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 2부 5권 Story 13 보물찾기 카운터에 엎드려 하품을 하고 있는데 지니가 나에게 다가왔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무슨 일인데요?” “가게에 관련된 일입니다.” 지니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건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자리를 옮겨 얘기하도록 하지요. 야! 나 대신 카운터 좀 맡아!” “예, 알았어요, 히로님.” 인디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고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하지만 인디는 생물학적으로 엄연히 남자다. 남자가 치마를 입다니! 이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다! “......” 뭐, 지가 좋아 입고 다닌다는데 신경 끄도록 하자. 무엇보다 잘 어울리기도 하고. 난 지니와 함께 직원실로 들어갔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니는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같은 커피라도 지니가 타면 뭔가 다르다. “드시지요.” 난 사양 않고 커피를 마셨다. 지니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럼 얘기를 시작하시지요.” “어제 건물주를 만나 얘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무슨 얘기요?” “건물주가 이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더군요.” “이민이요?” “예. 아들은 이미 미국 시민권자라 하더군요.” “미국 시민권자요?” “원정출산으로 낳았다고 합니다.” “......” 하긴, 미쳤다고 돈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애 낳겠냐? 우리나라는 속인주의를 택하고 있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속지주의를 택하고 있다. 속인주의란 혈연으로 국적을 정하는 것이고, 속지주의란 출생한 지역으로 국적을 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에 가서 애를 낳으면 그 아이는 우리나라 국적과 미국 국적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이중국적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국적자는 만 22세가 되기 전에 한쪽의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이중국적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대다수는 미국 국적을 선택한다. 그래야 원정출산한 보람이 있지 않겠나? 참고로 미국 시민권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미국 시민권을 갖게 되면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가능하니 영어 때문에 속 썩을 일 없고, 남자의 경우에는 병역의무를 피하는 것이 가능하다. 원정출산하는 부부들은 원정출산을 일종의 투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원정출산 비용 정도야 나중에 어학연수 보내는 것에 비하면 껌값이라나? 사실 그 의견에 대해서는 나도 동감한다. 영국이나 미국, 필리핀, 호주 등의 영어권 국가를 가보면 전부 한국인이다. 전부 영어 배우려고 몰려간 것이다. 백날 자동차 팔아봐야 뭐하나? 그 돈이 어학연수 비용으로 다시 해외로 빠져나가는데. 뭐, 원정출산 문제는 교육, 경제, 군대 등등 대한민국 사회 전반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얼마 전 원정출산한 아줌마 인터뷰를 보니 대답이 가관이더라. ‘한국이 살기에 좀 위험한 곳이잖아요. 언제 북한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입시 경쟁도 치열하고, 억지로 군대에 끌려가야 하고. 부모된 입장에서 아이를 좀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가 이 아줌마만큼의 모성애를 지니고 있다면, 대한민국 신생아수는 0명이 될 것이다. 사실 이러저런 이유를 대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나 병역 기피다. 그게 아니라면 원정출산 하기 전에 태아 성감별부터 할 리 없지. 그래, 다 좋다. 애가 미국 시민권자여서 병역 기피한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나? 문제는 이 애들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산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을 가지고 미국에서 살아간다면 병역 기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과 한국 국적을 가지고 한국에서 살아가다가 병역 의무를 질 때가 되면 한국 국적을 포기하니 문제가 되는 거다. 한국에서 살았다는 것은 한국인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혜택을 누렸다는 거다. 그런데 권리와 혜택을 누리고 난 후 책임과 의무는 기피하겠다니! 원정출산 전문여행사 앞에 써진 ‘권리는 두 배로! 책임은 반으로! 당신의 자식도 이중국적자가 될 수 있습니다!’ 라는 문구가 과장 광고는 아닌 셈이다. 내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어째서 원정출산을 법적으로 제재하지 않느냐는 거다. 원정출산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입국하는 것은 미국법상 엄연히 불법이다. 만삭인 상태에서는 아예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러니 만삭의 몸으로 출국하는 것은 사실상 불법인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원정출산에 대한 어떠한 법적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 이중국적자에 대한 제재 역시. 어째서일까? 만삭의 몸으로 장거리 비행기 여행을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고, 미국 역시 시민권 취득을 목적으로 한 원정출산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나라는 원정출산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는 걸까? “......” 뭐, 이유야 뻔하다. 원정출산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상류층이다. 이중에는 국회의원이나 장관, 심지어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사람도 있다(결국 당선은 안 됐지만). 입법을 하는 사람들이 원정출산의 최대 수혜자이니, 그 사람들이 미쳤다고 원정출산을 제재하는 법안을 입법하겠는가? 장려하지 않는 것만 해도 국민들은 고맙게 생각해야할 것이다. 으음, 안 그래도 신생아수는 점점 줄어드는데 원정출산은 점점 늘어가다니. 나라를 구성하는 필수 요건 세 가지는 국민, 영토, 주권이다. 이 셋 중 한 가지라도 없으면 나라는 유지될 수가 없다.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는 국민과 영토는 있었으나 주권을 상실했었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젠 국민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한국 영토 안에 미국 시민권자들만 살고 있다면 그게 한국이냐? 미국의 51번째 주지. “그런데 원정출산으로 낳은 아들이 미국 시민권자여서 건물주가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예? 건물을 내놓는대요?” “예. 저한테 건물 매입 의사가 없냐고 물어보더군요. 건물 전체를 매각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먼저 우리 쪽에 매각 의사를 타전해 온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라이의 집’ 이 입주한 이 건물은 지상 5층에 지하 1층 건물이다. 그중에서 우리가 지하 1층과 지상 1,2층을 임대하고 있다. 지하 1층은 창고로, 1층은 인형 가게로, 2층은 찻집을 비롯한 복합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사실상 우리 가게가 건물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으음, 임대료 부담도 컸으니 이번 기회에 건물을 통째로 매입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사일런스 백작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건물주가 급하게 떠나는 모양이니 시세보다 싸게 매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좁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무지 좁지요. 24평짜리 집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이사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이사요?” “건물을 매입해서 5층 전체를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집과 가게의 이동이 편리해질 뿐더러 평수가 배 이상 넓어지니 삶이 더욱 윤택해질 것입니다.” “그거 괜찮은데요. 그런데 건물 매입 자금은 충분한가요?” “이제까지 모아놓은 돈과 은행에서 매입하는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번 기회에 건물을 매입하여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리모델링이요?” “예. 기간은 한 달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가게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매출 감소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편의성과 훗날 더욱 많은 매출을 생각한다면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 역시 사일런스 지니! 눈앞에 닥친 일에 급급해 하기보다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라니! 나는 건물을 매입할 생각만을 했지, 매입한 건물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하지만 지니는 건물 매입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리모델링할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훌륭한 자가 내 밑에 있다는 것은 나의 홍복(洪福)이로다! “사일런스 백작님께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일을 진행시켜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이언스 공작님. 공작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건물 매입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가격 협상부터 담보 대출까지 지니가 다 알아서 한 덕분에 나는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서류에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세 장 다요?” “예.” “뭐, 그러죠.” 그래도 사인은 열심히 했다. 사인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내 사인이 워낙 유니크해서 말이지. 건물 매입이 끝나자 바로 리모델링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게 설계도입니다.” 지니는 내 앞에 커다란 종이뭉치들을 늘어놓았다. 거기에는 도면과 함께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이건 누가 만든 건가요?” “부족한 솜씨나마 제가 만들어 보았습니다.” “헉! 사일런스 백작님이요?” “예.” “건축할을 배운 적이 있으신가요?” “예. 한때 취미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이쪽 세계의 건축 방식에도 관심이 많아 건너온 후에도 꾸준히 연구를 했구요.” “으음, 그렇군요. 그런데 이 설계도 믿을 만한 건가요?” “요즘 교제하는 여성 중에 건축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그 여성분께 이미 설계도를 검증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분께서 이번 리모델링 작업에 참여해 주시기로 약조되어 있습니다.” “......”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요즘 교제하는 여성’. 이번에는 건축 디자이너란다. 건축 디자이너면 상당한 엘리트. “20대 미모의 여성인가요?” “물론입니다.” “......”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 “그 여자 월수는 얼마나 되나요?” “프리랜서인지라 일정치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인지라 연수입이 최소 3억 정도......” “헉!” 3억이라니! 그것도 최소! 그런 여자랑 결혼하면 평생 무위도식해도 되겠다. 새삼 지니가 다르게 보인다. 난 지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우리 친하게 지내요, 사일런스 백작님." "물론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을 향한 저의 충성심은 조금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두 손을 움켜잡으며 서로의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저기......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그 여성분께서 얼마나 원하시는지? 너무 많은 금액을 원한다면 제가 좀 곤란한지라......"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십시오. 그 여성분께서는 아이언스 공작님의 인품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감동하여 이번 일에 어떠한 금전적 대가도 원치 않늗나 말씀하셨습니다." "아하하, 그렇군요." 내 인품에 반한 게 아니라 지니의 얼굴을 보고 반한 것이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쨌든 공짜로 해준다는 게 중요한 거다. "그럼 자재비랑 인건비만 필요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최단 기간 내에 공사를 끝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 겠습니다. 그동안 아이언스 공작님께서는 휴가라도 다녀오십시오." "하긴, 제가 요즘 너무 열심히 일하긴 했지요." "그렇습니다. 이번 기회에 재충전 시간을 가지실 필요가 있다고 생 각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가게 입구에 공지를 써 붙였다. (라이의 집 내일부터 휴업) 라이의 집이 어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서비스로 다시 찾아뵐 것을 약속드립니다. "왠지 이상한 느낌이야." "응? 뭐가?" 내가 묻자 루시아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갑자기 휴업을 하니 좀 서운한 느낌이 들어서. 넌 어때?" "뭐, 그건 그렇지. 갑자기 실업자가 된 느낌이랄까?" "그동안은 잘 몰랐었는데, 이 가게에 정이 많이 든 것 같아." 루시아는 쓸쓸한 눈빛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난 그런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짝 끌어안았다. 조금만 기회가 생겨도 바로 스킨십을 시도하는 나. 루시아와 조금이 라도 가까워지고 싶은 나의 노력은 이렇듯 처절했다. "괜찮아, 루시아. 한 달 후에는 더 멋진 모습으로 재개장할 테니까." "응." * * * * 드디어 라이의 집이 휴업에 들어갔다.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부를 깨끗이 비워야 했다. 건물을 매입하는 시점에서 다른 가게들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었기에 건물 전체를 비우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은 1층의 진열대에 놓인 인형들을 박스 안에 넣고 포장했다. 크로니스와 인디는 건물의 장식물과 가구등을 밖으로 옮겼다. "꼭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해야 하나요?" "이번 리모델링은 외부 공사뿐만이 아니라 내부 공사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건물은 일제시대 때 지어졌습니다.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이번 기회에 보강 공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흐음, 보강 공사 중요하죠. 무엇보다도 안전이 우선이니." "그렇습니다. 다행히 이 건물은 튼튼하게 지어졌기에 별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세월의 흐름에 따른 부식을 보강하고, 현재 공법에 맞게 재시공할 생각입니다." "그 점에 대해선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잘 알아서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예. 최선을 다해 아이언스 공작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난 창고에 있는 짐들을 옮기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어린 엘프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자신의 몸보다도 커다란 박스를 두 손으로 들고 걸어가는 라이. 앞이 보이지 않는데다가 박스가 무거운지 심하게 비틀거린다. 비틀비틀~. 저러다가 어디 부딪치지나 않을까 걱정이군. 쿵! "우에에엥~!" "......" 저럴 줄 알았다. 난 재빨리 라이에게 다가갔다. 라이는 날 보더니 더욱 크에 울음을 터뜨렸다. "우에에엥~우엥~우엥~!" 원래 애들은 주위에 누군가가 있으면 더 크게 울기 마련이다. 난 라이을 끌어안고 다독여주었다. 토닥토닥~. "우리 라이 많이 아파?" "흑~ 여기 무릎을 부딪쳤어요오~. 그래서 무릎이 막막 아파요오~." "그래? 그럼 오빠가 호~해줄게. 그럼 안 아플 거야." 난 라이의 무릎에 입을 대고 호호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손으로 열심히 문질러주었다. 그러자 라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다행이군. 내가 안심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앙~!" 앗! 이것은 루비의 울음소리! 바닥에 쓰러진 루비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펑펑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같은 루가 같은 포즈로 쓰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루비랑 이마를 부딪쳤어요." 자세히 보니 루의 이마는 빨갛게 부어 있었다. 세게도 부딪쳤군. "그런데 넌 왜 안 울어?" 내가 묻자 루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제가 울면 형이 달래줄 거예요?" "내가 미쳤니?" "그러니까 안 우는 거예요." "......" 제법이군. 은근히 머리 쓰는데. 그럼 루비가 우는 건 내가 달려주길 바라기 때문일까? 아무튼 귀여운 여자아이가 구슬프게 울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빨리 달려줘야지~. "루비 많이 아프니?" "으앙~ 루랑 이마을 부딪쳤어요오~. 그래서 이마가 막막 아파요오~." "그래? 그럼 오빠가 호~ 해줄게. 그럼 안 아플 거야." 난 루비의 이마에 입을 대고 호호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손으로 열심히 문질러주었다. 아까 라이를 달래던 상황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3분 정도 달래주자 루비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난 손가락으로 남아있는 루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루비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패앵~! "헉쓰!" 얘 지금 뭐한 거야? 내 청남방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묻어있는 끈적거리는 액체. 점성이 장난이 아니군. "......"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를 봤나! 감히 오빠의 옷에 코를 풀다니! 그것도 왕건으로! 난 주먹을 불끈 쥐어 루비의 머리통을 내려치려했다. 하지만 훌쩍거리는 루비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내 옷에 코를 푼 죄는 단매에 쳐 죽여도 부족할 정도지만, 그래도 이 귀여운 아이를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때린다면 펑펑 울 것이 뻔하다. 넓은 마음을 지닌 내가 이해하고 용서해얃지. "울지 말고 웃어, 루비야. 루비는 웃을 때가 제일 예쁘니까." 난 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렇게 말했다. "오, 오빠......" 빨갛게 변한 루비의 얼굴. 루비는 붉은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나를 보았다. 난 계속해서 루비의 머리를 슥슥 쓰다음어 주었다. "헤헤~." "그래. 그렇게 웃어야 예쁘지." 난 루비를 껴안아 일으켜 주었다.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나중에는 얼마나 예뻐질까? 어쩌면 루엔보다 훨씬 예뻐질 수도 있겠군. "형." "응? 왜?" "이것 좀 보세요." "응? 이게 뭐니?" 루가 내민 것은 누렇게 변한 종이였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끝은 이미 낡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난 그것을 펼쳐 보았다. "헉! 이게 뭐야?" 누런 종이에는 그림과 함께 글씨가 쓰여 있었다. 글씨는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인지 희미해져 있었지만,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거 어디서 발견했니?" "아까 저쪽 창고에서 발견한 거예요." "저쪽 창고라면......" 루가 가리킨 창고에는 각종 잡동사니가 모여 있었다. 우리 가게 물품이 아니라 건물주의 물품이다. 그 창고에는 별별 물품이 다 쌓여 있었다. 다리가 부러진 책상부터 옛날 재봉틀까지. 건물주 말에 의하면 돈 될 만한 것은 다 빼냈으니, 가지고 싶으면 갖고 버리고 싶으면 버리라고 했다. 내가 저쪽 창고 물품을 굳이 버리지 않은 이유는 아직 창고에 공간이 많이 남아있기에 굳이 저 창고까지 비울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이번에 리모델링을 하며 저쪽 창고에 쌓인 잡동사니들도 다 버릴 생각이었다. "좀 자세히 말해보렴." "그러니까 어떻게 된거냐면요......" 루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는 어린 엘프들에게 지하 창고를 정리해줄 것을 부탁했다. 정리라고 해봐야 쌓여잇는 박스를 옮기는 정도다. 어린 엘프들은 처음에 조금 일을 하는가 싶어니 이내 흥미가 떨어졌다. 그때 라이가 제안을 했다. "우리 숨바꼭질 할래?" "와아! 그거 좋겠다." "빨리 하자!" 순식간에 의견을 일치를 본 아이들은 가위바뷔보로 술래를 뽑았다. "잠깐. 그러니까 창고 정리를 시켜놨더니 숨바꼭질을 했다고?" "네." "......" 이것들이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의 말을 콧구녕으로 들었나? 어디서 감히 숨바꼭질을! "아무튼 계속 얘기해 봐." "네." 술래는 루비였다. 루비가 뒤로 돌아 숫자를 세는 동안 라이와 루는 어디에 숨을지 고민했다. 라이는 상자 뒤에 잇는 작은 공간에 숨었고, 루는 잡동사니가 쌓여잇는 창고를 기억해 내고는 그곳으로 기어 들어갔다. 불도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장소. 루는 탁자 밑에 웅크리고 앉았다. 백까지 숫자를 센 루비는 라이와 루를 찾아 나섰다. 상자 뒤쪽에 삐죽 삐져나온 회색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라이 찾았다!" "아! 걸렸다." 라이는 순순히 항복했다. 이제 루를 찾는 일만 남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루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루비는 잡동사니가 있는 창고에 루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라이와 같이 그 곳에 들어갔다. 루비는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루비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꺄아!" "앗! 왜 그래, 루비야?" "저, 저기......" 문 바로 앞에는 사람 키만 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초상화에는 제복을 입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루비는 그곳을 보고 깜작 놀란 것이다. 아무튼 이 소동 때문에 루는 알아서 기어 나왔다. "무슨 일이야?" "저 초상화가 너무 무서워." "에이~ 저런 초상화가 뭐가 무섭다 그래?" 그 순간 갑자기 초상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쾅! "꺄아!" 루비는 재빨리 라이 뒤로 후다닥 숨었다. 루는 초상화를 다시 벽에 걸어놓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인해 틀은 이미 완전히 깨져있었따. 그리고 그 때문에 뒤판이 열렸다. "그 안에 그게 들어 있었어요." "으음, 누군가가 초상화 뒤에 감춰 놓았다는 거군." 뭔가 냄새가 풍긴다. 그냥 단순히 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는 절대감각의 소유자다. 왠지 이번 일을 끝까지 파헤쳐 보고 싶어지는군. 난 창고로 다가갔다. 창고 안은 불빛이 없어 어두웠지만,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는 빛 덕분에 분간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루의 말대로 바닥에는 사람 키만 한 초상화가 떨어져있었다. 틀이 박살나고 뒤판이 열려진. 난 초상화를 뒤집어 보았다. "헉! 이 사람은." "형 이 사람 알아요?" 루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 사진 속의 사람은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인자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인자해 보이는 얼굴과는 반대로 눈동자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검은 제복. 내가 알기로 이 옷은 일본식 제복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으음,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전 알 것 같습니다." "헉!"