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미야 하루히의 분열 번역자:jyhpsycho@naver.com 프롤로그 계절의 변화를 무엇으로 실감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요 반년간의 내 경우는 집에서 기르고있는 3색 고양이 샤미센의 동향으로 훨씬 알기 쉬웠다. 샤미센이 한밤중에 내가 잠들어있는 이불 속으로 숨어들지 않게 된 것으로, 난 이 지역의 사계절중에서 최고평가를 주어도 좋을 달이 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고양이 이상으로 계절에 민감한것은 환경변동의 대응에 감탄할만한 수준으로 정확한 식물들이라는 생각도 했다. 여기저기 만개한 벚꽃이 마치 전원이 사전에 협의라도 한듯이 스케쥴 그대로의 풍경을 보여줄듯한 4월 상순의 하늘은 크레용으로 칠한듯이 푸르고 태양은 이어질 여름의 준비운동이라도 할셈인지 매우 밝은 햇살을 지표에 뿌려댔으나, 산에서부터 불어내려오는 바람은 아직도 쌀쌀했기 때문에 나의 현 위치가 어느정도의 해발 고도에 위치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할일도 없어 한결같이 상공을 향해 벌려져있는 내 입에서 말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을듯한 단어가 흘러넘치는 이유는 역시 한가하다는 이유 밖에는 없겠지. "봄인가..." 딱히 누군가가 리액션을 취해주길 바라는건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읽으려하지 않으면서도 일부러 찬물을 끼얹는 녀석이, "의심할것도 없이 봄이군요. 또한 학생에게 있어선 새로운 1년의 시작입니다. 달력도, 연도적으로도, 그러고 저의 심정에도요." 터무니없이 상쾌한 말투, 뭐 봄과 가을은 닮았다고 생각해도 괜찮겠지. 여름은 푹푹 쪄서 괴로울 뿐이고, 겨울이라 해도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가까이에 있고 싶은 인물 넘버원은 아사히나 선배 정도니까. 내가 진작에 시선을 하늘로 돌리고 흘려듣기 모드로 돌입하려는것을 눈치챘는지 "고등학생이 되어서 두번째로 맞는 봄입니다만, 사적인 의견을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이것이 과연 '드디어'라고 해야 하는건지 '이제'라고 해야 하는건지 조금 판단이 망설여 지는군요." 망설임 따위 있을까보냐. 영어라면 어느쪽도 yet이다. 흘러간 시간을 하나하나 전부 기억하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강 문제는 일찍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의 일은 알리가 없으니까 빠르든 늦든을 떠나 지금 하는일은 내용에 따라 주로 즐거운가 아닌가, 빨랐다가 늦었다가를 자기나름대로 느끼면 되는거지. 조금은 시계가 되어 생각해봐라. 그녀석들은 불평도 없이 초침을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다구. 그렇다고 알람이 되어서 벽에 내던져지고 싶다는건 아니다. 특히 월요일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시계바늘은 우리들에게 객관적으로 무언가를 세어주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주관적으로밖에 느끼지 못하는 인간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지침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중요한것은 그 일정한 시간 내에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했는가 입니다." "이런 이런" 나는 느긋하게 모양을 바꾸려하는 구름의 관측작업을 중단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변함없는 미소는 그 주인인 코이즈미 이츠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항적운과 비교할것도 없이 바라보고 있어도 감상력을 기르기엔 적합치 않고, 그런걸 응시한다 해도 무엇하나 얻을게 없다고 생각한 나는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며 말했다. "내 사적인 의견을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말이지" 안뜰의 광경을 실컷 망막에 투사하면서 귀를 기울이려는 기색을 보이는 코이즈미에게 "역시 '드디어' 왔다고 느껴지는데" 무리지어가는 신입생들의 신선하고 새로운 교복을 눈으로 쫓으면서, 나는 뇌리에 녹화된 그리운 영상이 눈에 재생되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1년 전의 2학년들은 1년 전의 우리들을 이런 감각으로 보고 있었던걸까. 내가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학구분할제의 만행이지만, 그 떄문에 스즈미야 하루히라는 미확인 이동물체와 만나고 말았다고 인식할 여유도 없이 전파로 어이없는 자기소개를 듣고 '뭐야 이녀석은' 하고 생각하는 사이 어쩌다보니 하루히의 시공에 말려들어 그 결과 SOS단이라 불리는 수수께끼의 조직의 일원이 되어 결국은 진짜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적 존재까지 해후하게 되었고, 그들이 제각각의 능력을 가지고 온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적 이벤트에 강제로 참가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하루히가 뜬금없이 생각해낸 오락에 말려든 것일지도. 요 1년으로 나의 경험치는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어중간한 중간보스 정도는 한손으로도 쓰러트릴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습관이란 대단한 거구나" 등교시의 짜증나게 긴 언덕길에도 완전 익숙해져버려서 익숙해짐에 따라 기상시간이 늦어져가고 있다. 지금은 아슬아슬하게 이불과 동일화를 도모하고 있는 나였지만, 학교에 익숙해져 즐긴다는 의미에서는 나뿐만이 아니라 하루히도 폭포를 올라 용이 된 잉어 수준의 변화를 이루었다. 현시점의 하루히를 사진으로 찍어서 1년전의 하루히에게 보여주고 싶다. 넌 내년에 이렇게 된다, 라고 예언같은 음색으로. 실제로 그렇게 된다 해도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코이즈미는 눈을 반쯤 감듯이 가늘게 떠, 입술 끝을 올리고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아, 습관에 관해서입니다. 지구상에서 생활하고있는 것부터 알고 있습니다만 원래부터 인간은 순응성이 다분한 생물입니다. 대개의 환경에 적응해 버리니까요. 하지만 최근에는 그것도 옮고 그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에 익숙해져 있으면 불시에 일어나는 돌발적인 사태의 발생에 대해선 판단이 힘들어 진다구요." 무슨 소리냐. 하루히라면 돌발적이지 않을때가 더 적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코이즈미로서는 드물게 말을 흐렸다. 뭔가 말하고자 할때 생각없이 내뱉는것이 이녀석이다. 여기서 추궁하여 또 번거로운 이야기를 끌어내는건 나로선 참을수 없는 일이다. 뭔가 말하려는 코이즈미의 시선을 뿌리치듯이 나는 침묵하며 고개를 돌려 녀석과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굴렸다. "......" 침묵이라면 본좌급인 작은 몸집의 세라복 모습이,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머리칼을 흔들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나가토 유키, SOS단의 긍지, 신비한 우주적 비밀병기ㅡ 보다는 지금은 문예부 부장인 쪽이 장소에 맞는 지위겠지. 나와 코이즈미처럼 나가토도 학습 책상과 의지를 이 안뜰에 갖고 들어와 있다. 단 우리들과 수 미터는 떨어진 위치에서 묵묵히 독서를 할 뿐이다. 어쩐지 철학자와 화가와 음악가가 둥글게 모여앉아 있는듯한 제목의 책은 마치 콘크리트 블럭처럼 두꺼웠다. 나는 안뜰에서 부실동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부실로 뛰어가던 하루히와, 그 하루히에게 질질 끌려가는 아사히나 선배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이대로 오늘 하루는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기도 하고, 그 편이 모두에게도 행복하지 않을까. 그래도 괜찮겠지. 자, 상황 설명이 늦었군. 간단히 말하지. 신학년 신학기가 시작되고 수 일이 경과한 지금은 방과후. 이날 우리들은 안뜰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와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같은 모양으로 다른 2, 3학년도 있어ㅡ 단 전원이 모인건 아니다. 사람들 속에는 컴퓨터 연구부 녀석들의 모습도 보인다. 긴 테이블에 컴퓨터가 몇대 진열되어 있고, 디스플레이에선 무엇인지 CG같은걸 비추고 있다. 언젠가의 우주함대SLG가 아닌, 묘하게 파스텔틱한 디자인의 아무래도 점치는 소프트웨어 같다. 컴퓨터부장은 철새짓이라도 했는지 당연하게 3학년으로 무사히 진급한듯이 있는것은 확인되었지만 아직도 부장직을 맡고있는지는 모르겠다. 알바 아니지만 나중에 나가토에게 물어보자. 다른 장소로 눈을 돌리니 여기저기에 정체를 알수없는 그룹들이 북적이고 있다. 개중에는 듣도보도 못한 기괴한 동호회나 연구회의 이름들이 있었고, 그것을 본 나는 더욱더 오그라들었다. 원래부터 이런 행사에 우리들이 놀아줄 이유따위 없다. 그나마 관계가 있는것은 사실 나가토 뿐이다. 나는 다시한번 도자기같이 과묵한 독서광 여학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전체적으로 떨어져있는 위치에서 오도카니 자리에 앉아있는 나가토의 책상 앞에는, '문예부'라고 먹물자국이 선명한 명조체로 쓰여진 종이가 셀로판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다. 제멋대로인 봄바람에 종이가 팔락거릴 때마다, 미용실과는 거리가 먼듯한 나가토의 숏헤어도 흔들거렸다. 본인은 바깥세계로부터 격절당하길 바라는듯한 조용함으로, 책의 페이지에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이정도면 눈치챘겠지? 문화 계열의 클럽ㅡ 특히 약소부ㅡ 의 가입접수 겸 부활동 설명회. 현재 이 안뜰에서 거행되고 있는것은 그런 행사였다. 운동부 계열은 저마다 체육관이나 운동장에서 접수하고 있었고 그다지 권유활동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부원이 모일것같은 취주악부나 미술부도 각자 교실에서 그물을 펼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부들은 선전이라도 하지 않는 한 활동내용은 커녕 존재조차도 흐지부지가 될 연구부 이하 동호회 이상의 부 이다. 아참, 말할것까진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서 깜빡 잊었는데 SOS단의 멤버와 관계자들은 경사스럽게도 저누언이 평범하게 진급을 마쳤다. 나와 하루히와 나가토와 코이즈미는 2학년이 되었고, 아사히나 선배는 3학년이 되었다. 1년분의 추억이 묻어있는 1학년 5반 교실과는 작별하는 것에 대해 향수를 느꼈지만 2학년이 되어서도 이렇다할 차이가 없었고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또다시 하루히와 같은 교실을 쓰게 되었다. 시업식의 새로운 2학년 자기소개시간, 내 뒤에 앉아계신건 의심할것도 없이 스즈미야 하루히. 오만불손한 성격 중에서도 복잡함이 섞인 오리너구리를 의태했을지도 모를 입으로, "뭐야 이건" 하루히는 새 반친구들을 훑어봤다. "일년치고는 거의 변한 얼굴이 없잖아, 좀더 대담하게 바뀌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뻐하는건지 불평하는건지 어느쪽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때만큼은 나도 하루히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와 하루히는 2학년 5반에 편입되었고 어째선지 타니구치와 쿠니키다도 있었고 덤으로 담임은 학생들이 생각한대로 오카베였다. 가끔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녀석들도 섞여 있었지만 구성요소의 대부분은 옛날 1학년 5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이미 이과중시인양 하는 녀석들을 모으면 한 반 분량이고, 8반이 그런 녀석들의 그릇이 된 대신, 이전까지의 8반은 해체되어 다른 일곱개 반을 토막내어 집어넣은것 같다. 그리고 극소수는 언뜻 보기에 무의미한 느낌으로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이동된듯 하다. 담임 오카베가 성실히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를 시킨 것은 소수에 대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반 분할에 대해 사소한 의심을 품고, 의혹의 중심이 되어 사태의 뒤에서 암암리에 활약하는 인물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건 너희들의 계획이냐?" "틀리다" 나가토는 단조로운 소리로 대답하고, "우연이다" 하고 보험이라도 들듯 말했다. "짜고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학교 당국의 의향이겠죠. 적어도 '기관'은 이 일에 대해선 손을 대지 않기로 결정한 모양입니다" 코이즈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단언했다. "우연이겠죠" 아무래도 진짜인것 같다. 우연을 필연으로 바꿔버리는 여자의 이름을 한명 알고있지만, 내가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것도 없다. 그럼 아사히나 선배와 츠루야 선배도 같은 반이 된건가? 그렇다면 그쪽은 츠루야 家가 무엇을 한 것이겠지만, 어차피 나랑 상관 없는 일이다. 교실이나 학급은 달라도 방과 후가 되면 전원이 모여드는 장소는 같지 않은가. 내가 신경쓰이는 것은,ㅡ그리고 신경써야만 할 것은, 좀더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보고있는 신입생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주인 친구라면 있다. 미래인 선배도 얻었다. 요 1년간 제일 말을 많이 나눈 남자가 초능력자란 것도 부정할수 없다. 하지만 그날 그때 히가시중 출신 이외의 5반 학생들을 아연실색케 했던 하루히의 자기소개, 그 전설이 된 이야기거리의 문구 중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지위가 있다는 것을 잊을 순 없었다. 이세계인. 음 그런걸 딱히 원하는건 아니지만 없으니 허전한 것도 그 자리다. 아무튼 우리들은 탈없이 진급했고, 1학년의 자리는 비게 되었다. "이런 이런" 나는 뻐근한 어깨를 풀듯이 고개를 움직여, 새로운 1학년의 감시를 시작했다. 유망해보이는 애를 발견하면 확보하도록. 그것이 단장님의 명령이셨던가. 그런데 하루히가 말하는 유망한 녀석은 대체 어떤 이해하기 쉬운 자태인 것일까. 하는김에 말해두는데, 2학년 5반 첫 수업 자기소개 시간 때, 스즈미야 하루히는 1년 전과 같은 어구를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상쾌하게 멀리까지 잘 들리는 목소리로, "SOS단 단장, 스즈미야 하루히. 이상!" 대담한 미소와 함께 내 뒷머리를 흔들며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착석하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하겠지. 그리고 반 친구들 모두에게 있어도 충분할 것이다. 스즈미야 하루히와 SOS단의 이름을 모르는 인간은 이미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있다고 한다면ㅡ 나는 전년도 안뜰을 활보하고 있는 3학년의 색깔이 옆에 붙어있는 실내화를 신고있는 다리의 수를 세며 생각했다. 이녀석들 중에밖에 없겠지. 벚꽃입의 시기, 왕벚나무로 뒤덮여있는 그 옆에, 나와 코이즈미. 조금 떨어져서 나가토, 3명이 무위의 한때를 보내고 있는데, 모여드는 학생들을 헤쳐볼것도 없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모세처럼 이쪽을 향해 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선가 본적있는 상판의 남자로, 내가 이곳에서 무위함을 맛보는 처지가 된 원인이라고도 할수 있는 인물이었다. 선드러지게 블레이저 코트의 옷자락을 휘날리며 때때로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걸어오는 모습은 완전 판에 박은듯이 사이비 권력 페이스다. 나까지 삼류연극의 무대배경 소품이 되어버린 느낌이군. "오랜만이군" 학생회장은 무리 앞에 멈춰서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교롭게도 이쪽은 그렇지 못하다. 시업식의 전교생조례에서 길고긴 훈화를 진술하는 얼굴을 그리 간단히 잊을수는 없다. "그건 그렇고" 시나리오의 지시문에 써있는듯한 동작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안경을 고쳐올려, 신자모집에 불만이 있는 교주와 같은 표정으로, "단장은 어디있지? 한두개, 아니면 그 이상의 클레임을 건네주려고 일부러 발걸음을 옮겼는데 너희들 수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 글쎄, 어디 있으려나. 나는 그녀석의 비서도 매니저도 아무것도 아니고, 바쁜 동급생의 현재 위치를 분단위로 갱신하거나 하진 않는다고. "하는수 없군. 그럼 자네에게 묻지. 자네들은 여기서 지금 무얼 하는건가?" 다물고 있으면 코이즈미가 대답하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선지 우리 SOS단의 훈남은 그저 바보처럼 미소만 짓고 있었기 때문에, "보면 모르나" 건성으로 대답하는 나를 회장각하는 철가면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물론 한눈에 알아보고 말고. 여기가 어디며, 자네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고민할것도 없이 도출될 답이다. 내가 물은것은, 나의 예상을 넘는 어떤 계획을 도모하고 있는지 조금 걱정이 되어서다. 그런가, 없는건가. 그렇다면 내가 말할 대사도 이미 알고 있겠군" 그것이야말로 이쪽이 걱정하고 있던것과 토씨하나 틀린게 없기 때문이지. 차라리 하루히가 있을때 와줬으면 이야기가 술술 풀렸을텐데. 아니 잠깐, 어째서 회장이 하루히가 없는데도 무례한 포즈를 계속 하고 있는거지? 지금의 학생회장은 코이즈미에 의해 강제로 취임된 '기관'의 꼭두각시 정권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주위의 눈을 의식하는건가? 하지만 우리가 있는곳은 안뜰의 구석이라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한은 도청당할 염려는 없고, 수 미터 옆자리에 앉아있는 나가토의 귀에는 닿겠지만 나가토의 귀에 들려서 곤란한 이야기라면 CIA나 NORAD 상층부밖에 모르는 비밀 정보 정도일거다. 그럴셈도 아니었는데 나와 서로 노려보고 있던 회장 전하는, 갑자기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여긴 이제 됐다. 문화계열은 다 둘러봤다. 키미도리, 자네는 먼저 운동장에 가 있게. 나도 금방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 짧은 대사를 듣고 나는 처음으로 그곳에 있는 인물을 인식했다. 하마터면 무의식적으로 켁 하고 내뱉을 뻔 했으나, 간신히 집어삼키며 뻔한 말을 대신 토해냈다. "키미도리 선배?" "네" 그녀는 예의바르게 응답하고 품위있게 인사를 했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실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회장의 그림자에 동화되어 있다가 발성과 동시에 실체화하는 듯 하다. 그만큼 돌발적으로 출현하는 인상을 받았다. SOS단 의뢰인 제 1호이자 컴퓨터 연구부 부장의 전 애인, 지금은 학생회 서기직을 맡고있는 키미도리 에미리 선배는, 회화에 그려진 귀부인처럼 미소지으며 꾸벅하고 가볍게 인사했다. 멍 한채로 나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하하, 회장의 아니꼬운 포즈의 원인은 이건가. 키미도리 선배는 본성을 감추고 있다는건가.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말이지. 그건 그렇고 회장과 서기가 한 세트로 등장하는건 대체 어디서 온 풍습이냐. 조금은 회계나 부회장에게도 조명을 비춰줘.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지" 회장은 다시 안경을 누른다. "다만 우리 회계가 뭔가 말할게 있다면, 그쪽 문예부 부장에 대한 얘기겠지만" 그것에 대해선 나도 코이즈미를 통해 언뜻 들었다. 작년 봄방학 전에 있었던 학생회 주도 각 클럽의 예산분배회의에 관한 것이다. 부원이 한명이라고는 하나 없어서는 안될 클럽이고, 그 대표자도 회의에 출석하였다.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하루히가 아닌 나가토 유키이다. 하루히는 최후까지 대신 나가느냐 나가토의 보좌로 가느냐 했었지만, 아무튼 회의에는 간 모양이다. 문예부실을 불법점거하고 있는 주모자가 그런곳에 간다 해도 쓸데없이 자리만 망치게 될 뿐이고, 최악의 경우엔 난투극이 될지도 모른다. 못마땅해 하면서도 나와 코이즈미의 충언을 받아들여 하루히는 적국에 인질을 풀어주는 전국시대 무장같은 표정으로 소리도 없이 학생회실로 가는 나가토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그리고 한시간 정도 후에 돌아온 나가토는, 부원이 최저인수 뿐인 휴면되어도 쌀 부 치고는 파격적인 부비를 들고 온 것이다. 대체 어떤 요술을 쓴건지 뭐가 일어난 건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들은 바로는 나가토는 회의실의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있기만 하고,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그저 학생회 회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고 한다. 매년 그렇듯이 서로 뒤얽히며 장시간화가 될게 뻔한 예산분배회의는 이례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어 싸우는일 없이 종료되었다고 한다. 회장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듯이, "물론, 회의는 이름뿐이고 대부분은 나와 키미도리가 작성한 예산안에 따르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조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문예부만은 변칙적이었다. 하지만 딱히 이제와서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은 없네. 예산에 응하는 활동을 해 준다면 나도 불만은 없네. 하지 않는다면 불만이겠지. 이미 끝난 일이다" 회장의 연설을 조용히 듣고있던 키미도리 선배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럼 회장님, 저는 이만" "수고하게, 키미도리" 키미도리 선배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새싹같은 미소를 던지고 희미하게 백합 향기를 남기며 운동장을 향해 모습을 감췄다. 요전에 나가토와 키미도리 선배가 눈싸움을 한 것은 한순간 이었지만, 과연 서로 닮은 동지.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회화방법을 습득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나가토가 책에서 전혀 얼굴을 들지 않은 탓도 있으려나.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회장은 미끄러지듯 안경을 벗고 손끝으로 흔들며, "그 여자가 없는데 이야기를 진행시켜봤자 의미가 없다. 언제 돌아오지?" 금방 올거다, 아사히나 선배의 의상 체인지에 그렇지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좋다. 기다려주지" 그건 그렇고 이 회장 정말 그럴싸하다. 마치 3년전부터 회장을 하고있는거 같은 분위긴데. "난 학생회 업무따위 귀찮을 뿐이라구" 회장은 히죽 웃으며 이제야 정체의 일부를 철면피로부터 드러냈다. "막상 해보면 이게 의외로 재미있다고. 교사나 집행부 녀석들을 상대로 회장을 연기하고 있자면 말이지" 찰싹 하고 한손으로 볼을 두드리며, "어느쪽이 진짜 나인지 가끔 잊어버리게 된다. 다른 인격이 되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군" "인격을 바꾸는 것은 훌륭합니다만" 드디어 코이즈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얼굴의 가면에 본체를 지배당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미라 도굴꾼이 미라가 된다거나 고양이인양 내숭떠는 사람이 고양이가 된다거나 하는일도 종종 있으니 말이죠" "미궁에 홀로 남겨진 도굴꾼은 미라가 되진 않는다. 단지 송장을 방치해둘 뿐이지. 그리고 고양이의 수명은 인간보다 짧다" 회장은 맹금류같은 미소를 보이며 안경의 렌즈를 소맷자락으로 닦은 후 다시 코 위에 걸쳤다. "걱정마라 코이즈미, 나는 잘 하고 있으니. 그러나ㅡ" 안경을 걸친 회장은 본인도 어느쪽이 진짜인지 모르는것도 충분히 납득이 갈 정도로 학생회 회장으로 변화했다. "그 순진무구한 독재자의 목에 방울을 채워두는것은 너희들의 몫이다" 회장의 시선이 향한 부실동의 출입구에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봄의 도래를 확신하고 기뻐 날뛰는 숲의 동물과 같은 우리의 단장님과 봄의 요정이 따뜻한 햇살과 함께 구현화 한듯한 SOS단 전속 메이드의 모습이었다. 하루히는 한손에는 포장용 박스, 한손에는 아사히나 선배를 끼고 웃음이 만개한 상태였지만 회장을 보더니 돌연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 너 잠깐!" 큰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걷는 하루히의 팔에 붙잡혀있던 아사히나 선배가 바둥거린다. 하루히는 개의치 않고, "하하, 역시 그랬어, 생각한 대로야. 내가 없을때를 노리고 오는거지? 근데 미안하게 됐군. 우린 학생회에게 트집잡힐만한 일 한게 없으니 말이야!" 그건 글쎄다. 넌 대체 안뜰에서 무슨짓을 할셈이냐? "아..회장님" 울새처럼 눈을 깜빡이는 아사히나 선배가 메이드 의상인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것은 공터에 강아지풀이 피어있는 것처럼 낯익은 광경이니까. "야, 하루히. 그건 무슨 꼴이냐" 이건 나도 처음 보는거다. 언제 준비한거냐? 하루히는 오만하게 가슴을 펴며, "불만있어? 차이나드레스의 어디가 문제가 있다는건데?" 말 그대로 하루히는 슬릿부터 늘어져있는 다리도 눈부시고, 라메실로 승천하는 용이 크게 자수된 진홍색의 롱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덤으로 소매도 없네. 등장과 동시에 우렁차게 소리를 울렸기 때문에 곧바로 안뜰의 학생들의 시선을 독점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와함께 아사히나 선배도 중인환시의 처지가 되어 부끄러운듯이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은 가능하면 나만 볼수있게 독점하고 싶을 정도다. 헌법따위 알게 뭐냐. "그야 파티회장에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여긴 학교이며 그것도 많은 신입생 앞이다. 조금은 장소를 가려" 상식론으로 타이르는 나에게, "가리고 있잖아. 그래서 이걸로 한거야. 사실은 바니걸이 좋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또 시끄러울거 같아서 차이나드레스로 한 이 나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여!" 그리고는 하루히는 도전적으로 손가락으로 회장을 가리키려 했으나 양손의 부자유를 느끼고 아사히나 선배를 해방하고 포장용 박스를 내 책생에 놓고선 다시 손가락질 포즈를 취했다. "감사히 받아들여!" 두번이나 말할 것까진 없잖아. 하지만 회장도 역시 지지 않았다. "그런 배려는 배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학교 내의 풍기를 책임지는 학생회장으로서는 의연히 받아들일 순 없지. 그런데 *오십보백보라는 말을 들어본적 있나? *대동소이라도 괜찮겠군" "그게 어쨌다고? 도토리 키재기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아니. 나는 그저 미래를 향한 희망이 넘쳐흘러 나의 학교에 온 젊은이들에게 불필요한 혼란을 주지 않고싶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한창때의 남학우의 정욕을 자극하는 짓은 용서할 수 없다" "정욕? 