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스즈미야 하루히의 음모   -글 : 타니가와 나가루(谷川 流), 삽화 : 이토 노이지(いとうのいぢ) 

 

-번역 : NIKE  

 

 

 

 

 

 

 

 

 

 

 

 

 


 프롤로그 

 


 

 

 

 

 

 

 

 

 

 스즈미야 하루히가 얌전하다. 

 

 우울한 것 같지도 않고 한숨을 쉬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심심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요새 들어 왠지 모르게 조용한 느낌이 드니 이 정체불명의 얌전함은 나한테는 엄청난 불안감으로 작용한다. 

 

 물론 그냥 물리적으로 조용히 있는 게 아니며, 그렇다고 정서적으로 얌전하게 변한 것도 아니다. 이미 형성된 성격이 여간해서 바뀔 정도로 하루히는 자기자신에 의구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되면 또 내가 골치아파질 것 같으니 이제와서 교정을 시도해볼 생각은 없지만, 뭐랄까, 연중무휴로 방사되고 있을 불꽃과 같은 오오라가 활활 타오르는 빨강에서 주황색으로 변한것 같은 얌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반에서 하루히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챈 녀석은 한명이나 많아봐야 둘 정도일 거다. 그중 하나가 누군지는 말안해도 알거다. 나다. 입학한 이래 계속 내 뒤에 앉아서, 방과후가 되어도 얼굴 보고 살게 된 덕에 알아챈거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얌전하다고는 해도 심라만상에 도전하겠다는 투의 눈빛은 여전히 건재하고,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만족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행동력 또한 그대로니까. 

 

 지난달 말쯤에 열린 교내 백인일수 대회(百人一首:100개의 시가 적힌 종이를 두고 지명된 시를 빨리 집는 놀이)에서 아쉽게도 2위에 그쳤지만, 이달 초에 한 교내 마라톤 대회에선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 참고로 백인일수 1위는 나가토, 마라톤 2위도 나가토였다. 요컨대 SOS단 단장과 독서계가 문무 양면을 통틀어 원투 피니쉬를 날렸다고 하는, 대체 이 단은 뭘 하자는 건지 전교생들이 고개를 갸웃했겠지만, 이러는 나도 그중 한사람이다. 

 

 딱 하나 이해할 수 있는게 있다면, 지금까지의 경험상 하루히가 이런 표정 및 분위기를 보일 때는 다음엔 어떤 음모를 꾸밀까 하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비로소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 순간엔 실로 환한 웃음으로 바뀐다는 것까지 기정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던 적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말야. 있긴 있었나? 내 머릿속에 있는 역사교과서에하루히가 계속 얌전한 채 아무짓도 안했다는 식의 연표 따위가. 

 

 일시적인 평온은 다음에 찾아올 초대형 해일을 예고하는 확실한 전조일 뿐이다. 항상 그랬듯이 말이야. 

 

 어쨌든──. 

 

 추위도 절정에 다다른 한겨울 종반, 지금은 2월 초순이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작년에서 해를 넘기고도 1개월이 경과했다. 시간이 가속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새해 시작인 1월부터 잡다하게 한 일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일단 시간을 되돌려보기로 한다. 하루히가 지금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나대로 내 자신과 해결을 볼 필요가 있다. 2월은 한해를 뒤돌아보기엔 좀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내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오히려 의욕에 가득찼던 사건의 전말을 말해주도록 하겠다. 

 

 그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슬로건은 단 하나. 

 

 ──지금껏 미뤄왔던 걸 끝마치자. 가능한 한 빨리. 

 

 결심이야 겨울합숙 중에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까진 한동안의 시간이 필요했다. 

 

 때는 1월 2일, 평소의 그 역에서 시작하는 에피소드였다. 

 

 ……… 

 

 …… 

 

 … 

 


 

 

 

 

 

 

 


 눈보라 속에서 조난되어 수수께끼의 저택에 갇힌다는 괴상한 사건이 일어났던 합숙여행은 새해 이틀 되는 날에 그 마지막 날을 알리고, SOS단 겨울합숙 투어 일행은 머나먼 산 저편에 있던 여행지로부터 귀환하였다. 

 

 “후우, 다녀왔어-” 

 

 하루히가 우리 도시에 인사를 전하고, 석양에 시선을 주었다. 

 

 “이제야 좀 안심되네. 설산도 좋았지만 익숙한 우리 공기가 최고야. 좀 습도가 높긴 하지만.” 

 

 우리랑은 다른 루트로 돌아간 타마루 씨 형제와 아라카와, 모리 콤비의 모습은 이미 못본지 오래다. 그런 관계로 이 지역의 역에서 짐을 내린 사람은, 오랜 시간의 여행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초합금 심신의 하루히와 츠루야 선배, 이별을 아쉬워하며 아사히나 선배에게 딱 들러붙은 내 동생,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서있는 나가토와, 어딘가 피곤한 웃음을 짓는 코이즈미에 역시나 피곤한 기미의 나 및 내 짐으로 변모한 샤미센 뿐이다. 뭐 이정도면 충분하기는 한 것 같다. 

 

 “오늘은 이걸로 해산이야.” 

 

 하루히는 아주 잘 놀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모두 푹 쉬어둬. 내일은 근처 절이랑 신사에 갈 거니까. 아침 9시에 여기로 집합하도록. 아, 츠루야상은 어떻게 할거야?”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그 다음날 어디에 가겠다는 그 활력(vitality)에는 정말 경의를 표하는 바이만, 문제는 나를 대표로 하는 일반인의 체내엔 영구기관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하루히와 동급의 에너지원을 가지고 있는 듯한 츠루야 선배는, 

 

 “미안! 나는 내일부터 스위스에 가거든. 선물 사올테니까, 새전(賽錢)통에 내것도 좀 넣어줄래!” 

 

 지갑에서 잔돈을 꺼내 아사히나 선배에게 주고는, 이어서, 

 

 “이건 세뱃돈이야!” 

 

 동생에게도 동전을 쥐어주고, 

 

 “그럼 또보자-. 새학기에 봐-”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며 역전을 뒤로 했다. 참으로 호쾌한 발걸음으로, 어떻게 하면 저런 처자로 기를 수 있는지, 나중을 위해서라도 츠루야 선배의 부모님 되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고 싶다. 

 

 하루히는 그 웃음을 잃지 않는 상급생이 잡거빌딩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다가, 

 

 “그럼, 뭐, 우리도 집에 가자. 모두들 조심해서 가. 집에 돌아갈때까지가 합숙이니까.” 

 

 이 이상 무슨 일이 벌어졌다가는 나랑 코이즈미의 몸이 버티지 못할 지경인데, 집에 돌아갈때까지 별다른 일이 터지진 않겠지. 

 

 나는 나가토를 보았다. 수수께끼 저택에서의 좋지 못한 상태는 지금 전혀 보이지 않고, 평소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 상태로 돌아와 있다. 나가토의 눈이 살짝 움직여 나의 시선과 마주쳤다. 끄덕인 것 같은 느낌이 아마 착각은 아닐 거다. 

 

 이어 아사히나 선배를 보았다. 여행중엔 시종일관 덜렁대서 수수께끼 저택에서는 좀 불안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거면 좋았던 것이다. 아사히나 선배가 나설 때는 지금부터다. 마음을 담은 시선을 보내봤지만, 아쉽게도 아사히나 선배는 나의 이 사인 들어간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내 동생과 마치 동년배 친구처럼 달라붙어 놀고 있다. 

 

 “그럼 내일이야! 늦으면 안돼! 그리고 꼭 세뱃돈 많이 받아와! 신사 길에 노점이 쭉 늘어서 있을테니까 말야.” 

 

 그렇게 말한 하루히 및 다른 일행과도 헤어져 나는 동생의 손과 샤미센이 들어간 캐리박스(carry box)를 잡고 버스에 탔다. 

 

 “미쿠루짱, 잘가-!” 

 

 승강구에 달라붙은 동생을 끌고 좌석에 앉히는 사이, 아사히나 선배는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매우 죄송스럽게도 나는 지금 손을 흔들 수가 없습니다. 하루히나 코이즈미 상대라면 큰 소리로 작별인사를 외쳐주겠지만.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 샤미센과 동생에게서 해방되고 몇분 후, 나는 방금 막 헤어졌던 멤버중 두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냐고? 

 

 작년에 해둘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됐던 일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자 해서다. 내 자신의 나태가 원인이 돼서 두 번다시 그런 식은땀 흘리고 싶지는 않으니, 왼갖 여유를 부리고 있던 작년 말의 날 좀 혼쭐을 내주고 싶지만, 가야할 곳은 그것보다 조금 전의 내가 있는 곳이다. 전의 그 수수께끼 저택 사건은 아무래도 나가토와 코이즈미의 대처로 최악의 사태만큼은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서, 그런 일이 두 번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더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심하게 든다는 것이다. 여행중엔 어쩐지 좀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주저하고 있었지만 단원이 전부 흩어진 지금은 아무런 제한이 없다. 결심할 시간은 츠루야 선배의 별장에서 추리게임을 하거나 주사위 게임을 하는 동안에 충분히 있었다. 

 

 나는 반드시 가야한다. 나가토랑 아사히나 선배와 함께, 다시 한번 그 시간으로. 

 

 그렇다, 12월 18일 새벽으로──. 

 

 겨울 합숙의 피로를 달랠 틈도 없이, 나는 먼저 아사히나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금 막 헤어졌던 상대에게서 전화를 받자 가볍게 놀란 듯한 그녀였는데, 

 

 『무슨일이에요? 쿈군.』 

 

 “같이 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어서요. 지금 당장이긴 합니다만.” 

 

 더욱 놀란 목소리가, 

 

 『네에……? 어디를요?』 

 

 “작년 12월 18일입니다.” 

 

 놀라움과 곤혹이 섞여, 

 

 『네네……? 그, 무슨 소리죠……?』 

 

 “저랑 나가토를 과거로 데려가주셨으면 합니다. 지금부터 2주정도 과거로, 셋이서 함께 시간역행을 해야만 해요.” 

 

 『아니, 제 맘대로 TP……아니, 그, 사용할 수 없어요. 엄격한 심사랑 많은 사람의 허가가 필요한데요?』 

 

 내가 보장하건대 그런 허가 같은건 전부 통과다. 내 머리 위에 떠오른 망상 스크린 속에서 어른판 아사히나 선배가 윙크를 해주고, 이어 손에 입을 맞춰 던져주었다. 

 

 “아사히나 선배, 지금 당장 선배 상사나 그런 사람한테 연락해서 말씀해주세요. 제가 선배랑 나가토를 데리고 12월 18일 새벽에 가고자 한다, 고 말이에요.” 

 

 너무 자신만만했던 탓인지 아사히나 선배는 한동안 수화기에서 물음표가 튀어나올것마냥 침묵하였는데,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물론 기다리고 말고. 미래랑 어떻게 연락을 하는지 궁금했었는데, 이쪽에 오는 건 아사히나 선배의 고요한 숨결 뿐이었다. 10초에 지나지 않던 그 BGM은, 

 

 『말도 안돼……』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모두 통과에요. 아니, 어떻게……? 이리 쉽게……』 

 

 그거야 미래의 존망이 내 양 어깨에 달렸기 때문이지──라고는 말못하고, 그냥 전화로 그 긴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어서, 

 

 “나가토네 집에서 뵈요. 30분이면 오실 수 있겠어요?” 

 

 『아……잠깐요. 한시간 정도 주시겠어요? 또 한번 확인하고 싶고, 아, 또 나가토상 댁 안이 아니라 현관 앞에서 뵙고 싶은데……』 

 

 나는 흔쾌히 승낙한 후 전화를 끊고, 아사히나 선배가 귀엽게 놀라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실실 웃다가 얼굴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지금부터 가야할 시간대는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씬을 상영하지 않는다. 그건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또 한사람, 이쪽엔 연락을 안해도 알거 같기야 하지만, 일단 확인은 해둬야겠지.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한시간 후──. 

 

 너무 빨리 와버렸다. 기분 때문에 자전거를 막 밟았더니 이거 원. 이 호화 분양 맨션 입구에서 추위에 떨며 15분간 제자리걷기 운동을 하던 내게, 보드라운 선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갈아입을 틈 혹은 그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는지 방금 헤어졌던 때 입고 있던 옷 그대로다. 나도 그렇지만. 

 

 “쿈군,” 

 

 아사히나 선배는 아직 귀신에게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유를 모르겠어요. 어떻게 쿈군의 의뢰가 이렇게 쉽게 통과하죠? 그것도 나가토상과 함께라니, 그것도 반드시 그렇게 셋이서 가야한다고 오히려 명령을 받았어요……. 하지만 상세히 알려달라고 해도 극비라면서 안알려줘요. 거기다……, 쿈군 지시에 전부 따르라고 했어요. 왜죠?” 

 

 “설명드릴게요. 나가토네 집에서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나는 현관 패널에 나가토네 호실 번호를 입력하여 벨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반응이 왔다. 

 

 『………』 

 

  “나다.” 

 

 『들어와,』 

 

 활짝 열린 문을 넘어, 아차, 아사히나 선배를 잊어선 아니되지. 어딘가 아직도 멍한 상태다. 손짓을 하니 아차 하며 따라온다. 다소간에 무서워하는 듯한 모습은 여기 올때마다 볼 수 있는 그녀의 습성 같은 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아사히나 선배의 머리 주위에 물음표가 도는 것 같아 보였고, 약간 긴장한 표정에 아직도 넋나간 기색이 역력하다. 

 

 그 표정은 나가토가 문을 열고 우리를 안으로 들이기까지 이어졌다. 

 

 나가토에겐 틈도 여유도 있었나보다. 자기 집인데도 세일러 교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다. 반사적으로 크게 안심되는 모습이라 생각하고 만 것은 내가 세일러복 페티쉬즘(fetishism)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녀석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 때, 나는 머리 짧은 교복 모습의 누군가가 칼을 쥐는 광경을 보며 의식을 잃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는 나가토가 다른 의상을 입고 있으면 그때의 난 뭐가 되냐고. 내가 나가토를 딴사람이랑 착각하지는 않을거라 생각되지만, 세일러복은 이녀석만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 

 

 나가토는 말없이 손으로 거실을 가리켜 우리를 앉게끔 하고 이어 부엌으로 가서 차를 내올 준비를 하였다. 

 

 그럼, 이 틈에 아사히나 선배에게 지난 이야기들을 알려드리도록 할까. 

 

 프롤로그 - 02

 


 

 

 

 

 

 

 

 

 


 “믿기지 않아요……” 

 

 아사히나 선배는 동그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말했다. 

 

 “역사가 통째로 바뀌어있었다니, 정말, 저는 전혀 몰랐어요……” 

 

 그럴밖에. 누가 뭐래도 그 3일동안 멀쩡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나 혼자밖에 없었고, 그런 나도 나가토의 힌트와 그쪽 세계 하루히의 과감한 행동력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규모의 시공개변과 미래로부터의 접속개입……그런 일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니……” 

 

 아사히나 선배의 작은 목소리가 떨리고, 그녀는 삭막한 집의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거실의 코타츠 위엔 찻잔이 셋 놓여있다. 나가토가 끓여준 찬데, 아사히나 선배는 내 설명과, 그 사이사이 따라오는, 

 

 “그래” 

 

 라는 나가토의 추임새에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차는 손도 못댄 채 이미 식어있을 것이다. 

 

 “…………” 

 

 나가토는 내쪽 대각 방향에서 무표정으로 아사히나 선배를 바라본 후, 궁금한 게 있다는 듯한 눈빛을 내게 보내고는 다시 아사히나 선배를 보았다. 

 

 나가토가 무슨 말이 하고싶은지 알 것 같다. 내가 아사히나 선배에게 설명한 것은 나가토가 에러(error) 파워를 폭발시킨 탓에 12월 18일을 기점으로 세계를 바꿔버렸지만, 마지막 기회로 남겨준 탈출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것으로 나만이 4년전 칠석으로 가서, 거기 있던 이전의 나가토에게 협력을 구해 12월 18일로 되돌아갔는데, 또 거기서 이상(異常)을 일으킨 아사쿠라 료코에게 살인미수급의 공격을 당했지만 다행히 기절하기 전에 나는 내 자신과 나가토 및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을 보고, 그 미래에서 왔을 우리 일행들에 의해 세계는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뭐 이정도면 꽤 자세한 해설 및 주역 첨가물이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4년전 7월 7일, 거기서 또 한 명의 아사히나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알려줘도 되는지 안되는지를 잘 몰라서 말이다. 지금의 아사히나 선배는 아무것도 모른다, 즉 그렇다는 것은 그 어른판 아사히나 선배가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 시간대의 아사히나 선배는 미래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을 터이니 그게 정말 중요한 거라면 아사히나 선배(大)가 아니라도 다른 상사나 뭐 높은 양반들이 진작에 가르쳐 줬을테니깐. 미래인의 정보교환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내가 알 턱이 없지만, 그녀의 말 하나하나에서 어느정도 알 수 있다. ‘상세히 알려달라고 해도 극비라면서 안알려줘요’ 라는 방금 들은 말에서도 말이다. 

 

 아사히나 선배는 모르는 것이 아니다. 모르게끔 되어있을 뿐이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정도 이해는 간다. 미래인 치고는 너무 어리버리하다──는, 뭐 지금까지 여러번 든 생각이다. 까딱했다간 아주 영원히 무한루프 당할뻔 했던 8월, 눈보라 속에 홀연히 나타난 저택……최소한 이 두 사건만 봐도 아사히나 선배가 미래인다운 충고 같은걸 해줬다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왜인가? 

 

 이제 알 것 같다. 

 

 아사히나 선배(大)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모든 사건은 이전의 그녀──지금의 아사히나 선배──가 지나온 선로상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전에 회피하게 되어버린다면 미래에 있는 그녀의 역사가 바뀌고 만다. 기정사항이란, 만약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기정된 항목은 클리어해나가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폭주할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나가토처럼. 

 

 하지만, 그래서는 지금의 아사히나 선배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무슨 일이 일어날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횟수는 현대인인 우리보다 많을 지경이다. 아사히나 선배가 뭘 위해 이 시간대에 와있는건지부터가 수상해질 정도다. 단지 하루히를 감시하기 위해서라면 그냥 방범 카메라라도 붙여두면 될일이다. 

 

 무언가 있다, 진짜 목적이. 아사히나 선배 본인은 모르는, 그러나 미래의 본인은 알고 있는 목적이──. 

 

 생각에 잠기는 내게 매우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게 부탁이 있다.” 

 

 나가토 부탁이라면야 뭐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그 시간대의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니, ‘여’나 ‘야’ 뭐 요런것도 안된다 그거냐? 

 

 “가능한 한.” 

 

 나가토는 그 감정없는 눈으로 그리 자주 없는 내면표현을 하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띤 것은 강력한 부탁의 빛임에 틀림이 없었고, 나는 나가토의 부탁을 거절하느니 차라리 수면에 비친 달을 집어올리는 작업을 선택할 것이다. 

 

 “알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기꺼이 하마.” 

 

 그 쇼트커트 머리가 찬찬히 끄덕였다. 

 

 자세한 시공좌표는 나가토의 지시에 따른 것이고, 이를 충실히 실행한 것이 아사히나 선배다. 미안하지만 우주인 미래인 연합부대 쯤 되면 제아무리 코이즈미네 조직이 크다고 해도 승산은 없어보이는군. 싸울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나가토, 아사히나 선배 셋은 신발을 신기 위해 현관으로 가고, 그 좁은 공간에서 서로 어깨를 마주대고 모였다. 지난달, 아사히나 선배(大)와 시간역행을 했을 때에 신발을 까먹고 갔을때의 교훈이 여기서 되살아나는군 그래. 그녀의 하이힐이 4년 넘게 잘 놓여져있을  거야 나가토의 성격으로 봐서 확실하지만, 이 아사히나 선배에게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그냥 가만히 있자. 

 

 “에에, 그러니까 작년 12월 18일……몇시라고 하셨죠?” 

 

 나가토가 그 물음에 초단위로 대답해 주고, 아사히나 선배가 끄덕였다. 

 

 “이제 갈게요. 쿈군, 눈을 감아주세요.” 

 

 그리하여──. 

 

 시간이동. 몇 번인가 경험한 그게 또 찾아왔다. 구토 직전까지 몰리는 어지러운 현기증. 눈을 감고 있는데도 빛이 반짝이는 것만 같은 감각이다. 마치 상공을 향해서 떨어지고 있는 듯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지수 급상승, 설명키 힘든 공간파악능력 상실. 제어력을 잃은 롤러 코스터에 타서 몇십바퀴씩 돌고 있는 것 같은, 심신 양면에 걸쳐 평상 이탈, 내 반고리관이 한계에 다르기 직전──. 

 

 내 발은 지면의 감각을 되찾고, 지구의 중력이 느껴져왔다. 

 

 “왔어.” 

 

 나가토가 속삭이듯이 말하고,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랐다. 

 

 교문 앞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떠올려보자. 4년전 칠석으로 시간역행을 한 내가 나가토(대기모드)의 지시대로 아사히나 선배(大)를 따라 12월 18일로 이동했을 때, 나는 어둠 속에서 나가토가 세상을 바꿔버리는 광경을 지켜보고서 가로등 밑으로 나와 있었다. 

 

 그 딱 중간에 지금의 우리가 나타났다. 

 

 지금 그 ‘나’는 세상 개변을 끝내고 자신마저 변화시키고 만 나가토를 상대로 뭐라뭐라 하고 있다. 어깨에 내 재킷을 걸친 아사히나 선배(大)의 뒷모습도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위험하지 않냐. 너무 가깝다고. 

 

 “걱정마.” 

 

 우리 쪽 나가토가 억양없는 문장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불가시 방음 필드를 전개했다.” 

 

 즉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나’와 아사히나 선배(大), 그리고 나가토(안경)쪽에서는 이쪽 모습은 전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거로군. 나가토에게 물릴 필요가 없었던 것은 본인이 이렇게 해주고 있기 때문인가. 왠지 좀 섭하기도 하다만. 

 

 아사히나 선배가 눈을 깜빡이더니, 

 

 “저기……저 여자분은 누구세요? 어른이신것 같은데, 왜 여기에 있죠?” 

 

 아무리 그래도 뒷모습이다. 아사히나 선배가 못알아보는 것도 당연하며, 설마 그 사람이 미래의 자신이라고 상상하는 게 오히려 발상의 비약이 심한 거라 할 수 있겠다. 알려줘도 되나 하고 있으니 그런 잡생각따위는 단번에 날아가고 말 일이 벌어졌다. 알고야 있었지만 이렇게 객관적 시점에서 보니 소름이 돋는구만. 

 

 갑자기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속도로 그림자가 나타났다. 우리 옆을 스쳐간 그림자가 아사쿠라 료코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을 본 직후, 아사쿠라는 내게 부딪치듯이 하여, 아니 부딪쳤지. 허리춤에 칼을 들고 말이야. 

 

 아사히나 선배(大)가 뭐라고 외쳤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나’는 칼에 찔리고 말았다. 기억대로. 

 

 “윽……” 

 

 엄청나게 아파보였다. 그때는 몰랐는데 아사쿠라는 찌른 칼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아주 그냥 없애버리려고 작정을 했구만. 전혀 주저하는 기색 없이 ‘나’를 죽여버리려 하고 있었다. 이상(異常) 백업, 아사쿠라 료코는 완전한 살인미수범이다. 

 

 저기 있는 내가 쓰러졌다. 

 

 “아……아앗!? 쿈군이!” 

 

 아사히나 선배도 소리를 질렀다. 뛰쳐가려다가 '아……!' 하며 투명한 벽에 부딪혀 비통한 얼굴로 올려다본다. 아무래도 순간적으로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엔 쓰러진 ‘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마운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가토상!” 

 

 아사히나 선배의 외침에 나가토는 천천히 끄덕이고서, 

 

 “필드 해제. ……완료” 

 

 아사히나 선배가 뛰쳐나가고, 그와 동시에 나가토 자신도 내달리고 있었다. 밤바람보다도 빠르게 이동한 나가토는 순식간에 아사쿠라가 치켜올린 칼날을 잡고 있다. 아사쿠라가 황송과 증오가 섞인 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치는 것을 들으며, 나도 내 자신이 있는 쪽으로 갔다. 흐이구. 상태 한번 끔찍하구만. 

 

 아사히나 선배(小)가 울며 ‘나’에게 매달려있다. 걱정해주는 거야 좋지만 그렇게 흔들어대면 일찍 죽는다구요……. 

 

 눈시울 뜨거워지게도, 필사적으로 ‘나’를 부르는 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여성의 존재조차 잊고 있다. 정말 이건 다행이다. 

 

 침통한 표정으로 눈을 떨구고 있던 아사히나 선배(大)가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와주셨네요.” 

 

 좀 늦긴 했습니다만은요. 시간적인게 아니라 내 기분상 말이지. 

 

 “……………아……” 

 

 그 목소리를 낸 것은 내 기억에 있는 나가토였다. 심장이 애려오는 장면이다. 안경을 쓰고 있는 그쪽의 나가토는, 엉덩방아를 찧고는 충격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크게 뜨인 검은 눈동자가 쓰러진 ‘나’에게서 아사쿠라로, 그리고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세일러복 소녀에게로 이동하여, 마지막에는 내쪽을 향해 있었다. 

 

 “어떻……게……” 

 

 나가토와의 약속이다. 따라서 또 한 명의 나가토, 즉 지금 막 세계를 개변한 이쪽의 나가토에게 나는 말을 할 수 없다. 내가 해야할 것, 말해야 할 것은 단 하나였다. 

 

 나는 3년전의 나가토가 만들어준 단침총을 들어올린 후 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 대사를 말하기 위해서 나는 입을 열고, 기억에 있는 그대로의 말으 해주었다. 이게 맞는거 같기는 한데, 뭐 어차피 비슷한 소리니까 다소간의 차이는 허용범위겠지. 그 ‘나’는 작게나마 뜨고있던 눈을 완전히 감고, 털썩 하고 고개를 떨궜다. 죽었나 싶을 정도로 기가막힌 기절 씬이긴 한데, 지금쯤 지혈해주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것 같다. 

 

 자, 그럼 지금부터야말로 우리가 나설 차례다. 이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도 아직 모르지만. 

 일단 내가 발견한 것은, 아사쿠라를 멈춰준 나가토의 행동이다. 

 

 “…………” 

 

 나가토가 쥔 나이프가 반짝이며 가루로 변한다. 재빨리 물러서려는 아사쿠라, 하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것마냥 움직이질 못하고 있다. 나가토는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무언가를 외고 있다. 

 

 “아니, 말도 안돼, 너는……” 

 

 아사쿠라의 모습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네가 바랬던 거잖아……지금도……어떻게……” 

 

 꼼짝도 하지 못하는 아사쿠라는 마지막까지 의문의 말을 던지다가, 칼에 빨려들듯이 산산히 흩어져내렸다. 그와 동시에, 

 

 “아?……쿠우,” 

 

 아사히나 선배(小)가 ‘나’의 몸에 엎어지다시피 해 있다. 부드럽게 감긴 눈과 엷게 열린 입술은 아무리 봐도 자는 모습이고, 힘빠진 사랑스러운 상급생의 목엔 아사히나 선배(大)의 손이 가볍게 얹혀있었다. 

 

 “잠들었어요.” 

 

 어른 아사히나 선배가 서글프게 어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기 제가 있다는 걸 알아선 안돼요. 그렇게 해야만 해요.” 

 

 어린 아사히나 선배는 잠이 들어 기절한 ‘나’의 팔을 베게삼아 쓰고 있다. 

 

 “얘한텐 전 비밀이에요.” 

 

 3년전 칠석 때, 그 공원 벤치에서 본 것과 같은 얼굴이었다. 이유 또한 같았고, 역시 아무래도 아사히나 선배(大)는 과거의 자신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뒷모습이라면 몰라도 가까이서 보면 당연히 아사히나 선배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말야. 

 

 내가 아사히나 선배(大)와 ‘나’의 의식불명 상태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 

 

 나가토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칼로 휘저어진 ‘나’의 옆구리에 손을 댔다. 그 덕이었나보다. 그리하여 출혈은 멈추고, ‘나’의 창백한 얼굴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상처를 치료해준 건 역시 이녀석이었군 그래. 

프롤로그 - 03

 


 

 

 

 

 

 

 

 

 


 

 나가토는 조금의 정체도 없이 피가 묻은 손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말했다. 

 

 “이리 줘.” 

 

 나는 말없이 단침총을 들어올렸다. 마침 이런거 계속 갖고 있기도 뭐한 참이었다. 위협적이잖냐. 뭣보다 어느 나가토한테든 간에 이런걸 쏘고 싶진 않다. 

 

 담담히 총을 든 나가토는, 바닥에 앉아 떨리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안경 나가토에게 총구를 겨누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뭐가 발사되는 기척도 없었는데, 

 

 “…………” 

 

 나가토(안경)은 천천히 눈을 깜빡인 후, 더욱 천천히 일어섰다. 막대기처럼 서있는 모습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나가토의 자세와 다름이 없다. 입부 신청서를 준다거나, 어쩔줄 몰라하며 내 소매를 잡는다거나, 수줍은 엷은 미소의 주인이 아니다. 

 

 내 생각을 입증하듯이 그 나가토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나를 응시하고서 그 무감정한 눈을 다른 사람에게 고정시키고 말했다. 

 

 “동기(同期) 요구.” 

 

 두 나가토가 가만히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광경. 나는 몇 번인가 과거의 ‘나’를 본 적이 있다. 아사히나 선배가 대소(大小)로 둘 있는 현장도 두어번 봤다. 나가토가 둘이 되어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은 처음이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장관이로군. 

 

 “동기 요구.” 

 

 총에 맞았던 쪽의 나가토가 반복했다. 그에 대해 쏜 쪽의 나가토가 속답했다. 

 

 “거부한다.” 

 

 나도 꽤 놀랐지만 안경을 손에든 나가토는 더 그랬던 모양이다. 눈썹을 밀리 단위로 움직이고는, 

 

 “왜.” 

 

 “하고 싶지 않으므로.” 

 

 놀라 자지라질뻔 했다. 지금까지 나가토 입에서 저런 명료한 의사표명이 나온 적이 있었던가? 이건 뭐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저 명확한 거절의 말은 감정에서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다. 

 

 “…………” 

 

 그 말을 들은 나가토는 생각에 잠기듯 침묵하고, 

 

 “…………” 

 

 계속 서로 침묵을 유지한 채 바람에 머리를 휘날렸다. 

 

 나와 같이 미래에서 온 나가토가 불쑥, 

 

 “네가 실행한 세계개변을 복원하겠다.” 

 

 “알겠다.” 

 

 라며 저쪽 나가토가 끄덕이고는, 나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주저하는 기색으로, 

 

 “정보통합사념체의 존재가 감지되지 않는다.” 

 

 “여기엔 없어.” 

 

 나가토는 담담히 말하더니, 

 

 “나는 내가 존재하는 시공간의 그들과 접속하고 있다. 재개변은 내가 주도하여 실행하겠다.” 

 

 “알겠다.” 라는 과거의 나가토. 

 

 “재개변 후,” 

 

 우리쪽 나가토가 말을 이었다. 

 

 “너는 네 생각대로의 행동을 취해라.” 

 

 방금 막 원래대로 돌아온 나가토는 아주 약간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그 표정과 눈이 띤 불가시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나만큼 나가토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이 나가토는 그때 그 나가토다. 그날 밤에 병원에 나타난 그 나가토가 지금의 이녀석이다. 자신의 처분이 검토되고 있다던가 해서 날 화나게 한 그녀석이다. 

 

 나와 미래에서 온 나가토가 동기를 거부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나가토는 자신이 그때 해야 할 일을 지금의 자신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게 아니다. 

 

 왜냐면──왜냐고? 말할것도 없잖아. 

 

 고맙다──, 그때 들은 나가토의 말이 모든 것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쿈군” 

 

 가만히 서있던 내게 아사히나 선배(大)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애……저를 부탁해도 되겠어요?” 

 

 그녀는 무겁단 듯이, 잠든 아사히나 선배(小)의 상체를 일으키고 있다. 나는 곧바로 그걸 도와서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 언젠가처럼 등에 업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도 기억 그대로다. 

 

 “곧 대규모 시공진(時空震)이 발생해요.” 

 

 아사히나 선배(大)는 양팔을 감싸듯이 하여 공포가 섞인 진지한 얼굴로, 

 

 “나가토상이 방금 했던 것 보다 더 규모도 크고 복잡한 시공수정이에요. 이번엔 눈도 못뜨고 있을 것 같아요.” 

 

 선배께서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당연히 믿습니다만, 어떻게 다른 거죠? 

 

 “처음 때의 개변은 과거와 현재를 변화시킨것 뿐이에요. 거기다 시간을 올바른 흐름으로 되돌려놓는 작업이 필요하구요. 떠올려봐요. 쿈군이 어디서 눈을 떴는지를요.” 

 

 12월21일 저녁, 나는 병원 침대에서 의식을 회복했다. 

 

 “네. 그러니까 그렇게 되게끔 만들어놓아야 해요.” 

 

 내 블레이저를 어깨에 걸친 맨발의 아사히나 선배(大)는 어딘가 개운치 않다는 듯이 바짝 다가섰다. 아사히나 선배(小)를 업은 내 어깨에 손을 대고, 고개를 돌려 나가토에게 시선을 보냈다. 나와 같이 온 나가토가 조용히 걸어왔다. 또 하나의 나가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선채였고, 쓰러진 나도 그대로였다. 

 

 아사히나 선배(大)는 다른 한쪽 손을 나가토의 팔에 얹어선, 

 

 “부탁해요, 나가토상.” 

 

 나가토는 작게 끄덕이고, 마지막 인사라는 듯이 자기 자신을 보았다. 또 하나의 나가토도 아무런 말이 없다. 쓸쓸한 인상을 받은 것이 내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할 건 없다. 나는 그때 내가 한 대사를 기억하고 있다. 저기 쓰러져있는 ‘나’ 자신이 지금부터 해야할 말이다. 그녀석은 분명히 그렇게 말할 거다. 그러니 안심하고 병문안 와줘라. 너네 두목한테 엿먹으라고 전하는 것도 잊지 말고. 

 

 “쿈군, 눈을 감으세요” 

 

 아사히나 선배(大)가 속삭인다. 

 

 “시간멀미 할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그 충고에 따라 눈을 꽉 감았다. 

 

 그 순간, 나는 세상이 비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으아──” 

 

 무중력상태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은 감각은 벌써 몇 번이고 체험한 것이고,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이번 건 그 규모가 좀 달랐다. 지금까지 했던게 놀이공원 롤러코스터 수준이었다면 이번 건 무질서 분사중인 우주선 속에서 안전벨트를 까먹고 안찬 정도랄까, 다만 내 몸에 가중이 걸려있는 건 아니니 실제로 휘둘리는 건 아니지만 멀미한번 끝내주게 생겼다. 대체 어떤 상탠지 보고 싶기도 하지만 눈을 떴다가는 곧바로 토할 것 같아서 공포는 배가되고, 눈꺼풀 너머로 반짝이는 빛만이 내가 감지할 수 있는 모든 영상이었다. 등뒤의 아사히나 선배(小)의 체온과 어깨에 놓여있는 아사히나 선배(大)의 손 감촉이 너무나도 믿음직스러운 순간이다. 

 

 ──감긴 눈으로도 느껴지는 엄청난 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보고싶은 욕구를 억제치 못하고 눈을 떠서 그 붉은 빛을 보았다. 회전하는 적색등은 긴급차량에게 허용된 특권이다. 

 

 저건……? 

 

 키타고 교문에 구급차가 하나 서있다. 구경꾼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구급대원들이 들것에 누군가를 실어 가져오고 있다. 같은 속도로 그 들것에 맞춰 따라오는 두사람은, 내가 평생 못잊을 이름을 가진 여학생들이었다. 하루히는 완전히 얼굴이 파래져서, 아사히나 선배는 울상으로 들것을 쫓았고, 웃음이 얼굴에서 싹 가신 코이즈미가 약간 늦게 모습을 보였다. 

 

 들것은 곧바로 구급차로 옮겨졌고 하루히는 대원과 아웅다웅하더니 차에 올라탔다. 구급차의 붉은색 회전등에 사이렌 소리가 더해져 내달리기 시작했다. 눈가를 감싸는 아사히나 선배 옆에서 코이즈미가 심각한 얼굴로 어디다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가토는 없다. 하지만 없는게 오히려 당연한 것 같이 느껴진다. 

 

 나의 부유감(浮游感: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계속되고 있었다. 솔직히 몸이 어디에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내 몸 어딘가에 아사히나 선배(大)의 날숨이 느껴졌다. 

 

 “쿈군, 이대로 당신이 있던 원래 시간으로 갈거에요.” 

 

 눈앞에 보이는 영상이 페이드아웃(fade-out)되어간다. 서비스컷은 여기서 끝이란건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좋은 거 봤수다. 내 기억엔 없는 3일간의 단편, 그렇지 하루히, 단원 걱정을 해주는 건 단장의 사명이었댔지 아마. 

 

 다시 그 어지러운 감각이 찾아왔다. 이거 어디 멀미약이라도 없수. 다음엔 반드시 준비해올테다. 

 

 “당신이 출발한 시간에 좌표축을 맞춰놓을게요. 거기 있는 절 잘 부탁해요. 한동안 눈 안뜰거니까요……. 후훗, 볼에 뽀뽀정도는 해도 돼요.” 

 

 장난끼 어린 말을 남기고, 아사히나 선배(大)가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나가토네 방 거실에서 아사히나 선배를 업은 채 서 있었다. 

 

 정면에 나가토가 서서, 

 

 “출발한 시간으로부터 62초 후.”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돌아왔어.” 

 

 우리들의 시간과 세계다. 

 

 휴 하며 한숨을 내쉬고 아사히나 선배를 내려주었다. 확실히 키스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얼굴 최고 유력 후보다만, 그 아사히나 선배의 말을 정말로 받아들일 만큼 나는 순수하지 않다. 더욱이 여기가 나가토네 집이 아니라, 거기다 나가토가 감시하듯이 빤히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또 모르지만. 아니, 그런일 없어. 안한다니깐.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려 남아있던 차를 한입 머금었다. 시간여행에 나서기 전부터 진작 미지근해져 있었지만 엄청나게 맛있다. 목욕 끝내고 와서 마시는 보리차 같은 거다. 부실에서 마시는 아사히나 선배의 차에 필적하는 수준이로군. 

 

 “휴우” 

 

 비로소 작년에 미처 다 하지 못한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이제 남은 건 없겠지. 세계개변인 이걸로 끝, 두해에 걸친 겨울합숙도 끝이다. 이제 절이랑 신사밖에 생각 안난다. 뭐, 그동안 하루히가 무슨 생각을 떠올릴 테지만 그때까지는 얌전히 있겠지. 

 

 그리고 그 천사와 같은 미래인은 꽤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재워먹은 건지 배불리 먹고 따뜻한 곳에 누운 샤미센마냥 행복한 얼굴로 자고 있으니 깨우기도 미안할 지경이다. 나가토에게 부탁하여 방에다 이불을 깔고 거기에 아사히나 선배를 눕혀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가토, 아사히나 선배가 일어날때까지 잘좀 부탁하마.” 

 

 나가토는 그 깊디깊은 눈으로 잠든 손님을 바라보다가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히나 선배가 눈을 뜰 때 옆에 있어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사실 나도 피로의 극치에 다다랐다. 합숙과 시간여행의 피로를 우리집 목욕탕과 침대에서 회복시키지 않으면 내일 9시까지 일어나는 건 택도 없어 보이고, 한없이 꽉차있을 수 없는 지갑 속의 내용물이 자연현상처럼 줄어드는 일도 막고 싶었다. 다섯명어치 설날 요금은 엄청난 출혈일거라고. 