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는 사일런스 지니. "소리 좀 내고 다녀!"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정말 이 초상화의 인물이 누군지 아시나요?" "예." 지니는 전신 초상화를 훑어보며 말했다. "이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입니다." "아니, 이토 히로부미요?" "그렇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라면,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맞고 죽은......?" "예. 바로 그 사람입니다." "......" 잠깐, 지니가 이토 히로부미를 어떻게 아는 거지? 나도 몰랐는데. "이토 히로부미인지 어떻게 알았어요?" "제 어찌 아이언스 공작님 조국의 역사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1905년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지요. 후에 추밀원 의원장이 되어 1909년 만주 시찰을 겸하여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차 중국 하얼빈에 갔다가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맞아 죽었지요. 한국 입장에서는 조국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인물인 만큼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일본에서는 지금도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 어째서 우리나라 역사를 나보다 지니가 더 잘 아는 걸까? 이는 내가 무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세계사가 선택 과목인 것만 봐도 우리나라 역사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뭐, 내가 이렇게 불평을 하면 교육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사교육은 자네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있는 걸세. 뭐, 우리나라 교육이 원래 그러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국사나 세계사쯤이야 국영수에 비하면 별 거 아니라는게 교육부의 입장이니.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 초상화가 왜 여기 있는 건가요?" "글쎄요. 아무튼 이건 전(前) 건물주의 물품이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요." "그건 그러네요. 건물주 벌써 외국으로 떠났나요?" "아닙니다. 모레 떠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건물주를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 "제가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 * * * 지니는 전화로 만남을 요청했고, 다행히 건물주는 흔쾌히 승낙했다. "잠시 후에 이곳으로 온다고 하는군요." 난 건물주(지금은 아니지만)가 올 때까지 가게 안을 정리했다. 가게는 어느새 반 이상 비워져 있었다. 내일부터는 이곳에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왠지 섭섭하다. 으음, 내일부턴 나도 백수가 되는 건가? 집에서 뭐하고 놀아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되는군. 이번 기회에 루시아와 단 둘이 여행이나 떠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이들을 남겨두고 여행을 갈 루시아가 아니다. 분명 아이들을 데려가고 싶어 하겠지. 문제는 아이들을 데려갈 경우 데이트가 아니라 MT가 된다는 거다. 무슨 단합대회하려는 것도 아니고. "하아~!" 난 앞으로도 순탄치 않을 루시아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검은색 외제차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난 지니와 함께 가게 앞으로 나갔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70대 정도로 보이는 대머리 할아버지였다. "이분이 전 건물주이신 박일만 씨입니다." 지니의 소개에 나는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이번에 건물을 매입한 사람입니다. 본명은 박영웅 이지만, 주로 아이언스 히로라 불리고 있ㅅ브니다." "반갑네. 나는 박일만이네." 박일만씨는 내 손을 붙잡고 악수를 했다. "일단 들어가시죠." "그러지." 나는 그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지니는 재빨리 커피를 내왔다. 박일만 씨는 다리를 크게 벌리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튀어나온 배와 두 개의 턱이 그가 비만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상당히 깐깐해 보였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부른 건가?" "사실 오늘 창고를 정리하던 중 우연히 이토 히로부미 전신 초상화를 발견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뭐, 그건 아무 상관없지요. 중요한 건 그 초상화 뒤에 이게 숨어있 었다는 겁니다." 난 초상화 뒤에 껴 있던 누런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난 볼 수 있었다. 그가 놀라 헛바람을 들이키는 모습을. "헉! 이, 이건......" "적혀진 글과 그림을 봐서는 지도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이토 히로부미 초상화 뒤에 숨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네요. 혹시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으음." 그는 비대한 몸을 소파에 기대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난 지니가 타준 '역전다방 미스 김이 타준 커피보다 맛있는 커피' 를 마시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이건 보물지도 같네." "예? 보물지도요?" "하아~ 얘기는 우리 아버지 대(代)로 거슬러 올라가네. 우리 아버지 의 이름은 돌쇠였네." "예? 돌쇠요? 무슨 머슴도 아니고......" "맞네." "예?" "머슴 맞네." "......" 내가 놀라든 말든 그는 얘기를 계속했다. 때는 일제시대 초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개화기 때부터 시작된 서양 문물의 유입은 더욱 가속화 되었고, 전통적 가치관과 삶은 많은 변화를 맞았다. 조선시대 말기인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나, 제도가 바뀐다고 해서 사람의 인식이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시와 먼 시골의 경우에는 아직도 전통적 삶의 모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충북 음성에 위치한 박(朴)씨 가문. 그 가문에 머슴으로 있는 돌쇠. 가진 것은 넘치는 힘밖에 없는 돌쇠는 그날도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다. "엿차! 엿차!" 퍽! 퍽! 그가 기합을 내뱉으며 도끼를 내려칠 때마다 장작은 정확히 두쪽으로 갈라졌다. 어느새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그는 갑자기 웃통을 풀어헤치더니, 상체에 찬물을 촤악 끼얹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살려 다시금 장작을 팼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최예분. 최(崔)씨 가문의 여식으로 박씨 가문에 시집 온 여인이었다. 가문끼리의 정략결혼이었지만, 남편과의 사이는 원만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3년이 지나도 애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를 낳지 못하는 것은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가지 허물인 칠거지악(七去之惡) 중 하나였다. 결국 남편은 얼마 전 첩을 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녀에게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애 낳지 못한 죄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첩이 들어오자 그녀의 남편인 박충제는 첩에게 완전히 빠져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신경을 써 줬으나, 지금은 완전히 첩의 방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한창 때의 나이에 독수공방을 하는 것은 의금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 바늘로 허벅지를 푹푹 찌르며 버텨온 날들이 어언 한 달. 이제는 그것도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마당에서 웃통을 벗은 채 장작을 패는 돌쇠였다. "엿차! 엿차!" 힘차게 장작을 패는 돌쇠의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돌쇠에게 말했다. "이리 와 보거라." 그러자 돌쇠는 도끼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요, 마님?" "오늘도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요, 마님. 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구만유." "호호~ 말하는 모습이 아주 기운차구나." 마침 몸종이 상을 들고 왔다. 그녀는 그것을 마당에 내려놓도록 지시했다. "네가 먹도록 하거라." 그녀의 말에 돌쇠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요,마님. 지가 어찌 마님의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요?" "호호~ 괜찮다. 네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대견해서 내리는 것이니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마, 마님." "어서 먹거라." "그, 그럼 감사하게 먹겠습니다요." 돌쇠는 마당에 앉아 수저를 들고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가 두 번 수저를 놀리자 밥그릇은 어느새 깨끗하게 비워졌다. "호호~ 맛있게 잘 먹는구나. 말순아, 돌쇠에게 쌀밥을 가득 퍼다 줘라." "예, 마님." 몸종인 말순이가 바가지에 한가득 밥을 퍼오자 돌쇠는 다시 맛있게 퍼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못브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요." "왜 그러나?"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스토린데요. 혹시 나중에 돌쇠가 마님을 데리고 도망치지 않나요?" "어떻게 알았나?" "......" 어떻게 알긴. 척보니 딱이구만. "아무튼 그래서......" 돌쇠는 마님이 잘해주는 것에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하늘같은 마님이 자신같이 미천한 머슴을 신경 써 주시다니! 그것은 대단히 영광스런 일이었다. 돌쇠는 마님을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에 마님의 몸종인 말순이가 돌쇠를 찾아왔다. "마님께서 널 데려오라고 하셔." "아니, 이 시간에 마님께서 뭐 때문에 날 부르신대?" "따라와 보면 알아." 돌쇠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마님의 부름이니 어쩔 수 없이 말순이의 뒤를 따랐다. "발소리를 줄이고, 목소리를 낮춰.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안돼." "어째서?"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아, 알았어." 둘은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이쪽은 마님방으로 가는 길이 아니자녀." "잔말 말고 따라오라니까."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말순이의 재촉에 돌쇠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여기야." "여, 여기는......" 돌쇠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물레방앗간이었던 것이다! 물레방앗간이 어떤 장소던가? 조선시대 밤의 역사 중 상당수는 이곳에서 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였다. 애초에 설립 목적은 낙차하는 물의 힘을 이용해 바퀴를 돌려 곡식을 찧거나 빻기 위함이나, 그 취지가 무색해질 정도로 남녀의 밀회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물레방앗간인 것이다! "물레방앗간은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아니, 뭐가 너무한가?" "너무 진부하잖아요. 무슨 80년대 사극 에로무비도 아니고." "진부함이란 간결한 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실화이니 끝까지 듣게." "......" "안에서 마님이 기다리고 계셔. 어서 들어가 봐." 말순이의 말에 돌쇠는 쭈뼛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물레방앗간은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인영이 보였다. 창문틈으로 들어온 달빛 덕분에 돌쇠는 그 인영이 마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 마님. 지 왔습니다요. 헉! 왜, 왜 이러시남유?" 돌쇠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입을 연 순간 마님이 그의 품에 안겨왔기 때문이다. "돌쇠야." "마, 마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요." "돌쇠야. 날 더 이상 마님이라 부르지 말거라." "아, 아니...... 마님을 마님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릅니까요?" "예분이라 불러다오." "지, 지가 어찌 마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요?" "내가 이 집에 시집온 지도 3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그년이 집안에 들어온 이후 남편이라는 작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참을 만큼 참았지만,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구나." "그, 그래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요, 마님. 주인어른께서 아시면 경을 칠 겁니다요." "모르게 하면 되지 않느냐? 자, 내 가슴이 뛰는 것을 느껴보거라." 그녀는 돌쇠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댔다.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에 돌쇠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비록 양반댁 여식이라 하나, 나 또한 여인이다. 밤이면 밤 마다 사내의 품을 그리워하는 여인이란 말이다."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돌쇠를 바라보았다. 돌쇠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너무나도 고귀하고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여인을 앞에 두고 참아야 하다니! 돌쇠는 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차려진 밥상을 마다하는 것은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손만 뻗으면 마님이 내 것이 된다. 꿈에 그리던 마님을 안을 수 있단 말이다! 하지만 이 일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호통을 치는 주인어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멍석말이 당하는 자신의 모습도. 운이 좋으면 반병신이오,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양반댁 마님을 건드린 죄는 목이 잘려도 할말 없는 중죄였다. "이, 이러면 안 됩니다요, 마님." 돌쇠는 머슴 근성까지 동원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손을 빼고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돌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게냐? 내 이토록 네게 안기고 싶구나. 대체 얼마나 나를 고통스럽게 할 작정이냐?" "마, 마님......" "예분이라 부르라 하지 않았더냐 .대체 뭘 망설이는 게냐? 너 역시 날 원하고 있질 않느냐? 어서 나를 안거라. 어서!" 돌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더 이상 주인어른과 멍석 말이에 대한 생각은 나지 않았다. 지금 그는 단지 본능에 충실한 남자였다. 돌쇠는 바로 마님을 덮쳤다. 그리고 허겁지겁 그녀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마, 마님! 지도 전부터 마님을 좋아하고 있었구만유." "예분이라 부르거라. 난 지금 네 마님이 아닌 예분이란 이름의 여인일 뿐이다." "예, 예분 아씨......" "그래, 돌쇠야. 어서 날 기쁘게 해 보거라." "사랑해유. 사랑해유, 예분 아씨!" "저기요." "왜 그러는가?" "이 부분은 스킵하시고 다음 부분부터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어째서인가?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비디오로 봤었거든요. 제목이 '불타는 마님의 몸'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흐음." "마님과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그 다음엔 어찌 되었나요?" "그럼 거기서부터 말해주도록 하지. 그렇게 아버지가 마님과 하룻밤을 지내고 난 다음......" 물레방앗간에서의 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렬적이었다. 그녀는 그 동안 참아온 세월이 억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욱더 돌쇠에게 빠져들었다. 돌쇠 역시 스녀에게 완전히 빠져잇었기에, 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운우지락 (雲雨之樂)을 나누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였던가? 나름대로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자 집안 내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안 것은 3개월 정도가 지난 후였다. 처음에는 아닐 거라 생각했고, 아니기를 바랐지만 이젠 더 이상 부정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하늘을 원망했다. 3년 동안 갖은 치성을 드려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다. 그래서 석녀(石女)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당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지금 아기가 들어섰단 말인가? 그녀는 네 달 동안이나 남편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를 낳게 되면 혼외정사를 한 사실이 들통 날 것은 뻔할 뻔 자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뱃속으로 들어가 임신되 었다고 생각할 리 없으니. 그녀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따.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몸종 말순이가 그 사실을 주인어른께 일러 바친 것이다. 주인마님이 3개월 동안이나 머슴과 놀아나 임신까지 했는데, 몸종인 자신이 무사할 리 없었다. 어떤 변명을 해도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말순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무튼 사실을 알게 된 박충제는 불같이 분노했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그것도 머슴과 놀아나 임신까지 했다는데 그 누가 열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당장 아내를 끌어내 주리를 틀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가 개망신이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소리 없이 처리해야 했다. 그는 먼저 아내의 친정은 최씨 가문에 연락을 넣었다. 최씨 가문 역시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하는지라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빨리 처리하기를 바랐다. 비록 그 대상이 딸이라 해도 말이다. 박충제는 안채에 불을 질러 아내를 태워 죽일 생각이었다. 그럼 증거가 남지 않을 테고, 화재로 인해 사망했다면 가문의 명예 또한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돌쇠는 아무나 시켜 뒷산에 묻을 생각이었다. 돌쇠가 그런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히였다. 박충제는 자신의 계획을 첩에게 알렸고, 첩은 이제 자신이 정부인이 될 수 있다고 좋아했다. 그런 둘의 대화를 첩의 몸종인 분녀가 엿들었고, 분녀는 자신의 애인인 개똥이에게 그 얘기를 해주었다. 개쫑이는 돌쇠의 둘도 없는 친구였기에, 바로 돌쇠에게 알려주었다. 돌쇠는 재빨리 마님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큰일 났습니다요, 마님." 돌쇠는 마님에게 주인어른의 계획을 알렸다. 가만히 앉아 죽음을 당할 수 없었던 예분과 돌쇠는 함께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박충제의 계획대로 안채에선 불길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미 돌쇠와 예분은 값나가는 패물을 챙겨 도주한 뒤였다. "참 감동적인 스토리네요. 마님과 머승의 사랑이라니. 무슨 변강쇠 스토리도 아니고......" "그렇게 아버지가 마님과 함께 도망쳐 도착한 곳이 경성(京城)...... 즉, 지금의 서울이네. 그곳에서 마님은 애를 낳았지." "예? 결국 낳았어요?" "낳았으니까 내가 여기 있지." "예? 그 말씀은......" "내가 그 아이라는 거네." "......" 그렇군. 이 할아버지가 돌쇠와 마님의 사랑의 결정체였군. 이런 놀라운 일이! 내가 놀라든 말든 그는 얘기를 계속했다. "아버지께서는......" 돌쇠는 예분과 함께 경성에 정착해 살기로 했다. 그는 머슴이었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이름을 새로 지었다. 성은 주인어른의 성이었던 박(朴)씨로, 이름은 돌 석(石)자에 쇠 철(鐵)을 써서 석철로...... 합해서 박석철. 이것이 돌쇠의 새 이름이었다. 그리고 석철은 아들의 이름을 돌 석자에 북두칠성의 두(斗)자를 써서 석두라 지었다. 석철은 배운 거라곤 장작 패고 짐 나르는 것밖에 없는 무식한 머슴 이었기에 마님......아니, 아내의 도움이 컸다. 아내는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집을 사는 등 살림을 꾸렸다. 다행히 패물의 가격이 상당해 한동안은 별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잇었다. 하지만 한강 물도 퍼다 쓰다보면 마르는 법인데, 작은 옹달샘이야 오죽 하곘는가? 돈은 빠르게 사라졌다. 석철은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종로경찰서 청소부 일자리를 얻었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독립군 전담 부서가 있어서 강력범 검거보다는 독립군 검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하의 고문실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당시 종로경찰서 고등계 경부는 미와 경부였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이라 할 만큼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김두한이를 아직도 못 잡았나? 감시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를 거스르다니! 내 대일본제국을 위해서 기필코 그 더러운 조센징 놈을 잡아 죽이리라!"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당시 종로 주먹계를 평정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 상인들을 보호 하기 위해 애썼고, 그 때문에 사사건건 일본인들과 부딪혔다. 장군의 아들인 그는 16세 때 쌍칼에게 영입되어 주먹 세계에 입문 했고, 18세 때 신마적, 구마적 등을 꺾고 종로 우미관 뒷골목의 주먹 황제로 등극했다. "저기요." "또 뭔가?" "그 부분은 영화 '장군의 아들' 과 드라마 '야인시대' 로 봤거든요. 대충 요약하고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네." 어쨌든 종로경찰서에서 일하게 된 석철의 눈에는 일본도를 차고 다니는 순사와 독립군을 잡아 조지는 형사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내면서 일본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국가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위에 잇는 일본인들이 일본을 찬양하는 말만 해대니, 무식한 석철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애초에 애국심이라는 것이 없었던 그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박석철이던 그의 이름은 나까무라 다케시[中村 武]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나까무라 니혼[中村 日本]으로 바꾸었다. 대일본제국의 기상을 이어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핏줄만 달랐지 몸도 마음도 정신도 완전히 일본인이 된 다케시는 최선을 다해 일본을 섬겼다. 그런 그의 충성심은 우연히 종로경찰서 서장에게 알려졌고, 다케시는 결국 순사로 채용되었다. 순사가된 다케시는 열과 성을 다해 독립군들을 잡아넣기 시작했다. 일본의 적은 곧 그의 적이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앞잡이'였던 것이다! 그의 집안 벽에는 커다란 일장기가 걸려있었다. 