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봉인했다고 한다. 그 봉인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천신이 다른 존재들이 그 힘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페이나의 미궁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 어떤 인간도, 천족도, 마족도 천신의 결계에 의해 미궁을 통하지 않고는 절벽에 다다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흐음… 어느 정도 재밌는 이야기네요." "그렇지?" "흠…." 카루나 성을 나온 나는 넓게 펼쳐진 초원을 보며 숨을 들이셨다. 후… 공기가 맑단 말야… 기분이긴 하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왜 그런 곳에 가는 거죠?"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잖아. 언제 한번 가볼까? 확실히 그런 곳이면 우리를 따라 다니는 귀찮은 친구들도 없을 텐데…." 나는 다정스레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할딘과 씨아를 바라보았다. 흠… 정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괜찮아 보이는 커플이네? 흠… 확실히 씨아도 할딘 앞에서는 얌전하단 말야… "예를 들어 지금 성벽의 그림자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친구들?" 내 말이 끝나는 순간 할딘이 눈을 빛내며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그림자를 향해 뻗어나가는 엄청난 양의 전기… 성벽의 거대한 그림자를 모두 덮어버린 엄청난 양이었다. 와… 저게 최상위 마법사의 실력인가? 나는 휘파람을 불며 모습을 나타내는 그을린 복면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기절했네? "빨리 가죠. 아마 어디에 가는 지는 모를 테니… 듣지는 못하고 미행을 하던 모양인데… 린." 품속에서 꾸물거리며 기어 나오는 린. 그리고 린은 곧 거대한 괴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입을 쩍 벌리고 린을 바라보는 미토스와 질린 얼굴로 린을 바라보는 씨아.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할딘. 정말… 나는 린의 등위로 뛰어올랐다. "흠… 그런데 4명이나 탈 수 있을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린의 위에 생겨나는 할딘. 텔레포트? 하긴 할딘 정도면 이 정도의 짧은 거리는 식은 죽 먹기겠지… "몸무게를 줄였다." 확실히 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린의 위에 내려앉는 미토스. 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흠… 미토스야 갑옷 무게에 클레이모어의 무게도 있으니… 무겁겠지… 나는 씨익 웃으며 씨아를 바라보았다. "오오, 이런. 이러다 아가씨가 타는 순간 린이 쓰러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겁나지 않으셔?" 내 말에 나를 노려보는 씨아.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지 바로 뛰어오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죽거리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인상을 찡그리고는 린의 위로 뛰어올라오는 씨아. 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미소를 짓는 씨아. 그때 할딘이 입을 열었다. "이… 마물? 마기가 있으니… 마물에게 근력 증가 마법을 걸었다. 걱정 마." 처참히 일그러지는 씨아의 얼굴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흠… 괜히 갈궈서 귀찮게 할 필요는 없지. "뭐, 원래 씨아는 몸매는 좋으니까… 그럼 가보죠. 남쪽으로… 가자 린." 곧장 달리기 시작하는 린. 엄청난 속도에 일행이 탄성을 질렀다. 흠… 역시 괜찮은 이동 수단이야. 린의 머리를 베게 삼아 드러누운 나는 잠시 미궁에 대해 생각했다. 흠… 미궁이라… "미궁이면… 아, 미로에 가깝다고 했었나?" "그렇지.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미로다. 하지만 위로 날아오를 수도 없어. 이상한 마법장이 펼쳐져 있기에… 미로를 부수는 것도 불가능하고…." "흠… 길 찾기가 힘들겠네…." "아차피 통과하기는 힘든 곳이지. 운이 좋으면 통과하는 거고 실패하면 리콜 스크롤로 빠져 나오면 되는 거니…." 그런가? 하긴… 그래도 통과하면 좋을 텐데… "그런데 미궁, 미로면… 미노타우르스 같은 놈들이 있겠네… 흠… 또 뭐가 있지?" 나는 미궁에 사는 몬스터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미토스는 경치 구경. 할딘은 명상. 그리고 씨아는… 나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야. 이런 반인족 얼마냐?" "앙? 미안하지만 생물을 사고 파는 건 내 삶의 철칙에 어긋나는지라…." 내 대답에 인상을 찡그리는 씨아. "뭐야? 벌써 하나 사놓고는 무슨…." "미안하지만 린은 스핑크스에게서 받은 거라오. 물어볼 거 다 물어봤으면 아가씨의 애인의 옆에서 같이 명상이나 하시지요. 인성을 닦는데 좋을 거요. 약간 인격 파탄자의 그것과 흡사한 아가씨에게 좀 필요한 일이라 사료되오만?" 순식간에 날아드는 씨아의 발뒤꿈치. 으음… 피하기도 귀찮아… 나는 그냥 드러누워서 내 배를 가격하는 씨아의 내려찍기를 받아들였다. 퍽! "으으…." 내가 피하지 않고 그냥 맞고는 신음을 흘리자 오히려 씨아가 당황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야! 왜 안 피해?" "글쎄올시다, 호박." 방금 까지 짓고 있던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우며 다시 내 배를 내려찍는 씨아. 그때 나 대신 씨아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으음… 이거 오랜만에 발동되네? 쳇. 천악하고 싸웠을 때 발동되면 얼마나 좋았겠어… "뭐, 뭐야?" "공격 되돌리기라고… 내 아이템의 능력이지. 웬만하면 그만하지? 사람도 많아서 좁은데… 애인 옆에서는 좀 조신한 행동을 보이라고." 자신에게 죄가 있는지라 별말을 하지 못하고 다시 할딘의 옆에 앉는 씨아. 후… 일행에 정상적인 여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 레도르 녀석들과 다닐 때는 이시린, 레아, 유미가 있었건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궁이나 갔으면… 심심하다… =주인님. 앞에. "음?" 나는 몸을 일으켜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초록빛 맨티스들. 으음… "손님들이 오는데…." 내 말에 씨아가 몸을 일으켰다. 잠시 앞을 바라보던 씨아는 등에 매고 있던 석궁을 풀어 내리고는 장전. 맨티스들을 조준하는 씨아. 뭐지? 그때 할딘이 눈을 뜨고는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법? 할딘이 주문을 마치자 환한 빛에 휩싸이는 씨아의 석궁. 씨아는 그대로 석궁을 발사했다. 흐음… 좋은 구경이… 고개를 돌려 맨티스들을 바라보니… 한 맨티스에게 명중한 석궁의 화살. 그리고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키에에에엑! "오오… 멋진데?" 폭발로 일어난 불길. 곧 린이 그 불길을 뚫고 지나갔다. 호… 대단하다… "익스플로젼을 석궁에 걸었지. 쉽지 않는 기술이다. 저 석궁이 특별한 거라 이리 쉽게 성공한 거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할딘. 씨아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석궁을 다시 어깨에 매고는 할딘의 옆에 앉았다. 흠… 미토스는 아직도 주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참… 신기한 사람이야. 뭐 볼게 있다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광경이 멋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볼 정도는 아닌데… "린. 계속 달려." =예. 린의 대답을 들은 나는 눈을 감고는 낮잠을 즐기기 시작했다. 흠… 몬스터야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아니면 린이 알아서 피해가기도 하니… 으음… 약간 흔들, 흔들거리는 것이 기분 좋은데… 음… 얼마나 자고 있었지? 나는 내가 잠에서 깬 이유를 찾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으음… 뭐야? 협곡 같은 곳인가? 황무지에… 절벽들이 보이네? 하지만 포위될 만한 곳은 아닌 것이… 길이 많아… 꼭 그랜드캐니언 같은 곳인데… 그런데 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기. "조심해!" 아까와 비슷한 태도로 앉아있던 일행들이 몸을 움찔했다. 순간 날아오는 거대한 창. 제길… "린! 마기를…." 푸확!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창은 린의 다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대로 쓰러지는 린. 이, 이런… "쳇. 뭐지?" "화이어…." 불길이 넘실거리는 미토스의 클레이모어와 할딘의 손에서 일어나는 스파크. 카타나와 쇼트소드를 뽑아든 씨아가 나를 돌아보았다. "야, 이 멍청아! 빨리 준비를…." "닥쳐." 뭐라고 꽥꽥거리던 씨아는 내 살인적인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후… 후후후후… =흐윽. 주, 주인님… 내가 린에게 손을 가져가자 린이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했지만 상처는 그대로 있었다. 제길… 잠시 낮게 울다가 잠들 듯 고개를 숙이는 린. 후… 기절한 건가? 나는 린에게 포션을 발라주고는 품속에 넣어두었다. 어떤 놈들이지? "하하하. 드디어 잡았군, 어르신들. 이번엔 반드시 복수해주마." 모습을 드러내는 많은 사람들. 암살자에서 검사, 투사, 도둑은 물론 아처도 몇 명 끼어있는 상당한 조합이었다. 마법사는 없는 것 같은데… 그때 미토스가 나를 돌아보며 미안해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미안해. 우리를 쫓아온 놈들인데… 피해를 줬네?" 그 길드의? 나는 피식 웃고는 마나르트를 뽑아들었다. 저 앞에서 잘난 척 하는 놈이 대장이겠지? 몸도 다 회복 됐겠다… 나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뭐라고 제지하려던 미토스와 할딘은 내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씨아는… "야, 미친놈아! 잘난 척 그만 하고 나하고 할딘 오빠나 보호해!" 이런 짜증나는… 나는 이를 갈며 씨아를 노려보았다. "죽고 싶냐? 닥치라고 했다." 찔끔하며 슬쩍 할딘의 옆으로 다가가는 씨아. 쳇.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어르신들을 바라보았다. "호오… 다크소드? 정보가 맞았군."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 금발머리에 대장으로 보이는 친구. 후후… "야." 금발 머리를 길게 기른 놈이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죽을래?" "미친… 죽여!" 순간 달려드는 사람들. 미치겠네… 미토스와 할딘이 한숨을 쉬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안돼… 내가 죽인다… 나는 마기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쉬이익! 날아오는 단검과 화살들. 창은 날아오지 않는군… 아마 저 이상한 발사대 같은 것으로 날린 건가? 흠…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완전히 빡 돌지는 않았는데… 쉬이이이… 마기가 주위로 퍼져나가며 단검과 화살들을 묶었다. 허공에 멈추는 단검과 화살들. 나는 마기를 움직여 거꾸로 날려보냈다. "뭐, 뭐야?" 당황하며 단검과 화살들을 쳐내는 놈들. 나는 그대로 달려들며 맨 앞의 두 놈에게 검을 휘둘렀다. 단검을 막느라 자세가 흐트러져 있던 둘은 마나르트에 베여 넘어갔다. 후… 그래도 죽지는 않았군… 나는 쓰러진 녀석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 밟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저, 저거 미친거 아냐?" "글쎄… 할딘. 가자." 뒤에서 미토스와 할딘, 씨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두르는 금발머리의 대장… 후… 나는 이를 갈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내 주위로 많은 수의 녀석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으음… 스아아아앙. 내 몸의 주위로 생성되는 바리어. 바리어로 모든 공격을 막아낸 나는 마나와 마력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뒤로 퉁겨나가는 대장 자식… 후… 오랜만에 이렇게 싸운다… 나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으아아! 안그래도 천악한테 깨져서 기분도 더러웠는데… 린까지 다치게들 하셨다… 죽어 버렷! "으음…." 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라? 밤? 여기가 어디래? "일어났냐?" 나는 약간 풀린 눈으로 고개를 돌려 미토스를 바라보았다. 모닥불? 나무가 없는데… 할딘이 만들었나 보군.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할딘과 씨아. 그리고 일어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토스. "음? 기절했었나? 분명히 그 금발의 재수 없는 놈을…." 음… 그 금발의 대장 자식을 무릎 굽히고는 어떻게 죽을 거냐고 윽박을 지르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다른 놈들은 다 쓰러뜨렸고… 흐음… "아아… 그런데 갑자기 쓰러지더라. 마기도 사라지고. 그 마검 가지고 오느냐고 죽는 줄 알았다. 그러게 몸도 안 좋은데 그렇게 무리를 하니까 그렇지." 아아… 마나르트의 힘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었나보네? 하긴… 몸이 완전해 지지도 않았었는데 그렇게 발광을 해댔으니… 그때 씨아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하게 기절이나 하고…." "조금만 더 지껄이면 정말로 죽인다." 안 그래도 기분 더러워 죽겠구만… 내 살기에 눌린 듯 씨아는 질린 얼굴로 할딘의 뒤로 숨었다. 저런… 그런데 그 후로 상 황이 어떻게 된 거야? "상황은요?" "아아… 그놈들이 선발대 같은 거였나 봐. 내가 기절하고 좀 있으니까 떼거지로 몰려오더라. 아마도 다른 길드에도 도움을 청했던 것 같아. 암흑 길드 연맹에 속한 길드니 연합하기도 쉽겠지. 힘들었지만 물리쳤어. 어쩌면 더 올지도 모르지." 제길… 길드 하나로도 모자라서 다른 길드도? 암흑 길드 연맹… 나도 가입했었는데? "제길… 이거 불법 PK라고 하기도 그렇고… 어찌됐든 복수라는 이유로 쫓아다니는 거니…." "그렇지…." 어떻게 보면 불법 PK와 합법적 PK의 차이는 좀 애매 모호하다. 저번 레딕처럼 하수들만 골라서 죽이고 다니면 확실한 불법 PK범이지만… 비슷한 레벨을 공격하고 다니는, 그러니까 천악 같은 사람들은 불법이 아니다. 거기다 문제는 암살자들인데… 이건 암살을 하고 다니면서도 불법에 걸리지 않는 것이… 직업의 특성이라… 때문에 불법과 합법을 구분하기가 좀 힘들다. 그래서 운영자들이 정보를모아서 경고조치를 내리거나 최후에는 소멸을 벌을 내리는 것으로 불법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데… 이 길드에서 특정 사람을 쫓는 것은 길드의 특권, 인원 동원령? 이런 걸로 불법에 걸리지 않는 다는 것이… 참 힘든 세상이야. 그러고 보니 헌터가 되면 이렇게 쫓길 일이 꽤 있겠는데? "그런데 리콜 스크롤을 사용하면…." "그것도 위험하지. 마을에서도 지키고 있을지 몰라. 차라리 여기서 뚫는 것이… 넓은 지역이니까…." 그런가? 어느 정도 수긍한 나는 나무 없는 이상한 모닥불로 다가갔다. 흠… 따뜻하네? 씨아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 나는 품속에서 린을 꺼냈다. "야, 린. 일어나 봐."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었다. 음… 확실히 치료한 것은 아니니까… 곳 린이 몸을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광휘가 빛나던 눈동자가 좀 탁하게 변해 있었다. 확실히 아픈 모양이네… "린. 사람으로 변해. 그게 치료하기 쉽겠다." 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빛에 휩싸였다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세 일행은 갑자가 미녀가 내 품에 안기게 되자 눈을 부릅떴다. 할딘도 놀라워하는 눈으로… "괜찮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린. 하긴… 태어나서 처음 다친 거니… 나는 상처가 있는 다리의 바지를 걷어올렸다. 매끈한 피부에 완벽한 각선미. 상처가 허벅지에 있었기에 나는 바지를 끝까지 올렸고 그 바람에 린의 속옷이 살짝 드러났다. 미토스와 할딘이 고개를 돌렸다. 흠… "뭘 봐?" "아, 아니…." 이상한 놈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씨아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흠… 제길… 상처가 상당히 큰데… 거기다… 피부가 좀 푸르게 변한 것이… 독도 있었나보군. 젠장. "해독 포션 있는 사람?" "아, 내가 치료해 주지." 할딘이 좀 주춤거리며 린에게 다가와 마법을 시전했다. 해독 마법인가? 푸른빛이 린의 다리로 스며들고 피부색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호… 직빵이네? 덤으로 회복마법까지 걸어준 할딘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우리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흠… 생각보다 순진하네? 나야 밤에 가끔씩 완전히 벗은 몸도 봤는 지라… 상처에 포션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준 나는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읏샤… 여기 누워 있어라. 당분간은 사람의 모습으로 있는 게 치료에 편하겠다." 나는 내 다리를 베개삼아 린을 망토 위에 눕혀 주고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한?" 나는 미토스의 목소리에 그를 바라보았다. 약간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토스. "왜요?" "아… 이제 그만 헤어지는 게 어때? 괜히 너까지 위험해 질텐데… 복수야 했잖아? 거기다 그… 린…까지 지키려면 힘들텐데? 네 이름이 있으니 우리하고 헤어지면 건들지 않을 거야." 음… 그렇기는 한데… "우리 걱정은 마라. 아무리 몰려와도 몸은 빼낼 수 있다." "흠… 하… 그러죠 뭐… 어쨌든 오늘밤은 지내고…." 고개를 끄덕이는 미토스와 할딘. 나는 새근거리며 잠든 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흠… 어느 정도는 괜찮은데… 하지만 캐릭터 창으로 아는 것은 그저 그런 수치지 몸의 완벽한 상태까지는… 특히 마기에 몸이 얼마나 혹사당했는지는 알기 힘들다.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겠지. 오늘 마나르트를 과도하게 사용한 것이 두 번이다… 한번만 더 썼다가는… 몸에 남아있는 마력을 갈무리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흠… 아까 그 협곡 지대와 같은 곳인가 보지? "음… 하도 자서 잠은 안 오고… 음?" 앞에서 뭔가가 온다. 나는 샤프소드에 손을 가져갔다. 내 행동에 긴장하며 주위를 살피는 일행들. "한 명… 그렇게 강한 녀석은 아니군요. 한 300대 중반 정도…." 내 말에 긴장을 좀 푸는 기색의 셋. 하긴… 저 사람들에게 300대 중반이야… 나도 이 몸 상태에, 마나르트를 쓰기 힘든데도 별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데… 다가오는 기척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으음? 우우우우웅… 약하게 울리는 마나르트. 뭐야? 몸 상태가 나빠서 들고 있기도 힘든데… 무시하기로 결정한 나는 다가오는 상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행 중 그 누구도 일어나지는 않고 앉아있었다. 곧 나타난 사람은… 은발을 길게 기른 곱상한 모습의 기사였다. 성기사? 갑옷의 문양을 보니… 거기다 등에 매여있는 타워 실드… 아직 해가 조금 남아있는 시간이었고 불이 밝았기에 모습을 확실히 알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의아한 얼굴로 보고 있는데 그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합니다. 다크소드라는 분을 찾아왔는데요? 이곳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나에게 몰리는 시선. 나? 또 시덥잖은 결투 신청? "난데? 뭐지?" 내 말에 곱상한 얼굴의 성기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반정도 음산 모드를 유지하고 있는 내 모습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한 기색. "처음 뵙겠습니다. 성기사, 레지엘입니다. 배틀을 신청합니다." 빌어먹을. 몸도 가뜩이나 좋지 않구만… 그때 미토스가 나에게 말했다. "어쩔 거냐? 하지 않는 게 어때? 너 지금 몸 상태 최악 아냐?" 아까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느꼈는지 진지한 어조였다. 흠… "아… 몸이… 그럼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예의 바른 친구네? 그때 마나르트가 스스로 마기를 내뿜으며 울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은 왜이래? 우우우웅… 그때 레지엘이라는 녀석이 가지고 있는 검 또한 약한 빛을 내뿜으며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그때 잠시 놀란 눈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레지엘이 검을 뽑아들었다. 눈을 꿈틀거리는 일행들. 하지만 살기나, 살의를 느끼지 못한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레지엘이라는 친구가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잖아." 미친놈을 보는 시선으로 레지엘이라는 성기사를 바라보는 일행들. 하지만 내게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행동이었다. 혹시… 나는 마나르트를 뽑아들었다.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일행과 레지엘. "야, 뭐냐? 크윽…." 나는 엄청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특히 레지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세한! 저 망할 자식이 가지고 있는 쳐죽일 검! 성검이야! 쳐죽일 천족 자식이 들어있는. 죽여버렷! ……왜이리 흥분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상한 문양과 문자들이 새겨져 있는 레지엘의 검을 바라보았다. 성검이라… 그래서 마검의 주인과 한번 싸워보고 싶어서 온 건가? 흠… 나는 배낭으로 내 다리를 대신해 린의 머리를 받쳐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일행과 레지엘. "성검이라… 반갑군." 나는 몸을 좀 비틀거렸다. 제길… 생각보다 훨씬 않좋은데… 체력은 어느 정도 찼지만… 몸이 따르지 못하는 건가? 파리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일행과 레지엘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잠시. 내 말을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일행은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성검?" "확실히 신성력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한의 검에 비해서는 너무도 미약한데?" 순간 빛을 내뿜으며 신성력을 내뿜는 성검. 하지만 그래도 내가 사용하는 힘에 비하면 너무도 약했다. 다른 일행들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멋쩍게 웃는 레지엘. "성검은 제 레벨이 높을수록 능력을 많이 주거든요. 마검은 주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힘을 주는 것에 비해 고통 없이 알맞은 힘을 주는 거죠. 그래서 제가 그리 알려지지 않은 거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 나는 몸에 힘을 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상관없어. 덤벼라. 이 검이 아주 지랄을 떠는군." -이 자식이! 아, 아니지! 저 성검 자식! 눌러버렷! "크윽… 이 빌어먹을 자식! 닥쳐!" 내가 몸을 비틀거리며 검을 향해 악을 쓰자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후… "저… 몸이 상당히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다음으로 미뤄도 상관없습니다." "됐어. 배틀. 받아들인다." "그러시다면…." 검을 들어올리는 레지엘. 나는 이를 악물며 마나르트를 들어올렸다. 제길. 몸 상태 xx 같네… 최대한 빨리… 레벨에는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 나보다 조금 높은… 그렇다면 능력치로는 내가 유리하겠지… 속전속결이다. 나는 마력을 약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한 마기가 몸에서 새어나왔다. "한. 웬만하면 그만둬. 저 성검보다도 약하다고." 뒤에서 미토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 이게 최대는 아니니… 나는 그대로 뛰어나갔다. 포기했는지 편하게 주저앉는 미토스. 나는 레지엘의 앞으로 다가서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마주대고 검을 휘두르는 레지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확실히 마스터 레벨… 파악! 마나르트와 성검이 부딪힌 순간, 나는 엄청난 충격에 뒤로 날아갔다. 뭐, 뭐야? "한!" 잠시 정신을 놓치고 있던 나는 미토스의 고함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공중에서 몸을 돌려 착지했다. 제길… 뭐야? 레지엘도 놀란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레지엘도 뒤로 좀 밀려난 흔적이 있었다. 뭐지? 그때 할딘이 입을 열었다. "신성력과 마력의 차이 때문이다. 두 힘은 극과 극. 완전 상극이지. 때문에 두 힘 중 한 힘이 조금만 강해도 그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진다. 한, 네 힘이 저 레지엘이라는 녀석보다 약해서 밀려난 거다." 으음? 그런 건가? 마나르트가 약하게 울리는 것이 동의를 한다는 것 같았다. 레지엘도 뭔가를 듣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이 알려줬나? 흠… "그럼 똑같이 맞추면 되겠군." 고개를 끄덕이는 할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력을 좀더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성검과 비슷한 정도로 힘을 끌어올리자 내 몸 주위에 풍기는 마기가 조금 더 많아졌다. "끄으…." 허억… 머, 머리가 어지러워… 입가에 뭔가가 흐르는 것 같아 왼손으로 닦아보니 피였다. 피가 역류한 건가? 레지엘과 일행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길… 오늘 몸을 너무 혹사했나보네… 마나르트를 한계치까지 사용한 것이 두 번… 거기다 아까는 기절까지 했으니… 레지엘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그만둬. 평소의 반이 될까 말까한 힘을 내고는 그런 꼴을 하고서는…."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부탁을… 다,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뭐야? 지금 내 수고를 무로 돌리겠다 이거냐? 나는 이를 악물며 마나르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힘들거든? 빨리 끝내자?" 나는 그대로 앞으로 달려들었다. 입술을 깨물고는 마주 달려오는 레지엘. 아무래도 빨리 제압해서 끝내겠다는 건가? 마나르트와 성검이 충돌하자 또 폭발이 일어나며 주위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크으… 그래도 어느 쪽도 밀리지 않는 것이… 역시 힘을 똑같이 맞추니 비슷하네… 쾅! 펑! 화아아앙! 화려한 효과음들. 일행들은 입을 벌리고는 나와 레지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마력과 신성력 부딪히니까 아주 난리가 나는 구만… 부딪혀 보니 순수한 실력으로 보면 내가 조금 위였다. 검술만을 사용했는데 대등한 것을 보니… 지금 내 몸 상태와 모든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렇다면 내 몸이 정상이면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성기사 직업 하나를 마스터한 레지엘의 공격은 아주 깔끔했다. 후… 강한데? 콰콰콱! 다시 한번 강하게 검이 부딪히자 우리는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우… 바닥에 족적 남은 거 봐라…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뭔가 불만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레지엘. 뭐야? 그때 레지엘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최선을 다하시면… 여러 직업의 기술을 사용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검술만을 사용하시는데…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 진심으로 상대해 주십시오. 아… 혹시 몸이…." 나는 고개를 젓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 자기도 진짜로 싸우지는 않았다는 거냐? 레지엘이 입을 다물자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레지엘이 몸을 움찔했다. 나는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었고 내 주위의 검은 기운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의 일행들. 역시 이래도 평소에 비하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레지엘의 검에서도 빛이 조금더 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 비하면… "선풍각…." 나는 높게 뛰어오르며 레지엘에게 돌려차기를 넣었다. 당황하며 검을 들어 막으려는 레지엘. 성검에 발을 갔다 대서는… 나는 발을 끌어당겨 무릎을 굽히고는 검을 피해 다른 쪽 발로 레지엘을 내리쳤다. 어깨를 강하게 얻어맞는 레지엘. 마나와 마력 모두가 실린 공격이었기에 레지엘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대거 댄싱." 날아가는 단검들. 내가 빠르게 집어던진 단검에 레지엘이 당황하며 검을 휘둘렀다. 흠… 성기사면 방패를… 그리고 내 생각에 대답하듯 급히 타워 실드를 왼손에 드는 레지엘. 아마도 경량화 마법이 걸려있는지 너무도 쉽게 휘둘렀다. 흠… 나는 내 왼팔에 붙여놓은 마법석을 중심으로 바리어를 생성했다. 이런 마법석을 중심으로 바리어를 만들면 유지도 쉽고 위력도 좋다. 마법도 막고 웬만한 방패는 저리가라 하는 방어력, 거기에 가벼운, 아예 없는 무게 때문에 꽤 전부터 여기에 고정 바리어를 만들어 방패로 사용하는 나였다. 내가 진지하게 나가자 긴장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는 레지엘. 다른 일행들도 덩달아 긴장하며 나와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후… 읍… 나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의아한 얼굴을 하는 사람들. "크윽… 미, 미안… 내가… 졌다…." "예?" 나는 그대로 마나르트를 놓아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마나르트. 바닥에 돌이 많아 이런 소리가… 제길… 나는 코와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제길… 이게 뭔 꼴이냐… 그것도 성검의 주인 앞에서…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레지엘. 으으… 눈이 뿌옇게… "에라이! 이 멍청아! 그러니까 다음에 하라니까…." 미토스가 욕설을 퍼부으며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 역시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할딘. 그리고 씨아와 레지엘도 급히 내게 다가왔다. "으…." 아아… 머리가 어지러워라…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네? 오오… 갈릴레이 씨. 혹시 당신도 이래서 지구가 돈다고… 엉? 갈릴레이? 누구더라?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 그때 할딘이 마법을 사용하는 듯. 환한 빛이 내 몸을 감쌌다. 후… 어라? 그런데 왜 빛이 두 곳에서 나오는 거지? 점차 시력이 돌아오며 내게 치료 마법을 사용하는 할딘과 레지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성기사면… 거기다 성검까지 있으면 이런 마법도 가능하겠군… "으음… 아, 어지러워라. 오오… 아가씨. 너무도 아름답소." 내 말에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는 씨아. 나는 킬킬거리고는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미안.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네가 이겼다. 다음에 다시 하자…." 치료를 끝낸 듯 손을 거둔 레지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확연히 밀렸는 걸요. 만약 완전한 상태에서 싸웠으면 십중팔구 제가 졌을 겁니다. 무승부로. 다음에 다시 도전하죠." "으음…." 진짜 예의바른 친구로군. 누구와는 너무도 대조되는데… 나는 저절로 씨아에게 시선이 가는 것을 느꼈다. 열받은 얼굴로 나를 마주 노려보는 씨아. 흠… 나는 피식 웃고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별로…." 미토스의 물음에 대충 대답해준 나는 마나르트를 검집에 집어넣고는 모닥불로 다가갔다. 모닥불로 모여드는 일행. 나는 쭈뼛거리며 서 있는 레지엘을 돌아보았다. "와서 앉아. 별 신경 쓰지 않을 테니."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잠시 망설이던 레지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훗. 이 녀석도 좀 순진하네? 레도르와 비슷한데? 흠… 오랜만에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는 구나… 나는 레도르 등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후… 포션이나 먹고… 나는 린에게서 배낭을 빼고는 다시 내 다리를 베개로 내어주었다. 정말 잘 자네… 포션을 꺼내던 나는 레지엘이 내 다리를 베고 잠들어있는 린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다. "저… 그분은…." "훗. 내꺼니까 눈독들이지 마." "예?" 당황한 얼굴로 나와 린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는 레지엘. 어라? 뭐, 뭔가 이상한 상상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뭐지? 그분이라… 사람으로 착각했나? 아마도 린의 귀나 꼬리는 장신구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하긴 반인족은 아직 10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니… 나는 린의 귀를 살짝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어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얘는 반인족이라고." "예? 반인족이요? 반인족이면…." 잠시 얼빠진 얼굴을 하다가 다시 얼굴을 붉히는 레지엘. 어? 그러고 보니… 헉!? 반인족이라고 말하는 게 더 오해 받기가… 실수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세 일행이 헛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이런… "으… 말을 잘못했네. 그냥 애완용 고양이야. 됐지?" "예? 아, 예…."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는 레지엘. 쳇. 나는 한숨을 쉬고는 포션을 들이마셨다. 후… 오늘밤에 포션을 계속 마셔서 완전한 몸 상태를… 나는 끊임없이 계속 타오르는 땔감 없는 이상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음… 원래 야영을 할 때는 따닥거리는 나무 타는 소리가… 왠지 허전하군. "정말 괜찮아요?" "물론이지. 우리가 그런 놈들이게 당하겠어?" "걱정 마라." "흥. 자기 몸이나 챙기셔." 나는 짐을 모두 챙기고는 일행을 돌아보고 있었다. 흠… 뭐, 가라면 가지 뭐. 나는 린을 안아들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에 보죠. 아마 현실에서 보게 될 것 같군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걷기 시작했다. 내 옆에서 레지엘이 따라 걷고 있었다. 나와 동행하기로 결정해서… 특별히 일행도, 갈 곳도 없다며 함께 다니고 싶다고 하길래 허락했다. 흠… 레지엘의 레벨은 359. 마스터를 하고도 한 계급이 올라간 레벨. 하긴 그러니 실력이 그 정도지… 나야 파티 정보에 비공개를 해 놔서 레지엘은 내 레벨과 직업을 모른다. 별 불만을 표하지도 않고… "흠… 나이가 몇이야?"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린 때문에 시선을 피하고 있던 레지엘이 내 질문에 대답했다. "20입니다." 20? 동갑이네? 호… 하긴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은 나이대가 20대니까… 그래봐야 별 차이는 없지만… 흠… 그런데… "레벨이 그 정도면 백수?" 내 말에 레지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뭐, 그런 셈이죠… 부모님이 부자셔서… 곧 일을 구하기는 해야 겠지만요." 호오? 금상첨화? 이 친구도 헌터로 끌어들여 볼까? 성검의 주인… 이 정도면 직빵 통과일텐데… 착해 보이고… 별다른 직업도 없는데다가… 레벨이 400쯤 되면 성검도 완벽한 힘을 낼 테니… 내가 진지하게 고려를 하는 가운데 우리는 한 30분 정도를 걷고 있었다. 흠… 생각보다 넓어… 린을 타고 다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어라? 행차하셨나?" 내 중얼거림에 의아한 얼굴을 하는 레지엘. 나는 한숨을 쉬고는 앞에 있는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지엘을 무시하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네… 나는 단검 하나를 집어던졌다. 낮은 절벽에 박히는 단검. "들켰으니까 모습이나 드러내." 내 말에 레지엘이 긴장하며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곧 십 수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대부분이 암살자나 도둑… 그리고 몇 명은 격투가… 아마 몸놀림을 중요시하는… 격투가도 몸놀림이 빠르니까… 그때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어라? 저 친구는… 나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친구는… "어? 여… 오랜만인데? 레일(마을. 기억을 하실라나? 암흑 길드를 찾아갔던 곳.)에 있던 분이 여기는 어인 행차시지?" 약간 장난스럽게 말하다가 점차 살기를 내뿜는 내 말투에 전에 레일의 도둑, 암살자 길드에서 길마에게 나를 안내했던 친구가 몸을 떨었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나와 동행하던 둘을 쫓아온 건가?" 내 말에 당황하는 우두머리 씨. 잠시 당황하던 그 녀석은 내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곧, 익숙한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여어… 그때 그 길마가 아니신가? 어째 당신까지 여기에 행차를 하셨나?" "아아… 다크소드… 어떤 두 놈을 쫓아왔지. 암흑 길드 연맹의 길드 중 하나가 도움을 요청해서… 그런데 당신도 그들과 동행했다고 하던데?" "잠시 동행했을 뿐이다. 지금은 헤어졌지. 그러니 길 좀 비켜주지? 나도 암흑 길드 연맹의 회원, 맹원이다. 그것도 VIP 아니었나? 길을 열어라. 아니면 힘으로 뚫겠다. 그들과는 좀 친분이 있어서 동행을 했을 뿐. 나에게 작살난 그 길드의 친구들 얘기는 못들었나?" 내 말에 신음을 흘리는 사람들. 듣긴 들었나 보지? "으음… 들었지… 자네의 마물을 공격해서… 아주 공포에 질려있더군." "정당방위였지. 나는 내 물건에 손대는 놈은 가만두지 않아. 그쪽에는 호감이 더 많으니 신경 쓰지 않지. 다른 사람들을 쫓던 말던 신경 끊을 테니 길이나 열어." "좋아. 비켜라." 고개를 숙이며 길을 열어주는 사람들. 내가 지나가자 모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것이… 젠장. 무슨 깡패나 조폭도 아니고… 그때 레지엘이 나를 뒤따르자 다른 사람들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때 그 길마가 제지를 하고 나섰다. "그들은 아니다. 너무 약해. 자네의 동료?" "으음. 내 부하라고 해두지." "흠… 그때 그 검은 친구도 상당하던데… 저 친구는 더 대단하군." "그럼 내가 허접을 데리고 다니겠나?" "하긴… 잘 가게." "아아… 다시 만나길 기대하지." 나는 여유롭게 매복해 있는 사람들을 지나쳤고 레지엘도 약간 머뭇거리며 뒤따라왔다. "저…." "음?" 나를 부르는 레지엘의 목소리. 뭐지? "저런 사람들과 어떻게…." "아아… 내 분위기를 보라고. 어둡지? 그래서 저 친구들 패거리, 암흑 길드 연맹에 가입했었지. 정보 얻기에 좋아. 이런 상황일 때도 도움이 되고. 어차피 그다지 구속 있는 단체도 아니고… 내 이름이면 잡으려 들 놈들도 없으니까… 그런데 너는 특별히 갈 곳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레지엘. "예. 특별한 동료도 없고… 그저 돌아다닐 뿐이죠." "그래? 그럼 나하고 같이 갈래? 괜찮은 길드가 있는데… 총 인원이 10명 정도긴 하지만… 괜찮은 놈들이니 그 녀석들이나 만나보던지." "흠… 그러죠. 어디로 가야합니까?" "글쎄? 흠… 잠시만…." 나는 길드 창을 열었다. 흠… 자기들 끼리 대화하는 내용이 떠올라 있는데… <한이다.> 내 말에 곧 반응이 왔다. <형?> <어라? 오빠야? 어디야?> <아아… 그냥 여행중. 너희나 만나러 가려고 하는데… 어디에 있냐?> <우리? 차렌으로 가는데? 칼하고 니베 씨도 만나보고… 그 제시라는 사람도 길드에 가입하고 싶다고 해서. 니베 씨하고 제시 씨를 길드원으로 받아들이려고.> <그래?> <응. 그냥 도보로 이동하고 있어. 오랜만에 여행도 할 겸해서….> <그래… 아, 나도 가입자 한 명 데려간다. 마스터 레벨에 성검의 주인이다.> <헉!? 성검!?> <그래. 괜찮겠냐?> <물론이지. 형이 데려오는 사람이면 환영이지 뭐.> <좋아. 그럼 나도 도보로 천천히 가지. 차렌에서 보자. 도착해서 얼마간 내가 오지 않으면 연락하고. 길드창은 꺼둘 거야.> <알았어. 조심해서 와.> <아아….> 길드창을 닫은 나는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레지엘. "차렌으로 가야겠어." 레지엘이 고개를 돌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차렌 말입니까? 흠… 대륙의 동쪽에… 좀 멀군요." "걸어서 천천히 갈 생각인데… 괜찮아?" "괜찮습니다. 원래 그런 식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음… 협곡이 끝나네? 다시 초원이잖아? 나는 카루나 성에서 사온 대륙 지도를 꺼내들었다. 흠… 어디보자… 여기도 똑같은 나드 초원… 초원을 가로지르는 협곡, 이 협곡이 역시 나드 협곡? 센스하고는… 음… 근처에 도시가… 세 군데나 있네? 대도시 하나에 중급 도시 하나. 평범한 마을… 음… 이 마을이 괜찮은 고렙 지역이네? 우리가 가기에는 좀 약하긴 하지만… 평균 레벨 200정도… 그나마 가장 괜찮은 곳이군. 세리드 마을… "세리드 마을로 가지." "좋습니다." "좋아. 동료가 됐으니 잘 해보자고. 언제 대련도 다시 하고. 레벨은 나보다 네가 높으니… 네가 먼저 성검을 완벽하게 다루면 내가 지겠군. 흠…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 "그래도 한은 마검이 없어도 강하시더군요. 그래도 막상막하일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확실히 능력치 같은 걸로 따지면 내가 유리하지… 거기다 좀 무리하면 마나르트의 힘도 거의 끌어낼 수 있고… 사용 시간이 짧은 게 문제지만… 하긴 비슷비슷할지도… 나는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흠… 괜찮은 길동무를 만든 것 같은데? 백수라서 시간도 널널하다니… "그럼 가자고." 나는 린을 꽉 끌어안아 고정시키고는 살짝 달리기 시작했다. 퀵 스텝을 사용하지는 않았기에 레지엘도 쉽게 따라왔다. 그런데 성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것이… 내 시선을 느끼고는 레지엘이 설명했다. "성검은 여러 보조 효과가 있어서요…." "그래? 이 말만 많은 녀석과는 다르군." 내 말에 마나르트가 거세게 울리기 시작했다. 흥. 레지엘이 미소를 지으며 마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검에도 천족의 영혼이 있다며?" "예. 세파빌이라는 천족, 천사라고 하는데… 무슨 서열도 있다고 하고… 하지만 좀 무뚝뚝하고 조용해서 그다지 말은…." 허억!? 마나르트와는 정반대… 나는 선망의 눈초리로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약간 어색한 표정을 하는 레지엘. "부럽다… 이 자식은 너무 시끄러워서." 우우우우웅! 거세게 요동치는 마나르트. 나는 깨끗이 무시하며 계속 달렸다. 쳇. 좀 정신을 차리니까 더 귀찮은데… 전에 마나르트가 봉인되고 슬퍼한 것이 바보짓처럼 느껴져… 나는 한숨을 쉬며 계속 달렸다. "그런데 왜 마검을 선택하신 거죠?" "아, 이거? 그러니까…." 레지엘은 내가 말을 하다말고 얼굴을 굳히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바빠서 잊고 있었잖아! 그 망할 다크 워리어! 복수한다는 것을… 레지엘은 내가 갑자기 살기를 흘리자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아, 아냐. 그때 날 괴롭힌 망할 운영자 몬스터가 생각나서… 복수한다고 한 걸 잊고 있었군. 언제 찾아가야지…." "그렇습니까? 흠… 그럼 제가 도와드리죠." "글쎄올시다… 언제 자네를 확실히 믿게 되면.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돼는 일과 관련이 있어서…." 내 말에 레지엘은 화도 내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려져서는 안돼는 일이라는 것이 궁금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나중에… 제가 신뢰를 드린다면 같이 간다는 소리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래? 고맙군. 그런데 그 성검은 어떻게 얻었지? 성검에 대한 말은 없던데?" 내 말에 레지엘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기밀이라… 어느 던젼에서 찾았는데 비밀 던젼이라서요. 우연히 발견한 던젼이었죠. 그래서 운영자들이 공표하지 않은 거고요. 그런다면 저에게 그 위치를 물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그 마신의 신전과 같이 여러 무구가 있거든요. 저도 그 중에 검을 고른 거고…." 호… 마신의 신전과 같은 곳이 있다는 소리네? 그런데 완전히 비밀 던젼인 모양이군. 성검의 발견을 알리지도 않는 것을 보니까. 내 일은 아주 즐겁게 떠들어대더니… "그 던젼… 상당하더군요. 레벨 200이 좀 넘은 정도에 들어갔는데… 대충 레벨 300정도의 던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몬스터들이 모두 언데드라 간신히 통과했지만… 가지고 있던 아이템들을 모두 소비했었죠. 완전 파산이었는데… 그래도 이 검을 얻었으니 만족합니다." "그래?" 마신의 신전과 비슷하네? 언데드라… 타락 신의 신전 같은 곳인가? 아니면 무한한 생명을 가진 언데드를 놔둔 것 뿐 인가? 흠… 상관은 없지. 마검이 있는 이상 신성력이 깃든 무구를 사용할 수는 없으니… 다만 팔면 비쌀 텐데… 언제 술을 먹여서 캐내 봐? 아, 아니지… 나를 믿고 얘기한 건데… 나는 고개를 젓고는 정면을 바라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럼 부지런히 달리자고." "예." 정말 넓은 곳이야… 나와 레지엘은 남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세리드 마을을 택한 것은 일직선으로 선을 그으면 차렌과 딱 연결된다는 것도 있었다. "멋진데?" 나는 해가 멀리 보이는 산을 점차 벗어나는 광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흠… 좀 힘든 세상이긴 해도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단 말야. 마검의 주인과 성검의 주인.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나와 레지엘의 만남은 이게 시작이었다. "으음… 그러니까… 여기 시이라의 숲에 변종 트롤이?" 내 질문에 모험가 길드의 NPC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수도 꽤 되어서 한 5마리 정도… 보통 트롤이라면 레벨 200 정도면 상대가 가능하죠. 하지만 그 변종트롤들은 상당히 강해서 레벨 250은 되야 상대가 된다고 합니다. 덕분에 요새 시이라의 숲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꽤 많이 죽었죠. 시이라의 숲은 레벨 200정도의 숲이거든요." "보수는?" "없습니다. 다만 변종 트롤 한 마리를 죽였었는데 이상한 보석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 보석을 감정해 보니 하급의 마법석이라고 하더군요. 500골드는 나가는… 그개 보수라면 보수입니다. 모험가 길드에서는 그 보석으로 강한 분들을 모집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이 마을의 사람들 대부분이 레벨 200정도라서… 트롤이 5마리 정도가 뭉쳐 다녀서 아직 잡지를 못했습니다." "호오…." 괜찮은데? 보수가 그 보석이라면… 시이라의 숲은 차렌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고… 괜찮군… 나는 레지엘을 돌아보았다. "어때?" "좋군요. 어차피 가는 길목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NPC를 돌아보았다. "하지. 연락은?" "필요 없습니다. 이틀에 한번씩 가디언들로 이루어진 정찰대가 가거든요. 성공하시던 실패하시던 연락은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일종의 위험 경고 같은 거죠." "그래? 그럼 그냥 가면 되는군… 가자 레지엘." 나는 천상의 망토를 입고 있는 린을 데리고 건물을 나섰다. 뒤따라 나오는 레지엘. 흠… "저 정도라면 우리 둘로도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가자고!" 나와 레지엘은 광장을 걷기 시작했다. 흠… 꼭 길드는 중앙 광장에 있단 말야… 암흑 길드는 아니지만… 나는 팔짱을 껴오는 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길을 걸었다. 레지엘도 이제는 별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하는 행동에서 린과 내가 그런 사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낸 것 같은데… 린은 다리는 다 낳았는데 이게 더 좋다며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흠… 그리 특별한 마을은 아니네… 그저 평범한 중급 마을이로군." "그래도 활기가 넘치는 것이 사람이 꽤 많군요. 웬만한 중소 도시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렇지?" 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을 느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흠… 역시 눈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이 없으니 좋구나… 하지만 음산 모드가 아니면 좀 약한 느낌이라서… 가끔씩… "여어. 거기. 분위기 좋은데?" "………." 나는 좋던 기분이 싹 가시는 것을 느끼고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웬 느끼해 보이는 기사, 검사 패거리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린. 웃기는 친구들이네? "뭐야?" 내 싸늘한 반문에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는 느끼 패거리. 재수 없어라… 레지엘도 같은 생각인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흠… 확실히… 음산 모드가 아닌 나나 레지엘은 좀 유약한 분위기다. 나야 우락부락한 몸이 아니고 탄탄하게 잘 빠진 몸이고… 레지엘의 얼굴은 너무 곱상하고 순해 보여… "미친… 뭘 꼬라봐? 거기 그 아가씨가 예뻐서 말야." 나는 주인 있는 자신을 원하는 듯한 느끼 패거리에게 화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이 아닌 기뻐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린을 바라보았다. 얘는 왜이래? 혹시 예쁘다는 말을 들어서… 얼굴을 보니 맞는 모양이군. 전에 내가 예쁘다고 해줬을 때 짓던 표정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느끼 패거리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거 보라고. 그 아가씨도 너 같은 햇병아리에게는 관심이 없는 모양인데?"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느끼 패거리. 저놈들도 반인족을 못 알아 보네? 하긴… 악세사리 중에 이런 고양이 귀나 고양이 꼬리 같은 것들도 있으니까… 짜증나네… 오늘 살계를 열어?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는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무슨… "미친 건 그쪽 같군. 얘는 내꺼니까 꺼져." 내 말에 느끼 패거리들은 물론 주위에 몰린 사람들까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지엘은 그저 헛웃음을 지을 뿐… 그때 나를 노려보던 느끼 패거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 뭐니? "이런 미친 새끼… 너 죽고싶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말하는 패거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친구. 후… 레지엘의 눈이 약간 날카로워 졌다. 훗.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놈들을 노려보았다. "그 검을 뽑는 순간… 정말로 죽는다…." "이, 이런 개…." 놈이 검을 뽑으려는 순간, 나는 린에게서 망토를 벗기며 마나르트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몸을 감싸는 망토. 마기를 살짝 운용해 망토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마나르트를 놈의 목에 겨눴다. 마기에 의해 머리카락도 앞으로 넘어온 상황.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 내 모습에 느끼 패거리의 얼굴일 하얗게 변했다. 나는 살기를 뿜어대며 놈들을 노려보았다. "어이. 멍청한 친구들. 방금까지 내 기분이 꽤 좋았었는데 말야… 너희 덕분에 망쳤어. 어떻게 보상해 줄까? 아, 혹시 내가 누군지 알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느끼 대장. 나는 피식 웃으며 검을 거뒀다. "다시 말하지만 얘는 내 꺼다. 꺼져." 나는 마기를 발산하며 말했고 내 주위를 감싸는 검은 마기로 내 정체를 확신한 놈들은 허겁지겁 달아났다. 쳇. 덤비면 좋았을 텐데… 린을 돌아보니 약간 몽롱한 얼굴이었다. 린은 마기만 있으면 좋아한다. 태어날 때 마기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치… 그냥 조용히 지나갔으면… 그때 웬 검사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200대 후반. 아이템을 보니 꽤 좋은 것이… 아이템 발로 날뛰는 녀석. 뭐, 나도 아이템 덕을 좀 보기는 하지만… 나는 OPG를 빼면… 다른 아이템들은 희귀하기는 해도 좋은 아이템이라고 하기는 힘들지… 회복이 좋을 뿐… 나는 마나르트를 집어넣고는 놈을 바라보았다. "뭐지?" "배틀을 신청한다." "아이템을 믿고 까부는 거냐?" "흥. 네놈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피식 웃고는 남아있는 마력과 마나를 섞어서 강한 기운을 뿜어내었다. 마나르트를 잠시라도 쥐면 마기가 내 몸 속에 고인다. 내 앞을 가로막은 녀석은 내가 마검도 없이 마기를 내뿜자 질린 얼굴이었다. 흠… 좀 놀려줄까? 나는 마기를 움직였다. 후웅! 사르르륵… 마기가 놈의 얼굴을 지나가고 곧 놈의 머리카락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목에도 가느다랗게 베인 자국… 내 앞을 막고 있던 검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흥. 나는 깨끗이 무시하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곧 사람들이 사라지고, 아까 평소와 비슷한, 지나가는 사람들만 남자 나는 다시 망토를 벗어 린에게 입혀 주고는 머리를 정리했다. "대단하네요…." "아아… 날파리를 싫어하거든. 빨리 나가자." 나는 걸음을 좀 빨리 했고 곧 마을을 빠져나왔다. 흠… 넓은 초원. 이 나드 초원은 얼마나 이어지는 거지? 걸음을 옮기며 지도를 확인해 보니 남쪽으로, 시이라 숲이 경계선이군… 그 숲의 다음부터는 산지… 산도 나쁘지는 않지… 경치도 좋으니… 마을에서 좀 벗어나자 나는 린을 떼어내었다. "웅?" "린. 마물 모드." "히잉…." "빨리." 린은 투덜거리며 내게서 떨어졌고 레지엘은 의아한 얼굴로 나와 린을 바라보았다. 레지엘은 본적이 없지? 그리고 곧 린이 마물의 모습으로 변한 후, 나는 레지엘에 심히 놀랐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어떤 비명을 내지르는 지도… "으아아아악!" ……… 그렇다고 비명까지야… "호… 여기가 시이라 숲이구나…." 나는 울창한 숲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흠… 이렇게 밝은 느낌의 숲에 오는 것도 오랜만이군… 칠흑의 숲은… 생각하기가 무섭군. 나는 내 옆에서 별로 좋지 못한 안색을 하고 있는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흠… 여기는 현실이 아냐. 멀미를 할 일이 없다니까?" "하, 하지만… 느낌이…." 나는 레지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멀미라니… 세상에… 이 시대에 멀미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건가? 옛날 바퀴를 이용한 차들을 타던 사람들은 멀미를 하거나 했다지만… 레지엘은 부양형 이동 수단을 타고도 멀미를 한다고 하니…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게임에서… 아마도 기분 탓인 듯 한데…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숲을 바라보았다. "좋아. 들어가자!" "냐…." 고양이 모드로 변한 린이 내 어깨에서 울음을 흘렸다. 몬스터가 있는 숲에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는 위험하니까… 레지엘은 약간 비틀거리다가 뒤따라 왔다. "여기는 아직 전투 필드가 아닌 모양이지?" 세리드 마을을 나와서는 초원이 전투 필드가 아닌 안전 지역이었다. 그저 야생 동물들이 돌아다니는… 섀도우 월드에도 평범한 동물들이 있고 그 동물들이 사는 곳이 안전 지역, 몬스터가 출몰하지 않는 필드. 아마 이 시이라 숲도 초입은 그 런 곳인 모양인데… "경치 좋군." "그렇네요… 으…." 힘없는 레지엘의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오… 이 상쾌한 공기.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 아쉽구나. 나는 싱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화… 날도 화창하고! 이런 날에 일행에 여자, 아니 페페가 같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저기요." "음?" 뭐냐? 어디서 여자 목소리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웬 여자 둘이 서 있었다. 순식간에 발동되는 식스센스. 흠… 레벨 200대 초반. 성직자. 마법사. 흠… 나이 20대 초반… 쓰리 싸이즈… 흠… 페페보다는 못하군. 린에게도 밀리고… 대충… 헉!? 내가 지금 뭔 생각을… 으음… 식스센스가 너무 활발히 움직이네… 정신을 수습한 나는 정중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무슨 일이시죠?" 평범 모드로 돌아와 있는 데다가 어깨 위의 고양이, 곱상한 얼굴의 동료와 함께 있는 내가 정중한 목소리로 질문하자 두 여자의 얼굴이 안도감으로 물들었다. 혹시 나쁜 놈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나 보군… 성직자로 보이는 여자가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혹시 시이라의 숲으로 들어가시는 길인가요?" "예. 그런데요?" "아, 그럼 혹시 동행할 수 없을까요? 동행하기로 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일이 생겨서요. 둘이서 들어가기는 위험해서…." 흠? 동행? 별일이군. 내가 떠올린 대로네? 혹시 돈벼락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돈벼락이 쏟아지는 건… 시험삼아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자 레지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레지엘은 여행에 관한 건 내가 결정하라고 했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좋습니다. 안 그래도 저희 둘로는 좀 위험해서 걱정이었는데… 운이 좋았군요. 저는 한이라고 합니다. 격투가죠." 나는 손에 끼고 있는 건틀릿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 말에 두 여자는 내 허리에 차여 있는 샤프소드를 바라보았다. 마나르트는 천으로 묶어놓아서 그냥 보기에는 검으로 보기는 힘드니… 울리지 못하게 약간(?) 꼼꼼하게 묶어 나서… <레지엘. 실력을 숨기는 게 좋겠지?> 내 귓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레지엘. 나는 의아한 얼굴로 나와 샤프소드를 바라보는 여자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칭 백만불짜리 미소라고 생각하는 내 미소. "그냥 호신용입니다. 격투가이긴 하지만 검을 쓸 수는 있지 않습니까. 검사로 속이다가 주먹을 날리는 것도 쓸 만 하고요. 솔직히 말하면 좀 폼 나라고 차고 있는 거죠. 하하하." 내 말에 미소를 짓는 두 여자. 후… 성공이다. 걸렸어. 내 말이 끝나자 레지엘이 앞으로 나섰다. "레지엘입니다. 4계급 성기사죠. 음… 라이드 교단입니다. 반갑습니다." 약간 안색이 좋지 않은 레지엘을 보며 여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 녀석이 몸이 좀 좋지 않아서… 어제 어떤 사람하고 배틀을 했는데 그 휴유증이 있는 모양입니다. 꽤 격렬한 싸움이었거든요."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들. 게임에서 감기가 어쩌고 했다가는 미친놈 취급받지… 그냥 멀미 같은 거라고 해도… 나는 레지엘을 슬쩍 바라보았다. 레지엘 같은 특이 체질이나 그런 거니… 우리의 소개가 끝나자 여자들이 소개를 시작했다. 먼저 소개를 시작한 것은 성직자, 신관으로 보이는 검은 생머리의 여자였다. "아, 안녕하세요. 피아. 4계급 신관입니다. 저도 라이드 교단의 신관이죠. 같은 신전의 사람을 만나서 반갑네요." 라이드 교단? 섀도우 월드에도 교단이 몇 가지 있는데… 성기사나 성직자, 그러니까 신관은 교단 중에 한곳을 정해서 그 신의 힘을 빌려온다. 교단마다 능력이 조금씩 틀린데… 라이드 교단은 약간 전투적, 공격적 성향의 교단이다. 아마 저 신관은 다른 신관들에 비해 다른 능력이 약간 떨어지는 것에 비해서 힘이나 체력이 조금 높겠지… "저는 캐나에요. 4계급 마법사죠. 반갑습니다." 갈색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내리고 헐렁한 로브를 입고있는 마법사까지 대충 자기 소개가 끝나자 우리는 파티를 경성했다. 시이라 숲 탐험대. 흠… 좀 즐거워지겠네. 몸이 안 좋은 레지엘을 배려하고 좀더 친근한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며 내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어머. 그 고양이 너무 귀여워요. 조그만 게 깜찍하고…." 분위기를 파악한 린은 말은 하지 않고 있었고 대신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꺅꺅거리는 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린을 들어서 신관, 피아에게 건네주었다. "꺄… 부드럽다…." "피아, 나도, 나도." 린을 들고 좋아하는 두 여자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흠… 레지엘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좀 심심했는데… 잘 됐네… 나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 악마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니까요." "그, 그래요?" "드래곤과의 싸움이 멋지기는 했지만… 그래고 악마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 거죠. 아까도 마을에서 작은 시비가 붙었던 사람들을 아주 박살을 냈다고 하던데… 어쩌면 여기로 올 지도 몰라요." "마, 만나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 좋긴 개뿔이 좋냐…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왜 내 소문은 이렇게 퍼지는 거지? 분명히 건들지도 않고 고이 돌려보냈다고. 레지엘이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제기랄… "다크소드는 여자들은… 아이… 생각하기도 싫어요." "서, 설마요." "피아 말이 맞아요. 지금 세리드 마을은 비상사태래요." "아, 혹시 여기로 오면… 오시는 길에 보지 못하셨어요?" "아뇨." "하긴… 마을에 있는 친구에게 들으니 얼마 전이라고 하는데… 그 마을에서 여기까지 오는 대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두 분이 출발한지 꽤 후에 일어난 일일 거예요." "그럴까요?"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린을 타고 와서 시간 관계 성립이 되지 않았군… 거기다 망토는 품속에 넣어뒀고… 둘의 말을 들으니 마을에서 다크소드 일행이 셋이라고 말이 퍼져서 우리에게는 전혀 의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조심해야겠군요. 그 악·독·한 다크소드가 이 근처에 있다고 하니까…." "맞아요. 조심해야…." 나는 눈을 좀 꿈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편한 분위기에 피아와 캐나는 계속 말을 걸어왔고… 나는 그 덕에 나에 대한 욕, 혹은 좋지 못한 소문을 계속 듣게 되었다. 후… 도대체 이렇게 좋지 못한 소문만 퍼지는 이유가 뭘까? 거기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전에 레딕이라는 사람은 진짜 끔찍하게 죽었대요. 정말… 완전 악귀라니까요." "레딕?" "예. 좀 질이 나쁜 사람이었는데 다크소드에게 약간 실수를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실수 때문에 다크소드가 처참하게 조각내서 죽였다고… 정말 끔찍한 사람이라니 까요." "………." 왜 레딕보다 내가 나쁜 놈이 되는 거지? 좀 끔찍하게 죽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좀 질이 나빠? 약간 실수를 해? 나는 내가 다크소드라고 밝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밝혀서 나쁠 거야 없지만… 지금 와서 밝힌다는 것도 좀 웃기네… 위이이이잉! "음?" 이상한 소리에… 위험신호. 나는 손을 들어올리며 주위를 살폈다. 내가 전투태세로 들어가자 일행들도 긴장하며 각자 무기를 집어들었다. 호… 메이스? 그리 크지는 않고 약간 작지만… 나는 피아가 꺼내든 메이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주위를 살폈다. 뭐지? 마치 날개치는 듯한 소리… "스틸 비…." *스틸 비(Steel Bee) : 몸이 철처럼 딱딱하고 커다란 벌입니다. 육식성으로, 세력권에 들어온 생물을 집단으로 습격하여 강인한 턱으로 물어 죽여 버립니다. 독침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거대한 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그리 좋지는 않은데… 주위 지형을 살펴보니 거의 장애물이 없는 지형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상대하기가 더 힘들다. 집단 습격을 하는 놈들이라… "나무 사이로 들어가요. 여기서는…." 주위를 살피며 나보다 먼저 말을 꺼내는 캐나. 호… 마법사라 좀 똑똑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행들을 인도해 길을 벗어나 숲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점차 다가오는 벌들. "파이어 스톰!" 캐나가 한참 주문을 외우더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스틸 비들의 앞에 불의 회오리가 생겨났다. 멋진데? "좋아. 레지엘. 여기서 보호해. 다는 못 상대하니까." "예…." 약간 힘이 돌아온 레지엘의 목소리.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불의 회오리, 파이어 스톰을 뚫고 지나온 거대한 벌들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감히 사람에게 덤벼?" 나는 내게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드는 스틸 비를 올려쳤다. 아무래도 순간 도약을 사용하면… 걸리겠지… 때문에 나는 옆의 나무를 밟고 도약했다. 끄그그… 딱딱한 스틸 비의 껍데기를 이상한 소리를 내며 파고드는 OPG.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회전시켰다. "선풍각…." 스틸 비 하나를 밟아 발판을 마련한 나는 공중에서 몸을 틀며 돌려차기를 넣었다. 어차피 독침은 없으니… 공중에 떠서 슬쩍 보니 다른 일행들도 스틸 비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스틸 비는 한 마리 한 마리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이렇게 떼거지로 몰리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힘들다. 위이이이잉! 시끄럽네… 바닥으로 내려선 나는 그대로 옆으로 몸을 날리며 주먹을 올려쳤다. 내 머리를 노리고 돌진하던 벌 한 놈이 얻어맞아 멀리 날아갔다. 치… 부우우웅! 음? 뭐냐? 나는 나를 향해 날아오는 이상한 것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마치… 무슨 식물의 줄기 같은… 퍼억! "커헉!?" 그 괴물체에 얻어맞은 나는 스틸 비들의 사이로 날아갔다. 뭐, 뭐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이상한 생김새의 거대한 식물이 줄기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쫙 벌어지는 저 이상한 입… "맨 이터(Man Eater=사람을 먹는 자)." 숲이니… 제길… 차라리 길에서 싸울 것을… 이걸 예상하지 못했어. 후회하던 나는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날아드는 벌 씨들을 보며 생각을 거뒀다. 이런 웃기는 친구들에게 죽을 순 없어. 물리지만 않으면 안전하다. 나는 내 몸통 만한 거대한 벌을 향해 분노의 어퍼컷을 날렸다. 머리가 박살나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스틸 비 한 놈. 벌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캐나가 화려한 불꽃들을 연출하며 벌들을 굽고 있었고 피아는 보조 마법을 사용하며 메이스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보호하면 벌들을 떨어뜨리는 레지엘. 전에 나하고 싸울 때보다 훨씬 약해 보이는 것이 연기 실력이 꽤 좋아 보였다. "잘하는데?" 작게 중얼거린 나는 재차 날아드는 스틸 비를 후려쳤다. OPG가 아니라 평범한 건틀릿이었다면 벌써 금이라도 갔겠어… 나는 고통이 느껴지는 주먹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오옷! 승룡!" 머리 위에서 나를 노리고 떨어지는 스틸 비 한 마리. 이제 식스센스는 모든 공격을 알려준다. 다만 내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지만… 이런 벌들은 다 막을 수 있다! 나는 뒤로 조금 물러나며 위에서 낙하하는 벌을 올려쳤다. 머리가 뜯겨나가며 마지막 비행을 하는 스틸 비. 후… 부우웅! 또 온다… 나는 뒤에서 날아오는 식물의 줄기를 느끼고는 순간 도약을… 안되지… 옆의 나무로 뛰어올라 나무를 다시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내 밑을 지나가는 녹색 줄기. "스트라이크." 나는 아래로 떨어지며 두 손을 모아 줄기를 내리찍었다. 그대로 잘려나가는 줄기…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맨 이터의 본체가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좋아. 이대로 가면 다 죽일 수 있겠군. 아아… 밝은 미래여… 나는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려 발차기를 넣었다. 돌려차기에 얻어맞고는 훨훨 날아가는 스틸 비 하나… 우우… 다리가 얼얼하군… 크르라라락! "………." 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괴성이로군. 나는 애써 미소지으며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느낌은… 내 눈일 들어온 것은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는 초록 몸의 트롤들. 변종은 아닌 모양이네… 하지만 두 마리… 무리다. 스틸 비도 꽤 남아있는데… 아니지. 그냥 마나트르를… 제길. 스틸 비만 없으면 실력을 숨겨도 레지엘과 캐나와 합공하면… 타다닥. 나는 몸을 돌려 도망가며 계속 중얼거렸다. 캐나가 파이어 월 같은 걸로 발을 묶은 다음에 이러고 저러고… 나는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는 스틸 비들과 괴성을 지르는 트롤들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역시 이런 스릴도 가끔씩은… "튀어!" 스틸 비들을 상대하다가 달려오는 나를 발견한 일행들의 얼빠진 시선.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스틸 비 하나를 하늘로 솟구치게 해주고는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트롤 두 마리를 보며 뭐라 말하려던 입을 다무는 일행들. 그리고 일행은 곳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죠?" "불 장벽! 파이어 월! 그것도 써요!" "아… 적을 가로막는 화염. 길을 봉쇄하는…." 열심히 달리던 캐나가 힘겹게 주문을 외우자 우리 뒤로 불의 벽 하나가 생겨났다. 불에 몸을 쳐 박고는 고통스러워하느라 속도가 좀 느려진 스틸 비들. 몸을 비트느라 정신이 없구만… 부우우우우… 음? 나는 우리 일행의 앞에 날아가는 거대한 검은 물체를 보고는 눈을 깜박였다. 호오… 자이언트 비틀(Giant Beetle)? 정말 커다란 딱정벌레네? 나무의 수액 등을 먹고사는 몬스터. 먼저 공격을 하지 않는 순한 녀석이지… 아마 스틸 비들 때문에 놀라서 도망가는… 나는 씨익 웃으며 몸을 날렸다. "어? 어라?" "한? 왜요?" 나는 양손에 두 여자의 허리를 잡고는 높게 도약했다. 자틀(자이언트 비틀의 줄임말)는 그리 높지 않게 날고 있었고 나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큰 딱정벌레의 몸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뒤따라 딱정벌레의 위로 올라오는 레지엘. 딱정벌레가 약간 휘청거리더니 다시 빠르게 공중을 날랐다. 우리가 올라타 있는 곳은 딱정벌레의 가장 끝 부분… 검은 껍데기로 쌓여 있는 부분이었다. 앞에서는 날개가 엄청난 속도로… "꺄악!" "으으… 흐, 흔들린…." 비명을 지르는 캐나와… 신음을 흘리는 레지엘. 서, 설마 또 멀미를 하는 건 아니겠지… 레지엘의 얼굴을 보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맙소사… 나는 한숨을 쉬고는 뒤를 바라보았다. 점점 멀어지는 스틸 비와 트롤들. 역시 딱정벌레의 속도가 더 빠르군… "피아. 내 손을 잡아요. 캐나는 피아의 손을 잡고. 레지엘은 캐나의 손." 나는 심하게 흔들리는 딱정벌레의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힘겨워 하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잠시 의아해 하다가 서로의 손을 잡는 일행들. 나는 피아의 손을 왼손으로 잡고는 오른손의 OPG에서 손톱을 꺼냈다. 철컥. "하앗!" 나는 오른손을 자틀의 몸에 박아 넣었다. 푹 들어가 고정되는 오른손. "마, 맙소사… 그, 그러면 이 몬스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피아. 하지만 자틀, 딱정벌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만 그대로 날고 있을 뿐. 나는 씨익 웃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이놈은 껍데기가 굉장히 두껍고 딱딱해요. 웬만한 검으로는 피해를 주기 힘들 정도로… 때문에 이 정도로는 별 고통을 주지 못하죠." 몬스터 가이드에서 읽었던 내용을 큰 목소리로 설명해 주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날개 소리 때문에 크게 말해야 들리잖아? 다시 뒤를 돌아보니 스틸 비들의 모습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다행이군. 흠… 이대로 한 10분 정도만 들어가면… 변종 트롤들은 숲의 한 가운데에 출몰한다고 하니… "좋아. 이대로 10분 정도만…." 호기롭게 중얼거리던 나는 말을 멈췄다. 왜, 왠지 엄청난 시선이… 고개를 돌리자 애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지엘을 볼 수 있었다. 사색이 된 레지엘. 이런… 또 멀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곧 내려야겠군. 그래도 한 1분만 더 가서 완전히 따돌린 다음에… 부우우우웅. 거대한 딱정벌레의 날갯짓 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있었다. 흠… 이것도 꽤 신선한 경험이군. 딱정벌레를 타다니… 별일을 다 겪는걸? 주위의 나무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으으으…." "괘, 괜찮아요?" "이, 이거 신성력으로 치료가 되는 걸까요?" "흠… 잘…." 나와 두 여자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있는 레지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딱정벌레, 자틀에서 내리자마자 이 상태라니… 얼굴 색이 푸르죽죽하군… 두 여자는 멀미를 한 것 같다는 말에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신성력으로 치료가 될까? 멀미 치료 마법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잖아? 프로그램 상 멀미라는 병은 없단 말야. "정말 신기한 녀석이야… 일어나. 가자." "예에…." 내가 손을 잡아 일으키자 레지엘은 비틀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이때 몬스터라도 나오면… 순간 나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는 몸을 떨었다. 지금 레지엘의 상태가 말이 아니다. 이곳은 변종 트롤들이 출몰하는 범위의 외곽. 가능성은 적지만 변종 트롤들이 몰려올 가능성이 있다. 트롤들이 몰려온다. 렙 250정도의 몬스터 5마리 정도. 레지엘의 상태로 봐서는… 레지엘이 한 마리 이상을 상대하기는 힘들어보인다. 그리고 피아나 캐나는… 역시 아무리 잘 봐줘도 한 마리. 그렇다면… 나머지 4마리는…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 조금 더 들어가요. 괜히 돌아가다가 아까 그 스틸 비들을 만나면… 차라리 좀 강하더라도 수가 적은 놈들하고 싸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맞아요. 그게 좋겠는데… 어? 한 씨. 안색이 좋지 않은데… 혹시 한 씨도 멀미를…." 피아와 캐나의 말에 굳어있던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돼. 괜히 들어갔다가는 그 놈들을… "아니요. 돌아가죠. 이곳부터는 이상한 변종 트롤들이 나온다고 해요. 레벨 250 정도의… 우리로는 절대 불가능…." 크르라라락! "……설마…." 갑자기 주위에서 들려오는 괴성에 나는 안색을 굳혔다. 마, 망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상한, 약간 보라색이 감도는 피부를 가진 트롤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대충 포위 진형을 만들어서… "야. 레지엘. 나타났다. 정신 차렷!" 내 고함소리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레지엘은 성검과 타워 실드를 손에 들었다. 그래도 약간 비틀거리는 것이… 위험하다… 피아와 캐나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 둘이 한 마리를 상대할 수나 있을지… 아무래도 탈출을 시키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정보에 따르면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고… 큅 스텝이 있는 나면 몰라도… 이 둘을 안고 달린다고 해도 그럼 레지엘이 남는다. 제길. 그냥 싸우는 방법밖에는… 왠지 운이 없는 하루로군… "어, 어떻게 하죠?" "레지엘과 뒤에서 오는 놈들을 막아요." 우리 뒷편에서 다가오는 트롤 두 마리. 레지엘까지 셋이면 상대하겠지… 전투 시니 레지엘도 좀 정신을 차릴 테고… 아무래도 다시는 저런 탑승물에 레지엘을 태우지 말아야겠어… 흠… 세 마리라… 옛날로 치자면 리자드 킹 세 마리… 나는 뭐라고 말하려는 피아와 캐나를 무시하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속전… 단번에 베어야 한다… 몸을 절단 하지 않으면 그대로 상처가 아물어 버리니까… 나는 품속에서 천상의 망토를 꺼내 몸에 둘렀다. 그리고 마나르트… 몸에 퍼지는 통증. "하… 괜찬은데? 그건 그렇고… 왠지 고통을 즐기는 이상한 놈이 되간다는 느낌이…." 이 고통에 너무 익숙해 졌어… 왠지 모르게 보통 검을 잡으면 허전한 느낌이라고 할까… 뒤에서 폭발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캐나가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트롤에게는… <캐나. 파이어 블레이드. 화염의 검이었나? 그 마법으로 공격해요> 갑자기 들려온 귓말에 캐나가 몸을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물리적 타격이 섞여 있는 것이 더 좋지… 그리고 순간 내 눈앞에 변종 트롤 한 놈이 나타났다. "왔냐?" 빠른 속도로 내게 날아오는 몽둥이… 나는 몸을 숙이며 트롤의 다리를 베고 지나갔다. 한쪽 다리가 잘리며 기우뚱하는 트롤. 그리고 나는 트롤의 등뒤에서 날아올랐다. "승룡!" 아래에서 위로 올려 가른 내 공격에 트롤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절단된 것은 아니다… 역시 아물어가는… "뭐야!?" 나는 반으로 갈라진 트롤의 머리가 그대로 쩍 달라붙는 것을 보고는 경악성을 질렀다. 재, 재생 능력이 업그레이드… 그리고 내 뒤에서 내리쳐지는 몽둥이 하나… 나는 급히 앞으로 몸을 날렸다.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큰 몽둥이 하나가 내리쳐졌다. 우… 파괴력 죽이는군… 나는 질린 얼굴로 내 앞에서 괴성을 흘리는 이상한 트롤 3마리를 바라보았다. 하하… 너, 너무 쉽게 생각했나? NPC들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 섀도우 월드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씩은 떠올려 봤을 의문이다.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사실은 사람의 뇌를 이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뇌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 리자드의 지하. 지하 3층부터 지하 9층까지는 모두 컴퓨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 지하 6층부터는 절대 접근 금지 구역. 연구원과 회사의 특별 직원들이 아니면 절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다. 지하 7층. NPC 통제실. 엄청난 평수를 자랑하는 이 층에는 주먹만한 작은 캡슐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 캡슐들은 하나의 슈퍼컴퓨터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 캡슐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람의 뇌를 축소한 듯한 모양의 작은 뇌. 그리고 그 뇌 를 감싸고 있는 전선과 이상한 금속들. 이것이 바로 섀도우 월드 NPC들이 진짜 사람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비결이다. 그 어떤 경쟁 회사도 가지지 못한 (주) 리자드 만의 기술로 세계 특허를 가지고 있는 기술이다. 사람은 뇌의 기능을 반의반도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뇌가 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것이 이 기술이 세상에 나타나게 한 첫 번째 질문이었다. 사람의 뇌세포를 이용해 작은 소형의 뇌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뇌의 기능을 극대화시킨다.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못할 기술이다. 엄청난 부담이 되므로. 하지만 이 뇌들은 몸이 없고 아직은 생각도 잘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뇌의 활용도는 60%까지 증가한다. 보통 사람의 지능과 비슷한 정도. 그리고 이 뇌를 컴퓨터와 연결. 섀도우 월드에 자신의 몸을 가지게 하며 자신이 NPC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섀도우 월드에서의 생활 지식을 주입시킨다. 그리고 역사를… NPC들은 사람들과 같이 감정을 느끼며 점차 늙어가기도 한다. 수명이 다 한다면 컴퓨터는 그 NPC를 없앤다. 그리고 새로운 NPC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물론 아이도 가지게 된다. 새로운 캡슐들이 생겨나고 죽는 NPC들도 있으니까. 물론 프로그램 속에서 이들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별 감정을 가지지도 않는다. 생각해 보라. 어느 날 처음 보는 외계 생명체가 당신을 찾아왔다고 치자. 그 생명체는 당신에게 자신과 같은 종족이 아니라고 말한다. 당신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겠는가? 그와 같은 일. NPC들에게는 섀도우 월드의 세상이 자신들의 세계이며 생활지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자신들을 보살펴 주는 존재. 다른 세상의 존재이다. 어찌 보면 이들은 진정한 섀도우 월드 속의 주인이며 플레이어, 유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컴퓨터의 통제에 있지만 자의로 생동하며 보통 유저들과 같이 성장하기도 한다. 