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스즈미야 하루히의 폭주   
-글 : 타니가와 나가루(谷川 流), 삽화 : 이토 노이지(いとうのいぢ) 


-번역 : NIKE  


 서장 · 여름 

 

 한숨 투성이가 되었던 영화촬영 이전, 고등학교가 아직 여름 장기휴가중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고도에서 멍청한 추리극 쇼를 하게 되었던 SOS단 하기합숙에서 돌아와 수일이 경과하고, 비로소 나는 여름방학의 기분을 맛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순 강제연행이나 마찬가지였던 자칭 합숙은, 참을성없는 단장에 의해 출발일시가 방학 첫날로 설정되었으니, 긴 방학의 처음 며칠정도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낮까지 잘 수 있는 나날을 보내려고 했던 나의 주도면밀한 계획도 얼마못가 파탄, 덕분에 몸이 작년 여름방학 모드로 전환됐을 때는 이미 7월도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말할것도 없이 학교에서 왕창 내준 과제더미를 해결할 기분은 전혀 나지가 않았고, 뭐 이딴거 8월에 하면 되겠지 하고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획 7월이 지나가버렸으며, 막상 8월이 되자 난 엄청나게 들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생을 데리고 시골에 내려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사촌이며 육촌이며 조카며와 함께 2주정도를 강이며 바다며 산이며 초원이며에서 누구 내 꼴좀 봐라하고 하고 싶을 정도로 뼛속까지 놀고 먹고 있었다. 

 

 물론 하고싶지도 않은 과제따위야, 학습능력 있는 새가 독나방 유충을 기피하듯 손조차 대는 일 없이, 과제로 나온 설문을 하나도 안 풀고 놀기만 했던 날짜만이 그저 달력 위에 새겨져만 가고, 어느샌지 8월도 반을 넘어가려고 하던 쯤……. 

 

 그건 아무도 모르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같다. 


“여름이야!” 

 







 엔들리스 에이트(エンドレスエイト · Endless Eight)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우란분재를 넘긴 여름이 한창이던 날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집 거실에서 지루하게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 고교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무심코 오전중에 일어나버린 탓에, 한가하긴 하지만 산처럼 쌓인 여름방학 과제와 싸울 정도 기력이 넘치는 것도 아닌, 그런 정도로 시간을 날리고 있었다. 

 

 TV에 나오는 경기는 나와는 생판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같은 현끼리의 싸움이었는데, 약자동정심리에 의해 7대 0으로 지고 있는 편을 나도모르게 응원하고 있으니, 왠지 곧 하루히가 뛰쳐나올 것 같은 느낌이, 이것도 나도모르게 들었다. 

 

 요즘 한동안 하루히와 만난 적이 없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어머니쪽 친정이 있는 시골까지 피서와 선조공양을 겸해 갔다가 어제 막 돌아온 참이다. 그건 매년 하는 행사였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여름방학이었기 때문에 SOS단 녀석들과 만날 기회는 그리 없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거기다 방학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이상한 섬에 가서 이상한 일을 당했던 SOS단 하기합숙은 진작 지났다. 제아무리 하루히라도 여행 제 2탄을 하자고는 안하겠지. 자기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을 때쯤이다. 

 

 “그렇다곤 해도” 

 

 나는 중얼거리고, 어쩐 이유에선지 나는 울리지도 않은 휴대폰을, 우연히──정말 우연히, 휴대폰줄에 손가락을 걸어 손으로 가져왔을 때, 방 어딘가에 몰래카메라라도 설치되어있는게 아닌가 하고 의심해봐야할 사태가 발생했다. 

 

 실로 베스트 타이밍이라고 하여 부족함이 없을만큼 완벽한 타이밍에 전화가 발신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한순간 예지능력에 눈을 뜨고 만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가, 머리를 흔들고 포기한다. 바보같다. 

 

 “뭐지” 

 

 표시되는 전화번호의 주인은, 분명 스즈미야 하루히임에 틀림없다. 

 

 나는 세 번 정도 울릴 때 까지 기다린 후, 이또한 나도모르게 천천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하루히가 뭘 하자고 해댈지 이미 알것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내 자신을 의심했다. 

 

 『오늘 할일없지.』 

 

 라는게 하루히의 첫마디였다. 

 

 『2시 정각에 역앞에서 전원 집합이야. 좋은 말 할때 와.』 

 

 라고 말하자마자 곧바로 끊어버렸다. 시간에 따른 인사도 없을뿐더러 그냥 통상 인사도 없다. 그리고 내가 어쩐지 저쩐지도 확인조차 하지 않는다. 한마디 더하자면, 내가 오늘 할 일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아는거냐. 이래봬도 난……뭐, 아무런 예정도 없습니다만. 

 

 또다시 전화가 울린다. 

 

 “뭐냐.” 

 

 『지참물 말하는걸 잊어버렸어.』 

 

 빠른 속도로 가져와야 할 물건을 말해주고는, 

 

 『그리고 넌 자전거 타고 와. 그리고 충분한 돈. 오바-♪』 

 

 끊겼다. 

 

 나는 전화를 내던지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이 꿈같은 이상한 감각은. 

 

 TV에서 차가운 소리가 울려 눈을 돌려보니, 심정적 적팀의 득점은 결국 두자릿수에 달하고 있었다. 금속배트에 야구공이 맞는 소리가 사정없이 들려온다. 

 

 여름도 그 끝이 가깝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닫은 방에, 매미의 대합창이 벽을 뚫듯이 들려오고 있었다. 

 

 “거 할수 없구만.” 

 

 근데 하루히녀석,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합숙이라 칭하여 우리를 이상한 섬에 데려간 것 가지곤 불충분했던거냐. 더럽게 더워 죽겠는데 대체 어디서 뭘 하자고? 나는 냉방 잘 돌아가는 장소에서 나가고 싶진 않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들은 대로의 물건을 꺼내기 위해 옷장을 향했다. 


 “늦었잖아, 쿈. 좀더 의욕을 보이란 말야!” 

 

 스즈미야 하루히가 비닐봉지를 휘두르며 기분 좋은 얼굴로 내게 검지를 들이댔다. 이녀석은 뭐 하나 변한 것도 없군. 

 

 “미쿠루짱도 유키도 코이즈미군도 모두 네가 오기 전에 다 도착해있었다구. 단장을 기다리게하다니, 니가 그럴 군번이야? 페널티야, 페널티.” 

 

 집합장소에 나타난 마지막 인물은 나였다. 분명히 15분 전에 왔는데도, 나머지 멤버는 이 갑작스런 하루히의 호출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 같은 속도로 집합한 모양이다. 덕분에 맨날 나만 내야 하는 신세긴 하지만, 이제 익숙해져버리기도 해서 포기했다. 어차피 단 한명뿐인 일반인인 내가 특수한 배후관계를 가진 이 셋을 앞지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나는 하루히를 무시하고, 우리의 착실한 단원들을 향해 한 손을 들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른 둘이야 어떻든 간에, 이 분에게는 해둬야 할 말이다. 고상한 리본 달린 모자 아래서, 아사히나 미쿠루 선배는 내게 둥글게 미소지어주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 

 

 “괜찮아요. 저도 지금 막 온 참이에요.” 

 

 아사히나 선배는 두손에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뭔가 기대해도 좋을만한 게 들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왠지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계속 그런 기분에 젖어있고 싶었는데, 옆에서 방해자가 끼어들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때부터 또 여행이라도 다녀오셨나요?” 

 

 코이즈미 이츠키가 빛날 정도로 흰 이를 보이며 나를 향하여 한손을 들었다. 저 수상스런 웃음은 여름방학 반이 지나가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는 것 같다. 너야말로 어디 여행이라도 가면 될것을 뭐하러 척척 하루히 호출에 빠르게도 응해주는지 의문이 든다. 가끔은 거절해라. 

 

 나는 코이즈미의 밝은 위선자 면상을 경유하여 그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코이즈미의 그림자마냥 서있는 그것은 나가토 유키의 무정하고도 무기질한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하복을 입고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꼿꼿이 서있는 모습은 이미 친숙한 광경이다. 땀샘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의심스럽다. 

 

 “…………” 

 

 나가토는 움직이지 않는 생쥐 장난감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인사였던 것일까. 

 

 “그럼, 모두 모였으니 출발하자!” 

 

 하루히가 큰 소리로 외친다. 나는 일단 의무감에 이끌려 물었다. 

 

 “어디로?” 

 

 “당연히 시민 수영장이지.” 

 

 나는 내 오른손이 잡고 있는 타월과 수영복이 든 스포츠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뭐, 가는 곳이 어디 수영장이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여름은 여름답게, 여름같은 일을 해야하는 법이야. 한겨울에 물놀이하면서 좋아라하는 녀석은 갈매기나 펭귄 정도겠지.” 

 

 그놈들이라면 일년내내 헤엄치고 다니는 거고, 그것도 별로 좋아서 하는 게 아니잖아. 비교대상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동물을 얼렁뚱땅 넘길 내가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은 절대 안돌아와. 그러니까 하는거야. 이 단 한번뿐인 고1 여름방학에 말야!” 

 

 하루히는 평소의 텐션으로, 그 누구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기본적으로 내 이외의 저 셋은 하루히에게 의견을 제시한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행위는 하지 않기에, 매번 무시당하는 건 내 의견뿐인 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순 억지지만, 잘 생각해보면 상식적인 인간은 나밖에 없으니 그렇게 될 운명인 건지도 모른다. 거참 험한 운명이다. 

 

 내가 운명과 숙명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니, 

 

 “수영장까진 자전거로 간다!” 

 

 하루히 선언이 발표되고, 아무도 찬성치 않는데도 지맘대로 실행되게 되었다. 

 

 듣자하니 코이즈미도 자전거를 타고 오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여자 셋은 여기까지 도보로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전거는 합계 두 대. SOS단 멤버는 다섯명. 그럼 어쩔 생각인게야. 

 

 하루히는 명랑하게 외쳤다. 

 

 “하나는 둘이 타고 하나는 셋이 타면 되잖아. 코이즈미군, 넌 미쿠루짱을 태워줘. 나랑 유키는 쿈 뒤에 탈테니까.”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필사적으로 페달을 밟고 있다. 더워서 땀이 뻘뻘 나는 건 그렇다 쳐도, 내 머리 뒤에서 아까전부터 음량조정기능이 고장난 스피커같은 목소리가 계속 울려대는 것만은 제발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야 쿈! 코이즈미군이 놓고 가버린다! 확실히 밟아! 좀더 빨리, 제쳐버리란 말야!” 

 

 내 흐릿해져가는 시야에, 코이즈미의 자전거의 짐받이쪽에 앉아있는 아사히나 선배가 조심스레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왜 코이즈미는 ‘저거’고, 난 ‘이거’냐. 불공평이라는 표현의 어원은 지금 내 이 상황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다. 

 

 내 자전거와 두 다리는, 거침없이 밀려오는 엄청난 책임량을 애써 견뎌내고 있다. 짐받이에 콕 앉아있는게 나가토이며, 뒷바퀴 스텝에 서서 내 어깨를 잡고 있는게 하루히라는, 대략 곡예 급의 3인 타기다. 언제부터 SOS단이 잡종 곡예단이 된거냐. 

 

 덧붙여 자전거에 타기 전, 하루히는 이렇게 말했다. 

 

 “유키는 작고, 뭐 몸무게야 있으나마나 할거고.” 

 

 확실히 그렇긴 하다. 자기 체중을 제로로 하고 있는지, 반중력을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밟는 감각으로는 하루히의 무게정도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뭐, 이제와서 나가토가 중력제어를 한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오히려 이녀석이 못하는게 뭔지가 더 알고싶다. 

 

 하루히의 체중도 어찌 해주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만, 내 등과 어깨는 제대로 그 무게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사히나 선배의 머리 너머로 흘끗 뒤돌아보는 코이즈미의 괘씸한 미소가 보일듯 말듯 보며, 나는 이 세상의 무상함을 한층 깊이 느끼고 발작(Honore de Balzac:프랑스의 소설가. 근대 리얼리즘 문학 최대의 작가. ‘인간희극’으로 총칭되는 장단편 소설 90편 중에, 19세기전반의 프랑스 사회를 형성하는 여러모습의 인간의 기질을 그려냈다. 1799~1850)처럼 내 자신을 한탄했다. 젠장, 돌아갈 때는 반드시 아사히나 선배를 태울 수 있는 기회를 만끽하고프다. 분명 내 자전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여름이군요.” 

 
 

 엔들리스 에이트-02


 시민수영장은 간판을 서민수영장이라고 바꿔놓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싼 곳이라, 50미터짜리 수영장 하나에다, 수심 50cm 정도 되는 어린이용의 커다란 물웅덩이밖에 없다. 

 

 이런 수영장장에 수영하러 오는 고등학생이란 대략 갈 곳이 없는 녀석들뿐으로, 즉 우리다. 훌륭하게도 꼬마와 그 부모──특히 모친쪽──밖에 존재치 않았다. 나는 수영장을 가득 메우다시피 들어차있는 튜브낀 연령 한자리숫자 꼬마들을 보고, 즉시 암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내 시신경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아사히나 선배 뿐인 모양이다. 

 

 “음, 이 소독약 냄세. 아주 딱이야.” 

 

 태양빛 아래, 진홍빛 탄키니(상의가 민소매나 탱크탑으로 된 수영복)를 몸에 착 붙인 하루히가 눈을 감고 코로 킁킁 냄새를 맡고 있다. 아사히나 선배의 손을 끌다시피 하며 탈의실에서 나왔다. 한손에 바구니를 든 아사히나 선배는 마치 아이용 같은 장식이 나풀거리는 원피스였고, 나가토는 수수하니 꾸밈새 없는 선수용 같은 수영복이었다. 이 둘의 수영복도 하루히가 골라준 걸 거다. 자기 의상엔 전혀 신경 안쓰면서, 다른 사람 (특히 아사히나 선배) 의상엔 시끄러운 녀석이니깐 말야. 

 

 “일단 짐 놓을 장소를 확보해. 그리고 수영하자. 경주야, 경주. 수영장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누가 제일 빠른가로.” 

 

 지극히 애들같은 소리를 하더니, 준비운동도 하지 않고 풍덩 하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여기저기 쓰여있는 ‘뛰어들기 금지’라는 글자도 못읽나, 이녀석은. 

 

 “빨리 와-! 물이 미지근해서 기분 좋다구!” 

 

 나는 어깨를 들썩한 후 아사히나 선배와 마주보고, 가까운 그늘에 돗자리랑 가방을 놓기 위해 걸어갔다. 



 꼬마들이 이상 발생한 소금쟁이처럼 수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직선으로 전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실시된 단원대항 50미터 자유형 경주였는데, 의외라고 생각해야할지 아닌지, 1착은 나가토였다. 

 

 아무래도 이녀석은 숨도 쉬지 않고 계속 잠수로 수영장 밑바닥 닿을락 말락 하게 헤엄쳤던 모양이었다. 얼굴에 그대로 들러붙어있는 쇼트헤어에서 물방울을 떨어트리며, 말없이 골지점에서 우리들의 도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할것도 없지만 꼴찌는 아사히나 선배였다. 그녀는 숨을 쉴때마다 멈춰서고, 근처에 날아온 비치볼을 던져주는 등 나가토보다 열배 정도 오래 걸려 겨우 물가에 닿았을 때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스포츠에서 고민을 하게 된다는 건 다 거짓말이야. 신체와 머리는 별개라구. 몸은 생각없이도 움직이지만, 머리는 생각없이는 안돌아가니깐.” 

 

 하루히는 ‘나 말 한번 잘하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러니까, 다시한번 승부야. 유키, 이번엔 안 질거야!” 

 

 ‘그러니까’라는 접속사는 그런 경우에 쓰는 게 아니라고 이녀석한테 가르쳐줄 어른은 없었던 것인가. 뭐가 ‘그러니까’냐. 단지 지기 싫은것 뿐이잖아. 그것도 이길때까지 계속 해보겠다는 지구력 승부다. 

 

 그래서 나는 나가토가 분위기를 읽어주기를 기대하며 수영장에서 나왔다. 승부라면 열심히 해봐라. 나는 수영장 옆에서 구경이나 하련다. 나는 나가토한테 걸건데, 누구 하루히한테 걸 녀석은 없냐? 

 

 하루히와 나가토는 50미터 수영장을 다섯 번 왕복했는데, 그 사이에 SOS단 여성 유닛 3인방은 마침 거기 있던 초등학생 그룹과 의기투합하여 공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할 일이 없어져 심심해진 나와 코이즈미는, 수영장 옆에 앉아서 달리 할 일도 없기에 물과 장난치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즐거우신가 보네요.” 

 

 코이즈미는 하루히 무리를 보며, 

 

 “흐뭇한 광경입니다. 거기다 평화를 느낍니다. 스즈미야상께서도 꽤나 상식적인 유흥법을 익히게 되셨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나한테 말하는 것 같으니 대답해주기로 한다. 

 

 “갑자기 전화해서 일방적으로 용건만 말하고 끊는 권유법은 그다지 상식적으로 보이진 않구만 그래.” 

 

 “마음먹은 날이 길일(思い立ったが吉日:마음먹은 날이 하기 딱 좋은 날이라는 뜻)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저녀석이 무슨 마음을 먹어서, 그걸로 우리가 흉(凶)밖에 더뽑았냐?” 

 

 내 뇌리엔 바보같은 야구대회와 멍청이같은 거대 꼽등이의 모습이 스쳐갔다. 

 

 코이즈미는 스마일리(smily)한 어조로, 

 

 “그래도,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충분 이상의 평화입니다. 저렇게 즐겁게 웃고 계시는 스즈미야상께선 이 세상을 뒤흔들 만한 일은 하지 않으실 테니까 말이죠.” 

 

 그럼 좋겠다만. 

 

 내가 일부러 한숨을 지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가볍게 쿡 하고 웃고는……. 

 

 ──그때, 코이즈미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다. 즉, 가벼운 미소 이외의 표정을 지은 것이다. 

 

 “응?” 

 

 이라며, 코이즈미는 미간을 찡그리는 듯한 동작을 한다. 

 

 “왜그러냐.” 고 내가 물었다. 

 

 “아뇨……” 

 

 웬일인지 말끝이 흐리고, 말이 막히는 듯한 태도를 취했는데, 곧 미소로 돌아왔다. 

 

 “아마 제 기분 탓일겁니다. 초봄부터 여러 일이 있었기에 약간 예민해진 것 뿐이겠죠. 아, 올라오셨네요,” 

 

 코이즈미가 가리킨 방향에선, 하루히가 새끼 앞에서 먹이를 나르는 황제 펭귄과 같은 기세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만연한 웃음. 그 뒤에선, 성에서 나온 공주를 뒤따르는 것 같은 분위기로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가 따라온다. 

 

 “이제 밥먹자. 뭐게! 미쿠루짱이 직접 만든 샌드위치야. 시가로 치면 5천엔정도, 경매(auction)에 내면 50만 정도로 팔 수 있겠지. 그걸 너한텐 공짜로 먹여주는 거니까 내게 감사하도록.” 

 

 “감사합니다.” 

 

 라고 내가 말했다. 아사히나 선배에게. 

 

 코이즈미도 나를 따라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뇨, 아니에요.” 

 

 아사히나 선배는 겸연쩍듯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맛있게 됐는진 잘 모르겠는데요……. 맛없으면 죄송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사히나 선배의 우아한 손이 차분하게 조리한 음식물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먹든 맛있는 법이다. 이 경우, 육하원칙(5W1H: what, who, when, why, where, how)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했냐는(who done it) 것이다. 

 

 아사히나 선배께서 직접 만든 믹스샌드위치는 감동적인 맛이었고, 덕분에 맛있는지 어쩐지도 모를 정도다. 뭐 아무래도 좋다. 손수 따라주신 뜨거운 일본차도 샌드위치와는 전혀 안 어울렸지만 전혀 노 프라블럼(no problem), 그리 생각해서인지 흐르는 땀도 개운할 정도였다. 

 

 순식간에 자기 몫을 먹어치운 하루히는 체내에 끓어오르는 열량을 발산시켜보겠다는 듯한 기세로, 

 

 “한번 더 수영하고 올게. 너희들도 다 먹으면 와야돼.” 

 

 라는 말만 하고는 또다시 수영장으로 다이빙했다. 

 

 잘도 이런 장해물 천지의 수영장에서 헤엄치는구만 그래. 인류 해중진화설도 꼭 틀린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더욱이 하루히의 먼 조상같은 인류라면 달 표면에 던져놔도 순응할것 같군 그래. 

 

 그리고 잠시 후, 천천하고도 묵묵히 계속 먹기만 하는 나가토를 남기고, 우리 셋은 구애중인 물개처럼 수중을 가르는 하루히에게 갔다. 그쯤 하루히는 이번엔 또 여자초등학생 집단과 친해져서는 같이 수중 피구를 하고 있었다. 

 

 “미쿠루짱도 이리와! 여기!” 

 

 “네-,” 

 

 아사히나 선배는 한가롭게 끄덕인 직후에 하루히가 던진 강속 비치볼에 얼굴을 맞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한시간 정도 후, 물에서 나온 나와 코이즈미는 명랑한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밀리다시피 하여 수영장 옆에 앉아있다. 

 

 아무리 봐도 장소가 엉뚱하다. 하루히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아무것도 없는 시민 수영장을 고른 걸까. 물 미끄럼틀을 증설하라고는 안하겠지만, 더 쾌활한 고등학생 그룹이 갈만한 장소가 있을 텐데 말야. 

 

 쨍쨍 내리쬐는 따가운 햇빛에 피부가 급히 멜라닌 색소를 증강시키려는 게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나가토도 햇빛에 타나 싶어서 어딨나 찾아보니, 그 작은 체구의 무언 단발 처자는 아까 전 그 그늘 밑에 앉은 채로 허공에 그 영리한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평소의 모습이다. 어딜 가든 변함없이, 흙인형처럼 정지한 나가토의 모습──이긴 한데, 

 

 “응?” 

 

 이상한 바람이 내 마음속을 미끄러져갔다. 또 그 이상한 느낌이다. 한순간 왠지 나가토가 심심해 보이는 것 같은 감각이 스쳐지나간다. 그리고는 느껴지는 기시감(dejavu). 이어 무슨 일이 생길지, 나는 어디선가 경험했다. 그렇다, 하루히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둘이가 우리 단원이야. 무슨 말이든 들을 테니까 아무거나 시켜버려.” 

 

 수영장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여자 아동 무리를 데려와선 우리 앞까지 다가온 하루히를 발견했다. 

 

 원기발랄한 초등학생들을 상대하기 지쳤는지, 아사히나 선배는 수면에다 턱까지 잠그고 가볍게 눈을 감고 있다. 초등학생 이상으로 발랄한 우리의 하루히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나와 코이즈미에게 주고는, 

 

 “자-, 놀자. 수중축구를 할거야. 남자 둘은 골키퍼 해주도록.” 

 

  그건 대체 어떤 규칙에 어떤 스포츠냐, 고 반문하기 전에 내가 느낀 그 기시감(dejavu)은 사라졌다. 

 

 “……아아” 

 

 나는 대충 대답하며 일어섰다. 코이즈미도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 무리에 가세한다. 

 

 이젠 아까전의 위화감은 없다. 

 

 흠. 뭐, 자주 있는 일이다. 일상에서 보는 어느 순간을 꿈에서 본 것 같은 감각이란 말이지. 거기다 이 수영장은 나도 어릴때 와본 적이 있다. 문득 그때 기억이 난 걸지도 모른다. 혹은 뇌의 복잡한 정보전달 작업에 오류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까이에 떠있던 돌고래 모양 튜브를 밀어주며 하루히가 오버헤드킥의 요령으로 찬 비치볼을 쫓았다. 

 

 엔들리스 에이트-03

 


 우리는 열심히 논 끝에 비로소 시민 수영장을 뒤로 했다. 돌아갈 때도 나는 곡예 3인타기, 코이즈미는 청춘 탠덤(tandem:2인승 자전거)이다.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는군 그래. 

 

 짐받이에 앉은 아사히나 선배는 원래는 하얀 피부였는데 얼굴 부분부분이 상기한 듯 빨개져있다. 그 한 손이 새들(saddle:자전거, 오토바이 등의 안장)에 앉은 운전수 허리에 감겨있는 걸 보고, 내 속은 더더욱 뒤집혀간다. 귀를 기울이면 광야를 가르는 바람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기분이다. 

 

 하루히가 맘대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밟고 있자니 집합장소였던 역앞에 돌아오게 되었다. 

 

 아, 그랬었지. 얘네들한테 한턱 내야 했었지 참. 

 

 찻집에 들어선 나는 머리에다 차가운 물수건을 얹고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곧바로, 

 

 “이제부터 할 활동계획을 세워봤는데, 어때.” 

 

 테이블 위에 한 장의 종이조각이 엄숙하게 강림하시고, 우리보고 보라는 듯이 검지가 박혀있다. 노트에서 찢은 A4 종이. 

 

 “무슨 수작이냐.” 

 

 하루히는 내 질문에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얼마 안남은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낼것인지에 대한 예정표야.” 

 

 “누구 예정표냐.” 

 

 “우리 거. SOS단 서머 스케줄 시리즈(summer schedule series)야.“ 

 

 하루히는 냉수를 쭉 들이키더니, 점원에게 리필을 요구하고선, 

 

 “문득 떠오른거야. 여름방학도 앞으로 2주밖에 없잖아. 좀 놀라운 기분이었다구. 이래선 안돼! 아직 못한게 얼마나 많은데 그거밖에 안남았다니 말야. 그래서 지금부터는 이렇게 해나갈 거야.” 

 

 하루히가 쓴 계획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적혀있다. 




 

 

 




 ○『여름방학에 꼭 해야 할 것들』 

 

 ·하기합숙. 

 

 ·수영장. 

 

 ·윤무(우란분재날 밤에 많은 남녀들이 모여서 추는 윤무). 

 

 ·불꽃놀이. 

 

 ·아르바이트. 

 

 ·천체관측. 

 

 ·배팅(batting) 연습. 

 

 ·곤충채집. 

 

 ·담력시험 

 

 ·그 외. 

 

 

 







 여름방학 열(熱). 

 

 뭐 그런 열병같은게 어디 밀림에서 기어나온거 아니냐. 분명히 모기같은 걸 매개삼아 옮아가는 걸거다. 하루히의 피를 빤 모기에게 동정하마. 먹는 도중에 격추당했을 테니까. 

 

 적힌 걸 보니 하기합숙과 수영장 위엔 큰 가위표가 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종료 표시인 모양이다. 

 

 그럼, 그 이하에 적힌 메뉴를 2주가 채 되기 전에 다 해야 한다는 거냐. 거기다 ‘그 외’는 또 뭐냐. 또 뭘 하겠다는 거냐고. 

 

 “뭔가 떠오르면 또 할거야. 지금은 이정도지. 넌 뭐 하고 싶은거 있어? 미쿠루짱은?” 

 

 “음-글쎄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나는 곁눈질로 메시지를 보낸다. 그다지 엉뚱한 말씀은 안하시는게……. 

 

 “전 금붕어낚기요.” 

 

 “오케이-” 

 

 하루히가 든 볼펜이 리스트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시켰다. 

 

 하루히는 이어 나가토와 코이즈미의 요망도 물어봤지만, 나가토는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고, 코이즈미는 미소지으며 고사했다. 탁월한 선택이다. 

 

 “잠깐 실례,” 

 

 빠르게도 아이스오레를 비운 코이즈미가 용지를 들어올려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듯한, 뭔가를 쫓아내버리려고 하는 듯한 모습인데, 이런 이벤트 열거에 걸리는 점이라도 있는거냐. 

 

 나가토가 빨대로 소리없이 소다를 마시는 광경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감사합니다,” 

 

 코이즈미는 하루히가 칭하는 계획표를 탁상에 되돌려놓고, 고개를 살짝 갸우뚱 했다. 무슨 짓거리냐. 

 

 “내일부터 즉각 결행이야. 내일도 이 역앞에 모일 것! 내일 요 근처에서 윤무하는 데 있어? 불꽃놀이도 상관없는데.” 

 

 하다못해 먼저 알아보고 나서 결행해줘라. 

 

 “제가 알아보도록 하죠.” 

 

 코이즈미가 자진해서 맡기로 했다. 

 

 “추후에 스즈미야상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윤무, 또는 불꽃놀이 개최장소 말씀이시죠.” 

 

 “금붕어낚기도 잊지마, 코이즈미군. 미쿠루짱의 간절한 희망사항이니까.” 

 

 “윤무와 연일(?日:잿날, 신불과 이 세상과의 인연이 강하다고 하는 날. 약사여래는 8일, 관세음보살은 18일 등으로 정해져 있으며, 이 날에 참배하면 영검이 크다고 함)이 세트로 되어있는 곳을 찾아보는게 좋겠군요.” 

 

 “응, 부탁해. 너만 믿는다, 코이즈미군.” 

 

 하루히는 기분좋게 커피 아울렛(coffee au lait:우유 탄 커피)을 한입에 들이마시더니, 보물섬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도라도 다루는 듯한 손놀림으로 노트조각을 접었다. 




 

 

 




 내게 찻값 계산을 시키는 사이에, 하루히는 대회를 앞둔 조깅선수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내일을 쓸 힘을 모아두는 건지도 모른다. 어차피 폭발할거면 서서히 한발씩 펑펑 터뜨려줬으면 하는군 그래. 벌써부터 파편 회수가 걱정이다. 

 

 단원 넷도 각각 해산, 딱 알맞게 떨어진 때를 봐서 나는 어느 한사람을 불러세웠다. 

 

 “나가토.” 

 

 내가 부르자 여름용 세일러복을 입은 유기 안드로이드가 뒤돌아본다. 

 

 “…………” 

 

 무언의 무표정이 나를 바라본다. 피할수도 받아들일수도 없는 무기(無機)의 두 눈동자가 흰 얼굴 위에 뜨여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가토가 감정없이 보이는 거야 항상 그렇긴 하지만, 오늘의 나가토는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는 힘들 정도로 왠지 이상해보였다. 

 

 “아니……” 

 

 불러세운것까진 좋은데, 잘 생각해보니 할 말이 없는 걸 깨닫고는 조금 당황했다. 

 

 “아 뭐 별건 아닌데 말이지. 요즘 어떠냐? 일은 잘 되고?” 

 

 뭔 쓸데없는걸 묻고있냐 난. 

 

 나가토는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각도기로 재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각도로 끄덕여주었다. 

 

 “응.” 

 

 “그거 잘됐네.” 

 

 “응.” 

 

 아주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는, 응고된거나 마찬가지인 얼굴이 더더욱 굳은것 같은…아니 그 반대다, 이상하게 풀린 것 같은……. 왜 그런 모순된 의견이 나오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인간의 인식력이란 원래 그런거 아니냐? 라며 도망치자. 

 

 결국 그걸로 말은 이어지지 않고, 나는 적당한 이별의 말을 하는둥 마는둥 하고, 왠지 도망치듯이 나가토에게서 등을 돌렸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는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전거에 타서 집으로 돌아가, 저녁밥 먹고 목욕하고 TV나 보다가 잤다. 



 


엔들리스 에이트-04

 

 다음날 아침, 또다시 하루히의 전화는 내 단잠을 빼앗았다. 

 

 윤무회장을 찾았다. 시간은 오늘밤. 장소는 시내 시민 운동장. 

 

 …이랜다. 

 

 잘도 그리 타이밍 좋게 찾으셨군 그래. 내가 적절히 감동해주고 있으니 하루히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은, 

 

 “다같이 유카타를 사러 갈거야.” 

 

 스케줄의 시작은 그것인 모양이다. 

 

 “실은 칠석때 입혀보고 싶었는데 완전히 까먹고 있었거든. 그때 난 어떻게 좀 됐었어. 우리나라에 2개월 연속으로 유카타 입는 풍습이 있어서 다행이야.” 

 

 누가 다행이란 걸까. 

 

 참고로 지금은 아직 대낮이다. 밤에 모이면 될걸 벌써부터 이짓거린가 싶었다면 그게 맞는 모양이다. 어제에 이어 하루히는 위세좋게, 아사히나 선배는 포근하게, 나가토는 말없이, 코이즈미는 싱글거리고, 말할것도 없는 역앞 대집합이다. 

 

 “미쿠루짱이랑 유키도 유카타 없대. 나도 없거든. 전에 상점가를 지나다보니까 나막신이랑 세트로 싸게 팔더라고. 그걸로 하자.” 

 

 나는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의 모습을 보며 여자 3인방의 유카타 모습을 상상해본다. 

 

 뭐, 여름이기도 하니까. 

 

 나와 코이즈미는 평상복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유카타를 입는 건 여관에서 입는것만으로 충분하다. 남자 유카타 따위 봐서 좋을 것도 없다. 

 

 “그렇겠지. 코이즈미군한테는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너야 뭐.” 

 

 하루히는 흐흥하고 웃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자, 가자,” 

 

 지참하고 있던 부채를 휘두르며 호령을 내렸다. 

 

 “자! 유카타 가게로!” 




 

 

 

 




 여성의류 대량판매점에 뛰어들어간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 것도 맘대로 골라주곤 성큼성큼 탈의실로 걸어갔다. 

 

 나가토 외의 두사람은 입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여자 점원이 입혀주게 되었는데, 이게 꽤나 시간 걸리는 일이었다. 나와 코이즈미는 그저 할 일도 없이 여성양복이 늘어선 진열대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비로소 그 셋이 거울 앞에 모였다. 

 

 하루히는 화려한 하이비스커스(hibiscus:열대, 온대의 아욱과 무궁화) 무늬였고, 아사히나 선배는 알록달록한 금붕어 무늬, 나가토는 밋밋하고 수수한 기하학 문양이었다. 모두 제각각 나름의 느낌이 잘 살아있어서, 나는 어쩐지 시선 둘곳을 모르게 되었다. 

 

 여점원은 ‘누가 누구 남자친구인가요’ 라고 묻고싶은 듯한 표정으로 나와 코이즈미를 흘끗흘끗 보고 있긴 한데, 안됐지만 그런 놈 없다고 말해주고 싶군 그래. 코이즈미야 어떻든 간에, 난 시중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건 유감스러워해야 할 부분인가. 

 

 뭐 나는 아사히나 선배 유카타 버전을 뵈올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루히랑 나가토도 잘 어울려서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지만 말이지. 따로 말을 꺼낼 정도는 아니다. 

 

 “미쿠루짱, 너……”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보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 귀여워! 역시 나야. 내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해! 네 유카타 모습에 이 세상 남자 95%는 정신도 못차릴걸!” 

 

 나머지 5%는 뭐냐고 물어봤다. 

 

 “이 귀여움은 게이 남자한테는 안먹혀. 남자가 백명정도 있으면 다섯명은 게이라구. 잘 기억해놔.” 

 

 기억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네 그려. 

 

 아사히나 선배도 꼭 싫은 것만은 아닌지, 피팅룸(fitting room) 거울 앞에서 한바퀴 돌며 자신의 의상을 확인하고 있다. 

 

 “이게 이 나라의 고전 민족의상이군요. 가슴이 좀 끼긴 하지만 멋져요……” 

 

 하루히가 억지로 입힌 코스튬 중에선 톱클래스 급이다. 바니만큼이나 노출한 것도 아니며 메이드만큼이나 보편성이 없는 것도 아닐 뿐더러, 이 계절에 한해선 이 차림으로 동네를 나다녀도 별반 문제되는 의상도 아니다. 여름 풍물시 같은거다. 거기다 엄청 잘 어울리기도 하고. 마치 내 동생이 유카타를 입고있는 분위기조차 감돌았는데, 그것 치고는 허리띠 윗부분이 너무 언밸런스하게 부풀어있긴 하지만 귀여우면 뭐든 오케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성스러움과 거룩함이 뿜어나오고 있다. 설령 그녀가 은행강도 주범이라 할지라도, 나는 변호측 자리에 설 것이다. 하루히의 경우는 또 모르겠지만. 




 

 

 




 시간배분능력 전무의 하루히가 대낮부터 소집을 명한 바람에, 윤무회까지 상당한 시간이 남게 되었다. 할 수없이 역앞 공원에 모여 시간이나 날리고 있었고, 그사이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의 머리를 묶으며 놀고 있었다. 인형처럼 얌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두사람과,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그녀들의 머리카락은 그대로 연속사진을 찍어놓고 싶을 정도로 꽤나 좋은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더해두며, 저녁때를 앞둔 우리들은 시민 운동장으로 향하는 대열을 짰다. 

 

 일몰 전인데도 벌써부터 북적북적한 윤무회장엔, 어디에서 왔달 것도 없는 시민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잘도 이만큼이나 모였군 그래. 

 

 “와아” 

 

 순진하게 감탄에 마지않는 아사히나 선배, 

 

 “…………” 

 

 무슨 일이 있어도 무반응한 것이 나가토이다. 

 

 윤무회장에서 진짜로 춤을 추는 녀석은 그리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근데 윤무라. 어쩐지 정말 오랜만에 보는것 같다──. 

 

 “응?” 

 

 또다. 기시감(dejavu)틱한 감각이 편두통처럼 나타났다. 여기에 오는 건 꽤 오랜만일텐데, 바로 얼마 전에 온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운동장 중앙에 쌓인 땔감이나, 주위에 늘어선 축제 가게 하나하나를 본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저기 사방으로 퍼져 흔들거리는 거미줄을 잡듯이 그 감각은 곧 사라졌다. 

 

 하루히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쿠루짱, 네가 하고싶어하던 금붕어낚기도 있어-. 팍팍 낚으라구, 까만 툭눈금붕어(出目金)는 플러스 200 포인트니깐 말야.” 

 

 하루히는 지멋대로 룰을 만들어내더니, 아사히나 선배의 팔을 잡고 금붕어낚기 수조를 향해 대쉬(dash)했다. 

 

 “저희들도 해볼까요. 얼마나 낚는지 한판 해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게임을 좋아하는 코이즈미가 제안하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붕어따위 넣어줄 어항은 없다. 그것보다도 저 근처에 식욕증진을 촉진시키는 향기를 풍기는 음식 노점상 쪽에 더 흥미가 가는군. 

 

 “나가토 넌 어떠냐? 뭐라도 먹을래?” 

 

 웃지 않는 눈이 나를 보더니, 천천히 시선이 이동한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가면집. 그런거에 흥미가 있냐. 이녀석 취미도 통 알수가 없다. 

 

 “뭐 좋지. 일단 한번 봐보자고.” 

 

 스피커가 웅웅거릴 정도로 울리고 있는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 같은 축제음악(祭?子). 그것에 이끌리듯, 나는 가면집에 나가토를 데려가보기로 했다. 아주 조금 코이즈미가 방해물같이 느껴지면서. 

 

 “물고기말인데, 많이는 필요없어서 한 마리만 받아왔어. 미쿠루짱은 하나도 못 낚았지만 말야. 내걸 줬어.” 

 

 

 

 




 

 

 

 아사히나 선배의 손가락에 걸려있는 작은 비닐봉지엔 별 특이할 것도 없는 주황빛 금붕어가 아무 생각도 안하는 듯한 얼굴로 헤엄치고 있었다. 끈을 꼭 쥐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의 동작 하나하나도 사랑스럽다. 다른 한손에 들고 있는 것은 사과사탕(그림참조)이었다. 하나 사가지고 가서 동생한테 줄까. 가끔은 동생한테 점수를 따놓는 것도 좋겠지. 

 

 한편 하루히는, 왼손으로 물풍선(그림참조)을 통통 흔들면서 오른손에는 타코야키(??き:삶은 문어를 잘게 썰어 밀가루 반죽을 하여 탁구공만 한 크기로 구운 것*그림참조)를 한 판을 받쳐들곤, 

 

 “하나만 먹을거면 먹어도 돼.” 

 

 라며 내 앞으로 내민다. 내가 소스로 범벅이 된 타코야키를 맛보고 있으니, 

 

 “어, 유키. 그 가면 뭐야?” 

 

 “샀어.” 

 

 나가토가 멍하니 타코야키에 솟아난 이쑤시개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나가토가 옆머리에 쓰고 있는 가면은 빛의 나라 출신의 은색 우주인 모양이다. 몇 대짼지는 모르겠지만, 우주인끼리 뭔가 파장이 통하는 게 있었겠지. 유카타 소매에서 돈지갑을 꺼내어 소망한 것이 그거였다. 

 

 왠지 항상 나가토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그 정도는 사 줄까 했는데, 나가토는 말없이 거절하며 자기 돈을 냈다. 그러고보니 이녀석 수입사정은 어떨까 궁금해지는군. 

 

 운동장에 쌓인 땔깜 주위엔 유카타 차림의 부인과 아이들이 탄갱민요(炭坑節)에 맞춰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다. 어디 있는 노인회와 부인회와 어린이회 회원들만 온 것 처럼 보였다. 단순히 놀러 온 녀석은 윤무회에서 착실하게 춤이나 추고 있진 않을테니까 말야. 물론 우리들도 안한다. 

 

 아사히나 선배는 어디 개척되지 않은 정글에 가서 그곳 현지인에게서 환영의 춤을 받는 것 같은 얼굴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헤에-. 하아-” 

 

 작게 감탄사를 뱉어내고 있었다. 미래엔 윤무하는 풍습이 없나벼? 

 

 하루히를 선두로 한 우리 일행은 그 연일(?日)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하루히의 “저거 먹자” 라든지 “이거 해보자”라는 말에 따르기만 했다. 하루히는 무척이나 즐거워보였고, 아사히나 선배도 그런 것 같아서 나도 즐겁긴 했다. 나가토가 즐거워하는지 어쩐지는 도저히 알수가 없었고, 코이즈미가 즐거워 하든 말든 내 알바가 아니다. 

 

 코이즈미는 계속 때때로 이상하게 말을 안하다가, 그런가 싶으면 또 느닷없이 미소로 돌아오곤 해서, 이녀석은 이녀석대로 요즘 정서불안인거 아니냐. SOS단에 들어와버린 인간은 누구든지 그렇게 될 운명인지도 모르겠지만. 




 

 

 




 여름이며, 여름방학이었다. 




 

 

 




 유카타 차림의 세 처자를 바라보는 나는,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러니 하루히가, 

 

 “불꽃놀이 하자 불꽃놀이. 간만에 이런 차림도 하고 있고, 합쳐서 오늘 해버리자-” 

 

 그렇게 제안했을 때도 거의 전면적으로 찬성했을 정도다. 노점에서 팔던 애들용의 싸구려 불꽃놀이 세트를 구입한 우리는, 달과 화성밖에 보이지 않는 흐린 여름 밤하늘 아래 가까운 강가로 이동을 개시, 도중에 백원라이터와 일회용 카메라를 입수하고 물풍선과 부채를 휘두르며 걷는 하루히를 따라간다. 하루히는 그 언제보다도 들떠(high)있는 것 같았다. 왠지 옷이 날개라는 말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들썩거리는 하루히의 뒷머리를 보고 있으니, 유카타 차림으로 보폭을 넒게 하여 걸으면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주:유카타는 치맛단 끝이 좁아 보폭을 좁게 하여 걸어야합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것이 하루히의 특징인 것이다. 

 

 그로부터 한시간 후, 불꽃 막대에 눈을 둥글게 뜨는 아사히나 선배나, 두손에 용 불꽃막대를 들고 뛰어다니는 하루히, 꿈틀꿈틀 기어가는 뱀을 언제까지고 바라보기만 하는 나가토 등등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고서, 오늘 SOS단의 서머 이벤트는 종료됐다. 

 

 강물을 뒤집어쓴 불꽃 막대의 잔해를 비닐봉지에다 주워담고 있는 코이즈미를 본체만체 하고, 하루히는 손가락으로 입술 끝을 누르고 있다가, 

 

 “자 그럼 내일은 곤충채집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리스트에 넣은 항목은 소화해낼 작정인가보다. 

 

 “야 하루히. 노는것도 좋다만, 방학숙제는 끝내놨냐?” 

 

 하나도 안해놓은 내가 말하는 것도 좀 뭐하긴 하지만 말이지. 하루히는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짓고는, 

 

 “뭐야 너. 그정도 숙제쯤이야 3일이면 싹 끝나잖아. 나는 7월에 다 해놨다구. 너 항상 그래? 그런 귀찮은 건 먼저 빨리빨리 해버리고, 뒷날 걱정없이 열심히 노는게 올바른 여름방학 즐기기 법이라구.” 

 

 하루히에게 있어서는 진정 그정도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왜 이딴 녀석 머리가 이리 좋은거냐. 하늘이 사람 대상으로 하는 능력치 배분도 꽤나 대충대충이로군 그래. 

 

 하루히는 우리를 쭉 노려보더니, 

 

 “잠자리채랑 채집상자 갖고 전원 집합할것. 알겠지. 그래, 모두가 잡은 곤충 수를 대보는거야. 젤 많이 잡은 사람은 일일단장 권리를 주겠어.” 

 

 전혀 갖고싶지 않는 칭호로군. 그래서, 벌레면 뭐든 오케이냐? 

 

 “으-음……, 매미 한정! 아 그래, 이건 SOS단 내 매미잡기 대전이야. 규칙은……무슨 종류든 상관없으니

까 한 마리라도 많은 사람이 승리!” 

 

 혼자서 제안하고 혼자서 의욕에 찬 하루히는 부채를 잠자리채인냥 벌레를 잡는 모션을 취하고 있다. 잠자리채랑 채집상자냐. 집 창고에 있었든가. 옛날에 쓰던거. 

 

 그리고 겨우 집에 닿았을 때, 나는 사과사탕을 사오는 걸 까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엔들리스 에이트-05

 
 다음날, 비라도 내리면 좋겠다 싶어 테루테루보즈(照る照る坊主:날이 맑기를 빌어 처마 끝에 매다는 종이 인형)에다 못을 박아놨는데, 터무니없이 맑고도 맑은 날이 도래, 이번 여름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기온에 매미도 매우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미라는거 먹을수는 있을까. 튀김으로 만들면 맛있을지도 몰라. 아. 나 가끔 이런 생각 하는데, 튀김이 맛있는거 말야, 혹시 튀김옷이 맛있어서 그런거 아냐? 그럼 매미도 그럴지 몰라,” 

 

 니 혼자 처먹어. 

 

 고등학생이 다섯명이나 그나이씩이나 먹어가지고 각각 잠자리채와 채집상자를 들고 걷는 꼴이란 꽤나 볼만한 모습이었다. 

 

 오전중에 집합한 우리는, 나무를 찾아 키타고로 향하는 루트를 답파(踏破:먼 길이나 험한 길을 걸어서 끝까지 감)하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 학교는 산 중턱에 있어서, 왼갖 나무가 썩어나고 있었기에 숲을 근거지로 하는 곤충들에겐 절호의 주거지가 되어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나름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비관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무줄기엔 마치 매미로 된 나무마냥 맴맴 울어대는 곤충이 넘쳐나고 있었다. 눈감고 휘둘러도 잡히겠다. 허둥지둥 조심조심 잠자리채를 휘두르는 아사히나 선배마저 수확이 있었을 정도니 요근처 매미는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동물이 인간이라고는 인식하고 있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가르쳐줄 필요가 있겠지. 

 

 그렇게 마구 포획을 해댄 나는, 채집상자 안에서 꿈쩍도 않는 매미들을 바라보았다. 몇 년이나 땅속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히한테 기름으로 튀겨지려고 성충이 된 건 아니지. 그렇지 않아도 나는 해를 더해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은 여름 벌레소리에 쓸쓸함과 기만한 죄악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안하다, 아스팔트 같은 거나 깔아버리고. 인간의 이기를 용서해줬으면 한다. 

 

 그런 나의 독백(monologue)을 알아챈 건 아닐테지만, 하루히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캐치 앤드 릴리즈(catch and release:잡고 풀어줌) 정신이 필요하겠지. 풀어주면 나중에 은혜 갚으러 올지도 모르고.” 

 

 나는 인간 크기의 매미가 집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떠올리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일방적으로 잡았다가 풀어주고, 그걸로 은혜를 갚으러 오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진정 벌레수준의 지능이다. 복수(revenge)하러 온다는 게 차라리 더 말이 된다. 

 

 하루히는 채집상자 뚜껑을 열어서 앞뒤로 흔들어댔다. 

 

 “자! 산으로 돌아가!” 

 

 지지지──. 많은 매미들이 상자 속 여기저기를 부딪치면서 밖으로 날아간다. 아사히나 선배가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웅크려앉고, 그 위에서 날아다니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꼿꼿이 선 나가토의 머리를 스쳐가는 녀석도 있고, 어떤 녀석은 나선을 그리고, 또 어떤 건 일직선으로 저녁놀이 진 하늘로 멀어져갔다. 

 

 나도 하루히를 따랐다. 그 뛰쳐나가는 매미들을 보며 왠지 내가 헤르메스에게서 받은 상자를 무심코 열어버린 판도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다못해 마지막 한 마리 정도는 남겨둘까 하고 생각했을 때는 모든 매미들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멀리 날아가버린 뒤였다. 

 

 또 그 다음날은 아르바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히가 어디선가 따내온 아르바이트로, 성은이 망극하게도 우리 알선을 해준것이다. 그 하루짜리 아르바이트의 내용이란, 

 

 “어, 어서오세요-” 

 

 어색하게 굳은 아사히나 선배의 목소리가 우물우물 들려온다. 