그것도 그냥일장기가 아닌 욱일기가 일장기는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이 그려져있는 반면, 욱일기는 떠오른 태양의 기가 사방으로 뻗치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이 욱일기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일본이 대회침략활동을 할 떄 군용기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지금도 일본 해군은 이 깃발을 쓰고있다.) 이 점만 봐도 그의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수있을것이다. 그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조선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이토 히루부미였다.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인물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같이 이토히로부미초상화 앞에서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안중근의사의 이름이 적힌 짚인형을 바늘로 찌르며 저주하는 등 의 만행을 일삼았다. "아버님께서 정말 엄청난 매국노셨군요."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버지께서는 이토히로부미다음으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 을사오위인 과 함께 을사오위인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일본제국을 위해 큰 공을 세우신 송병준 백작님을 존경하셨다네 그리고 그분들 중 몇 분 과는 친분으르 쌓기도 하셧지." "예? 그사람들은 을사오위인이 아니라 을사오적 아닌가요?" "일부 무지한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기도 하더군. 하지만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위인들이시네. 대일본제국을 위한 그분들의 업적을 생각하신다면 어떻게 감히 그분들을 을사오적이라 부를수 있겠는가?" "........" 장난하냐? 하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그지없었다. 아버지가 매국노임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군. 뭐 을사오적의 후손들이 나라 팔아먹고 받은 땅 되찾으려고 소송을 걸고 건 소송마다 족족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매국노임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나라 팔아먹고 얻은 재산을 법적으로 인정해주다니! 상식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이해할수없는일이다. 법관들은사유재산이 중요하다 어쩐다 말을 하는데 그 사유재산을 인정해주는것이 국가다. 그런데 국가를 팔아서 얻은 사유재산을 국가가 인정을 해줘야 한다? 이건 어느모로보나 납득하기가 힘들다. 이는 국가가 매국을 장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 천지에 이런 좋은 나라가 어디있겠는가? 기회가 되면 언제든 매국을 하십시오 여러분! 지금 독립투사들 후손들은 대부분 극빈층을 벗어나지 못하고있습니다. 하지만 매국노들은 어떻습니까? 매국해서 얻은 여러분들의 재산. 그귀중한 재산을 대한민국 법정이 끝까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이런식으로 범국민적 매국 캠페인을 벌이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다. 아무튼 법이 이 모양이니 매국노들이 이렇게 떳떳하게 가슴펴고 사나보다. "아버지께서는 그 후에 고문관으로 잠시 일하셨지. 아버지께서 는 자신의 손으로 독립투사 몇명을 완전히 보내버렸다는 것이 큰 자랑이셨네. 고문하고 돌아온 날이면 날 무릎위에 앉혀놓고 독립투사들을 어떻게 보내버렸는지를 자랑스럽게 얘기해 주셨지. 나역시 그런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러웠네." "......." 왜이렇게 주먹이 근질거리는 걸까? 아아~ 한대 치고싶다. 완전히 보내버리고 싶어라~ "그때 난 정말 행복했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지만 않았어도 난 계속 나까무라 니혼이란 이름으로 살고있었을텐데......" 일본은 아무런 소득이 없는 중국에서의 전쟁에 싫증이 났다. 그래서 유럽식민지로있는 동아시아를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아시아쪽에는 일본이 필요로하는 자원이 매장되어있었기에, 일본은 이 지역이 절실히 필요했다. 일본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고철과 석유의 전면 수출 중단을 결정했기때문이다. 그랬기에 일본은 동아시아를 점령해서 직접 자원을 채굴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그힘을 바탕으로 태평양의 패자가 될 생각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대담하게도 기동 타격대를 이용해서 하와이의 진주만과 필리핀의 미국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봤을때 이러한 일본의 공습은 실패였다.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이 바다에 나가있어서 피해를 입지 않앗고 유류 저장시설도 피해를 면했던 것이다. 이 진주만 공습이 아니였다면 과연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였을까? 이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진주만 공습이 아니었더라도 미국과 일본은 필연적으로 부딪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면전을 피하고 외교적으로 해결했을 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쩃든 일본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다 못해 코피까지 냈고 미국은 엄청나게 열받았다. 열받은 미국은 바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따. 엉클 샘의 조카들이여 진격하라! 이 구호대로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섰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쟁터로 나가 아버지의 조국과 싸웠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목적은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게 쓴맛을 보여주고 나면 여기저기 벌여놓은 일들때문에 바쁜 미국이 알아서 전쟁을 피하려 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쓴맛도 정도껏 보여줘야지. 사자의 코를 쑤셔 쌍코피를 내고도 그냥 넘어갈수있을거라 생각했나? 일본은 애초에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처음에 잘나가나 싶던 일본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일본이 점령한 동아시아 영토는 다시 연합군 측으로 넘어갔고, 1942년 4월에는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옹ㄹ라탄 것처럼 그들에게는 오직 공격만이 있을뿐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더욱더 많은 물자와 인원이 필요해졌다. 나까무라 다케시는 이러한 물자와 인원을 조달하는데 앞장섰다. 젊은이들을 강제 징병해 전쟁터나 광산으로 보냈고 처녀들은 종군 위안부로 보냈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 숟가락 하나까지 징발했음을 물론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패색은 점점 짙어져갔다. 그 결정타가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였다. 1942년 6월 4일 일본군은 반전을 노리고 항공모함과 전함을 긁어모아 미드웨이 섬을 향해 진격했으나 패배했다. 이와중에 중요 항공모함과 우수조종사들을 전부 잃어버렸고 이로인해 전략의 주도군을 상실했다. 일본은 점점 막다른 길에 몰렸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코앞까지 몰려오자 본토에선 300만명이 옥쇄를 결심하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일본 본토를 점령하려면 100만명이상의 미군이 사망할 거라는 예상과 소련이 개입할 것이 두려웠던 미국은 간단하게 끝내기로 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투하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천황은 항복을 선언한다. 말을 하던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대일본제국은 패배하였네." "저,저기 .......그렇다고 우실것까지야......." "자넨 슬프지도 않은가? 만약 일본이 이겼다면 지금쯤 아시아는 하나가 되어있을걸세.대동아공영이 현실로 실현되었을거란 말이네ㅐ. "......"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구? 그는 잠시동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참후 마음이 좀 진정 되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잘나가던 우리 나까무라 가문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네. 조선내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네. 여전히 사회시스템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엉ㅅ고 일본의 패망소식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으니까. "예? 하지만 국사 교과서에는 광복일에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오는 사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사진 자체는 조작이 아니지. 단 그사진이 찍힌 시기가 9월 이후라는 거네. 생각해ㅑ보게 일본이 패망했다 해도 그 소식이 조선으로 바로 전해졌겠는가? 물론 고위층 일본인 관리들에게는 전해졌겠지 하지만 그게 뭐 좋은일이라고 그걸 홍보하겠는가? 숨겨도 모자랄 판에. 그리고 그때 사회 시스템은 일본인들이 전부 장악하고 있었네. 그런상황에서 태극기를 뛰쳐나오는건 미치지 않는 이상 하기 힘든일이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일본이 이길거라 믿고 계셨네. 하지만 어머니생각은 다르셨지. 어머니께서는 일본이 패할것을 대비해 재산을 처분해 일본으로 도망갈것을 주장하셨지." "재산이 얼마나 되었나요?" "아버지께서는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엄청난 재산을 모으셨네 . 특히 을사오위인들과 송병준 백작님등 몇분과 약간 친분이 있으셔서 그분들의 일을 도와주며 받은 돈이 꽤 되었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동산만 족히 백억원은 될걸세." "헉! 배,백억!" "아버지께서는 어미니 말씀을 따라 재산을 운반이 편한 금괴와 보석으로 바꾸셨네. 일본 역시 패망을 예상했었는지 각국에서 긁어모은 귀금속과 유물들을 본국으로 실어날랐지. 아버지께서는 재산을 일본으로 옮기려 했지만 떄가 너무 늦어 해외유출이 힘들었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그 재산을 어딘가에 숨기셨지. 일단 몸만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돌아와 재산을 꺼내실 속셈으로 말이야." "그래서 일본으로 피신하셧나요?" "결국은 못했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께서도 일본이 그렇게 갑자기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모르셨으니. 미국이 원폭을 투하할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시 일본 본토에는 300만명의 군인들이 옥쇄를 하고있었네. 만약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수개월 몇년까지도 길어졌을걸세.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며 전쟁은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끝나버렸지." "그럼 어떻게 되었나요/"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이 패망하자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였던 미와 경부는 집안에 꼭꼭 숨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보였기 떄문일까? 김두한은 지하실에 숨어있던 미와 경부를 끌어냈다. 그리고 남산 약수터로 끌고 가 패 죽인다음 매장했다. 그동안 충실하게 앞잡이 노릇을 했던 나까무라 다케시 역시 무사할리업었다. 종로 주먹패들은 다케시네 집에 쳐들어와 다케시를 끌어냈다. 그 자리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도 있었다. 예분은 무슨말을해도 남편을 살릴수없다는것을 알았기에 제 발 아들만은 살려달라고빌었다. 다케시의 아들과는 직접적으로 ㅅ원수진일이 없었기에 종로 주먹패들은 모자에게는 손을대지않았다. 종로주먹패들은 다케시를 어디론가 끌고 갔고 그후 그의 아내와 아들은 다시는 그를 보지못했다. "광복이 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자 나는 이름을 다시 한국식으로 바꾸엇네." "아! 그럼지금이름이.....?" "맞네. 지금 일므인 박일만 으로 바꾸었지. 성은 예전 아버지성을 따랐고 일만이라는 이름은 일본만세라는 의미로 내가 직접 지은거네." "오오! 이름에 그런 깊은 매국심이 숨어있었다니." "아버지께서 그렇게 돌아가신뒤 나는 어머니와 하마께 다른곳으로 떠나야했지 아버지의 명의로 되어있던 부동산은 전부 몰수당했네 아버지께서는 가진 부동산도 꽤 되셨지. 어머니께서 부동산 투자에 소질이 있으셨는지라. 동산은 전부 귀금속으로 바꾸어 어딘가에 숨겨놓으셨고 부동산은 전부 뺴앗겼으니 우리 모자는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은 수밖에 없었지. "혹시 아버님께서 힌트 같은것도 안 주셨나요?" "그럴 겨를조차 없었네 단한가지 단서조차 없었기에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 "그랬군요." "그이후 한국은 정말 빠르게 변했네. 6.25가 터지고 4.19혁명.5.16군사정변 10.26사건 12.12사태 5.18광주민주항쟁 등등 후에 나는 법정에 재산 반환 청구 소송을 걸었네.아버지께서 열심히 매국하셔서 모은 재산을 국가가 뻇어간다는게 말이나 되는가?" "글쎄요., 제생각엔 말이 되는것 같은데 ........ 아무튼 그래서 이기셨나요?" "물론이네.이건물도 그때 소송으로 되찾은거지." "숨긴 귀금속을 찾을 생각은 안해보셨어요?" "물론 했네 . 하지만 단서도 없었던 데다가 굳이 그 돈이 아니더라도 남부럽지않게 살수있었네. 소송을 통해 부동산을 돌려받자마자 부동산 값이 폭등하더군. 몇십억에 불과하던 부동산이 백억이 되는것은 순식간의 일이었지." "........" 독립 투사들은 재산을 전부 독립자금으로 쏟아 부어 그 자손들은 현재 극빈층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매국노들은 나라 팔아먹고 민족을 등쳐먹어 번 돈으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한술 더 떠 법정은 그들이 매국 행위를 해서 번 재산을 보호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라이에게 애국을 하라고 가르쳐야할지, 매국을 하라고 가르쳐야할지 고민되는군. "그 이토 히로부미 초상화는 복제품이어서 별 가치는 없지. 하지만 아버지께서 욱일기 다음으로 아끼셨던 거네. 그런데 그 뒤에 지도를 숨겨놓으셨을 줄은……." "용케도 이 초상화가 지금까지 남아있었네요." "원래 이 초상화는 이 건물에 있었던 것이 아니네. 종로경찰서 부근의 저택에 있었지. 나중에 법원의 결정에 의해 집을 다시 돌려 받았을 때, 이 초상화가 창고에 버려져 있더군. 값나가지 않은 물품이어서 누구도 가져가지 않은 거지. 그 후 나는 물품들을 이 건물로 모았네. 그리고 값나가는 물품들을 추려내서 팔거나 소장했지. 다른 물품들은 버리기가 뭣해서 그냥 지하창고에 쌓아두었고." "그런 깊은 사연이 있었군요. 이렇게 지도가 발견되었는데 혹시 찾아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돈 욕심이 나긴 하지만 그럴 생각은 별로 없네. 그 지도가 정확한지 의문도 들고, 찾았다 하더라도 정말로 거기에 금괴와 보석이 있을지는 확실치 않으니까 말일세. 어쩌면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지도일 수도 있지. 그리고 지금 재산으로도 남은 생을 보내는 데 아무 부족함이 없다네.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내가 내일 미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거지." "그렇군요."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졌군. 이만 일어나아겠네." "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를 밖으로 바래다주었다. 그의 말대로 얘기가 나무 길었는지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미국으로 가시면 뭘 하실 생각이신가요?" "뭘 하긴? 일단 미국으로 귀화부터 해야지." "예?" "미국이야말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아닌가? 대일본제국마저 무너뜨린. 그런 위대한 국가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지. 사실 한국이야 미국의 동맹국이라 떠들어대고 있지만,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지. 미국의 도움이 없으면 한시도 지탱할 수 없는. 오죽하면 미국이 군대까지 보내 지켜주겠나? 그런데 그런 고마움도 모르고 미군 장갑차에 몇 명 깔려 죽었다고 난리치는 꼴이라니. 하여튼 이 나라 국민들은 개념이 없엇 문제라니까. 내가 이 나라 시민권자라는 게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네. 옛날 나까무라 니혼이었던 때가 좋았었는데. 아버지께서 나에게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듯이, 나는 아들에게 미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네. 아들 역시 나에게 엄청 고마워하고 있네. 난 미국 시민권자가 되면 한국을 미국의 51번째 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네. 자네도 거기 동참할 생각 없나?" "……." 대를 이어 매국하는 나까무라 가문. 아버지는 친일파, 아들은 친일파이자 친미파, 손자는 친미파. 앞으로 있을 그의 매국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국가를 위해서라도 이 할아버지를 지금 제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난 그 생각을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런 매국노들이 수십 명 있다고 해도 쉽게 무너질 한국이 아니다. 비록 정치인들은 국회의사당에서 패싸움이나 하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남자들은 억지로 군대에 끌려가 2년 동안 개처럼 구르고, 매국노들 재산을 보호해주기 위해 국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등 한심하기 그지없는 나라지만, 그래도 한국인들은 이 나라를 사랑한다. 잘못된 점은 점차적으로 고쳐나가면 그만이다. 내가 이 나라의 잘못된 점을 계속 욕하는 것도 이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살펴 가세요." "잘 있겠나. 아! 난 이제 박일만이 아니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미국에서 날 만나게 되면 스티븐 J. 부시라 불러주게." "예? 스티븐 J. 부시요?" "스티븐이란 이름은 여러 미국 위인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네. 스티븐 킹, 스티븐 호킹,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븐 시걸…… 그리고, 비슷한 이름으로 스티브 유도 있지." "예? 스티브 유라면……?" 기억난다. 스티브 유는 한때 국민 가수였다. 그는 건실한 기독교 청년으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그를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인으로서 반드시 국방 의무인 병역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누차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신체검사까지 전부 끝마치고, 2월 14일 군 입대가 확정되었다. 그 누구도 그가 병역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군 입대를 한 달여 앞둔 1월 18일. 그는 돌연 미국 LA로 날아가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당연히 한국 시민권은 소멸되었고, 한국 남자라면 결격 사유가 없는 이상 반드시 이행해야할 병역 의무도 사라졌다. 사실 나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그의 행동이 별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 살려면 그 나라 시민권을 획득해야 많은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국적을 옮긴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는 거다.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도 한국이 자신의 모국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는 한국인이다. 한국의 핏줄이 아닌 백인이나 흑인도 한국에서 살며 한국을 사랑한다면, 그들 역시 한국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국적과 별 관계가 없다. 그 예로 중국 경제를 지탱하는 화교들은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다양한 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가 범국민적으로 욕을 먹는 이유는 한국인으로서 모든 권리를 누리고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의 의무는 기피했다는 것에 있다. 그는 수차례나 대중들에게 병역 의무를 이행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그는 그 약속을 안 지켰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못 지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 지킨 것이다. 그가 미국에서 살기 위해 시민권을 획득했다면, 그나마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 활동무대는 한국이다. 그는 이제까지 한국에서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한국인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 그동안 한국인으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누렸고, 미국인이 된 다음에는 미국인으로서의 권리(국적에 따르는)와 한국인으로서의 권리(핏줄에 따르는)를 모두 누리고 싶어 했다. 자신의 의무를 내팽개친 채 권리만을 찾으려 했던 그를 대중들이 외면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현재 한국 입국조차 금지 되었지만, 설사 돌아와서 계속 활동을 했다하더라도 다시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미국 청년이지. 나 역시 LA로 가는데 그 청년을 꼭 한번 만나고 싶군."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가시나보죠?" "무슨 소린가? LA로 간다니까." "예? 그러니까 로스앤젤레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나? 난 로스앤젤레스가 아니라 LA로 간다네." "……." 스페인과 에스파냐는 같은 나라다. 로스앤젤레스와 LA는 같은 도시다. 읽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완전히 무식이 단독 드리블을 하는군.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름이야 그렇다 치고 성은 왜 부시로 지으셨어요?" "이라크를 초토화시킨 위대한 미국 지도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성을 따서 지었네. 이제 이라크 석유를 마음껏 퍼다 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 니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지면 넌 기분 좋겠니? "J는 뭐에 약자에요?" "J는 Japan을 뜻하네. 그래도 나의 모국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미들 네임으로 붙인 거지." "미국식 이름에도 깊은 매국심이 숨어 있었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그는 차에 올라탔다. "살펴가세요. 미스터 스티븐 J. 부시." "잘 있게나." 그는 자신의 BMW를 몰고 가게를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사 진상 규명을 해서 반민족 행위를 한 사람들을 추려내야 할 텐데. 그래서 매국노 후손들의 재산 반환 청구 소송 같은 것을 막아야 할 텐데. 백날 입으로만 나라 사랑하라고 떠들어대면 뭐하나? 현실이 이 모양인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피해자들을 찾아내 보상을 해주고, 가해자들을 찾아내 처벌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역사 앞에 스스로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 뭐, 본인이나 조상이 친일 행적을 한 정치인들이 한둘ㄹ이 아니니 그런 걸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가게로 들어가 보니 안은 정리가 거의 끝났다. "내일부터 리모델링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지니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런스 백작님께서 고생하시겠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에 대한 얘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게……." 난 박일만…… 아니, 이젠 스티븐 J. 부시가 된 매국노에게 들은 얘기를 지니에게 해주었다. 얘기를 다 들은 지니는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아이언스 공작님의 조국엔 매국노가 정말 많군요." "에휴~ 이게 다 과거사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이 나라 잘못이니, 누굴 탓하겠어요?" "그나저나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보물을 찾으실 생각이십니까?" "으음, 백억이라고 하니 땡기긴 하네요." 