하 공동의 최하층은 중간에 거쳐온 어두운 현무암 통로와는 다르게 깨끗한 대리석으로 닦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날짜에 맞춰서 실험을 진행시키다 보니 주위의 나라카까지 보수할 여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유다는 대낮처럼 밝은 인공 조명에 의지한채 최하층 연구시설의 길목을 확인 했다. 하지만 그럴 것도 없이 연구소의 일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먼저 그들에 게로 다가왔다. " 아포스톨로스 이스가리옷 유다이십니까? " " 그렇다. " " 그 쪽의 동행분은……? " 남자가 유다의 곁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수정을 가리켰다. 다른 아포스톨로스들의 경우 각자 자신의 크루세이더들을 수행원으로 데리 고 왔건만, 이번에 방문한 사도는 웬 여자 아이 하나만 달랑 대동하고 있었 던 것이다. 설마 저 아이가 수행원이라는 것은 아니겠지? " 수행원이다. " ……맞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사전에 그는 자신의 마스 터에게서 언급받았던 것이다. 열두번째의 검은 세라핌 최고의 괴짜라는 얘기 를. " 두 분 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 남자의 안내에 유다는 성큼 성큼 그의 뒤를 따라걸었다. 그제야 수정도 구경 하는 것을 그만두고 쪼르르 그들에게 따라붙는다. 우우우우우 그때 연구소의 내부에서부터 기아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공기 중으로 퍼져나 가는 음파의 진동이 아닌, 좀 더 근원적인 세계의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동요되는 의지의 호소. 유다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새삼 자신들이 누구의 보금 자리에 들어왔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 여기에는 그 녀석이……. 저 울림은 바로……. " 아, " 계속되는 소리에 겁을 먹은 수정이 유다의 손을 움켜잡았다. 유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손을 힘 있게 잡아줄 뿐이다. 그런 이질적인 남녀의 모습에 안내하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저 모습의 어디가 수행원이라는 걸까? " 여기입니다. " 남자가 유다와 수정을 데리고 간 곳은 격벽으로 폐쇄된 지하 연구소의 한 실 험실이었다. 울림은 바로 이곳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윙 남자의 조작으로 이중으로 보호된 격벽이 열리자 그 안에서는 일련의 인물 들이 유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은 실험실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물체'였다. 지름 300미터의 유리벽에 감싸인 그것은 어두운 PET용액에 잠겨 제대로 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실험실의 조명에 반사광을 띄는 것으로 보 아 금속으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아닐까 하고 으레 짐작할 뿐이다. 금속의 물체는 앞에서 일행이 들을 수 있었던 신음 소리를 연신 흘리고 있었 다. 그 신음 소리에 발맞춰 PET용액에서는 기포가 줄을 맞춰 솟아오른다. ……마치 호흡이라도 하는 것처럼, ' 잠깐. 호흡을 하는 금속이라니? ' 말도 안되는 소리. 지금 저것이 살아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 하하하. 역시나 눈을 떼지 못하는군. 유다, 자네의 눈에도 이 녀석은 신기 해 보이는가 보지? " 유다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실험실에 있는 누군가의 웃음 소리에 의 해서였다. 그리고 돌아본 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 아포스톨로스 필립보. 아포스톨로스 마태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 유다는 수도복을 입은 두 명의 중년인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바람에 엉겁결에 뒤따라 오던 수정도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유다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흑인 수도사, 아포스톨로스 필립보는 그런 수정 을 귀엽다는듯 바라보며 말했다. " 왠지 유다의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젊은 애인을 사귀다보니 심적으로 여유가 생긴 건가? " " 에엣― " 그 말에 도리어 수정이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다. 저, 젊은 애인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필립보는 그렇게 대경실색하는 수정의 모습에 의아하다는듯 물었다. " 응? 내가 잘못 짚은 건가? " " 아, 아뇨! 아닌 건 아니지만, 또 그게 완전히 그렇지는 않고! 저기, 희망 사항이라고 해야할까, 지원 중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노력하고는 있지 만 그게 여러모로 부족하다 보니 영― " " 후, 후하하하하. 그래. 그래. 알겠네. 그 정도만 얘기해도 충분해요. 충 분히 이해했다고, 귀여운 아가씨! " 필립보는 수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재차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와 악 수했다. 수정은 그 큼직막한 손에 붙잡혀 이리저리 흔들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유다는 그런 필립보의 페이스에 휘말리기 싫었는지 아포스톨로스 마태오에게 먼저 다가갔다. " 변함없군요, 쉐인 씨는. 변함 없이 경박한 필립보에요. " " 후후후. 이해해주십시오. 그도 모처럼 밝아진 당신의 모습에 기뻐서 저러 는 것이니까요. " 마태오, 쟌 메이워드는 유다보다도 수십살이 연상이지만 여전히 그에게 존대 를 하고 있었다. 다섯번째의 검 아포스톨로스 필립보, 쉐인 알렉스와 여섯번째 의 검 아포스톨로스 마태오, 쟌 메이워드는 오파님에 의해 경쟁을 강요받는 세 라핌 중에서도 흔치 않은 유다의 친우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저 다른 세라핌들을 견제하는 차원에서의 협력 관계로도 비춰 질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서로의 관계에 이윤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유다는 쟌의 말에 수정과 떠들고 있는 쉐인을 바라보며 투덜거린다. " 글쎄요. 제 눈에는 단순히 즐기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 " 음. 그 말을 부인하지 못한다는게 그와의 우정을 증명하는 길이라니. 저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쟌은 쓴웃음을 지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유다는 그런 마태오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다. 그나마 바르톨로메오 누대인 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만약 그까지 있었더라면 이 두 명 과 마음이 맞아서 무슨 말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을지 모른다. " 그나저나 야고보의 호출에 응한 세라핌은 우리가 전부입니까? 다른 아포스 톨로스들은? " " 아무래도 당신이 마지막일듯 하군요.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은둔 중, 요한 과 바르톨로메오는 사명 중이니까요. 그 외의 사도들은 뭐, " " 시몬과 토마, 알패오의 아들……. 타데오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 다 불참했 군요. " 유다는 그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특히 그가 언급한 타데오 라는 이름에서는 뿌리 깊은 인과를 느끼게 한다. 쟌은 그러한 유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의 분노를 안타까워 했다. 그때 수정과 얘기를 마친 필립보, 쉐인 알렉스가 그들에게로 다가오며 예의 큰 목소리로 외쳤다. " 그것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녀석들이라고 했잖아! 그 녀석들, 세라핌의 사명에도 별 관심이 없고 그렇다고 승급을 포기한 것도 아니야. 분명 무슨 꿍꿍이들이 있을 거라고! " " 쉐인. 경솔한 발언은 금물입니다. 상급의 세라핌이 다른 아포스톨로스들 을 헐뜯는다니……. 중급3대와 하급3대의 귀에 들어간다면 두고 두고 비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필립보의 명예에 누가 될 거에요. " 쟌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만류했지만, 쉐인은 거리낄 것이 뭐가 있냐는듯 더욱 언성을 높였다. " 나,참. 그렇게 주위 눈치나 살피고 있으니까 우리 세라핌들이 이 모양 이 꼴이지. 문제가 있으면 서로 고치려고 노력해야지 덮어두기만 한다고 해서 무슨 해결책이 되나! 우리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니까 덩달아 오 파님들의 사이까지 악화되잖아! 그렇게 12지파들끼리 치고 박고 싸워봐야 좋아하는건 비숍 뿐이라고! " " 자자. 거기까지만 하세요. 쉐인의 말이 정론이라는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으니까요. " " 그렇게 실실거리면서 알기는 뭘 알아! " " 하지만 그 이상 하게 되면 분명 울리게 될 겁니다? " " 뭐? " " ……거기 옆에 있는 아가씨. " 쟌의 지적에 쉐인은 뜨끔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안색을 살피는 수정이 있었다. 그제야 쉐인은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역시 어린아이 앞에서 계속 할 얘기는 아니로군……. " 수정아. 저기서 실험실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라. 나는 잠시 이분들과 할 얘기가 있다. " 유다의 말에 수정은 머뭇거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인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자신이 유다의 곁에 있어봐야 신경만 쓰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후의 이야기 는 아포스톨로스들 사이의 얘기가 될 터이니 자신은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 았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구경이나 확실히 해보도록 할까? " 와. 정말 크네. " 수정은 유리관 안에 들어있는 검은 물체를 바라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아마 저 검은 물체가 기가스 티폰일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유다가 들어오기 전에 그런 옛날 얘기들을 해줬을 리가 없다. ' 하지만 거인이라고 해도……저것의 어디가 거인이라는 거야? ' 유리관의 티폰은 그저 검은 금속덩어리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인간의 형상 도 갖추지 못한, 어떻게 보면 심장같기도 한 모습. 그렇게 뚫어져라 티폰을 응시하던 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사 실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어딘가 무서워졌던 것이다. 마치 그 검은 쇳덩어리 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아서. 보이지 않는 입으로 말 을 걸어오는 것 같아서. 우우우우우 쇳덩어리의 신음소리에 유리관이 희미하게 진동했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수정은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유리관 맞은편에도 또 하나의 실험실이 있다는 것 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거기뿐만이 아니다. 이제 보니 그녀와 일행이 있는 실험실은 유리벽의 한 귀퉁이에 불과했다. 티 폰을 유리관이 감싼게 아니라 실험실이 유리관으로 감싸여 거인을 볼 수 있게 끔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총 다섯 개의 실험실이 티폰을 에워싸고 있다. 수정은 실험실의 측면에 바싹 붙어서 유리관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자 불투 명한 PET용액 사이로 반대편 실험실의 윤곽이 보여온다. 그리고 수정은 그 반 대편의 실험실에서도 자신과 똑같이 이쪽을 엿보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막 다섯살 정도 되었을까? 아이는 수정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 정은 영문도 모른채 마주 손을 흔들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 누구지? 저 아이는? " " 닥터 웰리스의 손녀로군요. " 수정은 갑작스레 들려온 대답에 움찔 몸을 떨었다. 어느새인가 그녀의 뒤쪽 으로는 쟌과 쉐인, 유다가 다가와 있었다. 얘기는 벌써 다 끝낸 건가? " 자신의 손녀를 실험실에 데려오다니. 그야말로 무사태평이로군! 그렇게 실험에 성공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 쟌의 말에 쉐인은 못말린다는듯 혀를 찼다. 수정은 그들의 말에서 이번 실험 을 주도하는 사람이 닥터 웰리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궤도 엘 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도 유다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던 것 같다. " 그나저나 닥터 웰리스의 손녀가 확실하다면, 저쪽이 메인 래버러토리(Main laboratory)겠군. 어쩐지 여기에는 스태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 어. " " 음. 그렇다면 직접 현장을 볼 수는 없는 건가요? 이거, 유감인데요. " 쉐인과 쟌의 말에 유다는 잠자코 유리관 너머의 실험실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조용하게 중얼거린다. " 도착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들이. " 우우우우우 그와 동시에 유리관의 티폰이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음을 터뜨리 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환성에 가까웠다. 이 눈 앞의 검은 물체는 지금, 메인 래버러토리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향해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고 있 었던 것이다. 《환영합니다, 세라핌의 검들이여!》 순간 실험실의 유리관 위로 한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덟번째의 검 타데오와 열두번째의 검 유다를 비롯해 세라핌 내에서도 가 장 최연소로 플러벨럼을 획득한 사도. 바로 아포스톨로스 야고보, 이네스 라 비에르의 영상이었다. 비숍과 오파님들에게 기가스 티폰의 연구를 허락받은 실력자!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듯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 합니다. 아포스톨로스 필립보, 아포스톨로스 마태오, 아포스톨로스 이스가 리옷 유다.》 " 사명을 받지 못한 한가한 사도로서 참석한 것 뿐이니 너무 고마워하지 마 시게나, 야고보. " 쉐인은 코웃음을 치며 이네스의 말을 비꼬았다. 그 모습에 쟌은 못말린다는 듯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저 불같은 성미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아? 하지만 이네스는 쉐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미소지었다. 《후후. 아포스톨로스 필립보는 제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군요. 알 겠습니다. 그렇다면 허례허식 없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스크린에서는 티폰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떠올랐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LA의 지하 공동, 에트나에서 기가스 티폰이 발굴된 것은 2003년도의 일입니다. 당시에 발굴된 티폰은 그저 단순한 암석덩어 리에 불과했으며 조금도 기가스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에트나의 오리하르콘 광산이 그 가치를 더 인정 받았죠. 그렇게 잊혀져가던 티폰의 연구가 다시 속행된 것은, 2005년도 케루빔의 오파니엘, 닥터 웰리스가 오리하르콘 제련법을 발견하면서부터였습니다. 아, 여기서부터는 그때의 당사자가 직접 설명해주는 편이 낫겠군요.》 이네스가 설명을 떠넘긴 상대는 부시시한 금발을 늘어뜨린 한 중년의 여인 이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돋보기를 쓴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하며 스크린 앞으로 나왔다. 《케루빔의 노엘 웰리스입니다. 2003년도 에트나 탐사대의 일원이었으며, 그때의 경력을 인정받아 이렇듯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단 이 자리를 빌어 선처를 해주신 상급 3대의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 니다.》 《흥. 어울리지 않는 겸손은 그만 떠시지, 닥터 웰리스.》 그때 스크린의 반대편 창이 열리며 한 연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깡마른 체구에 창백한 낯빛의 동양인. 노엘 웰리스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행이 보기에도 그녀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 다. 무엇보다 케루빔의 오파니엘을 대놓고 비꼬다니? 유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쟌에게 물었다. "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 " 케루빔의 삼대의원 중 하나인 라크비엘(Rikbiel), 닥터 챙입니다. 오파 니엘, 닥터 웰리스와 더불어 몇 안되는 오리하르콘 제련이 가능한 스멜 팅 마스터죠. 하지만 실력은 어디까지나 닥터 웰리스의 공식을 응용하는 수준이라서 학회에서는 줄곧 그녀와 비교당해왔던 모양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야고보의 초대를 받아왔군요. " " 이인자의 질투라는 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혈기왕성한 노인네로군. " 쟌의 설명에 쉐인이 그 큰 덩치를 움츠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에 수정은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린다. 스크린에서는 한창 닥터 웰리스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닥터 챙을 상대하 고 있었다. 《닥터 챙,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 것이 그렇게도 불 만입니까?》 《하! 불만입니까? 잘도 말해주는군! 그래. 불만이라면 불만이지. 같은 스 멜팅 마스터로서 내가 아닌 당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순전히 요피엘 의 장의 농간이야! 당신이 의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이번 연구 자리를 따냈다는 것은 케루빔 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런 일방적인 인사가 가능할 것 같은가!》 《……같은 스멜팅 마스터? 지금 나와 당신이 같다고 했나요? 지금?》 노엘은 터무니 없다는듯 실소를 흘렸다. 《내가 던져준 공식을 조금 이해한 것 가지고서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시는 군요. 그렇다면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오리하르콘이란 무엇이며, 왜 세계 각지의 가이아에만 존재하는 것인지, 또 원래의 쓰임새란 무엇이었는지. 당신이 그토록 자부하는 스멜팅 마스터의 견해에서 한 말씀 해보십시오, 닥터 챙.》 《……크. 그건,》 《물론 현상에 급급해온 당신이 본질을 헤아렸다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대답하려 애쓰지 마시길.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 기서 잠자코 구경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보여줄 오리하르콘의 진정한 제련을!》 《―!》 그 말에 닥터 챙은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 해지기를 반복, 결국 수치심을 견 디지 못하고 스크린창을 꺼버렸다. 그 모습에 모두들 닥터 웰리스를 못말린 다는듯 바라본다. 이런 식으로 케루빔의 실력자를 적으로 돌리다니, 너무 경솔한 행동이지 않 은가? 하지만 정작 노엘 본인은 조금도 개념치 않았는지 태평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우를 욕 보이는 사람까지 배려해줄 정도로 자비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흠! 얘기가 좀 빗나갔지만. 어쨌든 방금전의 대화로 이야기의 갈피는 잡 혀졌군요. 닥터 챙에게 말했다시피 이번 실험의 요지는 오리하르콘의 진 정한 제련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몇몇분들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군요. 티폰과 오리하르 콘의 제련에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느냐고. 하지만 상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티폰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바로 이 오리하르콘이 니까요.》 유다 일행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티폰의 구성물질이 오리하르콘이라고? " 티폰은 기가스, 가이아가 만든 거인입니다. 그런데 금속이라니……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 쟌의 질문에 노엘은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마치 그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 다렸다는 것처럼. 《구성물질이 금속이라고 해서 생물이지 말라는 법은 없죠. 기가스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던 영장류. 굳이 이름을 붙 이자면 살아있는 금속, 금속생명체였으니까요. 지구의 외핵이자 중력을 발생시키는 오리하르콘. 그 세계의 양수(羊水) 속 에서 태어난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기간테스, 가이아의 자식들이라는 이름 에 어울리지 않나요?》 " 그렇다면, " 유다와 두 명의 아포스톨로스들은 나지막히 신음했다. 기가스 티폰의 발굴. 그 뒤를 잇는 오리하르콘의 제련, 케루빔의 연구.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 으로 진행되었던 프로젝트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고증대로 에트나의 지하 밑에서 찾아낸 티폰은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유전자의 염기 서열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스스로의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Intron부분에 돌연변이를 일 으킨 상태. 동면이었겠죠.》 " 동면? " 《예. 면역계를 과잉반응시킨 결과라고 해야할까. 면역이 스스로를 지키려 한 나머지 외계를 차단시키고 체내를 폐쇄 생태계화 한 거죠. 보통 일반 적인 생물체라면 이러한 변질에 대사가 불가능해져서 뇌나 내장이 괴사 했겠지만, 티폰은 앞서 말했다시피 살아있는 금속생명체였습니다. 그는 오리하르콘 특유의 정신 감응과 셀프 라이팅으로 이 불가능한 가사 상태 를 지속시켜왔던 거죠. 제가 발견한 오리하르콘 제련법도 실은 이러한 티폰을 해동시키는 과정 에서 얻게된 응용과학(applied science)에 불과합니다.》 일행은 새삼스레 놀란 눈으로 PET용액에 잠긴 티폰을 바라 보았다. 수천년, 아니. 어쩌면 수만년이라는 세월동안 연명해온 이종 생명체라니. 그 경이적인 생명력 하나만으로도 기가스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 었다. 인간을 초월하고 있다! 저러한 생명체가 진정 본래의 모습을 찾게된다면, 그때는 얼마나 강해질 것 인가?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차마……상상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닥터 웰리스.》 노엘이 물러나자 다음은 이네스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노엘이 담당한 티폰의 발굴과 해동 과정이 프로젝트의 초석이었다면, 이네스 가 담당한 이후의 과정은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지금부터의 설명이 진정한 본론인 것이다. 《티폰을 해동시키는 와중에 케루빔에서는 오리하르콘을 이용한 수많은 실험 들이 행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저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오리하르 콘이 인간의 의지에 반응하는 정신 감응 금속, 이미지 메이킹을 사용하는 오라 능력자에게 최대의 상성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기가스에게는?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기가스라면 오라 능력자 와 정신 감응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서로의 의사를 교환하는 것이 가 능하지 않을까? 그러한 취지에서 저는 이번 피스메이커(Peacemaker) 프로젝트를 추진시켰 습니다. 성당 기사단이 보유하고 있던 세 명의 오라 능력자들을 인수받아 티폰과 교감시켜보았죠.》 거기서 이네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 뒤는 개인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대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실패였습니다. 티폰과 교감한 오라 능력자들은 하나 같이 정신이 붕괴되어 능력을 잃어버렸죠. 교감은 가능했지만 기가스 의 카르마 에너지를 영체가 견뎌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라 능력자가 아무리 영체의 힘을 증폭시켜 아스트랄 바디를 강화시킨다 고 한들, 정작 물질계의 육신은 나약하기 짝이 없었으니. 감당못할 카르마의 파도가 기존의 카르마 에너지들을 삼켜버렸던 거죠.》 그러고 보니 아포스톨로스 야고보의 연구가 2년 전에 한번 중단되었던 일이 있었다. 위의 실패는 아마도 그 시기에 벌어졌던 일이리라. " ……? " 그때 유다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수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손뿐만 아니라 안색까지 창백해진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스 크린의 이네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다는 수정의 손을 힘껏 잡아주며 재차 이네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전 내내 고민했습니다. 과연 티폰의 교감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자는 존 재하지 않는 것인가? 애초에 인간이 기가스와 의사를 나누겠다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었을까? 만약 전자라면 연구를 계속할 명분이라도 있었겠지만, 후자는 그것도 아 닙니다. 당장에 연구를 폐기해야만 했죠.》 하지만, 《그러던 차에……저는 제 연구에 전환을 맞이할 새로운 조력자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네스는 가늘게 눈을 뜨며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한 흑발의 미소년이 스크린의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이네스는 소년의 등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정스레 그의 귓가 에 밀어를 속삭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스크린의 모두를 향해 말했다. 《기가스 티폰과 동조한 오라 능력자. 코드 네임 피스 블랙(Peace Black), 한시영을 소개하겠습니다.》 Ｔo Ｂe Ｃontinued…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21권 (The Ascension)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Aura crops peacemaker) 第 24 話 showdown! (下) ================================================================================================================ 2020년 대재해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날. '이 아이가 배신자 한시영의 동생인가.' 실종되었던 것으로 여겨졌던 피스 블랙이 자신의 쌍둥이 동생 앞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줄곧 한시영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성당기사단은 당연히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고, 즉시 통일한국으로 그들의 이단심문관을 파견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끝난 뒤였다. 이단심문관이 한국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한시영에 의해 오라 능력자로 각성한 그의 쌍둥이 동생뿐이었고, 그 동생마저도 무리한 각성의 휴우증으로 폐인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아무리 봐도 여자인데? 분명 기록상으로는 ......' '오라의 2차 각성으로 인한 육체적 변이 같습니다. 특이한 케이스지만 강해진 오라 능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육체가 스스로 최적의 상태를 꾀한 거죠. 정신이 육체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정신을 따라가는 이 역천 현상은 아무래도 패턴 블랙의 영적 인력에서 기인한 것 같습니다.' '오라 능력을 활성화 시키기 위해 남성의 육체가 여성으로 바뀌었다고?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 건가?' '대상자의 오라 능력 때문입니다. 대상자의 오라 패턴 옐로우는 음파를 매개체로 삼은 구현화 능력, 그 능력을 이상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물질계와 아스트릴계 사이의 인력이 강할수록 좋습니다. 노래라는 것은 구조상으로는 물질 계에 잔류하는 음파의 조합이지만, 그 음파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스트릴계의 연체입니다. 소립자 와프가 물질계와 아스트릴계 사이에서 나선운동을 하는 것처럼, 이 음파도 같은 스파릴래 구조로 순환운동을 하여 물질계와 아스트랄계 사이에 피드백을 형성시키는 거죠. 따라서 아스트랄계의 아스트랄 바디와 물질꼐의 피지컬 바디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길수록 그 화음은 카오스의 영역에 들어서게 됩니다. 존재의 법칙을 뛰어넘게 되는 거죠.' '영체와 육체의 구성이 상극이 될수록 인력도 강해진다는 거군.' '예, 남자의 영혼에 여자의 육신, 카스트라토(castrato)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음파의 피드백인 것입니다. 그때문에 중세 사톨릭 교회에서는 비공식으로 성가대의 아이들을 거세시키는 일이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카스트라토가 된 아이들이 천상의 목소리를 낸다는 얘기도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패턴 옐로우야말로 인위적인 카스트라토가 아닌 진정한 가이아의 목소리, 갓 보이스(God Voice)로군!' 패턴 옐로우의 오라 능력자 한시민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성당기사단의 이단심문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패턴 그레이의 소유자 브루스 류와 패턴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 패턴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 패턴 그린 정진우와 함께 아포스톨로스 유다가 이끄는 제12성기사단 피스메이커의 일원이 되었다. '복수하고 말겠어!' 코드네임 피스옐로우를 임명받은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배반한 형에게 복수할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진해서 피스메이커의 개발실험에 참여했고, 동시에 끊임없는 전투훈련도 병행해왔다. 그런 시민의 힘에 대한 집착은 편집증에 가까웠기에 그녀는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피스 대원들의 톱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음파를 사용했던 최초의 오라 능력자.' 최초의 13인 중 하나였던 흑성모 막달라가 남긴 암흑의 노래 '흑성가'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였다. 라아아아아아 깊고 낮은, 그러면서도 음울한 음조가 옴팔로스의 신전에 울려 퍼졌다. 하늘을 밝히던 붉은 하늘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갔고, 그 어둠을 중심으로 지상의 거신상들이 검게 물들어간다. 화륵 이변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횅하니 뚫린 거신상들의 동공 속에서 검은 불길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들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늘어지더니 천천히, 하지만 결코 느리지 않게 신전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한다. "마, 마스터." 피스 카민 마유빈은 그것을 불안한 눈초리로 응시하다가 신음처럼 자신의 주인을 불렀다. 그는 이 눈앞의 조화가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스 옐로우가 사용하는 흑성가는 영체 자체를 음파로 현혹시키는 노래였던 것이다. 물질계의 생명체라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암시! 그 암시의 절대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몸소체험해 본 바가 있었다. "이건 대체....!"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는 다가오는 검은 불길에 수중의 초고진동 커터를 휘둘렀다. 그러나 불길에 덯은 초고진동 커터는 부지불식간에 불꽃의 어둠으로 물들어갔고, 당황한 류바는 오라 소드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차가움을 유지하던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떨리는 순간이었다. 검은 불꽃에 비친 그림자에서 수십개의 손들이 뻗어나왔다. 그것은 사자의 손이었다. 산 자를 나락으로 끌어들이려는 죽은 자들의 포박! 유황 냄새를 풍기는 손들은 점점 그 수를 불려갔고, 이내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크!" 무영신풍류의 배신자 황유평은 푸른 귀기를 발하는 후츠노미타마를 움켜쥔 채 다가오는 어둠을 경계했다. 생각같아서는 예전에 흑성가에 농락당했던 것을 되갚아 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어둠의 파도를 의식하는 것부터가 그가 흑성가의 암시에 걸렸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 뒷거음치던 일행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들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 그 그림자로부터 흘러나온 손들이 일행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 저편에 있던 손들도 일제히 유빈과 류바, 유평의 전신을 옭아맨다.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유빈은 기겁하며 양손을 내저었다. 육체를 거치지 않은 죽음의 감각은 순식간에 영체를 공황상태로 빠뜨렸다. 그 앞에서는 이성이나 본능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는 패턴 카민의 오라 능력조차 무용지물이다. 마인드 브레이커인 유빈이 이런 지경이니 류바와 유평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무력은 좌절로, 좌절은 체념으로, 체념은 절망으로....... 그들에게 있어 흑성가의 암시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겄도 없었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피스 블랙 한시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하들을 타일렀다. 그는 흑성가의 암흑에 뒤덮여가면서도 별다른 동요 없이 어둠 저편의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암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본인, 시영의 하나 뿐인 동생인 피스 옐로우 한시민을. '시민아, 노래 불러 줘.' 시영은 예전에 동생의 무릎을 베고 누워 동생이 불러 주던 너서리라임에 귀를 기울였던 자신을 떠울렸다. 노래 불러 달라고 어라광을 부리던 형과 어쩔 수 없다는 듯 쑥스러워하면서도 노래하던 동생. 그 정답던 과거의 향수가 떠오르자 시영을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렇기에 그때와는 너무나 달라진 동생을 아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 흑성가를 노래하던 시민은, 그런 시영의 눈초리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치 자신을 동정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랑한다며 속삭이는 듯한 그 눈과 마주하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째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지? 어째서? 어째서 네놈은 이 순간까지!' 바라보지마! 그만둬 ! '더 이상 날 혼란스럽게 만들지 마!' 시민은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더더욱 노래에 전념했다. 더 이상 시영의 존재에 동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인생을 빼앗았을 때 그녀가 사랑했던 그도 그녀 안에서 죽어버렸다. 그녀의 삶을 누구보다도 아껴 주던 그는, 그녀의 노래를 사랑해 주던 그는, 그녀가 가장 사랑해마지않던 형은! '시민아, 우리 형제는 축복받았어. 그러니까......' 닥쳐! 닥쳐! 닥쳐! 한순간 시민의 핏빛 안광이 촉사되며 암흑이 그녀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그녀의 검은 입술이 격력하게 움직이자 노래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동시에 암흑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탐욕스럽게 시영 일행을 집어삼켰다. '끝이다. 한시영!' 노래가 시작될 때 아스트랄계로 도망치지 않은 네 자만을 원망해라. 물질계에서 흑성가를 피할 수 있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아! 너와의 지긋지긋한 악연도! 그날 이후로 키워온 내원한도! '이제는....!' 시민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갔다. 하지만 그년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암흑에 가라앉는 시영을 노려보기만 했다. 어느 새인가 그녀의 입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루를 소중히 해야 돼. 알겠니?' 시영은 사라져가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웃고 있었다. 시민에게 미소하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그때의 미소와 흡사했기에. 그때의 형 그자체였기에! '그런건.... 형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 시민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기억 속의 대답을 속삭였다. 그러자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언더 시티의 메카닉센터. "현 대피상황을 보고하세요." 현재 작전본부실에서 유레카의 모든 제어권을 넘겨받은 이곳은 제2의 사령부로 기능하고 있었다. 한국지부의 부사령관인 민수정은 오퍼레이터팀 치프 윤채영과 기슬부 치프 시더 웰리스를 필두로 신속히 대원들을 대피시켰다. "기술부 대원들은 100퍼센트 대피 완료. 메디컬 센터의 의료부는 현 70퍼센트까지 대피완료했습니다. 그 외에도 메인 센터의 대원들이 25퍼센트 대피완료. 오퍼레이터팀은 진 사령관님과 메디컬 센터의 쉘토로 이동 중입니다." 채영은 수정에게 보고하면서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말꼬리가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퍼레이터팀 삼인방을 비롯해 문세희와 나머지 오퍼레이터들 모두가 단 한 사람도 쉘터로 몸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부하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있으니 애간장이 타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초조해하는 채영의 모습에 수정이 한탄했다. "역시 메인 센터의 기능이 마비된 탓이 크군요. 하다못해 궤도 엘리베이터라도 작동하고 있었으면....." 하지만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만약 팔라딘대가 궤도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메인 센터의 모든 이동기구들을 파괴시키지 않았더라면 대번에 시폰 뤼멘과 그의 수하들이 작전본부실로 들이닥쳤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 사령관과 오퍼레이터들은 즉시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겠지...... '팔라딘대가 엘리베이터를 부순 것은 시기적절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판단이 진 사령관님과 모두를 고립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수정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메인 스크린의 내부투시도를 바라보았다. 메인 센터의 진 사령관 일행은 이미 작전본부실을 떠난 뒤였다. 그 이후로는 연락두절. 물런 대원들에게 지급된 손목무전기는 실시간 위치추적이 가능하기에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빠른 속도로 메인 센터를 올라오는 시폰 뤼멘과 양산형 오라 능력자들의 모습에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시폰 뤼멘이 진 사령관을 따라잡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제발 아무런 일도 없기를!' 수정은 당장이라도 진 사령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팔라딘대의 상황은?" "현재 주둔지와 메디컬 센터의 가드들을 제외하면 모두 젼멸....인 것같습니다." "Oh,My holy god....." 채영의 보고에 시더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신음했다. 그많던 팔라딘 대원들이 수십 명만 남은 채 전멸이라니! 지금까지 간접적으로 전황을 살피기만 하던 그녀들은 사실 지구방위군의 습격을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팔라딘대의 전멸 소식에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너무해. 어째서...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어째서?" 피스 핑크 이유리는 자신들을 습격한 지구방위군에게 원망 어린 목소리를 토했다. 그녀는 수정과 채영, 시더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 없잖아?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저! 그저 모두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뿐인데....! 다들 바보같이 착해빠진 것뿐인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점점 높아져갔다. 유리는 짙은 분노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이런 건 인정할 수 없어!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꺼야! 절대로!" "....." 그 독기 어린 모습에 채영과 시더는 할 말을 잊었다. 가인이나 동료 피스 대원들의 일 외에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던 유리가 이 정도로 타인의 일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나. 아니, 그만큼 그녀에게도 피스메이커란 공동체는 의미가 컸던 것이리라. 수정은 침울해진 눈으로 유리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용서해서는 안 돼요. 유리양.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많은 수의 대원을 도망가게 하는 거에요. 한시라도 빨리 더 많은 대원들을 구해내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에요." "하지만...!" 유리는 대번에 수정의 말을 반박했다. 도망이라니! 왜 우리가 그런 일 밖에 할 수 없단 말인가? "왜 싸워 볼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 먼저 저쪽에서 쳐들어 왔어. 먼저 저들이 죽이기 시작한거야. 그러니 똑같은 꼴을 당해도 할말이 없다고! 그런데 왜...!" "그래서 모두 다 죽으라고요?" 수정은 차갑게 유리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 목소리와 표정이 얼마나 냉소적이었는지 유리를 비롯해 채영과 시더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고 말았다.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평소와 같은 웃음과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유리 양의 말대로 여기서 저들과 싸운다고 치죠. 결과는 우리의 전멸이에요. 비전투원들은 남김없이 사살당할 테고, 전투가 가능한 피스대원들도 결코 무사하진 못하겠죠. 행여 살아남는다 해도 우리에게 남는 것은 피로 물든 손밖에 없을거에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죠? 제가 저들이라면 그런 우리르 보고 비웃겠어요. 몬스터로부터 인류를 지키겠다던 녀석들이 결국엔 같은 인류에게도 칼을 들이대는구나.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들이야. 르고 말이죠. 우리가 지금껏 해온 일들은 모든 의미를 잃고 진흝탕 속에 빠질 거에요. 그런 진흙탕 싸움이야말로 저들이 원하는 일이겠죠. 한껏 놀아나는 거예요." "....." 채영과 시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유리는 여전히 고집을 꺽지 않고 수정을 노려보았다. 수정은 그런 소녀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넘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살아남는게 가장 중요해요. 살아남으면 기회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어요. 아니, 혹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죠. 앞으로 기회 같은 것은 영영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하지만....이대로 죽어버린다면 그 기회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않겠어요?" 그거야 말로 자포자기, 패배라고. 수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유리는 억울함과 답답함에 차마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뜰어뜨렸다. 수정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말은 언뜻 감상적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자리의 어느 누구보다도 냉정한 것이었다. 유리가 내심 그녀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거부감을 느꼇던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채영과 시더는 질린 표정으로 서로 속삭임을 주고받았다. "완전히 진 사령관 판박이네. 판박이." "평소 보살 같은 사람이 왜 사령관과 붙어 다니나 했더니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어머, 거기 두분. 대피자 수는 확실히 세고 있겠죠? 쉘터 안의 ID카드 체커와 실제 대피인원수가 다를 수도 있으니 무전기의 위치추적도 입ㅈ지 말고 하도록 하세요. 오차가 나는 건 순전히 여러분의 책임이니까." 그 속삭임이 들렸던 걸까? 수정은 언제 진지했냐는 듯 생긋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다만 그 명령이 어딘가 고압적으로 들린 것은 순잔히 그녀들의 기분 탓이겠지만. "....아" 그때 대피자들의 오차 수를 확인하던 채영의 눈에 알 수 없는 반응들이 목격됐다. 수정의 명령대로 그녀는 쉘터 안에 체크된 대원들의 인식 넘버와 그들이 찬 속목무전기의 위치추적을 서로 비교하고 있었다. 행여나 ID체크가 된 대원들 중 아직 쉘터 안으로 피신 못한 대원들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워들의 위치를 추적하던 중, '그'반응들이 목격되었다. 쉘터 안으로 피신한 대원들의 위치뿐만 아니라 언더 시티에 잔류한 모든 대원들의 위치가 스크린에 표시되던 중 있을 수 없는 인원의 대이동이 있었다. "이건 뭐지?" 채영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는 인원의 대이동. 그것은바로... "무슨 일인가요, 채영씨?" 채영의 기색이 이상해지자 수정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채영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뒤에 물러나 있던 유리와 시더도 채영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모두가 바라본 스크린의 내부투시도에는 수많은 대원들의 위치가 빽빽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 위치들은 마치 일련의 행진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리를 가득 메우며 천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우리가 인상을 찡그리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스크린에서 별다른 이상을 발견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정과 시더의 표정마저 채영과 비슷하게 굳어있자 다시 스크린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곧 그녀 역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해냈다. '너무...많어...' 그렇다. 언더 시티의 내부투시도에 떠오른 대원들의 위치표시들, 그 위치표시들 중 움직이는 수가 너무나 많았다. 적게 잡아도 300명? 아니, 점점 움직이는 수가 많아졌다. 멈춰 있던 위치표시들이 하나둘씩 움직여 거리의 행렬속으로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멈춰 있던 표시들도 움직인다고?'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깨달은 유리는 다급히 수정을 돌아보았다. 수정은 뭔가 감을 잡았는지 노기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까지 우릴 농락할 셈인 거지, 네 녀석들은 ....." 곧 스크린의 내부투시도 위로 위치가 표시된 대원들의 신상명세가 떠올랐다. 그것을 바라보던 시더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 거린다. 거리를 활보하는 대원들의 위치표시들 그것은 다름아닌 ".....Paladin?" 사망된 것으로 판명된 팔라딘 대원들이었던 것이다. 크륵 크르르 크르르르 언더 시티의 거리에서는 수많은 짐승들의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짐승의 울음이 아니었다. 엄연히 사람, 아니 한때는 사람이었던 이들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하얀 전투복의 군인들. 그들은 바로 언더 시티를 지구방위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분투한 필라딘 대원들이었다. 피 흘리며 죽어간 피스메이커의 순교자들. 하지만 그 순교자들은 안식을 얻지 못했다. 죽어버린 육체는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고, 죽어버린 정신은 정체성을 잃은 꼭두가시가 되어 있었다. 리빙 언데드! 죽었음에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았음에도 산게 아닌 상태. 영광스런 성기사들은 생전의 영광을 빼앗긴 채 타락의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크르르르르르르 어둠의 교리를 강매한 이단자의 사제,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그런 죽은 자들의 행렬 앞에서 걷고 있었다. 그녀의 두를 따르는 팔라딘대의 시체들은 모두 그녀에게 종속된 사이코포모스들이었다. 네이 안데르슨으로부터 계씅받은 능력, 블르디 인펙션으로 만들어낸 구울. 살아있는 사람을 흡혈했더라면 좀 더 수즌 있는 뱀파이어 종을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가는 길목에 널려 있던 것은 죽은 자들뿐이었다. 죽은 자들을 사이코포모스로 만들어 봐야 지능도 없고 본능만 남은 식인귀가 될 뿐이지만..... "뭐,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어차피 혈족을 늘일 생각이 아닌 이상 단순한 일회용으로는 그만인 녀석들이다. 애초에 에르체베트가 흡혈한 사이코포모스는 처음의 하 소령밖에 없었다. 그 하 소령이 죽은 팔라딘 대원의 시체를 흡혈했고, 그 흡혈된 시체는 구울이 되어 다른 시체들을 흡혈했다. 또 그렇게 살아난 시체들은 다른 시체들을 흡혈하고, 그런 일들을 몇 차례 반복한 결과 지금과 같은 대군이 탄생되었다. 이만큼 효율이 좋은 병사들도 드문 것이다. 인간보다 월등한 공격력과 생명력, 거기다 무한한 번식력이라니! '..... 무한한 번식력은 아니려나? 어차피 블러디 인펙션으로 활성화 된 육체는 마스터와 연결되지 않는 이상 자연 소멸하니까.' 그것은 혈족과 일회용품의 차이. 하지만 굳이 여기서 언급할 얘기는 아니다. "자 여러분! 준비는 되셨나요?" 에르체베트는 자신의 뒤에서 점점 증식하는 죽은 자들의 군대를 바라보며 ㅇ미소했다. "이제부터 스스로의 손으로 허물어뜨리도록 하세요." 당신들이 정성껏 쌓아올린 모래성을! 언더시티 유레카는 더이상 이치의 세계가 아니었다. 투타타타타타타 그나마 지구방위군과 팔라딘대의 교전은 상식의 범주 안에 속했다. 하지만 시폰 뤼멘을 위시한 여섯 명의 루미네선스가 살육을 자행하고, 블러디 노블맨의 혈족 에르체베트 바토리가 죽은 자들을 되살리면서부터 이곳은 기존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았다. 광기와 죽음에 휘둘리는 인외마경이 된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가지 마경에 물들지 않은 격전지가 하나 남아 있었다. 언더시티의 외곽에 위치한 팔라딘대의 주둔지. 옴팔로스와 연결된 궤도 엘리베이터를 수호하는 이 요새에서는 한창 성기사들이 밀려드는 침입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으앗" "ㅇ아아악!" 이곳 역시 언더 시티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비명과 폭음,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주둔지를 습격한 지구방위군 부대는 메인 센터로 향한 120명의 특임대 요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후방병력이었다. 그 전투력은 팔라딘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전투역량이 떨어지는 것은 주둔지의 팔라딘대 또한 마찬가지. 그들 역시 주 병력이 메인 센터의 방어를 위해 빠져나갔기에 나머지 병력들로 ㅅ주둔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전황에서 동떨어진 상황이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시폰 뤼멘과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눈 밖에 난 이 전장은 적어도 인간들의 싸움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정체된 교전 속에서 무의미한 소모전을 반복할 뿐이다. "컥!" 그러나 그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소모전도 비상식의 주체, 오라 능력자들이 나타남으로써 종말을 고해야 했다. 피스 레드 성마리와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 지상과 연결된 궤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이 두명의 무영신풍류 검사들은 빠른속도로 지구방위군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타타타타타타 지구방위군의 병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수중의 라이플을 발포했다. 그러나 상식의 무기는 비상식의 존재 앞에 무력했다. 주황색의 AI슈츠를 입은 남자 코마히코는 간단하게 오라 쉴드를 전개하여 자신에게 날아드는 모든 탄환들을 막아낸다. "흡!" 코마히코는 등뒤의 도츠카노츠루기를 발도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며 접근전을 펼쳤다. 그는 AI부츠의 힘을 이용해 표범처럼 병사들에게 돌진하다가 크게 몸을 휘돌리며 다섯 번의 돌려차기를 펼쳤다. 동작이 크고 힘이 분산된 돌려차기였기에 큰 위력을 없어 보였지만 그것은 오산! 퍼퍼퍼퍼퍼퍽 AI부츠의 각력이 더해진 돌려차기는 더없이 무시무시한 대인기술로 변모해 발에 걸리는 모든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날려보냈다. 그야말로 인간팽이, AI슈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기술이었다. 그 태풍과도 같은 공세에 휘말린 여섯 명의 병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수십미터를 날아가 떨어진다. "마, 말도 안돼!!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총알도 통하지 않고 덤으로 무시무시한 괴력까지 자랑하는 코마히코의 모습에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쳤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붉은색의 검날이 그리는 쾌곡선이었다. 마치 허공에 수를 놓느 것처럼 패턴 레드의 반물질 적삭성 커터가 병사들 사이를 누비며 지나간다. 촤촤촤촤촤 그렇게 붉은 돌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색하게 빈손을 들고 있는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던 라이플들은 하나같이 두 조각이 나서 땅바닥을 뒹굴고 있다. "....어?" 하지만 그뿐이었다. 베어진 것은 그들의 무기뿐이고, 정작 무기를 들고 있던 병사들은 털끌만큼도 다친 곳이 없었다. 두눈을 질끈 감고 죽음ㅇ르 기다리던 병사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무사함을 깨닫고 하나둘씩 눈을 뜨기 시작한다. "투항하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그때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병사들 뒤편에서 울려 퍼졌다. 모두가 돌아본 그 곳에는 등을 돌린채 붉은 색의 검을 갈무리하는 한 AI슈츠의 여성이 있었다. 놀라운 신기로 병사들을 무장해제시킨 장본인, 피스 레드 성마리였다. 그녀는 절삭성 커터를 해ㅈ한 오라 소드를 가볍게 수중에서 돌리다가 어깨 갑주에 집어넣고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등 뒤의 병사들을 향해 낮게 고했다. "아니면 이대로 계속 겨뤄볼텐가?" "...." 마리의 질문에 무장해제된 병사들은 일제히 양손을 드는 것으로 답변했다.그 모습에 코마히코는 쓴웃음 지으며 마리에게 다가왔다. "무기만을 베어내시다니. 검로가 더욱 섬세해 지셨군요. 일취를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그는 무기만을 베어내는 마리으 ㅣ실력에 감탄했다. 코마히코 역시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난전 속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활검을 마리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문에 그는 도츠카노츠루기를 봉인하고 굳이 익숙하지도 않은 육탄전을 펼쳤다. 하지만 마리는 단호하게 코마히코의 찬사를 사양했다. "축하받을 일이 아닙니다. 저는 몸통째 베어냈던 것이니" "....." 코마히코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몸통째 베어냈다고? "이미지 메이킹으로 그저 병사들의 라이플만 노렸던 것 뿐입니다. 오라 능력은 어디까지나 의지의 힘, 병사들에게 피해를 주지않고 공격대상을 한정짓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아...." 마리의 무뚝뚝한 설명에 코마히코는 작게 탄성을 울렸다. 작년에 마리가 쿠사나기의 술수에 빠져 융합형 몬스터로 변했을 때, 유가인이 마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몬스터만을 검으로 베어낸 일이 생각난 것이다 '과연! 오라로는 그런 일마저 가능하단 말이군' 마리는 코마히코의 찬사를 거절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여겼다. 공격대상을 한정짓는 오라 능력의 컨트롤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코마히코 자신도 그런 재주가 불가능했기에 맨손으로 싸운 것이 아닌가? '그나저나...' 코마히코는 조심스레 마리의 안새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아가씨의 심기가 좋지 않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군.' 계속 겨뤄 볼텐갈라느니, 몸통째 베어냈다느니, 아까부터 줄곧 무뚝뚝하게 구는 것이 보통 살벌한게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는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같다. 코마히코는 짐짓 그것을 모르는 척 말문을 열었다. "뭐 여기는 이정도면 되었군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 그 말에 마리는 조용히 뒤편을 돌아보았다. 돌아본 그곳에는 그녀와 코마히코가 만들어낸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팔라딘대의 주둔지를 공격하던 지구방위군들은 방금 전의 병사들을 마지막으로 모두 기절하거나 투항하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며 뒹구는 쪽은 코마히코가 맡은 병사들. 팔라딘대에 의해 연행되고 있는 쪽은 마리가 맡은 병사들. 그런 수많은 병사들 중에서 한 사람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그들의 실력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었다. 목숨을 노리는 적들을 상대로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것은 오라 능력자가 아니고는 해낼수 없는 일인 것이다. "아직입니다. 여기 외에도 난전을 벌이고 있는 곳은 많은 겁니다. 한시라도 빨리 도와주러 가지 않으면..." 마리는 무거운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코마히코는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혀를 찼다. 당장이라도 가인에게 달려가고 싶어 하는 것이 뻔히 보이거늘! 그것을 애써 눌러 참는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기란 말입니다!' 괜히 그런말을 했던가. 코마히코는 앞에서 했던 자신의 충고가 오히려 마리의 마음을 억누르는 결과가 된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는 그저 좀더 아가씨의 사정도 생각하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던 건데.... '하연간 사람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로군.' 코마히코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손목무전기를 마리에게 가리켰다. "일단 다시 수정씨와 연락해 보는 것이 좋겠군요. 부분 전력이 들어온 것으로 보아 언더 시티의 기능을 회복된 듯하니.... 그렇다면 지구방위군의 ECCM(대전자대책) 역시 무효화 되었을 테고, 어쩌면 다른 대원들의 소식도 접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그렇군요! 언더 시티에 들어와서 연락해 본다는 것을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어서 연락해 보세요!" 마리는 다른 대원들의 소식이라는 부분에서 금새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더였다. 코마히코는 속으로 ㅅ헛웃음을 삼켰다. 정말이지 아가씨는 생각하느 ㄴ거싱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군. 그런 점은 영락없이 사부님을 닮았단 말이야. '아니, 난 또 뭘 이런 걸로 흐뭇해 하는 거지?' 코마히코는 붉어지는 얼구을 감추며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그는 행여나 마리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까 두려워 차마 그녀를 마주하지 못하고 무전기를 작동시켰다. 삐삐삐삐 하지만 그보다 한발 먼저 무전기의 신호음이 울려 퍼진다. 막 무전기의 버튼에 손을 가져가던 코마히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리를 돌아보았다. "빠르군요." "....그렇군요." 마리역시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무전내용이 더 궁금했기에 손짓으로 코마히코를 재촉했다. 코마히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무전을 받았다. "피스!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입니다." <피스! 그쪽의 상황은 어떤가요, 피스 버밀리온?> 민수정이었다. 코마히코는 그녀의 무사함에 안도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주둔지를 습격하던 지구방위군은 모두 집압했습니다. 통신망이 재개된 것으로 보아 부사령관님쪽도 성공하신 모양이군요." <예. 유레카의 중추시스템을 탈환하면서 지하무선 재중계 시스템도 40퍼센트 가랑 복원시켰어요. 그랟 ㅗ아직 출력이 낮아 전파 불감 지역이 도처에 있을 테니 이 통신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들어오세요> 마지막? 수정의 그말에 코마히코의 안색이 굳어졌다. 어딘가 모르게 수정이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액정에 떠오른 그녀의 얼굴에서도 다급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안 좋은 겁니가?" <상황이 생각보다 안 좋게 돌아가고 있어요. 최악의 경우 유레카를 포기하고 몸을 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유레카를 포기한다니! 그게 무슨말씀이십니까, 수정씨!" 옆에서 무전내용을 듣고 있던 마리가 당황하며 반문했다. 액정의 수정은 그런 마리에게 눈길을 한번 주었다가 재차 말을 계속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마리양. 지금 저희들은 중추 시스템의 정보를 초기화하고 쉘터로 몸을 피할 생각이에요. 언더시티의 기능은 스탠드 어론 상태로 유지시킬테니 한도안 전력이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사이에 어려분도 주둔지의 팔라딘 대원들을 대피시켜 주세요.> "이대로 도망치란 말입니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모샇고!" 마리는 노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아직 가인과 다른 동료들이 어디 있는지도, 무슨일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건만! 그런 모두를 놔두고서 떠나라니! "난 절대로 그렇게 못해!" <저도 그렇게 하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또 그런 명령을 내릴 생각도 없고요> 수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뒷말을 덧붙었다. <....팔라딘 대원들의 대피가 끝나면 그 즉시 피스 레드와 피스 버밀리온은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옴팔로스로 향해 주세요. 이건 두 사람뿐만 아니라 언더 시티 내에 있는 모든 피스 대원들의 최우선 사항입니다> 옴팔로스?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주둔지의 궤도 엘리베이터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로서는 한 번도 내려가 본 적이 없지만 가인과 시민을 통해 그곳이 어떤장소인지는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테레이아ㅡ!' .... 그일이 있었던 장소인 것이다. 리리스가 자신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향하려 했던 장소. 몬스터들이 줄곧 노려왔던 비밀의 중심. 또 그것을 암묵해온 피스메이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저 세계의 밑바닥으로?' 마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왠지 저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두려웠다. 생리적인 혐오감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단순한 직감이라고 해야할까. 무엇보다 저곳으로 내려가 버리면 모든 것이 변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곳으로 갔다 온 후 가인과 유리는 머신 아더를 탈취하려는 등 피스메이커에 대한 반역행위를 저질렀고, 진우는 테레이라를 죽인 자책감에 괴로워하다가 라트 발렌시아와의 싸움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모든 불행들이 옴팔로스와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리에게는 옴팔로스의 탓인 것처럼 여겨졌다. 재앙의 원흉! 마리에게있어 옴팔로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장소일 뿐이다. "그곳에 가인씨가 있는 겁니까?" 그러나 마리의 생각은 코마히코가 수정에게 던진 질문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인이 또다시...내려갔다고? '저 기분 나쁜 지하 속으로?" <아마도요. 스틱스 광산의 초전도 현상이 패ㅓㄴ 블루의 위치탐색을 방해하는 것으로 봐서는 십중팔구, 또 패턴 옐로우의 위치탐색도 불가능한 것으로 봐서 시민씨 역시 옴팔로스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무엇보다....> 수정은 무겁게 뒷말을 이었다. <피스 블랙이 옴팔로스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는 또다시 가인 씨를 이용해 뭔가를 저지를 작정인 거예요.> "....!" 그말에 더이상의 주저함도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코마히코는 마리를 돌아보며 가늘게 미소했다. "아가씨, 이 밑에 가인 씨가 있습니다." 그는 예전에 옴팔로스가 리리스 건으로 들썩였을때 이 자리에 있지 못했다. 황유평의 일을 무영신풍류의 장로들과 논의하기 위해 잠시 언더 시티를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모두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어. 줄곧 그것이 마음에 걸려왔던 코마히코였다. 그리고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하체를 끌어안고 진우를 전송했던 마리 역시 마찬가지. "이번에는 늦지 말자고요. 반드시 제때 도착하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코마히코는 분명 언더 시티에 잔류하고 있었다. 마리도 모든 부상에서 회복되어 있었다. 그때와는 다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그때와는! "...예!" 마리는 힘차게 대답하며 궤도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ㄱㅆ다. 그 단호한 뒷모습에 코마히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피스레드와 피스 버밀리온, 부사령관님의 지시에 따라 옴팔로스로 출발하겠습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피스!" <피스! 행운을> "어째서 난 대기 중이라는 거야!" 막 코마히코와 교신을 끝낸 수정에게 성난 소녀의 항의가 들어왔다. 수정은 무전기를 끄며 담담한 눈으로 유리를 돌아보았다. "유리양." "나도 옴팔로스에 내려가겠어! 언더 시티 내에 있는 모든 피스 대원들의 최우선 사항이라며! 그런데 왜 나는 안된다는거야!" 유리와 수정의 목소리에 중추 시스템을 초기화시키던 채영과 시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수정은 작게 한숨을 쉬며 유리에게 말했다. "그럼묻겠어요, 유리양. 유리양이 옴팔로스에 내려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죠?" "그건....!" 유리는 말문이 막혔다. 막상 그렇게 물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리양의 패턴 핑크는 마인드 키핑, 사람의 마음에 개입하는 능력이죠. 어떻게 보면 현존하는 오라 패턴 중 가장 전능하다고도 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패턴 핑크는 가장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능력이기도 해요. 원래부터 보조계열로 개발된 탓에 패턴 카민과 같은 공격성도 없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정신장벽을 가진 오라 능력자에게는 물리접촉 없이는 개입할 수도 없다는 거에요. 아군의 오라 패턴과 싱크로하지 않을 시에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라는 거죠. 패턴 핑크는," 수정의 말은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객관적이었다. 시더와 채영은 시시각각 변해가는 유리의 안색에 식은땀을 흘렸다. 너,너무 심하게 말하는거 아닌가? 수정씨? "그런 유리양이 동행하는 능력자드도 없이 홀로 옴팔로스로 내려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저는 가뜩이나 적은 피스 대원들의 수를 더 이상 줄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유리 양의 패턴 핑크가 필요한 곳은 능력자들의 싸움보다는 비능력자들ㅇ과의 싸움이에요. 옴팔로스로 내려가서 괜히 목숨만 위협받을 바에는 차라리 우리와 동행하여 대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편이 효과적이라고요. 이정도면 유리 양을 대기시킨 이유가 설명되었나요?" "...." 유리는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떨었다.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분했는지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하지만 분명 수정이 한 말은 올항ㅆ다. 유리 자신이 단독으로 뛰어들어봤자 동료들의 발목만 붙잡을 뿐이다. 방해가 될게 뻔하다. '하지만....하지만...' 이래서는 그저 예전의 반복이잖아? 오빠가 윟머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못하느, 그저 무력하기만 한. '다짐했는데.... 다시는 오빠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오빠가 힘들어할때 반드시 오빠의 곁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다짐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역시 이룰 수 없는 소망이라느 ㄴ거야? 나에겐 그럴 기회조차 없다는 거야?' 유리는 필사적으로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아냈다. 필사적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움켜잡았다. '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 오빠에 대한 내 마음을 '이런식으로 포기하고 싶지 않아.' 오빠에 대한 내...... '...... 사랑을.' 그렇게 슬퍼하는 유리를 향해 수정은 조용히 마음속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유리양.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조금만더.' 기회는 올거에요. '모든 것이 끝나면...'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수정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며 대신 채영과 시더에게 물었다. "작업은 완료되었나요?" "아, 예. 시스템은 언더 시티의 기본적인 기능을 제외하고 완전히 초기화 시켰습니다." "시스템은 위그드라실을 통해 나중에라도 복원시킬 수 있으니까 Don't worry." "좋아요. 그럼 빨리 여기를 뜨도록 하죠. 꽤 위험한 인파들이 몰려들고 있으니까." 수정의 말에 새삼 채영과 시더는 창백해진 얼굴로 스크린을 주시했다. 스크린에서는 아까보다 늘어난 팔라딘대의 위치표시들이 메인 센터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나마 언더 시티의 감시카메라 영상들이 보이지 않기에 망정이지, 만약 보였더라면 음산한 지하거리를 활보하는 좀비의 대군을 볼 수 있었으리라. '제발 시간에 맞아야 할텐데.' 수정은 다급히 몸을 일으키는 시더와 채영을 독려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 유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요, 유리양.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말고 날 따라오도록해요. 그렇게 하면 아마도...." "....." "아마도 유리 양이 원하는 길도 열리게 될꺼에요." ".....?" 유리는 수정의 말에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원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니? 그러나 수정은 유리의 의문을 풀어 주지 않으며 그대로 메카닉 센터의 입구를 나섰다. "자, 우리는 이대로 메디컬 센터로 향합니다! 메디컬 센터에서 진 사령관님과 합류하는거예요!" 수정 일행이 메카닉 센터를 출발한 시각, 그녀들의 목적지로 삼은 메디컬 센터의 지하에서는 한창 쉘터로 대원들의 대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언더 시티의 다른 시설들과 달리 메디컬 센터는 오리하르콘 광산의 자체 동력으로 가동되는 유일한 건물이었기에 지구방위군의 전력차단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가능했다. "부상자를 우선으로 옮기도록하세요! 그다음이 병동의 환자들, 그 다음이 메인 센터의 대원들! 메디컬 센터의 의료진들은 가장 마지막에 대피합니다!"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 닥터는 부상자를 실은 의료진들을 먼저 쉘터로 들여보내며 뒤의 대피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지시에 발맞춰 메디컬 센터의 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몸을 움직인다. 