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미야 하루히의 한숨(2권) 프롤로그 고민이고 뭐고 없는 것 같이 보이는 하루히의 유일한 고민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상은 너무 평범하다’라는 것이다. 그럼, 이녀석이 생각하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란 무엇인고 하니, 이것도 한마디로 말하자면 슈퍼 내츄럴(Super Natural:초자연), 요컨대 ‘내 눈 앞에 유령 하나 나타나지 않는건 어째서인가’ 따위를 생각하고 앉았는 것이다. 덧붙여 ‘유령’의 부분은 ‘우주인’이나 ‘미래인’이나 ‘초능력자’ 정도로 치환이 가능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그런 게 눈 앞에 왔다갔다 하는 그런 세계는 픽션의 세계로, 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하루히의 고민은 이 세계에서 사는 한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었을 테지만 사실은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기에 나도 굉장히 곤란한 참이다. 어째서인고 하니 나는 우주인과 미래인과 초능력자와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할 말이 있는데, 들어줘.” “뭘?” “너는 우주인이나 미래인이나 초능력자 같은 녀석이 있길 바랬지?” “그렇긴 한데, 그게 뭐.” “그러니까 말이다, 이 SOS단의 목적은, 그런 무리를 찾는 거지?” “찾는 것만이 아니야. 같이 놀지 않으면 안돼. 찾는 것만으론 화룡점정(畵龍點睛:일을 완성키 위한 요긴한 마지막 손질)을 빼놓는 거라고. 내가 하려는 건 방관자가 아니라 당사자니까.” “나는 영원히 방관하고 싶다만…. 아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사실은 우주인도 미래인도 초능력자도 생각도 못한 의외로 가까이에 있어.” “헤에. 어디 누구? 설마긴 한데, 혹시 유키나 미쿠루짱이나 코이즈미군은 아니겠지. 그게 아니면 하나도 ‘생각도 못한 의외’는 아닌걸.” “에-…아-…. 사실 그리 말하려 했는데 말이야.” “바보야? 그리 속편한 설정이 있을 리가 없잖아.” “뭐, 보통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래서, 누가 우주인이라고?” “잘 듣고 기뻐하길 바란다. 그 나가토 유키는 우주인이다. 정확히 말하면, 뭐랬더라. 통합 뭐시기인가 사념체…정보 어쩌고 사념체였던가? 뭐 대충 그런 우주인같은 의식이 어떻게 됐다는 존재의 수하다. 그래,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였다. 그거야.” “흐응. 그래서, 미쿠루짱은?” “아사히나 선배는 말이야, 비교적 쉽다. 아사히나 선배는 미래인이야. 미래에서 왔으니까 미래인인거지.” “몇년 뒤에서 온건데.” “그건 몰라. 안가르쳐주더라.” “하하앙, 알았어.” “드디어 알아주는거냐.” “그러면 코이즈미군은 초능력자지? 그러려고 했지?” “틀림없이 그러려 했다.” “그렇구만.” 그렇게 말한 하루히는 눈썹을 깜빡이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웃기지마!” 이렇게 하루히는 내가 애써 고해올린 충격 진상고백을 아주 훌륭히 내팽개쳤다. 그럴만도 하지. 실제로 나도 그 셋이 우주인 유사품에 미래인에 초능력자 녀석이라는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어주었음에도 믿기 힘들 정도니까, ‘그거’나 ‘그거’ 등을 목격하지 않은 하루히에게 믿으라고 하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다. 달리 어떻게 말하면 되는데? 내가 말한 건 과장도 거짓도 없는 진실이란 말이다. 이래봬도 나는 뻥을 쳐서 뭐 얻는 것 하나 없을 때는 솔직히 진실을 말해주는 습성이 있다. 확실히 나라도 어디 사는 친절한 녀석이 ‘네가 잘 알고 있는 누구누구씨가 실은…’따위를 지껄인다면 ‘웃기지마’라고 할 것이다. 만약 그녀석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녀석 뇌에 질 나쁜 벌레라도 기생하나, 아니면 독성 전파를 수신하고 있는건가 하며 반대로 걱정해줄 지도 모른다. 어떻게 됐든 그다지 접점을 가지지 않도록 할 것인가. 음? 즉 그 ‘그녀석’이란 지금의 나란 거 아냐? “??, 자-알 들어봐요.” 하루히는 안구의 전 면적에 새빨갛게 불타는 불꽃을 피우며 나를 노려보았다. “우주인이나 미래인이나 초능력자라는 건 말야,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게 아냐! 발견하고 찾아내서 포획하고 목덜미를 잡아올려서 못 도망치게 거적에다 돌돌 말아놔야 할 정도로 희소가치가 있는거라구! 적당히 대충 데려온 단원 전부가 그런거라니, 말이 될 리가 없잖아!” 훌륭하신 말씀, 실로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다만 한명은 빼라. 다른 세명은 확실히 초자연현상의 결과다만, 나는 지상에서 멀쩡한 진화과정을 걸친 정상적이고도 평범한 인류의 동족이다. 그리고, 정말 단원을 적당히 대충 골라온거냐, 이녀석은. 근데 이 바보녀는 왜 이상한 데에서 상식을 찾는거냐? 순순히 믿었으면 지금보다 일이 훨씬 쉽게 풀릴텐데. 최소한 SOS단인가 하는 변태조직은 해산될 수 있음에 틀림없다. 이건 하루히가 우주인이나 (이하생략) 등의 불가사의적 존재를 찾기 위한 수수께끼 단체이니까 말이야. 찾아내버리면 용무 끝이다. 그 다음은 하루히 혼자서 그녀석들이랑 놀면 된다. 나는 가끔씩 끼워주면 딱 좋겠네. 퀴즈 프로그램에서 사회자 옆에 할 일없이 서서 웃을 뿐인 어시스턴트역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나도 정답에 박수치는 것만으로 출연료 받는 그런 포지션에 하루빨리 서고 싶은 거다. 현재의 나는 어쩐지 동물 버라이어티에 나와서 곡예를 강요당하는 잡종견 같으니까 말이다. 먼저 하루히가 모든 현상을 자각하고 있다면 이 세계전체가 어떻게 될지는 알 리가 없지만. 더하여 첫머리의 대화는 참가인원 2명으로 진행된 제 2회 ‘SOS단, 시내 어슬렁거리기 편(가칭)’ 날, 역앞 찻집에서의 나와 하루히의 대화이다. 나는 걱정없이 하루히가 내는 것임을 확신하고, 스트롱 커피를 빨아마시면서 여유만만히 해설했으며 하루히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거야 그렇다. 어떻게 봐도 믿는다는 쪽이 어떻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나대로 상세히 설명할 수도 없다. 대게 이런 건 잘잘한 디테일을 설명하면 할수록 머리를 의심받는 상황이 될테니까. 처음에 나가토네 맨션에 따라가서 구구절절 의미불명 은하규모의 전파 이야기를 들었던 내가 말하는 것이니 틀림없다. “네 재미없는 멍청한 농담은 이제 됐어.” 하루히는 빨대로 녹황색 야채 주스를 다 마신 후 그렇게 말하고는, “자, 가자. 오늘은 두 팀으로 나눌 수도 없으니까 둘이서 구석구석까지 도는거야. 그리고 나 지갑 놓고 왔으니까, 자 전표.” 내가 합계 830엔을 표시하고 있는 종이를 보며 항의 대사 내용을 생각하는 사이에 할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커피를 원샷으로 마시고, 내게 어떤 불만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찻집을 나가는 자동문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팔짱을 끼고 서있다. 그게 벌써 반년 전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만 있었던 것 같은 반년간이었다. 변함없이 SOS단의 정식명칭은 ‘세계를 엄청나게 재미있게 만들기 위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단’이라는 오슬오슬 추워지는 명칭 그대로이며, 이 단의 활동으로 인하여 세상이 대체 어떻게 재미있어졌는지는 완전 불명. 대략 재미를 보는 것은 하루히 단 한사람이 아닌가 싶으며, 그 존재의의와 활동방침도 물론 수수께끼이며, 우주인과 논다거나 미래인을 납치한다거나 초능력자와 공동 투쟁한다거나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 현재 하루히 나름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어쨌든 하루히는 아직 우주인도 미래인도 초능력자도 만나지 못했다고 고심에 빠져있기에 어쩔 도리가 없다. 친절히도 SOS단에 소속된 나 이외 단원들의 정체를 가르쳐 줬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건 이제 내 책임은 아닐 것이리라. 따라서 SOS단은 목적을 완수하고 존재의의를 잃으면서 원만히 해산되지도 않고, 오늘도 학교 사이드 비승인 조직으로서 부실동 한구석에 그 존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단원, 합계 5명은 아직도 문예부의 부실에 기생(Parasite)한 상태다. 학생회 집행부는 SOS단을 모든 의미로 무시한 듯 하다. 내가 제출한 창부 신청서를 팽개친 것뿐만 아니라 부실의 불법점거에도 아무런 말조차 없었다. 유일한 문예부원이었던 나가토 유키가 아무 말도 안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하루히에게 뭐라 말하느니 못본 척 하는게 전체적으로 나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추리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것은 밟으면 폭발합니다.’라고 만국공통문자로 네온을 빛내고 있는 폭발물을 밟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도 사양한다. 그런 걸 알고 있었다면 입학하자마자부터 교실 뒷자리에 앉아 뿌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학생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수로 시한폭탄의 기동 스위치를 내린 것 뿐만 아니라 폭탄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얼간이역을 억지로 맡게 되어버린 일반인 고등학생. 그것이 현재 내가 놓인 입장이다. 더욱이 ‘스즈미야 하루히’라고 쓰여있는 이 폭탄에는 폭발예정시각까지의 카운트다운조차 표시되어 있지 않다. 언제 어디서 작렬할지,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힐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그 이전에 이것은 정말로 폭탄인 것인지, 누군가 폭탄이라 말했을 뿐인 잡동사니인지, 그것마저 알수 없는 것이다. 그쪽을 뒤져도 위험물 전용 더스트 슈트(Dust Chute)를 찾을 수도 없고, 그것은 즉 이 인적 위험물은 시멘트로라도 발라넣은 듯이 내 손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진짜, 대체 어디다 갖다 버려야 할까, 이거. 제 1화 일반론으로, 학교에는 이벤트가 따라붙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에서도 저번 달에 체육대회가 실시되었었다. 하루히가 SOS단도 경기 사이사이 클럽 대항 릴레이 같은 익시비션 매치(exhibition match)에 참가하자고 말을 꺼냈을 때는 설마 했지만, 그 설마가 정말이 되어 우리 SOS단의 멤버가 배턴 릴레이로 육상부를 크게 앞지르고 럭비부마저 차내며 최후주자(anchor) 하루히가 2착으로 약 13마신차(마신:경마에서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로 결승 테이프를 끊을 줄이라곤 생각 못했다. 덕분에 이전부터 수군거려지던 우리들(나 이외)의 변태성이, 마치 누군가가 수업중에 장난으로 누른 비상벨이 교내에 울려퍼지게 된 것 마냥 쫙 퍼진 것에는 골치가 아프다. 말을 꺼낸 하루히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지만, 제 2주자의 나가토에게도 문제가 있단 말이지. 실로 순간이동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달리기 실력을 보여주다니, 나조차도 그건 예측하지 못했다. 미리좀 말해줘라, 나가토. 대체 어떤 마법을 쓴 거냐 물은 내게, 그 우주인 제작의 웃지않는 유기 안드로이드는 ‘에너지 준위’ 라던가 ‘양자 비약’이라던가 하는 단어를 써서 설명해 주려고 했지만 이미 이과를 포기하고 문과로 진로를 정하고 있던 나에겐 전혀 관계가 없었기에 이해조차 가지 않았으며,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광란의 체육대회가 끝나고, 겨우 다음 달로 바뀌었나 했더니 이번엔 문화제라고 하는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이 최악의 현립고등학교는 그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 준비하는 건 교사진과 실행위원회, 그리고 이런 때밖에 할 일이 없는 문화부 정도뿐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물론 부활동 이전에 부로서 인정받지 못한 SOS단이 무언가 창조적인 작업에 착수할 이유는 없다. 필요하면 근처에 도둑고양이라도 잡아 우리에 넣어서 ‘우주 괴수’라던가 하는 간판 달고 영업해도 난 상관 않겠지만, 눈치없는 손님들은 상관할 것이며, 눈치있는 녀석이라도 비웃을 것이다. 게다가 잘 생각해볼 것도 없이 연극 등을 고려할 필요성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할 생각도 없다. 현실적인 고등학교 문화제라는 것은 참으로 현실적이다. 거짓말 같다면 문화제를 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살짝 살펴보아라. 그것이 많은 학교행사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 하루히의 소속 반, 1학년 5반이 무엇을 하는고 하니, 앙케이트 발표인가 하는 적당한 방법으로 기획한 찻집을 하기로 되어있다. 초봄쯤에 아사쿠라 료코가 어딘가로 가버린 이래, 아직 이 반에서 리더십을 따려 하는 상태 나쁜 고등학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획 모노도, 답답한 침묵이 계속되던 끝교시 조회 시간에 담임 오카베가 억지로 생각해낸 아이디어로, 반대 찬성 양쪽의 의견도 전혀 없는 상태에 시간이 다돼서 결정됐다. 뭘 앙케이트 해서 발표할 건지, 그런 걸 해서 뭐가 즐거운지, 아마 아무도 즐기거나 따윈 안 하겠지만, 뭐 그런 걸 거다. 열심히 해줘라. 그런 고로, 나는 애퍼시 신드롬(apathy syndrome:무관심 증후군)의 무기력함으로 오늘도 이렇게 다시 부실로 향하는 것이다. 왜 가는 것인가. 그 답은 내 옆에서 위세좋게 걷고 있는 여자가 이런 말을 하기 때문임에 틀림이 없다. “앙케이트 발표라니, 바보같아.” 그녀석은 실수로 낫토(納豆)에다 소스를 뿌려버린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걸 해서 뭐가 즐거울까. 정말 이해가 안된다니까!” 그러면 뭔가 의견이라도 내면 될 거 아니냐. 칠흑같은 침묵 속의 교실에서 곤란해 죽으려고 하는 담임 오카베가 어르고 달래려는 얼굴을 너도 봤잖냐. “됐어. 어차피 반에서 하는 거 같이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애들이랑 뭘 하든간에 하나도 재미없을게 뻔해.” 잠깐, 체육대회에서 우리반 통합 우승에 공헌하지 않으셨수. 단, 중, 장거리 달리기와 스웨덴 릴레이의 최종주자로 등장해서 그 전부에서 우승한건 누구셨더라. 아, 딴사람이신가? “그거랑 이거랑은 이야기가 달라.” 그러니까 뭐가 다른건데. “문화제라구 문화제. 다른 말로 하자면 학원제. 공립학교는 학원이라고 별로 안 하는 거 같지만, 그건 됐어. 문화제라 함은, 1년 중에 제일 중요한 슈퍼 이벤트 아냐!” 그런거냐? “그래!” 라며, 그녀석은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선고했다.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 SOS단은, 더 재미있는 걸 할거야!” 그렇게 말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얼굴은,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알프스 산맥을 결의한 한니발과 같은, 흔들림없이 밝고도 밝은 빛을 뿜고 있었다. 뿜고 있기만 할 뿐이었지만. 하루히가 말한 ‘재미있는 거’라고 하는 게 내게 있어서 유쾌한 결과를 가져온 경우는 이 반년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대개 피로만 쌓이고 끝난다. 나와 아사히나 선배만 힘들어 하긴 하지만, 그건 멀쩡한 인류이기에 그런 것이다. 내가 보는 한, 하루히가 전혀 멀쩡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이제 뭐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세상의 상식이라 치고, 코이즈미도 보통 인간적인 정신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나가토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다. 난 그런 녀석들과 뒤섞여 대체 왜 이 비정상의 극치를 달리는 고등학교 생활을 헤쳐나가야만 하는 걸까. 내가 반년 전에 겪어야만 했었던 일은 이제 기억하기도 싫다. 다시는 그런 바보같은 경거망동은 하기 싫다 정말. 생각하기만 해도(누가 총좀 빌려줘)내 관자놀이를 쏴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 때의 기억이 들어있는 뇌세포를 추출해서 태워버리고 싶을 지경이라고. 하루히는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리하여 과거의 기억을 날려버릴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던 탓에 옆에 있는 시끄러운 여자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는지 듣지 못했다. “잠깐 쿈, 듣고 있어?” “아니 안 듣고 있었는데, 그게 어떻다고.” “문화제야 문화제. 너도 긴장 좀 타란 말이야. 고등학교 첫 해의 문화제는 한 번밖에 없다고.” “그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난리칠 건 없잖아.” “난리칠 만한 거야. 간만의 축제잖아, 난리 안치면 말이 안되지. 내가 아는 학원제란 대강 그래.” “너네 중학교는 그리 대단한 걸 했었던 거냐.” “전혀. 하나도 재미 없었어. 그러니까 고등학교 문화제는 더 재밌어야 한다구.” “어떤 식이어야 넌 재밌다고 생각하는데.” “괴물의 집에 진짜 괴물이 있다던가, 어느샌가 계단 수가 늘었다던가, 학교 7대 불가사의가 13 불가사의가 된다거나, 교장 머리가 3배 아프리카 머리가 된다거나, 학교 건물이 변형해서 바다에서 솟아나온 괴물과 싸운다거나, 가을인데 계절이 돌아가버린다거나, 뭐 그런거.” 그럼, 나는 도중에 그만 듣기로 했기에 계단 어쩌고 이후의 연설이 뭐였는지는 모르겠는데, 괜찮으면 가르쳐 주겠냐. “…뭐, 좋아. 부실에 가서 천천히 말해줄테니까.” 기분이 상해 말을 완전히 멈춘 하루히는, 크게크게 보폭을 넓혀 눈 깜짝할 새에 부실 문 앞에 섰다. 그 문에 달린 ‘문예부’ 플레이트 밑에 ‘with SOS단’ 이라고 무뚝뚝한 글씨체로 쓰여진 종이조각이 압정으로 박혀 있다. “벌써 반년이나 여기 있었어. 이 부실은 우리 거라 해도 누구 한명 불만 없는걸.” 라고 지멋대로 점유권을 주장하며 플레이트 자체를 바꿔버리려고 한건 하루히로, 말린건 나다. 인간으로서 정도라는게 있는 거다. 하루히는 노크도 안하고 문을 열었다. 나는 부실 안에 요정이 하나 있는 걸 보았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백합의 화신을 잘못 본 게 아닌가 할 정도의 미소를 띄우더니, “아…. 안녕하세요.” 메이드 의상에 몸을 감싸고 빗자루를 쓸며 청소하는 그녀는 SOS단의 자랑인 차대접 비서, 아사히나 미쿠루 선배였다. 평소처럼 그녀는 부실에 사는 요정과 같은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정말로 요정일지도 모른다. 미래인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표현하는 게 더 그럴듯 할 것이다. 단의 창단시, ‘마스코트 캐릭터가 필요할 것 같아서’ 라는 의미불명의 이유를 들이대는 하루히에 의해서 끌려온 아사히나 선배는, 또다시 하루히에 의해서 억지로 메이드복을 입게 되고, 이후 그대로 SOS단의 메이드로서 매일 방과후 여기서 완벽한 메이드 아가씨가 되어 있다. 사상 구조가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고, 눈물 없인 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한 사람이다. 바니걸이나 간호사나 치어걸마저도 되어준 아사히나 선배지만, 역시 메이드 의상이 제일 좋다. 확실히 말해서, 이런 모습으로는 뭐 하나 의미도 없다면 복선도 안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만, 여기선 대략 그런 거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하루히가 하는 일에 의미가 있었던 경우가 적다. 하지만 뭔가가 원인이 되었던 경우는 꽤 있다. 우리는 그런 걸로 자주 골치아프게 되니까 말이야. 어차피 상세 전부 일체가 무의미했던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런 하루히가 행한 몇 안되는 의미있는 일(라고 해봤자 이것밖엔 없군)은 아사히나 선배의 메이드 패션이다. 너무도 잘 어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 할 정도다. 이거에만큼은 하루히의 아이디어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군. 어디서 얼마에 사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히의 의상센스는 꽤나 괜찮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아사히나 선배라면 뭘 입어도 어울릴 최고의 모델이다. 그중에서도 메이드는 내 취향으로, 말하자면 즉 내 눈을 즐겁게 해준다는 의미로 유의의한 것이다. “곧 차 내올게요.” 귀엽게 속삭이는 아사히나 선배는, 빗자루를 청소용구함에 넣고, 폴짝거리며 찬장에 다가가 찻잔을 꺼내기 시작했다. 옆구리를 뭔 단단한 게 쳐대나 했더니, 하루히의 팔꿈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눈이 실같이 됐다 너.” 아사히나 선배의 귀여운 행동에 감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진 모양이다. 누구든지 그리 될거다. 귀엽고도 우아하게 수줍어하는 아사히나 선배를 앞에 둔다면 말이야. 1-02 하루히는 ‘단장’이라 쓰여진 삼각 이름표가 놓여진 책상에서 ‘단장’이라 쓰여진 완장을 집어들어 장착, 파이프 의자에 뒤로 눕듯이 거만하게 앉더니, 부실 안을 흘겼다. 또 하나의 단원이 테이블 구석지에서 두꺼운 서적을 읽고 있다. “……” 그저 묵묵히, 얼굴도 들지 않고 오직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이 사람은, 하루히 시점에선 ‘부실을 탈취하니 덤으로 붙어왔다.’ 라고 하는 문예부 1학년, 나가토 유키였다. 대기중의 질소마냥 존재감조차 희박한 주제에, 가장 기묘하기 짝이 없는 프로필을 가진 동급생이다. 설정의 기묘함 정도 자체는 하루히 이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루히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나가토는 어느정도 알아가지곤 쓰잘데 없는 혼란만 가져올 뿐이다. 나가토의 말을 믿자면, 이 무언, 무표정, 무감정, 무감동 4가지가 모여 만든 쇼트컷의 작은 체격의 이 여고생은, 인간이 아닌 우주인에 의해 창조된 대 인간용 커뮤니케이트 머신이다. 뭐냐 그건, 이라 해도 할말 없다.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뭐라 반문할 것도 없고, 어쩐지 정말 그런 모양이다. 단 하루히에겐 비밀이다. 지금 하루히는 나가토를 ‘좀 별난 독서광’으로밖엔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하여도 ‘좀’은 아니라고 본다만. “코이즈미군은?”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아사히나 선배는 한순간 움찔하더니, “아, 그게. 아직 안왔어요. 늦네….” 차 통에서 신중한 손놀림으로 찻주전자에 차를 넣고 있다. 나는 부실 구석에 옷걸이를 봄과 동시에 관찰했다. 갖가지 의상이 연극부 분장실처럼 걸려 있다. 왼쪽에서 순서대로, 간호사복, 바니걸, 여름용 메이드복, 치어리더, 유카타, 백의(白衣), 표범손, 개구리, 뭔지 잘 알 수 없는 번쩍거리고 투명한 옷, 엣세트라(et cetera) etc. 이거저거 할것 없이 전부 이 반년 사이 아사히나 선배의 피부 온기를 받은 의류들이다. 확실히 해두지. 그걸 아사히나 선배에게 입히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하루히가 자기 만족도를 높일 뿐이다. 어렸을 때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 마음의 상처, 쇼크)라도 있었나. 갈아입히기 인형을 사주지 않았다거나 하는 거 따위의. 그래서 이 나이가 돼서도 아사히나 선배를 가지고 노는것이 아닌가. 덕분에 아사히나 선배의 트라우마는 현재진행형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래서 나는 눈복에 한해 행복하다는 이야기이다. 뭐, 종합적으론 이걸로 인해 행복해진 인간의 수가 더 많은 것 같기에,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미쿠루짱, 차.” “네, 네, 지금가요.” 아사히나 선배는 분주한 동작으로 ‘하루히’라 매직으로 서명되어 있는 찻잔에 차를 따르고, 찻쟁반에 올려 조심스럽게 옮겼다. 받은 하루히는 살짝 입을 대며 뜨거운 차를 홀짝이더니, 제자의 미숙함을 꾸짖는 꽂꽂이 스승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쿠루짱, 전에도 말한거 같은데, 기억안나?” “예?” 아사히나 선배는 불안한 듯이 쟁반을 안고, “뭐였죠?” 어제 먹은 삼베의 진짜 맛을 떠올리려 하는 새와 같이 고개를 갸웃한다. 하루히는 찻잔을 상 위에 놓고는, “차를 가지고 올 때는 세번에 한번정도의 비율로 넘어져서 엎어버려! 메이드가 되가지고 어리버리한 맛이 하나도 없잖아!” “예, 아…. 죄송합니다.” 가냘픈 어깨를 떠는 아사히나 선배. 그런 명령을 했었다니 나는 첨 듣는다. 이녀석은 메이드란건 좀 어리버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거냐? “마침 잘됐어, 미쿠루짱. 쿈으로 연습해봐. 찻잔이 머리 위에 엎어지도록 말야.” “예?” 아사히나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본다. 나는 하루히의 머리에 구멍을 뚫고 알맹이를 바꿔넣으려고 전동 드릴을 찾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찾지 못하고, 대신에 한숨을 쉬었다. “아사히나 선배, 하루히 농담은 머리가 좀 이상한 녀석밖엔 안 웃는다구요.” 슬슬 좀 익숙해지셔요, 라고 뒤를 잇고 싶었다만 일단 안 하겠다. 하루히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더니, “거기있는 바보, 난 농담따위 안했거든! 언제나 진지하다구.”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로구만. CT스캔 검사라도 한번 받아보지 않겠냐. 그리고 너한테 바보란 소리를 듣는 게 평소 이상으로 열받는 건 내 조크 센스가 부족하기 때문이냐. “좋아. 내가 시범을 보여줄테니까, 미쿠루짱은 따라해.” 파이프 의자에서 일어선 하루히는 앵앵거리는 아사히나 선배의 손에서 찻쟁반을 빼앗아 찻주전자를 올리고, 내 이름이 적힌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멍히 보고 있는 사이에, 하루히는 엄청나게 차를 흘리면서 찻잔을 찻쟁반에 놓고 내 위치를 포착, 고개를 끄덕이고 걷기 시작하려는 차에 옆에서 찻잔을 뺏었다. “이봐! 방해하지마!” 방해고 뭐고 열탕을 머리부터 뒤집어쓰게 될 판인데 가만히 입다물고 있을 놈이 있다면 그놈은 사람이 아마 대책없이 착하던가 보험금 사기꾼이다. 나는 선 채로 하루히가 탄 녹차를 마시고, 같은 찻잎인데 어째서 아사히나 선배가 타준 것과 이렇게나 맛이 다를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생각할 것도 없다. 애정이라는 이름의 스파이스(spice)의 차이로구만. 아사히나 선배가 들에 핀 백장미라고 한다면, 이녀석은 꽃도 안 피우고 가시밖에 없는 특수한 장미다. 당연히 과실이 생기지도 않지. 하루히는, 아무말도 없이 찻잔을 기울이는 나를 죽일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흥.” 머리카락을 휙하니 날리면서 단장석으로 돌아갔다. 끓인 옛날 탕약이라도 마신 듯한 표정이다. 아사히나 선배는 이제 좀 안심이 된 듯이 행동을 재개, 나가토의 찻잔에 차를 타서 그 독서소녀의 앞에 가져다준다. 나가토는 꿈쩍도 안하고, 그저 묵묵히 하드커버에 맞서고 있었다. 조금은 고마워해 줘라. 타니구치라면 마시는데 3일은 걸릴 거라고. “……” 팔락거리며 책장을 넘길 뿐 나가토는 얼굴도 들지 않는다. 그것 또한 평소 모습이기에 아사히나 선배도 기분 상할 것 없이 메이드 활동 진행, 자기 찻잔을 스탠바이. 그때, 제 5의 단원이, 오지 않아도 아무도 신경쓰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회시간이 길어졌네요.” 여전히도 인축무해한 스마일 광선을 뿜으며 문을 연 자는, 하루히 왈 수수께끼의 전학생, 코이즈미 이츠키였다. 내가 애인이 있었다고 해도 친구로서 소개하고 싶지 않은 잘생긴 얼굴에다 미소를 띄우고, “제가 제일 늦은 모양이네요. 제가 늦은 것 때문에 회의를 시작하시지 못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뭐라도 한턱 내는 게 낫겠습니까?” 회의? 뭐냐 그건. 난 그런 거 한단 소리 못들었다고. “말한거 잊고 있었네.” 책상에 턱을 괴고 있던 하루히가 말한다. “점심시간 때 모두한테 다 알려뒀었어. 너한텐 언제든 말할 수 있을거 같아서.” 어째서 다른 교실에 갈 시간은 있으시면서, 같은 반 앞자리에 앉는 내게 전할 시간은 없는거냐. “뭐 괜찮잖아. 어차피 그게 그거고. 문제는 언제 들었냐는게 아니라, 지금 뭘 할 것이냐야.” 대사 자체는 훌륭하다고 느꼈다만, 하루히가 뭘 하든 내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건 이미 주지의 사실이라 하겠다. “그렇다기 보다는, 이제부터 뭘 할 건지 생각해야만 해!” 현재형인지 미래형인지 확실히 해줘라. 그리고 주어가 1인칭 단수인지, 복수형인지도 덧붙여서 말이야. “물론, 우리 전원이야. 이건 SOS단의 행사니까.” 행사라니? “아까도 말했잖아. 이 시기에서 행사란 건 문화제밖에 더있어?” 그거라면, 단이 아니라 학교 전체의 행사다. 그렇게나 문화제를 구성하고 싶었으면 실행위원에라도 입후보했으면 됐잖냐. 잡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거다. “그러면 의미가 없어. 역시 우리들은 SOS단다운 활동을 해야지. 힘들여 여기까지 성장해온 단이라구! 교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주목을 받는 단체잖아? 알고 있어?” SOS단다운 활동이란게 뭐냐? 난 이 반년간 행해진 SOS단적 활동을 떠올리고 얼굴이 가볍게 파래졌다. 넌 단순한 생각을 떠들어대기만 하고 있으니까 편할지 몰라도, 나나 아사하나 선배가 고생하는건 어쩔거야. 코이즈미는 쉼없이 웃기만 할 뿐이고, 나가토는 가슴 크기론 도움이 전혀 안되며, 그나마 일반인다운 나도 좀 생각해 줬으면 한단 말이다. 아아, 아사히나 선배도 별로 일반적이라고는 못할지 모르지만 예쁘니까 올 오케이다. 있는 것만으로 내 눈을 즐겁게 해주어 내 거칠어진 정신을 낫게 해주니까. “기대에 부응할 만한 걸로 해야 하겠지.” 하루히는 곤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지만, 대체 그 어느 누구가 SOS단이 하는 일에 기대를 하는지, 그거야말로 앙케이트로 알아봐야할 일이다. 성장해 왔다고 하는 말에 대해선, SOS단은 아직도 동호회 이하의 존재에서 승격하지 못하고 있고 부원도 늘지 않는다. 늘어봤자 복잡해질 뿐이니 없어도 상관이 없지만 이대론 아무리 지나도 탈선한 하루히 특급은 선로 옆만을 한없이 달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승객은 우리 다섯명 뿐이라는 거다. 하다못해 날 대신해 일을 맡아줄 희생양(scapegoat)가 있었으면 좋겠다만. 뭐하면 시급도 줄 수 있다. 백엔정도라면. 1-03 첫 찻잔을 30초만에 비운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둘째잔을 요구하면서, “미쿠루짱네는? 뭐해?” “에-…. 저희 반 말인가요? 야키소바 집을…….”(*야키소바[?きそば]:찐 중국식 국수를 야채ㆍ고기 등을 섞어 기름으로 볶은 요리. 혹은 기름에 튀긴 중국식 국수 위에 야채ㆍ고기 등을 섞은 ‘ぐすあん’[설탕ㆍ간장 등으로 간을 맞추어 걸쭉하게 끓인 갈분 음식]을 얹은 것) “미쿠루짱은 웨이트리스겠네, 분명.”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둥글게 하고는,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요리쪽을 하고 싶었는데요, 모두가 웨이트리스를 하라고 해서….” 하루히는 다시 생각하는 눈초리로 바뀌었다. 전례에 따르면 쓰잘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의 눈빛을 하고 있다. 그 눈이 옷걸이쪽을 향했다. 이제보니 아사히나 선배에게 웨이트리스 의상을 아직 안 입힌 것을 눈치챈 듯한 눈매였다. 하루히는 사려깊은 얼굴로, “코이즈미군네 반은?” 코이즈미는 살짝 어깨를 흔들었다. “무대극을 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만, 오리지널을 할지 옛곡을 할지로 의견이 갈려서 진짜 결정은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흐-응.” 여기저기를 떠도는 하루히의 시선이,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은 단원에게 향한다. “유키는?” 독서광 우주인 짝퉁은, 비의 낌새를 느낀 프레리도그(prairiedog:marmot의 일종)같이 고개를 들어, “점.” 여전히도 평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점?” 무심결에 되물은건 나다. “그래.” 나가토는 피부호흡도 안하는 것 같은 무표정으로 끄덕인다. “네가 점치는거야?” “그래.” 나가토가 점을 친다고? 예언한다는걸 잘못말한건 아니냐. 나는 까만 고깔모자에 망토를 두른 나가토가 수정구슬에 손을 올리는 모습을 상상하고, 커플객 둘을 앞에 두고 ‘당신들은 58일 3시간 5분 후에 헤어지게 된다.’ 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풍경이 보였다. 조금은 선의의 거짓말도 섞어줘라. 뭐, 나가토에게 미래예지가 가능한지 어떤지는 이미 확실하지 않은가. 아사히나 선배가 모의 음식점에, 코이즈미가 연극에, 나가토네가 점치기인가. 어디든 우리반의 무기력 앙케이트보단 몇배는 더 즐겁겠구만. 그래, 이런건 어떤가. 전부 섞어서 관극 점치기 앙케이트 음식점을 하는건.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당장 회의 시작하자.” 하루히는 내 귀중한 의견을 일축하더니, 화이트보드로 걸어간다. 라디오 안테나같이 생긴 막대기를 늘여, 보드를 팡팡 두드렸다. 아무것도 안 쓰여있는데, 어딜 보면 되냐. “지금부터 쓸거야. 미쿠루짱, 넌 서기 해야 하니까 말하는대로 똑바로 적어.” 아사히나 선배가 언제부터 서기였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모르겠지. 바로 방금 전에 하루히가 정한 모양이니까. 차대접 비서 겸 서기가 된 아사히나 선배가 수성 펠트펜을 들고 화이트보드 옆에서 하루히의 옆모습을 보며 대기. 그리고 하루히는 갑자기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SOS단은 영화상영회를 하겠습니다!” 대체 하루히 머리 내부에선 어떤 변환이 진행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그건 좋다 치자. 맨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회의가 아니라 니 혼자만의 소신표명 연설회 아니냐. “매번 있는 일이잖습니까.” 코이즈미가 내게 속삭인다. 낙서하고 싶을 정도로 굿 테이스트 스마일 표정으로 말이다. 단정한 입술을 부드럽게 비뚤은 코이즈미는, “스즈미야상은 처음부터 뭘 할지 정해놓으신듯 하네요. 대화를 나눌 여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뭔가 불필요한 말을 하신 건 아닌가요?” 오늘 토크중 영화에 관련한 건 전무했을 텐데. 어젯밤 심야에 저예산(Low Budget) C급 영화라도 보고 그 하잘것없음에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진 건 아니냐. 하지만 하루히는, 자기 연설이 청중을 하나도 빠짐없이 감동시키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밝은 기분으로, “쭉 의문이 남는게 있는데,” 나는 니 머리 속 알맹이가 의문이다. “TV 드라마 같은데서 마지막회에 사람이 죽거나 하는게 자주 나오는데, 그거 엄청 부자연스럽지 않아? 왜 그렇게 타이밍 좋게 죽는건데? 이상하다구. 그래서 난 마지막에 누가 죽고 끝내버리는 녀석이 엄청 싫어. 나라면 그런 영화 안찍을거야!” 어느쪽인거냐, 영화냐 드라마냐. “영화 만든다고 했잖아. 옛날에 만든 무덤 옆 동상도 제대로 귓구멍 만들어져 있다구.(일본속담) 내 말 한마디 한마디 놓치지 말고 제대로 기억해두란 말이야.” 니 미친 대사집을 암기하느니 요 근처를 달리는 민영철도 노선 역 이름을 순서대로 외우는 게 훨씬 더 유의미하다. 아사히나 선배가 원래 서예부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둥그스름한 글씨체로 ‘영화상영’이라 쓴 것을 보고 하루히는 만족스럽게 끄덕이더니, “그렇다는 거야. 알았어?” 장마의 끝을 확신한 기상예보사처럼 밝게 말했다. “뭐가 그렇다는거야?” 내가 묻는다. 당연한 의문이다. 영화를 상영하는 것밖에 모르냐? 배급원은 어디로 할 작정인데? 비엔나 스타 인터내셔널에 인맥이라도 있냐? 하지만 하루히는 대책없이 까만 눈동자를 번쩍번쩍 빛내면서 “쿈, 너도 머리가 좀 딸리는구나. 우리가 영화를 찍는거야. 그래서, 그걸로 문화제서 상영할거야. 프레젠티드 바이(Presented by) SOS단 이라는 크레딧(Credit) 넣고 말이야.” “여긴 언제부터 영화연구부가 된거냐?” “무슨소리야. 여긴 영원히 SOS단이야. 영연따위가 된 기억은 없어.” 영연 녀석이 들으면 기분나쁠 소리를 내뱉더니, “이건 이미 정해진 일이야. 일사부재리라구!(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法]어떤 사건에 대하여 일단 판결이 내리고 확정되면 그 사건을 다시 소송하여 심리하지 않는다는 원칙.) 사법흥정엔 응하지 않을테니까 그리 알어.” SOS단의 배심원단장께서 그렇게 말해주시면 의견이 다시는 안 뒤집히겠다만. 대체 어디사는 어느놈이야, 하루히를 저런 높은 자리에 앉힌 건…이 아니라, 그러고보니 이녀석은 지 멋대로 되어버린거다. 어느 세계든지 목소리 큰놈이랑 열심히 하는 녀석이 출세한다는 건 뭐 사실이니까. 덕분에 나나 아사히나 선배같이 이리저리 휩쓸리기 쉬운 선량한 사람들이 온갖 귀찮은 일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지만, 냉혹하고도 비정한 인류사회의 모순에 있어 진리이기도 하다. 내가 이상적인 사회제도란 무엇일까 하는 심각한 명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그렇군요.” 코이즈미가 뭔가를 알았다는 듯한 말을 했다. 나와 하루히에게 번갈아 미소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어이 코이즈미, 하루히의 헛소리 폭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너한텐 자기 의견이란 것도 없냐? 코이즈미가 손으로 앞머리를 살짝 넘기고는, “즉 우리들끼리 자체제작영화를 촬영하여, 관객을 모아 상영하자, 이런 말씀이시지요.” “바로 그거야!” 하루히가 화이트보드를 안테나로 두드리자 아사히나 선배가 움찔 놀란다. 그래도 아사히나 선배는 용기를 짜내듯이, “그런데요…, 영화로 하신 이유가 뭔가요?” “어젯밤에, 잠이 잘 안왔었어.” 하루히는 얼굴 앞에서 안테나를 와이퍼처럼 움직이면서, “그래서 TV를 켰더니 이상한 영화를 하는거야. 볼 생각도 없었는데, 달리 할 짓도 없으니까 보긴 했지.” 역시나. “그게말야, 엄청나게 하잘것없는 영화였어. 감독네 집에다 국제전화라도 걸고 싶을 정도였다니깐.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어.” 안테나 끝이 아사히나 선배의 작은 얼굴을 향했다. “이딴거, 내가 훨씬 나은 걸 찍고야 말겠어!” 자신만만히 가슴을 펴는 하루히. “그래서 까짓거 해보자! 그리 결심한거야. 뭐 불만이라도?” 아사히나 선배는 무서운듯 고개를 벌벌 떨고 있다. 만약에 불만이 있다고 하여도 아사히나 선배가 말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코이즈미는 예스 맴(Yes Ma'am)이고, 나가토는 입도 뻥긋 안하기에 이럴 때 뭔가 한소리 해줘야 하는 건 필연적으로 나인 것이다. “니가 혼자서 영화감독을 목표하건 프로듀서에 뜻을 두던 그런건 어찌되든 상관없어.. 니 진로야 너 좋을대로 하면 될 거다. 그런데 우리 희망이나 의사도 좋을대로 해도 되겠냐?” “뭘?” 라며 하루히는 오리입.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타이른다. “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우리는 아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들이 그런 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거야? 감독 혼자선 영화가 안된다고.” “안심해. 각본이라면 거의 다 생각해뒀으니까.” “아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건 그런게 아니…” “걱정할거 하나도 없어. 넌 평소처럼 나 하는대로 따라오면 돼.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구.” 걱정이다. “절차는 맡겨둬. 전부 다 내가 할테니까.” 더더욱 걱정이다. 1-04 “거 되게 시끄럽네. 한다고 했으면 하는거야. 목표는 문화제 이벤트 베스트 투표 1위야! 그러면 이해력 나쁜 학생회도 SOS단을 부로써 인정해줄 지도―아니! 반드시 인정시킬거야. 그러기 위해선 먼저 여론을 우리편으로 만들어야해!” 여론의 투표결과가 정비례할 거라곤 단정지을 수 없다고. 나는 저항을 시도해본다. “제작비는 어쩔거야?” “예산이라면 있어.” 어디에? 낚시꾼(angler) 조직 주제에 잘났다는 듯이 버젓이 부를 사칭하고 다니는 단 따위에게 학생회가 예산을 배분해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만. “문예부에게 주는 분량이 있지.” “그럼 그건 문예부 예산이지, 니가 쓸 수 있는게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유키가 괜찮다고 했는걸.” 