웃기고 있네. 제복이든 체육복이든 느끼는놈은 어떻게 해도 느끼는거야. 알겠어? 당신 우리들을 전부 알몸으로 수업받게 만들 생각이야?" "말이 안통하는군" 회장이 내뱉는다. "괜찮잖아. 학생의 자주성을 존중해 줬으면 하는데. 방과후 정도는 우리가 입고싶은 옷을 자신의 판단으로 입겠어. 등하교까진 바라지도 않아. 괜찮지? 그치? 미쿠루?" "네.. 아.. 네... 이 상태로 하교하는건 저기..." 아사히나 선배는 작게 고개를 부들부들 떨며 하루히의 중국인 모습을 눈부신듯이 쳐다보며 어쩐지 부러워보이는 듯 한숨을 쉬었다. 입고 싶은걸까? 뭐 아사히나 선배와 바니걸이 되어 교문에서 광고지를 뿌리던 작년과 비교해보면 지네 주름만큼 진보했다고 봐도 좋겠지. 피부의 노출범위가 격감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입생을 상대로 한 행사에서 2학년과 3학년생이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말이지.. 하물며 특별한 의미가 있는것도 아니고. "의미라면 있고말고, 이거봐 지금 굉장히 주목받고 있잖아?" 그러니까 주목받는것에 애당초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거다. 하루히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고래가 부상하는 기척을 느낀 크릴새우의 심정이 되어 묵묵히 독서중인 나가토의 등 뒤로 도망갔다. "쿈, 너 잊은거 아니지? 우리가 뭐하러 여기 왔지? 2초내로 대답해" 어- 그러니까 "네, 끝" 하루히는 내게 0.5초의 시간을 주고 선언했다.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며 그 손을 냉동처리 된듯이 부동자세인 나가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우린 유키를 도와주러 온거라구, 결코 SOS단의 신입 단원 권유를 위해 온게 아니야. 이점 확실히 알아두라고!" 하며 회장을 향해 말했다. 언급된 나가토 본인은 팔락거리며 페이지를 넘길뿐. "음" 여기서 그만 질리지 않는것이 현 회장의 특성이다. 안경의 귀걸개 부분을 검지로 만지며, "스즈미야군, 즉 자네는 문예부의 자격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예부의 부원 모집을 도와주겠다는 것인가?" 이해하기 쉽게 요약해주니 고맙다. "그래" 하루히는 점점 더 가슴을 뒤로 젖히며 이번에는 나와 코이즈미가 있는 책상을 가리켰다. "봐, 둘다 책상을 붙여서 앉아있을 뿐 아무것도 안하고 있잖아? SOS단이라고 써져있는 종이도 안붙어있고, 춘곤증 덕에 쿈은 평소보다 더 바보같고" 마지막 문장은 필요 없잖아. "호오" 회장은 턱을 당기며 안경을 의미없이 빛냈다. "그럼 스즈미야군, 자네가 가지고 온 그 상자에 들어있는 플래카드처럼 생긴 그건 뭐지?" "플래카드야" 하루히는 포장용 박스에서 삐져나온 봉의 손잡이를 움켜잡으며 주저없이 그것을 꺼내들었다. 하얀 페인트칠을 한 나무 봉 앞에는 하얗게 채색된 베니어 합판이 두 장 겹쳐져 있었고 거기에는 하루히가 쓴 것으로 보이는 "문예부"라는 글씨가 써져있었다. 손에 딱 맞는 나무손질, 조립, 칠, 기타 잡무가 나에게 돌아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봐봐, 문예부잖아. 미쿠루가 이걸 들고 서있을거야. 내버려두면 유키는 적극적으로 어필을 하려들지 않거든" 그건 사실이다. 클럽 소개 시간은 1학년 시간표에 짜여져 있었다. 라는건 이것에 대해 SOS단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따라서 소집된 것은 나가토 뿐이었다. 강당에 모여진 신입생들 각각이 앉아있는 앞의 단상에서 나가토는 할당된 시간을 최선을 다해 소비했다. 세계 각지의 주요도시의 기온을 담담히 낭독하는 기상 캐스터처럼 '대뇌 생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언어의 불완전성과 대화자간의 의사전달'이라는 테마로 논문을 발표했으며, 문예부의 '부'자도 나오지 않은것은 물론 서론이 끝날 쯤에는 신입생의 반분이 악마같이 엄습하는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최면술같은 설법이 한창일때, 문예부에 들어오려 했던 인간이 있다고 한들 확실히 기피하고 싶어지는 권태감이 강당을 지배하고 있었다. 과연 나가토 유키. 하지만 나가토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늘도 내버려두면 부실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었겠지. 내버려두지 않은건 역시 하루히다. 신입부원 모집 이벤트같이 흥미로운 일을 하루히의 가마 근처에 나있을지 모르는 센서가 무시할리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SOS단은 정식으로 공인된게 아니고 지금도 비밀결사같은 학교 내 비합법 조직이다. 대놓고 부원모집따윈 할수 없다. 예전의 하루히라면 대놓고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올해부터는 학생회장의 눈이 희번득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날을 재밌게 보낼 수 있느냐. 이렇게 해서 하루히의 머리에 있는 레지스터가 가동되어 우리들은 급조 문예부 자원봉사자가 되어 *춘소 일각 치천금이거늘 시간을 멍청히 보낼 뿐이었다. 여기까지가 표면상의 이야기로, 당연히 비하인드 스토리도 존재한다. 그것은 학생회장에게도 쉽게 계산할수 있는 사태인 듯, "그 플래카드, 뒷면도 보여주지 않겠나" "좋아" 하루히는 씨익 웃으며 손을 돌렸다. '문예부'의 뒷면에는- 역시 '문예부'였다. SOS단이라고 써있을리가 없지. "만반의 준비를 했군. 좋다,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없진 않군" 회장은 안경 브릿지를 누르며, "타협이 천성인 것은 아니지만, 애송이에게 소란을 일으키게 하는것보단 낫겠지. 다른 부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얌전히 다물고 일몰까지 거기 있어주게. 나는 시찰로 바쁘니까 말이지. 강제적인 입부, 권유 등은 엄금한다" 그건 운동부에게 말해야 할 사항 아니냐. 하찮은 현립고교인데다가 유망한 부원도 부족해서 곤란해 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렇게 말해두지. 마지막으로 묻고싶군, 문예부 부원을 모으는건 좋다. 그런데 부원을 모으면 어떻게 할지 궁금하군. 장소를 내줄건가?" "당신이 알바 아니야" 상급생에 대한 말버릇은 2학년이 되어도 변함없는 하루히였다. 흥 하고 옆을 보고있던 하루히에게, "음, 그것뿐이다. 그럼 다시 만나지" 회장은 하루히의 차이나드레스와 아사히나 선배의 메이드복을 필름을 태울듯한 안광으로 한동안 바라보며, 이윽고 유유히 키미도리 선배의 뒤를 따랐다. 뭐하러 온거지. 하루히를 향해 몇번이고 말한다는건, 역으로 '해라'라는건 아닐거다. 봐라, 하루히녀석 비행기타서 금세라도 폭소할듯한 얼굴이 되어있잖아. "잘됐군. 간단간단 간짜장하잖아" 회장이 보이지 않게 될때까지 기다리던 하루히는, 갖고있던 플래카드 봉을 지면에 내리꽂았다. 하루히는 판에 붙어있던 베니어를 잡아 뜯었다. 그 공정을 지켜보던 나는 놀라지 않았다. 겉의 '문예부'글자는 하찮은 목재 폐기물이 되었고, 그 이중으로 이루어진 판 뒤에서 나온 글자는 의심할것도 없이 SOS단. 작년 5월-며칠이었더라-결성된 '세계를 오지게 들썩이게 할 스즈미야 하루히의 단'은 당분간 명칭의 변경 없이 탈없이 진행될 것 같다. 하루히가 지참하고있는 포장용 박스의 내용물은 플래카드 뿐만이 아니었다. 플래카드를 아사히나 선배에게 떠넘긴 하루히는 중국풍 롱 드레스의 옷자락을 나부끼며 기술자의 어시스턴트처럼 차례차례 물건들을 꺼냈다. 우선은 액정 모니터, 이어서 DVD재생용 각종 코드와 케이블, 어댑터가 나왔고 마지막으로 구매한 것으로 보이는 대학노트와 필기용구. "자, 설치 설치" 하루히는 나를 재촉하며, "이거 제대로 나오게해" 안뜰에 콘센트따위 있을리 없지만 전원은 하루히가 사전에 준비해 두었다. 여기서 거역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명령에 따라 케이블을 연결하고 컴퓨터 연구부쪽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전기좀 빌려주세요" "그래" 대답해준건 부장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부장직을 맡고있는 듯 하다. 가슴으로부터 입부해보고 싶어지는 스탭 뱃지에 그렇게 쓰여있었다. "아직은 부원들이 염려되서 말이지" 부장은 어쩐지 거만하게, "일단 1학기는 내가 하기로 했어, 암튼 부장후보는 생각해 뒀으니 이제부터 잘 키워서-" 길어질거 같으면 다음에 부탁한다. 이정도라면 다른 부원들은 빨리 은퇴하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 실은 말이지" 부장은 다소 목소리를 죽여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나가토씨에게 이쪽 일을 겸해달라고 해서 잘 되면 부장도 해달라고 할 셈이야. 내가 본 사람중에 세계 최고로 컴퓨터와 상성이 좋은 인재야. 어떤 문제도 버그도 에러도 나가토가 스위치를 넣으면 마법처럼 사라져 버린단 말이야. 가끔 와서 잠깐 봐줄뿐인데 말이지. 매번 놀라움의 연속이라구. 그녀 전용의 자작 PC가 있는데 순식간에 전혀 새로운 오리지날 신형 OS 개발을 성공시켰어. 근데 소스를 아무리 봐도 완전 미지의 코드로 그녀 이외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어. 실험해본 모든 하드의 소프트를 완벽히 동작시키는 경이의 스펙으로 대체 어떤 구조로 구성된 것인지-" 그런 긴 이야기 나한테 말한대로, 그것이 나가토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인 의뢰라면 본인에게 직접 말해라, 분명 알려줄테니. 다만 지구인에겐 뭐가뭔지 이해할수 없을거다. 나는 케이블의 끝을 흔들었다. 의미를 올바르게 헤아려 준 3학년 현역 부장은 쾌히 뜰의 긴 코드 소켓을 빌려주었다. 하루히에 의한 컴퓨터부 SOS단 제 2지부화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듯 하다. 어디선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지구 전대륙이 사막화 되는것보다 먼저 전 인류 SOS단원화가 될지도 모른다. 호모사피엔스가 거기까지 우매하지 않음을 믿고싶다. 소켓에 플러그를 꽂고 감아둔 케이블을 풀면서 돌아온 나를, 하루히는 원반을 물어온 개를 맞이하는 주인과 같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싱글벙글한건 좋은 것이다. 특히 코이즈미는- 하고 생각하며 쳐다봤더니 자칭 에스퍼 소년은 그닥 기뻐보이지 않았다.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깍지를 끼고 입을 숨기듯이 손 위에 턱을 괴는 그 반응.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아무일 없는듯 나가토를 보고있는듯한 모습도 신경쓰인다. 뭐지? SOS단 소속 녀석들은 순번대로 정서가 불안해지는 법칙이라도 있는건가? 이번엔 코이즈미 차례고? 웃기고있네,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는 그렇다 쳐도 너만은 제정신을 잃지 않을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코이즈미는 나의 불신감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시선을 내쪽으로 돌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안심시키려는듯 미소를 지은 것 같아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억지로 꾸민듯한 느낌이었다. 이과 코스인 9반에 있던 이녀석은 그대로 곤돌라로 운송되듯 클래스메이트들 통째로 2학년 9반이 될 운명이었다. 마음에 안드는 녀석이 끼어들 틈도 없이. 하루히는 언제나처럼 팔팔하고, 코이즈미가 신경쓸 사태가 일어난다는건 생각하기 힘들다. '기관'이라는 집단의 상사에게 알바비라도 감봉당한걸지도 모르겠다. 그거라면 경사스러운 일이군. 네놈이 한가한건 내가 한가할 때 이상으로 축하할 일이잖아. 아니면 신학기 초부터 신입생 여학우들로부터 신발장에 넣어져있는 러블리한 봉투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거라면 내가 동정할 여지는 샤미센의 탈모로 빠진 털만큼 쓸모없는 것이다. 여하튼 코이즈미는 다물고 있으면 문답무용으로 이성의 눈을 뽑아버릴 기세인 얼굴을 싫어하니깐, 하루히도 그렇고. "쿈, 빨리 TV 나오게 해봐" 미스 차이나 선수권 최우수상 수상자 같은 하루히가 플래카드를 빙빙 돌리며 웃으면서 명령했다. 유유낙낙히 따르는 나를 도와 코이즈미도 일어나서 일을 했다. 그대로 DVD재생기와 액정 모니터를 잇는 코드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 도중, 코이즈미는 언뜻 평범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는데 어쩐지 나에겐 기묘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왜 자꾸 내게 미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거냐. 유감이지만 나는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의 시선은 접수해도 남자에게 눈부라려져서 의도를 해석하는 스킬은 없다고. AV기기의 배선을 대충 끝내고 내가 내뱉듯 종료 보고를 하자 하루히는 물고기떼를 발견한 어부마냥 좋아좋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 그러면" 상자를 뒤져 디스크를 잔뜩 꺼냈다. 마지못해 입을 연 중고 플레이어에 쑤셔넣고 자신만의 주문을 외치며 플레이 버튼을 검지로 눌렀다. 그러자 액정 모니터에 괴이한 영상이 비쳤다.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음악이 스피커로부터 빗물새듯 스며나왔다. 아사히나 선배가 흠칫한다. "아...." 안타까운 한숨을 토해내며 조심조심 화면으로부터 눈을 피했다. 그 애처로운 동작에 삽시간에 모여든 뭇 남성들을 환기시킨 나는, "하루히, 볼륨 너무 높이지 마라. 회장이 들으면 다시 돌아와" "상관없어, 난 그딴놈 조금도 신경 안쓰니까" 그럼 그렇게 해. "원한다면 여기서 공개 토론회를 열어도 좋아" 그건 하지마라. "아 몰라 시끄러워. 바보쿈" 하루히는 눈과 입을 역삼각형으로 하는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너하고 코이즈미는 여기서 대기해 줘, 뒤는 나랑 미쿠루가 어떻게든 할테니" 아사히나 선배의 허리를 팔로 두르고 꽉 끌어안으며 씨익 웃는다. "꺄악"하고 엉거주춤한 자세의 아사히나 선배. 하루히는 메이드 모습을 한 3학년과 뺨을 맞대고 비벼대며 나를 째려본다. "알겠지? 재밌어 보이는게 오면 확보한담에 이름과 반을 적고 난 뒤에 해방시켜. 그리고 우리는 영화연구부가 아니니까 그쪽 희망자는 쫓아내버려. 알았어?"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하루히는 강제적으로 아사히나 선배를 에스코트하며 안뜰 원정에 나섰다. "이건 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SOS단 플래카드를 땅에서 쑥 뽑아내서 의자 뒤로 숨긴 뒤, 모니터가 해상도의 한계를 다해 쓸데없이 비추고 있는 영상물을 바라보았다. 다름아닌 '나가토 유키의 역습 Episode00 예고편'과 같이 전력과 기재와 디지털 데이터를 쓸데없이 소비하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단편 영상을. 신학년 신학기 전에는 봄방학이라는 길것도 없는 휴가기간이 있어서 말인데, 당연히 그 하루히가 신년도의 도래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 구기대회와 사카나카의 개 사건이 끝난 무렵부터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겠지. 여름이나 겨울에 비해 과제가 적은 봄방학이야말로 완전 놀기에 최적인 기간이거늘, SOS단 단원들은 거의 매일 소환당하여 하루히의 즉흥적인 생각에 목적지를 향하여 순항하는 토마호크 미사일처럼 되어있었다. 안가본데가 없다구, 앤틱샵 순례에 프리마켓의 예비조사. 돌아오는 길엔 사카나카의 집을 방문하여 루소의 건강을 묻고, 츠루야 선배네 광대한 정원에서 개최된 대 꽃구경대회에 초대받고.. 아아 그건 재미있었지. 츠루야 선배가 손가락을 딱 치니 몸채에서 산더미같은 연회요리가 계속해서 나왔던 때는 정말 놀랐다. 아무튼 하루히는 초대받은 곳엔 반드시 갔다. 그렇다고 초대받지 않은곳에 안가는건 아니지만. 하루히는 초봄의 대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우릴 동분서주케 했다. 어째서 숨도 안차는건지 정말 궁금하다. 그중에 하루히가 특히 열의를 쏟은 것은, 작년 문화제에서 상영한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 Episode00 속편'이었다. 서브타이틀인줄 알았는데 실은 본 타이틀인 것에도 놀랐지만 내년 문화제를 향한 활동을 2학년도 되기 전에부터 준비하는 등 이렇게 빨리 *획책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해서 또다시 메가폰을 든 하루히는 새로이 만든 완장을 장착하고 부실 구석에 고이 잠들어있던 비디오카메라를 나에게 던지고 바로 아사히나 선배에게 천천히 다가가 눈을 부라렸다. 나와 코이즈미는 그자리에서 시선을 피했다. 타이틀 롤을 장식하는 인물이야말로 나가토 유키지만 미쿠루의 정체가 미래에서 온 싸우는 웨이트리스니까 아사히나 선배가 그 성희롱같은 복장을 하는것은 이미 하루히 감독적인 흐름인 것이다. 또한 나가토에겐 제복 차림에 얇고 긴 챙 모자와 검은 망토를 입히고, 코이즈미에겐 리플렉스 판을 들게 했다. 마침 타이밍 좋은 것이, 봄이면 벚꽃이 피어 있으니까 전회에 이어서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1년동안 두 번이나 꽃을 피우는 벚들에게 동정을 표한다. 하지만 어째서 예고편인 것인가. 봄방학인데 우리들을 부실에 집합시킨 하루히는 잘라 말했다. "너, 예고편에 속아본적 있어?" 그건 무슨 사기행위냐, 하고 되묻는 나에게 하루히는, "영화의 예고편 말이야, TV든가 극장에서 따로 영화 상영하기 전에 보여주잖아? 그거 보면 우와 재밌겠다 하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그 재밌어 보이는 영화를 두근두근하면서 보러 갔더니 그게 사실 완전 몹쓸 영화인거야, 예를 들자면 말이지-" 예 같은거 안들어도 되는데. 하루히는 나라도 알수있는 오래된 서양영화 제목을 입에 담으며, "이런것들 예고편만 보면 진짜 되게 재밌어보여서 웃어버릴듯한 영화였다고, 실제로 난 광고만으로도 몇번인가 웃어버린 적 있어, 그것때문에 개봉과 동시에 덩실거리며 보러갔었지" 하루히는 오버액션급으로 고개를 흔들며, "이게 무슨 영화냐 싶더라. 알고보니 예고편이랍시고 만든것이 그 영화에서 재밌는 부분만 짜깁기해서 만든거였어. 그걸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봤고, 덤으로 재밌는 부분은 예고편이 전부더라. 어떻게 생각해?" 내게 그런말 해봤자 말이지. 그게 불만이면 배급 회사에 전화라도 해줘라. 분명 예고편 담당부의 사원이 우수한 거겠지. "아무리 선전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좋은 부분만 꺼내서 편집하는건 말이야.. 그래서말인데 쿈" 하루히는 빛나는 은하를 가둬둔 듯한 눈동자로, "먼저 예고편을 만들고 본편은 다음에 생각하는거야! 예고용의 숏무비라면 얼마든지 재밌게 만들수 있어. 그도 그럴게 결말따위 필요없고 말이지, 보여줄 곳만 준비하면 되겠지?" 그런 이유로 본편도 존재치 않는 예고편을 만들게 되었다. 하루히도 두번째 이야기를 뭘로 할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단 거다. 게다가 그 영상을 신입단원을 낚을 떡밥으로 쓸 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본편이 없다, 어쩌지. 음 그래 그럼 예고편을 찍자. 정말 직구적인 사고회로다. 아직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 Episode00'을 DVD로 구워 끼워파는 야망을 버리지 않은 듯 하다. 전작의 *다이제스트판이라도 편집해서 내보내면 될텐데 아마 손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보고싶으면 입단하라고 할 셈인건가. 그런거 봐도 두통만 날 뿐이라고. 아사히나 선배의 *PV로선 120점이지만. 나는 야외에 부러 갖고간 모니터를 찌릿 쳐다보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화면이 마지못해 상영하고 있는것은 좋게 말하면 패러디겠지만 그저 여러곳에서 퍼온 장면들의 *온 퍼레이드 였다. 형광등같이 빛나는 봉을 쥔 이츠키에게 유키가 맥락도 없이 "나는 너의 어머니다"라던가 뜬금없이 유키가 안경을 쓰고있는 상태면 일반인이지만 벗으면 코스츔 체인지하며 하늘을 난다던가 검은 관을 덜커덕덜커덕 거리며 광야를 하염없이 걷는다던가, 슬슬 소재도 떨어져가는지 샤미센과 미쿠루의 인격이 느닷없이 바뀌어 아사히나 선배가 계속 냐옹거리며, 그 샤미센의 소리는 하루히의 립싱크로, 물론 입의 움직임은 대사와 전혀 맞지 않았다. 그전에 샤미센은 입도 열지 않았고. 이런저런게 언뜻 보기엔 볼만한 장면은 있을듯 보이지만 실은 전혀 스토리가 되지 않을 씬의 도미노 쓰러뜨리기식. 계속해서 무대도 연기자도 바뀌는데 템포가 몹시 나쁜 이유는 편집 센스가 없는 탓이다. 게다가 특촬씬은 일부러 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량했고, 삽입된 음악은 이미 소음의 영역에 도달하고 있었다. 출연할 필요도 없는데 기모노를 입은 츠루야 선배가 일본식 집 정원 앞에 늘어서있는 벚나무를 배경으로 시원스럽게 "으하핫하하"하고 웃으며 어째선지 같이있는 내 여동생과 샤미센과 장난치는 걸로 봐선 단순한 홈 비디오 레벨이었다. 찍는김에 잠깐 꽃구경 장면에서 의미없이 카메라를 돌렸으니까. 바람 부는 방향에 두면 냄새라도 날거같은 쓰레기 영상집. 다시볼것도 없이 확실히 첫번째 만듯것보다 악화되어 있었다. 웨이트리스 옷을 입은 아사히나 선배가 날아다니거나 뛰어오르거나 하는것은 과연 아사히나 미쿠루 프로모션으로서는 성공이었지만 대체 이것이 예고편일지 몇명이나 눈치챌 수 있을까. 마지막에 들어간 하루히의 나레이션, "나가토 유키의 역습, 올 가을 문화제에 공개상영 예정!"하는 괴성을 뺀다면. 한가지 물어도 될까? 전작에서 우주 저편으로 날아간 유키는 어떻게 지구에 돌아온거지? "그건 지금부터 생각하자. 새로운 적도 말이야!"하고 하루히 초감독이 말씀하셨다. 결국 아직 생각 안한거다. *어불성설의 차원을 넘어 완전 사기필름이다. 이런거나 보고 흥미를 가져줄 신입생은 이쪽에서 거절하마. 하루히의 중국옷이나 아사히나 선배의 메이드에 홀려버린 범인(凡人)들도 말이다. 이리하여 안뜰을 배회하는 신입생들도 탈선하여 의무교육에서 동떨어진 신분이 된 것이 제도상의 문제뿐만이 아니라는듯 나와 코이즈미가 나란히 앉아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책상을 멀찌감치서 바라볼 뿐 오려고 하진 않는다. 너희들의 판단은 침몰하는 배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려는 쥐새끼같은 현명함이다. 건강하게 제대로 된 고교생활을 할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이다. 여기에 있는 젊은이들은 알리가 없지. 하지만 나는 알고있기에 충고함에 한치의 주저함도 느끼지 못한다. 내 시기의 일년의 차이는 호랑나비 유충의 4년째와 5년째 정도의 차이가 있다. 설령 놀이라고 해도 지뢰밭 팻말이 꽂혀있는 초원을 활보하면 안되는거지. 인간이라면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 나가토가 충전중인 노트북같이 대기중인 책상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히를 대신해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진다. 창의적인 문예활동에 흥미가 있는 신입생은 아직도 등장하지 않은건가. 문예부가 작년에 한 유일한 활동. 코이즈미가 조작하고 회장이 계획하여, 보기좋게 속아넘어간 하루히가 지휘하여 우리가 쓴 회지는 거의 모두 무료로 배포해버려서 재고가 제로가 됐으며, 나가토가 앉아있는 책상에 놓여진 한권이 샘플용으로 열람이 가능케 되어있을 뿐이다. 나를 포함해 회지를 쓴 녀석들에겐 견본으로 한부씩 배포했지만 모처럼 받은걸 다시 뱉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들 똑같은지 손에서 떼려고 하지 않았다. 타니구치가 그렇게나 투덜거렸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다른 누군가가 회지를 읽으려 한다면 언제나 있는 부실의 나가토 문고에 있는 샘플을 읽는 수 밖에 없다. 만족을 모르는 탐구심을 손이 미치는 범위의 서적을 향하게 하는 나가토를 멍하게 쳐다보니, "......." 나가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색투명한 빛을 가진 눈동자를 내게 돌렸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던 탓에 당분간 눈이 마주치고 있는 것에도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정신을 차릴 타이밍에서, "고양이" 산들바람과 같은 목소리가 나가토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는것을 알아내기까지 1초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는 나가토의 자와 같은 시선을 받아들이며, "고양이가 어쨌다고?" "어때" "어떠냐니?" 나가토는 조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머리의 위치는 전혀 바뀌지 않고, "어때?" 좀전의 대사가 희미하게 의문형이 된 것 뿐이지만 이해했다. "샤미센을 말하는거군" 머리가 가볍게 끄덕 하고 기울어진다. "그래" "건강해, 말이라도 할 듯한 기색은 없고" "그래" 그것만 말하고 나가토는 다시 독서로 돌아갔다. 우리집의 청해력 좋은 삼색고양이를 걱정해 준건가. 누군가에게 정체모를 뭐였더라 *한번 더 말해주지 않으면 기억해 낼 수 없는 명칭을 가진 공생체의 숙주가 되버린 샤미센을 그렇게 만든 것도 나가토고, 아무튼 그 이후 우리집에서 살고있는 고양이는 먹이를 너무 많이 먹고 운동부족으로 조금 무거워진 것 빼고는 달리 변화는 없다. 마음껏 고양이같은 생활을 *구가하는 것, 하루히가 주워서 나에게 떠넘긴 후 그대로다. 소리소문없이 고양이 살찌는 봄, 이라는 절기와 관련된 인삿말을 생각해봤는데 어떨련지. 나도 봄방학땐 고양이처럼 뒹굴거리고 싶었다고. "정말 소란스러운 봄방학이었군요" 코이즈미가 개탄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뭄고나서 이쪽을 보기 시작한 코이즈미의 표정에 떠오른 미소는 내 눈이 어떻게 된건지 어딘가 지쳐 보였다. 코이즈미는 앞머리를 대충 만지면서, "어떻게 되진 않았어요. 당신의 눈은 정상입니다. 저는 조금 피로가 쌓인 듯 하네요" 그거야 하루히랑 어울리다보면 대체로 정상인 사람이라면 지칠만도 하지. "일반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제 정체와 임무를 기억하고 계신지요" 처음에는 하루히의 감시로, 지금은 기분을 맞춰주는 역할? "실례지만 제가 초능력자란 사실을 잊으신건 아니겠지요. 그리고 능력이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상황에서 발현되는지, 라는 것도 말입니다" 실컷 들어서 잘 알고있지. 너의 정체 고백을 들은건 나가토와 아사히나 선배 그 이후다. 다시말하면 SOS단 단원 중에서는 가장 최신의 정보라고 할수 있지. "그거 다행이군요, 이야기가 빨리 끝날 것 같습니다" 코이즈미는 일부러 한 듯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목소리를 죽인 채, "사실은 최근 수면부족이 계속되고 있어서 깊은 밤이나 새벽녘에 눈을 뜨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좋든 싫든 말이죠. 그 탓으로 몸이 회복하지 않는 겁니다" 밤에 잘수없다면 오후에 학교에서 자라. 수업중 5분의 수면은 통상 수면의 한시간에 해당한다. "그다지 불면증에 걸린것은 아니고 게다가 문제는 제가 아닙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죠.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빙 돌려 말하는건 다른 이야기를 할 때로 미뤄두죠" 코이즈미의 가늘게 뜬 눈에 숨겨진 안광이 어쩐지 진지했다. 언제나 네놈의 말투쪽이 더 돌려말한다고, 이제 조금은 반성할 기분이 됐냐. 할수없군, 모르는 사이가 아닌건 진실이다.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와 비교하면 뭔가 하나 부족한 녀석이지만. "폐쇄공간과 '신인'인가" 코이즈미의 초능력인가 뭔가가 발휘되는 곳은 대체로 그곳이다. "명답입니다. 요즘들어 출현빈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봄방학 이후부터 오늘까지 말이죠. 