지금 이곳은 메인센터에서 넘어온 수백명의 대원들과 부상당한 팔라딘 대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 덕분에 쉘터가 있는 지하공동은 전쟁난민소를 방불케 한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 불안에 떠는 목소리, 겁에 질린 목소리, 붉은색의 비상등 밑에는 모여든 대원들의 얼굴에서는 짙은 공포와 절망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나마 그런 혼란속에서도 누구하나 자산들의 대영을 이탈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었다. 피스메이커로서 인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자신들을 떳떳하게 여겼기에, 그지난날들을 후회하지 않기에 발휘할 수 있는 초연함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피스메이커로서 살겠다는 각오의 표명이다.이 자리의 대원 하나하나는 피스대원들처럼 직접 몬스터와 싸운 적은 없지만, 그들은 이미 훌륭한 피스메이커의 일원이었다. 닥터는 그런 대원들의 모습들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질 수야 없지. "닥터, 어디에 가시는거에요?" 닥터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쉘터의 대피를 돕던 간호사 하나가 그에게 소리쳤다. 닥터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병동을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쉘터에 오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ㅇㅆ을지도 모르고." "그런 위험한 일을! 언제 지구방위군이 올지도 모르는 판에! 병동을 도는 건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세요!" "여기의 대피만으로도 일손이 빠듯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에 인력을 낭비할 순 없지요. 또 특별히 제 지시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하지만!" 간호사의 목소리가 커지자 닥터는 주위의 이목이 모일까봐 재빨리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다른 사람들이 듣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 진 사령관님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상관의 마중이야말로 책임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 걱정은 말로 그대로 업무에 열중하도록 하세요. 모두의 대피가 끝나면 그대로 탈출하셔도 좋습니다." "닥터!" 그말을 끝으로 닥터가 메디컬 센터와 연결된 계단으로 올라가 버리자 간호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걱정스러운 누으로 그의 뒤를 바라볼 뿐이다. 부디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면서. '책임자가 해야할 일이라고? 정말이지 핑계치고는 지지부진하군.' 그러나 계단을 오르는 닥터의 표정은 짙은 자조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마치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듯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 개폐식 문을 자신의 ID 카드로 열었다. 그러자 사중으로 된 문이 열리며 황량한 메디컬 센터의 병동이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아무도 없군,' 닥터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다가 인적이 없을을 확인하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개인사무실에 향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지구방위군의 공세가 밀려들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런 의료시설은 그들의 관심밖이었다든가.' 목표는 메인 센터, 진 사령관이 있는 사령탑이었나보군. 하긴, 수뇌부를 제거하면 그 밑의 부속기관은 따라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닥터는 복도의 창밖으로 보이는 메인 센터의 상층부를 올려다보았다. 전력이 나가 한 점의 불빛도 들어오지 않는 메인 센터는 평소의 위용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이 꼭 피스메이커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 같아 닥터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결국 꽃이라는 것은 피고 지기 때문에 꽃인 것이다. "후우" 닥터는 자신의 사무실 앞에 당도하자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찾는 것은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그의 사무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액자. 그 액자를 들춰내자 작은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볼일이 있는 것은 금고가 아니었다. 닥터가 찾던 것은 금고를 덮고 있던 애자였던 것이다. 금고 안에는 그저 메디컬 센터의 업무를 기록한 서류들이 있을 뿐이었다. 찌이이익 액자 안에서 빼낸 그림은 헝겊으로 된 것이었다. 그 헝겊의 한 귀퉁이를 찢자 교묘하게 감춰진 DVD가 모습을 드러냈다. 닥터는 그 DVD를 잠시 어루만지다가 곧 준비한 케이스를 꺼내 그 안에 집어넣었다. DVD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서는 회한과 분노, 자괴와 슬픔의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것으로 이제....' 닥터는 케이스를 품안에 집어넣고 사무실을 나왔다. 목적한 바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닥터는 그런 자신의 반응이 의아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는 복도로 걷던 발걸음을 멈춰 잠시 벽에 기댔다. 참을 수 없는 피곤이 몰려들었다. 그는 그것이 대원들을 대피시키는데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절대로, 절대로 다른 이유는 없는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쿵 그때 희미하지만 어디선가 철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닥터는 감았던 눈을 뜨고 벽에서 몸을 땠다. 이게... 무슨소리지? 잘못들은건가? 쿵 쿵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계속되는 철울림이. 만약 닥터가 벽에 기대어 있지 않았더리면 소리의 전도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닥터는 새삼 철로 된 복도의 벽에 귀를 대고 소리으 ㅣ발신지를 뒤쫓았다. 쿵 쿵 쿵 쿵 쿵 소리는 닥터의 개인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연구실로부터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닥터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여기서....?" 닥터는 의아한 표정으로 방의 문패르 살펴보다가 소리가 점점 약해져가자 서둘러 자신의 ID카드를 꺼내들었다. 그의 ID라면 메디컬 센터 내에 있는 모든 인식 코드를 아무런 제재 없이 해체 할 수 있었다. 위잉 카드를 검문기에 대자 신호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렇게 방안으로 들어가자 닥터가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의자에 청테이프로 둘둘 감겨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앞에서 닥터가 들었던 소리는 여인이 의자에 묶인 몸을 억지로 끌고 와 문에 부딪칠 때 나던 소리였던 모양이다. 여인은 입까지 테이프로 묶여 있었기에 씩씩거리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그러다 그 눈동자가 방안에 들어온 닥터를 발견하자 화색을 띤다. 닥터는 그런 여인의 굉장하다면 굉장하다 할 모습에 얼이 빠져 있다가 뒤늦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대체... 뭘하고 계신겁니까, 주선생님?"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의자에 묶여 있던 여인, 주유화는 눈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 "날... 어떻게 할 셈이지?" "글쎄, 어떻게 할까나" 그람드링은 킥킥 웃으며 방아쇠에 건 검지에 힘을 주었다. "일단 대가부터 받아내야지. Give and Take!" 쾅 직후 울려 퍼지는 단발의 총성. 순간 유화는 영락없이 자신의 죽음을 느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이런 자리에서 저런 녀석의 손에 죽게 될 줄이야! 파직.. 파지직 하지만 그녀의 피는 흩뿌려지지 않았다. 덩달아 몸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있다면 불꽃이 튀는 소리, 그녀 앞에서 들려오는 그 소음이 전부였다. 유화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거기에는 방금 전까지 유전자 감식 결과를 산출하던 컴퓨터의 랜선이 그람드링의 아켄석 탄에 꿰뚫려 있었다. 끊긴 랜 선은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약간의 침묵이 지나자 랜 선은 곧 완전한 정적에 빠져 버렸다. '무, 무슨 짓이야?' 유화는 새파랗게 질린 안새으로 그람드링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림드링은 리볼버를 손가락으로 몇 번 돌리다가 품에 집어넣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증거확보. DB에서도너를 알아낸 시점에서 역추적 바이러스가 들어온단 말이야. 그랬다간 순식간에 하드는 날아가고 암살자가 들이닥칠걸? 난 오히려 선생의 목숨을 구해준 거라고?" "구해줬다고?" 유화는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표정을 찡그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 암살자는 바로 너잖아!" "나 참, 태평한 소리하기는, 내가 암살자였으면 댁은 방금 전에 죽어싸,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잖아?" "그, 그럼..." 정말.... 살려 준 거란 말이야? 유화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천천히 자신의 의자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그람드링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는 여전히 경계의 빛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날 살려 준거지? 너희 레드 브라더스의 DNA 도너가 유출 되는 것은 시폰 뤼멘에게도 달갑지 않은 일일텐데?" "아아,달갑지 않지, 특히 마스터가 눈엣가리소 여기는 피스메이커 의 사령관 유다에게 그 정보가 들어간다면 그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을 거야. 크크, 그래, 최악, 최악의 최악일거야. 크크크크!" 그람드링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연신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유화는 그런 소년의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래서야 마치 스스로가 자신의 마스터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 같지 않은가? '곤란하게...만든다고?' 유화는 정신이 번쩍들었다. 설마 그람드링 이아이는.... "대가라고 했지? 그 대가라는게 설마...." "크크, 역시 선생님은 눈치가 빨라서 좋아. 얘기가 빠르다니까. 선생님이 지금 알아낸 정보를 피스메이커의 상부에 제출할 것. 그게 내 선물에 대한 대가야." "...." 유화는 할말을 잊었다. 지금 그람드링은 그녀에게 마스터의 파멸을 부추겼던 것이다. 아마 시폰 뤼멘은 겉으로는 솔로몬 프로젝트의 연구라는 명분하에 오라 능력자의 복제를 추진해왔었 것이다. 만약 그 내막이 피스메이커의 상부, 나아가 성당기사단에게도 알려진다면 열 번째 검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와 그 휘하의 크로세이더들은 이단으로 판명, 모든 지위를 박탈 당하고 이단심문관이ㅡ 추적을 받을 것이다. 유화는 그람드링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람드링, 넌 대체.... 무슨 일은 꾸미고 있는거야? 맛스터를 파멸 시킨다고해서 네게 득이 되는 건 뭐지? 네가 이제 와서 새삼 피스메이커로 돌아섰다고는 생각하지않아." "...." 그람드링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마치 상처입은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말을 꺼냈다. "....적당히 까불라고 했지. 그때의 손목 하나로는 부족했던거야?" "...!" 유화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목을 감싸고 물러섰다. 예전에 그람드링을 추궁하다가 가의 의수에 손목이 부서젔던 일이 떠올랐다. 그람드링은 그런 유화의 모습에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킥킥거렸다. "Give and ttake 라고 했잖아. 내가 정보를 제공했으니 선생님은 그냥 내 부탁 하나만 들어 주면 돼. 그 이상을 물어보는 건 반칙이다. 안 그래?" "...조...좋아.." 유화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람드링을 자극시키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가 언제 변덕을 부려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것이다. 괜한 호기를 부릴 때가 아니지. 그람드링은 유화가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크크크크크! 좋아, 좋아, 그럼 이로써 계약 성립! 그 외에 다른 불만 사항은 없겠지?" "그래." "Okay! 그럼 이제는...." 순간 그람드링은 코트 안에 감춰두고 있던 청테이프를 꺼낻르었다. 그는 그대로 앉아 있는 유화에게 그것을 휘감기 시작했다. "뭣! 무, 무슨 짓이야! 잠깐! 그만!" 유화는 당황하며 소리쳤지만 그람드링은 의수의 괴력으로 그녀를 찍어 누르며 그대로 의자와 함께 청테이프를 휘감아 버렸다. 유화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무력하게 테이프에 포박당했다. "야, 당장 이거 풀지 못해! 빨리 풀어! 빨리!" 유화가 고함을 내지르며 발버둥쳤지만 그람드링은 히죽 웃으며 그녀의 입마저 청테이프로 봉해 버렸다. 읍!읍! 유화의 거친 신음소리가 그녀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람드링은 그제야 한숨 놓았다는 듯 다 써버린 청테이프를 아무렇게나 던지며 유화와 눈을 맞췄다. "크크크, 답답하더라도 좀 참아, 이것도 다 선생님을 위해서니까." 개자식! 뭐가 날 위해서라는거야! 유화는 그렇게 소리쳤지만 정작 입으로는 한마디도 새어나오지 않았따. 어디 그뿐인가? 몸까지 의자에 봉해져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발끝이나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람드링은 유화의 손목에 달린 무전기를 가져가며 말했다. "내가 컴퓨터의 통신을 끊었다 해도 역탐지는 이미 시작되었을거야. 아니, 적어도 데이터베이스에 누군가 침입했던 흔적은 남아있겠지.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용의선상에 오르는 건 순식간이야. 멋모르고 돌아다녔다간 마스터가 피스메이커 내에 심어둔 스파이ㅇ게 살해당한다고." "....!" 피스메이커 내에 심어둔 스파이? 유화는 짧게 숨을 들이키며 반항을 멈췄다. "알겠지? 보고를 하기도 전에 당신이 죽어 버리면 내가 곤란해. 그러니까 일단 선생님은 내가 죽인 것으로 마스터에게 보고하겠어. 그럼 적어도 스파이가 당신을 노릴 일은 없어지겠지. 그러니 여기서 얌전히 있다가 내가 풀어 주길 기다리라고." 그풀어 주러 오는 건 언제인거야? 그런 유화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그람드링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하드에 자동 저장된 유전자 정보를 DVD로 옮겼다. 그 후 하드의 자동 포맷을 실행시키며 DVD를 유화의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는다. "크크크 걱정마. 적어도 아사하기 전에는 돌아올테니! 모처럼의 기회니까 다이어트하는 셈치라고. 그렇잖아도 최금 몸무게 늘지 않았어?" 읍!읍! 유화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거친 신음소리를 내뱉었지만 그람드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어둠으로 물든 연구실. 그년느 수없이 그람드링을 욕하며 어떻게든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노력했다. 발끝으로 의자를 끌고 나가 문에 수없이 몸을 부딪치기를 계속.... 쿵. 쿵. .... 그런 유화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결국 하루의 절반이 지나가고 난 뒤었다. ---------------------------------------------------------------------------------------------- "빌어먹을 자식! 망할 꼬마놈!" 닥터에 의해 의자에서 풀려난 유화는 청테이프에 묶였던 손발을 주무르며 쉴새없이 욕을 내뱉었다. 안색이 초췌해진 것도 초췌해진 거지만 새하얗게 질린 것이 그야말로 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만약 살의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유화는 그람드링을 수백, 수천 번도 더 찢어죽일 수 있으리라. "고생이 심하셨군요.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유화의 욕 사이로 그람드링의 이름이 연거푸 터져 나오는 것으로 상황을 짐작한 닥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세한 정황을 모르는 그는 그녀가 그람드링의 손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했다. "그나저나 뭐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신 겁니까? 그람드링, 그 아이가 왜 주 선생님을..." "무슨 일이랑 것깢 ㅣ있어요! 그 개자식이 내가 유전자 ㅓㅁ색을 하는 사이에 들이닥쳐서 이런꼴로 만들어 놓은걸!" 유화는 인상을 찡그리며 내쏘듯이 닥터에게 소리쳤다. 그 말에 닥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예? 유전자 검색이라니... 혹시 레드 브라더스의 DNA 도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순간 유화는 움찔 몸을 떨었다. 알 수 없는 오한이 등줄기를 훑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DVD의 존재를 확인하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마스터가 피스메이커내에 심어둔 스파이에게 살해당한다고.' 문득 그람드링의 한 말이 생각났다. 스파이, 피스메이커 내에는 시폰 뤼멘이 심어둔 스파이가 있다고.... '그런데 지금 내가 이렇게 DNA 도너에 관한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유화는 마른 침을 삼키면 입을 다물었다. 닥터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경계의 빛으로 물들어갔다. '닥터는...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가 가인이나 피스메이커의 대원들을 향해 보여 준 애정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지금껏 보여 준 모습들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진심으로 모두를 걱정하고 염려해 줬다고.... 적어도 유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인 닥터.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또 뭐가 있지?' 성당기사단의 중급 버추즈에서 피스메이커로 배속된 실력파 의사라는 것. 외과 시술과 내과기술에 정통하며 PET용액을 포션으로 정제할 정도의 전문지식을 가졌다는 것. 또 오리하르콘 의수나 의족을 이식하는 수술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생명공학, 생체공학 쪽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닥터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그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 또 나이는 얼마인지, 심지어는 그 이름조차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성당기사단의 파견인이니까 기밀유지를 위해 신상명세를 공개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 더 수상하다면 수상할 수가 없는 인물이야!' 유화는 새삼 이런 정체불명의 남자와 비밀을 공유했다는 것을 깨닫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닥터는 그런 유화의 기색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 선생님, 왜 갑자기 말씀이 없으신 겁니까? 레드 브라더스의 유전자 검색을 하신게 아니었습니까?" "아 글게... 예 검색을 해보기는 했죠. 하지만 말했잖아요. 중간에 그람드링이 들이닥쳤다고. 극 아이가 제자하는 바람에 결과는 알 수 없었어요." 유화는 닥터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결과를 알아내지 못해 허탈해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닥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군요.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난 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겠어요. 평소 주선생님에게만 너무 위험한 일을 맡겼던게 아닐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목숨까지 위협받으실 줄은.... 정말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닥터의 정중한 사과에 유화는 가슴이 뜨금하여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어차피 저밖에 할수 없는 일이었고, 또 제가 자청했던 일 아닙니까. 닥터가 미안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유화는 화제를 돌릴 겸 연구실 밖으로 나오다가 곧 복도 창에 비친 폐허가 된 언더 시티으 ㅣ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닥터에게 소리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고 보니 병동에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요. 다들 어딜 간 겁니까? "....주선생님이 감금되어 계시는 동안 언더 시티로 지구방위군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습격? 닥터의 간결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유화는 일순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설마 웃으라고 하는 소리인 건가? 하지만 그녀가 바라본 닥터의 얼굴은 침중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제야 유화는 사태의 긴박함을 깨닫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일단 나머지 설명은 가면서 해 드리겠습니다. 현재 생존자들과 부상자들이 병동 밑의 지하 쉘터로 대피 중입니다. 곧 진 사령관님과 나머지 대원들도 도착할 예정이니 저와 같이 가시죠." "아,예!" 닥터는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유화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녀와 닥터의 거리는 이미 미묘하게 벌어져 있었다. '마스터가 피스메이커 내에 심어둔 스파이에게 살해당한다고.' 심적으로나 신적으로나, 불신은 신뢰보다 더욱 빨리 퍼지기 마련이다. "....." 흑성가는 끝나 있었다. 옴팔로스의 신전을 뒤덮던 죽음의 그림자와 사자의 검은 손들은 모두 삿라져 있다. 그 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붉은 하늘과 거인들의 대지, 그리고 흑성가를 노래한 피스 옐로우 한시민. "....."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했다. 그 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죽음의 암시에 걸린 영체들은 모두들 존재의 의미를 잃고 혼돈으로 회귀되어야 한다. 그것이 존재의 계 안에서 존재의 법칙으로 사는 생명의 순리였다. 그것이 세계의 이치다. "....." 그러나 그 이치를 정면에서부터 거부한 존재가 있었다. 시민 앞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서 있는 한 남자가 잇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카오스, 스스로의 세계의 손길을 거부한 이계의 존재였다. "어째서...." 그렇게 묻는 시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일격이 무산되었다는 허망함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궁금해하는 의문도 없었다. 그저 순순한 공포만이 있었을 뿐이다.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존재할수 없는 그 지독한 괴리감이라니! "어째서...네가?" 훗 동생의 질문에 형의 입가가 소리 없이 웃었다. 피스 블랙 한시영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 자신의 선글라스로 가져갔다. 안경을 벗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한쌍의 감홍빛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 행동이 신호가 되었다. 흭 시영의 뒤로 세 개의 그림자가 앞으로 튀어나온다. 피스 카민 마유빈,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 무영신풍류의 반역자 황유평. 흑성가에서 무사했던 것은 비단 시영뿐만 아니었던 것이다. "큭!" 시민은 다급히 뒤로 몸을 돌리며 공명을을 전개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형성한 음파의 벽으로 수십차례 무형의 기운이 충동했다. 류바가 날린 진공파였다. 음파를 열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시민의 방어에 진공기류로 생성기킨 충격파가 상쇄된 것이다. "....!"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시민의 음파방어를 뚫는 한줄기의 섬광이 있었다. 유평의 후츠노미타마! 푸른 귀기가 서린 신검이 소리없는 유령처럼 시민에게 날아들었다. 시민은 재빨리 백스텝으로 검광을 피했지만 간발의 차로 가슴을 베여버렸다. 그러자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AI슈츠의 가슴장갑이 종잇장처럼 잘려나간다. 그 광경에 시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음파방어는 소리를 내는 모든 공격을 무로 되돌릴 수 있다.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공기의 파동이 생기면 즉시 열에너지로 훤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에 그녀는 유평의 가로베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유평의 검이 대기를 건드리지 않고 움직였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말도 안돼!' 무음의 베기라니! 그런 게 진정 가능하단 말인가! "무영신풍류 사흉 도철" 그때 경악하는 시민의 귓가로 유평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시민의 몸으로 무음의 검광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촤촤촤촤촤촤 "헉!" 시민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음파방어조차막아내지 못하는 신속의 베기, 너무나 빠르기에 대기마저 눈치채지못하는 신풍이 그녀의 사지를 베어낸 것이다. 다행히도 수족이 잘려나간 것은 아니지만 시민은 양 손목과 양 허벅지에서 피를 뿜어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털썩 갑작스런 과다출혈로 의식이 멀어져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은 애써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순간 류바의 진공파가 다시 한번 음파의 벽에 가로막힌다. 노래를 중단했더라면 대번에 저 진공의 칼날이 그녀를 난도질했을 것이다. 시민은 창백해진 얼굴로 전방에 있는 류바와 유빈을 노려보았다. 류바는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자신의 오라 소드로 초고진공 커터를 생성시켰다. "거슬려.... 네 노랫소리." "...." 류바의 차가운 목소리에 시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절체절명의 위기다. 시민은 분한 눈으로 시영을 노려보았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수하들에게 맡겨 놓은 채 유유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빅어먹을.' 그 여유로운 자태가 시민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 여유로움을 깨뜨리지 못하느 ㄴ자신에게 분노가 치민다. '빌어먹을....!' 시민은 자신에게 재차 달려들려는유평을 공명음으로 봉쇄시키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피로 물든 전신을 시영에 대한 증오 하나로 지탱하며 나르키소스의 에코로 음파방어를 전개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에코로 흑성가를 노래하려는 찰나. "이봐 누나. 예전에 유리와 이런 재주를 부렸다면서?" 유빈의 목소리가 시민의 노래를 제지시켰다. 그녀가돌아본 그곳에는 패턴 카민을 패턴 화이트에게 싱크로시키는 유반과 류바의 모습이 있었다. 시민과 눈이 마주친 유빈은 잔인한 미소를 흘렸다. "이번에는 반대로 당할차례야. 부디 좋은 꿈꾸라고." "이...!" 노기 어린 목소리는 흑성가와 이어지지 않았다. 유빈에게서 패턴 카민의 힘을 이어받은 류바. 그녀는 그의 마인드 브레이크를 초고진공 커터에 실어 그대로 채찍을 시민에게 휘둘렀던 것이다. "...!" 소울 울트라하이 베큠(Soul Ultra-high vacuum) 영체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무형의 채찍이 사정없이 시민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 충격에 패턴 열로우의 헬멧이 좌우로 갈라지며 피가 하늘로 솟아오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이승과의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거기에는 더이상 시영에 대한 증도도 원망도, 미련도, 아모것도, 아모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모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가 되새기고 있었던 것은 '패배' 그 하나 뿐이었다. 13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민은 또다시 시영에게 패하고 말았다. --------------------------------------------------------------------------------- 차원진동이 현현된 가인의 천공뇌정궈은 하나의 극대소멸이라고 부르기엔 손색이 없는 아포칼립스였다. 각성된 패턴 블루의 영적인력은 소립자 와프의 파동을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고, 결과적으로 차원진동의 결집력을 강화시켜 진정한 친공의 힘을 끌어낸 것이다. 천공의 힘이 실린 차원진동권. 그것이 바로 천공권이 최종결정체인 천공뇌정권이었다. 투카카캌칵 거센 차원진동의 줄기들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주위의 거신상들을 소멸시킨다. 그 무시무시한 방전폭발에 물질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다존재의 의미를 잃고 혼돈으로 회귀할 뿐이다. 가인은 앞으로 내뻗은 헤븐 스매쉬를 천천히 내리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얼굴에서는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인은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이가 어떤 남자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브루스 류' 칠성권이 제 28대 계승자이자 피스메이커 최강의 피스 대어ㅜㄴ. 피스 그레이! 그남자가 이런 공격에 끝날리 없었다. 아니, 반드시 온다. 절대로 반격해올 것이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비록 채 2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브루스 곁에서 줄곧 그를 지켜봐운 가인은 그의 경천동지할 강함을 몸소 체험했다. 그 강함과 신념을 동경해왔다. '그런 남자가 이제 와서 나 같은 녀석에게 무너질 리 없지 않은가!' 휘익 그때 가인의 마음속 외침에 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뒤편에서 검은 폭풍이 나타났다. 칠성권이 보법으로 천공뇌정권을 피한 브루스였다. 원래대로라면 천공뇌정권은 적의 조심에서 아포칼립스를 현현시키는 일격필삼의 기술이지만 가인은 그만 브루스에 대한 정을 끊지 못하고 손속을 두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의 천공뇌정권은 빗나갈 수 밖에 없었다. '건방진 녀석!' 브루스는 이를 갈며 자신에게 등을 보인 가인을 노려보았다. 그 역시 가인이 일부러 천공뇌정권을 빗나가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인이 브루스에 대해 확신하는 것처럼 브루스 역시 가인에 대한 것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말했지? 날 걱정하는 것은 100만년은 이른 일이라고.' 브루스는 거세게 진각을 밝으며 전신으로 회오리치는 전사경을 왼손에 끌어모았다. 그는 유가인의 나약함을 비웃으며 주먹을 내뻗었다. "오만함을 끌어안고 죽어라. 오라의 주인!" 퍼어어어엉 옴팔로스의 대지가 뒤흔들리는 경력의 폭발! 바로 칠성관 제 3의 발경인 멸경 녹존이었다. 격공장 거문과 함께 제 1의 발경 탐랑을 구성하는 요소인 파괴의 무학! 유가인은 무방비 상태로 브루스의 멸경을 등에 적중당하고 앞으로 튕겨나갔다. ".....!"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몸을 떠미는 충격 속에서도 간신히 눈을 뜬 가인에게 보인 것은 자신을 추격해오는 사신의 모습이었다. 멸경 녹존으로 가인의 몸이 분쇄되지 않자 브루스는 그 즉시 제 2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것이다. 파파파파팟 강맹한 돌진에 브루스의 비어 있는 오른쪽 소매가 찢어질 것처럼 펄럭였다. 가인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몸을 양손으로 가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브루스의 어깨가 번개같이 그 위로 내리꽂힌다. 칠성권 개산벽! 콰아아앙 개산벽을 방어한 가인의 뒤로 충격파가 터지마 대기가 반으로 갈렸다. 그야말로 숨도 쉴수 없는 맹공이었다. 그 위력은 예전에 브루스가 가인을 수련시킬 때 발휘했던 힘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수준이었다. 눈앞의 상대를 확실히 말살하기위한 살초다! '그런데 어째서 녀석은....' 브루슨느 이를 악물고 재차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의 몸이 허깨비처럼 사라지며 가인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다. 브루스는 날아가는 가인의 등을 향해 그대로 승룡퇴를 날려 그를 하늘로 띄웠다. "크핫!" 가인은 등을 두드리는 경력의 전달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맡겼다. 그 무방비 상태의 모습에 부르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진각을 밝았다. 가인과는 손이 닿지도 않을 만큼 떨어져 있었지만 브루스에게 있어 그런 거리의 차는 의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내부의 진기를 뿜어 외부의 대기를 진동시켜 상대를 격상시키는 칠성관 제2의 발경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격공장 거문! 쿵 마치 대기가 하나의 쇠망치라도 된 것처럼 불곷을 튀겼다. 그 무형의 쇠망치에 얻어맞은 가인은 허공에서 재치 튕겨나가 이내 지상으로 추락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의; 표정은 점점 더 의혹으로 가득찼다. '어째서 녀석은...' 그가 방금 전에 펼친 절초들은 모두 칠성권이 극의라고 할 수 있는 무학들이었다. 존재의 계에 있는 모든 것을 분쇄시키고 소멸시킬 수 있는 파괴의 힘이다. 그런데 녀석은, '어째서...견뎌낼 수 있는거지?' 어째서 그 육체를 유지할 수 있을까? 원래대로라면 칠성권의 권 앞에 녀석은 피와 살을 흩뿌려야 했다. 진즉에 죽어나자빠져야 했다. "흐윽!"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인은 너무나 멀쩡했다. 물론 충격을 받은 듯 신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 영체는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그런 브루스의 생각은 힘겹게 일어나 자신을 노려보는 가인의 표정에 의해 더더욱 확실해졌다. '녀석은 나의 공격에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거지? 설마 내 힘이 그 정도로 약해졌단 말인가? 그 정도로 쇠양해진거야? '그럴리가!' 브루스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불신감을 뿌리쳤다. 아무리 시영이 연결시켜준 아리아드네의 실에 연명하는 그라지만 그것이 그의 힘을 약화시킬 이유는 되지 못했다. 자의로 삼계의 피드백에 접속하든 타의로 삼계의 피드백에 접속하든 브루스의 육체는 이미 완적한 수복을 끝낸 뒤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에 문제가 없다면 결국 상대의 힘에 변화가 생겼다는 건데.... 브루스는 새삼 유가인이 내뿜는 강렬한 영체의 빛, 패턴 블루의 오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했다. 과연.... 그렇게 된 것이란 말이지. '놀랍구나. 하긴. 차원진동을 현현시킬 수 있다면 중심파도 아닌 2차원적 표면파를 상쇄시키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겠지. 더 이상 네 녀석에게 내 발경은 무용지물이란 말인가?' 그렇다 브루스의 칠성권은 일반적은 권사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신권이지만 그 근본바탕은 2차원적 표면파인 발경. 발경을 통해 영체의 힘을 물질계로 끌어낸다지만, 그 발경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칠성권 역시 시건으로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가인의 패턴 블루는 모든 2차원적 표면파를 위상공간의 비선형 법칙에 따라 몸에 닿기도 전에 타원궤도로 돌릴 수 있다. 그야말로 칠성권의 천적이라고밖에 표현할수 없는 능력이다. "하아, 하아!" 그러나 발경을 상쇄시키더라도 그 안에 내재된 영체의 힘만큼은 완전히 막아낼 수 없었는지 가인은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헐떡였다. 브루스의 발경에 적중당한 부위가 타는 듯한 격통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아, 하아!" 가인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아까부터 브루스의 머리 뒤쪽에 달린 호통 모양의 머리장식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따. '브루스....' 가인은 자신도 모르게 슈츠 밑의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자신의바지주머니에 넣어둔 한 물건의 존재가 손끝을 통해 확연히 느껴지고 있었따. 그것은 바로 진우가 건네준 부서진 장신구였다. 8월, 피스 블랙과의 사투에서 브루스가 실종된이후 팔라딘대가 발견했던 그의 머리장식. 그 머리장식을 진우에게 받은 가인은 내내 그것을 소중하게 품에 지니고 다녔다. 언젠가 장식의 주인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그가 반드시 자신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그날이 오면 반드시 이 물건을 그에게 돌려주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보관해온 머리장식이었따. 브루스의 무사를 기원하며 간직해온 물건이다. 하지만, '브루스는 이미...' 지금 가인 앞에 서 있는 브루스는 이미 또 다른 머리장식을 하고 있었다. 가인이 품고 있는 것과 똑같은, 그러면서도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머리장식을. 그 것은 브루스가 시영과 아리아드네의 실을 공유하면서 삼계의 피드백으로 복원해낸 생전의 정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육체의 정보가 복원됨과 동시에 가인이 가지고 있던 머리장식은 부르스에게 환원되어야 했지만, 이미 시영의 도움으로 삼계의 피드백에 접속한 브루스는 시영의 도움을 받기 전과는 별개의, 또 하나의 독립된 개체였던 것이다. '그는이미...' 내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와는 달라. 다른 사람이다. 더이상 유가인이 알고 있는 그 남자는 없어. 피스메이커 최강의 피스 대원이자 언제나 모두의 앞길을 제시해 주던 그는 '내 사부님은 더이상...' 웃기지마! 가인은 이를 악물고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참아냈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웃기지마, 브루스가 없다고? 저 남자는 브루스가 아니라고? 웃기지마,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어. 멋대로 나의 사부ㅡㄹ 없애지마. 그는 분명히 있어. 분명히 내 앞에 서서 날 바라보고 있어! 존재하고 있다고! '그걸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겠어!' 내가! 내가! 가인은 움켜쥔 주먹을 앞으로 내뻗으며 자세를 취했다. 그 각오에 발맞춰 패턴 블루의 오라가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다. 그런 가인의 모습에 브루스는 입가의 미소를 한층 더 짙게 했다. '그래, 애송아. 그거면 되는 거다. 그거면...' 마읔껏 네 힘을 보여줘봐, 어서! '어서ㅡ!' 투아아아앙 순간 브루스의 마음속 외침이 신호가 되었다.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는 진각을 밟으며 마치 한줄기 빛처럼 앞으로 쏘아졌고, 피스 블루 유가인 역시 AI슈츠의 등 뒤로 반중력의 날개를 형성시키며 앞으로 쏘아진다. 검은 폭풍과 푸른질풍! 그 두개의 회오리는 용서 없이 성로에게 부딪쳐나갔다. 촤아아아아 먼저 공격이 닿은 것은 브루스였다. 그의 비경 칠성권 염정은 무시무시한 전사경의 소용돌이를 내재하며 대기를 가로부터 절단했다. 그 절단면에 닿은 모든 것이 형체를 잃고 바스러진다! 그것은 아무리 차원진동으로 상쇄시킨다고 한들 완전히 중화시킬 수 없는 순수한 경력의 집합체였다. 어디 이번에도 그 잘난 차원진동으로 막아보시지! "....!" 하지만 브루스의 발경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갈라야만 했다. 비경에 적중당해야 할 유가인, 그는 거짓말처럼 주먹의 궤도를 거스로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애송이에게 이런 움직임이 가능하단 말인가!' 누구보다도 가인을 곁에서 지켜봐왔던 브루스다. 한때의 제자였지만 그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충분히 가늠하고 있다. 녀석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나의 주먹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연이다!' 브루스는 노기 어린 표정으로 비경을 거두며 즉시 일곱 번의 팔꿈치를 휘둘렀다. 칠성권 연환칠격! 개산벽과 더불어 칠성권 최고의 박두술이 정면의 가인을 향해 이쁠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공세를 마주하는 가인에게서는 한 점의 흔들림도 차장볼 수 없었다. '지켜봐요, 브루스'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 당신이 가르쳐준 모든것! '내가 보여줄테니!' 촤촤촤촤촤촻 일곱 번의 파공음이 우리며 연환칠격이 대기를 갈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브루스는 헛손질을 하고 말았따. 가인은 놀랍게도 여전히 정면에서부터 그의 공격을 흘려냈다. 그런 유가인의 기이한 회피술에 브루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환각지!' 브루스, 그가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도도산에서 가인에게 전수해 준 기술! 가인과읜 수련에서 수십, 수백, 수천번이나 경을 날려 그 충격을 그의 뇌리에 각인시켜 몸이 의지에 상관없이 외부의 충격을 피해내게끔 만들어준 회피술이었다! "차아아아앗!" 환각지로 칠성권이 모든 공세를 떨친 가인은 브루스 앞에[ 다가설 수 있었다. 그리고 오른 손의 헤븐 스메쉬를 브루스의 가슴에 휘둘렀다. '천공권인가!' 브루스는 노호성을 내지르며 사기종인의 수로 가인의 주먹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격산타우의 소법으로 가인의 턱을 올려치려는 찰나! 투카카카카카칵 발밑에서부터 느껴지는 거센 차원진동의 흐름에 재빨리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자 브루스가 서 있던 자리로부터 섬뜩한 라이트닝 임펄스가 솟아오른다. 그 역천의 뇌전에 가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브루스는 인상을 굳ㅎㅆ다. 녀석, 이제는 시작점의 조절이 능숙해졌군! '그때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하는 애송이였는데.....' 브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감회에 젖어들었다. 유가인의 모습 하나하나가 그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따. 이렇게 가인과 대치하고 있자니 마치 1년 전 처음 서로가 대면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분명 생사를 겨루는 싸움이건만 이 평온함이라니! "후후.....후후후후" 웃음이 나왔다. 브루스는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솟아오르는 격정에 몸을 떨었따. 그것은 기쁨이기도 했고, 환히이기도 했고, 그리움이기도 했다. 또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슬픔이기도 했다. "후후후후, 후하하하하하!" 브루스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날렸다. 그는 그대로 가인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는 선도뇌격을 꿰뚫었다. 그러나 번개의 뒤편에 가인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당황하지 않고 재차 오른발로 자신의 왼쪽 발등을 찍으며 그 탄력으로 날아올랐다. 콰ㅡ콰ㅡ콰ㅡ콰앙ㅡ! 그렇게 브루스가 회피하기 무섭게 그 자리로 다섯 줄기의 뇌광들이 거미줄처럼 흩뿌려진다. 앞의 천공권으로 브루스의 시야에서 몸을 피했던 가인이 그대로 하늘에서부터 천공뇌정권을 사용한것이다. 가인은 천공뇌정권이 불발로 끝나자 그대로 반중력의 날개를 점화시키며 브루스에게 떨어져 내렸다. "브루스 ㅡ !" 가인은 양쪽 어깨의 오라 소드를 뽑아들며 그대로 오라베기를 시전했다. 그러자 푸른 뇌광의 검줄기가 교차하며 브루스에게 내리꽂힌다. "얕보지 마랏!" 그러나 브루스는 되레 그 오라 소드의 검날 사이로 승룡퇴를 날려 가인의 턱을 올려 쳤다. 그야말로 신묘하기 짝이 없는 반격! 거기서 그치지 않고 브루스는 가인의 발에서 등으로 팽이처럼 회전하며 타고 올라가 그 위에서 다섯 번의 주먹을 내질렀다. 중경파군! 풍경 무곡! 비경 염정! 심경 문곡! 그리고 이 4개의 발경이 합쳐졌을 때에야 비로소 발휘되는 멸경녹존! '칠성권 하부곤륜!' 콰아아아앙 칠성권이 일곱 별 중 불과 물, 흙가 나무, 그리고 쇠의 다섯 기운에 연달아 격중당한 가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옴팔로스의 대지로 내리꽂혔다. 원래대로라면 내경 거문과 극대소멸권 탐랑까지 더해져 칠성권 통제건곤으로 완성되는 기술이지만, 지금의 브루스는 탐랑의 사용을 아껴야만 했다. 영체의 힘이 약해진 그로서는 함부로 아포칼리스 제너레이터를 남발할 수 없었다. "크 ㅡ!" 지상에 일어난 흙먼지의 중심에서 가인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부곤륜에 의해 추락하기 직전에 그는 AI슈츠의 중력장을 역행시켜 낙하의 충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차원진동쉴드로 하부곤륜의 표면파마저도 타원궤도로 흘려보내 몸의 안위를 보존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물리공격에 대한 완벽한 내성! 존재의 법칙에 얽매여 있는 이상 그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후" 가인에게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내려선 브루스는 애초에 이런 결과를 예상했는지 냉소를 흘렸다. 그는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 보았다. 거기에는 검날이 사라진 오라 소드 한쌍이 주인을 잃은 채 나 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가인이 추락하는 와중에 쥐고 있던 오라 소드를 놓친 모양이다. 브루스는 그 오라 소드의 위를 지나쳐 비틀거리는 가인을 향해 걸어가려고했다. 스륵 하지만 막 그의 발이 오라 소드의 위를 지나치려는 순간 하얀 실들의 폭포가 그의 시야로 떨어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브루스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진다. 시야를 가렸던 것은 다름아닌 그의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이 풀려있어? '어느새...' 앞의 공방에서 피해냈다고 생각한 가인의 오라베기가 실은 브루스의 머리장식을 베어냈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녀석은 내 머리장식만을 노렸던 거야! 브루스는 흘러내리는 백발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과연! 과연 오라의 주인이라는건가!"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속마음과 다르게 겉으로는 계속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내 기다림에 대한 보상으로는 부족함이 없군! 잘도 그 어수룩한 애송이가 여기까지 성장했어!" "그런 식으로...말하지마!" 가인은 그런 브루스의 태도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슬픔에 잠기려는 목소리를 애써 쥐어짜냈다. "내가 여기까지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있었기 때문이야. 진우씨! 마리선배! 시민씨! 유리! 피스메이커의 모두들! 그리고...." 뜨거워지는 눈으로 마지막 희망을 담아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호소하듯 외쳤다. "....그리고 브루스,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가인은 마음속으로 쉼없이 소리쳤다. 돌아와요 브루스. 제발! 제발 예전의 당신으로 돌아와줘요! 내가 누구보다도 존경했던 당신으로! 누구보다도 사랑해던 당신으로! 제발! 제발! '제발 - !' "그래, 네놈의 강함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원은 부질없었다. 가인의 애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완손에 막대한 차원진동의 힘을 끌어 모으며 천천히 칠성권이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니 그 강함을 이제 와서 내가 돌려받는다 해도 억울하지만 않겠지? 자, 마음껏 덤벼 봐라! 전력을 다해 공격해봐!" "바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잉해하지 못하면서!" 가인은 절망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브루스를 원망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더더욱 자신의 오라를 불태우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영체의 힘을 사용할 생각인지 한계까지 패턴 그레이읭 힘을 끌어올인다. 오오오오오오 그러자 그의 오라에 밞자춰 차원진동이 증폭되었다. 휘날리는 백발, 전신을 감싸는 회색빛, 왼손에서 태어나는 혼돈의 집합체! 가인은 그것이 모든 것을 카오스로 회귀시키는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 극대소멸권 탐랑의 발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브루스는 칠성권 제 1의 발경을 사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는 너와 나의 싸움이 끝나지 않겠지. 결국 승패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는 거다." 브루스는 얼어붙은 가인에게 종용했다. "자, 보여줘 봐라. 네 녀석이 가진 혼돈, 너의 혼이 가진 힘을!" "...!" 가인은 고개를 숙이며 치를 떨었다. 참을 수 없는 무력감이 그를 엄습해왔다. 더 이상 자신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절실히 통감했다. "알았어요....브루스" 가인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드러난 두 눈에서는 그가 가진 영체의 빛이 검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인은 천천히 자세를 벌리며 등 뒤로 반중력의 힘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 주위로 거센 질풍의 힘이 휘몰아 친다 "그렇게까지 싸움을 바란다면... 원하는대로 해 주겠어요." 가인의 오른발이 서서히 백열하기 시작했다. 차원진동의 힘이 집중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소년이 망설임을 버리자 브루스는 가늘게 미소했다. "그래, 와라," 100여년이 넘도록 기다려온 소망, 갈말, 숙원. 금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도, 그 끝없는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ㅡ 일어날 시간이다, 동생아. 그 목소리는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시민의 의식을 강제로 부상시켰다,. 시민은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차가운 얼음칼이 뇌의 구석구석을 헤집으면 이런 기분일까? 단순히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일어났구나." "....!" 순간 귓가에 들린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달은 시민은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한시영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시민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분명 류바와 유빈의 싱크로 공격에 영체를 파괴당했다. 원래대로라면 그것으로 그녀는 죽은 목습이었다. 숨이 끊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살아있어?" 시밍니 자신의 무사함에 영문을 몰라 중얼거렸다. 류바의 소울 울트라 하이 베큠에 이등분되었던 머리는 AI헬멧이 사라져 있을 뿐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유평의 후츠노미타마에 베인 외상들마저 사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으!" 순간 시민은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주저앉았다. 예의 두통에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거야! "영체를 복구시킨 직후다. 약간의 환지통이 남아 있을테니 무리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시영의 목소리에 시민은 애써 덜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시영의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시민을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탁 시민은 사정없이 그의 손길을 뿌리친다. 그녀느 이를 갈며 소리쳤다. "건드리지마 ! 나에게 무슨 짓을 한거지! 왜 내가 살아있는거야!" "감히 저게!" 그때 그들 뒤편에 있던 유빈이 발작하듯 시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류바가 뜯어말린다. "죽을 뻔한 걸 기껏 마스터가 살려 줬다니 어디서 큰 소리야! 너 같은 걸 살리기 위해 마스터가 무슨 대가를 치렀는지 알어?" "그만해라, 유빈. 마스터의 동생에게 결례다." 류바는 그렇게 유빈을 제지하면서도 시민을 향해 적개심 어린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시민은 그들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살려....줬다고? 어째서? 그리고 대가라니?" "네 영체를 살리기 위해 마스터는 ㅇ가뜩이나 고갈된 카르마에너지를 더소모했단 말이야! 명이 단축되셨어! 저번에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힘을 쓰셨는데 또!" 영체의 정보를 읽고 복사하는 시영의 섀도우 다이브는 그동안 만능의 기술처럼 보였다. 다 죽어가던 라트를 부활시키고 아켄석 탄에 사경을 헤메는 유빈을 치료해내고, 시민과 유리의 싱크로 공격에 만신창이가 된 류바의 영체마저 복구해내는, 그야말로 전능에 가까운 능력. 하지만 그렇게 편리하기만 한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시영은 엄연히 능력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고, 그 대가가 바로 자신의 카르마에너지였다. 그는 유빈의 말대로 줄곧 자신의 목숨을 깎아먹으면서 모두들 치료해왔던 것이다. 유빈은 울먹이며 시영에게 소리쳤다. "마스터, 그대로 내버러둬도 됐잖아요? 왜 살리신 거에요! 왜! 흑성가를 저지시키기 위해서 무슨 수를 써도 좋다고 하시고선!" "내 소중한 동생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어차피 우린 다 같은 가족이란다. 거기에 죽어도 좋을 목숨 같은 건 없어." 시영은 유빈을 달래면서 시민을 향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다 살리고 싶었다.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이들은 아무도 죽게하고 싶지 않았어. 그랬기에 라트와 진우씨의 죽음은 정말이지 유감이었다. 라트야 리리스의 바나베인으로 구현된 회신이기에 이쪽에서 손쓸도리가 없었다지만, 설마 브루스 님이 진우 씨를 죽이실 줄이야...." "그만해!" 시민의 날카로운 외침이 시영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상대를 강하게 부정하는 거승로 자신의 이성을 유지할 뿐이다. "그만둬 줘. 기분 나쁜 농담은 거기까지만해!~ 뭘 생각하는 척하는거야? 뭘 안타까운척하는거야? 어파치 넌 너밖에 모르잖아! 원하는 바를 위해서라면 주위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그런 주제에, 그렇게 살아온 주제게 뭘 이제 와서 뻔뻔스럽게!" 나마저 그렇게 버려 버렸잖아! 날 지켜 준대 놓고선 모든 걸 빼앗았잖아! "위선 떨지마! 날 살려 준 것도 네놈의 유흥 때문이겠지. 한순간의 변덕일 뿐이면서! 그렇게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보는게 네놈의 저열한 낙이니까!" 시민의 폭언에 유빈뿐만 아니라 류바까지 분노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이 나서기도 전에 시영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맞는 얘기겠지. 나는 분명 내 목적을 위해 주위의 모든 것들을 희생시켜왔으니까. 일단 널 살려 준 것도 내 변덕 때문이라고 해두자. 무엇보다 너에겐 해 주고픈 얘기들이 많아. 그래, 진실, 그것도 빠뜨려서는 안되지. 넌 아직 진실을 듣지 못했어. 그런데 그걸 듣기도 전에 죽어 버린다니. 그건 너도 바라는 바가 아닐 거 아냐?" ",..!" 시민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렇다. 싸움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시영의 진실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물거리고 있을 틈이 없어! '빨리 녀석들을 쓰러뜨리고 가인씨를 도우러 가지 않으면...!' 그러고 보니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걸까? 그사이에 싸움이 끝나 버린것은 아니겠지? 시민은 초조함을 느끼며 재빨리 전투태세를 취했다. 앞의 환지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따. 좋아, 이 상태대로라면 다시 흑성가를 쓰는 데는 몬제가 없을지도! "쓸데없는 짓 하지마라, 동생아." 하지만 시영은 흑성가를 노래하려는 시민을 대번에 제지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는 동생의 모습에 혀를 찼다. 분명 이렇게 다혈질적인 아이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잊었나 본데. 이미 너의 흑성가는 우리에게 통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또 그 노래를 부르겠다고?" "아...." 시민은 짧게 탄식했다. 그녀는 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시영에게 물었따. "무슨 수를 썼던 거지? 분명 아스트랄계로 몸을 피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예전에 네 영체와 접촉한 적이 한 번 있었지? 그때 복사해둔 네 정보를 잠시 빌려온 거야. 흑성가는 영체를 통한 죽음의 암시, 분명 물질계에 존재하는 생물인 이상 그 암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암시주의 영체를 암시인의 영체가 덮어쓰고 있다면 어떻게될까?? 덮어...쓴다고? 시민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를 악물었다. "영체의 정보가 같아질테니...." 암시인과 암시주의 정보가 동일해질테고, 그렇게 되면... '흑성가의 암시 또한 대상자를 찾아내지 못해!' 설마 그런 기상천외한 방법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절대로 막아낼 수 없으리라 생각한 영체암시를 암시주의 영체를 복사하는 것만으로 막아낼 줄이야! 그야말로 시영의 섀도우 다이브이기에 가능했던 수였다. 그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흑성가의 유일무이한 방어책이다! '녀석을 쓰러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익힌 노래였는데.' 시민은 시영을 쓰러뜨릴 유일한 수딘이 무용지물로 돌아가자 허탈감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목숨을 걸구 흑성가를 익혀왔다. 언제나 흑성가의 어둠에 몸을 맡기며 몇 번이고 죽음의 암시에 홀렸다 풀리길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익힐 수 있었던 것은 30장의 흑성가 중 단 3곡. 11장 흑사현현과 16장 악검안처 28장 흑염초래뿐이었다. 그것은 결코 그녀의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만큼 흑성가를 배우는 것이 비인외도 였던 것이다. 스스로 지옥에 발을 내딛지 않고는 터득이 불가능한 힘누스! '그것이 이토록 허무하게....' 시민은 지독한 절망감에 눈앞이 암담해졌다. 이제 나는 무엇을 가지고 그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이대로 두손 두발 다 들고 포기해야만 하는건가? '그때처럼?' 쓰러진 자신을 내버려두고 웃으면서 떠나갔던 뒷모습. 그 뒷모습을바라보며무력하게 무력하게 돌아오라고 소리쳐야 했던, 울부짖기만 해야 했던, '그때로 돌아가라고?' 싫어! '절대로 싫어!'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끝내서는 안돼! '그런 무력감도, 그런 절망감도' 이제는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따. 겪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겪을 바에는 차라리.... '차라리 이대로 싸우다가ㅡ!' 시민은 흑성가를 끌어올리며 영체를 암흑으로 물들였다. 결과가 뻔히 보일지라도 이대로 자포자기하기보다는 싸우다가 죽겠노라고 각오했다. 시영은 그런 동생의 아집에 참다못해 결국 소리를 질렀다. "죽겠다는거냐? 그렇게 성당기사단에게 좋을 대로 이용만 당하다가 죽겠다고!" "...!" 그말에 달싹이려는 시민의 입술이 멈추었따. 뭐 ㅡ ? "무슨 소리를...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거야!"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흑성가는 최초의 13인 중 하나였던 흑성모 막달라 마리아가 만들어낸 비술이다. 그런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시영의 표정이 냉랭하게 굳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지금껏 몇 번 드러나지 않았던 불쾌함과 조소의 감정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에는 노아의 능력자들, 네가 몬스터로 알고 있는 이들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어. 지금과 같이 오라 능력자들 간의 싸움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런데 어째서 테라의 능력자인 흑성모는 그런 죽음이 노래를 창안한 것일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영체에 암시를 건다니, 이건 꼭 오라 능력자의 정신장벽이 통하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발견해 낸 것만 같은 능력이잖아?" 쿵 시민의 가슴속에서 불길한 추락음이 울려퍼졌다.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어. 그래서는 마치..." 마치 처음부터 흑성가가.... "그래." 시영은 그제야 시민의 말귀를 알아듣지 방긋 미소를 지었다. "흑성가는 오라 능력자, 그 중에서도 오라의 주인과의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인거야" ------------------------------------------------------------------------------------ 유가인은 질풍의 힘이 깃든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오라 소드를 잃어버린 지금 그가 유일하게 혼돈의 힘을 ㅇ끌어낼 수 있는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는 자신의 육체를 카오스로 변환시키는 질풍 라이징 킥뿐이었다. 아무리 차원진동을 현현시켜 천공권이 역적인력을 높인다고 한들 라이징 킥만큼 아포칼립스의 극점을 높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가인은 브루스의 왼손에서 휘몰아치는 차원진동의 기운을 바라보았다. 브루스는 패턴 그레이의 힘을 이용해 자신이 가진 영체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었따. 영체란 곧 카르마 에너지의 집합체. 그 카르마 에너지란 차원진동이 물질계로 투영된 또 하나으 ㅣ모습이다. 결국 브루스는 자신의 영체를 담보로 차원진동의 힘을 육체에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가인과 같은 차원진동의 현현이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자신의 목숨을 건 생애 마지막의 힘이었다. '브루스....' 예전 가이아와의 접속으로 차원진동의 힘을 이해한 가인은 알 수 있었다. 더이상 브루스에게 다음 기회란 없었따. 지금의 저 공격이 마지막이다. 저것이 최후의 주먹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나도 최선을 다해 응하지 않으면...' 가인은 지독한 서글픔에 또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욱 매서워진 눈으로 브루스를 노려보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써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러다 문득. 문득 이대로 끝내는 것은 억울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브루스가 어째서 자신들을 배신한 건지, 왜 그가 그래야만 했던 건지. 가인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싫어.'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따. 이런게 마지막이라니, 싫다. 그런 씁쓸한 결말은 싫다. 그런 허무한 이별은 싫었따. '브루스!' '진우씨! 브루스를....브루스를 찾은거예요? 찾았어요?'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던 거야.' '브루스...' 그때와 같은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돼. 안된다고! 가인은 다급해진 눈으로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 새인가 탐랑의 힘을 완성시켜 서서히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의 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인은 어떻게든 그 행동을 막기 위해, 적어도 서로가 충돌하는 시간만큼은 늦추기 위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칠성권이 계승자는!" "....?" "칠성권의 계승자는 그...탐랑을 사용할 수 있어야 겠죠? 그, 그렇다면 모든 계승자들이 차원진동을 다뤄왔다는 얘긴데...." 아! 막상 정신없이 던진 질문이지만, 그것은 평소 가인이 줄곧 마음속에 품어왔던 의문이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우에게 듣기로 칠성권이란 선도수행자가 배우는 경기공, 선기를 쌓는 체술의 일종이라소 했다. 그런게 그 일개의 체술의 초식에 어째서 탐랑과 같은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가 들어있는 것일까? 혼돈의 힘을 끌어내는 차원진동은 분명 오라 능력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그 차원진동의 사용을 전제로 하는 기술이 칠성권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브루스는 가인의 말에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가인의 의도가 성공하기는 했는지 그는 탐랑의 발동을 늦추며 설명을 시작했다. "후. 그렇다. 칠성권의 계승자들을 모두 다 차원진동을 다룰 수 있었따. 그도 그럴 것이 칠성권은 애초에 차원진동을 다루는 오라 능력자에 의해 만들어진 체술이니까." "....!" 가인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칠성권의 창시자가 오라 능력자였다고? "칠성권의 계승자는 탐랑을 성취한 이들이다. 그 때문에 계승자들 또한 다들 오라 능력자가 될 수밖에 없었지. 아니, 정확히는 차원진동을 다루는 오라 능력자만이 칠성권을 계승할 수 있는 거다. 거기에 탐랑을 체득한다는 것은 곧 차원진동의 힘을 체득한다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물질계와 영계, 정신계의 삼계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이것을 삼계의 피드백이라고 부르며, 칠성권의 계승자들은 이 피드백 안에서 늙지도 죽지도 않게 되지. 네 앞에 서있는 나도 벌써 그 삼계의 생사유전에 180년이 넘도록 살아온 몸이다." "180년!"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브루스의 나이가 외양과 달리 많은 거라고 예쌍했지만 이건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그건 그야말로 불사신이 아닌가? '그래서였나. 칠성권가 같은 고무술의 계승자가 그렇게나 적었던 것은?' 가인은 브루스가 28대 계승자였다는 것을 떠울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브루스는 그런 그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즉지 않는다고 하니까 굉장할 것 같지? 하지만 이건 그런 부러워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저 정체일 뿐이야. 뜻을 이루기 전에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어, 그야말로 끝없이, 기약없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인 거다." 목적. 그것이야말로 가인이 처음부터 브루스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그는 조심스레 브루스의 안색을 살피다가 물었다. "그 목적이란게 뭐죠?" "....선도수행자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밖에 없다. 선인이 되는 것, 그리고 천계로 향하는 것이다." "천계?" "승천(The Ascension)이라고도 하지. 진정한 탐랑의 힘을 발휘하는 순간 칠성권의 계승자들은 존재의 인력에서 벗어나 모두 다 그 천계로 향한다." 가인은 표정을 찡그렸다. 선인이니 천계니 승천이니, 도무지 얘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가장 그의 마음에 걸렸던 것은, "진정한...탐랑의 힘?" "탐랑은 결국 차원진동을 증폭시키는 영체진동파다. 그 진정한 힘은 같은 차어ㅜㄴ진동의 힘과 부딪쳤을 때 더 높은 인력을 발생시키지. 그 증폭된 인력에 몸을 맡겼을때, 그때야말로 나는 삼계의 인력에서 벗어나 먼저 떠나간 칠성권의 선행자들이 있는 정신계(평행 우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천계! 그것이 바로 칠성권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 내가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목적이라는거다! 브루스의 어주는 점점 격앙되었다. 그것만 봐도 가인은 그의 천계에 대한 열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럼...처음부터...차원진동 능력자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는 거잖아." 가인은 안색이 창백해져 중얼거렸다. 그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브루스의 목적을 알게 된다면 이 의미 없는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화해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형펀 좋은 착각이었다. 브루스의 목적을 알게된 지금 가인의 마음속에 찾아든 것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싸움의 이유였다. "오라 능력자가 오라의 주인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낸 비술. 그것이 바로 칠성권이다. 차원진동을 현현시키는 너, 오라의 주인은 처음부터 내 수련의 끝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거지." 브루스는 그 말을 끝으로 탐랑의 발동을 재개했다. "이제 설명이 되었다? 내가 반드시 너를 쓰러뜨려야 하는 이유!" "오라의 주인에게 대항하기 위해 오라능력자들이 만들어낸 비술은 총 세가지다." 시영은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 보았다. "하나는 지금껏 네가 사용해온 영체 암시술 흑성가, 그 다음은 저 브루스님이 사용하는 영체 진동술 칠성권,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영체 절단술 방혈의 창. 이중 영체절단술은 앞의 흑성가나 칠성권과 달리 특정한 후계자를 갖지는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재는 무영신풍류라는 고검류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더군." 마지막 말에 시영의 뒤편에 있던 유평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시영은 짐짓 모르는 척하며 시민에게 계속 말했다. "어쨋든 네가 나에게 맞서기 위해 배운 것이 흑성가였다면 넌 꽤 탁월한 선택을 했던 거다. 원 오라의 주인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 바로 그 기술이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시영은 무방비 상태인 동생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은밀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이 몸은 타락한 전대의 주인이라서, 지금 오라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그 소년이거든. 바로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느...." "나는! 나는 그런 건 조금도 알지 못했어! 조금도!" 시민은 당황하여 거세게 도리질쳤다. 설마! 내가 배운 흑성가가 오라의 주인을 상대하기 위한 비술이었다니. 그런 건 금시초문이다! 조금도 들어본 적이 없어! 시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렇다면 역시 성당기사단의 소행이로군. 그 너구리들이 꾸밀 만한 짓이야. 이용해 먹을 만큼 이용해 먹었으니 여차하면 제거하겠다는 건가?" "그게...무슨 말이야? 제거하다니? 누구를?" 시민의 두서없는 질문에 시영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따. "누구긴 누구겠어, 동생아? 지금 우리에게 있어 오라의 주인은 딱 한 사람밖에 없잖아? 피스 블루 유가인! 그 아무것도 모르고 제 발로 호랑이 굴에 찾아온 순진한 소년!" "...!" 시민은 가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만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내가 터득한 기술이 설마 그런 것이었을 줄이야! '흑성가가....그런 것이었단 말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인 씨를 해칠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한 것이었다고?' 그런 것을 내가 배워왔단 말이야? 내가? 시영은 쓰러질 뻔한 시민을 부축해 주었다. 시민은 그를 밀쳐낼 생각도 못하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가 흑성가를 가인 씨에게 사용할 리가 없잖아? 절대로 사용할 리가 없어. 내가 왜...." "네 의사 같은 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흑성가를 익혀 놓고만 있으면 언제든지 널 세뇌시켜 써먹을 수 있으니까. 실제로 시폰 뤼멘은 블루 브레인 프로젝트를 이용해 이간의 기억을 완벽히 다운로드 시켰다더군. 그런 물리적인 수단 앞에는 오라 능력자의 정신장벽도 소용없어. 충실한 성당기사단의 하수인으로 재탄생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지." 시민은 그 내용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가인을 공격하는 자신이라니! 그런 것은 죽어도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상상조차 하기 싫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알게 모르게 그런 일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시민은 애써 마음속에 혼란을 억누르며 시영에게 말했따. "그래... 네말대로라고 치자. 성당기사단이 나에게 흑성가를 제공한 것이 그런 목적 때문이었다고 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것이 꼭 오라의 주인을 제거하기 위한 일이라고는 볼 수 없잖아? 그들이 오라의 주인을 제거하려 들겠어? 어차피 너야 그들을 배신하고 몬스터의 편에 가담한 적도 있으니 충분히 눈 밖에 날 만하지만, 적어도 가인씨는 아니야. 그 사람은 조금도 잘못한게 없어!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피스메이커의 대원으로서, 성당기사단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해왔지. 모두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어! 그런 그가 왜 성당 기사단에게...." "크크,흐하하하! 정말 못들어 주겠네!" 