이젠 질렸다. 나는 나가토의 얼굴을 본다. 나가토는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느릿느릿 독서로 돌아간다. 문예부 입부희망자는 정말 더 없는건가. 물을 생각은 없지만, 미리 나가토가 손을 써서 폐부 직전에 밀어넣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이녀석은 하루히가 쳐들어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고 말이다. 만약 문예부에 입부하려고자 한 신입생이 있었다면 미안할 일이다. 반드시 문예부가 하루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 줬으면 한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른 채, 하루히는 안테나를 휘두르면서, “모두 알았지! 반에서 하는 것 보다 이게 우선이야! 반대의견이 있으면 문화제가 끝난 후에 듣겠어. 알겠지? 감독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그리 외치고 있는 하루히는, 한여름에 얼음덩어리를 선물받은 동물원의 백곰과 같이 다른 것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는듯 하였다. 단장 다음엔 감독이냐. 나중엔 또 뭐가 될 생각인데. …신이라곤 하지 마라. “그럼, 오늘은 이걸로 끝! 나는 캐스팅이나 스폰서 관계 등등 여러 가지로 생각할게 많으니까. 프로듀서는 할 일이 엄청 많다구.” 프로듀서란게 뭐 하는 직위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네녀석은 대체 뭘 할 생각인 거냐. 스폰서? 퍽. 매마른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나가토가 책을 덮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지금 SOS단 당일 영업종료의 신호처럼 됐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 라더니 하루히는 통조림을 여는 소리를 들은 고양이처럼 뛰어나갔다. 별로 자세히 듣고 싶은 이야기는 있을거 같지도 않다만. “잘됐잖습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건 당연히 코이즈미다. “우주괴물을 잡아다가 전시한다던지, UFO를 격추해서 내부 구조로 전람회를 연다던지 하는게 아니라서 저는 안심했습니다.” 어디서 들은 거 같은 대사로구만. 이 미소 초능력자는 후훗 하며 입을 다문 채 웃더니, “거기다 저는 스즈미야상이 어떤 영화를 찍으실 생각인지 꽤 흥미가 있습니다. 어쩐지 상상은 갈듯 합니다만.” 코이즈미는 찻잔을 치우는 아사히나상을 옆으로 보면서, “즐거운 문화제가 될 것 같습니다. 흥미진진하겠어요.” 나도 덩달아 아사히나 선배에게 시선을 옮긴다. 폴랑폴랑 흔들리는 머리띠를 보고 있자니, “아, 무, 무슨일이세요?” 남자 두 녀석의 눈이 자기에게 집중된 것을 안 아사히나 선배는 손을 멈추고 얼굴을 붉혔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하루히가 또 어떤 의상을 가져올지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라구요. 돌아갈 준비를 끝낸(끝냈다고는 해도 책을 가방에 넣는 것뿐이었지만) 나가토가 소리도 없이 일어서 문밖으로 소리도 없이 나갔다. 방금 전까지 나가토가 읽던거 혹시 점술 관련 서적 아니었냐. 서양 책이니 내가 알 턱이 없지만. “그런데말이야….” 내가 중얼거렸다. 영화…. 영화란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다소간의 흥미는 있었다. 코이즈미 만큼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시냇물 깊이다. 하다못해 나만큼은 기대를 가져주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아무도 기대따위는 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빠르게도 전언 철회, 기대따위 해주는게 아니었다. 다음날의 방과후, 나는 벌레씹은 기분이 된다. ㆍ제작 및 저작……SOS단 ㆍ총지휘/총감독/연출/각본……스즈미야 하루히 ㆍ여우주연……아사히나 미쿠루 ㆍ남우주연……코이즈미 이츠키 ㆍ조연……나가토 유키 ㆍ조감독/촬영/편집/짐꾼/잔심부름/파시리(?)/주문받기/그외잡무……쿈 이런게 쓰여있는 노트조각을 보고 내가 생각할 건 하나다. “근데, 난 대체 몇가지나 소화해야 하는거야?” “거기 쓰여진 대로야.” 하루히는 안테나를 지휘자처럼 휘두르더니, “너는 백업스탭이야. 캐스트도 보이는 대로. 기가막힌 캐스팅이지?” “제가 주연인가요?” 가느다란 목소리로 묻고있는 아사히나 선배는 오늘 메이드복이 아닌 평상 교복을 입고 있다. 하루히가 안 갈아입어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아사히나 선배를 끌고 어딜 나갈 작정인가보다. “가,가능하면 전 별로 눈에 안 띄는 역이….” 아사히나 선배는 곤혹한 얼굴로 하루히에게 호소한다. “안돼.” 대답하는 하루히는, “미쿠루짱은 계속 눈에 띄어줘야겠어. 너는 우리 단의 트레이드마크같은 거니까. 지금 사인 연습정도 해놓으면 좋을거야. 완성 피로연 때 관객 총출동 할 것 같으니까.” 완성 피로연? 그런거 어디서 할 작정이냐. 아사히나 선배는 매우 불안한듯이, “…저, 연기 같은 것 잘 못하는데요.” “괜찮아. 내가 확실하게 지도해 줄테니까.” 아사히나 선배는 겁에 질린 듯이 나를 보고, 슬피 속눈썹을 덮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우리 셋밖에 없다. 나가토와 코이즈미는 자기네 반에서 할 것에 대해 의논하는 것 따위 등으로 늦는다. 수업 끝나고 남아서까지 생각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적당히 대충 하면 될텐데, 열심히 하는 반이 의외로 많구만. “그런데, 유키도 코이즈미군도 좀 열심히 못하나.” 하루히는 화를 풀 길이 없다는 말투로 내게 칼끝을 돌렸다. “여기가 우선이라고 말해뒀는데도 자기반 사정으로 늦는다니, 엄중히 주의가 필요하겠어.” 나가토와 코이즈미는 나와 하루히보다도 반 소속의식이 있는 것이겠지. 이 시간에 여기 있는 우리 셋이 오히려 이상한 거라고.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아사히나 선배는 반 회의 안 들어가도 되나요?” “네, 저는 접대부라서 의상정도만 맞추면 돼요. 어떤 의상일지 좀 기대되네요.” 수줍어하며 미소짓는 아사히나 선배는 이제 완전히 코스프레에 익숙해져 있는 모양이다. SOS단에 의하여 의미없는 의상을 의미없이 입는것 보다, 잘 어울리는 곳에서 그 나름의 모습을 하는게 좋겠지. 야키소바 집에 웨이트리스가 있어도 전혀 이상할 건 없다. 문예부에 메이드가 있는 것 보다는 현격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하루히는 어떤 확대해석을 하고 있는지, “뭐야, 미쿠루짱. 그렇게 웨이트리스 하고 싶었어? 진작 말해 주지 그랬어. 그정도는 문제 없어, 내가 코스튬 맞춰 줄게.” 막 지껄여 대는건 좋은데, 문예부실에 있는 부원이 교복 이외의 어떤 모습을 하든간에 그건 장소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요전번의 간호사는 뭔고 했으며, 그러느니 역시 메이드가 제일 좋…은건 그저 내 취향인가. “뭐 그건 됐어.” 하루히는 내게로 방향을 바꾸더니, “쿈, 너 영화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게 뭔지 알고 있어?” 글쎄.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며 감명을 받았던 영화들을 떠올리며 참고자료로 삼았다. 한동안의 생각을 끝내고 자신있게, “참신한 발상과 제작을 향한 끊임없는 정열이 아닐까.” “그런 추상적인게 아냐.” 하루히는 당당하게, “당연히 카메라지. 기재도 없는데 어떻게 찍을거야.” 그럴지 몰라도, 내가 말하려던 건 그런 즉물적(卽物的: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함.)인게 아니라…뭐 됐어. 반론해야만 할 정도로, 나는 참신한 발상도 끊임없는 정열도 영화이론도 없다. “그러니까,” 하루히는 안테나를 짧게 해서 단장석 쪽으로 던지더니, “지금부터 비디오 카메라 조달하러 가자.” 콰당. 의자 소리가 나서 옆을 보니 아사히나 선배가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창백해질 정도란 말이지. 현재 이 부실에 진좌하고 있는 저 컴퓨터 한 대는, 하루히의 어이없는 강탈작전에 의하여 컴퓨터 연구부에서 뺏어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이 아사히나 선배였다. 밤색의 머리를 달달 떠는 아사히나 선배는, 앵두같은 입술마저 와들와들 떨면서, “저저저저저기, 스스스즈미야상, 그러고보니까 저 일이 있어서 지금 빨리 교실에 돌아,” “입다물어.” 하루히의 무서운 얼굴. 서있던 아사히나 선배에게서 ‘히’하고 작은 목소리가 새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루히는 갑자기 싱글 웃더니, “걱정하지마.” 니가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정말로 걱정할 일이 없었던 전례가 없다. “이번엔 미쿠루짱 몸을 돈 대신 쓸 생각은 없으니까. 조금 협력해주기만 하면 돼.” 아사히나 선배는 도살당하기 직전의 소와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위로 대신 하루히에게 말했다. “그 협력의 내용을 말해봐. 말하지 않는 이상 나랑 아사히나 선배는 한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다.” 하루히는 대체 이녀석은 뭘 걱정하는거냐고 말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스폰서를 한바퀴 돌거야. 주연 여배우를 데리고 가야 심증이 되잖아? 너도 따라와. 짐꾼 해야되니까.” - 제 1화 끝(제 2화 시작입니다 ㄱㄱ싱)++유치.빤스.(더유치함) 제 2화 지금쯤이면 가을이 됐을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하나도 시원하지가 않다. 드디어 지구가 미쳐버려서 일본에 가을이라는 계절을 데려오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여름의 더위는 무한 연장전에 들어간 것 마냥 끊임없이 계속되고, 누가 굿바이 홈런을 날려주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태세였다. 멈출 때쯤엔 가을을 건너뛴 채 겨울이 될 것 같지만 말이다. 하루히가 ‘오래 걸릴지도 몰라’라기에 우리는 가방을 가지고 학교를 나왔다. 기나긴 내리막을 거침없이 내려가는 하루히가 가는 곳은 어딜까. 고등학교 문화제용 자작영화에 제작비를 모아다줄 스폰서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영화연구부라면 몰라도 우리는 반년이 지나서도 아무도 아직 뭘 위해 모였는지조차 모르는 영세 괴 단체다. 문전박대가 뻔하다. 산을 내려온 우리는 민영철도선에 올라타서 세 역 정도 이동하게 되었다. 언젠가 나랑 아사히나 선배 둘이서 산책했었던 벚꽃길 근처. 큰 슈퍼마켓이나 상점가가 있는, 비교적 사람이 많은 지역이다. 하루히는 나와 아사히나 선배를 배후에 이끌고 상점가로 들어갔다. “여기야.” 이제야 멈춰선 하루히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어느 전자상점이었다. “그렇군.” 내가 말했다. 이 가게에서 영화촬영에 사용할 기재를 훔칠 생각인가보다. 어떻게 훔칠거냐. “기다려봐. 내가 말좀 해보고 올게.” 하루히는 가방을 내게 던지더니, 주저없이 유리 너머 가게 안으로. 아사히나 선배는 내 뒤에 숨듯이 서서, 조명기구 디스플레이 더미로 눈부신 가게 안을 무서운듯 엿보고만 있다. 소극적인 여자 초등학생이 처음 친구집에 간 것 같은 분위기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아사히나 선배를 지키겠다는 자신감에 차서는, 점장으로 보이는 아저씨에게 손짓발짓을 하고 있는 하루히를 관찰했다. 조금이라도 하루히가 수상한 짓을 하려고 한다면 이대로 아사히나 선배를 안고 도주해버리자. 유리 너머에서는 하루히가 뭔가 말하며 진열품을 가리키다 자신을 가리켰다 아저씨를 가리켰다 하고 있다. 아저씨도 뭔가 끄덕거리곤 있지만, 안이하게 저런 녀석이 하는 말에 끄덕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충고해줘야 하나. 드디어 하루히는 손가락 방향을 획 바꿔서 유리문 밖에서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를 가리키고는, 허파에 바람난마냥 크게 웃는 얼굴을 만들더니 다시 손을 흔들면서 연설을 계속했다. “뭘 하는 걸까요…?” 아사히나 선배가 내 비스듬한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집어넣었다 하면서 의문의 말을 던진다. 미래에서 온 아사히나 선배가 모르는 걸 내가 알 리가 없다. “글쎄요. 아무래도 이 가게에서 가장 고성능의 디지털 핸디 비디오카메라를 무상대여해줘라, 뭐 이런거 아닐까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여자다, 저 녀석은 말이다. 지가 세상의 중심에서 지구를 굴리고 있다고 믿는 녀석이니까. “참 난감하겠죠.” 얼마 전의 일이지만, 나가토에게 이 비스무리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하루히는 자신의 가치기준이나 판단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 타인의 의사나 의식이 자신과 다른 경우도 있다, 아니, 다르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초광속 항법을 실현하고 싶다면, 하루히를 우주선에 태워주면 된다. 아주 쉽게 상대성 이론을 무시해버릴 것이다. 나가토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그 말없는 우주인 유사품은, “너의 의견은, 아마도 옳다.” 라며, 나가토로선 꽤 의미있는 문장을 뱉어냈다. 농담이 되지 않는 존재, 그것이 스즈미야 하루히였다. “아, 이야기가 끝났나봐요.” 나는 아사히나 선배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회상씬에서 돌아왔다. 예상대로 하루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전자상점에서 나왔다. 양손으로 비교적 작은 상자를 들고 있다. 옆에 유명전자제품 메이커 로고가 커다랗게 프린트 되어있는 상품사진,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닌 한 그것은 비디오 카메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협박을 한거냐? 넘기지 않으면 방화해버리겠다, 불매운동을 하겠다, 매일 장난 팩스를 보내겠다, 지금 당장 난동을 부리겠다, 예고없이 자폭해버리겠다. “미쳤어? 그런 협박을 왜해.” 하루히는 기분좋게 상점가를 걷고 있다. “이걸로 처음 한 발은 순조롭게 잘 뗐네. 성공이야.” 나는 비디오 카메라가 들어있는 박스를 떠맡겨진 채 뒤를 따르고 있다. 하루히 뒤에서 흔들리는 생머리를 보며, “그러니까, 어떻게 했길래 이런 비싸보이는 걸 공짜로 주냐고. 그 아저씨가 너한테 뭐 약점이라도 잡힌거냐?” 그래, 문을 나온 하루히는 곧바로 ‘얻었다’고 선언했다. 준다면 나도 당연히 갖고 싶다. 그 결정 대사를 가르쳐 줘라. 뒤돌아선 하루히는 씨익 웃으면서, “별거 없어-. 영화 찍고 싶으니까 주라고 했더니 좋다며 줬어. 별 문제 없었다고.” 지금은 문제가 없어도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그런다. 이건 내가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 그런건가. “일일이 신경쓸 거 없어. 넌 느긋하게 내 부하로만 일해주면 되니까.” 나는 공교롭게도 올해 봄부터 선체 측면에 ‘타이타닉’이라고 적힌 배에 타게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딘가에다 SOS 전보라도 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모스 부호를 모른다. 그 이전에 나는 부하가 된다고 느긋해질 정도로 근성이 그렇게 차분하지가 않다고. “자, 다음 가게로 간다!” 하루히는 시장 인파 속에서 신나게 발걸음을 떼고 있다. 나는 아사히나 선배와 얼굴울 마주보고 경보선수 같은 스피드로 걸어가는 하루히의 뒤를 쫓았다. 다음에 하루히의 방문을 받은 건 모형 가게였다. 하루히는 또다시 나랑 아사히나 선배를 밖에 놔두고 혼자서 교섭에 들어갔다. 조금씩 알 것 같다. 유리 너머의 우리를 가리킬 때, 하루히의 손끝은 정확히 아사히나 선배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아사히나 선배가 값어치를 때우게 될 것 같은 모양새다. 그것도 모르고 아사히나 선배는 가게 앞에 진열되어 있는 디오라마(diorama) 케이스를 신기한 듯이 보고 있었다. 말해주는게 나을까? 기다리기를 몇분, 하루히는 또 큰 상자를 하나 들고 나왔다. 이번엔 또 뭐냐. “무기야.” 하루히가 대답과 동시에 내게 짐을 떠넘긴다. 자세히 보니 프라모델인지 뭔지로 보이는 박스였다. 그것도 피스톨 총기류였다. 이런건 가져다 엇다 쓸거냐? “액션 씬에 쓸거야. 건 액션에 말이야. 화려한 난사 씬은 엔터테인먼트의 기본이지. 가능하면 건물을 하나 통째로 폭파시킬 작정인데, 다이너마이트 어디서 파는지 혹시 알아? 잡화점에 있을라나.” 내가아냐. 적어도 편의점이나 인터넷에선 안 팔겠지. 어디 탄광인가 가면 있지 않냐-까지 말하고 나는 말을 멈췄다. 이녀석이 하는 짓이다, 한밤중에 도화관 및 TNT화약을 훔치러 가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비디오 카메라와 모델건 박스를 바닥에 놓고 하루히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이 짐들은 어디다 놓을거냐?” “일단 집에 가지고가서, 내일까지 부실로 가져와.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면 귀찮으니까.” “내가?” “네가.” 하루히는 팔짱을 끼고선 실로 즐거워하는 얼굴이다. 교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SOS단 전용 스마일이다. 그리고 이처럼 하루히가 웃는 경우엔 반드시 내게 재앙이 닥치는 역할이 주어지게 되어 있다. “저기요,” 아사히나 선배가 팔을 든다. “전 뭘 하면….” “미쿠루짱은 됐어. 집에 가도 돼. 오늘은 일 끝났으니까.”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깜박이며 여우에게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사히나 선배가 오늘 한 거라곤 무서움에 떨며 나랑 같이 하루히를 따라다닌 것 밖에 없으니까. 왜 하루히가 자신에게 동행을 강요했는지 전혀 이해불능일 것이다. 난 알 것 같았지만. 하루히는 지금이라도 라디오 체조 제 2번을 할 것 같은 기세로 우리를 근처 역으로 데려왔다. 오늘의 하루히적 활동은 이걸로 끝난 모양이다. 프로 교섭인(negotiator) 뺨 때리는 수완으로 입수해낸 비디오 카메라 한 대와 소총 몇자루. 지출비용은 무료, 즉 공짜다. 옛 사람들이 말했었다. 공짜보다 무서운 건 없다고. 문제는 하루히가 그걸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아니, 이녀석이 무서워할 만한게 있다면 내게 꼭좀 연락 바란다. -01 다음날, 내가 가방 외의 쓰잘데 없는 짐을 들고 언덕을 학학대며 오르고 있자니, “여, 쿈. 등에다 뭘 지고 있는 거야? 어디 이쁜 여자애들한테 줄 선물이냐?” 내 옆까지 따라붙어 온 녀석은 타니구치였다. 나와 하루히의 반에 있는 단순 단세포 멍청이인, 어디든 널려있는 평범한 동급생중 하나다. 평범. 좋은 말이다. 지금 내 입장에서 보자면 귀중하기까지 하다. 거기엔 현실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타니구치에게 비닐봉지 둘중에 가벼운 쪽을 떠넘겼다. “뭐야 이건, 모델건? 너 이런 음침한 취미도 있었냐?” “내가 아냐. 하루히의 취미다.” 그리고 일단 냅두지만, 음침한 취미라고 말해제끼는건 잘못됐다고 본다. “스즈미야가 혼자서 이런걸 분해하고 조립하고 하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데.” 나도 상상이 안가니까 이걸 분해하거나 조립하는 건 하루히 외의 다른 사람이 될 거라 짐작하고 있는 거다. 덧붙여 난 어릴 적에 모 회사의 모 모빌슈트를 조립하려다 도저히 오른쪽 어깨의 관절이 끼워지지 않아서 내던져버린 과거를 가진 남자다. “너도 고생이다.” 타니구치는 하나도 고생이라곤 생각지 않는 목소리로, “스즈미야 졸병놀이를 버텨낼 녀석은 사방팔방을 찾아도 너 정도밖에 없을거다. 내가 보장하마. 그러니까 빨리 결혼이나 해버려.” 무슨 헛소리냐. 나는 그 어떠한 의미로 하루히와 붙어지낼 생각은 없다. 내가 붙어지내고 싶다면 아사히나 선배 쪽이다. 누구든 그러는게 당연하다. 타니구치는 케케케거리며 요괴같은 웃음소리를 높였다. “아아, 그건 안되지. 그 분은 키타(北)고의 천사, 남학생들 마음의 쉼터란 말이다. 전교생 절반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거든 이상한 수작 부리지 않는게 좋을 거다. 너도 이성을 잃은 내게 배후를 당하고 싶진 않을거 아냐?” 그럼 나가토로 해두지. “그것도 좀 곤란하다. 그건 그거대로 숨은 팬들이 많아. 왜 안경 이제 안쓰는 건지 몰라. 렌즈 끼나?” “글쎄다. 그건 본인에게 물어봐라.” “들은 바에 의하면, 무슨 말을 걸든 아직까지 대답한 적이 없댄다. 전부 무시해 버린대. 아무래도 나가토네 반에선 나가토가 한마디라도 하면 그 날은 좋은 일이나 안좋은 일중 하나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나가토를 대나무에 피는 꽃마냥 말하지 마라. 언제적 길흉점 놀이냐. 확실히 그녀석이 평범하지 않긴 하지만, 나름대로 평범한 면도-아, 별로 없군. “그런고로 넌 스즈미야 낙점. 그녀석이랑 제대로 대화가 가능한 녀석은 너밖에 없고, 피해자는 적을수록 좋다. 뭐라도 좀 해줘라. 그러고보니까 좀 있으면 문화젠데, 이번엔 뭘 할 작정이더냐?” “그러니까 나한테 묻지 말란 말이다.” 나는 SOS단 섭외담당 요원이 아니다. 하지만 타니구치는 태연히, “스즈미야한테 물어보면 통 알수없는 소리밖에 더하냐. 잘못하면 타이밍이 어긋나서 폭발해버릴 수도 있잖냐. 나가토 유키는 어차피 아무 말도 안할거고. 아사히나 선배는 다가가기 힘들다. 또 하나 남자 녀석은 말하고 있자면 왠지 열받는단 말이다. 그러니까 너한테 묻고있는거라고” 이상한 핑계를 대는 녀석이다. 그러면 내가 성질이 좋기만 한 놈 같잖냐. “아니냐? 따라가면 절벽에 떨어지게 되는걸 알면서도 인간성 좋게도 따라가주는 녀석으로 보인다만.” 교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낙담하는 표정으로 타니구치에게서 비닐봉지를 도로 뺏았다. 하루히가 이끄는 이 어둠의 길 끝엔 뭐가 있을지는 몰라도, 나도 뭐 별것도 아닌게 기다리고 있을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같이하는 건 하루히와 나뿐만이 아니다. 아는 것만 세명은 된다. 그중 둘은 놔둬도 괜찮지만 아사히나 선배는 위험하다. 미래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전혀 모르고 있다. 뭐 그게 좋긴 하지만. “그러니까,” 라며 내가 말해준다. “누가 지켜주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다.” 오오, 내가 봐도 주인공틱한 대사다. 지킨다고는 해도 하루히의 지나친 성희롱의 마수에서뿐이지만. 나는 좋은 어조로, “내가 지키는 거다. 전교 남학생들이 뭐래든 난 몰라. 신사동맹을 맺든 협정을 맺든 맘대로 하라고 해라.” 타니구치는 또 악당같이 케케케 거리며 웃더니, “정도껏 해둬라. 초승달 뜨는 밤이 한달에 한번은 꼭 있는 법이니까.” 갑작스레 예언 같은 소리를 하며 교문을 통과했다. 내가 짐과 함께 교실 앞의 복도를 걷고 있으니 하루히가 자기 짐을 자기 라커에 밀어넣고 있었다. 나도 전기제품과 프라모델 박스를 내 출석번호가 쓰여진 스틸 라커에 집어넣었다. “쿈, 오늘부터 바빠질거야.” 하루히는 인사도 하지 않고 큰 소리로 라커를 닫더니, 나를 향해 초겨울에 오는 따스함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미쿠루짱도 유키도 코이즈미군도 말이야. 흐지부지되진 않아. 영화 시나리오는 내 머릿속에 완벽히 구성되어있다고. 부글부글 끓고 있을 정도라니깐. 다음은 형상화시키는것 뿐이야.” “아 그러냐.” 나는 대충 대답하고 교실에 들어갔다. 내 책상은 뒤에서 두 번째에 있다. 1학기부터 몇 번이고 자리바꾸기를 했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뒷자리가 걸린 적이 없다. 왜냐면 매번 하루히가 내 뒤에 앉게 되기 때문이다. 이젠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되었지만 나는 우연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믿어주지 않으면 우연 쪽이 자신감을 상실할 것 같아서 말이지. 이래봬도 난 배려심 깊은 사람이다. 하루히랑 부대끼다 보면 누구든간에 그렇게 될거다. 루즈볼을 따내러 가는 수비형 미드필더와 같은 것이다. 하루히는 오프사이드라인 한참 너머에 공만 기다리고 있는 초 공격형 포워드니까 말이다. 상대편 골키퍼보다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기에 패스하면 선심의 기가 올라가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건 하루히에게 있어선 그저 오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규칙이 있는게 이상하다며 매우매우 진지하게 외치겠지. 그리곤 손으로 공을 들고 골대 안으로 뛰쳐들어가도 골이라며 주장할 녀석이다. 럭비를 하라는 제안따윈 먹히지 않는다. 달리는 방약무인(傍若無人:제 세상인 듯 멋대로 버릇없이 행동하는 모양)의 대처법은, 아무것도 못들은 걸로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을 뜨던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석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나 말고 다른 동급생들은 진작에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날 6교시가 끝나고 하루히가 교실에서 모습을 감추고, 종례시간에 바로 내 뒷자리가 텅 비어 있어도 담임 오카베도 다른 누구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모르고 있거나, 모른 척 하는 거거나, 알아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거거나, 뭐 냅두는게 제일이기 때문에 뭐든 똑같은 거다. 나는 예감과 같은 것을 느끼면서 부실동으로 향하여, 양손으 그 박스가 든 봉투를 늘어뜨린 채로 문예부실 앞에 멈춰섰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꺄꺄거리는 건 아사히나 선배의 귀여운 목소리로, 그아아 거리는건 하루히의 목소리다. 또 시작이구만. 지금 문을 열면 실로 예술적 나이스 씬을 보는 것이 가능할 터이지만, 상식인인 나는 금욕주의(stoic)로 망상을 참으며 가만히 기다림의 태세를 취한다. 5분이 지나고, 안에서의 작은 투쟁이 끝났다. 하루히가 승리를 만끽하는 얼굴로 허리에 두손을 얹고 있음에 틀림없다. 토끼가 거대 아나콘다에게 이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로서, 아사히나 선배가 이긴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노크, “들어와-!” 하루히의 힘찬 목소리. 나는 아침에 봤던 종이봉투 안엔 뭐가 들었던 것인지 생각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하루히의 승리에 도취된 얼굴이다. 하지만, 그런 얼굴은 난 이제 질렸다고. 나는 하루히 앞의 파이프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로 시선을 돌리고 격렬하고도 격렬하게 주목하였다. 웨이트리스가 한명 있었고, 내게 눈물어린 눈빛을 보냈다. “…….” 머리를 풀고 있는 웨이트리스는 나가토를 따라하듯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선 하루히가 아사히나 선배의 풍성한 밤색머리를 트윈테일로 묶고 있다. 웬일인지 나가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때?” 하루히는 흐흥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왜 니가 자기 공로인양 웃고 있는 거냐? 아사히나 선배의 귀여움은 아사히나 선배 거라고. ……그렇다곤 말못하고. 글쎄다? 괜찮은 거 같은데? 아사히나 선배는 어떨라나? 아냐 나는 이의 없다? 근데 이 스커트 길이는 너무 좀 짧은거 아닐라나? 완전무결 100% 과일과즙 같은 모습에 웨이트리스 분장을 한 아사히나 선배는 무릎에다 두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것이 또 엄청나게 잘 어울렸다. 카에안제의 의상인가 싶었을 정도다. 덕분에 30초정도 아무말 없이 아사히나 선배만 바라보고 있었던 나는,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두드리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03 “이야 안녕하세요. 어젠 죄송했습니다. 오늘은 오늘대로 각본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만 저는 빨리 끝내주라고 했었거든요. 그런 진전도 없는 회의는 할 생각 없습니다.” 코이즈미가 기생오라비 같은 잘생긴 얼굴로 내 어깨너머로 부실을 보더니, “야아” 유쾌한듯 미소지으며, “이거 정말” 코이즈미는 내 옆을 지나 테이블에 가방을 놓고 파이프 의자에 앉더니,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그대로의 감상을 표현했다. 그런건 보면 안다. 알수 없는 건 찻집도, 그렇다고 패밀리 레스토랑도 아니면서 웨이트리스가 이 지저분하고 작은 방 안에 있냐는 거다. “그건말야, 쿈” 말하는 하루히. “영화에 이 코스튬을 입은 미쿠루짱을 찍을거야.” 메이드는 안되냐? “메이드란건 돈 많은 사람 집 저택 같은데서 개인적 접대 활동을 하는게 일이야. 웨이트리스는 달라. 길거리 가게에서 시급 30엔정도로 불특정 다수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목적이라구.” 그게 싼지 비싼지는 모르겠다만, 아사히나 선배는 접대근무나 알바를 하러 매일 이런 꼴을 하는게 아니잖아. 하루히가 돈주고 부리는 거라면 또 몰라도. “그런 자잘한 건 신경 안써도 돼! 이런건 기분의 문제란 거지. 난 기분 좋아.” 니가 좋아도 아사히나 선배는 어떻겠냔 말이다. “스스, 스즈미야상…. 이거 저한텐 좀 작은 것 같…” 아사히나 선배는 꽤나 신경쓰이는지 계속 미니스커트 자락을 누르고 있다. 그 미묘한 움직임이 초조해 보여, 이어 나마저도 거기를 보게 되어버리잖은가. “이정도가 딱 좋아. 저스트 핏(Just Fit)이랄까.” 나는 억지로 시선을 바꾸어, 밀림에 피는 화려한 꽃과 같이 웃는 하루히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하루히는 내게 앞만을 보는 눈빛을 조준, “이번 영화의 컨셉이.” 아사히나 선배가 둥글게 오무린 등을 가리킨다. “이거라구.” 이거, 라니. 찻집에서 알바하는 소녀의 일상 다큐멘터리 필름이라도 찍을 작정이냐. “아냐. 미쿠루짱 일상을 도촬해봤자 재미 하나도 없다구. 보통 일상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니, 어지간히 괴짜(eccentric) 인생이 아니고서야 택도 없지. 그냥 고등학생의 하루를 촬영해봤자 자기만족에 불과하다구.” 아사히나 선배는 별로 만족할 것 같지도 않고, 제 3자 입장에선 꽤 수요가 있을 것 같기도 하며, 아사히나 선배의 일상은 꽤 재밌을 것 같기도 하지만, 일단 가만히 있자. “나는 SOS단 대표 감독으로서 오락성에 중점을 두기로 했어. 두고보라구, 관객을 전부 기립박수(standing ovation) 시킬테니까 말이야!” 자세히 보니까 어느샌가 하루히가 찬 완장의 문자가 ‘단장(?長)’에서 ‘감독(監督)’으로 바뀌어 있었다. 용의주도한 녀석이다. 혼자서 불타오르고 있는 여감독과, 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주연 여배우, 애매한 미소로 구경꾼처럼 한걸음 물러나는 주연 남배우를 번갈아 보며, 어떻게 되어먹은 건지 생각하고 있자니 부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 뭐가 등장이라도 한 줄 알았다. 내 짧은 인생을 이렇게도 빨리 끝내러 왔나 하며 순간 움찔. 누가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러 온 사리에리 출연 영화의 악실로 잘못알고 왔는가 의심했을 정도다. “……”라며, 특유의 줄임표 연속으로 발소리도 없이 나타난 그자는 평소보다 하얀 얼굴의 나가토 유키였다. 얼굴밖에 노출되어있지 않다. 뒤는 새까맣다. 말문이 막힌 건 나뿐이 아니라, 하루히와 아사히나 선배는 물론 코이즈미마저도 미소에 놀란 기색이 소비세만큼 섞여있다. 그도 그럴것이, 나가토는 아사히나 선배도 깜짝 놀랄 기발한 의상을 휘감고 있었다. 암막처럼 검은 망토로 전신을 휘감고 머리엔 같은 색의 고깔모자를 쓴, 거의 완벽한 뱀파이어 헌터다.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신(死神)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나가토는 묵묵히 자기 지정 위치인 구석 자리에 앉고, 망토 옷자락에서 가방과 하드커버 책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우리 넷의 경악을 깔끔히 무시하더니, 담담히 독서를 개시했다. 문화제때 반에서 하는 점치기 의상이랜다. 어안이 벙벙한 모습에서 신속히 복구된 하루히의 재빠른 질문에 대답하는 나가토의 단어를 이으니 저런 말이 된다. 나가토에게 이런 유쾌한 의상을 입히다니, 이녀석 반엔 꽤나 재능있는 스타일리스트가 있는 모양이구만. 아무리 그래도 이 난감한 테루테루보즈(照る照る坊主:날이 맑기를 빌어 처마 끝에 매다는 종이 인형)같은 의상으로 자기네 반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니, 나가토는 나가토 나름대로 아사히나 선배에게 대항의식을 불태우고 있기라도 한거야? 하루히 이상으로 종잡을수 없는 여자다, 이녀석은. 그런 서먹서먹한 침묵의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하루히 혼자서 엄청나게 기뻐하고 있었다. “유키, 너도 꽤 알고 있잖아! 그래, 그거야!” 나가토는 천천히 시선을 하루히에게 옮기더니, 또다시 책으로 돌렸다. “내가 생각하던 배역에 딱 맞는 의상이야! 나중에 그 옷 준 애좀 가르쳐 줘. 이 감사의 마음을 전보로 쳐주고 싶을 정도네.” 하지마라. 너한테서 축전이라도 온 날엔 뭔가 꿍꿍이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 휩싸이는게 고작일거다. 조금만 너에 대한 주위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 봐라. 기분이 굉장히 좋아진 하루히는, 콧노래로 터키 행진곡을 연주하며 가방을 열어 몇장의 복사용지를 꺼낸다. 그걸 재빠르게 우리에게 배포하고, 막판 뒤집기로 승리한 씨름선수같은 표정을 했다. 나는 할수 없이 종이조각으로 시선을 떨어뜨려 본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난폭히 쓰여 있었다. 『싸우는 웨이트리스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가칭)』 ☆등장인물 · 아사히나 미쿠루……미래에서 온 싸우는 웨이트리스. · 코이즈미 이츠키……초능력 소년. · 나가토 유키……나쁜 우주인. · 엑스트라……아무나. (*역주 : 등장인물의 성은 한문 그대로, 이름만 카타카나로 바꾸었습니다.) …………뭐냐. 이건 그거잖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나오는 걸 초월해서, 이녀석은 대체 감이 좋은건지, 아니면 찍은게 우연히 적중한 건지, 모른척 하고 있었던 것인가 할 정도다. 뭐냐. 이 이상한 데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는 기괴한 예리함은. 아연실색했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쿡쿡 웃음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웃는 건 당연히 코이즈미이다. “이야, 이건……” 즐거워보여서 부럽구만. “뭐랄까요, 과연 스즈미야상이라고 밖에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스즈미야상 다운 배역입니다. 매우 근사하군요.” 나한테 미소짓지마라. 기분나쁘다. 두손으로 A4 복사용지를 잡고 읽고 있던 아사히나 선배는 화사한 손목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와…” 작은 목소리가 새더니, 내게 구원을 요청하는 듯한 얼굴을 보인다. 그런가 싶었더니 매우 슬픈 듯한, 비난하는 듯한 눈매였다. 마치 나이차가 좀 있는 착한 친척 누나가 장난이 지나친 유아를 타이르는 듯한…나는 겨우 생각해 냈다. 그러고 보니 반년전의 사건후, 내가 하루히에게 저 세명의 정체를 가르쳐 준 것을. 으악. 큰일났다. 이건 내 탓이냐. 당황해서 허둥거리며 나가토를 보니, 까만 망토에 흑모자를 코디네이트한 대 인간용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 녀석은, “………”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2-04 “특별히 문제는 없겠네요.” 코이즈미가 낙관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난 다신 못 웃겠다. “웃을 일도 아닙니다만 그리 비관할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아는데.” “영화 배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즈미야상은 정말로 제가 초능력 소년이라 생각하시고 있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영화라는 픽션 내이며, 제가 연기하는 코이즈미 이츠키라는 소년이 초능력자라고 설정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코이즈미는 기억력이 딸리는 학생을 대하는 가정교사처럼, “이렇게 현실에 존재하는 저, 코이즈미 이츠키와, 이 이츠키군은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내의 등장인물과 연기하는 배우를 혼동하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혹시나 혼동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스즈미야상은 아닙니다.” “그래도 안심은 못하겠다. 네 말이 맞다는 보장은 없어.” “만약 그녀가 현실과 픽션을 섞고 있다면, 세상은 진작에 판타지가 됐을겁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스즈미야상도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건 알아. 하루히의 현실적 사고방식이란 녀석이 어중간하게 비현실적이게 된 탓에 나는 수많은 이상한 사건에 말려들어버렸으니까. 게다가 정작 중요한 하루히는 전혀 모르고 있고 말이다. “증거를 일부러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코이즈미가 물 흐르듯 말한다. “어쩌면 그런 사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지금이 아니죠. 다행스럽게도 아사히나상과 나가토상의 세력도 같은 의견인 모양입니다. 저는 영원히 이대로였으면 좋을것 같습니다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전세계가 엉망진창이 되는 꼴은 보고싶지 않다. 다음 주에 발매되는 게임 소프트를 끝내 사지 않고서는 미련이 남을 것 같다. 코이즈미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전세계를 걱정하시기 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더욱 주의해서 지켜보셔야 하겠습니다. 저나 나가토상을 대신해줄 건 있어도 당신의 대역(understudy)은 없으니까요.” 나는 복잡해진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손에 들고 있던 총의 가스입구에 열중하는 척을 했다. 이날 하루히는 아사히나상에게 의상을 주고, 배역명을 발표한 것 만으로 끝을 냈다. 원래는 웨이트리스 코스튬을 한 아사히나 선배를 끌고 교내 전체를 순회한 뒤 거창하게 제작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아사히나 선배가 서럽게 울어대기에 내가 단념시켰다. 원래 이 고등학교엔 신문부와 보도부도 선전부도 없다. 하루히는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고는 입을 물총새같이 하며 물러나더니, “그렇기는 하네.” 놀랍게도 수긍했다. “내용은 끝까지 비밀로 해두는게 좋겠지. 너한텐 말해도 모를걸. 게다가 뺏기면 안되니까.” 헐리웃이나 홍콩영화 아이디어도 아니고, 누가 너같은 녀석 머릿속에 끓는 스토리를 갖고 싶어하겠냐. “그럼 쿈, 그 총, 내일중엔 쓸 수 있도록 해놔. 내일 개시(crank-in)이니까. 카메라 사용법도 알아놔야돼. 아, 맞다. 영화 데이터는 컴퓨터에 옮겨서 편집할거니까 필요한 소프트 어디서 훔쳐와. 그리고-” 그렇게 어지럽게 숙제를 밀어주더니, 하루히는 ‘대탈주’의 테마를 흥얼거리며 돌아갔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간에 한없이 귀찮은 일을 만들어내는 녀석이다, 참나. 그리고 지금, 나랑 코이즈미는 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모델건에서 BB탄이 나오도록 설명서와 씨름을 하고 있는 참이다. 옷을 다 갈아입은 아사히나 선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귀가, 나가토는 악마의 연회(sabbath)에 초대된 마녀와 같은 모습 그대로 가방도 없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무래도 나가토는 우리들에게 자기 분장을 보여주러 온 것 뿐인 모양이었다. 나가토가 하는 일이라 뭔가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모르고, 단순히 얼굴만 비추러 온 것일 수도 있다. 아마 지금쯤엔 자기 반에서 뭔가 하고 있을 것이다. 수정구슬 점의 예행연습이든지, 뭐 그런 걸 말이다. 오늘 하루 교내의 술렁거림이 미세하게 증가한 느낌이 들었다. 방과후가 될 때마다 울려퍼지는 취주악부의 허접스런 나팔소리는 틀리는 부분이 서서히 줄고 있고, 교정의 그림자에서 베니어(vaneer)나 펄서(pulser)를 잘라대는 녀석도 있으며, 나가토처럼 이상한 모습을 한 학생도 조금씩이지만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엔 작은 현립고등학교의 축제행사, 전혀 지나칠 것 없는 얌전한 문화제가 될 것 같다. 본 바론, 즐기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학생은 학교 전체로서도 기껏해야 반 정도니까. 