 

 차라리 그 칠석때처럼 아사히나 선배 옆에서 재워줬다면 암말않고 몸을 던져 곧바로 취침에 들어갈 자신도 있었지만, 뭐 그건 아무도 바라지 않는듯한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말이지. 

 

 미래인이 우주인 집에서 한번 묵어보는 것도 가끔은 좋지. 

 

 “내일 보자.” 

 

 “알겠다.” 

 

 나가토는 안정감 있는 무표정으로 나를 배웅해주었다. 차분한 두 눈동자를 내게 고정시키고 있다. 

 

 “오늘은 수고 많았다. 이래저래 폐끼쳐서 미안하다.” 

 

 아사히나 선배도 수고 많이 했지만 오늘 최대 공헌자는 나가토와 4년전 칠석에 여기 있던 나가토다. 

 

 “괜찮아.” 

 

 평소와 다름없는 나가토는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내가 원인.” 

 

 나는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우주인제 단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소 한번 안지어주나 싶었지만 아쉽게도──동시에 안심 되게도 그 작고 하얀 얼굴은 평소의 무표정이었다. 단지 뭔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그간 숙련된 내 시력의 산물이다. 

 

 맨션을 나온 나는 천천히 자전거를 굴려 우리집에 되돌아가자마자 침대에 엎어져 잠들었다. 지칠대로 지친 후에 든 잠이다 보니 무언가 좋은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어나고 30초 후에 꿈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지만 잔존하는 분위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미래인과 우주인이 사이좋게 앉아 차를 끓이고 있는, 뭐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프롤로그 - 04

 


 

 

 

 

 

 

 

 

 


 

 그리하여 나로썬 아사히나 선배의 몸과 함께 어깨에 있던 짐까지 벗어던진 기분이었고, 그만큼 비교적 평안하게 1월이 지나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겨져 있었다. 

 

 그 자는 얼굴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던 탓에 까먹고 있었는데, 잠들어 있던 아사히나 선배는 너무 잘 잠들어버린 탓인지 나나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大)가 그 12월 18일 때 했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나한테서 난데없이 시공개변의 사실을 듣고, 반신반의하며 과거로 가보니 거기서 ‘나’의 무참하고도 참혹한 현장에 당황, 이어 강제로 잠들어서 눈을 떠보니 원래 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된다. 

 

 내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해주었고 오히려 그녀가 아니었으면 못할 일이라고 보는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사히나 선배는 여름휴가가 끝나고 한동안 멍하니 딴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아사히나 선배를 따라 데이트 비스무리한 걸 했었던 일요일, 그 안경소년을 교통사고에서 구했던 그 날의 우울까지 이어졌는데, 꼭 찝어 말하자면 이건 아사히나 선배(大)의 비밀주의가 원인이다. 아사히나 선배를 울리는 녀석은 어디서 뭐하는 놈이건 간에 변명의 여지없이 패버려야 하지만, 그러고보면 내가 원인이 되어 운 적이 더 많이 않던가? 다음에 하루히랑 같이 권투 체육관에 체험입학해서 스파링이라도 한판 해볼까나. 적절히 때리고 적절히 얻어맞을 수 있겠지. 

 

 어쨌든, 둘이서 찻잎을 사러 나갔던 일요일의 사건 덕에 나는 SOS단의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동시에 아사히나 선배의 우울상태를 어느정도 완화시키는 것에도 성공했다. 솔직히 그녀가 어디까지 눈치를 채고 어디까지 알아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정도로 봐서는 상세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최소한 지금의 아사히나 선배에게는. 

 

 내가 하루히에게 존 스미스의 이름을 봉인하고 있는 것과, 아사히나 선배에게 어른판 아사히나 선배의 존재를 말하지 않는 것은 비슷한 의미와 이유를 가진다. 그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다. 

 

 그때가 오면──. 

 

 뭐, 그때같은 거 웬만하면 안왔으면 좋겠지만 말야. 

 

 … 

 

 …… 

 

 ……… 

 


 

 

 

 

 


 그리하여 2월에 돌입, 이야기는 첫머리로 돌아간다. 

 

 학기말쯤 되면 학교 분위기도 여러모로 바뀌는 법이라, 그 변화 중 하나로 3학년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지금쯤 그들 태반은 수험 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이고, 그탓인지 직원실의 분위기도 이상하게 날카로워져 있는 듯하다. 내후년의 우리를 생각하면 남일이 아니다. 올해 3학년들이 분발해서 시립 라이벌 학교를 합격률로 이겨주지 않으면 또 교장이 임시보충이다 뭐다 해서 개교기념일도 없애가며 모의시험을 볼게 뻔하므로 2년후의 우리의 모습따위는 아직 멀고먼 이야기로만 남겨두고 싶은 나로써는 울적할 뿐이다. 

 

 수험이라 하면 또 중학생을 상대로 한 특별반 추천입시도 시작될 쯤이고, 우리 학교에도 둘 정도 있다. 그러고보니 코이즈미네 9반은 이과반이었지. 그녀석 뒤에 있는 후원조직이 민 건지 원래 코이즈미의 실력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도 전입해 들어왔군 그래. 나라면 수학과 과학을 메인으로 한 코스따위 절대 안밟을테니까 말야. 

 

 일단 미래의 자신에게 닥쳐올 대입수험이라는 연옥에서 눈을 돌리고, 얼마 남지 않은 고1 생활이 더 길어질 일도 없고 해서 의식적으로 달력을 보지 않게 되었는데, 12월 18일에서 돌아오고부터는 꽤나 나른한 마음가짐을 구축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시공수정 이상으로 현안이 되는 일 따위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으며, 그것도 무사히 해결했으니 조금은 쉬어도 될 거 아니냐. 나가토는 완전히 원래상태, 아사히나 선배는 웃음 부활, 하루히는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어차피 곧 일 하나 저지를거다. 

 

 이정도면 이제 더 이상 문제는 없을거고, 생각하기도 싫다. 그런데, 어찌되든 전혀 알바 아닌 사소한 일을 퍼내서 맘대로 문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녀석이 부실에 가면 하나 있으니, 그녀석은 하루히와 함께 일전의 사건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받지 못했던 유일한 단원, 시공개변엔 도움될일 없는 초능력자, 코이즈미 이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께서 몇 번인가 가셨던 12월 18일 새벽은 두종류가 존재합니다.” 

 

 설산의 수수께끼 사건 이후, 내가 했던 시간이동에 대해 듣고싶어 안달이 난 코이즈미는, 조부모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손자처럼 몇 번이고 이야기를 그쪽으로 유도했다. 아무래도 이녀석은 시간여행이 하고싶었던지, 어쩐지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듯하다. 츠루야 선배의 별장에서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도 ‘절 데려가 주실수는 없겠습니까’ 라던가 ‘제 모습을 과거의 당신께서 보지만 않으시면 그걸로 괜찮지 않을런지요’ 라든가 했지만, 내가 들은 척도 안한 건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나가토 일도 있고 해서 계속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에 모든 일이 끝나긴 했어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코이즈미의 지적 욕구에서 나오는 끈질긴 대쉬에 두손두발 다들고 부실에 둘만 남았을 때 그냥 싹다 알려주기로 했다. 

 

 예상대로 코이즈미 녀석은 좋아라고 해설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이상동작을 일으킨 나가토상께서 세계를 개변한 것이 12월 18일 새벽이었죠. 저는 물론 스즈미야상 및 아사히나상까지 일반인이 되어버린 세계입니다. 당신은 그 세계에서 사흘간을 보내셨고, 나가토상의 탈출 프로그램으로 3년……아니, 이제 4년전이로군요……4년 전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아직 정상 상태인 나가토상과 만나 그때로부터 다시 12월 18일 새벽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그렇고말고. 덧붙이자면 거긴 또한번 갔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아 주십시오. 12월 18일 새벽……나가토상께서 세계개변을 실행한 이 시간을 X시점이라고 해봅시다. 당신께서 4년전 칠석에서 X시점으로 시간역행을 했을때, 그 X시점은 원래 X시점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건 또 뭔소리냐? 그럴 리가 없잖아. 같은 시간이 몇 개나 있을 수가 없다. 

 

 “아뇨,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간단한 원리입니다. X시점에서의 세계개변이 없어져버린다면, 애초에 스즈미야상께서의 소실은 물론 저희들의 일반인화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 과거에 돌아갈 이유도 없어지죠.” 

 

 타임 패러독스(time paradox)란 거 아니냐. 그정돈 나도 안다. 

 

 “그러나 세계를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서는 당신께서 과거로 가셔야 한다는 것이 필수조건입니다. 가지 않으시면 세계는 개변된 상태 그대로일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께선 분명히 과거로 가서 세상을 원래대로 해놓고 오셨지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시간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문쪽에다 힐끔힐끔 시선을 주었다. 아무나 상관없으니까 누가 좀 얼른 와서 이녀석 방해좀 해줘라. 

 

 “그림을 그려서 설명드리도록 하죠. 약간은 이해에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조난사건 이후로 도형 그리기에 취미라도 붙었는지 코이즈미는 손에 수성펜을 들고 화이트보드쪽으로 걸어갔다. 보드 밑에서 위로 향하는 세로선을 그으며, 

 

 “이 상행선이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죠. 그리고──” 

 

 라며 보드 중앙에 선을 멈추고, 선 끝부분에 둥근 점을 찍고 X라고 써넣었다. 

 

 “이것이 맨 처음의 X시점입니다. 여기서 나가토상께서는 자신을 포함한 전 세계를 개변시키고, 당신께서 가지고 계신 기억대로의 시간이 생겨나게 되죠.” 

 

 코이즈미는 펜의 움직임을 재개시켰다. 직선으로 잇는 것이 아닌, 오른쪽으로 향하는 급커브를 그리고는 출발지점 X로 돌아가는 원을 완성시켰다. 나팔꽃 이파리 중 하나를 뽑아낸 듯한 그림이 생겨났다. 

 

 “이 원이 당신께서 가지고 계신 기억에 있는 18일 후의 역사입니다. 탈출 프로그램으로 4년전 칠석으로 역행하여, 거기서 18일 새벽으로 점프하게 되고요. 그리하여 거기서 나가토상을 정상화시킬 수 있었다면 좋았겠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았죠.” 

 

 아사쿠라 료코가 있었으니까 말이지. 단 거기에 있었던 건 아사쿠라 뿐이 아니다. 미래에서 온 또다른 나와 나가토, 아사히나 선배가 있었고 세상을 어찌어찌 바꿨다. 지금의 내 입장으로 보자면 한달 정도 전의 일이다. 

 

 “그랬었죠. 당신께선 자기 자신을 구해내신 겁니다. 그것이──” 

 

 점X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코이즈미의 펜은 이번엔 좌측으로 향하는 원을 그렸다. 

 

 “──이쪽의 시간이 됩니다. 지금 이 세계로 이어져 있는 시간이지요. 저나 스즈미야상의 기억대로, 18일에 당신께서 계단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고, 21일이 될 때까지 눈을 뜨지않았다고 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지난달, 당신께서 구하러 갔다고 하는 당신의 시간의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코이즈미는 왼쪽으로 도는 원을 다 그리고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X를 통과하는 직선의 흐름을 보드 위로 끌어 맨 끝에 다다랐을 때 펜을 놓았다. 코이즈미는 보드에서 반걸음 정도 떨어져 나를 바라보고, 나는 찬찬히 그 도형을 보았다. 

 

 옆으로 눕힌 8자, 혹은 ∞마크의 정중앙을 세로선이 꿰뚫고 있는 형상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모든 선이 교차하는 중앙의 교점이 X시점이다. 

 

 이과 계열 과목에 대하여 공포를 공언할 정도인 내 머리로도 점차 코이즈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첫째, 오른 쪽 원이 내 기억에 있는 시간이다. 여러 소동 끝에 나는 X시점으로 돌아가서 안경소녀 나가토가 세계를 바꾸는 장면을 보고, 아사쿠라에게 칼로 찔렸다. 

 

 둘째, 왼쪽으로 돈 원에는 내 기억에 없는 부분이 있다. 칼에 찔려 의식을 잃고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기까지의 3일간이 저쪽 원에 들어있다. 

 

 그리고 어느 원이든 같은 점 X를 시작지점으로 하고 있다……. 

 

 “X시점은 두가지가 존재하게 됩니다.” 

 

 코이즈미가 결론을 말했다. 

 

 “세계개변을 발생시킨 X시점과, 개변된 세계를 재개변한──그렇군요, X’시점이라고 할수 있을까요.” 

 

 펜을 놓은 코이즈미는 흥미롭게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며, 

 

 “X를 없었던 일로 하자면 X’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래의 X는 소거되어있는 게 아니죠. 아마, 두 X시점은 시간적으로 겹쳐져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중복……그렇죠, 덮어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오래된 데이터 위에 새로운 데이터를 덮어 기록하듯이, 첫 번째 X와 그곳에서 파생된 개변세계는 X’와 두 번째의 시간축에 따라 덮어쓰여져 있습니다. 다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죠. 그것은 거기에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군.” 

 

 나는 시치미를 잡아떼며 아사히나 선배(大)의 말을 떠올렸다. 

 

 더 규모도 크고 복잡한 시공수정──이었던가. 

 

 “입체교차가 있는 서킷(circuit)을 위에서 본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교차부분은 2차원적으로는 이어져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차원을 더하면 단차가 생겨나게 됩니다. 가로와 세로 뿐인 세계에서는 같은 위치일 수 있지만, 깊이라는 부분에서 달라지는 것이지요.” 

 

 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코이즈미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미래인이 이 얘길 들으면 뭐라고 할까. 또는 우주인이라면. 

 

 “또하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말씀드려도 될런지요.” 

 

 뭐 까짓거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그래. 

 

 “당신께는 있고 저희에겐 있는 기억……18일에 당신께서 계단에서 굴러 혼수상태가 되셔서, 21일에 눈을 뜨시기까지의 3일간 말씀입니다만, 사실은 그런 시간따위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있든 없든 알게 뭐냐. 어차피 난 자고 있었고. 

 

 “그렇죠.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전에 제가 말씀드린 걸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세계가 5분전에 생겨났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는 것 말씀입니다. 어쩌면 당신께서 구급차로 옮겨지셔서 3일간 혼절해 있으셨다는 사실은 없었던 일일지도 모릅니다. 18일의 재개변 후, 21일 저녁에 당신께서 깨어나신 그 순간까지,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나 스즈미야상께 있는 3일간의 기억은 모조된 기억이지요. 저희들은 그 기억을 가지고 21일 저녁에 재구축되었다는 겁니다.” 

 

 뭐 듣겠다고야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영 아니잖냐──라고는 할 수 없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과거 1년을 통째로 바꾸는 것마저 가능했다. 그걸 감안하면 그까짓 3일쯤이야. 

 

 “그것과는 또 다른 이야깁니다만, 스즈미야상께서 보셨다고 하는 환상의 여자의 정체도 지금이라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구냐. 날 밀어 떨군게. 

 

 “나가토상이십니다.” 

 

 이번엔 또 뭔소리냐. 그때 나가토는 너네랑 같이 계단을 내려오는 중 아니었냐? 내가 맨 뒤였다고 들었다만. 

 

 “예, 저희들의 기억엔 그렇게 되어있지요. 나가토상께서 직접 뒤에서 당신을 밀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혼절하셨다는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 나가토상이시란 거죠. 스즈미야상께선 그걸 무의식중에 알아차리신 겁니다. 물론 나가토상이시란 것을 아셨을 리가 없고, 사실상 범인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스즈미야상께선 아셨습니다. 이렇게 된 건 누군가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며, 어딘가에 범인이 있을 거라고 말이죠.” 

 

 코이즈미는 밝은 미소를 보였다. 

 

 “그 직감이 그 수수께끼의 여학생의 모습을 그려낸 것입니다. 존재할 리 없는 환상의 인물을 말이죠.” 

 

 그정도라면 감에서 끝날 일이 아니지. 나가토가 주도한 세계개변, 나가토는 얼마든지 편할대로 기억을 날조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히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 시점에서 깨달았다는 거다. 누군가가 뭘 하고 있다, 내지는 했다고 말이지. 

 

 “가설입니다. 당신께서 가지신 의문에 대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고실험이지요.” 

 

 코이즈미녀석은 상큼하게 파이프 의자에 앉아 양손을 펼쳤다. 

 

 “물론 시간의 구성과 이동 원리에 대해서는 저도 알 턱이 없습니다. 다만, 아사히나성께서는 미래에서 오셔서 이 시간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십니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드리죠. 만약 당신께서 과거에 가셔서, 대참사가 될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능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밤의 칠석과 아사히나 선배(大)를 떠올렸다. 다른 학교에 간 하루히와 코이즈미, 서예부원인 아사히나 선배, 안경쓴 나가토가 모인 가운데, 나는 컴퓨터 엔터키를 누르고 두 번째 시간역행을 하게 되었다. 그 공원의 벤치엔 이전의 나, 중학생인 하루히를 도와 운동장에 그림을 그리는 ‘나’ 자신이 있었다. 

 

 그때, 내가 갑자기 뛰쳐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부터 무슨일이 일어날지 전부 가르쳐 주고, 하루히가 영화따위 찍게 놔두지 말라던가, 나가토좀 귀찮게 하지 말라던가 하는 식으로 열의를 담아 충고해줬다면. 

 

 어깨를 들썩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군 그래. 

 

 “글쎄다, 모르겠는데?” 

 

 그럴 기회가 있었으면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을거라고. 나는 내 머리를 별로 믿는 편은 아니지만 해야할 일이라면 몸이 알아서 기억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렇게 어찌어찌 헤쳐왔으니까, 지금부터도 그렇겠지. 기대하마, 나여. 

 

 “그 뭐냐. 아무리 그래도 그리 자주 시간여행 하진 않을거 아냐. 먼저 가는 목적이 있을거 아니냐고.” 

 

 “아쉽네요. 이번엔 저도 데려가주셨으면 하는데 말이죠.” 

 

 그렇게 밤중에 배가 고파진 샤미센 같은 눈 해봤자 소용 없어 임마. 아사히나 선배한테 가서 알아보란 말이다. 그것도 지금 그 아사히나 선배가 아니라 아사히나 선배(大)한테 말이다. 어디에 가야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멀미약이나 잘 챙겨가라고 말해주는 것뿐이다. 

 

 프롤로그 - 05

 


 

 

 

 

 

 

 

 

 


 

 코이즈미가 포기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혼자서 다시 장기를 시작하고, 나는 읽고 있던 만화잡지에 의식을 돌려 이제서야 겨우 부실에 정적이 돌아와서 잘됐다 싶어하던 차에, 

 

 “안녕!” 

 

 쾅, 하며 문을 박살낼 기세로 우리의 트러블메이커께서 들어오셨다. 힘차게 세일러복 옷자락과 검은 머리를 휘날리는 부실내 최고권력자, 하루히는 비닐봉지를 들고 쓸데없이 높은 열량을 뿜어내는 웃음으로, 

 

 “근처 구멍가게에 없어서 저 내리막까지 갔다왔어. 아-, 춥다.” 

 

 부실 구석에 있는 전기난로에 손을 녹이는 단장에 이어 나가토와 아사히나 선배가 모습을 나타냈다. 둘다 하루히와 같은 걸 들고 있다. 

 

 “…………” 

 

 나가토가 가만히 문을 닫고, 

 

 “저, 이걸로 뭘 하는거에요?” 

 

 아사히나 선배가 알쏭달쏭 하단 듯 고개를 갸웃하자 하루히는 거침없이, 

 

 “뻔하잖아. 미쿠루짱, 오늘이 무슨날인지 알어? 아니, 그것도 모르고 간거야?” 

 

 “2월 3일인데요……, 그게 무슨……?” 

 

 “절분(節分:입춘 전날. 이날 저녁, 볶은 콩을 뿌려 잡귀를 쫓는 풍습이 있음)이잖아 절분,” 

 

 하루히는 두겹으로 되어있는 비닐봉지 속에서 포장된 식재를 꺼내더니, 

 

 “으휴우, 미쿠루짱. 어릴때 많이 했었잖아? 오늘은 절분, 그리고 절분 하면 콩뿌리기(豆まき)하고 에호마키(?方?き:절분때 먹는 굵게 만 김밥(*太?き:후토마키). 상업번성, 무병식재, 소원성취, 연내행운, 액막이 등의 의미를 가짐) 아냐!” 

 

 에호마키는 확실히 지역 한정 행사지만, 어쨌든 자잘한 계절행사 한번 끝내주게 잘 챙기는 단장님이시다. SOS단은 이제 『세상를 엄청나게 재미있게 만들기 위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단(세카이오 오오이니 모리아게루 타메노 스즈미야 하루히노 단)』이 아니라, 『계절(season)마다 그에 맞는(on time) 행사를 차근차근 실행하는 조직(시-즌고토니 온타이무나 코-시오 시메야카니 직코-스루 소시키)』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다. 

 

 “뭐야 또 이건, 베르누이(Daniel Bernoulli:스위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유체역학에 관한 베르누이의 정리를 제출)의 곡선?” 

 

 하루히는 관찰력 한번 좋게도 화이트보드 위에 코이즈미가 그려놓은 그림을 발견하더니, 안면 있는 어린아이에게 말을 거는 수상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내 시간의 흐름을 쫓았다. 

 

 “……이 아니네. 어떤 계산이 이런 그림에서 나와?” 

 

 “그냥 낙서라죠.” 

 

 코이즈미가 태연히 일어서 보드 위의 궤적을 칠판지우개로 지웠다. 

 

 “심심해서 그린 낙섭니다. 생각하실 필요도 없다죠.” 

 

 말 한번 능청맞게 잘하는군. 

 

 “아 그래,” 

 

 쉽게 넘어간 하루히는 그거야 지 알바 아니라는 듯 내게 봉지를 던졌다. 그것은 건조한 소리를 내며 내 손에 떨어졌다. 볶은 콩이 잔뜩 든 패키지였다. 

 

 하루히가 오늘은 절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콩을 뿌려야한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오늘 점심시간때였다. 그때, 하루히는 자책과 함께 이렇게 외쳤다. 

 

 “계속 뭔가 까먹은거 같았는데, 오늘이 절분이었어!” 

 

 아마 타니구치 녀석 도시락통에 든 후토마키(太?き:상기의 굵게 만 김밥)를 보고 알아챈 거였겠지. 정작 타니구치는 뚜껑을 열자마자 ‘뭐야 이거밖에 없냐. 반찬도 없고.’라며 불만을 늘어놓았고 ‘애써 만들어준 음식가지고 툴툴거리지 마’라고 반사적으로 태클을 건 나조차 내심 제작자에게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다못해 하루히 눈에라도 띄지 않게 잘라서 넣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외래문화만 해버릇하면 못써. 우리 풍습을 존중해야 비로소 그에 따르는 이벤트를 즐길 권리가 생기는거야. 없어져버리면 아깝잖아. 그만큼 즐거움이 줄어든단 말야. 옛것을 지키는 걸 잊어버리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된다구!”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혹시 이녀석은 지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건가? 아무리 따져봐도 산골짝 길목을, 그것도 거꾸로 가고 있다고밖에 안보인다만. 

 

 “무슨 소리야? 난 항상 지름길을 찾아간단 말야.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다 한다구. 쿈, 너 오늘이 절분이란것도 모르고 있었지? 용서 못하지 그런건.” 

 

 지도 까먹고 있었던 주제에, 아니, 까먹고 있었기 때문에라고 해야 하나, 종례가 끝나자마자 하루히는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뭐 준비라고 해도 필요한건 콩이랑 김밥 뿐이다. 준비물 구입은 하루히 자기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기로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담임 오카베한테 불려가서 진로지도라는 명목의 설교를 받았으며, 코이즈미는 운좋게 청소당번, 따라서 짐꾼으로는 나가토와 아사히나 선배를 소집, 셋이서 의기양양하게 방과후의 학교를 나갔다가 지금 막 돌아왔다는 줄거리다. 

 

 후토마키는 길한 방향을 향해서 먹으면 땡이지만, 콩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엇다가 뿌리려고?” 

 

 내가 봉지를 열어 콩을 입에다가 집어넣으며 물었다. 차랑 같이 먹기엔 딱이로군. 

 

 “부실에 뿌리면 청소가 문제고, 그전에 아깝다.” 

 

 “아무데나 상관없어.” 

 

 하루히는 반짝이는 눈을 창밖으로 향하더니, 

 

 “그래, 학교 구름다리 맨 위에서 중정(中庭)쪽으로 뿌리는게 좋지 않겠어? 땅에 떨어져도 새들이 먹을거니까 치울 필요 없겠지 그지.” 

 

 거기다, 라며 하루히가 덧붙였다. 

 

 “그리고 복낭자(福娘:복낭, 복 아가씨. 우리나라의 사과아가씨, 포도아가씨 등과 같이 일본에서도 신사 등지에서 복낭자를 선발하는 문화가 있음)에 딱 맞는 인재들도 다 모였으니까 힘차게 해줘야겠지!” 

 

 SOS단 단장의 Ia형 초신성 폭발과 같은 눈동자가 향한 곳은 콩 봉지 설명서를 열심히 읽고있는 아사히나 선배와, 테이블에 붙어 께름칙한 제목의 미스터리 책을 읽어대는 나가토였다. 

 

 과연 그렇군. 

 

 만약 교내 복낭자 선발대회를 개최한다면 우승과 심사위원 특별상을 탈 두사람이지만, 그걸 제쳐두고서라도 이런 액막이 의식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콤비라 할 수 있겠다. 아사히나 선배는 연출적 측면에서, 나가토는 실무적 측면에서 말이지. 

 

 

 

 

 

 

 

 

 

 곧바로 하루히에게 끌려가는 아사히나 선배의 뒤를 쫓듯이 하여 건물 옥상의 구름다리까지 올라온 우리는, 거기서 내려진 명령에 따라 시원스럽게 콩을 뿌리게 되었는데, 이또한 명령에 따라 뿌리는 사람은 여자단원 3인조로 한정되었다. 나와 코이즈미는 여단원들이 들고 있는 되에다 묵묵히 콩을 보급해주는 역할었는데, 하루히의 지시치고는 꽤나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역할분담이 되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처음엔 무슨일인고 하며 살충제 분무를 두려워하는 바퀴벌레처럼 숨어있었지만, 1분도 안되어서 남학생들이 중정에 모이기 시작하여 아사히나 선배나 나가토가 던지는 콩을 오히네리(お捻り:신불에게 바치거나 하기 위해 돈을 종이에 싸서 가볍게 비튼 것)를 두고 다투듯이 왔다갔다 하고 있다. 그들은 하루히의 초강력 팔뚝이 뿜어내는 산탄총과 같은 콩 공격은 주로 회피하는 방면으로 행동이 일치했다. 

 

 “앗차,” 

 

 하루히는 마음깊이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이럴줄 알았으면 미쿠루짱을 무녀복장을 시켜서 돈받는 이벤트로 만들 걸. 일인당 100엔이면 꽤 벌 수 있지 않겠어?” 

 

 그런 옷을 입혀다가 학교를 휘젓게 하면 아사히나 선배의 인기가 더더욱 높아질 거 아니냐. 내 걱정거리를 더 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코스프레는 부실내로 한정해줬으면 한다. 

 

 “보, 복들어와라-, 에에, 그, 복들어와라-” (福は?, 尾には外:‘복은 집안으로 들고 악귀는밖으로 나가라’는 의미로, 입춘 전야에 콩을 뿌리면서 외는 말. 여기서는 ‘복이 들어오라’는 앞 구절만 나오고 있음) 

 

 나는 필사적으로 콩을 투척하는 아사히나 선배와 말없이 콩을 흘리는 나가토를 바라보고, 당연한 귀결로서 두사람의 무녀복장을 머릿속에 그린 후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하루히에게 말했다. 

 

 “일인당 500엔으로 하자.” 

 

 그리고 구호는 ‘복들어와라(福は?)’ 한마디로 제한되어있다. 그 이유는, 

 

 “난 말야, ‘울게 된 빨간 도깨비(泣いた赤鬼:일본 동화. 빨간 도깨비와 파란 도깨비는 인간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나 인간은 항상 이들의 모습을 보고 도망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읽고부터 도깨비를 보면 잘해주기로 마음먹었다구. 음, 빨간 도깨비도 엄청 울었을거야. 나라면 팻말을 본 즉시 좋아라고 달려가서 차랑 과자도 받아먹었을텐데……” 

 

 완전히 도깨비씨한테 감정이입하신 우리의 하루히는 내게 강렬한 눈빛을 주며, 

 

 “너도 파란 도깨비를 보면 친절하게 대해줘. 알겠지? 도깨비를 밖으로 내쫓는건 절대 허가 못해. SOS단은 인간 이외의 것에게도 넓게 문을 개방하고 있어야되니까 말야.” 

 

 그런 되다만 주장을 펼치면서 이렇게 안으로 들이기만 하는 거야 좋지만 밖으로 아무것도 안내보내면 오히려 잔뜩 불룩해져서 파열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야 하는데, 파란 도깨비에 대해서는 나도 하루히와 동감이다. 

 

 그건 내가 아직 감수성이 풍부한 꼬마 시절에 이 이야기를 읽고 눈물을 흘렸던 추억때문일지도 모르고, 나가토가 절분용 콩 패키지에 딸려온 싸구려 도깨비 가면을 머리 옆으로 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실에서 하루히가 말한 옛날이야기를 독서와 동시에 듣고 있던 나가토는, 무슨 이유에선지 종이로 만들어진 도깨비 가면에 흥미를 가진 듯이 손에 들고선 주사(走査) 레이저와 같은 시선을 주고서 자기 머리에 썼다. 

 

 하루히가 말하는 ‘인간 이외의 것’이란 어구가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인가──뭐 이건 내 망상이지만.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 콤비에 의한 교내 콩 서비스가 끝난 후, 우리는 부실로 돌아와 김밥을 먹게 되었다. 하루히는 올해의 길한 방향을 인터넷으로 알아본 후, 우리 모두에게 김밥을 나눠주더니, 

 

 “다 먹을때까지 말하면 안되는거 알지. 자 모두 일어서. 저쪽 보고 먹는거야.” 

 

 

 

 

 

 

 다섯명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일렬로 늘어서, 말없이 다식은 김밥을 먹는다는 요상한 풍경이 몇분간 지속되고, 하루히와 나가토는 거의 몇입만에 다 먹어치웠지만, 다람쥐마냥 두손으로 김밥을 든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깜빡이며 과식을 강요당했고, 나는 저녁밥이 같은걸로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뿐이었다. 

 

 남은 콩은 그릇에다 놓고 아사히나 선배가 타주는 차와 같이 주로 나와 하루히의 뱃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절분이 이렇게 배를 부르게 하는 행사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이걸로 하루히 기분이 풀렸나 싶었는데 어떻게 되어먹은건지 다음날엔 또다시 얌전해지고 말았다. 서두에도 말했지만 심각한 우울이 아니라는 건 절분을 떠올리고서 금방 밝아지는 하루히의 모습으로 증명되었지만, 그것만으로 이 미묘한 정적의 의미는 알 수 없었고 무언가 불온했다. 아무래도 하루히의 이 얌전함은 나만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잡다 캐릭터인 타니구치나 쿠니키다는 물론 하루히의 정신적 전문가를 자처하는 코이즈미조차 모르는 듯 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도 가만히 하루히의 동향에만 신경쓸 수는 없게 되었다. 

 

 더욱 직접적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쪽은 하루히와 같은 분위기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고 나타났다. 

 

 방금 막 코이즈미에게 시간이동에 관련한 일은 앞으로 당분간 없을거라고 한 찰나라 나도 그런 생각이었음은 방금 말한 대로다. 과거로 가서 뭘 어떻게 한다는 식의 일은 한동안 없었으면 했다. 많이 할게 못되니까 말이지. 더군다나 이유도 모른채 갈 곳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나의 그 처절한 바램이 닿았는지, 뭐, 그렇게 되기는 했지. 

 

 이번에 시간을 왔다갔다 한건 내가 아니다. 나는 바로 이 현실과 현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관련된 사건에 말려들지 누가 알았으리오. 

 

 그 사람은 문예부 부실의 청소도구함 속에서 나타났다. 

 

제 1화 

 

 

 

 


 

 

 

 

 

 

 절분으로부터 며칠이 지난 그날 저녁. 

 

 방과후, 부실 문을 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차가울 대로 차가워진 공기와 아무도 없는 실내 뿐이었다. 아사히나 선배의 따뜻한 맞이도 없을뿐더러 책상 구석에 붙어 책을 읽는 나가토의 모습도 없고, 하루히도 한동안 오지 않는다. 오늘은 그녀석이 진로지도를 받을 차례라 지금쯤 직원실에서 담임 오카베한테 되도 않는 진로를 말해대고 있겠지. 나중에 뭐가 되고 싶냐는 물음에 ‘지배자’ 나 ‘우주대통령’ 같은 헛소리를 진지한 얼굴로 해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칫 진짜 그런 게 돼버리면 큰일나므로 오카베가 찬찬히 잘 타일러서 하루히에게 제대로 된 인생설계를 하게끔 유도해 나가줬으면 한다. 무조건 설득하려고하면 억지로라도 삐뚤어지는 크롬(chrome) 원소와 같은 성격을 가진 녀석이니까 말이지. 

 

 나는 테이블 위에 가방을 놓고 아무도 없이 썰렁한 부실에 온기를 주고자 전기난로를 켰다. 구식 전기난로는 열을 발산시키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요한다. 

 

 달리 온도를 높일 수 있는 건 아사히나 선배가 끓이는 주전자 온기와 그녀가 끓여주는 따뜻한 차 정도다. 빨리 마시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옆에 있는 파이프 의자에 앉았을 때, 

 

 쾅──. 

 

 “뭐지?” 

 

 부실 구석에서 난 소리다. 내가 반사적으로 그쪽을 보니, 거의 대부분의 교실에 있는 철제 직사각형 모양의 청소도구함이 진좌해 있었다. 내 귀가 멀쩡하다면 음원은 그 속이다. 

 

 어쩌다가 빗자루나 대걸레가 쓰러졌나 싶었는데, 

 

 카캉──. 

 

 이번엔 좀 작은 소리가 나서 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뭐야 또” 

 

 이런 경우 있잖아? 가족은 전부 나가고 없는 집에 돌아왔을때 자기 혼자밖에 없는데도 인기척이 느껴지는 경우. 괜히 커텐 뒤가 흔들리는 것 같고, 누가 숨어있는 것 같은. 확인해보고 싶어도 진짜로 누가 있을까 무서워 보지 못하는.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괜한 느낌 선에서 끝난다. 

 

 이번에도 그런가 싶었다. 이게 부실이 아니라 나혼자 남은 집이라면 계속 쫄아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여긴 학교고 아직 날도 훤하다. 좀 흠칫하긴 하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청소도구함 쪽으로 다가가 별 기대도 없이 문을 열었고, 곧바로 말문이 막혔다. 

 

 “……………앙?” 

 

 청소도구함에 빗자루, 대걸레 및 쓰레받기 이외의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의외인 나머지 생각이 입을 통해 의문문으로 나타났다. 

 

 “……뭐하세요? 그런데서.” 

 

 당연한 의문을 품은 나를 본 그 사람은, 

 

 “아……쿈군,” 

 

 아사히나 선배였다. 그녀는 어쩐 이유에선지 안도의 표정을 짓더니, 

 

 “기다려줬군요. 다행이다-. 어떻게 해야되나 싶었는데, 이제 안심이에요. 저, 그래서, 그, ……전 어떡하면 돼요?” 

 

 “네?” 

 

 “에?”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보곤, 

 

 “저……. 오늘 이 시간 맞죠? 분명 여기서 만났다고……” 

 

 철제 도구함에 청소도구들과 사이좋게 앉아있는 그분, 자신없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세일러복 차림의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에, 아주 불길한 예감이 고도성장기의 공장지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사히나 선배……?” 

 

 이건 또 어찌된 노릇이냐? 숨바꼭질이라도 하는건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 

 

 마음속에 피어오른 연기가 매연으로 바뀌어가는 순간, 

 

 똑똑──. 

 

 부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오고, 나와 아사히나 선배는 깜짝 놀라 동시에 그쪽을 보았다. 내가 대답하려고 입을 연 그때, 

 

 “아, 엇? ……아, 안돼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아사히나 선배는 앞으로 고꾸라진 나를 청소도구함으로 잡아끌고는, 손을 뻗어 철제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웁, 뭐냐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냐고. 

 

 “쉿, 쿈군, 조용히. 아무말도 하지 마세요.” 

 

 틈새로 새들어오는 빛이 아사히나 선배가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댄 모습을 겨우겨우 비췄다. 안그래도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번 생각해봐라. 

 

 청소도구함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들어오라고 만든게 아니다. 혼자도 충분히 정원초과인데 둘이나 비집고 있었으며, 그 주인공은 나와 아사히나 선배다. 그리고 아사히나 선배는 하루히가 눈독들일만한 글래머한 곡선미의 소유자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나와 아사히나 선배는 서로 밀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실제로 밀착되어 있다. 교복 너머로도 느껴지는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것이 내 가슴 밑 언저리에 닿아있는 것이다. 

 

 내가 넋을 잃고 있으니 부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누가 들어왔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난방기구도 없는 겨울 산중에서 서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붙어있는것 마냥 아사히나 선배가 내게 찰싹 달라붙어 숨을 죽이고 있다. 뭔진 모르지만 안아주고도 있다. 이렇게 행복한 일이 이세상 어디에 또 있으랴. 

 

 불길한 예감따위 엿이나 처먹으라고 해라. 연기는 지금 맑은 오존(ozone)이 되어 나를 산뜻한 치유의 꿈속으로 불러……, 아니 더 이상 말은 필요 없다.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런 나의 도취도 부실에 들어온 그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중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아무도 없네……. 난로는 켜져있는데. 아, 이거, 쿈군 가방이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나는 아직도 넥타이를 잡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사히나 선배도 나를 올려다본다. 

 

 이어 나는 고개를 비틀어 뒤쪽을 보려 했다. 청소도구함 틈사이로 비치는 가느다란 빛이 유일한 광원이며 창이기도 했다. 인간의 목은 180도 회전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있지 않지만, 그래도 시야 구석으로 밖의 풍경이 살짝 보인다. 

 

 “…………!” 나는 소리없이 놀람을 표현했다. 

 

거기에도 아사히나 선배가 있었다. 

 

 손으로 난롯불을 쬐고 있는 그 아사히나 선배는 콧노래를 부르며 이동하더니 내 시야에서 사라져, 옷걸이에 걸린 메이드복을 가지고 재등장 한 후 세일러복 리본을 풀고 파이프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기어이는 지퍼를 열더니 하나둘 벗기 시작했다. 

 

 “…………!” 나는 말줄임표 연속이다. 

 

 그 아사히나 선배는 벗은 교복 윗도리를 의자에 놓고, 이번엔 스커트 쪽 허리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 내 얼굴에도 손이 닿았다. 

 

 “…………!” 

 

 이쪽의 아사히나 선배가 두손으로 내 얼굴을 잡아 억지로 앞쪽을 보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아사히나 선배의 얼굴은 빨개져있다. 그 입술이 움직였다. 

 

 보·지·마·요. 

 

 따로 독순술(讀脣術)을 발휘할 것도 없이 그렇게 보였기에, 뒤늦게나마 나는 내 자신이 하지 말았어야 할 행위를 한 것을 깨닫고, 사죄의 말을 할 뻔하다가 서둘러 입을 막고 지금 상황을 재확인했다. 

 

 

 

 

 

 

 

 아사히나 선배가 둘 있다. 