시민의 외침을 듣다 못한 유빈이 배를 잡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류바 역시 차가운 비웃음을 입가에 드리운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 시민은 이를 갈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시영 역시 실소를 금치 못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하하하,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네 의사 같은 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너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래.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심지어는 대재해 이후 줄곧 그들의 수족이 되어온 피스메이커 역시 마찬가지야." "피스메이커도?" "그래! 아무리 그들을 위해 몸 바쳐 일한다고 한들 너희 피스메이커가 오라 능력자인 이상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존재일 뿐이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 같은 것 말이야.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되는 거지. 그들은 언제나 그래왔어.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위험하다 싶은 요소들은 배제하고 억압하고 제거하고! 모든 것이 자신들의 통제 하에 이루어져야 해. 그래야만 만족하는 거야. 자신들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믿으면서! 인류의 대변자라고 굳게굳게 믿으면서!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야!" 시영은 시민의 어깨를 붙들며 광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모습에 질린 시민은 힘겹게 그를 밀쳐냈다. 시영은 자신에게서 뒷걸음치는 동생을 웃으면서 따라갔따. "시민아, 이건 오라의 주인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오라 능력자들 전부의 문제인 거야. 너는 모든 것을 알아야 돼. 네가 내 동생인 이상 너에게는 진실을 들을 의무가 있어." "으...!" 시민은 재차 시영의 손길을 뿌리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가. 앞에서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시민은 심한 구역질을 느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수 없는 두려움에 몸이 떨렸따. 시영의 입에서 뭔가 터무니없는, 그러면서도 자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얘ㅖ기들이 나올 것만 같았따. 그것이 두려웠다! "잠깐." 그때 한 목소리가 시영의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황유평이었다. 시영은 입가의 미소를 없애며 굳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유평?" "...녀석들이 오고있다." 유평은 평소보다 섬뜩한 귀기가 서른 후츠노미타마를 들어올렸다. 그말에 시영은 노다치가 가리키는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그림자 감지에서도 낯선 침입자들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시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당신이 기다리던 사람들이 오고있어요." 무영신풍류의 후계자들! 그들 중 하나가 가진 신검이 유평의 후츠노미타마와 반응하고 있었다. 아마도 피스 버밀리온의 도츠카노츠루기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옴팔로스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다. 어차피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저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뿐일 테니까." "부디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희생자도 내지 않도록... 다 당신의 사제들 아닙니까? "흥! 욕심도 과하군" 유평은 시영의 말에 코웃음치며 곧장 마리와 코마히코가 내려오는 궤도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영은 다른 수하들에게도 명령했다. "유빈, 류바, 당신들도 이대로 다른 엘리베이터 쪽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모처럼 갖는 동생과의 회포입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군요." "하지만 마스터..." "알겠습니다." 유빈은 시영과 시민만을 놔두고 가는 것이 불안했는데 반박하려 했지만 류바가 한발 먼저 대답했다. 그녀는 마스터의 사항에 자신들도 포함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누구이 방해도 없도록. 아무도 이곳으로 접근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말을 끝으로 류바는 유빈의 손을 붙잡고 유평이 간 반대방향으로 발걸을음 옮겼다. 유빈은 그런 류바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이내 뭔가를 깨달았는지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의 뒤를 따른다. 그렇게 수하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자 시영은 주저앉은 시민을 내려다 보았다. "자, 그럼 머부터 얘기해 볼까?" "....!" 순간 시민의 눈앞으로 어둠이 펼쳐졌다. 겹쳐진 두개의 그림자. 그 그림자를 통해 시영이 자신의 영체를 시민의 영체와 연결시킨 것이다. 시민은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 아니, 영체의 상태였으니 이를 악문다는 것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만큼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자신에게 닥쳐올 모든 것들에 대한 각오! ㅡ 역시 제일 먼저 있었던 일부터 얘기하는 것이 좋겠지? 시영의 위스퍼링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진실'은 형체를 띄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시,민아...' 거기에는 두명의 어린쌍둥이가 있었다. 흑과 금, 피투성이가 된 형과 그를 끌어안고 흐느끼는 동생. '모두가 행복해질 순 없어. 모두를 지켜 줄 순 없는거야.' 그중 형이동생에게 말하고 있었따. '그렇다면 나는 내 주위의, 내손에 닿는 이들만큼은.... 확실히 지켜내겠어.' 형이 동생에게 다짐하고 있었따. '시민아.. 너만은 내가 반드시....' 진실은 그 시절의 그들에게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p/.99까지 완료) 옴팔로스에는 총 다섯 개의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중 머신 아더의 격납고와 연결된 1번 궤도 엘리베이터는 피스 블루 유가인이 내려오면서 사용이 불가능해졌고, 메인 센터와 연결된 2번 궤도 엘리베이터는 팔라딘대의 폭발물 설치로 사용불가, 지상과 연결된 5번 궤도 엘리베이터는 피스 옐로우 한시민이 내려오면서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그리하여 남은 궤도 엘리베이터는 3번과 4번 위이이이잉 그중 팔라딘 주둔지와 연결된 4번 궤도 엘리베이터가 나라카를 통해 옴팔로스로 내려오고 있었다. 반중력을 이용한 궤도 엘리베이터는 와이어로프나 가이드레일이 없어도 자유자재로 낙하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렇게 입구에 다다른 엘리베이터는 서서히 감속하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추엇다. 띵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거의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케이지로부터 두 개의 붉은 인영이 앞으로 쏘아져 나온다.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는 십악검 도츠카노츠루기를 뽑아 들어 주위를 견제했다. 그 등 뒤로는 피스 레드 성마리가 오라 소드를 거머쥐며 코마히코의 사각을 견제한다. 그들은 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행여나 있을지 모를 적의 습격에 대비했다. "...." 그렇게 긴장된 순간이 흐르고 잠시 후, 코마히코는 짧게 한숨을 쉬며 도츠카노츠루기를 거두었다. 마리 역시 무영신풍류의 지검대적세를 풀며 그에게 말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군. 도착하자마자 성대한 환영인사를 받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게 없겠지만....." 코마히코는 아까부터 주황빛의 검기를 흘리는 자신의 심검을 바라보았다. 도츠카노츠루기의 이러한 현상은 분명 이 옴팔로스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후츠노미타마에 대한 공명이었다. 그것은 후츠노미타마의 주인인 황유평 역시 코마히코의 접근을 눈치채고 있다는 뜻이 된다. 십중팔구 그들은 침입자에 대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마리도 그런 코마히코의 심중을 헤아렸는지 다시 경각심을 끌어올렸다. "그나저나 여긴 뭐랄까.... 굉장한 곳이군요. 아까부터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여기의 무언가에 오라가 반응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가씨도 그렇습니까? "...." 코마히코의 질문에 마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옴팔로스의 전경을 돌아보았다. 휘몰아치는 붉은 하늘과 그 아래 펼쳐진 거인들의 무덤. 그야말로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세계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 쉴 수 없는 압박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회오리치는 하늘이 그들의 오라를 점점 빨리 뛰게 만들고 있었다. 그 박동이 너무나 거칠고 타의적이었기에 마리는 체내의 오라가 남김없이 증발해 버릴 것만 같안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이곳 어딘가에 가인이....' 이 불길한 장소에서 그가 불길한 일을 당하지나 않았을까. 마리는 그것이 너무나 걱정스러었다. 자꾸만 학교에서 헤어질 때 가인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난다. '가인, 다음에 볼대는 서로 웃으면서 보는 거다.' 다음에 볼대는. 분명 그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떠나려는 가인을 붙잡고 싶었기에, 시민에게 향하려는 그를 어떻게든 막고 싶었기에, 그렇기에 그런 자신을 억누르고자 필사적으로 던진 한마디였다.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한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얼굴을 보여 주네요, 선배.'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인에게 해 주고 싶었던 약속이기도 했다. 시영의 납치사건 이후 우여곡절 끝에 만난 가인은 누구보다도 가장 힘들고 괴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전과 변함없는 미소로 그녀를 반겨 주었다. 그것이 너무나 고맙고 미안했기에, 너무나 안도되었기에 그때 마리는 울먹이기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 흐느끼기만 했다. '바보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의 미소에 아무런 응답도 해 주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슬픔에 취해 있기만 했어.' 그것을 내내 후회해왔다. 그랬기에 이번만큼은 먼저 미소짓겠노라고, 그가 해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안심시켜 주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하며 건넨 약속이었다. 그런 약속이었는데....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기대도록 해라. 네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난 최선을 다하겠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때의 약속처럼 지켜내지 못한다면, 미소지어 주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마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안돼, 절대로 안 돼!; 그럴수 ㄴ없어. 반드시 지켜내겠어! 반드시 지켜내고야 만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아무런 후회도 남기지 않고! 마리는 수중의 오라 소드를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코마히코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을 굳혔다면 남은 것은 행동뿐! 그들은 천천히 옴팔로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목표는 옴팔로스 중앙에 위치한 신전이었다. 그 중앙에서부터 붉은 하늘을 꿰뚫는 범상치 않은 어둠의 원이 팽창하고 있었다. 저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해! "거기까지다." 그때 그들 뒤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와 코마히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그들이 앞에서 기척을 살폈을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서야 들려오는 이 목소리는! "....!" 긴장된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그들은 곧 자신들이 타고 내려온 궤도 엘리베이터의 케이지 위에 서 있는 한 남자이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따. 자신의 키보다도 큰 노다치를 어깨에 둘러맨 붉은 수도승 복장의 남자. 바로 황유평이었다! "사백!" 코마히코는 도츠카노츠루기로 지검대적세를 취하며 더업이 긴장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마음속으로는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거대한 절망감이 엄습해오고 있었따. 예전에 유평과 대면했을때만 해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때는 적어도 기량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완벽하게 단절된 듯한 교감. 마치 눈앞에 유평이 있지만 코마히코에게는 그가 아늑한 절벽 위의 존재처럼 보였다. 그것은 신검을 들고 있는 그이기에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예감이었다. 무엇보다 유평의 기척을 자신들이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이 이 예감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들은 그에게 조금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백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거야?' 그런 유평의 이질감은 마리 역시 진즉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인에 대한 마음이 더 급했기에 오라 소드를 유평에게 겨누고 소리쳤다. "외삼촌이 여기 계시다는 건 그 남자 또한 여기 있다는 뜻이로군요! 피스 블랙! 외삼촌은 아직도 그 남자의 뒤를 봐주고 계신겁니까!" "... 그 너저분한 관계라면 이미 앞에서 끝내고 오는 길이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더 이상 녀석에게 볼일은 없지. 여기에 온 것은 명백한 나 자신의 의지다." 유평은 그렇게 답하며 엘리베이터 위에서 소리 없이 그들 앞으로 착지했다. 이미 그 움직임에서는 조금도 인간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유령에 가까운 모습이다. 코마히코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쩌면 사백은 이미.... "그, 그게 무슨 말슴이십니까? 원하는 바를 이뤘다니!" 마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재차 소리쳤다. 유평의 말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원하는 바를 이뤘다는 것은 피스 블랙 역시 자신의 목적을 이뤘다는 뜻인가? 이미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가인은...! 시민씨는!' 유평은 그런 마리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짐짓 냉소를 흘렸다. "내 목적이 이미 이뤄졌다는 거다. 이렇게 다시 너희와 만나게 되었으니까. 애초부터 피스 블랙이 일 따위 내 알 바가 아니었어." "그럼!" "너희들의 동료가 어찌돠었는지 궁금한 건가? 그렇다면 날 쓰러뜨려라. 날 쓰러뜨리고 너희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 우우우우 순간 유평이 들고 있던 후츠노미타마가 귀곡성을 터뜨리며 푸른 귀기를 내뿜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개방감. 원전한 영기의 방출이었다. 유평은 귀기가 서린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물런 이런 날 너희들이 쓰러뜨릴 수 있을 리는 만무하겠지만." "스스로 신검의 제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까?" 코마히코는 후츠노미타마의 지독한 사기에 치를 떨었다. 어리석은! 내가 그토록 신검의 원령을 경게하라고 경고했건만! 유평의 후츠노미타마와 코마히코의 도츠카노츠루기는 사용자의 영체를 취하여 신력을 끌어내는 소울 이터(Soul Eatter)였다. 한순간이라도 검에 대한 경계를 풀면 그 즉시 신검에 자신의 생기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생기를 빼앗는 것으로 시작되는 신검의 사용은 점점 더 강한 유혹을 불러들이고, 이내는 사용자가 신검에게 잠식당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죽음뿐이다. 사용자는 신력에 취해 ㄴㄹ뛰다가 모든 생명을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유평은 자신을 비난하는 코마히코의 눈초리에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힘을 얻기 위해 난 기꺼이 이 한 몸을 제물로 바쳤다. 저번 너희들과의 싸움으로 깨닫게 되었다. 내 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검, 이 검을 사용하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내 적은 바로 나자신! 그리고 도츠카노츠루기다!' 코마히코는 예전 유평에게 외쳤던 자신의 외침이 생각나자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처음 유평을 봤을 때 느낀 이질감의 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싸웠다. 나를 유혹하는 후츠노미타마와 계속해서 싸웠어. 그렇게 얼마만큼 싸워왔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를 유혹하는 신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군." "설마." "....그래. 같은 신검을 사용하는 너라면 알고 있겠지?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알 수 없는 건가. 난 내 생명을 모두 신검에 쏟아 부었다. 완전히 잠식당한 거지. 나는 더 이상 예전의 황유평이 아냐. 후츠노미타마와 하나가 된 황유평이다. 후츠노미타마가 곧 나고, 내가 곧 후츠노미타마가 된 거지." "신검합일...." 코마히코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 유평에게서 느껴졌던 아늑한 절망감.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존재감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설마 신검의 유혹을 통해 신검과의 융합을 꾀할 줄이야!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그 신검합일조차 언제 꺼질지 모르는 등불이에요! 영체가 바닥나면 사라져 버릴, 그런 일시적인 현상이란 말입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적어도 내가 알고 싶던 바는 확인 할 수 있을 테니까." 유평은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듯 후츠노미타마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주위이ㅡ 대기가 신검의 귀기에 발맞춰 회오리치기 시작한다. 마리는 그렇게 파멸로 치닫는 외삼촌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인간으로서 자신을 잃어버리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으신 것이....대체 무엇입니까?" "....." 유평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그녀의 질문에 답할 뿐이었다. 촤앙 그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 뒤편에 있던 궤도 엘리베이터, 그 4번 엘리베이터의 케이지가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타타타타탕 메인센터에서 다른 건물들로 향하는 자동승강로는 센터의 45층 중앙 홀에 설치되어 있었따. 메디컬 센터와 메카닉 센터를 포함해 총 네 개의 건물들로 이동할 수 있는 승강로는 총길이 400미터의 반투명 터널로서 평소 각 센터의 수뇌부들은 이 터널을 이용해 신속하게 메인 센터로 집결할 수 있었다. 타타타타탕 하지만 현재 이 ㅈ둥앙 홀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더 시티의 전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관계로 자동승강로는 정지되었고, 그나마 듬성듬성 켜진 실내 조명등조차 피탄이 튀어 하나둘씩 꺼져가고 있었다. "제길! 따라붙었어!" 뒤편 복도를 향해 라이플을 난사하던 천요원은 이를 갈며 탄창을 갈아 끼웠다. 그녀 앞으로는 수십명의 오퍼레이터팀이 우왕좌왕하며 메디컬 센터의 자동승강로 족으로 달리고 있었따. 그 중 전투훈련을 받은 몇몇 오퍼레이터 대원들은 요원을 도와 같이 견제사격을 하고 있었으나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따. 역시 훈련을 받았다고 한들 비전투요원은 비전투요원인 것이다. 애초에 그들에게 큰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 멀었습니까! 뭘 머뭇거리고 있는 거예요!" 요원은 자동승강로에 모여 있는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진 사령관을 위시한 선두의 삼인방은 두 팔을 걷어붙이며 승강로의 자동문을 열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전력이 나간 자동문은 광센서가 작동하지 않았기에 비상개폐장치의 수동레버를 돌려야만 했는데, 아까부터 이 레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성인남녀 네명이 달려들어도 잘 돌아가지 않았따. 자동문의 유압식 도어 엔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따. 아마도 전자기 밸브가 강제로 차단되는 과정에서 피스톤의 랙이 피니언가 엇갈린 모양이다. 키릭 키릭 문은 간신히 손이 지나갈 틈만 남기고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따. 진 사령관과 함께 레버를 당기던 삼인방이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안 돼! 이런 데서 죽을 순 없어!": "왜 안열리는 거야! 왜!" "뭔가 지렛대라도 될 만한 걸 가져와 봐! 어서!" 순간 지렛대라는 말을 들은 진 사령관이 앞에서 견제사격을 하던 한 오퍼레이터 대원의 라이플을 낚아채듯 가져왔다. 그는 그대로 자동문의 열린 틈을 향해 라이플을 끼워넣고는 그대로 잡아당겼다. 키이이이이익 요란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좌우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서 문을 여는 진 사령관의 모습에 삼인방과 대원들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레버가 고장났다지만 네명이 달려들어도 안 열리던 문을! "자, 들어가지." 진 사령관은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문을 벌려 놓고도 땀 한 방울 흘리는 기색이 없었따. 그는 지렛대로 사용한 라이플을 내려두고 그대로 자동문 틈 사이로 들어가 버렸고, 멍하니 있던 대원들도 하나둘 그 뒤를 따랐다. 삼인방은 뭉ㄴ으로 지나가기 전에 진 사령관이 버려둔 라이플을 살펴보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라이플은 그야말로 직각에 가깝게 휘어져 있었다. "이, 이건 그런 걸까나? 생사가 걸렸을 때 발휘된다는 인간의 잠재력?"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뭔가 절박한 느낌이 없었어. 열혈도 없었고." "열혈은 만능이 아니야" "그래, 무엇보다 저 진 사령관이 열혈이라니. 그림이 된다고 생각해?" 그런 실없는 소리들을 늘어 놓는 선배들의 모습에 오퍼레이터팀의 막내 문세희는 한숨을 내쉬었따. 이건 여유가 있는 건지, 단순히 위기감이 없는건지... "뭣들 하는 거야! 당장 들어가지 못해!" 그때 뒤에서 벼락같이 터지는 요원의 외침에 삼인방과 문세희는 서둘러 문틈으로 들어갔다. "네네, 넷!" 요원은 모두가 들어간 것을 확인 한 후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복도 저편에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적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따. 붉은 AI 슈츠의 소년과 푸른 AI 슈츠의 소년. 그들은 마치 유람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자동 승강로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요원 일행을 쫓는 다급함도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따. '개자식들! 사람을 얕보는 것도 정도껏해야지!' 요원은 치솟는 분노를 애써 참아내며 자동문을 지나 승강로로 들어갔다. 일행은 벌서 한참을 그녀 앞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요원은 품에서 수류탄을 꺼내 핀을 뽑아 문틈 밖으로 던진 뒤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 콰아아아앙 뒤늦은 폭음이 멀어지는 그녀의 뒤에서 들려온다. '저런 녀셕들 때문에 모두가... 부대장님과 모두가....!' 요원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메인 센터의 1층에서 헤어진 동료들을 떠올렸다. 웃으면서 그녀를 보내 준 유한진 중위와 고참들. 분명 적들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그들의 방어진이 뚫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마도 없겠지.' 요원은 충혈되는 두 눈을 참지 못하고 질끈 감았따. 그녀는 자신의 동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녀가 아는 사람들 중에 지켜야 될 것을 뒤에 놔두고 도망치는 팔라딘 대원들은 없었다. 그들은, 부대장님과 고참들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싸우다가 죽어갔을 거야.' 요원의 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닦아내며 새된 숨을 몰아쉬었다. 달리면서 흘리는 눈물은 무엇보다도 괴롭고 힘들었다. 마읔껏 울음소리조차 못내는 현 상황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다.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했으면서. 약속했으면서.....' 콰지지지직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파열음. 메인 센터 쪽의 자동문이 일그러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요원은 힐끗 뒤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의 AI 슈츠 소년들이 그렇게나 열기 힘들었던 자동문을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잡아당기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ㅏㅁ도 요원 일행이 개폐한 문이기에 더욱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모양이다. 남좋을 일만 시켰군! '제길! 제길!' 요원은 슬픔에 잠길 기회도 주지 않는 적들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더더욱 앞의 일행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다. 이대로 멈춰 서서 사격을 할까도 싶었지만 어차피 AI 슈츠의 오라 쉴드 앞에서는 어떠한 물리공격도 통용되지 않았다. 차라리 한 걸음이라도 더 많이 도망치는 편이 나았따. "....!" 그렇게 일행을 뒤쫓던 요원은 곧 그들이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왜 계쏙 도망치지 않는 거야! 다들 죽고 싶어! '아!' 하지만 곧 ㅁ머춰 있는 이유를 깨달았따. 메디컬 센터와 연결된 반대쪽 자동문이 개폐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순 요원은 누앞이 깜깜해졌다. 여기는 승강로의 안쪽이라서 앞에서와 같이 수동으로 문을 열 수 있는 비상레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행을 이곳으로 데려운 진 사령관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따. 퇴로도 확보하지 않은 길로 일행을 끌고 오다니! 모두 다 죽을 셈이야! "열어! 어서 열어!" "어떻게든 해봐 ! 빨리!" 요원은 자동문 앞에서 아우성치는 대원들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따. 도망치는 것도 여기까지 인가. 그녀는 라이플을 적들에게로 겨누었따. '좋아. 도망치지 못한다면 죽을 때까지 싸워주지! 내 동료들! 부대장님!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화르르르륵 그때 일행들 사이로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났따. 요원의 뒤편에 있던 오퍼레이터 대원들 중 하나가 갑작스레 불꽃에 뒤덮였다. 그 바람에 불꽃에 휘감긴 대원은 물론이고 그녀의 주위에 있던 대원들까지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악!"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따. 산채로 불에 탄 여인은 고열에 피부가 녹으면서도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도와줄 수 없었따. 뒤늦게 진 사령관이 상의를 벗어 그녀의 몸에 붙은 불을 끄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따. 불꽃은 마치 그녀 한사람에게만 통용되는 것처럼 잔 사령관의 옷에도 번지지 않고 그녀에게만 맹렬히 타올랐다. 콰직 이번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불꽃의 근처에 있던 한 대원이 무시무시한 파쇄음과 함께 쓰러졌다. 한순가 얼어붙은 체내의 수분에 패앙하는 부피를 이겨내지 못하고 전신의 뼈와 장기가 으스러진 것이다. "아악! 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도대체 무슨 일ㅇ ㅣ일어나는 거야!" 쏟아지는 여자들의 비명 속에서 요원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곧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AI 슈츠의 소년들이 자신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웃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따. '저놈들! 저놈들이 한 짓인가? 저 녀석들이 죽인거야?' 하지만 무슨 수로? 어떻게 저 거리에 사람들을 태워, 얼려 죽일 수가 있는거지? '설마.... 이게 녀석들의 오라 능력?' 그제야 요원은 녀석들이 왜 자신들과 일부러 거리를 벌려서 쫓아왔는지 깨달았다. 애초부터 녀석들의 공격수단은 비거리의 제약이 없었던 거야. 언제든지 우리를 죽일 수 있었어! "우아아아아아!" 타타타타타타 요원은 고함을 내지르며 라이플을 발포했따. 그러나 그녀가 쏜 총알은 하나같이 AI 슈츠의 오라 쉴드 앞에 차단당했다. 이래서야 너무나 일방적이다. 하다못해 예전 시폰 뤼멘이 제조했던 아켄석 탄이라도 있으면 상대가 되련만! "끼아아아악!" 다시 요원의 뒤편에서 대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를 잇는 ㅂㄹ꽃음과 파쇄음. 또다시 적들의 공격에 대원들이 죽어나갔다. 요원은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AI 슈츠의 소년들을 노려보며 연신 라이플을 발포했다. 타타타타타 개자식들아! 날 죽여! 너희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나부터 죽이란 말이다! 괜히 힘없는 대원들 건드리지 말고 나부터 죽엿! 요원은 사격으로 소년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려 했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소년들은 악에 받쳐 날뛰는 그녀가 맘에 들었는지 키득거리며 얘기를 주고받았따. "저 여자, 내가 점찍어뒀어. 가장 나중에 죽일 테니까 먼저 건드리지 마. 알았어?" "그럼 내기하자. 다른 녀석들부터 차례대로 죽여가다가 마지막에 저 여자 혼자만 남았을 때 누가 먼저 죽이느냐로." "싫어, 스킬라, 넌 얼어 죽여서 편하겠지만 난 태워 죽여야 한단 말이야. 내 쪽이 더 시간을 잡아먹어, 불리해." "참 나, 얼어 죽이는게 어째서 태워 죽이는 것보다 편하다는 거야? 불은 그냥 붙이기만 해도 타지만 얼음은 계속 차갑게 식혀야 한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 쪽이 더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 "어쨋든 싫어. 네가 불리한 내기를 일부러 나한테 제안할 리가 ㅇㅄ잖아." "쳇, 그럼 저 여자는 너한테 넘길 테니까 그만큼 다른 녀석들을 나한테 넘겨. 알았지?" 두 소년의 대화에 요원은 기가 막혔다. 더이상 그녀에게 그들은 소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악마로 보일 뿐이었따. 잔인한 악마! 대체 네놈들은 사람의 목숨을 뭘로 아는 거냐! 윙 그때 갑자기 메디컬 센터의 자동문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뒤를 잇는 기계음. 문이 개폐되는 것이었다! 요원은 얼핏 열리는 자동문 틈 사이로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인 닥터와 주유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문을 연 것은 저들인가! 동시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품 안에 있던 폭탄 중 하나를 꺼내들었따. "모두들 달려! 어서!" 소리침과 동시에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던졌다. 소년들은 자신들의 발밑으로 폭탄이 날아옴에도 불구하고 태연스럽기 짝이 없었따. 어차피 폭탄이 터져 봐야 AI 슈츠의 오라 쉴드로 막으면 그뿐이었따. 하지만 그것이 맹점! 그것이 바로 요원이 노렸던 것이다.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한순간 무시무시한 빛의 홍수가 승강로를 메웠다. 요원이 던진 폭탄은 강한 조도의 빛을 발산시키는 플래시뱅, 섬광탄이었던 것이다. 영락없이 평범한 수류탄일 거라고 생각한 소년들은 정면에서 섬광탄을 얻어맞고 일순간 눈이 멀었따. "어서! 어서!" 빛이 채 꺼지기 전에 요원은 열리는 자동문으로 대원들의 등을 떠다 밀었다. 진 사령관과 대원들은 등쪽에서 느껴지는 섬광탄의 빛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정신없이 메디컬 센터로 몰려 들어갔다. 요원은 가장 뒤에서 문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대원의 등을 떠다밀며 소리쳤다. "문 닫아요! 빨리!" "어딜 가...!" 순간 요원의 등 뒤에서 괴성이 울려 퍼지며 검은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요원의 외침을 빛과 아우성의 혼란 속에서 알아들은 닥터가 자동문의 전자락을 작동시킨다. 그러자 거친 기계음과 함께 자동문이 빠르게 폐쇄되었따. 쿵 세차게 닫히는 자동문 밖에서 뭔가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따. 그 소리에 복도에 널브러져 있던 대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문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문은 약간의 찌그러짐이 생겼을 뿐 앞에서처럼 쉽게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따. 역시 개폐된 상태가 아니면 이 정도의 강철문을 여는 것은 AI 슈츠의 착용자라도 불가능한 것이다. 진 사령관은 쓰러진 몸을 일으키며 마찬가지로 쓰러져 있던 닥터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늦었군." "으음, 면목이 없습니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 생기는 바람에......" 닥터의 말에 뒤편에 쓰러져 있던 유화가 얼굴을 붉히며 일어났다. 진 사령관의 구출이 늦어졌던 것은 순전히 닥터가 감금된 그녀를 구해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유화는 자신에 대해 함구하는 닥터의 배려에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그를 일으켜 주었다. "흑, 흐흑!" 그때 쓰러진 일행 속에서 흐느끼는 몇몇 오퍼레이터들이 있었따. 그들은 유화와 닥터도 익히 알고 있는 오퍼레이터의 삼인방이었다. 아니, 삼인방이 아니다. 언제나 붙어 다니던 세명의 오퍼레이터들 중 한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따. 그 모습에 닥터와 유화는 가슴이 싸늘해졌다. 설마.... "주연아, 흐흑....." "어어엉!" 삼인방의 일원이었던 윤연정과 김성은은 닫힌 자동문에 기댄 채 소리내어 울고 있었따. 삼인방의 마지막 일원이었던 김주연이 앞에 있었던 오라 능력자들의 공격에 사망했다. 너무나 다급한 와중에 일어났던 일이라 그녀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김주연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 닥터와 유화는 서럽게 우는 연정과 성은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본의는 아니었다지만 자신들이 늦게 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연과 다른 오퍼레이터 대어ㅜㄴ들이 죽은 것이다. 자신들이 좀 더 일찍왔더라면, 좀 더 서두르기만 했더라면! 헤아릴수도 없이 많은 가정법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거기에 따르는 죄책감은 굳이 말로 설명하지도 않아도 충분히 처참한 것이었다. "잠깐...." 슬픔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일행 중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행의 뒤를 지켜 주던 천요원 중사. 그녀의 모습 또한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다. 닥터는 다급히 자동문 옆의 벽에 달린 검문기의 인터폰을 작동시켰다. 원래대로라면 CCTV 영상이 같이 나와야 하지만 앞의 폭발로 기기가 부서지기라도 했는지 승강로 내부의 목소리만 드문드문 들려올 뿐이었따. <이, 이게 쓸데없는 짓을!> <너 대체 무슨짓을 했는지 알아? 앙! 놓쳐버렸단 말이야! 마스터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고!> <빌어먹을! 이게 다 키마이라 너 때문이야! 이런 여자 따위 금방이라도 죽여 버리면 됐을 것을! 뭐가 맘에 든다고 살려두자고 했던 거야!> <시, 시끄러!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나도 몰랐어! 몰랐다고!> 당황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소년들의 목소리. 그것은 흡사 부모에게 꾸중 듣기를 두려워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다투던 그들은 이내 자신들을 곤란하게 만든 장본인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너!> <어떻게 죽여줄까? 응? 어떻게 죽고 싶어! 간단히 죽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마! 끝까지 가지고 놀다가 죽여주겠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며불며 사정하게 만들어 주겠어!> <크....> 그때 소년들의 음성 외에도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의 목소리, 바로 천요원의 음성이었따. 그 목소리르 들은 닥터와 일행의 표정에 안도감이 스쳐지나갔다. 아직 살아 있었어! 죽지 않았구나! 요원은 어딘가를 다쳤는지 상당히 쇠약해진 목소리로 소년들을 비웃었다. <웃기지......마. 크크, 너희 같은 놈들에게 사정 따위 할 것 같으냐> <뭐야> <대체 사람의 목숨을....뭐로 생각하는 건지. 빌어먹을 꼬마들. 흐, 그렇게 죽이는 게 좋아? 그래서 모두들 죽였던 거냐? 응?> <이, 이게 뭘 믿고 대체...> 철컥 소년과 요원의 대화 사이로 차가원 격철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닥터와 유화, 대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무, 무슨 짓을 할 생각인 거야? "그만두십시요, 요원씨!" 닥터가 인터폰의 발신기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버럭 소리질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승강로 내부에 닿지 않았따. 대신 인터폰으로 요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드려왔다. <......그렇게 죽이는게 좋으면 니들이 한번 죽어봐, 이 악마새끼들아> 타앙 천둥처럼 복도에 울려퍼지는 단발의 총성. 닥터는 황급히 인터폰에서 귀를 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재차 인터폰에 소리쳤따. "요원씨? 들립니까, 요원씨? 천요원 중사!" <......> 더이상 인터폰으로 들린느 소리는 없었따. 앞의 발포로 내부의 인터폰이 부서진 걸까? 아니면 더 이상 소리를 낼 사람이 없어진 걸까? 이자리의 모두는 전자일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들의 감정을 솔직히 후자를 선택하고 있었따. 닥터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인터폰에 몸을 기댔다. 유화 역시 후들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며 옆의 벽에 등을 기댄다. 특히 요원에 의해 지켜졌던 오퍼레이터 대원들은 비명이 터질 것 같은 입을 틀어막고 저마다 소리없이 오열을 터뜨렸다. "...." 진 사령관은 그런 부하들의 통탄에도 불구하고 그저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 모습은 감정이 없는 냉혹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따. 진 사령관은 검은 선글라스 안의 눈으로 부하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곧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어느새 나타난 건지 모를 하얀 정장의 중년인과 네명의 소년들이 서 있었따. "이런, 이런. 술래잡기는 여기까지인가? 좀 더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중년인은 일행의 모습에 유감이라는 듯 혀를 차며 말했따. 그 목소리에 슬픔에 잠겨 있던 닥터와 대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중년인을 돌아보았따. 지금 이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중년인이 누군지 확인한 일행의 얼굴 위로 경ㅇ악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시, 시폰 뤼멘." 방금 전까지 메인 센터에서 일행의 뒤를 쫓던 소년들의 주인, 피스 메이커 미국지부의 사령관이자 성당기사단의 열 번째 검. "4개월 만의 재회인가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피스메이커 여러분." 승강로의 자동문을 폐쇄함으로써 추적을 막아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진즉부터 메디컬 센터에 넘어와 있었던 것이다. -------------------------------------------------- "그래도 전 납들할 수 없어요." 브루스의 설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끝까지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 왜 그렇게까지 천계라는 곳으로 가야 하는 거죠? 이대로, 이대로 우리와 지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모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가야 하는 곳이라니! 그런 곳에 대체 뭐가 있다는 거에요!" 가인의 원망 섞인 외침에 브루스는 침묵했다. 그는 고집스러운 가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입을 열었따. "그곳에는.....반드시 다시 만나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있다." "....!" 다시 만나겠다고 약속한 사람. 그 말에는 진한 그리움과 슬픔,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것마능로도 가인은 그 사람이 얼마나 브루스에게 소중한 사람인지,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따. 느낄 수 있었따. 브루스는 그렇게 망연자실해하는 가인을 바라보다가 차원진동이 집약된 왼 주먹을 들어올렸다. "피차간에 말이 많았군. 이제 끝이다, 오라의 주인. 죽기 싫다면 네가 가진 모든 힘을 나에게 보여 주는 게 좋을 거야." "브루스!" "빨리 시영에게 가지 않으면 현 인류는 멸망할 거다. 그리고 한시민 그 아이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그렇게 돼도 좋은 거냐?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 틈이 있다는거냐?" "....!" 가인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 브루스의 말대로 그에게는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따. 그가 왜 이 옴팔로스로 내려왔겠는가? 바로 시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에게 전해야 할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런데.... "아" 가인은 짧게 탄식했다. 시민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브루스와 대치하고 있는 자신. 천계에 있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100여년이 넘도록 오라의 주인을 찾아 헤맨 브루스. '닮았어.' 자신과 그는, 유가인과 브루스 류는 나이도 성격도 외모도 살아온 과정도 모두 다 달랐지만, 같은 점이라곤 한 구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닮았어.' 딱 한가지. 누군가를 절실히 원하는 마음. 그 때문에 절박해질 수밖에 없는 그 모습은 너무도 서로가 닮아 있었던 것이다! 투아아앙 수간 브루스가 대지를 박차고 가인에게 돌진했다. 그러자 그들 사이의 공간이 좌우로 갈라지며 검은 폭풍이 일직선으로 쏘아져나갔다. 칠성권 하부곤륜의 다섯 발경들이 차례대로 전개되어 멸경의 기운이 형성되고, 거기에 내경 거문의 기운이 깃들자 칠성권 최고, 최후의 발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칠성권 제일발경! '통제건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극대소멸권 탐랑!! 아포칼립스 제너레이터 발동. 그와 동시에 브루스의 몸은 왼손의 주먹을 기점으로 회색의 오라에 뒤덮여갔다. 그의 여체가 잔류하는 카르마에너지를 모두 끌어올려 마지막 혼돈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 모습에 가인은 안색이 창백해져 등에 있는 반중력의 원을 날개처럼 펼쳐올렸다. 피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브루스와의 싸움을 피하고 싶어. 이대로 그와 충돌하고 싶지 않았따. 그렇게 하다간 반드시 한쪽이 죽게 될거야! 하지만...... '그곳에는..... 반드시 다시 만나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있다.' 그말을 듣고서, 그런 각오를 듣고서. '피할 수는....없어.' 브루스는 내가 피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정면에서부터 탐랑을 전개한 거다, 이대로 내가 피해 버리면 자멸할 것이 분명한데, 그런데도 날 믿고서! 내가 자신의 공격에 반드시 응해 줄 거라고 믿으면서!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어!' 가인은 바람의 날개에 몸을 실은 채 회색의 혼돈 정면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오른발에 실린 혼돈의 기운을 끌어 모아 힘차게 앞으로 내뻗었다. 질풍ㅡ! "라이징ㅡ" 투화아아아악 순간 반중력의 원이 일제히 폭발하듯 점화했다. 그러자 가인의 몸은 푸른 오라의 기운에 휩싸여 하나의 빛으로 변해간다. 스스로 차원진동의 촉매가 되어 현세에 혼돈을 강림시킨 것이다. "킥!"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 그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아포칼립스! ㅡ브루스! ㅡ유가인! 탐랑과 라이징 킥이 부딪히기 직전, 그들은 똑똑히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찰나였지만, 또한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그 느려진 시공 속에서 브루스와 가인은 서로의 모습을 눈에 새기듯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가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브루스가 언뜻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반드시 그랬으리라 믿으면서 자신도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니, 미소를 지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찰나, 너무나도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니까. 위이이잉 그 직후 충돌이 일어났다. 차원진동과 차원진동의 대립. 그것은 수세기 동안 반복되어온 세계의 흐름이었다. 그 흐름이 불러들인 여파는 시공차원에 영향을 미치고, 또 수많은 평행세계의 창조와 소멸을 가져온다. 지금 이 순간 존재의 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브루스와 가인을 중심으로 엇갈린 것이다. 한낱 인간의 힘이 차원의 흐름에까지 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의 법칙 속에서 유일하게 차원진동을 현현시킬 수 있는 오라의 주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위대한 창생의 업적이다. "으아아아앗!" 그런 세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포칼립스 속의 두 존재는 서로를 밀어내는 데 전념했다. 아포칼립스의 여파에 육체가 소멸되려는 것을 이미지 메이킹으로 막아내며 더 많은 차원진동을 끌어 모으기 위해 영적인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그것은 예전에 가인과 시영이 아포칼립스 대결을 펼쳤을 때와는 양상을 달리하는 구도였다. 그때는 시영의 블랙아포칼립스가 이미지 메이킹으로 투영된 혼돈이었기에 그저 순수하게 파괴력을 겨루는 싸움이었지만, 이번에는 차원진동의 대립으로 발생한 시공의 흐름을 누구에게 드 끌어들이느냐를 겨루는 싸움이었다. 그야말로 영체의 힘, 정신력의 싸움이다! 오오오오오 푸른빛의 아포칼립스와 회색빛의 아포칼립스 사이로 얇은 검은 장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포칼립스의 충동이 일으키는 혼돈의 파편, 시영 때와 달리 더욱 크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거대한 차원의 문이었다. 그 문이 나타나자 브루스의 얼굴 위로 환희와 격정이 떠오른다. 저것이다. 저것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토록 갈망해왔던 천계로의 길이다. 저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저 어둠의 혼돈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어!' 만날 수 있다! '드디어 나는.....!' 브루스는 이를 악물고 전심전력을 다해 유가인의 아포칼립스를 밀어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이징 킥의 혼돈을 밀어낸다면,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내딛는다면! 그럼 닿을 수 있다. 들어갈 수 있어! '방해하지 마라, 애송이!' 넌 알지못해!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내가 얼마나 외로워했는지! 쩌저저적 브루스의 왼손에서 시작된 균열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그의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부서질 테면 더 부서져 보라는 듯 혼돈의 파편을 향해 부서지는 왼손을 내뻗는다. 가인은 그렇게 조각나는 브루스의 육체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ㅡ 그만해요. 브루스! 제발 그만두라고요! 그러다간 죽어요! 죽는단 말이에요! 공간 속에서 울려 퍼지는 가인의 목소리에 브루스는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ㅡ후후, 후하하하! 죽는다고? 그거야말로 멋지군! 하하하하! 그거야 말로 내가 바라온 죽음이다! 아무래도 자신은 여기까지인 듯했다. 혼돈의 문을 만들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지금의 탐랑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브루스이 카르마 에너지는 완전히 고갈되었따. 브루스는 젖어드는 눈으로 혼돈을 바라보았다. ㅡ이것만을 위해 살아왔어. 이날만을 위해 간신히,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이 끝이야. 끝나는 거야. 더이상.... ㅡ브루스! 가인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브루스의 영체에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요, 죽지 말아요, 브루스. 이런 식으로 가지 말아요. 제발!' 가인은 자신이 탐랑을 받아치고 있기 때문에 브루스가 쉽사리 혼돈의 문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문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그 정체된 상황이 그의 육체를 좀먹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아포칼립스의 여파가 시전자에게 되돌아오는 것이었따. 브루스는 이미 탐랑을 전개하는 데 영체의 카르마에너지를 모두 쏟아 붓고 있었기에 그 여파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없었따. 한시라도 빨리 혼돈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인이 탐랑에 대항하는 라이징 킥에 힘을 풀 수도 없는 것이, 단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아 버리면 그 자신이 아포칼립스에 소멸될 판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그도 브루스의 아포칼립스를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쩌적 브루스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다리 부분이 바스러지고 있었따. 가인은 그것을 눈믈을 흘리며 바라보았따. 브루스는 이미 눈앞의 가인을 바라보지 않고 혼돈의 문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따. 가인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이대로, 이대로 나는 브루스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되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보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거야?' 브루스를 위해, 그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 있었다. 이 상황에서 브루스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인은 선택을 주저하다가 다시 눈을 떠 브루스를 바라보았따. 그리고 깜짝 놀랐다. 브루스의 변색된 얼굴 위로 어느새 균열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가인은 결정을 내렸다. 브루스를 구할 유일한 방법, 그 방법을 실행에 옮기겠노라고. ㅡ브루스. 가인은 잦아드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공간을 타고 전해진 것일까? 혼돈의 파편을 바라보던 브루스가 천천히 가인을 돌아보았따. 가인은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방긋 웃었다. ㅡ......살아줘요. 뭐? 브루스는 그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 정체되었던 혼돈의 균형이 깨지고 있었다. 유가인, 그가 브루스의 탐랑에 맞서던 자신의 아포칼립스를 일제히 거둬들인 것이다! 브루스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따. '이 바보 같은 녀석이!' 하지만 그의 손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따. 왜냐하면 가인의 몸은 이미....... "조심하십시오, 아가씨!" 촤앙 촤앙 촤앙 코마히코의 외침과 함께 주황빛의 검기가 마리에게 날아드는 푸른 검광들을 상쇄시켰다. 도츠카노츠루기와 후츠노미타가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대기가 흔들리는 검풍이 일어난다. 코마히코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수중의 신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후츠노미타마와의 검합이 생길 때마다 도츠카노츠루기의 제어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따. 아마도 유평과 융합한 후츠노미타마의 원령이 실체화되자 도츠카노츠루기 안에 잠들어 있던 원령 역시 눈을 뜨기 시작한 모양이다. '귀찮게 디었군!' 코마히코는 도츠카노츠루기에 대한 금제를 강화시키며 낮은 자세로 유평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유평은 후츠노미타마를 땅에 꼽다기 그대로 아래서 위로 올려쳤다. 그것만으로도 충격파에 가까운 검광이 대지를 가르며 코마히코에게 날아든다. 신검의 힘을 이용한 카마이타치였다. 코마히코는 예전과 달리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신력을 사용하는 유평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전에는 그토록 신력을 경멸했으면서.... "이제는 그 신념조차 버렸다는건가!" 노호성과 함게 코마히코는 달리던 그대로 두츠카노츠루기를 회응로 베었다. 그러자 이식 파쇄의 강맹함이 그대로 카마이타치를 가르고 지나간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코마히코는 물흐르듯 운요에 접어들어 일식 섬광을 펼쳤다. 촤촤촤촤촤 도츠카노츠루기의 주황빛 검기가 순식간에 거미줄 같은 검진을 만들어냈다. 한눈에 봐도 활로가 없는 사문이었다. 촤아아아앙 그러나 이번에도 유평은 무심하게 후츠노미타마를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섬광의 검진을 와해시켰다. 대충 휘드른 듯이 보여도 그의 일섬 하나하나에는 가공할 만한 신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코마히코는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더 신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그의 모습에 감탄과 실망을 동시에 늒ㅆ다. 이토록 대단한 실력을 지녔으면서! '어째서 자꾸만 사도(邪道)로 가시는 겁니까, 사백!' 코마히코의 몸이 회전하며 주홍빛 검기가 세 곳에서 유평을 노렸다. 무영신풍류 영식 찰나! 순식간에 도츠카노츠루기가 만들어내는 격자격세에 뒤덮인 유평은 또다시 카마이타치로 반격을 꾀하려 했다. 그러나 코마히코는 예상했다는 듯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따. 촤작 찰나의 검로가 직선으로 변하더니 세개이 검광이 한데로 모였다. 사식 단월이었다. 그것도 또 다른 달의 그림자를 간직한 이형! 다만 코마히코가 내다본 몇 수 앞을 보지 못할 상대도 아니었다. 유평은 놀라운 반응속도로 검로를 회수하여 단월과 그 밑에 숨어있는 이형 잔월을 파해한 후 도리어 코마히코의 목을 향해 살초를 휘돌렀다. 코마히코는 목으로 떨어지는 후츠노미타마를 바라보면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휙 순간 코마히코 뒤에서 붉은 그림자가 유령처럼 더올랐다. 성마리였다. 그녀는 완벽하게 코마히코의 배후를 타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공격을 감행했다. 그녀의 오라 소드는 코마히코의 목을 노리는 후츠노미타마의 검기를 빗겨내며 그대로 유평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렇게 살초에서 벗어난 코마히코는 즉시 수중의 도츠카노츠루기를 바꿔들어 역 지검대적세를 취했다. 동시에 유평 뒤에서도 마리의 오라 소드가 궤적을 바궈 다시 한번 상대의 등을 노렸다. "합식 열린!" 촤아아아악 주홍빛의 검기와 붉은 빛 검기가 좌우로 교차되어 유평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러자 그 몸에서 뜨거운 선혈이 튀어 오르며 마리의 시야를 붉게 물들인다. 그 바람에 마리는 잠시 주춤거렸다. 가오는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사람을, 그것도 외삼촌을 베어냈다는 사실이 새삼 상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머뭇거림이 치명적이었다. 이미 신검과 융합해 불사지체를 이룬 유평에게 평범한 살초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를 회복해내며 그대로 마리의 등을 향해 후츠노미타마를 찔러 넣었다. 푸욱 오른쪽 어깨 죽지를 파고 들어가 앞가슴을 뚫고 나오는 푸른 귀기의 날. 그것을 본 코마히코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고함을 내지르며 유평과 마리 사이로 뛰어올랐다. "감히 누굴!" 촤악 도츠카노츠루기가 마리의 몸에 박힌 후츠노미타마를 쥐고 있던 유평의 손목을 통째로 베어냈다. 하지만 주홍빛 검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유평의 어깨와 목, 다리마저 용서 없이 베고 지나간다. 그야말로 분노의 격자격세였다. 턱 순간 피범벅이 된 유평의 손이 코마히코의 목을 움켜잡았다. 이 정도의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코마히코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유평을 노려보았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몸이란 말인가! 콰직 코마히코의 몸이 허궁에서 회전하다 그대로 땅바닥에 메다 꽂혔다. 유평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를 내동댕이친 것이다. 코마히코는 등이 쪼개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커ㅡ!" 그 비명조차 끝가지 이어지지 않았다. 쓰러진 그에게 쉼 없이 유평의 발이 날아든 것이다. 그 발길질은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AI 헬멧을 우그러뜨리며 그대로 코마히코의 아래턱을 후려쳤다. 다행히 코마히코는 뒤로 고개를 젖혀 정타에 얻어맞는 것은 피해냈지만 AI 헬멧을 부서뜨리는 유평의 괴력에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따. '아, 이런 건!' 코마히코는 앉은 자세에서 팽이처럼 회전하여 도츠카노츠루기를 휘둘렀다. 그는 이식 파쇄로 유평의 두 발목을 끊어 버리고 일어남과 동시에 삼식 격멸로 유평의 전신을 아래서 위로 이등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평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다시 코마히코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이런 건!' 콰앙 천둥이 치는 소리와 함께 코마히코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의 얼굴을 가려주던 AI 헬멧의 고글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코마히코였다. 간발의 차이로 오라 쉴드를 전개해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코마히코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무슨 짓? 무슨 짓이라니?" 유평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들어 보였다. 그런 그가 입고 있는 수도승복은 이미 도츠카노츠루기와 오라 소드에 의해 넝마조각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넝마조각 사이로 보여야 할 상처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옷에 묻어 있던 혈흔들조차 감쪽같이 사라져 있는게 아닌가. 마치 처음부터 상처따위는 없었다는 모습. 그것이 바로 코마히코가 분노하는 이유였다. "이런 건 무영신풍류가 아니야! 신검의 힘에 의지한 채 제대로 된 초식 하나 휘두르지 않으며!" 무엇보다 목숨마저 도외시하는 마구잡이식 공격. 어차피 신력으로 회복될 테니 얼마든지 상처를 입어도 괜찮다는 건가? "이런 건..... 목숨을 걸구 싸우는 모든 이들을 무시하는 처사다!" 한순간의 허를 찔려 죽고 죽이는 것이 싸움이다. 그것이 검과 검의 대결이다. 그렇기에 검사들은 싸움 속에서 전신의 오감을 곤두세워 상대를 마주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필사이 일념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영신풍류의 정신. 무영신풍류가 추구하는 생사입멸의 검이었다. 생과 사 둘 모두를 소중히 여기기에 바라볼 수 있는 상승이 검도다. '하지만!' 유평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해 버렸다. 신검에 의지한 채, 신력에 의지한 채 자신이 가진 힘과 가능성을 모두를 버려 버렸다! "그러고도 당신이 무영신풍류의 검사인 겁니까?" 오라 능력을 증오하며 신풍을 거부하며, 무영신풍류는 무영신풍류로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당신은, "내가 존경했던 사백은....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후, 후후, 후하하하하!" 비통한 코마히코의 물음에 유평을 어깨를 흔드며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잘도 나불대는군.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이런 건 무영신풍류가 아니라고?" 그러다 뚝 웃음을 멈추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코마히코를 노려본다. "무영신풍류의 검사라니! 그런 건 무영신풍류를 나오면서 그만둔지 오래다. 신검을 들면서부터 잊어버렸지!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괴물일 뿐이다. 신력을 손에 넣음으로써 더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 괴물!" 코마히코는 유평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이 터무니없는 기도는..... 지금까지 우리를 상대한 것은 진심이 아니었단 말인가? "괴물이 싸우는데 무영신풍류가 다 무어란 말이냐? 괴물은 괴물처럼 싸우면 돼! 단순히 죽이는 거리면 몇백배나 탁원한 힘이다! 그런데 왜 굳이 번거로운 인간의 검법에 얽매여야 하지? 어차피 죽이는 거라면 이 힘을 사용하면 그만인 것을! "거짓말!" 순간 유평의 뒤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푹 그리고 유평의 발밑으로 날아와 박히는 노다치. 후츠노미타마였다. 신검에 꿰뚫린 마리가 스스로의 손으로 후츠노미타마를 뽑아들어 유평에게 집어던진 것이다. 유평은 자신이 잘려나간 오른손이 붙어있는 후츠노미타마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마리를 돌아보았다. 마리는 포션으로 상처를 회복해냈지만 흘린 피의 양이 많은지 청색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따. 오히려 더욱 형형하게 유평을 노려본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외삼촌! 뭐가 괴물이란 말입니까?" "이런 것을 괴물이라고 하지 뭐가 괴물이겠느냐?" 유평이 잘린 오른판의 단면을 후츠노미타마에 가져가자 신검의 손잡이를 붙잡은 오른손이 거짓말처럼 달라붙으며 상처를 복구해냈다. 순식간에 재생을 마친 그는 멀쩡해진 손으로 후츠노미타마를 들어올리며 비죽거렸다. "봐라, 대단하지 않느냐? 아무리 잘리고 부서져도 아프지 않다. 고통스럽지도 않아. 지금이라면 믹서기에 다져져도 순식간에 살아날 수 있을 거야.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이다. 대단한 괴물이야!" "외삼촌은 괴물이 아닙니다!" 마리는 단호하게 외치며 지검대적세를 치했다. "그 증거로 지금 외삼촌은 신검에 잠식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검을 지배하고 있죠! 그것은 예전 신검에 잠식당하여 패배한 것을 극복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코마히코는 놀란 눈으로 유평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자신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었따. '내 적은 바로 나 자신! 그리고 도츠카노츠루기다!' 유평은 줄곧 그 말을 신경 써왔단 말인가. 그 때문에 신검과 싸워 신검합일을? "앞에서 외삼촌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혹시 당신 ㅅ스로가 증오하던 신풍이 되어 무영신풍류의 강함을 확인하겠다는 뜻이 아니셨습니까? 그 때문에 자신은 무영신풍류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마리의 질문에 일순간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코마히코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사백님은 결국.....' 우리를 인정했기에, 지난번의 싸움으로 우리 오라 능력자 역시 같은 무영신풍류임을 인정했기에. 그랬기에 우리가 증명해 주길 바란 거야. 자신의 길이 틀렸음을, 무영신풍류는 무영신풍류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그 때문에 스스로 희생하면서까지 마지막 싸움을....' "내가 왜 무영신풍류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유평은 그런 코마히코와 마리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영신풍류의 지검대적세를 취했다. 냉소를 흘리는 그의 얼굴은 귀면상 그 자체였다. "정말이지 건방진 녀석들이야. 웃기지도 않는 오라 능력자 놈들. 좋아, 그렇게까지 멋대로 지껄인다면 사용해 주마. 네놈들의 장단에 맞춰 얼마든지 무영신풍류를 사용해 주지!" 우우우우우 유평의 의지에 발맞춰 후츠노미타마의 귀곡성이 점점 커져갔다. 코마히코는 재빨리 마리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와 함께 검진을 펼쳤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말이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든 모양이다. '진심이 되어 버렸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건가.' 그들은 성급하게 입을 놀린 것을 후회했다. 가뜩이나 신검이 ㅎ미만으로도 고전하던 상대였다. 거기에 무영신풍류의 기교마저 가미된다면 더 이상 자신들에게 승산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저렇게까지 화를 낸다는 것은 역시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겉으로는 부인하고 있지만 분명 유평에게는 아직 무영신풍류의 정신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없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따. 반드시 그에게 보여줘야만 한다. '우리가 가진 무연신풍류의 정신을!' 그렇게 전의를 다지자 마리와 코마히코의 오라 패턴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오라 소드의 반물질 절삭성 커터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한 붉은빛은, 도츠카노츠루기의 검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한 주홍빛을 내뿜닌다. 절대로, 절대로 패배는 용납되지 않는다. '절대로!' 그러지 일대가 침묵으로 접어들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세 명의 검사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도, 내쉬는 것도, 심지어는 생가가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따. 그만큼 그들의 정신은 남김없이 상대방의 기도에 집중되고 ㅇㅆ었따. 이번 격돌은 앞의 난전과 달리 이격이 존재하지 않는 일전이었다. 단 한순간의 틈, 그 틈이 보이는 순간 쌍방의 승패가 갈릴 것이다. 유평은 그런 사제들의 모습에 속으로 감타냏ㅆ다. 겁없는 녀석들 물러설 줄 모르는 녀석들 나와는 너무나 다른 녀석들! '이 녀석들이라면 과연....!' 그 감상이 기도를 흐트러뜨렸다. 기도는 정체를, 정체는 정적을, 정적은 시작을, 시작은 싸움을..... 마치 연쇄작용이라도 일어나듯 단 한 번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 팽팽하던 대립구도가 깨지고 멈춰있던 시간이 흘러간다. 검과 검이 움직였다. 그리고 불꽃이 튀고, 예기가 부딪치고, 공기가 뜨거워지다가 결국 피가 흐르겠지 날의 궤적을 따라 허공을 수놓으며, 그렇게 모든 것은 끝난다. 서 있는 사람과 쓰러진 사람. 승패는 갈라지고, 그것으로 또 한번의 싸움은 일단락 되는 것이다. 위이이이잉 하지만 갑작스레 들린 이명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렸다. 실제로 싸움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마리와 코마히코, 유평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기묘한 감각, 싸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확실하게 남아있는 손끝의 감각. 그 기시감에 마리와 코마히코는 유평이 앞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위이이이잉 그런 의문은 또다시 들려오는 이명에 의해 해결되었다. 마리와 코마히코의 가슴을 파고드는 격통! 이건 예전에도 느껴본적이 있는 고통이었다. 바로, "차원왜곡!"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렇다. 방금 전의 기시감은 어디선가 일어나는 차원왜곡 현상이 시간축과 공간축을 비틀었기 때문인 것이다. 시공을 뒤흔들 정도로 강한 왜곡 현상이라니! 이건 쿠사나기 때 역중력이 발생하거나 기상변화가 일어났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었다. "저건!" 그때 코마히코가 옴팔로스의 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오라 패턴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빛들의 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마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브루스.....가인?" 회색과 푸른빛. 그것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오라 능력자들의 것이었따. 그녀의 중얼거림에 코마히코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따. "확실합니가, 아가씨? 저곳에 있는게 가인 씨와 브루스님이 맞는 겁니까?" "예, 하지만......" 마리는 말끝을 흐렸다. 왜냐하면 저곳에 있는게 그들이라면....어째서 그들이 아포칼립스를 사용하는 건지, 또 왜 서로의 혼돈을 겨루는 건지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야 꼭 가인과 브루스가 싸우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저쪽은 슬슬 결판이 나는 것 같군." 유평의 말에 마리와 코마히코는 그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마리는 가슴속의 불길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저쪽? 외삼촌은 뭔가 알고 계씬 겁니까? 저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보다는 너희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 네놈들과 같은 오라 능력자, 동료들이 벌이는 전투라는 것을." ".,....!" 불길함은 적중했다. 마리는 대번에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유평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이 한순간 떠올린 생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브루스와 가인의 싸움이라니! 그런 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브루스 류....라고 했던가." 유평은 그런 마리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혀를 차며 말했다. "원하는 바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이더군.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제자들마저 죽여버리는 사람이야. 하긴, 그 정도 각오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소원이라는 건가. 피장파장이군.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야." "마, 말도 안돼." 마리의 떨리는 목소리에 유평을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했따. "뭐가 말이 안 되지? 어차피 그는 너희들의 동료였던 옛 제자를 죽였다. 그런데 이제 아서 또 한 명 죽여 봤자 뭐가 달라지지?" "....." "어차피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아무리 타인을 생각하는 척, 배려해 주는 척해도 결국은 자신을 우선시하게 돼. 자신의 일이 가장 소중한 거다. 그게 인간이야. 그런 인간인 이상 나도 너희들도, 저 브루스 류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인의 목숨을 뺏을 수 있지." "아니야! 달라!" 마리는 강하게 부인했지만 유평은 코웃음쳤다. "흥, 아니라고 하는 너희들이야말로 동료를 구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날 몇번이나 죽이지 않았나. 그래 놓고서 이제 와서 자신들만 깨긋한 척하는거냐? 뭐? 어차피 신검의 힘으로는 죽지도 않는다고? 하하하! 그거야말로 최고의 위선이다. 아무리 죽지않는다고 한들 너희들이 나에게 보낸 살의는 없어지지 않아. 무영신풍류부터가 살의를 전제로 한 생사입멸의 검인 것을. 너희들은 그것마저 부정할 셈이냐? 아무리 활검이니 뭐니해도 검을 든이상 우리는 훌륭한 살인자야!" "....!" "피스메이커라고 했던가? 말도 안되는 이상이지. 모순덩어리인 거짓 단체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꺼려함녀서 대체 평화를 어떻게 지킨다는 거냐?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지켜지지 않는 누군다고 있다는 거다. 그 시점에서 평화는 이미 공평한게 아니야. 이기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개념인 거다. 그러니 부정하지 말아라. 자신들이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이상 이기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크!" 마리와 코마히콘느 유평의 무자비한 말에 치를 떨었다. 