더불어 우리 1학년 5반은 즐기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 문화계 클럽에 소속하지 않은 녀석은 당일, 시간 때우기 꽤나 힘들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 귀가부(歸嫁部)의 대표격인 게 타니구치와 쿠니키다다. “문화제라면.” 타니구치가 말을 꺼냈다. 점심시간에 내 쪽의 단역 두녀석과 셋이서 도시락을 둘러싸고 있다. “문화제라면?” 쿠니키다가 되묻는다. 타니구치는 코이즈미의 기품있는 그것과 비교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보기흉한 히죽거리는 웃음을 짓더니, “슈퍼 이벤트다.” 하루히같은 소리 하지마 임마. 타니구치는 급격히 표정에서 웃음을 지우더니,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이벤트다. 뭐랄까, 좀 열받지.” “왜?” 라는 쿠니키다. “내가 전혀 즐겁지 않은데 즐거워하는 녀석들이 엄청나게 거슬린단 말이다. 특히 남녀 20인조? 살의를 느낀다. 앙? 뭐냐구?” 원수가 도리어 원한을 느끼는 격이지 뭐긴 뭐야. “우리반은 또 뭐야? 앙케이트? 아! 재미없기는. 보나마나 당신이 좋아하는 색은 무엇입니까, 뭐 이런거잖아? 그런거 집계해서 뭐가 재밌는건데?” 그럼 니가 명안을 하나 제시했으면 됐잖아. 그랬으면 하루히가 영환지 뭔지 헛소리 안했을 지도 모르는 일인데. 타니구치는 도시락통에 있던 비엔나 소시지를 한입에 집어삼키고는, “나는 그런 귀찮은 소리 안해. 아니, 하는 건 좋은데, 이거저거 잡일 하는건 진짜 귀찮으니까 말야.” 쿠니키다는, ‘그렇긴 하지’ 라며, 계란말이를 자르던 손을 멈추고, “그럴 때 손을 들어 발표해주는 건 분위기 파악 잘하는 녀석이나 책임감 강한 녀석 정도지. 아사쿠라상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캐나다에 이사간 걸로 되어있는 전 클래스메이트의 이름을 꺼냈다.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약간의 차가움과 식은땀을 만들어낸다. 아사쿠라를 없애버린 건 나가토지만, 그 원인이 된 건 나니까 말이다. 그냥 놔뒀을 경우에 사라졌을 건 나였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봤자 소용 없지만. “아아, 참 아까웠지.” 타니구치가 말했다. “하필이면 랭크 AA+가 없어지다니 말이야. 이 반이 되길 잘했다고 생각한 유일한 이유였는데 말이야. 제길, 지금은 반 안바꿔 주냐.” “어디 반이 좋아?” 쿠니키다가 묻는다. “나가토상네 반이라든가? 아, 그러고보니까 어제 마법사같은 옷 입고 있는거 봤는데, 뭐냐 그거?” 글쎄다. 난 몰라. “나가토 말이지….” 타니구치는 덧셈뺄셈 쪽지 시험이라도 보게 된 얼굴을 내게 보이더니, 이제 막 떠올랐다는 듯한 말투로, “아, 말해줬나? 너랑 그녀석이 교실에서 뒤엉켜있던 거. 어차피 그것도 스즈미야의 시나리오겠지. 날 놀래키려는 작정이었겠지? 그렇겐 안되지.” 맘대로 착각해준 덕분에 나는 짐 떨군 기분이다. …잠깐, 그때 너 잊고 놓고간 걸 찾으러 온거 아니었냐? 어떻게 우리가 니가 돌아올걸 알고 기다리냐-라니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타니구치는 멍청이라, 멍청한 녀석을 멍청하다고 해도 양심의 가책은 없다. 잘됐다, 이녀석이 멍청이라서. 감사하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너무 심심하네.” 타니구치가 개탄, 쿠니키다는 점심에 집중, 나는 후방 주시. 하루히 자리는 공석. 어딜 어슬렁거리는 걸까. 2-05 “학교에 영화찍을 만한 배경을 찾아다녔어.” 라며 하루히가 말했다. “그런데 전혀 없었어. 역시 요근처에서 해결볼려고 하면 안돼. 밖으로 나가자.” 학교내의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게 별로 신나지 않는다고 일부러 외부로까지 원정나갈 장소를 찾을 필요가 있냐. 어떻게든 지고싶지는 않은 모양이구만. “에…, 저기, 저도 가는거에요?” 아사히나 선배가 묻는다. “당연하지. 주역이 없으면 이야기가 안되지.” “이이이이 옷으로 말이에요-?” 하루히가 어디선가 가져온 의상, 어제에 이어 웨이트리스 옷을 입고 작은 모습으로 떨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다. “응, 그래.” 하루히는 깔끔히 긍정. 아사히나선배는 자기 몸을 끌어안듯이 하고 싫은듯 괴로워한다. “일일이 갈아입는것도 귀찮잖아? 게다가 현장에 옷 갈아입을 데가 없을텐데. 그럼 그냥 처음부터 입고 있으면 되잖아? 그지? 가자! 모두 다같이 가는거야!” “하다못해 걸칠 거라도……” 간청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안돼.” “하지만, 부끄럽잖아요” “부끄럽다고 생각하니까 부끄러워지는거야! 그래가지곤 골든 글로브(Golden Globe)상은 택도 없다구!” 목표는 문화제 이벤트 투표 1위 아니였냐. 오늘 부실에는 단원이 전원 모였다. 무대극 대본문제가 해결된 듯한 코이즈미도 있었고, 하루히와 아사히나상의 일방적인 공방을 싱글벙글 바라보고 있다. 나가토도 있다. 그리고, 그 나가토가 좀 문제였다. “……” 아무말 없는건 평소대로이며 지극히 정상이지만 꼬락서니가 괴상하다. 어째서인지 나가토는 어제 입고 나타났던 그 마녀옷을 오늘도 걸치고 왔다. 그런건 문화제 당일에나 입을것이지 왜 지금부터 안달이냐. 하루히는 완전히 나가토의 검은 망토와 고깔모자가 맘에 든 듯, “네 역은 ‘나쁜 우주인 마법사’로 변경이야!” 라며 순식간에 각본을 비틀어버렸다. 안테나형 막대기에 크리스마스트리 끝에 다는 별을 달고, 나가토에게 주고선 기뻐하는 하루히와 그 봉을 들고 가만히 있는 나가토를 보고 있자니 왠지 나조차 그 과묵한 독서매니아가 우주인 마법사가 되는 것에 이의가 없게 된다. 정보생명체의 말단보다는 그편이 더 나가토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해 줄 것 같다. 마법과 같은 힘을 갖고 있는 건 확실하다. 이 두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틀림은 없다. 나가토는 갑자기 검은 모자의 챙을 들어올리더니, 변함없는 그 무감정 눈으로 나를 보았다. “……” 다른 반이 준비한 의상을 멋대로 촬영용 코스튬으로 써도 되냐는 일말의 의문은 생기지만, 하루히의 안중엔 어떤 물음표(Question Mark)도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쿈! 카메라 준비는 됐겠지! 코이즈미군은 거기 짐좀 들어줘. 미쿠루짱은 또 왜 책상에 들러붙어있어? 빨리 일어나서 걸어!” 가냘픈 아사히나 선배의 저항은 헛된 것이었다. 하루히는 무력한 웨이트리스 소녀의 목덜미를 붙잡고 끌어당기기 시작하더니, 작은 비명을 지르는 조그마한 몸을 질질 끌고 문을 향해 걸었다. 나가토가 검은 망토자락을 끌며 그 뒤를 따르고, 마지막으로 코이즈미가 내게 윙크를 지으며 복도로 사라졌다. 나도 가야되나고 궁리하고 있자니, “이봐-! 카메라맨이 없으면 영화 못만들잖아!!” 하루히가 열린 문의 상반신을 내밀어 입을 크게 벌려 소리치더니, 나는 하루히의 왼팔에 있는 완장의 문자가 ‘대감독(大監督)’으로 바뀌어있는 걸 보고는 암담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진짜 할 생각인가보다, 이 여자. 하직 한 작품도 촬영한 적 없는 자칭 대감독을 선두로, 미소녀 웨이트리스가 얼굴을 땅에 떨군 채 뒤를 잇고, 그 다음엔 암흑빛의 마법소녀가 그림자처럼 따르며, 코이즈미가 종이봉투를 들고 기분좋게 미소지으며 그 뒤를 걷는다…그런 기괴한 일당과 가능한 한 거리를 두고 최후미에서 걷는 나. 진작에 건물을 이동하고 있던 시점에서 이미 주목만점이었지만, 할로윈 파티같은 이 일행은 교문 밖에서도 주위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독점하다시피 한 아사히나 선배는 2분정도 쯤에서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더니, 3분에 빨개지고, 5분정도 지난 지금에 와서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로봇마냥 걷고 있다. 천재지변의 징조같은 좋은 기분으로 ‘천국과 지옥’의 끝을 흥얼거리고 있는 건 선두를 달리는 하루히이다. 언제 준비했는지 오른팔엔 노란 메가폰, 오른손엔 감독용 의자(Director's Chair)를 들고 의기양양, 마치 초원을 누비며 서진하는 몽골군 기병과 같은 기세다. 그대로 어디로 돌격하는가 싶었더니 기어이 도착한 곳은 역이었다. 인원수만큼의 차표를 사온 하루히는, 우리에게 나눠주더니, 당연하다는 얼굴로 개찰구로 진군한다. “기다려요,” 할말을 잃은 아사히나 선배를 대신해 내가 이의제기에 나섰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에 가득찬 눈초리를 독점하고 있는 미니스커트 웨이트리스와, 그 옆에 따라다니는 흑색 의상의 땅딸보 처자를 가리키며, “이 꼴로 전차 태울 작정이냐?” “뭐 문제라도 있어?” 라며 하루히가 반문한다. “다 벗은 맨몸이면 몰라도 제대로 옷들 잘 입고 있잖아. 그게 아니면 뭔데? 바니걸이 더 좋아? 그럼 빨리 말하지. ‘싸우는 바니짱(가칭)’이라도 괜찮아.” 일부러 웨이트리스 의상까지 사온 녀석이 할 소리냐…기보다, 이번 컨셉은 이거라고 안했냐? 잘은 모르겠다만 컨셉이란 게 그렇게 간단히 바꿀 수 있는 거였냐. 내가 크리에이터(creator)의 심정을 엿보는 뇌수를 움직이고 있으니, “가장 중요한 건 임기응변에 대응하는 것. 지구상의 생물들은 그렇게 진화해왔으니까. 환경적합이란 거지. 멍하니 있으면 도태될 뿐이라구! 확실히 적응할 수밖에 없어!” 뭐에다 적응을 하면 되는 거냐고. 환경이 의사표현이 가능하다면 제일 먼저 하루히를 대기권 밖으로 내던져버릴 것 같다만. 코이즈미는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짐꾼으로 변신, 나가토는 평소상태인 무언속행, 아사히나 선배는 말할 기력조차 잃은듯 하여, 내 이외 전원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루히는 그 침묵이 자신의 대사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생긴 것으로 해석한 듯, “전차 왔다. 똑바로 걷는거야, 미쿠루짱.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동정받을 만한 어쩔수 없는 동기로 인하여 사람을 죽여버리고 만 여성 범인을 연행하는 형사처럼,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의 어깨를 껴안고 개찰구로 향했다. 내리는 곳은 그저께와 같은 역으로, 향한 곳도 같은 상점가이다. 혹시나 했더니 방문하는 가게도 같았다. 하루히가 교섭 끝에 비디오카메라를 얻어낸 전자상점. “약속대로 왔습니다-!” 힘차게 입점한 하루히가 외치자, 안에서 아저씨가 느리작느리작 나와서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눈을 향한다. “호오.” 아저씨는 그 자체만으로 성희롱이 될만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의 주연 여배우를 바라보았다. 아사히나 선배는 필살기를 다 쓴 게임 캐릭터처럼 경화중이다. 아저씨는 거기다, “저 아이, 그저께 그 애인가? 못알아볼 정도로군. 호오. 그럼 잘 부탁하네.” 뭘 부탁할 생각인거냐.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아사히나 선배의 뒤를 감쌀 작정으로 전진한 찰나에 하루히에게 밀려났다. “자, 지시 들어간다, 모두 잘 들어!” 그리곤 하루히는 지난 체육대회 클럽 대항 릴레이에서 우승한 직후와 똑같은 웃음꽃을 피우더니 선언했다. “이제부터 CM촬영을 개시하겠습니다!” (CM:Commercial Message. TV,라디오 광고) 2-06 “이, 이 가게는, 아-그게, 점장님께서 정말로 친절하십니다. 거기에 나이스 가이이십니다. 현재 점주이신 에이지로(?二?)상은 부친의 대를 잇고 계십니다. 건전지에서부터 냉장고까지 뭐든 있습니다. 에-…다음은, 그게,” 웨이트리스 아사히나 선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필사의 봉독을 하고 있다. 그 옆엔 ‘오오모리(大森) 전기점’ 이라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나가토가 직립해 있고, 그 둘의 모습을 내가 들여다보는 비디오카메라 파인더에 비쳐 있다. 아사히나 선배는 완벽하게 굳은 억지웃음을 짓고, 연결도 안된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내 옆엔 코이즈미가 가벼운 쓴웃음을 지으며 대사판을 들고 있다. 대사판은 방금 하루히가 깊이 생각도 않고 스케치북에 갈겨쓴 것이다. 코이즈미는 아사히나 선배의 대사에 맞춰 스케치북을 넘기고 있다. 전자상점의 점두, 상점가 한복판이다. 하루히는 감독용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불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아사히나 선배의 연기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컷!” 메가폰으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어쩐지 느낌이 안나와. 어딘가가 부족해. 확 꽂히는게 없다구.” 그런 말을 하면서 손톱을 물고 있다. 나는 한숨을 지으며 비디오카메라를 정지시켰다. 마이크를 두손으로 꼭 쥐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도 정지해있다. 나가토는 원래부터 정지해있었고, 코이즈미는 웃을 뿐. 배후, 상점가를 걷는 통행인들은 무슨 일이냐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미쿠루짱 표정이 너무 굳었어. 좀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웃어. 뭐 즐거운 일을 생각해봐. 아니, 지금 즐겁지? 넌 주연에 발탁됐단 말이야! 이 이상 기쁜 일은 네 인생에 두 번다시 없을 정도라구!” 적당히 해두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제 하루히와 점장의 대화를 두 행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영화 중간에 이 가게 CM을 넣어줄 테니까 비디오카메라 하나 줘.” “좋지.” 그 하루히의 말에 넘어간 점장도 좀 어떻게 됐지만, CM 들어가는 자체제작 영화를 만들어서 상영할 생각을 한 하루히는 너무 어떻게 돼버렸다. 한창 상영중에 주연 여배우가 CM까지 소화하는 영화는 들은 적도 없다. 영화 무대로 삼아 아무일 없는듯이 자연스럽게 배경에 비춘다면 또 몰라도, 이건 완전히 커머셜 필름(Commercial Film.[CF])이다. “알았어!” 하루히가 혼자서 크게 소리를 지른다. 부탁이다, 넌 제발 아무것도 알지 마라. “전자상점에 웨이트리스가 있는게 문제인거야.” 니가 가져온 의상이잖냐. “코이즈미군, 그 가방 줘봐, 거기 그 작은거.” 하루히는 코이즈미한테서 종이가방을 받더니 방심하던 아사히나 선배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점내에 거침없이 들어가더니, “점장님-, 안에 갈아입을데는? 응, 아무데나. 뭐하면 화장실이라도. 그래? 그럼 창고 빌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태연히 올라가더니, 가게 안에 아사히나 선배를 연행해갔다. 가여운 아사히나 선배는 이미 저항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하루히의 무식한 힘에 푹 쓰러져 순순히 걸어간다. 그 의상만 벗을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군. 남겨진 나와 코이즈미, 나가토는 할 일없이 그저 서있다. 검은 망토의 나가토는 미동도 없이 플래카드를 든 채로 핸디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팔도 안아프냐. 코이즈미가 내게 미소지었다. “여기선 제가 나설 차례가 없을 것 같네요. 실은 저희 반 무대극에서도 제가 주연이 돼버려서요. 다수결로요. 할수없이 대사 외우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전 가능하면 대사가 적은 역이 좋습니다만…. 어떠십니까. 당신께서 주연을 하시는게.” 캐스팅권을 쥐고 있는 건 어차피 하루히다. 그런 주문은 녀석에게나 해라. “그런 송구스런 일이 제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일개 배우가 프로듀서 겸 감독님께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전 상상도 못하겠습니다. 아무튼 스즈미야상의 명령은 절대적이며, 그를 거역한 결과로 어떤 응징을 치러내야할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건 나도 하기 싫다. 그러니까 이렇게 카메라맨이나 하고 앉았는 거잖냐. 그것도 찍는 건 영화도 아니고 개인상업 점포의 로컬CF다. 지역 밀착도 정도가 있는 거다. 지금쯤 점포 안에선 전례의 티격태격이 펼쳐지고 있겠지. 싫어라하는 아사히나 선배를 즐기듯 벗겨대는 하루히의 얼굴. 이번엔 뭘 입히고 있는진 몰라도, 그렇게 입히고 싶으면 자기가 입으면 되잖아. 외모적으로 아사히나 선배와 좋은 승부가 될 텐데, 그녀석은 자기가 주연을 하겠다는 생각은 안 드는거냐? “기다렸지!” 밖으로 나온 2인조, 당연히 하루히는 교복 그대로였다. 같이 나온 다른 한사람의 모습을 보니, 내 뇌리엔 여러가지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 그것도 벌써 반년전의 일이구나. 세월의 흐름이란 참으로 빠른 것이다. 이 반년사이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야구라던지, 고도(孤島:섬 이름)라든지, 이거든 저거든, 지금에 와서는 좋은 추억이긴 하지만.……일 리가 없잖냐. 아사히나 선배 추억의 코스프레 제 1탄, 하루히와 함께 교문에 출몰해서 전교의 화제가 된 아사히나 선배의 정신건강에 외상을 입힌 노출과다 코스튬. 어디하나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바니걸이 뺨을 물들이며 눈가엔 눈물을, 하루히 옆에서 토끼귀를 흔들고 있었다. “응, 이걸로 완벽해. 역시 상품소개엔 바니걸이지.” 하루히는 알수도 없는 소리나 하면서 아사히나 선배를 위아래로 쭉 둘러보곤, 만족스럽다는 웃음이 만연, 아사히나 선배는 애수 전개로 반쯤 열린 입에서 영혼이 나오고 있다. “자, 미쿠루짱. 처음부터 다시하는 거야. 이제 대사도 좀 외웠지? 쿈, 맨 처음으로 되감아놔.” 이래가지곤 아무도 대사를 들을 일이 없을거다. 상영중엔 아사히나 선배의 바니걸 모습에 도취될게 뻔하니깐. 스크린에 구멍이라도 안나면 다행이다. “그럼, 테이프 2!” 하루히가 크게 외치고, 메가폰으로 팡팡거렸다. 2-07 반울음 반웃음의 아사히나 선배를 하루히가 마음대로 조작하여 만드는 전자상점 CM이 어떻게든 끝이 났다. 마치 악덕 매니저에 부려먹히는 외국인 레슬러와 같은 앵글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방문한 스폰서가 하나 더 있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낼 것도 없냐. 하루히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겠지. 하루히는 ‘히익’인지 ‘헤엑’인지 귀여운 비명을 지르는 바니걸 아사히나 선배를 끌고 상점가 한복판을 걷고 있다. 그 배후령(背後靈:사람에게 붙은 영혼, 귀신)이 된 나가토는 끝까지 무감정하게 마녀 복장인 채로 나와 코이즈미에 이어 졸졸 따라온다. 그나마 위안이 될까 해서 아사히나 선배의 어깨에 내 블레이저를 걸쳐주었다. 오히려 더 눈에 띌지도 모른다. 뭐, 특수한 취향 많은 세상이니까. 미리 말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라고. 두 번째로 도착한 모형가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아사히나 선배는 수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나-즉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 모형가게는, 야마츠치 케이지(山土啓治·28)씨께서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작년에 샐러리맨을 그만두시고 개점 오픈하셨습니다. 취미가 이것뿐이라…질러버린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처럼 매상은 오르지 않고, 금년도 전기는 작년비로 신장률 18%, 꺾임선 그래프는 오른쪽으로 내려가고…해서어! 여러분들이 조금씩 사러 와주시길 바랍니다!” 아사히나 선배의 어미는 완전히 흐릿해져 있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야마츠치 점주가 이딴 나레이션에 OK한거냐? 아무리 봐도 자포자기 상태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고등학생한테 이런 소리 듣고 싶지도 않겠지만. 바니걸은 억지로 받은 어썰트 라이플(assault rifle)의 총구를 위로 올려, “사람을 향해 쏘면 안됩니다-. 깡통이라도 쏘면서 참읍시다아-.” 그 뒤에서는 나가토가 어딜 보는지도 알수없는 눈으로 ‘야마츠치 모델샵’이라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초현실적(佛,surrealisme)인 광경이었다. 아사쿠라 료코는 평범한, 즉 감정이 있는 인간으로 보였기 때문에 우주인제 인조인간이 전부 다 이런 로봇같은 녀석만은 아닌 것 같고, 나가토가 무감정인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거기다 아사히나 선배는 라이플 총으로 지면에 놓인 깡통을 향해 난사하며, “히에에엣, 맞으면 정말로 아플것 같습니다. 효에에엣,” 몸을 떨면서 알루미늄 캔을 벌집으로 만들겠다는 취지의 시범사격까지 시작하자, 지나가는 사람들을 술렁거리게 했다. 명중한 건 1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런 영상을 갖다 DV카세트에 녹화하고 있자니 참 미안한 기분이 드는구만. 아사히나 선배에게도, 이 비디오카메라 개발설계자에게도. 이런 걸 하잡시고 세상에 나온게 아닐 텐데. 이렇게저렇게 해서, 이 날은 엉터리 CM촬영으로 끝났다. 우리는 일단 학교까지 되돌아가, 부실에서 하루히의 다음 촬영 스케줄 설명을 듣는 중이다. “내일은 토요일 노는 날이니까, 아침부터 전원 집합이야. 키타구치(北口)역 앞에 9시까지 와있도록. 알겠지!” 그런데, 광고씬만으로 이미 15분 이상 써버렸는데 본편은 어느정도 길이로 할거냐? 문화제에서 3시간짜리 대작을 상영해봤자 아무도 끝까지 봐줄것 같지 않다고. 회전률도 안좋고. 거기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된 아사히나 선배를 보며 생각했다. 갈때는 웨이트리스, 올때는 바니걸로 전차까지 탄 아사히나 선배는 이제야 겨우 교복으로 갈아입고, 금방이라도 털썩 쓰러질것 마냥 웅크려있다. 이대로 촬영을 지속했다간 촬영도중에 주연 여배우가 몸져누워버릴 우려가 있다. 나는 테이블에 축 늘어져있는 아사히나 선배 대신에 코이즈미가 탄 현미차를 마시며, “저기 하루히, 아사히나 선배 옷말인데 뭐 좀 어떻게 안되냐? 좀더말야, 싸운다면 싸움에 어울리는 의상이 있을거 아냐. 전투복이라던지 군복이라던지.” 하루히는 별마크가 붙은 안테나 봉을 휙휙 휘둘러댔다. “그런걸로 싸우면 의외성이란게 없잖아. 웨이트리스가 싸우기 때문에 놀래킬 수 있는거지. 주목을 끄는게 중요한거야. 컨셉이라구, 컨셉.” 컨셉이 뭔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걸까. 나는 탄식할 수 밖에 없다. “뭐…. 그건 됐고 그럼. 왜 일부러 미래에서 왔다는 걸로 한거야? 미래인이 아녀도 별 상관 없잖냐.” 엎드려있는 아히나 선배의 어깨가 움찔하며 흔들렸다. 하루히는 눈치채지 못한듯 하다. “그런건 말야,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구. 누가 물었을 때나 생각하면 되는 일이야.” 그니까 내가 지금 묻고 있잖냐. 대답해.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으면 무시하면 돼! 어찌됐든 상관없잖아. 무조건 재밌으면 된다구!” 그건 재밌었을 경우의 이야기일텐데. 니가 찍으려는 영화가 재미있게 될 확률은 어느정도나 되는거냐?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 감독뿐이면 찍어도 소용이 없잖아. 골든 라즈베리 상 비전문가 부문 노미네이트라도 노리고 있냐? “뭐야 그건. 노리는건 하나야. 문화제 이벤트 베스트 투표 1위야! 거기다, 가능하면 골든 로브(golden robe)도. 그걸 위해서라도 미쿠루짱이 그에 걸맞는 옷을 입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구!” 아무도 곤란할 것까진 없을 것 같다만. 아무래도 하루히가 보고 격노하셨다는 그 영화란 녀석은 몇 년도인진 몰라도 골든 로브 상 수상작인 모양이다. 한번 더 한숨을 쉬고선 문득 옆을 본다. 검은 복장의 나가토는 부실에 들어와선 구석지에 틀어박혀선 다시 독서에 빠져들어있었다. 이녀석은 이 부실에 있을때 책을 안읽으면 죽기라도 하나? “잠깐.” 독서광 우주인을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어이, 아직 각본도 받지 못했다만.” 각본은 커녕 스토리조차 듣지 못했다. 알고 있는건 아사히나 선배가 미래 웨이트리스고 코이즈미가 에스퍼 소년이며 나가토가 나쁜 우주인 마법사라는 설정 뿐이다. “괜찮아.” 하루히는 뭘 할 생각인지 갑자기 눈을 감더니 안테나의 별 마크 끝으로 자기 관자놀이를 가볍게 찔렀다. “전-부 다 이 속에 있으니까. 각본도 콘티도 완벽 그자체야. 넌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어. 카메라워크도 내가 생각해 둘테니까.” 꽤나 정도가 심한 변명이구만. 너야말로 아무생각 없이 멍하니 창문 밖이라도 보고 있지 그래. 좀더 나은 표정만 하고 있으면 그즉시 바로 아사히나 선배랑 체인지할 수 있다고. “내일이야, 내일! 기합넣고 간다. 승리의 영광을 손에 넣기 위해선 먼저 정신론부터지. 그게 돈 덜쓰고 승리를 거머쥘 가장 빠른 방법이야. 마음이 바로잡혔을 때, 자신도 몰랐던 잠재능력이 눈을 떠서 생각지도 못했던 파워가 생겨나는거야. 그렇지!” 그거야 배틀만화의 일반적 전개에선 그럴지 몰라도, 아무리 정신론과 내셔널리즘을 앞세웠다고 해도 일본 축구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위해선 아직 한참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자 그럼 오늘은 해산! 내일을 기대해! 쿈, 카메라랑 소도구랑 의상 같은 짐 잊어먹으면 안돼. 시간 엄수야!” 하루히는 그렇게 말하곤 힘차게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다. 나는 복도 너머로 멀어져가는 ‘록키’의 테마를 들으며 산더미처럼 쌓인 짐더미들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이 감독의 횡포는 어느 조합에 고발하면 되는걸까. 실제로, 이 날이 오기 전까지의 우리의 학원라이프는 하루히가 이상할 정도로 영화에 정열을 걸고, 건 데 이어 탈선하고 있기만 한, 순전 평범한 일상의 연속에 지나지 않았다. 전국 학교를 구석구석 조사해보면 우리 외에도 우리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일당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평범’했다. 나는 나가토의 친척에게 죽을뻔 한다거나, 아사히나 선배와 시간을 뛰어넘는다거나, 발광성의 푸른 곰팡이같은 거인녀석이 나온다거나, 바보같은 진상이 기다리고 있는 살인사건도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학원생활이다. 다가오는 문화제란 축제의 카운트다운에 이끌려, 다소 들뜬 하루히가 부지런히 아드레날린을 분비하여 머리속에 기르고 있는 햄스터를 채찍질하여 쳇바퀴를 마하로 돌리고 있는 듯하다. 요약하자면 평소와 같은 상태다. -이 날까지는 말이다. 생각해 보자면 여기까지 아직 하루히는 자기 나름대로 세이브 해둔 것이렷다. 잘 생각해보면, 아직 영화는 1콤마 조차도 찍지 않았다. 디지털 비디오테이프에 기록되어 있는 건 아사히나 선배가 바니 옷을 입고 상점가 전자상점과 프라모델 가게를 소개하는 스폰서 대책에 불과하다. 하루히 총지휘 총감독에 의한 SOS단 프로듀스 영화작품은 그 전모가 전혀 밝혀지지 않았고, 그 편린조차 나오지 않았으며, 대략적인 스토리라인조차 불명인 것이다. 불명인 채로 있는게 나았을라나. 상영하는 건 아사히나 선배의 상점가 리포트 영상집인건지. 아니, 오히려 그쪽이 더 관객 이 몰리지 않을까? 지역 진흥책도 되어서 일석이조도 되고 말이다. 아니, 아예 그냥 아사히나 미쿠루 프로모션 비디오 클립으로 해버려라. 나는 그게 더 좋겠다. 촬영담당으로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하루히가 그걸로 만족따위 하지 않는다는걸 진작 알고 있었다. 이녀석은 한번 말한건 반드시 완수시킨다. 한다면 하는거다. 도중에 팽개쳐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참 쓰잘데없는 실행력이다. 그런 이유로 이 다음날부터 우리는 또다시 괴상한 사태에 빠져버리게 되었지만, 아니 참, 뭐라 해야할까. 하루히는 뭐라고 했었지? 마음이 바로잡혔을때, 자신도 몰랐던 잠재능력이 눈을 떠서 생각지도 못했던 파워가 생겨나-뭐 그런거였냐. 그렇구만. 근데말야, 하루히. 그렇다고 니가 각성하고 나설건 없잖냐. 그것도 니 자각도 없이 말이다. 제 3화 토요일, 바로 그날. 우리는 역전에 집합했다. 집에 있는 가장 큰 배낭(リュック:rucksack)에 온갖 것들을 집어넣고 역까지 걸어간 나를 나머지 넷이 전부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히가 캐주얼, 아사히나 선배가 여성스런(feminine) 스타일로 나란히 서있는 것이 멀리서도 내 시선을 잡았다. 마치 전혀 안 닮은 자매같달까. 상급생이면서도 오히려 동생으로 보이는 아사히나 선배는 복장만 언니같은 꾸밈이다. 애인 셋에게 둘러싸인 아사히나 선배는, 나를 보고는 조금 놀란 듯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조그맣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음음. “늦잖아!” 열받은듯이 소리치고는 있지만 하루히는 오늘도 기분이 좋은 듯하다. 이녀석이 빈손인 이유는 메가폰과 감독용 의자가 내 짐더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 9시 안됐다고.” 나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하곤 양쪽을 살핀다. 나가토의 도자기 얼굴과, 코이즈미의 상쾌한 스마일. 그건 그렇다 치고 학교도 아닌데 교복을 입고온 나가토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지만, 코이즈미마저도 교복이라니, 어떻게 된거냐. “이게 제 촬영의상이라시더군요.” 코이즈미가 말했다. “어제 그렇게 말씀하셔서요. 극중에서 저는 일개 고등학생으로 변장한 초능력자라는 설정이니까요.” 딱 그거잖아. 내가 카메라와 소도구 따위로 부풀어있는 배낭을 내려놓고 이마를 닦고 있으니, 하루히가 소풍 전의 초등학생과 같이 행복한 웃음으로, “쿈, 너 꼴찌로 왔으니까 벌금이야. 그치만 아직은 아냐. 이제부터 버스 탈거니까. 버스값 정도는 내가 내주지. ‘필요경비’란 거야. 넌 전원분 점심밥 사도록.” 멋대로 정해버리더니 한손을 흔들면서, “자 모두! 버스는 이쪽이야! 빨리빨리 따라와!” 난 그 팔의 완장이 ‘초감독(超監督)’이 되어있는 걸 놓치지 않았다. 기어이 하루히 자신 안에서는 대감독마저 초월해버린 모양이다. 어지간히 엄청난 영화를 만들 생각인가 보다. 다시 말하지만, 난 아사히나 선배의 PV를 찍는게 훨씬 즐겁지만. 버스에 흔들리기를 30분, 산속에 있는 정류소에 내려서 거기서 또 30분. 우리는 등산코스를 여기저기 헤매고 있었다. 어디든 있을법한 삼림공원이었다. 태어나서 자라기까지 이 근처에 산 나에겐 낯익은 장소다. 초등학교때 소풍이라면 매년같이 근처 산이었으니까. 공원이란건 이름뿐이고, 산 중턱에 억지로 공간을 파내서 대충 만든 분수가 있는 정도, 뭐가 좋아서 이런데까지 올라와야 하느냐고 고언(苦言:듣기에는 거슬리나 유익한 충고의 말)을 하나 드리고 싶을 만큼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좋아라 해주는 사람은 아직 오락이란 것이 뭔지도 모르는 꼬마 정도, 그 꼬마를 데려왔다 생각되는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기도 한다. 우리는 분수를 중심으로 한 광장의 한구석에 진을 치고 거길 촬영기지로서 쓰기로 했다. 빈손인 하루히는 남아도는 원기를 팔팔하게 뿜고 있었지만,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산행 도중에 코이즈미가 반 정도의 중량을 나눠 들어주지 않았으면 진짜로 완전히 쓰러져 죽을 뻔 했다. 내가 반더포겔(獨,Wandervogel:집단으로 산야를 걸어서 여행하며 심신을 단련하는 청년 운동. 또는 그 단체.) 장비같은 배낭에 기대어 죽을듯이 말하니, “저기, 좀 마실래요?” 눈 앞에 조그만한 페트병(Pet Bottle)이 보이고, 그 병은 아사히나 선배의 손에 쥐여 있다. “제가 마시던 거라도 괜찮으시다면…” 신이 내린 우롱차다. 아마도 천상의 맛일게 틀림없겠지. 좋고 싫고 따윈 없다. 마시지 않으면 천벌이 내려질 것이다. 내가 사양않고 받으려 했을때, 사악한 악마의 손이 천사의 팔을 잡아챘다. 아사히나 선배에게서 우롱차를 낚아챈 하루히가, “나중에 해, 나중에. 미쿠루짱, 지금은 한가하게 수분섭취나 할때가 아니야. 서두르지 않으면 이 절호의 날씨가 흐려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자 그럼 빨리 촬영 시작하자.”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둥글게 떴다. “에……? 여기서 찍나요?” “당연하지. 그럼 뭐하러 왔겠어.” “그럼, 저 안갈아입어도 되죠? 여기, 갈아입을 데도 없고…” “장소라면 있어. 봐, 여기 주위 자체가 그거야.” 하루히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초록빛의 나무에 둘러싸인 산등성이가 정렬되어 있었다. “조금 안쪽으로 가면 아무도 안올거야. 천연 탈의실이라구. 자, 가자.” “히히, 햐아악, 사, 살려주세” 살려드릴 틈도 없이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끌고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재등장한 아사히나 선배는, 촬영 코스튬인 웨이트리스복을 입고, 왠지 날뛰는 복잡한 머리카락을 하곤 글썽거리는 눈망울을 길가에 자라나는 가을꽃에게 향했다. 그 한쪽 눈이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달라져있다. 왼쪽 눈만 푸른색이다. 뭐냐 이건. “컬러 렌즈야.” 하루히가 설명한다. “좌우 눈 색이 다르단 것도 꽤 중요하지. 봐, 이거 하나만으로 신비성이 확 생기잖아. 이것만 하고 있으면 틀릴 건 없어. 기호야, 기호.” 등뒤에서 아사히나 선배의 턱을 잡고, 작은 얼굴을 기울인다. 거기에 맡긴 아사히나 선배는 바다처럼 넓은 눈빛이다. “이 푸른 눈엔 신비가 있다는 거지.” 라는 하루히. “뭐, 아무런 의미 없이 색이 달라도 이야기가 안되니깐.“ 지금이라도 쓰러질 듯한 아사히나 선배의 지친 얼굴도 엄청 끌리지만. “그래서, 어떤 신비가 있는거냐? 이 컬러 렌즈에.” “아직 비밀이야.” 하루히는 방긋 웃으면서 대답하길, “봐, 미쿠루짱,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넌 주연이라구. 프로듀서와 감독 다음으로 대단한 거란 말이야. 멀쩡하게 서봐 좀 멀쩡하게!” “흐에!” 아사히나 선배는 애처로운 소리를 내고선 하루히가 지시하는 대로 포즈를 잡는다.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에 권총(모델건이야)을 쥐어주더니, “여암살자 같은 느낌을 내봐. 거기다 미래에서 왔단 삘로.” 따위의 무리한 주문을 해댄다. 아사히나 선배는 머뭇거리며 자세를 잡고, 최선을 다해 눈길을 내-카메라지-게 주었다. 이렇게 안되는걸 하려는 느낌이 정말 좋다, 정말. 진짜로. 3-02 아무리 그래도 정말 쓸데없이 할 일을 늘이는 녀석이다. 본 영화가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나라도 자주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지가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며 영화를 찍잔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어서 모른다. 찍는다고 쳐도 그게 진짜로 더 나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히는 진정으로 자신에게 감독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최소한 심야에 하던 마이너 영화보다는 멋진 영화를 만들 생각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루히는 노란 메가폰을 흔들면서 소리치고 있다. “미쿠루짱! 수줍어하지좀 마! 자신을 버리는거야! 배역에 빠져들면 되는거야! 지금 너는 아사히나 미쿠루(みくる)가 아니라 아사히나 미쿠루(ミクル)라구!” ……물론, 하루히의 자신감이 어디선가에서 나오는게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다. 근거도 없는 자신만만으로 주위의 질서를 혼란(chaos)시키는 것이, 이녀석 스즈미야 하루히가 갖고 태어난 능력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한참 빗나간 완장따위 달고있을 차고 잘난척 할 이유가 없다. 감독 하루히의 지시 하에 그 기념비적인 씬 1의 촬영이 시작됐다. 말이 씬이지 광장을 달리고 있는 장면을 측면에서 찍고 있을 뿐이다. 이게 오프닝이라고 한다. 하다못해 각본이라도 써오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하루히는 그런 건 없다고 단언했다. “함부로 썼다가 내용이 새면 곤란하잖아.” 라는게 그 이유란 것이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홍콩형식으로 진행될 모양이다. 이제 뭐, 완전히 지쳐 죽기 직전인 나지만 카메라 렌즈 너머에 두자루 권총을 들고 달리기로 숨을 헐떡이는 아사히나 선배보다는 아직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사히나 선배는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좌우로 뛰어다니며, 테이크(take) 5만에 겨우 감독의 오케이를 받고는 그순간 주저앉았다. “히이…히이…” 두손을 바닥에 대고 숨을 몰아쉬는 웨이트리스를 하루히는 돌아보지도 않고 옆에 대기하던 나가토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럼 다음은 유키와 미쿠루짱의 전투씬이야.” 나가토는 마음에 든 듯한 검은 옷을 입고 카메라 앞으로 스스슥 이동한다. 교복 위로 암막같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검은 고깔모자를 머리에 씌우는 것 뿐이기 때문에 아사히나 선배처럼 수풀로 끌려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더욱이 나가토라면 어디서든 태연한 얼굴로 옷갈아입기 하나 못할 리가 없다. 배역을 교환해 보면 어떨까나. 나가토가 웨이트리스, 아사히나 선배가 마법사. 어느 쪽이든 희한하게 잘 어울릴 것 같다.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를 3미터 정도의 거리로 마주보게 세우고는, “미쿠루짱, 유키를 향해 맘대로 쏴버려.” “엣.”이란 아사히나 선배. 달린 덕분에 흩트러진 귀밑머리를 흔들며 “그래도, 이거 사람을 향해 쏘면 안되는거……” “괜찮아. 미쿠루짱 실력이면 어차피 안맞을거고, 어쩌다 맞았다고 해도 유키라면 피할거야.” 나가토는 말 없이 별이 붙은 안테나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건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가토라면 총구를 이마에 댄 상태에서 방아쇠를 당겨도 획 피해버릴 것 같다. “저기……” 아사히나 선배는 무서운 주방장에게 깨진 접시를 보고하는 신참 메이드와 같은 얼굴로 겁먹은 듯이 조심조심 나가토를 본다. “괜찮아” 라고 나가토가 대답했다. 그리고 안테나를 빙글 돌리면서, “쏴” “거봐, 괜찮대잖아. 얼른 쏴. 미리 말해두는데 동시에 쏘는게 아니라 번갈아가면서 쏘는거야. 그게 쌍권총의 기본이니까.” 코이즈미가 반사판(reflector板)을 머리위에 들고 있다. 어디선진 몰라도 하루히가 가져왔다. 아마 지금쯤 사진부 쪽에서 도난신고를 냈을지도 모른다. 근데 코이즈미, 너 주인공 아녔냐? “환경은 임기응변에 적합하지 않죠. 저는 촬영받는 쪽보다는 이게 적성에 맞습니다. 이대로 스탭이나 할까 하고 어제부터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만…” “에잇” 아사히나 선배는 모델건을 무겁단 듯이 들고 눈을 감은채로 마구 연사했다. 그 모습을 내가 옆에서 촬영한다. BB탄의 궤적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가토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서있는 걸 보니 정말 하나도 명중되지 않는 모양이다. 마법으로 빗겨가게 하고 있어서인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가토가 천천히 안테나를 들어올려 얼굴 앞에서 슬쩍 휘둘렀다. 틱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면에 총알이 하나 떨어진다. 안경도 없으면서 저 엄청난 시력은 그대로구만. 나가토는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총구를 바라보고 있다. 평소에도 별로 하지 않지만, 그것도 ‘가끔 해주지 않으면 부자연스럽기 때문에’라고 하는 이유 하의 깜빡임이라, 오히려 그게 부자연스러울 정도다. 이젠 뭐 동공을 연 채로 걷든 천상을 부수든 순간이동을 하든 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놀라진 않는다. 나가토는 고장난 와이퍼같은 움직임으로 가끔씩 안테나를 휘둘러 BB탄에 맞추어 톡톡 떨어트렸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단순한 전투씬이다. 나가토는 봉 외엔 움직이지 않고 아사히나 선배는 두자루의 그록인지 베레타인지를 마구 쏴댈 뿐이고, 그마저도 안 맞으며, 하루히는 ‘맘대로 쏴’ 외엔 아무런 대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들려오는 대사는 아사히나 선배의 ‘히익, 호앗, 으앗’ 정도 되는 작고도 귀여운 목소리 뿐이다. 그렇지만, 싸움 전에 미리 서로 치명상만은 피하자고 협의한 허브와 망구스와 같은 참으로 전의 없는 배틀씬이었다. “응, 뭐 이런걸까” 아사히나 선배의 권총에 총알이 바닥났을 때에야 비로소 하루히가 메가폰을 두드린다. 나는 핸디비디오를 내려놓고 감독용 의자에 편히 앉아있는 하루히에게 다가갔다. “어이 하루히, 이게 어디가 영화냐. 어떻게 되먹은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다.” 스즈미야 초감독께서는 나를 살짝 보더니, “괜찮아. 어차피 편집단계에서 자르고 붙이고 할거니까.” 누가 하는건데, 그 자르고 붙이고 말이다. 내 역직 부분에 ‘편집’인가 뭔가가 써져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만. “하다못해 대사라도 좀 넣으라고.” “정 안좋으면 음성은 지우고 애프터레코딩(after-recording:후녹음) 하면 될거야. 