 

 

 

 

 

 


 잠깐만. 둘중 하나가 어른 버전이라면 또 모른다. 그런 경우는 여러번 있었기에 여기에 그녀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근데 지금 이건 뭐냐. 완전히 똑같이 생긴, 영락없는 붕어빵 아사히나 선배들이 철제 문을 사이에 두고 안에 하나 밖에 하나 세트로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나와 숨과 살이 맞닿는 거리에서 정면으로 껴안고 있으며, 하나는 부실에서 정식의상인 메이드복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두쪽다 진짜 아사히나 선배다. 나는 나가토의 표정과 아사히나 선배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분야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높은 스킬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 판단에 따르면 이 두사람은 같은 사람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고, 동일인물이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이동이다. 

 

 둘중 하나가, 아마 나랑 이 비좁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이 아사히나 선배가, 지금과는 다른 시간, 그것도 극히 최근 시간대에서 온 것이다. 아무리 봐도 두 아사히나 선배는 전혀 차이가 없다. 일란성 쌍둥이도 이거보단 다르게 생겼겠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생각했다기보다는 느꼈다고 하는게 아무래도 맞는 말이겠지. 

 

 어쨌든 간에 안쪽에 있는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꽉 감고는 나를 놓아줄 생각을 않고, 바깥쪽 아사히나 선배의 옷깃 소리는 내 상상력을 자극하여 내 내호(內壕:성 안쪽에 판 못)와 외호(外壕:성 바깥쪽에 판 못)가 완전히 메워지고 공격 신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다. 사나다 유키무라(?田幸村: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의 무장 1567~1615)가 없는 오사카나츠노 진(大阪夏の陣:오사카 여름의 진. 1615년 여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일가를 멸했던 전투. 도쿠가와 측이 ‘겨울의 진[冬の陣]’ 화의조약을 깨고 오사카성 내호를 메우면서 발발)과 같은 꼴이다. 이런 투 플라톤 정신공격을 받고 반응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다. 

 

 뇌 한쪽에서 마약적인 물질을 분비하여 정신이 아찔해졌다. 제발 누가 좀 어떻게 해주세요. 

 

 이대로 가면 이 가까이에 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힘껏 껴안던가, 지금 당장 뛰쳐나가서 옷을 갈아입는 아사히나 선배를 놀래키던가 둘중 하나겠지만, 그 직전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문을 여는 소리가 나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았다. 

 

 “…………” 

 

 그녀석은 말없이 서있는 모양이다. 문을 닫는 소리도 안난다. 

 

 “아, 나가토상.” 

 

 아사히나 선배의 맑은 목소리가 들린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차 끓여드릴게요.”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야 구석에 메이드스커트 자락이 날리는 순간이 잡히긴 했지만 스커트 끝자락만 살짝 나오고 말았다. 따라서 옷을 다 갈아입은 아사히나 선배가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다가서는 모습을 머릿속에 재생했다. 

 

 “…………” 

 

 나가토가 들어온느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나가토가 평소 워낙에 발소리를 내지 않는 녀석이지만 문이 나가토마냥으로 소리없이 닫히는 것도 아니다. 즉 나가토는 들어오지 않고 계속 문앞에 서있는 듯 했다. 

 

 “저……왜그러세요?” 

 

 아사히나 선배는 불안한 목소리. 또 내 상상력 가동. 나가톤 한손에 가방, 한손에 문손잡이를 잡은 채 청소도구함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 

 

 “저기,” 

 

 “할말이 있다.” 

 

 나가토의 목소리다. 

 

 “네?” 라며 아사히나 선배가 놀란 목소리. 

 

 “따라와.” 

 

 “네에?” 라며 아사히나 선배는 더욱 놀라며, 

 

 “어, 어딜 가는거죠? 그……에……?” 

 

 “이 부실이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어.” 

 

 “그, 그래도 무슨 이야기신지……. 여기서 하시면 안되나요?” 

 

 “여기선 할 수 없다.” 담담한 나가토의 목소리. 

 

 “저어……저한테, 말씀이세요? 정말로요?” 

 

 “응.” 

 

 “아악? 저, 나가토상? 꺄, 안잡아당기셔도……” 

 

 더 이상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사히나 선배의 불규칙한 발소리가 나고 곧바로 문이 닫혔다. 두 인기척이 부실동 바깥으로 멀어져갔다. 

 

 나가토, 고맙다. 

 

 나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청소도구함 밖으로 나왔다. 이어 아사히나 선배가 굴러나왔다. 

 

 “흐아아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아사히나 선배는 안도인지 피로인지 모를 한숨을 지었다. 

 

 “깜짝 놀랬네,” 

 

 설마 나보다 더 놀랐을라고. 

 

 “아사히나 선배,” 내가 말했다. “뭡니까, 이거? 어떻게 된거죠? 어느 시점의 선배시죠?” 

 

 아사히나 서내는 낮은 위치에 있는 얼굴을 들어 나를 보고는 눈을 계속 깜빡이며, 

 

 “네? 쿈군, 아시는 거 아니에요?” 

 

 알기는 뭐를요. 무슨 수로. 

 

 “하지만,” 

 

 아사히나 선배가 겨우 잡아탄 구명보트에 구멍이 났다는 사실을 알아챈 침몰선 객실승무원과 같은 표정으로, 

 

 “쿈군이 이 시간으로 가라고 했었잖아요,” 

 

1-02

 

 

 

 


 

 

 

 


 

 

 

 

 


 잠깐만. 나는 두뇌회전을 시키기 시작했다. 일찍이 나는 비슷한 말을 했다. 분명히 했다. 때는 1월 2일이었고, 나는 과거인 12월 18일로 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갔다가, 돌아왔다. 

 

 거기까진 오케이. 그 다음이 문제다. 난 적어도 아사히나 선배에게 미래로 가라는 식의 지시를 한 기억이 없다. 가줬으면 하는 생각은 새털만큼도 없었다. 

 

 그렇다는건……. 

 

 미래다. 이 아사히나 선배는 미래에서 온 것이다. 

 

 “언제에서 오신거죠?” 

 

 “하아……” 

 

 아사히나 선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손목시계로 떨궜다. 

 

 “그게, 저, 일주일 하고 하루……8일후인, 오후 4시 10분인데요,” 

 

 “무슨 이유로요?” 

 

 “모르겠어요.” 

 

 아니 모르신다뇨. 

 

 “정말로 몰라요. 전 쿈군이 시킨대로 한것뿐이에요. 제가 묻고 싶네요. 왜 항상 쿈군의 신청은 이렇게 쉽게 통과되죠?” 

 

 아사히나 선배는 약간 하루히식으로 입술을 뿌루퉁하게 했다. 그 표정도 귀여웠지만 지금 한가히 비교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부실 문을 의식하며, 

 

 “제가 지시했다구요? 8일후의 제가 그런 걸?” 

 

 “네. 어쩐지 좀 당황하고 있었지만은 가면 알게 될거라면서요. 그리고 그쪽에 있는 쿈군을 잘 부탁한다고도 했어요.” 

 

 뭔 헛소리를 한거냐, 8일 후의 나는. 

 

 이해가 안간다. 아사히나 선배를 과거로 보내서 뭘 어쩌겠다고? 잘 부탁이라니 지금 큰일날뻔 했는데. 

 

 아니, 잠깐. 또 뭔가 이상해지고 있다. 이 아사히나 선배는 8일후로부터 왔다고 했다. 그리고 메이드 의상으로 갈아입고는 나가토에게 끌려간 아사히나 선배는 지금 시간대의 아사히나 선배가 맞다. 

 

 앙─……? 그럼 어떻게 되는거냐. 아사히나 선배가 둘. 하나는 부실. 하나는 나가토한테 학교 뒷골목에라도 끌려가서 기합이나 받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비상계단으로 끌려가서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하셨어요.” 

 

 아사히나 선배는 고개를 갸웃하며, 

 

 “신의 존재를 수론(數論)으로 증명하는 방법과 그 부정을 관념론적으로 이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던가……. 나가토상이 일방적으로 말하시고, 전혀 이해는 안갔지만, 그게 뭐 어쩌고 해서……아”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끊었다. 

 

 “……그렇구나,” 

 

 아사히나 선배의 이해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 있는 컬러 타이머가 점멸등 레드(red)로 바뀌었다. 그렇다, 이대로는 뭔가 골치아픈 일이 터진다. 

 

 나가토의 전파이야기가 계속 쭉쭉 이어지기만을 빌며, 

 

 “아사히나 선배, 선배는 일주일동안 미래에서 온 선배 자신과 만난 적이 없으시죠?” 

 

 “네, 없는데……” 

 

 이상하다는 듯이 끄덕이며 아사히나 선배도 약간 당황하고 있다. 그럼 서둘러야한다. 

 

 이 아사히나 선배를, 그 아사히나 선배와 만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나가토는 알아챈 것이다. 청소도구함에 나와 아사히나 선배가 있음을 알아채고, 시간을 벌 요량으로 데리고 나가준 것이다. 여기서 메이드 버전 아사히나 선배를 데리고 나가준 것은 이쪽에 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탈출시킬 시간을 벌게 해주려는 것이 틀림없다. 

 

 얼마안가 하루히와 코이즈미도 여기 온다. 가끔은 안와도 될걸 연어가 고향찾아오듯이 부실을 찾는 것이 SOS단 구성원의 습성이다. 나도 그렇기 때문에 잘 안다. 그리고 하루히가 아사히나 선배가 둘 있다는 사실을 보고 쌍둥이라는 변명이 먹힐지 안먹힐지도 미지수다. 아사히나 선배에게 애드립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한시라도 빨리 이 아사히나 선배를 여기서 끄집어내지 않으면 앞으로 호되게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가죠, 아사히나 선배,” 

 

 내가 가방을 들고 문을 살짝 열어 밖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 손짓을 하니 아사히나 선배가 쫄레쫄레 따라와서 조심조심 복도로 시선을 보냈다. 카운트다운 발동. 조건은 둘, 현재시간의 아사히나 선배에게 이 아사히나 선배를 보여선 안된다는 것과, 하루히로 하여금 아사히나 선배가 둘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하여선 안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변장이라도 시켜볼까 하여 나는 옷걸이에다 시선을 줬지만 오히려 더 눈에 띄는 의상밖에 없다는 것을 재인식하고선 포기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아사히나 선배는 교복 차림이다. 모름지기 나뭇잎은 숲에 숨으라 하였나니. 

 

 나는 아사히나 선배의 팔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부실을 나섰다. 빠른 스텝으로 걸어가며, 

 

 “8일후인건 틀림없지요?” 

 

 “네, 쿈군이 8일전 오후 3시 45분으로 가라고 했으니까요.” 

 

 아사히나 선배의 보폭도 평소보다 넓다. 부실동 계단을 두계단씩 뛰어 내려간다. 담임 오카베가 하루히 설교에 여념이 없기를 빈다. 

 

 “그럼, 선배는 앞으로 일주일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계시죠?” 

 

 1층에 도착한 나는 약간 갈길을 헤메다가 중정을 횡단하는 루트를 선택했다. 복도를 통해 한교 본건물로 가는 길은 하루히와 정면충돌할 가능성이 있고, 신발장 쪽으로 가려면 이쪽이 빠르다. 

 

 아사히나 선배가 입으로 숨을 쉬면서, 

 

 “네, 어느정도는요.” 

 

 “과거로 와야만 할 사건이라도 있었나요,” 

 

 “짐작조차 안가요. 갑자기 쿈군이 절 데리고가서, 그 청소도구함에,” 

 

 집어넣고, 오늘로 오라고 한 건가. 내가봐도 이해가 안가는 행동이다. 무슨 생각을 했던거냐? 그럼 나도 같이 여기 왔으면 될거 아냐. 그럼 나혼자서 별 생각 다 안해도 될것을. 

 

 나와 아는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안전히 신발장까지 도착한 나는 나도 모르게 멈춰서게 되었다. 

 

 “어딜 가야되지?” 

 

 학교에서 나가는 것까진 좋은데, 아사히나 선배를 숨길 수 있는데가 어디냐고. 

 

 아니, 그전에 뭘 하면 되는데?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8일후로 보낼 수는──. 

 

 “없어요.” 

 

 아사히나 선배는 쓸쓸한 눈빛으로, 

 

 “저도 그럴 생각으로 연락을 취해봤는데요, 안된대요. 언제 돌아가야 되는지도 극비, 도저히 모르겠어요.” 

 

 즉 8일후에서 오신 이 아사히나 선배는 오늘이 됐든 내일이 됐든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거야 일단 됐다 치자. 

 

 그래서? 

 

 그러니까, 그 뭔가가 뭔지 알고 싶단거 아냐 지금. 왜 대체 8일후의 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종이쪽지 하나 안준 거냐? 

 

 내가 미래의 나 자신을 꾸짖고 있으니 아사히나 선배는 2학년용 신발장으로 뽈뽈뽈 뛰어갔고, 나도 학교지정 실내화를 운동화로 갈아신으려다가, 

 

 “아사히나 선배!” 

 

 서둘러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을 찾았다. 아사히나 선배는 높은 위치에 있는 자기 신발장에 온 몸을 뻗어 열고 있는 참이었다. 

 

 “네?” 라며 아사히나 선배는 그 자세 그대로 뒤돌아보더니, 

 

 “왜그러세요?” 

 

 왜그러세요가 아닙니다. 

 

 “그 신발은 지금 여기 있는 선배 거에요.” 

 

 “아……그렇지, 참……” 

 

 아사히나 선배는 신발장 문을 닫고선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이걸 신고 가버리면 여기 있는 제가 곤란하겠죠. 그러고보니 신발이 없어졌던 기억은 없어요……” 

 

 그뿐만이 아니다. 아사히나 선배기 때문에 당연히 벗은 실내화는 신발장에 넣어버릴 거다. 그럼 어찌되겠냐. 그 아사히나 선배가 집에 가려고 할때 신발장을 열면 자신이 신고 있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는 실내화가 떡하니 나타날 것이다. 

 

 “그, 그렇군요,” 

 

 아사히나 선배는 당황하며, 

 

 “그럼, 전, 어떻게 나가야……” 

 

 실내화 채로 나갈 수밖에 없겠지. 조금 쪽팔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남의 신발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가느냐 보다도 ‘어디로’ 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나는 마음 속으로 북소리를 울리며 내 신발장으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찾아냈다. 

 

 어딘가 그리운 기분이 드는 미래로부터의 메시지. 

 

 “……과연, 준비 하나는 잘해주셨군요, 아사히나 선배.” 

 

 내 지저분한 신발 위에 팬시 봉투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1-03

 

 

 

 


 

 

 

 


 

 

 

 

 


 나와 아사히나 선배는 살속을 파고드는 산바람을 맞으며 내리막을 걷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교하는 키타고 학생들도 몇몇 있었는데, 빈손에다 실내화라는 하교엔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링의 아사히나 선배를 힐끔힐끔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건 내 기분 탓일래나. 

 

 내 오른쪽으로 아사히나 선배의 밤색 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는데, 표정은 머리처럼 가뿐치 못하였으며 차라리 눈내리기 직전의 구름에 가까웠다. 

 

 이어 내 얼굴색도 별로 좋지 않음에 틀림없다. 왜냐면 부실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가 있건 간에 무단으로 부활동(부가 아니라 단활동인가)을 빼먹으면 단장님의 기분이 급속도로 기울어버리기 때문에 그럴듯한 변명을 짜내지 못하면 하루히 특제 벌칙게임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사히나 선배를 방치한다는 것도 여러 의미로 염려스러운 일이다. 정처없이 추운 밤길을 헤매이는 아사히나 선배를 발견한다면 누구든 보호해주고 싶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보호자가 인격자만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그럼 내가 보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안해요,” 

 

 처량하면서도 귀여운 목소리가, 

 

 “저, 또 폐만 끼치고……” 

 

 “아뇨, 무슨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답하는 나. 

 

 “선배를 여기로 보낸 건 저잖아요? 그럼 제가 문제죠.” 

 

 그리고 아사히나 선배(大)다. 아무리 봐도 미래의 나 치고는 너무 불친절하다. 그렇게 과거가 싫은거냐, 미래인들은. 

 

 주머니 속 봉투를 꽉 쥐었다. 

 

 보낸이도 받는이도 써있지 않은 봉투에 들어있던 편지지에는, 

 

 『부디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아사히나 미쿠루를 잘 부탁해요.』 

 

 라고밖에 쓰여있지 않았다. 이 꼼꼼한 글씨체는 본 기억이 있다. 작년 봄, 이것과 같은 글씨체의 부름을 받아 점심시간에 부실로 가게 된 나는 초절정 글래머 미인이 된 아사히나 선배(大)와 만나 점의 위치 및 아주 중요한 힌트를 받았었다. 이걸 쓴 사람은 그녀임에 틀림 없다. 

 

 아니 근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건지요. 대체 뭘 해야합니까, 아사히나 선배(大). 허가받은 건 뽀뽀가 전부 아니었더냐. 

 

 그리고 이 편지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아사히나 선배에게도 보여줬다. 그녀에게 보여줘도 되는 걸 거다. 아사히나 미쿠루를 잘 부탁──까지만 읽어도 알 수 있다. 이게 내게만 주어지는 비밀지령이라면 그 부분은 아사히나 미쿠루가 아닌 ‘저’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사히나 선배는 ‘무슨 뜻일까요……?’ 하고 중얼였고, 자기가 나중에 쓰게 될 거라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하다. 

 

 그렇지만, 이제 슬슬 알아채기 시작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두 번째의 12월 18일, 그때, 그녀는 거기에 나도 나가토도 아사쿠라도 아닌 제 4의 인물을 보았다. 곧 잠들고 말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사히나 선배는 그 여성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달 하루히네 동네에 사는 안경소년을 사고로부터 구해주었을 때, 풀죽은 아사히나 선배를 차마 보다못해 어설픈 위로를 하려 했던 나의 모습을 보고 알아챈 부분도 어느정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아사히나 선배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이즈미 말마따나 SOS단 단원은 전부 약간씩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코이즈미 왈, 하루히 폐쇄공간을 만들어내는 빈도가 줄고 있다. 

 

 역시 또한 코이즈미 왈, 나가토의 우주인적 분위기가 감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는 코이즈미, 너도 전과는 약간 달라졌잖아. 안그러십니까, 부단장님. 

 

 내가 보기론, 하루히는 서서히이긴 하지만 주위에 녹아들어가는 것 같다. 문화제때의 임시보컬도 그렇고, 컴퓨터연과의 게임대전, 연말연시의 여름합숙 등 고1 초기때의 말도 못붙이던 시절에 비하면 완전 다른사람처럼 잘 웃고, 생판 남하고도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할수 있게 되었으니깐 말야. 

 

 ──우주인, 미래인, 이(異)세계인, 초능력자가 있다면, 저에게 오십시오. 

 

 ──우주인이나 미래인이나 초능력자를 찾아내서 같이 노는거야! 

 

 마치 이걸 실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 

 

 그 전부를 성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약 30분정도가 지나 아사히나 선배와 내가 온 곳은 우리 집이었다. 

 

 “아, 그렇구나-” 

 

 아사히나 선배가 현관에서 실내화를 벗으며, 

 

 “쿈군이 부실에 오지 않은건 이런 이유에서였군요.” 

 

 태평하게 납득의 말을 하고 있다. 

 

 그거야 이 아사히나 선배를 그녀 자신의 집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그걸 제외하고 나니 갈 곳이 따로 떠오르지 않았고, 어디 아사히나 선배같은 시간주재원이 살고 있다고 하면 몸을 맡겨도 되지 않나 싶었는데,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제겐 알려주지 않아요.” 

 

 도그 레이스(dog race:개로 하는 경주. 경마와 마찬가지로 관객은 돈을 걸어 즐김)를 끝낸 처녀출전선수와 같은 얼굴로 저런 말을 하시니 물러설수밖에 없다. 아사히나 선배의 비애는 깊었고, 사태는 오리무중 정가운데로 접어들고 있다. 결국 어떻게 되먹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걸 적극적으로 알고싶은 것도 아니고 한데, 그런 우리의 곤혹과는 상관없이 아사히나 선배에게 달려든 것은 내 동생이었다. 

 

 “아, 미쿠루짱이다!” 

 

 침대 밑에 기어들어간 샤미센을 끌어내려 하고 있던 동생은, 내가 내 방 문을 열자마자 아사히나 선배에게 달라붙어선 키타고 최고의 미소녀를 귀찮게 해주고 있었다. 

 

 “시, 실례할게요.” 

 

 “와아. 응? 쿈군이랑 미쿠루짱밖에 없어? 하루냥은?” 

 

 동생은 반짝이는 눈으로 아사히나 선배를 올려다보고, 나는 만 11세 초등학교 5학년짜리의 목덜미를 잡았다.


 “하루히는 아직 학교에 있다. 그리고 내방에 함부로 들어오지마,” 

 

 몇 번을 말해도 소용없는건 안다. 덕분에 들키고 싶지 않은 물건 숨기기가 여간 고생이 아니라고. 

 

 “그치만 샤미가 안나오잖아-” 

 

 동생은 아사히나 선배의 스커트 자락을 잡은 채 방긋 웃으며, 

 

 “유키는? 코이즈미군은? 츠루야상은? 안와?” 

 

 동생을 무조건 귀에 들어오는 애칭을 곧바로 영구채용하는 건 내가 쿈군이라 불리는 것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생선배를 존대하는 개념이 전혀 없는 초등학생, 그것이 바로 우리 동생이다. 제발 오빠라고 불러라.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아. 데이트? 그치그치,” 

 

 내가 동생을 내쫓음과 동시에 문까지 닫았다. 

 

 “자 그럼,” 

 

 아사히나 선배와 마주보고 앉아, 

 

 “요 일주일간 일어난 일을 요약해서 말씀해주시죠.” 

 

 “으-음,” 

 

 생각하는 모습을 하던 아사히나 선배는, 

 

 “8일전에……오늘이군요, 제가 부실에 가니까 아무도 없는데 난로가 켜져있어서,” 

 

 그거는 방금 봤다. 

 

 “옷을 갈아입고 있으니 나가토상이 오셔서, 비상계단 쪽으로……” 

 

 그것도 도중까지는 봤다. 

 

 “돌아와보니까 쿈군 가방이 없어지고 코이즈미군이 와계셨어요.” 

 

 간발의 차였다 그거다. 

 

 “30분 정도 있으니까 스즈미야상도 오셨어요.” 

 

 거 진로상담 한번 오래 했군. 그럼 그렇게 서두를 필요도 없었군 그래. 

 

 “스즈미야상은 좀 화나신거 같았어요.” 

 

 진로문제로 한바탕 했겠지 뭐. 그녀석이 지망하는 장래가 적힌 신청서를 받을 데는 아무데도 없다. 있으면 나도 한번 보고 싶군. 

 

 “무서운 눈으로 창문을 노려보고 계셨어요. 그리고 차를 세잔정도 더 드시더니──앗,” 

 

 아사히나 선배는 방 구석에 있는 지박령이라도 본것마냥 눈을 크게 뜨더니, 

 

 “스즈미야상이, 쿈군이 없는걸 알아채시고는……” 

 

 알아채고? 

 

 “전화를,” 

 

 그 말과 동시에 내 핸드폰이 울렸다. 

 

 아차. 

 

 생각해보면 지금 아사히나 선배가 말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선 녹화영상이지만 내게 있어선 실시간 실황중계다. 느긋하게 이야기나 듣고있을 때가 아니었던 거다. 무단결석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놓지 않았다. 하다못해 매너모드로 해놓을걸 그랬다. 안받으면 오히려 의심받는다. 일단 그전에 물어보자. 

 

 “아사히나 선배, 전 이때 전화를 받았나요?” 

 

 “네,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럼 받는게 좋겠군. 

 

 “여보세요.” 

 

 『야 너 어딨어,』 

 

 퉁명스런 하루히의 목소리는 어딘가 열받은 듯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방.” 

 

 『왜 거기 있는데. 땡땡이?』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다,” 

 

 이쯤에서 거짓말을 쳐줘야겠지. 

 

 『급한일은 또 뭔데,』 

 

 “아-……” 

 

 마침 샤미센이 침대 밑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 그게, 샤미센이 아픈거 같아서 동물병원에 데려갔었다,” 

 

 『네가?』 

 

 “그래, 집에 동생밖에 없어서 말이다. 나한테 연락을 하더라고.” 

 

 『헤에. 무슨 병인데?』 

 

 “아-……원형탈모증.” 

 

 대충 말을 지어내고 있으니 아사히나 선배가 입을 막고 있었다. 

 

 『샤미센이 탈모증이라고?』 

 

 “아아. 의사 말로는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거랜다. 현재 집에서 요양중이다.” 

 

 『고양이가 스트레스를 느끼기나 하는거야? 그리고 집에서 요양중이라니 그거 샤미센이 맨날 하는거잖아.』 

 

 “뭐 그야 그렇다만, 그, 우리 동생이 너무 귀찮게 하는게 문젠거 같더라. 그래서 내방에 동생 못들어오게 하고 샤미센을 보호하기로 했다.” 

 

 『흐-응』 

 

 넘어갔는지 어쨌는지 하루히는 콧방귀를 뀌곤 말없이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 지금 누구랑 같이 있어?』 

 

 “…………”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통화시간을 세는 액정을 바라봤다. 

 

 어떻게 아는거야? 아사히나 선배는 아무말도 안했고, 찍소리도 안나오게끔 입을 누르고 있는데. 

 

 “아무도 없어,” 

 

 『아, 그래? 너 말투가 좀 이상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쓸데없이 예리한 건 여전하다. 

 

 “샤미센밖에 없어. 뭐하면 바꿔줄까?” 

 

 『됐어.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줘. 그럼 안녕,』 

 

 의외로 깔끔하게 끝났다. 

 

 

1-04

 

 

 

 


 

 

 

 


 

 

 

 

 


 나는 침대에 휴대폰을 던지고 아사히나 선배 무릎으로 다가가는 삼색고양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디 털을 동그랗게 파줄까 생각했다. 까딱 잘못해서 하루히가 문병이라도 오는 날엔 끝장이니까 말야. 

 

 “하루히는 이다음에 뭘 했나요?” 

 

 샤미센의 귀 뒤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아사히나 선배는 다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에-그러니까, 5시 좀 넘어서까지 부실에 있다가 모두 돌아갔어요. 스즈미야상은……아, 좀 조용하셨어요. 부실에서도 계속 잡지만 읽고 계시고……” 

 

 하루히의 불길한 얌전함이 이젠 아사히나 선배마저 알 지경이 되었던 것인가. 

 

 다른 멤버들은 어떨까. 나가토는 사태를 알고 있을게 분명하지만. 

 

 아사히나 선배의 손놀림에 끌려가듯이 샤미센은 목을 고롱고롱 울리며 세일러복 스커트 무릎에다 앞발을 올렸다. 그대로 무릎위를 점거한 샤미센의 등에 손을 놓고는, 

 

 “평소와 달랐던건 없는것 같은데……. 미안해요, 잘 기억이 안나네요.” 

 

 뭐 할수 없죠. 나도 일주일전의 코이즈미 표정따위 새털만큼도 기억 안난다. 그런 질문을 받아도 뭐 평소나 다름없었다, 이런 식일 수 밖에 없다. 

 

 “다른건 없었나요? 내일이나 모레 말입니다.” 

 

 고롱고롱거리는 샤미센의 꼬리를 잡고 있던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내려깔고는,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내 미래 스케줄을 알려주시면 그대로 실행할 생각인데요. 

 

 “에에, 다같이 다음 국경일에 보물찾기를 하게 돼요.” 

 

 보물찾기라고요? 

 

 “네. 스즈미야상이 지도를 가지고 오셔서 그걸로 모두같이 땅을 파러……” 

 

 땅을 파요? 

 

 “네. 츠루야상이 스즈미야상께 드린거에요. 본가 창고를 정리하다가 조상님께서 쓰신 이상한 지도가 나왔다면서요, 이렇게,” 

 

 허공에 뱅어같이 뭐라고 쓰더니, 

 

 “구석에 그림이 그려져있는 오래된 지도였어요.” 

 

 츠루야 선배……, 선배 또 하루히한테 쓸데없는걸 주셨군요. 그보다 땅을 판다고? 헤이안쿄(平安京:평안경, 교토의 옛이름. 약 천년여간 수도였음)의 케비이시(?非違使:헤이안 시대에 쿄토 내의 치안, 풍속, 범죄 등을 단속하고 재판을 관장하던 관직)도 아니고, 대체 어딜 파는거래? 

 

 “산이요.” 

 

 아사히나 선배의 대답은 간결했다. 

 

 “츠루야상 사유지에 있는 산이에요. 학교 가는 오르막 중간에 보이는 둥근 산 있죠,” 

 

 듣기만 해도 벌써부터 지쳐온다. 무슨 ‘은원의 저편에(恩讐の彼方に:일본의 단편소설. 저자 키쿠치 칸[菊地?]. 1919년 ‘중앙공론’에 발표. 신분, 복수 등 봉건성에 새로운 윤리관을 제시한 주지적 작품)‘도 아니고, 산에 올라가서 삽질이라니, 이 드럽게 추운 날씨에 미친거 아니냐. 그리고 츠루야가(家) 소유 산이란 사실에 서프라이즈 포인트는 없다. 개인별장에 사설 스키장까지 있는 판에 근처에 산맥 하나 없을라고. 

 

 나는 한숨을 감추려고조차 하지 않고, 

 

 “그래서, 보물은 찾았나요?” 

 

 “아……아뇨.” 

 

 대답하기 전에 약간 머뭇거리는 듯 하였으나 아사히나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옛날 보물은 묻혀있지 않았어요.” 

 

 안물어볼걸 그랬다. 모처럼의 공휴일에 있지도않은 보물을 찾아 트레져 헌터 흉내를 내야하다니. 헛수고가 될 걸 알면서도 하는 일처럼 허무한 것도 없다. 

 

 “그 다음날인 토요일이랑 일요일에도……” 

 

 또 삽질하러 가는거야? 그러느니 츠루야가(家) 마당을 파는게 훨씬 가능성 있겠다. 온천이라든지 말야. 

 

 “아뇨, 토요일엔 그걸 했어요. 그그, 시내 패트롤요.” 

 

 아아, 그렇군. 이 세상의 불가사의를 찾기 위해 동네를 그냥 왔다갔다하는 SOS단 주요 활동 말인가. 그러고보니 꽤 오랫동안 안한것 같긴 한데, 그건 그렇다치고, 

 

 “일요일까지 이틀 연속으로 그걸 하는건 아니겠죠?” 

 

 “아……아뇨, 해요.” 

 

 아사히나 선배는 어째선지 시선을 돌리더니, 

 

 “월요일도 학교 쉬는날이었으니까요……” 

 

 이제보니 그렇군. 다음주 월요일은 특별반 추천입시가 실시된다고 학생들은 학교 안와도 된다고 했었다. 

 

 “그럼 뭐 이상한 거라도 찾았나요?” 

 

 그때문에 아사히나 선배가 일주일 전으로부터 왔나 싶었는데, 

 

 “아뇨,” 

 

 망설임없이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평소랑 똑같았어요. 차 마시고, 점심 먹고……” 

 

 들으면 들을수록 의문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아사히나 선배가 시간역행을 할 이유는 물론 내가 그렇게 시킬 동기 또한 전혀 찾을 수 없다. 이게 무슨 1년 후나 하다못해 개월 단위의 간격이라면 또 몰라도 바로 다음주에서 와서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나는 나뒹구는 샤미센의 배에 난 털을 간질이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넌지시 관찰했다. 

 

 단 일주일이라도 괜찮다면 이번에도 나가토의 힘을 빌려 미래로 갈 수 있다. 작년 칠석에서 4년전 칠석으로 이동했던 나와 아사히나 선배는 3년간의 시간동결 끝에 원래 시간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3년이란 시간 내내 아무도 안온다는 교훈을 십분 활용하면 되는거다. 이 아사히나 선배를 아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일주일 동안 숨겨두는 것만으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이번엔 잘 필요도 없다. 폐해라면야 이 아사히나 선배가 일주일 나이를 더먹게 된다는 거지만 그정도라면 아무 문제 없을 거다. 

 

 그런데말이지, 그러면 정말 아무 의미 없게 된다. 분명 뭔가 있을텐데 말이지. 아사히나 선배가 여기 온 것은 8일후의 내가 시켜서이고, 또 아사히나 선배(大)의 메시지……. 

 

 “전 그때 어땠나요? 뭐 그럴듯한 말을 하거나 하지 않았나요.” 

 

 “으-음……” 

 

 아사히나 선배는 멍하니 눈을 감은 샤미센의 발바닥을 문지르고 있다.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8일후의 제가 선배에게 시간여행을 하라고 했던 상황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거라면 잘 기억하고 있어요. 저한텐 오늘의 일이니까요.” 

 

 아사히나 선배는 고양이한테서 손을 떼고 공중에 가로선을 몇갠가 그렸다. 

 

 “중정(中庭)에서 이벤트를 하고 있었어요. SOS단 주최 사다리타기 이벤트를요.” 

 

 그건또 뭡니까. 

 

 “당첨된 사람에게……그, 호화상품을 준다고 하는 1인당 500엔짜리 사다리타기에요. 스즈미야상이 확성기로 사람을 불러서……” 

 

 보나마나 부비에 보태쓸 생각이었겠지. 

 

 아사히나 선배는 말하기 힘들다는 듯이 설명했다. 

 

 “제가 상품을 주는 역할이었어요. 참가자가 너무 많아서 좀 무서웠는데……” 

 

 절분때 못했던 걸 기어이 하려했던 모양이군. 

 

 “아사히나 선배, 그때 어떤 모습을 하고 계셨나요? 설마 무녀복장은?” 

 

 “네. 어떻게 알았어요?” 

 

 하루히가 너무나도 할만한 짓이니까 말이지. 눈에 띄기 위해서라면 먼저 복장부터 시작하는게 하루히 방식이다. 어쨌든 눈에만 띄면 된다 그거지 뭐. 아사히나 선배는 그냥 그대로도 시선을 끄는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는데 거기다 장식까지 하게 되면 차마 형용키 힘든 파워가 비약적으로 증대하게 된다. 능력치로 치자면 매력도라는 거다. 

 

 “제가 당첨된 사람에게 상품을 주고, 악수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아사히나 선배는 부끄럽다는 듯이 샤미센의 볼을 잡았다. 

 

 “쿈군이 갑자기 제 손을 끌고 부실로 데려갔어요. 빨리 교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해서 잘은 몰라도 그렇게 하니까 그다음엔 청소도구함에 들어가라더니 8일 전 3시 45분으로 가라고 했어요. 거기에 자기가 기다리고 있을거니까 뒤는 과거 쿈군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해서요. 

 

 아사히나 선배는 상황을 떠올리려는듯이 샤미센의 등을 검지로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곧바로 TPDD의 사용허가가 떨어졌어요. 말도 안될 정도로 빨리요. 마치 제가 신청하기를 기다렸단 듯이 말이에요.”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아사히나 선배(大)는 진작 알고 있었던게 분명하다. 모르겠는건 어째서 8일후의 내가 미래인의 계획에 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냐는 거다. 그 글래머러스 아사히나 선배가 이 아사히나 선배와 시간을 사이에 둔 동일인물이란 건 안다. 하지만 논리와 감정은 별개의 것이다. 작은 아사히나 선배에게 이유모를 시간이동을 여러번 시키면 직성이 풀리나? 이제 좀 가르쳐 줍시다, 아사히나 선배(大). 

 

 안그러면 내가 싸그리 확 불어버릴테니까 말야. 

 

 내 눈앞에 있는 아사히나 선배는 또다시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지난달의 그때와 똑같이, 자신의 무력함 앞에 좌절한 듯한 그림자가 얼굴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무력함으로 치자면 나도 지지 않는다. 지금만 봐도 누구한테 의지할까 궁리하고 있을 정도니까말야. 

 

 “후우,” 

 

 나와 아사히나 선배가 동시에 한숨을 쉬고, 샤미센이 지루하단듯 하품을 했다. 그때, 

 

 “쿈군-, 열어줘-” 

 

 문 너머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문을 열어주니 주스와 카스테라가 얹힌 트레이를 금방이라도 엎을것 같이 들고는 쫄랑쫄랑 들어왔다. 어머니가 신경을 써줬다는 건데, 세사람분이 있는 걸로 봐서 이녀석은 이대로 눌러앉을 생각인가보다. 뒤늦게나마 알아챘다. 아사히나 선배와 내방에 단둘이 있다는 절호의 상황이 연출되었는데 전혀 그런 분위기를 맛보지 못했잖아. 지금이라도 안나가주나 하고 눈에 힘을 줘봤지만 동생은 나를 본 척도 안하고 아사히나 선배 옆에 착 달라붙어서, 

 

 “샤미-, 카스테라 먹을래?” 

 

 작은 카스테라 조각을 고양이 코에 가져가는 동생을 보고, 아사히나 선배는 비로소 부드러운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동생도 가끔은 도움이 된다. 커가면서 이 순진함을 잃지 않기를 오빠로서 바랄 뿐이다. 

 

 

1-05

 

 

 

 


 

 

 

 


 

 

 

 

 


 동생은 고양이를 사이에 두고 한동안 아사히나 선배와 장난치며 놀다가, 나와 아사히나 선배는 비로소 우리집에서 탈출했다. 

 

 손목시계는 오후 6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해는 완전히 져서 어둡고, 입춘은 아직 다음달이다. 

 

 “어떻게 하죠, 쿈군.” 

 

 내 옆을 걷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가 하얀 입김을 내쉬며 말했다. 걸음걸이가 불안한 건 집에 있던 내 신발을 신고 있기 때문이다. 실내화보다는 낫겠다 싶었는데 신데렐라께서 신기에는 너무 크군. 

 

 “그러게 말이에요,” 라며 나도 김을 뿜었다. 

 

 이대로 아사히나 선배를 우리집에 계속 모셔두고 싶기도 했고 그러면 내 동생도 더욱 기뻐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분명 내 부모님도 아사히나 선배가 왜 안돌아가는지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이 소문이 돌고 돌아 쓰잘데 없는 부가정보까지 듬뿍 추가되어 하루히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내게 보다 현실적인 위기가 들이닥칠 게 뻔하다. 샤미센 털이야 밀어버린다 해도 다시 자라나지만 아사히나 선배의 존재를 없애버릴 수는 없다. 아사히나 선배의 우리집 숙박계획은 망상에서 그치는게 좋을 것 같다. 

 

 내 옆의 아사히나 선배는 갈팡질팡하며 걷고 있다. 팔이 서로 닿을만큼 가까워지면 움찔하고 떨어지고 하는 행동이 이 판국에서조차 사랑스럽다. 맞지 않는 신발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거라면 나야 좋긴 하지만 이또한 마냥 좋아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겐 아사히나 선배가 의지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의 강인한 자신감이 없다. 쓰러진 도미노는 다음 도미노를 쓰러트리고, 기어이는 마지막 도미노에 다다르는 것이다. 

 

 그럼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도미노는 누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건대 떠오르는 후보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일단 하루히는 제일 먼저 제외. 왜냐고 묻는 녀석이 있다면 그녀석 머리는 돌대가리라 해도 무방하겠지. 

 

 현시점에 있는 또 하나의 아사히나 선배는 논외다. 아사히나 선배 둘이서 더블로 허둥대는 순간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사태만 악화될 뿐이다. 뭣보다 타임 패러독스에 관해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코이즈미에겐 아직 어느정도 신뢰를 줄 수 있지만, 그녀석이 소속된 ‘기관’에서 미래인을 어떻게 다뤄줄지 미지수고, 그런 정체도 알수없는 조직에 아사히나 선배를 맡겼다간 어떤 짓을 해댈지 모른다. 아라카와 씨나 모리 씨 그리고 타마루 씨 형제는 착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코이즈미가 자칭하는 말단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위에서 지휘하는 녀석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얻기엔 신용도가 좀 부족하다. 

 

 따라서, 단순한 제거법을 통해 한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미 이번 사태에 대해 알고 있는 희유(稀有:흔하지 아니하고 드묾)의 존재로서 SOS단 배후의 실력자. 정체불명의 두목을 받들면서도 코이즈미네처럼 즉물적(卽物的:사물에 주관을 섞지 않고 실제의 사물에 비추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진 않은 존재……. 

