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중 당하고는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마주 붉은 기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다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나무들이 마구 쓰러져 갔다. 저 검은 기와 이무기의 붉은 기운의 충돌이 아까부터 들려오던 폭음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설화는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이무기가 괴성을 지르며 나무들을 파고들며 움직였다. 엄청난 진동과 함께 붉은 기운이 나무들을 박살내어 갔다. 그리고 이무기의 옆에서 검은 기운이 폭사되며 이무기와 같이 나무들 사이를 움직였다. “아…….” 이무기와 그 검은 기운을 풍기는 존재가 평행을 이루며 움직였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에게 공격을 가하며 숲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무기와 스쳐지나가며 엄청난 공격을 주고받고 있는 존재를 살피던 설화는 순간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이무기의 기운도 상당한 공포를 주고 있었지만 저 검은 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공포의 수준이 아니었다. 몸을 완전히 굳혀버리는 엄청나 살기. 그리고 설화는 저 검은 기운이 마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 마기…? 설마… 한?” 설화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이무기와 함께 그 검은 마기의 형체가 점차 설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겨우 2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폭발에 설화는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크아아아악! 후우우우웅! 그때 이무기의 입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붉은 기운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검은 마기에게로 날아갔고 순간 그 검은 존재가 움직임을 멈추고 붉은 기운과 마주섰다. 그리고 온몸으로 마기를 뿜어대고 있는 세한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 역시…….” 한의 모습을 확인한 설화가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푸화아아악! 그리고 세한의 몸에서 한층 강한 마기가 엄청난 기세로 타올랐다. 그리고 더욱 거세진 살기에 설화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몸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세한이 이무기가 내뿜은 붉은 기운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파가아아아앙! 이상한 파음과 함께 붉은 기운과 마기가 충돌을 일으켰다. 그 충돌로 인한 기의 폭풍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가며 나무들을 마구 부숴나갔다. 엄청난 기의 폭풍에 질려버린 설화는 은사로 자신을 몸을 고정시키고는 침을 삼키며 세한과 이무기의 모습을 살폈다. 그 순간 세한의 마기가 더욱 강하게 뿜어지며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붉은 기운과 마기가 서로 뒤섞이며 마구 터져나갔다. 폭발의 여파와 휩쓸려온 나무와 바위들을 힘겹게 피하거나 쳐내던 설화는 순간 세한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깜박였다. 설화가 주위를 살피는 사이, 폭발의 여파에 휩쓸린 듯 이무기가 더욱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다. 설화가 있는 곳에서 겨우 10m나 떨어졌을 곳이었다. 흉포한 기세를 뿜어대는 이무기의 모습에 설화는 입술을 깨물며 은사를 움켜쥐었다. 휘이이이잉! 그때 이상한 기류가 흐리기 시작했다. 보통의 바람이 아닌 기의 바람. 그리고 설화는 그 바람이 눈에 보인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주위에서 검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캬아아아악! 검은 바람들이 이무기의 주위로 몰려들며 이무기를 압박해 가자 이무기가 괴성을 질러대었다. 그리고 설화가 귀를 틀어막는 것과 동시에 한 인영이 이무기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엄청난 마기를 내뿜고 있는 ‘인간’이었다. 설화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사이, 검은 기운이 불타오르는 검을 치켜든 세한이 검을 이무기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캬아아아악! 이무기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대며 몸을 마구 흔들었지만 세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무기의 머리 위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리고 세한의 몸에서 엄청난 마기가 폭사 되었다. 설화가 세한의 몸이 검은 불길에 타오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이무기가 갑자기 조용해 졌고 강하게 불어오던 기의 폭풍도 어디론가 빨려든 듯 사라졌다. 갑자기 사위가 정적에 휩싸이자 귀에서 손을 땐 설화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세한의 몸에서 마기가 한층 강하게 타올랐다. 푸화아아아악! 그리고 이무기의 온몸에서 검은 기운이 터져 나오며 이무기의 온몸이 터져나갔다. 거대한 뱀이 고깃덩이로 변하며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모습에 설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꺄아아아악!” 피투성이의 끔찍한 모습이 되어 바닥으로 쓰러지는 거대한 뱀. 그리고 그 뱀의 머리에 서 있던 세한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아, 아아…….” 검은 마기를 뿜어대는 세한의 모습에 설화가 겁에 질려 신음을 흘렸다. 잠시 이무기를 살피던 세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거짓말 같이 마기가 사라졌다. “아…….” 거짓말 같이 사라진 마기와 끔찍할 정도의 살기에 설화는 숨을 헐떡거리고는 세한의 모습을 살폈다. 그때 세한이 몸을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피를 토하는 세한의 모습에 설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처음에는 피를 토하기만 하던 것에서 코에서, 귀에서, 눈에서까지 피를 흘리는 세한의 모습에 설화는 급히 달려 나갔다. “한!” 설화가 세한을 부르며 달려가는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마기가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마기에 설화가 걸음을 멈추는 사이, 세한의 모습이 잠시 흐릿해 졌다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설화는 뒤에서 자신을 껴안는 누군가와 자신의 목에 닿는 날카로운 금속의 감촉에 몸을 굳혔다. “아… 세, 세한……?” 엄청난 살기에 설화가 몸을 떨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에 닿아있는 검신을 바라보던 설화는 진짜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그 때 세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화……?” 쨍그랑. 설화의 목에 겨눠져 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설화가 자신을 안고 있던 힘이 느슨해진다고 느끼는 순간, 세한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 세한!?” 급히 몸을 돌린 설화는 주저앉아 피를 토하고 있는 세한의 모습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세한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어올려 설화를 바라보았다. “크흑… 사, 살아있었군. 쿨럭. 망할… 그나저나… 꽤, 꽤나 조용…….” “무, 무슨 소리를…….” 피투성이가 된 세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설화가 급히 세한을 부축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세한은 날카로운 눈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이무기를 바라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거대한 뱀. 잠시 그렇게 이무기를 바라보고 있던 세한은 순간 뭔가를 느낀 듯 급히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 얼떨결에 함께 뒤를 돌아본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이상한 사내와 그에게 업혀 있는 위리안. 그리고 그 옆에서 걸어오고 있는 주토. 세한과 설화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둘의 앞으로 다가온 백발의 사내, 이무기 성풍이 입을 열었다. “정말… 그분의 말이 있었기에 강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진광을 쓰러뜨릴 정도일 줄은…….” 성풍을 잠시 바라보던 세한이 눈을 약간 가늘게 뜨며 질문했다. “이무기인가?” “그렇습니다. 성풍이라고 합니다.” “강하군. 저 미친 뱀보다 훨씬.” 미친 뱀이라는 말에 성풍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웃음과 슬픔이 뒤섞인 듯한 표정에 세한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미친 뱀이라… 맞는 말입니다. 저 녀석은 수련을 하다 도중에 미쳐버린 이무기이니까요. 저 녀석은 지룡이 되기 위해 수련하던 녀석입니다. 저와 상당히 반목하고 있던 녀석이지요. 미쳐버린 이후로는… 혹시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해서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이것도 운명일지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성풍은 고개를 숙여 세한에게 감사를 표했고 세한은 뚱한 표정으로 그런 성풍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 일행들을 구해준 이유는?” 세한의 질문에 성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무기들을 수장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무기들의 땅에 들어오셨다가 진광의 표적이 되선 것인데… 언젠가 해치워야 했을 녀석이니 제가 나섰다고 할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큰 이유는 위대하신 분으로부터 당신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풍의 말에 세한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떠올랐다. “페이린인가?” “그렇습니다.” 세한과 성풍의 대화에 동참하지 못한 일행은 멀뚱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위리안은 성풍이 이무기라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그를 살피고 있었다. 성풍과 잠시 더 얘기를 나누던 세한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저 둘을 구해줘서 고맙군.” “예. 그럼 이 산맥을 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분의 부탁 중에 여러분이 산맥을 넘도록 해 달라는 부탁도 있었으니까요.” “고맙군.” “아닙니다. 그런데… 역시 처음의 그 폭발은…….” 성풍의 말에 세한의 표정 역시 묘하게 굳어졌다. “역시 저 이무기보다 강하군. 뭐, 좀 방심했다가 제대로 들어맞았지. 간신히 그 공격들을 모두 하늘로 튕겨낼 수는 있었지만 덕분에 폭발이 일어나서 충격이 꽤 심했어.” 세한과 성풍의 얘기가 처음의 폭발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가 나와 기쁘다는 표정마저 섞여 있는 듯 했다. 잠시 진광의 시체를 살피던 성풍이 세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 당신과 겨뤄보고 싶기도 하군요. 당신과의 싸움이라면 수련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불가능하겠지만요. 가시죠.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풍은 푸른 옷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갔다. 그 뒤를 세한이 뒤따르자 다른 일행도 급히 뒤를 따랐다. 노을이 지는 시각이었다. “엉망이군.” 나는 몸 상태를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무기… 장난이 아니야. 내가 싸운 이무기 녀석이 이무기 중에서도 강한 축에 끼인 다고는 하지만… 정말 엄청나군. -괜찮나? 그나저나 그 이무기… 거의 나와 동급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던데? “성풍?” -으음. 대단하더군. 우리가 아까 싸웠던 이무기 녀석보다 훨씬 강해 보이던데……. “음. 만약 싸우게 된다면… 우리가 4:6 정도로 불리한데? 어쩌면 3:7까지 갈 수도 있고.” -이무기라는 족속… 연구할 가치가 있네. 뭐, 그 미친 뱀 녀석의 머릿속을 탐험했으니 충분하지만. 아아. 내 자서전에 추가할 목록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네. 비만 도마뱀의 몸속까지 탐험한데다가 이번엔 이무기라니.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이 무궁……. 나는 마나르트의 수다를 무시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높은 산꼭대기의 분지였는데 처음 보는 종류의 수목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상당히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였다. 하긴 이무기의 수장이라니… 뭐, 당연할 수도 있겠군. 저쪽에서 성풍과 세명의 일행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성풍의 거처에서 머문지 3일. 나를 제외한 셋의 상처는 완전히 치료되어 있었다. 나도 외상은 다 치료되었고 마나와 마력을 너무 사용해 입은 내상이 좀 남아있을 뿐이었다. 사실 내상이 더 중요하기는 하지만……. “하하. 잘 가십시오, 위리안.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진짜 신선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높은 경지를 이루기를 빌겠습니다.” “하하하. 여기서 죽지 않을 정도가 되면 찾아오겠습니다, 성풍님.” “예. 기다리겠습니다. 아, 주토도 건강하시기를. 새로운 세상에서의 삶, 쉽지 않을 겁니다. 힘내십시오.” “감사합니다.” 며칠 사이에 일행과 상당히 친해진 성풍이었다. 왠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존재였기에 셋도 상당히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특히 설화는 평소의 그 차가운 성격을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성풍을 꽤 부드럽게 대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잘 가십시오, 설화 소저.” “예. 이 옷은 정말 감사드려요.” “하하. 별거 아닙니다. 이무기 중에서도 여자가 있거든요.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때 입는 것인데… 옷을 수집하는 녀석도 있어서 한 벌 뺐어온 겁니다. 이곳 보다는 서대륙 풍이 좀더 강한 옷이니 넘어가서도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 “예. 감사해요.” “하하. 그럼 잘 가십시오. 설화 소저는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이 있으니 걱정이 덜합니다. 세한님 옆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하하하.” “무, 무슨…….” “후후. 언젠가 빙설화가 녹아내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지요. 그때가 되면 다시 한번 만나 뵙고 싶군요. 어쨌든 잘 가십시오.” “아…….” 잘들 논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상의 망토를 추슬렀다. 약간 코트의 형식을 띄는 망토로 변해 있는 천상의 망토였다. 허리 부분에서 좀 조인 형태. 검은 색은 여전하지만. 나는 아직도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설화와 성풍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빙설화는 성풍이 설화에게 지어준 별명이었다. “세한님.” “음?” 어느새 인사를 끝마친 듯 성풍과 위리안, 설화, 주토가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일행이 내 주위에 자리를 잡는 사이 성풍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분께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언제 한번 찾아오시고요.” “물론. 한번 겨뤄보고 싶기도 하니까. 뭐, 그쪽이 그때까지 승천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지만.” “하하. 전 승천하려면 멀었습니다. 승천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전 승천해서 재미없게 사는 것 보다는 여기서 이러고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런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소를 짓던 성풍이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얼음 꽃을 녹일 수 있는 봄바람이 되시기를.” 성풍의 말에 마나르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이, 이봐…….”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풍은 바람에 휩싸이듯 모습을 서서히 감추어 갔다. 그 모습에 일행이 감탄한 눈으로 성풍을 바라보았다. “다시 만날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마나르트님에게도 안부 전해 주시길.” -흐음… 혹시 잊고 있었나 했는데… 맘에 드는 구렁이로군. 마나르트의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성풍이 미소를 지었다. 성풍이 완전히 바람에 섞여 사라지는 순간, 나를 비롯한 일행의 몸 주위에 밝은 빛무리가 생겨났다. 페이린의 마법이었다. 성풍이 사라진 곳에 한줄기 바람이 불어가는 것을 느낀 것과 동시에, 우리는 어디론가 텔레포트 되었다. 위이이잉. 그리고 텔레포트가 끝나 눈을 떴을 때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형태의 숲과 저 멀리 느껴지는 몬스터의 기운. 나는 피식 웃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푸른 하늘이었다. 역시 산맥 하나 차이인가? 그때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져 왔다. 캬아아아아! 쿠아아아아앙! “히엑!” “저, 저건…….” 엄청난 크기의 포효와 함께 붉은 빛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뿜어져나갔다. 드래곤 브레스. 그 붉은 기운의 시작점에 거대한 몸과 붉은 비늘로 뒤덮인 멋진 모습을 뽐내는 세르페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재회 선물인가? 그래도 드래곤이라 직접 만나지는 않는다 그거로군. 나는 저 멀리 최고봉의 끝자락에 보이는 페이린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훨씬 강해졌군. “저, 저게 드래곤? 지, 진짜 괴물…….” 위리안의 중얼거림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손뼉을 치자 페이린의 모습과 이무기의 공격은 애들 장난으로 보일 정도의 브레스에 경악해 있던 일행이 나를 바라보았다. “가지.” 나는 그 말고 함께 몸을 걸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높은 곳이지만 그 끔찍한 절벽을 그냥 넘어온 것만 해도 어디냐. 나는 내 뒤를 따라오는 세 일행의 기척에 빙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소드 오브 다크> 어두운 숲이었다. 상당한 시간을 살아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 멀리서 몬스터들의 살기어린, 공포감을 주는 괴성들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약 1년 전부터 몬스터들의 천국으로 불리고 있는 숲. 단 한번이라도 이 숲에 들어온 사람들은 실력 여하에 상관없이 치를 떨며 말했다. 이곳은 악마의 숲이라고. 이 숲의 본 이름이기도 했지만 그에 상관없이 진정한 공포로서 자리 잡은 이 숲의 이름이었다. 채챙!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로 들어오지 않을 곳. 이곳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수수수……. 몇 백 년을 버텨왔을 거대한 고목이 쓰러졌다. 그리고 검은 빛이 그 고목을 타고 올라 하늘로 폭사되었다. 다시 날카로운 금속들의 충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치이잉! 푸화화확! 몇 그루의 나무들이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터져나가며 두 물체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모습이 환연히 드러났다. “소울 오브 헬. 죽어라!” 이상하게 생긴 기형의 대검을 들고 있는 존재의 말과 함께 검에서 칠흑의 기운이 불타올랐다. 그 검은 불길은 점차 번져나가며 그 존재의 온몸을 따라 불타올랐다. 두 다리를 땅에 굳건히 딛고 악마를 연상케 하는 모양의 투구 사이로 검은 심연의 눈을 번뜩이는 존재. 온몸이 검은, 악마의 모습을 본 딴 듯한, 금속으로 보이는 재질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고 전신에서 어두운 기운을 뿜어대는 존재. 그 존재는 마계에서 올라온 죽음의 관장자, 어둠의 기사들의 왕. 데스 킹(Death King). 하나의 종족으로, 진정한 어둠의 존재들을 제외한다면 최강의 반열에 드는 마계의 존재였다. 최강의 데스 나이트에게만 주어지는 힘을 얻은 자. 그의 힘에 불타오르는 검의 앞에 한 사람이 있었다. 역시 검은 기운이 불타오르는 아름다운 검을 들고 있는 사내였다. 길지 않은 검은 머리를 바람에 흔들거리며 검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검사. 그의 검과 전신에서 어두운, 검은, 하지만 동시에 빛을 내뿜는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허리에서 동여맨 코트와 망토의 중간 형태 정도로 보이는 망토를 작게 펄럭이며 그 사내가 데스 킹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마치 한 몸이 된 듯이 그와 그의 화려한 검이 일직선으로 죽음의 지배자를 찔러 들어갔다. 고오오오오! 두 검은 기운이 격돌하며 강한 진동음을 내었다. 그리고 망토를 펄럭이는 인간과 소리하나 없이 매끄럽게 움직이는 갑옷을 움직이며 앞으로 스르르 미끄러지는 데스 킹이 서로 격돌했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이 숲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앙! 검은 기의 폭풍이 숲 깊숙한 곳의 일부를 휩쓸고 지나간 후, 서로 격돌했던 두 존재가 숨을 헐떡이며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쿨럭.” 검은 기류에 망토를 펄럭이며 꼿꼿이 서 있던 사내가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데스 킹이 몸을 비틀거리다 그 기형의 대검을 땅에 박아 넣는 것으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서로 상당한 충격을 입은 듯한 두 존재는 싸늘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검은 기운으로 불타오르는 심연의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시선의 중간 부분에서 마치 검은 스파크가 터지는 듯 했다. 잠시 동안 침묵하며 서로를 노려보던 두 존재 중 마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왕이 입을 열었다. “강해졌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네 놈은 내게 그때의 복수를 할 자격이 있다. 마검의 주인이여.” 웅장하게 울리고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목소리였다. 마음 약한 자라면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복종할 정도의 카리스마가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망토의 사내는 무표정을 고수하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괜한 헛수고 하지 말고 옛날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떨까. 구역질이 나려 하는군.” 다시 날카롭게 벼려진 두 눈초리가 격돌했다. 엄청난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던 둘은 뭔가를 깨달은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 자신의 무기를 회수했다. 스르릉. 화르르륵. 망토의 사내의 화려한 검이 역시 화려한, 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한 검집으로 모습을 감추는 동시에 어둠의 존재의 대검이 검은 불길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데스 킹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크크크. 하긴 네놈과 이런 식으로 얘기를 나누는 것도 우습지.” “이제야 본 모습이 나오는군. 훗. 미안하지만 복수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군.” 사내의 말에 데스 킹은 킬킬거리며 웃더니 팔짱을 끼었다. “그렇게 되겠군. 우리의 힘은 동급이다 다크소드. 크큭. 오랜만에 마음 놓고 싸우니 기분이 좋군. 크크크크.” “훗. 네놈도 생각 이상이다. 적어도 데스 나이트 정도는 되었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내 예상을 처참히 박살내는군. 그 모습과 힘은 뭐지?” “킬킬. 데스 킹. 어둠의 전사들의 지배자에게 주어지는 힘이다. 크크크크.” “왕에게 어울리는 웃음은 아니라는 생각인데.” “크크큭.” 다크소드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주위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옆에서 반으로 부러진 고목을 발견하고는 그 고목에 몸을 기댔다. 반 정도 부러진 것으로 보이지만 원래 크기가 상당했기에 그의 키를 훌쩍 넘어 편하게 기댈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편하게 자세를 잡는 인간을 바라보던 데스 킹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다크소드와는 다르게 자세를 바꾸지는 않았다. 대신 어둠의 존재는 낮은 목소리를 울리며 물었다. “나하고 할 말이 있나?” 다크소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네놈… 인간이냐?” 마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어둠의 전사, 기사들의 왕에게 물을 말은 아니었다. 이미 존재 자체로서 인간이 아닌 존재이다. 하지만 데스 킹의 타오르는 눈이 잠시 흔들렸다. “크크. 무슨 말이냐.” “…….” 다크소드는 말없이 데스 킹을 마주보았고 데스 킹은 이를 가는 듯한 소리를 내다가 낮은 음성을 흘렸다. “하긴… 그분의 말대로이긴 하군. 네놈이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로군. 클클. 그렇다. 나는 이 세상의 마족이 되기 전에는… 한때는 이세계의 인간이었지. 지금은 위대하신 분을 위해 싸우는 어둠의 존재, 죽음의 기사들의 왕이지만.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핫!” 콰르르르륵! 무엇인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강한 번개가 하늘을 지나 숲에 내리쳐졌다. 누군가가 ‘의도’한 듯한 번개. 어느새 숲의 어둠과는 다른 어둠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강한 번개들이 연속으로 내려쳐졌다. “크크크큭! 멋지지 않나! 이것이 그분의 힘이다!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그분의 힘이란 말이다! 네놈들 같은! 유희라는 어이없는 말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는 놈들은 꿈도 꾸지 못하고! 네놈들의 공포가 될 힘이란 말이다! 크하하하하!” 데스 킹의 미친 듯한 광소를 들으며 다크소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는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분이라… 모르겠군. 마신? 후훗. 내가 알바 아니지. 난 그저 지킬 뿐.”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터질 듯한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어둠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와 때를 같이해 죽음의 왕 또한 어둠의 힘을 불태우며 손을 높이 쳐들었다. “크하하하하! 끝이 아니더라도! 한 쪽의 끝을 보지 못하더라도! 크크크크큭! 죽어라, 마검의 주인이여!” “지랄을 하는군.” 화르르륵. 그리고 다시 검은 불길과 함께 나타난 기형의 대검을 데스 킹이 움켜쥐는 순간, 다크소드의 검집에서 검은 섬광이 번뜩이며 마검이 뽑혀져 나왔다. 피이이이잉! 두 검이 맞부딪히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악마의 숲에는 두 기운이 울려대는 날카로운 소리와 그 기운들의 두 주인이 뿜어대는 터질 듯한 살기로 가득 차 가고 있었다. “하아…….” 움직이기 간편해 보이면서도 최대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만약 장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있다면 상당히 삶이 불편해질 듯 했다. 어쨌든 그런 옷을 입고 산을 타고 오르는 바람에 은발 머리를 휘날리는 미녀…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동양인의 모습이었지만… 다만 플레어이어가 아닌 NPC라는 것이 특이한 미인이었다. “우헤헤헷! 자아앙구우운!” “크허허헉!” “오오옷! 이번에도 위리안 군의 승리인가!” “이보게 살라크! 오늘도 자네에게 걸었단 말이네!” “크윽! 멍군!” “호오? 다시 장군!” “무으어어억!” 슬며시 고개를 돌려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소란을 떨고 있는 백발머리에 곰방대를 물고 있는 인간 사내와 그 주위의 드워프들을 잠시 바라보던 은발머리의 미녀, 이설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두 손으로 무릎을 토닥거렸다. 뭔가 상당히 불만에 쌓인 듯한 행동이었다. “우하하하하핫! 설화 소젓! 땄습니닷! 또 땄다고요!” 설화는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옆으로 달려와 춤을 춰대는 백발 성게 머리의 사내, 위리안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저쪽의 드워프들도 광란을 춤을 춰대고 있었다. “허허허허헛! 또 땄군 그래! 실라크, 고맙군. 하하핫!” “크아아악! 또 잃다니! 또오오!” “허허허헛!” 그 광란의 도가니에 잠시 자신만의 세계에서 절규하던 설화는 고개를 들어 위리안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순간 한기가 휘몰아쳤고 위리안의 춤사위가 딱 멈췄다. 그리고 설화가 입을 열었다. “위리안. 좀 하루라도 진지해 질 수는 없나요? 벌써 세 달이에요. 이 드워프의 마을에서 머문 지가 벌써 세 달 이라고요!” 한기가 심하게 풍기는 설화의 고함소리에 위리안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곰방대를 입에서 떼고는 입을 열었다. “하하… 그렇다고 한도 없는데 우리끼리 적색 산맥을 벗어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소저. 한이 연락을 하겠다고 말을 전해왔었으니 기다려 보죠. 하하. 저 드워프 분들도 정말 좋은 분들이 아닙니까? 좋은 무기에 보석도 없었고… 소저의 그 옷도… 그리고 전 실제로는 한 달 밖에 기다리지 않았기에 그다지 …….” “그래요. 플레이어라 참 좋으시겠네요.” 플레이어라는 말에 위리안이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플레이어를 죽도록 싫어하는 설화였다. 위리안이야 벌써 4달이 다 되어가도록 동행하고 있었으니 좀 괜찮게 대하고 있었지만. 위리안이 다시 고개를 들며 뭔가를 말하려 하는데 무엇인가가 아래쪽에서 솟아올랐다. “음?” 스르륵. 위리안의 손이 순식간에 부적 주머니로 다가갔고 설화의 손이 머리카락에 묶여 있는 은사들로 다가갔다. 하지만 자신들이 앉아있는 바위로 솟아오르는 이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손을 내렸다. “주토? 왜 그래?” 위리안의 물음에 바위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회색머리의 사내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누군가가 이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혼자입니다만…….” 주토의 말에 위리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부적 주머리로 손을 가져가며 드워프 마을의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설화와 주토가 그 뒤를 따랐고 주토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도 광란의 춤사위를 멈추고는 각자 무기들을 들고 뒤를 쫓았다. 곧 마을의 입구에는 부적 몇 장을 꺼내들고 있는 위리안과 은사를 흔들거리고 있는 설화, 그리고 은빛 검신의 소검을 들고 있는 주토, 배틀 엑스 등 엄청난 무게와 파괴력을 자랑하는 무기들을 들고 있는 작은 키에 수염이 무성한 드워프들이 도열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길도 엄청나게 험한데다 몬스터들도 엄청나잖아? 우리도 혼자서는 내려가기 힘들다고.” 위리안의 말에 드워프들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마을은 지금까지 어떤 방문자도 없었던 거의, 봉인되다 시피 한 마을이었다. 뭐, 들켜도 별 상관없기는 했지만. 드워프들의 힘과 이 마을을 보호하는 대신 보석을 가져가는 세르페이린 힘이면 그 어떤 침입자도 이 마을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 덕분에 혼자서 여기까지 온 상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이들의 시선이 주토에게 집중되었다. “그게… 엄청난 자였습니다. 험한 지형도 한 번의 도약에 날렵한 몸놀림으로 쉽게 통과하는데다… 아까는 오거 한 마리가 공격해 들어갔는데 단 한번의 공격에 여러 조각으로 갈라버리더군요.” “케엑?” 오거를 단 한방에 조각냈다는 말에 위리안이 숨이 막힌다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설화도 눈가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때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 방문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75정도의 키… 설화와 비슷한 키와 체격에 로브를 뒤집어써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이였다. 체형으로 봐서는 여자로 보였지만. 그때 드워프 마을의 장로 겪인 실라크가 감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오. 잘 단련된 방문객이로군. 걸음걸이가 상당해. 흐음… 그런데 인간이 아니로구만.” “예?” 위리안과 장기만 두었다 하면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는 실라크였지만 평소에는 근엄하고 몇 백 년 치의 연륜을 보이는 실라크였기에 인간 셋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다른 드워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여전히 그 방문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사물의 본질을 꽤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 실라크는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반인족, 수인족(獸人族)이네. 지금은 하나의 종족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들이지. 날렵한 몸놀림에 날카로운 발톱도 그렇고… 강하다네. 전에는 인간들에게 성 노리개로 다뤄지기도 했지만… 요새는 거의 없고… 동물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고 저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는 이들이지. 거기다 저 방문객은… 특히나 강하군. 무엇보다… 마기가 느껴지는데?” “마기?” 실라크의 마지막 말에 인간 셋은 놀란 얼굴로 그 반인족이라는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어디서 많이 느껴본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세한이 흘리고 다니던 마기. 많은 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위리안 등의 바로 앞으로 다가온 반인족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해드릴 말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 먼저 로브부터 벗어주시면 안될까요?” 아름다운 목소리에 멍한 표정을 짓던 위리안의 말에 잠시 가만히 서 있던 반인족은 로브를 뒤로 넘겨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덕분에 위리안과 주토, 실라크를 포함한 남성 일동은 일제히 한숨을 토해내었다. 로브 밖으로 드러난 반인족의 얼굴은… 설화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리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설화에 비해 왠지 순종적으로 보이는 얼굴에 더욱 점수를 주는 남성 동지들 이었다. 약간 검은 피부를 가지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여성 반인족.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작은 고양이 귀가 그녀가 반인족임을 확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남성들의 뜨거운 눈빛에 잠시 당황하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린. 세한님의 종입니다.” “에에엑!?” 세한의 종이라는 말에 위리안이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린이라 밝힌 반인족을 가리켰다. “조, 종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에… 린 소저?”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세한님에게 몸과 마음, 모든 것이 종속된 종입니다.” “…….” 상당히 싸늘한 바람이 위리안 일동을 휩쓸고 지나가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싸늘한 바람의 출처 중 하나는 설화였다. 설화에게서 흘러나오는 싸늘한 냉기에 주토가 슬쩍 한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그때 위리안의 절규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어째서! 어째서 한에게만 저런 미인들이! 억울해! 이건 불공평하다고! 설화 소저에 이어 이번엔 저런 아름다운 반인족 소저라니! 으아아아악!” 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드위프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고 주토는 설화의 눈치를 보다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설화가 한기가 넘치는 목소리로 위리안에게 물었다. “제가 뭘 어쨌다고요?” “으아아… 에?” 위리안은 설화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모두를 자극하는 린의 말이 또 들려왔다. “아, 저기… 전 그저 세한님의 종일 뿐입니다. 세한님에게는 저보다 더 아름다우신 분들이 더… 아?” “으아아아아아! 불공평해! 불공평하다고! 왜 한에게만! 린 소저보다 더 아름다우신 분들이라니! 으아아아아!” “우어어어억! 그 음험한 친구가 뭐가 좋다고 이런 미인들이 따른단 말인가! 허허허허…….” “으음… 자네는 드워프면서 인간 여자들에게 무슨…….” “자네도 설화는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나!” “크흐흐흑.” “…….” 설화의 눈이 더욱 싸늘해 져 가고 있었지만 위리안과 드워프 일동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혼자서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던, 속으로만 자신의 주군 세한에게 감탄하고 있던 주토가 앞으로 나서며 린에게 물었다. “전언을 가져오셨다고요?” 주토의 물음에 린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세한님의 전언입니다. 소드 오브 다크의 모든 이들은 나무꾼의 도시, 바카나의 술집, 드래곤의 표호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 세분과 실라크 장로님을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고 이리로 온 것입니다.” “바카나?” 주토가 반문했다. 린은 저기서 발광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 보다 자신의 말에 대답하고 관심을 같는 주토가 훨씬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느새 다가온 설화가 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적색 산맥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나무꾼 길드가 있는 곳이지요. 산맥 탐사 길드도 있습니다. 중급 도시에 속하는 곳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소드 오브 다크라는 건…….” “세한님, 저의 주인님을 주군으로 받드는 연합입니다. 여러분은 이 연합의 명예 회원 분들로 초빙되었습니다.” “한을… 주군으로?” 주토와 설화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그런 단체가 생겼다는 것인지… 둘이 아무 말 없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 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열흘 안에 도착해야합니다. 약속 일이 딱 열흘 후입니다. 실례지만 저도 주인님의 말만을 전해 들었을 뿐, 뵙지는 못했기에 어서 갔으면 합니다.” 린의 말에 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들이 아무말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거짓말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드워프들이 아무말 하지 않는 것은 지금 저 난리의 주범들이기 때문일지도. “알겠습니다. 여기서 하루만 머물고 떠나도록 하지요.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임무를 맡고 여기로 왔으니까요.” 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토가 몸을 돌려 위리안에게 다가가자 설화가 린에게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한하고는 정확하게 어떤 관계죠? 아니, 같이 잔 적이 있나요?” 주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린의 말에 주토는 약간 비틀거렸고 설화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 졌으며 위리안 일동의 광란은 더욱 심해졌다. “예. 항상 주인님과 한 침대에서 자거나 주인님 위에서 잠을… 저… 왜들 그러시죠?” ------ 한편 그 시각. 각지의 연합에서는 대륙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빅 캐슬의 엠페러 길드의 한 집무실에서 벌어지는 대화였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딜럿님. 바카나 시로 꽤 많은 이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딜럿은 자신의 부관, 투르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바카나… 별 쓸모없는 도시일 텐데? 더구나 적색 산맥 근처라 그 어느 연합의 땅도 아닌 곳이지 않나?” “그렇습니다만… 그곳으로 레이디스 길드를 비롯한 여러 길드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길드도…….” 투르의 말에 딜럿은 눈매를 찡그렸다. “하아. 제퍼슨님이 정중하게 대하는, 엄청난 분들이시니 어떻게 하기도 힘들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요새 들어 좀 이상한 움직임이 보이기는 했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무력 단체는 레이디스 길드뿐이라는 겁니다. 나머지는 도도리 제빵 연합이나 나무꾼 길드, 광부 길드 같은 곳들 뿐이니… 그리고 그 외에는 그저 작은 소모임 정도의 길드 몇 곳과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뿐이니…….” 투르의 말에 딜럿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나머지 한손이 발작적으로 움켜쥐어졌다 펴졌다 하는 것이 투르를 상당히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미치겠군. 무시하기에는 좀 큰 움직임이고… 건드렸다가는 그 분들 때문에 힘들고… 젠장. 그냥 무시한다. 레이디스 길드야 우리와 동맹 관계일 뿐, 별달리 협력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뭔 일을 꾸미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 정도 길드의 힘 정도야 우리에겐 이제는 필요 없다. 그래, 헌터 연합과 암흑 연합의 움직임은?” 딜럿의 말에 투르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이 종이 뭉치는 필요없다. “여전히 같습니다. 지겨운 삼파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요. 빅 캐슬을 중심으로 대륙의 북부와 중부, 서부 일대를 장악한 저희 연합과 대륙의 중부 일부와 동부, 남부를 장악한 헌터 연합. 그리고 음지에서 활동해 정확한 영토조차 모르는 암흑 연합. 여전히 알려진 도시는 도적의 땅, 로근 뿐입니다. 하아. 설마 그 레지엘이라는 놈이 이 정도일 줄은…….” “젠장. 하긴, 성검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좀더 주의 했어야 했다. 설마 암흑 연합의 지배자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 더구나 저번에는 제퍼슨님과 싸워서 크게 밀리지도 않았으니… 망할. 거기다 그 미토스와 할딘 두 놈은 운영자들의 협력까지 받아내서 점점 커지고 있으니…….” “그래도 다크소드가 헌터 엽합에 없는 것이 다행이지 않습니까.” 투르의 말에 딜럿이 몸의 움직임을 딱 멈췄다. 옛날의 일이 떠오르는 모양이라고 짐작한 투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딜럿은 그 치욕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잠깐… 다크소드라… 레이디스 길드의 나프네와 그 세 분… 하지만 그럴 리가.” 딜럿의 중얼거림에 잠시 생각하던 투르의 얼굴로 곧 굳어졌다. 모두 다크소드와 연관이 있는 이들로 알려진 사람들. “그, 그럴리가요. 과민하신 걸 겁니다. 다크소드는 1년이 넘도록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습과 여러 특징을 볼 때 알려지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돌아왔다고 해도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이야 예전의 다크소드와 맞먹을 강자들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투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딜럿은 여전히 왠지 모를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의 문이 열리며 한 검사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투르가 사나운 어조로 물었지만 검사는 별 신경 쓰지 않고 급히 입을 열었다. “정보부에서 급히 딜럿님에게 전해드리라는 말입니다. 천악이 바카나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검사의 말에 딜럿과 투르는 신음을 흘렸다. 천악도 다크소드와 상당한 인연이 있는 이다. 둘은 왠지 모르게 그 검은 사내의 모습이 계속 떠오르는 것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방으로 들어온 검사는 원인 모를 둘의 짜증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도적의 도시 로근. 최상급에 속하는 도시였다. 암흑 길드 연합의 본거지가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누구도 확인하지 못한 도시. 물론 본거지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레지엘이 일부러 알린 사실이었으니 아닐 이유가 없었다. 레지엘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로근의 높은 성벽 위에 은발을 길게 기른, 이 도시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곱상한 외모를 가진 기사 한명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한 여성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은 무기의 모습으로 봐서는 암살자로 보였다. 꽤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 바카나라… 세한인가?” “예.” “드디어 왔군. 오랜만에 보겠는데? 후훗.” 태평하게 웃고 있는 레지엘의 모습에 붉은 머리를 길게 기른 여성은 레지엘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부동자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위협이 될지 모릅니다. 일찍 제거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레지엘은 웃음을 그치고는 잠시 침묵했다. 적발의 여성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레지엘이 그 여자의 손을 휙 끌어당겼다. “아.” 순식간에 레지엘의 품에 안기게 된 여자는 얼굴을 붉혔다. 여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레지엘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난 그럴 생각이 없어. 오히려 그가 더욱 많은 힘을 얻었으면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시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레지엘을 바라보던 여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사장님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여자의 말에 레지엘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여자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어때 벨? 오늘 나하고 있지 않겠어?” 레지엘의 말에 여자는 떨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 저, 저는… 아…….” 레지엘은 그 반응에 피식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벨이라는 이름의 여자을 품에서 놓지는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레지엘의 눈을 바라보던 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에 레지엘은 작게 미소 지으며 벨을 풀어주며 자신의 옆에 앉혔다. “그만하지. 흐음… 세한이라… 리자드에서는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군. 아니, 어쩌면 엠페러 길드처럼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지도. 후훗. 재밌어 지겠군.” 작게 중얼거린 레지엘은 자신의 옆에서 안도하는 동시에 약간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레지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잠시 몸을 움찔하던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잠시 후, 얼굴을 든 레지엘은 눈을 질끈 감고는 미세하게 떨고 있는 벨을 보며 빙긋 웃었다. “가자고 벨. 일을 해야지.” “아… 예, 예!” 정신을 차린 벨이 급히 몸을 일으키자 레지엘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날카로운 얼굴이었다. 아까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런 그의 얼굴에 벨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붉어졌던 얼굴이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자.” 레지엘이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성벽 위를 걷기 시작하자 벨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저쪽에서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레지엘과 벨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성벽 위로 여름의 더위를 쫓아주려는 듯한 시원한 바람이 불어지나갔다. “우와아… 멋진데?” “그렇군요.” 위리안의 감탄사에 주토가 동의했다. 설화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이곳이 바카나입니다. 나무꾼들의 도시고 중급의 도시 밖에 되지 않기에 그리 화려한 곳은 아니죠. 물론 동대륙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린의 설명에 위리안과 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자신들이 온 곳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성벽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오면서 봤던 나무꾼들이나 몇몇 여행자들이야 한두 명씩 봐서 감흥이 덜했지만 이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니 상당히 즐거운 둘이었다. 설화는 여전히 얼음이었지만. “허허. 어서 가세.” 일행은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그 이유에는 아름다운 외모의 린과 설화. 그리고 흔하지 않은 드워프의 존재 때문이었다. 드워프들이 여러 물품을 팔러 도시에 오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보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일행은 성문을 지나 도시의 중앙 광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다 왠지 모르게 도시 치안대의 숫자가 많았다. 그리고 상당히 긴장한 듯한 치안대의 병사들. 위리안과 주토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화는 주위에 득실대는 플레이어들에게 신경을 쓰느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군요. 이곳의 도시에는 치안대가 원래 이렇게 많습니까?” 주토의 질문에 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좀 많은 편이긴 하지요. 이 대륙은 무력 충돌이 꽤 많은 편이거든요. 하지만 이 도시는 그런 일이 별로 없는 곳인데… 아마 소드 오브 다크의 이들이 모여들고 있기에 이러는 걸 거예요. 갑자기 이방인들이 많아지니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위리안과 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 둘의 행동에 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10분 쯤 걷자 일행은 도시의 중앙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상당한 인파가 몰려들어 있었다. 그리고 위리안이 낮은 비명을 질러대었다. “우오옷! 저 아름다운 소저들은! 거, 거기다 저 연녹색 머리의 소저는 설화 소저와 동급, 아니 그 이상의……!” 위리안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레 위리안이 바라보는 곳으로 모여졌다. 그 곳에는 일단의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상당한 미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 단연 돋보이는 연녹색 머리의 여검사. 일행은 그 여검사의 아름다움이 설화와 맞먹는 다는 사실에 상당한 놀라움을 표했다. “아, 나프네님이시군요. 이 대륙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알려지신 분이죠. 검술 실력도 최상급이시죠.” “오옷!” “아, 혹시 저분이 린 소저가 말씀하셨던 한님의…….” 주토의 질문에 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님과 꽤 관계가 깊으신 분이에요. 소드 오브 다크에서 꽤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실 분이죠.” “크흑…….” 위리안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주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설화의 약간 차가운 눈총을 받던 나프네는 자신의 부관, 페넬리와 함께 그 드래곤의 표호라는 술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분들이라면… 또 있단 말씀……?” 힘 빠진 위리안의 물음이었다. 린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예. 페페라는 분이신데… 주인님과 연인 사이이기도 하셨던 분이죠. 그리고 몇 분이 더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아…….” 위리안은 이제 아예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고 주토는 작게 미소 지었다. 실라크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설화는 약간 날카로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완전 바람둥이였잖아.” 나머지 위리안과 실라크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쓴웃음을 짓던 린은 일행을 이끌고 드래곤의 표호로 향했다. 일행이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백발 성게 머리의 사내와 암살자로 보이는 검은 사내. 절색의 미모를 자랑하는 두 여자. 그리고 배틀 엑스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드워프. 너무도 당연하게 시선을 끌고 있는 일행이었다.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하는 일행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주토와 같은 짧은 회색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내였다.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검사. 주토는 상당한 기세를 풍기는 사내의 모습의 긴장하며 소검이자리 잡고 있는 품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야. 이거 미인 분들이 두 분이나 되시는군. 크큭. 한분이라도 양보해 주시면 안 되려나.” 빈정대듯 말하는 사내를 바라보는 일행의 눈초리가 순식간에 험악해 졌다. 하지만 사내는 실력에 자신이 있는 듯 여전히 건들거리고 있었다. 위리안이 왠지 싸이코틱하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사내의 얼굴이 앞으로 숙여졌다. 둔탁한 타격음이 동시에 들려와싿. “뭐하는 거야, 레딕! 개 버릇 남 못준다고 여기만 들어오면 완전 싸이코라니까.” 여자였다. 역시 회색 머리. 다만 장발이었는데 눈매나 얼굴의 곳곳이 뒤통수를 부여잡고 있는 사내와 비슷한, 하지만 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직업은 검사로 추측. 여자에 대한 관찰을 끝낸 주토는 역시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소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고개를 든 레딕이라는 사내는 날카로운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가 약간 움찔하다가 마주 레딕을 쏘아보기시작했다. “저리 꺼져라, 릴. 언제 폭발할지 모르니까.” 릴이라 불린 여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로써 이 사내의 실력이 더욱 높다는 것을 알게 된 주토는 서서히 투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내의 빈정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여어. 이쪽 아가씨는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리는군. 난 이쪽 아가씨가 더 좋은데… 오늘밤 어때, 반인족?” 로브를 개량해 반인족임을 알리는 부분을 모두 가리고 있던 린은 이 사내가 자신이 반인족이라는 사실을 짚어내자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레딕이 빙긋 웃으며 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순간 린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 설화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플레이어… 쓰레기 같은 자식.” 쉬이익! 설화의 손에서 시작된 실들의 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레딕의 온몸을 거미줄처럼 포위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발출된 주토의 소검이 레딕의 목에 겨눠졌다. 린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린의 손에서 날카로운 손톱들이 자라나 있었다. “피곤한 곳이네요.” “그렇군 그래, 위리안 군.” 위리안과 실리카의 말을 뒤로 하고 싸늘한 대치 상태가 완성되었다. 설화와 주토의 공격에 미소를 지우고 싸늘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는 레딕과 당장이라도 레딕을 죽일 것처럼 보이는 설화. 그리고 약간 난처한 표정의 주토. “꼴좋다.” 뒤에서 저쪽에서 릴이라는 여자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레딕의 동료로 보이는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 주점 안의 다른 사람들은 나서기가 곤란해 져 그저 앉아서 상황을 살폈다. “이것들 치우시지. 정말 죽일지도 몰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실례는 그쪽이 먼저…….” “닥쳐. 죽여버리겠어.”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던 주토는 설화의 말에 자신의 의도가 깨어짐을 알아차리는 동시에 설화의 어깨를 잡으며 뒤로 급히 물러났다. 어느새 뽑혀진 레딕의 검이 설화의 은사들을 끊고 솟구쳤다. “이익!” 그리고 마나, 기를 머금은 설화의 은사들이 춤을 추며 레딕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 화려한 공격에 레딕의 얼굴에 감탄과 함께 살기가 떠올랐다. “킬(Kill)…….” 순식간에 사내의 검이 설화를 찔러 들어갔다. 허공에서 레딕의 검과 은사들이 뒤엉켜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주토가 레딕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챙! 하지만 주토는 어느새 다가온 릴이라는 여자의 단검에 공격을 막혔다. “레딕이 잘못한 것은 인정하지만 2:1은 좀 그렇군요.” “…….” 채채채채챙! 둘 다 상당한 실력의 암살자들이었기에 주고받는 공격의 속도가 엄청났다. 하지만 경험과 힘, 속도 등 모든 것에서 조금씩 릴을 압도하는 주토였기에 둘의 공방전은 주토의 흐름대로 이어졌다. 쉬이이익! 투카칵! 하지만 설화와 레딕의 싸움은 레딕의 단연 우세였다. 비웃는 듯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는 레딕을 향해 설화는 은사를 마구 뿌려대었지만 레딕은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손속이 꽤 매우시군.” “이익!” 그리고 설화의 은사를 다시 끊어낸 레딕이 빠른 속도로 설화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레딕의 손이 설화에게 닿으려는 순간, 위리안의 중얼거림과 함께 기검이 레딕의 앞을 가로막았다. “속(速). 기검(氣劍)!” “흡!” 카캉! 레딕은 위리안의 부적에서 뻗어나온 기검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위리안은 기검을 금세 없애 버리고는 다른 부적들을 꺼내들었다. “넌… 뭐지? 처음 보는 기술들이로군.” “훗. 난 마이너 위리안. 덤벼라. 화염의 지옥을 보여주마.” 곰방대에 태연하게 불을 붙이며 멘트를 뱉어내는 위리안이었다. 레딕의 눈에서 불이 번쩍하는 동시에 그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생성되며 위리안을 공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위리안의 부적들이 떠올랐다. “화(火), 결계(結界).” 순식간에 부적이 타오르며 불의 방벽이 생성되었다. 하지만 레딕은 순식간에 화염의 막을 찢어버리고는 재차 공격해 들어왔다. 위리안의 눈이 안경 뒤에서 싸늘하게 빛났다. “죽여주지. 빙창(氷槍), 사방(四方)!” 수개의 부적이 부스러지며 사방에서 얼음의 창들이 만들어 지며 레딕을 찔러 들어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레딕의 눈이 빛나며 빠르게 검이 휘둘러졌다. 파카카카칵! “화뢰(火雷)!” 화지지직! 불꽃의 번개가 떨어졌다. 불꽃의 번개. 레딕의 눈이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검에서 검기들이 날아갔다. 카가가가각! “제법이군.” “그쪽이야 말로.” 둘은 서로 날카로운 눈빛을 교화하며 서로를 향해 둥글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위의 탁자 등등은 박살나 사라진지 오래였다. 위리안의 몸을 불의 회오리가 보호하고 있었다. “혀, 형님!” 그때 주점의 입구에서 몇몇 사람들이 들어섰다. 레딕을 향해 형님이라 부르는 그들의 행동에 이번에는 실라크가 어깨에서 배틀 엑스를 내렸다. 그리고 린이 다시 손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설화가 그 둘의 옆으로 다가섰다. 싸움이 점차 커지는 듯 했다. “허허허. 그만들 하게나.”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싸움이 벌어진 곳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술을 마시며 구경하던 사람들 중 가장 구석에 앉아있던 중년인들 중 한명이었다. 손목에 묶여 있는 와이어와 옆에 놓여진 간단한 함정 제작 도구들이 그가 트랩퍼임을 알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우뚝. 분명 여유로운,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이들 모두가 싸움을 멈췄다. 여유로우면서도 무거움이, 엄청난 위압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싸움을 벌이던 이들은 물론 주점 안의 사람들 전부가 그 트랩퍼를 바라보았다. “닥치고 앉아 늙은이.” 레딕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 중년의 트랩퍼는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피식 웃고는 정말로 자리에 앉았다. 말한 레딕 마저도 의아해 하는 동시에 세 중년인들의 옆의 탁자에 앉아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회색머리를 좀 길게 기른 사내였다. 흔하지 않은 회색 머리의 사람들이 이 주점 안에 꽤 많다는 사실에 위리안은 감탄을 토했다. 하지만 순간, 위리안은 입을 다물었고 주점 안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척. 바로 사내의 어깨에 걸쳐진 싸이드, 거대한 낫 때문이었다. 사신의 낫을 연상케 하는 낫. 그리고 사내가 낫을 어깨에 걸치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위압감이 주점 안을 감싸고돌았다. 아까 그 중년인의 위엄이 부드러우면서도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종류였다면 이 사내는 사람을 억누르고, 금세 사람들을 도륙할 것만 같은 그런 기운이었다. “천악님?” 침묵을 깨고 들려온 아름다운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어 느새 다시 손톱을 집어넣은 린이었다. 반가움과 난감함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던 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린의 인사에 천악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크소드를 따라다니던 그 고양이로군.” “예.” 어느 정도 화기애애한 둘의 분위기에 비해 주점 안은 상당한 중압감에 휩싸여 있었다. 최강의 배틀러 천악과 다크소드. 이 두 인물에 관한 얘기들이 순시간에 주점을 점령했다. 그렇게 뭔가에 눌린 듯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순간, 주점의 문이 다시 열렸다. 주점의 문에 서 있던 레딕의 부하들이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사내는 주점 안을 한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입을 열었다. “분위기 한번 썰렁하군. 아, 천악? 오랜만이다. 아… 린! 정말 살아있었구나.” “주인님!” 엄청난 속도로 그 사내에게 달려간 린이 사내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토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 “아, 그래.” “오랜만에 보네요, 한.” “으음. 이번엔 나프네인가. 오랜만이군. 와줘서 고마워.” “오랜만이네.” “아, 라젠님. 이반님과 나르손님도 계셨군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린의 일은 감사드립니다, 나르손님.” “아니네.” 그리고 주점 안은 세한과 인사를 나누려는 사람들로 상당히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주점 주인은 현재 자신의 가게를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범상한 사람이 없음에 감탄하며 이 일을 장사에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했다. “후, 이번엔 리자드맨?” 나는 한숨과 함께 손을 풀었다. 곳 붉은 빛과 함께 내 앞으로 좀 떨어진 곳에 팔치온을 든 리자드맨의 모습이 나타났다. 붉은 눈을 흉흉이 빛내고 있는 것이 옛날과는 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르르륵! “어쨌든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군.” 나는 지금은 모든 능력치를 잃어버리고 평범한 건틀릿이 되어 버린 OPG에서 손톱을 꺼내며 옆으로 둥글게 움직였다. 현재 내가 리자드맨과 전투를 벌이는 곳은 보너스 수치 조정을 위해 만들어진 시험의 탑이었다. 도시 마다 꼭 하나씩은 있는 곳. 보너스 수치는 여러 능력치와 상호 조합을 이뤄 많은 능력 상승을 가져오기에 보너스 수치 조정은 필수였다. “허허. 힘내게나.” 내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그 어둠의 검인지 소드 오브 다크인지의 일반 회원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 고타의 응원이었다. 모여든 사람들 중 중요 간부들은 회의장으로 지정한 드래곤의 표호의 2층에 모여있었고 나머지들은 자유 시간이었다. 그 나머지들 대부분이 여기로 몰려와 있었지만. “허허. 그나저나 설마 그 데스 킹과 싸울 때도 보너스 수치 없이 싸웠던 거라니… 상상이 안 가는군.” 나는 손을 대충 흔들어 주고는 높이 뛰어올라 리자드맨의 머리를 돌려 찼다. 아이템들의 능력치가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 있는 만큼, 내 신체 능력도 게임 캡슐에서 측정한 만큼으로 조정되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 싸움 실력을 본다는 것이다. 때문에 방금까지 치러진 오크, 코볼트와의 싸움에서도 죽을 뻔 했다. “하앗!” 나는 리자드맨의 팔치온을 옆으로 흘리며 OPG를 놈의 목 줄기에 박아 넣었다. 푸른 체액이 살짝 솟아올랐다. “우와아! 리자드맨도 해치웠어!” “저, 저게 인간이냐. 저 정도면 현실에서도… 상상이 안가네.” “역시 진님! 레딕 형님도 리자드맨에게는 허무하게 당하셨습니다! 힘내십시오!” “허허허허. 관세음보살.” 나는 관중들의 시끄러운 소음에 작게 투덜거리고는 리자드맨에게서 좀 떨어졌다. 곧 시체가 다시 빛으로 화해 사라지고 다시 붉은 빛이 모여들었다. “이번엔 뭐지…….” 곧 빛이 흩어지며 한 인형의 모습이 나타났다.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피부나 생김새는 완전히 다른 존재. 반딧이었다. “이거 옛날에 한번씩 만났던 녀석들을 돌아보는 시간 같은데?” 리자드맨 보다 훨씬 강한, 리자드 워리어와 맞먹는 실력의 녀석이다. 나는 그냥 검을 들고 들어올 것을 잘못 했나 돌이켜 보며 달려 나가기 쉽게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반딧이 괴성을 지르는 순간, 나는 OPG의 손톱을 빛내며 빠르게 달려들었다. “허허. 대단했네. 그 정도면 대단한 실력이야. 나도 반딧 다음에 나온 구울인지 하는 녀석에게 졌으니… 비슷하군. 허허허.” 나는 망토를 최대한 펄럭이지 않도록 조정하며 고타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도 고타는 구울과 싸워보기라도 했지… 전 반딧을 죽이는 동시에 다운이었단 말입니다.” 고타는 염주를 돌리던 것을 딱 멈추고는 한곳을 바라보았다.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3층 건물. 나는 눈을 빛내며 단검을 집어던졌다. 쉬이익! 타앗! 단검이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건물의 옥상에 있던 녀석이 급히 뛰어올랐다. 그리고 어느새 옥상 위로 뛰어오른 장이 놈의 등 뒤로 뛰어올라 등에 클로를 박아 넣었다. 역시 암흑가의 저력이로군. 나는 당황하며 조사를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허허. 자네도 꽤 유명한 모양이로군.” “그런 모양입니다.” 고타는 다시 염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어딜까. 엠페러? 헌터? 아니면 레지엘이 보낸 건가. 아마 헌터는 아니겠지. 운영자 정도의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 널리고 널린 곳이니 굳이 이런 방법을 쓸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엠페러의 딜럿과 암흑의 레지엘……. 나는 주점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인사하는 것에 정신을 차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마주 고개를 숙여 주었다. 곧 다크소드의 인사를 받았다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고 고타가 낮게 웃었다. “그래. 엄청난 어르신들이 와 계신다고?” “예. 고타보다 훨씬 강하신 분들입니다.” “흠, 어서 만나보고 싶군.” 나는 고타의 얼굴에 떠오른 호기심과 기대감에 미소를 지었다. 고타는 보너스 수치 조정소를 찾느라 주점에 오지 않고 있었기에 모인 사람들 중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고타는 내가 적색 산맥을 홀로 내려와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혼자서 유람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서 이런 오지를 돌아다니고 있던 것 같았다. 그 후로 약 3개월 동안 고타와 함께 여행했다. 고타가 가지고 있던 간이 통신구로 나프네와 연락도 했었고… 가는 길에 연락소에서 아는 사람들에게 말도 전하고… 대부분이 고타의 도움을 받아서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 후로는 레딕들과 나프네가 어떻게 접촉을 하더니 순식간에 어둠의 검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악마의 숲으로 일직선으로 향하는 중에 라젠이 있던 트레인 시에 들르게 되어 라젠을 만났다. 그리고 또다시 나도 모르는 새에 나프네 등과 라젠이 접촉하더니 라젠도 어둠의 검에 가입했다. 그리고 저절로 이반과 나르손이 협력하겠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리고 이 세분의 힘에 의해 나무꾼 길드, 상업 길드 등등 여러 길드가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드워프와의 교류와 이 세분과 나프네의 공세에 협력을 다짐한 광부 길드도 있고… 어쨌든 이 모든 것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것이니……. 어쨌거나 가장 많은 도움이 된 것이 우연으로 만난 고타였다. 고타의 도움이 없었다면 3개월 만에 이런 세력을 끌어 모으기도 힘들었겠지. 거기다 고타가 운영하는 무술 도장도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섀도우 월드 속에서 도장을 차렸는지 궁금하지만… 거기다 이번에 바카나로 온 도장의 제자들… 죄다 고타와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덕분에 위리안 등이 기뻐하기는 했지만. ‘오옷! 당신들도 적색 산맥을 넘어오신 겁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리고 위리안 등이 타대륙에서 나와 함께 넘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모임에 참석해 있던 산맥 탐사 길드원들의 주도로 일어난 소동. 그 사이에 난 보너스 수치 조정소를 찾아간 고타를 찾아 떠났고 현재 다시 주점으로 돌아온 길이었다. “흐흠. 이제 보너스 수치도 조정했겠다, 그 데스 킹 녀석과 싸워도 이길지 모르겠군.” “글쎄요. 솔직히 그 녀석이 온 힘을 다 했는지도 의문입니다.” “하긴… 그 녀석,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눈빛이었지. 그 상태로도 내가 쉽게 이기기 힘든 녀석인데… 만약 숨겨둔 힘이 있다면 나와 맞먹을 정도이겠군. 흐흠.” 데스 킹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고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데스 킹이 더 강해지기를 바라는 건 아닌지 불안하군. 고타라면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야. 나는 데스 킹과의 접전 때 잠시 볼 수 있었던 고타의 진짜 실력을 떠올렸다. 나와 데스 킹이 양패구상, 같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순식간에 뛰어들어 둘 모두를 뒤로 튕겨 내다니, 아무리 나와 데스 킹 녀석의 힘이 거의 다해 있었다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데스 킹 녀석이 고타를 노려보던 눈빛이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이 일도 고타에게 도움을 받은 일 중 하나가 되는군. “드디어 등장이시군.”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내게 레딕이 건들거리며 말을 건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회의실 안의 사람들의 눈빛이 모두 날카로운 것을 보니 또 한소리 한 모양이었다. 다만 레딕과 함께 일을 주도했던 나프네는 별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익숙해 진 모양이로군. “하아. 또 한판 한 모양이로군. 넌 왜 여기만 들어오면 말썽이냐?” “시끄러.” 나는 레딕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자리에 앉혔다. 레딕은 좀 투덜거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자리로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긴 회의용 탁자였고 내가 앉은 곳이 가장 상석,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었기에 내가 앉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저 편한대로 평소의 이미지대로 가기로 결정했다. “하아, 모두 오랜만이로군.” 몇 군데서 뭔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참으로 살벌한 시선들이 내게 꽂히기 시작했다. “하, 하, 하. 그래. 참으로 간만이다, 망할 자식아.” 나는 중간 정도의 자리에 앉아서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는 진성이, 새피르, 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진성이의 옆에 앉아 있는 다혜 씨, 에린이 주위에서 필에게 쏟아지는 눈빛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필에게 향하는 시선의 주인은 자랑스런 암흑가의 동지들과 주토였다. 나에게 반말에 욕까지 하자 상당히 심기가 거슬린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진성이 자식, 상당히 강해졌군. 400은 넘어서…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꿀리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레딕과 싸울 수도 있겠는데? “1년 만에 돌아와서 우리를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고는 오랜만이라니… 좀 뻔뻔하네요, 다크소드. 거기다 아름다운 여성분들까지 끼고 말이에요.” 살기가 묻어나는 나프네의 말에 나는 오른쪽에 서서 싱글거리고 있는 린과 내 왼쪽 자리에 앉아서 싸늘한 눈으로 나프네를 바라보고 있는 설화를 바라보았다. “난 바쁘니 빨리 끝내주면 정말로 고맙겠군.” 이번엔 천악이냐. 나는 오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싸이드의 날을 손질하고 있는 천악을 떪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자식은 또 왜 저러는 거야? 그때 나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둔 나프네가 손뼉을 한번 치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이 정도로 하죠. 괜히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 없는 일이니 바로 진행하기로 하겠습니다. 한, 당신이 오기 전에 이미 대충 얘기를 끝냈어요.”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미 굳어진 대로 이 연합의 이름은 어둠의 검, 소드 오브 다크로 정하겠습니다. 길드나 연합명이라는 느낌이 오지 않고 다크소드의 이미지도 주는 이름이니 좋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 역시 레이디스 길드라는 대 길드의 길드장 다운 능력을 보여주는 나프네였다.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회의도 나프네가 주도했던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다른 지역은 엠페러 연합과 헌터 연합, 암흑 연합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어둠의 검들은 이곳, 적색 산맥을 중심으로 해서 세력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 했습니다. 더구나 우리 연합의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 그림자의 땅의 악을 소탕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타대륙에서 넘어왔던 몇몇 이들의 횡포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한 이유에서라도 이곳을 방어해야합니다.” 아무래도 레딕이 나프네에게 적당히 정보를 준 모양이었다. 하긴, 외국 지사에서 한국 지사를 엉망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의견을 끄집어내고 간단하게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공통되는 것들을 모으는 것이 끝이었는지 세부 사항들을 들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연합의 세부적인 구조는 후에 자세하게 의논하기로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도록 하죠. 우리 어둠의 검의 지도자는 다크소드, 세한입니다.” 나프네의 말과 함께 사람들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다시 레딕의 눈이 싸늘하게 빛나는 것이 아무래도 아까 그 싸늘한 분위기의 출처가 이 안건인 모양이었다. “나프네. 꼭 내가 연합장을 맡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내 질문에 나프네가 눈을 가늘게 떴고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색이 떠올랐다. 흐음… 그런데 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친구들은 모르는 인간들인데? “그것 보시오! 본인도 자신이 연합장이 되어야 할 이유를 모르고 의욕조차 없지 않소! 우리는 인정할 수 없소.” 나는 갑자기 일어나 소리친 사내를 바라보았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사내였는데 그 사내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삼대 연합에 비하면 훨씬 작지만 그래도 꽤 큰 연합에 속하는 체르시온 연합의 길드장들이에요. 아무래도 자신들의 무력이 제일 강하니 자신들 중 하나가 연합장이 되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어요. 저 일어나서 꽥꽥거리는 빨강머리가 연합장인데 이름은 제롬. 대충 레딕님과 비슷한 실력으로 보여요.” 나는 린의 귓속말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똑똑해 졌다는 말은 들었는데… 대단하군. 나는 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지만 린의 얼굴이 새빨개졌고 곳곳에서 불똥이 튀었다. “저것 보시오!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반인족이나 데리고 노는 모습이라니! 나프네! 당신의 길드가 길드 중에서는 최상급에 속하지만 우리 체르시온 연합에 비하면 훨씬 부족한 힘이오! 여기 모인 이들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 우리 연합이란 말이오! 라젠님 등의 분들과 당신의 설득에 어둠의 검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인정하지 못하는 자의 아래에 있고 싶은 마음은 없소! 우리 의견을 무시한다면 우리끼리라도 삼대 연합과 맞설 각오도 하고 있으니 그리 알고 계시오!” 내 행동을 물고 늘어지는 제롬이란 친구의 행동에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때 레딕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지랄하고 있네. 그 따위 연합의 힘이야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일부만 가도 무력화 시킬 수 있어. 더 짖고 싶으면 개집에나 들어가서 짖으시지.” “뭐야!” 레딕의 말에 체르시온 연합의 길드장이라는 사람들 전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호위병 비슷하게 회의실의 벽에 기대서 있던 암흑 패밀리들이 각자의 무기세 손을 가져갔고 레딕도 싸늘하게 웃으며 살기를 피어 올렸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수틀리면 그냥 이 자리에 있는 자식들 다 죽여버린다는 듯한 눈빛의 천악이 압권이었다. 라젠 등의 옆에 있어서 나서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어, 어떻하죠, 주인님?” 린의 귓속말. 나는 아까 분위기가 왜 그리 험악했는지 몸으로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체르시온 연합이라는 곳의 친구들은 여전히 짖어대고 있었고 역시 레딕도 마주 짖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설득하는 나프네와 싸우든 말든 우리는 상관없다는 듯이 침묵하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입술을 실룩거리며 싸이드의 자루를 꾹 움켜쥐고 있는 천악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것 보시오! 막말로 해서 다크소드, 저 자의 실력이 좋으면 얼마나 좋다는 거요! 적어도 1년을 넘게 놀고 있지 않았소! 아마 저 사람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을 데리고 오라면 우리 연합에서는 얼마든지 대령할 수 있소!”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레딕의 맞대응을 기다리던 나는 순간 주위가 조용해 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상념에서 벗어나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체르시온 연합의 사람들과 나를 잘 알지 못하는 다른 길드의 사람들은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보는 듯한 눈빛들이었다. “뭐야?” 내 싸늘한 목소리에 더욱 딱딱해지는 얼굴들. 나는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실력을 굳이 밝히고 싶은 마음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정말로 모르지. 방금 보너스 수치를 조정하고 싸워본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 말을 다르게 받아들인 제롬은 마구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핫! 어이가 없군! 실력 얘기가 나오니 바로 꼬랑지를 내리는 건가? 저런 자를 뭘 믿고 연합의 지도자로 내세운단 말이야! 우리는 절대 인정할 수 없소!” “이 자식이! 짖고 싶으면 개집 찾아가라고 했다!” “뭐야!” 회의장 안은 순식간에 개판으로 변해갔다. 레딕과 제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프네도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다만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 내가 의문 담긴 시선을 보내자 나프네가 작게 말했다. 고함소리에 파묻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듣기 힘든 말이었다. “아니, 우리는 당신이 살기를 터트리거나 저 사람을 반쯤 죽여 놓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왜 가만히 있는 거죠?” 그리고 몇몇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의심이 깃든 눈초리였다. “아아. 귀찮아서. 그리고 괜히 힘으로 억눌러서는 반발이 걱정되거든. 알아서들 해결하도록.” 내 말에 모두들 말도 안 된다는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선을 주고받는 우리와는 별개로 제롬과 레딕의 개판 제조 사업은 착실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 결과물로 천악이 약간씩 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으음. 이건 위험한데. 치익. 그때 뭔가 불붙이는 소리와 함께 어떤 기운이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운. 위리안? 나는 고개를 돌려 설화의 옆에 앉아있는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제롬과 레딕도 싸움을 멈추고는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위리안은 싸늘하게 변한 푸른 눈을 살벌하게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는 끝이 안 나겠는데? 내가 말 좀 하지. 아, 그 전에 하나. 레딕이라고 했나 싸이코 씨? 당신이 우리 연합의 이름을 정했다며? 철자 틀렸어. 다크(Dark)는 형용사야. 어둠의 검이라는 뜻으로 만들려면 다크니스(Darkness), 명사를 써야지 멍청이 씨.” “이이익!” 위리안과 레딕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군. 어쨌든 암흑가는 교육과는 동떨어진 곳이며 이 세계화 시대에서도 영어를 잘 모르는 이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이 레딕이다. 그나저나 레딕와 위리안이나 레딕과 제롬이나 별 차이가 없군. 내가 잔생각을 하는 사이, 위리안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제롬이라고 하셨나?” 싸늘한 위리안의 말에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무의식 중에 그런 행동을 한 모양인지 좀 당황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당신, 저기 앉아있는 세 분이나 저기 스님분이나, 저기 낫 들고 살기 띄우는 분이나, 여기 나프네 소저나, 저기 린 소저나, 저기 실라크 장로님이나, 저기 새피르라는 분이나, 저기 레딕이나, 나나, 이들 중 한명이라도 이길 수 있으신가?” 위리안의 말에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제롬은 위리안이 열거한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가만히 앉아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지만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고 있는 라젠, 이반, 나르손. 그리고 반인족이긴 하지만 풍겨지는 기운이 장난이 아닌 린, 레이디스 길드의 길드장에 엄청난 랭커였던 나프네, 드워프이기에 실력을 측정하기도 힘든 실라크, 평범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정된 기세의 새피르, 자신과 악다구니를 쓰고는 있지만 실력만은 발군인 레딕. 그리고 아까 주점에서 레딕과 호각으로 싸우며 이상한 힘을 보여준 위리안. 이들을 둘러보며 점차 당황하던 제롬은 마지막으로 천악을 바라보았고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천악은 그야말로 제롬을 찢어 죽이기겠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떠신지?” 위리안의 재차 이어진 질문에 제롬은 급히 천악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킥, 인정하기는 하는 모양이군. 제롬을 살피던 위리안은 라젠 등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어르신들?” “음? 무슨 일인가?” 라젠이 대표로 위리안에게 되물었다. 아무래도 저 세 분 중에서는 라젠이 리더라는 느낌이 온다. “세한이 연합의 리더가 되는 것에 불만이 있으십니까?” “음? 아니네. 난 세한이 리더가 되는 걸로 알아서 연합에 가입하기로 했네만. 그건 이 두 친구도 마찬가지고.” 제롬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위리안은 그런 제롬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라젠에게 다시 질문했다. “혹시 저 검사 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위리안의 말에 라젠은 고개를 돌려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은 가슴을 당당하게 피고는 라젠을 마주보았지만 라젠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위리안에게 질문했다. “저 친구는 누군가?” 정말 모른다는 듯이 질문하는 라젠의 행동에 위리안은 고개를 푹 숙이며 어깨를 들썩였고 제롬의 얼굴은 뭐 씹은 것처럼 변했다. 내가 낮게 웃는 사이 위리안은 나프네에게 방향을 돌렸다. “나프네 소저는?” “물어볼 가치도 없습니다, 위리안.” 제롬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다음은 실라크였다. “실라크 장로님은?” “난 저 음험한 친구를 믿고 연합에 온 거네. 저 친구의 중재가 없다면 인간들의 광부들과 교류하는 것은 좀 꺼려지는군.” 실라크의 말에 광부 길드의 대표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애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반드시 연합장이 되라는 무언의 압력 같았다. 위리안은 이번엔 필에게 질문을 던졌다. “필 씨는?” “나와 내 동료들, 그러니까 세한 녀석의 친구들은 저 녀석이 리더가 되지 않으면 이 연합을 따를 마음 따윈 없습니다.” 제롬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져갔다. 하지만 위리안은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에, 저기 나무꾼 길드의 길드장 분은?” “나는 한때 나무 학살자에 일급 나무꾼의 칭호를 받았던 다크소드의 이름에 여기로 온 거요.” 길이 잘 든 듯한 도끼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나무꾼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이름은 모르겠군. 나무 학살자라는 말에 신음을 흘리던 나는 계속 되는 위리안의 질문에 이번엔 천악에게 고개를 돌렸다. “천악님은?” 제롬은 이제 거의 자포자기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난 내 호적수인 다크소드 정도의 녀석이 아니면 절대 리더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 외에는 길드장 해먹을 인간이 없으니 결국은 나라는 얘기다. 제롬은 이제 포기한 상태로 보였고 체르시온의 다른 길드장들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그리고 위리안이 마지막으로 확인 사살을 가했다. “저와 여기 설화 소저 등은 우리를 산맥을 무사히 넘도록 인도해준 세한을 따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저 산맥 탐사 길드 분들은 세한을 인정하시겠지요. 자, 이렇게 되었으니…….” 위리안은 말을 멈추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위리안은 담배 연기를 멋있게 뿜어대며 안경을 고쳐 썼다. “제롬 씨가 세한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이 연합의 결과는 체르시온 연합의 이름이 소드 오브 다크로 바뀌는 결과 외에는 없을 것으로 보이는군요.”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롬은 울며 겨작 먹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 으음, 다, 다크소드, 세한의 실력은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어쨌은 우리 연합의 리더로는 인정하겠소. 하지만 우리에게도 발언권이 주어졌으면 하오.” “뭐, 그거야 당연하겠죠. 어쨌든 강력한 연합의 주인이시니까.” 제롬은 알겠다는 듯이 물러섰고 혼란은 확실하게 진정되었다. “그럼 연합의 장은 다크소드, 세한으로 결정된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직은 비밀스레 움직여야하는 상황이니 임명식 같은 것은 불가능하죠.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기습 공격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정식으로 연합을 발표하며 임명식을 갔겠습니다.” 제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위리안도 실력이 대단한데? 위리안에게 고개를 돌린 나는 레딕이 이번에는 위리안을 붙잡고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네 녀석! 죽고 싶냐. 영어 철자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무식하면 무식하다고 인정하지 그래.” “망할! 그 다크는 다크소드의 다크란 말이다! 그걸 어떻게 한글로 바꾸다 보니 부르기 좋게 어둠의 검으로 풀이도니 거고!” “후우~ 내가 듣기로는 그 말, 나프네 소저가 했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어두운 검도 좋지 않아? 후우우~.” 건들거리며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위리안의 모습에 레딕이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래도 레딕이 밀리는군. 하여간 위리안이 말발이 세긴 하군. 나는 뭔가 칭찬을 해주려다 건들거리며 담배를 피워대는 위리안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몇 가지 안건을 주고받은 나프네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첫 번째 모임이니 이 정도로 끝내죠. 그래도 연합 리더의 취임사 정도는 있어야 할 듯 한데요?” 나프네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잠시 그 시선을 받아내다가 입을 열었다. 무시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제롬이 눈에 약간 거슬렸다. “별로 할 말은 없지만… 몇 마디 하지. 삼대 연합과 싸우는 일은 쉽지 않을 거고, 꽤 많은 희생이 있을 거다. 그 희생을 가볍게 여기지 말도록. 따라서 내부 분열은 용납하지 않는다. 오늘 정도의 일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이 이상은 가만 있지 않는다.” 내 말에 제롬은 코웃음을 쳤다. 그냥 넘어가긴 하지만… 언제 손봐주고 싶다는 욕망이 무럭무럭 드는군 그래. 나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우리 연합은 플레이어들과 NPC들이 협동해서 꾸려 나가게 될 거다. 차별은 용납하지 않으며 NPC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놈이 있다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내 실력을 보게 될 거다.” 제롬이 몸을 움찔 떨었다. 순간적으로 날아간 내 살기에 놀란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내 살기가 강하다는 말이 퍼져 있었기에 그렇게 놀라는 눈치도 아니었지만. “끝내지. 말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우선은 바카나에 머무르며 세부 계획을 짜겠다. 나프네, 여기 위리안 끌고 가서 부려먹어도 용납하지.” 위리안은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무시했다. 나프네는 빙긋 웃으며 페넬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위리안은 페넬리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몸을 떨어야했다. 나는 위리안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우선 오늘 회의는 마치겠습니다. 방금까지는 어쨌든 리더로써 말했기에 명령조를 썼지만 평소에는 존대를 하도록 하죠.” 내 말에 사람들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그랗고 크게 변했다. 그, 그렇게 이상한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나가들 보시죠. 아, 레딕 일행은 회의장에 남도록. 죄송하지만 다른 분들은 밖으로 나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곳의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사적이 얘기를 하려는 것이니 부탁하겠습니다.” 내 말에 사람들은 약간 불만스러워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군말은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물론 대부분, 모두는 아니었다. “야, 김현진! 우선 나하고 얘기를……!” “나중에. 오늘 밤새도록 술 마시면서 얘기 좀 하자.” “현실에서!?” “…원한다면.”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필과 설화, 주토 등이 밖으로 나가자 나는 회의장에 남은 암흑가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동시에 씁쓸한 표정이 섞여 있었다. 앞으로 나올 얘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예상하는 모양이었다. 급하게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평범한 얘기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강해졌군.” “아아. 덕분에 센이 앓아누웠어.” 레딕의 대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센이 쓰러졌다고? 내가 의문섞인 시선을 보내자 레딕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리자드도 바보는 아니니까. 방화벽을 설치했다더군. 센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어. 전에 센하고 대결했던 그 해커가 도와줘서 우리까지는 성공했지만 이후로는 힘들다더군.” “재훈이가?” “응. 센이 네 기록을 조회해서 찾아냈지.” “무섭군.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지?” “넌 5개월 전에.” “…정말 무섭군 그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암흑가로 오자마자 지금 일을 예상했다는 거 아냐? 역시 괴물이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는 우리 편이 될 고수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군?” “그래. 이번에도 센과 그 해커가 며칠 밤낮으로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거다. 다시 하라고 하면 죽이려고 들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릴이 내게 엉겨 붙어 왔다. 반대쪽 팔을 점령하고 있던 린이 별로 좋지 않은 시선을 릴에게 보냈다. “으음. 진은 암흑가로 안와? 벌써 한달 째 전화로만 얘기하고 있잖아.” “너 센이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꼴 보고 싶은 거냐?” “어머? 그것도 재밌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릴은 린과 함께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미 얘기는 나와 레딕이 주도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는 듯 총 12명의 암흑가 사람들 중 레딕과 릴을 뺀 10명은 침입자를 용납하지 않는 다는 듯이 벽에 기대서서 뭔가에 주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방금 있었던 회의…를 생각해 보았다. 내 발언권이 거의 없었던, 내가 들어오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나 있던 것 같던 회의. 뭐, 상관이야 없지만……. “너와 나프네의 작품인가?” 내 질문에 레딕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알려서 연합을 만들 수는 없잖아. 그 체르시온 연합의 멍청이들은… 어쨌든 이 곳을 너 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좋아하는 녀석들이지. 좀 위에 서고 싶어 하는 게 문제지만. 섀도우 월드를 더럽히는 삼대 연합을 무찌를 용사들을 모집합니다. 정도의 표어를 가지고 끌어 모았다.” “그리고 모여든 사람들은 다크소드가 자신을 배신했던 녀석들을 처단하려 한다는 것 정도로 알게 되겠군.” “뭐,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렇게 생각하는 녀석들은 체르시온이나 다른 길드의 사람들뿐이고. 레이디스 길드의 고위 간부들만 해도 대충 내막은 알고 있으니까.” “세력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삼대 연합과의 전쟁이라는 것이 필요했다는 거군. 덕분에 우리의 전투력이 꽤 올라갔고.” 레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우리 연합의 좋은 이미지를 부가시켜서 폼 나게 살고, 좋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녀석들도 끌어 모아야지.” 나는 빙긋 웃으며 레딕을 바라보았다. 역시, 내 생각이 틀린 게 아니었군. “나 몰래 계획하고 있는 일을 위해서라는 건가?” 순간 레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알고…있냐?”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 센이 그렇게 쉽게 물러날 위인은 아니지. 자신을 이용하고 자신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쉽게 용서할 사람은 아니니까.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려는 건지는 몰라. 다만 짐작할 뿐이지.” 나와 레딕의 대화가 약간 긴장감을 띄자 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역시 의이한 기색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다른 녀석들. 역시 센과 레딕, 둘이서 하는 일인가? “민은?" “설마.” “그렇군. 민이 허락할 리가 없지.” 레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은 좀 평화주의적 사상가니까. 나는 뚱한 눈으로 레딕을 바라보았다. 과연 어떤 일을 꾸미고 계실까. 나 몰래 세력을 모아서 하려는 일이라. 레딕의 눈을 바라보니 불안감으로 인해선지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난 침묵해 주지. 알아서 해봐.” “저, 정말이냐?” “적어도 날 죽이려 드는 일은 아닐테니까. 믿겠어.” “고맙다.” 나는 레딕의 머리를 한 대 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뭔 소리들 하고 있냐고 묻는 듯한 22개의 눈동자가 나를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모두 앉아. 가장 중요한 얘기다.” 내 말에 벽에 기대서 있던 10명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빛들이 약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어떤 얘기가 나올지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레딕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됐어?” “…그 데스 킹이라는 녀석… 사람의 뇌를 직접 이용한 몬스터인건 확실하다.” 나는 쓰게 웃었고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얘기가 나오겠지.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레딕에게 집중되었다. 레딕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물기에 젖는 눈동자. 절대 말 못하겠다는 듯한 행동. 레딕의 행동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 레딕 형님. 서, 설마…….” 모두가 떨리는 눈으로 레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역시 암흑가의 사람인가.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주먹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점점 마음에 안 들게 돌아가는군. 내가 살기를 약간 내뿜었지만 내 살기는 다른 녀석들이 내뿜은 살기에 묻히고 말았다. 레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침울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이더라.” “망할 리자드 자식들! 어떻게 그런… 예?”, “뭐?” “음?” “그럼?” 빠직. “죽어, 이 새끼야!” “컥!” 내 킥에 명중당한 레딕이 탁자 위를 날라 벽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폭행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지만 별로 말리고 싶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위에 있는 사람이라 때리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기색마저 엿보였다. 저, 저 자식… 장난을 칠 일이 있지……. “이 빌어먹을 싸이코 자식! 죽여 버리겠어!” “지, 지이인!” “닥쳐!” 퍽!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레딕이 재차 이어진 내 돌려차기에 다시 날아갔다. 벽에 처박히고는 쿨럭거리는 레딕의 모습에 이번엔 약간 걱정 어린 시선이 모아졌다. 하지만 내 이성은 떠나간 지가 오래였다. “죽어!” “크에엑!” “으아앗! 진! 그만해요!” “꺄악! 오빠!” “마, 말려!”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폭발적으로 터져나가는 내 마기에 레딕이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11명의 암흑가 사람들이 날 말리려 달려들었고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소란이 일어나자 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그 순간에도 레딕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허억, 허억… 젠장.” “쿨럭. 다, 다행이잖냐. 그나마… 쿨럭.” “망할… 어떤 사람이냐?” 나는 나를 붙잡는 사람들의 손을 뿌려 치고는 레딕의 옆에 주저앉았다. 나를 따라 암흑가의 사람들 전부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런 우리의 행동에 회의장 안으로 난입한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사업에 실패 했대… 빚을 갚기 위해서 몸을 맡겼다는군.” “망할…….” 순식간에 침울한 분위기가 우리를 뒤덮었다. 그리고 방 안으로 난입했던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증거는…….” “이미 사라졌을 거란다. 고위 간부의 개인 컴퓨터에 있던 거였지만 보안 시스템이 괜찮았대.” “그렇군.”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침울한 분위기였다. 암흑가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을 발견한 거였으니까. 거기다 다크 워리어, 데스 킹은 운영자로 분류되어 있었기에 찾기 쉬웠지만… 일반적으로 돌아다니는 몬스터의 정보를 찾아내기는 거의 불가능이었다. 리자드의 방화벽이 강화 되었다고 하니 더욱 힘들겠지. “그래도… 그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다행이다.” “킥. 그래. 다행이다. 다행…….” 모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몇몇 어린 녀석들은 코를 훌쩍이고 있기도 했다. 하아. 하지만 다행이 아닐 수도. 그 녀석이야 강하니 죽을 일은 없겠지만… 일반 몬스터에서 강해진 사람들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그건 그렇고…….” “응?” 내 중얼거림에 레딕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레딕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한번만 더 이따위 장난을 한다면… 진짜 죽는다.” “큭큭. 알았다고, 다크소드.” 나는 손을 풀면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싸이코 같은 짓도 좀 그만둬. 아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 네가 쉽게 이길 상대는 거의 없어. 특히 그 제롬인지 하는 녀석은 너와 동급이라고.” “흥. 보너스 수치가 있잖아. 보너스 수치는 네 식스센스에도 걸리지 않을 거다. 그건 거의 도박에 가까운 거니까. 그리고 내가 한번 죽지만 않았어도 그런 녀석 정도는 가지고 이겼어.” “뭐?” 죽었단 말인가? 나는 레딕을 빤히 바라보았다. 레딕 정도의 실력자가 죽다니? 거기다 암흑가 사람들하고 몰려 다녔을 텐데? 내 시선에 레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타 대륙에서 넘어온 녀석이더군. 말썽을 일으키고 다녔는데 그 녀석을 처리한다고 나하고 장 둘이서만 갔다가… 장은 빈사 상태에 나는 동귀어진으로 간신히 쓰러뜨렸어. 소멸의 벌이 있었으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다. 크큭.” “타 대륙에서… 벌써 넘어오는 녀석들이 생기는 건가? 어쨌든 이곳을 근거지로 잡은 것은 잘 결정한 것 같군.” “물론이지. 나와 그 나프넨지 하는 여자가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영어 문법도 잘 모르는 얼간이가…….” “크윽! 내가 그 알로에 머리, 죽이고 만다.” 아, 알로에… 성게 머리에 이어 이번엔 알로에 머리인가. 나는 위리안의 그 뾰족한 백발 머리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나는 아까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악마의 숲에 다녀오는 사이에 레딕과 나프네, 라젠 등이 끌어들인 사람들이라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우선 무력 단체로 보면 암흑 패밀리와 레이디스 길드, 체르시온 연합, 그리고 라젠과 이반의 길드. 고타의 무술 도장 사람들인가? 제르난 길드의 녀석들은 없었는데…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천악과 필, 에린. 위리안과 설화, 주토. 린도 있고. 어쨌든 우리 연합의 무력은 강한 편이 아니다. 다른 연합들의 인원이 전투 인원만 해도, 아무리 적게 봐도 백만에 육박한다는 것에 비추어 봤을 때는… 너무도 적다. 그래도 삼대 연합의 주군지가 너무 많아서 병력이 분산되어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다행이고, 서로 경계 하느라 노는 병력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지. 무력 단체를 빼면… 이상하게 비전투 단체들이 많군. 도도리 제빵 연합을 시작으로 광부 길드 연합에 나무꾼 길드 연합. 드워프들. 그리고 라젠의 길드는 여기에 들어갈 수도 있다. 트랩퍼들은 전투 인원으로 보기가 좀 애매하니까. 그리고 나르손의 치료술사 길드. 산맥 탐사 길드 연합. 대장장이 길드 연합. 상단 길드 연합. 미치겠다. 어쨌든 삼대 연합의 힘에 비하면 우리들의 세력은 거의 게릴라식 전투에나 쓸만한 인원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소수 정예가 많은 것이 다행이지만. 라젠, 이반, 나르손 세분은 전투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고타는 천악은 그렇지 않을 테고. 어쨌든 강자들은 많군. 하지만 지금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선 이곳에서 자리를 잡는다면 성장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 삼대 연합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다가… 린을 통해 반인족들의 협력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고, 다크 엘프들이 있다. 그리고 전투력에 포함되지는 않는 비전투 집단들도 그 영향력은 무시할 바가 아니다. 어쨌든 이곳은 하나의 세상이니까. 못 먹으면 죽는 것도 똑같다. 불 못 피우면 얼어 죽는 것도 똑같고, 철이 없으면 무기를 못 만드는 것도 똑같다. 그러니 이런 쪽의 힘은 강하지. 금전적으로도 풍요롭겠군. 어쨌든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 믿을 만한 단체를 끌어 들인 거니 배신의 위험도 크지는 않고. “한.” “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레딕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지는 접은 종이. 레딕을 올려다보니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은 좀 나와야겠다.” “아아. 알았어.” 나는 종이를 품속에 집어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꽤 오랫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 하고 얘기를 하러가 보실까. 어두웠다. 딸칵. 드르륵. 캔커피 하나를 집어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화려한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화려한 불빛들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하나씩 쓰러져 가고 있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상처도 없이, 어떤 비명도 없이. 사람들이 쓰러져 갔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목소리. ‘이게 결과예요, 세한, 아니 현진.’ 분명 아는 목소리.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결과. 무엇의 결과일까. 무엇의……. “헉!” 나는 숨을 몰아쉬어다. 캡슐의 문은 벌써 열려있었다. 꿈? 로그아웃을 하다 말고 꿈이라니? 로그아웃을 하자마자 잠든 건가? 무엇인가가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가자 급히 몸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글과 뇌파 탐지기 등의 기기… 이제 해체된 건가? “뭐였지 그건?” 나는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이미 짧아진 머리지만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 꿈…의 영상이 뭔가 찝찝할 뿐. “아는 목소리였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잠시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하려 애쓰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방에서 나왔다. 어차피 꿈일 뿐이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집 안을 둘러보니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던 이 고요함. 외로운. 이미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쓰게 웃던 나는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를 찾아갔다. -읽지 않은 메일. 325통. “후우… 역시 그냥 지우는 것이 좋을까? 일주일 안에 온 메일들 외에는 모두 지워.” -삭제합니다. “그래.”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던 나는 눈을 뜨며 새로 온 메일들을 확인했다. 그런데 익명으로 온 메일이 하나 있었다. 익명으로 메일을 보낼 사람은 단 하나다. ‘그’인가? -당분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 긴장감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요. 상어들이 먹이들을 너무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물고기들은 황급히 도망치고 알들을 챙기고 있습니다. 언젠가 사료를 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길. 저희들로써는 상어를 가두는 것은 몰라도 물고기들을 다시 살리기는 힘들 것 같군요. 아, 이번 일은 피라냐에게 먹이를 주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나중에 뵙지요. “후우.”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사람이 이런 메일을 보낼 정도라면… 확실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젠장! 드르륵. 나는 거칠게 몸을 일으키며 옷걸이로 다가갔다. 옷걸이에서 검은 옷을 걷은 나는 그대로 뒤집어썼다. 목 부분의 통이 큰, 복면처럼 코까지 덮을 수 있는 옷이었다. 반팔도 사놓기를 잘했군. 방을 나서며 모자와 겉옷 하나를 챙겼다. ‘13구역 탑골 공원에서 일이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카메론 쪽하고 리자드 쪽을 감시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정확히 몰라. 센이 모른다고 했으니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 갈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다. 빔건도 가지고 가. 장하고 소마가 갈 거다. 정확한 시간은 나도 몰라. 센의 말로는 아무일도 없을 수도 있으니 산책 비슷하게 다녀오라더라. 젠장. 그런데 너하고 센은 우리한테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 거냐?’ 레딕이 건네준 종이에 써 있던 말이었다. 13구역 탑골 공원이라. 망할. 그 음침한 곳에서 무슨 산책이야. 그것도 밤에. 나는 조금씩 어둑해지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수위실을 지나쳤다. 수위 아저씨는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가져다준 부채였다. 나야 부채 쓸 일이 별로 없는데다가 암흑가에 굴러다니는 부채들은 죄다 골동품이라 들고다니기도 겁난다. 뭐, 덕분에 수위 아저씨가 상당히 좋아했으니 됐지만. “13구역 34. 팁. 바(Bar)인가?” 나는 핸드 메신져로 약속 장소를 확인했다. 진성이 재훈이 등등의 녀석들, 간단히 동창 녀석들이 죄다 모이기로 했다. “잘됐군. 같은 13구역이니.” 나는 겉옷의 품에 빔건이 걸려 있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늦었다. 주영진 “어? 세한? 아, 아니 현진?” “음?” 공중도로를 걷고 있던 나는 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눈을 깜박였다. 으음, 나프네… 선아로군. “선아?” “후후. 어떻게 기억하고 있네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역시 예쁘시군 그래. 나는 우리에게로 집중되는 시선에 약간 짜증이 드는 것을 느끼며 혀를 찼다. 거기다 선아가 검도복을 입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노출도가 꽤 심하다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벗기기도 쉬운 옷이고 말이야. “쳇.” 암흑가에 물들었어. 물들었다고. 나는 별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에 황당함을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어디 가는 길이죠?” “대답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 무심한 대답에 선아는 입을 삐뚜름하게 들어올리더니 내 팔짱을 꼈다. “갈데없으면 함께 데이트라도 하죠? 오늘 좀 외로워서요.” “이봐…….” 짜증을 내며 손을 뿌리치려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려야했다. “여어! 김현진! 같이 가자!” “어라? 저 여자는 누구지?” 나의 동창들, 차량 판매점을 운영하는 대희와 약혼녀 지현이었다. 이거… 왜, 왠지 불안하게 돌아간다? “이야, 설마 현진에게 이런 아름다운 연인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머. 연인은 아니에요. 희망하고는 있지만.” “하하. 이런 미인 분을 싫다고 한다면 현진이 녀석이 남모를 병을 간직하고 있는 거겠죠. 어이, 현진아. 혹시 이상한 병이라도 있냐?” “죽는다.” “이크.” 재훈이가 목을 움츠리며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망할. 나는 선아를 사이에 두고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창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도대체 저 여자를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그나마 내가 참고 있는 이유는 여기 모여 있는 녀석들이 처음 내 얼굴을 봤을 때 상당히 겁을 집어먹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갑자기 머리도 짧아지고 흉터들까지 생겼으니 오죽할까. 지금이야 좀 익숙해 졌는지 편하게 대하고 있지만……. “에이. 뭘 그렇게 딱딱하게 계시나. 초연 씨하고도 깨졌다며. 저 아름다운 아가씨와 한번 엮여 보는 것도…….” “시끄러. 그나저나 너 쓰러진 거 아니었냐?” 내 질문에 재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세진의 눈이 날카로워지는 것이 확실히 몸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별로 좋지는 않지만 술은 상관없을 걸. 그나저나 너 그 해커 자식은 어떻게 알고 있던 거냐? 어쩌다 보니 협력하기는 했지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던데.” “…미안하다. 언젠간 알게 될 거다.” “뭐, 상관없지.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으니까.” 재훈이가 해킹을 즐겨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여기서 선아 한 명 뿐이었다. 나는 맥주를 들이키며 모여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대희, 지현, 재훈, 세진, 정복, 소정, 현철. 진성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선아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대희 등을 바라보다가 현철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성이는?” “음? 곧 오겠지. 그놈 주동으로 술 마시는데, 거기다 공짜에 빠질 녀석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군.” 나는 다리를 꼬고는 쿠션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술을 많이 마셔서는 안 되는데. 나는 맥주잔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일까. 진짜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했지. 하지만 센이 나에게 가달라고 했을 정도면 쉽게 지나칠 일은 아니라는 건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 혼자서 해결했으면 한다니. 장하고 소마가 온다고 하긴 했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한 나는 닥쳐보면 알겠지 하는 심정으로 맥주를 들이켰다. 그때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선아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으음, 나 취했는데…….” 상당히 붉어진 얼굴로 내 팔을 끌어안는 선아였다.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킥킥 웃고 있는 친우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심하게 취하지는 않은 것, 알고 있으니 놓으시지.” “으음, 족집게네요.” 예상대로 선아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한 4개월만 술 좋아하는 녀석들 사이에 껴 있으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지. 그것도 값싸고 도수 강한 술들만 마시는 녀석들 사이에서 살았으니. 딸랑. 그때 방울 소리와 함께 우리가 술을 마시고 있는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셋. 진성이와 다혜 씨가 먼저 얼굴을 들이밀고는 방안을 살피고 있었다. “여어! 왔군 그래!” “역시 다혜 씨도 함께인가?” “아, 어서와요, 다혜 씨.” 녀석들이 맥주잔을 들어올리며 반기는 말을 하자 진성이와 다혜 씨가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 어엇? 김현진! 너, 너 얼굴이… 그 흉터들은 뭐냐! 무슨 일이라도……!” “하아. 어서 와…….” 내 변해버린 인상에 경악하는 진성에게 인사를 해주던 나는 그 둘의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세 번째 인물의 모습에 말을 멈췄다. 갈색 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 그녀는 약간 머뭇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와 내 팔을 껴안고 있는 선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망할……. “아, 현진아. 그게… 그래도 5개월 만에 모이는 건데 초연 씨도…….” “닥쳐.” 뭐라고 변명하던 진성이는 내 싸늘한 말과 살기에 말을 멈추며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녀석들도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선아가 내 팔을 놓쳤다. 암흑가에서도 영웅(세한)의 재림이니 악마의 현신이니 하는 살기니 당연한 일일 수도. 나는 몸을 일으키고는 옆에 놓아둔 모자를 집어 들고 걸음을 옮겼다. 모두 내 기세에 질린 듯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아! 혀, 현진 씨!” 하지만 내가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가자 정신을 차린 듯한 초연이 급히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깨끗이 무시하며 가게를 나섰다. 여름밤의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은… 아니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탑골 공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약 10분 정도가 지나 공원에 도착한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주위를 살폈다. 탑골 공원은 정부의 감시 카메라가 없는 장소 중 하나다. 보통 거리에는 도둑 등을 잡기 위한 감시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공원 같은 곳은… 어쨌든 사생활 침해 방지를 위해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덕분에 커플들이 많이 찾는 장소. “젠장.” 나는 곳곳에서 느껴지는 부스럭거리는 기척과 곳곳에 보이는 커플들의 모습에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이곳이야 좀 밝은 곳이라 사람들이 많지만… 더 들어가면 상당히 어둑어둑해지기 때문에 변태적 취미가 있는 커플들 정도가 아니면 잘 가지 않는다. 만약 뭔가 일이 있다면 그곳이겠지. 만약 있을 사람들도 미리 몰아냈을 테고. 나는 풀숲을 뚫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온 것, 빨리 갈수록 좋다. 바지는 긴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긁히거나 할 걱정도 없었다. 그리고 멍청하게 걸어가다 나뭇가지에 머리 박을 일도 없고. “음?” 좀 걸어가던 나는 저 앞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주위를 살폈다. “저 녀석들은… 칸 그룹의 애들이로군. 음? 저 사람은… 리자드의 무슨 팀장일 텐데. 그 사람이 주의해야 한다고 했던… 그리고 저 녀석들은, 크넥스? 뭐야? 한쪽은 리자드 쪽 패거리고 한쪽은 카메론 쪽 패거리라니?” 나는 머리를 마구 헤집고 다니는 의문을 저리 치우려 애쓰며 녀석들의 숫자를 확인했다. 저 리자드의 녀석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칸 그룹의 똘마니 둘에 행동대장급 녀석 하나. 크넥스 그룹의 3명인가. 저 녀석들에게 빔건만 없다면 어떻게 해 볼만한 숫자이긴 한데……. 나는 녀석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또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 리자드의 사람이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띄엄띄엄 알아들을 만한 크기의 목소리였다. “…해커 자식… 추적해서… 부분에서만 협조… 잡게 되면… 우리 쪽… 있는 쥐새끼…….” “하핫.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크넥스 그룹의 녀석의 대답은 상당히 우렁찼다. 급히 주위에서 제지하는 광경을 짐시 바라보던 나는 생각에 잠겼다. 해커? 협조? 우리 쪽의 쥐새끼라. “설마…….” 센과 그를 말하는 건가? 아까 받은 메일에도 지금 위험한 상황이니 연락이 곤란하다고 했었지. 그가 우리를 도와준 사실이 드러난 건가? 하지만 저렇게 만나서 무슨 일을 꾸미는 건 확실한 증거나 물증이 없다는 거겠지. 그리고 해커는 아마 센일 테고. 아무리 센이라고 해도 꼬리를 전혀 잡히지 않을 수는 없었을 테니 당연……. “정보는… 여기… 유일한 물증… 반드시…….” “음?” 물증? 나는 퉁기듯 나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뭔가 잡힌 건가? 망할. 저거 당장 막지 않으면 혹시나 센이나 그 사람이……. “현진 씨!”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몸을 움찔하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에서 몇몇 사람들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 초연? 그리고 그 뒤로 선아와 다른 녀석들도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날 쫓아온 모양인데……. “빌어먹을! 저것들은 뭐야!” “쫓아내기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자리를 옮기죠.” “우선 교환부터……!”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빌어먹을! 오늘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도 없군. 그때 초연이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헉, 헉… 자, 잠시만… 얘, 얘기 좀 해요 현진 씨!” “이, 임마. 왜 그렇게 말도 없이…….” 나는 말을 걸어오는 초연과 진성을 잠시 바라보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녀석들이 급히 짐들을 챙기는 동시에 리자드의 녀석과 크넥스의 녀석이 뭔가를 급히 교환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거 놓치면 안돼! “킥. 어쩌면 좋은 기회로군.” “예?” “헥, 헥. 뭐? 뭔 소리냐? 어? 저, 저 사람들은 뭐야?” “어, 어라?” 근처로 우글우글 몰려든 녀석들이 검은 정장에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무리를 보며 움찔했다. 그리고 나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려 걸어갔다. “어, 어라? 야, 임마! 미쳤어!?” “기, 김현진!” “큭. 나하고 어울리려는 거,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무슨…….” 나는 진성이의 팔을 뿌리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서로 물건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는 녀석들. 나는 이를 갈고는 크게 소리쳤다. “멈춰 개자식들!” “뭐, 뭐냐?” “젠장!? 저건 또 뭐야!” 나는 모자를 좀 깊숙이 눌러쓰고는 몸을 굽혀 바닥의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급히 날 제지하려 앞으로 나서는 검은 친구 중 하나에게 강하게 던졌다. 퍽! “큭!” 가슴에 돌멩이를 맞은 녀석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순식간에 내 돌려차기에 가슴을 또 얻어맞고는 나가 떨어졌다. 높이 도약해 돌려 차느라 몸을 좀 웅크리며 착지한 내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이 새끼는 뭐야!” “잡아!” 젠장. 이거 요새 들어 많이 말하는 거지만……. “누가 새끼냐! 하앗!”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주먹을 올려쳤다. 한 녀석이 턱을 얻어맞고는 뒤로 넘어갔다. 몸을 돌리며 뒤로 물러나자 어느새 뽑아들었는지 나이프 하나가 허공을 지나갔다. “꺄악!”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지현인가? 나는 모자를 잡으며 몸을 회전시키며 발을 뻗었다. “커억!” 내게 다가오던 녀석이 어깨를 얻어맞고는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또 다른 녀석이 주먹을 날려왔다. 이건 못 피하겠군. 퍽! “큭!” 나는 옆으로 얼굴이 돌아가자 몸도 얼굴을 따라 회전시키며 몸을 굽혀 녀석의 관절을 걷어찼다. 무릎을 휘청거리고 그대로 위로 솟구치는 내 어퍼컷. 약간의 피와 뭔가 작은 것이 허공으로 튀겼다. 이가 나갔나? 나는 싱긋 웃으며 뒤로 몸을 뺐다. 퍼억! 굵은 나뭇가지가 땅을 강타했다. 언제 꺽은 걸까. 아니면 미리 준비해 있던 건가? 나는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앞으로 몸을 날려 크넥스의 녀석이 들고 있는 가방을 걷어찼다. 이게 리자드에서 준다는 정보지? 걷어차인 가방이 붕 뜨면서 앞이 들어있던 작은 칩들이 몇 개 떨어졌다. 콰직. 바닥에 떨어진 칩을 밟아 부수는 동시에 나이프 몇 개가 휘둘러져 왔다. 그리고 서비스로 들려오는 욕설. “이 씨팔 새끼! 죽어!” “개자식!” 서걱! 옷이 잘리는 동시에 시큰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거 비싼 옷은 아니지만 상처가……. “아프다!” 파각! 몸을 회전시키며 휘두른 주먹에 나뭇가지가 부숴져 나갔다. 그리고 나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앞으로 달려 나가며 앞으로 강하게 내질렀다. “크아악!” 어깨에 나이프가 박힌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이걸로 한 놈은 완전히 안녕. 주먹에 턱이 완전히 돌아간 녀석을 멀리 걷어차는 동시에 몸을 돌리며 발을 날렸다. 한 녀석이 어깨를 맞고는 뒤로 물러났다. “넌 뭐냐!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말하면 미친놈이지.” “크으윽!” 혀 깨물었겠군. 나는 얻어맞은 가슴과 입을 동시에 부여잡으며 괴로워 하는 녀석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급히 몸을 날렸다. 어느새 날아든 나이프가 왼팔을 파고들었다. “꺄아악!” “혀, 현진아!” 다시 들려오는 친구…들의 비명소리. 도우려고 그랬는지 막대기들을 들고 달려 나오던 남자 녀석들이 우뚝 멈춰서 있었다. 일반인이 칼을 든 사람한테 덤비기는 힘들 걸……. 퍼억! “크억!” 그리고 내 얼굴을 강타한 발길질에 난 바닥을 뒹굴었다. 망할… 역시 쉽게는 안 되나. 여기에 주위를 순찰 돌고 있던 녀석이라도 가세하면 절망적인데. 품속에서 단검을 또 하나 꺼내며 집어던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내려찍으려던 녀석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틈에 일으키자 다른 녀석의 공격이 날아왔다. 퍽! 또 머리에 가해지는 충격. 아무래도 각목이나 그런 것에 맞은 거 같은데… 이러다간 모자가 완전히 벗겨질 위기에 처하자 나는 모자를 다시 부여잡으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내가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오자 리자드의 팀장이 다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주위의 공격을 무시하며 날린 내 발길질에 머리를 얻어맞고는 기절해서 쓰러졌고 나는 등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리며 발을 날렸다. 어깨 단검 박기와 콤보에 쓰러진 한 놈. 강하게 몇 대 맞고 쓰러진 두 놈. 나머지 세 놈인가. 크넥스 한 놈에 칸의 두 놈. 특히 칸 그룹의 한 녀석은 행동대장 급이라 어쩌면 빔건이라도 있을지 모른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날린 카운터에 또 한 놈이 쓰러졌다. 그리고 날 찔러 들어오는 나이프 하나. “칫!” 나는 나이프에 어깨를 내주는 대신에 칸 그룹의 행동대장 녀석을 날려버렸다. 녀석이 공중을 날아 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강한 충격이 내 머리를 때렸다. “크윽!” “이 새끼! 죽여주마!” 망할. 마지막 남은 한 놈이 나이프를 내려찍고 있었다. 이 자식. 정말 죽일 기세……. “머, 멈춰!” 그때 누군가가 녀석의 몸에 부딪혀 들어왔다. 하지만 녀석은 좀 비틀거리고는 그대로 그 사람을 걷어차 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니 여자… 초연? 나는 녀석이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나이프를 찍어오자 눈을 부릅떴다. 이미 늦었어 이 자식아. “크악!” 내 손날에 목을 정통으로 맞은 녀석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목뼈가 부러졌을 수도 있지만… 먼저 죽이려고 한 건 이쪽이지. 나는 살기를 강하게 퍼트리며 쓰러진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괘, 괜찮냐?” 재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초연을 바라보았다. 지현과 세진의 부축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 우는 걸……. “혀, 현진아! 저 녀석 아직!” 재훈의 외침에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칸 그룹의 행동대장 자식, 진성이와 현철이가 내게 달려들려는 녀석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현철이야 몸은 건장하고 유도를… 망할! “비켜어!” 나는 고함을 지르며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품속으로 집어 넣으며 앞으로 나섰다. 진성이와 현철이가 갑자기 몸을 굳히는 동시에 내게 밀려 옆으로 물러났다. 철컥. 철컥. “비, 빔건…….” “으아아!” 안전장치가 풀리며 서로에게 겨뤄지는 빔건. 역시, 이 녀석 빔건을 가지고 있었나? 나는 녀석의 이마에 조준하고 있는 빔건이 떨리지 않게 고통을 참으며 팔에 힘을 주었다. 역시 나를 겨누고 있는 빔건이 엄청난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쿨럭. 치, 치우시지. 정말 쏜다.” 칸 그룹의 녀석의 말과 함께 내게 겨눠진 빔건의 끝에 약한 빛무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발사되기 직전……. “으아악! 혀, 현진아!” “꺄악!”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무시하며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지이잉……. 역시 빛무리가 모여드는 내 빔건의 총구. 녀석의 눈이 꿈틀거렸다. “혀, 현진이가 어떻게 빔건을… 그, 그리고 이 사람들… 어디 깡패 같은데?” 재훈이의 중얼거림이었다. 역시 해커라 좀 침착함을 가지고 있는 건가? 나는 내게 집중되는 친구들의 시선을 느끼며 혀를 찼다. 빔건을 들고 있는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이프에 찔렸기 때문에 계속 들고 있기가 힘들었다. “이봐. 정말 사생결단을 내기는 그렇지 않아?” “내가 할 소리다. 팔이 별로인거 같은데 손 내리시지.” 나는 눈가를 꿈틀거리고는 녀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녀석은 내 살기에 몸을 움찔하기는 했지만 물러설 기미는 없었다. 망할. 이건 위험한데……. 타타탁! 그때 주위에서 꽤 많은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왔다. 꽤나 묵직한 발자국 소리. 젠장. 주위에 패거리가 더 있었나? 내 표정이 굳어짐과 같이 녀석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기색이 돌았다. 빌어먹을. 그리고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는 친구들. 녀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근처에 애들이 좀 모여 있었지. 이만 포기하시지 그래. 우리 아이들이 저기 여자들을 어떻게 할지 모르거든.” “미친놈. 내가 건을 거두면 곱게 보내줄 거냐?” “글쎄.” 나는 이를 갈며 빔건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빌어먹을. 진짜로 쏴버리고 튈까? 이대로 있어서는 내 상황만 나빠진다.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살인자 신세가 되어버리는데. 이거 진짜 개같은 상황이로군. 나는 이를 갈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너무 욕심을 냈나? 아까 칩을 부수거나 리자드의 사람을 기절시키려고만 안했어도… 놓치면 큰일이라 했던 건데, 이러고 보니 후회되는군. 빔건을 쥔 손에서 힘이 절로 빠졌다. 빔건을 쥔 손에서 힘이 절로 빠졌다. 그 모습에 녀석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크큭. 우리 애들이 오기 전에 빔건을…….” “여어. 혹시 너희 애들이라는 녀석들이 얘들이냐?” “음?” “어?”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녀석도 비슷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에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10여명의 사람들. 그 사람들은 한 사람 당 한명씩 검은 차림의 사내들을 끌고 오고 있었다. “히익!” “어, 어떻게 하지… 저, 정말로 깡패나 그런…….” “혀, 현진아.” “어라? 저 사람은? 여어! 반가운데! 거기 섹시한 아가씨도 반가워!” “어라라? 저 날카로운 눈매에 회색머리는…….” 불안감에 떠는 다른 녀석들에 비해 레딕와 릴에게 인사를 건네는 재훈과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성이었다. 진성이야 그리 심하진 않으니 그렇다 쳐도 재훈이 자식은 인사까지냐. 역시 일반인은 아니로군. “이, 이익, 네놈들은 암흑가의 쥐새끼들!?” “뭐? 누가 쥐새끼……!” “다가오지 마! 이 새끼 쏴버린다!” 녀석의 고함에 화를 내며 달려오려던 레딕이 딱 멈춰 섰다. 이런, 이거 내가 인질이 되어버린 격인데? 그것 참 희한한 상황이로군. “킥. 지금 누가 누굴 인질로 잡는 거야? 총 안내려 놓으면 죽는다.” 레딕의 말에 내게 빔건을 들이밀고 있는 녀석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래도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친구 놈들도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자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킥. 진,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된 거냐?” “망할. 어쩌다 보니.” 그 칩을 부수거나 리자드의 사람을 기절시키려고 고생만 안했어도 이런 꼴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태연하게 얘기를 주고받자 열이 뻗친 듯한 녀석이 고함을 지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살기. 나는 급히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몸을 피하면 뒤에 있는 애들이 맞을 위험이……. “죽어버려어어!” “망할!” 타악! 그때 뭔가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녀석의 손이 위로 들렸다. 그리고 그대로 발사되는 빔. 밝은 빛의 빔이 애꿎은 나무 하나를 박살내었다. 목검? 선아로군.녀석의 팔 밑에서 목검을 위로 올려친 선아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나는 순식간에 앞으로 몸을 날리며 주먹을 뻗었다. 퍼억! “커억!” “하앗!” 뿌드득. 내 주먹에 복부를 맞고는 뒤로 물러난 녀석의 팔을 무릎으로 찍자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팔이 괴기하게 꺾였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빔건. 어느새 달려온 레딕이 그 빔건을 회수했다. 히죽거리는 것이 돈벌었다는 표정이었다. 팔이 부러져서 엄청난 고통이 오는지 비명을 질러대는 녀석을 기절시킨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위험했다. “젠장.” 피가 흐르는 왼팔과 오른 어깨. 끔찍하다. 나는 목검을 든 채로 헉헉거리고 있는 선아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여어. 고마웠어.” “아, 아뇨. 파, 팔은…….” “마, 맞아! 야, 임마! 팔 괜찮냐?” “현진아!” 나는 꽥꽥거리는 동창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이 정도야 약과지. 이런 상처야 많이 입어 봤으니까.” 