나는 상당히 고민했다. 백억 원 상당의 보물이 탐나긴 하지만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문제점을 살펴보자면……. 1. 지도를 보고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찾을 수 있는가? 2. 맞게 찾아갔다 해도 과연 보물이 그 자리에 있는가? 3. 보물이 그 자리에 있어도 과연 그것이 보물이라 할 만큼의 금전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대표적인 문제가 이 세 가지이고, 그 외에 다른 문제들도 많다. 지도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리 외에 다른 누군가가 보물을 노리고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일반적으로 보물찾기 스토리에는 악당들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부비트랩이 있으면 어찌할 것인가? 보물찾기라는 게 낭만적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완전 3D업종이나 다름없다. 보물찾기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노가다 이상, 보물을 찾을 확률은 로또 복권가 비슷. 이런 일에는 손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걸까? 이 기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난 일반인이라면 꿈에도 생각지 못할 환상적인 모험을 하고 이 세계로 돌아왔다. 평화로운 세상과 평범한 삶. 난 1년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지내왔다. 그 삶에 충분히 만족했다. 하지만 2프로 부족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 하지만 때로는 일탈도 필요한 법이다. 모험가로서의 피가 끓어오른다. 아직 나의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 아직 나의 모험은 끝나지 않았어. 이제부터 시작이야. 어렸을 때 '보물섬'을 잃고 얼마나 동경했는가? 나라고 보물섬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 예로 벌써 난 주인공이지 않은가(혹시라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한번 말해주자면 이 글의 주인공은 나다. 절대 사일런스 지니가 아니다)? "결심했습니다! 보물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훌륭하신 선택이십니다." "무슨 말이야? 보물찾기라니?" "보나마나 헛소리하는 게 분명해. 저런 뺀질이가 하는 말 신경쓰지 마, 루시아." 우리 곁으로 다가온 루시아와 일루니아 여사님. "보물찾기요?" "와아! 라이는 보물 좋아해요!" "루비도 좋아해요!" "저도 좋아해요!" 인디와 어린 엘프들도 등장. 난 그들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아까 매국노 스티븐 J. 부시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었다. 얘기가 끝나자 루시아가 말했다. "그 사람 진짜 나쁜 사람이다. 어떻게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지?" "을사오적도 있는데, 뭐. 지금도 일제시대 때부터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정치인으로 앉아 있고. 이 나라가 원래 좀 특이해." 일루니아 여사님도 입을 열었다. "아이리스 왕국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죠." "아! 한 명 있군요." "예? 누구요?" "……." 말없이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일루니아 여사님. 난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나만큼 아이리스 왕국을 사랑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내가 아이리스 왕국 독립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몰라서 그래? 이런 식으로 충신인 나를 모함하다니! 이는 그대가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렷다!" "시끄러, 이 간신배야!" "뭐, 뭐? 아줌마 지금 뭐라 그랬어? 간신배? 헉! 혀, 혈압이……." "진정하십시오, 아이언스 공작님." "그,그만하세요, 일루니아님." 지니는 쓰러지는 날 부축했고, 인디는 일루니아 여사님을 말렸다. 난 지니의 도움을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면 전부 저 아줌마 탓이다. "아이리스 왕국을 향한 나의 애국심이 얼마나 큰지 넌 알지? 그치 루시아?" "그래. 알았어." 건성으로 대답하는 루시아. "흑~ 나의 애국심을 몰라주는 것이 분명해." "애국심이 아니라 매국심이겠지." "매,매국심! 독립투사였던 나에게 매국심이라니! 헉! 다시 혈압이!" 아무래도 병원을 한번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뇌졸중은 미리미리 예방해야지. "그래서 보물을 찾으로 갈 생각이야?" "응." 루시아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보물을 찾아서 뭐할 건데?" "당연히……." 난 말을 하다 멈칫했다. 보물을 찾을 것만 생각했지, 그걸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원칙대로 하자면 찾은 놈이 임자라고, 당연히 내가 먹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보물은 나까무라 다케시가 매국 활동으로 모은 돈이다. 다시 말해 국가와 민족을 등쳣 번 돈이라는 거다. 그 돈에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이 들어있다. 내 어찌 그 돈을 그냥 먹을 수 있겠는가! "보물을 찾으면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은 사람들을 위해 쓰겠어! 극빈층으로 살고 있는 독립투사의 후손, 위안부 할머니, 강제 징용 피해자, 원폭 피해자 등등. 보물의 주인은 바로 그들이니까!" 내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자 존경어린 시선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난 재빨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수고료와 수수료는 떼고." "……." "……." * * * * 드디어 가게가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지니는 건축 디자이너라는 요즘 교제하는 여성과 현장에서 직접 지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난 보물을 찾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필요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방한복, 밧줄, 텐트, 식량, 랜턴 등등.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법 배낭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마법 배낭에는 무한대로 들어가고 무게도 10분의 1정도로 줄어든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짐을 챙기고 있는데, 어린 엘프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빨리 출발해요오~!" "응?" 어린 엘프들은 외출용 복장을 입은 다음 등에 소풍 배낭까지 매고 있었다. 라이는 키티 모양의 배냥을, 루비는 둘리 모양의 배낭을, 루는 피카츄 모양의 배낭을. "니들 지금 뭐하는 거니?" "우리도 보물 찾으러 갈 거예요오~" "뭐라?" 아이들의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난 그 눈동자 속에서 호기심과 모험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 역시 모험을 원하고 있다! ……라기보다는 그냥 놀러 가고 싶은 게 아닐까? "헤헤~." 방긋방긋 웃는 아이들.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다. "루시아한테 허락은 받았니?" "네에~!" "……." 헉! 루시아가 허락했단 말인가? 루시아 핑계를 대서 떼놓고 갈 생각이었는데, 루시아가 허락했다니! 사실 얘들 데리고 가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으음, 어떻게는 떼놓고 가야 할 텐데. 내가 떼놓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데 루시아와 인디가 부엌에서 나왔다. "여기 도시락." "와아! 도시락이다!" "고마워요, 언니." "사랑해요, 누나." 아이들은 재빨리 커다란 도시락을 배낭 속에 집어넣었다. 난 애들 배낭 속을 살작 들여다보았다. 배낭 안에는 엄청난 양의 과자와 빵, 음료수 등이 들어있었다. "이 작은 배낭 안에 어떻게 이런 많은 양의 간식이!" "인디 오빠가 마법을 걸어줬어요." "그래서 간식을 잔뜩 넣었어요." "헤헤~." "……." 이것들이 지금 소풍 가는 줄 아나?" "얘들아. 니들이 뭔가를 착각하는 모양인데, 오빠는 지금 소풍가는 게 아니란다. 이 보물찾기는 단체 소풍 가서 하는 보물찾기와는 레벨이 틀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아크리치의 던전 탐험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만큼 힘들고 위험한 일이란다." "루비는 수건돌리기 하고 싶어." "라이는 언니가 싸준 김밥부터 먹을 거야." "장기자랑 시간도 있겠지?" "……." 내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다음 자기들끼리 떠드는 어린 엘프들. 용서가 안 되는군. 한 대씩 쥐어박을까?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루시아가 다가와 나에게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이거 도시락이야. 가서 먹어." "루,루시아……." 도시락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난 그 온기에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루시아가 손수 만든 도시락. 메이드 인 루시아(?) 도시락. 혹시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가 아닐까? "애들 잘 돌봐야 돼." 루시아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난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해 크게 소리쳤다. "걱정 하지 마, 루시아. 애들은 내가 완벽하게 돌볼게. 나만 믿어!" "응. 믿얼게. 그럼 잘 갔다 와." "꼭 보물을 찾아올게." "잘 다녀오세요." "나 없는 동안 문단속 잘해라." "예. 걱정하지 마세요." 난 루시아와 인디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선 순간 나는 내 뒤에 혹처럼 붇은 아이들을 발견했다. "……." 헉! 분위기에 휩쓸려 그만 애들을 떠맡다니! "빨리 가요, 오빠."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재촉하는 루비.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그래. 가자꾸나, 얘들아. 오빠 뒤를 잘 따라오렴." "네에~!" 일단 집을 나오긴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다. 보물을 찾기 위해선 일단 보물이 있을 만한 범위를 좁혀야 한다. 대한민국을 전부 뒤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도라는 게 있는 거지. 난 지도를 펼쳐 보았다. 지도에는 그림과 문자가 뒤섞여져 있었다. "으음, 역시 산인 것 같지?" 난 그림을 보며 중얼거렸다. "라이 벌써 배고파." "루비도." "도시락 먹자." 어린 엘프들은 주섬주섬 도시락을 꺼내들었다. 난 어이가 없어 물었다. "니들 지금 뭐하는 거니?" "도시락 먹으려구요." "……."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집 앞 놀이터. 집 나온지 10분도 안 됐고, 이동거리는 100미터도 안 됐다. 그런데 벌써 도시락을 까먹겠다니! 이것들이 정말 제정신이란 말인가? 난 어린 엘프들을 얼차려 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도로 집어넣으렴." 다행이 아이들은 시킨대로 도시락을 집어넣었다. 대신 과자를 꺼내 먹었다. "……." 징한 것들 같으니라고. 난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놀이터 벤치에서 지도 해석을 하다니. 집에서 먼저 해석을 한 다음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의욕이 너무 앞선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난 상식선에서 생각을 해보았다. 매국노 나까무라 다케시는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동산을 부피가 작은 금과 보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딘가에 숨겼다. 과연 어디에 숨겼얼까? 적어도 서울을 벗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부피가 작은 금과 보석이라 해도 시가 백억 원이면 부피와 무게가 상당하다. 그것을 서울 밖까지 옮겼을 리는 없다. 아마도 집과 가까운 곳, 그러면서도 인적이 뜸하고 발견될 염려가 적은 곳에 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산이겠군." 우리나라는 70퍼센트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주위에 산은 널리고 널렸으니 옮기기도 쉽고, 숨기기도 쉬웠을 것이다. "혼자 옮겼을까?"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순금 골드바 1kg이 1600만원 정도다. 100억 원의 반인 50억 원만 순금이라고 해도 무게는 무려 30kg 이상이다. 혼자서 운반하기엔 부담스러운 무게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당시 나까무라 다케시의 지위를 생각해 볼 때 충분한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도의 맨 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아흔아홉 개의 언덕이 산을 이루는 곳. "……." 아흔아홉 개의 언덕이 산을 이루는 곳이라니? 산맥을 뜻하는 건가? 그럼 산맥 전체를 뒤지고 다녀야 하는 거야? 무슨 산맥인지도 모를 뿐더러, 안다고 해도 산맥 전체를 뒤지고 다니는 것은 미친 짓이다. 나의 잔머리에 의하면 이럴 땐 전문가와 상담할 필요가 있었다. "일어나자, 얘들아." "배불러서 졸려요. 좀 쉬었다 가면 안 돼요?" "……." 집 나온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쉬었다 가자 그러니? "니들 오빠 말 안 들을 거면 집으로 돌아가!" 내가 소리치자 아이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느릿느릿 일어났다. 그리고 아장아장 내 뒤를 따랐다. 에휴~ 어째 처음부터 예감이 안 좋군. 이래서 보물을 찾을 수 있으려냐? 난 가게에 들렀다. 건물 전체가 공사 중이었다. 손에 설계도면을 든 지니는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니의 옆에는 20대의 늘씬한 미녀가 서 있었다(어떻게 된게 만나는 여자들마다 20대의 늘씬한 미녀다). 검은색의 새미 정장, 보라색이 살짝 들어간 무테안경,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은 검은색 머리카락.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인텔리전트한 여성이다. 저 여자가 지니가 말한 요즘 교제하는 여성 중 건축 디자이너 직업을 가진 여자로군. "아!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보물 찾으러 떠나기 전에 작별 인사나 하려구요." "그러셨군요. 아! 이쪽은 운미정 양입니다." 지니는 옆의 여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이쪽은 아이언스 히로 공작님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처음 뵙겠어요."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참 부드럽다. 으음, 지니는 좋겠군. 뭐, 나한테는 루시아가 있으니까.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시간 괜찮으세요?" "물론입니다.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절 필요로 하시는데 시간이 문제겠습니까? 아이언스 공작님을 위한 시간은 언제든 마련되어 있습니다." 난 지니와 잠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현장지휘는 윤미정이라는 건축 디자이너가 맡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아흔아홉 개의 언덕이 산을 이루는 곳' 이라고 써져 있는데, 이게 뭘 뜻하는 건지 아시나요? 제 생각엔 산맥을 말하는 것 같은데……." "으음." 지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건 파자(破字)와 관련된 암호인 것 같습니다." "파자요?" "한자의 자획을 풀어서 암호화 시킨 겁니다. 예를 들어 '나무의 아들의 성은 무엇이냐' 같은 물음을 들 수 있겠지요." "나무의 아들의 성이요? 그게 뭔데요? "답은 이(李)씨입니다." "이씨요?" "그냥 말장난입니다. 나무의 아들이니, 한자로는 나무 목(木)자와 아들 자(子)자입니다. 이걸 합치면 오얏 리(李)자가 되어 이씨라고 하는 겁니다." "오오! 그럴싸하네요. 뭐, 또 다른 건 없어요?" "조선 시대 방랑시인 김삿갓은 파자에 관련된 일화가 많습니다. 그가 하루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부인 : 인양복일 할까요? 남편 : 월월산산이거든. 이 말을 들은 김삿갓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김삿갓 : 정구죽천이로다! 얘기를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내가 말한 '인양복일 할까요?' 는 '밥을 올릴까요?' 라는 뜻입니다. 인양은 사람 인(人)자에 어질 량(良)자입니다. 합치면 밥 식(食)자가 되지요. 그리고 복일은 점 복(卜)자에 한 일(一)자입니다. 합치면 위 상(上)자가 되지요. 두 글자를 합치면 '밥을 올랄까요?' 라는 뜻이 됩니다." "월월산산은요?" "월월은 달 월(月)자가 두 개이니 합치면 벗 붕(朋)자가 되고, 산산은 뫼 산(山)자 두 개이니 합치면 날 출(出)자가 됩니다. '밥을 올릴까요?' 라는 아내의 물음에 '친구가 가거든' 이라고 대답한 겁니다." "정구죽천은요?" "파자에 능했던 김삿갓인 만큼 그들의 대화를 다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벌덕 일어서며 외친 겁니다. 넷째천간 정(丁)자와 입 구(口)자를 합하면 옳을 가(可)자가 되고, 대나무 죽(竹)자와 하늘 천(天)자를 합하면 웃을 소(笑)자가 되지요. 감히 자신의 앞에서 문자를 쓰는 모습이 가소롭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호! 이거 정말 재밌네요. 어디 가서 써먹으면 좋겠는데요." "아무튼 제 생각에 '아흔아홉 개의 언덕이 산을 이루는 곳' 이란 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요?" "아흔아홉은 백에서 하나가 모자란 숫자입니다. 일백 백(百)자에서 한 일(一)자를 빼면 흰 백(白)자가 되지요. 즉, 아흔아홉은 흰 백자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으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요. 그럼 '언덕이 산을 이루는 곳' 이라는 것은 뭔가요?" "언덕이 산을 이룬다는 것은 언덕 구(丘)자와 뫼 산(山)자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합치면 큰산 악(岳)자가 됩니다." "그럼 아흔아홉 개의 언덕이 산을 이루는 곳이 백악(白岳)이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 백악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있나요?" "경복궁 북쪽에 있는 북악산(北岳山)을 백악산(白岳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 지니의 말에 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드디어 실마리가 잡힌 건가? 나까무라 다케시는 종로경찰서에서 일했고, 종로에 살았다. 북악산의 위치 역시 종로구. 아귀가 딱딱 맞아든다. "하긴, 그 무거운 것을 굳이 멀리까지 가자고 가서 숨길 필요는 없었겠죠. 그는 보물을 집과 가까운 북악산으로 가져가 숨긴 게 틀림없습니다!" "훌륭한 추리십니다. 과연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아하하, 뭐 당연한 거죠." "아닙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추리에 저는 다시 한번 감복하였습니다." "……." 그런데 추리는 니가 다 하지 않았니? 뭐, 상관없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무엇입니까?" "뭐 하러 이렇게 말을 비비꼬아 놓은 걸까요?" 이것은 정말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냥 간단하게 써놓아도 될 것을 뭐 하러 비비꼬아 놓은 거지? "제 생각에는……." "생각에는?" "이 지도를 만든 사람이……." "사람이?" "굉장히 심심했나 봅니다." "예?" "그냥 만들기 심심해서 비비꼬아 놓은 것 같습니다." "……." 그런 거였나? 하긴, 친절하게 위성항법장치(GPS)까지 이용해서 지도를 그려놓았으면 그게 보물 지도냐? 약도지. "아무튼 북악산인 걸 알았으니 그만 가봐야겠네요." "아! 이걸 가져가십시오." 지니가 내민 것은 핸드폰이었다. "이걸 왜 주세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제 번호는 1번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예. 계속 수고하세요." 난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북악산 가는 버스편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어린 엘프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소리쳤다. "그냥 택시 타고 가요오~!" "……." 지들이 돈 안 낸다고 말을 막하는 어린 엘프들. 싹퉁머리가 없기가 하늘을 찌른다. 난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버스를 찾아보았지만, 어느 버스가 북악산으로 가는지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와아~!" 내 지갑 사정 따윈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환호성을 내지르는 어린 엘프들. 오늘따라 얘들이 더욱 마음에 안 든다. 그냥 적당한 장소에 버리고 도망칠까? 그랬다간 루시아한테 맞아 죽겠지? "루비는 오빠랑 같이 보물찾기하러 떠난다는 게 너무 신나요." "하아~ 그러니?" "네. 루비는 막막 좋아요." 단체소풍 가는 걸로 착각 중인 어린 엘프들. 얘들 머릿속인 '도시락을 언제 까먹을까?' 하는 생각밖엔 없을 것이다. 매국노가 숨긴 보물을 찾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겠지. 얘들한테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북악산에 도착했다. 북악산 입구에는 등산객들이 바글바글 거렸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죠?" 내 질문에 택시기사가 친절하게 답변해주었다. "며칠 전 함박눈이 왔기 때문이죠. 산 위에 눈꽃이 예쁘게 폈다고 하더군요." "그럼 이게 다 설경(雪景)보러 가는 인파란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 어째 시기를 잘못 선택한 것 같은데.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 전진하는 수밖에. "가자, 얘들아!" "네에~!"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의욕 하나는 세계 최강이다. 우리는 등산객들 사이에 껴서 열심히 등산을 했다. 아장아장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모습은 등산하러 온 사람들에게 또 다른 기쁨을 안겨주었다. "어머, 저 애들 좀 봐. 외국인인 것 같은데 되게 귀엽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깨물어 주고 싶어!" 순식간에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된 어린 엘프들. 새하얀 눈꽃이 핀 산을 발랄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내 눈에더 그렇게 귀엽고 예쁠 수가 없었다. 누가 보무인진 몰라도 참 좋겠군. "……." 사실 내가 부모다. 우헤헤헤~. 애들 덕분에 내 어깨까지 으쓱하는군. 역시 애들은 잘 기르고 볼 일이라니까. "오빠에게 가까이 오렴, 얘들아." "네에~!" 난 애들과 가까이 붙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아이들 보호자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내가 애들과 생김새가 심히 다르다보니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내가 보호자인 줄 아무도 모른다. 난 애들과 다시 산을 타는 데 열중했다. 간만에 산에 와서 그런지 정말 기분이 좋다. 공기도 맑고, 경치도 좋고. 으음, 다음번엔 루시아와 함께 등산이나 해볼까? 요즘은 커플끼리 등산을 자주 한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면 부부동반(또는 커플동반)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곳곳이 얼음바닥으로 되어 있는 오르막길에서 한 여자가 미끄러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재빨리 부축해주었다. "조심해야지, 애기야." "미안해, 자기야." "우리 애기 어디 다친데 없어?" "손이 가졌어. 흑~ 아포." "우리 애기 많이 아파? 피까지 나네. 저런 나쁜 빙판 같으니. 오빠가 저 나쁜 빙판 떼찌~ 해주고, 우리 애기는 호~ 해줄게." "……." 남들 눈 전혀 신경 안 쓰고 염장질에 열중인 커플. 만약 내가 솔로(싱글이 정확한 표현이다. 하지만 솔로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 싱글부대라고 안 하고 솔로부대라고 하잖아)였다면 저 커플은 나한테 죽었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커플지옥 솔로천국' 이라는 문구의 뜻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나에게 루시아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라. 하지만 솔로부대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 염장 커플 옆을 지나가는 여대생 등산객들(대학교 산악 동아리로 보이는)은 한마디씩 궁시렁거렸다. "여기가 지들 데이트 하라고 만들어 놓은 줄 아나?" "산에 왔으면 등산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별 꼴이야 정말." "콱 절벽으로 밀어버렸으면 좋겠네." 커플부대의 염장질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솔로부대들. 