 

 남은 건 그녀석뿐이다. 

 

 따라서, 어디로 가야하는가 하면 역시 거기밖에 없다 그거다. 

 

 즉, 나가토 유키가 나설 차례가 왔다는 것이다. 이건 또 나가토냐느니 이젠 그것도 질렸다느니 하는 것 이전의 문제다. 미래인과 우주인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게 훨씬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래에서 과거로 오면 반드시 나가토네 집으로 가게끔 설정되는게 아닌가 싶군 그래. 

 

 거기다──, 나는 생각했다. 

 

 이 아사히나 선배를 현시점에 있는 본인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그쪽 아사히나 선배(現)를 부실에서 데리고 나가준 그녀석이다. 어쩌면 사정까지 설명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가토상 댁에요?” 

 

 하지만 아사히나 선배는 나를 올려다보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나는 힘을 돋궈주기 위해, 

 

 “그녀석이라면 괜찮을겁니다. 방도 텅텅 비었고, 일주일정도는 재워주겠죠.” 

 

 나도 잠옷을 들고가고 싶을 지경이다. 그럴듯한 변명만 떠오른다면 말이지. 

 

 “하지만……” 

 

 시선을 떨어트리곤, 

 

 “나가토상이랑 단둘이 있는건, 좀……그……. 일주일이나……말이에요?” 

 

 겁먹으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나가토가 아사히나 선배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지금까지도 여러번 신세를 졌었고, 바로 요전에도 같이 시간여행까지 갔잖습니까. 

 

 “그건 알지만요……” 

 

 이상하게도 이때 아사히나 선배는 나를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슬쩍 보더니, 

 

 “제가 같이 있으면 나가토상도 별로 재미없어 하시지 않을까요……” 

 

 “네? 왜요?” 

 

 나가토가 어떤 걸 재밌어하는지 아사히나 선배가 어떻게 아는겁니까? 그녀석이라면 자기 10센티 앞에서 정신나간 놈이 알몸으로 쌩쇼를 해도 꿈쩍도 안할 텐데. 

 

 내가 대답을 기대하며 바라보고 있으니 아사히나 선배는 볼을 불려서는 획하고 앞을 보며 삐진 듯이 말했다. 

 

 “……됐어요. 흥,” 

 


 

 

 

 

 

 


 최소한의 말수로 전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전하는 것이 나가토의 장점이고, 이때도 그랬다. 맨션 입구에서 이젠 내 지문도 잔뜩 박혀있을 넘버키와 벨버튼을 누른 내 귀에 들려온 것은, 

 

 『…………』 

 

 평소와 같은 무언의 리액션이었다. 

 

 “나다. 아사히나 선배도 있고. 좀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들어와』 

 

 지금까지 이 대화를 몇 번이나 했을까. 대소를 막론하고 내가 아사히나 선배를 데려온 게, 어디보자, 이걸로 네 번째인가. 첫 번째는 4년전 칠석, 두 번째도 그날이고, 세 번째는 지난달 2일이었다. 

 

 아사히나 선배가 약간 불안해하는 것도 매번 볼 수 있는 광경이며, 그것은 엘리베이터에서 7층 통로를 걷고 있는 동안에도 변함이 없다. 내 소매를 꼭 잡고 달리 비유할 수도 없는 아기동물틱한 아사히나 선배, 이 사람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세상에 지킬 것이 뭐가 있을 것인가. 

 

 “…………” 

 

 나가토는 방문을 반쯤 열어 몸을 내밀다시피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교복차림은 이제 나가토와는 뗄래야 뗄수없는 것이다. 이녀석이 사복을 입고 있는 걸 본 건 여름합숙이 처음이고 겨울합숙이 마지막이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은 달리 말하고 싶은 의견이 있다는 것 같진 않았는데, 아사히나 선배는 벌써부터 잔뜩 얼어있다. 

 

 “저……죄송합니다, 나가토상…….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여기 오는 것 같아서……” 

 

 사실 그렇긴 하지. 

 

 “괜찮아.” 

 

 나가토는 냉담하게 끄덕였다. 

 

 “들어와.” 

 

 아사히나 선배의 이 흠칫하는 태도는 나가토를 대하는 지침으로서 태양계에서 바나드성계(Barnard星系)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등을 밀자 비로소 발을 들여놓았다. 지난달 이 집 현관에서 잠들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정도로 어색해하는 분위기였다. 

 

 “실례하겠습니다……” 

 

 한때 나가토네 집의 살풍경한 모습은 오로지 최소한의 필수품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 봄에 내가 맨 처음 왔을땐 없었던 커튼이 페이즈리 무늬와 함께 거실 베란다 창 걸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인상은 꽤 변한다. 벽엔 크리스마스 이후로 방치된 트윈스타 게임이 돌돌 말려서 세워져 있다. 뭐 그렇다곤 해도 TV나 카페트 하나 없는건 예전 그대로다. 휑한 거실에 있는거라곤 코타츠 정도겠지만 이불도 안깔린 테이블 뿐이다. 한번 침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기도 하지만, 안보는게 나을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만약, 그 방이 팬시한 벽지나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고 공주님같은 침대 머리맡에 인형이라도 놓여져 있는 날에는 내가 나가토에 관련한 일체의 전제조건을 0으로 전면 리셋하고 처음부터 다시 정보구축을 시켜야만 한다. 그지경에 다다른 내가 할 말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여명기로 거슬러올라가도 존재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내일 무슨일이 터질지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걸 물어봐야 한다. 

 

 “저기 나가토, 넌 이 아사히나 선배가 미래……” 에서 온건 어느쪽이든 마찬가지지 참. “……가 아니라, 8일 후 미래에서 온 또 하나의 아사히나 선배라는 건 알지?” 

 

 나는 거실 코타츠 테이블 한쪽에 앉으며 말했다. 

 

 “알아.” 

 

 나가토는 내 정면에 정좌하며 아직 서있는 아사히나 선배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움찔한 아사히나 선배는 허겁지겁 내 옆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아사히나 선배는 왜 자기가 이 시간대로 왔는지 그 이유를 모르신댄다.” 내가 설명했다. “하시는 말에 따르면 그 시간대의 내가 가라고 시켰나본데……. 혹시 나가토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냐?” 

 

 설령 모른다고 해도 이녀석이라면 미래 일까지 가르쳐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몰라.” 

 

 이런 대답을 들어도 별로 동요치 않았다. 모르면 지금부터 알면 되는거다. 그 동기인가 뭐시긴가 하는걸로 말이다. 

 

 그러나 나가토는 내 기대를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불가능하다. 현재의 나는 과거 미래를 불문하고 그 어떠한 시공연속체에 존재하는 내 자신의 이시간동위체(異時間同位體)와 동기할 수 없다.” 

 

 내가 왜냐고 묻기도 전에, 

 

 “금지처리 코드를 신청했기 때문에.” 

 

 아직도 모르겠다. 대체 왜. 

 

 “내 자율활동에 차질을 빚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게 봉인이라니, 너네 두목이 그렇게 한거냐. 

 

 “정보통합사념체는 동의했을 뿐.” 

 

 나가토의 무표정은 어딘가 매우 맑아 보였다. 

 

 “나의 의지.” 

 

 나가토는 전보를 복창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제 코드는 암호화되어 나 외의 다른 인터페이스의 관리하에 놓여있다. 내 의지로는 해제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에-, 그러니까 즉 나가토는 미래의 자신과 정보를 교환할 수 없으니, 더 이상 미래의 일을 알 방도가 없다 그거냐. 따라서 8일후에서 아사히나 선배가 온 이유도 불명이란 말이지. 그럼 나보고 어쩌란 거냐? 

 

 “너의 판단으로 행동하면 된다.” 

 

 진지한 검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작게 비치고 있다. 

 

 “내가 그리 하고 있듯이.” 

 

 나는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다. 나가토가 자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 난 나가토한테 설교를 받고 있는건가? 

 

 “동기기능을 잃은 것으로 자율기동을 보다 자유화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나는 현시점에 있는 내 자신만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 미래에 속박당할 일은 없다.” 

 

 나가토 치고는 말을 많이 해주는군. 대체 무엇이 나가토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끔 하였는가. 

 

 “미래의 내 자신의 책임은 현재의 내가 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가토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도 그렇다. 그것이” 

 

 나가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의 미래.” 

 

1-06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만약 내게 예지능력이 있어서 8일후까지의 내 행동을 전부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치자. 그리고 도저히 그 결과를 바꿀수 없다는 걸 안다 해보자. 어떻게 해도 미래를 바꿀 수 없고, 뭘 해도 결국엔 그렇게 된다고 해서 달리 방법이 없다고 손놓고 포기하는 것이 옳은 길인가.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의 결과가 같다면 그것도 같은 결과라 할수 있는가? 

 

 나가토는 노력했을 것이다. 이녀석은 자신이 오류(error)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게끔 노력했을 거라는 건 의문형으로 둘 수밖에 없는 사실이 아쉽다. 어쩌면 알고 있었던 게 원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고 말았다. 누구 탓이냐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따지자면 내탓이다. 나가토가 변화하고 있는걸 느끼면서도 그 이상 생각지 않았던 내가 원인인 것이다. 약간은 하루히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지만 이것만큼은 아무에게도 떠넘길 수 없는 정신적 부담이다. 

 

 지난달, 미래의 나가토는 과거의 나가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지 않으므로. 

 

 자기가 해야할 걸 미리 알려주기도 싫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가토는 자기가 취해야 할 행동을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 결심할 것도 없다. 나도 그렇지 않은가. 

 

 나는 미래에서 온 자신이 한 말을 듣고 과거로 가서 거기 있던 자신에게 같은 말을 했다. 차후 어떻게 될지도 듣지 못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될거라는 건 이미 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해서 헤쳐왔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괜찮아.” 

 

 나가토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검고 무감정한 눈동자가 유난히 빛나보였다. 

 

 “내 최우선 책무는 너와 스즈미야 하루히의 보전.” 

 

 아사히나 선배도 넣어주면 좋겠군 그래. 괜찮으면 코이즈미도. 설산의 저택에서 널 꽤나 편드는 말을 했다고. 

 

 나가토는 끄덕였다. 

 

 “적성(敵性) 존재가 의도적으로 개입해왔을 경우에는.” 

 

 말하자면 어떤 거 말인데? 

 

 “정보통합사념체와 기원을 달리하는 광성대(廣城帶) 우주 존재. 전에 우리를 이공간에 감금했었다.” 

 

 설산 산장사건 말이로구만. 

 

 “그들은 정보통합사념체와 멀리 떨어진──” 

 

 나가토는 사용할 단어를 찾으려는 듯 입을 잠시 다물었다가, 

 

 “──위치, 에 존재하고 있었다. 상호의 존재는 확인하고 있었지만 접촉은 없었다. 상호간의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있었기에. 그러나, 그들도 알아채고 말았다.” 

 

 뭘. 

 

 “스즈미야 하루히를.” 

 

 오랜만에 느끼는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루히를 특별시하고, 그녀석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며, 때로는 끼어들기까지 한다. 

 

 “설산 때 조난당했던건 그녀석들 짓이었던 건가……” 

 

 “그래. 내게 부하(負荷)를 주고, 독력(獨力:혼자만의 힘)으로의 위기회피를 곤란케 했다.” 

 

 그때 너네 두목은 뭐하고 있었는데. 낮잠이라도 잤대냐? 

 

 “유기단말의 기능으로는 정보통합사념체의 총의(總意)를 완전히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하며 나가토는 2밀리 정도 고개를 기울여, 

 

 “그들이 발신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일종이라고 인식한 듯 보인다.” 

 

 어떻게 된 커뮤니케이션이 그따구냐. 우리를 잡아다 가둬놓고는. 현대사회에서 그딴 접근은 안통한다고. 

 

 “그들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이질(異質)로서, 사고 프로세스(process)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들도 우리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도저히 안된다 그거냐. 나는 그녀석들이 하루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싶은데. 

 

 “완전한 정보전달은 불가능하다.” 

 

 그렇겠지. 인사 대신에 눈보라를 가져오는 놈들인데 대화가 되겠니. 

 

 “약간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나가토는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그들이 나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낸다면, 불완전하나마 언어를 통한 접촉이 가능해진다. 확률은 높다.” 

 

 설마 벌써 어디 있는건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다.” 

 

 별로 안그랬으면 좋겠지만, 안나오는게 이상한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나. 

 

 “아……” 

 

 아사히나 선배가 날숨같은 목소리를 냈다. 

 

 “설마……” 

 

 아사히나 선배는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한, 그것도 엄청난 것에 짐작이 간다는 듯한 얼굴로 나가토를 보았다. 나가토도 아사히나 선배를 보았다. 난 그 두사람을 보고 미래인과 우주인이 서로를 응시하는 모습에 약간 놀랐다. 

 

 “왜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허둥지둥 표정을 정리하는 아사히나 선배에 정신을 놓고 있으니 나가토가 갑자기 일어섰다.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차를 가져올게.” 

 

 그렇게 말하곤 부엌을 향하다 갑자기 또 멈춰서서 뒤돌아보았다. 

 

 “아니면” 

 

 무슨 말을 할라나 하고 내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으니, 짧은 의문형의 단어가 날아왔다. 

 

 “저녁밥?” 

 


 

 

 

 

 

 

 

 


 나가토의 오늘 저녁 메뉴는 통조림 인스턴트 카레였다. 5인분은 족히 될 만한 크기의 커다란 캔을 그대로 냄비에 넣고 그냥 끓이기만 하는 조리엔 뭐라 딱히 표현할 수 없는 나가토스러움이 느껴진다. 하루히가 여기 있었다면 카레에 별 쓰잘데 없는걸 왕창 갖다넣을 거란 생각을 하고 또 나는 뭐라 표현키 힘든 기분이 들었다. 맛과 즐거움 중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가 하며. 

 

 그러고보니 정말 저녁먹을 때였군 그래. 

 

 아사히나 선배가 거실에 앉아서 몸둘바를 몰라 하는 건 나가토가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도움을 자청한 아사히나 선배에게, 

 

 “손님” 

 

 이라고 말한 나가토는 묵묵히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선반에서 카레 캔을 꺼내서 양배추를 썬것 뿐인가. 

 

 비로소 그릇에 갓 지은 밥을 산더미같이 퍼담고 거기다 카레를 붓는다는 식의 심플간단하면서도 호쾌한 조리법으로 된 메인디쉬와, 또 산더미같이 쌓인 양배추 온리의 샐러드가 나와 아사히나 선배 앞에 날라져왔다.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아사히나 선배는 계속 고개를 숙이며 그릇을 내려다보며, 산맥처럼 쌓인 대량의 카레라이스에 위병을 삼키는 듯한 표정으로 굳어선 한방울의 땀을 흘렸다. 

 

 나가토는 자기 자리에 앉더니, 

 

 “먹어.” 

 

 “자, 잘먹겠습니다,” 

 

 당연히 나도 두손을 모았다. 카레 냄새를 맡은 순간부터 울리기 시작했던 위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말이지. 손수 만든 요리가 아닌 건 조금 아쉽지만, 가끔은 인스턴트도 괜찮고,  말없이 카레 산을 무너뜨리는 나가토의 먹는 모습과 예절바르게 먹는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을 바라보며하는 식사도 색다른 맛이다. 이야기가 오가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하루히가 있었다면 혼자서 떠들었겠지만), 식탁 풍경으로썬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 후, 눈을 깜빡이는 아사히나 선배가 남긴 반분어치 남짓의 카레를 나가토와 같이 갈라먹고, 식후에 나가토가 타준 차를 마신 시점에서, 

 

 “잘 먹었다. 그럼 난 이쯤에서,” 

 

 “에, 쿈군 자고 가시는거 아니었어요?” 

 

 고상하게 차를 마시며 명치를 누르고 있던 아사히나 선배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가토마저 찻잔에 입을 댄 채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전……” 

 

 여기서 ‘그것도 좋겠네요’ 같은 말을 했을 경우의 망상이 엔진 폭주의 우주선과 같이 빠르게 머리를 휘저었다. 나가토가 빌려준 잠옷을 입은 아사히나 선배가 목욕후에 젖은 머리를 목욕수건으로 비비며 부끄러워하고, 그 옆에서 나가토가 머리에서 김을 뿜으며 꼴깍꼴깍 우유를 마셔대는 씬이 보였다가 사라져선 방에 깔린 두 이불의 추억으로 기억이 되돌아가더니 전혀 상관도 없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뇌내 스크린에 하루히의 메롱 표정이 나온 시점에서 제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돌아갈게요. 내일 학교 끝나고 들리죠.” 

 

 그리고 집 주인에게도, 

 

 “괜찮겠냐? 나가토.” 

 

 고개를 끄덕이는 나가토. 나는 매우 불안해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끄덕여주며, 

 

 “그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있어 주세요. 걱정마세요, 다 어떻게든 될거니까요.” 

 

 안심시키려는 빈말이 아니다. 정 안되면 나가토한테 시간동결이라도 해달라고 하면 된다. 첫 번째 칠석 역행때 그렇게 해서 3년후로 돌아왔는데 1주일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그리고 내겐 다른 예감도 있다. 아사히나 선배가 아무 의미도 없이 시간역행을 해왔을 리는 없고 8일후의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의 일인데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그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주머니 속에 든 편지가 알려주고 있다. 

 

 그렇죠? 아사히나 선배 어른 버전씨. 

 

 이 일에 선배가 관련되어 있는건 틀림없는 거겠죠. 

 

 

 

 

 

 

 

 불쌍하기까지 할 지경으로 보호욕을 돋구는 아사히나 선배의 떨리는 얼굴에 이별을 고하고 나는 한겨울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귀갓길에 올랐다. 

 

 그 도중에 생각했던 거라면, 나가토의 능력제한 고백이다. 코이즈미, 네 예감은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가토가 보통 여학생이 되고, 정보통합사념체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존재로서 문예부실의 일원이 될 날도 그리 멀지만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무슨 일이 생길때마다 나가토의 힘을 빌리러 가지 않아도 된다. 쓸데없는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된다. 같이 고민하고 걱정할 수 있는 보통 친구가 될 수 있다. 

 

 나가토의 힘이 없었다면,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큰 곤경이 닥칠 수도 있었겠지.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건데? 

 

 작년 12월, 하루히와 코이즈미가 없어지고 아사히나 선배가 나를 모르게 됐던 그 이상한 세계를 원래대로 돌렸던 데에 아무런 후회도 없다. 하지만 약간의 미련은 남아있다. 아사쿠라가 오뎅을 가지고 왔던 그날의 일──. 

 

 그 다소곳한 미소를 다시한번 보고 싶었다. 

 

 그게 이 세상에서 가능하다면, 당연히 그러는 게 좋다. 

 

 

 

 

 

-제 1화 끝

 

 

 

 

제 2화 

 


 

 

 

 

 

 

 

 

 

 

 

 


 그날, 등교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첫 번째 물체는 신발장 속의 봉투였다. 

 

 “그럼 그렇지,” 

 

 나는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게 재빨리 블레이저 주머니에 집어넣고 서둘러 신발을 갈아신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비밀 편지를 펴보기에 화장실처럼 최적의 장소는 없다. 

 

 봉투를 열어 접혀있는 편지지를 꺼냈다. 두장이었다. 

 

 첫 번째 종이엔 틀림없는 그녀의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동 ＸＸ번지 △△호에 있는 교차점에서 남쪽으로 가면, 근처에 포장되지 않은 뒷골목이 있습니다. 오늘 오후 6시 12분에서 15분 사이에 그 뒷골목과 국도가 교차하는 지점에 그림대로의 물건을 가져다 놓아 주세요. 

 P.S. 반드시 아사히나 미쿠루와 함께.』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건 거기까지다. 문장 맨 끝에는 듣도보도 못한 기호의 나열이 서명처럼 쓰여있었는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사인이 아닌가 싶었는데 편지 내용도 의미가 불명한 것임은 틀림이 없었고 나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무슨 지령이야 이건 또.” 

 

 그리고 내 고개는 두 번째 종이를 본 순간 더욱 기울여지게 되었다. 

 

 “뭐야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간략화됐음에도 도저히 잘 그렸다고는 할 수 없는 지도와, 아무래도 지점을 가리키는 듯한 Ｘ 표시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그 Ｘ 표시에 갖다놓으라고 하는 물체의 그림과 설명은 진짜 낙서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뭘 하란 겁니까, 아사히나 선배.” 

 

 오늘 오후 6시 12분부터 3분 이내로 그걸 거기에 갖다놓으라? 

 

 이런걸 하면 뭐가 바뀌는데? 

 

 나는 문장을 다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다가 편지지를 봉투에 넣어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만에 하나 하루히한테 들키는 날에는 모든게 끝장이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까 말야.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곰곰이 생각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걸로 약간은 풀렸다. 아사히나 선배가 8일 후에서 여기로 보내진 이유는 이때문이리라. 이 시간대에서 무언가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건 지금 학교에 있는 아사히나 선배에겐 불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데 왜 불가능이지? 

 

 끝없는 의문과 격투를 벌이며 교실에 도착한 나를 반겨준 건 여전히 이상하게 얌전한 하루히의 얼굴이었다. 

 

 하루히는 슬쩍 나를 올려다보더니, 

 

 “샤미센은 어때?” 

 

 “아-” 

 

 그러고보니 그렇군. 

 

 “뭐 그저 그래.” 

 

 “아 그래,” 

 

 차가운 의자에 앉은 나는 태연히 하루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하다. 지루한 듯이 턱을 괴곤 어딘가 불쾌하단 듯이 입을 다물고 있는데, 요 한동안은 계속 이런 상태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대로 깊이 생각할 틈은 없었다. 

 “근데, 하루히,” 

 

 “왜,” 

 

 “사실 그 샤미센 말인데, 오늘도 병원에 좀 데려갈 필요가 있다. 한동안 병원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고 해서 말이지. 그래서 오늘도 부실은 못갈거 같다. 미안하다만……” 

 

 보나마나 눈을 부라리며 노려볼거라 싶었는데, 

 

 “알았어, 그럼.” 

 

 어이구, 그냥 허락해주네. 그렇게 샤미센이 걱정되냐. 

 

 “뭐야 그 표정은,” 

 

 하루히는 놀란 표정의 나를 보고 눈썹에 힘을 풀었다. 

 

 “무단 땡땡이는 안돼도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나도 개념있는 단장이니까 잔소린 안해.” 

 

 개념도 있고 잔소리도 안하는 하루히따위 지금까지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나 하며 기억을 더듬다가, 혹시 이게 그 첫 번째 체험이 아닌가 하고 있으니, 

 

 “나중에 문병갈테니까 샤미센한텐 기운차리라고 전해줘. 그리고 너네 동생 샤미센 너무 좋아하는거 아냐.” 

 

 대충 말하더니 손목 위에 올린 턱을 살짝 흔들었다. 불쾌하단 듯이 말문을 닫는 하루히가 별로 자연스럽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이번만큼은 고마울 따름이다. 내겐 ‘아사히나 문제’란 숙제가 있으니까 말이지. 

 

 근데 이 기분은 뭐지. 뒷자리에서 그녀석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이상한 그리움과 신선함을 동시에 느낀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일어나 있는 시간의 반이라도 좋으니 이런 하루히였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안녕들 하냐!” 

 

 예비종이 채 다 울리기 전에 담임 오카베가 경쾌히 들어왔다. 

 

 알고는 있다. 

 

 하루히의 우울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미래인에게서 들은 첫 번째 구체적 예언이로군. 아사히나 선배의 말에 따르면 지금부터 이녀석은 우리를 보물찾기에 끌고가고 그 후에도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닌다고 한다. 일어나 있는 시간의 나머지 반은 그런 하루히여도 좋다. 

 

 좋든 나쁘든 그리하여 안심하게 되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나는 서둘러 도시락을 퍼먹고 부실을 향했다. 

 

 교실에 없다는 건 여기에 있다는 뜻이고, 역시나 나가토는 그 긴 테이블 지정석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나가토, 아사히나 선밴 어떠냐?” 

 

 내가 데려갔으니 신경은 써두는게 좋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나가토는 떨구고 있던 시선을 내쪽으로 고정하더니 질문의 의미를 헤아리려는 듯이 침묵하고선, 

 

 “어떠냐니?” 

 

 “폐가 되는건 아니지.” 

 

 “아냐.” 

 

 그거 다행이다. 나는 나가토와 아사히나 선배가 잠옷바람으로 나란히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아아 참으로 착한 장면이다. 

 

 “하지만,” 

 

 나가토는 평탄한 목소리로, 

 

 “나와 같이 있으면 안정되지 않는 듯 하다.” 

 

 광낸 동전처럼 빛나는 눈빛이 다시 하드커버 책으로 떨어졌다. 

 

 나는 말없이 나가토를 바라보고 그 흰 얼굴에 어떤 표정이 있지 않은지 찾기 시작했다. 아쉬워 하진 않는가, 좀 쓸쓸해하진 않는가──싶었지만 무표정의 나가토에게선 아무런 감정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아사히나 선배가 안절부절 못하는 건 알 것 같다. 아사히나 선배도 선배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나가토와 단둘이서 밀실에 갇히게 되면 침착성을 잃을 것이다. 나나 하루히나 코이즈미 외의 인간이라면 대개 그럴 것이고, 뭐 츠루야 선배는 괜찮겠지만,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나가토가 아사히나 선배의 그런 속성을 이해하고, 그런 태도를 이렇게 말했다는것에 포인트가 있는게 아닐래나. 

 

 “나도 아사히나 선배도 늘 네 신세만 지고 있어서 말이지. 신경이 쓰여서 그런다.” 

 

 “피차일반.” 

 

 나가토는 시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도 힘을 빌렸으니까.” 

 

 하지만 가장 많이 해주는 건 나가토 너잖아. 난 몇 번이고 네 덕에 목숨을 구했고, 거의 대부분의 사건에서 우리를 크게 도와주었으니까 말야. 아사히나 선배나 코이즈미가 전혀 도움이 안됐다는 건 아니지만 네가 없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았을테니까 말야. 

 

 “내가 원인이었던 것도 있어.”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굳이 따지자면 나랑 정보통합사념체란 녀석에게 책임을 물어야할 일이다. 너 혼자서 짊어질 일이 아니었다구. 그 사건 덕에 나는 비로소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말야. 포니테일 하루히도 볼 수 있었다. 내게 변화가 있었다면 그 경험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래.”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나가토는 페이지를 넘겼다. 바람이 불어 부실 창문을 진동시켰다. 나는 전기난로의 전원을 켜면서, 

 

 “너네 두목은 뭐하고있냐? 급진파는 제대로 눌러주고 있겠지.” 

 

 “정보통합사념체의 의사통일은 불완전. 하지만 지금은 주류파가 메인.” 

 

 오호, 의식생명 우주인에게도 파벌투쟁이 있는게로군. 

 

 “넌 주류파에 속해있는거냐” 

 

 “그래.” 

 

 아사쿠라는 급진파의 첨병(尖兵)이었다. 잠깐, 달랑 요 두 개뿐이냐? 또 있냐, 그런 파가. 

 

 “내가 아는 한은, 온건파, 혁신파, 절충파, 사색파가 존재한다.” 

 

 거 많기도 하구만. 아사쿠라는 나를 죽여서 하루히를 자극한다는 뭐 웃기지도 않는 계획을 꾸미고, 나가토는 그런 아사쿠라를 소멸시켰다. 위쪽에선 아직 시끄러운 모양이군. 

 

 내가 하늘 위 신들과의 교제를 시각화하고 있으니, 

 

 “다른 파의 생각은 내게 전해지지 않아.” 

 

 나가토는 찬찬히 고개를 들어올려 책에서 시선을 뗐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다.” 

 

 기복없는 목소리가 더없이 믿음직스럽게 울려퍼졌다. 

 

 “누구 마음대로도 되지 않아.” 


2-03

 


 

 

 

 

 

 

 

 

 

 

 

 


 우리는 편지의 지시에 따라 해당 장소로 이동했다. 이동수단은 자전거고, 아사히나 선배를 짐받이에 태워 둘이서 같이 탔다는건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그 장소는 시내에서도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대충 어슬렁거리면서 시간을 죽이고, 손목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후 6시 1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나는 12분에서 15분의 이 3분 사이에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걸 설치해야 한다.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건 해가 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긴 주택지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인적도 드문 길이었다. 그 길은 또 샛길로 파생되며, 거기부터는 포장이 되어있지 않다. 사설 도로도 아닌것 같고 그렇다고 어디로 통하는 지름길 같은 것도 아닌 터라 웬만하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지도에 표시된 Ｘ는 그 길이 국도로 바뀌는 아스팔트에서 몇센티미터 지점에 붙어있었다. 

 

 통행인이 거의 없는 게 다행이다.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행위는 그다지 보기 좋진 않은, 말그대로 장난이니까 말이지. 

 

 준비물은 망치, 못, 빈 깡통 세 개. 뭘 하려는건지 대충 예상이 가지 않냐? 

 

 “시작해볼까요.” 

 

 “네.” 

 

 전봇대 그림자에 가려진 나는 곧바로 목표지점으로 달려가 망치로 지면에다 못을 박기 시작했다. 꽤 단단하다. 못을 적당한 깊이로 박아넣기 위해선 꽤 강하게 칠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큰 소리를 내는건 좋지 않고, 보행자에게 목격당하는 건 더더욱 좋지 않다. 

 

 이 작업은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지면에 박힌 못에 깡통을 씌워, 아사히나 선배가 기다리는 전봇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좀더 떨어진 쪽의 어둠으로 몸을 숨겼다. 

 

 자,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장치가 어떤 작용을 할 것인지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뭐 그리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시각은 오후 6시 14분. 

 

 내가 숨어있는 길 반대쪽에서 남자로 보이는 그림자가 느리작한 걸음으로 걸어온다. 롱코트를 잎고 숄더백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진 않다. 

 

 남자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는데 그다지 발랄한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그 걸음이 뚝하고 멈췄다. 시선은 지면에 떨어져있는 깡통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하아……” 

 

 한숨이 들려왔다.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에 마음아파하는 선량한 사람인가 싶었더만, 성큼성큼 주스캔으로 다가가더니 아주 끝내주는 폼으로 한쪽 발을 백스윙하더니, 말릴 틈도 없이 킥을 내질렀다. 

 

 물론 그 캔은 어느 골대에도 꽂히지 않았고, 그러기는 커녕 거기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읏!? 아아아아악!” 

 

 남자는 발을 감싸쥐고 나뒹굴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으으으윽!” 

 

 말그대로 칠전팔도(七顚八倒), 죽을만큼 아파하는 것 같았다. 

 

 “젠장, 누구야 이거……하아…” 

 

 나와 아사히나 선배는 얼굴을 마주봤다. 

 

 저 장치의 목적이 꼴랑 이거에요? 

 

 글쎄요……? 

 

 우리는 시선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동시에 끄덕이고, 어둠속에서 나왔다.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이라는 설정으로 가자. 

 

 “괜찮으세요?” 

 

 두손으로 발끝을 잡고 누운 남자에게 아사히나 선배가 말을 걸었다. 나는 태연히 아사히나 선배 옆을 걷다가 신음소리를 내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아아?” 

 

 일그러진 얼굴은 생판 모르는 20대 중반쯤의 마른 남자였다. 롱코트 안은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평범한 샐러리만 같은 모습이다. 

 

 “도와드리죠,” 

 

 라고 말했다. 양심같은건 버리고 말이지. 

 

 “으으……부탁하네. 고맙구만,” 

 

 남자는 내 손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고, 얼굴을 찌푸리고 한쪽발을 들어올렸다. 

 

 “젠장, 누구야, 이딴 유치한 장난을 하는게……” 

 

 “너무하네요.” 

 

 나는 바닥에 웅크려 깡통을 주워올렸다. 아주 제대로 찌그러져있다. 고정시켜놨던 못도 대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어찌나 센 슛을 먹였길래 이렇게 되냐. 

 

 “이거 위험하네,”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못을 뺐다. 남자의 킥 덕분에 비교적 쉽게 뺄 수 있었다. 증거인멸을 위해 주머니에 넣어두자. 

 

 남자는 한쪽 발을 들었다 놨다가 하며 그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포기한 듯 혀를 찼다. 

 

 “이런 젠장. 부러지진 않은거 같은데……. 발목이라도 뼜나?” 

 

 “저,” 라는 아사히나 선배. “병원에 가보시는게……” 

 

 “그러는게 좋겠군.” 

 

 남자는 깽깽발로 뛰며 차가 다니는 도로로 향해 불안불안하게 가기 시작했다. 

 

 “부축해드릴게요,” 

 

 나는 남자가 쓰러지지 않게 딱 붙어서, 

 

 “구급차를 부를까요?” 

 

 “아아, 그건 됐네. 택시타고 갈테니. 겨우 이거가지고 구급차 부르는것도 그렇고. 미안한데 자네, 길까지 이렇게 가도 되겠나?” 

 

 “예, 괜찮습니다.” 

 

 사실상 내탓이다. 사실은 미안해 죽을 지경이라구. 

 

 내 어깨를 잡고 폴짝폴짝 뛰며 걷는 남자는, 가로등 빛 아래서 보니 꽤나 괜찮은 미남이었다. 

 

 “일이 좀 안풀려서 말이지,” 

 

 걷는 중 그는 변명같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울적한 마음을 푼답시고 깡통을 찬게 나빴다. 자업자득이지.” 

 

 “아뇨, 그런걸 만들어논 녀석이 나쁜놈이죠.” 

 

 “그것도 그래. 대체 어떤 놈이냐. 요즘에 저딴 장난을 하다니,” 

 

 그는 나와, 뒤를 쫄레쫄레 따라오는 아사히나 선배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어보이며, 

 

 “저 아인 자네 여자친군가?” 

 

 대답을 망설이길 약 2초, 

 

 “네, 뭐……” 

 

 이건 뻥이지만 뭐 그냥 그렇게 해두지. 

 

 “그런가,” 

 

 남자는 쉽게 납득한듯 다시 고통을 참는 얼굴로 돌아왔다. 

 

 교차점으로 나온 우리는 타이밍좋게 지나가던 빈 택시를 잡아 이 추운데도 진땀을 흘리는 남자를 뒷자리에 태워주었다. 

 

 “고맙네, 자네들. 미안했네,” 

 

 아뇨 별말씀을, 따지고 보면 우리 탓이다. 그리고 이 아사히나 선배는 무죄고, 만약 진상을 알게 된다고 해도 복수는 몇 년후인가의 그녀한테 부탁합니다……라는 생각과 함께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이에 택시는 출발하고, 남겨진 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물었다. 

 

 “이거면 된건가요.” 

 

 “으-음……” 

 

 아사히나 선배는 불안스럽게 한숨을 쉬고, 자기 몸을 감쌌다. 

 

 오후 6시 반이 되어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중대한 제약이 있다. 

 

 그것은, 나와 이 아사히나 선배가 같이 있는 장면을 또 하나의 아사히나 선배나 하루히에게 들켜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하루히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사히나 선배(현재의 그녀 말이다)가 또하나의 자신을 보고 그저 우연히 자신과 똑 닮은 사람이라는 선에서 납득해줄 만큼 머리가 안돌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집단 하교하고 있는 현재의 SOS단 멤버와 마주쳤다가는 그건 뭐 최악의 사태라고 할 수 있겠다. 

 

 단 아사히나 선배(8일 후의 선배)에 따르면 그녀는 이 기간에 자신의 도플갱어(Doppelganger:분신)를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우리가 대충 아무데나 싸돌아다녀도 괜찮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만 어디서 뭐가 잘못될지 모르는 일이고, 여기서 노력한 겨과가 미래에 반영된다고 하면 나는 이 시간대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걸 우습게 봐선 절대절대 안된다……는 게 되나? 

 

 모르겠다. 왜 이리 골치아파지는거냐고. 시간이동 해온게 아사히나 선배(8일후)가 아니라 (大) 쪽이었으면 탈없이 잘 굴러갔을텐데. 

 

 나는 곁에 있는 작은 체구의 상급생을 바라보았다. 

 

 키타고 세일러복을 입은 그녀는 추운듯 몸이 굳어있다. 거센 바람이 부는 2월 밤에 뭐 걸칠것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도 괴롭겠지. 마찬가지로 교복만 달랑 입고있는 나도 얼어죽을 지경이다. 

 

 “갈까요.” 

 

 나는 세워놨던 자전거쪽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사히나 선배는 고개를 끄덕하고는, 

 

 “……근데, 어디로요? 쿈군네 집에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입막음을 부탁할 인간은 적은게 좋고, 동생 입이 손자를 앞에 둔 할머니의 지갑만큼이나 불안하다는 건 오빠로써 잘 알고 있다. 

 

 “나가토 외에 당신을 받아주실 만한 집이에요. 아마 그분이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재워주실겁니다.” 

 

 이상하단듯 보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재촉하여 자전거에 올라타, 짐받이에 탄 가벼운 2학년생을 태워 목적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2-04

 


 

 

 

 

 

 

 

 

 

 

 

 


 내가 자전거를 세운 곳은 SOS단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억하고 있는 장소다. 

 

 물론, 아사히나 선배도. 

 

 “여기……저, 설마,” 

 

 짐받이에서 내린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둥글게 뜨고 그 집 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 자물쇠를 채우며, 

 

 “이분이라면 뭐든 해주실겁니다. 아사히나 선배라면 얼마든지 도와주실거에요.” 

 

 “그, 그렇지만 정체를 밝힐수는──” 

 

 “그건 제게 맡기세요,” 

 

 거대하고 고풍스런 문 옆엔 인터폰 하나만이 근대 문명의 모습을 하고 오브제(佛,objet)처럼 붙어있었다. 이걸 누르기 전에 일단 맞출건 맞춰놔야겠지. 

 

 “아사히나 선배, 잠시 귀좀,” 

 

 “네,” 

 

 순순히 고개를 기울이고 머리카락을 넘겨서 그 어여쁜 귀를 내보인다. 하루히가 그 귀를 질근질근 물던 기억이 나서 나도 그러고 싶어졌지만 난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안다. 

 

 “그, 그래서 말이죠.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만……” 

 

 소곤소곤 속삭이는 내 말에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깜빡이며, 

 

 “엣, 그래도, 제가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렵다구요, 그거……” 

 

 그렇겠죠. 진짜로 연기하려고 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아사히나 선배는 평소의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을 다해주기만 하면 된다. 분명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테니까 말야. 

 

 “일단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잘 될거에요.” 

 

 나는 낙관적으로 미소지어 보이며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 “…………” 

 

 나와 아사히나 선배는 말없이 대답을 기다린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받아줄 확률은 낮으니 그 사람에게 중개시킬 수 있는 말을 속으로 연습한다. 입속에서 리허설해보길 세 번, 1분 가까지 지나도 대답은 없고, 설마 단체로 집을 비운건 아닌가 하고 불안한 분위기가 엄습해오던 차에, 

 

 “잠깐만 기다려!” 

 

 위세좋은 목소리가 문 안쪽에서 직접 울리고, 찰캉 하는 소리가 났다. 이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목조 문이 열리기 시작하고, 

 

 “이야아! 이런 시간에 웬일이야! 미쿠루에 쿈군. 으응? 정말 둘밖에 없어. 이야-둘이 사이 좋구나 좋아! 뜨겁다 뜨거워,” 

 

 라며 츠루야 선배가 얼굴 가득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츠루야 선배의 복장은 평소 학교에서 보던 것과는 한층 달라져 있었다. 

 

 캐주얼한 평상복 풍 화복(和服:일본풍 옷)을 입고, 그 위엔 두꺼운 한텐(半纏:일본식 겉옷의 한가지. 작업복 및 방한복으로 입음. 옷고름이 없고 깃을 뒤로 접지 않는 활동적인 면이 특징)을 입고, 긴 머리는 고개 뒤로 간단히 묶어놨다. 금방이라도 사극에 튀어나올 모습이었다. 