그의 말에 강한 거부감을 느기면서도 뭐라고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들에게 치가 떨렸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라도 한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한들 그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아무리 이기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들 그것을 당연시 여겨서는 안된다. 인정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인정하는 날에는 이세계에 평화라는 말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세상사람 어느 누구도 평화를 노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무도 남을 배려하지 않는 혼자만의 세상. 거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애착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 하나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 진정 진실이고 올바른 길이란 말인가? ㅡ .... 살아줘요 그때 마리와 코마히코의 귀로 희미한 환청이 들렸다. 그것은 공간과 공간사이를 울리는 영체의 목소리였다.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 "가인!" 마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예의 빛이 나는 장소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없었다. 이미 앞의 빛들도, 격돌도, 공간을 우리는 마찰음도, 가슴의 격통도, 모든 것이 없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 마리는 일순 숨을 쉴수 없었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따. 그저 멍하니 빛이 사라진 장소를 바라만 볼 뿐이었따. 어떻게 된 거야? 왜 없어진 거지? 왜? 왜? '왜.....?' 그런 그녀의 귀로 유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느낌은...브루스 류인가? 그가 살아남았나?" "....!" 마리는 그말을 한 장본인을 찢어 죽일 것처럼 바라보았따. 브루스 류가 살아남았다고 그럼 가인은? 가인은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실낱같이 약하지만....분명 이어져 있어." 유평은 시영의 수하로 있으면서 연결된 아리아드네의 실로 브루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후츠노미타마와 융합한 그는 신검이 원령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은 곧 원령이 있는 아스트랄계와 어느 정도 의사교류를 가능케 해 주었던 것이다. 유평은 마리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따. "아무래도 네 동료였던 그 아이는 죽었나 보군." 그 말이 마리의 모든 이성을 끊어 버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이미 유평에게 달려들고 있었따. 가인이 죽었다는 소리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런 마리의 돌발행동에 검진을 유지하던 코마히코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멈추십시오, 아가씨!" 그대로는 당하러 들어가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에게 그의 목소리는 가닿지 않았다. 그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오라 소드를 휘둘렀다. '웃기지 마.' 누가 죽었다고? 가인이 죽었다고? '웃기지 마!' 네놈의 말 따위 믿을 수 없어! 내 눈으로 확인할 테다! 네 녀석을 쓰러뜨리고 내가 확인하러 가겠어! 가인은 절대로 죽지 않아! 누구도 죽일 수 없어! 왜나하면,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기대도록 해라. 네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난 최선을 다하겠다.' 내가, 내가 지켜 주기로 했는데. 힘이 되어 주기로 했는데....! '다음에 볼 대는 서로 웃으면서 보는 거다.' 웃으면서 보기로, 다음에는, 다음에 볼때는..... '다음에 볼때는 분명ㅡ!' "으아아아아아!" 마리는 눈물을 흩뿌리며 운요에 접어들었다. 그러자 유평에게 달려들던 그녀의 몸이 붉은 잔상을 남기며 대기로 녹아들어간다.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던 유평은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어려. 내가 너무 높게 평가한 건가." 그리고 움직이는 후츠노미타마! 푸른 귀기가 실린 검광은 수십, 수백개로 갈라지며 마리에게 날아들었다. 그것은 일견 한없이 느렸지만 아무 소리도 없이, 그리고 확실하게 운요에 접어든 마리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아가씨!" 마리의 뒤를 쫓으려던 코마히코는 후츠노미타마가 그리는 무음의 검광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은 그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심지어는 오의 발파마저 뛰어넘는 초신속의 발도술이었다. 유평은 짧게 중얼거렸다. "무영신풍류 사흉 도철." 촤차촤촤촤 너무나 빠르기에 대기마저 눈치채지 못하는 신풍. 그 신풍의 이빨 앞에 제 형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AI 슈츠도, 오리하르콘도, 살도, 뼈도, 피도. 마리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사지가 모두 떨어져나간 뒤였다. '가인' 몸뚱어리만 남은 육체가 자신이 흘린 피바다에 처박혔다. 하지만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없었따. 왜냐하면 그보다 더한 아픔이 이미..... '가인.' 마리의 의식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피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두 눈도 서서히 감겨간다. '미안하다. 나는 결국....아무, 것도......' 그렇게 패턴 레드의 빛은 꺼져가고 있었다. ----------------------------------------------------------- 어둠은 걷혀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붉은 하늘과 붉은 대지. 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는 형의 모습이었다. 시영의 새도우 다이브에서 풀려난 시민은 천천히 자신의 몸을 감싸안았다. 떨리고 있었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전신을 엄습한느 오한에 체온이 절대영하까지 곤두박질치는 것 같다.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런게....진실이라고?" "아아, 그래." 시영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진실! 그는 그녀에게 진실을 보여주었다. 섀도우 다이브로 그녀의 영체를 가이아와 접속시켜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빠짐없이, 눈에 그리듯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필시 시민의 정신붕괴를 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시영은 조금도 여과시키지 않았따.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전부 그녀의 기억 속으로 건네주었다. 시민의 얼굴에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눈물은 이내 서러운 울음으로 변하여 그녀를 괴롭혔다. 지독한 슬픔으로 그녀의 마음을 찢어발겼다. 시영은 그런 동생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얼마든지 욕해라. 이기적이란 것은 잘 알고 있어. 하짐나 네가 거부하더라도 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시민은 크게 울부짖으며 시영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 시영을 노려보았다. "거짓말이라니, 너도 알고 있잖아? 그건 이 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란 걸." "그런 기억 같은 건 몰라!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았어!" 시민은 소리치다 목이 메어 다시 흐느꼈다. 시영은 표정을 굳히며 천ㅊ너히 중얼거렸다. "알고 싶지....않았다니?" "나는....나는 그저 널 미워하면 되는 거였어,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진 널.... 내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은 널....마냥 증오하기만 하면 되는거였따고." 핏빛으로 물든 노을, 그 아래서 나를 고통 속에 던져두고 가 버린 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 너, "너에게 복수하는 것만을 꿈꿔왔어, 그것만을 위해 줄곧....줄곧 그것만을 위해.... 그런 동기라도 없었다면 난 직즉에 죽었을 거야. 너에 대한 배신감에.... 너에게 버림받았다는 슬픔에 지쳐서.... ㅕㄴ딜 수가 없어서....그래서 목숨을 끊었을 거야." "....." "널 미워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어. 미워하는 녀석에게 버림받아 봤자 조금도 슬프지 않으니까. 조금도 아프지 않으니까! 그래.... 널미워하면서부터 난 살 수 있었다. 오히려 더악착같이 살 수 있었지. 이대로 죽어버리면 너무 억울했으니까. 날 배신한 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정작 배신당한 내가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됐어. 싫었어! 똑같이 복수해 주고 싶었어! 너에게도 내가 겪은 아픔을 똑같이 돌려주고 싶었어!" 시민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시영에게 다가갔다. "네가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지! 다음날을, 또 다음날을!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엇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지! 그렇게 내 삶은 너에 대한 복수심으로 유지되었어! 그것만이 내가 사는 이유였고 전부였지!" 시민은 시영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올렸다. 시영은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오히려 자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그 표정에 시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버티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믈을 흘렸다. "그렇게.... 그렇게 사랑왔다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어. 10년이 다 되도록 그렇게만 살아왔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걸 보여주면 어떡하자는 거야. 널 미워하지 말라면 어떡하라는 거야. 그럼 나의 지난날은 뭐가 되는거야. 난 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온 거냐고!" 털썩 시민은 그만 다리의 ㅎ미이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따. 시영은 그런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런 이유도 가르쳐 주지 않고, 그저 그렇게 계속 내버려 두는 게 옳은 일이었을까? 그게 너한테는 더 좋은 거였어? "....." "네가 편한 대로 해. 날 증오하는 편이 좋다면, 그렇게 사는 게 편하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도록 해." 시영의 말에 시민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오열했다. 필사적으로 그에 대한 연민을 거부했지만 담담하게 자신을 달래는 형의 모습에 자꾸만 약해져간다. 외면할 수가 없다! 시영의 과거가 자꾸만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뿌옇게 변해가는 시야 속에서도 똑똑히, 너무나도 선명하게 아른거린다. 시영은 동생이 그렇게 울기만 하자 한쪽 무릎을 꿇어 시민과 눈을 맞췄다. "나를 봐. 너와 닮은 나를 봐, 내가 지난 10년 동안 거울을 볼 때마다 날 떠올렸듯 나도 널 떠올렸어. 거울을 볼 때마다 네가 보고 싶었어. 너와 만나서 무슨 얘기라도 하고 싶었어. 너무나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빛이 없는 곳에서만 살았어. 거울에 반사되는 빛 같은 것이 없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만 지냈지." 시영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이 선글라스도 그런 일환에서 줄곧 쓰고 다닌 물건이었다. 시영은 맨 얼굴로 시민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미소햇다. "그렇게 너에 대한 그리움을 참다가 다시 너를 만난 것은 작년이었지. 시민아, 기억나니? 우리가 재회했던 그날이? 그때 넌 오페라의 유령 공연을 보고 있었지. 공연에 몰입해 있는 너를 나는 문가에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어. 금방이라도 널 부르고 싶었지만.....네가 날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저 널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서, 그것만으로 가슴이 뿌듯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뭘 해야 할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어." "...." "그러다가 네 쪽에서 날 돌아봐 줬을때....하하, 그때의 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너와 헤어진 후로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어. 대재해 이후, 너와 헤어진 이후 한 번도 웃을 수 없었는데 그 순간은 절로 웃음이 나오더군." 시민도 그때의 일이 떠올랐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그 때 나는 어떻게 했던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영의 뒤를 쫓기에 바빴다. 행여나 그가 다시 사라질까봐, 내가 유령을 본 것은 아니었난 반신반의하며. 그렇게 다신 만난 그에게 나는, '무슨 이유로 이곳에 나타는 거지?'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해야만 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정들을 감추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형이라고 부를 것 같았기에. 더더욱 차갑게. 더더욱 냉정하게. '형? 형이라고? 도대체 누가 내 형이라는거야?' 그말을 들었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장난스럽게 받아넘기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시민은 다시 봇물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시영은 그런 동생을 조심스레 안아 주었다. 시민도 형의 포옹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10년만에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들이 형제였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벅찬 감격에 시영 역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하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 그러지 않았더라면 너는....." 시민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더 이상 말하지마.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마, 형. 괜찮아, 괜찮아.' 시영의 지난날을 본 시민은 그으 ㅣ고통을, 그의 슬픔을, 또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절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자기 자신만을 끌어안은 채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난 10년간의 시간은 그녀 혼자만 힘들었던 게 아니다. 시영 역시 그녀 못지않게 힘들었다. 오히려 그녀보다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마얀 내가 형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어쩔수 없었어. 어쩔수 없었어. 시민은 마치 시영을 달래듯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 번 그를 향한 마음을 열자 지금껏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도저히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렇게 그녀는 다시 그를 받아들리여 했다. 그로써 길고 긴 형제의 반목을 끝을 맺는 듯했다. ㅡ..... 살아 줘요. 하지만 그때. 그때 시민의 마음속으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간과 공간 사이를 울리는 영체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닫는 순간. 슬픔에 잠겨있던 시민의 정신이번쩍 뜨였다. 잊고 있었던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이 목소리는! '가인씨!' 순간 시민은 자신을 안고 있는 시영을 밀어냈다. 시영은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왜....그러는거야, 시민아? 어째서....?" "...." 시민은 정감 있게 들리는 시영의 목소리에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잊고 있었던 걸까? 어째서 망각했던 걸까? "나는....."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형이엇떠라면....그렇게 하지 않았을거야...." "....!" 시영의 표정이 못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한시민? 어째서? 시민은 마치 힐난하는 듯한 시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 시선으로 인해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나라면 그때.... 혼자 남게 되었을 가족의 곁에 있어 줬을 거야. 힘든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있든,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떠나지 않았을 거야. 함게 해결하려고 했을 거야." "바로 같으니! 넌 그것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시영은 그답지 않게 흥분하며 버럭 소리질렀다. "누근들 곁에 있고 싶지 않았겠어? 하지만 그 상황에선 함꼐 있어 봤자 둘 모두 위험해졌을 거야! 조금도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그는 시민의 어깨를 붙잡으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왜 그러는거야, 시민아? 방금 전만 해도 너도 인정했잖아? 너도 동감해 줬잖아? 어쩔 수 없었따고.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왜 갑자기...." "보고 싶었어! 형이 보고 싶었어! 형이 사라진 뒤로 계속! 계속 보고 싶었다고!" 시민의 동문서답 같은 외침에 시영은 말꼬리를 흐렸다. 뭐? "하지만 그런 외로움보다 더 괴로웠던 게 뭔지 알아? 바로 두려움이야! 형을 다시는 못 보게 된다는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는 두려움!" ".....!" "형은 그때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그래서 나처럼 두렵지 않았겠지만.....난 두려웠어. 너무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난 형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데, 얼마든지 살아 갈 수 있는데! 힘든 일도, 슬픈 일도, 괴로운 일도 모두다 견뎌낼 수 있는데!" "하지만 만났잖아. 이렇게 무사히 다시 만났잖아?"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어!" 시민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시영의 손을 밀쳐냈다. "매순간 충실하지 않으면, 만날 수 있을 때 만나지 않으면....아무리 후회해도, 아무리 슬퍼해도 돌아오지 않느 ㄴ것이 있어. 되찾을 수 없는 것이 있어." '시민씨를.... 사랑하는데요?' 붉은 노을 속에서 자신을 향해 고백한 한 소년이 생각났다. 시민은 몇번이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더라면, 주위의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사정이 어떻든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했더라면. '가인씨, 우리 둘이서.....이대로 어딘가로 가 버릴래요?' '더 이상....가인씨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가인 씨, 저한테 무슨 할 말 없어요?' '제발 날 미워하지 말아요. 다시 돌아봐 주세요. 내 얘기를 들어줘요. 부탁이에요!' 그와 함께 했더라면... 아무리 어렵고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함께 헤처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서로가 의지해서 이겨나갈 수 있었을 텐데. '함께 있을 수....있었을 텐데.' 단 한순간의 망설임 때문에. 어떻게든 될 거라고, 나중에도 기회는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매번 미루기만 하다가 결국은 모든 것을 놓치고 말았다. 잃고 말았다. 그 후회라니! 그 간절함이라니! 그 안타까움이라니! '만약 가인 씨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몰랐을 거야. 앞으로도 계속 몰랐겠지.' 저 한시영처럼, 나를 혼자 두고 떠난 저 형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의 고마움을 알지 못했을 거야.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 거야. 그녀는 이 모든 감정들을 깨닫게 해준 가인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보냈다. 고마워요, 가인씨. 고마워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시민의 얼굴에선 어느새 눈물이 그쳐 있었다. 대신 이번에는 눈부신 미소가 자리 잡았다. "어느 순간에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 사람에게서 배웠어. 나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남겠어. 그 사람과 함께 고난을 이겨내는 길을 택하겠어!" 시민의 단호한 외침에 시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시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라는건....유가인, 그를 말하는 거겠지?" "그래." "내가 아닌 그 소년의 곁에 남겠다는 거냐?" "그래" "내 지난날들을..... 보고도?" ".....그래." 시영의 물음에 시민은 괴롭지만 결코 피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거기에는 더 이상 형의 품에 안겨 울기만 하던 여린 동생의 모습은 없었다. 자기 자신의 사랑을 믿으며 스스로 행동하느 ㄴ낯선 여인이 있었다. 시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것이.... 자리를 비운 대가인가. 저 아이의 말대로 곁에 있어 주지 못했기에, 함께 있어 주지 못했기에. '.....잃어버린 거란 말이지?'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잃어버리다니?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어! '내가 처음부터 얘기했지 않은가? 얼마든지 욕하라고! 어차피 나의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라고!' 녀석이 거부한다해도상관없어. 난 그저 동생이 무사하면 만족해. 오랜 세월 동안 떠나 있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형 행세를 할 생각은 없어. 그런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시영은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남겠다고....그래, 그것도 좋겠지. 그게 네가 선택한 길이라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어." "...." "그런데 이를 어쩌나." 선글라느 밑에 있던 시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 입가로는 비틀린 미소가 떠오른다. "정작 그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 머물 생각이지?" "....!" 시민의 두눈이 부릅떠졌다. 그녀는 시영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노기서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무슨 소리야?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의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다. 느끼지 못했나? 가인 군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비명소리를?" 시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앞에서 가인의 환청을 들었던 것이다. 설마 그게? "우리가 영체교류를 하는 동안 아포칼립스 대결이 끝났나 보군. 결과는 뭐 예상했던 대로지만." 예상했던...대로라니? "후후, 애초에 각성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능력자였다. 그런 소년이 브루스님과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시영은 아포칼립스의 빛이 사라진 옴팔로스 저편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브루스님은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시는군. 영체의 실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선 애초의 계획도 실패한 모양이고.... 이거야 원, 애꿏은 가인 군만 죽어 버렸으니 딱하기도 하지." 죽어? 누가 죽었다고? 시민은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입술이 굳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따. 시영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걱정할 건 없다. 어차피 그는....." 콰아아앙 순간 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발밑에서 직각을 ㅗ치솟는 폭발이 일었다. 굳어 있던 시민의 입술에서 짧은 한마디가 흘러나오는 순간 그 한마디가 공명음으로 변해 무시무시한 대지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우수수수 폭파된 신전의 파편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시민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죽었....다고? 가인씨가.... 브루스님에게?" 질 나쁜 농담이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야. 무엇보다 저 한시영의 말이다. 곧이 들으려야 들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말도 안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그럴리가...." "이런, 이런, 무슨 성격이 이리도 급한 건지. 사람이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야 할 게 아니야." 하지만 시민의 중얼거림은 태연자약하게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에 의해 끊겼다. 그녀의 뒤에선 어느새 그녀의 그림자로 도약한 시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따.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며 속삭였다. "걱정할 필요 없다, 동생아. 내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를 함부로 대할 수야 없지. 이 형이 모든 걸 생각해서 가인 군을 브루스님에게 맡긴 거니까 너무 걱정 말아라. 브루스님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옴팔로스의 열쇠를 승천 같은 일에 날려먹을 순 없거든." "그건....가인 씨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얘기야?" 시민은 어둡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낸 것처럼 화색을 띠었다. 그러나 시영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는 이미 죽었다고 했잖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아" "....!" 그 무심한 대꾸에 시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대체 어디까지 나를 농락할 셈이야ㅡ!" 휙 고함소리와 함께 시민의 몸이 뒤로 튕겨지듯 날면서 시영에게 뒤차기를 날렸다. 시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간단하기 칠성권 사기종인의 수로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시민은 앞차기로 그와의 간격을 벌리며 그대로 브라질리언 킥을 날렸다. 그 상단방이 위쪽으로 들어오는 돌려차기는 언뜻 중단차기의 형태를 띠었기에 시영은 영락없이 오른쪽 어깨와 가슴 부위를 가격당해야 했다. 시민은 킥이 적중됨과 동시에 입으로 공명음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녀 특유의 노래하면서 싸우는 듀얼 파이트! 그러나 브라질리언 킥에 넘어간다 싶었던 시영은 물 흐르듯 손으로 땅을 짚어 한 바퀴 돈 후 그대로 시민의 정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노래를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시민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라ㅡ! 노래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멎으며 시민의 얼굴을 덮은 시영의 손 옷소매가 풍선처럼 터졌다. 간발의 차로 시영의 손에 공명음이 저지된 것이다. 시영은 시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잠시만 얌전히 있어라." "....!" 순간 시민은 거짓말처럼 자신의 그림자 밑으로 추락했다. 물리접촉으로 시민의 정신장벽을 무시한 시영이 앞에서 연결된 아리아드네의 실을 이용해 그녀를 아스트랄계에 추방시킨 것이다. 그가 만든 그림자 감옥에 그녀를 가둬 버렸다! 그렇게 한시민을 제압한 시영은 한숨을 쉬며 엉망이 된 자신의 옷소매를 흔들었다. "후우! 정말이지, 유가인. 유가인. 유가인.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유가인." 시영은 피식 웃으며 브루스와 유가인의 격전이 있었던 옴팔로스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선글라스 안의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가인 군, 슬슬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가?" 나와 당신. 전대 오라의 주인과 후대 오라의 주인. "......우리의 관계가 실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가이아의 대행자는 언제나 한 명뿐이었다. 한 시대에 두 오라의 주인이 나타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예고> ---------------------------------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나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 주리라.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시편 85장 10~13절>> (SS VOLUME 12. 2020년 3월 9일 시작 생략)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Aura crops peacemaker) 第 25 話 Peace Be Within You ================================================================================================================ =PART 1= 메디컬센터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한순간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간, 그래서 무거운 공기를 건드렸다간 대번에 숨도 쉬지 못하고 압사당할 듯한 분위기. 그런 긴장감, 그런 초조함. 닥터와 유화, 오퍼레이터 대원들은 실제로도 숨을 쉬지 못하며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이 답답한 정적을 깨뜨리면 숨이 트일 것도 같은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정적이 깨졌을 때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할지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그것이 너무나 두려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우리가 이곳에 넘어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군."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진 사령관이었다. 그의 말에 전방에 있던 남자, 시폰 뤼멘이 오래된 친우를 만난 것처럼 정답게 말했다. "그것도 있지만...도저히 60층 건물을 걸어서 올라갈 자신이 없더군. 아슬아슬하게 뒤쫓는 것도 취향이긴 하지만 그건 혈기왕성한 아이들 몫으로 남겨두고..... 난 밖으로 나왔지. 그러자 이게 웬걸? 밖에서 메인 센터를 올려다보자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자동승강로가 보이지 않던가. 그때 생각했지. 아, 저기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폭파시킨 건가? 하고 말이야." "그래도 자동승강로는 하나가 아니었을 텐데. 자동승강로는 이 메디컬 센터 말고도 최소한 아홉 군데의 건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 건물들을 일일이 찾아간 것치고는 너무나 빨리 우리를 찾아냈어. 꼭 출발하기 전부터 우리의 행선지를 알았던 것처럼." "아아, 말 그대로야. 출발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 시폰은 자신의 손목에 찬 무전기를 들어 올리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사전에 귀띰을 받았지. 자네들이 어디로 도망칠 건지 말이야." "뭣!" 그말에 진 사령관보다 뒤에 있던 일행들이 더 놀랐다. 귀띔을 받다니? 그에게 우리의 탈출 루트를 가르쳐 준 사람이 있단 말인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거야?' 그런 일행의 의문을 풀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진 사령관이었다. "자네가 심어둔 스파이겠군. 이 중에 있었던 건가?" 스파이! 일행은 안색이 창백해져 서로를 돌아보았다. 우리들 중에 시폰 뤼멘이 보낸 첩자가 숨어 있다는 건가? '하...하지만......'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대원들은 모두가 다 피스메이커의 중축에 관여하고 있는 핵심인물들이다. 피스메이커가 창설되었을 때부터 함께해온 멤버들. 모두다 다 몇 년째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 중 스파이가 있다고 해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정말 스파이가 있다는 건가? 우리 주에 정말로 스파이가? ".....!" 그렇게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살펴보는 대원들 중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한 사람을 노려보는 여 대원이있었따. 바로 주유화였다. 그녀는 누가 시폰 뤼멘의 스파이인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하얀 가운을 입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디컬 센터의 담당자가 있었다. '닥터!' 유화는 십중팔구 그가 스파이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앞에서도 의심했던 거지만 닥터에 관한 사항은 너무나 비밀이 많았다. 피스메이커 내에서 가장 불확실한 과거를 가진 남자, 성당기사단의 중급 버추즈에서 파견되어온 것 하며, 그야말로 의심하려면 끝없이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닥터는 어째서, '어째서 아까 병동에 남아 있었던 거지?' 그렇다. 그가 병동에 남아 있었던 덕분에 유화는 구출될 수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가 그 시기에 그곳에 있었던 게 이상했다. 자신은 진 사령관님을 마중하러 나왔다고 하지만 굳이 그것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부서의 치프가 해야 될 일인 걸까? 그냥 자기 밑의 아무 사람에게 시켜도 되는 거잖아? "응?" 그때 유화는 자신에게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는 시선의 집중을 느낄 수 있었따. 아니, 왜 다들 날 바라보는 거지? 어라? 닥터마저 날 보고 있어? '.....아' 유화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닥터를 의심하느라 잠시 신경 쓰지 못했지만 자신 역시 피스메이커 대원들이 보기에는 만만찮게 수상쩍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피스메이커에 들어온 지는 채 반년도 되지 않았고, 그전에는 중국의 중화인민공화국 소속. 거기다 한국에 온 것도 다름 아닌 저 시폰 뤼멘의 스카우트 때문이었고..... "나, 난 아니에요!" 유화는 다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질렀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의심만 크게 살 뿐이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유화는 자신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조금도 풀리지 않자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아 진짜! 난 아닌데! "저도 주 선생님은 아니라고 생각ㅎ합니다." 그때 유일하게 유화 편을 들어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닥터였다. 그는 일행의 눈으로부터 유화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그녀 앞에 서며 진지하게 말했다. "주 선생님은 누구보다 가인씨를 걱정하고 그를 위해 노력한 사람입니다. 시폰 뤼멘과의 관계도 지극히 공적이 관계였을 뿐 결코 그를 위해 일한 건 아니었습니다." 유화는 자신이 의심하던 사람이 되레 자기편을 들어주자 이걸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거부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ㅇㅆ따. 아니 어쩌면 의심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지능적으로 날 감싸주는 것일수도! "전 닥터가 스파이 같은데요." ".....예" 한창 유화를 감싸 주려고 모두를 설득하던 닥터는 정작 감싸 주려던 당사자가 자신을 범은으로 지목하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유화의 배은망덕(?)한 모습에 일행들의 눈도 한층 더 험악해진다. 유화는 그런 일행들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 하지만 닥터에 대해서 알려진 게 너무 없잖아요. 그....여기 있는 분들 중에 닥터의 실제 이름이나 과거에 뭘 했는지 아시는 분 있어요? 없죠? 다들 모르죠? 무엇보다 닥터는 피스메이커에 오기 전에 성당기사단의 버추즈 출신이었다고요! 이정도 사유면 충분히 의심할 만 하잖아요!" 그 설명에 일행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주춤거렸다. 하지만 쉽게 납득할 만한 조짐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닥터는 줄곧 그녀들이 아프거나 힘들 때 열성을 다해 치료해 준 은인이었다. 그런 사람을 이제 와서 의심하라고 하는 건 쉽지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의심을 받고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수상하다고 해 봐야 당사자만 더욱 수상해질 뿐이다. 유화는 자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일행들이 여전히 자기만 의삼하자 직접 닥터에게 물었따. "닥터! 할 말 있으면 해 보세요! 제말이 틀린 건가요?" ".....아뇨, 맞습니다. 주 선생님은 충분히 절 의심할 만합니다." 그것봐! 유화는 닥터가 순순히 인정하자 보란 듯이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변함없는 의심의 눈초리. 아니, 아까보다 더 노골적인 따돌림이었다. 유화는 얼굴이 시뻘게져 발을 동동 굴렸다. 으아, 진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네! 뭔가 내 결백을 증명할만한 방법이 없는건가? '.....아, 잠깐.' 그때 유화는 저편에 떨어져 있는 시폰을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끼리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지! 그녀는 시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다, 다들! 저기에 스파이를 심어둔 장본인이 있으니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ㄷ이 상황에서 스파이를 계속 숨겨둘 이유도 없고 말이에요!" 그러자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전방의 시폰에게 향했다. 시폰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일행들 사이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직접 자신의 눈들도 확인하시죠." "....!" 그렇게 시폰의 손가락을 따라간 모두의 눈에 보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확인한 일행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 어떻게....!" 시폰의 스파이가 진사령관의 목에 단도를 겨누고 있었따. 일행이 닥터와 유화에게만 신경 쓰고 있는 사이 그들의 상관이 인질로 붙잡힌 것이다. 스파이는 자신에게 경악의 시선들이 쏠리자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낯선 미소를 머금었다. "왜들 그러시나요? 그렇게 의외인가요?" "너..... 문세희!" 오퍼레이터 삼인방 중 하나인 윤연정이 비명처럼 스파이의 이름을 불렀아. 스파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후배 문세희였던 것이다! 삼인방의 일원인 김성은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네, 네가 어째서....어째서 스파이일 수 있는 거지? 응?" 성은의 물음에 세희는 가볍게 코웃음쳤다. "나 참, 이런 순진한 사람들로 무슨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고. 어째서 스파이라니? 당연히 처음부터 스파이로 들어왔으니까 스파이인 거지." 처음부터 스파이였다고? 그렇게 모두가 할 말을 잊고 있을 때 세희에게 인질로 잡힌 진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위그드라실의 스파이 위성으로 피스메이커의 정보를 빼낸 것이 바로 너였군." "어머나, 칼이 경동맥에 닿았는데 잘도 말씀하시네." 세희는 잔인한 미소를 머금으며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칼에 닿은 진 사령관의 목에서 가는 핏방울이 한줄기 흘러내린다. 그 모습에 닥터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만둬!" "그래요, 사령관. 스파이 위성 라다가스트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걸 보니 내가 스파이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네?" 세희는 닥터의 외침을 무시하고 진 사령관에게 물었다. 진 사령관은 칼날이 자신의 목을 파고드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표정했다. "알고 있었다.": "와, 대단하셔! 그래 보여도 빈틈없이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눈치챈거예요?" "네가 타데오의 총에 맞았을 때부터." ".....!" 그말에 세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닥터와 오퍼레이터 대원들은 진 사령관의 추리에 감탄했지만 그가 말한 이유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따. 어째서 그녀가 총에 맞았을 때 눈치챌 수 있었던 거지? 우리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의심하지 못했는데? 진 사령관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아는 아포스톨로스 타데오라면 그런 상황에선 여기를 쏘거든" "하ㅡ하하하하하!" 시폰은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눈가에 맺힌 눈믈을 떨궈내며 말했다. "정말이지 대단해! 자네야말로 나보다 더 날 잘 알아주는 남자군. 과연! 그래야 내 친우라고 할 수 있지, 암!" "웃기지 마라." 진사령관은 단호하게 시폰의 말을 부정했다. "넌 친우 같은게 아니다. 그저 쓰레기일 뿐이야." ".....!" 진 사령관의 목에 칼을 겨누던 세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이녀석이 감히 겁도없이! 그렇게 칼을 움직이려는 그녀를 시폰이 제지했다. "아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사령관님을 이리로 모셔 와라." ".....예" 세희는 인상을 찡그리며 거칠게 진 사령관을 끌고 시폰 앞으로 걸어갔다. 닥터와 일행은 이를 갈며 세희를 노려보았지만 진 사령관의 목에 겨누어진 칼 떄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시폰은 앞으로 다가온 진 사령관을 바라보며 미소했다. "스레기라고? 후후후, 간만에 보는 날카로운 반응이군. 언제나 나에겐 무심한 척, 관심도 없는 척하더니만 갑자기 웬 심경의 변화인가?" "너무나 당연해서 말하지 않은 것 뿐이다. 쓰레기를 쓰레기라도 새삼 지칭하는 것도 우스우니까." "이자식이!" 그때 시폰 뒤에 있던 네 아이들 중 검푸른빛의 AI 슈츠를 입은 소년이 분노하며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시폰은 이번에도 그런 부하를 제지하며 더욱 환하게 미소했다. "하하하하,. 너무나 좋아! 그래, 그 반응! 그 반응이야! 이제야 자네도 인간답구만, 좀더 화내 보시지? 좀더 분노해봐! 나에게 쌓인 감정들을 다 풀어내 보라고!" 시폰은 진 사령관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말이지....자네가 딸을 빼앗겼을 때도 이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기에 내심 실망했어. 이 녀석은 아무리 괴롭혀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이토록 괴롭히는 보람이 없는 녀석일까?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사실은 그게 참고 있었던 거라니....하하하, 이거 참 위안이 되는군!"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닥터와 일행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딸? 진사령관에게 딸이 있었나? 그런데 빼앗겼다니? 시폰 뤼멘에게 빼앗겼다는 건가? 뭔가 정확한 사유를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진 사령관과 시폰 뤼멘의 은원관계가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 왜 또 말이 없어지셨나? 내가 자네의 반응을 즐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나? 또 예의 무심한 척 하긴가?" "....." 시폰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진 사령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따.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노려만 볼 뿐이다. 그 눈빛이 시폰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일까. 그는 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진 사령관에게서 몸을 돌렸다. "아아, 아무 말도 하기 싫다면 그러도록 해. 갑자기 짜증이 나는군. 자네의 그 태도 때문에 기분을 망쳤어." 시폰은 곁에 있는 AI 슈츠의 소년들을 향해 명령했다. "저기에 있는 인간들, 이 남자가 보는 앞에서 다 죽여 버려." "기다리고 있엇어요, 마스터ㅡ!" 방금 전까지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검푸른빛의 AI 슈츠 소년 케르베로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힘차게 두 손을 내저으며 환호했다. 그의 곁에서는 갈색 AI 슈츠 소년 히드라가 활에 화살을 재는 것으로 의욕을 내비쳤다. 마지막으로 연두색 AI 슈츠를 입은 라돈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원격투시 능력을 전개했다. "......." 하지만 붉은색의 AI 슈츠를 입은 그람드링 뤼멘만은 별 흥이 동하지 않는지 잠자코 있을 뿐이다. 그는 팔짱을 낀채 음영이 드리워진 눈으로 진 사령관과 시폰 뤼멘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으......!" 닥터와 유화, 오퍼레이터 대원들은 자신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AI 슈츠 소년들의 모습에 뒷걸을쳤다. 그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어떻게든 도망쳐왔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죽을 줄이야! 시폰은 그런 일행의 공포를 음미하면서 옆의 진 사령관에게 말했다. "그렇게 계속 무심한 척 있으라고. 이제부터 저 친구들은 모두 자네의 무심함 때문에 죽는 거야. 지금이라도 자네가 무릎 꿇고 사정한다면 그만.....뭐 그럴리가 없나? 내가 아는 아포스톨로스 유다는 혈육마저 내치는 비정한 사람이거늘. 됐네, 그냥 그렇게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켜보시게." "......!" 그 말에 진 사령관의 표정이 험악했졌다. 하지만 앞으로 나가려뎐 그의 몸은 목에 들이댄 세희의 단도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그저 그렇게 자신의 부하들이 죽는 것을 꼼짝없이 지켜봐야 할 운명이었다. "자자자! 키마이라와 스킬라도 없겠다, 어디 마음껏 죽여 보자고! 녀석들이 돌아오면 후회하도록 남김없이 죽여 주겠어!" "Okay, Let's kill them." 케르베로스는 패턴 안트라센ㅡ블루의 능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들어올렸다. AI 슈츠의 힘만 있으면 저런 나약한 인간들 따위, 손으로 잡아 찢어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아, 살과 뼈를 종이처럼 뜯어내는 느낌은 어떠할까? 케르베로스는 상기된 얼굴로 대원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뒤편에서는 이미 히드라가 패턴 안트라센ㅡ 브라운의 자가분해력이 담긴 화살을 한 대원에게 겨누며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닥터는 여대원들을 감싸듯 앞으로 나서며 손을 벌렸다. 무의미한 행동임은 알고 있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모두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밖에 없었따.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며 유화는 눈시울을 붉혔다. '의심해서...... 죄송했어요, 닥터.' 그렇게 피스메이커의 대원들은 두눈을 질끈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부디 동료들이 놀라지 않도록 비명만은 지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리고 다음순간, 쾅 "으앗!" 갑작스레 옆에서 들린 쇳소리에 대원들은 앞의 다짐이 무색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감았던 눈을 뜨며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뭐야?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막 일행을 덮치려 했던 케르베로스와 히드라도 그쪽을 돌아보았다. ".....뭐지?" 쾅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쇳소리. 그것은 닫힌 자동승강로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뭔가가 승강로 안쪽에서 거세게 문을 들이받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시폰 뤼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분명 저쪽에는 키마이라와 스칼라가 있을 텐데..... 그는 옆에 멍하니 서 있는 라돈에게 명령했다. "키마이라와 스킬라를 투시해봐. 어서!" 그렇게 라돈이 막 원격투시에 들어가는 사이 승강로 출입문 근처에 있던 케르베로스는 코웃음을 치며 문으로 걸어갔다. 보나마나 키마이라와 스킬라가 이쪽으로 넘어오기 위해 문을 두들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멍청한 자식들 같으니라고. 돌아서 오든가 아니면 우리에게 열어달라고 연락하면 될 것이지." 그는 아둔한 형제들을 비웃으며 승강로의 자동문에 손을 가져갔다. 이미 앞에서 닥터가 문의 제어기에 자신의 ID 카드를 꽂아놓은 관계로 케르베로스는 가볍게 그것을 그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삑 ID를 인식하는 자동락이 해제 되는 소리. 그와 동시에 라돈이 문 저편의 상황을 투시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안 돼!" 평소 벙어리 같던 라돈의 고함소리에 케르베로스는 깜짝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 때문에 그는 보지 못했다. 열리는 자동문 사이로 날아드는 붉은 빛의 그림자를! 퍽 케르베로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붉은빛의 그림자에 부딪쳐 날아갔다. 그는 복도 반대편 벽에 어깨를 찧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갑자기 이건! "......어." 자신에게 날아든 그림자를 확인한 케르베로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림자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와 마찬가지로 붉은빛의 AI 슈츠를 입은 소년. 패턴 알리자린ㅡ레드의 능력자, 키마이라였다. 키마이라는 뭔가에 강한 충격을 입었는지 땅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케르베로스는 영문을 몰라 그에게 다가갔다. "어, 어이." 쾅 순간 키마이라의 상태를 살피려고 몸을 굽힌 케로베로스 위로 또 하나의 그림자가 지낙ㅆ다. 그림자는 방금 전에 케르베로스가 부딪친 벽에 거세게 몸을 부딪치고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앞에서 들린 쇳소리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이번에 날아온 그림자는 패턴 알리자린ㅡ블루의 능력자, 스킬라였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케르베로스는 생소한 형제들의 못브에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누가 이 녀석들을 이렇게 만든 거지? 우리 루미네선스들을 누가 이런 꼴로 때려눕힐 수 있냔 말이야! 그런 그의 의문은 자동문에서 걸어 나오는 한 여인에 의해 해소되었다. "어머, 또 있었네요?" 쾅 이번에 쇳소리를 울린 것은 케르베로스였다. 벽에 몸을 찍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서서히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그의 내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우웨에에엑!" 케르베로스는 AI 슈츠의 헬멧 안에 위액과 피를 토해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랫배에서부터 무시무시한 고통이 느껴졌다. 뭐야? 방금 저 여자, 나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도대체 정체가 뭐지? 그는 눈앞의 여인이 형제들을 때려눕힌 장본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도저히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간인데, AI 슈츠도 입지 않은 인간인데! 그런 인간한테 우리가! "후" 여인은 짧게 한숨을 쉬며 케르베로스에게 날린 형의권 벽권을 거두어들였다. 그렇게 복도로 걸어 나오는 여인의 모습에 닥터와 일행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저 흉악한 세명의 소년들을 쓰러뜨린 이는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수정씨!" ---------------------------------------------------------------------------------- "아가씨! 아가씨! 정신 차리십시오! 옴팔로스의 붉은 하늘 아래, 코마히코는 피바다 속에 잠겨 있는 마리를 끌어 안으며 울부짖었다. 마리의 떨어져나간 사지는 그가 필사적으로 끌어모아 포션을 이용해 붙여 놓았지만, 원상태로 돌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코마히코도 그것을 기대하고 그런 처방을 한 건 아니었다. 적어도 계속되는 출혈이나마 멈춰야 했던 것이다. 만약 그대로 내버려뒀다면 마리는 체내 혈액 부족으로 쇼크사 했을 것이다. "아가씨! 눈을 뜨세요! 절 보십시오!" 코마히코는 동공이 풀린 마리의 눈을 연신 매만지며 소리쳤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는지 뭐라고 계속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코마히코는 행여나 그것이 마리의 마지막 목소리가 될까 두려워 듣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 말도 핮 ㅣ마십시오. 지금은 몸을 추스르는 데 전력하십시오!" "코마히코....코마히코 씨......" "제 말 안들리십기나?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야....약속....." 약속? 코마히코는 그 말에 마리에게 윽박지르던 것을 멈추었다. 약속이라니? 그는 서둘러 마리으 ㅣ입에 귀를 가져갔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가 그의 귀를 간질였다. "지켜.... 주겠다고.... 가인..... 가인을 지켜, 주겠다고.....약속......." ".....!" 코마히코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믈을 쏟아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낀다. '유가인, 그는 제가 지켜내겠습니다! 아가씨의 소중한 사람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지켜내겠어요!" 그가 한성고에서 마리에게 했던 약속. 마리는 자신이 죽어가는 이 마당에도 가인만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앞날만을 걱정하고 있다! "어째서, 어째서 그리도 바보 같으신 겁니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사랑을....보답 받지도 못할 사랑을....왜!" 코마히코,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좀더 자신을 사랑하라고? 좀더 자신을 소중히여기라고? 애초부터 이 소녀에게는 그런 말이 통용될 리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의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바보같이 줄줄밖에 모르는, 바보같이 희생할 줄 밖에 모르는, 오직 상대방만을 걱정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 바보같은 사랑이었어! "아가씨ㅡ!" 코마히코는 마리를 끌어안으며 통곡했다. 자신의 말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은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이 상황에서도 오직 그만을 생각하는 그녀가 너무나 야속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내 얘기를 받아들였다면, 조금만 더 자신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런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나... 그사람이 좋으십니까? 그렇게나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코마히코의 그 질문만큼은 들린 것일까? 마리의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천천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편안해 보였기에, 너무나 부드러웠기에,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에. 아아ㅡ 이사람은 정말로 그를 사랑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마히코는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미소지었다. '이토록 바보 같은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들 반하지 않을까?' 그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마리의 사랑이 반드시 보답받기를. 이런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반드시 결실을 맺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분명 뭔가 잘못된 거라고. "살아야 합니다." 코마히코는 마리의 얼굴을 마주하며 뚜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죽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반드시 살아서, '살아서.... 가인씨를 만나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고백하시는 겁니다. 또다시 거절 당하면 몇 번이고, 몇번이고 고백하시는 겁니다. 절 믿으세요.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포기하지만 않으신다면....." 반드시, '반드시 이루실 수 있습니다. 반드시 가인 씨의 사랑을 얻을 거예요. 제가 장담합니다.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니 사십시오! 그러니 죽지 마십시오! '어떻게든 아가씨를 살려내겠습니다. 어떻게든 제가 반드시!' 코마히코는 마리를 으스러저라 끌어안으며 머리를 굴렸다.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마리는 분명 살 수 있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무슨 방법이 있다고....그렇게 코마히코의 무의식이 고하고 있다. '그게 뭐였지? 어서 생각해내. 어서!' 이대로 있다간 정말 아가씨가 죽어 버린다! ".....!" 순간 그는 유평이 후츠노미타마의 힘으로 불사지체가 되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코마히코는 자신의 도츠카노츠루기를 마리에게 쥐어 주며 소리쳤다. "아가씨! 살고 싶으시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도츠카노츠루기에 몸을 맡기십시오! 도츠카노츠루기에 잠식당하십시오!" 신검의 잠식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한순간이라도 원령에 대한 경계를 풀어버리면 대번에 영체의 카르마에너지가 고갈되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안다. 위험한 방법이라는 것은 잘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신검의 힘에 잠식당하여 몸의 치명상을 회복해내고, 그 뒤에는 신검의 유혹을 그녀가 이겨내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마히코는 마리의 힘없는 손에 도츠카노츠루기를 쥐어 주며 소리쳤다. "부디 마음의 경계를 풀고 도츠카노츠루기를 받아들이세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입니다. 이제 시간이 없어요! 부디 정신 차리고 제 말에 따라 주십시오, 아가씨!" 마리의 눈은 서서히 감겨가고 있었따. 코마히코는 그 모습에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아가씨! 조금만 더! "이렇게! 이렇게 죽어 버리는 것이 아가씨의 사랑입니까? 이대로 위험한 가인 씨를 놔두고 가는 것이 아가시의 마음입니까! 아가씨에게는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약.....속. 마리의 닫히던 눈꺼풀이 꿈틀 흔들렸다. 어둠 속에 잠겨가던 그녀의 의식 위로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약속..... 약속이라니.....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기대도록 해라. 네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난 최선을 다하겠다.' 아, '다음에 볼 떄는 서로 웃으면서 보는 거다.' 그래...... '그래, 난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마리는 필사적으로 남은 힘을 쥐어짜냈다. 감각이 없는 손으로 도추카노츠루기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검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자신이 품고 있던 모든 기억을, 모든 생각을, 모든 마음을. 있는 힘껏. 있는 힘껏. "아.....!" 코마히코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리의 몸에 굳어 있던 핏자국들이 사라지며 사지의 흉터들이 빠른 속도로 아물어간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던 피부가 화색을 띠며 빠르게 온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도츠카노츠루기의 신력이 돌기 시작한 거야! 코마히코는 마리으 ㅣ숨소리가 안정을 찾아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는 힘겹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만큼 마리의 생사에 애간장이 다 탔던 것이다. 그는 평온한 기색으로 쓰러져 있는 마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말이지....걱정이란 걱정은 다 시켜 놓고 저렇게 곤히 잠든 모습이라니.... '앞으로도 절 얼마나 더 걱정시켜야 속이 풀리시겠습니까?' 코마히코는 흘러내린 마리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초췌한 미소를 지었다. 마리의 무모함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그녀가 살아난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가씨. 정말....정말로.....' 그는 마지막으로 도츠카노츠루기가 마리이 몸과 잘 융합하는지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칭 하지만 코마히코의 목 주위로 어느 새 인가 푸른 귀기의 검날이 닿아 있었다. 칼끝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공기에 울려 퍼지는 청명음. 코마히코는 내심 이럴 줄 알았는지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귓가로 유평의 노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사가 검을 버리고 뭘 하는 거냐?" ".....제 소중한 사람을 구했습니다." 코마히코의 대답에 유평은 낮게 코웃음 쳤다. "흥, 무영신풍류의 이름도 땅에 떨어졌군. 한 녀석은 죽음에 평정을 잃고 자멸하질 않나, 한 녀석은 죽음에 적을 잊고 등을 돌리질 않나, 생과 사에 초연해지는 것도 무영신풍류의 가르침이거늘." "생과 사에 초연해지는 것과 생과 사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엄연히 다른 얘기입니다. 삶의 소중함을 알아야 죽음의 두려움을 알게 되고, 그 각각의 무게를 느껴야 비로소 자신의 검에도 무게를 실을 수 있는 법이지요." "닥쳐라! 지금 누구에게 유정검(有情劍)과 무정검(無情劍)을 가르치려 드는 거냐! 잔말 말고 냉큼 검을 들어라!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날 쓰러뜨려!" 코마히코는 감았던 눈을 뜨고 마리르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상태는 도츠카노츠루기와의 융화로 눈에 띠게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 신검을 거둬들일 때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의식은 한창 원령과 교감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 교감이 끝나기도 전에 신검을 그녀에게서 떨어뜨렸다가는 영원히 의식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코마히코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며 등 뒤의 유평에게 물었다. "이대로 저희를 보내 주실 수 없으십니까?" 뭐? "이대로.... 놓아 주실 순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유평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코마히콘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과한 욕심이었나. 그는 곧 정좌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부탁했다. "제 목을 치십시오. 대신 아가씨만은 보내 주십시오." 유평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 어린놈이.....! "한 번 이긴 상대입니다. 굳이 죽이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아가씨는 더 이상 싸우실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코마히코는 무릎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제 한 목숨만 취해 주십시오. 아가씨는....부디 살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사백. 유평은 그런 코마히코의 등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도록 하마." "....." 왠지 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정감 있게 들린 것은 기분 탓일까? 코마히코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의 억지를 들어 준 유평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언제나 마지막을 검을 들고 끝내리라 생각했는데.' 뭐.... 이런 마지막도 나쁘지는 않군. 코마히코는 크게 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목에 닿아 있던 후츠노미타마가 천천히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칼끝은 소리 없는 궤적을 그리며 허공으로 올라가다가.... 이내 힘의 정점에서 움직임을 멈춘다. 자, 이제는 떨어지는 일만 남았다. 머리끝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때가 검이 다시 움직일 때이고, 그 느낌을 받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다. 베였다, 라는 느낌이 들기도 전에 나의 목은 이미 땅바닥을 뒹굴고 있겠지. "....."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코마히코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신에게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유평은 궤도 엘리베이터의 입구 쪽을 바라보며 들었던 후츠노미타마를 밑으로 내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는 어느새 한쌍의 남녀가 나타나 있었다. 앞에서 유평과 코마히코가 결투를 벌이는 동안 궤도 엘리베이터가 언더시티와 옴필로스를 왕복했던 모양이다. 검은 한복을 입은 남자와 군청색 한복을 입은 여자. 그들의 모습에 코마히코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떻게....어떻게 여기에?" "제자가 곤경에 처하면 스승은 어떻게든 알게 되는 법이다." 군청색 한복의 여자, 황연우는 퉁명스레 대꾸하며 코마히코와 마리의 상태를 살폈다. 엉망이 된 그들의 모습에 그녀의 얼굴에 안쓰러움과 대견함이 스쳐지나간다. 연우는 애써 슬픔의 기색을 감추며 미소했다. "....늦게 와서 미안하구나, 코마히코." "아." 그 말에, 그 미소에 코마히코의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아아, 그렇다. 자신은 방금 전에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뻔했던 것이다. 검은 한복의 남자, 성비영은 그런 사제의 재회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유평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 비영의 인사에 유평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알 수 없는 희열이 전신을 엄습해오고 있었다. 유평은 입가를 비죽이며 되물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떻게 보이나, 매제?" 비영은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아까부터 줄곧 코마히코 뒤편에 쓰러져 있는 마리에게 고저오디어 있었다. 비영은 허리춤의 찬 칼집에서 진검을 뽑이들며 지검대적세를 취해따.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실리고 있었다. ".....가히 좋아보이지는 않는군요." =PART 2= "후후, 후후후후. 지금 나한테 검을 겨루는 거냐?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인간인 네가?" 유평은 검을 드는 비영의 행동에 조소를 금치 못했다. 너희들이 자랑하던 오라 능력자들도, 신풍이라도 추켜세우던 저들도 내 손으로 무릎 꿇렸다. 패퇴시켰어! 그런데 이제 와서 감희 너희가ㅡ! "저에겐 무영신풍류가 있습니다." 비영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비웃는 유평에게 자신은 무영신풍류가 있다고 자신한다. 그 모습에 한 점의 의심도 없었기에, 너무나도 순수하게 무영신풍류를 믿고 있었기에. 그랬기에 유평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비영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웃기지마! 수친느 질투로 변하고, 질투는 분노로 변했다. 유평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후츠노미타마로 지검대적세를 취했다. "어디 한 번 보여 보시지! 아버지가 날 내치고 택한 남자의 검을 보여 봐라.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지켜봐 주겠어!" 비영이 있었기에 유평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전대의 당주인 아버지가 친아들 대신 딸의 데릴사위를 후계자로 삼은 순간 무영신풍류에 꿈을 가지고 살아온 한 남자 역시 죽어버렸다. 검을 들었던 이유조차 잃어버린 채 빈 껍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비틀리기 시작한 것은. 유평의 검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것을 알고도 멈출 수 없게 된 것은..... "....." 비영은 그런 유평의 모습에 자신도 책임이 있음을 느꼈기에 검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과거의 속박은 스스로가 끊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을 주저하고 망설였기에 대신 다른 사람들이 다치고 말았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말았다. '더 이상의 희생자는 안돼!' 그렇게 각오하자 비영의 몸에서 파도 같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유평이나 코마히코, 마리가 펼치는 검기와는 양상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힘이 강대하고 사나운 맹수의 그것이었다면 비영의 힘은 고요한,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바다의 그것이었다. 유평은 그런 비영의 기도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새삼 눈앞의 남자가 현 무영신풍류의 계승자임을 상기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 대신 검을 물려준 사람임을 기억해냈다. 그래, 어쩌면 진즉부터 그와 겨뤄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줄곧 이런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려왔는지도 몰라. '이자라면 과연....' 슥 그때 팽팽하게 대립하는 유평과 비영의 기도 사이로 또 하나의 기도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맹수와 바다에게도 지지 않는 태양. 누구도 가릴 수 없는 눈부심과 따뜻함을 간직한 힘이었다. 그 기도가 흘러나오는 곳에는 수중의 연검으로 지검대적세를 취한 연우가 있었다. 비영은 곁에서 검을 드는 아내의 모습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싸울 거요?" "끝까지 따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연우는 비영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줄곧 유평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고집스러운 모습에 절대로 그녀를 만류할 수 없음을 깨달은 비영은 그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끝까지 따라와 주시오." "예." 그제야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진다. 그렇게 유평에게 맞설 준비를 하는 사부들의 모습에 코마히코는 당황하며 외쳤다. "사, 사부님! 안 됩니다. 제가 대신 싸우겠습니다! 신검의 상대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코마히코!" 연우의 호통이 코마히코의 목소리를 눌러 버려싿. 그녀는 제자를 향해 엄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네가 지금 해야할 일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싸우느 ㄴ것보다 우선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는냐!" "아...." 코마히코는 앞에 쓰러져 있는 마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딸아이를 잘 부탁한다, 코마히코. 너라면....안심할 수 있어." 연우는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코마히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믿었기에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비영 역시 미소하며 말했다.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고 마리를 데려가 주게. 