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런 아내(The Secret Wife) 린 그레이엄 1 심장이 북처럼 두근거렸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로지는 교회 안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안전한 거리에서 추도식을 지켜보려고 뒤쪽 신도석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안톤 에스트라다는 런던에서 꽤 명망 있던 인사였다. 어둑어둑한 교회 내부는 안톤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려고 찾아온 조문객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금실로 수놓은 검은색 스카프를 머리에 쓴 채로, 로지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만의 어두운 비탄의 동굴 속에서 몸을 떨엇다. 기억할 수 있는 한 오래 전부터,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짧았던 몇 달 동안, 그녀에게는 안톤이 있엇다. 이제 그는 갔다. 그녀를 칭하여 평생을 기다려온 기쁨이자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부르던, 그 온화하고 쾌활한 사람은 떠났다. 흐려진 초록색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녀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크고 화려한 에메랄드 반지를 초점이 흐려질 때까지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이제 누가 그녀를 사랑해 줄 것인가? 진정 그처럼 사랑해 줄 사람이 있기나 할까? 침묵과 나지막한 웅성거림이 그녀의 귓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교회를 거의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넋을 놓고 있던 자신을 당혹스럽게 여기며, 그녀는 벌떡 일어나 출구 쪽으로 향했다. 순간 스카프 자락이 신도석 끝에 걸려 머리가 뒤로 세게 젖혀졌다. 그녀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누군가가 그녀의 가냘픈 팔을 붙들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바닥에 굴렀을지도 모른다. 「괜찮습니까?」나직하고 풍부한 저음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 익숙한 악센트의 영어가 그녀의 전신을 씻어 내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으로 가득 채웠다.「아무래도 자리에 앉으시는게‥‥」 「아니에요」로지는 신경이 찢어질 듯 긴장하여 재빨리 몸을 펴고 남자의 손에서 팔을 와락 빼냈다. 스크프가 걸렸다는 것을 잊은 탓에, 스카프 아래에 있던 풍성한 금갈색 머리카락이 풀려 야성적으로 흘러내리는 것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흘끗 들었다가 충격과 공포로 얼어붙었다. 숨이 목구멍에 걸렸고, 눈물에 젖은 아름다운 얼굴이 창백한 대리석처럼 굳었다. 콘스탄틴 볼로스 역시, 그녀와 똑같이 마비된 듯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지는 근사하다고, 안톤의 사진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하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윤기 흐르는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 매혹적인 골격, 크고 관능적인 입술, 깊숙이 자리한 최면을 거는 듯한 검은 눈과 마주치자, 현기증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녀의 멍한 시선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한 강렬함으로 그의 눈동자에 못박혔다. 그것은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고‥‥떨어지고‥‥또 떨어지는 듯한 끔찍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숨을 쉴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공포에 빠뜨렸다. 「당신은 누구요?」그가 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더 가까이 몸을 내밀어, 스카프를 잡아당겨 그녀에게 내밀었다.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진 로지는 자신을 압도하는 어둡고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콘스탄틴 볼로스, 안톤과 그의 그리스인 아내 데스피나가 입양해 키운 아들. 「당신의 스카프는‥‥」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어, 이제는 성인이 된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그는 떨고 있는 그녀의 가냘픈 손을 붙잡았다. 「제발‥‥」로지는 숨을 급히 들어마셨다. 그녀의 가느다란 몸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크리스토스(맙소사)!」콘스탄틴은 그녀의 손에 끼워져 있는 고전적인 에메랄드 반지를 알아보고 경악의 외침을 토해냈다.「이 반지는 어디서 났소?」 예기치 못한 놀라움으로, 남자의 손에서 순간 힘이 빠졌다. 로지는 재빨리 손을 빼내고는 통로를 달려갔다. 겨울 바람이 그녀의 긴 곱슬머리와 헐렁한 검정색 코트를 미친 듯이 뒤로 휘날렸다. 그녀는 교회 밖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차량으로 붐비는 도로를 가로질러, 악마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달려갔다. 그녀의 위험천만한 통행에 뒤따르는 찟어지는 듯한 브레이크 소리와 경적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로지는 조용한 집 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안톤의 강력한 존재가 사라진 이 예쁘고 조그만 집은 텅빈 조개껍데기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서 살았음을 알려 주는 모든 사소한 증거까지 없앴다. 이제 현관문을 닫고 자신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어쨌든 그리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으리라고, 그녀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사랑했다. 하지만 안톤이 그녀의 날개를 붙잡도록 허락했었다. 그는 고집스런 설득과 협박과 애원까지 아끼지 않아, 그녀는 마침내 항복하고 이사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꺼이 그와 타협하고, 그가 원하는 존재가 되기를 스스로 원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항상 그녀는 언젠가는 자신이 반기를 들 수밖에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독립적인 여자예요」한번은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의 독립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젊은 여성이 어깨에 지기에 가장 부자연스러운 책임이야」안톤은 단호하게 반박했다.「내가 여기 있는 이상 너는 더 이상 그런 책임을 힘겹게 견딜 필요가 없어」 그러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의 의견에 가볍게 항의했다. 그녀가 그의 배경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그녀의 배경이나 살아온 인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너무 솔직하게 말하면 그는 상처를 받고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들은 양쪽을 조심스레 인정하는 것으로 지난 과거에 대해 다리를 만들었다. 자신은 행운아였다고, 그녀는 고통스럽게 회고했다. 넉 달이라는 기간 동안 맛본 완벽한 행복은, 어떤 사람들이 평생 동안 얻을 수 있는 것보다 값진 것이었다. 열정적으로, 조건적으로, 이타적으로 사랑받은 넉 달, 그 시간 동안의 멋진 기억은 평생의 나쁜 기억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그녀는 목구멍에 걸린 눈물 덩어리를 삼키고, 갑자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 누구도 그런 기억을 빼앗아갈 수 없다. 그리고 2백 년 동안 에스트라다 가문에 전해 내려온 반지, 안톤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검은 눈으로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던 유일한 유산이자 가보를 빼앗아갈 수도 없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주인을 찾았구나」 로지는 반지를 알아보았을 때의 콘스탄틴의 경악에 찬 분노를 기억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나는 이 조그만 기념품을 받았어요. 운이 좋은 줄이나 아시죠, 콘스탄틴 볼로스. 내가 탐욕스러웠다면 훨씬 더 많이 받아 냈을 테니까요! 안톤은 세상을 그녀의 발 아래에 깔아 주고 싶어했다. 그녀에 대한 그의 기쁨과 자긍심은 그가 지켜야 할 다른 모든 충절과 우선 순위를 압도했다. 그것은 그들이 심하게 다투었던 유일한 문제였다. 그리고 로지는 양심을 지키기 위한 마음의 갈등이 있었음을 죄스럽지만 인정했다. 그녀가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만든 것은 그의 부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그런 정도의 돈을 손에 쥔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녀가 숨기려고 애썼던 것은 쓰라린 원망이었다. 그런 감정이 그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들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자기 연민이나 질투를 느낄 수 있었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콘스탄틴 볼로스는 교통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안톤과 데스피나는 콘스탄틴을 그들의 집으로 데려와 친자식처럼 키웠다. 양자가 지닌 수없이 많은 덕목과 재능을 끊임없이 칭찬하는 것을 로지가 얼마나 싫어했는지 안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집 안의 고요가 로지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발소리가 만드는 메아리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안톤이 죽은 날 이 집을 치웠어야 했다. 하지만 너무나 큰 충격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되었던 것이다. 6주 전쯤 미약한 심장 마비가 처음 찾아왔을 때 안톤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녀는 그의 침상을 지켰다. 하지만 데스피나와 콘스탄틴이 공항에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지 마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지옥에나 가라고 해!」그녀를 병실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했던 간호사에게 화를 냈던 안톤이 무모하게 주장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닐 거예요. 부인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요」로지의 착한 부분이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나쁜 부분은 자신이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권리가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너는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구나」안톤이 무겁게 한숨지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내부에는 너무 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죄의식, 너무 많은 고통이. 데스피나는 30년 이상 그의 아내였다. 충실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게 배신당한 여인이었다. 로지는 일주일 내내 살금살금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녀의 타고난 낙천적 성격은 안톤의 건강에 대한 초기의 광적인 두려움을 상당 부분 가라앉혀 주었다. 안톤은 겨우 쉰다섯이엇다. 그는 일을 너무 많이 했다. 오, 그들은 그가 미래에 지켜야 할 분별 있는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미래가 겨우 몇 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의 머릿속에도 없었다! 안톤은 그리스의 섬들을 돌아보는 휴양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런던으로 다시 돌아온 첫날, 안톤에게 심한 심장 발작이 다시 찾아왔다. 「손쓸 새도 없이 돌아가셨어요!」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서가 전화기에 대고 흘쩍였다.「그런데 전화하신 분은 누구신가요?」로지는 한 번도 그의 사무실에 전화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안톤이 점심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로지는 미친듯이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지는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당연히 그녀는 그리스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잔인하게 배제당한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그녀는 런던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했다.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다가 콘스탄틴 볼로스와 맛닥뜨리게 된 것은 그녀의 불행이었다. 어제의 만남으로 로지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오래 전에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알았던 아버지를 잃었다는 현실에 적응할 시간과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로잘리‥‥?」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짐과 동시에 기도가 막히고 호홉이 멈췄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몸을 홱 돌렸다. 콘스탄틴 볼보스가 침실 밖의 계단참에 서 있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놀라울 정도로 핸섬한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당신 이름이지, 맞지?」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로지의 전신이 두려움으로 차갑고 축축해졌다.「어떻게 들어왔죠?」 「이 사악한 여우 같으니」콘스탄틴이 이를 갈았다.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근육질의 몸이 그녀의 탈출구인 문을 꽉 채웠다. 그는 이글거리는 검은 눈을 그녀에게서 떼지 않았다. 마치 표창에 둘러싸여 벽에 찰싹 붙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엄청난 노력으로, 로지는 가느다란 어깨를 펴고 단호하게 시선을 맞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당신이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을 텐데!」콘스탄틴은 두렵게도 한 발짝 더 앞으로 내딛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은 로지는 대체 그가 어떻게 그녀의 존재를 알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미친 듯이 걱정이 되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소‥‥. 정말이지 얼마나 그러고 싶은지 모르오!」콘스탄틴이 주먹을 불끈 쥑 잇새로 토해 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분노는 격렬한 폭풍의 전조처럼 그녀의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무‥‥무얼 원하는 거예요?」 「당신을 지구상에서 쓸어 내고 싶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소‥‥. 그게 나를 미칠 듯이 화나게 하오! 대체 안톤을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그토록 미친 짓을 하게 만들었소?」 「구워‥‥삶아요?」그녀는 멍하니 속삭였다. 너무 겁이 나서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했기에, 내가 아는 가장 고귀한 남자를 그가 가진 모든 명예와 가족에 대한 충절까지 버리게 만들었느냔 말이오!」콘스탄틴이 이글거리는 분노를 토해 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안톤이 죽기 며칠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른단 말이오?」콘스탄틴이 거칠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가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여행 가방을 보며 경멸적으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그가 내 품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뭔지나 알고 있소?」 로지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죽을 때 콘스탄틴이 임종을 지켜보았다는 것도 몰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새로운 사실에 그녀의 목구멍이 울컥하고 막혔고, 그 끔찍한 날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녀의 내부가 따뜻해졌다. 안톤은 비서만 있는 데서 혼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 콘스탄틴이 곁에 잇었다. 콘스탄틴이 그와 함께 있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안 들든 간에 아버지에게는 엄청난 의미가 있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귀에 거슬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칠흑처럼 검은 두 눈이 혐오감을 담고 그녀를 통렬하게 노려보았다.「그가 애써 토해 내려 했던 모든 말이 당신에 관한 것이었소!」 「오‥‥」그녀는 그의 고통을 감지할 수 잇었다. 자신이 콘스탄틴 볼로스와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감정의 실체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가 당신을 보호할 것이며, 그의 마지막 유언을 존중하겠노라고 명예를 걸고 맹세하게 만들었소. 하지만 나는 당신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소! 그가 대체 누구 얘기를 하고 있는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소‥‥. 그리고 어젯밤까지 난 그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인지도 몰랐소!」거의 억제할 수 없는 분노에 커다란 전신이 부들거렸다.「그는 유언장을 새로 만들었소. 그것의 공표로 데스피나가 상처 입을 위험만 없다면, 나는 유럽의 모든 법정에서 당신을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여우로 낙인찍은 후에야 한푼의 드라크마(그리스의 화폐 단위)라도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줄 거요!」 「유언장?」그의 격심한 모욕에 그녀는 심하게 몸을 떨며 말했다. 창백한 볼이 뜨거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최소한 이제 그녀는 콘스탄틴 볼로스가 왜, 그리고 어떻게 여기 왓는지는 알게 되었다. 바보 같게도 안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필요하지 않다는 그녀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뭔가를 남긴다는 유언장을 작성한 것이 분명햇다. 콘스탄틴은 어두운 분노로 그녀를 노려보며 코를 벌름거렸다.「몇 달 전에 데스피나는 안톤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다고 의심했소. 그녀가 그런 두려움을 털어놓앗을 때 나는 웃음을 터뜨렸소! 나는 안톤이 런던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새로 시작한 사업이 주는 도전과 흥분 탓이라고 안심시켰지. 나야말로 참으로 순진했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남자에게조차 젊음과 미모가 주는 유혹이 어떠한 것인지 과소평가했던 것이오. 안톤은 당신에게 미쳐 있었소‥‥. 그는 죽으면서도 당신 이름만 불렀소!」 「그는 나를 사랑했어요」로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따가운 눈물로 눈시울이 붉어지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죽으면 죽엇지 데스피나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겠소!」콘스탄틴이 거칠게 으르릉거렸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콘스탄틴 볼로스는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그는 그녀를 안톤의 숨겨진 여자, 소위 사랑의 둥지 속에 고이 모셔 둔 정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엇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굳게 다물엇다. 안톤은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서 비밀을 지켰다. 21년 묵은 배신은 그와 함께 무덤으로 간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비밀을 지켜 주어야 했다. 진실은 더 큰 고통과 비탄만 불러올 것이다. 안톤이 무엇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필요없었다. 그녀에게는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이 있고, 아버지의 미망인이 받아야 할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이라고 그녀는 느꼈다. 반지는 달랐다. 반지는 그녀가 평생을 박탈당한 채 살아왔던 유산과 배경에 대한 유일한 실체적 고리였다. 「보시는 바와 같이‥‥나는 떠날 거예요」로지는 고개를 당당히 들고, 위압적일 만큼 크고 거무스름한 그리스인을 씁쓸한 적의를 담고 응시했다.「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주위를 얼쩡거리면서 누군가를 당혹스럽게 만들 생각이 조금도‥‥」 「일이 그렇게 간단하다면, 우리는 이렇게 혐오스런 만남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거요」콘스탄틴이 사납게 끼여들었다.「당신을 이 집에서 강제로 내쫓아 버렸을 테니까!」 로지는 경멸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타고난 격렬한 성깔이 점차 뜨거워지고 있었다.「정말인가요?」그녀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그는 열린 여행 가방에 흘끗 시선을 던지며 딱딱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당신은 떠나려던 게 아니오. 어쩌면 어딘가로 짧은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는지 모르지. 하지만 그 무엇도 당신이 영원히 떠나려고 했다는 사실을 내게 납득시킬 수는 없을 거요!」 로지는 상대가 오싹해질 정도로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저런, 자만심도 대단하시군요.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당신에게 뭔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짙은 혈기가 드라마틱한 그의 광대뼈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 적나라한 조롱기가 번득였다.「창녀와 모욕을 주고받는 지경에까지 이르진 않겠소」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분노를 누르며 그녀가 소리쳤다.「나가요!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썩 꺼지란 말이에요, 이 무례한 돼지 같으니」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면」콘스탄틴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골똘히 응시하다가 불쑥 말했다.「당신, 임신했소?」 로지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입고 있는 헐렁한 블라우스를 흘끗 내려다볻가, 가늘게 모아 뜬 그이 눈 역시 그녀와 정확히 같은 방향을 헤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뺨이 진홍빛으로 변했다. 「만일 임신을 했다면‥‥그렇다면, 오로지 그렇다면 나는 안톤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소」콘스탄틴이 내키지 않은 듯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의 상상이 암시하는 것에 심한 고통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에야 그런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던 모양이라고, 로지는 짐작했다. 흐흥, 그런 생각이 암시하는 바가 그를 엄청나게 역겹게 만드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와 안톤의 진짜 관계를 밝힌다면 콘스탄틴 볼로스의 자연스러운 황금색 피부는 병든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릴 것이라고, 로지는 짜릿한 만족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안톤의 아이가 합법적 아이든, 비합법적 아이든 간에 그의 재산에 대해 일부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면, 콘스탄틴 볼로스는 감히 그녀를 모욕할 엄두를 내지 못할 테지. 그녀는 안톤의 딸이며, 그의 유일한 핏줄이자, 에스트라다 혈통의 마지막 후손이라는 사실을. 「대답을 하지 않는군」갑자기 콘스탄틴은 홱 하고 몸을 돌렸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원래 방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강인한 이목구비가 딱딱하게 일그러져 있었다.「진실을 겨우 알아내긴 했지만 당신에 대한 내 의견은 바뀌지 않았소. 하지만 처음에 그토록 화를 내며 몰아붙였던 것은 사과하겠소」 그는 빠르게 자신의 무례를 상쇄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는 안톤이 건설한 다양한 기업군의 유일한 통솔자로서의 찬란한 미래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멋진 미래를 흔들어 놓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두려워진 것일까? 그녀가 안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콘스탄틴 볼로스를 산산히 부숴 놓을 수도 있는 위협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 좋아하진 마시오」그가 느릿하게 못박았다.「정말 임신을 했다면,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종류의 테스트가 요구될 거요」 로지는 그가 혼자서 머릿속에서 열심히 돌리고 있을 실타래를 생각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가엾은 데스피나는 엄청나게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그의 숨이 놀란 헐떡임과 함께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맹렬한 금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당신의 악의는 참으로 변호의 여지가 없군」 그녀는 침대 위로 몸을 숙여 가방을 닫은 다음 침대에서 끌어내렸다.「안심해요, 콘스탄틴. 난 임신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에게도 데스피나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아요」그녀가 투명스레 내뱉었다. 아래층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침실 안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이 끊어졌다. 「택시일 거예요」로지는 안도감을 느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무릎은 후들거렷지만 내면의 우월감이 몸을 지탱시켜 주었다. 아버지는 콘스탄틴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양자인 그는 미스터 완벽이 아니었다. 흥,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말이야, 안 그래? 안톤은 순진하게도 콘스탄틴이 자신의 진짜 딸을 두 팔 벌려 관대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상상하곤 했다. 로지는 아버지가 입만 열면 자랑스레 떠벌리던 주장, 즉 콘스탄틴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그는 어린 여동생의 갑작스런 방문을 기꺼이 환영할 것이라는 생각에 별다른 이견을 제시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금전적인 탐욕에서 자유로운 자신이 콘스탄틴 볼로스보다 우월한 인간이라고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당당히 쳐들었다. 「문을 열지 마시오!」콘스탄틴이 갑자기 그녀 뒤에서 나직하지만 사납게 소리쳤다. 로지가 홱 돌아보았다. 그는 계단을 반쯤 내려와 있었다. 다이아몬드처럼 번쩍이는 그의 눈동자가 흉폭할 정도로 강렬하게 그녀에게 못박혀 있었다.「대체 무슨‥‥」 「조용!」그는 오만한 갈색 손을 강한 명령조로 공중에 대고 흔들며 거칠게 속삭였다. 분노를 숨기려고 애쓰지도 않은 채, 로지는 그의 명령을 무시하고 현관문을 홱 잡아당겼다. 하지만 어리둥절하게도 문 앞에 있는 사람은 택시 기사가 아니었다. 로지는 눈을 깜빡이고 침을 꿀꺽 삼킨 다음 그대로 얼어붙었다. 검정색 정장 차림의 작고 날씬한 여인이 고통으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로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인의 올리브 빛 피부에서 천천히 혈색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망설이듯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로지의 뒤에 나타난 콘스탄틴의 크고 거무스름한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의 미간이 완전한 당혹감 속에서 가늘게 좁아졌다. 죽은 아버지의 아내와 직접 얼굴을 대면하자, 로지는 숨이 멎는 것 같앗다. 마비된 얼굴에서 하나으 근육이라도 움직이면 내부의 공포가 드러날 것만 같았다. 묵직한 손 하나가 마치 구속의 사슬처럼 그녀의 어깨 위에 놓였다. 콘스탄틴이 그리스어로 뭐라고 말했다. 하지만 로지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자신과 가까이 붙어 서 있는 그의 크고 강력한 몸을 사로잡고 있는 격렬한 긴장만 느낄 수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이 든 여인은 한 손을 들어 로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고는 위로 당겨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에메랄드 반지를 살펴보았다. 에메랄드는 햇빛 속에서 풍부한 녹색으로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에스트라다 가문의 약혼 반지」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엿다. 그러고는 이해하겠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물론‥‥안톤이 그녀를 위해 네게 반지를 주었겠지! 콘스탄틴, 정말 바보 같구나. 내가 짐작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왜 내게 말하지 않았니?」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바보 같다니까‥‥. 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은 언제 어느 때라도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단다!」그녀의 얼굴엔 기쁨에 찬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 모든 의심과 불안은 사라졋다. 데스피나는 로지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내 아들과 약혼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약혼이요?」로지는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되물었다. 분홍빛 혀끝으로 메마른 아랫입술을 축였다. 「아주 최근에야 그렇게 됐어요」콘스탄틴이 천천히 말했다. 「내게 말을 해주었어야지」데스피나는 불만스런, 하지만 부드러운 어조로 나무랐다.「어떻게 내가 너의 행복에 괴로워 할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니? 아까 이 문으로 오면서 내 머릿속에 어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어 있었는지 안다면‥‥」 택시 한 대가 드라이브 웨이로 요란하게 밀고 들어왔다.「내 택시예요」로지가 억눌린 안도감으로 퉁명스레 내뱉었다. 「가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을 방금 만났을 뿐인데요」나이든 여인은 놀라움과 실망을 담고 항의했다. 「유감이지만 로잘리는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해요. 게다가 이미 시간도 상당히 늦었어요」콘스탄틴이 끼여들었다. 그러고는 로지가 가방에 다시 손을 가져가기도 전에, 먼저 그녀의 가방을 집어들고 재빨리 집 밖으로 나갔다. 「로잘리라‥‥정말로‥‥정말로 예쁜 이름이군요」데스피나는 기묘하게도 한순간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렸다. 다시 고개를 들기 전에 그녀의 눈은 베일에 가려졌고, 온기가 퍼졌다.「초대도 받지 않고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요」 「이렇게 서둘러 떠나게 되어서 유감이에요」로지가 억눌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이 든 여인과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양뺨에 빨갛게 홍조가 떠올랐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이미 택시 문까지 열어 놓았다. 로지는 그가 초능력이라도 있으면 그녀를 펑 하고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택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는 순간, 그의 강력한 손으로 그녀를 붙들고 오만한 검은 머리를 숙여 왔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게 빛나는 눈이 냉혹한 위협을 담고 그녀의 얼굴을 가차없이 노려보았다. 「우린 할 얘기가 남았소. 언제 돌아올 거요?」 「돌아오지 않아요」 「돈을 받으려면 돌아오겠지」콘스탄틴은 이를 갈 듯이 뱉어 냈다. 데스피나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목소리를 계속 낮게 유지하는 것이 그의 자기 통제에 대한 중요한 도전인 것이 분명했다.「이제 내키지는 않지만 연인으로서의 적절한 작별 인사를 해야겠소」 「다리 병신이 되어도 좋다면 마음대로 해보지죠」로지는 녹색 눈동자를 위협적으로 이글거리며 악의에 찬 미소를 조그맣게 지었다. 「크리스토스‥‥」콘스탄틴은 거칠게 숨을 들어켰고, 그녀의 팔꿈치를 잡은 손가락이 그녀의 살을 세게 파고들었다. 그는 끔찍이도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와, 그녀의 눈썹 위에 스쳐 가듯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다. 그가 입술을 대기 전까지, 로지는 조그만 양철 병정처럼 딱딱하게 서 있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몸을 떨며 재빨리 택시에 탔다. 택시는 바로 출발했고, 그녀는 뒤를 돌아볼 수도, 그의 연극에 현실성을 보태 주기 위해 손을 흔들 수도 없었다.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뛰었고, 그녀는 정말로 몸이 아프려는 것을 느꼈다. 양손을 무릎 위에 얹고 세게 깍지를 꼈다. 반지가 느껴졌다. 그러자 자신에게 미친 듯이 화가 났다. 그녀는 안톤의 죽음을 알던 날 바로 집을 떠났어야 했다! 그리고 에메랄드 반지를 끼고 다니지도 말았어야 했다. 위장이 조여 왔다. 문을 열었던 순간의 데스피나의 표정을 생각하며 떨림을 억눌렀다. 안톤의 미망인은 처음에 정말로 초췌해 보였다. 그 여인은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로지와 안톤의 집을 알아냈고, 그곳에서 어떤 사실을 대면하게 되든 간에 용감하게 맞서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런던에 있는 안톤의 두 번째 집에 대해 콘스탄틴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녀가 사랑했고 최근에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결론. 로지는 엄청난 죄의식을 느꼈다. 콘스탄틴이 재빨리 교활한 기지를 발휘하여, 그들이 약혼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에스트라다 반지를 주었다고 연극을 꾸미지 않았다면 과연 안톤의 미망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국 데스피나는 안톤에게 그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아이를 낳아 줄 수 없었다. 유산이 반복될 때마다 그들의 희망은 사그라졌다. 딱 한 번, 데스피나는 열 달을 채우고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사산아였다. 그것은 너무나 잔인한 운명이었고, 너무나 오랜 세월 아이를 바라며 살아온 그들에게 마지막 타격이 되었다. 데스피나는 안톤을 비통함 속에서 혼자 분투하도록 내버려 둔 채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들자, 한때 강하고 건실했던 그들의 결혼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톤이 로지의 엄마인 베스와 부정을 저지른 것도 그때였다. 로지는 그 불편한 인식을 몰아냇다. 하지만 데스피나를 잊기는 어려웟다. 그들은 정말 그녀의 두려움을 잠재우는 데 성공한 것일까? 그녀는 정말로 철썩같이 믿었을까? 요크셔로 떠나는 열차에 오르기 전에, 로지는 공중 전화 부스 뒤에 줄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콘스탄틴이 아직 거기 있기를 바라면서 집 번호를 눌렀다. 그의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그녀는 심호홉을 한 번 하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지예요. 음, 아까 말했어야 하는데 얘기가 좀 늦었어요. 내 말은, 돈은 당신이 가지라는 거예요‥‥. 알겠죠?」 「이건 또 무슨 게임이오?」전화선을 타고 콘스탄틴의 노여움이 전달되었다.「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에 내가 감동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데스피나는 갔소. 우린 얘기할 게 있소. 그녀가 오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떠나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거요. 지금 당장 이리 돌아오시오!」 로지는 귀에 들리도록 이를 갈았다. 그녀는 콘스탄틴 볼로스와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엇고, 정말이지 돈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전화를 한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 데스피나에게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미망인이 그들의 연극에 대해 조금이라도 냄새를 맡은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최악의 의심이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당신 같은 더러운 매춘부 때문에 하루 종일 시간을 낭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콘스탄틴이 경멸하듯 거칠게 고함쳤다. 「대체 누구에게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로지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내가 당신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골빈 멍청인 줄 알아? 글쎄, 이 말 하나는 해두지. 내게 좋은 인상을 주려면 유치한 독설과 번쩍이는 양복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구, 이 아니꼬운 개자식아. 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히 못박아 두겠는데, 당신 같은 인간과 다시는 마주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바로 이 더러운 매춘부라는 사실이야!」 분노와 굴욕감으로 몸을 떨며, 로지는 수화기를 꽝 하고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가방을 집어들고 열차를 향해 쿵쿵 대며 걸어갔다. 애초에 그에게 전화할 생각을 했던 자신에게 미칠 듯이 화가 났다. 전화 거는 데 들어간 동전이 아까웠다. 그녀는 너무 부드럽게 굴었다. 안톤이 그녀에게 그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그녀의 날카로운 가시를 쳐내고, 신뢰라는 새로운 씨앗을 심어 주엇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종류의 유약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은 진짜 세계였다. 안톤은 유쾌하고 감상적으로 살았던, 영원히 해가 비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유약하고 부드러워진다는 것은 어서 물어뜯어 달라는 공개적인 초대나 다름없는 것이다. 2. 모리스가 어슬렁거리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180센티미커가 훨씬 넘는 거구의 그는도끼 자루 같은 어깨에 가슴이 떡 벌어진 사내였다. 갈기처럼 무성한 금발이 그의 투박한 얼굴 주위에 축축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혹시 쇼핑 나가는 길에 맥주 사올 수 있어?」 닦고 있던 그을음투성이 버너에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로지는 그에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홀끗 던졌다.「농담이겠지!」 「설마 아직도 나에게 화를 내고 잇는 건 아니겠지?」모리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다소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전화를 했어야지. 네가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로나를 불러서 청소를 시켰을‥‥」 로지의 눈 속에 조소가 반짝였다.「네 동생은 자기 할 일만으로도 벅차. 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모리스. 