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미야 하루히의 경악 (10권) 번역자 : 톰슨가젤(mutzmi@naver.com) 이 이야기는. 나와 SOS단과 그리고 스즈미야 하루히와의 마지막 이야기다. 그래. 마지막... ............ ......... ...... ... 때는 12월 18일. 한때 내가 스즈미야 하루히를 소실하게 된지─마치 나의 소유물이라는듯 말하는것에 대해서는 미안하다.─1주년 되는 날이 였다. 물론 그런 날을 기념할 맘은 하루히의 속눈썹만큼도 없다. 아니 속눈썹은 좀 긴가. 어쨋든, 기념할 맘은 없다. 왜냐면, 그 날은 내게 슬픈 날이였기 때문이다. 이제 하루히는 나의 생활속에 구운 빵위에 올려뒀던 버터처럼 완전히 스며들었다. 아니, 내 가 하루히의 생활속에 스며들었다고 보는것이 더 적절하다. 앞에의 말과는 좀 상관없는 말이지만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스즈미야 하루히가 나를 좋아하는건가?". 거기, 비웃어라. 그래. 그럴리가 없다. 그건 오버다. 내가 왜 이런생각을 한건진 모르겠지만. 어쩌면 반대로 내가 스즈미야 하루히를 좋아하고 있는것일지도. 하지만 그것도 그럴리가 없다. 초특급 민폐여왕, 바보들중의 바보이자, 별종들의 집합체, 스즈미야 하루히를 좋아할리가 없잖는가. 아 니, 좋아하고 싶어도 못할것이다. 이런 잡스럽기 짝이 없으면서도 정말 평범한 고등학생같은 생각을 하며 등교길을 걷고있는 나였다. 물론 내옆에는 바보 타니구치가 이리저 리 잡담을 늘어놓고있었다. "나말야. 크리스마스날때 파티하기로 했어." 파티라니? "흐음. 그게 말이야. 난 사실 인기가 꽤 있거든." 그래서. "이쯤되면 알아야 하는거 아니냐? 이성들한테 인기가 있다고." 그뜻은 여자친구가 생겼다는거냐. 1년전 비슷한 시기에 너가 나에게 비슷한 식의 말을 했었지. "그건... 잊어줘." 미안. 심장부를 건드렸군. "어쨋든 그 아인 진심이야! 나랑 영화도 2편이나 봤다고." 영화 제목은 기억나냐. "그... 몰라." 타니구치답다. 타니구치 틱한, 타니구치의 한계를 철저하게 따른 대답이군. 이런 식의 실용도 소수점 단위의 대화를 하다보니 어느세 학교에 도착했다. 어느세도 아니지. 문을 열었을때, 창가의 끝자리에 위치한 하루히는 나를 기다렸다는듯이 끝내주는 미소로 반겼다. 뭐 잠시동안이지. 날 흘겨보더니 시선 을 창문밖으로 옮겼다. 무서운 녀석. 끝가지 내 뒷자리를 집어삼키다니, 하루히에게 어쩌면 장난감은 아사히나 선배뿐만은 아니라는 생각 이 들었다. 오늘은 하루히가 무슨짓을 꾸밀지 궁금증 반에 불안감 반인 상태로 하루히의 앞자리, 정확히 말해 내 자리에 앉았다. "안녕 하루히." "어." 그렇다고 날 반겨주진 않을꺼다. 이 녀석의 인사는 항상 건성건성 이였으니까. 하지만 하루히의 표정은 좋아보였다. 아니, 좋다니 이거 너무 싱글벙글한게 불안한데? "하루히, 무슨 생각하냐?" "바보 쿈따위는 생각할수 없는 아주 재미있는 생각." 하아, 재미있다니.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거지? 또 세계를 바꿔버릴만한 난감한 음모를 생각중이라면 나는 아주아주 곤란하게 된다. 물론 이제 하루히가 저지른 일을 해결하는데엔 도가 텄지만. "별거아니야. 크리스마스 이벤트도 생각중이고 그때 SOS단 전원이 엄청나게 커다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 생각이야." 혼자서 다 불었군. 크리스마스 이벤트라면 저번에도 했었고 그리 좋은추억은 아니였다. 사슴 복장으로... 됬다. 그만하자. "설마 또 나한테 그런 걸 시키진 않겠지." 라고 묻자 하루히는 하루히는 "음?"하며 턱을 괸채로 시선을 하늘에서 나에게로 옮겼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 그리고는 생각났는지 까르르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아!~ 맞어.. 그거 그거. 딱 좋다." 딱 좋다니. "그때 엄청 재밌었는데... 미쿠루랑 유키도 좋아할꺼야!" 진짜로 시킬 셈인가. 막아야 한다! "난 사양한다. 너희들 웃음거리 되는건 이제 질릴때로 질렸어." "웃음거리라니.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부부부단장으로 승급시켜줄수도 있어." 그러다가는 그냥 단원은 한명도 남지 않을것 같은데. 그리고 그런건 하나도 기쁘지않아. 가치도 없고. 돈을 준다면 생각해볼지도 모르지만 말야. "완전 속물이네." 시내 탐색때마다 빠져나가는 돈이 얼만데. 갑자기 하루히가 나에게만 일부러 늦게 연락하는 것으로 지각을 유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꽤나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다. 다들 이상할 정도로 지각─한가지 말해두자면 여기서 지각은 꼴지를 의미한다.─을 안한단 말 이다. 최악이라면 최악이라 할수 있을만한 타이밍에 맞춰 선생이 들어왔다. "어쨋든 오늘 회의할꺼니까 꼭 오라구." 하루히가 내 등을 볼팬으로 쿡쿡찍으며 미소를 날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미소가 그렇게 소중한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나가토가 말한 "조심해." 라는 위기의 복선을 의미하는 말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고있었다. 하루히는 그런 나를 보았는지 이리저리 재료를 메모하고있던 메모장을 덮으며 나를 처다보았다. "왜? 무슨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전혀." 내가 생각해도 뭔가 있을만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하루히한테 안들킬리가 없지. "뭐야? 설마 나 몰래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준비해 둔거라도 있어? 앞으로 모든것은 단장한테 보고한뒤 하라고." 있을리가 없지. 그런것에 쏟을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SOS단의 단원으로써 정말 창피한 발언인데. 다음에 한번 정신 교육을 시켜야겠어." 창피한게 아니라 인간적인 발언이다. SOS단을 들어간 이후로 나의 성적은 완벽한 하향곡선을 유지중이라고. 너가 가르쳐준 암기 방법도 전혀 쓸모 없었고 말이야. "너가 활용을 못한거야." 활용이고 자시고 애초에 뇌의 활동을 멈추게 하는건 나같은 평범한 인간으로선 불가능해. 아무 생각도 하지말라니, 가능한사람은 손 한번 들어봐라. 거봐, 없잖아. 대답없이 메모장에다가 계속 뭔가를 쓰고있는 하루히. 또 무시당한건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사람들과 여러가지 소음을 내고있는 차들로 북적거렸다. 시끄러운 도시다. 평범한─. 그리고는 한곳에서 시야가 멈췄다. 마트의 바로옆에있는 상가. 그곳 옥상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그냥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겠지'라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겪은 수많은, 정말 100% 정확하다고 알려진다면 세계가 오지게 떠들썩하게 만들것만 같은 사건을 겪어본 나로써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적이다. 누구지? 상당한 거리때문에 얼굴은 정확히 안보였지만 남자인것 같다. "신호등 켜졌다!" 라고 말하며 신호등이 깜빡거리는 횡단보도 위를 뛰어가는 하루히 덕에 정신을 차렸다. 자자. 침착하자. 저 녀석은 누구지? 미래인? 미래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미래인은 저렇게까지 부자연스럽게 모습을 들어내진 않는다. 기 관? 기관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기관도 마찬가지로 저렇게 모습을 대놓고 들어내진 않는다. 그렇다면, 저렇게까지 자신있게 건물 상가 옥상 에서 우릴 바라보고 있을 만한 존재는. 정보 통합 사념체의 유기 안드로이드. 그 종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일단 하루히를 따라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섞인 체로 마트안으로 빨려들어가듯 들어갔다. 이곳이라면 그나마 몸을 피하긴 좋을것이다. 나는 아무말 없이 하루히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고 하루히도 아무말없이 메모장과 마트의 안내판을 번갈아 보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생각할 시간이다. 녀석이 노리는건 누구지? 나를 죽여서 정보 폭발인가 뭔가 하는걸 관측하려는 거냐? 아니면 하루히를 뭐 어떻게 해보려 는거냐? 하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사쿠라의 공격을 받은지 1년 반이 지났으니까. 그 시간 동안 내가 다시한번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이상하다 볼 수 있다. 미리 나가토가 일을 처리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고. 그 동안 정보 통합 사념첸가 뭔가 하는 녀석들은 상당히 지쳤을 것이다. 수십억년을 살았다는 녀석이 몇년만에 질렸다는 말은 내 멋대로의 추측일 뿐이지만. 코이즈미의 말로는 하루히가 갈수록 폐쇄공간을 만드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일상 생활에 동요되어가고 있는것이다. 하루히의 입장에선 좋을지 나쁠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와 코이즈미와 아사히나 선배에겐 좋은 일이다. 나가토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히가 일상 생활에 동요됨으로써 피해를 보는 쪽은? 뭘 더 말할 필요가 있는가. 당현히 진화의 가능성이니 뭐니 하는 것을 위해 하루히를 하늘에 떠있는 알타이르에 붙어있는 다른 별들을 찾으 려는 천문학자처럼 하루히를 관측중인 정보 통합 사념체들이다. 그 외에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대표적인 녀석이 그 녀석들 일 것이다. 나도 참 기술이 많이 늘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하루히의 뒤를 쫓아가면서 "이거 어때?" 라던가 "요거 어딨지?" 라던가 "역시 이것도 필요해."라고 중얼거리는 하루 히의 말에 적절한 대답과 맞장구를 처주면서 동시에 쇼핑카트를 끌고 가면서 사람들을 피해다니는 기술. 비웃지마라. 생각보다 고도의 테 크닉이 필요한거라고. 옛날이라면 이런 생각들을 하며 바보같은 표정 이라 읽고 멍한 표정이라 쓰는 나만의 고유의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다가 하루히한테 "그 바 보같은 표정은 뭐야?" 라고 꾸중을 들을께 뻔하다. 그래놓고선 뭐 후세에 이 멍첨함을 알려야하니 뭐니하면서 나를 욕하겠지. "어이, 하루히." 아무래도 슬슬 돌아가봐야 할것 같다. 싸우더라도 ─싸우기 보다는 일방적인 공격이라 보는것이 더 적당하지만─ 이런곳에서 싸운다면 그 야말로 참사다. "왜?" "이제 슬슬 돌아가보자." "잠시, 계란만 남았어. 어딨지?" 라고 말하면서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하루히. 빨리가지마. 쇼핑카트로 사람들 피해 다니는게 얼마나 힘든 기술인지 아냐. 계란을 찾아다니는 하루히의 뒤를 이어가면서 아무래도 나가토에게 연락해야 할것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그저 건물위에서 누군가가 하루히와 날 처다봤다고 이렇게까지 혼란에 빠지다니. 이건 비일상인가, 일상인가. 비일상이라면 하루히는 비일상에 동화되어 가고있는건가? 하루히와 나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거야? 하루히 만 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이젠 내가 하루히의 방패가 되라 이거냐? 이런 생각은 또 왜하는건데? "어이, 하루히 나 화장실좀 갔다올테니까, 그것들 계산 다 끝내고 마트 앞에서 기달려." "뭐야? 그런 단순한 욕구때문에 SOS단의 중요한 계획에 금을 내버릴 샘이야?" 단순한 욕구라니. 필수적 욕구다. 이건 욕구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 유지를 위한 의무다 의무. 물론 그 의무를 위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려 는건 아니지만. 그리고 어째서 화장실에 가는것으로 SOS단 활동에 차질이 생기는거지? "모든 것에 정성을 들여야 하는 법이야." 너같이 기력이 남아돌다 못해 과포화 현상을 나타낸다면 몰라도 난 지금 기력 미달상태다. 하루히는 잠시 미간을 좁히고 검지와 엄지를 길게 펴 입술 아래에 가져다 놓고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뭐, 자비로운 단장님이 허락해주지." 라고하면서 내가 끌고있던 쇼핑카트를 잡았다. "계산 다하고 마트앞에서 기달려." 라고 말하고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화장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마트엔 제법 사람들이 많았는데. 뭐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나는 화장실의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처다보았다. 청소를 자주했는지 깔끔한 유리에 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지쳐 보이는군. 한번 찬물로 대충 세수를 한뒤 옷자락에 손을 닦은뒤 핸드폰을 꺼내었다. 07번. 나가토의 집이다. 뚜- 뚜- 뚜- 뚜- 뚜- 뚜-. 이쯤되면 나가토는 전화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전화를 받자마자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해야한다. 그런데 받질 않는다. 20초정도 더 핸드폰을 잡고있었지만 소용 없었다. 무슨 일 있는건가? 도서관에라도 갔을려나? 의문을 가진채로 핸드폰을 닫고 화장실을 나가려 했을때. 뭔가 많이 이상하다는것을 느꼈다. 문이 없다. 약간 누런 때가 든듯한 칙칙한 흰색의 벽. 그것이 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듯한 광경이다. "외부와는 완벽히 차단 됬다."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큰 키에 중간체격의 남자. 약간 쿠니키다랑 닮았군. 쿠니키다에 타니구치의 얼굴을 섞었다고 해야하나. 아니 그건 둘째치고. 넌 누구냐? "정말 유기 생물체라는 것들은 멍청해서 못봐주겠군. 진짜로 이곳에 자기 발로 굴러 들어오다니. 그 녀석은 역시 정확하군." 난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일 쯤이야 몇번 겪었다. 그리고 난 앞으로 하루히와 나를 매우 귀찮게 만들어 버릴것같은 그 녀석들에게 이 렇게 저항했다. 올테면 와보라 그래. 모두 상대해주지. 진짜왔군. 그것도 건물 옥상에서 여기로 말이야. 그래 이 상황이 상당히 위험할것같은 상황이라는 것 쯤은 알고있다. "묻는말에 대답이나 해. 넌 누구냐." "유기 생물체에게 내 퍼스날 네임을 알려줄 필요가 없어. 너를 죽이고 스즈미야 하루히가 어떻게 나올지를 보겠다. 그로써 엄청난 정보 플 레어를 관측할수 있겠지? 생각만 해도 정말..." 하아? "지금 당장 죽이고 싶은데?" 나한테 저런말을 할수있는 종류는 하나뿐이지. 다리가 떨린다. 두려움 때문인가? 날 죽이고 스즈미야 하루히가 어떻게 나올지를 보겠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그 녀석과 닮았군 그래. 정말 우연인데? 꿈이였으면 좋겠다. 이건 꿈이다. 내 눈앞에서 "이건 꿈이다. 그럼 이제 잠에서 깨라 멍청한 쿈아." 라고 말하면서 사라져줘. 내 눈앞에 있는 이름모를 유기 안드로이드. "죽을 준비해." 라고 말하는 녀석. 나는 내 손등을 꼬집어보았다. 그것도 손톱으로. 아프다. 재기랄 왜 아픈거지? 이게 꿈이 아니란말이냐? 녀석의 나이프가 나의 어느부위를 노릴것인가. 심장? 폐? 쇄골하정맥? 그것도 아니면 목이냐? 녀석의 나이프로부터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런 생각은 곧 물거품이 되었다. 녀석은 날 피식 하고 기분나쁜 미소를 짓는것과 동시에 내 볼에 따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나도모르게 볼에 손을 가져다 댔을때 손에서 묻어나온건 조금의 피였다. "포톤 레이져. 좀 원시적인 형태지만 유기 생명체 쯤이야, 하급 공격성 정보로 충분하다." 포톤 레이져라면 한번 들어본것 같다. 하루히의 말도 안되는 영화를 찍을때 아사히나 선배의 미쿠루 빔. 그중 잘못했다간 카메라와 함께 내 머리통을 쌔까맣게 태워버렸을 뻔 한 그 미쿠루 빔이 그것이다. 다행이 볼 옆을 좀 빛겨져 나가서 아주 조금 다친것 뿐이였다. 물론 그것이 녀석의 공격의 오류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나에게 겁을 주기위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것 과는 상관없이 지금 이 상황은 너무 불공평하다. 아사쿠라라면 그나마 나이프를 휘둘러대서 초반엔 피해 다닐수 있었는데 말이지. 레이져를 쏴대는 적을 어떻게 피하라는 거지? 내 몸의 속도는 커녕 반사 신경의 속도도 빛의 속도에 발끝만큼도 미치지 못하는데. "저런걸 보고 겁먹었다고 하는 건가? 정말 추해보여." 나에게 온갖 욕들을 퍼붙는 녀석이였지만 그런 녀석한테 똑같이 욕을 해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보다 이 상황에서 날 도와줄 사람이 누군 지를 열심히 생각해 볼 뿐이였다. 그래봤자 답은 하나다. 하루히- 는 절대 아니고, 그 녀석은 이곳에 올리가 없는 대다가 오히려 레이져를 한번 더 쏴달라고 할껄. 저번에도 날 도와준, 이번에도 도와줄꺼라 믿는, 나의 생명의 은인. 나가토가 다시 날 도와주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녀석이 다가온다.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겁먹어서 몸이 마비된건지 아니면 저 녀석이 나의 몸을 마비시킨건지는 모르 겠지만 후자였으면 좋겠다. 전자라면 내가 너무 겁쟁이가 되어버리니까. "하아-. 