정확하겐 봄방학 마지막 날부터 입니다만, 덕분에 제 아르바이트는 연속해서 24시간 경계태세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자조하는듯한 한숨을 쉬며, "익숙해 질려고도 해 보았습니다. '신인'퇴치는 저희들의 일상이니까요, 의무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요 1년간 실력이 확실히 녹슨 모양입니다. 작년 SOS단 결성 후의 스즈미야 씨는 그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정신이 안정되어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스즈미야 씨와 그곳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특히 말이죠" 발생빈도가 줄었다는 얘긴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 전에도 들었었지. 이브를 맞기 전에 타니구치가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할 때 즈음인가. 그 대신 다른 녀석이 더욱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지만... "아니, 잠깐 기다려" 나는 부조리한 기분을 맛보며, "코이즈미 너, 아까의 하루히를 못봤냐. 더이상도 없이 좋은 기분이었잖아. 신발에 날개라도 돋친 것처럼 물리적으로 땅에 다리가 붙어져있지 않은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고. 게다가 그 엿같은 이공간과 파란 거인은 하루히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쌓이면 나오는거잖아. 그녀석이 그정도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심심하진 않을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이론에 맞지 않잖아?" "확실히 제 눈에도 스즈미야 씨는 매우 건강해 보입니다. 한가한데 아무것도 안할리가 없죠. 여기서 한가지, 봄방학 마지막 날에 일어난 일에 대해 기억해보시겠습니까?" 지금가지 쭉 그 회상을 하고 있었다만, "짚이는데가 없다고 하시진 않으시겠죠. 그렇다면 기억해낼게 남아있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을 말이죠" 코이즈미는 어깨를 들썩이며 멍청한 도전자에게 최종힌트를 주는 사회자 같은 말투로, "봄방학 마지막 날 말입니다. 스즈미야 씨의 무의식 레벨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날부터입니다. 자, 무엇이 있었죠?" 또 무의식이냐. 하루히의 무의식과 코이즈미의 사이비 정신의학적 허세에는 언제나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프리마켓에 간 날이겠지. 하루히가 '이번엔 여기 참가하고 싶어'래서 전차까지 타고 옆의 옆 시까지-" "제가 지적한 때는 전차에 타기 전입니다" 그놈 참 시끄럽네. 하나하나 따지고 말이야. 나는 눈을 감고 다시 회상의 바다로 노를 저었다. 하루히가 프리마켓인가 노천시장인가 말을 꺼낸것은 봄방학이 되자마자 영화 제 2탄 예고편 촬영 준비중인 교실에서 였다. 아사히나 선배를 웨이트리스 옷으로 갈아입히고 나가토에게 점쟁이 겸 마법사용 모자와 망토를 입히고 *크랭크 인의 캠페인에서 적당히 메인 두명을 세워두기 전에, 하루히는 노란색 메가폰을 한손으로 막으며 부실에서 자주적으로 쫓겨나 겨우 돌아온 나와 코이즈미에게 천장을 보며 말했다. "이 부실, 좀 물건이 많아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찾아봤는데 요전에 만든 감독용 완장이 어디론가 가버렸어. 딴 짐하고 섞여버린 걸지도 모르겠는데, 슬슬 비품을 정비할 때가 온걸까" 쓸데없는 물건을 까마귀마냥 줏어오는건 주로 너잖아. 나가토는 책이고 아사히나 선배는 차 그릇이나 찻잎. 코이즈미는 각종 구식 게임 뿐으로, 부치가 큰 물건의 대부분은 하루히가 가져온 물건에 한정되어 있다. 하루히는 덜컥하며 단장 전용 의자에 앉으며, "나 말이야, 이벤트 공고 전단지라든가 나눠주면 절대로 받게된단 말이야. 그래서 좀전에 이거 받은거 잠깐 까먹었었어" 책상 속에서 쪽지가 나온다. "프리마켓의 공지문이야. 좀 멀긴 하지만 특급으로 타면 15분정도면 되겠네. 될수있으면 지금 바로 응모하고 싶었다고. 근데 우린 지금 여러가지로 바쁘고 신청 심사에도 시간 걸릴거같고" 우리가 바쁜건 하루히 덕이다만. 하루히가 팔락거리고 있는 전단지를 받고, 나는 내 전용 자리에 앉았다. 프리마켓이군. 이 시기쯤 되니 남는 재고를 세일해서 처분하는 모양이다. 나에게 새로운 행선지를 알려주는 종이를 바라보고 있자, "차요" 눈앞 테이블에 딸그락 하고 내 찻잔이 놓여졌다. 역시 멋지신 아사히나 선배. 영화용 웨이트리스 스타일이라도 다도예를 결코 잊지 않는 조신한 웃음과 친절에 나는 눈물샘이 느슨해져버린다. 메이드가 아니고 웨이트리스 차림으로 시중을 드는것도 신선해서 좋은데... 아니, 본래 이 모습이 일에는 더 맞는 복장이었지. 보통 웨이트리스는 우주인과 격투라든가 하지 않는다. "이 의상도 밖에 안나가면 귀여워서 좋은데요..." 아사히나 선배는 스커트의 옷자락이 신경쓰이는지 다리를 모았다. 그리곤 기쁜듯이 쟁반을 끌어안으며 *주전자와 찻잔의 원래 자리로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대로 전원 분의 차를 넣고 모두에게 돌렸다. 전교의 아사히나 팬의 최대 목표, 그녀의 몸종 모습을 볼수 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문예부실 뿐이다. 하는김에 마녀 옷을 입고 독서를 하는 나가토를 보는 것도 말이다. 일단 사진을 찍어두고 싶은 광경이다. 내가 눈과 목의 갈증을 가시게 하는 작업에 몰두하던 중, "잠깐, 쿈!" 5초만에 차를 다 마신 하루히가 찻잔을 소리나게 내려놓고 박차고 일어났다. 정말 바쁜 녀석이다. "이번엔 무리지만 다음엔 우리도 상품 갖고가서 참가할거야, 이따 가서 집의 벽장 뒤져서 비싸게 팔릴거같은 필요없는 물건을 준비해둬. 뭔가 아무튼 있지? 이젠 쓰지도 않는데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해서 사장되버린 콜렉션이라든가. 받은 것까진 좋은데 아직 봉투도 뜯어본적 없는 증답품이라든가" 어릴적에 잡지 추첨에서 받은 듣보잡 애니 프라모델도 괜찮은건가? 대량으로 받아서 조립하기도 귀찮고 그대로 방치해두는 꼴이 된 건데. "그런걸로 해" 하루히는 내 손에 들려있던 전단지를 날치기하듯 가로채고, 그것을 정중히 접으며, "프라모델? 걔도 너한테 만들어지는 것보다 좀더 솜씨 좋은 사람한테 만들어지길 바랄거야 분명" 어린이의 만들기 쉬운 프라모델보다 컴퓨터부에서 전리품으로 얻어온 노트북을 출품하는건 어떻냐. 비싸게 팔릴걸. "그건 중요한 비품이잖아. 슬슬 컴퓨터부에 연락해서 업그레이드 시켜야 하는데" 다음으로 하루히의 화살은 찻잔을 양손에 들고 후후 불고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향했다. "미쿠루네도 많이 있을거 같네. 오래 입어서 낡은 옷이라든가 생각없이 모은 식기든가. 쇼핑 자주가는거 같고" "아... 그게.." 아사히나 선배는 마음이 훈훈해지는 눈을 뜨며, "그, 그렇네요. 너무 귀여워서 그만 사버리고 말게 되요. 근데 막상 입어보니 안어울리고, 먹을거 사면 이상한 맛이 나거나... 근데.. 어떻게 아시는거죠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왜냐면 미쿠루하고 가게 앞을 지나가면 반짝이는 눈으로 '다음에 이거 사러와야지' 하고 트럼펫을 동경하는 소년같은 전파를 내보내고 있어. 잘도 용돈이 버티나보네" 흠칫 하는 아사히나 선배였다. 하루히는 다음 타겟을 향해 틈도없이 시선을 돌렸다. "유키한텐 책이 많을거 같네. 프리마켓에서 헌책방을 열면 괜찮을거 같애. 부실의 책들도 꾹꾹 눌러담아서 말이야. 봐봐, 바닥이 꺼질 기세라구" "......." 나가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루히를 본 뒤, 책더미들을 바라봤다. 덤으로 나도 흘낏 보더니 다시 독서로 돌아갔다. 나가토가 자신의 장서를 버리리라곤 생각하지 않고, 게다가 나가토의 집에는 책이 많이 있는게 아니라고, 많은 책 밖에 없다고 말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고 머리로 단어의 교체를 실험하고 있는 내게, "쿈, 그럴때는 카드를 가져가서 유키네까지 가지러 가는거야. 짐정리 도울 겸 해서" 나가토는 재차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주시했고, 나는 그 눈에 떠오르는 메세지를 환시하는 감각에 습격받았다. 그건 언제였더라. 아아, 나카가와의 바보천치같은 전화가 왔을 즈음이니까 겨울방학 중 이었나. 부실의 연말 대청소때 나가토는 책장에 넘치는 책들의 처분에 대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집의 자기방에 놓여진 책이라도 단 한권이라도 잃고 싶지 않을거다. "그렇군요" 코이즈미는 한손에 찻잔을 들고, "기껏 들고와도 대전상대가 없는 게임뿐이고 말이죠, 이 경우엔 제 콜렉션에서 빼도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쓴웃음 표정을 내게 비추는건 사양한다. 하루히는 매우 바쁘게 단장 책상에 뛰어 올라타 앉았다. "그래서 모두, 봄방학 마지막 날 예정을 비워놔. 프리마켓 예비조사에 갈거니까. 하는김에 재밌어보이는 물건이 있으면 부비로 사버리자" 그 부비가 SOS단의 것이 아니라 문예부에 할당된 돈임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ㅡ그렇게 해서, 학교가 당분간 놀게 되니 좋군. 그러나 문이 닫혀있는 휴가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루히가 이끄는 SOS단은 오전을 나태로 보낼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릴 봄방학 마지막 날도, 완전히 집합장소로 정착한 역앞을 향할 차례가 되었다. "이제야 도착하셨습니까. 설마 당신의 기억이 말소된건 아닌지 불안했었다구요" 그 날의 기억을 소거해서 누가 득이 된다는거냐. "이해득실 개념으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만 할수 있다면 제가 지우고 싶었습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코이즈미에게 기억을 조작당할 이유따윈 없을뿐더러 그런게 가능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하루히를 어떻게 했으면 좋았잖아. "말씀대로입니다" 그렇게 괴로운듯이 말하지 마라. 도대체 하루히 일로 고민하다니 인생의 낭비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스즈미야 씨의 고민은 제 고민이기도 하니까요" 코이즈미는 항복하듯 가볍게 손을 펴고, 나는 다시 회상으로 돌아갔다. 프리마켓 당일 아침, 나는 알람시계의 종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뒷머리가 끌리는 듯한 느낌이란게 딱 이거구나. 포근한 잠자리를 뒤로하고 나만 일어나는 것도 화가 났지만, 심지좋게 아침잠을 만끽하는 샤미센의 자는 얼굴을 보니 이불 속에서 끄집어 내는것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나는 홀로 고독을 씹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부엌을 들여다보자, "앗 쿈 인났어? 햐미느응?" 동생은 구운 빵을 입에 쑤셔넣으면서 내게 물었다. 나는 냉장고를 열고 보리차 병을 꺼내 컵에 따라 단숨에 마시고, "자고있어" "쿈군 빵도 구워? 아, 반숙 계란프라이 있어, 찬장속에-" "부탁한다" 하고 세면대로 갔다. 돌아와보니 동생은 토스터에 빵을 넣고 *햄에그가 든 접시를 전자렌지에 넣을 참이었다. 딱히 기특한게 아니라 그저 자기 손으로 조작하는게 재밌있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덧붙여 내일부로 초등학교 6학년, 11세가 될 예정의 여동생의 오늘 일정은, 미요키치네 집에 놀러가서 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나름대로 나들이 차림으로 차려입고선 도저히 동급생으로 생각되지 않는 모습의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그 미요키치 말인데, 3일정도 전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는 정말 놀랐다. 못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점점 미인으로 성장하고 있어서 내 여동생과 나란히 걷고 있으면 마치 오남매의 장녀와 막내딸으로 보일 정도다. 대체 뭘 먹고 자라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걸까. 정말이지 미요키치가 여동생이었다면 내 방에 멋대로 들어와서 물건을 집어가거나 하진 않을거고, 아침엔 좀더 품위있게 깨워줄거고 과도한 관심에 지쳐 도망나니는 샤미센을 쿵쾅쿵쾅하며 쫓아다니는 일도 없고... 어째서 나는 미요키치의 오빠로 태어나지 못한 것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ㅡ "여자친구 자랑 이야기는 사양합니다" 코이즈미는 눈 앞에 떨어진 벚꽃잎을 집어 들며,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요시무라 미요코 씨를 여동생으로 둔 사람은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당신의 여동생에게도 충분히 소질이 있다는 의견도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에 대해 상세히 들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무튼 자택을 나선 후 집합장소에 도착할때 까지의 이야기를요" 말투가 너무하는군. 네놈은 미요키치의 실물을 본 적이 없으니까 냉담할 수 있는거다. 뭐 좋다. 고교 1학년의 봄방학 마지막 날의 내 회고록을 그렇게 듣고 싶다면 말해주지. 하지만 거기엔 너도 등장인물로서 등장한다고, 무슨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을게 아니냐. "제 일엔 흥미 없습니다" 코이즈미는 손끝에 꽃잎을 올려놓으며, "제 관심대상은 그곳엔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의 눈을 통해 본 제 모습이 어떻게 비쳤는지 신경쓰이는 정도입니다만, 역시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분홍의 꽃잎을 튕겨냈다. "다음을" 언제나처럼 나는 자전거를 타고 역 앞으로 날아갔었지. SOS단 집합규칙 첫번째, 최후에 온 사람이 전원의 밥값을 부담한다. 참고로 나는 아직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얻어먹어 본 적이 없다. 가끔은 선두에 서서 -특히 하루히를 그렇게 하고싶다는 의도가- 나를 지휘하고 격려하는건 일상의 일이지만, 어째선지 노린듯이 하루히는 내가 오기 아주 조금전에 도착한 듯 보였다. 이녀석 어디서 숨어있다가 나를 감시하고 있던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역 앞 선로를 따라 자전거 보관소에 가서 빈 자리를 찾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쿈" "우왓" 그것은 기습에 가까웠다. 워낙 급작스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단 말이다. 멍청히 자전거를 밀고 있던 내가 순간 뒤꿈치를 지면에서 떼어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지.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며 목소리의 주인을 본 나는, 기억해내는것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뭐야, 사사키냐" "뭐야라는건 어디 인삿말이냐. 꽤 오래간만인데 말이야" 사사키도 자전거의 핸들을 손으로 잡고 서 있다. 그 얼굴엔 말과는 다르게 어딘가 온화하면서도 짗궂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쿈, 그러고보니 요전에 스도한테 전화가 왔엇는데 어쩐지 3학년때 동기들하고 동창회를 열고 싶다는 것 같아.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는데 언급하지 않은 부분의 뉘앙스나 여러가지 간접적인 증언들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당시의 어느 여자애에 미련이 남은 모양이더라구. 추측컨대 스도가 집착하는 상대는 여학교로 진학을 잡은 오카모토 씨가 아닐까. 기억나냐? 곱슬머리에 귀엽게 생긴 신체조부의 오카모토. 이번 여름방학에 어떨까 하고 묻길래 괜찮을거 같다고 대답해 뒀다. 사실 난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다만, 넌 어때?" 그야 한다면 가지. 나도 꽤 변했고 졸업식 이래로 본 적 없는 녀석들이 몇명이나 됐더라.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오카모토의 옆자리는 스도한테 양보할까. 사사키는 형용하기 어려운 독특한 미소를 지으며, "그럴 줄 알았어, 근데 말이야 그 중학교 졸업식 이래가 된 녀석들 중엔 당연히 나도 들어가 있겠지? 실제로 오늘 너하고 만난건 졸업증서를 받은 그날 이래로 1년 이상 지나서고" 한손을 핸들에서 떼어낸 사사키는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듯 손목을 돌렸다. "쿈은 키타고였지. 어때? 유쾌한 고교생활을 근심없이 잘 보내고 있냐?" 유쾌한가 어떤가는 평가의 분기점이다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불유쾌하진 않군. 재미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내가 키타고에서 보낸 1년간의 다이나믹 라이프를 말하자면 길어진다고. "그거 좋겠네. 난 별로 말할게 없어서 말이지. 아주 재미없는건 아니지만 내가 간 고등학교에는 물리법칙을 뒤흔들법한 사건이 없었으니까" 좋은 자세다. 그런게 아무 학교에나 있거나 하면 전국적으로 공황이 될 거다. 나는 동급생의 얼굴을 요모조모로 뜯어보고, 중학생 때와 다른점이 있는지 찾아보면서, "넌 시외의 사립학교에 다닌댔지. 명문 진학교에" 사사키는 웃음의 채색을 바꾸었다. "너가 내 프로필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지 않고 있는것에 대해 깜짝 놀랬다. 맞아. 덕분에 수업에 필사적이지. 지금도-" 하면서 역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전차타고 학원 가야해, 이건 뭐 공부를 위해 공부를 하는 기분이야. 봄방학이라는 실감도 안났고. 그리고 내일이 되면 즉시 머나먼 전차통학이 기다리고 있지. 만원전차만큼 익숙해지지 않고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것도 없지" 키타고 통학로의 급경사와 좋은 승부가 되겠군. "건강엔 좋잖아. 난 시립에 가고 싶었는데. 좋겠다 스도는" 뭐가 이상하냐, 사사키는 감히 흉내도 내지못할 웃음소리를 내며, "근데 쿈, 여긴 무슨 볼일이야? 열차 방향이 같으면 같이갈래? 할 얘기도 많고"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맙소사, 집합시간 3분 전이다. "미안하다 사사키, 일행이 있어서, 시간에 쪼잔한 녀석이라 늦으면 무슨 험한꼴을 당할 지 몰라" "일행? 학교의? 음, 그래. 그럼 서둘러야지. 아아, 걱정마. 나는 매일아침 오는 단골이라 유료 자전거 보관소하고 월정으로 계약되어 있어서. 그게 어디냐면-" 사사키는 바로 옆 자리에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내며 자물쇠를 채웠다. "여기야, 쿈. 네 일행과의 약속장소까지 같이 가고 싶은데, 네 친구라면 내 친구이기도 하지. 한번 얼굴이라도 봤음 해" 본대도 별 이익은 없을텐데, 정 그러겠다면 말리진 않는다. 소개한들 사사키의 인생에 뭔가 플러스 될리는 없겠지 하고 생각했다. 아사히나 선배의 사랑스러움을 가르쳐 주자니 내 공로도 아니거늘 왠지 자랑스럽다. 내가 자전거 보관소의 빈자리를 찾고 이용료를 지불하는 동안 사사키는 숄더 백을 메고 옆에서 같이 걸으며 중학교 시절의 잡담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SOS단의 집합장소가 보일 쯤에, "쿈, 넌 변한게 없구나" "그러냐" "어, 안심했다" 어째서 사사키에게 안심되지 않으면 안되는거냐. 본 느낌으론 너도 전혀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나는 마치 성장하지 않은게 되는거네. 신체검사의 결과를 신용한다면 육체적 수치는 어느정도 변화했을 테지만" 나도 키는 좀 컸다고. "실례,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외관은 바꾸려면 바꿀 수 있어. 예를 들면 머리를 기르던지 자르던지로 꽤 인상에 변화를 줄 수 있지. 간단히 변하지 못하는건 알맹이야. 좋든 나쁘든 인간의 의식이 물질에 머무르는 거라면 구성물질을 어지간히 교체하지 않는 한 개념이나 관점은 그리 달라지지 않겠지" 묘하게 그리운 느낌이다. 생각났다. 그래 사사키는 중학교때부터 이런 까다로운 이야기를 하는 녀석이었다. 사사키는 걸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혹은 개념이 완전히 바뀐 성 바울로, 또는 코페르니쿠스같은 전회가 없는 한 말이지. 세계의 변용은 이콜 가치관의 변용이란 말이지. 그것이 전부라고 해도 좋아.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인식능력을 초월한 사상을 결코 바르게 이해할 수 없어. 우리들의 눈은 적외선을 볼 수 없게 되어있지만 뱀은 열을 감지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 우리들의 귀는 일정치 이상의 주파수가 되면 소리로서 인식하지 못하지만 개들은 초고음파를 들을 수 있어. 어느쪽도 사람에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적외선이나 개호루라기의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게 아냐. 그저 감지하지 못할 뿐이지" 정말 키타고에 왔으면 좋았을텐데 사사키. 너와 죽이 잘 맞을 녀석이 한명 있다구. 마침 잘됐군.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이 기회에 소개시켜줄까? 내가 제안했을 즈음에, 어느덧 나를 제외한 SOS단 전원의 모습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한 분을 데리고 오셨었지요" 코이즈미는 여기저기에 비난을 희석시킨듯한 색을 섞은 목소리로, "어떤 의미에선 저와 좋은 말상대가 될 인물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저같은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죠. 입장이 너무 다릅니다. 저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있기 때문에 제가 선망과 달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은 소수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당신도 그중 한명이구요" 아첨같은거 떨어도 나는 델포이의 무녀처럼 신탁을 고하거나 하진 않는다구. "알고 있습니다. 불가항력만큼 무서운 것도 없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지만 거역할수 없는 힘 말이죠" 더욱이 사사키가 대단한 녀석인것은 중3때 1년을 같이 보낸 나는 알고 있었지만, 코이즈미가 아고 있었다는건 의외인데. "의외랄것도 없습니다. 당신에 대해 '기관'이 조사한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죠. 물론 태어날 때부터 대부분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당신은 보편적인 일반인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거 고맙군, 나는 네놈 조직의 보증서류인가. "원하신다면 발행해 드리지요. 아니, 이건 농담입니다. 농담이 되지 않는것은 당신이 중학교 3학년때 사사키 씨와 같은 반이 되고, 새로운 친구관계였다는 이력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제 심경입니다" 어째서냐. 코이즈미는 시를 낭독하듯이 대답했다. "당신의 친우인 사사키 씨 또한 일반인이지만 시각이나 관점이 남다른 인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입자의 행동을 하지만 파동의 임무를 수행하는, 마치 빛과 같이 말이죠" 불가항력인지 뭔진 모른다. 우연이란 단어는 지겹도록 들어왔다. 하물며 빛이 가진 이중 성질에 대해서 같은 것 따윈 평생 무관계한 상태로도 좋다. 아무튼 나와 사사키는 역 앞을 향해 걸어갔고, 멈춰선 곳은 언제나의 그곳이었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4인방의 모습, 내역은 세명 사복에 한명 교복. 그리고 매번이지만 듣게되는 감사스러운 단장님의 훈화말씀. "지각? 간이 부었군. 그렇게 말했는데 최후에다가 타임오버까지 하다니 봄이라고 너무 풀어진거 아냐? 쿈, 좀더 1분1초를 소중히 하라구. 너의 시간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니깐? 기다리는 우리들의 시간하고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구. 그러니까 지각한 분은 벌금으로 부치겠어. 지나간 시간은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 비위를 맞춰줄 생각이라면 아주 조금이지만 위안이 되니까" 하루히는 숨도쉬지 않고 말을 끝낸 뒤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기이한 눈초리로 내 옆을 쳐다봤다. "그거 누구야?" "아아, 이녀석은 내..." 하고 소개를 하려는 도중에, "친구" 사사키가 멋대로 해답을 말했다. "하?" 눈을 크게 뜬 하루히에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인사한다. "라고 해도 중학교 동창. 그것도 3학년때지만, 그 때문인지 박정하게도 1년동안이나 연락도 없었어. 이건 서로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1년만의 재회인데도 별 인사없이 회화를 할 수 있는 사이였다니 충분히 친했었다고 생각해. 나에겐 쿈, 니가 그런 경우야" 새로웠던 친구라는 의미는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곧잘 이녀석과 어울려 지냈으며 방과후에도 얼굴을 맞댄 횟수가 누구보다 많았던걸로 기억한다. 기억한다만- 왠지 그때의 기분이 좋지 않았던건 왜지. 말해두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뒤에서 손가락질 받을만한 행동은 한 기억이 없고 사실도 없다. 하지만 사사키가 나를 친구라고 말하는것을 옆에서 듣고 있으면, 그리고 하루히의 기묘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5분후에 뇌우가 휘몰아 칠 것을 알면서도 우산을 갖고 나가지 않은 3분후같은 기분이다. 어째서일까. 생각해보니 아사히나 선배는 깜빡이며 눈동자를 반짝이는 빈도를 늘려갔고, 코이즈미가 번뇌에 가득찬 표정으로 턱을 만지고 있었던 것 같다. 교복을 입고 무표정한 나가토도 부동자세였던 것 같지만, 어째서 나는 하루히의 얼굴만 봤던 것일까. 옆에서 움직임의 기척이 났다. 사사키는 반 보 정도 앞으로 나아가 하현달 형태로 입을 벌리며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하루히에게 악수를 청하듯. "사사키입니다. 당신이 스즈미야 씨군요. 이름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히가 찌릿 하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뭔가의 착오로 지명수배당한 무고한 시민의 기분을 맛보며, "너의 악행을 이녀석한테 말한적은 없어. 사사키, 넌 어떻게 하루히를 알고있어?" "그야 같은 시가지에 살고있고, 눈에 띄는 사람들의 소문은 이리저리 줏어들은게 있어서. 우리 중학교에서 키타고로 간 학생은 쿈 너뿐만이 아니지" 쿠니키다 라든가. "그래, 그도 말이지. 건강한가? 아마 지금도 유유낙낙히 살고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성적으론 꽤 좋은 학교에 갈수 있었는데 일부러 현립에 들어간 괴짜지" 사사키는 동창생 얘기를 허겁지겁 끝내고는 하루히를 바라봤다. "키타고에선 쿈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내민 손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는다. 사사키는 서양식 인사에 하루히는 초코렛을 착각하여 조약돌을 입에 넣고 씹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윽고 그 손을 잡으며, "잘 부탁해" 잡은 손을 흔들지도 않고 찬찬히 사사키의 눈동자를 보며, "자기소개는 필요 없겠군" "그렇군요" 사사키는 싹싹히 웃으며 대답하고, 하루히를 바라보며 청개구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낼 법한 소리를 내며 살짝 웃었다. "그쪽 분들은?" 사사키는 하루히의 손을 섭섭한 듯 놓고, 시선을 좌우로 돌렸다. 단원소개는 당장의 몫이라고 생각한건가. 하루히는 공백도 두지 않고 말했다. "그쪽의 귀여운게 미쿠루고, 저쪽 세라복이 유키, 이쪽이 코이즈미" 각자 지명받은 사람들은, "앗, 아..