그 아이의 바람을 반드시 이루어 주게. 부탁하네." "....." 코마히코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흐느낌이 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마리의 손에서 도츠카노츠루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가슴에 모으며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싶었다.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슬퍼하는 모습을 그녀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자신의 눈물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까 봐, 행여나 그녀를 놔두고 떠나지 못할 까 봐,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두려웠다. 두려웠다. 그랬기에.... "아가씨는 제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코마히코는 차마 그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약속했다. 흐느끼지 않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하려고 노렦했다. 그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그렇게, 그렇게...... "가거라." 연우는 우두커니 서 있는 커마히코의 등에 대고 작별을 고했다. 코마히코는 그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자신의 발걸음을 원망했다. "예." 그리고 그는 마리를 안은 채 옴플로스의 신전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사라지는 제자의 등을 바라보며 연우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사랑한다, 코마히코. '사랑한다, 내 아들아.' 유평은 동생부부가 충분히 자식들은 배웅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마리와 코마히코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후츠노미타마의 칼끝을 움직였다. "이제 이무런 미련도 없겠지? 슬슬 시작해 보도록 하지." ".....배려 감사드립니다." 비영은 짧게 인사하고 서서히 검을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 연우의 연검 역시 호선을 그리며 검진을 형성해낸다. '.....!' 신호도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운요에 접어드는 육체. 대기를 가르는 검날. 촤앙 칼끝이 서로에게 부딪치며 공명을 일으킨다.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청명음이란 말인가? 순간 유평과 비영, 연우는 진정으로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싸우는 이유도 목적도 다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뼛속 깊은 곳까지 검사라는 것, 검의 목소리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검사라는 것이다. ---------------------------------------------------------------- "수정 씨!" 닥터와 일행들의 부름에 피스메이커의 부사령관 민수정은 재치 있게 윙크했다. "늦게 도착해서 미안해요. 일부러 메카닉 센터에서 메인 센터를 거쳐 오는 바람에....."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자기 앞에 쓰러져 있는 AI 슈츠의 소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저편에 진 사령관을 인질로 붙잡고 있는 문세희와 시폰 뤼멘을 발견한 후 말을 잇는다. ".....그래도 돌아서 오길 잘했네요. 쉘터로 직행했더라면 이렇게나마 만나지도 못했을 테니." 수정은 진 사령관이 시폰 뤼멘에게 쫓긴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그래서 진 사령관이 메디컬 센터의 자동승강로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서둘러 메카닉 센터에서 자동승강로를 이용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닥터는 수정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수정씨,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혼자서 오신 건가요? 아, 그전에....." 분명 수정이 온 승강로 쪽에는 그녀가, "탈출하지 못한 천요원 중사가 있었을 텐데....."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는 닥터의 못브에 수정은 미소하며 문 쪽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문 쪽을 돌아보던 닥터와일행은 일순 저도 모르게 환성을 터뜨렸다. 거기에는 시더 웰리스와 윤채영의 부축을 받아 걸어 나오는 천요원이 있었다! "살아 있었어!" "요원씨!" 닥터를 선두로 유화와 오퍼레이터팀의 여대원들이 요원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요원은 지친 미소로 응답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껴안으려다가 곧 그녀가 입은 군복이 피로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안색이 변했다. 닥터는 당황하며 요원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은 겁니까? 역시 어딘 가를 다친 건....." "괜찮아요, 닥터. 포션으로 응급처방을 했으니까." 수정의 말에 닥터는 그제야 뒤늦게 문에서 나오는 핑크빛 AI 슈츠의 소녀, 이유리를 발견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녀의 AI 슈츠의 포션이 있었을 테지! 그렇게 요원의 무사함이 확인되자 일행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동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더는 닥터와 유화를 채영은 삼인방과 자신의 부하들을. 모두들 재회의 기쁨에 서로를 얼싸안는다. "우왕, 닥터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유화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하하. 시더양,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닥터는 자신의 품에 매달려 울먹이는 시더의 모습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둘의 포옹에 유화는 조금 떨어져서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고만 있었다. 그녀도 당장 닥터와 시더를 껴안고 싶었지만 뭔가가 쑥스러웠던 것이다. 무엇보다 닥터와의 관계도 어색해져 버렸고...... 시더는 닥터의 품에서 그렇게 머뭇거리는 유화를 향해 혀를 삐죽 내밀었따. "흥! 꼴좋다. 혼자 바쁜 척하더니 실컷 고생만 했나 보지? 뭘 그렇게 뚱해져 있는거야?" "누, 누가 뚱해졌다고! 바보!" 유화는 발끈하며 버럭 솔리질렀다. 때문에 자신이 처음으로 시더에게 경어를 생략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한편 채영은 평소와 달리 울음을 터뜨리기만 하는 부하들의 ㅁ습에 영문을 몰라 그녀들을 다독여야 했다. "다들 반가워서 이러는 건 알겠는데....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왜 이렇게들 울어?" "흑, 치프......치프." 연정과 성은은 채영을 올려다보며 흐느꼈다. "주연이가..... 주연이가 죽었어요. 주연이가....." "다들 죽었어. 다들......" 그제야 채영은 삼인방 중 한 명인 김주연이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ㅇㅆ다. 어디 그뿐인가? 다른 대원들의 수도 평소보다 줄어 있었따. 항상 볼 수 있었던 얼굴들이 보이지 않는다. 채영은 자신도 모르게 연정과 성은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몸을 떨었다. 내, 내부하들이. 내 부하들이 죽었다고? 하지만 오는 길목에 시체들은 없었는데.....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연정과 성은은 발밑에 쓰러져 신음하는 AI 슈츠의 소년들을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저 중 두명의 소년들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그녀들의 동료들을 죽였다. 불태우고, 폭파시키고, 불태우고, 폭파시키고,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두를 죽여 버렸다. 죽은 시체도 볼 수 없도록 죽여 버렸다고! 채영은 그런 부하들의 시선을 따라 소년들을 바라보다가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로 시폰 뤼멘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부하들을 죽인 장본인을 눈동자에 각인시켰다. 살인자들, 살인자들, 살인자들! '.....!' 그렇게 시폰 뤼멘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시폰 곁에서 진 사령관을 인질로 잡고 있는 한 여자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어, 어째서 저 아이가 저기 있는 거지? 왜 저런 모습이로? "문....세희?" 세희는 채영과 눈이 마주치자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하나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배신자! 수정도 진 사령관을 붙잡고 있는 세희를 발견했는지 표정이 굳었다. "에전 피스 대원들의 전투영상이 네터 상에 퍼진 일이 있었죠. 그때는 누가 그런 영상을 찍었던 걸까 했는데.....하지만 애초부터 위그드라실의 위성영상이 유출된 것이라고 한다면...." "아, 그건 위그드라실에 심어둔 스파이 위성 라다가스트의 작동을 실험해 본 거였어요. 언더 시티의 중추 시스템이 어느 정도까지 침입자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지도 확인 할 겸. 다행히 역탐지는 내부에서의 침입에는 반응하지 않더라고요. 사람이나 기계나 뭐가 그리도 순진한 건지. 덕분에 그 다음부터는 마음껏 자료들을 빼내갈 수 있었죠." 수정의 질문에 세희는 히죽거리며 구구절절 자신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정체를 숨기느라 어지간히도 입이 근질거렸던 모양이다. 채영은 더 이상 세희의 말을 듣지 못하고 두 눈을 감았다. 맙소사.... "잡담은 거기까지만 하지." 시폰은 세희의 말이 길어지려는 것을 제지하며 수정을 돌아보았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잘도 제 아이들을 그 꼴로 만들었군요. 수정 양. 왜 항상 유다가 크루세이더 없이 당신만을 대동하나 했더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당신의 아이들이 생각보다 격이 떨어지는 덕분에. 저아이들..... 제대로 된 오라 능력자가 아니더군요." 구정은 싸늘하게 대꾸하며 형의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런 그녀의 주위로 쓰러졌던 세명의 AI 슈츠 소년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이 계집....." "......죽여 버린다." "우리를 잘도....." 수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쫙 쫙 쫙 번개같이 키마이라와 스킬라, 케르베로스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후려친다. 소년들은 피가 터지는 입술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수정에게서 물러났다. 뭐, 무야. 뭐가 이렇게 빨라? 지금 뺨을 맞은 건가? "정말이지 부모가 나쁘니까 아이들도 나쁜 점만 배우네. 무슨 입들이 그렇게들 걸한 건지." "이ㅡ!" 본능적으로 상대가 월등히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케르베로스와 달리 키마이라와 스칼라는 머리끝까지 화가나 자신들의 능력을 전개했다. 평소 인체자연발화와 SLEVE로 간단하게 인간을 죽여왔던 그들은 오라 능력자도 아닌 한낱 인간에게 이 같은 모욕을 받는 것을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었다. 그들은 앞에 떨어진 수정을 바라보며 손을 내뻗었다. 불태워 주마! 얼려주마! '어쨋든 이대로 죽여 주겠어!' 콰직 그리고 울려 퍼지는 파쇄음. 그것은 분명 초전도 상승으로 인한 자연 폭굉의 소리, 혹은 초전도 감소로 인한 체내 팽창의 폭발소리여야 했다. 그렇게 분수를 모르고 까불던 인간여자는 죽어야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다! "케ㅡ엑!" 하지만 아니었다. 수정은 조금도 그들의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채 키마이라와 스칼라의 배에 각각 주먹을 하나씩 대고 있었다. 그 주먹을 타고 전해진 경력이 그들의 내장을 헤집고 있었다. 파쇄음은 소년들의 배에서 났던 것이다. '어째서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어째서?' 키마이라와 스칼라는 앞으로 거꾸러지면서도 그런 의문을 접을 수 없었다. 인간이잖아?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잖아? 오라능력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우리의 정신감을을 피할 수 있지? 정신장벽도 가지지 않으면서..... ".....!" 그 의문은 앞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았던 케르베로스가 풀 수 있었다. 그는 수정의 뒤에서 핑크빛 오라를 빛내는 유리를 발견했다. 저 꼬마인가! 저 꼬마의 능력이 이 괴물 같은 여자를 서포트하고 있는 건가? 그 짐작대로 패턴 알리자린ㅡ레드와 패턴 알리자린ㅡ블루는 유리의 패턴 핑크, 마인드 키핑에 의해 차단 된 것이다. 유리는 마인드 스페이스룰 확장시켜 수정과 일행을 물질계와 아스트랄계에서 차단, 외부의 영체공격으로부터 완벽하게 지켜주었다. '제길,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우리가, 우리가 오르 능력자란 말이야. 우리가!' 케르베로스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수정의 모습에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대로 당해줄 것 같으냐! 휙 순간 수정의 주먹이 아무런 제지도 없이 소년의 몸을 관통했다. 케르베로스가 자신의 능력인 패턴 안트라센ㅡ블루를 사용하여 디코이를 세 개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유리의 마인드 스페이스가 다시 수정을 보호하자 그녀의 대뇌반구에 걸렸던 암시가 풀리며 허상 속의 진짜가 나타났다. 케르베로스는 막 수정의 뒤로 접근하려던 차에 자신의 위치가 들통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으ㅡ!" 쾅 복도의 전경이 뒤바뀐다 싶더니 이내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케르베로스는 수정의 선풍각에 관자놀이를 얻어맞고 바닥에 메다 꽂혔다. 너무나 전광석화 같은 발차기였기에 미처 오라 쉴드를 전개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오라 능력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한 기량의 차이였다. 그녀는 무지막지하게 강하고 자신들은 형편없이 약했던 것뿐이다. "후.....!" 그렇게 소년들을 때려눕히고 짧게 호흡을 고르던 수정은 다음 순간 양 다리를 찢으며 그 대로 땅바닥에 꺼지듯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갈색의 궤적들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간다. 화살이었다. 수정은 재빨리 이어타정(?魚打挺)으로 몸을 일으키며 자신에게 화살을 날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는 패턴 안트라센ㅡ브라운의 능력자 히드라였다. 수정은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을 겨누는 히드라의 화살을 노려보았다. 화살을 쓰는 오라 능력자라니.... 정말 가지가지 만들었군. '그래도 화살이 어디로 겨누어지는지만 확인한다면 피하는 것도 무리는.....' 하지만 그 방법은 포기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살이 스쳤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흩어져 녹고 있었던 것이다. 패턴 안트라센ㅡ브라운의 자가분해력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안티 오리하르콘이 된 화살촉은 닿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분해시켜야 했지만, 단시간의 물리접촉이었기에 수정은 머리카락 몇올을 희생하는 것으로써 무사할 수 있었다. 시폰은 화살을 경계하는 수정에게 진 사령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제 아이들의 버릇을 고쳐주는 것도 좋지만 좀 더 상관을 생각해야 되는 게 아닐까요?" "....먼저 덤벼드니까 상대해 준 것뿐이에요." 수저은 재빨리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다. 그 모습에 시폰은 이를 뿌드득 갈며 곁에 있던 그람드링과 라돈, 히드라에게 명령했다. "저 바보 같은 것들을 당장 데려와! 오라 능력자도 아닌 인간에게 당하다니....모자란 것들!' 언제나 웃기만 하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자신하던 루미네선스들이 추태를 보인 탓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은 자신의 결과물들이 진 사령관의 결과물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민수정. 오라 능력자도 아닌 그녀가 루미네선스들을 이렇게나 압도하다니. 대체 무슨 수작을 브린 거지? 무슨 마술을 부린 거냐고? '유다! 왜 매번 네 녀석은 내 앞에 있는 거냐? 왜 난 너를 앞지를 수 없는 거냐?'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녀석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다. '네게서.... 그이름을 빼앗아 주마.' 그 하나만을 위해 만든 루미네선스들이었다. 그 하나만을 위해 만든 이그나이트들이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부었는지 모른다. "으으...." 하짐나 결과가 이것이었다. 시폰은 그람드링과 라돈, 히드라의 부축을 받고 걸어오는 케르베로스와 스칼라, 키마이라를 바라보았다. 수정에게 격퇴당한 그들은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털썩 패배한 아이들이 시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고통에 괴루워하면서도 아버지를 올려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케르베로스가 울먹이며 시폰에게 용서를 빌었다. "죄, 죄송해요, 마스터.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더 싸울 수 있어요. 이번에는 잘해 보일 게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 그런 케르베로스를 바라보며 시폰은 인상을 구겼다. 그 모습이 꼭 유다에게 무릎을 꿇은 자신처럼 보였던 것이다. 꼴사나운 모습. 추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 '아직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 정도로 끝낼 수야 없지.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시폰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진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하하! 대단하군. 이래서 자네가 수정양을 거두어 들인 건가? 처음에는 그저 딸이 없어진 적적함을 참지 못하고 입양한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 "언제부터 그녀의 능력을 알았던 거야? 어디서 그녀를 데려왔던 거지? 그녀의 정체는 뭔가? 응? 설명해 보게. 내 루미네선스들을 쓰러뜨린 저 강함을 한번 설명해 봐." "...." "뭐야? 왜 얘기를 못하나? 내 아이들을 이겼으니 얘기해 줄 수 있잖아?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자식자랑 좀 해봐. 내가 들어 주겠단 말이네. 아니면.... 한심한 아이들을 가진 부모에게 해 줄말 따위는 없나는 건가?" 빠르게 질문을 쏟아내는 시폰의 모습에 진 사령관은 처음으로 무펴정을 풀었다. 그리고 드러난 표정을 보는 순간 시폰은 눈앞이 깜깜해 졌다. 진 사령관은 정말로 시폰이 딱하다는 듯 연민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모라는 말을 쓰지마라. 너에겐 그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 "...." "자식의 소중함도 모르면서 자식에게 뭘 기대하겠다는 건가? 강함을 설명해 보라고? 내가 설명한다고 해서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진사령관은 수정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수정은 충분히 그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중함에 이유를 만들이 말아라. 그러면 너도, 네 자식들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겠지." "하!" 시폰은 진사령관의 말에 비웃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낼 뿐이었다. 그 모습을 곁에 있던 그림드링은 복잡ㅎ나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크리스. 역시 우리이 마스터는....' 시폰은 이를 갈며 진 사령관에게 소리쳤다. "잘도, 잘도 말하시는군! 대ㅡ단해! 마치 자신이 다 이겼다는 듯한 말투야! 소중함에 이유를 만들지 말라고? 그럼 지금보다 나을 거라고?" 언제나 그래! 언제나 그런 식으로 날 내려다보지! "착각하지마라 유다! 어차피 이 승부는 나의 승리야! 네놈은 거기서 무력하게 모두가 죽어나가는 걸 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네가 그토록 아끼는 민수정도! 피스메이커의 찌꺼기들도! 모두 다 죽여 주마. 네 앞에서 죽여 주겠어!" 시폰을 민수정을 돌아보며 비웃었다. "유다가 그토록 소중하신가? 그렇다면 시험해 보지. 자네들이 거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즉시 유다를 죽이겠다. 그리고...."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히드라가 화살을 재어 수정에게 겨누었다. "유다 앞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은 자네다, 민수정. 과연 자네들의 소중함이 어느 정도 인지 지켜보도록 할까? 화살을 피하고 싶다면 피해도 돼. 어차피 가장 소중한 건 자기 자신이니까. 타인 따위, 아무리 소중하다 한들 타인이다. 부디 의외의 결과르 날 즐겁게 해 주길 바라네." "......" 수정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런 시폰을 노려보았다. 그녀 뒤에 있던 닥터와 유화, 시더와 채영일행은 안절부절못했다. 어, 어떡하지? 이대로.... 이대로 수정이 죽는걸 지켜 보고만 있어야 하나? 이대로 우리가 차례대로 죽는 걸 기다리기만 해? 유리는 조심스레 정황을 살피다가 자신의 능력을 전개하려고 했다. 어떻게든 제때 마인드 스페이스로 진 사령관을 잡고 있는 문세희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단지 물리저촉도 없는 상태에서 루미네선스들의 정신제압이 가능할지는 의문이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진 사령관이 죽겠지.' 그런 유리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수정이 그녀를 향해 마음속으로 경고했다. ㅡ안돼요, 유리양.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절대로 아무것도 해서는 안돼요. 절대로. ㅡ 하지만! 이대로는 수정이 죽어 버리잖아? 다른 방법이 없어. 더 늦기 전에 내가 마인드 스페이스를 전개해야..... ㅡ 방법은....있어요! 뭐? 유리는 수정의 대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법이 있다니? 이 상황에서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야? 하지만 수정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며 시폰 진영 쪽의 한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움직여 준다면, 그가 변덕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그람드링 뤼멘.' 그가 자신들과 약속한대로라면! "......마스터." 그때 시폰 뒤에 있던 그람드링이 갑자기 그를 불렀다. 한창 수정에게 집중하고 있던 시폰은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지금 내가 바쁜게 보이지 않는 거냐?" "한 가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람드링은 시폰의 화난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크리스가 죽기전에 했던 말 기억하세요?" "뭐?" 시폰은 알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웬 뚱딴지 같은 질문을.... 그표정만으로도 그람드링은 알 수 있었다. 이미 크리스의 죽음은 시폰의 기옥 속에 남아 있지 않음을. 어차피 소모품의 말 따위....처음부터 저 사람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거야. '한마디만.... 아들이라고 한 마디만.....' 그 간절함도, 그 애절함도, '나에겐 그토록 클 수밖에 없었던 상실감도.' 저사람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어. '소중함에 이유를 만들지 말아라.' 갑자기 시폰에게 묻고 싶어졌다. 왜 소중히 하지 않았던 건지. 소중히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면 그건 또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때 왜 크리스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았죠?" 그렇게 묻는 그람드링의 두눈은 각기 다른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PART 3= 퍽 진사령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던 문세희는 일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고 몸의 감각이 아늑햊간다. 그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뒤로 넘어갔다. 이미 그녀의 머리는 수소가스를 소찬도의 아크열로 가열해 1억도 정도의 열에너지를 발생시키는 플라스마 날로 인해 세로로 쪼개져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그람드링의 아켄석제 도끼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탱그랑 진 사령관의 목에 닿아 있던 단도가 주인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면서 채 쇳소리를 내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세희를 죽인 도끼와 한 쌍이었던 나머지 플라스마 도끼가 대기를 가른다. 그 도끼는 멍하니 있던 라돈의 목을 동강내고 뒤쪽 벽에 꽂혔다. 라돈의 떨어져나간 머리는 바닥을 구르면서도 여전히 꿈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What!" 히드라는 그람드링의 돌발행동이 너문 뜻밖이었기에 튕겨지듯 뒤로 뛰어 스킬라와 키마이라, 케르베로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는 그 세 소년들 사이를 스쳐 지남과 동시에 화살ㄹ을 꺼내 활에 걸었다. 활을 겨눈 그 앞에는 이미 그람드링이 그들을 향해 쇄도해오고 있었따. "무슨 짓ㅡ!" 포션으로 막 상처를 회복하던 케르베로스와 스칼라, 키마이라는 당황하며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그람드링을 바라보았다. 그람드링의 양손에는 어느새 그의 주무기인 한쌍의 리볼버가 들려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케르베로스였다. 그는 즉시 자신이ㅡ 오라능력을 전개하여 자신의 분신을 세개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람드링의 오른쪽 눈은 원격투시안, 왼쪽 눈은 순간예지안. 그 두 눈이 발휘하는 싱크로 효과, 천리안 앞에서는 모든 암시화 현혹이 힘을 잃는다! 그림드링의 리볼버가 케르베로스의 분신들 중 정확히 본체의 이마를 향해 총구를 들이댔다. 쾅 한발의 총성이 울리며 케르베로스의 이마에서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 피가 튀는 곳에 그람드링은 이미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스킬라와 키마이라 사이에서 좌우로 리볼버들을 교차시키고 있었다. "....!" 스킬라와 키마이라는 코앞에 닿는 리볼버의 총구를 노려보며 죽음을 각오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네놈도 함께 데려가 주마!' 그리고 전개되는 패턴 알리자린ㅡ레도와 패턴 알리자린ㅡ블루. 순간 그림드링의 체내에서 지독한 열기와 냉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스킬라와 키마이라가 각각 그람드링의 초전도 현상을 증폭, 감소시켜 인체 자연발화와 SLEVE를 야기시킨 것이다. '....!' 하지만 그람드링은 정신장벽을 최고조까지 끌어올림으로써 그들의 감응능력을 저지시켰다. 어차피 그들은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는 레플리컨트들. 그람드링과 같은 복제인간이라 해도, "겪어온 햇수가 다르단 말이닷!" 쾅 양쪽 리볼버가 일시에 불을 내뿜으며 스킬라와 키마이라의 머리를 박살냈다. 살아온 기간이 길수록 영체의 카르마에너지는 축적되고 그것이 오라 능력의 컨트롤을 좌우하는 힘이 된다. 애초에 그람드링과 이그나이트들의 정신감응력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람드링의 말대로 겪어온 햇수가 다르다! "Goddam!" 히드라는 자신의 형제들을 눈 깜짝할 새에 도륙하는 그람드링의 모습에 평소의 침착함을 잃어버렸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활시위를 잡아 당겼ㄷ. 그람드링은 이미 그의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핑 활시위를 놓자 자가분해력을 담은 아켄석 화살이 그람드링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워! 그람드링은 그대로 오른쪽 의수로 화살을 막아내며 히드라의 입에 리볼버의 총구를 쑤셔 넣었따. "Go to Hell, brother!" 콰앙 방아쇠가 당겨짐과 동시에 히드라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졌다. 그 모습을 수정과 피스메이커 일행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잔인한 것도 잔인한 거지만 이건 너문 ㅏ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저 무적일 것만 같던 이그나이트들이 단 한 명의 오라 능력자에게 모두 목숨을 잃을 줄이야! 하지만 그것은 그람드링의 싱크로 능력에 대해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경악이었다. 순간예지안과 원격투시안의 결합, 천리안의 공간지각예지 능력이라면 이런 결과는 충분히 당연한 것이다. "크크" 그람드링은 비록 정이라고는 없었지만 자신의 혈육이나 마찬가지였던 쌍둥이 동생들을 내려다보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잔인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서글픈 느낌이었다. 그는 애써 감상을 떨쳐내며 힘겹게 시폰을 돌아보았다. 이제 모든 것의 인과를 바로잡을 때였다. 탕 그러나 채 돌아서기도 전에 총성이 울렸다. 그람드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천천히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붉은 AI 슈츠의 왼쪽 가슴 부근에 작은 총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총상으로부터 거짓말처럼 피거품이 뿜어져 나온다. 그람드링은 녹아내리는 오른쪽 의수로 가슴을 움켜쥐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초연이 감도는 권총을 그에게 겨눈 시폰 뤼멘이 있었다. 그람드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천리안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충분히 예지할 수 있었을 텐데....그런데 왜....' 오른쪽 눈이 욱신거렸다. 그람드링은 그제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자신이 왜 시폰의 발포를 공간예지할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한순간 오른쪽 원격투시안이 기능을 정지한 것이다. 때문에 천리안의 광범위한 순간예지도 사라져 버렸다. 왼쪽의 순간예지안만으로는 사각에서의 공격을 예지할 수 없는게 당연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른쪽 눈이 기능하지 안항ㅆ던 것일까? 왜? '크리스..... 이 바보 같은 녀석이.' 그림드랑은 오른쪽 눈의 본래 주인인 동생을 떠올리며 한탄했다. 그렇다. 오르크리스트 뤼멘. 바보같이 마스터밖에 모르던 그 녀석은 죽어서까지 마스터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마스터가 자신을 공격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에게는 천리안이 통용되지 않았던 거야! '하, 하하. 멍청한 놈. 결국 넌 끝까지....' 그람드링은 눈시울을 붉히며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폰은 그런 그가 자신을 배신할 줄은 몰랐기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게....대체 무슨 짓이냐, 그람? 어째서 네가?" "마스터, 대답을.... 왜 그때 크리스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았죠?" 그람드링은 비틀거리면서 천천히 시폰에게 다가갔다. 가슴으 ㅣ피가 멈추지 않았따. 아무래도 심장 근처를 관통한 모양이다. 상처야 포션으로 치료한다지만.... '아켄석 탄이었어.' 총을 맞은 직후부터 그람드링의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단순한 총상이 아니었다. 아켄석 탄에 의해 영체의 아스트랄 바디가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람드링은 이를 갈며 시폰을 노려보았다. 아켄석 탄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처음부터 루미네선스들도 믿지 않았다는 얘기였군. '언제든지 필요하면 이용하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고!' 대체 우리를 뭘로 아는 거야? 아무리 복제인간이라지만, 아무리 자연적인 생명이 아니라지만! '살아있어, 숨쉬고 있어, 움직이고 있어.' 인간이야. 생명이다! 물건이 아니야!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를 이용할 권리 따위는 없어!' 시폰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그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렸다. 그렇게 독기가 오른 그람드링의 모습에 시폰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품의 주머니에서 제어기를 꺼내들었다. 그람드링의 뇌하수체 밑에 장착한 ACR에 전기신호를 보내는 발신기였다. 그래! 이것만 있으면 녀석도 다시 말을 들을 것이다. 다시 내 말에 복종 시킬 수 있어! 쿡 쿡 하지만 몇번이나 발신기의 스위치를 올려도 그람드링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그람드링은 그런 시폰의 행동에 더욱 분노했는지 한층 더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어째서냐! 어째서 작동하지 않는 거냐! 어째서!' 그렇게 발신기를 붙잡고 식은땀을 흘리는 시폰의 모습에 피스메이커 진형 쪽에 있던 수정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발신기는 이제 무용지물이에요. 그람드링이 우리에게 협력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 ACR에 대한 대책으로 AI 헬멧에 외부의 전자파를 차단하는 장치를 해두었어요." 협력.... 그랬나. 그런 거였다. 시폰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수정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보기 딱했는지 수정의 곁에 있던 시더가 말했다. "고속 SCR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장치를 만들게 된 것도 다 미스터 뤼멘 당신이 예전에 가인의 암살을 꾸몄기 때문이에요.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몇날며칠을 끙끙대며 만들어낸 거죠." 설마 이런 일에 쓰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시더는 쓴물이 올라오는 것을 삼키며 시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시폰은 그런 피스메이커 일행들을 돌아보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람드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이를 딱딱거리며 어깨를 움츠리게 된다. '이 오한은 뭐지?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야?' 그것은 시폰이 처음으로 느끼는 '공포'라는 것이었다. 지금껏 극악무도한 짓은 모두 다 해온 그였지만 정작 자신이 공포를 느낀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시폰에게 더이상 그람드링은 소년이 아니었다. 아들이 아니었다. 소모품이 아니었다. 루미네선스가 아니었다. 그저 괴물잉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감당해낼 수 없게 된 괴물! 시폰은 벽쪽으로 물러서다 등을 부딪치며 숨을 삼켰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람드링의 눈빛을 어떻게든 누그러뜨리기 위해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의 부탁이라니? 무슨 부틱을 말하는 거냐? 그 아이가 나에게 무슨 부탁을 했던가?" "아들....이라고 불러 달랬어요. 아들이라고." 그람드링은 리볼버를 쥔 주먹에 힘을 주며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아까부터 오른쪽 눈이 계속 지끈거리는 것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마치 그람드링에게 눈동자가 고함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그가 할 행동을 멈추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아, 그런 거였나. 하하하." 시폰은 그람드링의 설명에 방긋 웃었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궁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일단은 비위부터 맞춰 줘야겠지. "그게 그렇게나 섭섭했느냐.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말이지.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단다 자....." 그는 최대한 진심이 담긴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쾅 순간 시폰 뤼멘의 얼굴이 웃는 형상 그대로 박살났다. 그 앞에는 그람드링의 리볼버가 총구에서 초연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 말 한번 해 주는 게 그렇게나 어려웠던 거냐?" 그람드링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폰이 시체를 경멸의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시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순간부터 지끈거리던 오른쪽 눈의 통증이 사라졌다. 통증의 여운 때문일까?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그의 오른쪽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람드링은 그렇게 한쪽눈으로만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지옥에나 떨어져, 아버지." ------------------------------------------------------------------- 1번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옴팔로스 외곽은 예전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차원진동과 차원진동의 격돌이 만들어낸 혼돈의 문은 일대의 모든 것을 유에서 무로 되돌려싿. 존재 자체가 혼돈으로 회귀되는 카오스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디멘션 데몰리션. 존재의 법칙을 말살하는 그 상위의 법칙 앞에 의미를 잃은 존재들은 영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 세계에서 사라진다. 혹자는 그것을 진정한 이탈이라고도 하며 혹자는 완벽한 소멸, 죽음이라고도 했다. 만약 차원진동의 격돌이 끝까지 유지되는 상태에서 혼돈의 문에 진입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물질계와 멘탈계, 아스트랄계의 삼계에서 해방되는 도약, 차원이동이 이루어졌을지 모르지만.... "....." 하지만 녀석은 그러지 못했다. 피스 블루 유가인, 오라의 주인으로 선택되었던 애송이, 그 바보 멍청이는 한창 차원진동의 대결이 일어나던 중에 자신의 능력을 모두 풀어 버렸다. 그대로 아포칼립스에 휘말려 버렸어! 털썩 브루스 류는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방이 폐허가 된 그곳에 그는 그렇게 홀로 남아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퍽 순간 브루스는 왼쪽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카르마에너지가 바닥난 그의 몸은 아스트랄 바디가 붕괴됨으로서 물질계의 육체(Physical Body) 역시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바닥을 내리친 그의 손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균열이 일어나야했다. 하지만,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부서질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몸에는 아직도 미약하나마 카르마에너지가 잔류해 있었던 것이다. 앞의 아포칼립스 격돌이 가인에 의해 중지되면서 브루스의 탐랑 역시 도중에 멈춰 버렸다. 때문에 힘을 완전히 쏟아 붓지 못했다. 그래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살아 줘요.' 브루스는 가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래서였나? 녀석이 갑자기 힘을 푼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나? 자신의 소멸조차 각오하고 아포칼립스를 풀어버린 이유는, '날....살리기 위해서?' 그런거였나? 그런 것이었나, 유가인? 브루스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혼돈으로 회귀된 폐허의 전경뿐이었다. 거대한 크레이터 속에 우두커니 남아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유가인, 그의 모습은...... "하하, 하하하하" 브루스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왓다. 그의 몸이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하하하하하" 공허한 웃음소리였다. 브루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가인이 마지막으로 보여 주었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살아달라고? 나보고 살아 달라고? 자기 대신 살아 달라는 거냐? '멍청한 놈! 어차피.... 어차피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몸이란 말이다! 어차피 소멸해가는 몸이야! 네까짓 놈이 살려 줘 봤자 앞으로 하루도 더 살 수 없단 말이다!' 녀석도 그걸 알고있을 터였다. 내 상태가 어떤지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다행이에요 브루스. 정말.....정말 다행이에요. 역시 무사할 줄 알았어요. 반드시 무사할 거라고.... 난 정말.....' 브루스는 예전에 자신을 끌어안고 자신의 무사함에 눈물을 흘리던 가인을 기억해냈다. 그러자 뜨거운 눈물이 그의 갈라진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가슴이....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밀어닥친다. '그래, 그런 녀석이었어. 처음부터 녀석은 그런 바보였어.' 멍청하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야단 맞으면서도.... 그렇게 그렇게 날 따라다니던 녀석. 언제나 브루스, 브루스 하면서 날 반기던 녀석. 내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던 녀석. 슬퍼해 주던 녀석. '흥! 건방떨지 마라, 애송이. 네 녀석이 날 걱정하는 것은 100만년은 이른 일이다.' 그 관심이 기뻤다. 그 마음씀씀이가 기트갷ㅆ다. 그랬기에 브루스는 더 가인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언제나 퉁명스러운 태도로 대해야만 했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오라 주인과의 결전이었기에. 유가인과 차원진동의 대결을 벌여 천계로 향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브루스!' 하지만..... '잘도 비웃어 주었구나, 내 제자를' '잘 보고 있어라.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거다!' '지켜 주지, 네 녀석이 내 눈에 띈 이상.'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다. 브루스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오라의 주인이, 유가인이,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가인을 만나 한국지부의 피스메이커들과 함께 지내온 시간은 그것 밖에 되지 않았다. 칠성권을 계승한 후 오라의 주인을 찾아 헤맨 100여년의 시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잉었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 시간을 짧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삶이란 단순히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또 누구를 위해 살아왔는지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브루스의 요 1년간은 자신의 지난 삶에 비해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어쩌면 더욱 값진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가인과 모두를 만나면서부터 더이상 고독함을 느끼지 않았다. 무감각해지는 삶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살아가는 의미를 한 껏 느낄 수 있었다.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어.' 그 시절 이후로는 한 번도 웃지 않았던 그가, 진심으로 웃을 수 없었던 그가 '수청(秀淸)' 그 시절의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그 시절이 생각났기에, 그 시절의 자신이 한 약속이 생각났기에, 맹세가 생각났기에! 두려웠다. 이대로 모든 것을 망각하는 게 아닌가 두려웠다. 그때의 일들을, 약속을 다 잊어버리는게 아닌지, 지키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나 두려웠다. 행복해지면 행복해질 수록! 이 얼마나 얕궃은 일이란 말인가?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한 약속이 정작 안식을 얻게 되는 순간 발목을 붙잡게 되다니. 결국 브루스는 선택해야만 했다. 약속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잊어버릴 것인가. 모두가 함께하는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천계로 향할 것인가. 그 선택은 뜻밖에도 그를 고민하게 만든 장본인, 유가인에 의해 결정되었따. '브루스, 저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에요. 돌아오기 위해서 가는 거에요.' 그말을 하며 자신의 품을 떠나는 가인의 모습에,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그 모습에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브루스는 선택할 수 있었다. '날....구해라.' 천계로 향하기로. 자신 역시 자신의 목표를 위해 나아가기로. 그 때문에 시영에게 결탁하여 영체를 복구시키고 마지막 탐랑을 사용할 준비를 갖춰왔다. 약해지려는 마음에 못을 박기 위해 애제자였던 정진우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그렇게 모든 미련을 떨쳐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자신에게 남은 것은 천계뿐이라고. 옜 맹세를 지키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크, 흐흐.....흐흐흐흐......" 브루스는 바닥에 엎드린 채 오열했다. 마치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서럽게 울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도. 천계를 가지 못했다는 것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브루스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실감, 지독한 마음의 구멍뿐이었다. 그 구멍 앞에서는 맹세도 각오도...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흐흐흐흑.....!" 결국 그는 아무것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이다. 유가인에 대한 마음도, 피스메이커에 대한 애정도, 지난 1년간의 기억도. 아무것도 떨쳐내지 못했다. 옛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지니고 있던 소중한 것마저 잃어버렸다. 아니, 오히려 제 손으로 부셔 버렸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나는....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럿단 말인가? 나는? '....살아줘요.' 멍청한 놈! 바보같은 놈!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거지? 미워하면 됐잖아? 증오하면 됐잖아? 전력으로 날 죽이려 했으면 됐잖아? 그런데 왜ㅡ! '왜.... 네가 나 따위를 살리려고 죽느냔 말이다!' 포기하면 됐는데. 나같은 놈의 기억 따위 끊어버리면 됐는데. 정 따위 떼어 버리면 그만이었는데. '어째서 넌 끝까지....그렇게나 바보처럼.....' 바보처럼. 바보처럼. 브루스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손으로 땅바닥을 긁으며 흐느꼈다. 그의 몸 주위로 회색의 아지랑이가 거세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가인이 대신 살려준 목숨이건만 그 목숨마저도 이제 그 명을 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다, 유가인. 미안하다, 정진우.' 나같은 못난 사람이 너희들의 사부라서.... 이토록 어리석은 사람을 스승으로 두게 해서..... '미안하다. 미안해....' 브루스는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자신이 소멸되기를, 죄많은 자신의 삶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ㅡ......으. 그때 그때 브루스 앞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환청? 환청인가? ㅡ 브루.....스. 환청 같은 것이 아니다! 브루스는 번쩍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앞에 보인 것은 푸른빛의 입자 속에서 천천히 형체가 갖춰지는 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 소년을 확인하는 순간 이미 브루스의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눈앞의 소년을 끌어안고 있었다. 으스러져라 힘을 주어 다시는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듯이 끌어안는다. "유, 가인....!" 멈춰 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브루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품에 안긴 가인을 바라보았다. 하나뿐인 왼손으로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몇 번이고 잠든 얼굴을 확인한다. 푸른 빛이 완전히 걷혀나간 가인은 곧 서서히 눈을 뜨며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브루스,......" 가인의 멍한 목소리에 브루스는 예전에 쿠사나기가 D타입으로 변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도 이랬다. 쿠사나기의 중력파가 만들어내는 아포칼립스에 휘말렸을 때도, 그때도 가인은 무슨 영문에선지 멀쩡하게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아포칼립스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다행이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브루스는 가인을 안은 왼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덕분에 가인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는지 영문을 몰라 자신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브루스, 이게 대체..... 어, 어떻게 제가 살아 있는 거죠?" 깨어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이런 얼빠진 소리라니! 브루스는 기가 막혀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임이 나오기가 무섭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부를 포기한 가인의 행동이 생각난 것이다. "왜....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거지!" 브루스는 거칠게 가인을 밀어젖히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가인은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어덩방아를 찧었다. 질풍 라이징 킥을 썼던그의 오른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지난번 시영 때처럼 오리하르콘 의족이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기능 이상을 일으킨 것이다. 브루스는 무릎을 꿇고 그런 가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죽고 싶었던 거냐! 이렇게 살아나리라 생각하고선 그랬던 거냐!" "아, 아뇨. 전 그냥....." "그,럼 왜야! 왜! 어째서 그때 힘을 풀었던 거야! 내가 말했지! 날 쓰러뜨리고 시영에게 가지 않으면 현 인류는 멸망한다고! 너는 시민을 구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었나? 그런데 그렇게 죽어 버리면 어쩌겠다는 거지? 어떻게 그아이를 구하겠다는 거야!" 브루스는 가인을 내동댕이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인의 안이함을 질타했다. "당장 일어나라! 앞에서 못다 한 승부를 계속 하는 거다! 진우의 죽음을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날 죽이지 않으면 네 소중한 것들은 모두 사라질 거다. 그래도 좋다는 거냐, 지금!" "하, 하지만...." 가인은 일그러진 얼굴로 브루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브루스...제가, 제가 브루스를 죽일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일순 브루스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지그시 눈을 감고 탄식하는 그에게로 가인의 젖어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쓰러뜨리고 죽이라니.... 그런 소리를 당연하게 하지 말아요. 그런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요." "이, 이.....답답한 녀석....!" 시민은 반드시 구하러 가야 한다. 그리고 시영의 계획도 반드시 막아내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에게 가는 길목을 막는 브루스는 쓰러뜨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게 당연한 순리다. 하지만 가인은 자신이 곧 죽어도 브루스만은 결코 죽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생각 없는 녀석!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하지만 브루스는 그런 가인을 꾸짖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실제로 가인은 한번 죽고 나서도 되살아나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녀석을 몇 번을 죽든 절대로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애송이니까 할 수 있는 애송이다운 사고방식이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한 외고집이다. "후후" 브루스는 왠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일생에 있어 이렇게나 자신의 목숨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던가. 그는 졌다는 듯 지금까지의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예의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시영과의 일이 마무리 된 다음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마." 브루스의 웃음소리에 조용히 그의 눈치를 살피던 가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려 준다니?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거다. 어차피 지금은 시영과 시민의 일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지 않느냐. 그런 네 녀석을 데리고 실랑이를 벌여 봐야 내 입만 아프지. 더 이상 시간낭비하기도 싫다." "브루스......" 브루스는 자신을 멍한 목소리로 부르는 가인에게서 몸을 돌려 근처 폐허더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예의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신발 밑창에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후우." 브루스는 자신이 내뱉은 담배연기를 바라보다가 가인에게 말했다. "약속해라. 돌아왔을 때, 그때 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럼 반드시 최선을 다하겠다고. 최선을 다해 나와 겨루겠다고." ".....!" 가인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역시 브루스는 끝까지 나와 싸울 셈인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셈인가? 절대로? 브루스..... 고개를 들어 막 그를 부르려던 가인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곰방대를 빨고 있는 브루스의 몸에서 회색의 아지랑이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명의 빛이었다. 브루스의 영체가 힘을 다해가고 있음을 알리는 경종이다. 브루스는 지금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가인에게 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가인은 흐려지는 시야로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약속을, 브루스의 소원을 도저히 저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가인이 확답을 하자 브루스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인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럼 가 봐라. 네놈과 꼴같잖은 싸움을 했더니 몸이 다 피곤하군. 한동안 네 녀석 얼굴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얼른 사라져라." "....." "사라지라는 말 안 들리냐!" 브루스의 호통에 그제야 가인은 마지못해 그에게서 발걸음을 돌렸다. 절뚝거리는 오른발로 힘겹게 시영과 시민이 있을 옴팔로스의 신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인은 애써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행여나 뒤를 돌아봤을 때 브루스가 이미 사라져 있지는 않을까, 그가 소멸해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그런 그에게 브루스의 마지막 모고시가 들려왔다. "유가인." 예? 가인은 돌아보지 않고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날 너무 기다리게 하지마라."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등 뒹 있을 패턴 그레이의 기운, 브루스의 기척,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 가인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뿌옇게 보여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브루스. 조금만......' 한시라도 빨리 그와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가인은 눈물을 흩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불편한 다리를 쉼 없이 놀리면서. 마음속으로는 계속 자신의 스승에게 말을 걸면서. '금방 돌아오겠어요. 금방......' 그러니까 반드시 기다려 주세요. 꼭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알았죠? 알았죠, 브루스? '흥! 건방떨지마라, 애송이. 네 녀석이 날 걱정하는 것은 100만 년은 이른 일이다.' 저..... 조금도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 =PART 4= "크" 그람드링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총상을 입은 왼쪽 가슴으로부터 출형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소지한 포션을 스스로에게 주사했지만 외상은 나을지언정 아켄석 탄에 입은 영체의 데미지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그에게 수정이 다가왔다. "괜찮아요, 그람드링? 잠깐 상처를 보여......" 탁 그람드링은 자신을 부축하려는 수정의 손길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는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크크, 괜히 친한 척하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의 동맹관계는 마스터가 죽기 전까지 아니었나? 이제 약속대로 죽여 줬으니 서로 신경 끄자고." "하지만 그 상처로는....." "아아, 어차피 내가 죽어 주는 쪽이 댁들에게도 좋잖아? 자꾸 귀찮게 굴지 말고 저리 비켜!" 그람드링은 신경질적으로 수정을 밀쳐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의 발밑에 널브러진 시폰과 루미네선스들의 시체를 음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최악의 아버지에 최악의 형제들이라지만, 그들은 분명 그람드링의 가족이었다. 그런 가족들을 죄다 죽여 버리는 패륜을 저질렀으니 마음이 편할려야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혀를 차며 시체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가 돌아본 방향에는 진 사령관이 있었다. "구해 준 것에 감사를 표하지." "흥. 그다지 감사 받을 만한 일은 아니군. 그쪽이 살아 있는 편이 마스터에게 더 괴로운 일일 거라고 생각해서였으니까." "그런가. 어쨋든 이쪽도 약속은 지키겠다. 자네가 타데오의 정보를 넘겨준다면 언제든지 성당기사단의 이단심문에 제출하도록 하지. 그걸로 타데오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은 파멸될 테니까." "....마스터의 정보는 내 담당의에게 넘겨 놓았으니 그녀에게 받도록 해." 그렇게 말하며 그람드링은 유화를 돌아보았다. 시폰 뤼멘이 심어 놓은 스파이가 죽어 버렸으니 더 이상 그녀를 감싸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시선을 받은 유화는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고 한탄했다. 그래서였군. 그람드링의 동생의 시신을 나에게 넘겨 준 것도 다 사전에 진 사령관과 협약을 맺었기 떄문이었어. 이래서야 보기 좋게 이용만 당한 셈이잖아? 그람드링은 그렇게 한숨을 쉬는 그녀에게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고, 선생님. 난 순수하게 선생님이 가장 원하는 선물을 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이런 걸 여기 속담으론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하던가?" 유화는 기가 찼다. 그런 걸 지금 이유라고.... "무엇보다..... 피스메이커 내에서 내 부탁을 들어 줄 사람 따위, 선생님 밖에 없었고." 아 유화는 짧게 신음했다. 그렇다. 시폰 뤼멘의 양아들인 그람드링에게 피스메이커의 대원들이 마음을 열 리 없었고, 실제로도 그는 언제나 피스메이커 내에서 혼자였다.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언더 시티에서 친분을 나누는 사람이라고는 한 달에 한 번 그의 메인테넌스를 맡고 있는 주유화가 전부였으리라. '이래 보여도 난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유화는 메인테넌스 때 그람드링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고소했다. 그럼 그때 그런말을 했던 것도 농담은 아니었다는 건가. 그녀는 새삼 그람드링을 조목조목 바라보다가 곧 그의 오른쪽 의수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히드라의 자가분해력이 담긴 화살을 막아낸 오리하르콘 의수가 액화상태로 녹아내렸던 것이다. "너, 그손.....!" "아아, 이대로 놔두면 다른 부위까지 번져가겠지." 그람드링은 오른손 상태에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벽에 꽂혀 있는 자신의 플라스마 도끼를 발견하고 빼내들었다. '쳇, 이수밖에 없나.' 그는 몇번 투덜거리더니 도끼로 자신의 의수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오퍼레이터 대원들 사이에서 짧은 비명소리가 터졌다. 그람드링은 비명을 지르는 대원들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도끼의 플라스마 날을 해제하여 품에 갈무리 했다. 잘려나간 의수의 단면에서는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으로 생체의 자기제어가 이루어져 출혈이 멈추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포션을 단면에 투여하여 상처를 아물게 한 다음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걸로 다시 외팔이가 되어 버렸군. '후우. 후우.' 그람드링은 문득 자신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AI 슈츠 안의 몸도 식은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포션으로는 아켄석 탄에 대한 치료가 완전하지 않은 건가?' 그는 벽에 손을 짚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다거와 유화, 시더와 채영 일행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람드링은 그들의 시선에 핏기 하나 없이 초췌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집어치워. 하나같이 다 마음에 안 드는 것들 뿐이야.' 조금 도와주니까 자기편이 되었다는 얼굴들 하고는 그전까지는 제멋대로 사람을 깔보던 녀석들이. 그람드링은 그 이중적인 일행의 모습에 구역질이 났다. 위선 떨지 마. 미워하면 계속 미워하고 증오하면 계속 증오해. 네놈들이 이제 와서 태도를 고쳐먹는다 해도 나에게 한 번이라도 보냈던 악의는 없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알고 있어? 지금 너희들이 평화는 내가 마스터와 형제들을 죽임으로써 만들었다는 걸?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듯 결국 죽이니까 평화가 있었던 거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죽이는 거야." 크크크, 결국 나만이 진정한 피스메이커였던 거지. 네놈들은 전부 가짜다. 거짓이야. 위선자들이다. '피스메이커. 피스메이커. 아아, 그야말로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이름이군. 크크크크' 그는 비틀거리면서 병동의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일행에게서 멀어지는 그람드링을 향해 진 사령관이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그말에 그람드링은 잠시 우두커니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아직 끝나기 않았어." 마스터에 대한 복수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피스블랙.' 그가 아직 남아 있었다. 오르크리스트를 죽인 녀석. 내 오른쪽 눈을 앗아간 녀석. 그것만으로도 한시영은 이미 그람드링의 철천지원수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에겐 시영을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녀석만 없었더라면 우리도.....'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람드링은 전신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뜨거운 불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스러져가는 영체마저 지탱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살의! 그람드링은 벽에서 손을 떼며 거짓말처럼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어 웃었다. 아직 죽여야 할 녀석들이 남아 있었다. 아직 죽이지 못한 녀석들이 남아 있었어. 그 녀석들을 모두 죽이기 전까지 그에게 평화란 없었다. 그람드링 뤼멘의 평화는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피스메이커가 되어 볼까." 그람드링은 뒤늦게 진 사령관의 질문에 답하며 유령처럼 병동의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런 그의 뒤를 피스메이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 보았다. 아마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람드링의 피스메이커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람드링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처음부터 '평화를 만드는 방법'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람드링과 헤어진 진 사령관 일행은 애초의 목적대로 메디컬 센터의 지하 쉘터로 향했다. 메디컬 센터의 담당자인 닥터는 자신의 ID 카드로 개폐식 문의 자동락들을 해제시키며 일행을 대피소로 이끌었다. "이쪽으로!" 사중으로 된 문이 열리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밑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모두 이미 대피한 것일까. 닥터는 자신이 올라오기 전에 지시한 사항이 잘 지켜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로 시더아 유화, 채영과 오퍼레이터 대원들이 내려가고, 마지막으로 수정과 진 사령관이 쉘터의 문을 폐쇄시켰다. 닥터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옆에 붙어 있는 유화에게 물었다. "주 선생님, 잠깐 물어볼 것이....." "닥터 , 한 가지 물어볼게 있습니다." 동시에 유화도 닥터에게 말을 꺼냈다. 그들은 멈춰 서서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닥터가 양보했다. "물어보십시오." "예, 닥터는....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유화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질문을 던졌다. 닥터는 돌려서 자신의 정체를묻는 유화에게 고소를 머금었다. 이제 와서 무엇을 감출 게 있다고. "제 과거를 밝히는 것으로 주 선생님이 절 신뢰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확실한 것이 좋은 거겠죠. 제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주 선생님이 직접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닥터는 잠시 말을 끊고 일행 뒤편에서 따라오는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저는 피스메이커에 오기 전에 성당기사단의 중급 3대 중 하나인 버추즈 이뤈이었습니다. 상급 3대 중 하나인 케루빔이 세계의 모든 과학 관계자들이 모인 집단이라면, 버추즈는 세계의 모든 의료 관계자들이 모인 집단입니다. 그런 곳에서 전 지금과 별다를 바 없이 의학연구와 시술에 종사하고 있었죠. 특별히 뭐 하나 잘하는 것도 없고, 이 병동 저 병동을 전전하는 인턴 같은 신세였어요. 그런 제가 버추즈의 바르비앨이라는 직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제 조부님의 후광 덕분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조부님은 케루빔의 3대 의원 중 한 분이신 리크비엘 닥터 챙이셨거든요. 꽤나 자기 주관이 강하신 분이었기에 당신의 하나뿐인 손자가 어떻게든 성당기사단의 중축에 들기를 희망하셨죠. 뭐, 저야 여러모로 부족한 손자였기에 그 뜻에 부응하지 못하고 번번이 실망만 안겨드려야 했지만...." 라크비엘 닥터 챙의 이름이 거론되자 수정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마치 알고 있었냐고 묻듯 옆의 진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물론 진 사령관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020년 3월 9일 LA에서 발생한 대재해. 그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 후 저는 조부모님의 사망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통지서를 받아들었을때.... 하하, 그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처음에는 그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유족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는 눈앞이 깜깜했죠. 저는 제가 그렇게 조부님의 죽음을 슬퍼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절 못마땅하게 여기시고 야단만 치시던 분이셨거든요. 돌아가시면 허전하기는 해도 그저 그뿐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부모님도 없는 저를 홀로 키워 주신 당신의 은혜는 생각보다 넓고 깊었죠. 저는 거의 한달이 넘도록 조부님의 죽음이 생각날 때마다 통곡하고 또 통곡해야 했습니다.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조부님의 흔적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죠." 그 말에 시더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닥터의 얘기에서 타계한 자신의 조부, 제이스컬 드리스덴이 생각난 것이다. 그랬구나. 닥테에게도 할아버지가.... 그래서 처음 피스메이커에서 날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잘 보살펴 줬던 건가? 나에게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있음을 알고서? "그렇게 슬퍼한 끝에 저에게 남은 것은 궁금증 뿐이었습니다. 과연 조부님을 돌아가시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부님은 왜 LA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대재해는 왜 일어났던 거지? 저는 제 능력을 총동원해서 대재해를 조사해 봤지만 일개 버추즈이 일원인 저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죠. 그나마 알아낸 것이 있었다면... 지금의 진 사령관님과 수정씨 그리고 시더양이 그 사건의 생존자라는 것 정도....." 유화와 채영 일행의 눈이 닥터가 지목한 세 사람에게 모였다. 설마 자신들과 이렇게 가까운 곳에 대재해의 관계자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 그 세 사람이 대재해 이후 나타난 몬스터에 대항하는 기관, 피스메이커의 창립멤버들이었다는 거죠. 피스메이커에 들어가면 대재해에 대해 뭔가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저는 피스메이커에 지원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많은 분들이 성당기사단의 존재를 거의 모르고 있었듯 진 사령관님은 피스메이커의 대원을 성당기사단과 무관한 사람들 사이에서 선출했죠. 아마도 그건 성당 기사단의 부속기관으로서 행동이 제약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겠지만....그런 이유로 성당기사단의 일원인 제가 피스메이커에 지원할 방법은 전무했습니다. 예외인 두 사람이 있었지만..... 한 사람은 케루빔의 의장 오파니엘의 손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진사령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아포스톨로스 바르톨로메오의 8기사단 소속, 거기에 패턴 그린의 오라 능력자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죠. 제게는 그들과 같은 접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 가지 낭보가 들려왔습니다. 진 사령관이ㅡ 대원 선출방식을 보다 못한 비숍이 성당기사단의 대리인을 피스메이커에 파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말이 대리인이지 사실은 피스메이커에 파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말이 대리인이지 사실은 피스메이커 내부에서 그들을 감시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감시에 적격인 것은 대원들의 모든 신상기록과 건강을 관리하는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 자리였죠. 그때문에 그 자리를 중급 버추즈의 바르비엘인 제가 지원하겠다고 나서자 비숏은 흔쾌하게 승난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승낙에는 제가 대재해 때 사망한 라크비엘의 손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죠. 조부님의 죽음에 집착하는 제가 절대로 자신들을 배신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 거겠죠. 그렇게 저는 제 모든 과거와 흔적을 지우고 성당기사단의 대리인 자격으로 피스메이커에 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착실하게 메디컬 센터의 책임자로서 의무를 다하면 서 한편으로는 피스메이커의 정보를 끌어모았습니다. 진 사령관님과 수정씨가 저를 조금도 신용하지 않았기에 이것 저것 제한이 많았습니다만..... 