 

 츠루야가(家)의 부지내에 우리를 들인 츠루야 선배는 들고 있던 각재(角材:네모지게 켠 재목)같은 빗장을 닫은 문 안쪽에 걸더니, 

 

 “근데 참 별일이네-. 쿈군이랑 미쿠루 둘이서 한겨울에 산책이라도 나온거야? 하루냥은 없고?” 

 

 “이래저래 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그런데 츠루야 선배, 문앞에 있는게 저희들인 걸 어떻게 아셨나요?” 

 

 인터폰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아 그거, 문 위쪽에 방범카메라가 있거든-. 누가 왔는지 쯤이야 금방이지! 그래서 보니까 너희 둘이라서 내가 나가는게 좋을거 같아서 말야. 놀랐어?” 

 

 츠루야 선배는 나막신을 딸깍이며 안채 현관까지 길게 이어지는 신사 경내같은 길을 걸으며 그 항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응? 미쿠루? 왜그래, 어쩐지 기운없어보이는데,” 

 

 “실은 그거 말입니다만,”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준비하고 있던 대사를 하기로 했다. 

 

 “부탁이 있어요. 이 아사히나 선배를 당분간 츠루야 선배 댁에 머물게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으응? 뭐 그거야 문제 없지,” 

 

 츠루야 선배는 흐흥 하며 코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를 내며 아사히나 선배를 자세히 바라봤다. 

 

 “음, 미쿠루……맞지 얘.” 

 

 움찔하는 아사히나 선배. 츠루야 선배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가늘게 수그러들었다. 들켰나? 

 

 “뭐, 됐어. 뭔가 또 사정이 있겠지? 미쿠루가 집에 못가는 뭐 그런게 말야,” 

 

 이야기 진전 한번 빨라서 좋습니다. 

 

 “언제까지 데리고 있으면 될까-?” 

 

 “길면 8일정도요,” 라는 나. 

 

 오늘부터 세서 8일이 경과하면 원래대로 이 시간대의 아사히나 선배는 하나가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괜찮겠어요?” 

 

 “응, 얼마든지-. 아, 그렇지, 이왕 왔는데 별채 써도 좋아. 그 별장에 있던거랑 비슷한게 여기에도 있거든. 오늘은 거기 아무도 없고, 내가 가끔 명상할 때 가는 암자야. 조용하고 좋아,” 

 

 나는 뭐 거의 숲이라고 해도 될 만큼 무성한 초목에 둘러싸인 츠루야 가택을 둘러보았다. 별게 다 튀어나올 거 같은 넓이다. 그러고보니 옛날부터 있던 창고가 있다고 했지. 

 

 내가 감탄과 놀람과 선망의 감각을 맛보고 있으니, 츠루야 선배가 입술에 깔끔한 반원을 만들어보이며 아사히나 선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미쿠루, 무슨일이야? 이상해-. 그렇게 굳어있을건 없는데-. 음,” 

 

 츠루야 선배는 고개숙이는 아사히나 선배의 턱을 콕콕 찌르더니, 

 

 “미쿠루답지 않어-” 

 

 꼼짝도 않는 아사히나 선배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분은, 아사히나 선배의 쌍둥이 동생인 아사히나 미치루(朝比奈みちる) 씨에요.” 

 

 “쌍둥이? 동생? 미치루짱?” 

 

 “그래……요. 태어나자마자 생이별하게 돼서……” 

 

 “헤에-?” 

 

 “그래서 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아사히나 선배……그러니까 미쿠루 선배는 동생이 있는걸 모르거든요,” 

 

 “하앙-. 근데 미치루짱 왜 키타고 교복을 입고 있어?” 

 

 “아아,” 

 

 아차. 그 생각을 못했다. 

 

 “뭐랄까요……. 아아, 그렇죠, 미치루상이요, 언니분을 보기 위해 키타고에 숨어들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교복을 어디서 조달해서 입긴 했는데 결국 하지 못하시고 우연히 저랑 만나게 돼서 제가 이야길 듣고, 에-그래서 그때부턴 말이죠……” 

 

 츠루야 선배가 어깨를 두드렸다. 

 

 “됐어-,” 

 

 츠루야 선배는 한없이 밝은 얼굴로, 

 

 “설명은 하는것도 듣는것도 귀찮으니까 말야. 얘가 미쿠루 동생이면 미쿠루랑 똑같은거지 뭐. 그래서 여기 데리고만 있으면 돼?” 

 

 “그리고 아사히나 선배에겐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걱정 하덜덜덜 마. 다 알아,” 

 

 “저어……” 

 

 아사히나 선배가 대화에 뒤처지는 게 두려운듯, 

 

 “정말로 괜찮으세요? 츠, 츠루야상,” 

 

 “앙. 메갓사 좋지! 자, 미치루, 여기여기, 별채로 안내할게,” 

 

 츠루야 선배는 아사히나 선배의 손을 잡고 아주 끌어당기듯이 발을 옮기기 시작하고, 그 직전 내게 심장이 멈출것만 같은 윙크를 해주었다. 

 

 

 

 

 

 

 

 

 


 그 별채는 전번 설산 산장에 있던 그것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츠루야 선배의 설명에 의하면 이 별채를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 그 별장이라 하니, 즉 이게 원본이자 진짜인 모양이다. 실로 포근한 화실(和室) 원플로어다. 

 

 다다미에 정좌한 아사히나 선배는 마치 검소한 암자에 놓인 프랑스 인형처럼 보였다. 

 

 츠루야 선배가 히터를 켜준 덕에 내부도 매우 따뜻했고, 나른하니 전혀 움직이고 싶지 않아졌다. 

 

 츠루야 선배는 토코노마(床の間:일본 건축에서, 객실인 다다미방의 정면에 바닥을 한 층 높여 만들어 놓은 곳. 벽에는 족자를 걸고 바닥엔 도자기나 꽃병 등을 장식해 둠)에 장식되어있는 족자에 대한 설명을 했다가, 이불이 들어있는 벽장의 위치를 가르쳐 주다가 하더니 비로소 ‘따끈한 차 가져올게-’라며 안채로 모습을 감췄다. 

 

 “어찌어찌 될 것 같네요.” 라며 내가 말했다. 

 

 “네, 이제 살 것 같아요. 츠루야상껜 나중에 감사하다고 해야겠어요.” 

 

 여기선 아사히나 미치루인걸로 되어있는 아사히나 선배는 얌전히 수긍하더니, 

 

 “미치루라……. 그것도 좋은 이름이네요.” (*みちる:차다, 가득하다는 의미) 

 

 이제서야 미소를 보여주는 아사히나 선배. 

 

 나는 다다미 위에 발을 뻗고 고풍스런 전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사히나 선배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츠루야 선배가 찻잔, 포트, 옷 등이 든 바구니를 들고 돌아올때까지. 

 

 

2-05

 


 

 

 

 

 

 

 

 

 

 

 

 


 츠루야 선배는 나를 만찬에 불러주었지만 이틀 연속으로 남의 밥을 먹었다간 우리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할 가능성이 높고, 그런 이유로 나는 귀가한다는 뜻을 밝혔다. 아사히나 선배가 묵을 곳이 정해진 덕에 마음이 놓였다. 이대로 어정버정하고 있으면 오늘에야말로 기어이 외박을 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사히나 선배를 별채에 남겨두고, 밖에 나온 나를 츠루야 선배가 배웅이라는 면목하에 나를 따라와 이렇게 말했다. 

 

 “이야-참, 미쿠루같으면서도 미쿠루가 아니네. 아니, 미쿠루가 아닌거 같은데 미쿠루 같달까? 그래, 오늘 학교에서 만난 미쿠루 그대로는 아닌거지?” 

 

 아까 한창 쌍둥이라고 설명했잖습니까, 선배. 

 

 “아하하하, 맞아. 그렇다 칠까,” 

 

 츠루야 선배는 내게서 한걸음 반정도 앞으로 나가 커다란 문으로 걸어갔다. 

 

 묶인 그 긴 머리가 흔들리는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묻고 싶어졌다. 

 

 “츠루야 선배.” 

 

 “왜에?” 

 

 “선배는 어디까지 알고계시죠? 아사히나 선배나 나가토──SOS단 멤버들이 어딘가 범상치 않다고 전에 말씀하셨었죠.” 

 

 “뭐-그냥-” 

 

 작게 폴짝 뛰고는 그 긴 머리의 상급생은 획 돌아섰다. 입 전체로 웃는 그 밝은 얼굴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쿈군, 잘은 몰라-. 왠지 좀 다른거 같다-정도라구, 적어도 나나 쿈군처럼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거 같달까,” 

 

 그정도만 아시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츠루야 선배는 별다른 걸 묻지도 않았고, 아사히나 선배의 정체가 뭔지 따위는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째서죠?” 

 

 츠루야 선배는 한텐 소매에 손복을 집어넣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난 말야, 즐거운 사람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즐겁거든! 내가 만든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라든지, 그냥 행복해보이는 생판 남을 보는게 좋아-. 음, 그래서 난 하루냥을 보고있으면 무지무지 기분이 좋아져! 왠진 잘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재밌잖아!” 

 

 그에 섞여들 생각은 하지 않으시나요. 보는것만으론 외롭지 않으세요? 

 

 “으-음, 난말야, 영화 같은거 보고 엄청 재밌다고는 생각해도, 영화를 만들려고는 하지 않거든. 보는것만으로 충분한거야. 월드시리즈나 슈퍼볼도 관전하는건 아주 기분 좋게 응원할 수 있지만 나도 저거 하고싶다! 거나 나도 같이 플레이하고 싶다곤 생각 안해-. 저사람들은 엄청나게 노력해서 저기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것만으로 기분이 좋아. 어쨌든 나한텐 안맞아! 그러니까 난 내가 할 수 있는걸 할거야!” 

 

 어떻게 보면 하루히와는 정 반대의 사상이로군. 그녀석은 재밌어보이는 거라면 뭐든 고개를 들이밀고, 뭐가 어떻든 간에 자기가 해버리려고 하는 녀석이니까. 

 

 츠루야 선배는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거랑 똑같아. 난 미쿠루도 하루냥도 유키도 코이즈미군도 쿈군도 보고만 있으면 재밌어! 모두가 뭔가 하는걸 보는게 무지무지 좋아! 그래서 그런 모두를 보는 나도 좋은거구!” 

 

 아주 밝은 얼굴과 목소리였다. 이분은 진정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난 내 지금 위치가 너무 맘에 들어. 분명 하루냥도 알고 있을거야. 날 억지로 끌어들이려곤 하지 않거든. 전부 다섯 명, 그렇게 다섯이서 있을때가 가장 좋아!” 

 

 츠루야 선배는 다시한번 폴짝 뛰더니 다시 문쪽으로 돌아섰다. 긴 머리가 좌우로 넓게 깔렸다. 

 

 “이 세상만사를 다 생각하면서 답을 낼수는 없어. 난 나 혼자도 벅차, 그러니깐,” 

 

 고개를 갸웃하고 내게 곁눈으로 보더니, 

 

 “쿈군, 최선을 다해뇨로요. 인류의 미래는 네 어깨에 걸려있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 츠루야 선배는 입을 씰룩이며 한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악의 한점 없는 아이와 같은 웃음소리에, 난 그 유쾌한 선배의 말을 농담처럼 받아들였다. 

 

 배를 붙잡고 죽겠다고 웃으며 눈가를 문지른 츠루야 선배는, 

 

 “뭐, 미쿠루만큼은 잘 따라줘! 하지만 장난같은거 하면 못써뇨로요. 그것만큼은 금지야! 장난은 하루냥한테 하면 돼! 이건 그냥 느낌이지만, 음, 받아줄거라고 봐!”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별로 뭔가를 진짜 해볼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지. 

 

 

 

 

 


 

 츠루야 선배에게 굿나잇의 말을 전하고 자전거에 올라탄 난, 얼마 가지도 않아서 브레이크를 거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안녕하십니까,” 

 

 길가의 어둠에 나타난 그녀석이 내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당신께서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로썬 츠루야상을 연루시킨 것엔 그다지 찬성치 않습니다만. 안전하다면 그만큼 안전한 곳도 없죠.” 

 

 이틀만에 보는 저 무난한 웃음, 그것은 코이즈미 이츠키의 해맑은 핸섬 스마일이었다. 

 

 “여, 이런데서 다 보는(奇遇:기우,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는 일)군.” 

 

 “그렇군요. 그러고보면 저와 당신의 첫 접촉부터 기우(奇遇)는 시작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당신과 스즈미야상이라 하는 것이 스타트 지점으로서 훨씬 어울리는군요.” 

 

 코이즈미는 인사란 듯 손을 들고 다가왔다. 너 임마, 계속 이 어둠의 그림자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수상한 놈이 있다고 신고당해도 할말 없다고. 

 

 풋, 하며 코이즈미는 가벼운 미소를 날리곤, 

 

 “재밌는 일을 하고 계신 듯 한데요, 전 이번에도 소외인가요?” 

 

 난 한숨을 선택하고, 숨을 하얗게 뱉어냈다. 

 

 “이건 나랑 아사히나 선배의 문제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냐. 얌전히 ‘신인’ 처리나 하면 되잖아.” 

 

 “그것도 요샌 감감 무소식이어서 말이죠.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이렇게 산책이나 하고 싶어질까요.” 

 

 한겨울 밤에 개도 안데리고 산책하는 건 아이디어가 없어 고심하는 크리에이터(creator) 정도겠지. 어쨌든 니가 여기 있는게 우연은 아니잖냐. 

 

 “이게 우연이라면 너무 타이밍이 기가막히다고밖에 말씀드릴수밖에 없군요.” 

 

 “용건이 뭐냐.” 

 

 라고 묻고 나서, 질문내용을 변경했다. 

 

 “아니, 용건이야 대충 안다. 넌 어디까지 알고있는거냐?” 

 

 “아사히나상께서 두분 계시다는 것 정도일까요.” 

 

 코이즈미는 태연히 중요한 사실을 내뱉곤, 

 

 “그리고, 츠루야상껜 어떻게 설명하셨는지요? 쌍둥이입니까. 설마 사실대로 말씀드린건 아니시겠죠.” 

 

 “뭐든 상관없었나보더라.” 

 

 “그렇겠죠. 츠루야상이시니까요.” 

 

 순 당연하단 식이잖아. 대체 츠루야 선배는 어떤 사람인거냐.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에게서 미묘히 거리를 두고 있는 그 밝디밝은 선배는. 

 

 “상부에서 ‘츠루야상은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코이즈미는 약간 진지한 모습으로 입모양을 바꾸더니, 

 

 “그녀께선 아주 아슬아슬하게 무관계의 범위에 속해계십니다. 원래대로라면 저희들과 교차할 일도 없었을 텐데, 어떠한 오류로 약간씩 접촉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스즈미야상이라 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로군요.” 

 

 어디서부터가 잘못된건데. 아사히나 선배네 반에 츠루야 선배가 있을때부터냐. 아니면 야구대회때 인원채우기로 왔을때부터냐. 

 

 “저희들은 그녀에 간섭치 않습니다. 그 대신 그녀께서도 저희에게 필요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으시지요. 그게 저희 ‘기관’과 츠루야가(家) 사이에 한 합의입니다.” 

 

 뜬금없는 뒷이야기를 그리 선뜻 말하지 마라. 

 

 쿡, 하며 코이즈미는 입 속으로 웃더니, 

 

 “더 말씀드리자면, 츠루야가는 ‘기관’의 간접적인 스폰서 중의 하나입니다. 단 저희들이 어떻게 되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지, 무얼 하든 무관심한 모습을 일관하고 있지만 말이죠. 오히려 그 편이 낫기 때문에 좋기야 합니다만, 츠루야상께선 츠루야가의 차대 당주가 되실 분입니다.” 

 

 츠루야 선배, 당신……. 지금까지 우린 무지막지한 사람과 알고 지냈던 모양이다. 정말로 알고싶다. 대체 정체가 뭐냐? 

 

 “평범한 고등학생이십니다. 저희들과 같은 현립학교에 다니시고, 커다란 집에 사시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십니다. 어쩌면 저희가 모르는 가운데 어느 사악한 존재와 싸우고 있다거나 난해한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거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요.” 

 

 방금 츠루야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생히 기억난다. 그녀는 우리와 깊게 지내지 않는 정도에서 유쾌함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츠루야 선배와는 앞으로도 지금껏 지내온 것처럼 지내는 편이 나을 거다. 그녀가 누구며 뭐하는 사람인지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하루히가 하루히인것처럼 츠루야 선배는 츠루야 선배다. 항상 힘차고 밝으며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아사히나 선배의 친구. SOS단 명예고문. 그정도가 가장 좋을 것이다. 

 

 

2-06

 


 

 

 

 

 

 

 

 

 

 

 

 


 하지만 아사히나 선배와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미래인에게도 읽을 수 없는 과거가 있었단 건가? 하루히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아, 그러다 생각났다. 

 

 “코이즈미, 넌 전에 아사히나 선배가 뭘하든 상관없다고 했었지. 그건 무슨소리냐.” 

 

 “미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당신께선 미래인이 과거에 자유자재로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과거에 대한 미래인의 우위성을 확신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미래는 실로 불확실 그 자체죠.” 

 

 과거 역사를 알고 시간역핵을 하면 지맘대로 개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난 그렇게 했고. 이상해져버린 세계와 나가토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러 갔으니까. 

 

 코이즈미는 미소짓는다. 

 

 “그건 과거에서도 상관없습니다. 만약 미래를 미리 알수가 있다면, 그 시점에서 미래를 바꿀수 있었겠지요.” 

 

 “미래를 어떻게 안단거냐.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코이즈미의 미소가 약간 위악(僞惡)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일부러 저러는 걸거다. 어쩌다 한번씩 이녀석은 쓸데없는 악취미를 보인다. 

 

 “전 초능력자입니다. 지역과 능력이 한정되어있지만 말이죠. 그렇지만, 그런 것 외엔 없다고 할 수 있으십니까? 저같은 대(對) ‘신인’ 전용이 아니라, 더욱 보편적인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가 없다고, 예지능력을 가진 인간은 아무데도 없다고, 그리고 그런 인간이 우리 ‘기관’에 한명도 없다고 단언하실수 있으신지요?” 

 

 경쾌한 미소로 돌아와선, 

 

 “전 그런 건 없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자식. 

 

 “물론, 있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군요.” 

 

 어쩌란거야. 이것만큼은 말해줘야겠다.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말씀드렸었죠, 전 말단이라고 말입니다. 모든걸 다 아는게 아닙니다. 아사히나상께서도 그렇죠.” 

 

 그건 알겠다. 아사히나 선배만큼이나 보기 안쓰러운 입장에 놓인 요원은 없다. 

 

 “그녀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미래인이 명확한 의도를 갖고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되면, 저희들은 그 움직임을 분석할 수 있게 되죠. 그녀께서 자신의 미래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불리 혹은 부적합한 행동을 할리는 없으니까요. 아사히나상께서 미래인이심에도 불구하고 아시는 것이 적은 이유는 정말로 아시는 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인인 저희들이 분석할 수 없게끔 하기 위한 미래로부터의 대항조치입니다. 지금 이 시공에서 그녀의 존재는 분명 필요하지만, 그녀의 존재로 인해 미래가 추측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그녀께선 완벽한 시간 주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전 그녀께 그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않으며, 필요할 때는 이쪽의 도우미로도 활동해줄 수 있을거라 보고 있습니다.” 

 

 코이즈미는 어깨를 들썩하는 득의의 동작. 

 

 “아마 미래측이 노리는 건 그걸 겁니다. 과거의 인간에겐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겠다는 의도겠지요. 그렇기에 ‘기관’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죠. 손을 댔다간 곧바로 미래측의 의도대로 되고 마니까요. 미래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는건 사절입니다.” 

 

 그럼 뭐냐, 너희들은 아사히나 선배네랑 대립하고 있는거냐. 

 

 “적대까지는 아니지만요.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소강상태 정도 될까요.” 

 

 몸이 차가워졌다. 물리적으로. 

 

 “예를 하나 들어보죠. 여기에 A라는 나라와 B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서로 거슬리기야 합니다만, 직접적으로 싸운 적은 없습니다. 거기에 A에 적대하는 세력 C와, B에 적대하는 세력 D가 등장합니다. A에게 있어 C는 공존불가능한 상대로써 직접적인 적입니다. B에 있어서의 D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그 C와 D가 동맹을 맺어 협력관계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라면 몰라도 둘을 상대한다는 것은 자군 세력으론 불안합니다. 거기서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는 옛말처럼 A와 B는 마지못해 모래위의 누각과 같은 공동투쟁관계를 맺게 되었다, 뭐 그런 걸까요.” 

 

 코이즈미는 의심스럽단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듣고 계십니까?” 

 

 “아아, 미안,” 

 

 라며 나는 자전거에 발을 얹고는, 

 

 “D 어쩌고 하는 부분부터 귀에 안들어오더라. 내 머리는 세 개까지밖에 기억 못하니까 그다음부터는 그냥 많다고 하면 충분하다.” 

 

 “전달은 됐을겁니다. 듣고 안듣고는 뇌가 선택하고 처리하죠.” 

 

 진지하게 받지마라. 살짝 넋좀 놓고 있었다고. 가끔은 개그같은것좀 해보는게 어떠냐. 아무리 얼굴이 잘생겨도 유머감각이 없으면 인기 같은거 없다고. 

 

 코이즈미가 싱긋 웃었다. 넌 대체 웃음이 몇종류나 있냐. 

 

 “저도 시간, 상황 및 상대에 따라 말이나 표정에 변화를 줍니다. 다만 당신을 상대로는 저도모르게 이런 대화가 되는군요.” 

 귀찮은 놈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동안은 아마 이럴 겁니다.” 

 

 어째선지 먼 곳을 바라보는 코이즈미는, 

 

 “언젠가 완전히 대등한 벗이 되어 당신과 웃으며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책무나 역할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한사람의 인간으로써 말이죠.” 

 

 그렇게 말하곤 이제 만족했는지, 

 

 “그럼 또 부실에서 뵙죠.” 

 

 경례같은 인사를 하고선 뒤돌아서 마치 정말 산책중이었다는 듯한 발걸음으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황급히 저녁밥을 먹고 내 방에 처박혔다. 

 

 가장 먼저 나가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사히나 선배를 츠루야 선배네로 이동시켰다는 사실을 알려줘야한다. 그렇긴 해도 나가토이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코이즈미도 알 정도니까 말이지. 

 

 나가토는 신호 세 번만에 전화를 받았다. 누구 전환지 알고 있다는 증거로 여보세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 

 

 “나가토, 나다. 간략히 말하마. 아사히나 선배 말인데,” 

 

 아사히나 선배가 한 말의 요소를 찬찬히 말해줬다. 나가토는 그저 『…………』만 일관하며 내 설명을 듣고 있다가, 

 

 『알았어,』 

 

 미련도 없단듯 담담히 말하곤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냐, 안심이다.” 

 

 『왜?』 

 

 왜냐니. 난 나가토가 아쉬워할까봐 걱정했다고. 일방적으로 가서 도와달라고 한것도 우린데, 또 일방적으로 나가버리는 건 좀 어긋나니까 말야. 

 

 『기우(杞憂).』 

 

 나가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의견을 이해할 수 있다.』 

 

 약간의 뜸을 주곤, 

 

 『나는 그녀처럼 되고자 하지는 않아. 다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심정은 타당하다.』 

 

 어떻게 타당한데? 

 

 『내가 그녀의 입장이라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기에.』 

 

 그러니까, 아사히나 선배가 나가토를 걱정하는 심정을, 나가토 넌 아사히나 선배의 입장이 되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는 거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비로소,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음기능을 켜놓을걸 그랬다 싶을 정도로 좋은 느낌을 주는 울림이다. 

 

 그후, 이래저래 대화가 오가고 나는 전화기를 놓았다. 아무래도 우주인과 미래인은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서로를 잘 이해해주고 있는 것 같다. 아마 그 두사람 생각보다 말이지. 

 

 나도 모르게 실실거리며 옆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샤미센이 침대 위에서 자고 있다. 마치 인간마냥으로 내 베개에 머리를 놓고 콜콜 자고 있었다. 만에 하나 하루히가 우리집에 찾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여기저기 털을 밀어둘까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샤미센 핑계를 댈 수 있는거지?” 

 

 그걸 물어보는걸 깜빡했다. 그 아사히나 선배는 내가 언제 부활동에 결석하고 언제 나왔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걸 이번주 내 스케줄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을텐데. 그러나 1주일 후에서 찾아온 그녀는 가진건 하나도 없고 휴대폰따위 없다. 전화한다면야 츠루야 선배에게 하면 되겠지만 코이즈미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왠지 지금 연락하는 건 뭔가 걸린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겠다. 그녀석이 하는 말이니 또 대충 그럴듯한 소리를 해서 내 안색을 살피는걸지도 모른다. 뭐, 그게 더 나을수도 있다. 

 

 나는 리모컨으로 에어컨을 조준하며 침대에 기댔다. 

 

 내일, 신발장 안을 보면 그날 행동예정이 나올 거다. 

 

 눈을 감고 입을 쩝쩝 움직이는 삼색고양이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리고, 막 목욕하고 나온 동생이 퍽퍽 때리며 일어나라고 하는 바람에 깨고 말았다. 

 

 

 

 

 

 

 

 

 

 

 

 

 

 


-제 2화 끝

 

제 3화 

 


 

 

 

 

 

 

 

 

 

 

 

 

 

 

 다음날. 

 


 

 

 

 『산에 가주세요. 거기에 눈에 띄는 모습을 한 돌이 있습니다. 그 돌을 서쪽으로 약 3미터 이동시켜 주세요. 장소는 그 아사히나 미쿠루가 알고 있습니다. 밤엔 어두워 위험하니 날이 밝을 때가 좋을 것 같습니다.』 

 


 

 

 화장실에서 열어본 종이 첫 번째 장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두 번째 장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어설픈 그림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표주박 모양의 그림에 화살표로 ‘돌’이라고까지 적어놨다. 

 

 결정, 오늘도 바로 하교다. 

 

 “그거야 그렇다쳐도……” 

 

 근데 뭘까. 이 막연한 지령은. 산에 있는 돌이라고? 어디 산 무슨 돌? 아사히나 선배가 알고있는 산이라니……. 

 

 쿵하며 머릿속에서 돌이 굴렀다. 

 

 “아 그렇군, 보물찾기가 어쩌고 했었지.” 

 

 아사히나 선배(미치루)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 공휴일에 보물찾기를 하러 간다고 했다. 모레다. 츠루야가(家) 소유 산이라고 했었지 아마. 근데 또 츠루야 선배 등장인가. 그분이라면 두사람의 아사히나 선배에 대한 이야기따윈 뻥긋도 안하고 하루히와 나를 앞에 두고도 그저 웃고만 있을거지만, 이대론 내 정서가 불안해질것 같다. 코이즈미한테도 좋은일은 아니겠지만, 잠깐만. 

 

 “그럼, 이제 하루히도 다시 기운을 차리는건가.” 

 

 나는 교실로 향하며 예측했다. 보물지도는 츠루야 선배가 가져오기로 되어있고 실행에 옮기는게 모레라면 하루히가 지도를 손에 넣는 건 오늘이나 내일이 틀림없다. 아마 내일일거다. 어젯밤에 츠루야 선배는 그럴것 같은 소리는 커녕 그럴듯한 느낌도 없었다. 아직 그 창고인가 하는데서 그 지도를 찾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있었으면 하루히한테 주라고 내게 떠맡겼을거고. 

 

 “여, 하루히,” 

 

 짐작대로였다. 먼저 교실에 와있던 하루히는 나가토 십억분의 일정도를 받았나 싶을정도로 낮은 분위기가 감돌았고, 찌뿌등한 느낌의 여고생을 연기하고 있다가, 

 

 “샤미센은?” 

 

 내쪽을 보지도 않고 숨으로 창문에다 김을 서리게 했다. 

 

 “아아, 뭐 그럭저럭 괜찮아진거 같다.” 

 

 “그래. 잘됐네.” 

 

 숨으로 부옇게 된 창문에 낙서(へのへのもへじ:글자로 사람 얼굴을 그리는 낙서)를 하고 있다. 

 

 너무 이상하다. 나와 하루히 사이에 이런 멀쩡한 대화가 오가다니, 나가토가 부실에서 책을 안읽고있는 모습보다도 희한한 일이다. 도저히 걱정……아니 불안해지지 않을수가 없다. 어디서 ‘신인’을 발광시키는건 아닐라나 모르겠네. 

 

 “왜그러냐? 요새 영 기운이 없어보이는데,” 

 

 하루히는 흥하며 콧방귀를 뀌더니, 

 

 “뭔소리야. 난 늘 그대로라고. 뭐좀 생각할게 있어서 그래, 내일……” 

 

 거기서 말을 멈췄는데, 말을 부자연스럽게 자른 하루히는 나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너야말로, 오늘은 부실 올거야?” 

 

 오든 말든 알바 아니라는 식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야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만. 

 

 “샤미센이 아직 좀 외로워한다. 동생한테 맡길수도 없고 오늘도 간병해야겠다.” 

 

 “응, 그게 좋을거 같어.” 

 

 이상하게도 하루히의 표정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플때는 외로워지거든. 완전히 다 나을때까지 같이 있어줘. 나도 건강한 샤미센이랑 빨리 놀고싶으니까.” 

 

 하루히한테는 샤미센도 SOS단의 일원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야. 하지만 고생은 다 나한테 맡겨놓고 자기 내킬때만 놀러오겠다는 심보가 보이는게 이녀석답다. 일주일정도 빌려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게.” 

 

 건성으로 끄덕인 하루히는 다시 창문을 부옇게 만들고 있었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수업처럼 시간이 안가는 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초조하게 선생이 나한테 뭘 물어보거나 시키지 않기를 말없이 빌며, 멍하니 그냥 칠판내용을 베껴적는 사이에 뭐하나 기억하는 내용없이 시간을 보냈는데, 잘 생각해보니 늘 그런 것이어서 이러니 성적이 하나도 안오르는가보다 하며 인식을 새롭게 했지만서도 이거나 저거나 방과후 할 일이 너무 많은게 문제다. 그런 게 틀림없다. 방과후 곧바로 집에 가는 타니구치가 나랑 같은 성적인 건 이번기회에 눈감아줬으면 한다. 

 

 도움도 안되는 교과서는 죄다 책상에다 집어넣고 그덕에 가볍디 가벼운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서려 했을때, 청소당번 타니구치가 빗자루를 메고 말을 걸었다. 

 

 “야, 쿈” 

 

 약간 얼빠진 듯 보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녀석이나 상대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아사히나 선배가 날 기다리고 있다고. 그 심정은 메로스의 귀환을 기다리는 세리눈티우스와 같을 것이다. (일본 문학작품 ‘走れメロス[달려라 메로스]’의 비유.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09-1948] 저) 지금당장 달려갈 거다. 

 

 하지만 타니구치는 내 앞길을 가로막듯이 빗자루를 내밀더니, 

 

 “좋겠다-, 너란 녀석은,” 

 

 원망스럽단 목소리로 뭔가 시비 좀 걸겠다는 투다. 뭐가 좋겠단거야 임마. 니가 부러워할 만한거라면 한다스정도밖에 생각안난다고. 

 

 “그렇게 많냐. 대략 세 개정도다.” 라며 타니구치는 기분이 안좋다는 투로 말하곤, 한숨을 뻑뻑 쉰다. 

 

 하루히의 우울함이 타니구치에게 전염되기라도 했는지, 그럼 그게 공기감염되는 무시무시한 병이 아닌가 하고 슬쩍 의심을 해보고 있자니, 

 

 “아아, 타니구치 말야,” 

 

 쿠니키다가 쓱 얼굴을 내밀더니 손에 든 쓰레받기를 흔들며 정답을 내놨다. 

 

 “얼마전에 여자친구랑 깨진모양이야. 그래서 저러는거야. 뭐 그럴만도 하지만,” 

 

 “저런저런,” 

 

 내가 반웃음으로 타니구치의 어깨를 다독여준다. 여자친구라면 크리스마스 전에 생겼다는 그 여학교 아가씨 말씀이신가. 내 이브 예정이 하루히 냄비요리라고 해서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줬지 아마, 타니구치 씨. 

 

 “하핫, 상태를 보아하니 차였나보구만? 암암, 힘내라,” 

 

 “시끄러,” 

 

 나의 저 동정받아 마땅할 친구는 비를 쓰는 척만 하면서 힘없이 꼬리를 내렸다. 

 

 “빨리 가버려. 청소하는데 방해되니까,” 

 

 쿠니키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런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난 시간문제였다고 봐, 타니구치. 난 네 여자친구 되는 분이랑 만나거나 본 적도 없지만 네 말 들어보니깐 아무래도 상대는 심각하지 않았던거 같은데,” 

 

 “니가 알 리가 있냐. 아니 알지마. 알아줘도 좋을것 하나도-” 

 

 “처음부터 말야, 만나게 된 계기부터가 이상했어. 어떻게 그런,” 

 

 “아-아-! 이제 더 이상 말 마라. 진짜로, 잊고싶으니까,” 

 

 한동안 이 두 친구에 의한 지극히도 고등학생다운 대화의 일막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어쨌든 난 내 길을 서둘러야한다. 

 

 “뭐 너무 그렇게 담아두지 마라. 너정도 되는 남자가 언제 끝내주는 여자 하나 못만나겠냐. 암, 십이지가 한바퀴 돌때마다는 어디서 하나씩 굴러올거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반격의 말을 듣기 전에 복도로 뛰쳐나와 뒤도 보지않고 걸어갔다. 최소한의 우정이다. 난 타니구치의 실연을 대놓고 비웃을 정도로 막되먹은 인간이 아니다. 솔직히 약간은 꼴좋다 싶었지만 말이지. 어쨌든 무엇보다 먼저 앞서나가던 친구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건 기뻐해야할 일이다. 같이 잘해보자꾸나. 

 

 “아? 근데 왜 그녀석이 날 부러워했던거지?” 

 

 문득 신발장을 열다가 떠올라서, 곧바로 이상한 연상까지 하기 시작했다. 타니구치가 저렇게 된 것과 같이 하루히의 다운된 분위기도 연애관계를 베이스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실로 무시무시한 상상을 말이다. 나는 그런 내 자신의 상상에 공포를 느끼고 곧바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설마.” 

 

 하루히가 상사병으로 저지경이 된다는 식의 본질 자체에 문제가 있는 장면따위는 내가 내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1위지명이 된다는 것보다도 말도 안되는 것이다. 뭐 그런거 해줘도 하나도 안 좋지만, 하루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싶어 지는군 그래. 에어컨없는 교실에서 난로 하나 붙잡고 있는데도 우울치 않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뭐 어때,” 

 

 나는 나대로 지금 정신없다. 그리고 하루히라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온다. 모레엔 우리를 끌고 보물찾기를 하러 나설 정도가 되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나로써는 쓸데없이 신경을 써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잘못 건드렸다가 SOS단 전원의 방향성까지 말아먹을 사태만큼은 피하고싶다. 괜히 무해한 세균에 방사능을 갖다대서 치사성 병원균을 만들어내는 사태는, 인류가 과학의 종인 이상 일으키지 않는게 좋은것이다. 때를 잘 가려야지. 

 

 “자, 일단은 가까운 미래를 해결해볼까,” 

 

 인류의 미래를 불안해하고 있어봤자 나아질건 하나도 없다. 내게 있어서 지금 가장 중요한 현안사항은 또하나의 아사히나 선배이니까. 

 

 

 

3-02

 


 

 

 

 

 

 

 

 

 

 

 

 

 

 

 일단 집에 돌아온 나는 곧바로 자전거에 올라타 츠루야 저택을 향했다. 

 

 그 사이에 한 거라면, 츠루야 선배네 집에 전화를 걸어 아사히나 선배를 부른 것 정도다. 그런데 츠루야 선배는 아직 학교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츠루야 선배네에 묵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미치루)와 대화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릴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받은 츠루야가(家)의 사람은 츠루야 선배에게서 미리 이야길 들었는지 자기소개 따위는 생략하고 그저 내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 아사히나 선배를 바꿔주었다. 이런 세세한 부분마저 참으로 편리한 츠루야 선배다. 미처 사전조율을 하나도 못해놨는데도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뭘 원하는지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다. 나중에 비서같은거라도 되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겠군 그래. 

 

 그 츠루야 선배와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운 또하나의 선배, 아사히나 선배에겐 ‘지금 찾아갈테니까 기다려주세요’ 라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말로 설명하는것 보다는 실물을 보여주는게 백배는 빠르다. 내 주머니엔 오늘 얻은 지령서와, 만일을 대비한 손전등이 들어있다. 

 

 몇 번이고 갔었던 탓인지 츠루야 선배네로 자전거를 밟는 발도 가볍다. 2월의 추위는 춥기야 하지만 눈이 안내리는것만도 감지덕지다. 귀와 코가 얼어붙어버릴 것만 같이 차가운 바람을 뚫고 츠루야 선배네에 도착한 나는 초인종을 누르고 한동안 기다렸다. 

 

 전용문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아사히나 선배는, 

 

 “쿈군,” 

 

 나를 보곤 안심한 듯한 웃음을 짓더니, 폴짝 문밖으로 나왔다. 세일러복이 아니라 바지위에 푹신한 느낌의 코트를 입고 있다. 

 

 “츠루야상 옷을 빌렸어요.” 

 

 아사히나 선배는 내 눈을 신경쓰는 듯이 코트 깃을 당기며, 

 

 “저희 집에서 옷을 가져올 수도 없으니까요……” 

 

 “선배 옷이 없어진 적이 없어서인가요?” 

 

 자전거 스탠드를 되돌리며 물어보니, 아사히나 선배는 약간 아리송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건, 그, 잘은 모르지만요……. 항상 입는 옷은 있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없어졌다 해도 몰랐을런지도……. 아니, 그, 그렇게 옷이 많은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아 괜찮습니다. 아마 저도 옷장에서 바지 하나 없어져도 영원히 도난신고 같은거 안할거니까 말이죠. 만약 분실했다고 해도 엇다 잘못 놨으니 어디 있겠지 할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따뜻한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사히나 선배를 바라봤다. 빌려입은 거든 뭐든 간에 어울리면 장땡이다. 

 

 “아니에요-, 정말,” 

 

 아사히나 선배는 수줍은 듯이 손을 저었다. 

 

 “소매랑 옷단이 저한텐 너무 길고, 그리고……” 

 

 가슴을 누르듯이 한 아사히나 선배는, 약간 빨개져더니 갑자기 손동작을 멈췄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일단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팔다리가 길어 늘씬한 스타일을 가진 츠루야 선배 옷이다. 아사히나 선배가 입기엔 옷단이 약간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 아사히나 선배가 어딘가 갑갑해하는 듯이 보이는 건 그쯤에 원인이 있다고 추정된다. 코트로 상반신 전체를 가리고 있는게 좀 아쉽긴 하지만 뭐 그건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 

 

 나는 신발장에 들어있던 미래편지를 보여주고, 

 

 “오늘은 이런걸 해야하는 모양인데 짐작가는건 있나요.” 

 

 산에 가서 돌을 움직여라, 는 마치 RPG 미션 같은 지령이다. 그것도 이 지령엔 이유가 명기되어 있지 않고, 달성시키면 뭐 도움되는 아이템을 받을 수 있는지 어쩐지도 불확실하므로 게임이라 해도 그리 괜찮은 부류는 아니다. 

 

 “저……. 그 산말인가요? 제가 장소를 알고 있다는건, 그 산이란 거겠죠. 이상하게 생긴 돌……. 아, 혹시 그거……?” 