지하 7층의 마지막 방. 이곳에는 다크 엘프들의 캡슐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중에 <악마의 숲의 마을>이라는 사인이 있는 지역이 있다. 세기 힘들 정도의 많은 캡슐들이 고이 모셔져 있는 곳. 이 캡슐들의 주인은 자신이 다크 엘프라 생각하며 다크 엘프로서 생활한다. 섀도우 월드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주) 리자드에서는 이 게임을 절대 없애지 않는 다고 선언했다 . 끊임없는 패치와 업그레이드로 계속 새로워 질 것이라고 공표 했다. 사람으로써 살아가는 NPC들과… 어떻게 보면 그들과 비슷한… 식물인간 등의 사람들. 이들도 섀도우 월드에 연결에 그곳에서 삶을 살아간다. 바로 이들을 위해. 섀도우 월드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크 엘프. 악마의 숲의 전사 미시안. 플레이어 수치 레벨 301. 검술. 정령술. 마법사용. 나이 258. 다크 엘프의 수명은 약 400. 하지만 늙기 시작하는 것은 350살부터. 미시안은… 현실의 시간으로 약 35년을 살 것이다. 그리고 섀도우 월드의 세상에서는 150년을… 미시안의 수명은 408세로 정해져 있다. 중간에 다른 일이 있지 않다면… 그리고 그 다른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미시안의 캡슐 속에서 작은 뇌가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섀도우 월드에서 표현된다. "렌. 괜찮아?" 어깨에 단검이 박혀 주저앉아 있던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렌의 상태를 확인한 미시안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인간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바스타드소드를 사용하는 상당한 덩치의 투사. 단검을 던졌다 잡았다하는 날렵한 체구의 암살자. 미시안은 살기를 내뿜으며 렌의 앞을 가로막았다. "렌. 가라. 저들은 소멸의 벌을 받은 놈들이야. 죽이면 끝난다. 어서." 잠시 주춤하던 렌은 자신의 활을 집어들고는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두 인간은 콧방귀를 뀌었다. "미친… NPC들 주제에… 사람 흉내를 내는 거냐?" "헛소리. 우리는 다크 엘프다. 네놈들 같은 인간 쓰레기와는 다르지." 미시안의 말에 큰 덩치의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스터 계급 6계급의 투사 지겔. 5계급 암살자 데란. 둘은 미시안의 말대로 소멸의 벌을 받은 유저들이다. 죽으면 캐릭터가 사라진다. 둘은 웬 엄청난 랭커에게 쫓겨 여기까지 들어왔다. 악마의 숲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고 숨기도 좋은 곳이다. 텔레포터 협회를 이용해 마법진으로 왔기에 그들의 추적을 뿌리쳤고 이 숲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숲 속 깊은 곳에서 다크 엘프를 만났다. 활을 들고 있는 다크 엘프. 잠시 멀리까지 나왔던 렌이었다. 다크 엘프…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는 종족이라 암흑 길드 연맹에 팔면 엄청난 돈이 굴러 들어온다. 상당히 강해 제압하고 나니 갑자기 다른 다크 엘프 하나가 나타났다. 상당한, 위험한 기운을 풍기는, 방금 까지 싸웠던 활을 쓰는 다크 엘프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다크 엘프. 때문에 다 잡았던 다크 엘프가 도망치는 것을 막지 못한 둘은 상당히 심기가 불편했다. "차라리 저놈을 잡자고. 강한 것 같으니 비싸게 팔 수도…." "아니… 그보다는… 이놈은 그냥 죽이고 다른 다크 엘프가 있나 찾아보자고. 어쩌면 이 숲에에 다크 엘프의 마을이 있을 수도…." "좋아. 어차피 소멸의 벌도 내렸겠다… 죽기 전에 돈이나 벌어볼까?" 섀도우 월드의 돈을 현찰로 사는 사람도 있기에… 다크 엘프들을 잡아다가 팔거나 정보를 주면 상당한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사실은 모르지만 저들이 자신의 마을의 위치를 밝히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미시안은 이를 갈며 검을 들어올렸다. "죽여주지." "흥!" 데란이 던전 단검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하지만 미시안이 미리 만들어놓은 방어막에 걸려 바닥으로 떨어지는 단검. 하지만 동시에 방어막도 깨졌다. 그리고 지겔이 달려들었다. 거대한 바스타드소드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뼈를 얼리는 냉기. 모든 것을 꿰뚫는 창. 아이스 스피어." 미시안의 손에서 얼음의 창들이 날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지겔을 돌아 달려가는 미시안. 얼음의 창들을 막느라 걸음을 멈춘 지겔은 미시안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미시안은 데란에게 달려들었다. 암살자는 접근전에 약하다. "칫." 급히 뒤로 물러나며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기려는 데란. 은신술. 하지만 세한과 싸워봤고 이런 어두운 숲속에서 살아온 미시안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데란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데란이 던진 단검. 자신의 이마로 날아오는 단검을 검을 쳐냈다. 그리고 빠르게 찔러 들어가는 미시안의 검. 그리고 다른 단검 하나가 미시안의 배에 박혔다. "크윽…." 부우웅! 데란의 비명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파공성. 데란의 가슴을 찌른 검을 급히 회수한 미시안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미시안의 어깨를 파고드는 지겔의 바스타드. "잡았다!" "뼈를 얼리는 냉기. 모든 것을 꿰뚫는 창. 아래에서 일어나는 공포의 창. 아이스 팽…." 순간 지겔의 아래에서 얼음의 기둥… 마치 맹수의 송곳니와 같은 얼음 기둥이 솟아 나왔다. 그 기둥에 꿰여 솟아오르는 지겔. 지겔과 데란의 몸이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시안은 의식을 잃었다. "………." 그리고 그런 미시안의 뒤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의 뒤에는 거대한 크기의 낫이 걸려 있었다. "죄,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아, 아깐 그냥…." "………." 나는 참담함을 느끼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군… 나는 내 몸에 묻어있는 이상한, 역시 보라색을 띄는 변종 트롤의 피를 닦으며 피아와 캐나를 바라보았다. 둘은 내 시선에 몸을 움찔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하… 일어나요… 난 그런 쳐죽일 인간이 아니라고요…." 레지엘은 변종 트롤들이 떨군 이상한 보석들을 주우러 다니고 있었다. 마나가 흘러나오는 것이 확실히 하급 마법석… 땡 잡았다. 나는 주춤거리며 일어나는 피아와 캐나를 올려다보았다. 후… 등판이 쑤셔… 망할 트롤 자식… 감히 그딴 몽둥이로 나를 후려쳤다. 이거지… 아주 조각조각을 내서 지옥에 쳐넣고 싶지만… 벌써 죽었지… "아, 맞다!"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크게 고함을 질렀다.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는 피아와 캐나. 아, 이런… 이게 아닌데… "한마디할게요." "예? 예…." "레딕이라는 놈은 악질 PK범에 여러 죄를 지은 범죄자였다고요. 그래서 내가 운영자의 부탁을 받고 해치운 거고. 알았어요? 그놈이 나쁜 놈이에요." 약간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피아와 캐나. 그리고 나의 넋두리가 시작되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단 말입니다! 내가 왜 악마라고 불리는 거냐고요! 이 복장 때문에!? 까만 옷 입고 다니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마검을 사용하면 마기가 흘러나오는 건 당연한 것 아냐!? 그럼 마검이 마력을 주지 신성력을 주냐!? 어떤 놈들이 이딴 소문을! 거기다 내가 여자에게 뭘 어쨌다고… #^&$%&@%$&$@&#*&$#&@$^#$^@#^$!$%$% @@%!" 횡설수설에 울분이 섞인 내 고함소리에 처음에는 주춤하던 피아와 캐나는 곧 내 얘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소문의 진실을 확인하려는 것인 모양이군… 내 상태에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거기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 이미지가 좋았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 어쨌든 내 넋두리는 계속 되었고 피아와 캐나는 열심히 경청하고 레지엘은 아이템과 돈을 주우러 다니는 개별 행동이 계속 되었다. 한 10여분 동안 계속된 이 기이한 행동은 레지엘이 아이템 수집을 끝마침으로 인해 끝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소문의 진상을 울분에 찬 목소리로 토해내고 있던 나는 레지엘이 내 어깨를 툭툭 치자 고개를 돌렸다. "다 챙겼어요." "어? 그래? 그럼 가야지…." 나는 자루를 받아들고는 속에서 마법석 하나를 꺼내 캐나에게 건네주었다. 마법사인 캐나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보석이 마법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꽤 놀란 눈치였다. "이, 이걸 왜…." "그냥.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말동무가 되 줘서. 고마우면 마을로 돌아가서 내 나쁜 소문들을 좀 타파해 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그 일은…." "한…." "아? 그래 가야지. 근처에 몬스터가 없으니 둘은 리콜 스크롤로 가세요. 저희는 여행중이니까. 아, 그리고 모험가 길드에다가 성공했다고 전해주시면 고맙고요. 귀찮으시면 할 필요 없어요." "예? 아, 예…." "어… 자, 잘 가세요… 고, 고마워요." 뭐가? 살려줘서 고맙다는 거야… 아니면 마법석 때문? 아니면 동행? 흠… 아니면 소문의 진실? 흠…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구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피아와 캐나가 리콜 스크롤을 꺼내는 것을 보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당황한 얼굴로 마주 손을 흔드는 피아와 캐나. 음… 이걸로 내 소문이 좀 희석될지도… 피아와 캐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텔레포트 되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아… 온몸이 뻐근해… "괜찮아요?" "별로…." 몇 대를 얻어맞은 걸까? 상당히 빠른 몸놀림… 그리고 이 마법석은 뭐야? 왜 이런 게 몬스터에게서… 그것도 트롤… 혹시 대형 이벤트라도 하고 있는 건가? 흠… 욱신거리는 몸을 풀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레지엘. 혹시 라이딩 스킬 올렸어?" 기사의 주 스킬이자 반드시 익혀야 한다고 하는 라이딩 스킬. 그런데 레지엘은… 레지엘은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 "아, 아뇨. 멀미 때문에… 말을 타도 멀미가 나더라고요… 스킬을 올리기 전에 잠깐 타보고는 그만 뒀어요. 대신 신성력을 이용한 치료 스킬을 좀…." 정말 신기한 녀석이야… 그러면서 어떻게 성기사라는 직업을 택한 거지? 레지엘은 내가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어디 보자…." 나는 품속에서 대륙 지도를 꺼냈다. 그리고 지도를 붙잡고 함께 딸려 나오는 린. 심심했나 보지? 린이 어깨 위로 기어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지도를 살폈다. 내 뒤로 다가와 함께 지도를 바라보는 레지엘. "흠… 시이라 숲을 지나면 산지야. 고산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덕과 내리막이 꽤 많은데… 린을 타고 가면…." 뻣뻣하게 굳는 레지엘. 나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걸어서 가지 뭐. 흠… 이 루트가 가장 빠르군… 레벨도 적당하고… 그리고 도중에… 아, 여기에 요새가 있네? 루카 요새라…." 흠… 산과 산 사이에 만들어진 요새로군. 아마 몬스터를 퇴치한다는 설정이겠지? 레지엘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내가 정한 길의 루트를 손가락으로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레지엘. "그럼 여기까지 가서 노숙을… 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3일이 다 되어가서요. 잠깐 쉬었으면 하는데…." "좋아. 나도 좀 쉬지 뭐." 흠… 숲이 끝나고 산을 오르는 곳이군… 괜찮은데? 노숙… 흠… 동행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흑. 이시린이나 레아, 유미 중에 한 명만… 아, 제시에 니베, 리아와 리사도 있구나… 모두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여자들이니… 세린과 세시는 예외다. 흠… 아니면 레도르나 미토스 같은 유쾌한 사람들도… 나는 만난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떠올리며 걷기 시작했다. 레지엘이 뒤따라오는 것이 느껴지는군… 하긴 레지엘도 여행 동료로는 그만이지. 하지만 둘이서 여행하려니 좀 썰렁하기도 하고… 뭐, 그래도 이렇게 홀가분한 것도 좋으려나? 그런데… 미시안이나 렌은 잘 있을까나? 베르시아도… 그 꼬마들도… 디렐…은 테이오가 있으니… 아, 그리고 보니 그때 만났던 파리운 일행도… 이런… 그만 하자. 이래서야 끝이 없겠네… 그건 그렇고… 미시안은 얼마나 강해졌을라나… "후… 날씨 좋지?" "하? 그러네요." 약간 쓰잘데기 없는 얘기로 말을 시작한 나와 레지엘은 숲이 끝날 때까지 계속 얘기를 나눴다. 도중에 스틸 비 떼거지를 만나 열심히 도망치면서도… "빌어먹을! 저게 뭐야!?" "여기에 벌들이 왜이리 많은 거죠?" "빌어먹을! 내가 언젠가 저놈들 로얄제리 뺐고 만닷!" "로얄제리? 로열제리였던 거 같은데… 아, 아니지. 로열젤리였나?" "발음차이야!" "흠… 역시 우리나라는 외국의 문물을 너무 빨리…." "으아아! 이 숲은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경치는 좋은데요?" 뭔가 맞지 않으면서도 대충 맞는 말을 주고받는 나와 레지엘. 흠… 확실히 길동무로는 좋은 것 같단 말야… 나와 레지엘은 빠른 속도로 시이라의 숲을 벗어났다. "반딧… 하하. 오랜만에 보는데?" 파리운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인간형의 몬스터들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옆에 서 있던 테일도 20마리 정도의 반딧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전에 여기서 한이 우리를 구해줬었는데…." "그랬죠…." 세나가 좀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나의 쓰라린 추억을 알고 있는 일행은 잠시 침묵했다. 히이이잇! 그때 반딧들이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상황에 오히려 파리운 일행이 놀라 반딧들을 뒤쫓아갔다. "이, 이런! 어딜 도망…?" "어, 어라? 파리운? 뭔가 쌍방간에 할 일이 바뀐 것 같지 않아요?" "그, 글쎄?" 잠시 당황하던 파리운 일행은 그래도 따라가 보자는 생각에 반딧들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언덕을 올라간 순간. 파리운 일행은 엄청난 수의 반딧들을 볼 수 있었다. "마, 맙소사… 거의 50마리는…." 베나의 중얼거림. 그때 뭔가를 발견한 듯 세나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저기! 가, 가운데에…." "뭐? 가운데… 저, 저게 뭐야?" 반딧 무리의 중앙을 바라본 파리운 일행은 경악한 얼굴로 반딧 무리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반딧들의 한 가운데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회색의 옷에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사람 하나. 그리고 온 몸을 로브로 감싸고 롱소드를 들고 있는 장신의 사람 하나였다. 그리고… 반딧들은 그 사람 둘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리운 일행은 굳이 도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반딧이 엄청나게 약한 몬스터는 아니다. 거기다 저런 엄청난 수라면 랭커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반딧들을 너무도 쉽게 쓰러뜨리고 있었다. "대, 대단해…." "저, 저 로브… 혹시 한 아닐까?" 테일이 의심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에 파리운 일행은 일제히 그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 화려한 검술 실력. 깨끗한 몸놀림. 파리운 일행은 정말 저 로브가 한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저런 모습을 했을 수도… "서, 설마…." "어? 이런… 아니잖아." 실망한 테일의 목소리. 그리고 다른 일행들도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은… 빙계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한은 마법을 쓰지 않는다. 약간 허탈한 얼굴로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파리운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도와야겠지?" "그렇겠죠…." "그럼 가세." 파리운 일행은 언덕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뒤에 몰려있던 반딧들이 일행을 발견하고 이상한 기합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낫을 들고 있던 남자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지? 그냥 지나가던 일행인가?" "그런 것 같군요." 로브의 안에서 듣기 좋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잠시 한눈을 팔던 천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반딧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후… 어서 공간의 낫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군… 다크소드라… 훗." 낫을 든 남자, 천악의 중얼거림에 로브의 사내가 잠시 몸을 멈칫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브의 사내는 다시 반딧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뼈를 얼리는 냉기. 모든 것을 찢는 바람의 폭풍. 아이스 스톰." 천악의 낫과 로브의 검과 마법. 파리운 일행의 공격에 반딧들은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곧 반딧들은 전멸했고 천악 일행과 파리운 일행이 마주 섰다. "괴, 굉장하시군요. 마, 마법사 파리운입니다." 떨리는 어조로 말하는 파리운을 지긋이 바라보던 천악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천악입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처, 천악!?" "컥. 커컥…." 각자 소개를 하려고 입을 열던 파리운 일행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고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 반응에 로브의 남자가 한숨을 내쉬더니 앞으로 나섰다. "시안… 감사했습니다." "아, 예…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륜이라는 무기로 인해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파리운이 시안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파리운은 로브에 가려 보이지 않는 시안이라는 사람에 대해 의문과 호기심을 가졌다. 검과 마법을 같이 사용하는 사람. 한 직업을 마스터, 그러니까 10개의 스킬을 모두 마스터하면 스킬을 하나 더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저 시안이라는 사람도 엄청난 랭커? 아니면 한과 같이 여러 가지를 섞어서 올린 것일까? 잠시 생각하던 파리운은 아직도 컥컥거리고 있는 자신의 일행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 일행입니다. 이쪽이 테일, 세나, 젠시, 베나입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천악. 천악의 성격상 자신보다 연장자가 아닌 다른 일행에게 인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대신 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저… 차렌으로 가시는 겁니까?" 파리운의 질문에 천악과 시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와 동행을… 파티는 맺지 않더라도 그저 길동무로라도 갔으면 하는군요." 파리운의 말에 시안은 몸을 돌려 천악을 바라보았고 천악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내밀었다. 로브의 소매 속에서 옅은 갈색을 띄는 손이 나타났다. "잘 부탁합니다." "아, 예." 파리운은 좀처럼 보기 힘든 피부색에 여자라고 해도 믿을 만한 손을 보며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어쨌든 그렇게 천악과 시안은 파리운 일행과 차렌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레지엘…." "예…." "사, 살아 있구나…." "간신히…." 나는 덜덜 떨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널리고 널린 몬스터의 시체들… 거의 20마리는 될만한 숫자였다. 거기다… 바닥에는 이상한 보석, 하급 마법석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반쯤 잘린 허리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으…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다… 나는 힘겹게 포션과 붕대를 꺼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대형 이벤트라도 하는 건 아닐까요?" "그래도 그렇지… 크윽…." 나는 피범벅이 된 몸을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제길… 반딧 킹들에게 이런… 보통 반딧들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반딧 킹… 산적왕이라는 놈들인데… 원래는 레벨 200정도의 놈들이다. 그런데… 거의 5계급은 되는 실력들이었어… 마나르트나 레지엘이 없었으면… 그대로 죽었다… 나는 힘겹게 몸을 돌려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역시 거의 박살이 난 갑옷과 타워 실드… 그리고 피범벅이 된 레지엘이 땅에 드러누워 있었다. 손에서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는 것이 치료중인 모양이었다. 으… 천상의 망토와 리턴 체인메일이 아니었으면 몇 번이고 죽었을 거다… 그리고… =주인님…. "아아… 괜찮아… 고마웠다…." 마물 모드로 변해 있던 린이 고양이로 변하고는 내 상처들을 핥기 시작했다. 으… 간지러워라… 막바지… 정신없이 싸우다 반쯤 죽어가던 레지엘과 나를 구해준 것이 린이다… 갑자기 마물로 변하더니 반딧들과 사투를 벌이는데… 린도 죽는 줄 알았다. 제길… 요새에서는 뭐하냐? 요새에는 NPC 기사나, 병사들이 꽤 있을 텐데… 토벌도 안하고… "어라? 린… 너 치유 능력도 있냐?" 나는 작은 고양이가 핥고 지나간 곳의 통증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냐… 마비 성분이 있어요." 아… 그런가? 마취약 같은… 대충 치료를 끝낸 나는 그대로 드러누웠다. 내 눈에 레지엘의 은발머리가 비춰졌다. 하지만 피가 묻어서 은발이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아… 나는 꿈틀거리며 기어가 레지엘의 상처를 살폈다. 나에게 뒤지지 않는 상처들… 나는 한숨을 쉬고는 갑옷을 벗겨 붕대를 감아주었다. "고, 고마워요…." "아니… 치료비로 조금만 주면 되니까…." "하, 하하…." 대충 붕대를 감아준 나는 대자로 몸을 피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상처를 핥고 다니던 린이 내 목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후… 지금 몬스터 하나라도 나오면… 죽겠다…." "그렇겠네요…." "침낭 있어?" "근처에 몬스터가 없을까요?" "없어." 식스센스에 의하면 50m 안에는 몬스터가 없다… 확신에 찬 내 목소리에 레지엘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기 시작했다. 으… 나도… 배낭… "린… 배낭 좀…." 내 말에 린이 내 목에서 내려와 배낭을 끌고 오기 시작했다. 이빨로 배낭의 일부를 물고 열심히 끌고 오는 모습이… 음… 귀여운 건가? 나는 미소를 짓고는 린이 끌고 온 배낭에서 침낭을 꺼냈다. "안전지대 설정…." 우리 주위에 반투명한 막이 쳐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나보다 먼저 침낭 속에 누워있는 레지엘… 나는 린이 기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현실에서 2시간 정도… 그러면 여기서는 오후 6시 정도니까… 루카 요새로 가자." "예…." 레지엘이 잠들 듯 조용해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쉬며 로그아웃을 시작했다. 수면으로 설정… 잠자면 회복이 더 빠르지… 그럼 밥이나 먹을까? 기이잉… 철컥. 캡슐 속에서 나온 나는 잠시 비틀거렸다. 좀 오래했나? 오오… 또 세상이 도는 구나… 잠시 헤롱거리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컴퓨터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아무… 뭔가 있어… 갑자기 저런 이상한 놈들이 나올 이유가 없단 말야… 초연 씨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이런 이벤트에 관한 건 알려주기 곤란해 하니… "음… 역시… 이벤트 공지에는 없어…." 그렇다면… 나는 게시판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글을 올리는 곳… 시간도 충분하고… 나는 사람들이 올린 글 중에 변종 몬스터에 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엄청난 수… "뭐가 이렇게 많아?" 항의에서 의문, 별별 말들이 다 떠돌아다니네… 흠…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잖아? 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초연 씨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잠시 후… "모른다고요?" -예… "어, 어째서…." -운영자들이 모든 이벤트나, 퀘스트를 알고 있은 건 아니에요. 항의가 많아서 이벤트 진행과에 문의를 넣었는데… 기밀이라고만 하고… 아버지가 알려고 해도 이벤트 진행과에서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요. 부장이신 아버지에게도 보고하지 않는 건데… 저희들이 알기는 힘들죠… 알아보니 회사 내에서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이벤트 진행과의 사람들뿐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런…." 기밀? 겨우 과장이나 일개 사원들로 이루어진 진행과에서 부장에게까지 비밀로 한다고? 이벤트 진행과가 좀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뭔가 이상한데… 그렇게 중요한 이벤트라고? 하지만 운영자의 도움도 없이… -지금 공표된 사항은 그저 좀 강하고 마법석을 주는… 고렙들을 위한 몬스터라고 하는데… 저렙들의 사냥터에도 이런 변종들이 나타나는 것이… "뭔가 이상하군요." -그래요. 그래서 회사 내에서는 헌터들, 게임 범죄 처리 팀의 사람들에게 이 변종 퇴치를 맡길 계획이라고 해요.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닌데…." -후훗. 월급이 올라간데요. "열심히 해야겠군…." 월급이라… 후후후. 갑자기 아까 만났던 그 변종 몬스터들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 느껴져… -예. 거기다 문제가 하나 있는… 아, 아니에요. "예?" 뭔가 말하려다 당황하며 입을 다무는 초연 씨. 뭐지? 또 기밀을 말할 뻔 했나보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기에 나는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이게 엄청난 실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시일이 지난 뒤였다. "으음…." 나는 온몸이 쿡쿡 쑤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후… 아직 완전히 치료가 되지 않는 건가? 어라? 그런데 그런데 이거… "아, 한. 일어났어요? 누가 찾아왔는데." "뭐?" 레지엘의 말에 나는 의아한 얼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NPC들이네? 기사 셋. 병사 열. 뭐야? 그 NPC들은 안전지대 안으로 들어와 쉬고 있었다. 뭐냐? "아, 다크소드 님?" "앙? 아, 맞는데…." "아, 감사드립니다. 여기 출몰하던 변종 몬스터들을 없애 주셨다고요? 여기 레지엘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아, 여기 마법석입니다." 나는 얼떨결에 NPC 기사 하나가 내미는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안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는 것이 마법석이 확실했다. 뭐야? "요새로 가시죠. 숙소를 마련해 드리고 감사의 표시로… 상금도 있습니다." 기사의 말에 내 눈이 반짝였다. 한숨을 내쉬는 레지엘. 그 동안 같이 지내며 내가 돈에 상당한 집착을 보인다는 것을 파악한 레지엘이었다. 후후… 상금이라… "그러죠.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모두 돌아간다!" 기사가 외치자 병사들이 몸을 일으키며 나와 레지엘을 호위하듯 섰다. 그리고 풀숲을 헤치고 나타나는 일단의 병사들. 기사 3명이 병사 약 20명이라… 이걸로 바딧 킹들을? 아마 정찰 비슷하게 나온 건가? 더 이상 병사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기사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저희들은 정찰 비슷하게 나온 겁니다. 지금 요새에서 기사단이 오고 있을 겁니다." 아… 선발대였나 보군… 몬스터들을 유인하려는 속셈이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지엘과 함께 기사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호위도 받고… 괜찮군… 거기다 상금이라…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레도르-형! 형! 형! 형! 길드창 열어! 빨리! 빨리 열어!> 엥? 뭐, 뭐냐? 레도르? 그런데 왜이리 흥분을 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드창을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떠오르는 레도르의 외침. <형! 한 형! 열었어!? 알아서 들어! 당장 차렌으로 와! 빨리! 급해!> 뭐야? <차렌으로? 왜?> <처, 천악! 천악이 왔어! 형을 찾고 있다고 하는데… 아주 우리를 협박한다니까. 잘못하면 우리 다 죽게 생겼어! 무기점! 무기점!> "천악!?" 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젠장! 그 자식이 왜… 나는 기사를 돌아보았다. "안타깝지만 시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상금은… 크으… 언젠가 받으러 오죠. 그럼… 먼저… 레지엘. 뒤따라 와. 먼저 간다. 요새에 들어가자마자 차렌으로 텔레포트 해. 먼저 간다." "예?" 나는 레지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통 유저들에 비하면 훨씬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나를 보며 NPC들이 탄성을 질렀다. 레지엘이 급히 뒤따라 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느려… 먼저 가는 것이… 나는 이를 악물고는 달…릴 필요가 없잖아!? "린! 마물 모드!" "예? 냐…." 내 품속에서 기어 나온 린이 약가 불만스러워 하는 듯한 얼굴이더니 곧 마물 모드로 변했다. 뒤에서 NPC들이 주저앉고 있었다. 레지엘 어딨어? "저, 저는 천천히 갈게요." 걸음을 멈추고 굳어있는 레지엘. 나는 단호한 몸놀림으로 레지엘을 붙잡아다가 린의 등에 태웠다. 죽을상을 짓는 레지엘. "미안하다." "흑. 몸도 안 좋은데 멀미까지 하면… 컥!?" 나는 내 주먹에 기절하는 레지엘을 받쳐들고는… 아, 그렇지. 나는 마나르트를 뽑아들고는 내게 말하던 기사 한 명을 마기로 묶어 린의 위로 끌어올리고는 린을 달리게 했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린. "왜, 왜…?" 내게 붙들려온 기사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어왔다. "요새의 문을 열어 주셔야죠. 요새 안에서 이 녀석을 타야겠습니다." "예?" "린! 빨리!" 린은 속력을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몇 개의 언덕을 순식간에 넘은 우리의 앞에 요새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긴가? 그리고 산길을 힘겹게 걸어오고 있는 일단의 NPC 기사들… 차차창! "뭐, 뭐냐!?" 갑자기 나타난 린의 모습에 기사들은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린의 등에 타 있던 기사가 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안돼! 공격하지마!" "음? 믹!? 이, 이런! 잡아라! 기사를 납치했다!" "잡아라!" 우르르 몰려오는 기사들. 린은 기사들을 우회해 요새로 달렸다. 제길… 저런 한심한 친구들이 있나… 나는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기사를 노려보았다. "설명 제대로 못합니까?" "죄, 죄송합니다." 나는 이를 갈고는 우리를 열심히 뒤쫓아오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새의 정문… 정문, 그러니까 성문은 열려 있었고 린은 그대로 요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기사들과 합세해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하는 NPC 병사들… 나는 내 옆에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기사의 멱살을 잡고는 마구 흔들었다. "설명해요! 저게 뭡니까!? 이래서야 데려온 보람이 없잖아!!" "하, 하지만…." "잡아라!" "기사를 납치했다!" 고함을 지르며 우리를 쫓는 NPC 기사와 병사들. 거기에 덩달아… "어, 어? 뭐, 뭐야?" "NPC를 납치했데! 잡아! 상금이 있을 거야!" "이, 이벤트인가? 잡아라!" 요새 안에 있던 유저들까지 우리를 쫓기 시작했으니… "어쩔 거야!? 설명을 하란 말야!" "하, 하지만…."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절에서 깨어나며 주위를 둘러보는 레지엘. "으음… 어, 어떻게 된… 헉!? 으윽… 머리가…." 얼굴색이 파랗게 변하는 레지엘. "크아아아악! 이게 뭐야!? 왜 되는 일이 없냐고!" "잡아라!" "잡아라!" 이날 루카 요새에서는 유래 없던 엄청난 크기의 소동이 일어났다. "저… 천악 님? 실례지만 한 형, 다크소드를 왜 찾는지…." "죽이려고." 천악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레도르 일행, 파리운 일행, 차렌 무기점 사람들 모두가 식은땀을 흘렸다. 천악… 비공식 랭킹 1위의 이 사람이라면 한도 죽일 수 있을 거야. 라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하, 하하… 이, 이유가…." 레로르가 어색한 어조로 질문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간단하 대답. "저번에 못 죽여서 이번에 죽이려는 거다." "그,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침묵하기 시작했다. 현재… 차렌 무기점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우선… 다크소드를 찾아왔다는 천악은 마침 도착해 있던 레도르 일행과 조우했다. 그러다 레도르 일행이 다크소드와 친분이 있다는 소리를 듣자 부르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을 시작했고 그 분위기에 괜히 따라온 파리운 일행은 식은땀을 흘렸다. 덕분에 하크는 무기점 안의 손님들이 다 떠나는 것을 보며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현재 이 상황. 천악은 공간의 낫을 어깨에 걸치고는 벽에 기대어 있었고 파리운 일행과 레도르 일행은 각자 긴장하며 언제라고 무기를 뽑아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니베와 제시는 한을 죽이러 왔다는 소리에 발광하는 칼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하크는 자신의 장사를 방해한 천악을 살벌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으니…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긴장감 넘치는 곳에서 이탈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무기가 상당하군요." 무기점 안을 기웃거리며 연신 감탄을 늘어놓고 있는 로브의 사내, 시안이었다. "그, 그런가?" "제가 있던 곳에서 이런 무기들을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NPC도 아니 신데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그, 그런가?" "장식도 훌륭합니다." "하하. 신경을 좀 썼지." "아, 천악. 전에 모아온 아이템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크와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다가 천악에게 고개를 돌리는 시안. 순간 무기점 안의 공기가 다시 싸늘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당연히 여기서 팔자는 거죠. 좋은 가게입니다. 괜찮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악은 말없이 아이템들이 들은 자루를 건네주었고 시안은 하크에게 감정을 부탁했다. 그리고 하크는 많은 아이템들을 보고는 감정을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천악을 노려보던 하크가 없어짐에 의해 분위기는 약간 부드러워 졌다. 하지만 여전히 천악을 향해 달려들려 하는 칼과 그를 붙잡고 있는 니베와 제시… "여자들이 말리는데 그렇게 날뛰다니…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엄청난 긴장감에 휩싸이는 무기점 안. 시안이 칼에게 시비를 건 것이나 다름없으니… 하지만 칼은 시안의 말에 뭔가를 느끼는 것이 있는지 이를 갈다가 발광하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시안은 다시 가게 안을 돌아다니며 감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야… 이 장식은 멋지군요. 그런데… 수제품입니까?" "예. 제가 만들었죠." "대단하군요…." 그리고 제시와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시안. 무기점 안의 분위기를 희석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자면… '세에하안… 오면 죽인다… 내게 이런 수고를 하게 만들다니… 그건 그렇고 이 인간들은 왜이리 살벌한 거야!?' 시안, 천악에게 발목을 잡혀 여기까지 끌려온 다크 엘프 미시안은 속으로 세한을 씹어대고 있었다. "형이 왜 오지 않는 거지?" 지미가 투덜거리는 순간… 뭔가 검은 것이 무기점의 앞을 가로막아 빛을 차단했다. 갑자기 어둠이 찾아오자 사람들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지는 검은 물체와 다시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햇빛. 그리고 문이 박살나듯 열리며 한이 뛰어 들어왔다. "천악 어딨어!" 상당히 고생을 한 듯, 한의 얼굴의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핫! 나는 무기점의 벽에 등을 기대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천악을 발견하고는 이를 갈았다. 저, 저놈 때문에… 천악을 비롯한 사람들은 내가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특히 제시나 니베 같은 그리 높지 않는 레벨의 여성들은 덜덜 떨고 있었다. "천악!!!" "음? 왜 그렇게 열을… 흡!" 마기를 이용한 기습공격. 천악은 내 마기에 묶여 몸을 굳혔다. 마나르트의 힘을 최대한 낸 거다… 몸 상태가 꽝이라 몇 분이나 버틸지 모르지만… 하지만 나는 엄청난 분노에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천악에게 다가갔다. "이… 쳐죽일 개놈의 자식아!" "하?"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천악과 사람들. 레지엘이 헐떡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지는 레지엘. 내 뒤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흥. 무시, 무시… 나는 이를 갈며 천악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천악. 불시에 기습을 당해 천악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내 마기에 묶여 있었다. "그래… 날 왜 찾아왔는지 들어 보실까? 네놈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상금도 놓쳤단 말이다! 시시껄렁한 이유면 이대로 죽일 줄 알아." 상금 어쩌고 하는 말에 황당하다는 얼굴이던 천악은 죽인다는 말에 얼굴을 굳히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흥분하고 있던 나는 천악의 옆으로 다가오는 로브를 입은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어라? 어디서 많이… 서, 설마… "이, 이 기운… 다크 엘프… 아, 아니, 미시안!?" 내 말에 천악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고 뒤에서는 더욱 큰 소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미시안이 후드를 넘겼다. 어두운 피부색과 뾰족한 귀가 드러났다. 헛바람을 들이쉬는 사람들. "미시안? 왜 여기…." "이쪽 덕분에… 좀 놔주지." 나는 눈을 깜박거리고는 천악을 바라보았다. 이놈? 이놈이 뭘 어쨌다는 거지? 나는 마기를 없앴다. 그리고 내 목을 향해 날아오는 낫. 흥. 분풀이냐? 전에 싸울 때에 비해 너무도 느린 것이 그저 화를 풀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마나르트를 들어올리려 했다. "엥?" "어?" "음?" 모, 몸이 움직이지 않아… 내가 멀뚱히 서 있자 천악이 급히 낫을 멈췄다. 내 목을 조금 파고든 공간의 낫. 헉… 위, 위험했다. "뭐지? 왜 피하… 힘이 다했군." "하?"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크으… 몸이… 나는 입술을 깨물며 천악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이 맹렬한 살의라니… 미시안이 한숨을 쉬고는 내 몸을 일으켰다. 제길… 서 있기 힘들어. 나는 벽에 등을 기대 간신히 버틴 후 경악의 눈초리로 우리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가." "예?" "가라고?" 나는 문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 주점에 가있어라. 따라가지." "아… 아, 알았어요." "아, 알았네." 순식간에 몰려나가는 레도르 일행과 파리운 일행. 하지마 칼은 남아 있었다. 가라고 해도 갈 위인이 아니지… 나는 한숨을 쉬고는 레도르를 가리켰다. "좀 지키고 있어." "예." 레도르를 끌어다가 앉히고는 상태를 살피는 칼.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천악과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둘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 엇? 이봐 VIP. 배틀은 나가서 해." "에? 하크 씨. 그게 무슨…." 나는 카운터로 걸어나오는 하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자루는 뭐냐? 거기다 저건 돈주머니? 그리고 배틀? 내 어리둥절한 얼굴에 하크도 눈을 깜박였다. "저 친구가 자네를 죽이러 왔다고 했네." 나는 천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천악. 뭐야? 죽이러 왔다고? 왜? 분명이 내가… "내가 찾아간다고 했는데?" "음?"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천악. 뭐, 뭐냐? 설마 까먹고 있던 건가? 내가 강해져서 찾아간다고 했잖아. 저놈도 기대한다고 했었는데? 잠시 나를 바라보던 천악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랬었지… 잊고 있었군." "까드득…." 살벌한 이가는 소리. 미시안? 미시안은 그야말로 쳐죽일 듯한 눈으로 천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봐… 그럼 내가 헛짓을 했다 이건가?" 헛짓? 그건 그렇고 미시안이 저런 살벌한 말투라니? 나는 영문을 몰라 둘을 바라보았다. "후… 그래도 내가 너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사실이지 않나? 거기다 네놈도 이 녀석에게 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 불꽃을 튀기는 구만… 나는 미시안과 천악의 눈싸움을 보며 의자를 끌어다가 걸터앉았다. 후… 좀 났네… 그런데 이 둘은 뭐야? "어이. 그만하지?" 내 말에 미시안이 시선을 거두고는 역시 의자 하나에 앉았다. 흠… 미시안은 천악에게 상대가 안되지… 강해진 것 같기는 한데… 그리고 천악은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벽에 기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악마의 숲에 소멸의 벌이 내린 인간 둘이 들어왔었어." 음? 나는 놀란 얼굴로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소멸의 벌? 그럼 범죄자 아냐? "렌이 그 놈들에게 당해서 구출하는데… 놈들이 마을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챘더군. 둘을 쓰러뜨리고 기절했다 눈을 뜨니 천악이 있었다. 그 두 인간을 쫓아 왔다고 하더군." 천악이? 하긴… 랭킹 3위에… 싸움을 광적으로 좋아하지만 않으면… 그리 나쁜 놈 같지는 않으니… "어쩌다 보니 네 얘기가 나왔고 너에게 안내하라고 하기에 여기로 데리고 왔다. 이곳이면 너를 아는 사람들이 있을 듯 해서… 은혜를 갚으라는 식으로 얘기해서… 그리고 너에게 할 말도 있었고…." 저런… 기억력 수치가 낮은가 보군… 기대한다고 간 건 언제고 이젠 자기가 찾아 오냐? 아마 미시안이 나를 안다고 하니까 순간 흥분해서 날 찾아온 모양이군… 내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천악이 얼굴을 찌푸리며 낫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유치한 친구로군. 나는 콧방귀를 껴 주고는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할 말?" "음… 요새 이상한 몬스터들이 나타나더군. 이상하게 강했지." "변종… 혹시 죽으면서 마법석을 떨어뜨리지 않아?" "그러더군." 악마의 숲에도… 도대체 그 이상한 놈들의 정체가 뭐지? "상황은 어떤데?" "그리 힘들지는 않아. 내가 없어도 잘 막겠지. 어차피 더 이상은 마을을 늘리기도 힘들어서…." 그렇군… 그런데 뭔가 말투가 이상해… 이상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나는 약간 불안이 담긴 눈으로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널 따라다니지." "마음대로 하소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나온 거… 돌려보내기도 힘들겠지… 나는 천악을 바라보았다. "안가?" "배틀을 할 생각은?" "개죽음은 사양이다." 내 말에 천악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그리고는 품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는 천악. 뭐지? "흠… 다크소드가 아니면… 11위 체슨이 레일 시에 있군… 이 녀석을 만나러 가야 하나… 아니면… 13위 레를이 메리든 시에… 아니면…." 뭐, 뭐냐? 설마 배틀을 신청할 상대를 저렇게 정해놓고 다니는 건가? 잠시 랭커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천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낫을 등에 맸다. "그럼 나는 가지. 다음에는… 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겠다." "아, 그러셔. 또 찾아오지나 말라고." 잠시 나를 노려보던 천악은 한숨을 쉬고는 가게를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악을 향해 돈주머니를 던지는 하크 씨… 천악은 몸을 틀어 돈주머니를 받았다. "대금. 가져가게나." 잠시 하크를 바라보던 천악. 그런데… 하크 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아… 그리고 하크를 유심히 관찰하던 천악이 예의 그 전투모드의 얼굴로 바뀌었다. 뭔가 흥분된 듯한 얼굴… 서, 설마… "괜찮군… 신경을 쓰지 않아 모르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하크… 혹시 미토스나 다크소드와 같은 케이스? 후후… 배틀을…." "일 없네." 천악의 말을 끊으며 카운터 위에 놓인 장부를 작성하는 하크… 이런 가게를 하는 플레이어는 공격할 수 없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악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무표정모드… 저 친구 오늘 뭔가 이미지가 망가지는데… 천악은 그대로 가게 밖으로 걸어나갔다. 으음… 아, 그러고 보니…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레지엘. 정상으로 돌아왔네? 그럼… 주점으로 갈까? "주점으로 가자." "음…." 미시안은 다시 로브의 후드를 써 얼굴을 가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레도르를 부축해 일으키는 칼. 나는 가게 밖으로 나섰다. 음… 햇빛을 받으니 좀 괜찮군… "흠… 메들린이라는 곳이 유명하지 않아?" "미시안… 거기가 유명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말야… 그곳은 연인의 도시라 불리는 곳이야. 낭만의 도시라고도 하고… 차라리 베르시아라도 데리고 오지 그랬어?" 내 말에 씁쓸히 웃으며 다시 생각에 잠기는 미시안. 후… 베르시나… 살아있었으면…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레도르와 검격을 교환하고 있는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화룡 십이격(火龍 十二擊)!" 불타오르는 검을 빠르게 휘두르는 레도르.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목까지 중요 위치를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마스터가 아니라… 지금 레벨이 283이랬나? 환한 빛을 뿌리는 성검을 휘둘러 공격들을 퉁겨내고 타워 실드로 공격을 막는 레지엘. 화려한데? 레도르 일행이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그 격돌의 현장을 보고 있었다. 레도르가 공격을 주도하고는 있지만… 레지엘이 봐주고 있는 것이니… "음… 아, 페이나의 미궁… 유명하지 않아?" "불가. 지금껏 통과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그리고 북쪽… 아, 맞다!" "음?" 가볼 만한 도시와 장소를 떠올리고 있던 미시안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칠흑의 숲에 다른 다크 엘프들의 마을이 있어. 한번 가볼래? 그곳까지 가면서 큰 도시나 유명한 장소도 들려보고… 어때?" 다른 다크 엘프의 마을이라는 말에 놀란 얼굴이던 미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레지엘과 함께 왔던 루트를 거슬러서… 아니지… 나는 대륙 지도를 꺼내들었다. "흠… 여기로 해서 갈까?" "아, 하지만 이곳은…." "길이 좀 멀어진다고." "그래도 처음으로 나선 여행인데…." 악마의 숲에서만 살았음에도 미시안은 상당한 수의 관광 명소를 알고 있었다. 천악과 여행하면서 들었거나… 운영자들을 통해 들었거나… 전설로 유명한 곳이거나… 아, 내가 말한 적이 있었나? 그때 레도르와 레지엘의 대련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광화룡(廣火龍)!" 엄청난 기세로 타오르며 마치, 검이 두 개로 갈라진 듯 레지엘에게 뻗어나가는 레도르의 검… 저 검의 이름이 파이어 드래곤이었나? 강도도 괜찮고 저렇게 불을 붙이는 기능이 꽤 좋아서… 마나르트의 말로는 멍청한 검이 되는 건가? 나도 저런 검 하나 있으면 하던 건데… 레도르의 강력한 공격에 레지엘의 눈이 좀 가늘어졌다. 긴장하는 건가? 그리고 더욱 환한 빛을 내는 성검. 그리고 레지엘이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레도르에게 쇄도했다. 그러고 보니 레지엘은 기술명을 작게 말한단 말야… 그리고 레도르와 레지엘이 스쳐 지나가며 약한 폭발이 일어났다. 목숨을 건 승부가 아닌 대련이라 힘을 줄여서… 그리고 레도르의 검을 타워 실드로 막고 성검을 레도르의 목에 대고 있는 레지엘. 갑옷에 그을린 흔적에 베어진 흔적까지 있는 것이… 아슬아슬했네? 나는 서로 뭐라고 중얼거리는 레도르와 레지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좋아. 좀 돌아서 가더라도… 이리로 가지." "고맙군." "그럼… 바로드 시로는 텔레포터 협회를 이용해서… 텔레포트로 가는 것이 좋겠군." "그러지." 미시안의 대답을 들은 나는 손을 들어올려 박수를 몇 번 쳤다. 레도르 일행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파리운 일행은 어제 다시 여행을 떠났고… 나는 세나가 준 반지를 바라보았다. 선물이라고 준 건데… 테일의 말로는 내게 관심이 있다고 하더니… 반지도 꽤 좋은 거다… 생각을 접은 나는 손짓을 해서 일행을 불러모았다. 여기는 내가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일급 나무꾼이라는 칭호를 얻을 당시 나무를 하던 숲이다. 몬스터도 없는 곳이라… 가끔 토끼나 뛰어다니고… 고양이 모드의 린을 데리고 놀고 있는 제시와 니베, 유미, 세나, 레아. 그리고 대련을 관람하는 시드와 지미, 칼과 이시린. 그리고 대련을 끝마친 레도르와 레지엘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음… 이렇게 둥그렇게 몰려 앉으니 꽤 많네? 하지만 역시 길드로 치면 적어… "나와 미시안은 곧 떠날 건데… 따라갈 사람." 곧장 손을 들어올리는 레지엘. 칼은 별말 없이 내 뒤로 다가와 나를 호위하듯 자리를 잡았다. 이거야 당연한 거고… 레도르 등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세린은 당장이라도 손을 들고 싶다는 눈치였지만… 자신의 일행이 고민에 잠겨 있다 쉽게 손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글쎄요… 우리는…." 하긴… 레도르들은 어차피 학교도 다녀야 하니… 나는 무슨 소린지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글픈 얼굴을 하는 세린. 하지만 학교를 다닐 일이 없는, 그러니까 21살의 시드는 여전히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쩝. 나도 안되겠네… 요새 일을 다시 시작해서… 거기다 이 녀석들을 도와야 하니… 요즘 우리를 건드리는 길드가 좀 늘어나서…." "뭐요? 어떤 놈들이?" "됐어. 그리 힘들지는 않으니까… 도와주는 길드도 꽤 있고… 어차피 그놈들이 우리를 건드리는 것도 네가 있나 없나를 확인하는 건데… 계속 나오지 않으니까 시들해 졌어." 나는 약간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레도르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별 상관없다는 얼굴의 레도르 일행. 흠… 그럼 나와 미시안… 레지엘과 칼인가? 남자만 4명… 나는 제시와 니베를 바라보았다. "미안… 레벨이 낮아서 별로 도움도 안될 테고… 무기점을 떠나기도 좀…." "웅… 저도… 제시하고 하크 아저씨하고 지내는 것이 익숙해져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의 사냥터에서 가끔씩 사냥을 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중급의 유저라 부르기도 힘든 제시와 니베였다. 한 초·중급? 후… 어쨌든… 이렇게 4명이서 가게 되는 거군… 그때 레도르가 입을 열었다. "형. 혹시 현실에서 만나지 않겠어요? 길드원 전부… 대충 가입할 사람은 다 가입했고… 한번 만나봤으면 해서…." 음? 나쁘지 않지… "어? 그러던지… 흠… 어디서?" 말문이 막히는 레도르. 나는 칼을 바라보았다. 칼의 집이 넓기는 한데… 그럼 폐를 끼치는 거고… 집안도 장난이 아닌데… 그럼… "우리집이군…." 내 중얼거림에 시선이 내게 모아졌다. 하이고… "우리집 넓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흠… 있어보자… 우선… 올 사람? 아, 아니 안 올 사람." 나는 일제히 손을 들어올리는 사람들을 보며 말을 바꿨고 순식간에 손들이 내려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얼굴의 몇몇 사람과… 생각에 잠겨 있는 칼과 니베, 그리고 레지엘… "저는 괜찮겠군요. 흠… 언젭니까?" 레지엘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시간… 있어보자… 며칠 뒤… 토요일에 미토스 등의 헌터 임명식이… 그날은 게임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임명식도 오전에 있고… "이번 주 토요일 오후… 3시쯤… 서울. 10구역. 아, 차라리 내가…." 나는 길드창에 우리 집 주소를 올렸고 일행은 일제히 주소를 되뇌며 메모입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칼이 입을 열었다. "저희도… 괜찮을 것 같군요… 집사와 함께 나오면… 하루 정도야…." 칼과 니베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행은 약간 당황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칼은 몰라도 니베는… 뭐, 집에서 알아서 하겠지? 나는 모두가 동의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미토스를 가입 못시켰네… 아, 그 랭킹 7위. 덤으로 6위에 20위도 있었는데… 거기에 마스터 레벨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레도르 일행.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짐들을 챙겼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로브를 입는 미시안. 다크 엘프라는 것… 이미 다 들통 났고… 그저 우연히 알게된 친구라고 얘기했다… 아직 마을의 위치를 알려주기에는… 좀더 있다가… 어차피 이번 여행이 끝나면 그 다크 워리어를 찾으러 악마의 숲 근처의 던젼을 돌아다닐 테니… 그때… 나를 따라 내 여행 동료들이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났다. "먼저 갈게. 다음에 보자. 흠… 여전히 길드창은 꺼둔다." "알았어요. 흠… 우선 우리는 갈바린 시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럼 토요일에 봐요." "그러자고. 우리 먼저 간다." 나는 짐을 챙기려는 레도르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마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오는 칼과 내 양옆에 서는 미시안과 레지엘. 흠… 괜찮은 파티긴 한데… 미시안은 마법도 쓰고… 레지엘은 치료도 할 수 있고… 칼은 순수 검사에… 나는 잡종이라 별별 능력도 다 있고… 흠… "그럼 우선은 바로드?" "그래. 우선 거기서… 흠… 오랜만에 경매장이나 가볼까?" "경매장?" "너는 좋은 무기도 없잖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미시안. 좋아. 우선 경매장이나 들리자고. "저건 어때?" "별로…." "그래?"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가격을 외쳐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좀 시끄럽군… 현재 우리는 한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경매장에 앉아 있었다. 미시안이 마음에 들어하는 물건이 나타나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칼이 괜찮은 검을 하나 샀을 정도… 하지만 칼이 산 꽤 좋은 검도 미시안에게는 맞지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선물을 하기로 한 거… 좋은 걸 해주면 좋겠지. 나는 경매에 열중하고 있는 미시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재밌냐?" "그럭저럭…." 인간세상 첫 나들이니… 천악과 여행을 하기는 했겠지만… 그걸 제대로 된 여행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천악의 성격이 있으니까. 어쨌든 미시안은 엷은 미소를 띄우고는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놀란 얼굴을 하며 눈을 빛내는 미시안. 뭐야!? 마음에 드는 것이 나온 건가? 무대 위에는 사회자가 조금 화려한 백색의 검을 들고 있었다. 붉은 천이 깔린 상자에 들어있는 백색의 검… 꽤 멋진데? "이번에 나온 무기. 화이트 소드입니다. 100% 미스릴로 공격력 250-350. 내구력은 무한. 완전 무속성. 마법 저항 증가. 그 외에 옵션은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 미스릴 제로 상당한 검입니다. 경매가 1000골드에서 시작합니다." 흠… 괜찮은 검이군. 현재 마나르트의 공격력이 550-550이다. 봉인이 풀리면서 좋아졌지… 그리고 샤프소드가 170-210이었나? 샤프소드보다는 좋군… 대충 공격력만으로는 OPG와 비슷한데… 상급의 검. 거기에 무속성이면 그 어떤 속성에도 밀리지 않는 다는 말이다. 반대로 그 어떤 속성도 받아들인다는 뜻이니… 빙계의 마법을 사용하는 미시안. 검에 빙계 마법을 걸면… 아, 레도르와 비슷한 효과가 나겠군. 검의 기능이 아니라 자의라는 것이 다르지만… "저걸로 살까?" "음. 괜찮은 검이군. 내게 딱 맞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매가를 확인했다. 1600골드… 빨리도 올라가네. 지금 괜히 끼어 들어서는 가격을 더 높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좀 높은 가격을 불러야 확실하게 끝낼 수 있지… "2000골드!" 대충 이 정도가 상한가. 검의 위력은 상급이지만 옵션이 없다. 나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검사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었다. "2150골드." "예! 2150골드! 더 없으십니까?" 대충 이 정도면 내게 낙찰. 2000골드에서 150골드를 뛰었다. 100골드도 아니고 150. 뭔가 어중간한 기분이 드는 가격이지. 그냥 50도 아니고 말야. "없으십니까? 그럼 화이트소드. 저 검사 분께 낙찰입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무대 위로 올라갔다. 흠… 가까이서 보니까 더… 멋있다기 보다는… 신비한 느낌? 거의 성검에 가까운 느낌이다. 나는 돈을 지불하고는 검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 첫 세상 나들이 선물이다." 내가 내미는 검을 미소를 지으며 받아드는 미시안.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 검에 마나를 살짝 불어넣었다 뺐다 하는 것이 확실히 마음에 들어하는 듯 했다. "그럼… 여기서는 더 살건 없네? 방어구나 사러갈까? 미시안, 너도 갑옷은 좋은 것이… 어쨌든 가보자." 어차피 미시안이야 엘프라 빠른 몸놀림을 중요시하는 스타일이다. 그렇기에 지금 입고 있는 간단한 갑옷도 괜찮기는 하지만… 방어구 경매장은 무기 경매장과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흠… 잠시 둘러보던 우리는 중간 정도에 빈 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지금 경매에 올라 있는 것은… 합금 풀 플레이트 메일. 저런 것을 입을 사람은 우리 중에서는 레지엘 뿐이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풀 플레이트가 최상급이니… 그냥 넘기고. "그런데 칼은… 갑옷은 괜찮은 거야?" "예. 이 플레이트는 상급이지만 안에 입고 있는 가죽 갑옷과 얇은 튜닉이 꽤 좋은 최상급입니다.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경량화 마법이 걸려있어서 가볍기도 하고요." "그래?" 확실히 칼의 간단한 플레이트 메일은 꽤 견고해 보이는 것이… 그러고 보니 나도 미시안과 같이 체인 메일 위에 간단한 합금 갑옷을 입고 있는 수준이다. 뭐… 이걸로도 충분하지. 이걸로 잘 버텨왔고… 꼭 플레이트 메일 같은 것을 장착할 필요성까지는 없으니… 나도 몸놀림을 중요시 여기는 타입이니까… "어라?" 순간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뭐야? 사회자가 가지고 나오는 것은… 티아라? 헤드기어 비슷한… 어떻게 보면 머리 장식 같기도 하지만… 이마와 머리 조금 위까지를 가리는 판에… 판은 멋지게 세공도 되어있고 머리를 살짝 감싸는 쇠 고리 같은 것들도 있고… 드래곤 모양인가? 그리고… 전체가 검은 빛. 전에 레도르에게 줬던 것과 비슷한 종류였다. 흠… 괜찮은데? 그건 그렇고… 저 헤드기어… 느낌이 이상해. 마력? 마기 같은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마력, 마기와 신성력이 동시에 풍기는 듯한… 이상한 느낌… 두 개가 동시에 나오는 것은 아닌데… "어둠의 방어자. 다크 가더라 불리는 헤드기어 형태의 투구 종류입니다. 간단한 방어구로 장식이 멋지기는 하지만 검은 색이기도 하고… 방어력 100로 상급 수준. 내구력이 무한인 것이 특징. 재생 기능입니다. 옵션은 없습니다만 미확인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투구라기 보다는 머리를 살짝 감싸는 장신구 종류로 긴 생머리를 가지신 분들에게 어울리시겠군요. 이걸 쓰면 머리의 모양이 가지런히 놓이죠. 하하하. 옵션을 없지만 미확인 금속이라는 것이 큰 작용을 합니다. 경매가… 1500골드부터 시작합니다." 웅성 웅성. "처, 천 오백!?" "저, 저게?" "아무리 미확인 금속이라지만…." 술렁이는 경매장. 그리고 사회자도 약간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내 샤프소드가 1000골드. 미시안의 화이트소드가 경매에 붙이지 않으면 대충 1000골드 후반. 두 아이템 모두가 상급이다. 그런데 별다른 기능도 없는 그저, 장식으로 보이는 저 헤드기어가… 1500? "말이 안되네요." "그렇군요." 미심쩍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레지엘과 칼. 하지만 나와 미시안은 약간 다른 눈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시안은 다크 엘프니 저런 것을 느끼는 능력이 월등히 뛰어나다. "이상하군… 뭔가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보다는 훨씬 뒤쳐지는 실력. 도대체 뭐지? 마기와 신성력이 뒤섞인 기운이라니… 말이 안돼! 모두에게 충격적으로 여겨지는 가격에 경매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1505골드…." 어떤 마법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라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걸지도… 마스터 레벨이군. 300정도… 어쩌면 미확인 금속이라는 말에 끌리는 것일 수도 있고… 겨우 5골드가 올라간 가격이지만 경매장은 조용했다. 1골드도 높이는 사람이 없는… "하하. 1505골드. 더 없으십니까?" "1600골드." "컥!?" "뭐, 뭐냐?" "한?" "한님?" 내 말에 술렁이는 경매장. 레지엘과 칼이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미시안은 '역시…'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당연히 내게 낙찰되는 이상한 헤드기어. 자리로 돌아온 나는 검은빛의 헤드기어, 혹은 장식품, 아니면 투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마와 머리 약간 위까지를 가리는 화려한 세공의 금속 판… 그리고 얇은 밴드 형식으로 뻗어져 머리를 감싸는 모양의 쇠고리들… 확실히 이상한 금속이네? 그리고 역시 이상한 기운… "이상하네…." 나는 이 이상한 헤드기어를 머리에 썼다. 쇠고리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내 긴 머리카락들. 확실히… 머리 모양이 멋있어 지기는 하는데… 이쪽으로 하면 전과 같이 얼굴을 가리는 것도 가능하고… 그때 내 몸 속에 남아있던 마기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뭐, 뭐야?" 갑자기 요동치는 마기… 내 몸 주위로 마기가 조금씩 솟아 나오고 있었다. 약간 어두운 경매장 안이기에 쉽게 보기는 힘들지만… 도대체 왜… 우우우웅! 그때 마나르트가 울리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지?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등에 매고 있던 마나르트를 무릎 위로 옮겼다. 천을 다 풀 필요는 없으니 손잡이만 풀고… 검은빛의 손잡이가 드러나자 나는 그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내 몸 안에 마력이 몰려오며 엄청난 양의 마기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력은 비슷한 정도지만… 마기가… 마력은 마족의 힘. 마기는 그 마력에서 만들어지는 힘이다. "크으으…." 쉬이익… 허억!? 손에서 김난다! 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내 손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마, 마기가 너무 강력해… 주위로 나가는 마기를 필사적으로 막고는 있었지만… 내 몸 안에 마기가 많다 못해 아주 넘치고 있었다. 마력이 아닌 마기라 고통스러운 것은 심하지 않았지만… 몸 안을 무언가가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은… 권장할 사항이 못된다. 그때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한. 그 금속. 마계의 금속이야. 메라트. 마력을 제어하며 마기의 순도를 높여주는, 엄청나게 희귀한 금속이지. 그 정도 양이면… 거의 몇만 골드는 하는 가격인데… 운이 좋았군. 지금 마기가 넘치지? 이상하게 다루기도 쉽고. 메라트 덕분이야. 내가 몸을 가지고 있을 때 사용하던 것과 비슷하군. 그리고 메라트는 착용자의 정신력을 높여주는 기능도 있으니… 자네에게는 금상첨화로군. 오오… 메라트? 몇 만? 나는 속으로 환희의 외침을 지르며 내 머리에 끼워져 있는 이상한 헤드기어를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 모양을 좀… 그렇게 바꿔서 문제지만. 확실히 마력은 그대로지만 그 마력에서 나오는 마기는… 훨씬 많고 강하다. 안 그래도 페이린과 싸운 후 올라간 307에서… 그 동안 겨우 3올랐다. 너무 안 올라. 이 직업의 특성이고 레벨 업 노가다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험치가 20%나 더 많이 오르는 것에 비해 너무도 저조한 성장. 그런데 이런 좋은 녀석을 다 얻고… 운이 좋은 날이군. "운이 좋았는걸?" 마나르트가 말을 하느라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던 나는 마나르트를 다시 등에 맸다. 그리고 내 중얼거림과 이상한 행동 등에 나를 바라보고 있던 셋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이 좋았다고? 괜찮은 아이템인 모양이군.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거의 기생오라비 수준이야." 미시안의 말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기, 기생오라비? 확실히… 머리카락들이 단정하게 모이면서 깔끔한 형태에 약간 매력적인 머리 모양을 만들고는 있지만… 기생오라비라니… 하지만 솔직히 내 모습이 좀 그렇기는 했기에 뭐라 반박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약간 주저하는 얼굴로 입을 여는 레지엘. "확실히… 좀 그런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멋있다면 멋있겠는데요? 검은 망토에 그렇게 하면…." 지금은 망토를 입고 있지 않지. 여기에 검은 망토를 입으면… 어, 어라? 이 모습은 어디선가… "마족…." "예?" 내 중얼거림에 레지엘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이, 이거… 검은 복장에 약간 색기를 풍기게 만드는… 완전 마족이잖아? 전에 마나르트가 이미지로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마족의 물품인 모양이지? 완전 마족을 위한 물건이라는 말이군. 후… 이거… 내가 마검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건 좀 심하군. 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머리카락들을 이마의 고리들 사이로 넣어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전과 별다를 것 없이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 하지만… 역시 이상하게 귀공자 스타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괜찮군." "흠… 뭔가 신비스러운 분위기… 멋져요." "멋지십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확실히 이런 이상한 헤드기어, 장신구에 얼굴을 가리고… 뭔가 이상한 머리모양…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는 하겠군. 다크 가더… 어둠의 방어자? 이상한 이름이군. 마력의 제어를 도와주는 거지 막는 것은 아닌데… 아이템 창을 확인하니 설명에는 암흑 계통의 몬스터들의 마력을 견디기 쉽게 해준다고 나와 있다. 하긴 다른 존재의 마력을 중화시키기는 하겠군. 나라면 오히려 내 힘으로 만들 수도 있겠고… 괜찮은 물건을 얻은 나는 미소를 지었다. 미시안 덕분에 좋은 것 얻었군. "고맙다." "뭐라고?" 뜬금 없는 내 말에 의아한 얼굴을 하는 미시안. 나는 그저 미소를 지어 주고는 다시 무대 위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은 가격에 엄청난 아이템을 얻었군. 아니, 나에게만 엄청난 아이템인가? 이 헤드기어 자체에는 능력이 없으니… 그저 정신력을 맑게 해주는 정도? 나는 미소를 지었다. "흠… 숲이나 이곳이나 같은 건 있군." "어떤 거?" "이런 보기 싫은 놈들이 있다는 것." 짜증 섞인 미시안의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흘렸다. 경매장에서 검을 구입한 다음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는데 구경거리를 보기도 전에 몬스터를 먼저 봤으니… 거기다 이 습격이 여행을 시작하고 12번째 습격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변종이 아닌 게 다행이군. 여기에는 없는 건가?" 크아아악! 나는 내게 날아오는 날카로운 발톱에 급히 뒤로 물러났다. 비스트… 간단하게 생각하면 짐승이라는 건데… 일반적인 동물과 달라서 문제라니까… *비스트(Beast) : 고양이과의 커다란 육식성 동물입니다. 숲의 나무그늘이나 바위그늘 등에 숨어 있다가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로 기습 공격을 걸어옵니다. 가죽과 손톱은 장식품으로서 비싸게 팔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성 유저들이 입고 다니는 고양이 귀 같은 것들은 대부분 비스트의 것들입니다. 크아아앙! 나는 입을 벌리며 내게 달려드는 비스트의 머리를 밟고 도약했다. 후… 린의 축소판. 단지 몸의 색이 다양하다는 것이 다르군. 나는 샤프소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주위로 퍼지며 각자의 무기를 뽑아드는 일행. 화이트소드를 뽑아든 미시안이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법을 거는 건가? "빙검(氷劍). 아이스소드(Ice Sword)." 화이트소드에서 날카로운 얼음이 덮씌워 졌다. 그리고 발산되는 한기… 레도르의 검과 비슷… 아니, 어쩌면 더 강한… 나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들군. 마나르트를 쓰면 이기겠지만… 그리고 성검을 뽑아든 레지엘도 환한 빛을 뿌리며 몬스터들의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그나마 평범하지만… 그래도 옅은 빛을 흘리는 새 검을 휘두르는 칼. 아무래도 내가 가장 평범하군. 나는 그저 그런 위력의 샤프소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지…. "한 사람 당 한 마리." 비스트의 숫자는 넷. 한 명이 한 놈씩 상대하면 정확하지. 비스트가 상당히 강한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당할 위험은 적다. 샤벨 타이거면 모르지만… 잠시 린의 모습을 떠올리던 나는 내게 날아들며 날카로운 발톱을 빛내는 비스트를 보며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흠… 이런 비스트들이 샤벨 타이거 같은 놈들로 성장하기도 하지. 점차 힘을 쌓아서 몬스터 승급이라는…. "어?"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오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몬스터들이 성장하면 강한 몬스터로 변하기도… 보통 몬스터들은 그 렇지 않지만… 비스트나 마족, 로우 데몬 같은 놈들은…. "그럼 그 다크 워리어도…." "세한!" 미시안의 고함소리. 나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내 망토자락을 찢으며 지나가는 비스트의 발톱. 으음… 위험했군. 빨리 끝내고 좀 얘기를 해 봐야겠어. "다크 캐논." 순간 내 왼손에서 엄청난 크기의 검은 빛줄기가 뻗어나갔다. 비스트의 몸을 관통하는 검은 빛줄기. 나는 커다란 구멍이 나 죽어가는 비스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동물 같이 생긴 놈들은 몬스터를 죽일 때보다 느낌이 좀… 머리를 휘저은 나는 주위를 살폈다. 이미 비스트를 쓰러뜨린 미시안과 막판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칼과 레지엘. 나는 미시안에게 다가갔다. "세한. 어디에 정신을 두고 있는 거야?"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말야." "뭐지?" "비스트들은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성장하면 샤벨 타이거로 변하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미시안. 그런 점에서 비스트는 굉장히 유명한 몬스터다. 각종 장신구로 팔리기도 하고… 보존의 마법을 걸면 시체가 사라지지 않으니까. 1/100의 확률로 샤벨 타이거로 변하는 것도 유명하고. "그런데?" "그럼 그 다크 워리어도 강해지지 않을까?" 순간 미시안의 눈이 번뜩였다. 평소에는 이상하리 만치 침착을 유지하는 미시안이지만 이 다크 워리어의 말이 나올 때만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놈… 전에는 데스 나이트였는데 죽어서 떨어진 것이라고 하니… 지금쯤이면 다크 나이트 정도는 되어 있지 않을까?" "음… 상관없어. 우리도 강해져서 죽이면 되니까." "그런가?" "어차피 실력을 기르기도 할 겸해서 이렇게 여행을 하기로 한 거니까. 칠흑의 숲에 도착한 다음 바로 악마의 숲으로 가기로 했으니… 이대로 계획을 따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과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비스트의 숨을 끊어놓고 있는 둘. 저 둘도 같이 가니까 괜찮겠지. 어차피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은 수련이니까… 때문에 우리가 정한 여행 루트는 유명하면서도 몬스터들이 강한 곳이다. -삐삐삐삐삐- 갑자기 들려오는 알람 소리. 시간이 된 건가? 10시에 맞춰 두었으니… 2시에 미토스들이 회사로 오기로 했지? "아무래도 우리는 나가야겠는걸? 적어도 3일 정도는 오지 못할 거야." 내 말에 미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꺼내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가 로그아웃을 하고 있을 때는 미시안 혼자 관광을 하러 다닌다. 근처 경치 좋은 곳으로. 지금까지 중 가장 긴 3일이니 꽤 멀리까지 다녀올 수도… 나는 레지엘과 칼이 다가오자 입을 열었다. "나가봐야겠어. 시간이 됐거든." "그래요?" "음. 그래서 말인데 말야. 레지엘하고 칼도 헌터를 할 생각 없어?" 내 질문에 둘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흠… 이 둘도 헌터에 들어오면 좋을 텐데? 나는 주저하는 칼을 바라보았다. "네 몸이 불편 한 건 상관없어. 어차피 헌터야 게임 안에서 활동하는 거니까. 너는 집밖으로 나오기도 쉽다며? 오늘 거서 신청을 해. 내가 받아들이면 오늘 안으로 헌터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내가 데리러 가지." "아, 그럼 좋습니다. 헌터가 되어서 한 님을 따라 다니는 것도 좋겠군요." 으윽. 결국 나를 따라다니기 위해 헌터가 된다는 소리? 완전 진담… 일 수도 있겠군. 대충 보니까 태경이네 집안이 엄청난 부자인 것 같으니까 일에는 별 관심이 없겠지. 나는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레지엘. 너는?" 내 질문에 레지엘은 몸을 움찔거렸다. 왜 저러지? 왜 저렇게 어색한 얼굴이야? 그리고 주저하며 입을 여는 레지엘. "죄송하지만… 별로 하고 싶지 않군요. 저희 집이 상당한 부자라… 일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얽매이기도 싫고요. 죄송합니다." "그래? 뭐,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아, 본명이나 알려 줘. 오늘 우리 집으로 올 테니까 이름은 알고 있어야지." 성격이 너무 좋은 건가? 그냥 싫다고 하면 될 걸 저렇게 머뭇거리다니… 그리고 뒤의 내 질문에는 상관없다는 듯 대답하는 레지엘. "김정수입니다." "흠… 같은 김씨네?" 레지엘이야 내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나는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장소를 정했는지 지도를 차곡차곡 접고 있는 미시안. 나는 약간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너는 죽으면 끝이야." "알고 있어." "좋아. 칼. 그럼 내가… 한 40분이면 도착하겠군. 늦어도 한시간이면 너희 집에 도착할 거야. 기다리고 있어. 레지엘은… 그냥 같이 로그아웃을 하는 게 어때?" "좋습니다." "좋아…."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내 뒤를 따르는 일행. 좀 들어가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을 만한 곳을 발견한 나는 그곳에다 침낭을 펼쳤다. "안전모드 설정." 둥글게 퍼지는 반투명의 막. 칼과 레지엘도 침낭을 꺼내 피고는 로그아웃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나중에 봐요." "음." 칼과 레지엘이 로그아웃을 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미시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미시안. 내가 있을 때야 식스센스로 사람의 접근을 감지해서 알려주지만 내가 없으면 로브를 써야 정체를 들킬 위험이 없다. 가려지는 미시안의 귀와 얼굴을 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조심해라. 3일이 지나면 여기로 돌아와." "알겠어." "그럼 나도 나가 보지…." 나는 침낭속에 들어가서는 로그아웃을 시작했다. 품속에서 기어 나오는 린을 느끼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꼭 침낭에 들어오면 이렇게 기어 나온다니까? 내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헬멧을 사야할까? 안전 장치가 확실해서 헬멧을 쓰지 않아도 걸리지 않지만… 이렇게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은 좀 귀찮군. "그래도 눈앞을 가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내 앞에서 고속도로를 주행하고 있는 차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충돌하지야 않겠지만 안전장치가 발동되면 귀찮다. 내 몸을 고정시키는 벨트들도 올라오고… 별별 희한한 것들이 몸을 감싸서… 완전 강철로 무장한 것 같은 모습이 된다. 그리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 제한 속도가 시속 200km. 덕분에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나 바이크들의 속도는 엄청나다. 그래봐야 사고 위험도 없으니 상관은 없지만… 공중에 떠 있는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모습은 꽤 볼만하다. 그리고 가끔씩 공중에 있는 공중 도로를 지나는 차들을 보는 것도 재미 쏠쏠하고 말야. 반투명한 특수 금속으로 만들어진 터널형 공중 도로는 이용료부터가 비싸 상위층의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깨끗하고 경치도 좋다. "흠… 태경이를 데리고 올 때는 공중 도로로 갈까? 분명 리자드까지도 도로가 놓여 있을 텐데…." (주) 리자드야 세계 규모의 기업이니 본사에 공중 도로가 놓여있는 것은 당연한 일. 경치 구경도 시켜줄 겸… 아, 그러고 보니… 레지엘은 뭘 타고 다닐까? 멀미를 한다고 하더니…. "큭." 잠시 레지엘을 생각하던 나는 웃음을 흘렸다. 멀미… 정말 이상한 녀석이야. 레지엘, 정수네 집안 사람들도 난감하겠군. 멀미를 하는 도련님을 모시기가 힘들 테니… 나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200km를 넘어서는 속도. 210km까지는 걸리지 않으니… 나는 아슬아슬하게 한계속도를 유지하며 도로를 달렸다. 매끈한 모습을 자랑하는 차들이 내 뒤로 멀어져갔다. "읏샤." 나는 바이크에서 내려서 커다란 대문으로 다가갔다. 흠… 다시 봐도 위용이 넘치는 저택이로군. 나는 엄청난 크기의 저택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 집은 얼마나 할까? 흠… 서울은 아니지만 이 주택가의 깨끗하고 넓은 길. 완벽한 조명. 이 많은 나무들. 이 정도면… 모르겠다. 나는 잠시 나란 녀석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벨을 눌렀다. "현진 님이십니까?" 집사 아저씨의 목소리. "예. 태경이를 데리러 왔습니다만?" "알겠습니다." 곧 문이 열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집사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오시는군요." "하하. 일주일 전에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틀에 한번씩은 오셔야죠." 나는 피식 웃으며 집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집안. 신을 벗고 거실로 들어선 나는 여전히 소리 없이 걸어다니는 메이드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정원이 보이는 전면 유리 앞에서 민경이와 함께 앉아있는 태경이. "아, 현진. 오셨어요?" "앗? 