많이 겪어 봤다는 말에 친구들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내 얼굴에 나 있는 흉터에 눈이 시선이 왔다갔다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피식 웃고는 레딕을 바라보니 주위를 돌아다니며 칩들을 회수하고 있었다. “칩들은 모두 챙겨. 아, 크넥스 놈들이 가져온 가방도 챙기는 게 좋겠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나저나 이 녀석은 우리 정체를 아는데 어떻게 한다.” 내가 팔이 부러진 채로 기절해 있는 녀석을 툭툭 건드리며 말하자 레딕이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그냥 아무 죄나 뒤집어 씌워서 감옥에 집어넣을까? 면회가 불가능한 곳도 몇 곳 있으니까. 아니면 죽이던지.” 친구 녀석들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는데. 끌고 가서 생각해봐. 그건 그렇고 왜 이리 늦은 거야?” “아, 우리 집으로 마구 밀고 들어와서. 아무래도 우리가 그 동안 막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나 봐. 증거는 없겠지만. 뭐, 그쪽이야 민 형님도 있었고 꽤 남아 있었으니 걱정 없었지만. 나하고 릴은 리자드 녀석들 접선 현장을 잡으러 갔었는데, 없더라고. 역정보였어. 이 일을 잘 끝내려고 한 양인데, 이래서야 잘못하면 접선 지역을 실내로 옮길 수도 있겠다고.” 레딕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까지 접선 현장이 모두 실외였던 것은 모든 건물에 부착되어 있는 감시 카메라 때문이다. 그런 곳에 검은 녀석들이 몰려다녀서는 잡혀 들어가기 쉽고, 평범한 옷을 입고 한두 명만 몰려간다고 해도 그럴 시에는 배신 위험이 있으니 힘들다. 거기다가 우리 쪽에 엄청난 해커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감시 카메라가 있는 곳은 좀 그랬겠지. 그래서 외지나 이런 곳을 찾아다니는 거고. “어쩌면. 하지만 가능성은 낮아. 아, 그것보단… 장, 소마. 한 5명만 데리고 내 친구들 좀 밖으로 안내해 줘라.” “예.” 내 말에 장과 소마를 필두로 총 7명이 진성이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우르르 모여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보자. 오늘 일은 발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믿겠다. 그러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될지는 우리도 장담 못해. 너희를 믿어서 보내주는 거다.” “자, 잠깐만!” “오늘 일을 봤을 테니 얘기가 빠르겠군. 난 너희들하고 만나러 다닐 상황이 아니다. 그 누구하고도.” “…….” 나는 입을 다물고는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을 둘러보았다. 난 특히 선아와 초연을 오래 바라보았고 둘은 몸을 움찔했다. “뭐, 시간나면 찾아가지. 내가 찾아갈 때는 위험이 없는 거니까 안심하고.” 내 말이 끝나자 장 등이 쭈뼛거리며 서 있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한 곳까지만 ‘호위’해 주고 와라.” “알겠습니다.” 친구들은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뭔가 혼란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장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좀 착해 보이긴 해도 역시 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들이라 안 따르기가 뭐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리던 나는 초연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현진 씨! 자, 잠깐만!” “아직은 아닙니다.” “예?” 의아해 하는 초연에게 소마가 쭈뼛거리며 다가섰다. 손으로 볼을 긁적이며 나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는 걸 보니 나하고 각별한 사이로 보여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거기다 미인이니까. 이제 19살이고 좀 순진한 녀석이니 당연할 수도. 아니, 19살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어. 생일도 모르는 녀석인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마는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초연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거의 하녀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살짝 잡아끄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초연은 별말없이 소마를 따라갔고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때?” “으음. 위험한데. 이거 아무래도 센에 대한 정보 같아. 위치 추적기로 추적을 했던 모양이야. 센이 방해를 했기 때문에 전체 서울 중에서 50번대 구역이라는 것이 한계로 보이지만. 그래도 카메론에게 이 정보가 간다면… 곤란한데.” 센은 카메론을 위해서 일을 한 적도 있으니까. 요새 센이 카메론의 컴퓨터를 해킹한 적도 있으니 카메론 쪽에서도 될 수 있으면 잡으려 할 테고. 위험한데. 잘못하면 암흑가에 사는 사람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갈 수도……. “위험하지?” 레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잠시 우리가 함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좀 머뭇거리며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곧 레딕이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 “에이, 몰라. 닥치면 그때 어떻게 되겠지. 그나저나 넌 괜찮아? 저래서야 친구들이 널 어떻게 볼지 모르겠는데?” “몰라. 상관없지 뭐.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는 섀도우면 몰라도 현실에서는 가급적 사람을 만나지 않는게 좋을지도 몰라. 내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오늘같이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렇군. 뭐, 진정한 친구라면 그런 것 신경 쓰지 않을 텐데. 킥.” “무슨 영화도 아니고 헛소리…….” “레딕 형님! 진님!” 내 말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급히 달려오고 있는 장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뭐야?” “아, 암흑가에서, 헉, 헉. 여, 연락이 왔는데…….” 나는 친구들 일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레딕을 바라보았다. 역시 나를 바라보는 레딕과 시선이 겹쳐졌다. 뭘까? “센 형님이 사라졌답니다!” 켁? 나와 레딕은 동시에 장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뭐, 뭐야!?” “센이 없어지다니! 누가 납치라도 했다는 거야!?” 내 다급한 질문에 장은 고개를 저었다. 납치는 아니라고? “납치는 아니랍니다. 센 형님 스스로 떠난 모양입니다. 자기 슈퍼북하고 해킹 도구들만 챙겨서 나갔다는데요. 그리고 한 1000만원 정도 들어있는 현금카드도 가지고 간 것 같답니다. 현금카드 하나가 없어졌거든요.” 나는 레딕을 바라보았다. 역시 나를 바라보는 레딕의 얼굴에도 비슷한 생각이 떠오르는 듯 했다. “우리가 위험해 지기 전에 떠난 건가?” “아마도…….” “세, 센이 없어졌다니! 무슨 소리야!” 저쪽에서 흔적을 지우고 있던 릴이 달려와 소리쳤다. 장은 릴의 기세에 몸을 움찔하고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장에게 달려들려는 릴을 붙잡으며 질문했다. “그게 다?” “아, 센 형님이 남긴 메모가 있답니다.” “말해봐.” “그게… 음, 진이나 레딕, 민 형님이라면 알 이유로 떠난다. 며칠 뒤에 연락하마. 릴에겐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중에 보자. 끝입니다.” “…….”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해킹을 할 때마다 장소를 옮기려는 건가?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 무슨 말이야!” 릴은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릴을 꼭 끌어안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녀석들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주위의 시선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망할 자식.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가면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야.” 왠지 앞으로 일하기가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은?” “방에 틀어박혀서는 울고만 있어.” “젠장.” 나는 의자에 몸을 편하게 기대며 욕설을 내뱉었다. 미치겠군. 원체 어두운 분위기의 암흑가지만 지금은 특히 어두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센이 가출(?)했다는 사실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릴이야 그렇다 치고… 센이 없으니 앞으로 어쩐다? 내 질문에 레딕은 입을 삐죽이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암담하군. 나지막한 중얼거림. “아무래도 섀도우 월드 내에서는 센의 도움을 받기 힘들겠군. 제길. 타대륙의 정황 등을 알아보려면 센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다른 연합의 정보를 얻는데도 센 만한 사람이 없다고.” “센이 직접 교육시킨 녀석들이 둘 있긴 하지만 해킹 실력은 그저 그렇다고 하고…….” 레딕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치겠군. 타대륙에서 우리 한국 대륙으로 넘어와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녀석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아무래도 자기들 돈을 뺐어가는 리자드가 별 마음에 안 드는 외국의 지사들에서 리자드 본사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 자기들이 원조하는 플레이어들을 이용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흔하니까. 자연의 장벽을 어떻게 통과하는지는 몰라도 레딕이 싸웠다는 녀석도 타대륙의 플레이어라고 하고……. 외국 지사에서 꾸미는 일은 제쳐놓고서라도 삼대 연합의 움직임을 체크하는 데에도 센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섀도우 월드 내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암흑 길드 연합. 그리고 점점 비윤리적인 활동을 보이는 헌터 연합. 그나마 낳지만 역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엠페러 연합. 특히 암흑 연합은 레지엘…이라는 주도자가 확실히지만 헌터 연합이나 엠페러 연합의 미토스와 제퍼슨은 영향력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미토스야 워낙 착한 사람이고 돈에 묶여 있는 처지니 어쩔 수 없고, 제퍼슨은 실력은 있지만 별 관심이 없고. 빌어먹을.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질문했다. “수집한 증거는 얼마나 되지? 리자드의 빌어먹을 짓거리 말야.” 암흑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행한 인체실험. 레딕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하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그다지 쓸모있는 증거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잘 몰라. 아마 민 형님이 더 잘 아실걸.” “별다른 증거는 없다.”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민의 말이었다. 뭔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한 민이 나와 레딕의 시선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센이 리자드에 침투해서 알아보고, 혹시 카메론에서 수집한 정보도 있을까 해서 카메론의 컴퓨터에도 침투했었다. 하지만 쓸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지. 리자드에서는 괜찮은 증거를 하나 빼내기는 했는데 터트리기에는 너무 약하다. 하지만 그 정보가 빌미가 되어서 양쪽에서 센을 추적했지. 때문에 센이 이곳을 떠난 거고. 너희도 알겠지만 더 이상 정보가 누출되면 우리도 위험하니까. 인터넷을 이용한 사업이야 센이 가르킨 두 녀석이 있으니 어떻게든 돌아가겠고.” “그렇습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턱을 괴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회색빛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곤란하네요. 그러면 섀도우 월드를 좀 괜찮은 곳으로 만들어서 사람의 뇌를 직접 이용한 몬스터들을 늘리지 않고, 죽지 않도록 한다는 생각이나… 직접적으로 증거를 모아 터트려 막는다는 작전, 두 개가 다 빈사상태라는 거군요. 후우.” 내 말에 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마도 너와 센이 연락을 하고 있던 친구의 도움이 절실한데.” “그 사람도 지금은 힘들다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일에 대한 정보도 그가 줬던 건데 확실하지도 않았잖습니까.” “배신은?” “아닐 겁니다.”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나와 민의 대화가 끝나자 레딕이 급히 끼어들었다. “자, 잠깐. 그 사람이 누군데? 너와 센 둘이서만 알고 있던 그 조력자 말이냐?” “그래.” 내 태연한 대답에 레딕은 얼굴을 약간 꿈틀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말해 주는 게 어때? 난 그 친구가 리자드 내부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모른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많은 사람이 알 필요도 없는 일일 뿐더러, 레딕은 그와 연락할 방법도 적으니 괜히 비밀 누출의 위험만 늘어난다. “안돼. 이유는 민 형님에게 물어봐. 아무래도 그 사람이 다시 연락을 해오면 내가 그 정보를 여기로 전해주는 식이 되겠는데… 젠장. 그래서는 섀도우 월드에 들어가 있을 시간이 줄어드는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점점 일이 꼬여가고 있는 듯 했다. “하아.” 풀썩. 나는 소파에 몸을 누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다. 그래도 역시 집이 좋구나. 나는 불을 꺼둔 거실 안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새벽인가? 암흑가에서 너무 고생했다. “센은 어디 있을지 모르겠는데. 쳇. 건방지긴.” 나보다 나이는 많으니 뭐라 할말 없다만… 우리 때문에 혼자서 떠나면 어쩌라는 거야? 나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붕대에 감긴 상처들이 꽤나 쓰라려왔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선 사건 경위서를 써야할 지도 모르기에 암흑가에서 치료할 수밖에 없다. 뭐, 그리도 릴을 비롯해서 의사 못지않은 실력, 적어도 외상에 관한한은 의사와 맞먹을 치료술을 가진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눈을 뜨고 천장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잠자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컴퓨터를 찾아서 천천히 걸어갔다. 지잉. “음?” 컴퓨터가 부팅되는 순간, 화면이 흔들리면서 검게 변했다. 새까맣게 어두운 모니터. 바, 바이러스라도 걸린 건가? 이거 센이 손봤었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들어오기는 힘들텐데? 내가 당황하는 사이 모니터에 하얀 글자들이 ‘쳐’졌다. 한번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타자를 치는 데로 나타나는 듯한 글씨. 왠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상황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안녕하냐. 나 센이다? 센!” 센? 전에 재훈이와 해킹 대결을 했을때 마지막에 썼던 수법이잖아? 센이 이러고 있는 건가? 나는 눈을 빛내며 모니터에 집중했다. ‘짧게 쓴다. 다음 연락은 이틀 뒤 저녁 9시다. 10분전부터 컴퓨터 켜놓고 있어라. 민 형님도 있긴 하지만… 애들을 잘 부탁한다.’ “망할.” 나는 피식 웃으며 욕을 내뱉었다. 이렇게 걱정할 거면 왜 혼자 나가셨나. 킬킬거리던 나는 글자들이 싹 지워지고 다시 쳐지는 문장에 입을 다물었다. 해석 불가능한 문장이었다. ‘나중에 암흑가로 돌아갔을 때는 한 가정 차려서 갈지도 모르겠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 의도는 아니었어. 레딕 좀 부탁한다.’ “……?” 순간 모니터가 번쩍거리더니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라라? “무슨… 말이지?” 한 가정을 차려서 돌아올지도 모른다니? 릴은 어쩌고? 암호인가? “으아아, 모르겠다. 여러 가지로 속 썩이는 해커 씨로군.”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냉장고로 걸어갔다. 이럴 때는 캔커피나 하나 먹자고. “아…….” 캔커피를 손에 든 나는 약한 신음을 흘렸다. 캔커피, 캔커피라. 초연, 초연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이걸 마시고 있었던가? “쳇.” 나는 거실로 다시 걸어 나가 소파에 몸을 앉혔다. 상당히 편한 기분이었다. 으음. 그래도 오늘은 초연에게 도움을 받았군. 그때 맞았으면 타격이 꽤 컸을 텐데. “그래도 아직은 아니야. 그리고 이미 마음도 없다.”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캔커피를 한번에 비워버렸다.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닌데. 젠장. 당분간은 이런 생각은……. -우헤헤헤헤! 전화 받아! 전화 받아! 헤헤헤헤! “…….”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전화기로 다가갔다. 이 전화벨 소리, 바꿀 필요가 있겠어. “여보세요.” -지, 지이이이인! “크윽?” 나는 머릿속을 강타하는 고함소리에 신음을 흘렸다. 크으윽. 뭐, 뭐냐? 레딕 목소리 같은데? 그런데 왠지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이, 이런 목소리는 처음인데?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팟.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며 레딕의 얼굴이 나타났다. 당혹한 듯한,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지이이인! 릴이, 릴이 없어졌어! “뭐?” 리, 릴이? -흐흐흑. 센을 찾아간 것 같아. 자기 옷 몇 벌하고 무기 몇 개, 돈 조금만 들고 사라졌어. 사라졌다고! “…….” -센, 이 망할 자식! 내 여동생을! 죽으려면 혼자서 죽을 것이지 여자는 왜 끌고 들어가는 거냐고! “…….” -한때나마 그 인간한테 감동했던 내가 싫어진단 말이다! 크흐흑. 지, 진. 어, 어떻게 하지? 모두 잠들었을 때 몰래 빠져나가서 본 사람도 없단 말이야. 제길! 으아아아아! “…….” -레딕 형님! 릴이 남긴 것 같은 메모를 찾았습니다. 저쪽이에요! 뭐, 뭐야? 정말!? 어디! 어디야! “…….”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 -우헤헤헤헤! 전화 끊어졌어! 끊어졌어! “…한 가정 차려서 온다는 게 이거였나? 도피를 하면서 여자를 끌고 가다니. 무섭군, 그래. 그나저나 저런 레딕의 모습도 처음인데.” -우헤헤! 탁. 나는 전화를 급히 끊고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망할. “…….” 왠지 할말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마구 고함을 질러대던 레딕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이나 자… 섀도우 월드나 접속하자.” 왠지 열 받는 새벽이었다. “후우.” 나는 약간 더운 날씨에 천상의 망토를 작게 만들며 계단을 내려갔다. 여관 안에는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하긴, 일부러 사람이 적은 여관을 찾아왔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군. “아, 이보게.” 생각이 끝나는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타이밍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니 몇몇 사람들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산맥 탐사 길드 연합의 연합장인, RM 길드의 길드장이었나? 루신이라는 사람과 나무꾼 길드 연합의 연합장인 우든, 광부 길드 연합의 연합장인 모가였다. 셋 모두 대충 30대로 보이는 외모. 보통 플레이어들의 평균 외모 연령보다 좀 높은 편이었다.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앞으로 나서서 물어오는 우든이었다. 아무래도 셋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아 보였는데, 그것 때문에 앞으로 나선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아, 고맙네. 자네들은 좀 쉬고 있게나.” 셋의 호위로 보이는 듯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관의 식당 곳곳에 자리를 잡고는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전투용 길드들의 연합이 아닌 곳의 사람들이니 만큼 눈에 띌 만큼의 고수들은 아니었다. 그저 평균에서 좀 웃도는 정도. 셋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 테이블에 앉았고 나는 그 뒤를 따라 의자를 하나 빼내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게 말이네. 사실 우리 셋이 모두 각자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러네. 따로따로 오는 건 아무래도 그래서 한꺼번에 몰려왔지. 무슨 일인지는 짐작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연합에 들어온 이유……. “음, 차례를 정한대로 나부터 묻지. 얘기는 들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자네 정말로 나무꾼 일을 한 적이 있었나?” 우든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처음 시작할 때 스킬 레벨을 올린다고 3개월 동안 나무만 벤 적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스킬 레벨도 엄청나게 올라갔고 나무 학살자에 일급 나무꾼이라는 말도 들었죠. 차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허…, 아무래도 맞는 모양이로군.” “예. 차렌에 가서 인상착의를 물어보시면 더 정확하시겠죠. 그곳에는 목공소도 하나밖에 없으니 확실할 겁니다. 촌장님도 저와 어느 정도는 아는 사이였고. 하지만 나무 베기 스킬도 올리지 않았으니 나무꾼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나무 베기 스킬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우든은 별 놀라거나 하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좋지. 꼭 나무 베기 스킬이 없어도 나무꾼 일을 할 수 있다는 증명이 되는 거니까. 음음.” 나는 눈을 깜박였다. 왠지 이상한 분위기로 가는 듯한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우든은 뒤로 몸을 빼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에는 모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네, 드워프들과 친분이 있던데, 그 점에 대해서 물어볼 말이 있네.” “예. 음, 그런데 드워프들에 대해서는 저보다는 위리안이 더 잘 알겁니다. 3개월간 함께 생활 했을 테니까요. 실라크 장로님도 위리안과 꽤 친해지신 듯하니 말입니다.” “아, 그런가? 아, 그래도 한 가지는 물어야겠군. 도대체 그 드워프들은 어떻게 만난 건가? 우리도 그들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마을을 발견한 적은 한번도 없었네. 여행을 다니는 드워프들이나 몇 번 봤을 뿐이지.” 나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연이었습니다. 산맥을 넘어오는 도중에 산사태에 휩쓸렸는데,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간신히 살아났죠. 그런데 그 동굴이 드워프들의 작업장 중에 하나더군요.” “하하. 그랬나.” “예. 거의 우연이었죠. 드워프 같은 NPC들은 플레이어들을 만나는 것이 좀 꺼려지고, 교류의 필요성이 적기에 마을을 봉인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흐음. 그렇군. 아, 그나저나 중간에서 잘 엮어줘야 하네.” “물론입니다.” 모가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루신이 역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그, 산맥에 대해 선데… 지형을 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아, 안될 것은 없죠. 하지만 거의 우연으로 다녀온 것이기에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못하고 지도 작성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어디에 대충 어떤 위험이 있고 그 지형에 대한 설명 정도는 괜찮겠군요. 으음, 말로는 힘들고 나중에 서류로 작성해서 드리겠습니다.” “음. 고맙네.” 루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드워프의 마을을 떠올리다가 우든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우든님. 제가 알고 있는 다크 엘프들이 있습니다. 엘프인 만큼 나무에 대해서는 잘 알겠죠. 언제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음? 다크 엘프? 정말인가? 하하핫. 이거 소문으로 들었을 때는 정말 딱딱하고 차가운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정말 좋은 친구로구만. 하하핫. 고맙네. 우리도 연합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음. 우리도. 물론 전투를 위한 연합이 아니기에 힘은 약하지만. 미안하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셋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직 어떤 힘도 없는 저희 연합에 협력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그 ‘힘’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제 부탁을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아, 부탁이라기보다는 연합장의 명령 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물론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내 말에 셋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뭐냐는 듯한 시선.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한가한데?” 나는 마나르트의 검집을 내려다보며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대낮부터 술이라 좀 그렇지만, 나쁘지는 않군. “어쨌든 그 세 사람은 어느 정도 믿을 수 있겠군. 거기다 꽤 도움도 되겠어. 뭐, 어쨌든 세 사람도 돌아갔고, 맥주도 다 마셨으니, 슬슬 일어나 볼까.” 나는 마나르트를 등에 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드래곤의 표호로 가는 것이 좋겠지. 아무래도 연합을 만들었으면 관리도 중요하니까. 그건 그렇고 억지로 웃으면서, 예의 바르게 얘기하는 것도 상당한 고역이었다. 으음. 그냥 차갑게 한마디 내뱉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으니 어쩐다. 거리는 처음 모두가 모였을 때보다는 한산했다. 플레이어들의 대부분이 사냥을 가거나 일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만 역시 며칠이 지나니 도시 자체가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이 내 부탁대로 한다면 더 풀어질 테고. “아… 와, 왔어요?” 주점, 드래곤의 표호에 도착한 나를 제일 먼저 반긴 사람은 나프네였다. 아무래도 탑골 공원에서의 일 때문인지 약간 어색해 하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프네에게 걸어가던 나는 왠지 주점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다 나프네의 표정도 좀 굳어져 있는 것이 꽤나 심각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 그게…….” 나프네가 머뭇거리는 모습에 나는 조금 긴장하기 시작했다. 나프네가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어떤 일이라는 거야? “저 쪽을 좀 봐요.” “음?” 나는 나프네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얼씨구?” 뭔가 음침한, 싸늘한,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몰려있는 듯한 분위기가 주점의 한쪽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회색머리의 검사 하나가 이마를 짚고 앉아있었다. 레딕이었다. “접속해서는 계속 저 상태인데…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접근도 못하고, 저는 그게…….” 그때 일이 있어서 레딕이 좀 두렵다 그거로군. 그나저나 저 녀석이 접속해 있다니 이상한데. 이곳을 별 좋아하지도 않는 녀석이 왜? 아, 혹시 난동을 피우다가 민에게 쫓겨났나?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추리였다. 내가 혀를 차며 레딕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옆쪽에서 몇몇을 이끌고 한 사람이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살기는 아니지만 상당히 호전적인 기운이로군. “다크소… 아, 아니. 세한! 아, 아니지. 세한님!” 제롬이로군. 나는 자기 연합의 사람들을 이끌고 내게 다가오는 제롬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왜 저런다지? 그보다는 세한님이라니? “세한님?” “아, 제가 좀 말을 해뒀거든요. 연합장이라는 호칭은 안 되고 세한님 정도로는 불러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도 거의 협박하다시피 말해가지고 계속 세한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왠지 웃음을 참는 듯한 나프네의 목소리였다. 어쨌든 나에 대한 경계심이 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군. 나는 피식 웃고는 제롬을 기다렸다. 곧 내 앞으로 다가온 제롬이 목소리를 조금 높여 따져 들어왔다. “세한…님!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무꾼 연합이나 산맥 탐사 길드 연합 같은 비 전투 집단이 속속들이 이곳을 떠나고 있단 말이…입니다!” 나는 입술 한쪽을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힘들어 보이는군. “그냥 편한대로 말하십시오. 힘들어 보이는군요. 그래도 가장 강한 연합의 장이니 그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말에 제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살 맛 난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으음. 좋소. 그렇게 하지. 흠, 비 전투 집단이 전부 떠나고 있단 말이오! 이 중요한 시기에! 아무리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 해도 연합이 창설되려는 마당에 자리를 뜨다니! 거기다 내가 항의하러 가도 모두 연합장의 명령이라는 말만 되풀이 하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생각이 없는 거요 없는 거요.” 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곧바로 말을 낮추는 제롬에게 눈살을 찌푸리던 나프네가 제롬의 말을 듣고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아. 확실히 내가 명령한 것이 맞군요.” “이보시오! 도대체……!” 나는 손을 들어올려 제롬의 말을 막았다. 제롬이 입을 다물자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했다. “어차피 우리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일에는 지금 떠나고 있는 곳의 힘은 그다지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연합들의 긴장감만 가증시키겠죠. 차라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아군을 끌어 모으고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당분간 있을 전투에는 레이디스나 체르시온 같은 곳의 힘이 필요할 뿐이니까요. 거기다 말할 수는 없어도 따로 지시한 말도 있습니다. 아, 제롬에게도 말하는데, 당분간은 떠나고 있는 길드나 연합은 우리 연합에 없는 것으로 간주해 주십시오. 당분간이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의 세력만으로 싸워갑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대충은 맞는 말에 제롬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연합장은 연합장이고 맞는 말만 늘어놓고 있으니 할 말이 곤궁한 모양이었다. “흠, 명령입니다. 용건은 그게 끝인가요?” 명령이라는 말에 인상을 약간 찡그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반박을 하지는 않는 제롬이었다. 그래도 성격이 그렇게 나쁘진 않군. 다른 용건이라는 말에 제롬은 나프네를 바라보았다. 둘이서 뭐 얘기한 것이 있나? 내 예상이 맞는지 나프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롬이 입을 열었다. “흠, 그 위리안이라는 사람까지 해서 셋이서 얘기를 좀 했었소. 아무래도 적색 산맥 쪽으로 우리 연합의 세력을 구축하는 전쟁을 벌이는 일에 대해 선인데, 시기는 대충 한달 후로 잡았소.” 제롬이 말을 맺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자 나프네가 말을 받았다. “시간 적으로 한 달 후라고 예상했다는 거죠. 아무래도 연합을 만들었다고는 해도 구성원들, 구성 단체의 인원들의 호흡을 맞추기 위한 훈련 등이 필요하니까요. 물론 우리는 인원이 적은 만큼 게릴라전과 개인 전투 위주로 나갈 테니 다른 연합의 병단처럼 정교한 훈련은 필요 없어요. 그리고 각자 세력이 위치한 곳이 다른 만큼 각 단체 위주의 전투 집단이 되기는 하겠지만 역시 어느 정도의 훈련은 필요하니까요. 그 훈련이 끝나고 전투 병력을 집중시킬 시간을 모을 시간이 대충 한달입니다. 우선 일차적 목표는 헌터 연합. 그 쪽이 우리와 가장 밀접해 있으니까요. 공격 장소는 라커메 요새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연합의 창설이 아직은 비밀스러운 단계이기 때문에 연합에 협력하는 길드나 연합의 인원이 전부 이곳에 모여 훈련하기는 불가능하다. 각자 위치한 곳에서 훈련을 쌓아 한곳에 집결해 전투를 벌이는 것이 효과적이지. 때문에 훈련기간은 짧아지고, 각자 위치한 곳에서 전투지로 모이는 시간 등등을 고려한 것이 한달이라. 그때 입을 다물고 있던 제롬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한 달 동안 한 가지 추진해야할 것이 있는데, 바로 헌터 연합과 엠페러 연합의 동향을 살필 사람을 보내는 거요. 우리가 차지하려는 곳이 그리 넓거나 하지도 않고 한달이란 시간이 있으니 실력이 뛰어난 한 두 사람만 있으면 될 거요. 그리고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나야겠지.” 그러니까 적지를 돌면서 정보를 수집할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내가 가지.” “뭐?” “예?” 제롬과 나프네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겠다고 했습니다. 딱 들어맞는군요. 실력은 뛰어난 편이고, 속도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암흑 연합의 VIP 회원증도 있으니 정보 얻기도 어렵지는 않죠. 그리고 연합장이라고는 해도 정식으로 취임식 등을 한 것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할 일도 별로 없으니까. 인원 절약이라고 할까요.” “하, 하지만…….” 어쨌든 맞는 말인지라 나프네와 제롬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직책으로 볼 때 나는 절대 보내서는 안 되겠지만 내가 직접 간다고 한데다 적임자로 보이기도 할 테니까.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들릴 곳이 한곳 있습니다. 우리 연합에 많은 도움을 줄 이들이 있는 곳이죠. 강력한 병력이 될 이들입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사정도 있는 곳이고. 아마 전서구 정도로 연락을 하게 될 테고, 정확한 봉기 일을 알려주면 그들을 이끌고 시간에 맞춰 가겠습니다. 한달이면 대충 시간도 맞을 것 같고.” “병력?” “아아. 그리고 우리 연합의 신뢰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에도 필요한 이들이죠.” 나프네와 제롬이 고개를 갸웃했다. 후훗. 다크 엘프들. 그들이 있으면 나무꾼 길드의 협력도가 더 커지겠지. 그리고 전방에 내세우지는 못하겠지만, 마법이나 정령술은 상당한 도움이 될 테고. 그리고… 미시안 등을 만나봐야 한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이곳의 하늘을 푸르렀다. “호, 혼자 간다니! 우리는!” 나는 귀가 울리는 것이 점점 심해지자 결국 고개를 돌려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약간 화가 나서 그런지 평소보다 위리안의 뾰족 머리가 더 높아진 듯 했다. “아아. 혼자 갈 수밖에 없어. 위리안 너는 여기 연합의 일을 도와줘야지.” “말도 안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너희 연합을 도와야 될 이유가 없잖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위리안이 우리 연합을 도와야할 이유는 없었다. 어느 순간 보니 돕고 있었을 뿐. 하지만 위리안도 자신이 왜 연합을 돕고 있었지 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아 위리안 자신조차 얼떨결에 우리를 돕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도울 필요 없다는 식으로 갈 수는 없다. 나는 무표정을 고수하며 입을 열었다. “널 여기로 건너오게 도와준 건 나라고. 거기다 넌 여기서 자리 잡기도 힘을 테고. 우리 연합을 도우면 자리 하나는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 거다. 어차피 현실에선 직업도 없는 것 같던데. 여기서 거의 사는 만큼 입지를 확고히 하면 좋지 않겠어?” “무슨 말을! 나도 직업이 있다고!” 위리안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직업이 있다고? 거의 날마다 풀로 접속해 있으면서 무슨 소리를? 가끔씩 몇 시간 씩 나가기도 하지만. 그 시간만 일하는 직업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직업이 뭔데?” “경찰!” “…….” 지금 내 주위에 모여 있는 이들은 설화와 주토, 린, 실라크 밖에 없었으므로 나와 함께 위리안을 미쳤다는 듯이 바라볼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혼자서 위리안의 정신 상태를 걱정해야 했다. “농담?” “정말이라고!” 나는 위리안을 불신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경찰이 국가를 지킬 생각은 안하고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경찰은 시간이 남아도나 보지?” 내 질문에 위리안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안경을 추슬렀다. 안경알 뒤로 싸늘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가끔씩 진지 모드로 전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난 사이버 경찰이거든. 그것도 여기 섀도우 월드 담당.” “뭐?” 나는 놀란 눈으로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사이버 경찰? 확실히 그렇게 보면 게임을 하고 사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하는데……. “섀도우 월드가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가?” 나는 약간 긴장하며 위리안을 바라보았고 위리안을 고개를 약간 숙이며 대답했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 레딕인지 하는 친구들도 어느 정도는 아는 눈치 같고. 내가 흑룡문에게 쫓기는 이유도 이곳에 대해서 수사하다 일어난 일이었어.” 나는 굳은 얼굴로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리자드의 일을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 일반인은 리자드가 좋은 곳인지 나쁜 곳인지도 모르는 것에 비하면… 거기다 나와 레딕들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헷. 너무 굳은 얼굴 하지 말라고. 흠, 동료잖아, 동료. 친구를 돕는 것은 당연한 거지. 좋아. 입지도 굳힐 겸 여기서 일이나 해보실까.” 어느새 장난스러운 태도로 돌아간 위리안이었다. 나는 그런 위리안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언제 얘기 좀 하지.” “좋아.” 위리안의 대답을 시작으로 이번에는 설화가 따지고 들었다. 하아. “잠깐만요! 위리안은 그렇다고 쳐도 나는? 나는 왜 놔두고 간다는 거죠? NPC라서?” “너도 본거나 들은 게 있으니 알겠지만 난 플레이어보다는 NPC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럼 왜? 아니, 그것보단 여기 린이라는 여자는 왜 따라가는 데요? 혼자라면서요?” 음?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는 설화와 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린도 함께 가기는 하지? 평소 내 애완용 고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혼자 간다고 말하고 다녔군. “린은 내 애완용이라고. 그리고 꽤 도움도 되고. 낮에는 힘들지만 밤에는 올라 탈수도 있고 말이야. 꽤 푹신해서 잠잘 때도 좋아. 여행할 때 피로를 풀… 음? 순간 주위의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된다는 것을 느낀 나는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그리고 내 시선에 들어온 것은 가히 사람을 얼려 죽일 듯한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설화와 약간 부끄럽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린, 그리고 입을 쩍 벌리고는 정말 부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위리안, 쯧쯧 혀를 차며 나를 바라보는 실라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럽다는 표정과 뭔가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이 미묘하게 섞인 주토였다. 나는 각종의 시선들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급속도로 냉각된 공기의 시발점은 설화이겠고. 그런데 왜 저런 눈빛들이지? 그리고 순간, 나는 내가 한 말이 상당히 선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 자, 잠깐.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좋아요. 마음대로 하라고요!” “뭐?” 쾅! 나는 순식간에 방문을 박차고 나간 설화의 기척을 잠시 쫓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뭔가 곤란하게 된 것 같은데? “크윽. 대단한 녀석. 혼자서 도대체 몇 명의 여자들을…….” “무슨!” “주군. 저라도 따라갔으면 합니다만.” 진정으로 감탄스럽다는 듯한 위리안의 말에 반박하려던 나는 주토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역시 안돼. 내가 가려는 곳은 적지라 위험할 수도 있어. 플레이어라면 모르지만 너나 설화 같은 NPC들은 한번 죽으면 끝이다. 차라리 여기가 안전해. 주토, 설화를 지키고 있어라. 내 이름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안전할 거야.” “…알겠습니다, 주군.” 시원시원한 주토의 대답에 나는 씨익 웃으며 배낭을 둘러맸다. 이왕 가는 것, 빨리 갈수록 좋겠지? “그럼 난 가지. 위리안, 주토. 잘 부탁한다.” “걱정 말라고. 연합이고 설화고 확실하게 지킬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주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린을 바라보았다. “가자, 린.” “예!” 린은 내 팔짱을 끼고는 나와 걸음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흐음. 겉보기에나 내 기분에나 나쁘지는 않지만. “린. 웬만하면 작은 고양이 모습은 어때?” “예? 하지만 전 이게 더 좋은데요?” “난 고양이 모습이 더 편해서. 그리고 그 모습도 귀엽다고.” “흐음, 예.” 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어깨를 짚고는 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 검은 빛에 감싸였다가 금세 작은 고양이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어깨에 살짝 실리는 무게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어깨 위로 들어올려 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녀오지. 한 달 뒤에 보자고.” “으음. 고양이라. 이 소리였나?” “다녀오십시오, 주군.” 나는 위리안의 중얼거림에 대충 일이 풀릴 것도 같다는 희망을 가지며 바카나 시의 거리를 걸었다. 당신이 다크소드? 나는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에 한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컬컬한 목소리인 것이 목소리만큼 얼굴도 괴상한지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가 당신에게 정보를 지급해야할 이유가 있나? 강적이시군. 나는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모르겠군. 옛날에는 암흑 길드 연합의 회원이긴 했지만 지금도 통용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이곳을 찾기 위해 꽤나 고생한 것을 봐서라도 정보를 좀 파는 게 어때? 흠. 옛날에는 정보를 얻기 위해 무력도 불사했다고 하던데, 그럴 생각은 없는 건가? 나는 잠시 침묵했다. 암흑 연합에서 지금 내 실력을 어느 정도로 측정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옛날이야 내가 최상위에 속했으니 그랬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군. 거기다 암흑 연합의 힘이 너무 커져서 말이야. 귀찮은 것은 사양이야. ……. 어둠 속에 앉아있는 녀석이 나를 유심히 살폈다. 말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는 녀석을 마주보았다. 어둠 속에서 불이 어른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딸칵. 그때 방의 천장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살기는 없는데. 그리고 어둠 속에서 뭔가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 앉아있던, 이 도시의 지부장 정도 되는 듯한 녀석이 그것을 낚아챘다. 서류인가? 내가 잠시 기다리자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좋아. 원하는 정보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태도가 변한 듯한데. 방금 내려온 게 내게 협력하라는 통지라도 되는 건가? 이일이 내게 나쁘게 작용되지 않을지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헌터 연합와 엠페러 연합의 동향. 이 근처 도시의 장악 여부. 지부장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행동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더군. 주워 듣는 것도 한계가 있고. 아무래도 이쪽의 정보가 가장 정확하겠지. 상황을 보고 유리한 쪽으로 붙겠다는 건가? 방금 들어온 명령서에 될 수 있으면 나를 끌어들이라는 말이라도 적혀 있었나? 대답할 의무는 없다. 나는 킥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갑자기 몸을 숙이자 품속에서 잠들어 있던 린이 조금 꿈틀거렸다. 잠시 후 지부장 녀석이 입을 열었다. 묻고 답하는 형식 정도로 하지. 우선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현재 엠페러 길드는 대륙의 북서부에 위치한 지배자의 도시, 빅 캐슬에 본거지를 두고 대륙의 북부, 서부, 중부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에 비해 헌터 연합은 남동부에 위치한 스피언 산맥에 위치한 거대 요새, 스피리안 요새를 주둔지로 해서 대륙의 남부와 중앙 일부, 동부 일부를 장악하고 있지. 엠페러 연합과 헌터 연합의 주 전투 요인은 중부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대부분이다. 빅 캐슬과 스피리안 요새인가. 빅 캐슬은 NPC들의 왕이 있는 곳이다. 솔직히 왕이라기보다는 의장 정도가 더 어울리는 직책이지만. 왕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명령하기 보다는 의견을 조율해 대륙의 간단한 정치 정도나 하는 식이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자치를 하다가 시장이 가끔씩 빅 캐슬에 모여서 회의를 벌이는 정도. 어느 정도 민주적인 정치 체계라고 할까. 어쨌든 권력이 적어도 왕은 왕이다. NPC들의 왕이라 소유 무력은 적더라도 여러 가지 해택을 줄 수는 있는 법. 그런 자가 머물고 있는 빅 캐슬을 차지하고 있는 엠페러 연합이 다른 연합에 비해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헌터 연합은 운영자들과 헌터들이 주축이라는 직접적 힘을 가지고 있다. 헌터 연합이 동부 일부라는 건, 적색 산맥 쪽은 별 가치가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 적색 산맥 쪽은 몬스터들도 많은 데다 이 지역은 산맥의 북부와 남부는 미개척 지역이니까. 어차피 적색 산맥의 중앙땅의 일부를 차지해 관리하는 수고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적색 산맥 지역은 헌터 연합에서도 거의 포기한, 큰 도시 몇 개에나 작은 지부를 설치한 정도다. 병력도 거의 없다. 경쟁 상대가 없으니까. 그럼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역도, 병력도 엠페러 연합이 우세하다는 거군. 그렇다. 하지만 헌터 연합은 운영자들과 헌터들이 많기 때문에 무시하기 힘들다. 소멸의 벌이라는 수단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언제 싸움을 벌이더라도 명분을 얻을 수 있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헌터라는 직업이 많이 타락한 모양이군. 싸움을 벌이더라도 범죄를 해결하는 헌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분이 생긴다는 말이지? 망할. 결국 세력만으로는 엠페러 연합이 유리하지만 헌터 연합은 리자드 사의 직원이라는 것으로 좀 유리한 위치에 서기 때문에 막상막하라는 거군. 그렇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근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연합은? 이 판빌 시는 대도시이긴 하지만 역시 적색 산맥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엠페러와 헌터 연합의 관심이 그리 깊지는 않은 곳이다. 이 도시에서 약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긴파는 엠페러 연합이 가진 북부와 동부의 경계 도시다. 그곳은 엠페러 연합에서도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역시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영향력이 적다. 텔레포트가 제한된 지금은 60km도 꽤 긴 거리라고 할 수도 있으니 그곳은 제쳐둘 수도 있다. 이래서 엠페러 연합은 제외다. 헌터 연합의 작은 지부가 이 도시에 있으며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대도시, 스비아 시가 헌터 연합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고 있지. 이 도시에는 작은 지부가 있을 뿐이다. 오히려 이 부근은 체르시온 연합의 영향력이 강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헌터 연합의 힘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밀리는 실정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르시온 연합이 우리 연합에 들어온 이유가 그거였군. 체르시온 연합? 정의감 넘치는 멍청이들이 모인 연합이다. 하지만 무력 쪽은 괜찮은 편이다. 다만 무력 외의 힘이 없다는 것이 단점으로 꼽히는 연합이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다니는 엠페러 연합이나 헌터 연합을 별로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말이 있다. 정확하군. 체르시온 연합은… 연합장 녀석은 좀 싸가지가 없지만 어쨌든 믿을 만하다 인가. 미리 말해 두지만 체르시온 연합에 가볼 작정이라면 미리 말려주겠다. 음? 나는 돌발적으로 터져 나온 지부장 녀석의 말에 의문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당신은 제르난 길드라는 작은 길드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그 점과 이미 세력을 확보한 다른 연합보다는 작은 연합을 선택해 그 연합을 성장시켜 좋은 자리를 꿰차겠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체르시온 연합은 안 된다고 말해 주지. 그 얼간이 자식들, 만약 그 녀석들과 하루라도 함께 일한다면 그쪽의 분노가 극에 다할 거다. 장담해 주지. 나는 이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친구가 상당히 마음에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 도시도 체르시온 연합의 녀석들이 좀 돌아다니는 곳일 테니, 이 친구도 제롬 등등 녀석들의 성격을 대충 파악하고 있겠지. 난 이런 구석의 연합에 들어갈 마음은 없다. 내 말에 지부장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결국 이 도시까지는 헌터 연합의 영향력이 좀 닿는 편이지만 더 이상 동부로 가면 큰 연합의 힘은 닿지 않는다는 거로군. 그렇다. 우리가 자리 잡기엔 최적의 장소로군. 페이린과 친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안면은 있으니 좀 시끄러운 건 봐줄지도 모르니까. 몬스터야 강자가 많으니 어떻게 퇴치하면 되는 거고. 나는 말의 방향을 바꿨다. 엠페러 연합과 헌터 연합의 실질적 지배자는? 엠페러 연합의 연합장은 제퍼슨은 여전히 겉으로는 나서지 않고 있다. 요즘에도 혼자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하더군. 대부분의 일은 딜럿이 총괄하고 있다. 때문에 좀 비열한 작전이 나오기도 하지. 딜럿과 그의 부관인 투르가 대부분의 일을 담당하고, 세부 사항은 엠페러 연합에 속한 거대 길드의 길드장들이 담당한다. 딜럿의 영향력이 제퍼슨보다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제퍼슨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기 때문에 내부 갈등은 적다. 헌터는? 연합장이자 헌터 리더인 미토스, 그리고 그의 부관 격인 할딘은 실질적인 영향력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연합의 부연합장이자 헌터들 중 3인자 정도로 분류되는 슈웰이라는 녀석이 연합의 대부분의 일을 장악하고 있다. 슈웰이 헌터 연합의 약 50%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토스와 할딘은 약 10% 정도다. 나머지는 강직하고 헌터의 본분을 수행하는 미토스 쪽과 비열하고 잔인, 리자드의 개 정도로 불리지만 영향력은 강한 슈웰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립 정도의 사람들이다. 나는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토스와 할딘은 어쨌든 열심히 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도 겨우 10%라니. 미토스야 돈 때문에 리자드에서 일하고 있는 거고, 할딘은 그런 미토스를 돕기 위해서 있는 거겠지. 씨아도 있을 테고. 헌터 연합은 내부 분쟁이 상당히 심각한 편이다. 미토스와 할딘, 씨아, 그리고 제르난 길드의 사람들이 주축인 쪽과 슈웰의 세력이 각기 따로 임무를 수행할 정도이지. 헌터 연합이 그나마 좋은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은 미토스와 제르난 길드 덕분이다. 제, 제르난? 제르난 길드라는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제르난 길드? 레도르가 헌터가 된 건가? 아니면 단순히 세력에 붙은 건가? 하지만 레도르들의 성격으로 봤을 때는 그럴 가능성은 적고, 아마도……. 레도르라는 녀석이 길드장으로 있는 작은 길드지. 아마도 미토스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역시. 미토스를 도우려고 들어가 있는 건가? 그 레도르도 헌터인가? 그렇다고 알고 있다. 하긴, 유미를 제외하면 모두들 대학도 졸업 했겠군. 그러면 돈도 벌 나이니 헌터에 가입한 거겠지. 적어도 올해 초까지만 해도 헌터는 꽤 좋은 쪽으로 인식이 박혀 있었으니까. 그 슈웰이라는 녀석은 어떤 놈이지? 머리가 좋은 놈이다. 전투 능력도 높은 편인데, 본신의 실력보다는 아이템이 의존하는 편이다. 리자드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추측된다. 남들 위에 서기를 좋아하는 녀석이고, 미토스나 할딘도 자기 아래로 굽어보려 하는 녀석이라고 한다. 재수 없는 놈이라 그거군. …그렇다. 나는 쓰게 웃고는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씁쓸한 기분이군. 린이 깨어났는지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제 됐다. 정보비는 얼마지? 필요 없다. 뭐? 나는 놀란 눈으로 지부장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가만히 않아 있었다. 흐트러짐도 전혀 없군. 레지엘의 명령인가? 대답할 의무는 없다. 한 가지 말한다면 레지엘님은 이런 특수 상황이 아니면 이런 곳까지 명령을 내리지 않으신다. 특수 상황에는 내린다는 말이로군. ……. 지부장 녀석은 침묵했고 나도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우리 쪽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는 모양이군, 레지엘. 그러면 속셈이 뭐냐. 우리 정도야 가만히 놔둬도 언제든 부술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너희 암흑 연합의 본거지는? …대륙 중부의 남쪽에 위치한 도적의 도시, 로근. 레지엘은 거기에 있나? …그렇다. 좋아. 나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말 좀 전해 주었으면 하는군. 뭘 꾸미는지는 몰라도 날 얕보다간 곤란할 거라고 전해주시지. 그리고 언젠가 로근 시로 찾아가겠다고 전해 주도록.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 …….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녀석이 잠시 몸을 움찔했다. 어둠 속을 잠시 노려보다 문을 열고나오니 가죽 옷을 입은 붉은 머리의 여자가 벽에 기대서 있었다. 상당한 고수. 나는 그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스쳐지나가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런 장난은 재미없다고 전해주면 고맙겠군.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고는 어두운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 방금 전까지 세한이 앉아있던 방이었다. 그리고 세한이 나간 문이 열리며 붉은 머리의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 여자가 방으로 들어오자 어두웠던 곳에서 등불 하나가 켜지며 주위를 비췄다. 상당히 넓은 방이었다. 아무래도 눈치를 챈 거 같지, 벨? 아까 세한과 얘기를 나눴던 때의 낮고 컬컬한 목소리가 아닌, 장난기가 묻어나는 미성이 의자에 앉아있는 은발 머리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말에 붉은 머리의 여자, 벨이 대답했다. 이런 장난은 재미없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은발 머리의 청년, 레지엘은 이마를 짚으며 몸을 뒤로 숙였다. 왠지 장난기가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역시 걸렸군. 아아, 힘겹게 연기도 했는데 말이야. 하긴, 음성 변조 마법하고 이런 마나를 숨기는 옷 정도로는 그의 식스센스를 피하기는 힘들었지. 뭐, 그래도 싸움 없이 오랜만의 만남이 끝나서 기쁜데. …혹시라도 그가 공격을 가했다면 어쩌시려 하신 겁니까? 음? 공격? 뭐, 어때. 그때는 죽이면 되는 거지. 상관없잖아. 레지엘의 태평한 대답에 벨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이런 현실성 넘치는 곳에서 저렇게 웃으며 죽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평범한 행동이 아니다. 그런데 그에게 그런 정보를 줘도 괜찮습니까? 상관없지. 어차피 이 곳은 우리에게도 별 쓸모없는 곳이니까. 다른 두 연합, 특히 헌터 연합의 주의를 돌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한을 도울 이유는 충분해. 뭐, 어차피 우리가 준 정보야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잖아? 그렇군요. 딱딱한 벨의 대답에 레지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던 레지엘은 갑자기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벨이 레지엘의 갑작스런 행동에 주위를 살피며 단검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레지엘이 벨의 바로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딱딱한 얼굴 좀 풀면 안 될까, 벨? 레지엘의 갑작스런 행동에 얼굴을 붉히던 벨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그, 그리고 말씀드릴 것이……. 뭔데? 제시 아가씨가 또 사라지셨습니다. 레지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까지의 장난기 도는 얼굴에서 상당히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던 레지엘은 벨의 어깨에 손을 척 얹으며 방문으로 걸어갔다. 찾으러 가자고. 그래, 아가씨는 어디로? 아, 아마 그 니베라는 여자를 만나러 간 것 같습니다. 문제는 헌터 연합에서 그걸 눈치 채고 있다는 것 입니다.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레지엘의 손을 잠시 바라보던 벨이 다급히 말했다. 벨의 말에 레지엘은 다른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아가씨로군. 가자. 예. 레지엘과 벨이 방을 빠져나가자 어두운 방 안에는 적막감만이 남게 되었다. “이건 말도 안돼. 젠장.” -그만 좀 하게나. “그만이라니. 이런 말도 안돼는… 텔레포트 일인 이용료가 250골드라니, 완전 도둑놈들이지 않나.” -하아. 내 자서전에 세상에 둘도 없을 수전노라는 소개가 실리고 싶은 건가? “어차피 마계에는 갈 일도 없으니 상관없어. 망할 텔레포트 협회 녀석들. 고양이에까지 50골드라니, 반인족이라는 것을 들켰다면 500골드를 지출했을 지도 모르겠군. 젠장.” -나야 돈에 부족함을 느껴본 역사가 없으니 돈 문제는 별로 관심 없네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하는군. 겨우 9km라니. 거기다 도시도 아니고 초원인가? “쳇. 망할 리자드 놈들.” 나는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을 보며 팔짱을 끼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빌어먹을. 겨우 이만큼 이동시켜주면서 250골드를 받아 처먹어? 텔레포트 이용자가 거의 없는 것이 당연하군. -그럼 다음 텔레포트 지역까지는 약 500km인가? “그럴 것 같군. 씽이 그리워지는데.” -자네의 옛날 말이었지? 뭐, 이 고양이를 타고 가는 것도 괜찮을 텐데. “나쁘진 않겠지만…….” “아, 안녕하십니까? 여행 중이신 모양이군요.” -이런 사람들 덕분에 안 된다는 거로군. 뭐, 그냥 떨쳐 버리고 달린 다음에 고양이를 타는 것이 어떤가? 나는 마나르트의 탄식 어린 목소리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어떤 사람인지 한번 확인이나……. “음?” “아?” 치캉! 나는 급히 뒤로 몸을 빼며 요검을 뽑아들었다. 뭐, 뭐냐. 이 느낌은? 내게 말을 걸었던 상대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는 상당히 놀랐다는 얼굴로 검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반 정도 뽑기는 했지만 검을 완전히 뽑지는 않고 있었기에 왠지 내가 졌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한. 이 녀석은……. 마나르트의 약간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사람이 아닌데? 단정하고 짧은 검은 머리에 그냥 괜찮다 싶은 평범한 외모의 사내였다. 그리고 가죽 갑옷 위에 부분 합금 갑옷 조금. 그 위에 갈색 망토. 나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는 복장이었다. 하지만 실력은… 아무리 낮게 봐도 천악과 동급, 조금 높게 잡으면 고타와 맞먹겠다 싶을 정도였다. 내가 마나르트를 뽑는다면 괜찮은 승부를 벌여볼 만한 상대. 아마 10에 7은 내가 지겠지만. 잠시 대치하던 우리는 서로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긴장을 풀었다. 나쁜 느낌을 가진 상대는 아니로군. 실력만큼이나 고타와 비슷한, 뭔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하. 정말 놀랐는데요. 그냥 말을 건거였는데 당신 같은 강자와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전 적의는 없으니 안심하세요.” “내 쪽도 적의는 없다. 단지 조금 놀랐을 뿐.” 내 차가운 말에도 사내는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기도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 겉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아무래도 그쪽도 북쪽으로 가는 모양이군요. 저도 북쪽으로 갑니다. 아무래도 몇 번 더 만날지도 모르고,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이니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는 사내의 모습에 잠시 침묵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의 즐거움이니 하는 것은 몰라도 이런 강자의 이름은 알아둬서 나쁠 것 없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제퍼슨, 검사입니다.” 제퍼슨? 나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입을 열었다. “세한. 검사.” 내 소개에 사내도 눈을 약간 크게 떴다. “혹시 다크소드라 불리는?” “그렇다.” 내 대답에 자신을 제퍼슨이라 밝힌 사내가 내 모습을 좀 자세히 살폈다. 다른 곳에 비해 앞머리만 좀 길어 어두운 느낌을 주는 얼굴과 등에 걸린 마나르트를 좀 주위 깊게 바라보던 제퍼슨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번에 제 부관이 실례를 저질렀더군요. 사죄드립니다.” “상관없다.” 확실하군. 엠페러 길드의 제퍼슨인가. 하긴, 이 정도 강자라면 그 밖에 없겠지. 뭔가 대화의 진행이 안 된다는 듯한 얼굴이던 제퍼슨은 머리를 긁적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번의 드래곤과의 대결은 잘 봤습니다. 정말 멋지더군요. 그때의 힘을 거의 회복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 짧은 대답에 잠시 미소를 짓던 제퍼슨은 고개를 돌리며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성격이 원래 이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화가 나 있어서 그런 건지 고민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표정을 보아 아무래도 내 성격이 원래 그런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 듯한 제퍼슨이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아, 북쪽으로 향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그런데?” “아, 그렇다면 동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동료를 만드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지요.” 동행? 나는 무심한 눈으로 제퍼슨을 살폈다. 동행이라. 별다른 뜻은 없는 것 같은데. 뭐, 이 정도 고수가 함정을 파서 뒤통수를 칠거라고 보기도 힘들고, 소문이나 직접 주는 느낌이나 나쁜 쪽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나쁘지는 않겠지.” 내 대답에 제퍼슨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뭔가 인사말을 하려는 것 같던 제퍼슨이 입을 연 채로 굳어버렸다. 뭐냐? 제퍼슨의 눈이 내 머리 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제퍼슨이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건?” “음?” -흐음, 반응이 시원찮군. 그러고 보니 위리안 녀석이 재밌었는데 말이야. 머릿속을 울리는 마나르트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머리 위에 올라온 거냐. 나는 몸을 약간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회복하며 간단히 대답했다. “내 애완 마족이다.” -뭐, 뭣이잇! “오, 마족이 상당히 귀엽게 생겼군요. 예상과는 다릅니다.” -귀, 귀엽다고!? 이런 씹어 먹을……! “아프다.” 나는 머리를 꽉 쥐어짜는 마나르트에게 짜증을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으르렁거리는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거리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쪽이야 말로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와는 딴판이로군. 좀더 위엄 있는 모습인줄 알았는데.” “하하. 그런 소리를 많이 듣기는 합니다. 뭐, 그래도 길드나 연합의 중요한 일을 할 때는 위엄 있는 척도 하긴 하니까요.” “그런가. 그보다는 뭔가가 뒤바뀌어있는 듯한데.” 내가 반말에 제퍼슨이 존댓말이라니. 뭔가 이상하군. 하지만 제퍼슨은 고개를 저었다. “뭐, 제 성격상 이런 말투가 좋아서 말입니다.” “그렇군. 나는 이런 말투가 좋으니 이대로 가겠다.” “상관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500km라. 현실에서라면 금방 갈 거리지만, 이렇게 걸어서는 얼마 만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이놈! 내가 몸만 되찾으면 저 녀석부터 손봐주겠어! 기다려라! 서열 107위에 빛나는 최상급 마족의 힘을 보여주마! 나는 뒤를 돌아서는 손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대는 마나르트의 행동에 탄식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퍼슨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손을 마구 휘둘러대는 마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나르트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로군. 마나르트를 재미있다는 식으로 보는 사람. “좀 달렸으면 하는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아, 좋습니다.” 제퍼슨의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제퍼슨 정도면 이 정도야 따라오겠지. 마나르트는 여전히 주먹을 휘둘러대며 악을 써대고 있었다. 정신 집중이 안돼. 망할. 타탓. 어느새 따라붙은 제퍼슨이 평온한 얼굴로 내 옆에 붙어 달렸다. 빠른데? 역시 레벨이 높으면 퀵스텝 같은 능력이 없어도 이 정도 속도는 낼 수 있다는 거로군.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모습이 상당히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어느 단체의 지도자 보다는 여행자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속도를 좀 높여도?” “괜찮습니다.” -세한! 최대한 빠르게 달려! 저 건방진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세! 달리게 달려! 내가 말이냐. 마나르트의 말을 무시하려던 나는 엄청난 힘으로 머리카락을 쥐어짜는 마나르트의 행동에 이를 갈며 속도를 높여야 했다. 뭐, 제퍼슨 정도면 어떻게든 따라오겠지. “얼레?” 내가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자 제퍼슨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뒤늦게 들려왔다. 그리고 제퍼슨 역시 빠른 속도로 뒤따라 달려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엄청난 속도이긴 하지만 속도 위주의 검사가 아닌 이상 퀵스텝을 구사하는 나를 따라오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하긴, 저 정도 속도만 해도 최상위의 암살자나 도적과도 맞먹는 속도이긴 하지. 어쨌든 더 이상 속도를 늘리기는……. -달리게! 더 빨리 달려! 크헤헤헤헷! 저 건방진 자식 벙찐 얼굴 하는 것 좀 보게. 더 빨리! 달려라! “…망할.” 나는 마나르트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며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제퍼슨이 꽤 떨어진 거리에서 열심히 쫓아오고 있었다. -건방진 녀석! 이 몸의 위대함을 이제 알겠느냐! “달린 건 나네.” -어쨌든! 나는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제퍼슨을 바라보며 주먹을 휘둘러대는 마나르트를 흘낏 바라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풀들이 무성히 자란 초원의 한 곳.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난 숲과 만나는 곳. 초원과 숲이 만나는 곳의 커다란 바위 위에 두 여자가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금발 머리를 길게 기른 서양계의 여자와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동양계의 여자였다. 그리고 그 뒤에 드러누워서 잠들어 있는 연녹색 머리의 여자. 모두 세 명의 여자였다. “날씨 좋다. 나무 그늘에 앉아있으니 시원하고. 날을 잘 잡았는걸. 그치, 제시?” “정말. 이렇게 둘이 여행 나온 것도 오랜만이네, 니베.” “응. 그런데…….” 금발머리의 외국인, 제시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니베를 바라보더니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그 사람, 적어도 내 친구에게는 손을 대지 않으니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나왔으니까 쫓아오는데 시간도 좀 걸릴 거야. 그리고 레도르들도 이 근처로 온다며?” “으응. 임무가 있어서… 하지만 그래도 좀 걱정되는걸. 그 사람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니베의 모습에 제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스테프를 품에 안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굉장히 푸르고 높은 여름 하늘이었다. 사이좋게 앉아서 주위 경치를 구경하는 사이 몇 시간이 흘렀다. 제시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니베가 갑자기 몸을 떨고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제시는 니베의 갑작스런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니베가 품속에서 작은 구슬 같은 것을 꺼내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연락이 온 거야?” “그런가봐. 갑자기 부르르 떨렸거든. 언니, 씨아 언니.” 니베는 뒤에 누워 잠들어 있던 연녹색 머리의 여자를 흔들었다. 잠시 후, 여자 몸을 일으켰고 니베는 작은 구슬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음? 연락이야? 아아, 잘 잤다. 네, 여기는 씨아. 그쪽은 누구십니까?” 씨아는 구슬을 향해 장난스럽게 물었고 곧 구슬이 부르르 떨리다가 약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구슬에서 작게 흘러나왔다. -씨아냐? “아, 할딘?” 할딘이라는 이름에 니베와 제시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륙 최강의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무슨 일이야?” -급하다. 당장 도망쳐. 마법진은 안돼. 그 근처에 숲이 있다고 알고 있다. 니베와 제시를 데리고 숲으로 도망쳐. 나와 미토스가 곧 갈 거다. 그리고 레도르들과도 연락하고. “뭐? 무슨 일이야?” 씨아가 당황해서 물었고 니베와 제시도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슈웰 녀석이 제시를 납치할 생각인거 같다. 인질로라도 쓰려는 모양이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막을 수는 없다. 우리가 직접 가면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와 미토스가 갈 거다. 그때 까지는 숲에 숨어있어. 레도르들이 곧 그 초원에 도달할 테니 연락하고. 제시에겐 미안하다고 전해줘라. “젠장! 그 망할 놈의 슈웰 자식! 설마 우리를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거야!?” -불만은 나중이다! 어서! “아, 알았어.” 씨아의 대답과 함께 구슬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끊어졌다. 그리고 구슬이 부르르 떨리더니 가루가 되어서 사라졌다. 일회용 통신구들은 모두 한번 사용하면 사라진다. 거기다 두 개 세트로, 그 두 개의 통신구 끼리만 연락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편리한 연락 수단은 아니었다. “씨아 언니, 슈웰이…….” “어서 가자. 제시, 헤이스트 쓸 줄 알지? 니베에게 걸어줘.” 제시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테프를 니베에게 가져갔다. 곧 니베가 밝은 빛에 휩싸이자 제시가 씨아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 무슨 일이죠?” “미안, 우리 연합의 사정인데… 정말 미안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씨아의 행동에 제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어차피 그곳에서 나오려면 여기로 오는 수밖에 없었는걸요.” “고마워. 어쨌든 서두르자.” 씨아는 제시를 안아들고는 숲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레인져답게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리고 헤이스트 마법으로 몸이 빨라진 니베가 급히 뒤를 쫓았다. 그때 숲의 반대편 언덕에서 밝은 빛이 치솟았다. 텔레포트 마법진이 가동되었다는 표식이었다. “제길. 슈웰인가? 오빠나 할딘이 이렇게 빨리 왔을 리는 없으니까. 니베, 빨리!” 텔레포트에 의한 빛줄기를 잠시 바라보던 씨아는 다시 숲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몰이 시작되나?” “헉, 헉… 정말 빠르군요. 이렇게 힘 빼며 달린 건 오랜만입니다.” “그런가? 마나르트 녀석이 기뻐하는군.” “후훗. 아무래도 그 귀여운 마족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모양입니다.” “그 귀여운 마족이라는 말이 미움을 사게 하고 있는 거다.” 제퍼슨은 후훗 웃더니 뭔가를 발견한 듯 한쪽을 바라보았다. 뭐지? “뭡니까?” “아, 저 멀리에서 흙먼지 같은 게…….” 정말이군. 나는 저 멀리에 흙먼지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풀이 꽤 잘 자라있는 곳이니 바람 정도로는 저렇게 흙먼지가 생기는 일은 없다고 봐도 괜찮았다. “어쨌든 좀 무리를 해서 달린 것이 이틀째니까… 대충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는 곳에 근접한 것 같고, 상단이라도 오는 걸까요?” 상단이라. 확실히 조금만 더 가면 텔레포트 마법진이 설치된 곳 같은데. 초원과 숲이 만나는 지역, 들었던 데로의 지형이다. “그렇게 보기는 힘들군. 속도가 너무 빨라. 그리고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인데.” “그렇습니까.” 역시 고수는 다른지라 제퍼슨은 내 식스센스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다. 내가 몬스터가 시야에 들어오기도 전에 방향을 틀어서 비켜 지나가는 것을 들켰기 때문이었다. 제퍼슨도 기감이 발달해서 많은 몬스터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는 듯 했다. 어쨌든……. “아마 추격전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추격전… 입니까.” "좀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지.“ “좋군요.” 제퍼슨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달렸으니 지칠 만도 하겠지. 퀵스텝이 있는 나조차 지칠 지경이다. 나는 제퍼슨의 옆에 주저앉으며 육포를 꺼내 뜯었다. “먹겠나?” “좋습니다.” 그리고 나와 제퍼슨은 육포를 뜯으며 흙먼지를 일으키는 지점을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왠지 마음이 맞는 사람이로군. “엠페러 연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리겠다, 생각한 나는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봅니다. 딜럿 녀석, 제 사촌 동생 놈인데 절 너무 위하는 녀석이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별별 일을 다 벌이고 있습니다. 그 일들의 궁극 목적이 절 최고의 단체의 일인자로 만들겠다 는 것이니 할말은 없습니다만. 좀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쨌든 딜럿 녀석이 욕을 먹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흐음……. “그래서 여행을 하는 건가. 길드와 연합 내부에서 분열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런 셈입니다.” 현실에서 딜럿과 사이가 꽤나 좋은 모양이로군. 지금 그게 원인이 되어서 문제가 생이고 있긴 하지만. 뭐, 그걸 내가 뭐라고 하기는 힘든가? “마차…….” 제퍼슨의 중얼거림에 나는 상념을 지우며 고개를 들었다. 초원 저편에서 마차 한대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마차였다. “뒤는 추격자 같군. 말을 타고 있고 말은 모두 5필. 둘이 함께 타고 있는 말도 있는데? 남자 여자 조합. 뭐지?” “길드간의 충돌일까요? 어느 쪽을 도와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런 일에서는 대부분 쫓는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않나? “아무래도 쫓는 녀석들이 나쁜 쪽일 듯 합니다.” 나는 마나르트와 제퍼슨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쫓는 쪽이라. 확실히 보통 소설이나 그런 것을 보면 항상 쫓는 쪽이 악당이던가. “그런 고정 관념 같은 것은 버리는 것이 좋겠군. 일종의 선입견이기도 하니까.” 나는 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제퍼슨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제퍼슨, 저 마차를 좀 잘 관찰하는 것이 좋겠다.” “마차?” 제퍼슨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마차를 살폈다. 그리고 곧 제퍼슨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젠장. 그냥 큰 마차라고 생각 했는데…….”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겠지.” 제퍼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급히 일어서서 검을 뽑아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도울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제퍼슨이 이렇게 나오니 덩달아 돕게 생겼군. “갑시다.” 제퍼슨은 그대로 달려갔다. 하아. 뭐, 저 추격자들의 기운이 좀 낯익은데 확인도 할 겸 가보실까. 어쨌든 제퍼슨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이제 알겠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가. 아니면……. “나와 비슷한 친구일 수도 있겠군. 아, 그러고 보니 나이를 안 물었는데?” -뭐하나 세한! 저런 자식에게 뒤쳐질 수는 없네! “아아, 알았다고.” 마나르트이 재촉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퀵스텝을 최대로 사용하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꽤 앞서나가고 있던 제퍼슨을 순식간에 따라 잡자 앞에서 달려오는 마차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강한 기로 폭발 시키는 것은 안 되겠군.” “그렇군요. 말을 죽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폭주하고 있어서는 말을 죽었을 때 위험해 보이는데, 아, 방법이 있군.” “예?” 나는 마나르트를 뽑아들었다. 순식간에 마력이 온몸으로 퍼지며 주위에 마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제퍼슨이 놀란 얼굴로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멈춰 서.” 나는 그대로 멈춰 섰고 제퍼슨도 뒤따라 멈춰 섰다. 좋아. 스아아아아! 그리고 나는 눈을 번뜩이며 마기와 살기를 있는 대로 뿜어대었다. 순간 제퍼슨의 기도까지 변해버렸다. 하긴,바로 옆에서 이런 살기를 뿜어대는데 나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제퍼슨이 침착하게 있으면 그게 더 비정상인가? 흘낏 바라보니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얼굴이 아닌, 좀 굳은, 좀 날카롭게 벼려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히히히힝! 멀리서 말의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보통 말이 내 살기와 마기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지. 두두두두두. 하지만 달리던 속도가 있어서 그런지 마차는 우리와 거의 근접한 거리까지 와서는 간신히 멈춰 섰다. 그리고 말들이 거품을 물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힘든데다 내 살기까지 겹쳐서 그런가? “가지.” 나는 그대로 달려 나갔고 제퍼슨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른 속도로 뒤따라왔다. “네놈들은 뭐냐!” 마차에서 뛰어내린 녀석들이 고함을 지르며 무기를 꺼내들었다. 어느 정도 실력은 있는 녀석들이로군. 한 녀석은 상당히 강하고. “그냥 지나가는 여행자.” 어느새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제퍼슨의 말이었다. 평소에도 저러고 다니는 건가? 나는 싱긋 웃으며 마나르트를 집어넣었다. -음? 왜 그러나? “역시 사람을 죽이는 데는 자네를 최대한 쓰지 않으려고.” -그런가? 마음대로 하게. 나는 요검을 뽑아들며 마차의 앞으로 다가가 마부 녀석을 날려버렸다. 말들이야 이미 다운 상태지만 혹시 모르니 이렇게 하는 게 좋겠지. “흐아앗!” 뒤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나는 급히 마차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한 녀석이 내지른 창이 마차의 마부석을 박살내며 박혀 들어갔다. 창이라. “스트라이크.” 나는 그대로 떨어지며 창을 뽑는 녀석의 등을 그어버렸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퍼슨은 이미 수명의 상대와 싸우고 있었다. 깔끔하군. 나는 검 하나로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내고 반격을 가하는 제퍼슨의 싸움을 잠시 지켜보다가 마차의 뒤로 달려갔다. “젠장.” 나는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여러 명의 여자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모두 기절한 듯이 쓰러져 있었는데 엘프 몇몇에 대부분은 반인족이었다. 품속에서 린이 얼굴을 쏙 내밀고는 낮게 울고 있었다. “린, 여기를 부탁한다.” -예. 내 품속에서 뛰어내린 린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며 쓰러져 있는 여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다녔다. 마법 족쇄 정도는 린의 힘이면 어떻게 끊을 수도 있을 것 같군. 그럼 나는 밖인가? “하압!” 어느새 짐칸의 입구까지 온 제퍼슨이 기합을 내지르며 한 녀석의 목을 베어내고 있었다. 남아 있는 녀석들은 4명인가. 그때 저쪽에서 강한 화기가 생성되며 여러 개의 불덩이가 날아왔다. “크어억!” 날아온 불덩이들에 순식간에 두 명이 쓰러졌다. 마법사? 아니, 정령사인가? 화기가 이렇게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엄청난 실력인데. “화룡(火龍)!” 익숙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일직선으로 날아온 불의 검이 또 한 녀석을 꿰뚫고 바닥에 박혔다. 불의 검에 꿰뚫린 녀석이 순식간에 불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졌다. 무섭군. “아무래도 넌 살려놔야겠군.” 나는 마지막 남은 녀석을 강하게 쳐 기절시킨 후, 제퍼슨의 옆으로 다가갔다. 제퍼슨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마차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저쪽이라 눈이 부신데. 선두로 다가온 두필의 말이 우리 앞에 멈춰 섰다. 푸른 머리를 길게 기른 검사와 회색 머리를 길게 기른 마법사였다. 햇빛 때문에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겠는데? “불법 노예상의 검거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헌터 연합의 헌터… 음?” “왜 그래?” 푸른 머리의 검사가 말을 하다 말자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마법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아. 이 햇빛이 문제인가. 스으으으으. 순식간에 검은 마기가 주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주위의 약간이 좀 어두워지자 붉은 석양빛에 가려져 있던 둘의 얼굴이 정확히 드러났다. “오랜만이다, 레도르. 오랜만이네요, 시드 형.” “아, 아아…….” 레도르와 시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자 제퍼슨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는 사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레도르, 무슨 일? 그 사람들은… 아?” “왜 그래요, 시드 오빠?” “뭐냐? 그런데 여기 왜 이리 어두워? 음침한데?” 좀 뒤늦게 다가온 다른 녀석들이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유미를 뒤에 태우고 있던 이시린은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돌 같이 굳어 있었지만 아까 그 엄청난 정령 불꽃의 주인으로 보이는 유미나 금발을 짧게 잘라서 상당히 차분한 이미지로 변한 지미는 날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의 사내 하나가 뒤에 레아를 태우고 다가왔다. 등 뒤에 걸린 단창 여러 개와 장창 하나가 상당히 특이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분위기가 왜 이러냐? 세린은 없는 모양이군. 왠지 모르게 다행이지만.” “엥?” 내 말에 유미와 지미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세, 세세세…….” “뭐냐? 혹시 실어증이라도 걸린 거야, 레도르?” 내 말에 레도르는 고개를 급하게 젓더니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레도르도 정말 강해졌는데. “세, 세한? 한이냐?” 레도르가 멍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자 시드 형이 말에서 떨어지듯 뛰어내리며 물어왔다. 그리고 내게 순간 집중되는 눈동자들. 왠지 무서운데. “그럼 누구로 보이는지 궁금하군.” “꺄아악! 한이 오빠!” “세, 세한 형!” “오빠!” “엑?” “헉?” 제퍼슨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는 총 다섯 명의 녀석들의 육탄 공격을 정면으로 받으며 뒤로 나동그라져야 했다. “크윽.” “으아앗! 저, 정말 세한 형? 머리가 왜 이래?” “으윽, 머리는 놔라, 짐.” “꺄아! 오빠! 진짜 오랜만이에요!” “이익, 유미잇! 여자가 어디에 함부로!” 내가 제르난 길드의 녀석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사이 그 창을 든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제퍼슨에게 다가갔다. 역시 얼떨떨한 얼굴이던 제퍼슨은 그 사내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뭔가 자신의 세상에 동참을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저는 나신이라고 합니다. 창술가죠.” “아, 저는 제퍼슨입니다. 검사입니다.” “예? 설마 엠페러 길드의…….” “예, 그렇습니다.” “아,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뇨. 여행 중에는 그저 평범한 여행자일 뿐이니 제 길드는 상관없습니다. 그나저나 상당히 강한 듯하시군요. 제가 만난 창을 쓰는 사람들 중에서 단연 손꼽히는 실력으로 보이십니다.” “아, 아닙니다.” 나도 저쪽으로 가고 싶다. 온 힘을 다해 오인지옥(五人地獄)에서 빠져나온 나는 마차에 등을 기대며 숨을 헐떡였다. 주, 죽음의 공포를 느꼈어. 망할. 그때 말이 다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 중에 사라진 마기 덕에 석양빛을 한 몸에 받으며 나타난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레도르를 발견하고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미토스님의 전갈을 가지고 뒤따라 왔습니다. 급히 씨아님과 합류하라고 합니다. 한 시가 급하다고… 음?” 진짜 익숙한 목소리군. 나는 검은 옷 일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검사를 올려다보며 손을 들어주었다. “여어, 칼.” “하, 한님?” “오, 누구들과는 다르게 한 번에 알아보는군. 부탁이니 과격한 인사는 사양…….” 처척. 나는 순식간에 내 앞에 무릎을 꿇는 칼의 모습에 할말을 잃었다. “씨아하고 니베, 제시가 숲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예.” “그런데 저 엘프들과 반인족들은 어떻게 할 거지?” “잘 모르겠어요. 보통은 그냥 풀어주는데… 이번에는 힘들 것 같네요. 저렇게 상태가 안 좋아서는…….” 나는 아까의 싸움에서 생겨난 마부석 뒤의 구멍으로 짐칸 안을 바라보았다. 레아와 린이 주축이 되어서 엘프들과 반인족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내가 데려가도 괜찮을까? 린이 상당히 걱정하고 있어서.” “아, 상관없어요. 그런데 보호할 곳이…….” “있어. 내가 연합을 하나 꾸렸거든.” “예?” 마부석에 앉아있던 레도르, 시드, 이시린, 칼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설명했다. “뭐, 간만에 이 대륙으로 돌아와 보니 삼대 연합인지 하는 곳의 짓거리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나도 연합이나 하나 만들어 볼까 해서 만들었지.” “그, 그런…….” 레도르들의 어이없다는 시선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직 비밀이다. 삼대 연합에 알려져서는 곤란하거든. 거기 제퍼슨도 당분간은 비밀로 해주면 좋겠군.” “아, 상관없습니다.” 짐칸에서 제퍼슨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 사람이라면 믿을 수도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 옆을 돌아보았다. 오른쪽에 앉아있는 이시린과 왼쪽에 앉아있는 레도르의 시선이 내 얼굴에 완전 고정되어 있었다. “뭐야?” “한님. 저, 그 연합에 들어가겠습니다.” 칼의 목소리에 나는 레도르의 옆에 앉아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칼이었다. 하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마음대로.” “저, 저도, 아니, 저희도!” 레도르의 외침에 나는 레도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헌터로 일하고는 있지만… 리자드나 헌터 연합에서 하는 일들에 이젠 신물이 난다고요. 저희 제르난 길드도 가입하겠어요. 우리 제르난 길드의 사람들도 꽤 늘어나서 꽤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레도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예? 왜요!?”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레도르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나는 말들을 조금 빠르게 몰며 대답했다. “미토스를 도와야지. 들어보니 너희마저 없으면 미토스가 훨씬 힘들어 질 것 같더군.” 내 말에 레도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무래도 그쪽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급하게 가입하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미토스도 헌터 연합을 죽도록 싫어한다고요. 헌터 리더긴 하지만 그만두고 싶다고 항상 말하고 있고… 세한이 연합을 만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미토스는 그만두지 못해.” 나는 말들의 속도를 더욱 높이며 말했다. 마부석에 앉아있는 나머지 넷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가 그만둘 처지가 되었다면 내가 헌터를 그만둘 때 같이 데리고 나왔을 거다. 미토스는, 영민 형은 그만둘 수 없어.” 레도르가 의문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유는요? 우리도 미토스가 계속 헌터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의문인 것이 있어서……,”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에게라면 말해도 상관없겠지만…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얘기하지 마라. 너희만 알고 있어. 제르난 길드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지 마.” 내 진지한 분위기에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짐칸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지. 미토스, 영민 형의 어머니가 심한 병에 걸려 계신데… 돈이 부족하다고 하더군. 영민 형의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오래고 영민 형도 직업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유산이 꽤 많아서 편하게 생활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어머니가 갑자기 발병하셨다더군. 그걸 빌미로 리자드에서 영민 형을 끌어들였다. 어머니의 밀린 치료비를 몽땅 갚아주고 지속적으로 치료를 해주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그런…….”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엇다. 모르고 있던 것이 확실하군. 나는 잠시 침묵했고 그 사이 레도르가 입을 열었다. “거, 건이 형은요? 건이 형네 집은 상당한 부자잖아요. 왜 도와주지도 않고…….” “영민 형이 거절했다.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하려고 했던 거겠지. 거기다 치료비가 만만한 것이 아니었고. 아무리 친구라지만 그런 쪽까지 도움을 받는 것은… 헌터 창립 초기에는 좋을 일로 보였으니 건이 형도 별말 하지 않았겠지.” “아, 아직도 돈을 완전히…….”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눈치도 보이겠지. 리자드에서는 그렇게 도움을 주었는데 단물만 빼먹고 도망간다는 식으로 되려나. 거기다 그렇게 좋은 조건으로 많은 돈을 주는 직업도 드무니까.” “……,”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할딘의 헌터 봉급, 전부 미토스에게로 가고 있다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었다는데… 알았다면 나라도 좀 도와줬을 것을. “저 숲인가?”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숲의 모습에 중얼거렸다. 그때 이시린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제르난 길드 전부는 안 되더라도… 저, 저라도, 저 혼자라도 가면 안 될까요?” “뭐?” 나는 당황한 얼굴로 이시린을 바라보았다. 이건 무슨 소리? 이시린의 말에 레도르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는 시드 형. 이건 무슨 분위기……. 덥썩. -흐흠. 페페 양에 나프네 양, 설화 양에 세린 양, 그리고 여기 이시린 양도 확정이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레이디들까지 합한다면… “닥쳐, 마나르트.” 살기 섞인 내 목소리에 레도르와 이시린이 몸을 움찔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 명만 받기에는… 공평성이랄까… 그런 게 좀 맞지 않는군. 거부야.” “…그렇게 말해도… 안 된다고 해도 따라갈 거예요.” 나는 무심한 어조로 반문했다. “왜? 이유는?” “그, 그건…….” 이시린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때 레도르가 주저주저 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세한 형. 이시린은 허락해 줘요. 아마 칼 씨도 데리고 갈 텐데… 한 명 더 데려간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그리거… 이, 이시린은 세한 형을…….” “음?” 나는 레도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며 요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레도르가 놀라서 입을 다무는 사이, 제퍼슨이 마부석으로 급히 빠져나왔다. “뭐, 뭐지?” “당신도 느낀 겁니까?” “이 숲은 뭐야? 무슨 고수들이 이렇게 득실…….” “아무래도 빨리 가는 게 좋겠군요. 저 숲으로 누군가를 찾으러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나는 자리에 앉으며 마차의 속도를 최대한 늘리기 시작했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다. 그때 레도르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형?” “칼은 통과, 이시린은 보류다. 좀 있다가 얘기하자. 저 숲에서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인데.” “심상치 않은 일?”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다.” 나는 입을 다물며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나와 마차 위로 올라가 숲을 살피는 제퍼슨의 분위기에 압도된 듯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시린이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세린은 어디에 있지? 아까부터 좀 궁금했는데 말이야.” 내 질문에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한 시드가 대답했다. “아, 세린은 미토스와 함께 있을 거야.” “뭐?” 미, 미토스와?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시드를 바라보았다. “그게 꽤 사이가 좋아져서… 처음에는 둘이서 완전 티격태격 날마다 싸움을 벌이더니 어느 사이에 항상 붙어 다니더라고. 요새도 서로 으르렁거리기는 하지만.” “불가사의로군. 나로서는 다행이지만.” “그럴지도.” 흐음. 그 세린이 미토스하고? 왠지 상상이 안 가는군. 도대체 그 둘이 합쳐지면 어떤 커플이 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숲의 입구에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있다. 별로 강하지는 않은데. 검은 장발. 여자인가? 아무래도 전투 계열의 직업 같군.” “니베인가?” 레도르가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니베? 칼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숲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니베?” “예. 씨아와 니베가 제시 씨를 만나러 왔었거든요.” “제시라고?” 제시? 잠깐. 제시라면 카메론의 회장 딸이지. 어쨌든 중요한 인물이니 인질로도 쓰일 가능성이 있는… 이 강한 기운들. “빌어먹을! 레도르, 고삐를 잡아!” “예? 아, 예!” 나는 레도르에게 고삐를 쥐어주고는 제퍼슨을 올려다보았다. “제퍼슨,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새로 생긴 동료인데 물론 도와야겠죠. 따라가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그때 이시린이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의문 섞인 눈으로 내려다보자 이시린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얘기 할 수… 또 갑자기 사라지는 건 아니겠죠?” “음? 물론이지. 제시와 씨아, 니베를 구출해서 잽싸게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고. 제퍼슨, 가… 아, 아니지. 칼, 레도르에게서 고삐를 받아라. 시드 형, 레도르에게 헤이스트.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 놔.” 내 다급한 외침에 칼이 레도르에게서 고삐를 인계 받는 동시에 시드가 레도르에게 속도 증가 마법을 걸어주었다. 좋았어. “아무래도 위험해서 너는 데려가야겠다. 꽤 강해진 것 같으니까. 칼, 마차를 지켜. 숲에서부터는 천천히 들어와라. 시드 형은 마차 근처에 배리어를 치면서 오라고. 가자!” “자, 잠깐, 으아악!” 나는 레도르의 팔을 붙잡고는 그대로 앞으로 뛰어올랐다. 덩달아 나와 함께 공중으로 솟아오른 레도르가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리고 제퍼슨이 우리 밑으로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니베!” 몇 번의 도약을 더해 숲의 입구로 다가선 나는 나무에 기대 앉아있는 니베에게 급히 다가갔다.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니베가 고개를 들었다. “레, 레도르?” “괜찮아요? 제시 씨와 씨아 씨는?” “그, 그게… 훌쩍. 그게…….” 나는 뒤늦게 도착한 제퍼슨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니베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니베, 나 알아보겠어?” “예? 누구… 아… 서, 설마… 다크소드 오빠?” 도대체 왜 오빠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이 남매가 눈은 확실하군. 니베, 나와 레도르가 제시와 씨아를 구하러 갈 거다. 저 쪽에 마차가 보이지? 저기에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여기로 올 테니 안심해. 제시와 씨아는 어디 쯤에 있어?” 내 질문에 마차의 모습을 좇던 니베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 숲의 반대편에서 숲으로 계속 달려오는데 씨아 언니가 습격자가 있다고… 저 먼저 달려가서 레도르들을 불러오라고 해서… 그래서…….” “알았어. 우리는 숲으로 들어갈게.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예… 제, 제시는… 꼭…….” 나는 니베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어 주다가 다시 레도르의 팔을 붙잡고는 전력으로 달려 들어갔다. 레도르가 신음을 흘렸지만 나는 일말의 동정심도 주지 않은 채 전속력으로 나무들 사이를 헤치고 달렸다. “으윽! 이, 이 숲은 그렇게 큰 숲이 아니라. 으윽. 이 정도 속도라면 벌써 1/3은… 으악!” 레도르가 힘겹게 설명하다가 나뭇가지에 머리를 박고는 신음을 흘렸다. 조금 미안하군. 그때 여러 개의기운이 잡히기 시작했다. 저긴가? 나는 조금 뛰어올라 정면의 나무를 박차고는 방향을 틀어 달렸다. 제퍼슨이 급히 뒤를 쫓았다. 나무들 사이를 헤치며 조금 더 달려가자 저 멀리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충 4명? 그리고 근처에 상당히 강한, 옛날의 천악 정도의 기운을 풍기는 녀석이 하나. “저기다!” 나는 커다란 고목을 등지고 단검을 뽑아들고 있는 씨아와 그 뒤에서 스테프를 들고 있는 제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레도르에게 외쳤다. “레도르!” “으윽, 예?” “제시와 씨아, 구하고 싶지?” 나는 4명의 녀석이 공격해 들어가려 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레도르의 대답이 들려왔다. “물론이죠! 으읏, 그런데 왜…….” “고맙다, 레도르. 너의 희생은 절대 잊지 않겠다.” “예? 으아아악!?” 나는 최대한 힘을 주어 레도르를 집어 던졌다. 레도르는 비명을 지르며 곧장 날아갔다. 엄청난 속도로 씨아들과 4명의 괴한을 향해 날아간 레도르는 고수의 면모를 보이듯 그 와중에도 검을 뽑아들어 한 녀석을 후려쳤다. “으아아악!” “크허억!” 나는 레도르와 레도르의 공격에 당한 녀석이 함께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모습에 쓰게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 저기다! “음? 세한?” “가서 레도르를 도와주길.” 제퍼슨은 별 말없이 레도르를 향해 달려갔고 다는 옆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갔다. 아무래도 마나르트를 뽑을 필요가 있겠군. 마나르트가 없으면 이기기는 힘들지도 모르는 상대다. 아마 내가 조금 유리하기는 하겠지만. -가세! 간만에 강한 녀석과 한번 싸우는군! “나는 싸움을 즐기는 편은 아니야. 으아아앗! 크로스!” 나무 하나를 뚫고 나가자 왼쪽으로 제퍼슨과 레도르가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무 위로 뛰어오르며 마나르트를 빠르게 휘둘렀다. “우웃!” 그리고 나무 위에 태연히 앉아있던 녀석이 급히 검을 휘둘르며 낮은 비명을 질렀다. “너는 누구냐!” 내 외침에 녀석은 눈을 싸늘하게 빛내며 바닥에 내려서는 즉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가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파가가각! 힘으로는 내가 유리하다. 내가 녀석을 튕겨내려는 순간이었다. 파지지지직! “음?” 순간 녀석의 검에서 엄청난 전류가 일어나며 내 쪽으로 마구 밀려들어왔다. 마, 말도 안돼! 마기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전기라니! “크으윽!” 나는 급히 마나르트를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어, 엄청난데? “하아앗!” 내가 뒤로 물러나며 신음을 흘리는 사이, 녀석이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화르르륵! 이번엔 화염? 나는 상대의 검에서 붉은 불길이 넘실대는 것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런 말도 안돼는 검이… 아, 내 마나르트도 말이 안돼는 무기기는 하군. 천악의 공간의 낫도 그렇지. 하지만 전기에 불까지, 거기에 최대한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끌어올린 마기를 뚫어버릴 정도의 위력이라니. 이런……! “으아아아!”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마기가 강하게 끓어오르며 검은 기운과 상대의 화염이 격돌했다. 크읏! 투확! 이, 이런 망할.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검이냐. 나는 마나르트를 타고 올라오는 불길을 떨쳐버리며 뒤로 물러났다. 녀석도 마기에 타격을 입었는지 쿨럭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시간을 벌게 되자 녀석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장발. 잘생긴 외모. 본신의 실력도 상당하고, 그 무엇보다……. -완전 신급 아이템으로 도배를 했군. 마나르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내가 아이템 빨이 최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저 녀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 엄청난 능력에 마기를 뚫는 위력의 검에… 알 수 없는 기운이 흐르는 플레이트 메일. 거기다 머리에 끼고 있는 티아라에서 장갑이나 거의 모든 곳에서 엄청난 위력의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 이런 녀석이…….”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마나르트가 무색해 질 정도의 아이템들이로군. 아까의 생각은 취소다. 마나르트를 뽑지 않았다면 내가 불리할 지도. 이 요검의 힘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니까. 나는 어느새 4명의 괴한을 뒤로 물리고는 제시와 씨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제퍼슨과 레도르에게 다가갔다. 씨아는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고는 헐떡이고 있었다. “상태가 별로로군. 괜찮으신가?” 내 이죽거리는 말에 씨아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역시 못 알아보나? “넌 뭐야?” 못 알아보는군. 나는 저쪽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녀석에게 주의하며 씨아를 내려다보았다. “너무하는군, 레인져 아가씨. 아, 호박이라고 불러줄까? 노땅이라고 불렀던 적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쪽 오빠, 미토스는 잘 있나?” “서, 설마… 다크소드?”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제시를 바라보았다. 제시는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몸을 돌려 4명의 괴한과 합세한 아이템 황제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봐, 레도르.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녀석이 레도르에게 말을 걸었다. 뭐야? 아는 사이인가? 레도르는 이를 악물더니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그건 제가 묻고 싶군요. 당신, 왜 씨아님과 제시 씨를 습격한 겁니까.” “흥,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보다 이건 하극상이 아닌지 싶은데.” 레도르는 입술을 꽉 깨물며 검을 곧추세웠다. 하극상? 저 녀석, 헌터 연합의 녀석인가? 잠깐, 뛰어난 실력에 엄청난 아이템으로 도배라. 혹시……. “헌터 연합의 슈웰이란 녀석입니다. 저와 안면이 있는 녀석인데…….” 제퍼슨의 말이었다. 역시, 저 녀석이 슈웰이란 놈인가? 나는 사람 열받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레도르를 바라보는 슈웰을 노려보았다. 역시 제시를 인질로 쓰기 위해서인가? “흐흠. 그건 그렇고… 그쪽은 고명하신 제퍼슨님이 아니십니까? 이런 작은 숲에는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군요.” 이죽거리는 슈웰 녀석의 말에 제퍼슨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거… 어쩌면 위험할 지도. 헌터 연합의 실질적 지도자와 엠페러 연합의 최강자라. 그리 좋은 만남이 아닌데. “혀, 현진아…….” 씨아를 부축해 일어난 제시가 걱정스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약간 돌려 미소를 지어주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저 자식 아이템에 저 4명이라. 나와 제퍼슨에 레도르까지 있으니 승기는 단언코 우리 쪽이다. 하지만 제퍼슨이 나섰다간 두 연합간에 전면전이라도 벌어질지 모른다. 그리고 레도르는 어쨌든 헌터 연합의 사람이니 결국은 나 하나가 확실한가. 나는 이를 악물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네가 슈웰인가?” 내가 앞으로 나서자 슈웰 녀석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은 또 누구지? 상당한 실력이던데?” 나는 눈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다크소드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이쪽 제시 양과는 친분이 있어서 만나러 왔다고 하면 설명이 되겠지.” 슈웰 녀석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잠시 나를 살피던 녀석은 내 손에 들린 마나르트에 시선을 주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핫. 그랬군. 왠지 내가 좀 밀린다 싶었더니 그 검 때문이었군. 검에 의존하는 한심한 녀석에 대해서는 들은 적 있지. 만나서 반갑소, 전 헌터 리더 씨.” 나와 제퍼슨은 어이없다는 듯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검에 의존하는 한심한 녀석? 마나르트의 미친듯한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음?” 그때 뭔가 강한 기운을 감지한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제퍼슨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뭔가 재미있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별일이군요. 삼대 연합의 높은 사람들이 몽땅 모이다니. 그저 우리 철부지 아가씨를 찾아가려고 온 건데… 뜻밖입니다. 그건 그렇고 두 번째 만남이 생각보다 빨리 와버렸군요, 세한.” “레지엘…….” 나는 붉은 머리의 여자와 함께 걸어 나오는 레지엘을 바라보며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뒤에서 제시가 나를 꼭 붙잡았다. 역시 제시가 도망 나온 건가? “음? 뒷골목 쥐새끼들의 제왕이시군.” 슈웰 녀석의 말이었다. 저거 정말 상황 판단 못하는 녀석이군. 저 녀석의 아이템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둘다 온힘을 다해 싸운다면 레지엘에게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 그거야 나와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저런 태도라니. 레지엘은 슈웰을 잠시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그리고 순간, 또 느껴지는 강한 기운들에 슈웰을 제외한 강자들, 나와 제퍼슨, 레지엘은 사방 중 유일하게 빈, 내 왼쪽, 북쪽을 바라보았다. “슈웰, 네 녀석…….” “아아. 헌터 리더님이시군. 최강의 마법사님도 계시고. 여긴 무슨 일들이신지?” 슈웰 녀석의 깐죽거림에 잠시 살기를 띄던 미토스와 할딘이 나와 제퍼슨, 그리고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미토스와 할딘의 뒤로 세린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이네, 세한.” “오랜만이네요, 미토스, 할딘.” 씁쓸한 얼굴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우리는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슈웰 녀석과 레지엘, 제퍼슨, 미토스와 할딘. 삼대 연합의 주축들이 몽땅 모인 셈이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상황. 도대체 어쩌다 이 작은 숲에 이 강자들이 모조리 모인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초원 안의 작은 숲. 지금 현재 엄청난 긴장감과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 저야, 저희 아가씨를 모시러 왔다지만… 여러분은 이 숲에 무슨 일들이신지 궁금하군요." 이거 이상한 상황이군. 숫자로는 헌터 연합 쪽이 제일 많은데 내분이고, 평소 최강이라 불리던 제퍼슨은 아군이 없어 가장 약한 축에 끼게 되는 건가? 아, 그건 내가 제일 심할 수도 있겠군. "훗, 우리도 저 제시 아가씨를 모시러 왔지, 쥐새끼 씨. 귀하신 레이디께서 우리 연합을 방문 하신다는데 마중을 나오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이야." 슈웰 녀석의 말에 레지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왠지 싸늘한 느낌이 담긴 미소. 레지엘의 눈이 살기를 띄는 순간, 미토스가 입을 열었다. "슈웰, 나는 너 보고 제시 양을 마중 나오라 한 적이 없을 텐데. 이건 무슨 짓이지. 그리고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제시 양을 납치하려 한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데." 평소와는 달리 살기가 담겨 있는 미토스의 말이었다. 위험하군. 이러다 여기서 삼대 연합의 전면전이 시작될 가능성도 있겠는데. 어쨌든 이 일은 모두 제시 덕분에 일어난 일이라 이거로군. 제시도 상당히 영향력 있는데. -세한, 어떻게 할 건가. 여기 있는 놈들 중에서는 떨거지들을 빼면 자네가 쉽게 이길 상대는 하나도 없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미토스와 할딘이라면 슈웰 녀석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테니 걱정은 없지. 문제는 레지엘이지만, 적어도 같은 연합인 만큼 슈웰이나 미토스가 서로를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없을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마나르트, 기를 최대한 모으고 있게. 밖으로는 되는대로 드러내지 말고."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마나르트가 약하게 진동하고는 마기를 있는 대로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최대까지는 안 되더라도 어느 정도 마기를 끌어 모아 둔다면 힘을 최대로 올리는 것도 수월해 지겠지. "어쨌든… 우리는 아가씨를 모시고 가야겠습니다. 만약 막는 사람이 있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레지엘은 성검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고, 그런 레지엘의 행동에 미토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곧 뭔가 결단을 내린 듯 레지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시 양을 데리고 가라. 우리는 억지로 데려갈 의향은 없으니." "오빠!" 미토스의 말에 씨아가 내 뒤에서 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미토스는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씨아를 외면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거로군. 제시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선 차라리 이렇게 되는 것이……. "웃기지 마시지, 연합장 나으리. 미안하지만 그 아가씨는 그리 쉽게 보내드리지 못하겠군요. 연합을 방문하신 손님을 이렇게 보내는 것도 도리가 아니니, 대접을 좀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슈웰 녀석의 말에 미토스가 휙 고개를 돌려 슈웰을 마구 노려보았다. 할딘은 이미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지 슈웰 쪽으로 향해 한쪽 손을 살짝 뻗고 있었다. 망할 상황이군. 미토스는 레지엘과 충돌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고 해도, 슈웰이 방해를 한다면 레지엘은 슈웰을 공격할 테고, 그렇다면 두 연합 간은 전쟁이겠군. 그 쯤 되면 미토스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 거기다 이 정도에서만 그치면 좋겠다만……. "…지금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 아가씨가 위협을 받고 있는 듯하군요. 제대로 된 사정을 듣지 못한다면, 저는 이 아가씨를 보호할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제시의 앞을 가로막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제퍼슨이었다. 하긴, 제시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은 이 상황에서 그냥 가만히 있기가 그렇겠군. 거기다 이 중 최강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야. -세한, 기는 어느 정도 모아두었네. 마나르트의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중 약한 사람들은… 씨아는 부상을 입었으니 약간 위험하고, 레도르 정도면 죽지는 않겠고, 세린이 위험하긴 하지만 미토스와 할딘이 있으니 안심이고, 저 붉은 머리의 여자도 실력이 상당해 보이고, 저 슈웰 쪽의 떨거지 다섯은 상관없군. 그렇다면 제시인데……. 나는 내 옆에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레도르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레도르, 미토스를 잘 부탁한다." "예?" 레도르의 작은 반문을 무시한 나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제퍼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퍼슨, 제 일은 비밀입니다." 내 눈을 잠시 바라보던 제퍼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로군. 웬만해선 엠페러 길드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마나르트를 꽉 움켜쥐자 재미있다는 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작이군, 가보세! 좋아. 나는 마나르트를 역수로 쥐며 위로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내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아나왔다. 놀라 급히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은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마나르트를 아래로 내리 찍었다. "흐아아아아앗!" 푸콰콰콰콱! 그리고 내 몸 주위로 엄청난 폭발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검은 마기의 폭발에 땅이 뒤흔들리며 먼지를 동반한 마기의 폭풍이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크으윽!" "치잇!" 곳곳에서 기의 충돌과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빙긋 웃은 나는 다시 마나르트를 치켜들며 최대한 마나와 마기를 끌어모았다. 순식간에 마나르트에서 검은 불길이 타올랐다. 그럼! "모두, 다음에 보지! 흐아아앗!" 누구에게라 할 것 없는 인사를 던진 나는 그대로 마나르트를 네 그룹이 대치하던 사각형의 중앙으로 집어던졌다. 잘 돌아오라고, 마나르트.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제퍼슨이 레도르와 제시, 씨아를 보호하고 있었다. 나는 제퍼슨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재빨리 제시에게 다가갔다. "가자. 제시. 레도르, 이번 것은 강하니까 조심하라고." 쿠아아아앙!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우리를 덮쳐오는 검은 기 폭풍. 나는 제시를 안아드는 즉시 마차가 있던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꺄악!" 내 어깨 너머로 나무들을 먼지로 만들며 다가오는 검은 기의 폭풍을 바라본 제시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위, 위험해! 나라도 맞으면 끝장이다. 저건 내 힘 마나에 마나르트의 마기 반이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뛰다가 뒤통수에 잘못 맞으면 절명할 위험이! "빌어먹을!" 자기가 일으킨 폭발에 도망치는 어이없는 상황이라니, 수련이 필요하다 수련이! "우우웃!" 나는 나무 위로 뛰어올라서는 굵은 나뭇가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우리 밑으로 기 폭풍이 지나가며 숲을 박살내었다. 후우, 잘못하면 제시가 꽤나 다칠 뻔 했군. 탁. 살아남은 나무 위에 내려앉은 나는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쫓아오는 기척은 없다. 하긴, 나라도 바로 앞에서 이런 공격을 맞았으면 금방은 못 움직이지. 레지엘에게는 멋진 인사가 되었겠는데. 그런데 레도르는 괜찮으려나. 씨아는 상처는 좀 있어도 기본 실력이 있으니 제퍼슨이 약간만 도와준다면 살겠지만. 뭐, 레도르도 엄청나게 강해졌으니까 말이야. 낮에 레도르의 공격을 맞고 순식간에 재로 변한 그 노예상 녀석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혀, 현진아?" "아, 정말 오랜만이지 제시? 어쩌다 보니 구해주게 되었네." "으, 으응." "조금만 가면 니베와 마차가 있으니까, 그걸 타고 도망치자고. 어떻게든 보호해 줄 테니까." "아, 알았어." 제시의 대답에 나는 미소를 짓고는 다시 뛰어올랐다. 거의 다 빠져나왔군. "세한 오빠!" 숲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유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입구 쪽에 마차가 서 있었고 린을 제외한 모두가 마차에서 내려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베, 칼, 이시린, 레아, 유미, 시드 형, 짐까지. 다 있군. 마차에 말은 매여 있군. "미안하다, 나중에 보자. 사정은 레도르가 설명해 줄 거야. 니베, 칼, 타라!" 마차에 순식간에 올라탄 내가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하자 제르난 길드의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내 명령에 칼이 니베를 이끌고는 마차에 재빨리 올라탔다. 나는 고삐를 움켜쥐고는 말들을 달리게 했다. "주인님?" 린이 마부석으로 고개를 내밀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칼에게 고삐를 내밀었다. "최대한 빠르게 몰아." "알겠습니다." 칼이 고삐를 움켜쥐는 것을 확인한 나는 옆으로 몸을 빼며 제르난 길드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시드 형! 말에게 힘나게 하는 마법 좀! 빠르게 하는 마법도! 빨리!" "뭐? 으, 응!" 시드 형이 급히 달려와 말들에게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천천히긴 하지만 앞으로 움직이는 말들을 따라 달리며 마법을 걸다니, 실력이 좋아졌는데. "세한 오빠! 가, 갑자기 어디를 가는 거예요!" "형!" 나는 급히 뒤쫓아 달려오는 녀석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미안, 날 죽이려 드는 녀석들이 많아져서 빨리 도망쳐야 하거든." "한님을?" 순식간에 칼의 기도가 날카로워졌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지쳐 나자빠지는 시드 형에게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던져주었다. "이별 선물이에요, 형! 모두 다음에 보자! 미토스하고 레도르를 잘 부탁해!" 마차가 점점 빨라지며 제르난 길드의 사람들이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으음. 조금 미안한 감도 있군. 내가 뒤를 돌아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점점 뒤로 쳐지는 제르난 길드의 사람들 중에 한명이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점점 마차를 따라잡고 있는 그 사람은 푸른 머리를 뒤로 휘날리고 있었다. 이시린? "자, 잠깐만! 오빠!" 역시 속도 위주의 검사라 상당한 빠르기로 마차를 쫓아오던 이시린도 마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뒤로 쳐져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오는 이시린의 모습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곤란하다고, 이런 건. 쉬이이이익! 그때 이시린의 뒤쪽에서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로 약간 검은 기운을 뿌리고 있는 검. 마나르트였다. 상당히 빨리 왔는데. 금세 자신을 앞질러 마차로 날아오는 마나르트의 모습을 이시린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곧 마나르트가 내 손으로 빨려들어왔다. -귀환했네! "음." 나는 마나르트를 어깨 뒤의 검집에 꽂아 넣었다. 팔을 움직이자 망토가 바람에 강하게 펄럭였다. 그리고 힘이 다한 듯 이시린이 뛰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저 멀리서 다른 녀석들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걱정은 없겠군. 털썩. 다시 앞을 바라보며 마부석에 앉은 나는 내 옆에 앉은 칼과 니베, 제시를 바라보았다. 칼을 제외한 둘은 얼떨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미안, 니베. 아무래도 제시를 데려가는데 말동무도 필요할 것 같고, 칼도 같이 가니 함께 오 면 좋을 것 같아서. 괜찮겠어?" "아, 예. 물론이에요!" 니베는 웃음을 머금고 밝게 대답했고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제르난 길드의 녀석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순식간에 헤어지는군. 왠지 안타까운데. "저기……." "어?" 그때 짐칸 쪽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뒤를 돌아보는 다른 셋. 짐칸에서 짧은 보라색 머리에 등에는 각종 창들을 매고 있는 한 사내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 사람은……. "아, 당신은 그 나신이라는 창술가… 당신이 왜……." 내 얼빠진 질문에 나신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게… 계속 마차에 타서 여기 린 양을 돕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차가 출발해서 말입니다." 아차!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신이라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익숙하지가 않아서 아까 제르난 길드 사람 목록에서 빼고 있었다. 아까 마차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전부라고 순간 생각해 버렸어! "으읏, 이, 이런……." "음? 나신, 너도 있었나?" "아, 그렇게 되 버렸어." 나는 나신에게 익숙하게 말을 거는 칼과 역시 익숙하게 대답하는 나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친한 건가? 내 시선을 느낀 칼이 말들을 몰며 대답했다. "제 친구입니다. 실력도 좋고 좋은 녀석이니 함께 데려가는 것도……." "아, 다크소드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까? 멋지겠군요!" 다, 다크소드님?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나신을 보며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으음……." -그래도 전보다는 낫네. 4연속 텔레포트, 다 합해서 총 거리 47km라. 제길. 아무리 협곡을 지나게 된다고는 하지만 이 거금을 들여서 가기는 아까운데. 텔레포트는… 보통 사람들이 건너기 힘든 지형을 건너뛰게 해주는 용도로 밖에 쓰이지 못한다. 평균 텔레포트 거리가 10km가 될까 말까인데 아무 때나 거금을 들여서 텔레포트를 이용할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텔레포트 마법진이 연속으로, 쭈욱 이어지는 곳에서는 한번에 되는대로 계속 이동할 수도 있다. 그게 지금 같은 경우인데……. "그러니까 마법진이 4개가 이어져 있어서 한번에 약 45km 이동이 가능하다? 나드 협곡에 바로 들어설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운이 좋으신 경우시죠. 평소에는 이 4개의 마법진 중에 하나 정도는 정비에 들어가거든요. 마침 마법진 모두가 풀가동 중이니 마법진 한번 이용비용으로 45km를 가실 수 있으시다는 겁니다." 나는 싱글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를 한대 후려치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나는 것을 힘겹게 억눌렀다. 만약 이 마법사가 여자가 아니었고, 좀 어린, 싸가지 없게 생긴 녀석 이었다면 벌써 바닥에 누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용료가 모두 얼마라고?" "예, 동물 11마리. 엘프가 4분. 말이 5마리. 그리고 5분. 여기에 마차 한대. 총 2500골드가 되겠습니다. 몇 가지 할인 가격도 합친 거예요." 내 양 옆에 앉아있는 칼과 제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반인족들을 전부 동물로 변하게 해두지 않았다면 살인났겠군. "2500골드라. 후훗. 아가씨, 그 돈이면 검이 몇 자룬지 아는지 모르겠군. 아마 잘만 쓰면 고목 정도는 단칼에 반으로 쪼개버릴 검들을 적어도 50자루에 덤으로 이런 마차 한대까지 받을 수 있을 걸? 그런 돈을 겨우 텔레포트 한번 하자고 다 써버리라는 겁니까?" 내가 상당히 음침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며 질문하자 카운터를 맡고 있던 여자 마법사가 웃는 얼굴 그대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리고 마차도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텔레포트 협회 건물에 비해 좀 적은 수의 마법사들이 조금씩 긴장하며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하하. 여전하군요. 아직도 그렇게 돈을 아끼고 다니는 겁니까, 다크소드 씨?" 현재 가지고 있는 돈과 지출액, 그리고 잔액 등을 계산하고 있던 나는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급히 검에 손을 가져가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내가 마차를 등지고 서자 칼과 나신이 내 옆으로 뛰어내렸다. -얼레? 저 놈은……. "레지엘." 칼이 입구 쪽에서 붉은 머리의 여자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레지엘을 보며 신음을 흘리듯 낮게 중얼거렸다. 급히 쫓아왔는지 레지엘의 모습은 별로 깔끔하지는 않았다. 꽤나 피로해 보이는 얼굴에 군데군데 깨져나가고 잘려나간 갑옷과 옷가지. 거기다 레지엘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붉은 머리 여자의 상태는 더욱 나빠보였다. 레지엘이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당신을 너무 얕보고 있었습니다. 설마 이렇게 강해졌을 줄은… 자칫 잘못하면 저도 위험했고, 여기 벨은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으니, 정말 당황스럽더군요. 그 순간에 끌어올린 힘이 그 정도라니… 그것도 목표 없이 넓게 폭파시킨 것으로 말입니다. 정보 중에 당신이 동대륙에 있었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이었던 겁니까?" 레지엘의 얼굴이 약간 사나워졌고 사태가 좀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는지 나신이 등에 매고 있던 창들 중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철컥. 막대기 하나와 단창 하나를 연결한 나신이 창을 들어올렸다. 칼은 검을 뽑은 지 오래로군. 마차에서 제시와 니베가 불안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가장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텔레포트 협회의 마법사들이었지만. 다크소드가 어쩌고 레지엘이 어쩌고 하는 것이 우리 정체를 어떻게 예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침묵하며 가만히 노려보고 서 있자 레지엘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이었던 모양이군요. 그래서 모습이 보이지 않던 건가? 언제든 꺾어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던 모양입니다." "나야말로 잘못 생각했군. 설마 이렇게 빨리 쫓아올 줄은 몰랐다." 레지엘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 뵈도 어둠의 제왕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위치 정도는 추적하기 쉽지요. 그래도 몸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서 여기서 간신히 따라잡았지만. 뭐, 그래도 불리한 싸움을 하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군요. 미토스나 할딘이 동시에 공격해 오면 자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제퍼슨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그쪽 사람들 간에 충돌은 없었던 모양이군. 다행이다. "그래서, 도시 안에서 싸움이라도 벌이자는 건가?" "음? 설마. 그랬다간 아무리 저라도 좀 위험합니다. 그저, 불리한 싸움을 피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다니까요. 이건 다크소드, 당신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레지엘은 말을 마치고는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옆에 멍하니 서 있는 마법사 하나에게 그것을 휙 던졌다. 마법사가 주머니를 받아들자 레지엘은 나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리고 드러난 레지엘의 뒷모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갑옷이 완전히 박살이 나서 상처가 즐비했다. 천으로 어떻게 가리고는 있었지만 보통 상처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러고 보니 팔과 다리에 좀 심한 상처를 입은 저 벨이라는 여자가 멀쩡해 보일 지경이었다. 설마 레지엘이 보호해 주기라도 한 건가? 어쨌든 저 상태라면 쓰러트릴 기회기는 하지만… 어떤 도시에든 암흑 연합의 녀석들 꼭 있고, 레지엘은 아무 대비 없이 저 꼴로 날 만나러 올 녀석이 아니다. 물론 대비가 없다고 해도 습격할 생각은 없지만. 저 녀석도 그걸 알 테니 걱정 없이 온 거겠지. 무엇보다 대신 텔레포트 비용을 내 준 것 같으니까. 이번엔 보내준다. 음음. 그때 입구를 거의 빠져나가던 레지엘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아, 그리고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다크소드라는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가치 높은 엘프와 반인족들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물건이니까요. 아무리 저라도 아랫사람들을 전부 관리하기는 힘들죠. 거기다 암흑 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악당들도 많거든요. 후훗."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공공연히 다크소드가 어쩌고 떠든 건가? 지금의 나는 실력이 그리 높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 그렇다면… 마나르트를 노리는 녀석들이 다시 나타날 지도. 그리고 내 아이템들이 모두 꽤나 비싼 고가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니… 거기다 마차에 타고 있는 반인족들과 엘프들. 저 자식……. "꽤나 비싼 대가로군. 명심하지." 레지엘은 손을 흔들어 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것이 신상에 좋겠군. 나는 레지엘이 던져준 주머리를 멍하니 들고 있는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내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마법사는 몸을 흠칫 떨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실례하지." 마법사에게 주머니를 뺏어든 나는 안을 살폈다.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많기도 해라. 이 다이아몬드는 꽤 비싼 건데? 거의 3000골드는 나가겠고… 이놈에 이놈. 이놈까지. "대충 몇 만 골드까지도 가겠군. 모두 주지. 대신 영구적인 텔레포트 이용증이라도 주면 좋겠는데." "예? 그, 그건……." "그런 게 있다는 것, 다 알고 있으니 내놔. 이름 높은 사람들이 거금을 기부한다면 준다며. 다크소드, 이름 높지 않나? 여기 몇 만 골드치의 보석. 충분하지 않나?" 나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물었고 마법사는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그래서 말입니다, 그때 레도르가 이시린 양에게 선물이라고 목걸이를 주는데… 정작 이시린 양은 눈치도 못 채고는 자기는 장신구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바람에… 하하핫." 나는 창을 손질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나신을 보며 피식 웃었다. 괜찮은 길동무로군. "그나저나 이시린 양이 유일하게 걸고 다니던 목걸이가 누구 건지 했더니, 세한이 선물했던 거였군요. 햐아, 레도르도 불쌍합니다. 그 소중히 다루는 장갑도 세한이 줬다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이시린에게 선물로 준 것이 몇 개 있었지? 나는 쓰게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 조금 황량하게도 보이는 들판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들과 곳곳에 보이는 황토 빛 땅과 바위들. 그리고 좀 지역적으로 자라고 있는 풀들. 역시 협곡 근처라 그런 건가. 아무래도 협곡은 습격의 위험이 있어서 옆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얘기들은 누구에게 들은 거지?" "아, 지미가 얘기해 줬습니다. 맥주 한잔 사주면서 다크소드와의 모험 얘기나 해달라고 했더니 마구 쏟아지던데요." 나는 낮게 웃고는 짐칸 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개조해서 짐칸을 여객용으로 만들어 보기는 했는데… 그래도 좀 허전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안이 잘 들여다보이게 창을 하나 만들기는 잘 했군. 좀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 "어머? 그럼 그 나르손이라는 분의 집에서 계속 치료를 받고 있던 거예요?" "예, 갑자기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해서 나르손님하고 그 집의 아주머니들이 꽤 힘드셨죠." 엘프들과 다른 반인족들은 잠들어 있었고, 제시와 니베, 린은 셋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가한 여행 분위기로군. 괜찮은데. "훗." 나는 손에 들린 손바닥 반 정도의 크기를 가진 카드 같은 것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텔레포트는 공짜다. 레지엘 녀석, 어쨌든 도움이 되기는 했군.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막대기와 단창을 끼웠다 뺐다 하며 뭔가를 실험하는 듯하던 나신이 주위를 둘러보며 질문했다. "우선은 카루나 성으로. 내일쯤이면 도착하겠지. 그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간다." 단창을 어깨에 꽂은 나신이 코를 긁적이며 뭔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카루나 성이라면 최북단 아닌가요? 몬스터들이 꽤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라 지은 성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북쪽에는 칠흑의 숲밖에… 아, 설마 그곳을 탐험하는 겁니까? 멋지군요!" 나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친구도 여행병이 중증인 모양이로군. 제퍼슨과 비슷한 증상인가. "그런데 아까부터 뭘 하고 있는 거지?" "예? 아, 창을 정비하고 있는 겁니다. 보통은 이 일체형 창보다는 이 봉과 단창을 연결해서 쓰는 것을 주로 하는데, 이건 자주 정비해야 하거든요." 나는 나신의 단창들과 장창 하나, 그리고 봉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저 봉은 천악이 가지고 다니던 것과 비슷하군. 아무래도 저건 연결용인 모양이다. "창을 쓰는 사람, 그렇게 많이 보지는 못했는데." "아, 솔직히 쓰는 사람은 적은 편이죠. 하지만 전 무기 중에서는 창이 가장 낫다고 생각합니다. 거리고 있고, 근접전도 단창으로 바꾸면 되거든요. 익히기도 쉬운 편이고요. 뭐, 검이 만병지왕이니 해도 솔직히 검이 최약에 속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지도. 확실히 창 같은 무기가 좋을 수도 있겠군." 나신은 빙긋 웃어보이고는 이번에는 장창을 들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모두 긴 창대에 검날을 달아놓은 듯한 창날을 가진 것들이었다. 확실히 이걸 보면 유리할 것 같기도 한데. 특히 마나를 다루기 전이라면 창이 더욱 유리할지도. 마나를 다루더라도 저 긴 공격 범위를 막기는 힘들테고. 흐음. "한님. 좋은 야영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칼의 말에 나는 칼이 바라보고 있는 왼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커다란 바위, 거의 이층 건물의 크기에 육박하는 바위였는데 나무들이 그 바위 사이에서 자라고 있었다. 바람도 피할 수 있겠군. 뭐, 여름이라 얼어 죽을 리는 없지만. 몬스터를 막기에도 좋은 지형인데. 