 

 “네, 모두 줄서 주세요. 아아……거기 밀지 마시고요,” 

 

 하루히가 우리에게 브로커(broker:중개인, 알선자)처럼 떠맡긴 아르바이트는, 동네 슈퍼마켓 창업기념 세일 집객업무였다.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이리저리 하다가 모이게 된 우리는,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넘겨받은 의상을 입게 되고, 아침 10시부터 슈퍼 앞에서 선전쇼 같은걸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부다 동물 옷 같은걸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쓰고 있었다. 

 

 대체 뭐가뭔지 모르겠다. 왜 나까지 이런 꼴을 해야 하냐고. 코스튬 입기는 아사히나 선배 담당 아니었냐……야, 코이즈미하고 나가토. 너네도 뭐라 불만 한마디 정도는 하란 말이다. 뭘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앉았는거냐고. 

 

 “일렬로 서주세요-. 부탁입니다-.” 

 

 전신 녹색의 의상을 뒤집어쓴 아사히나 선배의 혀짧은 소리를 들으며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우리들 분장은 개구리이다. 그것도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는 역할이다. 이 슈퍼가 매년 창업기념일에 하는 특별 이벤트라고 한다. 가족단위로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드리는 풍선 서비스. 

 

 과연 애는 애, 이딴 별 쓰잘데기 없는 얹어주기로 꺄꺄 기뻐해대고 있다. 야, 거기 멍청해보이는 꼬마, 이걸 주마. 빨간 풍선이다. 받암마. 

 

 청개구리 아사히나 선배가 특히나 인기다. 참고로 코이즈미는 참개구리이며, 나는 두꺼비다. 달리 선택이 없었다고 해주고 싶다. 아마존 개구리 모습을 한 나가토가 봄베(獨,Bombe:고압 가스 등을 수송·저장하는 데 쓰는 원통형 용기)를 조작하여 풍선을 부풀리고, 우리 셋이 나누어주며, 하루히는 어쩐고 하면 혼자서만 평상복으로 한손에 부채를 들고 점내에서 냉방 바람이나 쐬고 있다. 이걸로 일당배분이 똑같다면 폭동 일어날지도 모르는 판이라고. 

 

 듣자하니 슈퍼 점주는 하루히하고 아는 사이라고 한다. ‘아저씨~’란 소리나 듣고 그 아저씨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두시간 정도의 노동으로 풍선이 모두 없어지고, 하루히를 제외한 우리는 창고로 추정되는 대기실에서 그 쓰잘데없는 껍데기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막 허물을 벗은 뱀의 기분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다. 이렇게 한숨 놓이는 일은 요 몇 년간 얼마 없었다. 

 

 나가토는 멀쩡한 표정으로 나왔지만, 나와 아사히나 선배와 코이즈미는 온몸이 땀 범벅이었고, 기다시피 해서 그 개구리에서 탈출, 한동안 목소리도 안나왔다. 

 

 “흐에-” 

 

 얇은 탱크탑과 짧은 퀼로트스커트(culotte skirt:치마바지) 차림으로 웅크려앉은 아사히나 선배를 찬찬히 관찰할 체력도 없다. 

 

 “수고했어-” 

 

 하루히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나타났을 때는, 진심으로, 이녀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뜨거운 모래사장에다가 파묻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기다 아르바이트비는 청개구리 의상으로 둔갑해있었다. 하루히가 태연한 얼굴로 한 진상발표에 따르면, 처음부터 하루히의 목적은 이거였던 걸로 보이며, 안이 텅 비어 얄팍해져 있는 녹색의 괴물 개구리를 옆구리에 끼고선, 한번에 십만석을 더 얻게 된 공신 장수같은 얼굴을 하고있다. 우리가 받아야할 일당은, 당연하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좋잖아. 나 쭉 이게 갖고싶었거든. 소원성취야. 아저씨도 미쿠루짱한테는 준다고 했었어. 미쿠루짱, 너에겐 특별히 내가 만든 훈장을 줄게. 아직 만들진 않았는데, 기다리고 있어.” 

 

 아사히나 선배가 가진 물건에 또 하나 쓰레기가 늘게 되었다. 보나마나 ‘훈장’이라고 적힌 완장 같은걸로 넘길 생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개구리, 기념으로 부실에 걸어둘게. 미쿠루짱, 언제나 입고 싶을때 입어도 돼. 내가 허락하지!” 

 

 그런 하루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화낼 기분도 나지 않았다. 




 

 

 

 

 


 

 완전히 파김치다. 연일연야 수영장이니 곤충채집이니 동물옷 사우나니 하다보면 제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한 남자 고등학생이라도 지친단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날 밤 평온한 수면을 탐하며 휴대폰이 울리기 전까지의 평화를 꿈을 통해 느끼고 있었다. 

 

 밤중에 뭔가 쓸데없는 일로 전화를 해서 잠이 깨버리는 것 만큼 열받는 일은 없다. 전화를 하기엔 비상식적인 시간이며, 내 주위에 그런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멍청이는 하루히정도밖에 없다. 비몽사몽하면서도 한소리 해주려고 휴대폰 버튼을 누른 내 귀에 들려온 것은, 

 

 『……우우(훌쩍훌쩍)……우우우(훌쩍)』 

 

 여자 우는 소리였다. 무지하게 소름이 끼쳤다. 즉시 눈이 떠졌다. 이거 큰일났다. 받아선 안될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을 집어던지려고 하기 1초 전, 

 

 『쿈군-……』 

 

 오열에 차 있었지만, 틀림없는 아사히나 선배의 목소리가 그리 말했다.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소름이 돋았다. 

 

 “여보세요, 아사히나 선배?” 

 

 설마 이게 생애 결별 전화는 아니겠지. 공주님이 달로 돌아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여기’ 아사히나 선배에게 있어서 일시적인 거처라는 걸 알고 있다. 언젠가, 미래에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게 지금인가? 목소리로만 바이바이라니, 난 인정 못한다. 

 

 하지만 전화 너머에 있는 분께선, 

 

 『저에요……아아아, 정말 안좋은 일이……흑,흑, 읍, 이대로는……저, 으에에』 

 

 순 알도못할 소리를 초등학생처럼 나쁜 발음으로 우물거리고 있기만 하는 통에 전혀 못알아먹겠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건가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이야, 안녕하신지요. 코이즈미입니다.” 

 

 해맑은 녀석의 목소리가 바꿔들었다. 

 

 뭐냐? 이 둘이 왜 이런 시간에 같이 있는거냐? 왜 나는 거기에 없고? 어떻게 된 스토리인지 내가 납득, 및 안심할 수 있는 대답을 듣지 못하는 경우 코이즈미 네놈의 모가지는 몸뚱에서 분리되기 5초 전인줄 알아라.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그것도 꽤나 골치 아픈 걸로요. 그렇게 되어서 아사히나상께서 제게 연락해오신 겁니다.』 

 

 나보다 먼저냐. 재미없다. 

 

 『당신께 상담하여도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아니, 죄송합니다. 실은 저도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긴급사태라는 거죠.』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또 하루히가 세상을 끝장내려는 모양이지,”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계가 결코 끝나지 않는 사태로, 현재 빠져들고 있습니다.』 

 

 아앙? 아직 꿈속인가. 뭔 헛소리냐 이놈은. 

 

 코이즈미는 그런 나의 곤혹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가토상께도 방금 연락을 드렸습니다. 예상은 했습니다만, 그녀는 알고 계셨던듯 하네요. 자세한 사항은 나가토상께 여쭤보면 판명나겠지요.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지금 집합 가능하시겠습니까? 물론, 스즈미야상 없이요.』 

 

 가능이냐 불가능이냐로 물으면 당연히 가능이다. 훌쩍훌쩍 울고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방치하 녀석이 있다면, 그녀석은 여자가 쎄고 쎈 놈일 거다. 

 

 “금방 가마. 어디냐?” 

 

 코이즈미가 장소를 말했다. 또 그 역앞. 그곳은 SOS단 전용 집합장소였다. 




 

 

 

 




 그리하여 옷을 갈아입고 우리집 복도를 살금살금 걸은 끝에 자전거를 타고 도착한 나를 세 그림자가 반겨주었다. 인적이 전혀 없는 건 아니고, 학생풍의 인간들이 여기저기 조금씩 보인다. 덕분에 우리도 여름방학 밤에 갈곳을 잃은 모라토리엄(moratorium:육체적으로는 성인이 되었으나, 아직 사회적 의무나 책임이 지워지지 않은 유예 기간. 또는 거기에 머물고 있고자 하는 심리상태) 녀석들과 섞여 이 이상한 모임에 마음놓고 출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다시 졸려오긴 했지만. 

 

 역앞에는 파스텔컬러 모습의 아사히나 선배가 웅크려 앉아있었고, 그 양옆에 러프한 차림의 코이즈미와 세일러복 나가토가 보초처럼 서있다. 아사히나 선배는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왔습니다’는 식으로 상하 아무렇게나 입은 복장이다. 어지간히 허둥댔는지 시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온걸 알았는지, 키큰 쪽 녀석이 한쪽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대체 뭐냐” 

 

 가로등의 희미한 빛이 코이즈미의 온화한 표정을 비추고 있다. 

 

 “밤중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사히나상께서 이런 사태신지라,” 

 

 웅크려앉은 아사히나 선배는, 녹아가는 눈처럼 우물쭈물이었다. 울상인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고, 흠뻑 젖은 눈동자가 드러난다. 이거 참, 모든 걸 집어던져서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게 만드는 매혹의 눈동자로군. 

 

 “흐에에, 쿈군, 저……” 

 

 아사히나 선배는 코를 훌쩍이며 독백마냥 중얼거렸다. 

 

 “미래에 돌아갈수 없게 됐어요……” 





 엔들리스 에이트-06


 “자백하여드리자면, 그러니까 말이지요, 이런 것입니다. 저희들은 같은 시간을 오래도록 루프(loop)하게 된 겁니다.” 

 

 그런 비현실적인 걸 그리 해맑게 말해줘도 말이다. 코이즈미 넌 지금 제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나 있냐? 

 

 “알고 있습니다. 이 이상 없을 정도로요. 방금 아사히나상과 의논을 해 보았습니다만,” 

 

 나도 부르란 말이다, 그 의논에. 

 

 “그 결과, 최근 시간의 흐름이 이상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건 아사히나상의 공적이라 해도 되겠죠. 덕분에 저도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무슨 확신이냐. 

 

 “저희는 같은 시간을, 앞으로 몇 번이고 반복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요.” 

 

 그건 방금 들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8월 17일부터, 31일까지의 기간이지요.” 

 

 코이즈미의 말이 멍청하게 들린다. 

 

 “저희들은 끝이 나지 않는 여름방학 사이에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이 여름방학인건 맞다만,” 

 

 “결코 끝나지 않는 엔들리스 서머(endless summer)입니다. 이 세계엔 가을은 커녕 9월도 오지 않습니다. 8월이후의 미래가 없다는 것이죠. 아사히나상께서 미래에 돌아가시지 못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와의 소식불통은 미래 그 자체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리적 노 피쳐(no feature)가 뭐가 당연하냐. 시간이야 가만히 냅둬도 척척 흘러가 주잖냐. 나는 아사히나 선배의 머리 꼭대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누가 믿냐?” 

 

 “하다못해 당신께서만큼은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스즈미야상께 말씀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코이즈미도 아사히나 선배를 내려다보고 있다. 

 

 일단, 아사히나 선배는 설명을 해주려고 했다. 계속 흐느껴 울면서도, 

 

 “으우-, 그게…… ‘금칙사항’으로 항상 미래와 연락하거나 ‘금칙사항’하기도 하는데요……크흥. 일주일정도 ‘금칙사항’이 없어서 이상하다 싶었어요. 그랬더니 ‘금칙사항’……. 저 무지하게 놀라서 ‘금칙사항’도 해봤지만 전혀 ‘금칙사항’이라-……우우. 흑. 저 어떻게 하면……” 

 

 어쩌면 좋은지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그 ‘금칙사항’이란 건 방송금지용어인가 하는 겁니까요? 

 

 “우리가 지금 하루히가 만든 이상한 세상에 갇혀버린거냐? 그 폐쇄공간의 현실 버전이라든지 해서 말이다.” 

 

 팔짱을 끼고 자판기에 기대고 있는 코이즈미는 느긋이 부정했다. 

 

 “세상을 재생(再生)시킨것이 아닙니다. 스즈미야상께선 시간을 잘라내신 겁니다. 8월 17일부터 31일까지 그 사이만 말이죠. 그러니 지금 이 세상은, 단 2주밖에 시간이 존재치 않습니다. 8월 17일 이전의 시간이 없으며, 9월 1일 이후도 없습니다. 영원히 9월이 오지 않는 세계인 것입니다.” 

 

 휘파람을 잘못 분 것 같은 한숨을 쉬고는, 

 

 “시간이 8월 31일 24시 정각이 된 순간, 단숨에 모든 것이 리셋(reset)되어, 다시 17일로 돌아가게 된다는 프로세스(process)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17일 새벽쯤에 세이브포인트가 있을 것 같군요.” 

 

 우리의……아니, 전인류라고 해야겠군, 그 기억은 어떻게 되냐. 

 

 “그것도 모두 리셋입니다. 그때까지의 2주간은 없었던 일이 되죠. 또 한번 처음부터 다시 살게 됩니다.” 

 

 시간 한번 잘도 비틀어 대는군 그래. 미래인이 섞여있으니 어쩔수 없는 것 같다곤 해도. 

 

 “아뇨, 이 건에 아사히나상께선 무관계하십니다. 사태는 그처럼 사소한 범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아는데. 

 

 “이런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스즈미야상 뿐입니다. 당신께선 달리 짐작가는 곳이 있으신지요.” 

 

 그딴거에 짐작이 가는 녀석은 망상벽이 있거나 망상밖에 못하는 녀석이다. 

 

 “나보고 어쩌란 거냐.” 

 

 “그걸 알면 해결한거나 마찬가지죠.” 

 

 왠지 코이즈미는 즐거워 보인다. 최소한 곤란한 얼굴은 아니다. 왜? 

 

 “요즘 한동안 저를 고생시키던 위화감의 원인이 밝혀졌기 때문이지요.” 

 

 코이즈미가 진상을 밝힌다. 

 

 “당신께서도 그러셨을테지만, 시민 수영장에 갔던 날부터 지금까지, 부정기적으로 강렬한 기시감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저번 이전의 루프로 경험한 기억의 잔재──라고밖에 할 수 없죠──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리셋 때 누락된 부분이, 저희로 하여금 그것을 느끼게 한 것이지요.” 

 

 혹시 전인류가 느끼고 있는 거냐. 

 

 “그렇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저나 당신은 특수한 케이스입니다. 스즈미야상과 가까운 인간일수록, 이 이상을 느끼게끔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히는 어떤데. 그녀석은 조금이라도 자각하고 있냐.” 

 

 “전혀 하고 계시지 않는 것 같군요. 하고 계셔선 안되기도 합니다만……” 

 

 코이즈미는 나가토쪽으로 곁눈길을 보내어 그 우주인에게 물었다. 아무일도 없었단듯이. 

 

 “그래서,  저희는 몇 번정도나 같은 2주를 리플레이하고 있나요?” 

 

 나가토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이, 만 5천 4백 9십 8회 째에 해당한다.” 




 

 

 

 




 이거 완전히 쿠쿵이구만. 

 

 만 오천 사백 구십 팔. 히라가나로 20문자(いちまんごせんよんひゃくきゅうじゅうはち)나 걸리는 단어도 15498로 써놓으면 그래도 좀 적어 보인다. 대단하군, 아라비아 숫자. 누군진 몰라도 이걸 생각해낸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당신 대단하구만. 나는 그런 하나마나 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넋이 나가있었다. 

 

 “같은 2주를 만 몇천번입니다. 자신이 그런 루프에 붙들려있다고 자각하며, 기억도 그대로 축적된다고 한다면 보통 인간의 정신으론 도저히 버틸 수 없죠. 스즈미야상께선, 아마 저희들 이상으로 완벽한 기억말소를 받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럴때는 가장 많이 아는 녀석한테 물어봐야하는 법이다. 나는 나가토에게 확인해보았다. 

 

 “그거 진짜냐?” 

 

 “응.” 

 

 끄덕하는 나가토. 

 

 그러면 말이다. 내일 우리가 하게 될 예정인 것도, 이미 우리가 과거에 죽어라고 했던 거냐. 요전의 윤무랑 금붕어낚기도?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 

 

 나가토는 목소리에도조차 표정은 없다. 

 

 “과거 만 5천 4백 9십 7회의 시퀀스(sequence)에 있어서, 스즈미야 하루히가 취한 행동 전부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계속 담담히 나를 바라보는 나가토는, 역시나 담담히 말했다. 

 

 “만 5천 4백 9십 7회중, 윤무에 가지 않은 시퀀스가 2회 있다. 윤무엔 갔지만 금붕어낚기는 하지 않은 패턴은 4백 3십 7회에 해당한다. 시민 수영장의 경우는 아직까지 매회 가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은 것은 9천 2십 5회이지만, 아르바이트의 내용은 여섯가지로 갈린다. 풍선 나눠주기 이외, 짐 나르기, 영수증 찍기, 전단지 뿌리기, 전화받기, 모델촬영회가 있었으며, 그중 풍선 나눠주기는 6천 11회 시행, 두 종류 이상이 중복된 패턴은 3백 6십회. 그 시행순서에 따른 중복패턴은──” 

 

 “아니, 이제 됐다.” 

 

 에일리언표 인조인간의 말을 멈추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8월 후반의 2주를 만 5천- 으악 귀찮아, 15498 번이나 하고 있는 중인거냐. 8월 31일에 리셋되고, 8월 17일부터 다시 한다고. 근데 나한텐 그런 기억이 없고, 나가토한테는 있는 것 같은데──왜 그러냐? 

 

 “나가토상, 이라기보다는 정보통합사념체가,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겠죠.” 

 

 코이즈미의 저 엷은 웃음도, 이때만큼은 굳은 것처럼 보였던 건 빛 명도 때문인가. 

 

 아니 그거야 별 상관 없다. 제껴두자. 나가토랑 나가토네 두목이 그정도인건 안다. 내가 신경쓰인건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말이지……. 

 

 “그럼 나가토. 너는 계속 그 2주간을 15498번이나 체험했던거냐?” 

 

 “그래.” 

 

 나가토는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끄덕였다. 그래, 라니 너, 달리 할 말은 없냐. 그딴 말은 나도 할 수 있다. 근데, 

 

 “그니까 말이다……” 

 

 잠깐만. 15498회다. 그것도 곱하기 2주다. 합계일수로 바꾸면 216972일, 그러니까, 약 594년이라고. 그정도나 되는 시간을, 이녀석은 태연하게 다 지낸 다음 처음부터 다시, 다 지낸 다음 처음부터 다시, 이걸 쭉 보고만 있었던거냐. 아무리 그래도 이거 지치는 거 아니냐. 시민수영장에 15498번이나 가면 말이다. 

 

 “너……” 

 

 라고 말을 걸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가토가 참새처럼 고개를 기울여 나를 보고 있다. 

 

 수영장 옆에 앉아있던 나가토를 보고 든 감각이 떠올랐다. 심심한 것 같이 보였던 건 잘못된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천하의 나가토도 질려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녀석은 아무 말도 안하지만, 남몰래 체 하고 혀를 찼을지도──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현상은 대충 알겠다만, 왜 이렇게 됐는지가 미확인이다. 

 

 “하루히는 왜 이런 짓을 하는거냐?” 

 

 “추측입니다만,” 

 

 라고 코이즈미가 서론을 열어, 

 

 “스즈미야상께서는 여름방학을 끝내고 싶지 않으신 겁니다. 그녀의 의식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테죠. 그렇기에 끝나지 않는 겁니다.” 

 

 그런 등교거부아 같은 이유에서냐. 

 

 코이즈미는 캔커피 모서리를 무의식처럼 문지른다. 

 

 “그녀는 여름방학에 아직 다 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느끼고 계신 것이죠. 그것을 하지 않고서 신학기를 맞을 수는 없다…. 그것을 하고 나서가 아닌 이상 미련이 남는다…. 그런 생각을 하시며 8월 31일 밤을 향하여 잠드셔서……” 

 

 눈을 떠보니 깔끔하게 2주짜리 시간이 돌아와있다 그거냐. 뭐랄까, 이젠 놀랄 힘도 없군. 뭐든 할 수 있는 녀석인 줄은 알았지만, 점점 그 비상식 레벨이 높아져가고 있잖냐. 

 

 “대체 뭘 하면 그녀석이 만족하는거냐.” 

 

 “글쎄요, 전 모르겠군요. 나가토상께선 아시겠습니까?” 

 

 “알 수 없다.” 

 

 그리 쉽게 말하지 마라. 이중에서 결국 믿을만한 녀석은 너밖에 없단 말이다. 그런 생각이 내 목소리가 되어 나타났다. 

 

 “왜 지금까지 암말도 않고 있었냐? 우리가 끝없는 2주 왈츠를 하고 앉았는 걸 말이다.” 

 

 수초간의 침묵 후, 나가토는 얇은 입술을 열었다. 

 

 “내 역할은 관측이므로.” 

 

 “……그렇군.” 

 

 그건 좀 알겠군. 지금까지 나가토가 적극적으로 우리 행동에 관여한 적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관여하게 된 거라면 거의 전부라고 봐도 맞겠지만, 이녀석이 먼저 접근(approach)해온 적은, 나를 자기가 사는 맨션에 데려가줬던 그때 한번 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때 외의 나가토는, 어느샌가 필요한 포지션에 있어서 우리와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을 뿐이다. 

 

 잊어선 안된다. 나가토 유키는 정보통합사념체가 만든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라는 것을. 하루히를 관측대상으로 하기 위해 사용되는 유기생체 안드로이드인 것이다. 감정을 내는 것에 안전장치가 걸려있는 건 어찌 못하나.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이전에, 내게 있어서의 나가토 유키는, 책을 좋아하며 말이 없으며 여러 방면으로 의지가 되는 작은 체구의 동급생 소녀 동료다. 

 

 SOS단 멤버중에서 가장 박학다식하며, 거기다 실행력도 겸비되어있는 자가 누구냐고 하면 당연히 나가토인 것이다. 그래서, 좀더 물어보기로 했다. 

 

 “우리가 이걸 알아챈 건 몇 번째냐.” 

 

 나의 그 짧은 생각에서 나온 질문을, 나가토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마냥 대답한다. 

 

 “8천 7백 6십 9회째. 최근에 가까워질수록 발각확률이 높아지고 있다.” 

 

 “기시감, 위화감 천지였으니까요.“ 

 

 이해가 간다는 듯한 태도의 코이즈미였다. 

 

 “하지만 과거의 시퀀스에서, 저희들은 저희가 처한 상황을 느끼면서도, 올바른 시간의 흐름으로 되돌릴 수 없었군요.” 

 

 “그렇다.” 라는 나가토. 

 

 그래서, 지금 아사히나 선배도 울고있다는 거다. 알아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또 기억이나 경험치나 신체적 성장을 2주간 잃고 원래로 돌아가……또 알아내고 울게 되고 만다. 

 

 그럼 나는 대체 몇 번이나 이 생각을 한 것일까. 봄에 하루히를 만나고 지금까지, 그녀석 원인의 망할 이벤트가 발생할 때마다, 나는 이 생각을 해왔다. 지금도 그때다. 

 

 이게 웬일이냐. 

 

 이 2주동안 내가 이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이걸로 8769번째겠지만 말야. 

 

 참나 이거……. 

 

 또 바보같은 이야기를 들어버렸구만. 

 


 엔들리스 에이트-07

 
 그 다음날은 천체관측 차례였다. 

 

 실시장소는 나가토네 맨션 옥상이다. 코이즈미가 고지식한 천체망원경을 가져왔고, 거기다 삼발이까지 챙겨왔다. 오후 8시를 조금 넘었을 때. 

 

 하늘도 어두웠지만, 아사히나 선배도 어두웠다. 마음은 여기에 없소 하는 얼굴에다 멍해있다. 천체관측할 맘은 아니겠지. 내 마음도 복잡하다. 

 

 코이즈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미소로 세팅에 여념이 없다. 

 

 “제 어렸을때 취미가 이거였습니다. 처음으로 목성의 위성을 잡아냈을 때는 꽤나 감동했었다죠.” 

 

 나가토는 전혀 변함없는 모습이고, 그저 옥상에 멍하니 서있을 뿐이다. 

 

 내가 올려다본 밤하늘에 별은 셀 수 있을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염된 공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걸 하늘이 없다고 표현해야 될라나. 대기가 맑아지는 겨울이 되면 오리온자리 정도는 보이겠다만. 

 

 천체망원경의 방향은 지구 이웃씨에게 향해 있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하루히가, 

 

 “진짜 없나,” 

 

 “뭐가.” 

 

 “화성인.” 

 

 거 없었으면 좋겠군. 나는 문어같이 생긴 빅 아이즈 몬스터(big eyes monster)가 꿈틀꿈틀거리면서 지구 정복계획을 세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쉽게도 즐겁다곤 할 수 없군. 

 

 “왜. 엄청 우호적인 녀석들일지도 모르잖아. 봐, 지표면엔 아무도 없는거 같고, 분명 지하 동굴에서 조용히 숨어사는 생각깊은 인종이라구. 지구인을 놀래키지 않으려고 말야.” 

 

 하루히식 상상속 화성인은 지하인이기도 한 모양이다. 어느 한종류만 해주지 않겠냐. 펠루시더(Pellucidar:유명 SF소설)냐 마스어택(Mars Attacks:유명 SF영화)이냐. 그 둘을 섞으려고 하니까 골치아파지잖냐. 심플하게 생각해라, 심플하게. 

 

 “분명 화성에 최초의 유인비행선이 착륙했을 때, 어둠에서 등장한다는 식의 계획을 세우고 있을거야. 화성에 어서오십시오! 이웃 별 사람이여, 우리들은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뭐 이런 말 해줄게 틀림없어.” 

 

 그게 훨씬 더 지구인을 놀래키는 거다. 기습이면 또 몰라. 맨 처음 화성의 대지를 밟은 작자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미리 알아두는게 좋겠지. 메일은 NASA 앞이면 되냐? 

 

 순서대로 망원경으로 화성의 모습을 보거나 달의 크레이터(crater:달 표면의 분화구처럼 생긴 지형)을 관측하며 시간이 흘렀다. 문득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이 안보인다 싶어 찾아보니, 옥상 추락방지망에 기대다시피 해서 그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고개가 대각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눈을 감고 있다. 어제 잘 잤을 리가 없으니, 지금은 이대로 재워드리자. 

 

 하루히는 극적인 변화도 없는 밤하늘이 드디어 질렸는지, 

 

 “UFO를 찾아보자. 분명 지구는 외계인의 타겟이야. 지금도 위성궤도 쯤에다가 외계인 선견부대가 대기하고 있을 거라구.” 

 

 즐겁게 망원경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는데, 뭐 그것도 질렸나보지. 아사히나 선배 옆에 앉아, 그 작은 어깨에 기대어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코이즈미가 조용히 말했다. 

 

 “너무 놀아 지치신 겁니다.” 

 

 “우리보다 더 지쳐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지만 말이지.” 

 

 하루히는 쌔근쌔근 잠들었다. 그 얼굴은 낙서를 해주고 싶을 정도로 팔자좋아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는 얼굴이 가장 좋다는 건 아니다. 이녀석은 입만 안열면 된단 말이다. 나가토랑 의식이 바뀌기라도 하면 최고일지도 모른다. 너무 반응(reaction)이 없는 하루히도 어떨까 싶긴 하지만, 수다에 감정 풍부한 나가토도 상상을 초월하는군. 

 

 나는 살랑거리는 밤바람을 맞으며, 곤히 사이좋게 잠들어있는 하루히와 아사히나 선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면 하루히도 아사히나 선배에게 뒤지지 않는군. 그쪽이 더 낫다고 하는 녀석도 있겠지. 그건 틀림없다. 

 

 “대체 이녀석은 뭐가 하고 싶은걸까.” 

 

 한숨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친구들이서 사이좋게 재밌게 놀자, 뭐 이런거냐?” 

 

 “아마도 그렇겠죠. 그 친구들이란 저희들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만,” 

 

 코이즈미는 시선을 밤하늘 너머에다 고정시키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재미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모르는 이상, 끝도 오지 않습니다. 스즈미야상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그녀 자신께서도 모르시는 그 무언가를 알아내어 실행하는 그날까지, 저희들은 몇 번이고 계속 같은 2주간을 반복하게 됩니다. 저희는 기억이 리셋되는 것을 감사해야 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저희들은 진작 정신이상을 일으켰을 것이 틀림없으니까요.” 

 

 만 5천 4백 4십 8번의 반복. 

 

 진짜냐? 우리는 너무 나가토에게 얽매여있지는 않은가? 솔직히 말해서, 갑작스럽게는 믿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루히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짓 같기도 하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이녀석의 수수께끼 파워는, 아무래도 하루히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 거 같으니까 말야. 자기 의사든 무의식적으로든 뭘 하든 간에 골치아프게 만드는 여자다. 

 

 그런 하루히와 성실히 행동을 같이하는 우리는, 아무래도 너무 착한 사람들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SOS단의 착한 면면. 내가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입장이 되다니, 그거야말로 세상의 정기를 의심하고 싶은 이유다. 

 

 거기다말야, 지켜야 할 세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생각은, 인간 각자의 주의주장에 따라 너무나도 간단히 날조되어 대량생산될 수 있는 애매모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순 제멋대로의 바꿔치기 논리나 들이밀기식 강요에 맹종하는 녀석들로 들어차 것이다. 천년 후, 후세의 인간들에게 자기들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조금은 생각해봐야할 때다. 

 

 내가 그런 식으로 온 힘을 기울여 뭐 어찌되든 상관없는 생각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니, 코이즈미가 기습하듯이, 

 

 “스즈미야상의 바램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험삼아 이런건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뒤에서 스즈미야상을 껴안고, 귀에다 아이러브유 같은 말이라도 속삭여드리는 겁니다.” 

 

 “그걸 누가 한단 거냐.” 

 

 “당신 이외에 적임자가 있을까요.” 

 

 “거부권을 행사한다. 패스다.” 

 

 “그럼 제가 해볼까요.” 

 

 이럴때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내 자신으로썬 볼 방도가 없었다. 거울 같은 거 안갖고 다니니깐. 하지만 코이즈미에겐 보였는지, 

 

 “가벼운 조크입니다. 저로선 배우가 부족하지요. 괜히 스즈미야상을 혼란시킬 뿐일테니까요.” 

 

 라더니, 입 속으로 웃는 듯한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입을 다물고는, 탁한 여름 대기에도 굴하지 않고 거의 유일하다시피 빛나고 있는 달을 올려다본다. 

 

 빨려들어가버릴 정도로 어두운 하늘에 홀로 뜬 은쟁반은 태양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나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로? 그딴거 알게뭐냐. 

 

 멍하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가토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은 한동안 이어질 것 같지만 여름방학은 그 끝이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끝날지 어쩔지 알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좀 어떻게 해줘라 제발. 

 

 또 우리는 8월 17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뭘 해야 하루히가 그 ‘아직 하지 못한것’을 찾을 수 있을까. 

 

 뭘 남겨두고 있냔 말이다. 나는 여름방학중에 해야하는 학교 숙제가 잔뜩 쌓여있지만, 그게 하루히 마음에 걸리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녀석은 진작 숙제를 끝낸 상태다. 

 

 이다음에 우리는 어디를 향하게 될 것인가. 

 

 “배팅센터에 가자!”


 하루히는 금속배트를 지참하고 있었다. 언젠가 야구부에서 슬쩍해온 울퉁불퉁 배트다. 공을 쳐서 멀리 날릴 때 쓰는 거라고 하기 보다는 박살(撲殺:때려죽임)용 목적으로 적절할 싸구려 중고 배트. 아직도 갖고 있었구만 그래. 

 

 우리의 단장님께선 머리를 휘날리며 우리에게 고루 만족스레 웃는 얼굴을 보이며, 우리를 동네 배팅 센터로 이끌었다. 아마 요즘 하는 고교야구대회에 어떤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우울은 단원 차례대로 돌아가는 건지, 이번엔 아사히나 선배가 더더욱 창백한 표정이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약간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역시 원래 있던 데로 돌아가고 싶겠지. 

 

 나가토와 코이즈미는 거의 평소 상태로 돌아와, 가면과 스마일이 내 뒤를 이어 걷고 있다. 마치 자기네 역할은 여기 없다는 얼굴들이다. 조금이라도 심각해져봐라. 

 

 “후우” 

 

 나는 한숨을 쉬고, 앞을 콩콩 뛰어가는 하루히의 검은 머리에 시선을 두었다. 

 

 이녀석과 만나고부터, 그리고 SOS단의 결성기념일부터, 내 역할은 하루히 시중드는 것이라고 어디사는 누가 정한 모양이다. 누군지를 모르므로 그 저주의 한마디는 일단 자숙해두겠다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말해두고 싶다. 

 

 날 과대평가하지 마라, 난 그런 대단한 일반시민이 아냐. 

 

 그런 모놀로그도 지금은 헛된 소리였다. 

 

 아사히나 선배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고, 코이즈미는 웃고있을 뿐이며, 나가토는 보기만 할 뿐. 

 

 내가 하루히를 어떻게 해야만 한다. 

 

 그런데, 뭘 어째야 하냐고요. 

 

  그 답을 가진 자는 하루히밖에 없고, 그런 하루히는 뭐가 문젠지를 모르는 것이다. 

 

 “미쿠루짱은 안 휘둘러도 돼! 거기서 번트 연습해. 휘둘러도 맞을 리가 없으니까 말야. 공에다 배트를 맞춰서 굴리라구. 아 참나, 또 위로 쳐올리면 어떡해!” 

 

 이전의 아마추어 야구대회 사건의 영향인가보다. 설마 내년에도 나갈 생각이냐. 

 

 하루히는 시속 130킬로의 케이지를 독점하여, 그 날카로운 볼들을 깡깡 쳐대고 있다. 어찌나 기분이 좋아보이는지 보는 나까지도 기분이 좋아진다. 대단한 녀석이다, 이 여잔. 세포에 분포된 미토콘드리아 수가 일반인하고는 다른 걸지도 모른다. 이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조금은 이 세상을 위해서 써주면 좋을텐데. 




 

 

 

 




 그 이후도 하루히가 추구하는 노르마(러,norma:할당된 노동의 기준량) 소화태세는 그 누구에게도 포즈버튼(pause button:일시정지 버튼)을 못누르게 할 태세로, 우리는 움직일 뿐이었다. 

 

 진짜 불꽃놀이도 하러 갔다. 해변에서 직접 쏘아올리는 불꽃놀이. 이 세 처자는 또다시 유카타로 탈바꿈하여, 하늘높이 날아가 팡팡 터지는 화염 꽃을 (하루히 혼자서만) 뛰어나게 잘 했으며, 전혀 닮지도 않은 캐릭터 얼굴 불꽃을 보고 웃거나 했다. 하루히는 쓸데없이 화려한 걸 무척 좋아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 하루히의 웃음에서 사악함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 나이보다도 어린 느낌이 들어 나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보고 있으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서였지만, 뭐, 그 이상한 생각이 뭐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의상이란 위대하다는 것이 이번에 배운 점이다. 

 

 또 다른 날엔 현경 강에서 하는 망둥이 낚시대회에도 끌려갔다. 망둥이는 하나도 안 낚이고, 듣도보도 못한 작은 물고기가 미끼만 먹어댈 뿐이어서 계량도 할 수 없었지만, 하루히의 즐거움은 저울이 측정할 범위를 넘어선 듯 하였다. 혹시나 실러캔스(coelacanth:3억년 전에 번성하던, 현존 어류의 진화 이전의 물고기)를 낚는 것 보다는 훨씬 드문 일이라고 안도한 나는, 미끼로 쓰는 갯지렁이를 보자마자 파래져서는 멀리 달아난 아사히나 선배가 직접 만드신 도시락(幕の?弁?:깨를 뿌린 주먹밥에 반찬을 곁들인 도시락)을 마음편히 먹고 있었다. 

 

 이쯤되니 하루히도 나도 어디 애들인가 싶을 정도로 까맣게 타서는, 다른 두사람이 완벽하게 자외선 대책을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되었다. 나가토는 가만 놔둬도 탈 것 같지도 않고, 검게 탄 나가토도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므로 그건 그대로 좋았다. 

 

 이렇게 태평하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내 자신도 잘 알고 있긴 하지만. 




 

 

 




 쭉 깔린 레일 위를 질주하는 것만 같은 나날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다. 

 

 하루히는 좋아 죽는다. 나는 한숨만 뻑뻑. 아사히나 선배의 창백한 표정은 감색으로 변하고 있었고, 코이즈미는 이제 체념했다는 식의 미소만 지을 뿐이며,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나가토 뿐이었다. 

 

 떠올려보면 이 2주간 여러 가지 일을 했었다. 

 

 점점 타임리셋이 가까워져온다. 오늘은 8월 30일. 남은 여름방학은 내일밖에 없다. 오늘내일 사이에 뭔가를 해야 하긴 하는데, 뭘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여름의 햇살도, 쓰르라미의 울음소리도, 여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불안요소였다. 고교야구대회도 어느샌가 우승교가 결정나 있었다. 좀더 했으면 좋으련만. 

 

 하다못해 하루히 기분이 나아질 때 까지만이라도. 

 

 


 엔들리스 에이트-08

 
 하루히가 든 볼펜이 모든 활동예정에 엑스표를 긋고 있었다. 

 

 어젯밤, 일부러 한밤중을 골라 광대한 묘지까지 가서, 한손에 초를 들고 방황한다는 담력시험이 마지막 레크리에이션이었다. 유령이 인사하러 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도깨비불이 왔다갔다 하는 일도 없었으며, 아사히나 선배가 벌벌 떠는 모습 외엔 별 볼 것도 없었다. 

 

 “이걸로 일단 과제는 끝났네.” 

 

 8월 30일 정오 약간 지났을 쯤. 역시나 역앞의 그 찻집에서 생긴 일이다. 

 

 하루히는 토쿠가와(?川) 매장금(埋藏金)의 소재가 적힌 복사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노트 조각 끝을 보고 있었다. 납득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섭섭하다는 것 같기도 하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섭섭한 느낌이 들었을 거다. 여름방학은 내일 하루밖에 남지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끝이 정말 오는 것인지, 지금의 나는 꽤나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의심스러워질만도 하다. SOS단 같은 엉터리 조직에 몇 개월이고 몸을 담아 정서불안한 단장에게 끌려다니다 보면 말야. 좀더 단순한 성격을 갖고 싶었다구. 아사히나 선배가 있으니 뭐 됐어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단순 명쾌한……아니 뭐 말할 것도 없다. 지나친건 못한것 만도 못하다(일부러 잘못 쓴게 포인트다). 

 

 “으-음. 이걸로 좋았던걸까.” 

 

 하루히는 빨대로 콜라에 뜬 바닐라 아이스를 빙글빙글 돌리며 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은 표정이다. 

 

 “뭐, 음. 이런 거지. 참, 뭐 또 하고싶은 거 없어?” 

 

 나가토는 말없이 홍차에 뜬 둥근 레몬조각을 관찰하고 있다. 아사히나 선배는 혼난 강아지처럼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무릎 위에다 두손을 꼭 쥐고 있었다. 코이즈미는 미소를 지으며 비엔나 커피 컵을 입에다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도, 뭐 달리 할 말도 안떠올라서 뚱하니 팔짱을 끼고 앞으로 뭘 어째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뭐 됐어. 이번 여름엔 여러 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 여기저기 많이 다녔고, 유카타도 입어봤고, 매미도 많이 잡았었으니까.” 

 

 내겐 하루히가 자기를 타이르는 것 같이도 보인다. 그런게 아냐. 아직 충분치 않다. 하루히는 마음속 깊이 이대로 여름방학이 끝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말로 표명하려고 해도, 마음은 못 속인다. 하루히의 내면, 그 안의 안의 안쪽엔, 이걸로는 아직 만족스런 납득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오늘은” 

 

 하루히는 전표를 내게 넘기고는, 

 

 “이걸로 종료. 내일은 예비일로 비워두긴 했지만, 그냥 쉬어도 돼. 또 모레 부실에서 보자.” 

 

 하루히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떴다. 나는 괜한 조바심을 느꼈다. 

 

 이대로 하루히를 돌려보내선 안된다. 그럼 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코이즈미가 발견하고 나가토가 보증한 반복의 2주간, 그 만 5천 4백 9십 9번째가 오고 말 것이다. 

 

 근데, 뭘 해야 하는 것일까. 

 

 하루히의 뒷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멀어져간다. 

 

 그때다. 정말 돌연, 갑작, 별안간, 난데없이──, 

 

 그것이 왔다. 

 

 이거저거 할거없이 뒤섞여서 ‘어, 이 씬 전에 어디서……’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오늘의 이건 현격한 레벨의 어지럼증을 동반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없던 강렬한 기시감. 알고 있다. 지금까지 1만번이고 했던 반복된 일. 8월 31일. 앞으로 하루. 

 

 하루히가 한 말 어딘가에 그것이 있었을 것이다. 뭐냐뭐냐뭐냐. 

 

 “왜그래?” 

 

 누군가 말하고 있다. 코이즈미가 한 말이기도 했을 거다.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기도 하며, 미루려고도 하고 있다……. 

 

 하루히는 자리에서 일어나있다. 언제적인가처럼 획 돌아가버릴 작정이다. 돌려보내선 안된단 말이다. 그래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나는 어떻게 변화시키려고 했었을까. 주마등 정도로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지난번까지 우리가 했던 것……. 

 

 그리고──하지 않았던 것.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다. 무슨 말이라도 해라. 안돼!라고라도 외치란 말이다. 

 

 “내 과제는 아직 안끝났어!” 

 

 아무리 그래도 크게 외칠 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냉정히 생각해보면 내 해마조직에서 말소시키고 싶을 또 하나의 기억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주변의 손님 및 점원, 그리고 자동문 바로 앞에 있던 하루히마저도 뒤돌아 내게 주목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말은 순 지 멋대로 튀어나왔다. 

 

 “그래, 숙제!”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지른 내게, 가게 내의 모두가 경직해 있었다. 

 

 “무슨 소리야?” 

 

 하루히는 순 별놈 다보겠다는 듯한 눈으로 다가왔다. 

 

 “네 과제? 숙제라고?” 

 

 “나는 여름방학 숙제를 하나도 안했다. 이걸 하지 않는 이상, 내 여름은 끝나지 않아.” 

 

 “바보야?” 

 

 진짜 바보를 보는듯한 눈으로 말해댄다. 알게뭐냐. 

 

 “야 코이즈미!” 

 

 “아, 예, 무슨일이신지요.” 

 

 코이즈미도 어리둥절해있던 모양이었다. 

 

 “넌 다 끝냈냐?” 

 

 “아뇨, 뒤늦게 허둥지둥 하기 시작해서 말이죠. 이제 반쯤이나 했을라나요.” 

 

 “그럼 같이 하자. 나가토도 와라, 너도 아직 안했지.” 

 

 나는 나가토가 대답하기 전에, 인형극에 쓰는 꼭두각시 인형(puppet)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손을 가리켜 뻗었다. 

 

 “그리고 말이다. 아사히나 선배도 와주시죠. 이번 여름방학 숙제를 전부 끝내는 겁니다.” 

 

 “에……” 

 

 아사히나 선배는 2학년이니 우리 숙제하고는 전혀 상관없지만, 지금은 그런 거야 말로 상관 없는 거다. 

 

 “그, 근데, 그, 어디서요?” 

 

 “우리집에서 하죠. 공책이고 문제집이고 전부 다 가져와서 한꺼번에 해버리자. 나가토랑 코이즈미, 할수있는 데까지 베낄 수 있게 해줘라.” 

 

 코이즈미가 수긍했다. 

 

 “나가토상께서도 괜찮으신지요?” 

 

 “응.” 

 

 어중간한 길이의 단발머리가 끄덕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좋았어. 그럼 내일이다. 내일 아침부터 하자. 하루만에 어떻게든 해주마!” 

 

 내가 주먹을 쥐며 기세를 높이고 있으니, 

 

 “잠깐만!” 

 

 허리에 손을 걸친 하루히가 테이블 옆에서 떡하니 폼을 재고 있었다. 

 

 “네 맘대로 정하지마. 단장은 나라구. 그럴 때는 먼저 내 의견을 묻도록! 쿈, 단원 독단 행동은 엄청 큰 규칙위반이야!” 

 

 그리고 하루히는 나를 노려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갈테니까 말야!” 




 

 

 




 ──그날, 그 아침. 

 

 아무래도 정답을 뽑은 모양이었다. 내 방 침대에서 눈을 뜬 나는, 내가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한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면 내게는 추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우란분재 좀 넘어서쯤에 시골에서 돌아와, 하루히 일당과 수영장에 가고 매미를 잡고 했던 8월의 기억 하나하나가. 그 기억 중에서도, 유난히 어제의 날짜가 생생히 기억나는 것이 대단하다는 한 마디 뿐이다. 

 

 어제는 8월 31일, 그리고 오늘은 9월 1일이다. 

 

 최신 기억이 가르쳐주고 있다. 여름방학 마지막 날, 바로 이 방에서 SOS단 공부모임이 열렸다. 무지막지하게 지쳤던 기억이 선명하다. 하루만에 모든 공책을 베끼는 것도 큰 중노동인데, 내 머리로 생각하고 자시고 하다 보면 그 피로도가 어느정도나 됐는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어젯밤 취침 시점에서 내 체력 기력 정신력 게이지는 잽 한방으로 침대에 쓰러지기 직전의 여유밖에 남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어제, 자기가 끝낸 여름방학 숙제더미를 잔뜩 들고 들어온 하루히는, 나와 코이즈미와 나가토와 아사히나 선배가 부지런히 샤프를 놀리는 것은 상관하지도 않고 계속 내 동생이랑 놀고 있었다. 

 

 “똑같이 날로 베끼면 안돼.” 

 

 방에 있는 TV로 동생이랑 게임을 하는 하루히가 컨트롤러 버튼을 연타하며 한 말이었다. 

 

 “문장표현을 바꾸든가, 계산을 좀 다르게 하든가 하라구. 선생들도 멍청한 사람만 있는 거 아니니깐 말야. 특히 수학 요시자키(吉崎)는 꼼꼼해서 그런 부분 자세히 본다구. 내가 보기엔 요시자키가 가르치는 해법은 전혀 고상(elegant)치가 않지만.” 

 

 내 방은 다섯명 플러스 동생이 비집고 들어오기엔 약간 좁았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어머니가 주스니 점심이니 과자니를 끊임없이 들고 와주는 바람에 쓸데없이 귀찮아지긴 했지만, 건초염(腱?炎:힘줄을 싸고 있는 막에 생기는 염증)에 걸리나 싶을 정도로 손목을 움직여대는 우리와는 달리, 하루히는 꽤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여유의 웃음이라 할 수 있겠지. 위에 있는 녀석이 밑을 내려다볼 땐 이렇게 웃는 것이리라. 어찌나 여유가 남아도는지 하루히는 상급생인 아사히나 선배가 온갖 고생을 하는 소논문(小論文)에도 참견을 해대고 있었다. 아사히나 선배의 리포트가 C평가를 받았다면 그건 하루히 탓일 게다……. 

 

 그런 기억의 반려로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신학기가 시작된다. 시작될 것 같다. 

 

 2학기가 이처럼 기다려졌던 적은 지금껏 없었다. 




 

 

 




 체육관에서 교장의 연설을 듣고 짧은 조회시간을 끝내고 난 방과후이다. 현재 날짜는 9월 1일이 맞다. 교실에서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은 내게 타니구치와 쿠니키다가 딱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매점이고 식당이고 오늘은 열지 않기 때문에, 하루히는 교문 밖에 있는 슈퍼까지 뭘 사먹으러 나갔다. 부실엔 나랑 코이즈미밖에 없었다. 

 

 “스즈미야상께선 문무에 걸쳐 우수한 분이십니다. 그것은 어리셨을 때부터 그러셨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녀께선, 여름방학 숙제 같은 것이 부담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친구분들과 함께 분담작업을 하실 것도 없으셨을 테죠. 스즈미야상께선 그러실 필요 없이 혼자서 간단히 해결지을 능력이 있으셨기 때문에요.” 

 

 나는 코이즈미의 해설을 들으며, 창쪽에다 파이프 의자를 끌어다가 교정을 내려다보았다. 문예부 부실에서다. 시업식인 오늘, 달리 할 것도 없으니 집에 가는 것도 좋았겠지만, 왠지 여기에 오게 됐고, 같이 등장한 코이즈미와 같이 여기서 이러고 있다. 무시무시할 만큼이나 웬일인지 나가토는 없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그녀석도 역시 지쳐있었을지도 모른다. 

 

 근처의 매미 세력도는, 유지매미에서 쓰르라미의 판도증대로 가는 추세다. 여름방학은 끝났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거짓말 같기도 하다. 8월 후반을 만 오천 몇 번이고 했다는 거 말야.” 

 

 “그렇게 느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코이즈미는 해맑게 미소지으며 카드를 섞고 있었다. 

 

 “만 5천 4백 9십 7회, 그만큼의 시퀀스에 있었던 저희들과, 지금의 저희들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과거 그만큼에 해당하는 저희들은, 이 시간축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죠. 만 5천 4백 9십 8회째의 저희들만이, 올바른 시간의 흐름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힌트는 받았다. 그 여러번의 기시감, 특히 마지막에 느낀 ‘그거’는, 이전에 같은 입장에 있었던 수많은 ‘나’로부터의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전이라는 게 이상한가? 이전이고 뭐고, 시간은 호랑이가 녹아 버터가 될 정도로 메리고라운드(merry-go-round:회전목마) 상태가 되어있었던 것 같으니까 말야. 