평범한 유기 생물체따위를 관찰하는 건 질렸다. 죽어. 널 가지고 노는것도 별 재미없군." 이라 말하며 녀석은 내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 코앞으로 내밀었다. 손끝에서 뭔가 빛이난다. 죽는건가? 눈을 질근 감았다. ... 아무런 반응이 없다. 2초쯤 그렇게 있다가 살짝 한쪽 눈을 떠보았다. 그리고는 나는 화장실 문이 사라졌을 때 보다 더 놀랐다. 아마 학교에 가서 책상속을 뒤져보니 알수없는 고생대에나 살았을법한 벌레가 들 어있을 때 놀라는 수준과 비슷할것이다. 이미 화장실 안은 화장실이 아닌 이상한 공간으로 뒤틀려 있었고 녀석은 그 뒤틀린 공간에 둘러쌓여있었다. 말그대로다. 그 공간이 마치 거인의 손이라도 되어서 녀석의 몸 전체를 꽉 쥐고있는듯한 모습이였다. 녀석의 얼굴을 보았을 때, 녀석은 매우 힘들어 보였다. "이건 뭐지...?!" 그 녀석도 예상치 못한 일에 놀랐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 같은 구식 시스템은 인간의 출입만을 통제할 뿐이다." 뒷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봤을때, 그곳에는 무덤덤하게 서있는, 독서광이자 한때는 안경소녀였고, 그 누구도 따라올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가진 자랑스러 운 SOS단의 단원이 서있었다. "나가토." "설명은 나중에 할께." 나가토는 천천히 걸어와서는, 내 앞에 섰다. "나가토? 나가토 유키인가? 하하-. 그때의 나가토지. 재미있군 그래." 뭔가 알수없는 말을 짓거리는 녀석이였다. 물론 매우 불편해 보이는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을 쥐고있던 공간은 젤리가 경사진 곳을 따라 천천히 흐르듯 스믈스믈 바닥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대단한 녀석으로 알고있지. 아니 대단한 녀석이야." "허술하다. 모든 공간이. 시간 동결 베리어와 정보 프로텍트는 미약하고 그 정보의 수준도 최하수준이다. 아사쿠라 료코의 절반도 미치지 못해." 나가토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몇몇 부분에 억양이 있었다고 생각되는건 내 고막이 잠시 다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일것이다. "어쨋든 이곳은 나의 공간. 아무리 너라도 막지 못해." 그 녀석은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위로 처들었다. 순간 일그러진 공간이 사방에서 일그러진 공간이 모이기 시작했다. 액체가 고체로 변화 되듯이. 순식간에 가시같은 형태가 된 그것은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눈을 질금 감았고 그때 나가토의 목소리를 들었다. 20배속으로 빨리 돌리고 있는 듯한 목소리. 다시 눈을 떴을때 또 공간은 다른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번엔 마치 우주 한복판에 서있는것 같은 느낌 이랄까나. 여기저기 빛의 구체가 이리저리 정신없이 흩어져있었다. "정보 변경을 신청한다." 나가토가 중얼거린다. 왠지 그 말에 약간 화난듯한 감정이 서려있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겠지. "불가능해. 이곳은 완벽히 나만의 정보 제어 공간이다." 녀석은 그것을 비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녀석의 뒤에있던 공간이 한곳으로 모이면서 일그러지더니 촉수처럼 뻗어나와 나가토의 왼쪽 흉부를 관통했다. 옷에 선혈이 튀었다. "나가토!" 보나마나 큰 데미지는 없다고 말할 나가토겠지만 인간의 눈으로서 보자면 이것은 엄청난 중상이다. 사망이 이르는게 당연한. 나가토는 아무말도 없이 무표정하게 그 촉수 형태의 공간을 양손으로 쥐었다. "콘넥트." "뭐?" "공간에 대한 정보 변경을 신청한다." 녀석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굳어졌다. 이 장면은 어디선가 본듯했지만 일단 난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공간은 또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번에는 파란색 물감을 탄 물통에 빨간색 물감을 떨어트린듯한 빨간색과 파란색의 조화로 이루어진 공간이 였다. 나가토의 몸에있던 촉수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가토의 반대편 공간. 그러니까 녀석이 존재하던 공간이 강하게 일그러졌다. "말도안되!!" 녀석의 외침이였다. 녀석은 아까전 공간의 손에 잡혀있었을 때와 비슷한 꼴로 이미 뒤틀린 공간에 의해 몸은 보이지 않았고 빠져나온 얼굴 만이 보일 뿐이였다. "무엇보다 정보 링크가 가장 허술하다. 이런 정보 제어 공간을 반전시키는 건 쉬운일이다. 구식의 시스템. 어째서 너같은 시스템이 이곳까 지 온거지." "그냥 운이 좋았다고 알아둬. 좋아. 내 유기 정보를 해제해도 좋다. 내가 할말은 아니지." "유기 정보 해제." 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가토가 무감정의 목소리로 말했고 녀석은 순식간에 모래의 결정이 되어 바람에 흩어지듯 허공에서 서서히 눈 에도 보이지 않는 조각으로 나누어졌다. 내 시세포의 정보로는 그 녀석이 사라지기 직전에 경악 하는듯한 표정을 지은것으로 보인다. 구석에 서있던 나는 나가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확실하게 볼수 있었다. 감정을.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의 화장실로 돌아온 공간은 한참동안 조용했다. 당연히 나가토의 몸에 괴상한 공간의 촉수로 인해 몸이 꾀뚫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막 "괜찮냐."라는 말을 하려고 할때였다. 나가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위험하다." 이젠 조심해에서 위험해로 수위가 올라갔군. "스즈미야 하루히에 대한 외부 은하 정보 통합 사념체의 관심도가 높아졌다." 하루히의 인기도가 올라갔다 이거냐. 물론 나가토가 이런 나의 말에 대답을 해주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그리고 나가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나를 잠시동안 멍하게 만들었다. "모든 급진파들이 총 공세를 펼칠것이다." 급진파의 총 공세. "이미 급진파와 그에 대립하는 우리들은 너가 보이지 않는 수많은 곳에서 싸우고있다." 이미 공격은 시작됬다. 타겟은 나. 그리고 스즈미야 하루히. 스즈미야 하루히의 진화의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외부 은하의 정보 통합 사념체가 늘어 나는 것과 동시에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다. 그리고 새로 스즈미야 하루히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정보 통합 사념체들의 대부분은 급진파이다. 그들이 총 공세를 시작했다. 서로 동맹을 맺은것도 아니다. 왜냐면 모두들 공공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까. 스즈미야 하루히의 정보 폭발 관측. 그리고 그것으로 부터 자율 진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이게 나가토의 말이다. 이 말을 지나가는 수상한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어쩌구 저쩌구를 찬양합시다 라고 적힌 명함을 건내며 말했다면 소 수점 단위의 퍼센트조차도 믿지 않았겠지만 상대방은 나가토다. 그럼으로 무슨 말이든 간에 나는 믿는다. 이때까지 나가토가 틀린적은 없 었으니. 그래. 나가토의 이 말들을 모두 정리해보자. 지금 정보 통합 사념체라는 녀석들중 급진파인 녀석들이 하루히의 그 정보 폭발이라는 알기 힘든 현상을 관측하기 위해 모든 급진파를 지금 이쪽으로 보내고 있고, 그에 맞서는 나가토같은 녀석들이 그것을 도중에 막아내고 있다. 그 중간에 미래인이나 기관이 끼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가토의 말로는 아무래도 아닌거같다. 때에 따라 커다란 물고기의 몸에 붙어다니 며 이것 저것 이물질을 먹어대는 청소물고기 같이 미래인이나 기관이 기입 할지도 모른다. 어쨋든 하나. 정확한건. 이건 전쟁이다. 혼란스럽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유기 안드로이드 들이 이런 웃음도 안나오는 공간을 만들어 현대 CG기술을 가뿐히 뛰어넘는는 화려한 이펙트 를 선보이면서 싸우고 있을것이다. 옛날, 나를 죽이려고 했던 아사쿠라 료코의 촉수같은 팔에 의해 만신창이가 됬던 나가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나가토. 얼마나 위험한거지? 급진파 녀석들이 이렇게 나올꺼라면 왜 이제서야 이러는거야?"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수없다. 수많은 정보 통합 사념체는 지쳤다. 급진파들은 언젠가는 꼭 오게 될것이고 그것이 지금이다." 학교 쉴껄. 그래. 맘을 편히 가지자. 어쩌피 나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고 녀석들한테 대항할 힘은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생활하는 거랑 적들을 경계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는거랑 별 차이점이 없을것이다. 그래야한다. 내가 생각해도 불쌍하다. 하지만 난 그런 녀석들과 싸우는 파이터가 아니다. 단지 하루히가 저지른 여러 일들을 처리해주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하루히의 스페셜리스 트고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하루히의 뒷치닥 거리를 해주는. 으음, 그래 부하1이다. 문득 하루히를 떠올리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토. 나 가봐도 되냐." 끄덕─. 나는 바로 화장실을 나오려다가 이곳이 남자 화장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려 나가토를 처다봤다. 내뒤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것 같았다. 뭐 괜찮겠지. 나가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뒤 하루히가 늦게온 나에게 무슨 벌을 내릴지를 생각하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고 도중에 뒤를 돌아봤을 때 나가토는 사람들의 틈속으로 사라져있었다. 팔짱을 낀 하루히의 모습이 보인다. 옆에는 꽤나 무거울것같은 큰 용량의 비닐봉투에 무언가가 가득 담겨있었다. 다행이군. 녀석들이 하루히에게 무슨 짓을 햇다면 더 곤란해졌을 것이다. 하루히가 멀쩡한건 당연한것이지만. 애초에 하루히를 강압적으로 움직이게 할 녀석은 존재하지 않을테니, 나는 손톱만큼도 걱정하지 않았다. 손톱만큼 정도는 했으려나. 하루히는 나를 발견하고서는 무거워 보이는 비닐봉투를 한손으로 들어 내앞으로 다가왔다. "늦었잖아. 무슨 화장실에 가는대 그렇게 오래걸려?" 응, 그게 말이지. 또 너 때문에 죽을뻔해서 좀 늦었단다. 를, "화장실에 줄슨 사람이 많아서." 라고 풀어서 말해야 하는게 처지의, 제 3세계(1)의 기아만큼이나 불쌍한 존재가 나다. 만약 내가 사고로 죽게된다면 내 망령은 스크루지의 죽은 친구처럼(2) 하루히의 꿈속에 나타나서 하루히때문에 힘들었던 나의 나날들을 모두 말해줄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죄책감을 느낄 하 루히가 아니고, 당연히 그런 일은 없을것이다. 내가 왜 죽어? "사람들 비위만 맞춰 주다가는 힘이 다 빠져버린다고. 자신이 하고싶은 것에는 최대한 몰두해야 하는 법이야." 화장실 간다는 나한테 삿대질을 해댈때는 언제고. 그리고 그건 비위를 맞춰주는것이 아니라 너가 가장 준수하지 않는 도덕이라는 거다 도덕. "알게뭐야." 이길수없다. 하루히와의 말싸움은 타니구치의 농담 따먹기 만큼이나 쓸모없는 것이다. 가끔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거나 힘들게 매달려서 하루히의 의지를 바꿔놓을 때도 있지만. 난 하루히에게 두손을 들어 보인 다음에 뒤돌아섰다. "쿈. 어디가?" 당연히 집이지. 이제 볼일 다봤잖아. "정말 인간미 빵점인데. 벌점 5점이다." 도대체 어떤 면에서 인간미가 빵점이라는 건지 설명해줄수 있겠냐? "이거." 하루히가 내손에 무언가를 떠넘겼다. 순간 무거운 무게에 의해 한쪽 어깨가 푹 내려갔다. 비닐봉지다. 케이크 재료들로 가득찬. 갑자기 떠넘긴 비닐봉지를 떨어트릴뻔했지만 조건 반사에 나름대로 충실한 내몸은 비닐봉지를 잡은 손에 힘을주어 겨우 떨어트리지 않았다. "우리집까지다." 니네집까지라니? 라고 모르는 척을 해보았다. "바보 쿈. 감점 3점 플러스 알파를 당하고 싶은거야?"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군. "이거 들고 가달라고?" "무겁단말이야." 무겁다니, 아까전 까지만 해도 분명히 넌 한손으로 이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들고있었다고. "힘들어." 억지다. 하지만 어쩔수 없지 뭐. 하루히의 명을 거역해봤자 좋을것도 없고 하루히와 같이 다니면 왠지 조금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직도 하루히의 집을 가본적은 커녕 본적도 없는 나에겐 기회라면 기회라 할수있을 만한 기회였다. 산수를 갓 배운 유치원생에게 내가 기 회라는 단어를 몇번 썼는지를 식으로 써보라고 해보아라. 뭐 그냥 교육에 도움이 될까 해서 하는 소리다. "얼른." 하루히가 방금전에 켜진 신호등을 가리키며 횡단보도 위를 달렸다. 자기는 조그만한 핸드백 하나만 들고있으면서. 하지만 좋아보인다. 내 뇌는 멋대로 옛날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저번 봄, 비일상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그 중심, 나의 비일상의 중심은 하루히였다. 나가토는 하루히를 진화의 가능성이라 했고, 아사히나 선배는 시공 균열의 원인이라 했으며, 코이즈미는 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눈앞의, 저 미소짓는 하루히는 그냥 하루히일뿐이다. 하루히는 하루히인거고 또 하루히인거다. 토롤로지긴 하지만 이것 외에 내가 하루히의 정의를 설명할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 하루히는 하루히다. Haruhi is Haruhi. 그리고 하루히는 이제 내 일상이다. 하루히를 잃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 내 일상의 붕괴일 것이다. 급진파? 기껏 하루히의 비일상에 적응해나가려 하니까 그것을 방해하려는 거냐? 니 녀석들 뜻대론 안될꺼다. "어이 하루히 같이가!" 물론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저주하고 있었다. ------------------------------------------------------------------------------------------------------- 1 제 3세계)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국가를 뜻하는 말. 주로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 있다. 2 스크루지의 죽은 친구) 크리스마스의 악몽에 나오는 유령. 하루히의 집까지는 상당히 멀었다. 역 앞을 지나, 키타교에서 부실 문을 잠군 뒤, 내가 올라오는 키타교 하이킹 코스의 옆쪽으로 난 길로 몇분정도 내려가자 매우 평범한 2층 주택이 나왔다. 물론 그때까지 내가 그 거대한 짐을 들고 다녔고 수십 번이나 양쪽 손을 번갈아 가면서 혹사 시키는 동안 하루히는 "도와줄까?" 라던가 "힘 들어?" 라는 말은 한마디도, 오히려 "뭐야 쿈. 약해 빠졌네." 라는 말을 하며 나를 한심하다는 듯 처다보았다. 너무하잖아. 나에게 하루히 내 성이 엄청나게 증가한것이 그 나마 다행이다. 내성이 없는 사람은 중도 포기를 하겠지. 아니 포기하려다가 하루히의 발차기를 몇대 얻어맞 고는 다시 짐을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히에 대한 내성의 포화상태란 존재하지 않을것 같다. 나도 여전히 "스즈미야가 말이지"라는 말 을 들으면 불안하니까. 역시 아무리 그래도 집까지 요상하진 않구나. 대문앞에 'SOS단의 단장님이신 스즈미야 하루히님의 거처이시다.'라고 쓰여 있지도 않고. 하루히는 아니지만 적어도 하루히의 가족 만큼은 평범한 가족이니까. 하루히는 가족의 영향으로 별종이 된게 아니라 스스로 별종이 된 것일 뿐이니. 집 앞에 도착하자 하루히는 잽싸게 나의 손에서 비닐봉투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하는말이, "됬어. 이제 가도 좋아." 다. 뭐냐? 마치 내가 짐을 옮겨주는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는. "그럼 남의 집에 허락없이 들어갈 생각이야?" 그건... 아니지. "그럼 가." 네네 알겠습니다. 하루히님. 맘대로하세요.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뒤돌아섰다. 뭐 하루히의 집이 어디있는 지를 알았으니 위기 상황시 나름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지져스 크리스트조차도 할수없을 듯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서 말이다. 역시 난 음... 대단해. 분명 장래에 큰 사람이 될꺼야. 라는식으로. "잠깐." 하루히의 목소리다. 뒤에서 날 삿대질 하고 있을꺼라 생각하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안하고있군. 또 시킬꺼 있냐? "왜?" "으음..." 하루히가 얼굴을 15도쯤 옆으로 틀었다.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리고는 하는말. "잘가." 다행이다. 부실에 뭐 놔두고 온거같에. 라고 말하면 못들은척 도망치려 했는데. 하루히는 15도쯤 틀은 상태로 나를 힐끔 처다보았다. 얼굴이 붉어 보인건 내 시세포가 오류를 일으킨거겠지. "어." 