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진짜 저런 것들은 꽁꽁 묶어 절벽으로 밀어버려야 한다. "와아! 이거 봐요, 오빠. 눈꽃이 예쁘게 피었어요." 간만에 자연 속으로 들어오자 기분이 좋은지 아이들은 활기찬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얘들은 자연친화적인 종족인 엘프가 아니던가? 누구보다도 자연과 가까워야햘 이 아이들이 그 동안 아스팔트 위에서 매연을 마시며 살아왔다니! 미안한 마음이 온몸을 휘감는다. 이제부터라도 쉬는 날에는 아이들과 함께 교외로 나가야겠다. 그게 애들 건강에도 좋겠지. "빨리 오르자꾸나." "네에~!"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산을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짧은 다리의 압박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 한 걸음 걸을 때, 아이들은 두 걸음을 걸어야 했다. 당연 속도가 느리고 금방 지칠 수밖에 없었다. "좀 쉬었다 가요, 오빠." "저쪽에 쉴 만한 곳이 있네. 저기까지만 올라가자." 다행히 중턱에 등산객들이 쉬어갈 만한 장소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자리를 깔고 앉아 쉬거나, 밥을 먹었다. "도시락 먹어요오~!" 지금쯤이면 도시락을 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점심을 먹고 있으니. "그래. 먹자꾸나." "와아!" 아이들은 기뻐하며 재빨리 배낭을 뒤졌다. 그리고는 각자 엄청난 크기의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한 3인분 되겠군. 어린애를 기준으로 보자면 5인분 정도? 아무튼 엄청나게 많은 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애들에게는 저게 1인분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락 뚜껑을 열자 빼곡히 들어찬 김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재빨리 꾸역꾸역 김밥을 입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저거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 좀 봐. 루시아가 정성들여 싸준 도시락을 저따위로 먹다니! "물도 좀 마셔가며 먹으렴. 그러다 체하겠다." 난 음료수 캔을 따서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한 손에는 음료수를, 다른 손에는 김밥을 들고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참 복스럽게도 먹는군. 얘들 먹는 모습을 보면 거식증 환자도 한번에 치료될 것이다. "오빠도 드세요." 라이와 루비가 동시에 김밥을 내밀었다. 먹을 것에 무한한 집착을 보이는 이 아이들이 음식을 남에게 권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그야말로 구국의 결단이 필요하다고나 할까? "라이 꺼 먼저 드세요." "아니에요. 루비 꺼 먼저 드세요." 서로 자신이 내민 김밥을 먹으라고 재촉하는 라이와 루비. 나의 인기를 새삼 실감한다. 그런데……. "넌 왜 가만히 있니?" 난 루에게 물었다. 라이와 루비가 알아서 김밥을 상납하는데, 혼자만 가만히 있다니! 니 입은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라는 거냐? 내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자 꾸역꾸역 먹던 루는 슬그머니 김밥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형." "……." 이건 완전 옆구리 찔러 절 받기군. 난 김밥 3개를 한번에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아아~ 메이드 인 루시아(?)의 맛이 느껴진다. 루시아표 김밥을 먹는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 난 배낭을 뒤져 루시아가 내 몫으로 싸준 도시락을 꺼내들었다. 애들 것보다 크기가 작다. 일반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1인분보다는 많고 2인분보다는 적다. 뚜껑을 여니 빼곡히 들어찬 김밥이 보인다. 난 김밥을 입에 넣었다. 바삭바삭한 김과 톡톡 터지는 밥알. 단무지, 게맛살, 시금치 등이 어우러진 김밥의 맛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 잠깐 뭔가 좀 이상한데. 난 내 김밥이 아까 먹은 애들 김밥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일반인이라면 이렇게 쉽게 알아채진 못했겠지만, 나는 절대감각의 소유자다. 이 절대감각으로 미세한 차이도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다. 난 내 김밥과 애들 김밥을 과학적이고 심도 있게 비교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차이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내 김밥에는 햄이 없다! "어,어떻게 이런 일이……." 난 놀라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애들 김밥에는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는 햄이 어째서 내 김밥에는 없는 거지? 대체 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 * * * 몇 시간 전. 히로네 집 부엌. 루시아는 아이들과 히로를 위해 김밥을 싸기로 했다. 그래서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했다. 루시아는 김밥을 싸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인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밥이라는 게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아니다. 밥은 참기름과 소금을 살짝 뿌려 맛을 내고, 당근과 시금치, 우엉 등은 잘 다듬어 놓아야 한다. 계란도 부쳐야 하고 게맛살, 햄, 단무지 등은 같은 크기로 썰어야 한다. 김밥을 마는데도 고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너무 힘을 많이 주면 옆구리가 터지고, 너무 힘을 적게 주면 쉽게 풀린다. 루시아는 정성들여 꼼꼼히 김밥을 쌌다. 루시아가 김밥을 말면 인디는 참기름을 칠하고 들깨를 뿌렸다. 그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도시락 통에 담았다. 아이들 식욕을 잘 아는 루시아는 김밥을 최대한 많이 만들었다. 도시락 통 하나에 들어간 김밥은 무려 7줄. 그야말로 배터지게 먹을 양이다. 그런데 김밥을 싸다보면 언제나 생기는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준비된 재료의 양과 소모 속도가 달라 특정 재료가 먼저 떨어진다는 것이다. "햄이 다 떨어졌네. 햄 더 없어요, 형부?" "여기 있던 게 전부였어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지금 나가서 사오기엔 시간이 없으니, 히로 건 햄 없이 싸야겠네요." "예. 다른 재료가 많으니 햄은 안 들어가도 별 상관없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히로의 김밥에만 햄이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단지 김밥에 햄이 빠졌다는 이유로 히로가 큰 충격을 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 * * * 내 김밥엔 햄이 없어. 내 김밥엔 햄이……. "김밥 되게 맛있다." "응. 루비는 특히 햄이 맛있는 것 같아." "맞아. 햄이 없으면 김밥이 아니야." "응응. 라이도 그렇게 생각해. 김밥에는 반드시 햄이 들어있어야해." "……." 뭐야, 저 대화는?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라이와 루와 루비는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화기애애하게 김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슬쩍 내 김밥을 숨겼다. 내 김밥에 햄이 없는 것을 알면 쟤들이 날 우습게 볼 게 분명해. 어째서 내 김밥엔 햄을 넣어주지 않은 거야, 루시아? 흑~ 루시아 미워~. 아이들 김밥에 비해 한 없이 초라해 보이는 내 김밥. 난 눈물을 흘리며 그 김밥을 먹었다. "흑~ 그래도 맛있어." 눈물 젖은 김밥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사랑에 대해 논할 자격도 없다. 내 김밥에 햄이 없는 이유는 분명 저것들 때문이야. 저것들이 나를 향한 루시아의 사랑을 전부 뺏어갔기에 내 김밥에 햄이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귀엽게만 보이던 아이들이 징글맞게 보이기 시작했다. 루시아와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저것들부터 없애야 한다. 이대로 산 속에 버리고 튀는 것은 어떨까? 난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으음, 루시아한테 맞아 죽겠군." 김밥을 다 먹은 아이들은 디저트로 사과를 먹고 있었다. 아삭아삭. 그렇게 먹고도 배가 안 차는지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렴. 다시 올라가야지." "졸려요. 좀만 자고 가면 안 돼요?" 아이들은 하나같이 크게 하품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루비는 그 자리에 눞기까지 했다. 니들이 뭐가 예쁘다고 내가 낮잠 잘 시간까지 주겠니? "다들 일어나! 햄까지 들어있는 김밥을 먹어 배가 든든해졌을 테니 다시 힘을 내서 걷는다. 전원 구보 대형으로!"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는 아이들. 마지못해 한다는 티를 팍팍 낸다. 어쨌든 다시 행군을 시작한 우리들. 그런데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철퍼덕! "으아아앙~." 난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누가 넘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울음소리로 구분이 되니 참 편리하군. 원인은 빙판이었다.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 빙판이 되었고, 그 위에서 루비가 넘어진 것이다. 루비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 펑펑 울고 있었다. "으앙~ 으앙~." 난 루비의 다리를 살짝 만져보았다. 그러자 루비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꺄악! 으아아앙! 아파요오~!" "잠깐만 참아봐." 난 조심스럽게 루비의 신발과 양말을 벗겼다. 복사뼈(복숭아뼈라고 하기도 한다. 표준어는 아니지만) 주위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접질렸나 보네." 큰일이군.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에휴~ 하는 수 없지." 난 배낭을 앞으로 돌려 매고 루비를 업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루비……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까 먹은 김밥 무게까지 포함돼서인지 상당히 무겁다. "헤헤~ 오빠가 업어줬다." "앗! 라이도 업히고 싶어요." "미안하지만, 아무리 잘난 이 오빠라도 등이 하나뿐인 건 어쩔 수가 없구나. 혹시라도 오빠 등에 업히고 싶어서 일부러 넘어지는 등의 헐리우드 액션을 취할 생각은 하지 말려무나. 그럼 버리고 갈 테니." "아,아니에요! 라이는 오빠 등에 업히고 싶어서 일부러 넘어지려는 생각 안 했어요. 진짜에요." "……." 그런 생각 했나 보군. 어디서 잔머리만 늘어가지고(아무래도 내 영향이 크겠지?). 라이는 내 등에 업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지 걷는 내내 루비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편해?" "응. 오빠 등 넓어서 막막 편해." "따뜻해?" "응. 오빠 등 막막 따뜻해. 마치 난로 같아." "좋겠다." "응. 막막 좋아. 헤헤~." 내 등에 업혀 두 손을 내 목에 두르고 내 어깨에 머리를 걸친 루비. 그리고 그런 루비를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라이. 생각 같아선 둘 다 같이 업어주고 싶다. 신체적 구조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아쉽군. "라이는 나중에 업어줄게." "저는요?" "……."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루, 내가 웬만하면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주의긴 하지만 아무래도 여자아이를 좀더 신경 써주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귀엽다고 해봐야 남자아이를 어따 쓰겠나? 그래봐야 남잔데. 으음, 억울하면 다음 세상에는 여자로 태어나려무나. 그래도 붉은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 루를 보고 있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긴 한다. "그래. 너도 나중에 업어줄게." "헤헤~ 정말요?" "……." 웃지 마라. 정 든다. 난 루비를 업은 채 정상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몇 시간 후. 기나긴 인고의 세월 끝에 우리는 정상에 올랐다. 눈꽃이 만발한 북악산의 정상. 그 설경에 모두가 감탄했다. "너무 예뻐요!" 눈꽃 사이를 뛰어다니는 라이. 그 귀엽고 깜찍한 모습에 난 디카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 핸드폰 카메라(줄여서 폰카) 성능은 웬만한 디카 못지않다고 하던데. "……." 아! 생각해보니 아까 지니가 나한테 핸드폰을 줬잖아. 난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다행히 카메라 기능이 있군. 헉! 이 핸드폰은 삼승 애니퀄이잖아. 언제나(Any) 최고의 퀄리티(Quality)를 자랑한다는 애니퀄(Anyqual). 헉! 요즘 TV광고에 나오는 최신 모델이네. 헉! 500만 화소에 줌 기능까지 있네. 이게 그 유명한 럭셔리폰?" 과연 사일런스 지니. 썼다하면 무조건 최고급이구만. 요즘 교제하는 여성이 애니퀄 사장인가? 어쨌든 웬만한 디카보다 나은 성능을 지닌 폰카가 있어서 다행이다. "거기 서서 포즈 좀 취해보렴. 루비도 같이 서 봐. 루비는 다리 다쳤으니까 서 있기 힘들면 라이한테 살짝 기대." 난 눈꽃을 배경으로 애들 사진을 찍었다. 어깨동무하고 있는 라이와 루와 루비, 눈꽃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는 라이와 루비! 해맑게 웃으며 눈꽃 사이를 뛰어다니는 라이! 눈 위에 앉아 귀엽게 웃는 루비 등등. 그와 함께 설경도 몇 장 찍었다. 으음, 나중에 루시아한테 보여주면 좋아하겠군. "정상에 올라오니까 기분 좋아요." "맞아요. 올라올 때는 되게 힘들었는데 올라와서 보니 막막 좋아요. 루비는 산에 오길 잘한 것 같아요." "……." 맞는 말이긴 한데, 넌 내 등에 업혀 올라오지 않았니? 니가 되게 힘들었으면, 이 오빠는 뭐니? "그럼 우리 '야호' 한번 외칠까?" "네에~!" 우리는 두 손을 모아 힘차게 소리쳤다. "야아호오오오~!" 역시 등산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산만큼 좋은 친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올라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 산. 산에 오르는 것은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잊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헉!" 난 등산하러 온 게 아니잖아! 보물을 찾으러 왔지! 등산객들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정상에 오르고 말았다. 이런 게 군중심리인가? 난 잠시 동안 좌절했다. 어째 본래의 목적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한시라도 빨리 보물을 찾아 루시아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난 지도를 펴보았다. '아흔아홉 개의 언덕이 산을 이루는 곳' 이란 첫 문장 밑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 뭐야? 갑자기 이토 히로부미가 왜 나와? 이번에도 암호인가? 훗~ 이런 수준 낮은 암호를 푸는 것쯤이야 나에겐 껌이다. 5분만에 풀어주마! 1시간 후. 난 여전히 암호를 풀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추워요, 오빠." "그만 내려가요."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시끄러! 다들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해?" 암호는 풀리지도 않는데 애들 투정을 들으니 화가 폭바란다. 오빠가 암호를 풀고 있으면 조용히 앉아서 기다려주지는 못할망정 감히 투정을 부리다니! 건방지기 그지없군. 그나저나 이거 암호 맞긴 맞는 거야? 그냥 심심해서 이름 써놓은 것이 아닐까? 한참을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전문가에게 상담을 하기로 했다. 난 핸드폰을 열고 1번을 눌렀다.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예. 아이언스 공작입니다."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는지요?] "좀 이상한 암호가 있어서요." [무엇입니까?] "첫번째 암호 밑에 이토 히로부미라고 써져 있거든요. 이게 무슨 뜻인가요?" [그렇게만 쓰여 있습니까?] "예." […….] 지니는 생각을 하는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예? 정말요? 뭔데요?" [이토 히로부미를 한자로 쓰면 저 이(伊)자, 등나무 등(藤)자, 넓을 박(博)자, 무늬 문(文)자가 됩니다. 이 한자들ㄹ을 한국식으로 음독(音讀)하면 '이등박문'이 됩니다. '이등'이 성이고 '박문'이 이름이지요.] "그래서요?" [산에서 이등이러면 뻔하지 않습니까?] "뻔하다니요?" [일등은 최고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산에서 일등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되겠죠.] "헉! 그럼 이등은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그렇습니다.] "그럼 박문은 뭔가요?" [이건 소리 동화 현상에 따른 말장난인 것 같습니다.] "예? 소리 동화 현상이요? 그건 또 뭐예요? [받침소리가 'ㄱ(ㄲ, ㅋ, ㄳ, ㄺ), ㄷ(ㅅ, ㅆ, ㅈ, ㅊ, ㅌ, ㅎ), ㅂ(ㅍ, ㄼ, ㄿ, ㅄ)'은 'ㄴ, ㅁ'앞에서 'ㅇ, ㄴ, ㅁ'으로 발음됩니다. 즉, '박문'은 '방문'으로 발음 되지요.] "으음, 그렇군요." 그런데 어째서 외국인인 지니가 한국인인 나보다 한글에 대해 더 잘 아는 거지? "앗! 그럼 이토 히로부미는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를 방문하라는 뜻이었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오오!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그런데 어떤 자식이 암호를 이따위로 써놓았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앞에 있으면 한 대 패주고 싶어요. 아무튼 고마워요." [아닙니다. 보물을 찾으시기를 이곳에서 마음속으로나마 응원해 드리겠습니다.] "예. 이만 들어가세요." 난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가자, 얘들아! 목표는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난 뒤를 돌아보았다.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쿨쿨 자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 언제 어디서나 먹고 잘 수 있는 아이들. 인생 참 편하게 사는군. * * * * 나의 지휘 아래 어린 엘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기적어기적. 느릿느릿. 꿈틀꿈틀. "……." 뭐야? 뭔 의태어가 이래? 이게 일사불란이야?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루비는 다리가 아파서 못 걸어요. 업어줘요, 오빠." 난 루비의 발을 보았다. 붓기도 빠졌고, 피부도 원래 색을 되찾았다. "다 나은 것 같은데." 그러자 루비는 두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에요, 오빠. 멀쩡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골병이 들었어요." "……." 어린애가 별 소릴 다하는군. 구급상자만 있었으면 바로 치료해 줘서 딴 말 못하게 하는 건데. "아! 마법으로 치료해주면 되겠군!" 하도 오랫동안 마법을 안 쓰다보니 내가 마법사라는 것도 깜빡했다. 뭐, 주위에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니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지. 지금만 해도 내 옆에는 라이가 있지 않은가? "귀여운 라이야." "예, 오빠." "드디어 네가 나설 차례다. 마법으로 루비의 다리를 치료해주렴." "네." 라이는 두 손을 루비의 발목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힐링(Healing)!" 그러자 새하얀 빛이 루비의 발목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괜찮지?" "그래도 아픈 것 같아요. 너무 아파서 오빠 등에 업혀야 할 것 같아요." "……." 8클래스 마법사가 쓴 힐링이다. 효과는 완벽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프다고 떼를 쓰다니! 이렇게까지 해서 내 등에 업히고 싶은 건가? "꾀병인 거 다 아니!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렴. 자꾸 그러면 버리고 간다." 그러자 루비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일어났다. "그럼 저쪽 봉우리를 향해 출발하자." "이번에는 라이를 업어주세요, 오빠." "응?" "아까는 루비 업어줬으니까, 이번에는 라이 업어줘요." 라이는 회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무언가를 갈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만약 내가 거절의 의사를 밝히면 바로 울음을 터트리겠다는 의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눈빛을 마주 대하게 되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워낙 착한 오빠다 보니. "그래. 업히렴, 라이야." "정말요?" "응." 바로 폴짝 뛰어 내 등에 업히는 라이. 얘들에게 내 허리 사정을 생각해 달라는 것은 무리겠지? "출발!" 2시간 후. "헥헥~ 드디어 도착했다." 난 라이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뻗었다. 루와 루비도 힘든지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주물렀다. "저기요, 오빠." "응? 무슨 일이니, 라이야?" "라이 생각에는요……." "라이 생각에는 뭐?" "이 봉우리보단 저 봉우리가 조금 더 높은 것 같아요." "……뭐라?" 난 벌떡 일어나 라이가 가리킨 봉우리를 보았다. 라이의 말대로 저쪽이 약간 높은 것 같다. 그럼 여긴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가 아니라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 "언제부터 알았니?" "아까아까부터요." "그런데 왜 아무 말 안 했니?" "오빠 등이 너무 편해서요. 헤헤~." "……." 오빠 등이 편한 것과 말 안 한 것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거지? 난 누워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기가 아닌갑다. 전원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따르라!" 또 2시간 후. "헥헥~ 이번엔 맞겠지?" 다행히 '아까 거기다!' 라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서 더 이상 수색이 불가능했다. 밤에 산속에서 돌아다니다간 길을 잃는 수가 있으니. 게다가……. "배고파요." "저녁 먹어요." "맛있는 걸로요." 나도 배고프다. 확실히 저녁을 먹을 때가 됐지. 난 배낭을 뒤져 블루스타와 냄비를 꺼냈다. 냄비에 생수를 붓고 물을 끓였다. 오늘 저녁은 라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쌀밥 다음으로 많이 먹는 음식이다. 라면이 대충 끓여서 대충 먹으면 될 것 같아 보이는 음식이지만, 어떻게 끓이느냐에 따라 맛이 천자만별로 달라진다. 난 정성을 다해 라면을 끓였다. 애들 식성을 생각해서 무려 7개나 끓였다. 나 하나 먹고, 애들 두 개씩 먹으면 되겠지. 그런데 보통 이런 곳은 취사금지 아닌가? 뭐, 상관없겠지. "자, 먹자." 그러자 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냄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뜨거운 면발을 입 안으로 허겁지겁 밀어 넣는 아이들. "천천히 먹어. 입천장 델라. 여기 김치도 있으니까 같이 먹어." 난 김치를 쭉쭉 찢어 아이들 그릇에 올려주었다. "맛있니?" "……." 입에 든 면발 때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열심히 끄덕거리는 아이들. 후후~ 하긴 내가 끓인 라면이 좀 맛있긴 하지. 면발이 동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표정이었다. 후후~ 이럴 때를 위해 찬밥을 챙겨왔지. 난 찬밥을 꺼내 국물에 말아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수저를 들고 달려들었다. "천천히 먹으렴. 찬밥은 많으니." 결국 면발 한 가닥, 밥 한 알, 국물 한 방울까지 전부 먹어치운 아이들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난 배낭에서 텐트를 꺼내 설치했다.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수색에 나서야겠군. "자자." 그러자 아이들은 배낭에서 주섬주섬 잠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그리고 두꺼운 이불과 베게를 꺼냈다. 역시 마법 배낭이어서 그런지 별 게 다 들어가 있군. 우리는 텐트에 누웠다. 10인용 텐트여서 안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난 손전등을 입에 물고 지도를 살폈다. 하나의 입과 두 개의 산. 여기 암호다. 그래도 이번 암호는 혼자서 풀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지니가 말해준 파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 하나의 입이라 함은 한 일(一)자와 입 구(口)자다. 합치면 해 일(日)자, 혹은 가로 왈(曰)자가 된다. 그리고 두 개의 산(山)은 합치면 날 출(出)자가 된다. 왈출(曰出)은 말이 안 되니, 일출(日出)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일출이라……. 일출 때 뭔가가 나타난다는 건가?" 어쨌든 해가 뜰 때까진 기다려야 한다는 거군. 내일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이만 자야겠군. 