어떻게 해선가 여기까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죠." 닥터는 품에서 자신의 사물실에서 가져온 DVD를 꺼내 보였다. 그 모습에 일행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닥터는 시폰 뤼멘이 보낸 스파이는 아니지만 결국 성당기사단의 비숍이 보낸 스파이였던 것이다. 유화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닥터와 DVD를 번갈아보다 물었다. "그런 사실을.....왜 계속 숨기지 않고 다 말하시는 거죠?" "하하,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 선생님이 직접 판단하시라고.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으니 이제 판단이 서시겠죠. 제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닥터는 자조하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조용해진 일행의 모습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이 침묵이 끝났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모든 질타와 경멸의 순간들을. 그동안 쌓아올린 신뢰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의미를 잃고 위선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 자신은 피스메이커에 남아 있을 수 없다. "....." 하지만 닥터는 사실을 얘기한 것에 조금도 후회가 없었다. 오히려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 더 당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피스메이커에 들어온 이래 단 한 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날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대재해에 관련된 정보와 성당기사단의 사명을 위해 일단 철저하게 피스메이커의 사람이 되리라 결심했다. 아무리 성당기사단의 대리인이라 한들 자신이 그들과 같은 동료라는 사실을 인지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열심히 환자들을 돌봤다. 그때문에 늦은 시각까지 병동에 남았다. 그때문에, 그때문에, 그때문에....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치료를 받고 웃어 주는 대원들의 모습에, 자신을 믿고 따라 주는 동료들의 모습에 닥터는 여태껏 버추즈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묘한 가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조부의 강요에 못 이겨 일을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타의에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닌 자의로 뭔가를 하고 싶다는 감정. 자꾸만 누군가에게 뭔가를 베풀어 주고 싶어지는 감정. 바로 보람이라고 하는 녀석이었다. 닥터는 처음으로 자신이 읙학을 하는 이융와 사람을 돕는 기쁨을 이 피스메이커에 들어와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아서, 그 느낌을 계속 맛보고 싶어서, 그래서 닥터는 더욱 성심성의껏 대원들을 치료했다. 피스메이커에 들어온 애초의 이유조차 잊어버리고 헌신적으로 그들의 건강관리에 전념했다. 그럴수록 대원들은 그에게 의지했고, 모두들 그를 가족처럼 따랐다. 조부를 잃고 앞으로도 계속 혼자이리라 생각했던 닥터에게 그런 피스메이커의 따뜻함은 구원이었다. 희망이었다.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가족의 정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무리 대원들을 잘 보살핀다 해도 닥터 자신이 스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대원들의 웃음은 비수가 되었고 대원들의 정은 독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죄책감은 커져만 갔고, 언젠가는 반드시 모두를 속인 대가를 받으리라 생각했다. "....."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언젠가였다. 닥터는 눈을 감은 채 일행의 침묵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애써 의연해지려고 했지만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슬픔마저도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이라고 생각하며 각오를 굳혔다. 그런 그에게 수정이 말을 꺼냈다. "닥터가 라크비엘의 손자라는 것은 뜻밖이었지만 그 외의 사항은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이었어요. 닥터의 일거수일투족은 그전부터 오퍼레이터팀과 팔라딘대에 의해 감시되고 있었죠." "....." ".하지만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궁금한것? 닥터는 감았던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에 비친 수정은 그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째서 닥터는 그렇게 힘겹게 끌어 모은 피스메이커의 정보를 한 번도 성당기사단에게 넘기지 않았나요?" "....!" 한창 닥터의 정체에 반신반의하던 유화와 시더는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반신반의했다. 한번도 넘기지 않았다니? 그런 그녀들에게 오퍼레이터팀의 치프 윤채영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닥터는 피스메이커에 들어온 이래 성당기사단과 제대로 된 교신조차 한 적이 없어. 지금까지 피스메이커의 기밀이 유출된 것도 그와는 무관하고. 닥터는 우리가 알고 있던 그대로 줄곧 근면성실하게 메디컬 센터의 업무만을 수행해왔을 뿐이야." "그렇다는 건.....?" 유화와 시더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모이자 닥터는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제 목적은 처음부터 대재해의 조사뿐이었습니다. 성당기사단의 임무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죠. 게다가 그들은 제 조부님이 돌아가신 것을 동기로 저를 선택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지켜야 할 의리 같은 것은 없겠죠." "뭐야, 그럼! 결국 닥터도 우리랑 똑같은 피스메이커잖아?" 시더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는 듯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닥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똑같은 피스메이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똑같다니?" "생각해 봐요! 여기 모인 우리도 처음부터 평화를 지키고자 피스메이커가 된 것은 아니었어요. 저처럼 케루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구하고 싶어서 들어온 사람도 있고, 유화와 같이 가인에게 반해서 생각없이 들어온 사람도 있고...." "누가 생각 없이 들어왔다는 거야! 누가!" 시더의 말에 유화가 버럭 소리지르며 항의했지만 시더는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각자 다른 생각과 목적을 품고 피스메이커에 들어왔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다들 서로가 소중해진 거예요. 소중하니까 서로를 지켜 주고 싶고, 소중하니까 서로를 아껴 주고 싶고.... 그러다 보니 모두가 속한 피스메이커도 덩달이 소중해지게 된 거고. 으으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끙끙대는 시더를 대신해 수정이 웃으면서 말했다. "닥터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처음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은 닥터도 우리 모두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 주고 싶어 하니까." "아니, 나는...." "어머, 제 말이 틀렸나요?" 닥터는 대꾸하지 못하고 침음했다. 수정의 말대로 그는 피스메이커의 모두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지만....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처음부터 모두를 속이고....줄곧, 줄곧.... "닥터, 얘기를 모두 들은 제 판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유화는 고개를 숙인 닥터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진심어린 사과를 건넸다.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닥터를 의심했던 점,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가인을 걱정할 때 당신이 보여줬던 모습들은 분명 진솔한 것이었건만.... 무엇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닥터를 믿고 있습니다. 믿음을 보여 주지 않은 사람에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잘난 척 하지말고 결론을 얘기해봐. 결국 신뢰한다는 거야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시더의 이죽거림에 유화는 쌍심지를 켜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헛기침을 하고 닥터에게 다시 말한다. "닥터는 신뢰할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고개를 숙이지 마세요, 떳떳하게 들어 우리를 바라봐 주세요. 닥터에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시니까." "그러니 이건 저희가 받아가겠어요. 앞으로 피스메이커의 재건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될테니까." 수정이 닥터의 손에 들린 DVD를 가져가며 그에게 윙크했다. 닥터는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는 그녀의 모습에, 그리고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 주는 일행의 모습에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미소했다. "그럼....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좋아요! 이기세로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무사히 대피하는 겁니다!" 수정의 말에 멈추어 있던 일행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곧이어 어두운 계단 끝에 있던 지하병동이 그들을 맞이했다. 비상경보등의 붉은빛만으로 밝혀진 그곳에는 누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을씨년스럽기가지 한 대피소의 모습에 일행은 일순 마른침을 삼켰다. 유화는 애써 긴장을 풀고자 닥터에게 말을 걸었다. "닥터, 아까 저에게 묻고 싶다던 말씀은 뭐였습니까?" "아, 예. 앞에서 그람드링 뤼멘이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의 정보를 주 선생님께 넘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그랬죠.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유화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과드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닥터가 연구실에서 저를 구해 주셨을 때 저에게 물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레드 브라더스의 DNA 도너를 찾아냈냐고. 그때 그만 제가 거짓말을 해 버렸습니다. 사실 오르크리스트의 유전자 검색 결과는 이미 나온 뒤였어요. 그 때문에 그람드링이 시폰 뤼멘의 스파이에게 암살당하지 않도록 저를 가둬 놓았던 거고." "그럼...타데오의 정보는 그걸 말하는 거였습니까?" 닥터가 짧은 탄성을 내지르자 뒤에서 그들을 따르던 시더도 덩달아 놀라서 소리쳤다. "결국 알아낸 거야, 유화? 레드 브라더스의 DNA 도너가 누군지 알아냈어? 응?" "아, 그래. 그게 누구냐 하면....." 도너를 밝히려던 유화는 잠시 진 사령관과 수정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정보의 내용을 함부로 발설해도 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수정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정보공개를 허락했다. 유화는 마음을 놓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의 짐작대로 레드 브라더스, 그람드링 뤼멘과 오르크리스트 뤼멘은 성당기사단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한 오라 능력자의 복제인간이었어. 그리고 그 오라 능력자는 다름아닌....." "잠깐!" 그때 유화의 말을 끊은 날카로운 외침이 있었다. 유리였다. 일행의 중간에서 마인드 스페이스로 주위의 사념을 읽어내던 그녀가 지하병동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기운들을 발견해낸 것이다. 그녀의 경고에 발맞춰 수정은 재빠르게 일행을 보호하듯 나서며 지하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던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크르 크르르르 하나둘 들려오던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곧 병동 전체를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사색이 된 일행들은 수정의 뒤쪽에 모여서 몸을 떨었다. 뭐야? 대체 여기에 뭐가 있는 거야? "마, 맙소사! 이런거..... 이런 거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사념을 읽은 유리가 안색이 창백해져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읽힌 사념들은 적게 잡아도 300개였다. 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그만한 수의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 이질적인 사념의 기운은 뭐란 말인가? 도저히생기가 있는 사람의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생물이라면 당연히 느껴져야 할 마인드 리딩도 없는 것이 꼭...... '꼭.... 죽어 있는 사람들처럼.....' 아 순간 유리는 메카닉 센터를 떠나기 전에 스크린으로 보았던 의문의 행렬을 떠울릴 수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죽은 것이 확실한 팔라딘 대원들. 그들의 위치표시가 언더 시티의 내부투시도를 한가득 메워 움직이던 모습은.... '그래, 그거야. 이게 바로 그거였던 거야.' 유리는 이를 악물고 지하병동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천장 위에는 붉은 비상등의 불빛을 가린 수없이 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유리를 따라 천장을 올려다보던 일행들은 저마다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악!"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마치 박쥐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붉은 안광으로 일행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복도 저편에서도 느릿느릿한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들을 바라보는 순간 닥터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 검은 그림자들은 저마다 검은 얼룩이 진 하얀 가운과 간호복을 입고 있었다. 메디컬 센터의 의료진들이었다. 그들은 짐승과도 같은 신음을 흘리며 마치 나무토막 같은 움직임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일행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공포에 사로잡혔다. 대체 이게 무슨 지옥과도 같은 광경이란 말인가? "이제야 오셨습니까." 그때 일행들 앞으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 나타났다. 마치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그 등장에 수정일행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수정은 주위에서 으르렁거리는 시체들의 울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ㅔ 전방의 여인에게 소리쳤다. "성당기사단의 이단심문 기록에서 이러한 현상들을 읽어 본 기억이 있군요. 블러디 캐러미티(Bloody Calamity)..... 라이컨슬로프와 더불어 2대 역병 중 하나인 뱀파이어 인가요!" "블러디 노블맨, 네이 안데르슨님을 모시는 에르체베트 바토리라고 합니다" 드레스의 여인, 에르체베트는 가볍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예를 표했다. 일행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눈에서는 앞으로의 살육을 예고하는 듯한 짙은 선홍빛이 일어나고 있었다. "몬스터의 5대 간부 중 마지막 간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귀찮은 일은 모두 다른 간부들에게 떠맡기기만 하더니 이제야 미적미적 나타난 건가?" 진사령관의 말에 에르체베트의 눈빛이 한층 더 짙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감정변화에 따라 주위의 시체들 , 구울들의 기세도 한층 더 흉흉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 사령관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할 말을 다 했다. '거기다 마지막까지 자신은 보이지도 않고 수하를 내보내다니. 지독하게나 염치없는 작자로군. 그런 상관 밑에서 일하느라 수고가 많겠어." "..... 그 미개한 입을 어떻게 해 주길 바라나요? 지금 당신들의 처지를 알기는 하는 겁니까? 기껏 의욕을 가지고 시폰 뤼멘을 처리하려 했더니 어이없게 죽어 버리지를 않나. 모처럼 무대를 만들고 기다려 줬더니 상대는 무례한 소리를 내뱉지 않나." 에르체베트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그 모습에 닥터와 일행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왜 매번 이 사람은 상대를 도발시키지 못해서 안달하는 걸까? 가뜩이나 절망적인 상황이건만 그렇게도 빨리 죽고 싶은 건가? 하지만 곧 일행은 진 사령관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깨달았다. "무대를 만들어 줘? 기다려 줬다고? 너야말로 미개한 입을 놀리지 말아라. 너도 네놈의 상관처럼 염치가 없기는 마찬갖디야.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도 않고 죽은 자들의 손을 빌리려 하다니." 진사령관의 지적에 일행들은 그제야 자신들을 포위한 짐승들이 정체를 깨닫고 신음을 흘렸다. 피스메이커의 일을 하면서 별의별 몬스터를 다 조우해 본 그들이지미나 죽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거기다 그 죽은 사람들 또한 그들에게는 너무도 낯익은 사람들 뿐이었다. 팔라딘대의 대원들, 메디컬 센터의 대원들, 지하 쉘터에 몸을 피하려던 수많은 부상자들. 몇몇 지구방위군복을 입은 시체들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피스메이커의 동료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일행들의 가슴속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목숨을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죽여서까지 자기들 좋을 대로 이용하다니! "차가운 남자로만 보았는데 생각보다 뜨거운 구석이 있었군요. 그렇게나 옛 동료들이 적으로 돌아선 것이 화가 나나요? 그렇다면 제가 당신들도 같은 편으로 만들어 드리죠. 그럼 화가 날 일도 없을 겁니다. 후후후, 순순히 동료들의 키스를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크르르르르 에르체베트가 웃으면서 손짓하자 진 사령관 일행을 포위한 구울들이 허기에 진 표정들로 점점 다가오기 시자갷ㅆ다. 유리는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서라도 어떻게든 구울들의 사념을 조종하려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애초에 에르체베트가 만들어낸 이 시체의 군대는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피를 매개로 삼아서 생체적인 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촉매가 다르니 상대방의 지배에 개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채영과 오퍼레이터 대원들에게 부축을 받고 있던 요원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옛 동료 팔라딘대의 모습에 이를 악물고 권총을 빼들었다. 이렇게 된다면 사령관님 일행이라도 피신시켜야! '다행히 퇴로가 확보되어 있으니 이대로 도망친다면.....' 크르르르 하지만 채 탈출을 시도하기도 전에 계단 위쪽으로 천장에 붙어 있던 구울들이 뛰어내려왔다. 에르체베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요원을 바라보며 미소했다. "당신들은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는 겁니다. 그러니 저항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저항해 보시길." "빌어먹을!" 요원은 분노하며 에르체베트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했다간 이 대치상황마저 깨져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닥터와 유화, 채영과 시더는 저마다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기껏 시폰 뤼멘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했더니.... 이제는 쉘터로 몸을 피하는 일만 남았는데 마지막에 말도 안 되는 상대에게 걸려 버린 것이다. 자신들을 포위하는 수백의 사자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죽음의 올가미다. "수정." 그때 진 사령관이 곁에서 긴장하고 있는 수정을 불렀다. 수정은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불러 주는 자신의 이름에 놀란 눈으로 진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진 사령관과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검은 선글라스 밑의 눈동자를 느끼는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의 일을 기억해냈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심지어는 자신이 언제부터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한 소녀가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기억도 나지 않는 먼 옜날부터 살아왔기에 모든 것을 잊어버린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잊혀진 거인의 무덤에서 살고 있었다. 후에 알았지만 그곳은 앙코르 톰(Angkor Thom) 이라고 불리는 캄보디아의 유적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무와도 만나지 않은 채 홀로 매일매일을 살아왔다. 문명과 단절된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목소리 때문에 그녀는 외롭지 않았다. 그 목소리 때문에 그녀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 때문에 그녀는 자신 외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유적 밖을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바깥세상으로 나가봤자 싫은 일들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목소리는 그녀의 친구 겸 조언자가 되어 준 대신 그녀의 기억을 가져가 버렸다. 매일매일 계속되는 속삭임들이 정작 그녀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마저 잊어버린 채 영원토록 살 것 같았다. 만약 그들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녀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 그대로였을 것이다. '뭐야? 왜 이런 성지에 이런 계집애가 있는 거지?' 그들, 후에 성당기사단의 유적탐사대라고 알게 된 그들이 그녀의 보금자리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때때로 찾아왔던 관광객들과 달리 체계적으로 유적을 조사하다가 숨어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생포해냈다. 그때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를 통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직접 그런 일들을 '체험'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근처 마을에서 온 여자애인가? 그런 것치고는 미인인데? 피부도 훨씬 희고 말이야.' '크크 알게 뭐야. 이 오지까지 오느라 기분도 더러웠는데 마침 잘됐지. 모처럼 여행으로 지친 피로나 풀어볼까? 현지의 특산품이나 맛보면서 말이야.' '크크크' 그들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그 억센 팔들로 그녀의 사지를 붙잡았다. 거칠게 찢겨나가는 그녀의 단벌 옷. 그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한 그녀는 사색이 되어 저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친 욕설과 난폭한 매질. 그녀는 처음으로 슬픔이라는 것을 체험했고,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외로움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비명을 지르고 살려 달라고 울분짖어도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도.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또한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목소리가 단순한 목소리일 뿐 자신의 친구도 조언자도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자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서러움에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자신의 지난 시간들이 사실은 얼마나 외로웠던 것인지를 깨달은 고독의 눈물잉었다. 그렇게 육체는 남자들에게 짓눌리고, 정신은 고독에 짓눌리려는 그때. '어, 어째서?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네놈!' 그때 그가 나타났다. 그들의 일행이었던 남자. 하지만 그녀를 짓누르는 남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남자. 그가 그녀를 구해 주었다. 그들에게서 지켜 주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그녀를, 아무도 알고 있지 않은 그녀를.... '두고보자! 전장에서 뒤를 조심하라고!' 남자들이 떠나가고 자신이 비로소 안전하게 되었음을 깨닫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서럽게 울었다. 처음으로 가진 타인과의 만남이었다. 그 첫 만남이 설마 이런 무시무시한 경험이 되어 버릴 줄이야. 그렇게 하염없이 울고만 잇는 그녀에게 그녀를 구해 준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주지도, 안아 주지도, 달래 주지도 않았다. 단지.... '일어서라, 네 두 다리로.' 가르쳐 주었다. '강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언제난 들리던 목소리 대신. '그러니까 강해져라.' .....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때부터 그녀에게 있어 더 이상의 목소리는 필요 없었다. 목소리 대신 그녀의 친구가 되어 준 남자가 있었으니까. 조언자가 되어 준 동반자가 생겼으니까. 그녀는 이 미지의 동반자와 함께 바깥세상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남자의 이름은 유다. 본명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이름이 남자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유다를 따라 바깥세상으로 나온 그녀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동안 목소리로만 알아왔던 세상을 직접 경험하며 여러 가지 감정들을 배울 수 있었다. 기쁜 것, 웃는 것, 화내는 것, 슬픈 것, 우는 것..... 하지만 그 중에서도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건만 그녀 스스로 찾아낸 감정이 있었다. 바로 사랑하는것. 그녀는 유다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널 민수정이라고 부르지.' 그가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을 때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되새겼다. 민수정, 민수정, 민수정...... 그가 그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 줄 때마다 그녀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더 이상 그 없이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지켜 주리라 생각했다. 그가 처음 자신을 구해줬던 것처럼 언젠가 그가 위험에 처할 때 반드시 그의 힘이 되어 주기로 결심했다. 그랬기에 수많은 것들을 배웠다. 유다가 속한 단체인 성당기사단의 일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배웠다. 그 과정에서 유다의 마음씨 좋은 친구 아포스톨로스 바르톨로메오 누자운을 만날 수 있었고, 괴팍하고 무섭고 귀신같은 스승, 오라 능력자 브루스 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그녀가 살아온 그 어느 날보다도 뜻 깊고 보람찬 나날이었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마침내 행복이라는 감정을 발견해냈다. 그 감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아, 바깥세상으로 나오기를 잘했어. 유다를 따르기로 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하지만 행복 뒤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절망이라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그 절망은 그녀가 가장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던 일과 동시에 그녀를 찾아왔다. 그날은 2020년 3월 9일이었다. 기가스 티폰과 피스 블랙 한시영의 접촉이 실패하고 LA가 지옥으로 변한 그날. LA의 지하에 위치한 에트나 광산. 그 광산의 촤하층에 위치한 연구시설. 수정은 흙투성이가 된 몸을 내려다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몸에는 작은 생채기가 몇 개 났을 뿐 심각한 외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을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째서 내가 무사할 수 있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 의아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수정은 곧 자신의 뒤편에서 '그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붉은 비상등 아래 드러난 폐허 속의 전경. 거기에는 바로..... '아아ㅡ!' 바로.....절망이 있었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동반자. 그가 폐허더미로부터 그녀를 감싼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죽어가고 있다! '유다! 유다!' 수정은 울부짖으며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언제나 굳건하던 남자의 등은 부서저 있었고, 언제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남자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수정은 연신 목 놓아 그의 이름을 외치며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죽지말아요. 죽지 말아요. 죽지 말아요. 죽지 말아요. 죽지말아요. 죽지말아요. '날 두고 죽지 말아요!' 무서웠다. 다시 또 혼자가 된다. 다시는 유다를 볼 수 없게 된다. 그가 없는 세상을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된다. 영원토록. 영원토록. 영원토록. '싫어....!' 수정은 거세게 도리질하며 마음을 정했다. 유다가 없는 영원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유다가 없는 세상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절대로! '살려낼 거야.' 살려낼 거야.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내가 가진 영원을 모조리 동원해서라도. 누구도 그를 데려갈 수 없게 할 거야. 누구도. 누구도. 심지어는 신이라 할지라도! '나와 그를 갈라놓을 수는 없어!;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시간을 개방했다. 자신이 가진 영원의 시간을 유다에게 쏟아부었다. 시간이 그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죽음이 그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눈을 떠요, 유댜!'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영원을 잃어버리는 대가로 그에게 영원을 부여했다. "수정" 그때의 유다, 지금은 진사령관인 그는 자신을 살린 그때의 소녀에게 부탁했다. "나에게 준것을 이제는 가져가 줘." ".....!" 수정은 움찔 몸을 떨며 충혈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만 하는데, 그런데 갑자기 메이는 목에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젓기만 했다. 진 사령관의 무표정한 얼굴은 천천히 깨지고 있었다. 그는 한시도 벗지않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재차 부탁했다. "이제 그만 나를 보내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끝났다." "싫어요. 아직....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요. 유다의 바람은 아직....." 수정은 울먹이면서, 흐느끼면서 그렇게 말했다. 갑작스런 그녀의 눈물에 닥터와 일행들, 심지어는 에르체베트 바토리마저 영문을 몰라 수정과 진 사령관을 주시했다. 단지 그들 중 유일하게 사념을 읽을 수 있는 유리만이 경악의 표정으로 두 남녀를 바라봐야 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그 바람을 이룰 수 있는 이는 내가 아니다. 유가인, 그밖에 없다. 나는 처음부터 오라의 주인을 옴팔로스에 인도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어." 진사령관, 아니 유다는 달아오르는 눈으로 언더 시티에선 보이지 않는 옴팔로스를 눈으로 쫓았다. 수정은 유다에게 다가가 거칠게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것 말고도 유다가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결과를 확인해야죠! 자신이 해온 일이 결실을 맺는 것을 눈으로 봐야만 해요! 그것만을 위해 줄곧 노력해 오신 거잖아요!" "......아니, 나에게는 결과를 확인할 자격 따위는 없다. 나는 배덕자다. 딸을 버린 최악의 배덕자.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 같은 것은....처음부터 나에게 주어질 수 없는 사치였다." ".....!" 유다의 말에 수정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딸, 유다의 딸! '아빠!' 아포스톨로스 이스가리옷 유다. 성당기사단의 세리핌인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무감각한 것뿐이었다. 아니, 무감각해져야만 했다. 몰락해가던 유다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의 원로들은 성당기사단의 사명이라면 뭐든지 수행해야만 했고, 그것은 지파를 계승한 유다 본인 또한 마치가지였다. 몰락한 지파에 떨어지는 사명이란 세간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더러운 일, 이단심문을 비롯해 피보라를 몰고 다니는 일뿐이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느, 그렇기에 모든 것에 무감각해져야만 하는 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 할 수 있는 일. 그랬기에 유다는 무감각해졌다. 그랬기에 그는 모든 사면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유다의 이름을 12지파에 널리 떨칠 수 있었다. 지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무감각해졌기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기에. '아빠! 아빠!' 그런 그에게도 무감각해질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하나뿐인 딸. 사랑스러운 그의 가족. 그 아이가 있었기에 유다는 모든 무감각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한줄기 남은 마음의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딸은 그의 희망이자 전부였다. '아빠! 이것 봐!' 하지만 운명은 잔인했다. 잔인할 정도로 공평했다. 유다가 다른 모든 것에 무감각했던 것처럼 그 자신 또한 희망을 간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예쁘지? 예쁘지? 나 막 빛나지? 봐봐!' 어느 날 각성해 버린 그의 딸. 아이는 가이아의 선택을 받고 '그것'이 되어 있었다. 오라 능력자. 영혼의 빛을 사용할 수 있는 여신의 대리자. 그것은 곧 유다의 딸이 성당기사단에 반하는 이단자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유다 자신이 성당기사단에게 부여받은 사명은 이단색출! '후후후. 유다, 이건 자네의 충성심을 비숏에게 입증할 좋은 기회네. 자네의 딸은 이미 내가 이단심문회에 보고해 놓았네. 자네는 그저 딸을 갖다 바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손쉽게 지위와 명예를 손에 넣을 수 있어. 후후후후.' 거기에 최악의 상황으로 딸의 각성을 아포스톨로스 타데오에게 들키는 일마저 생겨버렸다. 시폰 뤼멘은 행여나 유다가 딸을 데리고 도주할까 봐 이단심문관들을 대동해서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딸의 떨림. 유다는 그런 딸을 끌어안고서 처음으로 신을 저주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저주했다. 그런 그에게 시폰이 말했다. '뭘 고민하는 건가? 자네는 지금까지 잘해오지 않았나. 이정도의 일쯤은 얼마든지 해치우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거지? 모든 것에 무관심했던 주제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주저 없이 해치워온 주제에, 그러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그러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단죄해 왔다는 거야?' 그말에 딸을 안은 유다의 손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그렇다. 자신은 지금까지 줄곧 이런 일을 반복해왔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같은 고통을 주면서 혼자서 무감각한 척,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척 외면해 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저 자신의 순서였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돌고 돌았던 아픔이, 고통이, 절망이 이제는 자신에게 돌아온 것뿐이다. 자신이 당할 차례였을 뿐이다. '아빠, 어디가? 나도 데려가! 나 혼자 두지 마!' 울부짖으며 아빠를 붙잡는 딸. 그런 딸을 시폰과 이단심문관들에게 넘겨주고 유다는 무기력하게 자리를 떠났다.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무감각해지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 일에도 무감각해질 수 있을 거라고,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그렇게...... '크흐, 흐흐, 흐흐흐흑' 하지만 무감각해질 수 없었다. 그는 결코 딸의 일에 무감각해질 수 없었다. 딸을 넘겨준 스스로에게 무감각해질 수 없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지난날들을 후회했다. 딸을 넘겨준 자신을 증오하고, 딸을 데려간 성당기사단을 증오했다. '유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자네의 딸이......' 그리고 증오는 체념이 되고 체념은 포기가 되었다. '열두번째의 검, 아포스톨로스 이스가리옷 유다. 그대에게 검으로서의 사명을 건네주겠다. 그대는 지금부터 판게아의 내룡탐사를 맡는다.' 'I can do all things through Him who strengthens me(저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 힘입어 저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그랬기에 그는 비숏의 내룡탐사를 자원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성당기사단을 떠났다. 살아 있는 한 이 저주받은 기구로부터 결코 벗어 날 수 없었기에 최대한 멀리 떠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정처없는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는 수많은 나라와 지역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잊으려고 했다. 모든 것에서 무감각해지려고 했다. 지쳐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도록,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자신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였다. 일부러 용병이 되어 분쟁지역을 전전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지인들이었던 바르톨로메오와 필립보, 마태오는 끊임없이 만류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따. 그들이 보기에 유다는 죽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유다는 자신의 죽음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몇번이고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을 시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빠' 언제나 꿈에서 나타나는 딸의 모습에. 분명 울부짖으며 끌려갔건만 예전과 조금도 변함없는 미소로 찾아오는 딸의 모습에. 도저히 죽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죽을 자격조차 없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학대하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무감각해지며, 끊임없이 괴로워하며. 모든 것에서 멀어지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다. 아니, 속죄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 지라는 것은 절대로 빚처럼 주고 갚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그저 그렇게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고 해야 했다. '일어서라, 네 두다리로.' 그러던 차에....그녀를 만났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톰에서. 거기서 유다는 자신의 딸과 재회할 수 있었다. '강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나이도 다르고, 모습도 다르고, 딸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절실히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그 눈빛이 마지막으로 본 딸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아니, 딸 그 자체였다! 그 눈빛 앞에서 유다는 도저히 무감각해질 수 없었다. 그때처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 절대로!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그러니까 강해져라.' 지켜 주리라. 반드시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으리라. 언제나 곁에 있어 주리라. '이제부터 널 민수정이라고 부르지' 그때문에 그는 자신의 딸에게 지어준 이름을 그녀에게도 물려주었다. 두번 다시 빼앗길 수 없는 마음의 빚! " 내 바람은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어. 널 만난 것만으로도 나는 분에 겨운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었어." 유다의 말에 수정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왜 자꾸 유다답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다시는 내 딸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가 함께 할수 있는 세상을 만늘고 싶었어. 오라 능력자들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이 더 이상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도록.... 그렇게 세계를 바꾸고 싶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하면 되잖아요! 제가 앞으로도 계속 도와드릴게요! 계속 유다의 곁에 있을게요!" 수정은 흐느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유다는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산자의 세계에 있어서는 안돼." ".....!" 유다는 에르체베트 바토리와 그녀가 만들어낸 시체의 군단들을 노려보았다. "저들을 봐라, 수정. 내가 저들과 다를 것이 뭐가 있단 말이냐? 나도 이제야 깨달았다. 죽은 자는 남아 있어선 안 돼. 산 자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물러나야 하는 거다. 그렇게 해야만 했어. 진즉에 그래야만 했던 거야." 닥터와 일행은 숨을 삼켰다. 죽은 자라니? 진사령과은 자신이 진즉부터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건가? 그런 일행의 시선 속에서 유다는 수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러니 너에게 맡기마. 내가 이루려고 했던 일, 내가 바라왔던 일, 모두를 너에게 맡긴다. 부디 모두를 지켜 줘. 오라 능력자들도, 인가들도 이 세상의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도록." 수정은 도리질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유다의 다음 말이 그녀를 멈추게 했다. "부탁한다, 내 딸아." 딸..... 수정은 눈을 감고 전신으로 그 어감을 느꼈다. 딸! 이 얼마나 기다려온 말이란 말인가?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란 말인가? 그런데 어째서....어째서 하필 이런 순간에, 왜 이런 마지막 순간에 하필이면.....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시네요." 수정은 감았던 눈을 뜨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 위로는 환한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실망시켜 드리진 않을게요, 아버지." 아버지. "아아....." 유다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지금껏 피스메이커의 일행이 볼 수 없었던 진 사령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미소였다. 수정은 그 미소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천천히 유다를 붙잡고 있던 팔을 풀어 주었다. 2020년 이후 줄곧 그에게 넘겨주었던 자신의 ㅅ시간을 돌려받았다. 그러자 유다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졌다. 줄곧 존재의 법칙을 속여왔던 거짓된 존재가 물질계에서 의미를 잃고 삼계의 피드백을 따라 영계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ㅡ유가인 소멸하기 직전에 그는 옴팔로스에 있을 오라의 주인에게 말했다. ㅡ자네의 선택을 믿겠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처럼 모두이ㅡ 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피스메이커 일행들은 그런 진 사령관의 소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대체 이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에르체베트 역시 당황함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우리처럼 촉매를 통해 영체를 붙잡아두었던 건가? 하지만 무슨 수로....." 오오오오오 에르체베트는 앞에서 모여드는 강대한 기운에 입을 다물었다. 그 기운의 중심에는 그녀가 있었다. 바로 민수정. 태양과도 같은 황금색 기류를 온몸에 휘감은 그녀가 금색이 번뜩이는 눈동자로 에르체베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수정의 모습에 피스메이커 일행 중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오라.... 능력자?" 그 중얼거림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수정은 왼손에 찬 손목무전기로 반원을 그렸다. 그리고 무전기에 목소리를 인식시킨다. "변신, 피스 골드!(Peace Gold)" 동시에 그녀의 몸을 뒤덮은 황금색 기류가 AI 슈츠의 형태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기존의 AI 슈츠를 간략화시킨 것만 같은 비전투형의 슈츠였다. 제대로 된 전투장갑도, 오라를 물리력으로 바꿔 주는 오리하르콘 근육조차 없는 초기의 형태! 시더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랜마.....?" (음... 이부분에서....AI 슈츠 만든 장본인은....노엘 웰리스가 아니던가요? 책에는 그랜파.... 라고 나와있네요...흠흠.....제가 임의로 고쳤습니다 ^^;) 시더의 할머니 노엘 웰리스가 만들어낸 프로토 타입. 현 AI 슈츠의 토대가 된 모델이 지금 수정의 몸에 착용되었던 것이다. 착용된 AI 슈츠는 전신에 달린 ACR에서 빛을 발하며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에르체베트는 그 뜻밖의 상황에 경악하여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이제 와서 새로운 오라 능력자라니! 이런 건 건네받은 정보에 없었어! 오라 능력자는 죽은 두명까지 포함해 총 11명이 아니었나?" "오라의 주인이 나타난 시점에서 이미 오라 능력자는 13명 이었던 겁니다. 개체수가 열셋으로 채워지지 않는 한 가이아 애드번트 이펙트는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이제 와서 새로운 능력자가 나올 리 없죠." 수정은 차분하게 대꾸하며 오랜만에 발하게 되는 자신의 오라 패턴을 살펴보았다. 이 빛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빛이 그동안 그 사람을 지켜준 것이었다. 그녀의 시간 대신 그 사람의 시간을 멈춰 준것이었다. 그녀는 새삼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게 만든 에르체베트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오라 능력은 패턴 골드. 영체의 영적인력을 끌어올려 아스트랄계의 카르마에너지를 축적해내는 영자결집 능력이죠." 그때문에 구정은 영체의 카르마에너지가 고갈되지 않은 채 셀 수도 없는 시간을 살아올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오라 능력을 각성한 이후 나이를 먹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강한 역적인력으로 세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죽음에 임박한 유다의 영체를 물질계에 붙잡아둘 수 있었다. "당신 때문이야." 수정은 패턴 골드가 투영되는 금색의 눈동자로 에르체베트를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당신이 내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갔어." 그리고 그녀의 황금빛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ㅡ!" 콰아아아앙 진각을 밟고 앞으로 내뻗은 수정의 손이 무시무시한 경기의 소용돌이를 품은 채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들을 폭파시켰다. 오라 능력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그녀의 형이권 붕권이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패턴 골드가 영체의 힘, 카르마에너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발경은 진각과 전사경으로 끌어올리는 경력에 따라 위력이 변하지만, 그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려면 외공의 경지를 뛰어넘어야 한다. 바로 내공. 흔히들 내가진기라고 부르는 영체의 힘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때문에 권사들이 가장 많이 전념하는 수련이 내공을 샇는 내가심법이고, 이는 자연적으로 호흡하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축적되는 카르마에너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카르마에너지를 무한정으로 끌어들이는 패턴 골드야말로 발경에 최적인 오라능력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사부 브루스는 차원진동을 필요로 하는 칠성권 대신 지극히 단순한 동작을 반복 훈련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발경법을 터득할 수 있는 형의권을 가르쳐 주었다. "이, 이 터무니없는 위력이라니!" 수정의 붕권이 한 번 휘둘러지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진기의 소용돌이가 구울들을 형체도 없이 날려 버렸다. 그 광경에 사색이 된 에리체베트는 지하 병동에 있는 모든 구을들과 사이코포모스들을 끌어 모아 수정에게 전진시켰다. 그러나 인성도 없고 단순히 괴력만 있는 시체들이 수정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퍼퍼퍼퍼퍼퍼펑 수정은 뒤에 있는 일행에게 달려들려는 구울들이(책에서는 굴이라고 나옴. 해산물이 달려들다니 ㅋㅋ) 보이자 번개같이 일행의 주위를 회전하며 연속으로 열 번의 선풍각을 날렸다. 그러자 그녀의 발차기에 실린 진기가 파도처럼 구울들을 휩쓸고 지나간다. 닥터와 유화, 시더와 채영은 구울들의(또다시 굴이라고 씀 ㅋㅋ) 습격에 놀라는 것보다도 수정의 무용에 더 기겁해야만 했다. 물리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프로토 AI 슈츠로 저런 파괴력을 끌어내다니! "유리 양!" 수정은 선풍각으로 잠시 굴들의 공세가 주춤거리자 재빨리 유리의 곁에 내려서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마인드 스페이스를 전개해 주세요! 이대로 단숨에 가는 겁니다!" ".....!" 마인드 리딩으로 수정의 의도를 직감한 유리는 즉시패턴 핑크의 능력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지하병동이 분홍빛 정신공간으로 물들어간다. 갑작스런 정신공간의 생성에 에르체베트는 당황했지만 곧 자신과 시체들에게 아무런 효과도 없음을 깨닫고 잔인한 미소를 흘렸다. '패턴 핑크의 정보는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어! 그 때문에 준비한 죽은 자들의 군대라는 거다!' 피를 매개로 삼는 우리에게 사념조작 따위는 통하지 않아! 에르체베트의 손이 거세게 앞으로 펼쳐지자 피스메이커 일행을 포위하던 구울들이(또 굴이라네요 ㅋㅋㅋㅋ) 일제히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 흉폭한 대군의 모습에 일행은 사색이 되어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유리도 창백해진 얼굴로 수정을 올려다보았다. "수정!" "지금이에요!" 수정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패턴 골드가 유리의 패턴 핑크에 동조되었다. 싱크로 현상에 의한 능력전이었다. 패턴 핑크가 펼쳐 놓은 정신 공간을 타고 패턴 골드의 영자결속력이 확산된 것이다. 그러자 패턴 핑크의 마인드 스페이스는 자신의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성기체들을 빨아들이는 아스트랄 인헐레이션(Astral Inhalation)이 되었다. 패턴 골드의 영적인력이 마인드 스페이스 안에서 적용되어 에르체베트의 블러디 인펙션을 뛰어넘는 강한 영자결집력을 생성, 모든 영체이ㅡ 지배권을 그녀에게서 빼앗아낸 것이다. 털썩 털썩 털썩 그러자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구울들이(네번째 ㅋㅋ) 우르르 땅바닥에 쓰러졌다. 에르체베트는 그 광경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일회용으로 급조한 사이코포모스들이라지만 이토록 허무하게 전멸할 줄이야! ".....!" 하지만 채 상실감이(상실감'에'라고 되있길래...문맥에 맞게 고쳤습니다... 작가님도 쓰시는데 무쟈게 바쁘셨던듯 ㅋ) 사라지기도 전에 에르체베트는 뒤로 몸을 날려야 했다. 아스트랄 인헐레이션을 사용하여 굴들을 정리하기가 무섭게 수정이 그녀를 향해 뛰쳐나왔던 것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접근해오는 수정의 모습에 에르체베트는 혀를 찼다. 이건 완전히 계산착오였다. 정보 부족이야.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건만! '주인님....!' 그녀는 마음속으로 네이 안데르슨을 부르짖으며 손톱을 길게 빼들었다. 동시에 수정은 에르체베트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꺄아아아아아앗!"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에르체베트는 손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수정을 가볍게 그녀의 공격을 흘려내며 그대로 에르체베트의 얼굴을 향해 찔러 올리듯이 발경을 꽂아 넣었다. 포권! 콰지지지지직 ㅃ와 살이 일제히 우그러지는 소리가 터지며 에르체베트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수정은 그 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긴장을 풀지 않았다. 촌경이 실린 포권에 얻어맞은 에르체베트는 얼굴 반쪽이 박살난 상태에서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다음 일격으로.....!' 휙 그러나 미처 수정이 에르체베트에게 달려가기도 전에 먼저 그녀를 뒤덮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한 자락의 검은 커튼처럼 에르체베트를 품안에 감싸더니 그대로 쉘터이 입구쪽으로 튀어나간다. 수정은 쌍심지를 켜며 그림자의 배후를 향해 일권을 내찔렀다. 어딜 도망칠 생각이냐! 촤촤촤촤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주먹을 뻗는 대신 공중으로 뛰어올라야 했다. 소름끼치는 파공성과 함께 수많은 무언가가 그녀에게 날아든 것이다. 피였다. 주위에 널려 있는 구울들의(다섯번째 ㅋㅋㅋㅋ/ 혹시...구울이나 굴이나 상관 없는 건가,,,? 라는 생각이... ┐-) 시체에서 피들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튀어나와 붉은 화살이 되고 있었다. 프로토 타입의 AI 슈츠로는 오라 쉴드를 생성시킬 수 없기에 수정을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켜 전사경을 생성, 그 위에 진기를 실어 넣었다. 파파파파팍 경력의 소용돌이를 뚫지 못한 피의 화살들이 힘을 잃고 비가 되어 사방으로 내렸다. 수정은 회전을 풀어 땅에 착지한 뒤 상대를 노려보았다. 에르체베트를 데려간 검은 그림자는 이미 지하병동의 쉘터 중 하나로 들어가 비상탈출장치를 작동시킨 뒤였다. 강철문으로 굳게 폐쇄된 쉘터는 그 안의 사람을 태우고 지상으로 쏘아져나간다. "제길!" 콰앙 수정은 쉘터의 강철문을 진기가 실린 주먹으로 후려치며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쉘터 안. 위이이잉 에르체베트는 얼굴의 왼쪽이 처참하게 짓이겨진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는 힘겹게 오른쪽 눈동자를 움직여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 준 이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곧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아....." "말하지 말아라. 상처의 회복이 먼저다." 힘겹게 입을 열려는 에르체베트를 그가 제지했다. 그녀를 구해준 남자, 네이 안데르슨은 슬픔에 잠긴 눈동자로 자신의 혈족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에르체베트는 주인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 어째서.... 어째서 주인님이 여기에.... 주인님은 분명....." "그래. 분명 미국의 워싱턴에 있어야겠지. 하지만 에르, 너와 400년 넘게 지내온 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네이 안데르슨은 에르체베트의 왼쪽 눈에 손을 가져가 블러디 인펙션을 사용했다. 그녀의 혈액을 활성화시켜 적혈구를 생성, 상처를 빠른 속도로 회복시킨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의 부서진 눈은 재생시킬 수 없었다. 블러디 인펙션은 영체의 정보를 재작성하여 육체를 강화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소실된 장기를 부활시킬 수는 없다. "바보 같은 녀석.... 네가 모든 것을 떠맡아 처리하면 내가 기뻐하리라 생각했나? 내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좋아할 줄 알았어?" "....." "네가 다치면 아무 소용도 없단 말이다! 노아를 쓰러뜨리는 것도! 테라를 쓰러뜨리는 것도! 세계를 바꾸는 것도! 내 하나뿐인 혈족인 네가 없으면! 아무런.....의미가 없단 말이다." 네이 안데르슨의 호통에 에르체베트는 눈물을 흘렸다. 발 ㅗ이 분이시다.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나는 그때부터 줄곧.... 그녀는 주인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넌 그저 나를 따라오기만 하라고. 그러니...앞으로도 계속 나를 따라와라. 절대로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예......" 네이 안데르슨은 에르체베트의 작은 어깨를 힘껏 끌어안으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모든 것은 자신들의 손을 떠났다. 자신들은 그저 지켜볼 뿐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옴팔로스의 오라 능력자들이 무슨 선택을 하게 될지 그저 기다릴 뿐이다. '이용해 왔다고 생각했는데....결국은 이용당한 셈이 되었나." 피스블랙 한시영. 네이 안데르슨은 자신의 동업자였던 그를 떠올리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축하한다. 카타스트로피는 네놈의 승리다.' "결국 살아남은 거은 우리들 뿐이군요." 쉘터 안으로 들어가려던 닥터는 지하병동에 널린 시체들을 몇 번이나 돌아보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만약 진 사령관 일행의 배웅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더라면 그 역시 이들과 같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것이 마치 모두를 남겨두고 자신만 살아남은 것 같아 닥터는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죠. 솔직히 우리도 몇번이나 죽을뻔했고." 유화는 닥터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채영은 지친 부하들을 위로하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오늘 있었던 일을 잊지 말고 가슴속에 품어둬.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 절대로...." "치프....."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잊지 않는 것. 오늘의 슬픔도, 분노도, 억울함도 모두 잊지 않고 가슴속에 담아두는 것. 그것 만이 몰락한 피스메이커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를 재기이 날을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다. 채영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잊지 않을 거야. 끝까지 기억할 거라고." 중얼거림은 울먹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요원은 쉘터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그들에게는 탈출하는 일만 남았지만 정작 탈출하고 나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분명 성당기사단과 지구방위군, 블러디 노블맨 쪽에서는 피스메이커의 생존자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아마 자신들은 전 세계적인 수배자가 되겠지 시더는 그런 요원에게 무너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까 했지만 이내 관뒀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누굴 위로하겠다고..... 그녀는 그저 슬플 뿐이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일궈온 피스메이커가 이런 식으로 끝나 버린다는 현실이. "일단 살아남은 사람들은 끛까지 살아남아야죠. 살아남아야 기회가 생길테고, 기회가 생겨야...모두의 뜻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일행의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수정을 똑발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진 사령관이 사라진 후부터 그녀에게서는 예전과 같은 장난기어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태도에 일행은 진사령관과 그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더더욱 물어볼 수 없었다. 수정의 말에 닥터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를 이끌었다. "수정 씨의 말이 맞습니다. 모두들 일단 탈출하도록 하죠. 여기도 아직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지상으로 올라간다고 해서 반드시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죠. 뒷일은 탈출한 뒤에 걱정하도록 합시다." "예.....!" 유화와 요원, 시더와 채영, 오퍼레이터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쉘터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입구에서 모두를 들여보내던 닥터는 곧 쉘터에 들어오지 않는 두 사람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수정씨? 유리양? 왜 들어오지 않는 겁니까?" 닥터의 질문에 쉘터에 들어가던 일행들도 몸을 돌려 바깥에 남은 둘을 바라보았다. 그런 모두의 의아해하는 시선에 수정과 유리는 쓴웃음을 짓는다. 수정이 유리의 손을 잡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저희는 이대로 여기 남겠습니다." "예엣ㅡ?" 닥터와 일행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니! 남는다니? 왜? 뭣 때문에? 그러나 그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수정이 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유리양, 제가 앞에서 약속했죠? 절 따라오면 유리양이 원하는 길이 보일 거라고. 지금이 바로 그때예요. 우리는 이대로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옴팔로스로 내려갑니다." "응!" 유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태도다. 그 모습에 일행들이 할 말을 잃어버릴 때 닥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수정 씨와 유리 양은 오라 능력자이니 우리들보단 가인 씨와 다른 피스 대원들에게 힘이 될 겁니다. 하지만 아래서 무슨 일이 있어 나는지도 모르는데 단둘이서 내려간다는 것은..... 또 벌써 시간도 한참이나 지났고....." "우리가 오라 능력자인 이상 반드시 가야만 해요. 이건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이들의 의무입니다." 수정의 단호한 답변에 닥터는 입을 다물었다. 의무라고? "아마 조만간 세계는 크게 변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몰라요.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왔던 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나큰 일이 생길 거예요. 이건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고 미래에도 계속 있을 일이이에요. 인류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이상 몇 번이나 겪어야 할 산고의 진통이에요." "그 일이라는 게.... 지금 저 밑의 옴팔로스에서 일어 나고 있다는 것입니까?" "예, 가이아가 열세명의 사도들을 선택했을 때 그들 중에서 여신의 대행자가 나타나고, 그는 곧 세계의 중심에서 카타스트로피를 몰고 올 것이니.... 이는 성당기사단의 창립 초기 때부터 전해져오는 오라 능력자에 관한 이야기에요. 이미 열세명의 사도, 열세 명의 오라 능력자들이 나타났고 거기에 여신의 대행자, 오라의 주인으로 가인 씨가 선택되었으니 남은 것은 세계의 중심, 옴팔로스에서 카타스트로피가 일어나는 일밖에 없어요." 그 이야기에 일행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진 반면 닥터이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성당기사단의 일원인 그는 이야기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닥터는 한숨을 쉬며 수정에게 물었다. "카타스트로피.... 대이변, 대단원, 대참사, 대실패.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말이군요. 2020년 때의 대재해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대재해는 전초전 같은 거였어요. 피스 블랙과 기가스 티폰의 동조 실험이 실패한 여파였죠. 그 여파만으로도 LA 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어요. 아마 이번의 카타스트로피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전 인류가 위험해질지도 몰라요." ".....!"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유화와 시더, 채영은 경악했다. 대재해가 전초전이었을 뿐이라니! 그정도로 큰 참사가 일어난단 말인가! 수정은 그들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그 때문에 저희가 가야하는 거예요. 현존하는 오라 능력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오라의 주인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그렇군요. 그게 오라 능력자들의 의무라는 거군요." "예, 오라 능력자로 인한 일은 오라 능력자가 마무리해야 하니까요." 닥터와 일행은 더 이상 그들을 붙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저들의 힘이 되어 주고 싶건만, 이렇게나 무력한 자신들이라니. "아, 잠깐." 그때 시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의를 제기했다. "열세명이라니? 그래야 오라의 주인이 나타난다고요? 하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오라 능력자들은 마지막의 수정 씨까지 포함해서 열두 명 밖에 되지 않잖아요?" 그렇다. 피스 블루 유가인, 피스 레드 성마리, 피스 옐로우 한시민, 피스 핑크 이유리, 피스 골드 민수정,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 피스 블랙 한시영, 피스 카민 마유빈, 피스 화이트 류바 에레노아, 그리고 사망한 피스 그린 정진우와 피스 실버 라트 발렌시아. 시폰 뤼멘이 만들어낸 이위적인 오라 능력자, 루미네선스들을 제외한다면 오라 능력자는 이렇게 총 12명이었던 것이다. 그런 시더에게 수정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서 시더 웰리스 당신도 우리와 가야만 해요." ".....!" 모두가 놀란 눈으로 시더와 수정을 번갈아 보았다. 심지어는 수정의 곁에 있는 유리마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시더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내가.....?" "시더 양, 당신도 오라 능력자예요. 오라 패턴은 바이올렛 (Violet) 당신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당신의 할머니 노엘 웰리스는 대재해 때 죽어가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과 시더 양의 정신을 오리하르콘의 셀프 라이팅으로 공유시켰어요. 하지만 오라 능력자가 아닌 그녀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죠. 오리하르콘과의 정신감응 시더 양 당신이 해냈던 일인 거예요. 때문에 당신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뛰어난 스멜팅 마스터예요. 패턴 바이올렛은 정신감응으로 오리하르콘을 자유자재로 조절해내는 야금 능력인 거죠." 모두는 할 말을 잊었다. 수정은 진실을 들은 시더가 충격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시더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요, 피스 바이올렛? 우리를 따라가겠어요?" "......" 시더는 수정의 물음에도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천천히 쉘터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정 일행을 따라나서려는 시더의 모습에 유화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저, 정말 갈 생각이야, 시더? 아, 아무리 네가 오라 능력자라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힘도 없었잖아? 네가 이대로 간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유화? 수정 앞에서 멈추어 선 시더는 고개를 돌려 유화를 바라보았다. 유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리, 가인의 힘이 되자고 했지? 나 말이야, 그동안 줄곧 유화에게만 모든 일을 맡겨놔서 미안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너무 속상했어. 그런데 말이야..... 나 가인에게 힘이 될 수 있대. 그러니까 갔다 올게. 가서 가인의 힘이 되도록 노력할게." "바보! 그런 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유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시더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닥터는 그런 유화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수정과 시더, 유리를 돌아보았ㄷ. 그리고 애써 웃는 얼굴로 그들을 보내 주었다. "수정 씨, 시더양과 유리양을 잘 부탁합니다. 모두를 무사히 데리고 와 주세요. 꼭...." "알겠습니다. 모두를 무사히 데리고 귀환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스!" 수정은 웃으며 닥터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러자 그녀를 따라 시더와 유리도 거수경례를 한다. 쉘터 안의 모두는 그런 세명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며 거수경례를 했다. "피스!" 그렇게 피스메이커의 생존자들은 재회를 약속하며 헤어졌다. "후우, 늦습니다. 늦어요." 시영은 옴팔로스의 붉은 하늘에 떠 있는 기가스 티폰을 바라보다가 뒤로 고개를 돌려싿. 그가 서 있는 옴팔로스의 중앙 신전, 그 밑의 입구로 막 한 소년이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당도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영은 선글라스 밑의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각성을 할 때도 그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하더니.... 그래, 진실을 들을 준비는 다 하고 오신 겁니까, 가인군?" ".....!" 물음에 되돌아온 것은 소년의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유가인과 한시영. 그들 두 오라의 주인들은 옴팔로스의 신전에서 서로를 밀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자 옴팔로스의 붉은 하늘이 그들을 중심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세계가 카타스트로피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 씨는 어떻게 한 거지!" 가인의 외침에 시영은 혀를 찼다. 이 소년이나 자신의 동생이나 성격이 급하기는 매한가지군. 오히려 그때문에 더 서로에게 끌렸던 건가? "후후, 제 동생을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형인 제가 어련히 알아서 보살피지 않겠습니까? 너무 주제넘은 참견은 삼가 주세요." 시영의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에 가인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곧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소리친다. "형인 당신이 알아서 잘 했다면 동생을 잘 보살폈더라면! 시민 씨가 그렇게 화를 낼리 없잖아? 그렇게까지 형의 일에 슬퍼할 리 없잖아? 시민 씨 곁에 줄곧 있어온 나는 알고 있어!" 그 말대로였다. 가인은 시민과 함께 산 2년동안 그녀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아직은 모르는 게 더 많지만 적어도 그녀가 과거의 일 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만을 잘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일.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배신. 바로 지금, 가인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러한 상처를 시민에게 입힌 장본인이라는 것! "당신이 시민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지! 