내가 들어도 싱거운 대답이다. 하루히는 그렇게 몇초간 서있다가 "칫."하면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저런 하루히도 뭐, 좋군. 뭐가 좋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도 소금에 절인 나물이 되어가는 두손을 힘없이 주머니에 쑤셔넣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전에, 메모지에 하루히의 집주소를 써놓고. 집에가서 숙제하고 씻고 잠이나 자야지. 아. 배아프다. 누구나. 내 배를 약 25kg의 힘으로 가격하고 있는 녀석은. 동생이다. 귀찮은 핸드폰 모닝콜 대신, 시간이 되면 항상 나를 어쩔수없이 램수면 상태에서깨게 만드는 동생녀석의 공격을 받고 일어난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어제의 일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래, 하루히의 크리스마스 케이크 판매 선언을 듣고 하루히의 손에 이끌려 마트로 갔으며 그 마트 안의 화장실에서 웃기지도 않는 녀석이 쏘는 레이져빔에 죽을뻔 했다가 만능 안드로이드 나가토의 도움으로 겨우 살았다. 그런데 그런 나가토가 웃기지도 않는 녀석들이 사방에 널려서 지금 나랑 하루히를 노린댄다. 그것 참 유감스럽군. 그리곤 하루히의 집주소를 알게되고 끝. 아, 한가지 더, 덕분에 지금 팔은 근육통을 호소중. 으─. 아침부터 이렇게 시작해야 하다니. 아사히나 선배가 타주신 차를 마시고 싶어진다. 시계를 처다보니. 10분남았다. 오늘처럼 키타교의 하이킹 코스가 힘들지 않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군. 학교에 도착한 후에서야 내 교복이 땀으로 젖어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슬아슬하게 교실에 도착했다. 타니구치 녀석도 나를 따라서 뛰더군. 그녀석과 자주 같이다니는건 싫은데 말이다. 교실에 도착하자 마자 나를향해 100와트 짜리 미소를 짓는 하루히. 오늘도 날 써먹을 일이 있는거냐? "재미있는 이벤트가 생각났어." 이벤트라니. 제발 나보고 순록이 되라는 말은 하지말아줘. "맞겨둬." 맞겨두라니 뭘 말이냐. 그때 앞문이 열리면서 한손에 출석부를 든 선생이 들어왔다. 왜 하필 타이밍이 다 이런거지? 하루히의 음모를 막을 시간좀 주지 못하겠냐. 하루히가 내 등을 샤프의 뒷부분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기대하라구." 하루히는 점심시간에도 부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젠 집보다 부실이 더 친근하다. 학교가 끝나면 보통 다들 집으로 가기 마련이지만 나의 경우는 집만큼 친근한 부실을 향한다. 이유는 사형당하기 싫으니까. 점심시간 직전, 하루히가 한말이 "끝나고 부실 안오면 사형이다!"였다. 똑똑. "네에─. 들어오세요." 아사히나 선배의 목소리다. 듣는것 만으로도 진정제 그 이상의 효과를 내는 천상의 랩소디이기도 하다. 아사히나 선배의 목소리를 녹음하여 외과 수술시에 환자 진정용으로 사용해 보는것도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부실에 들어갔다. "스즈미야씨는요?" "청소당번이랍니다. 안심하세요." 나를 향해 방긋이 미소짓는 아사히나 선배. 하루히, 지금 들어오면 용서하지 않을테다. 내 평화를 깨트리지 말아줘. "어때요. 한판?" 부실 책상에 앉아있던 코이즈미가 체스판을 흔들어 보였다. 코이즈미의 보드게임에도 규칙성이 있었군. 월요일은 오셀로, 화요일은 다이 아몬드, 수요일은 체스. 다음엔 이상한 야구 보드 게임일려나. 아니면 바둑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말없이 접이식 철제 의자를 펼쳐 앉았다. 코이즈미는 상큼한 미소로 체스판을 펼쳤다. 이 녀석은 놀아줄 사람이 나뿐이냐? 아사히나 선배가 방금전에 타주신 따끈따끈한 홍차를 마시며 문득 나가토를 처다보았다. 평소때와 다를 것이 없다. 저런 모습도 나름 진정제 효과가 있군. "체크 입니다." 벌써? "무슨 다른 생각중이십니까? 평소같지 않으시군요." 코이즈미. 하루히 못지않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녀석이다. 난 어제 내가 겪은 예기를 말할려다 관뒀다. 어쩌면 기관의 사람들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사히나 선배도 거기에 포 함해야 될려나. "그냥 하루히가 또 무슨짓할까봐." "모두들 많이기다렸지!!" 말이 씨가 된다더니, 내 말의 씨는 발육속도가 세포분열속도 보다 빠른거냐. 음속의 경지에 다를지도 모르겠군. 무엇보다 하루히의 저 오른손에 들린 저 옷 또는 그와 유사한 무언가가 가득 담겨있을 듯한 쇼핑백은 뭐지? 하루히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단장석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저번과 같이 쪽팔리는 일을 감수하기위해 하루히가 무슨짓을 할지에 대해 물어볼 의무가 있다. "하루히, 아침에 말한거 뭐냐? 그건 뭐고." "아? 이거?" 하루히는 그 쇼핑 백에서 뭔갈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히익!" 아사히나 선배다. 저것은. 저것은 말이지. 저번 크리스마스때도, 그리고 하루히가 소실되기 전에도 한번 본거같은 복장이다. "그렇지. 산타야. 산타." 저번에 아사히나 선배가 입었단 산타복장과 거의 일치한 짧은 옷자락의 산타복장이였다. "저어... 스즈미야씨..." 아사히나 선배의 손끝이 부들부들 미약하게 떨린다. 그때 충격이 생각보다 크셨나 보군요, 아사히나 선배. 죄송합니다. "어이. 아사히나 선배한테 그만좀 이것저것 입히라고." "착각하지마 쿈. 미쿠루꺼 아니야." 그러고보니 아사히나 선배는 산타복이 이미 있다. 하루히의 말을 듣고 다시한번 산타복장을 쭈욱 둘러보았다. 사이즈가 아사히나 선배의 산타복보다 조금 컸다. 나도모르게 나가토쪽을 처다보았다. 아니야. 나가토가 입기에는 좀 큰옷이다. 그렇다면 코이즈미? 아니 지금 내가 무슨생각을... 상상해 버렸다 젠장. 대뇌피질에 심각한 손상이 예상된다. 나는 당연히 아닐꺼야. 하느니 차라리 순록을 하겠다. 원한다면 썰매도 끌어주지. 그렇다면? "내꺼야 내꺼." 바니걸 복장 이후로 최초의 하루히 코스튬이다. 제법 어울릴것같기도 하군. "애애? 그러면 저는?" 아사히나 선배가 약간 놀라는듯한 눈으로 물었다. 목소리에 약간 아쉬움이 남아있는듯한?... 하긴. 코스튬은 늘 아사히나 선배가 맞아오던 것이였으니. "괜찮아! 미쿠루 꺼라면 여기 있지롱." 그리곤 쇼핑백에서 하나를 더 꺼냈다. 그것 역시 좀 눈에 좀 친근한 복장였다. "히... 히익!!" 놀라는 아사히나 선배. 물론 나도 놀랐다. 설마 저것이 나올까 했는데 진짜 나오다니. "산타의 영원한 파트너 루돌프지!!" 그렇다. 루돌프 복장. 순록 복장이다. 내가 예전에 저걸 입고... 하아. 말하기싫다. "미쿠루, 일로와... 옷갈아 입자~" 한손에는 산타 복장을, 한손에는 루돌프 복장을 들은 하루히가 무서운 미소를 지으며 아사히나 선배에게 유괴범같은 발걸음으로 다가갔고 나와 코이즈미가 부실을 나왔을땐, 부실안에서 하루히의 끔찍한 웃음소리와 아사히나 선배의 귀여운 비명소리가 어우러진 하모니가 들려 왔다. 나는 하루히와 아사히나 선배가 만드는 묘한 하모니를 들으면서 들고 나온 찻잔을 조금씩 마셨다. 이런이런. 벌써 식었군. 코이즈미는 찻잠에 남은 차들을 입에다 털어넣은 후 입을 열었다. "벌써 2년이 되어가는군요." 시시한 얘기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벌써 2년이 흘러간다. SOS단 모두가 만난지 말이다. "세월 참 빠르군요." 수능을 앞둔 재수생같은 말을 하고있군. "그거 알고계십니까." 모르고 계신다. "제가 신인을 못본지 1개월이 되어갑니다." 유감스러운데. 먹고 살 거리가 사라진거냐? 하루히랑 대판 싸우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야 한번 시도해줄수 있어.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요." 그런거 전혀 안했어. "그 전에도 스즈미야씨가 잠들 시기에만 아주 가끔 출현하곤 했는데. 요즘은 악몽도 거의 꾸지 않는것 같더군요." 사실 난 저런 녀석이 악몽을 꿀꺼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매일 날뛰는 것에 에너지 소비를 다할텐데 꿈을 꾸는데 사용되는 에너지 가 있겠냐. 있다면 밤중에 뭔갈 자꾸 먹는다거나 몸속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는 두개의 가설이 의심된다. 후자는 좀 오버겠지. "그래도 스즈미야씨는 정상이라면 정상이랄 만한 일반인이니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 건너편에서도 아사히나 선배의 비명소리가 서서히 옅어졌다. 이제 저항을 포기하신건가? "감사합니다." 뭘? 곁눈으로 코이즈미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 물론 스마일 모드였다. 저 스마일이 1개월도 안가서 질렸는데 19개월동안 보면 어떤기분일까. 한번 다들 상상해 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넌 맨날 스마일 모드 하고 살아도 그 잘생긴 얼굴에 주름 안생기냐? "당신 덕분에 스즈미야씨는 좀 별난 여고생이라고만 표현할수 있을만큼 안정된 상태입니다." 그전에는 세계가 오지게 두려움에 떨만큼 별난 여고생이였냐... 그랬군. 확실히 하루히는 옛날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여전히 미스테리 시내 탐방을 하기도 하고, 학교내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점이 있으면 "쿈! 이건 사건이야!" 라고 말하면서 멀쩡한 학생을 우주인이나 외계인이나 초능력자로 몰기도 하고, 이벤트란 이벤트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석 가탄신일에는 부실에 등불까지 걸어놓은 하루히지만, 확실히 옛날에 비해서 나아졌다. 하루히도 어느정도는 일상을 인정하고 있는것일까. "들어와~." 라는 하루히의 활기찬 목소리에 나의 나름 진지한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부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곤 경악했다. "어때 어때? 잘 어울려?" "히잉─. 스즈미야씨..." 아사히나 선배 복장의 수위때문이 아니다. 물론 하루히 복장의 수위때문도 아니다. 하루히 복장의 수위따위 별로 관심도 없다. 아사히나 선배는 네발을 아니 두손과 두발을 땅에 짚은채 부들부들 떨며 엎드려있었고 그위에 붉은색 산타복장을 입은 하루히가 다리를 꼰채로 앉아있었다. 이거 참... "와아-. 두 분다 참 잘어울리시는군요." 그게 아니야 코이즈미. "그렇지? 쿈, 어때?" 어때긴 뭐가어때. 어서 내려와. 내가 뚱한 표정으로 하루히를 바라보고 있자 하루히는 만족스러운듯한 표정을 바보를 보는듯한 표정으로 급전환하고는, "뭐야 그 반응은?" 하면서 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내 반응은 통계적인 반응이다. 의심된다면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이 광경에 대한 감상을 100자 내외로 서술하라고 해봐라. "어이 하루히. 아사히나 선배를 봐봐." "왜?" 하루히는 입을 삐죽 내민채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투르크 제국의 공격을 받는 콘스탄티노플처럼 금방 무너질것만 같은 아사히나 선배의 팔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하루히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지 나를 다시 한번 거만한 표정으로 날 처다보았다. "저게 뭐?" 저게라니. "너무하잖아." "뭐가? 루돌프잖아. 산타의 파트너. 완벽하지?" 아니 완벽하지 않은지에 대한건 일단 후지산이든 킬리만자로산 중턱이든 아무대나 묻어두고 아사히나 선배는 인간이지 순록이 아니라고. 이런 말을 듣고도 내려오지 않는 하루히를 보며 한숨을 내쉰뒤 하루에게로 다가가 하루히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뭐야?" "아사히나 선배가 힘들어하잖아. 봐봐." 나는 하루히가 일어서자 마자 녹초가 되어 바닥에 축 늘어진 가엾은 루돌프를 가르켰다. 하루히도 그 모습을 보며 고뇌하는 척을 하더니. "하지만 루돌프인걸." 이라고 했다. 현실을 직시해라 하루히. 루돌프가 아니라 루돌프 옷을 입은 아사히나 선배다. 그리고 루돌프는 산타의 조수급의 동물이지 산 타의 노예가 아니라고. 하루히는 다시한번 생각하는 척을 하면서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좋아." 라고 했다. 뭐가 좋다는거냐. "산타라면 루돌프를 타야하지만, 고정관념을 깨는것도 좋지. 꼭 오리지날 산타처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루히는 그것도 괜찮겠다. 라고 말하고 있는듯한 표정으로 말하며 단장석에 앉았다. "흐음, 오늘은 여기까지. 이벤트용 복장이니까 지금 많이 봐두면 나중에 질려." 라고하면서 어깨서부터 옷을 벗기 시작하는 하루히. 물론 나는 바로 뛰처나왔다. 나름 감상하고싶은 마음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코이즈미 녀석은 나보다 더 빨랐고. 지금에서야 말하는 것이지만 하루히의 산타 복장은 바니걸 코스프레만큼이나 어울렸다. 치맛자락이 좀 짧긴 했지만 바니걸 코스프레보단 선정성이 덜하겠지. 아니 비슷할려나. 이러는 동안은 아사쿠라같은 녀석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서 다행이군. 걱정할 겨를이 없다는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지만. 한숨을 쉬며 먼저 코이즈미한테 말을 걸어버렸다. 내가 먼저 거는건 싫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됬다. "혹시 다른 생각을 가진 기관에도 날 노리는 사람이 있냐?" 나름 자극적인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코이즈미는 표정의 변화없이 그대로 대답했다. "글쌔요. 거의 없을겁니다. 나가토씨나 아사히나씨 쪽의 분류라면 모를까, 반대 입장의 또다른 기관들은 스즈미야씨의 능력에만 관심이 있 거든요." 다행인것과 동시에 실망이였다. 내 존재의 중요성은 별로 없었군. "아뇨. 그건 그쪽에서일 뿐이지, 아마 당신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면 스즈미야씨는 폭주를 하게 될것입니다." 폭주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을 찾으려고 아마 온갖 행동을 다할것입니다.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당신을 부활시킬지도 모르죠." 농담이냐? "농담입니다. 하하하─." 전혀 안웃겨. 표정부터 의도까지 가식으로 떡칠한 코이즈미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다시한번 진지한 생각을 시작했다. 한때 코이즈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벼랑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꼭두각시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우리'를 '나'로 고치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코이즈미의 말에 따르면 스즈미야 하루히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존재지만 아사쿠라 왈, 나를 죽이면 커다란 정보폭발인가 뭔가하는 내 입장에서는 엄청난 민폐를 끼치는 녀석을 관측할수 있다고 한다. 이대로 계속 하루히와 있다가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루히를 어떻게 때어낼수도 없다. 그건 아마 SOS단도 끝이고 어쩌면 나도 끝일것이다. 세계도 끝이면 같이 끝날 동료가 생긴거고. 아니, 그전에 하루히를 때어내는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인류는 발전하고 발전하여 8세기에 늑대에게 물려 죽는다던가 14세기에 흑사병에 걸려 죽는다던가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21세기가 되었지만, 지금 난 그렇지 않다. 이래선 중세시대 보다 더 위험한것 아닌가. 교실에 갔더니 클레스 메이트의 칼부림에 죽을뻔하고 화장실에 갔더니 처음만난 사람한테 레이져에 맞아 죽을뻔했는데. 정말 이런 희곡의 작가는 누구냐. 누군진 모르겠지만 찾으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견줄만한 글을 쓴것으로 상을 주도록 하지. 그 상은 나의 플라잉 킥이다. 알았냐. 하루히라면... 잘 모르겠지만. 곧 "이제 됬어." 라고 하는 하루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부실에 들어가자 메이드 복을 입은 아사히나 선배와 다시 세일러복으로 돌아온 하 루히가 거만하게 단장석에 양반다리를 한채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백만불짜리 미소도 짓고있었다. 그 미소도 질리도록 본 미소지만 뭐랄까. 아사히나 선배나 코이즈미의 스마일과는 뭔가 다르다. "쿈.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기대되지 않아?" 참 많이 기대도 되겠구나. "원한다면야 기대해줄수도 있어." 이런말을 하며 펼처저있는 철제의자에 앉았다. 그후로 나는 코이즈미와 3라운드 체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하루히는 한참동안 인터넷 서핑을 했으며 잠시동안 존재를 잊고있던 나가토는 커다란 양장본의 책을 보고있었고 아사히나 선배는 놀랍지만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제 곧 재수생이 될 아사히나 선배이니. 그렇게 부실만의 일상이 지나갔다. 재밌냐고 묻는다면 일단 그 녀석을 몇대 두들겨 패준 후 재밌다고 대답할수 있는 그런 일상. 그런데 말이지. 내가 하루히를 만나게 된건 비극일까 아니면 행운일까. 원래 예정대로라면 내가 할일은 집으로 곧장 달려가서 씻고 숙제하고 뻗어 자는것이였다. 