으음, 루시아는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냐? 아! 루시아 목소리나 들어봐야겠다. 난 핸드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헉!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일루니아 여사님이 전화를 받으시다니! [누구시죠?] "저,저에요." [목소리만 들어도 재수 없는 걸로 봐서 아이언스 공작님이시군요.] "아니, 뭐라? 이 아줌마가 어디서 망발을! 아줌마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호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제가 루시아를 안 바꿔줘도 괜찮은가 보군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자,잠깐만요! 아하하~ 농담 한 걸 가지고 뭘 그렇게 흥분하세요. 단순한 조크였을 뿐이니 진정하세요."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는 것을 보니 루시아를 안바꿔줘도 뒬 것 같네요. 이만 끊죠.] "자,잠깐만요. 사,사과할 게요. 하면 되잖아요." 빠드득! [뭐죠? 방금 이 가는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아하하, 잘못 들으신 걸 겁니다." [어서 사과나 하시죠.] "……." 내가 이렇게 굴복해야 하는 건가? 이렇게 일루니아 여사님께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가? 감히 남자의 자존심을 뭐로 보고! [싫으신가 보죠? 그럼 전 이만…….] "잠깐만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다 제가 나빴어요. 용서해 주세요." [흐음, 성의가 없어 보이지만 뭐 이쯤에서 봐드리죠.] 빠드득! 이런 치욕까지 감수해야 하다니! 하지만 루시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면…….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루시아의 목소리. [여보세요.] "아! 루시아. 나야, 히로. 잘 있었어?" [나야 잘 있지. 그런데 거기 어디야?] "여기 북악산이야. 지금 자려고 준비하고 있어." [북악산? 거긴 왜 간 거야?] 난 그 동안의 사정을 루시아에게 설명해주었다. [으음, 그랬구나. 애들은 잘 있어?] "응. 잘 있어." [좀 바꿔줄래?] "으응." 계속 통화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아는 애들을 바꿔달라고 했다. 나도 루시아랑 계속 얘기하고 싶은데……. 난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애들에게 넘겨주었다. "라이는 잘 있어요, 언니." "루비도 잘 있어요." "저도 잘 있어요." "우리 모두 잘 있어요오~!" 핸드폰에 대고 합창을 하는 아이들. 난 다시 핸드폰을 넘겨받았다. [애들 다치지 않게 잘 좀 돌봐줘.] "응. 걱정하지 마. 그것보다 이렇게 니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참 좋다. 벌써부터 니가 보고 싶……." [아! 욕탕에 물 받아놓은 걸 깜빡했네. 그럼 이만 끊을게.] "자,잠깐만, 루시아!" [뚜뚜뚜뚜.] "……." 조금 더 루시아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다시 전화 걸기도 좀 그러니 이제 자야겠군. 내 왼쪽에는 라이와 루비의 잠자리, 그리고 오른쪽에는 루의 잠자리가 위치해 있었다. 굳이 이렇게 배치한 이유는 루가 라이와 루비에게 손을 뻗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남자는 아무리 어려도 늑대~. 라이와 루비는 수면용 모자까지 뒤집어썼다. 으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애들 잠옷 입은 모습은 참 귀엽다. 라이는 베개 대신 내 팔을 베고 누웠다. 그리고는 고사리 같은 두손으로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아앗! 루비도 오빠 팔 베고 자고 싶어요!" 내 오른쪽 팔을 노리는 듯한 루비. 그런데 그 순간 루가 내 오른쪽 팔을 베고 누웠다. "……."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고 감히 라이를 따라서 내 팔을 베다니! 당연한 얘기지만 내 팔은 여성 전용이다. 감히 남자 따위가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뭐, 오늘만 봐주도록 하자. "그럼 불 끈다." 난 손전등을 껐다. 라이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오빠." "응. 라이도 잘 자렴." "안녕히 주무세요, 오빠." "그래. 루비도 잘 자렴." 쿨쿨~ "……." 루 이 자식은 벌써 잠들었군. 잠자리 인사도 없이 잠들다니! 내 팔이 그리도 편하단 말이냐? * * * * 몸이 무겁다. 마치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난 팔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걸 가위에 눌린다고 하는 건가? 가위에 눌렸을 땐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거지? "……." 잠깐. 그런데 가위에 눌린 것 치곤 뭔가 좀 이상한데. 난 눈을 떴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텐트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오른쪽 팔은 루가 베고 있고, 내 왼쪽 팔은 루비가 베고 있다. 그리고 라이는 내 몸 위에 올라와 있었다. 아마도 라이가 내 위로 올라오면서 루비가 내 팔을 차지하게 된 것 같다. 어쨌든 무거워 죽겠다. 난 조심스럽게 팔을 뺐다. 찌릿찌릿. 헉! 팔에 쥐난 것 같아! 낸 재빨리 팔을 주물렀다. 양쪽 팔이 다 쥐났는지라 번갈아가며 주물렀다. 팔의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내 몸 위에 누워있는 라이를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제야 난 정상적으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넓은 텐트에서 좀 흩어져서 잘 것이지, 왜 나한테만 달라붙는거야? "……." 혹시 난 애들에게 인기 많은 타입? 난 텐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사방이 캄캄하고, 굉장히 추웠다. 난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가 점퍼를 입고 나왔다. 시간을 봐선 대충 1시간 정도 후면 해가 떠오를 것 같다. 난 랜턴을 켜고 아침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 메뉴는 카레다. 햇반에 3분 카레를 부어 먹으면 끝이다. 난 블루스타를 켜고 물을 끓였다. 그리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애들을 깨웠다. "다들 일어나렴. 전원 기상!" "우웅~ 졸려요오." 난 이불 속에서 비비적거리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생수로 세수까지 시켰다. "라이 화장실 가고 싶어요." "루비도요." "저도 급해요." "라이랑 루비는 저쪽으로 가서 볼 일 보고, 넌 저쪽으로 가서 볼 일 봐. 날이 어두우니 멀리 가진 마. 그 동안 오빠는 아침밥 준비할 테니." 아이들이 볼일을 보고 왔을 땐, 아침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햇반에 카레를 부어 먹으면 된단다. 한 사람당 햇반 2개에 3분 카레 2개씩. 아! 여기 3분 짜장도 있으니 취향에 따라 골라 먹으렴." 아이들은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눈을 깜빡깜빡거리면서도 열심히 수저를 놀렸다. "맛있니?" "네, 오빠." "많이 먹으렴." "네." 식사를 끝마친 후 설거지할 필요 없이 쓰레기와 그릇을 봉지에 넣고 묶어 배낭 속에 넣었다. 가끔 산속에 쓰레기를 버리는 몰상식한 인간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것 아닌가? 여기 있는 이 어린 엘프들처럼……. "거기 과자봉지 버리지 마! 산이 쓰레기장이냐?" 내가 애들 교육을 잘못시켰군. 그런데 엘프면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거 아냐? 엘프가 산에 쓰레기를 버리다니! 아예 숲에 불을 지르시지. "거기 블루스타 함부로 켜지 마! 불나면 니들이 책임 질 거냐?" 한시도 눈을 뗼 수 없게 만드는군. 난 바위에 걸터앉아 해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산허리 사이로 새빨간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보는 일출인가?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광경. 아아~ 난 돈 버는 데만 치중하느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았구나! 자연 앞에 인간은 작은 존재이거늘. 이런 광경을 루시아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새빨간 태양이 떠올라 어둠을 걷어낸다. 대자연 앞에 선 남녀. 그들은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한없이 빠져든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입을 맞춘다. 길게 맞춘다. 한 2, 3시간은 떼지 않는다. 기왕 시작한 김에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한다. 그리고 쉬었다가, 다음날 해가 뜨면 다시 한다. 으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군. "좋았어! 다음번엔 루시아와 동해 바다로 놀러 가는 거야!" 바다라……. 바다하면 떠오르는 것은 수영이다. 그리고 수영을 하기 위해선 당연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 "헉쓰!" 수영복이라니! 수영복이라면 몸매가 다 드러나는 그 옷을 말하는 건가? 여성용으로는 원피스와 비키니 두 종류가 있다고 하는. 비키니를 입은 루시아라……. "헉쓰쓰!" 상상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다. 만약 직접 보게 된다면 난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죽게 되더라도 꼭 보고 싶다. 비키니를 입은 루시아라면 목숨을 걸고도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으음, 루시아 외에도 라이레얼, 카르, 일루니아 여사님 등이 있군. 다들 몸매가 좋으니 비키니 입으면 잘 어울리겠지? "후후후~." 난 담배를 입에 물며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이제쯤이면 뭔가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참을성 있게 뭔가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참을성 없는 어린 엘프들은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그 순간 봉우리 한 부분이 반짝거렸다. "이거다!" 난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갔다. 반짝이는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난 그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꼼꼼한 수색 끝에 난 바위 한쪽에 거울 한 조각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까 나온 빛은 햇빛이 거울에 반사되며 나온 빛이리라. 거울은 분명 바위 속에 박혀 있었다. 거울이 우연히 바위에 박힐리는 없으니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설치해놓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맞게 찾아왔다는 거군." 난 다시 지도를 펴보았다. 煮豆燃豆?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헉! 이것은!" 써 있는 것이라곤 한자 스무 자.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 한자가 뜻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삼국지를 수백 번 읽은 내가 어찌 이것을 모르겠는가? 이 한자를 읽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자두연두기 두재부중읍 본시동근생 상전하태급 뜻은 다음과 같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아애서 눈물을 흘리네 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서로 들볶는 것이 어찌 그리 심한가 이 시의 제목은 칠보시(七步詩)다. 잠깐 이 시의 유래를 살펴보자면……. 때는 중국 삼국시대. 조식은 조조의 셋째 아들로 재주가 워낙 뛰어나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조조는 원소와 유표의 경우(둘 모두 장자 상속을 하지 않았기에 집안싸움이 일어났다)를 참고해서 둘째 아들인 조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첫째 아들 조앙은 일찌감치 죽었다). 왕이 된 조비는 조식이 세력을 기를까 두려워 미리 제거하려 했다. 그래서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한 수 지어보라 했다. 조식이 아무리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지는 못할 거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조식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시를 읊었다. 그 때 읊은 시가 바로 앞서 말한 시다. 콩대는 주로 땔감으로 사용하고, 콩을 삶을 때도 당연 콩대를 태운다. 콩이 삶아질 때는 콩 속의 수분이 마치 눈물처럼 밖으로 빠져나온다. 시 속에는 한 뿌리에서 나온 핏줄을 왜 이렇게 못 살게 구냐는 풍자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시를 들은 조비는 부끄러워하며 동생을 놓아주었다. 뭐, 그와는 별개로 동생이 연원히 세력을 기르지 못하도록 요직에 채용하지 않았고,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하도록 평생 거처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했다. 어쨌든 암호로 이 시를 써놓은 이유는 간단하다. '칠보시'라는 시 제목처럼 일곱 걸음을 걸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 거지? 이 해답 역시 시 속에 숨어있다. "칠보시니까 7시 방향으로 일곱 걸음이겠지?" 난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확인한 뒤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여섯 걸음, 일곱 걸음. 내가 멈춘 곳은 암벽 앞이었다. 그럼 이 암벽 속에 뭔가가 있다는 건가? 난 암벽을 조사해 보았다. 별 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내 느낌은 달랐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나의 절대감각은 이곳에 뭔가가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난 암벽을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작은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뭔가 이상한데. 잘 하면 이 바위를 옮길 수 있을 것 같아." "뭐해요, 오빠?" 잠이 깼는지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아이들. 난 일단 텐트를 접고 야영한 흔적을 지웠다. "다들 짐 챙겼지?" "네에~!" 아이들은 초콜릿을 먹으며 대답했다. "그만 좀 먹어라.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군것질이냐?" "그치만 배고프단 말이에요." "라이 일로 와봐." "왜요, 오빠?" "오빠가 부르면 '예' 하고 달려올 것이지 '왜요'가 뭐야? 어서 오지 못해!" 그러자 라이는 아장아장 걸어 내 앞으로 왔다. "마법으로 이 바위를 옮겨 보렴." "오빠가 하면 안 돼요?" "물론 이 오빠가 해도 돼지. 하지만 우리 라이도 알다시피 마법은 쓰면 쓸수록 느는 거란다. 8클래스 마스터인 이 오빠는 이미 늘만큼 늘었으니, 아직 8클래스 러너에 머물고 있는 우리 라이에게 기회를 주는 거란다. 그러니 잔말 말고 옮기기나 하렴." "알았어요." 참고로 클래스는 내가 더 위지만, 컨트롤에 있어선 라이가 나보다 앞선다. 다시 말해 파이어 볼을 만든다고 했을 때, 난 라이보다 훨씬 크고 위력이 강한 파이어 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파이어 볼을 던져 과녁 맞추기 놀이를 한다면, 라이가 나보다 더 잘 맞출 것이다. 내 마법은 스스로 공부해서 얻은 것이 아닌 이그리드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날로 먹었다고나 할까? 반면 라이는 700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익혔다. 그러니 라이가 나보다 마법을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주위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바위를 옮겨야 하기 때문에 나보다 라이가 낫다는 생각에서 라이를 시킨 거다. 라이는 배낭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헉! 그것은 14권에서 나한테 땡깡 써서 얻어낸 요술봉!" "헤헤~." 하얀색과 분홍색이 뒤섞인 요술봉. 생긴 것은 유치찬란하기 그지없지만, 고가의 아티팩트다. 성능 역시 엄청 좋은 거다. 라이는 그 요술봉을 휘두르며 주문을 외웠다. 헉! 저러니까 꼭 요술공주 밍키 같다. "레비테이션(Levitation)!" 그러자 수백 킬로그램은 될 것 같은 바위가 두둥실 떠올랐다. 역시 8클래스! 아무리 어려도 라이는 8클래스 마법사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라이도 이럴 땐 진짜 마법사 같다. 바위를 치우고 나자 안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드러났다. "이럴 수가! 이런 곳에 입구가 있었다니." 안에는 뭐가 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 난 배낭끈을 조이며 말했다. "가자, 얘들아!"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바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으렴." "네." 라이는 바위를 원위치 시켰다. 그러자 안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난 랜턴을 켰다. "이제부터 조심해야 돼. 이 오빠의 뒤만 잘 따라오렴." "네." 길은 내리막길 일직선이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을 인위적으로 손 본 것 같다. 그 증거로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투둑! 뭔가가 발에 밟혔다. 난 랜턴으로 아래를 비추어 보았다. 내가 밟은 것은 다름 아닌 사람 시체였다. 루비는 소리를 지르며 내 품에 안겼다. "무,무서워요, 오빠." "괜찮아. 오빠가 옆에 있잖아." 난 루비를 다독거려주었다. 라이는 워낙 오래 살면서 이 꼴 저 꼴 다 봤기 때문인지 별로 놀라지 않았고, 루는 꼴에 남자라고 안 무서운 척 하고 있었다. 난 시체를 살펴보았다. "죽은 지 몇 십 년은 된 곳 같군. 총에 맞아 죽은 것 같은데." 혹시라도 신분증 같은 거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전진했다. 루비는 무서운지 내 팔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잔뜩 겁먹은 루비의 표정.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깜찍하다. 잠시 걷자 길이 셋으로 갈라졌다. 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펴보았다. 칠보시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져 있었다. 청룡, 백호, 백호, 현무. "사신(四神)이군.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이니…… 청룡, 백호, 백호, 현무는 왼쪽, 오른쪽, 오른쪽, 직진을 말하는 거겠군." 지도에 그려진 그림은 이 지하 동굴의 약도인 것 같았다. 희미해져서 알아보기가 힘들었지만, 대충 맞아 드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 빨간점으로 표시된 것은 뭐지? 지도 곳곳에는 빨간색 점이 찍혀 있었다. 처음에는 보물을 나타내는 위치인 줄 알았지만, 수십 개가 찍힌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으음, 일단 가보는 수밖에 없겠군. 여기선 일단 왼쪽으로 꺾고……." 난 지도에 써진 대로 걸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걷자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이쪽을 파보면 되려나?" 마침 주위에 땅을 팔 만한 삽과 곡괭이 등이 있었다. 낡았지만 쓸만한 것 같다. 난 애들에게 삽을 한 자루씩 쥐어 주었다. "자, 이제부터 삽질을 하는 거야." 하지만 아이들은 삽질하는 시늉만 할뿐 제대로 하지 않았다. 때문에 작업을 한 지 10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파낸 흙은 주먹만큼도 되지 않았다. "농땡이 피우는 엘프는 점심 없다." "아,아니엥. 라이는 농땡이 안 피워요." "루비는 열심히 삽질해요." "제 주특기가 삽질이에요." 갑자기 열심히 파기 시작하는 어린 엘프들. 나도 질세라 열심히 곡괭이질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파고나자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딱! 딱! "걸렸다!" 윗부분만 살짝 모습을 드러낸 상자. 그 주위를 파고난 후에 상자를 끄집어냈다. "쓰읍! 엄청 무거운데." 어린애가 들어가도 될 만큼 커다란 상자. 난 상자의 흙을 털었다. 상자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쇠로 된 자물쇠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훗~ 지가 버텨봤자지. "언락(Unlock)." 마법 한방에 풀리는 자물쇠. 난 보물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천천히 상자 뚜껑을 열었다. 설마 이렇게 개고생 했는데 아무 것도 안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일기장이나 러브레터 같은 게 들어 있진 않겠지? 참고로 '이 러브레터가 나의 보물이야' 따위의 헛소리는 안 통한다. 만약 그런 게 들어있다면 결코 용서치 않으리! 내가 원하는 보물은 국제 통화로서의 가치를 지닌 보물이다. 금이나 보석도 좋고, 만원짜리나 지폐나 달러도 좋다. 그것도 아니면 문학적 금액을 지닌 골동품이나 고서적도 좋다. 어쨌든 현금화 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뚜껑을 다 열고 난 다음 랜턴을 상자 가까이 들이댔다. "헉!" "와아!" "보물이에요, 오빠!" "으하하! 보물이다! 진짜 보물이야!"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금괴와 보석이었다. 난 재빨리 금괴를 들어 깨물어 보았다. 선명하게 새겨지는 이빨자국. "우헤헤헤~ 순금이야!" "와아! 이거 예쁘다." "이거 봐, 라이야. 이 보석도 예뻐. 루비는 이 보석이 갖고 싶어." "난 이게 마음에 들어." "전원 스톱! 당정 내 보물에게서 떨어지지 못해?" 난 애들 손에 들린 보석을 빼앗아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그리고 상자를 감싸 안았다. "저리 가! 내 보물에 손대지 마! 보물 1미터 이내로 접근하는 엘프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어!" 그러자 라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러는 게 어딨어요? 보물을 찾을 때 같이 있던 사람에게도 보물에 대한 권리가 있어요. 그리고 라이는 같이 찾았잖아요." "시끄러! 니들이 한 게 뭐가 있다 그래? 이 보물은 다 내 꺼야!" "너무해요!"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이런 게 인생이란다. 훗~." 난 금괴와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아아~ 이 감촉! 이 느낌! 시가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려나? 정말 100억 원 정도 되려나? 요즘 금값도 많이 올랐다는데. "우헤헤헤~ 이제 난 부자야!" "라이도 같이 찾았는데." "루비도." "고생 많이 했는데." "뭐야? 어떤 엘프가 자꾸 궁시렁거려? 응? 누구야? 당장 나와! 쓴 맛을 보여주겠어!" "쳇!" "뭐야? 어떤 엘프가 '쳇' 이라고 했어?" "그,그치만요, 오빠……." 아이들을 대표해서 나서는 라이. "그치만 뭐?" 내가 눈을 부릅뜨자 라이는 재빨리 두 손을 내저었다. "아,아니에요. 보물 오빠 다 가지세요." "푸훗~ 우리 라이는 참 착하구나. 눈치도 빠르고. 아이구~ 귀여운 것!" 난 라이를 껴안고 볼을 부비부비 비볐다. 으음, 일단 이 보물을 옮겨야 할 텐데. 대충 무게가 40kg 이상이다. 이걸 들고 산을 내려가기도 힘들뿐더러, 주위의 이목도 생각해야 한다. "이동 마법을 쓰는 게 좋겠군." 본래 이동 마법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좌표를 잘못 잡아 이상한 곳으로 갈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차원의 틈에 끼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위험한 고난이도의 마법이 바로 이동 마법이다. 하지만 이쪽에는 8클래스 마법사가 둘이나 있다. 난 가게 건물 앞 주차자을 도착점으로 삼기로 했다. 그곳에는 크로니스가 만들어 놓은 영구 차원이동 마법진이 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은 크로니스가 항상 관리하고 있다. 판타지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넘어올 수 있는 것도 도착점의 마법진을 9클래스 마서트인 크로니스가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차원이동 마법은 9클래스만이 쓸 수 있다). 난 그 차원이동 마법진이 그러진 곳에 업혀 가기로 마음먹었다. 드래곤이 관리하고 있으니 안정적이고 마나도 덜 들 테니. "바닥에 이동 마법진을 그리렴, 라이야. 도착점은 가게 건물 앞 주차장으로 해. 좌표는 잘 알지? 최대한 예쁘게 그려야 해." "알았어요, 오빠." 라이는 요술봉으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법진이 완성되자 우리는 그 위에 올라섰다. 라이는 요술봉을 휘두르며 주문을 외웠다. "워프(Warp)!" * * * * 1박 2일의 긴 모험을 끝마친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는 루시아, 일루니아 여사님, 인디, 지니 등이 모여 있었다. 라이레얼과 카르는 데이트라도 하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크로니스 역시 어디 나갔는지 집에 없었다. 어린 엘프들은 많이 피곤했는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건물 리모델링 지휘를 하던 지니는 가게에서 만나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이렇게 많은 인원이 거실에 모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찾아낸 보물을 보기 위해서지. 