다크소드 님." 나는 고개를 젓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정말… 이런 귀한 집사람들이 왜 나에게 이런게 공대를 하는 거지? 즐거워하는 둘을 보며 집사 아저씨도 덩달아 즐거워하고 있었다. "데리러 왔어. 가자." "어머? 벌써 가요? 좀 놀다가 가시지…." "음?" 민경이가 아쉬운 어조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집사와 태경이. 으윽… 나는 한숨을 쉬고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그래… 딱 한시간만. 가는 길에 점심이나 사주려 하고 있느니까…."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이봐. 점심 준비하게." "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감독을 해야겠군요. 곧 차를 내 오겠습니다." "에?"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집사 아저씨. 이, 이런…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나는 얼빠진 얼굴로 사라져 가는 집사와 메이드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내 모습에 태경이와 민경이가 작게 큭큭거렸다. "시원하지?" "예." "존댓말 하지 말라니까." "아…." 나는 피식 웃고는 바이크의 속도를 높였다. 공중 도로의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내 뒤에 앉아있는 태경이가 신음을 흘렸다. 공포가 아닌 즐거움에서 나오는 소리. 나는 피식 웃고는 멀리 보이는 차를 피해 옆으로 바이크를 움직였다. 현재 태경이는 안전 장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슨 기갑 특공대 같은 모습. 철제 슈트가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멋지기도 했다. 다리를 쓰지 못하니 떨어질 것을 대비해 안전 장치를 사용한 것인데… 별 불만은 없어 보인다. "돌아갈 때 민경이에게 선물이라도 사줘야겠다." "아무래도…."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태경. 민경이는 외출 허락을 받지 못했고, 더불어 오후에 있을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가 집에서 나올 때 거의 울 듯한 얼굴로 투덜거리던 민경이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거의 다 왔다." 나는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고층 빌딩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른쪽으로… 나는 몸을 살짝 기울여 방향을 틀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의 통로로 들어서는 바이크. 공중 도로의 좋은 점은 제한 속도가 없다는 것이지. 바이크의 속력은 시속 300km를 넘어서고 있었다. "으, 으아아… 너무 빠른…." 당황한 듯한 태경이의 목소리. 나는 빙긋 웃고는 급히 핸들을 꺾었다. 옆으로 살짝 기울며 미끄러지는 바이크. 태경이가 숨을 죽였다. 그리고 한 통로의 바로 앞에 멈춰선 나는 그 통로 안으로 바이크를 몰았다. (주) 리자드의 옥상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통로. "재밌었지?" "예." "존댓말 하지 말라니까…." 나는 피식 웃고는 바이크를 멈췄다. 옥상 주차장에는 꽤 많은 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아마 회사 간부들의 차겠지. 초연 씨 아버님이야 돈이 충분하시면 서도 일부로 보통 도로를 이용하시는 분이니까 여기에 차가 없겠지만… 나는 태경이의 안전 장치를 풀어주고는 바이크의 뒤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휠체어를 꺼냈다. 접혀져 있는 휠체어를 펴서 태경이를 앉힌 나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53층…." "아… 전 괜찮을 까요?"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태경이의 목소리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데려가니까 별 문제는 없을 거야. 거기다 집사 아저씨에게 들어보니 너희 아버지가 (주) 리자드의 대주주라고 하던데? 8%를 가지고 있다고 했었나? 대단하신 분이더라." "그래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태경이. 집안에만 있어서 잘은 모르나 보지? 나는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자 층수를 확인했다. 53층. 맞네. "가자." "에…." 태경이는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무실을 보며 약한 신음을 흘렸다. 좀 당황한 건가? 나는 휠체어를 밀며 걷기 시작했다. "아, 현진 씨. 왔군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시렌이라는 운영자 박정호라는 사람이었다. 성격이 괜찮아서 몇 번 보지 않았는데도 꽤 친해진… "아, 아직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았죠?" "물론이죠. 흠… 이쪽은…." 정호 씨가 태경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 태경이라고 헌터로 만들려고 데려왔죠. 거의 마스터가 되어 가는 레벨에 제 동료고 그… 최민호 회장님의 아들입니다. 본사의 대주주라고 하던데요?" 내 소개에 놀란 얼굴을 하는 정호 씨. "아… 최 회장님의… 안녕하십니까. 박정호라고 합니다. 좀 기억해 주시죠." 장난스레 태경이에게 아부를 하는 정호 씨. 태경이는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킥. 나는 태경이에게 고개를 들이대고 있는 정호 씨를 밀어내었다. "이미 제가 잡았습니다." "우우…." 과장되게 실망했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물러나는 정호 씨. 나는 피식 웃고는 걷기 시작했다. 곧 다시 달라붙은 관호 씨가 입을 열었다. "저기. 드디어 게임 범죄 처리 팀 사무실이 완공 됐죠. 저기 김현진이라는 명패도 올려져 있는데… 어이. 초연 씨. 애인 왔어요." "예?" 저쪽에서 여자 운영자 몇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초연 씨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게 몰려드는 시선들. 정호 씨의 말에 내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오. 김 팀장." "아, 박 팀장님." 나는 서류 뭉치를 들고 내게 걸어오는 박관호 운영 팀 팀장 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게임 운영과에는 운영자들이 들어있는 운영 팀과 여러 팀들이 있고… 팀장들도… 나도 그 중에 하나지? "어라? 그쪽은…." "아…." 나는 약간 당황하며 다시 태경이의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정호 씨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황당해 하는 태경이의 얼굴이 상당히… 큭. "현진 씨." "아, 초연 씨." 나는 여러 여자들과 우르르 몰려오는 초연 씨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호호. 서로 좋아서 죽겠다는 얼굴이지?" "에… 평소에는 내숭이었단 말? 아니면 현진 씨가 워낙 좋은 건가?" "현진 씨가 멋진 거 아닐까? 내가 한번 도전해 볼까 생각중이라고." 나는 호호거리며 조잘거리는 여자 운영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왔다하면 이런 분위기로군. 그런데 오늘은 운영자들의 수가 좀 많은 것 같은데… 2기 헌터 임명식 때문인가? 하지만 내가 있을 때도 이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아, 오늘 오후에 서버 점검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그것보다는 오늘 아버지가 저녁을 산다고 하셔 서지만…." 아, 그런 거였군. 나는 피식 웃고는 여전히 태경이에게 달라붙어 뭐라고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당황하는 태경이의 모습을 즐기는 것이 확실하군. 태경이는 내게 구원을 기다린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초연 씨.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 다크 워리어 운영자…." "아… 아, 안 되요! 지금까지 참았는데… 게임에서 해결하기로 했잖아요." "……… 아니… 그게 아니고…." 전에 리자드 사의 어딘가 있을 그 운영자를 찾으려다가 초연 씨에게 한소리들은 적이 있었다. 몬스터 운영 팀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때 초연 씨하고 게임 속에서 복수를 하던지 하기로 약속했었지… "그게 아니고… 그 다크 워리어. 혹시 더 높은 마족으로 승급하지 않았어요?" 내 말에 잠시 당황하던 초연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크 나이트로 승급했다고 하던데…." "그래요?" 내 얼굴이 어두워 졌는지 초연 씨가 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 힘들겠는데? "실례합니다!" "음?" "에?" 갑자기 들려온 고함소리. 엘리베이터 쪽?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우리들을 약간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 짙은 검은머리에 좀 조용한 느낌의 여자와… 짧은 갈색 머리에 날카로운 샤프한 외모를 가진 남자. 그리고… 나와 비슷한 키에 짧은 녹색 머리… "미토스!" "미토스!" "어라? 세… 한?" 확실하네? 게임하고 비슷한데? 외모가 약간 떨어지고 키가 좀 작지만… 할딘은 저 샤프한 느낌이 같고… 그런데 저 여자는… "설마 그쪽이 씨아?" 곧바로 들려오는 대답. "불만 있냐?" "제길. 저 여자 잘라요." 당황하는 여자와 장난기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박 팀장 님. "어, 어…?" 나는 킬킬거리는 박 팀장 님과 미토스를 무시하고는 다시 한번 할딘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게 씨아라고? 말투는 확실하군. 나는 나를 노려보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겉과 속이 따로 노는 건가? "흠… 미스터리. 어쨌든… 정식으로 인사하죠. 김현진. 리자드 사 게임 운영과, 게임 범죄 처리 팀 팀장입니다. 2기 헌터로 임명된 것을 축하합니다." 내가 좀 엄숙한 태도로 말하자 셋은 잠시 당황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나… 저는 게임아이디 미토스. 본명은 손영민. 에… 한강 전자 부사장의 아들. 24세. 2기 헌터로 신고합니다." "할딘. 진건이다. 영민이와 같은 회사 사장 둘째 아들. 24. 헌터로 신고하지." "씨아, 손신희. 손영민 씨의 친동생… 입니다." 약간 어색하게 소개를 하는 셋을 바라보던 나는 손을 딱 치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그럼 지금부터는…." "아직 남았네." "음?" 나는 박 팀장 님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흠… 깔끔하게 프린트되어 있는 서류. 이미 채용 서류와 계약은 끝났다고 하니… 나도 집으로 찾아온 회사 사람, 초연 씨 아버님과 계약 문서를 작성했고… 저 둘도 회사 사람이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헌터 조약. "헌터. 섀도우 월드 내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해결하는 사람을 칭한다. 이 범죄는 규약을 어기는 모든 일에 해당하며 무력 사용을 허가한다. 자신이 헌터라는 것은 최대한 숨기도록 노력하며 지시 하달이 있기 전에는 평범한 플레이어로 행동한다. 운영자와 동급으로 운영자와 협력하여 일을 처리한다. 플레이 상 이득은 없으며 따라서 헌터는 자신의 레벨에 맞는 임무를 받는다. 그리고 생략. 간단히 말해서 나쁜 놈들을 때려잡으면 된다는 말이죠. 저는 제 1기 헌터, 헌터들의 리더로 김현진. 지금까지야 더 이상의 헌터가 없어서 이름뿐인 팀장, 리더였지만… 여기 본적 있죠? 페페, 초연 씨가 운영자들과 헌터들의 연결고리 역할을 맡습니다. 그리고… 플레이 상의 이득은 아니지만 신형 게임 캡슐 세트가 지급됩니다. 공식 끝." "야아! 발사!"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폭죽들을 터지기 시작했다. 화약 냄새야 나지 않고… 화려한 종이들이 허공을 날라 여전히 좀 딱딱한 자세로 서 있는 셋에게 공격을 시작했다. "웃?" "뭐야?" 종이들을 뒤집어쓰며 당황하는 셋을 보던 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밀가루. 밀가루 없어요? 복수할 기횐데…." "어? 밀가루?" 급히 준비해온 봉지를 뒤적거리는 박정호 씨. 아무래도 없는 모양이군. 나와 정호 씨가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도 사람들의 공격은 계속 되었다. 아주 알록달록한 종이 무더기에 파묻히다 시피 해서 헐떡거리는 셋. 좀 심한가? 그런데 이런 건 언제 다 준비한 건지… 그런데 왜 밀가루는 없는 거야? 저 망할 아가씨에게 퍼부으려 했더니… 나는 투덜거리며 종이들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셋을 끌고 나왔다. "이, 이게 뭐야?" "축하 파티라고 하죠."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셋. 미토스, 영민 형이라고 해야하나? 뭐, 게임에서도 말을 놓았고 내가 상급자니… 음? 순간 나는 몸을 숙였다. "어?" 푸확! 순간 우리들을 습격하는 이상한 액체와 거품들. 샴페인… 적절한 시기에 몸을 숙인 덕분에 나는 그리 젖지 않을 수 있었다. 게임에서의 식스센스에 익숙해진 나는 항상 주위에 신경을 쏟고 다녀서 게임에서만큼은 아니지만 기척을 어느 정도 읽어낸다. 덕분에 이런 기습 공격을 간신히 피하는 것이고… 하지만 아주 물에 빠진, 아니 술에 빠진 생쥐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셋. 정말 어이가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그래도 한강 전자? 어디 사장 급 사람들의 아들이라 그런지 셋의 옷은 방수처리가 되어 있었고 그리 피해가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웃!? 방탄복이다!" 정호 씨의 고함소리. 나는 킬킬거리고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미토스의 옷을 털어 주었다. "여기… 사람들, 정상 맞지?" "그러는 미토… 영민? 영민 형이라고 부르죠. 형은 정상이에요? 그보다는 어서 저리로 피하죠." 나는 셋을 이끌고는 우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아버리니… 벽이 모두 유리라 밖이 다 내다보이는군. 샴페인과… 케익도 있고. 별 희한한 음식들을 다 준비한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초연 씨가 귀뜸을 해주지 않았으면 나도 놀랐겠군. 내가 들어올 때는 아버님이 있어서 이렇게는 못했다고 하더니… "재밌는 곳이죠?" "어느 정도." 맥빠진 영민 형의 목소리. 영민 형? 흠… 괜찮군. 그때 사무실 안을 둘러보던 진건이라고 했나? 외자? 건이 형? 흠… 건이 형이 입을 열었다. "여기가 사무실?" 범죄 처리 팀 사무실. 53층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크기다. 요렇게 유리벽으로 막아서 밖과 대충 단절시킨. 벽으로 막힌 것을 빼면 밖과 똑같은 곳. 한 층을 반으로 절단한 것과 비슷한 구조다. "그렇죠. 그런데 한강 전자? 꽤 부잣집 사람들이었군요." "흥. 물론이지. 알았으면 알아서 대우를 해봐." 머리에서 술을 털어 내던 신희가 입을 열었다. 똑같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정말로 자를까? 당신 부모가 부자지 당신이 부자가 아니지 않아? 그리고 나는 부모님들은 없어도 통장에 20억은 들어있는 부자라고." 내 말에 놀란 얼굴을 하는 셋. 약간 거짓말이 섞여 있기는 하군. 하지만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사람은 없으니… 그런데 약간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인 세 사람. 어라? 아, 부모님이 없다는 말을 했지? "별 상관없어요. 그런데 시간이… 나는 집으로 가야 하는데. 제가 들어있는 길드 녀석들과 만나기로 해서… 아, 초연 씨." 나는 음식들을 담은 접시를 들고 들어오는 초연 씨를 바라보았다. "가려고요? 오늘 아버지가 저녁을…." "다음에 집에 가서 먹죠." 고개를 끄덕이는 초연 씨. 앗! 그러고 보니 태경이를 잊고 있었다. 나는 급히 밖으로 나가서는 태경이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태경. 샴페인에 거의 절어 있었다. 이런… 나는 그리고 걸어갔다.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환영하는 운영자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태경이를 빼냈다. "앗! 김 팀장! 우리 물주라고." "이미 제가 잡았다니까요." "우우~!"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월요일 오전에 오면 되는 거죠?" "음." 오늘은 그저 인사를 하는 비슷한 거고 월요일에 모여서 사무실 정리도 좀 하고… 그러기로 했으니. 특히 오늘은 부장급 회의가 있는 날이라 아버님도 오시지 않았으니… 원래 부장이 이런 작은 팀의 일까지 오지는 않지만 우리는 꽤 중요한 신생 팀. "아, 태경이도 임명입니까?" "물론. 태경 님이면 가능하지. 사무실에 채용서 등등 모여있으니 알아서 작성해. 놓고 가면 내가 부장님께 전해 드리지." 킥. 태경 님이라. 당황하는 태경이의 모습이 상당히 재밌었다. 박 팀장 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 안으로 휠체어를 끌었다. "어? 돌아왔네? 그 친구는 누구?" 초연 씨가 가져온 음식들을 먹으며 뭔가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던 넷(초연 씨도 해서)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2기 헌터. 칼, 최태경이라고 리자드 대주주 중 한 분의 아들입니다. 몸이 좀 좋지 못하고…." 나는 중얼거리면서도 내 명패가 올려져 있는 책상의 서랍을 뒤적거려 서류 몇 개를 꺼냈다. 컴퓨터로 프린트하는 것이 더 좋지만 귀찮으니… "그런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요?" 내 질문에 서로를 돌아보는 셋. "앞으로의 직장 생활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민을…." 나는 태경이와 서류들을 작성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처음 왔을 때는 당황했었지. 아, 맞다. "웬만하면 건이 형하고 신희 씨가 애인이라는 사실은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랬다간 공개적으로 키스를 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뭐?" "경험자의 말이니까 참고해요." 내 말에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다가 나와 초연 씨를 번갈아 바라보는 셋. 초연 씨의 얼굴이 붉어졌다. 흠… 작성 끝났고… 나는 서류를 책상 위의 팀장 캡쳐에 넣어두었다. 여기에 넣어두면 과장이나 부장급의 사람이 아니면 열지 못한다. 나는 강도훈 운영 기획부장이라고 캡쳐에 적어 두고는 셋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가봐야겠고… 셋은 월요일에 나오면 되요. 오전 아무 때나. 지금처럼 괜히 정장을 입고 올 필요는 없어요. 초연 씨. 저는 먼저 가볼게요. 흠… 내일 저녁에 가도 될까요?" "그러세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초연 씨. 나는 태경이를 끌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잠깐. 우리도 같이 가자. 어차피 갈곳도 없는데 너희 모임에나 따라가지 뭐." 음? 하긴 상관은 없는 일이지. 거기다 미토스들을 제르난 길드에 넣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기들이 좀 보고 결정하는 것도 좋겠지? 마음에 들면 알아서 들어올 테니까 말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너 바이크 끌고 다니냐?" "예. 태경이 좀 태워줘요." 나는 내 바이크를 보며 감탄하는 영민 형에게 태경이를 부탁했다. "그쪽도 부티나는 디카터네요. 그거 무지 비쌀 텐데…." "그러는 그 바이크도 엄청 비싸지 않아?" 서로의 승용물을 향해 놀라움을 표시하던 나와 영민 형은 곧 각자의 차에 올라탔다. 저 차는 영민 형의 차라고 하는데… 디카터. 엄청나게 비싼 차… 한강 전자가 잘 나가는 회산가 보네. 들어보니 전자 제품 시장에서는 수위에 드는 업체라고 하는데… 그리고 영민 형의 아버지와 건이 형의 아버지가 절친한 친구라고 한다. 그래서 저 세 사람도 저렇게 친한 모양이었다. 나는 태경이를 차의 앞좌석에 태워 주고는 바이크에 올라탔다. 영민 형이 운전. 뒷 자석에는 건이 형과 신희가 탄다. 왠지 불쌍하군. 나는 바이크를 출발 시켰다. "또 담요…." 나는 수위아저씨가 몸에 두르고 있는 담요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 12월 초. 확실히 쌀쌀한 날씨기는 하지. 눈이 오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하지만… 올해에 눈이 올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말야. 참 이상한 날씨. 해마다 날씨가 바뀐다. 어떨 때는 4월에서 7월이 여름이고 어떨 때는 7월에서 10월이 여름이다. 어느 정도 사계절이 뚜렸하다고 할만 하기는 하지만 해마다 바뀌는 계절의 시기는 좀 혼란스럽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정말 꿈같은, 일생에 한번 보면 정말 행운이라 할 만한 시대. 그래서 섀도우 월드가 마음에 들지… 새도우 월드도 곳 있으면 겨울인가? 몬스터가 강해지겠군. 그나저나 수위 아저씨가 몸에 걸치고 있는 담요는 전통적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고시대 유물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정말 저런 것들이 어디서 나는지 궁금할 정도야. 전에 이 아파트에 사는 꼬마가 저 담요를 장난 삼아 훔쳐다가 숨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대며 사람들에게 호소하던 수위 아저씨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이후로 그런 장난을 치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영민 형들은 아직 주차장에 있고 내가 수위실 앞에 서 있을 때. 저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멋진 코트에 긴 흑발을 날리며 걸어오는 잘생긴 남자.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나 정도(?)로 완벽한(?) 외모였다. 수위실로 다가온 그 남자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세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레지엘? "레지엘?" 나는 게임에서의 순하고 심약해 보이는 모습이 아닌, 강인하고 카리스마마저 느껴지는 모습을 하고 있는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왠지 나와 동류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뭘까? 왠지 느낌이 그랬다. "맞군요. 똑같은 모습이네요. 김정수, 레지엘입니다." "세한, 김현진." 정수와 악수를 한 나는 잠시 정수의 모습을 살폈다. 운동으로 잘 단련된 몸이었다. 나와 키도 비슷하고 긴 흑발도 같다. 그리고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눈도… 나는 미소를 지었다. "훨씬 멋있는데?" "세한은 현실에서도 멋지네요." 나와 레지엘, 정수는 서로 피식 웃었다. "여기에 살죠? 들어가요." 정수의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영민 형들이 태경이를 데리고 오고 있었다. "아, 저기 저 사람들도. 알지? 미토스하고 할딘. 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같이 있던 사람들. 손영민하고 진건이라고 하던데… 왜 그러냐?" 나는 영민들을 잠시 바라보던 정수의 얼굴이 좀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당황한 듯한 태도.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냉정함이 있는 얼굴.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정수가 아마 대기업 회장이나 사장의 아들일 거라고 예상했다. 뭔가 위에 위치한 사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죄송해요. 저는 가봐야… 죄송합니다." "그래? 흠… 내일 오전 11시." "아, 예. 그럼…." 급히 몸을 돌려서 걸어가는 정수. 왜 저러지? 그때 내 뒤로 다가온 영민 형이 정수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누구야? 왠지 너하고 비슷한 느낌을 가진 녀석이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영민 형도 나와 정수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흠… 그때 건이 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자기 말로는 부잣집 아들이라니까 어디 높은 사람들 모이는 데서 봤겠죠." "그런 것 같군. 그럼 정체를 들키기 싫어서 가는 건가? 아마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것을 알리기 싫어하는 친구인 모양인데?" 그런 건가? 내 느낌대로라면 상당한 대기업의 사람 같으니… 정말 섀도우 월드 고수들은 다 이런 재벌 2세들 밖에 없는 건가? 천악도 그럴지 몰라. 그때 영민 형이 입을 열었다. "나도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별 상관은 없지. 그런데 누구야?" 그러고 보니 누군지도 말하지 않았군. "레지엘. 저와 함께 여행하는 친구. 성검의 주인." 내 설명에 영민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때 그 예의 바른 친구? 그럼 건이의 생각이 맞는 모양이네. 자기가 재벌 2세라는 것을 싫어하나 봐. 게임에서도 그렇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너하고 불편한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지도." 그런가? 나는 이제는 보이는 않는 정수를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도 아니니 괜히 신경 쓸 필요는 없나? 부잣집 아들이라… "후… 놀랬군." 길을 걷던 레지엘, 김정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세한도 꽤 높은 사람들과 친분이 많은 모양이야." 정수는 씁쓸히 웃고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을 둘러보았다. 아직 아파트 단지 안이라 사람이 없었다. 정수는 약간 아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별다른 친구, 진짜 친구라 부를 사람이 없어 오늘 있을 모임을 꽤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괜히 내가 누군지 드러내는 것도… 아버지가 싫어하시니까…." 정수는 씁쓸히 웃고는 걷는 속도를 좀 늦췄다. "하필이면 한강 전자의 후계자들이 있을 줄은 몰랐어. 뭐, 나하고는 한번 스쳐지나가 정도지만… 후… 어디로 가야한다…." "저기…." "음?" 계획도 깨졌고 이제 뭘 할지를 고민하던 정수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외국인을 보고는 고개를 깜박였다. "누구시죠?" "아… 죄송해요. 아는 사람하고 착각을 했네요. 같은 긴 머리라서…." 긴 머리? 정수는 자신과 같이 검은머리를 길게 기른 사람을 떠올렸다. "세한? 아, 아니 혹시 현진 씨를 말하는… 음? 그러고 보니…." 정수는 이 서양계의 외국인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 만나신 적이… 전 제시라고 해요. 섀도우 월드에서도… 오늘 만남에 오신 건가요?" 제시의 말에 정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에 봤던 외국인. 섀도우 월드 속에서였기에 그저 모습을 그렇게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외국이었다니… 정수는 내심 놀라며 제시라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게임과 약간 달랐지만 비슷한 외모였다. "예. 레지엘, 김정수입니다. 세한과 같이 다니던 성기사죠. 일이 생겨서 돌아가는 중입니다. 아, 현진 씨가 방금 아파트로 들어갔는데… 어서 가보세요." "아, 그래요? 그럼… 다음에 뵙지요." 약간 어색한 말투였다. 정수는 아파트를 향해 달려가는 제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임에서가 아니라 현실, 현실에서 언젠가 본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정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형!"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내 집의 문 앞에 모여있는 일단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딱 7명. 제르난 길드의 사람들? 그들은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반가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게임에서와 얼굴이 똑같으니…. "누가 레도르야?" 나는 7명의 일행을 쭉 훑어보았다. 흠… 나는 손을 들어 뭐라고 말하려하는 검은머리의 말을 막았다. "내가 맞춰볼까? 지금 말하려한 네가 레도르. 저기 웃기는 노랑머리가 지미겠고. 그럼 저쪽은 당연히 시드 형. 음… 여기 차가운 아가씨가 이시린? 그럼… 여기 꼬마 아가씨가 유미겠네?" "저도 성인이라니까요!" 유미 맞군. 나는 좀 작은 키에 갈색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있는 소녀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어려 보이는데? 그리고 검은머리를 길게 기른 차가운 인상의 아가씨. 이시린이 확실하군. 나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누가 세린이고 레아일까? "이쪽이 세린?" "땡. 전 레안데요?" 크흑. 하나 틀렸다. 나는 장난기가 느껴지는 외모의 소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내 팔에 찰싹 달라붙는 녹색 머리의 여자. 세린이군.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세린을 흘려보냈다. "어?" "음?" 영민 형과 충돌하는 세린. 나는 당황하는 둘을 무시하며 문을 열었다. "불 켜." 순식간에 밝아지는 집안. 나는 점퍼를 벗어서 소파 위에 던져두고는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세린. 감탄한 얼굴로 집안을 둘러보는 레도르와 지미.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안을 둘러보는 영민 형들. 나는 태경이를 안아다가 소파에 앉혀주었다. "어라? 형, 부모님은 없어요? 이 큰집에서 자취할 리는 없고. 저하고 길수가 자취하는 대는 잠만 잘만한 곳인데? 부모님은요?" 쯧. 나는 혀를 차고는 레도르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데 지미의 이름이 길수인 모양이지? "인마. 돌아 가신지 어언 7년이다." "에?"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영민 형 일행이야 아까 들어서 좀 담담했지만 질문을 던졌던 레도르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어있었다. "됐어. 자기 소개나… 제시?" 나는 문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제시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제시. 사람들의 눈이 제시에게 쏠렸다. "진짜 외국인이었잖아?" "제시 언니? 진짜 외국인이었어요? 아, 이름이…." 젠장. "자기 소개!" 내 외침에 몸을 흠칫하고는 서로를 들어보는 사람들. 영민 일행은 뻔뻔스럽게도 냉장고에서 캔커피들을 꺼내다가 마시고 있었다. "아, 이지하. 레도르죠. 여기는 민길수. 지미고요." "아, 진예린이에요." "전 성도희. 여기는 친오빠 태희." 어라? 세린하고 시드 형이 친남매였나? 나는 그럭저럭 수긍하고는 아직 소개를 하지않은 이시린을 바라보았다. "신진아." 진짜 썰렁하군. 나는 한숨을 쉬고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나는 김현진. 알아서 소개를 하고 있어." 나는 영민 일행과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흠… 맥주가 좀 있고… 캔커피도 꽤 있다. 나는 맥주와 캔커피를 상자채로 꺼내서는 거실로 가지고 갔다. 대충 인사가 끝났는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어차피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라 쉽게 친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우선 이거나 마시고. 안주는…." 나는 도로 부엌으로 돌아가서는 전에 안주 삼아 먹으려고 사온 음식들을 순간 조리해서 내 왔다. 그리고 각자 가져온 꾸러미들을 풀고있는 사람들. 영민들이야 부자답게 뻔뻔해서 빈손이지만 지하 등은 챙겨온 것이 있었다. "오? 치킨?" 나는 지하가 꺼내는 치킨을 보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좋은데? 그리고 각자 마실것과 먹을 것을 꺼내는 다른 사람들. 가장 골 때리는 것은 지미, 길수란 놈이 꺼낸 물건이었다. "짜잔! 어스 파이터즈 X! 오늘 한번 질리도록 해보자고요!" 지미가 꺼낸 것은 어스 파이터즈(Earth Fighters, 이하 어파) X였다. 50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지금까지 계속 발전하고 사랑을 받아온 격투게임… 나는 길수가 꺼내는 가정용 게임기와 게임 건틀릿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파는 저렇게 손에 건틀릿을 끼고는 건틀릿에 달린 버튼과 주먹질을 이용해 하는 게임이다. 발차기는 몸의 방향과 버튼으로 하고. "후후훗! 제가 섀도우 월드에서는 이길 수 없을지 몰라도 이것만은 자신 있죠! 우리 대학 최고의 파이터라 불리는 접니다!" 길수는 저 혼자 하하거리더니 멋대로 게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으음… 확실히 우리 집 텔리비전이 상당히 커서 게임방에서 하는 것과 비슷하겠는데? "으음… 한번 해볼까?" 영민 형이 눈을 빛내며 길수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힘들 거예요. 저 녀석 정말 저것만큼은 신의 경지에 다다라 있거든요." 지하의 중얼거림. 확실히 저 꼴을 보니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어느새 죽이 맞았는지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던 여자들(진아 제외)도 거실의 중앙에 서서는 건틀릿을 끼고 있는 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영민이도 상당한 실력자지. 나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때 저것만하던 때도 있었다." "맞아요. 정말 집에서 건이 오빠하고 하루종일 저걸 하고 있던 적도 있었었는데… 물론 건이 오빠의 승률이 훨씬 높았지만." 영민 형을 보며 말하는 건이 형과 신희. 호오… 나는 거실에 상을 하나 피고는 음식들을 올려두었다. 음… 닭다리 하나 뜯고. 다른 사람들도 상에 몰려들어서는 이제 게임을 시작하는 길수와 영민에게 시선을 모았다. "호오? 베터? 상당히 난해한 캐릭터 아닌가?" 영민이 길수가 고른, 베리모를 쓰고 있는 캐릭터를 말하는 듯 중얼거렸다. 둘은 지금 게임용 고글을 쓰고 있었고 우리는 텔레비전에 뜨는 화면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길수의 캐릭터는 베터. 영민 형의 캐릭터는 레안이었다. 베터는 컨트롤이 엄청나게 어려운 캐릭터다. 엄청난 고수가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는 캐릭터. 그에 비해 레안은 밸런스가 가장 잘 맞는 캐릭터다. 확실히 길수 자식이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그리고 길수와 영민 형이 주먹을 휘드르며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 많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제자리에 서서 주먹을 내뻗는 형식. "와… 최신판이 좋기는 하군. 깔끔하잖아?" "그렇죠. 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거니까." 우리는 맥주와 안주를 먹으며 사투를 벌이는 길수와 영민 형을 바라보았다. 노랑머리와 초록머리의 싸움이라. 킥. 게임은 길수가 계속 유리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콤보와 기술들. 자잘한 공격들에 영민 형이 계속 밀리고 있었다. "와… 잘하는데?" 내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제시가 약간 이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훗. 그러고 보니 제시는… "컥! 졌다…." 게임 오버 표시가 나는 텔레비젼. 영민 형이 쓰게 웃으며 고글과 건틀릿을 벗고 있었다. 흠… 길수 자식. 진짜 고수로군. "흠… 내가 해볼까?" 이번에는 건이 형이 나섰다. 영민 형보다는 훨씬 잘한다고 하더니… "힘내요." "제길. 지다니… 건이 자식에게 매일 깨져서 열 받았었는데 또 깨졌어." 나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영민 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시작되는 게임. 나는 맥주와 음식들을 집어먹으며 계속 구경했다. 건이 형에 지하, 그리고 장난 삼아 도전한 태경이에 태희 형, 신희나 다른 여자들도 모두 깨지고 길수는 득이양양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후후. 모두 졌으니 이제 형이 나오죠? 다크소드의 위명을 처참히 무너뜨려 드리겠습니다. 우하핫!"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는 길수. 나는 빙긋 웃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제시에게서 건틀릿과 고글을 받아들었다. 방금 깨진 것이 제시였다. "흠… 나 X는 해본적 없는데? 매그넘하고 똑 같냐?" 내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길수와 지하 등. "이거 안 해 봤어요? 나온 지 꽤 됐는데… 후후. 또 내가 승리가 추가되겠군. 매그넘하고 똑같아요. 그저 그래픽 좋아지고 캐릭터 몇 개 추가되고. 대부분 같죠." "콤보나 기술도? 이번에도 82콤보?" "예. 쓰는 건 못봤지만 82콤보까지 있다고 하더군요. 어라? 형은 강진이에요?" "그래." 나는 빙긋 웃고는 고글을 썼다. 강진은 유일한 한국인 캐릭터다. 순간 풍경이 빠뀌며 내 앞에 베레모를 쓰고 있는 근육질의 군인 한 명이 나타났다. 흠… "제길. 길수 자식 기 살았구만." "오늘밤은 좀 시끄럽겠네요." 태희 형과 지하의 푸념. "제길. 뭐 저런 놈이 다 있는 거지? 내 움직임을 다 읽고 있는 것 같더군." "아이고. 현진이 질문하는 걸 보니 저 녀석이 11연승의 위업을 달성하시겠군." 건이 형과 영민 형의 넋두리. 다른 사람들도 동조하는 듯 했다. 다만 미소를 짓고 있는 제시. "아마 현진이가 이길 거예요." "엥?" 사람들이 제시를 바라보는 순간 게임이 시작되었다. 위로 점프하며 주먹을 내리찍는 길수. 훗.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나며 주먹을 날렸다. 간단하게 막는 길수. "하핫! 이게 뭡니까? 무슨 어린애… 어라?" 내 공격을 막고는 의기양양해 하던 길수는 계속 이어지는 내 공격이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치고 바로 다리를 치고 날라 차기에 손 날 치기. "컥!? 46콤보? 뭐야? 고수였잖아?" "무슨." 기겁하는 길수의 목소리에 나는 빙긋 웃었다. 46콤보? 아니지. 나는 계속 해서 버튼과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내 공격. 한순간 길수의 가드가 풀리며 그대로 연달아 내 공격이 먹혀 들어갔다. 점차 떨어지는 길수의 게이지. "86. 마지막 필살기." 마지막으로 어퍼컷을 날린 나는 여러 개의 버튼을 연달아 누르며 주먹을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게임 속에서의 나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는 옆으로 뛰쳐나가며 길수의 캐릭의 배를 강타했다. 그대로 길수가 쓰러지며 게임오버 메시지가 나타났다. "와아!" 탄성을 토하는 사람들. "말도 안돼!" 고글을 벗으니 역시 고글을 벗어 던진 길수가 나를 향해 악을 써댔다. "86콤보라니! 이런 말도 안돼는! 지금까지 56콤보를 사용하는 사람도 얼마 없었는데!" 길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제시는 예상했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이게 6년간 게임방 알바를 해온 사람의 실력이란다. 나는 매그넘 버전의 모든 캐릭터들의 기술을 다 쓸 수 있어. 86콤보는 강진밖에 쓰지 못하지만." "크오오옷!" 괴성을 지르며 다시 고글을 쓰는 길수. 쯧쯧. 미안하지만 6년간 매일 이 게임을 해온 나란다. 아주 지겨워서 그만두고 있던 게임이었는데… 내가 알바를 하던 게임방에 찾아와서 도전장을 내밀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그 중에는 너보다 훨씬 강한 상대가 얼마든지 있었지. 내 어파의 실력이 높은 데는 태권도와 끝없는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게임방 주인아저씨가 내가 유명해지자 알바비를 올려줬었거든. 때문에 죽어라고 어파에 매달리던 나의 과거가 떠오르는군. 잠시 회상에 잠겨 있던 나는 피식 웃고는 고글을 썼다. 화난 듯 위협적인 몸놀림으로 내게 달려오는 길수. "침착하지?" 나는 회피운동을 하며 옆으로 빠져 길수의 등판을 찍었다. 곧바로 몸을 돌리며 발차기를 날리는 길수. 미안하지만 이 속에서는 강 사범 님도 내가 이긴단다. 그러고 보니 어파에서 강 사범 님을 꺾고 이어져던 100번의 대련이 생각나는구나. 나는 몸이 쑤시는 것을 느끼며 강 사범 님의 막강한 파워를 새삼 떠올렸다. "흑흑. 나는 도대체 뭐지?"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길수의 처량한 목소리. 자신의 마지막 기술인 68콤보에 각종 필살기까지 동원하고도 내게 이기지 못한 길수는 현재 패닉 상태였다. 불쌍한 녀석. 나는 열심히 어파를 하고 있는 영민 형과 건이 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 게임을 가지고 온 것은 칭찬 할만 하군. 나는 소파에 기대서 잠들어 있는 여성 동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누가 덮치기라고 하면 어쩌려고. 나는 진아를 바라보고 있는 지하를 발견하고는 땅콩 하나를 지하에게 던졌다. "아야." "덮치기라도 하려고?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냐?" "예? 아, 아니 그게…."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을 더욱 빨갛게 붉히며 변명하는 지하. 나는 피식 웃고는 소파위에 뻗어있는 태경이를 바라보았다. 저기다 그냥 재울까? 나는 어파에 열중하고 있는 영민, 건이, 태희 형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제시를 업어다가 내 침실로 옮겼다. "너는 진아나 업고 와라. 침대에 눕혀야지." "예?"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긴장한 얼굴로 진아를 업어다 침실로 데리고 오는 지하. 나는 피식 웃고는 제시와 진아를 침대 위에 눕혔다. 다음은 예린이와 도흰가? 나와 지하는 잠들어 있는 여자들을 침대와 이불 위에 눕히고는 거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는 길수. 장장 32연패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술까지 겹쳤으니… 나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어파에 열중해 있는 형들을 바라보았다. 후… 현실에서도 즐겁군. 나는 땅콩 하나를 길수의 머리로 집어 던졌다. "누구야?" "지나가던 여자."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미시안은 누군지 모를 여자 검사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렇다고 미시안이 그 여자를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현재 날씨가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라는 것이 미시안이 그 여자를 안고 있게 하는 이유였다. 비 많이 맞으면 감기 들지. 그러면 진짜 감기 걸린 것처럼 어지럽고 힘도 떨어지고 별별 일을 다 겪고 말야. 심하면 그대로 죽기도 한다. 확실히 이런 폭우를 맞고 있으면 죽을 수도 있겠는데? 여자는 로그아웃을 한 것은 아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마 기절한 모양이지? 기절을 하더라도 로그아웃을 예약해 두면 기절한 상태에서도 자동으로 로그아웃이 되기는 하지만 여자의 상태를 보니 예약을 해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기절하지 않고 있을 때 예약 로그아웃이 발동되면 먼저 의사를 물어온다. 예약 로그아웃은 보통 알람 비슷한 기능이다. "어디서 주웠어?" "여기로 돌아오는데 숲 속에 쓰러져 있더군." 어느 정도 잠이 깨자 나는 그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 음? 뭐야? 인간이 아니잖아? "엘프?" "그런 것 같군. 여행이라도 나왔다가 습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 숲은 엘프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곳이니 여행을 한지 꽤 된 모양이야." "그래? 그런데, 베르… 시아하고 닮았군." "………." 미시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이 좀 비슷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저 엘프는 정말… 베르시아하고 닮았다. 별일이군. 그런데 문제는 베르시아를 닮았다는 말은 베르시나하고 닮았다는 말과도 통한다는 것이었다. 혹시 그래서 데려온 건가? 뭐, 미시안 성격상 이러나 저러나 데려오기는 했겠다만… 나는 미시안의 얼굴을 살폈지만 별다른 감정은 없는 듯 했다. 흠. "그런데 가을에 무슨 폭우가 쏟아지는 거지?" "글쎄…." 나는 축축하게 젖어있는 침낭을 접으며 투덜거렸다. 다행히 나무 밑이라 그리 많이 젖지는 않았군. 그에 비해 미시안은 완전 홀딱 다 젖어 있었다. 안겨있는 엘프도 그렇고. 다행히 엘프는 가죽 갑옷도 입고 있어서 몸이 다 드러나 보이는 불상사는 없었다. 아마 마법 도구 같은 것으로 외모를 감추고 있는지 귀도 인간과 똑같고… 나나 최상위 마법사, 엘프나 다크 엘프가 아니면 인간으로 알만한 외모였다. "아무래도 깨워야겠군." 나는 칼과 레지엘이 들어오기 전에 처리하기로 하고는 미시안이 앉아있는 나뭇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별말 없이 내게 엘프를 떠미는 미시안. 호? 왠지 좀 쑥쓰러워하는 분위긴데? 내 음흉한 시선에 약간 당황하던 미시안은 곧 페이스를 회복하고는 나에게 재촉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알았어. 어이. 아가씨. 일어나요." "…… 설마 깨운다는 것이 그런 거였나?" 어이없다는 미시안의 목소리. 그럼? 나는 약간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미시안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품속을 뒤적거렸다. 여기 어디에… 아, 여기 있다. "에너바이트." 나는 품속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엘프에게 가져다 대고는 작게 웅얼거렸다. 잠시 빛을 내다가 깨져나가는 보석. 아깝다. 이거 엘프만 아니었어도 그냥 깨우는 건데 말야. 기절한 사람을 깨우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마법. 곧 엘프는 정신이 드는 듯 몸을 움찔거렸다. "이봐요. 일어나요. 아가씨." "음… 아? 누, 누구… 꺄악!" 전에 베르시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었는데? 나는 피식 웃고는 나무에서 떨어지려는 엘프를 붙잡아주었다. 자신이 있던 위치를 파악했는지 익숙하게 자리를 잡는 엘프. 엘프는 자신의 양 옆에 앉아있는 나와 미시안을 돌아보았다. "뭐, 뭐죠?"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여는 엘프.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엘프 아가씨." "아!" 자신이 엘프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에 놀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엘프.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미시안을 가리켰다. "좀 정신을 차리고 거기 뒤 좀 봐요. 당신 네 일족… 맞나? 어쨌든 비슷한 친구니까." 내 말에 엘프는 고개를 돌려 미시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악하며 뒤로, 곧 내게로 물러나는, 이걸 뭐라고 해야하는 거야? 어쨌든 엘프는 엄청난 속도로 내 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 충격에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어엇?" "어?"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엘프. 나는 급히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움켜잡고는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기 시작했다. "뭡니까?" "다, 다크 엘프?" 내 말을 깨끗이 무시하며 미시안에게 말을 거는 엘프. 뭐야? 그런데 엘프의 얼굴에 긴장감은 물론 공포심까지 섞여 있었다. 왜 저러지? 나는 의아해 하며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쳇. 다크 엘프 맞아요." 내 말에 엘프는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또 내쪽으로… 나는 한숨을 쉬며 따라 뒤로 물러났다. 그때 미시안이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엘프들은 다크 엘프를 무서워하지. 뭐, 어둠에 빠진, 악마에게 혼을 뺐긴 엘프라고 인식되어 있다지? 훗." 나는 미시안의 말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엘프들이 다크 엘프를 무서워한다고? 악마에게 혼을 뺐겨? 다크 엘프가 어둠에 속한 엘프기는 하지만 엘프가 빛에 속한 것만 빼면 다를 것 없잖아? 똑같이 숲을 사랑하고 말야. "너무 무서워하지는 말아요.착한 녀석이니까.다크 엘프들은 다착하던데? 그런 선입관은 버리는 것이 인생사는 데에 도움이 된답니다. 어쨌든 당신을 어떻게 하려고 한 건 아니고 길바닥에 쓰러져 있기에 데리고 온 것뿐이에요." 내 말에도 긴장을 풀지 않으며 미시안을 바라보고 있는 엘프. 뭐야? 정말 겁에 질린 것 같은데? 그때 미시안이 나무 밑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없는 게 얘기하기 편하겠군." 미시안은 바닥에 내려서서는 레지엘과 칼의 옆에 주저앉았다.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푸는 엘프. 이상하군. "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지? 어차피 똑같은 엘프인데?" 나는 약간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미시안을 무슨 괴물 취급한 여자니 내가 잘 대해줄 이유가 없지. 엘프는 갑자기 돌변한 내 태도에 좀 당황하더니 입을 열었다. "다크 엘프들은… 제가 어릴 적부터 악마의 화신이니 뭐니 하는 말들을 들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거기다 다크 엘프는 어둠의 기운이 좀 있어서… 하지만 듣던 것보다는 순하네요?" 엘프의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듣던 것보다 순해? 나는 킬킬거리고는 밑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는 미시안을 잠시 바라보다가 엘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크 엘프나 엘프나 별 차이는 없는데? 다크 엘프들과 꽤 친한 내가 장담하죠. 아, 이 반지 보겠어요?" 나는 다시 부드러운 분위기로 말을 하다가 건틸릿을 벗었다.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고는 입을 벌리는 엘프. 흠? "일족의 은인이라는 표식이군요. 좀 어두운 기운이 있는 것이 다크 엘프들의 것인가요?" "그렇죠." "저희들과 같은 모양이네요. 솔직히 다크 엘프들은 우락부락하고 머리에 뿔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미시안을 내려다보며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엘프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엘프와 다크 엘프간의 사이가 어떤지 알겠군. 하지만 다크 엘프들은 엘프들을 꽤 좋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엘프들이 다크 엘프를 싫어하는 건가? 이유를 모르겠군. 어차피 같은 엘프인데 말야.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건 넘어가고. 엘프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이곳은 엘프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내 말에 엘프는 나를 돌아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아… 어쨌든 엘프들의 은인이시니 상관없겠죠. 여행을 나왔어요. 전투 능력이 꽤 높거든요. 그러다가 엘프라는 것을 웬 사 람들에게 들켜서 쫓기고 있었는데… 그러다 지쳐서 쓰러졌다가 눈을 뜨니 여기네요." 나는 순수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엘프를 보며 약간 감탄했다. 확실히 다크 엘프와는 좀 다른 분위기 같기도 한데? 약간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았다. 어쨌든 좀 순진한 엘프 같군. 혼자서 여행을? 왜 엘프 노예들이 섀도우 월드 속을 떠도는지 알겠어. "한. 제 이름입니다." "아, 실비아예요." "아, 반갑군요. 저쪽은 미시안입니다. 다크 엘프. 엄청난 실력의 전사죠. 뭐, 뿔은 없습니다. 아마도 엘프들 사이에 헛소문이 도는 모양이군요. 저기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둘은 제 동료인 칼과 레지엘입니다.둘 다 착한 놈들이죠." "일족의 은인의 동료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겠죠." 너무 쉽게 믿는 것 같군. 엘프의 특성인지 이 반지 때문인지 헷갈리는데? "푸하하핫! 새까만 몸에 머리에 뿔도 달렸다면… 진짜 악마? 하하하핫!" "예. 그런데 이제 보니 어른들이 저희들을 놀리느냐고 했던 얘기 같기도 하네요. 다크 엘프를 본적이 있는 엘프가 손에 꼽을만 하니까 확실한 모습을 알지는 못하거든요. 장로님이나 알고 계시겠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고요." "큭큭. 그래도 까만 몸에 뿔이라니… 미, 미시안… 하하." 나는 작게 투덜거리고 있는 미시안을 보며 계속 웃음을 흘렸다. 실비아의 말에 의하면 엘프들 사이, 특히 좀 젊은 엘프들 사이에서는 다크 엘프가 어둠에 빠져 타락한, 새까만 몸에 머리에 뿔이 달린 우락부락한 몸집,거기에 검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을 가진 악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미시안은 탄탄하기는 하지만 근육질이라고 보기는 힘든 보통의 체격에 나와 비슷한 키. 약간 갈색을 띄는 피부, 긴 은발의 미남자이다. 실비아의 말과 대치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실비아도 그 사실에 상당히 놀라워하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미시안의 눈치를 살폈다. 약간 불만스러워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실비아가 아직도 미시안을 좀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역시 오랜 시간 인식되었던 사실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건가? 뭐, 솔직히 오랜 시간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주입된 기억이라 할 수 있으니까. 아, 아니면 게임을 오픈하기 전에 엄청나게 시간을 늘려서 먼저 NPC들을 생활하게 했었을 지도 모르지. 게임에서의 시간을 현실에서보다 얼마나 느리게 할 수 있는지 모르니까. "으음…." 그때 레지엘이 몸을 움찔거리고는 침낭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로그인한 모양이네? 나는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어쩌겠어요? 우리하고 동행하겠어요?" 아까부터 이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혼자 여행하기는 좀 위험했으니까… 잘 부탁드려요. 그런데 제가 엘프라는 사실은…." "저 둘에게는 우선 비밀로 하죠. 저 둘은 실비아를 알아볼 실력은 아니니까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후훗. 드디어 우리 일행에 여자가 한 명 생기는 구나. 실력을 보니 실비아는 자기 몸은 물론 우리 파티에 꽤 도움이 될 만한 실력이었다. 엘프 사냥꾼들의 손을 피해 도망친 것만 해도 실력을 증명하는 일이다. 어차피 자기 마음에 찰 만큼 여행을 할 생각이라고 하니 우리와 동행해도 문제는 없겠지. 흠… 이제 육포 말고 좀 음식다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실비아가 엘프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기는 이미 물 건너갔다. 칼과 레지엘이 접속하고 바로 벌어난 헤프닝 때문이었다. "실비아. 이미 죽은 건데 뭐 어떻습니까? 저는 이것만은 도저히 못 먹습니다." 칼의 애절한 말에도 실비아는 싸늘한 표정을 유지하며 레지엘과 칼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 둘의 앞에는 야채와 과일들만이 담긴 접시가 하나 놓여있었다. "저희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인간이던 아니던 용납할 수 없어요! 생각을 해봐요. 그것들이 살아있을 때의 순진한 눈빛을 생각해 보라고요!" 실비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미치겠군. 나는 한숨을 쉬며 내 접시에 담긴 야채 샐러드를 집어먹었다. 다크 엘프들의 마을에 있을 때 많이 먹던 거고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 그리 싫지는 않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실비아와 동행을 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뭐, 미시안이야 즐거워하는 얼굴로 야채 샐러드를 먹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미시안에게 실비아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역시 엘프는 엘프로군. "칼, 레지엘. 그냥 먹어. 채식하면 몸에도 좋지 뭐." "한. 현실도 아니고 게임이잖아요. 즐기려고 하는 건데 고기도 못 먹으면…." 레지엘이 좀 어색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즐기기 위한 것인데 채식만 하기는 싫다? 즐기기 위한… 나하고는 좀 다르군. 뭐, 다른 사람에게까지 내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지? "그래도 아침이니까 그냥 먹자. 부탁이다." 부탁이라는 말에 칼은 몸을 흠칫하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묵묵히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반성하는 듯한 얼굴. 내 뜻을 거부하고 있었다고 자책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레지엘도 나와 실비아를 번갈아 보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토끼고기 육포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쉬며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샐러드라고는 해도 소스 같은 것도 없으니 거의 맹 맛이다. 그나마 과일이 있어서 과일 맛이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레지엘이나 칼에게는 좀 슬픈 아침식사인 모양이었다. 실비아가 동행하기로 해서 좀 맛있는 식사를 기대했더니 이건 더 슬프군. 종일 채식. 나는 한숨을 쉬며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뿌듯한 얼굴로 샐러드를 먹고 있는 실비아. 인간들이 고기르 먹는 것이 막았다는 것에서 나오는 기쁨인 모양이었다. "실비아. 미안하지만 앞으로는 저희는 육식도 할겁니다." "예?" "저희는 인간입니다. 엘프나 다크 엘프야 채식만으로도 몸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인간은 채식만으로 영양분을 공급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저희같이 활동을 많이 하는 전사들은 특히나 에너지 소비가 많아 고기를 먹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이해를 해 주시죠. 실비아도 여행을 했다면 고기를 먹는 모습도 많이 봤을 테니 별 상관은 없겠죠? 거기다 미시안도 육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즐기지는 않아. 지금은 행복하군." 샐러드를 우물거리며 말하는 미시안. 잠시 미시안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실비아는 나를 바라보며 불만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 말이 좀 타당하다 생각했는지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기뻐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칼과 레지엘. "그럼 샐러드는…." 실비아는 꽤 많이 남아있는 야채와 과일들을 보며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다 먹지. 이런 싱싱한 과일과 야채는 오랜만이니." 미시안의 말에 실비아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야채하고 과일들은 어디서 난 거지? 과일은 몰라도 이 채소들은? 엘프들의 방식이 있으려니 생각한 생각을 접었다. 어쨌든 식사가 좀 즐거워지겠는데? 육포만 뜯기보다는 이런 샐러드도 좋지.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후로 식사마다 나와 칼, 레지엘은 거의 울 것 같은 실비아의 시선을 받으며 편치 않은 식사를 하거나 아예 식단에서 고기를 배제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후의 이야기였다. "와… 냄새 좋다." 실비아가 싱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빵의 도시라 불리는 도도리 시. 성문을 지나 도시 안으로 들어서 가장 먼저 맡은 냄새는 고소한 빵 냄새였다. 화… 진짜 냄새 좋네? "이거 빵 냄새?" "예. 빵의 도시라 불리는 곳이죠. 제빵사들이 많이 있는 곳입니다. 맛있는 빵과 독특한 빵들이 넘쳐나는 도시죠. 다른 도시에서 비싼 텔레포트 비용까지 소비해 가며 빵들을 구입해갈 정도입니다. 덕분에 대륙 각지에서 도도리 빵집을 찾을 수 있지만 역시 맛은 여기가 최곱니다. 빵들도 모두 갓 구워서 내오거든요. 특히 도도리 시에서는 도도리 제빵 연합이라는 길드가 있는데 이길드에 가입한 제빵사들은 모두 특별한 제빵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아, 저 빵집의 간판에 표시되어 있는 것이 도도리 제빵 연합의 표식입니다." 이곳에 와 본적이 있다는 모두에게 설명했다. 나는 레지엘이 가리킨 간판을 바라보았다. 시시란 제과라는 이름의 빵집이었는데 간판의 오른쪽에 빵이 담겨져 있는 바구니 모양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저게 도도리 제빵 연합의 표식? 그건 그렇고 이런 단체도 다 있네? 재미있는데? "그럼 빵집에나 갈까? 어차피 점심을 먹을 시간이니까." "아, 제가 안내하죠. 잘 아는 빵집이 있습니다." 레지엘의 말에 우리 일행은 레지엘의 안내를 받으며 길을 걸었다. 거의 대도시 수준으로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그리고 가게의 1/3이 빵집이었는데 대부분의 빵집에 다수의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말 유명한 도시인 모양이지? 나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도도리 시를 찾아보았다. 도도리 시. 빵의 도시. 평균 레벨 200. 근처의 던젼 중에 가장 레벨이 높은 곳이 230이었다. 검의 무덤? 이상한 이름의 던젼이군. 유적 던젼이라고? 그리도 다른 던젼들도 150에서 200이상까지 다양한 레벨의 던젼이 산재해 있었다. 괜찮은 레벨의 도시. 이래서 사람이 많은 모양이지? 빵만 맛있다고 이런 사람들이 몰릴리는 없다. 좋은 사냥터도 있으니 사람들이 모이는 거겠지. "여깁니다." "음?" 레지엘의 목소리에 나는 생각을 접고는 우리 앞에 위치한 빵집을 바라보았다. 코코넛? 이상한 이름이네? 어쨌든 빵집은 맞는지 간판에 빵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도도리 제빵 연합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좀 낡아 보이는 건물이었다. 현실에서야 유서가 깊은 건물이니 하겠지만 섀도우 월드에서야 건물이 이렇게 낡았다면 가게 주인이 돈이 없는 거다. 아니면 일부로 이런 허름한 건물을 쓰는 걸 수도 있고. "별로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곳인 모양이죠?" 실비아의 말에 레지엘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편이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가게의 주인이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뭐?" 레지엘의 말에 나는 물론 다른 일행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손님을 받지 않아? 왜?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레지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지? "뭐야!" 웬 고함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이게 뭐야? 반죽도구? 나는 급히 몸을 틀며 공중을 부유하는 물체를 낚아챘다. 뭐, 뭐지? "손님 안 받으니까 당장 꺼져!" 구수한 빵 냄새가 풍기고 있는 가게였지만 주방, 카운터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빵색(?) 머리의 남자. 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빵집 주인으로야 어울리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야 뭐라 하기 힘들지. "손님을 안 받는다고?" 나는 슬쩍 마기를 이용해 제빵 도구를 던지면서 머리카락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저 친구가 보기에는 도구를 던지면서 자연스레 넘어간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음? 뭐, 뭐야?" 싸늘한 내 분위기에 좀 위축된 듯한 빵집 주인. 그때 뭔가를 알아낸 듯이 나를 바라보던 주인이 손뼉을 쳤다. "오오. 다크소드?" 약간 의심이 섞인 듯한 목소리에 나는 몸에 남아있는 모든 마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마기가 흐르는 내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빵집 주인. "흠… 좋아. 자네라면 우리 가게에서 빵을 먹을 자격이 되지. 들어오게." "뭐야?"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빵집 주인을 바라보았다. 빵 먹는 게 뭐 대수라고… 거기다 오히려 자기가 인심쓰는 듯한 저 태도는 뭐야? 헛웃음을 흘렸다.그때 레지엘이 다른 일행들을 이끌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하하. 프렌 아저씨. 아직도 손님을 받지 않는 게예요?" "엥? 레지엘?" 빵집 주인은 놀란 얼굴로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아저씨? 그럼 외모만큼 젊지는 않다는 소리잖아? 내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프렌이라 불린 빵집 주인이 인상을 팍 썼다. "잠깐.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라고 했지!" 그저 미소를 짓는 레지엘.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빵집 주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은 단 두 개였다. 우리는 두 테이블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같이 테이블에 앉는 빵집 주인. "하하. 소개할게요. 코코넛의 주인인 프렌 아저… 형이에요." "으음… 반갑군. 프렌이야." 레지엘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프렌. "겉보기만큼 나이가 적지는 않다고만 말하죠. 프렌 형은 손님을 가려서 받아요. 자신이 인정한 사람만." "미친 거 아냐?" 내 말에 나를 레지엘을 바라보던 시선으로 바라보는 프렌. 하지만 별달리 반박할 말이 없는지 나에게 항의하지는 않았다. 레지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프렌 형은 섀도우 월드에서는 물론 현실에서도 유명한 제빵사에요. 그러니 손님을 가려 받을 만 하죠. 아마 프렌 형의 빵 맛을 보면 이해를 할 걸요? 그리고 프렌 형은 도도리 제빵 연합의 연주이기도 하죠. 길드장은 아니고 련주, 그저 실력이 가장 뛰어난 제빵사. 도도리 길드에만 있는 제빵 기술도 프렌 형의 것이죠." 오? 나는 감탄했다는 눈으로 프렌이라는 빵집 주인을 바라보았다. 머리색이 빵색이라는 것을 빼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데? 다른 일행들도 나와 비슷한 눈으로 프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시안 마저 좀 감탄했다는 기색이었다. "흥. 소개는 됐어. 뭐, 손님을 받지 않는 것은 새로운 빵을 개발하는데 방해가 되어서야. 어쨌거나 오랜만의 손님이군. 빵이나 말들어 오지. 5인분이면 되지?" "예." 프렌은 나에게 던졌든 반죽 도구를 빙글빙글 돌리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어쨌든 칭찬을 들어서 기쁜 모양이야. 나는 피식 웃고는 편하게 앉았다. "프렌 형의 빵은 정말 맛있죠. 섀도우 월드에서 제빵사의 실력이 좋아야 빵이 맛있다는 것이 감사할 정도로. 현실에서는 형의 빵을 먹기가 엄청나게 힘들다고 하거든요. 특히 요새는 여기서만 지내서 현실에서는 빵을 별로 만들지 않고요. 다른 제빵사들이야 스킬이 높아서 반죽이나 굽기야 잘 하지만 고유의 기술을 따라가기는 힘들죠. 그리고 프렌 형은 기술을 알려주는 대신에 가게 수입의 1%씩을 받아서 가게 운영에는 문제가 없어요." 호…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군. 어쨌든 어떤 빵이 나올지 기대되는데? 근 7년간 내가 먹은 빵은 편의점에서 사먹은 싸구려 봉지 빵이나 순간 조리 빵 밖에 없었다. 요새 얼마 남지 않은 제과점에서 빵을 먹은 적은 까마득하지.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나 몇 번 먹어봤나? 나는 주방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실비아 덕분에 아침을 좀 부실하게 먹은 칼과 레지엘도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꽤 시간이 지났다. 빵을 만드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으니 이 정도 걸리는 것이 당연하겠지. 미리 재료를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면 곧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너는 프렌하고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내 질문에 잠시 옛일을 회상하는 듯한 얼굴이던 레지엘은 곧 입을 열었다. "그냥 길을 가고 있는데 프렌 형이 몬스터들에게 쫓기고 있더라고요. 프렌 형은 전투 능력은 형편없어요. 오크 떼거지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밀을 살피러 갔다가 그렇게 됐다고 하더군요." "호오." 밀? 그때 칼이 입을 열었다. "옛날부터 생각해 왔던 것인데… 저는 빵의 맛이 완벽하게 구현된다는 것이 좀 믿기지 않습니다. 제빵 스킬을 높으면 저절로 맛있어 지는 것 아닙니까?" 칼의 질문. 칼의 말에 레지엘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대충 알고는 있지만 설명하기는 힘들다는 듯한 얼굴. 나는 피식 웃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알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모든 감각은 뇌가 결정한다고 할 수 있지. 사람이 뜨거운 물체를 만졌을 때 신경을 통해 전해져 오는 신호를 뇌가 파악해서 뜨겁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거니까. 눈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야. 신경을 통해 신호가 오면 뇌가 다시 신호를 보내 어떤 모습을 나타내 주는 거지. 이 세상도 그런 것이고. 아무 것도 없지만 뇌에서 보내는 신호를 조작… 해서 눈앞에 뭔가가 있고 만지는 느낌도 들게 하는 거지. 그리고 맛도 마찬가지. 그러니 미각은 현실에서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고… 뭐, 이런 신호와 각종 자료들을 입력하고 이용하는 데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더라고. 7년간 수만의 사람들이 연구하고 프로그래밍 한 결과야. 빵에 대해서도 발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다 프로그래밍 했다고 하니까. 빵을 만들 때의 발효 세포 하나 하나의 반응을 모두 입력하고 똑같이 만들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냐. 거의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동원 됐다고 하더군." "그렇지. 나도 그중 한 사람이고." 칼과 레지엘이 내 설명을 곰곰이 생각해 듣고 있는 중, 갑자기 프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렌은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김이 나는 갓 구운 빵들이 가득했다. 프렌은 테이블 위에 빵들을 내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 작업을 도와주면서 섀도우 월드 평생 이용권을 얻었지. 하지만 수지 맞은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끔찍했다고. 어떻게 반죽을 하면 어떤 맛이 나며 이 효모가 어쩌고… 끔찍한 기억이다. 몇 년간 그렇게 시달렸지. 뭐, 덕분에 내 실력이 더 좋아지긴 했지만." 프렌이 피식 웃으며 말을 맺었다. 호. 이 사람도 섀도우 월드를 만드는데 힘을 보탰다고? 나는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프렌을 바라보았다. 정말 보통 사람은 아니군. 음? 잠깐. "어라? 섀도우 월드를 만드는데 거의 8년이 걸렸는데… 8년 전에 유명한 제빵사였다면 도대체 지금 나이가…." "크흠. 음, 음." 헛기침을 하며 나를 외면하는 프렌. 정말 나이가 몇이야? 레지엘을 바라보니 레지엘도 확실히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도대체 지금까지 무슨 얘기를 하신 거죠?" 의아해 하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실비아. 아, 이런. 실비아나 미시안이 알아서 그리 좋을 것은 없는 내용일수도. 뭐, 자신들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생명체이기도 한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현실에서 이 세계로 넘어올 때 그곳에서의 감각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말이죠. 저희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에요. 저희들의 영혼이 이 세계의 육체와 어떻게 동화되는지 말하는 거라고나 할까." "흠…."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는 실비아.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저 약간 순화했을 뿐. 그때 프렌이 인상을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이봐. 안 먹어?" "아!" 빵으로 손을 가져가는 일행들. 나는 빵 하나를 꺼내들고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오. 이게 뭐야? 도너츠 모양의 빵 여러 개가 겹쳐있는 모습? 도너츠는 아닌지 말랑말랑 했지만 모양은 도너츠를 여러개 겹쳐놓은… 이은 모양도 없으니 처음부터 이런 모양을 만들려고 했다는 소린데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거지? "에? 이게 뭐야?" 실비아의 목소리. 나는 실비아가 들고 있는 에펠탑 모양의 빵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맙소사.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모양을 만드는 거지? "대단하군요." 칼이 자신의 모양을 본 딴 빵을 들고 웃음을 흘렸다. 어라? 바구니 안을 살펴보니 나나 레지엘, 실비아 미시안의 모습을 딴 빵들도 있었다. 빵보다는 과자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빵에 비해 약간 딱딱했다. 약간 어설프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알아볼 수는 있군. 신기하다…. "맛은?" 나는 이상한 고리 모양의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오오? 맛있는데? 분명 안에 든 다른 내용물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약간 달면서도 고소한, 상당히 푹신푹신한 빵이었다. 오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녹다. "대단하군요." 칼이 자신의 머리를 먹고는 감탄을 흘렸다. 큭. 자기 머리를 저렇게 먹다니… 나는 실소를 흘리며 바구니 안에서 미시안 모양의 빵을 꺼냈다. 약간 눈썹을 꿈틀거리는 미시안. 나는 미시안 모양의 빵을 이리저리 흔들거나 이상한 포즈를 취해 보였다. 깔깔거리는 실비아와 미소를 짓는 레지엘, 칼. 그리고 미시안이 살벌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빵을 한번에 집어넣었다. "웁." 헉. 숨쉬기 힘들다. 나는 열심히 씹으며 미시안의 반응을 살폈다.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 모습의 빵을 꺼내드는 미시안. 뭐냐? 그리고 내가 한 것과 똑같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몸놀림을 재현시키는 미시안. 큭. 그리고 미시안 역시 내 모습의 빵을 한입에 집어넣었다. "웁웁!" "우우웁!" 입안에 빵을 한가득 넣고는 서로를 향해 악을 써대는 나와 미시안. 나머지 일행이 그런 우리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 어쨌든 맛있군. "아, 그러고 보니 약속이 있었는데?" 내 말에 나를 바라보는 일행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 초연 씨와 약속이 있었다. 내 말에 서로를 바라보는 일행들. "그럼 우리끼리 다녀야 하는 건가?" 내가 월요일 오후까지 빠진다는 선언을 하자마자 레지엘과 칼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뭐지? "저와 칼은 잠시동안 따로 행동하죠. 아마 실비아양은 미시안과 함께 다니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여행이 아니라면 좀 흩어지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둘. 흠? 실비아와 함께 다녀서 채식이나 하기는 싫다는 소리겠지? 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는 얼굴의 둘과 딱딱히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미시안. "세한." "아아. 같은 엘프니까 좀 어울려 보라고. 실비아하고 함께 있으면 저 둘은 식사가 힘들다고. 한 3일 정도만 있으면 돼." "어? 그럼 전 미시안 씨하고 함께 다니는 건가요?" "그래요." "잠깐. 난 아직…." "그럼 가볼까!" 나는 벌떡 일어났고 레지엘과 칼은 순식간에 가게를 뛰쳐나갔다. 사라지는 둘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미시안. 나는 낄낄 웃고는 프렌에게 다가갔다. "얼마죠?" "5골드." "헉!?" 5골드!? 말도 안돼! 내 시선에 프렌은 피식 웃었다. "맛을 떠올리면 별말 나오지 않을 텐데?" "나옵니다." "………." 시선을 교환하는 나와 프렌. 잠시 마주보고 서 있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돈을 꺼내 프렌에게 건냈다. 확실히 맛있기는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렸다. 당황한 얼굴로 미시안을 바라보며 안절부절 하는 실비아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미시안. 나는 한숨을 쉬고는 미시안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좀 보살펴 줘. 실비아 혼자서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잖아. 칼과 레지엘은 채식하기를 싫어하고. 좀 지켜줘라." 잠시 나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리던 미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미시안하고 얼마간 지내십시오. 늑대는 아니니까 안심하고요. 실력은 엄청나니까 위험할 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 "아, 예…."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가게를 나왔다. 승낙은 했지만 암담한지 아직도 그대로 서 있는 미시안과 불안한 얼굴의 실비아. 평소 쌓아온 이미지가 그리 쉽게 바뀌지는 않는 법이지. 하지만 내가 해준 말이 있기에 좀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훗. "냐… 켁, 켁." 품속에서 린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또 목에 걸린 모양이군.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린을 끄집어내었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린. 나는 피식 웃고는 배낭의 옆 주머니에서 작은 물통을 꺼냈다. 내가 물을 먹여주자 좀 넘어간 듯 다시 생기가 도는 린. 린은 다시 빵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긴 맛있나 보군. 나는 고개를 젓고는 길을 걸었다. "신이시여…." 나는 진심으로 신께 기도를 드렸다. 평소에는 가지고 다니지 않는 십자가. 나는 목에 걸어둔 목걸이 십자가를 두손에 움켜쥐고는 진심으로 신께 기도를 드렸다. 제발, 제발! "안녕 하십니까!" 나는 당당하게 외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도장 안.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쉬이익! 순간 느껴지는 기척. 으아아! 나는 급히 몸을 숙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내 머리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목검하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목검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살기등등한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한 사범 님과 불쌍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진 관장님. "아, 안녕하셨습니까, 한 사범 님.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 지십니다." 내 말에도 여전히 싸늘한 분위기의 한 사범 님. 크흑. 여자에게 이리 쫄아야 한다니. 아냐. 한 사범 님은 여자가 아니다. 저 무시무시한 목검의 위력은 분명 여자의 것이 아니야. "목검 들어!" "히엑!" 한 사범 님의 앙칼진 고함소리에 나는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목검을 냉큼 집어들었다. 그리고 내가 날아오는 머리 방어구. 나는 급히 방어구를 뒤집어썼다. 순간 방어구에서 철갑들이 생기며 내 몸을 살짝 감쌌다. 신식 방어구. 그때 방어구는 착용하지도 않은 한 사범 님이 내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왜 이런 시련을! "으아앗! 관장님! 말려줘요!" 검은 마흔을 넘긴 나이답게 엄청난 기세였다. 이런 무술가들의 현역 선수 생활은 40살까지. 그 이후로도 여러 대회에 참가는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올림픽이나 중요한 공식 대회에는 대부분 40세 이상은 참가를 거부. 그 이유는 노쇠해서가 아니라 후배들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요즘 시대에 4, 50대는 한창의 나이다. 한 사범 님은 42세. 그리고 그 증거로 한 사범 님은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순식간에 내가 쇄도하셨다. "어디 혼좀 나라!" 한숨을 내쉬고 계시는 진 관장… 저 인간이! 어찌 자신의 딸도 통제하지 못한단 말야!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내가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어? "음?" "어?" "뭐야?" 나와 한 사범 님의 대련, 정확히 말해서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구경하려 시선을 모으고 있던 사람들이 의문에 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한 사범 님이 봐주신 건가? 쉬익! 엄청난 기세로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목검. 아니, 페인트. 중간에 가슴으로 바뀐다. 나는 급히 옆으로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내 생각대로 중간에 괘도를 바꿔 내 가슴이 있던 자리를 지나가는 목검. 그리고 내 검이 한 사범님의 옆구리로 날아갔다. "읏!" 급히 몸을 회전하며 목검을 돌려 내 공격을 막는 한 사범 님. 뭐, 뭐야? 내가 언제 이렇게 세진 거지? 전에는 알지 못했던 공격들이 머리 속에서 저절로 이해가 된다. 거기다 요새는 태권도고 뭐고 한 적도 얼마 없는데? 실력이 늘 이유가 없다고. 내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한 사범 님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빠른 속도로 휘둘러지는 목검. 나는 머리 속에서 공격의 행로가 읽히는 것을 느끼며 공격들을 막아갔다. 반격까지는 몰라도 전에 맞기만 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 거기다 한 사범 님은 올림픽 은메달 리스튼데? "뭐, 뭐야!?" "현진이가…." 