우리가 처음 여기 이사 올 때, 너는 자기 일은 알아서 하겠다고 약속했어. 그런데 내가 등을 돌리기만 하면 넌 어떻게 하지?」그녀가 격렬하게 쏘아붙였다.「넌 오두막을 더럽고 지저분한 헛간으로, 내 정원을 쓰레기 하치장으로 만들었어!」 모리스는 불편하게 몸을 들썩였다.「내가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은 네가 올 줄 몰랐기 때문‥‥」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짓은 이제 그만둬! 나가서 잔디밭 위의 욕조들이나 헛간에 치우지 그래!」 모리스가 얼굴을 찡그렸다.「헛간은 꽉 찼어」 「그렇다면 팔아 버리거나 없애 버리면 되잖아! 그것들 때문에 집이 꼭 쓰레기장처럼 보인단 말이야」 「팔아 치운다구? 제정신이야? 저것들은 엄청난 가치가 있어!」모리스는 그녀의 제안에 멍해졌다.「나는 저 욕조 하나를 팔아서 네가 일주일 내내 시장통에서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팔아서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어」 자기도 모르게 그에 대한 유쾌함이 로지를 채우며, 원래의 분노를 희석시켯다. 양심의 가책도 잇었다. 모리스는 그녀가 열세 살 때부터 친구였다. 그녀는 한숨을 지었다.「이봐‥‥그만 가서 샤워나 하는 게 어때? 나중에 네가 정원 청소하는 걸 도와 줄께」 하지만 모리스는 계속 부엌을 떠나지 않고 헛기침을 했다.「어제 말을 했어야 하지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네가 아버지를 찾자마자 잃게 되어서 정말유감이야」 묵직한 덩어리가 로지의 목에 걸렸다.「멋진 사람이었어」그녀가 중얼거리고는 침을 세게 삼켰다.「그를 알게 될 기회가 있어서 내겐 행운이었어」 「그래‥‥」모리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두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하지만 그가 재산을 나눠 주려던 참에 왜 그렇게 급히 런던을 떠난 거지?」 「그 문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로지‥‥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사람이나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달아날 수만은 없어」 심한 홍조가 그녀의 뺨 위에 떠올랐다. 본능적인 자기방어로, 그녀는 고개를 다른곳으로 돌렸다. 지금보다 어렸을 적의 습관을 상기하는 것은 원하지 않앗다. 「그리고 유산 문제를 법 사이에 방치해 둘 수는 없어. 유언 집행인은 네가 있는 곳을 찾아낼 거야. 그건 그의 의무니까」 「나를 찾기는 힘들걸. 주소를 남기지 않았으니까」 「네게 주어진 걸 받아들이고, 시장에서 하는 장사에 작별을 고한 다음, 이곳에서 골동품 가게를 시작하는 것이 어때? 하고 싶어했잖아?」모리스가 냉철하게 지적했다.「그리고 우리 문제로 말하자면, 삼촌에게 이곳을 임대하는 대신에 직접 사겠다는 제안을 할 수도 있을 거야」 모리스의 치명적인 결점이라고, 로지가 빈정대듯 생각했다. 돈을 모을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는 완벽한 편집증. 그리고 그 때문에, 그는 아마 서른 다섯 살까지는 백만장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건축 수리 사업은 번창중이었다. 「너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어. 네 아버지가 원한 것도 그걸 거야」모리스가 확신을 담고 계속했다.「그리고 그의 미망인에 대해서 왜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는 거지? 그가 그녀를 알거지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 아니야!」 로지는 격분하여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홱 돌렸다. 하지만 모리스는 그녀의 견해를 듣기도 전에 부엌을 나가, 2층으로 안전하게 피신했다. 그에게 자기 일이나 알아서 하라는 말을 쏘아붙일 기회도 박탈당한 그녀는 조그만 라운지의 문지방에 서서, 그녀가 떠나 있는 동안 쌓인 남성 특유의 잡동사니와 찌그러진 맥주 캔, 자동차 잡지 등을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녀는 코를 찡그렸다. 오두막을 이전처럼 청결한 상태로 만들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그녀는 짜증스런 신음을 토하며, 흐린 봄날의 햇살 속으로 나갔다. 은빛 리무진 한 대가 도로에서 막 빠져나오는 참이엇다. 그 인상적인 자동차는 조그맣게 가르랑거리며 모리스의 로리 뒤에 매끄럽게 멈추었다. 로지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 쳐다보고 있자, 제복 차림의 운전수가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헛간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모리스는 일주일에 하루 일을 쉬었지만 고객을 돌려 보내는 일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우라한 비둘기빛 회색 양복을 차려입은 아주 키가 크고 거무스름한 남자가 리무진에서 모습을 나타내자, 로지의 가냘픈 몸은 충격과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햇살이 콘스탄틴 볼로스의 푸른빛을 띤 검은색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 귀족적인 남성다움을 더욱 강조했다. 「여자라면 누구나 콘스탄틴에게 사족을 못 쓴단다」언젠가 안톤이 울적하게 말했다.「모르긴 몰라도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을 거야. 불행하게도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여성에 대해 매우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단다」 로지는 순간, 아무 관련 없는 기억에서 깨어났다. 그는 마치 바퀴벌레보다 하잘것없는 존재인 양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 흙 묻은 스웨터와 물 빠진 청바지가 마음에 걸렸다. 다음 순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안에서 얘기합시다」콘스탄틴이 무겁게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죠?」 그는 검은 눈썹을 냉소적으로 치켜올렸다.「어렵지 않았소. 안톤의 수첩에 주소가적혀 있었으니까」 「당신이 여기 있는 걸 원하지 않아요」로지가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그러니 왔던 곳으로 돌아가시죠!」 「합의를 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거요」콘스탄틴이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만한 턱선은 굳어 있었고, 검은 눈썹 사이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몇살이오?」그가 불쑥 물었다. 「스무 살이에요‥‥당신이 알 바는 아니지만」 「스무 살?」콘스탄틴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관능적인 입술이 심한 혐오감으로 일그러졌다.「크리스토스‥‥안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어쨌든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엇어요!」로지가 조롱했다. 「하지만 탐욕스런 매춘부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나의 남성으로서의 경험이면 족하지」콘스탄틴은 쏘아붙였다.「당신은 안톤이 죽기 전의 2주 동안 그를 지옥처럼 괴롭혔던 게 틀림없소!」 로지의 얼굴이 충격으로 창백해졌다.「무슨 얘기예요?」 콘스탄틴은 그녀를 성큼 스쳐 지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안에서 얘기합시다」 「무슨 얘기냐고 물었을 텐데요」로지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을 요구했다. 콘스탄틴은 엉망으로 어지럽혀진 라운지의 문지방에 멈춰섰다. 그의 딱딱한 옆얼굴에 경멸의 주름이 잡혔다. 「돼지우리에 사는군!」그가 홱 몸을 돌리며 비난했다.「먼지투성이에 벌레가 우글거리겠군. 이 방에 들어가면 살갗이 스멀거릴 거요. 이 집은 소독이 필요한 것 같소!」 로지는 그가 다시 그녀를 스쳐 지나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망연히 지켜보았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면 여기서 얘기해야겠군」 그녀의 뺨이 분노와 굴욕감으로 붉게 상기되었다. 로지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어떻게 감히!」 「조용히 하시오」콘스탄틴은 차가운 위협이 가득한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입 다물고, 내 말 잘 들으시오. 안톤은 타고난 신사였소. 하지만 난 아니오.나는 이미 당신이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소. 그는 유언장을 법률적 조언 없이 서둘러 작성했소. 증인들은 하인들뿐이고, 런던으로 돌아온 날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소. 그는 또 한 번 심장 발작이 찾아올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고, 당신의 미래에 대해서 심각하게 걱정했소. 왜 그랬을까?」 그녀의 숨결이 목구멍에 걸렸다.「나는‥‥나는‥‥」 심판하는 듯한 냉혹한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매처럼 파고들었다.「안톤이 휴양 여행을 가기 전에, 당신은 그에게 임신했다고 말한 거야‥‥, 그렇지?」 「웃기는 소리 작작해요!」 「당신의 목적은 그가 데스피나와 이혼하게 하려는 것이었지. 그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압박했지만,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어. 당신은 임신하지 않았어.만일 그랬다면 어제 내 얼굴에 대고 즐겁게 폭탄선언을 했을 테니까!」 로지는 그를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당혹감으로 퍼덕였다. 콘스탄틴은 타는 경멸감을 담고 그녀를 응시했다.「유감스럽게도 안톤은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내 무릎 위에 던져 놓기로 결심했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암 모르겠지」콘스탄틴의 딱딱한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그가 한밑천 남겼으리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당신의 천박한 게임은 실패하고 말았소. 안톤은 유언장에 당신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로지의 미간에 깊은 주금이 잡혔다.「하지만 어제는‥‥」 「안톤은 원래의 유언장에서처럼 전 재산을 내게 남겼소. 하지만 유산 상속을 위해새로운 부대조건이 붙었소. 바로 당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거요!」 「겨‥‥결혼?」마른 입술을 축이기에는 혀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불신으로 휘둥그래졌다.「당신이‥‥나와‥‥결혼한다구요?」 「안톤은 당신이 임신했다고 믿었던 거요!」콘스탄틴이 그녀에게서 몸을 홱 돌리며 거칠고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등을 돌리고 있는 그의 어깨가 우아한 양복 재킷 아래에서 부러질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안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이성적인 생각이 끼여들 여지도 없이 서둘러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해 버렸던 거요. 왜 그렇게했겠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있지도 않은 아이가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보호받지 못할까봐 겁이 났던 거요. 또한 데스피나가 진실을 아는 것도 견딜 수 없었겠지」 「완전히 오해하고 있어요」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안톤과 나의 관계는 엄격하게 플라토닉한‥‥」 「나를 바보천치로 아는 거요?」콘스탄틴이 경멸하듯 거칠게 끼여들었다.「당신들은 관계를 맺고 있었소. 그는 그 집에서 당신과 살았고, 당신에게 홀딱 빠져 있었단말이오!」 로지의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갓다. 그녀는 지나치게 키가 자란 잔디밭 가장자리에 놓인 낡은 벤치로 다가가 천천히 앉았다. 안톤,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내부는 작게 오그라들었다.자유롭고 공공연하게 그녀를 딸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는 그녀의 미래가 안전하게 보장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조건은 합법적이지 않을 거예요‥‥」그녀가 딱딱하게 속삭였다. 「완벽하게 합법적이오」콘스탄틴이 거칠게 내뱉었다.「어쨌거나 그걸 뒤집으려면 법정까지 가야 하오. 안톤은 결혼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재산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소. 따라서 지금 그의 사업은 중단 상태이고, 구좌는 동결되었소. 하지만 데스피나에게 진실을 밝히지 않고 법적 수단을 강구하는것은 불가능하오」 로지는 명확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벌써 이 모든 일에 관해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녀는 모르오. 물론 원래의 유언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다른 유언장의 존재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소. 유언장이 발견된 것은 이틀 전에 안톤의 비서가 책상을 정리하다가‥‥」 「하지만 그녀에게는요? 내 말은, 맙소사, 안톤은 분명히 부인에게도 재산의 일부를 남겼을 텐데요」 「데스피나는 아주 부유한 여인이오. 안톤에게는 살아 있는 혈육이 아무도 없소. 데스피나는 내가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뜻에 동의하고 있소」콘스탄틴의 영리한 검은 눈동자가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며, 입술 위로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그 더러운 입을 열어 이런 얘기를 사람들에게 떠벌릴 경우, 땡전 한푼도 받지 못할 줄 아시오!」 로지의 다리에 갑자기 힘이 돌아왔다. 그녀는 적의로 눈을 빛내며 벌떡 일어났다.「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콘스탄틴 볼로스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값을 올리려는 거라면, 중대한 판단 착오를 범하고 잇는 거요. 당신은 결혼식에 참석해요. 그 대가로는 나는 당신에게 두꺼운 수표책을 주고, 적당한 때가 되면 이혼해 주겠소」 「정신 나갔어요?」로지는 기가 막혔다.「당신이 그 탐욕스러운 손을 안톤의 재산에 댈 수 있도록 내가 결혼까지 해줄 거라고 기대하는 거예요?」 그들 위쪽의 섀시 창문이 요란하게 열렸다.「로지? 타월을 전부 어떻게 한 거야?」모리스가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콘스탄틴 볼로스는 바짝 몸이 굳어,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는 반나체의 젊은 남자를 더 잘 보기 위해 한발 뒤로 물러섰다. 로지도 고개를 들엇다. 그 각도에서 보니 모리스가 금발의 킹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모리스가 투명스레 말햇다. 그녀와 함께 잇는 다른 남자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문신투성이의 이두박근과 털북숭이 가슴을 창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친구가 찾아온 줄 몰랐어」 「대체 누구요?」광대뼈 위로 짙은 혈기가 몰려든 모습으로 콘스탄틴 볼로스가 로지에게 사납게 캐물었다. 「내려가서 대신 처리해 줄까, 로지?」모리스가 물었다. 「네가 내 대신 싸워 주기를 바랄 때가 오면 차라리 무덤 속에 들어가고 말겠어!」모리스의 제안에 굴욕감을 느끼며 로지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섀시 창문이 다시 닫혔다. 「안톤의 몸이 아직 식지도 않앗는데, 벌써 다른 남자를 침대에 끌여들였군!」적나라한 격분으로 그의 번쩍거리는 검은눈이 지글거리는 황금색으로 변했다. 로지의 손이 올라갔다. 다음 순간 딱딱한 남성적인 광대뼈를 손가락이 얼얼해질 정도로 강력하게 후려갈겼다. 뺨을 맞은 것에 충격을 받은 콘스탄틴 볼로스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 천둥과 같은 침묵에 그녀는 골수까지 얼어붙었다. 「당신이 나를 모욕하는 것에 질렸어요」그녀가 이를 달그락거리며 뱉어 냈다. 그녀는 볼로스가 자신에게서 이끌어 낸 폭력적인 반응에 그만큼이나 충격을 받고 있었다.「내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리면, 모리스가 당신을 가루로 만들어 놓을 거예요」 「그는 안톤을 가루로 만들지는 않았지‥‥, 안 그래?」 키 큰 그리스인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연기가 피어오를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의 타는 듯한 시선을 마주 보았다. 심장이 천둥처럼 두근거렸고, 목구멍은 꽉 조였으며, 위장 아래쪽에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죽을 것만 같은 갑작스런 불편함에 허벅지가 꽉 조였다. 「그‥‥그건 달라요」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도 없고, 전에는 한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그의 시선에 힘을 잃고 있었다. 어떻게‥‥왜‥‥그녀는 이해할 수 없엇다. 똑바로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볼로스는 느릿하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의 호리호리하고 강력한 몸에서 긴장이 뿜어져 나왔다.「나는 게임을 할 시간이 없소, 미스 워링. 당신이 입장을 결정할 수 있도록 12시간의 여유를 주겠소. 그런 다음 나는 가차없이 가장 약한 부위를 공격할 것이오」콘스탄틴이 느릿하게 점잔 빼는 어조로 경고했다. 그 말투 때문에 그녀의 딱딱하게 굳은 척추 위로 전율이 흘렀다.「내게서 약간의 도움을 받는다면, 인생이 아주 어렵지 않을 수도 있을 거요. 이 오두막은 빌린 것이지. 임대가 갱신되지 않는다면 쓰레기 하치장 사업은 어떻게 될까?」 로지의 충격받은 눈 속에 이해의 빛이 돌아왔다.「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죠?」 차가운 미소가 그의 딱딱한 입술 한쪽을 장식했다.「내가 내키는 대로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다음 끼니를 위해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을 거요. 내일 아침 전화하겠소」 「우리가 이 집을 임대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멀어져 가는 그를 향해 그녀가 멍하니 물었다. 콘스탄틴은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특별히 부탁 하나 해도 되겠소?」그녀의 질문을 무시하며 비단결 같은 어조로 중얼거렸다.「남자를 기쁘게 하는 법을 알고 있는 여자치고는 당신은 나를 아주 놀라게 만들었소. 그러니 내일 내가 다시 올 때는 목욕이라도 좀 해두시오」 로지의 가슴이 공기를 찾아 크게 부풀어올랐다.「저런, 당신이야말로 그 더러운 머릿속이나‥‥」 리무진의 문이 값비싼 차답게 부드럽게 닫혔다. 그녀는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오두막으로 다시 돌아와, 부엌 식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자가 바로 지옥에서 온 오라버니로군. 그렇지?」모리스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뜨겁게 달아오른 볼과 지나치게 반짝이는 눈을 슬프게 응시했다.「이번에는 네가 누구인지 말했어?」모리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왜 그래야 해? 왜 그 망할 놈의 개자식에게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하냐구? 안톤이 그 사실을 이야기할 만큼 그를 신뢰하지 못했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로 신뢰할 수 없어!」 모리스는 한숨을 지었다.「볼로스는 네 유산 문제를 처리하려고 여기 왔겠지」 사래 들린 듯한 발작적인 웃음이 로지에게서 터져나왔다.「난 아무 유산도 받지 않았어! 대신에 안톤은 나를 콘스탄틴 볼로스에게 남겼다구」 모리스가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소리야?」 「아버지는 나를 그에게 떠넘겼어. 마치 내가 보살핌과 보호가 필요한 저능아라도 되는 듯이 말이야!」 「맙소사!」모리스는 그 단계에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가 중간에 끼여든 것은그때 한 번뿐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집중해서 그녀의 설명을 들었다. 「그 무식하고 오만한 개자식은 내가 그 일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더군.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로지가 격렬한 호소조로 동의를 요구했다. 모리스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네 아버지는 그를 끔찍한 곤경에 몰아넣었군」 「뭐라고?」 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현금의 흐름이 막히면 사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빨리 쓰리질 수 있는지 알아? 들어오는 돈이 없으면, 나가는 돈도 없‥‥」 「나는 안톤의 사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그리고 상관도 하지 않아」로지가 끼여들었다. 「머리를 써야 해, 로지. 볼로스는 궁지에 몰려 잇다구. 그자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넌 대체 누구 편이야?」 「언제나처럼 상식와 이윤의 편이지」모리스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네 아버지의 사업이 법률적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산산조각 나는 꼴을 보고 싶어?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볼로스는 이 문제를 공개 법정까지 끌고 가고 싶지는 않을 거야」 로지는 불편한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그런 각도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볼로스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적과 협상하기 위해 여기 온 거야. 가장 빠르고 가장 쉬운 해결책은 네 아버지의 유언장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거지」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있다니 믿을 수가‥‥」 「그리고 볼로스는 네 시간과 불편을 금전적으로 보상해 주려고 할 거야. 내가 궁금한 것은, 그가 테이블 위에 얼마까지 내놓을 준비를 해두었는가야」모리스가 생각에 잠긴 채 느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로지의 기막힌 듯한 비난의 표정에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너의 문제는 말이야, 로지. 너는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라는 점이야. 고집 부려서는 안 돼」 「내일 그가 오면 네가 상대해 보지 그러니?」로지가 쏘아붙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렇게 해주기를 원해? 나는 기꺼이 주변을 맴돌면서, 협상 진행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겠어. 그의 성깔이 너와 비슷하다면‥‥ 하지만 우린 유혈극을 바라진않잔항,안 그래? 우리가 그의 시체를 가지고 무얼 하겠어?」모리스는 유쾌하게 질문했다.「게다가 죽은 사람은 크고 두꺼운 수표책에 사인할 수도 없잖아」 「난 내일 여기 없을 거야」로지가 애매하게 말했다. 「이봐, 이건 사업상의 거래라구. 그 이상은 아니야. 너는 그 남자와 같이 살 필요도, 그를 좋아할 필요도 없어. 혹시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면」모리스가 그녀의 얼음장 같은 얼굴에 교활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네 아버지의 사업이산산조각이 나면 회사 고용인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를 생각해 보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콘스탄틴 볼로스에게 앙갚음할 방법은 없어」 「나는 그에게 앙갚음할 생각 없어! 단지 나를 내버려 두기를 바랄 뿐이야!」로지가 좌절감을 쏟아 내고는,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부엌에서 나가 버렸다. 두툼한 낡은 재킷으로 몸을 푹 감씬 로지는 온기를 유지하려고 계속 발을 굴렀다.얼음 같은 대기 속에서 하얗게 입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춥고 쌀쌀한 아침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시장은 한적하고 조용햇다. 모리스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플라스틱 커피 잔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로지는 놀라서 그를 훑어 보았다.「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모리스가 그녀의 눈길을 조심스레 피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장사는 어때?」 로지가 얼굴을 찡그렸다.「잘 안 돼」 모리스는 커다란 초록색 도자기 토끼 하나를 집어들어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이건 네 개인 소장품이잖아?」 이번엔 어깨를 으쓱해 보인 쪽은 로지였다. 광대뼈 위로 희미하게 분홍빛 홍조가 떠올랐다.「나는 다른 걸 사면 돼」 「아무도 이런 가격에는 사지 않을 거야」모리스가 가격표를 쳐다보고는 몸을 움츠렸다. 「벌써 몇 사람은 흥미를 나타‥‥」 「하지만 바이어가 아니잖아. 너는 이것과 헤어지는 게 싫어서 일부러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붙여 놓았어」 로지는 불편할 정도로 정확한 지적에 얼굴을 찡그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그는 나타났어?」 「그래‥‥」모리스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녀의 가판대 위의 물건들의 위치를 바꾸었다.「어디 가면 너를 만날 수 있는지 말해 주었어」 「뭐라구?」로지는 놀란 눈썹을 한껏 치켜올렸다. 「내가 가판대를 대신 봐줄께. 저기 그가 오고 있어‥‥」 로지의 겁에 질린 두 눈이 콘스탄틴 볼로스에게 닿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목구멍부근 어딘가에 덜컥 걸린 것만 같았다. 키가 큰 그리스인이 가판대의 맞은편에 멈춰 섰다. 덮개를 씌인 초라한 시장 안을경멸을 가득 담은 눈으로 둘러보는 동안, 그의 눈부시게 잘 생긴 얼굴은 냉소적인 조급함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로 유치한 게임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미스 워링?」 모리스는 귀에 들릴 정도로 신음 소리를 토해 냈다. 그는 앞으로 성큼 나서며, 콘스탄틴 볼로스의 놀란 손에 초록색 토끼를 집어 주었다.「점점 희소성을 더해 가는 실박 도자기 하나 보여 드릴까요?」 「이건 쓰레기요」콘스탄틴이 이를 갈 듯 말하며, 도자기를 재빨리 아무 데나 던져버렸다. 「어차피 당신은 차이를 알 수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로지가 버럭 소리치고는 가판대를 돌아가, 그가 아무렇게나 다룬 탓에 도자기에 금이 가지는 않았는지 서둘러 확인했다. 콘스탄틴 볼로스는 그녀를 무시하고 얼음장 같은 경멸을 담고 모리스를 훑어보았다.「대충 그림이 잡히는군. 당신은 아가씨의 시간에 대해 보상해 주길 바라는 거요?」 모리스는 팔짱을 꼈다.「싫으면 그만두시구려, 형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콘스탄틴 볼로스가 지갑을 펼쳐 지폐를 한 움큼 꺼내 그녀의 주머니에 찔러 넣자, 로지는 완전히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다.「난 당신의 돈을원하지 않아요!」 「어떤 사나이가 인생의 모든 사소한 일에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너는 그를 만족시키는 편이 좋을 거야, 로지」모리스가 유쾌하게 말했다.「그를 가까운 퍼브에데려가지 그래」 「나는 그와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 당신들 둘이나 어딘가로 꺼져 버리란 말이야!」로지는 콘스탄틴 볼로스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강한 손이 불쑥 뻗어나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놓아 줘요!」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하게 하면 내 손에 장사 치를 줄 아시오」모리스가 안에 물건이 든 쇼핑백을 내밀며 부드럽게 경고했다.「구입한 물건을 잊으면 안 되죠, 볼로스 씨. 조심해서 잘 다루시오. 로지는 토끼를 아주 좋아‥‥」 극단적인 경멸의 표시로, 콘스탄틴은 쇼핑백을 잡아채 똑같은 팔 높이에서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양철 쓰레기통 속으로 떨어뜨렸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에 로지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모리스도 신음을 토했다.「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로지는 콘스탄틴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쓰레기통으로 달려가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손상의 정도를 직접 눈으로 보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복구가 불가능햇다. 자시 부서진 도자기 조각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다가 다음 순간 그녀는 녹색 눈을 이글거리며 성난 암사자처럼 콘스탄틴을 향해 몸을 돌렸다.「어떻게 이런 짓을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할 수 있냐고요?」 「왜 고함을 지르는 거요?」의심 많은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눈동자와 강하게 부딪쳤다. 「이 이기적이고 천박한 돼지 같으니‥‥」로지가 격분하여 비난했다.「나는 이 토끼를 팔 결심을 하긴 햇지만 녀석이 좋은 가정으로 가실 원했어요!」 「정신이 이상한 거요,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연출하려고 작정한 거요?」콘스탄틴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최소한 나는 방자할 만큼 파괴적이거나 악의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아요!」 「악의로 가득 찼다구? 저 촌스럽고 지저분한 쓰레기를들고 다니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웠지만, 로지는 성질을 꾹 눌렀다. 흥, 이제 그는 자기 돈을 되찾게 되리라고 기대하지 못하리라.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걸어나갔다. 그녀가 인도를 지나 도로로 발을 내딛는 순간 차 한 대가쌩하고 지나치자 강력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와락 끌어당겼다. 「죽으려고 작정했소?」콘스탄틴 볼로스가 이를 갈 듯 말했다. 「당신이 나를 밀지 않았다는 게 놀랍군요」로지가 쏘아붙였다. 자신도 충격을 받아 떨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드러낼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오, 잊었군요. 내가 당신에게 가치가 있으려면 어찌되었든 살아서 버둥거려야 한다는 걸!」 길을 건너자, 그녀는 시장 상인들이 이용하는 조그만 퍼브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의 길동무는 퍼브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로지는 턱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어깨를단호하게 굳힌 다음 잠시 망설였다. 이 상황을 빨리 처리할수록, 더 빨리 그를 떼어 버릴 수 있다. 순간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어젯밤에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3 짙은 색 양복 차림의 두 남자가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엇다. 그들은 긴장된 표정이엇다. 하지만 콘스탄틴이 나타나자 강력한 안도의 제스처로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스어로 나지막하게 대화가 오갔다. 그들을 뒤에 거느리고 사람이 거의 없는 조용한 라운지 바로 들어가자, 젊은 남자 하나가 서둘러 다가와 통나무 벽난로 부근의 안락의자로 안내했다. 「저 어깨씨들은 뭐죠?」안락의자에 앉자, 로지가 두 남자 쪽으로 고개짓을 하며 물었다. 「드미트리와 타키는 내 경호원들이오」 「왜 저들이 필요한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당신의 인간성을 스스로 말해주니까요」맙소사, 경호원이라니! 로지는 당혹감을 감추려 애쓰며, 모자를 벗고 굽슬거리는 적황색 금발이 폭포수처럼 어깨 위에 흘러내리게 했다. 그녀는 짜증스런 손길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재킷을 벗다가, 그녀는 상대편에서 쏟아지는 불편할 정도로 강렬한 시선을 감지했다. 「뭘 보고 있는 거예요?」그녀가 공격적으로 물었다. 귀족적인 검은색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고,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에는 감탄의 빛이 담겨 있었다. 순간 그의 딱딱한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 미소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들어온 플래시 빛처럼 로지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깜짝 놀란 로지는 불안한 강아지처럼 어색하게 몸을 움츠렸다. 「당신의 머리는 대단히 눈길을 끄는 색깔이오」그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그리고 봉제 인형만이 이렇게 꾸불꾸불한 곱슬머리를 갖고 있죠」로지가 당황하며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웨이터가 가져온 음료를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잔을 쥐고있는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그녀가 편안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엇다. 그는 다리가후들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의 진짜 원인은 아니었다. 콘스탄틴 볼로스에게는 뭔가 훨씬 더 위험한 요소가 있었다. 감전시키는 듯한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는 압도적이고 강력한 성적 매력이었다. 「이 불행한 상황 속에서 마침내 제대로 얼굴을 마주 하고 앉을 수 있게 되었군요」콘스탄틴이 중얼거리듯 말했다.「하지만 말다툼을 할 시간은 지나갔소. 나는 이 불행한 사건이 조용히 그리고 신중하게 처리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오」 로지는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한 채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당신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어요」그녀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어쩌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일을 어렵게 만든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 책임도 있어요. 성급하게도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리는 형편없이 나를 모욕‥‥」 「알아듣게 얘기하시오」콘스탄틴이 짜증스레 끼여들었다. 로지는 바짝 긴장하여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불규칙한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안톤의 정부가 아니라구요」자신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난 그의 딸이에요. 혼외 정사로 태어난 아이라고 할 수 있죠. 당신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간에요‥‥」 콘스탄틴 볼로스가 그녀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생생한 불신의 빛으로눈이 이글거렸다.「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엄청난 거짓말을 하는 거요?」 로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하지만 사실이에요. 당신에게도 내 말을 믿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만, 안톤은 내 아버지예요」 그의 입이 혐오감과 짜증으로 일그러졌다.「정말 몹쓸 거짓말쟁이로군. 안톤이 어떤 식으로든 당신과 혈연 관계가 있었다면, 그의 변호사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요」 로지는 그를 멍하니 응시했다. 진실이 이토록 직설적인 경멸과 즉각적인 부정으로이어질 줄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그 환상적인 주장에 대한 증거는?」 「이봐요, 나를 찾아낸 것은 안톤이었‥‥」 「당신과 안톤 사이의 혈연 관계가 내가 서명할 수표의 액수에 영향을 끼칠 거라는 풍부한 상상력 따위는 접어 두시지」콘스탄틴이 이를 갈 듯 끼여들었다.「그리고 그런 말도 안되는 개 소리로 내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그만두시오!」 로지는 머리를 숙였다. 밀려드는 고통에 위장이 울렁거렸다. 증거라고? 그녀에게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안톤의 이름은 그녀의 출생 증명서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콘스탄틴은 그녀가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고 너무나 확신하고 있어서, 그녀의 말을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는 안톤의 죽음으로 자신이 그의 딸임을 증명할 어떤 수단도 사라지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런 수단으로 뭔가를 계획한 적은 결코 없었지만, 그러한 깨달음은 그녀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고통스러운 결정타를 가했다. 「사업 얘기로 들어가지」콘스탄틴이 건조하게 제의했다. 그의 불신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끼며, 로지는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걸아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쫓아 나오리라는 우울한 사실과 맹렬한 자존심만이 그녀를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도록 만들었다. 「당신이 동의만 하면 결혼 계약서가 만들어질 거요. 결혼식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치러야겠지. 내가 이용하는 런던의 법률 사무소에서 당신에게 연락이 갈 거요. 이 문제가 처리되고 나면, 당신은 가장 후한 보상을 받게 될 거요」그러고 나서 콘스탄틴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의 금액을 제시했다.「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비밀 보장과 에스트라다 반지의 반환 뿐이오」 로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안돼요」 「그것은 가보요. 반드시 돌려받아야 겠소」 「안 된다고 했어요」로지가 다시 말했다. 「오래된 물건이긴 하지만, 금전적인 가치는 별로 없소. 보석은 흠투성이요」 로지의 과민한 위장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었다.「반드시 다른 해결 방법이 있을 거예요」 「만약 있다면, 내가 여기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당신에게 비밀 결혼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을 것 같소?」 그 거칠고 무례한 질문에 로지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엇다. 그랬다, 콘스탄틴 볼로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데스피나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그녀가 어색하게 입을 열엇다.「벌써 그녀는 우리가 약혼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모든 것을 비밀로 유지할 필요가 있나요?」 「당신의 진짜 정체를 안다면, 그녀가 당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오?」콘스탄틴이 냉혹하게 말햇다.「그녀는 격분할 거요. 약혼에 대해서는‥‥경솔하고 성급한 결정이었다고 그녀에게 말할 거요. 그녀가 결혼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는 전혀 없소. 나는 당신이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소」 로지의 시선이 그의 시선과 불편하게 부딪쳣다. 그녀는 안토의 정부가 아니었지만, 그의 딸로서도 데스피나에게 환영받을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그녀가 명목상의 비밀 결혼에 동의한다면, 콘스탄틴은 유산을 물려받을 테고 안톤의 사업은 계속될 것이며 고용인들도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실 모든 것이 정상적인 상태로다시 돌아갈 것이다. 마치 로지라는 여자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로지는 고개를 들었다. 초록색 눈동자에는 어떤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돈은 당신이 가지세요. 반지는 내가 갖겠어요」그녀는 재킷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괜찮다면 나는 이만 가보겠어요」 「나는 도움에 대가를 지불하는 편을 선호하는 사람이오. 당신도 동의한 것으로 알아도 되게소?」 「나는 오로지 안톤의 뜻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동의하는 거예요. 당신이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요. 하긴 당신이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금전적인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인데‥‥」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데스피나의 행복뿐이오」콘스탄틴이 통렬하게 쏘아붙였다. 경멸감에 그녀의 가냘픈 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다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기분 내킬 때마다 다른 사람의 아내와 불장난을 일삼는 남자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참으로 감동적이군요!」 