모두의 시선이 녹슨 상자에 모인 상황. 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와아!" 모두가 놀라는 표정. 심지어는 일루니아 여사님 입까지 쩍 벌어졌다. "우헤헤헤~ 이게 다 제가 잘났기 때문이지요.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보물찾기…… 즉, 트레져 헌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뛰어난 지성과 강인한 체력은 기본이고 옵션으로 잘생긴 얼굴까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물론 저는 그 조건에 전부 충족되구요. 이 보물이라는 게 찾기 얼마나 힘든 건지, 안 찾아 본 사람은 절대 모릅니다. 특히나 지도에 적힌 암호를 푸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제가 바로……." "뺀질이." "……뺀질이 아닙니까? 제가 그 뺀질거리는 실력으로다가…… 아니, 뭐라?" 중요한 순간에 초를 치는 일루니아 여사님. 일루니아 여사님께서는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무시죠. 생각 같아선 바늘로 콱 꿰매버리고 싶네." "뭐라구요?" "어라? 혼잣말인데 들으셨나 보네요. 남의 말을 엿듣다니. 이제 보니 상당히 나쁜 버릇을 지니고 있으시군요." "혼잣말은 뭔 혼잣말? 그렇게 말해 놓고 내가 엿들었다고? 아줌마 지금 나랑 장난해?" "어머, 보석이 예쁘네요. 그렇죠, 인디님?" "예, 예." "……."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며 내 말을 무시하는 일루니아 여사님. 때문에 난 복장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감히 위대한 영웅 아이언스 히로에게 이따위로 굴다니! 언젠간 반드시 복수를……." "일단 금액을 측정해 봐야겠습니다." 지니의 말에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측정하시게요?" "제가 예전에 잠깐 보석 감별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 과연 사일런스 지니! 못 하는 게 없고, 안 하는 게 없는 인간의 진가가 이럴 때 드러나는군. 난 체중계를 가져와 금괴의 무게를 달았다. 그 사이 지니는 보석을 일일이 살펴보며 금액을 적었다. "금만 42kg이군요. 여기에 보석 금액을 더한다면 시가로 약 125억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잘만 받는다면 130억까지도 가능하겠군요." "헉! 130억!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겨우 일개 순사였던 나까무라 다케시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거죠?" "그의 철두철미한 매국 행각을 보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게다가 을사오적과 친분을 쌓았다면 이 정도 금액이야 우습지요." "130억이 우스워요?" "대표적 매국노 송병준 같은 경우에는 1904년까지만 해도 빈털터리였으나, 1911년에는 조선이서 5위 안에 드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이라는 작위까지 하사 받지요." 1904년이면 을사조약 1년 전이고, 1911년이면 한일합방 1년 후다. 결국 나라 팔아서 갑부가 되었다는 얘기다. "정말요?" "한일합방을 위한 그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겁니다. 그는 '1억 엔을 주면 내가 책임지고 조선을 일본에게 넘기겠다' 라고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습니다." "대단하군요." "지금도 그의 후손들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토지의 공시지가만도 2천6백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헉! 2천6백억 원!" "뭘 그리 놀라십니까? 이 정도 금액도 송병준의 원래 재산에 비한다면 푼돈에 불과합니다." "굉장하군요. 그런데 원래 매국노라는 게 핏줄로 이어지는 건가요? 저 같으면 쪽 팔려서라도 이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가정교육의 문제입니다.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 나라의 잘못도 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나라만큼 매국노가 살기 좋은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할말 없군요. 그래도 국가에서 매국 장려금이 나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죠." 아무튼 130억이라니! "이제 난 부자야! 우헤헤~!" 난 두 팔을 벌려 보물을 껴안았다.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 일단 루시아와 함께 살 큰 집을 사고, 별장도 사고, 요트도 사고, 기타 등등 이거저거 다 사야지~.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일루니아 여사님의 날카로운 목소리. 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예? 뭐하다니요? 제 보물 제가 만지는데 왜 그러세요?" "보물을 찾으면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은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보물의 주인은 그들이라면서요?" "……." 헉!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루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렇게 말했다." 이번엔 지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지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번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덧붙여 수수료와 수고료는 뗀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 그랬었죠? 이제야 기억나네요. 아하하~ 요즘 기억력이 가물가물해서." 난 재빨리 주판을 튕겨보았다. "으음, 수수료 45%와 수고료 45%를 더하면 90%군. 이 90%에 대한 부가가치세 10%를 붙이면 총 99%가 되니…… 1%인 1억 3천만원만 기부하죠. 아차! 주민세를 안 뗐구나! 그럼 99.9%를 내가 먹고, 0.1%만 기부를……." 퍼억! 갑작스레 뒤통수에서 전해져오는 충격. 난 고개를 획 돌리며 소리쳤다. "어떤 놈이야?" 굳이 물을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어떤 놈인지는 뻔하지 않은가? "또 아줌마야?" "훗~ 보고도 모르시나요?" "왜 때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때려? 내 뒤통수가 동네북이야? 응?"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리죠. 생각 같아서는 멍석말이해서 사흘 밤낮으로 패면 좋겠네." "……." 거의 망언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일루니아 여사님의 발언.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더 이상은 못 참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무슨 맞을 짓을 했는지 말해 보시죠!" "몰라서 묻나요? 99.9%를 수고료와 수수료로 떼고 0.1%만 기부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0.1%만 해도 1300만원이야. 이 보물을 찾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리고 그건 부가가치세랑 주민세도 포함한 금액이야!" "부가가치세랑 주민세가 뭔지나 아시나요?" "그건……."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다 갔다 붙여? 부가가치세는 소비세의 일종이고, 주민세는 소득에 대해 부과하는 지방세야!" "나도 다 알아! 아줌마가 아니 모르나 테스트 해본 거야." "훗~ 그러세요?" "……." 아까 뒤집혔던 복장이 원위치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뒤집한 복장이 다시 뒤집힌다고나 할까? "어쨌든……." 내가 '어쨌든 이 보물은 내 거야' 라고 소리치려고 하는데 루시아가 내 앞에 서서 내 손을 붙잡았다. "저 보물은 나까무라 다케시라는 매국노가 같은 민족의 고혈을 짜내 모은 거잖아. 이 나라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묻어있는 보물을 어떻게 우리가 가질 수 있겠어? 그 보물은 강제 징용 피해자, 정신대 할머니 등 일제치하의 피해자들에게 돌아가는 게 옳아." "루시아……."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루시아. 아아~ 예쁜 것도 모자라 착하기까지 하다니! 점점 루시아가 인간인지 의심스러워진다. 혹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아니면, 선녀? 난 나도 모르게 루시아를 와락 껴안았다. "자,잠깐만. 왜 이러는 거야?" "사랑해, 루시아. 정말 사랑해." "아,알았으니까 이것 좀 놔." "저 뺀질이가 감히 루시아에게 이상한 짓을! 뭐해요, 인디님? 어서 떼어내지 않고!" "아,알았어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는 나와 루시아를 억지로 떼놓았다. 점점 멀어지는 루시아의 모습. 아아~ 안 돼. 그녀를 내게서 뺏어가지 마! 어쨌든 루시아의 말에 큰 감명을 받은 나는 보물의 대부분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수고료와 수수료 10%만 떼고 90%를 기부하도록 하지." 그러자 루시아가 말했다. "그냥 다 기부하자." "뭐라? 전부 다? 한 푼도 남김없이?" "응. 돈이야 또 벌면 되잖아. 가게 장사도 잘 되고 있고." "그,그치만…… 힘들게 찾은 건데……." 루시아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나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자. 응?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 루시아가 나에게 부탁을 하다니! 루시아의 부탁이라면 기름통을 매고 불 속으로 뛰어들 각오도 되어있는 나다. 힘들게 찾은 보물을 전부 포기하는 거슨 보통 힘든 일이 아니지만 루시아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알았어. 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할게." "고마워." 쪽~. 루시아는 내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헉! 기왕이면 입술에 해줘도 좋은데. "그런데 이걸 어떻게 기부하죠? 그냥 이대로 주면 되나요?" 내가 묻지 지니가 대답했다.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정도의 금괴와 보석을 현금화 시키려면 여기저기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보물의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보물을 발굴한 사람이 전부 차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 보물은 찾는 사람이 다 갖는 게 아닌가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원 소유자와의 관계이고, 둘째는 어느 장소에서 찾았냐는 겁니다. 이번 경우에 두 번째는 별 다른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첫번째가 문제입니다. 보물은ㄴ 나까무라 다케시가 매국을 해서 모은 재산이고, 그가 죽은 지금 소유권이 그에게 있다고 판결할 것입니다. 그럼 보물의 일부만 발굴자 몫으로 돌아가고, 대부분 그의 주머니로 들어갈 겁니다." "그렇군요. 찾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복잡한 문제가 많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몰래 현금화 시켜야겠지요. 다행히 제가 요즘 교제하는 여성분 중 그런 걸 전문적으로 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이젠 장물애비와도 사귀나요?" "지하 경제계의 큰 손이시죠. 그분께 부탁하면 제값 받고 현금화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으음, 뭐 그 부분에 대해선 사일런스 백작님께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난 보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꺼이 지니에게 넘겨주었다. "방금 입에 넣은 건 뭐죠? 어서 뱉어내시죠." 일루니아 여사님의 날카로운 지적. 루시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보았다. 난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변명할 말 있으면 해보시죠. 뭐, 하고 싶어도 입에 든 보석 때문에 못 하겠지만. 훗~." "……." 그 말 그대로다. 난 어쩔 수 없이 입에 든 보석을 뱉어냈다. 손가락만한 에메랄드. "루시아 선물로 남겨두려 한 건데……." "난 괜찮다니까.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루시아는 마음만으로 충분할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 작은 것 하나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내 입 안에 든 보석까지 일제치하 피해자들을 위한 기부금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제까지 살면서 기부 한번 해본 적 없는 내가 130억이란 거금을 기부하다니! 평소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으음, 내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군. 많이 아깝지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 것이라 생각하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아! 그런데 한 가지 풀지 못한 의문이 있는데……." "뭔가요?" "지도에 찍힌 이 빨간 점들은 뭘 의미하는 건가요?" "잠깐 지도를 보여주시겠습니까?" 난 지도를 펼쳐서 보여주었다. 지니는 유심히 지도를 살폈다. "뭔지 알겠어요?"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뭔가요?" "제 예상이 맞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군요." "예? 그럼 설마 이 빨간점들도 다 보물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던가……." "보물은 아닙니다." 보물이 아니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김이 빠진다. "일단 이곳에 한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뭐,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죠. 마침 제가 좌표도 기억하고 있으니, 이동 마법으로 가면 되겠네요." "나도 같이 갈래." "루시아 너도?" "응. 나도 호기심이 생겨서." "저도 같이 가드리도록 하지요." "아! 일루니아님께서 가시면 저도 같이 갈래요." 일루니아 여사님과 인디까지 나서면서 인원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되었다. 난 거실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동굴 안에 그린 마법진을 지우지 않았으니 그 마법진과 연결하면 되겠군. "워프(Warp)" 시동어를 외치자 배경은 순식간에 어두컴컴한 동굴로 바뀌었다. 앗! 랜턴을 안 가져왔군. "끄악! 어떤 놈이 내 발 밟았어?" "라이트(light)" 인디가 커다란 빛의 구를 허공으로 띄웠다. 그러자 순식간에 환해지는 동굴. 난 재빨리 내 발을 밟은 범인을 찾았다. 뭐, 굳이 찾을 필요도 없다. "아줌마지? 아줌마가 내 발 밟았지?" "무슨 근거로 사람을 모함하시는 거죠?" "발에 감정이 실려 있었어!"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감정이 실려 있지 않고는 이렇게 세게 밟을 수 없으니까!" "훗~ 지가 지 발 밟아놓고 나한테 큰소리는." "뭐라?" "어머, 혼잣말인데 엿들으셨나 보죠?" "……." 헉! 복장이 다시 뒤집히려고 해. 이번 기회를 통해 분명히 말해두자면, 내가 일찍 죽으면 전부 일루니아 여사님 탓이다. 아아~ 루시아와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장수해야 할 텐데. 그동안 낸 국민연금 본전이라도 찾을 때까진 살아야 할 텐데. "거기 곡괭이랑 삽을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필요할 것 같아서요." 난 시킨 대로 곡괭이랑 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인디에게 넘겼다. 그러지 일루니아 여사님이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았고, 그 눈빛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그냥 내가 들기로 했다. 우리는 지도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거꾸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니는 길을 쉽게 찾았다. 혹시 네비게이터 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건가? "지도상으로 보면 여기군요. 이곳을 파주시겠습니까?" 내가 삽질을 시작하자, 지니도 지도를 내려놓고 삽질을 했다. 난 인디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왜 가만있어, 임마? 너도 삽 들고 파야할 거 아냐?" "저,저는……." "괜찮아요, 인디님. 저 뺀질이가 하는 말 듣지 말고 여기 앉아서 편하게 쉬세요." 일루니아 여사님은 손수건을 바닥에 펼쳐 인디를 앉게 해주는 정성까지 보였다. 나와 일루니아 여사님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인디는 결국 일루니아 여사님을 따랐다. "죄,죄송해요, 히로님." "……." 배신자. 일루니아 여사님 치마폭에 쌓여서 희희낙락거리는 꼴이라니! 흥! 꼴불견이야! 그 순간, 바닥에 무언가가 걸렸다. 나와 지니는 재빨리 주위를 파냈다. 참고로 지니는 삽질도 스페셜리스트였다. 내 평생 이렇게 삽질 잘하는 인간은 처음 본다. 아무튼 잠시 후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이게 뭔가요?" "석주(石柱)입니다." "석주요? 아니, 석주가 왜 여기 박혀 있어요? 석주는 건물 세울 때나 쓰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다른 용도로 이용되기도 하지요." "다른 용도라며뇯 "이번 경우에는 지맥을 끊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지맥을 끊어요?" "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했을 때, 그들은 무력으로만이 아닌 정신적으로도 조선인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석주를 박거나, 물길을 옮기거나, 산맥허리를 잘라냈지요. 1995년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예. 후에 이름이 중앙청으로 바뀌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었잖아요." "맞습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본이 조선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고자 경복궁 안의 강령전, 교태전 등 주요 건물 200여 간을 헐어내고 1926년 해 일(日)자 모양으로 건설한 것입니다. 그 건물을 철거하자 지하에 수백 개의 석주가 빽빽하게 박혀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예. 당시 뉴스에서 크게 떠들어 댔었지요." "그 석주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박아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요? 땅에 고작 석주 몇 개 박아 넣었다고 민족정기를 끊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조선은 풍수지리학의 영향을 받아 경성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남산을 안산(案山,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펴네 있는 산)으로 삼았습니다.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 낙타산(낙산이라고도 한다)은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되며, 한강은 객수(客水), 청계천은 명당수(明堂水)에 해당됩니다. 서울의 성곽에는 8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이는 역법의 팔괘(八卦)를 따른 것입니다. 그 외에도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해태 석상을 놓고, 남대문 옆에 연못을 팠고, 남대문의 이름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여 문액을 세로로 내걸었습니다. 이렇듯 풍수지리학은 조선시대 생활과 문화에 깊숙히 파고들어 있었습니다. 풍수지리학은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고, 어쩌면 단지 미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해서 전부 미신이라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이 미신이라 한다면 땅에 석주를 박는 것도 미신입니다. 미신에 미신으로 대항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지요. 인간의 믿음이란 무엇보다 큰 힘입니다. 일본이 석주를 박음으로써 조선의 정기를 차단할 수 있다 믿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그렇군요." 난 지니의 말에 다라 석주를 파낸 자리를 다시 흙으로 메웠다. 그리고 석주는 마법을 써서 완전히 가루로 만들었다. "그럼 여기 있는 붉은점들이 전부 석주를 가리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석주를 전부 파내기 위해 이동했다. 걷는 내내 지니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서울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궁인 경복궁은 서울 내에서도 특히 명당이지요. 그래서 일본은 경복궁의 일부를 헐어내고 조선총독부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정기가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석주를 박았지요. 이곳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주산인 북악산의 정기를 흩어버리기 위해 석주를 박은 것 같습니다." "그럼 이 지도가 원래는 석주를 박을 때 사용되었던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산 속에 이런 굴일 파는 데 얼마나 많은 인원과 자금이 동원 되었겠습니까? 당시 공법과 중장비가 발달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엄청난 금액이 들었을 테고, 공사 기간도 길었을 겁니다. 그러니 보물을 숨기기 위해 이런 굴을 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본격적인 일체지하가 시작되었을 때, 아마도 조선총독부 건물이 세워질 때쯤 굴을 파고 석주를 박아 넣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공사에는 나까무라 다케시가 관련되어 있었을 겁니다. 후에 일본이 패망할 조짐을 보이자 보물을 숨길 장소를 찾던 나까무라 다케시는 이곳을 떠올리고, 이곳이라면 안전할 거라 생각해 이곳에 보물을 숨긴 것 같습니다. 보물 무게가 혼자 옮기기는 힘든 무게이고, 아이언스 공작님이 말씀에 따르면 입구를 큰 바위가 막고 있다 했으니 혼자서 이곳까지 옮기는 것은 불가능 했을 겁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을 동원했겠지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의 행적을 살펴 볼 때 감옥에 가둔 죄인이나 독립투사의 가족들을 동원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자신을 도와주면 가족을 풀어주거나, 형량을 감해준다고 속였겠지요." "그럼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비밀이 새어나가면 안 되니 이곳에서 제거했겠지요. 지도에 암호를 써넣은 사람은 마지막으로 제거한 것 같습니다." "암호를 써놓은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가요?"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머슴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이런 암호를 생각해냈을 리는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대신 만들어 그에게 설명해주었겠지요." "아!" 그제야 난 입구에 시체가 하나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아마도 그가 암호를 만든 사람일 것이다. 그는 암호를 만들어 석주가 박힌 위치를 나타낸 지도에 적었고, 동굴을 나가기 직전 나까무라 다케시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바위로 입구를 다시 막는 거야 몇 가지 장치를 해두었다면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 으음, 그럼 얘기가 좀 맞아드는군.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석주까지 박아 넣었다니.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어. 다른 나라에게 점령당한 나라는 그렇게 비참한 걸까?" 아이리스 왕국도 예전에 다른 나라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내 덕분에 독립을 했지만. 그 때문인지 루시아는 한국과 동질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는 일루니아 여사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정말 나쁜 놈들이군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 건지." "뭐, 그들 입장에선 그것이 애국이었겠죠. 다른 나라를 밟고 올라서서 고혈을 짜내는 것도 애국에 속한다면 말이죠." 그래도 그들은 나은 편이다. 적어도 그들은 돈 때문에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진 않았으니. 이 나라에서 태어나 나라와 민족을 팔아넘긴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인간들은 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대한민국 법정은 그들이 매국해서 모은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의 후손들은 수천억 원 대의 토지 반환 소송에서 계속 승리하고 있다. 