아사히나 미쿠루예요" '아사히나삘' 이라고 써놓고 팔면 삽시간에 예약주문이 쇄도할것 같은 봄 스타일로 몸을 둘러싼 유일한 상급생은 서둘러 인사를 했다. "코이즈미 입니다" 아라카와 씨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정중함으로 고개를 숙이는 부단장. "......." 학교에 있을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교복 모습의 나가토는 끄덕도 움직이지 않는다. 삼인삼색의 인사를 들었지만 사사키는 귀찮았는지 단장 이외엔 악수를 청하지 않았고, "처음 뵙겠습니다" 그저 재미있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아사히나 선배는 조금 허둥지동 거렸으며, 코이즈미는 평소의 미소를 되찾았고, 나가토는 심해에서 이제 막 퍼올린 듯한 바닷물과 같은 눈으로 사사키를 관찰하는 시선을 내보내고 있다. 사사키는 3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려는 듯 몇초간 가만히 서있다가 빙글 돌며 나를 향했다. "그럼 쿈, 난 슬슬 전차시간이니까 살례할께. 다시 연락한다. 이만" 휙. 손을 흔들고, 다시한번 하루히에게 미소를 보내며 개찰구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정말 시원시원 하구만, 왠지모르게 나는 사사키의 뒷모습을 사라질때까지 멍청히 바라보았다. 오랜만 치곤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군. 이대로라면 다음에 만나는것도 1년후가 될 지도 모르겠다. 수 초간의 침묵이 진행되는 가운데, 하루히가 정적을 끊으며 말했다. "좀 별난 녀석이네" 네가 별나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하루히는 개찰구에서 눈을 떼며, "저기, 니 친구 옛날부터 저런 느낌이었어?" "어, 전혀 변하지 않았어. 외관도 알맹이도" "흐음?" 하루히는 뭔가가 생각중인 것을 귀에서 쏟아내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재빨리 포기한듯 머리의 각도를 수정하며, 뿅 뛰어올라 몸의 방향도 바꾸었다. "뭐 좋아. 그것보다 쿈이 낼 카페로 가자. 돈은 제대로 갖고 왔겠지? 프리마켓에서 살 물건이 있으면 마구 사야지" 전자상가의 형광등 파는곳과 같은 밝기로 웃으며, 하루히는 선두를 끊고 걷기 시작했다. 짐 정도는 혼자 들란 소리는 안할테니 적어도 자기가 갖고싶은건 자기 돈으로 사라구. 문예부 돈 쓰지 말고, 나가토를 위해서라도 내가 지켜야 한다. "그 뒤의 얘기는" 하고 나는 코이즈미에게 말했다. "네가 아는대로다. 카페로 가서 내가 내고, 프리마켓에 가서 하루히는 쓸데없는걸 잔뜩 사들이고, 바다가 보이는 멋들어진 가게에서 점심먹고 돌아왔지. 오는길에 사카나카네도 들렸었고" 네놈이 노부부의 노점에서 구입한 바둑판을 시종 끌어안고 있어서, 짐의 대부분이 내 팔에 맡겨져 있던걸 잊었다곤 하지 마라. 덕분에 난 헐값에 팔고있던 잡동사니-*데저트 로즈의 원석이라든가-를 대량으로 들게 되어 회장 내를 어슬렁거렸으니까. 그나마 흐뭇해 할만했던 것은 아사히나 선배가 초등학생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만화경을 보며 "와아, 정말 원시적인 장난감이네요. 그래도 이쁘다..."하고 감탄사를 내뱉는 씬과, 어딘가의 부족의 주술사가 쓰고 있던 것 같은 가면을 지그시 바라보는 나가토 정도였나. "어디 니 기억과 다른 곳이 있냐?" "다행스럽게도 없는 것 같군요" 코이즈미는 모니터의 뒷쪽을 열심히 관찰하며, "객관적인 사건으로서는 당신의 해설 그대로입니다. 다만 주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면 당신과 저의 해석은 꽤 어긋날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관찰하면 눈을 내게로 돌렸다. 마음에 안드는 눈초리다. "그럼, 여기서 문제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요즘들어 폐쇄공간의 발생률이 증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즈미야 씨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랑 거의 같은 수치입니다.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감소경향을 보이던 저의 아르바이트 출격횟수가 단숨에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봄방학 종료 직후입니다. 어째서일까요" 나는 안절부절하며, "말하고 싶은게 뭐냐"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언어화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텔레파티 같은 것으로 의사소통이 매끄럽게 되는 경우는 드물죠. 요컨대 인과관계입니다. 이 경우 '인'에 해당하는 부분은 봄방학 마지막 날이 되겠군요. '과'에는 폐쇄공간과 신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당신에게 내는 저의 문제입니다" "......." 나는 나가토같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후두부가 저려온다. 코이즈미는 죠몬시대의 지층에서 발굴한 원시적 가면같이, 웃는 얼굴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미소로, "스즈미야 씨가 신학기 개시와 동시에 폐쇄공간이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과, 봄방학 마지막 날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날 무슨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언제나처럼의 SOS단 활동으로 새삼스레 중요시 할 헤프닝도 없었습니다. 프리마켓에서 재미있게 논 것 뿐이죠. 평소와 틀렸던 것, 상례에 개입한 유일의 변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미 알고 계실겁니다" 사사키인가. "하지만 어째서냐. 약속장소에 그냥 우연히 만난 중학동창과 같이 온것 뿐이라구. 어째서 하루히의 정신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는거냐" 코이즈미는 놀란듯이 입을 다물고, 관찰보다는 감상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마치 여동생이 주워온 매미 껍질을 처음 본 듯한 샤미센의 표정을 만들었다. 한 10초간의 시간이 흘러, 슬슬 눈 앞에 손을 흔들어줄까 하고 생각한 순간, 인체에 무해한 핸섬보이 초능력 알바생은 차분히 고개를 흔들며, "왜냐면 말이죠" 과장된 동작으로 몸까지 나를 향했다. "당신의 친구를 자칭하는 사사키 씨가 아마 열 명중 여덟 명은 홀려버릴 실로 매력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사에 어두운 어리석은 임금의 시해를 결의한 간신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2년전 -딱 이맘 때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 3이 된 봄, 고교 진학을 걱정하는 어머니에 의해 학원에 난폭하게 처넣어졌다. 그 같은 반에 사사키가 있었고, 학교에서도 같은 교실을 쓰는 녀석은 사사키 뿐이었다. 가끔 자리가 가까워서 어느쪽이 먼저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야기를 나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여어, 너도 여기 오는거냐" 같은 거였던 거 같다. 계기는 그냥 그런 느낌으로, 그걸로 인해 중학교 교실에서도 가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딱히 주의를 기울인건 아니지만, 사사키의 네놈 이자식 저자식 하는 인칭대명사와 딱딱한 사내놈식 말투는 확실히 남자애들을 상대할 때만 사용한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여자애들 사이에선 보통의 여자애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남자를 상대로 남자같은 말투를 쓰는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상대의 남자에게 자신을 여자로 보이게 하고싶지 않다던가. 요컨대 나를 연애 대상으로 보지 마 하는 의사표현인걸까.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나? 물론 나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지. 애초에 나는 남의 말투에 태클을 걸 정도로 국어력에 대한 자신이 없다. 내 이름에 대해, 사사키는 재미있는 반응을 보였었다. "쿈이라니 굉장히 유니크한 별명인데, 어떻게해서 그렇게 됐지?" 나는 투덜대며 바보같은 에피소드와 여동생의 만행을 고발했다. "흐음, 네 이름은 뭐라고 읽는데?" 발음을 말해주자 사사키는 눈과 고개를 각각 다른 방향으로 기울이며, "*그게 쿈이 되는거야? 대체 어떤 한자로... 아, 말하지 말아봐, 추리해보게" 잠시간 재미있는듯 조용히 있던 사사키는 큭큭큭 웃으면서, "아마 이렇게 쓰는거지?" 노트에 끄적끄적 샤프를 놀린다. 쓰여진 문자를 보고 나는 감탄해 버렸다. 사사키는 정확하게 내 이름을 적은 것이다. "유래를 물어봐도 될까? 이 어딘지 모르게 고귀하고 장대한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이름의 이유" 아직 내가 어릴때 아버지에게 물어봤을 때 들은 얘기를 그대로 말해주었다. "좋네" 사사키가 그리 말하니 진짜로 좋은 이름이라고 와닿게 된다. "그래도 난 쿈 쪽이 더 좋은데. 울림이 좋아. 나도 그렇게 불러도 될까? 아니면 다른 명칭을 고안해볼까. 아무래도 넌 그 닉네임이 그닥 맘에 안드는 거 같으니" 어떻게 그런걸 알지? "그도 그럴게 넌 쿈이라 불릴 때보다 평범하게 이름을 불릴 때가 반응속도가 빠르잖아. 0.2초 정도" 나를 실명으로 부르는건 내게 뭔가 진지한 할 얘기가 있을 때 정도니까 말이지. 수업중에 다음 문제를 지명당할 때라든가, 별로 친하다고 할수없는 -특히 여자에게 불릴 때라든가... 그건 그렇고 0.2초? 잘도 그런 차이를 눈치채는구나. "보고 들은 정보가 뇌에 도달하여 반응을 개시하는 시간이 그정도야. 넌 실명으로 불릴 경우엔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쿈일 때는 의식하진 못하겠지만 그만큼 느려져. 너의 심층심리는 썩 좋아하지 않을거라 판단한거야" 생각해보니 무의식이라든가 심층심리든가를 내 사전에 기입한 때는 이게 최초라고 생각한다. 학원의 수업은 일주일에 3일. 화, 목, 토에 모두 저녁시간대였다. 학교가 쉬는 토요일을 제외하고 화요일과 목요일엔 나와 사사키는 같이 다니는게 금세 습관이 되었다. 학원은 이 근방에서 제일 큰 역 근처에 있어서 학교부터 걸어가기엔 꽤 짜증나는 거리였고, 그렇다고 버스도 바로가지 않고 빙 돌아가기 때문에 이 또한 시간이 꽤 걸린다. 제일 빠른 것은 학교부터 역까지의 직선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는 것. 이거라면 15분도 안걸린다. 내 집은 학교부터 목적지까지의 길의 직전상에 놓여있어서 일단 귀가하고 자전거를 꺼내 학원을 향해 질주하는것이 논리적으로 최선의 방책이었고, 따라서 안장 뒷자리에 사사키를 태우고 달리는 것도 습관이 되었다. 사사키에게 있어선 매우 경제적이었기도 하고. 학원에서도 같은 교실이었지만 매시간 잡담을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진 않았다. 서로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 탓인지 중2때부터 부드러운 커브를 그리며 하강하고 있던 성적곡선도 떨어지길 멈출 경향을 보였던건 고마운 일이었다. 갖고 돌아간 답안용지의 점수가 원대한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던 것에 애간장을 태우며 학원에 처넣으신 어머니도 약간 가슴을 쓸어 내렸겠지. 이렇게 해서 "좀더 공부 안하면 사사키랑 같은 대학 못간다" 하는 입버릇도 나으시면 좋으련만. 어째서 내가 그녀석과 진도를 맞춰야 하는건지. 이해할 수 없다. 학원이 끝나면 세계는 언제나 완전히 밤의 지배하에 놓여진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뾰루지같은 천연 위성을 올려다보며 나는 자전거를 밀며 걷고, 조금 뒤에 사사키가 따라온다. 돌아갈 땐 버스를 이용하는 사사키와 함께 근처 정류장까지 간다. "그럼 쿈, 내일 또 학교에서 봐" 도착한 버스의 승강구에 발을 올리며 말한 사사키는 손을 흔들었고, 나는 집을 향했다. 네, 회상 끝. "설마 그정도까지 였을줄은..." 코이즈미는 미간에 중지를 꽂으며, "마치 정말로 철없고 순수했던 중학시절을 소재로 한 연애소설의 한 페이지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나와 사사키는 확실한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고. 아니, 확실치 않았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 "네네, 그러시겠지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위 분들은 어떨는지요. 당신들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쿠니키다나 나카가와는 묘한 착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저라도 착각을 일으키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물론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것도 아닐겁니다. 어쩌면 아사히나 씨와 나가토 씨도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뭐 그 두 분은 조금은 당신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게다가 이것에 대해 매우 석연찮게 생각하실 분을 제가 한명 알고 있습니다" "...누구냐" 코이즈미는 미소를 애써 일그러뜨렸다. 그 눈에 머무르는 것은 나에 대한 비난의 시선이었다. "여기까지 말해도 모르신다면 당신의 머리를 절개하여 뇌에 직접 그 이름을 써 놓아야 하겠죠" 그쯤은 알고있다고. "설마라곤 생각하지만" 머리 위에 대향의 모충이 얹혀져 있는듯한 기괴한 감각을 느꼈다. "하루히가 사사키를 보고, 그것도 친우인지 뭔지 자칭하는 것을 듣고 그걸로 인해 뭔가 착잡해 한다는건가? 특기인 '무의식' 속에서?" "폐쇄공간, 신인. 당신이 알고 계신대로의 현상입니다만 그 날 이후의 그것들은 이전에 비해 상태가 다릅니다. 폐쇄공간은 그대로지만 신인의 행동이 어쩐지 불안할 정도로 얌전합니다. 출현하긴 하였으나 적극적인 파괴행동은 보이지 않고 무료하게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본분이 생각났는지 건축물을 툭툭 건드리는 정도죠" 저 청백색의 거인이 이성적인건 나쁜 일이 아니잖아. "저희 '기관'에 있어선 어느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인을 소멸시키지 않는 이상엔 폐쇄공간도 해방되지 않으니까요" 코이즈미의 주석은 계속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인, 나아가선 스즈미야 씨의 무의식은 어딘가 갈피를 못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겁니다. 혼미의 길을 방황하며 괴로워하는 무의식이죠" 프로이트 선생도 무덤속에서 쓴웃음을 지으실거다. 설마 자신의 연구성과가 하루히의 분석에 빈번히 쓰여지리라곤 상상도 못해봤겠지. "저로선 스즈미야 씨가 사사키 씨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고 친다면 이야기가 편해질 것 같습니다" 반론 하나 해주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루히를 위해서다. "그 녀석은 연애감정을 정신병의 일종으로 보는 여자다" "한가지 묻겠습니다만 당신은 스즈미야 씨가 남녀간의 연애에 대해 논할 수 있을 정도로 심리학에 정통하신 분으로 보이십니까?" 아니. "저도입니다. 스즈미야 씨는 아는 것 같지만 모르고 계시죠. 역의 경우도 성립되는 명제입니다만 아무튼 그녀의 정신은 또래의 여학생과 비교해보면 특별히 조숙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만 보면 극히 평범한 한명의 소녀입니다. 다만 삐뚤어진 포즈를 취한 것 뿐이죠" 너가 할말이냐. 적어도 내가 보기엔 너도 충분히 삐뚤어진 놈이라고. "그렇습니까" 고대의 가면을 벗어던져 웃음짓고, 연극하듯이 뺨을 만지며, "아직 정진이 부족하군요. 당신에게 이렇게까지 간단하게 간파 당하리라곤" 코이즈미는 양팔을 넓히며 고개까지 흔들었다. "분석해 보건대, 스즈미야 씨는 당신의 과거의 친구분이 존재하며, 그것이 자신이 모르는 인간이고 지금까지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사실의 발견에 설명하기 힘든 감각을 느낀 것으로 생각됩니다. '질투' 등 단순한 단어로는 해석불능한, 좀더 선천적이고 근원적인 감각 말입니다. 의표를 찔렸다고 정정할까요. 그리고 당신에게도 옛 친구 한둘은 있으시겠죠. 거기까진 스즈미야 씨도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인 친구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죠. 하지만 사사키 씨가 자신을 당신의 친우라고 공언한 것, 이것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예상 외 입니다. 그녀의 존재를 알고있던 저에게도 말이죠" "잘.. 아니, 완전히 모르겠는데" "스즈미야 씨의 중학시절은 거의 고립, 혹은 고독상태 였기 때문에 친구라는 울림이 마음에 걸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녀석은 바래서 그렇게 된 거잖아. 고고하다는건 하루히를 두고 하는 말일거다" "그렇다 해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 당신이 모르는 이성의 친구가 있고, 돌연히 눈 앞에 나타난다거나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있었냐?" 나는 다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녀석이야말로 음지에서 남몰래 애인을 만들고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코이즈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예가 나빴군요. 저로는 안되겠네요. 그럼 아사히나 씨가 과거에 친하게 지내던 남성이 있었고, 그가 그녀에게 마치 소꿉친구처럼 대한다면 어떨까요?" 피가 역류하지. 하지만 말이다. "그럴리 없잖냐. 아사히나 선배나 나가토는 놀이나 관광을 목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게 아니야" 조금은 노는 쪽이 좋을 정도군. 게다가 아사히나 선배의 과거라니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미래라구.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어떨까요. 상상입니다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을 느끼게 될 것 같군요. 질투도 아니고 곤혹도 아니고. 애초에 아사히나 씨는 그 이성을 특별히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닌 거 같고 표면적으로는 언제나와 같으며 정말로 어떻게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섣불리 지레짐작 하는것도 터무니없죠. 따라서 그런 감각은 의식 하로부터 잊어버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방금 얘기한 가정상황에서 아사히나 씨를 당신으로, 당신을 스즈미야 씨로 바꿔 넣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뜰에서 소규모의 함성이 들려왔다. 어딘가의 동호회에 입회를 결정한 1학년이 있는가보다. 코이즈미는 문득 그쪽을 바라보며, "하지만 통상의 의식 밖에 있는 부분은 그리 간단히 속일 수 없습니다. 때문에 무의식의 혼란이 폐쇄공간과 덜떨어진 신인을 만드는거죠. 원인이 명확한 듯 하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은게 실정입니다. 때문에 처리도 힘들죠. 실은 방법이 아주 없는것도 아닙니다만-" 코이즈미의 눈이 점점 가늘어진다. "쿈! 코이즈미군!" 아사히나 선배와 몸을 바싹 붙인 하루히가 안뜰의 포석을 밟아 부숴버릴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아앗, 아아아" 보폭이 1.5배정도 차이가 있기에 다리가 꼬일 수 밖에 없는 아사히나 선배를, 하루히는 포획한 먹이마냥 팔뚝에 고정시킨채 사정없이 돌진했다. 낚싯바늘에 신입생 한명쯤 꿰어 올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빈손이었다. 차이나와 메이드 콤비로 한마리도 낚지 못했단거냐. 이번 신입생은 상식에 찌든 녀석들 뿐인가보다.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끌어안은 채로 예고편을 반복해 상연하고 있는 모니터 앞에 멈춰서서, "재밌어보이는 입단희망자 누구 있었어? 유키쪽은?" 나가토가 희미하게 고개를 젓는 기미를 느끼면서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여기저기 다녀봤는데.. 틀렸어, 안돼안돼. 미쿠루가 탄 맛있는 차가 공짜라 간들거리면서 살랑대는 녀석들은 입단시험의 1단계에서 다 차버렸어. 여자로 꼬시면 언젠간 모두 도망가 버릴거고. 올해는 흉작인가봐" 코스프레 연구회와 착각했겠지. "그래도 한명정도는 누군가 적합자가 있을거라 생각하니까 이제부터야! 이제부터. 쿈! 네 중학교 후배중에 재밌는 애 없어? 아참, 그리고 나 중학교땐 그런애 전혀 없었으니까 히가시중 출신은 전원 불합격이야. 말하는거 깜빡했었네" 언성을 높이고 있던 하루히의 얼굴은- 역시 어느 각도에서 봐도 삼중으로 이루어진 연성처럼 빛나는 핵융합같은 웃음이었다. 그 이상의 빛은 없을 정도로. 그날 우리는 결국 무엇하나 성과도 올리지 못하고 어슬렁어슬렁 부실로 철수했다. 아사히나 선배는 마음에 걸리는게 있는지 앉음새를 바로잡으며 메이드 의상인 채로 서둘러 주전자를 풍로에 올려 차를 대접할 태세에 들어갔고, 나와 코이즈미는 테이블과 케이블의 정돈 및 설치와 정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나가토는 나가토대로 문예부의 벽보를 코푼 휴지마냥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보물을 다루는 듯한 손길로 회지의 견본을 선반에 놓고,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부실 구석에 자리를 내 하드 커버를 펼쳤다. 꽤 떨어져 있긴 했었지만 나와 코이즈미의 대화를 듣지 못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1년전에 비해서도 키가 완전 그대로인 우주인제 안드로이드는 냉정한 얼굴에 침묵 모드와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하여금 나를 의미없이 안도시킨다. 하루히는 단장석에 앉아 삼각뿔의 선단에 손가락을 올려, 달각달각 흔들며, "혈기왕성한 1학년이 없었군. 기다려도 오지 않고. 그물을 던지는 횟수와 해역은 많고 넓은 편이 좋아" 차이나드레스에서 삐져나온 맨발을 모으며, 새로운 장난을 고안중인 골목대장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두근두근 하고있는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트롤망을 내던지는 것 보다 핀포인트 지점에서 목표를 정해 외줄낚시를 하는편이 양질의 물고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만, 부러 그런걸 말해서 하루히의 신입단원 권유 촉진계획에 가담할 생각은 없다. "대어를 놓칠 생각은 없어. 작년처럼 전 부서의 클럽을 순회할까 생각도 해봤어. 딴 부한테 뺏기기 전에 끌어들이고 싶으니까. 이 수밖에 없고, 한명쯤은 맛있는 녀석이 있을거라구" 어떤 맛이 나는 하급생을 원하냐? 구워서 먹을 수 있는 녀석이라면 좋겠다만. "미쿠루 이상으로 귀여운 애라든가, 유키 이상으로 얌전한 애라든가, 코이즈미 이상으로 예의범절이 갖춰진 녀석이라든가, 그런거" 꽤 높은 허들이군, 애초에 하루히가 제대로 된 이유로 데려온 부원은 아사히나 선배 한명뿐이다. 자신의 눈에 든 모에캐릭터라는 이유의 어디가 제대로 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가토는 문예부실에 멋대로 쳐들어가 어쩌다 얻은 것 뿐이고, 코이즈미 따윈 그저 전학생이라는 칭호가 하루히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올해도 5월쯤에 전학온 학생을 문답무용으로 낚아챌 심산은 아니겠지. "전학생은 코이즈미로 충분해. 우수한 부단장이고. 유사캐릭터는 필요없어. 좀더 재밌지 않으면 안돼. SOS단은 소수정예주의니까" 하루히는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턱을 괴고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판단미스였어" 너가 과실을 범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작년에 미리 학구 내의 중학교를 돌아보면서 유능해 보이는 애를 발굴해뒀으면 좋았을걸. 딴 고교에 단원으로서 적합한 학생이 가버리는건 너무 아까워. SOS단 제 3지부를 타교에 설립할까? 그거하고 SOS단 예비부를 이 근처 중학교에" 하루히의 망상이 한도끝도없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렇게 사람 늘려서 어쩔거냐. 미식축구 팀이라도 만들려고?" "나의 SOS단은 말이야, 좀더 세계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돼. 컴퓨터의 기억을 담는 통도 점점 대용량화 되잖아?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목표는 세계야. 이 상태론 국제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지 못해" 정보화의 다음은 국제화냐. 난 소박하고 조촐한 인생이 좋다구. 아무 자격도 없는 고교생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주제넘게 뛰쳐나갈 마음은 없다. 차라리 나중에 어딘가에 사립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이 되어 학교이름을 SOS단 학원이라 명명하는건 어떻냐. 학생은 전원이 강제적으로 SOS단 단원이고. 음 생각만해도 오금이 저리군. "하항, 바보네. 법인화 따윈 논외야" 하고 하루히가 웃음을 던진다. "우린 영리가 목적이 아니니까 말이지!" 이것도 진보라면 진보인건가. 입으로는 호언장담하지만, 작년의 하루히라면 부활동 설명회에 억지로 참가하여 SOS단 선전 광고지를 대량으로 인쇄해 이사람 저사람 가리지 않고 뿌려댔을 테지. 위압적인 학생회장이 눈을 빛냈던 탓인지 올해는 레지스탕스같은 지하공작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다. SOS단의 지부를 늘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본부의 인원을 안이하게 늘릴 셈은 아니다. 어느쪽이냐고 물으면 그냥 불가사의한 현상의 정보를 각자 갖고 모여서 뭐라든 해보고 싶은 느낌이다. 우주인과의 접촉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는 시간여행자 라든가, 매일 밤 이공간에서 악과 싸우는 현재진행형 초능력자라든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것은 일찍이 나도 듣고 싶어하던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코이즈미의 바둑의 묘수풀이에 어울리면서, 아사히나 선배의 특제 차로 목을 축이면서, 나가토가 정좌인 채로 독서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SOS단에 정규단원은 이 이상 늘어나지 않겠지, 하고. 츠루야 선배같은 명예고문이 있고, 사카나카같은 단 외의 관계자도 생겼고, 다른 부를 컴퓨터부처럼 좌지우지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부실에 정박하려 다섯명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그대로 정착하는 경우는 없을거라고. 단지 예감일 뿐이다. 이유따윈 없다. 이것이야말로 천국에 사는 Dr.프로이트나 융 박사에게라도 듣지 않으면 모를 나의 무의식중의 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의 그 예감은 문자 그대로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하지만 이 떄의 나는 알 리가 없었다. 하고 상투적으로나마 말해두지. 설마 그렇게 복잡한 일이 발생하리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코이즈미에게도, 아마 나가토에게도, 심지어 아사히나 선배(대)에게도. 