 

 그래도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것이 먼저 2주를 살아주었던 그 수많은 ‘나’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주지 않으면 하루히에게 없었던 것으로 되어있는 그들의 여름이 전혀 쓸모없었다고 할 수 밖에 없잖냐. 

 

 특히 자신들이 리셋되고 만다는 것을 자각해준, 그 8천 7백 6십 9명의 내가 말이야. 

 

 “포커라도 할까요?” 

 

 코이즈미가 신미 마술사와 같은 손놀림으로 패를 넘긴다. 가끔은 놀아줄까. 

 

 “좋지. 근데 뭘 걸거냐? 돈이라면 없다.” 

 

 “그럼 노레이트(no rate)로 하죠.” 

 

 그리고 난 꼭 그럴때는 안해도 되는 승리를 한다.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시같은거 처음 봤다. 




 

 

 




 또 한번 이 날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될 기회가 있다면, 거는 돈 설정을 꼭 기억해두도록 하자. 

 

-엔들리스 에이트 끝


 

 서장 · 가을 

 
 문화제가 끝나고 왠지모를 허탈감에 휩싸여있던 12월 하순. 

 

 영화촬영 단계에서 온갖 열을 내고, 당일 상영회에서도 일단 대강의 흥행성적을 올린 하루히 감독님이셨지만, 이걸로 당분간은 만족감의 여운에 빠져 얌전히 있어주는가 싶었는데, 그 텐션은 문화제 전중후(前中後)에 걸쳐서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측으로서도 그렇게 순순히 하루히를 쓸데없이 좋은 상태로 만들어 줄만한 행사를 잇달아 꺼내기엔 일말의 뭐 하나 가진 것이 없었고, 한 거라곤 학생회 회장선거정도였다. 솔직히 나는 하루히가 입후보했다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하루히는 학생회 조직을 영세 문화계 동호회측의 원수라 믿고 있는 모양이어서, 자신이 직접 기생벌레로서 학생회에 들어가 학원음모 이야기의 흑막이 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흑막──그런게 있다고 할 경우에만 이긴 하지만──이라 솔선하여 싸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는 것 같았다. 

 

 기껏 SOS단이라는 사기 활동단체를 묵살, 거기다 본체만체 까지 해주고 있단 말이다. 고맙게 그 입장을 받아들이면 될텐데 하루히는 언제든 싸울 의향 만만, 그러나 뭘 어떻게 싸울 작정인지까지는 아직 내가 아는 범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 혹은 예감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온 것은 학생회측의 자객이 아니었다. 

 

 복수에 불타는 이웃이었던 것이다. 

 




 궁수자리의 날 (射手座の日 · The Day of Sagittarius) 


 
 눈앞에 암흑의 우주공간이 펼쳐져 있다. 

 

 눈가리개를 하여 말머리성운에 빨려든 것만 같은 새까만 암흑, 별 하나 반짝이는 것조차 관측할 수 없는 심플한 갤럭시 스페이스(galaxy space)로, 정확히 말하자면 손 하나도 안댄 배경판이다. 뭔가 좀더 연출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뭐 이 우주공간에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지. 예산이든가 기술이라든가 시간이라든가 하는 뭐 그런 게 말야. 

 

 “아무것도 안보이는구만.” 

 

 라고 내가 중얼거렸다. 아까전부터 모니터는 단순한 블랙 온리(black only)의 색채로, 거의 뭐 디스플레이 고장을 의심해봐도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내 눈에다가 전해주고 있다. 

 

 이 우주공간 어디를 방황해야할지 궁리하고 있자니, 허무한 화면 위 하단부에서 갑작스레 광점(光點)이 등장, 그대로 계속 전진을 개시하자 나는 망설임없이 내 의견을 아뢰기로 했다. 

 

 “야 하루히, 좀더 물러나있는게 낫지 않겠냐? 네 기함이 너무 앞으로 나갔다고.” 

 

 그것에 맞서는 하루히의 대답은 이랬다. 

 

 “작전참모, 날 부를때는 각하라고 하도록. SOS단 단장은 군 계급으로 따지자면 상급대장(上級大將)정도니까 말야. 이중에서 젤 높은 거.” 

 

 누가 작전참모고 누가 각하냐고 따져들기 전에, 

 

 “스즈미야 각하, 적 함대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나가토 정보참모의 연락이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코이즈미가 상황을 보고했다. 하루히의 회답은, 

 

 “신경쓸거 없어. 돌격만이 있을뿐!” 

 

 지극히 하루히다운 지령이긴 하다만, 아무도 그에 따라선 안된다. 아니, 아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진정 그녀석과 같이했다간 화승총(火繩銃) 3단발에 맞서는 타케다(武田) 기마군단처럼 묵사발이 날 거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아사히나 선배가 불안스런 표정으로 한손을 올려, 

 

 “저기요…. 저는 뭘 하면……?” 

 

 “미쿠루짱, 방해되니까 네 보급함대는 대충 그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돼. 기대도 안하니까. 쿈, 유키하고 코이즈미군이랑 같이 적 전위부대를 흩뜨려트려. 그럼 내가 마무리를 하러 나갈테니까. 엄숙하게!” 

 

 누가 이놈좀 멈춰줬으면 좋겠다. 

 

 나는 모니터로 눈을 돌려, SOS단 우주군의 자(自)함대 현위치를 재확인했다. <쿈함대>라는 이름이 붙은 내 통솔하의 15000척의 우주전함은, 마침 <하루히☆각하☆함대> 바로 뒤를 추격하는 형태로 최전선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옆에 <코이즈미군 함대>가 포진하고, 가장 의지되고 믿음직한 <유키함대>는 우리 한참 앞쪽에서 색적(索敵:적의 위치를 탐색함)작업을 맡고 있었다. 보급함을 거느리게 된 <미쿠루함대>가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니, 아사히나 선배의 불안한 조작에 의해 개전 스타트 때부터 진로탈선을 하고 있다. 

 

 “으에에-. 어디로 가야하나요?” 

 

 아사히나 선배는 비명에 가까운 곤혹의 목소리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곤란에 헤메고 있었다.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저희 뒤쪽에서 대충 어슬렁거리고 있어주십쇼. 화면상의 함대라고 할지언정 당신의 이름이 적힌 것이 다치는 건 보고싶지 않으니까요. 

 

 문득 바라보던 화면에 변화가 찾아왔다. <유키함대>가 뿌린 색적정으로부터의 정보가 데이터링크가 된 내 함대에게도 전해져 온 것이다. 같은 편 함대의 심벌마크 외엔 검은색 일색이었던 우주공간에, 나가토가 포착한 적 부대의 위치정보가 표시된다. 

 

 “뒤로 물러나, 하루히” 내가 말했다. “녀석들은 함대를 분산시키고 있다. 아마, 네 위치를 찾고있는 걸거다. 대장은 대장답게 놀아라. 뒤에서 폼이나 재고 있으면 된단 말야.” 

 

 “뭐야.” 

 

 하루히는 입을 뿌루퉁하게 내밀고 이의를 댔다. 

 

 “나만 빼놓을 작정이야? 그거 뭐하자는 심보야. 나도 빔이니 미사일이니를 뿅뿅 쏴대고 싶단 말이야!” 

 

 나는 <쿈함대>에 미속전진을 명령하는 한편, 

 

 “잘 들어라 하루히. 네 기함이 당하면 그 시점에서 우리는 진단 말이다. 봐봐. 앞에 나와있는 적 함대 넷은 전부 졸병 녀석들이다. 기함 함대는 후방에서 지령만 내리고 있을거라고. 장기나 체스도 왕장(王將)이 보조없이 혼자서 적진에 뛰어들진 않잖냐? 그것도 이런 초반에 말이다.” 

 

 “그거야……그럴지도 모르겠네.” 

 

 하루히는 떫은 얼굴로,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표정을 했다. 나를 보는 눈동자는 고양이가 먹이를 달라고 보챌 때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럼, 너희들이 어떻게 해봐. 적 기함을 찾아내서 펑펑 포격하는거야. 저런 녀석들한테 질 수야 있겠어! 이겨야돼. 지면 영광스런 SOS단의 이름에 먹칠하는 꼴이라구. 뭣보다 그녀석들이 잘난체해대는 꼴은 죽어도 못봐!” 

 

 “각하.” 

 

 곧바로 코이즈미가 긴급 보고를 올렸다. 

 

 “나가토 정보참모의 <유키함대>가 적 전위부대와 마주쳤습니다. 지금부터 전투행동에 들어가겠습니다. 소관의 미개한 의견으로는, 각하께서는 저희들 후방으로 이동하셔서 전체적인 전술지휘를 맡아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심각한 대사긴 하지만, 미소가 섞인 통에 현실성이 떨어진다. 

 

 “아, 그래?” 

 

 하루히는 코이즈미의 아첨에 만열(滿悅:만족하여 기뻐함)에 마지않더니, 단장석에서 팔짱을 끼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변변한 전술지휘능력도 없는 주제에 계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대장을 하는 사관학교 출신의 서투른 커리어(상급 시험 합격을 통하여 높은 관직에 채용된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는, 

 

 “코이즈미 참모 장교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원하는대로 해줄게. 그럼, 모두 똑바로 맡은일 하라구. 건방진 컴퓨터연(硏) 녀석들 따위 개판에 떡판으로 만들어버려. 우리들의 목적은 완전섬멸이야. 산산조각으로 때려부숴야돼.” 

 

 완전승리를 계획하는 것은 모티베이션(motivation:동기부여)으로선 옳긴 한데, 이 우주전쟁에는 상대의 의도도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적 컴퓨터연이라도 같은 야망을 갖고 참전하고 있을 테니까 말야. 

 

 그리고 내가 보기론, 우리 SOS단의 승산은 구 일본해군이 레이테(Leyte:필리핀 중부의 섬. 태평양 전쟁 말기, 미일의 격전지) 앞바다에서 미군에게 완승을 할 확률보다도 낮을 것 같다. 역사에 if란 없지만, 같은 수 같은 전력으로 리플레이 한다고 해도 똑같이 당하는 게 중심이 된 줄거리가 나왔을 게 틀림없겠지. 얼른 백기를 올리는 게 낫지 않을까나. 

 

 “뭐, 그럴수도 없겠다만.” 

 

 나는 그렇게 말하며 팔을 걷어붙이고, 화면의 적진 정보를 재확인했다. 과연 나가토, 기함부대를 제외한 적함 위치를 거의 총망라하는 데이터를 보내주고 있다. 지금부터 우리 군의 승리를 이끄는 건, 분수에도 맞지않게 작전참모의 지위를 떠맡게 된 내 두뇌와 수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고? 

 

 “어디보자……”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노트북 컴퓨터의 액정을 바라보며, 하루히 사령관 각하의 사리사욕대로 사태를 끝내는 방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전에, 우리가 지금과 같은 사태에 놓인 이유와 상황설명을 해두는 게 좋겠군. 혼란에 빠지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인생의 모든 기로며 유익이다. 그럼 그래볼까. 

 

 사건의 발단은, 1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궁수자리의 날-02



 모월 모일 가을의 방과후. 

 

 문화제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 학교에 고요가 돌아왔다. 

 

 …라는 건 쎄고 쎈 도입부 상투구로서, 쉽게 말하자면 모든게 문화제 전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뭐 무사히 끝나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기분이 드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속시원히 속내를 다 털어놓아준 것도 아니니 확실히는 알기 힘들지만, 코이즈미의 미소는 여느때보다도 안도의 비중이 높아져있는 것 같았고, 나가토의 평소 무표정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어쨌든 요새, 이 독서머신이 멍하니 책을 읽는 모습을 평온의 증거로 간주할 수 있게끔 되어 있어서, 만약 나가토가 묘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한다거나, 거기다 당황에 허둥지둥하는 듯한 광경을 보게 된다고 하면, 나는 당장 유서나 자서전중 하나를 쓸 준비를 할 게 틀림없다. 아마 나가토에게 있어서 예상치 못한 사태야 거의 없을테니, 이녀석이 문예부 부실에서 한가로이 해외 SF 원서를 읽고 있다는 사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무시무시한 악몽이 닥쳐올 리 없다는 확고한 증명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도저히 미래에서 왔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과거 일은 하나도 모르는 미소녀 겸 가짜 메이드께서는, 오늘도 무의미한 봉사 시중여성의 의상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심각한 눈과 손놀림으로 뜨거운 일본차를 타고 있었다. 어디서 얻었는지 각종 찻잎에 대한 최적의 물 온도에 관한 지식을 입수한 아사히나 선배는, 주전자 포트를 쓰지 않고 일부러 휴대용 가스렌지에다 주전자를 얹어 물을 끓이게 되었다. 한손에 들고 있는 것은 온도계로, 그런 걸 뚜껑열린 주전자에 집어넣고는 신중한 눈빛을 하고 있는 메이드 룩의 산뜻한 미래인이란 광경도 여기서밖에 볼 수 없겠지. 왠지 미묘하게 잘못된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틀린그림찾기를 하자면 SOS단 아지트에서 잘못되지 않은 거라곤 전혀 없다. 뭐든 잘못되어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 유일하게 정상인 것은, 확실히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내 의식 뿐이다. 아니 순 데카르트(Rene Descartes:프랑스의 철학자) 꼴이다. 

 

 문예부여야 할 이곳이 어느샌가 스즈미야 하루히와 그 일당의 근거지인 이(異)공간이 되어선, 이렇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나는 의외로 꽤나 거물인지도 모르겠군. 생각해보면 내 이외의 멤버는 처음부터 이상한 배후관계를 갖고 있었고, 단장 하루히는 언제까지나 수수께끼에 싸인 존재로, 불완전하나마 상식적인 객관성을 갖고 있는 것은 나뿐이라고 하는 이 꼬락서니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오. 

 

 비정상 넷에다 정상인 하나라니, 아무리 그래도 비율이 너무 이상하잖냐. 하다못해 한 명정도 내 정신피로를 공유할 수 있는 인간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 성실하게 정상인 노릇할 성격은 아니라고. 그럴 기분이 아닌 때도 많다. 나 혼자서만 이런 책무를 지게 된다니 불공평하다고 원망 한마디정도 하고 싶은 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니구치나 쿠니키다를 말려들게 할 생각은 없다. 미안해서 그런게 아니라, 능력적인 문제다. 그 두녀석한테 하루히에 대항할 수 있을 만한 말빨과 반사신경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그러고보니 그녀석들은 물론 츠루야 선배도 어딘지 모르게 좀 맹하지. 이런 망할. 이 세상은 미쳤으면 다인거냐. 

 

 “으-음” 

 

 나는 팔짱을 끼고, 아주 복잡한 생각을 하기라도 하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지금 코이즈미랑 하는 바둑의 다음 한수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다. 코이즈미의 흑돌을 대량학살로 몰아넣는 것은 그리 난이도가 높은 게 아니다. 게임매니아 주제에 하나도 나아지지가 않는 코이즈미랑 같은 취급을 해선 섭섭하지. 그런 생각이 아니라, 나는 이 세상이 정말로 제정신인지 아닌지를 걱정하고 있다. 왜냐면 나는 미친 세상에는 미친 인간 외엔 멀쩡히 살수 없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정신인 인간이야말로 미친놈 취급을 당하겠지. 잘도 이런 억지와 부조리가 소용돌이치는 SOS단 부실에서 일반 고등학생을 해먹고 있다니, 내가봐도 감격이다. 이젠 누가 칭찬을 해줘도 좋을 판이다. 

 

 “그럼 제가 칭찬의 말씀이라도 하나 드릴까요.” 

 

 코이즈미는 폼 하나는 끝내주는 손놀림으로 판 위에 바둑돌을 놓고, 내 백돌을 집어올리면서 미소지었다. 폼이야 끝내준다만. 눈앞의 포석에만 주의하고 있으면 자칫 몇 수 앞에 처하게 될 위험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법이다. 

 

 “거절하지.” 

 

 내가 대답하며 바둑돌 용기에다 손을 집어넣어 차르륵 차르륵 소리를 내면서 진심으로 나를 칭찬하고 있는 듯한 코이즈미의 표정을 마주보았다가, 별다른 기쁨도 얻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말했다. 

 

 “너한테 칭찬받아봤자 좋을 게 뭐가있냐. 오히려 뭔가 꿍꿍이가 있나하고 불안해질 뿐이다. 말해두겠다만 나는 게임에 쓰는 말이 아니다. 너네들 생각대로 움직일 줄 알면 큰 오산이다.” 

 

 “그 ‘너네들’이란 것이 어느 저희를 말씀하시는지 여쭤보고 싶긴 합니다만, 당치도 않습니다. 스즈미야상께서도 당신께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해주시니까 말이죠.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 하나의 확실한 증명이 되겠죠.” 

 

 만약 코이즈미가 전학오지 않았다면, 하루히는 이녀석을 SOS단의 일원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겠지. 그녀석에게 있어서 필요했던 것은 ‘코이즈미 이츠키’라고 하는 인간의 성별이나 성격이나 인품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저 전학왔다고 하는 이유 하나밖에 없다. 이상한 시기에 갑자기 전학온게 운이 나빴던 거다. 혹은 하루히에게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전학왔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하루히가 애타게 찾던 초능력자인 이녀석 입장에서 보자면, 언제 체렌코프(P.A. Cherenkov, 1904~1990) 방사를 시작할지 예측할 수 없는 방사성물질근처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 함부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 진짜 속마음일지도 모른다. 

 

 “그거야 이젠 과거형입니다.” 

 

 코이즈미는 손에 쥔 바둑돌을 보면서, 

 

 “그 당시엔 분명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감시하기만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즈미야상께서 처음 제게 찾아오셔서, 그날 방과후에 이 부실로 데려오셨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었다구요. 더군다나 활동목적이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를 잡아다가 같이 노는 것이라 하셔서 말이지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립단 듯 추억 이야기를 하는 코이즈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일찍이 수수께끼의 전학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 속성은 현재의 저와는 크게 다릅니다. 스즈미야상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그럼 뭐냐. 내 입장에서 보자면 넌 아직 수수께끼 투성이라고. 

 

 코이즈미는 부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좁은 장소를 좋아하는 고양이처럼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는 나가토를 보고, 이어 주전자와 눈싸움을 하고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바라보고선, 한바퀴 시선이 돌아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루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반 청소당번이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고서야 나랑 코이즈미가 태평히 이런 대화나 나누고 있을 리가 없겠지. 

 

 그 단장 부재의 부실에서, 코이즈미는 새를 치료하려는 베테랑 수의사와 같은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저나 나가토상은 물론 아사히나상께서도, 그리고 응당 당신께서도, 지금은 어엿한 SOS단의 일원이십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스즈미야상께선,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SOS단의 단원 이상 및 이하 분류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의미야 물론 있습니다. 우주인이나 이(異)세계인 같은 일반인류 외의 존재가 단원이상, 단원이외의 일반인류가 단원 이하입니다.” 

 

 타니구치나 쿠니키다, 츠루야 선배나 내 동생은 단원 이하란 거냐. 그녀석들이나 츠루야 선배를 감싸자는 건 아닌데, 그 사람들이 나 이하의 존재가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니 그거 미안하잖냐. 

 

 “지극히 간단한 논리입니다. 그들이 스즈미야상께 있어서 중요한 존재로써 간주되고 있다면, 그들도 저희들처럼 SOS단의 일원으로써 여기 있을 겁니다. ‘없다’는 것은 곧 그들은 스즈미야상께 있어서 중요치 않다, 즉 그저 지나가는 일반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참 결과론처럼 논증이 편한 논리도 없습니다.” 

 

 “이세계인은 어쨌는데. 아직 안온거냐.” 

 

 “결과론적으로, 지금 이 세상엔 없는 것이겠죠. 있다면, 여하의 우연이나 필연에 의해 이 부실에 오게 될 테니까요.” 

 

 “안와서 다행이다. 다른 세상따위 가고 싶지도 않아.” 

 

 내가 백돌을 놓아 코이즈미의 흑돌을 대량 학살하는 순간과, 승패가 명확해져가는 바둑판 옆에 찻잔이 놓여지는 것이 동시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차 다 됐어요.” 

 

 아사히나 선배가 약소 학교 야구부를 부임 첫해에 지역구 대회 우승으로 이끈 감독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서 있었다. 

 

 “‘카리가네(기러기의 울음)’란 걸 사봤어요. 제대로 만든 것 같긴 한데…. 꽤 비쌌습니다?” 

 

 배째고 죽을만큼 죄송합니다. 거기에 든 돈은 나중에 하루히한테 청구해야겠죠. 아니 뭐, 그렇게까지 찻잎에 연연하지 않으셔도 아사히나 선배의 아름다운 손이 내주시는 거라면 수돗물이라도 제겐 에비안(Evian) 이상의 품질입니다. 

 

 “후훗, 맛있게 드세요.” 

 

 이제 완전히 메이드가 다되어버린 아사히나 선배는, 코이즈미 앞에도 찻잔을 하나 놓고선, 능숙한 동작으로 쟁반을 들고 남은 하나의 찻잔을 나가토 쪽으로 옮겨주었다. 

 

 “…………” 

 

 평소처럼 나가토는 아무런 말이 없지만, 아사히나 선배 입장에선 감사의 말을 듣는 것보다 아무말 하지 않는 것이 더 안심되는 모양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SOS단의 우주인과 미래인이 사이좋게 대화하는 광경은 본 적이 없고, 아니 그렇다기보다 나가토가 누군가랑 즐겁게 이야기하는 씬 같은 건 아직껏 없다. 뭐, 그건 그거대로 좋다고 본다. 어느날 갑자기 나가토가 수다스러워져도 쫄아버릴 뿐이고, 하루히 수준의 ‘너는 입만 안열면……’ 같은 여자가 되어도 외모가 아깝기만 할 뿐이다. 

 

 아무말 없이 문제없는 녀석은, 결국 말없이 있는 게 더 나은 거다. 







 궁수자리의 날-03


 그렇게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면서 태평하게 차나 홀짝거리고 있으니,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소시민적인 평화도 오래가지 않고, 우리를 귀찮게 만드는 일은 마치 망각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마냥 주기적으로 방문을 해주는 것이었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상처투성인 싸구려 문을 바라보고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왜냐고? 부실내에 있는 사람은 하루히를 제외한 네명의 단원들이다. 그리고 하루히는 노크를 한다는 매너 행위하고는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웃고나 있을 녀석이다. 즉 이 노크의 주인은 하루히도 아니며 SOS단의 그 누구도 아닌 것이니, 그 외의 제 3자라는 사실이 된다. 뉜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어떤 성가시고 귀찮은 일을 제공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음에 틀림없다고 하는 추리가 곧바로 성립되지 아니한가. 그 언제쩍의 키미도리 선배처럼 말이지. 

 

 “네, 지금 가요-” 

 

 아사히나 선배가 실내화 소리를 내며 응대하러 간다. 이젠 너무나도 익숙한 동작이어서, 자기가 메이드라는 사실을 자기자신도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는 듯하였다. 좋은 현상……인가. 

 

 “아?” 

 

 문을 연 아사히나 선배가 의외의 인물을 본 모양이다. 가볍게 눈을 크게 뜨고, 

 

 “안녕하세요……. 드, 들어오시겠어요?” 

 

 아사히나 선배는 두걸음정도 물러서서, 왠지 두손으로 가슴을 가리는 듯한 동작을 취한다. 

 

 “아니, 여기면 되겠지.” 

 

 라고, 방문자가 다소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 열린 문에서 머리만 내밀어서 부실을 들여다보았다. 

 

 “단장씨는 부재인가…….” 

애써 감추는 안도가 진하게 묻어나오는 목소리를 낸 것은, 어느새 친숙해져 가기까지 하는 옆 부실의 주인, 컴퓨터연(硏)의 부장이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서 또다시 내가 나서게 됐다. 아사히나 선배는 서서 꼼짝도 못하고 있고, 코이즈미는 미소지은 채 상급생을 바라볼 뿐, 나가토는 책밖에 보는 게 없다. 

 

 “무슨 일인지요.” 

 

 일단 상급생이다. 경어 좀 섞어서 상대해주는 게 도리겠지. 나는 일어서서 아사히나 선배를 가리듯이 앞으로 나섰다. 응? 부실 문턱을 넘는 척도 안하는 컴퓨터연 부장, 그 뒤엔 몇 명의 남학생들이 선조 대대로 차마 다 죽지 못한 배후령처럼 떼지어 모여있다. 뭐지, 아직 습격의 시기로는 이르기 그지없다만. 

 

 부장씨는 나온 자가 나인 것에 안심했는지, 엷은 웃음을 띨 여유가 생긴 듯 어느정도 등골을 펴며, 

 

 “일단, 이걸 받아줬으면 좋겠군.” 

 

 무슨 생각인지, 한 장의 CD 케이스를 내밀었다. 받고 뭐고 간에 컴퓨터연이 나한테 선의에서 우러나오는 선물을 줄 리가 없으니, 나는 당연히 의심스러운 눈빛. 

 

 “아, 절대 수상한 건 아냐.” 라는 부장. “안에 들어있는 건 게임 소프트다. 우리가 직접 개발한 자체제작품이지. 요전 문화제때 발표했었는데, 못 봤던가.” 

 

 미안타만 그럴 시간은 없었구료. 문화제에서 내가 계속 기억해두고 싶은 거라면 경음악부의 밴드연주와 아사히나 선배의 야키소바집 의상 정도다. 

 

 “그런가……” 

 

 부장은 기분이 나빠진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전시장소가 나빴던 건가……” 라 중얼거렸다. 용건이 동네 수다라면 얼른 끝내고 돌아가는게 좋수다. 이러다가 하루히라도 나타나면 어떤 난리가 터질지 모른단 말요. 

 

 “물론 용건이 있어서 왔지. 그래도 간략하게 해두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럼 말해주지!” 

 

 부장이 어쩐지 땀을 좀 흘리면서 말하는 모습에, 배후령 집단도 단호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얼른 좀 하고 가슈. 

 

 “게임으로 승부다!” 

 

 부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또다시 CD 케이스를 들이밀었다. 

 

 왜 또 컴퓨터연이랑 우리가 그딴걸로 대전을 벌여야하냐? 놀 상대가 없어서 그런거라면 어디 다른 부실에나 가보는게 좋을거라고 노파심에서 나오는 말을 해주고 싶은 참이다. 

 

 “놀이가 아니다.” 

 부장씨는 철저항전할 생각인 듯, 

 

 “이건 승부다. 거는 것도 있단 말이다.” 

 

 그럼 코이즈미를 드리죠. 컴퓨터연 부실에서 속시원해질때까지 승부란 걸 해주면 되겠네. 

 

 “그런게 아니라, 너희들과 승부하자는 거다!” 

 

 부탁이니까 제발 승부승부거리지좀 말아주쇼. 하루히의 개코가 어디서 이 냄새를 맡을지 모른다고. 만에 하나, 그 근거불명의 자신만만씨가 그 단어를 듣기라도 하면──, 

 

 “으랏차!!” 

 

 “꾸에엑” 

 

 기괴한 소리를 뱉어내며 부장씨의 모습이 누군가에 의하여 날라차기를 당한 듯 옆으로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앗!?” “부장!” “괜찮습니까!” 

 

 몇초 늦게 부원들이 제각각 외치며 복도에 널부러져있는 부장씨에 달려들고, 나는 천천히 옆으로 시선을 돌린다. 

 

 “너희들 뭐하는 놈들이야?”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컴퓨터연 부원들에게 향하고, 잘난 모습을 한 입술로 크게 웃음짓는 그 여자야말로, 스즈미야 하루히임에 틀림없다. 

 

 부장씨에게 습격한거나 다름없는 드롭킥을 먹이고, 자기는 깔끔한 착지를 성공시키고 나서의 의기양양한 얼굴이다. 

 

 하루히는 귀에 걸린 머리카락을 보란 듯이 넘기고는, 

 

 “악의 집단이 왔나보네. 우리 SOS단을 방해물로 보는 비밀조직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겠지. 가만히 둘수야 있나, 어둠을 밝히가 사악을 뿌리뽑는 것이 정의의 편 쪽의 사명이라구! 잔챙이는 잔챙이답게 원샷으로 사라져버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박은 듯한 부장씨는, ‘으으으’ 인지 신음소리를 내며 부하 부원들에게 부축받으면서 걱정을 받고 있다. 하루히의 헛소리를 듣고있었던건 아무래도 나 혼자뿐이었던 모양이다. 

 

 “저기말이다, 하루히,” 

 

 고등학교 입학 이래 대체 몇 번째인진 모르겠지만, 타이르듯 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날라차기 먹이는 거야 이야기 듣고 나서도 충분하잖냐? 덕분에, 봐라. 나도 저 작자들도 뭘 해야 좋을지 몰라하고 있잖냐. 게임으로 승부──, 까지밖에 못들었단 말이다.” 

 

 “쿈, 승부라는 건 말야, 말을 꺼낸 그 순간부터가 승부라구. 선언 이퀄(equal) 선전포고야. 패자가 무슨 소리를 하려든 간에 그건 변명이야, 이기지 못하면 아무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는다구.” 

 

 하루히는 쏴죽인 짐승을 검분(檢分)하는 사냥꾼처럼 부장씨에게 다가가, 실례되게도 실망의 소리를 냈다. 

 

 “뭐야. 옆방씨잖아. 왜 이런 녀석이 나한테 싸움을 걸러 오는거야?” 

 

 그니까 지금 바로 그 설명을 들으려고 했던 참이었단 말이다. 기회도 안주고 옆에서 기습을 한 건 너다. 

 

 “그래도 말야,” 라며 하루히는 입을 뿌루퉁하게 하고, “보나마나 학생회가 부실을 비우라고 찾아온건 줄 알았단 말야. 슬슬 올때가 됐다고 계산했는데. 나참 복잡한 짓좀 하지 말란 말야.” 

 

 “그렇다 쳐도 킥을 먹인다고 일이 나아지냔 말이다.” 

 

 내가 하루히에게 충고를 좀 해주려고 하고 있으니, 

 

 “그러고보니 그 이벤트가 아직 없었군요……” 

 

 어느샌가 문가에 서있던 코이즈미가 불쑥 복도에 등장해서는, 깊이 생각에 잠기는 듯한 얼굴을 해대길래 발끝을 밟아줬다. 쓰잘데없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다. 

 

 “으으, 비겁하다, SOS단……” 

 

 부장씨는 신음소리를 내며 겨우 일어섰다. 옆의 부원들에게 부축받으며, 

 

 “어, 어쨌든, 승부는 해줘야겠다. 어차피 말은 안통할거라 생각해서, 문서를 작성해왔다. 이걸 읽어보면 승부 내용은 잘 알 수 있겠지.” 

 

 부원 하나가 야생 사자에게 생고기를 주는 손동작으로 복사용지 묶음과 CD 케이스를 들고 있자, 

 

 “수고하십니다.” 

 

 코이즈미가 친절히 받아들었다. 

 

 “게임인건 알겠습니다만, 설명서도 첨부되어 있나요?” 

 

 다른 부원이 또 종이다발을 코이즈미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부장, 용건은 끝났어요. 부실로 돌아가요.” 

 

 “음, 그러자.” 

 

 약하게 그덕이고는, 

 

 “그럼, 그렇게 알고──” 

 

 용건을 하는 둥 마는 둥 전하고는, 허둥지둥 가버리려는 부장씨의 목덜미가 하루히의 손에 의하여 꽉 잡히고 말았다. 

 

 “끝까지 설명하고 가. 문장으로 넘기려는 수작은 안 통하니깐. 이 머리나쁜 바보 쿈도 알 수 있게 말로 설명해!” 

 

 누가 바보란거냐 지금. 

 

 이리하여 가엾게도 부장씨는 문예부실로 질질 끌려오게 됐다. 남겨진 컴퓨터연 부원들이 항의의 말을 할 틈도 없었을 뿐더러 구조할 수도 없이, 문이 닫혔다. 


 

 궁수자리의 날-04


 문화제라고 하는 빛나는 시기가 지나서, 일년 내내 빛나기만 하는 하루히와는 달리 전교규모로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갔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컴퓨터연도 빛나는 기분을 지속시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현재 파이프의자에 앉혀져선 단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부장씨의 모습은, 마치 던전(dungeon) 최심부에서 파티를 놓친 끝에 리빙데드(living dead:좀비) 무리에 둘러싸여 MP 제로 상태의 백마법사 그 자체였다. 똑같이 오들오들 떨고있는 아사히나 선배가 탄 차엔 손도 대지 않고, 하루히에게 심문을 받고 있다. 

 

 간단하게 정리해보지. 

 

 부장씨의 요망은 다음과 같다. 




 

 

 




 1. 컴퓨터연 자작 대전 게임으로 승부를 가리자. 

 

 2. 우리가 이기면, 현재 SOS단 책상에 진좌하고 있는 컴퓨터는 본래 있던 장소로 귀환하게 된다. 

 

 3. 도저히 SOS단에 다기능형 컴퓨터는 맞지 않는다. 컴퓨터는 응당 컴퓨터연에 있어야만 할 기재로서, 강력히 귀환을 바라고 있는 바이다. 

 

 4. 컴퓨터 강탈시에 부장 및 부원들이 부담한 정신적 고통은 이 기회에 전부 잊을 수 있다. 아니, 잊고싶다. 서로 잊도록 하자. 

 

 5. 이상과 같은 이유로, 너희들은 우리와 싸워야한다. ……싸워라. 




 

 

 




 코이즈미한테서 돌아온 종이에는 이런 식의 말이 알아먹기도 어려울뿐더러 읽기도 힘든 글씨체로 촘촘히 적혀 있었다. 소송장의 형식을 겸하고 있는것 같은데, 깔끔히 인쇄된 문장도 나만 대충 훑어볼 뿐, 하루히는 직접 부장씨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안쓸거면 컴퓨터 돌려주란 말이다.” 

 

 부장씨가 말했다. 그 말에 대하여, 하루히는 뜻밖이라는 듯 대답한다. 

 

 “난 쓰고 있어, 깔끔하게. 요전에 영화도 이걸로 편집했다구.” 

 

 한건 나다만. 

 

 “홈페이지도 만들었고.” 

 

 그것도 내가 했다. 하루히가 컴퓨터를 이용해서 한 거라고 해봤자, 할 일없을 때 인터넷 순회와 낙서같은 심벌마크를 그린게 다다. 

 

 “그 홈페이지도 반년이 지나서도 인덱스밖에 없잖냐. 벌써 몇 개월동안이나 갱신할 기미조차 안보인다.” 

 

 부장씨는 뿌루퉁한 얼굴이다. 아무래도 그는 정기적으로 그 엉터리 사이트를 방문하여 액세스 카운터를 올려준 장본인인 모양이다. 오 그렇군, 꼽등이 사건 때의 그건 그 때문에 생긴 일이었던 모양이군. 우리가 컴퓨터를 활용하고 있는지 아닌지 어지간히 신경쓰였을테지. 

 

 “그래도 내가 달라고 했을때 준다고 했었잖아. 쿈, 너도 기억나지,” 

 

 그랬냐. 아사히나 선배가 주저앉아있는 씬은 뇌리에 생생히 떠오른다만, 부장의 코멘트까지는 미처 신경 못썼다. 만에 하나 했다고 할 지언정 그때 부장씨는 심신박약 상태였을테니 그 거래는 무효 아니냐. 

 

 “단호히 항의한다.” 

 

 부장씨는 진심인 모양이다. 팔짱을 끼고 입을 굳게 다문 저 표정엔 나름 최선의 열기가 떠올라 있다. 반년이 지났으니 이제 포기할만도 하겠지 싶었는데, 오히려 점점 그 분노가 쌓여 더 커진 모양이다. 

 

 흐-응, 하며 하루히는 미소와 함께 끄덕였다. 

 

 “뭐 알았어. 그렇게 승부를 내고 싶으면 해주지뭐. 우리가 거는 건 컴퓨터지. 그래서, 너네는 뭘 걸거야?” 

 

 “뭐라니, 그 컴퓨터다. 우리가 지면, 그건 너희들 거로 해도 상관없다.” 

 

 하루히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건 이미 우리 거란 말야. 원래부터 있는 걸 받아봤자 하나도 안기쁘다구. 다른 걸 가져와.” 

 

 나도 모르게 그만 이 말투에 감동마저 느꼈다. 뭐가 어쨌든 간에 일단 자기 손에 넣은 물건의 소유권은 죽어도 자기에게만 귀속되는 모양이다. 나중에 도둑놈이라도 될 생각인가. 

 

 하지만 부장씨는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엷은 웃음을 짓더니, 

 

 “알았다. 너희들이 이기면, 새로……그렇지, 컴퓨터를 인원수 만큼 4대 증정하지. 노트북 타입으로 해도 되겠지?” 

 

 스스로 판돈을 올리는 말을 뱉어냈다. 이것엔 하루히도 허를 찔린 듯, 

 

 “어, 괜찮겠어?” 

 

 앉아있던 단장석에서 폴짝 일어나서는 부장씨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진짜지? 중간에 안되겠다, 관두자, 이런 거 용서못해.” 

 

 “그런 말 안하지. 약속하마. 혈판장(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손도장을 찍은 종이)이라도 가져오는게 좋을거다.” 

 

 어디까지나 강경한 부장씨였으며, 나는 과연 부장답다 싶었다. 

 

 아까전부터 나가토가 들고 응시하고 있는 CD 내용물이 아직 어떤 게임인진 모르겠지만, 제작측네만 끝까지 다 깨봤겠지. 컴퓨터연이 잘하는 류의 게임이 뭔지는 제쳐두고서라도, 생초보인 SOS단 멤버따위야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제대로 한다 치면 어떤 승부든 간에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전에 야구에서 이겼을 때는 나가토의 말도 안되는 사기매직의 결과로, 우리의 실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너네, 여자부원 없지?” 

 

 하루히가 난데없이 이상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없는데, 그게 왜?” 라는 부장씨. 

 

 “갖고 싶어? 여자 부원.” 

 

 “……아-니, 별로,” 

 

 최대한의 허세를 부리는 부장씨였다. 하루히는 나쁜 술집 여주인같은 웃음으로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만약 너네가 이기면, 얘를 컴퓨터연에다 증정할게.” 

 

 라며 가리킨 건 나가토의 얼굴이다. 

 

 “여자애 하나 갖고싶지? 유키라면 분명 즉시 전력감이 될거야. 뭐든 잘 외울 거 같고, 이중에서 제일 고분고분하고.” 

 

 이 또라이자식, 무슨 제안을 해대는거냐. 상대가 컴퓨터 넷을 거는데, 여기가 한 대라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기라도 한거냐. 컴퓨터 네 대랑 나가토하고는 스펙 차가 너무 크단 말이야. 너야 모를란가 몰라도. 

 

 “………” 

 

 경품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도, 나가토는 태연히 앉아있다. 그다지 움직이지 않는 눈이 한순간 나를 스쳐 하루히를 지나 컴퓨터연 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장씨는 명백한 동요의 표정으로 쫄아서는, 

 

 “아니……그래도……” 

 

 “왜? 미쿠루짱이 더 좋아? 그럼 컴퓨터 네 대론 부족하겠어? 그럼, 부상으로 우리가 이기면 너네 부를 ‘키타고 SOS단 제 2지부’로 개명해.” 

 

 “아……저기……그,” 

 

 하루히의 말에 아사히나 선배가 입가를 누르고 꼼짝 못하고 서자, 

 

 “니가 상품노릇 해.” 

 

 나는 발끈하고 하루히에게 다가갔다. 

 

 “언제까지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를 비품 취급 할 거냐. 내걸거면 니 몸을 걸면 되잖아. 니 맘대로 지껄이지 마라.” 

 

 “무슨 소리야. 신성불가침의 상징과 같은 존재, 그게 SOS단 단장이라구. 단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야. 난 이거다 싶은 사람 말곤 이 자리를 넘겨줄 생각 없어.” 

 

 너는 졸업하고도 여기 눌러살 작정이냐. 

 

 “그리고 말야, 이 세상 어딜 찾아봐도 내 자신과 등가교환 할수 있는 녀석이 있을 리가 없어!” 

 

 하루히는 억지같은 소리로 내 공격을 깔끔하게 피하고, 말없는 나가토와 할 말을 잃은 아사히나 선배를 번갈아 가리키고는, 계속 부장씨를 몰아세웠다. 

 

 “그래서, 누가 좋겠어?” 

 

 그리고 나를 곁눈질로 보며 덧붙였다. 

 

 “도저히 안되겠으면, 뭐, 나라도 상관없어.” 

 

 

 

 




 과연 부장씨는 하루히의 헛소리에 놀아나지 않았다. 주의깊게 그 시선을 쫓고 있던 내 관찰 결과에 의하면, 아무래도 나가토 근처 쪽에 한동안 망설임이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뭐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하구만. 

 

 그는 아사히나 선배의 가슴을 움켜쥐어버렸다고 하는, 책형(?刑:기둥에 묶어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에 상당하는 전과를 가지고 있기에, 그 범죄행위의 상대를 지명할 만한 배짱은 없겠지. 거기다 타니구치에 의하면 나가토는 알게모르게 꽤나 인기있는 모양이어서, 부장씨의 취향이 무언계 독서소녀와 일치할 가능성도 있다. 아사히나 선배에게는 얼굴도 제대로 들 수 없다는 게 이유중 하나일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여자부원이 갖고 싶다’고 표명하진 않을 정도의 조심성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뭐 당연한 결과다. 

 

 아, 하루히? 그 성격이 만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는 판에 이녀석을 지명할 남자는 진정 별난 놈임에 틀림없다. 부장은 하루히 이상으로 별나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도 안심하고 내비두는 거다. 




 

 

 




 그리하여, 싸움의 무대가 갖추어졌다. 

 

 일단 문예부실에서 나간 부장씨는, 부하들을 몰고 돌아왔다. 그들의 손에 있는 것은 노트북 컴퓨터로, 잘못볼 수도 없다. 상품 선불이라니 거 손 한번 크다 싶었는데, 이 게임엔 한 팀당 5대의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한다. 컴퓨터연인지 전기배선업자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의 기민함으로, 그들은 하루히 전용 데스크탑과 네 대의 노트북 컴퓨터를 LAN 접속 시키고, 이어 자체제작 게임 소프트를 설치하고 있었다. 녀석들이 하는 대화를 듣자하니, 시합내용은 5대 5로 하는 온라인 우주전투 시뮬레이션임을 알 수 있었다. 요컨대 SOS단측의 5대, 컴퓨터연 측에서도 5대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그 전부를 하나의 서버에다 묶어 대전하는 듯 했다. 우리는 우리 부실에서, 그들은 자기네 부실에서 자기네 컴퓨터를 사용해서. 

 

 물론 서버가 되는 컴퓨터는 자기네 부실에 있다. 흠. 그렇군. 

 

 “연습기간은 1주일 정도면 충분하겠지.” 

 

 부장은 부원들의 능숙한 움직임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면서, 

 

 “일주일 후 오전 4시 스타트다. 그때까지 솜씨를 닦아놓는게 좋을거다. 너무 약하면 맥빠지니까 말이지.” 

 

 이미 이겼다는 듯한 투인데, 그건 하루히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비품이 늘어서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음, 마침 서브 노트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였어. 역시 컴퓨터는 단원 수만큼 있어야겠지.  설비투자는 일하는 자의 모티베이션(motivation:동기부여)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한 법이야.” 

 

 내 모티베이션은 노트북 컴퓨터에 눈이 멀 만큼 싸구려가 아니다. 물론 거저 준다면야 받겠지만. 

 

 나는 완전히 식어버린 차를 마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나가토의 표정을 보았다. 아사히나 선배와 함께 벽쪽에 늘어서서 컴퓨터연 부원들의 작업을 지켜보는 무표정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평소처럼 차분한 것 같았다. 

 

 녀석들이 제작한 게임이다. 설마 싶긴 하지만, 수상한 바이러스가 들어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나가토도 가만히 있진 않았을 것이다. 이쪽 일은 너만 믿어도 되겠지. 컴퓨터연이 어떤 비기를 쓰든, 나가토를 따돌리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다 마신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아사히나 선배가 다가왔다. 

 

 “쿈군, 이거……뭐 하는 거에요? 저 별로, 그, 기, 기계는 잘 모르는데요……”


 곤혹의 얼굴과 함께 점점 늘어가는 전기코드에 시선을 떨어트린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게임이니까요, 적당히 놀면 되는거에요.” 

 

 그렇게 달래주었다. 실제로 그건 내 본심이다. 만약 진짜로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를 건 승부라면 나도 최선을 다할 것임에 일말의 주저도 없을 테지만, 하루히가 빼앗은 컴퓨터를 돌려주니 안돌려주니 하는 문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컴퓨터연이 내민 조건은, 내게 있어서 전혀 위험부담 없는 반환(no risk high return). 우리와 그들 사이에 그만큼의 핸디와 자신감의 차가 있다는 것도 있겠군. 

 

 “져도 본전, 이기면 횡재에요. 이번만큼은 하루히도 이러쿵저러쿵 못하게 할겁니다.” 

 

 나는 딱 잘라 말하고, 아사히나 선배의 불안을 싹 날려버리기 위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도 저, 스즈미야상은……. 무척 열심이신 것 같으신데요……” 

 

 하루히는 설명서로 보이는 복사용지를 손에 든 코이즈미를 옆에 두고선, 컴퓨터연의 철수도 기다리지 않고 단장석에 앉아 마우스를 쥐고 있었다. 

 


 궁수자리의 날-05

 
 무슨 이유에선지 만족스런 얼굴로 부장씨이하, 옆교실 부원들은 자랑스럽단 듯이 부실을 나갔다. 간만에 솜씨좀 부린 모양이구만. 

 

 그 후, 한동안 컴퓨터 각각의 작동확인 등을 하고 있었는데, 슬슬 해도 지고 있어서 오늘은 그쯤 해두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 다섯명이서 집단하교를 하고 있을 때 나와 코이즈미가 한 대화이다. 언덕을 내려가는 여자 3인조와 수미터의 거리를 두고, 먼저 말을 건 건 내 쪽이었다. 

 

 “이쯤에서 봉인해두는 게 좋을 거 같은 표현이 있다.” 

 

 “호오. 무엇이신지요.” 

 

 “맞춰봐라.” 

 

 코이즈미는 입술로 엷은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깊이 생각하는 척을 하던 것도 잠깐, 

 

 “제가 당신의 입장이라고 했을 때, 남용을 피하고 싶다 생각되는 표현은 그리 많지 않군요. 후보로는 무언의 ‘……’이나, ‘적당히 해라’ 등이 유력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이것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없이 있으니, 코이즈미는 한결같은 미소와 함께 정답을 말했다. 

 

 “으이그.” 

 

 서비스인지 어깨를 들썩하며 두손을 위로 올리는 제스처도 붙였다. 코이즈미는 손을 팔락팔락 흔들며, 

 

 “당신의 기분도 잘 알 것 같습니다.” 

 

 니가 알아줘서 좋을 거 같냐. 

 

 “아니요. 가능한 한 매너리즘의 심경에 빠지는 것은 회피하고 싶으신 마음이 있으신 거죠? 같은 리액션만 해서는, 타인이야 어떨지 모른다고 해도 자기자신은 질려버리고 맙니다. 몇 번이고 반복 플레이하여 이미 할 맛을 잃은 게임을 한번 더 할 생각이 들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당신은 질려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계신 겁니다. 스즈미야상과 마찬가지로요. 다른 것이라면 그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행동을 주체로 하여 생각하십니다만, 당신은 먼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받은 후 반응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자, 그럼 과연 어느 쪽 입장이 속편할까요.” 

 

 무슨 분석의(分析醫)같은 소리를 해대냐. 내 정신상태를 그런 억지스런 이론으로 보완하려고 하지 말란 말이야. 그런 걸로 따지자면 말하는 너는 어쩌고. 코이즈미 너야말로 무조건 하루히의 행동에 수동을 취하고 있을 뿐이잖아. 

 

 “저희들은 저희들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잊어버리셨나요? 저나 나가토상, 아사히나상은 서로 주의주장은 다르지만 거의 같은 목적으로 여기 있는 겁니다. 말씀드릴 것도 없이, 스즈미야상의 감시라고 하는 중대한 과제를 가지고 말이죠.” 

 

 그런고로 달랑 혼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SOS단에 끌려온 나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한다는 꼴을 보이고 있다. 참나 이건 대체 누구 꿍꿍이냐. 

 

 “제가 알 리가 없죠.” 

 

 코이즈미는 즐겁단듯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관찰대상의 신분이라면, 스즈미야상 뿐 아니라 지금은 당신께서도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당신과 스즈미야상이 무엇을 하시는지, 전전긍긍하면서도 저는 어쩐지 여유있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건 감사의 말씀을 드려도 될 정도군요. 정말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야 남일이라면 보는것도 재밌겠지. 

 

 문화제를 계기로 제정신을 되찾았는지, 계절을 표현하는 산바람도 왠지모르게 쌀쌀한 가을바람을 동반하고 있었다.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계절이다. 이제부터 추워지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니, 차라리 하루히의 포악스러움이 훨씬 나을 것 같다. 

 

 벌써 어두워져버린 길을 걷는 우리들 앞쪽에서 혼자서 떠들어대는 하루히와 어쩌다 한번씩 맞장구를 쳐주는 아사히나 선배, 그리고 등하교때는 걷기 이외의 기능은 없는 것 같아보이는 나가토가 한덩어리로 뭉쳐있다. 나가토의 가방이 불룩해져있는 건, 우리가 받은 노트북 컴퓨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걸 가져가서 뭐하냐는 내 질문에, 나가토는 게임 CD를 가방 속에 집어넣으며 “해석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해야 할 말을 한다. 