그런데 이 세상은 날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에게도 하루히처럼 세상을 맘대로 바꿀수있는 능력이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지. 반대 로 이 세상은 날 맘대로 가지고 노는거같단말이야. 지친 몸을 끌고 집에 도착한뒤 몸을 씻고 나서 놀아달라고 들러붙는 거머리 이상의 흡착력을 가진 동생의 팔을 뿌리치고 하루히의 산타 의 상과 손끝에서 레이져를 쏴대는 이상한 녀석의 이미지가 셋트로 돌아다니는 머리를 잡스러운 파일들로 가득찬 휴지통을 오른쪽으로 클릭 한 뒤 휴지통 비우기를 클릭하듯 깔끔히 지워버린뒤 첫번째 문제를 풀기위해 샤프를 움직이려던 찰나. 책상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콘크리트 바닥을 드릴로 뚫을때 나는 소리에서 볼륨만 확줄인듯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난 핸드폰을 처다보았고 조금 놀랐다. 나가토의 전화번호였다. 안받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시세포가 뇌에까지 정보를 전달하자마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만나." 생각할것도 없다. 나가토의 목소리다. 아무리 현대인이 바쁘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삶을 산다고 해도 사람의 말에 이렇게 감정 제로퍼센트 의 목소리로 대답하진 못할것이다. "어디서? 아니, 왜?" "키타교 앞으로. 그곳에서 설명해줄께." "어... 알았어." 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가토도, 나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있었다. 갑자기 키타교앞으로 나오라니? 생각할 시간을 좀 주면 안되겠냐.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문득 나가토가 전화를 끊지 않고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먼저 끊기를 기다리고 있는것 같았다. "으음... 먼저 끊는다. 지금 바로 나오면 되지?" "그래." "알겠어. 그럼 키타교 앞에서 보자." "그래." 먼저 끊었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끝났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한가지 정확한건,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중요한 일이든 아니든 난 나가게 되겠지만. 바로 행동개시. 옷을 갈아입고 어딜 가냐고 묻는 동생에게 바람쐬러 간다는 거짓말인 것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변명을 한뒤 자전거를 끌고 키타교를 향해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낡은 철제 교문앞에 나가토는 이미 와있었다. 왜 이렇게 빠른거냐? 도착하자 마자 나가토는 나를 한번 흘겨보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자전거에서 내려서 자전거를 끌면서 그런 나가토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몇분동안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나가토가 키타교 하이킹 코스의 옆으로 난 길에 막 들어서려 했던 참이였다. "어이, 나가토. 이제 왜 날 불렀는지 말해주지 않을래?" 이곳으로 계속간다면, 하루히의 집이 나올것이다. 나가토는 발걸음을 멈췄다. 물론 나도 함께. "아직 말해줄수 없다." 그리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냐..." 라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뒤 다시 짧은 커트 머리의 소녀를 뒤따랐다. 예상대로 그렇게 좀 발빠른 거북이와 시합을 하면 팽팽하게 맞설만큼 느린 속도로 10분쯤 걸어가자 하루히의 집이 나왔고 그앞에서 나가토 는 멈췄다. 그리고는 벨을 눌렀다. 잠시, 어이! "나, 나가토. 어떻하려는거야?" "..." 나가토는 말없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정말... 대책없군. "잠시만요-." 라고 하는 하루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책없는 나가토를 보면서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있는 동안, 건너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곧 눈앞에 있던 철제문도 열렸다. "어? 뭐야." 그 집의 바보같고 민페적인 주인이 우릴 보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바보는 하루히고. "왜 왔어?" 다시 한번 물으며 나가토를 처다보는 하루히. 나가토는 나를 또 처다보네. 어이 그렇게 보면 곤란해. 한동안 나가토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동안 난 어떻게 변명을 해야될까 머리를 걸래짜듯이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배운 모든 지식과 경험들을 짜내어서 하나의 결과물을 배출했다. "크리스마스 이벤트 계획에 대해서 이것저것 말할께 있어서..." 내가 이거밖에 안됬다니. 스스로한테 참 실망인데. "잘할 맘이 생긴거야? 좋지. 들어와." 하지만 이 바보는 이렇게 단순한 변명거리도 통하는 대뇌 크기 측정불가의 인물이다. 하루히가 앞장서서 자신의 집 현관을 향해 걸어갔고 나와 나가토가 하루히를 뒤따랐다. "아버지는 해외출장 나가셨고, 어머니는 일때문에 고향에 올라가셨어. 즉 집은 텅텅 빈상태지." 라고 말하면서 현관문을 여는 하루히. 흠... 고향이라. 하루히의 고향은 어디일까나. 고베? 도쿄? 아니면 훗카이도 쪽인가. 설마 화성이나 금성인건 아니겠지. 현관문이 열리며 눈에 들어온 광경은 그 어느집이나 다를것 없는 평범한 집 내부의 모습이였다. 바닥에 깔린 카펫과 거실의 TV, 쇼파. TV옆에서 짹각거리면서 돌아가는 시계. 왠지 의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고 있었냐?" 난 그냥 궁금한것을 아무거나 질문했다. 아무 말도 안하면 왠지 더 의심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그냥." 놀랍다. 그냥이라니, 하루히한테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였다.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대해서 생각좀 하고있었어." 그럼 그렇지. 하루히의 뇌에겐 0.01초의 쉬는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뭐든 간에 어떤 생각을 하지 않고있다면, 그 하루히는 이미 하루 히가 아닐것이다. 하루히는 거실 정중앙에 놓여있는 고타츠(1)앞에서 앉았다. 나와 나가토도 말없이 작은 고타츠앞에 둘러앉았다. 고타츠위에는 노트가 이리저리 멋대로 펼처저 있었고 크리스마스 라는 단어가 여기저기 들어간 문장이 노트를 매우고 있었다. 하루히의 글 씨체인것 같군. 아, 근대 말이지. 나가토. 도대체 여긴 왜 온거지? "뭐 마실것좀 줄까?" 의외로 친절한 하루히였다. 뭐 표정은 약간 성가시다는듯한 표정이였지만. "그냥 물 한..." "아니." 나가토였다. "내가 가져올께." 라고하며 작은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나가토. 그리고는 부엌쪽을 향해 걸어간다. 무슨 생각인걸까. "냉장고에 오렌지 쥬스있으니까 난 그걸로 줘." 라고 말하는 하루히. 전혀 눈치없군. 넌 생각이 쓸대없이 많은거냐 아니면 그냥 아예 없는거냐? 나도 천천히 일어나서 나가토의 뒤를 따라가 보려다가 하루히의 눈치를 보았다. 나를 새침한 눈으로 처다보고 있었다. "따라가면 사형이 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눈이였다. 기양 일어선거 다시 앉기도 뭐 해서 거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척을 했다. 이리저리 어슬렁 거리는 동안 하루히는 말없이 노트에다가 뭔가 를 빠른속도로 써내려갔다. 나의 어슬렁거리는 할일없는 배부른 산짐승같은 발걸음은 하루히의 방으로 추정되는, 'SOS단장님이신 스즈미야 하루히의 방' 이라 적힌 방문 앞에서 멈췄다. 왠지 들어가보고 싶군. "여기 들어가봐도 되냐?" "... 자, 자, 자 잠시. 뭐하는 거야! 숙녀의 방을 함부로 들어가려고?!" 숙녀였냐. 숙녀의 정의는 남학생들이 보는 교실 한가운대서 옷을 벗어재끼는 여고생이 아닌것으로 알고있는데. "절대 안되! 들어가면 진짜 사형이야!" 하루히는 벌떡 일어서더니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다리에 힘을준 채로 나에게 다가와서 약간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나의 손목을 잡 아챘다. 그리고는 하루히의 괴력에 이끌려 고타츠 앞에 괴력의 노인네한테 이틀동안 시달린 끝에 배로 끌어올려진 커다란 물고기처럼(2) 널부러졌 다. 반항할 힘이 없던게 아니라 반항할 시간이 없었던 것 이라고 생각해준다면 고맙겠다. "진짜 쿈 완전 바보야 정말!" 그래서 물어봤잖아. 난 들어간 적은 없었다고. 때맞춰서 나가토의 개미 발소리보다 조금 클듯한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가토가 든 책받침위에는 물이든 컵 두잔과 오렌지 쥬스, 아니 오렌지 쥬스로 추정되는 노란 액체가 담긴 컵 한잔이 있었다. 하루히는 아까 까지만 해도 얼굴에 남아있던 불그스름한 기운이 사라지고는 거짓말같이 미소를 띄우며 책받침 위에있던 오렌지 쥬스를 거의 빼앗는듯한 동작으로 낚아채서 벌컥벌컥, 원샷이군. 하루히답다. 단순한것도 말이다. "캬─. 한잔 더!" 그런데 나가토는 엄연한 손님이거든. 나가토는 나노센티미터 단위의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인후 다시 부엌쪽을 향해 걸어갔다. "흠, 이번에는 갈곳을 세군대 정했어. 한군대는 저번에도 갔던대고, 또 딴곳은 저 코요엔 학원 근처에 있는 고아원, 또 하나는 그냥 키타교 앞이야. 어디가 좋을까?" 다 않좋아. 그리고 그냥 키타교 앞이라니. 크리스마스날 키타교에 사람이 있을꺼라 생각하냐. 아니, 그렇게 치면 3번이 재일 나은것같군 "하나만 골라봐. 하아암-." 길게 하품을 하는 하루히. 그리곤 상체를 뒤로 눕힌다. "으음. 발이 따뜻해서 그런지 잠이오네." 하품때문에 눈가에 약간의 눈물이 맺힌채로 맹한 표정을 하고있는 하루히의 모습은 제법 귀여웠다. 아이돌 가수로 추천하면 나도 돈좀 벌 수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동안 하루히는 몇번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숨소리만 들려왔다. 뭐야, 잠든건가? 다시 발소리가 들려온다. 나가토였다. 하지만 발소리는 고타츠 앞에서 멈춘게 아니라 부엌 입구쪽에서 멈췄다. 보기 드문 광경이였다. 나가토가 약간 놀란듯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나를 바라보면서. 아니... 내가 아니다. 나가토가 바라본 곳은 내 뒤였다. 그리고 나도 그곳으로 눈을 돌렸고 나는 나가토보다 100배쯤은 더 놀란 표정을 지었을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걸아가다가 앞에 뭐가 있어서 발로 걷어차봤더니 알고보니 축구공만한 쥐며느리였다면 아마 이만큼 놀랠 것이다. 내 뒤에는 또 다른 나가토가 서있었다. "흐어억?!" 나는 놀란채로 그대로 뒷걸음질첬다. 아니, 거의 뒤로 기어갔다고 보는편이 더 나은가. 하루히는 여전이 쿨쿨 자고있는 상태다. 어째서 이런 상태에서 자고있는거지? 아니, 이런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다는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거군. 그래. 하루히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어. 지금은 깨어나지마라. "..." 양쪽 나가토 모두다 침묵상태였다. 근대 누가 진짜지? "누가 진짜 나가토냐." 이런 질문을 하는 나도 바보다. 그러자 내 뒤에있었던 또 다른 나가토가 입을 열었다. "둘다 나가토 유키다. 그리고 난 저 나가토 유키의 이시간 동위체다." 이건 또... 또 뭐야 대체! ------------------------------------------------------------------------------------------------------- 1 고타츠) 탁상난로. 쉽게 설명하자면 나가토의 집 거실에 놓여있는 탁자와 같은 류 이다. 2 괴력의 노인네한테 이틀동안 시달린 끝에 배로 끌어올려진 커다란 물고기처럼) 톨스토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비유.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이틀동안의 사투 끝에 거대한 물고기를 잡게된다. 다리가 마비가 된것만 같았다. 그대로 주저앉은채로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두명의 나가토를 번갈아 처다보았다. 어떻게 된거지? 어른판 아사히나 선배도 모잘라서 이제는 미래에서 온 똑같이 생긴 나가토냐? "한 시간 전, 동기화 요구가 있었다." 나가토. 아니 그러니까 미래에서 온 나가토가 아닌 원래의 나가토가 말했다. "거절했다. 그러므로 난 지금 여기에 있다." 동기화 거절. 1월의 그날 이후로 처음이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그보다 미래의 나가토는 어째서 이곳에 온거야? 나가토는 원래 시간여행 같은거 못하지 않았냐? "지금으로 부터 4일 후의 아사히나 미쿠루의 TPDD를 통해 왔다. 동기화를 거절한다면, 직접 이 시공에 오는수밖에 없다. 정해진 루트다. 다 른 경우의 수 없음." 이번엔 미래판 나가토였다. 아사히나 선배의 도움을 받았다니 조금이나마 안심은 되는군. "아사히나 선배는?" "먼저 그 시공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다행이다. 아사히나 선배까지 여기서 돌아다니게 한다면 정말 곤란하다. 나는 조금이나마 놀란 모습을 덜 보이기 위해 벌려진 입을 억지로 다문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히는 여전히 곤히 잠을 퍼질러 자고 있었다. 참 태평하구나. "하루히는 니가 재운거냐?" 현재의 나가토를 향해 물었다. 그 나가토는 한번 오렌지 쥬스가 담긴 컵을 처다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오렌지 쥬스에 뭔갈 넣었나보다, 아니 그보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것이 있다. 내가 맨첨에 나가토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 너희들은, 그리고 나까지 합해서 왜 하루히의 집에서 이렇게 만나야 하는거지?" 두명의 나가토는 침묵했다. 이봐 한명이라도 입을 열라고. 나가토(현재)를 처다보자 녀석도 나를 초점없는 눈으로 처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계산을 통한 결과이다." 무슨 계산인데. "모든 경우의 수. 그중 가장 확율이 높은것이 이곳에 이시간 동위체의 내가 오는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가토도 예지 같은 것도 할줄 알았지. 저번해에 문화재때에도 보여줬던 그것이다. 예지도 그렇게 수학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였냐. 미래에는 예지에 대한 수학공식이 성립될지도 모르겠군. 나가토 유키의 정리 이런것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대첵없이 하루히의 집으로 돌격하는건 무리라고. 그리고 날 대려간 이유 또 뭔데. "필요할 것 같았다." 필요할 '것'이냐. 왠지 하루히의 말투를 닮아가고 있는듯한 느낌인데? 어쨋든 정확한건, 현재의 나가토는 별로 아는것이 없다. 그저 날 이곳으로 대려왔을 뿐이다. 할수없지. 이번엔 고개를 돌려 다른 점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찾아볼수 없는 미래판 나가토를 처다보았다. 의미가 통했는지 그 녀석도 입을 였었다. 그리고 난 곧 그런 의미를 전달한 것을 후회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정보 창조 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 시공간에 왔다." 이게 무슨말인가. 나가토가? 스즈미야 하루히를? 왜? 넌 SOS단 아니였냐? 나가토(미래)는 아까전 만큼이나 충격적인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5일후 스즈미야 하루히은 정보 창조능력을 상실하게 될것이다." 이건 또 무슨소린가. 나에게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고 녀석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발 이것이 꿈이길 빌었다. "그리고 너와 스즈미야 하루히는 죽는다." 나가토의 모습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나가토의 주변이 마구 일그러지기도 했고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죽는다고? 나랑 하루히가? 왜? "난 그것을 재구성하기 위해 이 시공간에 왔다." 정신이 멍해진다. 잘못하다간 의식을 잃을것같다. 그래 생각좀 하자. 5일후 나와 스즈미야 하루히는 죽는다고 했다.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완성되어간다. 한때, 아마 지난 2월달이였을꺼다. 아니 2월달이였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었었지. 급진파와 같은 생각을 가진 기관과 미래인, 우주인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능력을 노리고 있다고. 실패한다면 희생이 크지만 성공할경우 엄 청난 이득을 얻을수 있기에. 하루히는 급진파든 다른 생각을 가진 미래인이나 기관이든 그런 녀석들에게 저번 12월 18일날 맛이간 나가토가 스즈미야 하루히의 능력을 빼앗았던것 처럼 하루히의 능력을 빼앗을 것이다. 그리곤 우릴 죽인다. 굳이 죽일 필욘 없겟지만 녀석들은 악당축에 끼니까 그럴수도 있겠 지. 그래. 