깜짝 놀란 콘스탄틴이 벌떡 일어났다.「크리스토스‥‥」 로지는 그의 핸섬한 얼굴이 충격으로 어둡게 일그러지는 것에 통쾌함을 느끼며, 커다란 녹색 눈을 격렬하게 이글거렸다.「당신과 여배우 산치아 보르존의 오랜 관계는 비밀도 아니에요! 그런 주제에 고상한 척 위선 떨기는!」 고개를 높이 들고 몸을 돌려 나가면서도 그리스인들의 폭발할 듯한 감정의 격류를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안톤은 그 잘못된 관계에 대하여 오랫동안 심하게 탄식했었다. 안톤의 의견으로는, 콘스탄틴은 스물다섯이라는 <미숙한>나이에 금전적인 보상만 충분하다면 아내의 부정에 대해 기꺼이 눈감아 주는 남편을 가진 어떤 교활한 여인의 마수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여러 번에 걸쳐서 안톤과 데스피나가 그 관계가 끝났다고 희망을 품을 만하면, 산치아는 콘스탄틴의 인생에 들어오는 다른 모든 여인을 몰아내곤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로지는 어쩌면 안톤이 유언장을 바꿔 쓸 때 그러한 상황도 고려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울적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다가가자 모리스는 놀라서 얼굴을 찡그렸다.「또다시 볼로스만 남겨 두고 나온 건 아니겠지?」 「아니, 나는 동의했어. 마음에 들어?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누구인지도 말했어」로지는 친구에게 침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는 조금도 믿지 않앗지만」 모리스는 충격을 받고 그녀를 응시했다.「왜 못 믿겠대?」 「왜 믿어야 되지? 나는 안톤과 닮지도 않았어. 그리고 증명할 서류도 없지. 사실 콘스탄틴 볼로스와 거기 앉아 있는 동안, 지난 넉 달이 스쳐 지나가는 꿈이 아니었나 하는 기분까지 들었어」로지는 가판대 뒤에 앉으면서 힘없이 고백했다.「그러니 괜찮다면 그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안톤은 네 어머니가 보낸 사진을 가지고 있었잖아. 어쩌면 다른 물건도 갖고 있었을 거야」 「안톤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 사진을 어떻게 했는지는 하느님만 아시겠지」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로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지금은 별 의미도 없잖아, 안 그래?」 그날 밤 늦게, 현관문이 세게 닫혔다. 저녁 내내 청소하느라 녹초가 된 나머지 소파 위에서 반쯤 잠들어 있던 로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모리스가 흥분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귀퉁이가 닳은 반질반질한 고급 잡지를 그녀의 무릎에 던졌다.「로나가 이걸 갖고 있더라구. 그녀는 콘스탄틴 볼로스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었어」 「무슨 소리야?」로지는 졸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여동생은 부자와 유명인들에 관한 기사가 실린 잡지를 산더미처럼 갖고 있어.내가 그의 이름을 언급하자, 급세 이 잡지를 찾아서 건네주더라구. 볼로스는 진짜 그리스인 거물이야」모리스가 흥분해서 말했다.「그는 엄청난 갑부야! 원래 아주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구. 콘스탄틴에 비하면 네 아버지는 피라미 사업가에 불과해」 「그래서?」로지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로지‥‥너는 결혼식 전에든 후에든 어떤 것에도 서명하면 안 돼」모리스가 경고했다.「볼로스는 네 아버지의 재산이 필요없어. 그는 이미 엄청난 부자라구. 그자가네 주위에서 얼씬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를 유산 상속에서 제외시킨다는것은 옳지 않은 일이야!」 「난 자러 갈 거야‥‥」 「로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네게는 권리가 있어」모리스는 심한 분노를 드러내며 말했다.「볼로스가 하고 있는 짓을 알면 네 아버지는 무덤 속에서 돌아누울 거야!」 「모리스, 난 콘스탄틴 볼로스에게 원하는 게 하나도 없어」 하지만 콘스탄틴 볼로스가 아버지보다도 부자라는 게 사실일까? 분명히 안톤은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을 타고 돌아다니거나, 경호원을 달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어느 쪽이든, 그녀와 무슨 상관인가? 콘스탄틴이 엄청난 부자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3주 후, 로지는 중심가 부근에 있는 지정 법률 사무소로 차를 몰면서, 점점 더 높아만 가는 불안감을 달래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유언장을 성실한 마음으로 작성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그녀가 합법적인 딸이었다면 누렸을 법한 인생을 찾아 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은 알겠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죄의식과 미안한 마음을 느끼게 만들었다. 소형 밴을 주차장에 세우면서, 그녀는 이제는 친숙해진 리무진을 발견하고 인상을찌프렸다. 콘스탄틴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기다리며 사무실 밖에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요크셔의 늦은 봄의 냉기에 맞는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추위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더 젊은 쪽인 타키는 콧물을 훌쩍였다. 두 남자 모두 열성적인 태도로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 주고는 서둘러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늦었군요」콘스탄틴이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며 차갑게 비난했다. 「어쨌든 왔잖아요」로지가 담담하게 지적했다.「고마운 줄도 모르고 불평하지 말아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 그녀의 방수포 자켓과 청바지를 훑어보았다.「크리스토스‥‥안톤이 입을 만한 옷을 사주지 않았소?」 로지는 붉어진 얼굴로 그의 값비싼 청색 줄무늬 양복과 하얀 실크 셔츠와 황금색 넥타이를 응시했다.「싸구려 사기극을 위해서 내가 인형처럼 차려입고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나요?」 「이것은 싸구려 사기극이 아니오」콘스탄틴이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우리는 합법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결혼식을 치를 테니까」 다음 순간 사무원이 다가와 예식이 거행될 방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로지는 얼어붙었다.「난 이 일이 내키지 않아요」그녀가 황급하게 중얼거렸다.「애초에 동의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짜증스런 듯한 기다란 갈색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데스피나를 위해서 이 일을 해야 하오」 그는 잔인하게도 아버지의 상처입기 쉬운 미망인을 상기시키자 로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것은 가짜라고, 그녀가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불쾌하긴 하지만 콘스탄틴이 안톤의 재산을 잡음 없이 상속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엇다. 잠시 후 그녀는 콘스탄틴이 자신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들어올려, 손가락에 가느다란 금반지를 밀어넣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이 직접 운전해서 왔겠지」바깥에 나가자, 콘스탄틴이 중얼거렸다.「차 열쇠를 주시오」 로지가 얼굴을 찡그렸다.「차 열쇠?」그녀는 벌써 열쇠를 손에 꺼내 들고 있던 참이었다.「왜죠?」 콘스탄틴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손에서 열쇠고리를 빼앗아 타키에게 던져 주고는 그리스어로 뭐라고 지시했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로지는 타키가 열쇠를 가지고 부리나케 떠나가는 것을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지켜보았다.「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그녀가격분해서 소리쳤다. 「그가 당신 차를 집까지 가져다 놓을 거요. 우리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낼 거요」콘스탄틴이 그녀의 어깨를 꼼짝 못하게 붙드는 순간, 리무진이 다가와 멈춰 섰다. 「우‥‥우리가 어쩐다구요?」로지가 아연실색해 그의 거무스름하고 강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결혼식 직후에 서로 떨어진다면 의심을 살 수도 있소」 「누구 말이에요?」로지가 화를 냈다. 「우리의 합의가 의심을 받는다면, 나는 가짜 결혼으로 유산을 물려받으려 했다는 비난을 살 수‥‥」 「하지만 그게 바로 당신이 한 일이잖아요!」 「따라서 그것을 일부러 명백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멍청한 짓이 아니겠소?」 「나는 당신과 밤을 보낼 생각 없어요!」로지가 격렬하게 소리쳤다. 「당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소. 이건 거래의 일부요」 로지는 팔짱을 낀 채 물러서지 않았다.「안 돼요」그녀가 다시 말했다.「나는 당신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없어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차에 오르겠소?」위험한 검은 눈이 경고의 빛을 번득였다. 로지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화난 몸짓으로 리무진에 올라탔다.「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완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남자는 가련한 인간의 표본이에요!」 「그럼 나를 가련하게 여기구려!」콘스탄틴이 유들유들하게 조롱하고는, 그녀를 움찔하게 만드는 시선을 길게 던졌다.「당신이 고함을 지를 때마다, 나는 당신을 강하게 후려갈겨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만들고 싶소. 당신은 내게서 최선의 모습을 끌어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오. 그리고 안톤에게 지옥 같은 영향을 미쳤을 게 틀림없소. 이제 당신의 사나운 입에서 해방되었으니 안톤은 행운아요」 「내 입에는 잘못된 점이 없‥‥」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섹시한 입인 것은 사실이오. 다물고만 있으면」짙은 검은색속눈썹으로 반쯤 가려진 칠흑처럼 검은 눈이 문제의 분홍빛 입술에 머물렀다. 갑자기 불편해진 로지가 얼굴을 붉혔다.「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내게 무엇을 하라, 하지 마라 명령하지 마시오」콘스탄틴이 느릿하게 말했다.「아무도 그러지 않소」 로지는 본능적으로 사치스러운 차 내부의 온기에도 불구하고 냉기가 느껴졌다.「나는 당신과 호텔에서 묵을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오. 이것은 우리 계약의 일부요. 이 결혼이 무효화되는 그날까지 어떤 위험도 무릅쓰지 않겠소」 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과 긴장이 내려앉았다. 리무진이 컨트리 하우스풍의 한 호텔 앞에 멈춰 섰다. 로지는 밖으로 나와 주위를둘러보았다.「이건 우스꽝스러운 짓이에요」 「당신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차를 얻어 탄 히치하이커 같은 몰골이 아니라면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도 않을 거요!」 그들은 위협적일 정도로 우아한 로비로 들어섰다. 로지는 콘스탄틴에게서 6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가 숙박부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호텔 접수계원은 너무 훈련을 잘 받아서 똑바로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로지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몰래 던졌다. 로지는 얼굴을 붉히며 등을 돌렸다. 그들은 아름답게 장식된 스위트룸으로 안내되었다. 연결된 문을 발견하자, 로지는서둘러 다가가 안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욕실이 딸린 침실 하나뿐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녀는 기가 막혀하며 생각했다. 「내가 당신과 여기서 밤을 보낼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이지 꿈도 야무지군요!」 콘스탄틴은 그녀에게 냉소적인 시선을 던졌다.「내가 침실에서 자겠소. 당신은 소파를 쓰시오」 순간적으로 로지는 허파로 산소를 들여보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휘둥그레 치켜뜬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침에 베개를 흐트러뜨려 놓겠소. 타키에게 당신이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해 놓았소. 이 상황에 모리스가 협조를 아끼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오」콘스탄틴이 유들유들하게 조롱했다.「당신의 근육질 남자 친구는 적당한 가격이면 당신을 식인종에게라도 팔아넘길 거요」 「모리스는 친구예요, 연인이 아니라!」 콘스탄틴은 전혀 믿지 않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입술이 웅변적으로 곡선을 그렸다. 「아주 지저분한 사람이군요」로지가 격렬하게 비난했다. 뜻밖에도 어떤 미소가 그의 무자비한 입술 가장자리에 떠올랐다. 빛나는 검은 눈이 그녀의 노한 얼굴에 강렬하게 머물렀다.「불 같은 성격이군. 그 점이 내 흥미를 끈단 말이야. 안톤의 여자가 아니었다면, 당신을 내 침대로 데려가고픈 유혹을 느꼈을 거요」 로지의 분노는 충격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 순간 로지의 목구멍이 아플 정도로 사나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의 자만심은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요」 「불에 불로 맞설 자신이 없다면 그리스인을 자극하지 마시오」콘스탄틴이 느릿하게 경고했다.「하지만 어쩌면 당신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긴장감이 너무나 팽팽해져 그녀의 심장이 천둥처럼 두근거렸다. 그동안 그의 검은색 눈동자가 도전적인 의문을 담고 그녀를 뜨겁게 응시하고 있었다.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재빨리 돌아섰다. 드미트리가 들어왔다. 두려울 만큼 후들거리는 다리로 로지는 소파로 물러났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가슴에 둔중한 아픔과 고통스러운 팽창을 예리하게 의식했다. 그냥서서 그녀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그녀의 몸에 이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정말로두려운 일이었다. 그동안 콘스탄틴은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유창한 불어로 휴대폰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손은 잘 재단된 우아한 바지 주머니에 넣은 자세였다. 매끄러운 라인의 양복 재킷은 뇌쇄적일 정도로 날씬한 허리를 강조했고, 그 아래로 근육질의 팽팽한 히프와 길고 강력한 허벅지가 이어졌다. 정말로 옷이 잘 어울린다고, 그녀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옷을 전부 벗엇을 때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는 자신을 깨닫고 숨을 멈추었다.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호기심에 말할 수 없을 충격을 느끼자, 로지의 얼굴이 진홍빛으로 붉어졌다.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리모트 컨트롤에 손을 뻗어, 위성 음악 채널에 맞춰진 텔레비전을 켰다. 「음악이 듣고 싶다면, 침실 안의 TV를 이용하시오」콘스탄틴이 극단적이고 짜증스런 표정으로 통화를 중단하고 오만하게 명령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로지는 벌떡 일어나 화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산책 나가겠어요」 그의 거만한 얼굴이 다시 돌아왔다.「안 되오. 스위트룸 안에 있으시오. 가서 머리를 감든지 하면 될 것 아니오」그가 초조하게 충고했다.「난 할 일이 있소」 로지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비명을 지르며 천장으로 뛰어오를까 겁이 났다.「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볼로스 씨」 「내 주위에서는 안 되오」휴대폰을 옆으로 던지며, 콘스탄틴이 길고 거친 경고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주먹을 쥐엇다.「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나요?」 「차라리 당신을 리무진 트렁크에 밤새 가두어 놓고, 신부 역할을 연기할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편이 나았을 뻔했소. 그런 꼴로는 당신은 열다섯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오. 호텔 직원들은 내가 변태라고 생각할 거요.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우리를 신혼 부부라고 봐주겠소? 그리고 당신이 앙앙거릴 때면」번쩍이는 검은 눈동자가 숨김없는 분노를 발산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마치 발치에 귀찮게 달라붙어 치근대는 치와와 같소!」 로지는 강도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격분으로 몸을 떨었다.「어떻게 그런 말을!」 「당신이 나와 넉 달 동안 잠자리를 함께 했다면, 최소한 언제 입을 다물고 언제 두려워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았을 거요!」 「당신은 죽었을 거예요!」로지가 격분하여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똑똑히 내뱉었다. 「그렇게 생각하오?」느리고 야만적인 미소가 그의 강하고 거무스름한 얼굴에 피어올랐다.「아니, 내가 보기에 당신은 첫번째 주말이 될 즈음에는 내 주위에서 어떻게행동해야 하는지 배울 거라고 생각하오. 안톤과는 달리, 나는 참을성은 적고 기대치는 높은 사람이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당신은 모든 면에서 낙제점이오」 「10분 전에는 내게 수작을 걸려고 했어요!」그녀가 격분해서 비난했다.「하지만 그게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자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모욕을 주려고 하는군요!」 콘스탄틴은 오만한 검은 머리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그게 수작이었다고?」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조롱했다.「그래서 끙끙거리고 있었군. 나는 억제할 수 없는 욕정으로 헐떡거려야 하는 사람이란 말이지, 응? 그러고도 나에게 자만심이 어쩌고 비난하다니! 이 순간에는 당신에게 세상의 모든 성적 매력이 있다고 해도‥‥」 「한마디라도 더 지껄이면, 나는‥‥나는」 검은 눈썹이 활처럼 위로 치켜 올라갔다.「당신이 어쩐다고? 나를 물어뜯기라고 할건가?」 분노로 말을 잃은 로지는 에메랄드 같은 초록색 눈을 증오로 이글거리며 그저 입을 뻐끔거릴 따름이었다. 콘스탄틴은 위협적인 차가운 미소로 그녀를 조롱했다.「한가지만 똑똑히 해둡시다, 봉제 인형 아가씨. 당신이 나를 물며면, 나는 당신을 뼈재로 먹을 거요. 혹시 내가 당신의 다음 번 식권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현실 감각을 완전히 잃고 있는 거요. 나는 열기를 느끼기는 하지만 그 열기 속에 녹아들 생각은 조금도‥‥」 「이 무식하고 오만한 개자식!」로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고함쳤다. 「우리의 마음이 마침내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군」콘스탄틴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짙은 속눈썹이 번쩍거리는 검은 눈위로 내리깔렸다.「하지만 잊지 말고 기억해 두시오. 젊은 남자의 바보보다는 늙은 남자의 달링이 훨씬 낫다지 않소!」 로지는 분노로 몸을 떨며 그에게 등을 돌렸다. 평생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기분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녀는 모리스의 근육을 원했다. 그녀는콘스탄틴을 번쩍 들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다가 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로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침실 문에 이르렀다. 「타이프 칠 수 있소?」콘스탄틴이 불쑥 물었다. 마치 이전의 대화는 전혀 없엇다는 듯이. 「타‥‥이프?」로지가 기가 막혀 말을 더듬었다. 「속기는 할 수 있소?」그가 짜증스레 다시 물었다.「이 계약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좋소. 하지만 개인 비서들을 옆에 둘 수 없다는 건 정말이지 짜증나는 일이오」 「나는 타이프도 속기도 하지 않아요」로지가 딱딱하게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내뱉었다. 콘스탄틴은 별로 놀라지 않는 눈길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가냘픈 몸을 홀끗 쳐다보았다.「하지만 당신은 중년 고용주의 무릎 위에 올라가는 것에는 대단한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소」 4 한 시간 후, 타키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촌스러운 비닐 쇼핑백을 침실로 가져왔다.로지는 모리스가 챙겨 준 물건들을 살펴보고 기가 막혀서 전화기로 달려갔다. 「이 가방 속의 물건들은 대체 뭐야, 모리스?」로지가 성난 손으로 하늘하늘한 나이트 드레스, 딸기 색깔의 실크 슬립 드레스, 속이 비치는 타이즈를 뒤적이며 사납게 추궁했다. 가방 안에는 갈아입을 속옷이나 칫솔 같은 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네 신혼 초야잖아. 그래서 제대로 된 옷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지」 「하, 하」로지가 이를 갈 듯 내뱉었다. 「볼로스가 너한테 서명하라고 요구했어?」그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호텔 숙박계에도 서명하지 않았어」 「그는 혼전 계약이 영국 법정에서는 무효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자신에 대한 어떤 금전적 요구도 포기하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라고 할지도 몰라」 「모리스, 나는 너를 아주 좋아하지만, 이 순간에는 너의 지독한 탐욕이 수치스러워!」로지는 성난 어조로 내뱉고는 수화기를 꽝 내려놓았다. 그녀는 룸 서비스를 불렀다. 그러자 메뉴가 도착했다. 배는 별고 고프지 않앗지만,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차 한 주전자와 치킨 샌드위치 한 접시를 비웠다. 그녀는 TV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커져 가는 따분함과 분노를 삭이려 애쓰며 방 안을 하릴없이 오갔다. 침실 밖에서는 윙윙거리는 팩스 소리와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가 이어졌다. 7시가 되자, 그녀는 발작하기 직전이 되었다. 대체 왜 콘스탄틴은 그녀가 스위트룸 안에 꼭꼭 숨어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걸까?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본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생길 것인가?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녀의 가짜 신랑은 이기적이고 무심한 일 중독자니까. 그래, 내일 아침이면, 볼로스의 눈앞에서 그의 소중한 수표를 시원하게 찢어 버리리라. 그러면 그녀는 도덕적으로 훨씬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로지는 입술에 립스틱을 엷게 바르고 눈두덩에 아이섀도를 살짝 바르고는 턱을 한껏 치켜올렸다. 침실 문을 조금 열자, 콘스탄틴이 수화기에 대고 치켜올렸다. 침실 문을 조금 열자, 콘스탄틴이 수화기에 대고 차갑고 권위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왓다.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네」그가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하고 있었다.「내가 움직이라고 하면, 전속력으로 달리라는 뜻이야. 탭댄스나 추라는 뜻이 아니란 말일세」 로지는 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그가 침실 쪽에 등지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발끝으로 벽을 따라 생쥐처럼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나오자 그녀는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경호원을 무시하고, 타키의 심한 기침 소리에 속으로 움츠리면서도 조용히 신발을 신었다. 하지만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젊은 경호원이 그녀를 따라 탔다. 그리고 그녀가 조명이 어두운 1층 바로 들어가자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바 안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우아하게 지나가는 그녀에게 꽂혔다. 완벽한 달걀형 얼굴 주위를 야성적으로 감싸며 흘러내린 적황색 곱슬머리, 매끄러운 하얀 어깨에 걸린 가느다란 끈, 가냘픈 곡선 위로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딸기 색 실크 드레스,놀라울 정도로 길고 예쁜 다리에 부드럽게 감기는 치맛단. 로지는 의자를 하나 찾아앉았다. 타키는 웨이터를 손짓해 부르고는, 다시 한 번 심하게 기침을 콜록거렸다. 「당신은 침대에 누워 잇어야 해요」로지가 젊은 그리스인에게 연민의 눈길을 홀낏던졌다. 그러자 그의 광대뼈가 새빨갛게 붉어졌다.「하지만 콘스탄틴은 당신이 경련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야만 알아차릴 테죠」 기본적인 영어만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오, 맙소사! 자리에 앉아요! 당신에게는 로브가 들어간 뜨거운 위스키가 필요해요. 그걸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잠도 잘 올 거예요」 그는 주저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몽롱하고 수줍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로지는 그를 위해 위스키 더블을 주문하고 다 마시라고 재촉했다. 그는 자신이 없는 듯 검은 머리를 저엇다. 「마셔요!」로지가 강하게 명령했다. 그는 콘스탄틴보다 훨씬 순종적이었다. 사실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나자, 타키는놀랄 만큼 수다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가 자기 나라 말로 얘기했기 때문에, 로지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것도 그런 대로 좋다고 생각했다. 이제 젊은 그리스인의 몽롱한 시선에는 그녀에 대한 강렬한 찬탄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 거요?」로지의 상념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 듯한 비난의 목소리가 뚫고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테이블 위로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가 적황색 머리를 번쩍 들었고, 순간 손이 흔들리는 바람에 들고 있던 잔에서 와인이 쏟아졌다. 타키가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요란하게 뒤로 넘어졌다. 상황을 한눈에 파악한 드미트리는 서둘러 다가와 젊은 경호원을 부축해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귀족적인 얼굴 전체에 격노의 가면을 쓴 듯한 콘스탄틴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로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스위트룸을 떠난 줄 몰랐소. 당장 다시 들어가시오」그가 거친 위협을 담고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콘스탄틴의 난폭할 정도로 위압적인 태도는 로지의 혈관에 부인할 수 없는 공포의격류를 불어넣은 동시에, 그녀에게 최악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싫다면요? 자정이되기 전에 채찍을 맞기라도 하나요? 난 여기 앉아 조용히 한잔 마시고 싶을 뿐‥‥」 「위층이오」콘스탄틴이 이를 갈 듯 내뱉었다. 「당신은 타잔, 나는 제인인가요?」로지가 희미하게 경고의 미소를 번뜩였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계약을 했소」콘스탄틴이 천둥 같은 분노가 억눌린 어조로 경고하자, 그녀의 팽팽한 척추에 전율이 흘렀다.「그리고 당신은 비협조적으로 굴고 있소」 로지는 고개를 한껏 들었다. 그녀의 불꽃 같은 머리카락이 눈동자만큼이나 선명하게 빛을 뿜었다.「솔직히 말해, 나는 아주 적절하게 협조하고 있어요. 원래부터 나는 매춘부 역할을 하게 되어 있잖아요?」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원래 매춘부들은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법이죠‥‥」 「다시 말해 보시오」콘스탄틴의 높은 광대뼈 위에 선명하게 핏줄이 섰다. 「그래서 따분함을 견디다 못한 어린 아내들은 아래층 바로 내려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곤 하죠」로지가 슬프며섣 감상적인 어조로 계속했다. 「사람들이 보고 있소」입은 강철처럼 딱딱하게 다물고 눈은 불처럼 이글거렸다. 콘스탄틴은 긴장한 육식동물처럼 우아하게 의자에 앉았다. 「물론 보고 있죠‥‥. 그리고 축하해요. 당신은 이 가면극에 실제 같은 진실성을 추가하게 되었으니까요. 의심 많은 남편이 질투의 불꽃을 이글거리며 아내를 찾아 내려왔으니까요. 나는 이 쇼에 충분히 기가 죽은 듯한 표정을 짓도록 노력하겠어요」로지는 그의 격분에 찬 모욕을 기다리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하지만 위층으로올라가 침실에 갇혀 있지는 않을 거예요」 콘스탄틴은 아주,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조용히 내쉬엇다. 「영리하군, 콘스탄틴. 그 점은 인정해 주겠어요. 알겠지만 당신이 나를 강제로 여기서 끌고 나가려 하면, 사람들이 나를 위해 막아서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르죠」로지가 싱긋 웃었다. 「내일 아침도 내게는 너무 멀게 느껴지는군」콘스탄틴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알아요‥‥우리는 확실히 천생연분은 아닌 셈이죠」 「공공장소에서는 아주 용감하군」 「당신은 아주 커다란 남자니까요」 「모리스도 그렇소」 로지가 미소지었다.「모리스는 양처럼 순해요. 그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아요」 「그 관계에서는 당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테니까」콘스탄틴이 경멸이 가득 담긴눈으로 쏘아붙였다. 「당신은 여자들이 귀엽고 순종적이기를 기대하는 모양이군요. 시대를 잘못 타고 났어요, 콘스탄틴. 하렘을 가진 군주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그 시대에는 후궁들이 주인의 침실 바닥을 기어서 침대 발치부터 이불 안으로 들어가게 훈련받았다는 것을알고 있나요?」로지가 정보를 제공하듯 친절하게 말했다. 숱 많은 검은 속눈썹이 아래로 깔렸다. 그의 감각적인 입술이 비뚤어졌다.「나는 몇 달 동안 추진해 온 합병 건을 마무리지을 단계에 와 있소」속눈썹이 들리자, 짜증스런 빛으로 사납게 번득이는 검은 눈이 나타났다.「난 당신을 믿지 않소. 신혼 첫날밤에 당신이 혼자 여기 앉아 남자를 헌팅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소」 「나는 남자를 낚지 않을 거예요. 평생 한 번도 남자를 낚아 본 일이 없어요」 「바에 있는 남자들이 당신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소. 오랜 만에 부두에 상륙한, 섹스에 굶주린 선원들처럼!」콘스탄틴이 이를 갈 듯 내뱉었다. 그의 긴장한 광대뼈에 희미하게 홍조가 떠올랐다.「당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소. 존경받을 만한 여자라면 누구도 혼자서 바에 앉아 있지는‥‥」 「타키를 데려왔어요」 「그를 고주망태로 만들었잖소!」 「그는 심한 독감에 걸렸고 기분이 아주 안 좋았어요. 그래서 낮은 도수의 알코올을 마시게 할 필요가 있었어요」로지가 얼굴을 찡그렸다.「내가 그에게 마시라고‥‥」 「당신의 권유를 받아들인 죄로 그는 일을 잃게 될 거요」 로지의 얼굴은 충격으로 하얗게 질렸다.「그건 공평하지 못해요, 콘스탄틴. 내가 그에게 마시라고 강요했다구요!」 「또한 그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강요했나?」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검은 눈동자가 번쩍이고, 콧구멍이 벌름거렸다.「그가 당신에게 하는 말을 들었소. 감히 직원이 내 아내에게 로맨틱한 구애를‥‥」 「당신의 아내? 난 당신 아내가 아니에요!」기가 막힌 로지가 격렬하게 말을 끊었다.「수백만 파운드를 준다 해도 당신 아내가 되진 않을 거예요!」 「오! 자신을 그 정도 가격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군. 생각보다 훨씬 비싸군 그래」콘스탄틴이 냉소적으로 비꼬았다.「안톤은 당신의 몸에 얼마를 붙였나? 그는 당신을빌린 집에 살게 했소. 그는 당신이 안주할 집조차 사주지‥‥」그녀의 잔에 남은 와인이 강하고 거무스름한 얼굴에 확 끼얹어지자, 그가 말을 끊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격노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로지는 벌떡 일어나, 악에 받친 증오의 표정을 그에게 되돌렸다.「당신을 보면 네안데르탈인도 아인슈타인처럼 여겨져요!」 콘스탄틴은 그녀가 문을 닫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분노에 정신을 잃은 로지가 격렬하게 버튼을 두드렸다. 그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몸을 양팔로 붙들자, 엘리베이터 문이 마침내 닫혔다. 「놓지 못하겠어요, 이 더러운 돼지!」로지가 숨가쁘게 헐떡였다. 콘스탄틴의 이글거리는 눈이 그녀를 강렬하게 내려다보았다. 강한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 그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호리호리한 근육질의 남성적인 몸에 가까이 붙어 서자, 로지는 당혹감으로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어붙었다. 그의 열기와 내음이 자극적으로 그녀에게 밀어닥쳤다. 그녀의복부 아래 깊은 곳의 근육이 반사적으로경련하자, 다리가 기묘할 정도로 약하고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흉곽 속의 심장이 질식할 것처럼 빠르게 두근거렸다. 「당신은 나를 유혹하려 했소」콘스탄틴이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깊은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냉소적인 유쾌함이 담긴 희미한 미소가 그의 딱딱한 입술 한쪽에 떠올랐다. 「유혹?」로지가 멍하니 되물엇다.「당신 얼굴에 와인을 끼얹은 것이 유혹인가요?」 「어차피 당신은 날 이기지 못하니까」 그녀는 바들거리는 전신의 모든 세포,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가슴, 온몸에서 퍼져나오는 뜨거운 열기를 강렬하게 의식하며 숨을 쉬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니야‥‥! 그녀는 심한 충격 속에서 자신에게 소리쳤다. 난 유혹하지 않았어. 오만한 머리를 아래로 숙이며, 콘스탄틴은 관능적이고 나른하게 미소지었다. 로지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녀의 내부에서 통제 불능의 흥분이 불꽃처럼 폭발했고, 격렬한 열정이 그녀를 압도했다. 그녀는 걸신들린 듯 그의 키스를 되돌렸다. 그의 혀가 관능적으로 침입해 들어오자 그녀의 목구멍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녀의 몸이 연체동물처럼 그의 몸에 한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었고, 그녀의 모든 신경 마디가 비명을 지르며 더욱 가까운 접촉을절망적으로 갈구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의 멍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엘리베이터 밖으로 끌어냈다.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숨가쁜 흥분으로부터 단순하고 사무적인 동작으로 끌어내려진 로지는 방향 감각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 스위트룸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다시 확신에 찬 손을 그녀에게 뻗어왔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생명력이 달콤한 덫처럼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의 뜨거운 시선이 그녀를 집어삼키듯 응시했다. 「다시, 또다시 계속해서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말하시오」콘스탄틴이 숨김없는 욕망을 드러내며 거칠고 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그러면 나는 당신의 모든 욕망을충족시켜 주겠다고 말하겠소」 로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어, 그의 손길을 떨쳐 내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로지는 현실감을 회복하자 자신의 반응에 대한 충격으로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당신과 잘 수 없어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잠을 잔다고 했소?」 「당신은 유혹당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로지가 거의 비난하듯이 그에게 상기시켰다. 「하룻밤 정도는 그럴 수 있소. 아침에 뉘우치면 되니까‥‥」 「나는 죽을 만큼 피곤해요‥‥. 그리고 어쨌거나 당신에겐 할 일이 있잖아요」 그의 검은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이 잡혓다. 그리고 뇌쇄적일 정도로 관능적인 입술이 경멸로 일그러졌다.「크리스토스‥‥, 나는 섹스를 게임으로 여기는 여자는 질색이오! 내가 제공하는 것은 하룻밤의 오락뿐이오」그가 얼음처럼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나는 섹스를 돈으로 주고 사지‥‥」 「그러면 살아 있는 시체나 유혹해 보시죠!」로지는 그에게 사납게 쏘아붙이고 침실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등뒤로 문을 닫고는 문에 등을 기대고 터져나오는 흐느낌을 억눌렀다. 뜨거운 눈물을 참느라 눈이 따가웠다. 여러 시간이 지난 후에도, 로지는자기 혐오와 불안감에 싸인 채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콘스탄틴이 자신에게서 이끌어 낸 성적인 반응에 여전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10대 시절, 그녀는 강간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무사히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그 경험은 육체적인 친밀함에 대한 욕망을 그녀에게서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사실 자라면서 로지는 남자에 대한 깊은 불신을 키우게 되었다. 게다가 궁지에 몰리거나 불행한 기분이 들 때마다 그녀는 고아원에서 달아나곤 했다. 그런 습관은 모리스가 일이 생길 때마다 도망쳐서는 결코 문제가 해결할 수 없다고 설득하기 전까지, 그녀를 더 많은 난관에 부닥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집의 임대료를 지불할 수 있을 만큼 사업을 본 궤도에 진입시키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독립과 안정에 대한 그녀의 갈망은 자신을 심하게 혹사시키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안톤은 그녀를 런던의 집으로 이사오도록 설득함으로써 그녀의 자립 철학에 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전에는 한 번도 자신에게 탐사를 허락한 적이 없었던 감정과 가능성에 스스로를 열어 두었던 것이다. 안톤은 그녀를 쇼핑에 끌고 나가기도 했다. 그는 여성적인 옷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분명히 밝혔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가 사주는 대로 입었다.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안톤은 그녀와 모리스의 플라토닉한 관계를 받아들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가 그녀를 조금도 흥분시킬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떤 남자에게도 아무런 흥분을 느끼지 못했다‥‥. 콘스탄틴 볼로스와 교회에서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내일이 지나면 다시 그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그녀는 하느님께 감사했다. 그들의 만남은 콘스탄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욕망의 열기 속에서도, 그는 그녀에게 한줌의 호감이나 존경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가 제의한 것은 하룻밤의 지나가는 관계이다. 그는 유혹을 느꼈지만, 그 강도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녀가 거절했을 때 일말의 안도감마저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감정이 풍부한 그의 눈 속에서 그것을 읽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극심한 피로가 무거운 안개처럼 그녀의 위로 내려앉았다.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눈을 뜬 순간, 콘스탄틴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조명등 불빛 속에서 눈을 깜빡이며, 로지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척추를 따라 차가운 공포의 전율이 흘렀다. 「언제나 옷을 입고 잠을 자는 거요?」콘스탄틴이 그녀가 입고 있는 청바지와 T셔츠를 쳐다보며 질문했다. 그가 입고 있는 청색 검정색 로브 속으로 털이 무성한 갈색 가슴이 보이자,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치켜뜬 채 침대 반대쪽으로 재빨리 뛰어내렸다. 「크리스토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겁탈이라도 할 것 같소?」