 

 “근데 코이즈미. 내가 제안할 게 하나 있다만.” 

 

 “제안이라니 웬일이신지요. 들려주시겠습니까.” 

 

 만약을 위해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기로 한다. 

 

 “이번 컴퓨터연하고 하는 게임 승부만큼은, 일단 사기는 치지 말도록 하자.” 

 

 “사기라면 무얼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신지.” 

 

 코이즈미도 작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야구대회 때 나가토가 한 ‘그거’처럼 말이다.” 

 

 까먹었다고는 못할거다. 

 

 “우선 네게 말해두는거다. 만약 너한테 시뮬레이션 게임을 유리하게 풀어갈 수 있는 초능력이 있었다고 해도 쓰지 말란 소리다. 초능력이 아니라도, 어떤 수단이든 간에, 규칙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내가 가만 안있을거다.” 

 

 코이즈미는 미소지으며 내 모습을 살피는 듯한 시선을 주더니, 

 

 “그 말씀은, 다른 생각이 있으셔서 하시는 말씀인지요? 아니면 저희들이 져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래.” 

 

 내가 인정. 

 

 “이번만큼은 우주인적 혹은 미래적, 또는 초능력적인 사기 기술은 봉인이다. 정정당당히 싸워서, 정당한 결말을 맞이한다. 그것이 최적의 방법이다.” 

 

 “이유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져도 잃는 건 도난품 컴퓨터 뿐이다. 그것도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는거니까 말야. 우리는 별 곤란할 일 없어.” 

 

 돌려주기 전에 아사히나 선배 화상집을 딴데다 옮겨놓을 필요는 있겠지만. 

 

 “들려주셨으면 하는 것은 컴퓨터의 시비 여부가 아닙니다.” 

 

 코이즈미는 재밌다는 어조로, 

 

 “당신께서도 알고 계시듯이, 스즈미야상께서는 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 이제 질 것 같다, 고 느끼시게 되면 폐쇄공간을 만들어내어 남몰래 난리를 치게 만드실 정도로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는 겁니까?” 

 

 “별 상관 없어.” 

 

 나는 하루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녀석이라도 이제 알아야 할 때다. 그리 뭐든지 지맘대로 척척 될줄 아냐. 더군다나 이번엔 하루히가 먼저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만큼 의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일에라도 나가토에게 초현실 능력 봉인사실을 알려줘야겠군. 아사히나 선배에게도 말해드릴까. 자신이 직접 기계치 사실을 고백해온 그녀에게 각별한 능력이나 아이템이 있다고는 상정키 힘들지만, 뭐, 이것도 만약을 위해서다. 

 

 코이즈미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뭐냐, 기분나쁘게. 

 

 “아뇨, 이상해서가 아닙니다. 부러운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내 어디에 선망을 느꼈단 거냐. 

 

 “당신과 스즈미야상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뢰관계가 말입니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알아먹겠군. 

 

 “모른 체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당신께서도 모르셨을 수 있겠군요. 스즈미야상께선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또한 그녀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니맘대로 내 신뢰 정하지마. 

 

 “일주일 후 게임 승부에 졌다고 해보죠. 하지만, 당신은 그렇다고 스즈미야상께서 폐쇄공간을 만들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신뢰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또한, 스즈미야상께선 당신이라면 게임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다. 이것도 신뢰입니다. 그녀가 단원의 몸을 걸겠다고 말씀하신 건, 저희가 질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겉으로 드러내시지는 않습니다만, 당신과 스즈미야상 두분께서는 이상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신뢰감으로 이어져 계신 겁니다.” 

 

 나는 침묵의 우물에 빠져들었다. 받아칠 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코이즈미의 추측이 내 마음 과녁 고득점 쪽에 박혔기 때문인가? 신뢰 운운하는 건 전문가에게 맡기도록 하고, 확실히 나는 하루히가 정신세계에서 폭주를 해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건 이 반년간을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SOS단 설립으로부터 영화촬영까지,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갖가지 것들이 우리 앞을 지나쳐갔다. 나는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보고, 거의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하루히도 그럴 거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석은 정말 그녀석은 진짜 멍청이다. 대책안설 정도로. 

 

 “시험해볼 가치는 있겠지.” 

 

 겨우 나는 할말을 만들어냈다. 

 

 “컴퓨터연하고 하는 게임대전에서 져서, 그걸로 하루히가 그 망할 회색세계를 만들어내기라도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니녀석들 사정이야 알게 뭐냐. 하루히랑 같이 세계를 뒤집어버릴테다.” 

 

 코이즈미는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자못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게 신뢰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부럽다고 느끼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코이즈미는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들은 척도 안하려고 하는 걸 알아챘는지 끝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뭐 됐다. 코이즈미가 저런 얼굴을 하는 데는 이미 익숙하다. 아사히나 선배가 부실에서 메이드 복장을 하고 있다거나 하루히가 언제나 근거없는 자신감에 넘쳐흐르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극히 일반적인 일이다. 

 

 그리고 나가토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희박한 존재감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하고 싶긴 했지만──. 


 일주일 후 대 컴퓨터연 전(戰)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궁수자리의 날-06


 어떻게 저떻게 해서 다음날 방과후부터, 옆방 부원들을 가상 적으로 삼은 우리들의 특훈이 시작되었다. 특훈이라고 해도 게임이나 하고 앉았는 거긴 한데, 그 컴퓨터연 제작에 의한 자체창작 게임을 급한대로 대략이나마 소개해둘 필요가 있겠지. 

 

 《The Day of Sagittarius 3》 

 

 …라는 게 게임 타이틀이다. 뭔가 폼나는 걸로 하려다가 오히려 의미불명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부인할 수 없긴 한데, 문제시해야 할 것은 알맹이기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걸로 치면 SOS단이란 그룹명을 쓰는 우리 입장이 난처해지니깐. 명칭과 활동내용의 무의미함 및 무관계함으로 치면, 시점을 전세계적으로 넓혀보았을 때 우리 단 이하가 몇이나 될까 싶다. 근데 3이라는 건 1이랑 2도 있었다는 거냐. 

 

 그거야 어쨌든, 먼저 《The Day of Sagittarius 3》이라는 게임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 설명부터 하자면──. 

 

 시대는 어느 시댄지 모르겠다. 엄청나게 미래인 것만은 확실한 모양이지만. 인류는 우주 밖으로 나아가, 나름대로 판도를 쌓아올리고 있다. 그런 우주 넓이의 스케일에서, 어느 항성계(恒星系)에서 펼쳐지는 영토 전쟁인 모양이다. 그곳엔 두 성간(星間)국가가 수립되어 있어서, 서로 국경선의 위치에 관하여 한도 끝도 없는 전쟁을 펼치고 있다. 편의를 위해 한쪽을 <컴퓨터연 연합>, 다른 한쪽을 <SOS제국>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전장이 우주공간인고로 각각의 국가는 우주군 함대를 상비하고 있고, 금방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 같은 사태가 발생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전력을 전선에 투입, 상대를 섬멸하는 그날까지 무익한 전쟁을 계속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거긴 외교나 모략이라고 하는, 순수한 전투행동을 저해하는 온갖 쓰잘데없는 커맨드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섬멸만이 있을 뿐이다. 이거 하루히 취향일지도 모르겠군. 

 

 스타트 시점에서는 화면은 거의 새까맣다. 모니터 하부에서 파랗게 빛나는 게 우리가 조작할 함대 유닛이다. 밑변이 짤막한 이등변삼각형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합계 5개, 가로로 늘어서 있다. 그것은 하루히가 전군을 통괄하는 <SOS제국>군의 전력 전부다. 유닛 하나당 우주전함이 15000척 내포되어있기에 총수 7만 5천, 그것 플러스 각함대에 소수 붙어있는 보급함부대. 그 전함들을 조종하여, 동수의 적 <컴퓨터연 연합>의 함대를 격파하면 승리조건 클리어이긴 한데, 이번 룰에선 양측의 대장함대, 우리의 경우엔 <하루히☆각하☆함대>의 기함, 상대는 부장씨 함대의 기함을 격파하면 전군 데미지나 격침수와 상관없이 그 시점에서 피격측의 패배가 된다. 

 

 함대는 한사람당 한부대의 함대가 주어져, 자신의 컴퓨터로는 자신의 함대유닛밖에 조종할 수 없다. 하루히가 아무리 혼자서 독주를 해댄다고 해도, 내가 쓰는 노트북 컴퓨터로는 손쓸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 

 묘한 구속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철저하게 색적(索敵:적의 위치를 탐색함)하지 않으면 적의 위치는 커녕 근처에 어떤 장애물이 떠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게 된다. 어쨌든 함대를 이동시키려면, 그 방향에 뭐가 있으며 어떤 물체가 굴러다니는지 우선 색적정을 파견해서 정보를 받아야만 하고, 그것도 그 색적정이 돌아와서야 비로소 그 범위의 상황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복잡함. 

 

 각 함대의 시야는 반경 몇센티(화면상 거리로)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색정행동을 소홀히 하고 직진을 해대면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으며, 더군다나 그 적의 위치도 알 수 없다는 말아먹을 상황이 발생한다. 

 

 단, 우리편의 함대끼리는 데이터링크로 연결되어 있어(라는 설정인가보더라), 예를들어 나가토 함대의 시야나 색적정이 가지고온 정보는 그대로 우리 전원의 것으로서 공유할 수 있다. 내가 아무짓도 안하고 있어도 새까만 화면 안 그 범위만큼은 밝게 표시되어, 혹성이나 아스테로이드 벨트(asteroid belt), 색적한 시점에서 적함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구조다. 

 

 그리고 전체 맵은 엄청나게 넓어서, 신속한 적의 위치특정과 행동예측이 명암을 가를 것으로 보인다. 

 

 사용하는 무기는 두종류, 빔과 미사일 뿐이다. 적이 사정거리 내에 있기만 하면 빔은 발사한 그 순간 명중하고, 미사일의 경우는 느릿느릿 날아가는 대신에 유도기능을 달 수가 있다. 다가오는 미사일이 유도모드로 설정되어 있다면 피할 수가 없으므로, 일일이 격추시켜야만 한다. 

 

 대충 그런 식의, 우주를 무대삼은 2D 함대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참고로 턴제가 아닌 리얼타임제로 진행되기 때문에, 느긋하게 성계나 탐색하고 앉았으면 곧바로 적의 밥이 되기 십상이다. 이 부분도 이상하게 가혹한 느낌이 들었다. 




 

 

 

 




 다가올 시합을 앞둔 우리들은 곧장 게임주간에 들어갔다. 하루히만 혼자서 책상 데스크탑, 그 외의 넷은 긴 테이블에 들러붙어 노트북 컴퓨터를 들여다보면서 마우스를 깔짝거린다고 하는, 꽤나 초현실적인 광경이 한동안 SOS단 활동내용이 되어있다. 연습은 대전모드가 아닌 CPU전 모드지만, 난이도를 베리 이지(very easy)로 해놔도 1승을 올리기까지 3일이나 걸렸으니 이쪽 게임 스킬 랭크는 거의 맨틀 아래를 수동드릴로 파는 수준이었다. 

 

 “아악! 또 졌잖아! 쿈, 왠지 열받는다, 이 게임” 

 

 CPU상대로 요 성적이니깐 말이지. 비단 하루히가 아니더라도 열이야 받겠지만, 게임 밸런스에 별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네 기함이 무턱대고 전방에 돌진해서 일방적으로 상대 포격을 받기 때문이다. 

 

 “전술도 바꿔야겠지만.” 

 

 나는 구슬픈 BGM과 함께 게임오버를 알리는 액정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먼저 함대 패리미터를 손보는게 좋겠지. 특히 네 기함 함대 말이다.” 

 

 각각 함대 유닛에 따른 전력 분배 패리미터가 셋 있다. ‘속도’ ‘방어’ ‘공격’ 이 그것이다. 플레이어는 맨 처음 포인트를 100 부여받고, 그 세가지 패리미터를 배분하는 것이 초기설정 화면이다. ‘속도·30’ ‘방어·40’ ‘공격·30’ 이 그 예 되겠군. 하루히는 이걸 갖다가 ‘속도·50’ ‘방어·0’ ‘공격·50’으로 해놓고 플레이하고 있으니, 그녀석 함대 장갑은 골판지나 마찬가지다. 우주를 얕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재빨리 움직여서 적을 박살내는 것 밖에 생각지 않는 지, 나나 코이즈미가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기함이 작살나면 이거야 원 도와줄 수도 없다. 

 

 “아 진짜! 귀찮아 죽겠네. 이런거 만들어서 뭐가 재밌는지 몰라. 나는 좀더 알기 쉬운게 좋은데,” 

 

 저런 불평만 늘어놓으면서도 하루히는 계속 리플레이하기 시작했다. 이 노트북 컴퓨터 화면에 《The Day of Sagittarius 3》의 로고가 재표시된다. 

 

 하루히는 재밌다는 듯이 마우스를 클릭하며, 

 

 “RPG로 했으면 좋았을걸. 그녀석들이 마왕인가 사신(邪神)같은 역 하고, 우리가 용사. 오프닝 끝나고 바로 최종 보스전을 하는 걸로 말야. 이런 생각 자주 드는데, 던전 안에서 할 일없이 기다리지 말고 처음부터 두목이 등장해주면 좋을텐데, 안그래? 내가 마왕이라면 그렇게 할거야. 그럼 용사들도 장황하게 미궁을 헤멜 필요도 없고, 이야기도 쉽게 끝나고.” 

 

 나는 헛소리를 해대는 하루히를 무시하고, 그 옆에 있는 우리 멤버들을 순서대로 바라보았다. 가장 하루히와 가까운 곳에 앉아있는 코이즈미 참모 총장, 그다음이 나, 그 옆이 아사히나 선배, 가장 구석에 나가토가 있다. 

 

 “이거 참 어렵네요. 뭐 제가 이런 식의 게임에 익숙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요. 심플하지만 매니악(maniac)한 조작성이로군요.” 

 

 적당한 감상을 늘어놓고 있는 코이즈미는 오셀로를 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밝게 미소짓고 있었으며, 필요하지도 않은데 메이드 의상을 입은 아사히나 선배는, 

 

 “에에, 전혀 생각대로 안움직여 주는데요-. 그런데 우주라는 설정인데 왜 행동범위가 2차원 한정으로 되어있나요?” 

 

 기본적인 질문을 하며, 어색한 손놀림으로 마우스를 깔짝거렸다. 

 

 이 둘은 뭐 괜찮다 치자. 남은 한명이 내게 있어선 최대 검안사항이다. 

 

 “…………” 

 

 고도의 수학적 의문에 마주선 수리학자와 같은 눈으로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는 나가토 유키. 이 게임에 가장 빨리 순응한 것도 이녀석이었던지라, 하루히의 저돌 맹진 일직선 전법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승리를 따낼 수 있었던 것은 나가토의 정확한 함대운영능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짐은 시켜뒀다. 마술인가 정보조작인가 하는 초 비기는 절대 쓰지 않게끔. 점심시간에 그렇게 말해뒀다. 몇초간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가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하여 동의, 내 어깨의 짐도 약간은 가벼워졌다. 덕에 스스럼없이 대전게임에 나선다. 만약 이런 상태의 우리가 이겨버렸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며, 잘못되어버렸기에 별 수 없다. 음, 책임회피 변명도 준비만만이다. 

 

 다음은 최대한 선전할 수 있을 만큼의 전술을 재검토하여, 분전 끝에 허무하게 패배한다는 연출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아사히나 화상 폴더를 CD나 다른 뭔가에다가 구워두는 것도 잊지말고. 




 

 

 

 




 높은 가을 하늘과 같이 순식간에 1주일이 경과하고, 비로소 대전의 시간을 앞두게 되었다. 

 

 하루히 통솔하의 우리는 문예부실 정위치에서, 컴퓨터 연은 자기네 부실에서 화면상의 카운트다운만 바라보고 있다는 상황이다. 

 

 플레이 전 모니터가 표시하고 있는 건 서로의 함대 소개 일람이다. 그렇다곤 해도, 알 수 있는건 명칭과 어느 부대에 기함이 배치되어있는지 정도로, 패리미터나 함대위치는 숨겨져있다. 

 

 컴퓨터연 유닛은 기함부대 필두에 <디에스·이라에> <이퀴녹스> <루퍼칼리아> <블라인드니스> <무스펠렘>이라는 퍼스널 네임이 붙어있었다. 

 

 거 참 아니꼬운 네이밍 센스구만. 아주 쑈를 해라. 그런 그들이 생각해낸 애칭의 유래를 그리 알고 싶지 않은 건 나뿐만은 아닌 듯, 

 

 “귀찮으니까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적 A·B·C·D·E 로 부르자. 기함부대가 A야.” 

 

 하루히는 단번에 적 함대 코드네임을 변경하고, 그대로 녀석들의 그 잘난 명칭은 잊혀지게 되었다. 이왕 하는김에 내가 지휘하는 <쿈함대>도 잊어줬으면 좋겠다만. 

 

 “좀만 있으면 시작이네. 모두 잘 알겠지?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해. 적은 컴퓨터연 뿐이 아니야. 모든 방해물들을 끝장내고, SOS단은 우주 저편까지 그 이름을 떨쳐야돼. 이참에 교육위원회랑 교섭해서 모든 공립학교에 SOS단 지부를 만들 생각이야. 야망은 크게 잡아야지.” 

 

 하루히의 과대망상 격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코이즈미는 건조한 입술을 엄지로 튕기고, 아사히나 선배는 메이드 의상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는 심호흡하는 척을 하고 한숨, 나가토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뭐 우리가 질 리는 없겠지만 말야. 이기는게 당연하다고 해서, 절대 봐주는건 없어! 금지야! 어중간하게 해선 소용없어. 끝장을 내버려야돼!” 

 

 항상 하는 생각이긴 한데, 이 자신감의 원재료는 뭘까. 2밀리그램이라도 좋으니까 내게 좀 줬으면 좋겠군. 

 

 “그래? 좀 주입시켜줄까?” 

 

 뭔진 모르겠지만 하루히는 갑자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심각한 얼굴로 나 보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대길이 나오진 않는다고. 

 

 그대로 10초정도 경과하자 나는 차마 버티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그러자마자, 

 

 “어때, 효과있지?” 

 

 하루히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 눈싸움에 무슨 효능이 있단걸까. 

 

 “시선에 에너지를 담아 보내줬잖아.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거나, 발한(發汗:땀이 남)작용이 촉진된다거나, 뭐 그런 느낌 들었지? 그래, 지금부터 기운없는 사람을 볼때마다 이렇게 해줄까나.” 

 

 제발 부탁이니까 사람 많은 데서 그딴 짓 하지마라. 하루히의 에너지 주입행위를 시비 거는 걸로 착각하고 달려드는 불순단체에게서 도망칠 방법을 시뮬레이트하고 있으니, 

 

 “얼마 안있어 시작입니다.” 

 

 코이즈미의 재밌다는 목소리가 닿아, 내 시선은 컴퓨터 화면으로 되돌아간다. 혼자서 긴장감을 감돌게 하고있는 아사히나 선배가 아주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지-. 자신 없는데….” 

 

 그렇게 심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게임에서 사상자는 안나와요. 나온다고 해도 화풀이로 작살난 모니터 정도일겁니다. 

 

 패배에 열받은 하루히가 컴퓨터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지 않기를 같이 빌도록 하죠. 

 

 

 

 궁수자리의 날-07


 16시 00분. 

 

 개전의 팡파레가 울려퍼지고, 컴퓨터의 소유권을 다투는 전쟁의 막이 올랐다. 

 

 당초 <SOS제국>이 계획하던 작전은 다음과 같다. 

 

 선봉에 <유키함대>, 그 뒤에 <코이즈미군 함대>와 <쿈함대>를 배치하고, 바로 그 뒤를 <미쿠루함대>와 <하루히☆각하☆함대>가 따라온다. 

 

 ──이상이며, 이하는 없다. 

 

 색적정 파견을 “귀찮아”란 말 한마디로 거부한 하루히는 적의 색적정을 파괴(destroy)하는 것밖에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적과 실제로 조우하기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게 뻔했다. 

 

 그보다 더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아사히나 선배는 각 함대에서 빼낸 보급함을 묶어다가 조종하게끔 하여, <미쿠루함대>를 가리키는 유닛은 다른 것들보다 약간 큰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만큼 움직임도 둔하게 되기 때문에, 내가 아사히나 선배에게 지시한 것은 “전투에 말려들게 되면 도망치세요.”라고 하는 실로 이로정연(理路整然:논리의 맥락 등이 정연함)한 행동지침이었다. 당연하지. 

 

 그리고 하루히 함대의 패리미터는 ‘속도·20’ ‘방어·60’ ‘공격·20’ 으로 설정해놨다. 이유는 이녀석 부대가 궤멸되면 곧바로 패배이기 때문에, 방어력을 중시하게끔 하는 것도 어쩔수 없는 결단이다. 직접 전쟁은 ‘33’ ‘33’ ‘34’란 평탄한 능력배분을 한 나가토, 코이즈미, 내게 맡기고 하루히 각하께선 후방에서 가만히 있으면 보스답기도 하고 시간도 벌고 일석이조 아니겠냐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긴 한데, 잠깐 한눈팔고 있었더니 앞으로 뛰쳐나갔다는 것이 서두의 그 씬이다. 

 

 그리고 지금, 처음에 살짝 언급했듯이 컴퓨터연과 SOS단의 시뮬레이션 게임 대결, 드디어 그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려고 하고 있었다. 

 

 “할수없지. 그럼 난 뒤로 물러나있을테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묵사발 내버려. 미쿠루짱, 같이 구경이나 하자.” 

 

 “아, 그……그래야겠죠,” 

 

 내 오른쪽에 앉은 아사히나 선배는 뒤늦게 끄덕이고, 한숨섞인 작은 목소리로, 

 

 “힘내세요, 쿈군.” 

 

 백종류 정도의 힘으로 부응해주고 싶을 정도의 성원을 해주는 것이었다. 기함부대가 <미쿠루함대>였다면 기꺼이 이몸이 나서서 총알받이를 해주었겠지만, 재수없게도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은, 내가 만약 봉건시대 실력파 호족이었으면 제일 먼저 반란을 일으켰을 악랄횡포 주군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게임에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는 커맨드는 없는 것 같았다. 없으니 할수없지. 어떻게든 눈앞의 적을 무찌를 뿐이다. 

 




 

 

 16시 15분. 

 

 나가토가 맹렬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스피드가 비유가 아닌 진짜 거기 있었다. 마우스같은 우회적인 걸 쓰기 싫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때문만이 아니다. 어느샌가 나가토는 《The Day of Sagittarius 3》를 조작하기 위한 독자 매크로를 만들어서, 자재로 함대를 운영하기 보다는 직접적인 입력방식을 구축한 모양이었다. 그 덕에 <유키함대>의 분전은, 비잔틴(Byzantine) 제국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동로마 황제, 재위 527~565) 재위시대의 명장 벨리사리우스(Belisarios:동로마제국의 무장)에 필적할 만큼의 놀라운 사자분신(獅子奮迅:사자가 성난 듯이 달림)의 기세인데, 그마저 중과부적(衆寡不敵: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맞겨루지 못함)인 판이다. 

 

 여기서 제대로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것은 <유키함대> <코이즈미군 함대> <쿈함대> 3개함대로, 적측은 모습을 내보이지 않을 것 같은 <디에스·이라에> (적A)를 제외한 4개함대다. 과거 전쟁역사를 읽고 배워야 할 게 하나 있다. 기본적으로 전쟁은 수로 결판난다. 3대 4로는, 그냥 해도 열세일게 뻔한 우리에게 승리후의 샴페인 파이트(champagne fight)를 할 기회가 올 확률은 낮으며, 그렇다고 하루히나 아사히나 선배를 끄집어낼 수도 없는 처지다. 전군이 모여 금방 끝낼수 있으면서 좀더 가지고 놀 시간을 서비스해주는 것만은 확정적이겠지. 

 

 “적은 저희를 학익진으로 유도하여 에워쌀 작정인 것 같습니다.” 

 

 코이즈미 참모 총장이 내게 속삭였다. 

 

 “이대로 추격한다면 상대가 형성한 포위망에 제발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일시정지하고, 전수방위를 따르는 것이 득책(得策:훌륭한 계책)이라 보입니다만.” 

 

 말이야 쉽지. 나야 괜찮지만 하루히가 뭐라고 할라나. 

 

 그리고. 

 

 나는 아사히나 선배 머리 너머로 정보참모 나가토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묘하게도 나가토가 뜻밖의 적극성을 보이고있다. 개시 초반에 지나지 않는 이 게임에서도 겉보기엔 평소 그대로의 무표정이지만, 디스플레이상의 <유키함대>는 다른 그 어떤 유닛보다도 기동력있는 움직임으로 작전행동에 임하고 있다. 대체 《The Day of Sagittarius 3》의 어디가 나가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걸까. 

 

 해석한다, 고 하는 나가토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평소엔 무감동을 의인화한 것 같만 같은 우주인조인간은, 컴퓨터연 제작의 자체창작 게임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숙지할 정도가 되어있다. 어쩌면 이 게임을 만든 녀석들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녀석한테 걸리기만 하면 현대 지구문명권의 컴퓨터따위 산업혁명 이전의 공장생산라인만큼이나 뒤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 누워서 떡먹기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가토의 눈 광채가 무광택 검정에서 실버 금속처리로 바뀌어 있는 게 약간 맘에 걸리기는 한데……. 

 

 그 전례가 없는 의욕을 보이는 나가토는 타이핑게임마냥 어지러울 지경의 움직임으로 연달아 키를 입력하고 있었다. 시선은 한순간도 한곳에 고정되지 않고, GUI(graphical user interface)의 은혜를 포기하고선 화면구석에 연 작은 윈도우창에다 손가락에 경련이 일 정도의 스피드로 커맨드를 입력하고 있다. 

 

 “…………” 

 

 <유키함대>는 기민하게 위치를 바꾸며 거듭 색적정을 뿌려, 거리를 좁혀오는 적함대 포착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도 현시점에서 판명된 적의 위치는, 우리 제국군 전방에 있는 <적B>와 <적C> 2개함대 뿐이다. 나가토는 그 두 함대와 호각을 이루며 혼자서 전선을 떠받치고 있다. 이거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가세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쿈함대> 측면에, 난데없이 빔 폭우가 쏟아졌다. 

 

 “뭐야?” 란 나. 

 

 “앗차차,” 란 코이즈미. 

 

 보자니 <코이즈미 함대>도 좌현 방향에서 오는 포격을 받고 있다. 어디서 나타난건지, 어느샌가 접근해있던 <적D>와 <적E>가 각각 좌우에서 나와 코이즈미 유닛 측면을 공격하고 있었다. 금세 <쿈함대>의 보유함 수가 줄어간다. 

 

 “뭐하고 있어!” 

 

 하루히가 노란 메가폰으로 나한테 외쳤다. 

 

 “빨리빨리 반격하란말이야! 반격!” 

 

 안그래도 할거란 말이다. 이놈들, 나가토의 색적망을 뚫고 여기까지 오다니 한가닥 하는 모양인데, 이쪽도 니들 맘대로 되게 놔두진 않는다. 

 

 나는 <쿈함대>에 방향전환을 지시, 전함 뱃머리를 우현으로 90도 회전시켰다. 그리고 사정범위 내로 적함 포착, 곧바로 전력사격──하려고 한 순간에, <적E>는 재빨리 유턴하여 심원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게 굉장히 열받아서 추격을 하려고 그 근처에다 색적정을 보내봤지만, 군함 하나 잡히지 않았다. 

 

 “젠장, 도망쳤잖아.” 

 

 아무래도 ‘속도’에 특화시킨 함대를 이용한 일격 이탈작전인 것 같았다. <코이즈미군 함대>의 좌현을 공격하고 있던 <적D>도 완벽한 타이밍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군, <유키함대>와 전투를 벌이는 <B> <C>는 미끼에 불과하고, <D>와 <E>가 주전력인건가. 그리고 기함부대 <적A>는 전투에 참가치 않고 어디 꼭꼭 숨어만 있는, 뭐 그런 작전인가보군. 

 

 “히에, 무서워요,” 

 

 아사히나 선배는 서투른 움직임으로나마 착실히 자기 함대를 이끌어 화면 한구석으로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너무 멀리 있으면 우리 함대는 보급선을 잃고 곧바로 무장 제로가 되어버리긴 한데, 이래가지곤 에너지나 미사일 재고에 신경쓸것도 없이 승부가 나버릴 것 같은 분위기다. 주도권은 처음부터 <컴퓨터연 연합>에게 있었다. 

 

 그 후도, 측면공격부대인 <적D>와 <적E>는 한번 남은밥을 줬더니 맛을 들여 저녁때만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동네 똥개마냥 홀연히 나타나서는 <쿈함대>와 <코이즈미군 함대>에 치고 빠지기(hit and away)를 감행, 쫓아갈라치면 유도미사일을 쏘며 도주해버린다고 하는 실로 지극히 짜증나는 전법으로 우리를 괴롭혀주었다. 한번에 끝장을 내는 건 가급적 피하고, 야금야금 이쪽의 전력을 잡아먹겠다는 속셈이로군. 하루히가 제일 싫어하는 패턴이구만. 

 

 한편, 고립된 채로 혼자서 계속 전진하는 <유키함대>는, 어찌어찌 제압되려고 하는 <적B>와 <적C>의 파상공세를 정교하게 흘리며 효과적인 반격을 시도하는 등, 만약 이녀석의 함대가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성간물질 파편조각이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더라도 감투상정도는 줄 수 있겠지. 

 

 “…………” 

 

 나가토는 마치 호흡을 하지 않는 듯한 얼굴로 두눈을 모니터에다 고정시키고, 한시도 키보드 혹사를 멈추지 않는다. 이건 컴퓨터연 녀석들도 의외였을거다. 나조차도 의외니까 말야. 

 

 하루히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어느새 나가토에게까지 전염되어버린거냐, 고 말이지. 

 

 


 궁수자리의 날-08


 16시 30분. 

 

 사태는 어느덧 고착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았다. 

 

 선두의 <유키함대>가 꽤나 버겁다는 사실을 깨달은 컴퓨터연은, <적B> 1부대를 대(對) 나가토 전용으로 남겨두고, 아직 행방을 알 수 없는 기함부대 <적A>를 제외한 3개부대가 번갈아가며 우리의 좌우를 공격한다고 하는 시간차 파상공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감탄스럽게도 <적C><D><E>의 연계는 아주 숙련된 솜씨였다. <C>에 대처하려고 하면 곧바로 <D>가 반대쪽에서 공격을 보태고, <D>를 쫓아 진격하면 <E>가 또 측면에서 빔을 쏘는 신출귀몰함, 왠지 이젠 수준을 알수 없는 상급자와 대전게임을 해봤자 하나도 재미없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컴퓨터가 몇 대나 걸려있으니 그럴 수도 없겠군. 

 

 하여튼 이것은 꽤 좋지않은 상황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9할은 질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진다고 해도 좀더 화려한 전개를 예측하고 있었다. 화끈하게 치고박고한 끝에 호쾌한 격침이라든가 해서 졌지만 좋은 게임이었다, 뭐 됐다, 서로 열심히 했으니까──같은 걸 말이다. 

 

 근데 뭐냐, 이 깨작깨작한 체력소모 작전은. 

 

 “더이상 못참아,” 

 

 예상대로랄까, 곧바로 하루히가 휘하 기함부대에 단순명쾌한 지령을 내렸다. 

 

 “전함대 전속력 전진! 쿈, 거기 방해되니까 비켜! 적 두목녀석을 찾아내서 개떡을 만들어놓고 올테니까!” 

 

 <쿈함대>와 <코이즈미군 함대> 사이에 끼어들려고 하는 <하루히☆각하☆함대>를, 나와 코이즈미는 물고기 무리처럼 순간의 연계로 제지하려고 했다. 

 

 “뭐하는거야! 코이즈미군까지 내 화려한 싸움을 방해할 작정이야? 됐으니까 비켜. 참모총장 해임시켜버린다,” 

 

 “그것참 난처하군요.” 

 

 라고는 하면서도, 코이즈미는 하루히 함대의 진로상에 있는 자기 함대를 이동시키려곤 하지 않는다. 

 

 “각하, 여긴 저희들에게 맡겨주십시오. 시답잖지만 소관 코이즈미, 목숨을 걸고 마지막까지 각하를 지켜야만 합니다. 소관의 진퇴여부에 관해서는 전투종료 후에 좋으실 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나도 코이즈미 편을 든다.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고 싶으면, 넌 가만히 처박혀 있어. 여긴 아직 적 기함도 발견못했단 말이다.” 

 

 “그니까 내가 발견해주겠단 거 아냐. 아마 이쯤에──” 라며 우리가 있는 곳에선 보이지도 않는 모니터 구석을 가리키며, “──있을 거 같으니까, 거기까지 일직선으로 가는거야. 그리고 거기서 높은 사람들끼리 진검승부를 할거란 말야!” 

 

 어딜 갈 작정이신진 모르겠다만, 도착하기도 전에 <하루히☆각하☆함대>는 아직 겨울잠 전인 곰의 습격을 받은 벌집처럼 되는거 아니냐. 

 

 하루히는 아래쪽에서 함대를 쭉쭉 돌진시키며 마우스를 쥔 주먹을 쳐올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봤자 똑같단 말야. 아까부터 계속 보자하니까 이 <쿈함대>, 있는 적이란 적은 전부 놓치고 있잖아. 그리고 점점 전력도 줄어가고. 역시 내가 나가야돼.” 

 

 “그니까 하지 말란 말이다,” 

 

 나는 우리 함대를 조종하여 기함부대의 진로를 가로막고, 코이즈미도 은근슬쩍 반대쪽에서 같은 움직임, 그딴 거 알게뭐냐는 듯 <컴퓨터연 연합> 3함대는 일격이탈공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아사히나 선배의 <미쿠루함대>는 한참 옛날부터 우주공간의 미아가 되어있었다. 

 

 “여긴 어디에요-? 아아앙, 어디가 오른쪽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른쪽에 앉은 아사히나 선배는, 내 노트북 컴퓨터와 자기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반 울상인 얼굴로, 

 

 “모두 어디로 가버리셨나요-?” 

 

 아 이거참 죄송합니다. 아사히나 선배께는, 아무데나 좋으실 대로 떠돌아다녀주시라고 밖에는. 

 

 <하루히☆각하☆함대>가 <쿈함대>에 끈덕지게 붙어있는 바람에 나까지 맘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 하루히의 방패 역을 해주는거나 마찬가지이니, 적의 끊임없는 공격에 의해 내 유닛을 가리키는 삼각형은 점점 작아져간다. 

 

 “비켜!” 

 

 비키고 싶어도 못움직여 임마. 박정한 <코이즈미군 함대>는, 하루히한테 추돌당하기 전에 은근슬쩍 이탈하고, 모르는 척한 얼굴로 <적D>와 포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하루히 붙잡기역을 나한테만 맡겨놓을 심보냐. 

 

 “젠장,” 

 

 나는 <하루히☆각하☆함대>와 합체중인 자군 전력을 어떻게든 자유롭게 만들고, 마우스 왼버튼을 마구 눌러대며 포인터를 적당한데다가 이동시킨다. <쿈함대>의 삼각형은 크게 수축하여, 달팽이걸음으로 느릿느릿 방향전환을 하긴 하는데, 그래봤자 달팽이는 달팽이다. 그 러는 사이에도 내 부대는 적에게서 록온(rock on)되어 빔과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젠 끝이다. 

 

 내가 백기를 들고 싶어진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해줬으면 한다. 이쪽 대장이 이래가지고는, 만에 하나의 승기가 오려고 해도 맘 변해서 도망쳐버릴거다. 어느 판이든 그렇겠지만, 역시 윗대가리가 냉정치 않으면 조직은 원활히 움직이지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대충 그렇지 않냐? 

 

 나와 하루히가 현실은 물론 전자공간 내에서도 옥신각신 하고 있을 때, SOS단내에서 대국적인 시야의 넓이와 냉정함을 가지고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던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고 느낀 이유는, 테이블 구석에 있는 단원의 손가락 움직임 속도가 더욱 가속되어, 기어이는 고감도 카메라로 촬영하고 나서 슬로모션으로 재생하지 않는 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짜증이 난 나머지 폭발하는 것은 하루히의 역할이며 전매특허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반드시 그것만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지금 여기서 그 누구보다도 격앙(激昻:감정이 격해짐, 몹시 흥분함)하고 있는 것 같은 인물, 그건 우리 SOS단이 자랑하는 지식인 정보참모 및 독서매니아 문예부원──. 

 

 나가토 유키였다. 

 

 

 

 

 

 

 

 

 




 

 

 

 

 

 

 


 

 16시 35분. 

 

 “으잉?” 

 

 모니터에 믿기 힘든 광경이 홀연히 등장하여, 나는 무심코 얼간이같은 소리를 내버리고 만다. 

 

 “뭐냐 이건,” 

 

 <SOS제국> 전군의 색적종료범위가 한번에 세 배가 되어있었다. 출현과 소멸을 반복하던 적 <C><D><E>의 현재위치도 훤하다. 하나는 좌익방향에서 코이즈미 부대를 향해 사격을 미(微)조정 중이고, 하나는 이탈직후의 반전을 지금 막 끝내려던 참이었고, 또 하나는 이리저리 엉켜있는 <쿈함대>와 <하루히☆각하☆함대>를 노리고 진군중이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적의 움직임을 알 수 있게 되었냐고 하면……. 

 

 <유키함대>가 20개로 분열되어 있었다. 

 

 “오오 이것은,” 

 

 코이즈미가 내는 상찬의 목소리가 내겐 가식으로 들린다. 

 

 “과연 나가토상이십니다. 기어이 이 방법을 쓸 생각이 드셨군요. 저도 한번 생각해봤습니다만, 너무 번잡해지기 때문에 입안시에 포기했더라죠.” 

 

 “잠깐 코이즈미.” 란 나. “이런게 설명서에 써져있었냐?” 

 

 “있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이긴 합니다만.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먼저 컨트롤키와 F4키를 동시에 누르면서 숫자키로 분산하는 함대의 수를 결정하고──” 

 

 “아니, 됐다. 난 할 생각 없어.” 

 

 다시한번 모니터를 자세히 봐본다. 

 

 방금전까지 <유키함대>였던 삼각형 유닛이 괴광선이라도 맞은 듯이 축소되어있다. 그 대신이라고 말하기도 뭐하지만, 다른 똑같은 게 20개나 있다. 한번 그중 하나에다가 마우스를 대보니 <유키 분(分)함대12>라 표시되었다. 

 

 분함대? 

 

 01부터 20까지 넘버링된 그 작은 삼각형들은, 어떤 건 지금까지처럼 <적B>상대로 포격전을 속행하고 있었고, 또 어떤건 적함 사이를 뚫고 미지의 우주공간을 날아가고 있었으며, 다른 어떤것들은 좌우에 산개, 그리고 또 다른 것들은 크게 턴(turn)하여 고전하는 <쿈함대>에 가세해주는 것이었다. 

 

 코이즈미, 해설해라. 

 

 “그러니까 말이죠. 일단 함대 유닛을 둘 이상으로 나누어 개별적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상한은 분명 20이었던가 그랬죠. 설명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무슨 이점(merit)이 있냐?” 

 

 “보시다시피 색적범위가 현격히 향상됩니다. 그만큼 보는 눈이 는다는 거죠. 또 있습니다. 예를들어 함대를 둘로 나누어두면, 하나를 미끼로 두고 다른 쪽에 있는 적의 배후를 찌른다거나 말이죠. 하지만 결점(demerit)이 더 큰고로 컴퓨터연 쪽에서도 작전으론 쓰지 않는 듯 합니다.” 

 

 코이즈미는 내게 얼굴을 들이대며, 하루히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복수(複數)의 함대조작을 혼자서 해야 한단 말씀입니다. 하나를 움직이고 있는 사이엔 나머지를 움직일 수 없으며, 그저 허수아비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20개나 되는 분함대를 동시에 조작한다니, 인간의 능력으론 불가능하죠.” 

 

 옆방에서 기절초풍하고 있을 녀석들의 표정을 상상하며, 나는 옆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봐 나가──” 

 

 묵묵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가토의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스타카토(staccato)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들어봐도 탁탁탁탁…이 아니라, 다다다다 라고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저, 저기요……. 그렇게 세게 치면 부서지는 거……” 

 

 무서워 떨며 아사히나 선배가 말을 아뢰는데, 나가토는 들은 척도 안한다. 그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나하고 가보니깐, 나가토의 컴퓨터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게임 화면이 아니라 검은 배경에 흰 영문 숫자 및 기호밖는, 무슨 옛날 컴퓨터 BIOS 설정화면 같은 것이었다. 

 

 그게 또 무지막지한 속도로 스크롤되고 있다. 

 

 “왜?” 

 

 라며, 나가토가 나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아-그게 말이다,” 

 

 저기-, 나가토씨? 당신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온지요. 

 

 마음속으로 하는 혼잣말도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될 정도로, 나가토가 키를 두드리는 모습에서는 무형의 압박이 느껴졌다. 

 

 문득 내 모니터를 확인해보니, 20개로 분산된 <유키함대>는 마치 생명을 불어넣기라도 한 것마냥 생동감 있게 움직이며 적을 농락하고 있었다. 완전 화상의 유무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니, 잠깐만. 난 사기는 치지 말라고 했다. 

 

 “하고 있지 않아.” 

 

 라고 나가토가 중얼거렸다. 이때 처음으로 내쪽을 바라보고, 하지만 손의 움직임은 그대로, 

 

 “특별한 정보조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부과된 룰을 준수하고 있다.” 

 

 나가토의 시선상에서 떨어지듯이, 아사히나 선배가 흠칫하며 그 조그마한 체구를 멀리 떨어뜨린다. 나가토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나는 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아.” 

 

 “그, 그러냐. 그거 미안하군.” 

 

 어쩐지 무시무시한 오오라가 그 쇼트커트 머리 위로 피어오르고 있는것 같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가토의 표정이며 눈빛이며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기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라면 “응”하고 입을 다물 녀석이, 이때만큼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그것은 고발의 말이었다. 

 

 “사기라고 불리울 만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 컴퓨터연 쪽.” 

 

 
 궁수자리의 날-09

 
 때마침 하루히는 자기 유닛을 <쿈함대>에서 빼내는 데 성공하고, 

 

 “느려! 왜이렇게 느려터졌어? 컴퓨터에다 영양드링크 뿌리면 빨라질까.” 

 

 같은 헛소리를 하면서 좋다고 자기 함대를 전선으로 이동시키는데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아사히나 선배 앞으로 몸을 가져가 나가토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놈들이 사기를 치고 있다니, 무슨 소리냐?” 

 

 초고속 블라인드 터치를 잠시도 정체시키는 일 없이, 나가토는 무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들은 우리 컴퓨터 내에 존재하지 않는 커맨드를 사용하여, 이 유사 우주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고자 하고 있다.” 

 

 “어떻게 된 거야?” 

 

 나가토는 한순간 침묵했다가, 생각을 정리하듯이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색적모드·오프.” 

 

 라고 하더니, 이어 차분한 어조로 말해주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컴퓨터연 측이 사용하고 있는 게임은 처음부터 그 ‘색적모드·오프’라는 상태로 설정되어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에겐 그런 전환스위치는 없었으니, 온이랑 오프가 뭐가 다른지도 모른다. 뭐냐 그건. 

 

 “온으로 할 시 색적행동이 의무화된다. 오프의 경우엔 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색적 시스템을 형해화(形骸化:내용이 없고 모양뿐임)시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그러니까,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 

 

 “색적모드를 오프로 하면, 맵 전체가 라이트업(light up) 표시된다.” 

 

 그러니까……, 

 

 “맵 전역이 우리 함대위치를 포함하여 처음부터 완전 노출.” 

 

 나가토 치고는 알아먹기 쉬운 설명이군. 

 

 “그것뿐만이 아니야.” 

 

 그 웃지않는 우주인제 인공생명체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것에 의하면 <컴퓨터연 연합>측의 기함에는 워프기능까지 달려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타이밍 좋게 모습을 감출수 있었구만 그래. <SOS제국>하고는 기술수준에서 500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전국시대의 보병한테 자위대 기갑부대가 달려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가지곤 이길 리가 없잖냐. 

 

 “그래.” 

 

 나가토도 보증해준다. 

 

 “우리에겐 패배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없었다──라. 과거형이로군.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현재형으로 바꿔 말해줬으면 한데, 나가토의 검은 눈동자에 전에 본적 없는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고 나는 살짝 머리를 잡으며, 

 

 “근데말이다, 나가토. 그래도 우주 초능력 파워는 없이 했으면 한다. 녀석들이 얕은 수작을 부리는 건 잘 알겠다. 그래도말야, 그렇다고 우리가 또 사기마법을 써서 대항한다면, 결국엔 녀석들과 똑같아진단 말이다. 아니 그 이하다. 네 마술은 그다지 지구상 법칙에 따르지 않으니까 말이지.” 

 

 “너의 지시에 위반될 것은 없다.” 

 

 나가토가 속답했다. 

 

 “지구의 현대 기술수준에 따라 프로그램에 수정을 가하고자 한다. 기지(旣知)공간의 정보결합상태엔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인류수준의 능력에 맞추어, 컴퓨터 연구부로의 대항조치를 취하겠다. 허가를.” 

 

 나한테 하는 말이냐. 

 

 “내 정보조작능력을 제한한 건 너.” 

 

 …………. 

 

 이녀석이랑 만나고 벌써 반년이 넘었다. 그 사이에, 나는 나가토의 무표정 속에 숨겨진 미묘한 감정적 변화──이녀석한테 멀쩡한 감정이 있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를, 불완전하나마 다소간에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때 내가 나가토의 하얀 얼굴에서 피코(pico:1조분의 1)단위로 찾아낸 것은, 틀림없는 결의의 빛이었다. 

 

 아사히나 선배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코이즈미도 보고 있지만, 이녀석은 반웃음이다. 하루히만 혼자서 왼갖 소리를 지르며 빔이랑 미사일을 기세좋게 쏴대고 있어서, 얼마 안가 총알이 전부 떨어져 적진 한가운데에 남겨져 끝장이 나겠지. 결단에 남겨진 시간은 얼마 없다. 

 

 뭐라고 하지……그리 고민한 것은 몇초 정도였다. 나가토는 의욕에 차있다. 이런 나가토는 처음 봤다. 이것은 좋은 징조란 생각이 들어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보통합사념체에게 제조된 인간 판박이 유기 안드로이드. 의외로 이녀석도 일반 로봇에게 있을 법한, 인간이 되고싶다고 하는 욕구가 생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게 좋지 않은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좋아, 나가토. 해버려.” 

 

 나는 나가토를 격려하는 미소를 지어 마지막 확신까지 주었다. 

 

 “이 세상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뭐든 하고 싶은대로 해봐라. 컴퓨터연한테 한방 먹여주는거야. 두 번다시 우리한테 찍소리도 못하게, 하루히가 바라는 결말을 보여주라고.” 

 

 나가토는 꽤 긴 시간동안, 내 주관으로는 엄청나게 길게 느껴진 시간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어.” 

 

 그에 비해 대답은 매우 짧았으며, 그리곤 나가토는 실행키를 눌러, 단지 그 하나만으로 형세가 갑자기 역전되었다. 




 

 

 

 




 16시 47분. 

 

 교활한 함정은 이미 파이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움에 놀라울 뿐이지만, 내 경악 게이지는 그녀석들에 비하면 아직 아무것도 아니리라. 대전상대인 컴퓨터연 녀석들은 지금쯤 세계 경제공황 2일째의 월스트리트만큼이나 패닉상태에 빠져있을게 틀림없다. 

 

 모든 것은 나가토가 아까전부터 조종하고 있던 분신들이 이끌어낸 결과다. 같은편이라서 다행이다. 배를 갈라서라도 공물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다음에 재밌어보이는 책 하나 사서 선물해주마. 그러고보니 이녀석 생일은 언제로 되어있을까.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상황설명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적함대 수는 플레이어의 망연함을 구현하듯이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나가토는 자기 노트북으로 컴퓨터연 컴퓨터 5대에 침입, 가동되고 있는 《The Day of Sagittarius 3》 프로그램을 직접 손 좀 본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게 가능한지는 묻지마라. 내가 알 리가 없잖아. 알리야 없지만 목적은 단 하나, 상대측의 색적모드를 전부 온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에 따라 <컴퓨터연 연합>의 가시범위는 크게 줄어들었다. 아마 화면에 새까만 부분이 늘어났겠지. 녀석들은 색적정을 날릴 필요가 없었고, 또한 실제로 전혀 날려놓지 않았다는 정보참모님의 보고시다. 

 

 나가토는 한술 더떠 상대측의 ‘색적모드’가 온 상태로 고정되게끔 녀석들의 소스를 갈아넣어버리고, 또한 자기 외엔 아무도 수정 못하게 락을 걸어버렸다. 다만 워프기능은 삭제 대신에, 살짝 변경만 하고 그상태로 놓아둔다. 나가토 고안에 의한 약간의 모략이다. 

 

 이것 전부를, 게임중인 20대의 함대를 매끄럽게 조종하며 그전의 우주인적 능력 없이 해왔다는 말이니, 사람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이녀석은 역시 예삿놈이 아니다. 

 

 “자, 드디어 찬스 도래로군요.” 