단원들은 결백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즈미야 하루히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분열 프롤로그 계절의 변화를 무엇으로 실감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요 반년간의 내 경우는 집에서 기르고있는 3색 고양이 샤미센의 동향으로 훨씬 알기 쉬웠다. 샤미센이 한밤중에 내가 잠들어있는 이불 속으로 숨어들지 않게 된 것으로, 난 이 지역의 사계절중에서 최고평가를 주어도 좋을 달이 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고양이 이상으로 계절에 민감한것은 환경변동의 대응에 감탄할만한 수준으로 정확한 식물들이라는 생각도 했다. 여기저기 만개한 벚꽃이 마치 전원이 사전에 협의라도 한듯이 스케쥴 그대로의 풍경을 보여줄듯한 4월 상순의 하늘은 크레용으로 칠한듯이 푸르고 태양은 이어질 여름의 준비운동이라도 할셈인지 매우 밝은 햇살을 지표에 뿌려댔으나, 산에서부터 불어내려오는 바람은 아직도 쌀쌀했기 때문에 나의 현 위치가 어느정도의 해발 고도에 위치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할일도 없어 한결같이 상공을 향해 벌려져있는 내 입에서 말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을듯한 단어가 흘러넘치는 이유는 역시 한가하다는 이유 밖에는 없겠지. "봄인가..." 딱히 누군가가 리액션을 취해주길 바라는건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읽으려하지 않으면서도 일부러 찬물을 끼얹는 녀석이, "의심할것도 없이 봄이군요. 또한 학생에게 있어선 새로운 1년의 시작입니다. 달력도, 연도적으로도, 그러고 저의 심정에도요." 터무니없이 상쾌한 말투, 뭐 봄과 가을은 닮았다고 생각해도 괜찮겠지. 여름은 푹푹 쪄서 괴로울 뿐이고, 겨울이라 해도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가까이에 있고 싶은 인물 넘버원은 아사히나 선배 정도니까. 내가 진작에 시선을 하늘로 돌리고 흘려듣기 모드로 돌입하려는것을 눈치챘는지 "고등학생이 되어서 두번째로 맞는 봄입니다만, 사적인 의견을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이것이 과연 '드디어'라고 해야 하는건지 '이제'라고 해야 하는건지 조금 판단이 망설여 지는군요." 망설임 따위 있을까보냐. 영어라면 어느쪽도 yet이다. 흘러간 시간을 하나하나 전부 기억하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강 문제는 일찍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의 일은 알리가 없으니까 빠르든 늦든을 떠나 지금 하는일은 내용에 따라 주로 즐거운가 아닌가, 빨랐다가 늦었다가를 자기나름대로 느끼면 되는거지. 조금은 시계가 되어 생각해봐라. 그녀석들은 불평도 없이 초침을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다구. 그렇다고 알람이 되어서 벽에 내던져지고 싶다는건 아니다. 특히 월요일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시계바늘은 우리들에게 객관적으로 무언가를 세어주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주관적으로밖에 느끼지 못하는 인간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지침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중요한것은 그 일정한 시간 내에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했는가 입니다." "이런 이런" 나는 느긋하게 모양을 바꾸려하는 구름의 관측작업을 중단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변함없는 미소는 그 주인인 코이즈미 이츠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항적운과 비교할것도 없이 바라보고 있어도 감상력을 기르기엔 적합치 않고, 그런걸 응시한다 해도 무엇하나 얻을게 없다고 생각한 나는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며 말했다. "내 사적인 의견을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말이지" 안뜰의 광경을 실컷 망막에 투사하면서 귀를 기울이려는 기색을 보이는 코이즈미에게 "역시 '드디어' 왔다고 느껴지는데" 무리지어가는 신입생들의 신선하고 새로운 교복을 눈으로 쫓으면서, 나는 뇌리에 녹화된 그리운 영상이 눈에 재생되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1년 전의 2학년들은 1년 전의 우리들을 이런 감각으로 보고 있었던걸까. 내가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학구분할제의 만행이지만, 그 떄문에 스즈미야 하루히라는 미확인 이동물체와 만나고 말았다고 인식할 여유도 없이 전파로 어이없는 자기소개를 듣고 '뭐야 이녀석은' 하고 생각하는 사이 어쩌다보니 하루히의 시공에 말려들어 그 결과 SOS단이라 불리는 수수께끼의 조직의 일원이 되어 결국은 진짜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적 존재까지 해후하게 되었고, 그들이 제각각의 능력을 가지고 온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적 이벤트에 강제로 참가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하루히가 뜬금없이 생각해낸 오락에 말려든 것일지도. 요 1년으로 나의 경험치는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어중간한 중간보스 정도는 한손으로도 쓰러트릴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습관이란 대단한 거구나" 등교시의 짜증나게 긴 언덕길에도 완전 익숙해져버려서 익숙해짐에 따라 기상시간이 늦어져가고 있다. 지금은 아슬아슬하게 이불과 동일화를 도모하고 있는 나였지만, 학교에 익숙해져 즐긴다는 의미에서는 나뿐만이 아니라 하루히도 폭포를 올라 용이 된 잉어 수준의 변화를 이루었다. 현시점의 하루히를 사진으로 찍어서 1년전의 하루히에게 보여주고 싶다. 넌 내년에 이렇게 된다, 라고 예언같은 음색으로. 실제로 그렇게 된다 해도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코이즈미는 눈을 반쯤 감듯이 가늘게 떠, 입술 끝을 올리고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아, 습관에 관해서입니다. 지구상에서 생활하고있는 것부터 알고 있습니다만 원래부터 인간은 순응성이 다분한 생물입니다. 대개의 환경에 적응해 버리니까요. 하지만 최근에는 그것도 옮고 그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에 익숙해져 있으면 불시에 일어나는 돌발적인 사태의 발생에 대해선 판단이 힘들어 진다구요." 무슨 소리냐. 하루히라면 돌발적이지 않을때가 더 적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코이즈미로서는 드물게 말을 흐렸다. 뭔가 말하고자 할때 생각없이 내뱉는것이 이녀석이다. 여기서 추궁하여 또 번거로운 이야기를 끌어내는건 나로선 참을수 없는 일이다. 뭔가 말하려는 코이즈미의 시선을 뿌리치듯이 나는 침묵하며 고개를 돌려 녀석과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굴렸다. "......" 침묵이라면 본좌급인 작은 몸집의 세라복 모습이,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머리칼을 흔들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나가토 유키, SOS단의 긍지, 신비한 우주적 비밀병기ㅡ 보다는 지금은 문예부 부장인 쪽이 장소에 맞는 지위겠지. 나와 코이즈미처럼 나가토도 학습 책상과 의지를 이 안뜰에 갖고 들어와 있다. 단 우리들과 수 미터는 떨어진 위치에서 묵묵히 독서를 할 뿐이다. 어쩐지 철학자와 화가와 음악가가 둥글게 모여앉아 있는듯한 제목의 책은 마치 콘크리트 블럭처럼 두꺼웠다. 나는 안뜰에서 부실동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부실로 뛰어가던 하루히와, 그 하루히에게 질질 끌려가는 아사히나 선배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이대로 오늘 하루는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기도 하고, 그 편이 모두에게도 행복하지 않을까. 그래도 괜찮겠지. 자, 상황 설명이 늦었군. 간단히 말하지. 신학년 신학기가 시작되고 수 일이 경과한 지금은 방과후. 이날 우리들은 안뜰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와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같은 모양으로 다른 2, 3학년도 있어ㅡ 단 전원이 모인건 아니다. 사람들 속에는 컴퓨터 연구부 녀석들의 모습도 보인다. 긴 테이블에 컴퓨터가 몇대 진열되어 있고, 디스플레이에선 무엇인지 CG같은걸 비추고 있다. 언젠가의 우주함대SLG가 아닌, 묘하게 파스텔틱한 디자인의 아무래도 점치는 소프트웨어 같다. 컴퓨터부장은 철새짓이라도 했는지 당연하게 3학년으로 무사히 진급한듯이 있는것은 확인되었지만 아직도 부장직을 맡고있는지는 모르겠다. 알바 아니지만 나중에 나가토에게 물어보자. 다른 장소로 눈을 돌리니 여기저기에 정체를 알수없는 그룹들이 북적이고 있다. 개중에는 듣도보도 못한 기괴한 동호회나 연구회의 이름들이 있었고, 그것을 본 나는 더욱더 오그라들었다. 원래부터 이런 행사에 우리들이 놀아줄 이유따위 없다. 그나마 관계가 있는것은 사실 나가토 뿐이다. 나는 다시한번 도자기같이 과묵한 독서광 여학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전체적으로 떨어져있는 위치에서 오도카니 자리에 앉아있는 나가토의 책상 앞에는, '문예부'라고 먹물자국이 선명한 명조체로 쓰여진 종이가 셀로판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다. 제멋대로인 봄바람에 종이가 팔락거릴 때마다, 미용실과는 거리가 먼듯한 나가토의 숏헤어도 흔들거렸다. 본인은 바깥세계로부터 격절당하길 바라는듯한 조용함으로, 책의 페이지에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이정도면 눈치챘겠지? 문화 계열의 클럽ㅡ 특히 약소부ㅡ 의 가입접수 겸 부활동 설명회. 현재 이 안뜰에서 거행되고 있는것은 그런 행사였다. 운동부 계열은 저마다 체육관이나 운동장에서 접수하고 있었고 그다지 권유활동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부원이 모일것같은 취주악부나 미술부도 각자 교실에서 그물을 펼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부들은 선전이라도 하지 않는 한 활동내용은 커녕 존재조차도 흐지부지가 될 연구부 이하 동호회 이상의 부 이다. 아참, 말할것까진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서 깜빡 잊었는데 SOS단의 멤버와 관계자들은 경사스럽게도 저누언이 평범하게 진급을 마쳤다. 나와 하루히와 나가토와 코이즈미는 2학년이 되었고, 아사히나 선배는 3학년이 되었다. 1년분의 추억이 묻어있는 1학년 5반 교실과는 작별하는 것에 대해 향수를 느꼈지만 2학년이 되어서도 이렇다할 차이가 없었고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또다시 하루히와 같은 교실을 쓰게 되었다. 시업식의 새로운 2학년 자기소개시간, 내 뒤에 앉아계신건 의심할것도 없이 스즈미야 하루히. 오만불손한 성격 중에서도 복잡함이 섞인 오리너구리를 의태했을지도 모를 입으로, "뭐야 이건" 하루히는 새 반친구들을 훑어봤다. "일년치고는 거의 변한 얼굴이 없잖아, 좀더 대담하게 바뀌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뻐하는건지 불평하는건지 어느쪽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때만큼은 나도 하루히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와 하루히는 2학년 5반에 편입되었고 어째선지 타니구치와 쿠니키다도 있었고 덤으로 담임은 학생들이 생각한대로 오카베였다. 가끔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녀석들도 섞여 있었지만 구성요소의 대부분은 옛날 1학년 5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이미 이과중시인양 하는 녀석들을 모으면 한 반 분량이고, 8반이 그런 녀석들의 그릇이 된 대신, 이전까지의 8반은 해체되어 다른 일곱개 반을 토막내어 집어넣은것 같다. 그리고 극소수는 언뜻 보기에 무의미한 느낌으로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이동된듯 하다. 담임 오카베가 성실히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를 시킨 것은 소수에 대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반 분할에 대해 사소한 의심을 품고, 의혹의 중심이 되어 사태의 뒤에서 암암리에 활약하는 인물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건 너희들의 계획이냐?" "틀리다" 나가토는 단조로운 소리로 대답하고, "우연이다" 하고 보험이라도 들듯 말했다. "짜고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학교 당국의 의향이겠죠. 적어도 '기관'은 이 일에 대해선 손을 대지 않기로 결정한 모양입니다" 코이즈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단언했다. "우연이겠죠" 아무래도 진짜인것 같다. 우연을 필연으로 바꿔버리는 여자의 이름을 한명 알고있지만, 내가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것도 없다. 그럼 아사히나 선배와 츠루야 선배도 같은 반이 된건가? 그렇다면 그쪽은 츠루야 家가 무엇을 한 것이겠지만, 어차피 나랑 상관 없는 일이다. 교실이나 학급은 달라도 방과 후가 되면 전원이 모여드는 장소는 같지 않은가. 내가 신경쓰이는 것은,ㅡ그리고 신경써야만 할 것은, 좀더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보고있는 신입생 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주인 친구라면 있다. 미래인 선배도 얻었다. 요 1년간 제일 말을 많이 나눈 남자가 초능력자란 것도 부정할수 없다. 하지만 그날 그때 히가시중 출신 이외의 5반 학생들을 아연실색케 했던 하루히의 자기소개, 그 전설이 된 이야기거리의 문구 중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지위가 있다는 것을 잊을 순 없었다. 이세계인. 음 그런걸 딱히 원하는건 아니지만 없으니 허전한 것도 그 자리다. 아무튼 우리들은 탈없이 진급했고, 1학년의 자리는 비게 되었다. "이런 이런" 나는 뻐근한 어깨를 풀듯이 고개를 움직여, 새로운 1학년의 감시를 시작했다. 유망해보이는 애를 발견하면 확보하도록. 그것이 단장님의 명령이셨던가. 그런데 하루히가 말하는 유망한 녀석은 대체 어떤 이해하기 쉬운 자태인 것일까. 하는김에 말해두는데, 2학년 5반 첫 수업 자기소개 시간 때, 스즈미야 하루히는 1년 전과 같은 어구를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상쾌하게 멀리까지 잘 들리는 목소리로, "SOS단 단장, 스즈미야 하루히. 이상!" 대담한 미소와 함께 내 뒷머리를 흔들며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착석하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하겠지. 그리고 반 친구들 모두에게 있어도 충분할 것이다. 스즈미야 하루히와 SOS단의 이름을 모르는 인간은 이미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있다고 한다면ㅡ 나는 전년도 안뜰을 활보하고 있는 3학년의 색깔이 옆에 붙어있는 실내화를 신고있는 다리의 수를 세며 생각했다. 이녀석들 중에밖에 없겠지. 벚꽃입의 시기, 왕벚나무로 뒤덮여있는 그 옆에, 나와 코이즈미. 조금 떨어져서 나가토, 3명이 무위의 한때를 보내고 있는데, 모여드는 학생들을 헤쳐볼것도 없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모세처럼 이쪽을 향해 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선가 본적있는 상판의 남자로, 내가 이곳에서 무위함을 맛보는 처지가 된 원인이라고도 할수 있는 인물이었다. 선드러지게 블레이저 코트의 옷자락을 휘날리며 때때로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걸어오는 모습은 완전 판에 박은듯이 사이비 권력 페이스다. 나까지 삼류연극의 무대배경 소품이 되어버린 느낌이군. "오랜만이군" 학생회장은 무리 앞에 멈춰서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교롭게도 이쪽은 그렇지 못하다. 시업식의 전교생조례에서 길고긴 훈화를 진술하는 얼굴을 그리 간단히 잊을수는 없다. "그건 그렇고" 시나리오의 지시문에 써있는듯한 동작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안경을 고쳐올려, 신자모집에 불만이 있는 교주와 같은 표정으로, "단장은 어디있지? 한두개, 아니면 그 이상의 클레임을 건네주려고 일부러 발걸음을 옮겼는데 너희들 수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 글쎄, 어디 있으려나. 나는 그녀석의 비서도 매니저도 아무것도 아니고, 바쁜 동급생의 현재 위치를 분단위로 갱신하거나 하진 않는다고. "하는수 없군. 그럼 자네에게 묻지. 자네들은 여기서 지금 무얼 하는건가?" 다물고 있으면 코이즈미가 대답하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선지 우리 SOS단의 훈남은 그저 바보처럼 미소만 짓고 있었기 때문에, "보면 모르나" 건성으로 대답하는 나를 회장각하는 철가면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물론 한눈에 알아보고 말고. 여기가 어디며, 자네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고민할것도 없이 도출될 답이다. 내가 물은것은, 나의 예상을 넘는 어떤 계획을 도모하고 있는지 조금 걱정이 되어서다. 그런가, 없는건가. 그렇다면 내가 말할 대사도 이미 알고 있겠군" 그것이야말로 이쪽이 걱정하고 있던것과 토씨하나 틀린게 없기 때문이지. 차라리 하루히가 있을때 와줬으면 이야기가 술술 풀렸을텐데. 아니 잠깐, 어째서 회장이 하루히가 없는데도 무례한 포즈를 계속 하고 있는거지? 지금의 학생회장은 코이즈미에 의해 강제로 취임된 '기관'의 꼭두각시 정권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주위의 눈을 의식하는건가? 하지만 우리가 있는곳은 안뜰의 구석이라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한은 도청당할 염려는 없고, 수 미터 옆자리에 앉아있는 나가토의 귀에는 닿겠지만 나가토의 귀에 들려서 곤란한 이야기라면 CIA나 NORAD 상층부밖에 모르는 비밀 정보 정도일거다. 그럴셈도 아니었는데 나와 서로 노려보고 있던 회장 전하는, 갑자기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여긴 이제 됐다. 문화계열은 다 둘러봤다. 키미도리, 자네는 먼저 운동장에 가 있게. 나도 금방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 짧은 대사를 듣고 나는 처음으로 그곳에 있는 인물을 인식했다. 하마터면 무의식적으로 켁 하고 내뱉을 뻔 했으나, 간신히 집어삼키며 뻔한 말을 대신 토해냈다. "키미도리 선배?" "네" 그녀는 예의바르게 응답하고 품위있게 인사를 했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실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회장의 그림자에 동화되어 있다가 발성과 동시에 실체화하는 듯 하다. 그만큼 돌발적으로 출현하는 인상을 받았다. SOS단 의뢰인 제 1호이자 컴퓨터 연구부 부장의 전 애인, 지금은 학생회 서기직을 맡고있는 키미도리 에미리 선배는, 회화에 그려진 귀부인처럼 미소지으며 꾸벅하고 가볍게 인사했다. 멍 한채로 나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하하, 회장의 아니꼬운 포즈의 원인은 이건가. 키미도리 선배는 본성을 감추고 있다는건가.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말이지. 그건 그렇고 회장과 서기가 한 세트로 등장하는건 대체 어디서 온 풍습이냐. 조금은 회계나 부회장에게도 조명을 비춰줘.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지" 회장은 다시 안경을 누른다. "다만 우리 회계가 뭔가 말할게 있다면, 그쪽 문예부 부장에 대한 얘기겠지만" 그것에 대해선 나도 코이즈미를 통해 언뜻 들었다. 작년 봄방학 전에 있었던 학생회 주도 각 클럽의 예산분배회의에 관한 것이다. 부원이 한명이라고는 하나 없어서는 안될 클럽이고, 그 대표자도 회의에 출석하였다.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하루히가 아닌 나가토 유키이다. 하루히는 최후까지 대신 나가느냐 나가토의 보좌로 가느냐 했었지만, 아무튼 회의에는 간 모양이다. 문예부실을 불법점거하고 있는 주모자가 그런곳에 간다 해도 쓸데없이 자리만 망치게 될 뿐이고, 최악의 경우엔 난투극이 될지도 모른다. 못마땅해 하면서도 나와 코이즈미의 충언을 받아들여 하루히는 적국에 인질을 풀어주는 전국시대 무장같은 표정으로 소리도 없이 학생회실로 가는 나가토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그리고 한시간 정도 후에 돌아온 나가토는, 부원이 최저인수 뿐인 휴면되어도 쌀 부 치고는 파격적인 부비를 들고 온 것이다. 대체 어떤 요술을 쓴건지 뭐가 일어난 건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들은 바로는 나가토는 회의실의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있기만 하고,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그저 학생회 회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고 한다. 매년 그렇듯이 서로 뒤얽히며 장시간화가 될게 뻔한 예산분배회의는 이례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되어 싸우는일 없이 종료되었다고 한다. 회장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듯이, "물론, 회의는 이름뿐이고 대부분은 나와 키미도리가 작성한 예산안에 따르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조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문예부만은 변칙적이었다. 하지만 딱히 이제와서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은 없네. 예산에 응하는 활동을 해 준다면 나도 불만은 없네. 하지 않는다면 불만이겠지. 이미 끝난 일이다" 회장의 연설을 조용히 듣고있던 키미도리 선배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럼 회장님, 저는 이만" "수고하게, 키미도리" 키미도리 선배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새싹같은 미소를 던지고 희미하게 백합 향기를 남기며 운동장을 향해 모습을 감췄다. 요전에 나가토와 키미도리 선배가 눈싸움을 한 것은 한순간 이었지만, 과연 서로 닮은 동지.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회화방법을 습득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나가토가 책에서 전혀 얼굴을 들지 않은 탓도 있으려나.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회장은 미끄러지듯 안경을 벗고 손끝으로 흔들며, "그 여자가 없는데 이야기를 진행시켜봤자 의미가 없다. 언제 돌아오지?" 금방 올거다, 아사히나 선배의 의상 체인지에 그렇지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좋다. 기다려주지" 그건 그렇고 이 회장 정말 그럴싸하다. 마치 3년전부터 회장을 하고있는거 같은 분위긴데. "난 학생회 업무따위 귀찮을 뿐이라구" 회장은 히죽 웃으며 이제야 정체의 일부를 철면피로부터 드러냈다. "막상 해보면 이게 의외로 재미있다고. 교사나 집행부 녀석들을 상대로 회장을 연기하고 있자면 말이지" 찰싹 하고 한손으로 볼을 두드리며, "어느쪽이 진짜 나인지 가끔 잊어버리게 된다. 다른 인격이 되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군" "인격을 바꾸는 것은 훌륭합니다만" 드디어 코이즈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얼굴의 가면에 본체를 지배당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미라 도굴꾼이 미라가 된다거나 고양이인양 내숭떠는 사람이 고양이가 된다거나 하는일도 종종 있으니 말이죠" "미궁에 홀로 남겨진 도굴꾼은 미라가 되진 않는다. 단지 송장을 방치해둘 뿐이지. 그리고 고양이의 수명은 인간보다 짧다" 회장은 맹금류같은 미소를 보이며 안경의 렌즈를 소맷자락으로 닦은 후 다시 코 위에 걸쳤다. "걱정마라 코이즈미, 나는 잘 하고 있으니. 그러나ㅡ" 안경을 걸친 회장은 본인도 어느쪽이 진짜인지 모르는것도 충분히 납득이 갈 정도로 학생회 회장으로 변화했다. "그 순진무구한 독재자의 목에 방울을 채워두는것은 너희들의 몫이다" 회장의 시선이 향한 부실동의 출입구에서 모습을 나타낸 것은 봄의 도래를 확신하고 기뻐 날뛰는 숲의 동물과 같은 우리의 단장님과 봄의 요정이 따뜻한 햇살과 함께 구현화 한듯한 SOS단 전속 메이드의 모습이었다. 하루히는 한손에는 포장용 박스, 한손에는 아사히나 선배를 끼고 웃음이 만개한 상태였지만 회장을 보더니 돌연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 너 잠깐!" 큰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걷는 하루히의 팔에 붙잡혀있던 아사히나 선배가 바둥거린다. 하루히는 개의치 않고, "하하, 역시 그랬어, 생각한 대로야. 내가 없을때를 노리고 오는거지? 근데 미안하게 됐군. 우린 학생회에게 트집잡힐만한 일 한게 없으니 말이야!" 그건 글쎄다. 넌 대체 안뜰에서 무슨짓을 할셈이냐? "아..회장님" 울새처럼 눈을 깜빡이는 아사히나 선배가 메이드 의상인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것은 공터에 강아지풀이 피어있는 것처럼 낯익은 광경이니까. "야, 하루히. 그건 무슨 꼴이냐" 이건 나도 처음 보는거다. 언제 준비한거냐? 하루히는 오만하게 가슴을 펴며, "불만있어? 차이나드레스의 어디가 문제가 있다는건데?" 말 그대로 하루히는 슬릿부터 늘어져있는 다리도 눈부시고, 라메실로 승천하는 용이 크게 자수된 진홍색의 롱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덤으로 소매도 없네. 등장과 동시에 우렁차게 소리를 울렸기 때문에 곧바로 안뜰의 학생들의 시선을 독점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와함께 아사히나 선배도 중인환시의 처지가 되어 부끄러운듯이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은 가능하면 나만 볼수있게 독점하고 싶을 정도다. 헌법따위 알게 뭐냐. "그야 파티회장에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여긴 학교이며 그것도 많은 신입생 앞이다. 조금은 장소를 가려" 상식론으로 타이르는 나에게, "가리고 있잖아. 그래서 이걸로 한거야. 사실은 바니걸이 좋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또 시끄러울거 같아서 차이나드레스로 한 이 나의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여!" 그리고는 하루히는 도전적으로 손가락으로 회장을 가리키려 했으나 양손의 부자유를 느끼고 아사히나 선배를 해방하고 포장용 박스를 내 책생에 놓고선 다시 손가락질 포즈를 취했다. "감사히 받아들여!" 두번이나 말할 것까진 없잖아. 하지만 회장도 역시 지지 않았다. "그런 배려는 배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학교 내의 풍기를 책임지는 학생회장으로서는 의연히 받아들일 순 없지. 그런데 *오십보백보라는 말을 들어본적 있나? *대동소이라도 괜찮겠군" "그게 어쨌다고? 도토리 키재기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아니. 나는 그저 미래를 향한 희망이 넘쳐흘러 나의 학교에 온 젊은이들에게 불필요한 혼란을 주지 않고싶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한창때의 남학우의 정욕을 자극하는 짓은 용서할 수 없다" "정욕? 