그녀의 반응에 기가 막혀하며 그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소파가 더 편해요」 「침대를 함께 써도 되오. 지금은 새벽 3시고, 내 머리속에는 잠을 자고 싶은 욕망말고는 아무것도 없소」콘스탄틴이 오만하게 비꼬았다. 하지만 로지는 대답하지 않고 침실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피곤한 몸을 소파 위에 뉘었다.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인 것 같은데 밖에서 끈질긴 노크 소리가 울렷다. 그녀는 쿠션 아래에 머리를 묻고, 잠을 자러 나왔을 때는 없었던 담요의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신음을 토했다. 그리스어로 외치는 짜증스런 고함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암회색 바지와 하얀 실크 셔츠 차림의 콘스탄틴이 문을 벌컥 여는 게 보였다. 드미트리가 신문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왓다. 콘스탄틴은 신문을 보았다. 그러고는 그리스어로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가 조용해졌다. 콘스탄틴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스인 경호원은 안도의 마음을 숨기지도 않고 서둘러 빠져 나갔다. 콘스탄틴이 로지를 향해 몸을 홱 돌렸다. 「이 사악한 거짓말쟁이!」그가 긴 다리로 성큼 방을 가로질러 다가오며 예고도 없이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난폭하게 그녀를 소파에서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에요?」이글거리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로지가 분노와 충격에 소리쳤다. 「이 일은 꼭 대가를 치르게 하겠소!」 「대체 내가 무슨 일을 했다는 거예요?」 「당신을 믿은 내가 바보지. 변호사가 내게 경고했는데‥‥ 대체 왜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콘스탄틴이 혐오와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로지는 우유처럼 창백하게 질렸고, 복부 한가운데가 심하게 울렁거렸다. 「정말로 나와 결혼하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싶소?」콘스탄틴이 최면을 거는 듯한 위협적인 시선을 번득이며 순수한 격노를 쏟아냈다.「당신을 더러운 골방에 가둬 놓겠소. 내가 분이 풀릴 즈음이면 당신은 내게 이혼해 달라고 무릎 꿇고 애걸하게 될 거요!」 5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감히 거짓말할 생각 마시오!」콘스탄틴이 천둥처럼 소리쳤다. 로지는 그가 커피 테이블 위에 던져 놓은 신문에 두려운 호기심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콘스탄틴은 신문을 다시 낚아채, 단죄의 증거처럼 펼쳐 보였다. <거물의 비밀결혼> 1면 헤드라인이었다. 로지는 오두막 밖에 서 있는 자신의 익숙한 사진을 휘둥그레 치켜뜬 눈으로 응시했다. 지난번에 그 사진을 보았을 때, 그것은 라운지 맨틀피스 위의 액자 속에 있었다. 이사한 날,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자기 집을 갖게 된 기념으로 자랑스레 찍은 사진이었다. 「모리스‥‥」그녀는 고통스레 속삭였다. 오직 모리스만이 이 사진을 언론에 보낼수 있다. 「모리스」콘스탄틴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만족감을 드러냈다.「놈을 두 동강 내놓겠소!」 「아니, 모리스가 아니에요!」콘스탄틴의움켜쥔 주먹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체적인 폭력성에 충격을 받고, 로지가 공포에 질러 외쳤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을 꼭 부여잡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모리스가 아니에요‥‥내가 그랫어요」 「왜 놈을 보호하려 하는 거요? 그는 당신과 공범이오. 당신은 그에게 전화해서 우리가 어디 잇는지 말했을 거요. 여기 도착할 때까지는 목적지를 몰랐을 테니까」 「네, 그에게 전화했어요」로지가 딱딱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을 테지」그의 강하고 느릿한 어조는 채찍처럼 느껴졌고, 그 속에 든 분노는 그녀의 목덜미 잔털이 일어설 정도로 차가웠다.「데스피나가 결혼에 대해 곧 알게 될 거요. 그녀는 런던에 친구가 많소. 내가 결혼을 비밀로 한 이유에 대해 설명을 요구할 거요. 그 생각을 해보았소, 아니, 신경이나 썼소?」 로지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몸을 움찔했다. 「아니, 물론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당신은 자신의 탐욕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않아. 안톤이 당신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서 화가 난 거야, 그렇지?」콘스탄틴이생생한 혐오감을 담고 비난했다.「당신이 대단한 부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으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하지만 사망하기 2주 전에, 안톤은 마요르카 섬에 있는 한 쓰러져 가는 흉가를 사려고 막대한 대부를 신청했소. 감상에 빠진 단 한 번의 미친 거래로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했소. 하지만 그는 자존심이 강해서 나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소」 「마요르카?」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의 적황색 머리가 천천히 위로 들렸다. 「손 폰타넬, 에스트라다 가문의 옛집이오. 산양에게나 적합한 척박한 수에이커의 땅이 달린 쓰레기투성이의 집이지」콘스탄틴은 이를 갈 듯 내뱉었다.「그 흉가는 환경 보호 구역에 있어서 증축도 금지되어 있소. 그곳은 안톤 이외의 다른 누구에게도가치가 없는 집이오. 그 집의 전 주인은 안톤이 접근하자‥‥」 「안톤이 손 폰타넬을 샀어요?」로지가 숨이 막힐 정도로 충격을 받고 속삭였다. 「그는 언제나 감상적인 남자였소」콘스탄틴은 그러한 감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심정을 강하게 암시하면서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로지는 이해했다. 바로 이 방에서 아버지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확실하게 이해했다. 안톤이 딸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 집이었다. 손 폰타넬,안톤이 열다섯 살 때 홀로 된 어머니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팔 수밖에 없었던 집. 아버지는 평생의 대부분을 그리스에서 보냈지만, 조상의 집을 떠났다는 사실에깊은 상실감과 고통을 느꼈다. 무력하고 좌절감에 빠진 열다섯 살의 안톤은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언젠가는 손 폰타넬을 다시 찾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그는 그 집을 사랑했어요」로지가 부드럽게 중얼거렸다.「어떤 가격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것은 재정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소.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콘스탄틴이 입술을 꼭 다물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감정을 억제하느라 입술 한쪽 가장자리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안톤이 죽지 않았다면, 그는 파산하거나 내게 올 수밖에 없었을 거요. 나는 그가 자존심을 극복하고 내게 도움을 청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의 아내가 아니고요?」 콘스탄틴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크리스토스‥‥, 대체 어떤 남자가 아내에게 돈을 빌린단 말이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개인적인 문제를 당신하고 얘기하고 있는 거지?」그가 갑자기 화를 터뜨렸다.「가서 어젯밤에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으시오. 우린 이 호텔을 떠날 거요」 「<우리>란 말은 잊어버리세요.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콘스탄틴은 경멸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은 나와 함께 그리스로 갈 거요. 그게 내게 남은 유일한 선택이오. 내 말 잘 들으시오」그가 무자비한 검은 눈을 번뜩였다.「당신에게 약을 먹여 꽁꽁 묶어서 싣고 가야 한다면 난 주저없이 그렇게 할 거요」 「그‥‥그리스?」로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렸다. 「이젠 데스피나와 잠시라도 만나야 하오」콘스탄틴은 격렬한 적의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벌써 우리가 헤어졌다고 그녀에게 말한 것이 유감이오」 「당신이 어떻게 설명하든 내가 알 바 아니에요. 나는 그리스로 가지 않아요」로지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일어섰다. 「필요하다면 당신을 묶어 놓고 옷을 갈아입힐 거요」 로지는 숨김없는 위협이 담긴 검은 눈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콘스탄틴은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와 전화선을 뽑았다. 「이제부터는 바깥 세상과 연락할 수 없소. 자, 옷을 입으시오」그가 지시했다. 그녀는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멍하니 응시했다. 모리스가 어떻게 그토록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걸까? 언론과는 어떻게 접촉한 걸까? 그는 그러한 배신을 그녀가 어떻게 느낄지를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데스피나에게 더 이상의 어떤 고통도 주지 않으려고 결심한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욕실 문을 다시 열고 밖을 살며시 내다보았다. 콘스탄틴은 최고급 양복 재킷을 팔에 끼고 있었다.「왜 옷을 갈아입지 않는 거요?」 「모리스에게 전화하게 해주세요.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요」 짙은 속눈썹에 둘러싸인, 분노가 가득한 검은 눈이 그녀를 노려보았다.「안 되오」 「부탁이에요」그녀가 고집했다. 「그리스인 아내의 첫 번째 덕목은 순종이오」콘스탄틴이 먹이를 찾는 표범과 같은동작으로 천천히 다가왔다.「그리고 봉제 인형 아가씨, 내가 점프하라고 할 때 점프하지 않는다면, 순종적인 노예처럼 내 침실 바닥을 기어 들어오도록 당신을 교육시킬 거요!」 로지는 문을 꽝 닫고는 덤으로 자물쇠까지 걸었다. 「나는 그리스에 가지 않아요」로지는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모리스를 병신이 되도록 두들겨 팬 다음 업계에서 몰아내 버려야 되겠군」콘스탄틴이 미소 띤 얼굴로 바들거리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앗다.「내가 그렇게 할 수 잇다는 걸 의심하진 않겠지? 은밀히 조사해 보니, 모리스의 연로하신 삼촌 역시 모리스만큼이나 금전 감각이 뛰어나더군. 그리고 데니스 삼촌은 대가만 만족스러우면 당신들 두 사람 모두를 눈보라 속으로도 몰아낼 수 있다는 걸 알았지!」 콘스탄틴이 오두막 주인이 모리스의 삼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로지는 충격을 받았다.「당신은 알고 있‥‥?」 「나는 실행할 수 없는 위협은 하지 않소. 당신은 라인을 벗어났고, 나는 얼마든지앙갚음을 해줄 태세가 되어 있소. 나는 모리스 카터가 세상에 태어난 것마저 원망하게 만들어 줄 수 있소. 그리고 한때 당신과 침대를 함께 했다는 사실을 땅을 치며후회하도록 만들 수도 있소」 「화가 났군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분노는 내 정신을 맑게 해주는 대신, 당신의 머리는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모양이군」 「하지만 모리스는 이 일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모리스가 언론에 알렸다면, 그것은 콘스탄틴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리스는 그녀를 위해 그 일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있다.「당신이 그를 다치게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안톤이 내 성격에 대해 그 정도는 얘기했을 텐데? 이제 사람들을 대할 차례요」 그가 출구로 인도하자, 로지는 이가 덜거덕거릴 정도로 당혹스러운 고통을 느꼇다.「밖에 기자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잠시 후, 그녀는 수많은 얼굴과 번쩍거리는 카메라, 쏟아지는 질문과 마주했다. 그녀가 심하게 몸을 떨자, 콘스탄틴이 검정색 캐시미어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없이 군중 속을 뚫고 리무진으로 나아갔다. 아무도 그들의 앞을 막아 서지 않았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로지는 그의 냉정하고 위압적인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타키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아직도 타키를 해고할 생각인가요?」그녀가 불안하게 물었다. 「아직 고려중이오」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내가 권했다고요」 그녀의 주장에 대한 대답으로 침묵만이 돌아왔다. 「여권도 옷도 없이 그리스로 갈 수는 없어요」로지가 다음으로 지적했다.「먼저 집에 가야 해요」 「그 문제는 드미트리가 알아서 할 거요. 그는 우리와 공항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소」 「배가 고파요」 「비행기 안에서 먹으면 되오」 로지는 좌절감을 느끼며, 그의 따뜻한 코트 속에 푹 잠겨 앉았다. 드미트리가 그녀의 여행 가방고 낡은 배낭을 가지고 공항에서 그들과 합류하자, 그녀는 그에게 모리스에 대해 물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콘스탄틴이 그녀를 막았다.그 이후로 그녀의 분노는 더욱 격화되었다. 개인 전세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최소한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후에는 비행 시간 내내 잠만 잤다. 깨어나자 비행기는 착륙해 있었다. 그때 즈음에는 이미 아침도 점심도 거른 후라 너무나 배가 고팠다. 그녀는 자신을 한시도 눈앞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서둘러 아테네 국제 공항 밖으로 끌고 나가려는 콘스탄틴을 붙잡고 초코릿 바 하나라도 살 수 있도록 약간의 현금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망할 놈의 전화를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비명을 지르겠어요!」로지가 버럭 화를 터뜨렸다. 「이번에는 뭐요?」콘스탄틴은 따분해서 칭얼대는 아이를 상대하는 어른의 표정으로 휴대폰을 아래로 내렸다. 로지가 이를 갈앗다.「나는 더 이상 데스피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그럼 당신이 죽은 남편의 정부였다고 선언하겠다는 거요?」 좌절감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나는 안톤의 정부가 아니‥‥」 「이제는 며느라가 된 정부라고 하면 더 나은가? 데스피나에게는 그런 종류의 진실이 주는 고통이나 굴욕을 감수할 이유가 없소」콘스탄틴이 거칠게 반박했다. 차가 아테네의 교통 지옥 속을 헤쳐 나가는 동안, 그녀는 꼿꼿이 등을 세우고 앉아, 데스피나를 마주할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 리무진이 도심의 우아한 대저택 앞에 멈춰 섰다. 로지는 정오의 열기 속으로 내렸다. 덥기도 했지만 끊어질 듯 긴장한 신경 때문에 토할 것만 같았다. 콘스탄틴이 그들을 맞으러 나온 집사와 얘기하는 동안, 그녀는 그의 뒤에 비겁하게 숨어 있었다. 그가 몸을 돌리고 긴장으로 날카로워진 숨을 내쉬었다. 「데스피나는 여기 없소. 그녀는 오늘 아침 친구를 방문하러 브라질에 갔소. 틀림없이 내게 일정을 알리려고 했겠지만, 연락이 되지 않은 거요」 거대한 안도의 물결이 로지에게 밀어닥쳤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리무진에 탔다. 「이제 어떻게 하죠?」그녀가 쾌활한 어조로 물었다. 콘스탄틴이 얼굴을 찡그렸다.「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우리의 결혼 소식을 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소. 그녀의 친구는 오지의 커피 농장에 살고 있소」 「당신이 전화하면 되잖아요」 「그녀와 직접 만날 때까지 기다릴 거요. 전화로 이런 소식을 전할 수는 없소」그의 강한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하나요?」 콘스탄틴은 그 질문을 무시했다. 그가 다시 변덕스런 기분이 되었음을 로지는 알수 있었다. 「당신은 내 아내요」콘스탄틴이 불쑥 강조하듯 상기시켰다. 「법적으로는 그렇죠」로지가 힘없이 동의했다.「하지만‥‥」 「연극은 최소한 두 달 정도는 계속되어야 하오. 이제는 어쩔 수 없소」 「나는 형편없는 배우예요. 우리는 서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니 그 점을 곧 알아차릴 거예요!」 콘스탄틴은 다시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는 그의 그런 태도가 너무나 증오스러웠다.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의식 밖으로 몰아내는 것 같았다. 그럴 때문 마치 채를 휘두를 가치도 없는 귀찮은 파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단 일주일도 당신과 살 수 없어요. 하물며 두 달이라니, 꿈도 꾸지 말아요!」 콘스탄틴이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표정을 지었다.「지금 농담하는 거요? 당신은 지금 매춘부의 천국으로 들어갈 찰나에 있소! 내게는 당신에게 사치스럽고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소. 하지만 당신의 배반과 속임수에 대해 앙갚음할 생각을 하니 그나마 위안이 되는군!」 로지는 얼굴이 불처럼 상기된 채 증오로 숨을 씩씩거렸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무시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두 달 동안 굴욕을 참으며 벽장식처럼 죽어 지낼 거라고기대한다면, 그의 꿈이 야무진 것이다! 하지만 두 사간 후, 말할 수 없이 풍성하고 맛있는 식사로 배고픔에서 벗어나자, 로지는 이전의 불만투성이의 얼굴에 태양처럼 밝은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자신에게배당된 침실에 딸린 욕실의 자쿠지(기포 목욕탕)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콘스탄틴은 도시 외곽에 있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저택에 살고 있었다. 궁전처럼 장대한 그의 저택에는 하인들이 득실거렸고, 그들은 그녀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못하도록 분주하게 보살폈다. 마치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 묵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콘스탄틴이 하인들에게 그녀를 새신부라 소개할 때, 그녀는 이를 데 없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가 내부 전화 시스템을 설명해 주자 그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 만일 그에게 말할 것이 있으면 특정 번호를 돌리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전화하기를 기다린다면 그는 늙어서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도로 큰 집이라면, 언제든 모리스에게 연락할 수 잇는 외부선이 달린 전화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동시에 모든 장소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경멸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그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다고, 로지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인정했다. 그들은 정반대의 인격을 가진 남자엿다. 안톤은 농담을 즐겼고,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않았다. 그리고 모든 문제의 밝은 면을 보려고 애썼고, 가능하다면 문제 자체를 유쾌한 마음으로 완전히 무시하곤 했다. 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콘스탄틴에게 그녀와 결혼하라고 요구할 수 있었을까? 로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사 콘스탄틴이 그녀를 안톤의 딸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피후견인에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타월지로 만든 로브를 입은 다음, 로지는 훨씬 편안하고 긴장이 풀린 기분으로 욕실을 나왔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침실에는 아주 키가 크고 거무스름한 침입자가 들어와 있었다. 로지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콘스탄틴이 입고 있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더블 슈트 위에 닿았다. 그는 충격적일 만큼 섹시하고 위험한 마피아 단원처럼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그녀의 숨결을 빼앗고 얼어붙은 듯 마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 또한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콘스탄틴이 그녀를 험악하게 노려보며 말했다.「여기 있는 동안 정상적인 부부처럼 행동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소?」 로지는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저녁에 아래층으로 내려와 나와 식사하지 않고 쟁반을 올려 달라고 고집했소? 그리고 저택을 안내하겠다는 가정부의 제안을 왜 거절한 거요?」 로지가 한숨을 내쉬었다.「그 외에 또 잘못한 게 없나요?」 「당신은 손님이 아니오. 이곳은 당신의 집으로 되어 있소. 새신부처럼 행동하시오」 「새신부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내가 알 게 뭐예요?」 「당신은 대단한 상상력을 가졌잖소. 그걸 이용하시오!」콘스탄틴이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상상력은 벌써 사용되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오래된 흑백영화에 나오는 우수에 찬갱 단원이고, 상대역으로 나오는 신비로운 여배우는 로지였다. 화려한 20년대풍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연인인 갱이 유일하게 뜨거운 열정을 쏟는 대상이다. 처음 경험하는 에로틱한 환상에서 화들짝 깨어난 로지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대체 자신의 머리속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무슨 일이오? 평소답지 않게 조용하군」콘스탄틴이 검은 눈으로 의심스럽게 응시햇다. 「시차 때문이에요」로지가 성적인 백일몽에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하며 날카롭게 대꾸했다. 「당신이 날마다 비행기를 탈 수 있게 수배해 두어야겠군」콘스탄틴은 미소도 짓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빈정거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욕조에 있는 동안, 이미 짐이 풀려 있었다. 자신의 조그만 자수 보석함이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모리스가 장난스레 챙겨 넣었던 옷가지에 원한이 맺혀 있던 터라, 배낭 안에 보석함을 집어넣을 정도로 사려깊다는 사실에 경이감마저 느꼈다. 보석함을 열어 본 그녀는 잠시 얼굴을 찌푸렷다. 그러고는 기대하고 있던 것을 찾으려고 점점 더 다급하게 뒤졌다. 심장이 죽은 듯 멈추고 위장이 뒤집혔다. 에스트라다 반지가 없었다. 로지가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콘스탄틴은 그녀에게서 반지를 빼앗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지금 그 반지가 사라졌다. 콘스탄틴이 아버지가 그녀에게 준 유일한 선물을 훔쳐 간 것이다! 로지는 맨발로 길고 넓은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녀는 콘스탄틴이 어떤 방에서 거대한 홀로 막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반지를 돌려 주세요!」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고함쳤다. 깜짝 놀란 콘스탄틴이 홱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체 무슨‥‥」 「에스트라다 반지요. 보석함에 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요!」 「없다고?」콘스탄틴은 거대한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붙들고 우아한 리셉션룸으로 밀어넣었다.「어디로 사라졋단 말이오?」 로지가 얼굴을 찡그렸다.「당신이 이런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어요」 「만일 반지를 잃어버렸다면‥‥」콘스탄틴이 이를 갈 듯 뱉어 냈다.「당신 목을 졸라 버리겠소!」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 그건가요?」로지가 냉소적인 시선으로 노려보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이봐요, 당신이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요. 반지가 사라진 것은 당신이‥‥」 「크리스토스‥‥, 지금 나에게 도둑질을 했다고 비난하는 거요?」콘스탄틴이 격분하여 고함쳤다. 로지는 움찔하며 전술상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런 용어를 사용하진 않았어요. 그럼 당신이 내가 그걸 가질 권리가 없다고 믿고 있는 물건을 되찾아갔다고 말하죠. 하지만 내겐 당당한 권리가 있어요. 그 반지를 내게 주었어요」 「난 도둑이 아니오. 반지가 없어졌다면 경찰을 부르겠소. 하지만 먼저 이것이 또 하나의 계략이 아닌지 확인해야겠소」 「계략이라니‥‥,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죠?」로지는 사납게 대답을 요구했다. 콘스탄틴이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당신 남자 친구가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도 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을 거라는 뜻이오」 「더러운 돼지 같으니!」로지가 기가 막혀 몸을 떨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반지에 엄청난 보험을 들어 두었‥‥」 로지가 격분하여 주먹을 쥐고 달려들려는 순간, 하인이 문을 열고 콘스탄틴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가 오만하게 머리를 돌렸다.「이만 실례해야겠소. 손님이 왔소」 로지는 콘스탄틴의 무례한 퇴장에 부들부들 몸을 떨며 카펫 위에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었다. 콘스탄틴은 반지가 정말로 없어졌다는 것을 믿지 않거나, 교활하게도 불신과 무지를 가장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랬다! 그녀의 성난 시선이 마침 전화기에 닿았다. 그리고 그대로 멈추었다. 그제야 자신이 영국의 국제 전화 코드를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동안 방을 뒤졌지만 전화 번호부는 없었다. 그녀는 그리스에서 교환원에게 전화하는 법조차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모리스에게 연락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좌절감에 풀이 죽어 다시 홀로 나왓다가, 두런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찌푸리며 잠시 발을 멈추었다. 콘스탄틴과 방문객이었다. 찾아온 손님은 여자였고, 놀랍게도 영어를 쓰고 있었다. 호기심에 빼꼼이 열린 문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살짝안을 들여다보았다. 「루이즈‥‥」콘스탄틴이 아주, 아주 따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철도 레일처럼 긴 다리를 가진 엄청나게 매력적인 브루넷의 미인이 긴 의자에 앉아, 프릴 달린 손수건으로 설득력 없는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식을 신문에서 읽다니요‥‥. 정말이지 너무 놀랐어요, 콘스탄틴!어떻게 내게 말도 하지 않고 결혼할 수가 있어요? 당신은 몇 년 동안이나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아내가 있는 지금 계속해서 당신의 정부로 남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루이즈가 토라진 듯 한탄하며 신음을 토했다. 그러면서 냉정한 푸른 눈으로는 불평의 대상에게 자신이 미치는 효과를 주위 깊게가늠하는 듯했다. 그녀는 윤기 흐르는 풍성한 검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불평의 대상은 로지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녀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로지는 눈동자를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며, 문을 더 밀고 문지방을 섰다. 「확신이 서도록 도와 드리죠」그녀가 달콤하게 중얼거렸다.「콘스탄틴 주위의 반경 백 미터 안에 다시 나타나면 당신의 눈을 뽑아 버리겠어요!」 브르넷의 미인이 익살스러울 정도로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들엇다. 콘스탄틴이 말할 수 없는 불신으로 검은 눈을 이글거리며 몸을 홱 돌렸다. 「당신에 대해서는 말이죠」로지는 가짜 남편에게도주의를 돌리며 팔짱을 꼈다. 자신의 역할이 말할 수 없이 유쾌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웠다.「즉시 내 집에서 당신의 여자 친구를 쫗아내 달라고 말하겠어요. 왜냐하면 나는 지킬 수 없는 위협은 하지 않거든요」 그날 자기가 사용했던 말을 반복하자, 콘스탄틴의 청동색 피부가 하얗게 질렷다. 속눈썹을 내리깔기 전에 검은 눈동자가 홍금색 백열광처럼 이글거리고, 그의 감각적인 입술은 자제력을 최대한 발휘하느라 핏기 없이 일직선으로 굳었다. 콘스탄틴은 침묵을 지켰다. 저런, 저런, 거만한 대왕께서 한방 맞으셨군. 하지만 로지는 눈곱만큼도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 브루넷의 미인은 도발적으로 천천히 로지 곁을 지나갔다. 그녀는 로지보다 30센티미터는 더 큰 것 같았다. 여자는 콘스탄틴 쪽을 향해 악의적인 미소를 던졌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의 귀여운 미성년자 아내 덕분에 무척 즐거웠어요. 그런데 당신의 좋은 시절은 전부 끝났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녀는 지옥 같은 삶을 선사할 테고, 당신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고 봐요!」 로지는 루이즈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냉정하고 위엄 있는 퇴장에깊은 인상을 받았다. 멀리서 문이 꽝 하고 닫히자, 로지는 한숨을 지었다.「그녀의 심장을 찢어 놓지 않았으니 다행이군요. 나 어땠어요?」 폭발할 것 같은 침묵이 두렵게 이어졌다. 「당신이‥‥어땠느냐고‥‥?」콘스탄틴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내뱉었다. 「새신부로서 말이에요‥‥. 꽤 그럴 듯했죠? 내 말은, 아내라면 당연히 자신의 집에서 그런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거예요? 당신이 상기시켰듯이, 나는 손님이 아니니까요」 콘스탄틴은 그리스어로 거칠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영어로 내뱉었다.「당신 머릿속에 한 줌의 상식이라도 있기는 한 거요?」 로지는 불꽃 같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있어요. 그런데 혹시 신호를 잘못 읽은게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그 여자 친구가 당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구요. 하지만 아니죠, 네? 그럼 아무런 해될 일이 없는 거예요」 「당신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소. 선사 시대의 유인원 같은 모리스와 연락하지 못하게 하니까, 그 대신 내 사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로 작정한 거요」 「새신랑에게는 사생활이 없느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오?」콘스탄틴이 커다란 육실 동물처럼 으르렁거렸다.「당신은 내 사생활의 일부가 아니었던가? 당신은 내가 당신을 세상에 아내로 밝힐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잖소?」 로지는 갑자기 자신감을 상실하고 바짝 긴장했다. 처음으로, 오늘 아침 자신이 하지도 않은 죄를 그렇게 열심히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했다.「콘스탄틴‥‥」 「뭐요?」 로지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목구멍 어딘가에 걸린 채 쿵쿵거리고 있는것 같았다.「그만 자러 가야 할 시간이에요」 「나도 그렇소」콘스탄틴이 그녀의 가냘픈 몸에 능숙하게 팔을 감고 그녀를 번쩍 안아올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로지가 비명을 질렀다. 「어젯밤에 했어야 할 일을 하려는 거요!」콘스탄틴이 단호하게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당장 내려놓아요! 정신 나갔어요?」 「모두가 당신 잘못이오! 크리스토스‥‥, 당신은 계속, 또 계속해서 나를 몰아대고 있소!」콘스탄틴이 천둥처럼 그녀를 비난했다.「난 다신 방을 내게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배당했소! 겨우 나와 같은 지붕 아래에 있도록 하는 수준에서 말이오! 난 다시는 당신에게 유혹당하지 앟을 작정이었소. 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소」 「그럼 별로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안 그래요?」로지가 격렬하게 쏘아붙였다.「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다음 주 내내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사타구니를 갈겨 주겠어요!」 「참으로 입도 걸군!」콘스탄틴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낮고 탁한 음성에 로지의 자기 방어 본능이 최대한으로 깨어났다.「그 입으로 내게 키스나 하지 그러시오?」 「싫어요!」 「싫어?」 「내가 바보 멍청이로 보여요?」로지가 쏘아붙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콘스탄틴이 뜨겁고 굶주린 입술로 빛을 전부 몰아냈다. 세상이너무나 빠르게 회전해, 그녀는 거칠게 숨을 들어키며 그를 꼭 붙들었다. 작열하는 듯한 열기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열기가 아니라 그였는지도 모른다. 콘스탄틴 역시 뜨겁게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그의 딱딱한 뺨에 닿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모든 생각과 산소가 빠져나갈 때까지 키스를 계속했다. 어둠 속에서 그는 그녀를 어떤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가 좌절의 신음을 토해 냈다. 그녀는 물 속으로 하염없이 가라앉는 사람처럼 공기를 찾아 숨을 헐떡이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빛이 들어오자, 그녀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콘스탄틴이 실크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빼고 재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는 그녀 옆으로 다가와 누웠다. 달아나, 조그만 목소리가 경고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글거리는 검은 눈을 보았고, 그 순간 몸 전체가 익숙지 않은 감각을 느끼며 액체처럼 변했다.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갈망의 파도가 그녀를 집어 삼키자,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순교자처럼 가만히 누워 있지 마시오, 이 조그만 악녀 같으니」그가 거칠게 내뱉었다.「내가 마치‥‥난 그저 느끼고 싶을 뿐이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황홀한 자신감과 함께 강렬한 만족감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그가 앞으로 몸을 내밀고, 혀끝으로 그녀의 입술 사이를 관능적으로 침입했다. 그녀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그의 입술을 찾으며 손을 위로 뻗었다. 즉시 그는 만족스런 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의 신경 말단이 모두비명을 지를 때까지 격렬하게 키스했다. 콘스탄틴은 그녀의 파들거리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관능적으로 미소지었다.「이게 마음에 드오?」 로지는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육체만을 위한 세계였다. 그는 그녀의 부풀어오른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등이 뒤로 휘었다. 「크리스토스‥‥, 당신은 뜨거워」콘스탄틴이 크고 강한 몸을 아래로 낮추며 신음했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둥근 엉덩이를 감싸며 몸을 떨었다. 그는 좌절감에 욕설을 내뱉으며 벌떡 일어나 성급한 손길로 바지 혁띠를 풀기 시작했다. 뜨겁다‥‥뜨겁다구? 로지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뇌가 정상적인 사고를 시작했다. 그녀는 외설적으로 부풀어오른 자신의 가슴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짧은 산 순간, 그녀는 공포와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듯 누워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부리나케 침대에서 벗어나 올림픽 단거리 기록을 경신할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났다. 「크리스토스‥‥!」고함 소리가 콘스탄틴에게서 터져나왔다. 그 유창한 영어는 어디로 갔는지 그가 속사포처럼 그리스어를 쏟아냈다. 로지는 절벽에서 자살하도록 운명지어진 레밍스처럼 어두운 복도를 미친 듯이 달렸다. 뜨겁다‥‥천박하고, 값싸고, 손쉽다‥‥맙소사, 어떻게 그가 그렇게 할 때까지 내버려 둘 수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에게 고함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전형적인 콘스탄틴식 책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단하나의 약점을 공략해 점수를 만회하려는 수작. 이번에는 성적인 전투로 바꾼 다음, 남성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려는 계산인 것이다. 그녀는 혐오감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막다른 곳에 이른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얼어붙었다. 콘스탄틴이 3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로지는 등을 벽에 붙이고 본능적인 공포를 드러내며 풀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의 가냘픈 몸 전체가 공격에 대비하여바짝 긴장했다. 「대체 이게 뭐요?」 「소‥‥손대면 죽을 줄 알아요」그녀가 실처럼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콘스탄틴은 예리한 검은 눈으로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난강간범이 아니오」그가 험악하게 말했다.「폭력을 쓰지 않고 거절을 받아들일 수 있소」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지만, 로지는 천천히 팔을 내리고 대신 보호하듯 몸을 감쌌다. 그녀는 공포를 드러냄으로써 몸을 보여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폭로하고 말았다는 것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의식했다. 그리고 자신이 심하게 굴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로 누워 그렇게 야성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에 그가 믿을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마치 강간이라도 당하는 듯이 움츠러드는 여자는 냉수에 10분 동안 샤워하는 것 이상으로 싸늘하게 남자를 식게 만드는 법이오」콘스탅틴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단호하게 못박았다. 「당신이 강간하려 한다고 생각하지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소」그가 잘라 말했다.「나는 여자를 강제로 침대로 끌고 갈필요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소. 기회가 있다 해도, 그러지 않을 거요」콘스탄틴이 오만하게 선언했다. 「애초에 내가 오해하게 했었어요‥‥. 미안해요」로지가 중얼거렸다. 제발 그가 그만 떠나 주기를, 그래서 그녀가 혼자 회복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유가 뭐요?」 그 무례한 질문에 그녀가 움츠러들었다.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었고, 그것은 그녀가 알리고 싶지 않은 대답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내키지 않은 듯 투명스레 말했다.「당신을 원했어요」그 사실을 그에게 인정하는 것은 독약을 한 사발 마시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콘스탄틴이 가차없이 질문했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뜨겁게 달아올라, 마치 어둠 속에서 네온사인처럼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우리는 서로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기묘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괴팍한 매력의 일부지」 로지는 그 불편한 주장에 침을 꿀꺽 삼켰다. 콘스탄틴은 달빛 속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당신은 겁에 질려 달아났어, 그렇지?」그가 갑자기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자제력의 화신이오. 그런데 내가 당신의 자폭 버튼을 찾아낸 거지. 