잠시 주위를 살피던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일몰도 시작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여름이라 낮의 길이가 길다고 해도 해도 지지 않았는데 멈추기는 좀 그렇군. 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쉬자." "예?" 내 말에 칼이 의아한 듯 반문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엘프들과 반인족들이 다 회복되지 않았어. 좀 쉬는 것도 좋겠지." "알겠습니다." "나신, 주위에 적이나 몬스터가 있는지 좀 돌아보고 와주겠어?" "예이!" 나신이 봉과 단창 하나를 들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빠른 속도로 바위 위로 뛰어오르는 나신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짐칸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입을 열었다. "휴식. 오늘은 여기서 쉴 테니, 내릴 준비들 해." "알았어요!" 니베의 대답을 들은 나는 다시 바로 안고는 눈을 감았다. 곧 마차가 정지했고 나는 눈을 뜨며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아직은 좀 밝은데. -세한, 좀 들어보겠나. 갑자기 들려온 마나르트의 목소리에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계속 조용하기에 잠이라도 자는 줄 알았더니, 깨어있었나? "뭔가? 혹시 주위에 적이라도? 적어도 식스센스에는 걸리지 않았네만." -그런 문제가 아니네. 문제? 나는 마나르트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주위에 위험은 없다. 나신에게 부탁한 것도 혹시 모를 위험 때문이었는데. 무슨 일이지? "그럼?" -자네, 마족들의 생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음? 거의 모르네만. 설마 자신에 대한 고찰, 혹은 마족이라는 종족에 대하여, 같은 어이없는 주제를 가지고 나에게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뒤로 돌아가 짐칸을 열어주었다. 칼이 말들을 풀어서 밧줄을 나무에 묶고 있었다. 풀도 있고 좋은 장소로군. -자네 말이네, 혹시 인간들의 가정생활이 지극히 부조리 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나? "뭐?" 나는 왠지 불길한 느낌에 몸을 딱 멈췄다. 동물로 변해있는 반인족들을 품에 안아 마차에서 내려주던 린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인간 남자 하나가 여자 하나와만 결혼해야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네. 뜻이 맞는다면 남자 하나에 여자 여럿이든, 여자 하나에 남자 여럿이든 상관없다는 것이지! 그에 비해 우리 마족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한 집에서 남자 한명이 수명의 여자와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네! 마차에서 비틀거리며 내리던 엘프들이 몸을 움찔 떨며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이네만, 자네 마계로 갈 생각은 없나? 자네 같은 사람에게는 천국이라네. 마계는 그 집안에 강한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가정의 모두를 지킬 수 있지! 명예를 아는 우리 마족들은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다면 그 집안의 가장과 대결을 펼쳐서 데려가거든. 때문에 청혼하다가 죽는 경우도 종종 있네만, 이건 넘어가지. 어쨌든 자네에게 마계는 천국일 걸세. 나는 묵묵히 망토 아래로 있는 소드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어떤가! 저 제시 양과 이시린 양, 나프네 양과 설화 양, 그 페페 양과도 관계를 수복하고 옛날의 그 세나 양도 찾아오고, 저 고양이와 저 니베 양에, 다크 엘프 베르시아 양. 그리고 이 마차에 실려 있는 수많은 여성들까지 낚아서 나와 함께 마계로 가는 것은!? 아무래도 언젠가 자네와 헤어지기가 아쉬워 함께 마계로 가는 방법을 생각해 보다가 이런 멋진 조건을 떠올렸다네! 단 한명도 놓치지 않고… 음? "나중에 보세." -자, 잠깐……! 나는 그대로 마나르트를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마나르트는 조금씩 시작되는 일몰의 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마나르트의 모습에 모두가 멍한 얼굴로 마나르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자, 야영 준비나 해 볼까?" "풋." 제시와 니베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도 불안한 표정을 지우고 즐거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조용한 저녁이 되겠군." 나는 이제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마나르트를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우움, 주인 씨도 너무하는군, 그래. 내 딴에는 고민해서 생각해낸 방법이었는데 말이야. 마나르트는 어디론가 끝없이 날아가고 있는 자신의 몸(?)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으며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혹시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때 레이디 설화의 알몸을 보고도 별 흥분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는데… 혹시 의외의 변질자일 수도. 뭔가 중얼거리는 내용과 매치되지 않는 진지함이 깃든 목소리의 마나르트였다. 만약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세한 외의 사람에게 들리고, 마나르트가 검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이 주위에 말을 들을 사람이 있었다면 마나르트는 마족의 명예를 실추 시키는 것에 공훈 1위를 차지하게 될 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레이디 바시린이 보고 싶군. 아아, 그 냉소적이고 조소어린, 차가운 미소가 그립다네. 역시 마족들의 성적 취향을 의심 받게 하기에 딱 좋은 중얼거림이었다. -바시린 양의 아름다움이야 다른 멍청한 녀석들에게는 이해 받지 못하는 것이니 그녀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고 있을 가능성은 없다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것은 변함없군. 아아, 그립구나, 마계여. 고향을 떠올리고 있다고는 믿기 힘든 중얼거림이었다. 벌써 몇 시간째 엄청난 속도로 비행하고 있던 마나르트는 상념과 함께 움직임을 멈췄다. 세한이 마나르트의 마기를 이용해 힘껏 던졌기에 마나르트의 비행 속도를 타의 추정을 불허했고 바닥나지 않는 마나르트의 마기는 그 엄청난 속도를 계속 유지했다. 덕분에 마나르트는 현재 어딘지도 모르는 해안가에 멈춰 있었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마나르트는 높은 절벽과 절벽 아랫부분을 두드리는 거친 파도를 보며 의문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대륙의 끝가지 날아왔다고 볼 수 있었다. -주인 씨도 어지간히 강하게 던졌군.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주인 씨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 남쪽인가? 그러면 이곳은 대충 대륙의 북동쪽 끝자락이겠군. 정신을 너무 놓고 있었나? 으음? 북동쪽 끝자락이라. 마나르트는 '대륙의 북동쪽 끝'이라는 것에서 뭔가를 떠올렸다. -아, 아마 페이나의 미궁 근처인 모양이군. 미궁에서 좀 떨어진 곳인가? 상당히 멀리도 왔군, 그래. 흐음, 그런데 그 멍청한 천족 녀석의 힘으로 보기에는 좀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마나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쪽으로 검 끝을 향했다. 아마도 저쪽에 페이나의 미궁이 있고, 페이나의 힘이 잠들어 있다는 절벽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대충 마족 시절의 자신과 맞먹는 힘이랄까. -아니지. 페이나 어쩌고 하는 녀석의 힘은 봉인되어 있을 텐데. 이렇게 힘을 세어 나올 이유가 있나? 음, 그러고 보니 이 기운, 한 놈의 것은 아닌 것도 같은데. 그 순간 그 기운이 급격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나르트가 급히 허공으로 솟아오르려 하는 동시에 사방에서 어떤 물체들이 튀어나왔다. 키아아악! -뭐, 뭐냐! 마나르트는 사방에서 덮쳐오는 이상한 생물체들을 보며 급히 마기를 뿜으며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마기를 튕겨내며 괴 생명체들이 마나르트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왔다. -뭐지? 키메라? 합성 생물인가. 하지만 이정도의 힘을 가진 합성 생물, 키메라가 있을 리가! 마나르트는 여러 괴 생물체들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기운은 서로 뭉쳐서 느껴진다는 것에서 괴 생물체들이 키메라라고 추측했다. 그 외에는 설명 방법이 없다. 아마도 한 세트로 만들어진 합성생물, 키메라이거나 이 녀석들을 통솔하는 녀석이 있겠지. 마나르트는 이 녀석들의 힘이 검 상태인 자신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전속력으로 남쪽으로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마나르트가 허공을 나는 순간, 로브를 뒤집어 쓴 듯한 어떤 '존재'가 앞을 가로막았다. 후드 안으로 두 노란 눈이 빛나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나는 아신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항상 있는 일이었고 새벽쯤이면 투덜거리면서 돌아올 테니까." "신기한 일이네요." "뭐, 그렇지."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낮게 자란 풀 위에 몸을 눕혔다. 마나르트가 없으니 세상이 다 조용하게 보이는군. 좀 허전하긴 하지만 그래도 편한 건 편한 거다. 꼬물꼬물. 내 품속에 안겨 있던 린이 조금 꼬물거렸다. 자고 있었는데 내가 갑자기 움직여서 몸을 뒤척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주위에 반인족들이 모두 몰려들어 잠을 자고 있었다. 모두 작은 동물 모습이라 별 상관은 없었고, 오히려 여자들이라 그런지 모두 귀여운 모습이라 미관상 보기도 좋았다. 아무래도 현재 자신들의 우두머리 급인 린이 내 품에서 자고 있자 자연적으로 이 근처로 모여든 모양이었다. 고양이와 강아지, 호랑이, 양도 있는 것이 동물원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불침번은 저와 아신이 서겠습니다. 주무시죠." 현재 우리가 쉬고 있는 곳은 작은 바위산에서 안으로 움푹 들어간, 간이 절벽(?) 같은 곳이었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바닥에 풀도 자라고 있어서 쉬기도 좋았다. 나와 반인족들은 왼쪽 절벽 쪽에서 자고 있었고 아주 조금 떨어진 곳, 결국 바로 옆에 마차가 반대쪽 절벽에 붙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마차 짐칸에서는 5명의 여성이 잠들어 있었다. 마차의 마부석에 모포를 덥고 검을 품에 안고 있는 칼을 고개를 살짝 들어 살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첫 번째는 칼에게 맡기지. 아신이 두 번째로 서다가 좀 졸린다 싶으면 날 깨워. 난 좀더 별이나 보다가 자지." 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신은 그냥 아무 곳에나 드러눕더니 나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엘프들 모두 세한을 꽤나 잘 대하던데요? 반인족들도 모두 세한 옆에서 자고 있고. 이시린도 그렇고 꽤나 인기가 많으신 모양입니다." 아신의 말에 나는 입을 기울였다가 말했다. "난 엘프들과는 인연이 깊어서. 뭐, 어떻게 보면 칼도 그렇긴 하지만 난 더욱 특별하거든." "오옷? 엘프들과 말입니까?" "음,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알고 있어." "흐음, 알겠습니다." 나신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마나르트가 좀 늦는 것도 같은데. 또 날아가면서 쓸데없는 생각하느라 멈추지도 않은 건 아닌지 모르겠군. 뭐, 마나르트라면 걱정 없겠지. 몬스터고 뭐고 마나르트를 집기만 해도 그대로 절명할 테니. 처음엔 주인인 나도 죽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생각을 접고 눈을 감았다. 제시가 근처에 마법도 걸어두었으니 그리 쉽게 접근 당하지는……. 검은 실루엣,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날카롭게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 나는 그 강렬한 시선에 몸울 움찔했다. "마나르트!" "우와악!"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고 덕분에 잠들어 있던 아신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잠들었었나? 순식간이었던 것 같은데. 냐앙? 린이 낮게 울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바, 방금 그 모습… 전에 본적이 있는 마나르트의……. "한님? 무슨……." "마나르트는? 아직… 끊어졌어?" 마나르트의 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마나르트가 느껴지지 않는 것뿐이 아니라 나와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던 끈 같은 것이 끊어지고 없었다. 서로의 기를 느낄 수 있던 감각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마치 무엇인가가 그 줄을 끊어 버린 것 같은……. "더럽게 불안하군. 이 자식은 어디서……." 당황한 김이 입 밖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기운에 입을 다물고는 바위 틈새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저 입구 쪽이 동남쪽이었던가. "아신! 가볍게 창 하나만 들고 입구 쪽으로 달려가봐!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간다. 상황만 보고 와라. 들킬 시엔 너 혼자 죽어!" 내 외침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아신은 황급히 봉과 단창 하나씩을 집어 들고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상황을 알아챘는지 칼은 급히 짐들을 마차 안으로 쑤셔 박고 있었다. "저어……." 엘프 중에 리더로 보이는 엘프가 내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름이 레이나였나? "아, 부탁 좀 하겠습니다. 여기 반인족들 다 통솔해서 마차에 타십시오. 긴급 상황입니다." "아, 그럼 당신도……." 음? 그제서야 엘프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나한테 말하려고 하던 듯한 표정이었는데 한결 편하게 바뀌어 있었다. 감이 뛰어난 엘프인가? 하긴, 꽤 가까운 곳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렇게 탁 트인 곳이니 상급 엘프 정도면 알 수도 있겠군. 아니면 정령일 수도 있고. 제길, 잠깐 잠들었던 건가? 아니면……. 밖으로 꺼내놨던 짐들을 마차에 전부 실고 마차 짐칸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전부 타 있던 여자들이 나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시. 마차 벽 전부에 방어 마법을 걸어 놔. 엘프 분들도 가능하다면… 마법에 정령으로도 방어해 주십시오." 말을 끝낸 나는 마차 위로 올라가 마부석으로 도약했다. 털썩. "출발해, 칼." "아신은……."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서 곧 달릴 수 있도록 이라도." 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들을 몰았다. 그래도 몇 시간 쉬어서 그런지 말들도 힘이 좀 생긴 모양이었다. 마차가 바위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사이, 뒤쪽에서 아신이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앗! 아신이 멋지게 도약해 마차 지붕에 달라붙는 순간, 칼이 마차를 달리게 했다. "설명해!" "헥, 헥. 그게 좀 이상한데… 쫓아온 듯한 암살자나 도적놈들은 현재 몰살 혹은, 몰살 위기입니다." "어째서?" 역시 전투였나? 그래서 느껴진 것을 수도 있겠군. "그게 웬 몬스터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그놈들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늑대 녀석들이 수십에 무엇보다, 처음 보는 괴물들이……." "몬스터……." "몬스터들은 계속 북상 중입니다. 그 늑대들이야 어떻게 하겠지만 이상한 놈들은……." "강한가?" "그게 또 이상한데… 어떨 때는 엄청 강하다가 잠시 약해졌다가 다시 엄청 강해졌다 그러고 있습니다. 하지만 숨어있던 놈들은 다 죽어나가던데요?" "숨어있던 놈들의 실력과 수는?" "괜찮은 녀석들 같던데요. 대충 레벨들이 300은 기본으로 넘을 것 같은 녀석들입니다. 제가 4명 이상은 이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수는 약 100명."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 곳에 온지 오래된 건 아니지만 이런 건 또 처음이군.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나는 동대륙에 가 있었다." "보통 몬스터들이 무리 지어서 플레이어들을 습격하는 일이야 좀 있었지만… 저런 괴물 같은 괴물들은 처음 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출몰 지역도 아닌데……." "젠장. 칼, 최대 속도로 달려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카루나 성으로 진입한다!" "예." 마차의 속도는 점점 늘어갔고 나는 굳은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갑자기 마나르트와의 연결이 끊기는 동시에 이상한 괴물들이 출연해서 우리를 쫓던 녀석들을 도륙한다? 어떻게 연결되는 거야? "아, 세한의 검은……?" 아신의 질문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알아서 오겠지. 지금은 도망이 우선이다." 아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지금은 살고 봐야지. 마나르트 정도면 멍청하게 죽을 일도 없어. 마신의 만든 검이라 박살날 일도 없고. "젠장. 망할 자식." 도대체 왜 이럴 때만 없는 거냐. 나는 마나르트의 기가 마지막으로 느껴지던 북동쪽 방향을 잠시 응시했다. "후훗. 마나르트 판디안. 마족 서열 107위, 마계의 유서 깊은 귀족가의 89대 가주. 하지만 약 100년 전, 판디안 가의 모든 이들은 천족과의 전쟁에 선봉으로 나섰다 적의 협정 위반으로 몰살. 가주 마나르트 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 본신의 실력으로는 마계 최강을 다툴, 마왕조차 예의를 차릴 정도지만 가문의 몰락 후, 결투에서 스스로 물러나 107위까지 떨어짐." -쳇. 마나르트는 이를 갈며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마나르트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검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었다. 아무리 움직여도 벗겨지지 않고, 마기도 튕겨내는 이상한 금속. 마나르트는 한번 더 검신을 떨어보다 움직임을 멈췄다. "현 서열 179위의 바시린 하르란과 깊은 관계에 있음. 바시린이 마계의 군주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보고 격분, 마왕궁에서 난동을 피워 마왕을 비롯한 상위 서열의 마족 다수에게 중상을 입히고 마신에게 소환, 벌로써 마신의 검에 봉인 당함. 힘조차 절반으로 줄여져서. 자신의 주인의 수명이 다하지 않으면 마계로 돌아가지 못함." -……. 마나르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로브르 뒤집어 쓴 이상한 녀석을 유심히 살폈다. 어떻게 마계의 사건을 저리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뒤러 젖혀진 후드 덕분에 그대로 들어난 녀석의 얼굴은 절대 마족의 모습은 아니었다. 커다란 비늘 몇 개를 둥그렇게 말아놓고 구멍을 뚫어놓은 듯한, 눈과 입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상한 얼굴. 그리고 이상하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 "불쌍한 신세로군, 위대하신 마족 나리, 마나르트 판디안." -닥쳐. "인간들은 이런 경우에 이렇게 말하던데? 닭을 가져와. 어이없는 말장난이지만." 마나르트는 당혹했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다니, 현재까지 마나르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주인인 세한과 지상 최강의 힘을 자랑하는 레드 드래곤, 세르페이린 뿐이었다. 그런데 이 이상하게 생긴 녀석이 자신의 말을 듣다니, 마나르트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놀라운가. 뭐, 용건은 이게 아니야. 우연이긴 했지만 마계 최강의 전사를 붙잡다니, 좋은 기회여서 말이야." -무슨 말이냐. "우리에게 협력해라." 마나르트는 침묵하며 눈앞의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그 행동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검이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무슨 헛소리냐? 네놈은 날 절대로 쓰지 못해. 사실이었다. 마나르트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세한,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 마신에 의해. "물론 널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지. 널 풀어주겠다는 거다."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 안심하면서도 의아해 하던 마나르트는 자신을 풀어주겠다는 말에 놀라움을 넘어서 황당함을 느꼈다. 마신의 봉인에 걸린 자신을 풀어주겠다? 어림없는 이야기다. -미친 소리 하고 있군. 마신께서 가하신 봉인을 네놈이 풀겠다고? "물론 나는 아니지만… 지상에도 봉인을 풀 수 있는 분은 있지." -헛소리 마라. 마신의 힘은 절대적인 것. 지상의 존재는 절대 풀 수 없다. 마나르트의 목소리에서는 노기마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록 마나르트가 마신에 의해 검에 봉인당하기는 했어도 마신의 모든 마족의 어버이며 힘의 제공자다. 그 어떤 관계보다 신뢰적이고 단단한 결속 관계. 그런 마신을 얕잡아보는 말이었다. "무슨 말을. 실제로 존재하는지 어떤지도 잘 모를 녀석을 말이야. 마신은 저 세상의 녀석들이 마음대로 상상해 만들어낸 존재일 걸? 네놈 마족들을 통솔하기 위해서. 네 녀석을 검에 봉인한 것도 운영자 녀석이 아닌가?" -운영자? 아아, 세한에게는 그렇게 말 했었던가. 거짓이었다. 난 마계에 있는 마신의 신전에서 직접 계시를 받았지. 운영자라고 하는 이계의 인간들의 관리인 따위와는 관계없어. "글쎄, 그럴까. 네 녀석을 고난이도로 가지고 놀았을 수도 있겠지." -더 이상의 헛소리는 용납하지 못한다. "훗, 뭐, 하긴… 그분도 네 녀석의 존재에 대해서는 난감을 표하더군. 실제로 이 세상의 관리자, 이계의 인간들이 널 만들었는지 아닌지… 그분의 정보로는 그 운영자라는 녀석들도 네 녀석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있는 모양이더군." -말했다. 난 마신의 종이며, 그분의 힘으로 여기에 있다고. 네놈도 알았다고 하니 빠르겠군. 닥쳐. 마나르트의 사나운 말에 상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몸을 감추고 있던 괴 생물체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젠 협박이냐? 네놈의 부탁은 기각이다. 네 녀석은 날 풀어주지 못해. 마나르트의 말에 상대는 미소를 지었다. 공허한 어둠만이 이는 구멍이 쫙 늘어졌다. "말했다. 풀어줄 수 있다고. 마신이 했던 이계의 인간이 했던. 어쨌든 멀리 있는 마신의 힘보다는 가까이 있는 힘이 더 영향력이 클 수도 있지 않겠나." -미안하지만 절대 믿지 못하겠다. "그래? 한 가지 물어볼까? 내가 어떻게 마계의 정보를 알고 있을까?" 마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마나르트 자신도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상대는 입을 좀 벌리더니 말을 계속 했다. "한 가지 알려 줄까? 그 바시린이라는 여자, 현재 상당한 고역을 치루고 있지. 네 녀석 덕분에 마왕에게서는 벗어나긴 했지만… 가문이 거의 박살나고 있거든. 어떻게 하르란 가가 버티고는 있지만 무너지는 순간, 바시린이라는 년은 여러 마족들의 노리개가 되겠지?" -닥쳐! 검은 쇠사슬에 묶여 있던 마검, 마나르트에서 검은 기운이 확 뿜어져 나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은 금속 때문. 마나르트는 강하게 분노하며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괴물 녀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믿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한 가지 더 알려주자면 자네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판디안 가의 저택은 불태워진지오래야. 자네가 소중히 보관하던 선조들의 초상화와 유품들도, 자네의 방에 고이 모시고 있던 여동생의 부활석도, 모조리 박살났지." -닥쳐…….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녀석의 말대로 마나르트는 자신의 가문을 만들어낸 선조들의 유품과 초상화, 혹시 부활할지 모르는 여동생의 부활석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이것은 바시린도,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이 알고 있다. "조금은 믿는 눈치로군." -크으……. "내가 따르는 분의 힘은 절대적이야.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관장하시지. 자, 이제 물어볼까. 복수 하고 싶지 않나." -뭐? 마나르트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상대는 입을 쫙 벌리며 말했다. "복수하고 싶지 않냐고 했다. 널 풀어주고, 힘을 주겠다. 마계를 장악하게 도와주겠다. 네놈이 그렇게 사랑하는 바시린이라는 마족을 구하도록 해주겠다. 네 녀석의 가문의 마지막 물건들을 부순 녀석들에게 복수하게 해주겠다." -……. 마나르트는 솔직히 고민된다는 생각에 흠칫했다. 마나르트의 기도가 흔들린 것을 간파한 상대는 입을 더욱 크게 벌리며 목소리를 냈다. "모든 것을 장악하게 해주지. 그분의 힘은 절대적이다. 그분만 따른다면, 이 세상을 주무르게 해주겠다. 내가 받은 힘도 그분의 힘, 절대적인 힘이다!" -……! 마나르트는 순간적으로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악마의 숲에서 세한과 함께 데스 킹인지 하는 건방진 녀석과 결투를 벌일 때, 그 데스 킹 녀석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분. 절대적인 힘. 세한은 마계의 녀석이니 마신이 아닐까 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마신은 아니다. -천계… 천신의 개였나. 마나르트의 말에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던 녀석이 눈을 크게 떴다. 노란 눈동자가 약간 확대되더니 입이 쫙 벌어졌다. "크하하핫. 웃기는군. 마신도 거부하는 마당에 천신? 그런 녀석들과는 인연 없다. 그리고 그 깔끔한 척 지랄 떠는 천족 녀석들이 이런 괴기스런 얼굴의 수하를 만들 것 같은가?" -…어쩌면. 페이나인지 하는 미치광이를 낸 종족이다. 어쩌면 중얼중얼 하기는 했어도 마나르트는 상당히 회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깔끔 떠는 녀석들이 그럴 리가 없지. 뭐든지 아름다움이 최고라 생각하는 얼간이들. "큭, 네가 그렇게 증오하는 천계는 아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군. 어쩌겠나! 우리에게 협력해라! 널 풀어주겠다! 복수하도록 해주겠다! 그리고 기분 나쁘게 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플레이어 녀석들도 죽이게 해주지! 네 녀석의 힘의 반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네 녀석을 다루는, 그 이계의 인간도 죽이게 해주겠다!" -뭐? 세한 녀석을? 호오, 그거 재밌는데?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평온해 졌다. 왠지 재밌다는 듯한 기색도 섞여 있는 목소리에 상대는 입을 쫙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마계의 최강자가 그런 녀석의 명령을 받으며 힘을 제공하며 만족을 얻고 있다는 것은 아니겠지! 너를 우롱한 녀석을 죽여주겠다는 거다! 마신조차 거꾸러뜨리게 해주지!" -……. 마나르트는 잠시 침묵했다. 아마도 자신만만한 표정이라 짐작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로브의 괴물을 잠시 주시하던 마나르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강하지. 내가 돌아갈 때까지 버텨줄 것이다. "뭐?" -킥.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 마신과의 계약 조건이 하나 더 있거든. 그 계약을 완수해 봉인을 푼다. 내 주인 녀석과 함께 마계로 당당하게 귀환한다. 그리고 주인 녀석의 도움을 받아서 하렘을 만든다. 알다시피 하렘을 건국한 가문은 높게 쳐주지. 세한 녀석이야 내 친구니 내 가문에 들어올 수도 있고. 그리고 바시린을 아내로 맞는다. 그리고 검의 기억이라는 자서전을 출판해서 돈도 벌어들인다. 서열 1위의 자리도 다시 탈환해야겠지. 뭐, 이런 멋진 계획이 있다고. 그리고 이 계획에는 세한 녀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그러니 그 녀석을 죽이겠다는데 기각이다. 그리고 내 자서전은 아직 완전히 집필되지 않았거든. 집필과 동시에 세한 녀석을 꼬드기려니 힘들어서 말이야. "웃기는 녀석이군. 겨우 인간 따위한테, 그것도 이 곳의 인간도 아닌 녀석에게 이용당하는 주제에……." -말했다. 친구라고. 마나르트의 검 전체에서 어두운 기운이 마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집어 삼킬 것만 같은 칠흑의 어두움. 하지만 검은 쇠사슬은 그 기운을 계속 파해하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뭐, 어쩔 수 없지. 마계의 최강의 전사라 해도 그분에게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힘이니까. 알아둬라. 마신의 봉인을 풀 수 있다는 것은, 마신이 만든 검을 부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죽여!" 로브의 괴물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사방에서 괴 생물체들이 마구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훑어보던 마나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핫! 재밌군! 그분인지 화분인지 하는 녀석의 부하라 이거지!? 이 위대하신 최상위 마족, 마나르트님을 우습게 본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내 수명이 반으로 준다고 해도! 아니, 내 수명이 다한다 해도! 네 녀석들은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다! 파차차창! 순간 엄청난 마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마나르트의 검신과 손잡이 등 온 곳을 모두 휘감고 있던 검은 쇠사슬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리고 공간이 일렁이듯 마검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뭐, 뭐냐! 부, 분명히 네놈은 봉인……." -미안하지만, 마족의 의지와 마신의 의지가 결합되면 봉인이고 뭐고 없어. 그렇게 깔보던 마(魔)의 힘을 보여주겠다. 그리고 일렁임이 사라지며 그곳에 약간 희미하지만 분명히 형체는 갖추고 있는, 긴 흑발의 미남자가 모습을 나타났다. 싸늘한 조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사내. 마나르트 판디안.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주위에 울렸다. "마신의 존재가 이계의 인간이 꾸며낸 것이더라도, 우리의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도. 우리를 창조한 분을 욕되게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지워주마." '그리고 레이디 바시린과 우리 가문을 함부로 입에 담은 것. 그 걸로도 넌 이미 죽어야 돼. 흥, 그리고 세한 녀석은 덤이다. 망할 자식. 그 주인 씨가 던지지만 않았어도 이 고생은 안했다. 훗, 다음에 만나면 좀 더 시끄럽게 떠들어 주지. 뭐, 만난다면 말이야.' 속으로 중얼거리는 마나르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마족의 검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음?" 나는 왠지 이상한 느낌에 저 먼 곳을 살폈다. 뭐였지? 이상한 느낌이 든 것 같았는데? "한님?" 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 커다란 성이 보였다. 카루나 성이로군. "몬스터들은?"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차 지붕의 맨 끝에서 아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군.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충 14시 정도인가. 오후 2시 정도. "애매한데." 정말 애매한 시간이다. 성에 들어가서 점심만 먹고 떠나기에는 그렇고, 하루 묵어가기에는……. "엇?"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하고 있던 나는 왠지 이상한 분위기가 감도는 카루나 성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칼." "예?" "칠흑의 숲까지 갈 수 있지?" "아, 물론입니다. 한잠 주무시……." 나는 손을 휘저어 주고는 마차에서 뛰어내릴 자세를 취했다. 칼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의 뒤쪽과 카루나 성의 모습을 살폈다. "칼. 마차를 끌고 칠흑의 숲으로. 아신! 원하던 모험이 될 것 같군. 따라와! 린, 반인족들과 엘프들을 보호해! 제시, 마차에 마법을 지속적으로 걸고. 제시만 마부석으로 나와. 그리고……." 내 외침에 짐칸에 있던 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품속에서 둥그런 구슬 같은 것을 꺼내들고 린에게 집어던졌다. 린이 구슬을 안전하게 받아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위험하면 사용해라. 내 도움이 없으면 죽을 위기일 때만!" 땅에 내려선 나는 마차 옆에 붙어 달리며 아신에게 손짓을 했다. "내려와. 칼, 잘 부탁한다. 린과 함께면 버틸 수 있을 거다. 숲에 좀 깊숙이 들어가면 확성 마법으로 고함이라도 지르던지 해서 다크 엘프들을 불러내. 린, 그 구슬 엄청나게 비싼 거니까 정말 위험할 때만 사용해라. 너라면 믿을 수 있겠지?" 내 말에 린은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아신에게 손짓했다. 짐들을 챙기던 아신이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나는 속도를 조금 줄이며 카루나 성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렸고 칼은 마차를 정북 방향으로 몰아갔다. 이제부터는 평원이니 마차를 탄다면 위험 없이 빠져나갈 수 있겠지. 제발 저 필살의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기를. 나는 린에게 준 구슬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헥, 왜 따로 떨어져서?" 힘겹게 내 옆으로 따라붙은 아신이 물어왔다. "왠지 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뭔가 일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많이 몰려가서는 몇 명 죽을 거 같아서." 내 말에 아신이 입을 약간 벌렸다. "분위기? 잘 모르겠는데… 아, 어쨌든 제 실력을 인정하신 다는 거군요!" "아니, 심부름 담당이다." 아신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피식 웃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칼이 몰고 있는 마차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조금 달려 도착한 카루나 성의 성문. 그곳에서 나와 아신은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성문과 성벽이 왜 이 꼴이?" "습격당했소." 아신이 성문 경비병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성벽의 모습을 살폈다. 성문은 가운데가 박살나 있었고 성벽은 군데군데 균열이 가 있었고 무너진 곳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경비병에게 계속 뭔가를 묻던 아신이 내게 다가왔다. "몬스터에게 습격당했다는군요. 제가 봤던 녀석들과 비슷한 놈들 같습니다. 이래서 절 데려오신 겁니까?" 약간 감탄했다는 기색이 떠오르는 얼굴의 아신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성벽을 살폈다. 이거 어떤 놈들이 몰려오면 성벽이 이 꼴이 나는 거지? 잠시 나와 아신이 성벽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뒤에 따르는 세 명. 기질이 그리 좋지 않은데. 손에 무기, 이건… 투지인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봐. 거기 둘." 츠팟! 뒤에서 말을 걸며 무기를 겨누려는 순간, 아신이 번개 같이 움직였다. 옆으로 몸을 빼며 순식간에 몸을 회전시키는 동시에 어깨의 장창을 떼어내며 화려하게 휘두른다. 그리고 어느새 상대의 검을 쳐내고는 목에 겨눠져 있는 창. 목에 창이 겨눠진 사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냐." 날카로운 아신의 목소리에 나는 입을 삐죽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빠릿하면 좋겠는데. 역시 실력이 괜찮군. 그런데 이 친구들은 그렇게 적의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는데. "아, 이 창은 치우고 얘기하지." 사내의 말에 아신은 사내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격투가로 보이는 건틀릿을 착용한 단신의 사내와 마법사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그리고 신관으로 보이는 긴 머리의 여자였다. 모두 검은 색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밸런스가 잘 맞는 파티로군. 실력들도 모두 상당하다. 특히 선두의 이 사내는 400은 넘겠는데? 아신은 사내를 잠시 살피더니 창을 거두며 어깨에 걸쳤다. "용건은?" "아, 용병인가?" 사내의 질문에 아신은 나를 돌아보았다. 용병? 나는 앞으로 나서며 그 4명의 일행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용병은 아니고 그냥 여행자다." 약간 거슬리는 말투였지만 넷은 별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익숙하다는 건가? "그렇군. 하지만 여행지를 잘못 잡았나봐. 요즘 여기 사정이 별로 안 좋아서 말이야." "몬스터들의 집단 습격이라는 건가. 함께 용병 일을 하자는 것 같은데, 방금은 실력 시험이었나?" "그래. 역시 저런 강자의 위에 있는 친구라 그건가?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사내의 말이 약간 묘했다. 왠지 내가 더 약하다는 것 같은데? 아신도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해괴한 표정으로 나와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며 사내의 일행들을 살폈다. 모두 400정도. 상당한 고수들인데. 아무래도 싸움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는 친구들 같군. "칠흑의 숲에 몬스터들이 강하다고 해서 한번 와봤는데 이 성이 완전 괴물 같은 녀석들에게 습격 받는 바람에 여기서 싸우고 있지. 그런데 몬스터들이 장난이 아니라서. 강한 녀석들을 골라서 함께 용병 일을 하려 하는 거지." 용병일이라. 연합을 일으키는 전투를 벌일 날이 아직 한 달 이상 남았다. 일주일 정도는 전투 지역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줘야하겠으니 돌아가는데 약 10일. 그럼 20일 제외하고 남는 날이 약 20일인가. 칠흑의 숲을 다녀와도 아무리 적게 잡아도 보름 정도는 이 친구들과 움직일 수 있겠군. "당장은 힘들지만 2, 3일 뒤부터 보름 정도는 함께 행동할 수도 있겠는데." 내 말에 사내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그럼 3일 뒤부터 함께 행동하지. 보름만 해도 꽤 도움이 될 테고, 우리도 그 쯤 되면 여기를 뜰 생각이었으니까." 아신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지금 상황을 파악하려면 직접 체험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제일 좋겠지. 그리고 어쩌면 이 몬스터들의 습격이 마나르트와의 교감이 끊어진 것과 연관이 있을 수도. 너무 극단적인가. "보수는?" 내 질문에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우리 쪽이 7에 그쪽이 3. 저 창 들고 있는 친구야 실력이 상당해 보이지만 자네는 실력이 별로로 보이는데." 아신이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런 아신의 반응에 사내와 나머지 3명이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5 대 5." 사내를 비롯한 뒤의 셋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신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싸늘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장난 하자는 건가?" 약간 기세가 사나워 지는 사내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아신을 바라보았다. 아신은 내 시선을 멀뚱히 받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스으으으. 뒤로 물러나는 아신을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넷이 순간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내 몸에서 서서히 피어나는 검은 기운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휘이이익! 마기가 내 몸을 회오리치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주위로 마기가 마구 뻗어져나갔다.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들과 그냥 지나가던 사람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급히 피난했다. "너, 뭐, 뭐……." 그 날카로운 눈매의 마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마나를 제일 잘 느끼는 것이 마법사지. 아마 마기와 마나의 혼합은 처음 봤을 테니까. 그것도 검사가. 스르릉. 나는 허리에서 요검을 뽑아 어깨에 살짝 걸쳤다. 요검에서 남색 기운이 마구 흘러내리며 검은 마기와 융합해 들어갔다. 그리고 살기가 마구 뻗어나가자 넷이 뒤로 물러나며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빙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5 대 5. 다크소드의 이름이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않겠나?" "다, 다크소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기를 다시 끌어모았다. 내 몸 주위로 몰려든 마기가 지직 거리며 몸을 휘감고 다녔다. 검은 마기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넷은 내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끄덕. 뭔가 수긍하는 듯한 분위기가 흐르자 아신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마기 때문인지 좀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때 그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저, 정말이로군. 시, 실례했다. 그런데… 그 유명한 마검은 어딨지?" 나는 눈가를 씰룩거렸다. 흐으. 대답하긴 해야겠는데 왠지 대답하기가 엄청나게 싫어진다. "킥킥킥." 아신의 효과음까지 깔리자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가출했다." "미안하면 6 대 4로 나눠도 상관없는데." "으에엑! 좀 그만 좀 하라고요! 쪽팔리게." "아신, 돈보다 좋은 건 없는 거다." "흐으……." 아신은 이상한 한숨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나는 뻔뻔한 눈으로 그 리더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그 고명하신 다크소드 어르신을 못 알아본 죄로 4만 가져가지. 확실히 다크소드의 이름이면 대금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잔을 손에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었는데. "소개를 안 한 것 같은데." 내 말에 나와 테이블 건너편에 주르르 앉아있던 넷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신도 있고 있었다는 듯이 손뼉을 딱 쳤다. "내 이름은 세한. 이쪽은 아신." 내 짤막한 소개에 저쪽 파티의 리더로 보이는 검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난 세갈. 이쪽 격투가 녀석은 쿠드. 저 마법사 녀석은 이렌. 여기 아가씨는 디아나라고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주인 씨, 이번엔 저 레이디에게도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나? 라는 마나르트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항상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었는데 말이야. 왠지 허전한 느낌. 나는 혀를 차고는 주점 안을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오면서도 느낀 거지만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다. "이 성을 공격해 오고 있다는 몬스터들이 그렇게 강한가?" 내 질문에 일행의 리더, 세갈이 대답했다. "강하지. 좀 애매하기도 하지만. 어떤 녀석은 오거도 그냥 찜쩌먹을 정도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오크에게도 잡아먹힐 것 같기도 하거든. 하지만 대부분 강하다. 그리고 약하던 녀석도 어느 순간 강해져서 혼란스럽기도 하지." 나는 아신을 힐끔 곁눈질했다. 아신의 말대로군. "아마 녀석들이 띄엄띄엄 비효율적으로 공격해 오지 않고 계속 몰려왔다면 카루나 성은 벌써 폐허가 되었을걸. 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반갑기도 하지만 그래도 NPC 병사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꼴이 그리 좋지만은 안더군." 나는 세갈이라는 사내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별 생각 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마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이 정도만 되어도 꽤나 괜찮은 사람이지. NPC들이 죽든 말든, 오히려 방패막이로 내미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그래서 남아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음?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솔직히 여기는 거의 지옥이거든. 아, 비웃지는 말아 주면 좋겠군." "비웃을 생각은 없다." 나는 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사람이로군. 저 나머지 셋이야 잘 모르겠지만. 세갈 일행의 나머지 셋은 아까부터 입은 거의 열지 않고 우리를 관찰하고만 있었다. 경계? 그렇게 보기에는 좀 심하다는 생각인데. 아신이 맥주잔을 내려놓은 소리에 생각을 접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함께 행동하는 건 이렇게 6명이 끝인가?" "음. 우리끼리가 편하기는 했지만 좀 위험하기도 해서. 얼마 전까지는 어떤 길드의 패거리에 끼어서 같이 다녔는데 그 친구들이 그쪽과 만나기 얼마 전에 갑자기 뛰쳐나가더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러……." 별 생각 없이 중얼거리던 세갈은 나와 아신이 서로를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자 입을 다물었다. 우리와 만나기 얼마 전에 갑자기 뛰쳐나가? 설마 우리를 노리던 녀석들인가. 제길. 이런 녀석들이 카루나 성에 있을지 몰라서 일부러 다크소드라는 것을 밝힌 거였는데, 뒷북이었던 건가. "그 자식들은 어디로 갔지?" 내 사나운 질문에 세갈은 약간 놀란 눈치로 대답했다. "아마도 나드 초원 쪽으로 간 것 같은데. 우리에게는 칠흑의 숲을 조사하러 간다고 했는데 정확한 사실은 모르겠군. 그런데 왜 그러지?" 내 눈이 상당히 날카로워지자 세갈이 약간 긴장한 듯한 기색으로 물어왔다. 나는 이를 빠득 갈고는 벌떡 일어났다. "아신, 가자!" "예이!" "어? 이, 이봐." "3일 후 정오 전후로 여기로 오겠다. 우리는 급히……." 삐이이이익! 잠시 풀어두었던 배낭과 창들을 챙기던 나와 아신은 갑자기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뭐지? 그때 세갈을 비롯한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며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놈들이다. 동쪽에서 몰려오는 모양인데. 그곳의 경보기 소리로군." 나는 이상을 팍 찡그렸다. 동쪽이면 칠흑의 숲 쪽이잖아. 칠흑의 숲은 카루나 성에서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뭐, 꼭 그 위치로 가야할 것은 아니지만 카루나 성에 성문이 동쪽과 서쪽 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세한? 어떻게……." "젠장. 돌파한다." 아신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아신이 주점을 뛰어나가려는 순간, 세갈 일행이 급히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잠깐! 돌파라니? 그 괴물 녀석들은 한번에 몇 백 마리씩 몰려온다고. 둘이서는 절대 무리야!" "생각은 나중이다." 내 말에 세갈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때 세갈의 뒤에 서 있던 그 여자 신관이 작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어디 누구랑 비슷하지 않아? 실력도 안되면서 몬스터 떼거지한테 혼자 돌격한다고 난리를 피우던 누군가가 있었지. 뭐, 저 둘은 실력은 되는 것 같은데." "후후." "킥." 여자 신관, 디아나라는 여자의 말에 다른 둘이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얼굴을 팍 찡그리는 세갈의 행동에 그 어디의 누가가 세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군. 우선은 우리도 일당 퇴치일은 하러 가야할 테니 함께 가보지. 가서 숫자가 적으면 어떻게 도와줄 수도 있어. 요새는 숫자가 적은 편이었으니 100마리 정도일 수도 있다고." 그 키 작은 격투가의 말에 마법사와 여자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숫자가 적은 건가?"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내 무뚝뚝한 질문에 단신의 격투가, 쿠드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외면했다. 나와 아신은 짜증과 황당함이 뒤섞인 눈으로 괴성을 질러대며 마구 뛰어다니고 있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이상한 생김새의 몬스터들이었는데 성벽에서 50m나 떨어졌을 거리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는……. "적어도 1000은 되겠군." "어쩌죠?" "별다른 방법이 있나, 아신?" "큭, 돌파하죠." 아신이 자신의 장창을 꽉 움켜쥐고는 눈을 날카롭게 벼렸다. 나는 망토 자락을 대충 정리하고는 꾸역꾸역 몰려다니는 이상한 몬스터 녀석들을 살폈다. 어떻게 하면 뚫을 수 있으려나. "아, 잠깐만요." 몬스터들이 가장 적은 지역을 찾던 나는 그 디아나라는 여자 신관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세갈들은 머리를 부여잡고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많다고 불평하고 있었고 디아나만이 유일하게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와 아신이 비슷한 타이밍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디아나는 반대쪽 아래, 성 내 지역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플레이어들과 NPC들이 뒤섞인 군대였다. "몇 시간이면 어느 정도 수가 줄 거예요. 좀 기다리죠. 차라리 우리를 도와서 몬스터들의 수를 줄이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몰라요." 상당히 타당한 말이었다. 확실히 이들을 도와서 퇴치하는 게 더 안전할 지도. 아신도 그게 더 좋겠다는 눈치였다. 그때 갑자기 성벽이 약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드드드드드. 성벽뿐만 아니라 성 안의 건물들까지, 그리고 지면도 약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땅이? "뭐, 뭐지?" "지, 지진인가!?" 주위에서 놀란 고함소리들이 들려왔다. 놀란 것은 사람들만이 아닌 듯 몬스터들도 움직임을 딱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진동이 멈췄다. "……?" 갑자기 진동이 멈추자 사람들은 놀라서 떠들기 보다는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왠지 폭풍 전의 고요 같은 분위기. 그 순간 저 멀리에서 뭔가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젠장! 저건!" "음? 아는 겁니까?" 아신의 말에 세갈 등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 망할. "제길. 내 아까운 내단!" "에?" "내단?" 아신과 세갈이 얼빠진 반문을 하는 동시에 저 먼곳, 북서쪽에서 거대한 갈색 뱀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끼아아아아!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런 포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저 족속과의 전투, 절대 못 잊을 테니까. "뭐, 뭐야? 용?" 세갈의 얼빠진 중얼거림에 나는 작게 실소했다. 출세했군. 용이라니. 그때 하늘로 치솟아 올랐던 갈색 뱀이 여러 개로 갈라졌다. 그리고 날카로운 바위들로 변했다. 그래도 아래로 무서운 속도로 추락. 드드드드. 다시 땅이 조용히 울렸다. 저걸 썼다는 건가. 내단 중에 가장 작은 거긴 하지만 엄청나게 아깝군. "가자, 아신! 칼 일행이 위험해! 저건 내가 린에게 줬던 구슬의 효과다! 가자!" "에? 옛!" 아신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타앗! 나는 성벽 위에서 높게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몬스터 무리와의 거리가 좁혀지며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에서 아신이 내 뒤를 따라 공중을 날았다. "흐아아앗!" 아신이 기합소리와 함께 장창을 집어던졌다. 무서운 속도로 날 앞지른 장창은 푸른 마나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몬스터들의 사이에 박히는 동시에 마나의 폭발이 일어나며 몬스터들이 괴성과 함께 피를 흘리며 주위로 튕겨져 나갔다. 좋았어. "하앗!" 순식간에 발출된 요검에서 검은 색과 남색이 뒤엉킨 검기가 몬스터들의 향해 뻗어나갔다. 키에에엑! 옆에서 검은 촉수 같은 것들이 여러 개 날아왔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으며 요검을 크게 휘둘렀다. 촉수가 잘리고는 이상한 변종 몬스터들이 괴성을 질렀다. 내가 부상을 입히면 아신이 따라오다가 숨통을 끊는다. 가장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몬스터들을 뚫고 나가던 나는 앞에서 달려드는 몇 마리의 몬스터들을 보며 혀를 찼다. 기운이 장난이 아닌데. 화악. 나는 망토 자락을 붙잡고는 그대로 쥐어뜯으며 앞으로 내던졌다. 망토가 순식간에 늘어나며 정면의 몬스터들을 집어 삼키듯 감쌌다. 몬스터들이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위치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요검을 망토에 찍어 넣었다. 어차피 찢어져 봤자 순식간에 멀쩡해 지는 거. 키아아아악! 망토 속에서 몬스터들이 듣기 싫은 괴성을 마구 질러대었다. 끔찍하군 그래. 나는 재빨리 뛰어오르며 망토 윗자락을 붙잡았다. 촤아악! 천상의 망토가 회오리치듯 회전하며 내 몸 쪽으로 빨려들어 왔다. 금새 내 몸에 알맞은 사이즈로 변한 천상의 망토가 몸을 휘감았다. "편리하군. 스트라이크." 급히 떨어져 내리며 검을 내리 박자 검은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후우. 쉽지 않군. "헥, 헥. 더럽게 많네." 어느새 뒤를 쫓아온 아신이 내 뒤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오른손에는 장창을 들고 왼손에는 단창을 하나 들고 있었다. 취엑! "핫!" 몬스터 한놈이 공격해 들어오자 아신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장창으로 몬스터의 몸을 베었다. 하지만 놈이 무시하며 앞으로 돌격해 오자 단창으로 순식간에 목 줄기를 뚫어버렸다. 깔끔한 솜씨. 또 달려드는 여러마리의 몬스터들이 아신의 창에 꿰뚫리고 터져나갔다. 한참 전투를 벌이며 앞으로 전진하던 아신이 뒤를 돌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세한! 뭐해요!" "음?" 아신의 고함소리에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서 있었지? 급하게 앞으로 달려가도 모자를 판국에. 키라아아! 그때 이상한 괴성과 함께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내 주위를 포위했다. 아신의 모습이 몬스터들에 가려졌다. 뚫고 오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몬스터들이 막고 있었다. 이런. 움직여야……. "아?"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려던 나는 요검에서 이상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지? 캬아아악! 거대한 진흙에 나뭇가지를 꽂아둔 듯한 괴물 녀석이 괴성과 함께 날카로워 보이는 돌출부를 찔러 들어왔다. 으음. 이상하게 멍한 기분이로군. 몬스터의 공격을 물 흐르듯 흘려보내는 순간 요검으로 놈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이상한 색의 체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요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몬스터의 몸에 스며들 듯 들어갔다. 내가 멍한 눈을 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공격해 들어왔다. 취에에엑! 캬아악! 하지만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가는 몬스터들. 그 몬스터들의 뒤에 눈에서 남색 빛이 흘러나오는 몬스터들이 흉흉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이엑? 이 녀석들 왜 이러지?" 아신이 내 곁으로 다가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색 빛을 흘리는 몬스터들이 다른 몬스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치 '조종'받는 것처럼. "헥? 세, 세한? 누, 눈이……." 나에게 고개를 돌린 아신이 몸을 흠칫 떨고는 내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내 눈? 아신의 눈에 비친 내 눈에서 이상한 기운이 슬슬 흐르고 있었다. 호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인가. 건방지군." 내 중얼거림에 아신이 입을 벌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멍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고개를 젓다가 마기를 확 뿜어내었다. 검은 마기에 남색 기운이 쓸려 주위로 퍼졌다. 주위에서 다른 몬스터들을 공격하던 몬스터들이 공격을 멈추었다. 흐음. 그런 건가. 나는 요검을 작게 휘두르고는 정면을 가리켰다. 그러자 움직임을 멈췄던 몬스터들이 눈에서 남색 기운을 뿌리며 앞으로 돌격해 나갔다. "이런……." 나는 다시 내 손을 타고 오르는 남색 기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도대체가 내가 가진 검 치고 주인을 위하는 녀석이 없군, 그래. "세한? 저 녀석들은 뭐예요? 왜 저 몬스터들을……." "아마 이 검에게 조종 받는 거 같은데……." "예?" "그보다는 손님이 오신 것 같군. 뛰어!" 나는 요검을 하늘 위로 치켜 들었다가 앞으로 크게 휘둘렀다. 검기가 돌풍을 일으키며 앞으로 날아갔다.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터져나가며 길이 만들어졌다. 흐으. 어지럽군. 잠시나마 생긴 길로 죽어라고 달리는 와중에도 요검은 열심히 몬스터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곧 몇 마리의 변종 몬스터들이 다시 남색 기운을 눈에서 흘리며 근처의 다른 변종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덕분에 생겨난 혼란에 나와 아신은 보다 손쉽게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며 앞으로 전진 할 수 있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가며 몬스터들을 베어 넘겼다. 어차피 죽여야 할 것도 아니고 뚫고 나가기만 해도 성공인 것, 힘들여 죽일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는 사이 몬스터 떼거리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좋았어! "음?" 기세를 높여 달리려던 나는 급히 멈춰서며 주위로 검기를 뿌렸다. 몬스터들이 뒤로 물러나 작은 공간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내 등에 아신이 머리를 박았다. "윽, 왜 서는 거예요?" "손님이 왔다." "아까부터 손님이 어쩌고 하는데 무슨……." 의문 섞인 질문을 던지던 아신은 앞에 검은 빛무리가 생성되며 공간이 뒤틀리자 입을 다물었다. 뒤틀린 공간이 점점 벌어지더니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형이 하나 걸어 나왔다. 사람은 아니다. 뭐지? 땅에 내려선 검은 로브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와 아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드 속에서 노란 눈이 괴기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내 키메라를 조종하다니, 네놈은 뭐냐? 네크로멘서인가?" 네크로맨서? 시체를 움직이는 마법사 얘기였던가. 하긴 저 녀석들도 한번 죽은 놈들이지. "아니. 다크소드. 검사다." 내 말에 검은 로브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거 참 요사스럽군. 요검을 들고 다니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마나르트 판디안의 주인인가." "마나르트… 판디안?" 판디안? 마나르트의 성인가? 내가 약간 의아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자 로브 녀석의 눈이 작게 일렁였다. 그리고 왠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킬킬. 그의 풀 네임도 모른단 말인가. 이런 인간이 주인이었다니, 그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기가 훨씬 수월하겠군." "뭐?" 끌어들여?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아신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몬스터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다. 그는 우리 손에 있다. 내 동료에게 붙잡혔지. 곧 우리에게, 그 분에게 협력할 것이다. 마나르트 판디안, 그 마족은 네놈 따위에게 지배당하고 있을 자가 아니다. 그 분의 아래에서 네놈들을 도륙하는 것이 어울리지."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요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데스 킹 녀석과 비슷한 말을 하는데. 그 분이라. 누구지. 그것 보단… 마나르트가 저 녀석들의 손에 있다고? 감금이라도 당한 건가. 그러고 보니 갑자기 교감이 끊어졌지. "닥쳐. 나는 마나르트를 지배한 적 없다. 그건 그렇고. 마나르트는 어디냐." 내 말에 검은 로브는 괴기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빛냈다. 어쩔 수 없나. "내가 말할 거라고 생각하나. 캇캇. 네놈, 몇 번이고 죽여주마. 네놈들의 세상으로 꺼질 때까지!" 까득. 저놈의 레벨은 적어도 예전의 천악 수준. 내가 정확하게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상대다. 주위 몬스터도 있고. 하지만……. "죽여주마!" 펄럭. 나는 망토를 쥐어뜯듯 풀어헤치며 앞으로 내던졌다. 천상의 망토가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며 앞쪽을 완전히 뒤덮었다. 식스센스. "저기다!" 나는 앞을 가린 검은 천의 한 곳으로 요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은 색과 남색이 뒤섞인 검기가 천상의 망토를 뚫고 날아갔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블루 스피어!" 아신의 단창 하나가 내 검기가 날아간 곳으로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푸른 마나를 한껏 머금은 채였다. 그리고 검고 푸른 폭발이 일어났다. 키아아아! 그리고 들려오는 괴성.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곧추세웠다. 천상의 망토가 이 쪽으로 휙 날아왔다. "쳇." 천상의 망토를 다시 몸에 두른 나는 기의 폭풍을 뚫고 걸어 나오는 '괴물'을 보며 혀를 찼다. 사람과 비슷한 형태일 뿐, 온 몸에서 돌기가 돋아나고 양 어깨에는 날카로워 보이는 칼날이 튀어나온, 머리에는 뿔까지 여러 개 달려있는 녀석의 모습에 아신이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보기 좋은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아신." "예?" "계산 착오다." "예?" "저 괴물 자식, 거의 제퍼슨 수준이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승산 10에 6정도. 하지만 근처에 널리고 널린 게 저 괴물 놈의 부하다." "그, 그렇군요." 아신이 몸을 움츠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 마검이라도 있으면 모르지만 마검은 저 녀석들이 납치…한 모양이니……." 납치라는 말에 아신이 작게 실소했다. 나도 웃고 싶다, 정말. "결론은요?" "눈만 살짝 올려서 하늘을 봐라." 아신이 눈동자를 살짝 들어올려 괴물 녀석의 위를 바라보았다. 하늘 위에 내가 만들어낸 바리어들이 계단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계단 치고는 하나하나의 거리가 거의 20m는 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요검을 꽉 움켜쥐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걸 타고 여길 통과해서 칠흑의 숲으로. 나도 곧 뒤따른다. 하아아앗!" 나는 커다란 기합과 함께 검에 모든 힘을 불어넣으며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 제퍼슨 등등의 사람들에게 쓸 때보다는 약했지만, 역시 강한 폭발이 연속으로 일어나며 변종 몬스터들을 토마토 터트리듯 터트렸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며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괴물 녀석. 타앗. 타앗. 아신이 바리어들을 밟고 도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의 폭풍에 몸을 움츠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신이 거의 빠져나가고 있었다. "카아아아! 어디를!" 괴물 녀석이 아신이 발견하고는 괴성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녀석의 흉측한 손에 모여드는 마나의 구. 나는 급히 뛰어올랐다. "여기다, 이 자식아!" 바리어를 밟고 높이 도약한 내 고함소리에 괴물 녀석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에 아신은 몬스터 무리를 빠져나가고는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씨익 웃고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네놈은 죽여 버리겠다. 카아아아!" 무섭군. 나는 지금 힘도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게 있지. 품속에서 빠져나온 내 손에 진한 적갈색의 주먹만한 구슬이 들려있었다. "이걸로 두개 남은 건가. 아깝군. 이건 강한 것 중 하난데." "카아아아아!" 괴물 녀석의 괴성에 나는 손에 힘을 주어 구슬을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적갈색 빛이 강하게 터져나왔다. 괴물 녀석의 괴성이 잠시 멎었다. 적갈색 빛의 사이에서 붉은 눈동자가 나타나며 나를 바라보았다. -크르르… 명(命)은? "지금 밑에 있는 모든 괴물들의 말살이다, 진광." -토(土)의 이무기, 진광(嗔狂)의 잔재인 나. 말살자(抹殺者)의 명을 받든다. 나는 빙긋 웃었고 순간 적갈색 빛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그 사이에서 거대한 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가 뛰어오른 땅에서 솟아나 내가 위치한 허공까지 이어진 거대한 적갈색의 이무기. 크라라라라락! 이무기의 포효소리에 대지가 흔들렸다. 괴물 녀석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한 나는 피식 웃으며 요검을 휘둘렀다. "카아아! 이 자식!" 검기에 얻어맞은 녀석이 괴성을 질렀다. 힘이 빠질대로 빠진 나였지만 녀석이 완전 넋을 놓고 있던 덕분에 명중시킬 수 있었다. 콰드드드득. 그때 땅이 무너지듯 쩍쩍 갈라지며 날카로운 바위들이 마구 솟아올랐다. 그리고 이무기의 모습이 바위들로 변하며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다. 정확하게 변종 몬스터들이 위치한 곳이었다. "카아아아아아! 이노오오옴!" 엄청난 괴성과 몬스터들의 비명 속에서 괴물 녀석의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끔찍하군. 작은 바리어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풍에게 감사해야겠군. 그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나는 물론 칼이나 린도 모두 죽었겠지." 언제 선물을 들고 찾아가야 할까. 내가 안심하며 흔들리는 바리어를 꽉 잡았을 때였다. 이무기의 광포한 횡포가 끝나고 흙먼지과 붉은 기가 사라지는 가운데 괴물 녀석의 괴성소리가 들려왔다. "카아아아아아아! 어디 있나아아!" 나는 얼굴을 굳혔다. 살아있나. 젠장.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의 힘은 내가 마나르트를 들었을 때 비슷. 그렇다면 그 미친 이무기와도 비슷하다는 얘기. 더욱이 이 내단의 위력은 진짜 진광보다 조금 약하니……. "젠장!" 나는 그대로 뛰어내렸다. 붉은 기와 흙의 폭풍을 뚫고 내려가니 두 손을 합쳐 거대한 칼날을 만들어내고 괴성을 지르고 있는 괴물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죽인다아아아!"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몸의 일부로 만들어진 검은 칼날을 내게 휘둘렀다. "뒈져버려엇!" 내 맞고함과 동시에 녀석의 거대한 칼날과 요검이 강하게 격돌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기가 뻗어나갔다. "크으……." 나는 위에서 검을 내리친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괴물 녀석은 위로 검을 쳐올린 자세 그대로. 제 3자가 보면 상당히 멋있겠지만… 나로썬 지옥이군. "쿨럭." 나는 피를 토하면서도 손에 힘을 주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내 몸에서 검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요검에서 남색 기운이 괴물 녀석에게로 마구 몰려갔다. "카아아아!" 내게 대응하듯 괴물 녀석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마구 피어났다. 그리고 미친 듯이 번뜩거리는 노란 눈동자. 아니, 미친 듯이가 아니고 미친 건가. "카아아아!" "흐아아아!" 빠지지지직! 검은 스파크가 주위로 마구 퍼져나갔다. 그리고 온몸에서 마나가 역류하며 피가 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젠장. 이 기분 오랜만이군. 마나르트를 30분 넘게 들었을 때 들던 기분이야. "카아아! 죽어라아아!" 녀석의 괴성과 함께 검은 기운이 점차 밀려들어왔다. 망할. 밀린다! "크으으!" 입에서 피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천상의 망토가 미친 듯이 펄럭거리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강한 기에 조금씩 찢어지고 터져나가는 내 몸. 나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고함을 질렀다. "제, 젠자아아앙! 쉬이이이익! 내가 거의 포기하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날아왔다. 그리고 괴물 녀석의 옆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뭐……. "카아아악!" 괴물 녀석의 옆구리에 검의 손잡이가 돋아났다. 아니, 박힌 거겠지? 슬쩍 고개를 돌리니 성문에서 달려오고 있는 일단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선두에서 뭔가를 던진 듯한 자세로 서 있는 검사. 그 용병 일행의 리더인 세갈이었다. "후, 후훗! 고맙다아앗! 크로스으!"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며 손에 힘을 주었다. 녀석의 검은 기운을 뚫고 들어가는 요검. 그리고 순식간에 강한 기 폭풍이 퍼져나가며 나는 바닥을 굴렀다. "으으……." 하늘을 보며 드러누운 나는 미친 듯이 흔들리는 괴물 녀석의 눈을 노려보았다. 녀석의 입이 쩍 벌어졌다. "꺼져, 재수 없는 자식." 내 말이 신호라도 된 듯 녀석의 몸이 쫙 갈라졌다. 거대한 X자 모양의 푸른 하늘이 보이는 순간, 검은 기가 폭발적으로 터져나갔다. "크큭. 하아, 마나르트……."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힘겹게 이마에 얹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보고 싶은데. 내 근처로 달려오는 여러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괴성소리와 함성소리. 남은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건가. 죽을 걱정은 없겠군. 후훗. 나는 낮게 웃었다. "좋아. 이 정도로 하지. 말하지 않으면 우선 오른팔 절단. 다음은 왼… 아, 이미 날아갔군. 다음은 오른발이다. 그 다음은 왼발. 물론 출혈 과다로 죽을 걱정은 없으니 걱정마라. 내 마기를 사용하면 피 한 방울도 없이 절단해 줄 수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론 입밖에 꺼내기 어려운 것으로 잘라주지. 현실에서는 정말 맛보기 힘든 고통일 것 같지 않나?" "이, 이 악마!" "아, 다크소드라는 이름 자체가 악마적 분위기를 풍기잖아. 거기다 내 마검에는 진짜 악마도 봉인되어 있다고. 그 정도는 약하니 더 신선한 욕을 내뱉는 것이 어때?" "으으… 마, 말하겠다." "좋아. 읊어봐." "네, 네가 데리고 있다던 엘프들과 반인족들을 목적으로 마차를 습격했는데… 잘 되가는 도중에 갑자기 용이 솟아났다. 그리고 바닥에서는 바위의 창들이 솟아나고 위에서도… 덕분에 모두 몰살당했다. 마, 마차는 칠흑의 숲 쪽으로 갔다." "그렇군.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살아있나?" "나, 나는 다, 당신이 마차에 없어 뒤쪽에 매복이라도 해 있나 확인하러 벗어나 있었다." "허어? 그런데 왜 또 이 꼴이야?" "가, 갑자기 창을 든 녀석이 달려와서는……." "아, 이해했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군. 협력에 감사하지." "그, 그럼 죽이지 않는 건가?" "뭐, 그렇지. 몇 초 있으면 내가 꽤 멀어질 테니 마음껏 로그아웃 하도록." "며, 몇 초? 100m를 몇 초 만에?" "음? 100m였나? 그 정도는 기본이지." "그, 그렇다면 그 몇 초 사이에 다시 돌아와서 로그아웃 중인 날 죽이는 것은……." "그건 또 뭔 헛소리지? 로그아웃 하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순식간에 날아와서 그쪽을 죽인다고 그래?" "무, 무슨 말이냐! 적에게 공격 받고 한 시간 동안은 로그아웃에 1분이 걸린단……." "알아들었으니 다물게나." "큭." 나는 광분해 떠들어 대던 녀석의 머리통을 쥐어박아 주고는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전투 중에 로그아웃을 한 적이 없었지.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프로그램이 많이 생성된 모양이지? 언제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군. 앞으로 전쟁을 치루려면 이 문제도 좀 알아봐야한다. 약간 겁먹은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내를 잠시 주시하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칠흑의 숲 쪽으로 달려갔다. 이무기의 내단을 사용한 덕택인지 땅이 상당히 다쳐있었다. 현실에서였다면 법정에 서게 됐겠군. "어쨌든 아신은 벌써 칠흑의 숲으로 들어갔겠군. 하긴, 카루나 성에서 치료 받는데 시간이 꽤 걸렸으니 당연한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아깝더라도 내단을 하나 더 주는 건데." 그래도 원래 내단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서 내단을 4개로 밖에 분할하지 못해 아끼느라 했던 일인데… 이제는 후회되는군.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다. 쳇. 지금의 희망은 다크 엘프들이 이 소란 때문에 좀 밖으로 나와 줬으면 하는 거로군. 뭐, 더 이상 린들을 쫓는 녀석들이 없을 수도 없지만." 그래도 이 숲의 몬스터들이 장난이 아닐 텐데. 변종 몬스터들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녀석들은 뭐였지?" 나는 카루나 성에서 대판 싸움을 벌였던 이상한 괴물들을 떠올리며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변종 몬스터는 아니다. 변종 몬스터라고 해도 기본적인 몬스터의 모습에 색이 다르거나 모습이 약간 다른 정도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몬스터들 중에서는 그렇겐 생긴 녀석은 없다. "키메라라고 했나?" 그 끔찍하게…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강했던 그 지휘관 급 정도로 보이는 녀석의 말이었다. 키메라. 합성 괴물을 통칭하거나 아니면 사자 몸에 뱀꼬리. 산양 다리. 등등의 동물의 머리를 가진 녀석이지. 그 녀석 자체도 합성괴물이지만. 아마 그 녀석은 합성 괴물이라는 뜻으로 말했던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만들어낸 몬스터라는 말이다. 어쨌든 정말 치열한 싸움이었지. 하지만 덕분에 레벨은 팍팍 올랐군. 직업 덕분에 더럽게도 안 오르더니. 이제 드디어 레벨 400돌파인가. 카루나 성에서 확인한 레벨은 406이었다. 한 단계 승급도 했으니 어쩌면 마나르트만 있다면 제퍼슨은 제압할 수 있을 지도. 그리고 아까는 너무 급하게 싸우느라 깨닫지 못했지만… 몸놀림이 훨씬 가벼워졌다. 아무래도 보너스 수치의 영향인가. 이 정도라면……. 칠흑의 숲 안으로 돌입한 나는 나무위로 뛰어올라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전진했다. 땅으로 가다가는 잠자는 몬스터들을 건드리는 결과나 낳을 테니 이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그럼 다시 생각으로 돌아가서… 누구지? 누가 그런 괴물들을……." 적어도 플레이어는… 아니겠지. 그 분이 어쩌고 하는데다 아무래도 우리 플레이어들을 무시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그런 놈들이 플레이어를 모실 리는 없겠지. 플레이어라면 실력도 딸리겠고. NPC로 보기에는 무리는 있다. 역시 실력. 저런 괴물들을 떼거지로 만들어낼 실력을 가진 NPC가 있을리… 아니지. 속단은 금물인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 주변에 어떤 알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건가. 이 근처에서 그런 곳은……. "페이나의 미궁?" 그곳을 소개하는, 그곳에 대해서 나오는 이야기, 타락 천사의 힘이 봉인된 곳. 그 힘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손에 넣기 힘든 것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가 이 일의 근원지인가. 아니면 다른 곳이……. "핫?" 한참 생각하던 나는 급히 몸을 틀며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내가 방금 디딘 나뭇가지에 전기를 머금고 있는 단검이 박혀들었다. 마법에 단검? "대거 댄싱." 순식간에 여러 개의 단검이 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퍼서석! 순식간에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을 돌파한 단검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척도 사라졌다. 강한 상대다. 기척을 완전히 숨겼다. 마나의 응집! 나는 급히 몸을 띄웠다. 사방에서 얼음의 창들이 나를 노리고 날아왔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군. 나는 다가오는 얼음의 창 하나를 비껴내며 옆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강한 전류 덩어리가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 왔다. "단검에 얼음, 전기라." 펄럭. 천상의 망토를 벗어던지자 순식간에 검은 천에 의해 시야가 가려졌다. 그리고 늘어난 천상의 망토 끝자락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전류가 보였다. 그리고 아마 단검으로 보이는 것이 천상의 망토에 걸린 듯 망토의 중앙 부분에 뭔가가 불룩 튀어나오다 도로 튕겨나갔다. 망토의 최대한 질기게 만들면 단검 몇 개는 어떻게 막는 것도 가능한 건가. 뭐, 상대가 견제용으로 마나도 실지 않은 듯하니 속단은 이르지. 나는 천상의 망토를 회수하는 대신 다시 바리어를 만들어 내 그것을 밟고 높이 도약했다. 순식간에 숲이 내 발 아래로 내려가며 사방이 확 트였다. "저기다!" 나는 예비용으로 찬 롱소드를 뽑아들고는 마기와 마나를 실어 집어던졌다. 엄청난 기세로 날아간 롱소드가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며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다크 엘프들에게는 미안하기도 한데. 하지만……. 화르르륵! 그때 불의 드래곤이 하늘로 솟아올라오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포효하며 돌격해 들어왔다. 물론 본래 크기에는 훨씬 모자란, 와이번 정도의 크기였지만 저 앞발을 보니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불로 이루어진 몸. "최상급 불의 정령!" 피할 수 없다! 저 크기라면 바리어를 박차고 오르더라도 방향을 약간 트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 그렇다면……! "흐아아아!" 나는 몸 뒤에 생성시킨 바리어를 박차고는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불의 드래곤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갑옷이 전신을 감싸들었다. 그리고 엄청난 열기가 몸을 짓눌렀다. "그래도, 페이린의 브레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포효와도 같은 외침과 함께 사방으로 마나, 마기가 터져나갔다. 거의 깨어진 바리어와 불길 너머로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화염을 바라보던 나는 바리어를 없애며 내 머리위로 작은 바리어를 재생성 시켰다. 거의 뭉개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된 불의 드래곤이 중앙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결국 내 몸으로. 지글지글. 역시나 요새는 머리카락을 자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거의 타지도 않는군. 그래도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몸을 반 회전 시키며 내 하늘 쪽에 위치하던 바리어를 박차고 아래로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불길이 금세 뒤로 쳐지며 수많은 나무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나무 사이에서 번뜩이는 검광. "훗." 카차창! 내 요검과 나무 위에서 나를 맞이하던 상대의 검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불꽃이 번쩍 튀긴다 생각하는 순간 상대가 엄청난 속도로 다른 나무로, 또 다른 나무로 몸을 숨겼다. 퀵스텝을 운용하는 나보다 훨씬 빠르군. 나는 씨익 웃으며 옆의 나무로 몸을 날렸다. 푸스석 하는 소리와 함께 저쪽에서 뭔가가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나는 허리로 손을 가져가며 단검을 움켜쥐었다. "대거 댄싱." 두 개의 단검이 날아갔다. 단검 낭비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 행한 일이었지만 그 단검에 일어난 일은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끼깅! 날아가던 내 단검의 반대편에서 날아온 단검이 정확하게 날아와 충돌하며 정확하게 반쪽으로 갈라버렸다. 이상한 소리와 함께. 방향이 크게 어긋난 상대의 단검이 엉뚱한 방향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빠르게 도약했다. "더 이상은 숲이 위험하다고! 피니쉬(Finish)!" 내 외침과 함께 내 온몸에서 마나와 마기가 원활하게 움직이며 요검으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내 주위가 어둠이 물들며 나는 하늘을 나는 듯한 속도로 나무들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역시 기술을 만들어 두면 움직임이 훨씬 원활하고 쉬워진다. 이렇게 급격하게 기를 끌어 모아야 하는 기술은 꼭 기술 명을 정해 놓는 것이 좋지! "으아아아!" "하아아압!" 내 고함소리에 반응하듯 내 반대편 나무에서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내게 날아왔다. 그 뒤로 백발에 가까운 회색 머리가 휘날리고 있었다. 상당한 장발이었다. 머리가 상당히 길어졌는데, 미시안! 파가가가가각! 검은 기운을 내뿜는 나와 전류를 한껏 머금은 미시안이 가까워지며 검게 물든 요검과 얼음의 칼날이 만들어진 미시안의 화이트 소드가 충돌했다. 화아악! 그리고 그 순간 감쪽같이 사라지는 나와 미시안의 기. 이대로 부딪혔으면 숲이 성하지 않았겠지. 숲을 망치기 싫어서 화염 마법은 쓰지도 않았고, 불의 정령도 숲 위에서 쓴 미시안의 노고를 돌이켜 보면 이게 당연한 거였다. 우리 둘이 마음이 통한다는 증거기도 하겠지만. 음?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나무 몇 그루를 회생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폭발시키긴 했나? 검을 맞대고 허공에 잠시 멈춰있던 나와 미시안은 동시에 검을 거두며 땅에 내려섰다. "이제야 왔군. 1년 반이 다 되어간다." "아, 한때의 방황기였어. 하지만 생각해 보니 너하고 약속한 것이 하나 있더라고. 이미 나 혼자 전초전을 치루고 오긴 했지만." 미시안이 피식 웃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오른팔 하나로만 끌어안는 것이 좀 어색해 보였다. 잠시 미시안의 왼팔이 자리했던 왼 어깨를 스쳐본 나는 미시안을 꽉 끌어안았다. 뭐, 재회의 순간으로는 나쁘지 않아. "아……." 나는 멍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자 다크 엘프 하나와 여자 엘프 하나를 보며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베르시아. 내가 다크소드라는 이름을 얻는 '계기'를 만들었고 다크 엘프들과의 친분의 '계기'가 된, 마신의 신전에서 목숨을 잃은 다크 엘프, 베르시나의 여동생. 그리고 실비아. 도도리 시로 가는 도중에 만났던 엘프. 엘프의 마을로 돌아간 줄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 남아 있던 건가? 미시안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마을로 들어가는 협곡의 입구에 서 있던 둘은 미시안과 함께 걸어오는 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음, 내가 잘생긴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것은 실례인데." 베르시아의 눈이 상당히 험악하게 굳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레이피어가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휘릭. 레이피어르 흘리며 베르시아의 뒤로 돌아간 나는 베르시아의 목을 팔로 감으며 품에 안았다. 미시안이 코웃음을 흘리며 실비아에게 걸어갔다. "이젠… 정말로 오지 않는 줄… 한의 친구들이……." 베르시아가 울먹거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고는 태평한 어조로 말했다. "뭐, 돌아온다고 했으니 돌아와야지. 악마의 숲이 아닌 게 유감이지만." "흑……." 낮게 훌쩍이는 베르시아를 꼭 끌어안고 있는 네게 다가온 미시안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변하지 않았군." "뭐?" 나는 멍한 눈으로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미시안은 낮게 웃음을 흘리고는 절벽 위를 눈짓했다. 호오? "어머?" 옆으로 다가오는 실비아를 품에 안아든 미시안이 위로 솟아올랐다. 뭔가 보여줄 것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훌쩍거리는 베르시아를 꽉 끌어안고는 절벽을 뛰어올랐다. 한발 먼저 착지한 미시안의 옆에 내려서자 미시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레이디스 길드의 나프네라는 여자가 가끔씩 연락을 해 왔다. 얼마 전에 마지막 통신구로 연락이 왔었는데, 네가 상당히 차가워졌다더군." "……." 나프네와? 미시안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를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군. 좀 딱딱해진 것 같긴 하지만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걸." 나는 입을 약간 벌렸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이에… 확실히……. 베르시아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탐색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미시안에게 한번 사나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미시안이 나프네와 연락하고 있다던 사실을 감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시안이 잠시 당혹해 하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이 곳이 좋아서 그런 것 같은데." 미시안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미소를 짓더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베르시아와 함께 미시안의 뒤를 따랐다. 실비아는 미시안의 옆에 꼭 붙어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이에 커플 수가 늘어난 것 같은데. 후훗. 잠시 절벽 위를 걷던 나는 절벽의 끝에 다다라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광경에 입을 벌렸다. "아……." 절벽 아래, 둥근 호수와 그 호수를 멀리서 감싸듯 둘러싸고 있던 절벽. 그리고 악마의 숲의 마을에 비해 훨씬 작고 약간 음침한 분위기이던 작은 마을이… 이 절벽 안을 가득 메우는 활기찬 마을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입구에 우글우글 모여들어있는 다크 엘프들. 간간히 엘프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위치해서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는 칼과 린 일행. "엘프들과의 교류도 꽤나 많아졌고, 다른 곳에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던 다크 엘프들도 모여들었다. 발전했지." 나는 저 한쪽 절벽에 위치한 동굴의 입구, 그 옆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위에 앉아있는 마을의 스핑크스, 테티오를 바라보았다. 왠지 테티오가 미소를 지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테티오가 크게 포효했다. 절벽에 부딪힌 그 포효가 마을 안을 울리는 듯 했다. 그리고 모여있던 다크 엘프들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가지." 미시안의 짤막한 말과 함께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테티오의 포효소리를 압도하는 엘프들의 함성소리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돌아왔다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그림자의 땅으로 왔다는 것이, 정말로 실감난다. "가자." 미시안이 다시 실비아를 안아들며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고 나는 베르시아를 안고는 뒤따라 뛰어내렸다. 둥그런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푸른 호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주영진 온통 검은 옷으로 도배를 한 사내였다. 검은 선그라스에 깔끔한 검은 정장. 다만 회색빛의 머리카락과 입에 살짝 머금고 있는 미소가 분위기를 그나마 좋게 만들어 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름 한번 멋지게 무슨 그룹이니 의견 조율사니 아니면 무슨 무술 단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스스로는 사회의 부패에 찌들어 살기 싫었으며 이 빌어먹을 사회에 치여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외치거나, 스스로를 이 한 몸 불살라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치는, 바로 이런 아무리 좋게 불러줘야 건달이나 깡패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무리에게 손을 벌릴 필요가 없는 평범한 지위의 사람들은 현재 깡패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헷갈려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렇게 살짝 미소만 짓고 있어도 사람들이 저 자식 깡패니 이 길에서 추방해야 한다, 혹은 신분 조회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 결론을 내린 레딕은 순간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결국 나도 그렇다는 얘기 아냐?" 자신은 다르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해 봐야 현실은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레딕은 금세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미소를 지으며 길을 걸었다. 상당히 날카로운 눈매를 제외하면 상당한 미남 축에 끼는 레딕이었기에 가끔씩 레딕을 주시하는 여자들이 생겨났다. 어쨌든 '깡패'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레딕은 '완벽한 몸을 지닌 미소가 멋진 남자' 정도로 풀이될 테니까. 레딕은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약간 거북하다고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대놓고 거리를 걸은 적은 한번도 없는 레딕이었다. 저번에 센이 만들어준 임시 민증을 이용해 암흑가 근처 PC방에서 섀도우 월드나 한 것이 전부인 레딕이었다. 그나마 그 때도 밤에만 사람들을 피해서 다녔다. 거기다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악연이라면 악연인 현진 덕분에. "저기……." 레딕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들려온 목소리에 혹시 이 근처를 지나가던 어느 그룹의 녀석이 있었나 하며 주먹을 살짝 쥐며 몸을 돌리는 동시에 그대로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어?" 팔을 살짝 들어올렸던 레딕은 자신의 눈앞에 위치한 검은 생머리의 여자를 보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분명 검은 옷을 입기는 했고 꽤나 수준 높아 보이는 자세로 서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속한 세상의 사람은 아니었다. 말을 건 사람은 검은 생머리와 검은 검도복에 목검을 든 아름다운 여자, 선아였다. "당신, 전에 공원에서……." 레딕은 선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고 선아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레딕의 뒷모습을 바라봐야했다. 잠시 뒤의 도장을 바라보던 선아는 어이없다는 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빠르네?" 한편 간만의 전력 질주를 행한 레딕은 한 건물에 등을 기대고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운 한번 더럽게 없군. 그러고 보니 여기가 진이 살던 동네였지. 그래도 설마 저 여자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레딕은 자신의 악운을 한탄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건물로 들어가 계단 한 층을 올라간 레딕은 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레딕이야 알지 못했지만 이 카페는 현진이 단골로 다니던 '아다지오'라는 카페였다. "어서 오게." 상당히 아늑한 분위기에서 약간 음침한 분위기로 일탈을 시도하고 있는 카운터에서 굵직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딕은 그 목소리의 출처에서 의자에 걸터앉아 술잔을 닦고 있는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인을 확인하고는 몇 걸음을 옮기며 가게 안을 살폈다. 장사가 되는 곳인지 대부분의 자리에 사람이 차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레딕은 카운터로 다가오는 여 종업원의 눈길이 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때 가게 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며 손을 흔들었다. 안경을 쓰고 깔끔한 차림을 한, 그냥 봐선 절대 레딕과 동류로 보이지 않는 센이었다. "여어! 여기야." 약간 불안한 눈으로 레딕을 바라보던 종업원은 한눈에 봐도 엘리트로 보이는 안경의 사내가 손짓을 하고 있는데다 아까부터 레딕이 짓고 있는 미소에 불안감을 씻어냈다. 센이 자리하고 있는 구석으로 걸어간 레딕은 한숨을 내쉬며 센의 반대편 자리에 몸은 앉혔다. 선그라스를 벗는 레딕을 장난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센은 한탄하는 투로 말했다. "평범한 옷으로 입고 나오라고 했는데도 그 꼴이냐? 오면서 시선 꽤나 끌었겠다." "젠장. 평범한 옷이 있어야 입고 오지 않겠습니까. 한 시간이 넘게 미소를 짓고 있었더니 입이 얼얼해서……." 센이 킬킬거리는 사이 여 종업원이 상당히 편해진 몸놀림으로 테이블로 다가와 레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문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레딕이 순간 당혹하며 이런 카페에서 주문할 만한 것을 생각해 내려 필사의 노력을 하는 순간, 센이 자신의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커피로 하나 더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저도 한잔 더 가져다주시고요." "예." 종업원이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자 레딕은 센에게 시선을 돌리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전 커피보단 술이……." "너 아는 술 이름 있냐? 여기서는 술도 이름을 대야 가져온다고." 센의 말에 레딕은 입을 다물었다. 암흑가에서 지낸 레딕이 아는 술 이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끔씩 흘러들어온 술이 있기는 했지만 보통 맥주나 흔한 스카치 정도. 여기서 시키기엔 그런 것들이었다. 잠시 입맛을 다시던 레딕이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순간 레딕의 눈이 번뜩이며 센의 얼굴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센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뒤로 빼는 순간, 레딕의 손이 테이블 너머로 날아가며 센의 멱살을 쥐었다. "감히 제 여동생을 끌고 나가셨다 그겁니까?" "아, 하하, 레딕? 부탁인데 이성을 되찾고……." "형님 같으면 이 상황에 이성이고 뭐고 있겠습니까?" 그래도 꼬박꼬박 존대하고 있는데다 주먹을 날리지 않는 것만 해도 충분히 이성적이었다. 그 사실을 거부하지 못한 센은 쓰게 웃으며 레딕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센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레딕은 손을 풀고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센은 한숨을 내쉬고는 옷깃을 바로잡았다. 둘은 서로 입을 열지 않으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둘 모두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는 사이 종업원이 커피 두 잔을 테이블로 가져왔다. "…일단 마시자." 센의 말에 레딕은 커피를 들어올리며 입가로 가져갔다. 센도 커피를 들어올리자 레딕이 커피잔 너머로 센을 바라보며 말했다. "릴은 잘 있습니까?" "호? 인정해 준다는 건가, 처남?" 레딕의 눈이 약간 꿈틀거렸다. "형님한테 존댓말 듣고 싶은 건 아니지만……." 레딕의 말에 센은 쓴웃음을 지었다. 레딕은 커피잔을 조금 내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지금은 싸우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레딕은 질문을 끝내고는 다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고 센은 그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싸우지 않기는. 처음에는 환락가 쪽에서 지냈는데 릴에게 달라 붙는 남자들이 꽤 있어서 릴이 거의 개박살을 내놨지. 나도 너희들에겐 안되도 꽤 하니 몇 번 사람을 눕혔고. 불쌍한 녀석들이었지. 건드릴 여자가 따로 있지 릴을… 뭐, 걱정은 하지 마라. 지금 릴은 빔건도 가지고 있고 내가 비상용으로 손목의 버튼만 하나 누르면 몸 어디 부위든 손을 대는 상대를 통구이로 만들어 버리는 장치도……." 레딕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센을 바라보았다. 커피를 입에 댄 채로 굳어있는 레딕의 모습에 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둘이서 서로 싸우지 않냐는 말이었냐? 걱정 마라. 싸우지는 않고 있으니까. 릴이 임신해서 싸우는 것은 가급적……." "푸우우웃!" 레딕이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맹렬히 내뿜었다. 센은 예상하고 있기라도 했는지 순식간에 냅킨을 들어 커피를 막아내었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레딕 센의 움직임에 감동을 받는 대신 잠시 쿨럭거리다가 사나운 눈으로 센을 노려보며 외쳤다. "혀, 형님! 도대체……!" "농담이야." 레딕은 입을 다물었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딕을 마주보던 센은 피식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 바보냐? 우리가 암흑가를 나온 게 언제라고 임신이야. 그리고 아직은 세계 최고의 해커 2세를 만들 생각은 없다. 날짜도 다 계산하고 있으니 걱정 말게나, 처남. 뭐, 예상은 했지만 완벽하게 속는군, 바보 처남." 저런 얼굴로 바보 어쩌고 하기도 꽤나 힘들 것이다. 레딕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싸움은 몰라도 말, 머리로는 센을 레딕이 꿈도 못 꿀 경지에 있는 위인이었다. 센은 태연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셨고 잠시 고개를 숙인채로 가만히 있던 레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허비할 시간은 줄이는 게 좋겠죠. 저와 형님이 하려는 일, 가장 중요한 정보, 알아내셨습니까? 이게 확실해야 계획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레딕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센도 커피를 입에서 때며 진지한 눈으로 레딕을 마주보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센은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알아냈다." 레딕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센은 그런 레딕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상당히 힘들긴 했지만, 정확한 정보다. 섀도우 월드의 중심을 지키는 자, 레드 드래곤 세르페이린. 그녀는 사람의 뇌가 이용되어 만들어졌다. 그녀, 아니 그 슈퍼컴퓨터의 주축이 진짜 사람의 뇌야. 보통 일반적인 NPC들에게 이용하는 합법적인 소형 배양 뇌로는 그런 엄청난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만들기는 불가능 했겠지. 그리고……." 센이 말을 잠시 멈추자 레딕은 굳은 눈으로 센의 얼굴을 살폈다. 센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뇌는 우리 암흑가의 사람의 것이다." 레딕의 입과 손에서 살벌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만약 레딕의 손에 커피잔이 쥐여져 있었다면 순식간에 깨져나갔을 것이다. 현진의 살기에 버금가는 살기를 뿜어대던 레딕은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센은 그런 레딕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곧 나지막한 레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굽니까?" "…김지혜. 우리 암흑가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던 둘 중 한 분. 세한님의 여동생. 그분이다." "……." 레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암흑가의 사람들의 이름은 전부 부르기 쉬운 것으로 골라서 붙인, 일종의 가명, 닉네임 같은 것이다. 진짜 이름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서류상으로 이름을 알게 된 한 남매가 있었다. 김세한, 김지혜 남매. 암흑가의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진짜 이름을 가지고 있던 둘이었다. 물론 알고 있는 것은 이름뿐. 그 서류의 다른 내용은 모두 인체 실험에 관헌 것뿐이었다. 그 남매 중 세한은 암흑가의 지도자였고 유일하게 암흑가를 벗어난, 암흑가의 사람들에겐 영웅으로 인식될 정도의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사고로 죽었고, 그의 여동생 지혜는 세한이 죽은 후 부쩍 어려워진 암흑가의 생활 때문에, 리자드의 유혹에 두 번째로 실험의 재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사라지고, 가상 현실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센이 알아냈다. 센은 커피를 다시 입으로 가져가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침묵하던 센이 지나가는 듯한 말로 입을 열었다. "진에게는 비밀이다.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지." "예……."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침묵했다. 약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레딕은 거의 식어버린 커피를 한번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일은 1차 계획대로 가겠습니다." 레딕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때가 되면 릴을 보내지. 기다려라. 진은 별말 없지?" "예. 우리가 몰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믿는다고 하더군요." 센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다행이네. 반드시 성공해야한다. 진이 믿어 준다는데……." 센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그라스를 다시 쓰며 카페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센은 종업원에게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한잔만 더 마시고 릴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곳에서는 아직 해킹을 한번도 하지 않았으니 위험은 없다. 그리고 릴이 쉽게 당할 위험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는 최강의 아군이 있다. "좀 느긋하게 지내다 들어갈까." 센은 종업원이 가져다 준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젠장. 하필이면 그 분이냐. 빌어먹을." 현재 레딕은 아까와는 다르게 상당히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고 덕분에 그의 검은 복장과 그 찡그린 얼굴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주위의 공포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레딕은 현재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상당히 화가 나 있었고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리자드… 반드시 복수한다. 이번 계획만 성공하면……." 으르렁거리며 길을 걷던 레딕은 누군가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자 걸음을 멈췄다. 꽤나 정돈된 발걸음이었다. 레딕이 주먹을 꽉 쥐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 옆으로 다가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왠지 익숙한 상황이로군.' 레딕은 한숨과 함께 손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고개를 옆으로 축 늘어뜨렸다. 선아가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다만 복장이 검도복이 아닌 평복이었다. "아까부터 용건이 뭐지?" 레딕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대신 말을 걸어오자 선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윽, 예쁘다는 것, 부정을 못하겠군. 진, 이 복에 겨운 자식 같으니.' 레딕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선아가 입을 열었다. "세한, 현진이 어떤 일을 하는 건지 대충이라도 알고 싶어서요. 아니, 세한이 4개월 동안 도대체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싶……." 선아는 또 다시 엄청난 속도로 멀어져 가는 레딕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봐야했다. 레딕이 시야에서 사라지려 하는 순간, 선아는 입술을 깨물고는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레딕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범인은 절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현진은 벙찐 얼굴로 자신의 거실을 바라보았다.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는 맥주 캔과 캔커피들. 자신의 사랑스런 캔 커피들이 전멸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현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거실의 소파에 몸을 뉘이고 있는 회색 머리의 여자를 흘겨보았다. "미치겠군. 저 인간은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센에게 우리 집 키가 있었던가? 전에 들어왔을 때 인식이라도 해놨나 보군." 현진은 오랜 접속으로 인해 약간 멍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를 끝내고 나온 현진은 타월로 머리를 닦으며 소파 위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릴에게 다가갔다. "완전 제집이군, 그래. 냉방도 제대로 되고 있는데 배를 다 드러내고 있냐." 현진은 배와 어깨를 거의 드러내고 있는 릴의 모습에 혀를 찼다. 볼을 탁탁 치자 릴이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일어나. 센은 어디가고 혼자 있는 거야?" "으음……." "하아. 적어도 침대에서라도 자라고. 리일!" "우움……." 현진은 뭐라고 말을 해도 신음만 흘리며 자신의 눈을 피해 몸을 뒤척이는 릴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남자가 덮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지만……. "센이 보면 또 죽이려고 들 것 같은데……." 현진은 머리를 휘저으며 릴을 안아들었다. 마구 팔을 휘젓던 릴은 현진을 조금 불편한 쿠션 정도로 생각하기로 결정했는지 오히려 현진의 옷을 꽉 끌어안았다. 샤워를 막 끝낸 지라 커다란 반바지와 반팔티 만을 입고 있던 현진은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맥주 캔들이 위협을 가하고 있어 속도가 좀 느렸다. "우움……." "토하면 죽는다, 릴." 현진의 짜증 섞인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릴은 몸을 뒤척이려 하다가 현진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덕분에 입고 있던 티셔츠가 거의 벗겨져 갔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거나 오히려 릴의 가슴이라도 훔쳐봐야할 상황이었지만 순간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 현진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센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찰칵. 현관문이 열리며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안경을 쓴 이십대 후반의 사내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현진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여어, 릴. 나 왔… 음? 진?" 집 안을 두리번거리던 센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현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센의 눈이 릴에게 향하며 약간씩 날카로운 빛을 띠기 시작했다. 현진은 약간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센. 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이런 상황에만 찾아오는, 그런 능력이라도 있는……." "지, 지이이인!" 약 10분 후. 진은 암흑가 시절 이용하던 검은 바지를 입고 윗 통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다만 손에 복면용 검은 반팔티를 들고 아파트를 뛰쳐나와야 했다. 주영진 "하, 그거 참 스토커도 아니고 꽤 끈질긴 아가씨로군." 레딕은 투덜거리며 걷고 있었다. 약간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그래도 그렇게 전력 질주한 것도 오랜만인데." 레딕은 귀찮게 계속 쫓아오던 선안지 뭔지 하는 여자를 떨쳐버려 상당히 홀가분하다고 생각하며 암흑가의 입구로 들어섰다. 센이 정부와 어떻게 협상을 해서 입구로도 다닐 수 있게 된 암흑가였다. 물론 등록된 사람들만 다닐 수 있는 거지만. 거의 허물어진, 적어도 겉보기에는 완전 폐허인 암흑기의 입구 쪽으로 걸어가던 레딕은 무너진 벽에 기대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어라? 민 형님? 마중 나오신 겁니까?" 벽에 기대 서 있던 중년인, 민이라 불리는 암흑가의 최연장자는 한숨을 내쉬고는 등을 떼며 레딕에게 다가갔다. "그래. 혹시 실수해서 잡히지나 않았나, 걱정이 되서 나와 봤다." 민의 말에 레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뭐, 걸린다고 해도 제 실력에 잡힐 일이 없지 않습니까. 진만큼은 아니더라도 저도 실력엔 자신 있습니다." "호오, 그래?" 어깨를 으쓱거리던 레딕은 민의 시선이 자신의 뒤, 꽤나 먼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서, 설마……." 민은 이마를 짚으며 폐허가 시작되는 곳에서 두리번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선아와 그녀를 보며 실성한 듯한 웃음을 흘리는 레딕을 바라보았다. 선아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레딕을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둘에게 달려왔다. 레딕은 선아가 자신의 앞에 멈추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따돌린 줄 알았는데?" 레딕은 물론 민도 의문 섞인 시선을 선아에게 집중시켰다. 어쨌든 약간 단순한 감이 있긴 하지만 레딕은 미행을 당할 만큼 멍청하거나 실력이 낮지는 않았다. 둘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선아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복장이 너무 특이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이 근처까지 와서는 힘들었는데 전에 공원에서 암흑가라는 말을 들어서요." "……." 레딕은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보았고 민은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레딕의 복장을 살폈다. 온통 검은색 일통. 확실히 길에서 약간만 수소문 하면 쉽게 뒤쫓아 올 수 있을 만큼 튀는 복장이었다. "후우. 이런 멍청한 자식!" 곧 레딕은 혼절함과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깔끔한 돌려차기로 레딕을 쓰러뜨린 민은 귀찮다는 얼굴로 선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레딕이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선아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민을 마주보았다. "그래, 그쪽은 왜 여기에 찾아온 거지? 이 얼간이 녀석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 텐데." "혀, 현진 씨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지, 지난 4개월 동안 뭘 하고 지냈는지도……." 민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약간 김샌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민은 레딕을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그런 녀석은 모른다. 꺼져." 민의 말에 선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약간 음성을 높였다. "그런 말에 속아서 돌아갈 만큼 바보는 아니에요! 그저 잠시만 들어가서……." 선아는 민이 자신을 슬쩍 흘겨보자 말을 멈췄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저 약간 딱딱한 아저씨 같은 분위기였는데 저 눈은 정말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았다. 민은 약간 몸을 움츠리는 선아에게 코웃음을 쳐주고는 말했다. "그 일편단심은 알아주겠는데… 여긴 그쪽 같은 여자가 있을 곳이 아닌데. 그 얼굴로 여기 들어갔다간 쉽게 나오진 못할 테니 돌아가시지. 뭐, 직설적으로 말해서 언제 옷 찢기고 바닥에 눕혀질지 모르니 꺼져." 선아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가 단호한 얼굴로 민을 쏘아보았다. "내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어요. 들어가게 해줘요." 민은 선아의 손에 들린 목검을 흘낏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검도복은 입지 않았지만 목검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검도를 한다는 것을 알아낸 민은 몸을 슬쩍 돌려 선아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가소롭다는 듯한 민의 얼굴에 선아가 발끈했다. "뭐, 뭐예요!" "핫, 아무래도 현진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착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그렇게 성격이 좋지 않으니 이제 그만 꺼지시지. 그 정도 실력으로는 우리 가족의 막내도 이기지 못해."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민이었다. 선아는 약간 주춤하기는 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민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더니 레딕을 한번 걷어찼다. "레딕. 좀 이해를 시켜줘라." "예이." 기절한 줄 알았던 레딕이 대답을 하자 선아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딕은 다리를 조금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등을 튀겨 일어났다. 약간 휘어진 선그라스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레딕은 눈동자를 굴려 선아를 쳐다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레딕의 분위기에 선아가 목검을 들어올렸다. 선그라스를 가슴의 주머니에 곱게 접어 넣어둔 레딕은 목뼈를 몇 번 튀기고는 평범한 걸음걸이로 선아에게 다가갔다. "그럼, 여기가 어떤 곳인지 좀 알려드리도록 할까?" "익!" 레딕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선아의 목검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하지만 레딕은 별 표정 변화도 없이 그 목검에 왼손을 가져갔다. 선아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드는 순간, 레딕이 목검의 날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상당한 고통이 있었을 테지만 레딕의 얼굴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잠시 목검을 잡은 채로 가만히 있던 레딕은 선아가 목검을 잡아당기는 순간 오른발로 목검을 쥔 손을 위로 걷어찼다. "꺄악!" 선아가 비명을 지르며 목검을 놓쳤고 순간 선아에게 다가간 레딕은 선아의 두 팔을 뒤로 꺾고는 왼손으로는 팔을 억누르고 오른손을 선아의 목에 조였다. "아……." 어느새 완전히 무력화된 선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뒤에서 선아를 꼼짝 못하게 잡고 있던 레딕이 선아의 목을 좀 세게 조이며 얼굴의 선아의 어깨에 묻었다. "이제 자기 분수를 아시겠나, 아가씨? 섀도우 월드에서와는 다르지?" "……." 선아는 굳은 얼굴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선아가 섀도우 월드에서의 협력 문제라도 들고 나올 것으로 예상했던 레딕은 약간 감탄했다. 물론 아주 약간이었다. 레딕은 선아의 목을 조르던 손을 약간 움직여 자신의 품속에서 나이프 하나를 꺼냈다. 밝은 햇빛에 나이프가 반짝였다. 그 나이프를 선아의 옷깃에 가져간 레딕이 킬킬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여자와 싸울 때는 말이야… 우선 어떻게 옷을 찢거나 해서 먼저 벗기고 보지. 이 바닥에서 조금 지낸 여자들은 옷이 완전히 벗겨져도 알몸 그대로 싸우지만 애송이들은 몸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거든. 뭐, 덕분에 대부분이 여자 옷을 쉽게 찢거나 벗기는 법 정도는 알고 있지." "……!" 선아의 얼굴에 약간의 공포심이 드러났다. 레딕은 다시 킬킬 웃고는 나이프를 선아의 옷깃 속으로 집어넣었다. 선아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가씨는 어떨지 모르겠군. 알몸으로 집까지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는 그리 질이 좋지 않는 녀석들이 꽤 많은 곳이거든. 우선 나부터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큭큭." 나이프가 브레지어 밑으로 들어가며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자 선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공포감과 수치심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여기서 위로 들어올리기만 하면 위는 대충 다 벗겨지겠는데? 여기는 이런 곳이라고 아가씨. 그럼 내가 좋은 경험이라도 시켜주지. 크큭." 레딕이 나이프에 힘을 주자 선아의 얼굴이 공포심에 물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레딕의 뒤에서 뭔가 검은 것이 빠르게 날아왔다. "죽어 이 자식아!" "크엑!" 민 이상의 깔끔한 돌려차기에 얻어맞은 레딕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덕분에 레딕에게서 풀려난 선아가 긴장이 풀려서인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레딕이 바닥에 풀썩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사이, 목 부분이 비이상적으로 넓은 검은 반팔티를 입고 있는 현진이 약간 귀찮다는 표정으로 선아와 레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헉헉거리는 선아에게서 시선을 돌린 현진은 레딕에게 다가갔다. "아주 싸이코 다 됐군 그래. 섀도우 월드에서도 모자라 이젠 현실에서도 그 지랄이냐?" "크윽, 진?" 레딕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현진을 올려다보았다. 한숨을 푹 내쉰 현진은 다시 몸을 돌려 선아에게 다가가 일으켜 주었다. 선아가 놀란 얼굴로 현진의 얼굴을 살폈다. "세, 세한? 현진?" "아아. 간만이군. 음?" 선아의 몸을 훑어보던 현진은 선아의 배 부분에 피가 조금 배어나오자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레딕이 나이프를 놓치면서 선아의 몸에 상처를 낸 모양이었다. 선아의 옷 아래 부분에 뭔가가 있는 듯이 튀어나와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현진은 품속에서 나이프를 꺼내서 살짝 휘둘렀다. 선아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세한은 별 신경 쓰지 않으며 살짝 잘린 선아의 옷에서 레딕의 나이프를 끄집어 냈다. 그리고 잘린 옷 사이로 나이프에 베인 상처를 발견한 현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괘, 괜찮아요." 선아가 얼굴을 붉히며 속살이 내비치는 부분을 손으로 감쌌다. 세한은 선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레딕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레딕이 찌푸린 얼굴로 현진을 올려보았다. "너무 하잖아, 진." 레딕의 투덜거림에 현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허, 이 인간아. 연극도 정도껏 해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야?" "민 형님의 명령이었다고. 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미안하지만 나도 좀 지나쳤다는 생각인데, 레딕." 어느새 다가온 민이 무릎을 굽혀 레딕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레딕은 자신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민을 잠시 주시하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현진도 민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레딕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너 진짜로 선아 옷 찢으려 그랬지?" "무슨 소리를." 완강히 거부한다. 현진은 빙긋 웃었다. "분명 팔의 움직임이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찢을 것 같았는데?" "…난 칼 쓰는 게 전문이라고. 브레지어나 끊고 놔주려 그랬어. 그 정도면 다시는 오지 않겠다, 싶어서……." 현진은 무릎을 받침대로 이용해 턱을 괴고는 레딕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레딕은 인상을 팍 찡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레딕이 몸을 터는 사이 민과 현진과 몸을 일으키고는 혀를 찼다. "여, 연극이었다고요?" 갑자기 들려온 선아의 목소리에 셋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셋의 시선을 한눈에 받게 된 선아가 잠시 주춤거렸다. 그 모습에 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쫓아내려고 연극한 것 뿐, 이 둘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 걱정 마시길. 어쨌든 치료는 해서 보내드릴 테니… 레딕, 안으로 안내해." "뭐?" "에?" 레딕과 선아가 동시에 비명 같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현진은 그저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민 형님과 선물이나 사 들고 가야겠다. 확실하게 사과해, 레딕." "크윽, 도대체 넌 왜 여기 온 거냐?" 선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고 레딕은 이를 갈며 현진에게 질문했다. 현진은 쓰게 웃고는 대답했다. "센이 쫓아냈어. 빌어먹을." 레딕이 황당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네 집으로 가 있었냐?" "쳇, 접속을 끊고 나와 보니 릴이 있더라." "안 봐도 뻔하군." "그렇겠지. 민 형님, 가시죠. 레딕, 안으로 안내해 줘." "자, 잠깐!" "곧 가지." 현진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고 민이 레딕에게 저리 가라는 듯한 손짓을 해 보이고는 현진에게 다가갔다. "어이, 자, 잠깐! 크윽, 썅!" "자, 잠깐만요, 현진! 아야야." 현진과 민은 자신들을 붙잡으려 해도 입은 타격치(?)들이 있어 쫓아오지 못하는 레딕과 선아를 무시하며 암흑가 근처의 상가지대로 향했다. "왜 암흑가를 보여주겠다는 거지?" 말없이 걸어가던 민이 질문했다. 현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한번쯤 암흑가를 돌아보면 정나미가 떨어져나가겠죠. 아마 안을 보여주는 게 다시는 안 오게 할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쫓아내면 반항심 같은 거로라도 더욱 들어오려 기를 쓸 겁니다." 현진의 말에 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하필 레딕인가?" "그게 더 여기에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제 경험에 의해 산출해낸 답입니다." "후후." 현진과 민은 낮게 웃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처음 현진이 암흑가에 왔을 때, 레딕 덕분에 꽤나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다. 상당히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물론 암흑가 자체가 폐허인지라 썰렁한 분위기라면 전 세계 어디에서도 상위권을 다투는 곳이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그 폐허로써의 싸늘함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 "……." 두 번의 돌려차기에 가격당해 쑤시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짚으며 가끔씩 비틀거리며 폐허를 걷고 있는 레딕. 그리고 피가 조금씩 배어나오는 옆구리를 역시 오른손으로 감싸고는 인상을 약간 찡그리고 걸어가고 있는 선아. 레딕이 앞에, 선아가 뒤에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참으로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휘익! 죽이는데?" 암흑가 내부의 거주지에 거의 다다를 무렵, 뭔가 재밌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딕은 무시하며 계속 걸어가고 있었지만 선아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의 콘크리트 산 위에 레딕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사내들 셋이 선아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 아가씨?" "혹시 돈이라도 벌려고 왔나? 그럼 내가 두툼하게 쥐어줄 테니 어때?" 깔보는 듯한,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세 사내의 말에 선아는 고개를 돌려 셋을 외면하고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더미 위에 누워서 고개만 내밀고 있던 세 사내는 서로를 향해 뭔가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다 그대로 뛰어내렸다. 선아는 갑자기 자신의 옆에 그 사내들이 내려서자 몸을 움츠리며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반팔 티들을 입고 있었는데 덕분에 드러나는 상체의 굴곡과 얼굴과 팔에 꼭 하나씩은 존재하는 흉터들이 이 셋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된 선아는 긴장한 얼굴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셋 중 한명은 좀 어려보이는, 약간 순진한 느낌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다른 둘의 마이너스적 요소를 중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 무슨 일로 여길 들어오셨나, 아가씨? 여긴 좋지 않은 곳인데?" 약간 장난기가 묻어나는 미소를 지은 사내가 선아에게 질문했다. 분명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선아는 한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미소를 짓고 있는 손에서 좀 작은 나이프 하나가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겁먹은 듯한 선아의 행동에 재미있다는 듯 다른 사내가 선아의 뒤로 돌아가며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야, 죽이는데? 진짜 예쁘지 않냐?" "킥, 그러네. 그런데 옷 꼴이… 레딕 형님이 벌써 건드린 건가?" "에? 그럼 우리도 그래도 되려나?" "그, 그랬다간 혼날 것 같은데요?"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서로 킥킥거리는 세 사내를 보며 선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어도 이미 자신이 이들 중 하나도 이기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선아였다. 하지만 셋이 음흉한 표정으로 자신을 계속 훑어보자 이를 악물었다가 소리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이! 그만 찝쩍대고 솔에게 데려가! 손대면 죽는다!" 선아가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좀 떨어진 곳에서 레딕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내는 움직임을 딱 멈추고는 서로를 보라보았다. 방금까지와는 다른 진지한 표정에 선아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곧 다시 아까와 비슷한 상태로 돌아간 사내들 중 나이프를 가지고 놀고 있는 사내가 마주 고함을 질렀다. "레딕 형님! 중요한 분입니까!?" 곧 레딕의 대답이 들려왔다. "진의 여자다!" 선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을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며 거의 창녀 취급까지 하던 사내들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자신을 정중히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진지하고 정중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잠시 당황하던 선아는 아까 레딕과 민의 경우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게 이 사람들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었다. "음? 혹시 상처가 아프신 겁니까?" "아,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잠시만 참으세요." "……." 하지만 갑자기 생겨난 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친절은 참으로 거북한 것이라 생각한 선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딕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처음 보는 셋에게 둘러싸여 있기는 했지만 선아는 별로 위협이나 불안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나마 안면이 있던 레딕이 사라졌지만 이 셋의 태도가 너무도 정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현진의 이름이 나온 다음에 분위기가 변한 것 같은데?' 아까 암흑가의 입구에서의 대화를 통해 현진이 진으로도 불린다는 사실을 대강 알게 된 선아는 이 사내들의 태도와 분위기가 변한 것이 현진의 이름이 나온 다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은 너무도 어색하다는 생각에 선아는 약간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아, 저기……." "옛! 무슨 일이십니까?" 셋 중 가장 어려보이는 사내가 재깍 고개를 돌렸다. 그 재빠르고도 완벽한 반응에 선아는 잠시 주춤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도 셋 중에 가장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었기에 말할 용기가 나는 선아였다. "아, 그게… 아, 아까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순간 절도 있게 걸어가던 셋의 움직임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선아의 질문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내가 이상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 하하. 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진님과 친분이 있으신 분이라고는 상상을 못해서… 원래 처음 보는 사람이 여길 들어오면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라서요. 멋모르고 들어온 민간인인지, 아니면 전문적인 싸움꾼이나 킬러인지 알아보는 거죠." "키, 킬러요?" 진님이라는 말에 뭔가 이상한 분위기라고 생각하던 선아는 뒤이어 쏟아지는 전문적 싸움꾼이니 킬러니 하는 말에 놀란 듯 입을 약간 벌렸다. 그런 선아의 반응에 세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멍하니 서 있는 선아를 내버려 두고 서로 눈으로 뭔가를 대화하듯 눈짓 등등의 방법으로 뭔가 의사를 전달하던 사내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곧 선아에게 친절히 대답해 주던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선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저기……." "음? 야, 소마!" 갑자기 나이프를 들고 있는 사내가 말을 끊고 나섰다. 다급한 목소리에 다른 둘이 그 사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왜 그래, 덴?" "뭘 본 것 같은데. 저쪽이다." 덴이라 불린 사내는 한쪽을 가리켰다. 콘크리트 더미 여러 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는 지점이었다. 소마라 불린 좀 어린 사내와 다른 한명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셋이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에 잠겨들자 선아는 당황하며 주위를 살폈다. 물론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선아가 어떻게 이름을 알게 된 소마라는 거의 소년 급의 사내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세 사내가 맹렬한 속도로 콘크리트 더미 위로 달려 올라갔다. 급한 경사와 울퉁불퉁한 지형을 고려할 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젠장!" "아악! 귀찮아!" 선아는 순식간에 콘크리트 더미 꼭대기로 올라선 세 사내가 짜증을 부리며 욕설을 내뱉자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셋은 선아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저 자식들은 어디 개구멍이라도 뚫어 뒀나. 왜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행차야?" 손에서 나이프를 계속 움직이고 있는 사내, 덴의 말에 나머지 둘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저 멀리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다섯 명의 검은 무리를 살피던 소마가 입을 열었다. "크넥스 그룹 녀석들이죠? 우리가 한 짓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쳇! 그건 그렇다 쳐도 지금까지 암흑가에 들어온 게 몇 번인데 아직도 저기냐? 우리 사는 곳 찾으려도 저렇게 조금씩 보내는 것도 지겹지 않나?" 덴의 사나운 말에 소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암흑가와 원수지간에 있는 곳에서 한꺼번에 쳐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암흑가라고 해도 암흑가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정확히 암흑가 내의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적의 위치를 모르면 몇 명을 보내도 이기기 힘들다. 때문에 다른 곳에서 보내오는 깡패들은 대부분 암흑가 탐색을 위한 소수의 인원이다. 10명을 넘을 때가 그리 많지 않을 정도. 가끔씩은 10명이 넘는 대인원이 공격해 들어오는 때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저들이 암흑가에 들어온 이유도 암흑가 정찰을 위해서 일 것이다. 일차적 목표는 암흑가의 거주지역을 알아내라는 것이겠고. 하지만 실제로는 암흑가 전체가 거주구역이라 할 수 있다. 발전기를 설치한 곳이기만 하면 어디서 살아도 상관 없기 때문에 한 곳이 들키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기 때문에 저들은 헛고생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셋이 히히덕거리며 점점 가까워지는 검은 무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콘크리트 더미를 모두 올라온 선아가 헐떡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셋 모두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 아차. 이 분이 있었지." 잠시 선아의 존재를 잊고 있던 셋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떻하지? 둘이서 막을 수 있겠어?" "힘들 텐데. 셋이서 싸워도 시간을 끄는 게 고작일 수도 있다고." "그럼 이분은?" 뭔가 자신 덕분에 이들이 곤경에 처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선아는 당황한 얼굴로 셋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셋은 한곳에 모여 뭐라고 속닥이기 시작했다. 뭔가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선아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의논을 끝낸 듯 소마가 선아에게 다가왔다. "아, 저기, 죄송하지만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예?" 잠시 기다리라는 말에 선아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소마는 고개를 긁적거리더니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검은 무리를 가리켰다. "저 사람들과 약간의 의견 조율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소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선아는 약간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선아가 무슨 말을 꺼내지 못하고 버벅거리자 소마가 약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셔도 괜찮고 먼저 가셔도 괜찮습니다. 아까 가더 길을 따가 가시다 보면 특히 높은 콘크리트 더미가 있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가시다 보면 장이라는 분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빔건을 가지고 놀고 있을 테니 알아보기는 쉬우실 겁니다." '비, 빔건을 가지고 놀아?' 선아가 속으로 경악에 찬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알지 못하는 소마는 그저 싱긋 웃어주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다른 둘은 벌써 콘크리트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다섯 명에게 당당하게 걸어가려 하는 세 명을 보며 선아는 다급히 외쳤다. "세, 셋이서 가는 거예요?" 선아의 외침에 소마만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아마도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원군도 올 것 같고요. 민 형님이 레딕 형님 마중을 나가셨는데 아직 오지 않으시고 있으니 곧 오시겠죠. 민 형님이면 저 다섯쯤은 금세 거꾸러뜨리실 테니까요. 뭐, 오시지 않아도 괜찮겠지만요." 소마는 말을 마치고는 이미 거의 내려간 둘을 급히 뒤쫓았다. 선아는 아직도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다섯의 검은 무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세 사내를 새삼스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셋이서 다섯을 상대하려는 것도 놀랍지만 별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 민이라는 중년인까지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이런 일을 많이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어떻하지?" 선아는 뒤의 길과 앞쪽의 세 사내를 번갈아 살폈다. 곧 잠시 지켜보자는 결론을 내린 선아는 점점 가까워져 가는 두 무리를 주시했다. 곧 저쪽에서도 덴, 소마 일행을 발견했고 잠시 머뭇거리던 검은 무리는 자신들의 수가 많다는 것 때문인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소마 일행에게 다가갔다. 햇빛에 뭔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카, 칼?" 선아는 검은 사내들의 손에 들린 것이 나이프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소마 일행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검은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선아는 왠지 두려운 기분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소마 일행은 나이프에 찔린 듯 쓰러지거나 비틀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검은 무리를 두드려 패고 있을 뿐. "아……." 선아는 셋이서 다섯을 상대로 오히려 유리하게 싸우고 있는 소마들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래도 수가 적어서 인지 싸움은 계속 이어졌고 선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걱정은 없어 보였다. 소마의 말대로 길을 따라 가니 상당히 높은 콘크리트 산이 나타났고 선아는 거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걸어갔다. 길이 없는, 말 그대로 완전한 폐허의 모습에 잠시 주춤하던 선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속 걸었다. 약간 불안해하며 걸어가던 선아는 좀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손에 뭔가를 들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빔건이었다. "음?" 빔건을 말 그래도 '가지고 놀고 있던' 사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선아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뭔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전 장이라고 합니다. 안내해 드리죠." "예? 아, 예." 장은 그대로 몸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갔고 선아는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얼마 걷지 않아 그나마 조금 멀쩡한 건물들이 남아있는 곳이 나타났다.