 

 코이즈미가 유쾌한 미소를 섞어 화면상 상황 내레이션을 해주었다. 

 

 “봐주십시오. <적C>와 <적D>는 무수한 <유키 분함대>에 막혀 저희 위치를 놓쳤습니다. <적E>는 저와 교전중이며, 그리고 <적B> 말씀입니다만, 이대로라면 얼마안가 <하루히☆각하☆함대>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적 발견!” 

 

 하루히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울려, 코이즈미의 대사를 증명했다. 

 

 “쏴라 쏴라 쏴라 쏴라-!” 

 

 하루히는 모니터에다 이마를 대다시피 하여 빽빽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굴레에서 풀린 <하루히☆각하☆함대>는 사방팔방에다가 빔과 미사일을 쏴대며 적함대를 향해 돌격했다. 이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적B>는 허둥지둥 급속회전, 도망치려는 곳 앞에는 내 <쿈함대>가 기다리고 있다. 

 

 “이거나 먹어라,” 

 

 나는 검지를 살짝 움직여 <적B> 코앞에다가 갖고 있던 빔이란 빔은 모조리 갈겨댔다. 

 

 “야 쿈, 그건 내밥이야! 이리 넘겨!” 

 

 협공을 당한 <적B>는 눈 깜짝할 새에 모습이 사라져간다. 선체를 비비 꼬던 <적B> 유닛은 비로소 작은 삑 소리와 함께 가루가 났다. 한놈 끝. 

 

 하루히는 더 많은 사냥감을 찾아서, 이동식 발사 불꽃놀이 장치로 변한 함대를 이번엔 <적E>옆쪽으로 전진시킨다. 코이즈미와 밀고 당기고 하고 있는 <적E>는 또 2정면전투를 강요당한 결과로 함대수가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괴롭게 전투를 감행하던 <적E>가, 이젠 온갖 방책이 다했는지 마지막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그때까지 결코 <SOS제국>군 앞에서만큼은 쓰지 않던 비기 커맨드를 강행했다. 

 

 “앗, 없어졌다! 에? 왜?” 

 

 하루히의 외침, 나는 이어 그때가 왔음을 알았다. 그때까지 십자포격을 당하던 중심에 있던 <적E>가 사라졌다. 

 

 워프라는 거다. 뭔가 좀더 폼나는 이름이었으면 좋겠지만, 이래가지곤 워프도 아니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나가토가 판 교활한 함정의 중심이었다. 

 

 “어. 뭔 다른 녀석이 나타났어.” 

 

 하루히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이미 손을 놓고 있었다. 

 

 “꺄?” 

 

 아사히나 선배도 귀엽게 놀라고, 계속 눈을 깜빡이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쿈군, 제가 움직이고 있던 게 어디로 가버렸는데요……” 

 

 워프한 것은 <적E>뿐만이 아니다. <하루히☆각하☆함대>만 놔두고, 우리편 적편 할 거 없이 모든 함대가 공간이동을 하고 있었다. 

 

 나가토가 변경한 프로그램, 그것은 ‘컴퓨터연 중 어느 하나의 함대가 워프기능을 기동시키면, 적 아군 구별없이 <하루히☆각하☆함대>를 제외한 모든 함대도 동시각에 강제적으로 워프된다. 각함대에 대한 워프후의 출현좌표는 지정한 코드에 따른다.’,고 하는 것이었다. 

 

 눈에는 눈, 사기엔 사기. 다만 너무 지나치지 않게. 

 

 옆방의 경악은 색적모드때하고는 비교도 안되겠지. 내가 게임시작이래 처음으로 본 컴퓨터연 기함함대 <적A>(디에스 뭔가 하는거)를 화면상에 발견, 그 출현위치를 확인하고 어깨를 들썩해보였다. 

 

 “인과응보란 거다,” 

 

 부장씨의 <적A>는 <하루히☆각하☆함대> 정면에 나타나고 말았다. 

 

 그 뒤에는 같이 날아온 상처하나 없는 <미쿠루함대>가 닿을듯 말듯한 거리에 있었고, 거기에 쇼트워프한 <코이즈미군 함대>에 의해 우현에 공격을 한방 먹고, 반대측 좌현공격을 담당하는 것은 원래대로 합체한 <유키함대>였으며, 대각 옆으로는 있으나마나하게 작아진 <쿈함대>가 대기하고 있다. 컴퓨터연 녀석들이 어디에 있나 보니까, 그 넓은 맵 저 구석지에 네 함대가 전부 모여있었다. 저렇게 멀리 있으면 무슨 수를 써도 도와줄 방법이 없다. 

 

 <SOS제국>군 전함대에 의한 포위망 속에서, <적A> 1개함대만이 남겨져 있었다. 

 

 “어떻게 된건진 잘 모르겠지만,” 

 

 하루히는 입맛을 다시며 발랄한 표정을 지어, 크게 한 손을 들어올렸다. 

 

 “전함대 전력사격! 적 대장한테 지옥을 보여주도록!” 

 

 그 신호와 함께, 하루히, 코이즈미, 나, 나가토의 함대가 일제히 무장 방출을 시작했다. 허둥지둥하던 아사히나 선배도, 나가토의 “쏴”라는 차가운 목소리에 움찔하며 사면초가의 <적A>에게 이날 최초의 공격을 먹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라는 아사히나 선배. 

 

 뭐가 뭔지 모르겠는 건 하루히가 아니라 컴퓨터연 부장이겠지. 저 뒤쪽에 숨어 강건너 불구경이나 하고 있자니 난데없이 사기색적이 해제되고, 아무짓도 안했는데 갑자기 워프한 끝에 적진 한가운데에 출현하게 되었으니까. 

 

 “으, ……” 

 

 이그, 하고 이으려다가 말을 삼켰다. 코이즈미가 실실 미소짓고 있다. 무시다, 무시. 

 

 다시 화면에 주의를 돌리니 부장씨의 <적A>함대는 전후좌우의 근접 거리에서 빔 샤워와 미사일 비를 맞으며, 거꾸로 뒤집힌 남생이(민물거북)처럼 버둥거리고 있었다. 음, 이번만큼은 자업자득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불공평한 짓을 한 건 그쪽이 먼저니깐 말야. 그래도 뭐, 존재 자체가 불공평한 나가토 유키를 갖고 있는 우리도 그리 잘난 척은 못할라나. 

 

 나가토의 속사포 키 타이핑은 결국 마지막까지 쉼없이 이어졌다. <적A>함대는 발칸포 잔탄 카운터처럼 순식간에 그 수가 줄어갔고, 최후의 한척마저 <유키함대>의 도트단위로 정밀조준된 빔에 저격당하여, 그것이 적함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설픈 팡파레가 울리고, 5대의 모니터에 반짝이는 문자가 표시되어 게임은 끝이 났다. 

 

 『You Win!』 

 

 


 궁수자리의 날-10


 17시 11분. 


 결말이 나고 약 10분 후, 부실 문을 노크하는 자가 나타났다. 

 

 비틀거리며 들어온 것은 컴퓨터연 녀석들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부장씨는 자포자기한 듯한 말투로, 

 

 “졌다. 완패다. 깔끔히 인정하마. 미안하다. 사과하마. 용서해줘라. 본 대로다. 너희들을 얕보고 있었다. 실수였어. 완패가 당연했다…” 

 

 하루히는 고개를 푹 숙이는 부장씨 앞에서 해시계처럼 코가 높아져있었다. 컴퓨터연 부원들은 자신들을 노려보는 하루히 각하의 시선을 받으며 좋지 않은 얼굴색으로 고개를 떨군다. 

 

 “너한테 모조리 들통이 났었다니……. 우리가 얕은 수를 쓴 건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플레이 중에 게임 내용을 바꿔버릴 줄이야……. 도저히 믿을수가 없지만서도……사실은 사실인가……” 

 

 허구의 세계로 가버리고 말것만 같은 눈으로 부실을 빙 둘러보는 부장씨에게, 하루히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뭘 쫑알거리고 있어? 진 변명따윈 듣고싶지 않다구. 아참, 약속은 기억하지?” 

 

 흥에 겨워 손가락은 흔들고 있다. 승리의 기쁨에 너무나도 겨운 나머지 터무니없이 부자연스러운 승리를 따낸 것에 대한 의문은 머리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이녀석 개념으로는 말그대로 이기면 장땡인 것이다. 

 

 “이제 불만없지? 이 컴퓨터는 내 거고, 저 노트북들도 전부 우리거다. 까먹었다고는 못할거고, 만약 한다면 꽤나 험한 꼴 당할줄 알아. 그래, 먼저 ‘녹색 난쟁이가 쫓아온다-’고 소리지르면서 맨몸으로 교정을 10회 왕복하는 형에 처해야지.” 

 

 그 택도 없는 소리에 컴퓨터연 부원들은 더더욱 고개를 심히 떨군다. 그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마음이 쓰였는지, 

 

 “아…, 참, 차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친절한 아사히나 선배가 일어서 주전자 포트로 향하고, 쓴웃음을 지은 코이즈미가 서랍에서 종이컵 다발을 꺼내고 있었다. 나가토는 파이프 의자에 앉은 채, 하루히 앞에 정렬하여 고개를 떨군 남학생들을 농담 하나 안먹힐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루히는 좋다고 계속 잡 연설을 해대고 있었는데, 그 부원 줄에서 한명, 부장씨가 흔들거리며 내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너말이다,” 라며 그는 가는 목소리로, “그건 대체 누가 한거냐? 세계 상대로도 먹힐 그 초고수 해커는. ……아니, 대충 짐작은 간다만……” 

 

 나가토가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고, 부장씨는 나가토를 보고 있었다. 

 

 뭐 그렇지. 역시 외부인이 봐도 이런 영리한 일을 할만한 녀석은 나가토가 최고 유력 후보로 보이는 모양이다. 

 

 “저기 할말이 있는데,” 

 

 부장씨는 나가토에게, 

 

 “네가 한가할 때만이라도 좋다. 가끔이라도 좋으니 컴퓨터연 부활동을 해보지 않겠냐? 아니, 해주지 않을래?” 

 

 갑자기 권유를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무더위에 3일간 방치된 냉동 꽁치같던 눈빛이 지금은 활기를 띠고 있다. 본심을 드러내려면 정색하고 나서는 수밖에 없겠지만서도. 

 

 나가토는 모터를 내장한것만 같은 동작으로 얼굴 방향을 부장씨쪽으로 이동시켜, 그 동작을 역회전시키듯 하여 내쪽을 돌아봤다. 그 어둠에 싸인 유리같은 눈빛엔 물어보고 싶다는 빛을 반사시키며, 아무말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 

 

 뭘까. 염파라도 보내고 있냐. 아니면 판단 여부를 내게 맡기겠다는 의사표시냐. 그런 얼굴을 해봤자(라곤 해도 무표정이다만) 나만 난감하다고. 너한테 묻는거다. 그런 거쯤이야 니가 알아서 판단하면 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내가 나가토처럼 무언의 광선을 대답 대신 보내고 있으니, 

 

 “잠깐 잠깐, 거기서 뭐하는거야,” 

 

 하루히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희들 맘대로 유키를 대여한다니 말도 안돼. 그런 이야기는 나를 통해서 하도록,” 

 

 역시나 데빌 이어(devil ear), 다 들렸던 모양이다. 하루히는 두손을 허리에 얹고는, 금방 칭찬해주고 싶어질 만큼 잘난 척 폼을 재더니, 

 

 “알겠어? 얘는 SOS단에 필수 불가결한 침묵 캐릭터야. 내가 맨 첨에 점찍어둔 거니까 나중에 와봤자 늦었어. 절대 안줄꺼니깐 말야!” 

 

 니가 점찍어둔건 나가토가 아니라 부실이었을텐데. 

 

 “됐어! 유키 포함으로 받은거니까 그게 그거야. 난 이 부실에 있는건 뭐든지, 김빠진 콜라라 할지라도 절대 남한테 안줘.” 

 

 그건 내거니까, 하며 거리낌없이 세일러복 가슴을 위세좋게 펴는 하루히였다. 

 

 “아니, 잠깐,” 

 

 내가 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래봬도 나는 나가토의 표정을 읽는 데에 관해선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다. 난 3년전의 나가토 유키도 만나본 적 있는 사람이다. 안면상의 감정적 표현을 거의 완벽하게 억제하고 있는 나가토지만, 아주 무표정인 것도 아니라는 걸 나는 느끼고 있었고, 루프모드 여름방학 사건때도 그랬고, 이번 게임 대결에서도 어떻게 알 수가 있었다. 그래, 언젠가 시립도서관에 데리고 갔을때도 느꼈던 거다. 

 

 나가토에게도 나름 관심이 가는게 적으나마 있긴 있다. 

 

 컴퓨터연과 벌인 《The Day of Sagittarius 3》 대전에서 그 누구보다도 의욕에 차 있었던 것은 하루히가 아니라 나가토였다. 독서이상의 열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키펀치(key punch). 그게 사기트릭의 봉인을 명한 내 말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닌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그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이 왠지 즐거워 보였던 것이다. 복잡한 책을 읽는 것 외에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면, 그리 부정해야 할 일도 아니잖아? 이 SOS단 아지트에서 부실 부속품이 되어있는 것보다도, 타인을 접하며 조금이라도 학교생활에 녹아들어보는게 이녀석에게 있어서도 기쁜 일이 아닐까. 

 

 언제까지고 스즈미야 하루히의 감시역만 해가지고서는, 제아무리 나가토라도 지칠 게 틀림없다. 아무리 우주인제 유기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라고 할지라도, 가끔은 기분전환이 필요한 법이다. 

 

 “네 좋을대로 해라.” 

 

 오늘만큼은 부장씨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컴퓨터 조작 재미있었냐? 그럼, 네가 내킬 때만이라도 좋다, 옆방에 가서, 컴퓨터 좀 만지작거리다 와. 자체제작 게임 버그라도 제거해주면 고마워해 할거다. 분명 우리네보다 성능 높은 놀이도구가 잔뜩 있을테고 말야.” 

 

 나가토는 말없이, 하지만 미세하게 표정을 변화시키며 나를 보고 있다. 그래도 괜찮겠냐고 묻고 있는 듯 하기도 했고, 어쩌면 좋겠냐고 묻고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나가토의 새까만 눈동자에 흔들리는 그림자 같은게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실제론 눈 세 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었겠지. 

 

 “……응,” 

 

 뭐가 응이냐고 캐묻기 전에, 나가토는 고개를 끄덕하더니, 부장씨를 올려다보고 옥타브 변화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이라면.” 

 



 당연히 하루히가 투덜거렸다. 

 

 “이긴건 우린데 왜 우리 소중한 단원을 대여해줘야 되는데. 대여료는 비싸, 1분당 천엔이 최저 라인이야!” 

 

 분당 천엔이면 내가 하고 싶군. 

 

 “스즈미야 각하,” 

 

 차를 홀짝거리던 코이즈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진정한 주군은, 때에 따라 패군의 건투를 기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강한 것만이 아닌, 도량의 넓이를 보여주는 것도 최고의 자리에 서는 조건 중 하나입니다.” 

 

 “아, 그래?” 

 

 하루히는 입을 오리 주둥이처럼 하더니, 

 

 “뭐, 유키가 좋다면야 괜찮지만……. 그래도! 노트북은 안돌려줄거야. 아, 그리고 말이지,” 

 

 말하는 도중에 명안이 떠오른 모양이다. 하루히는 부장씨를 노려보며 씨익 웃어보인다. 거 면상한번 바쁘구만. 

 

 “알았지? 너네들은 패잔병, 승자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해야돼. 그게 전쟁이란 거야.” 

 

 얌전히 찻쟁반을 들고있던 아사히나 선배에게서 차(카리가네였든가?)를 낚아채서 벌컥벌컥 들이마시면서, 

 

 “너네들 전부, 이제부터 나한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해. 음, 걱정할거 없어. 난 실력주의니까 말야, 열심히 하는 정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정식 단원으로 올려줄수 있어. 그러니까……그래, 학생회랑 전면대전할 때는 내 손발이 돼서 일해. 그때까지는 준단원이야.” 

 

 이 기세로 전교학생을 SOS단 단원화 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라는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루히는 의기양양하게, 

 

 “코이즈미군, 얼른 조인서 만들어줘.” 

 

 “알겠습니다, 각하.” 

 

 어린 황제를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외척 재상과 같은 미소로 대답하며, 코이즈미는 막 자기 것이 된 노트북 컴퓨터를 이래저래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이후도 부실 풍경이 각별히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돼지에 진주 상태인 노트북 컴퓨터만 쓸데없이 늘었을 뿐이다. 아사히나 선배는 메이드 차림으로 여기저기 먼지를 턴 다음 가스렌지에다 주전자를 올려놓고, 코이즈미는 혼자서 백개먼(backgammon:주사위놀이의 일종)을 하고 있었고, 나가토는 테이블 구석에서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으며, 하루히가 다시 무슨 말을 꺼내기 전까지의 평온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변절없는 SOS단적 나날의 방과후에, 극히 드물게 독서광 우주인 모습이 보이지 않을때가 있다. 없나 싶으면 몇 분후에 또 홀연히 나타나서 독서를 개시하니, 역시 내 인식상으로는 나가토가 이 부실의 진짜 주인과 같은 것이었다. 

 

 “…………” 

 

 해외 미스테리 소설을 원서로 읽는 나가토를 얼핏 봤을때는, 언뜻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속이 변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글세. 그건 나도 모르겠군. 

 

 나가토는 여전히 여기에 이렇게 잘 있다. 변덕스런 산들바람처럼 옆방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 같다. 그걸로 충분하다. 

 

 “쿈군, 여기요. 이번엔 중국 차에 도전해봤어요. 후후……어때요?” 

 

 조심스레 미소짓는 아사히나 선배에게서 내 찻잔을 받아선, 천천히 맛을 보면서 마셔봐도 지금까지 마셨던 차랑 뭐가 다른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당신께서 주시는 거라면 잡초 주스라도 기가막힌 맛일게 틀림없습니다요. 

 

 나는 내 감상을 기다리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뭐라고 대답해야할까하고 적절한 단어를 뒤지기 시작하며, 당분간은 이상한 사건에 말려들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 예상이 큰 오산이었다고 판명된 것은, 그로부터 1개월 후, 겨울방학과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12월 중순쯤의 일이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존재가 사라졌을 때, 나는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궁수자리의 날 끝







 서장 · 겨울 


 스즈미야 하루히에 관해서 여러 가지 드는 생각이 많은 건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내가 이녀석을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이런 캐치카피가 될 것이다. 

 

 일본 핵미사일의 발사버튼을 맡겨선 안되는 여자, 여기 엄존(儼存:엄연히 존재함, 확실히 있음)하노라. 

 일반론으로 보통 여고생이 그런 걸 맡게 될 확률은 만분의 일도 안되지만, 이녀석에 한해서는 만분의 일의 확률이 억이 되든, 혹은 마이너스 거듭제곱이 얼마나 이어지든 전혀 상관없는 소리다. 어디까지나 맡게 되느냐 아니냐 둘중 하나다. 카운트다운 타이머도 안붙어있는데 작동시켜버린 시한폭탄보다도 그 질이 나쁘며, 멜트다운(meltdown:원자로의 노심의 용융)이 될 게 뻔한 원자로보다 골치아픈 것이긴 한데, 그게 작동정지는 안되더라도 일단은 안전하게 만들어 놓는 것 만큼은, 사방팔방에 폐를 끼친 후에야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알고 있었다. 

 

 그건 이녀석의 무료함을 어떻게 저떻게 해서 달래서, 한순간만이라도 핵미사일 따위는 잊게하는 것이다. 당분간만이라도 좋으니 다른 무언가에 열중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집 삼색고양이 샤미센한테 페트병 뚜껑만 던져주면 3분정도는 들러붙어 있는 것과 같은 원리로, 그 무언가에 매달려있을 테니까──. 

 

 뭐, 전에 나온 코이즈미의 주장의 요지이고, 그녀석은 아직도 그 의견을 바꾸지 않는 것 같다. 

 

 그런고로, 우리는 또 웃기지도 않은 꼴을 당하게 되었다. 

 

 당했다(遭う)? 아니 진짜로. 만나는(?う) 것도 맞는(合う) 것도　만나는(逢う) 것도 아니다.(주:전부 ‘あう’로 똑같이 읽히는 동사입니다) 지금만큼 이 단어가 딱 어울리는 경우도 많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진짜 완전히 완벽(perfect)할 정도로 조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설산증후군(雪山症候群) 



 “큰일이네,” 

 

 내 앞을 걷고 있는 하루히가 본심을 토로하듯이 말했다. 

 

 “앞이 전혀 안보이잖아,” 

 

 여기가 어디냐고? 여름방학엔 고도(孤島)엘 갔다. 그럼 겨울방학엔 어디에 갈지 하루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된다. 

 

 “이상하군요.” 

 

 코이즈미의 목소리는 맨 뒤에서 들려온다. 

 

 “제 거리감에 따르면, 진작에 산기슭에 도착했을텐데요,” 

 

 힌트는, 춥고 하얀 곳이다. 

 

 “추워요……으으” 

 

 마구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아사히나 선배의 목소리가 끊겼다 말았다 한다. 나는 뒤돌아서서, 새끼오리처럼 허둥지둥 걸어오는 스키복 차림의 선배를 확인했다.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여주고 다시 선두로 시선을 되돌린다. 

 

 “…………” 

 

 앞에서 우리를 이끌고 있는 나가토의 발걸음도 어쩐지 무겁게 느껴진다. 즈려밟는 흰 결정이 접착되듯이 스키화에 들러붙어, 한걸음 걸을때마다 무게가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럴만한데가 어디밖에 더있겠냐? 

 

 귀찮다. 정답을 말해주지. 

 

 보이는 거라곤 순 흰색뿐이고, 가도가도 하얀 눈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여긴 설산(雪山:눈 쌓인 산, 3권 무료편 고도증후군에서는 ‘눈 덮인 산’으로 의역) 외의 그 어디도 아니다. 

 

 그것도 눈보라가 옵션으로 추가된 놈이다. 

 

 눈보라치는 산장에 가려 한 결과, 그 설산에서 절찬 조난중──. 그것이 지금 우리가 놓여진 상황을 설명하기에 더없이 알맞다. 

 

 자. 이건 분명히 누가 예정한 스토리일 것이다. 이때만큼은 결말이 있는 시나리오의 존재를 믿고 싶다. 안그러면, 우리 다섯명은 여기서 사이좋게 동사(凍死:얼어죽음)의 체험에 직면하여, 봄이 돼서야 녹은 눈 밑에서 냉장상태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코이즈미, 어떻게 좀 해봐 임마. 

 

 “그런 말씀을 하셔도 말이죠,” 

 

 나침반에 시선을 떨어뜨린 코이즈미는, 

 

 “방향은 분명히 맞았을 겁니다. 나가토상의 네비게이션도 완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벌써 몇시간째 산을 내려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이건 결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죠.” 

 

 그럼 어떻게 된거냐고. 우리는 영원히 이 스키장에서 못나간단 거냐? 

 

 “비정상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나가토상께서도 원인을 모르겠다시니, 불측사태가 발생했다는것 밖에는 알 수 없군요.” 

 

 그딴거 나도 알아. 선두를 걷는 나가토가 길을 못찾고 헤매고 있으니, 이건 상당히 이상한 일이다. 

 

 또냐. 또 하루히가 무슨 택도없는 생각을 해버리고 만거냐. 

 

 “무조건 그렇다고 할 수도 없군요. 이건 제 감각이 느끼는 감입니다만, 스즈미야상께선 결코 이런 현상을 바라신 게 아니라고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스즈미야상께는 산장에서 벌어질 이상한 밀실살인사건극을 기대하고 계셨을 테니까 말이죠. 저도 그를 위해 여러모로 궁리해두었으니까 말이죠.” 

 

 여름에 이어 겨울 합숙을 한 곳에서도 살인(murder) 게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전번엔 꽤나 충격적이었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연극임을 밝히고 하는 추리대회다. 실은 등장인물도 똑같아서, 고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라카와 집사에 모리 소노 메이드, 타마루씨 형제가 또 같은 역이름과 설정으로 연극을 해주기로 되어 있다. 

 

 “분명히……” 

 

 실제로 하루히는 범인과 범인특정에 다다르는 트릭 해명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니, 오늘밤에도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산장에 돌아가는 길을 무의식적으로라도 거부하고 있거나 하진 않겠지. 

 

 덧붙여, 거기엔 임시 엑스트라로 츠루야 선배와 내 동생, 그리고 샤미센까지 와있어서, 우리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은 우리가 묵고 있는 산장은 츠루야가(家)에서 소유하는 별장이다. 그 밝고 명랑하신 분께서는 자기도 따라간다는 걸 조건으로 합숙소 제공을 흔쾌히 승낙하고, 샤미센은 코이즈미가 고안한 트릭 소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동생은 지 맘대로 내 짐더미에 붙어있었다. 그 두사람과 한 마리는 지금 이 조난 멤버엔 들어있지 않다. 샤미센은 산장 맨틀피스(mantelpiece:벽난로의 둘레 부분, 또는 벽난로 위에 장식으로 단 선반) 앞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을 거고, 츠루야 선배는 스키를 탈 줄 모르는 내 동생이랑 같이 눈사람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광경이다. 

 

 셋다 하루히 기준으로는 대략 SOS단 준단원이며, 재회를 저지할 이유는 그 누구에게도, 특히 하루히에게는 있을 리 없다. 

 

 그럼 왜냔 말이다. 왜 우리는 난방 빵빵한 SOS단 동계 합숙소로 귀환을 하지 못하는 것이더냐. 

 

 나가토의 힘을 쓰고도 길을 못찾겠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일이냐? 

 

 “여름엔 비바람에 겨울엔 눈바람이라……” 

 

 학교가 장기휴가에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인지를 넘은 현상에 조우해야만 한다는 법칙이라도 생긴거냐? 

 

 의문과 불안이 섞인 환미를 맛보며, 나는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거지?” 

 

 그럼 회상 모드, 스타트. 

 

 ……… 

 

 …… 

 

 … 



 겨울방학에 합숙을 한다는 건 거의 결정된 미래나 다름이 없었고, 그런 미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 실제로 그렇게 돼도 별로 놀랄 것도 없다. 

 

 어차피 여름방학 첫날부터 출발한 살인 고도투어(태풍동반)가 끝났나 싶었더니, 곧바로 돌아오는 페리 선상에서 드높게 선언을 해댔으니, 누가 선언했냐고 하면 그것은 하루히 외에 그 누구도 아니며, 그 결의표명을 얼렁뚱땅 받아들이고 만 것은 하루히 외의 우리이며 투어 컨덕터(tour conductor)로 임명당한 건 코이즈미이다. 

 

 겨울이 되면 또 다른 거에 정신이 팔려있어주리라고 약간은 기대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단장님께선 그런 거에만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으신지, 

 

 “송년 카운트다운 in 블리자드(blizzard:눈보라).” 

 

 스태플러로 찍힌 종이다발이 전원에게 돌아갔다. 다 나눠준 하루히는 유괴범이 아이에게 짓는 것 같은 웃음으로, 

 

 “예정대로, 이번 여름은 눈덮인 산장에 갈거야. 미스터리어스 투어 제 2탄!” 

 

 장소는 부실이며, 시간은 종업식이 막 끝난 24일이다. 긴 테이블 위에는 전자렌지에 얹힌 냄비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우리는 식재료가 대충 섞여있을 뿐인 그 냄비에 둘러앉아 점심 대신 먹고 있었다. 

 

 하루히가 순 엉터리같은 순서로 투입하는 고기 생선 야채류를, 행주를 뒤집어쓴 메이드버전 아사히나 선배가 긴 젓가락으로 열심히 젓고 섞고 하는 한편, 그저 먹기만 하는 나와 나가토와 코이즈미 SOS단 5인조와 더불어, 오늘은 스페셜 게스트가 초대되어 있었다. 

 

 “우와, 엄청 맛있다. 뭐야 이거? 와구와구……혹시 하루냥(주:하루히를 부르는 츠루야의 애칭) 요리 천재? 와구와구……이야아-. 국물이 끝내줘, 국물이. 쩝쩝,” 

 

 츠루야 선배다. 이 활기넘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묵묵히 먹기만 하는 나가토에 맞서 일일이 소리를 지르며 젓가락을 고속이동시켜 냄비 내용물을 자기 접시에 옮겨놓고는, 

 

 “역시 겨울엔 냄비야! 방금 쿈군 사슴쇼도 진짜 웃겼고, 이야~오늘은 정말 신나고 좋다-” 

 

 웃어주신건 츠루야 선배 혼자밖에 없으셨습니다요. 하루히랑 코이즈미는 시종일관 히죽거리기만 하고 있었고, 아사히나 선배는 중간에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고, 나가토에 와서는 대체 어디가 웃긴 것인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나는 정말 더 이상 배길래야 배길 수가 없는 기분을 최대한으로 실감하며 식은땀을 폭포처럼 흘리고 있었다. 사람을 웃기는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를 계기로 예능인만큼은 하지 말자고 마음을 굳혔는데, 뭐 그건 됐다. 

 

 츠루야 선배는 단지 냄비파티나 아사히나 선배 보조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페셜 게스트인 것이다. 그럼 대체 어떤 스페셜이냐고 하면……. 

 

 “그 눈보라 산장말인데,” 

 

 하루히는 산장의 수식어를 눈에서 눈보라로 업그레이드시키더니, 

 

 “기뻐해, 쿈. 뭔고하니! 츠루야상네 별장을 무료로 쓰게 해주기로 됐어. 뭔가 엄청 좋은 덴가보더라. 벌써부터 기대돼네! 자, 맛있게들 먹어!” 

 

 하루히는 츠루야 선배의 접시에다 돼지고기 덩어리를 투하시키고, 이어 자기 접시에도 잘 익은 아귀 조각을 확보시켰다. 

 

 “항상 가족이랑만 가는데 말야,” 

 

 츠루야 선배는 입에다 집어넣은 돼지고기를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키더니, 

 

 “올해는 아빠가 유럽 출장으로 없거든. 그참에 새해 3일(三が日)이 끝나면 스위스 가서 스키 타기로 돼버려서. 그래서 별장은 너희들이랑 같이 갈거야! 왠지 재밌을거 같기도 하고,” 

 

 아사히나 선배가 살짝 꺼낸 합숙 이야기를 들은 츠루야 선배가 그렇게 제안하고 나선 모양이었다. 코이즈미도 얼씨구 잘됐다 하면서 찬성, 하루히에게 겨울 합숙여행서를 제출하니, 하루히는 사시미를 통째로 받은 고양이처럼 아주 기뻐하며, 

 

 “츠루야상한텐 이걸 증정할게!” 

 

 책상 서랍에서 꺼낸 맨 완장에다가 ‘명예고문(名譽顧問)’이라 갈겨써서 건네줬다──그렇다. 


 설산증후군-02

 

 코이즈미는 실실 쪼개며 하루히와 나가토와 츠루야 선배에 의한 많이먹기 선수권 대회같은 식사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 

 

 “안심하시죠. 이번엔 깜짝쇼가 아니니까요. 미리 양해를 구하고 하는 추리게임입니다. 실은 멤버도 저번 때와 같습니다.” 

 

 집사 아라카와 씨와 메이드 모리 씨, 타마루 씨 형제 합계 네분이 이번에도 연극을 해주실 예정이랜다. 그거야 좋지만, 그 네분 평소엔 뭐하시는 사람들이냐? ‘기관’인가 하는 데 사무직원 쯤이나 되냐. 

 

 “모두 저와 아는 사이이시며 소극단 배우십니다……는 어떤지요.” 

 

 하루히만 납득을 한다면 뭐 그래도 상관없다. 

 

 “스즈미야상께선 재미만 있으면 다른건 전혀 신경쓰시지 않습니다. 그게 최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요……. 시나리오에 만족해주실지 어쩔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입니다.(*직역:위가 아픕니다.)” 

 

 그러면서 코이즈미는 위를 누르는 제스처를 했는데, 표정은 미소 그대로라 어설픈 연극으로밖에 안보이네 그려. 

 

 나는 하루히보다도 되먹은 인간이라, 칠칠맞게 좋아라 놀기만 하고 하고 뒷일은 하나도 생각지 않는 낙천적인 놈은 못된다. 나를 안심시켜줄 게 뭐가 있나 하고 둘러보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나가토의 무표정 얼굴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나가토였다. 내가 쭉 봐왔던 평소 그대로의 나가토 유키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냄비요리를 마구 먹고 있었다. 

 

 “…………” 

 

 뭐 어쨌든. 

 

 이번만큼은 나가토에게 부담이 갈 만한 사태는 피하도록 하자. 아니, 안 갈거다. 순서로 따지자면 이번엔 괜찮아야 할 차례다. 여름합숙에선 나가토가 묘한 활약을 할 씬은 없었다. 겨울 합숙에서도 그래줬으면 좋겠다. 고생하는 건 코이즈미와 그 동료들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든 종이다발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 종이조각에 적힌 스케줄에 따르면, 출발은 12월 30일. 섣달그믐(大晦日) 전날이다. 설산이라곤 해도 그렇게 멀진 않고, 열차로 몇시간 흔들리다 보면 그날 안에 도착한다. 

 

 일단 도착한 그 날은 스키 삼매경, 밤엔 모두 모여 연회(알콜 엄금), 요리는 여름에 이어 집사 아라카와 씨(가짜 집사긴 하지만 진짜 집사보다 더 진짜같았으니 달리 할 말이 없다)와 모리 소노 씨(역시 가짜 메이드였지만 이하동문)가 담당해주신다고 한다. 타마루 씨 두분께서는 그 다음날 아침에 늦게 도착한 손님으로 등장, 그때부터 추리게임의 전조가 시작되기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섣달그믐을 사건발생과 트릭의 해명에 맞추어 오전 0시 전에 전원 집합, 제각각 준비해온 추리를 ‘독든 초콜렛 사건’의 순서에 맞추어 공개, 최종추리자로 내정되어있는 코이즈미가 경쾌하게 정답을 말해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말끔히 해결된 후 끝나가는 한해에 작별을 고하며, 다가올 새해에 인사의 말을 전한다. 환영합니다! 

 

 …라는 계획이랜다. 

 

 얼굴을 드는 하루히의 득의만면한 얼굴이 내쪽을 향해있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어떻게 그리 득의만면하신 건지 궁금하구만 그래. 

 

 “새해는 성대하게 치러줄거야,” 

 

 하루히는 젓가락으로 파를 집으며, 

 

 “그러면 새해도 기뻐할거고, 엄청 좋은 한해가 될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구. 내년은 SOS단의 전기(轉機: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하는 계기, 전환하는 기회)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세월을 맘대로 의인화시키는 건 좋은데, 네게 있어서의 좋은 한해가 우리 전원에게 있어서 좋은 한해가 될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 나는 올해가 엄청 재밌었고 내년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넌 안그래? 아, 미쿠루짱, 국 쫄아들기 시작했으니까 물좀 더 넣어줘,” 

 

 “아 네네-,” 

 

 아사히나 선배는 동동거리며 주전자 쪽으로 다가가더니, 

 

 “읏차,” 

 

 무겁다는 듯이 들고 온 주전자를 냄비 위에서 주의깊게 기울였다. 

 

 그 화려한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올 한해 겪은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고, 약간 감정이 흔들렸다. 하루히는 올 한해가 엄청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럼 내가 재밌었는지 아니었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그거다. 

 

 어렸을때 뭔가 신기한 일이 없나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내 초심이었다. 그거야말로 우주인이든 뭐든 상관없이, 그 방면의 무언가가 나와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이야기에 동참하고 싶었으니까 말야. 망상이 실현되었으니 기뻐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계속 같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내심 그런 생각을 하지만서도 본심은 이렇다. 

 

 아아, 즐거웠다. 

 

 지금은 확실히 딱 잘라 말할 수 있다. 이 경지에 다다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다만, 또 하나의 본심을 말하자면, 조금만 더 평온이 계속되어줬으면 좋겠다. 내 주관으로는  부실에서 노는 그 이도저도 아닌 사건 사이사이의 간격이, 약간만 더 있어주길 바랬다. 

 

 “이상한 소리 하네,” 

 

 하루히는 아귀 간으로 입을 가득 채우며, 

 

 “계속 놀고만 있었잖아. 설마 너, 아직도 노는게 부족하단 거야? 그럼 올해가 가기전에 라스트 스퍼트를 올릴까” 

 

 “쓸데없는 짓은 안해도 돼,” 

 

 이녀석은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어떠한 사태와 조우하였으며, 어떻게 헤쳐나갔는지를. 야구를 이기게 한다든지, 여름방학을 끝낸다든지, 영화 때문에 이상해져버린 현실을 복구시킨다든지, 과거에 갔다왔다가 또 가고, 거기다 또 한번 가기로 결정되어 있다고. 내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그 누구를 탓할 생각도 없지만, 나중에 교직을 잡을 예정도 없는데 이 시기에 이렇게나 바쁘단 말이다. 

 

 뭐, 하루히한텐 이런 말은 할 수 없지만. 

 

 “스퍼트하는 건 산장에 가서 해도 늦진 않을거다.” 

 

 나는 하루히가 내민 젓가락을 몰아내듯이 냄비에서 배추를 집어올렸다. 날이면 날마다 있는 하루히 특제 냄비가 아니다. 식욕왕성한 여성진(아사히나 선배 제외)에게 다 뺏겨버리기 전에 먹어두자. 언제 또 먹게 될지 모른다. 

 

 “뭐,” 

 

 하루히는 기분좋게 소 내장을 자기 접시에 옮겨놓는다. 

 

 “스퍼트에 이어서 스파크도 할거야. 알겠지? 섣달그믐은 사실 일년에 한번 뿐이잖아. 한번 생각해봐. 그해의 그날은 생애에 한번밖에 없단 말씀. 오늘도 그렇고 말야. 오늘도 지나가면 두 번다시 안와. 그러니깐 말야, 후회 남지않게 살지 않으면 오늘한테 미안해진다구. 나는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매일을 지내고 싶어.” 

 

 하루히는 꿈을 꾸는 듯한 어조로, 옆에서 설익은 닭고기를 물고있던 츠루야 선배가, 

 

 “와우. 하루냥, 365일 내내 있었던 일 전부다 기억하고 있어? 대단하다-, 아, 미쿠루-, 차좀 줄래,” 

 

 “아 네네,” 

 

 찻주전자를 손에 든 아사히나 선배는 신중하게 츠루야 선배가 내민 손님용 찻잔에다 엽차를 따른다. 완전히 잔심부름꾼이 되어 있는데도, 정작 아사히나 선배 본인은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루히는 지 맘대로 휘젓는 냄비요리에 너무나도 재밌어하고 있고, 코이즈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를 배경으로 하고서까지 우아한 인상을 주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나가토는 묵묵히 들리지도 않는 입소리로 열심히 먹어대고 있다. 명예고문이 되신 츠루야 선배가 임시 준단원으로서 합세해있긴 하지만, 대체로 평소의 SOS단적 분위기였다. 

 

 지금의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시간이야말로 귀중한 것이다. 이쪽을 선택한 이상, 앞으로도 하루히를 중심으로 한 미묘 기묘한 사건이 이래저래 발생할 확률은 높음에 틀림이 없다. 모든 것의 결말이 나는 그날까지, 앞으로 하나나 둘 정도는 더 있겠지. 

 

 무엇보다 아직 이세계인이 오지 않았다는 것도 있고 말이야. 

 

 “올테면 와봐라 이거다.” 

 

 나도모르게 말이 새어나왔는데, 하루히와 츠루야 선배가 벌이는 버섯 쟁탈전 환성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단, 나가토만이 속눈썹을 아주 약간 움직인 것 같긴 했다. 

 

 문득 창문이 눈에 띈다. 내릴 듯 말듯하게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시선을 읽은 코이즈미가, 

 

 “여행지인 산에 가면 질리도록 눈을 보실 수 있답니다. 그런데 스키와 스노보드 중 어느 쪽이 좋으신지요? 용구 준비도 제 일이라서요.” 

 

 “스노보드는 타본적이 없군,” 

 

 건성으로 대답하고 하늘에서 시선을 뗐다. 코이즈미는 무난한 스마일을 띄운 채, 다만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당신께서 보고 계셨던 건 어느쪽 눈(雪:ゆき,유키)인지요. 하늘에서 내리는 겁니까? 아니면,” 

 

 이 이상 코이즈미가 하는 말에 장단을 맞춰줘봤자 이득될게 없다. 나는 어깨를 들썩하곤, 버섯 쟁탈전에 동참하기로 했다. 

　“출발!” 

　　　　　　-설산증후군 中


 설산증후군-03


 다행히도 선생들이나 선생에게 꼬지르려고 하는 누군가에게 들키는 일 없이, 뭐 알면서도 눈감아 준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배를 가득 채운 우리는 냄비니 식기니 쓰레기니를 치우고 부실을 뒤로하였고, 학교를 나갈 때쯤엔 그나마 약간씩 오던 눈도 그쳐있었다.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반드시 출석을 해야한다는 츠루야 선배와 헤어져, SOS단은 케이크 집으로 향했다. 하루히가 예약해둔 특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받아들고 향한 장소는 나가토네 맨션이었다. 

 

 혼자서 외로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게 될 나가토를 위해서가 아니라, 혼자서 사는 나가토네 집이라면 케이크를 먹으며 마음껏 떠들어댈 수 있다는 좋은 조건이 한몫 했다. 트위스터 게임을 짊어지고 있는 코이즈미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는 나 중 어느쪽이 더 행운인지는 모르겠지만, 선두에서 깡총깡총 뛰다시피 하고 있는 하루히는 충분히 해피 모드로 보였고, 그건 때때로 하루히에게 두손이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는 아사히나 선배나, 말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가토에게도 전염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라면 눈 대신에 산타 군단이 몰려올 일도 없을 것 같다. 하루히는 일반인 수준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만끽하고,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듯 보였다. 내 동생이나 되는 정신구조로구만. 오늘만 그런지도 모르지만. 

 

 일일이 이유를 설명할 일도 없겠지만, 이 시기의 나는 관대한 기분을 지속시키고 있었다. 만약 하루히가 갑자기 산타사냥을 떠나자고 해서 밤길을 배회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쓴웃음과 함께 같이 따라 나섰을지도 모른다. 

 

 방음처리 한번 잘된 나가토네 집에서 코이즈미가 준비한 각종 게임을 즐기는 동안, 우리보두가 즐거워 보였던 것은 진실이다. 노트북 컴퓨터 두 대를 연결해서 한 《The Day of Sagittarius 3》토너먼트는 나가토의 독무대였고, 트위스터 게임에서는 하루히와 엎치락뒤치락하는 꼴이 났지만, 그 근처를 걷고 있든 커플도 끌어들여 같이 하자고 해주고 싶을정도로 보통 난리가 아니었던 밤──. 



 우리의 크리스마스이브는 그런 식이었다. 


 그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섣달그믐 이브까지는, 하루히가 시간을 등뒤에서 밀어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사이에 부실 대청소를 하거나, 중학교 동창한테서 머리를 의심하고 싶을 만한 전화가 오거나, 그 때문에 미식축구 경기를 보러 간다거나 하면서, 당연하게도 점차 한 해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새해라. 진짜 어떻게 될라나. 내 개인적인 말을 하자면, 슬슬 성적 쪽도 어떻게 해놔야 할텐데 말야. 

 

 어머니는 말씀은 안해도 나를 예비교에 집어넣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계셨고, 그게 또 건전한 운동부에서 열심히 활약을 하고 있다거나 건전하지 않아도 정체가 분명한 부활동을 하고 있으면 그나마 변명의 여지가 있는데, 건전하지도 않을뿐더러 정체도 불분명한 미공인단체에서 빈둥거리기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뭐 그래도 이런 고등학교에서도 나름 배울게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떻게 되먹은 일인지 하루히는 억지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학업우수, 코이즈미도 요전번 기말 결과만 보자면 수재의 범주엔 들어가고, 고고학적인 취미에서 그런진 모르겠으나 아사히나 선배도 꽤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모양이고, 나가토 성적이야 굳이 말할 것도 없겠지. 

 

 “뭐, 뒤로 미뤄둘까,” 

 

 일단은 겨울 합숙을 성공리에 끝내야겠지. 지금 생각할 건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공부야 새해가 되고 나서도 늦지 않다. 송년 카운트다운 합숙은 올해 안에 그 시작을 끊어야만 한다. 

 

 뭐, 그런고로──. 

 

 “출발!” 

 

 이라 하루히가 외치고, 

 

 “야호-!” 

 

 라며 츠루야 선배가 동조, 

 

 “현장은 스키 타기에 매우 좋은 기후라고 합니다. 지금 현재는 말이죠.” 

 

 코이즈미가 기상정보를 전하며, 

 

 “스키인가요. 눈 위에서 타는 스키 맞죠?” 

 

 아사히나 선배가 머플러에 감긴 턱을 들어, 

 

 “…………” 

 

 나가토는 한쪽에 작은 가방을 든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와와~” 

 

 내 동생이 팔짝팔짝 뛰어올랐다. 

 

 이른 새벽의 기차역이다. 지금부터 열차에 올라, 몇 번 갈아타고 어쩌고 하다 보면 목적지인 설산에 도착하고 그 예정시각은 점심때쯤이나 된다. 뭐 그건 좋다, 그런데 왜 여기에 예정된 인원으로써 내 동생이 있냐 하면……. 

 

 “뭐 어때, 따라와버렸으니까 별 수 없지. 같이 데려가주면 금방 해결되잖아. 방해는 안되겠지.” 

 

 하루히는 몸을 앞으로 구부려 내 동생에게 웃어주더니, 

 

 “어쩌든 상관 없는 녀석이면 진작에 쫓아냈겠지만, 너랑 달리 솔직한 애니까 얼마든지 오케이! 영화에도 나와줬고 말야. 샤미센 놀아주기 상대로도 딱이잖아.” 

 

 그렇다, 이 여행엔 우리집 삼색 고양이까지 딸려있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SOS단 합숙계획 담당자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자. 

 

 “추리극 트릭에 고양이가 필요해서 말이죠,” 

 

 고양이는 알고있다, 뭐 그런거냐. 

 

 자기 짐더미 위에 앉아있던 코이즈미는, 

 

 “아무 고양이나 상관없었습니다만, 영화에서 꽤 훌륭히 역할을 수행해 줘서 말이죠. 그때 그 명연기를 다시 한번 하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의 샤미센은 말못하는 평범한 고양이란 말이다. 연기쪽은 기대 안하는게 좋을텐데. 나는 동생과 코끝을 맞대고 있는 하루히를 바라보며, 

 

 “덕분에 나가다 들켜버렸잖아.” 

 

 워낙에 아침 일찍이었고, 어머니한테는 강력히 함구를 요청해두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동생도 내가 하루히네와 여행을 간다고는 전혀 눈치 못채고 있었겠지. 근데 의외의 함정은 마지막에 그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방에서 기분좋게 자고 있던 샤미센을 고양이용 캐리백에 수납시키고 있는 찰나에, 난데없이 동생이 기어들어왔다. 아무래도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가 잠결에 돌아오는 길을 헤매서 다른 방에 들어와버린 모양이었다. 

 

 그 뒤의 전개는 보나마나다. 동생은 갑자기 번쩍 눈을 뜨더니, 

 

 “샤미센 데리고 어디가? 그 옷이랑 짐은 또 뭐야?” 

 

 으아악. 그리하여 초등학교 5학년생 만 11세의 우리 동생은 여름때보다도 더 난리를 쳐대면서, 급기야는 두손두발로 내 가방에 들러붙어, 암벽에 붙은 이상한 색의 조개처럼 도저히 떨어지려고를 하지 않았다. 

 

 “한사람 느는 것쯤이야 문제없습니다.”라며 코이즈미가 미소짓는다. “거기다 어린이 요금이구요, 딱히 예정을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저도 스즈미야상과 동감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돌려보낼 수도 없고 말이죠.” 

 

 하루히랑 다 논 동생은, 이번엔 아사히나 선배에게 달려들어 그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후, 다음엔 말없이 가만히 서있는 나가토의 무릎을 안고 흔들더니, 마지막으로 크게 웃고 있는 츠루야 선배와 손잡고 빙글빙글 돌며 꺄꺄거리고있다. 

 

 여동생이라 다행이지. 이게 남동생이었으면 즉각 뒷골목으로 데리고 갔을거다. 

 

 설산증후군-04



 설산행 특급열차 안에서도 동생녀석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우리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쓸데없이 생기발랄해 있었다. 지금부터 이렇게 발광을 해대면 종반에 가서 힘이 부칠 게 틀림없고, 또 내가 퍼자는 동생을 업고 걷는 꼴이 날게 불보듯 뻔하지만 그거야 주의를 해도 소용없다. 하루히와 츠루야 선배도 내 동생과 동급 수준으로 높은 텐션을 유지하고 있었고, 살짝 보니까 아사히나 선배도 왠지 들떠있는 것 같았다. 나가토는 읽으려고 펴놓았던 책을 그냥 도로 가방에다 집어넣고 내 동생에게 정적의 시선을 주고 있었다. 

 

 나는 창문에다 턱을 괴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풍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옆 통로쪽엔 코이즈미가 앉아있었고, 하루히를 비롯한 여성그룹은 우리 앞자리에 있었다. 서로 마주보게끔 좌석 방향을 바꿔서, 지금은 다섯명이서 우노(UNO:스페인어로 1, 우리나라의 원카드와 유사한 카드게임)를 하고 있다. 너무 떠들어대지 마라.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 간다. 