효과음이랑 BGM도 넣어야겠지. 지금은 그리 깊게까지 갈거 없어!” 생각하고 뭐고 간에 스토리가 니 머릿속에밖에 없으니까 내가 생각해봤자 소용없다. 나는 아사히나 선배에 대한 하루히의 성희롱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도록 주의하는 정도다. 내 이외엔 남자들의 바디터치(body touch) 엄금. 그게 내 기준이다. 불만은 없겠지? “그럼 다음 씬이야! 이번엔 유키가 반격하는거야. 유키, 마법을 써서 미쿠루짱을 공격해!” 나가토는 검은 고깔모자의 그림자 속에서 의상보다도 까만 눈동자를 내게 향했다. 나밖에는 확인할 수 없는 각도로 고개를 기울인다. 나가토는 해도 되냐고 묻고있는 모양이다. 물론 대답은 ‘노!’다. 마법이야 어쨌든 아사히나 선배를 아프게 하는 건 허가할 수 없다. 봐라, 아사히나 선배는 얼굴이 퍼래져서 벌벌 떨고 있잖냐. 당연히 하루히는 나가토가 이해할 수 없는 노트릭 매직을 쓸 수 있다는 건 모른다. 이녀석이 하라고 시키는건 마법을 쓰는 듯한 연기를 하라는 것일 게지. 나가토는 확실히 무슨 이야기인지 안 모양인지, ‘……’라는 무언의 대사를 하며 안테나 봉을 들어올려 흔들흔들, 마치 콘서트에서 관객들이 사이리움을 흔드는 듯한 동작을 한다. “뭐, 좋아.” 라는 하루히. “이 씬엔 VFX 쓸 거니까. 쿈, 나중에 유키 봉에서 광선이 나가는 듯이 해줘.” 어떻게 그런 비주얼 이펙트를 넣냐? 나한테 그런 기술은 없다고. ILM에서 사원이랑 기재를 빌려온다는 예정이 있다면 또 몰라도. “미쿠루짱 여기서 비명! 그리고 괴롭단듯이 쓰러져.” 한동안 허둥지둥하던 아사히나 선배는 ‘…꺄’라고 속삭이듯이 외치고는 앞을 향해 털썩 쓰러졌다. 두손을 던지듯이 쓰러지는 아사히나 선배의 옆에는, 나가토가 그 영혼을 막 입수한 사신과 같이 서있는 광경. 언제나 내 옆에서 반사판만 들고 있는 코이즈미. 점점 주위의 가족 단위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워지고 있다. 하루히가 자비롭게도 잠시동안의 휴식 시간을 준 덕분에 우리들은 한동안 바닥에 앉아 쉴 수가 있었다. 하루히는 내가 찍은 영상을 반복하여 재생시키면서 심각한 얼굴로 끙끙거리고 있다.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 사이에는 꼬마들이 쫄랑쫄랑 몇 명 와가지고서는, ‘이거 무슨 방송국이에요?’ 인가 따위를 묻고있다. 아사히나 선배는 가냘피 웃으며 고개를 젓고, 나가토는 완전히 그들을 무시, 대지와 일체화시켰다. 하루히는 대체 자기가 찍고 있는 영상이 어떤 씬인지도 밝히지 않았기에 전혀 모르겠지만, 그 초감독은 다음으로 근처 신사(神社)에 가자고 했다. 벌써 휴식 끝이냐. “비둘기가 있어” …그렇댄다. “비둘기가 날아가는 걸 배경으로 걷는 미쿠루짱을 찍는거야! 가능하면 전부 하얀 비둘기였으면 좋겠지만, 이 경우엔 어떤 색이든 눈길을 잡을거야.” 집비둘기밖에 없을것 같다만. 하루히는 이미 맛이 가버린 아사히나 선배의 팔과 자기 팔을 팔짱을 껴서(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겠지), 삼림공원 내를 횡단하여 국도를 향하는 모양이다. 나는 코이즈미와 기재를 챙겨, 정글 취재를 가는 촬영스탭 현지인 안내원(sherpa)같은 모습으로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이 산중의 커다란 신사였다. 참 오랜만이로군. 이거야말로 초등학교 때 소풍 이래 처음이다. 신사 내에 있는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는 간판 앞에서, 하루히는 당당히 빵조각을 뿌리고 있었다. 일본어를 못읽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갑자기 지면을 완전히 메울듯한 기세로 비둘기 무리가 하늘에서 날아온다. 비둘기 색으로 가득찬 신사 내는, 언뜻 봐도 은근히 기분이 나쁘다. 이 비둘기 카페트 안에는 아사히나 선배가 혼자서 서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입술을 떨고 있는 웨이트리스. 그 모습을 내가 정면에서 찍고 있다. 뭐하는거냐, 난. 화면 밖에서는 하루히가 아사히나 선배로부터 받아든 이글인지 토가레프인지의 권총을 들고는, 철컥 하고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뭘 하나 싶었더니 갑자기 아사히나 선배의 발밑을 향해 사격, “히에에엣!” 비둘기에게 장난감 총을 갈겨대는 화면을 정말로 뵈올수 있을거라곤 생각 못했다. 동물애호협회가 당장이라도 달려올 만행에 평화의 상징들은 일제히 날개소리를 내며 날아오른다. “이거야! 이 장면을 원했다구. 쿈, 잘 찍어야돼!” 일단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으니까 찍히긴 하겠지. 우왕좌왕하며 날아가는 비둘기 소용돌이의 중앙에서, 아사히나 선배는 머리를 감싸쥐고 잔뜩 웅크려 있다. “미쿠루짱 뭐해!! 왜 앉아있어!? 넌 날아가는 비둘기들 뒤에서 천천히 여유있게 걸어야 된단 말이야! 일어서!” 느긋하게 그런 씬이나 찍을 때가 아닌 것 같다. 내가 들여다 보고 있는 파인더의 저 뒤쪽에서 동물애호협회 대신에 신사 신주(神主)같아 보이는 할아버지가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카마(袴,폭이 넓어 치마처럼 보이는 일본 옷의 하의 바지.) 차림이니 대충 신주 관계자 정도 되는 모양이다. 나는 한바탕 설교 들을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하루히는 주저없이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손에 들고 있던 CZ인가 SIG인가 하는 모델건을 그 할아버지를 향해 쏘기 시작했다. 달구어진 철판에 선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신주(아마도). 실버 서비스 진흥회에서 항의가 들어올 듯한 행패였다. “철수-!” 하루히는 살며시 외치더니 몸을 획 돌려 튀기 시작했다. 언제 이동한 건지 나가토는 진작에 저 멀리 떨어진 신사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놔두면 뒤처지고 말 것만 같은 아사히나 선배를 나와 코이즈미가 양쪽에서 붙들고 짐과 함께 들어올렸다. 감독이 튀었단 말이다. 주연 여배우를 희생양으로 만들 순 없지 않냐. 3-03 몇분 후, 우리는 길옆에 있는 드라이브 인(Drive-in) 같은 식당 한구석에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내가 내야하는 걸로 되어있는 점심이다. “지금 생각하면 좀 아깝네. 그 신주를 악역으로 해서 싸우는 쪽이 애드립으로서는 좋았던게 아녔을까.” 하루히가 범죄에 가까운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아사히나 선배는 메밀국수(?蕎?:자루소바, 채반에 담아내는 메밀국수. 구운 김을 곁들임.)를 세가닥 정도 먹은 후에, 테이블에 푹 엎드려 있다. “미쿠루짱. 소식하는구나. 그러면 안큰다. 가슴만 커봤자 코어(core)한 매니아나 좋아할 뿐이랴구. 키도 제대로 키워야지.” 하루히는 말과 동시에 아사히나 선배의 국수를 뺏어선 후룩후룩 먹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다. 몇 년 뒤인진 몰라도, 아사히나 선배는 얼굴도 몸도 미스 태양계표로 뽑힐 정도로 성장을 이루어 낸단 말이다. 본인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코이즈미는 계속 쓴웃음을 짓고 있다. 나가토는 묵묵히 믹스샌드를 입에 옮겨 볼을 부풀리고 있다. 나는 다 먹은 미트소스 접시를 옆에 밀어놓고, 두사람 분의 점심을 다 먹어 치우고 있는 하루히에게 말했다. “그 신주가 학교에 불만이라도 토로하면 어쩔 생각이냐. 코이즈미의 교복으로 우리들 정체는 들켰다고.” “괜찮지 않을까.” 하루히는 어디까지나 낙관적이다. “거리도 있었고, 흔히 있는 블레이저였던 데다가, 뭐라 하면 시치미 떼면 되는거야. 우연히 닮은 거겠죠~라고. BB탄 만으론 증거가 안돼.” 나는 증거가 담겨있는 비디오 카메라를 봤다. 이 영상을 상영하면 단번에 뽀록날 것 같은데. 신사까지 와서 비둘기에 둘러싸여있는 웨이트리스가 이 근처에 둘 이상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래서, 다음은 어딜 갈건데?” “한번 더 공원 광장에 돌아가자. 잘 생각해보니까 그것만으론 전투가 안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더 거친 액션이 필요하지. 응, 이미지가 떠올랐다. 숲속을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미쿠루짱과, 그걸 쫓는 유키. 그리고 미쿠루짱은 벼랑에서 떨어져버리는 거야. 우연히 거길 지나가던 코이즈미군이 구해준다는 전개는 어떨까.” 완전히 될대로 되라는 전개구만. 이런 산중을 우연히 지나가는 교복차림의 남자 고등학생은 대체 뭐냐. 그걸로 충분히 수상하다. 거기에 하루히라면 진짜로 아사히나 선배를 벼랑에서 떨궈버릴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럼 하루히, 니가 떨어져라. 아사히나 선배의 스턴트로서 그 의상 입어라. 뭐, 조금 가슴이 부족할런지는 몰라도…. 하루히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나를 눈썹을 치켜올리고 가는 눈으로 째려본다. “너 뭔 상상하고있어? 설마 내 웨이트리스 차림을 망상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실로 정확하게 맞춰내더니, “나는 감독이니까 말이야. 그렇게 겉에 나오지 않는다구.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간 하나도 못잡는 법이라구.” 너 프로듀서도 겸하고 있는거 아니었냐. “표방 스태프는 몇 개를 겸하든 상관없어. 그래도 뭐, 까메오 출연처럼 잠깐 살짝 나오는건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노는 씬도 넣는게 매니아 심리엔 끌리니까.” 어떤 매니아가 대상이 되어있는 걸까. 아사히나 선배 매니아냐? 지금까지는 아사히나 미쿠루 코스튬 플레이 전집밖에 없다고. …생각해보면, 그걸로 충분하지만. 코이즈미는 핫오레를 우아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등장인물은 저희 셋뿐입니까?” 멍청아, 쓰잘데 없는거 묻지마. “그러네….” 하루히는 입을 오리같이 하고는 생각에 잠긴다. 그런건 미리미리 생각해두란 말이야. “역시 셋만으론 좀 적겠지. 그래, 적어. 조연이 빛나야 비로소 주연이 사는 거니까. 코이즈미군, 좋은 지적이야. 보상으로 출연을 늘려줄게.” “아…감사합니다.” 코이즈미는 미소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아뿔싸, 라고 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꼴 좋다. 긁어 부스럼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무말도 안한거다. 하지만 어디서 새로운 등장인물을 데려올 생각일까. 이녀석이 무작위(at random)으로 데려온 인간은, 75%의 확률로 변태적인 뒷설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순서대로 말하자면 이번엔 이(異)세계인이 올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녀석에 이 세상에 오지 않길 바라고 있다. “보스를 쓰러뜨리기 전에는 잔챙이들이 잔뜩 나와야겠지. 잔챙이, 잔챙이….” 입술 아래에 손가락을 살며시 댄 하루히는 나를 살짝 본다. “그녀석들이면 되겠지.” 나도 하루히의 생각을 읽었다. 타니구치와 쿠니키다. 데려와도 전혀 상관없을 녀석이라면 그 둘 정도다. 완전한 조연 이하의, 잔챙이중 잔챙이 캐릭터로 딱이다. 단독으로 출현한 슬라임보다 무해하다는 건 틀림없다. “그걸로 됐어.” 또 한명정도가 더 갖고싶다는 듯한 감독의 얼굴에서 눈을 피하여, 테이블에 뺨을 대고 눈을 감는 아사히나 선배를 몰래 봤다. 역시 자는 얼굴도 예쁘구나. 자는 척이라도 말이야. 나는 소다를 쪽쪽 빨고 있는 나가토의 사신(死神)의상에 눈길을 돌려, 그 무감정한 모습을 충분히 감상하고, “그래, 다음은? 뭘 찍을거야?” 하루히는 국물을 마시기 시작하여, 그걸 다 마실 때까지의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는, “어쨌든 미쿠루짱은 좀 힘든 꼴좀 당해줘야겠어. 불쌍한 소녀가 고생을 잔뜩 한 끝에, 최후에 역전 해피 엔딩을 맞는다는게 이 영화의 테마니까. 미쿠루짱이 불행하면 할수록 카타르시스(catharsis)도 쫙 깔리는 법이야. 안심해, 미쿠루짱. 이건 해피엔딩이니까.” ‘해피’란 최후 뿐이잖냐. 그 사이 아사히나 선배는 쭉 하루히 감독의 포악함에 시달릴 거란 말이다. 하루히는 대체 어떤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브레이크 역은 나뿐인 것 같고, 그거 하난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겠지. 근데 카타르시스란거 뭐냐? 아사히나 선배는 감고있던 눈을 반정도 뜨고는, 구원을 바라는 듯한 눈으로 내 쪽을 보고 있다. 왼쪽 눈만 벽안(碧眼:푸른 눈,서양인)인 다색(heterochromous)의 여인은 곧 옅은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뭡니까, 내가 의지할만 할게 못된다는 의사표시입니까. 코이즈미와 나가토도 무슨 방파제가 될 리도 없는 현재, 저 뿐이라구요, 당신 편은. 무엇보다 내가 하루히를 제지 가능했던 전례가 이 반년간 전무하지만 말이다. 내 기사도 정신적인 마음가짐만이라도 이해해 줬으면 한다. 풍차에 창을 던지는 듯한 허무함을 느끼지 않는건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별로 말릴 건 없다고 생각했다. 반년 전에 내가 하루히를 잡고 늘어져서라도 SOS단의 창단을 단념시켰어야만 했다곤 하지만, 그런 건 결과론으로서, 내가 멍하니 있는 새에 하루히는 부실과 단원을 갖추어버리고, 그 과정에서 얼렁뚱땅 단원중 하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현실적인 결과다. 하지만, 만약 내가 배후에서 이 여자의 후두부를 곤봉으로 후려치든 기습을 하든 습격을 하든 해서 제지가 가능했다면,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와 코이즈미와는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또 다른 형태로 만났을 지도 모른다. 즉 우주인이라든가 미래인이라든가 하는 믿기 힘든 설정을 알게 될 것 없이, 평범한 동급생이든 상급생이든 생판 모르는 사람이 되어 복도에서 스치는 정도였을 것이다. 어느쪽이 낫냐? 따윈 묻지마라. 나는 이미 단원 3인의 자기소개를 들어버렸고, 나가토의 이상한 힘과 또 하나의 아사히나 선배와 적색 구형의 빛이 되는 코이즈미를 목격해버렸으니까. 아마 어디 다른 세계(parallel world)에 가면, 하루히 이하 3인과 대화 한번 하지 않은 내가 있을 테니, 그녀석에게 물어봐라. 난 몰라. 모른다고 할수 없는 건 지금 내 상태이다. 영화만들기. 음. 지극히 문화제틱한 전개다. 전혀 이상할 건 없다. 이상하다고 하면 하루히의 머리 속 정도이지만, 그건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제와서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갑자기 영화를 찍자고 말한 순간부터 이녀석이 멍청한 소리를 해대는 것도 지금 보면 정기적인 루틴워크(routine work:일상적인 일)다. 적당히 대충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영화 촬영을 굳이 막으려하지 않았다. 감독이든 뭐든 하고싶은 대로 해라. 좋을대로 주위를 휘저어버려. 그걸로 니 마음이 풀린다면 나도 내심의 한숨을 억누르고 같이 해주마. 너와 단둘이서 또 정체모를 공간에 갇히는 건 절대 사양이지만 말이지. 나는 힘이 넘치는 하루히와 지친 아사히나 선배와 미소의 코이즈미와 판때기같은 나가토의 무표정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았어야만 했다고 후회하게 될 때가 오는 것도 모르고서. 3-04 우리는 다시 삼림공원 광장으로 되돌아갔다. 이 엉터리 순서좀 어떻게 안되냐. 신사에 가기전에 한번에 찍으란 말이다. 애초에 각본이 하루히 머리에밖에 없는게 문제다. 역시 문서화란 절실한 것이로구나. 문자정보 위대하심이라. “총은 아무래도 빼야겠어. 좀더 대단한 총알이 나올줄 알았는데, 화려한 불꽃 소리도 안나고 현장감도 없어. 별로 효과가 있는거 같지가 않아. 레플리카(replica:복제,모형)는 안돼.” 하루히는 야마츠치 모델샵의 적자경영을 심화시키는 소리를 하며 운동화 발끝으로 두 개의 X마크를 그리고 있었다.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 선배가 설 위치를 표시하는 건가보다. “미쿠루짱은 여기, 유키는 여기.” “휴우” 아침부터 하루히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아사히나 선배는, 이미 하루분의 칼로리를 전부 소비해버린 것 같은 휘청휘청하는 발걸음으로 저항의 여지도 없이, 야한 웨이트리스 차림으로 오락가락 하는 새에 쌓인 정신적 피로도도 꽤 되는 모양이다. 수치를 극을 넘어서 유아로 퇴행화하고 있는가 하고 생각될 정도로 인형같은 움직임이었다. 나가토는 원래부터 인형같았고, 묵묵히 정해진 위치로 이동하여 묵묵히 선다. 검은 망토가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흔들흔들 나부끼고 있다.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로부터 낚아챈 모델건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이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 서로 마주서서 노려보고 있는 씬을 찍을거니까. 코이즈미군, 반사판 준비해.” 그리고 감독용 의자도 돌아온 하루히는, 총을 하늘을 향해서 푸슝 하고 쏘더니, “액션!” 이라 외쳤다. 나는 놀라서 카메라를 채비했지만, 더 놀란건 아사히나 선배일 것이다. 액션이라니. 하루히는 서있으라고밖에 안했다고. 어떤 액션을 하라는 거냐. “………” 나가토와 아사히나 선배는 말없이 상대의 얼굴색을 살피고 있다. “저기…” 먼저 아사히나 선배가 시선을 피한다. “………” 나가토는 가만히 아사히나 선배를 계속 보고있다. “………” 아사히나 선배도 침묵한다. 그대로, 바람만 솔솔 불어올 뿐인 대면 장면이 쭉 이어져졌다. “아 진짜!” 하루히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것을 깼다. “그래가지곤 배틀이 안되잖아!” 서있을 뿐이니까. 권총에서 메가폰으로 바꿔든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자기가 묶은 부드러운 밤색의 머리카락을 톡 두드렸다. “미쿠루짱, 알겠어? 예쁘고 귀여우면 다가 아니야. 귀엽고 예쁜 여자애는 얼마든지 쎄고 ?오附??멍하니 있으면 금방 밑에서 젊은 것들이 치고올라온단 말이야.” 뭔 말이 하고싶은거냐? 하루히는 완전히 휘어잡힌 아사히나 선배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니까 말야, 미쿠루짱. 눈에서 빔(beam) 정도는 쏴봐!” “에에엣!?” 아사히나 선배는 놀란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무리에요-!” “색이 다른 그 왼쪽 눈은 그걸 위해 있는거야. 아무런 의미 없이 파랗게 해놓은게 아니라구.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다는 설정이야. 그러니까 그게 빔이지. 미쿠루 빔이라구. 그걸 쏘는거야.” “아, 안나가요!” “기합으로 나가게 해!” 하루히는 엉거주춤한 아사히나 선배에게 헤드락을 걸어서, 노란 메가폰으로 머리카락 가마를 톡톡 두드리고 있다. 아야아야 하며 울음소리를 높이는 아사히나 선배도 아사히나 선배다. 나는, 반사판을 놓고 재밌단듯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코이즈미에게 카메라를 넘기고 하루히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만해라, 멍청아.” 조그마한 웨이트리스로부터 포악 초감독을 떼어낸다. “정상인 눈에서 빔같은게 어떻게 나가냐고. 바보냐?”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봐라, 불쌍하게도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잖냐. 저 동그랗고 귀여운 눈동자에서 나올거라곤 진주의 눈물 정도란 말이다. “흥” 목덜미를 잡힌 채로 옆을 보고 콧방귀를 뀌는 하루히. “알고있어, 그정돈.” 나는 손을 놓는다. 하루히는 메가폰으로 목 뒤를 두드리면서, “빔이 나갈 정도의 기합을 넣으란 소리야. 주연다운 패기가 있어야지. 너도 농담 안먹히는 녀석이구나.” 니 농담은 농담이 아니니까 문제인거다. 아사히나 선배한테 진짜로 빔 발사기능이 있었으면 어떡할뻔 했냐. ……없죠? 불안해져서 곁눈질로 아사히나 선배를 본다. 아사히나 선배는 외눈(odd eye)의 눈물과 함께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깜빡깜빡 거리고는 고개를 기울인다. 아무래도 내 아이콘택트는 아사히나 선배한텐 안통하는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갑자기 코이즈미가 나서서는 하루히 편을 들어주었다. “그 부분은 찍은 다음에 CG처리를 하면 어떻게든 되겠죠.” 티슈 상자를 손에 든 코이즈미는 친절한 척 사기꾼 미소를 짓고는 그것을 아사히나 선배에게 건네주고는, “스즈미야상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시지 않았습니까?” “그럴 생각이었어.” 라는 하루히. 수상하다, 라고 생각하는 나. 아사히나 선배는 티슈로 눈물을 닦고, 코를 흥 풀고 나서, 거동이 불편하단듯이 하루히를 봤다가 날 봤다가. 나가토는 너무 눈에 띄는 쿠로코(가부키[歌舞伎]에서 배우의 후견역, 또는 후견역이 입은 검은 옷)과 같은 모습으로 아무말 없이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고 있다. 거 해좀 빨리 안지냐. 조명부족으로 인한 촬영속행불가가 될 시간이 무지하게 기다려지는구만. “지금건 NG, 다시한번 재촬영.” 하루히는 말하고 나서, 아사히나 선배와 결정 포즈의 상의를 시작했다. “미쿠루 빔! 이라고 외치면서 손을 이렇게 하는거야.” “이, 이렇게요……?” “아냐, 이렇게! 그리고 오른쪽 눈은 감아.” 왼손으로 만든 V 사인을 왼쪽눈 옆에 대고 윙크하면 눈에서 빔에 나가는 식인 모양이다. “미쿠루짱, 말해봐.” “……미미미, 미쿠루 빔,” “더 큰 소리로!” “미쿠루 빔!” “부끄러워말고 큰 소리로!” “히…미쿠루 비-임!” “배에서부터 소리를 내!” 이 뭐하는 콩트(佛:conte)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절규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복식발성을 강요하는 하루히. 광장을 어슬렁거리던 할 일없는 꼬마들과 가족등의 시선이 따갑다. 쇼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은 판이지만, 우리가 찍고있는건 영화같지도 않은 완전한 쇼다. 이 제작 씬을 찍어두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루히식 해피 스토리가 어느정도나 되는진 몰라도, 아하시나 미쿠루 프로모션으로선 이미 너무나도 충분하다. 비로소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는 아까 전의 마크 위에 서서, 코이즈미는 옆에서 반사판을 들고 만세포즈 속행, 그 옆엔 하루히가 등을 크게 젖히고 앉아있으며, 나는 나가토의 배후의 각도로 그 검은 망토로부터 2미터 정도 떨어져서, 그 어깨너머로 아사히나 선배를 찍게 되었다. 이것도 하루히 지시에 따른 카메라 앵글이다. 갑작스런 변화는 이 직후에 일어났다. “좋아, 거기서 빔!” 하루히가 외치자 아사히나 선배는 자신없단 듯 포즈를 취했다. “미…미쿠루 빔-!” 억지로 카메라를 보고 자포자기 가성(伊:falsetto), 귀엽게 외치며 어설픈 윙크. 그 순간, 내가 들여다보는 카메라의 파인더가 갑자기 새까매졌다. “아?” 뭐가 일어난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메라 고장인가 싶었을 정도다. 핸디 비디오를 눈에서 떼고 눈앞에 선 불길한 의상의 고깔모자를 봤다. “……” 나가토가 내 눈앞에서 주먹을 꼭 쥐고 있다. 렌즈를 까맣게 덮은 건 나가토의 오른손이었다. “아?”라고 하루히도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나는 하루히가 그린 X마크에서 2미터정도 전방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나가토는 분명히 그곳에 서있었다. 하루히의 액션콜에 아사히나 선배가 대사를 시작했을 때, 비디오카메라엔 나가토의 까만 뒷모습이 분명히 찍혀있었다. 그리고 일초도 되지 않아 나가토는 무슨 이유에선지 내 바로 앞에 나타나선 무언가를 쥐는 듯한 손을 하곤 한 팔을 올리고 정지해있다. 워프(warp)했다고밖에 설명이 안된다. “얼레?” 라며 하루히도 말했다. “유키, 언제 그런데로 간거야?” 나가토는 대답없이, 유리구슬같은 눈동자를 아사히나 선배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아사히나 선배도 눈을 크게 뜨고 경악의 표정, 그리고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또다시 나가토의 손이 광속의 스피드로 움직였다. 마치 날아다니는 모기를 잡듯이 허공을 잡는다. 갖고 있던 별 붙인 안테나 봉은 어딨냐? 응? 지금 뭔가 희미하게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불 붙인 성냥을 물에 던질때 나는 듯한, 그런 소리다. “에…?” 이 알수없다는 듯한 소리를 낸 것은 아사히나 선배다. 뭐가 뭔지 알 리가 없겠지. 나도 모른다. 나가토는 대체 뭘 하는거냐? 아사히나 선배는 구원을 바라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부자연스러운 소리가 코이즈미 쪽에서 울렸다. 착각을 의심할 필요 없는 확실한 소리, 펑크난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그런…. 코이즈미가 머리 위에 들고 있던 반사판-발포 스티롤 판에 하얀 종이 하나 달랑 씌운 싸구려다-이, 비스듬히 절단되어 있었다. 보기드물게 말을 잃은 코이즈미가, 휙 낙하하는 반사판의 윗면을 바라보면서 망연자실해 있다. 하지만 내게도 그런 귀중한 광경을 천천히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나가토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가토만이. 3-05 검은 그림자가 지면을 차고 사뿐히 내려앉은 곳은 아사히나 선배의 바로 앞이다. 나가토는 망토에서 나온 오른손으로 아사히나 선배의 안면을 꽉 움켜쥐었다. 작은 손가락이 아사히나 선배의 눈을 덮듯, 관자놀이에 손을 꼭 누르고있다. “아야…나나나나가토사……!” 나가토는 신경쓰지 않고 다리 후리기로 주연 웨이트리스를 지면에 넘어뜨렸다. 풍만한 가슴 위에 말타듯 앉은 사신 의상. 아사히나 선배는 비명을 지르고, 아이언 크로우를 걸고 있는 나가토의 가느다란 팔을 잡고 있었다. “히에에에!” 나는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뭐야뭐? 나가토가 순간이동을 해서 촬영을 방해하나 싶었더니, 코이즈미의 반사판이 잘리고, 우주인이 미래인을 덮쳤다. 하루히는 대체 언제 저 둘이게 이런 연출을 가르친거냐-도 아닌 모양이다. 감독도 나도 코이즈미와 함께 아연실색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둘의 연기가 참으로 실감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컷컷!” 하루히는 일어서서 의자에 메가폰을 두드렸다. “잠깐, 유키, 뭐하는거야? 그런 예정은 없어.” 흰 허벅지를 반 이상 드러내고 버둥거리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의 위에서, 나가토는 묵묵히 얼굴만 잡고 있다.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내가 그쪽을 향하니, 코이즈미가 반사판의 잘린 부분을 보고 입을 움직이고 있다. 그 눈이 나를 알아채고, 미묘한 눈길을 보냈다. 저건 또 뭐하는 짓이냐. 아니, 코이즈미의 뭔가 있어보이는 듯한 저 눈빛따윈 어떻든 상관없다. 지금은 무슨 이유에선지 통합 격투기를 시작한 나가토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 나는 카메라를 손에 들고, 엎치락뒤치락 하고있는 웨이트리스와 검정 일색의 마법사에게 달려갔다. “뭐하는거야, 어이 나가토,” 챙넓은 모자가 천천히 내쪽을 향했다. 블랙홀같이 검은 나가토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작은 입술이 열려, “………” 뭐라 말할거라 생각한 내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나가토는 말할 내용에 어울리는 언어가 없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그대로 말없이 입술을 닫고, 천천히 마운트 포지션을 풀고 일어섰다. 검은 망토의 오른쪽 어깨가 움직여, 의상 밑으로 손이 도로 들어갔다. “히이…헤에에…” 넘어진 아사히나 선배는 계속 떨고 있었다. 하긴 무서울 만도 하지. 나가토가 평소의 무표정으로 쫓아와서 바닥에 날 넘어뜨린다면 나라도 겁먹을 거다. 아무래도 지금 나가토는 밤길 길모퉁이에서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흑마법사의 모습이니까. 마음약한 유치원생이라면 실금(失禁)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 헐렁한 고깔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나가토는 미동도 하지 않고 정면의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떨고있는 아사히나 선배의 어깨를 부축하여 일어서는데 힘을 빌려주었다. 아사히나 선배는 오열을 삼키며 계속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긴 속눈썹으로 꾸며진 눈이 젖은 덕분에 한번 더 매력 업…얼레? “참나, 뭐하는거야 둘다. 대본에 없는 건 하지 말라구.” 대본도 안 쓴 감독이 다가와서는, 나처럼 ‘얼레?’라며 의아한 소리를 냈다. “미쿠루짱, 렌즈 어쨌어?” “엣……” 내 팔에 매달려 울고있던 아사히나 선배는, 왼쪽눈 밑에 손을 대보더니, “얼레?” 셋이서 의아해 하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다. 이럴땐 사태를 파악하고 있을만한 녀석에게 묻는것이 최상이다. “나가토, 아사히나 선배 컬러렌즈 모르냐?” “몰라.” 나가토는 태연히 대답했다. 거짓말같다. “방금전의 격투로 떨어진거 아닐라나.” 하루히는 엉뚱한 소리를 하더니 지면을 돌아본다. “쿈, 너도 찾아봐. 그거 싼거 아니라구. 값 꽤나 나갔단 말이야.” 기어 돌아다니는 하루히와 함께 나도 네발짐승이 되었다. 소용없을 줄은 알았지만. 아사히나 선배 위에서 내려온 나가토의 오른손이 뭔가를 살짝 잡고 들어간 걸 본 것 같았다 했다. 그리고, 깔아 눕힌 나가토가 들고 있던건 아사히나 선배의 안면이다. “왜 아무데도 없는거야” 입을 뾰족하게 한 하루히에겐 미안하지만, 난 제대로 찾고 있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코이즈미는 분리된 반사판의 잘린 부분을 붙였다 뗐다 하며 놀고 있다. 너도 찾는 척을 하란 말이야. 코이즈미는 미소지으며, “바람에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르겠네요. 가벼운 거니까요.” 팔자 늘어진 소리를 해대더니, 내게 반사판의 잔해를 보였다. 일어선 하루히가 그걸 빼앗는다. “어떻게 된거야? 부러졌어? 흐응, 싸구려였구나. 뭐, 우리학교 사진부니 그럴만도 하지. 코이즈미군, 뒤쪽에서 테이프로라도 붙여놔.” 하루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울음을 멈추고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악어같은 눈을 보냈다. “컬러렌즈가 없으면 계속 못찍겠지. 어쩔까나.”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비로소 머리에 꼬마전구 정도의 빛이 떠올랐는지, 하루히는 손가락을 딱 쳤다. “그래. 변신후에만 눈 색이 변하는 걸로 하자!” “벼, 변신이요?” 라는 아사히나 선배. “그래! 평소에 언제나 코스튬을 입고 있는건 아무래도 리얼리티가 떨어져. 그 의상은 변신후의 분장으로, 평소엔 좀더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는거야.” 픽션에 리얼리티 운운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본다만, 하루히의 의견을 그대로 듣자면, 고스프레 웨이트리스가 멀쩡하지 않다는 걸 알고있다 말한 것과 같다. 아사히나 선배도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조, 좋네요 그거. 멀쩡한 옷 입고 싶어요, 굉장히,” “그러므로, 미쿠루짱의 평상복은 바니걸!” “에엣!? 왜왜왜요?” “그거밖에 안가져왔는걸. 진짜 평상복이면 영화가 전혀 참신치 못해. 걱정마, 설정이라면 생각해뒀으니까. 그러니까 말야, 미쿠루짱의 평소 하는 일이 상점가의 손님끌기 바니걸이야. 위험을 감지하면 곧바로 변신! 싸우는 웨이트리스가 된다는 것. 어때, 완벽하지.” 방금 너 리얼리티가 어쩌고 안했었냐? “자, 그럼 빨리빨리 하자.” 하루히는 입을 초승달 모양으로 하더니 위험한 미소를 짓고, 아사히나 선배의 팔을 등으로 돌려 팔을 고정하더니, “저, 잠깐요, 아야야야” 라는 작은 비명을 지르는 웨이트리스를 숲 속으로 끌고 갔다. 으음. …뭐, 그건 됐어. 아사히나 선배에겐 합장해줄 수 밖에 없지만, 하루히가 사라져 줬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당신의 희생을 헛되이하지 않겠습니다. 바니걸도 기대할게요. ……뭐, 그것도 됐다. 나는 나가토에게 꼭 물어봐야 할 게 있다. “그래서, 그건 뭔 애드립이었던 거냐?” 나가토는 왼손으로 무감정히 고깔모자의 챙을 눌렀다. 얼굴의 대부분을 그림자 속에 가리며 천천히 오른손을 꺼낸다. 교복 위에 걸친 것일 뿐이라, 소매는 세일러복이다. 나가토는 오른손의 검지만 위로 올렸다. 그 손가락엔 푸른 콘택트렌즈가 얹혀있다. 역시 니가 쌔빈 거냐. “이거” 나가토는 그렇게 속삭이곤, “레이저.” 라고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3-06 …………. 이봐, 언제나 느끼는 거다만은, 니 설명은 최소필요한도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다못해 10초 정도는 말해줘라. 나가토는 자신의 손끝을 보며, “높은 지향성을 가진 불가시대역(不可視帶域)의 코히런트(coherent)광.” 대단히 천천히 말해주었다. 오호라, 높은 지향성을 가진 불가시…. 미안한데, 더 모르겠다. “레이저?” 라는 나. “그래” 라는 나가토. “그거 놀랍군요.” 라는 코이즈미. 코이즈미는 손가락으로 렌즈를 집어올려 빛에 비추듯이 관찰하고는, “보통 렌즈로밖에 안보입니다만.” 무언가 매우 가슴깊이 느낀 듯한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뭐에 놀라야 하는지 모르기에 당연히 느끼고 자시고도 없다. “무슨 소리야.” 코이즈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른쪽 손바닥을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뇨, 당신이 아니라, 나가토상 말이에요.” 검은옷의 소녀는 내게 시선을 보내고, 마치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토는 그걸 확인하고선 검지 외에 쥐고 있던 다른 네손가락을 펴고,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 우리 셋 사이에 세게 침묵의 바람이 한번 불었다. 나는 소름이 끼치며, 겨우 깨달았다. 그런 것이었던가. 나가토의 단순한 손금이 있는 오른손바닥, 거기에 검게 탄 작은 구멍이 몇갠가 뚫려있다. 붉게 달군 쇠젓가락으로 찌르면 저런 식의 구멍이 나지 않을까. 다섯 개 정도 있었다. “실드(shield)가 뚫렸다.” 그렇게 담담히 말하지마. 보기만해도 아파보인다. “너무도 강력. 순식간이었다.” “레이저 광선이 아사히나 선배의 오른쪽 눈에서 방출된 거죠?” 라는 코이즈미. “그래.” 그래, 가 아니잖아. 코이즈미도 코이즈미다. 상황 파악 이외에 할게 있을까. “곧 수정하겠어.” 그 말대로, 우리가 바라보는 가운데 나가토의 손에 뚫린 구멍은 신속하게 완전히 채워졌다. 원래의 하얀 피부로 돌아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나는 끙끙거릴 수밖에 없다. “아사히나 선배가, 진짜로 눈에서 빔을 쏜거냐.” “입자가속포가 아니야. 응집광(凝集光).” 어느쪽이든 상관없어. 레이저든 메이저(maser)든 마카라이트파프(マ-カライトファ-プ:‘지구방위군’이란 일본SF영화에 나오는 파괴광선)든 그게 그거다. 하전입자포(荷電粒子砲)든 반양자포(反陽子砲)든 알게 뭐냐. 괴수한테 효과가 있다면야 그런건 필요없다. 여기서 문제삼아야 할것은, 괴수도 나오지 않았는데 아사히나 선배가 열선을 뿜었다는데 있다. “열선이 아니야. 포톤(photon) 레이저.” 그니까 어느쪽이든 상관없다고, 그런 과학고증은. 나가토는 입을 다물고,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코이즈미는 렌즈를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이건 아사히나상께서 원래부터 갖고 계시던 기능인 겁니까?” “아니.” 나가토는 깔끔히 부정, “현재의 아사히나 미쿠루는 통상인류로서 그 단체(單體)는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럼 이 컬러렌즈에 뭔가 장치가 있는 것인지요?” 코이즈미가 물고 늘어지지만, “아니. 그냥 장식품.” 그렇겠지. 렌즈를 가지고 온건 하루히니까. 아니, 그렇다기 보다, 그것이 최대의 문제 아냐? 딴놈도 아니고, 그녀석이 가지고 왔다는 사실이. 생각해봐야 할것도 있다. 만약 나가토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아사히나 선배의 눈에서 나온 레이저 광선이 비디오카메라의 렌즈를 통과하여 내 눈마저 관통, 그 외 여러 가지 것을 태워버린 끝에 후두부로 뚫고나왔을 것이다. 무엇보다 뇌수가 타버렸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건 좀 곤란할 것이다. 그럼 방금 막 나가토가 내 목숨을 구해준 참이로군. 내가 설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코이즈미는 턱을 문지르며 어려운 웃음을 짓고있다. “이것은 스즈미야상이 저지른 일이군요. 그녀가 미쿠루 빔이 있기를 바랬기에, 현실이 그렇게 변화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 보증하는 나가토는 어디까지나 무표정이다. 나는 그리 가만있을 순 없다. “잠깐만. 그 렌즈엔 아무런 마법도 걸려있지 않았지? 하루히가 그리 바랬다고 해서 왜 살인광선이 나가는 거야.” “마법이나 미지의 과학기술등을 스즈미야상은 필요로하지 않으십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있는’ 것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런 망할 이론으로 내가 납득할것 같냐. “하루히는 진짜로 빔을 쏘라고 한건 아니잖아. 그건 그녀석 영화 속의 설정이다. 그건 그녀석도 그렇게 말했잖아, 농담이라고.” “그렇네요.” 코이즈미도 끄덕였다. 그렇게 간단히 반론을 받아들이지 마라. 내 말이 안이어지잖아. “스즈미야상이 상식인이신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세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에도 뭔가 특이한 현상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것은…앗, 돌아오십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계속하죠.” 코이즈미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렌즈를 셔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난감할 따름이다. 어떻게든 싸워서 지혜와 용기로 세계의 파멸을 막는다던지, 문답무용으로 어찌됐든 나쁜 녀석을 때려눕힌다던지, 조촐한 세계관 속에서 무제한 초능력 대전을 펼친다던지, 그 사이에 적당한 감정 드라마가 삽입된다던지-. 실제의 경우, 그런 편이 내 취향이다. 이왕이면 그런 거짓말 설정 이야기에 묻혀살고 싶다.현실에서 멀먼 멀수록 좋다. 그런데 지금 나는 뭐냐. 한 동급생에게 말을 건 것이 화근이 되어 뭔 설정인지도 모를 녀석들에게 둘러싸이고, 전혀 알 수없는 일만을 하고있다. 눈에서 빔? 뭐냐 그건, 무슨 의미가 있냐? 생각해보면, 대략 아사히나 나가토 코이즈미 수수께끼 설정 트리오 중 누구 하나 정체가 확실한 자가 없다. 제각각 제멋대로의 자기소개를 해주었지만, 그런 걸 믿기엔 내 머리는 너무나 정상이다. 아무리 믿지 않고선 못배길 체험들을 동반해주었다고 해도 말이다. 모든 일에는 정도라는 게 있고, 나는 내 자신의 기준이 되는 자를 가지고 있다. 눈금은 좀 이상해졌지만. 본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먼저 아사히나 선배는 미래에서 온 미래인이라고 한다. 서기 몇 년에서 왔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온 이유는 알고 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관찰 때문이다. 나가토는 지구 외 생명체에 의해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라고 한다. ‘그건 또 뭐야?’라고 하셔도 할말 없다. 나도 그러니까 반반(fifty-fifty)이라는 거다. 또 뭐 그런게 지구에 왔는고 하니, 정보통합사념체인가 하는 나가토네 두목이 스즈미야 하루히에게 대단한 흥미가 있어서라고 한다. 그리고 코이즈미는 ‘기관’이라고 하는 비밀조직에서 파견된 초능력자라고 한다. 이녀석이 전학해 온것은 임무수행의 일환으로, 역할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감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루히 말인데, 그렇게나 괴상한 프로필을 가진 자가 셋이나 있음에도 지금까지 존재자체를 알수 없는 녀석이다. 아사히나 선배에 의하면 ‘시공 비틀림의 원인’이며, 나가토의 말에 따르면 ‘자율진화의 가능성’이라고 하며, 코이즈미는 심플하면서도 거창하게도 ‘신’이라 부른다. 참으로 모두들 고생 많으시다고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다. 고생하는 김에 빨리 하루히좀 어떻게 해줘라. 안그러면 이 여단장은 언제까지든 미스테리와 함께 중성자성(中性子星)과 같은 인력으로 나를 중력권에 잡아둘 테니까 말이야. 지금은 아직 됐어, 그래도 말야, 10년후 쯤을 생각해 봐라. 그때가 되어서도 하루히가 이 하루히 그대로면 어쩔거야? 꽤 난감해질거다. 부실을 불법점유하고, 눈에 불을 켜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의미하게 떠들썩거리거나 화내거나 정서불안이 된다거나 하는 것이 허락되는 건 어디까지나 10대정도까지다.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또 할 일이 아니라고. 