 

 아사히나 선배는 바람에 흔들리는 편지를 차근차근 읽으며 저런 말을 하다가, 집을 잃은 시마리스처럼 고개를 갸웃하곤, 

 

 “짐작이 가는 곳이 있어요. 여기, 보물찾기하러 간 덴거 같거든요. 아뇨, 제가 알고있는 곳이라면 거기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당연히 난 모른다. 하지만 대충은 알것 같다. 

 

 “아사히나 선배, 보물찾기 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안나왔지요?” 

 

 “아, 네,” 

 

 벌써 손이 얼기 시작하는지 아사히나 선배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접고 있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으면서, 

 

 “이상하지 않아요? 아무리 봐도 이 지령은 보물찾기 관련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 그건,” 

 

 아사히나 선배는 고개를 숙이고, 

 

 “왜그럴까요. 으음……” 

 

 생각에 잠긴 듯하면서도 곧바로 입으로 뭔가를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표정으로, 슬쩍 내쪽을 올려다봤다. 그 눈빛에 쓰러질 뻔한 나를 향해 아사히나 선배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 그래요, 거기 가면 뭔가 떠오를지도……” 

 

 “그렇겠죠,” 

 

 일단 가볼까. 하루히한텐 미안하지만 먼저 보물찾기 로케 현장에 가보도록 하지. 모레 내가 신선미 떨어지는 태도를 보여도 봐줘라. 

 

 나는 자전거에 앉아 아사히나 선배를 뒤에 태웠다. 옆으로 조심스럽게 앉는 아사히나 선배와 머뭇머뭇 허리에 감기는 팔에 금방이라도 기절해버릴 것만 같았던 나는 문득 어젯밤의 기억이 냉정히 떠올랐다. 

 

 “왜그래요?” 

 

 앞으로 내달리기 전에 좌우를 둘러보는 내게 아사히나 선배가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묻는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문득 말이죠, 이쯤 어딘가에서 코이즈미나 코이즈미같은 녀석이 숨어있지 않을까 해서 그랬습니다. 츠루야 선배네 집에 잠복해있는건지 저희들을 쫓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츠루야가의 사유 산은 우리 학교에서 동쪽으로 수평이동한 장소에 위치해있다. 산이라고 하기엔 대형 언덕같은 느낌이라 그다지 높진 않다. 어찌 보면 잊혀진 고분(古墳)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천연림으로 뒤덮인 산 표면을 올려다보자면 이게 원분(圓墳)이든 휴화산이든 올라가기 힘든거야 마찬가지고, 거기다 등산로같은것도 없다. 있는거라곤 제아무리 곰이라도 오르내리는데 고생깨나 할만한 급경사 뿐이었다. 

 

 “이쪽이에요. 이쪽으로 올라갔어요.” 

 

 아사히나 네비게이션에 따라 자전거로 언덕을 오르고 논두렁길을 지나는 사이에 벌써 해가 져가고 있었다. 산기슭엔 말라붙거나 농작물이 자란 밭뿐이고 사람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남의 집 산에 맘대로 올라가도 될라나요,” 

 

 내가 질린 얼굴로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사히나 선배가 쿡 하며 작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츠루야상은 괜찮다고 하셨어요. 아, 제가 그 말을 들은건 며칠도 전……아니, 시간적으로는 내일인데……, 아아, 쿈군도 내일 이야기 들을거에요.” 

 

 이제서야 이 상황이 좀 익숙해졌는지 아사히나 선배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볼 여유가 생긴 듯 했다. 그것도 내겐 미래의 일이지만, 이왕 하는거 더 알려줬으면 좋겠다. 

 

 “알려드릴수 있는게, 그, 별로 없어요. 한거라곤 보물찾기랑 시내패트롤……정도에요.” 

 

 하루히 주최 제비뽑기는요? 

 

 “아, 네, 그것도요.” 

 

 아사히나 선배는 허둥대는 동작. 또 뭐 잊으신거 없습니까? 

 

 “에, 그-” 

 

 이상하게 계속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나한테 말못할 사연이라도 있나. 그 금칙사항이 어쩌고란 걸로. 

 

 “그, 그거에요. 금칙이에요. 으-음, 아마, 금칙사항일걸요,” 

 

 표정으로 보건대 아사히나 선배에게서 진지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와서 미래인의 비밀주의에 불만을 표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아사히나 선배도 뭔가를 알면서도 숨기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분은 현시각에 있는 아사히나 선배 뿐인가. 골치아프구만. 부등호로 표시하자면, 아사히나 선배(大) >……중략 > 아사히나 선배(미치루) > 아사히나 선배(小)정도 되나. 

 

 나는 그때 금방이라도 한숨을 쉴 것 같은 표정이었나보다. 아사히나 선배는 또 불안하단 듯이, 

 

 “저, 쿈군……?” 

 

 그래서 등을 돌려보니 아사히나 선배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고, 이런 눈을 보고 태연히 있을 만큼 나는 가학취미가 넘치는 녀석이 아니였으며, 오히려 이런 돌발적인 전애주의에 정신을 지배될 지경이었기에 곧바로 내 안면근육은 샤미센 뱃살처럼 늘어지기 시작했다. 

 

 “아뇨아뇨 무슨말씀을, 괜찮습니다, 저도 곧 알게 되겠죠 뭐.” 

 

 이 아사히나 선배의 말로는 8일 전으로 타임점프하도록 시킨 건 나라고 한다. 그 나는 모든걸 알고 있었기에 아사히나 선배를 과거로 보낸 것이다. 그건 지금 내 미래 모습이기 때문에 그녀석에게 물어보면 모든게 풀린다는 거고, 즉 물어볼 것도 없이 얼마있으면 나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안그럼 앞뒤가 안맞지.

 

 

3-03

 


 

 

 

 

 

 

 

 

 

 

 

 

 

 

 “해가 지기 전에 이 지령부터 해결하죠,” 

 

 난 아사히나 선배의 등에 손을 얹고 말했다. 올려다보는 아사히나 선배는 강아지같은 눈동자로 끄덕이며, 

 

 “아, 네. 제가 안내할게요. 그렇게 높이는 안갔으니까 금방이에요.” 

 

 울창히 우거진 산으로 들어간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앞서가며 자칫 위험할 수 있는 가지니 뿌린 하는 것들을 것들을 제거하며 나아가야 할텐데, 이런 한겨울같은 경우는 뱀이나 벌레들도 죄다 동면중일테니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판단한다. 올라가다 아사히나 선배가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게 뒤에서 잘 받쳐줄 궁리나 하자. 

 

 “하아, 후우, 으우,” 

 

 역시나 아사히나 선배가 산을 오르는 모습은 이래저래 많이 불안해보인다. 더군다나 순 길같지도 않은 길이다. 보통 등산길이라면 사람들이 많이 다녀버릇해서 길이 나있기 마련인데, 일단 그런 편리한 건 보이지 않는다. 녹림을 지나며 근처에 있는 돌에 손을 얹고 다시 오르는 것 뿐이다. 

 

 “아야!”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하는 아사히나 선배를 받쳐주는 역할에 나도 모르게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우리는 거의 일직선으로 그 소형 산 중턱을 향했다. 잘 살펴보니 지금 우리가 있는 길은 사람의 출입이 있다는 걸 말해주듯 여기저기 사람이 지나다니는 흔적이 보였다. 그렇다곤 해도 제대로 된 길은 아니었고, 그나마 길 같아 보일 정도였지만, 그것도 아주 자연 그대로였다면 이렇게 아사히나 선배가 내 앞을 가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산을 오르길 십여분, 내 눈 앞에 평탄한 평지가 나타났다. 

 

 “여기, 휴우, 여기에요. 여기저기를 파봤는데, 돌이 있었던 곳은 여기에요.” 

 

 아사히나 선배가 크게 숨을 쉬며 허리에 손을 얹고 있다. 

 

 나는 그옆에 나란히 멈춰섰다. 

 

 “하아,” 

 

 지금까지 순 가파른 오르막만 있었던 산 중턱에,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평지화 되어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 많은 수목도 거기만큼은 없었고, 그냥 텅 빈 반원형 장소다. 좌우폭이 10미터 좀 안되겠군. 그렇지, 산 이부를 깎아서 만든 것 같은, 등산 휴게장소로 딱이다. 인공적인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 벼랑이 무너진 흔적일라나. 잡초의 무성한 정도를 봐도 최근에 생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연의 작품이라고 보는게 알맞겠지. 

 

 숨을 고른 아사히나 선배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돌은 아마 저걸 거에요. 그림에 있었던 거랑 똑같은……” 

 

 표주박 모양의 돌. ……돌?


 “돌 치고는 좀 큰데요,” 

 

 거기다 아사히나 선배의 말엔 약간의 과장이 있다. 아무리 잘봐줘도 그림이랑 똑같다고는 못하겠군. 아사히나 선배(미치루)가 가이드가 없었다면 난 새벽까지 산중을 헤메고 있었을 거라고. 

 

 “그러고보니 표주박같아 보이기도 한데……” 

 

 돌이 있던 곳은 평지의 맨 앞부분이었다. 내 눈엔 박 보다도 수면에서 튀어나온 해룡 정도로 보인다. 하얗기는 해도 지면에 박혀있는 탓에 주위의 낙엽이나 풀에 섞여있어서 얼른 발견하기는 힘든 것이었다. 

 

 나는 편지 내용을 재확인했다. 

 

 “이 돌을 서쪽으로 3미터 이동……이라,”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계속 여기 오래 있는건 위험하다. 내려갈 때 발을 헛디뎌 둘다 굴러떨어지는 일만큼은 설사 기정사항이라 할지라도 피하고싶다. 

 

 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손전등을 건네고 손쪽을 비추게끔 부탁했다. 돌을 들어올려보기로 했다. 

 

 “이거 꽤 무겁네,” 

 

 이또한 손을 대 보고 알아낸 건데, 이 돌은 3분의 1정도가 지면에 박혀있다. 이래선 뭐 돌도 아니다. 김칫돌 치고는 너무 큰 이 맷집을 표현하자면, 바위 정도가 적절하겠지. 

 

 한번 냅다 당겨 봤다. 오호라. 분명 표주박이라면 표주박처럼 보이지 않는것도 아니군. 옆으로 눕혀져 있는 돌을 세로로 세워보니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돌을 들고, 대략 서쪽이라 싶은 방향으로 낑낑대며 걸어갔다. 3미터라. 그럼 내 통상 보폭으로 네 걸음 정돈가? 

 

 “좀더 앞이었어요.” 

 

 아사히나 선배가 지시한다. 아 그래, 이 아사히나 선배는 돌이 이동해야할 위치를 알고 있었지. 

 

 “네, 거기요. 그쯤이에요.” 

 

 돌을 지면에 내려놓았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원래대로 눕혀놓으려고 하자, 

 

 “그 돌, 세워져 있었어요.” 

 

 아사히나 선배가 제지하곤 눈을 크게 떴다. 

 

 “마치……무슨 표시처럼……” 

 

 나는 내려놓은 돌을 보았다. 

 

 표시. 

 

 이렇게 보면 부자연스럽게 눈에 띄는 곳에 돌이 있다. 종류는 알아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이 흰 색은 기묘하게 눈에 띄고, 모양도 특이하다. 백(白) 표주박 돌, 정도로 유물이라고 소개하면 믿을 녀석이 꽤 있을것도 같다. 

 

 “아사히나 선배, 혹시 하루히는 이 돌 밑을 파봤었나요?” 

 

 “네. 판건 쿈군이랑 코이즈미군이었지만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나왔다. 정말로요? 

 

 “네, 정말이에요.”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깔고는, 

 

 “보물이 나오진 않았어요……” 

 

 나는 ‘후우’ 하며 크게 숨을 내쉬고는 더러워진 두손을 합장했다. 

 

 그럼 지금 내가 하는건 대체 뭐냐──고는 묻지 않는다. 어제의 그 장난질이랑 그거에 걸려든 그 남자도 그렇지만 그 행위의 의미는 아사히나 선배도 모른다. 확실히 알고 있는 건 아사히나 선배(大) 뿐인게다. 그럼 그녀에게 말하겠다. 계속 이런 단순한 문장에 따른 일방적 지시라니, 이번만큼은 못넘어가겠다고. 

 

 나는 내가 방금 막 세공한 돌을 바라보며 더욱 부자연스런 사실을 깨달았다. 장기간 옆으로 눕혀져있던 돌은 당연하게도 반 정도가 흙이 묻어있다. 내가 파내기 전까지 아랫부분이었던 부분은 지금 뒷면이 됐다. 대충 봐도 누가 어디서 가져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저 지면도 그렇군,” 

 

 돌이 있던 장소다. 돌을 파낸 지면은 딱 그 부분만 어두운 흙색이고, 움푹 들어가있기까지 하다. 

 

 “선배가 오셨을땐 어땠었나요?” 

 

 아사히나 선배는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으-음, 아무도 말을 안해서 전 전혀 몰랐어요. 스즈미야상도 땅 파시는 일밖에 생각지 않으셨던거 같아요……” 

 

 그럼 뭐 그냥 가만히 놔둬도 될지 모르지만 일단 할 건 해두고 가자. 

 

 나와 아사히나 선배는 썩은 나뭇잎이니 덩굴이니를 모아서 훤히 드러난 지면에 뿌리고 잘근잘근 밟았다. 그리고 그 돌에 눌러붙은 흙도 긁어냈다. 충분하다곤 못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길고도 유구한 세월을 느끼게 하는 돌의 풍화한 부분과 그만큼 땅속에서 흙과 잠들어있던 부분은 차이가 너무 난다. 

 

 이래저래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날도 많이 어두워졌고, 작업도 어느정도 쯤에서 끝낼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대체 왜 고생해야하는지 모르면서 하는 고생은 더더욱 힘드니까 말야. 

 

 “이제 가요, 아사히나 선배.” 

 

 이번엔 내가 앞장섰다. 손전등 가져오길 잘했다. 가로등 없는 산의 어둠은 태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신성시했을만큼의 위용을 연출해내고 있다. 거기다 올라갈때보다 내려가는 게 그나마 편하고. 

 

 넘어질뻔 하여 내 등에 안기는 아사히나 선배를 받쳐주길 몇 번, 산기슭까지 내려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 되어있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 

 

 아사히나 선배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에요.” 

 

 그 이슬비가 가랑비가 되기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3-04

 


 

 

 

 

 

 

 

 

 

 

 

 

 

 

 아사히나 선배를 태운 자전거는 전력질주로 내달리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거의 내리막이어서 자전거를 밟는 내 발도 훨씬 가볍다. 갈때의 반도 안걸렸을 것이다. 체력적으론 3분의 1 이하고.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우리를 맞이해준 분이 계셨다. 

 

 “이야! 어서와,” 

 

 어제와 같은 복장의 츠루야 선배가 우산을 한손에 들고 밝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어디에 갔다온거야? 아냐, 됐어. 뭐 사정있는거 같으니까, 난 말을 묻지 않는 츠루냥이니깐! 어쨌든. 이런이런, 미쿠──아니지, 미치루! 많이 찝찝한거 같은데 바로 목욕할래?” 

 

 기관총처럼 말을 쏴대는 츠루야 선배는, 

 

 “추웠지! 자자 목욕하자 목욕! 우리 같이 하자. 쿈군은 어때. 등정도는 밀어줄 수 있어. 히노키부로(檜風呂:노송나무 목욕탕)!” 

 

 감격에 눈물이 다나는 제안이지만, 진심이 아닌건 그녀의 얼굴을 보면 안다. 하루히는 농담같으면서 사실 진심이고, 츠루야 선배는 진심같은 얼굴로 농담을 한다. 

 

 “전 집에서 하죠. 그보다 아사히나──미치루 씨를 잘 부탁해요.” 

 

 그대로 발길을 돌리는 나를 츠루야 선배가 잡아세웠다. 

 

 “잠깐 기둘,” 

 

 내게 우산을 씌워주며 한텐(*상기의 일본식 겉옷) 품속에서 둥글게 끈으로 묶은 종이를 꺼냈다. 

 

 “이거말야, 하루냥한테 부탁받은건데. 쿈군이 갖다줄래?” 

 

 그저 멀뚱히 바라볼 뿐이다. 낡고 두꺼운 화지(和紙:일본식 종이), 여기저기 벌레먹은 모습이 마치 고문서나 매장금의 위치를 적은 지도같은 느낌이다. 

 

 “뭐죠, 이거,” 

 

 “응, 보물지도.” 

 

  츠루야 선배는 시원스레 대답하곤 깔깔 웃었다. 

 

 “요전에 창고를 뒤지다보니까 무슨 고리짝같은 상자에서 찾아낸거야-. 하루냥한테 주려했는데 계속 까먹고 있어서 말이지,” 

 

 그런걸 받아도 되겠습니까. 보물이라구요 보물. 

 

 “괜찮아. 일부러 파러 가는것도 귀찮고. 뭐 나오면 1할정도 줘! 묻혀있는게 몇 대정도 선조건거 같으니까 말이야! 우리집에 전해내려오는 전기에 의하면 장난 같은거 되게 좋아하는 할아버지였나봐, 분명 후손들 놀릴 작정이었을걸. 아예 아무것도 안나오든가 뭔가 엄청난게 나올게 틀림없어!” 

 

 아무래도 전자같군요. 

 

 나는 가능한한 정중하게 지도를 받아들었다. 그렇다곤 해도 건네주는 츠루야 선배가 하도 아무렇게나 던져주다시피 하니 그렇게 고맙지만도 않다. 

 

 “하루히한테 잘 갖다줘! 알겠지!” 

 

 츠루야 선배는 한쪽눈을 감고 내게 기쁘게 웃어보였고, 아사히나 선배는 어딘가 굳은 표정으로 나와 보물지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내 시선을 느끼곤 곧바로 아래를 바라봤다. 뭘까. 정말로 보물찾기에 무슨 금칙사항이라도 있는건가? 난데없는 과거이동으로 그다지 밝지 못한 건 알겠지만, 아무래도 보물찾기에 이 아사히나 선배의 약점(weak point)가 있는것 같군. 

 

 “자, 쿈. 이 우산 빌려줄게. 조심해서 가야돼-. 그럼 안녕!”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는 츠루야 선배와 작게 한손을 흔드는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이 닫힌 문 너머로 사라졌다. 

 

 우산과 원통형의 종이를 들고 한동안 계속 비 아래 서있었다. 

 

 지금이라도 쳐들어가서 목욕하겠다고 하고 싶을 정도로 어쩐지 쓸쓸한 감각에 휩싸였다. 이것도 츠루야 선배 효과인가. 명랑한 사람 옆에 있다가 갑자기 혼자가 되면 즐거운 축제가 끝난 후의 기분이 되는 것 같은……. 걸어다니는 카니발이로군. 

 

 “춥고 썰렁하구만.” 

 

 나는 츠루야 선배에게서 받은 우산을 어깨에 걸친 후 자전거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하루히고 아사히나 선배고 나가토고 죄다 날 미치게 만드는군. 

 

 “아-, 배고프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도 코이즈미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이야기를 들어줘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다음날, 또하나의 아사히나 선배가 청소도구함에서 나타나고 4일째 되는날 아침, 전날의 비구름은 동쪽 너머로 사라졌고, 오늘은 한층 더 춥고도 쾌청한 날씨였다. 

 

 순 등산길 같은 산길을 오르내리는 덕에 교문에 닿을 쯤엔 몸도 달아오르지만, 난방기구같은건 절대절대 없는 교실에 박혀서 1교시를 반쯤 하고 있으면 땀을 흘린만큼 더욱 추위를 느끼게 되니 몸에 좋지도 않다. 

 

 교문을 지나 현관을 넘어 신발장을 열기 전에 나는 한번 심호흡을 했다. 내 앞으로 온 미래지령이 어제 그걸로 끝났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으므로, 오늘 아침도 들어있을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대체 이번엔 뭘 하라고 시킬런지 약간의 망설임이 있긴 했지만 도저히 못열겠다거나 하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왜냐면 이걸 열지 않으면 실내화를 신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도 봉투가 들어있었다. 

 

 그것도 세통이나. 

 

 “어이구야, 이번엔 또 뭐길래……” 

 

 그것도 넘버링까지 되어있다. 각각의 봉투 표면에 #3, #4, #6 이라 적혀있었는데, 3, 4, ……6? 

 

 “그럼 전에 두통이 #1 하고 #2 였단 건가? 그럼 맨 처음게 #0?” 

 

 근데 왜 4에서 갑자기 6으로 건너뛰는건데. 5는 어디갔어? 실수로 잘못썼나. 

 

 죄다 주머니에 집어넣고 화장실로 직행하는 이 행동은 이미 일상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숫자가 적은 순서대로 열어보았다. 

 

 예비종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대충 훑어보고, 화장실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게된 나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자신을 볼 수가 있었다. 

 

 아사히나 선배(大)는 우리한테 뭘 시키려는 거지? 아니, 생판 모르는 남자를 병원신세를 지게 만들고 돌을 이동시킨다는 등의 행위가 뭐 어쨌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런 걸  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싶단 말이다. 

 

 이런저런 의심과 함께 교실에 들어간 나를, 이번엔 이상하게 차분치 못한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쿈!” 

 

 큰소리로 내 괴상한 별명을 부르며 달려든 자는, 어제까지만 해도 우울기에 가득차있던 하루히였다. 

 

 “다 알고 왔어, 당장 내놔,” 

 

 저 얼굴 가득한 웃음으로 내놓으라는 게 뭘까 생각해보기 시작하니, 

 

 “너, 까먹고 놓고온건 아니지? 츠루야상한테 받은거 있잖아? 뭔지 알겠지?” 

 

 상태변환이 빠른것도 정도가 있다. 찌뿌등한 분위기를 뿜어내던 어제까지의 넌 어디로 간거냐? 설마 다른사람이 하루히인척 하고 있었던건 아니겠지. 

 

 “또 뭔 헛소리야? 난 언제나 나고 나 말고 다른 나같은건 없어.” 

 

 하루히는 눈썹을 치켜올리는 모양의 웃음으로, 

 

 “어쨌든! 빨리 내놓으란 말야. 놓고왔다고 하면 지금 달려가서 가져오라고 할거니깐!” 

 

 얼씨구. 한번 보쇼, 반 전체의 주목을 받게 됐군 그려. 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인생을 목표로 한다만. 

 

 “그런 목표같은거 옥상에서 비행기라도 태워 날려버려! 눈에 띄고 안띄고같은건 목표랑은 상관없다구. 인생을 말하려거든 죽기 3초전에 하도록.” 

 

 3초만에 인생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도 비참하다만, 할수없이……랄 것도 없군. 나는 가방을 열어 츠루야 선배에게서 받은 빛바랜 화지 원통을 꺼내──는 순간 그건 내 손에서 사라졌다. 그것을 가로채간 손의 주인공은 둥근 끈을 풀며 내게 약간 작은 목소리로, 

 

 “너, 이거 벌써 봤어?” 

 

 “아니, 아직” 

 

 “진짜?” 

 

 “그래, 받아서도 볼 생각조차 없었다.” 

 

 “보물지돈데도? 너, 그 소리 듣고 막 두근거리고 안그랬어?” 

 

 그랬든 안그랬든 난 보물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터라 ‘헛수고’라는 단어가 이 이상 잘 맞는 상황은 없고, 그걸로 어떻게 두근거릴수가 있는지 도리어 내가 묻고 싶다. 따라서 난 츠루야 선배에게 받은 불길하기 그지없는 선물을 가방에 처박은 채 본 척도 안했단 거다. 차라리 헛수고 하기 전에 보물찾기를 중지하려고도 생각해봤지만, 하루히는 둥글게 말린 화지를 난잡하게 펼치며, 

 

 “참, 츠루야상도 복잡하네. 나한테 직접 주면 될걸 쿈한테나 맡기고 말야. 아침에 받은건 좋지만, 방과후에 놀래켜주려고했는데……” 

 

 입으론 투덜거리면서도 기쁜 듯, 곧바로 등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필통과 교과서를 서진 대용으로 종이 한쪽을 누르며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나도 포기하고 자리에 앉아 새로운 의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야, 하루히.” 

 

 “왜.” 

 

 고개도 들지 않고 적당히 대답하는 하루히. 

 

 “츠루야 선배가 그걸 나한테 맡겼단거 언제 알았냐?” 

 

 “어젯밤에. 츠루야상이 전화했었어.” 

 

 여전히 지도만 바라보는 하루히는, 

 

 “너, 샤미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대며? 츠루야상네 집앞을 지날 때에 발견해서 맡겨뒀다고 그러더라. 샤미센도 많이 좋아졌나보네. 잘됐어.” 

 

 츠루야 선배의 말에 입을 맞출 수밖에 없겠군. 이 드럽게 추운 겨울 밤에, 그것도 빗속을, 거기다 고양이까지 데리고 산책하는 놈이라니 듣도보도 못했다. 그걸 믿는 하루히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만. 

 

 내가 어이없음을 표현하는 침묵에 휩싸여있는걸 알지는 못했는지 하루히는 절분때와 같은 빛나는 눈빛으로, 

 

 “봐봐, 쿈. 이건 틀림없는 보물지도라구. 그렇게 돼있다고 써있는걸,” 

 

 나는 하루히의 책상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곧바로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은 이 한 장의 화지, 거기엔 한번에 그린 것 같은 그림과 몇행의 문자, 그리고 서명이 들어있었다. 그림은 금방 알 것 같다. 그 산이다. 어제 갔었고, 내일 또 가게 될 츠루야산이다. 먹으로 그려진 간단한 그림인데, 산 능선의 특징을 잘 잡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문자 쪽은 읽을 수가 없었다. 꾸불꾸불한 가나(?名)체인건 알겠는데, 고문(古文) 교과서마저 때때로 외계어로 보이는 판에 이 중요문화재같은 서류를 읽을 수 있을리 없었다. 

 

 하루히가 번역해주었다. 

 

 “이 산에 신기한 것을 묻었다. 내 자손중 마음이 끌리거든 가서 파보도록 하라.” 

 

 그리고 말미의 서명을 손으로 문지르며, 

 

 “원록 15년(元?:에도시대 중기. 1688년~1704년까지의 일본 연호. 원록 15년은 1703년), 츠루야 후사우에몬(鶴屋房右衛門)” 

 

 참나. 츠루야 선배네 몇 대 조상인진 모르겠지만 별 쓸데없는걸 남겨주는군. 대체 왜 파야하는거냐? 츠루야 선배 말마따나 세대를 뛰어넘은 원대한 자난 아니냐. 그렇지 않다해도 원록시대에서 지금까지의 몇백년 사이에 진작 츠루야가의 다른 사람이 파냈을거다. 

 

 “산 어디에 묻혀있대냐?” 

 

 별 관심없는 말투를 한 내게, 하루히는 수묵화같은 산 그림을 가리키며, 

 

 “그건 안써져있어. 무슨 표시도 없고. 알 수 있는건 산 어딘가에 있다는거 뿐이야. 뭐 별 상관 없잖아.” 

 

 기세좋은 시선이 압력이되어 내 얼굴을 위협했다. 

 

 “대충 파다보면 팔 데가 줄어들어서 결국엔 찾게 돼있어. 롤러 작전이야 롤러 작전.” 

 

 그래서 그걸 누가 한단 소리냐. 동네사람들이라도 모아서 자원조직 만들어볼래. 

 

 “미쳤어, 그런거 안해.” 

 

 하루히는 지도를 다시 말아서 끈으로 묶고, 책상 속에 집어넣었다. 

 

 “당연히 우리끼리만 할거야! 너도 할당량이 줄어들면 싫잖아?” 

 

  자기 몫이 줄어드는 거야 당연히 싫지만, 없는걸 무슨 수로 줄이냐고 마음속으로 탄식을 했을 때 종이 울리고 담임 오카베가 들어왔다. 

 

 “수업 끝나고 부실에서 회의야,” 

 

 하루히는 샤프로 내 등을 찌르며 내 목덜미에다 대고 말했다. 

 

 “그때까지 비밀이야. 놀래켜주고 싶으니까. 그리고 너도 놀라는 척 해. 완전 처음들은 이야기인거 같이 해줘. 참, 츠루야상도, 진짜……” 

 

 이 이후 하루히의 투덜대는 소리는 오카베의 큰 목소리와 반 전원이 일제히 일어서는 소음이 덮어씌워주었다. 

 

 

3-05

 


 

 

 

 

 

 

 

 

 

 

 

 

 

 

 그럼, 수업 내용을 확실히 뇌세포에 전달하는 방법을 하나 전수해주도록 하지. 뭐 특별한 집중력 따위는 필요없다. 멍하니 있어도 되니까 선생님 말이 귀에 들어오게끔 하고, 다음은 칠판이니 교과서니를 바라보고 있기만 하면 된다. 당연히 노트에 적어놓으면 좋지만 그런걸 매 교시마다 꼼꼼히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요령도 필요하단 거다. 

 

 간단히 말하자면, ‘특별히 수업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 다만 수업이외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도록 한다.’ 이거면 땡이다. 딴 생각만 안하고 있으면 할 일없는 뇌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맘대로 기억해준다는 식의 계획이다. 

 

 뭐, 한번 시도해보도록 해라. 단 내게 이 방법을 가르쳐 준건 하루히라, 이게 스즈미야 하루히식 학습법이라는 건 잊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요컨대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공부 이외에 아무데도 머리를 쓰는 말라는 거다. 다만, 그런 생활이 재밌을 리가 없고, 실제로 하루히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보기 때문에, 그건 순 뻥이고, 즉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말이지만 정작 하루히 자신은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고 몰아붙인다면야 할말없다. 

 

 그리고, 현재의 내겐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루히가 최근 미묘히 꿀꿀해있는게 꽤 걸리기도 했는데, 마침 지도가 한 장 나와서 MP를 전부 회복시켰다는 건 환영할만한 일이다. 덕에 걱정거리 하나 줄었다. 

 

 그 대신, 아사히나 선배(大)의 미래지령은 한번에 셋이나 늘었고, 이건 나와 8일후의 아사히나 선배가 실시하지 않는이상 줄어들지 않는다. 얼른 끝내버리고 싶어도 시간까지 명시되어 있어서 만약 지금 교실을 뛰쳐나간다 해도 작업단축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놓고 느긋이 있을 수도 없는………… 

 

 뭐, 이딴 생각을 하고 있던 탓에 수업 내용을 하나도 못듣는 거지만, 누구를 탓할수도 없는 변명일 뿐이다. 

 


 

 

 

 

 

 

 


 방과후, 나는 하루히에게 끌려가다시피 해서 부실로 연행되었다. 완전 어장에 갇힌 민물고기 같은 기분이다. 츠루야 선배이 말 덕에 샤미센 양호를 구실로 한 내 조퇴 이유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됐고, 거기다가 오늘 나는 정말로 아무런 할일도 없다. 

 

 신발장에 들어있던 비밀 미래지령은 명료하게 오늘과 내일이 비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실행해야하는건 모레, 그리고 글피다. 세통을 오늘 한꺼번에 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한동안의 연휴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국경일에 토요일, 월요일의 중학생수험까지 해서 4일 연휴다. 

 

 그렇다곤 해도 미래인은 신발장을 편지함 대용으로 쓰는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직접 갖다주면 어디가 덧나나. 오늘은 아사히나 선배(大)에게 물어보고 싶은게 꽤 많다고. 

 

 그런 생각을 수업중에 했고, 하루히에게 끌려가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문예부실에 와있었다. 

 

 “안녕-! 나왔어!” 

 

 쓸데없이 힘찬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연 하루히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하여 나도 부실로 들어갔다. 상당히 오랜만인것 같은 느낌을 금치 못하는 이유는 모두가 집결해있는 이곳에 오는게 3일만이기 때문이다. 단 3일만에 향수를 느낄정도로 부실에 귀속의식을 갖고 있단 말인가.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으며 하루히가 열어제낀 문을 닫고, 간만에 우리 단원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제일먼저 구석에서 정육면체인가 싶을 정도로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쇼트컷 세일러복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가토는 흔들리지 않는 무표정으로 나와 하루히를 번갈아 보더니 곧바로 활자의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불필요한 말을 일체 하지 않는 작은 체구의 유기 안드로이드는 달리 쓸데없는 동작을 하지도 않고 평소처럼 지장보살과 같은 침묵을 지키며 부실 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야, 오랜만이네요.” 

 

 직소퍼즐을 분해하고 있던 코이즈미가 뭔가 있단듯한 미소와 태연한 대사와 함께 머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샤미센 1호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좋은 동물병원을 알선해드리겠습니다. 제 지인분의 친척이 경영하는 곳인데 꽤 좋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네가 아는 사람은 죄다 그런 인간 뿐이냐. 

 

 “전 이래봬도 발이 꽤 넓습니다. 여러 가지로 말이죠.” 

 

 코이즈미는 손끝으로 퍼즐조각을 튕기면서, 

 

 “그래서 연줄을 타고 가다보면 대부분의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제 아는 분의 아는 분 사이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여기서 코이즈미는 우아하게 손을 펼쳐 무슨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폼을 재더니, 

 

 “아직 지상에 존재치 않는 직종을 가진 인간뿐이죠.” 

 

 이미 우주인이나 미래인과 아는 사이인데, 이 이상으로 교우관계를 넓혀서 어쩌잔거냐. 난 이세계인따위하고 만나고 싶진 않다고. 골치아파지기밖에 더하겠냐. 

 

 코이즈미는 풋 하며 입끝으로 웃고는 나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하루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회의가 있다고 하셨던것 같은데요,” 

 

 “응, 그래. 긴급특별 회의.” 

 

 하루히는 단장석에 가방을 내동댕이 치고는 풀썩 앉았다. 

 

 “미쿠루짱, 차 한잔 줄래,” 

 

 “네-,” 

 

 귀엽게 대답하고 쫄레쫄레 주전자로 달려가는 메이드 의상의 그분은, 어디서 어떻게 봐도 아사히나 선배였다. 

 

 당연하다. 아사히나 선배가 여기 있어서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인가. 다만……. 

 

 “으음……” 하며 나는 끙끙대는 소리를 냈다. 

 

 혼란스러운 머리에 활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 이분은 지금 현재 츠루야 선배네에 있는 아사히나 선배(미치루)가 아니다. 내가 잘 아는 그 아사히나 선배고, 약간 더 미래에서 온 아사히나 선배가 아닌 쪽의 아사히나 선배다. 

 

 찻주전자에 콜콜 물을 따르고 있던 아사히나 선배는 문득 나를 보더니, 

 

 “저, 쿈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3일전에 등장한 아사히나 선배(8일후)와 완전히 똑같다. 당연하지만 말이지.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으니, 

 

 “고양이 상태는 괜찮나요? 겨울방학에 추운데에 가서 그런가……” 

 

 “아뇨……”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이 아사히나 선배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가 오늘부터……어디보자 5일 후 저녁쯤에, 그때부터 오늘에서 3일 전으로 시간이동할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지 않고 있으니……이거 영 골치 아파 미치겠군. 

 

 “샤미센은 어제 다 나았어요. 지금쯤 아마 제 방을 휘젓고 다니고 있을걸요.” 

 

 “그래요? 잘됐네요-,” 

 

 아사히나 선배는 밝은 웃음을 지어보이고, 나는 새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샤미센이 아픈게 뻥이란 걸 아사히나 선배(미치루)는 이미 알고 있다. 그쪽 아사히나 선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이 아사히나 선배를 걱정시켰다가 안도시켰다가 하는 원인 그 자체가 순 뻥이었다는 사실엔 죄송하기 그지없다. 

 

 “또 저랑 놀게 해주세요. 고양이씨, 너무 귀여우니까요.” 

 

 선배보다 귀여운 것따윈 은하계를 500광년 헤매도 안나올겁니다마는, 고양이를 구실로 저희집에 오시겠다는 거라면야 언제든 오케입니다. 샤미센이 좋아라하는 뒷집 검은고양이도 데리고 올까나요. 

 

 “후훗, 그거 좋네요……아!” 

 

 아사히나 선배가 폴짝 뛰어오르더니, 

 

 “물 넘쳤다,” 

 

 찻주전자가 물에 넘치고 있다. 나와 고양이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모양이었다. 이것도 하루히에 의한 어리버리 메이드 만들기 계획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하루히는 걸레로 테이블을 닦는 아사히나 선배의 당황하는 모습을 팔짱끼고 앉아서 만족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코이즈미 옆 파이프 의자를 가져와 앉은 다음, 하루히가 그 물건을 꺼내서 자랑스럽게 선언하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사히나 선배가 찻쟁반에 찻잔을 둘 얹어 하루히와 내게 가져다주었다. 이거 한모금 마실 정도의 틈을 줄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는데, 하루히 녀석은 도저히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뜨거운 차를 원샷해버리더니 실실 쪼개면서 단장석에 떡하니 앉아서 컴퓨터를 켰다가 옆에 있던 잡지를 들여다보거나 하고 있다. 어쩌다 나랑 눈이 마주치면 순간적으로 진지한 얼굴이 됐다가는 또 실실 웃고 앉아있다. 이건 또 무슨 전조냐? 

 

 코이즈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한가히 퍼즐을 맞추고 있고, 나가토는 아예 처음부터 아무 반응이 없었으며, 아사히나 선배는 두 번째 차를 끓이는데 여념이 없는 듯 하니 이거야 아주 완벽하기 그지없는 일상 풍경이지만, 오늘만큼은 이게 더 이상하다. 대체 하루히는 왜 이런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답은 얼마안가 밝혀졌다. 

 

 이 온화하고 평화로운 시간의 종지부를 찍은 건 하루히의 우렁찬 목소리도 아니었으며 하교를 강요하는 방송도 아닌, 리드미컬한 노크 소리였다. 

 

 “얏호-! 나 왔어. 들어가도 돼-?” 

 

 익숙한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지고, 그와 동시에 하루히가 번쩍 일어섰다. 

 

 “기다렸어. 들어와들어와!” 

 

 웬일로 단장님께서 손수 문을 열어주어 들어오게된 그 손님은, 

 

 “이야! 미쿠루 빼고 모두다! 진짜진짜 오랜만이야. 아아, 쿈군은 어제 봤지? 샤미는 어때 샤미는, 또 데리고 놀러와!” 

 

 큰 소리로 외치는 츠루야 선배가 지금이라도 하루히와 팔짱을 끼고 라인댄스를 출것만 같은 웃음과 함께 찾아왔다. 이번에돈가. 

 

 

3-06

 


 

 

 

 

 

 

 

 

 

 

 

 

 

 

 “응, 그래. 보물지도. 대략 300년 정도 된 보물이야. 무슨 원록시대 금화같은거 아닐까. 그랬으면 참 좋겠다!” 

 

 츠루야 선배는 다과로 나온 새우 전병을 와구와구 먹으며 파이프 의자위에 양반다리로 앉아있었다.

 

 “그 종이조각, 우리집 창고에 있었는데, 그 창고가 말이지, 진-짜 옛날부터 쓸데없는거 넣어놓는 덴데 말야, 한 5년인가? 그전에 정리하다 보니까 온갖 잡동사니랑 섞여있던 궤짝 속에서 나온거야!” 

 

 손님용 찻잔에 나온 엽차를 벌컥벌컥 마시는 츠루야 선배는 갑자기 검지를 번쩍 세워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거기엔 자석클립으로 붙인 고풍스런 지도가 있었고, 그 옆에 하루히가 서서 안테나 봉으로 어깨를 두드리고 있다. 기쁜 듯이. 

 

 “그 산 말인데, 국유지로 해라, 차라리 양도해라 어째라 말이 많았는데, 이것만큼은 조상님 유언으로 넘겨선 안된다고 해서 말야. 아아! 그렇지, 분명 보물이 묻혀있어서 그런걸거야! 그랬구나, 우리 조상님,” 

 

  츠루야 선배가 합장하고 져가는 석양에 나무아미타불 어쩌고 하며 기도, 하루히는 화이트보드를 봉으로 팡팡 쳤다. 

 

 “그렇게 된 거야.” 