 

 그들에게서 버림받은 나와 코이즈미는 열차가 출발하고 10분 정도 바바누키(婆?き:트럼프 놀이의 한가지. 같은 수의 패 두장이 짝지워질 때마다 판에 버려 나가는데, 마지막에 바바[보통 조커]를 가진 사람이 지게 됨)를 했는데, 허무해져서 곧바로 관뒀다. 뭐가 아쉬워서 남자 둘끼리 어릿광대(*조커를 이름) 떠넘기기를 해야하냐. 

 

 그러느니 차라리 내 눈을 향락의 잔치로 만들어줄, 아직은 못본 아사히나 선배의 스키웨어 차림이라도 망상하고 있는게 훨씬 더 건설적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떻게 하면 둘만의 스키장에서 사이좋게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궁리하고 있었는데, 

 

 “냐,” 

 

 발치에 있는 캐리백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그 틈 사이로 수염을 내밀었다. 

 

 전번의 영화소동이 끝나고 나서부터는, 샤미센은 원래 들고양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얌전하고 손도 별로 안가는 착실한 집고양이가 되어있었다. 밥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고, 함부로 장난치지도 않으며, 아무래도 이녀석 욕구 중에서 최대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수면욕인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 캐리백에 넣어둔 이래 쭉 자고만 있었는데, 아무리 게을러 터진 고양이라도 질리긴 하는 것 같다. 심심하단 듯 뚜껑 쪽을 긁고 있다. 물론 차내에서 꺼낼 수는 없다. 

 

 “좀만 더 참아라.” 

 

 나는 발치에다가 타일렀다. 

 

 “도착하면 신제품 과자를 주마.” 

 

 “냐,” 

 

 그거면 됐다는 듯이 샤미센은 도로 얌전해졌다. 코이즈미가 감탄스러운 듯, 

 

 “맨 처음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어떻게 되나 싶었습니다만, 고양이 하나는 잘 고른 것 같습니다. 아, 수컷 삼색고양이라는 희소성뿐만이 아니고요. 아주 영리하고 착한 고양이입니다.” 

 

 떼지어 모여있던 들고양이 무리 중에서 무작위로 이녀석을 집어올린 건 하루히였다. 그게 수만분의 1의 확률로밖에 발생하지 않는 염색체 이상이었으니, 언제 한번 하루히한테 복권이라도 사보게 하는 게 어떠냐. 약간은 활동비에 보탬이 될지도 모른다고. 언제까지고 문예부 부비를 횡령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복권 말씀이십니까? 그건 또 그거대로 스즈미야상께서 하시는 일이니, 또 골치아픈 일이 생길 것 같네요. 만약 그녀께서 억단위의 돈을 손에 넣게 되신다면 뭘 하기 시작하실 것 같으신지요?” 

 

 별로 생각하기 싫다만, 미군 불하품 중고 전투기 정도는 사들일 것 같군. 1인용이면 그나마 낫다, 만약 그게 2인용이나 그 이상이었다면, 뒷자리에 앉게 될 사람이 누가 될지는 생각할 것까지도 없다. 

 

 아니면 싸그리 광고비에 써버릴 것 같기도 하군. 골든타임 버라이어티 쇼를 보고 있으면 난데없이 ‘이 프로그램은 SOS단의 제공으로 보내드립니다.’는 식의 자막이 지나가고, 우리가 출연하는 CF가 전국 안방으로 전해지는 광경을 상상해보았더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루히한테 프로듀서같은 포지션을 맡겨서 변변한 작품이 나올 확률은 유치원생에게 주식 운영을 맡겨서 잘될 확률보다도 낮다는건 이미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다. 

 

 “잘하면 인류 전체에게 아주 득이 될 생각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어떤 발명비로 쓴다든지, 연구소를 차린다든지 말이죠.” 

 

 코이즈미는 희망적인 전망을 해주고 있지만, 무리한 도박은 안하는 게 나은 법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쪽에서 내거는 게 너무 크다. 리스크계산 좀 할수있는 놈이라면 주저할 게 뻔하지. 그거야말로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은 말야.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뽑기라도 시키자.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다시 바깥 풍경을 즐기기 시작하고, 코이즈미는 등받이에 깊이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도착하면 엄청 바빠지기 시작할테니, 지금부터 체력 보존을 꾀하는 건 참으로 바람직한 선택이다. 

 

 열차 밖 풍경은 점점 시골 모습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고, 터널을 빠져나올 때마다 눈의 모습도 더 많이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열차 여행을 끝내고, 짐을 들고 역에서 빠져나온 우리를 반겨준 것은, 쾌청한 푸른 하늘과 잔뜩 쌓인 하얀 눈의 투톤 컬러, 그리고 언젠가 본적이 있는 2인조의 정중한 인사였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깊게 허리를 숙이는 더 베스트 오브 집사역과, 

 

 “긴 여행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연령불명의 미인 메이드 씨였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시네요.” 

 

 넉살좋게 나선 코이즈미가 그 둘과 같이 늘어서, 

 

 “츠루야상께선 처음 보시는 분들이시죠. 이쪽은 제가 아는 분들로써, 여행 내내 여러 일을 해주시게 될 아라카와상과 모리 소노상입니다.” 

 

 여름 고도때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위 아래 조끼 세트를 차려입으신 로맨스그레이(romance gray:매력적인 초로[初老]의 남성의 희끗희끗한 머리털, 또는 그런 머리의 남자)의 아라카와 씨와, 검소하면서도 메이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에이프런 드레스가 꼭 어울리는 모리 씨는, 

 

 “아라카왑니다.” 

 

 “모리에요.” 

 

 완벽한 타이밍으로 머리를 숙였다. 

 

 이 살속을 파고드는 것 같은 추위 속에서 코트 하나 안 걸치고 있는건 연출의 일환인지, 아니면 아무리 연기라고 할 지언정 맡은 바 배역에 충실하는 직업의식에서 오는 건지. 

 

 츠루야 선배는 무거워보이는 가방을 가볍게 휘두르며, 

 

 “이야! 안녕하세요! 코이즈미군 추천이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해요. 별장도 맘대로 써도 돼요!” 

 

 “송구스럽습니다.” 

 

 아라카와 씨는 다시 공손히 인사, 그리고 비로소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차분한 미소를 보였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신 것 같아 안심입니다.” 

 

 “여름엔 실례를 범했습니다.” 

 

 모리 씨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내 동생을 보더니 그 미소를 더욱 부드럽게 한다. 

 

 “이런. 귀여운 손님이 오셨군요.” 

 

 불청객 내 동생은 열탕에 담근 건조미역보다도 빨리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와아~”거리면서 모리 씨의 스커트에 달려들었다. 

 

 하루히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나아가 눈을 밟으며, 

 

 “오랜만이다-. 이번 겨울 합숙도 기대하고 있을게. 여름엔 태풍 덕분에 좀밖에 못놀았지만, 그만큼 겨울에 수지를 맞출 작정이니깐,” 

 

 그리고 우리쪽으로 돌아서더니, 적진에서 왕장차(장기에서, 왕장의 자격도 아울러 갖게된 차)가 된 차(車)처럼 발랄하게, 

 

 “자, 모두. 지금부터 기합넣고 전속력으로 노는거야! 올한해 쌓인 거 전부 다 털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할 땐 새사람 처럼 돼야해. 내년에 후회 하나 가져가면 안돼. 알겠지!” 

 

 우리 모두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대답했다. 츠루야 선배는 “예-이!” 하며 한 손을 들어올리고, 아사히나 선배는 약간 놀라는 듯 하면서 조심스레 끄덕이고, 코이즈미는 어디까지나 싱글벙글, 나가토는 그대로 무언, 동생은 모리 씨에 착 들러붙어 있다. 

 

 그리고 나는, 보고있으면 눈이 아파질 지경으로 빛나는 하루히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먼 쪽을 바라보았다. 

 

 태풍이 올 거라곤 상상도 안갈 정도로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이다. 

 

 이 때까지는. 

 

 설산증후군-05


 츠루야가(家)의 별장엔 두 대의 4륜차에 나눠타고 갔다. 드라이버는 아라카와 씨와 모리 씨였는데, 그렇다는 것은 모리 씨는 최소한 4륜 구동 자동차 면허취득 자격에 충분한 연령이라는 것을 추리해낼 수 있다. 혹시 동년배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내겐 상당한 수확이다. 아니 별로 깊은 뜻은 없다. 부지런한 메이드라면 아사히나 선배 한분으로 충분하니 모리 씨에게 각별한 감정이 있단 건 아니다. 그점이 중요하다. 

 

 어딜 봐도 하얗디 하얀 풍경 속에서의 차 여행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5분 정도 달렸을까, 우리가 탄 억센 차는 펜션 풍의 건물 앞에 멈춰섰다. 

 

 “이거 꽤 분위기 좋은 데잖아,” 

 

 제일 먼저 내린 하루히가 눈을 밟으며 만족감을 감돌게 하는 감상을 늘어놓았다. 

 

 “우리 별장 중에선 제일 작은 데긴 해도 말야,” 라는 츠루야 선배. “그래도 맘에 들어. 딱 이정도가 맘이 젤 편하거든,” 

 

 역에서도 별로 안떨어져 있고, 가까운 스키장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하는 입지조건 하나만으로도 값 꽤나 나갈 거 같고, 거기다 츠루야 선배는 진심으로 이게 작다는 둥 하는 거 같긴 한데, 그건 츠루야 선배네 집인 일본식 저택과 비교해서 작은 정도고 일반적인 감성을 대표하여 말하자면, 여름에 찾아간 고도 별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크기였다. 대체 츠루야가는 어떤 나쁜 짓을 했길래 이런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드시죠, 여러분.”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집사 아라카와 씨. 그와 모리 씨 둘은, 츠루야 선배에게서 허가및 열쇠를 얻어 우리보다 하루 먼저 가서, 어제 여기 도착해서 각종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두 코이즈미의 주도면밀한 사전 공작에 의한 것이며, 자잘한 일은 신경쓰지 않는 츠루야 선배와 츠루야가 사람들의 시원스럽고 대범한 성격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전면목조, 진짜 펜션으로 오픈하면 매시즌 만원사례가 생기고도 남을 츠루야가의 겨울 별장에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가며, 나는 어떤 예감이 살짝 들었다. 

 

 뭔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막연한 예감은 분명히 내 머릿속을 지나갔었다. 

 

 “응……?” 

 

 나는 별장 내부 설비에 감탄에 마지 않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루히는 츠루야 선배에게 격찬의 말을 늘어놓으며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었고, 츠루야 선배도 쾌활한 웃음으로 대답해주고 있다. 코이즈미는 아라카와 씨 및 모리 씨 셋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동생은 재빨리 샤미센을 캐리백에서 꺼내 껴안고, 아사히나 선배는 가지고 있던 짐을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마음이 좀 놓인다는 듯 숨을 내쉬었으며, 나가토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기 힘든 시선을 공중에다가 고정시키고 있다. 

 

 아무데도 이상한 점은 없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름뿐인 합숙에서 며칠간을 그저 유흥에 소비하고, 또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서 일상의 연속을 즐기게 되……. 

 

 …었어야 했다. 

 

 발생여부가 확실한 살인사건극은 말그대로 연극이며 심각한 건 아니고, 미리 알고 하는 거니까 그걸로 인하여 하루히의 정서가 흔들릴 일은 없을 것이다.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가 나설 기회가 없겠지. 코이즈미가 초능력을 발동시킬 기회도 생기지 않는다──. 

 

 표현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전부 짜여진 이야기다. 한치 앞도 안보이는 수상한 살인사건이 아닌 것이다. 방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봤더니 꼽등이가 기어나온다는 정도의 예상을 넘을 만한게 나올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일까. 위화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게 정렬구의 요정처럼 지나간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제보니 여름방학 후반이 죽어라고 루프되고 있었는데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다만 묘한 감각만큼은 느끼고 있었던 그때 그 분위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기시감(dejavu)이란 건 아니고……. 

 

 “안되겠다,” 

 

 점액 투성이인 물고기를 쥔 것 처럼, 그 감각은 슬쩍 손에서 빠져나갔다. 

 

 “기분 탓인가.” 

 

 나는 고개를 젓고, 가방을 짊어지고 별장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각자 배정받은 방에 가기 위해서이다. 호화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그건 내가 값나가는 물건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겠지. 심플하게 보여도 이 계단 난간만 해도 입 쩍 벌어질 정도의 재료비와 인건비가 들었을 게 틀림없다. 

 

 침실이 늘어선 2층 복도에서, 

 

 “저기 쿈군,” 

 

 츠루야 선배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동생이랑 같은 방이어도 돼? 실은 방수가 좀 부족해서 말야. 내가 어렸을 때 쓰던 다락방을 열 수도 있는데, 그러면 외롭지 않을까?” 

 

 “뭐 나랑 같이 써도 돼,” 

 

 하루히가 고개를 내밀어와선, 

 

 “방금 방 보고 왔는데, 침대 꽤 크더라. 셋이서 자도 문제없을 정도야. 역시 여기선 여자끼리 같은 방 쓰는게 건전하지 않겠어?” 

 

 건전이고 나발이고, 나야 동생이랑 같은 방이든 아니든 별 상관없다. 아사히나 선배랑 같은 방을 쓰게 된다면 상당한 정신적 급경사가 생기겠지만, 내겐 동생과 샤미센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자, 어때?” 

 

 하루히가 물은 상대는 샤미센을 어깨에 매단 동생이었다. 동생은 천연덕스러운 웃음으로 아주 분위기를 깨는 발언을 했다. 

 

 “미쿠루짱네가 좋아,” 



 그런 관계로 동생은 아사히나 선배의 방에 좋다고 기어들어가고, 내 방에는 샤미센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간만이고 하니 이 고양이도 누구한테 빌려주고 싶었는데,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당신과는 달리 고양이가 말하는 것에 내성이 없어서요.” 

 

 코이즈미는 점잖게 거부하고, 나가토는 30초정도 그 삼색고양이의 미간을 바라보고 있다가, 

 

 “됐어.” 

 

 짧게 대답하고 등을 돌렸다. 

 

 뭐 대충 이 별장 속을 어슬렁거리게 해두면 되겠지. 생판 모르는 집에 데려왔는데도 샤미센은 우리집에 있을때랑 다름없는 얼굴로 침대에 올라가, 열차 안에서 실컷 잤을텐데도 또 졸기 시작했다. 나도 옆에 같이 눕고 싶어졌지만, 스케줄에 그런 휴게시간은 없었고, 우리는 하루히의 호령에 따라 곧바로 아래층에 집합하게 되었다. 

 

 “자, 가자! 스키타러!” 

 

 너무 당장인 것 같긴 한데, 하루히식 라스트 스퍼트 겸 스파크를 위해선 쓸데없이 낭비할 시간은 1초도 없는 것이다. 거기다 근본적으로 발랄하기야 츠루야 선배도 마찬가지셔서, 이거 하루히 이상으로 하이(high)한 그녀와의 상승효과로 행동력까지 두배가 되어있는 것 같기도 하군. 

 

 스키웨어와 판때기는 코이즈미가 대여해왔다. 언제 우리 치수를 쟀는지 거 신기하군. 갑작스레 참가하게 된 동생 것까지도 있었으며, 그또한 사이즈가 딱 맞았다. 

 

 ‘기관’이란 데의 에이전트(상상되는 검은 양복과 검은 선글라스)가 키타고 및 동생 초등학교에 잠입하여 보건실 책장에서 학생 신체정보를 뒤지고 있는 광경이 그려진다. 음, 나중에 아사히나 선배의 스리사이즈를 물어보도록 하자. 알아봤자 별거 없는 정보이긴 하지만, 이것도 지적 호기심이라는 거다. 

 

 “스키도 참 오랜만이네. 초등학교때 어린이회에서 간거 한번 뿐인가. 우리 지방엔 눈이 전혀 안오니까 말이지. 역시 겨울엔 눈이야.” 

 

 강설지방에 안사는 놈 특유의 주장이군. 눈따위 안왔으면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고. 특히 전국시대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 등은 그랬을거라고 나는 분석한다. 

 

 스키 판을 짊어지고, 걷기 힘든 부츠로 행군하는 우리들은, 비로소 끝내주는 스키장에 도착했다. 나도 하루히와 마찬가지로 스키는 오랜만이다. 중학교때 이후로 처음이로군. 동생인 아마 처음일거고, 아무래도 아사히나 선배도 그런 모양이다. 나가토도 미경험자나 다름없지만 프로 스키어 이상의 실력을 보여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리프트로 올라가는 여러색의 스키웨어가 띄엄띄엄 보인다. 생각보다 사람이 적어서 의아해하고 있자 츠루야 선배가 해설을 넣어줬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야. 아는 사람만 오는 조용한 스키장이거든. 뭐 10년 전만 해도 우리집 사유 스키장이었으니까 말야.” 

 

 지금은 개방해놨지만, 이라 부연 설명을 해주는 츠루야 선배의 말은 전혀 불쾌스런 데가 없다. 세상엔 진짜 이런 사람도 있구나. 외모는 물론 성격, 경제력, 집안 뭐하나 안 끝내주는 게 없는 완벽한 사람이 말이지. 

 

 리프트 승강장 근처에서 스키를 신은 하루히가 말했다. 

 

 “어쩔래, 쿈. 나는 당장 최상급 코스로 가버리고 싶긴 한데, 미쿠루짱이랑 탈 수 있어? 너는?” 

 

 “약간만 연습하게 해줘라.” 

 

 나는 판을 부츠에 장착하긴 했는데, 매 30센티마다 넘어지는 동생과 아사히나 선배를 보며 대답했다. 

 

 “일단은 기본을 가르쳐놔야지 이거, 최상급은 고사하고 리프트 타는데만도 고생 좀 할 것 같다.” 

 

 벌써부터 눈범벅이 된 아사히나 선배는, 마치 스키웨어를 입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이 분이 입고도 위화감이 생길 만한 옷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것인가. 

 

 “자, 미쿠루는 내가 맡을테니까, 하루냥은 동생을 부탁해! 쿈군네는 그냥 아무데나 타고 다녀,” 

 

 바라지도 않던 제안이다. 나도 잃어버린 스키 감각을 되찾기까지는 좀 걸릴 것 같다. 문득 옆을 보니, 

 

 “…………” 

 

 무표정으로 스키채를 손에 쥔 나가토가 휙 내려가고 있었다. 

 
 설산증후군-06


 결국, 동생 녀석의 스키실력은 도무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루히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발을 모아서 스키채를 세게 팍 치면 쉽게 나가니까, 그대로 기합넣고 가다가, 멈출때도 기합으로 멈추는거야, 이야앗! 하고. 이걸로 어떻게든 될거야.” 

 

 어떻게도 안 됐다. 기합으로 어떻게 되는 거였으면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환경 자동차가 개발됐겠지만, 아쉽게도 동생 정도의 기합으론 넘어지는 간격이 30센티에서 3미터가 된 정도의 차이다. 그래도 동생은 아주 재밌어하고 있어서, 꺅꺅거리며 넘어지면서도 좋다고 눈을 먹어대곤 했으니 결과야 어떻든 오락으로선 옳은 건지도 모른다. 배탈나니까 먹지마. 

 

 한편 아사히나 선배는 원래 재능이 좀 있었는지, 아니면 츠루야 선배가 높은 수준의 인스트럭터(instructor)적 수완을 겸비하고 있었는지, 하여튼간에 30분만에 웬만한 스키 스킬을 터득해냈다. 

 

 “와아, 재밌네요. 이야, 대단하다-” 

 

 새하얀 배경 위에서, 웃음꽃을 피우며 스키를 타는 아사히나 선배의 모습은, 길어질 것 같으니 중략하겠다만 짧게 정리하자면, 설녀(雪女)의 후예가 조심스레 현세에 나타난 것 같을 정도로 훌륭한 화면상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걸로 당장 유턴해서 집에 가도 괜찮을 정도다. 그 전에 사진을 찍어놓을 필요는 있겠다만. 

 

 하루히는 스키 연습을 하고 있는 나와 코이즈미는 본체만체 하고, 아무리 해도 늘지를 않는 동생을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는 한시라도 빨리 산 높은 곳에 가서 직활강을 하고 싶은데, 이 5학년짜리 꼬마를 데리고 갈수도 없다, 뭐 이런 얼굴이었다. 

 

 츠루야 선배도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하루냥네는 리프트 타고 가버려도 돼!” 

 

 츠루야선배는 넘어진 채로 좋다고 손을 파닥거리고 있는 동생을 일으키며, 

 

 “얘는 내가 잘 가르쳐 놓을테니까! 뭐하면 여기서 눈사람이라도 만들고 놀게. 썰매도 좋을라나. 저 어디서 빌려주는 거 같고 말야,” 

 

 “정말?” 

 

 하루히는 동생과 츠루야 선배를 보며, 

 

 “고마워, 미안-” 

 

 “됐어됐어~ 뭘 그런거 가지고! 자 동생군, 스키교실과 눈사람이랑 썰매 중에 어느게 좋겠어?” 

 

 “눈사람!” 

 

 이라 큰 소리로 대답하고, 츠루야 선배는 스키를 벗었다. 

 

 “자 그럼 눈사람이다-. 큰~거 만들자, 큰-거,” 

 

 곧바로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한 둘에게, 아사히나 선배도 끼고 싶다는 표정으로, 

 

 “눈사람인가요. 아-, 저도 그쪽이 더……” 

 

 “안-돼.” 

 

 곧바로 하루히가 아사히나 선배의 팔에 록을 걸고 씨익 웃으며, 

 

 “우리는 정상까지 가야지. 모두 가이 경주하는거야. 맨 먼저 산기슭까지 내려온 사람한테 동(冬)장군의 지위를 내릴게. 열심히 하는거다!” 

 

 보나마나 지가 이길때까지 할 작정일 거다. 그거야 뭐 됐다쳐도, 난데없이 정상까지 간다니 나도 좀 겁이 나는구만. 단계적으로 올라가자. 

 

 하루히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한심하긴. 이런건 도전하는 게 제일 재밌는데,” 

 

 같은 소리를 해대면서도 웬일인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단 중급 코스부터 가서, 메인 이벤트인 최상급 난관은 마지막으로 남겨놓기로 한다. 

 

 “리프트 타자. 유키-, 가버린다! 돌아와~” 

 

 주위를 빙글빙글 돌듯이 호를 그리고 있던 나가토는, 그 목소리에 맞춰 턴을 하더니 눈을 가르듯 날아와 내 앞에 딱 멈춰섰다. 

 

 “경주야 경주. 리프트는 인원수대로 프리패스를 받았으니까 해가 질때까지……아니! 해가 져도 몇 번이고 할거야! 자 모두 따라와,” 

 

 안그래도 그럴 거다. 만약 내가 눈사람 제작에 참가의사를 밝혀도 절대 허가해주진 않을거고, 코이즈미야 그렇다쳐도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를 하루히 맘대로 하게 놔뒀다가는 눈보라를 넘어 빙하기가 앞당겨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올바른 객관성을 가진 인덕자가 붙어있어야한다. 내가 이렇게 잘난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객관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뭐 확인된 바는 없고 코이즈미 쯤에서 곧바로 수십가지의 논리로 반론이 날아올 것 같지만,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그런거야 벌써 옛날에 어찌되든 상관없게 됐기 때문이다. 

 

 멤버 전원이 건강한 모습으로 여기 있고, 눈은 푹신한 파우더 스노였고, 맑은 하늘은 한없이 푸르다. 우리 단장님께서 그 하늘마냥 밝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이 리프트 둘이서 타는거지. 공평하게 제비뽑기로 정하자.” 



 자. 

 

 그 후의 전개에서 특별히 별로 쓸 건 없다. 개별행동인 츠루야 선배와 동생만을 남기고, SOS단 정규멤버는 리프트에 올라 완만한 기울기로 올라가고, 지극히 평범하게 스키를 즐겼다. 산기슭으로 타고 내려갈 때마다 눈사람은 점점 그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고, 츠루야 선배와 동생은 마치 동갑내기 친구처럼 밝게 웃으며 눈사람에다가 양동이를 씌웠다가 코를 붙였다가 하며 즐겁게 놀고 있다. 일찍이도 두 번째 눈사람에 착수하려던 두사람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최신 기억이다. 



 그리고, 최후의 기억이 될지도 몰랐다. 



 몇 번째 스키 대 회전 경주였을까. 

 

 순조롭게 타고 내려간 우리는, 어느샌지……이게 진짜 어느 샌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난데없이, 눈보라 한가운데에 있었다. 시야는 전부다 화이트 아웃, 말그대로 한치앞도 안보인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강풍이 눈덩이들을 태워 몸에 마구 부딪치고 있다. 차갑기 전에 아픔이 먼저 올 정도다. 그대로 드러난 얼굴이 금세 얼어붙고, 숨을 쉬는 것도 아래를 향해야만 하는, 터무니없는 눈보라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선두를 달리던 하루히가 스키를 멈추고, 같이 달리던 나가토도 급정지하였으며, 아사히나 선배랑 같이 천천히 가고 있던 나와 맨 뒤에 있던 코이즈미가 쫓아왔을 때──. 

 

 눈보라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마치 누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 

 

 …… 

 

 ……… 

 

 이상으로 회상을 마친다. 이걸로 우리가 설산을 걷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워낙에 시야가 순 먹통이다 보니, 바로 몇미터 앞에 절벽이 있어도 모르고 떨어져버릴 위험성이 있다. 물론 그런 절벽 같은건 없었던 것 같지만, 지도를 무시하고 난데없이 나타나도 그다지 이상하지만은 않으며, 점프대도 없는데 커다란 언덕에 도전장을 던지고 싶지도 않다. 아무리 그래도 절벽은 과장이 지나치다 쳐도 눈으로 하얗게 위장된 수목에 정면충돌을 했다가는 코뼈 한둘은 나가고 말거다. 

 

 “우리 지금 어디 있는거냐?” 

 

 이럴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나가토밖에 없다. 나로썬 결코 바라는 일이 아니지만 목숨하곤 못 바꾼다. 그리하여 나가토의 정확무비한 네비게이션에 따라 산을 내려가고 있는데, 벌써 그러기만 몇시간째 경과했었던 게 맨 처음에 썼던 대로다. 

 

 “이상하네.” 

 

 하루히의 중얼거림에도 수상한 기색이 섞여나오고 있다. 

 

 “어떻게 된거야?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사람 하나 안보인다는 건 말도 안돼. 대체 얼마나 걸은 줄 알아.” 

 

 그 시선이 선두의 나가토에게 향해있다. 나가토가 내려가는 방향이 틀린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상황이다. 여기는 비경(秘境:신비스러운 곳, 사람이 가 본 적이 거의 없는 알려지지 아니한 지역)이고 뭐고가 아닌 스키장이다. 대강 방향을 잡고 길따라 사면을 내려가면 자연히 산기슭이 나와야 하는 법이다. 

 

 “할 수없으니까 천막이라도 만들어서 아영이라도 할까? 눈이 좀 잠잠해질때까지,” 

 

 “잠깐,” 

 

 나는 하루히를 불러세워, 눈을 헤집다시피 해서 나가토 옆에 섰다. 

 

 “어떻게 된거냐?” 

 

 쇼트헤어를 빳빳하게 얼린 무표정 처자는 나를 천천히 올려다보더니, 

 

 “해석불능 현상.”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검디 검은 눈은 진지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똑바로 내쪽을 향해있다. 

 

 “내가 인식하는 공간좌표가 옳다고 한다면, 우리의 현재위치는 스타트 지점을 한참 지난 장소.” 

 

 뭐냐 그건. 그럼, 이미 인가에 있어야 맞는 소리잖아. 그렇게나 걸었는데도 리프트 케이블이나 로지(lodge:등산객을 위한 산장, 산막) 하나 안보였다고. 

 

 “내 공간 파악능력을 넘은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나가토의 냉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혀끝에 닿은 눈 결정이 증발하듯이 녹아가고, 나오는 말도 그와 마찬가지로 흩어져 없어졌다. 

 

 나가토의 능력을 넘는 사태? 

 

 묘한 감은 이것이었던 건가. 

 

 “이번엔 누구 짓이냐?” 

 

 “…………” 

 

 나가토는 생각에 잠긴 듯이 침묵하고, 내리치는 눈 난무를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바라봤다. 

 

 우리 전부 다, 손목시계도 휴대폰도 없이 스키장에 뛰쳐나왔으니, 현재시각조차도 잘 알 수 없게 됐다. 츠루야가의 별장을 나섰을 때가 오후 3시쯤이었을라나. 그러고 몇시간이나 지났을게 틀림없는데도, 흐린 하늘은 아직 환하다. 다만 두꺼운 구름과 눈보라 덕에 태양의 위치도 전혀 알 수가 없다. 반짝이끼에 덮인 동굴 속에 있는 듯한 요상한 밝기로, 나도모르게 나는 사랑니 한참 안쪽에서 쇳물 끓는 듯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도가도 눈의 벽이 막아서고, 위는 회색 일색.


어디서 체험한 것같은 광경과 비슷한 느낌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설마──. 

 

 “앗!” 

 

 바로 옆에서 하루히가 소리를 지르자, 나는 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오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야, 놀래키지마. 갑자기 뭔 소리를 그리 질러대냐,” 

 

 “쿈, 저거 봐.” 

 

 하루히가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일직선으로 손을 뻗은 쪽──. 

 

 거기에 자그마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뭐지?” 

 

 자세히 본다. 눈섞인 바람 때문에 마치 반짝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한데, 광원자체는 이동하지 않는다. 교미를 끝낸 반디같이 약한 빛이다. 

 

 “창문에서 나오는 빛이야,” 

 

 하루히는 목소리에 희색을 띄우며, 

 

 “저기에 건물이 있나봐. 잠깐 들렀다 가자. 이대로면 얼어죽어버릴 거 같아,” 

 

 정말 이대로 가면 그 예언이 사실이 되겠지. 근데 건물이라고? 이런 곳에? 

 

 “이쪽이야! 미쿠루짱, 코이즈미군. 잘 따라와,” 

 

 인간 제설차가 된 하루히가 눈을 갈라 길을 만들며 선두를 가기 시작한다. 추위와 불안과 피로에서 오는 것일까, 코이즈미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감싸듯이 하며 하루히의 뒤를 쫓았다. 스쳐가며 속삭인 말이 내 간담을 한층 더 서늘하게 한다. 

 

 “명백히 인공의 빛이군요.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런 빛은 없었습니다. 이래봬도 주위를 잘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 

 

 나가토와 나는 입을 다문 채, 스키로 눈을 헤쳐 길을 만들고 있는 하루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빨리빨리 와! 쿈, 유키! 떨어지면 안돼!” 

 

 달리 방도가 없다. 얼음 덩어리가 되어서 100년 정도 후에 뉴스 기삿거리가 되는 것 보다는, 자그마한 생존의 가능성에라도 걸어보는 게 낫다. 그게 누가 꾸민 함정의 입구라고 해도, 달리 길이 없다면 그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나가토의 등을 밀고, 하루히가 만든 눈길 위를 걷기 시작했다. 

 

 설산증후군-07



 가까이 감에 따라서 빛의 정체가 확실해져갔다.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선 하루히의 시력을 칭찬해줘야 할 대목이겠지. 그것은 틀림없이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실내등 빛이었다. 

 

 “양식 집이야. 근데 엄청 크다……” 

 

 하루히는 일단 멈춰서서, 얼굴을 수직으로 들어 첫인상 감상을 끝내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또한 그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고, 점점 암담한 느낌에 빠져든다. 하얀 눈과 회색 하늘 속에, 그 저택은 그림자처럼 홀연히 솟아있었다. 어쩐지 불길하다고 느낀 건 낯선 외견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저택이라기보다는 성에 가까운 위용을 자랑하였으며, 지붕 위에는 용도불명의 첨탑이 몇 개고 솟아있어서, 빛 밝기나 외장이 더더욱 어두워보인다. 그런 건물이 설산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게 수상하지 않다면, 전국 사전에 있는 수상하다고 하는 단어의 항목을 전부 바꿔쓸 필요가 있다. 

 

 눈보라치는 설산. 조난중인 우리. 방향을 잃고 걷고 있는 중에 발견한 작은 등불. 그리고 그것을 따라 우리가 닿은 곳은 기묘한 서양식 저택──. 

 

 조건이 이렇게씩이나 모여있다. 다음에 나올 것은 진짜 이번에야말로 수상한 저택 주인이냐, 무시무시한 괴물이냐. 그래서 지금부터 이어질 스토리는 미스터리랑 호러 중 어느쪽으로 갈리는거냐? 

 

 “실례합니다-!” 

 

 벌써 하루히는 현관문에다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인터폰도 노커(knocker)도 없다. 울퉁불퉁한 문이 하루히의 주먹에 의해 두드려졌다. 

 

 “누구 안계세요!?” 

 

 문에다 구타를 반복하는 하루히의 뒤를 따라, 나는 한번 더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짜여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상황설정과 무대장치다. 이게 코이즈미가 한 짓이 아니란 것만은 알겠다. 이대로 저택 문이 열려 아라카와 씨랑 모리 씨가 공손히 인사를 해준다면 최고겠다만……. 나가토나 자기입으로 자신의 능력을 넘었다고 증언한것만 봐도, 그렇게 되지 않을것만은 명백했다. 코이즈미네가 나가토를 뛰어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만약 나가토를 끌어들여 깜짝쇼의 일부로 가담시켰다고 해도, 나가토는 내게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루히는 맹 눈보라에도 지지않을 정도로 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길을 잃어버렸는데요! 잠깐만 쉬어갈수 있겠어요! 눈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돼서요!” 

 

 나는 뒤돌아 전원이 다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가토는 평소의 비스크 인형(bisque doll)같은 표정으로 하루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사히나 선배는 겁에 질린 얼굴로 자기 몸을 끌어안고, 귀엽게 재채기를 하고 완전히 빨개져버린 코끝을 문질렀다. 코이즈미의 얼굴에서도 실실 스마일이 사라져있었다. 팔짱을 끼고 기울인 고개, 꽤나 쓴 걸 씹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생각을 하는 코이즈미는, 문이 열려야 좋은지 닫혀있어야 좋은지 망설이는 듯한 햄릿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루히가 내는 소음은 이게 우리 동네라면 근처에 폐가 되고도 남을 정도의 수준에 달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아무도 없나.” 

 

 하루히는 장갑을 벗고 손을 호호 불며 한스럽단듯이, 

 

 “불빛이 있어서 누가 있을줄 알았는데……. 어쩔까, 쿈.” 

 

 어쩌냐고 하셔도 얼른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군요. 함정 냄새가 나는 장소에 기세좋게 달려드는 건 만화 열혈 주인공이나 하는 일이다. 

 

 “눈이랑 바람만 피할 데가 있으면 좋겠다만……. 근처에 헛간이나 창고 없냐?” 

 

 하지만 하루히는 그런 걸 찾을 생각을 하질 않았다. 다시 장갑을 끼고 눈에 얼어붙은 손잡이를 잡는 걸 보았다. 비는 듯한 옆얼굴이 한숨을 푹 쉰다. 심각한 표정 그대로 하루히는 천천히 손잡이를 비틀었다. 

 

 여기서 말려야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나가토의 어드바이스를 듣고 나서 판단했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이 뒤늦게도──. 

 

 마치 저택 그 자체가 입을 벌리는 것처럼. 





 문이 열렸다. 





 인공의 불빛이 우리 얼굴을 밝게 비춘다. 

 

 “문이 안잠겨있었나보네. 누가 있으면 나와주면 좋을텐데.” 

 

 하루히가 스키와 스키 채를 건물 벽에 기대어 세우더니, 제일 먼저 안으로 달려들어가서는, 

 

 “누구 없으세요-! 잠깐 들어갈게요-!” 

 

 할 수 없다. 우리도 단장의 행동을 모방하기로 했다. 마지막에 들어온 코이즈미가 문을 닫고, 몇시간씩이나 겪어온 냉기와 추위와 시끄러운 바람소리하고 일차적 결별을 고할수 있게 되었다. 역시 안심이 되었는지, 

 

 “휴우-” 

 

 아사히나 선배가 털썩 주저앉았다. 

 

 “저기 아무도 없으세요-!” 

 

 하루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밝기와 따스함이 뼈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딱 한겨울에 밖에 나갔다 온 직후에 목욕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머리와 스키웨어에 쌓인 눈이 금세 녹아 물방울이 되어 바닥에 떨어진다. 난방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인기척은 없다. 누가 곧 귀찮단 듯이 나타나서 하루히를 쫓아내버려도 될 만한 전개인데, 그 부름에 나타나는 등장인물은 전무했다. 

 

 “유령의 집이라든가 뭐 그런건 아니겠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 저택 내부를 둘러보았다. 문열고 들어가면 바로 넓은 홀이 있는 형식이다. 고급 호텔 로비라고 하면 너무 좀 그런가. 훤히 뚫려있는데다가 또 천장은 높아서, 거기엔 또 무지하게 큰 샹들리에가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있는 건 또 진홍빛 융단이다. 외장은 기괴한 성같아 보여도 속은 꽤나 현대적이어서, 한가운데엔 폭 좀 있는 계단이 2층 통로로 이어져있다. 여기다 클로크룸(호텔 등에서 휴대품이나 코트 등을 보관하는 곳)만 있으면 정말 호텔에 왔다고 착각할 정도다. 

 

 “잠깐 찾아보고 올게,”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저택 주인에 애가 탄 하루히였다. 흠뻑 젖은 스키웨어에서 허물을 벗듯이 기어나오더니 차다시피 해서 스키부츠를 벗어던지곤, 

 

 “비상사태니까 할수 없긴 한데, 맘대로 들어왔다고 나중에 소리 듣는것도 싫고 말야. 누가 없나 좀 보고 올테니까, 다들 여기서 기다려.” 

 

 과연 단장답다고 해야하나, 지극히도 대표자틱한 말을 하더니, 하루히는 양말바람으로 곧장 달려나가려고 했다. 

 

 “잠깐.” 

 

 멈추게 한 건 나다. 

 

 “나도 가마. 너 혼자선 어떤 실례를 범할지 불안하다.” 

 

 급하게 스키웨어와 부츠를 벗는다. 곧바로 몸이 가벼워졌다. 눈보라치는 산중을 헤매며 축적된 피로감을 싸그리 옷에  담아 벗어던져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나는 잔뜩 불은 옷을 넘겨주며, 

 

 “코이즈미, 아사히나 선배랑 나가토를 부탁한다.” 

 

 설산탈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초능력자 녀석은 입술을 구부리는 듯한 웃음을 짓고 머리를 살짝 숙여 대답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아사히나 선배의 걱정스러운 눈동자와, 묵묵히 서있기만 하는 나가토를 뒤로 하고서, 

 

 “가자. 너무 넓어서 안쪽까지 목소리가 안 닿는 걸지도 모른다.” 

 

 “네가 나서지 마. 이럴땐 말이지, 이런 리더십 필요한 건 혼자서 하는 게 나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구.” 

 

 하루히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리를 해대며 날쌔게 내 손목을 잡더니, 대기상태로 들어간 단원 셋에게, 

 

 “금방 돌아올게. 코이즈미군, 저 둘 좀 잘 부탁해.” 

 

 “알겠습니다.” 

 

 코이즈미는 다시 평소의 웃음으로 돌아와 하루히에게 대답하고, 나한테도 고개를 끄덕여댔다. 

 

 아마, 이녀석은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거다. 

 

 이 저택 구석구석을 뒤져봐도 사람 그림자 하나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왠지 난 그런 예감이 들었다. 
 

 설산증후군-08


 먼저 하루히는 위층 탐색에 나섰다. 홀 계단을 올라가니, 좌우로 갈리는 통로가 길게 뻗어있었고, 통로 좌우양측에 셀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의 목제 문이 늘어서있었다. 그중 하나를 일단 한번 열어본다. 매끄럽게 열린 문 너머엔 깔끔한 양식 침실이 있었다. 

 

 복도 양끝은 또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나와 하루히는 또 위층을 향했다. 물론 가는 길은 하루히 맘이다. 

 

 “저기. 다음, 여기” 

 

 하루히는 한손으로 가리켜 확인을 하며, 또 한쪽 손으로 내 손목을 당기고 있었다. 다른 층에 도착할 때마다 “누구 없으세요!” 라고 바로 옆에서 질러대는 그 큰 소리에 귀를 안막을 수가 없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안되는구만. 나는 하루히의 손끝이 가리키는 대로, 그저 따라다니기만 할 뿐이다. 

 

 수가 너무 많아서 아무 문이나 열어보고, 그 전부가 똑같은 침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우리는 4층까지 올라와 있었다. 저택 통로 불빛은 밤새 켜놓는지 어느 층이든 빛에 가득차 있었다. 

 

 자 그럼 어느 문을 열까 하고 눈으로 고르고 있자니,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여름 생각나네. 배 확인하러 밖에 나갔을 때 말야.” 

 

 ……아아, 그런 일도 있었지. 지금과 같이 나는 하루히에게 끌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속을 뚫고 가게 되었었다. 

 

 내가 암갈색의 기억필름을 되감고 있자니 갑자기 하루히가 멈춰서서 손목이 잡혀있는 나도 멈춰섰다. 

 

 “나말야.” 

 

 하루히는 톤을 낮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언제적부턴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느샌가 말야……. 가능한한 남하고는 다른 길을 걸으려고 해왔어. 아, 이 길이란 건 도로 이야기가 아니라, 방향성이라든가 지향성이라든가 하는 길 말이야. 사는 길 같은.” 

 

 “흐응” 하며 나는 맞장구를 쳐준다. 그래서 어쨌다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선택할 만한 길은 미리 피하고, 항상 다른 쪽으로 가려고 했단 거야. 안그렇겠어, 다른 사람이랑 같은 쪽으로 가봤자 거의 재미없는 거 뿐이었다구. 왜 그렇게 재미없는 걸 하고 싶어 안달을 하는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그래서 깨달았어. 그럼, 처음부터 대세와는 다른 쪽을 선택하면, 재밌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원래부터 성격이 비뚤어진 녀석은 어느 무언가가 메이저(major)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메이저한 것에서 등을 돌린다. 손득 따지지 않고 스스로 마이너리티(minority)의 길을 걷는다. 내게도 다소 그런 경향이 있으니 하루히의 말도 그리 이해가 가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넌 너무 극단적으로 나가버린 나머지 메이저고 마이너고 하는 것과는 순 다른 차원으로 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루히는 후훗 하며 미묘하게 웃더니, 

 

 “뭐, 그런 건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말야,” 

 

 뭐냐. 내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으면 처음부터 묻지마.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거냐. 느긋하게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니잖냐. 

 

 “그보다 신경쓰이는게 있는데,” 

 

 “이번엔 또 뭐냐.” 

 

 귀찮단 감정을 담아 되물은 내게, 

 

 “유키랑 뭐 있었어?” 

 

 …………. 

 

 하루히는 나를 보지 않고, 바로 앞에 있는 복도 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대답은 한박자 이상 늦어있었다. 

 

 “……뭔소리냐. 별로 아무일도 없어,” 

 

 “거짓말.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쭉-, 너, 유키 신경만 쓰고 있잖아. 어쩌다 보면 유키 쪽만 보고 있고.” 

 

 하루히는 이번엔 복도 끝을 자세히 보려고 하고 있다. 

 

 “머릴 맞아서 그런건 아니겠지. 안그럼 뭐야. 유키한테 이상한 감정 품고있는 건 아니겠지.” 

 

 나가토만 쭉 보고있었다니 전혀 그런 자각은 없었다. 아사히나 선배랑 비교하면 기껏해야 6대 4 정도의 비율……같은 소리 할 때가 아니지. 

 

 “아니……” 

 

 말을 우물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번 소실 건 때부터, 내가 나가토를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건 이미 하루히가 다 꿰뚫은 사실이고, 언어상으로라도 부정어를 사용하는 건 내 자신이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설마 이녀석이 눈치채고 있었을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대비한 모범답안도 준비해놓지 않았으며, 또 그렇다고 사실 그대로 말해줄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말해보란 말야.” 

 

 하루히는 일부러 발음을 분명하게 하며, 

 

 “유키도 좀 이상한걸. 얼핏 보기엔 전이랑 별 다를바가 없는데, 나는 다 알 수 있어. 너 유키한테 뭐 했었지.” 

 

 얼마 안되는 한두마디 사이에 품는 감정에서 기정사실로 변하려고 하고 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코이즈미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와 나가토는 진짜로 ‘뭔가 있었다’는 게 되버릴 우려가 있다. 실제로 뭔가 있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완전부정하기도 힘들다. 

 

 “아-. 그니깐 말이다……” 

 

 “속이려고 해봤자 그렇겐 안돼. 맘에 안들어.” 

 

 “아니라니깐. 뭐 켕길만한 일같은 건 나가토나 나나 없어. 아-……. 그러니까 실은……” 

 

 어느샌가 하루히는 내게 양궁 과녁을 보는 듯한 눈빛을 주고 있었다. 

 

 “실은?” 

 

 다 캐내겠다는 눈빛의 하루히에게, 나는 겨우 말을 짜낼 수가 있었다. 

 

 “나가토가 좀 고민거리가 있어서 말이다. 그래, 그렇다고. 좀 전에 내가 그 상담을 해줬었다.” 

 

 생각이랑 말을 동시에 하려니 괴롭구만. 그게 입에서 닥치는 대로 나오는 거면 또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아직 해결이 안됐다. 뭐랄까……그니까……나가토도 혼자서 해결 못할 정도니깐 말이다. 내가 할수 있는 건 얘길 들어주고, 나가토가 뭘 해야 좋은지를 혼자서 결정하게 해주는 정도다. 나가토는 아직 결정을 보류중이라 상담해준 입장으로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거다. 그게 눈에 드러나버린 거겠지 뭐.” 

 

 “어떤 고민이야 그건. 왜 너같은 녀석한테 상담을 하는건데? 나한테 해도 되잖아.” 

 

 의심이 가시지 않는 말투였다. 

 

 “유키가 나나 코이즈미군보다 널 의지하고 있다고는 생각 안되는데 말이지,” 

 

 “너만 아니면 아무나 상관없었겠지,” 

 

 나는 눈썹을 치켜올리는 하루히를 안잡힌 쪽 손으로 진정시켜주었다.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기 시작하네. 

 

 “그니까 대략 이렇다. 나가토가 혼자 사는 건 알지?” 

 

 “집안 사정때문이지?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좀 그래서,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그 집안 사정이 약간의 발전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 결과 여하에 따라 나가토의 자취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무슨 뜻이야?” 

 

 “쉽게 말하자면 이사를 간단 거다. 그 맨션을 나가서, 저 멀리……친족이 있는 곳에 갈 가능성이 있다. 당연히 학교도 바뀌게 되고 말이지. 그러니까 전학이다. 딱 가기 좋은 타이밍인 내년 봄에, 2학년이 됨과 동시에 다른 고등학교로……” 

 

 “진짜야?” 

 

 하루히의 눈썹이 평평하게 내려온다. 좋아 다 됐다. 

 

 “아아 그렇고 말고. 근데 나가토는 집안 사정이 어떻게 되든 전학은 가기 싫은가 보더라. 졸업할 때 까지 키타고에 있고 싶다더군.” 

 

 “그래서 고민하고 있었구나……” 

 

 하루히는 잠시 고개를 숙였는데, 얼굴을 들었을 때는 도로 화난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럼 더더욱 내게 와서 말했어야지. 유키는 소중한 단원이야. 맘대로 어디 보낼 순 없어.”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럽다. 

 

 “네게 상담같은걸 하면 쓸데없이 일만 엉켜버릴 거라고 생각했을거다. 네가 하는 일이다, 나가토네 친족한테 가서 전학 결사반대 데모 행진 정도밖에 더했겠냐고.” 

 

 “그야 뭐…” 

 

 “나가토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싶다고 결심은 하고 있다. 잠깐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뿐이지 마음은 그 부실에 있는 거라고. 하지만 계속 혼자서 골치를 썩여봤자 정신에 부담만 가니까, 누군가에겐 말해주고 싶었을 거다. 마침 내가 입원하고 있었고, 나가토가 혼자서 병문안을 와줬을 때 들은 거다. 내가 우연히 마침 거기 있었을 뿐이야.” 

 

 “아……” 

 

 하루히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그 유키가……. 그런 걸로 고민하고 있었어? 꽤 즐거워 보였는데. 방학 전에, 어쩌다 복도에서 만난 컴퓨터연 부원 똘마니들한테 90도로 인사받더라구. 그리 싫지만도 않은 것 같았는데……” 

 

 나는 그리 싫지만도 않은 얼굴을 하는 나가토를 떠올려보고, 도저히 상상이 안가서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하루히는 얼굴을 팟 하고 들더니, 

 

 “그래도, 음, 그래, 맞아. 유키답다면 또 유키답긴 하네.” 

 

 믿어준 듯 하여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거짓 에피소드 어디에 유키다운 면모가 있다는 건진 만들어낸 내가봐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하루히에겐 나가토가 그런 느낌의 아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이야기의 마무리에 들어갔다. 

 

 “이 이야기는 못들은 체 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토한테만큼은 말하지 마라. 안심해, 그녀석이라면 신학기가 돼도 부실에서 얌전히 책을 읽고 있어줄거다.” 

 

 “당연하지, 그래야돼.” 

 

 “그래도 말이다,” 

 

 나는 하루히에게 잡힌 한손의 열을 느끼며 덧붙였다. 

 

 “만약, 만에 하나. 나가토가 전학을 가게 된다거나 누구한테 억지로 끌려가거든 네 마음껏 날뛰어줘라. 그때는 나도 네게 가담하마.” 