그런 건 순전히 사회부적합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가서도 아사히나 선배나 코이즈미나 나가토는 하루히와 어울려줄 생각인가? 난 미리 사과하지. 미안,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면 시간이 없단 말이다. 인생이 손쉽게 리셋되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세이브 포인트가 있는것도 아니라고. 하루히가 시간을 비틀거나 정보를 폭발시키고 있거나 세상을 부수든 만들든 어쩌든 간에 상관없다. 나는 나고, 그녀석은 그녀석이다. 언제까지 애들 장난에 장단맞춰 놀아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귀가시간은 반드시 온다. 그것이 몇 년이든 몇십년 뒤의 일일진 몰라도 반드시 온다. “언제까지 뻗어있을거야! 이제 남이 보는 것도 익숙해졌잖아?” 나무 사이에서 하루히가 아사히나 선배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주연답게 행동해. 당당한 노출은 블루리본 신인상으로 가는 지름길이야! 이번 촬영에선 벗을 일은 없겠지만. 정신상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어.” 확인사살까지 한 토끼를 물고오는 사냥개와 같은 기세다. 하루히는 걷기 불편해 하는 하이힐 바니걸 아사히나 선배를 데리고,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이 영화가 성공하면, 그 수익으로 모두 온천에 데려가 줄게. 위안여행이야, 위안여행. 미쿠루짱도 가고싶지.” 하지만…뭐, 그렇지. 거기까진 나도 어울려주마. 내가 어울리고 싶었던 것은, 네가 찍고 있는 영화의 설정같은 이야기 속이었지만 말이다. 코이즈미 이츠키식 포지션이라면 오히려 만전을 기하겠지만, 어차피 내겐 숨겨진 힘 같은건 없는거 같으니까. 여기서 너도 순순히 들어가줘야겠어. 나중에 몇 년이고 지나면 ‘그러고보니 그럴땐 그런 일도 있었지’하며, 웃으며 남에게 이야기할 날도 오겠지. 아마도. -07 바니걸 아사히나 선배는, 웨이트리스 이상으로 부끄러워하며 걷고 있었다. 하루히만이 득의만면(得意滿面:뜻을 이루어 기쁜 표정이 얼굴에 꽉 참.)이다. 니가 만족스러워 해서 어쩌자는 거냐. 나는 비디오 카메라의 핀트를 조정하는 척을 하며 아사히나 선배의 가슴을 확대했다. 봐, 저거다, 일단 확인해둬야지. 아사히나 선배의 흰 왼가슴엔 작은 점이 있어서, 아주 자세-히 보면 별 모양을 하고 있다. 확인종료. 이 사람은 확실히 아사히나 선배다. 가짜가 아니다. “뭐하는거야?” 불쑥 렌즈 앞에 나타난 하루히의 얼굴. “내 지시외의 것은 찍으면 안돼. 이건 네 홈비디오가 아니니까말야.” 알고있어. 그 증거로 녹화버튼은 안눌렀다. 보기만 했을 뿐이야. “자자 모두 주목! 준비하고! 지금부터 미쿠루짱의 일상풍경을 찍을테니까. 미쿠루짱은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거길 걸어다녀. 그걸 카메라가 쫓는 거야.” 일상복으로 바니 옷을 입고 이런 삼림공원에나 출몰하는 여자는 대체 뭐냐. “됐어, 그런거. 이 영화 속에선 그게 일반적인거야. 픽션에 현실의 척도를 대는 게 더 이상한거라구!” 그거야말로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대사다. 네 경우는 현실에 픽션의 척도를 들이대고 있으니 반대이긴 하지만. 그 후, 아사히나 선배는 자신의 눈에서 살인레이저가 나간 것도 모른 채, 하루히의 연기지도에 따라 공원에 꽃을 딴다거나 나뭇잎을 주워서 입김으로 날린다거나 잔디밭 위에서 뛰고 달리고 하거나를 반복하며 점점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끝은 하루히의, “으응, 산을 배경으로 하니 아무래도 허전하네. 바니걸이 산을 그렇게 자주 돌아다니진 않겠지. 시내로 가자!” 방금전에 자기가 한 말을 깔끔히 뒤집는 한마디로, 또다시 버스이동 결정이다. 지금까지 조명담당밖에 한 것이 없는 남우주연 코이즈미는, 테이프로 보강한 반사판과 내가 맡긴 반량의 짐을 옆에 끼고 버스 손잡이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서 있으며, 나가토는 그 옆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되어있다. 빈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하루히와 아사히나 선배뿐이다. 내게서 카메라를 빼앗은 하루히는, 2인용 의자에 앉아 아사히나 선배를 바로 옆에서 찍고 있었다. 아사히나 선배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고, 하루히의 물음에 힘없이 무언가 대답하고 있다. 아무래도 감독에 의한 주연 여배우의 인터뷰인 모양이다. 버스는 산길을 꾸불꾸불 오르내리며 주택지에 닿아가고, 나는 운전수가 룸미러만 계속 보지 않도록 마음 속으로 빈다. 앞 똑바로 보고 운전해주쇼. 그 기도가 닿았는지 버스는 무사히 종점인 역전까지 도착해주었다. 그쯤에는 차내에도 승객이 바글거렸고 거의 모두의 시선이 하루히와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에게 향해 있었다. 쫑긋한 귀와, 뒤에서는 흰 어깨밖에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이 흉악하다. 아무래도 아사히나 바니 버전은 키타고는 물론 전 시내에 그 아성을 떨칠 분위기였다. 하루히가 노리는 게 그것일지도 모른다. ‘어제, 버스에 미녀 바니걸이 탔다구,’ ‘아, 나도 봤어.’ ‘그거 어찌 된거야?’ ‘뭔 키타고에 있는 SOS단인가 하는데에 있는 모양이야.’ ‘SOS단?’ ‘그래 SOS단.’ ‘SOS단이라, 기억해두자.’ 라든가, 그런 전개가 되는 걸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닐라나. 아사히나 선배는 SOS단의 광고도구가 아니라고. 그럼 무엇인가? 당연히 차대접 및 내 정신안정담당이다. 본인도 그렇게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물론, 하루히에게 있어서는 다른사람의 바램 따위는 마이동풍이긴 커녕 닿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타인의 말은, 하루히의 경이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고막 밖에서 튕겨나가기 때문이다. 삼투압 관계일지도 모르겠군. 이 구조의 설명이 가능하다면 노벨상 심사위원회가 생물학상의 심사대상까지론 해 줄지도 모른다. 누가 한번 안해볼래? (대충 되는대로 하는게 요령이다.) 이 날 해가 떨어지기까지, 아사히나 선배는 계속 바니걸이었다. 한거라고는 그 근처를 그 모습으로 걸어다닌 것 뿐이다. 이래선 언제나 하던 불가사의 탐색 패트롤과 다름이 없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만큼 쓸데없이 피곤해지며, 언제 경찰이 달려올지 조마조마하기까지 하다. 하루히에게 촬영허가라고 하는 개념은 없는 듯 하여, 어디서 뭘 찍든 어쩌든 간에 그건 전적으로 하루히의 자유이며, 그 자유는 인노켄티우스 3세(라틴,Innocentius 3세. 로마 교황. 영문명 이노센트.) 교황권과 같이 침범키 힘든 것-이라고 한다. 자유의 의미를 잘못알고 있다. “오늘은 뭐 이렇네.” 드디어 하루히가 일을 끝냈다는 얼굴을 해 주어, 나가토를 제외한 우리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일요일인 내일은 푹 쉬고싶구만. “자, 그럼 내일 보자. 집합시간과 장소는 오늘이랑 같아.” 그 벌린 입으로 말한다. 그래도 대체휴일은 주겠지. “뭐야 또 그건. 촬영이 빡빡하게 밀려있다니깐? 미련하게 쉬고 있을 시간 없어! 문화제가 끝나고 나서 맘대로 쉬면 되잖아. 그때까지는 달력에 빨간 날은 없다고 생각해!” 촬영 2일째에 이렇게나 빨리 시간배분을 말아먹고 있는 건 좀 어떻게 안되냐. 밀려있다고? 그렇다면 오늘 내가 찍은 몇시간짜리 영상은 거의 안쓴다는거냐? 아니면 대하드라마를 찍을 계획이냐? 이게 무슨 고정 연속프로인줄 아냐. 일개 문화제 자주영화란 말이다. 하지만 하루히는 뭐 하나 걱정할 게 없는 듯 했다. 내게 모든 짐더미를 떠맡기고선 자기는 완장을 휴대하는 것만으로 극상의 웃음을 흩뿌리고는, “그럼 내일보자! 이 영화는 반드시 성공시킬거야. 아니, 내가 감독을 맡고있는 이상, 성공은 이미 확실해. 다음은 너희들이 열심히 해주는 것 뿐이야. 시간 맞춰 와야돼, 안오면 사형(私刑)에다 사형(死刑)이니까!” (주:일본 발음도 ‘しけい’로 같습니다.) 그렇게 선언하고서 마릴린 맨슨의 ‘록 이즈 데드(rock is dead)’를 흥얼거리며 사라졌다. “아사히나상께는 제가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코이즈미가 귀에다 속삭였다. 아사히나 선배는 코이즈미의 블레이저를 머리부터 뒤집어 쓰고 있다. 지금이 겨울이었으면 코트라도 지참하고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계절은 여름에서 정체해 있었다. 나는 발앞에 쌓인 짐더미를 지겹게 바라보며, “뭘 전한다고?” “좀전 레이저 일 말입니다. 눈 색만 바꾸지 않는다면 이상한 광선도 나가지 않습니다. 스즈미야상의 법칙엔 그렇게 되어 있는 듯하니, 컬러 렌즈를 넣지만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반사판 주연 녀석은 내게 보험 외판원 같은 업무용 미소를 지었다. “만약을 위해 보험을 들어놓을까요. 그녀라면 협력해주실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빔은 위험하니까요.” 코이즈미가 다가선 곳은, 유리를 의인화한 듯한 검은 의상의 나가토 앞이었다. 온갖 짐더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나를, 여동생이 괴상한 생물을 보는듯한 눈으로 밖으로 나와 맞아주었다. 쿈인가 하는 얼간이같은 내 닉네임을 주위에 알린 원흉이 된 이 초딩 녀석은, ‘그거 비디오 카메라야? 와아 찍어줘 찍어줘’ 따위를 지껄여 댔지만 나는 ‘비켜’라고 대답하곤 방에 들어가 박혔다. 어쨌든 나는 지칠대로 지쳐 있고, 이 이상 성질에도 안맞는 카메라맨 노릇을 할 의욕은 진작 날아가버렸다. 아사히나 선배야 그렇다 쳐도 뭐가 아쉬워서 여동생 따위를 비디오 영상으로서 기록해야하는데. 하나도 안 즐겁다. 나는 방에 가방 배낭 종이가방 할것없이 전부 놓고 침대에 쓰러졌고, 저녁을 먹이려는 어머니의 사명을 받은 동생이 엘보우즈 매쉬(elbows mash)로 깨우러 올때까지 잠시의 안정을 취했다. -제 3화 끝 제 4화 다음날 우리는 또다시 역앞에 모였다. 하나 어제와 다른 점은 인원수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SOS단 이외의 인간 세명 정도가 뉴 페이스(new face)로서 내 앞에 나타났다. 하루히가 이르는 잡 캐릭터들이다. “어이 쿈, 이야기가 다르잖아,” 항의하듯이 말을 꺼낸 건 타니구치다. “예쁘신 아사히나상은 어딨어? 그쪽에서 마중나온다고 해서 나온거라고. 없잖아.” 말씀하신 대로, 아사히나 선배는 정각이 되어서도 오지 않았다. 아마 자택 방에서 출동거부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제도 그제도 그런 심한 꼴을 당했으니. “나는 눈요기 하러 왔다고. 그 결과가 뭐냐. 오늘은 아직 스즈미야의 험상궂은 얼굴밖에 못봤단 말이다. 이건 사기다.” 시끄러 임마. 나가토라도 보고있으면 되잖아. “아무리 그래도 나가토상 정말 잘어울린다-” 한가로운 소리를 하는 건 쿠니키다다. 타니구치에 이은 잡 캐릭 2호다. 내가 어젯밤에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동생한테서 수화기를 넘겨받고, 머리를 씻으며 들었던 것이, “타니구치 멍청이랑, 또 하나……이름은 생각 안나는데, 니 친구야. 그 둘을 내일 데리고 오도록 해. 잡 캐릭터로 쓸거니까.” 그걸로 끊어버렸다. 제발 인사라도 한마디 하란 말이다. 뭘 부탁할 때는 명령조가 아니라 애원조로 말해라. 아사히나 선배처럼 말이야. 목욕을 끝내고, 과연 타니구치와 쿠니키다의 휴일예정은 어떤가 생각하며 각 휴대폰에다 전화를 해보니, 이 할 일없는 단역 둘은 깔끔한 승낙의 반사를 보였다. 너네들 보통 휴일엔 뭐하냐? 남자 둘 가지고는 그림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하루히는 또 하나의 엑스트라를 준비하였다. 그 분은 챙넓은 고깔모자를 깊게 눌러쓴 나가토의 얼굴을 절하듯 엿보고 있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녀는 장신을 뻗으며 내게 웃음을 마구 던져주었다. “쿈군-, 미쿠루는 어쨌어?” 힘차게 말하는 그 여성은, 츠루야(鶴屋) 선배로, 아사히나 선배의 같은반 친구이다. 아사히나 선배가 이르는 ‘이 시대에서 생긴 친구’라고 하니, 이상한 프로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6월쯤에 하루히가 ‘아마추어 야구대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조력자로서 아사히나 선배가 데려온 일반적인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그러고 보니 그 때도 타니구치랑 쿠니키다가 있었었지. 거기다 내 동생까지. 츠루야 선배는 건강미 넘치는 흰 이를 스스럼없이 보이면서, “그런데 말야, 뭐하는거야? 할 일 없으면 오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말야-. 스즈미야상이 팔에 찬 완장 저거 어떻게 읽는거야? 그 핸디비디오로 뭘 할거야? 유키짱 저 차림새는 뭐야?” 쉬지도 않고 질문을 쏟아온다. 내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는, 츠루야 선배는 코이즈미 앞으로 이동해서, “와오, 이츠키군! 오늘도 멋쟁이구나,” 정신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활달함으론 하루히도 츠루야 선배에게 지지 않는다. 아침부터 잘도 이런 큰소리를 내는구나 할 정도의 목소리로 휴대전화와 싸우고있다. “무슨 소리야! 너 주연 맞아!? 이 영화의 성공은 30%는 너한테 걸려있다구! 7할은 내 재능이지만. 그건 됐어! 뭐라구? 배가 아파? 바보야?! 그런 꾀병이 먹히는건 초등학교까지야! 당장 와, 30초내로!” 아무래도 아사히나 선배는 돌발 히키코모리(집안에 틀어박힘, 또 그런 자.) 증후군에 걸린 모양이다. 어쩔 수 없다. 오늘도 그런 꼴을 당하면 정신적 복통에 이간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마음 약한 사람이니깐 말이지. “에이!” 하루히는 성내며 전화를 끊더니, 식사예절(table manner)이 안된 아이를 혼내기 직전의 집사같은 눈매를 했다. “징계가 필요하겠지!” 웃기지마라. 아사히나 선배는 너랑 달리 얌전히 생활하셨다고. 하다못해 학교도 없는 일요일 정도는 봐줄수 있잖냐. 물론 하루히는 주연 여배우의 엄살따윈 들어주지 않는다. 출연료도 안주면서 주연에겐 엄격한 여류감독은, “내가 데리고 올테니까, 잠깐 그 짐 줘봐,” 의상이 든 가방을 빼앗더니, 택시 타는 곳까지 대쉬해갔다. 그리고 서있던 택시 창문을 탕탕 두드려 문을 열게 하더니, 타자마자 어딘가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난 아사히나 선배가 어디에 살고있는지도 모른다. 나가토네 집에는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아사히나상의 기분도 잘 알겠네요.” 어느 새엔가 내 옆에 있던 코이즈미였다. 츠루야 선배는 우리반 얼간이 콤비에게 ‘야아- 오랜만이야-’ 식으로 말하더니 녀석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받고 있다. 그걸 웃으며 바라보던 코이즈미는, “아무래도 이대로 가면 진짜로 변신 히로인(heroine)이 될 분위기니깐요. 아무리 그래도 레이저 광선은 심했죠.” “심한게 아니라면 뭐냐.” “글쎄요. 입에서 불을 뿜는 정도라면 편집도 좀 쉽겠습니다만…” 아사히나 선배는 괴수도 재주꾼도 악역레슬러도 아니란 말이다. 그 귀여운 입술에 화상이라도 입으면 어쩔거냐.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설마 너, 솔선해서 책임지겠다 어쩌겠다 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뇨. 제가 책임을 느낀다고 한다면, 그 ‘신인(神人)’의 폭주를 허용했을 경우 뿐입니다. 어쩌다 그런 사태가 터진 적은…아아, 한번 있었군요. 그 때는 감사했습니다. 당신 덕분에 어떻게든 됐습니다.” 반년 전쯤에 하루히 덕분에 끝장 날뻔한 세계는, 내 분골쇄신의 노력과 정신적 소모 끝에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각국 수뇌가 나한테 감사패 한장씩 보내줘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데, 아직 그 어떤 나라 대사관원도 오지 않았다. 뭐 와봤자 곤란할 뿐이니 별로 바라고 있지는 않지만. 전번에 내가 받은 보수는 눈물맺힌 아사히나 선배가 안아준 정도로, 잘 생각해 보면 그걸로 이미 충분하다. 코이즈미한테 감사의 말씀을 들어봤자 별로 좋지도 않다. “그 아사히나 미쿠루 말씀입니다만.” 막 부르지 마 임마, 불쾌하다. “실례했습니다. 아사히나상 말씀입니다만, 일단 괴광선이 나가는 사태는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하루히가 컬러 렌즈 예비를 준비하지 않는다고 낙관시라도 하고 있는거냐? “아뇨, 그건 바램이 지나칩니다. 나가토상이 협력해주신다고 하십니다.” 나는 역 매표소를 본 채로 응고해 있는 철판 녀석에게 눈을 돌렸다가 코이즈미에게 다시 되돌렸다. “아사히나 선배에게 뭘 했어?” “그렇게 노여워하실 것 없습니다. 레이저 조사(照射)를 없앴을 뿐입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나가토상은 다른 TFEI 단말과는 달리 전혀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시니깐요. 저는 위험치를 제로로 해주시도록 의뢰했을 뿐입니다.” “TFEI는 또 뭐냐?” “저희들이 따로 만든 약어입니다. 꼭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나가토상은 ‘그들’ 중에서도 한층 다른 이채(異彩)를 뿜으시는 느낌이 듭니다. 그녀에겐 인터페이스뿐만이 아니라 그 이외에 다른 역할이 있는것이 아닌가,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그 조용한 독서녀에게 하루히 감시 이외에 뭐가 있다는거냐. 나가토보단 아사쿠라 료코가 사라지는 게 더 아쉬운 존재였다고. 난 물론 절대 아쉬워하고 있지 않지만. 기다리길 30분, 하루히를 태운 택시가 돌아왔다. 동승하고 있던 건 웨이트리스 아사히나 선배로, 어제에 이어 어둠에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계신다. 하루히는 운전수에게서 영수증을 받고 있다. 택시비를 경비에서 뺄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걸 보며 타니구치와 쿠니키다가 뭔가 말하고 있었다. “요 전에 말야, 밤에 편의점까지 갔다 오는데 택시랑 마주쳤는데,” “헤-에” “근데, 언뜻 보니까 그 택시의 ‘공차(空車:빈차)’ 램프가 ‘애차(愛車)’로 보이지 뭐냐.” “그거 깜짝 놀랐겠네.” “근데, 다시 확인하기도 전에 택시가 가버렸어. 그때 딱 느꼈지. 내게 지금 부족한 것은 사랑이 아닌가 하는 것을 말이다.” “진짜로 ‘애차(愛車)’라고 쓰여있던 거 아닐까. 개인택시일걸, 분명히.” 이딴 대화나 하고있는 바보 2인조에게 조력을 구해야 하다니. 인재 부족이 이정도까지 왔는가 하는 생각을 아니할수 없다. 타니구치와 쿠니키다가 니켈 합금이라면 츠루야 선배는 플래티나(platina)다. 여기 로켓불꽃과 아폴로11호의 차이 가지곤 어림도 없다. “야호~, 미쿠루, 택시로 오다니, 너 누구?” 츠루야 선배의 텐션(tension)도 높았는지, 엷은 마일드 하이 텐션(mild hight tension)이었다. 하루히의 정신나간 내츄럴 하이(natural high)와는 그 경계가 확실하다고 해둬야겠지. 그래도 츠루야 선배는 상식세계의 범주내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와아 멋지다! 에로틱해! 미쿠루 그 가게서 알바했어? 18세 미만 출입금지네-, 얼레? 너 아직 17살 아니었어? 아 그런가, 손님이 아니니까 괜찮은가보구나~” 한참 운 뒤의 눈을 하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는 두눈 모두 원래 색을 하고있다. 컬러렌즈는 품절이었다는 모양이다. 하루히는 작은 글래머러스(glamorous) 웨이트리스를 끌어당겨서, “꾀병 부려봤자 소용없다구! 착착 촬영해 나갈거야! 이제부터가 미쿠루짱 출연의 진면목이야. 모든 것은 SOS단을 위해! 자기희생정신은 어느 세상에서든 청중의 감동을 부른다구!” 니가 희생해라. “이 세상에 히로인은 한명밖에 필요없어. 진짜론 내가 그렇지만, 이번엔 특별히 양보해 줄게. 최소한 문화제가 끝날 때 까지만이라도!” 네놈이 히로인이라니 세상 그 누구도 인정치 않는다. 츠루야 선배는 아사히나 선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기침을 하게 하더니, “이거 뭐야? 레이스퀸? 무슨 캐릭터야? 아, 맞다. 문화제 야키소바 집때 입는거구나! 손님 엄청 올거야!” 아사히나 선배의 히키코모리 화도 잘 알겠다. 연속안타를 먹을게 뻔히 보이는데 마운드에 서고 싶어할 투수는 없다. 아사히나 선배는 천천히 얼굴을 올려, 구원을 바라는 순교자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는, 곧 눈길을 돌렸다. 한숨을 천천히 내쉬고, 당차게 미약한 미소를 보인 후 쓱쓱 내가 있는 곳 까지 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아사히나 선배의 뒤통수를 보며, “아뇨, 전 괜찮습니다만” “점심은 제가 낼게요…” “아니에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제일은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는 새에 광학 병기를 발사해버린 것 같아서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다치지도 않았구요…” 재빨리 엿본다. 나가토는 별 붙은 안테나를 들고 멍하니 있다. 그런 내게, 아사히나 선배는 안그래도 작고 가는 목소리를 더 조용히 해서는, “물렸어요.” 왼 손목을 문지르고 있다. “뭐에 말이세요?” “나가토상에게요. 무슨, 나노머신 주입이 어쩌고 하시면서…. 그래도, 눈에선 이제 아무것도 안나가게 된 모양이에요. 다행이다-.” 덕분에 나도 잘려죽을 염려는 없는건…가. 하지만 나가토가 아사히나 선배를 무는 풍경은 꽤나 상상하기 힘들다. 근데, 무슨 주입? “어젯밤이었어요. 코이즈미군과 같이 저희 집으로 오셔서…” 짐꾼을 하고 있는 코이즈미는 하루히와 뭔가 이야기를 하고있다. 나도 따라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럴 때나 좀 불러서 데려가라. 폐쇄공간 따위에 데려가는 것 보다는 당연히 아사히나 선배 집 방문이 훨씬 즐거울 거 아니냐. “무슨 비밀이야기 하고있어-?” 츠루야 선배가 아름다운 팔로 아사히나 선배의 목을 묶었다. “미쿠루 진짜 귀엽다~, 집에서 기르고 싶을 정도야! 쿈군, 사이좋게 잘 지내지?” 그거야 물론이죠. 타니구치와 쿠니키다의 또라이 콤비는 입을 쩍 벌리고 아사히나 선배를 관상하고 있다. 보지마 임마. 닳으면 어쩔거냐. 라고 생각하고 있자니 하루히가 외쳤다. “장소가 정해졌어!” 무슨 장소. “로케(location,촬영장소)말야.” 아 그랬지. 까딱만 하면 우리가 찍고있는 게 영화라는 사실을 잊게 되는군. 그렇다기보다 잊고 싶군 그래. 아이돌 탤런트의 저렴한 DVD 제작현장이라고 하는게 더 적절할 것 같고 하니 말이다. “코이즈미군네 집 근처에 큰 연못이 있는 모양이야. 일단 오늘은 거기서 촬영할 거니까 얼른 시작하자!” 빨리도 하루히는 ‘촬영대 일행’이라 쓰인 비닐제 깃발을 걸어 올리고 걷고 있다. 나는, 아직 아사히나 선배에게 실례되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 타니구치와 쿠니키다를 불러서 가방이나 자루 따위를 사이좋게 나누어 들었다. 4-02 30분정도 도보로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연못가였다. 언덕 중간쯤에 있는, 거의 주택가 한가운데이다. 연못이라곤 해도 꽤 크다. 겨울이 되면 철새가 날아올 정도의 크기로, 코이즈미의 말에 따르면 곧 오리고 기러기고 날아올 시기라고 한다. 연못 주위에는 철제 펜스가 세워져, 침입금지를 명시하고 있다. 그 이전에 상식 문제다. 예절 문제일지도 모르지. 요샌 초등학생도 이런 덴 안놀러온다고. 상당한 바보를 빼면. “뭐하고 있어, 빨리 넘어.” 이녀석이 상당한 바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루히 감독은 몸소 펜스에 다리를 걸고 손짓하여 부르고 있다. 아사히나 선배가 짧은 스커트를 누르며 절망적인 얼굴색을 하고, 옆에 있는 츠루야 선배가 깔깔 웃으면서, “에? 여기서 뭐할거야? (깔깔깔) 미쿠루 수영해?” 아사히나 선배는 떨며 고개를 젓고, 녹색 수면을 피연못을 보는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숨. “뛰어넘기엔 이 울타리는 조금 높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코이즈미가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나가토였다. 그녀석한테 일상회화를 걸어봤자 얻을 거 없다고. 예스든 노든, 아니면 이해불능 혼잣말을 해대기 시작할테니까. “………” 하지만 나가토는 입을 다문 채 진기하게도 반응(reaction)을 했다. 펜스의 기둥인 철로 된 봉에 손가락을 걸어, 톡 하고 옆으로 밀었다. 강고해야 할 철기둥은 불꽃 옆에 방치한 캐러멜처럼 휘어, 휜 그대로 상태를 고정했다. 여전히 신기한 짓거리를 한다. 쓸데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당황하여 재빨리 그 외의 대세에 시선을 돌린다. “헤에, 좀 오래된 모양이네.” 쿠니키다가 알겠다는 얼굴로 말하곤, “그니까 나는 뭔 역을 하든 좋아. 물귀신(かっぱ) 역이냐?” 타니구치가 틈이 열린 철망에 몸을 구부려 물가 쪽으로 갔으며, “이 동네, 옛날엔 철망 같은거 없어도 잘 살았는데,” 츠루야 선배도 그 뒤를 이었다. 그녀와 손을 잡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도 마지못해 하루히가 기다리는 못가로 향한다. 자잘한 일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단역 3인조였다. 더할 나위 없다. 코이즈미가 나와 나가토에게 균등히 미소를 지어주며 철망 내측으로 몸을 집어넣고, 흑마법사가 되어있는 나가토도 유령처럼 내 앞을 지나갔다. 할수없구만. 얼른 촬영하고 빨리 해산하자. 공공기물 파괴 장면이 들키기전에. 또다시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가 마주보고 서있다. 또 전투씬인 모양이다. 하루히는 정말로 스토리를 생각하고 있기는 한건가. 코이즈미는 대체 언제쯤에나 출연하는거냐. 오늘도 교복차림인 코이즈미는 내 뒤에서 반사판계를 맡고 있다. 하루히는 흙탕같은 지면에 감독용 의자를 놓고, 스케치북에 대사로 추정되는 문장을 마구 휘갈겨 쓰고 있었다. “이 씬은 말야, 미쿠루가 드디어 궁지에 몰리게 됐단 거야. 푸른 눈 빔은 유키가 못쏘게 해버렸다 그거야.” 펠트펜을 멈추고, 자화자찬의 얼굴을 한다. “음, 바로 이거야. 거기 너, 이거 들고 서있어.” 그런 사정으로 타니구치가 간판계가 됐다. 연기를 하게 되는 둘은 불만스러운 타니구치의 손 쪽을 보고, “이이이이런 걸로 저는 지지 않아요! 나쁜 우주인 유키상! 빨리 지구를 떠나세요! 저…죄송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과하는 아사히나 미쿠루에게, 나가토 유키라는 나쁜 우주인 마법사는, “………그래” 기분 나쁜 모습 전혀 없이 끄덕였다. 그리고 하루히의 지시대로 대사 봉독. “너야말로 이 시대를 떠나는게 좋다. 그는 우리가 손에 넣을것이다. 그에겐 그럴 가치가 있다. 그는 아직 자신이 가진 힘을 모르고 있지만 그것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먼저 그 일환으로서 지구를 침략하도록 하겠다.” 하루히가 지휘자처럼 흔들고 있는 메가폰에 맞춰, 나가토는 별 안테나로 아사히나 선배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그그그그렇게 놔두지는 않겠습니다. 이 목숨과 바꿔서라도,” “그럼 그 목숨도 우리가 가져가겠다.” 평탄(flat)한 나가토의 말에 아사히나 선배는 놀란 모습이 역력했다. “컷-!” 하루히가 외치며 일어선다. 둘 사이까지 다가가서, “꽤 느낌이 살잖아. 그래그래, 이 상태로 가는거야. 하지만 애드립 없이 해줘. 그리고 미쿠루짱, 잠깐 이리 와봐.” 감독은 우리를 놔두고 주연 여배우와 등을 돌린다. 나는 비디오 카메라를 내려놓고 기웃거려봤다. 무슨 의논을 하는거지. 곧바로 츠루야 선배가 참고있던 웃음을 성대히 터뜨리며, “이거 무슨 영화야? 아니, 영화야? 와하하, 엄청 재밌다!” 당신 이외에 재밌어 하는 사람은 하루히 정도인 것 같지만 말이죠. 타니구치와 쿠니키다는 ‘우린 뭐하러 불러낸거야?’라는 얼굴로 멍청히 서있고, 나가토는 혼자서 모르는 척, 코이즈미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연못 끝을 조망하고 있다. 나는 이어진 녹화로 이제 곧 가득 찰 테이프를 빼고 새 DV카세트의 스타트를 끊었다. 쓰레기를 늘리고 있는거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츠루야 선배가 내 손을 흥미깊게 바라본다. “흐응-. 요즘 비디오는 이렇게 생겼나? 이거 미쿠루 잡다 영상으로 가득이야? 나도 좀 보여주지 않을래? 엄청 웃길거 같아,” 웃을 일이 아닙니다. 요전에 바니 광고는 하루만에 끝났지만 이 바보 영화촬영은 말그대로 최악, 문화제 바로 전날까지 이어질 우려가 있다. 그 새에 촬영거부가 등교거부로 발전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곤란한건 나다. 맛있는 차를 마실수 없게 되니깐. 나가토가 타는 차는 무미건조하고, 하루히는 물리적으로 맛이 없다. 코이즈미는 논외로, 내가 직접 차를 탈 정도라면 수돗물로 참겠다. “기다렸지!” 아아 기다렸지. 암, 기다렸다마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고. 더 이상 이 부근 연못을 훼손하고 싶진 않으니깐 말이다. “본격적으로 이제부터가 진짜야. 자 봐봐!” 하루히가 밀어낸 것은 아사히나 선배이다. 보라니, 안그래도 매일같이 힐끔힐끔 본단 말이다. 봐, 평소와 다름없이 아름답고 귀엽고 아리따운 아사히나 선배……. “아아?” 한쪽 눈 색이 달라졌다. 이번엔 오른쪽 눈이다. 은색의 눈동자가 둘 곳 없이 나와 지면을 왕복하고 있다. “자, 미쿠루짱, 그 미라클 미쿠루 아이(eye) R에서, 뭐든 좋아, 신기한 걸 쏴서 공격해!” 멈춰, 라고 할 틈도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잠시 늦췄을 뿐이었겠지만, 모든건 너무나 순간적이었다. 위험한 명령을 한 하루히도, 놀라서 움찔 하고 눈을 깜빡인 아사히나 선배도, 그리고-. 아사히나 선배를 못가에 쓰러뜨린 나가토의 검은 옷도. 어제의 재현이었다. 리플레이 씬을 보는 듯 하다. 나가토가 특기인 순간이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순간, 모자만 원래 위치에 있다가 사뿐히 지면으로 낙하한다. 그걸 쓰고 있던 본체는 눈한번 깜빡할 정도의 시간(아마 0.2초 정도겠지)에 수미터 거리를 이동하여 아사히나 선배를 깔아눕혔다. 관자놀이에 아이언 크로우-. 습지에서 레슬링을 시작한 여배우 둘을 전원이 넋나간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나나나가토상, 히이이익!” 무언 무표정의 나가토는 그 비명에 미동도 없이, 겨우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린 것 정도로 아사히나 선배 위에 그대로 올라타 있다. “잠깐!” 제일 먼저 제정신이 든 건 하루히였다. “유키! 너는 마법사야! 육탄전은 잘 못한다는 설정이라구! 이런데서 흙탕물 프로 레슬링 해도 말야-” 하지만 하루히는 말을 도중에 멈추고, 3초정도 생각하면서, “뭐,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 장사 좀 되겠네. 쿈! 잘 찍어둬! 유키가 모처럼 낸 아이디어니까!” 아이디어는 아니잖아. 반사적인 행동이다. 콘택트렌즈를 어떻게든 하기 위한 방위조치란 거다. 아사히나 선배는 그걸 알고 있을 텐데,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바둥바둥. 아슬아슬하다. 아니, 그런 서비스샷을 노릴 상황이 아니란 말이다. 그 때, 쾅 하는 소리가 나서 그 둘을 제외한 전원이 뒤를 돌아봤다. 하루히가 넘고, 우리가 사이로 지나온 연못의 펜스. 그 공간이 뻥 뚫려있다. V자 형태로 잘렸던 펜스가 도로에 쓰러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누가 불가시(不可視) 레이저라도 쏜 것 처럼. 잠시 후 시선을 되돌리니, 빈혈 기미가 좀 있는 흡혈귀처럼 나가토는 아사히나 선배의 손목을 물고 있었다. “실수다.” 의외로 나가토는 자기비판의 말을 꺼내더니, “레이저는 확산하여 무해화하도록 설정했다. 지금 건 초진동성(超振動性)분자 커터.” 숨도 내뱉지 않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린다. 코이즈미가 고깔모자를 주워 내밀며 말했다. “모노피라멘트 같은 것이군요. 하지만 그 단분자 커터는 눈에도 보이지 않으니, 질량도 없죠?” 모자를 받아든 나가토는, 그걸 그대로 머리에 씌웠다. “미량의 질량은 감지했다. 10의 41승분의 1그램 정도.” “뉴트리노 이하입니까?” 나가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사히나 선배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웨이트리스의 오른 눈은 아직 은색 그대로이다. “저기…” 아사히나 선배는 물린 손을 문지르며 머뭇머뭇하더니, “이번엔 제게 뭘, 그, 주입하, 하셨나요?” 고깔모자의 앞부분이 5미리 정도의 움직임을 보였다. 내겐 그것이 곤혹의 표현으로 보인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궁리하고 있는 거겠지. 다름이 아니라 나가토는, “차원진동 주기를 위상 변환시켜 중력파로 치환하는 작용을 가진 역장을 체표면에 발생시켰다.” 라는 의미불명 소리를 하다못해 말하는 듯하였다. 어떻게 그것이 투명살인 와이어를 무효화시켰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 외의 둘은 나름대로 납득한 것 같다. 코이즈미 녀석은, ‘그렇군요. 그런데 중력은 파동인 것입니까?’ 따위의 상관도 없는 것까지 묻고 있다. 나가토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니까. 코이즈미는 결정포즈 같은 폼으로 어깨를 움츠린다. “하지만 확실히 실수였군요. 이건 제 책임이기도 합니다. 눈에서 나오는 것은 레이저 빔 정도라고 밖에 생각지 못했습니다. 뭐든 좋으니까 신기한걸 쏴라, 인가요. 스즈미야상의 사고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네요. 대단한 분이십니다.” 추종은 커녕 전(全)인류를 몇바퀴 뒤로 따돌려 버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3바퀴 정도 크게 앞지르고 있으며, 뒤에서 거리를 좁혀오는 압박감을 뒷통수로 느낄 정도이긴 하지만 얼핏 보여 같은 한 바퀴를 돌고 있다고 갤러리들에게 착각시키는 것이 특기다. 이건 같은 서킷을 달리고 있는 녀석들 외엔 알 리가 없고, 하루히가 빠른 이유는 S자이든 십자트랙이든 입체효과든 관계없이 직진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엔진은 한명만 패서드럼제트를 사용, 언제까지든 어디까지든 달려간다. 추월하고 싶어도 못하게 하는 규칙을 자신이 만들어 냈으며, 그것도 본인에게 짜고치기 의식은 제로. 천성적으로 주어지는 범주를 넘은 성질의 악함이다. “다행스럽게도,” 라는 코이즈미. “모두들 펜스 건은 노후화를 방치해놓은 지방자치단체의 관리부실의 결과라고 납득하고 계신 듯 하고, 일이 커지지 않아서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나는 모자에 숨은 하얀 얼굴을 힐끗 본다. 방금 살짝 봤던 나가토의 손바닥은 갈갈이 찢겨 있었다. 끔찍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녀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다. 지금은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와있지만. 나는 약간 떨어진 곳에 모여있는 제 2 집단을 바라보았다. 하루히와 조역인 들쭉날쭉 트리오는 핸디 카메라의 영상을 보며 교성(嬌聲)을 지르고 있……는건 츠루야 선배 뿐인가. “어쩔거야? 이대로 촬영을 속행했다간 무슨 참사라도 날 것 같다구.” “하지만 중지하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강인하게 영화촬영을 거부하면 스즈미야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날뛰겠지.” “그렇겠죠. 설사 본인이 직접 하시지 않더라도, 그 폐쇄공간에서 ‘신인(神人)’이 폭주할 것만은 확실합니다.” 제발 그 안좋은 추억을 상기시키지 마라. 나는 그런 데 두번다시 가기도 싫고, 그런 걸 하고 싶지도 않다. “스즈미야상은 분명히 지금 상황을 너무나도 즐기고 계십니다. 상상력을 구사하여 자신만의 영화를 찍겠다고 하는 행위를 말입니다. 그야말로 신과 같이 행동하실 수 있으니깐요. 당신도 이미 알고 계시듯이, 그녀는 평소에 이 현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안달하고 계셨습니다. 실은 그렇지도 않았습니다만, 알고 계시지 못하니 마찬가지죠. 하지만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그녀 마음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떤 설정이라 할지라도 가능하겠지요. 스즈미야상은 영화라고 하는 매개를 이용하여 하나의 세계를 재구축하려 하고 계시는 겁니다.” 진짜 자기중심파다. 자기 생각대로 다 된다니 상당한 돈과 권력이 없는 이상 무리다. 정치가라도 하면 된다. 내가 몇종류의 찌푸린 얼굴을 시험하고 있는 와중에 코이즈미는 한종류만의 웃음을 지키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물론 스즈미야상에게 그런 자각은 없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영화내의 픽션으로서 세계를 만드려는 생각입니다. 영화제작에 거는 진정한 정열이란 거죠. 그렇게 열중하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현실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디로 쓰러지든 마이너스밖에 나오지 않는 주사위다. 촬영을 계속하여 하루히의 망상을 폭주시켜도 아니되고, 그만두게 하여 기분을 상하게 해서도 아니되고, 모 아니면 도의 택일. “그렇지만 어느쪽으로든 쓰러져야만 하는 주사위라면, 저는 속행의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근거를 말해봐라. “‘신인(神人)’사냥도 이제 좀 질렸고 말이죠……라는건 농담입니다. 죄송합니다. 으음, 요지는 이렇습니다. 세계가 통째로 리셋되는것 보다는, 다소의 변화를 허용하는 쪽이 아직 생존의 길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아사히나 선배가 슈퍼우먼이 된다는 현실을 허용하라는 거냐? “지금 이 현실변용은 ‘신인’에 비하자면 소규모입니다. 나가토상이 해주신 것처럼 방어수정도 가능하겠지요. 세상이 제로부터 다시 만들어지는 것에 비하면, 단발적인 이상현상을 어떻게든 해보는 것이 더욱 쉽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그거다. 하루히를 뒤에서 때려서라도 문화제가 끝날 때까지 기절시켜놓으면 어떠냐?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당신께서 전부 책임을 지신다고 하면 굳이 막지는 않겠습니다만.” “내 양 어깨엔 세상은 너무 무겁다.” 그리 대답하며 아사히나 선배를 보니, 웨이트리스 코스튬에서 덜 마른 진흙을 손으로 털고 있는 참이었다. 어쩐지 세상만사 다 포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 시선을 느끼곤 당황한듯이, “저, 저라면 괜찮아요. 어떻게든 극복해낼테니깐요…” 안쓰럽다. 얼굴색도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데. 그거야 물론 무슨 일이 있을때마다 나가토에게 물리고 싶지는 않겠지. 아무리 눈 깜짝할 새에 물린 자국을 지워준다곤 하지만, 불안한 건 불안한 거다. 지금의 나가토는 손잡이 긴 낫이라도 주어주면 타로카드 13번 무늬(motif)로 써도 될 사신 아가씨나, 연령미상의 스페이스 뱀파이어(space vampire)이니깐. 어느쪽이든 딱이다. 아사히나 선배는 흡인(吸引:빨아들임)이 아니라 혼입(混入:섞어 넣음)당한 모양이지만. 하지만, 실수라고 하면 아사히나 선배는 미래인치고는 너무 위험의식이 없는 것 같다. 본심을 내고 있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뭐 금칙투성이인 모양이고. 뭐 그 새에 가르쳐 줄 것도 있겠지. 그 땐 물론 둘끼리만, 어딘가 좁은 곳이라는 상황이 좋겠네. 4-04 비로소 타니구치와 쿠니키다, 츠루야 선배의 등장 차례가 찾아왔다. 하루히는 그 셋에게 영화에서의 역할을 배정, 이것에 의해 세명은 이름도 없는 단역으로 판명되었다. 그 맡은 역이란 ‘나쁜 우주인 유키에게 조종당하여 노예인형이 된 일반인’. “그러니까 말이야,” 하루히는 기분나쁘게 싱글싱글 웃으며 설명한다. “미쿠루는 정의의 편이니까 일반인에겐 손을 못대. 유키는 그 약점을 이용하는거야. 보통 인간을 최면마법으로 조작해서 말이지. 그래서 공격해오는 일반인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미쿠루는 지쳐쓰러져.” 진작에 지쳐쓰러진 아사히나 선배에게 이 이상 무언가를 시킬 생각이냐, 고 내가 생각하고 있으니 하루히는, “그럼 제일 먼저, 미쿠루짱을 연못에 빠트려.” “에엣?” 놀라는 소리를 지른 건 아사히나 선배로, 츠루야 선배는 깔깔 웃는다. 타니구치와 쿠니키다는 얼굴을 마주보고선 곤혹한 얼굴로 아사히나 선배를 바라봤다. “어이 이봐,” 이상한 반웃음으로 말한 건 타니구치였다. “이 저수지에다가? 아직은 미지근 할런지 몰라도, 이제 가을 다됐다고. 수질도 깨끗하다곤 말할 수준이 아니다만.” “스스스스즈미야상, 저기 하다못해 온수 수영장에라도……” 아사히나 선배도 곧 울것만 같은 얼굴로 필사의 반론을 감행하고 있다. 쿠니키다마저도 아사히나 옹호쪽에 선듯, “그래. 깊으면 어떻게 할거야? 두 번다시 안떠오른다고. 블랙배스(black bass:농어와 비슷한 담수어)도 잔뜩 있는데.” 아사히나 선배를 졸도시킬 소리 하지마. 게다가, 저항하면 할수록 하루히는 옹고집이 된다는 것은 이미 확증이 끝난 사실이다. 하루히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오리입이 되어선, “입다물어. 알겠어? 리얼리즘 이전엔 다소의 희생이 따르는 법이야. 나도 이 씬 장소론 네스호나 그레이트 솔트레이크를 쓰고 싶었다고. 그래도 그런 데 갈 시간도 돈도 없어. 제한된 시간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류의 사명이란 것. 그러면 이 연못을 쓸 수밖에 없잖아.” 대체 무슨 헛소리냐. 어쨌든 아사히나 선배가 물고문을 당해야 한다는 게 전제잖냐. 다른 씬으로 바꾸던지, 뭐 그런 생각은 죽어도 못하는 거냐 이 여잔. 