 

 그렇게 됐다니. 지금은 그냥 츠루야 선배가 조상님 유품 내력을 설명했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그 조상님께서 묻어주신 보물을 우리가 찾으러 간단 거야. 이야기 흐름으로 봐서 그거밖에 더있겠어,” 

 

 하루히는 입을 크게 벌려 흰 이를 드러내며, 

 

 “내일부터 시작이야. 서두르지 않으면 누가 먼저 캐가버릴지도 모른다구. 내일 아침 9시에 역앞으로 집합이야. 산에 가자-! 도구는 내가 준비해올테니까 걱정 붙들어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난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젯밤에 츠루야 선배에게서 이 지도를 받은건 나고, 보물찾기 이야기는 3일전에 이미 아사히나 선배에게서 들었고 오늘 아침 하루히한테 한번 더 들었다. 이지경에 이르러서 놀란 척 하라고 시킨다고 해서 그렇게 할 정도로 난 연기력에 자신있는 인간이 아니다. 할수없이 거의 빈 거나 마찬가지인 찻잔을 입에 갖다댔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지금 여기서 놀란 얼굴을 한 사람은 단 한사람, 

 

 “에엣. 보물찾긴가요? 내일 하는거에요? 산이요? 아, 그러면 도시락 만들어야,” 

 

 아사히나 선배 뿐이었다. 

 

 나가토는 책을 편 채 눈으로 하루히가 든 봉 끝을 쫓으며 침묵을 고수, 

 

 “이런이런. 고고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 흥미로운 소재로군요. 정말 기대됩니다.” 

 

 코이즈미는 변함없이 하루히를 밀어주는 소리를 하며 미소지었다. 

 

 하루히가 전원의 경악을 기대하고 있었다면야 참으로 실망스러운 반응이 아닐 수 없지만, 지금의 하루히는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그치. 혹시 찾아내면 우리끼리 나눠가져도 되지? 물론, 이걸 제공해준 츠루야상 몫도 있구,” 

 

 “그럼!” 

 

 츠루야 선배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나온게 금화같은 거라면 하루냥한테 9할 줄게!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몇대 위인진 까먹었는데, 그 후사우에몬 할아버지가 자손에게 주려고 남긴 사유물 같은거면,할수없네-, 우리가 맡을게. 어쨌든 나는 보물찾기하러 못가서 말이지! 내일은 좀 일이 있어서 말야!” 

 

 내게 이상한 눈빛을 보낸다. 츠루야 선배는 내쪽을 향해 눈을 깜빡인 후, 아사히나 선배에게 시선을 주고 씨익 웃었다. 약속대로 이쪽 아사히나 선배에겐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바디랭귀지(body language)였나. 

 

 의심같은건 안합니다, 츠루야 선배. 하지만 말이죠. 

 

 우리에게 필요이상으로 관여치 않고 있는 츠루야 선배라고는 하지만, 코이즈미에게서 없어도 될 뒷설정을 듣기도 했다. 그렇다곤 해도──오히려 그렇기 때문인지, 그녀의 행동은 참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아마추어 야구대회 때와 겨울합숙 펜션 제공은 이쪽에서 의뢰해서 얻은거나 마찬가지지만, 일부러 하루히에게 이런 보물지도같은 떡밥을 준다니, 마치 우리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 같다. 설마 하루히가 원할만한 아이템이란 아이템은 죄다 던져주고 재미있어하는건 아니겠지. 

 

 그런 내 의심에도 불구하고 츠루야 선배는 전병을 열심히 먹으며 즐거운 표정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또한 이상하게도 코이즈미도 미스무리한 표정을 짓고 있다. 츠루야 선배가 몇 번이고 부실을 드나들었던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코이즈미가 그녀에게 뭔가 꿍꿍이 있어 보이는 표정을 보인 적은 없었다. 츠루야 선배는 건드리지 말라는게 ‘기관’인가 하는 데 상사한테서 나온 명령이라면, 이렇게 가까이서 오래 있으면 곤란한거 아니냐. 

 

 그리고……. 

 

 나는 코이즈미의 무해한 미소에 시선을 주며 생각에 빠졌다. 이녀석이 그날밤에 한 소리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모르겠다. 그 말이 맞다면 ‘기관’과 츠루야가(家) 사이엔 불문율같은 계약관계에 있다──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기관’과 츠루야가다. 코이즈미와 츠루야 선배 사이에 있는게 아니다. 이 두사람도 제각각 그딴거 알게 뭐냐는 식으로 나올 가능성도 있다. 그것도 서로에게 알려주지 않고 말이다. 

 

 츠루야 선배는 코이즈미나 나가토, 아사히나 선배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 같진 않고, 이 세 사람──과 하루히──이 뭔가 다른 존재임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파고들려고는 하지 않는 것이 츠루야 선배 스타일이다. 나는 그젯밤에 츠루야 선배에게서 들은 말을 전면적으로 믿고 있고, 코이즈미 말도 약간은 믿고 있다. ‘기관’과 나가토를 저울질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면 우리 편에 서겠다는 그때의 말을 말이지. 

 

 “……야, 쿈! 너 듣고있어?” 

 

 예리한 목소리가 귀를 때리고, 작대기 끝이 내게로 향했으며, 그 연장선상엔 하루히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알겠어? 내일은 움직이기 편한 차림으로 올 것!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옷을 입고 오도록 해. 너랑 코이즈미군은 맨손으로 와도 돼. 일단 필요한 건……”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를 시켜 수성펜을 잡게 했다. 

 

 메이드에 서기라고 하는 이상한 조합의 속성을 가지게 된 아사히나 선배는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귀여운 글씨체로 화이트보드에 받아적기를 해나갔다. 

 

 “먼저 삽 두 개. 이건 내가 가져올게. 그리고 도시락. 미쿠루짱, 부탁해. 돗자리도 필요하겠지. 그리고 조난당했을 때를 대비해서 나침반, 랜턴, 지도도 가져오자. 이 보물지도 말고 제대로 된거 말야. 비상식량으로 과자도 잔뜩 가져오는게 좋겠지. 발연통(發煙筒:연기나는 약품을 채운 통, 신호용으로 씀)은 어떻게 할까-” 

 

 얜 또 무슨 산을 올라갈 작정이야. 우리 학교가 있는데보다 정상이 낮은 산이라고. 또 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조난은 말도 안되는 소리고, 또 만에 하나 그런 비상사태가 벌어진다고 해도 나침반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다는 사실은 지난 연말에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나가토의 냉정한 눈동자가 아사히나 선배의 어설픈 글자를 바라보는 걸 확인하고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정도 전에서 온 그 아사히나 선배의 정보에 따르면 우리는 별 탈없이 보물찾기를 하고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고 한다. 그것도 아무런 보람도 없이 말이지. 거기서 무슨 중대한 사건이 터지거나 했으면 아무리 아사히나 선배라고 해도 주의하라는 식의 말은 해줬을 것이다. 

 

 올라가서 도시락 먹고 하산. 이거야 순 소풍이나 다름없다. 육체노동 담당으로 결정난 나랑 코이즈미를 제외하면 말이지……. 

 

 이쯤에서 나가토가 동기를 봉인한 이유를 다시한번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뭘 할것이며 하루히가 무슨 말을 해댈 것인지 모두 미리 알고 있는 지금은, 솔직히 말해 하나도 재미없다. 안들을걸 그랬네요, 아사히나 선배. 

 

 뭐 균형이 맞는다면야 그럴지도 모른다. SOS단의 이번 주말예정은 쫙 꿰고 있다. 하지만 나와 아사히나 선배(미치루)가 실행해야 할 아사히나 선배(大)가 내린 지령의 의미는 전혀 모른다. 따라서 손익 계산하면 나오는 건 0──이라 해도 될라나. 

 

 어쩐지 손해만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말야. 

 

 등산할 기분에 충만해있는 하루히가 끝도없이 준비물을 늘어놓은 덕에 화이트보드에서 받아적을 공간이 사라졌고, 바닥에 꿇어앉은 아사히나 선배가 자그마한 글자로 구석에다가 셰르파(sherpa)니 텐트니를 적게 되었는데, 

 

 “하루냥, 무슨 산맥 횡단하는건 아니잖아-. 산이라곤 해도 되게 작고 핸드폰 전파도 들어오고 하니까 조난 당할거같으면 전화해줘! 수색대 파견할테니까-,” 

 

 츠루야 선배가 깔깔 웃으며 말해주기를, 

 

 “내가 어렸을때 뛰놀던 산이야, 곰도 없어!” 

 

 하루히도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조난당했을 땐 부탁할게.” 

 

 뭐 처음부터 진심은 아니었을거 아냐. 하루히는 들고있던 봉을 빙글 돌려서, 

 

 “모두 다 알겠지. 이렇게까지 해주는 츠루야상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보물을 찾아내는거야. 자 모두 파이팅!” 

 

 나는 어쩐 이유에선지 안도하는 내 자신을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루히가 평소 상태로 돌아와서 내게 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여주고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 모든 불안감이 날아가버리는 것만 같아서, 뭐 그런 느낌 때문에 안심했다고 해야하나 어째야하나……. 

 

 뭐 어때, 누구든 간에 다시 밝아졌다는 건 좋은 일이다. 이유가 뭐든 간에 말이지. 

 


 

 

 

 

 

 

 


 일방적으로 보물찾기 계획을 세운 후, 하루히가 학교도서실에서 가져온 에도시대 도감이니 자료니 역사소설 등을 펼쳐놓고 츠루야 선배의 조상(쇼야인지 몬야인지 했었지)이 묻은 게 뭘지 추리해보게 되었는데, 그건 추리가 아니라 순 찍기 아니냐고 외치고 싶을 전개가 약 한시간정도 이어지고는, 오늘의 특별 긴급 회의는 끝났다. 

 

 거기다 하루히는, 

 

 “금화같은 건 시시해. 더 재미있는 게 나왔으면 좋겠네.” 

 

 같은 소리를 하며 억지를 부렸지만 나가토가 책을 덮는 것을 신호로 자기가 들여다보고 있던 화승총 도감을 덮었다. 이제 종업시각이다. 

 

 그리하여 전원 집단하교를 하게 되었다. 언덕을 내려가던 중, 나는 츠루야 선배랑 어찌어찌 단둘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그 기회란 건 그리 만만히 찾아와주질 않았다. 하루히와 츠루야 선배가 맨 앞에서 바람을 가르며 걷고 있었고, 그 뒤에 아사히나 선배로 이어져서, 묵묵히 걷기만 하는 나가토를 지나 맨 끝이 나랑 코이즈미다. 나는 아사히나 선배(미치루)가 츠루야 선배네서 평화롭게 잘 생활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게 하루히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뭐 괜찮겠지. 어차피 나중에 전화하게 될거니까. 그쪽 아사히나 선배와는 이후 예정을 맞춰야겠지. 오늘 아침에 온 세통의 편지 중 하나의 지령은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손에 넣어야만 하는 물건이 있다. 이젠 무슨 롤플레잉 같이 됐다. 얻는거야 하나도 없지만. 

 

 뭐 어쨌든 츠루야 선배는 대단하다. 하루히나 아사히나 선배를 대할 때를 보면, 자기네 집에 아사히나 선배 판박인지 쌍둥이 동생인지 도플갱어인지 모를 사람이 와서 뻗대고 있다는 듯한 태도는 조금도 내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츠루야 선배 그 자체다. 이 얼마나 믿음직한 선배인가. 

 

 “낼 보자! 지각은 벌금이야!” 

 

 나가토네 맨션이 보이기 시작한 쯤에서 우리는 삼삼오오 갈라졌고 나는 하루히의 목소리에 손을 흔들며, 지금부턴 집에 가는 척을 해주면 된다. 

 

 

3-07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히 집에 가는 고등학생의 모습을 연기하며 나는 전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꺼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좁은 골목길 사이로 몸을 숨기며 츠루야 선배네 저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츠루야가(家)에서 일하는 분인 듯한 사람에게 이름을 대니 곧바로 아사히나 선배에게로 연결됐다. 

 

 『여보세요. 쿈군? 저에요.』 

 

 나는 별채 방에서 다소곳이 정좌해있는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을 그리며, 

 

 “오늘도 편지를 받았어요.” 

 

 『으-응, 이번엔 뭘 하면 되죠……』 

 

 말끝은 거의 한숨에 가깝다. 

 

 “그 일로 의논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오늘 내일은 아무래도 자유시간인 것 같고요, 모레쯤부터 바빠질 것 같네요.” 

 

 『아, 네. 왠지 알것 같아요……』 

 

 그건 또 왜일까. 

 

 『토요일에 시내 패트롤을 했다고 했었죠. 차분히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러고보니까 그때 쿈군이 좀 이상했던것 같은……』 

 

 이것도 안듣는게 좋을뻔 했군. 무리해서라도 이상한 행동을 해야한다니 지칠 지경이다. 안그래도 내일은 꽤 피곤하게 생겼는데. 

 

 “그 이야긴 나중에 듣죠. 지금부터 그쪽으로 갈게요. 츠루야 선배는 아직 안오셨겠죠. 전 지금부터 갈 거니까 츠루야 선배보다는 약간 늦게 도착할 것 같네요,” 

 

 겨울바람에 발을 동동 굴러야만 하는 계절이다. 나는 전화를 끊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초인종 소리에 나와 준 분은 오늘도 츠루야 선배였다. 나와는 아주 간발의 차이였나본지 옷도 세일러복 그대로다. 

 

 “올줄 알았어,” 

 

 츠루야 선배가 문을 열며 밝게 말하고, 나를 손짓으로 불러들였다. 

 

 “그래서 어때? 저 미치루짱은 언제까지 우리집에 있어준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앞으로 며칠이면 될겁니다. 

 

 “난 이제 아주 갖고 싶어서 말이지! 아 진짜 귀여워 죽겠어! 같이 살다보니깐 학교에선 몰랐던 미쿠루……가 아니지, 걔의 귀여움을 열두개정도 새로 발견했거든! 껴안고 자고 싶을 정도라니깐!” 

 

 설마 진짜 하고 계신건 아니겠죠, 그 부러운 걸 말입니다. 

 

 “아니-. 같이 하는건 목욕 정도야. 미치루 걔, 뭐 말 하려고 할때마다 말해도 되는지 안되는지 생각하는거 같은 얼굴을 하거든. 그게 또 엄청나게 귀엽다니깐! 좀 불쌍하기도 하구. 신경안써도 되는데말야!” 

 

 나는 츠루야 선배를 따라 별채까지 따라갔다. 상상대로 아사히나 선배는 다다미 위에 정좌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명주실로 된듯한 화복(和服:일본식옷) 위에 한텐을 입은 모습이 신선했는데, 

 

 “아, 쿈군……” 

 

 내가 온 걸 보고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짓는 저 모습 또한 좋군 좋아. 지금이라도 미츠유비(三つ指: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방바닥에 가볍게 짚고 공손히 절하는 일)로 절을 해줄 것 같은 씬이다.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내 뒤에 있던 츠루야 선배의 고양이같은 미소가 눈에 띄었다. 뭔가 묻고싶은 듯한 눈빛이지만, 확실히 말은 해야겠지. 

 

 “츠루야 선배, 죄송하지만 저와 아사히나──미치루 씨 둘만 있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금방 끝납니다마는,” 

 

 “흐흐흐흐으응?” 

 

 츠루야 선배는 내 어깨 너머로 아사히나 선배를 바라보며, 

 

 “둘이만? 이 좁은 방에서? 좋지,” 

 

 츠루야 선배는 아사히나 선배가 얼굴을 붉히는 걸 재미있단 듯이 바라보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난 옷좀 갈아입고 올게. 으흐흐흐흥? 잘해봐~” 

 

 스텝을 밟는 듯한 발걸음으로 안채로 향하는 츠루야 선배. 그걸 보고 나서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몸이 굳은 것 같은 아사히나 선배는 바닥에 깔린 다다미 숫자라도 세고 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제가 더 난처합니다. 

 

 쓸데없는 번뇌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학교가방에 의식을 집중시키기로 했다.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이게 그 편지에요. 오늘 온겁니다.” 

 

 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두통의 봉투를 내밀었다. #3과 #4만을. #6은 보여주지 않았다. 이 6번은 나한테만 온 것이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그 #6이 마지막 편지일 거다. 이이상은 없다고 봐도 좋다. #5가 있다면 또 모르지만, 어쨌든 그 두통의 편지 안에 든 내용을 소개하지. 

 

 먼저 #3, 

 

 『모레, 토요일. 남쪽으로 가서 저녁까지 **동 **번지에 있는 육교로 가주세요. 육교 앞에 팬지(pansy)꽃 화단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아래의 주소로 익명 발송해주세요. 떨어져있는 건 소형의 기억매체입니다.』 

 

 두 번째 장에는 또 엄청나게 먼 주소가 적혀있었고, 위에서 말한 기억매체인지 뭔지 하는걸로 보이는 것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기억매체란 건 그림에 따르면 메모리스틱을 연상시키지만 자신은 없다. 도저히 잘그렸다고는 할 수 없는 그림이라서 말이지. 

 

 다음 #4는, 

 

 『강가의 벚나무길, 당신과 아사히나 미쿠루가 잘 알고 있는 벤치가 있을겁니다. 일요일. 오전 10시 45분까지 거기로 가서 오전 10시 50분까지 강에다 거북이를 풀어주세요. 거북이 종류는 상관없습니다. 작은게 좋겠죠.』 

 

 이것도 두 번째 장이 있었다. 귀여운 얼굴을 한 거북이가 둥근 말풍선으로 ‘잘부탁해요-’ 라 말하는 만화틱한 일러스트다. 

 

 #3과 4의 공통점은 『P.S. 반드시 아사히나 미쿠루와 함께. 둘이서만.』 이라는 추신이 붙어있다는 것과, 아사히나 선배밖에 읽지 못하는 기호 한줄이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사히나 선배는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읽고 있다가, #4의 두 번째 장을 읽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네요. 거북이라……” 

 

 이 한기단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강가에 거북이를 푸는 행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는게 오히려 이상하군. 알 수 있는건 그 벤치 정도다. 작년 봄에 아사히나 선배에게서 미래인 고백을 받은 그 벤치. 

 

 “하지만 꼭 해야 돼요.” 

 

 아사히나 선배는 손끝으로 코드를 문지르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저희들은 알 수 없지만, 모두 어떤 의미가 있는 일들이에요. 안그러면……” 

 

 갑자기 아사히나 선배의 눈이 슬프게 흔들렸다. 

 

 안그러면──뒤에 이어지는 말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사히나 선배가 여기 있는 의미가 없다. 둘이나 있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 

 

 나도모르게 덥썩 안아주고 싶어졌지만, 당연히 안했다. 츠루야 선배한테 다짐받은 것도 있고. 내 심정적으로도, 장난은 못써요. 

 

 “그보다 아사히나 선배,” 

 

 궤도수정을 꾀했다. 

 

 “토요일은 시내패트롤이라고 하셨죠? 그럼 그 지령 시간이랑 겹치는거 아닌가요?” 

 

 토요일은 저녁까지 해놓으라는 식으로 되어있어 시간이 조금 애매한데, 일요일은 오전 10시 45분이라고 꽤나 명확하게 명기되어있다. SOS단 멤버중 누구와 있든 이상한 전개가 될 듯하다. 나 혼자서 모습을 감출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럼 혹시 제가 무슨 이유라도 대고 빠졌나요?” 

 

 “아뇨. 쿈군도 오셨어요.” 

 

 아사히나 선배는 편지지를 소중하게 봉투에 넣으며, 

 

 “하지만 제비뽑기를 해서 두팀으로 갈라졌어요. 늘 그랬던 것처럼요. 방금 생각났는데요……토요일 오전엔 저, 스즈미야상, 나가토상 이렇게 셋이 되고 쿈군은 코이즈미군이랑 다니셨구요, 오후는 저랑 스즈미야상, 코이즈미군, 그리고 쿈군은 나가토상이랑……” 

 

 아사히나 선배는 기억을 재확인하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해요. 일요일 오전도 저, 스즈미야상, 코이즈미군이 한조, 쿈군은 나가토상이랑 한조였어요. 그리고 일요일은 오전만 하고 해산했어요. ……에, 아아?” 

 

 말하면서 알아챈듯 하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연치고는 꽤 대단한 확률적 저공비행이로군. 

 

 나와, 이 아사히나 선배가 미래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시간대에 한하여, 나는 반드시 나가토와 페어를 이루고 있게 된다. 다섯명의 사람이 있고 그중 특정 두명이 페어가 될, 그것도 세 번중 두 번이 될 확률을 구하라. 귀찮으니 계산은 안하겠지만 꽤나 적은 확률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나가토는 이쪽 사정을 죄다 알고 있다. 제비의 행방을 조작하는 일쯤이야 지금의 나가토라도 누워서 떡먹기일게다. 부탁하면 그렇게 해줄거다. 이건 그 결과인가. 

 

 “뭘까요.” 

 

 아사히나 선배는 자신이 없는것 같았지만, 

 

 “하지만 제 기억대로 돼야 앞뒤가 맞잖아요? 나가토상이 협력해줬을까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군. 아사히나 선배가 기억하는 저 조합은 기정사실이다. 1주일 후에서 온 미래인의 정보이니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냥 놔둬도 나는 나가토랑 한조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위적인 것인가……. 

 

 하지만 그 고민도 잠깐뿐이었다. 

 

 “나가토에게 부탁하죠,” 라고 내가 말했다. “조작은 그리 내키지 않습니다만 만에 하나 달라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죠. 그녀석이라면 이해해 줄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사히나 선배가 전격 동의해주었다. 

 

 “패트롤 때, 쿈군 모습이 조금 이상했던게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나가토상한테 제비뽑기를 조작해달라고 해서 말이에요.” 

 

 대체 나는 무슨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거지. 어떻게 해야 조금 이상한 모습이 나오는건데. 

 

 “그건……저, 왠지 좀 이상했다고밖에,” 

 

 말이 흐려지는 아사히나 선배였다. 구체적으로 정말 이상해보였으면 더 좋을뻔 했군. 

 

 “미안해요. 말을 잘 못해서,” 

 

 별말씀을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닐텐데요 뭘. 

 

 “하지만……아, 그렇지. 일요일에 저랑 스즈미야상이랑 코이즈미군이 백화점 서점에 있었을때,” 

 

 떠오르는게 있었나본지 아사히나 선배는 턱을 손으로 누르며, 

 

 “스즈미야상 전화에 장난전화가 하나 왔었어요.” 

 

 누구 전화였습니까. 

 

 “쿈군 전화요.” 

 

 내가? 그때가서 하루히 폰에다가 일부러 장난전화를 한다고? 

 

 “네, 스즈미야상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에 그러니까, 쿈군한테서 이상한 전화가 왔다고요. 진짜 농담도 재미없게 한다고, 곧바로 끊어버렸지만요. 11시쯤이였던가-,” 

 

 이걸로 또 하나 이해불능 행동예정이 늘었다. 뭔진 모르지만 난 거북이를 천에다 푼 후에 하루히한테 전화해서 재미없는 농담을 해야만 하는 모양이다. 

 

 “제가 뭐라고 했는지 말 안하던가요?” 

 

 “네, 저한텐 아무말씀도. 하지만 점심때 모두 집합했을때 쿈군이 스즈미야상한테 사과했었어요.” 

 

 이젠 이해불능을 넘어 부조리할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왜 그녀석한테 사과를 해야되냐. 

 

 “재미없는 농담이라 미안하다, 면서요.” 

 

 부조리를 넘어 난해하기까지 하다. 내가 그렇게 순순히 하루히에게 머리를 숙이는 건……뭐, 자주 없는 일이라고. 

 

 더 자세히 알고 싶어도 아사히나 선배는 그이상은 모른다고 한다. 나와 하루히의 대화는 달랑 그걸로 끝나고 다음 화제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알면 알수록 미래의 나는 이해안되는 짓들만 해대고 있다. 누가 할수만 있으면 추리좀 해줘봐라. 난 이제 포기했다. 

 

 “그보다 거북이,” 

 

 나는 #4 봉투를 집어올려, 

 

 “이 시기에 길거리에 나돌아다닐 거북이는 없을테니 어떻게 준비를 해야할텐데,” 

 

 동면중인 야생 거북이를 깨우는 짓도 마다치 않겠다. 어차피 삽질이라면 내일 보물찾기때 죽어라고 하게 될 거니까 말야. 설마 보물 대신에 거북이가 나온다던가 하는거 아니냐? 

 

 “아뇨, 아무것도 안나왔어요.” 

 

 그랬었죠. 우리가 내일 하는 보물찾기는 그저 등산으로 끝난다. 어쩌든 불길한 것만 안나와주면 다행이다. 

 

 “할수없죠. 사올게요.” 

 

 근처 홈센터에 애완동물 코너가 있었다. 샤미센 줄 통조림을 살 때 자주 이용하는데, 아마 거기서 남생이 같은걸 수조에 넣어 팔고 있었던걸로 기억한다. 그걸로 해결하면 되겠군. 집에 갈 때 들를까나. 아아, 일요일 SOS단 집합장소에 거북이를 가져갈 순 없으니 사전에 아사히나 선배한테 맡겨서──. 

 

 이런, 행동예정이 빡빡하다. 이번 주말엔 다리 뻗을 시간조차 없겠군. 

 

 그후, 나는 아사히나 선배와 토요일에 만날 시간과 장소에 대해 논의하고, 대강의 것들을 정한 후에야 일어섰다. 

 

 별채 문까지 아사히나 선배가 배웅해주고, 문을 여니 평상복 차림의 츠루야 선배가 추운 듯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아-. 둘이 재미좀 있었나본데! 정말 쿈군, 무슨 짓 한건 아니겠지-,” 

 

 저렇게 웃고 있으니 오히려 더 수상하다. 혹시 엿보고 있었던건 아니겠지. 다행이다. 장난 안해서. 이 해맑은 선배가 하는 말은 진심이 아니니깐. 

 

 나는 적당한 대답을 하고 뺨을 붉히는 아사히나 선배의 표정을 바라보며 츠루야 선배네 집을 나섰다. 

 

 

 

 

 -제 3화 끝

 

 

제 4화 

 


 

 

 

 

 

 

 

 

 

 

 

 

 

 

 

 

 

 

 다음날 아침, 내 머리맡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자명종을 끄러 온 동생이 나를 깨웠다. 

 

 “시끄럽잖아-, 그치 샤미-” 

 

 동생은 내 침대 끝에서 둥글게 또아리를 틀고 있던 샤미센을 들어올려 그 발바닥으로 내 코를 누르며, 

 

 “아침밥- 먹을거야-?” 

 

 노래마냥 가락을 붙여 부르는 저 음치 목소리가 알람보다 더 시끄럽다. 

 

 “먹을거야,” 

 

 나는 동생에게 조종되는 고양이 발을 내 얼굴에서 치우고 몸을 일으켜, 동생한테서 고양이를 뺏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귀찮아하던 샤미센은 코를 흥 불더니 다시 침대위로 기어올라왔다. 

 

 내가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 동생은 샤미센의 수염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샤미센이 비로소 귀찮아 죽겠다는 듯 꼬리를 흔들어 항의를 표명했는데 이마저도 잡히는 바람에, 기어이는 ‘니야아아앙’ 하고 울며 뛰쳐나가는 샤미센을 쫓아 나도 방을 나갔다. 아침부터 내방에서 난리치지마. 덕에 잠은 깼다만. 

 

 방을 나가 세수하러 가는 도중에, ‘고양이 목도리-’ 같은 소리를 하면서 샤미센을 자기 목에다 걸친 동생과, 틸든 스웨터(tilden sweater)에 발톱을 세우고 저항하는 샤미센 콤비와 마주쳤지만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이를 닦는 나의 잠덜깬 표정을 세면대 거울로 바라보며 오늘은 무슨 공휴일이었나 하는 별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창밖으로 쌩쌩 부는 바람소리를 저주하며 빨리 봄이 왔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가능하면 고등학교 1학년이라는 꽤나 신선한 포지션을 지속하고 싶었지만──유급밖에 방법이 없겠지만──, 추운건 이제 싫다. 보물찾기든 시내 산책이든 따뜻하기만 하면 좀 할만할텐데. 벌써 2월이라고 2월. 

 

 하긴 몇월이든 간에 하루히가 하자고 하면 곧바로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바다속에 가라앉은 배를 찾아내자 같은 소리를 안 해서 다행이다. 음, 매우 긍정적인 시각이다. 

 

 아침밥을 먹고, 가능한한 등산을 의식하여 옷을 입고 역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지 않는 이유는 츠루야산(山)에 가려면 역앞에서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현지집합이라면 훨씬 빨리 갈수 있는데도 일일이 역앞에 모여 간다니, 이유가 있고 없고를 떠나 그곳이 이유불문 약속장소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마치 태양과 내기를 한 북풍이 한껏 실력발휘를 하는것처럼 쌩쌩 부는 바람을 맞으며 얼굴을 머플러에 묻고 걸어갔다. 딱히 서두르지 않는 이유는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차피 시간맞춰 가봤자 내가 마지막일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뭐 거의 정해진거나 다름없다. 내가 누굴 기다리는 입장이었을 때는 그때뿐이다. 

 

 그래서 내가 역앞에 도착했을 때는 9시 되기 5분 전쯤이었는데, SOS단 전원이 이미 다 모여선 제각각의 표정을 내비쳤다. 

 

 동장군보다 윗 계급을 하사받은 것 같은 표정을 한 하루히가, 

 

 “왜 맨날 너만 늦는거야. 내가 올땐 모두 나와있단 말야. 단장을 기다리게 해놓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어?”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했다. 대략 나를 제외한 세명의 멤버가 너보다 일찍 왔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고 하니, 우리 찻값을 낼 역할을 네가 지지 않게 된 건 내 덕이라는거 아니냐. 조금은 감사할줄을 알아야지. 

 

 “무슨소리야, 늦게 온건 너잖아.” 

 

 하루히는 만족스레 웃으며, 

 

 “왜그래 쿈,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는거같은 얼굴이야. 무슨일 있었어?” 

 

 무슨일 좋아하시네. 이 간만의 휴일에, 그것도 이 추운 날 아침에, 나오지도 않을 보물을 찾는답시고 삽질을 하러 가는 내 자신의 불행함을 한탄하고 있는거 뿐이다. 

 

 “좀더 활기찬 표정 지으란 말이야. 샤미센 병이 도로 나빠지거나 한건 아니지?” 

 

 “아-니,” 

 

 나는 어깨를 들썩하며 고개를 젓고는, 

 

 “좀 추워서 그런다.” 

 

 하루히는 흐흥하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두손을 펼치며, 

 

 “그럴땐 임기응변으로 몸과 마음을 바꾸는거야. 오늘처럼 한랭지 등산 모드로 전환! 어때 쉽지?” 

 

 이게 무슨 프라모델 개조인줄 아냐. 그리 쉽게 변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인간에게 모드 선택 스위치따위 안붙어있다. 하루히 같은 올시즌 전천후 생체병기한테야 또 모르지만. 

 

 나와 하루히가 저렇게 한동안 아침인사를 나누는 사이, 우리 외의 세명은 관중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코이즈미·아사히나 선배·나가토 순으로,  캐쥬얼·베이직·내츄럴한 차림이다. 나가토의 ‘내츄럴’이라는 건 즉 교복 위에 더플코트를 걸치고 있을 뿐이라는 말로, 대체 어딜봐서 그게 등산패션인지 내가 말할것 까지도 없겠지만, 나가토를 츠루야 선배네에 갖다놓으면 츠루야 선배는 재밌어하면서 자기 옷을 입히며 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번 기회가 생기면 시도해 보도록 하자. 

 

 코이즈미는 어디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겨울용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그대로 어디 백화점 의류 코너에 가서 마네킹이랑 사이좋게 서있어도 좋을 정도였다. 공사현장에나 있을만한 저 두 개의 삽을 들고있지만 않으면 말이지. 

 

 아사히나 선배는 무난한 바지에 무난한 다운재킷을 입고 있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아사히나 선배의 사복차림은 한번도 같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시락 만들어 왔어요-” 

 

 완전히 소풍기분인지 미소 100퍼센트의 얼굴을 보이던 아사히나 선배가 들고 있는 것은 커다란 바구니 뿐이다. 오늘은 이걸 먹으러 왔다고 생각하면 될라나. 

 

 아무리 그래도, 이 아사히나 선배를 내가 반 명령식으로 과거로 날려보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그 아사히나 선배는 정말 사실을 말했던 것인가? 

 

 “괜찮으세요?” 

 

 아사히나 선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다. 

 

 “아뇨아뇨,” 하며 내가 태연히, “도시락 먹을 때가 기대돼서 말이에요,” 

 

 “그렇게 기대는 하지 마세요. 잘 만들었는지 자신도 없고……” 

 

 저 수줍어하는 투가 너무너무 귀엽지마는, 내 마음의 치유를 방해하는 녀석은 항상 이 여자다. 

 

 “도시락도 좋지만,” 

 

 하루히가 시야에 끼어들었다. 

 

 “너, 오늘의 취지를 알고 있긴 해? 놀러가는게 아니란 말야. 보물찾기야, 보물찾기. 도시락 먹을만큼 열심히 일 안하면 점심시간도 없는 줄 알아!” 

 

 하루히는 그런 소리나 해대면서 북풍과의 내기에서 이긴 태양처럼, 놀러 나가기 직전의 꼬마마냥 밝은 얼굴이었고, 나는 그 얼굴을 저장해놓고 아무 때나 불러오기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관뒀다. 

 

 잘 생각해보면 그게 평소 하루히 얼굴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2월 들어서 난데없이 침울해지는 바람에 깜빡 속을 뻔 했다. 왜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예외적으로 오늘은 찻집에서 내가 내는 차를 마시지 않고 그냥 출발했지만, 그렇다고 면제받은 건 아니고 보류되었을 뿐이다. 다음 모임때 제일 먼저 오든 몇시에 오든 간에 찻값은 내가 내게 되었다. 그렇게 말한 하루히가 향한 곳은 역전 로타리 버스 정류장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보물찾기 작업에 착수하지 않으면 간발의 차로 딴놈한테 뺏기고 말거라고라도 생각하고 있는지, 어쨌든 지금 당장 산에 올라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다. 나는 건네받은 삽을 짊어지고 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어 코이즈미와 손잡이를 잡고 나란히 서 있다. 둘이서 삽을 들고 있으니 눈에 띄는거야 어쩔 수 없다. 산 방면으로 가는 버스 승객이 적은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30분정도 갔을까. 하루히 재촉에 어중떠중 버스에서 내리고 나타난 그곳은, 역전의 북적임이 거짓말처럼 자연 그자체였다. 같은 시 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인데, 실은 초중생 시절에 소풍이란 이름하의 산행길 덕에 이 근처는 내게도 이미 익숙한 지역이라 그렇게 큰 의외성은 없다. 여기서 북쪽으로 더 가면 본격적인 등산길 시작이다. 다행이나마 츠루야 선배네 산은 그보다도 좀더 낮은 곳에 있었고, 의외였던건 그게 츠루야가의 사유지였다는 것이다. 소풍이라고 해도 도리로써 한번도 올라가지 않았었다. 

 

 “여기서부터 올라가는게 재밌을거 같아.” 

 

 하루히가 지도를 손에 들고 앞장선다. 나는 츠루야산──이라곤 하지만 진짜 이름은 모른다. 좋잖아 츠루야산──꼭대기를 바라보며 흰 숨을 내쉬었다. 

 

 그저께, 나와 아사히나 선배가 올라간 곳과는 달리 딱 산 반대쪽이다. 어디가 뒷길인가 하면 아무래도 그저께 왔던 그 길이 뒷길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지금 하루히가 향하는 산의 기슭은 정상으로 향하는 지그재그 모양의 가느다란 길이 나 있다. 그렇군, 이렇게 올라가면 꽤나 쉽게 등정할수 있겠는데 그래. 응……? 

 

 “쿈! 멍하니 하늘 보고 있을때가 아냐! 똑바로 걸어!” 

 

 하루히의 목소리가 날아와서 나는 멈춰있던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걸리는게 있었는데 그것때매 까먹었잖아. 

 

 “알고 있어.” 

 

 나는 삽을 다시 짊어지고 산길에 들어서는 일당의 뒤를 쫓았다. 들판 만난 토끼마냥 폴짝폴짝 뛰어 오르는 하루히야 그렇다 쳐도, 아사히나 선배까지 정말 소풍가는 어린애 분위기고, 나가토는 뭐 평소랑 완전히 똑같고, 코이즈미는 계속 쓴웃음 식이라 과연 이중에서 몇 명이나 정말 보물을 찾을 의욕에 차있는지 의문일 수밖에 없다. 내가 의욕이 하나도 없는건 내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그덕에 기력도 거의 없다. 아사히나 선배(미치루)에 따른 내 미래 예보엔 아무리 삽질을 해대도 뭐 하나 안나온다는 예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히가 하는 일이니 정말로 보물이 나올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그 아사히나 선배가 이런 하찮은 거에 거짓말을 할 리는 없기 때문에, 츠루야가(家)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비보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 맞다. 

 

 “괜찮으십니까?” 

 

 코이즈미가 내 옆을 걸으며 쓸데없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마치 저희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 완전히 헛된 일이라고 알고 계신 듯한 표정이십니다.” 

 

 나는 말없이 그냥 한귀로 흘렸다. 이녀석한테 할 소리는 없다. 

 

 코이즈미, 너도 이미 안다는 얼굴이잖냐. 뭐가 나오든 알바 아니지만 이게 자기 일이니 받아들이겠다는 얼굴이다. 

 

 아사히나 선배가 이 시간대에 또 한명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 했었는데,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될거 아냐. 내가 상담 요청하는걸 기다리겠단 거냐? 그럼 참 안됐수다. 나는 츠루야 선배라는 순수하신 협력자를 얻은 덕에 네녀석의 힘따위 필요없다 이거다. 그러니까 내쪽에서 정보를 줄 생각은 없네 그려. 인간이란 기다리기만 해선 하나도 나아질게 없단다 이친구야. 번거로운 의사표시는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라고. 

 

 내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코이즈미는 들고 있던 삽을 앞쪽으로 고쳐들었다. 미소를 머금은 저 얼굴이 그대로인건 여유의 표시인지 딴청인지 모르겠지만 뭐 평소의 코이즈미인 건 틀림없는 것 같다. 안심하는 나도 좀 뭐하지만 일단 지금은 등산이다. 

 

 하루히가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며 산 정상을 가리키곤, 

 

 “일단은 정상에 가는거야. 내가 보물 숨기는 사람이라면 가장 알기 쉬운데다 묻을거야.  츠루야상네 조상도 다 같은 사람인데, 당연히 발견하기 쉬운데다 묻어놨을게 뻔해.” 

 

 알기 쉬운 거 우선이면 묻을 필요도 없겠지만, 하루히가 향하는 곳은 일단 정상이다. 그러니까 이녀석은 SOS단 단장이다. 우주인 미래인은 물론 초능력자까지 수하에 거느리는, 정점의 인간이다. 우리의 안내인이기도 하지. 

 

 

4-02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르는 아사히나 선배의 등을 뒤에서 밀어주고 싶었지만, 하루히가 손을 당겨주는 바람에 내가 나설 곳은 없게 됐고 그러는 사이 산 꼭대기까지 30분만에 올라갈 수 있었다. 의외로 꽤 걸린 것 같은 느낌인데, 등산로는 최대한 등정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게끔 만들어진 듯 우리는 급경사를 거의 의식치 못하고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언덕보다는 좀 높지만 산이라고 하기엔 좀 낮아서 피로감도 그리 없다. 매일 학교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내리는 통에 다릿심 하나는 완벽하게 단련되어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 해야할 노동이다. 

 

 즉 우리는 지금부터 보물을 찾아야 하고, 지금부터 하루히가 본성을 드러낸다. 

 

 “저기쯤 있지 않을까?” 