주위에서 의문에 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관장님도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당황한 얼굴이던 한 사범 님이 입을 열었다. "김현진. 2단 아니었나?" "정확히 준 2단이었습니다." "혹시 그 동안 다른 도장에 다녔나?" "전혀. 태권도나 아주 약간." "………." "………." "이상하군." "훗. 드디어 제 천재성이 눈을 뜨는 모양이군요." 순간 살기가 번뜩이는 한 사범 님의 눈. 윽? "호… 그래. 네놈 잘났다. 이제 진짜로 해주마." "예?" 순간 엄청난 속도로 한 사범 님의 목검이 휘둘러졌다. 훠, 훨씬 빠르잖아. 왼쪽이야. 머리 속에서 조잘거렸다. 왼쪽! 나는 왼쪽으로 검을 막아갔다. 퍽! "컥." 나는 왼쪽 가슴을 강타 당하고는 신음을 흘렸다. 으윽. 분명히 읽기는 했는데 몸이… 퍽! 퍽! 퍽! 퍽! 퍽! 엄청난 속도로 나를 두들기는 한 사범 님. 분명히 머리는 공격 루트를 알고 있었지만 내 몸이 따라가지 못했다. 항상 한 사범 님의 공격보다 한 템포 늦게 휘둘러지는 내 검. 덕분에 나는 온몸을 골고루 얻어맞고는 헉헉거렸다. "이상한데? 내 공격을 읽고 있는 것 같군. 그런데 왜 막지는 못하는 거지?" 나, 나도 궁금해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한 사범 님은 생각은 나중에 하자는 듯이 다시 목검을 곧추세웠다. 제길! 차라리 한 대라도 때리고 죽자!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한 사범 님의 허리를 베어 가는 내 목검. 하지만 한 사범 님은 몸을 재빨리 움직였다. 왼쪽으로 반 돌고 검을 휘두른다! 머리 속에서 한 사범 님의 다음 행동이 읽혀졌다. 뭐지? 하지만 역시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몸. 나는 좀 늦게 검을 휘둘렀다. 약간 아슬아슬하게 내 공격을 피하는 한 사범님. 상당히 놀랐다는 얼굴. 그리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시는 한 사범 님. 움직임은 읽혀졌다. 나는 사범 님과의 거리를 좁히며 검을 짧게 휘둘러 베어갔다. 턱. 공격이 엇갈리며 나와 한 사범 님의 몸이 밀착되었다. 그, 그런데… 내 공격이 옆으로 흘렀고 덕분에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내 손이 한 사범 님의 가슴에 닿았다. 헉!? 순간 침묵에 잠기는 주위. 한 사범 님은 얇은 검도복 하나만 입고 계신다. 거기다 땀에 약간 젖어있지? 흠… 요새는 의학 발달로 30대나 40대나 미모든 몸매든 별 차이가 없다. 20대하고는 좀 차이가 있지만. 참고로 한 사범 님은 상당한 미인이시다. 흠… 고로 40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는 사람들이 보통 부부들의 사람들의 1/3이다. 한 사범 님은 아직 미혼이시다. 그런데 지금 고의는 아니고 손등이기는 하지만 내가 한 사범 님의 가슴을 누르고 있다. …… 죽었다. "죽어!!!!!!!!!!!!" "끄아아악!" 순간 엄청난 기세로 휘둘러진 목검에 나는 머리를 강타 당하고는 의식을 잃었다. 이번에는 읽지도 못했어. 제길. 그냥 평생 이곳을 오지 않는 건데. 아아, 노래하는 새들이 날아다니네? "머리가 부었어." "………." "불쌍하군." "………." "한 사범 님은?" "씩씩거리면서 사무실로." "………." "정말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지?" "그런가봐." "………." 으음? 나는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 내 눈앞에 안쓰러워 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두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음…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 2단의 진태 형님과 1단의 민지 누님. "허억!?" 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크으… 내 머리. 나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는 신음을 흘렸다. 으으… 정신을 잃고 있었나? 시간을 보니 4시. 1시간 정도 이러고 있었던 모양이네? 몸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으으. 머리가 부었어. 역시 한 사범 님의 공격 위력은 방어구의 방어력을 뛰어넘는다니까. "일어났냐? 불쌍한 것. 어쩌자고 아직도 소녀시절, 20대의 순수를 간직하고 있는 한 사범 님의 그… 으음." "맞아. 요새 결혼이나 할까 하고 나에게 물으시던 분인데…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야." "사범 님도 충격이 크셨던 게지." "…… 나 살아있지?" "그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눕혔다. 음… 매트 위인가? 푹신하군. 나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살았다. 정말 죽는줄 알았어. 내 머리를 강타하실 때의 한 사범 님의 살기는 가히 페이린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였어. 흑. 나는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어쩌면 좋지?" "…… 명복은 빌어줄게." 제길. 나는 진태 형을 노려보았다. 흑흑. 그때 민지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실력이 왜 그렇게 높아진 거야? 정말 엄청났어. 한 사범 님의 끔찍한 공격들을 그렇게 막아내다니." "맞다. 어떻게 된 거냐? 나보다 나아 보이더라." "뭐?" 아, 맞다. 정말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한 사범 님의 공격을 예상하고 읽을 수 있었던 걸까? 으음… 좋아! "강 사범 님을 만나야겠다!" 한번 확인을 해봐야지. 아무래도 이상해. 나는 벌떡 일어나서는 문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때 내 어깨를 붙잡는 진태 형의 손. "한 사범 님께 사과는 하고 가라. 아니면 나중에 더 맞는다." "으음." 나는 신음을 흘리다가 사무실로 걸어갔다. 뒤에서 쯧쯧거리는 사람들. 나는 조심스레 사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멍하니 앉아 계시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내는 한 사범 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 고, 고개를 들면 안돼. 나는 긴장하며 한 사범 님의 반응을 기다렸다. 의자를 끄는 소리. 헉! 이, 일어나셨다. 나는 초긴장 상태에 돌입하며 살짝 고개를 들었다. 나를 노려보고 계시는 한 사범님. "죄·송·하·다·고?" "죽을죄를 졌습니다!" 나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한 사범 님. 손에 목검만 들고 계셨으면 죽었겠다. 제길.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살기가 점차 증폭되고 있어!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빨리 머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아! 맞다! "호호. 그래. 현진 군. 잘 가."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럼." "그래. 호호. 언제 꼭 들리고." "예, 예." 나는 입을 쩝 벌리고 있는 관장님과 관도들 일동의 시선을 뒤로하며 급히 도장을 빠져 나왔다. 한 사범 님이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으음… "하, 한 사범님! 괜찮으신 거예요?" "수, 수진아. 괜찮은 거냐?" "호, 혹시 충격이 너무 커서…." "호호호." 도장 안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뒤로 한 채 나는 거리로 뛰쳐나왔다. 깨끗한 바깥 풍경과 화려한 조명들. 가로등의 빛이 거리를 휘감고 있었다. 후… 어, 어쨌든 살았다. "그런데 이제 어쩌지?" -*---------------------------------------------------------------------------------------------------------------------------- 정말 어떻게 해야한단 말이냐. 나는 십자가를 꼭 움켜쥐며 한숨을 쉬었다. 아아. 교회를 좀 열심히 다닐 것을. 한달에 어쩌다 한번, 일년에 10번 가면 기적일 정도였으니… 어쩐다? 어쩌지? 어떻하지? 어쩌면 좋아!? 나는 절망의 한숨소리를 내쉬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태권도장으로… 어쨌든, 우선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해 봐야겠어. "무슨 걱정 있나?" "대련을 부탁드립니다." "흐음?" "우왓! 현진이 형이 드디어 미쳤어!" "어, 어떻하지?" 아이들의 비명소리. 나는 한숨을 쉬고는 강 사범 님을 바라보았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강 사범 님과 어르신들. "별일이군. 전에 대련을 했을 때 실력이 늘기는 했었다만… 또 특훈이라도 했나?" 강 사범 님은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잠시 내 눈을 들여다보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아. 나는 강 사범 님과 마주섰다. 묵직한 기도를 풍기며 나를 노려보시는 강 사범님. 대련을 할 때는 저렇게 살벌해 지신 다니까. 나는 살짝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강 사범 님을 마주 보았다. 호오? 이상하게 전보다 기도가 잘 느껴져. 으음… 이렇게 보니 강 사범 님도 꽤 미남이시지. 어? 잠깐. 강 사범 님은 47세. 독신. 잘생겼다 할 외모와 뛰어난 실력. 오옷!? 순간 전광석화 같은 강 사범 님의 돌려차기가 내게 날아왔다. 빠, 빠르다. 하지만 역시 움직임은 읽을 수 있어. 나는 몸을 살짝 숙이며 손으로 발차기를 밀어내며 공격을 흘려보냈다. "음?" "와…." 순간 나는 몸을 한바퀴 돌리며 발차기를 날렸다. 역시 공격 속도는 변하지 않았어. 쉽게 피하시는 강 사범님. 그러니까 신체적 능력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는 소리? 이상하군. 나는 간단히 피하시는 강 사범 님의 회피로를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놀란 얼굴로 뒤로 조금 물러섰다가 발을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내려찍는 강 사범님.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큭. 역시 한 사범 님보다는 강 사범 님이 훨씬 위협적이야. 나이도 조금 많으시고 한 사범님의 흉기는 검 하나지만 강 사범 님은 온몸이 흉기… "대단하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돌려차기. 나는 뒤로 물러서며 역시 돌려차기를 넣었다. 내 몸을 스쳐 지나가는 강 사범 님의 공격. 그리고 내 발차기가 강 사 범님의 어깨에 작렬했다. "큿?" "………." 순간 침묵에 잠기는 도장. 아까와 비슷하군. 상황은 좀 다르지만. 강 사범 님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강 사범 님.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언제 실력이… 진짜로 해주지." 윽. 이건 움직임을 대충 읽었기에 가능한 거란 말입니다! 순간 엄청난 속도의 공격들이 날아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공격을 읽기도 힘들 정도의 빠르기. 역시 한 사범 님보다 훨씬 뛰어나시군.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공격들을 막아갔다. 공격은 읽을 수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몸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한단 소리. 그렇다면 최대한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철저한 실전.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퍼억! 가드한 내 가슴을 강타한 공격. 엄청난 충격에 나는 약간 떠올랐다가 내려섰다. 그리고 곧바로 날아오는 돌려차기. 나는 살짝 움직이며 공격을 흘렸다.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돌려차기. 위험했다. 강 사범 님의 얼굴이 상당히 굳어져 있었다. 제길. 너무 힘들어. 또 내게 날아오는 발에 얻어맞으며 나는 신음을 흘렸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철저한 실전에서 얻은 교훈. 차라리 피해를 최대한 줄여 맞고는 더 큰 타격을 입힐 공격을 해야지... 상대가 안돼. 처라리 한 부분을 맞으면서 반격을 날려야겠어. 섀도우 월드 속에서… 음? 아… 그, 그렇구나! 실전 경험! 섀도우 월드 속에서의 전투 경험이 머리 속에 남아있는 거야. 몸은 아니더라도 영혼, 머리, 뇌만은 전투를 많이 치렀다는 소리. 전투 경험이 머리 속에 쌓여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하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하면… 나는 간신히 공격을 흘려보내며 뒤로 물러났다. 으으… 얻어맞은 곳이 욱신거린다. 그러고 보니 현실에서도 주위에 신경을 많이 쓰고 다녔지? 어쩌면 그것 때문에 육감이 좀 발달했을 지도. 아니, 이런 식스센스와 비슷한 기능은 모르겠고… 어쨌든 전투 경험 때문인가? 몸은 몰라도 머리는 알고 있다 이런 건가? 그럼 몸만 좀 단련하면 실력이 많이 늘 수 있어! "훗." 나는 약한 웃음을 흘리고는 내게 날아오는 강 사범 님의 공격에 집중했다. 내 가슴. 나는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무방비의 내 왼 가슴을 강타하는 공격. 그리고 내 몸이 빙글 돌았다. 회전. 이 회전을 이용해 나는 오른 주먹을 강 사범 님의 몸으로 날렸다. 강 사범 님의 머리카락을 스치는 내 정권. 강 사범 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쳇.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얻어맞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주, 죽을 것 같아. "으으…." 나는 신음을 흘리며 강 사범 님을 바라보았다.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강 사범님. 그리고 순간 진지해 지는 사범 님이 얼굴. 흠… 확실히 관점을 바꿔서 보니 잘생기셨단 말야. "오랜만이군. 후후. 왜이리 실력이 늘었는지는 몰라도 재밌어. 그럼 정식으로…." "잠깐!" "음?" 내 고함소리에 강 사범 님이 움직임을 멈췄다. 좋아. "한가지 물어도 될까요?" "뭔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결혼할 생각 없으세요?" "………." 순간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며 내게 걸어오시는 강 사범님. 우웃. 하, 한 사범 님보다 더하다. 나는 잠시 아까 검도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무릎꿇고 있던 나. 그때 내가 떠올린 좋은 생각. "결혼상대 소개!" "뭐야?" 약간 흔들리는 한 사범 님의 목소리. 좋아! "결혼 상대를 소개시켜 드리죠! 좋은 분으로!" "………." 약간 붉어져 있는 한 사범 님의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예! 성공이닷! "책임지고 결혼을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 "저… 싫으십니까?" "뭐? 아, 아니… 저, 저기 그런데 이왕이면…." "마음에 내키는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내 말에 상기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기는 한 사범 님. "음… 잘생기고, 나와 같은 40대면 좋고. 검도나 무술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성격도 좋고. 음… 그러면… 결혼 경력은 없고. 또…." "………." 맙소사. 힘들지도 몰라. 나는 내 인물 프로필을 뒤져보았다. 없어. 저 조건에 들어맞는 조건을 없었다. (이때는 강 사범 님이 잘생겼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공포의 대상이었을 뿐) 내가 침묵하자 한 사범 님이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안… 될까?" "좋습니다. 찾아보죠." "어머. 정말?" 평소 대하던 무지막지한 모습이 아닌 사근사근하고 정말 소녀 같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목소리와 행동. 하긴 한 사범 님이 미인은 미인이야. 얼굴에 잔주름도 없고. 신기하다니까. 하긴 초연 씨 어머님도 50대 후반이신데 잔주름도 별로 없으시고 미인이시지. 나는 기뻐하던 한 사범 님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보니 강 사범 님이 그 조건에 딱 들어맞아. 하지만… 지금 이 기세는 뭐지? "후후. 현진 군. 너무 기어오르는군. 좀 맞아서 정신을 차려야겠네. 누구는 진지한데 농담을 걸어? 거기다 지금 내가 독신이라고 비꼬는 건가?" 망했다. 이말 오랜만에 하는군. 아아, 신이여. 나는 해탈한 마음으로 강 사범 님의 공격을 지켜보았다. 읽을 수가 없어. 한 사범 님보다 더 하군. 한 사범 님처럼 분노로 이성을 잃어서 한계치 이상의 힘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실력이라는 것이 다르지만. "윽." 나는 간신히 공격을 가드하고는 뒤로 나가 떨어졌다. 제길. 나는 내게 내리 찍혀져 오는 강 사범 님의 발뒤꿈치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일진이 별로 좋지 않군. 나는 재빨리 몸을 굴렸다. 퍼억! 엄청난 소리와 함께 매트에 박히는 강 사범 님의 내려찍기… 맞았으면 뼈 한두 대 나갔겠다. 나는 초긴장 상태로 돌입하며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퍼억! 엄청난 충격. 나는 오랜만에 허공을 부유했다. 으윽… "와! 또 난다!" "에이, 잘 했는데 결국은 저렇게 되는구나." 아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나는 듣지 못했지만 모여있던 어르신들도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길. 나는 또 얻어터져 나가떨어졌다. "대단하군. 저렇게 늘다니. 강 사범을 빼면 우리 도장에서는 최고 수준일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많이 늘었군." "하지만 저렇게 얻어터지는 것은 여전하군. 진철이가 온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지만." "쯧쯧. 그러니까 괜히 결혼 어쩌고 하는 농담을 해서 말야. 요새 같이 독신으로 살던 놈들이 다 결혼을 하니까 심기가 거슬리던 것 같던데 말야." "무술가의 길을 이해할 여자가 없다나 하면서 한탄을 하더니." "현진 군이 불쌍하군. 시기를 잘못 맞췄어." 현진이 듣지 못한 도장 어르신들의 대화였다. "괘, 괜찮아요?" "아아… 천사가 다 보이네. 천사가 정말 있기는 했구나." 순간 내 머리를 강타하는 충격. 컥? 나는 정신이 번뜩 드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으으윽!" 나는 엄청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아아… 옴 몸이 욱신거려. 쑤셔. 혹시 어디 부러지지는 않았나? 나는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좀 어두워진 도장. 아무도 없네? 그리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초연 씨. 오오! 천사의 강림이라 생각했었는데 초연 씨였나? 그리고 내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강 사범 님이겠지. "음… 어떻게 된 거죠?" 내 갈라진 목소리에 안쓰러워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초연 씨. "작은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셔서… 기절했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아…."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강 사범님을 바라보았다. 나와 같이 매트에 앉아 계시는 강 사범님. 으윽. 그러고 보니 크게 한 대 맞은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군. 나는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으윽… 너무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꼴로… 약속이 있었는데… 지금이 몇 시야?" 8시가 넘었군. 일요일이라 도장 문을 좀 일찍 닫았나 봐. "괜히 사람 열 받게 한 건 자네였네. 실력이 상당히 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감히 그따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시는 강 사범님.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 안돼. 직접적으로 물어서는 그대로 저승길이다. 다른 길을 모색해야돼. 나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초연 씨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런 눈으로 나와 강 사범 님을 바라보고 있는 초연 씨. "좀 늦었죠?" "아, 아뇨. 지금 가면… 지금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니까…." 이런.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으윽… 중간에 병원에 들려서 치료 캡슐이라도 이용해야겠군. 초연 씨가 나를 부축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따라 일어나는 강 사범님. "나도 오랜만에 형님과 형수님이나 만나야겠군. 같이 가세." "저 바이크 타고 왔습니다."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내 바이크. 요새 길거리 주차는 꿈도 못 꾼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시는 강 사범님. "바이크? 현진 씨 바이크 타고 다니세요?" "아, 예. 얼마 전에 하나 샀죠." "으음… 셋은 못타나?" "바이크에 무슨 세 명이…." 내 말에 한숨을 내쉬는 강 사범님. "나 혼자 택시를 타고 가야겠군. 초연이는 자네가 데리고 가겠지?" 나는 초연 씨를 돌아보았고 초연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처음으로 둘이서 타는 건가? 나는 약간 비틀거리며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병원에 들렸다 가겠습니다." "알겠네." 도장 정리를 하시는 강 사범님을 뒤로하며 나와 초연 씨는 거리로 나섰다. 나는 얼굴에서 느껴지던 이상한 느낌이 사라지자 눈을 떴다. 이미 가슴을 지나 다리까지 내려간 이상한 액체. 나는 한숨을 쉬고는 잠시 더 기다렸다. 곧 액체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는 앞에 있는 손잡이를 돌렸다. 이상한 소리와 함께 열리는 치료 캡슐. 밖에 초연 씨가 앉아있었다. "아, 끝났어요?" "예. 좀 늦었네요. 쳇. 얼마나 힘을 실어서 팼으면 20분이나 걸리는지…." 원래 치료 캡슐의 평균 치료시간은 약 7분 정도이다. 이용료는 항상 10만원이지만. 흠… 어쨌든 이익을 보기는 봤군. 그런데 치료 캡슐을 이용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평소에는 돈 아낀다고 치료 캡슐만은 죽어도 이용하지 않았는데 말야. 치료 캡슐은 대부분의 병원에 비치되어 있는 치료 도구로 타박상 등의 외상에만 효과가 있는 치료기다. 안에 들어가면 젤리와 비슷한 액체가 몸을 감싸고는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치료를 해주는 신기한 기계. 치료비가 10만원으로 좀 비싸기는 하지만 요새 외상은 전부 이 기계로 치료한다. 뼈가 부러져도 뼈를 맞춘 다음에 이 기계에 들어가면 한 시간이면 어느 정도 달라붙는 다고 하더니… 나는 초연 씨가 건네주는 내 옷들을 받아들고는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 캡슐로 타이트를 입고 들어가다니… 왜 캡슐들은 다 타이트를 입어야 하는 거지? "가죠." 나는 초연 씨와 함께 병원 옆의 주차장으로 나왔다. 보통 도시의 주차장들은 대부분이 병원의 옆에 위치해 있다. 길거리 주차가 불법이니 응급 환자들을 배려한 행동한 거라고 할 수 있는 방법. "와…." 내 바이크를 보며 탄성을 흘리는 초연 씨. 나는 미소를 짓고는 바이크의 안전 장치를 풀었다. 바이크를 감싸고 있던 도난 방지용 강철 갑주들(솔직히 이런 엄청난 보안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다. 요새 반쯤 돈 놈이 아니면 이런 바이크나 차량은 절대 훔치지 않는다. 이런 갑주가 없어도 전기 충격 등등의 기능에 설사 그것들을 뚫고 훔치더라도 차량 내부에 센서가 들어 있어서…) 이 사라지자 나는 초연 씨를 안아들고는 바이크의 앞쪽에 앉혔다. "아?" "빨리 가야겠죠?" 속도를 높이려면 앞쪽에 앉혀서 확실히 보호하는 것이 좋지. 나는 스스로 납득하며 좀 붉어진 얼굴로 앉아있는 초연 씨에게 기초 안전 장치를 서리해 주고는 바이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로 나오자마자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바이크. 머리카락 휘날린다… 역시 끈으로 묶고 다니는 것을 생각해 봐야겠어. 아니면 헬멧이라던가… "뭐 특별한 전달 상황은요?" 내 질문에 내 가슴에 등을 기대고 내 팔을 붙잡고 있던 초연 씨가 앞으로 가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대답했다. "일이 5가지가 있어요." "5가지? 상당히 많군요." "예. 그중 3개가 몬스터 퇴치고 하나는 PK 범 퇴치. 또 하나는 어떤 길드를 잡는 일이에요." 길드? 다른 건 이해해도 길드는 좀 그렇군. "길드라고요?" "예. 하르츠 길드라는 곳인데… 길드원은 30명 정도죠. 엘프 암거래 전적도 있고 성폭행 미수에 몰려다니면서 저렙의 유저들을 공격하기도 하는… 암흑 길드 연맹이라는 곳의 하급 길드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길드원 전원이 소멸의 벌을 받았죠." 엘프 거래?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임무와 몬스터 퇴치 중에 한 임무를 저와 칼이 맡죠. 나머지는 미토스들에게. 저와 칼이 한 팀, 미토스들이 한 팀으로 움직이기로 했으니까요. 요즘 미토스 일행이 길드에 쫓기고 있는데 또 길드를 공격하라고 할 수는 없죠. 몬스터 퇴치 중에 대륙 중앙에 가까이 있는 걸로 골라주세요." "예. 임무 하나는 도도리 시의 근처에 있는 검의 무덤이라는 던젼에 변종 템플러 가디언들이 출몰한다고 하고… 다른 둘은 좀 먼데…." "아무거나." 나는 내게 안겨 있는 초연 씨에게서 포근한 느낌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후… 검의 무덤? 전에 지도에서 봤던 이름이군. 내일 회사에 들린 후에 가야겠어. 칠흑 같은 어두움을 밝히는 화려한 빛들이 우리 뒤로 흘러가고 있었다. "레지엘." "예, 칼." "우리가 왜 여기에 들어왔을까요?" "후후. 아까 도깨비 한 놈을 쫓아서 들어왔지 않습니까." "………." "………." "제길." "하아…." 칼과 레지엘은 슬퍼하는 얼굴로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상한 템플러 가디언을 바라보았다. 이런 신전 계통의 던젼에 존재하는 몬스터. 생전 기사들이 이렇게 변했다 하는데… 능력은 천차만별.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칼과 레지엘이 들어와 있는 검의 무덤은 적정 레벨 230의 던젼이었고 템플러 가디언은 아무리 강해도 레벨 250을 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둘이 이렇게 질색을 하는 이유는… "왜 여기에 변종이 있는 것일까요?" "………." 보통 템플러 가디언의 색은… 약간 푸른색 갑주에 둘러 쌓여 있는 모습. 따라서 푸른빛. 하지만 이 템플러 가디언들은 황송하게도 붉은 빛을 내며 칼과 레지엘을 반기고 있었다. 변종이 틀림없었다. 둘은 지금까지 이런 이상한 색의 템플러 가디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망할 도깨비." 칼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이미 도망쳐 버렸지만 칼과 레지엘이 검의 무덤에 들어온 이유는 웬 도깨비 한 녀석 때문이었다. 서양 신화에 기초를 둔 섀도우 월드지만 몇가지 동양의 괴물들도 존재하니 그 중 하나가 바로 도깨비.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아이템을 떨궈 주는, 유저들이 굉장히 사랑(?)하는 몬스터이다. 한번 보기도 힘들 정도의 희귀성을 자랑하는 몬스터. 때문에 칼과 레지엘은 도깨비를 발견하고 죽어라고 쫓아 왔고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변종 템플러 가디언 3마리. 이길 수야 있겠군요." 스르릉. 레지엘의 말에 칼은 자신의 검을 뽑는 것으로 대답했다. 변종이라 해도 이길 수는 있다. 레지엘은 300대 후반의 성기사고 칼은 290. 곧 300이 되어 마스터에 들 레벨이다. 그 직업의 모든 기술을 익히게 되는 직업의 마스터 레벨인 레벨 300. 물론 그 뒤로도 레벨은 계속 올라가 지금 레벨 500에 가까운 플레이어도 있지만… 이 둘도 이 정도의 던젼에서 죽을 정도는 아닌 강자들이다. "가죠." 레지엘이 성검을 뽑으며 말했다.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 성검. 그리고 템플러 가디언들도 검을 뽑아들었다. 검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나도 끼지." "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레지엘과 칼은 대경실색해 뒤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회색머리에 싸이드를 들고 있었다. 거대한 낫. 하늘의 악마. 천악이었다. "천악?" "오랜만에 보는군. 나도 한몫 끼지." 천악은 미소를 흘리며 공간의 낫을 회전시켰다. 거대한 날이 바닥을 스치며 날카로운 소성이 들려왔다. 천악.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서버 최고의 강자다. "받아들이지." 천악이 갑자기 중얼거리자 레지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템플러 가디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 레지엘은 파티 신청을 보냈고 천악은 받아들였다. 칼은 약간 불만스러워 하는 얼굴이었지만 별말 없이 갑자기 나타난 천악 덕분에 잠시 주춤하고 있는 템플러 가디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엄청난 속도로 따라가는 레지엘과 천악. 템플러 가디언들과 세 유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검의 무덤에 있다고?> <칼-예. 천악이라는 분도 함께 있습니다.> 천악까지? 별일이군. 뭐,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다. <그럼 그 동굴은 너희 셋이서 해결해. 네가 맡았다고 해둘게.> <칼-알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구수한 빵 냄새가 풍기는 도시. 후… 오늘 아침에 회사에서 나머지 두 임무는 미토스들에게 넘겼고… 그럼 내가 해야할 일은 하르츠 길드를 없애는 것과 변종 오거 퇴치인가? 하르츠 길드의 일은 뒤로 미루고 변종 오거를 먼저 없애야겠군. 한 사범 님의 일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일이 중요하다. 며칠의 여유는 있으니…. "코코넛." 나는 내 앞에 자리잡고 있는 허름한 빵 가게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흠… 미시안이나 실비아가 있을지 모르겠군. 전에 여기서 만나기로 했으니… 적어도 프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겠지.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 안 받아!" 프렌의 고함소리와 함께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는 밀대. 나는 한숨을 쉬며 밀대를 낚아챘다. 쯧쯧. 미쳤어. 돈 좋은 줄 모르고 손님을 내쫓으려 하다니. 나라면 절대로 못할 짓이지. "접니다, 프렌." 약간 싸늘한 내 목소리에 프렌이 주방에서 걸어나왔다. 나를 알아보고는 눈썹을 들어올리는 프렌. 가게 안에는 미시안이나 실비아 중 아무도 없었다. 어디 놀러갔나? 미시안 성격에 여기에 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왔나?" "흠… 미시안이나 실비아는…." 내 질문에 프렌은 카운터에 올려져 있던 빵 중에 하나를 던져주며 대답해 주었다. "나갔네." 나는 날아오는 빵을 받아들고는 테이블에 앉았다. 프렌 역시 테이블에 앉아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미시안 그 친구가 그 엘프 아가씨에게 꼼짝을 못하더군. 음산하게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에 비해서 말야. 그 엘프 아가씨, 처음에는 내게 빵 만드는 법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동시에 미시안 그 친구가 인상을 쓰게 만들더니 이튿날에는 미시안 그 친구에게 휘파람을 가르친다고 야단을 떨고…." 안 봐도 뻔하군.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미시안 성격에 여자를 그리 가까이 하는 타입이 아니다. 보통 무시를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게 대했을 텐데 이번에는 실비아가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니… 당황해 하는 미시안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군. 휘파람을 가르치려 했다고? 미시안도 다른 다크 엘프들처럼 휘파람을 불지 못한다. "후… 지금은 어딨죠?" "글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둘이서 난리를 치더니 한 두 시간 전쯤에 나갔네. 놀러간다고 가더군. 어째 좀 어울린다 싶은 커플이더군." "…… 킥." 나는 피식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래서야… 혼자 가야겠군. 헤어지기 전에 실비아에게 미시안이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한 것이 통한 건가? 반쯤 농담이었는데… 아무래도 미시안이 상당히 곤란해하겠군. 하지만 그렇다고 미시안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뭐, 베르시나도 잊을 겸 어울리는 것도 좋겠지. 어차피 찾기도 힘들고. "그럼 가보죠. 그 둘이 돌아오면 한 3일 정도 후에 온다고 해 주세요. 좀 힘든 일이 있다고." "그러지. 10실버야." "…… 이거 돈 받는 거였습니까?" "물론." 나는 이미 반쯤 베어먹은 빵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돈 벌레 같기도 한데… 나는 한숨을 쉬고는 품속에서 은화를 꺼내 던져주었다. 미소를 짓는 프렌. 그럼 바이커리로 가볼까? 그 오거가 그 근처에 나온다고 했지? 내가 막 가게를 나가려고 할 때 프렌이 나를 불렀다. "한." "음?" 내가 의아해 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잠시 고민하는 프렌. 뭐야? 잠시 후 프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레지엘과 어떤 사이인가?" 음? 레지엘하고? 저걸 왜 물어보는 거지? "게임에서 만난 친구. 현실 이름까지는 알고 있는 사이죠. 현실에서도 길거리에서 한번 만난 적은 있고. 왜요?" "흠… 그렇군. 알았네." 뭐야? 나는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가 가게를 나섰다. 그런데 왜 저런걸 물어본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도도리 시의 텔레포터 협회로 걷기 시작했다. 꽃의 도시 바이커리. 관광 도시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도시 대부분의 곳에 꽃밭이 있고 도시 밖, 성벽의 주위에도 온통 꽃밭이라 붙여진 이름. 꽃의 도시. 바이커리 시를 벗어나 사방 100m는 안전지대. 모두 꽃밭이다. 그리고 그 꽃밭에는 수많은 커플들이 모여 있었다. "쳇." 꽃밭에 앉아 얘기를 나누거나 심해서는 키스에 서로 껴안기까지 하는 사람들. 나는 짜증을 부리며 성문으로 다가갔다. 다른 도시에 비해 좀 낮은 성벽이었다. "냐…." 린이 주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이제 가을인데 나비가 날아다녀? 이곳이 좀 이상하게 따뜻하기는 하지만… 뭐, 가상 현실인데 어떠랴. 마법이라도 이용했나 보지. 나는 주위에 널리고 널린 커플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성문으로 다가갔다. 바이커리 시의 남쪽에 위치한 숲을 탐색하고 오느냐고 이렇게 걸어들어오는 것인데… 열받는군. 언젠가 반드시 페페와 함께 오고 말리라. 성문을 지키고 있던 NPC 경비병들은 나를 보고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평범 모드로 돌아와 있으니까. 성벽을 지나 도시 안으로 들어선 나는 역시 이어지는 꽃밭들을 보며 감탄을 토했다. 커플들이야 거의 없었고 솔로들도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행이군. "그럼… 모험가 길드로 가야하는 건가? 이 지역에서 꽤 유명하다고 하니까 모험가 길드에 뭔가 정보가 있겠지." 오거들의 정확한 출몰 위치를 알아보기로 결심한 나는 중앙 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시의 중앙으로. 도도리 시의 거리와는 많이 다른 거리. 특히 많이 다른 것은 도도리 시는 빵집이 많았다는 것에 비해 이곳은 꽃집이 많다는 것. <살아있는 생화! 완벽한 보존 마법이 걸려있습니다. 연인에게 사랑의 선물을!> 어쩌고 하는 광고 글귀들… 나는 피식 웃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변종 오거라. 수가 얼마인지가 관건인데? 두 마리 정도야 어찌 해볼 수 있겠지만… 세 마리가 넘어가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확실히 보통 오거도 상대하기 힘든데 변종 오거라면… 특히나 내가 가지고 있는 OPG. 나는 한숨을 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중앙 광장. 확실히 주위에 작은 분수들이 잘 배치되어있고 고급 주점에 식당, 그리고 수많은 벤치들을 보니 중앙 광장이 확실한 모양이었다. "모험가 길드…."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모험가 길드를 찾았다. 안보여. 나는 내 앞에 모여있는 상당수의 사람들, 거의 수백에 이르는 사람들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왜 이렇게 모여있어? 가게들 간판을 보기가 힘들잖아. 어쨌든 이쪽에는 모험가 길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제길. 왜이리 몰려있는 거지? "음?" 사람들을 한창 뚫고 지나가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 볼게 있다고 이러고 있다냐? 그리고 나는 사람들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켁?" 내가 바라본 것은 중앙 광장의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분수였다. 그리고 그 분수대 앞에 일단의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모두 뛰어난 외모. 그리고…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듯한 여자… 연녹색의 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는… 그야말로 천상의 미모였다. 외모를 조작하기 쉬운 게임 속이라지만 저런 외모는… 소, 솔직히 말해서 페페보다… 헉!?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지? 사람들이 넋 놓고 볼만하군. 그런데 저 여인네들은 저기 모여서 뭐 하는 거야? "실례합니다만 저 여자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내 질문에 내 옆에 서 있던 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상당히 젊어 보이는 외모. 그저 평범한(여기서 평범함은 상당히 준수한 외모이다) 외모의 소유자였다. "아, 모르십니까? 레이디스 길드의 사람들이죠. 여성 유저들만 있는 그 길드 말입니다. 저 여자 보이시죠. 저 연녹색머리… 저 사람이 길드장인데… 나프네라고 랭킹 39위에… 모두가 공인하는 섀도우 월드 내 최고의 미인입니다. 저런 외모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합니다 정말… 저 여자보다 더 강한 여성 유저들이 있기는 하지만 저 여자를 따라가지는 못하죠." 뭘 못 따라간다는 거지? 확실히 저 여자보다는 레벨이 높은 씨아하고 비교를 하자면… 잠시 생각하던 나는 얼굴을 약간 경련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따라가지 못해. 그런데 저 여자들은 왜 저렇게 모여있는 거지? 그때 그 연녹색머리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페넬리. 아직 다 모이지 않은 건가요?" 헉!? 천상의 목소리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주위의 남자들도 탄성 혹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음성은 변조가 불가능하지. 적어도 목소리만큼은 진짜라는… 페페의 목소리보다 약간, 아주 약간 괜찮은… "아직 리카가 오지 않았습니다." "먼저 출발하죠. 영리한 아이니까 잘 쫓아오겠죠." "예. 출발한다." 부관으로 보이는 여자의 말에 약… 31명. 31명의 여자들은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아까 내게 설명을 해주던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끼고는 설명을 시작하는 마법사. "아, 이 북쪽의 숲에 출몰하는 변종 오거들을 퇴치하러 가는 거지. 수가 3마리 이상이라고 해서 레이디스 길드에서 나선거지. 솔직히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니, 이기겠지. 오거 세 마리야 저 길드에서 나서면… 그리고 원래는 길드원의 숫자가 몇 천에 달하는 길드니 흠…." 그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쉬워하는 눈으로 멀어져 가는 나프네라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면 따라가지 그래요?" "그게 안돼… 저 길드에서는 자신들의 행동에 남자들이 쫓아다니는 것을 싫어하거든. 쫓아 갔다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흠… 그렇군… 감사합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인파를 헤치고 나와 아까 그 여자들이 걸어간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거들을 해치우러간다고… 3마리가 넘었단 말이지… 확실하지는 않다고? 그건 그렇고… 지금 저 여인네들이 내 일을 뺐으려 한다는 소리 아냐!? 안돼! 일 한 건 당 20만원이닷! "흠… 북쪽 숲. 여기가 맞겠지?"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숲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상당히 밝은 느낌에 확실히 나무가 그리 빽빽하지도 않고 반짝거리는 햇살들이 숲을 감싸고 있었다. 역시 꽃의 도시 근처의 숲이라 아름다운 건가?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 무서우신 변종 오거들이 나타나신다는 것인데… "음… 들어가자고." 나는 기운차게 외치며 숲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공기가 좋아…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숲을 걷기 시작했다. 그 레이디스 길든지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좀 천천히 왔으니 꽤 많이 들어갔을 지도… 나는 옅은 검은빛을 띄는 샤프소드를 뽑아들었다.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지. 나는 장난스레 샤프소드를 휘두르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라?" 한 5분쯤 걷던 나는 뒤에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누구지? 한 명인데? 상당히 빠르군.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뒤따라오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소녀가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미와 비슷한 분위기로군. 한마디로 어려 보인다. 그 여자는 열심히 달려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한 10m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는 여자. 짧고 붉은 단발이 인상적인 귀여운 소녀였다. 저거 성인일 테니 18살은 됐을 테고… 일부로 외모를 저렇게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현실에서도 저렇게 동안인지 알 수가 없군. 그런데 이상하게도 옷이 상당히 지저분했다. 왜지? "누구세요?" 나를 멀뚱히 바라보며 물어오는 소녀. 확실하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어리다는 느낌이 팍팍드는군. 유미가 보면 좋아하겠는데? 동지가 생겼다고 말야. "아, 지나가는 여행자죠." "아, 그러세요? 그런데 지금 이 숲은 저희 레이디스 길드에서… 혹시 보지 못 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고 소녀는 약간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 너무해. 조금 늦었다고 두고 가 버리다니… 치." 투덜거리는 소녀를 보고 있으니 정말 어린 동생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귀하게 자랐거나 천성적으로 너무 순진하거나 아니면 좀 모자른 거겠지. 얼마간 투덜거리던 소녀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씨아와 같은 레인저 클래스인 듯 했다. 레벨도 200대 후반 정도… 조금 있으면 마스터를 할 상당한 고수였다. 거기다… 순발력을 열심히 올렸는지 엄청 빠르군. 나는 내 퀵 스텝 만큼은 아니지만 전에 씨아가 보이던 속도와 맞먹는 속도로 달리는 소녀를 보며 감탄했다. 재미있는 아가씨군. 등에 매고 있는 석궁도 자그마한 것이 힘이 좀 약한 모양이야. 꼭 길드의 전령이라고 하는 사람 같은걸?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어라?" 앞서 가던 소녀는 내가 자신을 금새 따라잡자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와… 오빠 엄청 빠르네요? 검사로 보이는데…." 역시 호기심이 동한 듯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소녀.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좀 빠르긴 하지. 그런데 나도 같이 가면 안될까?" "예? 하지만 이건 우리 길드에서 맡은 일을…." "흠… 나는 구경만 할게. 그 나프네라는 분이 너무 예쁘다고 해서 말야. 바이커리 시에 있다는 소리를 듯고 같더니 여기에 있다고 하잖아. 그래서 위험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건데…." 확실히 여기는 무서운 변종 오거가 출몰하는 곳이었고 거기다 약간 순진한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정성이라면… 좋아요. 같이 가요. 나프네 언니는 정말 예쁘거든요. 나이는 나보다 몇 살 많아서 언니라고 부르는데… 아코코." 즐겁게 얘기를 하던 소녀는 나뭇가지에 머리를 박고는 그대로 자빠졌다. 이 황당한 사태에 나는 잠시 멈추는 것도 잊고 그대로 달려가다가 뒤늦게 사태를 인식하고 그 소녀에게 돌아갔다. "괘, 괜찮아?" "히잉… 괜찮아요." "큭. 다행이네. 앞을 좀 보고 다니지 그랬어. 흠… 일어나. 아, 난 한이야. 검사지. 순발력만 열심히 올리고 아이템 덕분에 걸음도 빠른 최고의 속도 검사. 너는?" 내가 장난스레 소개를 하자. 빨갛게 변한 이마를 문지러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리카예요. 히잉… 빨리 가야되는데… 오랜만에 나프네 언니가 싸우는 모습을…." 싸우는 모습이라… 검을 차고 있었는데 검사인 모양이지? 나는 그 미인이 검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그려보다가 머리를 휘저었다. 그보다는 빨리 가야지. 내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 리카라는 소녀는 엉덩이를 털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훗. 재미있는 아가씨라니까. 나는 다시 퀵 스텝을 사용해 달리기 시작했다. 꼭 퀵 스텝을 사용하지 않아도 따라갈 수 있는 속도였지만 퀵 스텝의 숙련도도 높이고… 나는 이번에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 지려하는 리카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옷이 지저분했던 이유가 저거였군. 나는 고개를 젓고는 넘어지려 하는 리카를 붙잡아주었다. 꿋꿋하게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리카. 나는 또 넘어질라 긴장하며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리카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소녀였다. 정말… 달리는 도중 나한테 얘기를 하다가 나뭇가지에 머리를 박은 것이 3번이요 바닥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넘어질 뻔 제외) 것이 2번이었다.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준 숫자까지 더한다면… 으음… 모르겠군. "훌쩍."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다시 달리는 리카. 후… 이상한 여자로군. 나는 리카에게 신경을 집중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숲의 초입이니 여기나 별 차이는 없었다. 똑같이 좀 듬성한 나무들에 너무도 밝은 숲. 정말 이런 아름다운 숲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군. "음?" 나는 리카가 갑자기 멈춰 서자 급히 몸을 세웠다. 왜지? 의아한 얼굴로 리카를 바라보던 나는 리카의 앞에 위치한 두 마리의 몬스터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초록 몸. 맨티스네? "얏!" 이상한 기합소리와 함께 석궁을 발사하는 리카. 상당한 빠르기였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맨티스의 몸에 박히는 좀 작은 화살. 하지만 별다른 충격은 주지 못했다. 석궁은 원래 중세시대에 돌을 날리기 위해 제작한 특별한 활이다. 그것이 조금씩 변하면서 저런 쿼렐, 화살촉이 없는 화살을 날리는 것으로 바뀐 것. 화살이 상대의몸을 잘파고들어 보통 궁에 비해 파괴력이 강하고 연사속도가 좀 늦은 것을 화살의 연사 속도에 맞서는 것이 석궁이다. 그런데 리카의 석궁은 그런 보통 석궁보다 훨씬 작은 거였으니 연사력도 파괴력도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꺅!" 날카로운 앞발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맨티스를 피하는 리카. 리카는 팔에 날카로운 상처를 입고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쳇. 리카는 계속 석궁을 쏘고는 있었지만 맨티스는 쉽게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파워가 너무 약해. 나는 달리느냐고 집어 넣어두었던 샤프소드를 다시 꺼내들고는 맨티스 한놈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맨티스는 두 개의 날카로운 앞발을 동시에 휘둘러왔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맨티스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쾌검이라면 밀리지 않지. 하지만 머리가 날라가고도 계속 휘둘러진 맨티스의 앞발은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 아주 살작 베였군. "오빠!" "음?" 리카의 고함소리. 나는 고개를 돌리다가 공중에서 떨어지며 앞발을 내려찍는 맨티스를 발견했다. 언제 온 거야? 이거 리카에게 너무 신경을 쓰고 있었군. "승룡." 나는 급히 검을 위로 휘둘렀다. 맨티스의 앞발과 충돌하는 샤프소드. 샤프소드가 괜찮은 검이기는 하지만 맨티스의 앞발도 날카롭기로 유명하다. 때문에 앞발이 잘리는 대신 공중에 멈춰서는 맨티스. 나는 왼손을 움직였다. 키엑! 이상한 소리를 내는 맨티스. 나는 맨티스의 목에 박아넣은 단검을 비틀어 맨티스의 숨을 끊어놓고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맨티스를 걷어차서 멀리 날려버렸다. "쳇." 흑. 피묻었다. 맨티스의 목을 찌를 때 피가 나왔어… 나는 망토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리카를 바라보았다. 감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리카. "와… 오빠 대단해요." "하하. 뭘." "솔직히 처음에 봤을 때는 완전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약한 줄 알았었는데…." 리카의 칭찬에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얼굴을 굳혔다. 기, 기생오라비? 크흑… 나는 내 머리에 씌워져 있는 헤드기어를 벗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제, 제길. 이거 다크소드의 모습을 하면 그래도 좀 괜찮은데… 이렇게 머리를 다 뒤로 넘기면 이런 소리를 듣는 다니까… "기, 기생오라비라니… 음?" 뭐야? 나는 꽤 떨어진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이런… 리카에게 너무 신경을 쓰고 있었군. 아직까지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벌써 싸우고 있는 모양이야. 빨리 가자!" "예?" "너희 길드 말야!" "아…." 급히 달리기 시작하는 리카. 음… 레이디스 길드의 여자들이 확실하다. 약 30명에 그중 하나가 특출 나게 강하고… 그런데 몬스터들의 수가 엄청난데? 30, 40을 넘어가잖아? 중에 엄청나게 강한 기운을 풍기는 놈들이… 3놈? 그럼 변종 오거들이 3마리 있다는 소린가? 확실히 3마리 정도라고 했지? "아!" 나무들을 헤치며 얼마간 달리자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30마리 정도의 맨티스들. 그리고… 붉은 빛을 띄는 오거들. 모두 3마리. 그리고 그 오거를 상대하고 있는 여자들. 그 중에서 연녹색의 긴 머리를 휘날리며 싸우고 있는 나프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으음… "빠, 빨리 도와야… 페넬리 언니!" 리카의 고함소리에 사람들을 지휘하며 맨티스들을 해치우고 있던 검은머리의 부관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프네를 제외하면 저 여자가 가장 강한 축에 들었지만… 나프네는 다른 5명의 여자들을 이끌고 오거들과 싸우고 있었고 페넬리라는 여자는 좀 실력이 딸리는 여자들을 이끌고 맨티스들을 없애고 있었다. 흠… 그런데 밀리는 분위기로군. 변종 오거들과 싸우고 있는 6명은 엄청나게 고전하고 있었고 맨티스들과 싸우고 있는 여자들도 꽤 힘들어하고 있었다. 전투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 강한 6이 오거를 상대하고 있으니… "리카! 왜 남자를 데리고 온 거야!" 나를 보며 인상을 쓰는 페넬리라는 여자. 켁? "아, 그냥 구경만 한다고 했어요. 저를 도와주기도 했고요. 나프네 언니를 한번보고 싶다고 사정을 해서…." 으음… 리카의 말에 페넬리라는 여자는 나를 바라보더니 약간 얼굴을 찡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절대 끼어 들지 마!" "예, 예. 그럽죠."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사람들을 도우러 달려나가는 리카. 흠… 서로 협동이 잘 되는군. 연습을 꽤 했나? 아니면 저 나프네라는 여자가 데리고 다니는 직속의 부하들일 수도 있겠고… 나는 페넬리라는 싸늘한 느낌의 여자가 맨티스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오거들과 싸우고 있는 여섯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 진짜 예쁘긴 예쁘군. 약간 검신이 좁은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나프네의 모습은 정말 환상이었다. 음… 페페가 검 들고 싸우면 어떨까? 나는 싱긋 웃고는 편하게 자세를 잡고는 전투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뭐, 끼어 들지 말라는데 방법이 있나. 자고로 싸움 구경은 최고의 볼거리 중 하나다. "변종 몬스터들은 이런 약한 몬스터들을 부리기도 하는 건가? 흠… 오거와 맨티스가 이리 사이좋게 몰려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어. 오거가 3마리나 뭉쳐있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 뭐, 상관은 없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맨티스들이 모두 전멸 당했다. 하지만 레이디스 길드라는 곳의 피해도 상당히 심각했다. 게임오버 당한 사람들이 5명 정도에 십 수명이 상처를 입고 있으니… 맨티스들 중에 이상한 색을 한 놈이 있는 것을 보니 변종이 끼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힝… 아파요." 내가 자리를 잡은 곳은 그늘이 생기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때문에 레이디스 길드의 부상자들은 죄다 이리로 옮겨졌고 리카는 아까의 정을 생각했는지 혼자 쓸쓸히 앉아있던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흠… 저 나프네라는 아가씨가 예쁘기는 예쁘네." "헤헤. 언니가 예쁘다고 했잖아요." "현실에서도 예뻐?" "물론이죠! 22살이라는데 지금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어요." 흠… 나는 나프네에 대한 거의 찬미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 있는 리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꼭 이 길드가 나프네라는 여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태도로군. 아니지. 저 페넬린지 하는 여자의 태도를 보면 진짜 그럴지도… 자고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면 존경심이 들기도 한다니까… 에이 모르겠다. 변종 오거는 한 마리도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맨티스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합세해 3:9의 싸움이었지만 역시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나프네와 그 페넬린지 하는 여자가 함께 공격하고 있는 오거만 거의 죽어가고 있을 뿐. 여자들은 힘보다는 순발력을 올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여러 여자만의 장점이 있다) 대부분이 속도 위주의 공격이라 엄청나게 질린 오거의 가죽과 엄청난 체력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는 모양이었다. "크윽!" 순간 들려온 비명. 고개를 돌려보니 그 페넬리라는 여자가 꽤 큰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그 대신인지 드디어 변종 오거의 숨통을 끊어놓고 있는 나프네. 몬스터를 죽일 때 좀 씁쓸한 표정인 것이 약간 의아하면서도 왠지 어울리는군. "페넬리 언니!" 순간 내 옆에 앉아있던 리카가 뛰쳐나갔다. 정말 빠르군. 거기다 저런 상처까지 입고도… 정말 뛰는데는 신들린 경지… 가 아니구나.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리카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결국 페넬리에게 도착한 리카는 나프네와 힘을 합쳐 페넬리를 내 옆으로 옮겨왔다. 자리가 이곳밖에 없고 가까우니까… "호? 꽤 심한데?" 페넬리라는 여자의 상처를 보니 복부가 거의 으깨진 수준이었다. 까딱하면 죽을 정도로군. 아마 이 여자는 체력과 힘을 꽤 올린 모양이야. 그때 나프네가 나를 바라보았다. 흠… 확실히 가까이서 보니까 넋이 나갈 정도의 미인… 헛!? 나는 몽상을 쫓아버리고는 왜 그러냐는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당신은 도와주지 않을 건가요?" "음? 내가 왜? 이 아가씨가 절대 끼어 들지 말라고 하더군요. 죽어도 끼어 들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내 말에 나프네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내 말은 도와달라는 거예요." 흠? 페넬리를 바라보니 포기했다는 얼굴이었다. 별말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저 여자도 도와달라고 하는 건가? "싫은데?" 나는 약간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당황한 얼굴인 나프네와 인상을 쓰는 페넬리. 그리고 안절부절하는 리카. "웃기는군. 아까는 절대 끼어 들지 말라고 하더니 상황이 어려워지니 도움을 청한다고? 정말 자기들 편한 대로 하는군. 그저 값싼 자존심이었다 이건가? 나는 절대로 끼어 들지 않아. 자기들끼리 열심히 해 보시지." 왠지 재수 없는 여자들이야. 대충 보니 나프네의 생각은 아니고 페넬리와 다른 길드원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듯 했지만… 그래도 별 마음에 안 들어. 나프네는 상당히 당혹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제가하는 부탁… 절 봐서라도 안될까요?" "헛소리. 지금 얼굴 믿고 시위하나? 확실히 좀 예쁘긴 한데 난 당신같은 여자한텐. 관심 없어. 난 애인도 있으니까 딴 데 가서 알아봐." "너… 너!" 이번 말에는 페넬리는 물론 나프네도 나를 노려보았다. 흥. 외모에 자신이 있으신 모양이네?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편하게 드러누웠다. "호오? 착한 척, 순진한 척 해도 역시 자기 얼굴에 자신이 있었나 보지? 미안하지만 내 애인도 당신 못지 않게 예뻐. 난 당신들이 부탁했던 대로 가만히 있을 테니 알아서 해봐." "좋아요. 우리가 알아서 하죠." 약간 냉기가 풍기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오거들에게 뛰어가는 나프네. 하긴, 아무리 착한 여자라도 못생겼다는 말을 하면 열받을 텐데 이런 미인에게 이런 말은 쥐약이지. 이미 싸우고 있던 여자들은 7에서 4으로 줄어있었다. 그리고 오거 한 놈만이 꽤 큰 상처를 입어 많이 약해져 있을 뿐. 다른 하나는 거의 멀쩡했다. 그리고 나프네의 합세로 다시 열심히 싸우기 시작하는 여자들. "흠…." "너, 이 죽일 놈!" 포션을 먹고 좀 회복이 됐는지 나를 노려보며 고함을 지르는 페넬리. 확실히 나프네라는 여자를 꽤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지? 나를 바라보는 다른 여자들의 시선도 심상치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싸움을 지켜보았다. 흠… 결국 쓰러지는 다른 오거 하나. 남은 여자들은 나프네까지 3명이었다. 힘들겠지만 잘하면 어떻게 이기긴 이기겠군. 흠… 그냥 도와줄 것을 잘못했나? 왠지 말을 하다보니 기분 나빠서 이렇게 하긴 했는데… 나프네라는 여자, 내가 한 말과 비슷한말을 들어보지 못했던 모양이지? 흠… 확실히 페페가 없었으면 얼굴에 혹해서 도왔을지도… 나프네라는 여자, 은근히 자기 외모에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음?" 뭐야? 나는 열심히 싸우고 있는 여자들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뭐지? 이상한 기운이… 젠장! 나는 얼굴을 굳히고는 아직 고전하고 있는 나프네들을 바라보았다. 나프네가 랭킹이 높아도 역시 속도 위주의 검사. 거기다 저 오거는 비정상적으로 강한 변종이니 1:1로 붙어도 나프네가 쉽게 이기지 못할 놈이지. 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나는 등에 매고 있던 마나르트를 앞으로 옮겼다. 천에 감겨 있는 마나르트가 약하게 진동을 시작했다. 으음… 목숨을 걸어야겠군. 뭐, 저 정도 외모에 천성도 꽤 착한 모양이니 목숨을 걸만 하지. 나는 마나르트를 감고 있는 천을 벗기기 시작했다. "후… 가볼까?" 나는 천이 벗겨지며 화려한 모습을 뽐내는 마나르트를 다시 어깨에 매었다. 괜히 힘들게 들고갈 이유가 없지. "어? 오빠?" 리카의 목소리. 나는 리카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변종 오거와 싸우고 있던 나프네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른 둘을 이끌고 조금 뒤로 물러났다. 좀 밀리고 있던 오거는 숨을 돌리는지 괴성을 흘리며 그대로 서 있었다. "뭐죠?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약간 차가운 목소리.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이런… 목숨을 걸고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무슨 섭섭한 말씀을." "흥.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힘들긴 해도 우리만으로도 이길 수 있어요." 쩝. 그러실까?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이제 숨을 돌렸는지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오거를 바라보았다. 긴장하며 각자의 무기를 들어올리는 세 여자. 흠… "너에겐 볼일 없어."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놈. 내 손이 휘둘러지며 검은 검기가 오거에게로 날아갔다. 급히 몽둥이를 들어 막으려 하는 변종 오거. 하지만 마나르트의 힘이 더해진 내 검기다. 오거는 상당한 상처를 입고는 뒤로 물러났다. 역시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군. 그나마 많이 지친 놈이라 저런 것이겠지. 나는 마나르트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나프네를 바라보았다. "물러서시죠."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나프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오거가 서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셨군. 그때 오거의 뒤쪽에서 나무를 헤치며 몇몇의 몬스터들이 걸어나왔다. "마, 맙소사…." 신음을 흘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나프네. 나타난 놈들은 변종 오거 4마리였다. 후… 정말 목숨을 걸어야겠는걸? 나는 다시 나프네를 돌아보았다. "괜히 끼어 들지 말기를." 나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변종 오거들의 출현에 겁을 먹었는지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흠. 천상의 망토. 나는 망토를 꺼내 몸에 둘렀다. 그리고 내 앞을 가리는 머리카락들. 그리고 내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뒤에서 숨을 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으… 크아아아악!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엄청난 괴성을 지르는 오거들. 나는 피식 웃고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내 손에 끼워져 있는 OPG. "이것 때문에 그러냐?" 내 왼손에 시선을 모으던 오거들은 다시 시선을 내게 돌리며 살기를 내뿜었다. 죽이는군. 역시 대단해. 나는 상처를 입고 이제는 무릎까지 꿇고있는 오거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상처가 치유 되서 끼면 곤란하다. 잘려나간 오거의 목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나는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번 해보자. 으아아아아!" 내 몸에서 마기가 폭사되었다. 그리고 엄청난 기세로 달려드는 변종 오거들. "조, 조심해요!" 뒤에서 나프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으음…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내려쳐지는 오거의 거대한 몽둥이. 어느새 오거의 등으로 돌아간 나는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오거의 등에서 피가 솟았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는 오거. 역시 이 정도로는… 크아아악! 내 몸으로 날아드는 오거의 발. 나는 위로 뛰어올라 공격을 피해냈다. 발 밑을 스쳐 지나가는… 그리고 순간 나는 엄청난 충격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윽." 나를 후려치고는 다시 몽둥이를 내리찍는 오거 한 놈. 그래… 어디 해보자. "죽어…." 나는 마나르트의 힘을 전부 개방하며 검을 휘둘렀다. 엄청난 검기가 날아갔다. 오거의 팔을 날리고는 허공으로 솟아 올라가는 검기. "미안하지만 너희 목에 20만원이 걸려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옆으로 움직였다. 쉴새 없이 날아드는 오거들의 공격. 나는 망토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오거들의 사이를 지나가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오거들의 피가 내 몸을 적시고 있었다. 크… 이러다 또 반쯤 도는거 아닌지 모르겠군. 크아아악! 웬 오거 하나가 내게 온몸으로 부딪혀 왔다. 맞으면 그대로 골도 가겠지… 나는 순간 도약을 이용해 높에 뛰어올랐다. 오거들은 물론 나무들까지 넘어 올라간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오거들과 저쪽에서 놀란 듯 웅성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 다크소드라서 놀란 건가? 아니면 높게 뛰어올라서? 나프네는 함께 싸우고 있던 두 여자와 가장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표정인지 알기는 힘들군. 부우우웅!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는 오거의 몽둥이. 던진 건가? 나는 급히 몸을 틀며 몽둥이를 걷어찼다. 태권도를 배운게 도움이 될 때가 정말로 많아. 몽둥이를 찬 반동으로 체공시간을 늘린 나는 눈을 부릅뜨며 왼손을 휘둘렀다. 최대 파워다. "다크 캐논!" 내 손에서 뻗어나가는 검은 빛줄기. 예전 페이린과 싸울 때 썼던 것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지만 그래도 꽤나 멋진 모습… 오거들은 뒤로 물러나 다크 캐논을 피했다. 간발의 차… 지면과 다크 캐논이 만나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주위의 나무들이 쓰러지며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나무 학살자라… 나는 피식 웃고는 한 나무 위에 내려섰다. 크윽… 끔찍하군. 나는 온몸에서 통증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제길. 마나르트를 완전히 제어할 수만 있다면 이길 수 있는데… 먼지가 걷히자 오거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4마리 모두 무사. 충격을 받은 듯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기 많은 피해를 입힌 것 같지는 않았다. 제길!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 나프네가 쓰러져 있었다. 충격이 심했나? 몸을 일으킨 나프테는 콜록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 크아아아악! "이게 어디서…." 오거들이 살기로 나를 묶겠다는 듯이 나에게 살기를 뿜기 시작했다. 흥. 마주 살기를 뿜어대는 나. 오거들이 잠시 움찔 하더니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후… "부탁하네, 마나르트." -으음… 맡겨보게나. 마나르트가 말을 하면서 고통이 밀려왔지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오거들을 향해 마나르트를 집어던졌다. 오거가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마나르트는 스스로 괘도를 바꿔 몽둥이를 피하고는 한 오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괴성을 지르며 발광을 하는 변종 오거. "다크 건." 나무에서 뛰어내려 마주 달려가던 나는 양손에 기를 모으고는 휘둘렀다. 뻗어나가는 내 주먹만한 빛줄기. 두 오거가 다크 건을 막아내고는 뒤로 물러났다. 결과적으로 내 앞에 나선 놈은 단 하나. "속검." 나는 샤프소드를 뽑는 동시에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엄청난 기세로 날아가는 검은빛의 검기들. 오거는 괴성을 지르며 망할 놈의 몽둥이를 휘둘렀다. 공중에서 폭발하는 검기들. 한 두개만의 검기가 오거와 충돌하며 상처를 입힐 뿐이었다. 나는 퀵 스텝을 이용해 오거의 앞으로 쇄도했다. 역시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오거. 나는 샤프소드를 집어넣으며 양손에서 OPG의 손톱을 꺼냈다. "크로스." 나는 양손을 뒤로 당겼다가 오거와 맞부딪치며 앞으로 내질렀다. 오거의 가슴에 X자의 상처를 입히는데 성공. 퀵 스텝으로 오거의 공격보다 먼저 오거의 품으로 파고든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승룡권." 나는 비틀거리는 오거에게 두 번의 연타를 날리고는 어퍼컷을 날렸다. 3m에 달하는 키 덕분에 나는 순간 도약을 이용했고 나는 오거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동시에 오거의 어깨를 밟고 높이 도약했다. "마나르트!" 오거의 가슴에 박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오거를 괴롭히고 있던 마나르트가 내게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마나르트를 쥐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빌어먹을… 역시 최대로 힘을 내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 "으아아앗!" 나는 고함과 함께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남아있는 세 마리의 오거에게 날아가는 엄청난 검기. 그리고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다시 수많은 나무들이 박살나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레이디스 길드의 사람들이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나프네도 폭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선 나는 헉헉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크으… 더, 더 이상은… 그때 어느새 내게 다가온 오거 한놈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으으윽! 쉬이이잉. 바리어가 가로막았지만 순식간에 깨져나가며 몽둥이가 나를 후려쳤다. "커헉!" 제, 제길… 이렇게 공중을 나는 것고 오랜만이다… 오거의 힘은 엄청났고 나는 상당한 거리를 날아갔다. 흙먼지 덕에 뭐가 뭔지 보이지도 않는군. 퍽. "큭?" "꺄악!" 누군가와 부딪힌 나는 땅을 구르다가 나무에 걸려 멈춰 섰다. 제길…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니… 나프네? 나와 부딪힌 나프네 역시 넘어져서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쳇. 도대체 얼마나 날아온 거지?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직 3놈이나 남아있어. 오거는 가슴에 검이 박힌다고 죽을 놈이 아니다. "크…" "으으…." 나프네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폭발에 휘말린 데다가 나하고 부딪혀서 충격이 심한 모양이지? 아까의 싸움에서 마나를 많이 소모했다면 몸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괜찮… 치잇!" 나프네의 뒤에서 나타나는 붉은 오거. 나프네도 오거를 발견하고는 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났다. 제길… 차라리 마나르트가 박혔던 놈이라면 몰라도… 좀 멀쩡한 두 놈 중에 하나. 크아아아악! 나와 나프네를 발견한 오거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제길. 나는 내 몸을 지배하는 고통을 무시하려 애쓰며 마력을 모았다. "크으… 크으으윽!"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눈에서 피가 흘러나와? 눈은 물론 코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으… 차라리 기절하고 싶군. 내 마나까지 불어넣자 마나르트에서 검은 기운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또? 전에 페이린과 싸울 때도 이런 것이… "으아아아!" 나는 온힘을 다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검을 뽑아들고 뒤로 물러나는 나프네를 지나친 나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오거에게 검을 휘둘렀다. 내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몽둥이.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단하던 몽둥이는 쉽게 잘렸고 순식간에 오거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마나르트에게서 엄청난 기운이 날아가며 또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쾅! 크아아아악! "으으윽…." 오거의 괴성. 그리고 나는 마나르트를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빌어먹을. 이, 이제 끝인가? 나는 피를 토하고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두 번의 폭발로 일어난 흙먼지는 아직도 걷히지 않고 있었다. 이거 다 가라앉으려면 꽤 걸리겠는데? "괘, 괜찮은가요?" 나프네의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려 나프네를 바라보았다. 다크소드의 모습에 아직 가시지 않은 마기, 그리고 피범벅인 내 모습이 꽤나 공포스러웠는지 나프네가 몸을 흠칫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나르트를 집을 엄두가 나지 않는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마나르트가 서서히 떠오르더니 알아서 검집으로 들어갔다. 마나르트는 내게 돌아올 때나 내가 던졌을 때가 아니면 그리 빠른 속도로 날지 못하니 도움을 받을 수도 없어… "제… 길…." 나는 품속에서 최고급 포션 하나를 꺼내 들이마셨다. 포션과 피가 뒤섞여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음?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나프네가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흥. "필요 없어." 나는 괜한 오기에 나프네를 뿌리치고는 혼자 힘으로 버티고 섰다. 약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나프네. 쳇.나는 식스센스에 집중하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저쪽. "나프네 님!" 제길. 레이디스 길드의 인간들이었군. 나는 살벌한 눈으로 그녀들을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큭. 이 기운은… 크아아아악! 남은 오거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윽… 끝인가? 레이디스 길드의 사람들이 나프네를 보호하듯 둘러싸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모두가 큰 상처를 입고 있어서 먼저 죽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프네는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역시 검을 들어올렸다. 호? 검기? 나는 나프네의 검에서 솟아나는 미약한 푸른 검기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그때 나프네가 나를 바라보았다. 음? 뭔가 의지가 느껴지는 눈. 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죠?" 약간 떨리는 나프네의 목소리. "이건 내 일이거든…." 내 말에 나프네는 의아해 하는 얼굴이었다. 흥. 설명할 생각 없어. 나는 몸에 힘이 좀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오거들. 나프네도 따라오려는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막고 있는 듯 했다. 훗. 눈물나는 충성심이군. 가슴에 마나르트가 박혔던 오거는 상대적으로 느려져서 그나마 멀쩡한 행색을 유지하고 있는 오거가 먼저 공격을 해왔다. 몸의 색과 같이 붉은 눈을 빛의 눈을 빛내는 변종 오거… 나는 간신히 공격을 피하고는 단검을 집어던졌다. 평소에 비해 너무 느린 단검… 하지만 오히려 행운이었는지 단검은 오거의 한쪽 눈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는 오거. 좋았어… 순간 나는 다른 오거의 발에 얻어맞고는 바닥을 굴렀다. 크윽… 간신히 멈춰선 나는 샤프소드를 휘둘렀다. 나를 노리고 날아오던 오거의 몽둥이와 샤프소드가 격돌했다. 그그그극! 이상한 소리. 엄청난 힘에 나는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바닥을 치는 오거의 몽둥이. 나는 위로 도약하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제기랄! 목을 노렸건만 너무 약해진 내 몸은 그리 높이 뛰어오르지 못했고 내 공격은 오거 한 놈의 어깨를 베는데서 그치고 말았다. 어깨를 베인 오거가 몸을 돌리며 팔을 휘두르자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언제 다가왔는지 내 뒤에서 나를 노리고 몽둥이를 내리치는 오거. 빌어먹을. 나는 급히 몸을 날렸지만 오거의 몽둥이가 내 어깨를 강타했다. 두둑. 제, 제길… 나는 오른 어깨에서 상당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을 굴렀다. 형편없이 덜렁거리는 내 오른팔. 어깨뼈가 탈골된 건가? "빌어먹을…." 혹시 레이디스 길드에서 도와줄까 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어느새 나타난 맨티스들과 싸우고 있는 레이디스 길드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놈들이 불러모은 건가? 한 10마리뿐이었지만 나프네를 보호하고있는 레이디스 길드원들의 수도 적었고 모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꽤 고전하고 있었다. "제길…." 나는 살기로 번들거리는 변종 오거들의 눈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른팔이 이러니 검도 제대로 쓰지 못하겠군… 나는 오른손잡이라고… 더구나 샤프소드는 오거의 바로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마나르트를 뽑았다간 10초나 버틸지 모르겠고… 오거들은 승리를 장담한 듯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도 곱게 죽을 순 없지. 탈골된 뼈를 맞춰본 적은 없는데… 나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억지로 어깨로 누르기 시작했다. "끄으윽…." 두둑…. 이상한 소리와 함께 오른팔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붙자. 나는 신음을 흘렸다. 움직이려 하니 손가락이나 간신히 움직일 정도. 그래도 이 정도면 덜렁거려서 방해는 되지 않겠지. 나는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들고는 오거들을 노려보았다. 마치 가소롭다는 듯이 괴성을 흘리는 두 마리의 변종 오거. "대거 댄싱." 나는 단검들을 집어던지는 동시에 옆으로 빙돌아 달렸다. 날아오는 단검들을 보며 잠시 움찔하는 오거들. 그 사이에 나는 한 오거의 옆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옆의 나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간신히 오거의 어깨 높이로 뛰어오른 나는 오거의 머리에 단검을 박아 넣고는 그대로 매달렸다. 몸을 마구 흔들며 괴성을 지르는 오거. 크아아아악! 나는 이를 악물며 나머지 단검 모두를 오거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하지만 아직도 죽지 않고 발광을 하는 변종 오거. 그때 나머지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제길. 이놈이 죽던 말던 신경 쓰지 않는 다는 소리? 하긴 몬스터에게 동료애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실수일수도… 나는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내가 매달려 있던 오거의 머리 부분을 강타하는 몽둥이. 덕분에 머리에 단검이 박혀 있던 오거는 머리가 박살나며 쓰러졌다. 후훗… 퍼억! "컥!?" 땅으로 내려서던 나는 곧이어 날아온 마지막 오거의 발길질에 얻어맞고는 뒤로 날아갔다. 쿠당! 우스스스스… 나무에 부딪혀 멈춰선 나는 마지막 남은 오거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별 상처를 입지 않은 놈이었다. 그럼 내가 죽인 놈이 아까 마나르트가 가슴을 찔렀던 녀석인가? 나는 혼미해져 가는 의식의 끈을 붙잡으려 애쓰며 오거를 바라보았다. 레이디스 길드의 여자들은 맨티스들을 모두 쓰러뜨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모두 거의 탈진 상태로군. 나프네의 상태로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크아아악! 승리했다는 듯이 포효를 내지르는 마지막 변종 오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레이디스 길드의 여자들은 파랗게 질려 오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큭. 산채로 뜯어먹지나 마라." 오거는 사람을 잡아먹는다고도 하지. 나는 거의 포기한 심정으로 내게 다가오는 변종 오거를 바라보았다. 끝인가? 우우우웅! 갑자기 울리기 시작하는 마나르트. 뭐야? 미안하지만 지금 너하고 말할 시간도, 힘도 없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울리는 마나르트. 쳇.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같이… "크아아아악…." 마나르트를 뽑아들은 나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제, 제길… -세한! 나를 앞에 박아 넣어! 뭐, 뭐야? 더 이상 마나르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변종 오거는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혼미해져 가는 의식… 나는 이를 악물었다. "으아앗!"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짠 나는 마나르트를 높게 쳐들었다가 무릎을 꿇으며 땅속에 박아 넣었다. 1/3쯤 박혀드는 마나르트의 검신. 내 갑작스런 행동에 오거가 멈춰 섰고 레이디스 길드의 사람들도 신음을 흘렸다. 봐라! 네가 하라는 대로했다고 마나르트! 스으으으… "크… 음?" 신음을 흘리던 나는 마나르트에서 갑자기 마기가 솟아나자 눈을 부릅떴다. 혼자서 마기를? 스으으… 화아아악! 갑자기 엄청난 양의 마기가 폭사되었다. 주춤하는 오거. 그때 마나르트에서 솟아 나온 엄청난 양의 마기가 뭉쳐 들었다. 뭐, 뭐지?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뭉쳐든 마기가 서서히 어떤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크으으… 또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는 변종 오거. 마기는 점점 어떤 뚜렷한 형상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사람? 