나도 반대에 동참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뒤에서 누가 어깨를 두드렸다. 뒤돌아보니 코이즈미 녀석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알고 있다고. 하루히에게 섣불리 손을 대면 또다시 기괴한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거지. 아사히나 선배의 입에서 플라즈마 화염이 나가는 일이 터지면, 자위대를 적으로 돌려야만 한다. “저저저, 저, 하겠습니다,” 아사히나 선배가 비통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단장(斷腸: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이나 괴로움)의 아픔이란 이걸 두고 하는 말이렷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해야 하는 가련한 소녀의 시련이다. 순 엉터리 전개이지만, 메이킹 비디오에선 이부분이 클라이막스 부분이겠지. 비디오 돌리진 않았지만. 당연히 하루히는 대 기쁨. “미쿠루짱, 좋았어! 지금의 너는 엄청 멋있다구! 그야말로 내가 고른 단원이야! 성장했구나!” 성장이 아니라, 학습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 그럼, 거기 둘은 미쿠루짱 팔을 잡고, 츠루짱은 다리를 잡아. 하나 둘 구호로 간다. 하나 둘 할때 힘차게 못으로 던지는거야.” 하루히가 지시한 것은 다음과 같은 씬이었다. 단역 3인은, 먼저 나가토의 뒤에 정렬하여, 검은옷의 마법사가 휘두르는 안테나 봉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마치 신사에서 하는 액막이행사(お?い)를 받는 것 같다. 어폐(御幣)를 흔들듯 안테나를 다루는 나가토의 무표정은, 그러고보니 왠지 좀 무당이나 무녀틱한 느낌이 날듯 말듯 하다. 그 후, 말없이 아사히나 선배를 가리킨 나가토의 지령전파를 수신한 세사람은, 신선한 생육을 찾는 좀비와 같은 움직임으로 경직한 히로인에게 걸어갔다. “미쿠루-, 미안해. 이런 거 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 조종당하고 있거든. 정말, 미안~.” 재밌어하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츠루야 선배가 고양이같은 입을 하며 웨이트리스에게 다가갔다. 중요할때 소심자가 된 타니구치는 헤메는 척을 하면서, 쿠니키다는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파래졌다가 빨개졌다가 하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거기 바보 둘! 좀더 진지하게 연기 못해!” 바보는 너다, 란 말을 애써 집어삼킨 나는 카메라를 계속 들여다 본다. 아사히나 선배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히 물가쪽으로 뒷걸음치고 있었다. “각오해라~” 츠루야 선배는 밝게 외치며 아사히나 선배를 넘어뜨리더니, 훤히 드러난 허벅지를 두팔로 안았다. 뭐랄까, 지금 엄청 위험하다. “히익…히엣” 정말로 무서워하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 타니구치와 쿠니키다가 각각 한팔씩 들고 들어올린다. “자자자자잠깐만요 저기, 역시……이이이, 이거 정말 필요한 거에요~?” 비통히 부르짖는 아사히나 선배를 보지도 않고 하루히는 힘있게 끄덕였다. “이것도 좋은 영화를 찍기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예술을 위해서야!” 자주 듣는 말이다만, 이런 엉터리 자주영화의 어느 부분이 예술과 관계있는 것일까. 하루히가 호명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하나-둘!” 풍덩. 성대한 물보라가 치고, 못에 사는 수생 생물의 일상을 교란시켰다. “하, 아푸……하아아…아앗!” 물에 빠지는 연기 정말 기가 막히네요, 아사히나 선배……가 아니라, 정말로 빠지는 것 같은데. “발이……안닿…어푸!” 여기가 아마존 강이 아니라 다행이다. 그렇게 바둥거리면 피라냐(piranha:식인물고기) 밥이 되기 십상이지. 뭐 블랙배스는 사람을 습격하진 않겠지-라고 내가 파인더 너머로 생각하고 있으니, 물에 빠진 게 아사히나 선배뿐이 아니란 사실을 발견했다. “으악! 물 마셔버렸다!” 타니구치도 빠져있었다. 아무래도 아사히나를 던지는 기세에 자기까지 던져버린 모양이다. 이쪽은 안심하고 놔두기로 한다. “뭐하는거야 이 멍청아!” 하루히도 같은 의견인 듯 하여, 바보 한 마리를 방치해둔 채 메가폰으로 코이즈미를 가리켰다. “자, 코이즈미군, 네가 나설 차례야! 미쿠루짱을 구해주는거야!” 조명에만 일관하고 있던 주연 남배우는 우아한 미소와 함께 반사판을 나가토에게 건네주더니, 연못가로 다가가서 손을 쭉 뻗었다. “잡으십시오. 진정하시고요. 저까지 빠지지 않도록 천천히.” 대양의 조난자가 나무판자에 달라붙듯 아사히나 선배는 코이즈미의 손을 꼭 잡는다. 흠뻑 젖은 미래인 웨이트리스 전사를 가볍게 당겨 끌어올리고, 코이즈미는 그 몸을 받치듯 다가섰다. 너무 들러붙은거 아니냐, 얌마. “괜찮으십니까?” “……으으…차갑다…” 안그래도 꽉 끼던 코스튬이 젖은 바람에 완전히 그러그러한 상태다. 영화윤리규정관리위원회에 있었으면 주저없이 이 영화는 15세 미만 입장금지를 먹일 거다. 솔직히 말하지, 체포될지도 모르는 수준이다. “응, 완벽해!” 하루히가 메가폰을 두드리며 절찬의 고함을 질렀다. 나는 아직도 물거품을 일으키는 타니구치를 무시하고 있었고, 비디오 카메라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4-05 노점상 씩이나 운영하면서 타월 한 장 없는 건 대체 뭐냐. 츠루야 선배의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나는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영상체크를 하고 있는 하루히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음, 뭐 괜찮네.” 아사히나 수난(水難) 씬을 세 번이고 돌려보고 있던 하루히가 끄덕였다. “첫만남 씬으로는 우선 괜찮아. 이 단계에서의 이츠키와 미쿠루의 뻣뻣함이 잘 나오고 있어. 음음.” 그러냐? 나는 평소 그대로의 코이즈미로밖에 안보인다만. “다음은 제 2단계야. 미쿠루를 구해낸 이츠키군은 그녀를 자기 집에 숨기게 돼. 다음 씬은 거기부터 찍을거야.” 잠깐, 너. 전혀 이어지지가 않잖아. 타니구치 녀석들을 조종하던 나가토는 어디로 간거냐? 타니구치 녀석들은? 어떻게 격퇴당한거냐? 아무리 잡 캐릭이라곤 하지만 묘사가 없으면 관객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거 되게 시끄럽네. 그런거 안찍어도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한테는 전해진다구! 재미없는 부분은 넘겨버려도 된단 말이야!” 이자식, 그냥 아사히나 선배를 물에 빠트리고 싶었던 것 뿐이냐. 내가 의분(義憤:의로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니, 츠루야 선배가 손을 들어 발언했다. “저기말야-, 우리 집이 바로 옆인데 말이야, 미쿠루가 감기 걸릴거 같으니까 갈아입혀도 괜찮을까-?” “딱 좋아!” 라며 하루히는 빛나는 눈을 츠루야 선배에게 향했다. “츠루짱 방을 빌려주지 않을래? 거기서 이츠키와 미쿠루가 사이좋게 지내는 부분을 찍을테니까. 이 얼마나 윤활한 전개야. 이 영화는 분명히 성공할거야!” 편의주의가 인생의 메인 테마인듯한 하루히에게 있어서는 물론 이건 확실히 그냥 생각 나는대로 한 제안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하루히가 그런 걸 생각했기 때문에 츠루야 선배의 이 발언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씻을 수 없다. 하루히가 잡 캐릭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츠루야 선배도 나와 같은 일반일일 텐데. “에-저기, 우리는?” 쿠니키다의 질문이었다. 옆에서 타니구치가 젖은 셔츠를 걸레처럼 짜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가도 돼.” 하루히는 무정히 말하고는, “수고했어. 그럼 안녕. 다신 만날 일 없을걸.” 그걸로 하루히의 머리에서 이 동급생 2인의 이름과 존재는 지워진 것 같았다. 어이없다는 얼굴의 쿠니키다와, 개처럼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터는 타니구치를 두 번다시 보지 않고, 하루히는 츠루야 선배를 가이드역으로 지명하여 재빨리 걸어가기 시작했다. 둘다 좋겠구만, 맡은 역이 끝나서. 어무래도 너희들은 하루히에게 있어선 다쓴 BB탄 정도의 가치인 모양이다. 그건 사실 꽤 행복한 거라고. 왠지 츠루야 선배는 기쁜 듯이, “이야-, 여러부-운, 이쪽이에요-!” 선두에 서서 기를 흔들고 있었다. 하루히의 지멋대로 독단주의는 지금 막 생긴 것도 아닌, 아마 태어날 때 부터의 성질인듯 하고, 태어난 직후에 천지를 가리키고 팔문자숙어(八文字熟語:[주]천상천하 유아독존)를 절규했다고 하는 전설이 후 500년이 지나 스즈미야 하루히 어록의 하나로서 민간전승으로써 유포되어 갔을지도 모르지만, 뭐 그딴거야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다. 집단의 선봉을 이루며 걷는 하루히와 츠루야 선배는, 어느새 의기투합했는지 엄청나게 큰 소리로 브라이언 아담즈의 ‘18 till I die’의 후렴구만을 반복하며 부르고 있었다. 뒤를 걷고 있는 자로서, 일단 아는 사람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엄청나게 창피하다. 묵묵히 걷기만 하는 검은 나가토와 반사판 담당&주연의 코이즈미는 타인인 척도 안하고 잘도 따라가고 있구만. 조금은 어깨를 떨어뜨리고 고개를 숙여 저기 기운없이 걷고 있는 아사히나 선배를 좀 보고 배워라. 그리고 내가 짊어진 짐더미좀 대신 들어주라. 아까전부터 계속 오르막길이라 경사코스 훈련중인 경주마의 기분을 알것 같아졌다고. “자-, 도착-. 이거, 우리집이야.” 크게 소리지르는 츠루야 선배가 한 채의 집 앞에 섰다. 목소리도 큰 사람이었지만 집도 엄청나게 컸다. 아니, 엄청 크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문에선 집이 다 보이지 않기에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확실한 판단 재료다. 문에서 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까지 가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하는 김에 좌우를 돌아보니 고급주택인가 싶을 정도의 담이 원근법을 거슬러 끝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떤 나쁜 짓을 해야 이런 필요 이상의 토지를 가진 집에 살수 있을까. “자자자, 들어와 들어와-” 하루히와 나가토는 사양이란 말을 모르는지, 자기 집마냥 쏙쏙 들어갔다. 아사히나 선배도 온 적이 있는지, 그다지 놀라지 않고 츠루야 선배에게 등을 밀리다시피 하여 들어간다. “매우 고풍스러운 집이군요. 이 유서깊은 모습, 풍취가 있다는 것은 이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시대를 느끼게 해줍니다.” 코이즈미가 감탄하는 척을 하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어디 싸구려 리포터냐 니가. 삼각 베이스볼도 할수 있을 만한 공간을 건너 겨우 현관에 도착했다. 츠루야 선배는 아사히나 선배를 목욕탕으로 데려 가고, 우리를 자기 방에 불러들였다. 뭐랄까, 우리집 내방이 고양이 침실로 생각될 정도다. 널찍한 화실(和室:[다다미를 깐]일본식 방.)을 지나, 어디에 앉아야 할까 고민될 정도다. 하지만, 그런걸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나 혼자인 듯, 하루히는 물론 나가토와 코이즈미도 미안해하는 마음은 전혀 없는 듯 했다. “좋은 방이네. 여기서 촬영을 해도 좋을 정도야. 그래, 코이즈미군 방이라고 하자. 미쿠루짱이랑 짧은 씬 두 개를 여기서 찍는거야.” 방석 위에 앉은 하루히가 손가락으로 만든 사각형 안을 보고있다. 츠루야상의 방은 탁자밖에 없는 간소한 다다미 화실(和室)이었다. 나는 옆에 앉은 나가토를 따라서 정좌했지만, 3분도 못 버티고 그냥 편히 앉는다. 하루히는 처음부터 완전히 편히 앉아선 츠루야 선배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쿠흣! 아, 그거 재밌겠다! 잠깐 기다려봐!” 츠루야 선배는 명랑하면서도 높게 웃더니 방을 나갔다. 나는 생각한다. 츠루야 선배는 일반인 맞는거겠지. 이정도로 하루히와 친하게 놀수 있다는 것은 정신나간 인간이나 인간이 아닌 무엇이라고 밖에는 볼 수밖에 없지만, 다른 어떤 공통되는 파장이 있을 수도 있다. 기다리기를 몇분, 츠루야 선배는 돌아왔다. 가지고 돌아온 것은 아사히나 선배. 그것도 그냥 아사히나 선배가 아니다. 막 목욕을 끝낸 아사히나 선배다. 아무래도 츠루야 선배 것인 듯한 헐렁한 T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니, T셔츠밖에 입고 있지 않았다. “아…. 저, 저기 기다리셨죠…” 젖은 머리에 상기된 피부의 아사히나 선배는 츠루야 선배 뒤에 숨듯이 방에 들어와 오그라들었다. 워낙에 옷자락도 소매도 아사히나 선배에겐 너무 길었기에 T셔츠라고는 해도 원피스같이 보였다. 그것이 또다른 훌륭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잊고 렌즈를 빼지 않은 은색 오른쪽 눈은 위험하지만, 빔이고 뭐고 안나가는 듯 하니 일단 안심하도록 하지. 모자도 안 벗은 채 무릎꿇고 앉아있는 나가토를 어디 섭사(攝社:신사의 일종)로 모시고 싶을 정도다. “자 이거. 마셔마셔.” 츠루야 선배가 마루에 놓은 쟁반에는 인원수 만큼의 잔(glass)이 주황색의 액체로 채워져 있었다. 아사히나 선배는 츠루야 선배가 건네준 오렌지주스를 한번에 반 정도를 마셨다. 오늘 하루 제일 운동량이 많았기에 수분소모가 심했을 것이다. 나도 고맙게 받아 음미하며 마시고 있으니 한번에 다 마셔댄 하루히가 남은 얼음을 씹어먹으며, “자, 그럼 이 방을 촬영하자-” 충분히 쉬지도 못하고 재개된 촬영은 다음과 같은 씬이었다. 기절한 연기를 하는 아사히나 선배를 코이즈미가 안고서 방에 들어온다. 어째선지 이미 이불이 깔려 있어서, 코이즈미는 거기에 아사히나 선배를 내려놓고는 가만히 그 자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사히나 선배의 얼굴은 상당한 홍조, 속눈썹이 흔들리고 있다. 코이즈미는 그 무방비한 몸에 살짝 이불을 덮어주고, 팔짱을 끼고 머리맡에 앉았다. “우-웅…” 아사히나 선배가 잠꼬대같은 소리를 내고, 코이즈미는 넋나간 얼굴로 계속 주시한다. 여기서는 나올 일이 없는 듯한 나가토는 나와 츠루야 상 뒤에서 아직도 홀짝홀짝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파인더를 들여다보며 아사히나 선배의 자는 얼굴을 확대한다. 하루히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았으므로 이번엔 내 취미 세상이다. 하지만 하루히는 주연 둘에겐 리얼타임으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미쿠루짱, 이제 슬슬 일어나. 대사는 방금 말한대로.” “……으으-” 아사히나 선배는 천천히 눈을 뜨고 묘하게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코이즈미를 올려다본다. “정신이 드셨나요?” 라는 코이즈미. “예…. 저기, 여긴….” “제 방입니다.”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세운 아사히나 선배는 왠지 뜨거운 얼굴로 어디다 눈을 둬야할지 몰라 하고 있다. 뭔가 더 섹시한 느낌인데, 이거 연기냐? “고……고맙습니다,” 곧바로 하루히의 지시, “둘다! 거기서 얼굴을 가까이 대! 그걸로 미쿠루짱은 눈을 감고, 코이즈미군은 미쿠루짱 어깨에 손을 걸쳐, 그리곤 바로 쓰러뜨려서 키스해버려!” “에엣…” 어째서인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아사히나 선배는 입을 반 정도 열고, 코이즈미가 들은 대로 아사히나 선배의 어깨에 손을 걸친 장면에서 내 인내가 한계에 달했다. “잠깐만. 너무 생략이 많다고, 아니 그렇다기보다, 왜 이런 씬이 있는거냐? 뭐냐 이건?” “정사씬이야 정사씬. 러브씬. 시간대로도 이쯤엔 이런 걸 넣어놔야돼.” 미쳤냐. 이게 무슨 밤 9시부터 하는 2시간짜리 드라마냐고. 코이즈미 넌또 왜 나쁘진 않다는 얼굴을 하고 있냐. 이런게 상영됐다가는 다음날부터 니 신발장에 백단위의 저주 편지가 들어갈거다. 조금은 생각좀 하고 살아라. 누군가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다다미 가장자리에서 츠루야 선배가 폭소하고 있었다. “히히, 미쿠루, 이상해~,” 안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분명히 아사히나 선배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까전부터 고개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눈이 글썽글썽하며 얼굴은 빨갛고, 그것도 코이즈미에게 안겨선 무저항으로 가만히 있다. 재미없다. “우우-…코이즈미군, 저 머리가 왠지 무거워요…우우” 말을 하는 동시에 아사히나 선배의 몸이 흔들거린다. 약이라도 잘못 먹은건가 싶었는데, 나는 깨달았다. 시선이 빈 컵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되고, 츠루야 선배는 웃으며, “미안-, 미쿠루 주스에 테킬라(tequila:술 이름)를 섞어놨었어. 알콜이 좀 들어가는 게 연기가 더 잘될거라고 해서 말야,” 하루히의 흉계냐. 나는 어이없기보다는 화날 것 같았다. 그런거 몰래 섞지마. “괜찮잖아. 지금 미쿠루짱, 엄청 섹시하다구. 화면발도 좋고.” 라는 하루히. 아사히나 선배는 이제 연기고 뭐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감은 눈 아래가 붉게 물들어있다.섹시한건 좋다만, 코이즈미에게 기대어 있는건 불쾌하다. “코이즈미군, 이제 확 키스해버려. 물론 마우스 투 마우스(mouth to mouth)로!” 안되는게 당연하잖아. 정신을 잃은 사람한테 할 짓이 아니다. “하지마, 코이즈미.” 감독과 카메라맨 중 어느쪽 말을 따를 것인가, 코이즈미는 한동안 생각하는 척을 했다. 맞는다 이자식. 어차피 이미 난 카메라를 내렸다. 그런 씬을 찍을 생각도 찍힐 생각도 없다. 코이즈미는 나를 안심시키듯 미소지으며, 휘청거리는 주연 여배우에게서 떨어졌다. “감독님, 제가 지기엔 짐이 너무 무겁군요. 그리고 아사히나상도 이제 한계이신듯 하구요.” “…저라면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아사히나 선배는 언뜻봐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치, 할수없네.” 하루히는 입을 뿌루퉁하게 내밀고는 취한 처자에게 다가갔다. “어, 렌즈 아직 끼고 있었어? 이 장면 빼야겠네.” 아사히나 선배의 후두부를 딱 하고 때린다. “아…아야야” 아사히나 선배는 머리를 감싸쥔다. “이래가지고 되겠어 미쿠루짱! 이렇게 머리를 때리면 얼른 렌즈를 빼! 자 한번더, 연습” 딱 “아야” 딱 “…히이” 아사히나 선배는 눈을 꼭 감는다. “그만해, 멍청이.” 나는 하루히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뭐가 연습이야. 그게 어디가 연출이냐? 뭐가 재밌냐구.” “뭐야, 이거 안놔. 이것도 약속 사항중 하나야!” “그건 또 누구랑 한 약속이냐. 하나도 재미없다. 재미없다고. 아사히나 선배는 니 장난감이 아니란 말이다.” “내맘이야. 미쿠루짱은 내 장난감이야!” 그걸 들은 순간 피가 거꾸로 도는 듯 했다. 시야가 벌개지는 거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진짜로 열받았다. 한순간 충동이 사고를 능가하는, 그것은 무아지경에서의 반사적 행동이라 이르기에 무리가 없다.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코이즈미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작게 고개를 젓고 있다. 코이즈미가 내 오른손을 멈추게 한 걸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주먹을 높이 쳐든 것을 깨달았다. 나의 이 오른손은, 지금 틀림없이 하루히를 때리려고 한듯 했다. “뭐야…!” 하루히는 눈동자에 플레이아데스 성단과 같은 빛을 담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맘에 안든다는거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나는 단장이고 감독이고…하여튼 반항은 용서못하니깐!” 또다시 내 눈 앞이 새빨개져 왔다. 이 망할 여자. 이거 놔 코이즈미. 동물이든 인간이든 말해서 안들으면 때려서라도 듣게 해야 하는 법이다. 안그러면 이녀석은 평생 가시투성이 인간으로서 모두 피하기만 할 바보가 되어버린단 말이다. “그그…그만하세요!” 뛰쳐온 것은 아사히나 선배였다. 발음이 꼬이는 듯한 목소리로, “안돼요, 싸움은 안돼요…읏” 나와 하루히 사이에 비집고 들어온 아사히나 선배는, 붉은 얼굴로 휘청휘청 무너져내렸다. 하루히의 무릎을 안듯이 하여, “우우…웁.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해요…, 안그러면…우웅-, 아아 이거 금칙이었군요-…” 아사히나 선배는 무언가 중얼중얼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자는 호흡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06 나와 코이즈미는 언덕을 내려가며 걷고 있었다. 눈 아래 펼쳐진 광경은 방금 전의 연못이다. 여배우가 쓸 수 없게 되자 촬영은 중지되었다. 츠루야 선배에게 아사히나 선배를 맡기고 나와 코이즈미, 그리고 나가토는 대저택에서 사거(辭去:인사를 하고 떠남)하기로 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하루히는 혼자서 남겠다고 하곤 나에게서 비디오 카메라를 빼앗아 곧바로 등을 돌렸다. 나도 아무말 없이 잡다한 짐더미만 들고 츠루야 선배의 배웅을 받게 되었다. “미안, 쿈군,” 츠루야 선배는 미안해하면서, 하지만 곧바로 웃으며, “나도 분위기를 너무 탔나봐! 미쿠루 걱정은 안해도 돼. 나중에 보내던가, 뭐하면 재우고 보낼테니까!” 나가토는 문을 나와 곧장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모양이다. 나가토야 뭐 그렇지. 그녀석은 언제나 무감정이니깐. 그리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침묵과 함께 걷기를 5분, 코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좀더 냉정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이미 현실이 이상해져 오는데, 거기에다가 폐쇄공간까지 만들어지게 될 행동은 삼가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알바 아니다. ‘기관’인지 뭔지 하는 웃기지도 않은 비밀조직은 그걸 위해 있는 걸텐데. 너희들이 어떻게든 하면 된다. “방금 전 일 말입니다만, 스즈미야상의 무의식은 어떻게든 자제된 듯 합니다. 폐쇄공간은 아무데도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제가 부탁드리죠, 내일부터는 다시 화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뭘 어쩌든 내 맘이다. 니가 그런다고 ‘예 그렇게 합죠’ 할 것 같냐. “뭐, 그것보다 지금은 현재의 그녀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공간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도록 할까요.” 코이즈미는 순식간에 화제를 돌렸다. 나도 그것에 따르기로 한다. “생각이고 뭐고 나는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간단합니다. 스즈미야상이 무언가 좋은 생각을 떠올릴 때 마다, 이 현실은 불안정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나는 회색 세계에서 파괴의 끝을 보여준 푸른빛의 거인을 떠올린다. “스즈미야상이 무언가를 말하고, 저희들이 그것에 대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세계에서 저희들이 맡는 역할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붉게 빛나는 그 구체의 수를 기억하고 있다. 코이즈미는 천천히 걸으며 확신을 가진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희들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트랭퀼라이저(tranquilizer:진정제), 정신안정제입니다.” “그건…너야 뭐 그렇겠지만.” “당신도입니다.” 전 수수께끼의 전학생은 깔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저희들은 폐쇄공간이 주 작업장이지만, 당신은 이 현실세계 담당이십니다. 당신이 스즈미야상의 정신을 안정토록 해주시면, 폐쇄공간도 생기지 않으니까요. 덕택에 이 반년간 제 아르바이트의 출동 빈도도 낮아지고 있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하겠죠.” “안해도돼.” “그런가요. 그럼 안하겠습니다.” 언덕을 내려와 국도로 나온다. 코이즈미의 침묵도 거기까지였다. “지금부터 모셔다 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싫다면?” “금방 도착하기도 하고, 거기서 뭘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폐쇄공간으로의 초대도 아닙니다.” 코이즈미가 갑자기 한손을 들었다. 우리 바로 옆에 멈춰선 것은 어디선가 본것 같은 검은 택시였다. “이야기를 계속하죠.” 코이즈미는 뒤쪽 좌석의 시트에 등을 맡기며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운전수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 스즈미야상과 당신을 둘러싼 상황은 패턴화하고 있습니다. 스즈미야상의 변덕을, 당신이나 우리들 단원이 구체화하여 형상화시킨다고 하는 구조가 생겨있다는 겁니다.” “귀찮다.” “그렇겠죠. 하지만, 이 패턴화한 현상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비슷한 사태의 반복은 아마도 스즈미야상이 싫어하시는 것중 하나일테니깐요.” 지금은 즐기고 계신듯 합니다만, 이라 말하며 긴박감 빠지게 웃는 코이즈미는, “스즈미야상의 과도함이 영화 내부에서 그치도록, 어떻게든 노력해야만 합니다.”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배트 스윙 연습이나 달리기부터 시작해야하고, 기사(棋士)를 꿈꾸고 있다면 바둑의 규칙부터 외우는게 순서이며, 기말고사에서 1등을 하기 위해서는 밤을 새가면서 참고서를 보겠다는 마음가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즉 노력을 하기 위한 방법론이 사람마다 제각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히의 뇌내 망상을 삭제해버리기 위해서는 대체 무슨 노력을 하면 되는거냐? 하지 말라고 하면 삐져서는 그 망할놈의 회색 공간을 증식시킬거고,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냅두면 녀석의 망상을 따라주면 그 망상이 현실이 될 판국인 거다. 어느쪽을 취하든 양극단(兩極端:양쪽 모두 극단적임. 혹은 몹시 동떨어져 있음.)이다. 그녀석에겐 중용의 개념이 없는거냐. 뭐, 없기 때문에야말로 스즈미야 하루히가 스즈미야 하루히 외의 타인이 아닌 이유지만. 차 밖의 풍경엔 녹색이 서서히 많아졌다. 택시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고 있다. 곧바로 알아챘다. 어제 버스로 찾아간 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비로소 정차하고선, 텅빈 주차장. 신사(神社)의 참배객 전용이다. 어제 하루히가 신주(神主)와 비둘기에게 총구를 겨누었다고 하는 폭거를 일으킨, 그 신사이다. 이상하네. 일요일인 오늘이라면 좀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다. 먼저 택시에서 내려있던 코이즈미가, “스즈미야상이 어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 망언을 언제 다 일일이 기억하고 앉았겠냐. “가면 생각이 나실겁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이미 이 상태였던 모양입니다.” 각석(角石)을 쌓아올려 만든 계단을 올라간다. 이것도 어제 왔었던 길이다. 여길 올라가면 새집이 있고, 본전으로 향하는 길이 있으며, 거기엔 잡색의 비둘기가…. “…………” 나는 침묵한다. 바글바글 모여있던건 확실히 비둘기였다. 이동식 융단처럼 지면을 채우고 있는 조류 한무리. 하지만 어제의 그 비둘기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다. 왜인고 하니, 그 일면에 펼쳐진 비둘기 무리의 깃털이 한 올도 빠짐없이 새하얀 색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페인트칠이라도 한거냐.” 그것도 단 하룻밤만에. “틀림없이 저 새하얀 깃털은 비둘기의 신체에서 자라고 있는 그들 자신의 것입니다. 색을 칠하거나 탈색한 것도 아닙니다.” “어제 하루히의 총격전이 어지간히도 공포였던 모양이군.” 아니면 누군가가 대량의 흰비둘기를 가지고 와서는 신주의 비둘기들과 바꿔치기한거 아니냐. “설마요. 누가 그런 걸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본 거 뿐이다. 결론은 이미 내 안에 있다. 입에 담기 싫다고. 어제, 하루히는 이런 말을 했었다. ‘가능하면 전부 하얀 비둘기였으면 좋겠지만, 이 경우엔 어떤 색이든 눈길을 잡을거야.’ 잡기는 무슨. “그렇게 된 겁니다. 이것도 스즈미야상의 무의식이 초래한 일이지요. 하루의 오차가 있었던 건 행운입니다.” 먹이라도 주려고 했는데, 진작에 우리 발밑엔 비둘기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다른 참배객은 없다. “이렇듯 스즈미야상의 폭주는 착실히 진행중인 겁니다. 영화제작의 폐해가 현실세계에 닥쳐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사히나 선배의 눈에서 광선인지 와이어인지를 쏘게 하는 거 가지고는 성에 안차는 거냐. “하루히를 마취총으로 쏘든지 해서 문화제가 끝날때까지 재워두면 되지 않겠냐?” 나는 제안을, 코이즈미는 쓴웃음으로 대답을 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만, 깨어나신 후의 뒤처리를 감당해 주실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런 서비스는 내 업무엔 없다. 코이즈미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녀석은 신이잖아. 너희들 신자들이 어떻게든 해봐.” 코이즈미는 일부러 놀란 척을 했다. “스즈미야상이 신이라구요?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너잖아.” “그랬었죠.” 이녀석이야말로 맞아야 할 녀석이다. 코이즈미는 웃으면서, 당연한 그 대사, ‘농담입니다’를 하더니, “실제, 스즈미야상을 ‘신’으로 정의해도 문제가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기관’내의 의견은 대세를 따라 그녀를 ‘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반대의견도 있어서, 개인적으론 저도 그 회의론자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만약 그녀가 정말로 신이라면, 그 자각도 없이 이 세계의 내측에 살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라고 하는 자는 머나먼 위쪽 세계에서, 저희들을 조감하면서 여러 기적을 자유자재로 일으키며, 저희들이 놀라는 모습을 냉철히 관찰하고 있는 것일테니깐요.” 나는 몸을 구부려 떨어져있던 깃털을 주웠다. 그 자세 그대로 깃털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비둘기들의 움직임이 커졌다. 미안타, 빵조각 준비는 못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코이즈미는 혼자서 말하고 있다. “스즈미야상은 누군가에게서 신과 같은 능력을 얻었지만, 그 자각은 얻지 못했습니다. 신에 해당하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스즈미야상이야말로 그 신에게 선택받은 특수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것이죠.” 그녀석이 인간이든 아니든 나에겐 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왜 하루히에게 그런 근거없는무의식 매지컬 파워가, 비둘기를 하얗게 만들어버린다든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거냐. 뭘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글쎄요. 아무도 모릅니다. 당신은 아시겠습니까?” 이자식이 누구한테 싸움을 거는거냐. “이런, 실례를 했습니다” 라고 웃으며, 코이즈미는 말을 이었다. “스즈미야상에게는 세계를 구축하는 자이며, 동시에 파괴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희들의 이 세계는 실패작일지도 모릅니다. 그 실패한 세계를 수정하는 사명을 가진 자가, 스즈미야 하루히라고 하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얼마든지 지껄여봐라. “그렇다면, 저희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옳은 건 언제나 스즈미야상으로써, 그녀가 하는 행위를 방해하는 저희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이분자(異分子), 뿐만아니라 스즈미야상 외의 전 인류가 잘못된 것이 됩니다.” 흐-응. 그거 엄청 큰일이구만-. “문제는 틀린 측에 속하는 저희들입니다. 세계가 바른 세계로서 재구축되었을 때, 저희들은 과연 그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해충(bug)으로써 배제될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면 말하지마. 그것도 다 안다는 말투로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론, 지금까지 그녀가 그다지 세계를 잘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건 말입니다, 그녀의 의식이 창조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스즈미야상은 매우 긍정적(positive)인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역방향으로 향하면 어떻게 될까요.” 입을 다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포기하고 나는 물어주었다. “어떻게 되는데.” “모릅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만드는 것 보다는 부수는 것이 더 쉬운 법입니다. 그런 거 안믿으니까 없애버려,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뭐든 ‘없는’ 것이 되겠지요. 모든 것의 취소(cancel)가 가능해집니다. 아무리 강대한 적이 나타난다고 해도, 스즈미야상은 그들을 부정해버리는것 만으로 간단히 소멸시켜버릴 수가 있는것입니다. 마법이든 고도의 과학기술이든, 그 어떠한 것이 상대라고 해도 말이죠.” 하지만 하루히는 부정하지 않겠지. 그건 그녀석이 애절하게도 찾아헤매던 것이니까. “그것이 곤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코이즈미는 전혀 곤란하지 않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스즈미야상이 신인지 신과 비슷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유롭게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그 결과 세계가 변화해버린다고 하여도, 변화한 걸 아무도 알아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꽤 대단한 겁니다. 왜인가 하면, 그 변화는 스즈미야상 본인밖에 알수가 없으니까요.” “왜냐.” “스즈미야상도 그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조물주가 아니라는 방증 중 하나입니다. 세계를 만든 신이라면, 세계 외측에 있을 테죠. 하지만 그녀는 저희들과 같은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어중간한 개변밖에 할 수 없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극히 이상한 것입니다.” “나한텐 니가 더 이상해 보인다만.” 코이즈미는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이 세계를 상당히 좋아합니다. 갖가지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인류가 언젠가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천동설이 정설로서 태양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있다, 같은 개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스즈미야상이 그런 것을 믿지 않도록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폐쇄공간에서 돌아오신것 아닙니까?” 글쎄, 어떨까. 잊어먹었단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는 봉인하는 법이다. 코이즈미는 입가에만 웃음을 지었다. 자조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주제넘는 말씀을 드렸군요. 마치 자신들이 세상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정의측 인간과 같은 말투였네요. 실례했습니다.” -제 4화 끝 제 5화 일요일 아침은, 이미 문화제까지 1주만을 남기고 있음에도 여전히 헐렁한 분위기였다. 정말로 문화적인 축제를 할 생각이 있는 거냐 이 학굔. 더 열심히 바둥거려도 되잖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 여유있는 모습이다. 덕분에 난 피곤해 죽겠다. 그것도 교실로 가는 도중에, 날 더욱 피곤하게 만드는 장면이 날 기다리고 있다. 우리 교실 앞에 코이즈미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어제 그렇게나 말해대고도 아직 또 뭐가 있다는거냐. “9반의 연극 무대연습이 아침일찍부터 있어서 말입니다. 여긴 그냥 들른 것일 뿐입니다.” 아침부터 니 니글거리는 면상을 보고싶지는 않았다만. “뭐냐. 그 망할 공간이 발생해버렸다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어제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스즈미야상은 화가 나셨다기보다 쓸쓸하기에 바쁘신 것 같네요.” 왜일까. “알고 계실텐데요…. 그럼 설명드리죠. 스즈미야상은, 당신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편에 있을거라 믿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당신은 그녀의 편에 섭니다. 무슨 일을 저지르더라도 당신만은 용서해줄 거라고 말이죠.” 뭐가, ‘말이죠’냐. 그녀석을 용서하라니, 옛날에 순교한 역사상의 성인이 아니고서야 못할 일이다. 말해두겠다만 나는 성인도 위인도 아닌, 상식적인 일반인이다. “스즈미야상과는 어떻습니까?” 어쩔줄 알았냐. 그대로다. “다시 기운을 차리도록 무슨 말씀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흰 비둘기는 귀엽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스즈미야상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으면, 신사의 비둘기가 더 이상 비둘기가 아니게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뭐가 되는데.” “그걸 알면 이 고생 안하죠. 여러개의 끈적끈적한 촉수를 가진 동물들이 신사 내를 꿈틀거리면서 기어다니고 있으면 기분 나쁘잖아요?” “소금이라도 뿌리면 되겠지.” “그래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스즈미야상은 이도저도 아닌 상태입니다. 지금까지는 영화촬영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현실을 변용시켜버렸지만, 어제 당신과의 일 하나로 갑자기 벡터(獨:vektor,英:vector)가 역류해버렸습니다. 긍정(positive)에서 부정(negative)으로요. 그걸로 사태가 수습되면 좋겠습니다만, 이래가지고는 한층 더 끔찍한 일이 될 것 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보고 그녀석을 위로하라는 거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습니까. 화해하셔서 원래사이로 돌아와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원래고 나발이고 나는 그런 사이였던 적 따위 없다. “글쎄요. 당신도 지금쯤 쓸쓸하실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제 예상이 틀렸나요?” 나는 침묵을 지켰다. 어제 화를 내버린 이유는, 아사히나상에 대한 포악함을 본 나의 선량한 마음이 그리 만들었다-고도 할수 없다. 단지 칼슘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어젯밤에 우유 1리터정도 마시고 잔 다음에 일어났더니, 이상하게도 진정되더라구.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투약 형식에 따르는 심리효과)일런지도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왜 내쪽에서 다가가야 하는건데. 누가봐도 이건 그녀석이 설쳐서 그런거란 말이다. 코이즈미는 길든 고양이처럼 목을 울리지 않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내 어깨를 탁 쳤다. “잘 부탁드립니다. 당신이 거리적으로 가장 가까우시니깐요.” 내 바로 뒤에 앉는 하루히란 내가 뒤돌아보지 않는 이상 얼굴 마주대할 일이 없다. 오늘은 한층 더 하늘이 신경쓰이는지, 하루히는 창문 밖만을 바라보며 점심시간까지 그 상태를 지속시켰다. 더하여, 어떤 전염병인지 타니구치마저도 기분이 비뚤어져 있었다. “뭐가 영화냐. 어제는 괜히 갔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밥을 먹으며 막말을 해대는 타니구치였다. 하루히는 점심시간에 거의 없어지며, 오늘도 마찬가지다. 있었다면 이녀석도 그런말은 못하겠지. 소심한 녀석들은 안전권에 있으면 목소리가 큰 법이다. “스즈미야가 하는일이라구. 그 영화란 것도 어차피 쓰레기같은걸 거다. 당연하지 뭐.” 