진정하자. 지금 이 나가토는 그런 비극적인, 믿고싶지 않은 미래를 바꿔버리기 위해 온것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쉰후 나가토(미래)에게 말했다. "그래. 내가 뭘 도와주어야 하지? 아니... 내가 뭘 해야해?" 나가토(미래)는 나를 응시하였다. 옛날에 한번 본것같은 눈빛이다. "허가를." 뭘 말이냐. "스즈미야 하루히의 정보 창조 능력 삭제에 대한 허가." "..." 하루히의 그 무시무시하고도 괴상하고 미스테리어스한 능력을 삭제한다? "안되. 허가할수 없어." 멋대로 말해버렸다. 하지만 정말 난 허가할수 없다. 하루히의 능력을 없엔다니. 말도 안된다. 웃기지도 않아, 그만둬 전부다. "방법이 없다." "있을꺼야!!" 난 나가토(미래)에게 달려들어 녀석의 어깨를 쥐고는 쌔게 흔들었다. 작은 몸이 힘없이 흔들린다. 그리곤 내가 무슨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황급히 나가토의 어깨에서 손을 때었다. "...... 미안..." "..." 정적이다. 하루히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있고 나가토(미래)와 나는 물론, 나가토(현재)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우리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였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능력을 가지게 된 급진파들은 너와 스즈미야 하루히를 죽이는것 뿐만 아니라 이 우주의 패권을 쥐게 된다. 그러므로 가 장 중요한것은 정보 통합 사념체들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능력을 노리지 않게 하는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두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하나는 정보사념체를 완전히 삭제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정보 창조능력을 애초에 삭제시켜 버려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럼 첫번째 것을 하면되잖아. 잠시동안 하루히의 능력을 긁어내든, 뺏든, 아니면 부탁하든 간에 어떻게든 해서 급진파 녀석들을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하면 되잖아."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정보 통합 사념체는 사라진다. 정보 통합 사념체는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정보를 삭제하면 같은 정보 를 공유하고 있던 모든 정보 통합 사념체는 소멸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정보 통합 사념체는 그것을 바라지 않고있다." 정신이 멍해진다. 그래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능력을 없애겠다고? "허가를 내리지 않는다면." 녀석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내가 잘못 본것일지도 모르지만 나가토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보 통합 사념체의 명령에 따라 너를 없앨수도 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건 협박이잖아. 뇌의 하드용량이 한계를 알리며 적색경보를 울려대기 시작한다. 귀가 멍해지고 눈앞이 컴컴해지 며 모든 감각을 상실한것 같다. 이런 머리가 무지막지하게 복잡한 기분. 오랜만이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정보 창조 능력 삭제. 그래. 어쩌면 바람직한 것이다. 악당녀석들. 아니 그것도 순전히 내 기준에서의 악당이지만 어쨋든 그 악당녀석들의 손에 하루히의 능력이 들어가 우주의 패권을 잡게 될 것이고 우주 전체가 난리가 날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하루히가 죽는다. 나가토의 말이니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기관에서 바라던 것이다. 스즈미야 하루히가 조용히 평범한 여고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어쩌면 미래에서 온 사람들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바라고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없는 하루히는 내가 알고있는 하루히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주변에 수많은 사건들을 달고 다니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 난 SOS단에 들어가면서 부터 비일상이 되어가는 일상이 조금씩 재밌어졌다. 커다란 꼽등이나 신인같은걸 만나는건 별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름 재밌었던것 같다. 하루히의 능력을 없에는것. 하루히는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능력이 사라지는걸 원치 않을것이다. 당연하지. 이 제 더이상 재미있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우주인은 진화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뭐다 하면서 나가토를 철수시킬 것이고, 미래인은 자신의 시공으로 돌아갈테고, 기관에서는 더이상 하루히에게 볼일이 없을것이다. 그래 이게 우리가 원하던 것인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것.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쩌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것은 좀더 재밌는 일상을 보내고 싶은 나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하루히가 이대로 였으면 좋겠는걸. 약간 성격만 특이한 여고생이 아닌 세계를 언제 바꿀지 모르는 지칠줄 모르는 하루히로 말 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하루히는 하루히이고 하루히일뿐이다. 지금의 하루히가 갑자기 능력을 잃고 평범한 여고생이 될리가 없다.. 내가 생각해도 단순하군. 나름 좋은 사고방식 이다. 머리를 나가토(미래)에게로 돌렸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SOS단을... 포기해줘." 수많은 일이 떠오른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이때의 평범한 시절과는 다른, 비일상적인 하루하루. 그것을 포기할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난 아직 젊다. 아니 젊다기 보다는 어리다는 표현이 어울릴려나. 어쨋든 난 아직 죽을나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나가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때까지 수많은 일을 겪어오면서 자신이 어떤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확고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확고하냐면 A제곱 플러스 B제곱은 C제곱(1)이냐 라고 묻는 OX퀴즈가 나온다면 바로 정답을 말할수 있을만큼의 확고함이다. "그럴순 없어. 절대로 허가하지 않는다. ------------------------------------------------------------------------------------------------------- 1 A제곱 플러스 B제곱은 C제곱)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말함. 사방이 조용하다. 들리는 소리는 창문 밖에서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와 하루히의 숨소리뿐. 두명의 나가토는 모두 약간 놀란듯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아마 다신 이런 광경을 보지 못할것이다. 사진기가 있다면 바로 찍어버릴텐데 말 이지. "너의 뜻이... 하루히와 너의 죽음이라면..." 나가토(미래)가 고개를 푹 숙여 나의 시선을 피한채로 말했다. "아니, 그게아니다." 내 말은 그게아니다. 난 죽고싶지도 않고 SOS단이 해체되는 꼴을 보고싶지도 않고 하루히가 죽는건 그것들 보다 더 보고싶지 않다. "나가토, 넌 미래를 바꾸러 이곳에 왔다고 했지." 끄덕─. "너 흑백논리라는거 아냐?" 나가토가 숙였던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으음... 예를 들자면 어떤 녀석이 아이스크림을 사준답시고 바닐라맛하고 초코맛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단말야. 그럼 우리는 그 둘중 하나 만을 선택해야해. 뭐 이런식의 것을 흑백논리라 하지. 흑 아님 백. 하지만 말야. 분명 아이스크림엔 딸기맛도 있고 슈팅스타도 있을수도 있 고 초콜릿이라고 해도 민트 초콜릿맛이 따로 있을수도 있단말야." 내가 하는 말이지만 정말 쓸대없고 알기힘든 비유들이다. 코이즈미에게 점염된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넌 지금 나에게 단 두개의 선택권을 줬어. 그중 하나는 미래를 바꾸는 방법이고 나머지 하나는 미래가 바뀌지 않을때 적용되는 것 이겠지." 나가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라고 말했다. 자. 연설은 계속된다. "하지만 말이지. 미래를 바꾸는 것에 한가지 방법만 있다는건 좀 이상하잖아." 나가토는 약간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나가토(미래)는 내가 "허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 이후로 계속 놀란듯한 표정이였다. "난 미래를 바꿔볼꺼다. 그 웃음도 안나오는 엉터리 미래가 아닌 정상적인 미래로 말이야. 급진파를 막을꺼다. 물론 나 혼자선 무리겠지. 하 루히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고 코이즈미와 지금의 나가토는 물론, 어쩌면 아사히나 선배도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리고 그 모두만큼이 나 중요한 사람은 말이지..." 나는 나가토의 작은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아직 다하지 않은 말을 마저 끝마쳤다. "어이. 나가토. 날 도와줄꺼냐?" 나가토의 흑진주같은 두 눈은 날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로 한참동안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는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말을 듣는순간 자전거의 바퀴에 바람이 빠지듯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보니 자전거 바퀴에 바람좀 넣어야 겠던데. 아 니 지금 이런 생각을 왜 하고있는거냐. 긴장이 풀려도 너무 풀렸다. 나는 나가토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천천히 때어내고선 한걸음 물러섰다. "이제 가야한다." 나가토(현재)가 말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나가토(현재)는 손으로 시계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 시계는 정확히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좀 늦었군. 하지만 이 두 나가토와 함께 갈순 없다. 누구한테 발견이 되기라도 한다면, 거기에다가 사진까지 찍혀서 인터넷에 두명의 나가토와 길을 걷 고있는 나의 사진이 유포된다면 난 오컬트 매니아들의 집중 탐구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전에 난 하루히한테 시달리게 될것이다. 저 두 나가토는 뭐냐고 말이다. 생각만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군. 눈도 뜨지 못할정도로 무서운 공포영화를 볼때보다 더 소름돋는다. "어이. 나가토. 그러니까 현재의 나가토. 먼저 너네 집에 가있어. 나중에 이녀석도 보낼께. 둘이 같이 있는게 발견됬다가는 일만 꼬일테니까." 나가토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내가 말을 끝마친지 1.5초쯤 후에서야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하루히 집 의 현관으로가 신발을 신었고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10분쯤 있다가 나가자." 나가토(미래)가 끄덕인다. 벌써 똑같이 생긴 미래와 현재의 나가토를 대하는 것에 익숙해지다니. 내 몸은 비일상 내성을 띄게 된것 같다. 내 몸에 이런 유익한 내성을 불어넣은 녀석에게 고마워 해야겠군. 하루히. 너가 아니였으면 이런 내성이 필요하지도 않았겠지만. 나가토(현재)가 가져왔던 물잔을 천천히 들이켰다. 이미 얼음은 다 녹고 냉수라 불리기는 부적합한 온도의 생수가 되어있었다. 앞으로의 일에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급진파를 어떻게 막을것인가. ... 답이 안나온다. "어이 나가토. 오늘하고 내일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줘." 그래서 이 나가토(미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질지 아마 이 나가토는 알고 있을것이다. "앞으로 삼일간은 특별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좋아. 생각할 시간과 쉴 시간은 충분히 있을것 같다. 아니 쉴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23일 오전 11시 47분에 하루히는 납치될것이다." 암울하군. 일요일날부터 납치되어야 하다니. 하루히님도 참 고생하시는군요.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변경될수 있는 사항들이다." 그냥 말하지 말지 그래.. "그러냐..." 라는 말로 대수롭지 않은듯 나가토의 말을 흘려버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뭐 나도 손님인데 괜찮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냉장고로 가서 오렌지 쥬스를 꺼내왔다. 참, 무슨 좀도둑 같잖아. 오렌지 쥬스를 컵에 따르고 나서 거실로 되돌아 오는 도중에 하루히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큼지막하면서도 깔끔한 글씨체가 쓰인 문패가 달린 방문. 물론 그 문패엔 'SOS단의 단장님이신 스즈미야 하루히의 방.'이였다. 만약이다. 자신에게 2년간 친하다면 친할만한 사이로 지낸 여자 친구가 있다고 치자. 물론 그 여자 친구는 교제관계의 여자 친구가 아닌 그 그대로 여자인 친구를 의미한다. 어쨋든 그 녀석의 방은 커녕 집에도 한번도 못가봤다고 치자. 그리고 지금 녀석의 방을 구경할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들키지도 않을것이라 후환도 전혀 두렵지 않은 상태이다. 그럼 당신은 어떻하겠는가. 아마 대부분 방문을 열어보고 잠시만이라도 구경해 봐도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난 3초전에 멋대로 정한 통계적 수치를 따라 하루히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나가토는 별 신경쓰지 않는듯 그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내렸다. 끼이익─.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서서히 하루히의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개봉박두다. 사실 내가 예상했던것은 천장과 벽의 벽지가 SOS단 엠블럼 마크로 이루어져 착시 현상을 일으킬만큼 정신없고 땅바닥에나 벽이나 천장등 에 알수없는 문자들이 마구 적혀있을줄 알았다. 의외로 하루히의 방은 평범했다. 평범하다고 보기보단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말할수 있을만한 방이였다. 방은 좁았다. 일단 벽지는 그냥 평범한 올 화이트 벽지였다. 문 바로 옆에 1인용 침대가 있었고 그 옆의 탁상에 캐릭터 시계가 있으며, 그 반 대편에는 책상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교과서로 추정되는 책들과 공책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예상대로 이녀석은 공부를 별로 안하는것같 다. 책상 옆에있는 작은 책꽂이에는 10권 가량의 책들이 꽂혀있었다. 자세히 보니 두권은 동화책이 있고, 고등학생 필독 도서라고 큼지막해 적혀있고 그밑에 뭐라고 써저있는 책도 두권 있었으며 나머지는 다 문제집이였다. 그것도 버리기 귀찮았는지 중학교 1학년때의 문제집에서 부터 고등학교 2학년 것 까지 모두 있었다. 그 책장위에는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 에피소드 0과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 에피소드 1' 예상대로 하루히는 책하고는 거리가 좀 있군. 조심스럽게 방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자 아마 하루히가 숨기려고 했던 덧이라고 예상되는 것이 보였다. 중간크기의 TV만한 크기의 코르크 보드였다. 그 정 중앙에는 A4용지에 큼지막하게 복사되어 있는 SOS단 엠블럼 마크가 압정에 의해 박혀있었고 주변에는 수많은 사진이 붙여져 있었 다. 아사히나 선배의 코스튬 의상, 고도에서 찍은 사진들, 문화재의 경음악부 공연 사진과 저번 크리스마스 이벤트 사진, 그 해 마지막날 츠루 야 선배의 별장에서 찍은 단체사진 등등. "뭐야.,. 별거없네..." 이쯤 할까 하면서 문을 닫으려던 찰나. 