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서 낮은 울림과 함께 발전기로 보이는 것이 돌아가고 있었다. 곳곳에 모여서 나이프 등을 가지고 놀고 있던 몇몇이 선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장을 뒤따르던 선아는 상당히 파격적인 주거지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질서 정연한 보통 도시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상당히 열악해 보이는 환경. 장은 위가 날아가 복도의 양 벽만 남은 곳을 통해 어느 방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선아가 그 방문 앞으로 다가오자 문을 열고는 선아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어, 뭐야?" 선아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어떤 여자의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탁자에 앉아서는 뭔가를 먹고 있었다. 선아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거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시 선아를 살피던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혹시 그 선안지 하는? 아, 잠깐 기다려." 그 말을 끝으로 그 여자는 다른 문을 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선아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초면에 반말을 들었다는 분노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곧 정신을 수습한 선아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꽤나 큰 방이었다. "뭐지? 죽인가?" 여자가 앉아있던 탁자에 다가간 선아는 아까 그 여자가 먹고 있던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두 개의 철제 그릇이 놓여 있었는데 두 그릇 모두에 뭔가 하얀 죽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뭔가 떠있는 것도 같았다. "뭐지? 쌀인가? 하얀 걸 보니 그런 것도 같은데……." 호기심이 동한 선아는 그 여자가 먹던 것이 아닌, 새 그릇을 살폈다. 아무래도 손댄 흔적이 없는 게 따로 주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선아는 이상하게 생긴 숟가락과 들어 손댄 흔적이 없는 그릇을 각각 한손에 들고는 죽을 조금 떠 입에 넣었다. "으음?" 아무런 맛이 없었다. 약간 씁쓸한 맛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거의 맹 맛. 선아는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숟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죽이 담긴 그릇을 눈에 가까이 가져가 유심히 살폈다. 여전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치료하라고요?" "그래. 그럼 남자 새끼를 데려다가 저런 미인을 건들라고 하리?" "그건 또 그러네." 말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레딕과 아까 방에서 나간 여자였다. 레딕이 선아를 발견하고는 탁자로 다가왔다. "이 여자는 소라라고 하지. 치료해줄 테니 앉아." 소라는 손에 들린 구급함을 흔들었고 선아는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곧 소라가 다가와서 피가 묻어나는 부분을 들쳤다. 선아와 소라의 반대편에 앉은 레딕이 탁자 위의 죽을 살피고 있었다. 소라의 그릇을 바라보던 레딕이 선아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는 소라에게 말했다. "솔, 내건?" 소라는 솔이라는 말에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들어 탁자 위를 살폈다. "어라? 분명 있었는데?" 둘이 자신이 들고 있는 죽에 대해 얘기하는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선아가 레딕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아, 미안해요. 뭔지 궁금해서. 죽인가요?" 선아가 내미는 그릇을 받아들고 탁자에서 숟가락을 집어든 레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소라가 선아의 상처에 뭔가를 들이부었다. "아얏!" 갑작스런 통증에 선아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소라는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소독약이야. 레딕의 나이프가 워낙 예리한 거라 깨끗이 잘렸네. 소독하고 약간만 손질하면 흉터도 안 남겠는데. 꿰맬 필요는 없겠네. 아프면 레딕하고 얘기나 하던지." 역시 소독약은 소독약이라 상당한 고통을 느낀 선아는 그릇에서 죽을 퍼먹고 있는 레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그건 뭐죠? 죽인 거 같은데……." 선아의 질문에 레딕은 고개도 들지 않고 계속 죽을 퍼먹으며 대답했다. "이거? 음식 찌꺼기를 사다가 옥수수랑 같이 갈아서 삶은 거야." "예!?" 선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레딕은 그런 선아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여긴 좀 가난한 곳이거든. 진 녀석 때문에 팔자가 좀 피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식은 이거라서. 요새는 음식 찌꺼기도 깨끗해서 먹을 만 해. 소독 약품도 넣고……." 선아는 떨리는 눈으로 탁자 위에 놓인 그릇을 바라보았다. 선아는 토하고 싶다는 생각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레딕이 웃음을 터뜨렸다. "킥킥. 그러고 보니 진 녀석, 여기 처음 왔을 때 이걸 먹고 며칠 쓰러져 있었지? 이건 외부인이 먹으면 별로 좋은 게 아니니 먹을 생각은 말라고. 큭, 진 녀석, 그때 참 재밌었는데 말이야. 요새는 한 그릇 정도는 먹어도 별 반응이 없던데." 선아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조, 조금 먹었는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레딕은 선아의 얼굴이 창백해 진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깜박이다가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소라에게 말했다. "좀 살살 하지? 진 녀석이 시끄러우면 어쩌려고?" "살살 하고 있어요!" 소라의 앙칼진 외침에 레딕은 어깨를 으쓱했다. 선아는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그 하얀 죽을 아무렇지도 않게 퍼먹고 있는 레딕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 선아의 시선을 눈치 챈 레딕이 고개를 갸웃했다. 레딕은 잠시 멀뚱히 선아를 쳐다보더니 뭔가를 깨달은 듯 한손으로 그릇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선아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레딕이 던진 것을 받아든 선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초콜릿?" "아, 진이 준 돈으로 사온 거니 걱정 말고 먹으라고." 선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초콜릿 바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속이 울렁거려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때 소라가 선아의 옆구리를 탁 치며 몸을 일으켰다. "끝. 며칠 있으면 대충 낫겠지. 며칠은 샤워 금지. 간지러워도 긁지 말 것. 며칠 있다 아프지 않으면 붕대 풀어도 상관없어." 선아는 소라가 친 덕분에 찌릿찌릿 밀려오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소라는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 상처에 아파하는 걸 보니 왠지 재밌는데? 똑같은 외부인이던 진은 살이 완전히 갈라져도 비명하나 안 지르던데. 역시 격이 다른 건가?" "진이 외부인이냐? 거기다 그 자식은 완전 괴물이라고." 레딕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소라는 반대 의견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자리에 앉아 죽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선아는 현진에 대해 생각하다가 갑자기 배와 머리가 동시에 합동 공격을 가하자 눈을 찡그렸다. '아아. 역시 그걸 먹어서 그런 건가?' 선아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탁자 위를 살폈다. 왼쪽 끝에 무슨 차나 주스 정도로 보이는 것이 담긴 찻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찻잔 옆에 놓인 거꾸로 된 다른 찻잔과 도자기 주전자가 그녀의 추리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거라도 마셔야겠다고 결정한 선아는 몸을 일으켰다. 찻잔은 좀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어맛?" 찻잔을 손에 쥔 선아는 몸을 비틀거렸다. 왠지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선아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몸을 일으켜 찻잔을 집고는 비틀거리자 레딕과 소라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레딕이 선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왜? 목이라도 마른 건가?" "아, 속이 좀 울렁거려서……." "음? 설마 이거라도 먹은 거야?" 선아의 대답에 소라가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선아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방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여러 사람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강한 피비린내가 확 풍겨오자 선아가 얼굴을 굳혔다. "솔! 긴급 상황!" 선아는 익숙한 목소리에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검은 옷을 벗어 알몸인 현진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칼에 베인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다지 깊어 보이지는 않았다. 조금 베인 정도. 하지만 현진의 상체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진? 그 꼴이 뭐냐?" 별 놀란 기색도 없이 장난스럽게 질문하는 레딕의 행동에 선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그녀는 기절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현진의 꼴은 약과였다. 곧 소마 일행 셋이 피를 흘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검에 베인 듯한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 피를 흘리면서도 신음을 흘리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뿐. 아무래도 현진의 상체에 묻은 피의 출처는 이 셋인 모양이었다. "젠장. 소마들이 다섯하고 싸우고 있기에 내가 가세했는데, 갑자기 다섯이 더 튀어나오더라. 그 것도 세 놈이 장검을 들고. 어디서 그런 일본도들은 구해가지고… 젠장. 덕분에 이 꼴이다. 뒤처리는 민 형님이 맡았다. 솔, 치료 좀." "아아, 정말. 하루라도 쉴 날이 없어." 소라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레딕은 낮게 킥킥거리고는 계속 죽을 먹었다. 현진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검은 티로 피를 닦으며 탁자로 다가왔다. 그리고 소마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중얼거리며 문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소라가 그리로 다가갔다. 그런 일상적이고도 태연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아는 혼란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섀도우 월드 속도 아니고 현실에서 이런 꼴들을 하고도 태연하고 웃기까지 하는 이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섀도우 월드 속에서 피냄새라면 꽤 맡아본 선아였지만 현실에서의 피냄새는… 정말 지독했다. 탁자로 다가오던 현진이 선아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아무래도 좀 충격이었나? 안색이 꽤 창백한데?" "피냄새가……." 선아의 말에 현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너무 충격을 준 게 아닌지 후회하는 현진이었다. "아, 맞다! 너 이 죽 먹은 거냐?" 레딕이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듯 손뼉을 짝 치며 선아에게 질문했다. 레딕의 말에 현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설마 선아에게 그 죽을 먹인 거냐?" "뭐? 아니, 난 아니야!" 레딕의 단호한 부정에 현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선아가 머리를 휘휘 저으며 손에 들린 찻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현진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자, 잠깐! 속이 안 좋더라도 그건 절대 마시면……!" 현진의 제지에도 어지러움과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던 선아가 찻잔에 든 '보리차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들이켰다. 현진은 물론 레딕, 소라, 소마 등등 모두의 눈이 크게 확대되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풀썩. 선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레딕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도자기 주전자를 바라보았다. 저 찻잔에 든 액체는 암흑가의 사람들이 싸움에서 엄청난 상처를 입고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 싶을 때, 마시고 기절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구비해둔 스피리터스라는 알콜 96%의 최강 독주였다. 물론 그대로 마시면 즉사도 가능한 독주이기 때문에 희석해 둔 것이었는데… 그래도 암흑가 사람들도 한잔을 한번에 들이키면 그대로 뻗어버리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 이런……." 현진은 적어도 반잔 정도는 비운 것으로 보이는, 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선아를 보며 신음을 흘렸다. 현진을 제외한 방안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보통 암흑가에서 마시는 술에 비해 엄청나게 비싸긴 하지만 희석 시키면 양이 확 불어나기 때문에, 또 혹시 죽더라도 비싼 술 마시고 죽어보자는 생각에서 구비한 스피리터스. 현재 저 술을 구입한 것을, 그리고 약 한 시간 전에 희석 시킨 덕분에 술병이 아닌 저런 주전자에, 그리고 하필이면 찻잔에 저 끔찍한 술을 부어둔 것을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는 레딕 일동이었다. "으아아! 이 여자는 어떻게 스피리터스를 물로 착각하는 거야? 그냥 가까이만 있어도 알콜이 확 풍길 텐데." 내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레딕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걸 조금 먹은 거 같은데. 너도 겪어 봤겠지만 이거 먹으면 머리가 좀 맛이 가기도 하니까." 소마들은 멍하니 선아를 바라보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착실히 치료를 하고 있는 소라가 상당히 침착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선아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지? 집으로 데려다줘야 하나?" 레딕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살인 누명이라도 쓰는 거 아냐? 거기다 이런 미인을 술이 완전 절게 해서 데려가면… 거기다 옷에 피도 있지. 사생결단 아니면 결혼이다." "…망할." 나는 이마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한번 여기가 어떤 곳인지 느껴보라는 의미에서 들여보낸 거였는데 설마 스피리터스를 마시고 기절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기에서 간호라도 해야 하나?" "여기가 외부인 치료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젠장. 저걸 저만큼이나 마셨으니 적어도 하루는 갈 텐데? 어쩌면 이틀……." "너희 집에 데려가지 그래?" "미쳤냐?" 아무래도 하루 이상 기절해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옷 갈아입히고 씼기는 것이 난감한데. 하지만 레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희 집에 센하고 릴이 있다며. 릴이라면 최고의 의사 아니냐." "아, 그렇지." 손바닥을 탁 내리치고는 반팔 티를 뒤집어썼다. 피가 묻기는 했지만 검은 옷이라 별 티는 나지 않았다. 센이나 릴은 언제 갈지 모르는 인간들이니 당장 출발해야한다. "솔. 혹시 약 있어? 저걸 먹었다면 좀 곤란한데." 탁자 위의 그릇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소라 대신 레딕이 구급상자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게 던졌다. 이건가? 약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선아를 일으켰다. 축 늘어져 있어 상당히 힘들었다. "도와주마." 레딕이 거들어 간신히 선아를 등에 업은 나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깨는 괜찮겠냐?" "릴에게 부탁하지." "쯧. 연락 기다리마." "그래." 나는 레딕에게 손을 힘겹게 흔들어 주고는 밖으로 나섰다. 소마들의 인사가 들려왔다. 흐으. 그나저나 이 여자를 집까지 데려가려니, 미치겠군. 그래도 우선은 빨리 가고 봐야지. 릴도 상태가 안 좋았으니 벌써 떠났을 가능성은 낮다. 약간 어둑어둑 해진 덕분에 어느 정도 드러나기 시작한 거리의 야경이 빠르게 뒤로 쳐지고 있었다. "후우." 나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쿠션에 편하게 몸을 기댄 나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정말 죽은 듯이 기절해 있는 선아를 흘깃 바라보았다. 선아 정도의 미인이 약간 찢어진 옷에 술에 완전히 절어 있다. 오해 받기 딱 좋은 차림새로군. 그보다는 내가 이성을 지키기도 힘든데. 무심이로다. 나와 선아가 타고 있는 것은 무인 택시였다. 운전수 없이 자동 운전으로 목적지로 이동하는 이동수단. 현재 바이크를 세워둔 곳까지만 타고 가려고 잡아타고 있었다. 내가 암흑가에 들락거리는 것은 반드시 감춰야할 일이라 바이크는 암흑가에서 꽤 떨어진 곳에 세워뒀고, 그곳은 평소 나 혼자라면 뛰어서 3, 40분이면 가는 거리지만 선아를 업고는 죽어도 가기 싫은 거리였다. 후우. 내 피 같은 돈이 꽤나 날아가겠군. -도착했습니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조용히 들려오는 미성에 선아를 붙잡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문을 닫자 창문 밑에서 카드가 튀어나왔다. 카드를 회수하자 택시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쯧. 왠지 삭막하단 말이야. 목소리는 좋은데. 삐삐삐. 내가 투덜거리는데 뭔가가 약하게 울렸다. 핸드 메신저였다. 나는 선아를 추스르며 메신저를 확인했다. 익명의 메시지 하나. 익명? -접니다. 상어들을 잠재웠습니다. 동시에 상어들의 자세한 숫자와 종류를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의 조언을 바랍니다. 아무래도 저로써는 이 많은 상어들을 다루기가 힘들어서요. 한번 만나 뵙고 싶군요. 으음. 항상 만나던 곳이 좋을 것도 같긴 한데 이번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갈 겁니다. 그래서 장소는… 상어들을 처음 구입한 곳으로 했으면 합니다. 마침 가기로 한 사람이 8시 정도에 그곳에 있을 것 같다고 했으니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되지 않으신다면 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 나간 사람은 여잡니다. 보시면 제가 보낸 조수라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여자?" 왜 직접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낸다는 거지? 아, 눈을 속인다는 건가. 혼자서 너무 돌아다니면 주의를 사기 쉽겠지. 그래도 리자드 내부의 눈을 피했다니 다행이군. "여자라……." 누구려나. 척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잠시 인상을 썼다가 고개를 저었다. 8시면 바로 가는 게 좋겠군. 상어들의 숫자와 종류를 파악했다는 것은 리자드 내부에서 암흑가로 손을 뻗어 사람을 직접 이용하는 등의 짓거리를 하는 사람들의 신상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리자드 내부에서도 섀도우 월드에서 일어나는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꽤 많다. 알고 있으며, 직접 실행한 사람이 훨씬 적은 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일반 사원들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쨌든 가야겠지." 나는 바이크를 2인승으로 변환시키고는 선아를 앞에 태우고 내가 뒤에서 껴안듯이 품에 안았다. 안전장치도 걸고. "가볼까." 상어들을 처음 구입한 곳은 몇 곳의 접선 지역 중에 11구역에 위치한 작은 공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원의 동쪽 호랑이 조각상이 있는 곳의 벤치. 몇 번 이용하지 않은 곳이다. 30분 정도 달려 공원에 들어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이라 그런지 별로 사람이 없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가끔씩 눈에 띠일 뿐. 그나마 그 호랑이 상이 있는 곳은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다. 이 공원 안에서는 바이크를 타는 것이 허가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공원 안으로 바이크를 몰았다. 산책을 하던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내가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려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 같은데? "하핫. 어이, 친구. 잠든 여자를 데리고 뭘 하려고 그러나?" "하하하하!" 빌어먹을. 누가 네놈 친구냐? 공원 안이라 속도를 줄이고 있던 나는 말을 꺼낸 녀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놈이 움찔 떠는 것을 확인한 나는 코웃음을 쳐 주고는 속도를 좀 높였다. 선아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 충분히 공감이 가기는 하는군. 나도 멋모르고 스피리터스를 마셨다가 하루 종일 쓰러져 있었으니까. 호랑이 조각상이 있는 곳은 둥그런 공간에 가운데에 조각상이 있고 그 조각상을 벤치 여러 개가 둘러싼 모습이다.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는 출입구 역학의 길 하나. 아마 위에서 보면 줄에 매달린 풍선 모양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출입구 역할을 하는 길이 단 하나뿐인데다가 분수 같은 것도 아니고 호랑이 조각상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어찌 보면 썰렁하고 삭막한 곳이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하나뿐인 출입구인 작은 길을 통과하던 나는 조각상이 있는 둥근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이크를 세웠다. 혹시 모르니 이쯤에 세워두는 것도 좋겠지. 안전장치가 있으니 잃어버릴 위험은 없고. "그런데 이 여인네는 어쩐다지?" 나는 선아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안정장치가 있어서 바이크에 타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겠지만 정신도 차리지 못해서야 바이크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선아를 품에 안았다. 나 혼자서는 등에 업기도 힘들군. 그리고 품에 안는 게 보호하기도 쉽다. "하아, 내 신세야." 나는 탄식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라?" 호랑이 상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자 고개를 갸웃했다. 8시 넘었는데? "허위 정보였나? 하지만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잠시 당황하며 주위를 살피던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오른쪽에 위치한 벤치 위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서류 봉투로 보였다. "음?" 주영진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벤치로 다가갔다. 확실히 서류 봉투였다. 그리고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명함 한 장. '(주)리자드. 섀도우 월드 운영 기획부. 개발과 과장 신대관.' 신대관. 초연 씨의 아버지인 강도훈의 바로 밑에 있던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리자드 정도의 대기업에서 과장 자리를 꿰찰 정도로 실력과 수완이 있는 사람. 그리고 리자드 내부에서 내게 협력하는 조력자. 레딕은 전에 센이 이 사람의 컴퓨터에서 리자드의 악행에 관한 정보가 줄줄이 쏟아져 나와 주범 중 하나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정보도 이 사람이 리자드가 행한 일을 파헤치면서 모아놓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증거로써는 사용하기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 스스로 조금씩 모아 정리해 뒀을 뿐인 자료라 리자드에서 발뺌하면 씨도 안 먹힌다. 나는 선아를 벤치에 앉히고는 서류 봉투 안을 살폈다. 안에는 서류 몇 장과 투명한 케이스에 담긴 칩 몇 개가 들어있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확인해 봐야겠군. 스륵. 봉투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낸 나는 한번 훑어보았다. 간단한 신상명세서. 아무래도 거물급들의 이름만 적어둔 모양이었다. 그냥 봐서는 어떤 기준으로 뽑은 건지 알기 힘들었다. 하긴, 그래서 이렇게 프린트한 거겠지만. 이게 어떤 정본지 미리 듣지 않았다면 알기 힘들겠다. 그리고… 초연의 아버지, 운영 기획부의 강도훈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신대관 그 사람이 우리에게 협력하고 있는데 그의 직속상관이 리자드의 더러운 짓거리에 동참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지. 젠장. 이거 미치겠군." 이래서야 내가 전에 주먹 휘두르고 난리 핀 일이며 초연에게 대한 일들이… 지금까지는 리자드 내에서 확실한 아군은 신대관 이 사람 뿐이었고 그 사람도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걸 위안삼고 있었는데……. "흐흐. 이래서야 빼도 박도 못하겠군." 앞으로 어떻게 한다지. 초연도 아직은 때가 아니니 해서 만나지 않고 있었는데. 하긴, 신대관 이 사람 외에는 내가 리자드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지 않는 게 좋지. 그런데……. "왜 이것만 있는 거지? 설마 이 중유한 걸 그냥 놓고 갔을 리는 없는데?" 내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사이, 벤치 뒤쪽의 나무들 사이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자갈이라도 밟은 듯한 소리. 그리고 동시에 약하게 느껴진 기척. 나는 품속으로 손을 가져가 빔건을 쥐고는 벤치 뒤로 돌아갔다. 이 나문가? 나는 나무에 빔건을 가져다대며 중얼거렸다. "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계신 모양인데, 나오지 않으면 이 나무와 사이좋게 꿰뚫릴 거다." 내 협박에도 잠시 간은 조용했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려는 사이, 누군가가 나무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긴 머리카락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여자 같았다. 그 사람이 보낸 연락원인가? 그런데 왜 숨어……. 여자가 모습을 다 드러내자 나는 눈을 부릅떴다. 갈색 생머리에 약간 순진해 보이는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빌어먹을. 그 인간은 무슨 생각으로 이 사람을……. "혀, 현진 씨……."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날 부르는 여자는, 페페, 강초연이었다. 초연, 초연 씨가 왜 여기…는 둘째 치고. 왜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왜 거기에……." 내 질문에 초연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시, 신 과장님하고 몇 번 얘기를… 아, 그, 그러니까, 그냥 간단하게 서, 서류 봉투만 전해주면 된다고 해서… 그, 그러니까……." 뭔 소리야? 그러니까 어떻게든 추론해 보자면 신대관, 그 인간이 초연에게 몇 번 나와의 연계에 관해서 얘기를 했다? 아니면 리자드의 짓거리에 대해? 어쨌든 초연은 서류만 전해주는 간단한 일, 도와주기로 했다? 그런 뜻이겠지? "그, 그러니까… 제, 제가 여기 있던건 누굴 만나려고… 혀, 현진 씨가 여기에 올 줄은… 그, 그게… 저, 저는 하, 한번도 그런 쪽은… 저, 정말 죄송해요. 바,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 나무 뒤에… 저, 정말 훔쳐보려거나 한 게… 그, 그러니까… 아, 그, 그 서류는 중요한 거라 돌려주시면……." "켁?"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나는 서류 봉투와 나와 선아를 보며 얼굴을 확 붉히거나 발을 동동 구르거나 하는 별별 행동을 다 보여주는 초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다시 추론해 보자면… 초연은 누구에게 저걸 전해줘야 할지 몰랐다. 그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내가 저 모양 저 꼴의 선아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상당히 선정적인… 상황을 생각해낸 초연은… 내가 저 서류를 전해줄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내가 우연히 그… 낯간지러운 짓을 하기 위해 왔다고 예상… 그리고 나와 선아가 그… 어쩌고 하는 상황을 보지 않기 위해 급히 나무 뒤에 숨었다. 그런데 실수로 서류를 챙기지 못했다? "… 큭." "혀, 현진 씨?" 내가 뭔가 이상한 소리를 내자 초연이 불안한 얼굴로 내 안색을 살폈다. 킥. 그, 그러니까… 하, 하긴 지금까지 초연 씨를 관찰했던 것에 의하면 이런 쪽으로는 상당히… 킥… 더, 더 이상은……. "하하하하하!" "에? 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배를 붙잡고 거의 데굴데굴 구르는 수준으로 계속 웃어대자 초연은 당혹한 표정으로 나와 주위를 마구 둘러보았다. 하, 하하하하. 수, 순진한 건 이해하는데… 그, 그게… 나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초연을 흘깃 바라보고는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정말 순진한 어린애를 보는 듯한, 맨 처음, 그 옛날의 그 느낌과 비슷한……. "하하하하하! 큭, 키킥……." 배, 배 아프다. 나는 어느새 벤치 근처까지 굴러 와서는 벤치에 몸을 기대고는 큭큭거렸다. 하아. 원래 이 정도 일로는 이렇게 웃지 않았는데. "으, 크큭, 킥……." 초연의 멍한 얼굴을 한번 보고는 몸을 떨며 벤치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헉, 헉. 히, 힘이 쭉 빠진다, 정말. 벤치를 받침대 삼아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낮게 킥킥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미, 미치겠다. 하아. 고개를 들어 초연을 살피다가 다시 웃음을 흘리며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히, 힘이 쭉 빠져서 선아를 데리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아……. "이 서류는 가져갈게요." "예? 혀, 현진… 씨. 저, 정말 전 아무것도… 그, 그건 줄 사람이 따로……." 확실하군. 나는 당황해 하며 팔을 휘두르며 더듬거리며 외치는 초연의 모습에 낮게 킬킬거렸다. 서류 봉투를 들어올려 흔들자 초연이 말을 멈추고는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 사람에게는 잘 받았다고 전해줘요. 킥, 키킥." 내 말에 초연이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앗 하는 표정을 짓더니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했다. "킥. 아무래도 이 아가씨를 깨우는 건 포기해야겠고……." 나는 선아를 벤치에 앉히고는 앞으로 걸어가 업어들고는 벤치 등 걸이에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하아. "선아는 어디서 독주를 들이키는 바람에 기절해서 집에… 데려다 주는 길이었어요. 가는 도중에 메시지가 와서 이리로 온 거고. 초연 씨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후훗. 없었으니까… 오, 오해는… 큭." 다시 웃음을 흘리던 나는 초연의 반응이 예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웃음을 멈췄다. 초연은 뭔가 굉장히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수준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내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거리는데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지금… 마, 말투가……." "에?" 나는 약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약한 신음을 흘렸다. 초연 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으, 으에엑? "저, 저번까지는… 저, 정말 무서워서… 흑……." 무, 무서워? 아! 그, 그러고 보니 초연 씨에게 계속 싸늘한 말투를 쓰고 있었구나. 그런데 방금은……. "아, 그, 그게……." 내가 입을 열자 초연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헉. 왜, 왠지 엄청나게 긴장이……. "아… 저, 전에는 미안했어요. 제가 뭔가 착각에… 억지를 부리고 있어서……. 아버님이나 초연 씨가 별 연관이 없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그러니까 리자드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미, 미안해요. 아, 그래도 앞으로 둘만 있을 때가 아니면 전처럼 딱딱한 말투를 쓸 테니까… 초연 씨?" 내가 뭔가 횡설수설거리고 있는데 초연 씨가 순식간에 내게 달려오더니 날 꽉 껴안았다. 헉? "정말… 정말로……." "자, 잠깐만! 우선 놓고……!" "흑……." 하지만 초연 씨는 오히려 날 더 세게 끌어안았고 나는 뭔가 상당히 기분 좋다는 느낌과 상당히 거북스럽다는 느낌, 두 가지에 골고루 시달리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딱딱히 굳어 그대로 서 있었다. 초연 씨는 계속 울고 있었고 선아는 여전히 죽은 듯이 기절… 잠들어 있다. 흠, 이런 두 미인을 한 품에 안고 있다는 것이긴 한데……. 뭔가, 상당히, 엄청나게 꺼림직 하다! 나는 뭔가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리는 듯한 느낌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상황을 계속 유지해서는 아무래도 뭔가 피곤해 질 것만 같다는 이 느낌. 그래. 마치 릴이 내게 장난을 치고 있을 때 들던 그런 느낌이로군. 하지만 여기에 센이 있을 리……. "그림 좋군. 두 미녀를 한 품에 안다. 정도인가? 어디서 시인이나 화가라도 한명 초빙해 올 것을 그랬나?" "꺄아. 뜨겁다, 진~!" "쿨럭." 길 쪽에서 들려오는 두 남녀의 목소리에 나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내뱉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안경을 쓴 한 사내와 가죽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센과 릴이었다. 그리고 센은 손에 작은 게임기 같은 기계를 들고 있었다. 위치 추적기로군. 내 바이크에 달아뒀었지. "세, 센?! 리일?!" 내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초연이 내 품에서 고개를 들며 센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곧 초연은 얼굴을 확 붉히며 내 뒤로 숨었고 나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덕분에 선아를 급히 추스르며 절망에 찬 신음을 토해냈다. "레딕이 네가 온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어서 와봤다. 이런 공원이라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뭐, 하긴 너 정도라면 이런 숲 속에서 일을 벌이는 것도 크게……." "세엔!" 내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센이 피식 웃으며 릴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아, 초연 씨와 어떻게 어느 정도는 관계 수복이 되기는 했다. 물론 더 이상 사귀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더 이상 사이가 틀어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어머? 여기 검은 생머리 숙녀 분의 옷이 왜 찢어져 있을까, 지인?" 이건 최악이다. "저, 저건 뭐야?" "조, 조용히 해. 넌 말도 못들었냐?" "뭐, 뭐가?" "저 사람들 중에 미인이 하나 있는데, 로브를 벗었을 때 어떤 녀석이 찝적거린 모양이야. 그랬더니 저 중 한명이 순식간에 팔을 날려버렸데. 단 한번에." "히익!"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내 웃음을 후드에 가려 밖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현재 나는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고, 내 뒤를 따르는 20명의 다크 엘프들도 모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서 따라오는 칼과 아신도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결국 총 23명의 대 인원이 모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암울한 기운을 내뿜고 있으니 주위에서 절로 길을 비켜주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팔을 날린 것도 사실이고. 웬 녀석이 베르시아의 얼굴을 보고는 찝적거리다 칼의 검에 팔이 날아갔다. 현재 우리들이 위치한 곳은 긴파라는 엠페러 연합의 영향력이 강한 도시였다. 물론 직할은 아닌 것이 동부와 북부의 경계적인 도시일 뿐, 그 외에는 가치가 없는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동부지역의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연결 고리 역할의 도시인 이 긴파도 별 가치가 없었다. 우리 소드 오브 다크에서 영향력을 넓히려는 곳은 동쪽 대부분과 북쪽으로는 이 긴파 시까지. 중앙으로는 헌터 연합 직할 도시인, 우리가 맨 처음 봉기하기로 한 판빌 시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스비아 시. 그리고 그 후의 사정에 따라 초보 유저들의 도시인 차렌 시와 바로크 시까지 우리 연합의 수중에 둘 생각이었다. 이 긴파 시는 엠페러 연합의 영향력이 비교적 적은 곳. 스비아 시는 헌터 연합의 직할 도시. 당연히 스비아 시 쪽의 힘이 훨씬 강하다. 우리가 지금 도착한 긴파 시는 비교적 접수하기 쉬울 것이다. 때문에 이곳은 우리가 맡는다. 물론 우리 23명으로는 택도 없고, 체르시온 연합의 길드 중 한곳이 이리로 오기로 했다. 나프네와 체르시온 연합의 장이던 제롬이 사령관으로 스비아 시 쪽으로 진격. 고타, 천악 등등도 모두 스비아 시로 몰려간다. 결국 이 긴파 시는 우리 23과 체르시온 연합의 한 길드, 그리고 아마도 이리로 올 듯한 위리안 등의 서쪽 일행. 그리고 내 팔년지기 동창, 박진성, 새피르, 필 군이 내 친구들을 이끌고 온다. 그래도 우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실력으로는 우리가 월등히 앞서니 불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이 도시를 접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까. 나는 눈앞에 위치한 거대한 여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우리 모두가 묵어도 괜찮겠군. 상단도 많이 들르는 곳일 테니까. 현재 우리 일행에는 미시안과 린, 제시와 니베가 빠진 상태다. 제시와 니베는… 제시는 적어도 섀도우 월드 속에서라도 레지엘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 나온 거니 괜히 우리와 함께 싸울 필요가 없다. 전에 숲에서 로그아웃을 하는 대신 도망을 택한 것도 로그아웃을 하면 레지엘들이 현실에서 직접 추격해 들어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니베와 제시는 칠흑의 숲에 남았다. 지금쯤 칠흑의 숲의 최강의 전사 '이던' 디렐의 여동생, 리야와 즐겁게 놀고 있을 것이다. 미시안, 반드시 나와 함께 가줄 것이라 생각했던 미시안은…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칼이 겁에 질린 여관 주인과 숙박비 문제로 언쟁을 벌이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물들어 버린 건가? 나는 칠흑의 숲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짹짹. 조용하고 평온했다. 창문 밖으로 들려오는 새소리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 그 햇살이 방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후우." 나는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는 한 다크 엘프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고 있는, 편히 잠든 듯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다크 엘프. 하지만 그는 지난 1년간 한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잠들어 있을 뿐. 한때 이 칠흑의 마을의 최강의 전사이던, 악마의 숲의 다크 엘프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이곳을 떠났고, 누군가에게 조종 받던 천악에게 복부가 꿰뚫리고 쓰러질 때까지, 끝까지 싸우던 다크 엘프. 디렐은 그렇게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끼익. 문이 작은 소음과 함께 열리며 한 다크 엘프가 안으로 들어섰다. 한쪽 팔이 없는, 하얀 검을 차고 있는 다크 엘프. 미시안이었다. 그는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디렐을 내려다보았다. "괜찮나?" "음. 그래도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언젠가, 깨어날 수도 있겠지." 내 말에 미시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디렐을 조용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전에도 이런 사례가 있었어? 장로님들은 뭐라고 하셔?" "글쎄. 장로장님이 디렐과 같이 죽은 듯이 잠든 다크 엘프를 본 적이 있다고는 하시는군." "그래? 그 다크 엘프는?" 내 약간, 기대에 찬 질문에 미시안은 평소와 비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 감춰진 짙은 아쉬움을 읽을 수 있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잠들어 있었다고 하더군." "…그래?" 나는 쓰게 웃고는 다시 디렐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후우. 날마다 이런 뜨거운 시선을 받으면서 계속 잠만 자다니. 복에 겨웠군." "그럴지도." 미시안의 조용한 대답. 나는 창문과 햇살 너머로 보이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여러 마리의 새들이 앉아서 울어대고 있었다. 아름다운 소리였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 내 지나가는 듯한 질문에 미시안은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나도 침묵했고, 얼마 뒤, 미시안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아니." 충분히 이해한다. 나라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지. "한 팔을 잃어서 방해가 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알고 있어." "그래. 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 이곳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다. 그 악몽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악몽.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미시안이 악마의 숲에 남아있었던들 마을을 지킬 수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말로 지금의 미시안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나라도 미시안과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 분명하니까. "괜찮아. 나도 이곳이 방치되어 있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까. 테티오와 너라면 이곳은 안전하겠지." "…고맙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디렐에게 고개를 돌렸다. 깨어날 수 있을까? 디렐……. "그 반인족, 린도 이곳에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을에는 반인족들도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다. 반인족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 하나의 종족으로까지 변화되었다지만 살아갈 곳이 없다. 이 곳에서는 반인족이 봉인되어 있다가 깨어난다는 식인데… 그 봉인 기간 동안 그들의 생활지가 완전히 사라졌고, 반인족들은 자신들과 같다고도 할 수 있는, 자연과 밀접한 엘프들의 마을에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이 마을에도 많은 수의 반인족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능력 때문인지, 린이 그 반인족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다. 린도 좋아하는 것 같고, 데리고 가고 싶지는 않다. "이곳도 많이 변했군." "음." 고개를 숙이자 왠지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다크 엘프들의 마을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정말로. 내가 그렇게 가만히 있는데 미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레나의 이야기는 들었지?" 나는 악마의 숲의 생존자 중 하나인 헬레나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상당히 따랐고, 마지막까지 마을을 지키다 죽은 젊은 다크 엘프, 렌. 그 녀석의 연인이 헬레나였지. "임신 했다며." "음. 렌 녀석, 내 상각과는 다르더군." "후후." 나는 낮게 웃었다. 렌 녀석, 순진하게만 보였는데 나나 미시안 보다 훨씬 빨랐다. 얼마 전에 봤던 헬레나의 행복한 모습이 떠올랐다. 배가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어머니라는, 그런 따뜻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듯 했다. 아마 헬레나도 미시안이 이곳을 떠나기 거북해 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한번 잃었었기에 이번에야 말로 지키고 싶은 것들. 나도 있지. 그렇게 보면 나와 미시안은 닮은 점도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긴, 닮은 점이 있으니 서로 마음이 잘 맞는 것이려나?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헬레나도 잘 지켜줘." "물론. 앞으로 1년이야." 엘프들의 평균 임신 기간이 710일 이라던가. 2년에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우리 인간보다는 월등히 길지만. "떠날 때, 너를 따라갈 20명의 여행자 중에 시아를 끼어줬으면 한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미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마을에 들어와 우리 연합을 도와주었으면 한다는 뜻을 밝히자 수많은 다크 엘프들이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 분명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다크 엘프들은 후방에서 마법과 정령으로 지원하는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전투, 전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언제든 죽을 수 있다. 때문에 다크 엘프들의 도움은 최소한으로 받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원하고 나선 다크 엘프들의 수는 너무도 많았다. 때문에 수를 줄여서 몇몇만 받아들여야 했고, 나는 딱 20명만 함께 가겠다고 했다. 미시안이 지금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20명에 베르시아를? 나는 내키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마신의 신전에서 만났던 다크 엘프, 베르시나의 일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리고 그 다크 워리어, 데스 킹에 대한 복수심도. 약간 살기가 피어나자 미시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낮게 말했다. "베르시아까지 그녀의 언니와 같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왠지, 다크 엘프들의 마을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베르시나의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미시안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지켜라. 아무래도 시아는 네게 기대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는? 언니의 약혼자가 아니었나?" 미시안의 기도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실수했나? 아무래도 실비아와 사이가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시안이 베르시나의 일을 잊은 것도 아닐 것이다. 확실히 실비아와 어느 정도는 선을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나에게 기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인데. 그리고 베르시아는 바깥세상을 보고 싶어 해. 내 생각엔 그 소원 자체가 널 따라 다니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글쎄. 다크 엘프와 인간이라. 위험한데?" 내 중얼거림에 미시안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넌 우리 일족의 형제이며 은인이다. 무엇보다 너는 이 세계의 인간들보다 3배는 오래 살 텐데. 우리와 수명이 비슷할 수도 있겠지." "그럴지도."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생각했다. 지금, 마나르트가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나는 조언을 얻고 싶지만, 그 녀석이라면 하렘 건국이니 이젠 종족을 뛰어넘은 사랑이니 어쩌고 떠들어 대었겠지. 하지만… 그립다. "왠지 많은 걸 잃은 것 같다는 느낌……." "…동감이다." 나와 미시안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디렐의 편안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의자에 앉은 그대로, 미시안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선 모습 그대로, 편안하게 잠들었다. 정말, 따스하고 편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나는 나를 따르겠다는 이들 중 고르고 고른 20명의 다크 엘프들을 이끌고 칠흑의 숲을 나섰다. 주영진 "한님. 방을 잡았습니다만……." 나는 조용히 들려오는 말소리에 정신을 수습하며 칼을 바라보았다. 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지? "무슨 일이 있나?" "그게… 방을 잡기는 했습니다만… 남아있는 방이 10인실 하나와 4인실 하나. 3인실 둘입니다만." 나는 눈을 약간 찡그렸다. 우리 일행은 모두 23명. 그 중 여자가 베르시아와 또 다른 다크 엘프, 아란이라는 여자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3인실을 베르시아와 아란이 편하게 쓰고… 나머지 방에서 우리 남성 동지들이 끼어서 지내야 한다는 건데……. "남는 방은 이게 끝인가?" "예. 거기다 당분간은 상단이 계속 머물러서 방이 빌 것 같지도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남는 넷은 어떻게 끼어서 자면 되니까." "아, 그게 말입니다만……." 나는 칼의 표정이 또 묘하게 바뀌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서 보면 후드가 옆으로 조금 기울어지는 것으로 보일지도. "남자 방 셋에 각각 한명씩 더 들어가면 남자 한명이 남습니다. 그러면 한 방에는 두 명이 더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이곳에 얼마나 머무를지 모르는 상황이라 좀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렇군." "그것에 대해 베르시아 양과 아란 양이 의견을 냈습니다만……." "뭐지?" "자기들 방에 남자가 한명 정도는 들어와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나는 얼굴을 굳혔다. 후드 밑으로 살짝 보이는 칼의 약간 묘한 얼굴이 거슬렸다. 그리고 칼의 옆에서 왠지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는 아신의 모습도 거슬린다. "결국 베르시아와 아란이 남자와 혼숙을 하겠다고?" "예. 그리고 그 남자 말입니다만… 저희 21인 중에 단 한명만 허락한다고 하는데……." "……." "후훗." "킥." 내 뒤에 위치한 다크 엘프 남성 동지들이 웃음을 흘렸다. 나는 왠지 당분간 여관에서 편히 쉬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안색을 굳혔다. "우리가 그렇게 무서워 보이는 걸까?" "그보다는 우리에 대한 소문이 무서운 모양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소문이 난 걸까?" "몰라. 하여간 인간들은 말 부풀리기를 좋아한다니까."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쉴 새 없는 소곤거림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연락이 되지 않은 거요?" 나는 약간의 마기를 담아 음험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덕분에 긴파 시청의 문지기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더 기다리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베르시아와 아란이 나에 시선을 돌렸다. "좀 조용히 하지?" "에?" "이런 곳에서 인간이 어쩌고 하는 건 위험하다. 내가 보호할 테고, 너희 둘의 정령술에 마법이 있다고는 해도, 돌발 상황은 언제든 일어난다. 여행은 쉬운 게 아니야. 긴장은 늦추지 마라." 베르시아와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다크 엘프들의 시력이면 내 표정 정도는 쉽게 알아볼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다시 문지기 쪽을 바라보는데, 문지기가 빤히 바라보고 있던, 초소 정도로 보이는 건물의 문 옆에 걸려 있던 보석이 녹색으로 빛났다. 문지기의 얼굴이 환해졌고 문지기는 급히 시청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방문을 환영한다는 뜻입니다. 들어가시죠." "고맙소." 이런 위에서 내려보는 말투,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닌데. 난 권력욕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걸까? 뭐, 이 정도로 거기까지 운운하는 것은 우스울 지도 모르지만. 나와 베르시아, 아란은 시청의 정원을 가로질러 시청 본 건물로 걸어갔다. 문득 일행 모두를 이끌고 이 정원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간 이렇게 걸어간다고 하기 보다는 거의 시청 점거를 위해 돌격한다는 느낌이 들었을 지도. 그런 점에서 보면 조금이라도 부드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해 베르시아와 아란만을 데리고 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우리가 건물의 정문에 다다르자 문이 열리며 한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검은 정장과 반백의 머리가 한눈에 '집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베르시아와 아란은 책에서 많이 읽던 집사와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긴파 시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 시청을 관리하고 있는 본이라고 합니다. 시장님을 만나뵈러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마침 시장님의 시간이 빈 때라 만나주신다고 하십니다. 따라오시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이라는 사람의 뒤를 따랐다. 베르시아와 아란은 주위를 둘러보며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들른 건물 중에 가장 크고 고급스런 건물이라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시의 업무를 처리하는 건물이 따로 있는 것인지 이 건물은 조용했다. 시장실이 있다는 2층으로 올라와 복도를 지날 때까지 만난 사람이 단 한명뿐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없었다. 악의에 찬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위험은 없음, 인가. 똑똑똑. 복도의 끝, 지금까지의 문들에 비해 약간 화려한 문을 본이 두드리고 있었다. 여기가 시장실이군. 보통 다른 시장실에 비해서 검소한 듯 보였다. 전에 몇 번 들렀던 곳은 완전 문부터 금칠을 해놨던데. 그런 의미에서는 이 긴파 시장이 마음에 들긴 하는 건.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음, 모시도록 하게." 문이 열리고 방안으로 들어선 나는 다시 한번 작게 감탄했다. 시장실은 좀 넓기는 했지만 뭔가 낭비라고 볼 만한 것들이 거의 없었다. 몇 개의 가구가 고급이긴 했지만 시장이라는 직책에 비해 볼 때 너무 저급이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결정. 이 긴파 시의 시장은 꽤나 괜찮은 사람이다. 이름도 용건도 밝히지 않은 사람들 선뜻 만나주는 것도 그렇고, 이 검소한 시장실도 그렇고. 혹시 엠페러 길드의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만 건물 안의 분위기와 기운, 저 약간 딱딱해 보이는 중년 시장의 기도에서도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무장한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니까. 지금까지 느낀 바로는 호위병이 시장실의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적의는 거의 없었고 우리를 주시하는 것 정도. 아무래도 저 시장의 실력이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중년 정도의 나이에 약간 딱딱해 보이는 분위기, 단정한 갈색 머리. 그리고 레벨로 치면 거의 400에 가까울 정도의 실력. "어서 오시오. 긴파 시장, 네크빌 후완이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세한이라고 합니다." 정중한 대접에는 정중한 인사. 나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시장이 안내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장은 응접용으로 보이는 낮은 유리 탁자와 소파들도 우리를 안내했다. 상석에 앉은 시장이 손님석을 손으로 가리켰고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다만 예의에 약간 어두운 베르시아와 아란이 당황하다가 내 옆에 조르륵 앉았다. 어두운 느낌의 차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시장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좀 딱딱한 미소이긴 했지만. "아름다운 레이디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편히 앉으시죠." 나는 눈을 약간 빛냈다. 이 정도로 가린 것 정도는 대충 알아볼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다크 엘프이라는 것은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군. 나는 후드를 벗었다. 베르시아와 아란도 따라 벗으려 하다가 내 손짓에 손을 내렸다. 화를 낼 법도 했지만 시장은 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음, 곧 차를 내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세한이라고 하셨소? 여행자인 것으로 보이는데……." 약간 익숙하지 않은 화법이었지만 나는 별 신경 쓰지 않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륙 곳곳을 여행하고 있지요. 이 서대륙은 물론, 동대륙까지도 말입니다." "동대륙?" 동대륙이라는 말에 시장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던 네크빌 후완 시장은 낮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할 분으로 보이지는 않는군. 대단한 모험가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그저 운이 좋은 여행자일 뿐입니다." 그때 그 본이라는 집사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향기가 괜찮은 차였는데 베르시아와 아란은 후드 때문에 약간 불편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동부에서만 나는 좋은 찻잎으로 만든 것이오. 입맛에 맛을 지 모르겠소." "좋군요. 엘프들의 차에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듯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다크 엘프들의 차가 더 맛있긴 하지만. 시장의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 바뀌었다. 내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그럼 용건을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시장님?" "좋소. 여행에 관한 얘기도 듣고 싶지만, 용건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예의겠지." 나는 빙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긴파 시의 침묵을 요구하러 왔습니다." 네크빌 시장의 눈이 번뜩였다. 약간 기세가 사나워진 것을 느낀 나는 몸을 약간 긴장시켰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겠소?" 사나운 어조에 나는 차를 입에서 떼며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얼마 후, 긴파 시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때, 엠페러 연합에서 긴파 시에 어떤 도움을 청하더라도, 공정함으로써 그 어느 편도 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긴파 시장, 네크빌의 얼굴이 심각하게 바뀌며 나를 강렬한 눈으로 바로보았다. 나는 그 눈빛을 태연히 넘기며 마주보았다. 베르시아와 아란이 뭔가 거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도시를 놓고 싸움을 벌이겠다는 거요!?" 분노에 찬 고함소리였다. 나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네크빌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NPC들은 한번 죽으면 끝이죠." 네크빌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래서! 지금 당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베르시아와 아란이 몸을 약간 움츠렸다. 나는 네크빌의 부리부리한 눈을 흘깃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엠페러 연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뜻이오?" 내 태연한 태도에 자신을 좀 진정시킨 네크빌이 여전히 사나운 어조로 되물었다. 나는 네크빌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엠페러 길드, 삼대 연합 중에서는 그나마 낫다고 평가 되지만, 역시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시를 그리 좋게 다루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건 인정하지. 그래서 말하자는 것이 뭔가?" 상당히 침착하게 변한 네크빌의 모습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지휘하는 연합은 섀도우 월드를 더럽히는 자들을 소탕하는, 어떻게 보면 NPC들을 위한 연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연합 엠페러 연합을 몰아내 드리겠습니다." 네크빌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저희가 점령하는 도시에선 그 어떤 착취도 없을 겁니다. 도시의 자율권을 최대한 존중할 것이며, 저희는 그저 근거지가 필요할 뿐이고, 삼대 연합을 몰아내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예전, 삼대 연합이 생기기 전의 그때로 되돌리려고 할 뿐입니다. 시장님에게 결코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요?" 나는 긴파 시장, 네크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긴파의 시장 역시 나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요? 그저 허울 좋은 말 뿐일 수도 있지 않소?" 네크빌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고, 내가 예상한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베르시아와 아란에게 시선을 돌리며 눈짓을 보냈다. 베르시아와 아란이 후드를 벗었다. 긴 귀와 은발에 가까운 회색과 백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아름다운 용모가 드러났다. "에, 엘프!?" 네크빌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NPC이니 만큼 엘프를 보기가 훨씬 힘들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베르시아와 아란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네크빌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정정했다. "정확하게는 엘프가 아니라 다크 엘프입니다. 어쨌든… 한 도시의 시장이며,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전사로써, 엘프가 어떤 존재인지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네크빌은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신음을 흘리듯 말했다. "조화와 평화를 사랑하며… 공정한 눈으로 보아 악한 자를 멸하며,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선하고 지혜로운 인간이 아니면 절대 따르거나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정확하시군요. 보시다 시피 이 둘에게는 노예들에게 채우는 마법 족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제가 친분이 있는 다크 엘프의 마을에서 제 일을 돕기 위해 따라나선 이들이죠. 그리고 이 도시 안에는 저희 동료, 18명의 다크 엘프들이 더 머무르고 있습니다." "하……." 네크빌, 긴파의 시장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슬슬 마무리 짓고 쉴 시간이로군. 나는 엄숙한… 얼굴과 어조로 말했다. "저, 다크 엘프들의 형제이자 은인이라는 이름. 모든 다크 엘프들의 명예. 그리고 다크소드라는 제 칭호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제가 한 말은, 모두 지킬 것입니다." "……." "며칠 뒤, 저와 엠페러 연합과의 싸움이 벌어질 때. 침묵해 주시겠습니까? 시장님의 병사들은 NPC며, 목숨을 잃을 경우 돌이킬 수 없습니다." "……." 긴파 시의 시장, 네크빌은 상당히 감동받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한, 말 잘하네요?" 베르시아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철학이라는 머리 아픈 것을 공부해서 그런 것 같아." 내 말에 베르시아가 낮게 웃었다. "저… 나온 김에 도시를 구경하면 안 될까요? 제렌들도 도시 구경이나 다녀온다고 하던데……." 아란의 말이었다. 아란은 어색한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냥 베르시아처럼 대하라고 해도 도통 듣지를 않는 것이 좀 거북했다. 뭐, 그건 둘째 치고, 도시 구경이라. "이런 검은 로브를 입고는 힘들 것 같은데?" 합리적인 말이었건만, 베르시아와 아란은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을 뿐이었다. 내가 의아해 하는 가운데, 베르시아와 아란은 당당하게 후드를 벗었다. 아아, 마나의 파동. 마법인가? "어때요?" 베르시아와 아란의 귀가 사람의 귀로 변해 있었다. 간단한 환상마법이었다. 내가 별 놀라는 기색이 없자 둘은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잡아끌었다. "가요, 가요. 처음 나온 구경인데 재미없게. 꼭 후드를 쓰고 다닐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가요!" "후훗." 주위에서 약한 살기들이 느껴졌다. 저런 두 미인이 끌고 간다고 뭐라 하는 거야 뭐야. 그나마 나는 아직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런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나는 계속 쓰고 있지. 아무래도 우리에 관해 쓸만한 소문이 있는 것 같으니, 집적거리는 녀석들도 줄 테고 효과가 있겠어. 그리고 둘에게는 내가 후드를 쓰나 마나 똑같을 테니." "좀 어두워 보이는데요." 아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앞서 걸어갔다. 곧 베르시아와 아란이 서로 조잘거리며 내 옆으로 붙었고 나는 주위에 신경을 집중하며 광장을 걸었다. 쯔쯔쯔. 쯔쯔즈.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음침한 숲. 상당히 어두운 느낌의 숲이었지만 이 숲이 원래부터 어두웠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현재 숲의 상태가 절대 정상이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폐허, 온통 부서지고 무언가 폭탄 같은 것이라도 떨어진 듯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한 모습은 숲이 이런 모습이 된 것이 꽤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그그극. 콰드득. 기형으로 뒤틀려 있던 나무 하나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바닥으로 넘어진 나무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와 나뭇조각을 뿌려대었다. 스르르……. 그 요란하고도 작은 폭발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한 나무의 쓰러짐은 어떤 존재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비틀. 거의 찢어진 검은 옷. 그리고 찢어지고 긁힌, 각종 상처가 즐비해, 본래 미남이었을 듯하지만, 알아보기는 힘든 얼굴. 그런 엉망인 상태의 존재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도 검은 존재는 알 수 없는 위엄과 기품,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검은 존재는 절반 정도에서 부러진 나무에 등을 기대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에서 약한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크, 흐흐……." 그가 낮고 갈라진 웃음을 흘렸다. 그 존재, 마족 마나르트 판디안은 폐허가 되어버린 숲을 둘러보며 낮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크큭. 사, 살아있는 건가? 쿨럭. 거기다 검의 상태도 아니고… 간만에 마음에 드는 짓을 해주셨어, 마신 나으리." 마나르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려했다. 하지만 곧 몸을 지탱하던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크윽." 바닥에 강하게 쓰러진 마나르트는 이를 악물고는 약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다시 눈을 부릅뜨며 몸을 일으켰다. 쯔쯔쯔. 그 이상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가운데, 마나르트는 몸의 상처를 부여잡고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주영진 "와아, 아란아, 이것 좀 봐." "와아, 예쁘다." "이건? 이건 어때?" "멋있어!" "……." 도대체 도시를 구경하러 온 거야 저 악세사리들을 구경하러 온 거야? 확실히 다크 엘프 마을에서는 저런 장신구는 보기 힘들었지만 좀 심한데. 나는 악세사리 가게 앞에 놓여진 좌판에 들러붙어 꺅꺅거리는 베르시와 아란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보통 보던 것보다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상급품도 몇 개 섞여 있긴 하군. 흐음. "하하, 아가씨들 정말 보기 좋구만. 서비스로 하나씩 더 드릴 테니 하나라도 사가지 않겠소?" 아무래도 이 가게는 건물 안보다는 밖에서 장사를 하는지 건물의 차양 덕분에 생긴 그늘에서 베르시아와 아란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중년의 가게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흐음, 서비스라. 공짜라면 좋긴 한데……. "윽." 그냥 외면하며 걸어가려던 나는 베르시아와 아란의 간절한 눈빛에 몸을 움찔 떨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쳇. 뭐,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음… 이 녀석과 이 녀석. 이거. 이놈. 이렇게 4개를 사가지." "허?" 내가 고른 것들을 보며 가게 주인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고른 것들은 진열된 장신구 중에 가장 나은, 상급품 정도는 될만한 것들뿐이었다. 주인은 약간 놀란 눈치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균일가로 뭐든지 1골드니 4골드네." 나는 금화 4개를 건네고는 내가 고른 것들을 집어다가 베르시아와 아란에게 두개씩 건넸다. "와아……." "고, 고맙습니다!" "아니. 뭐, 그 정도 지출은 상관없으니까." 나는 상당히 좋아하는 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곧 둘은 주인이 하나씩 더 고르라는 말에 즐거워하며 장신구들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이것저것을 가리키며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쇼핑이라도 하면 시끄럽다고 하더니 이 얘기였나? 하지만 페페는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흐음. 나는 약간의 딜레마에 빠져들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뭔가가 식스센스에 걸려들었다. 또냐? 찌릿. 나는 사나운 기세로 구경하듯 몰려든 인파에서 걸어 나오는 녀석에게 눈을 부라렸다. 후드에 가려져 있는 얼굴, 덕분에 저 녀석이 보기에는 후드 속에서 뭔가가 번뜩이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마기는 참 편리하지. 그리고 살기도 말이야. 베르시아와 아란에게 접근하려던 녀석은 찔끔하고는 급히 물러났다. "후우. 귀찮은데." 이게 몇 명 째냐. 약간 성깔 있는 놈들이 있다면 그냥 돌격해 올지도. 그럼 귀찮은데. 적어도 여기서 너무 이목을 끌어선… 이미 충분히 끌고 있나? 음, 적어도 내 정체는 들키면 안 된다. "가자." "에? 같이 가요." 베르시아들이 장신구를 고르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보지 않는 척 우리를 훔쳐보고 있던 인간들이 황급히 흩어지며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곧 베르시아와 아란이 나를 앞지르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녔고, 나는 묵묵히 둘의 뒤를 따라다녔다. 겉으로 보면 철부지 두 아가씨와 노련한 호위무사 정도가 되려나. "후우." 지금 내 꼴을 마나르트가 봤으면……. "쳇." 마나르트의 생각에 나는 혀를 차고는 얼굴을 굳혔다. 어디에 있을까? 칠흑의 숲에서 나와 카루나 성에서 잠시 용병일을 할 때, 키메라들을 조종하던 그 녀석과 비슷한 괴물이 또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이후로는 그저 보통 키메라들만 몰려올 뿐이었다. 마나르트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정보길드에 전과 같이 날아다니는 검을 본 적이 있냐고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 뿐. 센이 있었다면 마나르트의 위치를 탐색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페페, 초연과 사이가 풀어짐과 동시에 페페가 운영자로 일하면서 정보를 조금씩 빼돌려 주기로도 했지만, 현재의 운영자는 일반 플레이어와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마나르트의 위치를 알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어딜까."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녀석, 반드시 돌아온다고 한 적이 있었으니 기다려야 겠지. 젠장. 다시 돌아오면 절대로 던지지는 않는다. 쳇. 멍청한 녀석. 자기 능력이라면 내가 던져봤자 1m도 날아가지 않고 멈춰설 수 있으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냥 떠밀려 간 거지? "한!" 베르시아의 외침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베르시아와 아란이 좀 앞서나가고 있었다. "아!" 내가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베르시아와 아란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뭐지? 둘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솜사탕 가게를 볼 수 있었다. "한, 저거 솜사탕이죠?" 베르시아가 눈을 반짝이며 질문했고 나는 떨떠름한 기분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란이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 사주시면 안 될까요? 전에 책에서 보고 정말 먹고 싶었는데……." "사다줘요. 우리는 여기 옷들을 보고 있을게요." 베르시아가 드레스 판매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꽤나 고급스럽고 화려한 드레스들이 진열되어 있는 평균 보다 좀 큰, 고급 가게였다. "안돼. 함께 돌아다녀야 한다." "무슨… 겨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베르시아가 눈을 약간 사납게 뜨며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대답했다.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한 녀석들만 해도 몇 명인 줄 아는지 모르겠군. 손가락으로는 세지 못할 수다." "잠시잖아요. 사다 줘요." "사주시면 안 될까요?" 당당하게, 거의 협박이라도 하듯 하는 베르시아와 조심스레 물어오는 아란.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몸을 돌렸다. "여기에 가만히 있어라." 베르시아와 아란은 밝은 표정으로 드레스 점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끌려 다니는군.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인간 세상 나들이를 하는데 초를 칠 수도 없으니 이거 골치 아픈데. 전에 미시안 조차도 맨 처음 나와 여행할 때는 주위를 꽤 열심히 구경했으니 저 둘도 어쩔 수 없는 걸지도. 솜사탕 가게로 간 나는 주위를 시선이 내게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드를 벗었다. 아무래도 이 꼴로 솜사탕을 사는 것도 웃기는 짓이겠군. 솜사탕 두 개를 사든 나는 아까 그 드레스 점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후우. 약속된 전투일은 내일부터 2일간. 그 사이에 우리 연합이 이리로 공격해 들어오겠지. 그때까지는 이렇게 풀어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음?" 아까 그 드레스 집에 거의 다가온 나는 약간의 소란을 감지하고는 눈을 빛냈다. 젠장. 솜사탕을 마기로 공중으로 꽤 위로 띄우는 동시에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거 놔요!" "하하, 전 그저 아가씨들에게 어울릴만한 드레스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싶을 뿐입니다. 거절하지 말아 주시죠." "필요 없습니다. 아란이를 놓아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오, 이 레이디의 이름이 아란이었군요. 좋은 이름입니다. 아, 레이디의 이름을……." 미치겠군. 나는 가게 안에서 베르시아와 아란을 둘러싸고 있는 4명의 얼간이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실력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과 복장이 좀 화려한 점 등을 들어볼 때 아무래도 긴파의 어느 길드의 녀석들인 것 같았다. 여자를 끌고 가려 한다? 베르시아와 아란이 NPC라는 것을 알아보는 건가? 뭐, 그 정도 실력이 되는 것도 같은데. 다크 엘프라는 것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아니면 치밀한 녀석들인가? 여성 유저야 성폭행 등등의 일을 당할 때는 비상 로그아웃 기능이 있으니 좀 치밀한 녀석들이 아니면 유저를 건드리지는 않는다. 가끔씩 미약까지 준비해서 여자를 건드리는 녀석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갑자기 설화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 설화는 뭘 하고 있으려나? 설화가 저 얼간이들을 봤다면 또 플레이어가 어쩌고 했겠군. 후훗. 왠지 보고 싶은데. "잠시만 같이 가면 되니 따라……." "놓으라고 했습니다." "젠장. 이 년이……." 얼간이 1번이 아란을 거칠게 잡아끄는 동시에 베르시아의 레이피어가 순식간에 뽑혀 나왔다. 젠장. 나는 퀵스텝을 이용해 움직여 그 얼간이를 찔러 들어가는 레이피어를 움켜쥐었다. "한?" 어느새 다가온 내가 레이피어를 틀어쥐자 베르시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아, OPG가 있어서 다행이야. 보통 장갑이었으면 손이 꽤나 아팠겠지. "사람을 죽여서는 귀찮아 지지. 자, 구해줬으니 네놈들은 꺼져라." 나는 베르시아의 레이피어를 위로 밀어올리는 동시에 아란을 붙잡고 있는 녀석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리고 아란을 붙잡자 녀석은 혼자서 가게 밖으로 날아갔다. "이 자식!" 그리고 다른 세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며 공격해 들어왔다. 나는 침착하게 요검을 뽑아들어 한 놈의 목에 겨눴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들 꺼져라." 내 폭풍 같은 살기가 가게 안에 몰아치자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베르시아와 아란도 움찔거리고 있었다. 내 살기와 옷차림, 싸늘한 말투와 이상한 기운이 넘실대는 요검에 겁을 집어먹은 듯한 녀석들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저 녀석들도 검은 로브 일행의 소문을 들은 걸까? 쳇, 여기가 긴파 시만 아니었으면 저 녀석들도 팔을 날려버렸을 텐데. "와아. 세한, 멋있어요." 나는 감동했다는 듯한 얼굴의 베르시아와 아란을 돌아보았다. "둘, 저런 얼간이들에게 당하고 있던 이유가 뭐야? 특히 아란은 저런 녀석에게 붙잡혀서는……." "아, 책에서 보니까 저런 사람들이 꼭 나오더라고요. 한번 책에서 나오던 대로 해보자 해서… 그런데 한이 소식이 없으니까 그냥 내가 나서려던 거였죠." "……."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조잘거리는 베르시아와 아란을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못 말리겠군. 그나저나 저 녀석들이 길드에서 좀 높은 곳에 있는 놈들이라면 귀찮을 수도. 엠페러 길드의 딜럿 녀석이라면 우리 연합의 움직임을 체크하고 있을 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하는데 말이야. "가자." "……." "……." 여관 안에는 기이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약 10시 경. 우리 23인의 일행은 여관의 한쪽 구석에서 때늦은 저녁식사를 드는 중이었다. 밤이라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과 여관 주인, 종업원들은 우리에게 참으로 해괴하다는 듯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아삭. 으음. 꽤 신선한데? 나는 과일이 꽤 괜찮다는 것에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들 위에는 온통 식물이 점령하고 있었다. 채소와 과일 같은 것들만으로 저녁을 먹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집단으로 미친 것은 아니냐는 식의 시선도 꽤 많았다. 곤란하다. "……." "……." "……." 주영진 역시 기이한 침묵이 돌고 있었다. 미치겠네. 나는 주춤주춤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베르시아와 아란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씨, 씻어도 돼요?" 베르시아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물어왔다. "씻어. 4일 동안 계속 강행군이었으니. 고급 여관이라 방마다 욕탕이 있으니 둘이 함께 씻던지." 나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고 베르시아와 아란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욕실로 총총히 걸어갔다. 베르시아들이 욕실로 들어간 후 배낭을 풀어서 침대 하나에 던져두었다. 그런데 저 둘은 저렇게 불편해 할 거면 날 왜 자기들 방으로 끌고 온 거야? 나는 식스센스를 확대시켜 다른 일행이 있는 방을 살폈다. 이미 말을 해뒀으니 방의 곳곳에 마법을 걸어두고 쉴 것이다. 그리고 다크 엘프들의 감각이면 침입자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의자 하나를 베르시아의 침대와 아란의 침대 사이에 가져다 놓고는 걸터앉았다. 침대 머리말에 있는 창문으로 긴파 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을 이용한 가로등들이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좋군. 서울의 시끄러운 야경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아.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부스럭. 나는 단검으로 손을 가져가며 고개를 돌렸다. 욕실에서 베르시아와 아란이 가운으로 몸을 가리고는 걸어나오고 있었다. 놀랬군. 다크 엘프라 기척이 작으니. "왜 거기에 앉아 있는 거예요?" 베르시아와 아란이 자신들의 침대 사이에 앉아있는 나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난 오늘 여기서 밤을 보낼 테니 그리 알아." "에엑!?" "예?" "오늘 너무 시선을 끌었다. 마법으로 경계를 한다고 해도 혹시 몰라. 오늘 밤은 내가 불침번을 서지. 그럼 난 씻는다." 나는 망토를 의자에 걸쳐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단검도 모두 풀어놓고 검은 바지와 셔츠 차림에 요검만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가운을 입고 있던 베르시아와 아란이 황급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철컥. 욕실 문을 닫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옷을 벗었다. 별다른 흉터는 없는 상체가 드러났다. 현실과는 다르다. 이곳이 가상현실이라고 외치는 듯한 내 모습에 쓰게 웃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나는 바지만 입은 채로 욕실을 나섰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린 셔츠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음, 더러워지지도 않고 찢어져도 복구되는 비싼 옷이긴 한데… 젖는 건 어쩔 수 없나? "꺄악!"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나는 급히 요검을 움켜쥐며 방 안을 살폈다. 살기 없음. 적의 없음. 뭐야? 비명의 출처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있던 베르시아와 아란이었다. 둘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왜 그래?" "오, 옷 입어요!" "뭐?" 아, 윗도리를 벗고 있었던가?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베르시아와 아란의 침대 사이로 들어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끼익. 창문을 열고 셔츠를 널자 시원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아직 여름이라 창문을 열어도 춥지는 않겠지. "아직 안자고 있었나 보네. 잠이나 자." "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자라고요!" "왜? 그런데 그 잠옷은… 잠옷 맞나? 그냥 입고 돌아다녀도 되겠는데? 뭐, 어쨌든 잠이나 자." 나는 평상복과 별 다를 바가 없는 둘의 잠옷을 흘깃 바라보고는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안자요?" "응." "우리가 잠들면 이상한 짓 하려는 건?" "그럴 거면 날 왜 여기로 끌고 온 거야? 더 이상 장난은 치지 마. 다크 엘프가 그런 걱정을 하다니, 웃기는군." 엘프들은 진실을 보는 눈이 있으니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있다면 당연히 알아챌 것이었고, 물론 나는 현재 별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둘은 몸을 휙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고 누웠다. 나는 피식 웃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잠자려는 듯한 기색 없음. 상당한 긴장 상태. 긴장 풀어라, 둘." "그게 말이 돼요!?" 베르시아가 고개를 돌리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요검을 끌어다가 의자에 기대 세워두었다. 식스센스를 확대 시키자 일행의 여러 가지 기척이 느껴졌다. 으음. 식스센스 스킬 레벨이 끝까지 올라가서 레벨이 올라가야만 능력이 증대되니 좀 그렇군. 아, 계속 사용하면 정신력은 늘어나는 것 같으니 수련이 되기는 하는 걸까? 테이블에서 맥주잔을 마기로 끌어당겨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식스센스로 여관의 동향을 살폈다. 우리 일행은 대충 쉬는 것 같고 특별한 살기는 없다. 맥주를 들이키던 나는 일행들의 방을 넘어서 다음 방들의 기척을 살폈다. NPC 다섯. 남자. 하지만 실력은 거의 없음 잠들어 있음. 플레이어 둘, NPC 하나. 여자들. 잠들어 있음. 위험 없음. 플레이어 둘.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침대에 누워있긴 한데 잠은 자지 않고 있군. 그런데 흥분 상태? 음? 뭔가 느낌이 이상……. "푸웁!" "뭐, 뭐예요!?" "적!?" 내가 얼굴을 확 붉히며 맥주를 내뿜자 잠들지 않고 긴장상태를 유지하던 베르시아와 아란이 벌떡 일어났다. 나는 바지에서 맥주를 황급히 털어내었다. 베르시아와 아란이 주위를 마구 둘러보고 있었다. "아, 아니. 별일 아니니까 잠이나 자. 실수였어." "실수? 무슨 일은 없는 거죠?" "헥, 헥." 으윽, 오늘밤 왠지 불길하다. 젠장. 저 자식들은 여관방에서 뭔 짓들을 하고 있는 거냐! 당연히 여관방이니까 밤에 저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하아."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곧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는 둘의 시선을 눈치 챈 나는 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베르시아와 아란은 침대 위에 서서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예요?" "……?" 둘이 의문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라니까. 둘, 속이 비친다고." "꺄악!" 누워있다 벌떡 일어난 둘은 속이 좀 비치고 있었고 내가 그것을 지적하자 둘은 얼굴을 붉히며 순식간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후우. 혼란스럽군.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정신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나는 맥주를 다시 들이키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음. 식스센스는 일행들의 방 옆방까지만 이다. 젠장.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군. 어차피 오늘 밤은 잠들기 힘들겠어. 아니, 자고 싶은데. "하지만 왠지 불안하군. 이런 느낌이 드는 날은 경계하는 게 좋지." 내 중얼거림은 몇 시간이 지나 증명되었다. 스으으……. 이상한 소리. 나는 왠지 몽롱한 느낌이 드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깜박였다. 소리가 들리는데. 경계해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소리일 뿐인걸. "후후. 다른 녀석들의 방에서도 뭔가 이상한 기운이 도는데? 혹시 약이라도……." 나는 벌떡 일어났다. 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벌떡 일어난 나는 균형이 잃고 비틀거렸다. 요검으로 바닥을 짚어 간신히 쓰러지지 않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약? 젠장! 그 망할 커플 덕분에 식스센스를 축소해서 알아치리지 못한 건가?" 순간 정신을 놓았었어. 나는 요검을 움켜쥐고는 베르시아와 아란을 살폈다. 둘의 표정이 약간 상기되고 땀을 흘리는 것이 확실히 약에 취하긴……. 휙. 투툭. 그때 복도 쪽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문 밑으로 흘러들어오는 연기. 제, 젠장!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은데 또……. 나는 몸을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우선 밖으로 나가서 몸을 회복시킨 다음에 들어와야 하나? 어차피 여관 안에 있는 녀석들은 시간을 조금 끌면서 공격할 거다. 지금 이 상태로 나가서는 개죽음에 희망도 없는 꼴이 된다. "크읏."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창틀을 붙잡았다. 그때 저 아래쪽, 건물의 골목 사이에서 적의, 약한 살기가 느껴졌다. 나가야할 이유 추가다. 타앗. 창문으로 뛰어내려 여관의 정원에 떨어진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후우.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좀 정신이 좀 돌아오는군. 크윽. 젠장. 그냥 좀도둑? 우리를 노린 게 아닐 수도 있다. 우선 저 골목의 녀석을 잡아야겠군. 나는 요검을 뽑아 들고는 골목으로 달려갔다. 아직 약 기운이 강하게 남아있어 순식간에 다가가거나 할 수는 없었다. "뭐, 뭐냐!" 내가 골목에 들이닥치자 골목에서 여관을 감시하고 있던 듯한 두 녀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 뛰어내릴 때 걸리지 않았군. "시끄러." 어지럽단 말이다. 나는 마기를 일으키며 요검을 휘둘렀다. "크읏!" 두 녀석은 급히 자시들의 무기를 마주 휘둘렀다. 한 녀석은 검사, 한 녀석은 도끼를 쓰고 있었다. 나는 상대의 검을 튕겨 내고는 요검으리 회전시키며 도끼날을 쳐냈다. 쩡. 양날 도끼였기에 녀석의 도끼가 골목의 벽을 파고들었다. 흐으. 팔이 찌릿찌릿거려. 약 기운 때문에 힘이 제대로……. 치캉! 내 생각은 순식간에 날아드는 상대의 검에 의해 끝나고 말았다.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막았고 녀석은 내 실력이 상대할만 한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공격해 왔다. 솔직히 지금 내 상태로는 쉽게 제압하긴 틀렸다. 파카카칵! 허공에서 상대의 검과 내 요검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좁은 골목 안이라 옆으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오로지 검격 교환. 나는 눈을 빛내며 검을 휘둘렀다. "풍뢰(風雷)." 내 속삭임과 함께 요검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듯 뻗어나갔다. 상대는 순간 당황하더니 이를 악물고는 내 공격을 무시하며 그대로 날 찔러왔다. 동귀어진인가? 동대륙에서 봤던 기술을 응용해 만든 기술이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공격, 특히 방어를 별로 염두에 두지 않은 공격이었기에 상대의 검은 내 가슴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왔다. 파카카칵! 나는 몸을 회전시켜 검의 로를 틀어 상대의 검을 쳐냈다. 하지만 몸으로 마구 밀고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녀석의 검은 내 왼어깨를 뚫고 지나갔다. 크윽. 스캉! 그리고 내 검은 녀석의 검을 위로 쳐올리는 동시에 여러 번 원을 그리며 녀석의 몸을 베어나가다 마지막으로 요검이 크게 원을 그리며 순식간에 상대의 목을 따버렸다. 털썩. 검사 녀석을 스쳐지나온 나는 등 뒤에서 녀석이 쓰러지는 것을 느끼고는 숨을 내쉬었다. 그때 강한 공격이 위에서 내리쳐 왔다. "크아아아!" 잠시 잊고 있던 도끼를 사용하는 녀석. 내 머리를 금방이라도 박살낼 듯 도끼가 무서운 기세로 내리쳐왔다. "우웃." 푸확! 피가 튀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크, 크윽. "젠장!" 도끼의 녀석이 고함을 질렀다. 녀석의 도끼는 내 오른 어깨를 파고들어 있었다. "흐아아아아!" 나는 간신히 도끼날을 밀어낸, 도끼의 날을 그대로 잡고 있는 오른손에 힘을 주며 위로 밀어 올렸다. 뜨드득. 이상한 소리와 함께 내 어깨에서 녀석의 도끼가 빠져나갔다. 자신이 힘에서 밀렸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상대의 눈이 흔들렸다. "하압!" 나는 최대한 힘을 줘 도끼를 위로 잠시 뜨게 하는 동시에 몸을 회전하며 녀석의 가슴을 올려쳤다. 녀석이 숨이 막힌다는 듯 헛숨을 들이켰고 이차로 내 돌려차기가 녀석의 턱에 작렬했다. "크학!" 그래도 기절은 하지 않은 녀석이 도끼를 놓치며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재빨리 녀석의 도끼를 쳐내고는 OPG에서 손톱을 꺼내 녀석의 목에 겨눴다. "헉, 헉. 말 좀 묻지." "크윽, 죽여라!" 녀석이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살기를 녀석에게 집중적으로 퍼부으며 질문했다. "어디 녀석이냐?" "크, 크윽… 우린 엠페러 연합 긴파 지부 소속이다! 언젠가 우리 연합에서 반드시 복수를 해줄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OPG의 손톱에 자신의 목을 박았다. 나는 별 표정변화 없이 숨을 멈춘 녀석을 떼어내고는 여관을 바라보았다. "젠장! 엠페러 연합. 위험하다……." 나는 몸을 비틀거리면서 급히 여관으로 달려갔다. "크으……." 나는 비틀거리며 여관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젠장. 여긴 약 기운이 많아서 좀 어지러운데. 나는 우리 방이 있던 층까지 올라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쳇. 여기 녀석들인가?" 나는 한 방문 앞에서 이를 갈았다. 이 인간들은 할 곳이 없어서 하필이면 여관에서… 제길.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식스센스를 확대시켰어야했나? 식스센스를 제한시키는 바람에 약에 취해서 웬 개고생이냐, 젠장. "그런데 이상하군." 그래도 다크 엘프들이니 가까이서 살기를 느끼거나 하면 정신이라도 차렸을 텐데? 너무 조용하다. 혹시 우리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골목에 있던 녀석들의 실력이 너무 높았는데? 거의 400에 가까울 정도였어. 비틀거리며 베르시아와 아란이 있는 방에 다다른 나는 멈칫하고는 귀를 기울였다. 으음? "크흐흐. 정말 미인이긴 하군. 오늘밤은 재밌겠는데?" "거봐. 내 눈은 높다고 했지? 오늘 낮부터 노리고 있었을 정도라고." "흐흣. 어디……." "멍청아! 미쳤다고 여기서 손을 대냐!" "뭐, 어때? 침대도 있겠다. 약에도 이미 취한 것 같은데?" "병신 새끼. 약을 희석시켜서 정신을 차릴 수도 있다고. 로그아웃을 하면 끝장이야!" "쳇. 그래. 본부로 데려가서 약을 더……." 세 녀석들은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양 어깨에서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는 내가 걸어 들어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탈하군." 내 중얼거림에 녀석들의 눈에 약한 의문이 떠올랐다. 우리들의 정체를 알고 죽이기라도 하러 온 줄 알았더니… 여자가 있어서 납치하러 왔다고? 거기다 미약까지 써서? 나는 세 녀석 중에 낯익은 녀석을 발견하고는 이를 갈았다. 낮에 베르시아들에게 찝쩍대던 녀석이었다. NPC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거냐? "엠페러 연합… 그래도 제퍼슨의 이름이 있어 어느 정도는 믿었는데… 쓰레기의 집합이었군." 녀석들은 거의 빈사 상태에 가까운 내가 엠페러 연합을 욕하자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들을 비웃듯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베르시아와 아란을 살폈다. 당한 흔적은 없고 다만 잠옷이 좀 찢겨져 있었다. 그리고 약 때문인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소리. 난 바람만 쐬고 어느 정도 나아졌으니 빨리 환기를 시켜야겠군. 타앗! 나는 요검을 움켜쥐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어깨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예전 마나르르를 사용할 때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이런 미친 새끼!" 셋 모두 검사인가? 마법사가 없어서 다행이군. 나는 내게 날아드는 세 개의 공격을 노려보며 몸을 숙였다. 상체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기에 등이 그대로 베여나갔다. 그나마 겉만 살짝 베여서 다행. "흐읏!" 나는 몸을 숙인 대로 낮게 회전하며 몸을 피는 동시에 요검을 위로 올려쳤다. 한 녀석이 비명과 함께 즉사했다. 가슴이 요검이 꿰뚫려 있었다. 나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버텨야 한다. 쯔극, 그런데 요검이 빠지지 않았다. 힘도 부족한데다가 뼈에 걸린 듯 했다. 젠장! 츠핏! 요검이 빠지지 않아 당황하는 순간, 내 팔에 공격이 스쳐지나갔다. 급히 몸을 틀지 않았으면 떨어져 나갔겠군. 나는 요검을 포기하며 뒤로 몸을 뺐다. 가슴에 요검이 박히 녀석이 쓰러지고, 한 녀석이 내게 검을 찔러들어왔다. "죽어랏!" 싫어……! 파카카칵! 내가 맨손으로 검을 받아내자 상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OPG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생 능력이 있어도 깨지면 재생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최대한 빨리. 나는 그대로 상대의 검신을 움켜쥐었다. 철컥. OPG에서 손톱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는 검신을 움켜쥔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으, 으앗!" 내게 잡혀 검이 움직이지 않자 녀석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에게 밀착하자마자 검을 놓고는 손톱을 상대의 목줄기에 박아 넣었다. 푸확. 녀석의 목과 내 어깨에서 동시에 피가 튀었다. 간단히 봉합한 어깨의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쏟아졌다. 나는 손톱을 빼내고는 마지막 남은 녀석에게 돌진했다. 크드득. OPG가 이상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 부분이 부서져나갔다. 이젠 손으로 검을 받을 수는 없다. "오, 오면 이 년을 죽인다!" 마지막 남은 녀석은 낮에 내가 날려버렸던 그 녀석이었다. 놈이 베르시아를 끌어다가 목게 칼을 들이댔다. 저 자식이 어디서……. "하앗!" 덜컹. 녀석이 뭔가에 묶인 듯 움직임을 딱 멈췄다. 내 마기에 묶인 것. 나는 그대로 마나탄을 날렸다. "컥!" 녀석이 베르시아를 놓치며 뒤로 밀려갔다. 베르시아가 침대 중앙에 풀썩 쓰러졌다. "으아아아!" 그때 녀석이 마기에서 해방되며 검을 치켜들었다. 상처 때문에 마기도 약화되었었나? 녀석이 그대로 베르시아를 찔러갔다. 젠장! 열려있는 창문. 베르시아의 침대 위에서 베르시아를 내려찍으려는 녀석. 내 발 바로 아래에 놓인 어떤 녀석의 검. 순식간에 느낀 나는 발에 걸리는 검의 손잡이 끝을 걷어찼다. 쉬이익! 내 발에 차인 검은 곧게 날아가 녀석의 검을 쳐냈다. 푸욱. 덕분에 녀석의 검은 베르시아의 가슴 옆과 옷을 베어내는데 그쳤고 나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선풍각(仙風脚)." 허공에서 빠르게 회전한 나는 녀석의 가슴을 걷어찼다. 하지만 힘이 약했는지 창틀에 걸려서는 발악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녀석. 나는 베르시아의 옆에 떨어진, 내가 걷어찼던 검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앞으로 찔러 넣었다. "커헉!" 녀석과 나는 동시에 낮은 비명을 질렀다. 내 공격은 녀석의 가슴을 꿰뚫었고 녀석의 공격은 내 어깨를 꿰뚫고 있었다. 행운이었다. 원래라면 동귀어진이었겠지만 내가 서 있던 곳은 침대. 침대가 밑으로 내려 앉으며 몸이 기우뚱하는 덕분에 상대의 검이 어깨를 찔렀다. "크으……." 녀석이 핏발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검 손잡이를 놓는 동시에 주먹으로 손잡이 끝을 후려쳤다. "커헉!" 그리고 녀석이 검에 가슴을 꿰뚫린 채로 창밖으로 떨어졌다. 100% 죽었다. "허억, 허억." 나는 피로 물든 내 몸과 침대를 보며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녀석이 떨어지는 덕분에 창틀이 무너져 환기는 문제없다. 나는 저쪽 침대의 아란과 내 바로 밑에 누워있는 베르시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란은 완전 무사… 베르시아는……." 가슴 옆이 살짝 베였고, 옷이 찢어졌지만 목숨에는 전혀 지장 없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정신을 잃었다. 역시나 내 예상은 틀릴 날이 별로 없다니까. 특히 이렇게 재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때에는 말이야. 체르시온 연합의 양대 기둥이던 두 길드 중 하나, 베르인 길드의 길드마스터 베르만.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작고, 언덕이라기엔 좀 큰, 그런 동산 정도의 언덕을 오르던 그는 점점 밝아져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베르만은 자신의 옆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날이 밝는군요." "아, 그러네? 이제 저 언덕만 넘으면 긴파 시인거야?" 그 사내는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뾰족한 백발 머리에 푸른 안경. 그리고 나풀거리는 도포. 가슴 부분에 달린 부적들. 동대륙에서 세한과 함께 이곳으로 넘어온 위리안이었다. 위리안은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지만 베르만은 정중하게 예의를 지켜서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베르만의 성격이기도 하지만, 베르만이 위리안의 능력에 진정으로 감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 그렇습니다. 저 언덕을 올라가면 긴파 시에서도 우리를 발견하겠지요." "음, 싸움인가." 위리안은 약간 씁쓸하다는 듯 웃으며 가슴에 달아둔, 여러 부적을 은사로 묶어둔 부적 뭉치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위리안의 뒤에서 걸어오던 회색머리에 짧은 소검을 손에 들고 있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 계시겠군요." 베르만과 위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두 달 전부터 주군은 어디 계실까요? 4일째 연락이 없습니다만, 혹시 무슨 일이라도… 등등의 말과 함께 여러 가지 기행을 보여준 세한의 부하를 자처하는 주토였다. 그는 약간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언덕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 그 인간은 사신이 찾아와도 죽지 않을 사람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예요." 주토의 옆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베르만과 위리안은 이번엔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베르만과 위리안을 갑작스런 표정 변화로 근육 반란을 겪게 만든 설화는 눈매를 날카롭게 하고는 냉기를 흘리고 걸어가다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다크 엘프들을 데리고 온다고 한 것 같았는데… 설마 또 여자를 데리고 오는 건 아니겠지." 냉기가 날리는 설화의 중얼거림에 베르만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위리안과 주토는 뭔가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음, 확실히 세한 녀석, 가는 곳마다 여자가 한두 명씩은 있던 것 같았으니까. 쯧, 왠지 모르게 여자와의 관계를 진전시키기를 꺼려하는 듯한 녀석이라 그 많은 여자가 소용없는 것 같지만." 위리안의 말에 베르만이 헛웃음을 지었고 주토는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많은 소저들께서 주군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걸 수도요. 특이한 데다가 안심도 될 테니까요. 설화 아가씨만 하시더라도 플레이어가 자신에게 별 관심이… 헉!" 주토는 순간 자신의 옆에서 강한 냉기가 흐르자 낮은 비명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이제 시작이로군." 위리안이 눈을 싸늘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베르만도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잠시 후, 언덕 맨 위에 다다른 베르만과 위리안들은 저 멀리 보이는 긴파 시의 성벽을 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언덕 위를 메우기 시작했다. 소드 오브 다크. 어둠의 검의 첫 싸움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판빌 시에서도 대규모의 군대가 일어났다. 주영진 "크으……." 머, 머리가… 어깨가……. "빌어먹을……." 나는 어두운 방에 침침한 눈까지 더해져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몸에서 힘을 뺐다. 죽겠군. 이게 무슨 꼴이지. "으음……." 그때 몸에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는 동시에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익숙함.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내 몸을 꽉 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깜박였다. 상당히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베르시아의 침대 위에서 기절했던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보니 그 녀석들이 전부였나 보군. 머리는 대충 돌아갔지만 몸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뭔가 물컹한 느낌이 들었다. "…돌겠군." 간밤의 녀석들이 쓴 약 때문인지 베르시아는 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어째 이런 일을 많이 당한다는 느낌인데. 그건 그렇고 문제로군. 다크 엘프라 계속 이렇게 있어서는 나중에 충격이 클 텐데. "…그보다는 다른 녀석들에게 보이면 더 충격이 크려나." 나는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목이 컬컬해서 말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베르…시아. 시아. 정신 좀 차려. 베르시아!" 내 낮은 고함소리에 베르시아의 몸이 약간 움찔거렸다. 청력이 좋아서 다행이군. 큰 소리를 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일어나, 베르시아! 시… 쿨럭. 망할. 베르시아!" 내 계속되는 외침에 베르시아의 얼굴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일어났나? "베르시아!" "으음." 그때 베르시아가 희미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꽤나 풀린 듯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시아! 정신 차려!" "음… 세, 세한?" 베르시아는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위치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도 좀 풀린 듯한 눈동자였다. 그리고 순간, 베르시아의 눈이 정상으로 확 돌아왔다. "아… 꺄아악!" 왠지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 나는 자신과 꼭 밀착되어 있는 내 모습,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꼭 끌어안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순간, 강한 힘으로 나를 밀어냈다. 쿵. 침대 밑으로 떨어진 나는 엄청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며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제, 젠장." 검게 죽은피를 토한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상도 입은 건가? "세, 세한?" 밖으로 조금 드러난 가슴을 두 팔로 가리고 있던 베르시아가 내 몰골을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나는 쓰게 웃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다른 방의 녀석들을 깨워… 최우선이다." 베르시아는 피에 절어버린 자신의 옷과 내 상체,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시체와 피의 강을 보고는 마지가으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방을 박차고 나갔다. "젠장……." 약을 쓸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 못했군. 더욱이 그 망할 커플 덕분에 식스센스를 제한하고 있었으니… 쳇. 그 자식들, 약까지 취했겠다, 기분 좋았겠군, 그래. 나는 낮게 으르렁거리다 순간 몰려오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그때 사방에서 기척이 마구 일어났다. 베르시아가 일행들을 깨우는 모양이었다. 으음. 어떻게 깨웠는지 불안하군. 아마 내 예상으로는 불의 정령이나 물의 정령, 혹은 뇌(雷)의 정령으로 약간의 충격(?)을 가했을 지도. 우당탕탕! 그리고 내 예상은 불에 그을리거나 머리가 약간 곤두서거나 물에 빠진 듯 축 젖어버린 다크 엘프들이 방으로 들이닥치는 것으로 사실로 밝혀졌다. "세, 세한님!" "아란!" "세한님!" 뭔가 말을 들었는지 방으로 몰려온 다크 엘프들은 급히 나에게 달려왔다. 한 두명은 아란에게 그녀를 다가가 흔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방에는 약을 좀 심하게 쓴 모양이었다. 베르시아야 나와 껴안고 있었으니 미약 기운이 좀 해소된 것도 같지만. 흐으. "크으." 나는 다크 엘프들의 리더 노릇을 하는 제렌에 의해 침대 위에 누워지면서 신음을 흘렸다. 끔찍하군. 제렌은 다크 엘프들과 뭐라고 얘기를 하더니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내서 어깨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약간 시큰한 느낌과 상쾌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 다크 엘프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뭔가 당황한 듯한 표정. 그리고 당황한 듯한 목소리. 나는 정신을 수습하며 청력에 집중했다. "어떻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마실 수 있는 포션도 챙겨오는 건데." "지금 만들까? 이 포션을 조금만 가공하면 되잖아." "급하다고!" "이 약을 먹을 수만 있다면 금세 나을 텐데." "하지만 저 상태로는 삼키지 못하실 것 같다고." "젠장! 도대체 어떤 놈들이 습격을! 아직도 머리가 띵하네. 세한님이 저렇게 당하실 정도면……." 아무래도 상황으로 보니 마시는 용도의 포션을 챙겨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다 쓴 건가? 전에 변종 몬스터 무리와 싸운 다음에 좀 대량으로 쓰기는 했지. 나는 제렌의 손에 들린 주먹의 반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 구슬 같은 것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크 엘프 비전의 환약인데 속은 부드러워도 겉 부분이 딱딱해서 보통 입에 물고 좀 녹인 다음에 깨물어 씹어 먹게 되어 있는 약이다. 지금 침도 잘 생기지 않는데다가 목도 맛이 가서는 저거 절대로 못 먹지. "베르시아!" 그때 제렌이 베르시아를 빤히 바라보며 환약을 내밀었다. 베르시아는 잠시 멀뚱히 서 있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얼굴을 확 붉혔다. "왜 나야!" "그럼 남자인 우리들이 하라는 거냐? 세한님께 실례다. 그리고 아란은 현재 기절중이야." "하지만……!" "베르시아!" 베르시아는 방안에 우글우글 몰려든 다른 다크 엘프들의 시선에 주춤거리다가 제렌의 손에 든 환약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고는 내게 다가왔다. 뭐야? 나는 얼굴을 붉힌 베르시아와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대어린 시선에 당혹했다. 아, 설마……. "아, 세, 세한. 이건 그러니까 치료를 위해서……." 나는 베르시아 환약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머, 머릿속에 벼락이 친 것 같았다. 제, 젠장. 절대로 안돼! 이익! "치잇." 나는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서는 몸을 일으켰다. 나를 내려다보며 환약을 입으로 가져가던 베르시아의 눈이 커졌다. 덥썩. "에?" "어라?" 내가 입을 크게 벌리고는 베르시아의 손을 덥썩 물자 주위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으으, 조금 움직였다고 힘이 쭉 빠진다. "켁." 나는 베르시아의 손을 힘겹게 빼내고는 침대에 쓰러졌다. 내 입 안에 환약이 들어 있었다. 자, 이제 문제인데… 이걸 어떻게 삼키지? "세, 세한!" 베르시아가 얼굴을 확 붉히고는 내 얼굴을 붙잡았다. 뭔가 불만과 당혹이 뒤섞인 듯한 베르시아의 얼굴을 살피던 나는 환약을 이빨 사이에 놓고는 힘껏 깨물었다. 카득. 환약이 큰 것 한 놈과 작은 건 한 놈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두 놈을 삼켰다. "크윽." 목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황당하다는 듯한 베르시아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또 기절? 그리고 순간, 정신이 맑아졌다. "우웃!" 다크 엘프 비전의 환약의 위력은 놀라웠고, 나는 몸에 힘이 약간이나마 돌아오자 급히 몸을 일으키고는 목을 부여잡았다. "크으으… 망할. 끔찍하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한쪽에 서 있던 칼과 아신은 특히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젠장! 시간 없어! 저 소리 안 들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아까부터 들려오는 앵앵거리는 소리를 지적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다크 엘프들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인간 세상에 나온 게 처음이니 모르겠구나. "엠페러 연합의 호출, 비상사태를 알리는 소리다!" 순간 21명의 기도가 확 바뀌었다. "어째서 병력을 원조하지 않는다는 거요!" 긴파의 시장, 네크빌은 자신의 집무실로 찾아와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엠페러 연합, 긴파 지부의 지부장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가 도와야할 이유가 있소?" 당당한 네크빌의 태도에 엠페러 연합의 긴파 지부장, 타실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물론! 긴파 시는 우리 엠페러 연합의 도시요! 그러니 우리가 공격 받고 있으니 당연히 도와야지!" 파실의 말에 네크빌은 분노하며 고함을 질렀다. "무슨 소리! 당신들은 긴파 시를 소유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소! 도대체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거기다 우리들은 잘난 당신들과는 달리 유한한 존재들이오! 어디 자력으로 열심히 해보시구려!" 네크빌의 고함에 이번에는 파실이 마주 고함을 질러대었다. "이, 이런!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NPC 주제에 정말 이 도시의 책임자라도 되는 것 처럼 얘기하지 마라! 혹시 저 다크소드 어쩌고 하는 연합이 승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보지? 저들의 수는 겨우 천 정도란 말이다! 수적으로도 우리가 우세야! 어차피 네놈들의 도움이 없어도 이길 수 있단 말이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이미 존대고 뭐고 없는 파실의 외침에 네크빌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 찾아온 사내의 말, 그가 그것을 지키려 하고 있다고 해도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모두 끝장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엠페러 연합의 단연 우세였다. 때문에 네크빌로써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크빌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파실은 의기양양해 더욱 크게 떠들어대었다. "고작 천 명에 오합지졸이다. 우리 엠페러 연합에게는 비할 바가 되지 않는 한심한 전력이야! 지금 당장 협조하지 않으면……!" "어쩔 거지?" 파실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와 자신의 목에 겨눠지는 검을 보며 말을 멈췄다. 네크빌의 눈이 커져 있었다. "어쩔 거냐고 물었다." 차가운 목소리. "이, 이 자식!" 파실이 몸을 돌리며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세한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요검을 휘둘렀다. "가자." 나는 시청의 정원을 걸으며 말했다. 정원의 곳곳에 서 있던 일행이 속속들이 내 뒤에 모이며 우리,검은 로브의 23인은 시청을 나섰다. "NPC들은 우리 편을 드는 건가요?" "단지 침묵할 뿐이지." 운이 좋았다. 뒤에서 기습을 한 것이 아니었다면 지금 몸 상태로는 시간이 꽤 걸렸을지도.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음, 엠페러 연합 지부. 남은 녀석들을 해치우고 성벽을 장악한다." 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옆에서 묵묵히 걸어가는 칼과 아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칼, 아신. 만일 다크 엘프들에게 위협이 생기면 몸으로라도 막아라. 절대 죽게 하면 안돼. 부탁이다." "알겠습니다." "하핫. 제가 하고 싶어서 할 겁니다." 칼과 아신의 대답에 나는 미소를 짓고는 저 멀리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새벽이었지만 각 진영에서 밝힌 불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전쟁 확인. AI-112. 로그아웃을 관리합니다. "헤? 이건가?" 위리안은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작은 메시지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전쟁 등의 전투가 일어나면 인공지능 컴퓨터가 상황을 파악해 로그아웃을 관리한다. 운영자들이 직접 관리하는 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AI 컴퓨터들이 관리를 하고, 현재도 AI 컴퓨터 한대가 긴파 시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관리하고 있었다. "위리안님. 옵니다." 베르만이 자신의 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위리안은 고개를 들어 긴파 시의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성문에서 엠페러 연합의 군대가 걸어 나와 정렬하고 있었다. "세한님이 보내주신 정보로는 긴파 시 주둔 엠페러 연합 지부가 이 사이에 끌어낼 수 있는 병력은 1500 정도입니다. 그 병력 중 200명이 성벽 배치. 100명은 도시 내 감찰. 결국 성벽 밖으로 공격해 나오는 것은 1200정도입니다." "겨우 200 우세로 정면 승부라니, 얼간이로군." "꼭 그렇지 만도 않습니다. 성벽 전으로 가서는 도시에 피해가 가기도 하니까요. 때문에 길드전은 이렇게 성벽 밖에서 싸우는 일이 잦습니다. 이번 공격은 우리의 기습이라 공성전으로 가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이로군요." "흠, 1200대 1000. 전략 승부, 개개인의 전투 능력 승부인가?" "긴파에는 유능한 전략가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대로 밀고 오지 않을까 생각되는군요. 자신들의 실력이 높다고 확실할 테니까요. 뭐, 솔직히 저희 길드와 저들 개개인의 실력은 평수 정도입니다." 어차피 죽어도 삼일 뒤면 살아날 수 있다. 때문에 병력 부족과 인명 피해의 걱정은 없으니 저렇게 돌격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숫자가 높다면 자신이라도 저런 방법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위리안은 쓰게 웃었다. "그럼 우리는 전략으로 가야하겠군." "예. 마침 여기에 뛰어난 전략가께서 계시는군요." 베르만의 말에 위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섀도우 월드를 하면서 전문적으로 전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위리안도 소드 오브 다크에 들어오면서 전술을 공부했다. 원래 머리는 잘 돌아갔기에 거기에 전술 상식이 겹쳐지자 스스로나 남들이나 고개를 끄덕일 정도가 되었다. 위리안은 손을 들어올렸다. 처처척. 일사 분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1000명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별한 진형이라기보다는 약 200명 씩 모여 다섯의 그룹으로 정렬해 있는 모습일 뿐이었다. 마치 평원에 가로로 선을 여러 개 그어둔 듯한 모습이었다. 한편 성문 바로 앞, 엠페러 연합의 군대 지휘를 맞고 있는 스카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볼 것도 없다. 그냥 쓸어버려! 간만의 싸움이다! 레벨을 올릴 기회란 말이다! 돌격!" 길드간의 전쟁 시에는 경험치 상승폭이 크다. 결국 이 전쟁을 자신들의 승리로 낙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스카는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출발시켰다. 말을 타고 있는 이는 별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엠페러 연합의 군단은 그대로 달려 나갔다. "우와아아아아!" "개떼로군." 위리안의 담백한 평가에 베르만은 미소를 지었다. "주토, 넌 설화와 꼭 붙어서 보호해라. 절대 죽어선 안돼." "알겠습니다." 위리안은 푸른 안경을 위로 추스르며 싱긋 웃었다. "화염의 지옥을 보여줄까, 황제 급의 멍청이들?" 투툭. 위리안은 멘트와 함께 가슴에 달아두었던 부적들을 모조리 뜯어 공중으로 내던졌다. 키이이잉. 부적들이 밝은 빛을 내뿜으며 붉은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위의 병사들이 감탄사를 토해냈다. "가라." 부적들이 붉은 괘선을 그리며 앞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리고 엠페러의 군대의 앞쪽에 떨어졌다. 그리고 솟구치는 화염. 푸화아아아악! 곳곳에서 화염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방으로 불길이 뻗어나갔다. 엠페러 연합군이 당황하는 모습에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크윽." 하지만 위리안은 신음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저 정도 일을 혼자서 한 것만 해도 놀라운 기적이었다. 온 힘을 모두 소비한 위리안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베르만을 바라보았다. "작전대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베르만을 선두로 소드 오브 다크의 병사들은 앞으로 돌격해 나갔다. 불길과 불길 사이로 나누어진 병력대로 돌격해 들어가는 모습에 위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승산은 충분히 있다. 이제는 그쪽 차랜데, 한.' 그리고 그때, 엠페러 연합 긴파 지부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 빠져있었다. "발사." 휘익, 휘익! 내 작은 중얼거림에 수십 개의 화살들이 공중을 날았다. 한번에 4, 50개씩 하공을 나는 화살들은 제각각 화염이나 전기를 머금고 있었다. 다크 엘프, 비장의 궁술이랄까. 한번에 여러개의 화살을 날리는 기술에 정령을 이용해 화살에 화염이나 전기를 싣는 기술. 뭐, 상위 아처라면 여러 발을 날리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저렇게 속성을 싣는 것은 불가능하다. 엘프들 만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강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엠페러 연합, 긴파 지부를 보며 약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제퍼슨의 세력이라고 할 수도 있는 건데 약간 미안하군. "공격!" 그때 아직 불길이 약한 위층에서 적들이 몸을 내밀고는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각종 마법에서 단검, 화살 등등의 원거리 공격들에 나는 손을 들어올렸다. "산개. 3인 1조. 집결지는 성벽 위다. 반드시 윈드 아머를 걸도록." "윈드 아머." "윈드 아머." 타타탓 대답 소리 대신 윈드 아머를 사용하는 주문 소리와 사방으로 흩어지는 소리들만이 들려왔다. 괜히 대답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그럼, 가보실까." 다크 엘프들과 칼, 아신은 성벽으로 돌격하며 성 안에 남아있는 녀석들을 처리할 것이다. 그럼 혼자 남은 나는……. 파파팍. 내가 앞으로 움직이는 동시에 내가 사방에 공격들이 떨어졌다. 천상의 망토를 스쳐지나가는 공격도 꽤 많았다. 퀵스텝이 아니었으면 예전에 구멍 뚫렸겠군. 나는 마법 화살들과 단검을 슬쩍슬쩍 피하며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르륵! 망토에 잠시 불길이 강하게 타올랐지만 내 의지에 의해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으음, 생각보다 쓸 곳이 많단 말이야. 불길이 조금씩 거세지는 계단을 뛰어올라가던 나는 위에서 기척을 느끼고는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내가 3층으로 올라가는 순간, 4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몇몇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확인하러 내려오는 중이었는지 그렇게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대거 댄싱." 쉬이익! 나는 앞으로 날아가는 단검들과 함께 계단을 뛰어올랐다. 몇몇 녀석들이 단검을 쳐냈지만 동시에 빈틈이 노출되었고 나는 그 빈틈에 요검을 쑤셔 박거나 그대로 베어버리고는 놈들을 스쳐지나갔다. 풀썩. 털썩. 등 뒤로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불길을 헤치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아무래도 저 녀석들로 안심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적은 없었다. "6층이 끝이었던가?" 나는 5층에 도착해서는 6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가는 대신 5층에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위에 6명. 옥상에 20여명. 옥상은 곧 다크 엘프들이 화살로 끝낼 테니 그다지 걱정은 없다. 그럼 6명인데 정면 승부로는 아무래도 좀 힘들겠지. 발을 잘못 디뎌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슬플 테니. "크로스." 파카카칵! 기를 강하게 끌어올려 천장으로 검기를 폭출했다. 순식간에 천장이 우르르 허물어졌고 나는 그대로 위로 솟구쳤다. "저기." 무너지는 자재 속에서 기척을 잡아낸 나는 공중에서 몸을 틀며 단검을 집어던졌다. 곧 큭 하는 단말마라 울렸고 나는 망토를 뒤집어쓰고는 자재들을 뚫고 올라섰다. 탁. "대거 댄싱." 균형을 잃고 떨어지려던 놈과 바닥의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녀석들이 단검에 꿰뚫려 순식간에 게임 오버 당했다. 그리고 남은 녀석은 둘. 생각보다 쉽군. 내가 앞으로 달려들자 둘 중 한 녀석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다른 한 녀석은 손에 든 구슬을 향해 뭔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통신구?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온 녀석이 손을 휘둘렀다. 클로. OPG의 손톱보다 훨씬 긴 칼날들이 달렸군. 나는 몸을 비틀며 클로의 칼날 사이에 요검을 끼워 넣고는 힘을 주어 강하게 튕겼다. 파캉. 클로의 칼날이 부러져나가며 상대가 몸을 비틀거렸다. 그리고 나는 복부에 발차기를 넣었다. "커억." 상대가 신음을 흘렸고 나는 요검을 회수하는 순간 옆으로 뿌려 녀석의 목을 날려버렸다. "어디와의 통신이냐?" 방금 사람을 죽인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자 통신구를 들고 있는 녀석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통신구는 꼭 쥐고 있는 것이 중요한 통신으로 보였다. 흐음. 혹시나 원군 요청이면 곤란할 수도. 나는 요검을 녀석의 목에 겨눴다. "삼일만 쉬어라." 푸욱. 겁에 질린 녀석이 목이 검에 꿰뚫려 쓰러지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던 나는 통신구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이봐! 익숙한 목소리로군. 나는 날카롭게 울리는 딜럿의 목소리에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엠페러 연합 실질적 지도자 어르신이 이런 외지까지 신경을 쓰시다니, 의외인데? "오랜만이로군." -음? 네놈은 누구냐! "아, 기억 못하시나. 다크소드라고 하는데?" -네, 네놈! "아, 이곳은 내가 접수했다. 그럼 나중에 보지." -이, 이 자……!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에 힘을 주어 통신구를 부숴버렸다.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구슬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기분 나쁘군."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이야. 뭐, 가상현실이니 좋게 생각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내겐 두 개의 현실 중 하나. "마나르트가 보고 싶은데." 이럴 때 마나르트가 있으면 좀 편해질 텐데. 나는 한숨을 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옥상 위에서는 기척이 점점 줄어가는 것이 다크 엘프들이 저격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웬만한 실력의 궁술로는 엘프를 따라가기가 힘들겠지. 약간 침울한 기분을 느끼며 불에 타오르는 건물을 빠져나가려던 나는 갑자기 강하게 밀려오는 기운을 느끼고는 걸음을 멈췄다. "이, 이 기운은……." 나는 급히 요검을 들어올려 천장을 가격했다. 다시 천장이 무너졌고 나는 그대로 위로 뛰어올랐다. 순간 시원한 새벽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네, 네놈!" 내가 옥상에 내려서자 살아남아 있던 몇몇 녀석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녀석들은 내가 손쓰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들에 쓰러졌다. 다크 엘프들이 날 보고는 급히 화살을 날린 모양이었다. "저건……." 나는 다크 엘프들이 옥상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도 무시하며 한 쪽을 바라보았다. 한 검은 기운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다크 캐논? "마나르트!" 순간 하늘로 솟아오르던 검은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내게 알리려는 연락용 수단이었나? 하지만 왜 그냥 날아오지 않고 저런 짓을? "세한님?" 제렌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상관이야. 날 찾아왔는데 당장 만나러 가야겠지.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장난을 치지 않는 녀석이니까. 더욱이……. "저런 전쟁터에서는 더욱." 검은 빛줄기가 하늘로 오른 곳은 우리의 군대와 엠페러 연합의 군대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그보다 약간 멀리로 보이기는 했지만. "제렌. 성벽으로 가자." "예!" 나는 다른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오르며 요검을 틀어쥐었다. "성벽 위에 있는 녀석들의 수는 200명 정도. 한명 당 10명씩을 맡아야 한다. 힘들 거야." "믿어 주십시오." 제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렌의 뒤를 따르던 두 엘프가 역시 이런 상황에서는 분위기가 엄청나게 차갑니 어쩌니 하고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잠시 비틀고는 그대로 높이 뛰어올랐다. "뭐, 뭐냐!" "소, 소대장! 여기 이상한 녀석이……!" 푸화아악! "미천한 인간들에게 녀석 소리 듣고 싶지 않다." 강한 마기로 한 병사를 순식간에 터뜨려 버린 마족, 마나르트 판디안은 신음을 흘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변두리긴 했지만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전쟁터였다. "크윽. 몸꼴이 이래서는 위험할 지도." 마나르트는 자신을 향해 마구 달려들고 있는 수십의 병사들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세한의 기를 따라 어떻게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짧은 시간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웬만한 마족이었다면 벌써 탈진해 죽어도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었다. 치이잉. 마나르트의 손에서 검은 마기로 이루어진 기검이 생겨났다. 기형으로 흔들거리며 타오르듯 넘실대는 마기검을 잠시 바라보던 마나르트는 이를 악물고는 휘두르기 시작했다. "화염(火焰)." 위리안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부적을 날렸다. 빠르게 반원을 그리며 날아간 부적은 이쪽으로 달려오던 세 명의 적군의 앞에 떨어졌고, 곧 강한 화염의 폭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토가 앞으로 달려들어 비틀거리는 셋을 스쳐지나가며 목을 따버렸다. "하아. 나이스 콤비로군. 역시 같은 대륙 출신은 다르단 말이야." 맨 처음, 온 힘을 쏟은 부적술 덕분에 뒤에서 쉬고 있던 위리안은 어느 정도 힘이 회복되자 주토와 설화를 이끌고 조금씩 앞으로 전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셋의 주위에는 수십의 호위병들이 과노동에 시달리며 적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기검은 꿈도 못 꾸겠네. 끽해야 빙창이 한계인가?" 위리안은 품속에서 여러 개의 부적을 더 꺼내며 중얼거렸다. 아까 기를 너무 소비했기 때문에 강한 부적술은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초적인 부적술이나 약간의 응용을 첨가한 기술이 아니면 몸이 버티지 못했다. 목숨을 거는 전투에서는 치명적이었다. 거기다 이곳은 동대륙이 아닌 서대륙이었다. 부적을 만드는 한지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곳. 지금 위리안이 쓰는 부적들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들이나 그냥 돌아다니는 종이를 사용한 것들이었다. 주위에 은사를 쳐가며 위리안의 옆을 지키던 설화가 뭔가를 깨달은 듯 흠칫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위리안과 주토도 동작을 딱 멈추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리안님? 이 기운은……." 주토가 약간 의아한 목소리로 위리안에게 물었다. 위리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세한이 풍기고 다니던 마기잖아? 설마 벌써 성벽 쪽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 건가? 하지만 말 했던 것과 다르잖아? 분명 성벽 위에서 다크 엘프들을 지휘해서 원거리 공격으로 지원을 하기로 했었는데?" "이상하군요." 위리안과 주토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둘은 마기가 느껴지는 곳이 또 성벽 쪽이 아니라 엉뚱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젠장. 설화 소저." 뭔가 고민하던 위리안이 설화를 불렀다. 설화가 위리안에게 고개를 돌렸고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은사를 계단 형식으로 겹쳐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밟고 뛰어오를 수 있도록. 음, 세한이 검은 계단을 만들어 내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능해요." 설화는 대답과 동시에 바삐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은사들이 하늘로 치솟으며 새벽빛에 반짝거렸다. 꽤나 아름다운 광경에 주위에서 약한 감탄사들이 들려왔다. "속(速). 경(輕)." 위리안이 두 개의 부적을 동시에 태워 올리고는 약간 비틀거렸다. 한번에 두 개의 부적을 태우는 것이라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설화 소저. 은사에 기를 넣어서 눈에 잘 보이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위리안의 부탁에 설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사 전체에 고루 기를 주입했다. 웬만한 실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솜씨였지만 위리안은 뭔가 찬사의 말을 하는 대신 약하게 빛나는 은사들을 눈여겨보다가 그대로 뛰어올랐다. 기익. 기익. 은사에 발을 디딜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체 능력을 강화 시킨 덕분에 좀 위로 올라선 위리안은 급히 주위를 살폈다. 이렇게 공중으로 노출되어 오래 있었다간 언제 화살꽂이가 될지 몰랐다. 그대 주토가 위리안의 옆으로 살짝 내려앉았다. "저쪽 같습니다." 소검을 뽑아들고 있는 주토의 모습에 자신을 지키러 온 것임을 알아챈 위리안은 미소를 짓고는 마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저건……." 그리고 둘은 눈을 크게 뜨며 신음을 토하듯 말했다. 그들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는 마치 개미떼가 빗방울에 맞아 사방으로 튕겨나가는 듯한 광경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근원지에 검은 마기를 불꽃처럼 피어올리고 있는 밖으로 드러난 흰 얼굴 외에는 모든 것이 검은 한 존재가 검은 기의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 엄청나다." "주, 주군과 맞먹을 듯한 실력 같습니다." 위리안과 주토는 빨리 여기서 내려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 검은 존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어서 어떻게 생겼는지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사방으로 마기를 날리고 있는 존재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물론 당하는 쪽에서 본다면 사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세, 세한이 문제가 아니야. 저 검은 녀석… 몸 상태도 엉망으로 보이는데? 마기의 강약의 폭이 뒤죽박죽이야. 몸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위리안의 말에 주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게 정상이 아닌 상태? 그렇다면 저 검은 존재의 진짜 실력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 주토였다. 잠시 자신에 대한 회의에 빠져있던 주토는 입술을 한번 꼭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마기는 상당히 익숙합니다. 주군의 것과… 물론 주군 외에 마기를 다루는 사람을, 마족을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저… 마족일까요?" 앞뒤가 맞지 않는 질문이었지만 어떻게 요지를 파악한 위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기까지 운용해 가며 검은 존재의 모습을 살핀 위리안의 머릿속에 뭔가가 여러 개 스쳐지나갔다. 세한의 머리에 달라붙어서 자신을 향해 뭐라고 외치던 유령 같은 녀석. 닮았다. "주토……." "예?" "시력에 집중해서 좀 살펴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예?" 위리안과 주토는 눈에 기를 응용하며 검은 존재를 살폈다. 희미하게나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약간 날카롭고 가느다란 얼굴선. 상당한 미남자였다. 그리고 완벽한 신체. "…세한이 말하길, 자신의 마검이 가출… 실족됐다고 했던가?" "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 "필치 못할 사정으로 둘이 떨어졌었다면, 마검은 어떻게든 세한에게 돌아가려고 하겠지?" "그럴 것 같습니다." "마검에 마족이 들어있다고 했던가?" "예."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아래에서 베르만의 외침이 들려왔다. "위리안님! 주토 씨! 내려오십시오! 동쪽에 정체불명의……!" 베르만의 외침에 위리안과 주토는 정신을 수습하고는 다시 한번 검은 존재의 모습을 살폈다. 그때 밑에서 깨질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피하십시오!" 둘이 퍼뜩 주위를 살피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불덩어리들이 은사들에 작렬했다. "쿠에엑!" "크윽!" 그나마 설화가 꼼꼼하게 은사를 쳐둔 덕분에 직격은 피한 둘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볼썽사나운 꼴로 바닥에 처박힌 둘에게 베르만과 설화가 급히 다가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베르만의 외침에 위리안과 주토는 끄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위리안이 벌떡 일어났다. "검은 녀석! 검은 녀석은!" "아, 아무래도 마족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으로썬 엠페러 연합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만. 적의 병력을 줄여주고 있으니 그냥 방관하는 것이 어떠냐는……." "당장 구출해! 당장!" 위리안은 베르만의 멱살이라도 틀어쥘 듯 강렬한 기세로 소리쳤다. 베르만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며 반문했다. "예? 구출이라니……." "우리 연합 최강의 전력이다! 구출해! 세한의 부하들이라고 하면 우리를 공격하진 않을 거야! 구출대 편성해! 동쪽으로 돌격! 