나와 비슷한 키를 가진 사람의 형상… 그리고 또 조금 지나가 마나르트의 앞에 검은머리에 검은 옷들을 입고 있는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뭐, 뭐야… 이, 엄청난 마기… 그때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으음?" 긴 검은머리. 그리고 하얀 피부. 새빨간 입술. 깊어 보이는 눈동자. 옥을 정성 들여 깎은 듯한 완벽한 얼굴… 왠지 색기마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이 헤드기어를 하고 있는 다크소드의 모습과 비슷한, 왠지 나하고 비슷한 모습. 누가 보면 쌍둥이라고 할 수도 있을 만한… 하지만 그 얼굴에 비해 검은 복장과 분위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 모습을 전에 마나르트가 보여준 적이 있었지. 그때는 비웃었는데… "마… 나르트?" 내 말에 그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후후. 꼴이 말이 아니군, 한. 나의 주인이여." 맙소사. 나는 얼이 빠져 내 앞에 서 있는 남자, 마족을 바라보았다. 마나르트? 어떻게 이런 모습을… 그때 마나르트가 손을 뻗었다. 내 머리에 마나르트의 손이 닿았다. 굉장히 차가운 손이었다. "음?" 나는 몸이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는 마나르트를 바라보았다. 쉽게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신을 차린 나는 마나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지 않았나? 이게 내 모습이라고." 그 말을 끝으로 마나르트가 몸을 돌렸다. 오거가 몸을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마나르트는 차갑게 웃으며(보이지는 않았지만 분위기 상)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마나르트의 손에 모이는 엄청난 마기. 그리고 그 마기가 오거를 향해 날아갔다. 다크 캐논? 그 마기 덩어리는 오거의 몸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몸을 뚫고 나오지는 않는 마기… 순간 오거가 폭발했다. 맙소사… 오거가 터져 나가자 마나르트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 "흠. 간단하군. 후후. 뭐, 마족의 모습을 하면 이 정도라네. 그건 그렇고 이 일로 내가 그 동안 모아놓은 힘도 다 소비했군. 뭐, 자네를 구했으니 됐지. 아, 저 여자들은 나를 보지 못할 걸세. 마계가 아닌 곳에서는 우리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지. 마기를 느낄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우리를 보지 못해. 뭐,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려 하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어쨌든 이렇게 대면하니 좋군. 우린 정말 닮지 않았나?" 나는 미소를 지어주었고 마나르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다시 검안으로 돌아가야겠군. 봉인을 잠시 깨느냐고 너무 무리했어…." 마나르트의 모습이 흔들리며 다시 마기로 변해 검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나르트는 잠시 진동하더니 조용해졌다. 하핫?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마나르트를 뽑아들었다. 어라? "마기가 없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쿨… 음냐, 음냐… 오오! 바시린 양… 으음… "………." 마나르트는 멀쩡하군. 나는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는 마나르트의 목소리를 무시하려 애쓰며 검집에 집어넣었다. 크윽… 무리했다고 하더니 회복하려고 자는 모양이지 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이디스 길드의 사람들. 그런데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군. 나는 좋게 봐주면 정상적인 걸음걸이로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내 물음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프네. 나는 피식 웃고는 나프네의 뒤에 주저앉아있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후… 나는 나프네가 오른팔을 꽤 깊게 베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품속에서 붕대를 꺼냈다. "맨티스들을 상대해줘서 고맙군요." 솔직히 그 맨티스들은 오거가 이들을 상대하려 부른 것 같지만… 어쨌든 고맙다는 말에 나프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프네의 팔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잠시 당황하던 나프네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감사합니다." 나프네의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나프네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으음… 몸이 말이 아니군. 그때 나프네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자, 잠시만!" "음?" 내가 돌아보자 나프네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크소드가 맞으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구겠소? "도움에 감사드려요. 저희 레이디스 길드는 당신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협조하고 돕겠습니다. 언젠가 길드로 찾아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언제 찾아가죠." 내 대답에 나프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잘 가요, 오빠!" 리카의 목소리. 그러고 보니 쓰러져 있는 레이디스 길드원 중에 리카도 있었다. 부상이 그리 심해 보이지는 않는… 운이 좋은 아가씨로군.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몸을 돌렸다. "린." =예! 순간 내 앞에 마기가 깔렸다가 마물, 마수 모드의 린이 나타났다. 품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린… 언제 린에게 전투 훈련이라도 시켜야겠어. 뒤에서 숨을 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린의 위로 뛰어올라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프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여기있네? 나는 화려한 세공이 놓인 단검을 꺼내 잠시 바라보았다. 작은 황금 검집에 들어있는 여성용 단검. 나는 그 단검을 던졌다. 잠시 움찔하는 나프네. 그 단검은 나프네의 앞에 박혔고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가자, 린." =예, 주인님. 린이 달리기 시작했다. 내 식스센스에 나프네가 몸을 굽혀 단검을 뽑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임무 해결이닷!" 이미 레이디스 길드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내 고함소리가 숲을 울리고 있었다. "마, 말도 안돼…." 나는 내 앞에 위치한 폐허를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도대체… 무너져 내리고 불에 탔는지 재까지 남아있는 폐허. 군데군데에는 아직 불도 꺼지지 않고 있었다. 프렌의 빵집 코코넛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제 바이커리로 돌아갔던 나는 하루를 쉬고는 오늘 아침, 혹시 변종 오거가 더 남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북쪽의 숲을 뒤지고 도도리 시로 돌아왔다. 마력을 잃고 잠들어 있던 마나르트는 하루가 지나가 서서히 마력 차오르며 다시 마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3일이 지나고 코코넛으로 돌아온 나는 폐허가 되어 무너져 있는 코코넛을 볼 수 있었다. "말도 안돼…." 내가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주위에 다수의 유저들이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지만 무너진 건물의 근처로 다가오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약 30명 정도로 보이는 그 무리는 곧바로 코코넛의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 맙소사… 코, 코코넛이…." 달려온 사람들은 경악한 눈으로 코코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강한 사람들은 아니군. 한두 명을 제외하면 끽해야 3계급의 실력이나 될까한… 그때 그 무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으음?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네놈 짓이냐!" "가, 감히 우리 도도리 제빵 연합의 자존심을…." 아, 도도리 제빵 연합의 사람들이구나. 프렌이 련주니 놀라서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이군. 그건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내가 폐허의 바로 앞에 서 있자 나를 범인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아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내가 거짓말을 해서 뭐 한다고. 어차피 당신들 실력으로는 날 이기지 못해." 싸늘한 내 목소리에 열도 받고 의심이 가증 되었는지 제빵 연합의 사람들이 갑자기 달려들기 시작했다. 거의 이성을 잃은 수준이군… 이들에게서 코코넛의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 "곤란하군…."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마나르트의 마기를 이용해 사람들을 묶었다. 수가 상당히 많았지만 내 마나까지 혼합해 사용하자 대충 모두 묶을 수 있었다. 모두 전투 능력이 낮은 사람들이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꽤 강해 보이는 둘은 내 마기를 떨쳐 버리고는 흉흉한 기세로 내가 달려왔다. "이놈!" "쳇," "그만해!" 내가 어쩔 수 없이 손을 쓰려 하는데 폐허, 코코넛의 안에서 프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뚝 멈춰서는 검사. 그리고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코코넛을 바라보았다. 박살이 난 문을 걷어차고는 걸어나오는 프렌. 꽤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뒤에 업혀있는… "미, 미시안?" "련주님! 무사하셨군요!" 무의식 중에 내가 마기를 풀어주자 사람들이 프렌에게 몰려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느 놈이 코코넛을…." 흥분하는 제빵사들. 모두가 다행이라는 듯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프렌이 죽었다면 스킬이 꽤 떨어졌겠지… 들어보니 프렌이 제빵사들에게서 거의 우상이라고 하니 저들이 저렇게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잠시 뭐라고 하려던 프렌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미시안을 추스르고는 내게 다가왔다. 미시안은 로브는 벗고 있었지만 프렌이 임시방편으로 젖은 수건으로 미시안의 머리를 감아놓아 뾰족한 귀는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죽지는 않았네… 이 친구의 정체에 꽤 놀랐지만…." 미시안을 받아든 나는 미시안이 엄청난 상처를 입고 기운을 모두 소비했는지 탈진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시안이 이 꼴이 되다니… 도대체 누가… 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프렌을 바라보자 뒤에 서 있던 제빵사들이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하르츠 길든지 하는 놈들이… 그 엘프 아가씨를 납치해 갔네. 나하고 미시안이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미시안은 그 꼴이 나고 내 가게도…." 프렌의 꼴을 보니 역시 상당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르츠 길드? 페페가 말했던… 실비아의 정체를 알고 쫓아온 건가? 어쩌면 실비아를 쫓고 있다던 놈들이 그 녀석들이었을 지도… 프렌은 슬퍼하는 얼굴로 폐허로 변한 코코넛을 바라보고 있었다. 덩달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너진 코코넛을 바라보고 있는 제빵사들. "죄송합니다." 내 말에 프렌이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후…." 하르츠 길드? 크크큭… 너희들 곱게 죽을 생각은 마라. 나는 저절로 솟아오르는 살기를 억제하려 애쓰며 미시안에게 포션을 먹여 주었다. "언제였습니까?" "한… 1시간 정도 된 것 같군. 미시안이 곧 죽을 것 같기에 치료를 하느라 알리지 못했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시안을 프렌에게 넘겼다. 얼떨결에 미시안을 받아드는 프렌. "부탁입니다만 미시안을 좀 지켜 주십시오. 저는 하르츠 길드를 쫓아가겠습니다." 내 말에 프렌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그런…." 나는 뭐라고 말하려 하는 프렌을 뒤로하며 순식간에 코코넛이 있는 거리를 벗어났다. 프렌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그리고 곧 칼과 레지엘도 돌아올 테니까. 나는 눈을 번뜩이며 거리를 달렸다. 콰앙! "뭐, 뭐야!?" 내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서자 웬 여자와 키스를 하고 있던 사내가 기겁을 했다. 흠? 옷깃을 추스리며 그 남자의 뒤로 숨는 여자. 나는 살벌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내 손에 들려있던 녀석을 집어던졌다. 쾅! 한쪽 벽을 뚫고 들어가는 불쌍한 친구. 멋모르고 나에게 칼을 들이밀던 녀석이다. 그리고 내 뒤에서 무기를 꺼내들고는 떨고 있는 친구들. 이 도둑 길드의 길드원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너, 넌… 다, 다크소드?" 나를 보며 놀란, 거의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길드의 길마. 나는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뭐, 뭐냐?" 덜덜 떨면서 뒤로 물러서는 길드마스터. 나는 지금 다크소드의 모습은 물론 오른손에는 마나르트도 뽑아들고 있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발이 바닥에서 떠오르자 길마는 하얗게 질려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 길드는 손님 대접이 그리 좋지 않군." "무, 무슨…." 내가 붙잡아 올리고 있는 이 길드마스터의 레벨은 300대 중반. 이미 마스터를 하고도 한 계급 정도 승급했을 레벨이었다. 하지만 내 갑작스런 등장과 살벌한 분위기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마기로 몸을 묶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 길마는 자신이 겁에 질려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하르츠 길드라고 알겠지?" "하, 하르츠 길드?" "그래."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길마. 나는 씨익 웃어주고는 놈의 얼굴을 내 얼굴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 살기에 길마가 숨을 들이켰다. "불어." "으으…." "그 놈들이 암흑 길드 연맹과 관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당장 불어." "이, 이 도시의 남서쪽에 가면 커다란 창고가 있는데… 거, 거기가 임시 기지… 오, 오늘 엘프 하나를 잡아다가가 거기로 간다고 했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엘프가 내 거였거든. 난 내 물건에 손대는 놈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만약 그 놈들이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다면… 당장 네놈부터 죽이러 오겠다. 이건 복수다. 그리고 나도 암흑 길드 연맹 특급 회원이지. 어차피 하르츠 길드는 가입도 되어 있지 않으니 신경 끊어. 알겠나?"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길마. 나는 씨익 웃어주고는 놈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뒤에서 덜덜 떨고 있던 여자와 부딪혀 바닥을 구르는 녀석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주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다. 언제. 사례하지." 나는 좌우로 쫙 갈라서는 이 길드의 길드원들의 사이로 걸어갔다. 이런 곳에서는 절대 겁먹은 태도를 보이면 안 되지. 그리고 겁을 먹을 이유도 없어. "남서쪽이라…." 나는 린에게 계속 마기와 마나를 불어 넣어주며 길을 걸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린의 도움을 받아야겠어. 린도 내 생각에 반대하지는 않고 내 마기와 마나를 흡수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실비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다 죽는다." 나는 살기를 섞어 말하고는 손을 살짝 움직였다. 내 손에서 가는 실 같은 것이 잠시 흔들렸다. 흠… 어디 진짜로 한번 싸워볼까? "그 엘프 계집은 어떻게 했어?" "가둬뒀어. 뭐, 도망칠 것 같지는 않더군. 아주 넋이 나가서는 계속 울고만 있다고." "큭큭." 실비아의 얘기를 하는 모양이군. 나는 묵묵히 놈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아까 그 이상한 놈이 당한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지?" "몰라. 후… 그나저나 빨리 마법 족쇄가 도착해야지… 건들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킥킥." 마법 족쇄라… 엘프들은 강제로 순결을 잃으면 그대로 자살하지. 그래서 엘프 노예들에게는 마법을 걸어둔 족쇄를 채우고 세뇌 마법도 좀 건다고 들었는데… 그걸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아직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군. "조용히 해라." "헷. 길마. 일도 잘 끝났구만 뭘. 저 엘프의 주인인 듯한 놈도 박살을 냈고." "그걸 떠나서 좀 입을 다물라는 소리다." "쳇. 알았수." 저놈이 길드마스터인가? 나는 그리 특이하지 않은, 좀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검사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창을 통해 달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 꽤 강하군. 359정도… 거기다 다른 녀석들도 최소한 5계급은 넘은, 레벨 250은 된 고수들… 수는 31명. 페페가 전해준 정보와 일치하는군. 이놈들을 모두 해치우면 임무 완수인가? "아…." 나는 창고의 건너편의 위쪽 난간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군. 나는 커다란 짐들 사이에서 몸을 드러냈다. "너희들이 하르츠 길드의 사람들이냐?" 이리저리 흩어져 앉아 쉬고 있던 사람들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림자 속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 뭐냐! 여기가 어딘줄 알고!" 순식간에 무기들을 뽑아드는 31명. 검에서 창, 단검 등 여러 가지 무기들이 뒤섞여 있었다. 후… 강한 상대들. 나는 그림자 밖으로 나섰다. "감히 내 엘프를 훔쳐 갔겠다… 어서 돌려주시지." "다, 다크소드!?" 하르츠 길드의 녀석들의 눈이 커졌다. 나는 싸늘하게 웃어주고는 샤프소드를 뽑아들었다. 벌써부터 마나르트를 뽑아들었다가는 힘들다. 어차피 내 몸 속에 남아 있는 마력과 마기면 연출효과는 낼 수 있다. 놈들은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기를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화, 확실하군. 하지만 혼자서 오다니…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 핼버드? 나는 커다란 창을 들고 있는 녀석의 외침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갈며 달려나오려고 하는 녀석. 하지만 그 길드마스터라는 녀석이 달려나오는 녀석을 붙잡았다. "대장! 놔요! 어차피 혼자인거, 죽여버립시다!" "멍청한 놈. 다크소드면 엄청난 괴물이다. 적어도 우리 중 다수는 죽게돼. 거기다 저놈이 아무리 생각이 없는 놈이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올 것 같나?" 머리가 돌아가는 친구로군. 하지만 정말로 혼자 왔는데? 아, 린이 있기는 하군. 내가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길마가 내게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 엘프가 당신의 것이라고 했소?" "음. 잠시 나갔다온 사이에 내 부하 놈은 반 죽여놓고 엘프를 훔쳐갔더군. 거기다 코코넛을 박살내? 정말 지옥을 보고 싶은 모양이지?" 나는 남아있는 모든 마력을 총동원하며 마기와 살기를 뿜어내었다. 하르츠 길드의 사람들이 절로 긴장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음… 제길. 돌려주겠소. 아직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으니… 그 엘프를 돌려주면 그냥 돌아가겠지?" "대장! 저런 건방진 자식을 그냥 돌려보낸다니… 죽여버립시다!" 미친놈들. 나는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누가 그냥 돌아간데? 엘프를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거고 덤으로 너희들의 목숨도 받아가야겠다. 소멸의 벌이 내렸다지? 어디 한번 즐겨보자고. 난 내 물건에 손을 대는 놈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미, 미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길마도 별말 없이 자신의 무기를 바로 세웠다. 흥. 그때 눈을 번뜩이며 달려오던 놈들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이, 이게 뭐야!?" 가슴 부위를 베이고는 비명을 지르는 녀석들. 이런… "쳇. 너무 오랜만에 썼더니 익숙하지가 않군." 나는 왼손을 움직였다. 긴 실이 움직이며 내 손에 감겨 들어왔다. 쳇. 목을 노린 것이었는데… "은사(銀絲)!? 와이어다!"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몸을 날렸다. 내 손에서 달빛을 받아 잠깐 반짝이는 가느다란 실들. 언젠가, 마신의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만났던 트랩퍼가 준 선물. 나는 재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실 다루기. 트랩퍼의 스킬이다. 나야 실다루기를 배운 것은 아니지만 함정 파기가 있다. 함정 파기 스킬은 말 그대로 함정을 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트랩퍼 기술의 기초다. 물론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못하지만 덕분에 나는 이 은사, 와이어를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다. 전에 악마의 숲의 다크 엘프들을 도울 때도 이 와이어를 많이 사용했다. 함정 비슷한 것을 만드느냐고… "크아악!" 와이어를 피해 옆으로 돌아 달려오던 놈들이 어깨를 베이고는 비명을 질렀다. "미안하지만 이 창고 곳곳에 와이어들을 좀 설치해 놨지." 내 말에 이를 가는 녀석들. 나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왼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허공을 나는 단검들. "비겁한 놈!" "흥. 30:1로 싸우려 하는 놈들이 할 말인가?" 나는 싸늘하게 대답해 주고는 계속 몸을 움직이며 단검을 날렸다. 정보에 의하면 하르츠 길드에는 마법사나 궁수가 없다. 원거리 공격은 단검이 다. 나는 내 몸을 노리고 날아오는 단검을 바리어로 막아내었다. "빌어먹을! 저놈이 실을 무한정 가지고 있지는 않을 거다! 모두 끊어버려!" 역시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길마 씨로군. 하지만 오판이야. 이 와이어는 잘려도 스스로 잘린 길이만큼 늘어난다. 정말 비싼 물건 같은데… 실 다루기 스킬이 없어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 원통하다. "후… 그럼… 윽!" 커다란 짐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던 나는 볼을 살짝 베이고는 신음을 흘렸다. 은사? 나는 급히 샤프소드를 휘둘러 은사를 끊어내었다. 나는 이곳에 은사를 설치한 기억이 없는데? 그때 내 옆에서 무언가가 공격해 들어왔다. "큿." 나는 급히 샤프소드를 휘둘렀다. 단검? 검신이 약간 긴 단검에 걸리는 샤프소드. 암살자로군.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은사를 다루는 사람이 너만 있는 건 아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다시 돌격해 들어오는 암살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몸을 날렸다. 어느새 짐들이 사라지고 나는 창고의 중앙 쪽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잡았군."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 길마.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사들을 제거했는지 내가 은사를 설치해둔 곳에서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몇 개가 남아있을 뿐… 나는 내 앞에 모여 무기를 들이밀고 있는 녀석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면으로 싸워야하는 건가? 린!" 크아아앙! 갑자기 반대편의 난간에서 거대한 마수가 뛰어내렸다. 린. 내 마기와 마력을 흡수한 린은 엄청난 양의 마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마, 맙소사! 이게 뭐야…." "모, 몬스터? 이, 이런 몬스터는 본적이 없는데…."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는 하르츠 길드의 사람들. 나는 샤프소드를 집어넣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 "린. 공격해라." =예! 내 말이 끝나자마자 린이 포효를 내지르며 하르츠 길드의 녀석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사전에 말했던 데로 오른쪽 끝으로. 둘러 쌓이면 위험하지. "그럼 시작해 볼까?" 내 말에 움찔하며 나를 돌아보는 사람들. 나는 살기를 피어 올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다크 건." 내 양손에서 검은 빛줄기가 뻗어나갔다. 콰앙!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다크 건. 상대들이 옆으로 퍼지자 나는 왼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린과 같은 방향. 내 앞을 아까 그 암살자가 가로막으며 단검을 내질러왔다. "광룡사(狂龍絲)." 내 왼손에서 검은 마나를 머금은 은사가 뻗어나갔다. 은사 다루기의 기본은 마나 주입과 마나 다루기. 이거야 나에게는 상당하다 못해 완벽하달 수 있는 기술. 덕분에 은사는 내 의지대로 움직여 나갔다. 하나의 은사만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슬프군. "끄으윽…." 은사에 목을 뚫린 녀석이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옆으로 회전하며 놈의 목을 감는 은사. 나는 은사를 쫙 잡아당기며 옆으로 움직였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핼버드가 박히는 동시에 그 암살자의 목이 떨어졌다. 은사를 감싸고 있던 마나, 사기(絲氣)(?) 덕에 피가 묻지는 않은 은사가 내 손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은사를 사용하기는 무리군… 나는 은사를 손에 잘 감는 동시에 오른손을 올려쳤다. 카강! OPG와 충돌해 퉁겨나가는 핼버드. 쳇. 나는 내게 날아드는 각종 무기들을 보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크아아앙! 린? 제길. 웬 놈이 린의 등을 단검으로 찌르고 있었다. 린의 마기를 뚫다니… 상당한 녀석이로군.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핼버드를 포함한 무기들이 내게 날아들고 있었다. 스아아아… "크윽!?" "뭐, 뭐야!?" 무기를 내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녀석들. 나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마나르트를 들어올렸다. "죽어라. 속검." 내 휘두름에 따라 많은 수의 검기들이 날아갔다. 마기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던 놈들이 두 동강이 나며 점차 희미해져 갔다. 하지만 그거야 실력이 좀 떨어지는 녀석들의 얘기고… "짜증나는군." 엄청난 기세로 내게 날아드는 핼버드. 하긴… 이렇게 쉽게 끝나면 이상하지. 나는 몸을 반회전하며 검을 올려쳤다. 허공으로 치솟는 핼버드. "스핀." 나는 그대로 한번 더 회전하며 상대의 가슴을 베었다. "크윽!" "훗. 이 정도로는… 큭!?" 뒤로 물러나는 핼버드 녀석을 보며 중얼거리던 나는 상당한 고통에 뒤로 물러났다. 내 옆구리에 단검 하나가 박혀 있었다. 제길. 크아아! 린의 상황이 좋지 않군. 나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내게 단검을 던지고 다른 단검을 뽑아들던 녀석. "선풍각." 나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그 녀석을 걷어찼다. 나동그라지는 암살자 녀석. 나는 바닥으로 내려서며 동시에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카캉! 서걱. 제길! 핼버드는 쳐냈지만 내 어깨를 훑고 지나가는 검 하나. 나는 다시 날아오는 핼버드를 피하며 왼손을 휘둘렀다. "크억!" 내 단검에 가슴을 찔리고는 뒤로 쓰러지는 녀석. 그 모습에 핼버드를 들고 있던 녀석이 고함을 질렀다. "이 악마 같은 자식!" "그러는 네놈들은?" 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대꾸하자 핼버드(아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냥…)는 광폭한 기세로 핼버드를 휘둘렀다. 내가 공격 범위 밖으로 벗어나자 다시 외치는 핼버드. "끄극… 그래도 이렇게 다 죽일 필요는 없지 않으냐!" 바보 아냐. 그럼 날 죽이려고 드는데 가만히 있을까? "그러는 네놈은 날 죽이려 하고 있지 않나? 그리고 말야… 이건 내 일이다." "뭐야?" 눈을 끔벅거리는 핼버드. 아차. "날 건드린 녀석들을 죽이는 것. 이게 다크소드의 일이다." "으윽…." 제길. 완전 미친놈 되가는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길. 저놈은 곱게 죽지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난리야? 안 그래도 임무가 이놈들을 다 죽이는 거라 좀 그랬었는데… 차라리 스프리스 길드 때처럼 미쳐서 날뛰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쳇!" 나는 내게 날아오는 빠른 공격을 느끼고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내 허리와 망토를 스치고 지나가는 붉은 검. 특이한 검인데? "그럼 내 길드원들을 지키는 것은 내 일이지. 죽어라!" 그 길마로군… 나는 내 앞에서 검을 겨누고 있는 길마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제길. 상당한 녀석인데? 거기다… 아직 20명 정도가 남아있어… 상황이 그리 좋지 않군. 린이 내 뒤로 다가왔다. 제길… 아무리 내게 마물 하나가 있다지만 2:20은 좀 힘들겠는데… "우리도 이게 꽤 중요한 일이라서… 이대로 죽어줘야겠다." "이긴 다음에나 그렇게 말씀하시지." 나는 마나르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상처를 꽤 입었지만 마기 덕분에 회복이 빨라진 린이 내 뒤에서 거칠게 포효했다. 후… 그래. 둘이서 하는 데까지 해보자. "하앗!" 그 길마 녀석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린." =예. 나는 내게 날아오는 검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허공을 지나가는 검. 그리고 나는 뒤로 도약하며 린의 머리위로 올라갔다. 머리를 치켜드는 린. 그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 나는 길마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큿?" "스핀." 나는 빙글 돌며 검을 휘둘렀다. 급히 검을 들어 막고는 뒤로 퉁겨나가는 길마. 그리고 그 길마에게 린이 공격해 들어갔다. 좋아. 제일 강한 놈은 봉쇄했고. "흑룡(黑龍)." 내 왼손에서 은사가 뻗어나갔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마나르트에 감기는 은사. 검은 마나를 머금은 은사는 마나르트를 넘어서 길게 뻗어나갔다. 허공에 뻣뻣하게 뻗어 서서 꿈틀거리는 은사. 나는 마나르트를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나르트가 휘둘러지는 대로 함께 움직이는 은사. "크읏!" 한 놈이 은사에 손목이 잘려 신음을 흘렸다. 이거 컨트롤이 어려워서 근처에 동료가 있을 때는 절대 사용하지 못할 방법이지만… 여기에는 동료가 없지. 신나게 마나르트를 휘두르던 나는 내게 날아오는 단검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못된 놈들. 나는 뒤로 덤블링하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린의 공격을 막고있던 길마가 나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훗. "스핀 스트라이크."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검을 내리찍는 나. 길마는 내 공격을 간신히 막에 내고는 뒤로 물러났다. 린이 내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잠시 움찔하다가 이를 악물고는 내게 달려드는 길마. 나는 마주 검을 휘둘렀다. 챙, 챙, 챙, 챙! 밸런스가 완벽한 공격이군. 나는 길마가 휘두르는 검을 받으며 잠시 감탄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 이런 놈이 왜 이런 일이나 하고 있는 거지?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검을 퉁겨내고는 크게 검을 휘둘러 길마를 떨어뜨린 나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공격으로 4명이 죽었다. 남은 수는 15정도… 제길.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힘들겠는데? "후… 명불허전이시군." 왠지 비웃는 듯한 어조로군. 나는 입을 연 길마 씨를 노려보았다. 마기가 합쳐진 내 살기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길마. "제길. 반드시 죽여주마! 공…." "누가 누굴 죽인다고?" 공격 명령을 내리려던 길마는 순간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거대한 날을 보며 파랗게 질렸다. 어느새 길마의 뒤로 다가와 거대한 싸이드를 들이민 사내. 천악이었다. "천악… 쳇." 나를 보며 피식 웃는 천악. "고마우면 배틀 3번." "웃기시는군."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길마를 뒤로 밀쳐버리는 천악. 길마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천악은 예의 그 공간의 낫을 빙글 돌리더니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는 삐딱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는 천악. 그때 내 뒤에 둘이 다가섰다. 칼과 레지엘이로군… "왔어?" "예." "후… 정말 무모하다니까… 혼자서 이런 곳에 오면… 프렌 형에게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레지엘의 푸념. 나는 피식 웃고는 둘을 돌아보았다. 어라? "너희 옷이 왜 그러냐?" 아주 누더기… 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심하게 망가진 옷들. 그리고 몸에 상처도 꽤 많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천악을 돌아보았다. 역시 별로 좋은 꼴은 아니었다. "꼴이 다 왜 그래?" "후… 검의 무덤에 템플러 가디언들이 꽤 많더군요. 강하기도 하고… 검의 무덤을 모두 뚫고 나니 이 꼴이었습니다." "그래? 나는 죽을 뻔했다. 변종 오거들이 마구 덤비는데… 아, 이게 아니지. 우선 저 친구들부터." 나는 마나르트를 들어올려 잔뜩 굳어있는 하르츠 길드의 녀석들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꽤나 힘들었나 보지? 천악마저 저 꼴인걸 보니… "음?" 뭐야? "쉽지는 않겠군…." 천악의 중얼거림. 나는 이를 갈며 창고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일단의 무리가 들어서고 있었다. "이런… 제드!" "쳇. 왔나, 벤." 창고로 들어서는 무리의 리더인 듯한 사내와 그 길마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빌어먹을… "하르츠 길드의 뒤를 봐주는 길드가 있다고 들었는데… 저놈들인가?" 내 중얼거림에 벤이라고 불렸던 사내가 내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크소드? 이런… 그 말이 사실이었나? 이곳 도둑 길드의 길마 녀석이 다크소드가 있으니 관심 끊으라고 하더니… 얼씨구? 천악 어르신까지 계시는군. 거기다 저건… 으음…." 칼과 레지엘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무는 벤이라는 녀석. 이 둘이야 알려진 적이 없으니 할말이 없나 보지? 나는 싱긋 웃어주고는 살기를 피어 올렸다. "차라리 잘됐군. 네놈들도 곱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싸그리 죽여주지." 나는 그대로 달려나갔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마기. 주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황하며 주위를 살피는 녀석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당황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하아앗!" 한숨을 내쉬는 레지엘과 그대로 달려드는 칼. 그런 칼을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지엘도 밝은 빛을 발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다만 그대로 서 있는 천악. "지옥에 온걸 환영한다." "웃!?" 순간 내가 자신의 뒤에 나타나자 황급히 몸을 날리는 제드라는 하르츠 길드의 길마. 하지만 제드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그의 목이 몸와 분리되었다. "제드!" 그 모습에 고함을 지르며 내게 달려드는 벤이라는 녀석. 동시에 창고의 입구에 서 있던 10여명의 놈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마스터 레벨… 나는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성검을 휘두르는 레지엘. 환한 빛이 옆으로 뻗어나가며 레지엘의 주위에서만 내 마기가 걷혔다. 그리고 순간 옆으로 뻗어나가는 환한 검기. 순식간에 한놈의 허리가 절단되었다. 역시 레지엘도 무서운 녀석이라니까. 그리고 역시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한번에 세 명을 상대하고 있는 칼. 이제보니 마스터 레벨로 올랐잖아? 300대 초반… "잘 가라." 내가 다시 몸을 나타내자 기겁을 하는 어떤 검사. 순간 마나르트가 놈의 배를 뚫고 지나갔다. 내가 갑자기 이쪽 끝에 나타나자 이를 가는 벤이라는 친구. 나는 마기를 거뒀다. 순간 사라지는 어둠. 더 이상 썼다가는 버티기 힘들어… 그리고 순간 검은 검기가 내 주위로 뻗어나갔다. 몇놈들이 내 검기를 막으며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그리고 내 반대편에서 폭발하는 환한 빛. 콰앙! 우우우우웅! 마나르트가 진저리를 치는 듯 울렸다. 훗. 그래도 말을 걸지 않는 것이 다행이군. 그때 잠자코 서 있던 천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기가 힘들군." 눈을 빛내며 낫을 휘두르는 천악. 엄청난 기세였다. 천악까지 합세하고 린이 포효하며 공격해 들어오자 30:5라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팽팽한 균형을 이루어갔다. "맙소사…." 신음을 흘리는 시드. 그런 시드의 반응에 레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창고 안을 바라보고 있던 이시린이 입을 열었다. "한 오빠가 우리를 부른 이유가 뭘까요?" "그, 글쎄?" 레도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레도르도 자신들이 이곳으로 열심히 달려온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도 가담할까?" 지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유미와 레아, 세린은 오지 못했지만 이곳에는 레도르와 시드,이시린과 지미가 모여 있었다. 세한이 길드창에 띄운 말에 급히 이곳으로 몰려온 것이었는데… 지금 창고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니… 왠지 도와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넷이었다. "도와야지. 지금은 몰라도… 점차 한사람당 상대하는 적의 숫자가 늘고 있어. 지치기도 할 테고… 꼴을 보니 모두 상처가 상당한데…." 확실히 안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넷의 몸에서는 상처가 상당했다. 이 넷이야 모르고 있었지만 한을 제외한 셋의 상처는 여기서 입은 것이 아니다. 어쨌든 전투의 양상은 세한들이 밀리는 쪽으로 가고 있었고 그 모습에 레도르가 검을 뽑아들었다. "가자." "음… 레도르?" "왜?" 안으로 달려들어가려 하던 레도르는 지미가 자신을 붙잡자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순간 딱딱하게 굳는 레도르의 얼굴. "이런…." "형! 뒤로 물러나요! 화룡!" 레도르의 검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히 뒤로 물러나며 마법을 준비하는 시드. 그리고 역식 검을 뽑아들며 앞으로 나서는 지미와 이시린. 그들의 앞에 20여명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무기를 뽑아들고 있는데다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운 것으로 보아 아군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내게 걸어오는 사내. 으음… 하르츠 길드를 돕는 길드, 아이칸 길드의 길드마스터라… "형!" 레도르가 비명을 지르듯 고함을 질렀다. 인마… 지금 너도 죽을 판에 누굴 걱정하는 거냐? 나는 싸늘한 눈으로 내게 다가오는 검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왼손에 실비아가 붙잡혀 있었다. 제길… 먼저 실비아를 구했어야 했는데… "너… 내 물건에 손을 대면 가만히 있지 않아…." "호오? 후후."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게 실비아를 집어던지는 아이칸 길드의 길마. 나는 실비아를 받아들었다. 별 상처도 없는… 제길. 실비아 때문에 이 꼴이 날 줄은 몰랐군. "다크소드!" 저 멀리서 천악이 내게 다가오려고 발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럿의 적에게 둘러 쌓여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천악. 이미 공간 가르기도 다 써버렸으니 날 도울 수도 없겠지… 천악 뿐만이 아니라 한쪽에서 중상을 입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칼과 레지엘도 이를 갈고 있었다. 레도르 일행은 열 명이 넘은 적을 상대하느라 바쁘고… 나는 품속에서 떨고 있는 린을 느끼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복수해 준다. 몇 번이고 죽여주마." "흠… 너무 무서워서 몸이 움직이질 않는군. 훗. 그럼 잘 가라고, 다크소드 씨." 놈의 검이 위로 치솟았다. 내 손에서 웅웅거리는 마나르트. 이봐… 지금 너를 휘두를 힘도 별로 없어… 최상급 포션을 하나 먹으면 좀 움직일 수 있으려나? 하지만 저 검이 떨어지기 전에 포션을 먹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놈의 검이 아래로 내리쳐지기 시작했다. "흐음… 신이시여…." 나는 십자가를 감싸 쥐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보실까? "안녕하십니까!" "오옷! 현진이 형님!" 내 인사와 시기를 같이해 도장 한쪽에 몰려 있던 아이들이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쯧. 나는 손에 들린 치킨 상자를 휙 던져버렸다. 급히 몸을 날리는 아이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어르신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 진 사범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그렇군. 관장님 말로는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하더군. 한번 해볼 텐가?" 그야말로 뒷골목 깡패 같은 몸집의 진 사범님. 나는 정중히 거절하고는 (그 정중한 거절에 진 사범님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는 것은 넘어가자. 진 사범님은 생긴 것과는 달리 평화주의자다) 강 사범님께 다가갔다. 진 사범님이 나오셨기에 할 일 없이 도장 바닥에 누워 계시던 강 사범님이 눈을 치켜 떴다. "뭔가?" "아, 저녁을 대접하려 합니다만." 눈을 끔벅거리시는 강 사범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돌렸다. "전통 한식 전문 집을 예약해 뒀습니다. 보너스로 30만원을 벌어서 한번 쏘려고…." 어느새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시는 사범님. 나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도로 신발을 신었다. "어엇! 현진이! 우리는!?" "다음 번에 대접하죠." 한숨을 내쉬는 어르신들. 으음… 그 한식집 예약하고 요리 주문하는데 딱 30만원이 들었다. 더 이상 돈 깨기는 싫다. 곳 강 사범님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셨다. "진 사범. 뒷정리 부탁하네." "예. 잘 드시고 오십시오." 크으… 나는 사범님의 옷차림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냥 도복 위에 코란(개량 한복. 상표 이름. 위에 걸치는 코트와 형식의 개량 한복을 칭함. 제 임의 설정입니다) 하나 걸친 것 아냐? 이런… 그렇다고 뭐라고 말하는 것은 자살 행위고… "후… 가시죠." "음." 나는 도장을 빠져 나와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밝았다. 날이야 저물어 가지만 저 가로등들이… 밤낮의 구분이 애매하단 말야. 나는 한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와 보조를 맞춰 걸으시는 강 사범님. "어디로 가는 건가?" "에? 역시 나이가… 당연히 한식집이죠." "으음…." 나는 뒤로 살짝 물러나 주먹을 피하고는 다시 따라 붙었다. "먼저 들릴 곳이 있습니다. 검도장에 잠깐… 그곳 사범님도 모시고 가려고요." "검도장?" "예. 사범님도 알다시피 저 검도장도 다니지 않습니까. 두 도장 사범님들게 감사의 표시로 식사나 대접하려고요." "흠… 알았네." 얼마 걷지 않아 검도장 앞에 도착한 나는 잠시 도장이 위치한 건물을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후… 신이시여! 나는 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어! 안녕하십니까!" "허억!?" "저, 저 자식 미친 거 아냐?" 태권도장과는 다르게 내 또래라 할 수 있는 인간들이 좀 있는 곳… 진태 형과 민지가 내게 급히 달려왔다. "야! 미쳤냐? 한 사범님 한테 걸리면… 어, 어라? 아, 안녕하십니까." 내게 달려오던 걸음을 멈추고는 얼떨결에 내 뒤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진태 형과 민지. 어라? 뒤를 돌아보니 강 사범님이 눈을 빛내며 도장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윽. 강 사범님이 저런 눈을 하고 계실 때는… 대련하면 죽도록 맞는다는 표시. 뭔가 호승심이 담겨 절로 왠지 모를 기운이 솟아나는 강 사범님. 진태 형과 민지가 고개를 숙일 만 했다. "아아. 우리 태권도장 강 사범님." "아, 그래? 음… 야, 그것 보단 네 목숨이…." "아, 한 사범님! 저 왔습니다!" "커헉…." 내가 한 사범님을 발견하고 높게 소리치자 진태 형이 사래가 들린 듯 켁켁거렸다. 쯧쯧. 검도복을 입고 사무실에서 걸어나오시다가 나를 발견한 한 사범님. 강 사범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흠… 왜? "아, 현진 군?" "하하. 저녁 대접이나 하려고 왔습니다. 아, 저희 태권도장의 강 사범님." "어머? 호호. 그래? 잘 왔어 현진 군. 아, 안녕하세요. 한수진이라고 합니다." "강진철입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와 인사를 건네는 한 사범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진태 형과 민지에게 다가갔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어. 그럼 난 간다. 아, 가시죠."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고 계시던 두 사범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장 밖으로 걸어나가셨다. 흠…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도장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며 도장을 빠져 나왔다. "하하. 은메달이라니… 대단하십니다." "호호. 뭘요. 강 사범님이야 말로 금메달까지 따셨었다니… 대단하세요."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제길. 나는 씨부렁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으음… 역시 전통주는 뭔가 다르군. 나는 그야말로 십년만에 만난 절친한 친구를 대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는 두 사범님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길. 내가 미쳤다고 이 두분을… "하하. 그렇군요. 역시 그 동안 현진이 녀석을 너무 풀어두고 있었던 듯 합니다. 감히 그런…." 나는 전에 검도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전해듣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시는 강 사범님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제, 제길… "어머? 강 사범님께 주먹을 날려요? 이런… 호호. 현진 군. 언제 대련이나 한번 할까?" 빌어먹을! 나는 치를 떨며 술을 들이켰다. 고급 나무 식탁에 올려져 있는 음식들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쳇. 먹자 먹어. 이 인생에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지 정말… 나는 약간 취기까지 올라 즐겁게 담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범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쳇. 고급 전통주에 전통 한식에… 이런 대접을 했으니 좀 가만 두십쇼. 흑. 서러워서 정말…." 내 말에 껄껄 웃으며 대나무 주를 들이키시는 강 사범님.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으음… 어? "아아.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기 더 이상 있다가는 어떤 꼴이 날지… 계산을 끝냈으니 두 분께서 얘기나 나누다 가시죠." "음? 그게 무슨…." 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가게를 뛰쳐나갔다. 강 사범님과 한 사범님이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어둑어둑한 골목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제길. 여기로 들어온 것 같았는데? "빌어먹을!"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 분명히 (주) 리자드의… 회계부? 금융부? 무슨 돈을 관리하는 곳의 높은 사람이었는데? 그리고 그 뒤를 쫓아가던 까만 놈들… "제길!"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계속 달렸다. 어디지? 중간에 그 높은 사람이 눈치채고 도망가는 바람에… 그 까만 옷들에 그 높은 사람까지 놓쳤으니… "으으… 도대체 어디… 음?" 저긴가? 나는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포착하고는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다! 한 갈림길을 꺾자 다수의 까만 무리와 그 높으신 나으리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높으신 분의 머리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니… 음? 태권도 자세 아냐? "으앗!" 발차기를 날리는 높은 사람. 하지만 까만 놈들 중 하나가 간단히 막고는 그대로 걷어차자 높은 사람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맙소사. 저번의 그 까만 놈들보다 훨씬 강한 친구들이네? 저 높으신 분의 실력도 그리 나쁘지는 않건만… 나는 이를 악물고는 주위를 살폈다. 옆에 떨어져 있는 각목하나. 나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이봐." "음?" 나는 내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리는 놈의 머리를 각목으로 후려쳤다. 신음을 흘리며 나가떨어지는 까만 녀석 하나. 동시에 다른 까만 놈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모두 6놈… "이봐요, 높으신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게임 처리 팀 소속 팀장입니다." "아…." 나를 알아보는 듯 반가워하는 얼굴인 높은 사람. 나는 싱긋 웃어주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 새끼! 뭐야!?" "나, 성인, 된지, 꽤, 오래됐다!" 내 머리를 각목 하나가 스치고 지나가자 마자 나는 그대로 주먹을 올려쳤다 턱에 내 주먹을 맞고는 뒤로 물러나는 까만 친구. 제길. 역시 보통이 아니시네? "자, 잠깐. 저 새끼… 전에 일을 방해했던…." 어? 나는 나를 가리키며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까만 친구를 바라보았다. 뭐야? 나를 알아보는 건가? 아, 그럼 전에 아버님을 습격했던 놈 중에 하나? "하하. 혹시 전에…." "조심해. 고수야. 혼자서 수명을 쓰러뜨린…." 급히 나이프를 꺼내드는 그 까만 친구. 그리고 동시에 다른 녀석들도 덩달아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제길… 눈앞이 캄캄해지는군. 나는 내 가슴을 찔러오는 나이프를 흘려보내고는 까만 친구의 팔을 붙잡고는 무릎을 올려쳤다. "끄아악!" 팔이 부러진 듯 비명을 지르는 녀석. 읏? 그때 옆에서 다른 놈이 나이프를 휘둘러 왔다. "크윽." 제기! 이거 꽤 비싼 옷인데… 나는 왼쪽 팔에서 상당한 고통을 느끼며 급히 물러났다. 그때 옆에서 날아오는 각목. 나는 마주 대고 각목을 휘둘렀다. 파가각! 동시에 깨져나가는 각목들. 으윽! 무기 사라졌다. 나는 날아오는 나이프를 발로 쳐내고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돌려차기를 넣었다. 가슴에 공격을 당하고는 나가떨어지는 한 까만 친구. 그리고 나도 오른 어깨를 걷어차이고는 나가떨어졌다. "제길!" 벽에 부딪혀 몸을 가다듬은 나는 몸을 숙이며 로우 킥을 날렸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머리위로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졌다. 크윽… 이곳 건물들이 좀 낡기는 했지만… 그래도 쉽게 부숴 질 리가 없어. 그럼 얼마나 강한 거지? 나는 내 공격에 무릎을 꿇는 녀석의 얼굴을 후려치고는 몸을 굴렸다. 내 등을 스치는 나이프. 바닥을 한번 구른 나는 급히 주위를 살폈다. 웃? 내 앞에서 각목을 내리치는 녀석. 제길! "윽!?" 그때 자세가 흐트러지며 비틀거리는 친구. 나는 잴 것 없이 몸을 일으키며 주먹을 올려쳤다. 나가떨어지는 까만 친구. 어라? 뒤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높으신 분. 도와준 건가? "아, 감사합니다." "헉, 헉. 괘, 괜찮나?" "별로…." 나는 대답과 동시에 몸을 돌리며 발을 날렸다. 큭? 각목과 충돌하는 내 다리. 각목은 깨져나갔지만 내 다리도 그리 성치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날아드는 나이프… 제길! "헉, 헉…."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이를 갈았다. 내 앞에 서서 역시 이를 갈고 있는 두 까만 녀석. 나머지는 모두 한군데씩 부러지거나 기절해 있다. "제길. 이거 괴물이잖아?" 나를 보며 치를 떠는 까만 친구를 보니 남 같지가 않았다. 그래… 나도 강 사범님을 보며 그런 생각을 꽤 많이 했지. 내 뒤에 서 있던 그 높으신 분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거기다 적어도 50대는 되어 보이지만… 어느 정도 도움은 되겠지. 내가 거의 탈진 상태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지만 어쨌든 2:2가 되자 남아있는 두 까만 놈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 뭔가 눈짓을 보내는 둘. 그러자 쓰러져 있던 다른 까만 친구들이 기절한 녀석들까지 모두 수습해 모여들었다. 뭐지? "저, 저건!" 순간 까만 놈 중 리더로 보이는 친구가 품속에서 꺼내든 물건. 저, 저건… 높으신 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빔 건(Beam Gun)? 제길! 어떻게 저런 물건까지 가지고 다니는 거야? "후… 미안하지만 우리도 피를 흘려서 말야… 우리는 시시한 깡패들이 아니라 신분이 노출되면 위험하거든? 그만 죽어줘야겠다." "으드득…." 나는 왼팔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며 빔 건을 들고 있는 까만 친구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떤 친구들이기에 저런 무기까지… 저런 건 적어도 고급 경찰은 되야… "그럼 잘 가라." 빔 건의 위에 얹어둔 왼손을 뒤로 당기기 시작하는 까만 친구. 저게 끝까지 뒤로 가면 발사되지… 끝인가? "이놈!" "컥!?" 순간 들려온 노호성과 함께 까만 친구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까만 친구. 깨끗한 솜씬데? 어, 어라? 나는 바닥을 구르는 빔 건을 멀리 차버렸다. 저 구석으로 날아가는 빔 건. 그리고 빔 건이 스파크를 일으키더니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앙! "우욱." 폭발과 함께 일어나는 먼지… 나는 상처에 먼지가 들어가자 고통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누가… "괜찮나, 현진 군!? 이 놈들!" 강 사범님? 강 사범님이 까만 친구들을 쥐어 패고 있었다. 급히 친구들을 수습해 도망치기 시작하는 친구들. 그리고 한 사범님이 먼지를 헤치며 내게 다가왔다. "이런… 괜찮아요. 현진 군?" "아…." 흑. 눈물이 다 나려 그러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추격을 중지하고는 내게 달려오는 강 사범님. 그리고 나는 머리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으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이 멍청한! 이런 일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해야지! 자네가 죽기라도 하면 초연이를 어떻게 보라고! 제길. 그런데 뭐 하는 놈들인데 빔 건을 들고 다니는 거지?" "아…." 나는 긴장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높으신 분을 발견한 강 사범님. "음? 이런, 강태 형님! 형님이셨군요. 이게 무슨…." 그 높으신 분을 보며 눈을 부릅뜨는 강 사범님. 아아… 아버님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더니… 거기다 같은 회사. 초연 씨 아버님의 동생인 강 사범님이 알아볼 수도 있겠지… 나는 한 사범님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끝으로 정신을 놓았다. 쳇. 끝? 나는 내 머리를 향해 내리쳐오는 검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두 번째로 죽는구나. 저쪽에서 일행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쉬이익! 어라? 순간 내 뒤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단검? 빠른 속도로 날아온 단검이 아이칸 길드 길마의 검과 충돌했다. 쨍!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길마의 검이 뒤로 퉁겨나갔다. 으음… 산 건가? 순간 내 앞으로 떨어지는 단검. 어라? 이건… 내가 익숙한 단검의 모습에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급히 달려와서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오오? "괘, 괜찮아요?" "아… 나프네? 왔군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그리고 수십의 여자들이 달려왔다. 놀란, 경악한 얼굴로 레이디스 길드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나쁜 친구들. "레이디스?" 이를 갈며 나프네를 노려보는 길마. 으음… 다른 여자들이 앞을 막아서자 숨을 돌린 나프네가 나를 돌아보았다. 걱정이 담긴 눈… "괜찮으세요? 하… 쉬고 있는데 갑자기 당신의 메시지가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하하… 도움을 좀 일찍 청했죠?" "아, 아뇨." 나는 살짝 웃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당황하며 부축을 해주는 나프네. 으음… 시야가 붉어지는 것이… 눈에서 피나네… 나는 쓰게 웃고는 아이칸의 길마 씨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아아…." 그때 레이디스 길드의 출현으로 당황하는 하르츠, 아이칸 길드의 녀석들을 떨쳐버린 일행들이 내게 다가왔다. 모두 헐떡거리는 데다 상처가 상당했다. 천악은 별다른 상처가 없었지만… "너… 어떻게 레이디스 길드를… 혹시 남장 여자였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드 형. 그리고 시드는 그 대가로 삐끗한 목을 감싸고는 신음을 흘렸다. 쯧. 어쨌든 한숨 돌린 일행은 몸을 늘어뜨리며 하르츠, 아이칸의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길마 녀석이 고함을 질렀다. "나프네! 언제부터 레이디스 길드가 남자를 구하러 달려오게 된 거냐! 이건 그쪽 길드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저, 저 건방진 놈이 감히 나프네 님에게…." 이를 뿌드득 갈며 길마를 노려보는 페넬리. 후… 무서운 아가씨야. 순간 어떤 소녀가 나를 붙잡고는 정신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아아, 어지러워라. "꺄악! 한 오빠! 이게 뭐예요!? 이런 꼴이라니…." 리카로군. 나는 이리 저리 흔들리는 시야에 눈을 깜박였다. 또 혼자 뒤쳐졌던 모양이군.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자 그 길마는 부들부들 떨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때 나프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엘프 매매를 하려다 적발된 현장이 아닌가요?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가 끼어 들어서는 안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크소드는 우리 길드의 은인. 제가 인정한 우리 길드의 은인입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일행(남자)들. 아이칸의 길마가 이를 뿌드득 갈고는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하는 하르츠, 아이칸의 길드원들. 그리고 레이디스 길드의 여자들과 내 동료들이 눈을 빛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후… 나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 이런. 다크, 아, 아니. 한 씨? 이런 몸으로는…." "꺄악. 오빠! 움직이지 마요!" 얼굴에서 피를 떨구며 걸어가는 내 모습에 나프네과 리카가 급히 만류해 왔다. 흐으… 나는 그런 둘의 손을 뿌리쳤다. 당황하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그저 내 뒤를 따라오는 둘. 나는 아이칸의 길드마스터에게 다가갔다. 나를 보며 치를 떠는 길마 씨. "크윽…." "이봐. 난… 이런 사람이야." 내 말과 함께 길마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순간 잘려나가는 길마의 팔. 그리고 나는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냈다. "하, 한 씨!" "꺄아! 오, 오빠!" 제, 제길. 나는 고개를 휘젓고는 길마에게 다가갔다. 몸이 풀리기는 했지만 마나르트에 잘린 오른팔 덕분에 자리에 쓰러져 있는 길마. 나는 씨익 웃어주고는 마나르트를 들어올렸다. 나프네가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건… 정당한 복수." "크윽… 우, 우리에게… 복수의 권리는… 없다." 암흑 길드 연맹의 철칙이지. 정당성이 인정되는 행동에 대해서는 복수할 수 없다. 물론 같은 연맹원들에게만 통용되는 사항이지만. 나는 간신히 미소지어 주고는 마나르트를 내리찍었다. "허억!?" 나는 몸을 일으켰다. "크으… 후… 어, 어라?" 꿈이었나? 나는 밝은 느낌의 방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상하군. 여기는… "혀, 현진 씨!" 초연 씨? 고개를 돌리니 초연 씨와 아버님. 그 높으신 나으리. 그리고 그… 전무? 어쨌든 상당히 높으신 어르신 한분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음?" "흑." "으음?" 나는 순간 내 품으로 안겨오는 초연 씨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몸이 다 낳았네? 여기는… (주) 리자드의 회복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음… 아침이네? 그럼 밤새 기절, 혹은 잠을 자고 있었던 건가? 그 사이에 치료가 끝났고?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강태? 성은 모르겠군. 어쨌든 그 부장 나으리와 다행이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님. 그리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전무 나으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후… 경쟁 업체의 사람들이라고요?" "그렇네. 여기 유 부장은 우리 회사의 회계를 맡고 있지. 아마 유 부장을 납치하기라도 하려고 했던 것 같네. 자네 덕에 무사할 수 있었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는 안정을 되찾은 초연 씨가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흐음… "그런데 증거가 없단 말입니까? 제가 분명히 몇몇 친구는 피를 보게 만들었는데요?" 분명히 내가 나이프를 도로 돌려주거나 안면 공격으로 피를 흘리게 했는데? 그렇다면 신원 파악은 너무도 쉬운 일이지. 하지만 자신을 방호진이라 밝힌 전무 나으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고 그 강진철이라는 분에게 말 들었네. 하지만 자네를 구해준 두 분은 자네를 급히 옮기느라 그곳을 떠났었고… 조사팀이 갔을 때는 이미 증거가 다 지워지고 없더군. 그 빔 건의 흔적도 사라졌고. 다만 폭발의 흔적이 있었네만…." "으음…." 나는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제길. 결국 누군지는 또 모른다는 말이잖아. "흠… 자네야 일개 팀장이기는 하지만… 알아보니 게임 내에서의 경력이나 헌터가 된 후의 실적. 그 외의 실력과 인맥. 그리고 여러 전적이 화려하더군. 여기 강 부장을 구해준 적도 있었다고 들었네. 자네 덕에 드래곤 프로젝트가 무사히 끝났다고… 그러니 말해주지. 아마… 카메론 사나 크라지 사 일걸세." "음? 카메론?" "알고 있나?" "어느 정도…." 카메론이면… 제시네 아버지 회사 아냐? 얼마 전에 한국으로 본점을 옮겼다고 들었는데? 리자드의 경쟁 회사면… 크겠지? 모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본점을 한국으로 옮긴… 확실히는 모르지만… 큰 회사입니까?" "음. 세계적인 온라인 사업체지. 우리 회사야 국내에서는 일류지만 세계에서 보면 좀 미숙하고 떨어지는 감이 없잖아 있네. 다만 섀도우 월드 덕에 세계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카메론 사가 보기에는 우리가 자신들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곳으로 보이겠지. 아마 이번 일과 저번 드래곤 프로젝트의 일도 카메론 사의 짓이라 생각하네. 크라지 사는 그다지 원한이 깊은 곳은 아니거든." "………." 맙소사. 그렇게 큰 회사였다고? 왜 몰랐지? 그럼 제시가 엄청난 부잣집 딸? 몰랐는데? 다른 친구들도 모르는 사실이고… 어떻게 된 거야? "카메론 사의 가상현실게임… 광휘, 샤인이라는 게임이 있네. 섀도우 월드보다 약 반달정도 일찍 출시된 게임인데… 상당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완벽한 재미를 추구하는, 이용자가 엄청난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된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현실성을 추구하는 우리와 대조적이네. 요새는 막상막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네만… 때문인지 본점도 한국으로 옮겨 우리를 견제하려 드는데다가… 우리의 프로젝트를 훔치려 하기도 하고… 좀 불법적인 일로 우리 회사의 간부들을 노리기도 하고 있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크… 이게 뭐야? 그럼 제시 네가 그다지 좋은 집안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건가? 아, 아니지. 이 정도야 큰 회사라면 어디서나 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시야 상관없는 일이지. "거기다 카메론 사는 각국의 정부와 끈도 많이 닿아있지. 이번 일도 그래서 이리 쉽게 은폐된 거라 생각하네. 자네에게는 미안하군." "아, 아닙니다." 내가 겸양을 표하자 전무 씨는 피식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상부에서 연락이 왔네만… 월급도 인상하고 보너스로 100만원을 준다고 하더군. 뭐, 원래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야 그런 걸 그다지 따지지 않아서… 일이 일이라 공식적으로 감사의 뜻을 밝히지는 못하겠네. 어쨌든 고맙네. 자네에게 우리 회사가 두 번이나 빚을 졌군. 강 부장이 사위는 잘 얻었다는 생각일세. 하하하." 맙소사. 100만원? 월급 인상? 그건 그렇고… 어째서! 사위이이이? 나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아버님. 맙소사. "하하. 그럼 돌아가게. 병원비야 우리가 모두 부담했네. 그럼 나는 가보지. 이번 일로 급한 회의가 있어서. 음. 가세." 아버님과 회계를 맡고 있다는 부장 씨를 데리고 사라지는 전무 나으리.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카메론? 제시의 아버지의 회사? 초연 씨가 내 점퍼를 가져다주었다. 후… 뭔가 복잡한 일에 휩쓸린 기분이군. "또 실패란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회장님." 한 중년의 동양인,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한숨을 내쉬며 바라보는 중년의 서양인. "김 사장. 내가 한국으로 본점을 옮긴 것은 리자드 사를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견제가 이런 나쁜 쪽의 견제는 아니었어요. 이런 일도 한두 번입니다. 조심해 주세요." "예." "후… 그래. 또 그 이상한 젊은이가 방해를 했다고요?" 약간 어색한 한국어. 김 사장이라 불린 한국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알아봤습니다만… 이름은 김현진. 올해로 20살이 된 친구로 이상하게도… 태극 상급학교를 졸업. 그리고 대학은… 그저 평범한 대학입니다만… 특이하게 철학과 출신이군요. 부모는 사고사. 서울 10구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리자드 사의 신생 게임 범죄 처리 팀의 팀장이라고 합니다. 게임 속에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고 인맥도 넓은, 한국의 중요 자본가들과 인맥이 두터운 친굽니다. 현재 실적도 뛰어납니다. 그리고 태권도와 검도에 조예가 깊다고 합니다. 이번 일은 물론 저번의 드래곤 프로젝트, 그리고 게임 내에서 암흑 길드 연맹을 이용한 범죄 행각도 저지한 인물입니다." 신음을 흘리는 회장이라 불린 서양인.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다시 눈을 뜨며 입을 여는 카메론 사의 회장. "김현진이라… 들어본 이름이군요. 우선 지켜보세요. 그리고… 다시 이런 보고를 듣고 싶은 마음은 없군요. 이런 일은 뒷처리가 힘듭니다. 잘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후… 그럼 또 국회의원 분들을 대접하러 가야겠군요. 빔 건의 문제는 확실하게 해결했겠죠?"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키는 회장. 그 뒤를 따라 그 한국인도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서양인 회장이 몸을 돌린 채로 말했다. "그리고… 그 김현진이라는 사람. 신변에 위협을 가하지는 말아주세요. 들어보니… 내 딸의 절친한 친구로군요. 될 수 있으면 정중하게 다루라는 말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김 사장.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김 사장이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숙였고 서양인 회장은 방을 나섰다. 회장이 나서자마자 김 사장은 고개를 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꼬이는군. 그 김현진이라는 친구… 위험한 친구야. 게임에서의 입지도 상당하고… 최민호 회장의 아들이 상당히 따르는 인물에… 한강 전자의 자제들과도 친분이 있다… 거기에 리자드 사 안에서의 입지도 상당하고. 거기다 외가 쪽은 더 무시무시하군. 깨기가 쉬운 상대가 아니야." 상당히 싸늘한 어조. 그는 탁자에 놓인 프로필을 들어올렸다. 현진의 상세한 정보가 나타나 있었다. 김 사장은 무심한 눈으로 현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작게 중얼거린 김 사장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눈을 감았다. 요새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바쁜, 상당히 피곤한 김 사장이었다. "………." "이봐! 이쪽! 이쪽!" "그게 아냐! 좀더 오른쪽으로!" 우당탕! 뚝닥. 쾅! 얼씨구… 나는 멍한 얼굴로 수십의 제빵사들이 몰려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허허… 저래서야 새로운 코코넛을 언제 만들려나. 나는 이제 간신히 골격을 갖춘 옹색한 건물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역시 저쪽에 서서 쓴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열심히만 일하는 제빵사들을 보고 있는 프렌. 제빵사들은 그야말로 '열심히'만 일하고 있었다. "저래서야…." "우와악! 피해!" "무너진다!" 나는 한쪽이 무너지며 연기를 피어 올리는 공사현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제빵사 중에건설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어서 만들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인부들의 실력이 너무 딸리지. 나는 고개를 젓고는 몸을 돌렸다. "갈까?" "음." 칼이 내 뒤로 시립해 섰고 미시안은 실비아를 데리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두 그룹을 잠시 돌아보다가 내 쪽으로 붙는 레지엘. "가자고. 칠흑의 숲으로." 우리 다섯은 대충 몸을 풀어가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프렌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후훗. 다음에 왔을 때는 새로운 코코넛을 볼 수 있으려나? 좀 회의적이군. 나는 내 앞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몸이야 회복됐지만… 지금 미시안의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생겨 있다. 얼굴을 사선으로 나누는 검상. 아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때문인지 실비아는 미시안에게 무척이나 잘 대하고 있고… 어쨌든 미시안의 몸이 완전하지는 않아서 칠흑의 숲으로 곧장 가기로 했다. 다크 엘프가 몸을 회복하기 가장 쉬운 곳은 다크 엘프의 마을일 테니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줄인다고나 할까… "흠… 한. 그 나프네 하고는 어떻게 알게된 사이에요?" 레지엘의 질문. 흐음? "어쩌다 보니." "그래요? 나프네면 최고의 미인이니 하는 말이 따라 다니는 데다가… 좀 남자를 무시하는 경향의 여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다고 하던데… 어쨌든 대단하네요." "그래?"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품속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들었다. 잠시 관심을 보이는 레지엘. 하지만 좀 곤란하다는 내 얼굴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착한 녀석. 나는 피식 웃고는 서류를 살폈다. 임무 평가서. 하르츠 길드를 퇴치한 것에 치하를 보냅니다. 제 2기 헌터 칼과 공동으로 임무를 수행했기에 임무 수당은 반으로 나눕니다. 다른 인물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것은 헌터 규약에서도 인정하는 것이며 임무 도중 헌터로서의 정체를 전혀 밝히지 않은 것도 높이 사고 있습니다. 다만 하르츠 길드 이외에 아이칸 길드를 몰살시킨 것에 대해 약간의 부정적 의견이 있습니다. 물론 아이칸 길드로 그리 좋은 길드는 아니며 상황을 이해하기에 이런 부정적 측면은 아주 미미합니다. 다만 임무 외의 인물들을 PK하는 것은 좀 자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르츠 길드의 퇴치 임무는 전반적으로 매우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세한, 칼 요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랭크 A. 흠… 아이칸 길드를 건드린 것이 좀 그렇다고? 하긴… 좀 너무하기는 했나? 그래도 정당방위였다고. 어쨌든 별 상관없다고 하니… 어쨌든 A랭크라고? 좋군. 나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 후… 임무 평가서. 바이커리 시의 변종 몬스터, 변종 오거들을 모두 처치한 것에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비록 레이디스 길드의 도움이 좀 있기는 했지만 리더의 공로를 깎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저희의 평가입니다. 죽을 고비까지 넘겨가며 임무를 수행. 그리고 레이디스 길드의 지속적인 협력을 얻으신 것을 치하합니다. 부정적 측면은 전혀 없으며 앞으로도 좋은 활동을 바랍니다. 랭크 A+. 좀 짧군. 어쨌든 잘 했다는 소리. 확실히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쳇. 헌터들은 죽어도 레벨 다운이 없게 해주면 좋을 텐데 말야. 변종 몬스터에 대한 보고서. 지금껏 변종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모두 모아 정리한 자료입니다. 보통 운영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헌터들에게 공개한 적은 없는 것으로써 여전히 변종 몬스터들의 출현 이유 등은 이벤트 진행과에서 밝히지 않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변종 몬스터들은… "한!" 음? 나는 레지엘의 목소리에 서류를 덮고는 고개를 들었다. 어라? 다왔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요? 내가 보기에는 이상한 도형들만 나타나 있던데?" "아, 별거 아냐." 그러고 보니 이런 헌터 서류는 헌터들이 아니면 읽지 못하지.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군. 나는 피식 웃고는 이미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미시안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저쪽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마법진. 그리고 다수의 마법사들. 미시안을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벽에 몸을 기댔고 실비아도 따라 벽에 몸을 기댔다. 로브를 뒤집어쓴 둘이 저러고 있으니 좀 이상하군. "칠흑의 숲으로 가려 합니다." 나는 카운터로 다가가 아르바이트 생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머리위에 NPC라는 말이 뜨지 않는 것을 보니 확실한 플레이어. 제시와 같은 아르바이트겠지. 그러고 보니 제시는 아직도 무기점에서 일을 하고 있겠지? 니베하고 같이… "예. 음… 50골드입니다. 칠흑의 숲은 그리 이용이 많은 지역도 아니고 거리가 꽤 멀어서 비용이 꽤 비싼 편입니다." "으음…." 나는 신음을 흘리고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어깨를 으쓱하고는 돈주머니를 건네는 일행들. 나는 레지엘과 칼의 돈을 받아들고는 미시안을 바라보았다. 깨끗이 무시하고 있는 둘. 나는 눈 꼬리를 파르르 떨며 미시안을 노려보았다. 크으… 또 돈 없다고 그런다 그거냐? 언젠가 뜯어먹고 만다. 나는 내 돈으로 미시안의 돈을… 제길! 실비아도 있잖아! 크아악! 150골드… "여, 여기… 250골드… 그리고… 일회용 텔레포드 스크롤… 되는대로…." 거의 살기까지 흐르는 내 목소리에 아르바이트생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절로 모여드는 시선. 돈주머니를 건네고는 보석 몇 개를 꺼내서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곧 한 마법사가 달려왔다. "이, 이건… 마, 마법석!?" 변종 오거들을 죽이고 없는 마법석이다. 중급은 되던데… 특히 마법석은 마법사들에게 팔면 비싼 가격을 받을 수 있는데… 그래. 그렇지.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마법석 3개와 텔레포드 공짜. 일회용 텔레포트 스크롤을 5개를 교환하고는 싱글거릴 수 있었다. "저… 돈 안 돌려주나요?" 약간 어색하게 물어오는 레지엘.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레지엘을 돌아보았다.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지엘. 칼이야 포기한 듯,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이지만… "돈? 내가 보석 지불했잖아. 야… 이 숲 멋지지 않아? 소름이 끼치지?" 나는 슬쩍 몸을 돌리며 칠흑의 숲을 바라보았다. 뭔가 말하려다 한숨을 내쉬는 레지엘. 내가 보석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일회용 스크롤도 얻지 않았느냐는 소리를 하려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깨끗이 무시하며 칠흑을 숲을 바라보았다. 으음… 여전히 어두침침에 오싹한 곳이로군. "음산하군요." 칼이 칠흑의 숲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약간 긴장한 얼굴. 그러고 보니 칼이나 실비아는 조금 위험할 지도 모르겠는데? 뭐, 일행이 있으니 상관없겠지. 칼도 마스터 레벨이니까. "그렇지." "확실히… 우리들이 살만한 곳이로군." 미시안의 말이었다. 실비아는 약간 겁먹은 얼굴이었는데… 엘프들이 사는 곳은 이렇게 공포스런 분위기는 아닌 모양이지? "그런데… 몬스터들이 너무 강해보여. 어떻게 살아남아 있는 거지?" "아, 이곳의 마을에 스핑크스가 있거든. 수호수, 수호자. 다크 엘프들을 도와주고 있어." 미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숲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약간 머뭇거리다 미시안의 뒤를 따르는 실비아. 나도 샤프소드에 손을 가져가며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군." "음?" 내 중얼거림에 미시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다른 일행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무 긴장하는군. "몬스터가 왜 없는 거지? 전에 왔을 때는 트롤에 미노타우르스. 오거까지도 나왔었는데? 그것도 꽤 자주. 그런데 지금은… 30분이 넘었는데도 소식이 없잖아?" "글쎄." 하긴. 미시안에게 물어본 것이 잘못이지. 여기 와 본적도 없는데 말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역시… 근처에 기척이 없어. 여기에 서식하는 놈들은 모두 덩치가 큰놈들이라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왜… "흣!" "어?" "마, 맙소사!" "꺄악!" 저, 저게 뭐야? 콰콰콰콰콰쾅! 엄청난 폭발. 저 멀리서 여기서도 환히 보이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로 치솟는 빛줄기. 저 기운… 전에 느껴본 적이 있어. 테티오의 힘… 그리고… 뭔가 도움을 청하는 듯한, 테티오라면 내가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겠지. 마을에 일이 있는 건가? 음? 자, 잠깐. 나는 급히 서류를 꺼냈다. "한. 저, 저게 도대체…." "닥쳐!" 내게 질문을 해오다가 내 사나운 기세에 찔끔하는 레지엘. 나는 사과도 하지 않고는 서류를 살폈다. …… 변종 몬스터들은 웬만한 몬스터 출몰지역에 계속 출몰한다고 밝혀짐. 