웃기고 있네. 제복이든 체육복이든 느끼는놈은 어떻게 해도 느끼는거야. 알겠어? 당신 우리들을 전부 알몸으로 수업받게 만들 생각이야?" "말이 안통하는군" 회장이 내뱉는다. "괜찮잖아. 학생의 자주성을 존중해 줬으면 하는데. 방과후 정도는 우리가 입고싶은 옷을 자신의 판단으로 입겠어. 등하교까진 바라지도 않아. 괜찮지? 그치? 미쿠루?" "네.. 아.. 네... 이 상태로 하교하는건 저기..." 아사히나 선배는 작게 고개를 부들부들 떨며 하루히의 중국인 모습을 눈부신듯이 쳐다보며 어쩐지 부러워보이는 듯 한숨을 쉬었다. 입고 싶은걸까? 뭐 아사히나 선배와 바니걸이 되어 교문에서 광고지를 뿌리던 작년과 비교해보면 지네 주름만큼 진보했다고 봐도 좋겠지. 피부의 노출범위가 격감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입생을 상대로 한 행사에서 2학년과 3학년생이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말이지.. 하물며 특별한 의미가 있는것도 아니고. "의미라면 있고말고, 이거봐 지금 굉장히 주목받고 있잖아?" 그러니까 주목받는것에 애당초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거다. 하루히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고래가 부상하는 기척을 느낀 크릴새우의 심정이 되어 묵묵히 독서중인 나가토의 등 뒤로 도망갔다. "쿈, 너 잊은거 아니지? 우리가 뭐하러 여기 왔지? 2초내로 대답해" 어- 그러니까 "네, 끝" 하루히는 내게 0.5초의 시간을 주고 선언했다.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며 그 손을 냉동처리 된듯이 부동자세인 나가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우린 유키를 도와주러 온거라구, 결코 SOS단의 신입 단원 권유를 위해 온게 아니야. 이점 확실히 알아두라고!" 하며 회장을 향해 말했다. 언급된 나가토 본인은 팔락거리며 페이지를 넘길뿐. "음" 여기서 그만 질리지 않는것이 현 회장의 특성이다. 안경의 귀걸개 부분을 검지로 만지며, "스즈미야군, 즉 자네는 문예부의 자격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예부의 부원 모집을 도와주겠다는 것인가?" 이해하기 쉽게 요약해주니 고맙다. "그래" 하루히는 점점 더 가슴을 뒤로 젖히며 이번에는 나와 코이즈미가 있는 책상을 가리켰다. "봐, 둘다 책상을 붙여서 앉아있을 뿐 아무것도 안하고 있잖아? SOS단이라고 써져있는 종이도 안붙어있고, 춘곤증 덕에 쿈은 평소보다 더 바보같고" 마지막 문장은 필요 없잖아. "호오" 회장은 턱을 당기며 안경을 의미없이 빛냈다. "그럼 스즈미야군, 자네가 가지고 온 그 상자에 들어있는 플래카드처럼 생긴 그건 뭐지?" "플래카드야" 하루히는 포장용 박스에서 삐져나온 봉의 손잡이를 움켜잡으며 주저없이 그것을 꺼내들었다. 하얀 페인트칠을 한 나무 봉 앞에는 하얗게 채색된 베니어 합판이 두 장 겹쳐져 있었고 거기에는 하루히가 쓴 것으로 보이는 "문예부"라는 글씨가 써져있었다. 손에 딱 맞는 나무손질, 조립, 칠, 기타 잡무가 나에게 돌아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봐봐, 문예부잖아. 미쿠루가 이걸 들고 서있을거야. 내버려두면 유키는 적극적으로 어필을 하려들지 않거든" 그건 사실이다. 클럽 소개 시간은 1학년 시간표에 짜여져 있었다. 라는건 이것에 대해 SOS단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따라서 소집된 것은 나가토 뿐이었다. 강당에 모여진 신입생들 각각이 앉아있는 앞의 단상에서 나가토는 할당된 시간을 최선을 다해 소비했다. 세계 각지의 주요도시의 기온을 담담히 낭독하는 기상 캐스터처럼 '대뇌 생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언어의 불완전성과 대화자간의 의사전달'이라는 테마로 논문을 발표했으며, 문예부의 '부'자도 나오지 않은것은 물론 서론이 끝날 쯤에는 신입생의 반분이 악마같이 엄습하는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최면술같은 설법이 한창일때, 문예부에 들어오려 했던 인간이 있다고 한들 확실히 기피하고 싶어지는 권태감이 강당을 지배하고 있었다. 과연 나가토 유키. 하지만 나가토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늘도 내버려두면 부실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었겠지. 내버려두지 않은건 역시 하루히다. 신입부원 모집 이벤트같이 흥미로운 일을 하루히의 가마 근처에 나있을지 모르는 센서가 무시할리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SOS단은 정식으로 공인된게 아니고 지금도 비밀결사같은 학교 내 비합법 조직이다. 대놓고 부원모집따윈 할수 없다. 예전의 하루히라면 대놓고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올해부터는 학생회장의 눈이 희번득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날을 재밌게 보낼 수 있느냐. 이렇게 해서 하루히의 머리에 있는 레지스터가 가동되어 우리들은 급조 문예부 자원봉사자가 되어 *춘소 일각 치천금이거늘 시간을 멍청히 보낼 뿐이었다. 여기까지가 표면상의 이야기로, 당연히 비하인드 스토리도 존재한다. 그것은 학생회장에게도 쉽게 계산할수 있는 사태인 듯, "그 플래카드, 뒷면도 보여주지 않겠나" "좋아" 하루히는 씨익 웃으며 손을 돌렸다. '문예부'의 뒷면에는- 역시 '문예부'였다. SOS단이라고 써있을리가 없지. "만반의 준비를 했군. 좋다,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없진 않군" 회장은 안경 브릿지를 누르며, "타협이 천성인 것은 아니지만, 애송이에게 소란을 일으키게 하는것보단 낫겠지. 다른 부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얌전히 다물고 일몰까지 거기 있어주게. 나는 시찰로 바쁘니까 말이지. 강제적인 입부, 권유 등은 엄금한다" 그건 운동부에게 말해야 할 사항 아니냐. 하찮은 현립고교인데다가 유망한 부원도 부족해서 곤란해 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렇게 말해두지. 마지막으로 묻고싶군, 문예부 부원을 모으는건 좋다. 그런데 부원을 모으면 어떻게 할지 궁금하군. 장소를 내줄건가?" "당신이 알바 아니야" 상급생에 대한 말버릇은 2학년이 되어도 변함없는 하루히였다. 흥 하고 옆을 보고있던 하루히에게, "음, 그것뿐이다. 그럼 다시 만나지" 회장은 하루히의 차이나드레스와 아사히나 선배의 메이드복을 필름을 태울듯한 안광으로 한동안 바라보며, 이윽고 유유히 키미도리 선배의 뒤를 따랐다. 뭐하러 온거지. 하루히를 향해 몇번이고 말한다는건, 역으로 '해라'라는건 아닐거다. 봐라, 하루히녀석 비행기타서 금세라도 폭소할듯한 얼굴이 되어있잖아. "잘됐군. 간단간단 간짜장하잖아" 회장이 보이지 않게 될때까지 기다리던 하루히는, 갖고있던 플래카드 봉을 지면에 내리꽂았다. 하루히는 판에 붙어있던 베니어를 잡아 뜯었다. 그 공정을 지켜보던 나는 놀라지 않았다. 겉의 '문예부'글자는 하찮은 목재 폐기물이 되었고, 그 이중으로 이루어진 판 뒤에서 나온 글자는 의심할것도 없이 SOS단. 작년 5월-며칠이었더라-결성된 '세계를 오지게 들썩이게 할 스즈미야 하루히의 단'은 당분간 명칭의 변경 없이 탈없이 진행될 것 같다. 하루히가 지참하고있는 포장용 박스의 내용물은 플래카드 뿐만이 아니었다. 플래카드를 아사히나 선배에게 떠넘긴 하루히는 중국풍 롱 드레스의 옷자락을 나부끼며 기술자의 어시스턴트처럼 차례차례 물건들을 꺼냈다. 우선은 액정 모니터, 이어서 DVD재생용 각종 코드와 케이블, 어댑터가 나왔고 마지막으로 구매한 것으로 보이는 대학노트와 필기용구. "자, 설치 설치" 하루히는 나를 재촉하며, "이거 제대로 나오게해" 안뜰에 콘센트따위 있을리 없지만 전원은 하루히가 사전에 준비해 두었다. 여기서 거역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명령에 따라 케이블을 연결하고 컴퓨터 연구부쪽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전기좀 빌려주세요" "그래" 대답해준건 부장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부장직을 맡고있는 듯 하다. 가슴으로부터 입부해보고 싶어지는 스탭 뱃지에 그렇게 쓰여있었다. "아직은 부원들이 염려되서 말이지" 부장은 어쩐지 거만하게, "일단 1학기는 내가 하기로 했어, 암튼 부장후보는 생각해 뒀으니 이제부터 잘 키워서-" 길어질거 같으면 다음에 부탁한다. 이정도라면 다른 부원들은 빨리 은퇴하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 실은 말이지" 부장은 다소 목소리를 죽여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나가토씨에게 이쪽 일을 겸해달라고 해서 잘 되면 부장도 해달라고 할 셈이야. 내가 본 사람중에 세계 최고로 컴퓨터와 상성이 좋은 인재야. 어떤 문제도 버그도 에러도 나가토가 스위치를 넣으면 마법처럼 사라져 버린단 말이야. 가끔 와서 잠깐 봐줄뿐인데 말이지. 매번 놀라움의 연속이라구. 그녀 전용의 자작 PC가 있는데 순식간에 전혀 새로운 오리지날 신형 OS 개발을 성공시켰어. 근데 소스를 아무리 봐도 완전 미지의 코드로 그녀 이외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어. 실험해본 모든 하드의 소프트를 완벽히 동작시키는 경이의 스펙으로 대체 어떤 구조로 구성된 것인지-" 그런 긴 이야기 나한테 말한대로, 그것이 나가토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개인적인 의뢰라면 본인에게 직접 말해라, 분명 알려줄테니. 다만 지구인에겐 뭐가뭔지 이해할수 없을거다. 나는 케이블의 끝을 흔들었다. 의미를 올바르게 헤아려 준 3학년 현역 부장은 쾌히 뜰의 긴 코드 소켓을 빌려주었다. 하루히에 의한 컴퓨터부 SOS단 제 2지부화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듯 하다. 어디선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지구 전대륙이 사막화 되는것보다 먼저 전 인류 SOS단원화가 될지도 모른다. 호모사피엔스가 거기까지 우매하지 않음을 믿고싶다. 소켓에 플러그를 꽂고 감아둔 케이블을 풀면서 돌아온 나를, 하루히는 원반을 물어온 개를 맞이하는 주인과 같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싱글벙글한건 좋은 것이다. 특히 코이즈미는- 하고 생각하며 쳐다봤더니 자칭 에스퍼 소년은 그닥 기뻐보이지 않았다.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깍지를 끼고 입을 숨기듯이 손 위에 턱을 괴는 그 반응.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아무일 없는듯 나가토를 보고있는듯한 모습도 신경쓰인다. 뭐지? SOS단 소속 녀석들은 순번대로 정서가 불안해지는 법칙이라도 있는건가? 이번엔 코이즈미 차례고? 웃기고있네,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는 그렇다 쳐도 너만은 제정신을 잃지 않을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코이즈미는 나의 불신감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시선을 내쪽으로 돌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안심시키려는듯 미소를 지은 것 같아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억지로 꾸민듯한 느낌이었다. 이과 코스인 9반에 있던 이녀석은 그대로 곤돌라로 운송되듯 클래스메이트들 통째로 2학년 9반이 될 운명이었다. 마음에 안드는 녀석이 끼어들 틈도 없이. 하루히는 언제나처럼 팔팔하고, 코이즈미가 신경쓸 사태가 일어난다는건 생각하기 힘들다. '기관'이라는 집단의 상사에게 알바비라도 감봉당한걸지도 모르겠다. 그거라면 경사스러운 일이군. 네놈이 한가한건 내가 한가할 때 이상으로 축하할 일이잖아. 아니면 신학기 초부터 신입생 여학우들로부터 신발장에 넣어져있는 러블리한 봉투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거라면 내가 동정할 여지는 샤미센의 탈모로 빠진 털만큼 쓸모없는 것이다. 여하튼 코이즈미는 다물고 있으면 문답무용으로 이성의 눈을 뽑아버릴 기세인 얼굴을 싫어하니깐, 하루히도 그렇고. "쿈, 빨리 TV 나오게 해봐" 미스 차이나 선수권 최우수상 수상자 같은 하루히가 플래카드를 빙빙 돌리며 웃으면서 명령했다. 유유낙낙히 따르는 나를 도와 코이즈미도 일어나서 일을 했다. 그대로 DVD재생기와 액정 모니터를 잇는 코드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 도중, 코이즈미는 언뜻 평범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는데 어쩐지 나에겐 기묘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왜 자꾸 내게 미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거냐. 유감이지만 나는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의 시선은 접수해도 남자에게 눈부라려져서 의도를 해석하는 스킬은 없다고. AV기기의 배선을 대충 끝내고 내가 내뱉듯 종료 보고를 하자 하루히는 물고기떼를 발견한 어부마냥 좋아좋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 그러면" 상자를 뒤져 디스크를 잔뜩 꺼냈다. 마지못해 입을 연 중고 플레이어에 쑤셔넣고 자신만의 주문을 외치며 플레이 버튼을 검지로 눌렀다. 그러자 액정 모니터에 괴이한 영상이 비쳤다.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음악이 스피커로부터 빗물새듯 스며나왔다. 아사히나 선배가 흠칫한다. "아...." 안타까운 한숨을 토해내며 조심조심 화면으로부터 눈을 피했다. 그 애처로운 동작에 삽시간에 모여든 뭇 남성들을 환기시킨 나는, "하루히, 볼륨 너무 높이지 마라. 회장이 들으면 다시 돌아와" "상관없어, 난 그딴놈 조금도 신경 안쓰니까" 그럼 그렇게 해. "원한다면 여기서 공개 토론회를 열어도 좋아" 그건 하지마라. "아 몰라 시끄러워. 바보쿈" 하루히는 눈과 입을 역삼각형으로 하는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너하고 코이즈미는 여기서 대기해 줘, 뒤는 나랑 미쿠루가 어떻게든 할테니" 아사히나 선배의 허리를 팔로 두르고 꽉 끌어안으며 씨익 웃는다. "꺄악"하고 엉거주춤한 자세의 아사히나 선배. 하루히는 메이드 모습을 한 3학년과 뺨을 맞대고 비벼대며 나를 째려본다. "알겠지? 재밌어 보이는게 오면 확보한담에 이름과 반을 적고 난 뒤에 해방시켜. 그리고 우리는 영화연구부가 아니니까 그쪽 희망자는 쫓아내버려. 알았어?"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하루히는 강제적으로 아사히나 선배를 에스코트하며 안뜰 원정에 나섰다. "이건 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SOS단 플래카드를 땅에서 쑥 뽑아내서 의자 뒤로 숨긴 뒤, 모니터가 해상도의 한계를 다해 쓸데없이 비추고 있는 영상물을 바라보았다. 다름아닌 '나가토 유키의 역습 Episode00 예고편'과 같이 전력과 기재와 디지털 데이터를 쓸데없이 소비하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단편 영상을. 신학년 신학기 전에는 봄방학이라는 길것도 없는 휴가기간이 있어서 말인데, 당연히 그 하루히가 신년도의 도래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 구기대회와 사카나카의 개 사건이 끝난 무렵부터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겠지. 여름이나 겨울에 비해 과제가 적은 봄방학이야말로 완전 놀기에 최적인 기간이거늘, SOS단 단원들은 거의 매일 소환당하여 하루히의 즉흥적인 생각에 목적지를 향하여 순항하는 토마호크 미사일처럼 되어있었다. 안가본데가 없다구, 앤틱샵 순례에 프리마켓의 예비조사. 돌아오는 길엔 사카나카의 집을 방문하여 루소의 건강을 묻고, 츠루야 선배네 광대한 정원에서 개최된 대 꽃구경대회에 초대받고.. 아아 그건 재미있었지. 츠루야 선배가 손가락을 딱 치니 몸채에서 산더미같은 연회요리가 계속해서 나왔던 때는 정말 놀랐다. 아무튼 하루히는 초대받은 곳엔 반드시 갔다. 그렇다고 초대받지 않은곳에 안가는건 아니지만. 하루히는 초봄의 대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우릴 동분서주케 했다. 어째서 숨도 안차는건지 정말 궁금하다. 그중에 하루히가 특히 열의를 쏟은 것은, 작년 문화제에서 상영한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 Episode00 속편'이었다. 서브타이틀인줄 알았는데 실은 본 타이틀인 것에도 놀랐지만 내년 문화제를 향한 활동을 2학년도 되기 전에부터 준비하는 등 이렇게 빨리 *획책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해서 또다시 메가폰을 든 하루히는 새로이 만든 완장을 장착하고 부실 구석에 고이 잠들어있던 비디오카메라를 나에게 던지고 바로 아사히나 선배에게 천천히 다가가 눈을 부라렸다. 나와 코이즈미는 그자리에서 시선을 피했다. 타이틀 롤을 장식하는 인물이야말로 나가토 유키지만 미쿠루의 정체가 미래에서 온 싸우는 웨이트리스니까 아사히나 선배가 그 성희롱같은 복장을 하는것은 이미 하루히 감독적인 흐름인 것이다. 또한 나가토에겐 제복 차림에 얇고 긴 챙 모자와 검은 망토를 입히고, 코이즈미에겐 리플렉스 판을 들게 했다. 마침 타이밍 좋은 것이, 봄이면 벚꽃이 피어 있으니까 전회에 이어서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1년동안 두 번이나 꽃을 피우는 벚들에게 동정을 표한다. 하지만 어째서 예고편인 것인가. 봄방학인데 우리들을 부실에 집합시킨 하루히는 잘라 말했다. "너, 예고편에 속아본적 있어?" 그건 무슨 사기행위냐, 하고 되묻는 나에게 하루히는, "영화의 예고편 말이야, TV든가 극장에서 따로 영화 상영하기 전에 보여주잖아? 그거 보면 우와 재밌겠다 하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그 재밌어 보이는 영화를 두근두근하면서 보러 갔더니 그게 사실 완전 몹쓸 영화인거야, 예를 들자면 말이지-" 예 같은거 안들어도 되는데. 하루히는 나라도 알수있는 오래된 서양영화 제목을 입에 담으며, "이런것들 예고편만 보면 진짜 되게 재밌어보여서 웃어버릴듯한 영화였다고, 실제로 난 광고만으로도 몇번인가 웃어버린 적 있어, 그것때문에 개봉과 동시에 덩실거리며 보러갔었지" 하루히는 오버액션급으로 고개를 흔들며, "이게 무슨 영화냐 싶더라. 알고보니 예고편이랍시고 만든것이 그 영화에서 재밌는 부분만 짜깁기해서 만든거였어. 그걸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봤고, 덤으로 재밌는 부분은 예고편이 전부더라. 어떻게 생각해?" 내게 그런말 해봤자 말이지. 그게 불만이면 배급 회사에 전화라도 해줘라. 분명 예고편 담당부의 사원이 우수한 거겠지. "아무리 선전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좋은 부분만 꺼내서 편집하는건 말이야.. 그래서말인데 쿈" 하루히는 빛나는 은하를 가둬둔 듯한 눈동자로, "먼저 예고편을 만들고 본편은 다음에 생각하는거야! 예고용의 숏무비라면 얼마든지 재밌게 만들수 있어. 그도 그럴게 결말따위 필요없고 말이지, 보여줄 곳만 준비하면 되겠지?" 그런 이유로 본편도 존재치 않는 예고편을 만들게 되었다. 하루히도 두번째 이야기를 뭘로 할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단 거다. 게다가 그 영상을 신입단원을 낚을 떡밥으로 쓸 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본편이 없다, 어쩌지. 음 그래 그럼 예고편을 찍자. 정말 직구적인 사고회로다. 아직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 Episode00'을 DVD로 구워 끼워파는 야망을 버리지 않은 듯 하다. 전작의 *다이제스트판이라도 편집해서 내보내면 될텐데 아마 손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보고싶으면 입단하라고 할 셈인건가. 그런거 봐도 두통만 날 뿐이라고. 아사히나 선배의 *PV로선 120점이지만. 나는 야외에 부러 갖고간 모니터를 찌릿 쳐다보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화면이 마지못해 상영하고 있는것은 좋게 말하면 패러디겠지만 그저 여러곳에서 퍼온 장면들의 *온 퍼레이드 였다. 형광등같이 빛나는 봉을 쥔 이츠키에게 유키가 맥락도 없이 "나는 너의 어머니다"라던가 뜬금없이 유키가 안경을 쓰고있는 상태면 일반인이지만 벗으면 코스츔 체인지하며 하늘을 난다던가 검은 관을 덜커덕덜커덕 거리며 광야를 하염없이 걷는다던가, 슬슬 소재도 떨어져가는지 샤미센과 미쿠루의 인격이 느닷없이 바뀌어 아사히나 선배가 계속 냐옹거리며, 그 샤미센의 소리는 하루히의 립싱크로, 물론 입의 움직임은 대사와 전혀 맞지 않았다. 그전에 샤미센은 입도 열지 않았고. 이런저런게 언뜻 보기엔 볼만한 장면은 있을듯 보이지만 실은 전혀 스토리가 되지 않을 씬의 도미노 쓰러뜨리기식. 계속해서 무대도 연기자도 바뀌는데 템포가 몹시 나쁜 이유는 편집 센스가 없는 탓이다. 게다가 특촬씬은 일부러 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량했고, 삽입된 음악은 이미 소음의 영역에 도달하고 있었다. 출연할 필요도 없는데 기모노를 입은 츠루야 선배가 일본식 집 정원 앞에 늘어서있는 벚나무를 배경으로 시원스럽게 "으하핫하하"하고 웃으며 어째선지 같이있는 내 여동생과 샤미센과 장난치는 걸로 봐선 단순한 홈 비디오 레벨이었다. 찍는김에 잠깐 꽃구경 장면에서 의미없이 카메라를 돌렸으니까. 바람 부는 방향에 두면 냄새라도 날거같은 쓰레기 영상집. 다시볼것도 없이 확실히 첫번째 만듯것보다 악화되어 있었다. 웨이트리스 옷을 입은 아사히나 선배가 날아다니거나 뛰어오르거나 하는것은 과연 아사히나 미쿠루 프로모션으로서는 성공이었지만 대체 이것이 예고편일지 몇명이나 눈치챌 수 있을까. 마지막에 들어간 하루히의 나레이션, "나가토 유키의 역습, 올 가을 문화제에 공개상영 예정!"하는 괴성을 뺀다면. 한가지 물어도 될까? 전작에서 우주 저편으로 날아간 유키는 어떻게 지구에 돌아온거지? "그건 지금부터 생각하자. 새로운 적도 말이야!"하고 하루히 초감독이 말씀하셨다. 결국 아직 생각 안한거다. *어불성설의 차원을 넘어 완전 사기필름이다. 이런거나 보고 흥미를 가져줄 신입생은 이쪽에서 거절하마. 하루히의 중국옷이나 아사히나 선배의 메이드에 홀려버린 범인(凡人)들도 말이다. 이리하여 안뜰을 배회하는 신입생들도 탈선하여 의무교육에서 동떨어진 신분이 된 것이 제도상의 문제뿐만이 아니라는듯 나와 코이즈미가 나란히 앉아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책상을 멀찌감치서 바라볼 뿐 오려고 하진 않는다. 너희들의 판단은 침몰하는 배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려는 쥐새끼같은 현명함이다. 건강하게 제대로 된 고교생활을 할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이다. 여기에 있는 젊은이들은 알리가 없지. 하지만 나는 알고있기에 충고함에 한치의 주저함도 느끼지 못한다. 내 시기의 일년의 차이는 호랑나비 유충의 4년째와 5년째 정도의 차이가 있다. 설령 놀이라고 해도 지뢰밭 팻말이 꽂혀있는 초원을 활보하면 안되는거지. 인간이라면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 나가토가 충전중인 노트북같이 대기중인 책상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히를 대신해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진다. 창의적인 문예활동에 흥미가 있는 신입생은 아직도 등장하지 않은건가. 문예부가 작년에 한 유일한 활동. 코이즈미가 조작하고 회장이 계획하여, 보기좋게 속아넘어간 하루히가 지휘하여 우리가 쓴 회지는 거의 모두 무료로 배포해버려서 재고가 제로가 됐으며, 나가토가 앉아있는 책상에 놓여진 한권이 샘플용으로 열람이 가능케 되어있을 뿐이다. 나를 포함해 회지를 쓴 녀석들에겐 견본으로 한부씩 배포했지만 모처럼 받은걸 다시 뱉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들 똑같은지 손에서 떼려고 하지 않았다. 타니구치가 그렇게나 투덜거렸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다른 누군가가 회지를 읽으려 한다면 언제나 있는 부실의 나가토 문고에 있는 샘플을 읽는 수 밖에 없다. 만족을 모르는 탐구심을 손이 미치는 범위의 서적을 향하게 하는 나가토를 멍하게 쳐다보니, "......." 나가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색투명한 빛을 가진 눈동자를 내게 돌렸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던 탓에 당분간 눈이 마주치고 있는 것에도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정신을 차릴 타이밍에서, "고양이" 산들바람과 같은 목소리가 나가토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는것을 알아내기까지 1초정도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는 나가토의 자와 같은 시선을 받아들이며, "고양이가 어쨌다고?" "어때" "어떠냐니?" 나가토는 조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머리의 위치는 전혀 바뀌지 않고, "어때?" 좀전의 대사가 희미하게 의문형이 된 것 뿐이지만 이해했다. "샤미센을 말하는거군" 머리가 가볍게 끄덕 하고 기울어진다. "그래" "건강해, 말이라도 할 듯한 기색은 없고" "그래" 그것만 말하고 나가토는 다시 독서로 돌아갔다. 우리집의 청해력 좋은 삼색고양이를 걱정해 준건가. 누군가에게 정체모를 뭐였더라 *한번 더 말해주지 않으면 기억해 낼 수 없는 명칭을 가진 공생체의 숙주가 되버린 샤미센을 그렇게 만든 것도 나가토고, 아무튼 그 이후 우리집에서 살고있는 고양이는 먹이를 너무 많이 먹고 운동부족으로 조금 무거워진 것 빼고는 달리 변화는 없다. 마음껏 고양이같은 생활을 *구가하는 것, 하루히가 주워서 나에게 떠넘긴 후 그대로다. 소리소문없이 고양이 살찌는 봄, 이라는 절기와 관련된 인삿말을 생각해봤는데 어떨련지. 나도 봄방학땐 고양이처럼 뒹굴거리고 싶었다고. "정말 소란스러운 봄방학이었군요" 코이즈미가 개탄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뭄고나서 이쪽을 보기 시작한 코이즈미의 표정에 떠오른 미소는 내 눈이 어떻게 된건지 어딘가 지쳐 보였다. 코이즈미는 앞머리를 대충 만지면서, "어떻게 되진 않았어요. 당신의 눈은 정상입니다. 저는 조금 피로가 쌓인 듯 하네요" 그거야 하루히랑 어울리다보면 대체로 정상인 사람이라면 지칠만도 하지. "일반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제 정체와 임무를 기억하고 계신지요" 처음에는 하루히의 감시로, 지금은 기분을 맞춰주는 역할? "실례지만 제가 초능력자란 사실을 잊으신건 아니겠지요. 그리고 능력이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상황에서 발현되는지, 라는 것도 말입니다" 실컷 들어서 잘 알고있지. 너의 정체 고백을 들은건 나가토와 아사히나 선배 그 이후다. 다시말하면 SOS단 단원 중에서는 가장 최신의 정보라고 할수 있지. "그거 다행이군요, 이야기가 빨리 끝날 것 같습니다" 코이즈미는 일부러 한 듯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목소리를 죽인 채, "사실은 최근 수면부족이 계속되고 있어서 깊은 밤이나 새벽녘에 눈을 뜨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좋든 싫든 말이죠. 그 탓으로 몸이 회복하지 않는 겁니다" 밤에 잘수없다면 오후에 학교에서 자라. 수업중 5분의 수면은 통상 수면의 한시간에 해당한다. "그다지 불면증에 걸린것은 아니고 게다가 문제는 제가 아닙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죠.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빙 돌려 말하는건 다른 이야기를 할 때로 미뤄두죠" 코이즈미의 가늘게 뜬 눈에 숨겨진 안광이 어쩐지 진지했다. 언제나 네놈의 말투쪽이 더 돌려말한다고, 이제 조금은 반성할 기분이 됐냐. 할수없군, 모르는 사이가 아닌건 진실이다.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와 비교하면 뭔가 하나 부족한 녀석이지만. "폐쇄공간과 '신인'인가" 코이즈미의 초능력인가 뭔가가 발휘되는 곳은 대체로 그곳이다. "명답입니다. 요즘들어 출현빈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봄방학 이후부터 오늘까지 말이죠. 정확하겐 봄방학 마지막 날부터 입니다만, 덕분에 제 아르바이트는 연속해서 24시간 경계태세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자조하는듯한 한숨을 쉬며, "익숙해 질려고도 해 보았습니다. '신인'퇴치는 저희들의 일상이니까요, 의무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요 1년간 실력이 확실히 녹슨 모양입니다. 