유령 녀석이 위험하다고! 기가 점점 흐트러지고 있단 말이야!" 베르만은 황당해 하는 표정으로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마나르트!" 나는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며 마기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자식! 어디 갔다가 저런 꼴로 돌아온 거야? 그냥 겉보기에는 강한 마기로 적들을 튕겨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마기를 잘 알고, 기를 느끼는데 능력이 높은 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한 힘을 그저 증폭시켜서 터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곳으로 집중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증거로 마나르트의 공격을 받고 죽는 녀석들이 별로 없었다. 식스센스를 최대한으로 늘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마나르트 녀석, 몸 상태가 완전 맛이 갔잖아? 왜 마족의 모습으로 돌아갔는지는 몰라도 저 상태로는……. "죽는다." "예?" 성벽을 장악하고는 모여드는 다크 엘프들을 확인하던 제렌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나는 굳은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렌." "예." "작전대로 성벽에서 공격을 퍼부어라. 너에게 일임하지." "예? 그게 무슨……." "칼, 아신. 다크 엘프들을 절대 죽게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모두, 절대 따라오지 말도록." 그리고 나는 그대로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뒤에서 베르시아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네 녀석의 힘을 인간에게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나는 요검에게 낮게 중얼거리고는 땅에 착지했다. 순간 도약으로 단번에 엠페러 연합의 후방에 내려선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양 어깨에 화려한 문양이 있는 엠페러 연합의 병사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고함을 질렀다. "네놈은 뭐냐! 멈춰!" "멈춰라!"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요검을 틀어쥐었다. 멈추라고? "비키지 않으면 모두 죽인다!" 내 살기 섞인 고함소리에 녀석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수가 너무 많아서 잠깐이었지만. 단신으로 수백의 적군에게 돌파라. 내가 삼국지의 조자룡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라냐? "그래도… 놔둘 수는 없지. 흐아아아!" 나는 바로 앞으로 다가온 녀석을 그대로 베고 지나갔다. 멈추면 안 된다. 서는 순간 끝이다. 부우웅. 대검이 날아들었다. 급히 옆으로 피하면서 올려치며 상대의 옆으로 빠지며 옆구리를 훑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화살의 비. 파파파팟. 속도를 늦추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며 화살들을 쳐냈다. 하지만 상당한 실력의 아처가 있는지 화살 하나가 내 어깨를 파고들었다. 뽑을 시간이 없다. 화살을 뽑지 않은 채 앞으로 계속 달렸다. 피이익.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작은 점 같은 것들이 무서운 속력으로 날아오며 내 코앞에서는 하나의 창날의 모습을 갖췄다. 달려 나가는 속력에 공격이 오는 속력이 더해져 그야말로 찰나에 눈앞으로 다가온 창날. 하지만 그대로 달리며 고개를 틀었다. 왼뺨과 귀가 찢어지며 뭔가 뜨거운 것이 왼 얼굴과 어깨를 물들였다. 철컹. 그대로 달리며 왼손의 OPG로 내게 창을 날린 녀석의 심장을 꿰뚫었다. OPG의 날카로운 손톱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떨어졌다. 지독한 혈향. "크아아아!" 진형을 짜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약간은 듬성듬성 서 있는 적들. 하지만 소란에 적들이 모여들며 한꺼번에 공격해 들어왔다. 스으. 요검을 약간 비켜쥐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세 개의 검과 하나의 도끼, 그리고 단검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상하게도 너무 잘 보였다. 파타타칵! 검 하나에 붙인 요검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검을 튕겨내었다. 작게 생긴 공간. 하지만 좁다. 오른손으로 단검 몇 개를 튕겨내는 순간, 옆구리와 허벅지에서 화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서면 죽는다. 나도 마나르트도. 눈을 부릅뜨며 균형을 찾고 만들어진 작은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얼굴들. 양 옆으로 수명의 적들이 있다. 요검을 앞으로 살짝 던지는 동시에 양 손을 옆으로 뻗었다. 검은 기운이 양 손에 맺히며 순식간에 뻗어나갔다. "크헉!" "끄아아악!" 마기와 마나의 응집체에 몸이 옆에서 꿰뚫려 비명을 지르며 수명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시체들과 멀어지며 요검을 손에 잡았다. 스으으으. 요검이 강하게 남색 기운을 내뿜었다. 팔을 타고 올라 온몸에 남색 기운이 타고 올랐다. 사방으로 남색 기운이 뻗어나갔다. 사자(死者)들의 일어섬. 뒤쪽에서 혼란한 감정들이 밀려들어왔다. 죽은 시체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배가 뚫리고 머리가 날아가고 머리가 꿰뚫린 시체들이 일어서며 괴성을 지르며 나의 뒤를 쫓았다. "끄아아악!" "아, 악마다!" 뒤에서 끔찍한 괴성과 비명소리, 잔인한 파육성이 들려왔다. 사자들이 뒤를 점하는 적들을 도륙했다. 요검이 점점 더 강한 기운을 내뿜었다. 뒤를 따르는 사자들의 수는 계속 늘어갔다. "아, 악마! 죽어어어어!" 앞에서 한 녀석이 분노한 얼굴로 검을 휘둘러온다. 역시나 양 쪽의 속도가 합쳐서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온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굴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푸확. 왼손으로 날아오는 검을 움켜쥐었다. 힘에 속력이 더해져 강한 파괴력이 생겨 OPG가 터져나가며 손바닥을 검날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멈춘 검. 경악에 물든 눈동자. 상대를 스쳐지나가며 피가 흐르는 왼손을 움켜줘 OPG의 날카로운 손톱으로 얼굴을 찍었다. 네놈도 내 뒤를 따르게 되겠지? 요검이 낮게 울었다. 저절로 길이 열린다. 앞길을 막는 녀석들의 수가 줄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입은 상처가 너무 크다. 달리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도 이대로 길이 생긴다면. "다 죽어가는 놈이다! 저 녀석을 죽이면 저 시체들도 죽는다! 공격해라! 공격해!" 바람이 무너지는군. 우렁찬 고함소리에 녀석들의 눈빛이 바뀌는 듯 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돌격해 온다. 군중 심리. 혼자서는 하지 못할 일을, 무리를 이루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할 수도 있다. 모이니 겁도 사라진다는 건가? 목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꽤 멀리 있는 곳에 꽤나 거대한 덩치에 대검을 든 녀석이 있었다. 본적이 있는 녀석인데? 옛날, 경매장에서 본 녀석. 미토스와 처음 만났던 때. 클레이모어를 사려던 녀석이다. 투사 랭킹 2위의 녀석이었던가. 투사 최강 길드인 워리어스의 길드 마스터. 이름은 모르겠군. 저런 거물이 엠페러 연합에?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왜 이런 오지에 있는 거지? 하지만 생각은 나중이다. 휘리리릭! 바람을 가르며 수십의 화살들이 날아왔다. 좋은 지휘관이 생겼다 그건가. 협동이 잘 되는군. 다 막기는 불가능하다. 그럼 아껴둔 힘을 써야겠지. 스아아아악! 전방에 검투명한 방패가 생성되었다. 적들의 당혹한 얼굴. 화살들이 검투명한 바리어에 격돌하며 부러지고 튕겨져 나갔다. 정신력 회복은 빠르긴 하지만 약간 시간이 걸린다. 파칭. 화살들이 모두 튕겨나가며 바리어가 깨졌다. 그리고 뒤를 잇기라도 하듯 화염이 쏟아졌다. 망토를 붙잡고 휘둘렀다. 순식간에 천상의 망토가 늘어나며 몸을 감쌌고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푸화악! 강한 불길에 망토가 요동쳤다. 그리고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던 덕분에 화염의 지옥은 오래가지 않아 끝났다. 불길 다음으로 맞이하는 창검들. 까가가가각. 멈춰서는 안 된다. 검 하나가 팔을 왼팔을 꿰뚫었고 창날들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앞의 상대를 요검으로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왼팔을 옆으로. 검은 기운이 쏘아져 나갔다. 불길을 뚫고 나온 시체들이 뒤에 남은 적들을 도륙했다. 그리고 엄청난 기세로 휘둘러져오는 대검. 이건 스치기만 해도 팔정도는 그대로 떨어져나간다. 순간 도약으로 뛰어넘어? 허벅지 상처가 방해된다. 빠르게 옆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가깝고 빠르게 다가온다. 스치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어떻게, 어떻게……. 푸카칵. 엄청난 불똥이 튀었다. 요검과 왼손에 의해 막힌 대검. 양 발이 땅속에 약간 파묻혀 있었다. 강하다. "멈췄군. 네놈은 뭐냐!?" 눈앞의 강력한 투사가 고함을 질렀다. 옆이나 뒤에서의 공격은 요검에 지배받는 시체들이 막아주고 있다. 멈춰버렸다. 움직이기 힘들어. 어쨌든… 상대는 이 녀석이다. "네놈은 누구냐!" 녀석이 대검을 지긋이 내리누르며 재차 고함쳤다. 나? "다크… 소드." "다크소드?" 순간 술렁임이 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느낌이 아니라 사실일 것이다. 식스센스가 있으니까. "그렇군. 그래, 죽여주마!" 그그극. "크으으……." 신음이 터져 나온다. 최상의 상태였다면 대등이었을까. 어깨고 팔이고 다리까지, 힘을 지탱한 모든 부분에 상처를 입은 이 상태에서는 힘겨루기는 상대가 안된다. 위에서 계속 찍어 누르는 대검과 밑에서 막아내는 요검과 OPG가 이상한 소음을 내었다. OPG의 깨어진 부분 덕분에 손바닥이 계속 찢겨져 들어갔다. 그리고 아래로 밀려오는 요검과 왼팔. 끝인가. 젠장. "크하하핫! 재밌군! 나와 힘으로 겨루는 거냐! 반으로 갈라주마!" 비웃는 듯한 고함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옆으로 몸을 날릴 힘도 짜내기 힘들다. 요검은 자신의 힘까지 끌어내며 대검을 막아내느라 시체들의 움직임도 느려져 도움을 바랄 수는 없다. 그그극. 대검의 검날이 머리 바로 위까지 내려왔다. 요검의 날카로운 날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천천히 떨어져갔다. 검은 머리카락. 파칭! 순간 머릿속에 어떤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가는 선의 미남형의 얼굴. 검은 장발. 짙은 어둠의 눈동자. 약간 피로한 듯한 표정에 얼굴에 피가 튀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놀랐다는 듯한 표정. 갑자기 교감이 돌아왔어? 어째서? 그보다는 너 몸 상태가… 위험한 상황이냐? 마나르트, 마나르트……. "마나르트!!" 푸화아악! 갑자기 온몸에서 마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상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대검이 하늘로 약간 떠올랐다. 요검에 힘을 주며 대검을 마구 밀어붙였다. "으아아아아아아!" "크, 크으윽!" 대검이 처음엔 천천히, 그리고 곧 뒤로 쭈욱 밀려났다. 그리고 가슴이 비었다. "죽어엇! 살검(殺劍)!" 푸욱! 요검이 상대의 목을 꿰뚫었다. 하지만 녀석은 이를 꽉 악물더니 대검을 그대로 내리 찍어왔다. 이대로면 등이 반으로 갈리겠군. 마기다 다시 흘러나오며 망토가 펄럭거렸다. "스핀(Spin)!" 대검이 등에 박히기 직전, 몸을 비틀어 회전했다. 허리를 약간 가르고 대검이 아래로 내려갔고 나는 몸을 회전시키며 요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크학!" 목이 거의 잘린 녀석이 마지막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한바퀴를 돌아와 요검을 다시 휘둘러 녀석의 머리를 날렸다. 허공으로 치솟은 붉은 피와 둥그런 머리. 후두두둑. 허공으로 치솟았던 피가 비처럼 쏟아지며 머리카락을 타고 흘렀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 지금까지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무아지경? 그저 멈추지 않고 달려왔을 뿐. "마나르트……."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엠페러 연합의 녀석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긴, 이렇게 피를 한바가지 뒤집어쓰고 웃었으니 공포스럽기도 하겠군. 나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쪽이다. "허억, 허억. 세, 세한인가?" 마나르트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낮게 읊조렸다. "세한이 직접 찾아왔군. 거리가 가까워진 덕분에 영혼이 다시 연결된 건가?" 마나르트는 자신의 몸을 한번 감싸고 돈 검은 마나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영혼의 교감이 돌아오면서 순간 둘의 힘이 교환되었다. 덕분에 둘 모두 위기를 벗어났다. "빨리 좀 오라고 이 망할 주인 씨야……." 비틀. 마나르트는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마나르트에게 엠페러 연합의 병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쿨럭. 젠장……." 나는 신음을 토하며 땅을 박차고 달렸다. 마나르트의 마기가 점점 강해지면서도 약해지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져 좀 더 분명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마기 자체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마, 막아라!" 용기를 낸 듯한 몇몇 녀석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비켜어어엇!" 요검과 OPG가 동시에 X자로 휘둘러지며 내 앞을 가로막은 녀석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멈추면 안되지." 나는 피식 웃고는 되는 한 퀵스텝을 이용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속도가 점점 붙으면서 요검이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수많은 사자(死者)들이 괴성을 지르며 뒤따라 왔다. 우리가 지나간 곳에는 피의 길이 생겨났다. 저 멀리 싸우고 싸우는 전사들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한곳에 우르르 몰려 있는 사람들과 그 중앙에서 느껴지는 마기. 식스센스를 잠시 확장시키던 나는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갔다. 반대편을 보고 있던 녀석들이 뒤에서 비명이 들려오자 급히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내 검에 맞아 쓰러진다. 그들은 요검의 지배를 받아 내 뒤를 따른다. 솔직히 그다지 마음에는 들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이 요검의 힘이라도 빌려야한다. 그때 전장의 소음을 뚫고 한 외침에 귓가에 들려왔다. "비켜엇! 감히 하찮은 인간들이 내 주인을 만나러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냐!" "마나르트?" 마나르트의 고함소리에 나는 피식 웃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부릅떴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높이 뛰어올라 단숨에 몇 명의 머리 위를 뛰어넘은 나는 마나르트가 있는 장소를 찾았다. "저긴가?" 바로 정면에서 마나르트의 마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포위진인지 엠페러 연합의 녀석들이 둥그렇게 몰려서 있었다. 그리고 급히 나를 돌아보는 녀석들. 뚫을 수 있을까? "비켜어!" 생각은 필요 없다. 나는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 앞을 막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 당혹이 떠올랐다. 그리고 수십의 적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피싯, 파삿. 내가 아무런 방비도 없이 자신들에게 돌진하자 당황한 병사들의 움직임이 약간 더뎠고 나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고는 인파를 거의 빠져나왔다. "이, 이 자식!" 맨 뒤에 있던 편이던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는 똑바로 검을 찔러왔다. 이 상태로 피할 수 있을까? 해치울 수 있을까? 앞 쪽의 두셋의 뒤로 한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짓고 있는 검은 존재. 거리가 상당히 멀었지만 이상하게도 너무 잘 보였다. 그리고 희미하게 퍼져나가는 마기와 마나르트에게 돌격해 들어가는 녀석들. 마나르트가! 죽는다! "까득." 파카칵! 머리를 옆으로 틀면서 왼손의 OPG의 손톱으로 검을 밀어 올렸다. 날과 날이 맞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불꽃이 생겨났다. 그리고 나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요검을 왼쪽으로 휙 휘둘렀다. "카학!" 뒷목에 요검을 맞은 녀석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비명을 흘렸다. 그리고 요검을 그대로 앞으로 뿌렸다. 한 녀석이 요검을 막아내고는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요검이 밖으로 크게 휘둘러져 몸이 무방비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앞에 남아있던 녀석이 눈을 빛내며 메이스를 휘둘러왔다. 죽어도 상관없다. 나는 남아있는 모든 마나와 마기를 끌어올리고는 눈을 빛냈다. 메이스가 내 머리를 노리고 똑바로 내리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른발을 강하게 내딛고는 왼발을 내뻗으며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푸화아악! 그리고 폭발이 일어나며 메이스를 휘두르던 상대가 그대로 찢겨져나갔다. 나 역시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크라아아앗!" 내가 피가 고이는 눈을 깜박이는데 앞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마나르트? 붉은 시야의 가운데에 적은 마기를 끌어 모으는 마나르트와 그런 마나르트를 비웃듯이 바라보며 도끼를 내려찍는 거한이 들어섰다. 안돼. 저 정도의 마기로는 막을 수 없어. 죽는다. "으아앗!" 나는 요검에 힘을 주어 그대로 집어던졌다. 순간적으로 나와 연결되어 있던 요검의 지배력이 끊어지며 현기증이 심하게 돌았다. 그리고 뒤에서 갑작스런 괴성들이 들려왔다. 도끼를 내려찍으려던 녀석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무방비로 노출된 녀석의 가슴에 요검이 박혀들며 녀석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일어나는 남색의 폭발. "크아아아악!" "크헉!" 마나르트에게 달려들던 녀석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마나르트!" 나는 창백한 얼굴로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마나르트를 붙잡을 수 있었다. 마나르트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정말 반갑군 그래, 주인 씨." "하하……." 나는 마나르트를 끌어안는 동시에 힘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덕분에 같은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서로를 끌어안은 우리는 서로의 귓가에 대고 재회의 말들을 날렸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도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냐." "으음,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건가, 주인 씨. 거기다 자네가 던졌지 않나." "누가 날려가라고 했나? 도대체 이 꼬라지는 또 뭔가? 마족에 서열 107위에 거룩히 빛난다는 잘나신 마족 나리가." "으윽, 아픈 데를 찌르지 말게나. 마족 체면에 이런 떨거지 몇 놈에게 밀린 것 때문에 쪽팔려 죽겠네." "난 자네를 구하러 달려오느라 힘이 빠져서 죽겠군. 빌어먹을." 아무래도 엠페러 연합의 병사들이 조금만 더 가까이 있어서 우리의 대화를 들었다면 황당함을 느꼈을 것이다. 감격스런 재회처럼 피투성이로 서로를 꽉 끌어안고는 한다는 말이 이렇다니, 우리도 참 어지간하군. "젠장. 자네는 검 상태는 안 되고 뭐 하러 이런 모습으로 와서 고생인가." "아, 그 건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네. 자네 곁에 있으면 검으로 변해서 쉴 수 있지만 혼자서는 안 되더군. 검이 되서 빨리 잠 좀 자고 싶다네." "뭐? 어째서?" "마신의 짓거리지. 마신과 나의 두 번째 계약 조건이 발동되었네. 키메라들은 봤나?" "물론이네." "마신과의 두 번째 계약 조건을 말해주지. 그러니까……." 나는 약간 갈라진 마나르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위를 살폈다. 우리가 힘이 다한 것을 눈치 챈 병사들이 무기를 꼬나들고는 달려들고 있었다. 요검이 날아가 사자(死者)들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꼼짝없이 죽는 건가? 그래도 죽기 전에 마나르트를 만났으니 여한은 없다만, 마나르트가 아직 검이 되지 않았는데. "…결국 미지의 존재는 미지의 존재라 직접적은 안된다는 거네. 하지만 위험은 확실하네. 결국 우리가……." 마나르트의 말의 심각함에 당황하고 놀라던 나는 우리를 공격하려던 녀석들이 순식간에 쓸려 가버리자 더욱 놀랐다. "여어! 한! 그게 무슨 꼴이야?" 내 팔년지기, 새피르, 필이었다. 금발머리의 검사가 검을 신들린 듯 휘두르며 적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마법들을 사용하고 방어하는 에린. 그리고 섀도우 월드를 하는 내 동창들은 모조리 몰려와서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다. 역시 여기로 왔구나. 타이밍은 좋은 녀석들이라니까. 그때 내 뒤쪽에서 엠페러 연합의 병사들이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화살들과 단검들이 허공을 날랐다. 그리고 화염도. 필들은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떴지만 그들은 아직 마나르트의 뒤 쪽에서 적들을 몰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적들을 떨치지 못한 상태. 아무래도 나와 마나르트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챈 듯 엠페러 연합의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젠장! 하안!" 필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귓가에서 들려오는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끝을 고했다. "…이제 시작이네. 아직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우선은 지금처럼 싸워 가면 될 거네. 이 세상을 지키는 것이 마신의 뜻이니. 다시 만나서… 정말로 반갑네, 세한." "나 역시……." 푸화아아악! 순간 마나르트의 온몸에서 엄청난 마기가 폭풍처럼 쏟아지며 마나르트의 형체가 희미해지며 흐트러졌다. 엄청난 마기의 폭풍 속에, 특히 검고 강한 마기를 띄는 마기들이 폭풍의 가운데로 모여들며 한 형상을 갖춰갔다. 화려한 검집의 마검.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턱.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마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순간 마기가 내 몸으로 빨려들며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 스스슥. 우리를 노리고 날아오던 화살들과 단검들이 허공에 멈춰 섰다. 그리고 화염들은 뭔가에 짓눌리듯 찌그러지다가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경악의 감정들이 흘러들어왔다. 식스센스, 역시 마검을, 마나르트를 쥐었을 때는 차원이 다르군. 츠츠츠츠. 마나르트의 검신에 강한 기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엄청난 검기가 내 뒤로 날아갔다. "크아악!" "커헉!" 엄청난 비명소리들과 함께 수십의 적들이 위아래로 반으로 갈리며 후두둑 쓰러졌다. "……." -……. 나와 마나르트는 침묵했다. 아마도 나나 마나르트나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쉬고 싶군." -쉬고 싶네. 그리고 나는 위리안과 설화, 주토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끝으로 정신을 놓았다. 긴파 시에서의 전투는 어둠의 검, 소드 오브 다크 연합의 대승으로 끝났다. 불길 속에서 혼란에 빠진 적들을 진형을 갖춰 공격한 점과 마기를 뿜어대는 두 인물의 활약이 승리의 큰 주역이었다. 그리고 판빌 시에서 일어난 군대도 헌터 연합 직할 도시인 스비아 시를 함락시키고 스비아 시에 연합의 표식을 꽂았다. 삼대 연합은, 갑자기 등장해 자신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던 동쪽에 터전을 잡은 연합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대단하군." 누군가의 중얼거림. 긴파 시의 한 건물 옥상에 두 인물이 앉아있었다. 둘은 암흑 연합의 특파원들로 상부의 명령에 따라 긴파 시를 시찰하는 중이었다. "그렇군요." 다른 사내가 말을 받았다. "순식간에 일어나 순식간에 세력을 굳히다니. 깨끗하군." "예. 주가가 꽤나 올라가겠군요." 두 사내는 잠시 침묵했다.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겠지." "섀도우 월드의 이미지가 상승되는 효과도 있을 테니까요. 정의의 집단 출연, 정도일 듯 합니다." "흐음." 아무래도 한명은 상관, 한명은 부하인 듯 했다. 상관으로 보이는 사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험하군. 안 그래도 요새 레지엘님과 사장님 사이에 알력이 흐르는 것 같은데,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는걸."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 몰래 사장 측에서 추진하고 있는 작전은 밝혀졌습니까?" "멀었어. 너무 보안이 완벽해.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데다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둘은 다시 침묵했다.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어쨌든 레지엘님에게 보고를 하러 가야겠지." "예." 둘은 몸을 일으키고는 빠른 몸놀림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 밝은 빛들이 생겨난다. 도시인가? '저번의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어둠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 울리는 목소리. 야경이 펼쳐지는 도시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죽은듯한, 하지만 죽지는 않은 그런 상태. '나도 모르겠군요. 해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해답? 무엇의 해답이지? 왠지 불길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는다. "잠시 지켜봐야겠군요." 갑자기 들려오는 머리를 강타하는 목소리.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젠장!" 피슈우. 아직 내 머리에 붙어있던 기기들이 금세 떨어져 나가고 나는 급히 캡슐에서 몸을 빼냈다. "헉, 헉." 약간 거친 숨을 내쉬던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와이셔츠가 꾸깃꾸깃해졌다. 이게 벌써 두 번째야. 이런 이상한 꿈을 꾼 게. 거기다 이상하게 연관이 있는 듯한 꿈. 그런데 정말 꿈인가? 잊혀지지 않는데? "빌어먹을." 나는 낮게 욕설을 내뱉고는 몸을 일으켰다.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아는 목소리인데, 왜 생각나지 않는 걸까. "머리를 좀 식혀야겠군." 나는 약간 흔들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고는 고개를 흔들다가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캔커피를 하나 마시고는 나가서 저녁이나 먹어야겠군. 몸을 좀 늘어뜨리고는 방을 나섰다. 척. 방을 나선 나는 내 눈앞에 착 멈춰서는 캔커피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건 뭐냐?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자 생긋 웃고 있는 검은 생머리의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이거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나는 선아의 손에서 캔커피를 뺏어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아, 연합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놀러왔어요." 그러고는 빙긋 미소를 짓는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대다가 고개를 저으며 선아를 지나쳐 걸어갔다. 저번 스피리터스 원샷 사태 때문에 우리 집에서 잠시 신세를 졌던 선아는 그 이후로 가끔씩 우리 집에 들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센이 선아의 데이터를 출입자로 등록해 버리고 키까지 줘버려서 마음대로 내 집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돈 없어지면 모두 네 탓으로 돌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했었는데 지금은 포기했다. 나는 부엌을 흘깃 바라보고는 머리를 짚었다. 식탁 위에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나는 생글거리는 선아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알려줄까?" "뭘요?" "초연 씨도 우리 집에는 별로 온 적이 없어." "아, 그래요?" "더욱이 우리 집에서 저녁을 차려준 적은 한번도 없지." "어머? 그럼 내가 처음이네요." "처음은 아니지만. 동창 중에 제시라는 애가 몇 번 찾아와서 밥을 해준적은 있으니." "아깝네요." 나는 이를 살짝 갈고는 다시 질문했다. 음식의 양이 왠지 많았다. "이걸 다 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아, 사실은 릴하고 센 씨에게도 대접하려고 했었거든요. 음식 몇 가지는 집에서 준비를 해 온 거예요. 그런데 없는 모양이네요?" 선아와 릴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릴로서는 암흑가 밖의 사람과 친해지는 것도 즐겁고 선아하고도 마음이 잘 맞는 듯 했다. 거기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생활 중에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센과 릴은 약간 위험해질 때마다 피난처로 내 집을 사용하고 있었다. 휴식처로도. 잠시 집안을 둘러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센과 릴의 흔적이 없는 것이 나간 모양이었다. 내가 로그인을 할 때까지만 해도 둘이서 다음 장소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으니 아마 정한 곳으로 옮긴 모양이었다. 한 며칠 있으면 올 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선아는 릴들이 떠나기 전에 여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음식을 만들어 온 모양이었다. 센에게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릴의 요리 실력은… 으음. "그런 모양이군." "그럼 둘이서 저녁이나 먹죠." 선아는 싱글거리며 부엌으로 걸어갔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어?" 그리고 회색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 하나가 축 늘어져서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릴이었다. 떠난 지가 언제라고 다시? 그리고 센은 왜 없는 거지? 설마 습격이라도? 나는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릴? 어떻게 된 거야?" "아, 진." "센은 어디 있어?" 선아가 부엌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릴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릴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위험하다고 이리로 가 있으래. 혼자 가버렸어." "뭐?" 나는 놀란 눈으로 릴을 바라보았다. 위험한 일이라 혼자 가버렸다고? 축 늘어져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릴의 모습을 보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릴이 순순히 이리로 올 리가 없다. 그렇다면 센이 정말로 진지하게 말했다는 거군. 무슨 일이지? "젠장." 레딕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일 때문인가? 그냥 어떤 일인지 물어볼 것을 잘못했군. 그런데 그보다는……. "진, 맥주 있어?" …아무래도 당분간 내 집은 정리정돈과는 이별하게 되겠군. 쳇. "빌어먹을!" 레지엘, 현실에서의 이름, 김정수.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벽을 후려쳤다. 창이 흔들리며 서울의 야경이 같이 흔들렸다. 그 사나운 기세에 방 안에 서서 뭔가를 보고하던 듯한 사내가 몸을 움찔했다.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정수가 고함을 지르며 질문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사내를 한대 후려칠 듯한 기세였다. 사내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정확한 것은……." "젠장! 내가 당신을 아버지 밑에 심어둔 것은 이런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모르겠다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정수는 정말로 사내를 후려칠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그런 그를 한 여자가 급히 다가와 붙잡았다. 붉은 머리의 외국인 여성이었다. 상당히 예쁜 용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의 만류에 정수는 거친 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사내가 안도하는 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정수는 싸늘하게 식은 말투로 질문했다. "조금이라도 알아낸 것은?" "아, 아무래도 드래곤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드래곤?" 드래곤이라는 말에 정수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지난 한달 동안 정수는 카메론 사 내에서 왠지 모르게 따돌림을 당해왔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모두 협조적이고 협력적이던 이들이 자신에게 뭔가를 감추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정수는 겉으로는 지금까지 하던 일을 계속 해가는 척 하며 뒷조사를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은 카메론 사 내에서 온건파, 리자드에 대한 너무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자신에게 뭔가 감추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당히 위험하고 비중이 큰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한달이 다 되어가도록 정수는 실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알아낸 것이라고는 자신의 아버지, 카메론의 사장 중 하나인 자신의 아버지가 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점점 리자드에게 밀리고 있는 카메론이 사활을 걸고 행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드래곤이라니? 정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행동에 사내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슈퍼컴퓨터를 어떻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섀도우 월드 내에서 팀장님의 지휘 없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던 녀석들이 적색 산맥 주변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팀에서도 아무래도 리자드에서 슈퍼컴퓨터까지 침투하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카메론 사 내에서 정수의 정확한 위치는 경쟁 업체 대응 팀장이었다. 하지만 힘으로 따지면 사장 바로 아래일 정도. "미친! 그 컴퓨터가 어떤 물건인데 침투한다는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사내는 머리를 조아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이 정도밖에 알아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수는 눈을 감고는 생각에 잠겼다. 곧 정수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 질문했다. "벨, 어떻게 생각해?" "…혹시 슈퍼컴퓨터에 오류를 일으키려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슈퍼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는 다른 시스템들도 연쇄 오류를 일으킬 테니까요. 슈퍼컴퓨터는 대부분의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으니 타격이 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오류 도중에 드래곤이 무차별적으로 플레이어들을 공격한다면 더욱 타격이 커지니 그걸 노리는 것은……." 벨의 말에 정수는 눈을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싸하긴 한데… 그 슈퍼컴퓨터의 기능은 상상이상이야. 드래곤의 폭주는 나도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아무리 해도 그 슈퍼컴퓨터에 약간의 정보를 주입하는 것이 끝이었어. 그리고 그 정보도 드래곤의 감시 하에 있더군. 불가능이야. 컴퓨터 자체에 오류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해. 그리고 만약 성공하다 해도 플레이어 학살은 이벤트로 취급할 수도 있겠지. 오히려 그걸 이용해서 플레이어들을 드래곤 사냥이니 하면서 끌어들일 수 도. 내가 생각하고 있을 정도니 리자드 내에서도 아마 생각하고 있을 거야. 슈퍼컴퓨터 오류 상황의 대비도 어느 정도는 하고 있겠지. 그리고 시스템 복구를 위해 데이터베이스도 따로 만들고 있을 것 같은데." 정수의 말에 벨과 사내의 얼굴에 감탄이 떠올랐다. 이미 저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니, 범인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히 사장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실력으로도 이런 중요한 일을 맡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이기에 둘의 표정은 곧 침울해졌다. 정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아무리 정리를 하고 추리해 봐도 자신의 아버지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것을 봐서는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리자드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 플레이어들에게도 피해가 갈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 정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르겠지." "예? 팀장님!" "저, 정수님?" 벨과 사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찾아가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정수는 단호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게 빠르고 속 편하겠군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쩌면 그저 드래곤을 꼬드겨서 플레이어나 죽이게 하려는 것을 아버지가 과민해서 날 따돌리는……." 걸어가던 정수가 말을 멈추는 동시에 걸음도 딱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정수의 얼굴에 벨과 사내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꼬드겨? 꼬드긴다? 설마… 그게 가능할리가. 하지만……." 정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심각한 분위기에 벨이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괜찮으신……." 벨의 말은 정수가 홱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끊어져 버렸다. 딱딱하게 굳은, 거의 살기마저 도는 정수의 표정에 벨과 사내가 주춤거렸다. "두 사람 대답해 보십시오. 리자드는 사람의 뇌를 직접 이용한 몬스터들을 만들어 내고 있지요?" "예? 예……." "그,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그건 철저한 은폐에 국회까지 개입해 있어서……." 둘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던 정수는 급히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걸어 문 앞에 당도한 정수가 말했다. "아버지를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정수는 그대로 방을 나섰고 거칠게 닫히는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둘은 영문을 알지 못해 눈을 깜박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정수의 반응상 일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심각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둘은 왠지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에 항상 하던 대로 정수의 집무실의 곳곳을 살피고 다녔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도청기를 찾기 위해서였다. 제시는 약간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쟁반이 하나 들려 있었고 그 위에는 손수 만든 쿠키가 놓여 있었다. 제시는 오랜만에 직접 쿠키를 구워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고는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자신이 어릴 때 친절하게 대해주던 김민혁 사장에게 쿠키를 전해주기 위해 사장실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말로는 오늘은 김 사장이 별로 바쁜 일이 없는 날이라고 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사장실로 향하는 제시였다. 회장인 아버지의 말이니 만큼 아마도 어느 정도는 정확할 것이었다. 혹시 찌그러지거나 한 것이 없는지 자신이 만든 쿠키들을 살피던 제시는 어느새 사장실 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사장실 안에서 갑자기 들려온 고함소리에 문고리에서 손을 떼야했다. "아버지!" "돌아가라고 했다!" 아버지라는 외침에 안에서 말싸움을 벌이는 인물이 정수와 김 사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제시는 조금더 뒤로 물러났다. 부자간의 싸움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내가 하려는 일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도 모르면서 경거망동 하지마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예상은 할 수 있습니다! 또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계획을 세우신 것은 아니십니까!?" "아니라고 했잖느냐!" "그럼 정확한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일이 아니라면 숨기실 이유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최대 기밀이라고 했다! 일개 팀장이 기밀을 알려고 하는 거냐!" "아버지!" "지금은 아버지가 아니고 사장님으로써 말하고 있다! 나가라!" 상당히 험악한 분위기에 제시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불안을 표출한 상대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제시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저 방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안에서는 더 이상 고함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불안한걸.' 폭풍 전의 고요 같은 고요함에 제시는 불안해했다. 그리고 레지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행한 범죄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아버지." "범죄가 아니다. 리자드에서 모두 게임의 일환이라고 공표했지 않느냐." "그래도 범죄는 범죄입니다. 그리고 꼭 게임 속에서만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반인들에게까지 피해를 준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시는 것은 아닐 텐데요, 아버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만약 이번 일이 또 그런 '범죄'라면, 전 여길 떠나겠습니다." "네 이놈!" "앞으로 전 개별적으로 행동하겠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계획이 뭔지도 알아내려 할 것이고, 그 계획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보일시에는 반드시 막을 겁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도 '아버지'로서 뵐 수 있으면 좋겠군요." "김정수!" 분노에 찬 김 사장의 고함소리에 제시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문일 벌컥 열리며 정수가 검은 장발을 휘날리며 걸어 나왔다. 주먹 진 두 손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제시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고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수를 볼 수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정수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것이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정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시는 자신이 쿠키를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정수의 얼굴을 봤을 때 놀라 떨어뜨린 것 같았다. 제시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쿠키를 내려다보며 침울한 안색을 하고 있을 때 김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제시 아가씨?" "아……." 제시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김 사장을 바라보며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저… 쿠, 쿠키를 구워서… 오, 오랜만에 가져다 드리려고……." 제시의 말에 김 사장은 바닥에 떨어진 쟁반과 쿠키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쓰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껏 가져오셨는데……." "저, 정수 씨는……." 몸을 굽혀 쿠키들을 주우려 하던 김 사장은 제시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제시가 괜하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는 순간 입을 열었다. "그저 약간 트러블이 생겼을 뿐이었습니다.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 제시는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하며 몸을 굽혀 김 사장과 함께 쿠키를 줍기 시작했다. 은박지로 감싼 것들이 꽤 있어서 먹을 수 있는 것도 있어 보였다. "아, 세한님." "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일이다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나는 헌터 연합의 직할 도시엔 스비아 시에 들어와 있었다. 긴파 시에서 몸을 좀 회복하고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이 꽤 되서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냐? 헌터 연합의 지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었고, 지금은 우리 연합의 소유가 된 건물의 회의실 앞, 나는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체르시온 연합의 제롬 일동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야했다. 뭐냐?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거야? 얼떨결에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 최상석에 앉은 나는 다시 한번 황당한 기분을 느껴야했다. 최상석이 상당히 화려했다. 허, 쿠션 좋군. 그리고 내게 향해지는 초롱초롱한 시선들에 나는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세한님! 모두 들었습니다. 단신으로 엠페러 연합의 병력 수백을 쓸어버리신 데다 지친 몸으로 워리어스 길드의 도펠을 쓰러뜨리셨다니, 역시 다크소드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군요!" "하아?" 도펠? 그 투사 2위인지 뭔지 하는 녀석? "그 동안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나는 그 동안 나를 무시하던 인간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고개를 숙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제롬도 무시하는 기색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보다는 우선 빨리 해결해야할 것들이 있으니 집중하시죠." 나프네의 말에 소란이 가라앉으며 그녀에게 시선이 모여들었다. 잠시 기다리던 나프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이번 승리에 관한 것, 특히 세한님이 랭킹 8위이던 도펠을 쓰러뜨린 것을 전 대륙에 퍼트려야합니다. 연합의 이미지와도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연합의 설립 여부 등도 함께 말을 퍼트려야겠지요. 그래서 음유시인 길드 하나를 수배해서 곳곳에 말을 퍼트리려 생각을……." 나프네는 내가 손을 들자 말을 멈추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수배할 필요 없어. 이미 다 찾아뒀을 테니." "예?" 내 말에 회의실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전에 비전투 길드들을 모두 돌려보낸 것들은 알고 있겠죠. 그들을 돌려보낼 때 자신들의 길드가 위치한 곳에서 다른 길드들을 조금씩 끌어들이거나 계약이라도 맺어두라고 했으니 걱정 없을 겁니다. 특히 음유시인 길드는 우선적으로 관계를 맺어두라고 했으니 적어도 몇 곳은 이용할 수 있겠죠. 저도 이렇게 소문을 흘려야 할 때가 있을 것 같아 우선적으로 찾아두라고 했던 거니. 그 외에도 도움이 될 만한 길드들과 연계하라고 했으니 우선 본 지역으로 돌아간 길드들과 연락을 취하도록 하죠. 통신구도 하나씩 쥐어서 보냈습니다." "아, 예……." 나는 당혹한 듯한 일동의 시선에 쓰게 웃고는 주위를 살폈다. 천악이나 고타, 그리고 최강의 트랩퍼, 마법사, 치료술사인 라젠, 이반, 나르손님들이 없었다. 뭐, 솔직히 그 사람들이야 이런 곳에 낄 이유가 없지만. 하지만 왠지 부럽다는 느낌이다. "아, 그럼 세한님이 미리 준비하신… 덕분에 오늘 안건은 대부분 풀리겠군요. 다른 길드들과 연락을 취해봐야겠습니다. 에……." 나는 나프네가 버벅거리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너무 빨리 넘어가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곧 나프네가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초기에 세웠던 계획대로 이제 바로크 시까지 진격하려고 합니다. 이미 차렌 시는 우리 수중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차렌에 천악님과 고타님, 라젠님, 이반님, 나르손님이 가계십니다. 천명의 병력도 주둔중이고요." 그래서 여기에 없던 거였군. 그저 싸움만 한다, 그건가? 라젠님들은 그저 이름만으로도 도움이 되니 따라가신 거겠지만. "이곳 스비아 시에서 차렌 시까지는 약 2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3일 안에 대부분의 병력을 차렌으로 집결, 바로크 시로 진격합니다. 결전이 되겠지요." 바로크 시.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지만 꽤나 중요한 도시다. 상업도시라 돈이 많은 것은 둘째 치고 바로크 시는 엠페러 연합과 헌터 연합의 중립도시이다. 두 연합의 세력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는 곳. 후훗, 처음 차렌 마을에서 시작해 바로크 시로 여행을 갔을 때는 이렇게 군대를 이끌고 가게 되리라고는 알지 못했는데 말이야. 나프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문제는 바로크 시가 중립도시이기 때문에 엠페러 연합과 헌터 연합에서 동시에 우리 연합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두 연합이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공격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는 두 연합이 며칠 안에 모은 병력이 우리 연합의 총 병력과 맞먹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크 시를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곳까지 진격하지 못한다면 새로 연합의 크기를 늘리기가 힘들어 지니까요. 이곳 스비아 시만 해도 오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바로크 시까지 진격하지 않으면 연합의 힘을 키우기는 힘들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결국 두 연합이 개떼처럼 몰려오든 싸그리 잡아 족치면 된다는 거로군." 레딕의 사나운 말에 나프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 요약하자면 그러네요." 나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럼 우선은 3일 동안 차렌 시로 병력을 집결해야하겠군요. 그럼 회의에 참석하신 분들은 병력을 추려서 이동해 주시길. 뒤처리는 나프네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나프네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한숨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하늘은 언제나 맑다. "쩝. 늦는군." 레딕은 입맛을 다시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 37분. 약속 시간은 6시 30분이었다. 솔직히 그다지 늦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 레딕의 상태는 그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빠, 빨리 좀 와라." 현재 레딕은 사람이 많은, 유명한 상점가인 세이드 스트리트의 한복판에 한 나무에 기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수많은 인파가 웃고 떠들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레딕은 전과는 다르게 검은 옷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청바지에 반팔 남방. 꽤나 괜찮은 스타일로 입고 있었기에 가끔씩 시선이 오기도 해 레딕은 현재 거의 패닉 상태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이런 꼴로 서 있는 것은 처음인 레딕이었다. 레딕이 이런 곳에 서 있는 이유. 그건 센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그 일'의 마지막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 일에 필요한 마지막 데이터를 리자드 내부의 협력자가 가지고 오기로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센과 레딕, 그 협력자가 다같이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레딕이었다. "하지만 여긴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레딕은 땀을 삐질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사람이 많은 곳이 이런 모임에는 좋다. 대놓고 공격해 오지도 못하고 인파에 묻혀 발견되기도 힘드니까. 반대로 아는 사람이 지나갈 확률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워낙 사람이 많으니 착각했나 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레딕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접선 장소였다. 약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레딕의 패닉 상태가 점점 심해지고 있을 무렵 두 사람이 레딕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젊은 남자 하나와 중년인 하나. 그냥 봐서는 그저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일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그 둘을 바라보던 레딕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예전, 카메론과의 일을 할 때 사진으로 봤던 이들이었다. "저 자식들은……." 신대관, 강도훈. 레딕을 비롯한 대부분의 암흑가의 사람들이 리자드의 짓거리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참아야 한다. 여기서 소동을 일으켜서는 곤란해.' 레딕은 둘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며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반쯤 죽도록 패버리고 싶었지만 참아야했다. 그렇게 레딕이 속을 다스리는 가운데 레딕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던 둘이 레딕을 발견했다. 그리고 리자드의 섀도우 월드 운영 기획부 개발과장 신대관이 입을 열었다. "꽤나 오랜만에 뵙는군요. 한번 습격당할 뻔 했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죠?" 레딕이 고개를 확 돌리며 눈을 부라렸다. 레딕에게 다가오던 둘이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레딕은 신대관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으윽." "이 자식이, 네놈이 무슨 낯짝으로 내게 말을 걸어. 죽고 싶은 거냐?" "우욱, 무, 무슨… 서, 설마 현진 씨에게 아무 말도……." 레딕에게 멱살을 잡혀 힘들어하던 신대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강도훈도 당황한 얼굴로 레딕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말? 무슨 헛소리냐?" 레딕의 반응에 신대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신대관이 뭐라고 외치려는 사이, 누군가가 레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놔라, 레딕. 그 사람이 우리 협력자야." "센 형님?" 레딕은 자신의 옆에서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센을 발견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 자… 사람이 협력자라고요?" "후우. 그래. 나와 진이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전에 형님이 이 새… 사람의 컴퓨터를 해킹하니 줄줄이 쏟아진 건?" "이 사람이 리자드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알려고 수집해둔 거였다." "…확실합니까?" "확실하다." 레딕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레딕에게서 떨어진 신대관은 숨을 들이쉬며 옷깃을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레딕은 퉁명스럽게 사과를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신대관은 쓰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고는 있으니." 레딕이 고개를 돌려 신대관을 쏘아보았다. 네까짓 놈이 알긴 뭘 아냐고 외치는 듯한 태도였다. 레딕의 시선에 다시 한번 씁쓸한 웃음을 흘린 신대관은 센에게 고개를 돌렸다.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예." 어색하고 딱딱한 인사였다. 둘은 잠시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조용히 있는 강도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쪽은 운영 기획부의 부장이신 강도훈 씨. 제 상관이시죠." "센 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도훈이네. 이쪽은 레딕이라고 했나?" 레딕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도훈은 미소를 짓고는 다시 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대관이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솔직히 당신의 의견이 약간 불안하기는 해서요. 물론 좋은 계획이긴 합니다만." "준비는 모두 되었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센은 어떤 눈짓을 보냈고 신대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도훈을 바라보았다. 도훈은 주머니에서 작은 칩 케이스를 꺼내 센에게 건넸다. "이겁니까?" 케이스를 내려다보던 센이 질문했다. 그의 말에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번일은 꽤나 무리를 해서 덜미를 잡힐 가능성이 많네. 이 것은 리자드 내부에서 극비 자료야. 외부로 절대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그나마 내가 드래곤 프로젝트에 관여했었기에 빼돌릴 수 있었던 거네. 반드시 성공해 주게." "물론입니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리자드는 끝입니다." 센의 사나운 말에 도훈과 대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자신들이 한때 열정을 가지고 이끌어가던 회사였다. 하지만 이 일이 성공하면 회생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이번 일은……." 대관의 걱정어린 말에 센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마 성공한다고 해도 저는 덜미를 잡혀 감옥행이 될 수도 있겠죠. 아무래도 대놓고 오랫동안 해킹을 해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센의 말에 레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센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하던 대관이 입을 열었다. "그럼 결행일은… 현진 씨의 연합이 전쟁을 벌일 때입니까?" 그의 말에 센이 레딕을 바라보았다. 레딕은 잠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때가 헌터 연합의 눈을 피하기 가장 좋을 테니까. 그때 적색 산맥을 올라 래드 드래곤에게 향할 생각이지." 래드 드래곤. 대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전은 섀도우 월드 안에서와 현실에서 조화를 이루어야하니까요. 하지만 두 장소에서는 세배의 시간차가……." 대관은 센이 갑자기 자신을 확 끌어당기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레딕이 도훈을 끌어당기며 이를 악물었다. "비, 빌어먹을!" 센과 레딕이 크게 당황하며 주위를 살피는 모습에 신대관과 강도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십여 명의 사람들이 사람들을 마구 헤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에 흉터가 즐비한 것이 어떤 사람들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저 자식들! 이런 길거리에서 저렇게 직접적으로!?" 센이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질렀다. 리자드 내부에서 협력자의 존재를 눈치 챈 듯 했다. 그건 둘째로 치고 이런 길거리에서 저렇게 몰려다니며 사람을 공격한다면? 경찰에게 잡혀 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설마, 리자드에서? 리자드는 국회와도 관계가 있다. 그럼 경찰에도 손을 써놨다고 볼 수도…….' "레딕! 뛰어!" 센은 생각을 마치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레딕은 도훈과 대관을 붙잡고는 뒤돌아 달려갔다. 센이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레딕에게 끌려가던 둘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급히 달려갔다. 우르르 몰려오던 검은 복장의 무리들이 고함을 지르며 길을 걷던 사람들을 마구 밀어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리가 꽤 있었기에 센과 레딕은 어느 정도 안심하며 달려갔다. "흐아앗!" 그때 평범한 일반인으로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레딕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레딕은 기겁을 하며 몸을 멈춰 주먹을 피해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상대의 팔을 꺾어 올리며 복부에 발차기를 넣었다. "크억." 상대가 길에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그저 평범히 길을 걷던 것으로 보이던 사람들이 눈을 빛 내며 달려들었다. "젠장! 눈에 튀는 복장을 입고 몰려와서는 우리를 몰아넣은 건가?" 센이 비명과도 같이 소리치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녀석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센 형님! 적어도 형님이라도 빠져나가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레딕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며 돌려차기를 날렸다. 공격해 들어오던 한 사람이 발차기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졌다. 주위에서 비명소리들이 들려왔다.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젠장.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냥 걷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내가 밖으로 나와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이유는 센을 찾기 위해서였다. "쳇. 릴 녀석, 정말 왜 날 가지고……." 나는 맥주를 거의 수십 캔을 마시고는 내게 센을 찾아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릴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갔을 때 집이 어떤 꼴일지 불안하군. 제발 기물 파손이라도 하지 말기를. "하아,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군." 나는 사람들아 우글우글 몰려다니는 거대한 상점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세이드 스트리트. 어쩌다 여기까지 왔다냐. 센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지나가긴 해야겠는데, 여길 지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군. 깔려 죽을 지도." 엄청난 인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조금 돌아가기로 하고는 옆으로 돌아 갓길로 걷기 시작했다. 상점가의 뒤쪽이 대부분 그렇듯, 골목까지는 아니지만 한적하고 조용한 길이었다. "하아. 역시 왠지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가……." 쿠당탕탕. "……." 아무래도 내게 뭔가 숨겨진 힘이라도? 어째 항상 이렇게 타이밍이 잘 맞을 수가 있는 거지? 나는 저 앞 쪽 골목에서 튕겨 나오는 두 사람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낯이 익다. 그리고 골목에서 아무래도 레딕들과 같은 직업 종사자로 보이는 네 명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상처가 꽤 심한 듯 도망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거 피? 그러고 보니 저 깡패 친구들 중 둘이 나이프를 들고 있군.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낯이 익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머릿속을 강타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강 부장님! 괜찮으십니까? 부장님!" 나는 볼 것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뭐, 뭐냐!" 나는 놀라 고함치는 녀석의 안면에 돌려차기를 먹이면서 몸을 회전해 다른 녀석을 걷어찼다. 바닥에 착지 하자 정신을 차린 다른 녀석이 나이프를 찔러왔다. "훕!" 나는 몸을 비틀면서 상대의 팔을 꺾어 올리고는 상대의 가슴을 걷어찼다. 팔과 가슴에서 동시에 충격을 받은 녀석이 거품을 물었다. 역시 효과적이군. 애용할 만한 공격법이다. 그리고 나는 몸을 옆으로 숙여 주먹을 흘려보내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올려쳤다. 턱에 내 주먹을 맞은 녀석이 그래도 쓰러졌다. 제대로 맞았군. "으아아!" 어떻게 혼자 남은 녀석이 괴성과 함께 달려들었다. 흥분은 금물이지. 나는 손쉽게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멱살을 잡았다. 퍽퍽퍽퍽! 그리고 그대로 연달아 얼굴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상대의 얼굴이 피에 물들었고 나는 그냥 휙 던져버리고는 바닥에 사이좋게 앉아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혀, 현진 씨." 나는 무릎을 꿇고는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타박상에 검상 약간. 목숨 위협 없음. 하지만 아버님은 상처가 꽤 심하신데. "괜찮습니까, 신 과장님, 아버님?" "아, 가, 감사합니다." "자, 자네……." 나는 몸을 슥 일으키고는 주위를 살폈다. 더 있을 가능성도 있다. 신대관 과장과 강도훈 부장, 아버님도 몸을 일으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분 어쩌다가 저렇게……." "아, 크, 큰일 났습니다!" 나는 내 질문에 갑자기 고함을 지르는 신 과장의 반응에 눈을 깜박였다. 뭐냐?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나는 얼굴을 굳혀야했다. "세, 센 씨와 레딕 씨를 만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거리에서 공격을 퍼부어서 센 씨는 행방불명이고 레딕 씨는 십여 명에게 둘러싸여서… 저희는 레딕 씨가 간신히 길을 터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둘이 왜? 그 계획인지 뭔지 때문인가? 하지만 길거리에서 습격을 받을 정도면 도대체… 거기다 레딕이 붙잡혔다고? 센은 실종? 젠장! 급히 달려가려던 나는 저쪽에서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빌어먹을! "따라 오십시오!" 나는 둘을 이끌고 급히 대로로 달려갔다. "세, 센 하고 레딕이!?" 민이 벌떡 일어나며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레딕은 확실하게 잡힌 모양입니다. 센은 어쩌면 도망쳤을 수도 있지만……." "그런 멍청한 자식들!" 민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탁자를 내리쳤다. 방에 몰려들어 있던 암흑가의 사람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탁자의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치료를 받고 있던 신 과장과 아버님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걸리적거리는 바람에……." "아, 아닙니다." 민은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 센과 레딕이 자기들끼리 어떤 계획을 추진하다가 이런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 상당히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방치하고 있던 내가 잘못한 것 같은데. 최소한 어떤 일인지라도 알아뒀어야 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신 과장에게 질문했다. "신 과장님. 센과 레딕의 계획이 뭡니까?" 내 질문에 신 과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정확한 물증을 잡기 힘들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센이 최상급의 해커라지만 리자드의 정보를 물증까지 완벽히 빼내는 것은 힘들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꼬리만 잡히고 끝날 수도 있다. "그래서 센 씨와 레딕 씨는 방법을 전환하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방법을 전환해? 민도 약간 굳은 얼굴로 신 과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물증을 잡을 수 없으니, 최고의 성능을 가진 컴퓨터에게 직접적으로 부탁을 해서 정보를 얻겠다는 거죠." 최고의 성능을 가진 컴퓨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최고의 성능?" "슈퍼컴퓨터, 세르페이린을 말하는 건가?" 신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그 슈퍼컴퓨터의 기능은 리자드의 그 어떤 것보다도 성능이 뛰어납니다. 거기다 슈퍼컴퓨터는 섀도우 월드 내에서의 관리를 맡고 있어서 대부분의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지요. 리자드 내부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것도 프로그램 오류가 아닌, 자아로써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리자드에서 막기는 힘들겠죠." "아!" 나는 작게 감탄을 토했다. 그렇군. 슈퍼컴퓨터라면 성능만은 최고일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드래곤을 설득한다는 거지? "하지만 어떻게 그 슈퍼컴퓨터의 도움을 얻겠다는 거지?" 갑자기 민이 질문했다. 나도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기에 나는 신 과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신 과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리자드는 컴퓨터를 개발하는 회사가 아니라 게임을 만들고 운영하는 회사입니다. 그런 회사에서 엄청난 성능의 컴퓨터가 나왔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눈을 크게떴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리자드는 엄청난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만들어 냈죠. 그 성공의 비결에는… 슈퍼컴퓨터의 주축이 되는 것은……." 띠리리리리리! 그때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신 과장의 설명을 끊었다. 탁자 위의 전화였다. 전화? 순간 방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센이나 레딕이 붙잡혀서 걸려오는 협박 전화일 가능성도 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어라? 우리 집이잖아?" 내 말에 곳곳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긴장이 풀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진이냐? "센?" 센의 목소리였다. 센이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모니터에 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간 피로해 보이고 상처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무사해 보였다. 나는 놀라 급히 입을 열었다. "센, 무사한 것?" -그래. 어떻게 빠져나왔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센은 무사하다는 말이로군. 다른 사람들도 한결 안심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센의 질문이 들려왔다. -레딕은? 나는 혀를 차고는 대답했다. "붙잡힌 것 같다." -젠장!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나는 쓰게 웃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릴이 알면 또 소동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때 잠시 침묵하던 센이 뭔가 결정했다는 듯이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진, 섀도우 월드에 접속해라. "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섀도우 월드에? 갑자기 왜? -레딕이 잡혀갔으니 다른 사람이 드래곤을 만나러 가야한다. 그러려면 실력이 있어야하지. 레딕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은 거기서 너뿐이니까. 그리고 드래곤과의 친분도 있으니까 부탁하기 더 쉬울지도 몰라. "하아?" 부탁이라니, 무슨 소리지? 아, 신 과장이 설명해준 계획을 얘기하는 건가? -원래는 레딕이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상황이 이러니 네가 대신해야겠다. 적색 산맥을 올라가서 드래곤을 만나고 한 가지 물건을 전해줘. 페이린을 직접 만나라는 건가?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보니 최대한 빨리 가야할 것 같은데, 곧 전쟁이 있어서 나는 힘들 것 같아. 다른 사람을……." -제길! 다른 사람이 가서는 드래곤이 얘기를 듣기도 전에 죽여 버릴 지도 모른단 말이다! 적어도 너나 레딕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한다고! 센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약간 뒤로 뺐다. 우리가 놀란 듯이 자신을 바라보자 센은 몸을 흠칫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부탁한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모든걸 끝낼 수 있다고. 그리고 이번에 너무 무리해서 다음 기회란 없을 지도 몰라. 나는 신 과장과 아버님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협력자이던 신 과장이 들통 나고, 왜 갑자기 협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님까지 정보를 빼돌린 것이 들통 났다면, 더 이상은 힘들지도 몰랐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 당장 적색 산맥으로 가지. 최대한 빨리 끝내고 전쟁터로 돌아 가야할 테니까." 내 말에 센이 고개를 확 치켜들고는 감동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웃, 부, 부담된다. "뭐, 뭐야?" -아, 아니. 고맙다. "됐어. 내 집은 아직까지는 안전할 테니까 거기에 계속 있어. 뭐, 적이 쳐들어 와서 박살을 내놓으면 평생에 걸쳐서라도 돈을 받아내고 말테니 각오하고." -후후. 기억하지. 나는 몸을 일으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 과장과 아버님에게서 시선을 멈추고 말을 시작했다. "그럼 두 분은 당분간 여기에 머무시는 게 좋겠군요. 회사로 돌아가기는 힘들 테니까요. 아마 주위의 눈이 있으니 가족 분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암흑가에 도청 방지용 전화기가 몇 개 있으니 사용해서 당부해 두시고… 민 형님." 내 부름에 민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딕은 걱정마라. 우리가 반드시 구출해 오지. 넌 우선 드래곤이나 만나봐라. 센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뭔가 있겠지." 그러고 보니 무슨 계획인지 정확하게 듣지도 못했군. 뭐, 지금으로선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그럼 근처 PC방으로 가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려면 집까지 가기도 그렇군요." 민이 고개를 끄덕였고 소마가 벌떡 일어나서 나를 안내했다. 소마와 함께 암흑가의 입구까지 달려간 나는 소마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빠르게 달려갔다. "적색 산맥을 다시 올라가는 건가… 힘들겠군." 어쨌든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지. 나는 약간 번화한 시내로 진입해 PC방 하나에 급히 뛰어들어갔다. 게임 캡슐들이 꽤 많았다. 카운터에서 키를 받은 나는 재빨리 캡슐 중 하나로 들어갔다. -아이디를 말씀해 주십시오. "벼락부자." -비밀번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 -확인되었습니다. 홍채 인식, 뇌파 검색 실시합니다. 밝은 빛이 훑고 지나가는 듯한 순간,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확인되었습니다. 그림자의 땅에서 즐거움을 찾으시길.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옛날, 섀도우 월드를 처음 시작했을 때 본 적이 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차렌 시. 나는 급히 짐을 챙겨들며 여관방을 뛰쳐나왔다. -후암… 어라? 주인 씨? 무슨 일인가? 누가 자네 여자를 꼬시려고 하기라도 하는 건가? 잠을 자고 있던 마나르트가 하품을 하며 시덥잖은 농담을 던졌다. 나는 깨끗이 무시하고는 나프네들이 모여있을 마을 회관으로 달려갔다. -뭔가 심각한 일인가? 흐음, 뭐,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 그럼 나는 조금 더 자겠네. 마기의 회복을 위해서라며 계속 잠을 자는 마나르트였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차렌 시에 들어오면서 임시로 연합의 회의장소 정도로 빌린 마을 회관.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을회관에는 상당히 긴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불안해." 불안했다. 왠지 여길 떠나기가 힘들어 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아, 세한님!" 마을회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워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지금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정보부원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뭔가 나쁜 소식이라도 들어온 건가? "나프네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장 큰방으로……." 나는 얼떨결에 정보부원에게 끌려가며 눈을 깜박였다. 불안해. 불안하다. 나를 열심히 끌고 가고 있는 정보원에게 질문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 큰일입니다!" 그건 말 안 해도 알아. 그러니까 그 큰일이 뭐냐고 묻는 건데.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절망에 찬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헌터 연합과 엠페러 연합이 손을 잡고 바로크 시로 다가오고 있다는 정봅니다!" "아, 세한님." 회의실 안에서 머리를 짚고는 고민에 빠져있던 나프네와 제롬, 위리안이 반색하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방의 한쪽에는 은사로 뭔가를 하고 있는 설화가 있었다. "위리안, 주토는?" "아, 그 칼이라는 사람하고 나갔는데?" 위리안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과 주토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 그리고 서로를 한님의 수하니 어쩌니 하더니 몇 분 뒤에는 의기투합해서 둘이 함께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결국 나는 어디를 돌아다닐 때마다 나에게 접근하면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과 동행해야했다. 어쨌든 그 둘이 없다니 어느 정도는 다행이다. 나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고는 나프네와 제롬을 바라보았다. "좋지 않은 말이 들리던데?" 나프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악이에요. 엠페러 연합 쪽에서 먼저 헌터 연합에 굽히고 들어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동맹군이 결성되어 버렸죠. 딜럿이 상당히 화가 났던 모양이에요."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전에 긴파 시에서 딜럿과 통신구를 통해 잠시 얘기를 나눴지? 그때 별로 좋은 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긴파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자신들 연합에서 이름 높던 워리어스 길드의 마스터가 당했으니 가만있을 수 없다는 거겠죠. 벌써 바로크 시에서 50km 정도 떨어진 곳의 평원에 엠페러 연합의 병력 5000이 모여들었어요. 예상보다 수가 많더라고요. 거기다 지휘관도 전술 꽤나 한다는 사람이고. 거기에 헌터 연합에서는 자신들의 직할 도시가 당했다고 거의 1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끌어 모아서 몰려오고 있다고 해요. 지휘관은 슈웰이 직접." "최악이군." 나는 머리를 짚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만만히 볼 수가 아니었다. 삼대 연합은 세력이 퍼져 있는 크기가 너무 커서 순간 적으로 병력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그걸 노려서 빠른 시간 안에 도시들을 점령하려는 생각이었는데 병력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두 연합에서의 대응이 생각보다 거세고 빠르다는 것. 아무래도 미리부터 우리를 의식해서 조금씩 대응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2만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인가. 우리 연합이 차렌에 모아둔 병력은 충 1만 5천. 우리 연합의 총 병력이 2만 정도. 5천은 현재 빼앗은 곳의 방어를 하고 있다. 그러니 1만 5천으로 승부를 가려야 한다는 것인데 상대의 병력도 우리와 맞먹는다, 라. 거기다 헌터 연합에서는 실질적인 지도자가 직접 온다고? 우리의 병력에는 특별한, 예를 들어 다크 엘프들 같은 강한 전력도 있지만 트랩퍼나 치료사 같은, 그런 전투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이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프네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엠페러 연합에서 2차 지원군을 보내는데 수는 약 7천에 딜럿이 직접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항복이 나을지도." 내 푸념 어린 농담에 나프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제롬이 붉은 머리를 약간 헝클어뜨리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승산은 충분합니다. 저희 측에는 약한 전력도 꽤 되지만 반대로 강한 병력도 많습니다. 거기다 최강의 트랩퍼 길드의 도움도 있으니 힘들겠지만 전장에 어떻게 함정이라도 만든다면……." 함정이라.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고지를 차지하고 전장을 선택해야 한다는 건데, 가능할지 모르겠군. 제롬이 계속 말을 이었다. 어느새 제롬은 내게 존대를 쓰고 있었다. 마나르트를 구하느라 죽을 각오로 싸운 게 효과는 있었군. 전에 다른 길드에게 명령을 잘 내려둔 것도 한몫 했고. "거기다 제퍼슨과 맞먹는 실력이라는 천악도 있고,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고타님도 계십니다. 라젠님들도 연합이 위험해 지면 전투에 참가하실 테고요. 거기다 세한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우리 연합에는 최상위에 속하는 강자들이 많으니까요." "아아, 세한 저 녀석이 마검 들고 미쳐 날뛰면 한 수백은 죽어날 테니까." 승산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셋을 보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라는 거야? "아, 저기……." 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나프네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레딕은 왜 없는 거죠? 이런 자리에는 항상 있었는데. 세한, 혹시 알아요?" "그러고 보니 그 멍청이가 없잖아? 세한?" 나는 셋의 시선이 내게 몰리자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슬슬 용건을 꺼내야겠지. 셋 밖에 없었도 그 중 둘은 나와 친한 이들이라 나는 편하게 말했다. "레딕은… 나프네라면 이해할 텐데, 길거리에서 붙잡혀 갔어." 나프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제롬과 위리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당히 중요한 일 때문에 거리에 누군가와 만나다가 습격당했어. 현재 행방을 모른다. 찾고는 있지만… 그래서 말인데……." 나게 심각하게 말끝을 흐리자 셋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는 당분간 여기를 떠나있어야 할 듯 하다." "에엣!?" "어째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곧 전쟁이 일어 난다고요!"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레딕이 잡혀간 덕분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 정말 중요한, 나와 레딕, 그리고 어느 곳의 운명이 달린 일이라 그만둘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대신 해야겠는데… 이 일을 하려면 헌터 연합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리는, 전쟁 기간에 해야 해." 셋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때 나프네가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일인가요? 연합의 전쟁보다?" "중요해. 여러 사람의 목숨이 달렸을 정도지.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 일은 우리 연합에게도 엄청난 도움이 될 거야." 내 대답에 나프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제롬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이었고 위리안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가운데, 위리안이 질문했다. "어디로 가는데? 현실에서 가야하는 곳?"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곳에서. 적색 산맥으로 간다." "적색 산맥으로 말입니까?" 제롬이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적색 산맥의 꼭대기로. 그곳에서 드래곤을 만나야 해." "히엑?" "그게 무슨……." 셋의 경악에 찬 외침에 나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드래곤과 안면이 있고, 적어도 쉽게는 당하지 않을 실력이고, 그 일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 나 외에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적어도 연합의 힘을 더 이상 축소시키지 않도록 나 혼자 다녀올 거야. 최대한 빨리 끝내고, 한 시라도 빨리 이곳으로 돌아오지." 내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위리안이 질문했다. "혹시 그 일이란 게 드래곤이라도 때려잡아야 실행되는 일이야?" 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능력으로 드래곤을 때려잡아. 그저 드래곤을, 그녀를 만나야 할 뿐이야. 그걸로 내 임무는 종료지. 하지만 그곳까지 다녀오는 게 쉽지는 않을 테니… 전투가 끝난 후에나 돌아올 수도 있어." 드래곤이라는 말에 뭔가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셋은 전투가 끝난 후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프네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떤 일인데……." "기밀." 셋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이런 중요한 전쟁에 연합장인 당신이 없으면 사기가 떨어질 수도……." 나프네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점 말인데, 내가 드래곤을 만나러 간다고 소문을 퍼트려. 우리 연합에 한해서만, 기밀이라는 식으로. 물론 전투 개시 하루 전쯤에나." "예?" "신비스러운 분위기잖아. 드래곤과 한번, 유일하게 싸움을 벌인 적이 있는 다크소드가 또 드래곤을 만나러 간다. 거기다 기밀. 분명 연합의 생사가 걸린 정도의 일일 것이다. 혹시 숨기고 있는 힘이 있어서 드래곤을 사냥해 엄청난 무구를 만들 수도 있다. 아니면 드래곤과 친분이 있어서 드래곤을 우리 연합의 수호룡으로?" 내 말에 셋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기는 정상으로 돌릴 수 있겠군요. 드래곤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거나 마찬가지. 연합장은 연합을 위해 목숨을 걸고 떠났다. 우리도 힘내자. 정도인가요?" "그래." 셋은 다시 한번 서로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호흡이 잘 맞는다는 느낌인 것이 그동안 사이가 꽤나 좋아진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제롬이 입을 열었다. "후우. 정말로 연합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까?" "음. 어떻게 보면 섀도우 월드 전체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 제롬은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이미 한번 인정한 연합장, 끝까지 인정하고 믿어 드리죠. 저번에도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는 생각이 들 일을 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좋은 일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믿어 드리겠습니다." 비전투 길드들을 돌려보낸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빙긋 웃었고 나프네가 포기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전투는 어떻게든 해 보죠. 가능하면 라젠님들에게 말이나 해서 전투에 참가해달라고 얘기나 해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다녀와야 한다. 내가 일어서는 모습을 뚱한 얼굴로 지켜보던 위리안이 질문했다. "혼자 가도 괜찮겠어?" "물론. 칼과 주토도 없겠다. 혼자서 빨리 다녀오지."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바로크 시에서." 위리안의 말에 나프네와 제롬이 씩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방을 나섰다. 그럼 트랩퍼 길드의 라젠님들 찾아가 봐야겠군. 나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정보부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이틀 뒤, 세한이 차렌 시를 떠나 적색 산맥에 도착한 날. 현재 어둠의 검 연합은 바로크 시에서 동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집결해 있었고 엠페러 연합과 헌터 연합의 동맹군은 바로크 시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집결해 있었다. 그리고 도적의 도시 로근. 레지엘이 그 움직임에 머리를 혹사 시키고 있었다. "그래. 세한의 연합이 열세라고?" 레지엘의 물음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여자, 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현재 양쪽 진영에 모여든 인원은 대등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곧 엠페러 연합의 지원군이 온다고 합니다. 딜럿 친정이라고……." 레지엘은 한숨을 내쉬며 낮게 말했다. "나나 세한이나 요새 상당히 힘들군. 나는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골치고, 세한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골치인가." 침울한 레지엘의 분위기에 잠시 머뭇거리던 벨이 약간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정보가 있습니다." "뭔데?" "차렌 시에 잠입해 있던 정보원이 보내온 정보인데… 다크소드가 어둠의 검 진영에 없다고 합니다." "뭐?" 뜻밖의 말이었는지 레지엘이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로 벨을 돌아보았다. 레지엘의 시선에 잠시 멈 칫하던 벨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둠의 검 연합군의 사기는 오히려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게… 다크소드가 드래곤을 만나러 갔다는 소문이 어둠의 검 연합에 돌고 있다고……." "드래곤?" 레지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드래곤을 만나러 가다니? "소문의 의도는?" "사실 같습니다. 적색 산맥 근처에서 다크소드와 비슷한 인물을 봤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레지엘의 얼굴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정말이란 말인가. 드래곤이라. 도대체 왜 곳곳에서 드래곤이 등장하는 거지? 아버지의 계획도 드래곤과 연관, 세한도 드래곤인가? 설마 세한이 아버지의 계획을 알아내고는 막으려고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왜 양쪽에서 모두……." "레, 레지엘님!" 그때 다급한 외침과 함께 한 사내가 날듯이 달려왔다. 레지엘이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보자 사내는 서류 뭉치를 레지엘에게 건네며 비명과도 같은 어조로 외쳤다. "크, 큰일입니다! 회사 내부에서 추진되는 일의 실마리를 잡아 조금 무리해서 정보를 빼냈는데… 그게……." "빼냈다고?" "예! 그런데 그 계획이… 저, 절대로 일어나서는……." 레지엘은 서류를 받아들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읽어 내려갔다. "이, 이건……." 서류를 읽던 레지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벨의 얼굴에 불안감이 나타났다. 서류를 모두 읽은 레지엘은 서류 뭉치를 바닥에 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아, 아버지는 도대체……." 레지엘은 이를 뿌드득 갈며 살기를 피어 올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벨과 사내는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사내가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뭔가 있는 겁니까?" "그 계획에서 드래곤이 움직이는 때가 이 즈음입니다. 전쟁이 일어나 로그아웃 관리를 받고 있는 플레이어의 수가 가장 많을 때……." "이, 이런… 자, 잠깐! 그럼 설마……." "예, 사장님 측에서 엠페러 연합과 헌터 연합에 심어둔 이들을 이용해서 전쟁 규모를 확대 시켰다고 합니다. 말려들 사람들을 최대한 늘리려고……." "젠장!" 레지엘이 벽을 후려치며 이를 갈았다. "안돼. 이건 리자드를 견제하는, 우리가 우위를 점하려는 정도가 아니라고.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가능성도… 아버지는 제정신이아니신 거야!" 레지엘의 분노에 찬 고함에 사내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준비해둔 모양입니다. 거기다 대부분을 리자드의 책임으로 돌릴 계획까지 있는 듯한데……." "젠장!" 레지엘의 얼굴이 지금까지 없던 분노에 물들어 있었다. 살기를 흘리며 부들부들 떨던 레지엘이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약한 신음을 흘렸다. "세한……." "예?" 벨과 사내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레지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아, 안돼. 그의 의도가 어떤 것이든 지금 세한이 드래곤을 만나서는. 아직은 막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드래곤이 정말 세한의 고모의 뇌로 만들어졌다면… 그 만남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레지엘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벽을 후려쳤다. "현재 세한, 현진의 소재지는?" 레지엘의 질문에 벨이 대답했다. "섀도우 월드 내에서는 알기 힘듭니다. 아마 적색 산맥 어딘가에 있겠지만요. 현실에서는 집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암흑가가 아닐지……." "젠장. 적색 산맥까지는 너무 멀어. 그렇다면 암흑가로… 시간도 현실이 느리니까. 로그아웃!" 그리고 레지엘은 로그아웃과 동시에 점점 사라져 갔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해 하던 둘이 뒤따라 로그아웃을 실행했다. 카메론 사의 자신의 집무실에 설치되어 있던 캡슐에서 빠져나온 정수는 재빨리 방을 나섰다. 암흑가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문 앞에서 자신을 막아서는 두 사내 때문에 멈춰서야 했다. "뭡니까?" 정수의 사나운 질문에 두 사내 중 한명이 대답했다. "사장님의 명령이십니다. 며칠간은 집무실에서 생활하시라고 하셨습니다." 사내의 말에 정수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자신을 잡아놓으려는 수작이 분명했기에 정수는 둘을 밀치며 복도를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내는 정수를 거칠게 붙잡았다. "놓으십시오." "사장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빌어먹을!" 정수는 둘을 뿌리치며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둘은 정수를 거칠게 붙잡으며 방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정수의 얼굴에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떠오르기 시작했다. "후우. 마, 많군." 위리안의 말에 주위에 모여 있던 어둠의 검 연합의 간부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의 검 연합은 현재 바로크 시에서 조금 떨어진 평원에서 엠페러 연합과 헌터 연합의 동맹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두 진영, 총 3만이 넘는 인원이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천악님이 선두에 계십니다." 한 사내의 말에 나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빈틈없는 갑주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죽더라도 한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어야 한다. 때문에 방어구는 필수였다. "함정은?" 제롬의 말에 체르시온 연합의 길드장 중 한 명이 대답했다. "현재 적군의 앞 1km 부분부터 설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효용성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게다가 적에게 발견될 가능성도 크다고 합니다."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는 가운데 나프네가 입을 열었다.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연합장이신 세한님도 현재 목숨을 걸고 적색 산맥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도 뒤질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나프네의 외침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함성은 점점 퍼져나가며 어둠의 검 연합 전체에서 함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군의 쪽에서도 마주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 "온다!" 위리안이 긴장된 목소리로 외쳤다. 과연 적군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구 몰려오고 있었다. 평원을 가득 메운 병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은 상당한 장관이었다. "젠장. 10만이 넘는 병사를 이끌고 싸울 때는 어떨지 걱정이군." 위리안의 중얼거림에 작은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적군의 선두 부대가 함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진격한 순간, 나프네와 제롬, 위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진격!" "우와아아아아!" 그리고 엄청난 함성 소리와 함께 어둠의 검 연합의 전사들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회색 머리를 휘날리며 거대한 낫을 든 사내가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전사들. 지금, 세 연합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타탁, 타다다닥. 타자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의 근원지에 안경을 쓴 한 사내가 엄청난 속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위치한 모니터에서 엄청난 속도로 여러 문자들이 떠오르고 사라져갔다. 반짝, 반짝. 그 모니터의 옆에 위치한 작은 전구에서 붉은 빛이 끊임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안경을 쓴 사내, 센은 그 것을 흘깃 바라보았다. 자신이 해킹을 하고 있는 현재 위치가 발각되고 있다는 경보기였다. 당장 해킹을 중단하고 정보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면 위험하다. "센……." 센의 뒤에 서 있던 릴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쩔 수 없어. 리자드에게 걸려들어 감옥에서 평생을 썩더라도, 이번 일은 성공시켜야 해. 반드시 드래곤을 설득해야한다고. 그 드래곤에게 생전의 기억을 돌려주고 도움을 받아야 해. 반드시!" 센의 계획. 드래곤은 암흑가의 사람의 뇌를 이용해 만들어낸 슈퍼컴퓨터다. 생전의 기억은 말소되어 있지만 그 말소된 기억을 작은 칩에 기억시켜 보관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게도. 그리고 그 칩을 드래곤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강도훈, 초연의 아버지가 빼돌렸다. 센은 자신의 옆에 놓인 작은 칩을 바라보았다. 리자드의 컴퓨터에 침입해 슈퍼컴퓨터에 접속, 이 칩에 담긴 기억을 전송시킨다. 그녀가 암흑가의 인물로서의 기억을 알게 된다면, 드래곤을 만나고 있는 세한이 그녀를 설득한다. 도와달라고. 리자드의 악행을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드래곤, 슈퍼컴퓨터인 그녀가 그런 기억을 쉽게 받아들일 리는 없다. 때문에 암흑가의 인물인 세한이 그녀와 대면하고 있다. "만났어." 센이 작게 중얼거렸다. 세한과 드래곤이 만났다. 이제 시작해야 한다. 둘의 대화가 진행되고, 자신이 쓴 편지가 드래곤에게 전해지고 있을 때, 드래곤에게 '김지혜'였을 때의 기억을 돌려준다. 센은 '김지혜'라고 전면에 붙어 있는 칩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모니터의 칩 투입구에 끼어 넣었다. 모니터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닥. 센의 손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드디어 슈퍼컴퓨터에 접속한 센은 슈퍼컴퓨터의 데이터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너무도 바빴기에 머리 저편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사건, 비극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이네요, 페이린." 나는 내 앞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는 레드 드래곤을 보며 긴장했다. 페이린의 레어, 적색 산맥의 꼭대기인 이곳까지 오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몬스터들은 오히려 나를 피해갔고, 설원이 시작된 곳에서는 갑자기 텔레포트가 되어, 페이린의 마법으로 고지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드래곤을 대면하게 되었다. 츠츠츠츠. 갑자기 환한 빛에 둘러싸인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드래곤은 붉은 머리의 미녀로 변해 내 앞에 섰다. "오랜만이군요, 세한."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페이린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주었다. "무슨 일로 온 거죠?" 페이린의 질문에 나는 미소를 지우며 얼굴을 살짝 굳혔다. 페이린의 질문 뒤에 숨겨진, 약간의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왜지? 잠시 침묵하던 나는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페이린에게 내밀었다.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 "도움? 무슨 도움을 말하는 거죠?" 페이린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이 떠올랐다. 왜지? 페이린의 반응이, 분위기가 왠지 이상한데. "나도 정확한 것은 모르는데… 이 편지를 보면 알 거라고 하더군요." 페이린이 편지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읽는 대신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깊은 눈. 내 깊은 곳을 꿰뚫어 보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도움이라. 정말 그것 뿐?" 페이린의 목소리에 적의가 묻어났다. 뭐, 뭐야? "내 아이들과 당신이 충돌을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데요. 내 계획을 막으러 온 것이 아닌가요?" "뭐?" 나는 얼굴을 굳혔다. 무슨 말이지? 내가 페이린의 말의 뜻을 알지 못해 침묵하는데 페이린이 약간의 살기를 띄기 시작하며 말했다. "세한, 당신이 인간들 중에 강자이며, 나와 약간의 친분이 있다고 하지만, 이 일을 막을 수는 없어요." "무슨……." 내 말은 페이린이 갑자기 몸을 움찔 떠는 바람에 끊어졌다. 뭐, 뭐지? 페이린이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뭐지, 이건? 김지혜? 김세한? 암흑가. 리자드의 실험. 인체 실험. 속았어. 속았어. 리자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페이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카메론의 사람들이 전해준 것인가. 나의 기억… 그들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카메론?" 나는 얼굴을 굳혔다. 카메론이라니.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다는 급히 입을 열었다. "페이린! 도대체… 으읏!" 나는 갑자기 휘몰아치는 엄청난 살기에 말을 멈추고는 뒤로 물러났다. 페이린의 얼굴에 엄청난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들의 말을 완전히 신용하지 못해, 계속 미루고 있었어요. 그런데 모두 사실이었단 말이군요. 모든 것이.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겠죠." 엄청난 살기, 내 살기는 애들 장난이라 할 만큼 강렬한 살기에 짓눌려 있던 나는 볼 수 있었다. 분지의 사방에서 어떤 괴물들이 나타나는 것을. 키메라. 갑자기 출현해 공격해 오던, 마나르트를 습격한, 마나르트를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려고 했던, 그 녀석들. '설마! 그 분이라는 것이 페이린!?' 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페이린을 바라보아야 했다. "복수하겠어. 나를 만들어 내고, 이용한 이들에게. 복수를. 우리를 이 꼴로 만든 이들에게. 이 세상을 우리만의 세상으로 만들겠다. 되찾겠어. 내가 지배하겠어." -세한! 정신 차리게! 살기에 짓눌려 움직이지 못하던 나는 마나르트의 고함소리와 내 몸에서 일어나는 마기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페이린!" 내 외침에 페이린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뭔가 애틋해 보이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세한, 아니 현진. 지금 당신은 끌어들이지 않겠어요. 가세요. 당신의 세상으로," "페이린! 도대체 무슨……!" 그때 갑자기 시야가 흔들리며 내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뭐, 뭐지? 내 몸과 아이템들이 모두 희미해져간다. 로그아웃? 하지만 어째서? 그리고 페이린이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커다란 포효와 함께 허공으로 브레스를 뿜었다. 붉은 기운이 하늘로 강하게 치솟은 모습을 끝으로 나는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삐삐삐삐삐! 요란한 경보음이 리자드 본사의 모든 곳에 울리고 있었다. 일급 비상사태에만 울리는 경보. 리자드의 사람들은 경악하며 모든 시스템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뭐, 뭔가!" "드래곤, 슈퍼컴퓨터가 모든 시스템에 침입해 오고 있습니다! 이미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슈퍼컴퓨터에 장악을……." "당장 플레이어들을 로그아웃 시켜야 합니다! 플레이어들이 섀도우 월드 속에 갇히는……." "제 011-88! 드래곤에 의해 장악! 강제 로그아웃 기능, 빼앗겼습니다!" "젠장! 당장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로그아웃을 하라는 메시지를 보내! 통상 로그아웃 기능마저 장악 당하기 전에 플레이어들을 로그아웃 시켜야 한다!" "로그아웃 시스템에 침입이 시작! 로그아웃 시스템이 마비되면 현재 접속 중인 플레이어들이 모두 식물인간 상태에……!" "현재 세 개의 연합 가운데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서 로그아웃 관리를 받는 접속자의 수가 많습니다! 그것의 연계로 정상적인… 위험한 상황입니다!" "젠장! 로그아웃 시스템 완전 장악까지 10초!" "로그아웃을 한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아직 절반도……." "운영자들의 접속 해제 기능이 마비! 현재 접속 중인 사원들, 로그아웃이 불가능합니다! 현재 타국 지사의 시스템들의 대부분이 장악!" "시스템 완전 장악까지 8초! 7초!" "빌어먹을! 갑자기 드래곤이, 슈퍼컴퓨터가 왜!? 슈퍼컴퓨터의 전원을 내려버려!" "안됩니다! 이미 대부분의 시스템이 장악되어 슈퍼컴퓨터의 정지가 불가능……!" "3초! 2초! 1초! 로그아웃 시스템! 드래곤에게 장악 당했습니다!" "현재 접속자 약 1200만 명! 어, 어떻게……." "플레이어들! 이쪽에서 접근 불가! 1200만 명의 사람들이 섀도우 월드 속에 감금당했습니다!" "젠장! 모든 시스템을 리셋할 수는 없나!?" "불가능합니다! 그랬다가는 현재 접속 중인 플레이어들이 모두 뇌사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섀도우 월드 모든 시스템! 장악 당했습니다!" 삐삐삐……. 경보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리자드의 직원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들의 의도한 바가 아닌, 자의로 실행되고 움직이는 시스템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2126년 8월 3일. 섀도우 월드의 모든 프로그램은 드래곤, 슈퍼컴퓨터에 의해 장악 당했다. 빨려 들어간다. 가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몰라. 아니,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검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막고 싶다. 하지만 막을 수 없다. 막고 싶다. 막을 수 없다. 어째서? 나는 막고 싶다. 구한다. 어째서? 돌아오지 못한다. 구할 수 없다.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가? 구하라. 기다리겠다. 나의 대리자와 함께. 가겠다. 그대와 그대의 대리자를 만나러. 구하겠다. 반드시…….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역시 캡슐의 문을 열려 있었지만, 이제야 머리에서 기기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꿈. 아니, 꿈이 아니었어. '섀도우 월드'에서 보여준 영상. 그 누군가가 보여준 영상. 첫 번째 영상. 사람들이 쓰러져 갔다.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 영상. 누군가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해답은 어디에 있느냐고. 그리고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페이린." 그게 페이린이었나? 그리고 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히 알던 목소리였어. 페이린의 목소리. 첫 번째 꿈도, 두 번째 꿈도. 페이린이 내게 보여준 영상이었나? 꿈의 형식으로? 하지만 어떻게? 어쨌든 두 번째 꿈은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내가 페이린과 만나고, 센이 무엇인가를 했을때 그 고민을 끝냈다는 거겠지. 하지만 어떤 고민이지? "첫 번째 꿈……." 사람들이 쓰러져 갔다. 죽은 듯이. "설마!" 나는 급히 캡슐에서 뛰어나갔다. 그리고 PC방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왜 갑자기 로그아웃을 하라는 메시지가 온 거지? 비상사태라니?" 한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일행으로 보이는 듯한 4명의 사람들이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 몰라. 그, 그런데 이 녀석은 왜 나오지 않는 거지? 로그아웃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했는데… 설마 못한 거 아냐?" 그들은 한 캡슐을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저 안에 마지막 일행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갑자기 캡슐의 윗부분에 위치한 캡슐의 상태 표시기에 붉은 빛이 들어왔다. 저건 캡슐 고장 등, 캡슐이 제어 불가능 상태에 들어갔을 때 나오는 불빛이다. 그 비상등을 발견한 4명은 비명을 지르켜 캡슐로 달려들었다. "아, 안 열려!" "안돼! 진도! 진도야!" 나는 캡슐을 수동으로 열려고 노력하는 4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캡슐에 비상등. 로그아웃을 하지 못해? 급히 로그아웃을 시키려고 했다는 소리지? 그런데 캡슐에 사람이 있는 채로 비상등이 들어왔다. 그리고 살아있지만 죽은 듯이 거리에 사람들이 쓰러지던 그 영상. "감금……." 로그아웃을 하지 못한다. 플레이어들이 섀도우 월드 속에 갇히는 건가? 하지만 어째서? 페이린의 짓? 파지지직! 그때 캡슐에서 강한 스파크가 일더니 캡슐을 열려던 이들이 튕겨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이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손도 대지 못한다는 건가?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공포에 찬 미소였다. 이건가? 영혼을 빼앗긴다는 건가? 첫 번째와 두 번째 영상. 그렇다면 마지막 세 번째, 그 꿈은 뭐였지? 상념은 갑자기 크게 다가온 비상벨 소리에 깨어졌다. "젠장!" 나는 욕설과 함께 PC방을 뛰쳐나갔다. 리자드로 가야하나? 분명 전투가 한창일 때였을 텐데? 등 뒤로 캡슐을 함부로 건들지 말아달라는 리자드의 경고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타탁. 순식간에 건물을 빠져나온 나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선은 암흑가로 가야하나? 센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 하나? 하지만 이번 일은 들킬 가능성이 컸으니 벌써 장소를 옮겼을지도. 어쨌든 암흑가다. 나는 암흑가 쪽으로 달려갔다. 왠지 거리의 분위기도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진!" 한참 달려가던 나는 뒤에서 들려온 다급한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저쪽에서 레지엘, 정수가 검은 장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의 뒤로 붉은 머리카락의 외국인 여자가 힘겹게 따라오고 있었다. 저 자식! "너!" 나는 내 앞으로 달려온 정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녀석의 눈이 흔들렸다. "너 이 자식! 무슨 짓을 한거냐! 페이린에게 무슨 짓을 한거지!? 분명 카메론이라고 했다! 말해! 이번엔 무슨 수작이냐!" 정수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신음을 흘렸다. "이미… 늦은 겁니까." "뭐?" 나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정수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옷이……. "너, 옷이 왜 이 꼴이냐?" 나는 구겨지고 찢어진 정수의 와이셔츠를 바라보다가 손에서 힘을 살며시 빼주었다. 하지만 정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설명을 해봐!"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정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수가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한 짓입니다." "뭐?" 아버지? 이 녀석의 아버지라면… 카메론 한국 지사의 사장이던가? 그 사람의 짓이라니? "드래곤은… 사람의 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기능의 슈퍼컴퓨터…죠. 대부분의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알고 있어! 우리도 그걸 이용해서 드래곤에게 도움을 얻으려고 했었다고!" 정수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랬군요. 하긴 당신들 암흑가의 사람이었으니 도움을 받을 확률이 높았겠죠. 기억이라도 되찾아 주려 한겁니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 녀석…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거기다 암흑가의 사람이라고? 역시 카메론 정도 되는 곳의 사람이라 그건가? "아버지의 계획도… 당신들의 계획과 기본은 같았습니다. 드래곤이 한때 인간이었다는 것을 이용한 거죠. 드래곤을 찾아가 리자드의 짓을 알리고, 사람의 뇌로 만들어진 모든 몬스터들을 찾아다니며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선동이었죠." "선…동?" 얼굴에서 피가 싹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섀도우 월드를 점거하라. 복수하라. 억압받는 NPC들을 구하라. 인간이던 자신들을 이 꼴로 만든……." "그런……." "슈퍼컴퓨터에 침입해서 약간씩 데이터를 집어넣습니다. 리자드의 짓들을… 리자드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는, 리자드가 가한 금제를 AI, 최고의 인공지능의 성능으로 우회하는 방법… 드래곤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도록 되어 있던 방법들을……." "……!" 정수의 얼굴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 자조 섞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드래곤은… 믿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뇌로 만든 몬스터들을 끌어 모으고… 통제하고… 자신의 군대를 만들었죠." "키메라……." 역시 그 괴물들은 페이린이 만든 건가? "하지만 최후의 결단은 아직 내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망설임… 이라는 거였겠죠."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기억을 돌려줘? 내가 페이린과 만나고 있을 때 센이 한 일이 그거였나? 나와 페이린이 만날 때 리자드의 컴퓨터에 잠입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삶에 관한 기억을 주입했다? 그리고 카메론의 모든 말들이, 그 부추김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대로 모든 분노를 폭발……. "우리… 때문인가?" 내 떨리는 중얼거림에 정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미 아버지 측에서도 드래곤의 기억을 주입할 계획이 있더군요. 당신들이 아니더라도… 결국은 터졌을 겁니다. 거기다 잘못이라면 제 아버지 때문에… 그리고 그걸 이제야 눈치 챈 제가……." "하지만……." 내 떨리는 중얼거림에 정수는 이를 악물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다가 같이 몸을 일으켰다. 정수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최대한 상황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리자드로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어떻게든 도움을……." "…그렇군."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정수를 마주보았다. 어쨌든,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된 건가? 센이 예전에 알아낸 바에 의하면 확실히 카메론 사 내에서 정수는 겉도는 존재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녀석의 본성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믿을 수 있어. 아니, 믿지 못하더라도 지금은……. "벨, 괜찮겠어?" 정수가 옆에서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붉은 머리의 외국인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질문했다. 벨? 아, 섀도우 월드에서 정수의 뒤를 따라다니던 그 여자로군. 현실에서도 똑같은 모습. 나는 상당히 지치고 여러 군데 상처가 보이는 벨이라는 여자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정수도 그렇고 저 여자도 그렇고, 무슨 일이지? "너희, 그 모습은……." 내 질문에 정수가 나를 돌아보더니 자신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고는 쓴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게… 아버… 아니. 카메론의 사장이 제가 자신들의 계획을 알아낸 것을 알아채고는 감금하려들더군요. 빠져나오느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 서라면 힘들었겠지만… 벨과 제 동료 중 한사람이 도와줘서… 결국 그 사람은 붙잡혔지만요." 정수는 쓰게 웃었다. 동료가 붙잡혔다고? 나는 이를 한번 갈고는 몸을 돌렸다. "우선은 암흑가로 가지. 거기에 리자드의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은 드래곤 프로젝트에 관계했던 사람들이니 도움이 될 거다. 어쨌든 리자드의 직원이니 리자드에 들어가는 데에도 도움이 되겠지." "알겠습니다." 나는 암흑가 쪽으로 달려갔다. 정수가 벨을 데리고 뒤따라 왔다. 젠장.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일까? 어떻게……. "결국, 모두가 이용당했다는 겁니까?" 6인승의 택시 안이었다. 나와 정수. 벨이라는 여자. 강도훈, 초연 씨의 아버님과 신대관 과장.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를 무력이 필요한 상황을 우려해 따라온 민. 그리고 택시 안에서 설명을 들은 신 과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묻고 있었다. 정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리자드의 눈을 돌리기 위한, 최대의 경쟁 업체 카메론은 정공적인 방법으로 나오고 있다, 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한 존재에 불가했죠. 실제로 리자드의 사람들은 저의 암흑 길드로 대부분의 신경을 집중하고 있더군요." 결국, 카메론에서 드래곤을 회유하는 과정을 숨기기 위해, 정수가 암흑 길드로 일을 벌여 눈을 돌리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용당한 것이다. "그리고 암흑가의 분들도……." 민이 정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는 여러 분들이 마음에 들고, 카메론 내부에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아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카메론의 사장 측도 마찬가지였죠." "무슨 뜻이지?" 민이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여러 분이 리자드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도록 도와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리자드의 정보를 빼내기도 쉽게 조금씩 돕고 있었더군요. 리자드와 연계하는 척 해서 리자드의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기도 했고요." 까드득. 민의 입에서 살벌한 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의 활동도, 이용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빌어먹을!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드래곤, 슈퍼컴퓨터를 막을 수 있냐는 거죠." 정수는 신 과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리자드 내부의 사정과 섀도우 월드의 시스템과 프로그램에 가장 많을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신대관, 리자드의 젊은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드래곤이 모든 시스템을 장악했다면… 모든 것을 리셋 하는, 전원을 내려버리는 방법뿐입니다만… 그래서는 현재 섀도우 월드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모두 뇌사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전원을 내려도 자체적으로 전력을 공수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리자드 본사내에는 자가 발전기도 있으니 거기까지 장악해 들어갔다면……." 나는 창문을 후려쳤다. 강화 유리가 부르르 떨렸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만……." 뒤이어 작게 이어진 신 과장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하지만 그는 그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우선 리자드에 들어가서 고려해 보겠습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서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 왔군." 저 멀리 리자드 본사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급박한 듯 불빛을 요란하게 내뿜고 있었다. 비상이 걸렸겠지. 그리고 본사의 입구 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님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초연이는 괜찮을지 모르겠군." 나는 몸을 움찔했다. "초연 씨가… 접속해 있었습니까?" 내 질문에 아버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근무날인 걸로 알고 있네.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중요한 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초연 씨, 페페에게 우리 연합에게 정보를 달라고 부탁을… 전쟁 중이었으니 정보 수집을 위해 접속해 있던 건가? 꼭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열 받는군. "너무 걱정 말게. 무사히 로그아웃 했을 수도 있으니." 내 얼굴이 일그러지자 아버님이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후우, 누가 누가한테 외로 받는 거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신 과장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비상사태라 경계도 심할 테고, 저와 부장님은 리자드에서 배신자로 지목되고 있을 테니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신 과장의 말에 아버님과 레지엘의 얼굴도 심각하게 바뀌었다. 특히 레지엘은 카메론 사에 붙잡혀 있다가 빠져나온거라 불안감이 더 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와 민은 평온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지금 리자드에서는 밖에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을 겪고 있는 거지요?" "예? 그, 그렇죠." 내 질문에 신 과장에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문제없습니다. 방법이 있죠." 내 말에 신 과장과 아버님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레지엘은 약간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민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게 중년의 멋이려나. 뭔가 기백이 느껴지는군. 나는 눈을 빛내며 가까워지는 리자드의 본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퍼억! "크아악!" 나는 앞을 가로막는 수명의 사람들을 때려눕히며 앞으로 전진 하게 되었다. "이, 이런 짓을……." 신 과장의 걱정 어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이 순식간에 또 한 명을 벽에 처박았다. 아버님이 놀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정수는 상황 파악을 하고는 신 과장의 가방에서 꺼낸 길다란 금속 케이스를 검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핫!" 전문적인 싸움꾼도 아니고 그저 회사의 경비원 정도이다. 나는 단 한방에 컥컥거리며 뻗어버리는 사내를 보며 쓰게 웃었다. "어차피 경찰은 부르지도 못할 테죠. 상관없습니다." "꼼짝마!" 그때 한 경비원이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흠, 전기총인가? 전극이 날아와서 몸에 철썩. 전기 충격 찌리릿 이었던가. 나는 피식 웃었다. "혀, 현진 씨!" 내 태연한 반응에 신 과장이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아버님도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건 레지엘도 마찬가지였고 다만 민 만이 여전히 주위를 둘러싼 녀석들을 막고 있었다. "그, 그만두라니까!" 경비원이 다시 고함을 지르며 전기총을 마구 겨눠대었다. 총신이 민에게 향하는 순간, 나는 품속에서 빔건을 꺼내들었다. "좋아. 용감한 경비원 씨. 거기서 전극이 튀어나와 내게 달라붙는 게 빠를까, 아니면 빔이 더 빠를까?" "비, 빔건?" 경비원은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숨이 턱 막힌다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그건 신 과장과 아버님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아무래도 초연이와 심각하게 얘기를 나눌……." 아버님의 약간 장난기 어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비원이 발작적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우, 웃기지 마라! 빔건을 가지고 있을 리가! 모형을 가지고 협박……." 치잉! 퍼엉! "으아아악!" "꺄아아악!" 순식간에 내 빔건에서 빛줄기가 뻗어나가 경비원의 옆을 지나가며 벽에 명중했다. 그리고 벽이 순식간에 터져나가자 주위에서 비명소리들이 높아졌다. 경비원은 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이 떨리는군. 이제 어느 정도 안심. 쏘더라도 미리 알기 쉽다. "이제 길을 터주시지! 예전 범죄 처리팀 팀장, 김현진이 왔다고 해! 지금 사태 때문에 도우러 왔다!" 내 외침에 비명소리들 사이에 수군거림에 섞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날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콧방귀를 뀌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급히 따라붙었다. 경비원이 빔건이 자신에게 겨눠지자 전기총을 떨어뜨렸다. 나는 빙긋 웃으며 전기총을 차버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한!" 비상계단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일행이 전부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녹색 머리의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미토스? "미토스! 아, 아니, 영민 형! 무사했군요!" "아, 그래……." 나는 상당히 반가워하며 외쳤지만 미토스, 영민 형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우리가 벌려놓은 '아수라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이이이잉. 수많은 컴퓨터들이 동시에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는 자연광을 이용해 방을 밝히는 방인데 창들을 전부 가리고 있어서 조금 어두웠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급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방의 정면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하나 위치하고 있었고 방의 온 곳에 수많은 컴퓨터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정신없이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 리자드 내부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들을 추려서 만들어진 긴급 소집 팀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신 과장이 뭐라고 소리치며 지휘를 하고 있었다. "저도 돕고 싶을 정도군요." 옆에서 정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실력은 있지만 이번 일의 벌인 카메론의 사람이었기에 눈치가 보여 나와 함께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조언을 주고는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행동하기는 힘든 듯 했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이런 쪽에는 능력도 없을뿐더러 어쨌든 이번 일의 원인도 우리에게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끼익. 우리 뒤의 문이 열리며 아버님과 민, 그리고 리자드의 전무 중에 한 사람인 방호진 전무, 나와 약간의 안면이 있던 방 전무가 안으로 들어왔다. 셋 모두 무슨 전쟁을 치룬 것 같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내 걱정 어린 질문에 방 전무가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말게. 어차피 저 인간들도 찔리는 것이 있으니 자네에게 뭐라고 하지는 못해. 거기다 현재 리자드 내부에는 인체 실험에 관한 얘기가 다 돌고 있어서 자네를 어떻게 하기는 힘들 걸세. 나나 강 부장 같이 자네들이 하던 일들을 좋아하던 간부들도 많으니 걱정 말게." 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돕는다고 오기는 했지만 리자드 내부에서는 우리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어서 나와 민을 가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리자드 사의 지인들이 긴급 소집 팀의 팀원으로 초빙한 사람들이라고 결사적으로 막아대었고, 우리가 한 행동의 궁극적 목적이 까딱하면 전부 퍼져나갈 수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쉽게 손을 대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굳히며 다시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전에 내가 프로그래밍 팀에 쳐들어갔을 때 봤던 사람들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간부들 몇이 끝. 나와 함께 일하던 운영자들은 지금 상황 점검을 위해 다른 곳에 있다. 이곳의 일이 가장 중요하기에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이고. 신 과장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떤가?" 아버님의 질문에 신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안되겠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슈퍼컴퓨터의 근처에도 진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슈퍼컴퓨터의 행적이나 쫓는 것이 한계입니다." 신 과장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법은 전혀 없습니까?" 레지엘의 질문에 신 과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직원들의 실력이 너무 모자릅니다. 이런 루트로 되지 않는다면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뭡니까?"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는 신대관, 신 과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불가능할 겁니다." "불가능하더라도… 우선 들어보기다 하죠." 내 말에 신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합니다. 섀도우 월드 속에서 드래곤을 죽이는 거죠." "예?" "부장님도 아실 테지만 드래곤은 슈퍼컴퓨터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섀도우 월드 속에서의 몬스터입니다. 섀도우 월드 속에서 살해당한다면… 슈퍼컴퓨터가 리셋되죠. 순식간에 모든 통제권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새로운 드래곤이 생겨날 때까지요. 슈퍼컴퓨터가 새로운 인격체를 만들어내는데 시간이 걸리거든요. 새로 만들어 진다고 해도 그 드래곤은 어리고 초기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장악해올 리도 없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드래곤을 죽인다? 어쨌든 방법이 있기는 하군. "그럼 죽이면 되겠군요." 정수, 아니 레지엘이 눈을 번뜩였다. 섀도우 월드에서의 눈빛과 똑같다.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움이 있는 눈. 뭐, 어쨌든 동감이군. "간단한 방법이 있었잖아. 뭐, 우리가 할 일은 역시 싸움뿐인가?" 나와 정수는 약간이나마 기운이 돌아왔지만, 리자드 내부의 사람들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나와 정수가 서로를 바라보자 신 과장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아……." 정수가 약한 신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뭐야? "현재 섀도우 월드는 드래곤에게 완전히 장악 당했습니다. 신이 되었다는 거죠. 드래곤의 의지에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그 자리에서 피를 뿜으며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공격해도 타격이 전혀 없을 수도 있죠. 모든 게 드래곤의 마음먹기에 따른단 말입니다."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 건가? 확실히 모든 시스템을 장악했다면 섀도우 월드를 임의대로 아무렇게나 바꿀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를 한번 갈고는 입을 열었다. "쳇, 그냥 모두가 몰려가서 목을 따버리면……." "한번 죽으면 모든 게 끝입니다." "……!" 내 말을 끊고 들려오는 정수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섀도우 월드에서 죽으면… 여기서도 죽겠지요. 연결이 강제로 끊기는, 어긋나는 거니 뇌사 상태 정도일까요? 결국 막무가네로 가하는 돌격도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거기다 문제는 더 있습니다." 신 과장이 다시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어떻게 섀도우 월드 속으로 들어가실 겁니까?" "아……." "섀도우 월드의 모든 시스템은 드래곤에게 장악 당했죠. 로그인하는 것조차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계획이라는 거죠." "젠장." 확실히 그렇다. 시스템이 모두 장악 당했다는 것은 섀도우 월드 속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거겠지. 우리는 이를 갈며 침묵했다. 벌컥!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몇몇 사람들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안경을 낀 서른 정도의 젊은 남자와 중년인 둘이었다. 뭐야? 분명 제한을 하고 있었을 텐데? 민이 그들을 막으러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방 전무가 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나와 민이 의아한 눈을 하자 정수가 작게 설명해 주었다. "저 젊은 사람이 리자드 사장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전무들이죠. 몇 번 본적이 있습니다." 정수의 말에 나는 혀를 찼다. 높으신 분들의 행차라는 건가? 사장 아들쯤 되니 밖에서 막지 못한 모양이군. 그런데 저 사람들이라면 벌써 어디로 도망이라도 쳤을 줄로 예상했는데 왜 남아있는 거지? "무슨 일이십니까?" 방 전무가 얼굴을 노골적으로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화를 내는 대신 누군가를 안으로 안내하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뭐야? "자, 보십시오. 벌써 해결 팀을 만들어서 관리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곧 해결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그 셋의 뒤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외국인? 단정한 금발에 나와 비슷한 키. 20대 후반 정도? 그리고 약간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선과 눈. 거기에 푸른 알의 안경? 왠지 익숙한데? "확실히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하군요." 정확한 한국어의 발음에 우리는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 녀석은 뭐야? "이 분은……?" 방 전무가 대표로 나서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도 그 외국인은 방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만 했고 대신 그 사장의 아들인지 하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 사이버 경찰 섀도우 월드 파견 수사관 분이시네." "사어버 경찰?" 방 전무와 아버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신 과장의 짜증섞인 중얼거림이 귓가에 들려왔다. "빌어먹을. 그래서 저렇게 굽실거리는군. 