 

 일단 하루히가 가리키는 데를 닥치는대로 파봤다. 매장금 내지 비보를 손에 넣기엔 너무 막연한 방법이지만, 아무리 알고 있었다지마는 2미터를 파내도 돌멩이나 굳은 흙 외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굴삭작업은 남자만 한다는 지극히도 차별적인 결정에 따라 나와 코이즈미만 현재 삽질중이다. 여성 3명은 완전히 소풍 기분이며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주는 아사히나 선배만이 유일한 위안거리다. 

 

 하루히는 ‘다음, 저기’ 하며 지 맘대로 여기파라 저기파라 명령만 하고 있고 나가토는 돌부처마냥 꿈쩍도 않는다. 물론 부탁하면 보물이 어딨는지 가르쳐 줄테지만 만에 하나 그런게 있다고 해도 단번에 찾아버리는 것도 좀 부자연스러우리라 생각한 나는 나가토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했다. 

 

 정말 있다고 해도 애초에 찾아내선 안된다. 그리고 제아무리 리얼리티를 완전히 무시한 하루히라 할지라도 고생 하나 없이 보물을 찾아내면 약간은 의문을 가지게 될 거다. 문제는 고생하고 있는게 나랑 코이즈미뿐이란 거지만, 코이즈미는 유쾌히 토목작업을 즐기고 있는 듯 하니 결국 고생을 느끼는 건 나뿐이라는 소리가 된다. 

 

 새털만큼은 도움이 될 것 같은 타니구치와 쿠니키다도 데려오고 싶었지만 이건 하루히의 거부에 실패했다. 

 

 “미쳤어? 우리가 찾는건 보물이야, 보물. 찾아낸 사람한테 소유권이 있다 그거야. 나는 공평한 단장이니까 딱 균등하게 나눠줄 거라구. 그녀석들까지 집어넣으면 7등분해야 되잖아. 난 그런 아까운 짓 절대절대 안해!” 

 

 원록시대 금화가 나온다면야 나도 그럴거라고. 하지만 츠루야 선배네 창고에서 나온 지도잖냐. 츠루야 집안은 태평(太平)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아직도 번영하고 있다는 소린데, 세상의 변천과 함께 달라지는 것도 있잖냐. 조상이 남긴 매장금이라니, 진작 누가 파내서 써버렸을거 아니냐? 이 보물지도란 녀석은 옛날 츠루야가(家) 당주가 남긴 낙서거나 자손에게 한 스케일 큰 장난이다. 왼갖 고생 다해서 파낸 상자 속에 ‘당신은 낚였습니다’같은 종이 한 장 달랑 들어있을 확률이 높다고 본다. 생각해봐라, 츠루야 선배 조상이다, 그런일쯤이야 심심풀이로 하루에 열 번 하고도 남을 양반일게 뻔하다. 츠루야 선배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니까 보물지도를 순순히 하루히한테 넘겨줬을거 아니냐고. 츠루야 선배가 그 당주 입장이라 해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짓 같군. 약간의 기대와 희망을 선물한 후 마지막에 가서는 힘빠진 웃음을 선사하겠다는 심보다 이건. 

 

 ……같은 말로 설득하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내 안에 있는 욕구를 넘어 묵묵히 삽질을 계속했다. 

 


 

 

 

 

 

 

 


 작은 산이니만큼 정상도 그리 공간이 없었고, 그나마도 여기저기 파댄 탓에 사방이 구멍 천지가 되었다. 하루히가 시키는대로 가만히 육체노동을 감수하는 나와 코이즈미, 다만 나는 실실거리며 삽질의 소임을 다하는 코이즈미와는 달라서 이젠 아주 학대를 받는것 같은 기분이다. 파낸 구멍을 그대로 놔두는 것도 위험한지라 다시 메우는 쓸데없는 작업이 더해져 있는 탓도 있다. 어디 비인도적인 수용소나 형무소에서 일하는 착각에 빠질 지경이다.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보물이나 찾아,” 

 

 돗자리 위에 떡하니 앉아있는 하루히가 교전 후방에서 지휘봉을 휘두르는 대장처럼 겁 없는 미소를 지으며 지시만 해대고 있다. 그 우측에 시녀처럼 앉아있는 나가토가 정좌하여 책을 읽고 있고, 좌측에 앉은 아사히나 선배는 하루히와 서로 몸을 녹이는 듯이 찰싹 붙어있었다. 

 

 “쿈, 너희들은 땀흘리고 있으니까 따뜻할지 몰라도 보는 우리는 꽤 춥다구. 빨리 안찾아주면 얼어죽게 생겼어. 파는 방법이 잘못된거 아냐?” 

 

 난 니녀석이 파라는 데를 파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고 싶으면 니가 직접 니좋을대로 파라 임마. 

 

 하루히와 팔짱을 끼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가 머뭇머뭇, 

 

 “저……. 제가 도와드려도……” 

 

 “됐어.” 

 

 하루히가 지 맘대로 내 대답을 가로챘다. 

 

 “이것도 다 쿈을 위해서야. 나중에 공사판 노가다 뛸때를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돼. 경험치를 미리미리 쌓아놔야 나중에 고생 안하지.” 

 

 동갑내기한테 인생론 이야기를 들어봤자 하나도 고마울 리 없다. 

 

 “나중에 이거 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때가 올거야. 인과는 돌고 도는 법. 그러니까 사람이란 뭐든 해봐야돼,” 

 

 그럼 니가 해 임마. 

 

 “야, 하루히,” 

 

 나는 삽질을 멈추고 턱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렇게 대충 아무데나 파서 보물이 나오겠냐. 이 산을 싹 평지로 만들어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그리고 애초에 보물이 묻혀있는지조차도 의심스럽단 말이다.” 

 

 “있을지 없을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아직 못찾아낸 것뿐일지도 모르잖아.” 

 

 “못찾아냈다는건 없다는 소리 아니냐. 먼저 보물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나서부터 삽질 시켜라.” 

 

 하루히는 입을 오리처럼 내밀었으나 눈은 웃고 있다. 

 

 “이게 증거아냐.” 

 

 그 손엔 츠루야가(家) 전래 보물 지도가 들려 있었다. 

 

 “이 산에다가 묻어놨다고 써있으니까 묻혀있다는 사실 자체는 틀림없잖아. 난 츠루야상 선조님을 믿고 있다구. 그러니까 보물은 있어, 반드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대는 하루히의 얼굴은 보통때 이상으로 확신에 가득 차있었다. 마치 츠루야 후사우에몬 씨가 보물을 묻는 장면을 보기라도 한것 같은 자신감이다. 

 

 “하지만, 그래도,” 

 

 하루히는 생각하듯 턱에다 손을 대고는, 

 

 “정상에 묻혀있다고 보는건 좀 성급한 생각인 것 같아. 보물 하나 묻자고 올라오는것도 귀찮을테니까 좀더 낮은 데 있을지도 몰라. 음, 좀더 재밌는곳에 있었으면 좋겠고 말야,” 

 

 아사히나 선배 팔에서 손을 빼고서 번쩍 일어선 하루히는 신발을 고쳐신더니, 

 

 “묻혀있을만한 데를 찾아올게. 그때까지 쿈, 너는 저쯤을 파고 있도록 해.” 


 새로운 발굴후보지를 가리키곤 수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길도 없는데를 잘도 파헤치면서, 올라온 쪽 반대방면으로 내려간다. 

 

 나는 말없이 하루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 방향감각이 맞다면 그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산 중턱쯤에 꽤나 평평한 장소가 나올 거다. 그리고 거기엔 표주박 모양의 돌이 있을테지. 바로 여기를 파라는 식으로 특이하게 박혀있는 돌이. 

 

 

4-03

 


 

 

 

 

 

 

 

 

 

 

 

 

 

 

 

 

 

 

 시키는 대로 파긴 팠지만 도저히 짜증나서 못해먹겠어서 삽을 집어던지고 다시 메우는 작업은 코이즈미에게만 일임한 후 돗자리에 앉아있으니, 

 

 “이것 좀 드세요,” 

 

 아사히나 선배가 뜨거운 차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었다. 이거야말로 최고의 보양식이다. 매우 맛있었는데, 이 맛이 아사히나 선배에게 참 잘 어울린다. 

 

 소중히 은색의 보온병을 들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는 내가 조금씩 그 호박색의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후훗, 날씨 참 좋네요, 오늘. 그리고 경치도 정말 좋고……” 

 

 과실같은 눈이 먼 곳을 향한다. 남쪽으로, 산위에서 하계를 내려다보는 방향이다. 저편 멀리에는 우리가 사는 동네가 펼쳐져 있고, 더 가면 바다가 보인다. 

 

 산바람이 불어 아사히나 선배가 살짝 몸을 떨었다, 

 

 “봄에 왔으면 좋았겠네요. 2월은 추워요.” 

 

 아사히나 선배는 어딘가 쓸쓸한 듯이 말하고, 살풍경한 산 정상 풍경을 돌아보고는 미소지었다. 

 

 “꽃이 피면 여기도 좀더 분위기 좋은데가 될까요……” 

 

 그럼 한번 더 올까요. 그때는 꽃놀이하러 말이죠. 앞으로 2개월만 지나면 한기단도 가버리고 고기압이 몰려올겝니다. 

 

 “아, 그거 좋겠네요. 꽃놀이. 한번 해보고 싶어요.” 

 

 아사히나 선배는 무릎을 감싸듯이 앉았다. 

 

 “4월인가요. 그쯤엔 저도 3학년이 되어있겠네요.” 

 

 그야 그렇겠지. 그쯤엔 내가 2학년이 되어있듯이 아사히나 선배도 진급하면 3학년이다. 설마 유급을 하겠어. 

 

 “네,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사히나 선배는 한숨과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또한번 2학년을 하고 싶단 생각이 좀 들어요. 쿈군이랑 같은 학년이 되니까요. 지금은 저 혼자만 한학년 위인데 전혀 선배답지도 않고……” 

 

 그런 걸 아사히나 선배께서 신경쓰실 필요는 절대절대 없습니다. 동안에 작은 체구의 글래머 미소녀라는 이유로 강제로 마스코트를 만들어버린 건 하루히이고, 여간해선 말을 듣지 않는것도 하루히이다. 만약 그녀석이 아사히나 선배와 같은 학년이 되고싶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선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급이든 강등이든 시키고 말테니, 선배께선 신경쓰지 마시고 SOS단 전속 메이드의 역할을 다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우훗, 고마워요.”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가토가 신경쓰이는지 아사히나 선배는 내게 계속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음 학년엔 좀더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을텐데……” 

 

 내가 순간적으로 또 하나의 아사히나 선배에 대해 말하려 하기 직전, 말라붙은 낙엽을 밟으며 하루히가 되돌아왔다. 

 

 “뭐야, 벌써 쉬고 있어?” 

 

 2시간 연속으로 일만 하라는 식의 말투는 뭐냐. 

 

 “후후후, 뭐 좋아. 배도 슬슬 고파오고.” 

 

 하루히는 뭐가 그리 좋은지 몇걸음씩 건너뛰듯 다가와선, 

 

 “미쿠루짱, 도시락 먹자.” 

 

 “아, 네네,” 

 

 곧바로 바구니를 여는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이 사뭇 성스러워 보인다. 직접만든 샌드위치,  삼각김밥(三角お握り), 반찬 등이 이어졌고, 그것이야말로 내게 있어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이걸 위해서 오늘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나가토도 읽고있던 책을 살그머니 덮고는 가만히 아사히나 선배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땅을 메워 평평해진 지면에 삽을 꽂은 코이즈미가 다가와서, 

 

 “정말 맛있겠네요.” 

 

 차분히 사전감상을 늘어놓고는, 

 

 “당연히 맛있지, 운동한 다음이잖아.” 

 

 하루히가 또 지멋대로 단정짓더니 자기 종이컵에다 보온병에 든 차를 따르고는 높이 들어올렸다. 

 

 “그럼, 보물찾기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맛있게 먹자!” 

 

 이것만 보면 아주 완벽하기 그지없는 소풍이다. 나와 코이즈미의 흙투성이 차림만 빼면 말이지. 

 

 다시마가 들어간 주먹밥을 입 한가득 넣고 먹는 모습만 보자면, ‘하루히 치고는’이지만 그래도 보물찾기라는 본목적을 잊은 듯이 아사히나 선배의 도시락에 빠져있다. 나와 코이즈미가 허탕만 치고 있는 모습에 제 성질을 못이기고 직접 자기가 삽을 들고 나서서 여기저기를 파대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오늘의 하루히는 이상하게 처음부터 즐거운 듯 했다. 산에 올라 모두같이 먹는 점심이 목적이었다는 듯한 모습이다. 

 

 아사히나 선배(大)의 미래통신만큼이나 최근 하루히의 행동도 쉽게 알 수가 없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싶으면 난데없이 콩을 뿌려대질 않나, 또 얌전해졌다 싶으면 보물지도에 들뜨질 않나……. 

 

 뭐, 괜찮다. ‘신인’이 있는 개떡같은 공간을 만들어낸다거나 가을에 벚꽃을 피워대는 짓거리에 비하면야 백배는 낫다. 지구에서 달과 안드로메다 성운중 하나를 골라 다녀오라고 하면 당연히 압도적으로 달이 낫다 . 이미 인간의 발이 닿은 천체와 은하철도 999를 타야만 갈 수 있을 정도로 머나먼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성운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물론 난 폐쇄공간과 가을의 이상현상을 이미 경험한 바 있긴 하지만. 

 

 단원 다섯명이서 하는 야외 도시락파티는 또 색다른 맛이 있었다. 거침없이 먹어대는 나가토의 식욕도 안도감을 더한다. 나가토는 나가토대로 새로운 자기다움을 뿜어내고 있었고, 하루히는 기력충만, 코이즈미는 평소 그대로다. 아사히나 선배도 평소나 다름없긴 하지만, 또 하나의 아사히나 선배가 츠루야가에서 꿔다논 보릿자루마냥 있는 모습을 생각해보자면 그리 차분해질 수도 없다. 

 

 “있잖아, 쿈. 만약 보물을 찾아내면 넌 어떻게 할거야?” 

 

 한입에 샌드위치를 집어넣는 하루히가 내게 물었다. 그런 망상은 항상 하기 때문에 내 대답도 재빨랐다. 

 

 “곧바로 환전해서 새 게임기랑 게임을 사고, 몇 년 전인가 엄마가 헌책방에 팔아넘긴 만화도 모조리 다시 사들인 다음에 남은건 저금할거다.” 

 

 “그런건 그냥 돈 쓰는 거잖아. 좀더 큰 꿈을 가지란 말야.” 

 

 순식간에 샌드위치를 싸그리 먹어치운 하루히는 한심하단 듯이 나를 바라보고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할거냐.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난 돈같은거 필요없어. 환전할수 있는 보물이라도 팔고싶진 않아. 애써 찾은 보물인데 소중이 간직해뒀다가 나중에 또 딴데다 묻어야지. 내 자손한테도 보물지도 주고 말야, 돈으로로는 살 수 없는 즐거움일 것 같지 않아?” 

 

 자손에게 시키는 보물찾기 게임이라면야 재미있게도 하겠다만, 나도 그렇게 속물적인 욕심에 가득찬건 아니다. 받을 수 있는거라면 착착 받고, 필요없는거라면 묻기보다는 버릴거다. 

 

 “시시하긴.” 

 

 하루히는 질렸다는 듯 입술을 빼쭉거리더니 웃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래. 쿈처럼 쓸데없이 쓰지 않게 하려면 돈으로 바꿀수 없는 보물이 좋겠어. 미쿠루짱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갑자기 질문을 받은 아사히나 선배는 먹고있던 주먹밥을 떨어뜨릴뻔 하면서 음식을 먹는 입가를 고상히 손으로 가리고 있다가 그 큰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그렇네요. 아니, 그……, 그게 더 좋을 것 같은……” 

 

 무슨 이유에선지 거기서 말을 자른 아사히나 선배는 나와 하루히를 힐끔힐끔 바라보곤 허둥대며 손을 내저었다. 

 

 “나, 나오면 좋겠네요. 보물,” 

 

 “아니, 반드시 나와. 보물. 난 알 수 있어.” 

 

 하루히가 여느때처럼 근거없는 발언을 해대며 샐러드 샌드위치를 한입에 집어넣었다. 

 

 돗자리 구석엔 나가토가 하루히에게 지지않는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고 있었고, 그 옆엔 코이즈미가 소년 아이돌 그라비아 사진같은 포즈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있다. 코이즈미는 내 시선을 알아채더니 종이컵을 살짝 기울여 말없이 미소지었고, 아사히나 선배는 자기가 만든 도시락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처리하는 하루히와 나가토를 황홀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한때뿐이었지만, 미래인에게서 온 편지나 츠루야가(家) 재중의 아사히나 선배등의 골치아픈 일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다같이 도시락을 먹는 지금 이순간이 꽤나 즐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때아닌 등산도 보람없는 보물찾기도 좋은 기분의 하루히나 멀쩡한 나가토나 평소 그대로의 코이즈미나 아사히나 선배를 보고 있자면 꽤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괜찮아야만 한다. 

 

 그래서 다시 떠올랐다 그거다. 할 일이 내일과 모레 남아있다는 나의 미래가. 

 

 

 

4-04

 


 

 

 

 

 

 

 

 

 

 

 

 

 

 

 

 

 

 

 그리하여 떠들썩한 점심식사가 끝나고, 소화라도 하자는 듯, 굳이 묘사할 필요도 없는 나와 하루히의 티타임 대화를 일단락 지은 다음에, 하루히가 두손을 털고 일어섰다. 드디어 올게 왔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자 그럼 보물찾기 오후일정 개시!” 

 

 하루히는 도시락통과 보온병을 정리하는 아사히나 선배를 힐끗 보고는, 

 

 “아까 저쪽으로 내려가봤는데 말야, 이 산, 나무가 많아서 묻을만한데가 별로 없어. 다시 말하면 나무가 안자란 데에 묻어놨단 거야. 나무가 있는데는 못파니까 말야.” 

 

 삽을 내게 떠넘기고는, 

 

 “그래서 딱 알맞게 열린 공간을 찾아냈어. 거기로 가자. 그리고 거기로 곧장 가보니까 내려가는 것도 빠르겠더라구. 굳이 버스같은거 안탔어도 될뻔 했어.” 

 

 코이즈미는 벌써 삽까지 메고 하산 태세다. 나가토가 돗자리를 돌돌 말아 손에 들고, 아사히나 선배는 두손에 바구니를 소중히 들었다. 모두 하루히 지시에 착착이다. 

 

 하루히는 암벽과 나무 천지인 급경사를 다람쥐처럼 폴짝폴짝 뛰어내려갔다. 별로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거침없이 쓱쓱 내려가는 나가토에, 

 

 “이야, 히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아사히나 선배를 구해주는 것도 나가토였다. 나와 코이즈미는 무거운 삽 때문에 거기까지 미처 손이 닿질 않는다. 이런 삽따위는 집어던져버리고 아사히나 선배를 업고 가고 싶을 정도지만, 지금은 나가토에게 맡겨두자. 나가토가 받쳐줄 때마다 머리를 숙이는 아사히나 선배, 선배는 너무 생각이 깊으셔요. 

 

 거의 직선코스로 내려온 덕에 올라갔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야. 봐봐, 이부분만 부자연스럽게 평지잖아?” 

 

 발을 멈춘 하루히가 우리에게 가리킨건, 바로 그것이다. 그제 저녁에 나와 아사히나 선배(미치루)가 왔었던 바로 그곳이다. 커다란 수목에 둘러싸여 있어서 대낮에도 좀 침침하긴 하지만, 낙엽이 빼곡히 깔린 반달모양의 공간은 기억이 안날래야 안날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 돌도 건재했다. 눕혀있던 걸 세워서 3미터 이동시킨 그 돌은, 내가 했던때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틀전만큼 희지 않은 듯 보인 이유는 아마 비 때문이었을 거다. 전체적으로 물에 젖어있어서 색이 눅눅해졌다. 거기다 진흙까지 맞았는지 얼핏 봐서는 색감차이를 거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역시 하루히가 그 돌에 다가갔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다. 약간의 이상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여자란 말이다, 제발 눈치채지만 말아라고 빌고 있으니 하루히가 돌에 발을 갖다대더니 옆으로 눕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돌에는 그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쿈, 코이즈미군. 제 2부 시작이야. 일단 그 근처부터 좀 파볼래?” 

 

 우리를 향해 웃는 그 얼굴은 순 장난하는 얼굴이라고 표현해야 알맞을 것이다. 코이즈미는 곧바로 ‘알겠습니다’ 같은 소리로 분위기를 맞춰주며 하루히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데, 나는 또 하나 좀 걸리는 부분이 있다. 

 

 그 돌이 있었던 장소, 나와 아사히나 선배(미치루)가 위장한 것까진 좋았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니 좀 부자연스러운 곳 같은데──, 

 

 “…………” 

 

 바로 그 장소엔 나가토가 돗자리를 펴고 있었다. 몸을 굽히고 있던 나가토의 옆머리 사이로 무감정한 눈이 나를 살짝 바라본다. 나가토는 별다른 신호를 보내진 않았지만 돗자리 위에 앉아서 묵묵히 책을 펴는 모습이 마치 부처처럼 보였다. 

 

 구석지 하나는 끝내주게 좋아하는 우주인이 많은 공간을 남기고 있기에 빈 부분엔 아사히나 선배가 사양치 않고 정좌했다. 장르가 완전히 다른 여신이 페어로 있는 씬도 꽤나 귀중하다. 항상 가운데에 대빵같은 녀석이 진좌해있기 때문에 말이지. 

 

 “야! 쿈, 멀뚱히 서서 뭐해. 빨리 코이즈미군을 도와!” 

 

 그 대빵에 해당하는 단장이 하청인의 태만함을 발견한 현장감독같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이렇게 즐겁다는 듯이 명령하는 녀석도 별로 없을거다. 하루히를 부하직원으로 둔 상사는 얼마안가 스트레스로 회사 출근을 거부할테지만, 내가 그럴 입장이 될 리는 없을거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삽을 흔들어 대답을 대신하고 눅눅한 지면을 파고 있는 코이즈미쪽을 향했다. 

 

 

 

 

 

 

 

 


 

 결과부터 말하지. 

 

 예상대로랄까, 뭐 당연한 거지만, 파도파도 보물은 커녕 토기조각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아사히나 선배(미치루)의 예언대로인지라 하나도 놀랄 건 없다. 까딱 잘못돼서 뭐 이상한 거라도 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나는 안심과 헛고생이 섞인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건 이거대로 좋은 결과지만, 너무 그대로인 것 같지 않냐? 

 

 “으-음. 못찾겠네, 매장금.” 

 

 고개를 갸웃하고 끙끙대는 하루히였다. 하루히는 지참한 초코쿠키를 나 보란듯이 와구와구 먹어대며 돌 위에 앉아있었다. 

 

 나는 메우기 작업에서 손을 놓고 주위를 살폈다. 자연 그대로였던 지면이 무참하게 파여있다. 여기저기를 팠다 메웠다 한 통에 생초보가 갈아놓은 밭마냥으로 꼴이 말이 아니다. 역시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가 좋은 법이다. 

 

 “할수없지,” 

 

 하루히 치고는 드물게 해탈한것 마냥 어깨를 들썩이곤, 

 

 “더이상 팔데도 없는것 같고, 이걸로 끝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검지가 가리킨 곳은, 하루히의 발언저리, 자기가 앉아있는 돌 바로 아래였다. 

 

 명령에 따라 또 땅을 파는 나와 코이즈미. 파도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공허한 삽질. 파낸 토사를 원래대로 메워넣는 나와 코이즈미. 

 

 이건 순 딱딱한 지면을 부드럽게 갈아주는 일이나 다름없다. 

 

 보물이 미발견으로 끝난 사실에 하루히가 어떤 화풀이를 해댈라나 싶었는데, 

 

 “그럼 가자. 해도 져가고, 더 이상 있다간 얼어죽을 것 같아. 이쪽으로 내려가자. 딱 우리학교 통학로 근처로 나있어.” 

 

 주섬주섬 짐을 챙겨선, 나와 코이즈미가 아사히나 차를 마시며 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하산명령을 내렸다. 시원시원한 발걸음으로 산길을 내려가는 그 모습은 마치 이제 이 산에도 보물에도 아무런 미련이 없는 듯 보였지만, 그럼 뭐냐 이건. 추위 뚫고 소풍나와서 삽질만 한거냐. 

 

 무상함을 느끼는 내 어깨에 코이즈미가 손을 얹었다. 

 

 “괜찮잖습니까.” 

 

 타이르는 듯한 말투는 하지 마라. 우리 엄마 화났을때가 생각나니깐.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많이 지쳤습니다. 여기서 죽치고 있다가 스즈미야상께서 다음 발굴지점을 찾아내시기 전에 재빨리 철수하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나도 같은 의견이다. 이미 아사히나 선배랑 돌돌만 돗자리만 달랑 들고있는 나가토도 철수태세고 말야. 나는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의미라고요?” 

 

 걷기 시작 한 내 뒤를 쫓으며 코이즈미가 목소리에 웃음을 넣어가며 말했다. 

 

 “스즈미야상의 변덕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잖습니까. 매번 이렇지 않았나요?” 

 

 보물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린 듯한 하루히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사히나 선배, 나가토로 이어졌고, 나와 코이즈미는 거기서 약간 떨어져 걷고 있었다. 

 

 한창 내려오다가 코이즈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말씀입니다만, 사실 보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건 상당히 이상한 일입니다.” 

 

 네가 할법한 말이다. 왠지 지금은 동의해주고 싶다. 

 

 “아시겠습니까? 스즈미야상께서 거기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츠루야상 선조께서의 보물 매장 여부와 상관없이 사실이 되어 정말 무언가 있게 됩니다. 스즈미야상께서는 그러실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야겠지. 네 주장에 따르면 말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건 상당히 이상한 일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뭐 하루히도 실은 안믿고 있었던거 아니냐. 그런 신빙성 없는 보물지도를 누가 믿냐. 후사우에몬 할배가 하신 낙서다. 

 

 코이즈미는 순순히 끄덕였다. 

 

 “과연, 잘 알고 계십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스즈미야상께선 원록시대부터 전해져오는 보물의 존재를 간절히 바라고 계셨던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군요. 단지 저희 모두와 소풍을 하고 싶으셨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냥 솔직하게 소풍가고 싶다고 하면 될것을 말이지. 구차하게 보물찾기같은 구실 안붙여도, 소풍정도에 반대할 건 없다. 

 

 “미묘한 여심이 작용한 게 아닐까요? 겨울방학 이후로 스즈미야상의 정신은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마 지나친 안정에 질리신 것일 수 있습니다..” 

 

 너도 할 일 없어서 좋겠구만. 그 시퍼런 거인을 상대하러 나가든 안나가든 알바비는 그대로일테고……. 

 

 “아니, 잠깐,” 

 

 나는 한손을 들어 발언권을 구했다. 

 

 “하루히 정신이 안정세라고? 2월들어서도 말이냐?” 

 

 “예. 미묘한 변동은 있습니다만, 최소한 부정적인 방향으론 안가고 있군요. 비교적 꽤나 고양되어 있는 편입니다.” 

 

 그럼 한동안 하루히한테서 느껴지던 그 우울한 오오라는 뭐였던거냐? 내 기분탓이냐? 

 

 “그런 느낌을 받고 계셨습니까?” 

 

 코이즈미는 가볍게 놀란 듯이, 

 

 “제겐 평소의 스즈미야상으로 보였습니다만,” 

 

 넌 하루히 정신전문가 아니었냐? 내가 느낀걸 왜 니가 알아채질 못하는데. 이제 분석의(分析醫) 흉내는 안 내기로 했냐. 

 

 “그것도 좋겠군요.” 

 

 간단히 웃음을 되찾은 코이즈미는 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께서 스즈미야상의 심리를 저보다 더 잘 읽어내실 수 있다면, 저는 기쁘게 제 역할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폐쇄공간의 ‘신인’퇴치도 포함해서요. 안가보신지 꽤 오래 되셨죠, 그쪽 세계도요.” 

 

 필요없네요. 그런데 다신 안가. 모든 방면에서 난 여기가 좋단 말이다. 

 

 “그거 아쉽게 됐네요. 하긴 저도 안가본지 꽤 됐군요.” 

 

 겨우 주어진 능력을 쓰지 못한다니 거 참 아깝겠다. 한번 회색공간 탐방 패키지 투어 장사라도 해보는게 어떠냐? 대박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도록 하죠. 그 아이디어를 상관께 제안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겠지만요.” 

 

 코이즈미를 상대로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나는 그저께 왔었던 논두렁길에 가까워져 갔다. 먼저 내려가던 하루히가 나가토 및 아사히나 선배와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질녘 노을에 붉게 물든 그 세명이 황폐한 논 옆에 서있는 모습은, 인상파 화가에게 소개해주면 곧장 디자인을 시작하고 말것 처럼 기가막혔는데, 찬찬히 감상할 틈도 없이, 

 

 “역까지 갈것도 없겠어. 오늘은 여기서 해산하자.” 

 

 하루히가 내게서 삽을 가로채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재밌었어. 가끔은 이렇게 자연속에 가보는것도 좋구나. 보물은 없었지만 의기소침할것 없어. 곧 찾을 수 있을테니까. 분명 오늘 경험이 도움이 될 때가 올거야. 츠루야상한텐 다시한번 말해둘게. 다음엔 무로마치(室町, 실정:1338~1573)시대 지도가 나올지도 모르고.” 

 

 어느 시대 보물이든간에 이제 지도는 됐다. 나도 츠루야 선배한테 한마디 해줘야겠다. 뭐가 나오더라도 하루히한테는 절대 주지 말라고. 

 

 하지만 삽 두 개를 메고 큰길로 향하는 하루히의 신나보이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싫은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녀석이 교실에서 꽁하니 있는 것처럼 보였던게 내 착각이었는지 아니었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운을 찾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이상하게 얌전하면 대규모 폭발을 위한 게이지 충전을 하는게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하게 될 뿐이다. 으-음? 왜 나는 내 자신을 타이르는 듯한 말을 독백으로 하고 있는거냐? 

 

 키타고 통학로로 나온 우리는 한동안 단체로 걸어갔다. 그리고, 항상 헤어지는 길에 닿은 쯤에 하루히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뒤돌아봤다. 

 

 “아, 맞다. 내일도 역앞에 집합해. 시간은 오늘이랑 똑같이. 괜찮지?” 

 

 안괜찮다고 하면 예정을 철회해주기라도 하냐? 

 

 하루히는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뭐냐 이 웃음은. 

 

 “시내 불가사의 탐사를 할거야. 한동안 안했으니까 말야.” 

 

 전혀 질문과 관계없는 소리를 하고는 단원 전체를 체크하듯이 둘러보았다. 

 

 “알겠지. 모두 늦지않게 와야돼. 늦은 사람은,” 

 

 하루히는 차가운 공기를 심호흡하듯이 들이마시곤, 그 고정대사를 말했다. 

 

 “벌금이니깐 말야!” 

 

  

 

4-05

 


 

 

 

 

 

 

 

 

 

 

 

 

 

 

 

 

 

 


 내방에 도착한 내가 가장 먼저 한건, 에어컨 전원을 켜며 핸드폰을 꺼내는 일이었다. 

 

 무슨 정기연락이나 되는것처럼 돌린 번호는, 당연히 츠루야 저택의 번호였다. 전화를 받는 츠루야가(家) 여성의 정중한 응대와, 아사히나 선배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연결도 이젠 익숙하다. 

 

 “저에요,” 

 

 『아, 네. 저에요. 미치루……아니, 미쿠루에요,』 

 

 “츠루야 선배는 집에 계시나요?” 

 

 『아뇨……. 오늘은 외출하신 것 같아요. 가족분들과 같이 법사(法事)에 가신다고 하셨는데,』 

 

 츠루야 선배가 어디서 뭘 하는지에 대해선 그리 깊게 개입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아사히나 선배, 갔다왔어요.” 

 

 『보물찾기요……?』 

 

 “아무것도 안나왔지만요.” 

 

 아사히나 선배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UT다. 

 

 『다행이네요. 제가 아는대로 돼서……. 혹시나 다른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었어요.』 

 

 나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의식적으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달라질 게 있나요? 과거는 어디든 똑같지 않던가요.” 

 

 『아,……네. 그건, 그, 그렇지만요……』 

 

 수화기를 손에 들고 망설이는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아주 가끔 달라지는 경우도……. 그,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사이에 나도 떠올랐다. 내가 몇 번인가 갔던 12월 18일. 코이즈미가 화이트보드를 이용해 설명한 더블루프설인가 하는걸. 

 

 생각해보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기정사항인지 알 수 없는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가토가 변화시켜버린 1년간은 어떻게 분류해야되냐? 코이즈미설로는 12월 18일은 둘이 있다. 시간이 여러개 있어선 안되기 때문에 재수정되어 원래대로 돌아온 이 시간대가 올바르다는 건, 뭐 대충 맞는 소린것 같다만은……. 

 

 그건 어느쪽이었냐. 지난달, 나는 어느 초등생 소년을 교통사고에서 구했다. 그 안경잡이 꼬마가 살아남는 건 기정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차는? 기정사항을 깨기 위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그 소년을 들이받으려고 한 거라면? 

 

 기정사항을 깨려고 하는 자와, 지키려 하는 아사히나 선배쪽 미래인이 있게 된다. 그리고 전자또한 미래인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건──역시 같은 미래인 뿐이다. 

 

 이젠 좀 알 것 같군요, 아사히나 선배(大). 선배가 제게 시키려 하는 일을 말입니다. 

 

 『미안해요, 쿈군,』 

 

 아사히나 선배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주고 싶은 말은 금칙 때문에 못하고, 도움될만한 건 하나도 모르고……. 쿈군, 저……』 

 

 금방이라도 울것만 같아서 나는 당황하여 말을 꺼냈다. 

 

 “그보다 내일 일 말인데요,” 

 

 아사히나 선배가 말해준 행동예정대로, 하루히는 시내 패트롤을 하자고 했다. 내일, 토요일엔 #3 지령을 실행해야하기 때문에 어디서 만날 장소를 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하루히와 아사히나 선배(小)에게 들키지 않을만한 곳을 말이다. 

 

 “아사히나 선배, 가능하면 변장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변장요?』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 이것도 훤히 보이는 듯 하다. 

 

 “선글라스……는 부자연스럽겠네요. 계절이 계절인만큼 마스크를 써도 눈에 띄진 않을겁니다. 그정도라면 어떻게 해보실 수 있겠어요?” 

 

 『아, 네. 츠루야상께 부탁해볼게요.』 

 

 “다음은 시간이네요. 내일 저희는 몇시쯤 해산하죠?” 

 

 『에-』 

 

 아사히나 선배가 그걸 떠올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딱 5시였어요. 3시쯤에 집합해서, 다같이 그 찻집에 가서……』 

 

 나는 책상 서랍에서 #3 봉투를 꺼내서 내용물을 펼쳤다. 지시받은 주소는 집합지점부터 걸어서 약 10분 정도 될라나. 넉넉잡아 15분이라고 해도 왕복 30분. 

 

 오전중엔 가만히 츠루야가에 있다가 오후 시내패트롤이 시작할 때쯤 돼서 만나는게 가장 좋을 듯 하다. 

 

 나는 자세한 타임스케줄을 묻고 나서, 합류할 장소와 시간을 지정했다. 

 

 “그럼 내일 잘 부탁해요. 가능한한 눈에 띄지 않는 차림으로요. 아, 그리고,” 

 

 내 심중에 있는 자그마한 먹구름이 이렇게 말했다. 

 

 “가능하면 츠루야 선배랑 같이 오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부탁했다고 전해주세요. 아-그리고, 아아, 우리 일에 끌어들이는 건 아니에요. 그부분은 걱정마세요. 그냥 아사히나 선배를 바래다 주실 수 있을까 해서……” 

 

 이 아사히나 선배는 츠루야가에서 약속장소까지 혼자서 왕복해야만 한다. 좀 지나친 걱정일 수 있지만, 내 위험의식이 매사에 조심하라고 말해주고 있다. 혼자는 안다니게 하는게 좋겠지. 

 

 『아 네, 말씀드려볼게요.』 

 

 츠루야 선배라면야 내 의도쯤은 단번에 알아낼 거다. 기대하고 있지. 

 

 나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나가토 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쪽에도 의뢰할 게 있으니깐 말야. 

 

 그런데. 

 

 “으응?” 

 

 놀랍게도, 통화중이었다. 

 

 나가토가 딴사람이랑 통화중? 뭐 광고전화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나는 나가토네 집에 전화를 건 오퍼레이터를 동정하며 일단 핸드폰을 놓고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흙투성이 바지를 세탁기에 집어넣고 돌아와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받았다. 

 

 “나다.” 

 

 『…………』 

 

 역시나 나가토는 침묵. 

 

 “내일 뭐좀 부탁할게 있어서 말이다. 패트롤 멤버는 항상 제비로 뽑잖냐? 내일이랑 모레 그걸 좀 조작해줬으면 한다.” 

 

 『그래』 

 

 투명도 높은 목소리가 싸늘히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 오후 거랑 모레 처음걸 너랑 내가 되게끔 해주지 않겠냐?” 

 

 『………………………』 

 

 약간 긴 듯한 침묵 후에, 

 

 『그래』 

 

 해주겠다는 거겠지만, 일단 확인해본다. 

 

 “해주는거지?” 

 

 『알겠어.』 

 

 “고맙다, 나가토.” 

 

 『괜찮아.』 

 

 “그리고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게 있다. 방금 전화했을때 통화중이던데, 누구랑 하고 있었냐?” 

 

 

 

 또다시 시간이 멈춘것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만약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사이드스토리를 진행시키는게 아닌가 하고 조바심이 생기려 하자, 

 

 『스즈미야 하루히』 

 

 쌩판 딴놈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석이 전화했냐?” 

 

 『그래』 

 

 “왜 또 그녀석이 너한테 전화를 했는데,” 

 

 『…………』 

 

 세 번째 침묵. 내가 청각에 신경을 집중시켜 수화기 너머의 분위기를 파악하고자 하고 있으니 나가토가 불쑥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말할 수 없어.』 

 

 요 며칠간 나가토한텐 놀라기만 한다. 내가 나가토한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나는 콘센트빠진 라디오마냥으로 침묵했다. 

 

 『모르는 편이 나아.』 

 

 그런 무시무시한 말은 하지 말아줘라.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말이라고. 

 

 『…………걱정할 건 없어.』 

 

 망설임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말할까 말까 망설였던것 같은, 다만 확실히 심각하게 걱정할 건 없는 것 같은 느낌은 전해져온다. 하하, 알겠다. 

 

 “하루히가 말하지 말라고 한거냐?” 

 

 『그래』 

 

 즉 하루히가 또 무슨 이상한 짓을 꾸미고는 거기에 나가토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나한텐 비밀인게지. 뭔진 모르겠지만 나가토의 말투로 봐서 알아봤자 별 쓰잘데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보물찾기 제 2탄이나 뭐 그런거겠지. 

 

 나는 숨을 죽이고 있는 나가토에게 내일 제비 건을 거듭 확인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으이그, 이렇게 바쁜 일주일은 수학 물리 세계사가 같은날에 걸린 시험기간때보다 심각하다. 

 

 “하루히 녀석, 이번엔 우리한테 또 뭘 시키려고……?” 

 

 이대로는 내 동료는 코이즈미밖에 없어질 것 같구만. 하루히는 물론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도 내 예상을 초월한 일을 할것 같단 말이다. 아아, 츠루야 선배도 말이지. 아무래도 생명체상, 본질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당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무시무시한 X염색체. 대체 그 본질이 뭔지 알려줘라. 

 

 무사히 다음주가 오기만을 빌며, 나는 바닥에 누운채로 크게 팔다리를 쭉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