틀림없이 그런 자제력으로 안톤과 오랑우탄 사이를 아주 쉽게 분리된 궤도로 오갈 수 있었겠지‥‥」 「오랑우탄?」 「모리스 말이오. 그 표현은 그에게 꼭 들어맞소. 놈은 타고난 간교함 외에는 아무재능도 없는 덩치만 큰 멍청한 유인원이지」콘스탄틴이 유들유들하게 설명했다. 「모리스는 멍청하지 않아요!」로지가 격렬하게 쏘아붙였다. 「물론 멍청하고말고. 그는 당신을 내 품 안에 밀어넣었소. 놈은 당신이 내 세계에서 나와 함께 지낸 후에 자기에게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는 거요?」 「난 어떤 면에서도 당신과 함께 지낼 생각 없어요!」 「하지만 오랑우탄은 과거속으로 사라졌고 안톤은 죽었소. 그리고 당신은 이제 볼로스 부인이오. 잠시 동안은」콘스탄틴이 몸을 돌리고 떠나려다가, 홀끗 고개를 돌렸다.「당신이 내 침대로 들어올 때까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군. 당신이 내 침대에 들지 않고 견디는 것은 육체적으로 불가능할 거라는 게 내 생각이오!」 그가 어둠 속으로 거의 모습이사라질 때쯤 로지가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내 방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죠?」 몸을 홱 돌린 콘스탄틴은 핸섬한 얼굴을 뒤로 젖히고, 곤경에 빠진 그녀를 보며 고소해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로지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증오심으로 몸을 떨었다.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자신이 없어 그녀는 침묵 속에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마침내 익숙한 복도에 이르자,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이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렇소?」그의 어조는 더 깊은 의미를 암시했다. 로지의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그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에 한 팔을 두르자숨이 목구멍에 걸렸다. 검은 시선이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당신은 겉으로 꾸미는 것만큼 강하지 않아, 그러지? 당신은 겁먹고 있소. 하지만 잠재적인 보상을 생각해 보시오. 나를 즐기시오, 그러면 다시는 나이 든 남자에게 스스로를 팔 필요가 없을 테니까!」 로지는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이토록 약하고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든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그 일을 겨우 서른여섯 시간 만에 해냈다. 그녀는 겁먹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그녀의 급소를 찾아냈다. 그는 벌써 그녀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틴처럼 성적 경험이 풍부한 남자를 끊임없이 도발시킨 것은 그녀의 바보 같은 실수였다.만일 자신을 경멸하는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한다면, 그후에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여기게 될 것인가? 만약 그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의 인생의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루이즈는 감정적으로는 냉정했지만, 마침내 다른 여자가 콘스탄틴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믿음에 거의 복수심에 가까운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유일하게 콘스탄틴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겨지는, 아름다은 이탈리아 여배우 산치아 보르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로지는 자신의 수치스럽고 무모한 행동에 훨씬 더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콘스탄틴에게는 도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파렴치하고 마력적인 성적 매력에 속절없는 희생자가 되기 일보직전까지 온 것이다. 이제는 타고난 두뇌를 사용할 시간이었다. 왜 그녀가 그리스에 머물러야 한단 말인가? 데스피나와의 불편한 만남을 다시 한 번 시도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콘스탄틴은 신부가 벌써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고 말하면 그만이엇다. 그가 정부와 만나는 장면을 아내에게 들켰다는 설명을 덧붙인다면 더욱 신빙성 있게 들릴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떠나면 좋을까? 바람직한 목적지를 생각해 내는 데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콘스탄틴이 손 폰타넬을 다시 팔기 전에 마요르카로 가야지. 한 시간 후, 로지는 배낭 하나만 메고 침실 밖의 발코니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배수관 위로 약간 우회해, 벽을 가득 덮고 있는 억센 담쟁이에 손을 뻗었다. 그런 다음, 아래 쪽의 포장 테라스 위에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착지했다. 안심하게에는 너무 가까운 위치 어딘가에서 개 한 마리가 컹컹 짖었다. 로지는 쏜살같이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제는 한 마리 이상의 개가 짖고 있었다. 바깥 담장 근처에 이르렀을 때, 사이렌 소리 비슷한 것이 요란하게 울리고, 갑자기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나타났다. 로지는 담을 향해 돌진했다.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를 후려치려는 순간, 남자가 기침을 하는 바람에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타키‥‥?」 그가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타키, 제발요」그녀가 애원했다. 개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3미터 높이의 벽 위로 그녀를 올려 주었다. 그즈음 또다른 경보벨 소리가 사이렌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질렀다. 로지는 길 위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관목림 숲으로 재빨리 숨어들었다. 경찰차 한 대가 경보등을 번쩍이며 나타났고, 전기로 작동되는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한방 먹었군요, 람보 씨. 그녀가 거만하게 비웃었다. 그런데 콘스탄틴은 타키를 정말로 다른 곳에 취직시켜 주어야 할 것 같았다. 타키는콘스탄틴의 안전을 책임지기에는 너무 마음이 여렸다. 그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글쎄, 콘스탄틴과 가능한 한 멀리 거리를 두고 싶긴 하지만, 그에게 정말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바라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그를 아주 좋아했다. 그녀로 말하자면‥‥콘스탄틴이 반지를 가졌으니 그들의 계약은 완료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는 그는 그의 길을 가고, 그녀는 그녀의 길을 가는 것이다. 로지는 이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6 「대체 어디 있는 거야?」모리스가 귀청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질렀다. 로지는 수화기를 귀에서 약간 떼었다.「마요르카‥‥」 「마요르카?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콘스탄틴이 여기 왔었어. 꼭 미친 사람 같았다구! 제기랄, 로지. 그 불쌍한 녀석에게 최소한 메모라도 남겼어야 하잖아!그는‥‥」 「언제부터 콘스탄틴을 가엾게 생각했어?」로지가 어이없어하며 야유했다. 「그가 네 행방과 안전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지」모리스가 역겨울 정도로 근엄하게 말했다.「너는 난생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어. 넌 외국어도 몰라. 돈도 없고. 그런데 한밤중에 그의 집에서 사라져 버렸잖아! 난 네가 야반 도주 습관을 극복한 줄 알았어」 「그런 게 아니야!」로지가 격렬하게 반박했다. 「네가 나하고 여기 있다고 생각하고 들이닥쳤을 때, 콘스탄틴은 길길이 날뛰고 있었어. 하지만 네가 없다는 걸 발견하자, 이번에는 완전히 혼비백산해서‥‥」 「콘스탄틴은 혼비백산하는 타입이 아니‥‥」 「대체 마요르카까지는 무슨 돈으로 간 거야?」 「그건 신경 쓰지 마. 나는 단지 알고 싶어서‥‥」 「어디 묵고 있어? 내가 그리고 갈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화 잘 내는 다혈질의 정신병자 같은 너희 둘에게 질렸어.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너를 찾으려고 그리스 경찰을 동원하고 있었어! 어디에 묵고 있는지 당장 말하지 않으면, 콘스탄틴에게 네가 마요르카에 있다고 말해 버릴‥‥」 5초 우, 로지는 결혼 관련 뉴스가 어떻게 언론에 새어나갔는지 알아내지도 못한 채 공중 전화 부스에서 쿵쿵거리며 나왔다. 모리스와 사이가 틀어진 것은 화가 났지만, 이제는 그녀가 더 이상 강간당하기 직전에 구원받은 겁에 질린 열세 살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리스도 인정할 때가 되었다. 그녀는 3일 만에 반 이상 바닥 난 비밀 비상금 계좌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빌린 오토바이 위에 올라탔다. 활기 없는 작은 마을을 벗어나 위험한 커브와 아찔한 경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로로 들어서면서,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험악한 빛이 감돌았다. 콘스탄틴이그녀를 쫓아 영국까지 날아갔다는 것을 알자 추적당하는 짐승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녀를 격분시켰다. 한 달 전만 해도 그녀는 그 개자식을 만난 적도 없엇다. 그런데 이제 그는 마치 그녀가 마치 자기 소유물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밤중에 감옥에서 달아났다고 해서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그녀는약속대로 그와 결혼해 주었다. 그에게는 그녀에게 그 이상의 희생을 요구할 어떤 권리도 없다! 오전이 다 지날 무렵, 로지는 심하게 녹슨 대문에 가시 철사줄 끝에 매달린 낡은 철제 문패를 보고 있었다. 손 폰타넬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룬 가파른 언덕 위로 이어지는 기다란 짐마차 바퀴 자국이 끝나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오토바이를나무 아래에 세워 둔 채로, 로지는 비옥한 계곡 속에 자리한 아버지의 생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빌라는 빛바랜 붉은색 지붕에, 세월을 타지 않는 복숭아 빛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좌우대칭의 2층짜리 건물로, 기둥으로 떠받쳐진 우아한 로지아(한쪽이 트인 복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남쪽으로는 야자나무가 점점이 심어진 손질 안 된 정원 경계면을 따라 무서져 내릴 것 같은 아치가 이어졌다. 아니,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게 아니라 단지 낡았을 뿐이라고, 그녀는 서둘러 정정했다. 지붕 타일이 여기저기 빠져 있고 벽에 금이 가 있기는 했지만‥‥ 손 폰타넬은 콘스탄틴이 말한 것처럼 그런 흉가는 절대 아니었다! 로지는 바퀴 자국을 따라 경사면을 서둘러 내려갔다. 그녀의 걸음은 뜰 입구에 이르자 아주 느려졌다. 포동포동한 노부인이 로지아의 그늘에 놓인 의자에서 꾸벅꾸벅졸고 있었다. 로지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지 걱정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노부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노부인은 화들짝 놀란 시선을 로지에게 못박았다. 부인의 주름투성이 얼굴에 환한 기쁨의 미소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녀는 놀라운 기세로 벌떡 일어나, 마치 로지가 안겨들기라도 기대하듯 두 팔을 활짝 내밀었다.「세뇨리타 에스트라다?」그녀가 소리쳤다. 아버지의 성을 말하는 소리에, 로지는 놀라서 몸이 굳었다. 노부인은 속사포처럼 스페인어를 쏟아내며 로지를 끌어안고 양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검은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그녀는 하얀 에이프런 주머니 속에서 심하게 구겨진 사진 반장을 꺼냈다. 「라 하이 데 돈 안토니오‥‥. 돈 안토니오의 딸」그녀가 안톤과 로지가 함께 찍은 스냅 사진을 자랑스레 보여 주며 한숨을 지었다.「난 카르미나예요‥‥」 카르미나. 아버지의 유모였던 여자. 로지는 더 이상의 소개가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노부인은 그녀가 누구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안톤은 손 폰타넬을 사러 이곳에 왔을 때, 카르미나가 여전히 섬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귀향과 재회의 감격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딸이 하나 있음을 똑똑히 밝힌 것이다. 로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떨리는 입술에 행복한 미소가 어렸다.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너무나 커다란 의미가있었다. 노부인은 주머니 속에 다시 손을 넣어, 조심스레 접힌 신문조각을 꺼냈다. 그녀가하얀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세뇨리타가 아니라‥‥세뇨라지」카르미나는 자기를나무라듯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세뇨라 볼로스‥‥맞죠?」 젠장할, 로지는 불신과 분노로 기운이 빠졌다. 외국에서 카다란 산을 반이나 넘어왔는데도, 여전히 콘스탄틴과 그 망할 놈의 결혼식 뉴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니! 흥분에 찬 스페인어와 점점 확신을 얻어가는 영어를 뒤섞어 쏟아내며, 카르미나는 에스포소가 어디 있는지 열심히 묻고 있었다. 로지는 이를 갈았다. 에스포소, 스페인어로 남편이란는 뜻이었다. 거의 동시에, 멀리서 바닥이 진동하는 듯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헬리곱터 한 대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새처럼 날라오고 있었다. 헬리곱터가 착륙 지점을 찾아 정원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기체는빌라 정면에서 15미터쯤 떨어진 평지에 내려앉았다. 날개가 회전을 멈추기도 전에,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로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호흡마저 방해할 정도의 거대한 흥분이 밀려왔고, 동시에 철저하고 당혹스러운 패배감이그녀를 가득 채웠다. 콘스탄틴은 길고 강력한 근육질의 다리로 성큼성큼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무자비하게 이글거리는 검은 눈과 마주치자, 그녀는 표본실의 나비처럼 얼어붙었다. 「나는‥‥」그녀의 것 같지 않은 기묘하게 끽끽거리는 목소리가 숨가쁘게 새어나왔다. 그녀의 앞에 이르자 콘스탄틴은 우뚝 멈춰 섰다. 티끌만한 경고도 없이, 그는 몸을 굽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충격 때문에 로지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내가 하려는 말에 청중은 필요 없소」콘스탄틴이 위협적인 저음으로 말했다.「그리고 신부를 안고 문지방을 지나는 것은 전통이 아니겠소?」 마지막 헬기를 보았을 때 로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의 드미트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콘스탄틴의 경호원은 함지박만하게 싱긋 웃고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진홍빛으로 변한 로지가 고함을 질렀다.「당장 내려놓아요!」 「그렇게 만들어 보시오」콘스탄틴은 손 폰타넬의 열린 문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며 도전적으로 자극했다. 로지는 성난 주먹으로 그의 등을 마구 두드렸다. 「좀더 노력해야겠소, 귀여운 봉제 인형 아가씨」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듣기 싫어요!」그녀가 고함쳤다. 그는 넓은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어울리는 표현이라서 말이오.내가 당신에게 걸맞는 남편이라면, 행복한 마음으로 당신의 실밥을 전부 뜯었을 거요!」 「그건 무슨 뜻이에요?」로지가 급히 숨을 들이쉬엇다. 「다양한 체벌 방법을 생각해 두었다, 그 말이오. 수많은 흥미로운 가능성을 숙고해 볼 시간이 아주 많았거든」콘스탄틴이 조각이 새겨진 나무문을 어깨로 밀어 열며, 지글거리는 듯한 위협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악몽 같은 사흘 동안, 나는 아테네에서 맨체스터로,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다시 아테네로‥‥ 그런 다음아테네에서 팔마로 날아왔소. 그렇게 고된 여정에 대해 값을 치르게 하겠소」 「누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이라도‥‥」 「왜 내가 그렇게 했는지 알고 싶은 거요?」콘스탄틴이 그녀를 침대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아니요‥‥」그녀가 마른 입술로 속삭였다. 「지금 이 순간에는」그녀가 마비된 토끼처럼 그를 뚫어지게 마주보고 있는 동안, 콘스탄틴이 그다지 침착하지 못한 어조로 내뱉었다.「그리스에서는 남편이 도망간 아내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 주고‥‥」 「난 당신의 아내가 아니에요‥‥」로지는 부정의 말을 생각해 내는 것조차 엄청난어려움을 느끼며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다시 천천히 일어나려 했다. 팔다리가 기묘할 정도로 말을 듣지 않았다. 콘스탄틴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하얀 리넨 베개 위에 눌렀다.「그대로 있으시오!」 로지는 그대로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치켜뜬 채로. 그가 넥타이를 풀고, 양복 상의를 벗고, 단추가 뜯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하얀 실크 샤츠를 벗어던지는 것을지켜보았다. 그녀의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었다. 불안한 전율이 빳빳하게 긴장한 전신을 타고 지나갔다. 그녀의 모든 주의는 콘스탄틴의 벌거벗은 가슴에 못박혀 있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는 이제 검은 팬티 한 장만 입고 있었다. 그가 팬티에 엄지를 살짝 걸치는 동작을 해보이자, 로지는 자신이 마치 남성 스트립쇼를 구경하는 여자처럼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을 벗으시오」콘스탄틴이 말했다. 로지는 목뼈가 삐끗할 만큼 고개를 홱 돌렸다. 얼굴이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충격과 수치심 때문에 머리가 불에 덴 듯 멍해졌다. 그랬다, 그의 몸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이 훔쳐본 데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가 뭐라고 말했지? 그가 다시 반복했다. 그녀는 커다란 녹색 눈을 휘둥그레 뜨며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좋소」콘스탄틴이 심하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러고는 놀랄 정도로 재빨리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뭘 하는 거예요?」티셔츠가 머리 위로 벗겨지자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사무적인 손길로 그녀의 레깅스 허리밴드를 잡아당겼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가슴을 본능적으로 가리며, 로지가 마구 저항했다. 레깅스가 팬티와 함께 끌려 내려가자,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서둘러 손을 아래로 내려 팬티을 올렸다. 콘스탄틴이 무자비한 손길로 레깅스를 마저 벗기자, 그녀는 팬티밖에 입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이 방을 나가자마자 경찰에 고발하겠어요!」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내가 당신의 남편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그들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을 거요」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로지가 격렬하게 쏘아붙였다.「내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입 닥치고 잠이나 자시오」 콘스탄틴이 강력한 근육질의 거구를 침대 위에 눕히며 으르렁거렷다. 그러고는 그녀를 강제로 바짝 끌어안고 만족스런 신음을 내뱉었다. 「지난 사흘 동안 한잠도 자지 못했소. 그러니 내가 자는 동안 당신도 자는 거요」콘스탄틴은 깊고 그윽한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로지는 수갑처럼 조여오는 그의 품 안에서 몸을 틀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햇다. 졸음이 가득한 검은 눈 아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기처럼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은 벌써 광대뼈 위로 내리깔리는 중이었다. 얼굴을 가까이 대하자, 그녀는 그가 얼마나 창백한지 알아차렸다. 그가 열거한 여행 경로를 떠올리며 문득 묘한 죄의식을 느꼇다. 「내가 다시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군요」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하지만 당신이 깨어났을 때도 여기 있겠다고 약속하겠어요」 전혀 믿지 않은다는 듯이, 콘스탄틴이 몸을 조금 움직여 한쪽 팔을 그녀의 머리 아래로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이미 당혹스러울 정도로 가까운데도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콘스탄틴!」그가 털이 무성한 단단한 가슴을 그녀의 가슴에 밀어붙이자, 로지가 고뇌의 비명을 질렀다. 「계속 못 자게 버둥거린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소」그가 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잠자기 전에 사랑을 나누어 버릴 거요. 섹스는 스트레스와 긴장에 대한 또 하나의근사한 해독제라고 할 수 있다오, 봉제 인형 아가씨」 그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바짝 긴장했다. 로지는 가슴에 전달되는 느리고 규칙적인 심장 박동을 느끼며 석상처럼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고르게 내는 그의 숨결에 그녀의머리카락이 조금씩 날렸다. 그의 양팔로 그녀를 꼭 껴안고 있었지만, 그것은 성적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포옹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일종의 곰인형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녀가 다시 자유를 찾아 달아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그녀를 침대로 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그는 커다랗고 만족스런 통나무처럼 쿨쿨 곯아떨어져 있다! 누군가에게 몸이 흔들려 깨어난 로지는 껴안고 있던 베개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몽롱한 눈이 콘스탄틴에게 닿았다. 그는 옷을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엇다. 그리고 모든 생기 배터리가 한껏 충전되어, 지글대는 에너지가 위협적인 파동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몇 시예요?」창문을 통해 여전히 햇빛이 흘러들어오는 것에 어리둥절해진 그녀가중얼거렸다. 아니, 무엇보다도 실제로 그의 품 안에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도 지난 며칠간 별로 잠을 자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방심하고 긴장을 푼 데 대한 변명은 될 수 없었다. 「오후 3시요. 그만 일어나시오. 점심이 준비되고 있소」 「누가요‥‥카르미나?」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여전히 졸리는 하품을 토해 냈다. 「이 집에 나이 든 관리인 한 사람밖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인 여럿을 이곳에 따라오도록 수배해 두었소」콘스탄틴이 건조하게 말했다.「하지만사용할 수 있는 방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들은 영지 변두리에 있는 코티지를 사용할 거요」 로지는 시트를 조심스레 목까지 잡아당기며 일어나 앉았다. 그는 염치도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려고 목청을 가다듬었다.「대체 내가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이 이용한 비행기의 승객 명부에서. 이건 일종의 감상적인 여행이오?」콘스탄틴은 그녀가 안톤의 생가를 도피처로 선택한 이유에 공공연한 의심을 표했다. 「내가 여기 있으리라고는 당신이 절대로 추측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로지가 눈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감상적인 여행‥‥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정곡을 찔렀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안톤의 딸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분노의 눈길로 그녀를 사정없이 살펴보았다. 「결혼 반지는 어디 있소?」콘스탄틴이 갑자기 버럭 소리치는 바람에 그녀가 깜짝 놀랐다. 「뺐어요」 「그렇다면 다시 끼도록 하시오」콘스탄틴이 험악하게 말했다. 「불가능해요‥‥」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쓰레기통에 버렸으니까요」 콘스탄틴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천천히 내쉬었다. 로지는 그게 무슨 행동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열까지 세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거친 광대뼈 위에 떠오른 불꽃처럼 짙은 홍조의 의미와 개인적인 모욕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격렬한 자제의 표정이었다. 「옷을 입고 아래층에서 얘기합시다」콘스탄틴이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며, 찌르는 듯한 시선을 흘끗 던졌다.「당신은 내 집을 떠나기 위해 선택한 방법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할 거요」 「내가 당신이라면 별 기대는 하지 않겠어요」로지가 턱을 치켜올렸다.「나는 사과에는 재능이 없어요」 「하지만 곧 배우게 될 거요」 왜 그는 배우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그녀보다 훨씬 완고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침대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가구가 거의 없는 침실에는 구식 욕실이 딸려 있었다. 욕조는 가족 전체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빅토리아풍의 샤워기가 달린 그 욕조는 모리스가 군침을 흘릴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찬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를 덜덜 떨며 재빨리 샤워를 끝내고 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옷을 찾았지만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점잖지 못하게 콘스탄틴이 치워 버린 게 분명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조그만 타월로 몸을 감싼 다음, 로지는 침실 문을 열고 몸청껏소리쳤다.「콘스탄틴!」 1분쯤 지났다. 그녀는 무디고 울퉁불퉁한 나뭇바닥을 발로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고함을 질렀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로지는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하지만 콘스탄틴이 아니었다. 드미트리를 대신 보낸 것이다. 격분한 로지는 웃을 입지 않은 상태를 숨기려고 문 뒤에 숨었다. 「볼로스 씨는 큰 소리로 호출당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계단참에 멈춰 선드미트리가 유창한 영어로 사과하듯 조그많게 말했다.「그런 일은 그의 기분을 아주 상하게 만들죠」 「언제는 기분이 좋았나요?」로지가 투덜거렸다. 「그는 아직도 에스트라다 씨의 죽음에 깊이 상심하고 있습니다」 그 조용하고 차분한 지적에 로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확실히 그녀는 콘스탄틴의화내기 쉬운 격한 성격에 슬픔과 비탄이 일조했다는 것을 참조하지 않았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부인?」그녀의 침묵에 드미트리가 정중하게 말했다. 「됐어요, 중요하지 않아요」로지는 다시 문을 닫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아버지가 죽은 후로, 그녀 역시 쉽게 화를 내게 되었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밤을뜬눈으로 지새웠던가? 그녀는 안톤을 겨우 몇 달 알았을 뿐이다. 20년을 같이 지낸 콘스탄틴에게는 상실감이 훨씬 더 컸으리라. 하녀가 문을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운반해 온 옷가방의 무게에 거의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녀는 무거운 짐을 의자 위에 올려놓은 다음, 다시 방을 나갔다. 두 번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콘스탄틴이 가죽 가방 두 개를 들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좋아요, 이 방에 묵으려는 모양이군요. 내가 나갈 수 있도록 옷을 갖다 주겠어요?」로지가 요구했다. 하지만 방금 하고 있던 생각 때문에 평소보다 덜 딱딱한 어조였다. 「이게 당신 옷이오」콘스탄틴이 대답했다.「여행하면서 샀소」 그녀의 적황색 머리가 가방 쪽으로 향했다.「왜 당신이 내 옷을 사요?」 「당신에겐 입을 만한 옷이 하나도 없소. 새로운 옷장을 선물받은 셈 치시오」 초록색 눈동자가 불을 뿜었다.「아주 관대하시군요, 콘스탄틴‥‥ 하지만 내 옷을돌려받는 게 훨씬 좋아요」 「안 되오. 내가 왜 그걸 버렸을 것 같소?」 「버‥‥버렸다고요? 당신이 내 옷을 버렸단 말이에요?」 콘스탄틴이 감각적인 입술을 딱딱하게 굳히며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당신이 다른 남자가 사준 옷을 입는 게 싫소」 「아까 입고 있던 옷은 팔마의 제일 싸구려 가게에서 산 거예요!」 그의 검은 눈에 짜증의 빛이 번득였다.「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소. 당신이 호텔에서 입엇던 옷 말인데‥‥그건 안톤이 사준 거지, 그렇지?」 로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깨끗이 치워 버린 거요. 당신이 그의 여자엿다는 시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말이오!」콘스탄틴은 자신의 괴팍한 행동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성질을 터뜨리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누구의 여자도 아니‥‥」 「당신은 이제 내 여자요」 「뭐라구요?」로지가 숨을 들이켰다. 「안톤이 당신을 내게 주었소」 「다시 말해 보세요」로지가 그의 파렴치한 말에 격분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엇다. 「당신을 내 책임하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 지금부터는 당신이 내 기대를 충족시키고, 내 요구를 존중하기를 기대하겠소」 「거절하겠어요」 「이제부터 당신은 나와 함께 지내는 거요」 「내 옷이나 돌려 줘요!」로지가 벌떡 일어나며 고함쳤다. 더 이상 타월로 몸을 가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당신을 증오해요. 더러운 손을 내 몸에 대지 말아요!」 「잠에서 깨어나니, 당신은 삿갓조개처럼 내게 꼭 달라붙어 있더군. 그래서 대신 달라붙을 수 있도록 베개를 안겨 주어야 했소, 아가씨」 「당신이 그렇게 크지 않다면, 그 오만한 목을 부러뜨려 버렸을 거예요」 「이런, 이런‥‥벌써 진전이 있군. 일주일 전이었다면 주먹을 들고 직접 달려들었을 텐데」콘스탄틴이 노골적인 만족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로지는 분노와 혼란 사이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콘스탄틴은 양손을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기다란 갈색 손가락이 머리 밑을 부드럽게 애무하자, 로지는 심한 폭풍에 휩싸인 여자처럼 자신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는 늑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녀를 놓아 주었다. 평가하는 듯한 검은 눈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그녀를 응시했다.「오늘밤에는 얼마든지 깨물어도 좋소, 귀여운 봉제 인형 아가씨. 나는 침대에서 새로운 경험을 기꺼이 환영하는 사람이니까」 문이 닫히자, 로지는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설마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 오늘밤 그녀와 정말로 사랑을 나누겠다는 뜻일 리가 없다. 그가 수작을 걸어오면 그녀는 그저 싫다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싫다고 말하다? 그녀는 콘스탄틴에게 싫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서둘러 떨쳐 냈다. 7 로지는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거대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웟 입술에 땀이 맺혔다.냉정한 만족감이 담긴 콘스탄틴의 시선이 그녀의 걸음을 따라왔다. 그 표정 속에 소유의 빛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색깔이 당신의 머리색과 근사하게 어울릴 것라는 걸 알았지」 로지가 자신의 외모에 심한 자의식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비싼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단순한 초록색 서머 드레스였다. 이 옷을 고른 것은 노출이 심한 대부분의 다른 옷보다 상대적으로 실을 많이 가려 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입자, 옷감은 제2의 피부처럼 온몸의 가느다란 모든 곡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왜 일꾼들을 여기로 불렀죠? 당신이 말하는 흉가에서 오래 묵을 계획은 아니잖아요?」로지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딱딱하게 말했다. 「건너편 쪽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요. 하지만 몇 주 정도는 이쪽에서 궁핍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소」 「몇 주?」 「안 될 이유라도? 신혼 부부가 산 속의 빌라에서 은둔하는 것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 뭐가 있겠소?」콘스탄틴은 일광욕을 즐기는 커다란 고양이같이 나른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자꾸 그 바보 같은 결혼 얘기를 들먹이는 거예요?」로지가 쏘아붙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불온스런 유쾌한 빛이 반짝였다.「이제 우리가 휴전에 합의할 시간인 것 같소」 「휴‥‥전?」로지가 불안하게 되물엇다. 콘스탄틴이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안톤이 유언장에 달아 둔 조건에 대해 격분할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소. 어쩌면 지나치게 반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톤은 내게 친아버지보다 소중한 존재였소. 그의 인생에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소」 「그렇지 않아요!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나는 그의 정부가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도 그 집에 가보았잖아요」로지의 어조에는 답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우리가 침실을 따로 썼다는 것쯤은 알았을 거예요!」 콘스탄틴은 넓은 어깨를 아무렇게나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강한 얼굴은 험악하게 굳었다.「당신들의 잠자리 배치 습관은 내 알 바 아니오」 「하지만‥‥」 콘스탄틴이 서릿발 같은 시선을 던졋다.「나는 여자의 침대에서 밤을 지샌 일이 한 번도 없소. 그렇다고 내가 수도승처럼 산 줄 아시오?」그가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은 칼처럼 그녀에게 아프게 박혔다. 콘스탄틴이 사랑스러운 루이즈의 품을 떠나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영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당신은 냉혈 동물이군요」그녀가 격렬하게 비난했다.「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는 거죠. 그것을 인정할 정도의 염치는 있나요?」 콘스탄틴의 광대뼈에 희미하게 붉은 기가 떠올랐다. 그의 입이 딱딱하게 굳었다.「섹스는 육체적 쾌락의 교환일 뿐‥‥」 「흥, 그럼 고마워해야 할 쪽이 여자라 이건가요? 로맨스도 싫다, 낭만도 싫다. 여성에 대한 당신의 태도에 안톤이 실망한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군요!」 콘스탄틴의 황동색 피부가 하얗게 변했다.「크리스토스‥‥」그는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에서 어떻게든 자제력을 유지하려고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내 여성관에 잘못된 점은 하나도 없소」 「사랑에 대해서는요?」 「나는 한 번도 사랑에 빠진 적이 없소」콘스탄틴이 점점 더 짜증스런 시선을 던졌다.「나는 사랑을 믿지 않소. 만일 열중이나 욕망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면‥‥」 「아뇨, 됐어요. 그만하면 당신이 하루치의 위신은 충분히 떨어뜨렸다고 생각해요」로지는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첫 번째 코스를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다구? 산치아 보르존과도 말인가? 눈알이 투어나올 만큼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거나 누군가가 알려 주지 않는 한, 콘스탄틴은 그 감정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공들여 장식된 음식 접시에서 하얀 리넨 테이블보 위에 놓인 반지에 닿았다. 그녀는 요란하게 포크를 내려놓고 에스트라다 반지를 집었다. 그녀가 불안하게 속삭였다.「왜 이걸 다시 돌려 주는 거예요?」 「고마워할 것 없소. 나는 심부름을 했을 뿐이오. 당신은 반지를 영국에 두고 왔소」 「마지막으로 이걸 보았을 때는 내 보석함 속에 있었어요」 「내 생각은 다르오. 모리스가 부엌 창틀 위에서 발견했소」 로지는 죄의식으로 얼굴을 붉히며, 화려한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거기 놓아 둔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당신이 가져갔다고 오해해서 미안해요」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는 신문 기사에 대해서도 책임을 인정했소」 로지가 고통이 담긴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아니에요!」 콘스탄틴은 차갑고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의 충격받은 얼굴을 응시했다.「당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하군」그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당신 덕분에 모리스는 대단한 금전적 가치가 있는 기삿거리를 알게 되었소. 그는 망설이지 않고 기회를‥‥」 「믿을 수 없어요‥‥믿지 않아요!」 「그가 스스로 인정했소!」콘스탄틴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차분하게 되받았다.「당신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한 것을 사과하겠소」 로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상관없어요」 「내게는 상관이 있소」콘스탄틴이 침착하게 중얼거렸다.「나는 당신을 오해했소. 하지만 왜 범인인 것처럼 굴었소?」 로지는 목구멍을 가득 채운 덩어리를 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나는‥‥나는」 「당신의 모든 행동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을 배신한 남자를 보호하기 위한감상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군」콘스탄틴이 경멸하듯 비난했다. 로지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말하고는, 가능한 한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나왔다. 모리스가 돈 때문에 그들의 우정을 팔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다. 모리스에게 돈이 중요하고, 매우 야심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번창하고 있었고, 돈이 아쉬운 상태도 아니었다! 사무 기기를 들고 부산스레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물 때문에 몽롱해진 시야에 들어왔다. 로지는 제복을 입은 하녀와 부딪칠 뻔하면서, 현관문을 빠져나와 햇빛 속으로 나갔다. 안뜰조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래서 이번엔 상처입은 동물이 혼자 있을 곳을찾듯이 정원으로 나갔다. 그제야 발작적인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그녀가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급히 숨을 들이켜며 놀라 얼어붙었다. 