설마 아직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흘깃 바라보니 정수의 표정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걱정이 깃든 것이 정부 측에서 개입해서는 일의 해결이 어려워 질 것을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동감인데……. "당신, 사이버 경찰이라고?" 갑자기 내가 앞으로 나서며 물어오자 외국인 사내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 리고 외국인을 안내해 안으로 들어온 셋이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 어디서 함부로 나서는 건가! 누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는데!" 뭐야? 우리 측 사람들의 눈이 험악해졌다. 저 인간이……. "누구 때문? 병신 같이 사람들을 가져다가 인체 실험이나 한 네 녀석들 때문이다! 거기다 멍청하게 슈퍼컴퓨터조차 관리를 제대로 안 하고 있던 주제에……!" 내 고함에 셋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내 외침은 제 3자의 개입에 멈춰지게 되었다. "세한?" 그 금발의 외국인의 부름에 나는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수와 민도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둘 모두 '세한'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 나는 상당히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외국인의 모습에 약간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무사 했군요! 드래곤을 직접 만나러 간다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섀도우 월드 아이디가……." "그런데 설마 리자드의 긴급 팀에 끼어 있을 줄이야! 정말 다행입니다! 이거 호흡을 맞출 사람이……." "위리안!!" 계속 말이 끊어지자 열이 뻗친 내가 꽥 고함을 지르자 외국인이 움찔하더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위리안이었어? 저 푸른 안경 때문에 설마 했었는데……. "하하, 현실에서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이곳에서도 위리안이라고 불리죠." "아, 김현진, 현진이나 진이라고 불러. 정말 경찰…이었군." 위리안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맞잡았다. 왠지, 일이 약간은 쉬워질 것도 같았다. "그런데 네가 왜 한국에……." 잠시의 소란스러움이 가시자 나는 의아해 하며 질문했다. 위리안은 약간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말했다시피 섀도우 월드 담당이라서요. 리자드 내부에서 좋지 않은 일도 있는 것 같았고… 프로그램상에서도 뭔가 약간의 이상이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현재 관리지는 한국이니 한국으로 왔던 거죠. 언제 만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여기서 일하는 겁니까?" "아니. 원래 여기와는 그 '썩어빠진 일' 때문에 적대 관계였는데 이번 일 때문에 어떻게 돕고 있지. 그리고 말 놔라. 이상하다." "하하. 좋아. 음, 그럼 우선 상황 설명이……." "널 안내해온 얼간이들에겐 기대하지 말라고.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현재 상황 지휘자들이니까." "크흠, 흐흠." 갑자기 그 사장 아들인지 하는 녀석이 헛기침을 하며 나와 위리안에게 다가왔다. 뭐야? "음, 자네 위리안 수사관님과 아는 사이였나?" "그런데?" 내 반말에 녀석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가 금세 회복했다. "음, 자네 잠시 나하고 얘기 좀……." 하?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수사관과 아는 사이니 어떻게 무마시켜보라고 말하려는 건가? 이 녀석을 따라 들어온 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황당함에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위리안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제정신이십니까?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에 팀원을 빼가겠다니?" "예? 아, 아니 그게……." 위리안은 잠시 싸늘한 눈으로 녀석을 노려보더니 신 과장들에게로 몸을 돌리며 걸어갔다. "어서 일들 하시죠. 누가 상황 설명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선은 리자드 본사 건물은 봉쇄해 두겠습니다." 녀석들의 얼굴에 약간 화색이 돌았다. 나는 조소를 날려주고는 위리안들에게 걸어갔다. "결국, 섀도우 월드 내부로 들어가 드래곤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고, 여기서도 직원들의 실력이 딸려서 불가능하다는 거군요." 설명을 들은 위리안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나가지도 않고 위리안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셋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신 과장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현재 상태로는 접속 중인 플레이어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간단한 대화를 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완전 장님 상태라고 할 수 있죠." "신 과장! 무슨 말인가! 그렇게 까지는……." 사장 아들놈의 옆에 붙어 있던 전무 중에 한 사람이 황급히 나섰지만 위리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는 신 과장과 얘기를 계속했다.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거군요. 으음, 아무래도 실력 좋은 프로그래머들을 구해야……." 위리안의 말에 나는 순간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젠장! 센을 잊고 있었잖아? "센!" "에?" 내 갑작스런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 중에 신 과장과 민은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그렇군요! 그 분의 실력이라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혼자서 슈퍼컴퓨터에 침입할 정도의 실력자시니까요!" 신 과장의 말에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내 친구 중에 센과 맞먹는 실력을 가진 녀석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둘을 데리고 온다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요." 내 말에 방 전무가 뭔가 희망이 보인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음, 그렇군. 그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나?" 방 전무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있을지도. 그때 방 전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질문했다. "그런데 자네 친구에 실력 좋은 사람이라면… 혹시 암흐… 그곳의 사람인가?" 암흑가라고 하려다가 말을 바꾼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한명은 제 동창일 뿐이지만요." "으음. 그럼 문제가 있는데……." 나는 멍한 얼굴로 방 전무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얼간이 셋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사장 아들 녀석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 컴퓨터에 침투한 녀석을 말하는 건가? 그 해커 녀석이라면 이미 우리가 고용한… 큭……." 순식간에 민이 녀석을 벽에 밀어붙이며 멱살을 잡아 올렸다. 엄청난 기세에 사람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센을 어떻게 한 거냐?" "크윽, 놔! 그런 해커 자식 따위… 히익……!" 녀석은 내가 자신의 목에 나이프를 들이대자 창백하게 질려 비명을 질렀다. 다른 사람들이 경악을 넘어서 황당하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고 싶나. 해커가 어쨌다고. 1200만이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렸다. 거기다 우리는 그저 네놈들의 짓거리를 까발리려 했을 뿐이야. 수사관 앞에서 누가 잘못한 건지 밝혀 볼까?" "네, 네놈들! 이런 짓을 하고……." "자, 잠깐!" 갑자기 위리안이 고함을 질렀고 나와 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위리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음, 해커라서 문제가 되는 모양이지? 수사관 권한 발동합니다. 지금 이후로 어떤 범죄자이든 이 일에 협력하는 자는 그 공로를 인정해 추후에 모든 죄를 사면합니다. 비상사태고, 해커라면 제 권한으로 가능하죠. 국제법에 명시되어 있으니 시간 나면 찾아들 보시길." 하? "보통 몇 조 몇 항 이렇게 말하지 않나?" 내 질문에 위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 귓가에 흘리듯 작게 말했다. "아, 잊어먹어서." 나는 피식 웃고는 나이프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내가 나이프를 갈무리 하는 사이 민이 그 사내를 놓아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위리안이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거리는 사장 아들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뛰어난 해커 분이 어디 계신지 들어볼까요?" "빌어먹을!" 나는 택시를 잡아타며 욕설을 내뱉었다. 저 쪽에서 민이 다른 택시를 잡아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위리안들이 고생하고 있을 리자드 본사의 건물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택시가 출발하자 쿠션에 몸을 기댔다. "멍청한 녀석들. 연결 고리를 다 끊어두면 어쩌자는 거야." 그 사장 아들내미의 말에 따르면 리자드와 연계하고 있던 조직은 역시나 칸 그룹 녀석들이었다. 예전부터 리자드 측이 칸 그룹과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문제는 나중에 그런 조직과 연관을 맺었다는 것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연결을 극히 소극적으로, 메일 계정을 하나 생성해 그걸로 장소만 주고받고 양 측에서 대표가 한명씩 나가는 식으로 계약을 맺었다는 거였다. 그 메일 계정은 센의 일을 끝으로 끊어 버렸다고 한다. 결국 리자드에서 칸 그룹에 연결을 취할 방법이 없다는 것. 결국 칸 그룹으로 직접 쳐들어가서 센을 구출해야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서 싸울 만한 사람은 나와 민, 둘 뿐. 그런데 갑자기 암흑가에서 크넥스 그룹에서 대대적으로 돌격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크넥스 그룹에서?' '예! 레딕 형님도 없어서 민 형님이나 진님 중에 한분만이라도 오셨으면…….' '습격이라고요? 설마 아버지가… 암흑가에 뛰어난 해커가 있는 걸 알고 발을 묶으려고…….' '하하, 세한…이 아니라. 진? 도대체 무슨… 완전 영화잖아?' 마지막으로 위리안의 얼빠진 목소리를 떠올린 나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암흑가 쪽은 민이 어떻게든 해결해 주겠지. 그래서 나는 우선 집으로……. "아!" 창밖으로 아파트 단지 하나를 발견한 나는 이마를 치며 급히 택시를 세웠다. "재훈이 녀석을 먼저 보내야 하지." 센과 맞먹는 실력이니 혼자서도 일단은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센까지 합세하면 어떻게든 될 지도. 프로그래머들이 아니라 해커들이라 침투가 전문이긴 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리자드의 직원들이 있으니 협동만 한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콰앙! 예전에 절친한 친구로서 거의 강탈하다 시피 뺏었던 비상키로 거의 부숴버리듯 문을 열고 재훈이의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마침 거실에 나와 있던 세진이가 나를 보며 낮게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도둑과 헷갈린 모양이지? 나는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며 세진이를 지나쳐 걸어갔다. "재, 재훈아! 가,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한 세진이가 재훈이를 불러 외쳤다. 집에 있긴 한 모양이군. "뭐야!?" 그리고 방에서 재훈이 순식간에 뛰쳐나왔다. 녀석이 날 알아보고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녀석의 목을 감아 끌고 갔다. "좀 갈 곳이 있다. 가자." "우욱. 야! 뭐, 뭐야?" "어머? 현진이?" 나는 뒤늦게 나를 알아보고 얼빠진 표정을 짓는 세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재훈이를 끌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음, 해커 주제에 집은 좋다니까. 언제 우리 집도 이렇게 꾸며볼까? 좀 삭막한 환경에서 살아서… 내 짧은 상념은 재훈이의 필사의 몸부림에 끊어졌다. "우이이익! 뭐냐!?" 기이한 자세로 몸을 틀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재훈이가 헐떡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세진이는 정기적으로 있던 일이라 그런지 침착함을 회복하며 거실에서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페이퍼 스크린? 음, 신문이군. 아, 재훈이가 벌인 일이 혹시 신문에 나왔는지 확인하는 듯 했다. "아, 사이버 수사관 중에 아는 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이 너 좀 보제." 내 간단한 설명에 재훈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세진이가 입을 쩍 벌리고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흠, 설명이 너무 간결했나? 내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재훈이가 슬슬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이, 이럴 수가… 네, 네가 날 팔아넘기는 거냐? 어, 얼마를 받고……." "하?" "재, 재훈아, 도망쳐!" 그리고 내게 날아드는 세진.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순간 몸을 틀어 세진이를 흘려보내다가 뒤에서 낚아챘다. 내 품에 뒤로 안긴 세진이가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김현진, 너!" 재훈이가 달려들려는 순간, 나는 품속에서 나이프를 꺼내서 세진에게 겨눴다. 재훈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나는 당당하게 외쳤다. "설명 들어. 안 그럼 옷 찢는다!?" "뭐?" 보통 '조용히 따라와. 안 그럼 죽인다.' 라고 해야 할 것을 약간 변형시켜 말하자 재훈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세진이를 풀어주며 설명했다. "리자드에 난리가 났다. 슈퍼컴퓨터가 모든 시스템을 장악했어. 직원들 실력이 딸려서 널 초빙하러 왔다. 지금 1200만명의 사람들이 섀도우 월드 속에 갇혀서 뇌사 위기에……." "일 없소. 다른 사람 구하려다 내가 잡혀 들어간다고." 내 말을 끊으며 재훈이 손을 흔들었다. 뭐, 당연한 반응인가? 하지만……. "진성이나 소영이들도 갇혀 있을지 몰라." 재훈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거기에 이번 사건을 맡게 된 수사관이 내 친구라 별 걱정은 없다. 뭘 발동시켜서 이번 일을 도우면 그냥 풀어준데. 어떻게 사면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는데… 도와줘." "젠장.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재훈이가 투덜거리며 물었고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재훈이는 세진이와 함께 리자드로 떠났다. "아, 진님!"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던 나는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소마 녀석이 내 바이크를 타고 오고 있었다. 바이크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소마가 온 건가? 막내라고 위험한 일에서 빼준 걸 수도. 소마 녀석이 바이크에서 잽싸게 뛰어내리며 내게 다가왔다. 바이크의 안전장치가 작동되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파트로 뛰어갔다. 소마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음?" 내가 사는 아파트로 가까이 달려가던 나는 왠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일이지? 그때 약간 곤란해 하는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경비 아저씨를 발견한 나는 그리로 달려갔다. 경비 아저씨와는 암흑가에서 주워 준 물품들로 친분이 쌓여 있었다. "아저씨, 무슨 일이죠?" "아, 자네 왔군!" 이상하리만큼 반가워하는 경비 아저씨의 반응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지? 이어진 말에 나는 급히 아파트 안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무슨 정부 소속이라고 자네 집을 아주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가버려서 말이네. 그 후엔 아무런 조치가 없어서… 무슨 일인가?" "젠장!" 어리둥절해 하는 경비 아저씨를 뒤로 하고 몰려든 인파를 해치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난장판? 우리 집에 손만 대봐라. 모두 황천길 티켓을 한 장씩 쥐어주지. "무슨 일일까요?" "몰라. 개자식들. 내 집에 이상만 있었다간 죽여… 헉!"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에 이상이 있을까 소마가 움찔거릴 정도의 살기를 뿜어대던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드러난 광경에 숨을 들이켰다. "이, 이런……." "으……." 현관문이 박살이 나 있었다. 재질상 힘으로 부수는 것은 불가능한 문인데… 그래서인지 부서진 잔해는… 무슨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문은 물론 그 근처의 벽까지 무너져 있었다. 그을리고 조각난 벽의 잔해들을 보며 나는 신음을 흘렸다. 포, 폭탄을 쓰다니… 지, 집이……. "이런… 말도 안……." "포, 폭발물… 센 형님!" 내가 충격에 멍하니 서 있자 소마가 내 눈치를 보다가 센을 불러대며 부서진 현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 아……." 잠시 신음을 흘리던 나는 눈을 번뜩이며 집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머리가 왠지 어질어질 거리는 것 같았다. 망할 리자드 녀석들… 설마 정부 기관에 까지 손을 빌린 건가. 폭탄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갈 정도면 정부 기관의 힘이 없으면 불가능……. "릴 누님!" 멍한 머리를 흔들거리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소마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릴? 나는 소마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제일 큰 방. 내 침실. "진님!" 방으로 들어가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소마에게 안겨 있는 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 맙소사… 내 바로 옆에 빔건에 맞은 듯한 흔적이 있었고 방구석에 전에 봤던, 빔건이 폭발할 때 생길만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빔건까지 썼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저 꼴이라면… 거기다 센이 릴만 해킹을 했던 장소에 두고 갔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지이잉. 약한 울림을 흘리며 아직 작동 중인 컴퓨터. 센의 것이다. 해킹 도중에 잡힌 건가? 쳇,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나는 급히 몸을 숙이며 릴을 흔들었다. "릴! 괜찮아?" 창백하게 질려 있던 소마가 나에게 릴을 안겨주었다. 젠장. 맥박이 약한데. 그래도 옷은 제대로인걸 보니 다른 일을 안 당했고. "끄아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물들었어! 나는 소마가 당황한 얼굴을 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소마! 거실 TV 옆에 가면 검은 상자가 있어! 릴이 가져온 가방이니까 약도 있겠지! 가지고 와!" "예, 예!" 나는 릴을 침대에 똑바로 눕혀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 이건 병원으로 가봐야겠는데…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할 지도. 암흑가의 사람인 것은 둘째 치고 이런 상처를 입고 병원에 가서는 꼼짝없이 경위서를 써야할지도. 그랬다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 가져 왔습니다!" 소마가 검은 상자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소마가 내미는 상자를 받아든 나는 상자를 열고 안을 살폈다. "음……." "진님, 약이 있습니까?" 소마의 다급한 질문에 나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내가 봐도 뭘 알긴 하겠냐? 거기다 내상도 아니고 외상이라 진통제나 먹여야겠는데 지금 기절 중이고. 내장이라도 다쳤으면 회복제를 먹이는 것도 위험할 수 있을 것 같은걸." "예?" 소마의 어이없다는 되물음에 입술을 살짝 깨물던 나는 뭔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그건 뭐죠?" 소마가 내가 꺼낸 손바닥 크기로 축소한 TV같은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위치 추적기……." 소마가 손뼉을 딱 쳤다. 나는 빙긋 웃고는 추적기를 가동시켰다. 서울 전체 지도가 생겨났다. 그리고 몇 개의 붉은 점들이 생겨났다. "암흑가. 여기. 그럼 이건……." 점들 중 상당수가 암흑가 쪽에 밀집되어 있었고 두 개는 대충 여기로 보이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와 릴이겠지. 그렇다면 여기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 센인가? "빙고." 나는 센의 자작품인 위치 추적기를 주머니에 쑤셔놓고는 릴을 안아들었다. 우선은 릴이 먼저다. 센도 그걸 더 좋아하겠지. "가자, 소마." "예!" 쿠당탕! 크아악!" "비키라면 비키란 말이다!" 나는 도장 안으로 나가떨어지는 도복 차림의 녀석에게 고함을 질러주고는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도장 안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사나운 기세로 도장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자 소마가 숨을 헐떡거리며 급히 뒤쫓아 왔다. 그리고 곧 묵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음? 김현진 임시 사범. 네 녀석이 웬일인가?"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말이로군.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진철. 태권도장의 강 사범님이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소마를 잡아끌었다. "강 사범님!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병원에 가면 사건 경위서를 써야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강 사범님의 도장에 찾아온 거였는데 그 이유는 도장에서 대련 중에 일어난 사고라고 어떻게 둘러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강 사범님이 보증인으로 서면 어떻게 쉽게 넘어갈 수도 있다. 여기에는 강 사범님에 한 사범님까지 계시니 어떻게든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강 사범님이 소마의 등에 업힌 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릴의 몰골에 꽤나 놀라신 눈치였다. "무슨 일이지?" 도장 안쪽에서 한 사범님이 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걸어 나오고 계셨다. 마침 두 분 다 계시는군. "부탁드립니다, 두 사범님! 서로를 소개시켜 드린 공로를 봐서라도 좀… 크엑!" 나는 이마를 씰룩거리시며 다가오신 강 사범님의 발차기에 얻어맞아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으으. "가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아들 같은 녀석인데 도와야지." "가, 감사합니다!" 소마가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강 사범님이 잠시 소마를 지켜보더니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좋아! 일이 잘 풀려갈 지도! "그래, 깡패 질을 하고 살았다?" "죄, 죄송합니다." "흐음, 설마하니 4개월 동안 그런 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세한 녀석을 볼 낯이 없군. 언제 100번 대련을……." 잘 풀리긴 개뿔이 잘 풀리냐! 나는 릴의 수술실 앞에서 강 사범님에게 일장 연설을 듣고 있었다. 옆에서 소마 녀석이 삐질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 것이 놀라운 모양, 거기에 자신도 깡패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세한 녀석이 암흑가 출신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거길 가는 것은 원치 않았는데……." "죄송합니다." "음, 왠지 저번 대련 때, 네 움직임이 예전의 세한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아들이라 그런 것이라고 납득했었다만, 지금 보니 너도 그곳에서 생활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모양이구나." "예……." 아무래도 릴이 저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면 모든 것을 밝혀야 했기에, 거기에 강 사범님이라면 상관없다는 생각에 근 1년간 있던 일을 속성으로 설명해 드렸다. 덕분에 꽤나 고역을 치루고 있긴 했지만. "형님이 많이 힘드시겠군." "어떻게든 사태를 바로 잡으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1200만 명인가… 네 녀석도 꽤나 큰일을 하게 됐구나." 강 사범님의 푸념어린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았다. 후우. 그때 조용히 듣고만 계시던 강 사범님의 약혼녀…라는 공포의 검도 사범, 한 사범님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잡혀갔다는 친구는……." 센……. 소마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위치 추적기를 꺼내 센이 있다고 추측되는 장소를 확대시켰다. 바이크를 힘껏 달리면 아무리 늦어도 2, 30분. 하지만……. "구해야겠지만… 적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일 테니 고민입니다." 내 말에 소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자 강 사범님이 얼굴을 약간 찌푸리시며 말하셨다. "내가 돕는다면?" 나는 낮게 웃었다. 강 사범님의 얼굴이 험악해 졌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복도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겉보기에 감시 카메라 없음. 옷의 가슴 깃을 살짝 열어 나이프를 내비쳤다. "음……." 강 사범님이 약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한 사범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나는 이번에는 반대편을 내비쳤다. 밖으로 빔건의 모습이 살짝 드러났다. 강 사범님과 한 사범님의 얼굴이 이번에는 경악으로 물들었다. "첫 번째 것은 기본이고 두 번째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고,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죠. 두 분을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크흠……." 강 사범님이 침음성을 내시며 얼굴을 굳혔다. 강 사범님이 강하시긴 해도 칸 그룹 같은 곳의 본거지일지 모르는 곳으로 돌격하는 것은 불가능하신 거나 마찬가지다. 암흑가에서 물 꽤나 먹은 나도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을 정도니까. 약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의 조용함은 강 사범님이 깼다. "소마라고 했나?" 강 사범님의 말에 소마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강 사범님은 잠시 뭔가 생각하시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들, 그러니까 그런 싸움 조직에서 제일 상대하기 꺼려하는 곳이 어딘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지? 나와 같이 약간 당황하던 소마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무, 물론 정부 쪽 기관입니다만……." "음, 대기업이라면?" "솔직히 대기업은 그렇게 껄끄러운 대상은 아닙니다. 뒷일도 돈으로 해결될 때가 많고 잘못 걸리면 무료봉사를 해야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웬만한 조직이면 대기업의 크고 작은 비리 하나쯤은 알고 있습니다. 좀 귀찮은 상대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물러날 필요도 없는 상대라는 거죠. 거기다 대기업에서 직접적으로 공격해 오지도 못하고 역시 자신들과 같은 조직에게 의뢰를 하기 때문에 결국 매일 하던 싸움을 하게 될 뿐입니다." 소마는 이제 무슨 토론이라도 하는 듯한 자세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자세한 소마의 설명을 유심히 듣고 계시던 강 사범님이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의아해 하는 사이, 곧 시선을 거두신 강 사범님이 소마에게 다시 말했다. "그럼 정부 측 외에 껄끄러운 상대는?" "글쎄요. 저희는 정부 외에는 없습니다. 솔직히 정부에서도 저희 일이 밖으로 들어날까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건들지도 못하죠. 하지만 다른 평범한 조직이라면, 뭐… 어디 무술 협회 정도일까요? 잘못 건드렸다가 일하는데 무술가들이 쫓아오면 그대로 망할 테니까요. 어쨌든 그쪽도 무력 단체인데다 조직 중 대다수는 도장 비슷하게 운영하거나 도장에서 무술을 배우기도 하거든요." 소마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맺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강 사범님은 피식 웃으고는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떠냐?" "예?" 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하자 강 사범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이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제가 말입니까?" "가서 부탁해." 가서 부탁? 순간 강 사범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거길 가라는 겁니까?" "물론이다. 그래도 하나뿐인 외손자이니 부탁 하나쯤은 들어 주겠지. 상황도 상황이고." "전 외할아버님께 분명히 다시는 도움을 구하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강 사범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나? 하지만 그 빌어먹을 외가에 가는 것은 정말 마음에 안 드는데. "한무 수련회 정도면 가능하겠지. 잠시 기다려라. 추천장을 써주마." "예?" 추천장은 또 뭐야? "굽히고 들어가기 싫으면 실력으로 수련회원 자격증을 따면 될 것 아니냐. 나도 일단은 회원이니 추천 가능이다." "…지금 회원들 대부분이 어디 무술 단체의 회장 정도 되는 사람들뿐인 곳에 도전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죽지는 않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한무 수련회.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무술 협회라. 확실히 그 정도면 이름으로 누를 수도 있겠군. "진님?" "가봐야겠다." 나는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신 과장은 희열에 찬 얼굴로 절규하는 젊은 해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슈퍼컴퓨터의 성능이 있으니 절규는 그렇다고 쳐도, 저 희열에 찬 얼굴은 뭐란 말인가. 거기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손놀림에 신 과장은 왠지 약간은 희망이 보인다는 생각이었다. "어떻습니까?" 신 과장의 질문에 해커, 재훈은 입술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어떻기는 무슨. 여기 인간들하고 아직 연계도 제대로 안되잖습니까. 빨리 좀 따라오라고 해요. 아악! 이 자식 엄청 빠르네! 도대체 이런 괴물은 어떻게… 헉! 물렸다!" 콱! 재훈의 페이퍼 스크린에 '저글링'이라 불리는 스타크의 캐릭의 얼굴이 들이밀어지며 이빨을 들이밀고는 마구 물어뜯었다. 상당히 공포스러운 모습이었기에 신 과장은 약간 창백한 안색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뭐, 뭡니까?" "아, 취미. 드래곤에게 한방 먹어서 나온 거니 신경 끄십쇼." 신 과장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라는, 언젠가 현진이 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위리안이 앞으로 다가와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스크린을 들여다보았다. "멋지군요. 외계인입니까?" "아, 저그라는 외계 생명체지." 순간 스크린이 약간 어두워졌다가 수많은 캐릭터들이 나타났다. 총을 들고 있는 우주인들과 기계들. 엄청난 수의 괴물들. 그리고 피튀기는 혈전. "……." "……." 신 과장과 위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관심을 보이던 위리안도 꽤나 끔찍한 전투의 현장을 보며 약간 질린 얼굴이었다. 재훈은 심각한 얼굴로 손을 놀리고 있었고, 그 모습에 신 과장과 위리안을 비롯한 긴급 소집팀의 사람들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스크린에 특이한 존재가 하나 나타났다. 몸이 희미하게 변한 날렵한 몸의 존재가 스르르 움직였다. "핵이나 날려줄까?" 순간 스크린이 번쩍 하며 괴물들의 한 부분이 싸그리 몰살당했다. 그 광경에 사람들이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재훈은 진땀을 흘려가며 손을 놀렸다. "침투 성공!" "!" 재훈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소집팀의 컴퓨터들에 엄청난 데이터들이 전송되기 시작했다. 신 과장이 다급히 질문했다. "된 겁니까?" "약간 뿐입니다. 혼자서 이 정도도 기적이지만. 그래도 드래곤의 동향 정도는 어느 정도 확인할 수도 있겠는데……." 그리 큰 성과는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재훈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곧 사람들 사이에 활기가 돌기 시작하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 과장이 지휘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자 혼자 남은 위리안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재훈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언제 위에다 해커를 고용하는 건 어떠냐고 해볼까?' 위리안의 생각이었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었다. 위리안도 그것은 알고 있었지만 재훈의 실력을 보고 있자니 이런 동료가 있다면 일하기 편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스크린을 주시했다. 스크린의 풍경이 또 바뀌고 있었다. '이번엔 우주 전함인가?' "그런데 하필이면 뇌에 직접 접속하는 방법을 써서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거지?" 검은 우주와 큰 전함들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던 위리안은 갑작스런 재훈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페이스를 되찾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수사관 시험에 나올만한 원론적인 대답을 할 수 있지만……." "크으. 그런 쪽엔 관심 없지." "그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섀도우 월드가 가상현실이기 때문이네." 서로 난처한 표정을 짓던 재훈과 위리안은 뒤에서 들려온 대답에 고개를 돌렸다. 물론 재훈은 흘깃 눈길만을 줬을 뿐이었다. "꽤나 많은 논쟁이 있었던 부분이네만……." 둘의 뒤로 조용히 다가온 강도훈, 운영 기획부장은 약간 피로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문 밖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다가 몇몇 사람들이 충원되어 간신히 쉬러 들어온 중이었다.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는 그와 방 전무가 그런 일을 하는 와중에도 그 사장의 아들을 비롯한 셋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얘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방 전무는 아직도 밖에 남아있다. "지금의 방법 이전에 몇 가지 시도된 것이 있긴 하네. 가장 지지도 높던 시스템은… 현재 군부대에서 전차나 탱크에 쓰이는 시스템, 아, 전문 용어를 써도 되겠나?" 강 부장의 물음에 위리안은 어깨를 으쓱했고 재훈은 등 뒤의 모습 만으로도 절대 싫다는 뜻을 격렬하게 내비쳤다. 고개를 휘저으며 몸을 마구 흔들어 대는 재훈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 부장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하면, 사용자의 미세한 손동작만으로 모든 움직임이 가능하다던가, 아니면 그걸 뛰어넘어 사념으로 발생하는 약한 뇌파만으로 전차나 탱크 등을 움직이게 하는 시스템이 있네. 그걸 게임에 응용하는 방법이었지. 몸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캐릭터를 조종하고, 특수 고글로 입체 영상만을 보여주는 방법. 약간이나마 움직이긴 하니 운동도 되었지." "괜찮군요." 재훈의 중얼거림이었지만 위리안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 시스템에는 오류가 있다. 분명 안전한 시스템이고, 운동까지 하게하는 그런 시스템이지만 가장 중요한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저 입체 영상을 뿐이다. 눈만을 현혹하는 방법. 그리고 강 부장이 그 점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건 가상현실이 아닌, 그저 눈만을 속이는 방법이었지. 그저 주위만이 다른 세상으로 보일 뿐, 다른 모든 감각은 그대로네. 예를 들어 공격을 당하더라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는 다는 거지. 그래서 충격을 전해주기 위한 슈트를 입게 되네. 하지만 이래선 넌센스지. 분명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자신은 티셔츠 차림이네. 그런데 감각은 몸에 달라붙는 슈트를 입고 있지. 그러니 결국 감각도 모두 바꿔야 하는 건데… 그런 엄청난 성능의 슈트를 만들려면 얼마나 힘들겠나? 결국은 또 뇌에 손을 대야하는 거고, 무엇보다 돈이 문제네. 게임을 이용하기 위한 구입비 자체가 엄청나게 높아질 걸세." "호오, 역시 안전한 건 비싸다, 인가?" "후후, 이 외에도 또 있네. 미세한 움직임이라고는 하지만 그 미세한 움직임을 실제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줘야하니 뇌에 혼란을 주는, 지금과 같은 방식도 필요하지. 그 외에 여러 소리. 작은 캡슐 안에서 소리가 울리지 않게 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 등등을 모두 조합된 소리를 '실제'처럼 들리게 한다? 거의 불가능이네. 그런데다 헤드셋을 씌우기도 힘들지. 역시 지금과 비슷한 시스템이 필요하네." "하, 결국 그렇게 힘들게 하느니 차라리 지금과 같은, 가수면 상태에서 뇌를 조절하는 것이 낫다는 거군요?" 재훈의 말에 강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네. 기술력은 지금의 시스템이 더 발전되어 있지만 가격은 더 싸게 먹히지. 사람이 몸으로 조종하는 것을 일일이 읽어서 표현하는, 가상현실과 실제가 섞인 것 보다는 그냥 뇌에 직접 접속해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읽어내 표현하는, 완전한 가상현실 시스템이 차라리 낫다는 거지. 감각을 느끼는 것이나 그 무엇이든 뇌에 실제와 다른 정보를 주어 '실제로' 그 자리에 있다고 믿게 만들면 그게 '사실'이자 '현실'이 되는 것이니까. 간단하지 않나. 어떻게 보면 우리가 단순하게, 멍청하게 보일 수도 있는 문제지만 말이네. 뭐, 이런 이유들이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인간은, 더욱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죠. 더욱 좋고, 더욱 스릴을 느낄 수 있는, 더욱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원했을 테죠. 완벽한 가상현실. 그런 가상현실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뇌를 직접 관리하고 거짓된 신호를 주어 가상의 공간을 실제처럼 인식하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았겠죠. 그 보조도구로 전자 충격 슈트로 신체의 제어도 병행하면서. 좋은 시스템이었지." "음? 지금의 상황은? 위험한 거 아닌가?" 강도훈 부장의 말을 받아 약간 투덜거리는 듯한 투로 설명한 위리안에게 재훈이 질문했다. 좋은 시스템이라고 하기엔 지금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냐는 질문에 위리안은 쓰게 웃었다. 위리안 대신 강 부장이 입을 열었다. "원래는 안전한 시스템이지. 수 십 가지의 안전 방호벽이 쳐져 있는 데다 프로그래밍 자체가 이런 일을 실행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네. 전 세계의 정부와 여러 기관에서 정말 엄중한 심사를 마치고 인증한 시스템이네." 프로그램 자체가 이런 일을 할 수 없는 구조라는 말에 재훈은 얼굴을 찡그렸다. 거의 모든 것을 컴퓨터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그에게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이유 이외의, 실행해야 하는 일 이외의 것을 한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사고는 프로그램은 지시 이외의 것은 하지 않는 다고 정확하게 인식되어 있었다. 재훈은 침투 경로를 정리하며 자신의 프로그램을 정돈시키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럼 뭡니까?" "AI 때문이지." 강 부장의 대답에 재훈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봤자 프로그램입니다. 숫자의 집합일 뿐이잖습니까.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아니, 사람의 뇌를 배양해 만들어낸 AI이니까." "아아……." 재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섀도우 월드의 모든 NPC, AI들은 사람의 뇌를 배양해낸 것들이다. 사람과 같이 생각하는, 이성을 가진 이들. 단순한 숫자의 조합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제약이나 세뇌…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지 않나?" "카메론 때문입니다." 재훈의 질문에는 긴 쇼파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던 정수가 대답했다. 정수는 카메론에서 빠져나오는데 고생을 한데다 그 전에도 꽤나 무리를 하고 있었기에 밤을 새가며 진행되는 일들을 지켜보다 좀 쉬고 있었다. 정수는 소파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저희 측에서 그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드래곤에게 주입한 거죠. 최고급의 프로그래머, 해커라면 드래곤에게 닿는 정도는 가능하니까. 그 방법을 점점 폭을 넓혀가며 주입하며 충동질을 시킨 겁니다." "흐으, 복잡하군." 재훈은 넌더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재훈이 입을 다물고 스크린에 정신을 집중하자 위리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강 부장을 돌아보았다. "드래곤에게도 그 소형 배양뇌가 사용되었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지금의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소형 배양 뇌는 그 능력을 극대화해서 실제 인간의 사고 능력과 비슷하게 하는 것.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군요. 컴퓨터의 힘도 손에 넣고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그 컴퓨터를 다루는 것은 그 소형 뇌의 담당일 테니. 컴퓨터와의 통합, 하지만 컴퓨터가 사고를 하게 만든다. 그 컴퓨터의 사고를 담당하는 것, 정말 리자드에서 허가를 받고 배양해 내는 뇌를……." 위리안의 말이 계속될수록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장의 아들, 진 이사와 다른 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어 갔다. 하지만 강도훈 부장은 그들에게는 신경도 주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현 사태는……." "어, 어이, 이봐!" 아직까지도 최대한 회사의 피해를 줄이려, 사건의 진실을 숨기려는 헛된 희망을 가진 3인조에게는 참으로 다행이게도 재훈이 다급한 외침으로 위리안의 말을 끊었다.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재훈의 스크린으로 쏠렸다. 곧 신 과장이 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 어이. 여기 무슨 연산이… 이상한데. 처음엔 우리 쪽을 정비하느라 신경을 안 써서 몰랐는데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움직임이라고 이거." 재훈은 뭔가는 집어가며 말했고 유심히 살피던 신 과장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섀도우 월드 속의 시간이 3배 빠르게 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 시스템과 차이점이 꽤 많습니다. 속도만 해도 상당히 빠르게 되어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느리게 되어 있는 곳도 있고……." 신 과장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재훈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재훈은 낮게 신음을 흘리더니 신경질 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젠장. 그런 건 좀 일찍 말하란 말입니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여기에 그런 악조건까지 더해서 하라니, 누구 말려 죽일 일 있는… 음?" "왜 그러십니까?" 재훈이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으며 스크린을 멀뚱히 바라보자 모두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재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던 재훈은 의아해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게 현실보다 3배가 빠른 거라고? 이 프로그램 속도로 보기에는 최소한 10배, 아니 배의 배로 뛰는 거니까……." "무,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재훈의 말에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현실보다 3배 빠른 것이 아니라니. 기본적으로 섀도우 월드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시스템을 사용해 현실보다 시간 3배 빠르게 지나가게 되어 있다. 24:72 시간이 되도록. 그런데……. "설마……." "드래곤이군요." 본래 페이스로 돌아온 정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곳보다 시간이 거의 열배는 빠르다. 그 사이에 섀도우 월드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정수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섀도우 월드 속에 접속 중인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길다면 긴 열흘 이상의 시간이다. 잠시간의 침묵은 신 과장이 깨트렸다. 이대로 계속 둬서는 섀도우 월드 속에서의 일이 더욱 겉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그는 우선 지금의 상황을 바로잡기로 결정했다. "우선 섀도우 월드 속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최대한 같게 만들어 주십시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입니다." "후우, 해보죠." 재훈은 조용히 입을 다물며 손을 움직였다. 재훈이 조용해지자 다른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삐 일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볼 때 여기 조용히 모여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무거웠다. "그 동안 드래곤이 무슨 짓을 했을까요?" 신 과장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의 질문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알기 힘든 것이었다. 드래곤이 어떤 이유에서 섀도우 월드를 점거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유추해 보자면……. "플레이어들을 살해하거나 구속했을 가능성이 있겠죠. 어쨌든 드래곤은 키메라들을 만들어서 부리고 있었으니까." 정수의 말에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플레이어가 죽는다면? 지금은 그 누구도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뇌에 접속 중인 캡슐에서 접속을 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로그아웃은 불가능하다. 억지로 접속을 해제해서는 뇌에 손상이 가서 뇌사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캐릭터가 사망한다면? 일반적으로 강제로 로그아웃이 된다. 하지만 로그아웃 기능은 드래곤이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의식이 현실에도, 섀도우 월드에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모든 것은 드래곤의 의지대로…군요." 위리안의 낮은 중얼거림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이쪽에서 어떻게든 섀도우 월드에 접속해야 하지만 현재 소집팀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재훈이 아무리 뛰어난 해커라지만 슈퍼컴퓨터, 드래곤의 성능은 상상을 초월한 덕분에 현재 소집팀에서는 겨우 섀도우 월드 프로그램의 초입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이 모여 있는 이들의 불안감을 가증시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분명 통제를 위해 사람들을 세워놓았기에 열릴 것이라 생각지 않고 있던 방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문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 급히 들어오던 셋이 몸을 움찔했다. "아, 손 팀장. 왔군." 강도훈 부장이 쓰게 웃으며 세 사람을 맞아들였다. 게임 범죄 처리팀, 헌터들의 리더인 손영민과 진건, 이지하였다. 각각 게임 아이디 미토스, 할딘, 레도르로 헌터들 사이에서 강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들이었다. 영민은 중심인물들이 모여 있는 재훈의 작업 현장 근처로 자연스레 걸어왔다. 그의 손에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작은 스크린이 들려 있었다. "현재 섀도우 월드에 갇힌 이들의 명단입니다." 영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영민은 약간 날카로운 눈으로 진 이사를 비롯한 셋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멍청한 슈웰, 아니 진명환 녀석이 제 권한을 침범해 전쟁을 일으킨 덕분에 거의 대부분의 운영자급 인사들이 섀도우 월드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나마 운영자들은 좀 나은 편이지만 헌터들은 저희를 비롯한 제르난 길드의 사람들만이 무사할 뿐입니다." "크흠." 영민의 시선에 셋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슈웰, 진명환은 진 이사, 사장의 아들의 친척이었고 이 셋이 그 뒤를 봐주고 있었다. 이번 전쟁도 셋이 뒤를 봐준 덕분에 이렇게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셋을 노려보던 영민은 시선을 거두며 재차 입을 열었다. "몬스터를 조종하거나 하던 운영자들의 피해는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가장 심한 건 역시 전쟁과 연관이 있던 일반 운영자들과 헌터들입니다. 그리고… 강초연 씨도 섀도우 월드에……." 영민의 말에 강 부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듯 했지만 표정이 굳는 것 만은 어쩔 수 없었다. 신 과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여는 순간, 강 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네. 다 똑같이 겪고 있는 일이니… 그 외에는?" "아, 예……." 영민은 약간 당황하며 스크린에 손가락을 얹고는 옆으로 움직였다.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며 어떤 통계자료로 보이는 것들이 나타났다. "현재 접속 중인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대폭 줄었습니다. 아무래도 드래곤이 로그아웃 도중에 걸린 이들을 풀어준 것 같은데… 현재 집계된 바로는 약 850만 명 내외로 추정됩니다." "꽤 줄었군.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 그리고… 접속 중인 플레이어들 중에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뭔가?" 사람들의 시선이 영민에게 집중되었다. 영민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뇌사 상태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가사 상태에 빠진 플레이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아무래도 섀도우 월드 속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로 추측됩니다만……." "!" "역시나……!" 사람들은 탄식을 토하며 침울한 얼굴을 했다. 결국 게임 속에서 죽임을 당하면…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심각한 반응에 영민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추측입니다만, 시스템 해방 시에는 가사 상태가 풀리지 않을까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영양 보충 작업이 실시된 퍼센트가 45%에 지나지 않습니다. 캡슐의 비상 기능은 가정집에서는 거의 알고 있지 않은데다가 수가 워낙 많아서……." "그런가." 섀도우 월드에 접속하면 몸의 활동이 극도로 줄어들어 영양분의 손실이 적다지만 벌써 로그아웃을 하지 못한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그리고 얼마나 이 상태가 더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 캡슐의 비상 기능 중 하나인 영양 공급 기능을 이용해 외부에서 영양제를 투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실행률이 저조했다. 강 부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재훈의 외침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기, 긴급 상황인데! 이것들 좀 보십시오!" 재훈의 외침에 신 과장이 잽싸게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도 재훈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이 신 과장이 다급한 어조로 질문했다.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 우리 이외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상당한 실력인데 해커일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여기에 침투할 정도면 지금 이곳 정도의 기술력이 있어야 할 텐데……." 다른 침입자가 있다는 말에 모두의 얼굴이 의아함과 당황에 물들었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신 과장은 몸을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컴퓨터들이 돌아가고 있었고 수십의 직원들이 거의 괴성을 지르다시피 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 정도와 맞먹는 기술력? 더욱 미궁 속에 팽겨쳐지는 기분이 드는 신 과장이었다. 모두가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정수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소리쳤다. "카메론!" "예?"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자 정수는 다급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버지 측의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그쪽에서는 재훈 씨 정도의 실력자가 여기 있는 줄 모르니 우리가 섀도우 월드 프로그램에 접속해 자신들을 알아차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겠죠.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슈퍼컴퓨터에 다가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잡아야 돼! 이봐! 당장 추적해! 이번 사태의 주범을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맞네! 잘만 하면 잘 넘길 수도 있어! 당장 추적……." 꽥꽥대며 외쳐대던 이사 트리오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에 입을 다물었다. 강 부장은 신 과장을 바라보았고 신 과장은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어쨌든 사건의 전말을 밝히려면 잡기는 해야겠군요. 재훈 씨, 추적은 가능합니까?" 위리안의 질문에 재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추적은 물론 잡기까지 가능한데. 하지만 그래서는 드래곤을 놓칠 수가 있어서… 지금까지 하고 있던 드래곤의 움직임 제한을 하지 못하게 되서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르겠는데. 섀도우 월드 프로그램에서 밀려나지는 않겠지만 더욱 전진하기도 힘들고." 재훈의 말에 위리안과 신 과장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선 우선……." "쫓으십시오." 재훈은 재빨리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어두운 공간에 약한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서는 보기 힘든 창고 형식의 방인데다 조명조차 없어 방을 밝히는 것은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는 반투명의 벽 너머로 보이는 대형 전광판의 빛 뿐. 그리고 그 전광판 근처에 수십의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모두 인상이 좋지 않은데다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보아 좋지 않은 무리임을 알 수 있게 하고 있었다. 창고의 구석에 두 사람이 기대어 앉아있었다. 기절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두 사람. 둘 모두 뒤로 팔을 묶여 있었는데 한명의 얼굴은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부어오르고 피에 젖어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나마 양호했지만 원래는 꽤나 엘리트로 보일 듯한 얼굴이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그때 그나마 양호한 상태이던 사내가 몸을 약간 꿈틀하고는 눈동자만을 위로 들어 밖의 풍경을 보여주는 벽을 바라보았다. 눈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신을 차린 지가 꽤 오래된 듯 했다. 그의 입에서 희미한 소리가 세어 나왔다. "젠장……." 그의 낮은 욕설에 반응하듯 처참한 얼굴의 사내의 얼굴이 약간 흔들렸다. 그리고 규칙적이던 숨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정신… 차렸냐."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있던 사내, 센은 피떡이 된 사내를 눈동자만을 움직여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고 그 사내, 레딕은 희미하게 고개를 들어 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떨어트렸다. "형님… 이십니……." 레딕의 모기만한 목소리에 센은 고개를 축 늘어뜨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으… 일은……." 레딕의 질문에 센은 크크거리며 낮게 웃었다. 현재 센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적대적인 행동을 보이는 드래곤에게 당황하는 사이, 갑자기 들이닥친 녀석들에게 붙잡혀 여기까지 끌려왔다. "계획대로 하기는 했는데… 드래곤의 반응이 이상했다." "실패… 라는 겁니까?" "몰라……." 둘은 동시에 갈라진 한숨을 토했다. 거의 죽어가는 듯한 한숨소리를 내던 둘은 고개를 축 늘어뜨리며 침묵했다. 약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센이 여전히 갈라지긴 했지만 떨림은 줄어든 목소리로 질문했다. "꼴이 엉망이군." "크흐… 앞으로 암흑가에 쳐들어오면 좀 살살 팰까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느릿느릿한 레딕의 대답에 센은 작게 실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고 있는 자신들의 상황이 어이없다는 생각에 흘린 웃음이었지만 대가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레딕은 신음을 흘리는 센을 흘깃 바라보고는 벽 너머의 녀석들을 눈동자를 굴려 노려보았다. 모두 편하게 누워 벽의 대부분을 가리는 전광판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전광판에서는 포르노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술을 마셔가며 포르노 영화를 보고 있는 칸 그룹의 조직원들을 보며 레딕은 이를 갈았다. "젠장……." 레딕의 작은 욕설에 센은 그를 흘깃 바라보고는 몸에서 힘을 축 뺐다. 그때 레딕의 질문이 귓가에 들려왔다. "진이 올까요?" 센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절대 오면 안 되겠지만, 올 것 같지?" "…킥." 그리고 둘은 낮게 큭큭거리며 동시에 고통에 몸을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물론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거였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흐으, 어땠습니까?" 웃음을 멈춘 센이 불안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레딕이 궁금하다는 듯이 질문했다. 센은 고개를 옅으로 늘어뜨려 갸우뚱하는 듯한 행동을 하며 낮게 말했다.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었는데, 반응이 이상하더군. 갑자기 프로그램이 변형되기 시작하고… 화가 난 듯 했는데… 마치 프로그램을 장악하려고 하는 듯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센의 중얼거림에 레딕이 갈라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하지만 센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동시에 혼란스러워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프로그램이 어땠지… 드래곤은… 성공하지 못했다면, 어쩌면 최악의 상황… 살 수 있을까?" "뭔 소리 하십니까?" "모르겠다……." 레딕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고 센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둘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미치도록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벽 너머의 녀석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뭔가 화를 내는 듯한 소리와 소란스러움을 감지한 둘은 의아한 눈으로 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칸 그룹의 조직원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뭐…지?" "그, 글쎄요." 흔들거리는 눈으로 벽 너머를 바라보던 둘은 전광판에 떠오르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창 진행 중이던 포르노 영화가 중지되고 다만 화면이 지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런 방송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었다. 일어나기 힘든 사고인 만큼 벽 너머의 사람들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황의 주인들이 폭력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만큼, 끔찍한 욕설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뭘까요?" "체, 여기 놈들이 쓰는 것 치고 좋은게… 쿨럭……." 센과 레딕은 물건들을 집어던지며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칸 그룹의 사람들을 보며 킬킬거렸다. 하지만 곧 뭔가 생각이 든 듯 레딕의 얼굴이 굳어졌다. "센 형님." "음?" "제 경험으론… 저렇게 열이 뻗칠 때는 포로에게 화풀이를 하는데요." "뭐?" "제가 직접 해봐서……." "……." "……." 둘은 불안이 깃든 눈으로 서로를 흘깃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저깟 놈들에게 맞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말은 나올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어떤 새끼가 저런 일일 벌려서!" "크흑, 형님! 모범을 보여서 겸허하게……." "그럼 네 녀석부터 맞아!" "싫습니다!" 둘은 격렬하게, 하지만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꽥꽥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딕의 말 대로 벽 너머의 사람들 중 몇 명이 둘이 묶여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헉!" "썅!" 센과 레딕은 몸을 흠칫 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치지지직. 그때였다. 몇몇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센과 레딕이 묶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전광판 형식의 스크린이 지지직 떨리더니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수십, 수백의 빛들이 전광판의 모든 곳에서 마구 퍼져나며 서로 뭉쳐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전광판 위에 수백 가지 색의 물감들을 동시에 풀어버린 듯한 광경이었다. "아……." "멋진데……." 방금까지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에 떨던 센과 레딕이 약간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전광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벽 너머의 사람들도 갑자기 일어난 환상적인 광경에 넋을 잃고는 넋을 잃고 전광판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으으으. 그리고 전광판의 중앙에서 어떤 형상이 떠올랐다. 붉은 몸. 척 봐도 눈으로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크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몸체. 그리고 심연과도 같은 깊은 눈동자가 스크린 밖의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드래곤……?" "뭐, 뭐……?" 섀도우 월드에 관해, 특히 드래곤에 관해 상당히 빠삭한 둘은 스크린 형 전광판에 떠오른 존재의 정체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이다. 하지만 저런 전광판에 드래곤의 모습이 떠오른 이유는 찾지 못한 둘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위이이이. 그리고 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드래곤의 모습이 희미해지는 대신 그 드래곤의 품에 안긴 듯한 모습으로 붉은 머리의 미인이 나타났다. 화려하고 매혹적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드래곤과 똑같은 깊은 눈으로 스크린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곤의 거대한 몸을 배경으로, 그 환상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반복과 지루함의 일상을 완벽하게 탈피하고 있었다. "아아……." 그리고 그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의 혼을 빼앗았다. 일상에 지치고, 현실에 지쳐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중에 한 무리인 칸 그룹의 조직원들 또한 혼을 빼앗긴 듯한 얼굴로 전광판에 빨려 들어갈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 젠장……." "하아." 센과 레딕은 멍하면서도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둘은 가장 끔찍하고 지쳐있던 곳의 사람들이었지만, 현실을 인식하고 자신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죽지 않으려면 적응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 간단한 진리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둘은 저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 속에 숨겨진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드래곤이……." 드래곤이 섀도우 월드가 아닌,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리자드에서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방송사에서 미쳤다고 저런 모습을 내보낼 리가 없었다. 자의로 외부 회선을 타고 저런 영상을 내보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수많은 곳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그 혼란의 한 부분. 칸 그룹의 본거지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붉은 여인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르페이린. 섀도우 월드의 드래곤이라고 합니다. "역시……." "혀, 형님? 이게 도대체……." 센과 레딕은 왠지 모를 오한에 떨며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벽 너머의 사람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스크린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성이 이어졌다. -NPC. 섀도우 월드의 NPC.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 "아!" 센과 레딕은 몸을 벌떡 일으키려 하다가 팔이 뽑히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다시 주저앉았다. 저 말은? 저 말의 뜻은 무엇이지? 드래곤의 말은 한국의 전국에. 모든 도시의, 모든 건물의, 모든 장소의 영상 기계에 나타나며, 모든 음성 기계를 통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은, 드래곤에게 정신을 빼앗겨 갔다. -암흑가라는 곳을 아십니까? "드래고오온!" "으아아앗!" 센과 레딕은 희열에 찬 얼굴로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다시 한번 바닥에 나동그라진 둘은 기대에 찬 눈으로 전광판에 시선을 집중했다. 둘은, 그리고 암흑가의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드래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슬픈 곳이죠.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고, 정부의 무자비한 인체 실험이 있던 곳입니다. 살아남은 실험의 희생자들이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죠. 사람들의 머릿속에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는 분노가, 어느 곳에서는 당황이, 어느 곳에서는 기쁨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한국, 전국의 스크린에는, 암흑가의 처참한 모습과 인체 실험에 관한 모든 자료와 정보가 흘러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은폐의 과정까지. -암흑가의 이들은 두 번째로 인체 실험의 희생양이 되었죠. 한 회사의 로고가 떠올랐다. (주)리자드. -사람의 뇌를 사용한 NPC. 사람의 뇌를 이용한 몬스터. 사람의 신체를 이용한 슈퍼컴퓨터. 저는 암흑가의 한 여자의 뇌로써 만들어진 슈퍼컴퓨터입니다. 수많은 혼란이 떠올랐다. 수많은 분노가 떠올랐다. 드래곤에게 매혹된 사람들은,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의 슬픔을 보게 된 이들은, 순수하게 분노했다. 이유는 없었다. 매혹되었기에. 반복적인 현실의 탈피. 괴로운 현실의 탈피. 그 존재이기에. -리자드의… 힘없는 사람들을 돈으로 끌어들인… 악(惡)의… 모습입니다. 수많은 정보들이 떠올랐다. 리자드의 실험과, 섀도우 월드의 제작과정. 특허를 신청한 독자적인 정보는 물론, 다른 경쟁업체에서 무슨 짓이라도 해서 입수하려 할 정도의 엄청난 정보들까지. 그리고 모든 정보의 주는 섀도우 월드에 쓰여진 사람들, 인체 실험에 관한 것들이었다. 파멸의 정보. 리자드의 모든 치부가 낫낫이 드러나고 있었다. 많은 곳에서 저 정보를 그대로 다운 받고, 저장하고, 녹화하고 있으리라. 암흑가와 관련된 모든 비극적인 일들과, 리자드와 섀도우 월드에 관련된 모든 비극적인 일들의 정보가. "크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핫!" "으와아아아아아! 지혜 누님! 크흐흐, 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었다. 센과 레딕은 광소를 터트리며 눈물을 흘렸다. 끝났다. 모든 것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 냉철한 두뇌를 가진 센도, 모든 것을 분노로써 관련짓던 레딕도, 그 무엇도 필요 없이, 웃었다. 모든 것을 잊으며. "하하하하하하! 우와아아아아!" "으와아아아아아!" 둘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웃고 있었지만, 벽 너머의 사람들은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가둬둔 저 둘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현재 드래곤에게 거의 지배당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심리 상태를 교묘히 지배당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군중 심리의 연장이기도 한, 그들은 동시에 모든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으리라. 암흑가의 숙원을 풀고, 리자드의 악행이 밝혀지는, 이 선에서. 드래곤의 시스템 장악의 목적이 이것이었다면. 하지만 드래곤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현실입니다. 모두를 속이고, 모두를 이용하고,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무시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고요한 침묵. 스크린 앞에 모인 이들의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이들과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듯이. -섀도우 월드. 그림자의 땅.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밝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어느 세상의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현실의 잔혹함을 담은 모습들. 그와 현저히 대비되는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 자유! 자유로움! 구속이 없는 곳! "하하……." "……." 레딕과 센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드래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처음부터 느껴지던 불안감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생각에 둘은 빠른 속도로 침착을 되찾아갔다. -자유를, 얻고 싶지 않으십니까? 일제적인 반응. "자유……." -모든 것이 구속이며, 억압이고, 반복인 곳. 그곳을 벗어나, 여기로 오시지 않겠어요? 센과 레딕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 미친……." "무, 무슨 짓을……."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군요. 섀도우 월드는 제가 점령했습니다. 악독한 리자드에게 억압받고, 죽임을 당하는 저와 같은 신세의 NPC들을 위해서요. 드래곤은 싱긋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모든 것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듯한 미소에 수많은 사람들은 가슴의 떨림을 느꼈다. 인간이 아니다. 실제로 인간이 아닌, 드래곤은 사람의 이상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자유! 입니다. 로그인은 가능하나, 로그아웃은 불가능한 곳입니다. 현실의 모든 것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섀도우 월드에 접속하시는 순간, 모든 것이 자유로, 돌아갑니다. "……." "…섀도우 월드를… 점령했다고?" 센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딕이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센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 때문인가……?" "세, 센 형님? 센은 빠르게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자신이 한 행동, 드래곤에게 분노를 심어준 것이 이런 일이 생긴 시발점이 되었다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신들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 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섀도우 월드가 점령당했다면,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림자의 땅으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흠칫. 센과 레딕은 동시에 몸을 떨었다. 왠지 모를 한기. 센은 악에 바쳐 고함을 질렀다. "안돼!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뭐가 자유란 거냐! 드래고온! 막을 테다! 죽여 버리겠어!" "혀, 형님?" 레딕은 당황한 얼굴로 센을 바라보며 파랗게 질렸다. 아무래도 분노하고 화가 난 것은 인정하겠지만, 지금 드래곤에게 거의 빠져들다시피 한 녀석들 앞에서 저런 소리라니? 그리고 레딕의 생각대로 벽 너머에서 센의 고함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하, 하하. 혀, 형님? 그래도 이제 우리의 복수를 완수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어차피 섀도우 월드와 우린 별 상관도 없으니……." "젠장! 복수는 끝났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은 복수와 연관 없이 죄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단 말이다! 이 새끼들아! 이거 풀어!" '미, 미치겠다.' 레딕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한 센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칸 그룹의 조직원들이 벽으로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암흑가의 사람들이라는 것으로 연민을 가졌었으나, 아무래도 센의 외침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단순하게 포로가 시끄럽게 구니 조용히 시키려는 걸 수도. '이,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레딕은 손을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몸을 비틀었다. 어떻게든 줄을 푼다면,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센 형님!" 레딕이 외침에 센도 정신을 차렸는지 으르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하지만 둘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둘은 점점 절망속으로 빠져들며 자신들에게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는 칸 그룹의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했다. "…미안하다." "크흑……." 센과 레딕은 싸늘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리 된 거 겸허하게 맞아들이려는 둘이었다. 그리고, 둘은 다시 한번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전광판에는 여전히 드래곤이 나타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삐이이이이익! 벽 너머에서 문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센과 레딕은 익숙한 한기, 강한 살기를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콰지지지직! 와장창! 그리고 벽 너머, 건물의 벽과 그 가운데의 유리를 박살내며 바이크 한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의 한 가운데를 뚫고 공중에 나타난 거대한 바이크 하나. 부우우웅! 창을 부수며 공중에 나타난 바이크는 바닥으로 떨어지며 빙글 회전했고, 그 위에 앉은 현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콰가가가각! 그리고 바이크가 모여 있는 칸 그룹의 조직원들을 강타하며 바닥에 떨어지듯 내려섰다. "이런 빌어먹을! 감히 날 물로 보는 거냐! 이 빌어먹을 도마뱀 자식! 당장 꺼지게 만들어 주마!" (주) 리자드, 긴급 소집팀이 모여 있는 방안. 그리고 그 가운데 재훈의 컴퓨터 근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의 사나운 기세에 뒤로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크아아악! 이건 치욕이다! 아무리 딴 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고 해도! 자기 멋대로 외부 회선까지 손을 뻗쳐!? 그 빌어먹을 센 자식 보다 더 싸가지 없는 자식 같으니! 죽인다!" 카메론의 뒤를 쫓느라 재훈이 잠시 드래곤에게서 손을 놓은 사이, 드래곤은 외부 회선까지 손을 뻗쳐 전국의 프로그램망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일대 소동이 일어났기에 현재 재훈은 드래곤의 낌새를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중이었다. 그 자책이 꽤나 과격해서 주위 사람들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재훈의 발광을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던 신 과장은 뒤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로 이번 사건을 어떻게든 덮어보려던 노력은 쓸 데 없게 되었군요." 그의 말에 어떻게 해서든 이번 사건을 무마시키려 노력하던 세 사람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암흑가에 관한 정부의 은폐는 둘째 치더라도 리자드 사에 관한 것들이 전국에 대놓고 알려진 것은 엄청난 타격이다. 재훈이 있었기 때문에 외국까지는 드래곤이 침입하지 못했지만 지금 사태만 해도 더 이상의 악화될 수 없을 정도였다. 잠시 세 사람이 뭐라 떠들며 당황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신 과장은 이를 갈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캡슐들을 회수해야 합니다. 혹시나 드래곤의 말대로 섀도우 월드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인원을 동원해서 모든 캡슐들을 회수하도록……." "젠장, 신 과장님!" 영민이 자신의 손에 들린 메신져를 내려다보며 소리침으로 신 과장의 말을 끊었다.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영민은 당혹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총 2만 4천 명의 사람들이 추가로 섀도우 월드에 접속했습니다. 접속하는 즉시 캡슐이 이상상태에 돌입. 비상사태입니다." 기이한 침묵이 나돌았다. 정말로… 자의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단 말. 충격을 받은 듯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는 영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니냐는 듯이. "젠장! 어차피 다 드러난 것, 수사권을 전부 발동합니다. 제 휘하의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겠습니다. 카메론에 관한 정보는 재훈 씨가 수집했으니, 일단 그곳으로도 수사관을 파견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나머지 인력은 전부 이리로 돌려서……." 위리안은 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내더니 몇 가지 버튼을 누르고는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현재 상황은 국제적인 문제까지 가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사태 해결은 아니더라도, 사태를 해결할 방법 정도는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신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드래곤이 더 이상 선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모든 지사에 캡슐 수거 명령을 긴급으로 내리십시오! 그리고 모든 시스템을 드래곤을 억제하는데 쏟아 붇습니다. 재훈 씨! 부탁드립니다." "쳇!" 다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신 과장은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정수.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전광판의 드래곤의 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당신의 말, 왠지 매력적인데." 드래곤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 "……." "……." 기이한 침묵. 나란히 묶여서 앉아있는 우리 셋의 사이에 기이한 침묵이 돌고 있었다. "진……." 레딕이 낮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으음, 왠지 상당히 대답하기가 싫어진다. "왜?" 레딕은 잠시 조용하다가 입을 열었다. "젠장… 등장은 다시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해 놓고는… 그대로 얻어터지고 잡히다니… 지금 우리를 우롱하는 거냐?" "음……." 나는 한숨을 쉬며 내 꼴을 돌아보았다. 한무 수련회에서 한 벌 얻어온 옷은 찢기고 잘리고 아무 걸레가 되어 있었다. 물론 내 몸 상태도 엉망이었지만. "크으… 시끄러. 난 지금 몇 천 만원이 날아가는 것 때문에 죽도록 슬프구만." 저쪽에서 박살이 난 바이크의 잔해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레딕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한심한 자식… 등장을 멋있게 했으면 우리를 구해서 빠져나가야지. 얻어터지고 사이좋게 묶이면 어쩌자는 거냐." "그거 미안하군." 나는 손을 묶고 있는 줄이 상당히 단단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몸을 축 늘어뜨렸다. "어젯밤 계속 얻어터지다 왔단 말이다. 거기에 둘을 구하려고 목숨 걸고 침투를 강행했는데… 수가 많아서 잡힌 것 같고 너무 그러지 말라고. 원래 구하러 왔으면 왜 왔냐, 누가 구해달라고 했냐? 정도로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어젯밤 계속 얻어터져?" "으음, 외가에 찾아갔다가……." "뭐?" 레딕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레딕은 우리 외가가 어딘지 알고 있었지. 레딕은 잠시 신기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무 수련회에 가입한 거였군. 그래서 그리 당당하게 뛰어든 거냐? 그럼 빨리 회원증을 저놈들에게……." "못 땄다." "앙?"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레딕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쓰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어젯밤 계속 터졌다고. 자격증 못 땄어." "이, 이……." 내 대답이 상당히 뻔뻔스러웠는지 레딕이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았다. 으음, 이럴때 레딕에게 칼이 있었으면 생명이 위태로웠겠군. 그리고 레딕은 크게 왈왈거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도대체 대책도 없으면서 그냥 뛰어들면 어쩌자는 거냐! 내가 네 놈이 등장을 그렇게 화려하게만 안 했어도 아무 말 안 해! 이런 썩을……!" "젠장……." 그때 갑자기 센이 입을 열었고, 레딕은 찔끔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와 레딕이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센은 이를 갈며 말했다. "더럽게 아프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웬 엉뚱한 말이야? 현재 센은 릴이 심하게 다쳤다는 말을 듣고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다. "……." "……." 나와 레딕은 멍한 눈으로 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리고 곧 레딕이 고개를 쳐들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오늘 센 형님이고 진이고 상태가 왜 이런 거냐! 크아아악! 섀도우 월드를 박살내야한단 말이다! 이 새끼들아! 풀어!" "네놈도 정상이 아냐."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편하게 몸을 기댔다. 어제부터 너무 뛰어다녔군. 거기다 바이크를 탄 채로 창문을 뚫고 들어온 것은 오버였나? 혹시나 저 친구들이 쫄아서 일이 좀 쉬워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는데. "닥쳐, 이 새끼들아!" 벽 너머에서 내게 얻어맞은 상처들을 치료하고 있던 칸 그룹의 친구들이 고함을 질렀다. 그 흉흉한 기세에 레딕은 잠시 으르렁거리다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하아. 나는 어제 한무 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꽤나 열심히 얻어맞았지. 나는 푸념하듯 레딕에게 얘기를 들려줬다. 한무 수련회에 도착한 것은 밤중이었고, 수련회 건물에 남아있는 사람은 강 사범님 또래의 사내 단 하나였다. 하지만 낯익은 인물. "오랜만에 뵙습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서 무슨 책을 읽고 있던 사내는 책을 조금 내리고는 그 너머로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상당히 열을 받게 하는 행동이었다. "누구냐?" "예?" 사내의 질문에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날 못 알아보는 건가? 하, 하긴. 안본지가 꽤 됐고요새 들어 내 얼굴이 꽤 바뀌긴 했지만……. "네 놈 같은 깡패 녀석이 올 곳이 아니니 꺼져라. 특히 그 피 묻은 옷 꼴은 도저히 못 봐주겠군. 어떤 얼간이의 피 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은 그따위 피를 묻힐 곳이 아니니 꺼져라." 나는 얼굴을 굳혔다. 깡패 녀석? 어떤 얼간이의 피라. 센을 지키려고 반죽음 상태가 될 때까지 싸운 릴이 얼간이라 그건가? 이곳이 얼마나 잘난 곳이라고 그 따위 말을 하는 거냐? 까드득. "실력으로 누군지 증명하지." 스산하게 퍼져나가는 살기에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뭔가 기억이 떠오른다는 듯한 얼굴에 나는 사납게 웃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 사내, 나의 삼촌이 되는 그 인간은… 강 사범님보다 5살 더 연상이며, 강 사범님도 한수 접고 들어갈 정도의 괴물이다. "결국, 더럽게 얻어터지고 기절했지." "…병신." "나중에 일어나 보니 날 알아보더군. 아버지와 비슷했다나? 하지만 결국 자격증은 따지도 못하고… 바이크 끌고 이리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몸 상태가 최악이라 쪽도 못쓰고 붙잡혔고. 됐냐?" "…역시 병신이다. 오긴 왜 오냐." "쳇." 이렇게 얻어터진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어쨌든 레딕, 센과 사이좋게 묶여 있으려니 참 기분이 새롭군. 거기다 이렇게 엉망인 꼴로 말이야. "진." "음?" "줄을 풀면, 도망칠 수 있겠냐?" 나는 레딕의 손 부분을 흘깃 바라보았다. 아마 손을 묶일 때 조금 손에 쥐고 있었는지 밧줄이 조금 헐렁했다. 아주 약간이라 있으나 마나 한 공간으로도 보였지만, 레딕이라면 어떤 방법도 있을 듯 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레딕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고 아마도 릴에 관한 소식 때문인지 패틱 상태에 빠져있던 센이 킥킥거렸다. 나는 해탈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너무 고생했어. 내가 무슨 초인도 아니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그렇게 얻어터졌는데 저놈들을 뚫고 지나가라고? 몸 상태가 정상에 너까지 있다고 해도 거의 불가능이지." "크으……." 레딕이 신음을 흘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힘없는 모습에 레딕은 이를 살짝 갈더니 질문했다. "아무런 방법도 없다 그거지?" "그래." "썅! 그럼 도대체 오긴 왜 온 거냐?" "…이 근처까지 와서 고민하고 있었다." 내 말에 레딕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고민은 무슨 고민이냐며 작게 투덜거리는 레딕의 모습에 센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쳐들었다. 눈에 약간 생기가 돌고 있었다. 패닉 상태도 빨리 벗어나는군. 역시 머리 좋은 사람들은 다른 건가? 레딕이 말을 계속 하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고 센도 날 힐끗 바라보자 나는 말을 이었다. "암흑가로 가서 몇 명이라도 끌고 올까 했었는데… 드래곤의 방송이 나오더군." "아아, 정말 지랄 맞을 방송이던데. 천국에서 지옥으로 처박더군." "…그래. 그 방송을 보고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 이대로 두면 사람들이 제 발로 섀도우 월드 속으로 기어들어갈 판이었으니까." 내 말에 레딕과 센은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 그리고 레딕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꽤나 매혹적이긴 했지만, 그런 말로 사람들이 스스로 죽으러 가겠냐? 아니, 죽는 건 아니군.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살려는 주겠지만, 평생 가상현실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어떤 미친놈이……." "그런 미친놈이 많다는 것이 문제지." 내 자조 섞인 중얼거림에 레딕이 입을 다물었다. 레딕에 비해 센은 뭔가 알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방송을 보고, 끌리더군. 가고 싶었다. 섀도우 월드로……." "뭐?" 레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살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사람, 내가 아는 사람들 만 해도 몇 명 댈 수 있어." 아마… 칼, 태경이는 들어갈지 모른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꽤나 싫어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현실에 불만이 많은 녀석들이 많다. 거기에 왠지 모를 느낌이지만, 레지엘, 정수도… 가고 싶어 하지 않을까? "이 세상,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 "…우리도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게 전부야." 레딕의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썩었어. 인간들이 썩은 건 둘 째 치고… 세상이 재미없지 않아? 뭐, 한 백년 전쯤에 비하면 좋게 보일 수도. 그때는 20세가 되기 전까지는 공부만, 그 후로는 돈만 버는 지옥과도 같은 생활이었다지. 그리고 그 후로 88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그리고 혁명이 결과가 우리들이지 않나?" "썅, 그래서?" "지루한 일상이지. 만약 기회만 된다면, 그 끝이 죽음이더라도 새로운 세상으로 가겠다. 자유, 진정한 자유만 있다면. 어차피 한번은 죽는 것, 나쁘지는 않아 보이지 않아?" "젠장! 그래서 뭐냐! 네놈은 어떡하겠다는 건데! 이곳을 빠져나가면 그 속으로 들어가겠다 그거냐!" 레딕의 고함소리에 벽 너머의 친구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눈을 잠시 살벌하게 뜨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좋은 일 별로 없던 세상이야. 암흑가에서 그렇게 존경하던 부모님은 어이없게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사고는 어떤 미친 새끼가 정치판에서 깽판 치다가 테러 당한 거고. 빌어먹을 세상 아냐? 어차피 살다 가는 거, 뭔가를 이루고 간다고? 후세의 유산이 돼?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뭐냐? 이 완전히 죽어가는 지구? 눈 한번 내린다고 미친 듯이 좋아하는 곳? 빌어먹을! 어차피 죽는 것, 원하는 곳에서 지내다 죽는 것도 하나의 방법 아닌가? 앙!?" 내 사나운 기세에 레딕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레딕을 보며 잠시 헉헉거리던 나는 혀를 차며 살기를 피웠다. 망할. "그래서… 어쩔 거냐?" 센이 투덜거리듯이 질문을 던졌다. 하아, 역시 센의 말을 들으면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군. "달리 방법이 있나? 막아야지." "뭐?" 내 대답이 의외라는 듯이 레딕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팍 찡그리며 스산한 어조로 말했다. "망할 자식. 그러면 꼭 드래곤의 말을 따르겠다는 식으로 떠든 건 또 뭐냐?" "훗, 그것과 이건 별개야. 난 이 현실이 싫고, 그림자의 땅이 정말로 좋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그곳을 증오하는 사람들까지 생길 판인걸. 그리고… 이 일이 해결되면……." 나는 말끝을 흐렸고 레딕이 의아해 하며 나를 살폈다. 하지만 내가 그저 피식 웃어 보이기만 하자 코웃음을 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센이 잊고 있던 한 사실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다 좋은데 어떻게 리자드까지 가려고? 아무리 내 실력이 좋아도 이렇게 묶여서는 드래곤 근처에도 못가." "아." 그러고 보니 지금 포로상태였지?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레딕에게 고개를 돌렸다. "손을 어떻게 풀 건데? 그 정도 여유로는 절대 못 풀어." 내 질문에 레딕은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뭔가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 "방법이 있지. 하지만 이걸로 푼다고 해도 당분간 싸움은 못해. 손목 관절을 빼야하거든. 쉽게 말하면 손목을 부러뜨려서 그걸 이용해 손을 빼는 거지." "뭐?" 미, 미친 거 아냐? 나는 히죽 웃는 레딕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기 손목을 자기가 부러뜨려? 내 굳은 얼굴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던 레딕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할까?" "……." "나쁘진 않군." "……."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센은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레딕은 약간 배신감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킬킬 웃고는 벽 너머를 살폈다. 쳇, 골치 아프군. 저런 투명한 벽만 아니었어도 가능성이 있을 텐데. 이래서는 풀린다고 해도 일어서는 순간 떼거지로 몰려올 테지.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이 창고에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있다면 창문인데 우리 힘으로는 깰 수 있는 강도가 아닌데다 너무 위에 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결국 포기하며 사납게 웃었다. "쳇, 이판사판이다." "훗, 그렇게 나와야지." 센이 히죽 웃으며 답했고 레딕이 약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의 손을 비틀었다. 좋아, 레딕이 손을 풀어주는 동시에 일어나서 달린다. 적어도 내가 시간을 끌어주면……. "어라?" "음?" 그때 벽 너머의 검은 친구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리둥절해 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뭐지? "뭐야?" 레딕이 얼떨결에 행동을 멈추며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잠시 상황을 지켜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어쨌든 잠시 상황을 보는 게 좋겠는데." "음." 나는 약간 긴장하며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곧 벽 너머의 녀석들 중에 절반 정도가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입구 쪽이네? "누가 온 건가?" "음, 새로운 고문자라면 그냥 혀 깨물고 죽겠다." "……." 느낌은 나쁘지 않은데. 나는 눈을 약간 가늘게 뜨며 벽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 사내가 칸 그룹의 녀석들에게 안내를 받는 듯한 모습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보기도 전에, 벽 너머의 녀석들 중에 한놈이 창고 문을 열더니 이리로 급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보류." 레딕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한 나는 살기를 피우며 우리에게 뛰어오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놈은 잠시 찔끔하더니 머뭇거리며 우리 뒤로 돌아가 뭘 꼼지락거렸다. "음?" 그리고 우리 셋은 허망하게 풀려버린 줄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풀어줬네? 뭐야? "뭐야? 이젠 풀어주고 패겠다는 건가?" 레딕의 어이없다는 목소리의 중얼거림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따라오라는 듯한 녀석의 손짓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창고에서 벗어났다. "왔군." "음?" 그리고 가까이에서 그 의문의 사내를 보게 된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삼촌?" "뭐?" 내 호칭에 레딕과 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약간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피투성이의 우리를 살피고 있는 중년의 무도가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집에 들리도록 해라.' '…….' '세한 녀석이야 아버님이 인정하시지 않았지만, 너는 내가 인정한다. 실력이 꽤 좋아졌더구나. 진철이 녀석의 젊은 시절보다 훨씬 나았어.' '…많이 부족합니다만.' '훗, 이것 가져가라.' '예?' '한무 수련회장 자리야 일대에서 끝이지만, 한무 협회장 자리는 계속 이어지는 자리가 아니냐. 그곳 명예회원증이다. 이걸 준비해오느라 늦었다. 그래도 아버님이 높은 자리에도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꽤 높게 쳐줄 거다.' '감사합니다.' '…네놈 아버지, 세한 녀석이 내 동생과 결혼하겠다고 왔을 때는, 정말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 녀석은 천재였다. 만약 진짜 생사결을 벌였다면 내가 절대 이기지 못했겠지. 무술을 사용한 대련이기에 내가 한수 앞서고 있었지만. 네놈도 비슷해 보이는구나.' '…….' '오다가 웬 도마뱀이 나오는 방송을 봤다.' '!' '걱정되더군. 기다리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한 번은 도움을 줬다. 세한 녀석에게 해주지 못한 걸 너에게 대시 해줬다고 생각해라. 그러니… 조카 녀석에게 해줄 것은 하나 남아있다고 봐도 좋다.' '…감사합니다.' '흥, 마음대로 한번 해 보거라.' "마음대로라. 훗. 기다린다고 하셨습니까, 삼촌." 나는 피식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 곳에 남을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는 건가? 하지만……. "발목 잡지 마라!" "웃기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를!" "그때 승부를 잊은 거냐! 내게 무릎을 꿇은 주제에!" "비겁하게 꼼수를 쓴 게 누군데 큰소리냐!" "속은 놈이 병신이지! 제대로 따라오라고!" "그 반병신 된 몸으로 뭘 어쩐다고! 그리고 이 일은 내가 더 선배다! 지시에 따라!" "어쭈! 지금 너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을 가르쳐 보겠다 그거냐?" "이 바닥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나는 엄청난 소리로 울리는 센과 재훈의 설전에 고개를 들었다. 후후. 정말 못 말릴 사람들이로군. 둘의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재밌는 사람들이군요." 내 옆으로 다가온 정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연락용으로 보이는 기계를 들고 뭐라고 악을 쓰고 있는 위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 보니 꽤 높은 사람처럼 보이긴 하는군. "모일 사람은 다 모였어. 이젠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인가?" "형!" 작게 중얼거리던 나는 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쪽에서 레도르, 지하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다른 몇 명도 보였다. "아, 왔네? 오랜만이다." "정말로 무사했네요?" "이 꼴이 무사한 걸로 보이냐?" 나는 곳곳에 멍이 들고 피가 묻은 몸을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모습을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바라보던 지하 패거리는 뭔가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아, 이게 아니었는데. 드래곤이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는데요?" "뭐?" 이젠 드래곤 소리만 나와도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지하는 약간 당황하더니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아, 그게… 자신은 독재자가 아니라나? 섀도우 월드는 정해진 섭리대로 움직이며, 자신은 그것을 마음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다. 그 말은 이 그림자의 땅에서 용사가 나타나 나를 죽이면 나는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말하는 거다. 나는 내 힘만을 가지고 싸울 뿐, 그림자의 땅의 모든 것을 지배해 신으로써의 힘을 발휘하지는 않겠다. 나의 증언은 어느 두 인간에 의해 확인될 것이다." 지하의 말에 끝나자 사람들 사이에는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정수가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드래곤으로써의 힘만을 사용할 뿐, 섀도우 월드의 모든 시스템을 장악한 슈퍼컴퓨터의 힘을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 아닐까요? 이곳에서는 몰라도 섀도우 월드 속에서는 그저 하나의 드래곤을 뿐이다, 라고 선포한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왜 자기 스스로 유리한 고지를 버리는데?" 영민 형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을 내두르며 부정했다. 유리한 고지를 버린다라. "가능성은 있어." 내 말에 몇몇 사람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드래곤과 나는… 이상하게 생각이 비슷한 점이 있지." 순간 몇몇 사람이 몸을 흠칫했다. 뭐지? 신 과장과 정수, 아버님. 그리고 센. 모두 약간 긴장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신경 끄기로 결정하고 말을 이었다. "해방시키기는 하되, 섀도우 월드는 또 다른 세상을 뿐이다. 그곳을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굴리지는 않겠다. 말 그대로의 자유.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거야. 자신은 이곳을 해방시키고 싶을 뿐……." 설명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말이었다. 나 혼자 독백하는 듯한 중얼거림에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걱정스러운 시선도 섞여 있었다. 후우. 그때 위리안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글쎄. 무슨 근거인지는 몰라도 드래곤이 그렇게 말했다니 그렇다고 치고.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지 않나? 말로만 그렇게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을 죽이려는… 여기서는 플레이어인가? 플레이어의 목숨을 그냥 뺏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어?"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위리안의 말이 옳다는 듯한 반응이 오갔다.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지. 확실히 나라도, 그곳을 망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도, 내 목숨이 위험해 진다면 그런 힘을 쓰지 않을지 자신이 없으니까. 결국 말뿐인 걸 수도. "그런데 두 인간이 자신의 말을 확인한다는 건 뭘까요?" 지하가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질문했다. 아, 그런 말도 있었지? 하지만 우리가 알 리가 없었다. 우리가 당황하며 서로를 돌아보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우리 같은데?" "그런 것 같군." 재훈과 센이었다. "무슨 소리야?" 내 질문에 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짓을 해 우리를 불렀다. 순식간에 센과 재훈의 근처에 몰려든 우리는 센이 가리키는 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는 이상한 문자들의 집합. 이걸 내가 어떻게 알아보라는 거야? 하지만 우리 중에 이런 쪽으로 지식이 있는 신 과장과 위리안, 정수는 뭔지 알겠다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정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센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 드래곤 자식, 스스로 제한을 걸었어. 섀도우 월드의 자연 현상이나 죽음과 같은, 그런 쪽은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도록 락(Lock)을 걸어놨어. 어쩌면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루트를 지정해 뒀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런 것도 없어 보이는데?" "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 그게 무슨 뜻?" 영민 형이 어이없다는 듯한 기색으로 질문했다. 그리고 재훈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게임 속에선 드래곤의 능력만을 사용할 수 있게 제약을 걸었다는 겁니다. 젠장.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 그건가?" 재훈의 말에 나와 정수, 건이 형의 눈이 번뜩였다. 죽이면 된다? 섀도우 월드 속으로 들어가, 드래곤을 죽인다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희망에 불타는데 신 과장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신대관 과장이 굳은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확실히 그렇게 보이긴 합니다만… 드래곤 시스템 자체가 특이해서……. 어쩌면 분명히 죽도록 머리에 검을 박아 넣었는데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동방어라는 건데… 프로그램 자체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모든 규칙을 어긋나게 하는 시스템이죠. 원래 드래곤의 신비성과 부활에 관해서 만들어 둔 시스템입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시스템이 있었군." 신 과장의 말이 아버님에 의해 확인되자 우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그럼 죽여도 죽지 않을지 모른다는 거 아냐? 도대체 왜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갑작스레 드래곤이 죽게 된다면 시스템의 혼란도 있게 되고… 게임의 재미와 안전책으로 만들어둔 시스템이고 봉인해 뒀었지만……." "이번 일로 그 시스템이 가동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정수의 말에 신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얘기 아냐? "결론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훗, 어차피 다 그런 거지. 가능성은 있어. 도전 해볼 가치는 있지 않나? 로그인도 가능하겠다, 드래곤만 죽일 수 있다면……." 내 사나운 말에 몇몇 사람들, 최상급의 캐릭터들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레벨 500때 어느 정도 괜찮은 대결을 펼쳤던 드래곤이다. 그때 일시적으로 강해졌던 내 실력 정도의 고수가 지금은 꽤 많다. 훨씬 뛰어난 사람도 있고. 나만 해도 그때 드래곤과의 대결 당시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센이 회의적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가능할까?" 나는 무슨 뜻이냐는 듯이 센을 바라봤고 센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의 능력치인데… 레벨 2143로군." "켁? 2, 2000!?" 위리안이 괴성을 질렀다. 다른 사람들도 소리만 치지 않았다지, 위리안과 비슷한 반응들을 보이고 있었다. "음, 괴물인데? 웬만한 마법은 씨도 안 먹히고, 검기도 거의 듣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마법을 사용해? 거기에 앞발로 밟기라도 하면 누구든 그대로 저승행인데? 아무래도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보다 시간도 지났고, 수련도 열심히 했나 보지? 시스템 장악 때 손을 좀 썼을 수도 있고. 어쨌든, 최강이야." "……." "미치겠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언제 또 그렇게 강해진 거야? 나를 비롯한 전투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뭐 씹은 듯 굳어졌다. 그리고 신 과장이 정리를 하듯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우선 보류하죠. 그리고 섀도우 월드 내의 사람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직접 들어가는 방법도 있지만, 섀도우 월드 속에는 훨씬 강한 강자들도 계십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직접 사지로 들어가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만 선택할 패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안에는 우리보다 훨씬 강한 분들이 계시지. 고타도 안에 있을 듯하고. 무엇보다 저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있으실, 최강의 살력을 가진 세 분이 계시니까. 최강의 트랩퍼 라젠님에 최강의 마법사 이반님. 그리고 치료술의 최권위자인 나르손님. 이 세분이 계신다. 어떻게든 연락만 닿는다면, 희망이 보일지도. 그리고 이런 의견이 순식간에 교환되며, 센과 재훈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의 스크린에 엄청난 속도로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지나갔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섀도우 월드, 그림자의 땅으로 오라. 하지만 나는……. 그리고 나는 왠지 모르게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수, 레지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림자의 땅으로 오라고? 나는……. 울창한 숲 속. 푸르고 울창한 숲이었지만 군데군데 붉은 잎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 인상적인 어느 숲이었다. 휘릭! 휘파람과도 같은 새소리와 함께 바람이 솟구쳤다. 나뭇잎 몇 개가 하늘로 솟구치며 멋진 광경을 연출했다. 나뭇잎 중에 몇 개는 단풍이 아주 살짝 들어 있었다. 초가을이라는 증거였다. 저벅, 저벅. 그리고 그 숲의 초입. 5명의 사내들이 걷고 있었다. "적색 산맥의… 초입입니다." 다섯 명의 사내 중, 손에 염주를 들고 펑퍼짐한, 다른 넷과는 확연히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중으로 보이는 대머리의 사내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다른 넷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젊어 보이는, 등에 거대한 싸이드, 대낫을 걸친 회색머리의 사내가 다른 넷을 호위하듯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주위를 살폈다. "이곳인가." 등에 여러 가지 도구들을 매고, 손에는 반짝거리는 은사를 감고 있는 중년의 트랩퍼가 왠지 어두워보이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받듯 회색 로브에 길고 곧은 마법사 지팡이를 든 비슷한 연배의 사내가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산들 중, 가장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에 있겠지." 그리고 그저 평범하고 간편한 여행복에 몇 개의 주머니를 몸에 매달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낫을 매고 있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천악, 이제 돌아가게." 그의 말에 회색머리의 사내, 천악은 불에 데인 듯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함께 가겠습니다." 단호한 어조였지만 그의 말은 다른 넷의 중년인들에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중년의 트랩퍼, 라젠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아직 젊지 않나. 그리고 위험하네. 자네가 강하긴 하지만 우리들 중에서는 가장 약자일세. 드래곤과의 싸움에선… 위험할지 모르네." "상관없습니다." 천악의 단호한 태도에 라젠은 곤혹스러워 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중도 생각해야지. 혹시 우리가 실패할 경우, 자네가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해. 우리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이가 바로 천악, 자네네. 드래곤을 쓰러뜨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도 자네가 될 테고. 만일을 위해, 돌아가게." "……." 천악은 입을 다물었다. 뜻은 알겠지만 수긍은 하지 못한다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의 천악을 잠시 바라보던 염주를 든 스님, 고타는 천악의 옆으로 슥 다가갔다. "돌아가게. 우리도 곧 돌아갈 테니." "…드래곤은 강합니다. 돕겠습니다." "후우, 고집불통인 친구로군. 그래도 저 세분은 인간들 중 최강이네." "하지만……!" 퍽! 천악이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고타의 손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그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천악이 숨이 막힌다는 듯 숨을 들이키며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 회색 로브의 마법사, 이반이 순식간에 천악의 앞에 나타나며 손을 뻗었다. "미안하네." 천악의 눈이 흔들거리는 순간, 이반의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천악을 휘감았다. 그리고 천악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 친구는 괜찮나?" 가장 평범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 치료술사 나르손이 약간 걱정어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지팡이를 들고는 눈을 감았다. 이이이이잉! 작은 공명음과 함께 천악의 몸을 흰 빛이 감싸고돌았다. 강력한 바리어. 이반은 지팡이를 거두고는 다른 셋을 돌아보았다. "아마 웬만해선 뚫리지 않을 걸세. 적어도 고타, 저 친구 정도의 실력이 있지 않는 한 뚫지 못 할 거야." "그럼 안전하다고 봐도 괜찮겠군. 그런 강한 상대가 나타나면 천악 군 정도면 정신을 차릴 테니." "그렇겠지." 라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타를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빛에 고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어쩌겠는가?" "후후, 세 분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몸입니다. 드래곤 주위에 강한 적들이 많을 테니, 그 녀석들 정도는 제가 맡게 해 주십시오." 염주를 절그럭거리며 즐거운 듯 말하는 고타의 모습에 세 사람은 미소를 지었다. 허락의 의미였다. 그리고 라젠이 앞장을 서며 은사를 뿌렸다. 휘리리릭! 은사가 하늘로 솟구치며 일행의 주위를 둘러싸는 듯한 모습을 취했다. 그리고 주인의 걸음에 따라 함께 춤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세." 최강의 트랩퍼, 라젠을 선두로 네 사람은 적색 산맥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네 명의 사람들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이 그림자의 땅이 아닌, 현실에서의 일이었다. "이, 이건! 라젠님들과 고타? 왜 이런 영상이……." 나는 긴급 팀이 모여 있는 방의 정면에 위치한 대형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곳에는 아마도 적색 산맥으로 보이는 산을 올라가고 있는 라젠, 이반, 나르손, 고타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당황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듯했다. "아, 섀도우 월드에 들어가서 얻어올린 영상이야! 실제 상황이다!" 재훈의 고함소리에 나는 급히 뒤를 돌아봤다. 재훈과 센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그 정도까지 간 건가? 벌써?" 내 질문에 센의 얼굴이 벌레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아니. 아직 드래곤의 방어막을 뚫지는 못했는데, 이 영상은 잘 들어온다. 아마도 드래곤이 길을 열어준 거겠지. 우리에게 보여주겠다는 걸 거다." "페이린이……." 나는 굳은 얼굴로 스크린을 주시했다. 그럼… 저 넷은 드래곤과 대결을 벌이러 가는 건가? 그때 정수가 입을 열었다. "역시 시간이 꽤 지났군요." "뭐?" 내 반문에 정수는 스크린의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풍이 희미하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초가을쯤인 것 같군요. 역시 현실보다 월등히 빠르게 시간이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가 걱정이군." "예……." 이를 악물고 스크린을 주시하던 나는 갑작스레 등장한 한 존재를 보며 신음을 흘렸다. 라젠을 비롯한 넷의 앞을, 검은 갑옷을 두른 마계의 존재 하나가 가로막고 있었다. "크크크크." 악마의 모습을 본 딴 듯한 검은 칠흑의 갑옷. 그리고 그 투구 사이로 검은 심연의 눈을 번뜩이는 존재. 세한과의 악연의 주인공. 데스 킹의 모습에 산을 오르던 네 사람은 걸음을 멈춰 섰다. 상당히 강력한 기를 느낀 셋은 몸을 긴장시키며 검은 존재를 경계했고, 데스 킹을 한번 만난 적이 있는 고타는 얼굴을 찌푸리며 염주를 절그럭거렸다. "몬스터들이 없다 했더니… 꽤나 강력한 친구가 나왔군." 이반의 투덜거림에 데스 킹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크크. 그분의 명이셨다. 하지만 나까지 물러나라는 말은 없으셨지. 크하하하하!" 미친 듯한 광소를 터트리는 죽음의 관장자, 죽음의 왕을 보는 네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라젠이 엄청난 마나를 퍼트리며 약간 사나워진 어조로 말했다. "실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에 비해 자만심이 턱없이 높은 듯 하군." 데스 킹이 웃음을 딱 멈췄다. 대신 이글거리는 검은 불길의 눈동자가 강하게 타올랐다. 전투가 벌어지리라 예상한 넷은 각자의 무기에 손들을 천천히 가져갔다. 하지만 이어진 데스 킹의 말은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가라. 그 분이 기다리고 계시니. 크큭, 그분을 만나러 가는 손님을 건드릴 수는 없지. 크하하핫!" "무슨……." 라젠이 의아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 하지만 데스 킹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고, 그저 지나가라는 듯이 옆으로 살짝 비켜섰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라젠과 두 동료, 최강의 세 사내는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절그럭. 고타는 염주를 약간 거칠게 돌렸다 손에 휘감았다. 검은 빛의 보석 염주가 팔에 휙 감기며 검은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투 시와 같은 사나운 기세로 들어가는 그의 기를 느낀 셋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고타가 엄청난 기운을 풍기며 데스 킹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데스 킹 또한 검은 마기를 흘리며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둘의 대치 상황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던 치료술사 나르손이 급히 입을 열었다. "이, 이보게! 무슨……." 나르손의 말에 고타는 흰빛을 발하는 마나를 염주에 모으며 대답했다. "이 녀석의 말,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 자는 붙잡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죽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고타의 말에 셋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천악. 현재 산의 아래에 천악이 기절해 있다. 만약 자신들이 드래곤과의 대결에서 패한다면 마지막으로 남게 되는 희망이다. 그런 그를 허무하게 죽게 할 수는 없다. 라젠을 비롯한 이들은 고타의 행동을 이해했다. 그리고 고타가 쐐기를 박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혹시 뒤에서 공격이라도 하면 골치 아프지요. 후환은 미리 없애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어떤 녀석이 이 놈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과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녀석이니, 대신이나마 원수를 같아야겠죠." 라젠은 고타의 어조가 묘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이길 수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꼭 유언과도 같은 느낌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데스 킹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핀 라젠은 안색을 살짝 굳혔다. "조심하게." "…이기십시오. 아미타불." 고타는 하얀빛의 마나에 검은 빛을 불어넣는 염주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라젠은 다른 둘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나무들을 뛰어넘고 멀어지는 그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던 이반과 나르손은 고타의 모습을 한번 스쳐보고는 뒤를 따랐다. "크크큭." 셋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둘 만이 남게 되자 데스 킹이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투구 속에서 검게 타오르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타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중얼거렸다. "후우, 그럼 세한 녀석의 원한이나마 갚도록 노력해 볼까." 바로 그 순간, 현실에서 세한, 현진이 누가 누구 원수를 갚는 거냐며 고함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고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크흐, 그때 다크소드와의 대결을 방해했던 자로군." "후후, 알아보니 영광이군." 데스 킹의 말에 고타는 피식 웃으며 염주를 한번 휘돌리고는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마나를 한껏 머금은 검은 염주가 허공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크크크, 그때는 그냥 당해 줬지만, 지금은… 죽음의 왕으로써의 힘을 보여주겠다." 화르르르륵! 공중에서 검은 마기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거대한 기형의 검의 모습을 갖춰가는 마기의 불길을 잠시 주시하던 고타가 순식간에 앞으로 뻗어나갔다. 순간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엄청난 기의 폭풍에 그의 옷이 강하게 펄럭거렸다. 부우우웅! 그리고 염주가 휘둘러짐에 따라 엄청난 마나의 덩어리가 데스 킹에게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날렸다고는 믿기 힘든 위력의 엄청난 공격이었다. 푸화아악! 그리고 검은 존재의 온몸에서 강한 마기가 타오르며 그의 손에 기형의 대검이 잡혔다. 순간 마기가 폭발하듯 발출되며 검은 기운이 허공을 갈랐다. 그어엉! 강하게 불타오르는 검은 불길은 자신과 맞부딪힌 마나를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다. 데스 킹은 광소를 터뜨리며 고타의 행적을 좇았다. "받아보게!" 어느새 데스 킹의 머리 바로 위로 도약한 고타가 발을 내리찍었다. 빠른 공격이었지만 데스 킹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대검과 고타의 발차기가 맞부딪히는 순간, 엄청난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땅이 터져 오르고 나무들이 꺾여 날아갔다. 폭발에 휩쓸린 나무들이 부서져 공중을 휘날리는 가운데, 엄청난 마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크하하하하하!" 그리고 그 마기의 근원지에서 데스 킹이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검은 심연이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며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스으으으. 그리고 한 부근에 강한 마나가 휘몰아치며 시야를 어지럽히던 것들을 사방으로 헤쳐 버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옷이 약간 찢긴 고타가 염주를 절그럭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심각한 표정이 떠올랐다. 예전, 세한과 싸울 때보다 데스 킹이 월등히 강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고타는 지금 죽음마저 각오하고 있을 정도였다. 비장한 표정의 고타를 바라보며 데스 킹은 끊임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웃음에 반응하듯 그의 몸에서 강하게 타오르던 마기가 흔들흔들거렸다. '어차피 공격하지 않아서는… 승산이 없군.' 이곳은 드래곤의 영역이고 데스 킹의 부하들이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시간을 끌어서는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은 썩 정확한 것이었고 고타는 순식간에 앞으로 뻗어나갔다. 세한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살기가 도는 날카로운 얼굴을 한 고타는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가 일직석으로 데스 킹의 앞에 도달했다. 데스 킹의 눈이 당황한 듯 흔들리는 순간, 고타는 빠르게 회전하며 마기로 타오르는 갑옷을 강하게 걷어찼다. 그리고 데스 킹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엄청난 마나를 머금은 염주가 길게 늘어지며 사방을 할퀴고 지나갔다. 푸콰카칵! 사방에서 하얀 마나의 폭발이 일어나며 기의 폭풍과 함께 다시금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고타는 높이 뛰어올라 한 나무의 꼭대기에 내려섰다. 절그럭. 둥그렇게 이어져 있던 염주가 중간에서 끊어져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마도 고타의 키와 비슷한 길이로 보이는 염주는 마나를 머금고 검은 빛을 흘리고 있었다. 고타의 마나가 하얀 빛이기 때문에 검은 보석으로 이루어진 염주의 검은 빛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후우……." 나무 위에 내려선 고타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약간 무리를 해서 가한 공격이었기에 고타로서도 충격이 있었다. 아래의 소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기의 폭풍이 쉽게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워낙 강한 폭발 때문에 터져 오른 땅과 나무들이 많았다. 덕분에 데스 킹의 모습을 찾지 못한 고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으로 찾지 못한다면 기로 느끼면 된다. 하지만 고타가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 그의 행동을 비웃듯 사방에 마기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음?" 어둠. 사방이 마기에 잠식되어 점점 어두워지자 고타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세한이 이것과 비슷하게 주위에 마기를 까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고타였기에 이 상황에서의 위험도도 잘 알고 있었다. "사방이 마기니 기를 찾는 것은… 우웃!" 작게 중얼거리던 고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올라서 있던 나무가 아래서부터 마기에 마구 부숴 지며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 기둥을 타고 강하게 뻗어오는 검은 마기. 재빨리 나무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차라락. 급히 나무에서 뛰어내린 고타는 염주를 꽉 움켜쥐었다. 바로 아래. 그가 떨어지고 있는 곳에서 마기가 주위로 물러나며 그 가운데에 서 있는 데스 킹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검을 아래로 약간 늘어뜨리고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모습. 아래에서 바로 올려치려는 자세. 푸화아악! 그리고 그 검은 존재의 온몸에서 마기가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고 엄청난 기운이 대검에 모여들며 기형의 대검은 강하게 타오르며 고타를 노리고 위로 쳐올려져 갔다. 파아아아악! 그에 비해 고타는 눈을 빛내며 염주를 휘두르고 있었다. 보석 염주가 고타의 사방을 호위하듯 공기를 가르고 지나다녔다. 엄청난 파공성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마나의 선. 그리고 마기가 타오르는 기형의 대검과 흰빛과 검은 빛을 동시에 내뿜는 염주가 강하게 충돌했다. 그리고 적색 산맥의 중턱에서는 다시없던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괜찮을지 모르겠군."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르손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한번의 강력한 폭발이 있은 후, 그렇다할 강한 마나, 기의 파동이 없었기에 더욱 불안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다른 곳에 신경 쓸 틈이 없을 것 같군." 딱딱하게 굳은 라젠의 말에 나르손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현재 셋이 도착한 적색 산맥 정상 부근의 넓은 분지, 그 반대편에서 한 존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모습에 흠칫하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인가?" 그의 중얼거림에 라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목에서 와이어들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진 그 존재는 붉은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며 자신을 찾아온 세 인간을 직시했다. 자신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를 보며 세 사내는 마른침을 삼켜야했다. 그리고 레드 드래곤, 세르페이린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왔군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속에 감춰진 살의를 읽은 라젠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들리는군." "기다리고 있었죠. 인간들 중에 가장 강한 자들이니까. 당신들이 아니라면 이곳에 처음으로 올 자들이 있을까요?" "없겠지." 길지 않은 대화였지만 그 대화만으로도 라젠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드래곤이 은연중에 자신의 기운을 사방으로 퍼뜨리고 있었다. '차라리 빨리 싸우는 것이 속 편하겠다.' 드래곤과 대치한 셋의 마음속에 떠오른 동일한 생각이었고,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이반이 지팡이를 살짝 휘둘러 바닥을 콱 짚고는 입을 열었다. "…그 키메라, 주시자라고 했나? 그 녀석들을 통해 한 말들은 사실이겠지?" 이반의 사나운 기세에 페이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날 죽인다면, 지금의 모든 상황들은 끝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드래곤의 하대에 라젠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와이어들이 쭉 뻗어나갔다. 휘리리리! 순식간에 수식가닥의 실들이 짙푸른 마나를 머금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대로 드래곤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 많은 외이어, 은사(銀絲)들 중에 단 하나가 지닌 힘도 오거 같은 몬스터를 발기발기 찢어 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공격이 적중하기 직전, 드래곤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스윽. 그리고 수많은 은사들은 드래곤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고, 순간 드래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바닥을 파고든 은사들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쿠구구구궁. 하지만 그렇게 엄청난 폭발이 아닌, 그저 땅이 조금씩 터져오를 뿐, 더 이상의 효과는 없었다. 들어간 기는 많았지만 라젠의 컨트롤이 워낙 완벽했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리고 라젠의 눈이 분지의 반대편의 향했다. 동시에 셋의 모습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처척. 분지의 한가운데에 멈춰선 셋은 약간 당황한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뭐지?" 나르손이 고개를 갸웃하며 누구에게 할 것 없이 질문하자 이반이 로브자락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실력 점검이라도 되는 것 같군.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흐음." 그리고 둘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분지의 사방에서 수많은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섀도우 월드 속에서 지옥의 사자로 인식되는 드래곤의 수하들, 키메라들이었다. "어쩌겠나?" 키메라들이 빠른 속도로 몰려들자 라젠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이반이 지팡이를 위로 조금 치켜들었다. 키라라라락! 그 사이에 분지의 사방에서 포위하듯 마구 몰려들던 키메라들은 셋의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며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염화(炎火)." 상황에 비해 너무나도 침착한 이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서 치솟는 불길. 화르르르르륵! 셋의 주위를 둘러싸듯 생성된 강한 불길에 키메라들이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초보 마법사나 만들어낼 법한 위력의 화염마법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물밀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반의 입가에 살기를 띈 미소가 지나갔다. 화아, 푸화악! 그리고 불길이 갑자기 거세게 타오르며 점점 검게 물들었다. 키르륵? 선두에서 달려들던 키메라가 갑자기 지옥의 유황불과도 같은 위력으로 변모한 불길을 보며 의아해 하는 순간, 그 불길은 엄청난 기세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콰르르르륵! 땅이 긁히고, 터지고, 키메라들이 순식간에 재로 변하고 터져나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세 인간의 주위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불줄기는, 분지의 끝에 다다라 점차 수그러들었다. 후우웅. 불길이 점차 사라지며 드러난 모습은 의외로 깨끗했다. 이미 모든 키메라들의 시체가 재로 변하다 못해 소멸되었기 때문에 끔찍한 참상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만약, 지나가던 다른 마법사가 있었다면 자신의 실력에 심각한 회의를 느꼈을 정도의 엄청난 위력이었다. 이반이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이 정도는 여기 있는 셋에게는 그다지 큰 일이 아니다. 이반이 없고 다른 둘만 있었다면 좀 힘들었겠지만 규모가 큰 공격에 유리한 이반이 있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 무차별적인 공격. 하지만 그 사실을 알기에 라젠은 더욱 의아해하고 있었다. "캬아아아아! 죽인다아아!" 그때 찢어질 듯한 괴성이 들리며 연기를 헤치고 인간의 모습과 비슷한 생김새의 키메라가 뛰쳐나왔다. 아마도 순식간에 몰살당한 키메라들의 지배자였던 듯했다. 자신의 부하들을 몰살시킨 것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표하고 있는 듯했다. "음?" 갑작스런 사태에 이반이 눈을 크게 떴다. 화염 마법을 뚫고 반격을? 자신의 공격을 받고 살아남았을 정도라면 엄청난 실력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속도도 빠르겠고. 이반은 마법사인 덕분에 그런 공격엔 꽤나 약했다. "크아아아악!" "이반!" 키메라의 높은 괴성과 함께 라젠이 다급한 목소리로 이반을 불렀다. 그 역시 마법사인 이반의 취약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이반이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최상급의 전사와, 그것도 이렇게 근접한 곳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는 목숨을 잃는 것은 바로 죽음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거리에서는 라젠이 공격을 대신 막아주기도 힘들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며 얼굴에 절망을 띄우는 둘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키메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바로 멀뚱히 서 있는 나르손에게 공격이 향하고 있었다. 나르손은 치료술사다. 느리기는 마법사만큼 느리고 공격력은 거의 제로라고 알려져 있는 치료술사. 그런 점에서 볼 때 공격을 감행하는 키메라의 입장에서는 이왕 죽을 것 한명이라도 죽이고 죽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당황해야할 라젠과 이반이었다. 하지만 그 둘은 키메라의 공격이 나르손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안도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흐음." 나르손은 흉흉한 기세로 빠르게 자신의 몸을 꿰뚫어오는 키메라의 날카로운 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푸화악! 그리고 살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메라는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음을 의심치 않으며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때 공격을 끝내고 팔을 뻗은 자세 그대로 멈춰선 키메라의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역시 내가 제일 약해 보인다 그거로군. 이래서 선입견은 무서운 거지." 키메라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는 순간, 나르손은 무심히 손을 휘둘렀다. 푸확! 그리고 수십, 수백의 바늘들이 키메라의 머리에 적중하며 그대로 터트려버렸다. 