하나의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코르크 보드의 가장 가장자리 아래쪽 부분에 붙어있는 사진이였다. 나의 사진. 그것도 자고있는 모습이다. 반쯤 닫은 문을 다시 열어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냥 사진이 보고싶었을 뿐이다. 가까이 가보았다. 내가 봐도 약간 멍청한 표정으로 자고있는 내 모습. 아무래도 고도에 가기 전, 배에서 찍힌 사진인것 같다. 후세에 나의 이 어리석음을 알리니 뭐니 하면서 찍은 그 사진이다. 나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것과 동시에 겨울방학에 코이즈미가 또 고생을 할것을 생각하며 갑자기 터질듯 나오는 웃음을 겨우 막아냈다. 뭐 사실 웃어도 별 상관은 없지만 밖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이곳에 온 나가토가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예의라는 거다. "하루히도 참... 이걸 꼭 걸어놔야 되냐." 난 혼자 중얼거리며 보는김에 다른 사진들도 구경해보기로 했다. 아무생각 없이 그 옆에있는 고도에서의 단체 사진을 들췄다. 그 아래에는 다른 사진이 붙어있었다. 또 내사진이다. 그것도 또 자고있는 사진. 이건 또 언제찍은거지? 이렇게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루히의 카메라에 희생양이 되고 있었던건가. 재길. 앞으로 하루히앞에서 잠자나봐라. 기억을 더듬었다. 수많은 뇌세포의 일거수 일투족을 조사한 결과 하나의 답이 나왔다. 저번, 비가 내리던 어느날. 아무래도 그 날인것같다. 하루히가 가져온 교사용 우산을 쓴 덕에 그나마 옷이 비에 덜 젖었었지. 근대 왜 하필 잠자는 것만 찍은거야? 그렇게 우습냐? 나는 다른 사진도 살펴보면서 19개월동안의 추억들을 다시 회상했다. 찍은지도 몰랐던 사진도 꽤 있었다. 나랑 코이즈미가 체스를 두고있 는 모습, 아사히나 선배가 나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고 계신 모습, 나가토가 두꺼운 양장본의 책을 보고있는 것을 "역시나" 라고 말하고있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 컴퓨터 연구부로 부터 얻게된 노트북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있는 내 모습. ... 다 내가 찍혀있군. "이제 가보는게 좋을것 같다." 뒤쪽에서 익숙한, 그리고 무감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가토가 인체에 무해한 무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응... 어..." 그렇게 대답하고는 바로 방을 나왔다. 문을 닫는것도 잊지 않았다. 안 닫았다가는 하루히의 방을 구경한 것을 하루히에게 들킬수도 있으니 말이다. 방을 나오자 나가토─물론 미래에서 온 나가토다─는 현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나도 그 뒤를 말없이 뒤따르며 고타츠앞에 뻗어서 자고있는 하루히를 곁눈으로 처다보았다. 이대로 가면 내일이 되면 파리채에 맞아 산산히 분해된 그리마(1)처럼 팔다리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할만큼 하루히에게 얻어 맞을지도 모른다. 난 잠시 나가토에게 양해를 구해 하루히의 노트를 맨 뒷장을 펼친뒤 대충 휘갈겨 썼다. '하루히.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간다. 내일보자.' 흐음. 완벽해. 남의 눈에는 전혀 완벽해 보이지 않겠지만 하루히에겐 단순한것이 완벽한것이다. 곤히 잠든 하루히의 얼굴옆에 노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옆에서 하루히의 작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참 잘도 자네. 그런 녀석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분명 돈이 될만한 얼굴인데 말이야. 외모를 좀더 획기적으로 사용하라고. 난 하루히의 얼굴에 낙서를 하고싶은 갑작스러운 충동을 나가토의 무표정한 얼굴로 막아내고 걸을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짧은 커트 머리 의 나가토를 따라 하루히의 집을 나섰다. 그동안 나가토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흐음. 집에가서 발씻고 잠이나 자야지. 아니, 숙제를 아직 못했군. 그래도 아직까진 이런 잡스러운 생각을 할수 있었던 나였다. ------------------------------------------------------------------------------------------------------- 1 그리마) 지네와 비슷하게 생긴 절지동물. 조금만 충격 받아도 몸이 분해되는 것으로 유명함(?) 당신은 당신에게 복근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이상한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말그대로다. 아마도 나는 상당한 복근이 있을꺼라 생각된다. 아니, 어쩌면 그냥 단단한거일뿐일지도. 갑자기 무슨 소릴 하냐고 묻는다면 지금 내 배위에서 니킥 십삼단콤보를 줄기차게 달성하고있는 동생녀석을 보면 이해 될것이다. 아... 그래도 아프다. 저번에는 동생의 모닝콜 니킥에 한번 잘못 맞아서 학교에 하루 못나온적도 있었는데. 난 녀석을 무시하고 한참 즐기고 있던 달콤한 램수면에 다시 빠저드려 했으나 동생에게 그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십삼단 니킥이 잘 통하지 않자 이번엔 내 팔을 녀석의 괴력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 힘은... 하루히의 그것과 비슷하다!! 라고 느낀 순간 동생의 손에 의해 몸은 침대를 벋어나 궤도이탈. 우주를 떠돌아 다니는 이것저것이 달에 박혀 크레이터를 만들듯이 내 몸은 그대로 단단한 땅바닥에 직격탄을 날렸다. 아... 잠 확깬다. 수면제 한통을 통째로 복용한뒤 영원한 잠에 빠지려고 해도 이거 한번이면 다 해결될것 같다. 난 세겹으로 접혀있는 내 팔을 본뒤 "으억..." 하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아프다. "어이! 좀 살살좀 하는게 어때." "그러면 쿈이 안일어나잖아? 엄마가 얼른 아침밥 먹으레." 라고 말하면서 아까전 땅에 직격탄을 날린 소리에 잠이 깬 샤미센을 한손으로 안아들고는 방을 나갔다. 도대체 이방은 내 방인거냐 저 녀석 방인거냐. 그것도 아니면 샤미센 방인거냐. 나는 부시시한 상태로 잠시 멍한상태로 서있다가 천천히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의자에 대충 걸려있는 교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써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SOS단의 단원으로써가 아닌. 언제부터 였을까. 이 하이킹 코스를 피크닉 수준으로 가볍운 발걸음으로 걷게 된것은. 이정도면 후지산 등반도 문제 없을것 같은데. 언제 한번 하루히한테 권유해볼까. "여어, 쿈." 질리면서도 짜증나는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온다. 그리곤 곧 나의 어깨를 툭 치며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늘어놓겠지. 바보 타니구치 녀석. 제발 나한테 따라 붙지좀 마. 내 몸값이 한없이 제로에 가깝게 폭락하는것이 느껴진다. 원래 그렇게 높지도 않았지만. "요즘 스즈미야랑은 잘되가냐?" 녀석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뭐가 잘되간다는 거야? 나의 뇌가 멋대로 과거의 기역을 떠올렸다. 이 바보 타니구치 녀석은 옛날에 한번 웃기지도 않는 '하루히 열애설' 을 퍼트린적이 있었다. 그 걸로 난 히가시 중학교 출신의 녀석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녀석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했지. 자기는 자신이 퍼트린 헛소문이 아니라고 잡아 땠지만 일년넘게 코이즈미의 관심법을 봐오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습득하게 된 나는 당황하는 타니구치의 표정에서 녀석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흠씬 두들겨 주려다가 옛날 나가토 사건까지 들춰내서 할수없이 그만뒀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타니구치. 너 지금 나 놀리는거냐? "재밌냐." "푸하하─. 왜? 맞잖아. 아, 참고로 난 아주 잘되가고 있어." 결국 자랑하려고 그런거군. 어쨋든 맞긴 뭐가 맞아? 맞고싶냐? "진정하라고 쿈. 우리 둘에게도 이제 매일 찬란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어. 캬─. 이런 날이 올지 누가 알았겠냐." 찬란하긴 뭐가 찬란해. 매일 하루히가 무슨 짓을 할지 조마조마 하고, 코이즈미의 미칠듯이 질리는 스마일을 보며 다이아몬드 3연패를 하 는 기분을 니가 아냐. 대신에 아사히나 선배의 따뜻한 차가 있긴 하지만. 그 후로 계속되는 타니구치의 쓸모없는 자랑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린뒤 삼투 현상으로 뇌속에 녹아든 약간의 정보까지 완벽하게 폐기처분을 한 나는 그대로 쭈욱 걸어서 나의 반에까지 직행했다. 문앞에서는 항상 나보다 일찍 와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하루히의 뚱한 표정을 감상할수있었다. 감상문을 쓴다고하면 절대 5줄 이상으 로 쓰지 못할 모습이다. 나는 말없이 녀석의 앞자리에, 그러니까 내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선 시간표를 확인했다. 나도, 하루히도 아무 말이 없었다. 뭐 평소때와 크게 다를건 없지만. 아무 말없이 하늘을 처다보는 하루히의 얼굴은 왠지... 불편해 보였다. "무슨 일 있냐?" 조심스럽게, 별 조심스럽게 보이진 않지만 상대가 하루히라는 점에서 충분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악몽을 좀 꿨거든." 악몽이라. 코이즈미의 말로만 듣던 악몽인가. 어떤건지 나도 한번 들어보자. "됐어. 그런게 있어." 뭐가 있는데. 라고 묻는 나의 질문은 가볍게 침묵으로 무시당했다. 내가 다시 1교시 책을 꺼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고 했을때였다. "쿈." 반쯤 돌아간 고개를 급정지 시킨뒤 다시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왜?" 하루히의 시선이 하늘에서 나의 얼굴로 옮겨갔다. 뭔가 우울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이거 큰일인데... 아사히나 선배, 코이즈미. 미리 말해두 자면 난 아무 잘못없어. "너... SOS단 안 그만둘꺼지?" 이건 또 뭔말인가. "좀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는게 어떨까." "그러니깐..." 하루히는 뭔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그만둔듯 입을 작게 벌린채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왜그래? 어쩌면 지금쯤 코이즈미는 어딘가에서 나타난 신인과 이종격투기 한판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난 다음에 한 하루히의 말에 조금 놀랐다. "SOS단을 포기하지 않을꺼지?" 하루히의 말에 잠시 머릿속이 하예졌다.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어제의 일들이 마하의 속도로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가토 그리고 나가토. 그 나가토의 56메가톤급 폭탄선언. 그리고 미래에서 온 나가토의 한마디. 'SOS단을 포기해줘.' 설마 그 말을 무의식중에 들은건가? 하루히가 말한 악몽은 그것인가. 하루히는 그런 악몽에 침울해 질만큼 약해진건가. 그게 아니면... "무슨 소리야. 넌 포기할꺼라고 생각하냐? 포기하면 니 손에 아작날께 분명한데." 난 적당히 둘러댔다. 하지만 이건 진심이다. 만약 "그럴지도" 라고 한다면 녀석은 나를 계단으로 끌고가 천천히 협박을 시작할것이다. 아마 그래도 안되면 고문을 할지도. 흐음... 싫다. 마조히스트도 아니고 좋을리가 없잖아? 하루히도 그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는지 그세 우울한 표정은 차원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지? 좋아. 이틀전에 줬던 감점은 무효화 하도록 하지." 별로 기쁘진 않아. 하루히가 뚱한 표정을 나에게 떠맞겼는지 난 뚱한 표정으로 하루히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 녀석은 24k자리 금괴 몇십개쯤의 가치가 될만 한 미소로 대답하였다. 그런 녀석을 향해 의미없는 한숨을 내쉬자 때에 맞추어 종이 울렸다. 이제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이제 제법 모범생이다. 앞에 나름이 붙어야 더 적합하긴 하지만. 수업시간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선생이 칠판에 휘갈겨쓰는 원소기호를 하나도 빠짐없이 노트에 옮겨쓰고 쉬는 시간에 친구 녀석들과 의 미없이 반을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숙제나 예습을 한다. 하루히도 그런 나를 나쁘지 않게 보는것 같았다. 개과천선이랄까나. 아니 그건 별로다. 난 바닥에서 돌아다니고 있던 녀석도 아니고 지금이 정상에 올라와 있는것도 아니다. 어쨋든 그 계기는 역시 어머니의 압박이였다. 고등학교 2학년의 기말고사까지 망쳐버린 나는 어머니에 의해 입시학원에 끌려갈뻔 했다가 앞으로 어떻게든 시험을 잘 보겠다는 진심이 60%정도 첨가된 일종의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이러고 있다. 만약 입시학원에 끌려가게 된다면 부활동은 커녕 잘시간도 부족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좀 분한건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아니 나름 노력했는데 아직도 하루히보다 훨씬 아래다. 역시 평범한 인간이 특별한 인간을 뛰어넘 을수는 없는것일까. 하긴, 저건 그냥 특별한 수준이 아니지. 내가 어떻게 신을 이길수 있겠는가. 무슨 데쓰노트의 L도 아니고. 어쨋든 그런 형용사 나름과 제법이 붙은 모범생인 나는 수업시간과 쉬는시간 내내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솔직히 말해 잡생각을 전혀 안한 건 아니지만 사람이 공부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진짜 모범생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가짜 모범생이란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바쁘디 바쁘게 4교시를 끝마치고 속도위반으로 걸릴만큼 빠른속도로 차가운 점심밥을 위장속에 밀어넣은 뒤 바로 부실을 향해 내 려갔다. 물론 하루히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굳이 이렇게 바쁘게 행동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세 나는 또 이렇게 바쁘게 부실을 향하게 되는 전혀 쓸모없는 반사 작용이 생겨나게 되었다. 쯔쯔, 얼마나 학대당한걸까, 내 몸이여. 스스로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터벅터벅 복도를 걷다보니 어느세 걸음은 부실앞에서 멈추었다. 똑똑─. 아사히나 선배. 부디 혀짧은 목소리로 "네에─."를 외쳐주세요. "들어와." 잰장. 전혀 예상못한건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현실을 잔혹하게 만들 필욘 없잖아 하루히. 힘빠진 손가락으로 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공기가 내 피부를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인터넷 서핑중인 하루히와 그 옆 구석에서 평소때와 다름없이 두꺼운 양장본의 책을 감상중인 나가토, 나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짓고계신 찻 잔을 든 아사히나 선배와 "심심했는데 마침 잘됬네요." 라고 말하고 있는듯한 스마일로 날 처다보고있는 코이즈미. 4인 4색이다. 과연 난 어느 색에 물든걸까. 아마 4가지 색이 모두 섞여 괴상한 색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뭐... 확실히 나도 이제 평범한 학생이라 말하기는 글렀지. 이게 더 좋기도 하고 말이다. 난 문을 닫은뒤 접이식 의자를 펼처 코이즈미의 앞자리에 앉았다. 할것은 이미 정해져있다. 책상 위에는 바둑판이 올려저 있었다. "좀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녀석이 먼저 말을 건냈다. 그래, 이 몸이 요즘 공부라는걸 좀 하느라 피곤하단다. 그 스마일 소년은 쓸대없이 싱글벙글거리며 바둑판을 펼치고는 정 중앙에 검은돌을 내려놓았다. 뭐냐. 바둑이 아니라 오목이였냐. "바둑은 맨날 제가 지잖습니까? 지기만 하는건 재미없는 법이죠." 넌 그런 소리할 자격 없다. 난 놀아주고 있는거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채 그 옆에 하얀돌을 올려놓았다. 딱─. 딱─. 딱─. 딱─. 고요한 부실 안에서는 아사히나 선배가 차를 끓이는 소리와 인터넷 서핑에 잔뜩 빠진 하루히의 콧노래 소리, 그리고 바둑알이 바둑판에 부 딪히는 경쾌한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나 더 붙이자면 나가토의 책 넘기는 소리랄까나. 나름 비일상적이면서도 평화로운 상태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때이기도 하다. 