억제된감정의 긴 떨림이 전율하듯 흘러나왔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요」콘스탄틴이 거칠게 중얼거리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사람들이 실망시킬 때면 마음이 아픈 법이오」 「그는 내가 신뢰하는 유일한 남자였어요‥‥안톤을 제외하면」로지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헛되이 싸웠다. 콘스탄틴이 그녀의 얼굴을 감싼 두 손을 와락 떼어 내고는 사납게 노려보았다.「모리스를 안 지는 얼마나 되었소?」 「열세 살 때부터예요‥‥생각하면 기묘한 일이었죠」그녀가 과거를 회상하며 탁하게 중얼거렸다.「그를 알기 전에는 고아원의 다른 어떤 소년보다도 무서웠어요」 「무슨 고아원?」 로지가 탁한 웃음을 토해냈다.「엄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나를 고아원에 맡겼어요」 「왜?」콘스탄틴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격렬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아이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는 엄마와 결혼한 후에야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는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잖소. 왜 당신 엄마와 이혼하지 않은 거요?」콘스탄틴이 물었다. 로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엇다. 토니 워링은 엄마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귄 남자 친구였다. 엄마가 비서일을 찾아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그는 결혼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승낙하자, 그는 너무 기뻐서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구박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엄마는 그 이야기를 여러 번 그녀에게 해주었다. 엄마는 토니가자신의 두 아들과 로지를 똑같이 대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일이라고 결론짓곤 했다. 「그는 엄마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엄마가 자신에게 한 일을 극복할 수가 없었죠」로지가 투명스레 내뱉었다.「그들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용서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시자 나를 계속 데리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죠」 「당신은 몇 살이었소?」 「아홉 살 때 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어요. 그후에는 양부모의 집을 수없이 전전했어요. 나는 언제나 도망쳤어요. 그래서 다루기 어렵다는 딱지가 붙었죠. 마지막으로들어간 고아원에는 아주 거친 아이들이 몇 명 있었어요」 「모리스도 그 중 하나였소?」 「모리스는 아동 복지관들이 그의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까이 두기 위해 입소시켰을 뿐이에요. 그의 여동생은 입양되었지만, 십대 소년을 입양하려는 가족은거의 없어요.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로지가 발길을 돌려 떠나려 했다.이렇게 당혹스럽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아무 상관도 없는 콘스탄틴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당신은 돈밖에 모르는 오랑우탄을 정말로 사랑하는군」콘스탄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내뱉었다.「놈은 언제라도 당신을 팔아넘길 수 있는 비열한 개자식이오!」 로지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홱 돌렸다.「당신이 뭔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는 당신을 내게 밀어붙였소.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그가 신경이라도 썼소? 그 가사가 새어나가면, 내가 당신을 어떻게 취급할지에 대해서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단지 생각할 수가‥‥」그녀가 격렬하게 반박했다. 「한마디만 더 옹호하는 말을 하면, 영국으로 날아가 놈을 산 채로 찢어 버릴 거요!」콘스탄틴이 천둥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의 타는 듯한 격노에 그녀는 충격을 받고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그리고 왜 놈을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묻기 전에, 놈은 전체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오! 신문에 기사화된 조그만 일부가 아니라! 나는 가까운 장래에 당신과 안톤의 더러운 관계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걸 보고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소!」 콘스탄틴은 성난 몸짓으로 발길을 돌려 떠나려다가, 다시 몸을 홱 돌렸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안으로 들어가서 식사를 마저 끝내시오‥‥」 「싫어요」 「내 아내는 정원에 숨어 코를 훌쩍이며 하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 없소!」 콘스탄틴은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가차없이,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그녀의 축축한 뺨을 닦아주었다. 로지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좋아요」심한 혼란을 주는 그의 행동의 이유를 알아냈다고 믿으며, 그녀가 투명스레 내뱉엇다.「이 가짜 결혼이 그렇게 빨리 파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싫은‥‥」 그 대답으로, 콘스탄틴이 오만한 검은 머리를 숙여 그녀의 놀란 입술에 무자비하게 키스했다. 그녀의 맥 빠진 몸에 불꽃이 피어올라, 전신의 피부 세포를 폭발적으로 번져 나갔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자, 로지는 몽롱한 시선으로 그의 시선을 응시했다. 콘스탄틴은 무표정한 눈으로, 당혹스러울 정도로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오늘밤 포르멘토르에서 식사할 거요. 하인들에게 집 안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하니까」 반짝이는 진주빛 이브닝 가운을 우아하게 차려입은 로지는 자신이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호텔은 근사했고, 식사하는 사람들 중에서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사를 두어 명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들 중에서 콘스탄틴이 가장 돋보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엇다. 콘스탄틴에게 두 번 눈길을 던지지 않는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샴페인을 따르는 등 한눈 팔지 않고 관심을 보여서 그녀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식당 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의 머리가 돌아가게 만드는, 아슬아슬한 드레스 차림의 금발 미인이 도착했을 때도 그는 시선 한번 들지 않았다. 「오늘밤에는 아주 조용하군」 그에게서 반항적인 시선을 떼어 내는 데는 엄청난 의지력이 필요했다. 자신에게 화가 나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촛불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느다란 백금 반지를 응시했다. 저녁 무렵, 한 보석상이 값비싼 반지를 가직 손 폰타넬에 왔다. 그 중에서 하나가 선택되엇다. 콘스탄틴은 그녀가 첫 번째 반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사실에 호기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왜 갑자기 친절하게 나오는 걸까? 「로지‥‥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애칭을 사용하며 물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매우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로지는 샴페인 글라스를 응시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했다.「모리스 생각을 하고 있어요」그녀가 거짓말을 했다. 겨우 몇 시간 전에 그토록 상처를 주었던 사건을 벌써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크리스토스‥‥」콘스탄틴이 불 같은 짜증을 토해 냈다.「그 놈의 오랑우탄은 도무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군!」 그녀가 분노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모리스는 당신만큼 교육도 못 받고 지위도 높지 않을지는 몰라도,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곁에 있어 주었어요!」 「당신의 필요가 그의 탐욕과 배치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랬겠지」콘스탄틴이 경멸스럽다는 듯 비꼬았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당신을 최우선 순위에 두기를 기대할 수는 없어요. 심지어 안톤조차도 그랬지만요」로지가 고통스레 인정했다.「하지만 내가 모리스를 필요로 했을 때,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어요‥‥」그녀가 말꼬리를 흐리며 초조하게 샴페인을 들이켰다. 「계속해 보시오」콘스탄틴이 건조하게 재촉했다. 긴장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로지가 침을 꿀꺽 삼켰다.「열세 살 때, 두 소년이 몰래 방으로 들어와 나를 겁탈하려고 했어요. 모리스가 그들을 막아 주었죠.두 명이 한꺼번에 덤벼드는 바람에 모리스는 엄청나게 얻어맞아야 했고요」 콘스탄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천둥 같은 침묵을 담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그럼 이제는 그를 오랑우탄이 아니라 성 조지라고 불러야 하는 거요? 우선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다른 녀석들이 강제로 요구한 것을 그가 당신에게서 얻어 내는 데는 얼마나 걸렸소?」 로지는 뺨을 세게 얻어맞은 듯이 움찔했다.「왜 그런‥‥당신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인가요?」 그녀의 고통을 감지한 콘스탄틴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그녀의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로지, 나는‥‥」 단호한 거부의 몸짓으로, 로지는 손을 세차게 뿌리치며 날카롭게 말했다.「나는 그에게 여동생을 생각나게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는 동생을 돌봐야 했어요. 어머니가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고아원에 맡겨진 후, 로나는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어요. 모리스는 외롭게 남겨졌구요. 그들은 연락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지만, 예전 같지 않았어요. 그날밤 그가 왜 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알고 싶다면 머릿속에서 그 더러운 생각을 몰아내도록 하세요. 당신에게는 너무 어려운 부탁일까요?」 로지는 눈물을 글써이며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식당 밖으로 걸아나갔다. 그는 로비에서 그녀를 따라잡고 강력한 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았다.「로지‥‥」 「콘스탄틴!」황홀한 기쁨이 가득한 여자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콘스탄틴은 얼어붙은 채 순간 주춤했다. 로지의 머리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홱 돌아갔다. 손바닥만한 검정 드레스를 입은 금발 미인이 풍만한 가슴을 출렁이며 그들에게 서둘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열성적인 푸른 눈이 만족감으로 반짝였다.「언제 도착했어요?」여자는 콘스탄틴을 로지에게서 떼어 내어 그의 입술에 오래도록 친밀한 키스를 퍼부었다.「이러니까 몬테 카를로의 추억이 생각나지 않아요, 달링?」그녀는 신음을 토하며, 그의온몸을 쓰다듬었다. 콘스탄틴은 오만하게 몸을 떼어 냈다. 호기심이 가득한 로지의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의 광대뼈 위에 희미하게 홍조가 피어올랐다. 「저스틴‥‥이쪽은 내 아내 로지요」그가 극단적인 자제력을 발휘하며 천천히 말했다. 「오, 상관하지 마세요」로지가 달코하게 대답했다.「나는 당신을 독점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요」 「결혼했어요? 당신이?」저스틴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이 여자와?」그녀는 입을 쩍 벌린 채 로지를 응시하며 도무지 아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숨을 들이켰다.「왜요?」 「기분이 내키면, 그를 빌려 줄 수도 있어요」로지가 부글거리는 분노를 참으며 달콤하게 미소지었다. 그러고 몸을 돌려 밤 공기 속으로 걸어나갔다. 순간 머리가 빙글 돌았다.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을 깨달았다. 호텔 현관에서 몇 발짝 멀어지기도 전에, 콘스탄틴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크리스토스‥‥어떻게 우리 결혼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소?」그가 거칠게 고함쳤다. 「한 가지만 분명하게 하겠어요, 콘스탄틴」타원형의 얼굴이 격분으로 상기된 채 우뚝 멈춰 섰다.「우리는 결혼하지 않았어요! 알아들어요? 만일 내가 결혼을 한다면, 식은 교회에서 치를 것이고 최소한 신랑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일 거예요. 그는 하룻밤의 정사 이상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위선적이고 무감각하고 오만한 돼지가 아닐 거예요! 그러니 가서 차나 가져와요!」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시오!」콘스탄틴이 고함쳤다. 「그리고 당신의 여자 취향은 가련하기 짝이 없어요!」로지는 자신의 의견을 똑똑히 밝히고 싶은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고함쳤다.「무슨 이유로 저녁 내내 내게 간들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거예요? 몬테 카를로에서 훨씬 나은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텐데요, 콘스탄틴 달링! 당신은 바람둥이에요! 나는 기다란 막대기로도 당신을 건드리기 싫어요!」 「말 다 했소?」콘스탄틴이 고함쳤다. 「네, 말 다했어요, 달링!」로지가 악의적인 기쁨을 느끼며 비꼬았다. 밝은 플래시 빛 때문에 갑자기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눈을 깜빡였다. 애써 초점을 맞추자,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콘스탄틴은 두 팔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는 무자비하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우웃! 마치 머리가 공중으로 떠오르는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어, 그것이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한 채, 그를 원하고 증오하고 갈망하면서 숱 많은 머리카락 속에 성난 손가락을 밀어넣고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언제 차를 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드미트리는 언제나처럼 앞만 보고 있었지만, 뒷죄석와 운전석을 분리하는 두꺼운 유리를 통해 그의 커다란 어깨가 가느다랗게 들먹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내가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오. 하지만 식당에서 쫓아나왔을 때 당신에게 사과할 작정이었소」콘스탄틴이 딱딱하게 인정했다. 「우와」로지가 차갑게 대꾸했다. 하지만 내부 깊은 곳은 긴장과 충격으로 떨고 있었다. 그들의 사진을 찍었던 파파라치가 호텔 밖에서 다른 손님과 몸싸움이 벌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의 행동은‥‥」콘스탄틴은 적절한 영어 단어를 찾아내려 애쓰는 것 같았다. 「간담이 서늘한 것이었죠」로지가 무거운 어조로 끼여들었다.「하지만 이 일의 밝은 측면을 보려고 애쓰는 것이 좋겠어요」 「크리스토스‥‥꼭 안톤처름 말하는군. 지붕이 무너져도 아직 벽이 서 잇으니 고마워하자는 식이었지!」콘스탄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를 갈았다.「어떤 밝은 면말이오?」 로지가 떨리는 양손을 꼭 맞잡았다.「그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 파경에 관한 추측이 나올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파경?」 「우리의 가짜 결혼이 끝나는 것 말이에요. 내 말은 언론에서 우리의 불화를 알아차렸으니, 헤어지기 위해 두 달씩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을 거라는 뜻이에요. 당장이라도 이혼 수속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죠」로지가 딱딱하게 지적했다. 「괴로움이 있다면 즐거움도 있다는 식이군」 긴장된 침묵이 이어졌다. 「아까 모리스와 친밀한 관계가 될 때까지 얼마나 걸렸느냐고 물었던 것은 생각이 짧았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둔하고 무감각하지는 않소」콘스탄틴이 조그맣게 내뱉었다.「당신이 그 나이에 그런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당황했소. 하지만 한 번의 기사도적인 행동만으로 모리스를 당신의 구세주로 보지는 않소. 사실 이제는 당신의 영웅 숭배와 감사의 마음을 이용해 온 기생충이라고 생각하오」 오랑우탄에서 기생충이라. 콘스탄틴의 머릿속에서 모리스가 인간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나는 모리스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에요」로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퉁명스레 말했다. 「지금은 아니지. 더 이상은」콘스탄틴이 단호하게 못박았다. 그가 강한 턱선을 굳히며 냉소적인 시선을 던졋다.「그리고 우리가 헤어진 후에 그에게 다시 기어들어갈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마시오! 놈은 당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소」 「나는 스무 살이에요, 열 살이 아니라」 「하지만 아직도 아이처럼 거짓말을 밥먹듯 하잖소」차가 손 폰타넬의 안뜰에 멈춰서자, 콘스탄틴이 건조하게 중얼거렸다.「함께 살고 있던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는 말을 정말로 믿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당신이 임신하고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안톤이 왜 나에게 당신과 결혼하도록 강요했을 것 같소?」 「나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하지 말아요!」로지가 차에서 내려 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한 가지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소」콘스탄틴이 그녀를 따라 홀을 지나면서 천천히 말했다.「만일 당신이 안톤의 아이를 임신하거나 정말로 그와 혈연관계라면‥‥」경멸적인 웃음소리가 그 가능성에 대한 그의 의견을 밝혀 주었다.「아마 평생 동안 이 결혼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오」 로지는 귀를 의심하며 우뚝 멈춰 섰다.「그건‥‥그건 미친 소리예요」 「미쳤다구?」그가 진심으로 놀란 듯 미간 사이에 주름을 잡았다.「다른 상황이엇다면, 안톤이 내게 부과한 의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명예가 달린 문제였을 거요」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비난했다. 「당신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콘스탄틴이 쓴웃음을 지었다.「하지만 안톤은 나를키워 주었소. 그리고 나는 그를 엄청나게 존경하오. 그는 가족에 대해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소. 그런 종류의 충성심은 개인적인 감정을 우선하는 것이오」 로지의 마른 입술에서 떨리는 웃음이 조그맣게 새어나왔다. 갑자기 그녀는 안톤의딸이라는 주장을 반복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아버지의 유지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평생 동안 그녀를 오만하게 속박할 콘스탄틴의 모습을 똑똑하게 그릴 수 있었다. <명예의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안톤이 그렇게 하라고 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말로 낯선 여자와 결혼해서 평생을 살아갈 거라는 말인가요?」 「그렇소, 나는 낯선 여자와 결혼했소. 문제는, 당신이라는 여자는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더욱 아리송하다는 사실이지」콘스탄틴이 갑자기 격한 어조로 고백했다.「난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소. 이해하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가 없을 것 같소!」 로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그에게 시선을 던지지도 않았다. 이제는 후퇴할 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뜨거운 손으로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나를 보시오‥‥」콘스탄틴이 부드럽게 말했다. 로지가 움츠러들었다.「내 생각에는 이만‥‥」 「난 바람둥이가 아니오」 「그렇다고 해두죠」 「저스틴과 스쳐 지나가는 관계를 맺었을 당시 나는 겨우 스물한 살이었소」 「저런‥‥그녀에게 대단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군요!」 「내 재산은 언제나 그런 효과가 있으니까」콘스탄틴은 두려움에 질린 먹잇감의 주위를 배회하는 사자와 같은 유연한 동작으로 양손을 웅변적으로 펼쳐 보였다.「하지만 당신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는 듯 보이오. 그것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고, 당신에게서 기대하지 못한 가장 놀랄 만한 반응이오」 「그런가요?」로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 번에 두 계단씩 달리듯 올라갔다.「그게 왜 놀랍죠?」 「당신이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탐욕스러웠다면, 아마 나를 유혹하려고 애썼을 거요. 나와 침대를 함께 쓰는 것으로 더 많은 돈을 긁어 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말이오」콘스탄틴이 천천히 뇌쇄적인 미소를 지었다. 「콘스탄틴」로지는 계속 계단을 올라가면서 약간 불안한음성으로 말했다.「당신이도전을 더 좋아할 거라고 여기는 교활한 여자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나요?」 「내 생각을 알고 먼저 치고 들어오는 식이군」콘스탄틴이 금빛 눈을 만족스레 빛내며 불편할 정도로 유쾌하게 대답했다.「그렇다면 달리 무슨 이유로 내게 저항하는거요?」 「왜냐하면‥‥왜냐하면‥‥」드디어 계단참에 이른 로지가 미친 듯이 이유를 찾았다.「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짜증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싸우는 거예요!」 「당신이 나와 싸우는 것은」콘스탄틴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탁하게 으르렁거렸다.「나를 안달나게 만들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책략을 너무 자주 사용했소. 나는 눈치가 느릴지는 모르지만 일단 사태를 파악하고 나면 빛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소.이제부터는 당신이 고함을 지를 때마다 그 입을 내 입으로 막아 버릴 거요」 「소용없을 거예요. 나는 원래 말싸움을 좋아해요!」로지는 훨씬 더 긴장한 어조로소리쳤다. 그는 재빨리 그녀를 번쩍 안아올려 침실로 데려갔다.「크리스토스‥‥물론, 소용이 있고말고. 일단 우리가 사랑을 나누고 나면, 그래서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쾌락의 맛을 알게 되면, 당신은 오랑우탄 얘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게 될 거요. 나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신뢰도 면에서는 그를 훨씬 능가하오!」 로지는 그를 올려다보앗다. 가슴이 북처럼 두근거렷다.「우‥‥우린 이러면 안 돼요」그녀가 더듬거렸다. 「되고말고‥‥내가 보여 주겠소」콘스탄틴이 그녀의 입술 가장자리에 대고 앓는 듯한 신음을 토했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뺨에 쏟아졌다. 8 키스에서 깨어났을 때, 로지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햇다. 한쪽 팔꿈치를 딛고 몸을 일으키자, 드레스가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슴이 드러날까 봐 재빨리 목선을 움켜잡았다. 막연히 탐색하던 손이 드레스가 헐렁해진 이이유를 찾아냈다. 지퍼가 내려져 잇었다. 그녀는 몽롱한 시선으로 콘스탄틴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벌써 반나체가 되어 있었다. 그는 크고 감각적인 입술에 짓궂은 미소를 띠고,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왜 그렇게 수줍은 척하는 거요? 어둠 속에서만 사랑을 나누었소?」 분홍빛 홍조가 전신의 피부를 물들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를 꼭 잡고,침대 끝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콘스탄틴은 아주 조용히 앞으로 성큼 다가와, 그녀의 신발을 벗겼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긴장했다. 그가 핸드폰으로 손을 뻤자, 로지는 기대에 차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벨소리가 멎었다. 「뭘 하는 거예요?」그녀가 속삭였다. 「전원을 껐소」 「중요한 전화일지도 모르잖아요!」 로지의 말할 수 없이 불안한 시선을 받으며, 콘스탄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무슨 일인지 몰라도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 있소, 봉제 인형 아가씨」 콘스탄틴의 품 안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로지는 그 생각을 만족스레 음미하는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녀는 문득 얼어붙었다. 콘스탄틴과 밤을 지내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는 욕정을 채우는 즉시, 어딘가 다른 곳으로 잠을 자러 떠나 버릴 것이다. 욕정. 맙소사, 어떻게 그와 사랑을 나눌 생각을 하게 되었단 말인가? 「긴장하고 있군」바지를 벗은 콘스탄틴이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렷다. 「긴장한 게 아니에요」로지가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만큼의 의지력을 되찾았다.「안됐지만, 한 끼 저녁 식사와 새 옷 몇벌로 나를 살 수는 없어요. 그리고 5분 정도 인간 흉내를 냈다고 해서 내 눈을 속일수는‥‥」 콘스탄틴이 확신에 찬 두 손으로 그녀의 딱딱한 어깨를 짚었다.「두려워할 필요 없소. 나는 침대에서 거칠지 않소」그가 탁하게 말했다.「당신이 그러길 원한다면 다른 문제지만‥‥」 다시 침대에 눕혀진 로지가 더듬거렸다.「코‥‥콘스탄틴‥‥」 따뜻한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을 덮었다. 그녀는 그 가볍지만 소유욕에 가득 찬 손길에 몸을 떨었다.「이러지 말아요」그녀가 잔뜩 짓눌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그녀의 팔을 따라 드레스의 어깨끈을 내렸다. 동시에 맥박이 거칠게 뛰고 있는 그녀의 목 부위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로지에게서 희미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그녀의 등을 살짝 들어 드레스를 벗겨 내고는 다시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난 아주 부드럽소」콘스탄틴이 탁한 어조로 진심을 담아 약속햇다.「모리스의 면상을 묵사발로 만들지 않은 것이 한이오! 대체 그가 침대에서 어떻게 한 거요?」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려 하지 않는 그녀의 고통스런 눈을 응시하며, 그가 거칠게 내뱉었다. 「아무것도요!」 「절대 아프게 하지 않겠소‥‥」콘스탄틴이 그녀의 부드럽고 도툼한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번쩍이는 눈동자가 그녀를 강렬하게 내려다보았다.「놈은 전희란말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을 테지‥‥. 그 말을 증명하는 데 하룻밤이 몽땅 소비된다고 해도, 당신이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을 즐길 것이라고 맹세하겠소, 봉제 인형 아가씨」그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탐사했다. 그녀의 입술이 무심코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 콘스탄틴이 미소지었다. 로지의 심장이 왈칵 뒤집혓다. 그는 손가락을 뺐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를 아래로 숙여, 혀끝으로 그녀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장난하듯 간질엿다. 그녀는 그가 키스해 주기를 원했다. 그것은 즉각적인 갈망이었다. 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콘스탄틴이 이미 반쯤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도발적으로 속삭였다.「전희요」 하지만 갈망에 사로잡힌 로지는 그리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관능적인 입술을 스스로 찾아내려고 팔을 위로 뻗었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를 강하게 당겨, 그가 오래도록 강하게 키스하기 전까지는 만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가 앞서 나갔다. 그는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쓰다듬더니, 익숙한 손길로 부풀어오른 가슴을 감싸쥐었다. 고문받는 듯한 쾌감의 신음 속에서 그녀의 허파에서 숨결이 모두 빠져나갔다. 그는 고개를 숙여 가슴에 키스했다. 고통스러운 흥분의 불꽃이 통제 불능의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제발‥‥」그녀는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애원했다. 콘스탄틴이 매트리스 위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다시 입술에 키스했다. 그의 혀가 극단적인 소유욕을 드러내며 그녀의 입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동시에, 그는 잔뜩 긴장한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전신에 전기에 감전된 듯 전율했다. 「당신은 뜨거운 새틴 같소」그가 그녀의 부풀어오른 입술에 대고 신음했다. 로지는 말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녀의 전신이 교묘한 손의 고문하는 듯한 탐색에 집중되어 있었다. 심장이 천둥처럼 두근거렸다. 흥분이 지나치게 고조된 나머지, 그녀는 실제로 고의적인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가 떨릴 정도로 고통스런 기쁨의 절정에서, 콘스탄틴이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로지는 죽은 사람도 깨어날 정도의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그가 소리에 놀라 갑자기 얼어 붙었다. 통증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욱신거리는 채로, 로지는그를 올려다보았다. 콘스탄틴이 그리스어로 뭐라고 거칠게 외쳤다. 검은 눈동자를 죄의식과 분노와 당혹감으로 반짝이며 그가 떨리는 숨을 토해 냈다.「미안하오‥‥당신 때문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제력을 잃었소」 마력적인 검은 눈동자 속에 담긴 당황한 표정에 가슴이 뭉클해졌다.「나는‥‥」 「하지만 지상의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이오」그가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고백했다.「나를 믿으시오, 봉제 인형 아가씨」 로지는 햇볕 속의 서리처럼 녹았다. 찌르는 듯한 조그만 흥분의 파도와 함께 열기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자, 모든 맥박이 미친 듯이 고동치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좋소?」콘스탄틴이 탁하게 물었다. 좋냐구? 그것은 좋은 것 이상이었다. 그것은‥‥그것은 찬란했으며, 너무나 친밀한 나머지 그에게 완전히 소유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거칠게숨을 들어켜며 물에 빠진 사람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로지는 그의 어깨가 점차 긴장하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는 아무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이 비뚤어졌다. 「당신은 처녀 같은 느낌이었소」그가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하긴, 처녀가 어떤 느낌인지 내가 알 게 워요! 크리스토스, 내가 그것에 관해 뭘 알겠느냔 말이오!」 그는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샤워를 해야겠소」 「콘스탄틴‥‥」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오」콘스탄틴은 욕실 문지방에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거칠게 내뱉었다.「하지만 지금은 이런 진전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소」 충격이 지나가자 굴욕감이 밀려들었다. 로지는 샤워기의 물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콘스탄틴은 후회하고 있었다. 성적인 허기가 채워지자, 콘스탄틴은 범죄의 현장을 서둘러 벗어나지 못해 안달했다. 거대한 덩어리가 로지의 목에 걸렸다.눈자위가 찌르듯 뜨거웠다. 그녀는 그를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안 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쾌락에 탐닉한 나머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쳐다보기를 거부한 것이다. 콘스탄틴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방 안의 모든 가구를 두드리며 다녔다. 마침내로지는 호기심에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조명 속에서,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동작에서 지글거리는 긴장이 짜증스레 뿜어져 나왔다. 「외출할 거요」콘스탄틴이 갈색 어깨 너머로 내뱉었다. 「마음대로 하세요」로지가 다시 등을 돌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평생 지금보다 외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콘스탄틴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혐오감이 그녀의 가냘픈 몸을가득 채웠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뜬눈으로 누워 있다가 새벽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엇다. 9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창문 아래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콘스탄틴이 어디서 잤는지 궁금해하다가,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자신을 경멸했다. 아래층에서 그녀는 어느 닫힌 문을 지나가다 문 너머에서 콘스탄틴의 말소리와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로지의 입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식사가 도착했지만 식욕이 없엇다. 커피를 거의 다 마셔 갈 때쯤 카르미나가 한아름의 꽃다발을 안고 환한 얼굴로 나타났다. <용서하시오>카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로지의 뺨에 핏기가 몰렸다. 용서하라고? 백 년 동안 무릎꿇고 빌어도 어림없지!그녀가 이를 갈았다. <그녀에게 꽃다발을 갖다 주도록> 그는 드미트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 콘스탄틴에게는 대단히 수고이고말고! 로지는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모두가 너무 바빠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30대의 날씬한 브루넷의 미인이 선 채로메모를 받아적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나지막한 그리스어로 속사포처럼 구술을 하면서, 전화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컴퓨터 터미널 앞에 앉은 젊은 남자가 뭐라고 투덜거렸고, 또 한 사람은 팩스 앞에서 수미터 길이의 용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로지는 방을 가로질러 서류 분쇄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 다음 단추를 누르고 금속 이빨 속에 꽃을 밀어넣기 시작했다. 분쇄기는 꽃송이를 씹어삼킨 다음,줄기에 이빨이 박히자 삑 하는 경고음을 냈다. 천천히 고요가 내려앉자, 로지가 몸을 홱 돌렸다. 콘스탄틴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글거리는 초록색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런 명령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방을 나가 버렸다. 「이 더러운 개자식! 어떻게 내게 꽃을 보낼 수가 있어!」 「어젯밤의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소!」콘스탄틴이 검은 눈을 단호하게 빛내며 말했다.「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가 없소」 「나를 침대에 끌어들인 것은 당신이에요!」그녀가 사납게 비난했다. 「우리 사이의 압도적인 끌림을 생각할 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소! 하지만 어젯밤 양부의 정부에게서 손을 뗄 수 없었던 내가 그리 자랑스럽진 않소」콘스탄틴이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가 턱을 치켜올렸다. 초록색 눈동자가 도전적으로 불을 뿜었다.「도대체 몇 번이나 안톤과 내가 연인이 아니라고 말해야 되겠어요?」 콘스탄틴은 검은 눈을 이글거리며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세상에는 속고 또 속는 바보가 있는지 몰라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그녀는 카르미나를 끌고 와, 사진을 보여 주고 안톤이 뭐라고 했는지 반복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에게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이 될 것인가. 그리고 대체 무엇을 위해서? 콘스탄틴에게 그녀가 안톤의 딸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킨다고 하더라도, 그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녀는 명예를 되찾고 싶기는 했지만, 어제 저녁 콘스탄틴이 명예에 관해서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안다면, 콘스탄틴은 안톤에 대한 존경심에 걸맞는 행동으로 바꾸어 대해야 하는 의무감을 느낄 것이다. 그 생각에 그녀는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최소한 현재 생활에서는, 그들은 대등한 입장에서 마주하고 있기는 했다. 언젠가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때가 분명히 오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신은 안톤에게 임신했다고 말했소」콘스탄틴이 냉혹하게 접근하며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렷다.「그것은 저속한 속임수였소. 안톤이 나를 당신과 결혼하도록 요구한 것은 그 때문이오」 「나는 저속한 속임수 따위는 쓰지 않아요」로지가 불안하게 말했다.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예민하게 부풀어 올랐지만, 냉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크리스토스‥‥, 당신은 주문을 거는 마녀 같소!」콘스탄틴이 갑자기 눈을 번득이며 거칠게 소리쳣다.「나는 지금 어젯밤보다 훨씬 강하게 당신을 원하고 있소」 「설마!」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사납게 대꾸했다. 그녀의 멍한 녹색 눈동자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그의 딱딱하고 거무스름한 얼굴에 못박혔다. 콘스탄틴이 손을 뻗었다. 그의 강력한 손가락이 그녀의 빳빳하게 굳은 어깨를 단단히 붙들어, 품 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그녀의 모든 세포가 원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반항할 수 없엇다. 그는 그녀의 몸을 부러뜨릴 듯이 관능적으로 껴안은 채,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 안았다. 로지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다리가 고무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는 굶주린 듯 뜨겁고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공격했다. 욕망의 열기가 모든 사고를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그녀는 그의 넓은 어깨에 미친 듯이 매달리며 격렬하게 키스를 되돌렸다. 