누가 뭔 소리를 하든 좋다. 나는 내가 위대한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며, 역사에 이름을 새길 것 같지도 않다. 구석지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뭐 그런 인간이다. 나는 요리도 못하면서 어머니가 만든 음식에 트집을 잡는다든지 하는 걸 잘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두고 싶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너한테만큼은 그런소리 듣고 싶지 않다.” 타니구치, 너는 뭘 하냐? 하다못해 하루히도 문화제에 참가하여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있다. 귀찮기 짝이 없는 일로밖엔 되지 않지만, 최소한 아무것도 안하는 주제에 불만만 토로하는 녀석보다는 낫다. 이 멍청한 녀석아. 전국의 타니구치 씨에게 사죄해라. 네놈과 같은 성을 쓰고 있다니 네 이외의 다른 타니구치 씨에게 있어선 불쾌할 뿐이라고. “진정해, 쿈.” 쿠니키다가 끼어들었다. “쟨 삐져있는거야. 실은 스즈미야상네랑 더 놀고싶은 거라구. 쿈이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그딴거 아냐.” 라며 타니구치는 쿠니키다를 노려봤다. “나는 그런 바보집단이랑 한패가 될 생각은 없다고.” “부르니까 바로 따라갔잖아? 어제도 좋아라했었잖아. 어디 나갈 약속까지 취소하면서말야.” “시끄러, 멍청이.” 타니구치가 기분이 나빴던건 그런 이유였던 거냐. 간만에 약속까지 하나 날리면서 와보니깐, 거의 찍어주지도 않고 퇴장을 먹였으니까 말야. 물에까지 빠졌다. 그렇군, 동정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진 않다. 왜냐면 나는 나대로 화나있으니까 말이다. 하루히의 영화가 눈에도 안들어올 정도로 보잘것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언제나 전후 생각도 않고 전력질주만 하고 있으니, 그날 그시간에 찍고싶은걸 찍을 뿐, 연결도 연출도 없다. 그걸로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천재가 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보건대 하루히에게 감독의 재능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타인에게 지적당하는것은-글세, 왜 화가 나냐면…. “어떻게 된거야 쿈. 오늘은 스즈미야상도 별로 기분 안좋아보이고. 무슨일이 있었어?” 쿠니키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도 타니구치나 마찬가지다. 하루히가 시키는대로 굽실거리곤 뒤돌아 툴툴거리는 것 뿐이다. 내가 이녀석에게 느낀 건 내 자신에게도 딱 들어맞는다. 하루히가 하는 일을 따르다 뒤돌아 싫증이 나는 기분은…,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인 것이다. 나만의 역할. 타인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윽, 제길. 타니구치 이 망할 녀석. 니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런거다. 너때매 지금부터 계속 후회하는 듯한 소리를 하게 되잖냐. 나는 무엇을 했는가. 도시락에 뚜껑을 덮고, 그대로 교실을 나와버렸다. 하루히는 문예부 부실에 있었고, 비디오카메라와 컴퓨터로 뭔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고는 놀란듯이 얼굴을 들었다. 왼손에 들고 있는건 카레빵이냐. 그 빵을 허둥대며 던지더니, 뒤로 손을 뻗어 머리를 만지-나 했더니, 검은 머리를 풀었던 것 뿐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묶고있던 뒷머리를 서둘러 푼 모양이다. 잘 보고 있지도 않았고,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면 되는 거다. 나는 지금 지금 해야 할 말을 했다. “어이, 하루히.” “뭐야.” 하루히는 전투태세에 접어든 고양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에 나는 말해버렸다. “이 영화는 반드시 성공시키자.” 기분이라고 하는 거다. 나도 일년에 두 번 정도는 기분이 업 될 때가 있다. 어제 화난 건 그 이유다. 어쩌다 그거랑 겹친거라고. 그게 오늘은 코이즈미의 이상한 말이랑 타니구치의 바보면상이랑 하루히의 우울한 얼굴이 다 뭐랄까, 섞여가지고 나도 어근버근해 있었던 거다. 이 충동을 가만히 놔두면 교실 유리를 깨고 뛰어내렸을지도 모르니, 여기서 해소해버리기로 한 거라고. 왜 난 이런 변명을 하고 있는 걸까나. “음” 이라 하루히가 말했다. 그리곤, “당연하지. 내가 감독을 맡고 있으니까. 성공은 약속된거나 다름없어. 네가 말 안해줘도 말이지.” 이 어떠한 단순함인고. 조금은 기특한 얼굴이라도 해줄줄 알았다만, 하루히의 의미불명에다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는, 어디서 충전한 건지 다시 자신감의 불꽃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간단하다. 자신에게 고레벨의 회복마법을 쓰는 중에 나타난 보스 정도의 번거로움이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필요한 건 밸런스다. 공격 한방으로 약한 녀석을 매장시켜버리는 게임은…뭐라고 하더라, 그래, 카타르시스란 게 없다구. 뜻은 잘 모르고 애초에 별 의미도 없으니, 그러니까 나는, 힘빠진 하루히따위 기분나빠서 보기 싫다 그거다. 이녀석은 평소에 끝도없이 의미도 없고 근거도 없으며 목적지도 없는 뇌내 1000미터 대쉬를 할 녀석이니까 딱 좋다. 갑자기 멈춰버리면 쓸데없이 무의식중에 알도못할 짓을 해 버릴 것 같으니까. 그것뿐이다. ……이라 나는 그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5-02 그날 방과후의 일이다. “더 하신 말씀은 없었습니까?” 코이즈미가 묻고, “미안.” 나는 대답했다. “기운을 내게 하신다고는 해도, 좀 뭐……별 영향이 없는 걸로 해주셨으면 했습니다만.” “……미안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기 보다, 오히려 더 파워풀해졌는데요?” “………” “이래선 숨길 수가 없겠군요.” 반성하는 나에게, 코이즈미는 온화한 색을 띄운 눈을 향했다. 비난하고 있는건 아닌거 같다만, 그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의 음계를 띠고 있다. 그렇겠지, 사태는 확실히 악화하고 있고, 그건 아무래도 내 탓 같으니깐. 왜냐고? 그걸 내가 아냐. 벚꽃이 만개해 있다. 재확인해두지, 지금은 가을이다. 확실이 아직 잔서(殘暑:남은 더위.늦더위.)가 다 가시지 않았다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여 일본의 벚나무는 봄에 피는 거다. 약간의 플라잉이라면 봐줄 수도 있지만, 반년은 이르다. 벚나무도 태양의 정신나간 짓거리를 따라할 생각은 아니겠지. 벚꽃이 떨어지는 가운데, 하루히 혼자만 엔진 전개였다. 웨이트리스 복장의 아사히나 선배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건 때이른 꽃관광객 사이에 있기 때문이겠지. “이 얼마나 좋은 상황이야! 어쩐지 벚꽃 장면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거든. 훌륭한 타이밍의 이상현상이네!” 하루히는 입에 거품을 물고는 아사히나 선배에게 무리한 포즈를 강제로 시키고 있었다. 안돼, 역시. 인간이란, 일시의 감정으로 무슨 짓을 해버리면 그것은 반드시 미래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법이며, 현재의 나는 이 반년간 계속 그 비스무리한 일들만 반성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 이랬으면 좋았겠다’가 아닌 ‘그러는게 아니었다’라는 실로 소극적인 개인 반성대회다. 누가 총좀 빌려줘라. 모델건 말고 진짜. 벚나무는 낮쯤에 꽃봉오리를 부풀리더니, 해질녘에는 만개해 있었다고 한다. 가을의 대사건으로, 지역 방송국에서 중계까지 나와있다. 가끔은 이런 일도 있다고 생각해줬으면 고맙겠네. 최근 몇 년의 지구규모 이상기후가 원인이다. 그렇게 해둬. 알겠지? “스즈미야상께서 이렇게 생각하신 모양이네요.” 조금 전까지 아사히나 선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가를 걷고 있던 코이즈미가 말한다. 외모만 좋은 이녀석과 모든 것이 좋은 아사히나 선배의 투샷은, 세상 남성들을 초조하게 효과를 내기에 적격이어서, 나를 기분나쁘게 만들었다. 나가토는 벚꽃에 그렇다할 감성도 없이, 또한 표정도 없이, 체내 시계가 미쳐버린 벚꽃들을 막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검은 망토 위에 분홍색 꽃잎이 몇장 달라붙어 아주 약간의 엑센트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녀석은 흰 비둘기 사건을 알고는 있는걸까. “그래! 고양이를 잡아오자!” 갑자기 하루히가 말했다. “마녀한텐 조수가 있어. 그걸론 고양이가 딱이지! 어디 까만 고양이 안굴러다녀? 털결 좋은 녀석.” 잠깐. 나가토의 초기설정은 나쁜 우주인 아니었냐? “됐으니까 고양이야! 내 이미지론 그거야. 고양이가 있을만한 데가 어딜까.” “애완동물 가게지.” 내 적당히 넘기려는 대답에, 하루히는 웬일로 타협하는 듯한 말을 했다. “도둑고양이면 돼. 파는 고양이나 집고양이는 빌리고 돌려주고 하는거 귀찮으니까. 어디 공터에나 가면 고양이가 모여있는 데 있지 않아? 유키, 혹시 몰라?” “알아.” 나가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종교지도자와 같은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가토가 모르는 것 따윈 없겠지. 내가 5년쯤 전에 잃어버린 돈지갑이 어디 있는지 물으면 가르쳐 줄 지도 모르겠군. 당시 내 전재산으로, 500엔 정도는 들어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도보로 15분 정도 이동한 후의 도착지점은, 나가토가 혼자 살고 있는 호화 맨션 뒤쪽이었다. 손질의 범위가 닿는 잔디가 펼쳐지고, 주위를 정원수가 에워싸 바깥에서의 시선을 차단시키고 있다. 거기엔 고양이가 몇 마리고 모여있었다. 도둑고양이인 듯한데 사람을 겁내지 않는 녀석들 뿐이라,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나는 척도 안한다. 먹이라도 주는가 싶었는지 발치에 착 달라붙어있을 정도다. 하루히가 그중 하나를 들어올렸다. “새까만 녀석은 없네. 좋아, 이 고양이면.” 삼색 고양이(三毛猫:흰색,검정,갈색이 섞인 고양이)로, 귀중하게도 수컷이었다. 하지만 하루히는 그게 얼마나 희귀한 종인지 모르는 모양인지 자신의 무작위 추출의 결과에 놀라지도 않으며, “자, 유키. 이게 네 짝이야. 사이좋게 지내.” 나가토는 하루히가 들어올린 삼색고양이를 아무말 없이 받아들었다. 노상에서 휴지를 받은 것과 같이 무감정한 모습이며, 고양이도 무감동하게 건네어지고 있다. 곧바로 그 곳에서 촬영이 재개되었다. 맨션 뒤측이다. 이제 뭐 장소따윈 어디든 상관없는 모양이다. 내 비디오카메라에 가득 들어있는 건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찍은 잡다 컷뿐이다. 이걸 편집하여 제대로 된 한편의 이야기로 만드는 게 내 일은 아니겠지. “유키, 미쿠루짱에게 공격!” 하루히의 지령에 나가토는 이상한 자세를 유지한 채 끄덕였다. 왼 어깨에 고양이를 태운 검은 의상의 마법사. 아무리봐도 고양이가 중량초과다. 삼색 고양이가 얌전히 나가토에 매달려있는 건 좋은데, 나가토는 고개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기울여 고양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balance)을 잡고 있었다. 그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유지하며 아사히나 선배에게 봉을 휘두른다. “받도록 하라.” 아마 이 씬에선 나가토의 봉에서 불가사의한 광선이 나가는 걸로 되어있겠지. “…히잇-” 이라며 아사히나 선배는 괴로워하는 연기. “좋아 컷!” 하루히는 만족스럽게 외쳤고, 나는 녹화정지. 코이즈미는 반사판을 내린다. “그 고양이, 말하는 고양이로 할거야. 마법사가 기르는 고양인걸, 놀리는 소리 한마디 정돈 할줄 알겠지!” 택도 없다. “네 이름은 샤미센이야. 자, 샤미센, 뭐라 말해봐!” 말할 리가 있냐. 아니, 말하지 마라. 내 바램이 하늘에 닿았는지 샤미센이라는 불길한 명명(命名)을 받은 삼색 고양이는 갑작스레 일본어를 말해대는 일 없이 꼬리털을 다듬으며 하루히의 명령을 무시하였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숨 놓는다. “순조롭네.” 하루히는 오늘 찍은 영상을 재확인하며 만족스럽게 웃음짓고 있었다. 오전중까지의 표정이 거짓말같다. 기분전환이 빠르다는 건 좋은 거다. 그것만은 칭찬해주어도 좋을 일이다. “쿈, 그 고양이는 네가 돌봐.” 감독용 의자를 접으며 내게 억지명령을 내렸다. “집에 데리고 가서 환대해줘. 이제부터 할 촬영에 필요하니까. 잘 길들여놓는거야. 내일까지 재주라도 하나 가르쳐놔. 그래, 불로 된 링 통과하는거 라든지 말야.” 나가토의 어깨에 가만히 매달려 있는것 만으로도 고양이로선 훌륭한 부류에 속할 거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내일부터 마지막 씬이야! 드디어 클라이막스(climax)로 촬영쾌조, 컨디션은 최고조야! 모두 푹 쉬고 내일 다시 모이는거다!” 메가폰을 휘두르며 해산을 선언한 하루히는 ‘블레이드 러너’의 엔딩 테마를 흥얼거리며 혼자 돌아가고 있었다. “휴-” 한숨으로 유니슨(unison:합창,일치)을 이루는 나와 아사히나 선배. 그 외 둘, 코이즈미는 반사판을 옆구리에 끼고는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고, 나가토는 샤미센을 잉크 떨어진 볼펜을 보는듯한 시선을 주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려 삼색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수고 많았다. 다음에 고양이밥 캔 하나 사주마. 아니면 말린 멸치가 좋냐?”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명랑한 바리톤이 그런 대사를 뱉어냈다. 이곳에 있는 그 다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다. 나는 코이즈미와 아사히나 선배가 놀라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나가토의 무표정을 봤다. 같은 곳에 시선을 향하고 있다. 내 발치에. 그곳에는 삼색고양이가 있었으며, 둥글고 검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이어이.” 나는 말했다. “지금건 나가토냐? 나는 너한테 물은게 아니라고. 고양이한테 물은 거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답도 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된 말이라도 한 것인가.” 라고, 고양이가 말했다. “난처해졌네요.” 이건 코이즈미다. “깜짝 놀랐어요. 고양이가 말을 하다니……” 이건 아사히나 선배다. “………” 나가토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샤미센을 들고 서 있다. 그 샤미센은, “나는 너희들이 왜 놀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라고 말하고는 나가토의 어깨에 매달렸다. 괴물고양이, 고양이귀신의 일종이다. 몇 년을 살아야 이렇게 된다더라. “그것도 나는 알 수 없다. 나에게는 시간의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지금이 언제인며 언제가 과거인지는 나에겐 흥미없는 일이다.” 고양이가 말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미묘하고도 관념적인 말을 지껄여대고 있다. 고양이 주제에 건방지기는. 삼미선옥(三味線屋:샤미센[일본의 발현악기]가게)은 어디 있을까. 타운 페이지에 실려있을라나? “확실히 나는 너희들에게 있어 사람의 말로 들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앵무새나 잉꼬 류도 그 정도는 하지 있지 않는가. 무슨 이유로, 너는 내가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가진 음성을 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인가.” 뭐라는거냐, 이자식. “그게 왜냐면,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하고 있으니까 그런거다.” “내가 내는 음성이 우연히 너의 질문에 대하는 응답에 부합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자면 인간끼리도 대화가 성립하지 않게 되잖아.” 난 또 왜 고양이를 상대로 이런 진지한 말을 하는거냐? 삼색 도둑고양이 샤미센은 앞다리를 할짝 핥더니 귀 밑을 긁는다. “바로 그대로다. 너와 그쪽의 아가씨가 흡사 대화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였다 하여도 그것이 바른 의사전달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건방지게 떫은 목소리로 말하는 샤미센이었다. “누구든 속마음과 원칙을 가려 쓰고 있으니까요.” 라는 코이즈미. 넌 좀 닥치고 있어. “듣고 보니 그렇……네요.” 라는 아사히나 선배. 죄송합니다만, 당신도 좀 닥쳐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잔디에 뒹굴고 있는 고양이들을 한 마리 한 마리 데려다 조사를 해보았다. 샤미센 이외의 고양이들은 ‘미유-’나 ‘냐옹’이나 ‘우-’ 정도의 소리밖에 낼 수 없는 것이 판명되고, 아무래도 이 수컷 삼색 고양이만 어쩐 이유에선지 별안간 인간 언어 구사능력을 획득한 듯하다. 대체 왜? 그 멍청이 때문이다. 5-03 “현황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네요.” 머그컵을 우아하게 입가로 가져가는 코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아직도 스즈미야상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무슨 말이세요?” 라며 아사히나 선배가 소곤거린다. “스즈미야상의 영화내 설정이 세상의 상식으로서 고정되어버릴 우려가 생겼습니다. 그녀가 상상하는 영화내용이 현실화하여, 그것이 그대로 보통 정경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아사히나상께서 레이저를 쏘신다던가 고양이가 말을 한다던지 하는 게 말이죠. 만약 그녀가 ‘거대운석이 낙하하는 씬을 찍고 싶다’고 생각하시면 정말로 그것이 현실이 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현재, 하루히를 제외한 SOS단의 네명이 집합하여 있는 곳은 역앞의 찻집이다. 전원이 대(對) 하루히 대책 긴급합동대책본부의 설치를 제창한 코이즈미에 찬성했다. 아무래도 심각하며, 금방이라도 큰일이 터질 듯한 급박한 상황이 된 모양이다. 겉보기에는 고등학생 몇 명이 나누는 철없는 담소(웃고 있는 건 코이즈미 뿐이었지만), 그러나 하는 건 특촬물의 악당간부가 정의측의 필살기를 막을 방법을 연구하는 것과 같이 수상함이 넘치는 모임이었다. 참고로 샤미센은 가게 밖에 나무 심어 놓은 곳에서 기다리도록 시켰고, 거기서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도록 부탁해놓았다. 별 불만의 기색 없이 ‘나쁠 것 없지’라고 대답한 고양이는 길옆의 상록수 그늘에 몸을 숨기듯이 웅크리고 앉아 나를 배웅하였다.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한층 더 심각한 아사히나 선배. 가엾게도 상당히 지쳐있다. 하루히 영화 덕분에 가장 신경이 병들어버렸으니까. 나가토는 원래의(default) 무표정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차림새도 그 검은 옷 그대로다. 코이즈미가 핫오레를 홀짝홀짝 마시며 말하고 있다. “하나 확실한 건 스즈미야상을 이대로 놓아두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니가 그런 소리 할 것도 없어.” 나는 냉수를 한번에 들이마셨다. 주문한 애플티는 진작 다 마셔버렸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루히를 멈추느냐가 문제인거잖아.” “어떻게라고 하셔도 말입니다, 이제와서 영화촬영을 중지하는 것이 누가 가능할까요. 최소한 전 자신이 없습니다.” 당연히 나도 없다. 하루히는 일단 발동이 걸리기만 하면 스위치를 끄지 않는 한 어디까지든 달려가버릴 거니까 말이다. 헤엄을 멈추면 죽어버리는 물고기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계보를 타고 올라가면 그녀석 선조에 멸치나 가다랑어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가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얼굴로 묵묵히 시나몬 티를 마시고 있다. 정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며, 그저 극단적으로 조용한 걸 수도 있다. 이녀석이랑은 반년이나 같이 지냈지만 뭘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나가토,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뭐 의견이라도 없냐?” “………” 컵으로 소리도 없이 컵받침에 내려놓은 나가토는,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나를 보았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지난번과 달리 이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프리즈 드라이(freeze dry)한 목소리였다. “정보통합사념체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코이즈미가 우아하게 이마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저희들은 곤란합니다.” “우리는 곤란치 않아. 오히려 관측대상에 변화가 생긴 것은 환영할 만한 것.” “그렇습니까.” 나가토가 깔끔하게 끝장을 보고, 코이즈미는 또다시 내게 얼굴을 돌렸다. “그럼 스즈미야상의 영화가 어떤 장르가 될지, 그걸 결정지을 필요가 있겠군요.” 참나, 이녀석은 또 알지도 못할 말을 지껄일 생각일거다. “이야기의 구조는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세계 범위 내에서 진행되는가, 구조를 파괴하여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가, 파괴한 구조를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가.” 아니나다를까 연설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아? 이사람 대체 뭔소리야? 뭐 그런 거다. 아사히나 선배도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보지 마십쇼. “그런데 저희들은 그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를 추측하거나, 관측에 의해 지각해야만 합니다.” 구조라니, 뭔 소리냐. “말하자면 저희들의 이 ‘현실’을 생각해 보죠. 저희들이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세계 말입니다. 그에 대하여 스즈미야상이 만드시는 영화는 저희들에게 있어서 픽션(fiction)입니다.” 당연한 거잖아. “저희들이 문제시하는 것은 그 픽션내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라클 미쿠루 아이(eye), 비둘기, 벚꽃, 고양이. “허구에 의한 현실로의 침식은 막아야만 합니다.” 어쩐지 코이즈미는 이런 말을 할 때는 힘이 솟는가보다. 매우 밝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반항으로 나는 흐린 얼굴을 하기로 한다. “스즈미야상의 이능력(異能力)이 영화제작이라고 하는 필터를 통하여 표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픽션은 어디까지나 픽션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을 스즈미야상에게 각인시켜야만 합니다. 지금의 그녀는 그 범위를 무의식중에 애매화 시키고 있으니까요.” 꽤나 흥이 올랐구나. “픽션에서 일어난 일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론적 수속을 통하여 증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 영화가 합리적으로 끝나도록 유도해야만 합니다.” “고양이가 말하는 걸 어떻게 정당화시키면 되는데?” “정당화라고 할 수는 없죠. 그렇게 되면 결국엔 고양이가 마구 말해대는 세상이 구축되어버립니다. 저희들의 ‘현실’에서의 고양이는 말하지 못합니다. 말하는 고양이에 뭐가 잘못됐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양이가 말하는 세상은 저희들의 세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 중 하나이니까요.” “우주인에다 미래인에다 ESP는 있을 수 있는 일이냐?” “예, 물론이지요.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저희들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스즈미야상에게 알려져서는 안된다, 라는 조건하에 말이죠.” 그러냐? “예를 들어 저희들 세계를 어느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하죠. 그 내지 그녀에 있어서 ‘현실’의 세계가, 이전의 당신처럼 초현실적인 초자연현상이 없는 세계-우주인도 미래인도 초능력자도 없는 세계 말입니다-라면, 저희들의 ‘현실’은 실로 픽셔널(fictional)한 세계로 보이겠지요.” 그게 네가 말하는 신의 정체냐.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본 경우일 뿐입니다. 당신은 이미 이 세계에 초자연적 존재-즉 저나 나가토상이요-가 확실히 현재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 세계에 살아가는 이상, 당신도 다시 그 구조 속에서 현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현실의식은, 1년 전과 비교하여 상당히 달라졌을 거니까요.” 모르고 사는게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글쎄요. 어쨌든, 하나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스즈미야상은 이전의 당신과 같은 상태입니다. 즉 아직 현실인식이 변화할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입으로는 여러 말을 하시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초자연적 존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녀가 본 것이라면 폐쇄공간과 ‘신인’ 정도입니다만, 스즈미야상은 그때 일을 꿈으로 알고계시죠. 꿈은 허구입니다. 그렇기에, 이 ‘현실’은 아직 저희들에게 있어 현실로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다고 한다면. “예, 그렇기 때문에 이대로 허구가 계속 현실화하여 스즈미야상이 그것을 ‘현실’이라 인식하시면, 말하는 고양이의 존재는 ‘현실’의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고양이가 말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에, 말하는 고양이의 존재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세상 자체의 재구축이 필요로 합니다. 스즈미야상은 고양이가 말을 하여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를 만들어내시려 하겠지요. 아마도 SF적인 세계관은 되지 않을겁니다. 그녀의 사고패턴으로 봐서 그런 귀찮은 일을 하시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판타지의 이론이 순식간에 세상을 지배하게 되겠지요. 고양이가 말하는 것에 아무런 이론이나 증명이 필요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고양이가 있다, 라는 그저 그 사실만으로 충분합니다. 왜 말하는 고양이가 있냐는 익스큐즈(excuse)는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면 고양이는 원래부터 말할 수 있는 동물인게 되어버리니까요.” 코이즈미는 머그컵을 놓고서 도기그릇의 끝을 손으로 문지른다. “그렇게 되면 무척 곤란해집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구축하고 있던 개념이 완전히 뒤집혀버리니까 말이죠. 저는 나름대로 인류의 관측결과와 사고실험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연에 말하는 고양이가 있다는 것은 관측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예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의 이 세계에 있어선 이상한 존재입니다.” 너희들은 어떻게 되는데. 초능력자나 말하는 고양이나 그게 그거잖아. “예, 그렇기에 저희들 또한 세계에 있어선 기정법칙을 흔드는 이물(異物)입니다. 저희들이 존재하는 건 스즈미야상 덕분이겠지요. 그리고 이 말하는 고양이도 그렇습니다. 그녀가 영화에 등장시키려 했다, 바로 그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스즈미야상이 만드시려 하는 영화의 내용과 이 현실세계가 연결(link)되려 하는 것 같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기만 하면 어쩔거야. 뭐 어떻게 안되냐. “그러기 위해서 먼저 영화의 장르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적당히 해두라고 말하고 싶군. 혼자서 좋다고 열변을 토하는 것이, 자기야 즐거울 지 몰라도 한번 듣는 사람 입장이 되어봐라. 전교 조례때의 교장 훈사말씀에 필적할 정도다. 봐라, 아사히나 선배도 아까전부터 이상하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계시잖냐. 하지만 코이즈미는 아직도 할 말이 남은듯, “만약 이것이 판타지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고양이가 말하거나 아사히나상의 눈에서 빔이 나간다는 것 등의 현상은 아무런 설명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 세계는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있는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창문밖으로 시선을 옮기고, 아직 샤미센이 그곳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말하는 고양이나 미쿠루빔이 존재하는 것에 어떠한 이유가 있는고 하니, 그 시점에서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희들이 몰랐을 뿐이지 고양이가 말하거나 아사히나상께서 빔을 쏘신다거나 하는 현실은 확실히 있다, 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관측에 의하여 존재증명이 되어버린 겁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희들의 세계는 변모합니다. 초현실적 현상이 없는 세계에서 초현실적 현상을 내포한 세계를 재인식해야만 하게 됩니다. 저희들이 알고있던 현실세계는, 사실 거짓된 것인 게 되어버리니까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녀석 죽어도 말은 안멈출 모양이다. 즉 고양이가 말하기 위해서는 말하기 때문에 라는 이유가 있다, 그말이 하고 싶은거냐. 그러면 너나 나가토나 아사히나 선배는 어떻게 되냐. 너와 그녀들도 충분히 초자연현상으로 분류되고도 남지 않냐? “당신에게 있어서는 그렇겠지요. 자명한 일입니다. 당신에게 있어서의 세계는 이미 변모하고 있습니다.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었을 때의 당신과 현재의 당신이 인식하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당신의 현실인식은 이미 이전의 것과는 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들과 같은 존재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당신은 이제 알고 계시겠지요.” “내가 뭘 안다고?”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만, 지금 스즈미야상이 만드려 하시는 것은, 아마도 판타지로 분류되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안에서는 고양이가 말하는 것도 아사히나상이나 나가토상이 마법과 같은 힘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되어있다, 그걸로 충분한 겁니다.” 그럼, 요괴고양이나 미래인 웨이트리스나 나쁜 마법사에게 존재의의를 주어주면 되는거냐. “하지만 그것도 안됩니다. 존재의식이 주어지게 되면 더더욱 위험해집니다. 관측자가 이야기의 스타트부터 결말까지 ‘이야기내의 세계가 변화’한 것을 인식해버리면, 완전히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리니깐요. 말하는 고양이가 존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계가 변해버리고 맙니다. 저는 이 이상 세계가 복잡해지는 것은 그다지 환영하고 싶지 않네요.” 나도 당연히 환영 안한다. 곤란할 것 없는 건 나가토쪽 정도겠지. “조금 전에 제가 장르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떠한 하나의 장르가 되기를 바라면 됩니다. 그 장르는, 모든 수수께끼나 초자연현상을 해체하여 합리적인 결과를 얻으므로써 잘못된 세계를 원래의 세계대로 되돌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 스타트 부분에 있었던 세계가 결말에 와서는 부활하여, 수수께끼와 같은 현상을 전부 합리적으로 해소할 힘을 가진 유일한 장르가 있습니다.” 뭐냐. “미스테리입니다. 특히 본격 미스테리라고 불리우는 것의 일부입니다. 이 장르의 방법론을 사용하면, 믿기 힘들다고 생각되었던 현상은 말그대로 그저 ‘믿기 힘들다’고 하는 것 하나만으로 굳이 그 초자연현상을 언급하지 않아도 상관없게 됩니다. 말하는 고양이도 아사히나 필살 빔도, 어떤 트릭이었다고 해버리면 되는 거니까요. 그리되면 저희들의 현실이 변모할 일은 없겠지요.” 찻집의 웨이트리스가 아사히나상을 의식하고는 무시하는 듯이 우리들의 컵을 가지러 왔다. 코이즈미는 그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사람 말을 하는 고양이가 있다는 것은 명백히 이 세계의 상식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말하는 고양이가 존재합니다. 존재할 리가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저희들의 세계에 있어서 심히 불합리한 일입니다.” 물이 든 유리컵에 부착된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합리적인 끝을 맺어야 합니다. 고양이가 말한다거나, 미래인이 있다거나, 마법사 우주인이 있다는 것에 맞서는, 이론적으로 만민이-라기보다는 스즈미야상이-납득하는 결말 말입니다.” “그런게 있기는 있냐?” “있습니다. 지극히 단순하며, 이렇게까지나 이치에 안맞는 전개를 단숨에 상식적인 것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결말이 말이지요.” 말해봐라. “꿈입니다.” “…………” 침묵이 찾아왔다. 모두에게 평등하게도. 비로소 코이즈미가 말했다. “농담은 아니었습니다만….” 앞머리를 잡아 손가락으로 감고있는 그 부드러운 남자에게, 나는 경멸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하루히가 그걸로 납득할거라 생각하냐? 그녀석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떠나서 진짜로 무슨 상이라도 노리고 있는 것 같다고. 그게 꿈이라? 아무리 그녀석이 바보라고 해도 그것까지 꿰는 엉터리같은 영화로 만들지는 않은거 같은데.”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닌, 저희들 사정에 맞춘 결말을 생각해본 결과입니다. 영화의 내용이 전부 꿈, 거짓, 틀린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작품내에서 자기언급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해결방법입니다.” 너에게 있어선 그렇겠지. 내게 있어서도 그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하루히는 어떨까. 혹시 벌써 그녀석 머리 속에는 어이도 없는 자화자찬 라스트 씬이 떠올라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게다가 나는 이제 꿈이 어떻게 됐다든지 하는 이야기엔 두 번 다시 휘둘리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하나도 재미없는 니 독단 사정연설에도 말이야. 5-04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홈센터(home center,가정용 목공 재료나 잡화를 취급하는 대형 소매점)에 들렀다. 가장 싼 고양이용 화장실 한 채와 특매 고양이밥 캔을 구입하고, 일단 영수증을 받고 밖으로 나간다. 샤미센은 앞발로 얼굴을 문지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걷기 시작하고, 고양이도 따라온다. “알았냐, 집에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마. 제대로 고양이답게 행동해라.” “고양이답게, 라는 말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르도록 하지.” “말하지마. 반응은, 냐옹, 으로 통일해라.” “냐옹” 데리고 돌아온 도둑고양이를 본 동생과 어머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생각해둔 거짓말인 ‘이녀석 주인이 아는 사람인데 한동안 여행을 가게 되어서 일주일 정도 맡게 되었다’로 설명하고, 흔쾌히 승낙을 얻어냈다. 특히 동생은 매우 기뻐하여, 샤미센을 여기저기 마구 만져대고 있다. 괴물 고양이 녀석은 얌전히 ‘냐옹’이라 울 뿐이었다. 그건 그거대로 영 고양이답지 않구만. 무사히 아침이 밝았다. 오늘도 나는 학교에 가야한다. 두고 가는 것도 걱정거리가 될 것이기에 데리고 가기로 했다. 스포츠가방에 들어가라고 재촉한 나에게 샤미센은 ‘뭐, 괜찮겠지’ 라며 기특하게 들어갔다. 교문 근처에 풀어놓기로 하자. 문화제까지 며칠 남지 않은 우리 학교는, 마치 하루히 텐션(tension)이 연동되었는가 싶을 정도로 착실히 어수선한 분위기를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무기력함은 대체 왜였나 싶을 정도다. 아침 일찍부터 여기저기서 악기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간판이나 팻말을 만드는 학생들도 보이며, 뭘 할 건지 알 수 없는 의상을 입은 일당들도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 안에 이(異)세계인이 한둘 섞여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을 정도다. 의욕 제로는 우리 1학년 5반 뿐이었냐. 하루히가 우리반의 의욕 전부를 빨아들여버렸기라도 한건가. 내가 교실에 들어가니, 하루히는 진작에 와서 자리에 앉아 공책에 무언가를 마구 써대고 있었다. “드디어 각본을 쓸 맘이 생긴거냐?” 내 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하루히는 콧바람을 불어대며 턱을 들어올린다. “아냐. 이건 영화 캐치카피(catch copy:카피문구)라구.” “보여줘봐.” 노트를 들어올려 눈을 굴린다. ‘아사히나 미쿠루의 비장환비 극비영상 만재! 안보면 반드시 후회한다! SOS단 presents로 보내드리는 금년최대의 화제작! 운하(雲霞:구름과 노을)처럼 몰려오라!’ 순 선정적인것 뿐이라던가 올해는 앞으로 2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다만, 이거 가지고는 아사히나 선배가 나온다는 거 외엔 알 수가 없다. 이 카피문구를 읽고 어떤 영화인지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다른 의미론 존경해 주마. 뭐 촬영하는 나조차도 무슨 영화인지 모르며 트집잡을 것도 없다. 하루히마저도 모르잖아? 그건 그렇고 사전도 없이 운하(雲霞)따위 잘도 썼군. “전단지를 뽑아서 당일날에 교문앞에 뿌릴거야. 음, 결과는 분명 엄청날거야! 문화제땐 바니걸 옷 입는다고 오카베도 뭐라 말 못하겠지!?” 아니, 할걸. 여긴 엄격한 현립고등학교라 말이지. 우리 담임 속을 뒤집을 소리는 하지 마라. “거기다 아사히나 선배는 음식점 일로 바쁘잖아. 코이즈미랑 나가토도 자기네 반에서도 뭔가 하잖아, 당일에 한가한 사람은 너랑 나정도다.” 하루히는 나를 수상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바니 옷을 입겠다는거야?” 그게 왜 그렇게 되냐. 니 혼자서 하면 되잖아. 나는 그 뒤에서 플래카드라도 들고 있어 주마. “근데 알기는 아냐? 문화제까지 앞으로 며칠 안남은거. 이번주 토요일이랑 일요일이 문화제 당일이라고.” “알고있어.” “그러냐. 한가해 보이길래 날짜를 잘못알고 있나 했다.” “한가하다니. 방금도 광고문구 생각하고 있었잖아.” “선전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할 게 있을거 아냐. 영화는 언제 완성시킬거냐?” “금방 다 돼. 이젠 부족한 씬을 마저 찍고, 편집해서 애프터 레코딩이랑 음악이랑 VFX만 넣으면 완성이라구.” 그거 놀랍군. 카메라맨 입장에서 보자면 부족한 씬이 훨씬 많은 거 같은 인상을 준다만, 이 감독은 대체 어떤 영화를 생각하고 있는걸까. 거기에 촬영종료 후의 작업이 지금까지 걸린 만큼의 시간이 걸릴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게 그냥 내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다마는. 3교시와 4교시 사이의 쉬는 시간이었다. “쿈군~!”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 전부 일어설 만큼 큰 목소리가 들려오고 내가 반사적으로 그쪽을 보니 츠루야 선배가 교실 문에서 얼굴을 쏙 내밀고 있었다. 그 어깨 뒤로 아사히나 선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잠깐 일루 와봐-” 나는 츠루야 선배의 웃는 모습에 끌리듯 다가갔다. 