오목 2회전이 끝나서야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우리는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공중 분해되듯 부실앞에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런 평화로운 맛을 언제까지 즐길수 있을까. 하루히. 넌 답을 알고있냐? 이해가 안간다. 뭐 어떻게 풀라는 거야? 쉬는시간 마져도 나의 대뇌 함대는 풀리지 않는 무적의 수학문제 함대에 의해 차가운 바다속으로 침몰하고 있었 다. 아─. 비장해라. 이래서 복습같은건 싫다. 희미해진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힘든데 거기에 문제의 난이도는 더 추가되니 말이다. 눈앞이 캄캄하구나. 나의 미래는 갈수록 암흑속으로 빠져드는것 같다. 이래선 수능때 나가토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상은 어머니에게 목숨 을 구걸하는 수밖에 없을 것같다. 마지막 쉬는시간, 수학 문제집과 전략 시뮬레이션을 능가하는 대전을 펼치고 있었다. 뭔가 떠오르려고 하는 순간 내등에 뾰족한 무언가로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 등뒤에서 이렇게 팬이나 샤프로 찔러댈 녀석은 한명뿐이 지. "뭘 그리 열심히해?" 하루히가 아까전부터 머리를 쥐어뜯고있는 날 의식했는지 궁금하다는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하루히라면 뭔가 이해가게 설명해줄지도 몰라. 난 녀석과의 일대일 전투를 포기하고 하루히에게 배턴(1)을 넘겨줬다. 자 달려라 하루 히. 무적의 수학 함대를 바다깊숙히 침몰시키는거다. 천국에서 타이타닉호에게 안부나 전해라고 해. "하루히. 좀 도와줄레?" 하루히가 "응?"하고 말하며 고개를 쭈욱 내밀었다. 난 문제집 맨 오른쪽의 문제를 손으로 가르켰다. "그거 미정계수(2) 문제 아니야?" 그렇습니다. 하루히 교수님. "이거 쉬운데." 흠... 쉽군... 쉽다라... 삶의 의욕이 제로를 향해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이건 틀림없는 마하의 속도다. 미국의 비싼 어떤 스텔스기보다도 빠를것이다. "전개 하면 AX^2 -(4A+2B)X + 4A+C이 나온다." 내가 이뤄낸 유일한 성과를 공개했다. "이거 양변의 각 항의 계수가 같아야 되는건 알겠지? 아무리 너라도 그건 알꺼야. 그걸 이용하면 되잖아. 정말 뻔한 문제네..." 그만. 그냥 답이나 말해봐. 하루히는 문제집에 내가 건내준 샤프로 복잡하고도 긴 식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 A가... A가 1이니까 AX^2-(4A+2B)X+4A+C 이잖아. 그러니까 A 이콜1, B 이콜 -4, C 이콜 -9. 끝." 하루히 프로페서가 쓴 정답아래 두번 밑줄을 그은후 시시하다는듯 문제집 위로 샤프를 던져놓는 하루히. 괴물. 괴물이다, 잰장. 이 문제를 10초만에 다풀다니. 조금만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줄순 없는건가. 하루히의 유전자는 어째서 이렇게 뛰어난거지? 그 비상한 머리 를 좀 나눠줄수 없냐. 너의 머리에만 갖혀있어 봤자 별로 빛을 볼것같진 않으니. 하루히는 별 볼일 없다는듯 다시 책상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다본다고 미확인 비행물체라도 나오냐. 진짜 나와버 리면 곤란하지만. 그런 하루히를 향해 의미없이 어깨를 치겨올린후 다음 주자 지구과학을 향해 비장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저번에도 한번 언급했던것 같지만 파블로프라는 아저씨는 엄청난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알다시피 반사 작용인데, 한 생물체가 어느 환경에 반응에 적응되어 그 반응에 의지와는 관계없이 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그래서 난 지금 부실로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고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집에 있는시간보다 부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램수면과 논램수면에 대한 설명만큼이나 쓸모없는 설명을 하는동안 어느세 내 몸은 부실앞에 도착해있었다. 목소리를 한번 가다듬은후 노크. 오늘은 하루히가 청소 당번이라 아사히나 선배의 그 귀여운 혀짧은 소리를 들을수 있을것이다. "들어오세요." 잠시 이 목소리는... 오, 신이시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따끈따끈한 밥속에서 바퀴벌레 반마리를 발견한듯한 기분 더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문을열었다. 목소리의 장본인은 코이즈미였다. 부실 안에는 코이즈미와 나가토만 있었다. 무지하게 조용하군. "아사히나 선배는?" "청소당번 이랍니다." 녀석은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미 바둑판을 셋팅시켜놓았다. 별로 할 기분 아닌데. 머리쓰는 거라면 이제 질렸다. "정말 열심이시군요." 놀리는거냐 칭찬하는거냐. 둘다 싫다. "아뇨. 진담입니다.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있는 당신을 본적은 별로 없었던것 같아서요." 그런가. 그세 코이즈미 저 녀석한테 그런것까지 간파당하고 있었더건가. 난 코이즈미를 대신하여 바둑판을 반으로 접어놓고 옆으로 밀어놓았다. 그냥 뻗어 자고싶군. 책상위로 올린 팔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나가토의 얼굴이 보였다. "어이, 나가토. 미래에서 온 나가토는 잘 지내냐?" 난 말해놓고 잠시 흠칫했다. 농담 수준으로 말한거였지만 문제는 그게아니라... 코이즈미는 이 사실을 모를텐데. 곁눈으로 코이즈미의 표정을 살폈다. 진지해져 있다. 재기랄. "내가 미래에서 온 나가토 유키. 과거의 나 대신에 내가 이곳에 왔다." 이것으로 난 "아아, 코이즈미. 재미없고 쓸대없는 농담을 한것 뿐이다."라는 변명조차 할수 없어졌다. "무슨... 말씀이시죠?" 코이즈미가 물었다. 나가토에게인지 나에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복잡해졌다. 뭐 언젠간 알려주게 되겠지만. 오늘부터 코이즈미의 알기힘든 해석들을 들어야하다니. 난 몸과 정신이 모두 지친 상태라 고. 슬쩍 나가토를 처다보는 것으로 도움요청의 표시를 보내었다. 의미가 전달된것일까. 나가토는 천천히 입을열었다. "말해도되." 그 의미가 아닌데. 다시한번 코이즈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3일동안 실크로드를 해매다가 조그만한 오아시스를 발견한듯한 눈이였다. 어쩔수 없지 뭐. 다 불었다. 나를 죽이려고 한 그 괴상한 녀석부터 어제 나가토의 수소폭탄급의 발언도. "흠. 이제 좀 후련하시겠군요. 진작 말씀해주시지 그랬습니까. 힘이 닷는데까지 도와드릴텐데 말이죠." 전혀. 힘이 닷는데까지 도와줘서 일이 더 꼬일까봐 걱정이다. "아마 그런일은 없을겁니다." 웃으면서 그런말 하지마. 무엇보다 웃을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점이 있군요." 녀석이 검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뭐가 이상한데 또? 이 상황보다 더 이상한게 있단말이냐. "나가토씨. 뭐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코이즈미는 나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는것으로 대답하고 나가토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가토도 읽고있던 무지막지한 크기의 양장본을 천천히 덮으며 코이즈미를 올려다보았다. "미래는 평범한 사람의 손으로도 변형될수 있습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냐. 마치 "너같은 녀석이 감히 그런 비극적인 미래를 바꿀수 있을꺼라 생각하는거냐?" 라는 의미를 내포한듯한 저 말은. 나가토는 곧 대답했다. "가능하지만 희박하다. 하지만 다른 요소가 개입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책장으로 천천히 걸어가, 양장본의 책을 나가토 전용 책장에 넣고 그 옆에있는 붉은 표지의 책을 꺼내어 다시 나가토 전 용석을 향해 걸어갔다. 코이즈미를 처다보자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짓는 녀석. 기분나쁘다. "그게 이상하다는거냐?" "아뇨. 저의 예상일뿐이지만 어쩌면 이미 미래는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또 무슨말이냐. "당신은 스즈미야씨가 주무시고 계실때 그 말을 들었다고 하셨죠?" 그렇다. "아, 그러고보니 하루히는 아무래도 잠결에 무의식적에 그 말을 들었는지 오늘 나한테 SOS단을 포기하지 않을꺼냐고 묻더군." 녀석은 흥미롭다는듯 웃었다. "사실은 어젯밤에 상당한 규모의 폐쇄공간이 나타났습니다. 밤중에 말이죠. 시간은 정확히..." "나가토가 그 발언을 한 시간이랑 같다는 말을 하고싶은거냐." "네." 그정도 쯤은 예상하고있었다. 별로 이상할것도 없어. "아뇨, 제가 미래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것때문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때, 그러니까 그 꿈속에서 스즈미야씨는 이렇게 생각했겠 지요." 녀석은 몸을 쭉 내밀어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분나쁘다, 저리 치워. "쿈. SOS단을 버리지 말아줘." 코이즈미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이였다. 나는 잠시 경직됬다. 잠시였지만. 아니, 그전에 니입에서 쿈이란 소리가 나온건 이번이 처음이다. 맞을준비 해라. "그게 뭐?" 거부감을 느끼는 듯한 나의 얼굴을 봤는지 녀석은 다시 몸을 뒤로빼고 막바지에 이른 해석을 끝마쳤다. "그걸로 미래는 바뀐겁니다. 물론 그 미래가 밝을지 어두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당신의 입에서 'SOS단을 버리지 않겠다.'라는 말이 나 왔으니까요." 그리고는 코이즈미는 다시 시선을 나가토에게로 돌렸다. "미래에서 온 나가토씨. 당신의 12월 19일의 기억도 이번 12월 19일의 기억이랑 같습니까?" 책을 읽던 나가토의 표정에 뭔가 변화가 생겼지만 정확히 어떤 표정인지는 알수 없었다. 느리게 머리를 좌우로 저어 부정의 표시를 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코이즈미가 아닌 나를 처다보았다. 그리고는 그것보다 훨씬 더 천천히, 나가토는 입을 열었다. "그때 너는 아무 대답도 하지못했어." ------------------------------------------------------------------------------------------------------- 1 배턴) 이어달리기할때 손에 쥐고 달리는 막대기. 보통 바통이나 바톤이라고 부름. 2 미정계수) 항등식의 성질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식에서 미지의 계수를 구하는 방법. 현재, 한국의 7차 교육과정에서는 10-가 수학. "그때 너는 아무 대답도 하지못했어." 공기가 서늘해지는것 같다. 지금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되는거지. 웃어줘야 하는거냐, 화내야 하는거냐, 울어야 하는거냐, 당황해야 하는거냐. 이 타이밍에 맞춰서 아사히나 선배가 등장해주셨으면 했지만 내 바램은 이루어 지지않을것 같다. 그런가... 그래서 그때 나가토가 놀란듯한 표정을 지은건가. 나는 의미없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책상위에 올린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피곤해진다. 순식간에 자기내들끼리 할말 다 하는게 어딨어. 치사 하다. 완전 바보가 된듯한 느낌이다. "스즈미야 하루히가 바랬기때문에, 넌 SOS단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루히, 하루히, 하루히. 맨날 하루히인가. "그럼... 이제 나랑 하루히는 안죽겠네?" "그렇다고 볼순 없습니다." 코이즈미였다. 끼어들지마. "그때, 스즈미야씨가 원한것은 결과가 아니니까요. 당신은 SOS단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변형된 것은 그것 뿐일 것입니다. 아직 긴 장을 풀어서는 안되죠." 갈수록 듣기 싫은 소리만 나온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머리는 6줄은 될만한 수학문제를 풀때만큼이나 복잡해져있다. 어쩌면 연수하고 대뇌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뇌세포가 독립선언을 한뒤 침샘을 통해 빠져나와 현재 내 입속에서 아밀라아제와 어깨동무를 한 채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비유인진 모르겠지만. 문득 나가토에게 아주 당연한것이 묻고싶어졌다. 그냥 문득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 아마 들을 말은 다듣고 이제 내가 질문을 할 차 례가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이 나가토." 나가토는 나에게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 책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한페이지를 넘긴다. 별 중요한 질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건가. 나 가토에게 중요한이라는 개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였다. "나랑 하루히. 살수는 있는거야?" 페이지를 넘기던 나가토의 손 중간에서 멈췄다. 얇은 한장의 페이지는 중력에 의해 힘없이, 그리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말을 이런 어조로 말하고 있는걸까. 마치 삶의 미련을 버린듯한, 꼭 사신이 목숨을 거둬갈 사람의 마지막 모습같다. 안되.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지 말자고. 내가 죽을리가 없잖아. 그런 엉터리에 웃기지도 않고 가능성 제로퍼센트처럼 보이는 미래가 진짜로 있을리가 없잖아. 똑똑─. 정적을 깨고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코이즈미가 평소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천천히 문이 열렸다. 어째서 이런 말을 듣고도 저런 태평한 목소리를 낼수 있는걸까. 등장한 사람은 아사히나 선배였다. 다행이라고 해야될까 불행이라고 해야될까. 어쨋든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것 같았다. "어... 아사히나 선배. 좀 늦으셨군요." "아─. 네..." 아사히나 선배는 천천히 부실로 들어와 환상적인 미소를 지었다. 조금이나마 진정되는것 같군. 세일러복을 입고계신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도 참 오랜만에 보는것 같다. 그런 아사히나 선배가 조금 곤란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힐끔힐끔 처다보고 계셨다. 뭔가 할말이 있는건가... "저어..." 순간 떠올랐다. 부실에서 아사히나 선배의 사명을. 물론 그 사명은 하루히가 멋대로 정한 사명이지만. "아아, 죄송합니다." 이미 코이즈미는 문밖에서 대기중이였다. 저런 발 빠른 자식. 난 천천히 일어나 부실밖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 오늘은 좀 쉬고싶다. 문이 닫히고 코이즈미는 나에게 물어볼것이 많은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시간 이동이라는 것에 대해 정확히 아십니까?" 이 녀석은 어쩌면 그런것들에 하루히 이상으로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잘 모른다. 언어로 설명할수 없다나 뭐라나." "그렇군요. 그럼 과거로 이동해서 무슨 사건을 처리할때 간접적으로 사건을 해결합니까?" 난 천천히 하루히를 소실했을때, 다시한번 7월 7석으로 날라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렇지." "그렇군요. 그럼 혹시 과거로 이동하면 자신의 행동에 제한이 있습니까?" 뭐가 그렇게 궁금한거냐. 아사히나 선배한테 부탁해서 이녀석한테도 시간여행이라는 그 토나오는 경험을 시켜줘야하나. "없다. 하지만 정해진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미래가 바뀌어질지도 모르니까, 난 멋대로 행동하진 않았다." "그겁니다." 뭐가 그건데. "만약 저번 2월달에 미래의 아사히나씨가 당신에게 준 전달사항을 무시했다고 칩시다." 나는 2월날, 신발장 안에 있었던 여러 쪽지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미래는 바뀌겠죠. " 만약 내가 그때 이상한 모양의 칩을 그자리에서 부셔버렸다면, 만약 내가 그때 거북이를 강에 방류하지 않았다면─결과적으로는 안경소년한테 주게 됬지만─ 그리고 만약... 내가 안경소년을 폭주하는 차로부터 구해내지 못했었더라면. "하지만 시키는대로 하게 됬잖아. 그뜻은 미래는 거스를수 없다는것 아닌가?" "저는 가끔 이런생각을 합니다." 코이즈미는 자신이 멋대로 만든 이론을 말하는것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는 자신의 경험만이 적용된다. 라고 말입니다." 그건 또 뭔데. 억지로 이 세계를 미스테리하게 만들어 버릴려고하는 오컬트 매니아의 신비이론같은 발언이다. "작년 12월 18일, 그때 당신의 기억과 저의 기억은 서로 달랐죠.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의 나가토씨의 기억과 지금으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의 우리의 기억이 다를지도 모르죠. 그렇게 된다면 미래는 거스를수 없는거라 해도 나가토씨가 겪은 세계와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는 전혀 다 른 세계일지도 모르죠.