 

 하루히는 눈을 두 번정도 깜빡거린 후, 나를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극상의 웃음을 지으며, 

 

 “물론이지!” 

 

 나와 하루히가 1층 입구 로비로 돌아가니, 스키웨어를 벗고서 기다리고 있던 세사람이 각자 세가지 반응으로 맞아주었다. 

 

 왠지 아사히나 선배는 벌써부터 반 울상이 되어선, 

 

 “쿈군, 스즈미야상……. 다행이다, 돌아와줘서……” 

 

 “미쿠루짱, 뭘 또 울어. 금방 돌아온다고 했잖아.” 

 

 하루히는 아주 기분 좋게 말하더니 아사히나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나는 코이즈미 녀석의 표정이 눈에 거슬렸다. 뭐냐고, 그 아이콘택트(eye contact)는. 그런 의미불명 패스를 해주셔도 내 가슴엔 안닿습니다요. 

 

 또 한 사람, 멍하니 선 나가토의 그 검은 눈은 하루히 쪽을 향해있다. 평소 이상으로 멍하게 보였는데, 우주인 유기생명체한테도 제설차 같던 눈속 진군은 부담이었다고 해석하고 납득하였다. 나가토가 무류(無謬:잘못이 없음, 결점이 없음)성 집합체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그것을 아는 쪽에 속한다. 

 

 “잠깐 괜찮으시겠습니까?” 

 

 코이즈미가 태연하게 다가와서 내게 귓속말을 했다. 

 

 “스즈미야상께는 비밀로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말없이 그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구만. 

 

 “당신의 체감이어도 좋습니다. 당신과 스즈미야상께서 이곳을 떠나서 돌아오실 때 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십니까?” 

 

 “30분도 안걸렸을걸.” 

 

 도중에 하루히의 이야기를 듣고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둥 하면서 느낀 감각으론 그정도다. 

 

 “그렇게 말씀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코이즈미는 만족스러운 건지 곤란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기에 남겨졌던 저희들에게 있어선 말이죠, 당신과 스즈미야상께서 탐색에 나서셔서 여기로 돌아오시기까지, 무려 3시간 이상이 경과했습니다.” 


 

 설산증후군-09


 계측해 준 것은 나가토였다고 코이즈미가 말했다. 

 

 “두분께서 너무나도 늦으시기에,” 

 

 완전히 마른 앞머리를 넘기며, 이녀석은 허무(라:nihil)하게 미소지으면서, 

 

 “제 짐작을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나가토상께 제겐 보이지 않는, 다른 장소에 가보시도록 의뢰를 해보았습니다. 초수까지 정확하게 세게끔 미리 사전에 의논해두고, 10분 후에 돌아오시도록 약속을 하고요.” 

 

 나가토는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이 입구에서 옆쪽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걸어가서, 비로소 모퉁이를 돌아 그대로 모습을 감추고──. 

 

 “그런데, 나가토상께선 제가 200을 채 세기도 전에 돌아와버리셨습니다. 제 감각으론 3분도 지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나가토상께선 정확히 10분을 지켰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나가토가 옳은 게 당연하다. 네가 중간에 졸았던가 자릿수를 틀렸는지도 모르잖냐. 

 

 “아사히나상께서도 저와 거의 같은 수를 작은 목소리로 세고 계셨다죠.” 

 

 그거야……. 그래도 역시 나가토가 맞다고 보는데. 

 

 “물론 저도 나가토상의 카운트 정확성을 의문시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녀가 이런 숫자적 단위작업에 오류를 범하실 리가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럼 대체 뭐냐. 

 

 “이 저택은 장소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혹은, 존재하는 각 인간에 의한 주관시간과 객관시간에 차이가 발생한다. 그 둘중 하나거나, 둘 다입니다.” 

 

 코이즈미는 더더욱 상쾌한 표정으로 난폭하게 아사히나 선배를 달래는 하루히를 보고, 다시 나를 봤다. 

 

 “가능한 한 전원이 한데 뭉쳐있는 편이 낫겠죠. 안그러면 점점 시간의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건물 내부만 시간적으로 뒤틀려있는 것이라면 대처방법도 없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마치 이끌리듯이 여기에 오고, 그 전부터 차이가 시작되고 있었다면 어떨까요. 갑작스런 눈보라와,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에 닿지 않는 하산길에 대해, 당신께선 어떤 상상을 하셨는지요? 저희는 그 시점에서 이미 다른 시공간에 말려들어 있었다면……” 

 

 하루히에게 머리를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보고서 나가토를 보았다. 눈보라 때문에 이상한 모습이 되었던 머리모양은 완전히 말라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눈보다 온기있는 흰 피부다. 

 

 나도 코이즈미에게 귓속말을 했다. 

 

 “너말이다, 나가토랑 아사히나 선배하고 이미 이야기를 마쳤을 테지. 뭐라고 하더냐?” 

 

 “아사히나상께선 아무런 짐작도 가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거야 보면 안다. 중요한건 다른 한사람이다. 

 

 코이즈미는 더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그게, 아무것도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의뢰를 했을 때도 아무말씀 없이 다녀 오셨다가, 또 계속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정말로 10분이었는지를 여쭤보자 끄덕여주시긴 했습니다만, 그 외에 아무런 의사표시도 해주지 않으십니다.” 

 

 나가토는 빨간 융단 표면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다. 표정이 없는 건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지만, 멍한 정도가 훨씬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정말 내 기분 탓에 지나지 않을까. 

 

 내가 나가토에게 걱정의 말을 건네려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쿈, 뭐하고있어. 애들한테 보고해야지.” 

 

 하루히가 조황(釣況:낚시의 성과, 상황)을 자랑하는 듯한 투로 일동을 곁눈으로 보며, 

 

 “방금 한번 쭉 돌아봤는데, 2층하고 그 위층들은 전부다 침실이었어. 어디 전화기 하나 없나 했는데……” 

 

 “아아, 없었지.” 라며 나도 추가정보를 공개한다. “그리고 TV나 라디오도 없었다. 모듈러 잭(modular jack)이나 무선기같아 보이는 기계도 말이지.” 

 

 “그렇군요.” 

 

 코이즈미는 손끝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즉 어딘가와 연락을 취하거나, 외부에서 정보를 얻을 수단은 하나도 없단 말씀이군요.” 

 

 “적어도 2층 이상엔 말야.” 

 

 하루히는 불안 하나 없다는 듯 미소지으며, 

 

 “1층 어디에 있으면 좋겠는데. 있지 않을까? 이렇게 큰 저택이니깐, 통신전용 방이 따로 있을지도 몰라.” 

 

 그럼 찾으러 가자, 며 하루히는 깃발 대신 손을 흔들고, 어두운 표정의 아사히나 선배를 끌어당겼다. 

 

 나와 코이즈미, 그리고 살짝 늦게 나가토도 걷기 시작한다. 

 

 얼마안가 우리는 식당에 도착하게 되었다. 고풍스런(antique) 실내 장식이 되어있는 이 공간은, 가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별 세 개짜리 레스토랑같이 엄청난 넓이와 호화로움을 겸비하고 있었다. 흰 테이블보가 깔린 탁상엔 황금색으로 빛나는 양초까지 세워져 있었으며, 천장을 올려다보니 거기엔 호화스런 샹들리에가 달려있어선, SOS단 멤버들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아무도 없었나보네.” 

 

 하루히는 온기가 피어오르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이 사람들 대체 어떻게 된걸까. 불이니 에어컨이니 다 켜놓고, 전기비가 아깝네. 통신실 같은것도 없고 말야. 어떻게 된거야?” 

 

 하루히가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는 핫밀크티는, 이 레스토랑 같은 식당 안 주방에서 컵과 포트 등을 무단으로 빌려서 탄 것이다. 아사히나 선배가 물을 끓이는 사이에 하루히와 여기저기 열어보고 다녀본 결과, 찬장엔 막 닦고 건조시킨 것 마냥 번쩍번쩍한 식기가 늘어서 있었고, 특대 냉장고에는 식재료가 잔뜩 들어있었으며, 도저히 이 저택이 오랫동안 무인 저택으로 방치되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마치 우리가 도착함과 동시에 전부 짐싸들고 나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그조차도 의심스럽다. 그럼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야 맞다. 

 

 “마치 매리셀레스트(Mary Celeste:1872년에 실종된 배, 유령선) 호 같네.” 

 

 하루히가 개그를 하려는 모양인데, 별로 안웃기는군 그래. 

 

 1층 탐험은 다섯명 전부와 함께 이루어졌다. 줄줄이 열을 지어 걷던 우리들은 문을 발견할 때마다 열어제껴보고, 그때마다 쓸만한 걸 발견해나가고 있었다. 거대한 건조기가 설비된 세탁실을 찾아내는가 하면, 최신기재가 구비된 노래방을 찾아내기도 하였고, 목욕탕처럼 커다란 욕실을 찾을 수도 있었으며, 당구대와 탁구대 및 전자동 마작판이 설치된 레크리에이션 룸을 찾는 등……. 

 

 바라는 대로 방이 생겨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가능성으로는,” 

 

 코이즈미는 컵을 찻접시(saucer)에다 놓고는, 번쩍번쩍한 촛대를 갖고 놀듯이 집어들었다. 그대로 하나 슬쩍할 작정인가 싶었는데, 세공상태를 꼼꼼히 감정하는 듯한 눈으로 보고는 곧장 내려놨다. 

 

 “이 저택 사람들은, 눈보라가 치기 전에 전부 멀리 떠났다가, 이 악천후 때문에 발이 묶여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연한 미소를 하루히에게 보여주려는 듯이 짓고는, 

 

 “그렇다면, 눈보라가 멈추는 즉시 돌아오겠지요. 무례하게 들어와버린 것을 용서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용서해줄거야. 달리 방법이 없었잖아. 아, 혹시 이 저택, 우리처럼 길을 잃은 스키 여행객을 위한 대피소 같은거 아닐까? 그러면 사람이 없는 것도 이해가 안가지만도 않아.” 

 

 “전화에 무전기도 없는 대피소가 어딨냐.” 

 

 내 목소리는 피로가 녹아있었다. 다섯명이서 1층 부분을 돌아다녀본 결과 알 수 있었던 건 그정도 뿐이다. 통신수단이나 뉴스 소스 뿐 아니라, 이 건물엔 시계조차 없었다. 

 

 그 이전에, 이 저택은 건축기준법과 소방법을 확실히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며, 

 

 “어느 녀석이 이렇게 크기만 하고 불편한 대피소를 만들겠냐?” 

 

 “나라나 자치단체 같은데 아냐?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홍차같은 것도 속편히 마실 수 있고 말야. 세금이면 나도 내고 있으니까 사용할 권리는 있어. ……그래, 배고프니까 뭐 좀 만들어먹자. 좀 도와줄래, 미쿠루짱.” 

 

 마음만 먹으면 다른 사람 의견엔 절대 좌우되지 않는 하루히다. 날쌔게 아사히나 선배의 손을 낚아채더니, 

 

 “네? 아, 네네,” 

 

 우리에게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며 주방으로 끌려갔다. 아사히나 선배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코이즈미가 말하는 시간의 흐름도 신경이 쓰이지만, 하루히가 사라져준 것 만큼은 좋은 상황이다. 


 설산증후군-10


 “나가토.” 

 

 나는 텅 빈 도자기를 보고 있는 쇼트컷 머리 옆모습에다 대고 말했다. 

 

 “이 저택은 대체 뭐냐. 여긴 어디냐고.” 

 

 나가토는 굳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30초정도 지나고서, 

 

 “이 공간은 내게 부하(負荷)를 준다.” 

 

 그렇게 불쑥 말씀하셔도 말입니다. 

 

 모르겠다. 무슨 소리냐? 나가토네 창조주(creator)인지 후원자(patron)인지한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할 순 없냐. 비상사태라고. 가끔은 도와줘도 되잖아? 

 

 겨우 내쪽으로 향한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정보통합사념체와의 연결이 차단되어 있다. 원인 해석불능.” 

 

 너무나도 말을 담담히 해서 이해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제정신이 들자 다시 물어보았다. 

 

 “……언제부터냐.” 

 

 “내 주관시간으로 6시간 13분 전부터.” 

 

 감각을 잃어서 숫자로 말해줘도 알아먹기 힘들구나 하고 있으니, 

 

 “눈보라에 말려든 순간부터.” 

 

 검디검은 그 눈동자는 평소처럼 차분한 색을 띠고 있었다. 다만 내 마음은 결코 차분해지지 않았다. 

 

 “왜 그때 말해주지 않은거야.” 

 

 탓하는 건 아니다. 나가토의 침묵은 별일 없다는 증거나 같은 것이니, 할 수 없다기보단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단 건 여기는 현실에 있는 장소가 아니란 거냐. 이 저택뿐만 아니라……우리가 지나왔던 설산이니 뭐니 전부 다, 누군가가 만든 이(異)공간인가 하는 거냐고?” 

 

 나가토는 다시 침묵했다가, 이윽고, 

 

 “알 수 없다.” 

 

 어쩐지 쓸쓸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그 언젠가의 나가토를 상기시켜서, 약간 초조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녀석이 ‘알 수 없다’는 말을 쓰는 현상이 하루히 관련 말고도 있을 줄이야.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한 명의 SOS단 단원에게 말했다. 

 

 “넌 어떠냐. 뭐 할 말 없냐.” 

 

 “나가토상을 두고 제가 이해가능한 현상도 그리 없습니다만,” 

 

 나가토에게 흥미깊은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부단장님께선,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제가 알수 있는 것은, 여기가 폐쇄공간은 아니라는 것 정돕니다. 스즈미야상의 의식이 구축한 공간이 아닙니다.” 

 

 정말이냐? 

 

 “예. 이래봬도 스즈미야상의 정신활동에 관해서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니까요. 그녀께서 현실을 바꾸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시면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스즈미야상께선 이번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란 것도 아니구요. 완전히 무관계하다고 단호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뭐든 걸어보시죠, 그 자리에서 더블업(double up:배로 걺)을 외치겠습니다.” 

 

 “그럼 누구냐.” 

 

 나는 약간의 추위를 느꼈다. 눈보라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인지, 식당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은 오로지 회색 뿐이었다. 거기서 푸른색의 ‘신인’이 불쑥 얼굴을 내밀어도 별반 이상하지도 않을 것 같은 배경이었다. 

 

 코이즈미는 나가토를 본받은 듯이 침묵하고 어깨를 들썩 했다. 긴장감 하나 없는 제스쳐였지만, 그건 연기였는지도 모른다. 심각한 얼굴을 보이기 싫었던 걸까. 

 

 “오래 기다렸지-!” 

 

 마침 하루히와 아사히나 선배가 샌드위치가 산더미처럼 쌓인 큰 접시를 들고 나타났으니까 말야. 

 

 내 체내 시계가 감으로 알려준 바에 따르면, 그리 기다릴 것도 없는 정도였다. 하루히와 아사히나 선배가 주방으로 사라지고 나서 5분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루히에게 물어보고 나서 확실해진 소요시간은 최소 30분은 걸렸던 모양이고, 들고온 음식을 봐도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샌드위치용 식빵은 전부다 하나하나 구워져 있었고, 햄이나 양상추에도 간이 쳐져 있었고, 계란을 삶고 자르고 마요네즈에다 버무리고 하는 것도 5분 가지곤 택도 없지. 산처럼 쌓인 믹스 핫 샌드위치의 양은, 둘이서 아무리 별 쑈를 해도 시간이 꽤 걸릴 정도로 많았으며, 여담인건 알지만 그게 또 꽤 맛있었다. 하루히의 요리실력은 크리스마스 냄비 때 절실히 느꼈지만서도, 대체 이녀석이 못하는 종목은 뭘까. 초등학교 때 만났으면 도덕 성적 만큼은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내 머리를 살짝 쳤다.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걱정해야 할 건 지금 우리들이 처한 상황 뿐이다. 

 

 아사히나 선배가 자기가 만든 요리의 행방이 신경쓰이는지, 내가 다른 샌드위치로 손을 뻗을 때마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더니, 안도한 얼굴을 했다가 긴장했다가 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가 하루히가 만든 거고, 후자는 아사히나 선배가 만든 거겠지. 훤히 보인다. 

 

 그녀는 아직 모른다. 코이즈미한테도 말 안했다. 하루히한테 알려줄 수는 없다. 

 

 나가토랑 나만 알고 있으며, 아직 실행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렇다──. 



 나는 아직 세상을 구하러 과거에 가지 않은 것이다. 

 

 서둘러 갈 것도 없겠다 싶어, 새해가 돼도 괜찮으려니 하고 있었다. 아사히나 선배한테 뭐라 말할까 문안을 작성할 필요도 있고 해서, 태평하게 연말기분을 맛보고 있었던게 잘못이었나? 이대로 이 저택에서 못나가게 된다면……. 

 

 “아니, 잠깐.” 

 

 그러면 이야기가 이상하게 된다. 나는 나가토 및 아사히나 선배와 함께 반드시 12월 중간 쯤으로 시간역행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 내가 본 그 세사람은 뭐였냐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단 것은, 우리는 안전히 원래 공간으로 탈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안심이 좀 되겠다만. 

 

 “자, 많이들 먹어,” 

 

 하루히는 몸소 마구 먹어대며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다. 

 

 “아직 많이 있으니까 말야. 뭐하면 더 만들어 줄수도 있어. 식량고에 평생 먹어도 다 못먹을 만큼 식재료가 잔뜩 있었거든.” 

 

 코이즈미는 쓴웃음을 짓고 햄 샌드위치를 음미하며, 

 

 “맛있습니다. 굉장히요. 마치 레스토랑 것 같은 맛입니다.” 

 

 아첨꾼 같은 소리를 해대고 있는데, 내가 신경쓰이는 건 이녀석이 아니다. 재료의 무단사용이 너무나도 걱정된 나머지 영 진도가 안나가는 아사히나 선배도 아니다. 

 

 “…………” 

 

 나가토다. 

 

 저 깨작깨작한 식사법은 원래 이녀석 것이 아니었다. 

 

 우주인제 유기 안드로이드는, 마치 평소의 왕성한 식욕을 엇다 놓고 온것마냥 손과 입의 움직임이 반으로 줄어있었다. 




 하루히와 내가 태반을 먹어치웠던 간단한 식사가 끝난 후, 

 

 “목욕하자.” 

 

 하루히가 촐랑거리며 제안하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의견이 없다는 것은 모두 긍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녀석 특성이라, 

 

 “목욕탕이 있었으니까 말야. 남녀 따로는 아니었으니까 순서대로 들어가는거다. 단장으로써 공서양속(公序良俗:공공질서와 미풍양속)과 풍기를 문란하게 할 순 없으니깐. 레이디 퍼스트인건 알지?” 

 

 달리 할 게 생각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이럴 땐 하루히처럼 속속 다른 할 일을 생각해 내주는 녀석이 있다는 건 꽤나 다행스런 일이다. 그만큼 이 상황을 잊을 수가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달리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기계적으로라도 몸을 움직여주는 편이 뇌에도 자극을 줘서 무슨 생각이 번뜩 떠오를 지도 모른다. 내 뇌에 기대해보도록 하자. 

 

 “그 전에 방을 정하자. 어디가 좋겠어? 다 똑같긴 한데.” 

 

 코이즈미론에 따르면 한 방에 뭉쳐있는 게 최고겠지만, 그런 제안을 하면 날라차기가 날아올 것 같아서 자중, 

 

 “모두 가까운 방인 게 낫겠지. 서로 옆이나 마주보는 걸로 다섯 개 확보해두면 될거다.” 

 

 내가 자못 진중하게 말을 함과 동시에 하루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럼 2층에서 정하자,” 

 

 우리는 힘차게 걷기 시작하는 하루히를 뒤따른다. 도중에 입구쪽에다 내던져놨던 스키웨어를 세탁실 건조기에다 구겨넣고서 계단을 올랐다. 

 

 ‘저택 사람이 오면 금방 뛰쳐나갈 수 있게끔’이란 하루히의 배려로 계단 가까이에 있는 방 다섯을 임시 주거지로 삼게 되었다. 나와 코이즈미가 바로 옆이며, 그 통로 맞은편엔 나가토, 하루히, 아사히나 선배가 침실을 확보해 놓았다. 내 정면이 하루히 방이다. 

 

 아까 하루히랑 돌아다녀 봤을때도 느낀 거지만, 정말 다른건 하나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침실이다. 싸구려 3류 비즈니스 호텔에도 이거보단 더 있다. 고풍스런 화장대를 제외하면 침대와 커튼정도밖에 없다. 창문은 완전히 붙박이라 열수도 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2중 유리로 되어있었다. 그 방음효과 때문인지, 밖엔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내는 완전 무음이다. 오히려 더 으스스하다. 

 

 정리할 짐 같은것도 없기에 우리는 방을 정한 직후 곧바로 빨간 융단 통로로 집합했다. 

 

 하루히는 아직 도발적인 웃음으로, 

 

 “알고 있지, 쿈.” 

 

 알긴 뭘? 

 

 “뻔하잖아, 이런 시츄에이션에 놓인 번뇌 덩어리 남자가 할만한 짓을 하면 안돼, 알겠지. 나는 그런 스테레오타입이 제일 싫으니까!” 

 

 뭘 하면 된다고? 

 

 “그러니까……” 

 

 하루히는 여단원 둘의 팔을 끌어당기더니, 평온한 얼굴로 그냥 끌려오는 나가토의 옆머리에다 자기 옆머리를 대면서, 단호히 말했다. 

 

 “엿보지마!” 

  

 설산증후군-11


 하루히 혼자서만 시끄러운 세 처자들이 멀이져가는 걸 보며 나는 미끄러지듯이 내 방을 나왔다. 저택의 통로는 바깥의 미칠듯한 눈보라 따위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잠잠했다. 공기도 따뜻하다. 하지만 그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과는 무관한 모양이다. 마음을 차갑게 하는 따스함에 감사를 느낄 수는 없다. 

 

 발소리를 죽이며 향한 곳은 바로 옆 방이다. 조용히 노크. 

 

 “무슨 일이신지요.” 

 

 코이즈미가 얼굴을 내밀고, 환대해주는 듯한 웃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입술에다 검지를 대자, 알아들었다는 듯이 입을 다문다. 나도 말없이 코이즈미 방으로 들어갔다. 숨어드는 건 아사히나 선배 방으로 하고 싶었지만, 지금 놀고 있을 틈은 없다. 

 

 “너한테 해둬야 할 말이 있다.” 

 

 “호오.” 

 

 코이즈미는 침대에 털썩 앉고, 내게도 앉으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그거야말로 무엇인지요. 신경이 쓰이는군요. 다른 세분께서 들으시면 안될 말이라도.” 

 

 “나가토야 들어도 상관없긴 하다만,” 

 

 무슨 이야기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하루히의 소실부터 시작해서, 내가 병실에서 눈을 뜨기까지에 이르는 장대한 이야기다. 아사쿠라 료코의 부활, 두 번째의 시간역행과 3년전의 칠석, 설정이 달라져버린 SOS단 멤버들, 아사히나 선배 어른 버전,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게 될 세계부활계획──. 

 

 “약간 길어질 거다.” 

 

 나는 코이즈미 옆에 앉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코이즈미는 아주 훌륭한 청객이어서, 중간중간에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주며 마지막까지 모범 청강생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요점만을 묶어서 생각보다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나로썬 세부한 부분까지 장황하게 묘사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우선해야 할 것은 이해의 용이함과 일반성이라고 보기에, 그렇게 해 주었다. 

 

 얌전히 끝까지 다 들어준 코이즈미는, 

 

 “그렇군요.” 

 

 특별히 놀란 것도 아닌 듯 하면서, 미소를 지은 입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흥미롭다고밖에 달리 드릴 말씀이 없군요.” 

 

 네가 하는 ‘흥미롭다’는 표현은 시후 인사냐. 

 

 “아뇨,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실은 제게도 짐작이 가는게 있었기 때문에요. 당신께서 그 이야기대로의 체험을 하셨다고 한다면, 제 의혹도 보강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나는 재미없단 얼굴을 하고 있었겠지. 네놈 짐작은 또 뭐냐. 

 

 “약해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구요.” 

 

 그니까 뭐가. 

 

 “스즈미야상의 힘입니다. 또한 나가토상의 정보조작능력도 그렇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나는 코이즈미를 봤다. 코이즈미는 무해한 미소를 유지하며, 

 

 “스즈미야상께서 폐쇄공간을 만들어내는 빈도가 줄고 있다는 사실은 크리스마스 전에 말씀드렸었죠. 그것과 발맞춰, 제가 나가토상께 느끼는……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우주인스러운 분위기라고 할까요? 그런 감각, 느낌 같은 겁니다. 그게 감소하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흐음” 

 

 “스즈미야상께선 서서히 보통의 소녀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가토상께서도 정보통합사념체의 일개 단말의 입장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코이즈미는 나를 보고 있다. 

 

 “저로썬 더할 나위 없는 전개입니다. 스즈미야상께서 그대로 현실의 자신을 긍정하시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생각따윈 하지 않으신다면 제 일도 끝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나가토상께서 아무런 힘도 가지지 않은 보통 여학생이 되주신다면 완벽하군요. 아사히나상께선……글쎄요, 그분이시라면 그대로 미래인이어도 상관없겠습니다만.” 

 

 코이즈미는 나를 무시하듯이 독백을 계속한다. 

 

 “당신께선 다시 한번 과거로 가서 자신과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만 합니다. 왜냐면, 당신께선 그 과거에 있어서 미래에서 온 자신과 나가토상과 아사히나상을 목격했기 때문에──였었나요.” 

 

 그렇다마다. 

 

 “그런데 현재 저희 모두 눈보라치는 산중에서 길을 잃고, 누가 준비라도 해준것 같은 수상한 저택에 있습니다. 나가토상께도 이해하실 수 없는, 이른바 이공간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여러분들께서 과거에 돌아갈 방도가 없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그 이유에 따라 최소한 당신과 나가토상, 그리고 아사히나상 세분께서만큼은 원래 공간으로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아니, 돌아가는 건 이미 결정되어 있죠……” 

 

 안그러면 이상하잖냐. 내가 또 하나 긴박감을 느끼고 있는 건 그거 때문이다. 그 때 나는 확실히 내 목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아직 그때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이 눈보라치는 저택에 계속 체재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탈출할 수 있는 것은 기정사항이다. 아사히나 선배(大)도 그렇게 말했었잖냐. ‘안그러면 지금의 당신은 여기에 없지 않겠어요?’라고. 

 

 “그렇군요.” 

 

 코이즈미는 또 한번 똑같은 말을 하더니, 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제게 또 다른 가설이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비관적인 가설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희 전원이 원래 공간으로 돌아가지 못하여도 전혀 상관없는 이론이죠.” 

 

 무게잡지 말고 빨리 말해. 

 

 그럼, 하고 문장을 연 코이즈미는 신중하게 목소리 톤을 낮췄다. 

 

 “현재의 저희들은 진짜 저희가 아니라, 이(異)세계로 복사된 존재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해하기를 기다리는 듯이 이쪽을 보고 있는데, 의미불명에도 정도가 있다. 

 

 “알기 쉽게 바꿔 말씀드리도록 하죠. 예를 들어 저희의 의식이, 그대로 스캔(scan)되어 컴퓨터 공간에다 옮겨져버렸다고 하면 어떨까요. 의식만 그대로 가상현실공간으로 이송되었다면.” 

 

 “복사라고?” 

 

 “그렇습니다. 의식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통합사념체급의 힘을 가진 자라면 무엇이든 가능하겠죠. 즉 이 이공간에 말려들고 만 저희는 진짜 저희들이 아닌, 어느 일정시각부터 충실하게 복사된 동일인물입니다. 진짜 저희들은……글쎄요, 지금쯤 츠루야상의 별장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죠.” 

 

 잠깐만. 의미파악이 안되는 건 내가 무식해서 그러냐? 

 

 “꼭 그렇다고 볼순 없습니다만. 좀더 친근한 예를 들어보죠. 당신께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계신다고 가정해보도록 하죠. 판타지류 RPG입니다.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동굴에 들어가기 전, 일단 세이브해 두는 것은 당연한 대책이라 할 수 있겠죠. 설령 거기서 파티가 전멸했다고 해도, 다시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가 리플레이할 수 있으니까요. 미리 카피 데이터를 제작해두면 오리지널은 소중히 보존이 되며, 복사본만 있으면 무모한 행동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리셋시키면 되니까요. 지금 저희들이 놓인 상황이 그렇다면 어떠시겠습니까?” 

 

 코이즈미는 체념한 듯한 표정이 되어서도, 아직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즉  여긴 누군가가 구축한 시뮬레이션 공간으로, 저희는 복사된 실험동물입니다. 이와같은 상황하에 놓였을 때, 스즈미야상을 포함한 저희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관찰하기 위한, 실로 그를 위한 장소인 겁니다.” 

 

 “코이즈미……” 

 

 나는 중얼거리면서 맹렬한 기시감에 쫒기고 있었다. 여름의 엔들리스 오거스트(August:8월)에도 체험한 것과 같은, 불완전한 기억 조각이다. 뭘까.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는 기억이 내 머리 한구석에서 소리치고 있다. 기억해내라, 고. 

 

 내가 겨우 말을 꺼냈다. 

 

 “이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냐?” 

 

 “설산에서 조난당한 기억 말씀이십니까? 제겐 없습니다만.” 

 

 “그거 말고,” 

 

 설산은 무관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어떤 다른 시공에 갇힌 것 같은 기억이……왠진 모르겠지만 내겐 있다. 거긴 아주 비현실적인 곳이고……. 

 

 “꼽등이 퇴치 때 말씀하시는 건 아니신지요? 그건 분명 이공간이었죠.” 

 

 “그것도 아니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홀연히 떠오르는 것은, 기묘한 복장을 한 코이즈미에 하루히, 나가토에 아사히나 선배, 그리고 나. 

 

 그래, 코이즈미. 왠진 모르겠지만 넌 하프(harp:현악기의 일종)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전원이 모두 고풍스런 의상을 입고, 거기서 우리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데……. 

 

 “설마 전생의 기억을 갖고계신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요. 당신껜 그런 일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생이나 후생 같은게 진짜 있다면, 인류는 더 관용적으로 살아야 할 거다. 그딴 건 현세에다 변명하고 싶어하는 녀석들이 만들어낸 헛소리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젠장. 생각이 안난다. 내 이성은 이공간 같은 것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내 깊은 곳에 있는 감성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뭐였던 걸까. 단편적인 키워드밖에 안떠오르긴 하지만, 거기엔 왕이라든가 해적이라든가 우주함이라든가 총격선이라든가 하는 것이 거품처럼 흔들거리고 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런 건 없었다고 하는 기억은 있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서 이리저리 얽혀 도무지 맞지를 않는 조각들은 대체 뭘까.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설산증후군-12


 내 고뇌하는 듯한 표정을 봤는지, 코이즈미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나가토상께서도 해석불능이며, 거기에 그녀에게 부하(負荷)를 주는 공간이라면, 저택을 포함하여 눈보라치는 산에서의 조난을 연출한 자의 정체도 어느정도 추리가 가능합니다.” 

 

 나는 말없이 있었다. 

 

 “나가토상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자일겁니다.” 

 

 그게 누구냐고. 

 

 “모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존재가 저희를 이런 상황에 몰아넣고, 이대로 저희들을 가둬둘 생각이라면, 가장 큰 걸림돌은 나가토상이겠죠.” 

 

 코이즈미는 아랫입술을 손으로 문지르며, 

 

 “제가 만약 그 자의 입장이라면, 가장 먼저 나가토상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생각해볼 겁니다. 단독으로는 거의 무력하다고 해도 좋을 저나 아사히나상과는 달리, 나가토상께선 통합사념체와 직결되어 있으니까요.” 

 

 하루히보다 더 신적인 녀석들인가보구만. 단수인지 복수인지도 모르겠다만. 하지만 자기네 두목과 연결이 차단되었다고 나가토는 고백했었다.


 “어쩌면 그 자는 나가토상의 창조주보다도 강대한 힘을 가지고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되면 아웃이겠습니다만……” 

 

 말하는 도중에 뭐가 떠올랐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선, 그 핸섬 소년 녀석은 팔짱을 꼈다. 

 

 “아사쿠라 료코를 기억하시지요?” 

 

 거의 잊을 뻔 했다만 이번달이 되어서 도저히 잊을수 없는 일이 일어났단 말이다. 

 

 “정보통합사념체 내부의 소수파에 과격파, 그 일파가 쿠데타를 성공시켰다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들에게서 보면 신이나 마찬가지인 지성체입니다. 나가토상을 고립시키고, 저희를 위상이 엇갈린 공간에 가둬버리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떠오른다. 사교적이며 밝고 우수했던 우리반 반장. 날카로운 칼끝. 나는 두 번이나 아사쿠라에게 공격을 당하고, 그와 함께 나가토에게 구원을 받은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말은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저희는 이 저택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기나긴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용궁이라도 되냐. 

 

 “아주 정확한 표현입니다. 저희가 처한 이 상태는 환대라고 해도 되겠죠. 바라는 대로 뭐든 준비되어 있고요. 따뜻하고 넓은 저택, 냉장고에 가득찬 식재, 따뜻한 물도 완비된 목욕탕, 쾌적한 침실……. 저택 탈출에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 말이죠.” 

 

 그래가지곤 의미가 없다. 난 이런 언노운 스페이스(unknown space)에 갇혀서 나태한 생활을 만끽할수 있을 정도로 인생에 절망한 놈이 아니다. 고등학교 생활도 1년이 채 안됐는데 벌써 끝내기엔 너무 짧잖아. 나도 여기에 있는 녀석들 이외에 한번쯤은 더 만나고싶은 사람들이 있단 말이다. 타니구치나 쿠니키다를 거기에 포함시켜도 좋고, 가족이나 샤미센하고도 이래가지곤 섭섭하다고. 난 겨울에 많이 약해서, 아이슬란드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눈이랑 얼음에 갇혀서 여생을 보낸다니 평생을 걸려도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다. 여름의 더위와 매미의 연주를 더없이 사랑하는 남자라고 불러줘라. 

 

 “그 말씀을 들으니 저도 안심이 되는군요.” 

 

 코이즈미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만약 스즈미야상께서 이상상태를 느끼시고, 자신의 능력을 발산시키게 된다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걸 꾸민 자의 목적은 그것일지도 모르죠. 이렇다할 진전이 없다면, 일부러 자극적인 조작을 하여 폭발을 종용한다. 자주 있는 수법입니다. 이곳이 시뮬레이션 공간이며 저희들이 진짜 저희와 떨어진 복사본이라면,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죠. 당신께서도 게임 캐릭터에 무모한 행동을 시키고 양심이 찔리는 경우는 좀처럼 없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과거가 없지많은 않군. 하지만 그녀석들은 어디까지나 수치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현실에 살아있는 존재다. 

 

 “먼저 여길 탈출해야 합니다. 이공간에 있기보다는 현실적인 조난이 훨씬 낫습니다. 어떻게든 되죠. 아니, 어떻게든 해야만 합니다. 스즈미야상이나 저희를 가두고자 하는 존재는 저희에게 있어서 명확한 적입니다. 저희라는 건 ‘기관’이나 정보통합사념체가 아니라, SOS단을 말하는 거긴 합니다만.” 

 

 뭐든 상관없어. 나랑 같은 의견이라면, 그녀석은 그 자리에서 우리편이다. 

 

 그만큼 나는 깊은 사색에 잠기고, 코이즈미도 싱크로하듯이 생각에 잠기는 듯한 얼굴로 턱에다 손을 댔다. 

 

 비로소──. 

 

 작은 소리의 노크가 나와 코이즈미 사이의 침묵을 깼다. 풀이라도 바른 것 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는 문을 열었다. 

 

 “저기……. 목욕탕 비었어요. 들어가셔도 돼요.” 

 

 목욕을 마친 아사히나 선배는 알맞게 상기되어 있어서, 묘한 색기를 천진난만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한가닥 볼에 붙어있는 게 또 묘하게 선정적이어서, 큰 티셔츠에서 나온 맨 다리가 요염해 보였다. 내 정신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당장 들어다가 내 방 구석에다가 갖다놓고 싶을 정도다. 

 

 “하루히랑 나가토는 어딨나요?” 

 

 내가 복도를 보며 말하니, 아사히나 선배는 쿡 하고 웃음짓더니, 

 

 “식당에서 주스 마시고 있어요.” 

 

 내 뚫어지는 듯한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허둥거리듯이 앞쪽 옷을 눌렀다. 

 

 “아, 옷은 탈의실에 있었어요. 이 셔츠도 그거구요. 목욕수건이랑 세면도구도 거기……” 

 

 수줍은 듯한 느낌의 동작이 말도 못할 정도로 끝내줬다. 

 

 나는 뒤돌아 코이즈미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재빨리 통로로 나왔다. 등뒤로 문을 닫고서. 

 

 “아사히나 선배,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요,” 

 

 “네?” 

 

 커다란 눈이 나를 올려다보고, 웬일이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 저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무지하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만, 선배는 어떠신지.” 

 

 아사히나 선배는 길고 윤기있는 눈썹을 깜빡거리며, 

 

 “에-그게 스즈미야상은 이것도 코이즈미군이 준비한 미스테리 게임의……그그, 복선? 인가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하셨는데요……목욕탕에서요,” 

 

 하루히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좋지만, 아사히나 선배까지 그리 납득을 해버리시면 곤란합니다요. 

 

 “시간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건 어떻게 된건가요. 선배도 코이즈미가 한 실험을 보셨죠?” 

 

 “네. 그래도, 그것도 전부 트릭……? 같은거 아닌가요?”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애써 참았다. 어떻게 해야 코이즈미한테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도 알 수없는 판이고, 만약 그게 정말 우리를 기만한 트릭의 일부라고 하면 하루히한테도 가르쳐줘야 공평하다. 무엇보다 시간은 아사히나 선배 전문분야 아닙니까. 

 

 나는 마음먹고 말했다. 

 

 “아사히나 선배, 미래랑 연락이 되나요. 지금, 여기서말입니다.” 

 

 “네?” 

 

 동안의 상급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보더니, 

 

 “그런 걸 말할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우훗. 금칙이에요-” 

 

 이상한 소리 말라며 웃어주긴 했는데, 나는 농담을 할 생각은 아니었을 뿐더러, 이게 웃을 일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사히나 선배는 계속 쿡쿡 웃으며, 

 

 “자, 빨리 목욕하러 안가시면 스즈미야상한테 혼나요. 후후” 

 

 평지 주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초봄의 배추흰나비와 같은 발걸음으로, 그 작은 체구의 상급생은 나풀나풀 계단쪽을 향하고, 한번 날 뒤돌아보고 어설픈 윙크를 해주고선 아래층으로 모습을 감췄다. 

 

 큰일이다. 아사히나 선배는 도저히 의지할 게 못된다. 의지할만한 녀석은……. 

 

 “젠장.” 

 

 나는 융단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그녀석한테 쓸데없는 부담은 주고싶지 않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뭔가를 해줄 만한 녀석은 그녀석 하나밖에 없다. 코이즈미는 잘난 척 추측만 펼쳐대고 있을 뿐이고, 하루히는 잘못 건드렸다간 어떤 폭발을 일으킬지 모른다. 아무리 내가 비장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코이즈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함부로 쓸 수도 없겠다. 우리를 이 상황에 처하게 만든 그 자는, 아마 이것을 노리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떡해야 되냐고……?” 


 “쿈군……” 

　　　　　　　　　　　　　　　　　　-설산증후군 中


 설산증후군-13

 
 목욕을 하면서 혈행을 좋게 해주면 뭔가 명안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내 머리가 어떻게 되먹었는지는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듯이, 이 사태를 개선할 수 있을 만한 아이디어를 내놓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여서 낙담조차 안되는 게 한심하다. 

 

 탈의실에는 아사히나 선배가 말한 대로 목욕수건과 갈아입을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단정히 개인 프리사이즈 티셔츠와 여러 가지 크기의 바지가 선반에 쫙 놓여있었다. 대충 아무거나 골라서 입고, 코이즈미하고 같이 식당으로 향했다. 

 

 먼저 와있던 세사람은 테이블에 주스병을 늘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꽤 목욕 오래했네. 뭐했어?” 

 

 나로썬 평소보단 좀 짧은 입욕시간이었다만. 

 

 하루히가 건네준 귤주스를 마시며, 내 시선은 도무지 나가토 아니면 창문 밖으로밖에 가지 않는다. 몸이 따뜻해진 덕인지, 한껏 기분이 물오른 하루히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주스를 병째로 들고 마셨고, 아사히나 선배도 자신이 놓인 상황을 전혀 모른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있었고, 그건 상황을 알고 있는 코이즈미도 그랬다. 나가토가 평소보다도 작아보이는 건 젖은 머리가 가라앉아 있어서 그런건가. 

 

 그건 그렇다치고 지금은 대체 몇시냐고요.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여전히 눈보라 일색이었는데, 아주 약간 어두운 듯 했다. 완전한 암흑이 아닌게 오히려 더 으스스하다. 

 

 하루히도 시간감각을 잃고 있었나본지, 

 

 “오락실에서 놀자,” 

 

 그런 극락적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노래방도 좋지만, 오랜만에 마작이 하고 싶어. 레이트는 핀 원쓰리로 룰은 아리아리,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으니까 칩이랑 축의 없이. 국사13면이랑 사암각 단기는 컬러풀 역만으로 해도 되겠지?” (*마작을 모르니 대체 뭔소린지=_-;) 

 

 룰에다 트집잡을 생각은 없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해야할 건 노래방도 마작도 아닌 생각이기 때문에. 

 

 “일단 한숨 자자. 노는거야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 오늘 하루 일도 많아서 좀 피곤하다.” 

 

 눈에 반 파묻혀서는 몇시간이나 스키 짊어지고 헤매고 다녔다고. 이래도 피로가 축적되지 않는 건 하루히의 근육 정도다. 

 

 “그렇네……” 

 

 하루히는 다른 단원들이 어느쪽 의견에 찬성하는지를 확인하려는 듯이 각자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뭐, 좋아. 좀 쉬고 하자. 하지만 일어나면 열심히 노는거야.” 

 

 소용돌이 성운이 두세개 정도 들어가있기라도 한것 마냥 눈을 반짝이며 선언했다. 



 각자 정해뒀던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침대에 엎드려 타개책 강구목적 뇌내 인격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 한해선 이놈저놈 할 것 없이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기만 할 뿐, 무엇하나 유익한 제안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너도나도 입다물고 앉아서 누가 무슨말 안하나 눈치만 보고 있다가 시간은 지나고,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면, 

 

 “쿈군.” 

 

 난데없는 목소리에 나도모르게 펄쩍 뛰어올랐을 정도니까. 

 

 문이 열리는 소리도, 누가 들어오는 발소리나 옷소리,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곧 그런 이유로 나는 놀라고, 방 중앙에 서있는 사람을 보고 더더욱 경악했다. 

 

 “아사히나 선배?” 

 

 광원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은 열린 커튼 창문 너머에서 오는 눈 색뿐이다. 그러나 그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그 사람의 용모를 잘못 볼 수는 없다. 언제나 귀여운 부실의 정령과 같은 존재, SOS단 마스코트 아사히나 선배다. 

 

 “쿈군……” 

 

 아사히나 선배는 다시한번 말하곤 미소짓더니, 사뭇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걸어왔다. 놀라 자세를 바로잡은 내 옆에, 그대로 드러난 두 다리를 모아 사뿐히 앉았다. 뭔가 확언하기 말하기 힘든 미묘함을 느끼고 자세히 보니, 복도에서 헤어졌을 때와는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긴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 것 같던 그 옷차림이 아니다. 그렇다고 걸친 옷이 는 것도 아니었다. 

 

 아사히나 선배는 흰 와이셔츠 하나뿐인, 마치 누군가의 망상을 구현화시킨 것 같은 의상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저기……” 

 

 아름다운 동안의 얼굴이 무언가를 바라는 듯이, 

 

 “여기서 자도 돼요?” 

 

 폐 두짝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소리를 했다. (수상하다.) 

 

 글썽이는 눈이 정확하게 나를 포착, 볼을 살짝 상기시키며, 아사히나 선배는 얌전히 내 팔에 기대었다. (뭐냐이건) 

 

 “혼자면 불안해요. 잠이 안와서……쿈군 옆에서라면 잘 잘수 있을 것 같은데……” 

 

 뜨거운 체온이 셔츠를 통해 전해져 온다. 화상이라도 입는가 하고 착각할 정도로 뜨거웠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밀려온다. 아사히나 선배는 내 팔을 안듯이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괜찮죠?”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사히나 선배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거절할 인간은 남자든 여자든 없다. 그니까, 좋아요. 아 그렇군, 이 침대는 혼자 자기엔 너무 넓으니까……. (잠깐만) 

 

 그녀는 우훗 하고 미소짓더니 내 팔을 풀어주고, 안그래도 열려있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부드러운 곡선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루히에 의해 바니걸 옷을 입게 됐을 때나, 무심코 부실문을 열었다가 옷 갈아입는 현장을 봤을 때로 봐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숨겨두었던 폴더 속에 있는 화상과 같은, 그 가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얌마 정신차려. 아냐.) 

 

 흰 와이셔츠 단추는 앞으로 둘……아니 하나. 아주 다 벗고있는 것 보다도 선정적인 씬이었다. 모델이 워낙 좋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아사히나 선배가 이러고 있다고. (야) 

 

 아사히나 선배는 나를 올려다보며, 부끄러운 듯 하기도 하고 부르는 듯 하기도 한 표정으로 미소짓고 있다. 손가락이 마지막 단추에 다가갔다. 눈을 피해야 하나. (자세히 봐) 

 

 앞이 완전히 갈라진 셔츠 안쪽으로, 숨쉬고 있는 흰 맨살이 보였다. 너무나도 예술적인, 아프로디테도 울고갈 스타일로(아니라고), 하얗디하얀 가슴 한쪽으로(바로 그거다), 악센트같은 하나의 별이……. 

 

 “윽……!” 

 

 나는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뛰쳐나갔다. 

 

 “아냐!” 

 

 자세히 봐라, 왜 여태 몰랐었냐? 그 사람이 내 아사히나 선배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이전에도 그렇게 확인하려고 했었잖아. 아사히나 선배의 그걸 보기만 하면, 난 알 수 있다. 

 

 “넌 누구냐,” 

 

 ──이 아사히나 선배에겐 왼쪽 가슴에 점이 없다. 

 

 침대 위에서 반라상태인 그녀는, 나를 슬픈 듯 바라보며, 

 

 “왜그래요? 날 거부하는 거에요?” 

 

 이게 만약 진짜 아사히나 선배라면? (아니라고 했잖아) 그래도 나는 이성을 지킬수 있을 것인가. 아니, 아니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아사히나 선배가 남의 눈을 피해서 날 유혹하러 올 리가 없다. 그럴 필요는 없단 말이다. 

 

 “넌 아사히나 선배가 아냐.”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치며, 눈물이 괴기 시작하는 매혹적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어떻게 됐다. 이런 표정을 할 정도라면 아사히나 선배든 아니든 상관 없는거 아냐? 

 

 (그만둬) 

 

 “그만둬라.”


나는 겨우 말을 뱉어냈다. 

 

 “누구냐. 이 저택을 만든 녀석이냐. 우주인이냐 이세계인이냐. 왜 이런 짓을 하는거지.” 

 

 “……쿈군,” 

 

 그 아사히나 선배의 목소리는 슬픔에 젖어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슬픈 듯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 

 

 그녀는 셔츠 옷을 뒤집어, 바람처럼 달려 문쪽을 향했다. 방을 뛰쳐나가기 직전, 눈물어린 눈동자로 나를 뒤돌아보고는, 곧장 복도로 나갔다. 문이 의외다 싶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닫히고, 그 소리와 함께 나는 안에서 문을 잠갔던 것을 떠올렸다. 여분이 없는 이상 침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잠깐만요!” 

 

 순간 존댓말을 쓰며, 나도 문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쾅. 더더욱 큰 소리가 났다. 아무리 세게 열었다지만 문 하나 열리는 효과음으론 너무 큰 것 같다 하고 있으니──. 

 

 “응? 너……” 

 

 정면에 하루히의 얼굴이 있었다. 내 방 맞은편에 있는 자기 방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던 하루히가, 입을 딱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쿈, 방금 너 내 방에 있……진 않았지,” 

 

 통로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건 나와 하루히뿐만이 아니었다. 

 

 “저기,” 

 

 하루히 오른쪽으로, 티셔츠 차림의 아사히나 선배도 당혹스런 얼굴로 문을 반쯤 열고 있었고, 그 왼쪽엔, 

 

 “…………” 

 

 나가토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내 옆을 보니, 

 

 “이런이런,” 

 

 코이즈미가 콧등을 문지르며 이상한 눈빛을 보내더니, 묘하게 미소지었다. 

 


 설산증후군-14

 

 소리가 크게 난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다섯명 전원이 아주 똑같은 타이밍으로 문을 열었던 것이다. 5중주의 싱크로가 그 정체였다. 

 

 “어, 모두 어떻게 된거야?” 

 

 하루히가 맨 처음 바로서고, 나를 노려보는 듯 하다가, 

 

 “왜 모두 동시에 방에서 나온거야?” 

 

 나는 가짜 아사히나 선배를 쫓으려고──라 말했다가 알아챘다. 방금 하루히가 한 말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너네는 왜 나왔는데. 화장실에 가려고 한건 아니겠지.” 