하루히는 쉬는 시간이 되면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기에 교실엔 없다. 아마 학교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는 거겠지. 거 팔자 좋수. 츠루야 선배는 복도에 나온 나의 소매를 당기며, “미쿠루가 할 말이 있대!” 반대쪽 건물까지 들릴만한 큰 소리로 외치고는, 아사히나 선배의 등을 탕 두드렸다. “자, 미쿠루, 어서 쿈군한테 그걸!” 아사히나 선배는 머뭇거리는 손동작으로 내게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이거……. 그, 하, 하, 할인권이에요.” “우리네 반에서 하는 야키소바집 거야!” 라고, 츠루야 선배가 추가설명. 감사히 받기로 한다. 쿠폰 같은 건가 보다. 낙관이 찍힌 인쇄문자를 읽은 바로는, 이걸 가지고 가면 야키소바를 3할 할인받을 수 있다고 한다. “친구분들과 같이 와주세요.” 꾸벅 머리를 숙이는 아사히나 선배와 만화 캐릭터같은 입모양으로 웃고있는 츠루야 선배였다. “그뿐이야! 그럼 또보자!” 츠루야 선배가 시원스럽게 걸어나가고, 아사히나 선배도 그에 따라가려다가 갑자기 혼자 돌아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츠루야 선배는 그걸 보며 깔깔거리며 웃더니, 멈춰서서 기다리는 자세를 취한다. 아사히나 선배는 두 손의 손끝을 모아서는 나를 살짝살짝 보더니, “……쿈군,” “예.” “코이즈미군이 말씀하시는 것, 저기, 별로 믿지 않으시는게…. 이런 말씀 드리면, 제가 코이즈미군을 나쁘게 말하는 것 같아서, 저기, 좀 그렇지만은요…그래도,” “하루히가 신이라던가 하는 그 이야기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그런 거 전혀 안믿으니 안심하십쇼. “저는, 저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니까 그, 그건……코이즈미군의 해석과는 다른 거에요.” 아사히나 선배는 한숨을 휴 쉬더니,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본다. “스즈미야상에게 이 ‘현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건 틀림이 없어요. 하지만, 그게 세계의 구조를 바꾸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처음부터 이랬던 거에요. 스즈미야상이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다구요.” 저런저런……. 코이즈미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의견이군요. “나가토상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해요.” 아사히나 선배는 교복 앞으로 손가락을 굴리며, “저기…. 이런 말씀 드리면 남이 듣기에 좀 나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요…” 츠루야 선배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새끼에게 둥지를 떠나도록 재촉하는 부모제비 같은 얼굴이었다. 무슨 오해라도 하고 있는거 아닐까. 말을 잇는 아사히나 선배의 어투는 꾸밈이 없다. “코이즈미군이 말하는 것과 저희들이 생각하는 건 달라요. 코이즈미군이 하는 말을, 저기, ……별로 믿지 말라…고 하면 실례지만, 저기,” 당황하여 손을 마구 휘두르더니, “죄송합니다. 저 설명도 잘 못하고 친구가 기다리고 있고…저기,” 고개를 숙였다가 나를 봤다가 하더니, “코이즈미군에겐 그쪽의 사정과 이론이 있고, 저희둘도 그래요. 아마 나가토상도요. 그러니까,” 아사히나 선배는 온몸의 기력을 총동원한 듯한 결의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얼굴도 매우 귀엽다. 나는 이 귀한 얼굴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감격에 떨며 자신감을 갖고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하루히가 신일 리가 없잖습니까.” 그딴 녀석한테 새전(賽錢:신불에 참배할 때 바치는 돈)을 바칠 거면 차라리 아사히나 선배를 교조(敎祖:어떤 종교나 종파를 처음으로 일으킨 사람)로 삼아 종교법인을 세워 신자를 모으는게 백배는 낫다. 인감도장이랑 보증도장 둘다 찍어도 좋다. “저는 아직 코이즈미보다는 아사히나 선배의 의견 쪽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사히나 선배는 아주 잠깐 미소지었다. 스위트피(sweat pea)가 웃으면 아마 이런 느낌이겠지. “네,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코이즈미군에게 무슨 감정이 있다는 건 아니에요. 그것도 알아주세요.” 미묘한 말을 하고선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더니,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아니, 저기, 별로 안거나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사히나 선배는 조그맣게 손을 흔들고는, 어미 뒤를 따라가는 오리처럼 츠루야 선배 뒤를 쫓았다. 5-05 조금이라도 더 작업을 진행시켜놓는 게 낫겠지.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왜 내가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가 의아해하며, 컴퓨터를 쓰러 방문한 부실에는 고깔모자와 검은 망토를 쓴 선객(先客:먼저 온 손님)이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아사히나 미쿠루의 주장은 이렇다고 생각된다.” 나가토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서론을 내놓고는, “스즈미야 하루히는 조물주가 아니다. 그녀가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 모습 그대로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초능력이나 시간이동체, 개념형 지구외생명체 등의 초자연적 존재는 스즈미야 하루히가 갈망함에 따라 생겨난 것이 아닌, 원래 그랬던 것이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역할은 그들을 자각 없이 발견하는 것으로서, 그 능력은 3년 전부터 활엇화되었다. 단 그녀의 발견은 자기인식에 도달치 못했다. 그녀는 세계의 이상(異常)을 탐지할 수 있지만 결코 인식할 수는 없다.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 또한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로 웃지 않는 그 입술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가토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말을 멈추었다. “그것이, 우리들.” “아사히나 선배한텐 코이즈미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루히가 불가사의 현상을 보면 일이 곤란하게 된다는 거냐.” “그래.” 나가토는 펼쳐진 책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나와의 대화따위야 어찌되든 좋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그녀가 귀속된 미래 시공간을 지키기 위해 이 시공에 와있다.” 어쩐지, 중대한 이야기를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아사히나 미쿠루의 시공간에 있어서 변수이기에, 미래의 고정을 위하여 바른 수치를 입력할 필요가 있다. 아사히나 미쿠루의 역할은 그 수치의 조정.” 나가토는 종이 스치는 소리 하나 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다. 굳세고 검은 그 눈은 깜빡이지도 않고, “코이즈미 이츠키와 아사히나 미쿠루가 스즈미야 하루히를 보는 역할은 각각 다르다. 그들은 서로의 해석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혀 다른 서로의 이론은 자신들의 존재기반을 흔들리게 하기 때문에.” 잠깐. 코이즈미는 3년 전에 갑자기 초능력이 생겼다고 했다고. 내 의문에 나가토는 즉답, “코이즈미 이츠키의 말이 진실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 핸섬 미소를 뇌리에 그려보았다. 확실히 보증은 없다. 코이즈미의 이론은 내가 겪은 일에 그럴듯한 해설을 갖다댔을 뿐이다. 그것이 정설인지 아닌지 누가 알아? 사실, 아사히나 선배는 믿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아사히나 선배의 이론도 그게 그거다. 아사히나판 해답이 옳다고 하는 보장 또한 없기 때문에. 나가토를 본다. 코이즈미가 하는 말이 순 엉터리일지도 모른다. 아사히나 선배는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냉정한 우주인만큼은 거짓을 말할 것 같지 않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어느것이 정답인데. 전에 네가 말했던 자율진화의 가능성이란 결국 뭐냐.” 검은 옷의 소설광은 한없는 무감정이었다. “우리가 어떤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너는 확증을 얻을 수 없다.” “왜.” 바로 그때. 나는 평생 다시 볼 수 없는 것을 보았다. 나가토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놀라고 있으니, “내 말이 진실이라는 보증 또한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나가토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책을 놓고 부실을 떠났다. “너로서는.” 예비종이 울렸다. 모르겠다. 누군들 알겠냐? 코이즈미도 나가토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라. 일부러 어렵게 돌려말하는 거 아닌가 싶구만. 조금은 쉽게 정리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안그러면 그런 이야기는 한귀로 들어갔다가 한귀로 나오니까 말이야. 아무도 안들어준다고. 팔짱을 끼고 걷는 나를, 무국적 중세풍의 모습을 한 일당이 앞질러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나가토가 그 검은 의상을 입고 그 안에 섞여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어디 반이나 부에서 하루히에게 지지 않으려고 판타지 영화라도 찍고있는 건지도 모르지. 좋겠다, 저녀석들은. 아마 나처럼 고민할 것 하나 없이, 즐겁게 촬영을 하고 있겠지. 좀더 제대로 된 감독이 상식적인 지휘를 맡고 있을 거고 말이야. 나는 한숨을 쉬고선 1학년 5반 교실로 귀환했다. 영화촬영이 순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루히밖에 없으며, 나와 코이즈미와 아사히나 선배의 얼굴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짙어져만 갔다. 촬영이 진행함에 따라 갖가지 일이 터지기만 했다. 어느새 모델건에서는 BB탄이 아닌 수격탄(水擊彈)이 나가게 되었고, 하루히가 다른 색의 렌즈를 가지고 올 때마다 아사히나 선배는 위험한 광선을 쏘았으며(금색이 라이플 다트였고 녹색이 마이크로 블랙홀이었다), 그때마다 나가토에게 물렸으며, 벚꽃은 폈나 싶으면 다음날에 져있고, 신사에 있던 비둘기들은 며칠 후엔 진작 멸종된 여행비둘기(passenger pigeon)가 되어있었던 모양이고(코이즈미가 살짝 말해주었다), 지구의 세차운동이 미묘하게 어긋났다고 한다.(나가토의 정보). 일상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듯 했다. 지친 몸을 끌며 집에 돌아오니 이번엔 수염달린 동물이 내게 말을 걸어대고 말이야. “그 활발한 소녀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겠지.” 그 삼색 고양이는 스핑크스같은 자세로 내 침대 위에 엎드려있었다. “잘 알고 있잖아.” 나는 샤미센의 긴 꼬리를 가볍게 잡았다. 고양이는 꼬리를 내 손에서 스륵 빼내더니, “너희들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다. 그 소녀에게 내 말을 들려주는 것은 왠지 내 자신에게 상황이 좋지 않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코이즈미에 의하자면 그런 모양이더군.” 고양이가 말한다. 그렇다는 것은 고양이가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이유가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말하는 고양이가 존재해도 뭐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세계를 구축하면 되는 모양이다. 그럼 그건 대체 어떤 세계의 어떤 고양이냐? 샤미센은 하품을 하고선 꼬리털을 다듬는다. “고양이도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그 ‘여러가지’ 의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고싶군. “알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네가 고양이로 변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고양이의 심리를 체득하는 것 또한 그럴 것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젠 지긋지긋하다. 슬슬 목욕이나 할까 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내 방에 와서는 누군가 나를 찾아왔음을 알린다. 누굴까 하며 아래층으로. 결국 우리집까지 찾아온 사람은 코이즈미였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서 밤길을 걸으며 손님을 맞기로 한다. 집에 들여보내서 그 끝도없는 연설을 해대기 시작하면 골치만 아프고, 샤미센과 더블로 의미불명 추상론을 펼쳐대는 것도 절대 사양이다. 생각대로 코이즈미는 혼자 그 길디긴 이론연설을 시작하더니 기어이는 이런 소리까지 해댔다. “스즈미야상께서는 자잘한 설정이나 복선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십니다. 이게 더 재밌겠다, 이거면 충분한 거죠. 거기엔 합리적인 해결도, 면밀한 구성도, 실마리가 되는 복선도 없습니다. 꽤나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결말 같은 건 생각해 놓지도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미완으로 끝날지도 모르죠.” 그러면 안되잖냐. 이렇게 내팽겨진 상태로 끝나면 엉망이 되어가는 이 현실은 그대로 현실로서 고정되어버린다고 니가 주장했었잖아. 하루히가 결말을 생각해놓았어야만 하며, 그것도 현실에 들어맞는 결말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들이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루히는 생각이 없고, 게다가 그녀석이 생각하는 건 하나같이 상식을 벗어난 것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무래도 나은 것이다. 그런데 왜 또 그런 궁리를 해야하는 지 억울할 노릇이다. 누군가 이 저주를 대신 짊어져줄 녀석은 없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코이즈미는 어깨를 움츠렸다. “진작에 저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겠죠. 그러므로 저희들이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합니다. 특히 당신에게 걸린 기대가 큽니다.” 대체 뭘 하라는 거냐. 그거부터 가르쳐줘봐. “세계가 픽션화되면 곤란해지는 건 저희 논리이니까요. 아사히나상도 곤란하실지 모릅니다. 그녀와 그녀의 단체엔 그 나름의 논리가 있는 것 같으니까요. 나가토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관찰자는 결과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최후에 승리한 이론을 냉정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만약 지구가 날아가버렸다 해도, 스즈미야상만 살아남으시면 그걸로 됩니다.” 가로등의 빛이 희미한 어둠 속의 코이즈미를 사무적으로 비추고 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스즈미야상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을 가지고 있는 단체는 저희 ‘기관’과 아사히나상의 일파 뿐이 아닙니다. 많이 있습니다. 수면하에 저희들이 치르는 여러 항전과 피의 섬멸전을 요약(digest)하여 들려드리고 싶을 정도네요. 동맹을 배신하고 방해와 해코지, 파괴와 살육. 각 그룹 모두 총력을 기울여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합니다.” 코이즈미는 지친듯한 웃음을 지었다. “저도 저희들의 이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실정입니다. 제 초기배치가 마침 그 쪽이었으니깐요. 어딘가로 배반할 수도 없습니다. 백의 폰(pawn:체스의 졸)은 흑이 될수 없다는 거죠.” 오셀로나 장기로 해라.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겠지요. 스즈미야상도요. 그 편이 낫습니다. 특히 스즈미야상은 영원히 몰라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마음을 침울케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기준으로 말씀드리자면, 스즈미야상은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가지고 계십니다. 아아, 물론 당신도요.” “왜 나한테 그런 걸 알려주는거냐.” “말씀을 드리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유같은 건 없습니다. 거기다 저는 농담을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상한 망상에 홀려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동정을 받으려 하는 것일지도요. 어느쪽이든 간에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확실히 그렇지. 전혀 재미없다. “재미없는 이야기에 이어 한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아사히나 미쿠루가……실례, 아사히나상이 왜 저나 당신과 행동을 같이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아사히나상은 보기에 염려스러운 미소녀이십니다. 금방 도움을 드리고 싶어지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당신께선 그녀가 무엇을 하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겠지요.” “그게 어디가 나쁜데.” 약자를 돕고, 강자를 누르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정신체계다. “그녀의 역할은 당신을 농락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사히나상께서는 그와 같은 용모와 성격을 하고 계신 겁니다. 당신의 취향에 꼭 맞을만한 약하고 귀여운 소녀로서 말이죠. 조금이라도 스즈미야상에게 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하니까요. 당신을 붙잡아두는 것이 최적인 것입니다.” 나는 심해어처럼 침묵한다. 반년 전에 아사히나 선배가 말한 것들이 떠오른다. 지금의 아사히나 선배가 아니라, 더욱 먼 미래에서 왔다는 어른 버전 아사히나 선배의 말이다. 나를 편지로 불러낸 그 아사히나 선배는, ‘저하곤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지 마세요,’ 라고 했었다. 그건 그녀의 입장에서 나온 말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심정토로였던 것일까.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 가운데, 코이즈미는 마치 하루방이 말하는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사히나상께서 부주의해 보이는 것은 그렇게 연기하실 뿐, 본심은 다르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쪽이 당신의 공감을 얻기 쉬울 것이라 판단하였겠지요. 어려보이는 용모나, 스즈미야상의 무리한 고집에 고분고분 따르는 불쌍한 입장과 위치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눈을 자신에게만 향하게 하기 위해서라구요.” 이자식, 본격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구만. 나는 나가토의 평탄한 목소리를 흉내낸다. “농담은 이제 질렸다.” 코이즈미는 미세하기 미소짓고는, 다소 오버액션으로 양손을 펼쳤다. “아아, 죄송합니다. 역시 저는 농담을 끝까지 해내는 능력이 부족하군요. 거짓말입니다. 전부 지금 제가 만든 말도 안되는 설정입니다. 조금 심각한 말을 하고 싶어져서요. 믿으셨었나요? 그렇다면 제 연기도 나름 괜찮군요. 무대에 설 자신이 생겼습니다.”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저희 반에서는 셰익스피어 극을 하기로 되어있습니다. ‘햄릿’입니다. 저는 길든스턴 역을 맡게 되어서요.” 모르는 이름이다. 어차피 조연이겠지. “원래는 그랬습니다만, 도중에 톰 스토파드(Tom Stoppard)판을 쓰게 되어서 말입니다. 제 출연도 상당히 늘고 말았습니다.” 수고가 많구만. 햄릿에 셰익스피어판 말고 다른 게 있는 줄은 몰랐다. “스즈미야상의 영화와, 이쪽 무대에서의 제 스케줄은 꽤 빡빡합니다. 압박(pressure)이죠. 제가 정신적으로 지쳐보이신다면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거기에 폐쇄공간까지 나가게 된다면 완전히 쓰러져버릴 자신도 있습니다. 그렇기도 해서, 당신께 부탁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스즈미야상의 영화를 발생원으로 한 이상현상을 어떻게든 막아주실 수 없을까 해서요.” 합리적인 결말이란 거 말이냐? 너는 꿈 결말이 어쩌고 했었잖아. “하루히의 영화 내용이 전부 엉터리라는 사실을 하루히 자신에게 자각시킨다-였었냐?” “명확히 자각시키는 것입니다. 그녀는 총명하시기에, 영화가 픽션이라는 것 쯤은 잘 알고 계십니다. 단 이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는 안된다, 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가능하면 촬영이 종료되기 전에 말이지요.” 코이즈미는 잘 부탁드린다며 인사를 하더니 밤길 속으로 사라져갔다. 뭐지. 저녀석은 내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온건가. 자기는 이미 고생을 할 만큼 하고 있으니 다음 고생은 내가 하라, 그런 소리냐? 그렇다면 큰 오산이다. 바바누키(婆?き:트럼프 놀이의 한가지. 같은 수의 패 두장이 짝지워질 때마다 판에 버려 나가는데, 마지막에 바바[보통 조커]를 가진 사람이 지게 됨)의 조커도 아니고, 서로 떠넘기자는게 아니다. 스즈미야 하루히는 쉰 세 번째의 카드가 아니라고. 비장의 카드도 올마이티(almighty:전능함)도, 그렇다고 바바도 아니다. “뭐, 그래도” 나는 중얼거렸다. 내버려둘 수는 없는 듯 했다. 나가토야 그렇다 쳐도, 아사히나 선배도 코이즈미도 이제 곧 HP(hit point)가 데드라인에 가까워져 가는 것 같다. 내가 모르고 있을 뿐 전세계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건 좀 곤란…하겠지.” 젠장, 거 되게 귀찮네. 나도 허덕이는 판에. 나는 방책을 생각해 보았다. 하루히의 망상을 진정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영화는 영화, 현실은 현실, 각각 다른 것이라고 똑바로 인식시키면 되는거냐. 그런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납득시킬 방법이란 무엇일까. 꿈의 결말……그 외엔? 문화제까지, 앞으로 조금. 5-06 다음날, 나는 하루히에게 하나의 제안을 하여, 옥신각신 끝에 승낙을 얻어냈다. “좋아 오케이!” 하루히가 높게 외치며 메가폰을 두드렸다. “수고했어-! 이걸로 촬영은 전부 끝이야! 모두 열심히 잘 해줬어! 특히 난 날 칭찬해주고 싶은걸! 음, 난 역시 대단해. 그레이트 잡(Great Job)!” 웨이트리스 아사히나 선배는 그 말을 듣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마음 깊이 안도한 듯, 얼마나 안도하였는지 울것만 같은 얼굴이다. 실제로 흐느끼는 소리까지 내었을 정도다. 하루히는 그 눈물을 감격에 겨운 것으로 해석하였는지, “미쿠루짱, 울기엔 아직 일러. 그 눈물은 팔메도르(Palme d'Or:황금종려상)나 오스카상을 수여받는 그날까지 아껴두는거야. 모두 잘 해내자!” 학교 건물 옥상에서, 문화제를 하루 앞둔 점심시간이다. 이미 밥을 먹기에는 시간이 너무 절박했다. 미쿠루와 유키의 라스트 배틀은, 갑자기 자신의 능력을 각성한 코이즈미 이츠키의 알수없는 편의주의 파워에 의해 유키가 우주 너머로 날아간다는 걸로 막을 내렸다. “이걸로 완벽해. 엄청 좋은 영화를 찍어냈어. 헐리웃에 가지고 가면 바이어(buyer)들이 눈사태처럼 몰려올거야! 먼저 실력있는 에이전트랑 계약해야겠지!” 세계로 뻗어나갈 글로벌 위세 한번 좋은 하루히였다. 이런 영상집을 누가 봐줄지는 모르겠지만, 인기 좀 끌만한 건 주연 여배우 뿐이고 그 외 스탭은 별볼일 없다. 뭐하면 내가 아사히나 선배의 에이전트를 맡아서 경영을 해보고 싶군. 딱 좋다, 하루히 너도 그라비아 아이돌 쪽 한번 해보지 않겠냐? 내가 사진이랑 이력서 보내 줄 수도 있다고. “드디어 끝난 건가요.” 코이즈미가 해맑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열받는 일이지만, 이녀석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정은 이런 무료 스마일인 것 같다. 우울한 코이즈미 따위 별로 보고싶지 않구만. 비위 상할거다. “그래도 끝나고 보니 한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즐거운 시간은 빨리간다고들 합니다만, 그럼 즐겼던 건 누구일까요.” 글쎄다. “그 다음 일은 당신께 맡겨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전 지금 저희 반 무대극 쪽 일로 머리가 복잡합니다. 영화랑 달리 거기선 대사를 틀리면 다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코이즈미는 평소의 간드러진 미소를 짓더니, 내 어깨를 손등으로 치며 작은 목소리로, “또 하나. 당신께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또한 제 개인으로서도요.” 그 말만 하고서 옥상을 뒤로 했다. 나가토는 평소의 무표정으로 묵묵히 코이즈미의 뒤를 따르듯 걸어간다. 하루히는 아사히나 선배의 어깨를 안고는, 둘이 같이 저편에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표는 헐리웃, 블록버스터!” 같은 소리를 외치게 시키고 있다. 목표로 하는건 좋은데, 그쪽 방향으로 바다를 건너면 호주라고. “휴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발치에 비디오 카메라를 놓고 푹 앉았다. 코이즈미와 나가토와 아사히나 선배에게 있어선 이게 끝이겠지. 하지만, 내게 있어 이것은 끝의 시작이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내가 기록한 방대한 온갖 디지털 영상들, 그 쓰잘데없는(junk) 디지털 정보 집적물(集積物)을 가져다 어떻게든 ‘영화’의 체재를 갖추도록 해야만 한다는 거다. 그것이 내 일이냐, 물론 말안해도 알고 있다. 금요일 저녁이다. 부실엔 나와 하루히 뿐이다. 다른 셋은 각자 자기네 반 일로 없다. 촬영(crank-up)한 건 좋은데, 촬영이 순조롭게 미뤄진 덕분에 다른 걸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컴퓨터에 있는 영상을 다시 보게 된 내가 낸 결론은, 역시 아사히나 미쿠루 프로포션 비디오 클립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실로 심플한 것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끝끝내 촬영 마지막까지 하루히가 무슨 영화를 찍고 있는지 픽셀단위로 알 수 없었다. 모니터에 비춰지는 웨이트리스와 사신소녀와 간들미소 소년 셋은 머리가 좀 이상한건가? 당연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비주얼 이펙트를 끼워넣을 시간따위는 남지 않았으며 원래 그런 기술도 없다. 이대로 무가공 무첨가의 생 영상을 돌릴 수 밖에 없다. 투덜거리는 건 하루히였다. “그런 미완성을 개봉시킬 수는 없어! 어떻게든 해봐!” 혹시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냐. “그런 소리 해도 말야, 문화제는 내일이고, 나는 할 수 있는데까지 했다. 니가 그때그때 막 찍은 스토리를 어떻게든 연결되도록 편집한 것 만으로도 이제 한계란 말이다. 당분간 무슨 영화든 간에 영화는 안볼거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묵살하는 데에 뛰어난 하루히는 “밤새워서 하면 시간 안에 되잖아?” 누가 하는데, 라고는 묻지 않았다. 여기엔 나밖에 없고, 하루히의 흑단(黑檀)과 같은 눈은 일직선으로 날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묵고 가면 되잖아.” 그리고 하루히는, 내가 기겁할 대사를 내뱉었다. “나도 도와줄테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루히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한동안은 내 등 뒤에서 뭐라고뭐라고 지껄여 댔지만, 한시간도 안돼서 책상에 엎드려선 퍼자기 시작했으니까는. 이런, 그 퍼자는 얼굴이나 찍어둘걸. 엔딩 크레딧 맨 끝에 그 얼굴을 확대해서 정지화면으로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덧붙이자면 나도 그뒤 얼마 되지 않아 잠들어버렸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까 아침이 되어서 얼굴 반쪽엔 키보드 자국이 박혀있었으니까. 따라서, 학교에 묵은 의미는 전혀 없었다. 영화는 미완성 그대로다. 어떻게 저떻게 자르고 붙이고 해서 30분만에 끝내긴 했지만, 보기에 무참한 졸작의 완성이다. 영화도 잘 모르는 문외한이 의지로만 찍어내면 이따위가 된다고 홍보하는 것 같다. 차라리 바니걸 아사히나 선배의 CM컷만 내놓으면 또 몰라도, 막무가내 편집방침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스토리의 앞뒤를 맞게 했으니, 오히려 파탄에다 박차를 가하여 더 난감하게 되어버렸다. 결국 애프터 레코딩도 없으며 VFX따위는 그 어느 씬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쓰레기 영화다. 이래가지곤 타니구치한테도 보여줄 수 없다. 나는 컴퓨터를 창문으로 던져버릴까 하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잤더니 등뼈가 뻐근하다. 먼제 일어난 하루히가 나를 깨운 현시각은 오전 6시 반. 그러고보니 학교에서 자고 가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군. “어떻게 됐어?” 하루히가 내 어깨 너머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나는 할수없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재생이 개시된다. “……헤에?” 하루히의 작은 환호성을 듣는 나는 깜짝 놀랐다. 만든 적도 없는 CG영상이 호화롭게 펼쳐지며 타이틀을 표시했다. 그 뒤에 나타난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 에피소드 00’ 은, 스토리는 엉터리, 대사는 안들려, 영상은 흔들려대, 거기에 화면 밖의 감독의 화난 목소리까지 들어 있었으나, 비주얼 이펙트만은 고등학생 자체제작 영화 치고는 상당한 수준이 되어 있었다. 아사히나 선배의 눈에선 레이저도 나가고 있었고, 나가토의 봉에서도 이상한 색의 광선이 나가고 있었다. “이야-” 하루히도 감동하고 있다. “꽤 하잖아? 뭔가 아쉽긴 하지만, 너로선 잘했어.” 내가 아니다. 내가 자는 사이에 내 다른 인격이 깨어나서 한 게 아니라면. 아무리 봐도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 말고 다른 녀석이 한거야. 본명(本命[ほんめい]:경마,경륜,선거 등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나가토. 대항(對抗[たいこう]:경마 등에서 우승 후보와 경합할 것으로 예상 되는 말이나 선수.)·코이즈미. 무인(無印[むじるし]:경마 등에서 입상할 가망이 없는 말이나 선수.)·아사히나 선배. 대혈(大穴[おおあな]:경마, 경륜 등에서 예상이 크게 벗어남. 또는 그로 인해서 크게 돈을 땀. 다크호스.)·아직 등장하지 않은 다른 누군가. 그런 거겠지. 잠시 동안, 우리는 말없이 자체제작 영화의 감상회를 하고 있었다. 그 작은 화면에서가 아닌 더 거대한 스크린에서 보면 또다른 감개가 느껴질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디스플레이상의 동화(動畵:움직이는 그림)은 라스트씬에 접어들고 있다. 코이즈미와 아사히나 선배는 손을 맞잡고는 벚꽃이 만개한 벚나무 길을 걷고 있다. 그대로 카메라가 파노라마로 푸른 하늘을 비춘다. 곧바로 간드러진 음악이 시작되고, 스태프 롤이 세로 스크롤을 개시한다. 그리고 가장 끝에 하루히 목소리로 나레이션이 들어간다. 내가 고안하고, 어떻게든 하루히로 하여금 말하게 할 수 있었던 나레이션. 여유를 두는 부분도 필요하다고 설득했더니, 감독 자신을 통하여 모든 것의 끝을 알리는 대사다. 그 모든 것의 취소를 가능케 했던 마법의 문장이었다. 『이 작품은 픽션으로, 실재하는 인물, 단체, 사건, 그 외의 고유명사나 현상 등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거짓입니다. 어딘가 닮았다고 해도 그건 우연입니다. 우연히 닮은 것입니다. 아, CM 씬은 또 달라. 오오모리 전기점과 야마츠치 모델샵을 잘 부탁합니다! 많이 사러 가주세요. 응? 한번 더해야돼? 이 작품은 픽션으로, 실재하는 인물, 단체………. 잠깐, 쿈. 왜 이런 거 해야되는거야. 당연한 소리잖아.』 -제 5화 끝 에필로그 문화제가 시작되고, 내가 할 일은 없어졌다. 실제로 이벤트는 준비단계 때가 가장 즐거운 것 같다. 막상 시작하고 보면 시간은 금방 가고, 눈 깜짝할 새에 정리할 시각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나는 그 때가 오기까지 어슬렁거리고나 있자. 오늘이랑 내일 정도는 나 하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을테니까. 유일하게 뭐라 할 것 같은 하루히라면, 지금쯤 바니걸이 되어선 교문 앞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있을 거다. 담임 오카베나 실행위원회가 저지하러 올때까지 과연 몇장이나 뿌릴 수 있을까. 나는 부실에서 나와서, 막 활기를 띠기 시작한 교내로 걸어나갔다. 걱정했었던 현실의 변모란 것들은 전부 원래대로 돌아온 모양이다. 코이즈미가 그렇게 주장하고 나가토가 보증했으니 뭐 틀림없겠지. 나는 샤미센이 말하지 않게 되는걸 보고 알아챘다. 자금이야 뭐 나가토급의 벙어리다. 이제와서 쫓아내기도 그렇고 하니, 이 기회에 길러도 좋지 않을까 싶다. 동생도 움직이는 인형이 생겨서 좋아라하니깐. 가족에겐 ‘원래 주인은 여행 끝에 이주하게 되어버렸다’고 변명해둬야지. 수컷 삼색고양이는 가끔 ‘냐옹’인가 하는 소리를 내긴 하지만, 나한테 그렇게 들릴 뿐이지 사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뭐, 어떻든 좋다. 없어졌다고 한다면, 이상하게도 바로 전날까지 자주 보였던 기묘한 의상 일당들이 나올만한 상연 목록도 문화제엔 없었다. 실행위원 발행의 팜플렛을 봐도 보이지 않으며, 그런게 나올만한 교실을 살펴봐도(연극부라든지), 그 어느곳에도 전혀 없다. 그녀석들은 대체 뭐였던 거냐. “흠.” 나는 별 의미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교내를 걸었다. 실제로 학교내에 이(異)세계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들이 거기다 이세계 판타지 틱한 의상을 입고 있다면. 그래, 마치 나가토같이. 그렇다면, 나가토는 하루히의 눈을 속이기 위해 고의로 그런 모습을 하고 시종일관 나다녔던 건 아닐까. 마치 그런 의상은 문화제 때나 입는 거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하루히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나가토는 입을 다물고 전혀 말하지 않기에 모르는 일이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다른 싸움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번엔 무척 얌전했군. 지구의 파멸을 구한다는가 하는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녀석이라면 아무말도 하지 않겠지. 물어보면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말로는 다 전할 수 없을 내용일 거고 내가 그걸 알아먹을 머리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아무말 않기로 했다. 특히 하루히에겐, 계속 아무말 하지 않아야겠지. 여담이지만, SOS단 제작의 영화는 시청각실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일단 영화연구부의 작품과 함께 두 작품이 상영되는 걸로 되어있다. 하루히가 영연(영화연구부)을 들볶아 억지로 그리 하게 한 것이다. 프로젝터가 있는 교실은 거기밖에 없다. 영연은 끝까지 난색을 표했지만, 하루히의 결정에 거스르는 인간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듯, 결국 할수 없이 CM까지 들어간 엉터리 영화를 같이 상영하게 되었다. 덧붙여 SOS단이란 단체는 문화제 실행위원 쪽에선 없는 것으로 되어있기에, 문화제 프로그램 그 어느곳에도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이란 상영 목록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인기투표 베스트 1은 포기하는게 나을 듯하다. 우리에게 투표된 건 전부 영연으로 가겠지. 여담 하나더. 하루히로 하여금 촬영을 하게 만들었던 심야방송 영화 말인데, 찾아보니 골든 글로브(Golden Globe)상이 아니라, 꽤 옛날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되기‘만’ 했다는 상당한 것이었다. 그녀석, 뭘 어떻게 착각하고 있었던 거냐? 한번 시험삼아 빌려서 봐봤다. 처음 30분만에 잠들어버렸다. 그랬기에 재밌는건지 재미없는 건지조차 모른다. 반납하러 가기 전에 한번 더 도전해볼까 한다. 모처럼이니 1학년 9반의 연극도 감상해주기로 했다. 코이즈미는 시종일관 미소지으며 연극을 하였으며, 마지막에 어이없게 죽게된다는 알수없는배역이었다. 하루히의 영화에 버금갈 정도의 멍청함이었지만 관객들에겐 꽤 먹힌 모양이다. 이건 주연이 코이즈미라서 내 머리에 이상한 편견이 생겨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이즈미의 연기는 연기로 보이지 않았고 그냥 평소의 코이즈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내게 있어선 마이너스 요소다. 커튼콜(curtain call:막이 내린 뒤 관중이 박수를 쳐서 출연자를 막 앞으로 불러내는 일)의 박수에 응하여 나온 코이즈미는 나를 향해 한쪽눈을 감아 윙크를 했다. 나는 그 기분나쁜 윙크가 닿기 전에 교실을 나왔다. 이어서 나가토네 반에도 가줄까 했는데, 점치기를 하는 교실 앞에는 이미 긴 줄이 생겨있다. 살짝 보니, 암막 천지인 실내에서 검은 옷을 걸친 여학생들이 몇 명 정도 배치되어 있었고, 나가토의 무기질 하얀 얼굴도 그 안에 있었다. 책상에 설치된 수정구슬에 손을 올리고 담담히 손님에게 뭔가 말하고 있다. 분실물 찾기 정도만 해둬라, 나가토. 영화와 영화에 얽혔던 잡다한 사건은, ‘그런 건 결국 픽션이다’ 라는 걸 인식시키는 걸로 어떻게든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현실세계 그 자체를 갖다가 픽션이라고 하고 끝낼 수는 없다. 나나 하루히나 아사히나 선배나 나가토나 코이즈미는 분명히 여기에 있고, ‘사실 그런 녀석 없다’ 로 끝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얼마 후엔 뿔뿔이 흩어져버릴 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 여기엔 SOS단이 존재하며, 단장도 단원도 갖춰져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세계에선 그렇게 되어있으니깐 말이야. 나가토식으로 말하자면, ‘내게 있어선’. 음, 뭐랄까, 혹시 모든 건 다 뻥이고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루히는 아무런 힘도 없으며, 아사히나 선배와 나가토와 코이즈미가 장대한 거짓말을 펼친다는 식으로, 흰 비둘기는 페인트칠, 샤미센은 복화술이나 내장마이크, 가을의 벚꽃도 미라클 미쿠루 아이(eye) 공격도 전부, 짜고 한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그게 뭐 어쨌다고 밖에 못할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건 아니겠지-.” 어느쪽이든 간에 지금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루히랑 단둘이 어디 갇혀서 나혼자 고생하는 것 보다는, 모두다 고생하는 게 일인당 부담이 경감된다는 사실은 계산할 것도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SOS단 단원은 나뿐이 아니니까. 멀쩡한 인간은 나뿐이지만. 1학년 5반의, 그저 휴게소가 되어있는 교실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앗,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곧 약속시간이다. 애써 주신 할인권을 쓰지 않을 수야 없지. 어떤 의상인지도 신경쓰이고. 아사히나 선배가 기다리는 야키소바 집에 가기 위하여, 나는 타니구치와 쿠니키다와의 약속장소로 서둘러 가기 시작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한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