문제는 방치할 경우 수가 계속 늘어나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수가 많아진 다는 것입니다. 변종 몬스터들의 수가 계속 늘어서 많은 수의 변종 몬스터들이 다른 평범한 몬스터들을 이끌고 습격이라도 감행한다면 거대한 혼란이…… "비, 빌어먹을…." "한?" "무슨 일이지?" 나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일행들을 무시하고는 생각을 계속했다. 비, 빌어먹을… 변종 몬스터들은 한번 나오면 끝이 아니라… 계, 계속 쌓인다는 소리 아냐? 그, 그럼… 화, 확실히 바이커리 시에서의 변종 오거들도… 듣던 것보다 수가 많았어. 사람들이 퇴치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었기에 그 시간동안 변종 몬스터들의 수가… 그, 그렇다면…악마의 숲이나 칠흑의 숲은… 사람들은 거의 들어가지 않는 곳이고 두 곳의 마을을 어느 정도 확장해서 사냥보다는 방어에 더 치중을… 빌어먹을! "린!" =예! 순간 내 품속에서 뛰쳐나오며 거대한 마물의 모습으로 변하는 린. 실비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걸음 물러났다. 나는 재빨리 움직여 칼과 레지엘, 실비아를 린의 위로 던져 올렸다. "무, 무슨…." "마을이 위험해! 변종 몬스터다! 설명은 나중에 하지. 린! 최대한 빠르게 달려어!" =예! 크아아앙! 한번 포효하고는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린. 그리고 나는 퀵 스텝을 이용해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린과 비슷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히 따라오는 미시안. 이런 숲에서라면 미시안의 속력은 엄청나지…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이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단 말야? 도대체 왜!? 나는 이를 악물고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악마의 숲도 위험하다. 모두가, 모두가 죽을 지도 몰라. 특히… 이곳에는 테티오에 디렐까지 있지만… 악마의 숲은… 상대적으로 약한데다 미시안도 없다. 나는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는 미시안을 잠시 바라보았다. 제길! '지금 공표된 사항은 그저 좀 강하고 마법석을 주는… 고렙들을 위한 몬스터라고 하는데… 저렙들의 사냥터에도 이런 변종들이 나타나는 것이….' '뭔가 이상하군요.' '그래요. 그래서 회사 내에서는 헌터들, 게임 범죄 처리 팀의 사람들에게 이 변종 퇴치를 맡길 계획이라고 해요.'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닌데….' '후훗. 월급이 올라간데요.' '열심히 해야겠군….' '예. 거기다 문제가 하나 있는… 아, 아니에요.' '예?' 저번에 초연 씨가 하다 말았던 말… 보통 운영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헌터들에게 공개한 적은 없는 것으로써 여전히 변종 몬스터들의 출현 이유 등은 이벤트 진행과에서 밝히지 않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변종 몬스터들은…… 운영자들은 알고 있었다고? 크윽… 그때 알아냈어야 했어. 그, 그랬어야… 어, 어쩌면… 모두 죽는다… "한?" 나는 미시안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길! 나는 망토를 두르며 다크소드의 모습을 갖췄다. 제길. "제기라알!" 내 고함소리와 함께 퍼져나간 엄청난 살기에 새들이 날아올랐다. 저건! 칼이 고함을 질렀다. 칼의 고함소리에 사색이 된 얼굴로 비틀거리던 레지엘이 고개를 돌렸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마을. 그리고 그곳에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몰려있었다. 쳇! 나는 나무 위로 뛰어올라 최대한 높이 점프했다. 크윽… 협곡이 뚫렸잖아? 나는 협곡에 널려있는 많의 수의 몬스터의 시체들과 다수의 다크 엘프들의 시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제길. 마을의 한 귀퉁이가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화살을 날리거나 마법을 날리고 있는 다크 엘프들. 그리고 디렐이 전사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맙소사. 나는 화려한, 두렵기까지 한 고대마법들을 사용하고 있는 테티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티오 덕에 버티고 있는 모양이군. 탁. 휘익. 한 나무의 꼭대기에 내려선 나는 다시 앞으로 몸을 날렸다. 내 밑에서 린이 달리고 있었다. 후… 마나소비가 장난이 아니군. 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마나르트는 이미 상황을 인식했는지 미리 마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마나르트. 그리고 칼과 미시안은 이미 무기를 뽑아들고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레지엘도 이를 악물고는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쯧. 이런 상황에서 멀미라니… 닥치는 대로 죽여! 나는 고함을 지르며 협곡, 절벽 위를 달렸다. 아래의 좁은 통로를 질주하고 있는 린. 나는 절벽의 끝에 다다라 최대한 멀리 뛰었다. 하아아앗! 긴 머리카락과 망토가 강하게 휘날렸다. 그리고 저절로 뽑혀서는 내 손으로 빨려 들어오는 마나르트. 나는 내게 흘러들어오는 마력에서 오는 고통에 쓴웃음을 지었다. 제길. 순식간에 내 몸에서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음… 후… 어디 목숨을 걸어볼까? 역시 고달픈 인생이라니까…. 나는 불타는 나무집들 사이에 내려서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엄청난 크기의 검기가 날아갔다. 그리고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변종 트롤. 쳇. 완전히 잘리지 않아 트롤의 몸은 빠른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역시 변종 몬스터의 회복 속도는 훨씬 빠르다. 크로스. 나는 그 트롤의 목의 높이에 맞춰 뛰어오르며 검을 휘둘렀다. 잘려나가는 트롤의 목과 그 트롤의 뒤에서 괴성을 지르고 있는 몬스터에게 날아가는 하나의 검기. 이놈은 뒤돌아서고 있어서 쉬웠지만… 크윽. 저기 변종 오거도 있네? 나는 저쪽에서 테티오가 상대하고 있는 붉은 몸의 오거들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전에 4마리하고 싸우다가 반 죽었었지? 잠시 한눈을 팔던 나는 저쪽에서 한 다크 엘프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순간 내 주위로 뻗어나가는 살기. 몬스터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와라. 크아아악! 나는 엄청난 기세로 돌격해 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속검…. 나는 검을 빠르게 휘두르며 옆으로 움직였다. 마나르트에 베이며 주춤거리는 몬스터들. 나는 그대로 뛰어오르며 한 놈의 목을 베어내었다. 세한님! 디렐? 나는 저쪽에서 다크 엘프들을 이끌고 싸우고 있는 디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나는 내버려 두면 눈물까지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한 디렐을 보며 검을 휘둘렀다. 닥치고 죽여! 순식간에 몬스터 하나를 쓰러뜨리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디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후… 음? 뒤… 조심해라. 미시안이군. 나는 뒤에서 공격해 오던 몬스터들 막아내는 미시안의 어깨를 툭 쳐주고는 높이 뛰어올랐다. 어느새 레지엘과 칼도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환한 빛을 내는 성검을 휘두르는 레지엘. 린, 실비아와 함께 싸우고 있는 칼. 그리고 가히 눈빛으로 몬스터를 죽일듯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미시안. 으아아앗! 스핀! 나는 공중에 떠 있는 나를 향해 날아오는 미노타우르스들의 배틀 엑스들을 보며 몸을 회전시켰다. 카캉! 엄청난 소리와 함께 튕겨나가는 배틀 엑스들. 나는 아래로 추락하는 동시에 바리어를 만들어 냈다. 스아아아앙… 내 발 아래로 만들어지는 바리어. 나는 보드를 타는 듯이 바리어 위에 올라타고는 바리어로 트롤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 듯 몸을 휘청거리는 트롤. 변종이 아니니 쉽게 죽일 수도 있겠군. 나는 바리어를 박차고 살짝 뛰었다. 순간 사라지는 바리어와 트롤을 스치듯 지나 땅에 내려서는 나. 크라락! 괴성과 함께 녹색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트롤. 놈의 몸에 정확히 반으로 금이 가 있었다. 마나르트의 마기로 몸속을 마구 헤집어 놨으니 살기는 힘들 거다. 빙검. 아이스 소드. 미시안의 중얼거림과 함께 내 뒤에서 엄청난 한기가 느껴졌다. 으음… 서늘한데? 나도 질 수는 없지. 나도 미시안 못지않게 열 받아 있다고! 화아아악! 순간 내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테티오가 나를 흘낏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죽어. 내 몸을 중심으로 엄청난 마기의 폭풍이 일어났다. 몬스터, 몬스터. 다크 엘프, 다크 엘프. 마나르트, 마나르트. 빠르게 휘둘러지는, 빠르게 휘둘러지는 마나르트.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몬스터. 바닥을 구르는 몬스터의 머리. 하늘로 솟는 피. 죽음.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다크 엘프. 엄청난 상처를 입고 울부짓는 테티오. 한 팔이 너덜너덜해 지고도 검을 휘두르는 칼. 다크 엘프들의 시체를 보며 이를 갈며 싸우는 레지엘. 포효하는 린. 마지막 변종 오거. 헐떡이고 있는 테티오를 향해 날아가는 몽둥이. 내 몸이 움직이며 순식간에 오거의 머리를 날렸다. 한숨을 내쉬는 테티오. ………………. 악마의 숲. 다크 엘프. 순진해 보이는 얼굴. 렌? 악마의 숲. 다크 엘프. 여자. 가끔씩 꿈에서 피를 흘리던 다크 엘프. 베르시나? 베르시아? 왜 울고 있지? 악마의 숲. 다크 엘프들의 마을. 불타는 나무들. 바닥을 뒹구는 렌의 머리. 머리? 죽은 거야? 헬레나가 슬퍼하겠군. 괴성을 지르는 몬스터. 거대한 검이 내게 날아왔다. 우와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에 붙들려 움직이지 않는 몸. 내 눈앞은 캄캄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중앙에 떠 있는 밝은 문자. 예약 로그아웃. 하! 로그아웃? 기절…. 제길! 마지막 놈을 죽이고 기절했구나! 나는 황급히 로그인을 시도했다. 하지만 경고성과 함께 떠오르는 경고문. 얼마간의 휴식이 필요합니다. 영양을 보충하세요. 젠장! 빌어먹을! 설마 내게 예지몽 같은 능력이 있지는 않겠지? 나는 악마의 숲의 영상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제길! 나는 급히 캡슐에서 나왔다. 음식, 음식. 제길! 영양제를 사둘 것을 그랬나? 게임에 완전 미친 인간들은 그것만 먹고 산다던데… 나는 그런 수준은 아니라 사지 않았으니 있을 턱이 없지. 쳇! 나는 순간 조리식품 중에 미트볼을 하나 꺼내서는 조리기에 집어넣었다. 캔커피… 그리고 조리가 되는 동안 캔커피 하나를 들이키고… 순간 끝나는 조리. 나는 미트볼을 깨내서는 선채로 꾸역꾸역 넘기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이야.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로그인을 한 시간에서… 10시간 정도가 지났군.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떠오르며 깔끔한, 질서정연한 도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늘에 이어진 공중 도로와 안전거리를 완벽하게 유지하며 달리는 차량들. 그리고 꺼져가는 가로등들. 섀도우 월드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지. 어쨌거나… 이제 됐을까? 요새 기절하는 일이 좀 많아져서 예약 로그아웃을 맞춰뒀던 건데… 실수했군. 로그아웃을 한지 꽤 지났으니 음식만 먹으면 로그인이 가능하다. <아이디를…> 제길! 벼락부자! ********! 나는 거의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악마의 숲으로 가야 돼! 칠흑의 숲이 이 정도인데… 악마의 숲은 더 위험하다. 그곳에는 테티오 같은 수호수도 없고… 미시안도 없다. "미시안! 나는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테티오. 동굴? 테티오의 동굴이군. 나는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듯 옅은 빛에 휩싸여 있는 테티오를 바라보았다. -깨어났군. 고마웠…- 미시안 어딨어! 나하고 같이 온 다크 엘프 말야! 흥분한 내 고함소리에 테티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지? 그 다크 엘프라면… 엄청난 실력을 가졌더군. 디렐하고 대련을 한다고 연무장에…- 빌어먹을! 대련? 나는 테티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쓰러져 버린 나. 이, 이런… 힘이….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겠지. 내가 불러주겠네. 자네의 일행도 모두 모여 있으니.- 눈을 감는 테티오. 나는 떨리는 몸을 가다듬고는 다시 내가 누워있던 간이침대에 누웠다. 곧 눈을 뜨고는 나를 바라보는 테티오. -불렀네. 모두 온다고 하더군. 흠… 다시 말하지만 고마웠다- 약간 짜증난다는 기색.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동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빨리 와야…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지?- 몬스터 때문에. 내 간단한 대답에 테티오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잠시 뭐라고 웅얼거렸다. 순간 내 몸을 감싸는 은은한 빛. 조금씩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음… 몬스터라… 그 이상한 몬스터들… 아무래도 계속 늘어나는 모양이다. 전에는 소수였는데 갑자기… 아마 누적이 되고 다른 몬스터를 통솔하는 능력까지 갖춘 모양이지. 흠… 하지만 이제는 없네. 생기려면 꽤 걸릴 테고. 지금까지는 몰라서 지키고만 있었지만 이제는 사냥을 다니면 상관없어. 그런데 왜 그렇게 열을 올리지?- " 빌어먹을! 악마의 숲의 다크 엘프들 때문이다! " 내 고함소리에 테티오가 눈을 크게 떴다. 긴장하는 기색. 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식스센스에 정신을 집중했다. 동굴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는 기척. 미시안? -음, 그렇군. 그 다크 엘프가 악마의 숲 출신이지? 그런 생각을 못하다니… 왔군- 순간 미시안이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헐떡거리고 있는 데다 손에는 검까지… 확실히 디렐하고 대련이라도 하고 있던 건가?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거의 회복된 몸. 다만 마기 덕분에 몸안의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아. 세한! 일어났군! 제길! 미시안! 당장 악마의 숲으로 가야해! 음? 미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변종 몬스터들은 계속 늘어난다. 이 마을이 이런 꼴이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야! 악마의 숲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지 몰라! 그곳도 이곳과 같이 사냥은 멈추고 방어만 하고 있으니까… 당장 돌아가야 해! 내 말을 이해했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미시안. 제길! 나도 없는데… 하지만 시간이… 빌어먹을! 미시안이 고함을 지르며 동굴을 벽을 후려쳤다. 시간이라… 일회용 텔레포드 스크롤이… 꽤 있군. 일회용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어. 악마의 숲으로도 갈 수 있으니까…. 내가 품속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내자 미시안이 재빨리 낚아채고는 달려 나가려 했다. 어지간히 흥분한 모양이군. 미시안! 진정해! 우리 둘이서 뭘 어쩐다고! 일행을 기다려! 크윽…. 내 고함소리에 미시안은 걸음을 멈추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무기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레지엘, 칼과 디렐. 그리고 장로들이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오오! 세한님! 깨어나셨군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드리크를 무시하며 칼과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당장 떠난다. 이곳 말고 미시안이 왔던 마을이 있는데 그곳이 위험해. 괜찮겠어? 예? 또 다른 마을? 명령이시라면. 의아한 듯 되묻는 레지엘고 고개를 숙이며 긍정하는 칼. 레지엘도 잠시 칼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린! 내가 불렀지만 린은 반응이 없었다. 뭐야? 나는 품속에서 린을 끄집어내었다. 뭐야? 나는 린의 몰골에 얼빠진 얼굴을 했다. 왜이래?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린. 별다른 상처를 입거나 한 것은 아닌데? 그리고 마기 약간이 린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병이라도 난 건가? 나는 남아있는 마력을 전부 린에게 쏟아 부었다. 평소에도 마력을 전해주면 상당히 팔팔해 지던 린이기에 행한 일이었지만… 쓰아아아아! 뭐, 뭐야? 음? 순간 린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 테티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기가 이리저리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딱딱해 지는, 고체로 변하는 마기. 린을 들고 있었기에 나는 그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알? 나는 검은 껍질에 휩싸인 린, 아니 이제는 처음 태어날 때 들어있던 알과 비슷한 모양의, 하지만 크기는 훨씬 큰 알의 모습을 한 린 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진화인가?- 뭐? 나는 테티오를 돌아보았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테티오. -혹 네 마기나 마력에 영향을 받거나 해서 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니면 전투를 많이 경험해서 전투에 알맞은 몸으로 진화하는 것일 수도. 전투에서 보니 상당히 잘 싸우더군. 하지만 몸이 커서 전투에는 좀 비효율 적이다. 그러니 진화를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아니면 네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알로 돌아갈 이유가 없지. 물론 근거는 없는, 내 예상이다- 그래? 진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는… 확실히 테티오의 말대로 마력도 많이 먹었고(?) 전투도 많이 했으니까. 테티오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도 이런 예측을 한 것이니 신빙성이 있기는 하군. 나는 옆에 있는 내 배낭을 들어올려 천 (마나르트를 감싸던 것. 비싼, 무한대 내구성과 방어력마저 갖춘 천이다)을 꺼내 린을 싸기 시작했다. 쳇. 좋기는 한데… 시기는 좋지 않군. 린을 타고 숲을 빨리 나갔어야 했는데… 달리자! 나는 린을 배낭 속에 넣고는 일행에게 외쳤다. 순간 튀어나가는 미시안. 하지만 다급한 테티오의 목소리에 미시안은 다시 멈춰섰다. -내가 데려다 주지. 몸이 좋지는 않지만 그 정도는 가능하다- 고맙군. 그때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장로가 입을 열었다. 가시는 겁니까? 좀 머물다…. 악마의 숲이 위험합니다. 그곳에 몬스터라도 침략해 온다면… 그곳에는 테티오 같은 수호수도 없고 미시안도 이곳에 있습니다. 아…. 당황한 얼굴인 드리크. 나는 테티오가 몸을 일으켜 내 앞에 서자 그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곧 따라 뛰어오르는 칼과 레지엘. 자, 잠시만! 저희도 도움을… 전사들을 보내겠습니다. 음? 지원? 하지만 텔레포트 스크롤은 5개뿐인데… 안됩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 5개뿐이라서… 테티오! 빨리 출발…. 제가 가겠습니다. 갑자기 테티오의 위로 뛰어오르는 디렐. 한명이라면 좋지. 거기다 디렐은 강하니까… 나는 디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으며 테티오를 제촉했다. -후… 무겁군. 알았다. 서두르지- 테티오는 좀 비틀거리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환한 빛이 몸을 한번 훑은 것이 우리에게 경량화 마법을 걸고 자신에게 근력 증가 마법이라도 건 모양이었다. 제발… 제발…. 미시안이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큭…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크윽… 그래. 제발, 살아있어라. 무사해라. 빌어먹을! 망할 운영자! 아, 프로그래머인가? 이벤트 진행과…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번일이 끝나면… 가만두지 않는다. 테티오가 빠른 속도로 협곡을 벗어나고 있었다. 먼저가지. 뭐? 미시안은 대답도 하지 않고는 숲으로 달려 들어갔다. 후… 이런! 미시안! 그리고 급히 따라가는 디렐. 어느새 꽤 친해진 모양이군. 괜찮을까요? 빛 무리를 뚫고 나온 레지엘이 사라지는 미시안과 디렐을 보며 중얼거렸다. 엘프니까. 숲에서는 안전해. 몬스터가 아무리 많아도 미시안이나 디렐이면 도망칠 수 있어. 가자.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레지엘과 칼이 급히 뒤따라 왔다. 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시안 혼자서는 힘들 텐데… 레지엘과 칼은 길도 모르기에 내가 뒤따라 갈 수도 없고… 몬스터가…. 나는 식스센스를 이용해 주위를 탐색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근처에서 몬스터들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칠흑의 숲에서와 비슷한 상황. 왠지 불안해… 읏샤. 나는 뛰다 말고 순간도약을 이용해 높이 뛰어올랐다. 나무 하나를 중간에 디뎌 상당히 높은 곳까지 뛰어오른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내 이제 내 밑에 다다라 숨을 고르고 있는 칼과 레지엘. 이 둘과 보조를 맞추려니 약간… 마음은 죽도록 뛰고 싶은데… 그리고 저 멀리 검은 물체가 나무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시안이겠지? 역시 빠르군. 마을은…. 마을이 위치한 쪽을 바라본 나는 얼굴을 굳혔다. 연기? 빌어먹을! 나는 마을이 있는 쪽에서 검은 연기들이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곧 몸이 아래로 떨어지며 서늘한 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한? 아래에서 나를 찾고 있던 레지엘이 나를 바라보았다. 쳇. 나 먼저 간다! 예? 나는 당황하는 레지엘과 칼을 무시하며 취대한 속도를 높여 달려 나갔다. 설마… 한! 우리는 길도 몰라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레지엘의 목소리. 쳇. 이거면 되겠지? 다크 건. 나는 손에 마나를 모아 하늘로 쏘아 올렸다. 검은 빛줄기가 나무들을 뚫고 자나가며 검은 잔영이 남았다. 이거면 따라올 수 있겠지. 레지엘도 수긍했는지 더 이상의 고함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발…. 나는 신음 같은 중얼거림을 흘리며 계속 달렸다. 퀵 스텝을 최대한으로 펼친 덕분에 마나와 체력의 소모가 급격히 심해져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보통 길에서라면 내가 미시안보다 좀 빠르겠지만 이런 숲에서는 미시안이 나보다 더 빠르다. 거기다 지금은 미시안도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있을 테니 거리를 좁히기는 쉽지 않겠지… 다크 건. 나는 다시 한번 허공으로 마나를 쏘아 올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시안의 기척은 느껴지지… 음? 순간 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얼굴을 굳혔다. 미시안? 몬스터가 꽤 많은데… 뭐, 미시안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거기다 디렐도 있고… 그리고 내 예상대로 미시안과 디렐은 곧 몬스터들을 떨치고 계속 달려갔다. 흠… 그런데 문제는… 카아아아악! 휘휘휘휙! 나는 전방 50m 정도에서 괴성을 지르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쳇. 한 놈의 팔이 꽁꽁 얼어있는 것을 보니 미시안과 싸우긴 한 모양이군… 카아악! 순간 로우 데몬 한 놈이 나를 발견하고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듀라한 둘과 로우 데몬 하나. 모두 색이 조금씩 달랐다. 그리고 기세도 위협적이니… 변종 몬스터인가? 쳇. 나는 도망도 치지 못하니…. 뒤에서 레지엘과 칼이 오고 있지… 이놈들을 이대로 두고 가서는 그 둘이 고생을 좀 하겠지. 아니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고. 몬스터가 더 몰리면 레지엘과 칼만으로는 위험하니까. 나는 지금 기분이 별로야 친구들. 나는 살기를 섞어 중얼거리며 마나르트를 뽑아들었다. 순간 내 몸에 퍼져나가는 강한 마력. 그럼 오랜만의 재회를 즐겨볼까? 으아아앗! 나는 마기를 극도로 끌어올리며 빠른 속도로 몬스터들에게 다가갔다. 일격에. 모두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되는대로 많이 피해를 입혀야지. 죽어랏! 나는 기술도 발동시키지 않고는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순간 마나르트가 여러 갈래로 나눠지며 주위를 휩쓸었다. 그리고 일어나는 엄청난 폭발. 콰아아앙! 우오오옷! 몬스터들을 스치고 지나간 나는 등뒤에 폭발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가며 허공을 비행했다. 오랜만인데? 커헉! 쿠당탕. 바닥을 몇 번 구른 나는 고통을 참아가며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자기 공격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다니… 검기 등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사용하면 폭발이 일어나 상당한 충격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공격 능력이 커지는 만큼 충격 등에 견디는 힘도 늘어나기 때문에 지금의 나와 같이 자신의 공격에 생겨난 폭발에 충격을 받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빌어먹을! 마나르트! -아… 빨리 끝내야 할 것 같기에… 크윽! 말하지 마! 나는 마나르트에 대고 악을 써주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몬스터들은 다 죽었다. 두놈은 숨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레지엘과 칼이 간단히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빈사 상태. 망할 자식. 꼭 처음 호흡을 맞출 때 같은데? 나는 옛날, 마나르트를 처음 사용하던 때를 떠올렸다. 오크와의 싸움…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마나르트가 자신의 능력을 자의로 이용해 내 공격의 위력을 높여준 것인데… 덕분에 몬스터를 잡기는 했다만…. 나는 빠른 속도로 나무들을 피해 지나가다 나무뿌리에 걸려 잠시 비틀거렸다. 크윽… 몸이 정상이 아니잖아…. 나는 갑작스런 마력의 이용으로 충격을 받은 몸 상태에 이를 갈며 다시 숲을 가로질렀다. 망할 마나르트. 잠시 후 내 앞에 큰 절벽이 나타났다. 후… 숲을 최대한 빠르게 가로 지르려면 여기다. 다크 건. 하늘로 마나를 쏘아 보낸 나는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흐읍! 순간 절벽에서 솟아나는 바리어. 나를 바리어를 한번 딛고는 다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솟아나는 바리어. 이런 식으로 바리어를 4번 이용한 나는 그대로 높이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내 발밑으로 나무들이 지나갔다. 이 높이면 약간 위험하군. 나는 점차 가까워지는 지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읏샤! 나무 하나를 박차고 오른 나는 다시 하늘을 향해 마나를 날리고는 포션 하나를 들이켰다. 이러면 좀 나아질 지도 몰라… 몸에 힘이 좀 돌아오자 나는 다시 온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후우… 제발 무사하기를. 나는 오른쪽 꽤 먼곳에서 느껴지는 몬스터들의 기척에 살기를 내뿜었다. 흐으… 머리가 좀 이상한데? 나는 머리가 약간 쑤시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쳇, 모르겠다. 나는 다시한번 나무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다크 건. 하늘을 향해 마나을 날린 나는 협곡에서 뛰어내렸다. 크윽. 나는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또… 이상하게 머리가 아픈데? 나는 짜증을 내며 협곡을 달렸다. 확연하게 보이는 검은 연기들… 나무가 타는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풍겨오는 피냄새…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마나르트를 뽑아들었다. 크으…. 환상의 하모니군. 나는 두통에 마나르트에게서 오는 고통까지 합해진 더블 공격에 이를 악물었다. 왜지? 나는 살기를 뿜어내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나 뜨나 식스센스 덕에 별 상관은 없다. 눈을 감으면 더 확실하게 느껴진다. 왜 몬스터가 없는 거지? 나는 마을쪽에서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얼굴을 굳혔다. 몬스터만 없으면 좋겠지만… 다크 엘프들의 기척도…. 왠지 불안해… 나는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하며 협곡을 벗어났다. 반짝거리는 호수. 그리고 마을은 호수를 빙 둘러 이루어져 있다. 으아아아악!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미시안? 나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불타는 마을. 그리고 흙 속에 스며들고 있는 붉은 피의 바다.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으으…. 나는 나무에 걸려 있는 붉은 고깃덩이를 보며 신음을 흘렸다. 켄 씨? 가죽이 거의 벗겨져 있지만… 얼굴의 형체를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켄… 씨? 흠… 확실히 우리 일족이 만든 것이군. 엘프들의 작품이야. 내 천상의 망토를 강화시켜준 마을의 장인… 흐으으…. 오빠! 피리 불어줘! 흐윽?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환청같은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꼬마들? 크아아아아아! 미, 미시안! 진정을…. 미시안과 디렐의 목소리. 나는 몸을 떨며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 보이는 검은 인영. 저게 미시안과 디렐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보이는… 세한님? 으윽!? 또다시 들려오는 환청. 이, 이게 무슨… 렌의 목소리? 나는 울부짖고 있는 미시안에게 걸어갔다. 그런데 저게 미시안이 맞기는 맞아? 툭. 흐윽? 나는 뭔가에 걸려 바닥을 뒹굴렀다. 흐으으… 에나? 나는 기괴한 모양으로 뒤틀려 있는 어린 다크 엘프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 내가 막기에는 시아가 너무 포악해서… 으악! 으아! 뭐야!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뒤로 물러났다. 으으… 이게… 무슨… 나는 내 얼굴이 축축해 진 것을 느끼고는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물? 눈물인가? 내가 왜 울고 있는데?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세한님? 괜찮으십니까? 디렐인가?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인영. 왜… 이렇게 보이는 거야? 그런데… 어째서… 세한! 한님! 레지엘? 칼?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두 인영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주춤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두 인영. 저게 칼과 레지엘? 왜 검게… 그런데 왜… 왜 이건 잘 보이는 거지? 나는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불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많은 시체들… 스베인…. 나는 시체들 중에 하반신이 잘리고 없는 한 다크 엘프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내가 베르시아에게 쫓기다 도움을 청했는데… 베르시아가 포악하다고 했던가? 덕분에 머리를 태워먹었지… 아까 환청에서… 스베인의 목소리가… 세한! 세한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 나는 내게 다가오는 두개의 검은 인영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건! 이건 말도 안돼!! 미시안의 절규. 절규? 절규가 뭐였지? 갑자기 내 입이 열렸다. 렌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갑자기 몸을 흠칫 하는 두 인영. 이상하게 음산한 목소리잖아? 내 목소리가 왜 이래? 나는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들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눈물… 이게 언제 흐르더라? 목소리가 들린 이들은 다 죽었어. 세한? 나는 저절로 내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는 심각해졌다. 내가 지금껏 어떻게 걷고 있었더라? 나는 시체들 사이를 걸어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 둘이 급히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느껴져? 왜 느껴지지? 느껴져… 마을에 죽어있는 다크 엘프들의 수는 모두 8325명이야. 그중 2000명 정도는 머리가 잘렸고… 렌? 나는 한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 어깨와 머리만 남아있는 끔찍한 모습. 그 다크 엘프는 상당히 젊었고 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너도 죽은거냐? 세한! 나는 마나르트를 떨어트렸다. 바닥에 박히는 마나르트. 나는 무릎을 꿇었다. 무릎… 다리에 있던 건가? 아니지? 원래 앉으면 팔이 땅에 닿는거 아니었어? 렌… 네가 왜…. 나는 렌을 끌어안았다. 하반신이 없었기에 너무도 가벼웠다. 가벼워… 이상하게… 가볍다… 내 눈에 창백한 렌의 얼굴이 들어왔다. 내가 탓…. 내 탓? 뭐가 내 탓이라는 거지? 으아악! 이게 뭐야! 치워! 치우란 말야! 나는 갑자기 내 시야의 중앙에 위치한 창백한 얼굴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치, 치워! 렌? 왜 그렇게 창백하지? 왜 입가에 피가 묻어있는 거야? 왜? 치워! 내 탓… 내가 좀더 일찍 알았으면… 내가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일찍… 네가 죽었으니… 헬레나가 슬퍼하겠구나… 헬레나는 살아있을까…? 살아있을까…? 세한! 세한님! 몸이! 순간 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옆에 박혀 있는 마나르트. 그리고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렌을 끌어 앉고 있는 나. 지금껏 저 모습으로 내가 살아왔었나? 이 그림자의 세상에서?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이게 뭐야? 내가 내 모습을 보고 있어? 왜… 내 모습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된 거야아아아아아아아아!!!!!! 순간 내 시야가 사라졌다. '인간이 왜 사람이라고 불리냐고? 흠,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지.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크허억! 비, 빌어먹을! <일급 경보! 일급 경보!> 으아아아악! 나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몸을 꿈틀거리려 했지만 지금은 몸을 묶고 있는 족쇄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일급 경보! 사용자의 뇌에 충격, 쇼크! 프로그램 오류! 급히 응급 치료 시작! 긴급 코드 003!> 딱딱한 기계음과 함께 갑자기 고글이 사라졌다. 흐으? 그리고 내 머리를 감싸는 차가운 금속들. 지이이이잉! 즈즈즈즈! 크으…. 나는 내 머리를 통과하는 이상한 기운에 몸을 굳혔다. 으으… 호, 혼란스러워… 이게 뭐… 순간 머리를 감싸던 금속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풀려나가는 족쇄들. 치이잉… 허억! 캡슐의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쓰러지듯 캡슐을 벗어났다. 털썩. 크으으….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아… 좀 괜찮아 진 건가? 나는 고여 있는 눈물을 짜내고는 덜덜 떨며 몸을 일으켰다. 치이이이익… 열려있는 캡슐의 문으로 이상한 연기들이 흘러나왔다. 왜… <긴급 코드 003의 사용으로 게임 캡슐에 무리가 전해져 현재 복구중입니다. 복구 예정시간은 3시간. 현 복구 때문에 본사에 정확한 사고 경위를 보고하지 못했으니 직접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구?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캡슐의 옆에서 흘러나오는 백지. 백지는 내 앞으로 흘러왔고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건… 페이퍼 스크린(Paper Screen)…."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탁자 위로 올렸다. 여기에 하나 있었는데… 아… 작은 물체에 손이 닿자 나는 힘겹게 손을 끌어내렸다. 손에 들려 있는 작은 금속. 나는 그 금속을 백지에 가져다 대었다. 순간 여러 글자들이 나타났다. <일급 상황. 긴급 코드 003 사용. 게임 이용자의 뇌에 갑작스런 쇼크가 생겼음. 기존의 뇌파에서 커다란 변동이 생겨 프로그램 오류. 오류 코드 215.> <본사에서 지정한 뇌파 지수 127에서 갑자기 뇌파 지수 218로 급상승. 이유 불명. 가상현실의 육체와 분리. 상당한……> <캐릭터의 삭제 조치도 가능하며 조사에 착수할 것.> 이건…. 나는 멍한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로는 스크린을 던져버렸다. 빌어먹을… 갑작스런 쇼크? 크큭… 맞아… 다크 엘프들이 죽었던가? 렌…. 나는 마지막에, 내 의지로는 아니었지만 내가 품에 안았던 다크 엘프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이게… 왜… 캐릭터 삭제? 너희가 죽고… 나도 죽는 건가? 왜… 크흑…. 나는 숨죽여 울음을 터뜨렸다. 죽었다… 죽었어… 모두가 죽어버렸어… 대체 왜… …… 전화……. 뭐? 받아…… 전화…. 핫! 나는 눈을 떴다. 으음… 잠들었나? 아, 눈물? 나는 눈가를 닦아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좀 어지럽기는 했지만 견딜 만… 하지 않군. 우욱…. 나는 탁자를 집어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는 고개를 휘저었다. 이게… 어떻게 된… 아…. 잠들기 전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렌… 제길! 왜이러 머리가 지끈거려? 혼란스러워서… 슬프다는 감정도… 전화 받아! 전화 받아! 헤헤헤헤! 나는 살기를 피어 올렸다. 저 망할… 전화 받아! 전화 받아! 시끄러! 나는 전화기를 강하게 쳐버렸다. 스크린 등의 전화 기기가 벽으로 날아가 산산이 깨져나갔다. 헉… 헉… 시끄럽다고….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큭. 옛날로 돌아간 기분… -현진님. 갑작스런 기물의 파괴가 있었습니다. 강초연 씨와의 통신이 끊겼습니다. 전화 2호가 파괴. 복구 불가능으로 보입니다- ………. 나는 몸을 일으켰다. 왠지 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머리가 아프지 않은데? 후… 몇 년 전의… 지금처럼 억지로 유쾌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내 본성. 쳇. 나는 혀를 차고는 거실의 소파로 걸어갔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러니까… 쇼크를 받아서… 프로그램 오류라…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캐릭터가 삭제될 수도 있다고? 그것보단… 한명이라도 살아있을까? 렌… 큭! 순간 상당한 두통을 느낀 나는 마음을 추슬렀다. 이게 뭐야… 왜 이 꼴이 된 거지? 전화 받아! 헤헤헤헤! …… 쳇. 나는 몸을 일으켜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옆의 전화로 다가간 나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강초연… 초연 씨? 흐으… 받아도 될까? 다크 엘프들이 죽은 건 초연 씨가 나에게 말을… 빌어먹을… 이거 도대체 왜이래? 나는 갑자기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해 졌어… 쳇. 나는 살기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후… 인마. 생각해 보라고. 너 초연씨 좋아하는 거… 크아악!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무릎을 꿇었다. 이, 이게 도대체… 크흐으…. 어떻게 된 거야? 화를 내면서 분노할 때는 멀쩡했는데… 전화받아! 전화받아! 크으….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몸을 일으켰다. 역시 사라지는 통증. 나는 화상모드가 아닌 음성모드로 전화를 받았다. 현진 씨? 어? 왜 음성모드가…. 나는 초연 씨의 목소리르 들으면서도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평소 목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하던 감정은 물론… 분노하는 감정까지. 이상하게 약간만 화가 나도 주체할 수가 없는 듯한… 아… 전화기가 좀 고장이 나서요. 약간 떨리는 내 목소리. 하지만 초연 씨는 눈치 채지 못했는지 상관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현진 씨! 괜찮으세요? 갑자기 본사에 일급 경보가… 헌터용 기기라 깜짝 놀랬다고요. 무슨 일이죠? 일급이면… 혹시 몸에 이상은…. 초연 씨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일급 경보… 뇌에 손상이 왔다고? 캐릭터 삭제도 가능하다… 그럴 순 없어. 아… 그게… 캡슐에서 나오다가 캡슐 속에 커피를 흘려서요. 갑자기 연기가 나더니 일급이 어쩌고… 그러고는 지금 자체적으로 수리가 가능하다고 수리중인데… 별일 아니에요. 내 말이 끝나고 초연 씨의 안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런 거였군요… 깜짝 놀랐어요. 일급 경보면 사용자의 신변에 이상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급히 전화한 건데…. 하하. 별일 아니에요. 회사에 그렇게 전해 주세요. 예. 곧 정호 씨, 시렌 아시죠? 그분이 가실 거예요. 캡슐 수리도 할 줄 아시는 분이라… 후…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약간 떨리는 초연 씨의 목소리. 나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아, 미안한데 지금 할일이 있어서… 나중에 봐요. --------------------------------------------------------------------------------------------------------------------------------------------------------------------------------------------------------------------------------------------------------------------------------------------------- 아, 예. 나는 연결을 끊고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나는 머리를 감싸 안고는 고개를 숙였다. 크으…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 누구의 말이더라? 나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뇌에 이상이 생긴 건가? 프로그램 오류라… 밝히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가? 빌어 먹을! 나는 격한 감정을 느끼고는 고함을 질렀다. 제길… 역시 이상하게 분노만은… 너무도 빨리 강해진다… 이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슬퍼하지도 못하는 건가? 제길… 렌…. 나는 렌의 생각이 나자마자 몸을 흠칫 떨었다. 또… 어라? 안 아프네? 나는 눈을 멀뚱하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야? 방금까지 아프던 것이 장난인 듯… 이, 이게 뭐야? 나는 황당한 기분에 머리를 톡톡 쳐 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다시 멀쩡해 졌네? 나는 유쾌한 감정이 드는 것을 느꼈다. 일시적인 통증이 있던… 크아악! 갑자기 물려오는 두통. 나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쓰러졌다. 크으… 이게 도대체… 발작이라도 되는 듯이… 나는 다시 렌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두통이 훨씬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마음을 비우려 노력했다.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현진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주) 리자드의 운영자 시렌, 박정호님이십니다- 나는… 감정을 잃게 된 건가? 나는 갑자기 몰려오는 공포에 이를 악물었다. 제길… 또 두통이 몰려오고 있었다. 으음…. 나는 멍한 눈으로 하얀 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졸린다. 이 시간에 졸음이 오다니…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고역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깐 왜 그리 청승을 떨었던 건지…. 현재 두통은 다시 사라지고 없었다. 이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지금도 짜증이나 열은 너무도 잘 받는다. 이거 왜 이러는 건지… 접속할까? 나는 게임 캡슐이 들어있는 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까 정호 씨가 다녀갔는데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돌아갔다. 캡슐이 자가 수리 중인 게 다행 이었어… 그런데 정상적으로 접속이 될까? 나는 이미 자가 수리가 끝나 죽은 듯이 멈춰있는 캡슐을 의심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뇌에 약간 이상이 생긴 것도 같은데… 괜찮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멍한 상태로 돌아가며 하얀 벽지를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두통이 사라졌지만 언제 또 머리가 아플지 몰라 나는 지금 무심 상태 유지하기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그 수련이라는 것이 몇 시간 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라서 문제였지만… 하지만 이게 좋을 수도…. 죽어나간 다크 엘프들의 생각을 떠올리느니 차라리 이렇게 침착하게 있는 것이 더 좋을 수도… 그런데 이걸 침착하다고 할 수 있나? 순간 렌의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곧바로 변종 몬스터들에 대한 살의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후우… 이거 무의식중에…. 처음 약 한 시간 동안 두통에 시달리다 보니… 지금 어떤 감정이 생길라 치면 순간적으로 열 받는 기억을 끄집어내 스스로 분노하고 있는 나였다. 이거 좀 위험할 지도… 나는 다시 멍하니 모드로 돌아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후우…. 이 살기를 띄는 짓거리도 그만둬야 하는데… 이거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머리를 한대 쳤다. 흐음… 이거 이렇게 때릴 때는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무슨 감정이 생기면 아픈 이유는 뭐지?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으음… 그러고 보니 강 사범님 말로는… 무심의 상태가 최고의 경지라고 하던데… 흠…. 나는 오래 전에 강 사범님이 대련에서 져 쓰러져 있는 나를 붙잡고 장장 한 시간 동안 떠드셨던 말을 떠올렸다. 모든 무도의 끝은 무심,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잊는 경지라던가? 그게 뭔 소린지야 모르지만… 솔직히 그때 졸고 있었다. 어쨌든 이거 연습하면 좋을지도 몰라. 흠… 그러고 보니 강 사범님과 한 사범님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 나는 그 두 분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흠… 솔직히 절대 이어주면 안돼는 두 분인데… 어째 잘 어울리시는 듯해. 으음…. 나는 또 머리가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아프다 안 아프다 그러는군. 나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흔들 흔들거렸다. 후… 이거 병원에 가야하나? 하지만 병원에 갔다가는 진료 기록 전산화가… 그거 들킬 위험도 있고… 좀 문제가 있지… 접속? 나는 게임 캡슐이 있는 방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끔찍한 모습을 또 보기는 싫다고… 나는 아까보다야 훨씬 덜하지만 머리가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가 어디야? 나는 잔디밭에 대자로 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호… 너무도 맑은 하늘… 역시 현실과는 딴판이지. 나는 식스센스를 발동시켜 보았다. 근처에 생명체는 없고… 내가 와본 적이 없는 곳 같은데… 여기가 어디지? 튕기면서 프로그램이 오류가 났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인가? 후… 어쨌든… 접속도 제대로 되는 데다 악마의 숲도 아니니…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나는 윗몸을 일으켜 앉았다. 으음… 숲? 초원? 숲이군. 나는 나무들이 좀 듬성듬성 나 있는 넓은 숲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어디야? 마르코 수림(樹林)…. 나는 이곳의 지명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들어보는군. 나는 눈을 깜박이며 몸을 일으켰다. 넓은, 거의 초원 수준의 넓은 대지. 그리고 푸른 나무들. 날씨도 따뜻… 허억!? 나는 날씨가 따뜻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비명을 질렀다. 마, 맙소사… 분명 계절이 초겨울 아니었어? 그런데 따뜻? 그럼 대륙의 최남단인가? 남단지방은 항상 봄 날씨라고 하더니… 후… 이거 짜증나는군. 내 중얼거림과 함께 갑자기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오오! 새들이 날아오른다! 나는 내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역시 이런 분노하는 듯한 감정이 너무 심하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나르트가 없으니 이제는 웬 두통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군 그래. 나는 마음을 비우려 노력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충 오전 중이군. 해가 동쪽에 있으니… 여기가 대륙의 남쪽이라면 저기가 북쪽이겠지? 북쪽으로! 흠… 가볼까? 이왕 이렇게 된 것, 즐기기로 결심한 나는 빙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거… 거의 도가 텄군. 얼굴을 웃고 있는데 실상 진짜 즐거워하는 것은 아니니… 으으…. 나는 웃다보니 괜히 즐거운 마음이 드는 것을 깨닫고 미소를 지웠다. 이거야 원… 결국 무표정 모드로 돌입한 나는 천천히 나무들 사이를 걸어갔다. 지도를 좀 볼까? 마르코… 헉? 지도를 꺼내기 위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나는 비명을 질렀다. 비, 비었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품속에 아무런 아이템도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우우… 또 머리 아프네… 나는 눈을 조금 찡그리며 내 몸을 살펴보았다. 품속에는 아무 것도, 1실버도 없고… 배낭은 어디론가 떠나갔고… 마나르트도… 샤프소드도… 반지 하나 없어? 마, 맞다… 린까지! 나는 내 모습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튕기기 전에 마나르트도 떨궜고… 아이템들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기는 했어. OPG도 없잖아…. 그래도 옷은 입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옷들은 아이템이라기보다는 기본 의복이라는 개념이 강해서… 하지만 조금이라고 능력치가 있던 옷들은 다 사라졌다. 크… 그 비싼 옷들이…. 나는 씻을 필요는 물론 내구력 무한의 환상의 검은 의복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슬픔에 잠겼다. 말도 안돼… 지금까지 모은 재산이… 오옷! 머릿속에서 반란이 일어났어! 나는 한쪽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음… 시, 시야가…. 나는 시야가 이상하게 반으로 나뉘는 것을 느끼고는 멍하니 모드로 돌입했다. 후… 너무 격한 감정을 느끼니… 프로그램이 좀 이상을 일으키나? 이거 어떻게 할지 모르겠군… 아니… 그것보단…. 나는 검은 가죽 바지에 가죽과 면이 혼합된 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천상의 망토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나마 멋있어 보이네. 신발은 역시 검은 부츠. 꽤 고급인 게 다행이지만 이건 강철 부츠 안에 신고 있던 건데… 쳇. 어째 반지하나 남기지 않고 다 없어진 거지? 후… 진정하자…. 나는 잠시 눈을 감고는 마음을 추스렀다. 후… 진정… 무념무상이라… 나는 다시 무표정모드로 돌입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쨌든 이제는 지도도 없고… 무기하나 없어. 돈도 없고… 강한 몬스터가 없기를 기원해야하나? 나는 씁쓸히 웃고는 다시 숲을 걷기 시작했다. 우선 마을에 들려야 얘기가 되겠군. 걸음을 옮기던 나는 갑자기 어떤 물체가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는 걸음을 멈췄다. 뭐지? 부들… 나는 몸을 돌렸다. 뒤쪽에서 느껴지는데? 나는 내가 처음 누워있던 자리에서 뭔가가 느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깜빡였다. 뭐지? 음? 그러고 보니… 저기 뭔가 검은 바위 같은… 린! 그 검은 물체가 알로 돌아간 린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풀 속에서 조금씩 진동하고 있는 린. 내가 알을 들어올리자 진동이 멈췄다. 내가 혼자 가니까 좀 움직인 모양이지? 나는 피식 웃고는 알을 쓰다듬었다. 크으… 이 감동적 순간에도 두통에 시달리다니…. 나는 고개를 휘저으며 린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들어갈까? 천상의 망토는 최고급 아이템이다. 덕분에 린은 무리없이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게 들어갈 일은 없는 건가? 그럼… 가보자고. 흠… 능력치에는 이상이 없는 것도 같은데… 스킬은 전혀 이상 없고…. 나는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떠 있는 반투명한 창. 내 능력치들이 나타나 있는 캐릭터 창이었다. 스킬은 들은 이상 없어. 능력치들이…. OPG의 부재로 힘과 체력이 뚝… 반지들과 각종 악세사리들이 없어진 덕분에 지혜와 민첩도 어느 정도 떨어졌을 테고… 리턴 체인 메일도 없고… 마법 저항력이 꽤 낮아졌네? 흠… 그, 그런데… 내가 이렇게 똑똑했나? 나는 여러 아이템들의 목록과 예상되는 능력치 하락 수치와 현재 능력치를 비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약간 입을 벌렸다. 펴, 평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왠지 잘 돌아가는 머리에 스스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천재성(?)이 여기서 진가를 발휘하는구나.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 어쨌든 아이템이 없으니… 왠지 무서워… 케르륵! 엥?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괴성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라? 저 개머리 씨들은… 코볼트로군. 전에 몇 번 본적이 있지. 하급 몬스터. 캐캥! 코볼트들은 간단한 갑옷에 메이스들을 들고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 7마리. 놈들은 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 숲에는 코볼트들이 사나? 흠… 보통 허약한(?) 코볼트는 아니고 좀 업그레이드 된 놈들이군. 한 1, 2계급 용. 오? 저놈은 코볼트 치픈가? 3계급 몬스터는 되겠는데? 그때 놈들이 나를 보며 포효를 시작했다. 크아아아앙! 훗. 누구 앞에서 포효를 하고 지랄…. 느긋하게 웃으며 허리로 손을 가져가던 나는 얼굴을 굳혔다. 으음? 그, 그러고 보니… 나는 허공을 지나다니는 내 손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무기가 하나도 없지?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내 몸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에서 품속. 와이어를 감아두던 손목. 그리고 OPG의 손톱을 꺼내던 자세까지 취해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으읏… 맨몸으로? 가, 가죽 장갑도 없고… 그저 평범한 가죽 부츠. 이걸로 싸우라고? 마나를 이용하면 되긴 하겠지만… 나는 긴장한 눈으로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으으… 초보용 쇼트소드 하나만 있었어도 저런 놈들에게 이렇게 긴장을 하는 일 따위는… 케케케… 크르륵. 나를 보며 비웃듯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코볼트들. 나는 눈을 부릅뜨며 놈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날 비웃은 거냐! 순간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살기. 그리고 내 몸에서 약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후… 이거 마나르트가 없어도… 내 마나에 마기가 좀 섞여 있으니 이렇게 나오는군. 어쨌든 확실히 화가 잘 나기는 하는데? 마나르트 없이 이런 기운이 나온 건 처음이야. 네놈들 따위에게… 비웃음 당할 이유는 없다. 죽음으로 사죄들 하라고. 나는 내 살기에 짓눌려 뒤로 한발짝씩 물러나 있는 코볼트들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후… 이거 나쁘지 않은 기분이군. 단검 하나 없는 게 아쉬워. 죽인다…. 나는 살기가 넘쳐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코볼트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몸을 떨다 발작적으로 내게 달려드는 코볼트들. 나는 더욱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낙원이로세." 마르코 수림. 나무들 사이를 걸어가던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섀도우 월드에서 보기 힘든 중년의 외모를 한 사내. 거기에 더욱 특이하게도 사내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이마에는 6개의 점까지 찍혀있는 것이… 마치 오랜 수행을 한 고승 같은 모습이었다. "후후. 그럼 여기서 얼마간 지내볼까."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거리는 사내의 모습은 수행 깊은 고승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거기에 사내의 복장은 중세풍… 좀 펑퍼짐한 것이 약간 동양틱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서양의 옷이었다. 그리고 손에서 절그럭거리는 염주… "하하. 오늘따라 염주의 느낌이 좋군 그래." 사내의 손에 들린 염주는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검은빛의 보석이라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반짝거리는 보석 염주는 역시 스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이상한 중이 허허거리고 있는데 그 사내의 옆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낙원은 무슨… 몬스터도 없고… 하아… 나프네 언니는 왜 이런 이상한 아저씨를 따라다니라고 한 거지?" 투덜거리는 소녀. 소녀는 붉은 단발머리에 등에는 작은 석궁을, 그리고 몸 여기저기에 단검에서 짧은 소검들을 차고 있었다. 레인져로 보이는 소녀. 소녀의 투덜거림에 허허거리던 중이 눈을 가운데로 모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리카. 나도 너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네 그래. 나프네 양의 부탁이 없었으면… 그리고 코볼트 같은 몬스터와 싸운 것이 언제라고 그렇게 불만인가?" 리카. 레이디스 길드의 전령 소녀 리카는 허허거리는 중의 목소리에 입을 삐죽내밀며 투덜거렸다. "힝… 코볼트가 무슨 몬스터예요. 저한테는 경험치도 주지 않는데… 고타 스님은 너무 고지식해." "허허. 뭐가 고지식한지 모르겠군. 어쨌든 여기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 흠… 그런데 나프네가 리카 양을 왜 나하고 동행시켰는지 의문이로세… 어쨌든 계속 걷자고 리카 양." 뭔가 스님이 쓸만한 말투와 평범한 말투가 뒤섞여 있는 고타라는 중의 말에 리카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통통거리며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고타는 염주를 절그럭거리며 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이한 것은 분명 달리지는 않고 있는데 마치 달리는 듯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하. 역시 이곳에서는 꿈에서만 그리던 무술들을 사용할 수 있다니까. 으음? 리카 양. 이 늙은이를 좀 기다려 주면 덧나겠나?" "힝… 고명한 무승(武僧) 고타 아저씨가 저를 못 쫓아온다 고요? 베…." 리카는 고타에게 혀를 쑥 내밀어 보이고는 계속 깡총거리며 뛰어다녔다. 아이 같은 리카의 모습에 고타는 한숨을 내쉬고는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마주 달려가고 싶었지만 몇 십 년간 쌓아온 불가의 사람으로써의 행동이 베어있는 고타는 계속 그 천천한 듯 하면서도 빠른 걸음걸이를 고수했다. 전투 시에는 마구 날뛰는 이상한 중 고타였지만 어쨌든 그는 사람들이 점잖다 부르는 '스님'이었다. "후…." 고타는 한숨을 내쉬며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잠시 후, 해가 저물어 가자 고타는 리카를 불러세웠다. "리카 양! 이제 쉬었다 가세나. 해가 저무는군." 고타의 말에 여전히 깡총, 통통거리며 뛰어다니고 있던 리카는 고타의 옆으로 다가왔다. 좀 힘들었는지 이마에 땀방울을 맺혀 있었다. "하아… 헤헤. 역시 나이스 타이밍…." 고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현실에서는 구시대의 유물이라 불리는 남색 담요를 꺼내 바닥에 깔고는 그 위에 정좌했다. 그리고는 염주를 절그럭거리는 고타. 리카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관세음보살…." 고타는 염주를 천천히 움직이며 불경을 외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리카는 눈을 깜박이다가 자신의 배낭에서 침낭을 꺼냈다. 곰돌이 그림들이 수 놓여 있는 귀여운 침낭… "펫 베어!" 품속에서 뭔가 작은 것을 꺼내든 리카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 작은 것은 순식간에 리카에 육박하는 크기의 곰 인형으로 변했다. 잠시 눈을 기이하게 경련 시키던 고타는 자신에게 목탁이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계속 불경을 외었다. 리카와 함계 여행을 한 4일 정도 되었지만 저런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은 쉽게 적응되지 않는 것이었다. "헤헤…." 곰 인형을 끌어안은 리카는 그 커다란 곰인형을 침낭속에 집어넣고는 자신 역시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곰인형을 끌어안고 뒹굴거리는 리카. 고타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계속 불경을 외웠다. 오늘은 리카나 고타 모두 로그아웃을 할 필요가 없는 때다. 고타는 한번 밤을 새워 불경을 외는, 자신의 63년 생애에 존재 않던 업적을 남겨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흠… 아니지. 망나니 무승이라 불리던 내가 그런 짓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백두산의 상당히 큰 절, 장백사의 유일한 무승 이한인. 그게 현실에서의 고타의 이름이었다. 고타는 평소 자신의 행실에 대해 떠올리다 불경을 멈췄다. 역시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결정을 내리고는 불경을 기본만 외고 그만두어 버린 것이었다. "흠… 어쨌든 이 게임을 시작한 것이 꽤 도움이 되는군… 시간도 늘어나고… 무술 실력도 늘어난단 말야. 하하. 이래서야 사조님들의 전설을 뛰어넘은 신화적 무승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 껄껄걸."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다 껄껄거리며 웃는 고타를 리카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느낀 고타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멈추고는 옷을 가다듬었다. 중세풍의 서양복이면서도 약간 동양틱한 펑퍼짐한 옷… 그 옷을 기이하게 움직이던 고타는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으음?" "힝? 왜 그래요, 고타 아저씨?" 갑자기 고타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하지만 고타는 리카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시없던 진지한 얼굴로 숲의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타의 저런 진지 모드를 처음 보는 리카는 상당히 놀라워하고 있었고 고타 자신도 이런 멋진 모습을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허허. 으음… 리카 양. 잠시 기다리시게. 좀 다녀올 곳이 생겼군." "에에? 안전지대를 설정해서 몬스터가 올 리도 없는데 왜…." 리카의 질문에 고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기이한 의복이 펄럭거렸고 곧 고타의 모습이 리카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리카는 투덜거리며 침낭에서 기어 나왔다. "펫 베어! 중간 크기." 리카의 외침과 함께 잠시 꿈틀거리던 커다란 곰 인형은 좀 작은 크기로 변했고 그 모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리카는 고타가 걸어간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허허…." 고타는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 방향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감돌고 있는 엄청난 살기. "내 생애에… 진정 아수라의 기운을 지닌 이를 만날 줄은 몰랐군 그래." 고타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는 10이 넘는 수의 코볼트 치프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검은 망토의 청년이 있었다. 더구나 청년의 주위에는 수십의 코볼트들이 죽어있었다. "맙소사… 정말 아수라가 아닌지 의문이군…." 고타는 긴 검은머리를 가진 청년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전신에서 검은 기운과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청년은 무기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맨손으로 싸우고 있었다. 마나로 몸을 감싸고 있다고는 해도 마나가 무한정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때문인지 지금 청년의 양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맨몸으로 무리하게 몬스터를 공격해서 생긴 듯한 상처… 그리고 청년의 다리에도 상당한 상처가 보였다. 그저 평범한 가죽 부츠는 상당부분이 찢겨 나가 있었고 그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허… 무도가인가?" 고타는 깨끗한 돌려차기로 코볼트 하나를 절명시키는 청년을 보며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기운에 와보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했던 고타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여기가 게임 속이라고는 해도… 이런 살기를 뿜어내고… 살기를 형상화시키기까지 하다니… 이건 상당한 경지인데… 흠… 나보다는 못하지만." 청년의 마나에 이상한 마의 기운과 엄청난 살기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고타는 순수하게 감탄하다 순간 자신이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뒷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저 청년이 자신보다 모도의 경지가 낮다는 것은 맞는 사실이니까. "에… 그렇게 자화자찬하면 즐거워요?"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고타는 갑자기 들려온 리카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입을 삐죽이며 곰 인형을 들고 있는 리카가 서 있었다. "하하… 그, 글세." "흠… 어라? 앗! 한 오빠다!" "음?" 리카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고타는 리카가 저쪽에서 싸우고 있는 청년을 보며 아는 채를 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저 청년과 아는 사이인가, 리카 양?" "에… 그렇긴 한데… 히익. 분위기가 왜 저런 거지?" 숨을 죽이는 리카를 보며 고타는 리카에게서 설명을 요구하기는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청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캐캥! 이미 그 많던 코볼트들은 2마리로 줄어있었다. 그리고 양 팔에서 엄청난 피를 흘리며 헐떡거리고 있는 청년. 마나가 거의 고갈되었는지 몸에서 마나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공할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 고타는 숨을 죽였다. 불가의 무승인 자신이 추구하는 길과는 정 반대의 길에 있는 듯한 청년. 고타는 씁쓸하게 웃고는 청년을 유심히 살폈다. "힝… 도와야겠다." 리카는 등뒤에서 석궁을 풀러내렸다. 그 모습에 잠시 고민하던 고타는 리카를 제지했다. 의문 섞인 눈으로 고타를 바라보는 리카. 고타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저 고개를 흔들어 보였고 고타의 진지한 얼굴로 리카는 시무룩하게 변하며 곰 인형을 끌어안았다. "후…." 고타가 다시 시선을 돌리니 그 청년이 나머지 코볼트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고타는 시선을 집중했다. 코볼트 치프는 상당한 속도로 메이스를 휘둘렀지만 그 청년은 너무도 쉽게 공격을 흘려보냈다. 두 마리의 코볼트의 공격을 마치 읽기라도 하듯 쉽게 흘려보내는 청년의 실력에 고타는 감탄했다. 아무리 컴퓨터가 실력을 조정해 주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거야 무기가 있을 경우 마음먹으면 컴퓨터가 경로를 좀 조정해 주는 정도이지… 진짜 고렙들은 게임을 하면서 전투 경험을 쌓아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그 움직임과 컴퓨터의 조정이 결합되어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하지만 저 청년의 모습은 그런 것들도 뛰어 넘은 듯 했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그저 공격을 흘러보내는 것… 아마 저 움직임은 게임에서만 통용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고타의 생각이었다. 자신도 경험한 일. 전투 경험이 뇌에 각인 되는 일. "허… 혹시 겉모습을 젊게 바꾼 건가?" 고타는 청년의 젊은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자신의 경지에 비하면 모자르지만… 상당히 뛰어난 실력… 하지만 그 실력에 비해 나이가 적어 보이는 청년의 모습. "흐음… 혹시 이 지고의 천재보다 더욱 똑똑한 우주의 천재가…." 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고타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리카. 리카의 시선에 고타는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청년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 청년은 순식간에 코볼트 하나를 쓰러뜨렸고 마지막 코볼트와 대치하고 있었다. "흐음?" 고타는 갑자기 살기가 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침을 삼켰다. "후… 이 세상에서 저런 살기를 풍기는 사람, 존재는 처음 보는데?" 그리고 순식간에 코볼트의 앞으로 다가가는 청년. 상당히 찢어져 있던 망토는 신기하게도 정상으로 돌아가 펄럭거리고 있었다. "신기하네?" 호기심을 보이는 고타. 그리고 청년이 코볼트의 메이스를 물 흐르듯 피하며 오른손을 코볼트의 머리에 가져갔다. 코볼트의 입을 강하게 움켜쥐는 청년. 순간 코볼트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으음…." "히익?" 신음을 흘리는 고타와 리카. 고타는 상당히 잔인하다고 할 만한 청년의 행동에 고타는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나와 비슷한 친구가 또 있군.' 고타는 싸움만 시작하면 좀 끔찍한 죽음을 몬스터들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참으로 중 답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고타다. 어쨌든 그 청년에게서 같은 무도가로서의 동질감과 자신과 동류라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낀 고타는 미소를 지으며 걸어나가려 했다. 순간 들려오는 고함소리. "으아아악! 또 흥분했닷!" "………." "힝?" 방금까지 자신들을 압박하던 살기들이 사라진 것을 느낀 고타와 리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의 팔을 내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 "흐으… 이 꼴이 도대체… 이거 왜 이래?" 고타와 리카의 황당함은 청년이 눈을 꼭 감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극에 다다랐다. 치료도 안해? "음?" 그때 청년에게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고타가 의아한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에? 왜 그래요 아저씨?" "흠… 저 친구… 무심의 경지? 하지만 그건 몇 개의 단계를 뛰어넘는… 나도 입구에도 들어가지 못한 경지를… 으음?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하군. 비슷하긴 한데 또 달라. 아류인가? 아니면 그저 흉내내기…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기운이 너무 정갈해 졌는데?" 고타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리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그 청년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둘이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순간 깜짝 놀란 고타와 리카는 숨을 들이켰다. "거기 누구… 어라? 리카?" 그 청년은 아까와 같은 살기를 뿜는 대신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다만 리카를 발견하고는 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을 뿐. 리카는 그 청년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달려갔고 고타는 염주를 돌리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엉망이군… 나는 피투성이에 거의 걸레처럼 변해버린 양팔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또 이꼴이군. 아침부터 코볼트들하고 싸움을 벌였더니… 그것도 맨몸으로 싸웠으니 당연한 건가? "흐음… 저건 뭐야?" 나는 내게 다가오고 있는 두 사람이 들고 있는 특이한 물건들을 보며 황당함을 느꼈다. 리카는 커다란 곰 인형을 안고 있고… 저 남자는… 중년? 아, 아니, 그건 그렇다고 치고… 중? 대머리에 이마에 만화에서 많이보던 점까지 있네? 거기다 저 보석 염주는 또 뭐야? "한 오빠!" "아아… 오랜만… 인가? 어쨌든 반갑네 리카." 나는 상당한 고통이 느껴지는 팔을 간신히 들어올리며 리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에 눈물이 그렁거기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리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 상처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으음. 안녕하신가. 나는 고타라고 하지." 엥? 나는 굵직한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이상한 남자. 얼레? 복장은 더 가관이군. 나는 특이한 형태의 복장에 눈을 몇 번 깜박거리고는 품속에서 붕대를 꺼내 팔을 감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한입니다." "하하. 반가운걸? 하하핫!" 스님은 아닌 모양이군. 나는 껄껄 웃고 있는 고타라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 저나 별일이군. 여기서 리카를 만나다니. 어? 그러고 보니 리카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레이디스 길드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붕대를 다 감은 나는 리카에게 질문을 던졌다. "리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 그건…." "우선 자리를 옮기지. 자네 상처를 치료해야하고… 우리가 안전지대를 설정해 놓은 곳이 있다네." 스, 스님 맞나? 나는 갑자기 말투가 바뀐 고타라는 사람을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이군. "간단하게 수행 여행이군." 나는 탁탁 타오르는 작은 모닥불을 보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봄 날씨라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분위기도 내고 주위로 밝히려고 지핀 모닥불이다. "힝… 그런가 봐요." "리카는 너무 덤벙대잖아." "힝…." 나는 침낭 속에서 뒹굴거리는 리카를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애 같군. 그건 그렇고 저런 엄청난 크기의 곰 인형이라니… "상처는 괜찮아?" 고타라는 남자의 말. 이거…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나는데 이런 말투… 좀 의아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이거 무표정을 하고 있기는 해도 계속 어떤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군. 약간 시큰거려… 나는 눈을 감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제길… 눈을 감으니 상처의 고통이… 나는 양팔과 다리에서 전해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코볼트들이야 내가 단검 하나라도, 가죽 장갑 하나라도 끼고 있었으면 쉽게 잡았을 테지만… 마나라는 것은 어떤 매개체를 이용해 사용해야 소비가 적은 것이다. 이렇게 맨몸으로 사용하면 위력과 효율성이 떨어지지… 거기다 회복 아이템도 다 떨어져 나갔으니… 천상의 망토가 있기는 하지만… 마나 소비에 비해 회복수치가 너무 낮아. 싸움이 끝난 지금은 마나가 거의 다 차고 있지만… "자네, 무심의 단계를 밟고 있나?" 음? 나는 갑작스레 나온 고타의 질문에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무심의 단계? 뭔 헛소리? 내 눈을 잠시 마주보던 고타는 손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던 염주를 멈췄다. "무심의 단계가 무엇인지는 아나?" 또 진지 모드로군. "무도의 최고 경지. 라고 제 사범님이 말씀하시더군요." 내 대답에 고타는 의심쩍어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흐음? 나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고타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던 고타가 몸을 일으켰다. 뭐야? "잠시 대련을 해보겠나?" 나를 내려다보는 이상한 중, 고타를 바라보던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나쁠 것 없겠지. 침낭 채로 뒹굴거리던 리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나는 대충 자세를 취하고는 고타와 마주섰다.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는 고타. 나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했다. 고수는 아닌 것 같은데…나는 내 앞에서 보석 염주를 절그럭거리는 이상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별로 강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엄청난 하수거나 엄청난 고수, 둘 중 하나일텐데… 하수겠지? 고수라면 천악이 제일로 쳐지는데… 천악도 내 식스센스에서 피해가지는 못했다. "흠… 핫!" 가만히 서 있던 나는 순간 엄청난 기세에 살짝 뒤로 물러났다. 기합을 내지르며 내게 다가오는 고타… 이, 이거… 왜, 왠지 강 사범님과 대치하고 있는 듯한… 지, 진정해라 현진! "으읏!" 나는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고타의 손을 느끼며 몸을 회전시키며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느새 좀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타. 뭐, 뭐야? "확실히 움직임을 읽는 것이 뛰어 나기는 하군… 아직 애송이지만." 나는 히죽거리는 고타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뭐야?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후우… 순식간에 주위가 내 살기에 휩싸였고 곳곳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숨을 들이키는 리카. 고타도 얼굴을 약간 찡그리고는 다시 자세를 취했다. 검이 없으니 태권도를… 나는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나가며 돌려차기를 넣었다. 퀵스텝을 극도로 사용했기에 내 속도는 엄청났다. 하지만 쉽게 내 공격을 흘려보내는 고타. 하지만 허공을 가르는 발을 빠르게 내리며 몸을 회전시켜 다른 쪽 발을 내리찍었다. "아수라…." 음? 나는 뭐라고 중얼거리는 고타의 말을 들으며 빨리 몸을 움직였다. 저런 말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나는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공격들을 날렸다. 하지만 모두 막아내거나 피해내는 고타. 이, 이건 말도 안돼… 나는 이를 악물고는 계속 공격을 펼쳤다. 10분 가량 그렇게 나와 사방을 뛰어다니던 고타는 내게서 휙 떨어져서는 손을 들어올렸다. "이제 그만하지." 내가 잠시 멍하니 서 있자 고타가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만? 아아…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담요 위에 앉아서 염주를 만지작거리는 고타. 별로 어울리는 광경은 아니군. "태권도인가?" "아… 예." 어쨌든 나보다는 나이가 많으니 존댓말을… 나는 멀뚱한 얼굴로 고타를 바라보았다. 흠… 혹시 알려지지 않은 최상위 랭커? 1, 2, 3위는 확실하고… 그럼 혹시 4위인가? 하지만 한 대도 때리지 못했는데… 천악에게도 꽤 상처를 입힌 나였는데… "무심의 경지에 대해 들었다… 사부가 누구지?" 사부? 나는 약간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 시대에 무슨 사부야? 내가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는데 고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김세한이라고 아나?" 고타의 말에 나는 몸을 흠칫 떨고는 고타를 노려보았다. 뭐, 뭐야? 어떻게 아버지의 이름을… 아, 아니지 침착하세… 동명이인일지도… "음… 사부는 아니지만 제가 다니는 태권도장의 강진철 사범님이 제 스승이라 할 수 있죠." 내 말에 고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아는 건가? "하핫! 진철이 말인가? 아, 그래서 자네가 세한의 버릇을 좀 가지고 있었군. 