그는 그녀를 끌어앉은 채 회전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이 헐렁한 티셔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브래지어에 손이 닿자, 그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 대고 좌절의 신음을 토해 냈다. 그는 능숙하게 고리를 풀고는 드러난 젖가슴을 감싸쥐었다. 강렬한 전율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만일 서 있었다면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당신은 나를 한계에 몰아붙이고 있소」콘스탄틴이 사납게 고백했다.「일하는 신혼여행이란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소」갑자기 그는 두 팔로 그녀를 번쩍 안아올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만한 손을 재빨리 움직여 서류를 옆으로 밀쳐 내고는 그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하지만 낮 시간 동안 아내와 사랑을 나누가 싶다면, 그것 또한 내 문제요」 로지가 속눈썹을 파드득 치켜떴다.「난 당신의 아내가 아니‥‥」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녀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일어난 내부의 어떤 변화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 갑자기 그녀는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격렬한 소유욕을 느꼈다. 헐렁한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긴 다음, 콘스탄틴은 거대한 만족의 신음을 토해 내며 그녀의 반쯤 벌어진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엇다. 그녀는그의 입술 아래에서 기쁨의 신음을 토해 냈다. 갑자기 그가 그녀를 뒤로 밀었다. 양손이 그녀의 스커트 아래로 들어와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격렬한 쾌감 속에서 허파에 산소를 공급하려 안간힘을 썼다. 로지는 휘둥그레 치켜뜬 눈으로 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다. 「당신은 나를 고통스럽게 해‥‥」그가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대며 거칠게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를 고문하고 있었다.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입을 떼지 않은 채, 손을 아래로 내려 면 팬티의 허리밴드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녀가 순수한 기대감으로 폭발하려는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콘스탄틴이 얼어붙었다. 그는 부리나케 그녀의 티셔츠를 집어 그녀에게 던졌다. 그녀가 놀란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콘스탄틴이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과 동시에, 도자기 부딧치는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금속음이 바깥 복도에서 들렸다. 지금까지 밖으로 몰아냈던 다른 소음들이 한꺼번에 들려왔다. 전화벨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고, 팩스는 윙윙거렸다.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몸에 걸치고 있는 단 하나의 옷을 제외하면, 그녀는 나체였다. 밝은 대낮에, 그녀는 뻔뻔스러운 매춘부처럼 콘스탄틴의 책상 위에 누워 있었다. 오, 하느님 맙소사! 콘스탄틴이 문을 부드럽게 다시 닫았다.「하녀가 커피를 가져왔는데 드미트리가 그녀를 막았던 거요. 그가 너무 놀라게 한 나머지, 쟁반을 떨어뜨린 모양이오. 10대시절 이후로는 이런 짓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그가 갑자기 울적하면서도 즐거운 듯이 중얼거렸다. 로지는 그를 쳐다보는 것을 피했다.「나가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굴욕감으로 산 채로 불태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옷을 입는 동안 나가 있으란말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어처구니없는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소?」 「빌어먹을‥‥ 내가 뭐라고 하면 군말 없이 따라 줄 순 없나요?」그녀가 잔뜩 짓눌린 어조로 격하게 외쳤다.「언제나 그렇게 토를 달아야겠어요?」 잠시 후, 문이 꽝 하고 닫혔다. 로지는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서둘러 옷을 입었다. 이제는 신선한 바람을 쐴 차례였다. 콘스탄틴을 다시 마주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선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정원에 나가 새로운 지붕 타일이 쌓인 지역을 지나고 있을 때, 로지는 드라이브 웨이로 차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선명한 노란색 지프였다. 차는 그녀 근처에 이르자 요란하게 멈춰 섰다. 그리고 햇빛 속에서 금발의 갈기를 휘날리며 운전자가 내렸다. 로지가 얼어붙었다. 「모리스?」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모리스!」그러고는 눈 깜빡할 사이에 그에게로 달려가 반가움에 흐느끼며 매달렸다. 9 거대한 북극곰처럼 그녀를 감싸안은 모리스는, 야성적으로 물결치는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물어린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밝은 청색 두 눈 사이에 걱정스런 주름이 잡혔다. 「꼴이 엉망이군‥‥무슨 일이 있었어?」그가 물었다. 「드라이브나 가자구!」그에게서 벗어나, 로지는 지프의 조수석에 올라탔다.「뭘 기다리고 있는 거야?」 「콘스탄틴」모리스가 조스의 주제가를 흥얼거렸다. 「농담하지 마!」로지는 사방으로 경계의 시선을 던지며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콘스탄틴이 나타나 차에서 끌어낼까 봐 신경을 있는 대로 곤두섰다.「아무래도 그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드디어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로지의 악몽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모리스는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의 예의도 차려 주지 않았다. 「대체 여긴 어쩐 일이야?」그녀가 뒤늦게 물었다. 모리스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선명한 노란색 지프를 U턴 했다.「오랫동안 휴가가 없었잖아. 네가 마요르카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태양과 바다가 눈에 선하더라구.그리고 네가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도 알았어. 거기서부터는 지도를 연구하는 일만 남은 거지」 그가 고소공포증 환자 같은 속도로 경사가 급한 도로를 기어가는 동안, 로지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두통이 날 때까지 콘스탄틴에 대해서 생각했다. 제기랄! 그는 그녀의 평화와 안전을 훔쳐 갔다. 그 대가로 그는 그녀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자기 혐오와 활화산 같은 분노, 수면 부족만을 안겨 주었을 뿐이다. 콘스탄틴이 그녀에게서 원하는 것은 섹스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저항할 수 없었고‥‥ 그는 그녀를 편리하게 생각했다. 그 타블로이드 신문이 그들의 비밀 결혼을 보도하지만 않았다면 콘스탄틴은 다음날 아침 뒤로 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인생에서 떠나갔을 것이다. 「신문 기사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어?」모리스가 문득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면, 콘스탄틴이 내 잘못이라고 말해 주었니? 그건 사실이야. 내 잘못이었어. 내가 동생한테 입을 잘못 놀리지만 않았어도‥‥」 「로나?」로지가 자기만의 생각에서 깨어나, 모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나는 미치인가 하는 개자식을 퍼브에서 만나곤 햇어. 그는 지역 신문의 리포터였지. 로나는 오랫동안 그를 쫓아다닌 모양이야」모리스가 우울하게 설명했다.「그녀가 그 자식에게 이야기를 해버렸던 모양이야. 자기에게 대단한 연줄이 있다는 걸 알면 그가 감명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로나는 커피를 마시자고 그를 자기아파트에 초대했어. 그리고 그에게 보여 주려고 몰래 가져간 네 사진을 빌려 가도록허락했지」모리스가 한숨을 지었다.「로나가 그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어. 미치는 런던의 한 신문사가 내민 특종 기자직을 냉큼 낚아챘거든. 다행스러운 것은, 나는 로나에게 네가 콘스탄틴과 결혼할 거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는 거야. 로나는 네가 그를 런던 어디에서 만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모리스는 다시 한 번 무겁게 한숨을 지었다.「로나가 안톤이나 유언장에 대해서 알았다면, 그 지저분한 기자 녀석이 로나에게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캐냈을 거야!」 로지는 한숨을 지었다.「너는 로나를 보호하려고 거짓말을 했구나」 「콘스탄틴은 으스스한 녀석이야. 사실, 꼭 로켓포처럼 어디선지 모르게 나타난단 말이야」모리스는 백미러를 응시하며 신음하듯 말했다. 로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콘스탄틴에 대해 변명해 주려는 말을 입 밖에 내려다가 경악하며 서둘러 다시 삼켰다.「나는 그에게 열중하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곧 극복할 거야」그녀는 아무런 미래도 없는 관계에 체면을 지키려고 애쓰며 맹세하듯 말했다. 「그러기를 바랄게. 인간의 생명을 눈곱만큼도 존중하지 않는 미치광이만이 이렇게위험한 도로에서 내 범퍼를 들이받으려 할 테니까」모리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무슨 얘기‥‥?」로지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낮은 지붕의 진홍색 스포츠카 한 대가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혼비백산한 모리스가 지프의 브레이크를 미친 듯이 밟아 급정거시켰다. 콘스탄틴이 스포츠카에서 튀어나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10대 시절에 한동안 카레이스를 했대」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데스피나가 설득해서 겨우 그만두게 만들었어」그후 레이스 대신 여자에 취미를 붙였지,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인간은 수천 킬로미터 깊이의 벼랑 끝에서 앞도 보지 않고 걷는 미치과 ㅇ이야!」모리스가 이를 갈았다. 「더 빨리 달려서 통과할 수는 없었어?」 「너도 똑같이 미친 거야?」모리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이런 도로에서 페라리를 추월하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야」 콘스탄틴은 그들의 차에서 1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춰섰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어, 값비싼 맞춤 재킷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검은 눈이 로지에게 박히자, 그녀는 한기가 도는 차가운 위협에 뜨거운 분노보다 훨씬 더 위협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모리스는 두 사람에게 울적한 시선을 차례로 던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차에서 내려, 로지」그가 단호하게 중얼거렸다.「나는 평지에서만 영웅이라고‥‥게다가, 콘스탄틴은 네 남편이잖아!」 충격으로 로지의 입술이 우아하지 못하게 쩍 벌어졌다. 「물론, 네가 저자에게 맞을 거라고 말한다면 얘기는 달라지지‥‥」모리스는 그녀에게 미심쩍은, 그러나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을 던졌다. 로지는 거짓말을 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격분에 찬 콘스탄틴의 번쩍이는 시선을 응시하고는 부끄러움으로 움츠러들었다.「하지만 너무 하는‥‥」 「미안해, 하지만 편을 들지 않겠어」모리스는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는, 그녀가 맨안전띠의 해체 버튼을 눌렀다. 「현명하기도 하지」콘스탄틴이 후드를 돌아 다가오며, 만족스레 으르렁거렸다. 문을 벌컥 연 다음, 콘스탄틴은 두 손으로 로지를 조수석에서 번쩍 들어 냈다. 「걸을 수 잇어요!」로지가 분노와 굴욕으로 얼굴을 붉히며 고함쳤다.「당장 내려놓지 못해요!」 그녀가 뭐라고 고함지르든 간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콘스탄틴은 위협적인 침묵 속에서 도로를 성큼성큼 따라 내려가 그녀를 페라리 속에 밀어넣었다. 「대체 무슨 짓이에요!」그가 운전석에 앉자, 그녀가 사납게 비난했다. 「그럼 어떻게 할 줄 알았소. 당신이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고 박수라도쳐줄까?」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모리스는 양심상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나와 싸워 당신을 데려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소.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니라고 했던 당신 말은 사실인 것 같소. 하지만 섹스의 결여는 당신 쪽의 노력 부족 때문은 아닌거야, 그렇지?」콘스탄틴이 날카로운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당신들이 친구 사이로끝난 것은, 그가 우정 이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이 명백해졌소」 「그런 말도 안 되는‥‥」로지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당신이 안톤에게 몸을 던진 것은, 자신도 다른 남자에게 매력적일 수 잇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소? 아니면 모리스의 질투를 불러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리도록 만들기 위한 최후의 절망적인 수단이었나?」 「웃기는 소리 말아요‥‥. 나는 모리스를 사랑하지 않아요」 「어쨌거나 모리스는 당신의 안심 담요(아이가 안도감을 얻기 위해 항상 잡고 있는담요)같은 존재요. 그리고 이제는 당신도 모리스 없이 해나갈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소. 많은 것이 변했소, 그걸 부정하진 마시오, 봉제 인형 아가씨. 지금 당신이 원하는 사람은 나요‥‥」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예요. 그녀는 자신의 취약성 때문에 뼛속 깊이 불안을 느꼈다. 그녀는 바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손을 들어 그녀의 적황색 곱슬머리를 부드럽게 움켜잡았다.「그리고 난 당신을 원하오」그가 간결하게 선언했다.「그래, 뭐가 문제요?」 로지는 참고 있던 숨을 끊어지듯 내뱉엇다.「당신이 생각하지‥‥」 「당신 옆에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소」콘스탄틴이 그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탁하게 인정했다. 로지는 흥분의 떨림을 억제하려 애썼다. 수치심이 덮쳐오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쓸어 넘겼다.「인생에서 확실한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꼭 가격을 흥정하자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감정에는 가격이 붙지 않아요」 그는 오만한 머리를 뒤로 젖히며, 냉정하고 주위 깊은 검은 눈 위로 도전적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나는 이미 자유를 포기했소. 그리고 당신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이전에는 한 번도 제공하지 않은 값비싼 양보처럼 느껴지고 있소」 로지는 턱을 치켜올렸다.「당신이 뭔가를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에요. 당신은 유언장 때문에 나와 결혼했을 뿐이고,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언론에서 우리의 결혼을 알아냈기 때문이에요. 내가 어떤 기분인지 관심이나 있어요? 글쎄요, 어떤 기분인지 알려 드리죠‥‥. 막간의 성적 여흥에 동원된 매춘부 같은 느낌이에요!」그녀는 그의 오만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그리고 당신에게는 놀랍기 그지없겠지만, 나는 스스로 그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침묵이 내려앉은 차 안에는 그녀의 빠른 숨결만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얘기할 게 없겠군」콘스탄틴이 부드럽게 결론지었다. 로지가 당혹감에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콘스탄틴이 오만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당신은 막간의 성적 여흥을 원하지 않고‥‥나는 그것 외에는 관심이 없소」 로지의 홍조 띤 뺨에서 서서히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의 냉정한 선언은 마치 비수처럼 심장에 깊이 박혔다. 「물론」콘스탄틴이 부드럽게 덧붙였다.「당신은 언제든지 내 마음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 잇소, 봉제 인형 아가씨」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동시에 똑같은 강도로 그 사람을 증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충고 하나 하겠소」그가 중얼거렸다.「오랑우탄과 도망가려는 시도는 다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로지는 적황색 머리를 높이 쳐들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내게 관한 한, 당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그녀가 위엄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며, 떨리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선언했다.「그리고 당신과 관련된 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요!」흘끗 고개를 들자 카르미나가 신선한 레모네이드한 잔을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로지가 나무랐다.「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직접 가지러 갈 수 있어요」 「언제 안으로 들어올 거죠?」노부인이 투덜거렸다.「어두워질 무렵에야 겨우 집에들어오잖아요」 로지는 일어나서 몸을 쭉 폈다. 등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지저분한 반바지 위에 손바닥의 땀을 닦은 다음, 결연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받아들었다.「정원이 다시 옛날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해요?」 카르미나는 로지의 부지런한 노동의 결과로 이제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 돌 계단참위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결혼이‥‥잘 되어 가지 않는 것 같은데요」 로지는 내심 움찔하며, 레모네이드를 길게 한 모금 들이켰다. 갈증은 사라졌지만,잔뜩 긴장한 식도를 통해 액체를 넘기려니 목구멍이 쓰라졌다.「카르미나‥‥」 「이건 아버지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카르미나는 고집스레 말했다.「당신과 콘스탄틴은‥‥이 결혼은 그가 꿈꾸었던 미래가 아니에요」 지난 사흘 동안, 콘스탄틴과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녀는 그와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고, 그를 보는 것도, 그와 말하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힘든 육체 노동을 통해서만 격앙된 감정을 삭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너무나 피곤해서 죽은듯이 잠들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몸을 뒤척였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도 콘스탄틴에 관한 꿈을 꾸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는 당신이 돈 안토니오의 딸이란 걸 모르고 있어요」카르미나가 책망하듯 불평했다.「그건 남편에게 숨기기에는 너무 큰 비밀이에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카르미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손 폰타넬에는 평화가 없어요. 우리는 모두 살금살금 기어다녀요. 웃음도 없고, 미소도 없어요. 요리사로 말할 것 같으면‥‥그는 한 번만 더 음식이 손도 대지 않은 채 돌아오면 떠나 버리겠다고 위협하고 있어요!」 「콘스탄틴이 성질을 부리니까요」 「아내가 하루 종일 정원에 나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죠. 당신은 남편을 무시하고 있어요」 천만에, 그녀는 전혀 그러고 있지 못했다.「그는 무시당해도 싸요」 「당신은 남편만큼이나 완고하군요」카르미나는 불만스럽게 혀를 끌끌 차며 집으로들어가 버렸다. 로지는 그들의 결혼을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가 만약 지금의 그녀와 콘스탄틴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그 역시 그녀를 나무랄 것이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그녀에게 성적인 관심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만일 그녀가 안톤의 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그들의 관계에 섹스 이상이 잇는 것처럼 가장할지도모른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내내 자신을 결혼이라는 덫에 가둔 그녀를 미워하고 원망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에게 보여 줄 증거도 없는데 이런 생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왜 내가 고용한 정원사들을 보내 버린 거요?」 로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렷다. 커다란 그림자가 태양을 완전히 가렷다. 그녀는 손으로 바느질한 콘스탄틴의 이탈리아제 구두에 초점을 맞추고, 그 이상은 올려다보지 않았다. 「혼자서 일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정원이 수십에이커는 되잖소」 「나는 시간이 아주 많아요」가증스럽게도 그녀의 시선이 아름답게 재단된 회색 바짓단에서 호리호리한 근육질의 허벅지까지 올라갔다. 위장이 경련을 일으키며 요동쳤다. 콘스탄틴은 폭발하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점심 먹으로 나가자고 해도 싫다, 저녁 먹으러 나가자고 해도 싫다‥‥심지어는 드라이브를 하자고 해도 싫다‥‥」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요」 「당신은 토라진 아이처럼 심통을 부리고 있소!」 「심통 부리는 게 아니에요. 그저 서로간에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죠. 당신은 할 말을 전부 다했어요」 「크리스토스‥‥, 내가 이야기할 때는 최소한 일어서서 쳐다보기는 하시오」콘스탄틴이 예고도 없이 팔을 뻗어 그녀를 와락 일으켜 세웠다. 로지는 그의 손을 떨쳐 내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닿았다. 그것은 그녀가 두려워하던 것 이상으로 나빴다. 그 실수는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마치 대형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쳤고, 허파에서 산소가 모두 빠져나갔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자존심에도 지성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폭풍처럼 격렬하고 절망적이고 압도적인 갈망의 굶주림 속에서 모든 근육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했다. 「내가 전에 했던 말은‥‥」어둡게 번쩍이는 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도전적으로 맞받았다. 그의 감각적인 입술이 비뚤어졌다.「어쩌면 내가 우리 사이의 질문에 아직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소?」 그녀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너무나 간절히 믿고 싶어서, 자기 내부의 절망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 변명을 생각해 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갑자기 로지는 그의 말에 잠시라도 귀를 기울인 자신을 경멸했다.「샤워나 해야겠어요‥‥」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할 말이 그것뿐이오?」 성난 초록색 눈동자가 그의 눈을 노려보았다.「계산 착오예요, 콘스탄틴. 당신은여자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 너무 익숙해서, 나까지 같은 식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씁쓸한 웃음이 긴장된 목구멍에서 터져나왔다.「당신은 솔직하게 나오는 것으로 관계가 주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사실, 그렇게 나를 밀어내는 척하면 내가 더 열심히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쓸 거라고 기대하고‥‥」 콘스탄틴은 잉크처럼 검은 속눈썹 아래로 그녀를 찌르듯이 내려다보았다.「그건 사실이 아니‥‥」 「당신 말은 믿지 않아요. 당신은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비열한 인간이예요」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비난했다.「나는 당신이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아요! 내게 그 따위로 말하는 남자에겐 일초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말 다 했소?」콘스탄틴이 양손을 뻗어 단호하게 그녀를 붙들어 바짝 끌어당겼다.그녀의 긴장된 몸 속에 있는 모든 세포가 경련을 일으켰다.「우리가 관계를 끝내기 전에, 당신은 1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내게 주게 될 거요!」 그의 입술은 복수하듯 뜨겁고 거칠었다. 그녀의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관능적으로 밀고 들어와, 그녀에게서 기쁨의 흐느낌이 터져나오게 만들었다. 거친 흥분이 그녀를 감전시켰고 통제하듯 힘든 갈망의 급류가 무섭게 몰려왔다. 그녀는 경련하듯 몸을 떨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똑바로 서 있으려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풀려났다. 초록색 동공이 충격으로 한껏 팽창된 채, 후들거리는 다리로 혼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의 새하얀 셔츠에 묻은 시커먼 손자국에 멍하니 초점을 맞추었다. 조금전까지 바지 속에 얌전히 들어가 있던 셔츠 자락이 이제 밖으로 삐져나와 바람에 휘날렷다. 이제 저 손자국을 모두가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수치와 항복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배지처럼. 「셔츠를 갈아입아야겠어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만에, 자랑스레 입고 돌아다닐 거요」콘스탄틴이 불편할 정도로 유쾌하게 대답했다. 「갈아입으세요」로지가 애원하듯이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나는 샤워나 하겠어요」 「2층에서 봅시다」콘스탄틴이 뒤따라오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몸이 굳었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계단참 건너편의 침실에서 잠을 자긴 했지만, 옷의 절반은 그녀의 방에 있는 옷장 속에 있었다. 머리가 여전히 빙글빙글 돌았다. 한 번의 키스에 그녀가 보인 지나친 반응을 생각하면, 콘스탄틴은 그녀에게서 뭐든지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비웃는 것도 당연했다. 손을 뻗기만 하면 그녀는 언제나 그의 것이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있다. 택시 한 대가 안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지가 홀에 들어가자, 하녀가 서류가방을 든 은발의 남자를 응접실로 안내하는 중이었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충격받은시선을 로지에게 던졌다. 남자의 예리한 검은 눈동자에 어둠이 드리워졌고, 그는 고개를 정중하게 끄덕여 보이고는 재빨리 응접실로 사라졌다. 로지는 계단 아래에 서 있는 드미트리에게 호기심이 담긴 눈길을 던졌다.「누구예요?」 「테오도폴로스 스테파노스 씨입니다. 볼로스 씨의 변호사죠」 그녀가 정원사처럼 옷을 입고 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임시든 아니든 콘스탄틴의 아내에게서 기대할 만한 이미지는 아닐 테니까. 침실로 들어가 그녀는 옷을 벗었다. 괴로운 자기 혐오감이 그녀를 삼켰다. 그녀는콘스탄틴의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자신의 위치를 고통스레 곱씹으며 오랫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아내도 아니고, 여자 친구도 아니고, 심지어 정부도 아니었다. 내부의 목소리가 자기 연민은 그만두라고 조그맣게 나무랐다. 어쩌면 그들의 관계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진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기만의 방어적인 불안감 속에서, 그녀의 최대의 적은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분노와 혼란이 그녀를후려쳤다. 이제 그녀는 콘스탄틴을 변명하며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끝낸 그녀는 타월로 대충 몸을 감싼 채 침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뚝 멈춰 섰다. 콘스탄틴이 하얀 리넨 시트에 근육질의 몸을 누인 채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로지는 눈을 휘둥그레 치켜뜬 채 숨을 들이켰다. 유쾌한 미소로 그의 감각적인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콘스탄틴이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의도를 꼭 입으로 말해야겠소?」 「당신 의도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콘스탄틴」로지가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을 활짝 열어 나가라는 의사를 표시할 작정이었다. 「문은 잠겼소」 로지가 몸을 홱 돌렸다. 콘스탄틴이 커다랗고 장식이 많은 열쇠를 손가락에 걸고 흔들었다.「다시 하인들을 놀라게 할 수는 없지 않소?」 「이리 내놓지 못해요!」로지가 격렬하게 고함쳤다. 「와서 가져가시오」 로지가 망설였다. 콘스탄틴이 음흉하게 싱긋 웃자,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내 주위에서는 조심해야한다는 걸 말하지 않았던가?」 그 말에 그녀의 분노가 도를 넘었다. 로지는 열쇠를 잡아채려고 침대로 다가갔다.콘스탄틴은 열쇠를 방 건너편에 던져 버리고는, 두 팔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감았다. 「미끼에 걸릴 줄 알았지」 로지가 불꽃 같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놓아 줘요!」 「자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겠지」콘스탄틴이 무자비한 만족감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당신이 핫팬츠 차림으로 정원에서 몸을 쭉 펴는 것을 보았을 때, 나 역시 똑같이 도전받았소, 귀여운 봉제 인형 아가씨. 그리고 더위를 식히려고 티셔츠를 펄럭일 때면, 그 아름다운 가슴이 아래위로 출렁거리고 옷 위로 가슴이 그대로‥‥」 「그만 해요!」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그가 그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로지는 굴욕감을 느꼈다. 콘스탄틴은 번쩍이는 어두운 눈으로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분홍빛 볼을 응시했다.「당신은 아직도 처녀처럼 얼굴을 붉히는군. 그것이 나를 더욱 타오르게 만드오」그가 탁하게 고백하며, 재빨리 시트를 발로 차내고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타월을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로지가 손을 뻗었지만, 콘스탄틴은 번개처럼 빠르게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강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로지가 반항하듯 소리쳤다.「안 돼요」 「맙소사‥‥당신에게서 비누 냄새가 나오. 깨끗하고 신선하고 달콤하군. 하지만 먼지 투성이로 땀에 절어 있을 때도 당신은 나를 흥분시켰소. 당신의 향기, 당신의 감촉, 당신의 맛‥‥모두가」그가 관능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몸에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당신의 변호사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그녀는 갑자기 그 사실을 기억해 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테오는 벌써 갔소」콘스탄틴의 미간 사이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별볼일없는 서류를 여기까지 직접 가져와 놓고서는 점심도 먹지 않고 떠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다니, 미친 영감이야」그의 눈이 그녀의 새빨간 얼굴 위를 탐욕스레 헤맸다.「하지만 빈틈없는 수완꾼이지」 로지는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무시하려 애쓰며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주위에 다른 사람은 필요없소. 그들은 방해만 되고, 나는 일을 하기에는 정신이 너무 산만하오. 아무 말이라도 해보시오」콘스탄틴이 용기를 북돋듯 재촉했다. 마른 입술을 벌린 로지는, 자신의 흥분을 너무나 강렬하게 드러내는 오직 한마디만 토해 냈다.「제발‥‥」 원시적인 승리의 빛이 그의 눈 속에서 번득였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녀가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상체를 위로 올렸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게걸스럽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절망적인 다급함으로 키스를 되돌렸다. 며칠 동안 갇혀 있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그녀의 손이 그의 따뜻하고 매끄러운 청동빛 피부 위를 마구 헤맸다. 그녀의 목구멍 속에서 굶주린 신음 소리가 초조하게 터져나왔다. 로지가 그를 갈구하는 불꽃 속에서 마구 몸을 비틀었다. 이미 한 조각의 자제력도남아 있지 않았다. 콘스탄틴이 그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소」 「상상 속의 당신은 토를 달지 않아요‥‥당신은 멈추지도 않고‥‥나를 기다리게 하지도 않아요!」로지가 죄절감을 폭발시켰다. 천둥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았다. 오, 맙소사,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내가 어떻게 하는데?」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원하는 대로」로지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콘스탄틴이 거칠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절정의 순간에 이르자, 로지는 격심한 흥분 속에서 전율했다. 그녀는 소리조차 낼수 없었다. 「눈을 뜨시오」콘스탄틴이 명령했다. 로지는 긴 속눈썹을 들어, 이글거리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햇다. 마침내 고통스런 열기가 그녀의 내부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부서져 내렸다. 「하인들에게 나머지 하루를 쉬게 한 것은 정말이지 좋은 생각이에요」로지가 반들거리는 식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중얼거렸다. 콘스탄틴은 그녀가 만든 대문짝만한 샌드위치를 남김없이 다 먹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하지만 요리사가 없다고 당신이 이렇게 무력해질 줄은 몰랐어요」 콘스탄틴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신이 요리를 할 줄 아는 줄 알았소」 「물론 할 줄 알아요. 하지만 나는 샐러드, 과일, 인스턴트 음식으로 연명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당신의 요리사는 인스턴트 음식은 사용하지 않더라구요. 선사 시대의 유물같은 버너로 그렇게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 내다니, 그 사람에게 표창장이라도 줘야겠어요. 어쨌거나 최소한 나는 커피 정도는 끓일 수 있어요」그녀는 춤추듯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그가 큰맘 먹고 도전해서 뽑아낸, 인간이 마실 수 없는 걸쭉한 검은 액체에 홀끗 시선을 던졌다.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기 좋소」콘스탄틴이 그녀에게 말했다. 로지는 식탁에서 내려섰다. 그러고는 팔을 뒤로 돌려 적황색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50년대 영화 속의 여주인공 같은 포즈를 취했다. 그의입술 에서 느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나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 거로군, 그렇지?」‥ 「겨우 이제 알았어요?」 「나는 형광등이오」감상하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번의 우아한 몸놀림으로 식탁에 다시 걸터앉았다.「하지만 창문 쪽으로는 가지말았으면 좋겠소」 「창문?」 「당신은 가끔 도둑 고양이 같은 데가 있으니까」 「오랜 수련의 결과죠」그녀가 불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화제의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달아나는 것 말이오? 나한테는 시간 낭비요」콘스탄틴이 단호하게 못박았다.「다신이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나는 더욱 열심히 추적할 거요. 일종의 본능적인 반응이오. 나도 어쩔 수가 없소」 「위협인가요?」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더 이상의 위협은 없소」그가 부드럽게 말했다.「약속하겠소.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고 싶소」 차분한 검은 눈동자에 담긴 부드러움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는 너무나 솔직하고 숨김이 없었다. 문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비밀을 가진 것은 그녀 쪽이었다. 곧 그에게 그녀가 안톤의 딸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야 하리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다. 그가 그녀에게 진실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천둥처럼 문이 닫히는 소리에 로지가 움찔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불빛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베개에 등을 기댄 채 청바지말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침대 발치에 맨발로 서 잇는 콘스탄틴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술에 어렸다. 그가 너무나 근사해 보여서. 그녀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즐기던 숙면을 경솔하게 깨운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 눈이 그녀의 시선과 부딪쳤다. 로지는 깜짝 놀라 몸이 굳었다. 미소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콘스탄틴에게서 이글거리는 긴장과 분노가 파동처럼 발산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그녀가 속삭였다. 「배가 고팠소. 그래서 먹을 것을 찾으려고 일어낫소. 아래층에 내려가는 길에, 얼마나 중요한 서류이기에 테오가 자기손으로 직접 가져왔을까‥‥, 그렇게 중요한 서류라면 왜 자기 입으로 직접 설명하지 않고, 내게 떠안기자마자 그렇게 빨리 떠나려고 했을까 궁금증이 일었소」 로지의 시선은 그가 한쪽 손에 들고 있는 두툼한 갈색 봉투로 천천히 떨어졌다. 심장이 죄어 왔다. 「하지만 이제 이해하겠소. 테오는 당혹스러웠던 거요」콘스탄틴은 여전히 지독하게 차분한 어조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안톤의 이름으로 남겨진 어떤 은행 대여 금고의 내용물을 찾아오라고 테오에게 부탁할 때만 해도, 우리 중 누구도 그 속에 뭔가 비밀스런 물건이 들어 있으리라는 예상하지 못했소‥‥」 그는 침대 위로 뭔가를 던졌다. 로지는 그것을 잡았다. 손이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던 시절의 조그만 컬러 스냅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검은 시선이 그녀에게 내리꽂혔다. 그의 호리호리하고거무스름한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당신은 복수를 원했던 거야, 그렇지? 당신의 아버지 얘기를 내 얼굴에 집어던질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라고!」 10 복수? 말도 안 되는 비난에 충격을 받은 로지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녀는 재빨리 침대에서 빠져나와, 콘스탄틴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애원하는 몸짓으로 다가갔다. 「그만두시오! 지금 이 순간 제일 관심 없는 것이 당신의 조그만 몸에 유혹당하는 일이오!」콘스탄틴이 통렬하게 경멸조로 소리쳤다. 로지는 갑자기 자신이 발가벗엇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침대 옆에 떨어진 타월을 집어, 서둘러 몸에 감았다.