작년 SOS단 결성 후의 스즈미야 씨는 그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정신이 안정되어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스즈미야 씨와 그곳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특히 말이죠" 발생빈도가 줄었다는 얘긴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 전에도 들었었지. 이브를 맞기 전에 타니구치가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할 때 즈음인가. 그 대신 다른 녀석이 더욱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지만... "아니, 잠깐 기다려" 나는 부조리한 기분을 맛보며, "코이즈미 너, 아까의 하루히를 못봤냐. 더이상도 없이 좋은 기분이었잖아. 신발에 날개라도 돋친 것처럼 물리적으로 땅에 다리가 붙어져있지 않은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고. 게다가 그 엿같은 이공간과 파란 거인은 하루히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쌓이면 나오는거잖아. 그녀석이 그정도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심심하진 않을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이론에 맞지 않잖아?" "확실히 제 눈에도 스즈미야 씨는 매우 건강해 보입니다. 한가한데 아무것도 안할리가 없죠. 여기서 한가지, 봄방학 마지막 날에 일어난 일에 대해 기억해보시겠습니까?" 지금가지 쭉 그 회상을 하고 있었다만, "짚이는데가 없다고 하시진 않으시겠죠. 그렇다면 기억해낼게 남아있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을 말이죠" 코이즈미는 어깨를 들썩이며 멍청한 도전자에게 최종힌트를 주는 사회자 같은 말투로, "봄방학 마지막 날 말입니다. 스즈미야 씨의 무의식 레벨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날부터입니다. 자, 무엇이 있었죠?" 또 무의식이냐. 하루히의 무의식과 코이즈미의 사이비 정신의학적 허세에는 언제나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프리마켓에 간 날이겠지. 하루히가 '이번엔 여기 참가하고 싶어'래서 전차까지 타고 옆의 옆 시까지-" "제가 지적한 때는 전차에 타기 전입니다" 그놈 참 시끄럽네. 하나하나 따지고 말이야. 나는 눈을 감고 다시 회상의 바다로 노를 저었다. 하루히가 프리마켓인가 노천시장인가 말을 꺼낸것은 봄방학이 되자마자 영화 제 2탄 예고편 촬영 준비중인 교실에서 였다. 아사히나 선배를 웨이트리스 옷으로 갈아입히고 나가토에게 점쟁이 겸 마법사용 모자와 망토를 입히고 *크랭크 인의 캠페인에서 적당히 메인 두명을 세워두기 전에, 하루히는 노란색 메가폰을 한손으로 막으며 부실에서 자주적으로 쫓겨나 겨우 돌아온 나와 코이즈미에게 천장을 보며 말했다. "이 부실, 좀 물건이 많아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찾아봤는데 요전에 만든 감독용 완장이 어디론가 가버렸어. 딴 짐하고 섞여버린 걸지도 모르겠는데, 슬슬 비품을 정비할 때가 온걸까" 쓸데없는 물건을 까마귀마냥 줏어오는건 주로 너잖아. 나가토는 책이고 아사히나 선배는 차 그릇이나 찻잎. 코이즈미는 각종 구식 게임 뿐으로, 부치가 큰 물건의 대부분은 하루히가 가져온 물건에 한정되어 있다. 하루히는 덜컥하며 단장 전용 의자에 앉으며, "나 말이야, 이벤트 공고 전단지라든가 나눠주면 절대로 받게된단 말이야. 그래서 좀전에 이거 받은거 잠깐 까먹었었어" 책상 속에서 쪽지가 나온다. "프리마켓의 공지문이야. 좀 멀긴 하지만 특급으로 타면 15분정도면 되겠네. 될수있으면 지금 바로 응모하고 싶었다고. 근데 우린 지금 여러가지로 바쁘고 신청 심사에도 시간 걸릴거같고" 우리가 바쁜건 하루히 덕이다만. 하루히가 팔락거리고 있는 전단지를 받고, 나는 내 전용 자리에 앉았다. 프리마켓이군. 이 시기쯤 되니 남는 재고를 세일해서 처분하는 모양이다. 나에게 새로운 행선지를 알려주는 종이를 바라보고 있자, "차요" 눈앞 테이블에 딸그락 하고 내 찻잔이 놓여졌다. 역시 멋지신 아사히나 선배. 영화용 웨이트리스 스타일이라도 다도예를 결코 잊지 않는 조신한 웃음과 친절에 나는 눈물샘이 느슨해져버린다. 메이드가 아니고 웨이트리스 차림으로 시중을 드는것도 신선해서 좋은데... 아니, 본래 이 모습이 일에는 더 맞는 복장이었지. 보통 웨이트리스는 우주인과 격투라든가 하지 않는다. "이 의상도 밖에 안나가면 귀여워서 좋은데요..." 아사히나 선배는 스커트의 옷자락이 신경쓰이는지 다리를 모았다. 그리곤 기쁜듯이 쟁반을 끌어안으며 *주전자와 찻잔의 원래 자리로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대로 전원 분의 차를 넣고 모두에게 돌렸다. 전교의 아사히나 팬의 최대 목표, 그녀의 몸종 모습을 볼수 있는 것은 전 세계에서 문예부실 뿐이다. 하는김에 마녀 옷을 입고 독서를 하는 나가토를 보는 것도 말이다. 일단 사진을 찍어두고 싶은 광경이다. 내가 눈과 목의 갈증을 가시게 하는 작업에 몰두하던 중, "잠깐, 쿈!" 5초만에 차를 다 마신 하루히가 찻잔을 소리나게 내려놓고 박차고 일어났다. 정말 바쁜 녀석이다. "이번엔 무리지만 다음엔 우리도 상품 갖고가서 참가할거야, 이따 가서 집의 벽장 뒤져서 비싸게 팔릴거같은 필요없는 물건을 준비해둬. 뭔가 아무튼 있지? 이젠 쓰지도 않는데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해서 사장되버린 콜렉션이라든가. 받은 것까진 좋은데 아직 봉투도 뜯어본적 없는 증답품이라든가" 어릴적에 잡지 추첨에서 받은 듣보잡 애니 프라모델도 괜찮은건가? 대량으로 받아서 조립하기도 귀찮고 그대로 방치해두는 꼴이 된 건데. "그런걸로 해" 하루히는 내 손에 들려있던 전단지를 날치기하듯 가로채고, 그것을 정중히 접으며, "프라모델? 걔도 너한테 만들어지는 것보다 좀더 솜씨 좋은 사람한테 만들어지길 바랄거야 분명" 어린이의 만들기 쉬운 프라모델보다 컴퓨터부에서 전리품으로 얻어온 노트북을 출품하는건 어떻냐. 비싸게 팔릴걸. "그건 중요한 비품이잖아. 슬슬 컴퓨터부에 연락해서 업그레이드 시켜야 하는데" 다음으로 하루히의 화살은 찻잔을 양손에 들고 후후 불고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향했다. "미쿠루네도 많이 있을거 같네. 오래 입어서 낡은 옷이라든가 생각없이 모은 식기든가. 쇼핑 자주가는거 같고" "아... 그게.." 아사히나 선배는 마음이 훈훈해지는 눈을 뜨며, "그, 그렇네요. 너무 귀여워서 그만 사버리고 말게 되요. 근데 막상 입어보니 안어울리고, 먹을거 사면 이상한 맛이 나거나... 근데.. 어떻게 아시는거죠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왜냐면 미쿠루하고 가게 앞을 지나가면 반짝이는 눈으로 '다음에 이거 사러와야지' 하고 트럼펫을 동경하는 소년같은 전파를 내보내고 있어. 잘도 용돈이 버티나보네" 흠칫 하는 아사히나 선배였다. 하루히는 다음 타겟을 향해 틈도없이 시선을 돌렸다. "유키한텐 책이 많을거 같네. 프리마켓에서 헌책방을 열면 괜찮을거 같애. 부실의 책들도 꾹꾹 눌러담아서 말이야. 봐봐, 바닥이 꺼질 기세라구" "......." 나가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루히를 본 뒤, 책더미들을 바라봤다. 덤으로 나도 흘낏 보더니 다시 독서로 돌아갔다. 나가토가 자신의 장서를 버리리라곤 생각하지 않고, 게다가 나가토의 집에는 책이 많이 있는게 아니라고, 많은 책 밖에 없다고 말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고 머리로 단어의 교체를 실험하고 있는 내게, "쿈, 그럴때는 카드를 가져가서 유키네까지 가지러 가는거야. 짐정리 도울 겸 해서" 나가토는 재차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주시했고, 나는 그 눈에 떠오르는 메세지를 환시하는 감각에 습격받았다. 그건 언제였더라. 아아, 나카가와의 바보천치같은 전화가 왔을 즈음이니까 겨울방학 중 이었나. 부실의 연말 대청소때 나가토는 책장에 넘치는 책들의 처분에 대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집의 자기방에 놓여진 책이라도 단 한권이라도 잃고 싶지 않을거다. "그렇군요" 코이즈미는 한손에 찻잔을 들고, "기껏 들고와도 대전상대가 없는 게임뿐이고 말이죠, 이 경우엔 제 콜렉션에서 빼도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쓴웃음 표정을 내게 비추는건 사양한다. 하루히는 매우 바쁘게 단장 책상에 뛰어 올라타 앉았다. "그래서 모두, 봄방학 마지막 날 예정을 비워놔. 프리마켓 예비조사에 갈거니까. 하는김에 재밌어보이는 물건이 있으면 부비로 사버리자" 그 부비가 SOS단의 것이 아니라 문예부에 할당된 돈임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ㅡ그렇게 해서, 학교가 당분간 놀게 되니 좋군. 그러나 문이 닫혀있는 휴가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루히가 이끄는 SOS단은 오전을 나태로 보낼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릴 봄방학 마지막 날도, 완전히 집합장소로 정착한 역앞을 향할 차례가 되었다. "이제야 도착하셨습니까. 설마 당신의 기억이 말소된건 아닌지 불안했었다구요" 그 날의 기억을 소거해서 누가 득이 된다는거냐. "이해득실 개념으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만 할수 있다면 제가 지우고 싶었습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코이즈미에게 기억을 조작당할 이유따윈 없을뿐더러 그런게 가능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하루히를 어떻게 했으면 좋았잖아. "말씀대로입니다" 그렇게 괴로운듯이 말하지 마라. 도대체 하루히 일로 고민하다니 인생의 낭비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스즈미야 씨의 고민은 제 고민이기도 하니까요" 코이즈미는 항복하듯 가볍게 손을 펴고, 나는 다시 회상으로 돌아갔다. 프리마켓 당일 아침, 나는 알람시계의 종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뒷머리가 끌리는 듯한 느낌이란게 딱 이거구나. 포근한 잠자리를 뒤로하고 나만 일어나는 것도 화가 났지만, 심지좋게 아침잠을 만끽하는 샤미센의 자는 얼굴을 보니 이불 속에서 끄집어 내는것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나는 홀로 고독을 씹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부엌을 들여다보자, "앗 쿈 인났어? 햐미느응?" 동생은 구운 빵을 입에 쑤셔넣으면서 내게 물었다. 나는 냉장고를 열고 보리차 병을 꺼내 컵에 따라 단숨에 마시고, "자고있어" "쿈군 빵도 구워? 아, 반숙 계란프라이 있어, 찬장속에-" "부탁한다" 하고 세면대로 갔다. 돌아와보니 동생은 토스터에 빵을 넣고 *햄에그가 든 접시를 전자렌지에 넣을 참이었다. 딱히 기특한게 아니라 그저 자기 손으로 조작하는게 재밌있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덧붙여 내일부로 초등학교 6학년, 11세가 될 예정의 여동생의 오늘 일정은, 미요키치네 집에 놀러가서 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나름대로 나들이 차림으로 차려입고선 도저히 동급생으로 생각되지 않는 모습의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그 미요키치 말인데, 3일정도 전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는 정말 놀랐다. 못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점점 미인으로 성장하고 있어서 내 여동생과 나란히 걷고 있으면 마치 오남매의 장녀와 막내딸으로 보일 정도다. 대체 뭘 먹고 자라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걸까. 정말이지 미요키치가 여동생이었다면 내 방에 멋대로 들어와서 물건을 집어가거나 하진 않을거고, 아침엔 좀더 품위있게 깨워줄거고 과도한 관심에 지쳐 도망나니는 샤미센을 쿵쾅쿵쾅하며 쫓아다니는 일도 없고... 어째서 나는 미요키치의 오빠로 태어나지 못한 것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ㅡ "여자친구 자랑 이야기는 사양합니다" 코이즈미는 눈 앞에 떨어진 벚꽃잎을 집어 들며,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요시무라 미요코 씨를 여동생으로 둔 사람은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당신의 여동생에게도 충분히 소질이 있다는 의견도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에 대해 상세히 들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무튼 자택을 나선 후 집합장소에 도착할때 까지의 이야기를요" 말투가 너무하는군. 네놈은 미요키치의 실물을 본 적이 없으니까 냉담할 수 있는거다. 뭐 좋다. 고교 1학년의 봄방학 마지막 날의 내 회고록을 그렇게 듣고 싶다면 말해주지. 하지만 거기엔 너도 등장인물로서 등장한다고, 무슨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을게 아니냐. "제 일엔 흥미 없습니다" 코이즈미는 손끝에 꽃잎을 올려놓으며, "제 관심대상은 그곳엔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의 눈을 통해 본 제 모습이 어떻게 비쳤는지 신경쓰이는 정도입니다만, 역시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분홍의 꽃잎을 튕겨냈다. "다음을" 언제나처럼 나는 자전거를 타고 역 앞으로 날아갔었지. SOS단 집합규칙 첫번째, 최후에 온 사람이 전원의 밥값을 부담한다. 참고로 나는 아직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얻어먹어 본 적이 없다. 가끔은 선두에 서서 -특히 하루히를 그렇게 하고싶다는 의도가- 나를 지휘하고 격려하는건 일상의 일이지만, 어째선지 노린듯이 하루히는 내가 오기 아주 조금전에 도착한 듯 보였다. 이녀석 어디서 숨어있다가 나를 감시하고 있던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역 앞 선로를 따라 자전거 보관소에 가서 빈 자리를 찾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쿈" "우왓" 그것은 기습에 가까웠다. 워낙 급작스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단 말이다. 멍청히 자전거를 밀고 있던 내가 순간 뒤꿈치를 지면에서 떼어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지.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며 목소리의 주인을 본 나는, 기억해내는것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뭐야, 사사키냐" "뭐야라는건 어디 인삿말이냐. 꽤 오래간만인데 말이야" 사사키도 자전거의 핸들을 손으로 잡고 서 있다. 그 얼굴엔 말과는 다르게 어딘가 온화하면서도 짗궂은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쿈, 그러고보니 요전에 스도한테 전화가 왔엇는데 어쩐지 3학년때 동기들하고 동창회를 열고 싶다는 것 같아.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는데 언급하지 않은 부분의 뉘앙스나 여러가지 간접적인 증언들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당시의 어느 여자애에 미련이 남은 모양이더라구. 추측컨대 스도가 집착하는 상대는 여학교로 진학을 잡은 오카모토 씨가 아닐까. 기억나냐? 곱슬머리에 귀엽게 생긴 신체조부의 오카모토. 이번 여름방학에 어떨까 하고 묻길래 괜찮을거 같다고 대답해 뒀다. 사실 난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다만, 넌 어때?" 그야 한다면 가지. 나도 꽤 변했고 졸업식 이래로 본 적 없는 녀석들이 몇명이나 됐더라.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오카모토의 옆자리는 스도한테 양보할까. 사사키는 형용하기 어려운 독특한 미소를 지으며, "그럴 줄 알았어, 근데 말이야 그 중학교 졸업식 이래가 된 녀석들 중엔 당연히 나도 들어가 있겠지? 실제로 오늘 너하고 만난건 졸업증서를 받은 그날 이래로 1년 이상 지나서고" 한손을 핸들에서 떼어낸 사사키는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듯 손목을 돌렸다. "쿈은 키타고였지. 어때? 유쾌한 고교생활을 근심없이 잘 보내고 있냐?" 유쾌한가 어떤가는 평가의 분기점이다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불유쾌하진 않군. 재미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내가 키타고에서 보낸 1년간의 다이나믹 라이프를 말하자면 길어진다고. "그거 좋겠네. 난 별로 말할게 없어서 말이지. 아주 재미없는건 아니지만 내가 간 고등학교에는 물리법칙을 뒤흔들법한 사건이 없었으니까" 좋은 자세다. 그런게 아무 학교에나 있거나 하면 전국적으로 공황이 될 거다. 나는 동급생의 얼굴을 요모조모로 뜯어보고, 중학생 때와 다른점이 있는지 찾아보면서, "넌 시외의 사립학교에 다닌댔지. 명문 진학교에" 사사키는 웃음의 채색을 바꾸었다. "너가 내 프로필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지 않고 있는것에 대해 깜짝 놀랬다. 맞아. 덕분에 수업에 필사적이지. 지금도-" 하면서 역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전차타고 학원 가야해, 이건 뭐 공부를 위해 공부를 하는 기분이야. 봄방학이라는 실감도 안났고. 그리고 내일이 되면 즉시 머나먼 전차통학이 기다리고 있지. 만원전차만큼 익숙해지지 않고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것도 없지" 키타고 통학로의 급경사와 좋은 승부가 되겠군. "건강엔 좋잖아. 난 시립에 가고 싶었는데. 좋겠다 스도는" 뭐가 이상하냐, 사사키는 감히 흉내도 내지못할 웃음소리를 내며, "근데 쿈, 여긴 무슨 볼일이야? 열차 방향이 같으면 같이갈래? 할 얘기도 많고"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맙소사, 집합시간 3분 전이다. "미안하다 사사키, 일행이 있어서, 시간에 쪼잔한 녀석이라 늦으면 무슨 험한꼴을 당할 지 몰라" "일행? 학교의? 음, 그래. 그럼 서둘러야지. 아아, 걱정마. 나는 매일아침 오는 단골이라 유료 자전거 보관소하고 월정으로 계약되어 있어서. 그게 어디냐면-" 사사키는 바로 옆 자리에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내며 자물쇠를 채웠다. "여기야, 쿈. 네 일행과의 약속장소까지 같이 가고 싶은데, 네 친구라면 내 친구이기도 하지. 한번 얼굴이라도 봤음 해" 본대도 별 이익은 없을텐데, 정 그러겠다면 말리진 않는다. 소개한들 사사키의 인생에 뭔가 플러스 될리는 없겠지 하고 생각했다. 아사히나 선배의 사랑스러움을 가르쳐 주자니 내 공로도 아니거늘 왠지 자랑스럽다. 내가 자전거 보관소의 빈자리를 찾고 이용료를 지불하는 동안 사사키는 숄더 백을 메고 옆에서 같이 걸으며 중학교 시절의 잡담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SOS단의 집합장소가 보일 쯤에, "쿈, 넌 변한게 없구나" "그러냐" "어, 안심했다" 어째서 사사키에게 안심되지 않으면 안되는거냐. 본 느낌으론 너도 전혀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나는 마치 성장하지 않은게 되는거네. 신체검사의 결과를 신용한다면 육체적 수치는 어느정도 변화했을 테지만" 나도 키는 좀 컸다고. "실례,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외관은 바꾸려면 바꿀 수 있어. 예를 들면 머리를 기르던지 자르던지로 꽤 인상에 변화를 줄 수 있지. 간단히 변하지 못하는건 알맹이야. 좋든 나쁘든 인간의 의식이 물질에 머무르는 거라면 구성물질을 어지간히 교체하지 않는 한 개념이나 관점은 그리 달라지지 않겠지" 묘하게 그리운 느낌이다. 생각났다. 그래 사사키는 중학교때부터 이런 까다로운 이야기를 하는 녀석이었다. 사사키는 걸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혹은 개념이 완전히 바뀐 성 바울로, 또는 코페르니쿠스같은 전회가 없는 한 말이지. 세계의 변용은 이콜 가치관의 변용이란 말이지. 그것이 전부라고 해도 좋아.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인식능력을 초월한 사상을 결코 바르게 이해할 수 없어. 우리들의 눈은 적외선을 볼 수 없게 되어있지만 뱀은 열을 감지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 우리들의 귀는 일정치 이상의 주파수가 되면 소리로서 인식하지 못하지만 개들은 초고음파를 들을 수 있어. 어느쪽도 사람에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적외선이나 개호루라기의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게 아냐. 그저 감지하지 못할 뿐이지" 정말 키타고에 왔으면 좋았을텐데 사사키. 너와 죽이 잘 맞을 녀석이 한명 있다구. 마침 잘됐군.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이 기회에 소개시켜줄까? 내가 제안했을 즈음에, 어느덧 나를 제외한 SOS단 전원의 모습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한 분을 데리고 오셨었지요" 코이즈미는 여기저기에 비난을 희석시킨듯한 색을 섞은 목소리로, "어떤 의미에선 저와 좋은 말상대가 될 인물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저같은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죠. 입장이 너무 다릅니다. 저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있기 때문에 제가 선망과 달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은 소수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당신도 그중 한명이구요" 아첨같은거 떨어도 나는 델포이의 무녀처럼 신탁을 고하거나 하진 않는다구. "알고 있습니다. 불가항력만큼 무서운 것도 없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지만 거역할수 없는 힘 말이죠" 더욱이 사사키가 대단한 녀석인것은 중3때 1년을 같이 보낸 나는 알고 있었지만, 코이즈미가 아고 있었다는건 의외인데. "의외랄것도 없습니다. 당신에 대해 '기관'이 조사한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죠. 물론 태어날 때부터 대부분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당신은 보편적인 일반인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거 고맙군, 나는 네놈 조직의 보증서류인가. "원하신다면 발행해 드리지요. 아니, 이건 농담입니다. 농담이 되지 않는것은 당신이 중학교 3학년때 사사키 씨와 같은 반이 되고, 새로운 친구관계였다는 이력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제 심경입니다" 어째서냐. 코이즈미는 시를 낭독하듯이 대답했다. "당신의 친우인 사사키 씨 또한 일반인이지만 시각이나 관점이 남다른 인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입자의 행동을 하지만 파동의 임무를 수행하는, 마치 빛과 같이 말이죠" 불가항력인지 뭔진 모른다. 우연이란 단어는 지겹도록 들어왔다. 하물며 빛이 가진 이중 성질에 대해서 같은 것 따윈 평생 무관계한 상태로도 좋다. 아무튼 나와 사사키는 역 앞을 향해 걸어갔고, 멈춰선 곳은 언제나의 그곳이었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4인방의 모습, 내역은 세명 사복에 한명 교복. 그리고 매번이지만 듣게되는 감사스러운 단장님의 훈화말씀. "지각? 간이 부었군. 그렇게 말했는데 최후에다가 타임오버까지 하다니 봄이라고 너무 풀어진거 아냐? 쿈, 좀더 1분1초를 소중히 하라구. 너의 시간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니깐? 기다리는 우리들의 시간하고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구. 그러니까 지각한 분은 벌금으로 부치겠어. 지나간 시간은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 비위를 맞춰줄 생각이라면 아주 조금이지만 위안이 되니까" 하루히는 숨도쉬지 않고 말을 끝낸 뒤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기이한 눈초리로 내 옆을 쳐다봤다. "그거 누구야?" "아아, 이녀석은 내..." 하고 소개를 하려는 도중에, "친구" 사사키가 멋대로 해답을 말했다. "하?" 눈을 크게 뜬 하루히에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인사한다. "라고 해도 중학교 동창. 그것도 3학년때지만, 그 때문인지 박정하게도 1년동안이나 연락도 없었어. 이건 서로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1년만의 재회인데도 별 인사없이 회화를 할 수 있는 사이였다니 충분히 친했었다고 생각해. 나에겐 쿈, 니가 그런 경우야" 새로웠던 친구라는 의미는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곧잘 이녀석과 어울려 지냈으며 방과후에도 얼굴을 맞댄 횟수가 누구보다 많았던걸로 기억한다. 기억한다만- 왠지 그때의 기분이 좋지 않았던건 왜지. 말해두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뒤에서 손가락질 받을만한 행동은 한 기억이 없고 사실도 없다. 하지만 사사키가 나를 친구라고 말하는것을 옆에서 듣고 있으면, 그리고 하루히의 기묘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5분후에 뇌우가 휘몰아 칠 것을 알면서도 우산을 갖고 나가지 않은 3분후같은 기분이다. 어째서일까. 생각해보니 아사히나 선배는 깜빡이며 눈동자를 반짝이는 빈도를 늘려갔고, 코이즈미가 번뇌에 가득찬 표정으로 턱을 만지고 있었던 것 같다. 교복을 입고 무표정한 나가토도 부동자세였던 것 같지만, 어째서 나는 하루히의 얼굴만 봤던 것일까. 옆에서 움직임의 기척이 났다. 사사키는 반 보 정도 앞으로 나아가 하현달 형태로 입을 벌리며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하루히에게 악수를 청하듯. "사사키입니다. 당신이 스즈미야 씨군요. 이름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히가 찌릿 하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뭔가의 착오로 지명수배당한 무고한 시민의 기분을 맛보며, "너의 악행을 이녀석한테 말한적은 없어. 사사키, 넌 어떻게 하루히를 알고있어?" "그야 같은 시가지에 살고있고, 눈에 띄는 사람들의 소문은 이리저리 줏어들은게 있어서. 우리 중학교에서 키타고로 간 학생은 쿈 너뿐만이 아니지" 쿠니키다 라든가. "그래, 그도 말이지. 건강한가? 아마 지금도 유유낙낙히 살고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성적으론 꽤 좋은 학교에 갈수 있었는데 일부러 현립에 들어간 괴짜지" 사사키는 동창생 얘기를 허겁지겁 끝내고는 하루히를 바라봤다. "키타고에선 쿈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내민 손을 미동조차 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는다. 사사키는 서양식 인사에 하루히는 초코렛을 착각하여 조약돌을 입에 넣고 씹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윽고 그 손을 잡으며, "잘 부탁해" 잡은 손을 흔들지도 않고 찬찬히 사사키의 눈동자를 보며, "자기소개는 필요 없겠군" "그렇군요" 사사키는 싹싹히 웃으며 대답하고, 하루히를 바라보며 청개구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낼 법한 소리를 내며 살짝 웃었다. "그쪽 분들은?" 사사키는 하루히의 손을 섭섭한 듯 놓고, 시선을 좌우로 돌렸다. 단원소개는 당장의 몫이라고 생각한건가. 하루히는 공백도 두지 않고 말했다. "그쪽의 귀여운게 미쿠루고, 저쪽 세라복이 유키, 이쪽이 코이즈미" 각자 지명받은 사람들은, "앗, 아..