진철이와 세한은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하하하. 그랬군…." 마, 맙소사. 동명이인이 아냐. 진짜 아버지를 알고 있는 건가? 거기에 강 사범님도?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고타를 바라보았다. 고타는 그런 내 반응에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중이라네." "…… 농담하십니까? 스님이 싸움을 한다라…." 중이라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겉모습은 중이로군. 그런데 하는 행동이나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것에… 싸움 실력까지… 거기에 저 복장은… 내 시선에 고타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 승병(僧兵)이라고 아나?" "물론입니다." 승병이면 옛날에 있던 싸우는 스님들 아냐? "승병들의 행적이 가장 두드러지는 때가 바로 임진왜란 때지. 왜군을 몰아내던 싸우는 중들. 그걸 보면 중도 싸움을 잘 한다는 얘기가 되지 않나?" 나는 눈을 멀뚱히 뜨고는 고타를 바라보았다. "믿어드리죠, 스님." 별수 없이 믿어준다는 식의 내 말에 고타의 눈썹이 들어올려졌다. "큭, 고, 고맙구만. 어쨌든 중들 중에도 무술을 익히는 중들이 있지. 100년 전까지만 해도 소림사에서는 그런 중들이 넘쳐났으니까. 요새야 불교가 점차 사라져가면서 거의 사라졌지만. 그리고 잘 알려지지야 않았지만 한반도의 중들 중에도 무술을 익히는 중이 남아있네. 간단하게 말해서 승병들의 후배들이지." "오오. 설마 고타 씨가 그 승병의 후예란 말입니까?" "음? 알고 있군 그래." "에?" 나는 얼빠진 얼굴로 고타를 바라보았다. "나는 백두산 장백사의 유일한 무승이라네. 절에 고이 모셔져 있던 무서를 발견하고는 무술을 익혀 망나니라 불리는… 크흠." 나는 다시 무표정 모드로 돌아와 고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길. 한편의 소설을 쓰는구만. 무승이라니… "어쨌든 어릴 적 동자승 시절부터 무술을 익혔고… 체계가 확실하게 잡힌 무술이라 내 실력은 일취월장을… 자화자찬은 아니네. 어쨌든 내 실력은 높아졌고… 절에서 나와 강하다는 후배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지. 그 중에 한명이 진철이와 세한이고… 진철이야 태권도의 달인이고… 세한은… 음… 어쨌든 싸움의 달인이니… 그런데 자네의 몸놀림이 진철이와 세한을 꽤 닮았더군. 다만 그 미친 듯한 살기는 전혀 틀리지만. 아수라의 기운이더군." 나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맙소사… 이 연도에 아주 새로운 무림 역사를 쓰고 계시는군… 나는 마나르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죽이 잘 맞겠는데? "내가 익힌 무술은 장백무(長白武)라고 하는데… 아, 내가 그냥 붙인 이름이네. 멋지지 않나? 어쨌든 그 책의 마지막 장이 무심의 경지였지. 뭐, 불가능이라 생각하네. 어찌 사람이 아무런 감정 없이 살수가 있겠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쨌든 무심의 경지는 진철이 정도만 되면 다 아는 경지인데…." 제길… 잠이나 자야지… 무승이라는 고타의 중얼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어쨌든 이 게임이 많은 도움이 되더군. 실전 경험을 통해서 실력도 향상되고… 자네도 느꼈지? 거기다 꿈처럼 여기던 기를 이용한 무술도 펼칠 수 있고 말이네." …… 으아아! 옆에서 계속 떠들고 있으니 잠이 안 와… "어쨌든 이곳에서도 무심의 경지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지. 허허. 내 허황된 꿈이었을 지도. 어쨌거나… 이 게임을 하면서 내 실력도 많이 늘었고… 무술의 진가도 확인하고… 상당히 즐거웠네. 언제 캡슐을 설치하러 백두산 깊은 곳까지 찾아온 친구들에게 장백사의 비보인 1000년 짜리 뱀술을… 으음. 어쨌든… 하하. 그때 그 친구들, 백두산 깊은 곳에서 캡슐을 설치해 달라고 하니 얼굴이 노래지더군. 하하하." 아아… 벌써 새벽이야… 나는 이미 잠들어 버린지 오래인 리카를 흘낏 바라보았다. 으윽… 또 살기 치밀어 오르네… 진정하자… "오옷! 바로 그 살기 말이네! 정말 대단하더군. 장백무의 중반부에 이런 말이 있었네. 이 무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을 정갈케 하는 것. 이게 깨달음을 얻기를 갈망하는 우리가 해야할 일이기도 하기에. 몸과 마음을 정갈케 하는 것. 이것은 무심의 경지에 다다라 완벽해 진다. 그리고 이에 반대되는 개념도 있으니 아수라의 기운을 품고 싸우는 것이다. 강한 살의를 품고 무술을 행하는 것. 이 방법은 싸움의 방법으로는 효능이 높지만 우리 불가가 추구하는 것에는 맞지 않는 다는 것이 말의 요지였는데… 확실히 요즘 시대에 아수라의 기운을 품는 무술은 전혀 없지. 그런데 자네를 보니 아주 아수라의 기운이 극에 달했더군. 진철이가 그렇게 가르쳤을 리는 없으니… 자네 스스로의…." 주, 죽고 싶다… 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타의 말에 치를 떨었다. "물론 자네가 아수라의 기운을 풍기며 싸우는 것이 강하기는 하겠지만 나나 진철이에게는 미치지 못하지. 물론 아수라의 경지로 치자면 꽤 상위겠지만 자네 본신의 실력이 낮으니. 물론 이것도 놀라운 일이네. 그런데 내가 진정 놀란 것은 자네가 무심의 경지를 따라하고 있어서… 마음을 비우는 것 같더군. 아수라의 무술과 마음을 정갈케 하는 불가 계통의 무술을 동시에 익히다니… 그리고 또 한가지 의문증은 자네의 무심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인데… 뭐, 나도 가보지 못한 길이니 뭐라 하지는 못 하겠네만…." 아아아… "사람으로써 감정을 모두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지. 부처라면 모를까… 어쨌든 자네 행동을 보니 꽤 도움이 되기는 할 것 같았네. 마음도 진정되고 냉철함도… 무도의 길을 가기에도 좋겠지. 지금 후대를 위해 자네가 쓰는 방법을 장백무의 앞부분에 새로 수록할까 생각 중…." 마, 맙소사… 나는 점차 밝아지는 주위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쨌든 내 말의 요지는 자네가 행하고 있는 이상한 무심이 꽤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것이네. 축하한다고도 해야하나?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어쨌든 마음을 다스리기에 좋아 보이는군. 솔직히 말하면 오랜 수행을 한 고승들, 나도 자네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지. 어쨌든 특이한 후배를 만나 즐거운 기분이네. 내가 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런 무도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니까… 으음? 설마 날이 밝은 건가?" "빌어먹을…." 경악하는 고타의 목소리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내가 저 인간을… "이런… 내 평생 불경을 외우면서도 밤을 샌 적이 없거늘 이런 얘기를 하면서 밤을 새우다니… 하하. 어쨌든 진철이를 만나면 안부나 전해주게. 아, 그리고 세한이라는 친구, 진철이가 알 거네. 그 친구도 찾아가서 안부를…." 나는 이를 뿌드득 갈고는 몸을 일으켜 고타를 노려보았다. 눈을 깜박이는 고타. "빌어먹을… 아버지는 돌아 가신지 오래니 좀 닥쳐주시죠?" "음? 그게 무슨… 으음? 세한이 죽었다 그건가? 음? 그럼 자네가 세한의 아들?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그런데 세한이 죽었다고 했나? 하긴… 만난지가 10년이 되어가니… 세한이 죽었다? 허허허…." 비, 빌어먹을. 세한, 세한 하니까 꼭 내 얘기를 하는 것 같군. 그건 그렇다고 쳐도… "닥치라고 했어…." 나는 살기를 극도로 끌어올리며 고타를 노려보았다. "음… 미안하네. 내 실수였어." 당황하며 사과하는 고타. 솔직히 그리 진실성 깊어 보이지는 않는군. 어차피 아버지 돌아가신 거야 익숙해진 것이니… 나는 머리가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쳇. 됐습니다. 후… 그런데 결국 말의 요지가 뭡니까?" 내 짜증 섞인 물음에 고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 글쎄? 그, 그러니까… 자네가 아수라의 기운을 뿜어서 신기하고… 특이한 무심을… 맞나? 으으음…." 죽어버렷! 나는 밤새도록 뭐라고 떠들어대고는 정작 뭐라고 한 건지는 설명도 못하는 고타를 보며 치를 떨었다. "젠장. 그냥 그러니까 나 잘났다 그걸로 알아듣죠. 흐으…." 나는 진절머리를 내며 몸을 풀었다. 내 살기 때문이었는지 리카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쨌든 얼마간은 동행하게 되겠군.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쓸만하다는 소린가? 나는 어쨌든 밤 동안 습득한 지식을 정리하며 몸을 풀었다. "미시안들은 어떨까…." 나는 몸을 돌려 서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귓말을 꺼놓고 있는데… 완전 대화 차단을 해놓고… 피하고 있는 건가? 나는 머리가 약간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입맛을 다셨다. "설마…." 피하는 것일 수도 있겠군… 나는 쓰게 웃고는 고타를 바라보았다. 고타는 밤을 새웠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는지 기뻐하는 얼굴로 불경을 외고 있었다. 제길… 남의 아버지 죽었다고 놀랄 땐 언제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는 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림자의 땅에서의 새로운 하루. 공기 참 상쾌하군. "잠을 잤으면 더 상쾌했을 텐데…." 나는 고타를 살짝 노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쳇. 그럼 아침이나 준비할까? "저기, 리카야." "에?"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리카. 지금 우리 셋은 마르코 수림을 천천히 걸어서 통과하고 있었다. 아직 내 다리의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단검 하나만 얻을 수 있을까? 가장 싸구려로." "단검이요?" 내 말에 눈을 잠시 깜박이던 리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기의 허리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오오… 중급은 되겠는데? 나는 눈시울이 괜히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흑… 이, 이런 싸구려 하나가 없어서… 어제 그 고생을 했어다니…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고마워." "헤… 아니에요." 헤죽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리카. 역시 칭찬에 약하군… 나는 속으로 약간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미안한데… 포션 하나만 줄래? 아까 쓴 게 마지막 거라서…." "아, 여기요." "오오. 고마워! 하하. 역시 리카는 천사라니까." 나는 내 과장된 감삿말에 좋아하는 리카에게서 포션 여러 병을 받아들고는 미소를 지었다. 후후. 어제 코볼트들에게서 얻은 포션들을 다 써서 약간 불안했는데… 나는 포션들을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리카야. 혹시 붕대는 없어?" 리카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더니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흑, 죄송해요… 붕대는 안 가지고 다녀서… 붕대감기도 없어서 줍지도 않거든요…." "그래?" 나는 슬픈 얼굴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 리카를 보며 약간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으음… 약간 찔리는군. 나는 염주를 돌리던 것도 멈추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찌 저런 순진한 아이를 이용하느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고타는 내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몸을 움찔했다.후후. "하하, 스님. 혹시 붕대 없으십니까?" 아침에 일어난 리카로부터 고타가 무승, 그러니까 중이 틀림없다는 말을 전해들은 나는 그 후로는 약간의 비아냥을 담아 고타를 스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고타야 자신을 스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드디어 생겼다며 감격스러워 했지만… "으음, 부, 붕대 말인가? 조금 있기는 이지… 여, 여기." "하핫. 감사합니다. 역시 백두산의 너그러움을 이어받으신 당대 최고의 무승께서는 뭔가 달라도 다르시군요." "하핫! 뭘 그렇게 까지. 하하핫!" 나는 껄껄거리는 고타는 잠시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온 김에 하는 말입니다만… 혹시 남아도는 단검이나 장갑, 혹 쇼트소드나 간단한 갑옷은 없는지요? 으음?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설마 백두산 정기를 이어받으신 너그럽고도 자비로우신 최고의 무승께서 '비싼' 상급 아이템도 아닌, 남아도는 '싸구려' 하급 아이템 몇 개를 아까워하시는 건 아니겠죠?" 내 말에 얼굴을 살짝 굳히는 고타. "아, 그게…." "으음… 설마 사랑하는 후배, 김세한의 아들이자 역시 사랑하는 후배, 강진철의 제자인 저에게 겨우 그런 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나는 연습해오던 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고타를 바라보며 계속 씨부렁거렸고 얼마간은 나를 외면하던 고타도 결국엔 포기했는지 배낭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여기 단검이 몇 개 있네. 그냥 가지고 다니던 건데… 여기 롱소드도 하나… 갑옷은 없군… 여기 가죽 장갑이네…." 나는 약간 노려보며 아이템들을 건네주는 고타. 나는 싱긋 웃어주고는 아이템들을 받아들었다. 흠… 이제 약간씩 아이템들이 갖춰져 가는 구나. 역시 내 생확력은 뛰어나단 말야. "흠… 중급 단검들… 에? 이게 뭐야? 그냥 싸구려 하급 롱소드 아냐? 줘도 이런 걸…." "아미타불…." 내 투덜거림에 고타는 염주를 시끄럽게 절그럭거리며 불경을 외웠다. 훗. 어젯밤 날 괴롭힌 복수다. 나는 단검들을 허리에 차고는 롱소드는 검집을 그냥 버려버렸다. 검집도 헐거워서 차라리 그냥 들고 있는 게 낫겠어. 나는 약간 무든 날의 롱소드를 슬쩍슬쩍 휘둘렀다. "후…." 갑자기 마나르트가 그리워지는군… 샤프소드도… 마나르트는 뭘 하고 있을까? 나는 잠시 마나르트를 떠올려 보았다. 지금은 머리도 시큰거리지 않고… 좋군 그래. "검도 써?" 내가 그저 호신용으로 검을 달라고 했다고 생각했는지 고타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검도도 배웠죠. 이곳에선 검을 주로 씁니다, 스님." "흐음…."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다크소드라는 이름으로 불리죠. 닉네임에 소드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아시겠죠?" 내 말에 고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소드… 듣긴 들었네. 자네가 다크소드였군. 흐음… 그런데 왜 그 꼴인가? 완전 거지로군." 나는 내 몸을 훑어보는 고타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내 등뒤와 허리, 망토자락 사이, 손 등을 훑어보던 고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러고 보니… 오빠. 왜 아이템이…."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아… 게임을 하다가 강제 로그아웃을 당했는데… 그때 프로그램이 오류가 났는지 아이템이 다 떨궈졌어. 이 망토하고 능력치 없는 옷들만 빼고. 아마 이 망토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보니 이 천상의 망토는 왜 남아있는 거지? 대충 영혼으로 맺어져 있는 마나르트도 떨어졌는데…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마나르트는 왜 없어진 거야? 자기 말로는 나하고 계속 같이 다닌다고 하더니… 천상의 망토… 이 망토를 업그레이드 할 때 내 마나를 넣어서 나와 좀 연결되어 있지… 하지만 그건 마나르트가 더… 아, 그러고 보니 마나르트를 내가 놓쳤었지? 천상의 망토는 그대로 입고 있었고. 그래선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에이, 몰라. "어쨌든 그렇게 어찌어찌 해서 아이템 다 떨구고 어딘지도 모르는 여기에 와 있는 거지." "헤…." "흠… 자네 이 게임을 하는 이유가 뭔가?" 돌발적으로 흘러나온 고타의 질문에 나는 몸을 멈칫했다. 뭐요? "들어보니 마검을 사용하면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군. 이건 즐거움을 얻는 가상현실 아닌가?" 고타는 깊어 보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스님 같기도 하군. 나는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약간 이채를 떠올리는 고타.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현실과 이 세상을 동급으로 취급합니다. 진짜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NPC들… 그리고 현실감 있는 생활들. 무엇보다… 나와 정을 쌓은 NPC들 때문에 이 세상이 좋죠. 그리고 내가 마검을 쓰는 이유는 그 NPC들을 지키기 위해서…." 제길! 그 NPC들이 모두 죽어버렸단 말이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했는지 고타와 리카가 몸을 움찔했다. "제가 아는 NPC 하나가 몬스터에게 죽었죠. 그리고 그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저는 마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몬스터를 찾아다니고 있고… 그리고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고타가 산다는 백두산에서나 간신히 볼 만한 이런 푸른 하늘과 좋은 경치. 그리고 이곳에서 쌓은 인연들.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그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그런 인연과 생활이 마음에 들죠. 여기는 내게는 게임 속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고…." 빌어먹을. 그래. 이 세상을 지키고 싶어서 헌터에 가입했지. 그 레딕… 그 자식이 개기가 되었고… 또 범죄를 처리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NPC들을 지킬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런데…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어떤 인간들이… 그 끔찍한 참극을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모르고… "부모님도 먼저 가시고… 삶의 낙도 없고… 살아가기 힘든… 환경도 나쁜, 자신을 버린 듯한 세상보다는 이런 곳이 더 끌린 다는 건가…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존재들 때문이라… 어찌 보면 깨끗한 젊은이고… 다르게 보면 멍청한 친구로군." 나는 진짜 늙은 고승처럼 보이는 심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타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얼굴은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놀랍군. 그렇게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무심의 초기라고 적혀있네." 나는 느긋하고 뭔가 부드러운 고타의 음성에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도 끌어 오르는 분노들… 내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자 어쨌든 이 상황을 넘기려 하는지 고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NPC를 죽인 몬스터를 쫓는다고 했나?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군. NPC나 몬스터나 똑같은 프로그램이지 않나? 아,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자네가 NPC들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알아. 원론을 얘기한 거네. 어쨌든 몬스터도 자네의 말대로 라면 자네가 사랑하는 이 세상의 존재물 아닌가? 그런데 죽이러 다닌다라… 그리고 들어보니 자네는 몬스터 헌터로도 이름을 날린다지? 전에 나프네에게서 들었네만 이상한 변종 오거들을 싹 쓸었다더군. 이상한 놈들이긴 했지만 자네가 마음대로 종말 처리를 해도 되는 놈들이었나?" 선문답? 나는 뭔가 의미가 담긴 듯한 고타의 말에 잠시 생각했다. 뭔가 쉽게 말하려고 풀어 말한 것 같군. 내 생각은 정확히 1초만에 끝났다. "당신은 고기 안 먹습니까?" 현실에서도 고기를 먹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이는데 이곳이라고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법 있냐는 뜻을 내포한 내 짧막한 대답. 고타는 이해는 했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곧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여는 고타. "흐흠. 중이 육식을?" "이 세상에 스님들이 채식만 한다고 하면 미친놈 소리들을 겁니다." 내 말에 리카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아리를 일주일만에, 심하면 사흘만에 어른 닭으로 만들어놓는 세상. 고기는 넘쳐난다. 그러니 재정 사정이 예전에 비해 나빠진 절에서도 고기는 많이 먹고… 가치관이 많이 자유로워진 이때에 고기를 먹지 않는 스님들을 찾기는 힘들다. 뭐, 겉으로는 쉬쉬하고 있지만… "서, 설마 당대의 무승인 내가 육식을 하겠나… 장백무의 기본이 육식을 하지 않고 몸을 정갈케하라는 것이네." 그럼 어떻게 저런 경지까지 올라가 있는 거지? "어라? 아저씨 고기 먹잖아요. 나프네 언니가 그랬는데? 아롱사태인지를 좋아하신다고…." 나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고타를 바라보다가 리카의 말에 비웃음을 흘렸다. "훗…." "으으음… 아미타불…." 지금쯤 화제를 잘못 돌렸다는 후회를 하고 계시겠지. 나는 얼굴을 씰룩거리며 염주를 빠르게 돌려대는 고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로세. 캐캥! "왔군." 나는 저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코볼트들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주위를 맴돌고 있더니 결국은 나오는군. "그, 빛나리다! 조심해라!" 메이스를 하늘로 높이 들어올리며 살기를 내뿜는 코볼트. 그리고 그 코볼트의 주위에 서 있던 10여 마리의 코볼트들도 메이스를 들어올리며 개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마, 말했어?" 코볼트가 말을? 말도 안돼. 아, 그러고 보니… '정말 엄청난 오크였어. 말도 엄청 유창하고… 아주 매복도 완벽하게… 다른 오크들도 무슨 군대지휘같이 통솔하더라고. 그러니 내가 별수 있었겠어.' 나는 프렌이 오크에게 쫓겼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던 말을 떠올렸다. 저놈도 그런 케이스? 그러고 보니 씨아와 만났을 때 봤던 그 악취미 켄타우르스… 나는 씨아를 공격하고 있던 헤어밴드를 쓴 켄타우르스를 떠올렸다. 그놈… 말도 유창하고 후퇴에… 다른 몬스터들도 잘 다뤘지. 이놈도 비슷한 놈인가? 그런데 이놈들은 뭐야? 변종도 아니고… 운영자들도 이런 놈들에 대해서는 아무말 없었는데? "빛나리라…." 나는 살기 어린 고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야말로 신들린 경지로 염주를 움직이고 있는 고타. 얼굴이 상당히 굳어있었다. 허헛? "힝… 저 코볼트는 어제 만났던… 이상하게 말하던 코볼트다!" 나는 리카의 말에서 대충 지금의 상황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제 저 코볼트를 만났고… 똑똑한 저 이상한 코볼트는 도망쳤고… 지금 복수하러 왔고… 대충 그런 건가? "한. 해치우게나. 후배의 실력을 좀 보고싶군." "아아… 팔에 고통이… 으윽. 다리가 덫 낫나봐…." 나는 무릎을 꿇고는 두 팔을 감싸 쥐었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고타와 리카. "설마 부상자를 전선에 내보내려는 것은?" "그럼 나보고 살계를 열라 그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리카 양은…." "설마 연약한 숙녀에게 싸움을 맞기려는 것은…." "그으음!" 나는 씨익 웃고는 편안하게 주저앉았다. 그럼 대 선배의 실력을 구경해 보실까… 나를 리카를 끌어다가 내 옆에 앉혔다. 관전모드로 돌입한 우리 둘을 바라보다가 눈썹을 모으던 고타는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나섰다. "저, 빛나리를 조심해라! 엄청난 인간이야!" 나는 비장한 어조로 외치며 메이스를 들어올리는 코볼트를 보며 신음을 흘렸다. 혼란이 오는군… 이제 몬스터도 천대의 시대가 온단 말인가? 왜 저런 놈들이 등장하는 거지? 저런 놈들이 나온다는 정보는, 업데이트 소식은 전혀 들은 것이 없는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코볼트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때 본 켄타우르스와 비슷해… 약간 멋을 낸 듯한… 마치 사람이 자신을 꾸미는 듯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심각한 눈으로 코볼트들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빛나리라… 관세음보살…." 뭐라고 좀 중얼거리던 고타는 또 그 희한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쭉 나가더니 강맹한 기세로 염주를 휘둘렀다. 염주와 함께 휘둘러진 손에서 날아가는 엄청난 마나. 부아아앙! 콰콰쾅! 나는 엄청난 위력에 안색을 굳혔다. 맙소사… 그 짧은 순간에 저런 위력을 끌어올렸다는… 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휙휙휙휙! 나는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지며 엄청난 위력의 마나들을 날려보내는 고타를 보며 입을 약간 벌렸다. 역시… 준비 기간도 없어… 나는 주위로 퍼져나가며 코볼트들을 쓰러뜨리는 흰 빛의 마나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 저런 사람이 어떻게 랭킹에…." "아, 고타 아저씨는 레벨은 한 400정도에요. 거의 여기서 사시니까… 거기다 기본 무술실력이 워낙 뛰어나셔서… 레벨 1때 리자드들을 잡고 다니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니면 자신보다 레벨이 몇배나 높은 유저와 배틀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레벨이 금방 올랐죠… 어쨌든… 고타 아저씨는 랭킹에는 올라있지 않아요. 회사측에 랭킹에 올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거든요. 한 오빠도 그러지 않았어요?" 아, 나도 일부러 그냥 랭커로만 되어있지… 고타 씨도 그런 케이스? 하지만 그런 건 좀 특별한 사람들만… "하지만 그런 부탁도 아무나 들어주는 건…." "아, 고타 아저씨의 현실에서의 권위가 있어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긴… 자기 말로는 무술계의 지존이라 떠들고 다니니… 나는 이제 마나 공격을 끝내고 코볼트들에게 달려드는 고타를 바라보았다. 잠깐! 그럼 저 사람이 실질적으로는 진짜 지존인가? 나는 새삼 엄청난 실력을 보이고 있는 고타를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승이 어쩌고 하더니… 역시 대단하구나… 하지만 내 생각은 곧 정지되었다. "이놈!" 퍼억! "케엑? 저, 저거…." 나는 고타의 손놀림에 따라 코볼트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보석 염주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마, 맙소사… 여, 염주로 저런 짓을… 리카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매, 맨손이라 어떻게 싸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저, 저런… "이놈! 이놈! 이놈!" 나는 허공을 빠르게 날아다니며 몬스터들의 팔을 뜯어내거나 머리를 박살내거나 살을 뜯어내는 검은빛의 보석 염주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 저거… 지, 진짜 중 맞아? "맙소사…." "으아아아!" 나는 그 이상하게 똑똑한 코볼트가 도망을 치는 것을 보며 잠시 눈을 빛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고타가 싸우고 있는 곳으로… 퍼억! "이노옴!" 나는 피로 물들어 있는 염주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으, 으음… 저, 저런 짓을 한 염주를… 그렇게 만지작 거렸다는 말이지? "이노오오옴!" 퍼어어억! 나는 마지막 남은 평범한(?) 코볼트의 머리를 뚫고 나오는 염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자드로 쳐들어가던가… 일행을 만나러 가던가… 아니면 혹시 살아남아 있을 지 모르는 다크 엘프도 찾아보지 않았고… 거기다 모든 메시지를 차단해 뒀으니…." 나는 씁쓸히 웃었다. 이거… 정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허허허. 힘내게나." "까득." 나는 이를 갈고는 몸을 반회전 시켰다. 내 가슴이 있던 곳을 지나가는 창. 나는 재빨리 오른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그리고 순간 창을 수습하려 하고 있는 미믹의 목으로 내 손이 날아갔다. 끼엑! 이상한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믹. 나는 단검을 뽑아내고는 뒤로 몸을 날렸다. 거꾸로 공중 제비를 돈 내가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창이 박혔다. 나는 깊숙이 박혀 잘 빠지지 않는 창을 뽑으려 하는 믹에게 단검을 날렸다. 단검이 목에 박힌 믹은 힘을 잃고 쓰러졌다. 믹은 초록색 몸에 사람보다 약간 작은 체격, 푸르고 눈동자가 없는 커다란 눈을 가진 이상하게 생긴 몬스터다. 대부분 창을 들고 다니는 놈들. 나는 푸르고 진득한 액체에 젖어있는 단검을 보며 회수를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후… 이거 이제 단검이 2개밖에 남지 않았군. 나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혹시 믹들이 떨군 단검이 있나 찾기 시작했다. "히잉…." 리카? 고개를 돌리니 리카가 믹의 몸통에 박혀 있는 화살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석궁의 화살은 잘 나오지 않는 데다 소요가 심한 소모품이라 될 수 있는 한 회수해야 하는데… 믹의 특성상 그러기가 쉽지 않다. 나는 믹의 이상한 체액에 흠뻑 젖어 있는 화살을 침통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리카를 바라보다 고타에게 시선을 옮겼다. "쳇." "으음?" 내가 싸늘한 얼굴로 노려보자 당황한 표정을 짓는 고타. "그러기에 나도 돕는다고 하지 않았나." "까득." 나는 이를 갈고는 마지막 남은 포션을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제길. 그 피에 물든 염주를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고타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보석 염주를 흘깃 바라보았다. 무서운 녀석이야. 저거 한 10년만 지나면 엄청난 마의 무기(?)가 되어 있을 지도… 고타의 엄청난 활약(?)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 둘이서 몬스터 퇴치를 떠맡은 나와 리카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화살들을 포기한 리카. "어라?" 리카가 허공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저러는 거죠?" "글쎄? 나도 모르겠군." 나와 고타는 약간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리카를 바라보았다. 왜 저럴까? 나는 나무 하나에 기대서서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기를 다루는 법이라…." 나는 아까 고타가 내게 대충 설명해준 말을 떠올렸다. 흠…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여기서는 가능하다고? 나는 고타를 흘깃 바라보았다. 역시 대단하긴 대단한 사람이야… 그 기를 다루는 방법인지는 현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론적인 방법. 하지만 마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이 세상은 현실의 것들의 똑같이 옮겨놓은 것. 사람의 몸도 똑같으니 가능할 지도 모르지. 스으으…. 나는 마나를 손에 모아보았다. 검은빛에 휩싸이는 내 손. 흐으음… 평소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무의식중에 다루던 건데… 어쨌든 고타가 말한 것을 익히다보면 강해질 수 있겠지… 강해질 수… "쳇." 나는 또 살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멀뚱히 뜨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타. 나는 어깨를 으쓱해 주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역시 느껴지지 않아… 나는 다시 눈을 뜨고는 고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몸을 돌리고 있는 고타. 하지만 식스센스에 읽혀지지 않았어… 저것도 수련을 해선가? 자칭 최고의 무승이라더니 헛소리는 아니었군. "히잉…." 끝났나? 나는 리카를 바라보았다. 나와 고타의 앞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딱 멈추는 리카. "무슨 일이야?" 고타의 질문에 리카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돌아가야겠어요." "뭐?" 돌아간다고? "우선, 케니 시로 가서 그곳의 길드 지부에 들려야겠어요. 우리 레이디스 길드는 저 같은 전령을 제외하면 귓말 등을 허용하지 않아서… 페넬리 언니가 메시지를 보냈는데… 고타 아저씨도 왔으면 한데요." "나도? 무슨 일인데?" "흠… 엠페러 길드의 딜럿이 일을 벌인다는 것 같은데… 그리고 암흑 길드 연맹의 중급 길드도 움직인다고… 그 외에 잘은 모르겠어요. 무슨 안건인지도 모르고요." "그래? 어쩔 수 없군… 가자고. 아, 자네는 어쩔 건가?" 고타와 리카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 "같이 가면 좋기는 하겠지만… 나는 지금 리콜 스크롤을 쓰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둘이서 가라고. 근처에 도시가 어딨지?" 튕김으로 인해 여기로 왔으니 리콜 스크롤을 쓰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들렸던 마을로 돌아가는 거니 뭔가 오류가 생길 수도 있고, 어쩌면 악마의 숲으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충 알아들었는지 아쉬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리카가 대답해 주었다. "이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케니 시요. 하지만 아무리 여기서 계속 달려도 하루는 걸릴 텐데… 그리고 저는 급해서 금방 길드 본부가 있는 바이커리로 가야해서…." "그럼 헤어지는 거지 뭐. 잘 가."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훗. 드디어 고타로부터 해방인가? 고타 역시 아쉬워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쉽군. 좀 더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언제 다시 보세나. 진철이에게 안부나 전해주고…." "그러죠."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이서 뭐라고 잠시 조잘거리던 둘은 리콜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확실히 급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럼 가볼게요. 또 봐요 오빠." "흠… 또 보세나." "음. 잘 가도록." 나는 빛무리에 휩싸여 사라져 가는 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곧 둘이 서 있던 장소는 텅 비어버렸고 나는 무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혼자인가? 흠… 우선은 도시로 돌아가야겠어." 보관 협회에 보석 좀 맞겨 둔 것이 있으니… 제길. 이거 뇌에 이상이 생겨서 튕긴 것만 아니어도 페페에게 부탁해서 아이템들을 찾아오는 건데…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한심하군… 혹시 그곳으로 돌아갈까 두려워서 스크롤 하나 쓰지 못하는 건가?" 그곳… 나는 무의식중에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달려볼까?" 나는 퀵 스텝을 사용해 나무들 사이를 빠른 속도로 질주해 나갔다. 해 떨어지기 전에 들어가면 좋겠군… "우아아아앗!" 나는 고함을 질러가며 달렸다. 하… 좀 후련해지는 것 같군… 한편, 현재 섀도우 월드 홈페이지는 엄청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 것. 현재 섀도우 월드 자유 게시란, 이벤트 확인란, 운영자에게 질문을 등등의 모든 게시판에 한 사건이 업글되고 있었다. -맙소사!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 발견! -앗! 저도 봤습니다! 로카카 평원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데 어떤 검은 검이 엄청난 속도로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는…. -대륙 서쪽에서 공중을 날아다니는 검을 발견했습니다! 검의 크기는 보통 롱소드보다 약간 큰 것 같았는데… 검은 색에 화려한 검집. 그리고 이상하게도 검 손잡이에 검은색의 배낭이… 아, 검이 날아다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이거 혹시 이벤트 아닐까? 그검이 엄청난 검이라든지… 혹시 이거 도깨비와 비슷한 아이템 주는 신종 몬스터는… -현재 이 검은 검은 무서운 속도로 남진하고 있는 듯… 여러 전투 필드를 통과해 가고 있고 속도가 엄청나서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지만 저희 테션 정보 길드의 추리로는 남진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신고! 버그로 추정되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한 검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거기다 마치 플레이어라도 되는 듯이 배낭까지 매고… 거기에 검에 샤프소드까지 묶여 있습니다. 아무래도 돌발적 버그가 아닌지… "………." "이거… 혹시 현진 씨의 마검 아닐까?" "서, 설마요…." 시렌과 함께 폭주하는 문의들을 확인하고 있던 페페는 식은땀을 흘렸다. "대충 경로를 종합해 보면… 대륙 서부에서 남부로 이동하고 있는 듯 한데… 그건 그렇고… 이거 현진 씨의 검이 맞는거 같은데?" "그, 글쎄요?" "검은빛에… 화려한 검집… 검은 배낭이 매달려 있어? 샤프소드도? 그 마검은 날아다니는 기능도 있다고 들었는데…." 시렌과 페페는 서로를 바라보며 실성한 듯 웃음을 흘렸다. 둘이 보기에는 세한의 마검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설마 검에게 심부름이라도 시킨 건 아니겠지?" "어쩌면 마검이 가출이라도…." "아, 마검도 NPC급의 인공지능… 어쩌면 둘이서 싸워서 마검이 아이템들을 가지고 도망치는 중이라던가…." "혹시 숨막꼭질은 아닐까요?" "차라리 술레잡기는 어때?" 페페와 시렌은 서로를 바라보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너무도 황당스런 사태에 별 희한한 생각이 다 들고 있는 둘이었다. "그건 그렇고… 세한도 메시지 거부 상태인데…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죠?" "…… 날 새야겠군." "………." 이미 수만을 넘어가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글들을 보며 오랜만에 야근을 하게 생겼다고 생각한 둘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여기가 케니?" 나는 상당한 대도시로 보이는 도시의 성벽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상당하군. 하긴 이 정도니까 레이디스의 지부가 있는 걸지도." 나는 조금 더 도시를 관찰하다가 성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도 성벽 주위에 꽃밭이 꽤 있는데? 관광 도시라고 하더니… 바이커리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멋진 곳이로군. "실례합니다." "………." 나는 경비병이 나를 불러 세우자 가만히 멈춰 섰다. 보통 이 정도 도시면 이렇게 검문을 하기 마련이다. 운영자 쪽에서 내려온 수배범이나 PK범 등과 여러 길드에서 부탁한 수배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 경비병은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를 좀 뒤적거리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호, 혹시 당신은…." "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마나를 조금씩 끌어올렸다. 뭐지? 설마 암흑 길드 연맹에서 내게 수배령이라도? 하지만 그 일은 이미 복수권이 사라졌을 텐데? 경비병이 나를 보며 놀란 얼굴을 하고 있자 다른 경비병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어올리며 나를 경계했다. 동시에 성문을 지나다니던 유저들도 긴장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불러 세웠던 경비병은 주위의 그런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직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다크소드라 불리는 분이십니까?" "다크소드?" "저게?" 의문 섞인 말들이 들려왔다. 제길… 나는 급히 마나를 끌어올려 내 주위를 좀 가리는 동시에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얼굴 드러나서 좋을 것 없다. "맞는데?" 순식간에 돌변한 내 분위기에 좀 위축된 듯 보이던 경비병이 정신을 차리더니 서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운영자 분들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터져서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운영자 분들게 연락을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경비병. 그런데 이상하군. 내 담당자였던 페페라면 내가 어디에 있는 질 알 수 있을 텐데? 아, 혹시 나를 담당하던 임무가 끝나서 그런가? 지금은 헌터와 운영자의 연결고리를 맡고 있으니까… "마음대로. 들어가도 되겠죠?" "아, 물론입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주고는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소문과는 다르다는 둥 어쩌고 중얼거리는 주위의 사람들. 나는 깨끗이 무시하며 성문을 지나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후… 술이나 마시러 갈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확인해 보았다. 흐음, 50골드 80실버라… 안됐다며 리카와 고타가 좀 떼어준 돈에 내가 주은 돈까지 해서 좀 모였군. "대충 맥주 한잔이 아무리 비싸도 30실버를 넘지 않지? 맥주나 좀 마셔야겠군." 나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중앙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시의 중앙으로. 중앙 광장에 도착한 나는 약간 눈을 찡그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16명이군. 아까부터 나를 쫓아다니는 녀석들. 이곳에 있는 길드의 사람들인 모양이지? 나는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살기를 쏘아보내 주고는 주점 한곳으로 들어갔다. 시끌시끌하고 거의 가득 차 있는 게 꽤 괜찮은 곳으로 보였다. "구석으로 갈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저쪽 구석에 비어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괜찮군. 시선도 별로 오지 않는 곳이고. 내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자 돌아다니고 있던 점원 하나가 다가왔다. "뭘 드릴까요?" "그냥 맥주로. 아, 얼마죠?" "20실버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런… "미안하지만 와인, 흠… 2골드. 선불입니다. 가장 좋은 맥주 한잔에 최고급으로 와인 한잔. 알아서. 혹시 남으면 아가씨가 팁으로 가지세요." 내 말에 점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남는 모양이군. "감사합니다. 곧 가져다 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의자에 편하게 기댔다. 구석 자리라 테이블도 작은 것이라 두 명이 겨우 앉을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남은 한자리에 한 여자가 거리낌없이 앉았다. "흠… 누구시더라?" "후후. 너무하시네요. 페페 씨가 있어서 저 같은 여자들에겐 별 관심이 없나보죠? 세라에요." "흐음?" 세라라? 운영자들 이름은 대충 알기는 하는데… 대충 기억이 나기는 하는군. 나하고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아가씨도 꽤 예쁘긴 하지. "세라 씨도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만 하니 그런 소리는 마시죠. 아, 고마워요." 나는 잽싸게 맥주와 와인을 가져온 점원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와인을 세라에게 넘겼다. 흠… 구석이지만 테이블이 꽤 깨끗한데다 테이블보도 괜찮아서 와인을 올려놔도 빠지지는 않는군. "훗. 그런 식으로 여자들을 꼬시시는 모양이죠? 들어보니 당신에게 빠진 여자들이 꽤 있다고 들었는데요?" "………." 나와 말장난하자는 건가? 나는 싸늘한 눈으로 세라를 노려보았다. "후훗. 꽤 강렬한 눈빛이네요. 그 눈빛도 여자 꼬시는데…." 콱! 세라는 자신의 바로 앞에 박힌 단검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게… 왜이리 쉭쉭거려? "헌터는… 운영자 공격도 가능하다, 라는 조항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운영자니 죽어본 적은 없겠죠?" 내 말에 세라는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았다. 흥. 나는 깨끗이 무시하며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괜찮네? 세라는 나를 노려보고 있더니 와인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침묵… "이봐. 아직도 확실한 답이 오지 않았다는 거야?" "아, 그 날아다니는 검?" "그래." 어라? 나는 저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날아다니는 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별 상관없었다. "운영자들 말로는… 너 다크소드 알지?" "물론이지. 그 사람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건 그렇지. 그 다크소드의 마검이라는데?" 켁? 마나르트? 나는 약간 표정을 굳히며 그 둘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뭐, 그 검에 날아다니는 기능이 있데. 다크소드는 운영자들이 건드리기도 힘든 사람이라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다크소드가 검에게 뭔가 임무라도 내린 것은 아닐까 한다는데?" "임무? 검한테? 역시 뭔가 다르군… 그런데 운영자들도 건드리기 힘들다고?" "뭐, 그런 말이 있나봐. 요새 다크소드가 사건 몇 개를 해결한 적도 있잖아. 그 레딕이라는 녀석도 잔인한 PK범이었고… 변종 몬스터들도 퇴치하러 다니고… 그런 것 때문에 요새 다크소드의 주가가 올라가고 있다고." "음…." 젠장. 나는 약간 짜증이 나는 것을 느끼고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나저나… 마나르트가? 날아다녀? 날 찾아오고 있는 건가? 그거 본 사람들… 황당했겠군. 그건 그렇고 이렇게 거리낌없이 내 무기라고 밝히다니… 하긴 내가 메시지도 거부해 뒀으니 방법이 없었겠군. 내 이름이라면 무마하기가 쉬웠을 테니. "제가 온 건 당신의 검 때문이에요." 확실하군. 나는 세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요새 당신의 검으로 추정되는 검은빛의 검이 여러 지역을 통과해 남진하고 있어요. 그것을 본 사람들의 문의가 빛발 치고 있고… 검이 배낭을 매고 있는 데다가 샤프소드도 매달고 다녀서 말이 많더군요. 어쨌든 그런 말들 덕분에 당신의 검이라는 것을 예상했죠. 맞나요?" "맞아. 흠… 싸워서 내가 여기로 도망 왔다고 하면 믿겠나?" "당신의 성격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들어보니 NPC들하고도 상당히 친하다고 하더군요. 비정상적일 정도로. 회사 운영자인 다크 워리어를 죽이려 하고 있기도 하다죠? 어이가 없고 한심하더군요. 그 일 때문에 현재 회사 내에서는 당신의 평가가 엇갈리고… 흡!"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세라. 제길. 너무 흥분했나? 나는 살기를 거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흐으… 운영자만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다… 주위에서 몇몇 사람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좀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인가? 나도 아직 수련이 부족하군. "미안하군." 세라는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비어진 맥주잔을 바라보다가 세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 살기가 감도는 내 눈빛에 세라가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한번만 더 그딴 식으로 말을 꺼낸다면 정말 죽일지도 몰라."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얘기했고 세라는 내 그런 모습에 치를 떨었다. "어쨌든 내 마검은 내가 심부름 비슷한 것을 시켜서 어디에 좀 갔다가 나를 찾아오는 중이니 그렇게 아시지." "흥. 알았어요. 와인 참 고맙군요." 세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쯤 남은 와인을 내게 촥 부어버렸다. 미치겠군… 나는 내게 날아오는 붉은 액체들을 마나와 바리어를 조합해 묶어버렸다. 허공에 떠버리는 와인. 주위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더 망신당하기 싫으면 가보시죠, 세라 양." 세라는 나를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사나운 기세로 주점을 빠져나가는 세라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허공에 떠다니던 와인을 다시 와인 잔으로 돌려보냈다. 사람들은 바닥을 구르던 와인 잔이 테이블로 저절로 올라오고 그 안으로 공중에 떠 있던 와인이 들어가자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사람들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주고는 생각에 잠겼다. "후… 이거 위험하군." 요새 회사 내에서 날 싫어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은 진작 느끼고는 있었지만… 하긴 분위기는 좋았을 지 몰라도 처음부터 내가 그리 환영받지는 않는 분위기였어. 이거 이번 일로 좀 시끄러워질 지도… 나는 씁쓸하게 웃고는 다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망했다…." 마나르트가 나를 찾아오고 있다고? 전에 이런 상황에서 찾아오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진짜였군. 거기다 내 아이템들, 배낭에 샤프소드까지 챙겨서? "큭큭…." 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킥. 그 꼴을 좀 보고 싶은데? 배낭을 매고 검도 하나 차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마나르트라… 이거 그걸 본 사람들이나 소식을 들은 사람들, 운영자들도 황당하겠는데? 그런데 악마의 숲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힘들겠지? 마나르트가 오고 있는 길을 찾아서 나도 그쪽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만나겠지. "후… 이번에는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두려운데?" 나는 피식 웃고는 아까 마나르트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어디보자… 마나르트가 어디쯤 있는지 알아봐야지. "거기다 요새 다크소드에 관해 도는 소문도 있잖아." "아, 그 소문? 나도 대충은 들었어." 내 소문? 마나르트에 관한 얘기나 계속할 것이지… "그래? 뭐, 다시 들어라. 다크소드가 다크 엘프들하고 친분이 깊다고 하더라고." "맞아." 뭐? 다크 엘프? 어, 어떻게… "들어보니까 언제 다크 엘프 하나가 몬스터 운영자에게 죽으니까 열 받아서는 그 운영자를 죽이러 찾아가기도 했다며?" "그것도 그거지만 다크소드가 다크 엘프들을 보호해 주기도 했단다. 정말 소문은 믿을 게 못돼. 소문으로는 다크소드가 나쁜 인간이니 뭐니 해도… 실제로는 정말 정의로운 사람이라니까." "그렇지." "아, 그런데 이런 사실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제길! 나도 궁금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걸 아는 사람은... "글쎄? 그건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고…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 다크소드하고 엠페러 길드하고 정면으로 맞붙는 건가?" "아, 이거 흥미진진하군. 엠페러 길드에서 다크 엘프의 마을로 쳐들어간다고 하니… 하지만 이건 좀 확실하지 않잖아." "거의 확실해. 암흑 길드 연맹에서 자기들은 다크 엘프들을 얻고 엠페러 길드는 다크소드를 없앨 기회를 준다는 것으로 손을 잡았다고 하더라고." "그건 그렇고 암흑 길드에서 다크 엘프의 마을이 악마의 숲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안 거지?" "아, 우리 길드에서 알아보니까 어떤 범죄자들이 그곳으로 도망갔다가 다크 엘프를 만났데. 하지만 다크 엘프 전사에게 모두 죽었는데… 현실에서 암흑 길드 연맹에 정보를 판 모양이야." "나쁜 놈들. 괜히 잘 살고 있는 다크 엘프들을 어쩐다는 건지… 안 그래도 가끔씩 엘프들이 팔리는 것이 못마땅했는데…." "이번에도 다크소드가 막아낼까? 그보다는 두 길드의 움직임을 알고는 있을지… 혹시 다크소드라도 만나게 된다면 내가 성심성의껏 도움을…." "그 말 정말입니까?" "쿨럭." "허억!?"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던 둘은 어느새 자신들의 옆으로 다가온 나를 보며 마시던 맥주를 뿜어내었다. 머리카락으로 머리를 감고 약간의 마나로 음산 모드로 돌입한 나를 보며 둘은 입을 뻐끔거렸다. "다, 다크소드!?" "마, 맙소사!" 둘의 고함소리에 순간 주점 안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마, 맙소사… 다크소드가 이 도시에 들어왔다더니… 진짜였어?" "저, 저 사람이…." 나는 주의의 수근거림을 무시해가며 얘기를 나누던 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돕는다고 했죠? 그 말이 사실입니까? 암흑 길드 연맹의 길드하고 엠페러 길드에서 악마의 숲으로 들어간다고?" 내 질문에 얘기를 주도하던 정보 길드의 사람으로 보이던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암흑 길드에서는 다크 엘프들을 얻고… 엠페러 길드에서는 한창 뜨고 있는 당신을 꺾기 위해… 랭킹 1위인 제퍼슨은 조용하고 정의적인 사람이지만 부관인 딜럿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다. 그자가 일을 주도한 모양입니다. 제퍼슨이야 워낙 조용하게 지내기 때문에 아직 알지 못하는 모양이고… 아마 이 일로 당신을 불러내려는 모양인데…." "빌어먹을!" 순간 감정이 내 제어를 벗어나 살기가 가게 안을 휘돌았다. 숨을 죽이는 사람들. 제길. 잠깐, 그럼 레이디스 길드에서 사람들을 소집한 이유도 이건가? 이 일의 대책을 논의? 레이디스 길드는 좋지 못한 일들은 막으려 노력하는 좋은 길드니까… 잠깐, 그런데 살아남아 있는 다크 엘프들이 있을까? 아, 아니… 적어도 그곳에는 미시안이… 그 자식 성격으로는 하나하나 무덤이라도 만들어 주고 있을 텐데… 그리고… 솔직히 그때 살아있는 다크 엘프를 언뜻 느낀 듯도… "그 두 놈을 잊고 있었군, 제길!" 그때 미시안이 해치웠다는 둘… 현실에서 입을 열거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어… 젠장! "당장 가봐야겠군." 나는 몸을 돌려 주점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급히 나를 붙잡는 남자. "자, 잠시만. 지금 마검이…." 나는 그 남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가지 말라는 소리? 그건 싫군요. 당신들도 말했지만… 나는 다크 엘프들과 친분이 있어서. 어쨌든 정보에는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손을 뿌리치고는 주점 밖으로 달려나갔다. 젠장… 왜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거지? 그것도 연속으로? 얼마간 운이 좋은 듯 하더니 이제는 불운의 연속인가? "제길…." 그때, 게임과 분리되기 전에 식스센스가 극도로 높아졌을 때… 살아있는 다크 엘프들도 느꼈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우선 바이커리로 가서 나프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들어줄지 모르겠군." 나는 수중에 남은 돈을 계산해 보며 텔레포트 협회로 달려갔다. 한편 케니 시에서 2km정도 떨어진 곳의 평원. -오오옷! 드디어! 드디어! 허공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고 있던 마나르트는 감격에 젖어 고함을 질러대었다. 물론 속으로다. 마나르트는 세한이 아니면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할 수가 없다. -크흑. 드디어 며칠간의 대장정이… 엄청난 속도로 평원을 가로지르던 마나르트는 감격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악마의 숲에서 세한이 갑자기 사라진 직후. 세한의 기운이 대륙의 남부로 이동한 것을 알아차린 마나르트는 급히 이동을 시작했다. "어? 잠깐, 마나르트라고 했나요? 세한에게 가는 거면 아이템들도…." 레지엘의 상냥한(?) 배려로 세한이 떨군 모든 아이템들을 자신의 몸에 맨 마나르트는 며칠간 정말 열심히 날았다. 세한이 없으면 자신의 마기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마나르트였지만… -후훗. 메라트로 만들어진 아이템이 있어서 다행이군. 마나르트는 자신의 몸(?)의 중간쯤에 휘감겨 있는 이상한 모양의 금속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워 하는 미소(?)를 지었다. 마나르트는 마족이었고 마계의 금속인 메라트를 다룰 줄 알았고 이 금속을 이용해 자신의 마력을 일시적으로 제어하고 있었다. 덕분에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진 마나르트였다. -건방진 인간들. 감히 이 고귀하신 몸을 잡으려 하다니. 흥. 하긴 다시는 그런 짓을 하려 하지 않겠지. 잠시 마나르트를 잡으려다 중요 급소들을 얻어맞고 거품을 문 불쌍한 유저들에게 애도를 보내자. 어쨌든 마나르트는 현재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며칠간 찾아 헤맨 세한이 조금만 더 가면 있는 것이다. -후후. 이번에는 그대로 넘어가지 않을 테니 준비하게나. 후후후… 마나르트는 세한에게 가할 충격 요법 중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나르트는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 뭐야?! 세, 세한의 기운이… 안돼에에에! 마나르트는 절규하며 최대한으로 속력을 올렸다. 곧 케니 시의 성벽이 보였고 마나르트는 빠른 속도로 성벽을 넘었다. "마, 맙소사! 날아다니는 검이다! 다크소드의 검이다!" "다크소드를 찾아온 건가? 와아아아!" -오옷? 저 인간들이 드디어 이 고귀하신 몸을 알아보는 건가? 후훗. 하긴 이 마족 서열 107위에 빛나는 이몸이라면 인간들의 저런 환호를 받을 만… 이게 아닌가? 어쨌든 나는 그 망할 마신님 덕분에 검의 모습이… 마나르트는 자신을 보며 환성을 지르는 인간들을 보며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어떻게? 묻지 마세요). -앗차!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닌… 순간 세한의 기운이 다시 느껴지자 마나르트는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현재 마나르트가 멈춰선 곳은 케니 시의 중앙 광장에 위치한 텔레포터 협회의 앞이었다. 마나르트는 세한의 기운이 저 까마득한 거리의 대륙의 중북부 지방에서 느껴지는 것이 절망했다. -으아아아아악! 안돼에에에에에! 흐흐흐흐흐흑. 세하아아아안! 주위에 몰려들어 마나르트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비록 마나르트의 목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마나르트가 비통하게 몸을 떨고(?) 있다는 것과 다크소드가 방금 바이커리 시로 떠났다는 사실로 현재 마나르트의 기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으흐흐흐흑. 언제 또 저 위로 간단 말인가… 세한… 이런 일이… 흐흐흑… 마나르트는 비통하게 흐느끼며 세한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끝을 그쪽으로 돌렸다는 소리임). -흐흑. 어쩔 수 없지… 좋아! 다시 북상한다! 오오옷! 마족 서열 107위의 저력을 보여주마! 마나르트는 새로이 전의를 다지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후… 서둘러야…." 나는 텔레포트가 끝나자마자 광장으로 달려나갔다. 길을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사람을 붙잡았다. "실례합니다만 레이디스 길드가 어디에 있죠?" 레이디스 길드에 대해서 물으려면 남자에게 물어야지. 그 남자는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아, 광장의 오른쪽, 그러니까 이 반대편에 있는데… 가장 큰 건물을…." 나는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걸음을 옮겼다. 후… 그런데 나프네가 도와줄라나? 엠페러 길드면… 랭킹 1위가 길드장으로 있는 최강길드… 뭐, 솔직히 고타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제퍼슨이라는 사람도 진짜 1위가 아닐지도… 어쨌거나 천악이 제퍼슨을 꺾기도 했으니… "음?"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하는 기분에 걸음을 멈췄다. 이, 이 기운… 어디서 많이… 순간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크소드! 당신의 검을 가지고 왔습니다!" "비, 빌어먹을!" 케니 시의 그 정보 길드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모습… 파하앙! 공중으로 조금 떠오르며 엄청난 마기를 발산하는 마나르트… 마나르트를 끈으로 묶어서 들고있던 그 친구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마, 망했다… 저거 장난이 아냐… 진짜로 열받은 모양이군… -세에하아아아안! "크윽!" 업그레이드?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내게 전달되는 것에 감탄했다. 왠지 마기가 전보다 강해진 것 같은데? 나중에 알았지만 마나르트가 나의 다크가더를 사용하고 있었단다… "으윽…." "아아앗! 날아다니는 검! 다크소드의 검이다!" "그, 그럼 저게…." 후아아앙! 순간, 엄청난 기세로, 공기를 가르는 소리까지 내며 내게 사나운 기세로 돌진해 오는 마나르트. 나는 급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 이봐! 잠깐 말 좀… 제길!" 나는 엄청난 기세로 내게 돌진해 오는 마나르트를 보며 침을 삼켰다. 순간 도약! 나는 마나르트가 나와 충돌하기 직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마나르트도 그걸 예상했는지 아랑곳없이 방향을 비틀어 위로 날아올랐다. -죽어라앗! 마족 서열 107위의 분노를 보여주마! "빌어먹을! 이 자식이 주인한테!" "우와아! 저, 저게 뭐야!?" "으아악!" 사람들의 감탄사와 함께 들려오는 비명소리. 마나르트가 급격히 방향을 틀면서 생긴 마기의 폭풍에 휩쓸려 날아간 인간들의 비명소리였다. 제길… "이봐! 마나르트! 잠깐 대화를… 큿!" -필요없어!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아나!? 나는 급히 바리어를 만들어 발판으로 삼고는 공중에서 옆으로 다시 도약했다. 아래에서 사람들이 감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크윽… 별로 기쁘지 않아… -우오오오옷! "빌어먹을! 너만 개고생했냐! 나도 얼마나 고생을… 크윽!" 나는 마나르트에게 가슴을 얻어맞고는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으으… 피가 거꾸로 쏠리는군… "으아아악! 떨어진다!" "다크소드와 마검이 싸우고 있어!" 경악한 인간들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크윽… 이 사람들이 받아줄 생각은 안하고… 탁. 간신히 바닥에 제대로 내려선 나는 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장난이 아니로군. 쉽게 넘어가기는 힘들겠는데? 하긴 명색이 마족 서열 107위라니… "커헉!" 순간 나는 뒤통수에 강렬한 충격을 받고 허공을 부유했다. 어, 어느새… -푸헤헤헤헤! 이제 최상급 마족의 위대함을 알겠나? 내가 마기만 제어하면 이쯤 한단 말야. 푸하하하하! 저, 저 자식이… 이를 갈던 나는 어떤 사람과 부딪혀 바닥을 굴렀다. 뭐야? "괘, 괜찮으십니까?" "오호라? 나의 사랑스런 마검을 가져다주신 장본인?" 나는 케니 시에서 내게 정보를 주던 사내를 보며 씨익 웃었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 남자. "그, 그게… 다크소드님을 도와드리려고… 그, 그건 그렇고 마검이 왜 다크소드님을…." "가끔씩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어쨌든 고맙군요. 인사했으니 꺼지십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빙글빙글 거리고 있는 마나르트. 후후후… 그래… 어디한번 해볼까? 나는 살기를 피어올리며 마나르트를 노려보았다. 순간 휘몰아치는 살기와 마나의 폭풍. 순간 마나르트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래! 오늘 누가 먼저 부러지나(?) 한번 해보자! 으아아아앗!" 나는 살기를 폭발적으로 내뿜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남자가 뒤로 날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약간 미안한데? -하, 하하? 괜찮은 살기… 가 아니라 끔찍한 살기로군. 언제 그 정도… 으음… 우리 대화로 해결하는 것은… "시끄러!" 나는 마나르트의 옆으로 도약해서는 검집을 그대로 후려찼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마나르트. 밑에서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크으으윽! "멀었네!" 나는 손에 마기를 모아 추락하는 마나르트에게 날렸다. 마나 덩어리에 직격당해 털털거리며 허공을 부유하는 마나르트. 순간 마나르트가 엄청난 마기를 내뿜으며 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좋아! 어디 오랜만에 한번 붙어보자고! "훗. 주인의 위대함을 보여주지." -마족 서열 107위의 위대함을 보여주겠네! 순간 나의 마나와 마나르트의 마기가 충돌했다. 순간 공중에 멈춰서는 우리. 제길. 이거 무기가 없이는 힘들지도. 나는 허공에 바리어를 여러 개 만들어내며 그것들을 밟아갔다. 순식간에 마나르트의 옆으로 도약한 나. "이거 가져다 줘서 고맙네." 나는 옆에 배낭과 샤프소드를 매고 있는 마나르트의 모습에 빙긋 웃고는 샤프소드와 배낭을 낚아챘다. 순간 빙글 돌며 나를 후려치는 마나르트. 나는 급히 샤프소드로 공격을 막고는 바닥으로 내려섰다. "OPG가… 오케이. 오랜만에 차니 힘이 넘치는데? 어디 한번 해보자! 응?" 호기롭게 외치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마나르트가 내 코앞에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몸을 날렸다. 바닥을 파고드는 마나르트. 콰콰콰쾅!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광장의 바닥이 터져나갔다. 허허… 저, 저런 공격을 내게 했다는 말씀? "으아아악! 도망가!" "악마다! 다크소드! 도망가!" "…… 미치겠군." 나는 마기를 머금고 내게 날아오는 마나르트를 강하게 쳐내며 중얼거렸다. 나와 마나르트가 격돌하며 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소문이 어떻게 퍼지려나…." -우오오오옷! 받아라아앗! 저녀석은 또 너무 흥분하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마나를 끌어모았다. "나프네님." 레이디스 길드, 가장 꼭대기 층(그래봐야 5층이다. 다만 이 건물은 옆으로 크다는…). 자신의 방의 침대에 누워있던 나프네는 자신의 부관 페넬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슬쩍 움직였다. 속이 살짝 비치는 얇은 옷을 입고 연녹색의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흔들리는 나프네의 모습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페넬리는 그런 나프네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리카와 케니의 지부장들. 소냐와 미쥬타의 지부장들이 도착했습니다. 리카 쪽은 꽤 전에 도착했지만 미쥬타에서 도착하는 것을 기다니느라 보고가 늦었습니다." 페넬리의 딱딱한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프네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 딱딱한 목소리는 좀… 어쨌든 알았어요, 페넬리. 곧 내려가죠." "예." 페넬리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나프네는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해야하지?" 현재 나프네는 암흑 길드와 최강 길드라 불리는 엠페러 길드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디스 길드는 섀도우 월드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들을 막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나프네 자신의 생각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프네를 추종하기 위한 여자들의 집단… 뭐, 어쨌든 나프네의 생각도 맞기는 하다.) 길드이니 만큼 다크 엘프들을 노리는 암흑 길드를 막아야겠지만… "엠페러 길드는… 건드리기 힘든데…." 엠페러 길드는 말 그대로 황제의 길드다. 랭킹 1, 2, 4위로 시작해 가장 많은 수의 길드원과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길드원들로 만들어진 길드. 최강의 길드다. 조용히 여행을 다니며 정의로운 플레이어로 알려져 있는 제퍼슨의 길드이기에 이미지도 상당히 좋은 길드. 다만 제퍼슨의 부관인 딜럿의 과잉 충성이 문제였다. 가끔씩 딜럿이 좋지 않은 일을 벌이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의 일까지 벌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나프네로서는 현재 상당히 고민이 되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내려가 봐야지…." 나프네는 몸을 일으키고는 침대 옆의 작은 티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고급 망토를 집어들었다. 그리 화려하지도, 너무 수수하지도 않은 그저 깨끗한 망토. 사실, 처음에는 이것보다 훨씬 화려한 망토였지만 나프네의 강력한 주장으로 이 망토로 바뀐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나프네는 빙긋 웃고는 망토를 입으려 했다. 콰차차차창! "아…." 엄청난 폭발음과 파괴음, 파공성.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어떤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우와아아아아악!" 나프네의 방의 발코니 창들을 모조리 박살내며 안으로, 그것도 몇 바퀴를 구르고는 벽에 머리를 박고 축 늘어진 사내. 나프네는 박살이 난 발코니를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사내에게 눈을 돌렸다. "암살자?" 혹시 몰라 테이블 위의 검에 손을 가져가던 나프네는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사내의 모습이 상당히 낯이 익다는 것을 눈치챘다. "다크소드?" "으으윽… 이게 무슨 꼴이냐… 별들이 다 보이는군." "………." 나프네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약간 풀린 눈으로 주위를 살피는 세한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프네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세한. "앗! 나프네 양?" "아, 예…." "아, 그래서 웬 여자들이 나를 필사적으로 막았던 거였군요. 아, 이게 아니지. 나프네.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 악마의 숲에…." "그보다는 숙녀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했으면 옷이라도 입을 시간을 좀 주는 것이 어때요?" 나프네의 표독스러운 말에 세한은 입을 다물었다. 나프네는 약간 날카로운 눈으로 세한을 바라보다가 망토를 몸에 둘렀다.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세한은 어색한 얼굴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발코니부터 시작해 세한이 서 있는 장소까지 박살이 나 있는 모습. 나픈네는 평소 자신이 아끼던 장신구들과 조각상들이 산산이 깨져나가 있는 것을 보며 슬픔에 잠겼다. "나프네님!" 순간 방문이 열리며 엄청난 수의 여자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그리고 세한을 보며 기겁을 하는 여자들. "뭐냐! 암살자냐!" "앗! 저 놈은…." "한 오빠!" "다크소드!" "………." 세한은 여자들의 반응에 헛웃음을 짓다가 순간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엄청난 속도로 나프네에게 다가갔다. 기겁을 하는 레이디스 길드원들. "조심해!" 세한은 나프네를 가로막으며 수중의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순간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꺄악!" "나프네님!" "암살자냐!" 순간 부서진 발코니로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는 검이 날아 들어왔다. 참으로 신선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암살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레이디스 길드원들. 나프네도 입을 약간 벌리고는 그 검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세한이 악을 써댔다. "그만햇! 감히 주인에게!" 그리고 들리지는 않았지만 검이 소리쳤다. -시끄럽네! 감히 이 몸의 검집에 흠집을 내다니! 용서할 수 없네! "빌어먹을! 그거야 하루 지나면 모두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무슨… 쳇!" 순간 세한의 검과 검은 검이 맞부딪쳤다. 순간 다시 일어나는 폭발. 나프네와 레이디스 길드원들은 자신들의 자랑스런 레이디스 길드 본부의, 나프네의 방이 박살이 나가는 모습을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제는?" 짧은 검은머리에 그저 평범한 체격. 약간 찢어진 눈을 가진 검사. 얼마 전, 가장 만나기 싫은 랭커 1위에 당당히 등극한 한국 서버 랭킹 2위, 엠페러 길드의 부 길드장 딜럿. 그는 눈을 감고는 나무에 기대서 있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 곱슬곱슬한 금발의 마법사가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몇가지 들자면… 우선, 정보대로 이곳에 변종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딜럿은 자신의 부관인 마법사 투르의 말에 눈을 떴다. 약간 가느다란 눈이 자신을 향하자 투르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건 알고 있어. 그 일 때문에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니까." 딜럿의 싸늘한 목소리에 투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암흑 길드 연맹 측의 사람들과 본 길드의 길드원들 사이에 심한 알력이 생기고 있습니다. 어차피 3일 이상 가지 않을 동맹이기 때문에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후… 그래도 제퍼슨님의 눈을 피해서 정예라고 데리고 온 놈들인데… 그렇게 머리들이 돌아가지 않으니… 역시 제퍼슨님의 눈길을 피할 정도에서는 이런 놈들이 한계로군." 딜럿의 푸념에 투르는 약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현재 우리 길드 측의 인원은 150명. 그중 단 50명만이 랭커. 나머지는 믿을 수는 있지만 실력은 별볼일 없는 놈들이니… 거기다 문제는 암흑 길드의 50명 모두가 랭커라는 것입니다. 최하위들이기는 하지만…." 걱정이 섞여 있는 투르의 말에 딜럿은 비웃음 담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심한 놈들이지. 다크 엘프들을 잡아다 돈이나 벌자는 것 같은데… 후후. 꽤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군. 연맹에서 꽤 힘을 쓴 흔적이지. 랭커 50이라… 하지만 그리 위협은 아니다. 우리 둘이 있으니 반란 위험은 없다." 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암흑 길드 연맹에서 추려보낸 인물들 50명이 모두 랭커기는 하지만 모두 최하위 랭커들. 그에 비해 자신들 쪽의 랭커 50은 절반 이상이 중급 이상의 랭커다. 거기에 딜럿은 공식적 2위… 그리고 투르 자신도 랭킹 1000위안에 드는 몸이다. "하지만… '그자'의 말에 의하면… 현재 다크 엘프들은 변종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수가 100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 투르는 말을 하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딜럿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투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딜럿의 눈치를 살폈다. "그자에 대해서는 될 수 있으면 언급하지 말도록. 흠… 지금이야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자고. 암흑 쪽에는 철저히 비밀에 붙였겠지?" 딜럿의 물음에 투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우선 여기에 온 길드원 중에서도 그자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저와 딜럿님, 그리고 보엘 뿐이지 않습니까." 딜럿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 암흑에서 우리에게 추궁할 일은 없어. 문제는… 지금 마을에 있다는 놈들이다. 전투 능력이 상급 랭커와 맞먹은 엄청난 다크 엘프 둘과… 레지엘이라는 랭커. 그리고 칼이라는 녀석… 그리고 제르난 길드라는 작은 모임의 녀석들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제르난 길드의 녀석들은 그리 걱정은 없습니다. 칼과 레도르라는 녀석이 좀 주의가 필요하고… 가장 위험한 놈들은 두 다크 엘프와 레지엘이라는 성검의 주인이라고 하는데… 뭐, 그 일이야 그 꼭두각시 녀석이 있지 않습니까." 투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맺었고. 그 모습에 딜럿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힘으로 밀어 붙여도 상관은 없지만… 현재 대외적으로는 암흑 길드 연맹에서 엠페러 길드를 끌어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괜히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는 자신들의 전력이 그대로 노출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들과 전투를 벌인 놈들은 엠페러 길드에서 이 일을 주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확률이 높다. 현재 딜럿은 제퍼슨의 눈을 피해 이 일을 벌이고 있다. 제퍼슨은 이런 일을 절대 용납할 인물이 아니기에… 딜럿이 '그자'의 도움과 여러 연막작전으로 제퍼슨과 여러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는 있지만… 이 일의 주도자가 엠페러 길드라는 것이 알려져서는 제퍼슨의 귀에 소식이 100% 들어간다. 그저 훗날 위협이 될 녀석으로 찍힌 다크소드를 없애는 일… 그런 큰 여파를 만들 수는 없다. 그리고 전력을 다하지 않고도 끝낼 계획도 있다. "꼭두각시라… 후후. 천악 말이지… 하하하." 딜럿은 낮은 웃음을 흘렸고 투르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하하. 역시 그자의 능력은 대단하더군요. 천악을… 후후. 천악이라면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겁니다. 그자의 말로는 천악과 거기에 있는 녀석들이 친분도 있다고 했으니… 안심하고 있을 때 치게 하면…." "훗. 그 건방진 녀석… 그때 제퍼슨님이 사정을 봐 주지만 않으셨어도 지금 그렇게 활개를 치지는 못할텐데… 훗. 뭐, 지금은 오히려 잘 되었지만." 딜럿은 만족스러워 하는 얼굴로 몸을 바로 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투르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천악을 먼저 이용하고… 암흑 길드원 전체와 하위 랭커 10과 떨거지 20을 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상관없겠죠. 그런데 다크소드가 도착하면…." 투르의 말에 딜럿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어차피 놈은 세력도 없어. 내가 해치우지. 천악과 내 실력은 비등하다. 그놈은 천악에게 당한 적이 있다고 했지… 훗. 그 건방진 자식은 내 손으로 무너뜨리겠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딜럿을 자부심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투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혹시 놈이 오지 않으면… 아니, 오더라도 다른 세력이라도 끌고 오면…."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보면… 놈은 반드시 여기로 온다… 그자의 말로도 그랬고… 그리고 그놈이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전혀 없었어. 거기다… 후훗. 헌터라던가? 그런 일을 하는 녀석이니 반드시 오겠지." 헌터라는 말에 투르가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하… 설마 그놈이 그런 일을 하는 줄은… 하지만 그자를 확실히 신용할 수는…." 딜럿은 다시 눈을 감고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당연히 신용할 수는 없어. 하지만… 어차피 그자도 이번 계획을 위한 일회용 협력자일 뿐. 어쨌든 지금까지는 그자의 말이 모두 맞았으니… 제퍼슨님의 눈을 속여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 실패는 있을 수 없어. 후에 제퍼슨님을 위협할 만한 놈들은 모두 짓밟아 놔야한다… 후… 그럼 시작하지." 딜럿은 다시 눈을 뜨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바라보던 투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딜럿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자신들에게 정보를 주고 천악이라는 카드를 전해준 그자를 신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보아 자신들의 편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투르가 불안해하는 것은 그의 행동이 아니라 그의 정보력과 천악을 다루는 솜씨였다. 모든 일을, 다크소드는 물론 그의 주위 사정까지 너무도 자세히 알고 있는 자… 투르는 그자의 확실한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그를 절대 신용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내쉬었다. "후… 세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레지엘의 푸념 어린 말에 나무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던 미시안이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걱정과 분노가 공존하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아이템을 떨구고는 소멸된 세한에 대한 걱정과… 현재 접속한지가 꽤 되었음에도 이곳으로 오지 않고 있는 세한에 대한 분노였다. 그 눈을 잠시 바라보던 레지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한은… 와…." 레지엘은 미시안의 옆에 주저앉아서 중얼거리고 있는 다크 엘프를 바라보았다. 베르시아라고 했던가? 레지엘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 다크 엘프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저 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십 여명의 사람들… "레지엘! 가죠!" 레지엘은 현재 마을에 와서 살아남은 다크 엘프들을 도와주고 있는 제르난 길드의 길드장, 레도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지엘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고 그의 뒤를 나무 그늘 뒤에 서 있던 칼이 뒤따랐다. 그리고 또 그 뒤를 따르는 제르난 길드의 사람들… 그리고 그 뒤를 미시안과 디렐이 따랐다. 협곡으로 걸어가는 전사들을 바라보던 베르시아는 저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다크 엘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을까요?" 