적어도 동생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는 거! 사랑하는 가족에게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는 거! 그렇지 않았다면 시민 씨가 그렇게나 힘들어 했을 리가 없지! 그렇게나 울지는 않았을 거야!" "모르면 모르는 대로 조용히 있으십시오! 당신이 저와 제 동생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드는 겁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증거로 제가 왜 시민의 형인지, 왜 우리가 형제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 시영의 호통에 가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형? 형제? 저 사람과 시영 씨가?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시영과 대면했을 때마다 언급되던 형제라는 말. 그때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깊이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시민 씨와 저 사람의 얼굴은 같아. 쌍둥이야.' 쌍둥이. 일란성 쌍둥이..... 하지만 성별이 다르기에 이란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제라면.... "후후후. 어지간히도 둔하군요, 당신은. 역시 이런 몇 마디 말보다는 직접 보여 주는 편이 나으려나? 시민, 그 아이도 내가 진실을 보여 주기 전까지는 애를 먹었으니까." 시영은 웃으면서 천천히 가인이 있는 옴팔로스의 신전 밑으로 걸어서 내려왔다. 가인은 절뚝거리는 오른발로 그에게서 뒷걸음친다. 시영의 진실 타령이라면 넌더리가 나도록 당해왔다. 자신이 그에게서 더 알아야 될 진실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다 시영의 마지막 말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진실을 보여 주기 전까지는 애를 먹었다니? "시, 시민 씨에게 뭘 한 거야? 시민 씨는 어디 있는 거지?" 진실을 보여 주고 나서는 애를 먹지 않았다는 건가! 진실을 안 시민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지? "시민은 내 동생이다! 주제넘은 참견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순간 시영의 외침이 가인의 뒤쪽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가인이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시영이 그림자 넘기로 그의 배후를 잡았던 것이다. 가인은 이를 악물며 시영의 주심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천공뇌정권을 시전하려고 했다. 시작점을 조절하여 시영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사각에서부터 동시에 다섯 개의 뇌전들을 날린다! 파지지지직 차원진동의 힘이 실린 천공뇌정권이 일제히 시영에게 적중했다. 세인트 엘모의 불이 일어나며 시영이 입었던 양복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그리고 그밑에 있던 육체 역시..... ".....!" 뒤를 돌아본 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영은 뇌전에 적중당한 상태에서도 너무나 태영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뇌전도 아닌 차원진동의 힘이 실린 뇌전을! "크!" 시영은 그대로 가인의 목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동시에 둘의 몸은 그들 밑의 그림자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인은 시영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림자에 빠져드는 순간부터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리접촉을 통한 정신장벽의 해제 그리고 그림자를 통한 영체의 접촉으로 신체의 자유를 빼앗긴 것이다. "가인 군, 당신은 분명 브루스님과의 일전에서 한 번 죽었습니다." 귓가의 들리는 시영의 목소리에 가인은 그를 노려보았다. 한 번 죽었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 그건 말입니다. 당신과 제가 둘이면서 하나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것을 확신하게 된 것은 저번 당신과의 아포칼립스 싸움 때부터였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짐작하기는 했지만 차마 시험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죠.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 아포칼립스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 속삭임에 예전 12구역에서 벌였던 시영과의 일전이 떠올랐다. 그래, 그때 아포칼립스에 적중되었을 그는 다음 순간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그림자 넘기도 할 수 없는 차원봉쇄 상태에서의 일격이었는데. "당신과 내가.... 하나인 존재라고?" "그렇죠. 당신이 가이아에 의해 오라의 주인으로 선택받은 순간 세게의 의지는 그 전대의 주인이었던 저와 당신을 하나의 개체로 인식한 거죠. 여신이 정한 법칙에서는 절대로 오라의 주인이 한 시대에 두 사람이 될 수 없거든요. 그 때문에 내가 죽어도 당신의 존재가 판게아에 남아 있는 이상 저는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건 유가인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죽어도 제가 살아 있는 이상 당신은 살아나게 됩니다. 꽤 재미있는 모순이지 않습니까? 역시 세계의 의지라는 것도 별수없나 봅니다. 모순 많은 인간들의 영체가 모인 이상 그 군집도 모순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나 봐요." "어, 어째서 그런 모순이 생길 수 있는 거지?"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어쩌면 그 모순조차 이 남자가 꾸민 일일지 모른다고. 무엇보다 그는 가인 이전의 오라의 주인이었다. 굳이 오라의 주인 자리를 포기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이유가 이 모순을 유발하기 위해서였다면..... 그런 생각을 영체의 접촉으로 읽어낸 시영이 피식 코웃음쳤다. "저는 세계의 모순을 이용할 정도로 재주가 좋지 않습니다, 가인 군. 그리고 제가 오라의 주인 자리를 포기했던 것은 자의도 아닌 타의였죠. 한 번 증폭기를 통해 가이아와 접속한 오라의 주인은 그것으로 대행자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저도 대재해 때 기가스 티폰과 동조하여 가이아와 접속한 후 오라의 주인이 아니게 된 거죠. 그 대문에 저번 노아의 리리스가 당신을 머신 아더와 동조시켜 세계의 의지에 접속하려고 했을 때는 깨나 당황했습니다. 하마터면 제가 준비해온 모든 이들이 물거품이 될 뻔했거든요. 그때문에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서둘러 머신 아더를 파괴했던 겁니다." 어느새 가인과 시영의 주위는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얘기하던 중 완전히 그림자 밑으로 가라앉았던 것이다. 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시영의 위스퍼링이 가인에게 울려 퍼졌다. ㅡ그렇다면 말입니다. 한번 가이아와 접속하여 자격을 상실한 제가 어째서 아직도 오라의 주인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가인 군. 그것은 가이아가 이번 카타스트로피를 위해 마련한 안배인 것 같습니다. ㅡ가이아가 마련한 안배? 아까는 모순이라고.... ㅡ모순입니다. 가이아가 스스로 의도한 모순. 가이아는 말입니다. 지금 껏 자신이 정한 법칙을 조금씩 조금씩 바꿔왔어요.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춰 자신도 변화해 왔다는 겁니다. 그 가까운 예로 증폭기와 함께 가이아에 접속하여 자격을 잃는다는 법칙부터가 그녀 자신이 최초로 의도한 모순입니다. 최초의 13인을 이끈 오라의 주인에게는 그러한 제약조차 없었죠. ㅡ최초의 13인 이라면.... 가인은 리리스가 마지막으로 보여 줬던 드림 다이브의 기록을 떠올렸다. 판게아를 지배했던 노아. 그 노아는 발의 별이라는 오리하르콘 증폭기로 옴팔로스의 가이아와 접속하여 다른 차원들을 침공했다. 그를 보다 못한 가이아는 노아의 식민지 중 하나인 테라에 자신의 대행자와 사도들을 강림시켰는데, 그들이 바로 최초의 오라능력자. 최초의 13인. 현 인류의 조상이 되는 이들. ㅡ아, 리리스의 드림 다이브로 거기까지는 알고 있었군요. 그럼 얘기가 빠르겠군요. 시영은 가인의 기억을 읽고 세계의 의지를 향한 영적인력을 높였다. 그 혼자만이었다면 세계의 의지를 영적인력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현 오라의 주인인 유가인이 있었다. 그와 기가스 티폰의 아리아드네의 실을 연결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적인력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문에 시영은 앞에서 시민에게 세계의 의지를 불러들여 과거의 기록들을 보여 줄 수 있었다. ㅡ테라의 오라 능력자. 최초의 13인에 의해 노아가 판게아에서 추방 된 이후 그때부터의 일들을 보여 주면 되겠군요. 시영의 말과 함께 가인 앞으로 하나의 영상이 펼쳐졌다. 그리고 가인은 그것을 숨죽여 지켜 보았다. ㅡ그리스도의 해(Anno Domini)가 막 시작될 무렵의 일입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수십세기도 전에 있었던 일. 세계가 기억하는 과거의 기록. ㅡ최초의 13인은 오라의 주인, 나자레안을 중심으로 12개의 통치기구를 만들어 판게아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세계의 진실이었다. ㅡ아, 안돼. 시민은 시영이 만든 그림자의 감옥에 갇혀 가인이 진실을 접하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더 멀리 보이는 그에게 다가가려고 손을 내저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아스트랄계의 감옥은 시영과 같은 영체이동 능력이 없는 한 끊임없이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ㅡ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하면! 그녀는 시영이 보여준 진실을 통해 그가 가인을 이용해 무엇을 꾸미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시민을 미끼로 삼아 가인을 옴팔로스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ㅡ안돼. 가인씨가 그것을 보면 안 돼. 알게 되면 안 돼. 만약 그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 시영의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기 될 것이다. 절대로 거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가인씨가! ㅡ절대로 보게 해서는 안 돼! 막아야만 해. 절대로! 하다못해 여기를 나갈 수만 있다면! 나가서 그와 만날 수만 있다면! 만나서 설득할 수만 있다면! ㅡ 나가야 해! 시민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무형의 감옥을 노려보았다. 이감옥은 시영이 만든 일종의 아공간이었다. 자신의 영체와 그녀의 영체를 아리아드네의 실로 연결하여 물질계의 육체와 아스트랄 바디를 붙잡아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체의 연결을 끊어 버린다면? 그와 연결된 아리아드네의 실을 끊어 버린다면 이 감옥에서 탈출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녀를 아공간으로 끌어당기는 영적인력이 사라질는지도 모른다. ㅡ영체의 연결을 끊어 버리기만 한다면..... 시민은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하다가 천천히 표정을 굳히기 시작했다. 한가지 방법이 있었다. 시영과 연결된 아리아드네의 실을 끊어 버릴 유일한 방법이. 하지만 그건..... ㅡ..... 시민은 얻둠 저편의 가인을 바라보다가 곧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주저 없이 방법을 사용했다. 라아아아아아아 어둠 속으로 울려 퍼지는 시민의 목소리. 그것은 이 칠흑 같은 어둠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죽음의 암시를 담은 노래. 바로 영체를 현혹시키는 흑성가였다. 시민은 자신에게 흑성가를 사용함으로써 자신과 연결된 시영에게 타격을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거라면 암시주의 영체정보를 자신에게 덮어씌워도 무용지물이지. 애초부터 그 암시주의 영체를 암시대상으로 노래하는 거니까! 라아아아아 시민은 자신의 영체가 갈가리 찢겨질 때까지 흑성가를 노래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타격을 입은 시영이 자신의 영체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풀어낼 때까지. '가인 씨!' 계속해서 노래했다. "호오라, 슬슬 기다리는 것도 못해먹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옴팔로스의 외곽에 위치한 4번 궤도 엘리베이터. 시영의 명에 따라 그곳을 지키고 있던 유빈과 류바는 궤도 엘리베이터로 내려온 뜻밖의 상대를 맞이해야 했다. 유빈은 앞에 있는 유리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지었다. "유리 너야 내려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고..... 그옆에 두 사람은 못보던 얼굴들인데?" "민수정 부사령관,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 한때 한국지부의 피스메이커로 활동했던 류바가 유리 옆에 있는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 둘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인상을 찡그렸다. ".....당신들, 오라 능력자였나?" "그, 그래! 피스 바이올렛 시더 웰리스다!" 류바의 질문에 시더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가 곧 재빨리 수정의 뒤로 숨었다. 모처럼 멋지게 자신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적들과 마주하는 순간 자신에게 아무런 힘도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수정에게서 오라 능력자라는 말을 들었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더는 노엘과 정신을 공유하는데 패턴 바이올렛의 힘을 모두 사용하느라 실제로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수정은 뒤로 숨는 시더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류바에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소개하죠. 피스 골드 민수정입니다. 고의로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상관 없겠지. 어차피 죽여버리면 오라 능력이 있든 없든 그만인 것을." 류바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의 오라 소드로 초고진공 커터를 생성시켰다. 그 살벌한 모습에 시더는 안색잉 새파랗게 질려 몸을 떤다. 유빈은 그런 시더를 비웃으며 손을 들어 류바를 제지했다. "마스터가 한 말씀 잊어버렸어? 되도록 오라 능력자는 죽이지 말랬잖아." "그런 건 알 바 없다. 마스터의 방해가 된다면 모두 죽일 뿐이다." "엇!" 류바는 거칠게 유빈을 밀어젖히며 앞으로 나섰다.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증오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시영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생긴 소중한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돕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그런 류바에게 있어 시영의 방해가 디는 것은 모두 무가치했다. 죽어 없애도 마땅한 것이었다. 되도록 죽이지 말라고? 적을 배려해서 어쩌자는 건가? 적은 확실하게 말살해야 한다. 다시는 우리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이게 진짜!" 바닥에 쓰러진 유빈은 시뻘겋게 얼굴을 붉혔다. 저게 감히 누굴 넘어뜨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앞을 걸어가는 류바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막 그녀에게 소리치려는 찰나, ".....!" 한순간 눈앞에서 황금색이 찬란하게 치어올랐다. 유빈은 그 빛을 손으로 가리며 이를 악물었다. 뭐야, 이건? 콰아아아앙 뒤이어 터지는 폭음. 그리고 상황은 정리되어 있었다. 유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앞을 걸어가던 류바는 그들 위쪽에 있는 거신상에 몸을 처박은 채 실신해 있었다. 그리고 류바가 있었던 자리에는 금색의 AI 슈츠를 번쩍이는 수정이 내찌른 주먹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유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능적으로 눈앞의 수정이 자신들과 격이 다른 오라 능력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실제로 그의 마인드 리딩이 읽어 들이는 수정ㅇ의 정보는 수세기를 살아온 불사자의 기억이었다. 그 압도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는 순간 유빈은 다리의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유빈의 귀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수정이 류바를 상대하는 사이 재빨리 마인드 스페이스를 전개하여 유빈을 포위하고 있었다. 유리는 그가 대적할 경우를 대비해 수정의 손을 맞잡고 싱크로 효과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미 유빈에게는 전의가 없었다. 그는 수정의 사념을 읽어들이는 것만으로도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제, 제길! 뭐야....뭐야, 이건? 넌.... 넌 대체 누구야?" 기가 질린 유빈의 질문에 수정은 짧게 답했다. "당신보다 좀 더 나이가 많은 오라 능력자 일 뿐이에요." "이, 인정했어!" 수정의 말에 시더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가 수정의 눈총을 받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는 유빈이 순순히 제압되자 그에게 소리쳤다. "오빠는? 시민 언니는? 다들 어디 있어? 무사해? 무사한 거야?" "..... 흥, 그런 녀석들 알게 뭐야? 다 죽어 버리라지." 유비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빈정거렸다. 순간, 퍽 그의 안면으로 유리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크핫!" 유빈은 피가 터지는 코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너, 너.....!" "죽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마! 너도! 네 동료들도! 네가 따르는 그 남자도! 다들 왜 그 모양이야? 대체 사람의 목숨을 뭐로 아는 거야? 너희들도 인간이잖아! 너희들도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잖아! 그런 주제에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노냔 말이야! 무슨 권리로!" 유리는 울분을 터뜨리며 씩씩거렸다. 그런 유리를 유빈은 이를 갈며 노려보았다. "내가....말했지! 힘이 곧 권리라고! 약한 놈이 강한 놈에게 먹히는 건 당연한 거야. 지금 너희가 우리를 굴복시킨 것처럼! 그리고 같은 사람들이라고? 모르는 소리! 우리 오라 능력자들과 그 녀석들은 달라! 아무리 같은 인간의 배를 빌려 태어날지라도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종이 달라진단 말이다! 그렇다고 불공평할거라 생각해? 어림도 없는 소리! 녀석들은 다수고 우리는 소수야. 녀석들에게 맞서려면 우리는 가진 힘을 최대한 사용하는 수밖에 없어. 살기 위해 힘을 쓰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거야!" "그건 피스 블랙이 가르쳐 준 이분법인가요?" 수정이 유리를 뒤로 물리며 유빈에게 물었다. 유빈은 그녀에게서 마스터의 코드네임이 언급되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하, 하지만 마스터가 그랬단 말이야. 오라 능력자들의 유토피아를 만들자고! 아무도 오라 능력자들을 핍박할 수 없는 오라 능력자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그건 같은 오라 능력자인 너희에게도 좋은 이야기잖아?" "오라 능력자들의 유토피아.... 물론 구미가 당긴느 얘기네요. 하지만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안 될 거야 없지!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무시 못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손에 넣는 거야! 그래서 모두를 굴복시키면 돼! 말을 안 듣는 녀석들은 죽여 버리면 돼! 우리 오라 능력자들과 달리 녀석들은 셀 수도 없지 많으니까! 우리가 인간들을 지배하는 거야!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어. 아무도 오라 능력자들을 무시하지 못하게 될거야!" 유빈의 말을 듣던 수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는 역시..... "세계정복이라도 하고 싶어요? 역시 마유빈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피스 블랙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카타스트로피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따라다녔군요." 유빈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누, 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야! 누가!" '그럼 당신은 그에게 물어봤나요? 오라 능력자들의 유토피아, 그것을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룰 것인지?" "그건.....! 마스터가, 마스터가 알아서 해 주실 거야. 그러니까 걱정 할 필요 없어! 그냥 마스터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돼!" "그럼 제가 가르쳐 드리죠. 그가 하려는 일, 카타스트로피가 무엇인지." 유빈은 왠지 귀를 막고 싶어졌다. 자신은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미워하고 인간들을 증오할 수만 있다면, 마스터를 위해 능력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복수할 수만 있으면 딘다고! "카타스트로피는 세계의 의지에 오라의 주인이 접속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거예요. 때문에 피스 블랙은 그토록 가인 씨에게 집착했던 것이죠.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건 당신의 말처럼 강대한 힘을 손에 넣는다거나 그런 일이 아니에요." "그, 그럼?" "자세한 건 알 수 없어요. 하지만 피스 블랙이 오라의 주인이었을 때, 그는 이 카타스트로피를 일으켜 LA의 대재해를 일으켰어요." "뭐....." 유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마스터가 LA에 대재해를 일으켰다니? 그로서는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대재해는 몬스터가 일으킨 게 아니었나? "무슨....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스터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하지만 사실이에요. 저는 그때 현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어요. 여기 있는 시더 양도 마찬가지죠. 그녀도 모든 것을 지켜봤어요. 그러고 보니 마유빈 당신도 그때의 생존자이지 않나요? 그 사고로 양친을 잃은것으로 알고 있는데." "......!" 유빈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수정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외쳤다. "웃기지마! 그럼 마스터가 내 부모를 죽인 그 빌어먹을 사고의 장본인이라 이거야? 그런 헛소리르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마스터가 그랬을 리 없어! 절대로 그랬을리 없다고! 그 사고 때문에 내 인생이 어떻게 변했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야만 했는데?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마스터 때문이라는 거야? 수정은 자신의 말을 거칠게 부정하는 유빈의 모습에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저희와 함께 가도록 해요. 가서 당신이 직접 피스 블랙에게 물어보도록 하세요. 아마 그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크, 좋아! 따라가 주지! 얼마든지 물어봐 주겠어!" 유빈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 앞에 섰다. 그 모습에 시더는 어깨를 으쓱했다. 포로 주제에 뭐가 저리도 기세등등해? 유리는 그런 마유빈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저 멀리 보이는 옴팔로스의 중앙신전을 바라보았다. 저기에 오빠와 시민 언니가..... "어서 가지 않고 뭘 하는 거야!" 유빈의 신경질적인 재촉에 수정은 거신상에 처박힌 류바를 바라보다가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만나러 가 보도록 하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을." ㅡ최초의 13인이 만들어낸 12개의 통치기구. 이 기구의 이름은 가인 군도 익히 알고 있을 겁니다. 성당기사단. 피스메이커의 전신 격인 테라의 통제기관. 가인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성당기사단이 그렇게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단체라니!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 단체의 창립자들이 오라 능력자였다는 것이었다. 시영의 위스퍼링은 계속되었다. ㅡ나자레안은 자신의 열두 동료들에게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필립보, 마태오, 시몬, 토마, 바르톨로메오, 타데오, 알패오, 유다의 12지역을 관리하게 했죠. 이 12 지역이 나중에 12지파가 되고 세습제가 되어 성당기사단을 이끄는 세라핌의 모태가 되죠. 테라의 고대도시들의 영상에서 이번에는 붉은 하늘과 붉은 대지의 영상이 나타났다. 그 영상을 바라보던 가인은 중얼거렸다. 옴팔로스? ㅡ 그 시절의 옴팔로스 입니다. 최초의 13인은 정기적으로 회의를 가졌는데, 그때의 장소가 이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테라의 미래와 오라 능력자들의 미래를 논의했죠. 아, 그리고 최후의 만찬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최초의 13인들이 분열되기 시작한 그 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ㅡ최후의....만찬? ㅡ후후, 성서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 전날 자신의 제자들과 가졌던 마지막 식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으로도 유명하죠. 그건 실제로 있었던 일화입니다. 하지만 성서의 내용처럼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 아니었죠. 푸화아아아악 순간 옴팔로스의 대지로 붉은 선혈들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피를 흘리는 남자와 그를 둘러싼 12명의 남녀들이었다. 그들 주위로는 만찬을 가졌던 테이블이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피를 흘리는 남자, 나자레안이 말했다. '어째서 이런 짓을..... 왜......' '모두들 당신을 두려워해요. 당신 때문에 우리 오라 능력자들까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죠. 국민들에게 우리와 저들이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킬 방법이 필요해요.' 12명의 남녀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검은 사제복의 여인, 흑성모 막달라가 말했다. 그녀는 나자레안이 등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동료이자....그의 아내였다. 나자레안은 설마 그녀가 이 반란의 주동자일 줄을 몰랐기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국민들이 날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날 두려워하는 거겠지. 내 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노아의 추방을 지켜보았은까. 그러한 일이 언제 또 일어날까 두려운 것 아닌가?' 그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일으켜 동료들이었던 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가장 신뢰했던 사람들인 만큼 그 배신은 너무나 처참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어린 그의 딸까지 그에게 칼을 들이댈 줄이야.... '당신의 시체를 십자가에 내걸겠어요.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보도록 하겠어요. 그러면 사람들도 안심하겠죠. 오라 능력자들도 자신들처럼 죽는구나 하고 말이죠.' 막달라는 싸늘하게 대꾸하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있던 두 명의 오라 능력자들이 옆으로 섰다. '당신을 상대하기 이해 줄곧 능력을 개발해 왔어요. 우리가 가진 영체절단술과 영체 암시술, 영체진동술이라면 충분히 당신을 제압할 수 있겠죠.' '정말이지...... 꽤나 공들여 준비한 모반이군. 그동안 눈치채이지 않게 하느라 고생을 했겠어.' '당신만 죽어 준다면 그 고생도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겠죠.' 나자레안은 너무나 변해 버린 아내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그동안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던 것도 모두 거짓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는 자신의 오라 능력을 전개하며 소리쳤다. '십자가에 나를 걸어 전시하겠다고? 어디 한 번 해 보시지! 하지만 12개의 십자가를 더 준비해야 할 거다!' '십자가는 하나로 충분해!' 그리고 최초의 13인은 더 이상 13인이 아니게 되었다. 그들의 싸움은 가인이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오라 능력자들 간의 싸움보다도잔인하고 치열했다. 뼈가 갈라지고 피가 터지고 비명이 울려 퍼진다. 옴팔로스의 대지와 하늘은 그들의 싸움에 울부짖는 것처럼 거세게 회오리쳤다. 가인은 차마 더 이상 영상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 혼자만의 생각일 뿐, 영체의 상태에서는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나자레안이 자신의 딸을 죽이지 못하고 주춤거리다 아내의 흑성가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야만 했다. ㅡ그뒤 최초의 오라의 주인이었던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흑성모와 나머지 오라 능력자들은 주인을 잃은 성당기사단을 거두어들였습니다. 하지만 배덕의 대가였을까. 그들의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나자레안의 죽음으로 오라 능력자들 또한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인지한 사람들이 흑성모와 오라 능력자들을 독살하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꿰찬 거죠. 바야흐로 오라 능력자들의 세상은 몰락하고 인간들의 세상이 된것입니다. 성당기사단을 차지한 인간들은 모든 오라 능력자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말소하고 자신들의 지배권을 돈독히 하는 데 혈안이 됩니다. 또 오라의 주인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이단심문회를 만들어 세계 각지의 이단현상, 오라 능력자들을 찾아내 말살하는 짓을 반복합니다. 시영의 설명에 따라 영상에서는 성당기사단의 이단심문관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각성한 오라 능력자들을 살해하는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셀수도 없이 많은 각성자들이 죽었다. 그들 중 소수는 성당기사단의 모르모트가 되어 죽었고, 소수는 성당기사단의 이단심문관이 되어 다른 능력자들을 암살하다가 죽었다. 그 끔찍한 모습들에, 너무나 처참한 그 진실들에 가인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가이아의 대행자인 그가 잘 알 수 있었다. 거짓이 아니다. 모두 다 진실이다. 거짓 같은..... 진실. ㅡ자, 이제 배경 설명은 끝났나. 그럼 이제부터는 저와 제 동생에 대한 얘기를 해 보도록 하죠 모든 영상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두 쌍둥이 형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흑과 금의 머리카락. 가인은 그것이 시영과 시민의 어린 시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어째서 시민 씨가 보육원 같은 데 있는 거지? ㅡ저와 동생은 다섯 살 때 통일한국의 한 보육원에 맡겨졌습니다. 부모님은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말씀만 남기시고 그 뒤로 돌아오시지 않았죠. 아, 가인 군도 저 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겠군요. 그도 그럴 것이 사고로 가족들을 잃고 한동안 신세를 졌던 곳일 테니까. 가인은 저도 모르게 오른쪽 손목을 왼손으로 감쌌다. 오른쪽 손목에 찍힌 바코드가 타오를 것처럼 아팠다. 그것은 그의 영체에 새겨진 트라우마의 흔적이었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 ㅡ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저런 곳에 맡겨지면 꽤나 고생하게 되죠. 우리 형제는 결국 계속되는 보육원 아이들의 텃세에 문제를 일으키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입양되었습니다. 시영이 동생을 괴롭히는 고아에게 오라 능력을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고아를 거의 죽일 뻔하고 망연자실해진 그를 시민이 울면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노래를 불렀다. 자신을 대신해 상처받ㄴ느 형을 위해 동생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 ㅡ하지만 부양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저희를 입양한 남자는 어린아이들만 보면 환장하는 짐승이었고, 우리는 그런 그에게 성노예롤 팔려온 거였죠. 그래도 보육원에 있을 때보단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저는 기꺼의 그의 노예가 되기로 했습니다. 동생에게 제대로 된 옷을 입혀주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해 주고, 학교에도 보내 줄 수 있었으니까요. 때문에 밤마다 그 짐승의 상대를 해 줘야 했습니다. 하하, 처음에는 죽기보다도 싫었는데 계속 당하다 보니 나중에는 그럭저럭 할 만하더군요. 그냥 잠시만, 아주 잠시만 무감각해지면 되는 거였어요. 무엇보다 제가 잠시만 그런 일을 당하면 동생은 웃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들께 버림받은 잏로 단 한 번도 웃지않던 그 아이가 즐거운 듯이 웃을 수 있엇어요. 그 웃음만 지킬 수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좋았죠. 어떤 괴로운 일이든지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의 시영이 밤마다 양아버지를 찾아가 스스로 폭행을 다아는 것은 절대로 괴로운 일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그럭저럭 할 만한 일이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지옥이었다. 하루하루가 지옥만 같은 고통의 시간. 지금 가인이 보는 기록들은 시각뿐만 아니라 나머지 오감들과 그때의 감정들, 느낌들까지 전부다 전해주는 것이었기에 가인은 그때의 시영이 느꼈던 모든 것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미치지 않고서는 버텨낼 수 없는 시간이었다. 가인의 영체는 몇 번이고 토하고 울부짖었다. 시영은, 그는 시민 씨를 지키기 위해 이런 고통을 감수했단 말인가? 기꺼이 지옥에 떨어졌단 말인가? 시민 씨의 미소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서? ㅡ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짐승은 자신의 폭행에 무감각해진 제가 재미가 없어졌는지 이번에는 동생에게 손을 뻗치더군요. 가인 군, 살의가 무엇인지 압니까? 진정 누군가를 이 세상에서 존재조차 완전히 지우고 싶어지는 그 기분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옷이 찢겨져 짓밟히려는 동생을 보는 순간 저를 사로잡은 것이 바로 그 살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 짐승을 죽이고 난 뒤였죠. 첫 살인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특별히 죄책감이 느껴진다거나 후회가 드는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슴이 뻥 뚫리는 해방감을 느꼈죠. 그 짐승이 우리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렇게 쉽게 죽여도 되었던 걸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습니다.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때 마음에 걸렸던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동생은 어떻게 되지? 어떻게 하면 동생을 지킬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었습니다. 너무나 걱정이 되었기에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그런 암담함이었죠. 양아버지의 시체 곁에서 몸을 떠는 시영과 그런 그를 울면서 끌어안는 시민. 그 형제들이 느끼는 슬픔과 공포, 절망은 가인이 예전에 가족을 잃었을 때 느껴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가인은 시영 형제의 기록에 완전히 동화되어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차에 그녀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성당기사단의 세 번째 검 아포스톨로스 야고보 이네스 라비에르. 그녀는 우리가 양아버지를 죽였다는 것도, 내가 오라 능력을 사용했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죠. 그녀는 저에게 제안했습니다. 내 오라 능력으로 자신의 실험을 도와 달라고. 그러면 동생의 안전은 보장한다고. 시민이는 평범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 준다고. 저에게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한국에 시민이를 혼자 남겨두고 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죠. 당시 제가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일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성당기사단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현명했습니다. 만일 거절했다면 저와 시민이 둔다 위험해졌겠죠. 오라 능력자의 존재를 알고도 방치해둘 그들이 아니니까요. 시영은 이네스를 따라 LA의 내룡,에트나에서 그녀의 실험을 도왓다. 자신의 오라 능력을 개발하며 패턴 매저린, 섀도운 다이브를 완성시키고 화이트 파우더로 오리하르콘과 정신감응을 높이는 실험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패턴 그린의 소유자 정진우와 잠시 연구생활을 같이하기도 했다. ㅡ패턴 매저린의 능력이 완성되자 이네스의 실험은 본 궤도에 올랐습니다. 바로 에트나에서 발굴한 기가스 티폰과 오라 능력자를 동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라의 주인과 오리하르콘 증폭기를 이용하여 세계의 의지에 접속하려던 것이었죠. 그것이 그녀가 성당기사단으로부터 받은 사면, 피스메이커 프로젝트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라의 주인을 찾을 방법이 없었기에 무작정 세계에서 찾아낸 오라 능력자들을 티폰과 동조시켜야 했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오라능력자들이 죽거나 폐인이 되었습니다. 티폰의 정신용량을 받아들이기엔 인간의 아스트랄 바디가 너무나 협소했던 겁니다. 실험이 성공하려면 모자라는 아스트랄 바디를 대신해 가이아의 의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오라의 주인이 필요불가결했죠. 저는 여타의 오라능력자들처럼 제물이 되기 위해 티폰과 동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1차 접촉실험. 거기서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기가스 티폰과 동조한 시영을 패턴 매저린을 패턴 블랙으로 변질시키며 가이아 애드번트 이펙트를 일으켰다. 자신이 오라의 주인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ㅡ오라의 주인으로 판명된 저는 코드네임 피스 블랙을 받고 피스메이커 프로젝트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상은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네스와 연구직원들은 모두 저를 극진히 대해 주었고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전까지와 달리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삶은 보내게 되었죠. 물론 그 호의들이 제가 오라의 주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 힘이 필요하기에 비위를 맞춰 주는 것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죠. 하지만 말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타인의 호이였던 겁니다. 그때까지 제 동생을 제외한 타인들은 모두가 다 적이었을 뿐인데. 거기에 어린아이의 들뜬 기분까지 더해서 저는 진짜로 제가 행복해진 거라고 착각해 버렸지요. 그래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제 역할을 잘 수행해내기만 한다면, 오라의 주인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모두의 도움이 된다면, 이네스의 도움이 된다면.... 그 착각은 깨지지 않을 거라고, 행복은 지켜질 거라고 믿었죠. 그 착각이 깨진 것은 그로부터 알미 지나지 않아서였다. 2020년 3월 9일, 인류가 대재해라고 칭하게 된 바로 그날. ㅡ2차 접촉실험이 있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이네스는 성당기사단의 중심인물들을 LA로 불러 모으고 자신의 실험을 공개적으로 발표했죠. 실험이 시작되었다. 모두의 주목 속에서 시영은 프로토 타입의 AI 슈츠를 입고 기가스 티폰과 접속했다. 실험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ㅡ실험은 대실패였습니다. 에트나는 분명 현존하는 판게아의 내룡 중 가이아의 힘이 충만한 곳이었지만 세계의 중심은 아니었죠. 옴팔로스가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세계와의 접속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기가스 티폰조차 당시에는 불완전한 스폰이었고, 오라의 주인이었던 저 한시영도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접속 속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본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ㅡ세계의 기억이 흘러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평소 제가 의심하고 불신하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불길한 일들로만 이루어진 어둠의 기록들이었습니다. 앞에서 가인 군이 보았던 최초의 13인과 성당기사단의 추악한 역사. 수많은 오라 능력자들의 죽음, 죽음, 죽음. 설마 제가 몸담고 있었던 곳이 이런 곳이었을 줄이야! 저는 스스로 무덤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오라 능력자들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 몸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래 놓고서 자신이 행복해졌다고 착각하다니! 하하하,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이란 말인가! 시영의 위스퍼링에서 자조와 분노, 슬픔의 감정이 흘러나왔다. ㅡ무엇보다 저는 제가 가장 궁금해 했던 과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나와 시민이를 버린 부모님! 그들은 왜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은 걸까? 왜 우리를 잊어버린 걸까? 세계이 기억은 그것마저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저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두명의 남녀가 성당기사단의 이단심문관들에게 고문을 받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문기구들에 피를 흘리면서, 비명을 지르면서. ㅡ모든 것의 시작은 성당기사단이었던 겁니다. 저희 부모님은 성당 기사단의 첫번째 검 아포스톨로스 베드로와 두 번째 검 아포스톨로스 안드레아. 오라 능력자들을 자식으로 둔 성당기사단의 사도들이었죠. 그들은 어떻게든 당신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외딴 동양의 보육원에 우리를 맡겨두고 이단심문관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잔혹한 고문 속에서도 자식들의 위치를 끝까지 발설하지 않은 채 자결하셨죠. 저희 부모님은 결코 자식들을 버렸던 게 아니었습니다. 부모님들을 빼앗아간 것은 다름 아닌 성당기사단이었던 것입니다! 빼어 문 혀를 늘어뜨린 채 피 속에 쓰러진 남녀의 시체. 가인은 시영의 분노에 몸이 떨렸다. 만약자신이 그였더라도 똑같이 분노했을 것이다. 가족이 소중했던 만큼. 가족이 절실했던 만큼. ㅡ이네스가 저와 시민을 찾아낸 것도 우연이 아니었죠. 그녀는 처음부터 우리 부모님을 알고 있어고, 우리가 오라 능력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알고 우리에게 접근했던 거예요. 그리고 만약 내가 실패할 경우 동생을 다음 실험체로 쓸 생각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나는 내 동생이 오라 능력자인 것으 그들에게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겁니다. 동생의 생활을 보장해 준다는 식으로 그 아이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기가스 티폰과 접속한 시영의 눈에 비틴 에트나의 전경. 그 연구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네스와 성당기사단의 사람들. 시영의 눈에 비친 그들은 하나같이 다 적이었다. 모두가 다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는 짐승들이었다. 이 세상의 모두가, 자신과 시민을 제외한 모두가, 오라 능력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다ㅡ! 콰콰콰콰콰콰콰 그리고 가인은 대재해의 전말을 보았다. 시영의 분노에 동조한 티폰은 LA의 신의 철퇴를 내렸다. 에트나의 중력을 조절하여 다운 버스터 현상을 초래, LA를 죽음의 도시로 만든 것이다. 그때 오라 능력자를 제외한, 또 그들이 감싸력 했던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ㅡ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민을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오라 능력자들을 저 탐욕스러운 테라의 무리들로부터 지킬수 있을까? 그 끝에 오늘의 카타스트로피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예전 최초이 13인이 노아를 추방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옴팔로스에서 기가스 티폰과 오라의 주인을 동조시켜 세계의 의지에 접속, 오라 능력자를 제외한 모든 인간들을 판게아 밖의 차원으로 추방시키기로 결정한 거죠. ㅡ그것이....카타스트로피라고?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단순한 파괴의 의미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카타스트로피는 인류의 영체 속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시공주소를 변경시켜 한 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판게아 밖으로 날려보내는 차원이동이었던 것이다. 가인은 예전 노아의 대군을 어떻게 테라의 13명만으로 추방시킬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런 방법이 있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오라의 주인, 오리하르콘 증폭기, 옴팔로스. 이 세가지 조건만 갖춰지면 충분히 가능해! ㅡ하지만 기가스 티폰만으로는 카타스트로피를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대재해 때의 접촉으로 저는 오라의 주인 자격을 잃어버렸고, 또 세계의 중심인 옴팔로스가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저에게는 그 모든 조건을 갖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사이에 성당기사단의 수중에 있는 시민이 위험해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시민의 안전을 확보하고 시간을 벌 수도 있는 그런 방법이 필요했죠. [끼아아아악!] 폐허가 된 LA의 도시 위로 거대한 흑색의 괴수가 나타났다. 가인은 그것이 D타입으로 변한 쿠사나기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ㅡ요르문간드가 판게아로 파견한 최초의 화신 브라트라입니다. 때 마침 제가 기가스 티폰과 접촉한 그때,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때 노아가 판게아로 원정대를 보냈던 거죠. 너무나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 않습니까? 마치 제가 카타스트로피르 일으키리라 마음먹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ㅡ그, 그럼 설마 대재해 이후 노아가 나타나게 된 것도 당신이 전부......? ㅡ하하하, 설마요. 그런 재주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분명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었겠죠. 저는 이 우연이 가이아가 준비한 계획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가이아는 인류가 타락할 때마다 멸망을 부르고 새 인류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녀가 보기에는 이번의 인류, 테라 역시 멸망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거겠죠. 어쨋든 노아의 참공은 시간을 벌고 싶었던 저에게도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성당기사단은 노아를 몬스터로 명명하고 자신들의 천적인 오라 능력자들을 앞세워 이계의 이능력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뻔뻔스러운 짓거리가 가인 군이 몸담고 있는 피스메이커 입니다. 피스메이커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은 이네스가 연구한 카타스트로피를 노아에게 사용할 목적으로 옴팔로스에 자신들의 본거지를 짓고, 머신 아더라는 티폰의 대용품을 만들고, 오라의 주인인 당신을 찾아낸 거죠. 그런 뻔뻔스러운 짓거리라 할지라도 그 속에 시민을 구할 방법이 있었습니다. 시민을 완전한 오라 능력자로 각성시킨다면! 그 아이가 피스메이커가 된다면! 적어도 노아가 판게아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성당기사단이 그 아이를 위협할 일은 없었죠. 더불어 세상의 오라 능력자들까지 안전해질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노아의 첫 번째 차원도약자 네이 안데르슨을 찾아갔습니다. 그에게 기가스 티폰을 맡기고 그 대가로 노아의 판게아 원정대에 들어가길 요구했죠.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옴팔로스의 탐색도 용이해질 뿐더러 성당기사단의 추적도 피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테라와 노아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으니까요. 그들의 대치상황은 제가 카타스트로피의 조건을 갖추기 전까지는 절대로 깨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면이 바뀌었다. 거기에는 붉은 노을이 있었고, 그 밑으로 대재해 때보다 성장한 시영과 시민이 3년 만의 재회를 나누고 있었다. '더욱 큰 힘을 가지고 싶지 않아?' 그때 시영은 자신이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동생에게 해야만 했다. 그는 시민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행복한 시간만을 가지길 바랐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하하하하! 축하한다, 동생아! 넌 오늘부로 가이아에게 선택받았다! 내가 일깨워 준 힘, 소중히 간직하는 게 좋을 거야!' 깨부숴 버렸다. 그 아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우리 형제를 지키기 위해서. '하하하하하!' 그렇기에 그때의 웃음은 너무나 공허하고 서글플 수밖에 없었다. ㅡ그 뒤는 인내의 시간이었습니다. 티폰을 완전체로 키워낸느 것도, 세계각지의 내룡을 돌아다니며 올팔로스를 찾아내는 것도. 당장이라도 동생을 만나고픈 욕구를 억눌며 하루하루를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유가인, 카타스트로피의 마지막 조건인 오라의 주인! 당신은 대재해로부터 13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가인을 감싼 모든 어둠이 걷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한시영이 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제 힘으로 끝까지 카타스트로피를 이루고 싶었지만....." 그는 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 가인 군. 저와 제 동생 그리고 모든 오라 능력자들을 위해 현 인류를 멸망시켜 주십시오." 오오오오오오오 순간 오라의 주인과 아리아드네의 실이 연결된 티폰이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카타스트로피를 위한 세가지 조건이 모두 갖춰진 거이다. "으음....." 마리는 아까부터 계속되는 오라의 공명에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곧 자신이 누군가의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셨습니까, 아가씨?" 그녀를 안고 있는 사람은 코마히코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에 마리는 정신이 번쩍 깨어 다급히 그의 품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코마히코는 내심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능숙하게 그녀를 땅으로 내려 주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나는 분명.....!" 마리는 당황하며 코마히코에게 묻다가 곧 자신이 유평의 후츠노미타마에 사지나 잘려나갔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 분명 자신은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을 텐데!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의 상처는 이미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가씨의 몸을 신검에 잠식시켜야 했습니다. 멋대로 일을 진행시킨 점 사과드립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코마히코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마리는 자신의 손에 들린 도츠카노츠루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군. 신검에 잠식됨으로써 일시적으로 불사지체가 된 건가? 어쩐지 포션의 회복치고는 너무 뛰어나다 했어. "사과라뇨. 코마히코 씨는 저를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신 것 아닙니까? 오히려 멋대로 뛰쳐나간 제가 사과를 드려야죠. 걱정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마리는 코마히코의 굽힌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에 코마히코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시는 그런 무리한 짓 하지 마십시오. 원래대로라면 크게 혼을 내 줄 생각이었지만....일단은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면목 없습니다." 마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코마히코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부모님들에 대한 얘기를 해줘야 할까. 자신들을 대신해 유평과 맞선 사부들의 마지막 모습을. 마리는 가만히 눈시울을 붉히기만 하는 코마히코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그런데...외삼촌은 어디로 가신 겁니까? 아니, 그 전에 승부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앞에서 유평과 승부를 벌였던 궤도 엘리베이터 부근이 아니었다. 옴팔로스의 중앙 신전이었다. 신전은 현재 하늘의 검은 기가스를 중심으로 붉은 기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어떻게 온 건가요? 코마히코 씨가 외삼촌을 물리치신 겁니까?" "그건...." 코마히코는 인상을 찡그리며 뒷말을흐렸다. 역시 말해 줘야 하는 건가.... 그리고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마리양! 코마히코 씨!" "마리!" 뒤쪽에서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마히코와 마리가 돌아본 그곳에는 AI 슈츠를 입은 수정과 유리 그리고 연구복 차림의 시더가 있었다. 마리는 그 뜻밖의 지원에 반가운 표정을 짓다가 곧 수정의 AI 슈츠 차림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정씨...이번 코스츔은....피스 대원입니까?" "아무리 저라도 이런 상황에서 목숨 걸고 코스츔을 하진 않지요." 마리의 질문에 수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코마히코는 수정의 몸에서 피어나는 패턴 골드의 빛을 확인하고 경탄했다. "수정 씨도 오라능력자셨군요. 그동안 정체를 숨기셨던 겁니까?" "고의는 아니었어요. 저도 이 힘을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기에.... 어쨋든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싸워나갈 피스 골드입니다. 잘 부탁해요." "피스 바이올렛, 시더 웰리스! 수정의 소개에 뒤이어 시더가 벌떡 앞으로 나오며 자신의 존재를 PR 했다. 그 모습이 보기 딱했는지 유리가 감상을 표했다. "명함 내미는 회사원 같아." "으앙! 이런 건 내가 원한 히어로의 길이 아니야!" 시더는 크게 낙담하며 훌쩍거렸다. 마리와 코마히코는 시더마저 오라 능력자였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저마다 중얼거렸다. 뭔가 갈수록 쏟아져 나오는군. 이 오라 능력자라는 것도....그런 그들에게 수정이 물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나요? 가인씨와 시민씨는?" ".....!" 가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깨어난 후로 계속 정신이 없었다지만 설마 이런 중요한 일까지 잊고 있었을 줄이야! 마리는 가인이 죽었다는 유평의 말을 떠울리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마리가 가슴을 움켜쥐고 말을 잇지 못하자 코마히코가 대신 입을 열었다. "앞에서 저희를 상대했던 이가 말하기를....가인 씨는 브루스님과의 싸움에서...죽었다고." "거짓말!" 유리는 버럭 소리지르며 코마히코의 말을 부정했다. 시더도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쓸 생각도 못하며 중얼거린다. 가인이 죽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코하미코는 그런 여인들의 반응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 말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 어디에도 가인 시의 모습은....." "그럴 리가 없어요. 가인 씨가 죽으면 피스 블랙은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어요. 그가 오라의 주인이 죽도록 방관했을 리 없어요." 수정의 단호한 답변에 일행들은 번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아있어? 가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거야? 수정은 무언으로 묻는 일행의 질문에 자신들이 데려온 소년을 돌아보는 것으로 답했다. "피스 카민! 당신의 마스터는 어디 있는 거죠? 이 중앙 신전에 오면 만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마리와 코마히코, 유리와 시더의 시선이 수정이 돌아본 방향을 쫓았다. 그곳에는 어느 새인가 옴팔로스의 중앙 신전에 올라간 유빈이 있었다. 유빈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시끄러! 재촉하지마! 지금 한창 마스터가 교섭을 벌이고 있단 말이야!" "교섭? 누구와 교섭을 한다는 거죠?" "누구긴 누구야! 너희들이 찾는 그 빌어먹을 유가인 녀석이지! 그 녀석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짓을 했던 거잖아!" ".....!" 그의 말에서 가인의 무사함을 확인한 일행은 화색을 띠었다. 다행이다! 살아 있었어! 특히 가인의 죽음에 묵숨까지 내던질 정도로 절망했던 마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미소했다. 유가인, 이 몹쓸 녀석! 대체 어디까지 날 걱정시켜야 속이 시원해질 셈이냐! "쳇, 요란 떨기는!" 유빈은 소란스러원지는 수정 일행의 모습에 투덜거리며 계쏙해서 마스터의 기척을 찾았다. 그의 뇌리에는 아까부터 수정이 했던 말이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피스 블랙이 오라의 주인이었을 때, 그는 이 카타스트로피를 일으켜 LA에 대재해를 일으켰어요.' 웃기지마. 그런 헛소리를 믿을 거 같으냐! 절대로 그럴 리 없어! 절대로! 그런 마음과 달리 유빈은초조해진 표정으로 마스터와 연결된 아리아드네의 실을 더듬었다. '마스터, 어디 계신 거예요? 나와 보세요! 나와서 설명해 주세요! 녀석들의 말이 거짓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마스터!' 오오오오오오ㅡ! 그때 그들의 상공에 있던 티폰이 무시무시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와 시영 사이에 연결된 아리아드네의 실에 어떠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동시에 옴팔로스의 붉은 하늘이 티폰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수정이 긴장한 표정으로 유빈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기가스가 날뛰는 거죠?" "제길! 나도 몰라! 나한테만 물어보지 말란 말이야!" 유빈은 이를 갈며 주위의 거신상 쪽에 몸을 고정시켰다. 그들이 있는 중앙 신전으로 거세게 바람이 불어 닥치는 것이 범상치가 않았다. 실제로 옴팔로스의 붉은 하늘, 가이아의 현현된 의지를 망토처럼 휘감은 티폰은 점점 중앙 신전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유리가 예전 머신 아더 때의 일을 떠올리고 일행에게 소리쳤다. "오라의 주인이, 오빠가 세계의 의지에 접속하기 시작한 거야! 틀림없어! 그때와 같아! 그때처럼ㅡ!" "늦어 버렸나!" 수정은 혀를 차며 재빨리 유리와 시더를 낚아챈 뒤 유빈처럼 근처의 거신상으로 몸을 치했다. 그 뒤를 코마히코와 마리가 따른다. 티폰이 지상에 다다름에 따라 신전 주위의 대기가 찢어질 것처럼 광풍을 일으킨다. 모두는 그 광풍에 몸이 날아가지 않도록 피사적으로 주위의 거신상들을 붙잡을 채 티폰을 올려다 보았다. 오오오오오 서서히 푸른빛으로 백열하던 티폰이 옴팔로스의 신전에 착지했다. 순간, ".....!" 하늘로부터 붉은 섬광이 티폰에게 내리꽂혔다. 끝없이 상승하는 티폰의 초전도 현상이 세계의 의지마저 끌어들일 정도로 강한 영적인력을 발생시킨 것이다. 옴팔로스의 붉은 하늘, 물질계로 침식한 아스트랄 라인이 회오리치며 티폰을 향해 끌려 내려오고 있었다. 옴파로스와 오리하르콘 증폭기, 그리고 오라의 주인이 만들어낸 데우스 엑스 마키나! "으아아아앗!" 일행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섬광과 자신들을 가두는 용권풍의 세기에 비명을 내질렀다. 차원마찰로 인한 격통이 오라 능력자들의 가슴을 뒤흔들엇다. 수정과 일행은 이를 악물며 섬광을 가린 손 사이로 앞을 바라보았다. 섬광의 중심에는 두개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 두 그림자가 각각 누구인지 알아본 유빈과 유리가 동시에 소리쳤다. "마스터!" "오빠!" 중앙 신전에 무릎을 꿇은 티폰 앞으로 한시영과 유가인이 서로 대치하며 서 있었다. 섀도우 다이브를 통해 세계의 기록을 들여다본 그들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후ㅡ! 순간 거짓말처럼 눈앞의 섬광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귀청을 시끄럽게 두들기던 용트림소리마저 자취를 감춘다. 그제야 수정 일행은 천천히 거신상을 붙집고 있던 손을 풀었다. "마스터!" 일행 중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유빈이었다. 기는 티폰의 위압감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시영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시영은 유빈의 거친 포옹에 그제야 신전을 찾아온 외부인들이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절친한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소리쳤다. "하하하!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와 주셨군요. 그렇잖아도 이대로 우리끼리 조촐하게 카타스트로피를 거행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다들 알아서 모여 주실 줄이야! 마치 운명과도 같군요. 카타스트로피를 위해 모인 21세기의 오라 능력자들이라니!" "가인!" 마리는 싱여의 외침에 신경 쓰지 않고 그 앞에 있는 가인을 불렀다. 가인의 몸에는 기이한 푸른빛이 구현되어 있었다. 그것은 여느 때와 같은 패턴 블루의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인체 내의 초전도 현상이 폭주라도 하는 듯한 반응, 리미터가 해제된 오라의 발현이었다. 가인은 굳은 표정으로 시영을 노려보다가 마리의 외침에 일행을 돌아보았다. "선배, 어떻게 다들...." "오빠!" "가인 씨!" "가인!" 유리와 수정, 코마히코와 시더가 가인의 무사함에 감격하며 소리쳤다. 그 반응들에 가인은 어리둥절해졌지만 이내 자신을 반겨 주는 일행의 모습에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앞에서 시영이 보여줬던 진실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런 가인의 심경변화를 마인드 리딩으로 읽어낸 유리가 작게 반문했다. 오빠? "음? 그런데... 몇몇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군요." 시영은 일행을 돌아보다가 자신의 품에 안긴 유빈을 내려다보았다. 유빈은 그의 시선을 받자 우물쭈물 자신 없게 말했다. "마, 마스터! 죄송해요. 아무도 오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는데....또 류바도...." "다들 좋은 상태가 아닌 것 같구나. 일단 이곳으로 불러들여야겠군." 시영은 유빈의 어깨를 토닥이며 아리아드네의 실로 연결된 수하들을 중앙 신전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그의 그림자로부터 한 사람씩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실신한 채 쓰러져 있는 류바 에레노아였다. 그 모습에 시영을 눈썹을 찡그리며 다음 사람을 불러냈다. 그러자 류바 곁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황유평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뭔가에 고전한 듯 역수로 쥔 후츠노미타마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코마히코가 버럭 소리쳤다. "사백!" 유평은 그의 부름에 코마히코 쪽으로 시선을 주며 무뚝뚝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검흔들은 이미 후츠노미타마의 신력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코마히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부님은..... 사부님들은...어떻게 된 겁니까? 어째서 당신만이.....!" "코마히코?" 마리는 코마히코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그의 사부님들이라면.... 내 어머니와 아버지! 어째서 그분들이 여기서 언급되는 거지? 하지만 코마히코는 마리의 의문을 풀어 줄 새도 없이 재차 소리쳤다. "대답하십시오! 사부님들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 유평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코마히코는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부님! 사부님! "이런." 그때 세 번째 사람을 불러내려던 시영은 짧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는 가인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브루스님과 연결된 아리아드네의 실이 끊어졌군요. 스스로 끊어 버린 건지, 아니면 기력이 다해 저절로 끊어진 건지." "....!" 그 말에 수정과 나머지 일행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지나갔다. 수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영에게 소리쳤다. "지금 스승님이 돌아가셨다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저보다도 직접 브루스님과 싸운 가인 군이 잘 알고 있겠죠. 가인 군? 브루스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수정과 일행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이 브루스 류와 싸웠다고! 가인은 대답을 바라는 모두의 시선에 표정이 무거워졌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돌아오라고 했어요." ".....?" "너무 기다리게 하진 말라고...." 가인은 작게 심호흡을 한 후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모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무사할 거예요. 저와 약속했어요. 꼭 다시 만나기로..... 브루스는 절대로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것은 가인 자신을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살아 있을거야. 브루스는 반드시 살아있을 거야.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지않아! 절대로! 그렇게 말하고 입을 굳게 다무는 가인의 모습에 수정과 일행도 덩달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시영은 그런 일행의 분위기에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다군요. 빠진 사람은 진우씨롸 라트, 브루스님입니까? 안타깝군요, 모두가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다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마리의 노기 어린 외침에 시영은 코웃음을 쳤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마십시오. 진우 씨와 라트의 문제는 그들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성당기사단에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쓰러져간 가여운 이들이죠. 브루스님 역시 자신이 한 옛 맹세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을 뿐이고요. 안 그렇습ㄴ까, 가인군?" "......" 시영이 동의를 구하자 가인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일행은 당연히 반박할 줄 알았던 가인이 긍정의 기색을 보이자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시영은 그런 가인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입가의 미소를 짙게 했다. "가인 군, 어쩌면 그들 세 사람은 그런 운명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인류 테라의 원죄에서 비롯된 것이죠. 성당기사단의 이단심문관에 의해 부모를 잃고 복수의 화신이 된 라트 발렌시아, 성당기사단의 달콤한 평화 타령에 속아 라트와 대적해야만 했던 정진우, 그리고 성당기사단의 창시자들인 최초의 13인이 고안해낸 영체증폭술 칠성권의 계승자가 되어 오라의 주인과 대적해야만 했던 브루스 류. 모두들 테라의 성당기사단만 없었더라면, 오라 능력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았더라면 절대로 반목할 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 누구하나 죽지 않았을 거예요." 시영은 가인의 뒤에 있는 수정과 마리, 유리와 코마히코, 시더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성당기사단에 의해 이용만 당해온 불쌍한 사람들이죠. 이제 노아라는 인류의 적도 사라졌으니 성당기사단은 더 이상 피스메이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피스메이커의 오라 능력자들도 제거하려 들겠죠. 거기다 이번 시폰 뤼멘의 반란을 성당기사단이 진정 몰랐을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있었던 겁니다. 용도가 다한 피스메이커를 헌신짝처럼 버린 거라고요. 방치시킨 겁니다." "마, 말도 안돼!" 마리와 코마히코, 시더는 그 말을 반박했지만 전말을 알고 있는 수정은 작게 침음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성당기사단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이번 사태를 막을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지구방위군의 병력을 동결시키고, 네이 안데르슨을 견제하여 시폰 뤼멘을 고립시켰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가인 군, 당신은 평소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그 때문에 피스메이커가 된 거고요? 그렇다면 고민할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여기 당신이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습니다. 이들만 지켜내면 되는 겁니다. 이 사람들만 앞으로도 계속 소중히 여기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영은 가인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라 능력자 이외의 인류를 추빙시키십시오." "....!" 그 말에 일행은 시영과 가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정이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거였나. 이것이 카타스트로피의 정체였나?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테라가, 성당기사단이 어떤 녀석들인지는 당신이 보여 준 진실들로 뼈저리게 잘 알았어.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 모두를 추방시키는 건 잘못된 거야. 오라 능력자가 아닌 사람들 중에도 분명 우리를 이해해 주느 사람들이 있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들 모두가 성당기사단 같은 사람들은 아니야!" "모두를 지켜내야 한다. 그런 이상론으 펴는 겁니까? 제가 예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행복해질 순 없다고. 모두를 지켜낼 순 없다고. 지켜지는 사람이 있으면 지켜지지 않는 사람도 반드시 존재하거늘. 애초부터 지킨다는 말 자체가 이기적인 개념인데 어떻게 이타적으로 모두를 지키겠다는 겁니까? 당신이 몸을 담았던 피스메이커만 해도 테라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누아를 방치시켰습니다. 멸망해가는 차원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판게아로 파견한 노아의 원정대를 남김없이 귀환시켰죠. 그 과정에서 당신의 친구였던 리리스 역시 희생당했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 지킨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지키겠다는 모두란 테라의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되겠군요. 그것 참 대단히 제한적인 모두로군. 영원히 차원을 떠돌게 된 리리스만 불쌍하게 되었어요!"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시영에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분명 리리스의 죽음 이후 그는 피스메이커에 회의를 느끼고 모두를 지킨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으니까. "끄러니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지켜내십시오. 자신의 손에 닿는 이들만 확실하게 지켜내십시오. 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고 오만이고 거짓입니다. 그러다간 지켜낼 수 있는 사람들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게 될 거예요." 시영의 말에서는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의 흔들림도, 주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가인은 시영이 자신의 동생을 위해서 해온 일들을 모두 다 보았던 것이다. 그는 동생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주위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왔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가인 군, 부탁드립니다. 제 동생을 구해 주십시오. 저의 이기적인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당신의 사랑에 호소하겠습니다. 