 

 놀랍게도 하루히는 약간 고개를 숙이듯 하여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그러고선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상한 꿈을 꿨거든. 네가 내 방에 숨어들어오는 꿈. 전혀 너같지 않은 소리를 하더니, 에-그게, 그러다가 이상하다 싶어서……. 그래, 패주려고 했더니 도망치길래……. 응? 꿈……맞지? 그래도, 뭔가 이상해.” 

 

 그게 꿈이었다면, 지금도 계속 꿈을 꾸고 있어야 맞다. 생각하려고 미간을 찡그린 하루히를 바라보고 있으니, 코이즈미가 걸어왔다. 

 

 “저와 같군요.” 

 

 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제 방에도 당신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겉보기론 당신 그 자체였습니다만, 약간 그 행동이 말이죠, 느낌이 이상했다고 할까요……. 당신께선 도저히 하지 않으실 것 같은 걸 말이죠. 하고 계셨습니다.” 

 

 괜히 소름이 끼친다. 나는 코이즈미의 실실 쪼개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아사히나 선배를 주목했다. 저건 진짜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금방 알 수 있다. 방금 난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분위기로 보든 행동으로 보든, 이게 아사히나 선배가 아니면 뭐겠냐고. 

 

 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사히나 선배는 무슨 이유에선지 얼굴을 붉혔다. 아사히나 선배 방에도 내가 나타났겠거니 하고 있으니, 

 

 “제 방엔 스즈미야상이,” 

 

 손가락을 머뭇머뭇거리며, 

 

 “저기 그, 이상한 스즈미야상이라서……. 잘은 말 못하겠는데, 가짜같은……” 

 

 …가 아니라 가짜다. 그건 틀림없지만, 대체 이건 무슨 일이냐. 각 방에 우리중 하나의 가짜가 나타났다고? 내방엔 아사히나 선배, 하루히랑 코이즈미 방엔 나, 아사히나 선배 방엔 하루히……. 

 

 “나가토,” 나는 나가토에게 물어보았다. “네 방엔 누가 나타났냐?” 

 

 아사히나 선배와 같이 티셔츠 한 장만 입은 나가토는, 차분히 그 멍한 얼굴을 올려 나를 바라보곤, 

 

 “너.” 

 

 작은 목소리로 말하곤, 천천히 두눈을 감았다. 

 

 그리곤── 

 

 “……유키!?” 

 

 하루히의 의문형 외침을 배경음으로, 나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았다. 

 

 나가토가, 그 나가토가 풀썩 쓰러져서,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라도 눌린 것처럼 옆으로 넘어져 있는 것이다. 

 

 “왜그래 유키. 응……” 

 

 모두가 할말을 잃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와중에, 하루히만 유일하게 곧바로 다가가 그 작은 몸을 일으켜세웠다. 

 

 “이야……. 엄청난 열이잖아. 유키, 괜찮아? 응, 유키!” 

 

 나가토는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고 있다. 자는 얼굴도 무표정했다. 하지만 나가토가 편안히 잠들어있는게 아니란 사실을, 내 본능이 알아채고 있었다. 

 

 하루히는 나가토를 안고선, 진지한 눈으로 크게 소리쳤다. 

 

 “코이즈미군, 유키를 침대에다 옮겨줘. 쿈, 넌 얼음베개를 찾아와. 어디 있을거야. 미쿠루짱은 수건에다 물 적셔서 가져오고.” 

 

 나와 아사히나 선배, 그리고 코이즈미 셋이 한동안 얼떨떨해 있는 걸 보고, 하루히는 재차 큰 소리로, 

 

 “빨리!” 




 나는 코이즈미가 녹초가 된 나가토를 들어올리는 걸 보고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얼음베개라. 어디를 찾아야 나올라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나가토가 기절하듯 쓰러진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있을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탓에 가짜 아사히나 선배가 내 방에 나타난 것이나, 다른 단원들 방에 각각 우리중 누군가의 가짜가 나타났다고 하는 미스터리가 이젠 어째도 상관없게 되었다. 될대로 되라. 그딴거 나랑은 상관없다. 

 

 “젠장,” 

 

 진짜로 큰일났다. 망할, 나가토한텐 한동안 평화로운 인간적 생활을 맛보게 해줄 요량이었는데, 이래가지곤 순 반대나 다름없잖아. 

 

 얼음베개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걸어다니고 있는 사이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와있었다. 우리 집의 경우엔 냉각시트는 구급상자가 아닌 냉장고에 들어있다. 이 저택은 과연 어떨까. 

 

 “잠깐.” 

 

 대형냉장고의 손잡이를 잡기 전, 나는 문득 손을 멈췄다. 머릿속에 얼음베개의 모습을 그려보고, 강하게 떠올려본다. 

 

 냉장고를 열었다. 

 

 “……역시나,” 

 

 양배추 위에 파란 얼음베개가 놓여있었다. 

 

 대단하군. 너무 편리하다. 근데 누군진 모르겠지만 역효과다. 덕에 결심이 섰다. 

 

 이딴 곳에 이 이상 있어선 안된다. 

 
 꽁꽁 언 얼음베개를 들고 식당을 나가니, 저택 입구에 코이즈미가 혼자 서있었다. 현관문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대체 뭐할 작정일까. 하루히가 눈을 긁어모으라고 시키기라도 한거냐. 

 

 나는 고언(苦言:듣기에는 거슬리나 유익한 충고의 말) 한마디 던져주려고 다가갔는데, 코이즈미는 내가 왔단 걸 알아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침 잘됐네요. 이걸 봐주셨으면 합니다.” 

 

 문을 가리킨다. 

 

 나는 말은 뒤로 미루도록 하고 코이즈미가 가리킨 곳을 본다. 그곳에 있는 기묘한 걸 발견하고, 말이 막혀버렸다. 

 

 “뭐냐, 이건.” 

 

 나오는 말은 그정도 뿐이다. 

 

 “이런게 있었을줄은 몰랐는데,” 

 

 “네, 없었습니다. 이 저택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접니다. 문을 닫았을 때 보았습니다만, 그땐 이런게 없었습니다.” 

 

 저택의 현관문, 그 안쪽에 형용하기 힘든 것이 달라붙어 있었다. 굳이 가까운 표현을 찾아보자면, 콘솔이나 패널 정도 될까. 

 

 나무로 된 문에, 금속광택을 내는 각 변 50센티정도 되어보이는 플레이트(plate)──역시 패널이라고 하는게 나을라나──가 붙어있어서, 두통을 부르는 듯한 기호와 숫자가 늘어서 있었다. 

 

 고통을 감수하고 눈을 집중했다. 가장 위에 있는게, 

 

 




 x-y=(D-1)-z 

 

 




 그 아래쪽에도 기호가 있었는데, 

 

 




 x=□, y=□, z=□ 

 

 




 네모 속이 텅 비어있다. 마치 거기다 뭘 써넣으라고만 하는 것 같다. 내가 세 개의 네모에 곤혹스런 눈빛을 보내고 있으니, 

 

 “피스(piece)는 거기 있습니다.” 

 

 코이즈미가 가리킨 쪽 바닥에, 나무 프레임 안에 숫자블록들이 들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0부터 9까지의 숫자가 세줄로 놓여져있었다. 한번 집어올려봤다. 마작패 같은 형태로, 무게도 딱 그정도다. 마작이랑 다른 건 표면에 패인 문양으로, 한자리수 아라비아 숫자만 찍혀 있다. 

 

 합계 10종류의 숫자가 3줄 씩, 평평한 나무상자에 들어있었다. 

 

 “이 방정식의 답에 해당하는 숫자를,” 이라며 코이즈미도 블록을 하나 집어올려 관찰의 시선을 고정시키며, “빈 부분에 맞춰넣으라는 거겠죠.” 

 

 나는 다시 한번 수식 쪽을 바라봤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다. 수학은 그 수많은 취약과목중에 하나란 말이다. 

 

 “코이즈미, 넌 풀 수 있겠냐?” 

 

 “어디선가 본것 같기도 한 식이긴 합니다만, 이것만 가지곤 풀 수 없겠군요. 단순히 양쪽의 수치를 같게 하는 것 뿐이라면 얼마든지 짜맞출 수가 있습니다. 이게 만약, 단 하나의 답을 원한다고 하면, 더 조건을 좁혀주지 않으면 무리죠.” 

 

 나는 네 가지 알파벳 중, 이채를 뿜고 있는 하나에 주목했다. 

 

 “이 D는 뭐냐. 안 맞춰도 되는 것 같다만.” 

 

 “혼자서 대문자이기도 하구요.” 

 

 코이즈미는 숫자 0의 석패를 만지작거리면서 목을 누르는 듯한 시늉을 하더니, 

 

 “이 수식…….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까지 나왔는데요……. 그게 뭐였죠. 그리 오래 전에 본건 아닌것 같습니다만,” 

 

 그대로 굳어선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 흔치 않은 광경이다. 코이즈미가 저리 진지한 얼굴로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은. 

 

 “그래서? 이거에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 

 

 나는 가지고 있던 패를 상자로 되돌려놓았다. 

 

 “문 안쪽에 난데없이 수학문제가 생겼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어쨌단 거냐고.” 

 

 “아아,” 

 

 코이즈미는 문득 제정신이 들었는지, 

 

 “열쇠입니다. 문이 잠긴 거라구요. 안쪽에서 열 방도가 없습니다. 손잡이를 아무리 비틀어봐도 소용이 없더군요.” 

 

 “뭐야?” 

 

 “한번 해보시면 아실겁니다. 보시다시피 안쪽엔 열쇠구멍도 노치(notch)도 없습니다.” 

 

 해봤다. 안열린다. 

 

 “누가 어떻게 잠근거냐? 오토록(auto-lock)도 안에선 열리잖아.” 

 

 “그런 상식론이 먹히지 않는 공간이라는 하나의 증거가 되겠군요.” 

 

 코이즈미는 무의미 스마일로 돌아와선,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저희를 여기에다 가둬둘 요량이겠죠.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붙박이에, 입구 문은 엄중히 잠겨있으니 말입니다.” 

 

 “그럼, 이 패널에 있는 수식은 또 뭐냐고. 시간때우기 퀴즈냐?” 

 

 “제 생각이 맞다면, 이 수식이야말로 문을 여는 열쇠인 겁니다.” 

 

 코이즈미는 여유있는 어조로 말했다. 

 

 “나가토상께서 만들어주신 유일한 탈출로로 보입니다.” 

 


 설산증후군-15



 내가 최근의 기억을 되살려 향수(nostalgia)에 젖어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코이즈미는 열심히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정보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떠한 조건투쟁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누군가가 저희를 이공간에 가둡니다. 나가토상께선 그것에 대항하여 탈출로를 준비하십니다. 그게 이 수식이 아닐런지요. 풀 수만 있다면 저희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계속 이상태에 머물게 될 겁니다.” 

 

 코이즈미는 문을 탕탕 두드리더니, 

 

 “구체적으로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게 정신생명체끼리의 정보전이라고 하면 저희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현실엔 이러한 형태로써 나타났습니다. 이 패널이 그 결과겠죠.” 

 

 수수께끼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계산문제. 

 

 “우연은 아닙니다. 저희들이 기묘한 꿈 같은 걸 꾸고 있나 싶었는데, 그 직후에 나가토상께서 쓰러지시고, 문에 이런 패널이 생겨났다……. 이 연속된 사건들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성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코이즈미는 초조를 느끼는 것 같았지만 전혀 그런 티는 내지 않고, 

 

 “분명 이것이 그 탈출의 열쇠일 겁니다. 아마 나가토상에 의한.” 

 

 무심코 패널에 『Copyright ⓒ by Yuki Nagato』라고라도 쓰여있는 게 아닐까 하고 찾아봤다. 없었지만. 

 

 “이것도 추측입니다만, 나가토상께서 이 공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통합사념체와의 접속이 끊긴 지금, 그녀에겐 그녀 단독의 고유능력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만들다 만 것 같은 탈출구밖에 만들지 못하신 거겠죠.” 

 

 추측치고는 아주 그럴듯하구만. 

 

 “네, 뭐 그렇죠. ‘기관’은 나가토상 이외의 인터페이스와도 접촉을 꾀하고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의 정보는 제게도 돌아옵니다.” 

 

 다른 우주인 이야기도 자세히 듣고싶긴 하지만, 지금은 됐다. 그보다 이 이상한 패널을 어떻게 해보는게 먼저다. 나는 패널의 기호와 상자에 든 숫자를 번갈아 바라보고, 나가토의 조심스런 목소리를 떠올려보았다. 

 

 ‘이 공간은 내게 부하(負荷)를 준다.’ 

 

 우리를 눈보라치는 저택으로 이끈 녀석이 뉜지는 모르겠지만, 나가토를 쓰러지게까지 만든 녀석은 용서못한다. 그런 망할 녀석 심산대로 되게 놔둘 것 같냐.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나가 츠루야 선배의 별장으로 돌아가주마. 누구하나 빠짐없이 SOS단 전원이서 말이다. 

 

 나가토는 그 상황에서도 자기 할 일을 다 끝내주었다. 내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이공간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보이지않는 ‘적’과 싸우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평소보다 더 멍하게 보였던 건 그 때문이었겠지. 그 결과, 쓰러져가면서도 작은 탈출구를 만들어주었다. 다음은 우리가 문을 열 차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길 나간다.” 

 

 코이즈미는 내 결의표명에 산뜻하게 웃었다. 

 

 “저도 물론 그럴 생각입니다. 아무리 여기가 쾌적하다 할지라도, 계속 있을 장소는 못될거 같으니까요. 이상향(理想鄕:이상적인 세계)과 디스토피아는 표리일체(表裏一體)죠.” 

 

 “코이즈미.” 

 

 코이즈미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놀랄 정도로 진지했다. 

 

 “네 초능력으로 어찌 못열겠냐. 이대론 곤란하다. 나가토가 저렇게 돼버린 지금,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녀석은 너뿐이다.” 

 

 “그건 과대평가십니다.” 

 

 코이즈미는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전 제 자신이 만능 초능력자라고 말씀드린 기억은 없습니다. 그 힘을 쓰기 위해선 한정된 조건하에서 뿐입니다. 그건 당신께서도 잘 알고 계실──” 

 

 그 말을 끝까지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코이즈미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겨선, 

 

 “내가 언제 그딴거 물었냐,” 

 

 입술을 짓궂게 구부리는 코이즈미를 노려보고, 

 

 “이공간은 네놈 전문이잖아. 아사히나 선배를 의지할 순 없는 노릇이고, 하루히는 그모냥이다. 언젠가의 꼽등이 사건때처럼, 니녀석이 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거란 말이다. ‘기관’이란 데엔 허수아비놈들 뿐이냐,” 

 

 허수아비이긴 나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침착하지도 못하니 코이즈미 이하라고도 할 수 있다. 맘같아선 여기서 코이즈미를 패버리고, 그다음엔 나를 패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자기가 자신을 안봐주고 때릴 순 없으니까 말이지. 

 

 “뭐하고있어?” 

 

 등뒤에서 예리한 목소리가 찔러왔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한 음색이, 

 

 “쿈, 얼음베개는 어쨌어. 하도 안오길래 나와봤더니 뭐야? 코이즈미군이랑 주먹질 연습해서 엇다 쓸 건데?” 

 

 하루히가 무시무시한 자세로 서서 허리에다 손을 대고 있었다. 감 도둑 상습법을 현행범 체포한 동네 아저씨와 같은 표정으로, 

 

 “유키 생각도 좀 해봐. 놀고 있을 틈이 어딨어!” 

 

 나랑 코이즈미가 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면, 하루히도 약간 정신을 딴데다 두고 온 건지도 모른다. 나는 코이즈미 멱살을 놓고, 언제 떨어트렸는지조차도 기억나지 않는 얼음베개를 집어올렸다. 

 

 하루히는 재빨리 베개를 낚아채더니, 

 

 “뭐야 이거.” 

 

 시선을 문쪽에 붙어있는 식으로 옮겼다. 코이즈미는 흐트러진 옷깃을 펴며, 

 

 “글쎄요, 이것에 대해 저희 둘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스즈미야상께선 짐작가시는 게 있으십니까?” 

 

 “오일러(Leonhard Euler:스위스 수학자 1707~1783) 아냐?” 

 

 맥빠지게도 하루히는 시원스레 답을 내놓았다. 대답한 건 코이즈미로, 

 

 “수학자 레오나르트 오일러 말씀이십니까?” 

 

 “성밖에 모르긴 하지만,” 

 

 코이즈미는 다시한번 문에 붙은 수수께끼 패널을 몇초간 바라보더니, 

 

 “그렇군요,” 

 

 연출처럼 손으로 딱 소리를 냈다. 

 

 “오일러의 다면체정리로군요. 아마 이건 그 변형일겁니다. 스즈미야상께서 알아내셨군요.”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이 D 부분에 차원수가 들어간다면 아마 맞을걸.” 

 

 틀리든 맞든 상관없다. 일단 난 당연하단 듯이 의문을 품는다. 오일러는 어디서 뭘 한 작자냐. 다면체정리는 또 뭐고? 그런게 수학 시간에 나왔었냐? 라고도 물어보고 싶은 판이지만, 수학시간엔 항상 조는거나 마찬가지여서 적극적으로 묻는건 삼가도록 하자. 

 

 “아뇨, 보통 고등학교 수학에선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도 들어본 적은 있으실 겁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건너기 문제는 말이죠.” (*18세기 동(東)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현재의 칼리닌그라드)에 있던 프레겔강(江)의 다리건너기를 제재(題材)로 한 초기의 위상기하학 문제를 말한다. 이것은 ‘한붓그리기’의 문제이나, 불가능하다는 것이 스위스의 수학자 L.오일러에 의해 밝혀졌다.) 

 

 그거라면 알고 있다. 수학선생 요시자키(吉崎)가 수업중 잡담의 일환으로 가져온 퍼즐 예문이었다. 그거다, 강으로 갈린 두 모래사장 사이에 있는 몇 개의 다리를 중복없이 한번에 건널 수 있느냐는 거였지? 분명 불가능했지 아마? 

 

 “그렇습니다.” 라며 코이즈미가 끄덕이고,  “그 퍼즐은 평면상의 문제지만, 오일러는 그것이 입체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증명해냈습니다. 그는 역사에 남는 정리를 여럿 발견해냈는데요, 다면체정리는 그 중 하나입니다.” 

 

 코이즈미는 해설을 시작한다. 

 

 “어느 다면체에서, 그 다면체의 꼭지점 수에다 면의 수를 더하고 모서리의 수를 빼면, 반드시 답은 2가 된다는 정리입니다.” 

 

 “…………” 

 

 내가 모든 수학적 요소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알았는지, 코이즈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손을 등뒤로 돌려, 

 

 “그럼, 알기 쉽게 그림으로 그려보죠.” 

 

 검은색 펜을 꺼냈다. 어디서? 엇다 감춰놨었냐? 그것도 내가 얼음베개를 꺼낸 방법으로 얻은거냐. 

 

 코이즈미는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그 검은 융단에다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루히도 나도 말리지 않는다. 낙서따위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저택이다. 

 

 그리하여 코이즈미가 그린 것은 주사위같은 정육면체 그림이었다. 

 

 “보면 아시겠지만, 이건 정육면체입니다. 꼭지점 수는 8, 면의 수는 그대로 6입니다. 그리고 모서리 수는 12. 8+6-12=2……, 딱 맞죠?”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싶었는지, 코이즈미는 또 다른 다면체를 그렸다. 

 
 “이번엔 사각뿔입니다. 세어보면 꼭지점의 수가 5, 면도 5, 모서리는 8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5-8로, 답은 역시 2가 됩니다. 이와같이, 가령 면의 수를 늘려 백면체정도 된다고 해도 답은 반드시 2가 되는 식을, 오일러의 다면체정리라고 합니다.” 

 

 “그러냐. 그건 알겠다. 근데 하루히가 말한 차원수란 또 뭐냐.” 

 

 “그또한 단순합니다. 이 다면체정리는 입체에만 적용되는 식이 아니라, 2차원평면도에도 적용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엔, 꼭지점+면-변은 필연적으로 1이 됩니다만,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건너기 문제는 이것을 통해 증명이 됩니다.” 

 

 융단에 다른 낙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별, 한번에 그린 별마크입니다.” 

 

 직접 세어봤다. 꼭지점은 어디보자……10이다. 면은……6이로군. 변의 수가 가장 많아야 하는건가, 어디보자 합계 15. 그렇다는 건 10+6-15니까──1이다. 

 

 내가 계산하고 있는 사이에 코이즈미는 네 번째 그림을 끝내고 있었다. 북두칠성을 잘못 그린것 같은 그림이다. 

 

 “이런 엉터리 그림이어도 상관이 없다죠.” 

 

 귀찮아지기 시작했다만, 뭐 자주 하는 것도 아니니 암산해주지. 에-……. 점은 7, 면은 1, 그리고 변은 7이냐. 오호라. 역시 1이 되는군. 

 

 코이즈미는 해맑은 웃음으로 펜의 뚜껑을 덮고, 

 

 “즉 3차원의 입체라면 2, 2차원의 평면이라면 1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염두를 두고 이 식을 보도록 하죠.” 

 

 펜 끝은 문에 붙은 패널에 향해있었다. 

 

 “x-y=(D-1)-z. x는 아마 꼭지점이겠죠. 그렇다면 거기서 빼야 하는 건 변밖에 없기 때문에 y는 변의 수입니다. 그러나 불명인것은 원래 좌변에 있어야 할 z, 즉 면의 수가 우변에 이동하여 마이너스 기호로 바뀌어있군요. 그리하고 이 (D-1)는 말씀입니다만, 입체는 2, 평면은 1이 되어야 하기에, D에 해당하는 것은 3차원이라면 3, 2차원이라면 2가 되겠죠. 이 D는 디멘션(Dimension:차원), 차원의 D인 것입니다.” 

 

 나는 말없이 계속 들으며 머리를 굴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음. 어쨌든 알 것 같다. 오호라, 이것이 오일러씨께서 개발하신 어쩌고 정리라는 건 이해할 수 있겠다. 

 

 “그래서?” 

 

 라고 내가 물었다. 

 

 “이 숫자 퀴즈의 답은 뭔데. x랑 y랑 z엔 어떤 숫자블록을 넣으면 되냐?” 

 

 “그것은,” 

 

 라고 코이즈미가 대답했다. 

 

 “알 수 없습니다. 보기가 되는 다면체나 평면도가 없는 한.” 

 

 그럼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어디에 있는데, 그 보기가 되는 도형이란 건. 

 

 글쎄요, 라며 코이즈미는 어깨를 들썩하고, 나를 더더욱 열받게 만든다. 

 

 하지만, 그때였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방정식을 보고 있던 하루히가, 갑작스런 생각이 떠올랐단 듯, 

 

 “이딴거 어쨌든 상관없어──, 그보다, 쿈,” 

 

 난데없이 소리지르지마. 

 

 “이따가 유키 보러 가줘,” 

 

 그거야 당연하지만, 왜그렇게 무섭게 말하슈. 

 

 “왜라니, 유키가 잠꼬대로 네 이름을 부른단 말야. 한번밖에 안하긴 했지만.” 

 

 내 이름을? 나가토가? 잠꼬대? 

 

 “뭐라고 부르든?” 

 

 “그니까, 쿈, 이라고,” 

 

 나가토가 나를 애칭으로 불러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니, 본명이든 닉네임이든 간에 한번도 구체적으로 나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부른 기억 자체가 없다. 그녀석이 나를 주어로 하는 말을 할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2인칭 대명사였다……. (*너, 자네, 그대, 당신 등으로 듣는 이를 가리키는 대명사) 

 

 내가 속으로 부정형의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 

 

 “아니……” 

 

 코이즈미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게 정말 ‘쿈’이었나요? 다른 말을 잘못들으셨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뭐냐 이놈은, 나가토의 잠꼬대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냐. 

 

 하지만 코이즈미는 나를 보지 않고 하루히만을 보며, 

 

 “스즈미야상, 이건 꽤나 중요한 사실입니다. 잘 떠올려봐 주시겠습니까.” 

 

 코이즈미 치고는 꽤나 기합 들어간 투의 말로, 하루히도 약간 의외라는 듯 하며 눈을 한쪽 위로 향하곤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으음. 확실히 들은 건 아니라서 쿈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목소리도 작았고 말야. 어쩌면 ‘횬’이나 ‘존’이었을지도 몰라. ‘캰’이나 ‘큔’같은 건 아니었던 것 같아.” 

 

 “그렇군요.” 

 

 코이즈미는 만족스러운듯, 

 

 “맨 처음의 제 1음이 불명이고, 남은 어미만 확실히 들렸다는 것이로군요. 하하, 그런가요. 아마 나가토상께서 말씀하셨던 건 ‘쿈’도 ‘존’도 아닌, ‘욘’이었을 겁니다.” (욘[よん]:일본어로 4.) 

 

 “욘?” 이란 나. 

 

 “네, 숫자의 ‘4’ 말입니다.” 

 

 “4가 어쨌단……” 

 

 나는 말을 멈췄다. 수식을 다시 올려다본다. 

 

 “저기,” 

 

 하루히는 삐진 것처럼 입술을 뿌루퉁하게 하더니, 

 

 “이딴 숫자퀴즈하고 놀 시간 없단 말야. 유키 생각도 좀 해보라구. 진짜,” 

 

 얼음베개를 휘두르며 눈을 세모꼴로 하며, 

 

 “나중에 꼭 보러 와야돼! 알겠지!” 

 

 버럭 지른 소리만을 남기고, 큰 발소리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 코이즈미가 말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와 표정으로, 

 

 “겨우 조건이 다 모였습니다. 이걸로 알겠습니다. x, y, z에 해당하는 숫자가요.” 



 설산증후군-16


 “방금 저희들이 체험한 현상을 떠올려봐 주시길 바랍니다. 스즈미야상께서 꿈으로 아셨을 정도로 이상한 저희들이 나타난 가짜 사건 말입니다.” 

 

 코이즈미는 다시 펜을 한손에 들고 몸을 굽혔다. 

 

 “누구의 방에 누가 나타났는지, 그것을 그림으로 해보도록 하죠.” 

 

 먼저 코이즈미는 빨간 융단에 점을 하나 찍고, 그 옆에 ‘키(キ)’라 적었다.(*쿈[キョン]의 첫글자.) 

 

 “이것이 당신입니다. 당신 방에 온 것은 아사히나상이셨죠.” 

 

 점에서 위쪽으로 직선을 그어, 그곳에도 점을 찍고 ‘朝’라 적는다. (*아사히나[朝比奈]의 첫글자) 

 

 “아사히나상의 방엔 스즈미야상께서 등장하셨죠.” 

 

 ‘朝’가 있는 점에서 이번엔 대각 왼쪽 아래로 선을 그어, 점과 ‘?’ 자를 쓴다. (*스즈미야[?宮]의 첫글자) 

 

 “스즈미야상이 계신 곳에는 당신이셨고요.” 

 

 점 ‘?’에서 그은 선은 점 ‘키(キ)’에 합류하고, 직각삼각형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제 방엔 당신이셨습니다. 정말로 당신같지 않았던 당신이셨습니다. 만약 정신이 나가버리신다고 해도 그런 짓은 안하실 겁니다.” 

 

 점 ‘키(キ)’에서 아래쪽으로 선을 그어, 점 ‘古’라 써넣었다. (*코이즈미[古泉]의 첫글자) 

 

 “나가토상도 당신이라고 하셨죠.” 

 

 이 시점에 나도 깨달았다. 나를 가리키는 점에서 오른쪽으로 그어진 선 끝에 점 ‘長’가 찍히고, 코이즈미는 펜의 뚜껑을 덮고 종료의 동작을 한다. (*나가토[長門]의 첫글자) 

 

 “모든 것은 연결되어있었던 겁니다. 꿈인지 현실인지 조차 구분이 안가던 가짜는, 그러니까 나가토상께서 저희들에게 보여준 환영(幻影)입니다.” 

 

 나는 코이즈미가 그린 최신 도형을 보았다. 꼼꼼히. 



 한번에 그린 ‘4’였다. 

 

 “이걸 문의 수식에 따라 계산하면 되는 겁니다. 저희가 본 가짜 저희와의 상관도를 말이죠. 평면인고로 D는 자동적으로 ‘2’가 되겠죠.” 

 

 내가 머리로 채 다 계산하기도 전에, 

 

 “그것을 적용시키면, 꼭지점은 저희 인원수인 ‘5’, 면의 수는 당신과 스즈미야상과 아사히나상께서 구성시킨 삼각형 뿐이니 ‘1’, 변의 수는 전부 ‘5’.” 

 

 코이즈미는 손으로 앞머리를 넘기곤, 웃기 시작했다. 

 

 “x=5, y=5, z=1. 이것이 정답입니다. 양변이 딱 0이 되는군요.” 



 감탄이나 칭찬할 시간이 아깝다. 

 

 나는 숫자블록을 손에 들었다. 세 개. 답이 판명되었으니, 재빨리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코이즈미는 아직 의문을 가지고 있는지,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게 소거 프로그램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일단 한번 물어본다. 그건 또 뭐냐. 

 

 “저희들이 복사되고, 시뮬레이션에 따라 존재되고 있는 것이라면, 일부러 이 공간에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원본이 현실에 있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말이죠.” 

 

 코이즈미는 양손을 위로 올리곤, 

 

 “이 수식의 정답을 맞추는 것으로 발동되는 장치, 그 정체는 저희들을 소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이른바 자살하는 게 되는 거라구요. 자, 여기서 영원히 변화없는 만족스런 인생을 보내는 것과, 삭제(delete)당해 버리는 것 중, 당신은 어느쪽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둘다 싫다. 영원히 살고 싶다곤 생각안하지만, 지금 바로 사라져버리는 것도 절대 사절이다. 나는 나다. 다른 누군가랑 바뀌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가토를 믿는다.” 

 

 내가 들어도 침착한 목소리였다. 

 

 “너도 그렇다. 나는 네가 내놓은 답이 정답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 방정식의 답 하나만 말이지.” 

 

 “그렇군요.” 

 

 코이즈미는 이심전심의 기술을 터득하였는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반걸음정도 뒤로 물러나, 

 

 “당신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 당신과 스즈미야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제 일이며 임무이기도 하기 때문에요.” 

 

 그 역할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잘됐다.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이 있는게 아니라고. 

 

 코이즈미는 웃음의 어느정도를 진지하게 바꾸어, 

 

 “저희들이 통상공간으로 복귀하게 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이야기입니다만, 하나 약속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후, 나가토상께서 궁지에 몰릴 일이 있다고 하고, 그리고 그게 ‘기관’에 있어서 좋은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저는 그때만큼은 ‘기관’을 배신하고 당신의 편이 되겠습니다.” 

 

 내 편말고 나가토 편 해줘라. 

 

 “그와같은 상황하에선, 당신은 먼저 확실히 나가토상께 가세하실 테니, 제가 당신의 편이 된다는 것은 곧 나가토상을 돕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꽤나 우회적이긴 하지만요.” 

 

 입술 한쪽 끝을 구부려, 

 

 “제 개인적으로도 나가상께서는 매우 중요한 동료이십니다. 그때, 한번 만큼은 나가토상 편에 서고 싶습니다. 저는 ‘기관’의 일원이지만, 그 이전에 SOS단의 부단장이기도 하니까요.” 

 

 코이즈미는 완전히 주시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말할 차례를 끝내고, 의사표시의 권리를 포기하고 만족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나도 사양할 것 없이 내 자신이 생각해야 할 걸 주저없이 생각해 보도록 하자. 

 

 12월 중순──. 난 혼자만 이상한 세계에 원래 정신으로 남겨져, 이리저리 뛰어다닌 끝에 탈출해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때와 다른 건, 지금은 나 혼자가 아닌 SOS단 전원이서 여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용궁엔 볼일 없다. 사라지는 건 우리가 아니다. 이 공간이다. 

 

 나는 주저없이 블록을 주어진 자리에 끼워넣었다. 

 

 철컥.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금속 풀리는 소리인 것 같았다. 

 

 숨을 죽이고 손잡이를 잡았다. 힘을 넣는다. 


 “────” 

 지금까지 나는 말로 표현못할 소리를 내고 말 것만같은 체험을 해왔다. 어이가 없어 기가 막힌 때도 있었고 경악하기도 하였으며 송구하기도 하였던 나날들까지, 몇 번이고 ‘이건 아니다’ 싶기도 하였고, 이렇게나 자주 시간과 공간이 소 위장만큼이나 뒤틀려있을 씬에 마주치면 아무리 그래도 지금쯤 되면 점점 살충제의 효과를 보기 힘들어지는 바퀴벌레들의 내성이 생겨도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철회해야 할 것 같다. 

 

 무거운 문을 끝까지 연 나는, 

 

 “────” 

 

 도저히 목소리를 내는 게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내 눈을 믿을수가 없었다. 왜 내 시신경이 뇌에 이런 광경을 전해주는 거냐. 어디가 문제냐? 망막이냐 수정체냐. 어디가 미친 거냐고. 

 

 밝은 햇살이 내 눈을 아찔하게 만든다. 밝은 햇빛이 하늘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이건……”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눈보라는 커녕 눈조각 하나 떨어지지 않는다. 끝없이 맑고, 구름 한점 떠있지 않은 하늘이었다. 있는 것이라곤……. 

 

 리프트 케이블이 시선을 가르지르고 있었다. 덜컹덜컹 움직이는 리프트에 스키웨어 차림의 커플이 타고 있었다. 

 

 비틀거리던 발이 어떻게 된 일인지 더더욱 무거웠다. 

 

 눈이었다. 나는 눈을 밟고 있다. 밝게 빛나는 하얀 대지가 눈부셔서 눈이 더욱 침침해져갔다. 

 

 문득 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올리니, 맹 스피드로 활주하는 그림자가 바로 옆을 지나갔다. 

 

 “으악?” 

 

 나도모르게 살짝 점프하여 시선에 헤매인다. 나를 방해물처럼 피해간 것은, 카빈 스키를 신은 스키어(skier)였다. 

 

 “여긴……” 

 

 스키장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여기저기 스키 타는 사람이 있었으며, 스키를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 하나둘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옆을 보았다. 어쩐지 어깨가 무겁다 싶었더니 스키와 스키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어 발쪽으로 눈을 돌리니, 내 발엔 스키 부츠가 신겨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입고 있는 것은 츠루야가(家) 별장을 나올 때 지급받은 스키웨어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둘러 등뒤를 바라본다. 

 

 “아……?” 

 

 아사히나 선배가 아기 코이노보리(鯉幟:종이나 천 등으로 잉어 모양을 만들어 단오 때 기처럼 장대에 높이 다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오호.” 

 

 코이즈미도 놀란 듯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둘 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물론 티셔츠 차림 따윈 아니다. 

 

 저택따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여긴 그저 잘 알려지지 않은 스키장이다. 지도에도 없는 수상한 저택이 튀어나올 리는 코털만큼도 없다. 

 

 ……그렇단 건. 

 

 “유키!?” 

 

 하루히의 목소리가 몸 앞쪽에서 들리고, 나는 서둘러 얼굴과 안구를 움직였다. 

 

 눈 위에 쓰러져있는 나가토를, 하루히가 매달리다시피 해서 일으키려고 하던 참이었다. 

 

 “괜찮아? 유키, 그러고보니까 너 열이……응?” 

 

 하루히는 보금자리 구멍 밖을 내다보는 새앙토끼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상하네……. 방금 전까지 저택 방에서,” 

 

 그러다 내가 있단 걸 알아채고, 

 

 “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나는 말없이 스키채를 집어던지고 나가토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하루히는 물론 나가토도 눈보라 전에 헤매고 있었을 때와 같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나가토,” 

 

 그렇게 부르니, 그 쇼트커트 머리가 움직여,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 

 

 한없는 무표정, 평소와 다름없는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눈범벅으로 한 나가토는, 그런 채로 한동안 말없이 시선과 얼굴을 고정하고 있었는데, 

 

 “유키!” 

 

 나를 냅다 밀쳐낸 건 하루히였다. 그리하여 나가토를 안듯이 하여,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근데……, 유키, 정신이 들어? 열은?” 

 

 “없어.” 

 

 나가토는 담담히 대답하곤, 자기 발로 일어섰다. 

 

 “넘어졌을 뿐이야.” 

 

 “진짜로? 그래도 엄청난 열이었……던 거 같은데, 응?” 

 

 하루히는 나가토의 이마에 손을 대고, 

 

 “정말이네, 안뜨거워. 그래도,”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엇? 눈보라……. 저택……. 설마? 꿈……은 아니겠지. 얼렐레? 꿈……이었어?” 

 

 나한테 묻지마. 제대로 된 답변서비스는 접수불가다. 네 한정으로 말야. 

 

 내가 모르는 척을 하고 있으니, ‘얘들아-’ 하는 위세좋은 목소리가 그리 멀지 않은곳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된거야-?” 

 

 경사가 완만해지는 스키장 기슭에서, 두명의 사람 그림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쿠루-, 하루냥-!” 

 

 츠루야 선배였다. 그녀 곁에는 대중소 세가지의 눈사람이 세워져서, 딱 중 규모의 눈사람과 같은 키의 사람 그림자도 옆에 딸려있었다. 이쪽을 보며 폴짝폴짝 뛰고 있는 것은 내 동생이었다. 

 

 나는 비로소 현재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리프트 승강장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초급 코스, 그것도 상당히 아래쪽에 우리 다섯사람이 모여있었다. 

 

 “뭐, 됐어.” 

 

 일단 하루히는 깊이 생각하기를 관둔 듯, 

 

 “유키, 업어줄테니까 내 등에 타.” 

 

 “괜찮아” 라는 나가토. 

 

 “안괜찮아,” 라며 하루히가 단호히 말하더니, “잘은 모르지만, 나도 뭐가뭔진 모르겠지만, 넌 무리하면 안돼.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왠지 그랬던것 같단 말야. 안정을 취해야돼!” 

 

 하루히는 다짜고짜 나가토를 업더니, 손을 흔드는 츠루야 선배와 내 동생쪽으로 걸어갔다. 신품 제설차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다 싶을 만큼, 만약 동계 올림픽에 사람업고 눈위 백미터 달리기 종목이 있다면 금메달은 문제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설산증후군-17
 

 그 후. 

 

 츠루야 선배의 연락에 의해, 아라카와 씨가 차를 몰고 와주었다. 

 

 나가토는 자신을 병자취급하는 하루히에게 저항하듯이, 나가토 나름대로 자기가 건강하단 증거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내 눈짓의 효과가 조금은 있었는지 비로소 묵묵히 하루히가 시키는 대로 한다. 

 

 차에는 나가토, 하루히, 아사히나 선배와 동생이 타고 먼저 별장으로 가고, 나와 코이즈미와 츠루야 선배는 산책하는 발걸음으로 걸어서 돌아가게 되었다. 

 

 그중에 츠루야 선배가 말한 바에 따르면, 

 

 “근데말야, 모두 판 짊어지고 스키장 아래로 내려가길래 가봤는데, 뭐하고 있었어?” 

 

 저 저기, 눈보라는? 

 

 “응? 그러고 보니까 10분정도 눈이 엄청나게 왔던 때가 했었지 아마? 근데 눈보라 까진 아니었어. 그냥 갑작스런 눈이었어.” 

 

 아무래도 우리가 눈 속을 헤치며 저택에서 보낸 반나절 남짓의 시간은 츠루야 선배에게 있어서 몇분도 안되는 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츠루야선배는 시원시원한 발걸음과 어조로, 

 

 “너네들 다섯이서 열심히 내려가길래, 뭐하나 싶어서 가보니까 나가토짱이 풀썩 쓰러져있드라구. 뭐 금방 일어나긴 했지만 말야-” 

 

 코이즈미는 쓴웃음만 지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나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밖에서 우리를 관측하고 있던 제 3자, 이 경우엔 츠루야 선배에 해당하는데, 그녀에게 있어서 우리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옳은 것이다. 우리는 꿈 내지 환상의 세계의 있었다. 현실은 이쪽, 진짜 세계는 이쪽이다. 

 

 한동안 말없이 걷고 있으니, 츠루야 선배가 상쾌하게 웃더니, 내 귀쪽 가까이에 입을 가져왔다. 

 

 “저기 쿈군, 이건 다른 이야긴데 말야,” 

 

 뭡니까요 선배. 

 

 “미쿠루랑 나가토짱이 평소랑 살짝 달라보이는 거 쯤은, 나도 보면 알 수 있어. 물론 하루냥도 평소답지 않고 말야.” 

 

 나는 물끄러미 츠루야선배를 관찰하고, 그 밝은 얼굴에 순수한 밝음만을 발견하고선, 

 

 “알고 계셨어요?” 

 

 “진작에 알고 있었지. 뭐하는 사람들인진 모르지만 말야! 하지만 뒤에서 뭔가 이상한 일 하고 있지? 아, 미쿠루한텐 비밀이야. 걔는 나름 일반인인 척 하고 있으니까!” 

 

 그에 반응하는 내 얼굴이 얼마나 웃겼는지 츠루야 선배는 배를 감싸듯 하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응. 하지만 쿈군은 일반인 맞지. 나랑 같은 냄새가 나거든,” 

 

 그리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뭐-. 미쿠루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진 않겠어. 보나마나 말하기 힘든 사연이 있을테니깐 말야. 어쨌든 좋아, 친구니깐!” 

 

 ……하루히, 이분은 더 이상 준단원도 명예고문도 아니시다. 츠루야 선배도 정식으로 스카우트해라. 어쩌면 이 분은 나 이상으로 이해력 넓은 일반인을 연기해줄 지도 모른다고. 

 

 츠루야 선배는 시원시원한 동작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미쿠루 잘 부탁해. 걔가 나한테 말못할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도와주라구.” 

 

 그거야……, ……물론입니다만. 

 

 “근데말야,” 

 

 츠루야 선배는 눈을 반짝이며, 

 

 “그때 영화, 문화제 때 거 말야. 혹시, 그거, 진짜 이야기야?” 

 

 듣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코이즈미가 어깨를 들썩하는 동작을 한 게 시선 한구석에 잡혔다. 

 

 

 

 


 

 별장에 돌아가니, 나가토는 하루히에 의해 강제로 자기 방에서 자게 되었다. 

 

 그 저택에 있었던 때와 같이 멍한 느낌은 지금은 얼굴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부실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 싸늘한 인상이 얼굴에도 분위기에도 나타나있다. 가끔 미세히 감정이 흔들리기도 하는, 내가 아는 나가토 그대로였다. 

 

 아사히나 선배와 하루히가 마치 침대에 깃든 간호의 정령처럼 나가토 머리맡에 지켜서 있었고, 동생과 샤미센도 거기서 대기하고 있었다. 뒤늦게 온 나와 코이즈미, 츠루야 선배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는지, 전부 모인 차에 하루히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기, 쿈. 나말야, 뭔가 이상하게 리얼한 꿈을 꾼거 같은 느낌이 들어. 저택에 가서, 목욕을 했다가 샌드위치 만들어먹었다가 하는,” 

 

 환각을 봤겠지, 하고 대답한 내게 하루히는 이어서, 

 

 “유키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데, 미쿠루짱은 나랑 비슷한 걸 기억하고 있더라고,” 

 

 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눈길을 주었다. 귀여운 우리의 메이드 씨는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숙였다.


 

 이거 골치아프게 됐군. 전부다 환각이나 데이드림(daydream)이었던 걸로 끝낼 작정이었는데, 두명이서 똑같은 백주몽을 꿨단 데엔 어떻게 변명의 여지가 떠오르질 않는다. 

 

 어떻게 속여넘길까 생각하고 있으니, 

 

 “집단최면입니다.” 

 

 코이즈미가 내게 할수없다는 듯한 얼굴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실은 제게도 그와 같은 기억이 있습니다.” 

 

 “최면술에 걸렸단 거야? 나도?” 라는 하루히. 

 

 “인위적인 최면술과는 다릅니다만. 그렇군요, 스즈미야상의 성격으로 보아, 만약 지금부터 최면술을 걸겠다고 미리 말해두면, 오히려 회의적이 되어 최면술이 통하지 않겠죠.”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루히는 생각하는 얼굴. 

 

 “하지만, 저희는 눈보라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 속을 일정한 리듬으로 오래간 걷고 있었습니다. 하이웨이 히프노시스(highway hypnosis)라는 현상을 아시는지요. 차로 직선 고속도로를 오래간 달리고 있으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가로등의 풍경이 드라이버에게 최면상태를 유발시켜 급기야는 재워버리고 만다는 현상입니다. 저희들도 그와 같은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지하철에서 가만 앉아있으면 곧잘 잠이 오게 되는데요, 그것도 지하철의 진동이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재울 때에 등을 찬찬히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런거야?” 

 

 하루히가 처음 알았다는 듯한 얼굴을 하자 코이즈미는 깊게 끄덕이며, 

 

 “그렇답니다.” 

 

 설득하는 듯한 어조로, 

 

 “눈보라를 헤치며 가는 중에 누군가가 중얼거렸겠죠. 어디 피난할 저택이 있어서, 그것도 아주 쾌적한 공간이면 좋겠는데……식으로 말이죠. 아무래도 조난중의 저희들은 극한상태에 다다라 있었고, 그런 정신상태에선 어떤 환상을 봐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사막을 헤매는 사람이 오아시스의 환영을 본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으셨죠?” 

 

 코이즈미 이놈, 억지로 마무리작업에 들어가고 있다. 

 

 “응……, 뭐 하긴. 그게 그랬단거야?” 

 

 하루히는 고개를 기울여 나를 보았다. 

 

 근가보다야. 나도 끄덕거리며 납득하는 듯한 얼굴을 만들어보였다. 코이즈미는 더욱 진지하게, 

 

 “나가토상께서 쓰러진 소리에 저희들이 제정신이 들게 된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듣고보니까 그런거 같기도 하네……” 

 

 하루히는 고개를 더 숙였다가, 곧바로 원래대로 되돌렸다. 

 

 “뭐, 그렇겠지. 그렇게 때맞춰 저택이 나타나줄 리도 없고,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가고. 꿈속에서 꿈을 꾼것 같은 기분이야.” 

 

 그래, 그건 꿈이다.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저택이었다. 우리에겐 필요없는, 단순한 정신피로에서 오는 환각이었다구. 

 

 걸리는건 다른 둘, SOS단 단원이 아닌 외부인들이다. 나는 츠루야 선배를 본다. 

 

 “에헷,” 

 

 츠루야 선배는 내게 윙크를 하며 웃어주었다. 그 표정이 말하는 걸 해독하자면, “뭐, 그런 걸로 해두자구,” 라는 암묵의 오케이 사인과 같았다. 내 지레짐작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지. 츠루야선배는 그 이상 아무말 없이 평소의 츠루야 스마일로 돌아와선 달리 쓸데없는 말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또 한명, 내 동생은 어쩐고 하니 아사히나 선배의 무릎에 달라붙다시피 해서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고양이랑 마찬가지로 일어나서 나불거릴 때는 귀찮아 죽겠지만 자고 있을때 만큼은 귀여워서, 아사히나 선배도 싫지만도 않단 듯이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이걸로 봐서 아사히나 선배도 동생도 코이즈미의 해설 후반부를 거의 못들었을 거다. 

 

 바닥에서 털정리를 하고 있던 샤미센이 나를 올려다보며 “냐옹”하고 울었다. 마치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 같이. 




 

 

 




 그런 짓을 하는 동안, 비로소 겨울 합숙 첫날 밤이 도래했다. 

 

 나가토는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때마다 하루히는 온갖 난리를 치며 반 강제로 쓰러트리다시피 해서 이불 안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생각한다. 무리하게 재울 필요는 없다. 만약 그걸로 즐거운 꿈을 꾼다고 해도, 어차피 꿈은 꿈이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우리가 이렇게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꿈같은 무대에서 꿈같은 대활약을 한다고 해도, 눈을 뜸과 동시에 강제종료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알고야 있다──. 

 

 여러 가지 일이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결국 그 저택은 뭐였는지, 하루히는 코이즈미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진짜로 믿고 있었는지 등등. 지금은 나가토를 가지고 노는 일에 빠져 어쨌든 상관없어진 모양이지만. 

 

 나는 하루히의 요란한 목소리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그냥 밖에 한번 나와봤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별들과 그 빛을 반사하는 일면의 백금이 아주 눈부셨지만, 웬일인지 별로 춥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일은 1년의 마지막 날이다. 코이즈미작(作) 추리극이 기다리는 섣달 그믐, 하루히도 라스트 스퍼트에 박차를 가할 테지. 

 

 뭐 하여튼. 그때까지 천천히 쉬고 있으면 된다. 나가토는 이런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은 녀석이다. 언제 자는지, 아니 잠을 잘 필요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생겼다. 마음껏 수면욕을 충족시켜 줘야지. 샤미센을 이불 위에 얹어놓는 것도 묘안이다. 온돌 대용은 될거다. 

 

 저멀리 보이는 설원을 향해 나는 혼잣말을 했다. 

 

 “눈보라는 안칠 것 같군.” 

 

 나가토가 꿈을 꾸는 게 가능하다면, 오늘밤 만큼은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 

 

 그렇게 바라지 않을 이유따윈 내겐 전혀 없다. 

 

 그리고 별들에게도 빌어두자. 오늘은 칠석도 아니고 섣달그믐도 아니지만, 굳이 견우성이나 직녀성한테만 하는 이야기도 아니니 상관없다. 우주엔 항성이 저렇게나 많다. 그 중 하나에만 닿으면 된다구. 

 

 “좋은 한해 부탁한다.” 

 

 너만 믿는다, 이걸 듣는 자 누구든. 



-설산증후군 끝



-스즈미야 하루히의 폭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