「이 사진은 어디서 났죠?」 콘스탄틴은 대답 대신 봉투에 든 사진을 전부 꺼내, 결투의 장갑처럼 매트리스 위레 던졌다.「아홉 살 생일 때. 그리고 이 사진으로 보건대 당신은 행복한 아이는 아니었군. 사진의 반 이상이 눈에 눈물이 맺혀 있소. 다리에 생긴 푸른 자국은 멍처럼보이는군」그의 깊은 저음이 약간 떨려 나왔고, 응변적인 입술은 딱딱하게 굳었다.「안톤은 이런 당신을 보고 가슴이 찢어졌을 거요. 당신 어머니는 모진 여자였던 게틀림없소!」 「어쩌면요」고통스런 숨결이 목구멍에 걸렸다.「당신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하려고했지만‥‥」 「그리고 당신 어머니는 딸에게도 똑같이 모진 성격을 물려 주었던 거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신은 자신이 안톤의 딸이라는 사실을 데스피나 앞에서 폭로할 계획이었소!」 로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천만에요! 절대로 그럴 생각 없어요!」 「글쎄, 당신은 내게 자신의 신분을 확신시키려고 별로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소. 그 아이디어를 완전히 다시 생각해 본 후에 말이오!」콘스탄틴이 통렬하게 비난했다.「입 다물고 있는 게 재미있었겠군, 그렇지?」 말도 안 되는 비난에 로지가 입을 쩍 벌렸다.「도무지 이해할 수가‥‥」 콘스탄틴은 성큼 다가와 두 손으로 그녀의 양팔을 거세게 붙들엇다.「크리스토스‥‥, 당신은 최대의 충격을 가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런던에서는 데스피나와 갑자기 마주쳤기 때문에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 하지만 당신은 내게 말했소. 마치 고약한 농담처럼 불쑥 말하고는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소. 좋소,난 귀를 기울이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도 진지하게 납득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생각할 것 같소?」 「당신을 믿게 할 방법이 없었어요. 증거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로지가 격렬하게 고함쳤다. 「안톤에게는 증거가 있었소. 당신도 그걸 알고 있었을 거요. 당신은 이 파일이 데스피나의 손에 떨어질 위험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소!」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내며, 콘스탄틴이 그녀에게서 다시 손을 놓았다. 「그래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맙소사! 아버지가 돌아가실 거라고 내가 미리 예상했을 거라고 생각해요?」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그리고 안톤은 파일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어요‥‥. 파일 안에 뭐가 있는데요?」 「당신의 출생부터 시작되는 모든 기록이오. 그는 당신을 찾기 전에 이미 당신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소!」 로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인생에는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은 고통스러운 사건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절대 말하지 않앗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의 인생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안톤은 당신 어머니와 어떻게 알게 된 거요?」콘스탄틴이 물었다. 로지는 더 이상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멍하니 주저앉았다.「안톤의 비서가 병이 났어요. 엄마는 소개소에서 추천한 임시 비서였어요. 그들의 관계는 몇 주밖에 지속되지‥‥」 「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톤과 데스피나가 법적 후견인이 되었기 때문이지. 당신은 그 일이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졋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을거요」 이상한 일이었지만, 로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엇다. 약 21년 전에, 그녀는안톤의 결혼이 암초에 걸렸을 때 실수로 임신되엇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임신된지 몇 주도 지나지 않아 비극적인 교통사고가 일어났고, 아버지오 그의 아내에게 오랫동안 갈망해 온 아들이 생긴 것이다. 아홉 살짜리 소년은 그들의 공동책임이 되었고, 그들 사이의 불화를 효과적으로 치유해 주엇다. 그리고 그 소년이 바로 콘스탄틴이었다. 「타이밍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어요‥‥정확히는요」그녀가 딱딱하게 대답했다.「하지만 안톤은 어머니와 헤어질 때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그가 그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녀를 도와 주기에 너무 늦었죠」 「아니, 그는 사진과 함께, 당신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결코 알지못할 딸의 아버지가 되엇다는 차가운 편지를 받았소. 사진이 더 이상 오지 않자, 안톤은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을 찾기 시작한 거요」 「안톤은 의붓아버지의 이름조차 몰랐어요‥‥. 단서가 거의 없엇기 때문에 그는 두 번인가 포기했어요」 「크리스토스‥‥,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인생 때문에 당시은 데스피나만큼이나 나를 미워한 게 틀림없소!」콘스탄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마치 더 이상 그녀를 보는 것조차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몸을 홱 돌렸다.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요」 하지만 로지는 안톤의 추도식장에서 안톤의 합법적이 가족에게 질투했던 것을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때는 콘스탄틴과 데스피나를 만나기 전이었고, 현실에직면하기 전이었다. 「안톤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어요」그녀가 딱딱하게 지적했다.「그는 언제나 데스피나만을 사랑했어요. 나에 대해 알았다 하더라도, 엄마를 위해 그녀와 이혼하진 않았을 거예요. 엄마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을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도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소」콘스탄틴이 씁쓸하게 비난했다.「당신은 내가 안톤과 당신이 잠을 잤다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소. 그 믿음으로 내가미칠 듯이 괴로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계속 믿게 내버려 두었소!」 「우리가 연인이 아니었다고 계속 이야기‥‥」 「하지만 자신의 변명이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잖소! 안톤의 유언장에 대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당신이 임신했다는 것뿐이었소. 그리고 당신은 내가 다루는 대로 묵묵히 받아들였소!」콘스탄틴의 독수리 같은 옆 얼굴이 긴장으로 팽팽하게 굳었다. 그가 그녀에게 거칠게 시선을 던졌다.「하지만 이제 나는 안톤을 잔인하고 냉소적으로 오판했다는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하오! 안톤이 나를 신뢰하고 맡긴 책임을 회피하려고 모든 수단을 다 부린 것에 대해서도!나는 모든 면에서 그의 신뢰를 배반했소」 「당신은 아무것도 배반하지 않았어요. 애초에 나와 결혼하라고 요구한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요! 좋은 의도였다는 건 알고 있지만, 미친 짓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에스트라다 부부가 받아 주었을 때, 나는 대단한 문제아였소. 그들은 나를 나무라고 바로잡아 주었소. 그들의 사랑과 인도가 없었다면, 나는 레일에서 탈선하고 말았을 거요. 아무리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는 은혜요」창백해진 콘스탄틴이 그녀에게서 다시 몸을 돌려,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가 커튼을 열었다.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안해요‥‥, 좀더 빨리 다시 얘기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처음 말햇던 날 당신은 잔인하게 내 말을 웃어 넘겼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빚이니 뭐니 하는 얘기를 들먹이는 바람에‥‥」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그저‥‥」 갑자기 콘스탄틴이 몸을 돌리고 방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놀랄 정도로 강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글거리는 검은 눈이 격렬한 분노를 발산하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처녀였소. 하지만 안톤의 여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기쁨을 내게 주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말았겠지! 당신은 가능한 한 모든 면에서 나를 괴롭히고 고문했소! 당신은 복수심에 불타는 냉혹한 마녀요!」그가 이를 갈듯 탁하게 뱉어 냈다.「그런 당신을 다르게 생각하려 햇던 내가 바보 멍청이지」 그가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는 동안, 로지는 그대로 서 있었다. 떨리는 뺨에 고통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잠을 잤다. 그녀는 그와 너무나 가까워진 느낌이었고‥‥ 너무나 소중하게 대우받는다고 느꼈다. 소중하게? 흐느낌과 함께 딸꾹질이 새어나왔다. 왜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 어쩌면 그리도 순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콘스탄틴은 침대에서 열정적이고, 너무나 경험이 풍부해서 어떤 여자라도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거나, 그들의 결혼을 진짜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녀를 경멸했다. 아니 증오했다. 그녀는 자신이 상대하는 남자의 본성을 그동안 경솔하게 무시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과 불안 때문에, 그녀는 이기적이고 둔감하게 굴었다. 콘스탄틴은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성격이었다. 그녀의 계속된 침묵은 일종의 기만이었고, 최악의 추측을 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몇 시간 동안 방 안을 오가던 로지는 마침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오랜 고독과 상처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너무 심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잠재울 수 없었다. 침대 옆의 보조등을 켜자, 거의 새벽 3시가 된것을 알 수 있었다. 콘스탄틴은 자고 있을까? 아니면 그녀처럼 잠들지 못하고 누워 있을까? 로지는 면직 나이트 셔츠를 걸쳐 입은 다음, 발끝으로 계단참을 가로질러 천천히 그의 방문을 열었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아무도 없는 침대 위를 비추었다. 그녀는 아래층 응접실에서 희미한 불빛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로지는 살며서 응접실 문을 열었다. 램프는 하나만 켜져 있었다. 거대한 방의 대부분은 그림자 속에 가려진 채였다. 콘스탄틴이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그리스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짙은 속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 초점을 맞추려는 듯 애쓰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콘스탄틴?」 그가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의 짙은 눈썹 사이에 천천히 주름이 잡혔다. 그리고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리스어로 대답했다. 그의 검은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딱딱한 턱을 따라 검푸른 수염이 거뭇거뭇 자라 있었다. 하지만 로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것은 그의 눈 속에 떠오른 황량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소파 옆에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았다.「너무나 미안‥‥」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자, 로지가 놀라서 숨을 들어켰다. 문 뒤쪽에 놓인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다가오는 사람은 드미트리였다.「제가 돌보겠습니다, 볼로스 부인」 「아픈가요? 내 말은‥‥」그녀는 강한 알코올 냄새를 포착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의 시선은 러그 위를 구르고 있는 위스키 병과 잔에 닿았다. 그녀는 경악으로 얼어붙었다.「그는‥‥그는‥‥?」 「약간 과음했을 뿐입니다. 침실로 가시죠」드미트리가 담담하게 재촉했다.「제가 여기 있겠습니다」 「습관적으로 이러나요?」로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모습은 저도 처음입니다」콘스탄틴이 성격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로지는 나이 든 상대방 남자의 눈 속에 떠오른 차가운 표정을 놓치지 않앗다. 이 충성스러운 남자는 그녀가 마치 고용주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라도 하듯 소파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그녀가 질문했다. 콘스탅틴은 몸을 뒤척이며 뭐라고 또 중얼거렸다. 「토끼 얘기요」드미트리가 극히, 내키지 않는 듯 정보를 제공했다. 「토끼?」로지가 조그맣게 되물었다. 「편하게 주무시도록 자리를 봐드려야겠습니다」드미트리가 앞으로 다가왔다. 로지는 콘스탄틴의 손을 놓고 비틀거리며 일어설 수 밖에 없엇다. 「나도 도울게요」 「고맙지만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로지는 경호원의 노골적인 적의에 당혹해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머뭇거렸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는 잠자는 콘스탄틴의 위엄을 손상시킬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문가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요」그녀가 무기력하게 변명했다. 「저는 생각할 위치가 아닙니다, 볼로스 부인」 하지만 비난은 온 얼굴에 명백하게쓰여 있었다. 그가 평소에 보여 주었던 우정어린 태도는 콘스탄틴에 대한 강한 충성심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계단을 올라갔다. 로지가 상큼한 향이 풍기는 소나무 숲에서 걸음을 멈춘 것은 아주 이른 시간이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간식을 먹었다. 캔 음료와 기다란 햄 샌드위치, 토마토는 그녀의 식욕을 채워 주었지만 내부의 공허한 마음은 채워 주지 못했다. 그녀는 콘스탄틴이 없는 삶도 있을 수 있다고 자신을 확신시키려고 절망적으로 노력했다. 결국 그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그는 오만하고, 권위적이고, 일밖에 모르는 실업계의 거물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그녀와 달랐다. 부자에, 높은 교육을 받았고, 가문도 훌륭했다. 또한 그는 수만흔 여자들이 쫓아다녔고, 로지는 그 여자들과 경쟁할 만한 타입이 아니었다. 콘스탄틴이 그녀에게 일말의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녀가 그것을 죽여 버렸다. 따라서 그의 성격에서 더 긍정적인 면을 고려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유쾌하고, 책임감 강하고,사려 깊고, 솔직하다는 등의 얘기는 이 상황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그들은 진짜 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임시 계약은 파기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번쩍이는 검은색 리무진 한 대가 손 폰타넬 밖에 주차되어 있었다. 로지는 안뜰로들어가 차를 지나쳤다. 그리고 뻣뻣한 몸으로 천천히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그녀가 헬멧을 벗고 있는데, 콘스탄틴이 계단으로 성큼성큼 내려왔다. 심장이 로지를 배신하며 염치없이 두근거렸다. 이탈리아식 크림색 더블 양복이 그의 검은 머리와 청동빛 피부를 더욱 강조햇다. 그의 모습을 한 번 흘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햇볕 속의 초콜릿처럼 흐물거렸다. 번쩍이는 검은 눈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의 강하고 거무스름한 얼굴에기묘한 평온이 깃들여 있었다.「내가 미친듯이 걱정하고 잇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소?」 로지가 불편하게 얼굴을 붉혔다.「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오토바이는 대체 어디서 났소?」 「여기 처음 도착했을 때 2주 예정으로 빌렸어요」 「아마 최근에 고용된 인부들 중에 주인이 있을 거요. 드미트리에게 말해서 돌려 주게 하겠소. 그렇게 위험한 도로에서 당신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소」콘스탄틴의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약간 창백해 보였다. 그것이 그의 입가에 어린 팽팽한 긴장을 더욱 강조했다. 그가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동안,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해했다. 그는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그는 그 주제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의 반도 하지 않고 있었다. 「10분 전에 데스피나가 도착했소」그가 딱딱하게 내뱉었다. 로지의 몸이 얼어붙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오, 안 돼‥‥」 「그녀에게 사실을 밝히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결정했소」그가 우울하게 말했다.「이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신분을 알고 있소. 누군가가 한치만 입을잘못 놀려도 진실이 드러나게 될 거요. 그런 위험을 무릎쓸 수는 없소」 충격으로 로지의 발이 바닥에 얼어붙었다. 콘스탄틴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을잡고, 홀로 이르는 계단으로 이끌었다. 로지는 그에게서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당신이 하세요!」 「이 고백은 두 사람 모두 필요하오」콘스탄틴은 손에 힘을 잔뜩 준 채, 그녀가 더이상 항의하기도 전에 응접실로 끌고 갔다. 데스피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지의 위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요」데스피나가 소파에 다시 앉아,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하녀가 커피를 따랐다. 커다란 석조 벽난로 옆에 앉은 콘스탄틴은 다소 긴장된 대화에 끼여들었다. 하녀는 모두에게 잔을 돌리고 나자 문을 닫고 사라졌다. 데스피나는 로지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천천히 검은 머리를 저으며 부드럽게말햇다.「아무래도 가면극이 너무 오래 지속된 것 같아요. 콘스탄틴이 설명하기 힘든 것을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군요. 물론 나를 보호하려고 이런 연극을 꾸민 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먼저 고백했어야 했어요. 저 아이는 어렸을때도 거짓말을 못했어요. 눈을 보면 언제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죠」 커피에 설탕을 넣던 콘스탄틴이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커피가 쏟아졌다.「그렇다면‥‥?」 「나는 20년 전부터 로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단다」데스피나가 콘스탄틴의 충격받은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고백했다. 로지가 억눌린 신음을 토해 냈다.「당신을 즉시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요, 로지. 하지만 콘스탄틴이 당신 이름을 이야기하는 순간 안톤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당신의 머리 색깔과 특이한 이름은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죠. 게다가 두 사람은 아주 이상하게 행동햇으니까요. 두 사람이 내게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어요」 「20년이라뇨‥‥?」콘스탄틴은 차분하고 자그마한 그리스 여인에게서 여전히 눈을떼지 못한 채 물었다. 「안톤은 감정을 숨기는 데는 재능이 없었단다. 그는 로지의 첫 번째 사진을 받은 후에 몹시도 혼란스러워했어」데스피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설명했다.「나는 그의 책상 서랍에서 로지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와 함께 편지를 발견햇단다. 그래서 이해한 거야. 나도 아주 고통스러웠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결혼을 지키는 일이라는결론에 이르렀지. 그에게 따져 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다고 내가 무엇을 얻을수 있겠어? 안톤이 죄의식과 발각당할 두려움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했어. 나는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단다. 어쩌면 그토록 오랫동안 그 일을 덮어 둔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아니요‥‥, 안톤은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을 거예요」콘스탄틴이 조그맣게 부정했다. 「그는 이미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어요」나이 든 여인이 로지를 응시하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평생 동안 나는 아무 노력도 없이 원하는 것을 전부 얻엇어요. 마지막 임신에서 아들이 사산됐을 때, 나는 마침내 살아 잇는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어요. 나는 모든 분노와 고통을 남편에게 쏟아부었죠. 그리고 그를 거절햇어요. 그에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고, 밖으로 몰아냈죠. 내게는 그가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돌렸다고 불평할 권리가 없어요‥‥」 콘스탄틴이 얼굴을 찌푸렸다.「두 분의 결혼에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랏어요」 「네가 우리에게 오기 전의 일이엇으니까. 나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 로지의 존재를 계속 비밀로 남게 했단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했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계속 사진을 몰래 찾아보곤 했단다. 안톤은 언제나 같은 장소에 보관했거든. 대여 금고에 넣은 것은 안톤이 죽기 직전이었어」 「그동안 내내‥‥나에 대해 알고 잇었군요」로지가 멍하니 속삭였다. 「하지만 안톤이 당신을 찾아냈다는 사실은 몰랏어요. 당신이 더 어렸을 때, 안톤은 당신을 추적하려고 했지만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는 것은 알고 있었죠. 6개월 전에 그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자, 나는 또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은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어요」데스피나는 조심스럽지만 따뜻한 눈으로 로지를 응시했다.「하지만 그가 당신을 찾아냈다는 시실에 유감은 없어요, 로지. 사실 그가 죽기 전에 당신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무척 기뻐요.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가 잇었을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로지가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엿다.「정말 관대하시군요」 「비밀은 우리 모두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어요」데스피나가 울적하게 지적했다.「나는 남편의 새로운 유언장에 대해서도 아제 알고 있어요. 둘 중 누구라도 좋으니, 이 결혼이 진짜인지, 아니면 유언장을 위한 가짜 결혼인지 솔직히 말해 준다면 고맙겠어요」 로지가 목구멍에 걸린 묵직한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우린 가짜로 결혼‥‥」 「무슨 소릴 하는 거야!」콘스탄틴이 격분해서 로지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질문이 시기상조인 것 같구나」데스피나는 어쩐지 유쾌한 미소를 희미하게 떠올리며 빈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두 사람이 내게 손자를 안겨 줄 수 있을 정도로 오래 함께 있어 준다면 아주 감사하겟어. 그 기쁨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으니까 말이야」 로지는 뺨을 불처럼 물들이며 바닥만 뚫어지게 내려다보앗다. 그녀는 콘스탄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미망인이 방금 한 말은 그녀를 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데스피나는 로지를 가족의 일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콘스틴틴이 양어머니에게 물엇다. 「상황을 정리하려고 잠깐 들른 것뿐이야. 조만간에 다시 손 폰타넬로 돌아오마. 그런데 로지‥‥」데스피나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안톤은 그의 어머니에게 가문의초상화를 팔지 말도록 설득했어요. 그 그림들이 다시 원해 자리에 걸리는 모습을 볼수 있다면 무척 행복하겠어요」 리무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로지가 중얼거렸다.「그녀는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완패시켰어요」 여전히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갓다. 모든 상황이전부 이해가 되었다. 데스피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더 이상의 가짜 결혼을 지속할 필요도, 이혼할 구실을 찾을 필요도 없다. 갑자기 로지는 다리에 힘이 빠지고, 깊은 늪 속을 걸어가려 애쓰는 사람처럼 연약하게 느껴졌다. 데스피나는 그들의 관계를 유지시켜 준 모든 인공적인 방어막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들의 시간은이제 끝났다. 「왜 우리 결혼이 가짜라고 말한 거요?」콘스탄틴이 격렬하게 비난햇다.「꼭 그렇게 해야 했소?」 로지는 힘겹게 어깨를 편 다음, 그나마 모든 자존심을 긁어모아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나는 진실을 말했어요. 그토록 솔직하게 고백해 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건 모욕이에요」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물리적인 힘을 가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어떻게 그게 진실이오?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소? 우리가 연인이 아니오?」 로지의 신경이 피아노 줄처럼 팽팽하게 긴장했다.「당신은 어젯밤 나에 대해 어떤감정인지 분명히 밝혔어요」 「크리스토스‥‥, 나도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확신하지 못하겠소. 당신은 정당한 이유도 없이 내게 지옥의 고통을 겪게 했소. 안톤의 딸이라는 주장을 웃어넘긴 것으로 당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햇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그게 너무나 믿기 힘든 얘기였다는 것은 당신도 인정할 거요!」번쩍이는 검은 눈동자가 시선을 회피하려는 그녀의 눈을 쫓았다.「좋소‥‥, 내가 잘못했소.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잘 알게 된 후에도 그 주장을 되풀이하지 않은 이유는 이해하지 못하겠소」 「별 차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어차피 이제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더 이상 다른 사람을 위해 연기할 필요가 없으니까, 우리는 이혼할 수 있어요」 콘스탄틴이 얼어붙었다. 그의 강한 얼굴이 딱딱하게 긴장했다.「나는 이혼하고 싶지 않소」 「나는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당신의 바보 같은 명예욕을 위해서 계속 붙들려 있지 않을 거예요!」 콘스탄틴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명예와는 아무 상관 없소, 로지」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흐느낌이 목구멍에 걸렸다.「난 돌아갈 테니까 뭐든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올라가 짐을 싸겠어요」 그녀는 지옥의 사자에게 쫓기듯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사실 지옥의 사자는 그녀의 머릿속에 잇었다. 그녀가 질색하는 작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콘스탄틴이 스스로를쟁반에 얹어 내밀고 있지 않느냐고 벌써 지적하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그 정도로 멍청하고, 그녀가 그를 원한다면, 왜 그에게 매달리면 안된단 말인가? 그녀는 성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로지‥‥」 「당신이 침대에서 대단하다는 이유로도, 나를 당신 곁에 머물게 하진 못해요!」그녀는 미처 말을 삼키기도 전에 비난하듯 뱉어 냈다. 콘스탄틴은 문을 세게 닫고 등을 기댔다. 근육질의 호리호리한 몸이 긴장으로 굳어 잇엇다. 콘스탄틴은 그녀를 어둡게 마주 응시했다.「하지만 그런 끌림이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어젯밤에는 복수심밖에 없는 차가운 마녀라고 했잖아요!」 길고 새까만 속눈썹이 격렬한 검은 눈 위로 내리깔렸다.「크리스토스, 그건 진심이 아니었소. 나는‥‥나는‥‥」그가 이를 갈며 더듬었다.「나는 너무나‥‥」 「당신이 어쨌다는 거예요?」로지가 대답을 재촉햇다. 「상처받았소.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잖소!」콘스탄틴이 버럭 고함을 질러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소! 나는 우리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소. 그런데 갑자기 당신이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소. 그리고‥‥나는 최악의 숙취에서 깨어났소. 그리고 알앗소, 당신이 여전히‥‥」 「여전히 내가 악녀라고 생각했나요?」 콘스탄틴은 좌절감에 못 이겨 격렬하게 양팔을 흔들엇다.「물론 아니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오!」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어요」로지가 다시 걸어가 서랍 속의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햇소.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소. 나는 먼저 공격부터 하오. 아침에 깨어나서 당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소‥‥」 그의 깊은 저음에 깔린 생생한 긴장에 로지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를 쳐다보는 것을 고집스레 거부하며, 떨리는 손으로 옷을 산더미처럼 바닥에 쌓아 나갔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 것은 분명했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렷다. 「받으세요‥‥, 어서요!」로지가 어깨 너머로 짜증스레 고함쳤다. 목졸린 듯한 저주의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그렇게 했다. 로지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리스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도 아니고‥‥ 그러나 그녀는 그가 <산치아>라고 말하는 것을 종소리처럼 똑똑하게 들었다. 그러자 살인적인 분노가 폭발했다. 그녀는 벌떡일어나, 몸을 던지다시피 그에게 돌진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침대 옆에 놓인 물병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내가 가고 나면 산치아와 얘기하세요! 그 전에는 안 돼요!」그녀가 격하게 비난했다.「당신네 둘은 지옥 불 속에서 활활 불타야 해요. 그녀의 남편이 밀통 현장에서 당신과 그녀를 죽여 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폭풍 속의 낙옆처럼 부들부들 떨며 다시 몸을 홱 돌렸다. 핀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침묵이 주위에 내리깔렷다. 「산치아와는 여러 해 전에 헤어졌소. 우리는 친구요」콘스탄틴이 거의 수다를 떨 듯이 말했다.「안톤과 데스피나에게 우리 관계가 계속되는 것으로 오해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저녁 식사 약속을 할 때마다 두 사람이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자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것이 당혹스러웠기 때문이오」 로지가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들은 내가 결혼해서 정착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지만 나는 흥미가 없었소. 산치아는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소. 그들이 그 일을 그만두었으니까」 로지는 물병 바닥에 가라앉은 휴대폰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산치아를 질투할 필요는 없소. 오래 전에 끝난 일이오」 굴욕감이 그녀를 휘감았다.「질투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당혹스럽게도 콘스탄틴의 대답에는 유쾌한 어조가 감돌았다.「하지만 내가 다른 여자와 마주칠 때마다, 당신은 암살자처럼 효과적으로 그들을 제거하더군」 「나는 아내 연기를 하고 잇었던 거예요‥‥. 그냥 연기였다고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이 연기하는 것은 원하지 않소. 당신이 저 문으로 걸어나간다면, 내 인생은 거기서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될 거요‥‥」 로지는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손으로 젖은 뺨을 닦았다. 그녀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통해 그를 보았다. 그의 어두운 눈이 강렬한 갈망과 희망을 담고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당신이 아직도 모리스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알고 있소」콘스탄틴이 탁하게 말햇다.「하지만 내가 인내심을 가지면 당신도 점차 그 생각에서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오. 당신을 잃고 싶지 않소. 오늘 아침 숙취에서 깨어날 때 깨달았소‥‥. 당신이 여전히 내게 있는 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로지는 그의 몸에 팔을 두르고 싶은 절망적인 충동을 억제하려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고는 기다렸다. 그 말을 먼저 듣고 싶었다. 콘스탄틴은 구명줄도 없이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은 사람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엇다.「당신을 미친 듯이 사랑하오」 로지는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난 모리스를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상처를 주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안톤이 내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결혼을 지속하려 할까 봐 견딜 수가 없엇어요」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냇다. 그가 거칠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가 너무 강하게 조여 와서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엇다.「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소? 내가 왜 그렇게 만취했다고 생각하오?」 「당신에게 그런 영향을 미칠 힘이 내게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이제 알게 되엇으니, 앞으로는 내가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못하게 하겠군」 콘스탄틴이 그녀의 머리를 들어올리고, 확신을 찾아 너무나 간절히 그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환한 미소가 그의 거무스름한 얼굴에서 마지막 긴장을 몰아냇다.그는 기쁨으로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앗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벽에 충돌한 느낌이엇소. 그리고 안톤의 집에서 당신을 발견했을 때는 머리가 돌아 버리는 줄 알았소. 나는 당신이 나만의 여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소」 「나는 처음부터 당신의 신경을 잔뜩 긁어 놓았군요」로지의 손이 그의 실크 넥타이의 매듭 푸는 일에 행복하게 매달렸다. 그녀는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던져 버렸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무시하게 내버려 두지 않앗소. 그 다음부터 나는 당신을 위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소‥‥.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소?」그는 그녀가 재킷을 벗기는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재킷이 바닥에 떨어졌다. 「변명거리?」로지가 집중하려고 애쓰며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나갔다. 「당신을 대신해서, 나는 당신이 나이 든 남자의 정부가 되어야 했던 수만 가지 이유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소」 「모리스가 내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든가, 그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의 질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안톤에게 몸을 맡겼다든가 하는 얘기 말이에요?」그녀는 그가 셔츠에서 팔을 빼낼 수 잇도록 도왔다.「우리가 침대에 들어가기도 전에, 당신은 나를 위해 수많은 변명을 생각해 내고 있었군요」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햇군」콘스탄틴이 말했다. 그리고는 로지가 이번에는 허리띠에 매달리는 것을 유쾌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크리스토스‥‥, 나는 모리스에대한 질투로 머리가 돌아 버리는 줄 알앗소. 당신은 그의 얘기를 끊임없이 입에 올렸소. 당신과의 사이가 어느 정도 진전됐다고 생각할 참이면, 언제나 모리스가 다시끼어들곤 했소」 「그는 제일 친한 친구예요. 우리 사이에 불꽃이 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당신은 그를 잘못 판단했어요」로지가 나무랏다. 그러고는 콘스탄틴의 드러난 가슴을 탐욕스레 응시하며 찬탄하듯 미소를 지었다. 「잘못 판단했다고?」 그녀는 모리스의 동생 로나와 비열한 기자에 대해 퉁멸스레 설명했다. 그녀는 털이 무성한 가슴에서 허벅지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올려 다급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그들은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들은 행복한 피로 속에서 서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누워 있었다. 문득 로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그런데 물어 볼 게 하나 있어요‥‥. 토끼라니요? 드미트리말로는, 당신이 토끼에 관해 얘기했다고 하던데, 무슨 얘기예요?」 콘스탄틴이 약간 몸을 긴장했다. 그의 광대뼈에 희미하게 홍조가 떠올랐다.「아래층에 토끼가 두 상자 있소」 「무슨 소리예요?」로지가 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수집하는 실박 토끼 말이오‥‥, 내가 하나 깨뜨렸던 건 기억하지? 지난 주에 중개상에게 전화했소. 그가 주위에 소문을 퍼뜨린 탓에, 당신은 이제 세계에서제일 값비싼 도자기 토끼 컬렉션의 임자가 되었소」 환한 미소가 로지의 얼굴을 빛냈다.「너무 근사해요, 콘스탄틴. 나를 감동시키려고 정말로 안달했던 모양이군요」 「표현하고는!」그의 짙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응시햇다.「나는 당신과는 정반대로 무뚝뚝하기만 하지. 그런데 당신의 상상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언제 말해 줄 거요?」 로지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엇다.「충격을 주고 싶지 않아요」 「휴대폰을 물에 던져 버렸을 때도 난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소」콘스탄틴은 그녀를 아래로 끌어당기며 격렬하게 키스했다. 거의 동시에, 로지에게서 만족의 한숨이 빠져나왔다. 그녀는 그가 마피아 역할을 얼마나 즐길지 궁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