같은 민족을 배신한 매국노들을 상대로 처벌은 커녕 재산 환수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을 욕할 자격이나 있을까? 남의 작은 허물은 쉽게 알아채는 반면, 자신의 큰 허물은 알아채기 힘들다. 한국은 언제까지 이런 모순을 안고 살아갈까? 우리는 석주를 뽑는 와중에 십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나까무라 다케시의 손에 죽은 사람들인 것 같았다. 나는 마법으로 그 시체들을 모아 화장한 다음 유골을 북악산에 뿌려주었다. 석주를 다 뽑은 나느 마법으로 동굴 전체를 흙으로 메워버렸다. "이제 서울에 다시 기가 모여들겠죠?" "결국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입니다.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만 있다면 땅의 기가 문제겠습니까?" "하긴 그러네요." * * * * 보물을 현금화 시키니 정확히 128억 7천만원이 나왔다. 나는 그 돈을 몽땅 일제치하 피해자(정신대 할머니, 강제 징용 피해자, 원폭 피해자, 극빈층으로 살고 있는 독립투사 후손들)에게 기부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니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래도 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 돈이면 루시아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으음, 역시 난 아직 세속의 때를 벗지 못한 건가? 무소유야말로 진정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라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셨거늘. 아아~ 나는 그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 멀엇구나. "아! 눈꽃을 배경으로 애들 폰카 찍은 거 있는데 볼래?" 난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루시아에게 보여주었다. "어머! 너무 귀여워!" 연신 '귀여워'를 연발하는 루시아.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언제 같이 산에 갈까?" "그래. 애들이랑 같이 가자." "……." 결국 언제나 결론은 아이들이다. 난 루시아와 단 둘이 놀러 가고 싶은데. 역시 애들이 방해꾼이라는 건가? 생각해보면 내 김밥에면 햄이 없었지. 아아~ 그 일을 생각하니 또 다시 눈물이……." 일루니아 여사님이 나에게 말했다. "뭐,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이번 일은 잘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 헉! 설마 일루니아 여사님이 날 칭찬한 건가? 인디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히로님 정말 대단해요. 전 히로님을 다시 봤어요." 지니도 한마디 했다. "아이언스 공작님의 위대함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번 일을 통해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역시 아이언스 공작님은 저의 큰 스승이십니다." 루시아도 말했다. "정말 멋있었어. 그 사람들도 분명 고마워 할 거야." "그,그럴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다니! 왠지 엄청 쑥스럽다. "우헤헤~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뭐." "알긴 아시네요. 아이언스 공작님께서 별로 한 게 없긴 하죠." "……." 잠깐 겸손한 척했더니 바로 깔아뭉개는 일루니아 여사님. 해도 너무하는군. "제가 한 게 없긴 뭐가 없습니까? 저만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그렇다. 난 무려 128억7천만원이라는 거금을 기부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완용이나 송병준 등의 매국노 후손들이 기부는커녕 수천억 원 대의 토지 반환 소송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나의 행동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나저나 간만에 모험을 하니 참 기분 좋다. 비록 1박2일 간의 짧은 모험이었지만 정말 재밌었다. 역시 나에겐 모험가로서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건가? 아예 이번 기회에 트래져 헌터로 나서봐? "전 세계를 여행하며 숨겨진 보물을 찾아 나서는 거야!" 내가 벌떡 일어서며 외치자 지니가 한마디 했다. "아이언스 공작님꼐서 떠나시면 가게는 누가 봅니까?" "……." 역시 난 루시아와 함께 가게나 보는 것이 어울리는 것 같다. 아이리스 2부 5권 Substory 7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어느 날 아이들이 내 앞에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는 애들 가진 부모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것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오~?" "헉!" 이것은 상당한 고난이도 질문이기에 답변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다수 부모들은 '애들은 그런 거 몰 라도 돼!' 라고 호통을 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예전에는 그랬었고. 하지만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 그래선 안 된다고 나오더라. 성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시켜야 한다나 뭐라나? 어렸을 때 바른 성(性) 정체성을 확립해야 커서도 올바르게 행동한다고 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호통을 친다면, 아이들은 성에 관련된 얘기 를 더욱 더 안으로 숨기고 결국은 잘못된 성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다. 그러므로 지금 잘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기가 어덯게 생기는 거냐면......" "......"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설명을 하자면......" ".....?" "그러니까 그게......" ".....!" "그게......" "빨리 말해주세요오~!" "......" 이럴 땐 대체 어떻게 답변을 해줘야 하는 거지? 난 고민해 보았지만, 적당한 답젼이 떠오르지 않았다. "으음, 어린 것들이 별 걸 다 궁금해 하는구나. 건방지게 말이지. 어린애면 어린애답게 인형이나 가지고 놀 것이지,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건지를 궁금해 하다니. 순진해야할 아이들이 어째서 이렇 게 발랑 까진 걸까? 나의 교육 방법에 문제가 있나? 너희들은 어떻 게 생각하니?" 그러자 라이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답변해주기 싫으시면 안 해주셔도 돼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 면 되니까요." "그,그래줄래?" 이 순간만큼 라이가 예뻐 보인 적이 없었다. 이 오빠가 곤란해 하 는 걸 알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주겠다니! 그런데 누구한테 물어 볼 생각이지? 루시아? 지니? 인디? 일루니아 여사님? "라이레얼 언니한테 물어봐야지." "그래. 라이레얼 언니한테 물어보자." "라이레얼 누나라면 분명 잘 말해 줄 거야." "......헉!" 라이레얼에게 애들 성교육을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 기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전원 스톱! 원위치로!" 내가 소리치자 아이들은 내 앞으로 다시 몰려왔다. "왜 그래요, 오빠?" "그냥 이 오빠가 설명해주도록 하마." 아이들은 자리에 앉았다. 난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고민했다. 잠시 고민 중. 이윽고 고민을 끝마친 나는 고전적인 대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주는 거야." "예? 황새요?" "응." 그러자 라이가 갑자기 팔짱을 끼며 고개를 획 돌렸다. "응? 라이 왜 그러니?" "거짓말쟁이!" "헉!" "오빠는 거짓말을 하는 나쁜 오빠에요!" "무, 무슨 소리니?" "라이가 라이 친구 이코한테 물어보니 황새는 아기 같은 거 안 물 어준다 그랬어요!" "......" 그, 그러니? 하긴 라이코스도 새니 황새 사정을 잘 알려나? "어쩔 수 없군. 그럼 이 오빠가 진실을 말해주는 수밖에. 너희들 이 듣고 충격 받을까봐 그동안 숨겨왔거늘. 이렇게 까지 알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지. 사실 아기는......" 꿀꺽! 누가 침 삼켰니? 한마디라도 놓칠 새라 길고 뽀족한 귀를 쫑긋 세우는 아이들. "다리 밑에서 주어오는 거란다." "헉!" 놀라 숨을 멈추는 아이들. 그때 라이가 나서서 물었다. "그런데 그 다리가 교량(校梁)을 뜻하는 거에요, 사람 다리를 뜻 하는 거에요?" 난 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냥 넘어가도 좋을 것을 꼬치꼬치 캐묻다니. 우리 라이는 참으 로 버르장머리 없고, 눈치없고, 겁 없는 3무(三無) 엘프구나." 이때 쓰이는 다리는 교량과 사람 다리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 고 있다. 어쨋든 제왕절개를 하지 않은 이상 엄마 다리 밑에서 주어 온 건 사실이지 않은가? "라이레얼 언니한테 가자, 얘들아." 바로 뒤로 돌아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들. 난 놀라 소리쳤다. "거기 서! 오빠 말 아직 안 끝났어!" 그러자 다시 내 앞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나도 어쩔 수 없군. 이젠 정말로 진실을 말해주는 수밖에.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위험한 거다. 때로는 잔인한 진실보다 아 름다운 거짓이 필요할 때도 있다. '모르는 게 약' 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다른 몉에서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금이야 말로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켜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것은 부모의 의무라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자라면서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했다. 학교에서 성교육 비디오라고 틀어준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 득했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성교육 비디오의 내용을 떠올려보자면...... 철수라는 고등학생이 있다. 철수네 반 담임 선생님은 예쁜 여자였다. 철수는 어느 날 밤 잠을 자던 중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 예쁜 여 선생이 땡땡이무늬 투피스를 입고 나와 옷을 살랑살랑거리며 춤을 추었다, 철수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불을 들춰보 았다. 장면은 바뀌어 화장실. 철수는 화장실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빨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 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거기서 뭐하니?" "아, 아니에요, 엄마. 속이 좀 안 좋아서요. 들어가서 주무세요." "그래. 너도 빨리 자라." 시간은 흘러 아침이 되었다. 장소는 강변 산책로로 바뀌었다. 철수가 갑자기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한다. "내가 그런 지저분한 상상을 하다니! 나 같은 건 살 자격도 없 어!" 다시 장면이 바뀌며 철수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하지만 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 다.] 학교 친구가 철수에게 잡지를 빌려준다. 그 잡지 표지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여자 사긴이 장식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철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 위에 잡지를 펼쳤 다. 카메라는 갑자기 철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비추기 시작했다. 흐르는 땀과 거칠어지는 숨소리. 다시 장면은 아침의 강변 산책로. 또 다시 뛰기 시작하는 철수. "내가 그런 나쁜 짓을 하다니! 난 더러운 인간이야!" 달리다 지쳐 숨을 몰아쉬는 철수. 그런 철수 앞에 나타난 아버지. 아버지는 철수의 등을 다독여주며 말했다. "나도 너만 한 나이에는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단다." "아, 아버지......"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 성교육 비디오는 여기서 끝이 났다. "......" 이 성교육 비디오는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개연성이라는 게 무시되다 못해 아예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대체 꿈에 여선생이 투피스를 입고 나와 살랑살랑 흔들어 댄 것 과 빨래를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자꾸 뛰는 건데? 주제가 '운동을 하자' 야? 난 자다가 그 비디오를 보고 민밫위 훈련 비디오인 줄 알았다. 민 방위 훈련 비디오가 아니라면 저렇게 열심히 달릴 리가 없으니. 하지만 내 옆에 앉아있던 친구의 생각은 달랐다. "야! 저게 왜 민방위 훈련이야? 저거 지진 대피 훈련이야, 임마!" "......" 그렇다. 나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민방위 훈련인지 지진 대피 훈련인지 구분도 안 가는 비디오를 성교육 비디오라 틀어주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학생들에게 피임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성교를 하 라고 장려하는 것이다, 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에. 어른들의 성은 부끄러운 것, 숨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러 한 사회적 인식은 성을 더욱 어둠 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그래도 옛날 같았으면 문제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아 이들은 인터넷을 통한 음란물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막고자 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켜주어 스스로의 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다. 구시대적 성교육의 피해자는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일 수 밖에 없으니. "......" 으음, 난 왜 이렇게 옳은 소리만 하는 걸까? 그래. 나는 정직과 신용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아이언스 히로가 아니던가? 그런 내가 위기를 넘기기 위해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난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기는 남자와 여자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면 태어나는 거야." "예? 그렇고 그런 짓이 뭐예요?" 아이들은 흥미가 생기는지 내 앞에 쪼그려 앉아 귀를 쫑긋 세웠다. 저 호기심 가득한 여섯 개의 눈동자! 지적 호기심을 이런 쓸데없는 곳에 투자하다니! 차라리 영엉 단어를 하나 더 외우란 말이다, 이것들아! "그렇고 그런 짓이란 그렇고 그런 짓을 말하는 거지." "틀렷어요, 오빠" "응? 틀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라이야?" "무언가를 설명할 대는 상대가 해당 동의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 다면 모를까, 그럴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의어로 설명하면 안 되요. '사람은 인간이고, 인간은 사람이다' 라고 설명하면 의미전달이 안되잖아요. 게다가 지금 같은 경우는 동의어인데다가 동음어이 기까지 해요. 이는 사람을 사람이라 정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이에요." "......" 언제나처럼 쓸데없는 부분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하는 라이. 평소에도 이렇게 똑똑하면 얼마나 좋을까? 으음, 그럼 귀여운 맛이 사라지려나? "그래, 알았어. 제대로 설명해주면 되잖아. 그렇고 그런 짓이란 남자랑 여자가...... 아! 이해하기 쉽게 오빠와 루시아 언니로 설명 해 줄게. 그러니까 이 오빠가 루시아에게 뽀뽀를 한 다음 침대로 데 려가서......" 쫑긋! 쫑긋! 쫑긋! 아이들 귀가 10cm는 더 길어진 느낌이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 청자의 반응이 이렇게 좋으면, 화자도 흥이 나기 마련이다. "천천히 루시아의 옷을 벗겨......" "헉!" "뭘 그리 놀라고 그러니? 이건 당연한 수순이란다. 그 다음엔 루 시아의 가슴에 손을......" 퍽! 갑작스레 뒤통수에서 전해져오는 충격. 누굴까? 누가 감히 본좌의 뒤통수에 손을 댄 것일까? "......" 물어보나 마나다. 나의 뒤통수에 손을 댈 사람은 뻔하지 않은가? 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 아줌마가...... 헉! 루시아!" 당연히 일루니아 여사님이 서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놀랍게도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루시아였다. 루시아는 팔짱을 낀 채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가슴에 손을 어쨋다고?" "......!" 헉! 설마 다 들은 건가? "아,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난 열심히 변명했지만 루시아의 눈빛은 점점 차갑게 변했다. 그 와 더불어 점점 낮아지는 체감 온도. 루시아의 저런 눈빛은 일루니아 여사님의 '찢어 죽일 것 같은 눈 빛' 이나 카르의 '얼려 죽일 것 같은 눈빛' 보다 더 무서웠다. "아, 아니야, 루시아!" "뭐가 아니야?" "나, 난 널 두고 이상한 상상을 한 게 아니라......" "침대로 데려가서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진다며?" "아, 아니...... 그게 꼭 옷을 벗기고 가슴을 만진다기보다 는......" "게다가 애들 듣는 앞에서 말이야." "......" 아이들이 관련되었다 하면 무조건 신경이 곤두서는 루시아. 난 이제 죽었다! 안 돼. 천하의 아이언스 히로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변명할 말을 생각해 보자. 변명할 말을. "그, 그게 말이야...... 얘들이 자꾸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거냐고 묻기에 어쩔 수 없이...... 아! 맞아. 전부 얘들이 잘못한 거야. 전부 얘들 탓이야." 내가 아이들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아이들은 벌떡 일어나 항의 했다. "무슨 말이에요, 오빠?" "루비는 잘못한 거 없어요." "우리는 결백해요." "결백은 개뿔이 결백! 니들이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거냐고 묻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니야? 그러니 니들이 나빠. 알았어? 니 들 전부 나쁜 엘프야. 라이는 나쁜 엘프1, 루비는 나쁜 엘프2, 너는 나쁜 엘프3. 알았어, 이 나쁜 엘프들아?" "우에에엥~ 라이는 나쁜 엘프 아니에요오~." "으아아앙~ 루비는 착한 엘프란 말이에요오~." "엉엉~ 형 혼내줘요, 누나." "어머! 울지 마, 얘들아." 아이들 물음에 놀란 루시아는 재빨리 아이들을 껴안고 달래주었 다. 그 사이를 틈타 난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 순간 들려오는 루시아의 싸늘한 목소리. "거기 서" 그 목소리에 내 몸은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원위치." 후다닥! 난 재빨리 몸을 원위치 시켰다. "애들을 울리면 어쩌자는 거야? 그리고 뭐? 나쁜 엘프? 얘들만큼 착한 엘프가 세상에 어디있어? 이렇게 착하고 귀여운 엘프 있으면 어디 데려와 봐! 그리고 니 잘못을 왜 애들에게 덮어씌워? 애들이 뭘 잘못햇다고. 잘못은 니가 했잖아. 어떻게 이 귀여운 아이들을 그렇게 윽박지를 수가 있어? 그리고......"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지라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루시아의 잔소리를 새겨들었다. 물론 잔소리를 듣는 중에 가끔 아이들을 노 려봐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니들 루시아 가고나면 다 죽었어! "앗! 오빠가 라이를 노려봐요!" "루비도 노려봤어요!" "누나 가고나면 우릴 때리려는 게 틀림없어요." 아이들은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아이들 의 그런 행동은 루시아의 화를 더 돋웠다. 그 때문에 잔소리 듣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잔소리 하는 걸 보니 아줌마 다 됐구나, 루시아. 하긴 벌써 애가 셋이니 아줌마라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 난 루시아가 아줌마여도 좋아~. 약 30분에 걸친 루시아의 잔소리가 끝나자 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잔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의외로 많은 체력 과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잔소리 한번 듣고 나면 머리가 멍해지고 몸에 힘이 쭉 빠진다. 내가 탈진해 있는 사이 아이들은 루시아에게 물었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오~?" "뭐?" 깜짝 놀라는 루시아. 난 루시아가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했다, 잠 시 당황하던 루시아는 대다수 부모들처럼 행동했다. "어린애들이 못하는 말이 없어! 애들은 그런 거 몰라도 돼! 어디 서 버릇없이......" "잠깐만, 루시아." 난 루시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왜 그래?" "내가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말이야......" 난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조기 성교육의 중요성을 루시아에게 말 해주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듣던 루시아도 점차 나의 말에 공 감하는 듯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줘야지." 난 루시아와 함께 다시 애들 앞에 섰다.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 건지 지금도 궁금하니?" "네에~!" "좋아. 그럼 오빠가 알려줄게 아기는...... 아! 이렇게 말로 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낫겠다. 효율적인 시청각 자료 활용이 학습 효 과를 극대화시키니까 말이야. 이 오빠가 침대 밑에 숨겨둔 CD와 잡지들이 있거든. 그걸 보며 우리 배워보자꾸나." "뭔 소릴 하는거야? 그리고 그거 언니가 다 내다버렸어." "뭐? 다 내다버렸다니? CD랑 잡지를 전부 다? 침대밑에 잘 숨겨 놓았던 그것들을?" "그래. 저번에 청소하다가 발견됐기에 언니가 전부 내벼렀어. 넌 어떻게 그런 지저분한 것들을 볼 수 있니? 하여튼 남자들이 란......" 난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침대 밑은 뒤져보았다. 놀랍게도 침대 밑은 텅텅 비어있었다. 단 한 장의 CD도, 단 한 권의 잡지도 남아있 지 않았다. "헉! 나의 컬렉션들이! 내, 내가 그걸 어떻게 모은 건데......" 어떻게 이런일이! "어흐흐흑~." 밤마다 루시아 몰래 보는 것이 나의 취미였는데. 보물찾기하러 갔다 온 사이 다 사라졌을 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작별 인사라도 해두는 건데. 미리 보안 마법을 걸어두지 않은 나의 잘못이 크다. 그나저나 이 아줌마는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의 컬렉션들 을 전부 내다버렸단 말인가? 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애들 앞에 섰다. "미안하다, 얘들아. 시청각 자료가 전부 사라졌구나. 흑~."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워?" 때마침 라이레얼이 길게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왔다. 아이들은 라이레얼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오~?" 그럭자 라이레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냐고? 그건 말이지......" "헉! 안 돼!" 결국 난 아이들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야단을 쳤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감히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에 대해 궁금해 하다니! 네놈들이 간뎅이가 땡땡 붓다 못해 배 밖으 로 튀어나왔구나! 전부 단매에 죽고 싶은 게냐?" "우에에엥~ 라이는 단매에 죽기 싫어요오~." "으아아앙~ 오빠 무서워요오~." "엉엉~ 형 나빠요." "시끄러! 뭘 잘했다고 울어? 응? 오빠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무 릎 꿇고 손들고 있어. 그리고 오늘 저녁은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난 펑펑 우는 아이들을 놓아둔 채 방을 나왔다. 응? 조기 성교육은 어쩌냐고?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성교육은 뭔 성교육. 그냥 교육하기도 바 빠 죽겟는데. 이제부터 애들이 쓸데없는 생각 못하도록 과외나 시키든지 해야 겠다. 정말로 학원을 한 다섯 개씩 보내 버릴까?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애들을 뺑뺑이 돌리면 루시아와 단 둘이 있을 시간이 많이 생길 텐데. 그나저나 오늘밤부터는 뭘 보가 잔다냐? 그 컬렉션들을 다시 모으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텐데. "에휴~ 오늘부터 열심히 인터넷 뒤져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