가인 군이 진정 제동생을 사랑한다면, 그 아이를 위해 주고 싶다면 이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가인은 치밀어 오르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시영은 진정으로 부탁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자신의 동생을 구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가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피스메이커의 모두를 돌아보았다. 물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의 선택을 대신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선택은 오직 가인만이 할 수 있었다. 시민과 오라 능력자들을 지키기 위해 테라의 모든 인류를 추방시키느냐, 아니면 이대로 포기하고 테라의 성당기사단의 영원히 쫓겨 다닐 것이냐. 분명 시영의 말대로라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답은 하나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가인이 고민하고 있을 때 시영의 곁에 있던 유평이 입을 열었따. "그렇다면 인류인 나는 너의 적이라는 거군." 소리없는 발도! 신속의 발도술이 유평에게서 시전되었다. 무음의 검광, 무영신풍류 사흉 도철이었다. 난데없이 유평이 시영을 공격한 것이다. 푸화아아아악 그리고 후츠노미타마가 정확하게 시영의 오른쪽 옆구리부터 심장을 거쳐 왼쪽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미처 그림자 도약으로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운요에 접어든 도철은 인지한다고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기술이 아니었다. ".....!" 하지만 시영의 왼쪽 어깨를 관통하고 나온 후츠노미타마는 유평에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시영의 왼손이 후츠노미타마의 귀기가 서린 검날을 움켜쥐고 있었다. 유평은 두 눈을 부릅뜨며 시영을 노려보았다. 시영은 언제 검에 베었냐는 듯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유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인과 하나의 존재로 세계에 인색되는 한 그에게 죽음이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적은 베어 버린다. 그뿐이다." 유평은 짧게 대꾸하며 후츠노미타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신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검의 날을 쥔 시영의 손이 짙은 암흑으로 물들어있었다. 패턴 블랙의 이미지 메이킹으로 현현되어진 혼돈, 블랙 아포칼립스였다. 그 검은 혼돈이 천천히 시영의 손에서 번져 나와 후츠노미타마의 검날을 덮어간다. 시영은 낮게 경고했다. "그동안 함께한 정을 생각해서라도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후츠노미타마를 놓으십시오. 어차피 평범한 인간인 당신은 신검만 없으면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요." "후....후후. 신검만 없으면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그 정도의 평가밖에 안되는 건가, 나는? 후후후후. 이러니 그 녀석들에게도 질 수밖에 없었군." 유평은 자신에게서 떨어진 코마히코와 마리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승부는 네놈들의 사부들이 이겼다." 아 "덕분에 깨달았지. 역시 무영신풍류는 강하다는 것을 말이야." 유평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제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시영의 블랙 아포칼립스는 어느덧 신검의 날을 먹어치우고 손잡이를 넘어 유평의 손에 당도하고 있었다. "정말 놓지 않을 겁니까?" "바보 같은 소리. 손에서 검을 놓는 검사가 어디 있다는 거냐." 시영의 마지막 질문에 유평은 태연자약하게 코웃음을 쳤다. "후... 그렇다면ㅡ!" 파싯 시영이 손을 휘두르자 순간 유평의 몸이 검은 혼돈으로 완전히 뒤덮이며 수축되었다. 그리고 수축이 끝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영체조차 남김없이 무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 사백의 소멸을 코마히코와 마리는 넑이 빠진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비록 지금까지 줄곧 생사를 걸고 싸워온 유평이지만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자신들과 같은 무영신풍류의 정신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영은 유평에게 베였던 옷자락을 털며 혀를 찼다. "자, 생각지도 못한 일에 시간을 빼앗겼지만 다시 얘기를 계속할까요? 가인군, 마음의 결정은 내렸습니까?" "마, 마스터." 그러나 시영의 질문에 답한 것은 그의 곁에 있던 유빈이었다. 시영은 그를 내려다보며 표정을 굳혔다. "유빈, 지금 내가 바쁜 것이 보이지 않느냐? 용건은 나중에 말하도록 해라." "마스터....." 평소의 유빈이라면 시영의 말을 절대로 거역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최초로 마스터의 명을 어기고 있었다. 유빈은 더욱 시영의 옷자락에 매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LA 에 대재해를 일으켰던 장본인이...마스터라는 게 사실인가요?" 순간 유빈을 바라보는 시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람드링은 저격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옴팔로스의 전경이 널리 보이는 외곽의 거신상 위였다. 그는 그고에 엎드려 오르크리스트의 무기였던 대전차 라이플을 중앙 신전의 용권풍에 겨누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왜 이렇게 자꾸만 숨이 거칠어지는 걸까. 역시 시폰 뤼멘의 아켄석 탄에 맞은 왼쪽 가슴 부위가 문제였다. 상처는 포션으로 이미 완전히 치료되었지만 영체가 입은 상처는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무너진 영체의 그릇 사이로 카르마에너지가 끊임없이 빠져나간다. ㅇ쩌면 이미 완전히 고갈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안 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람드링은 아늑해지려는 정신을 집중하며 능력을 전개했다. 이미 그의 몸은 한계였다. 이런 몸을 이끌고 이 세계의 끝까지 내려온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집념의 승리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자신의 거친 숨소리로 귓가가 멍해졌다. 오른쪽의 원격투시와 왼쪽의 순간예지가 싱크로 되자 곧 천리안이 발동되었다. 일단 천리안이 발동되자 중앙 신전을 가린 용권풍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보였다. 모든 이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자신이 찾던 인물을 찾아냈다. '크, 크크. 있다. 있어....' 그람드링은 모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입으로 킥킥거렸다. 그는 퀭해진 눈으로 자신의 사격범위 안에 들어온 한시영을 바라보았다. '네놈에겐 반드시 갚아 줘야 할 빚이 있었지.' 오르크리스트를 죽인 놈. 내 오른쪽 눈을 빼앗아간 놈.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놈.' 그래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람드링이 한시영을 증오했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녀석만 없었더라면 나도, 크리스도 그리고 그 멍청하게 이용만 당한 이그나이트들도 이런 저주받은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게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녀석만 없었더라면! 녀석만 없었더라면! '너희들 때문에...너희 오라 능력자들 때문에... 빌어먹을 여신의 은총을 받은 녀석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람드링의 시야가 뿌옇게 젖어들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리안을 사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어째서, 이제 와서 갑자기 이런 눈물이.... '용서할 수 없어. 다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그람드링은 라이플의 총구를 시영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그러다 잠시, 그는 생각을 바꿨다. 문득 시폰 뤼멘이 한 말이 생각난 것이다.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죽이는 것 너무 쉬우니까.' 크크크. 크크크크크. 그람드링은 배를 잡고 키득거렸다. 그렇게나 증오한 주제에. 그래서 결국에는 제 손으로 죽여버린 주제에. 여전히 자신은.... '나는 영락없이 뤼멘의 자식이로군.' 그람드링은 낄낄거리며 총구의 방향을 바꿨다. 이번에 그가 노린 것은 시영과 대치해 서 있는 유가인이었다. 그래, 피스 블랙. 녀석의 목표는 저 병신이었다지? '그래, 눈앞에서 네놈의 소망을 산산조각 부셔 주지. 그게 더 괴로울 거야. 그게 더 고통스러울 거야.' 허억. 허억. 허억. 허억ㅡ!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람드링은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자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이 이상은 한계인 모양이었다. 한 놈밖에 죽일 수 없다는 건가? 제길! 제길! '어서 빨리 쏘지 않으면. 빨리. 어서 빨리.....' 그람드링은 점점 감겨가는 눈으로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넣었ㄷ. 마치 주위의 공기가 시멘트로 변한 것처럼 그의 몸을 짓누른다. '아아.....괴로워. 너무 힘들어. 크리스..... 마스터....' 그는 무의식 중에 시폰 뤼멘을 부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이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그 차가운 금속음이 그람드링 뤼멘이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세상의 목소리였다. 시영은 생각해 보았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분명 지금까지 잘못 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마스터!" 하지만 뭔가가, 뭔가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법이 틀렸다고 외치던 시민부터, "대답해 주세요! LA의 대재해는 마스터가 일으킨 거였나요?"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유평 그리고 지금은 절박한 표정으로 쇠치는 유빈까지. 모든 게 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뿐이었다. 분명 잘못 된 것은 없었을 텐데....어째서..... "마스터!" "그래." 시영은 유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LA의 대재해는 나와 티폰이 일으킨 다운 버스터였다." "아...." 순간 유빈은 못들을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비특거리며 시영에게서 떨어졌다. 고개를 저으며 방금 전 마스터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빌어먹을 사고가, 내 부모를 앗아간 사고가, 나에게 저주받을 오라를 남기 사고가 모두, 모두 마스터가 한 일이었다니! 시영은 그런 유빈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왜 그러는 거냐, 유빈? 함께 오라 능력자들의 세상을 만들자고 하지 않아쓰냐? 그런데 그 때의 사고로 몇명이 죽든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카타스트로피가 일어나면 매한가지인 것을." "하, 하지만.... 하지만 그 사고로 제 부모님이....아빠와 엄마가...." "어차피 그들도 오라 능력자가 아닌 인간이었을 뿐이다. 만약 그들이 살아 있었다고 한들 오라 능력자인 너를 자식으로 받아 줬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네 양어머니가 너에게 했던 행동들을. 어차피 인간들은 다 똑같아. 자신보다 힘이 있는 자들을 무서워하고 꺼려한다. 결국에는 힘이 있는 자들을 따돌리고 멸시하지. 특히 자신들이 다수의 우위를 장악했을 때는 더욱 잔인해진다." 그런 시영의 말에 가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오라 능력이 밝혀진 후 학교에서 받았던 모든 차별과 멸시가 떠올랐던 것이다. 옴팔로스로 내려오기 전에 지구방위군이 발표한 성명의 내용 역시 떠올랐다. 피스메이커의 도움으로 호의호식할 때는 언제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해방되지 즉시 누명을 덮어씌우는 모습이라니! "그, 그래도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그냥, 그냥 우리가 지배하면.... 인간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면..." 유빈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가 꿈꾸는 오라 능력자들의 유토피아는 인간과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그는 인간을 증오했지만 그들이 사라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인간들에게 절망을 받은 만큼 자신도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 주고 싶었다. '너 같은 건 내 자식이 아니야!'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들고 싶었다.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아들이라니! 아무리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라지만 저런 자식은 내 쪽에서 사양이야.' 오라 능력자의 세상이 되면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거라고. 예전처럼 자신을 내치지는 못할 거라고, 무시하지는 못할 거라고. '날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유빈은 인간을 증오했지만, 그 증오만큼이나 또 인간을 갈구했던 것이다. 그는 결코 인간들이 사라지는 세상을 원치 않았다! 그런 유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유리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인간을 똑바로 사랑하지 못하는 저 모습이라니. 인간에게 애정이 있었던 만큼, 그들에게서 애정을 받지 못했기에 그 애정은 전부 증오로 변해 버렸다. 누군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저렇게까지 삐뚤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서? 그래서 너도 내게서 돌아서겠다는 거냐, 유빈?" "아, 아니요! 저는.... 제가 마스터를 따르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그때 그때 마인드 키퍼와 마인드 브레이커는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가이아가 자신의 대리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카타스트로피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음을 유리와 유빈에게 알린 것이다. '그람드링 뤼멘!' 그가 이 용권풍 밖에서 안의 누군가를 노리고 있었따. 그리고 노리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안 돼!" 유리는 저도 모르게 가인을 향해 뛰어갔다. 그람드링의 총구가 가인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것을 똑똑히 사념으로 느꼈다. 뒤이어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사념이 느껴지려 했다. 유리는 가인의 앞으로 뛰어오르며 양팔을 벌렸다. 제발 시간에 맞아라! 피육 방아쇠가 당겨지는 사념. 다은 순간 가인 앞으로 피가 튀어 올랐다. 털썩 그리고 누군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 가인과 시영은 경악하며 쓰러진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영이 소리쳤다. "유빈!" 그람드링의 라이플이 쏜 아켄석 탄에 맞은 것은 유가인도 이유리도 아닌 피스 카민 마유빈이었다. 가인을 대신해 아켄석 탄에 맞으려던 유리를 유빈이 감싸 안았던 것이다. 유리는 멍하니 발밑에 머리를 처박은 유빈을 내려다보았다. "유빈! 괜찮은 거냐!" 시영이 다급히 달려와 유빈을 끌어안았다. 유빈은 아켄석 탄에 가슴을 관통당한 채 입가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킥킥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헤, 헤헤. 바보같이... 또 그 자식에게... 대체, 대체 몇 번을 당하는 건지." "말하지 마! 즉시 아스트랄계로 보내 주마! 살 수 있어!" 시영은 유빈을 자신의 그림자로 집어넣으려 했다. 하짐나 유빈의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 하지 말아요, 마스터. 저 때문에, 저 같은 녀석 때문에 더 이상 마스터의 목숨을,.... 낭비하지 마세요. 마스터는 충분히....." 그는 더 이상 시영이 누군가를 치료하는 데 자신의 생명을 쏟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유빈의 생명은 빠르게 꺼져가고 있었다. 그는 희미한 눈으로 자신이 구한 유리를 바라보았다. '평소.... 마스터를 위해서 죽으리라...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그 의문을 마지막으로 유빈은 패턴 카민의 빛을 잃었다. "유빈?" 시영은 자신의 품에서 편안히 잠든 유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리는 입을 가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유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유빈이 마지막에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던진 사념을 들을 수 있었다. ㅡ다시 하 번.... 보고 싶었는데. 그때, 함께 본.... 야경.... 작년에 유리가 슬퍼할 때 그가 데라고 가 준 아파트 단지의 옥상. 거기서 보았던 야경. 유빈은 내심 그때의 일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흐느끼는 유리를 가인이 끌어안으며 아켄석 탄이 날아온 용권풍 밖을 노려보았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람드링 뤼멘!" 시영은 유빈을 내려놓고 자신의 그림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옴팔로스의 그림자들 속에서 자신이 찾던 이를 발견하고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림자를 통해 빛을 잃은 AI 슈츠의 소년이 밖으로 끌려나온다. 소년은 시영의 말대로 그람드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유빈을 잃은 분노를 그에게 풀려고 했던 시영은 자신의 손에 축 늘어져 있는 그람드링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정말이지... 정말이지 끝까지 날 화나게 만드는 군! 이 지긋지긋한 인간들! 저주 받은 죄인들!" 시영은 가인을 돌아보며 눈을 희번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걸 얘기해 주지 않았군요, 가인 군! 왜 인류가 카타스트로피를 맞이해야 하는지! 아까저는 제 목적 때문에 카타스트로피를 일으킨다고 얘기했죠? 예, 그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가지 조건이 더 필요합니다. 바로 가이아가 카타스트로피를 원해야 한다는 것! 가이아가 인류의추방을 원할 때만 카타스트로피는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가이아가 원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가이아가 인류의 추방을 원할 때는 언제일까요? 노아의 경우를 생각하면 알 수 있겠죠. 바로 인류가 가이아의 힘을 악용할 때 입니다!" 시영은 그람드링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ㄷ. 거칠게 선그라스를 벗는 그의 두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가이아에 접속하여 멋대로 차원의 힘을 사용하는 것도 악용이지만 여신의 대리자들을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도 악용이지요. 성당기사단은 피스메이커 프로젝트로 가이아의 힘을 넘보는 것도 모자라서 우리 오라 능력자들마저 복제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물들이 바로 이 루미네선스들이죠. 이들은 이네스가 채취한 제 DNA를 시폰 뤼멘이 넘겨받아 배양해낸 복제인간들입니다. 인류를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666의 낙인들이죠!" 시더는 신음에 가까운 탄성을 흘렸다. 그럼 유화가 알아낸 루미네선스들의 DNA 도너는 한시영이었다는 건가! 성당기사단은 오라의 주인을 복제하려 했던 거군! "카타스트로피는 인류 스스로가 자초한 파멸입니다! 저는 거기에 불을 붙여 줬을 뿐이죠. 세계의 의지마저 멸망하기를 바라는 현 인류라니! 여기에 더 이상 무슨 동정의 여지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아직도 망설일 거리가 남아 있단 말입니까, 가인 군!" 시영의 불같은 추궁에 가인은 유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시민과 똑같은 시영의 얼굴 때문에 꼭 그녀가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았다. 왜 선택하지 않느냐고? 왜 시영의 말을 듣지 않느냐고? 이대로 자신과 모두를 구하지 않을 셈이냐고? "나, 나는....." 가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피스메이커의 사람들, 노아의 사람들, 학교의 친구들과 선생님, 사고로 죽은 자신의 가족들.... 아무리 시영의 말대로 지킨다는 것이 이기적인 개념이고, 그 때문에 한정된 사람들밖에 지킬 수 없다 하더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택하지 않는다니! 그런 것이 용인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이 정말 세계의 의지가 택한 방법이란 말인가? 시영은 끝까지 선택을 주저하는 가인의 모습에 한탄했다. 이대로는 영영 끝이 나지 않겠군! '그렇다면 직접 시민이와 대면시켜 줘야겠어. 그 아이를 본다면 한결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가 쉽겠지.' 시영은 그림자 감옥속에 가둔 시민을 꺼내기 위해 그녀와 연결된 아리아드네의 실을 당겼다. 순간, "커ㅡ!" 시영은 입으로 피를 토해내며 비명을 내질렀다. 시민과 연결된 아리아드네의 실을 통해 흑성가의 암시가 흘러들어왔다. 대체 무슨 짓을! '나에게 암시가 통한다는 건 자기 자신한테도 암시를 걸었다는 건가!' 시영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당장 그림자 감옥 속에서 시민을 해방시켰다. "하아!" 다급한 신음소리와 함께 시영과 가인 사이에 있던 그림자에서 한 인영이 떠올랐다. 평소와 달리 옅어진 노란빛의 AI 슈츠를 입은 여인, 한시민이었다. 그녀를 본 순간 가인과 유리가 다급히 시민을 부축했다. "시민씨!" "시민 언니!" "아... 가인.....유리.....양." 시민은 피로 붉게 물든 눈동자로 가인과 유리를 확인하고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AI 헬멧이 없는 그녀의 얼굴은 자신의 눈과 코, 입에서 흘린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흑성가의 암시를 스스로 받아내느라 영체의 타격이 심각했던 것이다. 아스트랄 바디의 손상률이 극심해지자 그 피해가 물질계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시민 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가인은 시민의 처참한 상태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뒤이어 다가온 수정과 마리, 코마히코와 시더도 시민의 상태를 살피며 신음했다. 가인은 앞에 있는 시영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시민 씨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자기 동생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놓고, 뭐? 동생을 지키겠다고?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바보 같은 녀석." 시영은 가인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동생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흑성가에 타격을 입은 그의 육체는 이미 원상태로 복원되어 있었따. "멍청한 짓을 했구나, 한시민. 네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시영의 말에 시민은 수정과 마리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일어나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 방법이 아니면...네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내 말은 그런게 아니다. 아직 네 몸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거냐?" "....?" 시민은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ㅡ!" "그래, 이제야 알았겠지. 만약 네가 나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면 그 의도는 성공한 거다. 내 지난 노력들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니까." 가인과 일행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시영과 시민을 번갈아보았다. 시영은 더없이 침통한 표정이었고, 시민은 안색이 창백해진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가인은 그런 시민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여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민 씨, 왜 그러는 거예요? 저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 가인씨....나는.....나는....." 시민은 다가오는 가인에게서 뒷걸음치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시영은 그런 시민의 팔을 낚아채며 가인에게 말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궁금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지 궁금해요? 그렇다면 가르쳐주죠!" "싫엇ㅡ!" 시민이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시영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의 손에서 생성된 블랙 아포칼립스는 이미 시민의 전신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수축.아포칼립스는 시민이 입고 있던 AI 슈츠와 그 안의 옷을 혼돈으로 되돌리고 그녀를 알몸으로 만들었다. 가인과 일행은 시영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다들 의아해하다가 곧 시민의 새하얀 나신을 바라보는 순간 저마다 입을 벌려야 했다. "시, 시민 씨ㅡ?" 가인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거기에는 한시민이라고 불리던 여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한시영의 쌍둥이 형제인 한시민이라는 남자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 AI 슈츠가 사라진 시민의 몸은 가녀리기는 했지만 분명 남자의 것이었다! "흑성가를 자신에게 사용하는 바람에 영체가 오라 능력을 유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타격을 입은 거다. 덕분에 내가 각성시켜 준 카스트라토의 힘이 사라져 버렸군. 다시 남자로 돌아가는 것도 당연하지." "나, 남자....." 유리와 마리 ,시더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단지 시민이 전에 남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수정만이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시영은 우두커니 시민을 바라보고만 있는 가인에게 시니컬하게 말했다. "자, 왜 우리가 형제인지 이제 알겠습니까? 시민의 패턴 옐로우는 각성에 따라 육체와 영혼의 상극이 심화됩니다. 더 강한 영적인력을 발휘하기 위해 성별이 변화되는 거죠. 때문에 각성한 동생은 한동안 여자로 살아왔고, 가인 군은 그런 동생에게 반했던 겁니다. "...." "후후, 왜 말이 없습니까? 그렇게나 놀란 겁니까? 아니면 속은 기분이라도 드는 겁니까? 뭐 그야 무리는 아니죠. 좋아했던 사람이 실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니. 그래서 제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던 겁니다." 그런 시영의 말은 비수가 되어 시민의 가슴에 꽂혔다. 시민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가인에게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가인 씨. 저는 말하고 싶었어요. 언제나, 언제나 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어요. 정말이에요. 결코 숨길 생각이 아니었어요. 믿어 주세요." 아아, 이 얼마나 비참한 결말이란 말인가. 시민은 아무 말도 없는 가인의 태도에 그가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잘도 뻔뻔스럽게 행동해 왔다고. 모든 것을 숨기고서 잘도 사람의 마음을 농락해 왔다고. '좀 더 진즉에 얘기했더라면.... 그를 맏고 사실대로 얘기했더라면....' 그랬다면 적어도 이런 식으로 폭로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나 처참한 기분은 아닐 텐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가인 씨. 미안해요." 시민은 그저 울면서 그 말만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영은 그런 동생의 애처로운 모습에 나지막이 탄식했다. 가인을 향한 시민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나 저 소년이 좋은 거냐? 그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나 슬픈거야? 시영은 자신이 시민을 구하려고 해왔던 일들이 오히려 동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조금씩 어긋나던 톱니바퀴가 쌓이고 쌓이더니 결국에는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시민을 위해 준비한 계획이었다. 오라 능력자인 그 아이를 성당기사단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카트스트로피였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뒤집어져 버렸다. 카스트라토의 능력을 잃어버린 시민은 가이아가 행하는 추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영체를 보호하는 정신장벽(오라 쉴드)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면 영체의 시공주소가 바뀌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카타스트로피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시민은 인류 테라와 함께 판게아에서 추방될 것이다. 시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시민에게 말했다. "그래. 이래도 저래도 고통스러울 뿐이라면 차라리 둘 다 죽는 편이 낫겠지. 어차피 여기까지 진행된 카타스트로피를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어. 그건 누구도 불가능해. 가인 군이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해도 그건 추방이 지연될 뿐이지 중지가 되는 것은 아니야." 그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았다. 빛의 입자에 휘감긴 가인 역시 어깨를 꿈틀거린다. 시영이 아까부터 가인에게 강요했던 것은 카타스트로피를 일으키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아니었다. 카타스트로피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미 인류의 추방은 멈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테라의 녀석들을 따라서 추방된다면 유일한 오라 능력자이 너는 십중팔구 녀석들의 모르모트가 될 거다. 노아가 테라 인코그니트에서 바나베인의 능력자들로 판게아에 귀환할 방법을 실험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그전에 네가 네 목숨을 거두어 주마. 추방이 시작되기 전에 삼계의 피드백에 접어든다면 시공주소가 바귀는 것을 면하고 다음 세대에 이 판게아에서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까." "무, 무슨 소리야! 지금 시민 언니를 죽이겠다는 거야!" 유리가 당황하며 시영에게서 시민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리도 도츠카노츠루기를 들고 그 앞을 가로막는다. "방금 전까지는 동생을 구하겠다더니 이번엔 죽이겠다고? 그렇게 제멋대로 구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방해하지 마라!" 순간 시영의 외침과 함께 유리와 마리의 그림자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일어나 그들의 몸을 죄었다. 시영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우리 형제의 일에 참견하지 마라!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이것만이 내 동생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방법이 있다면 주저하고 있을 틈 같은 것은 없었다. 동생을 죽이겠다는 시영의 행동은 언뜻 냉혹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동생을 위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생을 구하는 일이 비록 그를 죽이는 일이 될지라도 그것이 최선의 수단이기만 하다면 시영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수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맹목적이고....일방적인 사랑이었다. 실제로 수정은 시민에게 다가가는 시영을 막지 못했다. 그녀도 시영이 선택한 방법 외에는 시민을 구할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이아의 차원추방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어싿. 그것도 시공주소가 바귀기 전에 삼계의 피드백으로 접어들어야만 하는! 그것은 영체의 영적인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수정이었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시민은 그렇게 자신을 죽이러 오는 형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바라보았ㄷ. 그러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경멸을 받은 판이었다. 더 이상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민은 눈물을 흘리며 시영의 손길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예의 아포칼립스로 자신을 영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해 줬으면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영 가인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만둬"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시영의 행동을 제지했다. 시민은 감았던 눈을 뜨다가 곧 자기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른 입자에 휩싸여 있는 AI 슈츠의 소년! 가인....씨? 시민의 작은 중얼거림에 가인이 살며시 뒤돌아보았다. 시민의 예상과 달리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경멸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안해요, 시민 씨. 잠자코만 있어서. 잠시 생각할 게 있었어요." 생각? "제가 시민 씨에게 고백했던 날을 생각했어요. 우성 씨와 수미 씨의 결혼식에서 돌아왔을 때 말이에요. 그때 시민 씨가 이상할 정도로 저를 차갑게 대했잖아요?" 아.... "제가 아는 시민 씨는 분명 그럴 분이 아닌데, 그런 식으로 남의 마음을 비웃을 분이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고, 일부러 냉담하게 대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민을 바라보는 가인은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이 있었던 거군요." "가인 씨,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있었죠. 시민 씨가 매번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시는 일이. 사실 그때마다 제가 얼마나 애간장이 탔는지 아세요? 시민 씨가 언제 쯤 얘기해 주실까. 오늘 쯤이면 얘끼해 주지 않으려나. 언제나 먼저 묻고 싶은 걸 참아가면서 시민 씨 쪽에서 먼저 얘기해 주길 기다렸어요." "가인 씨...." "그래서 전 오늘 시민 씨에 대해 알게 돼서 좋았어요. 제가 모르는 시민 씨를 더 알 수 있어서 기뻤어요. 비록 이런 식으로 엉겁결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시민 씨를 더 알 수 있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시민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아, 가인씨. 가인씨. 그렇게 동생과 가인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시영은 마리와 유리에게서 그람지 묶기를 거두며 싸늘하게 말했다. "비키십시오, 가인 군. 어설픈 동정으로 제 동생의 마음을 흔들지 말아 주세요. 당신이 지금 시민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저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순 없어요. 아니면 저 대신 시민이를 죽이기라고 하겠다는 겁니까?" "그런 일은 할 수 없어요." 가인은 고개를 저으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시영에게서 시민을 지켰다. "하짐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순간 그림자에서 풀려난 마리 곁에서 한줄기 바람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마리가 도츠카노츠루기를 쥔 손에서 힘을 풀자 신검은 그대로 가인의 손이 있는 곳까지 깃털처럼 날아갔다. 가인은 도츠카노츠루기를 쥐어 올리며 말을 계속했다. "카타스트로피라는 건 옴팔로스와 오라의 주인, 오리하르콘 증폭기 세 개가 충족될 때만 일어난다고 했죠? 그렇다면 그 중 하나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어떨까요? 완전히 물질계에서 사라진다면?" "뭐....." 시영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하지만 그가 뭔가를 저지하기도 전에 가인으로부터 거센 질풍이 쏟아져 나와 주위에 바람의 벽을 형성시켰다. 마리와 유리, 시민과 일행들은 질풍에 몸이 휩쓸리려는 것을 견뎌내며 소리쳤다. "가인!" "오빠!" "가인 씨!" 가인은 자신을 부르는 동료들에게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손에 쥔 신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도츠카노츠루기의 검신이 백열하기 시작했다. 차원진동의 의한 아포칼립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시영은 그 혼돈의 생성에 가인이 말한 방법을 짐작하고 이를 갈았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티폰이나 당신에게 아포칼립스를 사용한다고 해서 카타스트로피는 멈추지 않습니다! 한 번 시작된 카타스트로피는 반드시 진행될 수 밖에 없어요! 행여나 자결을 할 생각이라면 당장 그민두십시오!" "저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어요. 가이아와 젒ㄱ하고 있는 것은 당신만이 아니니까요. 한 번 시작된 카타스트로피는 반드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행시키면 되는 거예요!" 오오오오오 가인의 의지에 발맞춰 그와 아리아드네의 실이 연결된 티폰이 등 뒤의 날개에서 그림 리퍼를 꺼내들었다. 사용자가 시영에서 가인으로 바뀐 탓인지 티폰은 그 개통능력까지 변화되어 있었다. 그림 리퍼의 반물질 절삭성 커터로 패턴 블루의 차원진동이 현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이내 가인이 신검에 생성시킨 것되 마찬가지인 아포칼립스를 그림 리퍼에도 생성시켰다. "진행시킨다고?" "세계의 의지가 카타스트로피의 시작과 끝을 인식하는 것은 차원이동에 의해서예요! 그렇다면 임의적으로 차원을 이동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세계의 의지는 그것을 카타스트로피로 인식하겠죠!" 가인은 그렇게 외치며 자신의 손에 들린 신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렇다. 임의적인 차원이동! 그 방법을 가인은 브루스와의 결전에서 배울 수 있었다. 차원진동의 격돌로 생성되는 혼돈의 문. 그 문을 향해 돌입하는 승천이야말로 곧 차원이동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브루스 류! 그가 그런 방법을.....!" 시영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설마 다 죽어가던 그 남자가 그런 차원이동방법을 가인에게 남겼을 줄이야! 시영은 어디선가 당황한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한 브루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따. '꼴좋구나.' 시끄러워! 시영은 환청을 향해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입으로는 가인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서 당신은 자기 혼자만을 희생해서 모두를 구하겠다는 겁니까? 그래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여전히 테라와 성당기사단은 판게아에 군림해 있을 테고, 남아있는 오라 능력자들은 여전히 그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할 거예요! 그런 방법으로는 누구 하나 행복해 질 수 없단 말입니다!" "나는 당신처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 같은 것은 없어요. 다만..... 다만 시민 씨가 살아주길 바래요. 그저 살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런 건 위선이야! 자기 자신이 불행해지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건 자기만족일 뿐이야!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생각을 해 봐요, 가인 군! 이 세상이 바뀌지 않고 시민이 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오라 능력자인 그 아이는 여러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며 살아갈 거야! 고통뿐인 인생일 거라고! 그건 당신이 직접 겪어 봐서 알고 있을 거예요! 힘이 있는 자에게 사람들은 어떤 배려를 해 줬지? 어떤 취급을 했던 거야? 그저 괴물이었을 뿐이잖아? 배척만 받아왔을 뿐이잖아?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안 돼.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변하지 않는다고! 계속 고통만 받을 뿐이다!" "맞아요. 시영 씨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틀린 것도 있어요." 가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달라지는 것은 있어요. 변하는게 있어요. 저도 시영 씨처럼 생각했어요. 아버지, 어머니, 신이. 내 가족들이 사고로 죽고 저 혼자 살아남았을 때. 그때 저는 왜 제가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문 ㅏ고통이었어요. 그대로 가족들을 따라 죽고싶었죠." 하지만 가인들은 자신의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러다 모두를 만났어요. 다시는 웃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줄곧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의 시선이 마리에게서 멈췄다. "마리 선배, 선배는 언제나 절 지켜봐 주셨죠. 힘들 때 언제나 제 힘이 되어 주셨어요. 절 이끌어 주셨어요. 만약 선배가 없었더라면 전 진즉에 지쳐 쓰러졌을 거예요. 여기까지 모두와 함께 해쳐올 수 없었을 게예요." "가인....." 그의 시선이 유리에게서 멈췄다. "유리야, 네가 있었기에 난 신이에 대한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어. 네가 날 오빠라고 불러줬기에, 웃으면서 따라줬기에 난 신이에 대한 기억들을 추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어. 내 가족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웃으면서 돌아볼 수 있었다. 네가 없었더라면 난 여전히 그때의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거야." "오빠...." 그의 시선이 수정과 코마히코, 시더에게 향했다. "수정씨, 코마히코 씨, 시더. 피스메이커의 모두가 없었더라면 전 소중한 것들을 깨닫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만 ㅏ힘들 일인지....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아무것도 몰랐을 거예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가진 평화의 소중함도 알지 못한 채 매일을 살아왔을 거예요." "가인씨....." "가인...."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시민에게 향했다. "그리고 시민 씨. 시민 씨를 사랑 할 수 있어서 전 너무나 행복했어요. 시민 씨의 목소리와 행동 하나하나에 언제나 기뻐하며 다음날을 기다릴 수 있었죠. 내일은 시민 씨와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하면서 살 수 있었어요. 비록 전 시민 씨를 화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울게도 만들었지만, 시민 씨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 후회하지 않아요. 시민 씨를 사랑한 것은 저에게 다시없을 소중한 보물이에요." "가인 씨...." 시민은 눈물을 흘리며 질풍 속에 있는 가인을 바라보았다. 가인 씨가 지금 날.... 날 사랑한다고..... "시민 씨, 사랑해요. 남자든 여자든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시민 씨가 시민 씨라서,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시민 씨라서 사랑합니다. 그동안 제대로 얘끼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마음 아프게 해서 죄송해요." "저도..... 저도 사랑해요. 사랑해요, 가인 씨......" 시민은 복받쳐 오르는 기쁨에 저도 모르게 신께 감사드렸다. 아아, 감사합니다. 가인 씨를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인 씨를 사랑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인은 시영을 돌아보며 한 자 한 자 힘줘서 말했다. "살아만 있으면, 살아만 있으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시영 씨의 말처럼 고통뿐일지라도 모르겠지만 행복해질 기회도 얼마든지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 시민 씨가 살아 주길 바래요. 최선을 다해 모두를 살릴 거예요. 자기만족일 뿐일지라도, 하하. 그래요. 전 바보라서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이 정도 밖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나지 않아요. 이 일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어요." 가인은 천천히 수중의 신검을 들어올렸다. 그의 뒷모습을 피스메이커 모두는 누믈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전 평화를 만들[피스메이커] 능력 같은 것은 없어요. 하지만 평화라는 게 있다는 것만은 믿고 있어요. 그렇기에 노력할 거예요. 내가 동경했던 사람들처럼." 리리스! 진우 씨! 브루스! "그 사람들이 선택했던 길을 믿고 따르겠어요!" 오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티폰이 아포칼립스가 실린 그림 리퍼를 가인에게 휘둘렀다. 가인은 바람의 날개를 생성시켜 거인의 정면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위이이이잉 그림 리퍼의 아포칼립스와 도츠카노츠루기이 아포칼립스가 부딪치며 만들어낸 진동이 전 차우너을 뒤흔들었다. 차원진동과 차원진동의 격돌! 그러자 그 사이로 혼돈의 파편이 생겨나며 거대한 차원의 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인은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그림리퍼의 아포칼립스를 밀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나아가!' 여기서 한 발짝 더! '물러서지 말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가인은 전신을 짓누르는 아포칼립스의 여파에 대항해 찢어질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타오르는 신검으로 티폰의 아포칼립스를 베어나간다. 질풍의 검 "으아아아아아압ㅡ!" 바람 가르기 순간 옴팔로스에서 시작된 패턴 블루의 빛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윽" 황연우는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검에 몸을 의지한 채 비틀거리는 그녀의 몸에서는 왼팔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앞의 일전에서 유평의 사흉 도철에 잘려나간 것이다. 그녀는 과다한 출혈에 희미해져가는 시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부는....어떻게 된 거지?' 자신이 기절했다면 남은 비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혼자 유평과 맞서 싸웠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그 사이에 승부가 끝난 것은 아니겠지! "....."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지아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성비영, 그는 그녀에게서 멀지 않은 앞에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마치 쓰러진 자신의 아내를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연우는 그 등에 넋을 빼앗기고 있다가 이윽고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시야에 가까워지는 비영의 모습은 처참한 것이었다.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으며 양팔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있었다. 그야 말로 서있는 것이 기적인 몰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발등에 꽂아 넣은 검 때문이었다. "당신...." 연우는 미소하며 비영의 등에 손을 올렸다. 하짐나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디든 끝까지 따르기로...그렇게 약속한 사람은 저이건만....." 그녀는 비영의 등에 머리를 기대며 몸을 떨었다. 그녀의 손에 맞닿은 남편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비영은 서 있는 상태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당신이 먼저 가버리면 어쩌자는 건가요? 예?" 연우는 비영의 차가운 몸을 끌어안으며 오열했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옴팔로스의 중앙 신전에서부터 시작된 푸른빛이 하늘을 타고 퍼져나간다. 그 푸른빛에 드러난 비영의 얼굴은 피로 붉게 물든 와중에도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우는 하늘의 빛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비영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아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이 사람이! 엄연히 범인들을 도와줬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24구역 파출소. 거기에는 한성고에서 지구방위군의 일을 방해한 한 체육교사와 네 명의 학생들이 붙잡혀 진술서를 쓰고 있었다. 한성고의 체육교사이자 2학년 1반 담임인 하지연은 경찰의 계속되는 질문에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결국 참다못한 경찰은 진술서 쓰는 것을 때려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는지!" "자자, 진정하시고. 가서 담배 좀 피우다 오세요. 제가 한 대 드릴까요?" 지연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 경찰에게 건네주었다. 경찰은 그 담배를 건네받고 기가 막히는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대로 흡연실로 걸어가 버렸다. 독종들! 지독한 것들! 그렇게 경찰을 보내고 난 지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벌써 네 시간이 넘게 뭐하는 짓이래? 그만 포기하고 보내 주면 안 되려나?" "서, 선생님. 정말 이렇게 무대포로 행동해도 되는 걸까요? 이러다 진짜 잡혀 들어가면 어떡하죠?" 지연의 옆에 앉아있던 박재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연은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한대 후려치며 핀잔을 중ㅆ다. "에라, 이! 그러면? 콩밥 먹기 싫으니까 친구를 팔겠다 이거냐?" "으,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팔기는 누구를 판다고. 그래도 저녁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도통 풀어 줄 생각을 안 하니까...." "음." 재영의 말에 지연도 불안해졌는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표정을 풀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래도 지들이 죄도 없는 교사와 학생들을 어떻게 하겠냐 ? 저 사람들도 우리가 처지 곤란하니까 이렇게 붙잡고만 있는 거야. 만약 우리가 큰 죄라도 저질렀더라면 진술서고 나발이고 당장 감옥에 처넣었겠지." "응, 그렇기는 하네요." "자자, 그런까 끝까지 걔겨라. 여기서 밤샐 각오하고 다들 버티는 거다." "으아, 교사로서의 자각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 "자각이 없기는! 밤새는 니들이 걱정되니까 내가 동행해 주는 거잖아! 교사동행!" 지연은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투덜거리는 재영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그 녀석들은 알고 있으려나? 지연은 지구방위군의 포위를 뚫고 도망친 수정 일행을 생각하며 팔짱을 끼었다. 아까부터 TV에서 나오던 지구방위군의 성명발표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다들 무사하겠지? 별일 없는 거겠지?" 지연은 작게 중얼거리며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뜨인다. 저건? "다들 석방이다!" 그때 흡연실로 갔던 경찰이 인상을 쓰며 지연 일행이 이쓴 곳으로 돌아왔다. 그 바람에 지연은 방금 전까지 본 것을 까먹고 재영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갑자기 왠 석방? 방금 전까지는 절대로 보내 주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만. "아....." 하지만 그들은 곧 자신들이 왜 풀려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경찰 뒤편에는 지연과 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양호교사 박미정이 서 있었던 것이다. 26구역 정진우의 집. "다들....괜찮으려나." 윤미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비어 있는 이웃집을 돌아보았다. 딸과 함께 한성고등학교의 축제에 갔던 그녀는 동행이었던 수정의 충고에 따라 일찌감치 지구방위군의 검문을 통과해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미연은 TV에서 계속되는 지구방위군의 성명발표에 불안해하며 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을 바라봉ㅆ다. 거기에는 고인이 된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모두가 무사히 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무사히......' 사진 속의 진우는 그런 미연의 부탁에 걱정 말라는 듯 활짝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연은 불안함을 애써 털어내며 미소했다. 그래, 모두가 돌아왔을 때는 맛있는 요리를 해 주자. 깜짝 놀랄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는 거야.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거실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의 딸이 미연을 불렀다. "엄마!" "응?" 돌아본 곳에는 하나가 창문을 바라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미연은 무슨 일인가 싶어 하나에게 다가가 같이 창밖을 바라봉ㅆ다. "왜 그러니, 하나야?" "봐봐! 예뻐!" 하나는 창밖의 붉은 노을을 가리켰다. 그 손을 따라 노을을 올려다 본 미연은 짧게 탄성을 터뜨렸다. 붉은 하늘 사이로 신비한 푸른빛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도화지에 물감이 번지는 것만 같은 풍경. 미연은 그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긴 채 중얼거렸다. ".....예쁘네." "그치? 응?" "후후, 그래. 정말 예쁘다." 미연은 하나를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두 모녀는 하늘의 푸른빛이 가실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ㅡ여기는..... 가인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두운 회색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물질계에서 끝없이 아스트랄계로 뻗어나가는 웜홀이었다. 특별한 시공주소도 없이 차원을 떠도는 미아. 만약 탐랑의 차원진동과 충동했다면 탐랑의 진동이 기록하는 시공 주소가 그를 칠성권의 권사들이 향하는 천계로 인도했겠지만, 가인은 카타스트로피를 멈추기 위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티폰의 차원진동과 혼돈의 문을 만들어냈다. 당연히 기록된 시공주소도, 특별한 목적지도 있을 수 없었다. 가인은 기분이 울적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나도 결국 리리스처럼... ㅡ오빠. 가인은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목소리는! ㅡ신아? 가인의 앞으로 투명한 영체의 모습을 한 어린 소녀가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사고로 죽은 그의 여동생 유신이었다. 유신은 오빠를 마주하며 미소지었다. ㅡ오랜만이야, 오빠. ㅡ너는.....! 순간 가인은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이아와 의식이 연결된 그는 이 눈앞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인은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곧 눈시울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ㅡ오랜만이야, 신아. 그러고 보니 그전에도 두 번인가 만난 적이 있지? 한번은 작년 용장호에서 가이아 애드번트 이펙트를 일으켰을 때. 도 한번은 올해 8월, 지구방위군의 융단폭격을 막기 위해 질풍의 검을 사용했을 때. 그 직후 가인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신이와 재회할 수 있었다. 신이는 그런 가인의 생각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ㅡ오빠의 생각대로야. 나는 가이아의 의식. 오라의 주인과 만나기 위해 오빠와 안면이 있는 사후의 영체들 중 하나의 모습을 하고 나온거야. 그래도 내가 유신인건 변함이 없다. 가이아의 의식이란 곧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영체가 모인 군집령이니까. ㅡ나와 안면이 있는 사후의 영체? 그렇다면..... 가인이 생각을 떠올리자 어느 순간 눈앞의 신이는 진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ㅡ이 녀석! 하하하. 그래, 날 불러 줄 줄 알았다! 오랜만이다, 유가인! ㅡ지, 진우 씨. 가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생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히죽 웃고 있었다. ㅡ울기는 왜 우나, 사내 녀석이. 모처럼 반갑게 만났는데 웃어야지! ㅡ그, 그래요. 그렇죠. 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마주 미소지었다. 진우는 자기도 코끝이 찡해졌는지 가인의 머리를 일부러 거칠게 쓰다듬어 중ㅆ다. ㅡ자자, 미연이와 하나는 건강하지? 다들 별 문제 없고? ㅡ예, 미연이 누나와 하나는 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시민씨도, 마리 선배도, 유리도, 다들, 다들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가인은 브루스와 피스메이커의 몰락에 대해서도 얘기할 까 했지만 도저히 진우의 얼굴을 보고 그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런 가인의 기색에도 뭔가를 눈치챘는지 씁슬하게 미소지었다. ㅡ......그래. 그럼 됐어. 수고했다. 모두를 지켜줘서 고맙다. ㅡ고맙다뇨. 오히려 제가, 제가 진우 씨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ㅡ..... ㅡ그래요. 줄곧 사과하고 싶었어요! 테레이아를 죽인 것은 진우 씨의 고의가 아니었는데, 리리스를 그렇게 만든 것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분명, 분명 진우 씨도 괴로웠을 텐데. 그런데 전.... ㅡ테레이아와 리리스? 우리를 말하는 거야? 순간 고개를 든 가인 의 눈앞에서 진우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을 가진 친구였다. 동시에 드림 다이브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그녀의 또 다른 세계에서의 모습이었다. 테레이아와 리리스! ㅡ테, 테레이아? 아니, 리리스인가? ㅡ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죠? 반가워요, 가인 씨. ㅡ아, 테레이아가 가인과 대면하는 건 처음이겠네. 가인! 이 모습으로 나와 얘기하는 것도 처음이지? 테레이아는 낯선 태도로 가인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고, 리리스는 외모는 낯설지만 태도는 친숙하게 인사했다. 가인은 그제야 리리스가 테라에서 테레이아의 육체를 빌려 생활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테레이아의 육체가 본래 가지고 있던 영체와 노아에 있을 리리스의 영체가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가인은 리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ㅡ리, 리리스? 정말 리리스야? 테레이아가 여기 있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어쨋 ㅓ네가? ㅡ으응? 뭐야, 그래서 나와 다시 만난 게 싫어? 만나지 말 걸 그랬나? 리리스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가인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ㅡ아니, 하지만, 하지만 너무 뜻밖이라서....나, 나 다시는 널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ㅡ후후. 농담이야, 농담. 네 말대로 난 원래 시공주소를 잃고 영원히 차원을 떠돌아야 했지. 리리스는 저 멀리 다른 차원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ㅡ카이 브릿드 알지? 그 아이가 노아에 남아 있는 내육체의 생명 유지장치를 부셔 버렸나 봐. 그 덕분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하여튼 난 떠돌이 신세를 면하고 세계의 의지에 합류할 수 있었지. ㅡ카이 브릿드가.... 가인은 리리스를 끔찍하게도 아꼈던 그녀의 동료를 떠올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영원히 차원을 떠도는 그녀를 보다 못한 카이가 원로원의 명령조차 거부하고 리리스의 육체를 죽여 그녀의 영체를 자유롭게 풀어 준 모양이다. 동생을 죽이겠다던 한시영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했던 카이 브릿드나. 가인은 그들의 기구한 사랑방식에 감탄과 탄식을 동시에 흘려야만 했다. 그래도.... ㅡ둘 다....좋아 보이는 거 같네. ㅡ응! 가인의 웃음에 테레이아와 리리스는 고래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들은 가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도, 또 가인이 생각지도 못한 고인들로 차례로 나타나 그와의 재회를 가졌다. 그러던 중 가인은 그 사람이 아까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루스 류! 분명 그도 여기 왔을 거라고 생가갷ㅆ는데,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여기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래, 그렇구나!' 가인은 화색을 띠며 이 아스트랄 너머에 있을 물질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며 기쁨을 느꼈다. 그랬어. 역시 그랬던 거야! 그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지! 살아 있었던 거야! '그래, 약속했는 걸! 다시 만나기로! 그때까지 기다려 주겠노라고!' 아.....!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인은 작게 탄식했다. 자신에게는 이제 돌아갈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약속을 지킬 방법이 없어! 가인은 그때 자신을 홀로 보내고 뒤에 남은 브루스를 떠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브루스. 약속....지키겠다고 했는데, 금방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리고 모든 재회가 끝나자 가이아의 의식은 다시 처음에 나타난 신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이가 가인에게 물었다. ㅡ오빠, 소중한 사람들은 지킬 수 있었어? ㅡ.....덕분에 무사히. 과연 자신이 한 행동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시영의 말대로 단순한 자기만족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ㅡ앞으로 오빠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혼자 계속 살아가게 될 거야. 그래도 후회하진 않겠어? 적어도 나는.... ㅡ후회하지 않아. 가인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는 그런 오빠의 눈가가 붉게 변해 있는 것을 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ㅡ그래. 그 마음.... 앞으로도 잃어버리지마. 앞으로도 계속. 마지막까지. ㅡ 응, 마지막까지!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完>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DK 二部 次回豫告 2033년 11월 15일, 인류의 카타스트로피가 시작된 그 날. "전 평화를 만들(피스메이커) 능력 같은 것은 없어요. 하지만 평화라는 게 있다는 것만은 믿고 있어요. 그렇기에 노력할 거예요. 내가 동경했던 사람 들처럼!" "힘이 있는 자에게 사람들은 어떤 배려를 해줬지? 어떤 취급을 했던 거야? 그저 괴물이었을 뿐이잖아? 배척만 받아왔을 뿐이잖아? 근본이 바뀌지 않 으면 안 돼.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 변하지 않는다고! 계속 고통만 받을 뿐이다!" 실질적으로 인류 테라는 멸망해버렸다. =-=-=-=-=-=-=-=-=-=-=-=-=-=-=-=-=-=-=-=-=-=-=-=-=-=-=-=-=-=-=-=-=-=-=- 그리고 3년이 지난 2036년. =-=-=-=-=-=-=-=-=-=-=-=-=-=-=-=-=-=-=-=-=-=-=-=-=-=-=-=-=-=-=-=-=-=-=- 타앙! 거칠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언제나 철부지로만 보이던 하나가 분 노를 숨기지 않으며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노려보는 눈길을 마주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누구보다도 과거를 잊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녀였다 는 것을……. "바보 같아! 엄마도 언니도! 어차피 지난 일은 지난 일이잖아!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 과거 타령은 그만 좀 하란 말이야!" 울먹이며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하나의 모습에 나도, 미연 언니도 아무런 말 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이렇게 과 거에 집착하기만 해서는, 행여나 잊어버릴까봐 움켜쥐기만 해서는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난……." 누가 그랬던가. 가장 무서운 것은 고통도 죽음도 아닌 망각이라고. 그렇다. 우리는 망각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무의식 중에 망각을 바라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깨달음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두려움이었다. =-=-=-=-=-=-=-=-=-=-=-=-=-=-=-=-=-=-=-=-=-=-=-=-=-=-=-=-=-=-=-=-=-=-=- 지구방위군 지정 1급 감시 대상 이유리.(코드명:피스 핑크) 한때 구 피스메이커의 피스 대원으로 활약했던 이상능력자. 2033년 11월 15일을 기점으로 자진 지구방위군에 투항했으 며, 그 대가로 피스 그린 정진우(死)의 가족인 윤미연과 정 하나의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현재, 그녀들과 함께 동거 중이며 틈틈히 군의 상부가 지시 하는 이상능력자의 탐색과 확보를 돕고 있다. =-=-=-=-=-=-=-=-=-=-=-=-=-=-=-=-=-=-=-=-=-=-=-=-=-=-=-=-=-=-=-=-=-=-=- 패턴 레드의 힘이 담긴 절단 앞에 제 형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 도 없었다. 반물질 절삭성 커터가 그리는 붉은 폐곡선에 닿은 블러디 캐슬의 파수꾼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바닥에 거꾸러진다. 그녀의 검은 한치의 용서도 없이 총기를 든 가드들의 사지를 베어버렸다. "하아. 하아. 그래. 얼마든지 덤벼라! 절대로 한놈도 돌려보내지 않는다! 끝까지 상대해주겠어!" 가드들에게서 튄 피가 그녀가 입은 AI슈츠의 붉은빛을 한층 더 붉은 핏빛 으로 물들였다. 피스 레드 성마리는 홀의 복도에 있는 이십여명의 가드들 을 혼자 쓰러뜨렸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한듯 재차 다음 사냥감을 찾고 있었 다. 거칠게 숨을 터뜨리면서도 희번뜩 눈을 빛내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 로 한 마리의 흉폭한 야수였다. "아가씨……." 뒤를 따르던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는 격하게 흔들리는 마리의 등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어긋나버린 거지? 성마리.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만은 지켜내겠다고 코마히코는 굳게 다 짐했다.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지켜준 두 사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맹세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그는 이 3년간 최선을 다해왔다. 그리고 여기 까지 그녀의 생명을 지켜올 수 있었다. 언제나 무모한 짓을 도맡아하는 마 리 때문에 코마히코는 생명마저 불사해야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3년전과는 너무나도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타인의 피를 뒤집어쓰고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자괴하고 만다.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사부님들이 그에게 지켜달라고 했던 것은 어쩌면……. 어쩌면 그녀의 안위 가 아닌……. '3년전 아가씨가 보여주셨던 웃음.' 그 올곧은 마음을 지켜달라고 한 게 아니었을까……? =-=-=-=-=-=-=-=-=-=-=-=-=-=-=-=-=-=-=-=-=-=-=-=-=-=-=-=-=-=-=-=-=-=-=- 지구방위군 지정 1급 테러리스트 성마리(코드명:피스 레드) 반 블러디 노블맨 활동을 벌이는 신생 피스메이커의 행동 대장. 세계 각지에 위치한 블러디 캐슬을 세 개나 파괴한 최대, 최악의 테러리스트다. 언제나 최전방에서 살육을 자 행하기에 그 별명 또한 레드 머더러(Red Murderer). 언제나 피스 버밀리온 카구라 코마히코를 대동하고 다닌다. =-=-=-=-=-=-=-=-=-=-=-=-=-=-=-=-=-=-=-=-=-=-=-=-=-=-=-=-=-=-=-=-=-=-=- "주인님." 미국 워싱턴 DC의 펜타곤. 이곳은 전 세계에 위치한 블러디 캐슬의 중심지이 자 블러디 노블맨의 지배자, 네이 안데르슨이 기거하는 거처였다. 그 때문에 붙은 이름 또한 로스트 템플(잊혀진 사원). 그 이름은 신의 믿음을 저버렸기에 사라진 예배당을 뜻하고 있었다. "미끼는 이미 던져놓았습니다." 로스트템플의 블랙타워에 위치한 국방장관실. 어두운 방안에서 한 여인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여인의 붉게 빛나는 외눈에 걸맞게 차갑고 음습 하기 짝이 없었다. 외눈의 여인, 에르체베트 바토리의 보고에 창가의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미소를 띄었다. "아아. 정말이지……원념이 서린 인간들만큼 성가신 것은 없군." 남자의 이름은 네이 안데르슨. 인류 테라의 뒤를 이어 세계를 지배하는 블러 디 노블맨의 주인이자 어둠의 제왕. 그는 지난 3년동안 내내 자신들의 통제를 방해해온 적들을 향해 조소를 흘렸 다. "이번에야말로 뿌리째 뽑아주마. 과거의 망령들을!" 그리고 멈춰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第26話 Ｄａｒｋ Ｋｎｉｇｈｔ Ｂy Ｎext Ｎeo =-=-=-=-=-=-=-=-=-=-=-=-=-=-=-=-=-=-=-=-=-=-=-=-=-=-=-=-=-=-=-=-=-=-=-=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우리의 눈 앞을 지난 그것, 공간을 가르고 블러디 캐 슬의 외곽 벽에 구멍을 낸 검은 소용돌이의 존재를. 그것은 지난 3년동안 조 금도 잊어버릴 수 없었던, 너무나 그리운 과거의 잔영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용돌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처, 천공권?" 중얼거리고 나서도 여전히 실감나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이 바로 그것이었을 까? 정말 그 천공권이 맞았던 걸까? 하지만,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천공권이 여기에 나타났을 리가 없다. 그 도 그럴 것이 천공권을 사용했던 유일한 오라 능력자는, 내가 사랑했던 그 남 자는 분명 3년 전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 않은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 로 가버렸지 않은가? 분명 그럴 텐데……. "설마…… 너는……?" 옆에서 들려오는 마리의 중얼거림에 나는 앞의 검은 소용돌이를 본 사람이 나만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그것은 분명 천공권이었다. 그것은 그 남자만이 쓸 수 있었던, 그와 함께 한 2년동안 줄곧 보아왔던 패턴 블루 의 능력임이 분명했다. 패턴 블루의 천공권이 틀림 없어! =-=-=-=-=-=-=-=-=-=-=-=-=-=-=-=-=-=-=-=-=-=-=-=-=-=-=-=-=-=-=-=-=-=-=- 오라전대의 진정한 최종장. =-=-=-=-=-=-=-=-=-=-=-=-=-=-=-=-=-=-=-=-=-=-=-=-=-=-=-=-=-=-=-=-=-=-=- 부서진 외벽을 따라 밖의 밤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밖의 네온 사인들이 발하 는 빛이 전기가 나간 빌딩의 내부를 밝혀준다. 하지만 바람도 빛도, 부서진 외벽에 서있는 한 남자의 그림자에 의해 가로 막히고 있었다. 남자를 바라보던 내 머리속이 하얗게 변해간다. 아무런 생각 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멈춰가는 시간 속에서 하염없이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볼 뿐이다. 후우우우우― 남자의 등에 달려있던 검푸른 망토가 거세게 휘날렸다. 그것은 예전 머신 아더의 등에 달려있던 오리하르콘 스래드로 만들어진 오라 클록을 사람의 몸 에 맞게 줄여놓은 물건이었다. 그 오라의 망토를 덮어쓴 남자는 검푸른 AI슈 츠를 장착한 오라 능력자였다. "아……." AI헬맷의 사이로 보이는 하얗게 샌 머리카락도, 예전보다 검게 물들은 오라 도,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았어.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지난 3년간 흘려온 눈물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눈물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기뻤기에, 너무나 그리웠기에, 너무나 반가웠기에, =-=-=-=-=-=-=-=-=-=-=-=-=-=-=-=-=-=-=-=-=-=-=-=-=-=-=-=-=-=-=-=-=-=-=-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오빠." 그랬기에 흘려야만 했던 환희의 눈물이었다. ...............................AURA CROPS PEACE MAKER ＤＫ COMING SOON! (출판본과는 달리 중간에 빠진 부분이 여러군데 있습니다.) 오라전대 피스메이커 연재장소 http://www.drwk.com/serial/frame.php?idx=911&bidx=7 Neo군(작가) 블로그 http://nextneo81.eglo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