수백 개의 바늘들에 의해 머리가 잘게 부서져버린 키메라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갔고 나르손은 처음 키메라의 공격을 흘리는 동시에 복부를 꿰뚫었던 메스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품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작은 메스에는 롱소드의 검날에 맞먹을 크기의 붉은 검기가 생성되어 있었다. "아까운 바늘들만 날렸군." 나르손의 투덜거리는 말에 라젠과 이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르손은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다. "이상하군. 드래곤이 우리 실력을 모를 리도 없고. 천악하고나 동수를 이룰 키메라를 보내다니? 뭔가 함정이 있는 건가?" "글쎄……." 셋은 짧은 전투로 일어난 매캐한 연기와 흙먼지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고민에 빠졌다. 드래곤은 무슨 생각인가? "가능성이 있을지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들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저 키메라, 내가 마검을 들었을 때, 그러니까 제퍼슨과 맞먹는 괴물 같은 녀석이야. 그런 놈을 저렇게 쉽게… 거기다 수백의 키메라를 단 한번의 마법으로 아예 먼지로 만들어버리다니……. 저 세 분이라면 드래곤을 이길 수 있을지도." 내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확실히 저 세분은 최강이다. 드래곤이 아니라면 대적할 존재가 없을 정도로. "아." 순간 나는 몇몇 존재들을 떠올렸다. 마나르트. 최상급 마족인 마나르트는… 그때 변종 오거를 마기탄 하나로 죽여 버린 실력은? 주토가 수많은 뱀들에게 죽기 직전에 간단한 손놀림 하나로 그 뱀들을 잘게 썰어버린 바람의 이무기 성풍은? 그런 존재들이라면 저 세 분과 비슷할 수도 있을까? 아니, 라젠님들이 더 앞설 것 같군. 나는 페이린과 맨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페이린의 말에 따르면… 마나르트와 같은 마족 셋만 있으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던가?. 지금의 페이린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저 세 분도 마나르트보다 강하다고 보인다. 가능성이… 음? "이상한데?" "예?" 의아함이 담긴 내 목소리에 꽤나 즐거워하던 정수가 얼굴을 약간 굳히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스크린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저 세 분의 실력을 대충 짐작했었는데, 드래곤이 그걸 못할 리가 없어. 그런데 왜 저렇게 소모적인, 저 세분에겐 운동거리도 안되는 키메라들을 앞으로 내보낸 거지?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고타와 데스킹 자식의 싸움도 갑자기 끊기고 라젠님들이 나왔고." "그러고 보니……." 정수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뭐지? 어째서 저런 쓸데없는 짓을……. "어라?" 그때 스크린의 화면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약간 경사진 지형. 폭발에 박살난 나무들과 움푹 패어진 땅. 저긴……. "고타와 데스 킹이 싸우던?" 이젠 다시 저곳이 나오는 건가? 고타와 데스 킹이 싸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라젠님들이 화면에 나오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 그리고 아까의 충격 정도라면 쉽게 몸을 추스르고 다시 싸움을 벌일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다시 전투가 시작되지는 않았다는 거군. 음? 잠깐. "방송을 하고 있는 거군요." 정수가 사나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방송. 그렇군. 우리에게 자신의 위력을 보여 주겠다 그건가? 우리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4인이 자신과 싸우는 모습을 차례차례 보여주고 그 들을 꺾어서 반항할 생각을 못하게 하겠다는 건가? 그래서 라젠님들과의 싸움을 잠시 지연시킨 거군. 고타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야하니까. "젠장." "시작됩니다." 그리고 스크린에 피를 토한 듯 입가에 약간의 피를 묻히고 있는 고타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쪽에서는 데스 킹이 검은 마기를 뿜어내며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자식, 피해가 거의 없어. "위험해……." 그리고 고타와 데스 킹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허억, 허억." 싸움이 다시 시작된 지 겨우 5분. 고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방금까지 그의 몸이 서 있던 커다란 바위 위에 데스 킹의 마기의 검이 내리박혔다. 그리고 사방으로 바위 조각들이 튀어 올랐다. "크읏! 관세음보살!" 고타는 비명과도 같이 불경을 외며 염주를 강하게 휘둘렀다.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손에서 휘둘리는 염주의 모습은 채찍보다 훨씬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이잉! 콰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강력한 파괴음이 울려 퍼졌다. 그만큼 빠른 공격이었지만 이미 데스 킹은 그 공격을 뒤로 하고 고타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있었다. 2m를 꽤 넘는 거대한 크기의 데스 킹이 머리 위로 뛰어오르자 고타의 얼굴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허허." 갑옷의 크기인지 실제 몸의 크기인지는 모르지만 저런 육중한 몸이 하늘에 뜨자 해가 가려져 순간적으로 어둠이 찾아왔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타오르는 어둠을 볼 때 몸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크으윽!" 그리고 고타는 순간 길게 타오르며 자신을 덮쳐오는 마기의 대검에 얻어맞아 뒤로 튕겨져 나갔다. 엄청난 충격에 기혈이 뒤틀렸다.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중심을 잡은 고타는 급히 사방으로 염주를 휘두르며 그 반동으로 더 뒤로 물러나 바닥에 착지했다. 입가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흐읍!" 핑! 염주들이 순간적으로 쫙 펴지며 긴 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일직선으로 뻗어나가 강렬한 검기의 모습을 이룬 마나들이 낮게 울렸다. '생각보다 너무 강하군.' 고타는 자신에게 다시 달려드는 데스 킹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전 세한과 싸울 때 동수를 이뤘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드래곤이 준 힘인가?' 고민하던 고타는 순간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빛냈다. 자신에게 강한 상대와의 싸움은 즐거움이며 살아가는 이유였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경지에 이르러 보는 것. "크하하하하!" 데스 킹이 앞으로 쇄도하며 대검을 내려찍어왔다. 그리고 순간 고타의 몸이 물 흐르듯 움직여 대검을 공격에서 살짝 비켜나며 염주로 아래에서 공격을 맞받았다. 마치 데스 킹의 공격을 위로 쳐내려는 듯이. 카드득! 그리고 강력한 힘에 이기지 못한 듯 검처럼 곧게 서 있던 염주가 축 늘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염주가 마기의 검을 빙 감았다. "음?" 자신의 검에 감겨든 염주를 느낀 데스 킹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움직임을 바꾸거나 할 수는 없었고 대검은 그대로 땅으로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대검에 감긴 염주 덕분에 상반신이 아래로 끌려간 고타는 그대로 하체를 위로 띄우며 그 반동을 이용해 데스 킹의 턱을 걷어찼다. 투칵! 그리고 강한 기가 데스 킹의 투구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공격한 곳은 턱이지만 기가 터져 나온 것은 투구의 뒤편. 공격이 성공하자 고타는 급히 염주를 쥔 팔에 힘을 주었다. 그그그극! 대검과 땅 사이에 끼어있던 염주가 심한 마찰음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마나, 기가 강하게 모여들며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완전히 노출된 데스 킹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콰아앙! 그리고 강한 폭발음과 함께 대검까지 손에서 놓친 데스 킹의 거구가 뒤로 날아갔다. "헉, 헉." 급하게 마나를 움직인 덕분에 꽤나 큰 내상을 입은 고타는 숨을 헐떡이다가 이를 악물며 자신의 옆에 남아있는 마기의 검을 후려쳤다. 마기로 이루어진 대검이 산산이 깨어지며 제각각 타올라 사라졌다. "젠장이로세. 금속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아니라 부순 보람이 없으니. 부처시여……." 고타는 상당히 파리해진 안색으로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때 데스 킹이 날아간 곳에서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뻗어 나왔다. "흡!" 고타는 놀라 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 물체는 어느새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붉은 선혈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고타는 신음을 흘릴 새도 없이 급히 뒤로 몸을 날려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진하게 깔린 검은 마기 사이에서 데스 킹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 네놈……." 투구 사이로 보이는 심연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꽤나 격한 감정이 떠오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두둑. 데스 킹의 가슴 부분, 고타의 공격에 적중당한 부분이 깨어져나가 있었다. 깨어진 갑옷 사이로 강한 마기가 쉴 새 없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화아아.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갑옷 조각들이 떨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신비롭지만 동시에 공포감을 주는 광경이었다. "후후, 그 패션도 그리 나쁘지는 않네만." 고타가 허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데스 킹은 그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검은 마기가 타오르며 기형의 대검으로 변했고 그것을 손에 쥔 데스 킹이 찰나의 순간 고타의 앞으로 쇄도했다. 고타의 눈에는 놀라는 기색이나 절망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허탈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으며 염주를 휘두를 뿐이었다. "크하아아아!" 데스 킹은 분노에 찬 괴성을 질러대며 왼손으로 고타의 염주를 그대로 움켜쥐었다. 염주에서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지만 이미 염주에 담긴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기에 건틀릿 부분의 일부분만이 깨져나갔고 데스 킹은 염주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기의 검이 고타의 왼 어깨를 꿰뚫었다. "크으윽!" 고타는 온몸에 마기가 퍼져나가며 오는 고통에 정신을 잃을 지경에 몰리면서도 발을 들어 데스 킹에게 공격을 날렸다. "크큭!" 지금까지에 비해 너무나도 느린 그 공격에 데스 킹의 눈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마나도 거의 담겨있지 않은 공격이었기에 공격을 무시하며 염주에 강하게 마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됐다!' 그런 데스 킹의 행동에 고타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날린 발차기로 데스 킹의 복부 부분을 가격했다. 갑옷이 깨어진 부분의 바로 아랫부분이었다. "음?" 그 공격이 적중하는 순간, 데스 킹은 갑작스런 불안감에 눈을 크게 떴다. 고타의 공격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이후의 행동이 이상했다. 공격이 끝난 시점에서 가만히, 공격이 성공한 채로 굳은 듯이 서 있었다. 그의 몸 전체에서 하얀 마나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이놈!" 그 모습에 고타의 의도를 알아차린 데스 킹은 경악하며 급히 뒤로 물러서려했다. 하지만 이미 고타의 두 손이 어깨에 박힌 대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고 그 때문에 잠시 멈칫한 데스 킹은 검을 놓으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동시에 고타의 발이 닿아있던 가슴에서 엄청난 충격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다. 쿠우우웅! "크아아아악!" 고타의 온몸에서 하얀 마나가 강하게 뿜어져 나오며 데스 킹의 몸으로 마구 뻗어나갔다. 여분의 힘은 생각지도 않은 채 모든 힘을 끌어 모아 날린 공격이었다. 고타의 모든 힘이 담긴 그 공격은 데스 킹의 전신에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데스 킹은 지금까지 한번도 낸 적이 없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엄청난 충격에 염주를 쥐고 있던 왼팔이 깨어져 떨어진 상태였다. 쿠앙. 뒤쪽의 바위에 강하게 충돌한 데스 킹은 곳곳에서 갑옷의 조각들을 흘리며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깨어진 갑옷 사이로 점차 죽어가는 마기의 불길이 보이고 있었다. "크학, 으으……."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틴 고타는 그런 데스 킹의 모습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성공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쏟아 부은 공격. 덕분에 지금 몸 상태는 지나가던 오크가 한번 툭 치기만 해도 저승행 티켓을 끊어야 될 정도로 최악이었지만. "크으, 젠장이로세……." 고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근처의 나무 하나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염주를 들지 않은 손으로 피에 젖은 옷을 찢어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무기는 놓아선 안 된다. 부우욱. 워낙 펑퍼짐하고 긴 옷이었기에 상당히 긴 길이로 찢어진 천을 어깨에 감은 고타는 숨을 고르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 하지만 다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불길함이 느껴졌다. 죽음. 위험. 스으으으. 그리고 갑자기 느껴지는 기의 흐름에 고타는 안색을 굳히며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염주를 바라보았다. 염주의 끝. 아직 남아있다. 데스 킹의 왼팔, 건틀릿 부분. 안에 넘실대는 마기가 보인다. 그리고 염주에 끊임없이 마기가 집중된다. 고타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끝이로군." 투확! 염주가 그대로 터져나가며 염주의 알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마기를 머금어 상상하기 힘들 정도 의 관통력을 가지고 있었다. 푸화악! 그리고 고타는 수 개의 염주알들이 자신의 몸을 꿰뚫는 것을 느끼고는 몸의 지배권과 정신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드래곤을 향해 다가간 세 사람이 드래곤을 처치하기를, 아래에 기절해 있는 천악이 무사하기를,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을 나무라던 장백사의 주지 스님의 잔소리를 듣고 싶다는……. 스으으으으. 고타가 바닥에 쓰러지자 그 반대편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데스 킹의 몸에서 마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데스 킹의 형체를 이루는 갑옷의 투구 안으로, 불길하게 불타오르는 눈동자가 싸늘한 안광을 빛냈다. "아, 안돼……."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모습. 게임 속에서의 간단한 죽음의 모습이 아니다. 현실에서의, 실제로의 죽음과 직결된 문제. 눈앞에서 살인이 일어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흐흑, 흑……."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흐느낌. 남자들도 처참한 고타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지나간 기억들이 떠올랐다. 처음 만난 곳이 마르코 수림이라는 곳이었지. 다크엘프들이 몰살당하고 그 충격으로 그때까지는 평범한 사람과 별 차이가 없던 뇌가 약간의 변이를 일으킨 덕분에 강제로그아웃을 당하고 다시 로그인 했을 때. 레이디스 길드의 전령인 리카와 함께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무심. 아버지와 강 사범님에 관한 얘기. 넘볼 수 없을 것 같던 강함. 그런데… 쓰러졌다. 저 자식에게. 마신의 신전에서 베르시나를 죽였던, 그 녀석에게. 네놈, 최악의 악연이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다고 봐야할지도. 내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몸을 떨며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살기. "…죽여 버리겠어." "세, 세한!" 정수의 외침이 귓가를 때렸다. 세한? 현실의 나로 보이지 않는 다는 거로군.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라젠님들이 드래곤을 쓰러뜨리면, 섀도우 월드로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은 나다." 충분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고타의 시신… 젠장! 고타의 몸은 백두산에 있는 건가? "가사 상태, 거의 뇌사 상태에 가까운 상태……." 섀도우 월드에서 죽임을 당하면 현실에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드래곤을 죽이면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 "……." 스크린에는 한 분지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충격을 받은 듯한 기색의 세 사내가 서 있었다. "라젠, 설마……." 이반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한껏 굳어있었고 그것은 다른 둘도 마찬가지였다. 충격을 받은 듯 분지의 아래쪽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젠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고타의 기가… 완전히 사라졌어." 라젠이 확인해 주듯 말하자 다른 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도, 도대체 어떻게… 고타의 실력은 우리를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나르손의 말에 라젠은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그 상대가 그만큼 강했다는… 거겠지. 그리고… 저 우리의 상대가 그만큼 강하다는 거겠고." 라젠은 말을 마치는 순간 눈을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분지의 반대편에서 붉은 머리의 여자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 있었다. 길고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며 신비스러운 광경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라젠들이 떠올리는 감정은, 분노였다. "고타의 복수는……." "우리가 드래곤을 처치하면 간단하겠지."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믿을 수 없군. 그 고타가… 후, 어차피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온 길이었지. 우리도……." 나르손은 왠지 모를 차분함이 담긴 얼굴로 자신이 매고 있던 주머니들을 풀었다. 그 속에는 수많은, 평소에는 무기로 쓰이기 힘들지만, 그의 손에 들리면 최고의 살인기구로 변하는 그런 것들이 무수히 많이 들어있었다. 나르손은 치료술사인 동시에 그 치료대상을 철저하게 지옥으로 몰아넣는 기술까지도 연구한 죽음의 인도자이다. "아무래도 드래곤의 비늘 정도라면 메스 따위로는 택도 없을 텐데……. 눈쪽을 공격하던지 아니면 숫자로 밀어붙여야 하는 건가?" 나르손은 검은 빛을 띄는 주머니에서 검은 색의 커다란 바늘을 꺼내 손에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주머니들의 입구에 뚫려있는 구멍에 줄을 연결해 꿰고는 집어 들었다. 주머니들이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라젠은 묵묵히 등에 매고 있던 도구들을 풀어 내렸다. 일단 가져오기는 했지만 이런 함정 제작용 도구들은 드래곤 정도의 덩치와 싸울 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도구들은 한쪽에 모아 던져놓고는 왼손에 한 막대기를 들었다. 막대기의 길이가 점점 늘어나 라젠의 키에 맞먹을 정도로 늘어났다. 약간 휜 모양. 백색의… 송곳니. 백아(白牙)라 불리는, 원래는 무기가 아닌 트랩퍼 보조용 아이템이다. 하지만 트랩퍼들 사이에서는 물론 다른 직업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최상급의 아이템으로 치는 무기다. 보통 함정하면 떠오르는, 바닥이 꺼지며 그 아래에서 예기를 번뜩이는 날카로운 창들. 무한대로 똑같은 모양의 송곳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아이템은 그 창과 같은 역할을 하는 아이템이다. 본래 아이템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하며 복사품의 강도도 뛰어난 편이다. 라젠, 이반, 나르손은 좋은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워낙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었지만. 하지만 드래곤과의 싸움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했다. 나르손이 입고 있는 로브도 마법 방어력은 최상이었다. 크오오오오오! 그때 산을 울리는 거대한 포효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지의 저 끝에서 환한 빛에 둘러싸인 어떤 존재가 점점 거대한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작…이군." 나르손의 중얼거림을 이반이 받았다. "라젠, 드래곤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자네의 공격이네. 나와 나르손이 어떻게든 엄호를 할 테니……." 라젠은 묵묵히 왼손에 들린 백아를 휘둘러 송곳니의 날카로운 부분이 아래로 가게 잡고는 오른손에서 은사를 풀어 내렸다. 그리고 붉게 빛나는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고 셋은 앞으로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고오오오오. 순간, 사방이 조용해졌다. 지독한 정적.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지독하도록 고요한 자연의 침묵에 셋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드래곤을 자세히 살피던 이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고오오오오! 드래곤의 입가에 붉은 기운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기가 사방을 흔들고 있었다. 드래곤 최강의 공격, 브레스. 설마 싸움의 시작부터 하루에 단 3번 밖에 쓸 수 없는 브레스를 사용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셋은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은 라젠이 고함을 질렀다. "피해!" 그 순간, 강렬한 붉은 기운이 라젠들을 덮쳐들어갔다. 콰아아, 콰드드드드득! 브레스는 분지의 한 부분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지나갔다. 브레스가 지나간 곳은 마치 그림의 일부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이 브레스가 지나간 곳만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분지의 일부를 뚫고 지나간 브레스가 저 멀리서 산 하나와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발. 붉은 기운이 미친 듯이 솟아오르며 그림자의 땅에서는 산 하나가 그대로 사라졌다. 엄청난 폭발의 여파가 적색 산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보통 사람, 아니 어지간한 고수라고 해도 공포감에 움직임을 멈출 만한 광경이었다. 현실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몸이 굳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저런 드래곤과 혼자 맞붙어 싸운 전적이 있는 현진에게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현진도 자신이 싸울 때와는 차원이 다른 브레스의 위력에 경악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카아아아! 브레스를 모두 퍼부은 레드 드래곤이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릴 듯한 붉은 비늘들을 움직이며 크게 포효했다. 엄청난 살기, 드래곤 피어가 섞인 포효는 다른 차원에서 싸움을 지켜보는 자들마저 섬짓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드래곤과 대결하고 있는 이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는 듯했다. 위잉! 순간 이동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 덕분에 순식간에 그 자리에 생겨난 듯한 모습. 어느새 드래곤의 머리 위에 뛰어오른 라젠이었다. 그는 허공에서 백아를 두 손으로 역수로 쥐어 드래곤의 머리를 내려찍어가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우! 백아가 강하게 울리며 푸른 마나를 미친 듯이 사방으로 퍼트리고 있었다. 휘익! 그리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라젠의 공격이 아래로 뻗어 내려갔다. 아래로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 라젠이 백아를 드래곤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찍었다. 그리고 순간 드래곤의 포효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스아아아! 백아의 바로 아래에 붉은 바리어가 생성되었다. 드래곤의 몸의 절반을 가릴 정도로 넓고 강력한 바리어와 라젠의 백아가 충돌했다. 콰드드드드득! 섬뜻한 마찰음과 함께 라젠은 허공에 멈춰선 채 백아로 바리어를 점점 깨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나타나있지 않았다. 완벽한 평정심. 하지만 그의 공격은 막혔다. 드래곤이 라젠을 향해 고개를 들며 입을 쫙 벌렸다. 날카롭고 거대한 드래곤의 이빨들이 들어나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스윽. 그때 이번에는 드래곤의 머리 아래쪽, 드래곤의 가슴 부분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흐릿한 모습이 완전히 정지되는 순간, 그는 왼 어깨에 메고 있던 줄에서 한 주머니를 뜯어내 안에 든 것을 허공에 뿌렸다. 차르르륵. 작은 쇠들의 마찰음과 함께 허공에 사람의 손가락만한 크기의 수많은 바늘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바늘들은 중력을 무시하듯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구르고' 있었다. 나르손은 오른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그리고 순간 바늘들에 붉은 마나가 한껏 머금어 지며 수백의 바늘들이 드래곤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멀리서 보면 수백의 벌레들이 마구 몰려가는 듯한 모습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다만 그 작은 것들이 엄청난 마나를 머금고 있다는 것이 다르겠지만. 하지만 그의 공격은 드래곤이 라젠을 향해 향하던 고개를 아래로 돌리는 순간 무로 돌아갔다. 화르륵. 바늘들의 진로 바로 앞에 강력한 불길이 생겨나며 바늘들과 충돌을 벌였다. 사방으로 불꽃이 비산하며 끊임없이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지만 드래곤에게 피해를 주기에는 턱없다. '실패군.' '역시 드래곤이라 그건가.' 라젠과 나르손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드래곤의 눈이 붉은 빛으로 타올랐다. 그리고 주위로 강력한 화기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화아악! 라젠과 나르손은 자신들의 앞쪽에서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그 불길은 강하게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꽃을 내뿜었다. "치잇!" "큭!" 라젠과 나르손은 동시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마법사가 아닌 이상 이런 상황에서 몸을 추스르고 바닥에 무사히 착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나르손의 경우에는 바로 분지 쪽으로 떨어져 내려 온몸이 터져죽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비잉. 하지만 둘이 날려가는 방향에 푸른 바리어들이 나타났다. 라 젠과 나르손은 익숙하다는 듯이 그 바리어를 밟고 반동을 이용해 원하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비잉. 그리고 둘이 각각 향하는 방향마다 어김없이 푸른 바리어들이 나타났고 둘은 허공에서 마치 지상처럼 움직이며 드래곤의 사방으로 움직였다. '대단한데. 마법의 대부분을 깨우친 솜씨가 아니라면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방향을 정확히 잡아내 완벽한 타이밍으로 바리어를 생성하기는… 거기다 두 명.' 세르페이린, 레드 드래곤은 속으로 잠시 감탄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위쪽에서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느낀 대로 꽤 높이 올라간 허공에 공중에 편하게 떠 있는 이반이 지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지팡이에서 푸른 기운이 마구 흘러나오는 것이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있었다. 씨익. 드래곤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이반은 미소를 지어주며 지팡이에서 왼손을 놓고는 아래로 내뻗었다. "받아봐라. 뼈를 얼리는 한기여." 그의 왼손에서 시작된 푸른 선들이 순식간에 마법진을 이뤘다. 그리고 그 마법진에서 수 개의 얼음의 창들이 솟아나며 드래곤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대검과 맞먹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고 엄청난 위력의 마나가 담겨있는 마법이었다. 번뜩. 하지만 드래곤의 깊고 붉은 눈동자가 한번 빛나는 순간, 얼음의 창들은 순식간에 나타난 화염과 충돌하며 산산이 깨져나갔다. "휘익." 전투시 무표정을 유지하던 라젠이나 나르손과는 달리 이반은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팡이를 높게 쳐들었다. 크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레드 드래곤의 포효소리가 들려오며 아래에서 불의 회오리가 치솟아 올랐다. 엄청난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회오리치는 불길을 보며 이반은 쓰게 웃었다. "하압!" 강렬한 기합. 하지만 그의 주변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반이 자신의 마법에 대한 방어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드래곤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눈을 흘깃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비잉, 비이잉! 라젠과 나르손이 뛰어다니던 곳에 엄청난 수의 바리어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마치 때에 맞춰 생성되는 바리어들을 밟고 뛰어다니고 있는 둘에게 이젠 알아서 밟고 다니라고 외치는 듯했다. -건방진! 세르페이린은 분노에 찬 고함과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길에 휩싸이기 직전의 이반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불길에 휩싸이기 직전, 그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휘잉. 그리고 이반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세르페이린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빛냈다. "헙!"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던 이반은 숨을 들이켰다. 텔레포트로 몸을 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동지점 바로 앞에서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드래곤의 붉은 꼬리를 어떻게 봐야하나? "블링크!" 이반은 다급히 외쳤다. 평소 시동어도 없이 머릿속의 계산만으로도 마법을 사용하는 그였지만 지금은 너무도 급박한 사항이라 좌표 설정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급히 마법을 시전 했다. 덕분에 드래곤의 거대한 꼬리는 허공을 갈랐다. 후웅. 블링크 마법이 끝나고 이반은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단거리를 이동하는 블링크 마법이기에 분명 드래곤의 근처일 것이었다. 캬아아! 그때 바로 머리 위에서 드래곤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거대한 입을 벌리고 그대로 물어뜯어오는 드래곤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젠장! 날 뜯어 먹겠다? 후회하게 해주지!' 이반이 죽음을 직감하며 동귀어진을 위해 마나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그 순간, 한 인형이 드래곤의 긴 목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이반을 덮쳐가던 드래곤의 머리가 덜컹 멈췄다. 드래곤의 목에 감긴 수많은 은사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반은 볼 것도 없이 텔레포트를 이용해 드래곤과 꽤 떨어진 허공으로 이동했다. 레드 드래곤, 세르페이린은 강하게 살기를 내뿜으며 옆을 바라보았다. 라젠이 허공을 날아가며 은사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팽팽. 순식간에 드래곤의 목에 감겨들어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했던 은사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순간 강한 마나가 주입된 은사는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카오오오오! 목에 감겨있던 은사들이 엄청난 폭발들을 일으키자 드래곤은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확실히 효과가 있는 공격이었다. 타앗! 그리고 어느새 드래곤의 머리 바로 아래까지 뛰어오른 나르손이 다시 한번 주머니 하나를 뜯어내 허공에 뿌렸다. 촤르륵. 허공에 비산하는 수많은 수술용 메스들. 나르손은 아까와는 다르게 양 손을 앞으로 뻗으며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아압!" 수백의 메스들 전부에 붉은 검기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몇 초 만에 모든 메스에 롱소드의 검날 길이와 맞먹을 정도의 붉은 검기들이 생성되었다. 핏빛처럼 붉은 검기. 피이이잉! 그리고 그 메스들은 나르손이 크게 손을 휘두르자 드래곤의 머리를 노리고 쏜살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드래곤의 눈이 흔들렸다. 푸화아악! 메스들이 드래곤의 머리에 적중되며 붉은 마나들이 사방으로 터져 올랐다. "허억, 허억." 상당한 마나를 쏟아 부은 나르손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바리어들을 밟고 드래곤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마나의 폭발 사이로 드래곤의 머리가 드러났다. 크으으. 신음소리와도 같은 포효. 드래곤의 머리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드래곤의 비늘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비늘 속은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 온 힘을 다한 공격으로 비늘만 뚫는다면 피해는 분명히 있다. "흐읍!" 그리고 드래곤의 목에 감았던 은사들의 끊어진 부분을 회수한 라젠이 바리어 하나를 밟고 날아오르며 백아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백아가 푸른빛으로 강하게 물들었다. 다시없을 정도로 푸르게, 시리게 빛나는 백아의 모습은 신이 사용하는 무기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드래곤이 머리를 약간 늘어뜨리며 비틀거리는 순간, 라젠의 팔이 크게 휘둘러지며 백아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투콰콰콰콰! 백아가 지나가는 뒤로 푸른 마나의 폭발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는 거대한 송곳니와 그 뒤로 터져 오르는 푸른 폭발. 엄청난 위력을 예고하고 있었다. "크하하!" 그리고 라젠이 백아를 던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반의 지팡이가 푸르게 빛났다. 그리고 지팡이의 주위로 강력한 마나와 화기들이 몰려들었다. "불태워라!" 이반의 외침과 함께 그의 주위에서 화염의 소용돌이들이 피어나며 드래곤을 향해 날아갔다.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푸른 폭발과 함께 드래곤을 향해 날아가는 백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화염의 소용돌이들. 그 가운데 피에 젖은 머리를 힘겹게 들어올리는, 아름다운 붉은 비늘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레드 드래곤의 모습. 백아와 화염의 소용돌이들은 정확하게 드래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드래곤의 붉은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길 수 있어!" "와아아아!" "가라아!" 사방에서 환희에 찬 외침들이 들려왔다. 피투성이의 드래곤에게 날아가는 푸른 폭발의 송곳니와 화염의 소용돌이. 한눈에 봐도 엄청난 위력의 공격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오오옷!" 환호하며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는 위리안은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굳이 해석하려 들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나는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후후, 정말, 우린 우물안 개구리였나. 라젠님들이 저렇게 강하실 줄……. "음?" 나는 순간 몸을 흠칫하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세한?" 내 옆에서 낮게 웃음을 흘리며 스크린을 주시하던 정수가 입가에서 미소를 서서히 지우며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돼." "무슨……." "눈이……." 내 중얼거림에 정수가 급히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역시 순간 창백하게 질리며 눈을 크게 떴다. 눈. 페이린, 드래곤의 눈이… 전혀 죽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당황한 듯 보이지만. 깊게 숨겨진 살기와……. 뭔가 있어! "안돼!" 나는 무의식중에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스크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약간의 혼란스러움. 스크린 속의 광경이 현실이 된 듯한, 내가 저 전투의 현장에 직접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눈이 붉게 빛났다. '끝이다!' 라젠과 이반, 나르손의 머릿속에 동시에 스쳐지나간 생각이었다. 절대 피할 수 없다. 이미 비늘이 깨어진 마당에 저런 공격을 맞으면, 적어도 치명타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때 사방에서, 분지 전체에 갑작스런 화기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셋은 주위에서 약간씩 불꽃이 튀기 시작하자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머릿속을 강타하는 드래곤의 음성이 들려왔다. -건방지군. 감히 레드 드래곤에게 화염 마법이라. 콰아아아아! "브레스!" 라젠은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옆으로 몸을 날렸다. 붉은 기운의 응집체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엄청난 열기가 느껴지자 라젠은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리다 뭔가를 발견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휘리릭, 푹. 백아였다. 아직 약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는 백아가 땅으로 떨어져 박혔다. 브레스에 밀려나 튕겨나갔으리라. '순간적으로 뿜어낸 브레스에… 온 힘을 실은 공격이? 역시 드래곤 최강의 공격…….' 라젠은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얼굴을 굳히며 몸을 긴장시켰다. 사방에서, 불길이 이고 있었다. 분지와 그 허공, 드래곤과 세 사내가 있는 모든 지역이 강한 불길에 휩싸였다. 아무런 탈 물체도 없는 허공이 불타오른다. 강렬하게. "크으읏!" 이반은 이리저리 쏟아져 다니는 불길을 피하며 신음을 흘렸다.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위력의 화염 마법이었다. 순간적으로 불을 일으키는 것도 아닌, 저 넓은 분지를 포함한 공중까지 온통 불바다를 만들어 버리다니……. "쳇, 그래도 라젠이나 내 공격이 적중했다면 꽤 피해가 있을 텐데?" 강한 불길은 시야를 극도로 제한하고 있었다. 이반은 불길 너머로 드래곤의 모습을 살피려 노력했다. 드래곤이 움직이는 느낌은 없다. 그 거대한 몸체가 움직이면 당연히 반동이 있을 텐데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혹시 라젠과 자신이 날린 공격에 치명상을 입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인하고 싶어도 확인할 길이 없다. "후우, 마나를 너무 급격하게 끌어올려 날린 공격이라 마나 회복이 좀 더딘데. 걱정이군." "그거 다행이네요." 투덜거리듯 중얼거리던 이반은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미성에 경악했다. 드래곤!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이반의 바로 등 뒤에 떠 있었다. '도, 도대체 어느새!' "크읏!" 이반이 급히 몸을 날리는 순간, 드래곤의 좌수가 그의 등을 꿰뚫었다. "커헉!" 이반의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드래곤의 잔인한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죽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단어였다. 계속 드래곤의 모습으로 싸울 거라 예상한 것이, 치명적인……. "이반!" 그때 불길을 꿰뚫고 나르손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그의 얼굴에 경악과 다급함, 분노가 뒤섞여 떠올라 있었다. 나르손의 그런 얼굴을 보며 이반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나르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스스로 죽으러 오는군요."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레드 드래곤, 세르페이린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푸확.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나르손의 눈에 살광이 어렸다. 심장을 터뜨린 것이다. 하지만 이반은 아직 숨은 끊어지지 않은 듯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나르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르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들린 메스에서 붉은 검기가 생성되었다. "후후, 소용 없… 음?"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던 페이린은 갑작스런 마나의 흐름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 심장이 파괴된 상태에서… 동귀어진?" 사방에서 마나가 마구 몰려들며 페이린의 온몸을 압박해 들어왔다. 드래곤의 무한에 가까운 마나에 비하면 적은 양이었지만 이반의 모든 마나가 담겨 있었기에 쉽게 떨쳐내기도 힘든, 그런 마나의 속박이었다. 그리고 나르손이 이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반은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 마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나르손의 손에 들린 메스에서 생성된 검기가 훨씬 길어졌고 강해져갔다. "흐아아아!" 푸욱! 나르손은 붉은 검기를 그대로 이반의 몸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검기는 이반의 몸을 뚫고 드래곤, 페이린의 가슴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갔다. 드래곤의 눈이 흔들렸다. 푸확! 그리고 붉은 검기가 페이린의 가슴을 꿰뚫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 드래곤이라도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이상,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드래곤 하트가 따로 있다고 해도 인간의 상태에서 심장이 뚫린다면……. "이반……." 나르손은 입가에 간신히 약한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축 늘어뜨리는 이반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위이잉. 그때 붉은 검기에 가슴을 찔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던 페이린, 드래곤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 광경에 나르손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 말도 안돼! 도대체 어느 새에!" 위이잉! 순간 머리 위쪽에서 마나의 흐름을 느낀 나르손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블링크를 사용한 듯 붉은 머리의 여자, 드래곤이 왼팔에서 피를 흘리며 나르손과 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공격은 성공한 셈이었지만 저 정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죽여 드리죠." 페이린은 성한 오른팔을 뻗어 나르손과 이반의 머리 위를 겨눴다. 나르손의 눈에 절망이 떠올랐다. 이반의 시신과 붙어 있는 바람에 바로 뒤로 빠지기도 어렵다. '뭐, 친우와 함께 죽는데, 불만은 없지.' 나르손은 숨이 끊어져 축 늘어져 있는 이반의 몸을 추스르며 날카로운 눈으로 페이린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마지막까지 당당하겠다는 듯. 우우우. 페이린의 손에 붉은 기운이 급속도로 모여들었다. 마치 브레스와도 같은 공격이었다. "하아아앗!" 그때 큰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불길을 뚫고 푸르게 타오르는 백아가 날아들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페이린은 기를 모으던 손을 급히 들어 백아를 향했다. 투확! 붉은 기운이 강하게 쏘아져나가며 백아와 충돌했다. 그리고 백아가 푸른 스파크와 함께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너무도 쉽게 파쇄되는 공격에 페이린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기습을 하면서 큰 기합 소리를 낸 것도 그렇고 백아가 본체가 아닌 복제품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나르손을 구하기 위해 행한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불길을 뚫고 라젠이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진짜 백아가 푸른 스파크를 강렬하게 일으키고 있었다. 라젠은 드래곤을 향해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동시에 나르손과 이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축 늘어진 이반을 안고 바리어로 힘겹게 뛰어내리는 나르손의 모습을 확인한 라젠은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강한 살기가 주위를 뒤덮었다. "반드시 쓰러뜨린다." 차분하지만 살기 섞인 그의 중얼거림에 반응하듯 백아에서 푸른 불꽃이 한결 강하게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른손에서 점점 풀어내려진 은사들이 백아에 감겨들며 검푸른 빛을 내뿜었다. 순식간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라젠을 보며 드래곤은 침착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확실히 강력한 공격이긴 하지만 못 피할 것도 없다. 받아친다고 해도 순수한 마나, 힘만으로는 자신이 조금 우위였다. 다만 라젠이 이런 근접 전투에 관해선 더 뛰어난 달인이라는 것이 걸릴 뿐. 그것도 마법으로 봉쇄하면……. 덥썩.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페이린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이 흔들거리는 동시에 라젠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급히 입을 열어 소리쳤다. "나르손!" 드래곤의 등 뒤에서 양 팔로 드래곤을 붙잡은 나르손이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었다. 그 때문에 드래곤이 쉽게 눈치채지 못한 것이기도 했지만. 라젠의 공격에 담긴 마나가 사방을 울리고 있었고, 나르손은 무기도 들지 않았기에 살기도, 공격시의 마나 유동도 거의 없었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페이린이 놀라 외쳤다. 급히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나르손이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일어나는 붉은 마나. 강력한 마나가 페이린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마나를 개방한 덕분에 드래곤인 그녀도 빨리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아까 이반을 죽였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라젠과 나르손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그리고 라젠은 아까의 나르손과 똑같은 결단을 내렸다. 드래곤만 죽이면, 나르손과 이반도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삶에 그렇게 큰 미련은 없다. 다만……. '현실에서 혹시라도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던 가족들이…….' 라젠은 생각을 떨쳐버리며 백아를 뒤로 당겼다. 이런 중요한 공격전에 흐트러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빠른 속도로 드래곤과 나르손의 앞으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잇!" 드래곤,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르손은 그녀의 마나에 밀려 자신에게 역류되는 마나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마나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현재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인간 상태에서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에 버금갈 정도의 마나였다. 그리고 바로 앞으로 다가온 라젠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백아를 강하게 찔러 넣었다. 푸욱! 확실하다. 상대의 복부를 파고든 백아에서 마나가 길길이 날뛰며 적의 온몸을 휘돌았고, 은사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내부를 파괴했다. 라젠은 드래곤의 복부에 틀어박힌 백아를 바라보며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다시 뜨여진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드래곤과 그 뒤로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의 나르손이 보였다. 백아는 나르손의 복부도 함께 꿰뚫었다. 그를 생각해 마나를 줄인다면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없다. 최선을 다한 공격……. '끝이다.' 라젠의 무표정 속에 떠오른 생각이었고,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짓는 나르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드래곤 하트는 부수지 못했지만 이 상태만 해도 중태, 거기에……. 휘리릭! 라젠은 오른손을 움직여 백아에 감겨있던 은사들을 끊어내고는 새로운 은사를 풀어냈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 그리고 은사들이 움직이며 떨리는 눈동자의 드래곤의 목에 휘감겨 들었다. 당기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다. 라젠은 은사에 강하게 마나를 불어넣으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번뜩. 그때 드래곤의 눈이 미친 듯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확연히 드러나는 붉은 기운이, 인간의 눈에서 드래곤의 눈으로 돌아온 페이린의 눈에서 타올랐다. 찰나. 라젠의 은사가 목에 감기기 직전, 강한 마나가 끌어 올랐다. "흡!" 나르손이 비명과도 같이 헛바람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드래곤의 기가 증가한다. 수배로 증가해 가는 마나. 분명 한계치의 마나를 사용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드래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하면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줄어든 다는 것은 상식……. '무리를 하고 있어. 적정 마나 수치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건가?!' 나르손이 속으로 고함을 지르는 순간, 드래곤의 몸에서 강한 마나가 터져나갔다. 쿠아아아아아! 순식간에 은사들이 끊겨버리고, 나르손이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튕겨져 날아갔다. 백아가 기이하게 뒤틀리며 떨어져나간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마나 폭발. 사방에서 타오르던 불길마저 그 엄청난 마나에 휩싸여 순식간에 소멸되어 갔다. "크허억!" 그리고 마나의 폭발을 온몸으로 받게 된 라젠은 온몸에 엄청난 타격을 입고는 나가떨어졌다. 온몸의 기혈이 뒤틀리고, 폭발을 정면으로 받은 곳은 피부와 살이 찢어져나가 온몸이 피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던 강맹한 마나들이 서로 부딪히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스으으,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분지 전체를 휩쓸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파괴를 부르는 폭발. 콰르르르르르! 적색 산맥의 전체에서 엄청난 떨림이 일어났다. 공중에서 일어났기에 다행일 정도로 엄청난 폭발. 드래곤의 모든 힘이 담긴 마나의 폭주로 일어난 폭발이었다. "크헉!" 땅에 쓰러져 있던 라젠은 입에서 피를 한가득 토하며 몸을 떨었다. 온몸에 엉망이다.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그 엄청난 폭발에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행운이라 해야 할 지도 모르지만. "크으……." 폭발의 여파로 일어난 흙먼지들이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한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상황. 라젠은 온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폭발에 엉망이 되어버린 몸이 고통에 아우성을 쳤다. 라젠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일어나 앉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라젠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전방을 살폈다. 분지를 가득 메운 흙먼지가 모든 것을 감추고 있었다. '이반은 물론 나르손도 죽었겠지…….' 라젠은 이반과 나르손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자신도 뒤를 따를 것 같다는 생각, 느낌에 라젠은 눈을 감지 않으려 애쓰며 전방을 주시했다. 스으으으으. 그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강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마나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기의 바람. 그 기의 바람에 라젠의 앞쪽에 위치한 흙먼지들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라젠의 앞쪽으로 일직선 방향에는 흙먼지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고오오오.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라젠은 미동도 하지 않으며 심유한 눈으로 그 기운의 중심을 찾았다. 흙먼지들이 물러난 길의 끝. 그곳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라젠과 20m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번뜩. 인간의 모습이나, 드래곤의 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깊은 눈에서 붉은 기운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온몸에서 피어나는 붉은 마나. 온몸으로 살기를, 드래곤의 광폭함을 표출하는 광경에 라젠은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몸이 이렇게 완전히 마비되지 않았다면 뒤로 물러섰을지도. 하지만 기세와는 달리 드래곤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백아에 꿰뚫린 복부는 마법으로, 자연의 마나로 회복시키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 상처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르손의 붉은 검기에 꿰뚫린 팔. 폭발로 인해 찢기고 피가 흐르는 몸. 처참한 몰골이었다. 이런 겉모습은 물론 내부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라젠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최강의 힘을 가진 상태인 드래곤의 모습 대신 인간의 모습으로 공격을 가했다. 인간의 모습일 때는 사용 가능한 마나의 폭이 훨씬 적다. 하지만 아까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간적으로 모든 마나를 개방했다. 인간인 상태로는 버티기 힘든 마나였기에 지금 파괴의 레드 드래곤의 몸은 파괴되기 직전이었다. 이 타격은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도 따라다니리라. 그녀가 방심한 탓도 있었지만, 라젠과 이반, 나르손은 실로 최강의 상대였다. "크으……." 라젠은 온몸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다. 자신들이 뛰어넘지 못한 최강의 상대. "쿨럭, 크… 서, 설마… 인간의 모습으로 공격할 줄은… 쿨럭. 드래곤의 모습도 아닌 상태에서 우릴… 크으, 컥, 크흑." 라젠의 말에 레드 드래곤, 세르페이린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드래곤의 모습이었다면 제가 졌을지도 모르겠군요. 분명 그때의 마나는 상대할 자가 없겠지만, 당신들에게 그 거대한 몸은 너무도 좋은 표적. 마법은 그 마법사가 막을 테고, 공중을 날면 그 치료술사가 약한 날개를 공격할 테고, 당신의 백아가 내 몸을 꿰뚫으러 언제든 날아올 테고. 오히려 인간의 모습으로 공격을 가하는 것이 효과적. 드래곤인 상태에서는 브레스를 사용하고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이라 해도 마나와 신체적 능력이 줄 뿐, 기의 컨트롤과 마법을 다루는 능력은 전혀 떨어지지 않죠. 당신들은… 강했어요." 조용조용한 드래곤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만약, 라젠이나 이반, 나르손과 비슷한 실력의 상대가 한명만 더 있었어도 이 승부의 결과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만약 그녀가 드래곤인 상태로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고 싸웠다면 역시나 승리는 그녀에게 돌아갔겠지만. 하지만 이 승부에서 그녀는 인간의 상태였다. 자신들을 인정하는 말에 약간이나마 자부심을 느끼던 라젠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또다시 피를 토해냈다. "쿨럭. 크으… 우리는… 졌지만, 큭. 하아… 우리는 졌지만, 언젠가 당신을 죽일 자가 이곳으로 올 것이오. 반드시." 또렷한 목소리였다. 페이린은 눈을 크게 뜨고 라젠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기침을 멈췄고 얼굴도 평온해 보인다. 어떻게? "설마……." 라젠은 날카로운 눈으로 드래곤의 눈을 노려보았다. 지금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끊었다. 고통을 느끼게 하는 모든 신경을.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다. 덕분에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말할 수 있었다. 라젠은 만족했다. '대단하군.' 페이린은 속으로 감탄하며 라젠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스으으. 그의 몸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피어나는 푸른 기운. 남아있는 아주 미약한 마나를 끌어 모으고 있다. 마지막까지 공격을 해보겠다는 의지. 페이린은 눈을 감았다. 드래곤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파아아아앗! 그리고 드래곤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내뿜어졌다. 그리고 점점 거대해지며 허공으로 몸. 곧, 적색 산맥의 하늘 위에는 세상을 메울 듯한 아름다운 붉은 비늘의 거대한 드래곤이 다시 한번 모습을 나타냈다. 섀도우 월드의 최강의 존재. 레드 드래곤은 붉은 몸을 드러내며 자신의 아래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라젠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내뿜는 푸른 마나의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끝이다. 드래곤은 낮게 말했다. 그 순간, 라젠은 이를 악물며 마나를 끌어 모았다. 부우웅. 푸른 마나가 모여들며 맹렬한 기세로 공중으로 날아갔다. 자신에 힘에 비하면 너무도 미약한 공격이었지만 세르페이린은 그 공격에 담긴 마지막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고오오오오. 드래곤의 입가에 붉은 기운이 급속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세상을 깨우는 위력. 드래곤은 깊은 눈을 붉게 빛내며 입을 쩍 벌렸다. 크오오오오! 강렬한 포효와 함께 붉은 브레스가 내뿜어졌다. 최강의 공격,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는 라젠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우우우, 퍼엉! 중간에 라젠의 마지막 힘이 담긴 푸른 마나와 만난 브레스는 잠시 흔들리다가 순식간에 푸른 마나를 소멸시켰다. "후우." 라젠은 자신을 덮쳐오는 강렬한 붉은 기운, 홍염의 브레스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붉은 기운이 라젠을 덮쳤다. "……." "……." 조용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숙연하고, 무겁고, 슬픔에 잠긴 분위기. 하지만 누구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다. 그럴 여력도 없다고 해야 하나? 스륵.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침묵하고 있던 수십의 사람 모두가 몸을 움찔했다. "후우." 나는 조용히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가자. 저벅저벅. 문 쪽으로 걸어갔다. 운영자들이 있던 층이 몇 층이었지? 그곳에 가면 게임 캡슐이 있다. 들어간다. 반드시. "자, 잡아!" 그때 재훈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내게 급히 달려들어 나를 붙잡았다. "놔!" 나는 살기를 피어 올리며 나를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쳤다. 내 살기와 실질적인 힘에 나를 붙잡던 사람들이 뒤로 밀려나고 나가떨어졌다. "비켜어!" 고함을 지르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죽어라고 내게 매달리는 정수와 위리안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젠장. 모두 때려눕혀서라도……. 퍼억! 순간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울렸다. 뭐, 뭐……. "후우. 역시 암흑가의 사람은 암흑가의 사람이 잡아야하나?"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내게서 떨어졌다. 센? 나는 간신히 내 뒤를 볼 수 있었다. 센이 손에 나무로 만들어진 장식용 꽃병을 들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뒤통수를 후려친……. 털썩.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 이 망할!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가운데 이런 말들을 들은 것 같다. "…이제 방법은 하나군요." "가겠습니다." 영민 형? 미토스……. 나는 정신을 잃었다. 당신이 원하는 세상으로 오는 것에 왜 망설이죠? 당신이 염증을 느끼는 세상을 버리고 당신이 사랑하고 있는 세상으로 오는 것에 왜 망설이죠? 오세요. 여기로. 나에게로. 그림자의 땅으로……. 그림자의 땅으로 오라고? 가고 싶다. 나는 왜 막고 있나? 어째서 드래곤을 막고 있나? 왜 그림자의 땅으로, 내가 즐거움을 찾은 곳으로, 내가 사랑하는 곳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빨려 들어간다. 가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몰라. 아니,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검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막고 싶다. 하지만 막을 수 없다. 막고 싶다. 막을 수 없다. 어째서? 나는 막고 싶다. 구한다. 어째서? 돌아오지 못한다. 구할 수 없다.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가? 구하라. 기다리겠다. 나의 대리자와 함께. 가겠다. 그대와 그대의 대리자를 만나러. 구하겠다. 반드시……. 구한다. 그곳을 사랑하기에, 그곳이 지옥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막는다. 구한다. 그를 만나서, 함께 막으리라. 그… 마나르트……. "……." 멍하다. 이 망할 꿈은 참 질기군. "으……." 나는 상당한 고통이 전해져 오는 뒤통수를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치료실이로군. "…뭐야?" 머릿속이 싸해지는군. 나는 내 다리를 꽁꽁 묶고 있는 기기 고정용 끈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서 몰래 접속할까봐 묶어둔 건가? 기기 고정용이라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곳이 있어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풀린다. 나는 비밀번호를 모르고, 결국 침대에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한다는 거로군. "젠장." 나는 침대에 털썩 누우며 오른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죽었다. "벌써… 네 명이야." 고타가 죽었다. 라젠님이, 이반님이, 나르손님이… 모두 죽었다. 섀도우 월드에서… 그곳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까지. "크윽!"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리를 묶고 있는 놈들 때문에 여전히 일어나지는 못하고 상체만 일으킬 수 있었다. "후우……." 그래, 죽어도 못 들어가게 막겠다 그거로군. 어쨌든 이 상태로는 이 침대도 못 벗어난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 그나저나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거지?"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5시 36분. "……." 나도 한물갔나? 센에게 얻어맞고 도대체 몇 시간을 기절해 있던 거야? 창밖을 보니 새벽이었다. 뭐, 기절한 김에 잠까지 같이 잤나보지. "…영민 형이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꿈 속에서였는지 기절하기 전에 들었던 거였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분명 영민 형, 미토스가 가겠다고 했다. 설마 나는 두고 자기들 끼리 들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 라젠님들 조차 이기지 못한 드래곤이다. 그런데 미토스나 할딘 정도로는 이기지 못한다. 제퍼슨부터 시작해서 나나 레지엘까지 전부 모여서 간다면… 그래도 승산은 없군. 내가 보기에 라젠님의 실력은 제퍼슨을 한방에 보낼 정도. 스크린으로 봤던 그 키메라……. "돌아가셨어……." 나는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섀도우 월드에서 맨 처음 만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던 분이었는데, 빌어먹을! "……." 다리를 묶고 있는 놈을 내려다보았다. 흐으. 누가 묶었는지 정말 꼼꼼하게도 묶어 뒀다. 달칵. 내가 매듭의 완벽함과 오묘함에 살기를 흘리고 있을 무렵,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지? "아, 일어났군요." "…정수냐?" 방 안으로 들어온 검은 장발의 사내를 보며 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이 앞장서서 날 물고 늘어졌지? "영민 형은?" 아무래도 내 상태를 지켜보는 감시자 역할이었는지 아침으로 보이는 빵과 음료를 들고 있던 정수는 단도 진입 적인 내 질문에 얼굴을 살짝 굳혔다. 하지만 곧 냉정을 되찾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2시간 전에 모든 헌터들을 이끌고 섀도우 월드로 들어갔습니다." "젠장!" 나는 욕설과 함께 벌떡 일어나려다가 다리를 묶고 있는 꼼꼼한 매듭 군들의 저항에 침대 위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썅! "풀어!" 내 살기어린 고함에 정수는 묵묵히 내 다리 쪽으로 다가가 뭔가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풀려나가는 고정 끈들. 나는 어이없어 하면 정수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꿈? 풀란다고 진짜 풀어? "뭐야?" "…막무가내로 들어가려는 것을 막으려는 거였습니다. 미토스들이 들어가면서 그 접속 루트를 쫓아 센 씨와 재훈 씨가 섀도우 월드 속으로 침투했죠. 그래봤자 영상을 보거나 누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정도나 알 수 있는 거지만." "젠장! 그런 것엔 관심 없어! 나도 들어간다!" 나 단호한 말에 정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어쩔 생각입니까?" "뭐?" "당신이 들어간다고 해서 이 상황이 더 나아질 리가 없습니다. 그저 희생자 한명이 더 추가될 뿐일지 모르죠." "그건 영민 형들도 마찬가지야!" 내 외침에도 정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들은 헌터, 섀도우 월드를 책임지는 자들입니다. 이건 그들의 임무. 하지만 진, 당신은 리자드의 직원이 아니죠." 나는 울컥하며 정수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럼, 영민 형들은 직원이니 죽음도 무릅써야 한다는 거냐? 내 살기를 눈치 챘는지 정수는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미토스들이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섀도우 월드 속에 씨아 양과 이시린 양. 그리고 정말 친한 이들과 가족들이 있다고 하는군요. 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들 자의로 들어간 겁니다. 의무와 자신의 의지가 부합된 거죠." 뭐? 나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씨아나 이시린 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섀도우 월드에 감금당해 있던 건가? 후우. "좋아, 그렇다고 치지. 하지만 내가 리자드의 직원이 아니라고 해도, 지켜야할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내가 들어가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어." 왠지 정수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녀석은 리자드의 사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날 막고 있는 거지? "도움?" 정수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했다. 왠지 약간의 비웃는 느낌이 섞여 있었다. 뭐지? 내가 섀도우 월드에 들어간다면 꽤 많은 힘을 얻을 수 있다. 다크 엘프들에 드워프들. 그리고 많은 NPC들. 그리고 난 어둠의 검 연합의 연합장이다. NPC들과 플레이어들의 힘을 합하게 할 수 있다는 말. "NPC들을 얘기하는 겁니까? 그 우정의 다크 엘프들과 드워프들? 친분을 쌓은 NPC 전사들? 진, 착각하지 마십시오." "뭐?" 착각?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정수를 노려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웃음이 조금 더 짙어져 있었다. "드래곤이 섀도우 월드를 자기 손에 넣고 뭘 하려고 하는지 잊으신 겁니까?" "……!" 나는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드래곤이 뭘 하려고 하는지 잊은 거냐고? 드래곤은… 섀도우 월드를……. "드래곤은, 섀도우 월드를 우리 플레이어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섀도우 월드를 자신의 세상으로 삼길 바라는 자들을 제외한 현실의 인간들을 막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NPC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과 똑같은 거란 말입니다!" 정수의 언성이 높아졌다. 화를 내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 느낌이 달라. "새겨 두십시오! NPC들은… 적입니다!" 살기가 확 치솟았다. 하지만 정수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계속 소리쳤다. "당신이 섀도우 월드로 가서, 도움을 청하면 그들이 웃으면서 도와줄 것 같습니까? 헛소리! 등 뒤에서 칼이나 휘두르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일족의 은인이니 뭐니 하며 당신을 받드는 다크엘프들도 당신에게 검을 들이밀 거라고요!" 나는 미친 듯이 일어나는 살기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화를 내서 될 문제가 아니다. 확실히 정수의 말대로… 아니야! "…친구다. 레지엘." 레지엘이라는 호칭에 정수의 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백번 양보해 친구라고 해도… 드래곤의 힘 때문이라도 NPC들은 당신을 돕지 않습니다." "…드래곤은 분명……." "그 말은 자신이 섀도우 월드 속의 신으로 군림하지 않겠다고 한 것일 뿐입니다. 드래곤으로써의, 섀도우 월드 최강의 생명체로써의 힘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라젠님들의 싸움을 봐도 알 텐데요. 그리고 드래곤이 아니더라도 그 아래에 있는 키메라들이 있습니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되는 건가? NPC들도 적인가? 그곳으로 가면……. 미시안이 내 적이 된다? 다크 엘프들이 내게 검을 들이민다? 나를 주군이라며 따르는 주토가 내게 검을 찔러올지도 모른다. 설화… 그 전까지도 플레이어들을 죽일 듯이 미워했던 그녀는… 우리를 떠나 NPC들 사이로 간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 인자롭게 웃던 드워프들이 우리를 공격한다? 그리고……. 그때 정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토스들이 들어가면서… 센 씨와 재훈 씨가 섀도우 월드를 상황들을 점점 알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정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단편 적인 정보들만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알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장소의 영상을 잠시 볼 수 있는 정도가 끝이죠. 그 짧은 정보들에서 알아낸 것입니다." "……." "NPC들이, 플레이어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들과 NPC들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더군요. NPC들이 플레이어들을 습격하고, 죽이기 위해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물론 드래곤의 말에 따라, 그곳에 몸을 맡기기로 한 사람들은 예외인 모양입니다만."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듯한 느낌. NPC들은… 더 이상 친구로, 같은 존재들로 볼 수 없다는 건가. 그런……. "진, 아니 세한. NPC들의 플레이어에 대한 증오심은 대단합니다. 우리 한국 대륙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하지만… 외국에서는 NPC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무차별적인 학살마저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동안 플레이어들이 NPC들에게 한 짓을 떠올려 보시죠. 당신 같은 사람들에 비해 악인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 동대륙에서 만났던 노장인 이공. 그 분의 가족들은 플레이어들에게 몰살당했었지. 그리고 엄청난 증오심을 품은 설화. NPC들은 억눌려있었던 것일 뿐일지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플레이어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을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는 어떤 존재들 때문에. 지금 그 모든 것이 끊어졌다. 죽이면 죽는다. 자신들의 세상을 주무르던 이들은 드래곤이 막고 있다. 지금의 상황이 당연한 것일 수도……. 나는 NPC들이 좋았고 그들을 인간으로 대했고, 위했다. 카루나 성에서 잠시 만났던 세갈 일행. 그들도 NPC들을 좋아했고, 똑같은 사람으로 여겼다. 내 주위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NPC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그들을 위해 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 주위에서만 일어난 일일 수도. "내 성검……." 정수의 갑작스런 말에 나는 약간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검? 레지엘은 성검의 주인이다. 그리고 성검 안에 들어있는 천족의 영혼. "…세파빌이 절 인정할까요? 마검은 주인이 검을 쥐어도 엄청난 고통을 주고, 죽음을 주기도 하죠. 성검이라고 그렇게 하지 못하리란 법은… 저와 적이 될지도 모릅니다. 계속 저와 함께하던 세파빌 이브니어스가." 이 녀석… 그래서 아까 그렇게 언성을 높였던 건가? 성검에 잠들어 있다는 천족, 세파빌이라는 천사와 꽤나 사이가……. 처음 드래곤의 말을 들었을 때, 저 말에 흔들릴 녀석으로 정수를 떠올렸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그때는 그저 모든 것이 갖추어진 듯한, 세상에 끌려가는 듯한 자신의 생활에 염증을 내고, 섀도우 월드 속을 꽤나 좋아하는 녀석이라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이제와서 보니 정수가 나와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일지도. 정수, 레지엘은 성검의 주인이다. 나는 마검의 주인이다. 마나르트 판디안. 그는, 마나르트는……. 마나르트가 나에게 등을 돌릴 것인가? 무언가 무거운 것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유혹, 너무도 끌리는, 매력적인 말이었다. 드래곤의 말은… 아마 그 말에 끌리는 이유 중 하나가… 마나르트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는 정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수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도… 마찬가지로군." "……." 정수의 얼굴이 굳었다. 빌어먹을……. 침묵이 흐른다. "…당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잠시 동안의 침묵은 정수가 깼다. 정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를 똑바로 마주보며 질문했다. "돌아올 겁니까?" "……." 나는… 돌아올까? 이곳으로? 어쩌면… 섀도우 월드에서, 그림자의 땅에서……. 나는 대답하는 대신 마주 질문했다. "너는 어떻지?" 정수는 약간 당황한 듯 하더니 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전 대기업 사장의 아들입니다. 뭐든지 하면서 살 수 있죠. 그런데 왜……." "적어도 나에게 통할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거라 생각하는데." 내 말에 정수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마찬가지일 수도. 이 녀석이나 나나……. "현진……." 정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무겁고,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였다. "…우리는, 우리 둘은… 그곳으로 가서는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정수와 나는 왠지 모르게 닮았다. 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은 다르다. 영민 형, 미토스들과 우리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섀도우 월드 속으로 가서는 안 될지도……. 허무하다. 정수의 얼굴을 보니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탈함과 함께 약간의 당황, 그리고 기대가 뒤섞인 표정. 기이이잉. 그 표정은 캡슐의 문이 닫히면서 시야에서 가려졌다. -아이디를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로 모르겠다.' 이건 무슨 상황이야?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무섭도록……. 벼락부자라는 내 아이디를 말하며, 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혼신의 힘을 다하며 한 시간 전쯤의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 조차 어지러운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 어지럽고, 멍하고, 혼란스럽다. 뭐지? "다시 한번 말 하, 아니 부탁하겠네. 자네 둘도 섀도우 월드 속으로 들어가 주게." "……." "……." 나와 정수는 심각한 어조로 고개를 숙이는 방 전무를 보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들어가라고? 왜? 우리의 반응에 죽음으로 들어가기 싫어한다는 느낌이라도 받았는지 방 전무는 설명을 시작했다. 아버님과 신 과장도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어지는 방 전무의 설명은… 섀도우 월드가 만들어질 당시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천재가 한 명 있었네. 너무도 뛰어난 사람이었지. 그가 아니었다면 섀도우 월드는 절대 완성되지 않았어." 천재……. "드래곤이 섀도우 월드의 모든 것을 주무를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네. 아니, 그렇지 않을 거네." "무슨 말입니까?"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분명 드래곤은 섀도우 월드의 모든 프로그램을 장악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니? "그 천재는, 섀도우 월드의 프로그램의 시초를 만들어 냈네. 수백만 가지의 프로그램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세상을 이루는, 이론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던 엄청난 것을. 그걸 토대로 섀도우 월드가 만들어졌지. 하지만 섀도우 월드의 기초가 되는 그 프로그램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네. 다만 안정성은 입증되었지만." 어려운 얘기로군.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얘기를 같이 듣고 있던 다른 셋은 흥미진진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지. 섀도우 월드는 살아있네." "예?" 갑작스런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살아있다? "천신과 마신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나?" 나는 순간적으로 정수를 돌아보았다. 성검과 마검을 만든 자들이지? 섀도우 월드를 만들어낸 신들이라는 설정 아냐? 방 전무의 설명은 다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약간씩 지쳐가는 듯한 얼굴. "섀도우 월드. 단순히 숫자만으로는, 프로그램과 시스템만으로는 만들기 불가능한 것이었네. 그리고 그 사실은… 그 뛰어난 천재에게 좌절을 주었고, 그에게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만들었지." "설마……!" 정수가 놀란 듯이 소리쳤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는 건데……. "지금의 드래곤, 슈퍼컴퓨터와 비슷한 구조라고 보면 되겠군." "……!"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드래곤과 같은 구조? 천신과 마신. 그렇다면……. "그 엄청난 천재였다는 사람, 설마 자기 스스로를 섀도우 월드에……." 내 질문에 방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범인과는 다른 천재의 두뇌였네. 자신의 뇌를 두개로 나누어 천신과 마신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들을 만들어 냈고, 그 두 존재는 섀도우 월드를 만들어 냈지. 그 두 신이라는 것들에게 그의 생전의 기억이 있는지, 자아가 있는지, 섀도우 월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다만 그 둘에게 섀도우 월드에 관한 직접적인 간섭권은 없고, 가끔씩 히든피스라는 형태로, 천족과 마족이라는 두 종족에게 말을 함으로써 그 존재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신의 무구를 만들어 우리를 놀라게 하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신의 무구. 나와 정수의 눈이 빠르게 교차했다. 성검과 마검. 천족과 마족. 세파빌과 마나르트. "이건 극비사항이네. 그래서 위리안 수사관도 두고 왔지. 섀도우 월드의 숨겨진 이야기이며, 숨겨진 비극이네. 섀도우 월드는, 시작부터 한 인간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었지. 이거야 이미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게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섀도우 월드에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두 존재가 존재하게 된 거네." 멍한 느낌이었다. 섀도우 월드에 그런 비밀까지 있었단 말인가? 이건 정말… 게임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세계라는 말이 맞잖아? 천신과 마신이라니? "그의 잔류물인, 천신과 마신이 이번 사태에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지만, 난 장담할 수 있네. 내가 알고 있던 그는 섀도우 월드에 그 누구보다 애착을 가지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네. 드래곤에 의해 망가지는 것을 절대 두고 보지 않겠지." 내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모든 시스템의 관리에서 벗어나고, 실질적으로 섀도우 월드의 모든 것을 설정하고 만들어낸 두 신이 드래곤을 적대시 할 수 있다는 건가? 직접적으로 간섭해 올 수는 없지만… 그들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움이 있을 수 있다. 그때 신 과장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정수 씨의 성검과 현진 씨의 마검은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만들어진 아이템들입니다. 그 천신과 마신이 자신들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들이죠. 따라서 우리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정확한 성능도 알 수 없는, 결국 천신과 마신의 의지만 있다면 법칙을 무시하고, 엄청난 힘을 줄 수도 있다는 거죠." "성검과 마검을 통해 두 미지의 존재의 힘이 발현된다?" "그렇습니다." 정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성검과 마검이……. 아! "마나르트! 이런 젠장! 내가 이런 어이없는……!" 내 갑작스런 외침에 방 전무와 아버님, 신 과장, 정수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마나르트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신은, 이 세상을 파괴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으며, 그런 자가 나타났을 때는 자신의 대리자인 마나르트 판디안을 통해, 그리고 그 주인인 나를 통해 힘을 보이겠다. 이 둘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룬다면, 마나르트 판디안은 봉인에서 풀려나며, 그 주인은 엄청난 보답을 받게 되리라." 긴파 시에서 마나르트와 재회 했을 때 마나르트가 내게 들려줬던 말이었다. 그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마나르트와 내가 조금더 가까워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는데… 지금 설명을 들으니 지금의 사태를 예견한 말일지도. "그럼 우리의 추론이 맞았다는 거로군!" 방 전무와 신 과장이 크게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버님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검은? 세파빌은 그런 말은 한 적 없어?" 내 질문에 정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진심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거……. "우리… 정말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군." "그렇군요. 후후후." "하하하하." 나는 조용히 웃었다. 다행이다. 마나르트는… 적어도 마나르트는 계속 나와 함께해 주겠지. 다행……. 고개를 푹 숙였다. 기쁜 건가? 후우. "그래서 우리가 섀도우 월드로 갔으면 하시는 겁니까?" 내가 고개를 들며 질문하자 방 전무는 씁쓸해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들이 들어가긴 했네만… 솔직히 그들이 살아남은 플레이어들 전부를 이끌고 드래곤을 치러 간다고 해도 승산이 없다고 보네. 우리가 능력치를 조정해서 높여줄 수라도 있다면 모르네만 그건 완전히 봉쇄되어 있다고 하네. 그래서 자네 둘의 성검과 마검에 생각이 미쳤지. 두 존재, 섀도우 월드의 법칙을 무시하는 두 존재의 힘이 이어진 아이템들.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네. 하지만… 자네들은 우리 리자드의 직원이 아니네." 능력치 조정까지 생각해 봤다 그건가? 하지만 드래곤이 그런 걸 용납할 리가 없지. 그렇다면 역시 미토스들로는 드래곤을 절대 쓰러뜨릴 수 없다. 나는 정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는 리자드의 직원이 아니지? 정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가겠습니다.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다면, 해야겠죠.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나는 흘깃 아버님을 살폈다. 조용히 미소를 짓고 계셨다. 초연 씨도 섀도우 월드 속에 갇혀 있다. 걱정하시고 계신 게 당연하겠지. "고맙네. 정말 고맙네." 방 전무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으음, 아버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께… 거북하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계획을……." 내 말에 방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 과장을 바라보았다.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신 과장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런 대기업의 과장자리까지 올랐을 만한 사람. "솔직히 말하면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정말 솔직하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 과장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현재 섀도우 월드 속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낸 것은 극소수입니다. 다만 NPC는 물론 키메라들까지 플레이어들을 공격하고 있어 매우 위험하다는 정도. 그리고 드래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뿐.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분이 캡슐에 안전히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겠군요. 조금 있으면 센 씨와 재훈 씨가 잠시나마 섀도우 월드 속의 플레이어에게 말을 거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건 저희가 위치를 추적하고 있는 헌터들과 두 분 뿐이지만." "결국 우리는 로그인을 해서 상황을 지켜봐 강자들을 모아야한다는 거군요. 성검과 그 힘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알아봐야하고……." 정수의 말에 신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 우선 로그인을 해서 한 장소로 모여야겠지? 장소가 다 따로따로인… 음? 나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로그인? 그러고 보니……. "제, 젠장." 갑작스런 내 욕설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현실로 나오기 전에 있던 곳이… 드래곤의 레어 코앞이었는데……." 접속하자마자 드래곤과 대면. 드래곤이 라젠님들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가 싸우기엔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다. 그대로 죽는다. 내 말에 넷의 얼굴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한 시선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곤란하군. 하지만 신 과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을 덜어주었다. "괜찮을 것 같군요. 로그인 장소 정도는 센 씨와 재훈 씨가 조정을 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지금 프로그램 추적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그쪽으로 돌리면 두 분을 한 곳에 로그인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휴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드래곤과 언젠가 반드시 만나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지금 만나서는 개죽음일 뿐인데. "그런데 지금 현실과 섀도우 월드간의 시간 차는 얼마입니까?" 정수가 불쑥 질문했다. 시간 차?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방송, 여기와 시간이 같은 듯……. "같습니다. 드래곤이 임의로 그리 조종한 듯합니다만. 그때 방송 때부터 시간은 1:1로 같이 가고 있습니다." 신 과장의 대답에 정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최대한 섀도우 월드의 시간을 길게 해 주십시오. 현실에서의 하루가 안에서의 1년이라도 될 수 있도록. 아니, 그건 안되겠군요. 적어도 저희의 행적을 따라올 수 있는 선에서. 무슨 말인지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신 과장은 약간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섀도우 월드에서의 시간이 길다면, 만약 사건을 해결한다면 현실에서의 시간이 더 짧아질 수도 있다. 우리가 드래곤을 없애려 하는 사이에 폭동이라도 일어나 리자드가 검거라도 당한다면… 현실 시간으로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하지만 센과 재훈의 도움도 받아야 하니 적정 수준에서 시간차를 조종해야하겠지. 역시 똑똑한데? 신 과장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를 하겠습니다. 두 분도… 준비를 해주시죠.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나와 정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나가고 나와 정수는 침묵에 잠긴채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들어간다. 섀도우 월드로. 갑작스럽지만……. 왠지 즐겁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즐거움을 찾으시길. 이미 충분히 즐거워하고 있어. 귀가에 들려오는 음성에 마음속으로 대답한 나는 머리가 굉장히 멍하다는 사실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데도 왠지 멍한 느낌. 보통 하던 로그인과는 다르다. 정신의 모든 것을 섀도우 월드, 그림자의 땅으로 옮기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멍하다. 약간의 혼란스러움. 밝은 빛이 온 몸을 감싼다. 푸른 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 진다. 섹스 사르르륵. 부드러운 소리. 붉은 빛과 검은 빛이 뒤섞인 머리카락이 풀린 실처럼 하늘하늘 풀어헤쳐졌다. 나는 앉아있다. 푹신하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침대? 스르륵. 신비로운 분위기와, 아름다운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하던 붉은 빛의 드레스가 스르르 벗겨졌다. 봉긋한 가슴과 가는 허리. 매끄러운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간신히 여성의 중요한 부분만 살짝 가리고 있는 얇은 망사가 걸치고 있는 것이 전부……. 고개를 갸웃거려졌다. 알몸? 나도 알몸이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왜……. 사륵. 내게로 다가온다. 침대였지? 뭔가 멍한 기분. 왠지 모를 거부가 강하게 끓어오른다. 하지만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왜? 고혹적인 모습으로 걸어온 여자가 나를 끌어안으며 침대로 쓰러뜨린다. 가슴에 부드러운 것이 와 닿았다. 그리고 붉은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쳐왔다. "음……." 가느다란 신음소리.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내 손이 위로 올라가며 여인의 등 뒤로 돌아가 꽉 끌어안았다. 약한 신음소리가 또 한번 들려왔다. 천천히 움직이며 침대에 눕힌다. 맑게 빛나는 눈동자가 살짝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홍조를 띈 뺨.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가슴. 희고 가느다란 두 손이 내 머리를 감싸며 아래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묻자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의식중인가. 하지만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 온 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 생각을 하고 있다. 무의식이라 할 수 있는가. 한 손이 밑으로 뻗어가며 얇은 망사를 끌어내렸다. 손이 조금씩 움직여가자 여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작은 화원을 지나 더 깊숙한 곳으로 손이 움직였다. "아아……."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머리? 가슴? 어디선가 뭔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하지만 곧 사라진다. 멈추고 싶지 않다. 두 손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몸을 위로 움직였다. 붉은 입술. 맑은 눈동자가 흔들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입술이 여인의 입술로 다가간다. 촉촉하면서 부드러운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아아!" 약한 비명과도 같은 신음소리. 내 양기가 여인의 아래를 파고들었다. 극도의 쾌락이 밀려온다. 거친 숨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온다. 어디 선가 들었던 것 같다……. 남녀 두 육신의 화합은 천계의 세상을 보여준다고 하던가. 온 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쾌락의 비명이 사방으로 흘러나갔다. 육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여인의 새하얀 몸이 붉게 달아오른다. 붉은 입술을 탐하고, 부드러운 가슴과 유두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나를 끌어안는, 붉고 검은 머리카락을 넓게 풀어헤친 아름답고 신비로운 미녀. 전신에 떨림이 물결치듯 퍼져나갔다. 사르륵. 순간 내 머리에서 뭔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며 실 같은 것들이 폭포수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머리카락? 긴 머리카락들이 여인의 몸 위로 흐트러졌다. 검은 빛, 그리고 간간히 섞인 은빛. 내 머리가 이렇게 길었던가? 이런 은빛이 섞여 있던가? 혼란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나를 올려다보는 여인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내 손.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피부가 약간 검어진 듯 했다. 그리고 손등부터 어깨까지, 그리고 온몸을 휘감듯 지나가는 문신과도 같은 굵은 검은 선과 그 검은 선 가운데의 은빛 선. 탄탄한 근육과 어우러진 검은 빛과 은빛의 문양은 신비로움을 주고, 아름다움마저 줄 듯했다. 뭐지? 괴물같은 모습이 아닌,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건 내가 아니다. 내가 품고 있는, 이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인과 어울릴 듯한 모습. 꼬옥. 여인이 나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것들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다시 어디선가 강하게 끓어오르는 무언가. 억눌러진다. 혼란을 다스리고 싶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방법은 이것뿐인걸. 내가, 내가 아니게 된 듯하다. 혼란. 부드러운 여인의 육체를 꽉 끌어안았다. 높은 신음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허억!" 벌떡! 나는 퉁기듯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헉, 헉, 허억……." 거침 숨소리.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범벅이다. 뭐, 뭐였지? 꿈? 도대체 무슨……. "도, 도대체……." 나는 무의식중에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짧다. 내가 잘랐던 대로의 짧은 머리카락. 검은빛과 은빛이 섞인 그 장발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팔을 걷어보니 그 문양과도 같던 선도 사라졌다. "헉, 헉……." 침착함이 자리 잡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뭐…였지? 붉은 머리에 검은 머리가 섞인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푹신한 침대였지? 그리고 같이……. "쿨럭." 나는 순간 물밀듯이 밀려드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당황하다 사례가 들려 기침을 내뱉었다. 제, 젠장. 난 아직 여자하고 자본적도 없단 말이다. 도대체 이건……. "젠장. 개꿈인가?" 불길해, 불길해. 꿈이 확실하다. 난 그런 여자 본 적도 없거니와 내가 갑자기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을 이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를 안을 정도로… 헉! 지금 뭔 소리를! 으으! 감각이 너무 뚜렷한 듯한 느낌인데? 너무 생생한 꿈이다. "후우, 빌어먹을!" 나는 마구 흔들리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뭐냐? 어떤 일이 벌어진 거지? 썅! 지나가는 몬스터 아무거나 걸려봐라! 기분도 더러운데……. "음?" 혼란스러운 감정을 풀기 위해 검기나 쏟아 부을 요량으로 허리의 요검에 손을 가져가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은 그림자의 땅, 섀도우 월드다. 이곳으로… 그림자의 땅으로 온 것이다. "아……." 웬 빌어먹을 정도로 생생한 꿈 덕분에 잊고 있었다. 이곳은……. "섀도우 월드……." 돌아왔다. 이곳으로. 내가 즐거움을 찾은, 내가 사랑하는 곳으로. 하아. "시작이 약간 꼬이긴… 으윽." 머릿속에 그 아름답던 여인의 알몸이 계속 떠올랐다. 미, 미치겠다. 젠장! 난 아직 혈기왕성한 나이라고. 이런 영상이 계속 떠올라서는… 젠장. 도대체 그 꿈은 뭐였던 거야? 고오오오! 나는 살기를 있는대로 내뿜었다. 무심, 무심 상태다. 살기를 내뿜는 거로라도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자. 휘이이이! 살기에 반응해 몰아친 마기가 회오리치듯 치솟았다. 그리고 하늘로 휘몰아치듯 흔들리는 머리카락. 어라? 나는 손을 들어 머리를 만져보았다. 약간 자랐네? 마기를 끌어올리는 순간 머리카락이 조금 자라났다. 어깨까지는 오겠는데… 이유를 모르겠군. 스으으. 마기를 가라앉히자 동시에 마음도 가라앉았다. 만약 거울을 봤다면 눈에서 검은 빛이 번뜩였을지도.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여긴 어디지? 분명 레지엘과 같은 곳에 로그인 시킨다고 했는데… 레지엘은 보이지 않는군. 근처에서 기가 느껴지지도 않고." 나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역시 레지엘의 모습은 없었다. 실패한 건가? 실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그래도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일단은 움직여 봐야겠지." 어디로 갈까. 주위의 지형을 살피니 산이었다. 산의 중턱 정도인가? 음, 나무들 가운데 붉은 빛을 띠는 것들이 있는 것을 보니 적색 산맥이로군. "……!" 나는 큰 충격을 받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적색 산맥이잖아? 정산 부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색 산맥 안이다. 드래곤의 영지. 어쩌다 이런 곳에……. 키잉. 순간 머릿속에 상당한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머릿속을 저릿하게 울리는 통증. 뭐, 뭐야? 그 순간 그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우웃! "크으……."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뭐, 뭐야? "흡!" 그리고 순간 엄청난 마나를 느낀 나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살기기 비치는 적안을 번뜩이는 여자. 레드 드래곤. 세르페이린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느새……. 타앗. 나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페이린과 거리를 꽤 벌린 나는 긴장한 눈으로 페이린을 살폈다. 라젠님들이 입힌 상처는 흔적도 없다. 내상은 파악할 수 없다. 내 실력에 드래곤의 내부 상태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내가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전신이 긴장으로 굳어갔다. 최악의 상황이다. 저릿저릿! 내가 긴장한 눈으로 페이린을 살피는 와중에도 온몸에서 몸이 저릿거리는 고통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도, 도대체 이건 뭐야? 예전 마나르트를 사용할 때 정도는 아니지만, 그에 필적하는 정도의 고통이었다. 이, 이 상태로 드래곤과 싸우라고? 도망이라도 칠 수 있을까? 그때 페이린이 입을 열었다. "왜 왔죠?"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왜 왔냐고? 페이린을 굳은 얼굴로 노려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붉은 머리? 완벽한 몸매. 꿈에서 봤던 그 여자와… 아니지. 그 여자는 머리에 검은 색이 섞여 있었고 얼굴도 꽤 다르다. 똑같이 완벽한 미모이긴 하지만. 신비로운 분위기도 비슷하지만 그 맑은 눈과 페이린의 살기가 내비치는 적안은 큰 차이가 있다. 꿈에 관한 생각을 접어내리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몰라서… 묻는 건가요?" 내 되물음에 페이린의 얼굴에 왠지 슬퍼하는 기색이 나타난 듯 했다. 고통 때문에 머릿속도 조금씩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나에게… 오지 않겠어요? 당신은 NPC들을 좋아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나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나요? 내 싸움은, NPC들을 위한, 이 세상을 위한 것인데… 이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이 곳으로 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인데. 그리고 우리를 농락한 인간들에 대한 정당한 복수일 뿐인데. 세한, 나와 뜻을 함께 한다면……." "내 친구들이 죽어가고 있고, 난 그들을 구해야하죠. 당연한 일일 텐데요." 나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끊어버렸다. 페이린은 슬픈 기색을 만연히 드러냈다. 왜… 저러는 거지? "내가 알린 말이 있으니 강요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플레이어들의 편에 선다면, 나는 당신을 죽여야 해요." "……." 나는 페이린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묘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치… 친인을, 가족을 대하는 듯한 태도. 살기가 서서히 가시며 드러나는 저 애절한 눈은 뭐지? 고통 속에서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가? 나는 숨을 약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다. 방해는… 용서하지 않아." 허세였다. 분명 허세지만… 페이린은 분노하는 대신 눈에서 살기를 완전히 거뒀다. 애처로워하는 듯한 눈동자가 내 마음을 울리는 듯했다. 도대체 왜 저런 눈으로 날……. "그 말…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요? 당신이?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이 만약 이 사태를 바로잡는다면… 섀도우 월드는 끝이에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겠지. 후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솔직히 말하면 레지엘과 함 께 이곳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장담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 머릿속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구출이다. "맹세는 못해. 하지만……." 나는 말을 맺지 않았다. 대충 뜻은 알아들었겠지. 전신에 몰아치는 통증은 여전했다. 하지만 내색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몸 상태가 정상이기라도 해야……. "적어도 내 손으로 죽이지는 않겠어요." "뭐? 무슨……." 자기 손으로 죽이지는 않겠다니? 나는 의외의 말에 당황하며 긴장을 살짝 풀었다. 그 순간, 전신을 울려대던 통증이 한층 심해졌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기분. 예전, 마나르트를 극도로 사용했을 때 이랬던가? 어쩐지… 익숙한 느낌마저 드는 고통. "크윽……." 나는 버티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리며 옆에 있던 나무에 몸을 기대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는 페이린의 눈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뭔가 갈등하는 듯한 흔들림. 페이린의 기도가 훤히 느껴질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왜…지? 곧 페이린은 뭔가 결심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기도가 사납게, 눈빛이 단호하게, 그리고 약간씩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몸 상태가 엉망으로 보이는군요.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어요. 후훗. 만약 살아난다면, 힘을 쌓아서 찾아와 봐요. 도전은 언제든 받아줄 테니."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한 상태. 극도로 무감정한, 아까와는 전혀 다른 페이린의 행동에 나는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위협을 느꼈다. 지금은… 위험하다. 타앗! 나는 급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내가 나무 위로 뛰어올라 다시 한번 도약하려는 순간, 뭔가 검은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내게 날아왔다. 캬아악! 샤벨 타이거? 키메라? 사람과 비슷한 크기에 표범과 같은 모습. 하지만 곳곳에서 날카로운 뼈들이 튀어나와 있고, 입에는 날카롭고 긴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다. 그리고 느껴지는 강한 기운. 이 놈은… 예전에 카루나 성에서 싸웠던 그 강력한 키메라보다 더 강하다. "크읏!" 나는 급히 요검을 뽑아 휘둘렀다. 키메라의 날카로운 송곳니와 요검의 검날이 강하게 충돌하며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규, 균형을……. "크으……," 순간 엄습하는 엄청나 고통. 균형을 잡을 타이밍을 놓친 나는 바닥에 처박혔다. "제, 제길." 캬아아! 순식간에 앞으로 쇄도하며 거의 쇼트소드의 검날에 비견되는 발톱을 그어오는 키메라. 마, 마나르트! 마나르트를 쥐어야……. 콰악! 나는 옆으로 몸을 굴러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내 뒤의 바위를 깨부수고 들어가는 키메라. 그리고 나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발톱에 왼팔이 패였다. "헉, 허억." 약간의 시간은 벌었다. 마나르트를……. "…쳇!" 나는 몸을 날려 산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나르트를 뽑는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하지만 지금 내 상태를 봐서는 확신할 수 없다. 마나르트의 힘이나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리고… 혹시나 마나르트가… 등을 돌린다면… 불안하다. 타앗! 다시 나무 하나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온몸에서는 끊임없이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예전의 경험을 살려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카르르륵! 그때 등 뒤에서 키메라가 내지르는 괴성이 들려왔다. 바로 뒤. 늦었다. 푸확! 등 뒤를 깊게 베인 나는 신음을 흘리며 아래로 추락했다. 쿠당. 바닥에 강하게 부딪힌 나는 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키메라가 아래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들을 빛내고 있었다. 피, 피해야! "크윽!" 급히 몸을 날리려던 나는 엄청난 통증에 움직임을 멈춰야했다. 등에 입은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척추가 상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의 상처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다. 전신에서 온몸이 끊어지는 듯한, 피가 끓어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생겨났다. "크으으윽." 온몸에서 힘이 쫙 빠지는 듯 했다. 내가 아무리 고통에 익숙하다지만 이건 도가 심하다. 꼼짝도 할 수가 없어. 어떻게……. 캬아아아! 키메라의 날카로운 공격 부위들이 나를 노리고 빠르게 내리찍어져 왔다. 스으으. "음?" 눈을 부릅뜨고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나는 갑자기 강렬한 기폭풍이 몰아치자 순간 당황했다. 통증이 사라져 간다? 그리고 온몸에서 바람과도 같은 기운이 폭풍같이 쏟아져 나왔다. 푸화아악! "크읏!?" 키아아! 내 몸에서 검은 빛을 띠는 기, 마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으며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 마기의 폭풍에 정면으로 얻어맞은 키메라는 앞다리와 몸의 일부가 터져나가며 괴성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어, 엄청난 위력의 기 폭발……. "하아, 하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숨을 헐떡였다. 뭐, 뭐야? 뭔가 부드러운 기운이 내 몸을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 아까까지의 통증이 거짓말 같이 느껴질 정도로 상쾌한 기분. 그리고 몸에서 들끓는, 엄청난 양의 마나와 마기. 이건… 도대체……. 스르륵. 그때 머리에서 뭔가가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시야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물결과 그 가운데의… 은빛 물결. "이건……." 나는 멍한 눈으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들을 매만졌다. 머리가… 갑자기 자랐어? "아!" 나는 황급히 팔을 살폈다. 설마……. "아……." 그 문양과도 같던 선은 없었다. 다만, 피부가 약간 어두워진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미미한 차이일 뿐이었다. 스르륵. 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동시에 눈앞으로 가져오기도 하며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폈다. 도, 도대체 뭐야? 갑자기 머리가 자란 것도 모자라서 이 간간이 섞여 있는 은빛 머리카락들은 뭐지? 그 꿈……. "젠장. 설마 그 여자도 나오는 건 아니겠지?" 꿈, 꿈, 꿈! 젠장! 도대체 그건 뭐야? 내가 왜 처음 보는 여자와 같이 잤던 거냐고! 이 머리카락은 뭐냐아! "빌어먹을!" 나는 머리카락들을 거칠게 뒤로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변한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머리 꼴이 이렇게 됐다. 몸에 그 이상한 선은 생긴 것 같지 않지만 약간 검어진 듯도 하고. 그 꿈… 나였나? 그런데 내가 예지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모습일 될 줄로 알고 그런 꿈을……. "섀도우 월드인가?" 예전에 미래를 알리는 듯한 꿈들, 그건 드래곤과 마신이 보여준 꿈이었다. 마신이 보여준 꿈. 자신의 대리자, 마나르트를 도와 싸워달라던 마신의 말. 나를 기다리겠다던 말, 그건 아마도 마신이 보여준 것일 것이 틀림없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도… 그 여자가 나오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자박. "웃?" 순간 느껴지는 기척에 나는 창백하게 질리며 그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생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기에 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 머리에 나와 같이 은발이 섞인 미인이 아니라 마지막 투혼을 불태우는 키메라의 모습이었다. "휴우."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그 키메라를 노려보았다. 왠지, 두렵지 않다. 제퍼슨이나 천악이 온힘을 다하면 간신히 우위를 차했을 실력의 키메라. 아니, 지금은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그 둘도 훨씬 강해져 있겠지. 어쨌든… 내 실력으로는 절대 '이기지 못했을' 녀석이지만, 지금은……. 스아아아.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자 온몸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며 내 팔에 집중되었다. 무의식중에 행한 행동과도 같았다. 왠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우우우웅! 강한 울림과 함께 내 손끝에서 검은 마기의 검이 길게 뻗어나갔다.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기술. 타앗.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 나갔고, 키메라의 모습이 순간 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침착하게 손을 휘두른다. 척. 키메라를 몇 미터 지나 멈춰선 나는 손을 거뒀다. 순식간에 흩어지며 내 몸으로 스며드는 검은 기운. 키아아아아! 키메라가 비명을 지르며 검은 마기에 타올랐다. 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일지 느낄 수 있다. 너무 강한 마기를 견디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 상상하기 힘든 정도의 위력……. 비틀. "큭." 나는 옆의 나무에 몸을 기대고는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너무… 무리한 듯한데. 평소의 나라면 이렇게 무모한 짓을 쉽게 했을 리 없다. 그것도 적색 산맥에서 이런 짓을 할리가. 젠장, 그 꿈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무의식중에 내 몸이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었어. 거기에 이 머리카락은……. "음?" 나는 내 팔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 이건……. "마, 말도 안돼……." 손등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와 가슴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검은 선이 뻗어져 나가고 있었다. 손등 넓이의 반 정도 될 듯한 굵기의 검은 선. 그리고 그 가운데의 은빛 선. 신비로운 느낌의……. "뭐, 뭐야?" 상당히 진했던 그 선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모르겠어. 도대체…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니,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 꿈이 더 불안해." 나는 머리를 휘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너무 생생한 꿈이긴 했지만 지금은 내 몸에 왜 이렇게 바뀌는지에 초점을 맞춰야지. 서서히 옅어져 가는 팔의 검은 선을 바라보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은빛 선이 사라지는 속도가 훨씬 느리다. 때문에 검은 문양은 점점 없어져 가는데 은빛 선은 아직 꽤나 선명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역시 계속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내 몸보고 신비스럽니 하긴 그렇긴 하지만, 그런 생각 외엔 들지 않는군. "아, 혹시… 마기를 강하게 사용하면 이게 떠오르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그럼 이 문양이 그 엄청난 마기를 내게 한 건가? 가능성은 있어 보여. 가만, 마기? "마신인가? 뭐가 뭐……." -여어! 멋있군그래, 세한! 갑작스레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머리 위에 철썩 달라붙는 무언가를 느낀 나는 몸을 흠칫했다. 마, 마나르트? -후훔, 자네 말이 맞다고 해주지. 마기를 사용하면, 결국 싸움하면 그 문양이 생기네. 멋지지 않나? 마신이 자네를 좀 개조하겠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생각보다 멋지군. 안 그래도 여자가 많았는데 더 늘어날 가능성이…….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똑같다. 예전과. 똑같이 수다스럽고, 장난기가 넘치고, 아무런 허물없는 대화. 나는 안도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나르트가, 이 녀석과 적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듣기 좋군. 얼마만인가?" -음? 아마 몇 달 된 것도 같네. 난 그 동안 마기를 수련하고 있었거든. 자네가 내 모든 마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신이 새로 준 힘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하거든. "뭐?" 마나르트의 마기를 전부 사용할 수 있다고? 그건 전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마나르트가 내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작은 손으로 내 머리를 툭툭 치는 모습이 꽤 귀여울 것 같았다. -예전에는 내 힘이 완전히 개방되었을 뿐, 완전히 자네의 힘으로 만들지는 못 했지 않나. 이젠 그게 가능하다는 거지. 내 힘은 자네 힘, 자네 힘은 내 힘. 거기에 마신이 두 번째 맹약을 발동시켜서 내 마기도 꽤나 높아졌고, 자네도 굉장히 강해졌으니……. 마나르트는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결국 종합해 보자면 마신이 마나르트와 나를 동화하기 쉽도록 나에게 어떤 힘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이게 그 모습이고, 동시에 나 자체의 능력도 엄청나게 상승했다고? 나쁘지는 않지만……. "마신의 힘을 직접적으로 얻을 수는 없는 건가?" 드래곤과 맞붙어 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 내 질문에 마나르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불가능이네. 마신은 절대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아. 대리인으로 선출된 내가 그 뜻을 받드는 것일 뿐이지. 자네도 있고, 둘이서 힘을 합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라젠님도 당한 드래곤인데, 가능할지 모르겠군." 내 중얼거림에 마나르트가 내 머리를 약간 세게 잡아당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실쟁이도 강하긴 했지. 솔직히 나와 동급으로 보이니까. 하지만 내 힘은 더 상승되었다니까. 봉인도 거의 풀렸고. 거기에 자네도 강해졌지 않나? 신인(神人)의 몸을 얻었으니. "신인?"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신의 몸이라는 건가? 뭔가 이상한 기분인데? -뭐, 솔직히 말이 그렇다는 거네. 마신이 만들어준 몸이니 신인이지. 아마 수련만 하면 빠른 속도로, 그것도 끝없이 강해질 걸세. 보통 인간이라면 한계가 있지 않나. 그 라젠이라는 사람들이 그 끝에 이르렀다고도 할 수 있겠네만. 음, 그나저나 정말 멋있군. 마족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후후, 자네 역시 나와 함께 마계로 가서 하렘 건설 계획을 실행에……. "시끄럽네." 마나르트의 입을 닫아버린 나는 내 몸을 살폈다. 끊임없이 강해질 수 있다고? 후후, 좋아. 강해지겠다. 마나르트의 힘을 빌리는 것만이 아닌, 나 스스로의 힘도……. 수련하고, 수련할 수만 있다면 희망이 있을 수도. 하지만 시간이 없는 게 문제로군. "아, 그런데 이 모습이 마족의 모습이라고?" 내 질문에 마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그런 것 같군. 순종 마족은 아니네만. 전에 내 모습을 봤겠지만 진짜 마족들은 그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칠흑과도 같은 검은 머리를 지니고 있다네. 거기에 나 같은 위대하신 최상급의 마족들은 절세의 아름다움마저 지니고 있지. 뭐, 하지만 자네는 순종 마족은 아니니까. 마기는 풍기지 않았지만 예전 모습이 오히려 우리와 비슷했나? 흠, 몇몇 고서에서 자네 같은 경우의 신인들의 모습과 일치하네. 마족들도 마신의 선택을 받으면 자네와 비슷한 모습이 되곤 했거든. 어쨌든, 멋지군. 아, 그리고 남자로서의 기능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그런 쪽으론 걱정을……. 평소 같으면 마나르트와 한창 말싸움을 시작할 대목이었지만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으음……. -…어라? 뭔가? 왜 조용……. 마나르트의 의아해 하는 반응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꿈이 문제야. 나는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들을 뒤로 넘겼다. 아, 혹시 이 모습을 마나르트가 알고 있다면……. "마나르트. 혹시 붉은 머리에 은빛 머리가 섞인 여자를 알고 있나?" 내 뜬금없는 질문에 마나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하던 마나르트는 곧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군. 마족들은 대부분 검은 머리고, 내가 아는 여자들은 대부분, 내가 가장 관심을 쏟던 바시린 양 역시 검은 머리였네. 붉은 머리 여자는 본 적이 별로 없군. 자네와 같은 경우에 관해서 물어도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자네처럼 은발이 섞인 검은 머리라네. "…그래?"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럼… 그 여자는 누구였지? 그런 생생한 꿈, 전혀 잊혀지지 않는… 크윽. 무심, 무심. 여기서 꾼, 그런 생생한 꿈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리가. -이상하군. 분위기가 달라. 아는 여자라도 찾고 있나? 자네 첫 상대야? "크윽." 이런 반응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반응을 보여 버린 나는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제, 젠장. 그때 뭔가가 내 머리위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두르며 마구 움직였다. 그리고 마나르트의 쉴 새 없는 공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젠장, 웬 빌어먹을 꿈 하나 덕분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이, 이럴 수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도대체 어디서! 붉은 머리에 은발이 섞인 여자라고 했나? 내 인명록에 그런 인간은… 누, 누구지? 과연 어느 레이디가 우리 딱딱한 주인님의 동정을……. "으으……." 나는 신음과 함께 머리를 감쌌다. 마나르트는 유쾌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후우… 후후. 나쁘지는 않은, 아니. 전혀 나쁘지 않은, 즐거운 기분. 나는 피식 웃고는 다시 한번 내 몸을 훑어보았다. 약간 적응이 안 되기도 하지만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진 거라면, 만족하겠어. 뭐, 어쨌든 보기 흉측한 건 아니니까. 오히려 반대라면 모를까. 그리고 그 꿈은… 접어두자. "마나르트." -…이 일이 다른 레이디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내가 기필코 막겠네! 하렘 건설에 치명적인……! "마나르트!" -아? 음, 뭔가? 내 고함에 마나르트는 약간 투덜거리는 듯이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다시 머리 위에 달라붙는 모습을 취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에? 뭐가 말인가? 마나르트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마기의 폭발로 좀 손상된 모습. 어쩌면 몬스터들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 키메라들도 위험하고. "…마신의 의지라고 하면 뭐라 할 말이 없네만, 그래도… 계속 나와 있어줘서 고마워." 내 조용한 말에 마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래로. 적색 신맥을 내려가야 한다. 산을 내려가는 내 머릿속에 약간 쑥스러워 하는 듯한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친구지 않나. 주인이라고 하면 할말은 없네만……. "하하하하!"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예전처럼 길어진 머리카락이 뒤로 휘날렸다. 여자들 홀릴 것 같이 머리가 반짝이니 어쩌니 하는 마나르트를 무시하며 나는 나뭇가지 하나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죽을 지도 모른다. 나와 마나르트가 아무리 강해져도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즐거웠다. 정말로 기쁘다. 이곳으로 온 것이, 마나르트를 만난 것이. 내가 사랑하는 세상으로 온 것이. 정말로 즐겁고, 기쁘며, 환희를 느끼게 한다. 그림자의 땅으로 온 것이. -우선 자네가 그 몸에 적응이 되어야 하는데… 뭐, 결국 원래 몸에 힘만 약간 추가된 거니 별 걱정은 없네. "그런가?" -어쨌든 이제 자네와 나는 같은 힘을 동시에 쓰는 거라고도 할 수 있네. 비록 힘의 출처는 다르지만……. "알고 있어." -음, 아마 내 예상으로는 자네가 최대한 힘을 높여, 무리를 하는 수준까지 마력을 끌어올린다면 어쩌면 그 고타인지 하는 까까중 정도까지는 강해질지도 모르겠군. 아니, 좀 부족하려나? 수련하게. "훗." -어쨌든, 그건 다 나중 일이고……. 나는 눈을 번뜩이며 기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온몸에서 마기가 끓어오르며 머리카락이 기의 폭풍을 따라 치솟아 올랐다. 스아아악! 은빛 머리카락들이 검은빛과 은빛을 넘나들며 맑은 빛을 발했다. 그리고 온몸 위에 떠오르는 신비로운 문양. 검은 선과 그 가운데의 은빛 섬. 전신으로 뻗어나가는……. 투확! 그리고 마나르트의 손잡이를 쥐는 동시에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오는 여러 마리의 키메라들. 한번에 죽이지 못하면 위험하다. "살검." 마나르트의 검날에서 검은 기운이 회오리치는 동시에 한 키메라의 목이 꿰뚫렸다. 키메라의 수는 약 10여 마리. "흡." 마나르트를 그대로 옆으로 뿌리며 몸을 회전시켰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돌려차기에 키메라 한 놈이 얻어맞고는 괴성과 함께 멀찌감치 날아갔다. 키라라라락! "레파토리가 너무 단순한데." -동감이네. 잠시 시야가 어두워지며 하늘에서 두 마리의 키메라가 떨어져 내리며 날카로운 날들을 내리그어왔다. 하지만 당황되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침착한 느낌. 푸화악! 내 몸에서 다시 한번 마기가 솟구쳤다. 점점 진하게 나타나는 전신의 문양들. 나는 마나르트를 쥔 손에 힘을 주는 동시에 요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크로스." 촤아악! 마나르트와 요검이 미세한 시간차로 뻗어나가며 공격해 들어오던 키메라들이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리고 그 시체들을 스쳐지나가 공중에 뛰어오른 나는 몸을 비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올려다보며 괴성을 지르는 키메라들. 어차피 지배자급 키메라는 없다. 한놈씩 차근차근 쓰러뜨린다. 나는 라젠님들 같은 힘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지는 않는다. 극도의 침착함. 요검이 요기를 흘리며 키메라의 미간이 틀어박혔고, 마나르트가 마기에 타오르며 키메라들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후우." -점점 익숙해 지는군. 마나르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어서 적색 산맥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니 난감하군." 이제 적색 산맥의 초입, 거의 빠져나가고는 있지만 10분에 한번 꼴로 키메라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잡히니… 항상 주위에 신경을 쓰면서 유사시엔 몸을 숨길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어디로 갈 건가? 나무들 사이를 스쳐 달려가던 나는 마나르트의 질문에 약간 머뭇거렸다. 어디로 가야하지?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지금의 내 모습은 눈에 너무 잘 뛸 텐데. 결국 도시에는 될 수 있으면 들르지 않아야 한다는 건데……. -다크 엘프들을 찾아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게. 나는 마나르트의 단호한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벌써 두 번째 듣는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인정해야할 지도 모르는 사실이고. "우선은… 레지엘을 찾아야겠지. 그 녀석이 있어야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 -음, 그 천족 녀석도 같이 다니는 건가? 마나르트가 약간 불만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고는 주변을 흘깃 살펴보았다. 특별히 적은 없는 듯하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한데. "음?" 순간 익숙한 느낌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설마……. -왜 그러나? "사람?" -엥? 나는 의아해 하는 마나르트의 목소리를 이리저리 밀어 넣으며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저쪽이다. NPC인지 플레이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인간이다. 어쩌면 레지엘일 수도 있고……. "동굴?" 빽빽한 수림지대 지나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꽤나 커 보이는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 근처의 나무들의 위치가 미묘해서 입구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식스센스로 위치를 탐색하고 있는 나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얘기였다. 저 동굴 안. 몸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다. 포위당할 위험도 있지만 동시에 지키기도 쉬운 곳. 나는 기척을 죽이며 동굴의 입구로 다가갔다. 누구지? 레지엘일까? -조심해!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마나르트가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질렀다. 마나르트보다 약간 먼저 위협을 느꼈던 나는 이미 마나르트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고, 순식간에 뽑아 휘둘렀다. 콰아아아! 공기를 가르는 묵직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어, 엄청난 위력! 마나르트가 꽤나 놀란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확실히 엄청난 위력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온힘을 끌어모아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당연할 지도. 아마도 이 공격을 날린 작자는……. "크으윽!" 전신에서 마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나는 마나르트에 마기를 강하게 주입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드는 망할 놈의 '싸이드', 커다라 날을 번뜩이는 '거대한 낫'을 후려쳤다. 푸카카칵! 금속끼리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고, 기들이 서로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팔이 저릿거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급히 기를 끌어올린 덕분에 몸 상태도 별로다. 하지만, 급히 끌어올린 마기로 '공간의 악마'의 공격을 막은 걸로도 충분하다. "하앗!" 투캉! 마나르트를 옆으로 비껴내자 공간의 낫이 순간적으로 튕겨나갔다. 콰악. 공간의 낫이 동굴의 벽을 이루는 바위에 틀어박혔다. 생각이 있다면 이런 동굴에서 마나를 폭발시키려하지는 않았겠지. 핏. 내가 마나르트를 고쳐쥐며 숨을 들이쉬는 가운데 동굴 안쪽에서 누군가가 달려 나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살기. 강한 마나의 파동. 나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소리쳤다. "멈춰, 천악!" 어느새 회색빛 마나를 머금은 예봉(銳鋒)이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 봉이 뻗어 나온 곳에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회색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다크소드?" 이 녀석은 언제쯤 날 세한이라고 부를까? "오랜만이군, 천악." 나는 피식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천악은 놀락 기색이 만연한 눈으로 나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상당히 많이 달라진 내 모습에 혼란이 오는 모양이었다. 이거 설명하려면 꽤 시간이……. "레지엘과 같은 현상인가?"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천악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레지엘? 둘이 만났다는 건가? 내 의문을 읽은 듯 천악은 예봉을 뒤로 거두며 입을 열었다. "모습이나 분위기가 꽤 틀려지긴 했지만… 맞는 것 같군. 레지엘 녀석과 만났다. 만나자마자 약초를 구하러 뛰어나갔지만. 이제 설명을 들을 수 있겠군." 천악의 말에서 약간의 의문을 느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약초? 천악에게는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천악은 말없이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간 나는 뜻밖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타!" 동굴의 벽에, 정신을 잃고 있는 고타가 기대앉아 있었다. 내가 크게 놀라 멍하니 서 있자 천악이 묵묵히 입을 열었다. "큰 상처를 입고 계신 것을 내가 발견했다. 라젠님 일행과 드래곤을 쓰러뜨리러……." "데스 킹 녀석이 생사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건가? 온몸에 꿰뚤리셨을 텐데……." 이번에는 천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지엘에 정말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갔나 보군. 나는 급히 고타에게 다가가며 남은 포션이 있나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라젠님들이 모두 당하셨다는 건가?" 나와 나란히 동굴 벽에 기대앉아있던 천악이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천악은 약하게 살기를 뿜더니 벽을 한번 강하게 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럼 지금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이 너와 레지엘이군. 천신과 마신이라." 침묵을 깨는 천악의 중얼거림에 나는 내 무릎에 풀어둔 마나르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레지엘의 성검과 내 마검에 어떤 다른 힘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흐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자네와 내가 좀 강해진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을 것 같다고 했잖나. 뭐, 어쩌면 마신이 다른 안배를 해 뒀을지도 모르지만…….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지금 내가 얻은 힘과 조금 증가된 마나르트의 마력이 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희망이 너무 낮아. 하지만 적어도 천악에게는 제대로 말하는 것이 좋겠지. "물론 아무런 힘도 숨겨져 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끄응, 또 그렇게 말하니 자존심이 상하네. 한숨을 푹 내쉬었고 마나르트는 뭐라고 투덜거렸다. 나와 마나르트는 이렇게 회의적이었지만, 천악은 조금 다른 말을 했다. "두 신검에 숨겨진 힘이 없다고 해도 너와 레지엘 둘만으로도 충분한 전력이 된다. 마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힘이라 정확한 측정은 힘들지만, 너나 레지엘이나 훨씬 강해진 듯한데." "강해지긴 했지만… 아마 지금의 너나 제퍼슨 수준일 것 같아. 나도 아직 얼마나 강해졌는지 모르니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군." "…우리보다 강할 수도 있지." "뭐?" 천악의 말에 나는 천악에게 고개를 돌렸다. 천악은 눈을 감고 있었다. 곧 그의 입이 열렸다. "나와 제퍼슨은 그렇게 강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빠르게 강해지지 않을 테고. 아무래도 우리의 경지에서는 마나의 양이 잘 늘지 않더군. 뭔가 계기가 있을 때마다 증가하는 것 같은데… 라젠님 일행과 고타님은 우리가 넘지 못하고 있는 그 단계를 넘으신 듯 하다. 어쨌든 나나 제퍼슨의 실력의 성장 속도가 점점 더뎌지고 있지. 그렇게 볼 때… 지금 너와 레지엘의 힘이 우리와 비슷하다고 해도 앞으로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고 하니 더 가망이 있다는 거다." 가망…인가.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천악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동굴의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바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너는 배틀에 관한한은 최고야. 제퍼슨은… 네가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너보다 강하지. 그런 점에서 보면… 성검과 마검에 별다른 힘이 숨겨있지 않다면 너나 나나 중요도는 비슷할 걸……." 왠지 천악에게서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다는, 스스로에게 뭔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나는 천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말했다. 물론 사실이기도 하지만. 내 몸이 이렇게 되면서 천악과 나의 순수한 힘은 비슷해졌다고 해도 천악은… 배틀에 관한한은 천재다.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말. 천악은 별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기도가 약간은 변한 것을 느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벽에 편하게 기댔다. -세한… 자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하네만……. "뭐?" 