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보다는 시공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요." 뭔가 납득할수 있을것 같으면서도 김빠지는 소리였다. 나가토는 분명 그런것까지 알수 있을만한 만능 안드로이드다. 그런 실수를 할리도 없지 않은가. "그냥 가설일 뿐입니다." "그래서 3일후 죽을수도 있는 날 위로해준거냐?" 대답 대신 이 스마일보이는 어깨를 치겨올렸다. 하아─. 짜증나. 심장이 입으로 기어나오는 느낌이다. 그게 무슨느낌인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냥 묘하다. "뭐, 스즈미야씨가 뭔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이루어질테니. 그 과정에 약간의 오류가 생길수도 있죠." 뭔갈 말해서 이녀석의 말에 반박하고 싶지만 딱히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나가토가 겪은 미래는 물론 시공간의 균열, 기관과 급진파의 최근 행동조짐, 미래에서 관측된 시공 진동. 뭐 그따위 것들을 내가 알리가 없지않은가. 내가 알수있는건 단 하나. 하루히의 기분이 꿀꿀한지 아닌지 이런것뿐이다. 스스로에게 절망감을 느끼며 좌절하고 있을때, 그 좌절감을 한방에 날려주는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 들어와도 되요." 아, 이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생명의 기운이 되살아나는것 같다. 동면 상태에 빠진 세포들이 하나둘씩 재가동을 시작한다. 아사히나 선배의 메이드 복장과 은은하게 우려낸 홍차의 맛을 떠올리며 나도모르게 흐뭇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있을때. "미안─! 좀 늦었지?" 반경 5미터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추정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아─. 그래도 코이즈미의 지겹고도 알아먹기 힘든 해설은 그만들을수 있겠군. 뭐, 잘된일이다. 별 좋지않은 일조차 긍정적이게 받아들이 는 이 사고능력. 21세기를 밝게 비추어 주리리. 하지만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서 하루히의 오른쪽 손에 들린 두터운 쇼핑백을 보자 나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외계인의 원자 분해 광선을 맞은 지구인처럼 한줌의 재가되어 대자연속으로 사라졌다. 하루히의 오른손에는 뭔가가 가득 담겨있는 쇼핑백이 들려있었고, 지금 우리는 그 쇼핑백에서 튀어나온 빨간색 꼬깔모자를 착용중이다. 녀석이 청소당번이랍시고 이렇게까지 늦은건 그것 때문이였군. 나가토는 꼬깔모자를 착용한 채로 책을 읽고있고─은근히 어울렸다─, 아사히나 선배는 산타복이 아닌 메이드복을 입은채로 꼬깔모자를, 코이즈미는 그냥 실실쪼개면서 모자를 쓴채로 팔짱을 끼고 하루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까지 이런걸 착용해야 하는거지. 방어력이라도 오르냐? "하루히. 아직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멀었는데 벌써부터 이런 기분을 낼 필욘 없다고 생각되는데." "왜? 좋잖아. 미리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면서 즐거운 기분을 좀더 많이 느끼는걸 미스터 그리스도가 본다면 기뻐할꺼야." 아니, 난 전혀 즐겁지않은데. 그리고 그 미스터 그리스도는 우릴 내려다볼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 사람한테도 하루히가 뭔가 중요 한 녀석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이 꼬깔모자를 머리에서 때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뭐. 좋겠지. 지금을 즐겨보는 것도. "그럼 하는김에 아예 지금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보는게 어때?" 나도 모르게 이런말이 튀어나왔다. 이런걸 원한건 아닌데 말이다. "그걸 위해서 또 준비했지!" 하루히는 휘파람을 불면서 쇼핑백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내었다. 뭔가 알수없는 붉은색과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CD케이스였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군. 하루히는 그 CD케이스를 내 얼굴앞으로 한번 들이밀어 보여주었다. 거기엔 'The music for the Christmas' 라고 쓰여있었고 아직 가격표가 붙은 비닐이 제거되어 있지 않은채 형광등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어때?" 그저 그래. 녀석은 싱글벙글거리는 얼굴로 가격표가 붙은 비닐껍질을 뜯어내고 90년대 중반에 나왔을만한 촌스러운 케이스를 열어 케이스 겉표지와 똑같이 생긴 CD를 꺼내어 옆에있는 조그만한 오디오에 넣었다. 곧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크리스마스틱한─그게 어떤건진 모르겠지만─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때?" 그저 그렇다니까. "역시... 이걸론 부족하지?" 아니, 그게 아닌데. 이미 포화상태를 뛰어 넘었어. 녀석은 또 다시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그런 모습을 코이즈미는 싱글벙글 스마일 모드로 지켜보고 있었다. 넌 그렇게 만사가 즐겁냐? 하루히는 쇼핑백에서 눈 스프레이를 꺼내더니 그것으로 냅다 창문에 무언가를 쓰기시작했다. 치이이익─. 거리는 소리와 하루히의 손이 몇번 창문앞을 슥슥 스쳐지나더니 곧 그곳에는 'XMas D-5' 라는 눈처럼 보이지만 실재로는 거품 인 눈으로 쓰인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녀석은 25일이 엄청나게 기대되나 보다. 아니, 크리스마스 파티는 24일날 해야하는건가? "크리스마스 파티가 얼마나 근사할지 기대되는군요. 얼른 크리스마스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코이즈미의 말이였다. 아마 이 말은 진심이였을 것이다. 나도 얼른 지옥의 23일이 지나고 평화로운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 었다. 빨간색 꼬깔모자를 쓰고 하교하라는 하루히의 명을 받은 SOS단은 해산했다. 그딴걸 쓰고 하교할리가 없잖아. 에반에센스의 'Bring me to life'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흥얼거리며 자신의 집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하루히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 하자마자 재빨리 꼬깔모자를 때어냈다. 누가보면 벌써부터 가짜 산타 연기를 연습중인 알바생이나 보이는 그대로 반쯤 돌은 인간으로 볼께 뻔하다. 키타교 학생이라면 "저 녀석 말로만 듣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부하인가보군." 이라면서 손가락질을 할테고.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교내에서 유명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유명해졌다기 보단 SOS단이 유명해졌다고 봐야하나. 평범한 고교생활을 보내기는 글렀다. 이 말을 이미 2년이나 지난상태에서 한것은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졸업을 하고도 스즈미야 하루히의 부하라는 낙인이 찍힌채로 손가락질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하던 도중 문득 한가지 잊고있 던 것이 생각났다. 나가토는 잘있으려나? 나도 모르게 상상을 하게 되었다. 두명의 나가토가 조용한 거실에서 둘다 조용히 책을 읽고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왔다.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이상하게 처다보는군. 이런 이런. 정말로 이상한 인간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르겠다. 집에가서 발닦고 잠이나 자자. 그전에 문제집도 풀어야겠지만. 텔레비젼에서 광고중인 먹음직스러운 3층쩌리 색색깔의 아이스크림 광고를 봤는지, 동생 녀석은 자꾸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졸 랐고─그럴꺼면 엄마한테 가서 매달려라.─ 난 하루히도 설득이 가능한 능숙한 말솜씨로 동생을 방에서 내보낸뒤 5분간 멋대로 섞어버린 직쏘 퍼즐을 짜맞추듯 열심히 정신을 모아 모아 공부에 집중. 하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였다. 오늘은 더 안되는것 같았다. "왜 이러지..." 혼자서 중얼거리며 책상에 얼굴을 기댔다. 책상을 통해 차가운 냉기가 볼에 전해진다. 아─.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네. 그때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내 얼굴 바로앞에 있는 A4용지 였다. 문득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난 책상에 착 달라붙은 얼굴을 때어낸뒤 샤프를 들고 무작정 A4용지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 뭔가는 유서다. 하하하. 내가 이러면 안되지. 왜 벌써부터 이러는거냐. 그래. 난 심심했다. 문제집도 풀기싫은데 가끔 심심하면 이런거 써보는것도 나쁘지 않잖아?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거나 뭐 그런것들 을 느낄수 있을지도 모르고. 흠흠. 유서쓰기란 참 참신한 활동이군. 진심인지 아니면 자기위로인지 모를 자문자답을 하면서 천천히 팬을 눌렀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써서 몇분만에 심심해서 쓴 유서는 작성되었다. 나 참, 살면서 마지막으로 남길 메세지를 몇분만에 쓰다니. 진짜로 유서 쓸때는 이러면 안되겠군. 내가 쓴 유서를 한번 쭈욱 읽어봤다. 정말 평범한 유서군. 아니, 평범하기 보단 엉망이다. '부모님,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하고요. 동생아, 잘 자라라. 나가토, 나 없어도 하던일 잘하고. 코이즈미, 이하동문이다. 아사히나 선배, 그동안 감사했고 사랑합니다. 츠루야 선배, 사실 예전부터 동경하고 존경해왔습니다 선배. 타니쿠치, 쿠니키다, 니네들을 만나서 아주 쬐 끔은 즐거웠다.' 이건 낙서 이하의 수준이다. 유서인지 뭔지도 모르겠군. 아, 참고로 '사랑합니다.' 라는건 우정의 표시니 오해하지 말도록. 하루히에게 전하는 말도 쓰려다가 딱히 할말도 없어서 뭘쓸까 고민하다가 아무 생각없이 떠오르는것을 썼다. '하루히, 내가 존 스미스다.' 정말 왜 이딴걸 쓰고있는거지 라고 중얼거린뒤 언제 한번 정신병원에서 진료를 받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며 A4용지를 두번 접은뒤 문 제집 페이지 사이에 쑤셔넣었다. 지친다. 아무래도 이 피곤함은 육체적 피로 때문이 아닌 뇌세포가 24시간 동안 신체 대장정을 해서 생긴 정신적 피로겠지. 아무것도 할 의욕이 생겨나지않아 나는 문제집을 푸는것을 내일 학교에서 하기로 마음먹고 문제집을 가방에 쑤셔넣고는 바로 침대에 들어 누웠다. 아─. 피곤하다. 앞으로 내가 살날은 이틀밖에 안남았을 지도 모르는 일인데.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수마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최후의 요세까지 점령당한 나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어버렸다. 일어난건 아침이였다. 너무하네. 적어도 저녁밥은 먹을수 있도록 깨워줘야 되는거 아닌가. 그래도 일찍 잔 덕분에 동생의 파워풀 모닝콜을 온몸으로 받아낼 필요는 없었다. 시계는 아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난 벌써부터 교복을 전부다 차려입고 부엌에서 아침밥을 기다리고 있다. 내 몸이 너무 늦잠에 익숙해져있어서 인가. 뭐, 대신에 등교길에 타니구치의 심기 불편한 얼굴을 볼일은 없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하? 근대 이게 뭔가. 일찍 학교에 가서 문제집이나 풀자는 생각으로 아침을 먹고 바로 등교길 코스에 올라 날씨는 쨍쨍한데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이번 크리스 마스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무리겠군 이라고 생각하며 하이킹 코스의 90%를 완주했을때, 익숙한 사람의 뒤통수가 눈에 띄었다. 좌우로 팔랑팔랑 흔들리는 길지않은 머리칼과 그 양옆으로 살짝 보이는 노란 밴드. 그리고 저 힘차다고 해야될까 당돌하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매우 바빠보인다고 해야할까, 어쨋든 그런 발걸음. 저 여자. 늘 이시간대에 등교하던 거였군. 완전 근성인데. 그건 둘째치고 지금 나는 고민중이다. 무슨 고민이냐 하면 지금 저 하루히한테 달려가서 인사를 할것인가 아니면 모르는척 뒤에서 적절히 걸음걸이를 맞춰주며 걸을것인가. 그 고민은 5초도 가지 못하고 분자 구조를 잃고는 공기중으로 사라졌고, 나는 발걸음이 빠른 하루히에게 뛰어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어 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냥 하루히가 등교할때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서였다. 눈꼽이라도 붙어있으면 유쾌하게 웃어주리리. 뭐 목숨만 보장된다면야. "뭐야?" 라고 하며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는 하루히. 누군지부터 확인한 뒤에 "뭐야?" 라고 하는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높디 높으신 하루히님께서는 자신의 어깨를 건드린 장본인의 얼굴을 쭉 훑어보더니. "뭐야, 무슨 할말이라도 있어? 보나마나 별거 아니겠지만." 아니, 별로. 그리고는 다시 걷는 하루히. 너무하네. 전설로만 내려오는 무술을 모두 익힌 이름없는 무림고수와 같은 빠른 발걸음으로 걷는 하루히를 따라가는 것은 참 힘들었다. 따라가면서 "오늘은 날씨가 별로네." 라든가 "크리스마스날 눈이 올까?" 등, 짧은 대답이 예상되는 쓸대없는 질문을 늘어놓았고 하루히는 "그렇네." 와 "알게뭐야." 로 대답했다. 옛날에 비해선 나아졌군. 만약 작년 봄이였다면 첫번째 질문엔 대답도 안할것이고 두번째 질문엔 "그걸 내가 어떻게알어?" 라고 신경질적 으로 답할것이다. 어쨋든 그렇게 이틀간 땀을 전혀 안흘려도 문제 없을만큼 땀샘을 통해 엄청난 량의 노폐물을 흘려대며─사실 별로 많이 안흘린것 같지만─ 하루히의 뒤를 쫓아가다 보니 주변 환경 인지 능력이 부활했을 때에는 이미 교실 안이였다. 하루히의 표정은 좀 피곤해보였다. "크리스마스 파티 계획은 잘 되가?" 이 주제라면 하루히도 열변을 토해낼수 있겠지. 하루히의 머릿속도 좀 파해쳐보는 겸에 한 말이였다. "어제 그거때문에 한숨도 못잤다니까." 걸려 들었군. 역시 난 하루히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스페셜 리스트다. 후후, 코이즈미 덤벼. "뭐 좋은게 떠올랐는데 까먹어버려서. 그거 기억해내느라고 밤세 애썼어." 저걸 바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끈기있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기억해냈냐?" "아니─. 재대로 된건 하나도 없어. 아, 하나는 기억해냈지." "그게 뭔대?" "루돌프." ... 그거라면 이미 아사히나 선배가 입는? "아니, 그거 말고 너." ... 설마, 아니지? 설마 나한테 또 그 루돌프 복장을 입혀놓고 굴욕의 브레이크 댄스를 추게 하진 않겠지? 그때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옆에있는 책상에 종아리를 부딪혀서 시퍼렇게 멍들었던것도 생생히 기억난다. 또 그 광경을 보고 폭소를 터트리는 츠루야 선배와 하루히, 그리고 웃 음을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조금 더 냅두면 큰일이라도 날것만큼 얼굴이 빨게진 아사히나 선배와 시종일관 쓰나미가 밀려오는 도중에도 변 하지않을것 같은 스마일모드로 관전중인 코이즈미 그리고 고통에 괴로워 하며 굴러다니는 나를 무덤덤한 눈빛으로 처다보는 나가토도 생 생히 기억난다. 아─. 그 고통의 연속. 뭣하면 이번엔 윈드밀이나 헤드스핀이라도 해줄까. 온몸이 마르고 닮도록 노력한다면 하루히가 컷 사인을 내릴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캠코더로 찍어줄수도 있어." 그런 너의 기준에 맞춘 배려는 속눈썹만큼도 원하지 않아. 하루히가 만약 캠코더로 그 장면을 찍는다면 그것을 SOS단의 사이트에 올릴 가 능성은 타니구치의 여자 헌팅이 실패할 확율과 비슷 비슷 할 것이다. SOS단의 카운터를 올려주는 고마운 사람들은 몇 없지만 말이지. 만약 그게 배포된다면 난 어제 쓴 유서를 진짜 유서로 남겨두고 미련없이 세상을 떠버릴꺼다. 하루히는 저번 크리스마스 파티를 떠올리는지 아니면 음모를 꾸미는건지 알수없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기분은 좋아보이지만 나 한테 돌아오는건 없잖아. 놀려면 나를 가지고 놀지 말고 다른 이상한 것들을 가지고 놀아달라고. 예를 들면 꼽등이라든가. 단 꼽등이일 경 우 나한테 달려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어쨋든 우리 앞에서 보여줄 재밌는 쇼 하나 준비해둬." 너무하네. 난 서커스단에 막 입부한 신참 광대가 아니란말이다. "잠시 하루히. 나 그거 절대 안해." "모두들 기대하고 있단 말이야!" 누가 기대한다는거야 도대체. 설마 이미 말해둔거냐? 나의 절망적인 질문에 하루히는 씨익 미소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