아사히나 미쿠루예요" '아사히나삘' 이라고 써놓고 팔면 삽시간에 예약주문이 쇄도할것 같은 봄 스타일로 몸을 둘러싼 유일한 상급생은 서둘러 인사를 했다. "코이즈미 입니다" 아라카와 씨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정중함으로 고개를 숙이는 부단장. "......." 학교에 있을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교복 모습의 나가토는 끄덕도 움직이지 않는다. 삼인삼색의 인사를 들었지만 사사키는 귀찮았는지 단장 이외엔 악수를 청하지 않았고, "처음 뵙겠습니다" 그저 재미있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아사히나 선배는 조금 허둥지동 거렸으며, 코이즈미는 평소의 미소를 되찾았고, 나가토는 심해에서 이제 막 퍼올린 듯한 바닷물과 같은 눈으로 사사키를 관찰하는 시선을 내보내고 있다. 사사키는 3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려는 듯 몇초간 가만히 서있다가 빙글 돌며 나를 향했다. "그럼 쿈, 난 슬슬 전차시간이니까 살례할께. 다시 연락한다. 이만" 휙. 손을 흔들고, 다시한번 하루히에게 미소를 보내며 개찰구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정말 시원시원 하구만, 왠지모르게 나는 사사키의 뒷모습을 사라질때까지 멍청히 바라보았다. 오랜만 치곤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군. 이대로라면 다음에 만나는것도 1년후가 될 지도 모르겠다. 수 초간의 침묵이 진행되는 가운데, 하루히가 정적을 끊으며 말했다. "좀 별난 녀석이네" 네가 별나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하루히는 개찰구에서 눈을 떼며, "저기, 니 친구 옛날부터 저런 느낌이었어?" "어, 전혀 변하지 않았어. 외관도 알맹이도" "흐음?" 하루히는 뭔가가 생각중인 것을 귀에서 쏟아내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재빨리 포기한듯 머리의 각도를 수정하며, 뿅 뛰어올라 몸의 방향도 바꾸었다. "뭐 좋아. 그것보다 쿈이 낼 카페로 가자. 돈은 제대로 갖고 왔겠지? 프리마켓에서 살 물건이 있으면 마구 사야지" 전자상가의 형광등 파는곳과 같은 밝기로 웃으며, 하루히는 선두를 끊고 걷기 시작했다. 짐 정도는 혼자 들란 소리는 안할테니 적어도 자기가 갖고싶은건 자기 돈으로 사라구. 문예부 돈 쓰지 말고, 나가토를 위해서라도 내가 지켜야 한다. "그 뒤의 얘기는" 하고 나는 코이즈미에게 말했다. "네가 아는대로다. 카페로 가서 내가 내고, 프리마켓에 가서 하루히는 쓸데없는걸 잔뜩 사들이고, 바다가 보이는 멋들어진 가게에서 점심먹고 돌아왔지. 오는길에 사카나카네도 들렸었고" 네놈이 노부부의 노점에서 구입한 바둑판을 시종 끌어안고 있어서, 짐의 대부분이 내 팔에 맡겨져 있던걸 잊었다곤 하지 마라. 덕분에 난 헐값에 팔고있던 잡동사니-*데저트 로즈의 원석이라든가-를 대량으로 들게 되어 회장 내를 어슬렁거렸으니까. 그나마 흐뭇해 할만했던 것은 아사히나 선배가 초등학생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만화경을 보며 "와아, 정말 원시적인 장난감이네요. 그래도 이쁘다..."하고 감탄사를 내뱉는 씬과, 어딘가의 부족의 주술사가 쓰고 있던 것 같은 가면을 지그시 바라보는 나가토 정도였나. "어디 니 기억과 다른 곳이 있냐?" "다행스럽게도 없는 것 같군요" 코이즈미는 모니터의 뒷쪽을 열심히 관찰하며, "객관적인 사건으로서는 당신의 해설 그대로입니다. 다만 주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면 당신과 저의 해석은 꽤 어긋날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관찰하면 눈을 내게로 돌렸다. 마음에 안드는 눈초리다. "그럼, 여기서 문제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요즘들어 폐쇄공간의 발생률이 증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즈미야 씨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랑 거의 같은 수치입니다.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감소경향을 보이던 저의 아르바이트 출격횟수가 단숨에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봄방학 종료 직후입니다. 어째서일까요" 나는 안절부절하며, "말하고 싶은게 뭐냐"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언어화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텔레파티 같은 것으로 의사소통이 매끄럽게 되는 경우는 드물죠. 요컨대 인과관계입니다. 이 경우 '인'에 해당하는 부분은 봄방학 마지막 날이 되겠군요. '과'에는 폐쇄공간과 신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당신에게 내는 저의 문제입니다" "......." 나는 나가토같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후두부가 저려온다. 코이즈미는 죠몬시대의 지층에서 발굴한 원시적 가면같이, 웃는 얼굴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미소로, "스즈미야 씨가 신학기 개시와 동시에 폐쇄공간이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과, 봄방학 마지막 날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날 무슨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언제나처럼의 SOS단 활동으로 새삼스레 중요시 할 헤프닝도 없었습니다. 프리마켓에서 재미있게 논 것 뿐이죠. 평소와 틀렸던 것, 상례에 개입한 유일의 변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미 알고 계실겁니다" 사사키인가. "하지만 어째서냐. 약속장소에 그냥 우연히 만난 중학동창과 같이 온것 뿐이라구. 어째서 하루히의 정신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는거냐" 코이즈미는 놀란듯이 입을 다물고, 관찰보다는 감상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마치 여동생이 주워온 매미 껍질을 처음 본 듯한 샤미센의 표정을 만들었다. 한 10초간의 시간이 흘러, 슬슬 눈 앞에 손을 흔들어줄까 하고 생각한 순간, 인체에 무해한 핸섬보이 초능력 알바생은 차분히 고개를 흔들며, "왜냐면 말이죠" 과장된 동작으로 몸까지 나를 향했다. "당신의 친구를 자칭하는 사사키 씨가 아마 열 명중 여덟 명은 홀려버릴 실로 매력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사에 어두운 어리석은 임금의 시해를 결의한 간신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2년전 -딱 이맘 때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 3이 된 봄, 고교 진학을 걱정하는 어머니에 의해 학원에 난폭하게 처넣어졌다. 그 같은 반에 사사키가 있었고, 학교에서도 같은 교실을 쓰는 녀석은 사사키 뿐이었다. 가끔 자리가 가까워서 어느쪽이 먼저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야기를 나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여어, 너도 여기 오는거냐" 같은 거였던 거 같다. 계기는 그냥 그런 느낌으로, 그걸로 인해 중학교 교실에서도 가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딱히 주의를 기울인건 아니지만, 사사키의 네놈 이자식 저자식 하는 인칭대명사와 딱딱한 사내놈식 말투는 확실히 남자애들을 상대할 때만 사용한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여자애들 사이에선 보통의 여자애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남자를 상대로 남자같은 말투를 쓰는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상대의 남자에게 자신을 여자로 보이게 하고싶지 않다던가. 요컨대 나를 연애 대상으로 보지 마 하는 의사표현인걸까.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나? 물론 나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지. 애초에 나는 남의 말투에 태클을 걸 정도로 국어력에 대한 자신이 없다. 내 이름에 대해, 사사키는 재미있는 반응을 보였었다. "쿈이라니 굉장히 유니크한 별명인데, 어떻게해서 그렇게 됐지?" 나는 투덜대며 바보같은 에피소드와 여동생의 만행을 고발했다. "흐음, 네 이름은 뭐라고 읽는데?" 발음을 말해주자 사사키는 눈과 고개를 각각 다른 방향으로 기울이며, "*그게 쿈이 되는거야? 대체 어떤 한자로... 아, 말하지 말아봐, 추리해보게" 잠시간 재미있는듯 조용히 있던 사사키는 큭큭큭 웃으면서, "아마 이렇게 쓰는거지?" 노트에 끄적끄적 샤프를 놀린다. 쓰여진 문자를 보고 나는 감탄해 버렸다. 사사키는 정확하게 내 이름을 적은 것이다. "유래를 물어봐도 될까? 이 어딘지 모르게 고귀하고 장대한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이름의 이유" 아직 내가 어릴때 아버지에게 물어봤을 때 들은 얘기를 그대로 말해주었다. "좋네" 사사키가 그리 말하니 진짜로 좋은 이름이라고 와닿게 된다. "그래도 난 쿈 쪽이 더 좋은데. 울림이 좋아. 나도 그렇게 불러도 될까? 아니면 다른 명칭을 고안해볼까. 아무래도 넌 그 닉네임이 그닥 맘에 안드는 거 같으니" 어떻게 그런걸 알지? "그도 그럴게 넌 쿈이라 불릴 때보다 평범하게 이름을 불릴 때가 반응속도가 빠르잖아. 0.2초 정도" 나를 실명으로 부르는건 내게 뭔가 진지한 할 얘기가 있을 때 정도니까 말이지. 수업중에 다음 문제를 지명당할 때라든가, 별로 친하다고 할수없는 -특히 여자에게 불릴 때라든가... 그건 그렇고 0.2초? 잘도 그런 차이를 눈치채는구나. "보고 들은 정보가 뇌에 도달하여 반응을 개시하는 시간이 그정도야. 넌 실명으로 불릴 경우엔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쿈일 때는 의식하진 못하겠지만 그만큼 느려져. 너의 심층심리는 썩 좋아하지 않을거라 판단한거야" 생각해보니 무의식이라든가 심층심리든가를 내 사전에 기입한 때는 이게 최초라고 생각한다. 학원의 수업은 일주일에 3일. 화, 목, 토에 모두 저녁시간대였다. 학교가 쉬는 토요일을 제외하고 화요일과 목요일엔 나와 사사키는 같이 다니는게 금세 습관이 되었다. 학원은 이 근방에서 제일 큰 역 근처에 있어서 학교부터 걸어가기엔 꽤 짜증나는 거리였고, 그렇다고 버스도 바로가지 않고 빙 돌아가기 때문에 이 또한 시간이 꽤 걸린다. 제일 빠른 것은 학교부터 역까지의 직선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는 것. 이거라면 15분도 안걸린다. 내 집은 학교부터 목적지까지의 길의 직전상에 놓여있어서 일단 귀가하고 자전거를 꺼내 학원을 향해 질주하는것이 논리적으로 최선의 방책이었고, 따라서 안장 뒷자리에 사사키를 태우고 달리는 것도 습관이 되었다. 사사키에게 있어선 매우 경제적이었기도 하고. 학원에서도 같은 교실이었지만 매시간 잡담을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진 않았다. 서로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 탓인지 중2때부터 부드러운 커브를 그리며 하강하고 있던 성적곡선도 떨어지길 멈출 경향을 보였던건 고마운 일이었다. 갖고 돌아간 답안용지의 점수가 원대한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던 것에 애간장을 태우며 학원에 처넣으신 어머니도 약간 가슴을 쓸어 내렸겠지. 이렇게 해서 "좀더 공부 안하면 사사키랑 같은 대학 못간다" 하는 입버릇도 나으시면 좋으련만. 어째서 내가 그녀석과 진도를 맞춰야 하는건지. 이해할 수 없다. 학원이 끝나면 세계는 언제나 완전히 밤의 지배하에 놓여진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뾰루지같은 천연 위성을 올려다보며 나는 자전거를 밀며 걷고, 조금 뒤에 사사키가 따라온다. 돌아갈 땐 버스를 이용하는 사사키와 함께 근처 정류장까지 간다. "그럼 쿈, 내일 또 학교에서 봐" 도착한 버스의 승강구에 발을 올리며 말한 사사키는 손을 흔들었고, 나는 집을 향했다. 네, 회상 끝. "설마 그정도까지 였을줄은..." 코이즈미는 미간에 중지를 꽂으며, "마치 정말로 철없고 순수했던 중학시절을 소재로 한 연애소설의 한 페이지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나와 사사키는 확실한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고. 아니, 확실치 않았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 "네네, 그러시겠지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위 분들은 어떨는지요. 당신들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쿠니키다나 나카가와는 묘한 착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저라도 착각을 일으키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물론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것도 아닐겁니다. 어쩌면 아사히나 씨와 나가토 씨도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뭐 그 두 분은 조금은 당신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게다가 이것에 대해 매우 석연찮게 생각하실 분을 제가 한명 알고 있습니다" "...누구냐" 코이즈미는 미소를 애써 일그러뜨렸다. 그 눈에 머무르는 것은 나에 대한 비난의 시선이었다. "여기까지 말해도 모르신다면 당신의 머리를 절개하여 뇌에 직접 그 이름을 써 놓아야 하겠죠" 그쯤은 알고있다고. "설마라곤 생각하지만" 머리 위에 대향의 모충이 얹혀져 있는듯한 기괴한 감각을 느꼈다. "하루히가 사사키를 보고, 그것도 친우인지 뭔지 자칭하는 것을 듣고 그걸로 인해 뭔가 착잡해 한다는건가? 특기인 '무의식' 속에서?" "폐쇄공간, 신인. 당신이 알고 계신대로의 현상입니다만 그 날 이후의 그것들은 이전에 비해 상태가 다릅니다. 폐쇄공간은 그대로지만 신인의 행동이 어쩐지 불안할 정도로 얌전합니다. 출현하긴 하였으나 적극적인 파괴행동은 보이지 않고 무료하게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본분이 생각났는지 건축물을 툭툭 건드리는 정도죠" 저 청백색의 거인이 이성적인건 나쁜 일이 아니잖아. "저희 '기관'에 있어선 어느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인을 소멸시키지 않는 이상엔 폐쇄공간도 해방되지 않으니까요" 코이즈미의 주석은 계속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인, 나아가선 스즈미야 씨의 무의식은 어딘가 갈피를 못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겁니다. 혼미의 길을 방황하며 괴로워하는 무의식이죠" 프로이트 선생도 무덤속에서 쓴웃음을 지으실거다. 설마 자신의 연구성과가 하루히의 분석에 빈번히 쓰여지리라곤 상상도 못해봤겠지. "저로선 스즈미야 씨가 사사키 씨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고 친다면 이야기가 편해질 것 같습니다" 반론 하나 해주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루히를 위해서다. "그 녀석은 연애감정을 정신병의 일종으로 보는 여자다" "한가지 묻겠습니다만 당신은 스즈미야 씨가 남녀간의 연애에 대해 논할 수 있을 정도로 심리학에 정통하신 분으로 보이십니까?" 아니. "저도입니다. 스즈미야 씨는 아는 것 같지만 모르고 계시죠. 역의 경우도 성립되는 명제입니다만 아무튼 그녀의 정신은 또래의 여학생과 비교해보면 특별히 조숙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만 보면 극히 평범한 한명의 소녀입니다. 다만 삐뚤어진 포즈를 취한 것 뿐이죠" 너가 할말이냐. 적어도 내가 보기엔 너도 충분히 삐뚤어진 놈이라고. "그렇습니까" 고대의 가면을 벗어던져 웃음짓고, 연극하듯이 뺨을 만지며, "아직 정진이 부족하군요. 당신에게 이렇게까지 간단하게 간파 당하리라곤" 코이즈미는 양팔을 넓히며 고개까지 흔들었다. "분석해 보건대, 스즈미야 씨는 당신의 과거의 친구분이 존재하며, 그것이 자신이 모르는 인간이고 지금까지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사실의 발견에 설명하기 힘든 감각을 느낀 것으로 생각됩니다. '질투' 등 단순한 단어로는 해석불능한, 좀더 선천적이고 근원적인 감각 말입니다. 의표를 찔렸다고 정정할까요. 그리고 당신에게도 옛 친구 한둘은 있으시겠죠. 거기까진 스즈미야 씨도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인 친구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죠. 하지만 사사키 씨가 자신을 당신의 친우라고 공언한 것, 이것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예상 외 입니다. 그녀의 존재를 알고있던 저에게도 말이죠" "잘.. 아니, 완전히 모르겠는데" "스즈미야 씨의 중학시절은 거의 고립, 혹은 고독상태 였기 때문에 친구라는 울림이 마음에 걸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녀석은 바래서 그렇게 된 거잖아. 고고하다는건 하루히를 두고 하는 말일거다" "그렇다 해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 당신이 모르는 이성의 친구가 있고, 돌연히 눈 앞에 나타난다거나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있었냐?" 나는 다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녀석이야말로 음지에서 남몰래 애인을 만들고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코이즈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예가 나빴군요. 저로는 안되겠네요. 그럼 아사히나 씨가 과거에 친하게 지내던 남성이 있었고, 그가 그녀에게 마치 소꿉친구처럼 대한다면 어떨까요?" 피가 역류하지. 하지만 말이다. "그럴리 없잖냐. 아사히나 선배나 나가토는 놀이나 관광을 목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게 아니야" 조금은 노는 쪽이 좋을 정도군. 게다가 아사히나 선배의 과거라니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미래라구.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어떨까요. 상상입니다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을 느끼게 될 것 같군요. 질투도 아니고 곤혹도 아니고. 애초에 아사히나 씨는 그 이성을 특별히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닌 거 같고 표면적으로는 언제나와 같으며 정말로 어떻게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섣불리 지레짐작 하는것도 터무니없죠. 따라서 그런 감각은 의식 하로부터 잊어버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방금 얘기한 가정상황에서 아사히나 씨를 당신으로, 당신을 스즈미야 씨로 바꿔 넣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뜰에서 소규모의 함성이 들려왔다. 어딘가의 동호회에 입회를 결정한 1학년이 있는가보다. 코이즈미는 문득 그쪽을 바라보며, "하지만 통상의 의식 밖에 있는 부분은 그리 간단히 속일 수 없습니다. 때문에 무의식의 혼란이 폐쇄공간과 덜떨어진 신인을 만드는거죠. 원인이 명확한 듯 하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은게 실정입니다. 때문에 처리도 힘들죠. 실은 방법이 아주 없는것도 아닙니다만-" 코이즈미의 눈이 점점 가늘어진다. "쿈! 코이즈미군!" 아사히나 선배와 몸을 바싹 붙인 하루히가 안뜰의 포석을 밟아 부숴버릴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아앗, 아아아" 보폭이 1.5배정도 차이가 있기에 다리가 꼬일 수 밖에 없는 아사히나 선배를, 하루히는 포획한 먹이마냥 팔뚝에 고정시킨채 사정없이 돌진했다. 낚싯바늘에 신입생 한명쯤 꿰어 올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빈손이었다. 차이나와 메이드 콤비로 한마리도 낚지 못했단거냐. 이번 신입생은 상식에 찌든 녀석들 뿐인가보다.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끌어안은 채로 예고편을 반복해 상연하고 있는 모니터 앞에 멈춰서서, "재밌어보이는 입단희망자 누구 있었어? 유키쪽은?" 나가토가 희미하게 고개를 젓는 기미를 느끼면서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여기저기 다녀봤는데.. 틀렸어, 안돼안돼. 미쿠루가 탄 맛있는 차가 공짜라 간들거리면서 살랑대는 녀석들은 입단시험의 1단계에서 다 차버렸어. 여자로 꼬시면 언젠간 모두 도망가 버릴거고. 올해는 흉작인가봐" 코스프레 연구회와 착각했겠지. "그래도 한명정도는 누군가 적합자가 있을거라 생각하니까 이제부터야! 이제부터. 쿈! 네 중학교 후배중에 재밌는 애 없어? 아참, 그리고 나 중학교땐 그런애 전혀 없었으니까 히가시중 출신은 전원 불합격이야. 말하는거 깜빡했었네" 언성을 높이고 있던 하루히의 얼굴은- 역시 어느 각도에서 봐도 삼중으로 이루어진 연성처럼 빛나는 핵융합같은 웃음이었다. 그 이상의 빛은 없을 정도로. 그날 우리는 결국 무엇하나 성과도 올리지 못하고 어슬렁어슬렁 부실로 철수했다. 아사히나 선배는 마음에 걸리는게 있는지 앉음새를 바로잡으며 메이드 의상인 채로 서둘러 주전자를 풍로에 올려 차를 대접할 태세에 들어갔고, 나와 코이즈미는 테이블과 케이블의 정돈 및 설치와 정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나가토는 나가토대로 문예부의 벽보를 코푼 휴지마냥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보물을 다루는 듯한 손길로 회지의 견본을 선반에 놓고,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부실 구석에 자리를 내 하드 커버를 펼쳤다. 꽤 떨어져 있긴 했었지만 나와 코이즈미의 대화를 듣지 못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1년전에 비해서도 키가 완전 그대로인 우주인제 안드로이드는 냉정한 얼굴에 침묵 모드와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하여금 나를 의미없이 안도시킨다. 하루히는 단장석에 앉아 삼각뿔의 선단에 손가락을 올려, 달각달각 흔들며, "혈기왕성한 1학년이 없었군. 기다려도 오지 않고. 그물을 던지는 횟수와 해역은 많고 넓은 편이 좋아" 차이나드레스에서 삐져나온 맨발을 모으며, 새로운 장난을 고안중인 골목대장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두근두근 하고있는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트롤망을 내던지는 것 보다 핀포인트 지점에서 목표를 정해 외줄낚시를 하는편이 양질의 물고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만, 부러 그런걸 말해서 하루히의 신입단원 권유 촉진계획에 가담할 생각은 없다. "대어를 놓칠 생각은 없어. 작년처럼 전 부서의 클럽을 순회할까 생각도 해봤어. 딴 부한테 뺏기기 전에 끌어들이고 싶으니까. 이 수밖에 없고, 한명쯤은 맛있는 녀석이 있을거라구" 어떤 맛이 나는 하급생을 원하냐? 구워서 먹을 수 있는 녀석이라면 좋겠다만. "미쿠루 이상으로 귀여운 애라든가, 유키 이상으로 얌전한 애라든가, 코이즈미 이상으로 예의범절이 갖춰진 녀석이라든가, 그런거" 꽤 높은 허들이군, 애초에 하루히가 제대로 된 이유로 데려온 부원은 아사히나 선배 한명뿐이다. 자신의 눈에 든 모에캐릭터라는 이유의 어디가 제대로 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가토는 문예부실에 멋대로 쳐들어가 어쩌다 얻은 것 뿐이고, 코이즈미 따윈 그저 전학생이라는 칭호가 하루히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올해도 5월쯤에 전학온 학생을 문답무용으로 낚아챌 심산은 아니겠지. "전학생은 코이즈미로 충분해. 우수한 부단장이고. 유사캐릭터는 필요없어. 좀더 재밌지 않으면 안돼. SOS단은 소수정예주의니까" 하루히는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턱을 괴고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판단미스였어" 너가 과실을 범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작년에 미리 학구 내의 중학교를 돌아보면서 유능해 보이는 애를 발굴해뒀으면 좋았을걸. 딴 고교에 단원으로서 적합한 학생이 가버리는건 너무 아까워. SOS단 제 3지부를 타교에 설립할까? 그거하고 SOS단 예비부를 이 근처 중학교에" 하루히의 망상이 한도끝도없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렇게 사람 늘려서 어쩔거냐. 미식축구 팀이라도 만들려고?" "나의 SOS단은 말이야, 좀더 세계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돼. 컴퓨터의 기억을 담는 통도 점점 대용량화 되잖아?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목표는 세계야. 이 상태론 국제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지 못해" 정보화의 다음은 국제화냐. 난 소박하고 조촐한 인생이 좋다구. 아무 자격도 없는 고교생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주제넘게 뛰쳐나갈 마음은 없다. 차라리 나중에 어딘가에 사립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이 되어 학교이름을 SOS단 학원이라 명명하는건 어떻냐. 학생은 전원이 강제적으로 SOS단 단원이고. 음 생각만해도 오금이 저리군. "하항, 바보네. 법인화 따윈 논외야" 하고 하루히가 웃음을 던진다. "우린 영리가 목적이 아니니까 말이지!" 이것도 진보라면 진보인건가. 입으로는 호언장담하지만, 작년의 하루히라면 부활동 설명회에 억지로 참가하여 SOS단 선전 광고지를 대량으로 인쇄해 이사람 저사람 가리지 않고 뿌려댔을 테지. 위압적인 학생회장이 눈을 빛냈던 탓인지 올해는 레지스탕스같은 지하공작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다. SOS단의 지부를 늘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본부의 인원을 안이하게 늘릴 셈은 아니다. 어느쪽이냐고 물으면 그냥 불가사의한 현상의 정보를 각자 갖고 모여서 뭐라든 해보고 싶은 느낌이다. 우주인과의 접촉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는 시간여행자 라든가, 매일 밤 이공간에서 악과 싸우는 현재진행형 초능력자라든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것은 일찍이 나도 듣고 싶어하던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코이즈미의 바둑의 묘수풀이에 어울리면서, 아사히나 선배의 특제 차로 목을 축이면서, 나가토가 정좌인 채로 독서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SOS단에 정규단원은 이 이상 늘어나지 않겠지, 하고. 츠루야 선배같은 명예고문이 있고, 사카나카같은 단 외의 관계자도 생겼고, 다른 부를 컴퓨터부처럼 좌지우지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부실에 정박하려 다섯명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그대로 정착하는 경우는 없을거라고. 단지 예감일 뿐이다. 이유따윈 없다. 이것이야말로 천국에 사는 Dr.프로이트나 융 박사에게라도 듣지 않으면 모를 나의 무의식중의 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의 그 예감은 문자 그대로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하지만 이 떄의 나는 알 리가 없었다. 하고 상투적으로나마 말해두지. 설마 그렇게 복잡한 일이 발생하리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코이즈미에게도, 아마 나가토에게도, 심지어 아사히나 선배(대)에게도. 단원들은 결백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즈미야 하루히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