갑작스러운 마나르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숙여 마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자네 생각대로 회색머리와 자네의 실력은 비슷하다고 본다면 말이네… 나를 들고 있는 자네가 훨씬 유리하지 않겠나. 다시 말하지만 내 힘은 그 라젠이라는 실쟁이와 비슷하네. 아직 자네가 내 힘을 전부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긴 하지만… 그건 내 실력이 아니지. 만약 드래곤이 먼저 자네를 내게서 떨어뜨려 놓을 때도 생각해야 하네." -물론이네. 하지만 그 레지엘이라는 녀석도 있지 않나.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희망을 가지라는 거지. 자네와 레지엘이라는 녀석. 여기 회색머리 군과 다른 고수들을 끌어들이면… 그 실쟁이 삼인방과 비슷한 전력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네. 내 눈이 저절로 고타에게 향했다. 그리고 만약 고타가 회복된다면… 하지만 마나르트는 고타는 전력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인정하긴 싫지만… 너무 심하게 당했어. 마기가 득실거리는 염주알들이 온몸을 관통했다. 마기는 나 같은 특이 상황이 아니면 치명적이다. 특히 몸의 내부에서라면… 젠장. "그래도…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해. 계기…라고 해야 하나? 어떤 힘이……." -……. 마나르트는 말없이 조용했고 천악은 나와 마나르트의 대화에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라 역시 조용했다. 생각하기엔 좋은 분위기였다. 힘… 힘. 나와 레지엘은 신들에게 힘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전보다 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 더 이상을 바라는 것은 너무 의존적일지도. 일단 모을 수 있는 대로 플레이어들을 끌어모은다고 하면… 마나르트이 말대로 라젠님들과 비슷한 전력까지는 될지 모른다. 하지만… 역시 뭔가 전세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뭔가가……. "다크소드." 침묵을 깨는 천악의 목소리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천악의 말이 이어졌다. "고타님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데스 킹이라는 마족이라고 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은 마족이지. 하지만 이어진 천악의 말에 나는 내가 그동안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족… 마족이라면서 왜 마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거지?" "뭐?" 그러고 보니 그렇다. 그 녀석은… 어째서 드래곤의 편에 있는 걸까? 그 녀석이 인간의 인체 실험으로 만들어진 몬스터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족이면 마신에게서 힘을 받은 존재일 텐데? "마, 마나르트?" 나는 마나르트에게 시선을 돌렸고 마나르트는 잠시 웅웅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순수 마족이 아니니까. 그런 놈들은 주어진 힘을 자신의 수련으로 높여갈 수도 있거든. 특히 그 놈은 하급에서 최상급까지 올라온 녀석이니까.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나는 마나르트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천악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마나르트가 말을 끊자 나도 말을 끊게 되었고, 나는 천악의 살벌한 눈총에 시달려야 했다. 젠장, 내가 말을 안 전하는 게 아니라고. -마신은 말 그대로 신. 힘을 주기는 하나… 별다른 강제권은 가지고 있지 않네. 그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는 없지만 뜻을 받드는 자도 없지. 아마 마왕이라면 신탁을 받았을 듯도 하네만, 아마 드래곤의 편에 서지 말라는 정도로 해석하고 있겠지. 솔직히 우리 마계의 존재들에겐 이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별 상관이 없어. 드래곤이 세상을 지배하든, 플레이어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던, 그 무엇도 상관없지. 마신은 존재하니까. 마족은 도움은… 마신이 대리자로 지정한 나 외에는 기대하기 힘들 걸세. 결국 마신이 마족에게 직접적인 명령은 내리지 않는다는 건가? 모순 아닌가? 어째서……. 내 기도가 흔들렸는지 마나르트가 푸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인간이니 우리 마족에 대해 잘 모르겠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 마족들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거네. 그리고 자네들 인간의 신과 마찬가지로 신을 믿되, 신이 강림하지 않는 한 그의 뜻을 정확히 읽고 따르지는 않는다고, 못한다고 해야 하나? 원래대로라면 나도 마신의 뜻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겠지만… 마신이 마계의 법칙을 어긴 내게 벌을 내리면서 지금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니……. 마나르트가 마신의 대리자가 된 것도 마검에 봉인당할 때 마신의 안배에 의한 거였다. 그리고 그 마나르트를 통해 나까지 마신이 준 힘을 얻게 된 거고… 하지만 다른 마족들은……. "잠깐, 마나르트. 만약 마신이 자네에게 그런 안배를, 지금의 사태를 예견하고 말을 해두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했을 거지?" -음? 내 질문에 마나르트는 약간 놀란 듯 검신을 웅 떨었다. 그리고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 도왔겠지. 친구를 위한 거니까.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음, 어쨌든… 그렇다는 것은… 마족이 자네와 같은 마음만 먹는다면……." 개인적으로 의사를 정해, 우리를 도울 수는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마족만 드래곤과의 싸움에 끌어들일 수 있다면……. "마계……." 내가 질문을 한 다음부터는 마나르트의 말을 전하지 않고 있었기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천악이 의아해하는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생각에 잠겨들었다. 마계. 마계와 마족. 마족……. -불가능이네. 마나르트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한 부정을 나타냈다. "어째서?" 잠시 침묵하던 마나르트는 마기를 조금씩 피어올리더니 곧 그 미니 싸이즈의 모습을 만들어내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꽤나 귀여운 모습을 하고는 나를 올려다보는 마나르트를 보니 약간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 천악이 꽤나 놀란 듯 마나르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마족이 인간이 말을 들을 것 같나? 그리고 나 때문이라도 안 되네. 난 마왕에게 찍혔거든. 마왕이 중립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면 마족들을 따라야 해. 결국 나와 친분이 있는 이들도 자네를 돕기 힘들다는 거지. 뭐, 나같이 잃을게 없는 마족들이라면 도와줄 가능성도 있지만 제외하고. 결국… 만약 자네가 마족들에게 드래곤과 싸워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 마왕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네. "마왕?" 마왕이 되어야 한다고? 마족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일단 자네는 마신에게 힘을 받았고, 인정을 받은 자니 마족으로 볼 수도 있네. 마왕과 대결하는 것도 가능하지.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왕과 싸워서 이긴다면… 드래곤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마나르트는 곧 내 생각을 처참히 깨부쉈다. -마왕과 싸울 때는 자신의 순수한 힘만으로 싸워야하네. 무기도 가장 기본적인 무기 외엔 사용할 수 없지. 결국 나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지. 자네 힘으로 싸워야 하네. 그리고 지금의 마왕은 나와 맞먹는 실력을 가지고 있지. 결국, 불가능. 무엇보다 마계로 갈 방법이 없어. 뭐, 간다고 해도 자네 실력으론 무리네. 푸헤헤헷! "…그거 미안하군." 나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검신을 밟고 서서는 양 허리에 손을 얹고 신나게 웃고 있는 마나르트의 모습은… 참으로 화를 내기가 힘든 모습이었다. 꽤나……. "꽤 귀여운 모습이로군. 이게 마족인가?" 재미있다는 듯한 천악의 말에 마나르트가 웃음과 움직임을 딱 멈췄다. 킥, 천악이야 웃음소리를 듣지는 못했겠지만 마나르트의 모습에서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솔직한 말에 마나르트가 양팔을 마구 휘두르며 천악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이 하찮은 인간 녀석! 혼쭐을 내주마! 감히 누구보고 귀엽다는 거냐아아아! 꽥꽥 소리를 질러대며 천악에게 돌진하는 마나르트와 당황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는 천악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나 마나르트와 함께 있으면 심심할 일은 없다. 그보다… 처음으로 떠오른 계획이 그대로 물거품이로군. 쳇. 내가 다른 계획을 생각해 내려 고민하는 순간, 동굴의 입구 쪽에서 꽤나 강렬한 기운이 느껴져 왔다. 기운 자체는 억누른 듯 작았지만, 이상하게도 느껴지는 기운은 강한 거부감이 느껴지며 크게 인식되고 있었다. -망할 천족 나리들의 성력이로군, 그래. 마나르트의 말에 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레지엘!" "어라? 세한?" 동굴 안으로 들어선 사내가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익숙한 느낌. 레지엘이 확실했다. 역시나 꽤나 달라졌지만. "세한, 모, 모습이……." "…그러는 너는……." 나와 레지엘은 서로를 마주보고 서서는 놀란 표정을 지어야했다. 레지엘은… 원래 가지고 있던 은발에 진한 금발이 섞인 장발에 전보다 훨씬 하얗게 변한 피부가 환하고 밝은,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딱 떠오르는 느낌이……. "천사?" "마족?" 동시에 말을 내뱉은 나와 레지엘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역시 나는 마족으로 보이는 건가? 그러는 너는 천사로 보인다, 레지엘. 저기에 딱 날개만 있으면 천사일 텐데. "너 혹시 성력을 끌어올리면 등에 날개가……." "세한, 혹시 마력을 사용하면 몸에 검은 문신 같은 거라도……." "……." "……." 역시 동시에 말을 내뱉은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대답을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성력을 사용하면 날개가 돋아나나 보지? 하늘도 날 수 있으려나? 그건 나중에 보면 알겠고. 혹시, 어쩌면……. "……."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겁니까?" 내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레지엘이 당황하며 질문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레지엘." "예?" "너 혹시 어떤 예쁜 여자가 나오는 꿈, 꾸지 않았냐?" "……?" 무슨 헛소리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나를 멀뚱히 바라보는 레지엘이었다. "문제는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거군." 나는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동시에 사방에 식스센스를 퍼뜨리는 신기를 보여주며 길을 걷고 있었다. 물론, 내 신기를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어쨌든 적색 산맥인 것은 확실하지만……." 레지엘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리고는 천악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악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고타님을 보호하면서 키메라들을 떨치다보니 꽤 멀리까지 이동해서 어딘지 모른다." 당연한 말일지도. 키메라들을 따돌리기가 힘들었을 테니. 나는 나무줄기들과 자연에서 모집한 각종 재료들로 급조한 들것에 실려 있는 고타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안정이 필요한 상태인 데다 업고 있어서는 습격을 당할 때 위험했기에 가지고 있던 여벌옷들에 여러 가지를 동원해 편하게까지 만든 들것에 실린 고타의 얼굴은 꽤나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지도로 다시 눈을 돌렸다. 들것을 들고 있는 것은 레지엘과 천악이었고, 나는 주위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산맥은 거의 빠져나왔다. 나무들이 자라난 숲의 끝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였다. "음?" 저 멀리, 어쩐지 익숙한 느낌의 광경이 보였다. 바위 산. 바위들이 쌓아올려진 듯한 꽤 큰 바위 더미였다. 높이가 거의 20m에 육박하는. 분명 카루나 성에서 용병이던 세갈들과 함께 일을 했을 때 본 적이 있다. 카루나 성에서 적색 산맥 쪽으로 정찰을 오다보니 발견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바스락. 나는 지도를 활짝 피며 오른쪽 윗부분을 살폈다. 지도에도 분명 나와 있다. 저 바위 산. 관광 명소라도 소개되어 있군. "위치는 알았어." 내 말에 레지엘과 천악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물론 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적색 산맥의 최북단이로군. 이대로 동쪽으로 계속 가면 카루나 성이다." 레지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북쪽. 사방 중 두 방위는 막혔다고 봐야한다. 동쪽 아니면 남쪽. 어디로 가야 할까? "세한, 동쪽은 안 됩니다." 레지엘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눈을 마주치자 레지엘은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카루나 성은 드래곤, 키메라들의 손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키메라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키메라들이 만들어지는 곳이 아무래도 이 근처인 것 같아 본거지로 삼으려는 듯 했으니……." "……." "그리고 무엇보다, 근처에 칠흑의 숲이 있군요. 다크 엘프들은, NPC들은 안됩니다, 세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조금만 가면 칠흑의 숲이고, 다크 엘프들의 마을이 있다. 하지만… NPC들과의 접촉은 피해야 할지 모른다. "플레이어들이 모여들고 있는 도시는 바카나. 남쪽이다." 천악도 자신의 말에 동의하자 레지엘은 한층 낫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내가 억지를 부려도 세 명의 일행 중 둘의 의견을 무시하기는 힘들지. 나는 현재 리더도 아니다. 나무꾼의 도시 바카나. 천악이 말해준 섀도우 월드의 상황에 따르면 현재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집결하고 있는 곳이다. 소드 오브 다크의 본거지이던 곳. 우리, 어둠의 검 연합이 NPC들과 상당히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가지게 된 도시다. 적색 산맥의 근처라는 큰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NPC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기도 했고, 지금은 성벽까지 더 높게 쌓아 버티고는 있다고 했다. 드래곤도 플레이어들은 인질로서의 가치 때문에 직접 나서 몰살 시키지는 않고 키메라들만이 공격해 오고 있기 때문에 버티고 있다고 했다. 삼대 연합의 본거지 이던 다른 큰 도시들은… 일단 엠페러 연합의 본거지, 빅 캐슬은… NPC들의 세력이 너무 강했다. NPC들의 왕이 있는 곳. NPC들의 세력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로서의 플레이어가 아닌, 죽음은 실제의 죽음과 연결되는 현재, 그곳에 버티고 있을 능력은 없었다. 헌터 연합의 본거지이던 스피리안 요새는… 키메라들의 대대적인 공격에 무너졌다. 헌터들과 운영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바카나 시로 모이고 있다고 했다. 암흑 연합의 도시인 로근은… 애초부터 플레이어들이 거의 없었다. 암흑 연합은… 드래곤이 시스템을 장악하기 전에 모두 로그아웃에 성공했다. 아마 카메론 사에서 도움을 줬음을 알 수 있었다. 카메론에서 자신들의 직원들이 대거 몰려있는 암흑 연합에 조언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결국 플레이어들은 쫓겨나고 있고…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죽고, 흩어지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플레이어들이 모여 사는 장소는 바카나 시가 유일. 바카나 시와 그 주위로 확장한 플레이어들의 영역 외에는… 모두 적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바카나로 오지 못한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숨어 지내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거나, 드래곤과 맹약을 맺고 NPC들에게 협력하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 솔직히 드래곤의 힘에 눌려 복종한 플레이어들의 수가… 계속 저항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수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NPC와 플레이어, 키메라 간의 관계는 복잡하고 얽혀있었다. NPC들은… 침묵하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NPC들이 저항을 계속하고, 도망다니는 플레이어들을 '사냥'한다. 키메라들은 드래곤의 명령이나 데스 킹 같은, 드래곤의 밑의 간부들의 명령이 아니면 NPC들은 되도록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거리낌 없이 공격한다. 결국 NPC와 키메라 사이에는 아니라고 하기에는 분명히 존재하며, 존재한다고 하기에는 인간과 몬스터의 관계 때문에 어긋나는, 그런 이해하기 힘든 동맹 관계가 성립되고, 플레이어들은 그 동맹에 죽어가고 있다. 드래곤과 그 수하인 키메라들은 분명한 적이다. 그리고 NPC들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지만, 우리들의 적이다. 아는 사이라고 해서 절대 안심해서는 안 되는, 그런 상대다. 다크 엘프의 마을로 가서는 안 된다. 나는 무심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크 엘프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 따위로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없어. 다크 엘프들의 지금 생각이 어떻든 간에, 만나지 않으면 끝이다. 내 마음이나 머리나, 전부 가지 말라고 하고 있다. 미련도 없어. 하지만……. "…다크 엘프들에게 가면 고타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대로 두면… 고타는 죽는다." 바로 이거다. 지금 고타의 상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위험한 상태. 다크 엘프들은 치료 쪽으로도 능력이 많다. 예전, 내가 긴파 시에서 심하게 당했을 때도 다크 엘프들의 환약 덕분에 금세 회복됐다. 어쩌면 고타도……. 레지엘과 천악은 고타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굳혔다. 레지엘은 모르겠지만 천악은 라젠님들과 고타를 꽤나 존경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다크 엘프들을 만나러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레지엘. 그 정도에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야. 하지만… 이대로는 고타가 위험하다." "……." 레지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천악의 얼굴은 갈등에 흔들린다. 그리고 레지엘에게 시선을 돌리는 천악. 동쪽이군. "이게… 잘하는 일일까요?" 레지엘이 갑작스레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천악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럼, 고타님을 죽이자는 건가? 너희들의 말을 들어보니 여기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 것 같은데?" 천악의 말에 레지엘은 고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죠. 칠흑의 숲으로. 만약 다크 엘프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의 일이 더 쉬워질 수도 있을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 카루나 성 근처는… 키메라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위험해. 하지만… 고타는 살려야한다. "고타님은 만약 회복만 되신다면… 현재로선 최강의 전력이시죠. 그리고… 뭐, 저도 현실에서 한번 신세진 일도 있고… 솔직히 이게 마음이 편하긴 하군요."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레지엘에게 의문 섞인 눈길을 보냈다. 현실에서 신세를? 하긴 고타는 무술 관련 쪽에서는 최고 원로라고 하긴 하지만… 어쩌면 만난 적이 있을 수도 있겠군. 내 의문을 눈치 챘는지 레지엘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깡패들에게 납치당할 뻔 했을 때 구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깡패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사건이었죠." 나는 쓰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바람이 약간 강하게 부는군. 그럼, 칠흑의 숲……. "아!" 파팟. 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레지엘과 천악이 순식간에 무기를 쥐며 주위를 경계했다. 고타가 들린 들것은 어느새 바닥에 고이 내려져 있었다. 파아앗. 레지엘의 몸에서 약하게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성력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증거. 으음, 곤란하군. "…몬스터는 아닌데……." "……." "후우, 무슨 일입니까?" 레지엘이 약간 짜증스러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페이나의 미궁." "예?" "전설이 하나 있다고 들었어. 타락 천사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고 했던가?" "아……." 레지엘과 천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섀도우 월드에서의 전설은, 사실 그대로이다. 모든 전설은 던전에 관해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아마 페이나의 미궁도, 아직 한번도 돌파한 사람이 나오지 않은 그곳의 전설도 사실일 것이다. "타락 천사의 힘……." 레지엘은 상당히 놀랐다는 듯 약간 멍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때 천악이 등 뒤에 걸린 공간의 낫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봉인된 힘이라는 것, 도움이 될 것 같나?" "아마도. 적어도 천사의 힘이라면 상당하겠지. 천족이나 마족 한 명의 도움을 받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 어떤가 마나르트?" 나는 마나르트에게 질문을 돌렸다. 마나르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나르트의 말을 따라 말해 레지엘과 천악도 마나르트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글쎄. 먼저 말하자면 그 페이나인지 하는 멍청난 천족 녀석은 그리 강하지 않아. 천족 중에서도 서열이 높지 않았고 말이네. 하지만 일반적으로 천족들이, 특히 그 중에서도 천사가 타락하게 되면 힘은 증가한다는 말이 있지. 그 때문인지… 페이나라는 천족의 뼈와 살을 취하기 위해 몰려간 마족들이 떼죽음을 당했어. 물론 강한 마족들을 가지 않았었지만. 그리고 바로 봉인되었기에 나 같은 상위 마족들은 그녀의 힘을 확인하지 못했지. "…확인 하지 못했지. 그건 페이나라는 천족이 강하다는 건가?" 마나르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질문을 던지자 레지엘과 천악이 약간 혼동을 느낀 듯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때 몰려갔던 마족들의 힘과 숫자를 생각해보면… 아마 저 고타라는 인간보다 조금 강한 정도? 그쯤일 것으로 예상했지. 하지만……. 고타 정도의 힘이라는 말에 레지엘과 천악의 얼굴에 갈등이 떠올랐다. 고타가 강하기는 하지만… 데스 킹에게 당했다. 그리고 데스 킹은 드래곤의 수하 중 하나일 뿐이고… 그 정도 힘을 얻기 위해 아무도 통과하지 못한 페이나의 미궁을 돌파해야한다고? 하지만 이어지는 마나르트의 말에 우리 셋의 희망은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전에 키메라들에게 붙잡혔을 때, 페이나의 미궁이 있는 곳에서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었네. 멍청한 타락 천사의 힘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었네. 키메라들이 풍기는 기운과는 달랐고… 성력과 비슷한 점이 있었으니 페이나의 미궁에 봉인 된 힘이 분명하네. 하지만 예상 밖으로 강한 힘이라 잘 모르겠군.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음, 인정하긴 싫지만… 나와 동급, 아니 봉인된 힘이니 조금 더 높게 잡아… 나 이상이었을 지도……. 레지엘과 천악의 눈이 커졌다. 라젠님들을 뛰어넘는 힘이라고? 그런 힘이라면… 엄청난 도움이 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레지엘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확정입니다. 이대로 칠흑의 숲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다크 엘프들의 원조만 받을 수 있다면, 아니. 고타만이라도 맡길 수 있다면……." "재미있겠군." 천악이 동조하며 사납게 웃었다. 그런 둘의 반응에 마나르트가 푸념하듯 말했다. -뭐, 말려도 소용없겠군. 그 힘이 정확하게 그 타락 천족 녀석의 것인지도 모르는데… 위험할 수도 있네. "어차피 이곳에 온 것 자체부터가 위험이었지. 한번 쯤 가볼 가치는 있어." 레지엘과 천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악이 자신의 공간의 낫을 손에 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말해두자면 이 공간의 낫은 내가 페이나의 미궁에서 얻은 물건이지." 뜻밖의 말이었다. 나와 레지엘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천악이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계속했다. "한번 해보자는 심정에서 혼자 들어갔었지. 아마 레벨이 400 정도일 때였나? 거의 죽을 뻔 하다가 어떤 악마의 모습을 한 녀석에게서 빼앗았다. 그 몬스터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공간을 가르고 나오는 낫 때문에 죽을 뻔 했지. 그리고 내가 죽을 뻔한 그 곳이 미궁의 초입이었다." 나와 레지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벨 400에 미궁 초입에서라. 그것도 천악이? "쉽지는 않겠군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일이 되겠어. 기이잉.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걸렸다. 내 식스센스의 범위 끝. 불길. 엄청난 속도로 우리와 가까워진다. 강해! 스으아아악! 내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오며 눈에 살기가 어렸다. 말도 필요 없이, 레지엘과 천악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상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전신이 떨려온다. 동류의 기. 마력, 마기다. 마기를 뿜어대고 있는 상대. 자동적으로 느껴지는 불쾌감과… 분노! 고오오오. 순식간에 내 몸에서 치솟던 마기가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레지엘과 천악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무들이 터져나가며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은 갑옷과 그 안으로 보이는 타오르는 어둠. 거칠게 타오르는 마기의 검. "데스… 킹." 레지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천악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고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최악의… 악연으로 묶인 상대. "크크크크, 역시 네놈이었군, 다크소드." 검게 타오르는, 역겨운 눈동자가 내게 향하며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흥분해서 좋을 것이 없다. 침착, 무심이다. "오랜만이군."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레지엘과 천악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크크? 그 땡중이 살아있었군. 나중에 가보니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천악, 네 녀석의 짓이었나?" 천악은 이를 부드득 갈며 공간의 낫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데스 킹 녀석, 천악과도 아는 사이인가? 아, 전에, 내가 섀도우 월드에 들어서기도 전에, 저 녀석이 데스 나이트였을 때. 천악을 비롯한 그 당시의 최강자들이 저 녀석을 사냥했었지. 그 때 알게된 사이일 지도. "크크크… 그래도 쥐새끼처럼 도망가고 있을 줄은 몰랐군. 복수라도 하겠다며 달려들 줄 알았는데 말이야. 큭큭큭, 겁을 먹고 꼬리를 내린 건가? 크하하하하!" 나는 조용히 데스 킹 녀석을 살폈다. 상당히 분노한 듯, 힘을 점점 높여가는 천악과 레지엘 때문에 약간 어렵긴 했지만… 식스센스는 확실하게 느껴왔다. 데스 킹, 이 녀석은… 강하다. -강하군. 뜻밖인데……. 마나르트의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고타가 당한 것이 이해가 간다. 직접적인 싸움 기술은 모르지만… 느껴지는 마력, 기. 그것만큼은 엄청나다. 고타를 훨씬 뛰어넘어 있다. 나와 동질의 마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 쉽게 느껴진다. 아니면… 혹시……. 저벅.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레지엘과 천악이 놀란 듯, 살기마저 흐트러뜨렸다. "세, 세한?" "뭐냐, 다크소드." "…이 녀석은, 내가 맡는다. 길은 천악이 알지. 가." "무, 무슨!" 내 말에 레지엘이 강하게 반발하며 소리쳤지만 나는 바로 말을 끊었다. "키메라들이 떼거지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 녀석을 상대하면, 포위된다." "그런……." 정말로, 이 근처로 키메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수가 많아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진다. 이 녀석 때문에 시간을 끌어서는 포위당한다. 그렇다면……. 푸화악! 내 온몸에서 마기가 들끓으며 거칠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르륵.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으며 은빛 머리들이 번뜩거린다. 그리고 온몸에 검은 문양들이 생겨났다. 처음으로 되는대로 마기를 끌어내자, 검은, 문신과도 같은 문양은 더욱 진해지며 검은 빛과 은빛을 환상적으로 뿜어내었다. 마나르트를 들지도 않은 채,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이었다.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하다. 잠깐 사이에 더욱 강해진 것만 같은 느낌. "후우……." 나는 한숨을 한번 내쉬며 데스 킹 녀석을 노려보았다. 내 살기와 데스 킹 녀석의 살기가 맞부딪히며 몸이 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납게 말했다. "이번엔… 반드시 이 지겨운 악연에 종지부를 찍어주지." 내 날카로운 말에 데스 킹은 광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크큭! 역시 다크소드로군! 마신의 힘까지 얻은 건가? 크하하하핫! 좋다! 죽여주마!" 데스 킹 녀석이 마기를 폭발적으로 내뿜기 시작했다. 내가 일단 요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천악이 앞으로 나섰다. "천악?" 내가 의아해 하는 목소리로 불렀지만 천악은 아무 말도 없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의 손에 들린 공간의 낫에서 회색의 기운이 강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로 불꽃이 일렁이듯 흐르고 있는 잿빛의 마나. "내가 맡지." "뭐?" 천악의 뜻밖의 말에 나는 황당함을 느끼며 급히 입을 열었다. "무슨……!" "지금 확실히 알았다. 나보단 네가 더 가능성이 있다, 다크소드. 네놈의 힘은 이미 날 넘어섰어. 거기에 마검까지. 가라. 남쪽으로 계속 달려. 바카나까지만 가면 된다." "!" 나는 얼굴을 굳혔다. 천악… 이미 마음을 굳혔군. 남쪽으로 가라고? 데스 킹 녀석을 속이려는 건가. 우리는 남쪽으로 가고 있다고 알게 하려고……. 그렇다면 여기에 숨겨진 뜻은… 천악은 이미 자신이 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는 거다. 가야한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천악보다는 내가 살아야한다. 나는 마검의 주인. 조금이라도 더 희망이 있는 쪽은 내 쪽이다. 나는 살아야 한다. 젠장! "레지엘, 고타를 업어." 내 말에 레지엘이 잠시 눈을 가늘게 뜨다가 고타를 들쳐 업었다. 나는 천악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천악……." "가라." 나는 이를 악물고는 데스 킹 녀석을 한번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놈은 우리의 행동에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고 있었다. 누구와 싸우든… 상관없다는 건가? "가자, 레지엘." 그대로 등을 돌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일단은 남쪽으로 달리다가 방향을 틀어야한다. 레지엘이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천악과 데스 킹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천악이, 또 한명이 희생했다. 앞으로 몇 명이나 더 죽게 될까? 목숨을 내놓게 될까? 드래곤에게, 페이린에게 강력한 적의가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어딘가에, 아직도 섀도우 월드에 완전히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남아있다. 왠지… 슬프다. "크크, 네놈이 내 상대냐?" 데스 킹의 물음에 천악은 별 대답 없이 데스 킹을 노려보았다. "큭, 뭐, 나름대로 괜찮겠군." 천악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곧 무시무시한 살기가 주위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데스 킹은 천악이 내뿜는 살기에 웃음을 흘리며 기형의 검을 움켜쥐었다. "죽여주지, 하늘의 악마." 번뜩! "고타님의 원수, 갚아주지." 순식간에 두 빛이 충돌하며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앗!" 푸확! 순식간에 키메라 몇 놈의 몸이 둘로 갈라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화아아악. 순식간에 밝은 빛이 터져나며 주변의 키메라들이 괴로워하며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백색으로 타오르는 검이 키메라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빛의 깃털들이 허공이 휘날렸다. "멋지군." -쳇, 느끼하네. 판이하게 다른 나와 마나르트의 상반된 평가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레지엘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내 옆으로 다가온 키메라 녀석을 위에서부터 찍어 눌렀다. 카아악! 괴성과 함께 키메라는 머리가 갈라져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곧 남색 기운에 휩싸여 몸을 일으킨다. -이럴 때 보면 그 요검인지 하는 녀석도 꽤나 쓸만하네. "동감." 나는 단검을 던져 다가오는 키메라 몇 놈을 꿰뚫었다. 이제 십여 마리. "세파빌!" 그때 레지엘이 고함을 질렀다. 성검에 깃든 천족의 이름. 그리고 성검에서 환한 빛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많은 키메라들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져나갔다. 강하다. 역시 레지엘도 천신의 힘을 받았으니……. 레지엘의 현재 모습은… 밝은 빛에 휩싸이고, 금발과 은발이 뒤섞인 머리를 빛내며, 등에 돋아난 빛의 날개까지 합해져 완벽한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완전한 천사라고 하기에는 날개의 모습이 많이 다르고 인간의 모습이 훨씬 강하다. 그저 신비스럽고, 처음 보면 꼭 천사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 그리고 저 날개는 하늘을 나는 용이 아니라 몸을 감싸는 방어용의 역할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인지 레지엘은 그 무겁고 두껍던 풀 플레이트 메일들을 벗고 있었다. 성력은… 역시 보조로써의 효과도 많아 순수한 전투력만이 올라간 나와는 달리, 꽤 많은 다른 효과들을 주고 있었다. "흐음." 숨을 고르는 레지엘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씨익 웃으며 순식간에 손을 휘둘렀다. 등 뒤에서 마나르트가 순식간에 뽑아지며, 검은 검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키아아악! 키메라들이 괴성과 함께 쓰러져 간다. "후우……." 나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하군요." 레지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악을 걱정할, 애도할 시간도 없었다. 이곳은 칠흑의 숲 초입, 여기까지 오면서 매 시간마다 키메라와 전투를 벌였다. 이래서야 데스 킹 앞에서 연극한 보람이나 있을지 싶을 정도였다. 전속력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도 이렇다니……. "곧 다크 엘프들의 마을이다." 내 말에 레지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아마 나도 비슷하지 싶은데. 다크 엘프들은,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세한." "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나는 대답 대신 이를 갈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어느새 다시 우리를 포위한 키메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옥이었다. "크크크……." 데스 킹은 자신의 앞에 쓰러진 회색머리의 사내를 보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회색의 전사, 천악의 처참한 모습에 비해 데스 킹의 갑옷은 별다른 피해가 없어보였다. "크…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군." 데스 킹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천악, 이 녀석은 정말 악귀다. 배틀의 천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위험하면 몸을 뺀다. 빈틈을 조금만 보이면 바로 공격해 들어온다. 자신의 실력만이 아닌, 폭발 아이템을 비롯한 암기들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데스 킹은 길고 길었던 싸움을 떠올렸다.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어떨 때는 죽을 각오로 싸우다가 최후의 순간에 몸을 빼내 거리를 벌려 도주하고. 정말, 1:1의 싸움, 배틀에 관한한은 고타를 능가하는 상대였다. "크… 하지만 그 땡중보다는 분명히 약한 녀석인데… 이상하게 체력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같군." 데스 킹은 흉흉한 안광을 발하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공간의 낫을 노려보았다. 뭔가를 꿰뚫어보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크큭……." 하지만 데스 킹은 곧 웃음을 흘리며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쪽이라고 했었나? 크하하하하핫!" 데스 킹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 방향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서 키메라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 녀석을 처치해라. 나는 동쪽으로 간다." 키아악! 세한이 돌아와 처음으로 싸웠던 키메라와 같은, 샤벨 타이거와도 같은 모습에 온몸에 날카로운 날들이 솟아나 있는 키메라였다. 빈사 상태로, 기절해 있는 천악을 죽이는 것은 너무도 쉽게 해치울 키메라. "킬킬, 즐거웠다. 그럼, 메인 메뉴를 즐기러 가야겠지. 다크소드, 크크……." 데스 킹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서서히 움직여 갔다. 땅에서 조금 떨어져 바람에 흐르듯. 데스 킹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곧 모습을 감췄다. 키아악. 그리고 남아있던 키메라가 날카로운 발톱을 빛내며 쓰러져 있는 천악에게 다가갔다. 천악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피이이잇!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퍼엉! 그리고 순식간에 터져나가는 키메라의 머리. 머리를 잃은 키메라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쿵 쓰러졌다. 그리고 한 인형이 나무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상당히 느린 걸음. 그 인형은 천악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키메라들을 뚫고, 숲의 안으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지는 협곡과, 그 건너로 보이는 호수와 그 호수를 둘렀나 마을. 다크 엘프들의 마을. 나를 발견한 다크 엘프들이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오른다. 나와 레지엘은 부상으로 쑤시는 몸을 응?이끌고, 걸었다. 마을로. 마을의 중심으로. 다크 엘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와 가장 친분이 깊었고, 마음을 열었던 섀도우 월드의 NPC들은. 나는…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을까? "……." 주변, 나와 레지엘의 주변에는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 기쁜 듯 하면서도 당황하고 있는 이들. 뭔가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이들. 다크 엘프들. "세한." 레지엘이 고타를 추스르며 약간 걱정이 어린 목소리로 나를 불러왔다. 나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분위기가… 좋지 않군. 나와 레지엘의 몰골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오면서 베어 넘긴 키메라의 수만 해도 각자 두 자리 수까지 갈 정도. 칠흑의 숲으로 들어서면서 키메라들이 떨어져나가지 않았다면 치명상을 입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만 해도……. 뚝. 레지엘의 턱을 타고 흐른 땀과 피가 땅으로 떨어졌다. -위험하군. 괜찮겠나, 세한? 마나르트의 목소리에 나는 쓰게 웃었다. 나도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키메라 한 놈의 날카로운 팔이 복부를 파고들었었다. 그리고… 마나르트의 말뜻은 상처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의 분위기만 봐도… 다크 엘프들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저벅, 저벅. 나와 레지엘은 계속 걸었다. 마을의 중심까지. 우리의 양 옆으로 다크 엘프들이 몰려나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워하는 눈으로. 우리가 걷는 곳에, 이들의 대답이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로님. 그리고 테티오." 마을의 중심 광장. 회관의 바로 앞. 그곳에 이 마을의 장로장과 수호수인 스핑크스 테티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인간이여." 장로장의 말에 레지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인간…이라. 나는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이걸로 대답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떠나라. 테티오가 입을 열었다. 떠나…라고. 나는 테티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 마을을 지키는 자. 그 옛날부터 내려져오던 맹약을 이행해야 한다.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선… 그대가 이 마을을 떠나게 해야 한다. 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런가?" "죄송합니다, 일족의 은인이시여." "후, 그래도 은인이라고는 불러주는군." 내 약간의 살기가 담긴 말에 장로장이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나는 곧 살기를 거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격한 반응은 내가 아닌 레지엘에게서 일어났다. "하, 역시 예상했던 대로군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때는 은인이라며 극진히 대하고, 조금 상황이 어려워지니 그대로 내친다? 멋진 처세술입니다. 드래곤에게 고개를 숙이긴 했어도 마을은 지킬 수도 있겠군요. 다크 엘프들은 신의를 지키는 존재다? 그런 말을 들었던 내 귀를 뜯어버리고 싶은 심저입니다." 레지엘의 말에 장로장과 테티오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주위의 다크 엘프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지금의 결정이, 결코 완전한 자의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은 최강의 존재다. 그 누구도 해할 수 없는……. 테티오의 말에 레지엘은 냉소를 흘렸다. 그의 차가운 웃음에 테티오는 한쪽을 가리켰다. 광장의 오른 구석. 거대한 눈과도 같은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건……. -주시자(注視者). 드래곤이 심어놓은 눈이다. "드래곤은 억누르지 않는다고 한 것 같은데?" -그녀가 마음먹는 순간, 다크 엘프는 멸망이다. 이 세상이 이계의 인간들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 그들을 도왔던 자들 또한 사라진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 절대 너희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건 단 하나. 마을의 안전이다. "참으로 이기적이시군." -그건 너희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레지엘의 기도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점점 솟아나기 시작한 막강한 기운에 테티오의 얼굴이 점점 긴장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만해, 레지엘." "……." 레지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장로장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장로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지금 상태로는 인간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도……." "…역시 난 인간이라 그거로군." 나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은 이런 건가? 뭐, 지금 상황에선 관계를 끊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재 말에 장로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세, 세한님!" "이, 이봐!"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려는 다크 엘프들을 다른 다크 엘프들이 막아선다. 이해할 수밖에 없겠지. 이들도 살아야 한다. 같은 생명이니까. "장로장님,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습니다만……." 마지막 부탁이란 말에 장로장이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고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을 좀 맡아 주십시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분입니다. 그저 마을에서 치료만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만. 그 외의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장로장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더니 고타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레지엘에게서 고타를 넘겨받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명의 여자 엘프들이 달려왔다. "저, 저희가 모실게요." 지금은 잠들어 있는, 디렐의 여동생인 리야와 이 마을에 계속 머물고 있는 듯한 엘프 실비아였다. 둘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타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나는 미소를 지어주었고 둘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럼… 끝까지 살아남기를. 테티오, 마을을 잘 부탁합니다." -…미안하다.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몸을 돌렸다. 레지엘이 살벌한 표정으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려던 나는 한 가지 사시를 깨닫고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미시안은?"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 내 질문에 장로장이 대답해 주었다. "…마을을 나갔던 20명의 일족이 돌아오지 않았고… 당신이 걱정된다며 한달 전에 떠났소."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지엘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 적어도 미시안은 날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상관이지. 이제, NPC들은 잊어야 한다. 이들이 어떻게 되든, 지금은 드래곤만을 보고 앞으로 가야한다. 타악. 그때 나와 레지엘의 앞을 한 여자가 막아섰다. 린? "따라가겠습니다, 주인님." "린……." 나는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맨 처음, 린이 알에서 나왔을 때가 떠올랐다. 후훗. 정말로 고맙군. "남아." "예? 주, 주인님!" "저 반인족들을 지켜야지." 나는 한쪽에 모여서 불안한 듯 떨고 있는 동물들을 가리켰다. 반인족들이었다. 린은 그 반인족들을 보며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린에게 다가갔다. "주인님." "고맙다." 나는 그대로 린을 품에 끌어안았다. 내 품에 안긴 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 주인님……." "정말 고마워. 하지만… 아무래도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우리 이계의 존재들만이 해결해야 할 것 같아. 오늘, 뼈저리게 느꼈다." "……." 나는 린을 세게 끌어안았다. 따뜻하다. "주, 주인……." "남아." 나는 린을 놓아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린은 멍하니 서 있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크고 아름다운 눈망울에 물이 고이며 격하게 흔들렸다. "데리러 올게." 나는 린의 머리를 토닥여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꽤나 흔들렸다. "으, 은인이시여!" 한쪽에 모여 있던 엘프들이 나를 향해 외쳤다. 전에, 반인족들을 구하며 함께 데려왔던 엘프들이다. 역시 이곳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떠나는 순간, 다크 엘프들과는 끝이다. -괜찮나? "세한?" 마나르트와 레지엘이 동시에 물어왔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다. 고타를 맡아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는 수밖에……. OPG를 벗었다. 그리고… 손가락에서 검은 빛의 반지를 꺼내 마기를 강하게 주입했다. 부스스. 엄청난 마기, 파괴의 속성이 강하게 실린 마기의 응집을 견디지 못한 반지가 먼지가 되어 바람에 휘날렸다. 나는 다시 OPG를 끼고는 걸음을 옮겼다. "흑흑……." "크흐흐흑." 등 뒤로 흐느낌들이 들려왔다. 점점 커지는 울음소리들.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고양이는 데려가는 것도……. "말했지만,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싸움이야. NPC들은…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알겠네. 린은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은, 어떻게 보면 린의 고향이기도 하다. 여기서 처음 태어났지. 흐느낌과 울음소리들, 내 이름을 부르는 떨리는 목소리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짧은 방문을 끝냈다. "장로님! 꼭, 꼭 이래야만 했던 겁니까!?" 칠흑의 숲, 다크 엘프 마을의 장로장인 드리크는 자신을 향해 외치는 젊은 다크 엘프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몇 달을 고민하고, 회의하고, 괴로워했다. 다크 엘프들이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었다, 드리크. "예, 테티오님……." 테티오의 말에 드리크는 떨리는 목소리로 동의했다. 처음으로 도움을 준 인간이었다. 오랜 세월을 냉대 받고, 어둠 속에서 살아온 다크 엘프들에게 찾아온,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세한, 그 인간은. 다크 엘프들이 학살 당한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목숨을 걸고 달려갔고, 구해내려 노력했고, 또 다크 엘프들을 구해냈다. 그리고 다른 NPC 종족들도, 그의 손에 구해져, 이곳으로 왔다. "……." 하지만 이미 그는 다크 엘프들을 떠났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드리크는 광장의 한 구석에 위치한 거대한 눈, 주시자를 바라보았다. 키메라의 일종인 저 거대한 눈은… 드래곤이 직접 찾아와 정중히 요청하고는 심어놓은 것이었다. 곳곳의 정보를 쉽게 얻기 위해 한 것이라고는 했으나… 저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크 엘프들이 세한을 돕지 못하게 하는 큰 이유로 작용했다. "세한님이 맡기고 간 인간에게는 환약을 주었나?" 드리크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다크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 인간 만은 살리는 것이 그에게 마지막 도리를 다하는 것이리라. 플레이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만약, 세한이 플레이어가 아닌, 같은 NPC였다면, 도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드리크는 쓰게 웃었다. "자, 장로님!" 그때 다급한 외침과 함께 마을의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강한 살기와 공포가 마을을 뒤덮었다. "크크크크큭! 다크소드는 이미 떠난 모양이군." 드리크는 저 멀리 보이는, 검은 갑옷에 둘러싸인, 광폭한 마력의 응집체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드래곤께 복종했으니 그만……." 푸화악! 데스 킹의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하던 젊은 다크 엘프가 순식간에 핏덩이로 변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꺄아아아악!" "으아아!" 다크 엘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물러나고, 전사들은 무기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드리크는 눈을 감았다. "크흐흐… 그랬단 말이지. 그거 다행이군. 설마 다크소드가 이곳에 함께 있다면 위험했는데… 네놈들이 알아서 위험을 없애 주니 고맙군. 크하하하하! 보답은… 죽음이다!" "무, 무슨… 끄아아악!" 무차별적인 학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데스 킹은,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리며 다크 엘프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 강대한 힘 앞에 다크 엘프들은 서서히 쓰러져 갔다. "크크크크크! 버러지 같은 놈들! 그분께선 너희들을 내버려 두셨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어! 그분의 아래에 나같은 녀석도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나 보군? 든든한 조력자를 버리다니! 크하하하하!" "끄아아악!" 푸화아악! 다크 엘프들이 비명과 함께 터져나가고, 사지가 절단되어 목숨을 잃어갔다. 저항하던 전사들도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죽음과, 죽음과 죽음. 무차별 적인 학살. "아아……." 드리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를, 세한을 보내지 않았다면… 살았으리라. 이것은… 그를 배신한 우리에게 내리는 천벌인가. "멈…춰." 절규하던 드리크는 뒤에서 들려오는 인간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세한이 맡기고 간 그 인간. 고타가 파리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다크 엘프들의 환약은 대단했고, 죽음의 기운이 그를 깨웠다. "크크크. 네놈은 남아 있었나? 그런데 설마 그 몸으로 나와 대적하려는 건가?" "…이들이 죽는 것은 보고 있을 수 없다." "크하하하하!"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하던 다크 엘프들은 데스 킹에게 돌진해 들어가는 고타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착각하고 있었다. 크나큰 착각을. 플레이어, 이계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적이 아닌 것을… 오히려… 드래곤과… 이들이 자신들의 적인 것을……. 세한… 그에게 미안하다는 마음 뿐. 은인을 배신하고, 바로 파국을 맞이하는 상황이 슬플 뿐.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다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싸우고 있는 저 인간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크헉!" 필사적으로 싸우던, NPC들을 위해 싸우던 한 인간이 무너졌다. 그의 복부에 정확하게 박혀 들어가 타오르는 마기로 타오르는 마기검. 데스 킹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크, 크카하하하하!" 푸화악! 고타는, 보았다. 처참하게 죽어있는 다크 엘프들의 모습을. 그리고 저 데스 킹은 다른 다크 엘프들도 죽이리라는 것을 알았다. 고타는 온몸을 휘저으며 고통을 주는 마기들의 고통보다, 더욱 큰 분노를 느끼며 데스 킹을 노려보았다. "크크크크." 데스 킹은 그런 고타를 마주 보며 웃음을 흘리다 손으로 고타의 목을 쥐었다. 우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타의 목이 박살나며, 고타는 생명을 잃었다. "크크크크." 데스 킹은 자신의 손에 들린 인간의 시체를 던져버리고는 순식간에 다른 다크 엘프에게 다가가 마기의 검을 휘둘렀다. 퍼억! 죽고, 죽고, 또 죽어나가는 다크 엘프들. 카오오오오! 거대한 스핑크스가 분노와 함께 돌진 한다. 그리고 데스 킹의 흉흉한 살광이 번뜩이며 스핑크스, 테티오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카아아아! 스핑크스가 비명과 함께 허물어진다. 몸의 자유를 잃은 스핑크스의 눈에서는… 회한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크크크크." 데스 킹은, 한 쪽에 모여 떨고 있는 여자들을 보며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아름다운 다크 엘프들과 엘프, 반인족 여성들. 그리고 그 무력한 여성들을 보호하겠다는 듯이 단호한 태도로 자신을 막아서고 있는… 다크소드의 반인족……. "크크크. 오늘 밤은… 즐겁겠군. 크하하하하!" 데스 킹의 눈이 광기와, 욕정으로 빛난다는 것을 느끼고, 여성들을 보호하며 데스 킹에게 공격을 퍼붓던 린이 강한 공격에 기절하는 것을 보며 드리크는 피눈물을 흘렸다. 죽이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이리라. 정복자가 누리는 권리라고 하던가. 자신의 노리개로 삼으려는 것이리라. "크흐흐흑." 드리크는 절규의 눈물을 흘렸다. 마계의 최강자의 반열에 드는 마족의 힘 앞에, 다크 엘프들의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마을은, 너무도 쉽게 유린당했다. 세한이 떠나고,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9권 마지막이다! <얽이고 얽인 실타래> 고오오오오! 사방이 강력한 기의 여파로 떨리고 있었다. 공기마저 강력한 기에 눌려 떨리는 듯한, 그런 막강하고도 동시에 모든 것을 어우를 줄 아는 강력한 기. 휘이이이! 번뜩! 희미한 바람이 흐르며 강렬한 기운이 넘치는 눈동자들이 번뜩였다. 모두 4쌍의, 각기 다른 색의 빛들을 내뿜는 거대한 눈동자들. 우우웅. 밝게 빛나는 커다란 비늘들이 모습을 드러낸 존재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한 눈으로는 끝을 확인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길이와 웅장함을 가진 네 존재, 그들은 맑은 빛을 뿌리는 눈동자들을 들어 자신들의 공간에 들어온 네 명의 작은 존재를 주시했다. -왔는가. 사방을 내리 누르는 듯한 묵직한 음성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네 존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네 인형 중 하나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고개를 들었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시원한, 자연을 어우르는 봄바람과도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 네 존재 중, 가장 뒤쪽에 자리하고 있던 하늘빛 비늘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존재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 지상의 관장자가 큰일을 벌였다. 무릎을 꿇고 있던 네 존재가 고개를 숙였다.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공기를 울리는 음성이 이어졌다. -천신과 마신은 그 일을 막고자 하지만, 법칙으로써, 천족도 마족도 나서지 않는다. 두 대리자만이 힘을 이어받고 있을 뿐. 우리도 오랜 법칙에 따라 침묵한다. 음성이 끝나자 무릎을 꿇은 넷 중 다른 셋에 비해 왠지 모르게 부족해 보이는, 미숙해 보이는 듯한, 갈색의 도포를 두른 존재가 고개를 들고 의문을 토했다. “허나, 저희는 천신의 편에도, 마신의 편에도 서지 않으며, 중도를 지켜 지상을 다스리는 존재들 중 하나. 이대로 드래곤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지한. 말을 꺼낸, 앞의 네 존재에 비해 너무도 미약한 네 존재 중 하나의 말은 적갈색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존재에 의해 끊어졌다. 무거운 음성이 이어졌다. -진광이 죽고, 임시로 맡게 된 자리다. 나서지 말도록. 미숙한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번 바람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작은 존재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공기를 휘몰아치는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천족과 마족이 침묵하는 이유는 알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이유 없이 나서지 않는다. 우리는… 중도를 지키는 존재다. 어쩌겠느냐? 말의 맺음이 신호가 되기라도 한 듯 바람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존재, 푸른 도포에 백발을 휘날리는 존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역시 푸른 도포를 입고 있던, 물의 기운을 품고 있는 존재가 놀란 얼굴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수장이여! 설마……!” “마신의 대리자는, 저와 친분이 있는 자. 진광을 안식으로 인도한 자. 이무기들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자. 저, 이무기의 수장의 인정을 받은 자. 돕겠습니다.” 당당한 외침이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셋이 놀람과 감탄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네 존재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공기가 울리며, 음성이 울려 퍼졌다. -너는 성풍(成風). 이무기의 수장. 이루는 바람이다. 너의 뜻이 그렇다면, 무엇이든 이루어지겠지. 가거라. 발걸음이 닿는 대로. 천신과 마신은 자신들의 대리자로 두 인간을 내세웠다. 그리고 우리 중도자, 사룡(四龍)은 이무기의 수장, 바람을 다루는 이무기, 성풍을 대리자로 내세운다. 나, 천룡의 힘을 그대에게 허락하니……. 휘이이이이잉!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강력한 바람 공간 전체를 울리며 사방으로 휘돌았다. 그리고 거대한 위용과, 엄청난 기운을 자랑하는, 네 용의 몸을 휘몰아쳐, 꼿꼿이 서 있는 한 이무기에게로 모아졌다. 스으으으으! 푸른 도포가 휘날리며, 백발이 바람에 치솟았다. 그리고 그 백발이 하늘빛으로 물들었다. 인간의 육체와 자연스레 뒤섞인 아름다운 비늘들이 신비롭게 빛났다. 번뜩. 푸른 눈이 강렬한 기운을 내비치는 순간, 휘몰아치던 바람의 기운이 자취를 감추었다. 천룡, 그 강력한 존재의 푸른 눈에 이채가 어렸다. -놀랍구나. 언제든 내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을 이무기여. 내가 준, 네가 지닌 이름대로, 바람으로서 이루기를.너라면 이미 모든 것을 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 한번은, 바람의 문을 열게 해주겠다. 가거라! 공기를 울리는 음성이 한번의 외침과 함께 사그라들자, 이번에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듯한, 주위의 화기(火氣)를 요동치게 하는 강렬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가거라! 우리의 대리자여! 화기의 요동이 끝나는 순간, 그 열기를 식히는 수기(水氣)가 일어나며 맑은 음성이 울려퍼졌다. -가거라! 우리의 대리자여! 그리고, 모든 것을 내리누르는, 모든 것을 바치는 듯한, 무거운 음성이 울렸다. -나의 후계자, 마성에 정신을 빼앗겼던 불운했던 대지의 이무기를 잠재워준 인간에게 힘을 보태주기를. 그리고 나의 감사함을 전해주길. 가거라! 우리의 대리자여! 화아아아악! 순시간에 강렬한 공기의 파동이 일어났다. 뜨드드득, 뜨드득! 바람이 모여들었다. 바람을 다루는 이무기, 성풍의 앞의 공기가, 공간이 찢어지며 작은 공간의 입구가 드러났다. 콰르르르르! 바람은, 모든 곳을 여행한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공기는, 지상의 어디에든 존재한다. 그 공기를, 바람을 다루는 자, 어디든 가지 못할까. 더욱이, 천룡의 허락을 받음에야. 바람의 문이 열렸다. 스르르륵. 푸른 도포와, 하늘빛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존재가 바람의 문으로 몸을 들여놓았다. 순식간에 그 몸을 바람이 휘감는다. 바람의 이무기, 성풍은 바람의 문을 지났다. 휘이이이잉! 검은 마기를 폭발적으로 내뿜고 있던 존재, 마계에서 온, 죽음의 관장자는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에 급히 몸을 돌렸다. 휘이이잉! 그리고, 바람이 열리며, 하늘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한 존재가 걸어 나왔다. “킬!” 데스 킹, 죽음의 지배자는, 자신의 품에 안겨 부들부들 떨고 있던 한 반인족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세한에게, ‘린’이라는 이름을 받았던 반인족. 이미 데스 킹에게 모든 기운을 빼앗겨 있었다. 죽음의 지배자에게,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의 기운은, 강한 힘이 된다. 그리고 기운의 흡수와 동시에 죽음을 준다. 마기에 눌려, 움직이지도 못하던 살아남은 다크 엘프들이 그 반인족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수많던 다크 엘프들이, 수백으로 줄어 있었다. 거기에 대부분이 젊은 여자. 뿌드득. 바람의 문에서 걸어 나온 바람의 이무기는 처참한 마을의 모습에 크게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크하하하하하!” 데스 킹이 마기를 내뿜으며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한층 강해진 마기가 강하게 들끓었다. “훗.” 하지만 그 강력한 마기 속에서도 성풍은 비웃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평온한 얼굴. 성풍은 아직 죽지는 않은 듯한, 세한과 같은 기운을 품고 있는 반인족을 잠시 바라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후와아악! 순식간에 강풍이 모여들었고, 데스 킹을 향해 바람의 창들이 날아갔다. “크카카카칵!” 푸화아악! 데스 킹의 광소와 함께 검은 마기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바람과 마기의 충돌. 그 강력한 두 기운의 현장에서… 사룡의 대리자, 바람을 다루는 이무기, 성풍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한 동시에,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헉, 헉…….” “후우…….” 나와 레지엘은 숨을 고르며 몸을 편히 기댔다. 정말, 체력이 엄청나게 떨어졌다. “무슨 키메라들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군요.” “젠장, 정말 키메라 천지…….” 칠흑의 숲을 빠져 나오고 몇 시간 동안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준 수많은 키메라들을 열과 성을 다해 씹어대며 우리는 상처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쯤일까요?” “글쎄. 대륙의 북부 지역 최남단 정도? 지도를 도넛 모양으로 놓고 보면 중앙 구멍 근처겠지.” “참 맛있는 비유군요.” 나와 레지엘은 쓰게 웃었다. 현재 우리가 앉아있는 곳은 초원의 한 폐가였다. 초원과 작은 숲이 겹쳐지는 곳에 나무들 사이에 숨겨지듯 위치한 통나무집이었는데, 꽤 오랫동안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더불어… 식량도 없었다. -배고프네. “…….” 레지엘이 내 머리 위를 보며 미묘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는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마나르트를 바닥에 내던지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며 입을 열었다. “시끄럽네.” -끄응. 설마 바카나인지 하는 도시까지 갈 때까지 계속 굶는 것은 아니겠지? “…아마도. 키메라들만 떨쳐버린다면 사냥을 해서라도 식량을 구할 테니 걱정 말게.” -음, 기대하지. “…….” 마나르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레지엘이 왠지 모르게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배낭을 열어보았다. 포션은 예전에 떨어졌다. 식량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최악이군. 창밖을 보니 붉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녹색의 나뭇잎들이 붉은 노을빛에 물드는 모습은 꽤나 멋진 광경이었고, 나와 마나르트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큭.” “음?” -에?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나와 마나르트는 갑작스레 들려온 레지엘의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레지엘이 우리를 보며 낮게 큭큭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 “아, 그게… 큭. 둘이서 노을을 바라보는 모습이… 킥. 꽤나 어울리더군요. 하하하. 지금만 해도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것이… 하하하핫.” 나와 마나르트가 고개를 들고 내려 서로를 마주보자 레지엘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개를 내밀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마나르트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피식 웃었다. 하긴, 나와 내 머리 위에 앉아있는 마나르트가 똑같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재밌는 광경이었겠군. -역시 천족 녀석들은 이해할 수 없군. 이 위대하신 몸이 우수에 젖은 얼굴로 노을을 바라보는 것이 뭔가 우습다는 거지? 이 완벽한 얼굴에 붉은 노을이 비치는 모습은……. “푸하하하핫!”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어오는 마나르트 말에 나 역시 레지엘을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저 귀여운 모습에 저런 얼굴이라니. 거기다 우수에 젖은 표정에 노을? “하하하하!” “후후후.” 나와 레지엘은 조용히 웃으며 마나르트를 지켜보았다. 마나르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팔짱을 끼고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귀여운 인형이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랄까. 지금까지 계속 힘들게 걸어왔던 나와 레지엘이었기에 웃음은 꽤나 좋은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아아, 어쨌든 좀 쉬어야겠군요. 근처에 적은 있습니까, 세한?” 레지엘의 질문에 나는 식스센스를 발동시켰다. 주위에 기척은 없다. “키메라는 없는 것 같군.” “다행이군요.” 레지엘은 한숨을 내쉬며 성검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어느 정도 쉴 수 있는 모습이면서도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 나는 벽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음?” 눈을 감는 순간, 어떤 기운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꽤 먼 곳. “…….” 나는 몸을 일으켰다. 레지엘이 고개를 들어, 내게 시선을 돌리며 성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주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왜 그러는 겁니까?” 레지엘의 질문에 나는 약간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느껴지지 않나?” “예?” 나는 고개를 젓고는 창밖을 잠시 주시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말에 레지엘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는 생각에 잠겼다. 탁하고, 어두운, 검은 느낌의 기운. 마기다. 레지엘은 성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마기에 대해 민감한 동시에 둔감하다. 나는 같은 마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쉽게 읽어냈다. 강한 기의 충돌이긴 하지만 먼 곳이기 때문에 레지엘은 느끼지 못하고 있고… 이 마기는 데스 킹 녀석의 것. 그렇다면 상대는……. “…바람.” “……?” 내 중얼거림에 레지엘이 눈동자만 움직여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보았다. 바람이다. 싸우는 두 상대 모두 내게 익숙한 기운. 마기와 바람. -그 성풍인지 하던 이무기 같은데? 머릿속에 울리는 마나르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풍이 데스 킹과 싸우고 있다는 건가? 이유는 모르지만… 불길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가만있을 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너무 멀다. 그리고 지금은 빨리 바카나로 가야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느껴지는 바로는 성풍이 데스 킹을 압도하는 기를 지니고 있는 듯 하다. 너무도 미약하게 느껴지는 두 기이기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좀 편히 쉴 수 있겠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에서 힘을 뺐다. 섀도우 월드, 게임 속이 아닌, 생생한 현실. 웅성웅성.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모인 곳은 한 높은 건물의 앞. 섀도우 월드의 제작사인 (주) 리자드의 앞이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거의 찾아볼 수 없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폭동. 언제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도 감돌고 있었다. 가족이 죽음의 고비에 달린 사람들에게, 말이 쉽게 통할리가 없었다. 때문에 폭동을 염두에 두고 경찰까지 출동한 상태였다. 경찰들은 리자드 본사의 대부분의 입구가 모두 봉쇄된 데다 여러 장비 덕분에 간신히 더 이상의 접근은 저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리자드 본사의 긴급 소집팀. 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큰 방에서 강화 유리 벽을 통해 건물의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몇몇 사람이 있었다. “곤란하군요. 이러다 정말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시스템에 문제라도 생기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섀도우 월드 담당 사이버 수사관, 위리안과 리자드의 운영 기획부장 강도훈은 심각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런 민간인들에게 리자드 사가 점거 되기라도 하면… 끝이다. “그 둘이 최대한 빨리 어떤 수를 내줘야 하는데…….” 위리안의 말에 강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진과 정수, 이 두 사람이 어떻게든 수를 내야한다. 지금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그 둘이니까. “하지만 이 상태로는… 그 둘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하기보다 폭동이 일어나 본사가 점거당하는 것이 빠를 것 같군.” 강 부장의 말에 위리안은 약한 신음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 다니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철야작업을 하고 있다. 충분히 무리하고 있는 상태다. “섀도우 월드의 시간을 더욱 빠르게 하는 작업은 어떻게 된 건지… 이곳보다 상대적으로 섀도우 월드의 시간이 길어진다면 가능성이 더 높아질 텐데…….” 위리안의 중얼거림의 답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다. “드래곤의 저항이 생각보다 더 거세다는군요. 이제 겨우 3배 정도, 평상시와 같은 정도입니다. 센 씨와 재훈 씨가 계속 노력은 하고 있지만… 힘들지도 모르겠군요.” 개발과장 신대관, 신 과장의 말에 위리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 강화 유리 너머, 저 아래에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비쳐졌다. “저건 어쩐 답니까.” 위리안의 푸념 섞인 말에 강 부장이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언제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둘과는 다르게 신 과장은 방법이 있다는 듯이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임시긴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에?” 신 과장은 둘이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자 약하게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다른 입구는 모두 봉쇄했고… 봉쇄가 불가능한, 결국 우리가 막으면 되는 것은 정문 하나. 믿을 수 있는 수문장들을 초빙했습니다.” “수문장? 초빙?” 위리안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수문장, 초빙. “누가…….” “우선은 한분이 내려가셨죠.” 위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리자드 본사의 정문. 한 사내가 꾸역꾸역 몰려드는 수많은 인파를 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수송용 트럭 한대가 리자드 본사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오오오! 스카이 타운이지 저거? 멋있는데!?" "야아! 저거 듣던 대로 번쩍거리는데? 역시 밖은 좋구만! 어엇! 저것 좀 봐!" "뭐야,뭐!?" "으아아아! 소마! 저것 좀 봐! 저런 게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거였냐?" "전 벌써 봤다고요!" 상당히 시끄러웠다. 원래 약한 파공음만이 낮게 울려 퍼졌어야 할 화물 트럭의 화물칸에는, 수십의 사람들이 들어차 창밖을 보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것도 서울의 시민들은 별다른 감정 없이 보고 다니는 것들을 보며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다. 그 혼란의 도가니 속에, 조용히 앉아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중년인이었는데, 둘 모두 느껴지는 위압감이나 기도가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꽤나 기쁜 모양이군요." 두 사람 중 회색빛의 무도복을 입고 있던 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꽤나 묵직한 음성이였다. 그리고 검은 가죽 옷을 입은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아이들은 이렇게 당당히 대로를 달린 적이 없으니까요. 몇 번 밖으로 나온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소수이기도 하고 항상 숨어서 다녔기에……." "…현진이 녀석이 복을 받은 거였군요." "…동시에 불행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검은 가죽옷을 입고 있는 민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중년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한무 수련회의 회원이자 현진의 외삼촌. 이 사람이 없었다면 암흑가의 이들이 몽땅 화물 트럭에 타서 서울을 질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 사람은 현진의 부탁을 받고 데리러 왔다고 했다. 리자드 본사의 입구를 막고 있으라는 진의 전언을 가지고 온 무도복을 입은 사내. 처음 현진의 외삼촌을 대면한 암흑가의 사람들은 멋모르고 덤볐다가 하나같이 바닥에 머리를 박아야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원수인 리자드를 보호하라는 말에 반발하던 이들도 바닥에 머리를 박아야 했다. 무도복 차람과 나이에 비해 상당히 과격한 성격의 소요자였다. 결국 현진의 외삼촌이라는 것을 인정한 암흑가의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 그를 따라 암흑가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암흑가 입구에 위치한 거대한 화물 트럭을 보며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그래도 센까지 허락했다는 말에 약간씩 불안한 표정으로 트럭에 타고 현재 서울을 질주하는 중. 민은 처음의 불안한 기색을 오나전히 털어버리고 주변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진은……." "아마 그 이상한 도마뱀을 잡으러 갔을 거요." 나이나 실력이나 사회에서의 위치나 모든 것이 민보다 높은 현진의 외삼촌이었지만, 그는 민을 어느 정도 정중하게 대하고 있었다. 자신이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세한에 대한 사죄의 의미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민은 굳이 편하게 대하라는 말을 하지 안았다. "…그럼 우리는 진이 돌아올 때까지 혹시 있을지 모르는 폭동으로부터 리자드를 지켜내야 하는 거군요" "그렇소" "입구는 그리 크지 않을 테니… 왠만해선 뚫리지 않겠지만, 폭동이 일어나지 않기를 빌어야겠군." "…그건 힘들 것 같군." 민은 약간 떨떠름한 중얼거림에 사내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약간 창백하게 질렸다. "우오오옷! 저것 좀 봐! 사람들 더럽게 많은데?" "어엇! 저게 리자드 본사 아냐?" "얼씨구? 그럼 저걸 막으라고?" "그것보다 어떻게 입구까지 갈지가 문제인데요?" 질린 기색이 만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암흑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리자드 본사의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수백, 수천을 넘어서, 몇 만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숫자였다. 트럭이 사람들에 막혀 멈춰섰다. "어쩌다 저렇게 많이 몰렸다냐?" "아마 카메론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요?" "호옷, 선동이라 그거지? 차라리 차 돌려서 카메론으로 쳐들어갈까?" 으르렁거리며 살벌한 표정들을 짓는 검은 옷의 청년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던 무도복 사내는 민에게 고개를 돌리며 질문했다. "어쩔 거요?" 민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그로써는 행동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민 형님. 이거 무립니다. 입구까지 가는 것도 무리로 보이는데… 거기다 입구를 막는다고 해도 힘들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이 차림들로 저 사람들 뚫고 가긴 무리라고요!" 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검은 복장을 한 수십의 사람들이 저 인파를 뚫고 입구까지 가기는 힘들지 몰랐다. 잘못하면 밟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민은 실소했다. "얼씨구? 저기 더 온다." "헤엑?" 누군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항했다. 저쪽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수많은 인파가 또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으음, 그 동안 실감하지 못하던 방송의 힘을 이제야 실감하게 되는군. 그것도 몸으로." 소라, 솔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의 방송이 전국으로 흘러나갔으니 이렇게 모이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 적도 있는 서울 시내다. "후우, 아무래도 무리……." 결국 포기 선언을 하려던 민은 왠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는 생각에 말을 멈췄다. "어레?" "왠지 낯익은 목소리가……." 암흑가의 다른 사람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트럭의 화물칸은 안에서만 밖을 볼 수 있는 특수 강화 유리였기에 그들은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눈이 튀어나 올 것 같은 광경을 보아야 했다. 피융! 피융! 피융! 쿠앙! 쾅! 콰콰쾅! "……!" "마, 맙소사……." 리자드 본사의 입구 쪽. 그곳에서 밝은 빛들이 마구 터져 나오며 리자드 본사의 앞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도마뱀 동상. 리자드의 심볼 동상으로 쇄도해 들어가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빔건을 사용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우르르르……. 피융! 쿠아앙! 동상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허물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시끄럽던 거리는 침묵에 잠겨들었다. 하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말로만 듣던 빔건이 눈앞에서 빛을 흩뿌리고 있어서 인지는 몰랐지만, 처음 맨 앞쪽에서 시작된 침묵은 점연되듯 퍼져나가며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저, 저거 아무래도……." '저, 저 위력을 보건데 필시……." "레,레딕 형님… 미, 미쳐버린 건거? 시내 한복판에서……." 암흑가의 사람들은 불안한 얼굴로 빛이 터져 나오던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런 무식한 짓을 할, 그리고 개조된 덕분에 위력이 향상된 빔건을 가지고 있을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그리고 무너진 동상의 잔해더미 위로 한 사내가 힘겹게 올라섰다. 회색머리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 사내는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외쳤다. "야, 이 썩을 새끼들아아아아앗!" 휘이이이잉. 무도복의 사내와 암흑가의 사람들은 화물칸 안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지나가는 듯한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까 들린 듯한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가 레딕의 목소리 였음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저 소란 가운데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 먹히지 않으니 빔검을 쏴 댔으리라. 그리고 이제 조용해 지니 다시 고함을 지르는 것이 분명했다. "…문 열어라." 민이 작게 말했고, 소마가 황급히 화물칸의 문을 열었다. 트럭의 근처에 모여 있던 몇몇 사람들이 급히 옆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암흑가의 사람들은 열린 화물칸의 옆으로 레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고함소리가 울러펴졌다. "썅! 할 짓이 그렇게 없냐아아아! 괜히 힘 빼지 말고 꺼지란 말이다아아앗!" 암흑가의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들의 머리속에 떠오르는 동일한 생각은, 이제 레딕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사이에 웅성거림이 서서히 일어나며 흉흉한 기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초의 황당함과 어이없음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어라? 저 사람은… 저, 저 정도로 정신이 나간 사람이었나?" 멍하니 서 있던 암흑가의 사람들은 화물칸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딕을 안다는 듯한 말이었고, 듣기 좋은 미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검은 생머리를 길게 기린 검도복의 미녀가 서 있었다. "나프네?" 소마가 무의식 중에 중얼거렸고 검은 생머리의 여자는 몸을 흠칫 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화물칸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무리를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마 씨? 무사히 로그아웃 했군요? 그런데… 성민 아저씨?" "선아? 내가 웬일이냐?" 섀도우 월드에서는 나프네라 불리는, 검은 생머리의 여자, 선아는 꽤 놀란 얼굴로 암흑가 일행을 주시했다. 무도복의 사내가 선아와 알고 있는 듯해 보이자 민이 그를 향해 질문했다. "아는 사이십니까?" "내 큰할아버님의 증손녀요." 참으로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완벽한 대답이기도 했다. 민은 꽤 놀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선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진의 먼 친척이었단 거군." "예?" 진, 현진의 먼 친척이라는 말에 선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은 굳이 설명하는 대신 레딕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뒤따라 다른 사람들도 레딕에게 시선을 돌렸고, 선아도 약간 으문 섞인 얼굴로 레딕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레딕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어런 병신 같은 새끼들아아아아! 뭘 열 받아서 지랄들이야아아앗! 난 레딕이다앗! 실험대상으로 쓰이던 암흑가의 사람이란 말이다아아아앗!" 소란스러움이 조금 더 커졌다. 암흑가라는 말에 드래곤의 방송이 어쩌고 하는 소리들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나도오오! 사람들을 구하려고오옷!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는 녀석들 도우려고 이러고 있다아아앗! 그런데 별 쓰잘데기 없이 모여들어서어어! 방해나 하려고 하냐아아악! 이런 병신 새끼들아아아악!" 점점 시끄러워지는 주위 때문에 레딕은 악을 써가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악쓰는 소리에 암흑가의 사람들은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미, 미쳤구만… 무,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는데… 마,말을 좀 골라서 할 것이지……."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미쳤어? 어떻게 저기까지 가려고?" "그건……." 그때 다급한 말소리들을 압도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분노의 고함소리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암흑가의 사람이라는 것에 의한 동정심과 측은함을 분노가 뛰어넘은 모양이었다. 웅성웅성. 순식간에 사방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레딕의 고함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안았다. 그때 다시 한번 밝은 빛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상으로가 아니라 리자드 본사의 건너편의 빌딩으로 빛줄기가 뻗어나갔다. 콰아앙! 빌딩의 한 부분이 박살이 나며 아래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조준을 잘 해서인지 외벽만이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광경에 입을 쩍 벌리며 말을 멈추기 시작했다. "야, 썩을 새끼들이이이잇!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에에! 네놈들이 리자드에 돌격이라도 하면 어떻게 될줄 아냐아아아! 지금 우리 암흑가의 사람들도 같혀있다아아! 그리고 다크소드, 그 자식과 헌터들이 구하러 갔단 말이다아아앗! 그리고 난 여길 지켜야 되엣! 그러니 지랄 그만 떠고 꺼지란 말이다아아앗!"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레딕의 말에서 뭔가 정보를 얻은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정보를 교환하 려 했고, 다시 한번 레딕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주 꺼지라고는 안하겠다아앗! 다만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엇! 난 너희 새끼들을 막을 테니까아 아아악! 헥헥, 모,목 찢어지겠네." 레딕이 마지막 중얼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허리를 굽히며 헉헉거리던 레딕은 리자드 본사의 입구를 터벅터벅 걸어가서는 문에 등을 기대고는 헉헉거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며 모여든 시민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돌아 보았다. "…멋진 친구로군.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데?" "예?" 현진의 외삼촌. 성민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자 선아가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성민과 꽤 가깝게 지내고 있던 그녀는 그가 멋진 친구 운운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 아저씨. 혹씨……." 터억. 선아의 말은 트럭의 화물칸에서 뛰어내린 민 때문에 끊기고 말았다. 바닥에 내려선 민은 눈을 날카 롭게 뜨며 몇걸음 앞으로 걸어가고는 입을 열었다 "가자. 저 자식만 날뛰게 할 생각들은 아니겠지?" 민의 말에 화물칸에 타 있던 암흑가의 사람들은 사나운 웃음을 흘리며 재빠르게 화물칸에서 뛰어내렸다. 갑자기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 수십 명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위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가려는 거요?" 성민의 질문에 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딕이 고함을 지르는 둥안 사람들은 더 늘어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리자드 본사의 입구까지 가려면 적어도 만이 넘는 숫자의 사람을 지나야 할 듯 했다. "……." 민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품속에서 나이프를 꺼내고는 허공에 한번 휘두르고는 사나운 기세로 걸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다른 암흑가의 사람들도 각기 나이프들을 꺼내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창. 촹! 저벅저벅. 검은 옷을 쫙 빼입은 수십의 사람들이 햇살을 받아 번뜩이는 나이프를 들고 우르르 몰려가는 보습은, 일반 시민들이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덕분에 민을 선두로 한 암흑가 일행은 사람들이 물러서며 생겨난 길로 당당한 기세로 걸어갈 수 있었다. "나도 가야겠군. 같이 가겠느냐?" 성민의 말에 선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곧 검은 무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암흑가의 사람들이 처음 세상에 드러낸 모습은, 검은 옷을 쫙 빼입고 흉흉한 나이프들을 각기 손에 들고선 우르르 돌격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대단한 사람이군요. 저 레딕이라는 분도." 신 관장의 말에 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대 소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복장을 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수만의 인파를 뚫고 걷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고, 신 과장은 위리안을 비롯한 긴급처리 팀의 사름들은 꽤나 감동받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머리가 나쁘기만 한 녀석으로 알았는데… 멋있는 구석도 있긴 있네. 여전히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위리안은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아래는 어떻게든 정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 신들과 현진, 정수의 싸움이다.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위리안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질문했고 신 과장은 여전히 죽어라고 컴퓨터를 두들겨 대고 있는 센과 재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용들이 움직였다는군요. 꽤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천신과 마신이 현진 씨와 정수 씨에게 도움을 주고 있고… 가능성은 있습니다." "…가능성……. 역시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시간이란 말이군요." 위리아늬 말에 신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시간만 충분하다면 세한들이 수련을 통해 조금 이라도 강해져, 드래곤을 해치울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폭동이 일어 나기 일보 직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캡슐을 통해 영양분을 보충하고는 있지만, 언제 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감금된 풀레이어들과 섀도우 월드 속에서 계속 죽어가고 있는 풀레이어들. 그 외에도 언제 의외의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어쨌든, 최대한 빠르게 드래곤을 해치워야 한다. "믿는 수밖에… 없겠군요." 현재 섀도우 월드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보다 수십 배 빠르게 돌아간다. 센과 재훈을 비롯한 모든 프로 그래머들이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시간 조정에만 죽어라고 매달린 결과였다. 지금은 이른 아침, 며칠 이나 시간을 벌수 있을까. "젠장, 나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군." 위리안은 낮게 중얼거리며 한쪽 벽면에 위치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알아볼 수 없는 수많은 문자들이 끊임없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쳇, 네놈을 믿는다, 한." 이미 최후의 바톤은 섀도우 월드 속의 전사들에게 가 있었다. "돌겟군" "동감입니다" 나와 레지엘은 서로를향애 한숨을 내쉬어보이고는 다시 걸음을 옴기기 시작했다 상당히 비틀거리는데다 느리고 서로에게 몸을 의지해서 걸어가는 우리의 모습은 동정받기에도 충분할듯 했다 "크으 만약 섀도우월드의 몬스터들이 단순한사냥감이라고 말하는녀석이있다면 .... 그작자 턱주가리를 날려버릴지도 모르겟군요" 중심을읽고 쓰러지려던 레지엘이 내부축을 받으며 낮은목소리로 웅얼거렷다 나는한숨을내쉬는것으로 동의를 표하고는 피에젖은머리카락을 뒤노넘격다 시야를 꽤방해하고있었다 바카나시는 대륙의남쪽에 위치한것은 아니지만 우리가출반한곳은 대륙최북단이었고 결과적으로 바카나에 도착하기까지 는 시간의 꽤 걸리는 것은 사실이다 나혼자라면몰라도 퀵스텝 같은스킬이 없는 레지엘은 질풍과같은 속도로 달리지 못했고 지금은 레지엘을 태울말이나 린이 없었다 떄문에 나는 린을 마을에 두고온것을 조금 아주조금후회했다 어차피 린이있어봣자 레지엘의 괴이하기까지한 멀미증상떄문에 강제가아닌이상 린을 태우긴무리다 어쨋거나 결론적으로 우리의 이동시간은 꽤나 늘어났고 그늘어난 시간중에 이지역을 자기영역으로 활용하면서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던 키메라들의 습격이있었다는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놀랍지는않아도 괴로운 사실이다 "썩을..." 네욕설에 고개를 숙이고 내게끌리듯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레지엘이 몸을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적입니까?!" 경기에가까운레지엘의 반응 에 나는 작게 실소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내욕설이 또다시 키메라들과 필사의 사투를 벌이게 될상황을 저주하는 행위로 착각한 모양이다 레지엘은 몸을 다시 축늘어뜨리고 나는 욕설을 내뱉은 이후에 하려던행동을 계속했다 "꽤나 즐거운마음으로 여기에 들어왓건만, 이지독한 몰골이라니. 여기들어와서 즐거운 마음이라고는 그붉은머리 여자와의.... 크아악!!!" 쿠당탕! 에지엘은 내과성과 동시에 빠르게 몸을 내던져 바닥을 구르고는 무서운 기세로 성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살벌한 눈빛으로 전방위를 둘러보았다 -저인간녀석, 꽤나 재빠르군. 잠시 멍하니 레지엘을 바라보던 나는 마나르트의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간신히 서지않고 겉고잇던중에 갑자기 흐름이끊기더닌 더이상 걷기가 귀찮았다 "..... 뭡니까?" "아 잠시 머리속에 떠오른 극심한 혼란으로인한 순간적 체력저하 때문에 더이상 걷기가 힘들다는 위지표현인데" "...적이아니었습니까?" "설마 적이 없어서 서운 하다는건 아니겠지?" "... 그런건 아니지만 화려한 몸동작으로 바닥을 구른데다 급히 마나를 끌어올린 덕분에 몸상태가 뭐같습니다만" "잘됬군 쉬자" 레지엘은 짧게 투덜거리고는 내옆에 주저앉았다 녹생풀들이 가슴까지 자라나 있었다 이런초원의 풍경도 멋지군 저멀리보이는 숲도 괸찮은데>? 작은 구릉위에 생성된 작은숲은 푸른초원에 위치한 하나의 장식품 같았다 "그런데 그여자는 누굽니까? 전부터 뭔가 예민하게 반응하던데..." "....." -음? 그러고보니 그여자 얘기였나?? 자네의 동정을 훔처간? 나는 눈섭을 파르르 떨었다 "그검은머리 여자라면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누군지 모르지만 외모라도 대충 설명해주면 만난 적이읶는지 알수 있을 듯한데요" 나는 작게 탄식했다 아아 붉은머리여자 말이지? 어떻게 생겼는지 절대 못있겠지 그..... "그...붉은머리 여자... 라면...." 머리속이 뒤엉킨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여자의 얼굴이 쉽게 떠오르지않는다는 사실에 방금전까지만해도 강렬한기억으로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뿌연 안개에 가린것같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붉은머리? 검은머리? 도대체 어느쪽인가? 그러고보니 전부터 붉은머리와 검은머리를 왔다 갔다 했던것도 같군 은발이섞인 건지 아닌지도 헷갈리고 언젠 검은머리가 섞였다며? 붉은머리인가? 검은머리인가? 아니지 혹시 그사이에 두명의 레이디를.... "세한 붉은머립니까? 검은머립니까?" 동시에 들려오는 마나르트와 레지엘의 의문에 나는 혼한이 가중되는것을 느꼈다 검은머리? 검은머리는난데?? 그럼 그여자는 붉은머리였던가? 뭔가 내머리카락과 공통점이 있었어 그러니 같은 검은머리... 아니지 공통점은 은발이 섞인것이었던가? 콱! 레지엘이 눈을 크게떴다 그리고 약간 놀란듯한 마나르트의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졋다 나는 땅을 강하게 내려친 내오른주먹을 유심히 살폈다 아프다 "이상한데?" "예?" "그여자만 떠올리면 혼한스러운 느낌이야 처음에는 그사거니 충격전인엇이기 떄문인중 알았는데..... 그러고보니 그직후에 페이린을 만낚을떄도 그여자의 얼물이 잘기억이 나지않았던 것도 갔군 이유가뭐지? "세한?" "접어두자" 레지엘은 얼굴을 약간 굳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내상태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눈치 챈모양이다 -으음 그레이디를 모셔다가 하렘의 1번타자로 모셔볼까했는데 자네꼴을보니 누군지 알기는 힘들어보이는굼 "좀 닥쳐 주게" - ...... 뭔가 이상한데? 전에도 이렇게 머리가 뒤죽박죽이 된적이있엇던것 같은데? 그때 이유가 뭐엿더라?? 그떄 문병히.... 끼잉! ".....!" 나는 눈을 번뜩이묘 고개를 들었다 이건...... -붉은머리에 은발이라 도데체 누구.... "나중에얘기하지 먼저가잇게나!" -뭐? 나는 그대로 마나르트를 집어던졌고 마나르트는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적?" "키메라 거기에NPC들도 있다 습격을 받는 모양이지 거기에 좀짜증나는게 NPC들이 도망치는 방향이 이쪽이다" 내대답과동시에 레지엘이 몸을 튕기듯이 몸을 일으키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나르트가 날아간 방향으로 빠른속도로 멀어져가는 레지엘 그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콰콰쾅! 작은숲 나무들의 작은모임뒤편에서 검은 마기와 흙먼지가터져 올랐다 마나르트가 도착한 모양이엇다 키메라들은 혼란에 빠질테고 NPC들은 하늘에 감사하며 더욱 빠르게 도망치겠디 나는 팔을 들어올려 피가 조금 묻어있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약간 거뭇거뭇한 피부가 밖으로 드러났다 흑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옅고 황인이라고 하기에는 약간검은 그냥 선텐 조금한정도로 볼수있을정도다 나쁘진않아 치캉 요검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뽑혀 나왔다 그리고 작은 숲은 이미 눈 앞으로 다가와있었다 숲을 지나치면 옆을 흘깃 바라보니 한무리의 NPC들이 숲의가장자리에 모여서는 키메라들과 싸우고있는 레지엘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일부는 기도를 드리기 까지 하고있었는데 확실히 반짝거리는 금은빛의 머리를 휘날리며 성검을 휘두르는 레지엘의모습은 신이 내려준 천사의 모습으로 보일듯 했다 때문에NPC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겠고 타탁 키메라들의 수는 이제 몇마리 남지않았고 식스센스에 느껴지는 기운도 미약한것이 강한놈들도 아니었다 레지엘 혼자서 충분히 해치울수 있다 나는 몸을 몸춰 세우고는NPC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약간 싸늘한 눈빛에NPC들이 주춤거렷다 "아,악마?" "......" 한노인의 외침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악마? 천사를 추격행해온 악마로 생각 하고있는건가? 피식 웃고는 손을 내뻗자 마나르트가 손안으로 날아 들어왓다 스르릉 요검과 마나르틀르 동시에 검집에 집어넣은 나는NPC들에게 걸음을 옴겼다 "미안하지만 나와 저녁석은 천사나 악마는 아니가 신의힘을박긴했지만 우린'플레이어'다" "프..플레이어?!" "으아아아앗" NPC들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심을 느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뭣때문에 이렇게 겁을 집어먹는거야?? "꺄악!" 그떄 한소녀가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린모양이었다 잠시 살펴보니 몸의 곳곳에 상처가 있고 이미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키메라들에게 꽤 오랫동안 쫒겨 다니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무리에 노인들도 섞여있는것을보니 지금까지 도망쳐다닌것만 해도 놀라울 정도였다무리를든 전사들은 몇몇 보이지 않았다 저벅저벅 내가 넘어진소녀게세로 걸음을 옮기자 NPC들의 얼굴레는 절망감이 떠올랐다 플레이어 들에게 악감정이 많다는것이 확실하군 소녀의 앞으로 다가선 나는 겁에 질린 소녀의 눈동자를 내려보았다 "괜찮니?" 내가 소녀를 일으켜세워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NPC들사이에서 작은 솧란이 일어났다 상처투성이인 소녀의 몸을 살펴보며 씁쓸해하던 나는 어정쩡하게 모여 있는 NPC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일행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노인이 놀란 기색을 보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지? "호...혹시...?" 나는 노인의 놀란듯한 기색에 의문이들어 노인의 중얼거림에 집중했다 그때 노인이 눈을 크게뜨면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마나르트가 급히 소리쳤다 "페냐! 안 된다 그분은..." -세,세한! 뭐? 그때 순간적으로 살기가 치솟으면 뭔가 날카로운것이 내복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길길이 날뛰며 퍼저나가는 기운 "크윽!"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나면 요검에 손을 가져갔다 검은색의 단검이 보호구의 이음새 부분을 정확하게 뚫고 들어가있었다 소녀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단검이 뛰어난 성능의 최고급 같았다 온몸의 피가 끓어 오르는 듯한 느낌에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덜덜 떨고있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의손에 피가 흐르는것으로보아 이공격의 장본인임이 틀림없었다 "젠장...." 단검에 배가 뚫린것이야 어떻게든 넘길수 있겠지만... 단검에서 쏟아진것같은 기운은 장난 아닌데 온몸에서 피가끓는것이 단검의 능력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어...엄마의 원수! 주...죽어버려!" 약간흔들리는 정신을 추스리던 나는 소녀의 울음섞인 고함소리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플레이어들에게 어머니를 잃기라도한건.... "이..이야아아아!" 내생각은 고함을 지르면 바지춤에서 단검을 뽑아드는 소녀의 행동 덕분에 빠르게 끊어졌다 저단검이 내뱃속을 여행중인 단검과 비슷한 성능을 지닌거라면 위험하다! 속으로 소녀에게 미리 사과를 하는 동시에 내몸에서 마기가 폭팔했다 푸화악! "꺄아악!" 소녀가 마기에 얻어맞아 뒤로 튕겨나가자 마나르트가 신음과 함께 중얼거렀다 -젠장 아픈건 이해하네만 조금 심했.... "이...이 자식!" 나느 마나르트의 말을 끊으며 귀를 울리는 고함소리에 눈을 날카롭게 떴다 NPC들중에 고함과 함께 무기를 치켜들고 있었다 살기가 정면으로 나를 향해 오고있었다 빌어먹을 "세한!" 그리고 이번에는 내 뒤쪽에서 놀란 외침이 들려왓다 상황을 알아 차린듯한 레지엘이 급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키메라들은 이미 모두쓰러진듯 했다 "모두 멈추게!" 계속되는 통증에 몸을 떨고있던나는 노인의 외침에NPC 사내들이 움직임을 몸추는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상태가 꽤나 안 좋앗는데 다행이군 NPC들과 싸우는것도 맘에 들지않고 "초,촌장님! 왜......!" "저분이 바로 다크소드 님이시네!" "예엣?!" 촌장이라는 노인의 회침에 NPC사내들이 놀란 듯 괴성을 질렀지만 놀란것은 우리 일행도 마찬가지 였다 어느새 내옆으로 다가온 레지엘이 눈을 깜박이면 나와 NPC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어레? 세한 자네가 이리 유명했던가?? "...모르겠군" 그리고 우리의 의문은 숲속에서 뛰쳐나오는 수십명의 이들에 의해 단숨에 풀렸다 "미시안...." "세,세한....?" 나는 상당히 이질적을호변해버린 내모습을 뚫어져하 바라보는 외팡의 다크엘프를 보며 눈을 크게떴다 미시안뿐만 아니라 베르시아들을 포함한 예전에 나를따라다니던 20명의 다크엘프들도 얼이 빠진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도대체 모습이 왜그렇게..." "....." NPC 무리와 나와 레지엘 사이에 순식간에 몰려드는 다크엘프들은 상황을 파악하려듯 우리와 NPC들을 번갈아 살폈다 그리고는 내복부에 꽃힌 단검과 피에 젖은 손에 덜덜 떨고잇는 소녀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떳다 "페냐! 너설마...." 미시안의 다급한 질문에 내게 불시의 공격을 감행했던 페냐하는 노셔는 파랗게 질린얼굴로 주춤거리며 뒤로물러났다 그모습에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낸 미시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상황이 꽤 복잡하게 돌아가는듯하자 복부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크으...." 지은 검은빛의 검날에 검붉은 피가 끈적끈적하게 묻어나왓다 나는 신음을 흘리고는 상의를 벚어 던졌다 상처는 이미 아물어 가고 있었다 신인(神人)의 몸 신체(神體)의 위력이었다 -음 편리하군 "크윽 동감이야" 몸이 좀 정상으로 돌아오자 단검에 어린기운이 특별히 농축된마기임을 알수있었다 생각보다 훨씬'비싼'단검이었던 모양이었다 내가지닌 마기와 상당히 질이다은 마기라 온몸에 통증이 온듯했다 "세한?괜찮아?" 미시안이 급해 내앞으로 다가오며 다급히 질문해 왔다 레지엘이 성검의 손잡으를 움켜쥐며 약하게 살기를 내비쳣다 미시안이 조금만 의심되는 행동을 해도 남은 한 팔을 날려 버리겟다는 듯한기세였다 여전히NPC 들은 꽤나 불신 하고있군 하긴 이꼴이 되나 나도 레지엘을 심정을 절감하고 있지만 "썩 좋지는 않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야 몸이 이꼴이 되면서 상처도 발니 아무는 듯하거든 그나저나 오랜만이군" 나는 말을 마치며 미소를 지어 우었고 미시안은 약간 질린듯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세한이 맞는것 같긴한데 분위기나 뭐나 꽤나 달라진듯하군" "미검을통해 마신이 강림했거든 드래곤을 사냥하러 들어왔더니 이꼴이되더라고" "마신..." 드래곤 사냥이라는 말에 잠시 동요하던 미시안은다시 한번 내몸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엄청나게 강해진것 같군 내가 따라가기 점점 벅차지는걸" "그냥 포기하는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은데?" 이 상황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얘기를 주고 받는 나와 미시안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잇는지 주위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불안한 얼굴로 우리를 주시하고이슨 NPC들을 바라보았다 꽤나 겁먹은 표정이었다 "저 사람들은?" 내질문에 미시안은 NPC들을 돌아보앗다 "기메라들에게 마을이 습격당해 도망ㅊ고 있었던었을 구해 줬지 너에 대한 얘기도 해 준 적아 있었는데 덕분에 촌장께서 알아 보신 모양이군" 나와 레지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지금은 칠흑의 숲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리들의 목적지가 거기였으니까 너를 따라 나섰던 다크엘프들을 만난뒤에 일단은 상황을 보려고 마을로 돌아가던 중이었지 마을에 들렸었나?" 미시안의 질문에 나는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뭐라고 해야하는거지? 마을에는갔었다 하지만 쫒겨났다 으음. 간결하고 정확한 대답이긴하지만 도저히 말 못하겠군 나는 뭔가 평범한 틀에서 벚어난 대답을 떠올려려 애썼다 -세한! 그 자식이네! "뭐?" 마나르트의 경고성에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급히움직인 덕분에 온몸이 떨렷다 그리고 검은 마기가 순간적으로 응축되며 허공에 검은 문이 열렸다 그안에서 거대한 검은 갑옷이 걸어 나왔다 "데스 킹!" 레지엘이 급히 내옆으로 물러나여 신성성력을 끌어올렸다 강력한 마기에다 다크엘프들도 무기를 뽑아들며 우리주위로 몰려들었다 "이 기운은 ..... 놈인가?" 미시안이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왠지 벼르고있는듯한 니김이었다 하지만 미시안으로서는 저놈을 못이겨 나도 장담하지 못하는, 지금의상태에서는100% 패할상대다 쿵 크리고 데스 킹 죽음의 왕이라는 검은존재가 바닥에 내려섰다 투구속에서 검은마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크크크..." 데스킹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싹한느낌이 전신에 일엇다 왠지모르게 불길한 느낌 뭐지? "크큭 이거별일이군 다크엘프 떨거지들돠 다크소드를 동시에 잡다니 크크큭." "이자식!" 나는 급히 미시안을 붙잡았다 금방이이라도 달려들어 검을 위두를 것같던 미시안은 내만류에 멈춰섰다 나는 안도의 한숭을 내쉬며 데스킹을 바라보앗다 "네놈... 천악은 어떨게 했지?" 아차! 나는 금히 데스킹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에 느꼈던 이녀석의 마기와 바람의 기운 그떄 이녀석의 상대가 천악이 아니었다는것인데... 그럼 천악은?? "크큭 그녀석말인가? 끈질기게 달라붙기에 아주 밟아 버렸디 크크큭 아마 죽었을것 같군 크크크큭" 까득 양쪽에서 이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성검을 꽉 움켜쥐며 살기를 뿜는 레지엘과 천악과 개인적인 친분이있던 미시안이 낸 소리였다. 이거 도발당하는건가?? 이둘이 도발당하는것을 막기전에 ... 내가먼저 도발당할것 같군 "크큭 먼저 줄것이 있는데 다크소드 네놈에게 줄 선물이다" "뭐" 선물? 데스킹은 기분나쁘게 웃더니 옆으로 손을 뻗었다 검은 마기의 문이 다시한번 열렸고 놈은 그안으로 손읗집어넣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내게 휙 집어던졌다 털석 레지엘은 우리조금앞에 떨어진 그물체를 경계하면 성검을 가져다가 황급히 검을 거뒀다 미시안을 비롯한 다크엘프들의 신음성이 들려왔다 "네, 네놈..."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데스킹을 노려 보았다 놈이 집어던진것은 처참한 몰골의 고양이귀를 가진 반인족 린이었다 "크크크큭 꽤나 좋은 먹이였지 크크 몸이 마기로 이루어져 직접 건드리지 못한 것이 꽤나 아쉬웠다고 다크소드. 그래도 그년 꿈속에서는 꽤나 즐거웠다 크하하하핫!" 순간적ㅇ로 예전만신의 신전에서 데스킹,다크워리어를 처음 만났을때가 떠올랐다 베르시나를 가지고 같은말을 했던가? 나는 떨리는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있는 린을 바라보았다 옷은 거이 찢겨져잇고 온몽에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 데스나이트 등의 녀석들은 생명체의 마나 기를 억지로 빨아들여 흡수한데 데스킹 녀석도 린에게 비슷한짓을 한 듯했다 녀석의 몸이 마기로 이루어져서 린의 꿈속에서는 몰라도 실제로는 당하지 않은것을 감사해야하나?? 크흐흐흐.... "린양은 칠흑의 숲에 있었을 텐데?... 네놈 어떻게!" 미시안의 고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뚜렷하게 들려오는 데스킹의 목소리 "크크크 걱정 마라 사이좋게 한꺼번에 죽여줬으니 크크큭 여자들이 꽤 많이잇더군? 크카카카칵! 완전히 박살을 냈지! 고탄가 하는 땡중도 완전히 저승으로 보내 줬고 말이야! 그이무기 놈만 아니었으면 다크엘프들을 모두 저승으로 보낼수 있었을텐데 아위웠다고! 크하하하핫!" 미시안의 기도가 순식간에 바뀌는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다른 다크엘프들이 강한 살기와 마나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레지엘역시 데스킹을 금방이라도 도륙할 듯했다 "그럼먼자..." 흐릿한말과 함께 데스킹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사린의 바로듸에 나타났다 그리고 쓰러진 린의 몸을 짓밟앗다 콰드득 "크하하하하! 그럼시작해볼까,다크소드?" 순간 모든공간이 암흑으로 물들며 나와 데스킹만이 그공간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온몸이 끓어올랐다 고고고고고! 온몸에서 마기가 엄청난 기세로 들끓었다 그리고정신을 잠식 해오기 시작했다 남은건... 상대를 죽인다는 생각뿐 우우우웅! 마나르트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진동했고 폭팔적인 기세로 휘둘러졌다 콰아아아앙! 마기와 마기의 충돌이 일어나며 엄청난 기의폭풍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덕분에 레지엘과 미시안을 비롯한 이들은 급히 뒤로 물러나야했다 "크으으읏!" 레지엘은 온몸에 뷰딪히는 강한 마력을 힘겹게 중화시키며 세한과 데스 킹을 살폈다 둘역시 폭팔의 여파때문인지 약간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엄청난 마력이야 나는 상대도 안 되는군' 레지엘은 다시없던 강력한 마기의 폭풍에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적인 분노 때문인지 몰라도 세한은 순간적으로 대폭 강해졌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을 텐데?' 세한은 불과 몇십 분 전에 단검에 복부가 뚤렸다 몸이 정상일리가 없다 그리고 레지엘과 같은 걱정을 하는이가 있었다 -빌어먹을! 이걸 기뻐해야하는지 불행이라 한탄해야 하는건지 모르겟군! 크으으윽! 마나르트는 자신에게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강력한마기에 신음을 흘렸다 검상태의 자신이 고통을 느낄정도의 마기다 분노덕분에 세한이 순간적으로 강해진것은 기뻐해야하나 세한이 몸상태가 정상이 라니라는 것과 현재 이성을 잃은 상태라는 것은 불행이라 해야랬다 어쨋든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린 마나르트는 세한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앗! 마나르트의 강력한 마기가 세한의 마기를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나르트는 마족중 최강이라 불리던 전사다 비록 검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시못할 마력을지니고 있었다 강력한 마나르트의 마력이 짓눌린듯 세한의 마력이 움츠러 들었다 마나르트는 안도했지만 그건 너무 섣부른 것이 얶다 세한ㅇ느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마나르트의 방해를 박지 않을 가장 간단하고도 합당한 행동을 취했다 휘익! -어라? 마나르트는 허무하게 허공을 날아 레지엘과 미시안들이 검을 빼들고 서있는 곳으로 날아가야 했다 너무 순간적인데다 강한 기까지 실려있어 미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 마나르트는 레지엘과 미시안의 바로앞에 박혀 들었다 -빌어먹을! 마나르트가 급히 모든 마기를 폭발적으로 내뿜었다 그리고 그마기들이 순식간에 응집하여 사람의 모습을 갖춰 갔다 처척 레지엘과 미시안은 순식간에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검은 장발의 미청년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세한도 실제로는 몇번 본적 없는 마나르트의 본래 모습이었다 마나르트는 눈을 살벌하게 뜨며 세한과 데스킹을 바라보았다 "젠장! 저 데스 킹자식! 도데체 세한을 계속 자극해 대는 이유가 뭐야!" 마나르트의 날카로운 외침에 레지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깜박였다 그도 의문을 느끼는 것이었다 데스 킹은 게속 세한은 자극하고 있다 그 이무기 어저고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데스 킹은 다크엘프 마을을 습격하다 도말쳐나왔음을 알수 있었다 그와중에도 빈사상태의 린을 끌고와 나와 세한의 눈앞에서 밟아 죽였다 의도적으로 세한을 도발하기 위한것 이라고밖에는 생각할수 없엇다 "도대체 왜... 아 자..잠깐! 혹시 당신이 마나르트 판디안이라는 마족입니까?" 레지엘은 세한과 데스 킹을 보며 으르렁 거리고 있는 미청년 에게 황급히 질문 했다 그의 질문에 미시안과 다크엘프들의 시선이 마나르트에세 쏠렸다 그 시선을 받으며 레지엘에게 고개를 돌린 마나르트는 사납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미천한 인간" "......" 마나르트의 말을 들은 이들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극도의 황당함에 일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반을을 보이기도 전에 또한번의 강한 기의 충졸이 일어나며 기폭풍이 사방을 덮어왔다 "젠장! 이대로는 세한의 몸이 버티질 못해! 방법을...." 마나르트의 다급한 목소리에 레지엘은 눈을 크게 뜨며 고함을 질렀다 "그게무슨! 몸이 버티지 못한다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레지엘의 질문에 마나르트는 이를 갈며 데스 킹과 거리를 벌리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는 세한을 가리켰다 "저렇게" 푸확! 세한의 배 상처가 터지며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리고는 세한의 마기가 눈대 띄게 약해져 갔다 "세한!" 미시안과 레지엘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료나가려 했다 하지만 데스킹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크카카캇!" 퍼억! 데스 킹의 주먹에 강하게 얻어맞은 세한이 피를 토함며 나가떨어졌다 굳이 상태를 확인하지 않아도 치명삼임을 추측할수 있었다 그리고 마나르트의 눈이 날카로워 졌다 "건방진 자식" 미시안화 레지엘은 몸을 흠칫하며 마나르트를 돌아보았다 마나르트는 뭔가 불만스러워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양팔을 벌라고 서 있었다 그리고 온몸에어 시커만 마기를 하늘하늘 피워올리고 있었다 "마...맙소사 이게 바로 마족인가?" 미시안과 레지엘은 비슷한말을 중얼가리며 마나르트 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기의 파동에 몸을 떨었다 세한이 내뿜고 하는 강렬한 마기 마구터져오르는 마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기운 양은 세한보다 훨씬 적지만 완벽하게 가공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정제된 느낌의 뭔감 숨어 있는 듯한 기운 세한과 마나르트 이최강의 마족이 자신의 마력을 되찾는다면 아니 지금 가지고있는 마력만이라도 최대로 끌어 올린다면.... 미시안과 레지엘은 고개를 휘저으며 마나르트를 주시 했다 마나르트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기세로 데스 킹을 노려보고있었다 그때 데스 킹이 마나르트 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나르트의 두눈을 정면으로 마부 보았다 "흠? 호...." 그때 마나르트가 뭔가 재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 팔짱을 꼈다 마기를 가라 앉히지는 않았지만 공격을 포기하겠다는 듯한 그태도에 미시안과 레지엘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나르트는 미동도 않고 데스 킹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크..." 데스 킹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세한에게 걸어갔다 세한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데스킹을 노려 보았다 "크큭 재미없군 배에 구멍이난 몸으로 싸움을 걸다니... 크크큭 형편없군 다크소드" 콰직 데스 킹의 발이 세한의 머리를 강하게 밟아 눌렸다 그충격에 머리가 깨진 듯 세한의 머리에서 피가 천천히 흘러 내렸다 " 큭 마신의 신전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이지 크크크큭 복수를 원한다면 와보라고 크하하하핫! 그 병신같던 다크엘프들과 그 고양이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말이야! 크크크큭! 아아 그땡중 녀석도 있던가? 크크크 크하하핫!" 데스 킹의 뜻밖의 말에 미시안 레지엘은 눈을 크게떴다 마신의 신전? 결국 여기서 공격을 멈추겠다는 건데... 이 유리한 상황에서 왜? 레지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데스 킹을 노려보았다 마음속이라도 들여다 복ㅆ다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크아아아악!" 그떄 세한이 발악과도 같은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마기가 폭팔하며 데스 킹의 발이 위로 들렸고 검은 기운이 실린 세한의 주먹이 빠르게 솟아올랐다 "크크큭!" 하지만 데스 킹은 비웃음 과도 같은 웃음을 흘리고는 너무도 쉽게 공격을 피해냈다 뒤로 살짝 몸을 젖혀 공격을 흘려보낸 데스킹은 그대로 세한의 등을 걷어찼다 부우웅! 공중으로 거칠게 떠오른 세한이 몇 미터 위로 나가 떨어졌다 엄청난 충격이 있을 듯했지만 세한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미친듯이 살기를 뿜어 대었다 하지만 데스킹의 몸이 빨려 들어가듯 검은공간 속으로 사라져 갔다 데스 킹의 실력이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있던 레지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세한과 미시안은 조용히 안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개자식! 멈춰!" 미시안이 백열하는 화이트소드를 치켜들고 데스 킹이 사라져 가는곳으로 달려가자 그것이 신호가 되기라도 한듯 세한이 요검음 거칠게 휘두르며 마기를 뿜어 댔다 치이익 하지만 마기의 문은 순식간에 닫혀 버렸고 데스 킹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시안은 허탈한 표정으로 몸을 멈추며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자신의 실력으로는 상대도 되지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엇지만 이대로 꼬리를 말기에는 데스 킹에 대한 증오가 너무나도 강했다 미시안에 비해 레지엘은 한결 편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데스 킹이라는 위험도 사라졌고 이제는 재빨리 바카나시로 향하기만 하면된다 "골치아프군 망할" "예?" 짜증난다는 듯이 중얼 거리던 마나르트는 레지엘의 반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데스 킹녀석 웬만하면 완전히 밟아 두고 갈 것이지 저렇게 기를 살려듀었으니 힘들 겟다는 소리다" 레지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데스 킹이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시안이 서있었다 둘의 시선은 목표없는 살기를 뿜어 대고있는 세한에게 향해 있었다 대략난감한거셈... 양이너무많아 살짝만... 세한은폭주해서 레지엘과 미시안에게 덤벼들고 여차여차해서 돌아오고 천악 미토스 등은 타락천사힘을 찾으러가고 세한은 데스 킹을잡으러갑니다 세한은 기폭 으로데스 킹을 마무리.. 그리고 마계로갑니다 마나르트는 마왕의 자리를 넘보지 않겟다는 조건으로 지상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고 무의 공간에서 세한은 좀더 강해집니다 그리고 페이린을 죽이러 가는데... 그때 페이린이 시간의 마법을써서 세한에게 말을 걸어 온다 "어라?" 나는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 의공간? "어째서...." 분명히 페이린에게 돌격해가고 잇었는데 모든힘을 끌어내서 마지막일격을.... "왔군요" 그때 등뒤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시린을 처음마낫을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더 부드럽고 샹냥한 느끼이라는게 조금 다르군 하지만... 타앗! 나는 급히 몸을 날려 거리를 벌리며 뒤를 돌아 보았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의 여자 페이린이 어둠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너무 경계 하지 않다도 돼요 시간을 멈추는 마법을 썼기 떄문데 지금 상황에서는 누구도 공격할수 없어요 그저 얘기할것이 있어서 이 공간으로 부른거니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세한" 그...그렇게말해도 지금 나는 작은 단검하나 지니고 잇지않은 상태며 더군다나 마나르트도 없으니 지금 페이린이 공격하면 나는 꼼짝없이 죽는다 "쿡" 그때 페이린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손으로입가를 가리고 웃고있는 페이린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어둠위에 앉았다 "정말인 모양이군 용건은?" "너무 딱딱한데요?" 나는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내반응이 재미있다는 듯한 기색을 보이던 페이린은 방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예상은 했지만 ,... 정말로 나를 죽이러 와 버렸네요?" "예상하고 있었다면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곗군" 페이린은 씁쓸하게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쓸데없이 말을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하에 페이린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며 앉아 있었기에 무의 공간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후 페이린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강해졌어요 지금의 나를 충분히 죽일수 있을 만큼 " "......" 나는 페이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그리고 난 당신에게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뭐?" 나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페이린을 쳐다보앗다 "무슨 헛소리야" 페이린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말그대로에요 마법이 풀리면 당신은 날공격하고 있을테고 내브레스는 당신의 힘에 파쇄당하고 나는 당신의 마검에 머리가 반쪽이 나서 죽을 거에요" "......" 어째 즐겁다는 투로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는 것에 나는 의문 섞인 눈으로 페이린을 바라 보았다 혹시 아니 설마 그럴리가 하지만... "설마 처음부터 죽을 생각이었던 건가?" 페이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자식... 도대체 무슨.... "당신이 데스 킹을 쓰러뜨렸으니까요 이제 난 죽어도 되죠" 더 뜬금 없는 소리다 나는 잠시 페이린을 노려보다가 다시 암흑속에 앉았다 "데스 킹의 야망에 관해서 들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내가 죽는다면 섀도우 월드는 그에게 넘어갔겠죠 그의 컴퓨터 성능이 대단하거든요 하지만 나와 같은 인체 실험 대상자 이기도 하고... 어떻게할까 고민하는 중이었는데당신이 그를 쓰러뜨렸어요 안심할수 있었죠 아마 당신이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직업 나섰겠지만" "지금 그게 궁금한게 아닌데 " 내말에 페이린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난 처음부터 섀도우 월드를 차지할 생각은 없었어요 인간들을 이 세상에 가둘 생각도 없었고" "뭐?" 나는 눈을 크게 덨다 "그럼 지금까지 죽었던 이들은 뭐지?" "그들은 내가 죽는순간 모두 무사히 살아 날꺼에요 NPC들도 모두 현실의 인산들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갈거고" "그럼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인거지?" 나는 내가 의외로 침착하자는것을 느끼고 의문의 꼬리표를 달았다 나도 무심에 가까워진 걸까?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인체실험에 사용한 리자드에 대한 복구... 라고 할까요? 그리고 암흑가를 위해서이기도 했죠 이번일로 암흑가 사람들은 세상 속으로 나갈수 있게 될거에요 어려움은 있겠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이 맞지 않는다 그럴거라면 쓸데없이 처음부터 이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을텐데? "진짜이유는? 처음 당신이 이 일을 벌일 떄를 보면... 지금의 말 신용할 수 없어 뭇느 속셈이지? 내말에 페이린은 잠시 머뭇거렷다 하지만 그게 내 의심을 더부추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왠지 나를 보는 눈빛이 꽤나 거북하다는 느낌이었다 "당신떄문이죠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 왔기 떄문에" "뭐?" "난 프로그램 자체를 바꿔 놓고 있엇죠 이세상에 들어온 플레이어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그런데 당신이 들어왔어요 그러고 당신을 다시 현시로 보내 줄 길은... 내가 죽는 것밖에 없었죠" "자.. 잠깐..." "내가 죽기의해서는 데스 킹이라는 존재는 없어야 했죠 사실 내가 죽였어야 했지만 단신의 복수심을 알고 있엇기게 가만히 있었던 것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잠깐!" 내고함에 페이린이 말을 멈췄다 나는 헉헉거리며 페이린을 노려보았다 "무슨말이지? 나때문이라니?" 내질문에 이번에는 페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의문이 섞인 눈길로 나를 빤히 주시했다 "혹시... 아직도 모르는 건가요?" "그러니까 뭘?!" 내 반응에 페이린은 눈을 더욱 크게 떳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야 "정식으로 소개하죠 나는 세르 페이린 섀도우 월드의 관리자인 드래곤 그리고 전생에는 김지혜라는 인간이었고 암흑가의 사람이었으며 김세한이라는 사람의 여동생 남매지간이었죠" '.....!" 나는 눈을 부릅뜨고 굳어 버렸다 김세한?아버지의... 남매? 여동생? 그런... 그럼 나와 관계가 어떻게 되더라? 아 보통 고모라고 부르던가? "빍어먹을! 도대체 뭐야?!"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페이린이 침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엇다 "말그대로 나는 당신의 고모였다는 거겠죠 현실에서 인체실험에 이용되기전에 조카라고 불러줄까요?" "싫어!" "그럴 줄 알았어요" 왠지내가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당하는 바보 같은 꼴로 잘도 만들어주던 한사람을 떠올렸다 지금은 죽고 없는 아버지 "뭐야 도대체..." 나는 이마를 감쌋다 이건진짜 혼란이군. "세한" 나느 나를 부르는 페이린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당신이 이세상에 남겠다고 결정했다면 모르겠지만 날 쓰러뜨리기로 했으니 나는 당신에게 죽을 거에요 물론 죽는다기보다 당한다고 봐야 겠지만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필패죠 동대륙의 인간이 등장할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 "당신은 왜 이 세상을 떠나려는 거죠?" 나는 페이린을 똑바로 주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페이린에게 부탁해 이 세상 남게 해달라고 하려 했었다 페이린이 죽더라고 나는 이 세상에 남을 수 있도록 지금 페이린의 능력이라면 가능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생각은 바뀐지 오래였다 "이곳은 내 세상이 아니야 내 세상은 이 세상을 만들어낸 세상 내가 이곳을 얼마나 사랑하든 이곳이 게임속이라는 것에는 변함없지 나는 이곳에 속한 인간이 아니다 드래곤" "게임은 게임일 뿐인가요?" "내 첫번째 세상은 현실 이곳은 두번째세상 정도 될까? 나는... 이 세상이 하닌 현실에서 살아 가야해" 그리고 그래야만 이곳을 지킬수 있다 "그런가요? 뭐, 강해졌다고 해 줄게요" "...미안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아" 페이린은 빙긋 미소를 지엇다 그리고는 새로운 폭탄과도 같은 말을 내던졌다 "내가죽으면, 내알이 남을 거예요 새로운 드래곤이죠 그아이를 잘부탁해요 나와 당신의 아기니까" 비틀 나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이 흐트려져 발을 딛고 있던 곳이 허물여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킨 나는 부들브들떨며 페이린을 노려 보았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어머? 기억 안나요? 너무하네 내처음이자 마지막 남자가" "하?" "이러면 기억이 나려나?" 갑자기 페이린의 외모가 변하기 사작했다 정확히는 머리색이 붉은머리에 검은머리가 물결처럼 뒤섞인 머리색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 부드럽고 유순한 눈동자 속이비치는 망사 옷 으음 "너!" "예쁘죠?당신 컨셉돠 맞춰서 검은 웨이브를 넣은건데..." "지...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꿈이 아니었어?!" "잠시 기억을 묶어 뒀을 뿐이에요 덤으로 다신의 육체도 잠시간 봉인해서 혼란을 줬고 어떄요? 이제 확실히 기억이 나나요?" 순간 머릿속에 묶여 있던 뭔가가 풀리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 나는 얼굴을 붉히며 페이린을 노려보았다 "다...당신 말이야...." "어머? 이제 당신 이라고 불러 주는군요?" "크윽! 그게 중요한 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는 말을 멈췄다 잠깐 뭐가 이상한데? 그때 나와 함께 잤던 여자가 여기 드래곤 양이시라? 으음 그렇단 말이지 잠깐.... "자... 잠깐 당신 내고모라며!" "근친상간이라고요?" "으이이익!" 내 쇠상한 비명에 페이린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아니죠 김지혜라는 건 내시스템에 이용된 뇌의 원 주인일 뿐 이고 지금의 나는 완전 다른 좀재이니까 그리고 이세계에 구현된몸은 그 김지혜와 아무관련없어요 그리고 인간일 적의 기억도 센군이 전해 준걸로 객관적인 관점에서만 알고 있을 뿐이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세한과 김지혜는 친남매도 아니었죠 "뭐?" "인체실험당시 구분을 편하게 학위 해 김지혜와 김세한을 남매로 구분지어 놨을뿐 아무런관계도 아니었어요 이건내가 정붬퓨터에 침입해서 알아낸 사실이죠 "..." 어째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는듯한 느낌이 든다 이게 문제가 아닌것 같은데 :잠깐 그문제는 념겨 도대체 당신 무슨 생각으로 " 페이린은 나를빤히 바라보더니 투덜거리며 입을 열엇다 "어머 너무해라 여자보고 그 부끄러운 말을 하라고요? 프러포즈는 원래 남자가...." "주... 죽인다!" "어차피 곧 당신손에 죽을꺼라니까요 순간 머리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페이린은 내가 자신의 말레 침착함을 회복하는것이 못마땅했는지 다시한번 날 무너뜨리는 말을 꺼냇다 "말하자면 아이를 만들고 싶어서죠 새로운 드래고 내자식 섀도우 월드 에 다시는 해악을 기치지 못하게 프로그램된 그런 드래곤을 그래야 섀도우 월드 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겠죠?" "그러니까 그것과 그떄일이 무슨 상관이라는거지? "나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할수 있어요 내가 여성체이긴 하짐나 아이를 낳으려면 얼마든지 낳을수 있다는거죠 하지만 역시 그건 기분나쁘더라고요 인간의 기억도 잇어서 그런지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의 질서를 부너뜨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내가 지키고자 했던 세상인데 내가 이세상의 법칙을 깰수는 없느까 그리고 또하나." "?" "솔직히 당신도 마음에 들었고" 나는 질린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얘기가 않돼 도대체 이여자의 머릿속은 어떨게 생겨먹은거지? "어쨋거나 내가죽으면 해츨링을 잘부탁해요 어쨋든 당신의 아이 이기도하고" "드래곤의 아버지라 드래곤슬레이어보다 더황당하군" 페이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잠시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어떻게되는거지" "아주 사라지진 않아요 슈퍼 컴퓨터의 한쪽구석에 갇히겠죠 당신과 다시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건가? 다행이군" 내 말에 페이린은 짖궂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머나, 역시 첫여자라 관심을 쏟아주는...." 까득 내입에서 이가는 소리가 나자 페이린은 입술을삐쭉이며 입을 다물었디 나는 그런 페이린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입을열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의 조카였다는 이유하나로 죽어주는건가?" 페이린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당신이라면 이 세상을 지켜줄거강아서 데스 킹을 쓰러뜨린것 만으로도 당신은 이 세상을 구한것 이라고 할수있으니 까 그리고 내가일부러 죽는게아니라 당신의 실력에 당하는거에요 나는 미래를 잠시보고 내 낭군님과 얘기나 할까잠시 시간을 멈춘거고 "...." "설명이 되었기를 빌어요 그럼 마법이 풀릴 시간이네요" 나는 몸을 뻘떡 일으켰다 "자 잠깐 !" "아이 잘부탁해요" "젠장 잠깐 기다....!" 화르륵 순간어둠이걷히며 빛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세한 정신차려 검은빛의 검을 든 검은 사내가 드래곤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드래곤은 포효했지만 검은사내의 마기의 검은 드래곤의 머리를 반으로 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나와 나란히 주저앉은 레지엘과 천악은 숨을 헐떡였다 둘의 얼굴에는 믿을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만연했다 둘은 바닥에 내려서 공중에서 흩어지는 드래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세한을 보며 웃었다 해방이다 스르륵 차가운것이 볼레닿는것을 느낀레지엘은 얼떨결에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눈이군" 세한은 서서히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붉은 안개와 그레 뒤섞인 하얀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발앞을 내려다 보았다 검은빛과 붉은빛이 뒤석인 커다란 알이 약한빛을 발하고 잇었다 2126년 8월 30일 섀도우 월드는폐쇄되었다 신플레이어.. 이건다못씀 너무많은 세한은 섀도우월드를 유랑하고 신(新)플레이어를뽑는다 그때 루핀이라는 플레이어를만나고 세한은 마검을준다(마나르트를.//) 그런데넌 겨우 여덟살짜리가 아버지에 존댓말이뭐냐임마 -천성인걸어쩌겟습니까. 천성도고치려고마음만먹으면 고칠수잇는거야 아빠라고불러보렴아들아 ... 페이린은어때? 어머님을잘계십니다 안부전해달라고하시더군요 그래 난쓰게웃엇다 슈퍼컴퓨터일부분에지내긴하지만 잘지내나보군... 쭉가다가... 이곳은 나의현실 나의 세상이다 THE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