베르시아는 헬레나의 물음에 다시 멀어져 가는 전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베르시아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헬레나는 그녀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헬레나와 함께 몰려나온 살아남은 다크 엘프들… 모두 50여명이 채 되지 않는 수였다. 다크 엘프들은 멀어져 가는 전사들을 바라보다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동족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오기도 전에 다시 들려온 인간들의 침략소식… "세한 형은 왜…." 살아남은 다크 엘프들 중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아이들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 아이를 잠시 바라보던 베르시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세한은… 와… 세한은 약속을 한번을 잊어도 두 번은 잊지 않거든… 이번엔 올 거야…." "오겠지." "예." "흑… 오빠 보고 싶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은 다크 엘프들은 베르시아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너무도 푸른 하늘… 다크 엘프들은 한숨을 내쉬고는 편하게 주저앉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한곳에 모여 자신들의 친구인 세한을 떠올리던 다크 엘프들은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이… 왜…." 베르시아의 중얼거림. "하하. 설마 마신님이라도 강림하시는 건가?" 다크 엘프들은 하늘의 남쪽이 약간씩 어두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불안에 휩싸였다. 더 이상의 불행이 없을 정도의 불행을 겪은 다크 엘프들… 그렇기에 지금의 공포는 더 했다. 또 다른 불행이 몰려올 것만 같은 불안감… "왜 하늘이…." "설마 뭔가 나쁜 일은 아니겠지?" 다크 엘프들은 공포 섞인 눈으로 여전히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 사실 여기서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다크 엘프들의 시력으로 볼 때 상관없는 거리… 다크 엘프들은 계속해서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몸을 떨었다. "아… 이, 이 기운…." "뭐? 베르시아… 왜…." 베르시아는 벌떡 일어서서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어둠… 그 검은 기운이 상당히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다킁 엘프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정도로 괜찮을까?" 시드는 약간 씁쓸한 눈으로 협곡의 사이를 막아놓은 바리케이드를 바라보았다. 여러 부숴진 집기와 나무들도 쌓아놓은 바리케이드… 그 위에는 미시안이 걸터앉아 있었다. "후… 글쎄요… 그래도 이렇게 라도 해 놔야 좀 안심이 되네요." 레지엘의 말에 시드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 엠페러 길드에… 암흑 길드 연맹… 드디어 우리 길드도 길드 대항전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건가?" 세린의 말에 모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크 엘프들인 미시안과 디렐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칼을 제외한 인간들은 모두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린은 그저 농담으로 했던 말이 이 정도 여파를 몰고 오자 당황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 나, 난…." "괜찮아… 어차피 우리가 선택한 일이니까." "물론. 드디어 길마의 첫 번째 전쟁령이 내렸는데 목숨을 걸어야지." 레지엘의 말에 지미가 주석을 달았고 사람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역시 미소를 짓고 있는 레지엘이 고개를 홱 돌려 협곡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벌떡 일어서는 미시안과 디렐. "세파빌이… 누군가가 온다고 하는군요. 엄청난 실력자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보다도…." 레지엘이 자신의 성검이 해준 말을 전해주자 다른 사람들은 질린 얼굴로 각자 무기를 뽑아들었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강한 실력자… 11명의 일행은 긴장된 얼굴로 협곡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아침 안개가 살짝 깔려 있는 협곡에서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인형의 등뒤에는 거대한 기형의 무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낫… 싸이드… 천악?" "천악…." "저 사람이 왜…." 여전히 딱딱한 얼굴을 하고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천악을 보며 일행들은 긴장하는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여기서 천악이 나올 이유가 없는데… 천악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미시안(함께 여행)과 레지엘, 칼 (함께 던젼 탐험에 하르츠 길드와 싸움)은 바리케이드를 넘어 죽 늘어서 천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따라 넘어와 미시안의 옆에 서는 디렐. "천악? 여기는 웬일이지?" 미시안이 화이트소드를 꽉 움켜쥐고는 물었고 천악은 좀 떨어진 곳에 멈춰서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크소드는?" "…… 없다." "그래? 후… 도우러 왔다. 엠페러 길드와 한판 붙는다고 하더군. 그곳의 딜럿이란 녀석에게 빛이 있어서 말야…." 천악의 말에 일행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의심을 떨치지는 못한 미시안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재밌을 것 같더군." 평소 싸움을 즐기는 천악을 알고 있는 일행은 납득하면서도 의아함에 휩싸였다. 하지만 천악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앞으로 걸어나왔다. 잠시 긴장하던 일행은 천악이 무기에는 손도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걸어오는 모습에 안심했다. 어쨌든 천악은… 배틀을 하고 다니면서도 운영자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괜찮은 인물이다. 대충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인간들은 안심했고 미시안은 전에 이 숲에 다크 엘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신경 쓰지 않던 천악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안심했다. 다만 디렐 만이 날카로운 눈으로 천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 고맙군. 안 그래도 한 명이 아쉬운…." 기이이잉… 순간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한걸을 앞으로 나서 천악을 맞아들이던 미시안이 몸을 굳혔다. 그리고 천악의 등뒤에 걸린 낫의 날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딱딱하게 굳는 일행의 얼굴. "젠장!" 미시안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급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어느새 검은 공간을 열고 아래로 휘둘러지는 낫. 순간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크아악!" 피하는 것이 좀 늦은 미시안의 어깨에 공간의 낫이 파고들었고… 순간 공간의 낫이 미시안의 왼팔을 어깨부터 잘라내었다. 미시안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미시안! 으아앗! 실프!" 순간 바람에 휩싸여 천악에게 돌진하는 디렐. 바람의 정령에 휩싸인 디렐은 엄청난 속도로 천악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앞으로 달려나가는 일행들… 레아가 피가 터져나오는 어깨를 오른손으로 막고 있는 미시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대한 낫을 휘두르는 천악. "취명…." 거대한 낫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지며 디렐의 검을 퉁겨냈다. 그리고 동시에 칼의 가슴을 베고 지나가는 거대한 낫… "으아아!" 순간 레지엘의 성검이 엄청난 빛을 내며 천악을 베어 들어갔다. 하지만 너무도 쉽게 공격을 흘려보내는 천악. 그리고 순식간에 공간의 낫이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레지엘은 자신을 베고 지나가는 날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크윽!" "레지엘! 젠장! 화룡!" 허리를 감싸쥐고 바닥에 쓰러진 레지엘을 보며 레도르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타오르는 불꽃과 동시에 번뜩이는 다른 일행의 검들… 하지만 천악은 공격들을 흘려보내는 동시에 낫을 휘두르며 엄청난 공격을 가해왔다. 콰아앙! "비, 빌어먹을!" "꺄악!" 순간 바닥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지미와 세린이 뒤로 퉁겨나갔다. 마법폭탄… 레도르는 하얗게 질린 눈으로 천악을 바라보았다.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 "파공…." 천악이 작게 중얼거리며 순식간에 낫을 휘둘렀다. 천악의 주위를 회오리치듯 베고 지나가는 공간의 낫. 저번 세한과 싸울 때의 모습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의 공격이었다. 저번 세한과의 배틀에서 처럼 사정을 두지 않고 최대한의 힘을 발휘한 천악의 공격은 엄청났다. 콰콰쾅! 순간 천악의 주위의 땅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폭발… 땅속에서 마나를 폭발시키는 고도의 기술… 모든 스킬을 마스터하고 2개의 스킬을 더 마스터 해 모두 12개의 스킬을 마스터하면 생겨나는 마나 폭발 스킬의 응용이다. 그 폭발에 공격하던 일행은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충격파가 앞으로 뻗어나가며 마법을 준비하던 시드와 맞부딪혔다. "커헉…." "형!" 기이잉… 시드를 향해 고함을 지르던 레도르는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급히 몸을 날렸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공간의 낫… 레도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악을 바라보았다. "하아아아앗!" 그나마 천악과 제대로 공격을 주고받고 있는 디렐… 하지만 그 역시 현저히 밀리고 있었다. 이시린과 세린의 지원이 없었다면 몇 번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을 정도… 디렐은 이를 악물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마나를 끌어올리기도 전에 날아드는 금속 스태프. 공간의 낫의 날이 사라져 있었다. "크윽…." 얻어맞은 충격에 마나를 흐트러뜨린 디렐은 급히 주위를 살폈다. 순간 뒤에서 공간을 열고 솟아 나오는 낫. 공간의 낫은 디렐의 복부를 뚫고 앞으로 솟아 나왔다. "크흑…." "디, 디렐 씨!" 털썩. 공간의 낫이 제자리로 돌아가며 디렐이 그대로 쓰러졌다. 급히 달려가는 레아와 세린. 아직 완전히 당하지는 않은 레도르와 이시린은 다른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하아앗!" 혼자 천악을 공격하고 있는 칼… 레도르는 이를 악물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죽어라… 아이스소드…." 음산한 목소리… 어느새 다가온 미시안이 얼음의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미시안의 어깨는 마법을 사용했는지 얼음들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덕분이 피는 흐르지 않고 있었지만… "큭!" 역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미시안은 금세 뒤로 밀려났다. 처음부터 미시안과 디렐이 합공을 펼쳤다면 승산이 있었겠지만… 각개 격파당한 지금 천악을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미시안과 디렐 다음으로 강한 레지엘도 상처를 입고 있는 상태… 레도르는 단 한명에게 이렇게 당한 일행을 둘러보며 이를 악물었다. "하하핫! 벌써 끝났잖아?" "쳇. 우리에게는 차례가 돌아오지도 않겠군." 순간 협곡에 모습을 드러낸 적들을 보며 일행은 안색을 굳혔다. 약 30여명… 천악 하나로도 힘든 상황에 저들까지…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아 레도르 정도면 둘 정도를 상대할 실력… 만약 천악과 싸우기 전에 붙었다면 이쪽에 승산이 있을 정도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크윽… 이렇게 간단하게 지는 건가?" "괘, 괜찮냐?" 이를 갈며 중얼거리던 레도르는 자신의 어깨를 집어오는 지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토한 듯한 모습… "젠장… 저놈들만 있었거나 저 악마만 왔으면 어떻게 이길 수도 있겠는데…." 꼴이 말이 아닌 시드가 비틀거리며 걸어와서는 중얼거렸다. 미시안을 데리고 후퇴한 칼. 디렐의 앞을 막고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시린… 디렐을 치료하고 있는 레아… 그리고 세린과 유미는 절망어린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인가…." "안돼… 죽인다…." 미시안은 붉게 충혈 된 눈을 빛내며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하지만 비틀거리는 몸으로 미시안을 레지엘이 붙잡았다. "차라리 바리케이드 뒤로…." 그래도 바리케이드 뒤로 가면 얼마간 버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더 버틴다고 해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지만… 하지만 어떻게든 버틸 방도를 찾는 레지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악이 앞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일행은 안색을 굳히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고고고고고고… "음?" "무, 무슨… 마기?" "세한?" 순간 엄청난 마기를 느낀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서는 천악. 순간 엄청난 마기를 머금은 검은빛의 검이 일행을 지나 천악에게 날아갔다. "마나르트? 세한을 찾으러 갔는데… 그럼…." 마나르트를 세한에게 보냈던 레지엘의 중얼거림. 순간 마나르트와 천악이 충돌하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쾅! 마기와 마나의 격돌. 순간 천악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뒤로 퉁겨져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뒤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와 바닥에 박히는 마나르트. 일행은 얼빠진 눈으로 바닥에 박혀 있는 마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천악? 저 자식이 왜… 미안하다. 늦어버렸어." 일행은 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검은 마기에 휩싸여 있는 하늘. 하늘의 일부가 어둠에 물들어있었다. 전투에 집중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한 듯한… 그리고 그 어둠의 가운데에 스핑크스와 비슷한 크기에 칠흑 같은 몸을 가진 거대한 흑표범이 떠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날카롭게 선 검은빛의 털들. 마치 전신에 가시가 돋아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흑표범은 몸은 있었지만 다리가 중간에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칠흑 같은 마기… 온몸이 마기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흑표범의 위에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서 있었다. 엄청난 살기를 내뿜고 있는 검은 남자… "세한?" 일행은 물론, 천악, 암흑 길드와 엠페러 길드의 길드원들까지 놀란 눈으로,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 흑표범의 다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엄청난 속도로 마기를 흡수하는 흑표범… 마기가 모두 흡수되는 동시에 빳빳히 서 있던 털들도 가라앉았다. 매끄럽게 잘 빠진, 거대한 검은 샤벨 타이거의 모습을 한 린. 그리고 세한이 바닥에 내려섰다. "수고했어, 린." 세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표범은 전보다는 몇 배나 커진 고양이, 아기 흑표범의 모습으로 변했다. 약간 사람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 린은 낮게 가르릉거리고는 세한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작은 공처럼 뭉쳐서 망토속으로 들어가는 린. 세한은 고개를 돌려 천악과 침입자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군." 바닥에 박혀 있던 마나르트가 세한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듯 날아가 세한의 손에 쥐어졌다. 순간 주위를 잠식하는 엄청난 마기. 일행은 숨을 죽이는 동시에 속으로는 기쁨,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번 해보자." 세한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마기가 터져나왔다. "젠장! 딜럿님! 레이디스 길드! 나프네가 왔습니다!" 투르의 말에 딜럿은 인상을 구겼다. 이를 빠드득 가는 딜럿의 모습에 투르는 몸을 움츠렸다. "젠장… 다크소드와 나프네가… 빌어먹을. 그냥 쓸어버릴…." "하, 하지만 미토스와 할딘이 레이디스 길드에 끼어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대로 공격하고… 엠페러 길드의 치부를 모두 드러내겠다고…." 투르의 말에 딜럿의 눈에서 폭발적으로 살기가 치솟았다. "빌어먹을… 그자의 말에서 한가지 틀린 점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몰랐는데?" 딜럿은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엠페러 길드의 길드원들. 딜럿은 제퍼슨을 생각했다. 여기서 자신의 주군의 명예를 깎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빌어먹을!" 딜럿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정말… 현진 씨는 어떻게 보면… 좀 바보 같은 면도 있다니까. 어떻게 다크 엘프들 때문에 엠페러 길드와 정면으로 맞붙다니… 뭐, 좋게 끝났으니 됐지만. 안 그래도 요새 현진 씨를 적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번 일도 한소리 들을지 몰라. ………. 자신의 말을 초연이 듣고 있든 않든 미나는 계속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번엔 현진 씨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지도… 창민 씨가 다크 엘프 하나를 죽인 것에도 그렇게 화를 내던 사람인데… 이번에는… 혹시 우리 과에 쳐들어오는 것 아냐? …… 어쩌면… 그런데 변종 몬스터에 관해서는 아직도 기밀인가요? 그래. 나도 모르는 일인걸. 각 팀장들하고 프로그래밍 팀만 알고 있는 일이거든. 그 외에 사람들 중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고…. 초연 씨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53층에 멈추는 엘리베이터. 초연 씨는 미나 씨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초연 씨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입을 여는 미나. 무슨 걱정 있어? 초연 씨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문이 닫히면서 함께 들려오는 초연 씨의 목소리. 현진 씨가 날 용서할지 몰라서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미나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용서할지 몰라서라… 훗. 나는 낮게 웃고는 고개를 들었다. 웃음소리에 나를 돌아보고 있는 미나 씨. 나는 피식 웃고는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현진 씨? 어, 언제부터? 아, 아니… 그것보단 왜…. 모자에 얼굴이 가려있던 데다가… 계속 조용히 구석에만 있었기에 날 알아보지 못했겠지. 초연 씨도…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54층에 멈추는 엘리베이터. 나는 머리카락사이로 미나 씨를 살짝 노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미나 씨. 미나 씨도 이벤트 진행과의 몬스터 관리부, 그 다크 워리어를 조종한다던 인간과 같은 몬스터 조종자. 저런 반응이 당연한가? 자, 잠깐, 현진 씨! 멈추십시오. 현재 기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 뒤에서 나를 부르는 미나 씨와 사무실 입구에 서 있다가 나를 가로막는 사람들. 기밀 프로젝트라… 게임 범죄 처리 팀장 김현진입니다. 그 기밀 프로젝트라는 것을 파헤치려고 왔습니다만. 무슨… 컥!? 내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지는 남자. 나는 싸늘히 웃어주었다. 뒤에서 미나 씨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집중되는 시선. 당신들 덕분에 몇 명이 죽었는지 알아? 이봐! 무슨…. 나는 내 어깨를 붙잡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쓰러진 남자와 함께 나를 막아서던 사람. 나는 깨끗이 무시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프로그래밍 팀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이 자식이…. 나는 뒤에서 나를 덮쳐오는 사내를 느끼며 몸을 움직였다. 현실에서의 식스센스 발현… 게임에서보다는 훨씬 떨어지지만 어느 정도 쓸만해 졌어… 그동안 노력한 덕분에 기척을 읽는 것만은 강 사범님을 뛰어넘을 지도… 꺄악! 혀, 현진 씨! 저, 저거 뭐야!? 내가 돌려차기로 사내를 한방에 기절시키는 모습에 비명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를 알아보고는 딱딱히 굳기도 하는 일부의 사람들. 나는 그대로 프로그래밍 팀의 사무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분위기에 사람들은 나르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길을 비켜주기도 하였다. 어쩌다 보니 생겨난 이 폭발적인 살기… 쓸데가 있기는 한데? 이, 이봐! 지, 지금은 기밀 프로젝트를…. 프로그래밍 팀의 사무실 앞에 서서는 나를 제지하려드는 남자 몇. 흠… 이 사람들은 무술을 배운 모양이군. 나는 절제된 동작을 보여주는 세 사람을 보고는 살짝 혀를 찼다. 부장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로 알아내러 온 게 아니라… 힘으로 알아내려 온 거니… 막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겁니다. 내 말에도 셋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내게 다가왔다. 이번엔 진짜로 해야겠네. 쳇… 어떻게 수습이 되겠나? 모,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라…. 후…. 초연의 아버지, 도훈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는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을 확인했다. 엄청난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숫자. 초조해 하는 그의 모습에 신대관, 일명 신 과장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벌써 운영자 정도의 사람들은 대부분 몰려들었다고 하던데… 우선 현진 씨가 헌터로… 변종 몬스터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는 것과… 회사의, 사장님의 방침이 NPC들을 생명체로 대한다는 것이었기에… 그다지 문제는… 허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초조해 하던 도훈과 현진의 행동이 가져올 여파를 중얼거리던 신 과장은 눈을 부릅떴다. 바닥에 묻어 있는 피… 둘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몰려들어 있는 운영자들과 이벤트 진행과의 사람들. 그리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몇몇 사람들. 현진에게 당한 것 같아 보였지만 그 중에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그럼 이건…. 아, 아빠? 도훈은 자신을 부르는 초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초연을 발견한 도훈은 급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급히 뒤따르는 신 과장. 초연이 서 있느 곳에는 운영자 박정호와, 운영 팀장, 그리고… 저번 현진이 금융부 유 부장을 구했을 때 얼굴을 비췄던 그 전무(방호진)가 초연의 옆에 서 있었다. 그의 모습에 잠시 멈칫하던 도훈과 신 과장은 신경을 끊고는 초연의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왜 눈물을…. 도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초연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때 들려오는 현진의 일갈. 젠장! 빨리 불어! 그 프로젝트라는 게 뭐야!? 도훈과 신 과장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동시에 몸을 흠칫했다.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서서는 프로그래밍 팀장의 멱살을 잡고 있는 현진.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좀 밝은 빛의 옷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프로그래밍 팀에서… 십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고 하는군… 거기다… 뒤에서… 저걸로 머리를 내리쳤다고 하네…. 도훈은 방 전무가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고는 신음을 흘렸다. 강화 합금판… 캡슐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메모리 장치이기도 한… 도훈은 합금판이 우그러져 있는데다… 상당한 양의 피가 묻어있는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리는 신 과장. 이제 현진 씨가 잘릴 위험은 없군요… 오히려 프로그래밍 팀에서 희생양이 나올지도….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현진과 그에게 멱살을 잡혀 있는 팀장. 사람들이 하얗게 질린 눈으로 보는 사이. 프로그래밍 팀의 팀장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우, 우리도 모르네…. 순간 살벌함을 떠나 그야말로 금방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한 눈빛으로 변하는 현진. 그 모습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키며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우리도 모른다는 팀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모른다고? 살기가 뚝뚝 묻어나는 현진의 목소리. 그리고 불쌍한 팀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사, 사실은 우리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버, 버그 같은 거네… 어, 어떤 해커가 침투한 듯한데… 시,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방어할 수도… 거기에 프로그램 자체를 조작해 놔서… 비, 비밀스레 해결하려고 하니 거, 거의 불가능 했네. 이, 이 일이 알려지면… 무, 문책이…. 팀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현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그러니까… 네놈들 잘릴까 무서워서… 그 많은 NPC들이 개죽음 당했다고? 흐흐… 오늘 내 피도 본 김에 당신 피도 한번…. 자, 잠깐! 김 팀장! 그대로 주먹을 후려칠 듯한 자세를 취하던 현진은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행동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현진을 간절함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초연과 도훈 등의 사람들. 자네 마음은 알지만… 우선은 이 일을 해결해야 두 번째 피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 아닌가. 방 전무의 말에도 현진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방 전무는 식은땀을 흘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자, 자네의 행동은 정당함이 인정 되네… 아무도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으니… 하, 하지만 진 팀장을 다치게 해서는 힘들어져…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자네의 행동이 우리를 살린 것이니… 우선 이 사태를 해결하게 해주게. 그리고 어떻게 보면 시스템에 침투한 해커 놈이 더… 그놈도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방 전무의 말에 현진은 초연과 도훈을 바라보았다. 애절함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초연에서 시선을 잠시 멈추던 현진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손에 붙잡혀 있던 친구를 방 전무 쪽으로 집어던졌다. 으, 으아아! 바닥에 발을 디디자마자 급히 방 전무 쪽으로 도망치는 프로그래밍 팀장. 그에게 사람들의 약간, 싸늘한 시선이 내리꽂이고 있었다. 진 팀장. 우선은 이 사태를 해결해야지. 확실한 설명을 바라네. 싸늘한 방 전무의 목소리에 진 팀장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 어떤 엄청난 해커가 프로그램에 침투했습니다. 침투 경로는 아직 발혀내지를… 비, 비밀리에 하려고 하니 모든 시스템을 구동할 수도 없었고… 그, 그 해커가 몬스터 시스템을 조작해서… 변종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 거기다 그렇게 생겨난 변종 몬스터들은 비상용 제어 기능도 있지 않아서… 거기다 그 해커 놈이 수시로 침투해 시스템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럼 모든 시스템 사용권을 주고 다른 부서의 최고급 프로그래머들을 붙여주면 막을 수 있겠나? 진 팀장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신 과장이 끼어들었다. 전무님. 음? 이 분야에서는 제가 전문가라 말씀드립니다만… 우선 변종 몬스터라는 것이 패치 형식으로 추가된 듯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차라리 해커가 조작했다는 시스템을 우리 측에서 장악해 변종 몬스터를 보스급 몬스터로 조절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컴퓨터의 통제하에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괜히 시스템을 청소하다가는 서비스에 장애가 갈 수 있습니다. 침착한 신 과장의 설명에 방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미 이번 일도 카메론 사의 짓이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방 전무 역시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공격을 오히려 이롭게 이용하는 것이 되겠군. 좋아. 신 과장의 말을 수용해서 처리하도록. 혹시 제어를 벗어나는 놈들이 있어도 헌터, 김현진 팀장이 막아낼 수 있겠지. 방 전무의 말에 도훈과 신 과장의 눈빛이 약간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순간 시선을 교환하는 방 전무와 도훈. 약간 싸늘한 눈빛을 교환하던 둘은 동시에 현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음? 어디로…. 현진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린 둘은 사라진 현진의 모습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진이 서 있던 자리에는 초연이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손수건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혀, 현진이? 아, 오랜만에 뵙는군. 재훈이를 보러 왔는데? 나는 싱긋 웃으며 세진이를 바라보았다. 입을 뻐끔뻐끔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세진이. 이봐 동창. 왜 그래? 아, 맞다. 나는 피투성이의 내 모습을 한번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 나는 세진이를 지나쳐 걸어갔다. 바닥에 찍힌 피의 발자국에 낮은 비명을 지르는 세진이. 조, 조금 미안하군. 나는 한 방의 앞으로 다가가서 품속에 손을 가져갔다. 내 등록카드가… -삐익. 허용된 신분. 오픈. 낮은 기계음과 함께 방문이 열렸다. 카드를 집어넣은 나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을 반으로 가로지르는 가리개. 그리고 가리개에 비추는 검은 그림자. 그리고 뭔가 짤각짤각거리는 소리. 나는 피식 웃고는 가리개를 넘어갔다. 센서를 끼고는 페이퍼 스크린을 건들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재훈. 평소 엘리트스런 모습과는 딴판인 모습… 나는 익숙한 동창의 모습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는 녀석이 머리에 쓰고 있는 센서에 손을 가져갔다. 체포한다. 쿠당탕! 우와악! 순식간에 몸을 날리며 스크린을 잡아 찢으려드는 재훈이.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붙잡았다. 페이퍼 스크린 가격이 꽤 나가지? 그만해. 헉, 헉… 뭐, 뭐야. 너였냐? 킥. 그럼 이 방에 마음대로 들어올 녀석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냐? 헐떡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재훈이. 꼭 야한 걸 보다 들킨 소년 같은 모습에 나를 빙긋 웃어주었다. 하지만 순간 급속도로 굳어가는 재훈의 얼굴. 이, 인마! 너 꼴이 이게 뭐야? 왜, 웬 피가 철철… 괘, 괜찮냐?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빌어먹을… 한번 앉으니까 다시는 일어나기 힘들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재훈이를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 몸을 살피고 있는 녀석. 뭐하고 있었냐? 내가 힘을 잃고 쓰러져 있는 페이퍼 스크린을 바라보며 질문하자 재훈이는 급히 시선을 애꿋은 천장으로 옮기며 휘파람을 불었다. 후… 끄지 말지… 부탁이 있다. 부탁이라는 말에 재훈은 휘파람을 딱 멈추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네 부탁 치고 쉬운 게 없었지. 그래, 야동은 아니겠지? 나는 빙긋 웃어주고는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재훈이에게 건넸다. 피에 젖은 내 명함을 떪은 눈으로 바라보던 재훈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 손가락은 명함의 오른쪽 위에 위치한 (주) 리자드의 심볼마크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두운 방안. 한 남자가 의자에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빛이라고는 한줌도 들어오지 않는 방. 사내의 모습을 비춰주는 조명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과 담배를 태우는 약한 빛이 다였다. 남자는 약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특이하게도 안경을 쓰고 있었다. 돈 10만원만 들이면 양쪽 2.0의 시력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다. 이건 세상에서 안경을 쓰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썬그라스라면 모르지만… 아마 자의로 안경을 쓰는 것이리라. 그리고 안경의 남자의 앞에서 빛을 발하는 컴퓨터 역시 상당한 구형, 요새 널리 쓰이는 간편한 페이퍼 스크린이 아닌 모니터였다. 거기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흡연까지… 사내가 안경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에는 하나의 체스판이 나타나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알아보기 힘든 복잡한 기호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는 작은 창이 하나 있었고 나머지 모든 화면은 하나의 체스판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체스판에는 흰색, 아군의 말들만이 놓여 있을 뿐 상대의 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디디딕… 약한 기계음과 함께 체스판의 상대 진영에 여러 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킹을 선도로 퀸과 나이트, 병사까지… 그리고 모니터의 한쪽 구석에 위치한 창에는 이상한 기호들이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갔다. 그 모습에 안경의 남자는 빙긋 웃고는 역시 구형인 키보드를 몇 번 두들겼다. 후후. 왠지 분위기가 다르다 했더니… 드디어 여기까지 뚫고 오셨군. 리자드에서 알아차린 모양이지? 흠… 어쨌든 의뢰주는 막기가 불가능해 위치를 들킬 정도만 아니면 될 수 있는 한 오래 버티라 했으니… 리자드의 친구들은 실력이 어떤지 한번 볼까? 남자는 좀 중얼거리고는 책상에 올려져 있던 센서를 머리에 썼다. 사용자의 사념을 읽어 컴퓨터 속에 전달하는 기계. 그리고 순간 모니터에서는 혼란이 일어났다. 검은색의, 상대의 체스 말들이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내는 빙긋 미소를 지었고 동시에 수많은 모니터에서는 흰색, 아군의 말들도 열심히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두둑! 카캉! 체스 말들이 서로 부딪힐 때마다 말들은 서로를 공격했고, 동시에 구석의 창에 엄청난 속도로 이상한 문자들이 스쳐지나가듯 나타나고 있었다. 곧 검은 말들의 수가 줄어갔다. 그에 비해 하나도 죽지 않은 흰색의 말들. 그때 약간 지루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안경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시시하군. 너무 정석적인 플레이잖아? 쳇. 역시 회사의 친구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심심풀이도 안 되는군. 검은 색의 말들의 수가 2/3으로 줄어들었고 사내의 얼굴에서 따분하다는 기색이 만연히 들어났다. 그때 갑자기 화면이 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음? 그리고 체스판의 한쪽에 나타나는 일단의 체스 말들. 그 체스 말들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 맙소사… 내가 눈치 채기도 전에 내 방어망을 뚫고 온 건가. 하하핫. 이거 오랜만에 재밌는 녀석을 만나는데? 이놈은 진짜로군. 그런데 누구지? 리자드는 아니군. 개인 컴퓨터… 2:1의 싸움인가? 흠….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던 사내는 빠른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회색 말들과 흰색 말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은 말들을 상대하느라 수가 좀 부족한 흰색 말들이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내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이건 진짜다! 하하핫! 정말 오랜만인데? 좋아! 어디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사내는 센서를 벗어던지고는 한손으로는 키보드를, 한손으로는 마우스를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흰 말들과 회색 말들이 격렬한 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이 자식은 뭐야?! 나는 비명을 질러대는 재훈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명을 지르기는 하는데 아주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군. 역시 이놈도 뭔가 정상은 아니야. 대단한데? 평범한 녀석이 아니라고! 역시 현진이 네가 가지고 오는 일감은 항상 죽여준다니까! 아까와는 달리 눈을 빛내며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는 재훈. 나는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이상한 기호들이 마구 몰려다니는 스크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잡을 수 있겠어? 조용히 해! 나는 흥분한 얼굴로 책상을 따닥따닥 두들기고 있는 재훈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정도가 좀 심하군. 역시 리자드에 침투할 만한 해커여서 그런가? 음?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나는 재훈이 경악한 듯 고함을 지르자 급히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레? 나는 아까와는 다른 스크린의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는 흰색 글씨가 많았는데 지금은 검은색 글씨가 월등히 많았다.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회색 글씨. 흰색이 우리고 검은색이 그 해커. 회색이 리자드라고 했지? 검은색이 월등히 많은 게… 재훈이가 밀리느 건가? 야, 밀리는 거야? 내 질문에도 침묵하는 재훈이. 대신 녀석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너희 뭐해? 뒤에서 들려오는 세진이의 목소리. 세진이야 재훈이 아내나 다름없으니 당연히 들어올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깨끗이 무시하며 스크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욱… 생각을 좀 많이 했더니 피가 또 나는 것 같은데? 나는 머리를 좀 쓰다듬었다. 찌잉… 순간 이상한 소리를 내는 페이퍼 스크린. 갑자기 스크린에서 이상한 기호들이 사라지며 한 그림이 떠올랐다. 어, 어라? 이건… 일본 애니? 나와 재훈이는 스크린에 떠오르는 벗은 소녀(?)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연속으로 떠오르는 다른 야한 그림과 사진들… 순간 내 뒷 통수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꺄악! 너희 뭘 보는 거야!? 끄아아악! 사, 상처가…. 꺄악!? 미, 미안해! 스크린에 떠오르는 야한 사진을 보고 오해했는지 내 뒷통수를 후려갈겼던 세진이는 다시 피가 흘러나오는 내 상처를 보며 안절부절 했다. 제, 제길… 나는 고개를 다시 들며 악을 썼다. 야! 저 새끼 잡아! 반드시 잡아! 내가 저놈한테 이 고통을 그대로 전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잡아! 제길! 이 새끼 잡고 만다! 감히 이 몸에게 장난질을 했다 이거지! 세진이는 광분해 고함을 질러대는 우리를 둘러보다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센서를 벗어 던지는 재훈. 어? 뭐야 인마? 젠장! 센서는 해커들이 쓰기에 좋은 물건이 아니라고. 정석적인 방법이 아니면 잘 읽지도 못해. 여, 거기 옆에 있는 케이스에서 마우스하고 R-34라고 써 있는 것들 꺼내서 연결해! 제길… 어쨌든 저 놈 말을 듣기는 해야지. 나는 내 옆에 있는 케이스를 뒤적거렸다. R-34. 이건가? 나는 작은 칩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꺼내들었다. 마우스? 그런데 마우스가 뭐지? 야, 마우스가 뭐냐? 쥐? 젠장! 끈달린 손잡이! 엥? 끈달린 손잡이? 아, 이걸 말하는 건가? 나는 전선이 연결되어 있는 물건을 꺼냈다. 내가 꺼낸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재훈. 재훈이는 지금 키보트를 엄청난 속도로 두드리고 있었다. 제길! 이 자식 인간이 아냐! 제길! 인마! 해커 대회에서 1등도 했던 놈이 그런 놈 하나 못잡냐!? 빌어먹을! 해커 대회에는 진짜 알짜배기는 잘 나오지 않는 다고! 이놈은 나와 동급이란 말야! 제길… 나도 천재 소리 꽤 들었는데… 빨리 연결해! 나는 칩을 스크린에 박아넣고는 마우스라는 것의 전선 끝에 달린 칩도 스크린에 연결했다. 마우스를 빼앗듯 가로채는 재훈. 재훈은 곧 한손은 키보드를, 한손은 마우스라는 녀석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오. 환상적 손놀림이로군. 그때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며 이상한 배경이 드러났다. 뭐야? 우주? 우주에 왜 땅이 떠 있어? 그리고 그 이상한 땅에 나타나는 우주인들. 저거 뭐냐? 왜 구시대의 우주복을 입고 있는 거야? 거기다 저 구시대의 유물이라 불리는 총들은… 얼레? 탱크라는 놈들도 있네? 뭐, 뭐냐? 그때 화면의 저쪽에 이상한 괴물들이 나타났다. 개처럼 생긴 이상한 녀석과 전에 봤던 에얼리언에 나왔던 것과 비슷한 괴물. 그리고 코끼리를 보는 듯한 크기의 괴물. 그리고 저쪽에는 이상한 칼을 들고 있는 거인들이 나타났다. 네발 기계도 있네? 이, 이게 뭐야? 이거? 스타크라고 21세기 초에 유행하던 게임. 해커들은 싸움을 이렇게 게임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하나씩은 개발하고 있거든. 나는 이 게임을 모티브로 프로그래밍 했고… R-34가 이 프로그램 칩이야. 저 괴물이 해커고 저 우주인이 리자드다. 이 사람들이 나고. 제길. 역시 반반인가? 순간 괴물들이 사라졌다가 1/3은 리자드 쪽으로, 2/3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총을 난사하는 우주인들과 이상한 체액을 뿜는 괴물과 손톱을 빛내며 달려드는 개 정도 크기의 괴물들… 스릴러냐? 해커들은 취미도 희한하군. 아니, 재훈이의 취미가 이런 건가? 겨우 2/3? 감히 날 무시 하다니! 재훈은 흥분해서 뭐라고 고함을 지르더니 엄청난 속도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왠지 가까이 가기가 무섭군. 나는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스크린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쪽 리자드 쪽은 이 괴물들이 이기고 있는 듯 하고… 재훈이 쪽은… 그야말로 피 튀기는 혈전이었다. 막상막하… 아, 저 해커는 병력의 2/3 뿐이니 저쪽 실력이 더 뛰어난 건가? 그래서 무시니 어쩌니 하는거군… 걸렸다! 뭐? 순간 기쁜 듯 고함을 지르는 재훈이. 나는 의아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때 옆에 달려있는 작은 모니터에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구. 북부. 아시아. 동남. 한국. 중부. 서울…- 계속 뭐라고 늘어나는 글자들. 뭐지? 놈이 있는 주소! 연결 고리를 찾았어! 그거 메모해! 뭐, 뭐야? 으아앗! 역시 네놈은 천재야 인마! 우하핫! 내 승이다 이놈! 뒤에서 세진이기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메모를… 서울… 북부… 50… 56구역? 이, 이게 뭐야? 음? 왜 그래? 황당하다는 내 목소리에 열심히 손을 놀리던 재훈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내가 적은 구역 번호를 보고 얼굴을 굳히는 재훈이. 56구역? 거긴… 암흑가… 젠장! 속았다! 내 주의를 돌린 거야! 속은 건가? 암흑가… 2080년대 한국의 중심지… 완전한 기계화와… 일할, 배울, 땀을 흘릴, 모든 행위의 필요를 잃어버린 인류의 타락이 있던 곳… 88혁명이 있은 후 파괴된 구역… 이곳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젠장! 괜히 기뻐했군! 지지직… 음? 뭐야? 그때 스크린이 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점차 떠오르는 글자들 오랜만에… 즐거운 대결이었다… 대단한 실력이군… 하지만… 역시… 내가… 이겼다…. 떨리는 목소리로 글자를 읽는 재훈. 그리고 글자가 모두 사라지고 어떤 그림이 떠올랐다. 손? 이건…. 사람의 손. 주먹을 쥔 손. 그리고… 서서히 펴지는 가운데 손가락… 나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다. 크으… 피가 더… 하지만 재훈은 분노를 참지 않았다. 무으어어억! 개자식! 광분해 발광을 하는 재훈이. 순식간에 페이퍼 스크린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덕분에 연기를 피어 올리다 안전모드로 들어가는 컴퓨터. 크아아악! 내가 이 자식 반드시 잡는다! 으워아이으아악! 해괴한 고함을 지르며 발광을 하는 재훈… 나도 왠지 저 분노의 춤사위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는 눈을 감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제길… 놓쳤군. 나는 재훈이를 진정시키려 애쓰는 세진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후… 언젠가는 이놈도 잡는다… 섀도우 월드에서는 다크 워리어… 현실에서는 이 해커인가? 순간 빈혈을 느낀 나는 몸의 제어권을 잃고는 의자에서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후… 대단한 녀석이군. 가끔씩, 띄엄띄엄 올라오는 글과 기호들을 제외하면 조용한, 아까와는 달리 너무도 평온한 스크린을 바라보며 안경의 사내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 정말 오랜만에 진지해 졌었군. 그건 그렇고… 누가 그 정도의 해커를 찾아낸 거지? 남자는 모니터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쨌든 그 친구 덕에 연결을 끊어 버렸으니… 어쨌든 좀 꼼수까지 쓰게 되었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장소를 약간 옮기는 것이 좋겠어. 사내는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방을 나섰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호적수가 마음에 들었다. 리자드가 없었다면 자신이 더 확실하게 이겼겠지만…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번 승리도 자신이 상대를 속여서, 리자드 사의 프로그램에서 연결을 끊어서 얻은 것이니… 잠깐. 그럼… 저 녀석은 리자드 사의 컴퓨터에 일차적으로 침투한 후에 나하고 겨룬 건가? 그렇다면…. 이중 침투. 자신이 연결을 유지하고 있던 곳은 리자드 사의 프로그램. 그렇다면 상대는 리자드 사의 프로그램에 침투해 자신을 찾아내었다는… 그렇다면 상대도 리자드와 자신을 동시에 상대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하… 허탈하군. 언제 정식으로 한번 대결을 해보고 싶은데? 아, 형님. 안경의 사내는 방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남자를 바라보던 안경잡이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걸음을 옮겼다. 하하. 오늘 기분이 꽤 좋은데? 가자고, 레딕. 후…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뭐, 어때. 레딕 이라 불린 20대 중반 정도 나이의 남자는 고개를 젓고는 안경의 뒤를 따랐다. 건물 밖으로 나온 두 사람. 둘이 서 있는 곳은 폐허, 어둠에 휩싸여 있는, 암흑가라 불리는 무인 구역이었다. 너희 말이야…. 음? 지금 날 우롱하려는 거냐!? 내 악에 바친 고함소리에 재훈이과 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낄낄거리며 웃는 세진이와 지현이. 나는 거친 동작으로 맥주 캔을 따고는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길… 왜 하필이면 저 둘이냐고. 지금 솔로 놀리기라 이거냐? 에이, 대희네 가게가 오늘 휴일이라 부른 건데 뭘. 그리고 넌 초연 씨가 있잖아. 재훈이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초연 씨라. 쳇. 나는 맥주를 들이키며 재훈이를 바라보았다. 으윽? 세진이의 눈빛이 장난이 아닌데? 다쳤을 때는 술 마시면 안 된다더니… 나는 세진이의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하던 말이나 계속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 해커가 리자드 사에 침투해서 몬스터를 조작했다고 하던데? 그래서 잡으려는 거고. 그 자식만 아니었으면…. 내가 약간 흥분한 듯하자 재훈이가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내가 말을 멈추자 입을 여는 재훈. 그게 이상하다니까. 나도 그 녀석과 같은 해커야. 하지만… 우리는 컴퓨터에 침투해 바이러스를 퍼트리거나 시스템을 조금 조작하는 정도가 끝이라고. 무슨 소리야? 후… 역시 너도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니까. 크윽! 나는 발끈해 재훈이를 노려보았다. 숨을 죽여 킥킥거리는 나머지 셋. 내 살기섞인 시선에 재훈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야. 리자드에 침투했다고 해도 네가 말한 그 변종 몬스턴지 하는 놈들을 만들 수는 없다는 말이야. 뭐? 무슨 소리지? 그렇게 시스템을 완전히 조작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지. 아마… 그 변종 몬스터라는 것들, 리자드에서 이미 만들고 있던 것들일 거야. 그 녀석은 침투해서 그것들을 퍼트리기만 했을 거고. 그게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는 재훈이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럼 그 해커 자식이 변종 몬스터를 만든 게 아니라… 원래 리자드에서 만들고 있던 거라고?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어제 회사에서는… 그런 말은 없었다고. 그 전무나 아버님, 신 과장 중 그 누구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는데? 만약 원래 하고 있던 프로젝트라면… 그들이 그렇게,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봐, 그럴 리가 없어. 다른 사람들은…. 나는 재훈이에게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재훈이. 약간 이상해진 분위기에 나머지 셋은 맥주를 홀짝이며 우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재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해커가 그 정도로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해. 침투해서 어느 정도, 그러니까 만약 변종 몬스터가 원래 만들어지고 있었던 거라고 친다면 그걸 좀 조절해 여러 지역에 무자비로 생기게 하는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으로는 분명 리자드에서 그 변종인지 뭔지를 만들고 있었을 거야. 흠…. 재훈이는 눈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재훈이를 마주보았다. 잠시 그렇게 나를 마주보던 재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회사에서 위치가 어느 정도냐? 음?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 했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그리 높지는 않지. 팀장이기는 하지만 신생팀이고. 실적이야 좀 있기는 하지만… 음… 거기다… 솔직히 말하면 회사 내에서 내가 좀 묘하게 경계를 받는 듯한 느낌이야.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그렇지 않지만… 좀 높은 사람들? 그런 인간들은 대부분 나를 좀 심각하게 살피는 정도거든. 확실히 가끔 내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내 말에 재훈의 얼굴이 약간 심각하게 바뀌었다. 우리 중에 머리가 가장 똑똑한 녀석은 이 녀석이지. 뭔가 알려 주려나? 대충 예상되는 것을 한 가지 말해보지. 지금 회사 내에서 뭔가 비밀스런 일이 진행되고 있을 수 있어. 그 변종인지 뭔지도 그 비밀스런 뭔가의 일부분일 수도 있고. 흠… 어쨌든 그런 비밀스런 일을 진행하고 있는데 네가 떡하니 들어온 거야. 전혀 새로운 인물.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녀석이 들어왔으니 경계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지. 거기다 어쨌든 팀장 정도면 괜찮은 위치니까. 그리고 네 팀이 좀 중요한 팀이기도 하고. 그런데… 굳이 그 팀을 신생해야 할 이유는 뭐지? 흠… 네 팀이 그 비밀스런 일에 꼭 필요한 곳인가? 흠… 어쨌든. 여기서 경계하는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고. 하나는 비밀 프로젝트라 경쟁 업체의 스파이일 가능성 때문. 하지만 그럴 리는 거의 없지. 네 신분이 확실하니까. 아니면… 그 비밀스런 일이 그다지 좋지 않은, 외부 사람들이나 네가 알면 뭔가 곤란한 일일 수도 있지.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이번 일도 네게는 비밀로 하고 있는 거니까. 뭔 일인지는 당연히 모르고. 재훈이는 추리하듯 중얼거렸고 나는 녀석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비밀스런 일? 글쎄… 모르겠군. 나와 재훈이가 심각한 얘기를 주고받다 동시에 생각에 잠기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이런, 안 되지. 됐어. 나중에 알아보지 뭐. 마시자고. 인마. 그만 생각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뭐, 알았다. 어쨌든 나는 그 해커나 잡도록 노력해 보지. 그래. 마시자. 좋아! 곧 분위기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며 빈 맥주 캔들이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어지러워. 머리가 심하게 깨진지 얼마나 됐다고 술을 들이마시니 이 꼴이군. 거기다 병원에 가는 대신 세진에게만 치료 받았으니… 세진이가 의대출신이긴 하지만… 속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서로를 보며 웃으며 얘기하고 있는 두 커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나를 우롱하려는 속셈이 깔린 것 같아. 나쁜 놈들. 그나저나… 초연 씨라. 내가 예전처럼 대할지 모르겠군. 후… 내가… 게임 속에서의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역시 그곳은 또 다른 세상이야. 리자드 측에서도 그렇게 발표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리고… 항상 불행했던 내가… 즐거움을 얻은 곳. 쳇. 아, 현진아. 그 섀도우 월든지 재밌냐? 네가 미쳐서 할 정도면 재밌겠지? 재훈이의 물음. 세진이에게 물어봐. 세진이도 하니까. 뭐, 재밌긴 재밌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지. 이런… 세상보다는. 씁쓸히 웃는 나를 뚱한 눈으로 바라보는 넷.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회색의 하늘. 겨울이라 더 심하군. 오염 때문에 저렇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산성비 걱정은 없다. 저 오염권 아래에 인공 정화층이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올해에도 눈이 오지 않을까? 하늘은 푸르지. 어쨌든 공기도 말고. 자유로운 곳이지. 이런 억압된 듯한 세상보다는. 완벽한 질서? 웃기지 말라고 해. 88혁명 다음부터는 많이 풀리고 있기는 해도 아직 좀 강제성이 있는 생활. 그곳에서는 그렇지 않아. 그리고 사람과 똑같은, 아니 또 다른 세상의 생명들인 NPC들도… 인권 단체들이 리자드 사를 왜 비판했는지 알 것 같더군.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고… 내가 지키고 싶은 곳. 헌터가 된 것도 그 이유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또 하나의 세상이야. 후후. 그러냐? 아, 섀도우 월드에 대해서 재밌는 말을 들었는데. 뭐? 대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재밌는 말? 흠… 섀도우 월드의 세상이 인간이 만든 하나의 세상이듯…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어떤 인간들이 만든 세상이고 우리가 NPC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2100년 전의 예수도, 예언자도, 부처도, 천사도, 그런 모든 존재가 이 세상으로 건너온 플레이어들이 아니었을까. 자신들이 위대한 자가 되고 싶어 하던 우리의 창조주, 또 다른 인간들은 아니었을까. 나는… 불안하다. ………. ………. 순간 싸늘한 정적이 흐르는 재훈이의 집. 저, 저런 망할 자식… 가, 간신히 분위기를 띄워 놨더니 뭐가 어째? 하지만속 마음과는 달리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셋도. 섀도우 월드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글이라더라. 인터넷에도 널리 퍼진 글이고. 무섭지 않냐? 글쎄… 그거 신학의 일종 아냐? 어차피 신이라는 것이 존재할거라는 소리잖아. 그것보단… 우리가 인간에 의해 창조된 존재일지 모른다는 거지. 젠장. 갑자기 분위기가… 그만하자. 며칠동안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일어난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냐? 그냥 놀자고. 후후. 그러지. 그럼 너 오늘로 나가는 거다? 너 때문에 나와 세진이의 시간이… 커헉! 야! 나는 재훈이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기는 세진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 재밌지. 대희와 지현이가 낄낄거리고 있었다. 하… 12월… 24일 인가? 크리스마스 이브로군. 나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일대 소동을 벌이고 있는 다른 녀석들은 듣지 못했다. 내일… 초대형 이벤트가 있지? 빅 캐슬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축제. 마침 섀도우 월드도 겨울이고. 내일 회사로 가야 하는군. 3기 헌터들 임명식도 있고…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때 혹시 있을지 모르는 경쟁 업체의 방해를 저지하기 위해 헌터 총 투입. 3기 헌터가 15명이니 모두 20명 투입인가? 운영자도 전원 투입이니… 최대의 도시인 빅 캐슬과 주위의 평원 전체를 축제지로 꾸며 크리스마스, 12월 25일 12시부터 만 하루, 가상에서의 3일간 벌어지는 대 축제. 대륙 전체의 플레이어가 몰려들 대형 이벤트. 바쁘겠지. 그리고 이 이벤트가 끝나면… 새해까지 서비스 중지. 중요한 패치가 있다. 전 서버 통합. 대륙의 결합이다. 이제 우리 대륙에도 외국인들이 몰려다니겠군. 외국의 플레이어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또 여러 가지 중요한 패치들이 있다고 하고… 천악은 신나겠군. 새로운 대륙의 강자들과 배틀을 할 수 있을 테니. 다른 대륙의 친구들은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군.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더 취하기 전에 일어나야겠군. 나가서 술 깨는 약이나 먹고 좀 돌아다녀야겠다. 난 가볼게. 뭐? 야! 크리스마스이븐데 그냥 가냐? 2차는? 파티는? 놀란 재훈이의 외침.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내일은 회사 내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만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은 좀 혼자 돌아다니려고. 좀 있으면 진성이와 다혜 씨 들도 온다지? 커플들 사이에 끼기는 싫다. 다른 녀석들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즐거웠다. 어? 어이! 나는 손을 흔들어 주고는 재훈이의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띵. 1층에 내려선 나는 아파트를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사이 그쳐버린 진눈깨비. 역시 변덕스런 날씨로군. 크리스마스이브를 같이 보낼 사람도 없다니… 한심하다, 현진. 초연 씨를 만나기는 힘들 것 같군. 에라 한심한 자식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도장이나 갈까… 후후. 이제는 강 사범님에게 완벽하게 당하지는 않겠지. 그동안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 스스로도 실력이 늘었다고 자부하니까… 좀 태권도의 틀에서 벗어난, 거의 길거리 싸움 비슷하게 되어서 문제지만. 음? 나는 뭔가 차가운 것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는 급히 고개를 들었다. 설마… 눈? 하하하…. 나는 천천히 떨어지는 하얀 눈들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진짜 눈… 인공 눈은 아냐. 원래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인공 눈을 내리는 것이 국제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바로… 이 감격을 위해선가? 우와아아아아! 눈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나는 주위에서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후훗. 확실히 감격스러운 날이로군. 이 날을 기다린 사림이 얼마나 많을까? 근 50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아예 눈도 내리기 힘든 세상이었는데… 하하. 점점… 이 세상도 회복되어 가는가? 88혁명이 괜한 짓은 아니었구나. 야! 인마! 김현진!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파트 창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내밀고 고래고래 악을 써대고 있는 재훈이. 하핫. 그래. 이런 날에 혼자 돌아다닐 수는 없지. 빨리 와라! 오늘 내가 한턱 쏠게! 우오옷! 여! 팔년지기! 그 말 진심인가? 진성이? 나는 저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진성이와 다혜 씨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기분이 좋은데? 하핫! 아버지! 어머니! 보고 있어요? 드디어 눈입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 이러다 금방 그치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게 될 수도 있겠군. 화이트 크리스마스! 꿈이 아니라고! 이제 몇 시간이다. 어이 눈씨들! 그치지 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입으로 외쳤다. 이 세상이… 조금 더 좋아졌어.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눈과,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경험했다. 으음… 도대체 내가 얼마를 쓴 거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100만원 이상은 나간 것 같군. 나는 씁쓸히 웃었다. 쳇. 설마 다른 동창 자식들까지 다 모일 줄이야. 뭐, 그래도… 이런 날이니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군. 나는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하얀 눈송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도시는 아주 광란의 분위기였다. 우루루 몰려다니는 사람들. 서울 시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온 건 처음일거야… 아주 도로가 가득 찼다. 지금 전 세계에서 눈이 오고 있는 나라는 그다지 많지 않다. 겨우 5개국… 다른 나라에서 부러워하고 있겠는데? 이날, 자연적으로 눈이 오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만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겠군. 환경이 그마나 많이 회복된 건가? 하아… 슬슬 가볼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좀 흔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쩝, 저 퍼포먼스, 여자들이 예쁜데다 의상도 멋져서 좀 더 보고 싶었는데… 가게? 음. 회사에 가봐야 하거든. 잘 즐겨라. 그래. 또 보자. 나는 재훈이와 세진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인파를 해치고 길을 걸었다. 사람 많군.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 메신져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빅 캐슬 이벤트. 헌터 20명 외, 플레이어들 고용. 흠… 플레이어들은 가보면 알 수 있겠지. 나는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눈들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길을 걸었다. 나쁘지 않은데? 정화층도 쓸만하군. 그게 없으면 이렇게 눈을 맞고 있지도 못했겠지. 으음… 어쩐다? 길을 걷던 나는 눈을 감고는 고민에 잠겼다. 상가 건너로 보이는 고층 빌딩, 리자드 본사. 그리고 어쨌든 상가를 가로 지를 수 있는 골목. 아니면 상가를 좀 돌아가도 되고… 시간이야 많으니… 거기다 골목은 왠지…. 도대체 이런 골목에서 몇 번의 싸움이 있었던 거야? 아, 겨우 두 번인가? 그래도 꺼려지는군. 칼까지 맞았었고. 그런데 그놈들은 왜 걸리지 않는 거야? 경찰 수사력이 그런 깡패들도 못 잡을 정도일 리가 없는데… 아무리 카메론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증거 인멸을 하려 한다고 해도 말야. 그냥 돌아서 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걷기 시작했다. 하아… 어쨌든… 이번 이벤트가 끝나고 대충 일주일 휴가지? 그때… 좀 알아봐야겠군. 변종 몬스터가 원래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라. 그 정도라면 몰라도 내게까지 비밀로 하는 이유는 설명이 되지 않아. 사실인지 좀 알아봐야지. 나는 약간 굳은 얼굴로 골목길을 지나치려 했다. 도, 도와주세요! 앙? 나는 내 팔을 잡아당기는 힘을 느끼며 약간 비틀거렸다. 뭐야? 고개를 돌리니 어떤 여자가 눈물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씨구? 옷은 왜 그러시나? 나는 약간 찢어진 여자의 옷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도, 도와주세요. 고, 골목에 강도가…. 뭐요? 이 세상에 웬 강도? 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기는 해도 확실히 그런 놈들이 있기는 했지. 하지만 그놈들은 고용 받고 하는 전문 깡패… 그러고 보니 깡패가 있다는 소리잖아. 제, 제 애인하고 잠깐 골목에 들어갔었는데… 지, 지금 안에서…. 뭔 짓을 하러 골목으로 들어갔었는지? 나는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 흠, 좀 이상하기 하지만… 가죠. 고, 고맙습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여자는 나를 급히 잡아끌기 시작했다. 흐음… 나는 여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리고 저쪽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타격음과 비명소리. 미, 민성 씨! 음? 저 년은 왜 돌아온 거냐? 뭐, 어때. 잘 됐지 뭐. 나는 세 사람에게 구타를 당한 듯 바닥에 엎드려 쿨럭거리고 있는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흠… 어절씨구리? 나는 피식 웃고는 내 팔을 붙잡고 있는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내 손에 목을 잡히는 여자. 커, 컥. 무,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은. 연극이 유치하군. 이래 뵈도 무술을 배우면서 맞으면 어떤 꼴이 나는 지도 대충 아는 몸이야. 이런 짓에 내가 걸릴 것 같아? 흠… 이런 식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돈이라는 뜯는 건가? 내 말에 여자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쯧쯧. 나는 여자를 뒤로 던져버리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흠… 여자까지 5명이라. 훗, 튀자. 나는 그대로 뒤로 달려가려 했다. 큭, 역시… 이봐. 오랜만이군. 음? 맞은 척 연기를 하고 있던 녀석의 목소리.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같군. 나는 몸을 굳히고는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누구지? 20대 중반. 흠… 그저 평범하군. 몸이 보통이 아닌 게 단련이 잘 된 것 같고. 그리고 약간 날카로운, 악(惡)해 보이는 눈. 음? 순간 떠오르는 한 인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큭큭. 알아보나? 현실에선 처음이지? 게임 속과 모습이 비슷하군, 다크소드. 레딕…. 나는 당황한 얼굴로 킬킬거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으음… 비슷하다고? 확실히 음산모드는 아니니…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 그때 뒤에서 몇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욱?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두 녀석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걸렸군, 빌어먹을!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레딕을 노려보았다. 저 녀석 레딕이 확실한가? 큭, 네놈 덕에 캐릭터도 삭제되고 꼴좋았었다. 확실하군. 나는 이를 악물고는 주위를 살폈다. 튈 길이 없군. 뒤의 두 놈을 뚫고 튈까? 그런데… 지금 게임에서 당했다고 복수하는 건가? 레딕. 빨리 끝내지. 이번일이 마지막이야. 일? 마지막? 그나저나 저놈은 현실에서도 레딕으로 불리나?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의 말에 레딕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으음… 저놈 게임에서처럼 나쁜 놈 같은 느낌은 아니군. 쳇, 레딕이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후… 확실히 이번 일이 마지막이긴 하니까… 훗, 다크소드 씨. 미안하지만 여기서 좀… 쉬어야겠어. 레딕의 말과 함께 다른 녀석들이 손을 우드득거리기 시작했다. 하… 그래도 나이프를 꺼내지 않는 게 다행이군. 번번이 우리 동생들을 괴롭혔다고 하던데…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아 다크소드 씨. 그쪽은 며칠간 일을 하면 안 되거든. 레딕. 레딕을 제지하는 중년의 사내. 뭐야? 동생들을 괴롭혀? 아, 전에 아버님과 그 부장을 습격했던 까만 놈들… 그럼 레딕,, 저 녀석들이 그 깡패 조직이라도 되나? 그보다는… 며칠간 일을 하면 안 된다니? 쳇, 그보다는 튀는 게 먼저겠지.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갔다. 웃? 치익! 써걱. 빌어먹을! 이거 비싼 옷이란 말이다! 이 자식들은 번번이 칼을 빼들고 지랄이얏! 나는 내게 나이프를 겨누고 나를 막아서는 두 까만 친구를 보며 고함을 질렀다. 약간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둘. 쳇. 그냥 협조해도 상관은 없다고 다크소드 씨. 그쪽은 그냥 며칠만 우리와 있으면 돼.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죽는 수가 있다고. 고용주 나으리들은 그쪽을 죽여도 별 상관은 없다고 하더군. 훗, 살인이라. 그랬다간 순식간에 잡힐 거다. 이 시대 경찰들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내 싸늘한 말에 어깨를 으쓱하는 레딕. 아, 그거 우리에게는 통용되지 않아.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경찰들이 우릴 찾을 걱정은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나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으며 주위를 살폈다. 앞에 다섯. 한명은 여자고… 뒤에 나이프 둘이라. 그래도 둘이 좋으려나? 하지만… 나는 깨끗하게 잘려나간 옷깃을 바라보았다. 장난이 아닌 솜씨. 저번 친구들과는 좀 다른 친구들인데?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이번 이벤트라도 방해하려는 건가? 글쎄? 우리는 그런 건 몰라. 뭐, 우리가 하는 일이야 이런 일이 뿐이거든. 아, 한 형님은 해커…. 레딕! 중년사내의 외침에 입을 다무는 레딕. 입이 좀 싸군. 그런데… 해커? 그럼… 그때 그 개자식이 네놈들… 잠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젠장! 설마 너희들! 정말 암흑가에…. 그때 알아낸 주소가 진짜였단 말야!? 순간 녀석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서로를 돌아보는 레딕과 중년사내. 젠장! 그럼 저놈들 형님인지 뭔지가 그 망할 해커? 민 형님. 건 있습니까? 없어. 어쨌든 살려 보내서는 안 되겠군.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레딕. 쳇, 저 자식, 꽤 마음에 들었는데. 그런데… 그럼 센 형님이 말하던 해커가 저 자식? 글쎄. 나중에 알아보고. 죽여. 레딕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런… 역시 침묵은 금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어쨌든 싸워야한다는 말이군. 레딕이 손이 품속에서 빠져나오며 약한 반사광을 내는 나이프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길… 웃? 쳇! 핫! 나는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나이프를 몸을 틀어 흘려보내며 그대로 돌려차기를 넣었다. 얼굴을 가격당하고는 바닥을 구르는 둘 중 하나. 쳇, 또? 나는 또 다른 녀석이 나이프를 찔러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앞으로 몸을 날렸다. 헥… 이거 기척에 이상한 예기도 느껴지네? 평소에 주위에 신경을 쓰고 다닌 것이 정말 효과가 좋군. 목숨도 살려주고. 켁? 한바퀴 구르고 고개를 든 나는 하늘에서 내려 찍히는 발을 보고는 급히 몸을 틀었다.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레딕의 내리찍기.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폈다. 하… 동작이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 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 그 자식들이 당했을만하군. 레딕의 중얼거림. 나는 녀석들이 약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특히 중년의 사내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좀 싸움 잘하는 인간이면 방금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건 쉽잖아? 강 사범님만 해도… 큭! 나는 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내 허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나이프 하나. 쳇. 저 여자… 그냥 미끼는 아니었네? 내가 미쳤다고 따라 들어왔지… 혹시 진짜일까 몰라서 왔던 건데… 그때 나이프를 뽑아들지 않은 고마운(?) 두 녀석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 중년의 사내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왜 저러지?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나는 급히 고개를 숙여 상대의 주먹을 머리 위로 보내고는 그대로 뛰어오르며 올려 찼다. 턱을 얻어맞고는 뒤로 나가떨어지는 한 까만 친구. 좋아. 이대로… 크윽! 순간 복부에 충격을 받은 나는 공중에 뜬 상태로 뒤로 날아갔다. 끄으윽… 그리고 어느새 다가와 나이프를 휘두르는 레딕. 이 자식… 죽어 인마! 나는 쓰러진 자세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위로 돌려차기를 넣었다. 나이프가 바닥에 박히는 동시에 내 발차기에 얼굴을 얻어맞는 레딕. 크… 몸 쓰라려… 순간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내 오른팔에 박혀드는 나이프. 크윽…. 후… 죽어! 그리고 동작이 굳어진 순간, 레딕의 칼이 내 복부를 파고들었다. 제, 젠장… 이, 이 자식들… 정말로 죽이려고… 나는 헐떡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레딕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젠장… 크으… 비, 빌어먹을…. 나는 침침해지는 눈을 부릅뜨며 벽에 등을 기댔다. 크으… 선택 하나 잘못했다가… 이게… 무슨… 나는 피에 절어… 붉게 물들어 있는 눈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레딕을 노려보았다. 젠장… 네놈… 괴물이냐? 괴물? 나는 인상을 쓰며 레딕을 노려보았다. 크으… 죽기 싫어 발악하는… 크윽… 나는 복부를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크으… 다, 다리에서 힘이… 나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레딕 패거리를 바라보았다. 쓰러진지 오래된 세 녀석과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둘. 그리고 역시 꽤 상처를 입고 헐떡이고 있는 레딕. 그리고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남자. 큭… 아버지… 어머니… 이 시대에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군요… 빌어먹을…. 게임을 너무 해서 그런가? 죽는 다는데 별 감흥이 없는 것 같아. 아… 그보다는… 이 세상에 별 미련이 없어서 그런가? 미련이라…. 초연 씨는… 쳇.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 건 뭐였냐 현진. 나는 피식 웃고는 벽에서 등을 땠다. 흐으…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데? 그런데… 사람이 배를 찔리고도 이렇게 오래 살아있을 수 있기는 한 모양이지? 게임에서는 그랬지만… 급소를 피했나? 쳇…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혹시 어디 연락이라도 했으면 곤란하거든. 살인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큭… 나는 급히 몸을 날려 바닥을 굴렀다. 벽에 나이프를 박고는 나를 노려보는 레딕. 이… 질긴 자식…. 이, 인마… 내가 화를 내야지… 네가 내면… 그때 살아남은 떨거지 중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손에서 빛나고 있는 나이프… 끝인가? 하앗! 퍼억! 음? 나는 내 눈앞을 가리는 검은 실같은 것들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얼쑤? 목검을 들고 있는 당신은 누구? 나는 순식간에 목검을 휘둘러 까만 친구를 뒤로 물러나게 만든 사람을 바라보았다. 간단한 복장에 긴 검은 머리… 나하고 왠지 비슷한 분위긴데? 레지… 정수? 진! 괜찮아요? 진? 킥. 나는 몸을 들썩거리며 웃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진이… 뭐냐…. 그, 그보다는 이 사람들은 뭡니까? 진이 이리로 들어가기에 따라왔다가… 이거 구해오느라 조금 늦었어요. 아아… 여자를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쫓아 왔나 보군… 제길! 저 자식은 또 뭐야? 쳇, 민 형님, 저놈도 죽일까요? 그리 강한 녀석으로 보이지는…. 가자. 애들 챙겨라. 예? 어느새 더욱 딱딱해진, 거의 유령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 되어 있는 중년의 남자의 말. 뭐지… 나는 몽롱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뭔가 급히 달려가는 그림자들… 어지러워… 그런데… 그 남자는 왜 그런 눈으로 날… 진? 현진! 괜찮아요!? 이게… 괜찮아 보이냐… 바닥으로 떨어지는 핏방울… 얇게 쌓인 눈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후후…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최악이군. 어째면 오늘 아버지, 어머니를… 현진! 나는 붉은 눈밭에 얼굴을 묻었다. 물컹… 나는 온몸에 전해지는 물컹한 느낌. 캡슐 치료기인가? 아…. 나는 신음을 흘렸다. 모, 몸이… 온몸이 쑤신다. 쑤, 쑤시기만 하면 좋겠는데… 왜 끔찍하게 아픈데다… 미치겠네. 끔벅…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형상. 검은 긴 머리… 정수인가? 그리고 옆에… 갈색머리 여자라… 순간 내 몸이 꿈틀했다. 초연 씨? 뽀그르… 순간 액체들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으니… 치료를 끝내는 건가? 몸이 액체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나는 몸에서 힘을 잃고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크으… 하. 그래도 바지는 그대로 입고 있어서 다행이군. 캡슐이 열리며 레지엘, 정수가 나를 부축해주었다. 진, 괜찮아요? 쿨럭… 크으… 지, 진이 뭐냐…. 나는 쿨럭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큭… 대충 설 수는 있군. 혀, 현진 씨. 괜찮아요? 걱정과 불안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초연 씨. 나는 잠시 그녀를 물끄럼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는 초연 씨. 후… 여기가…. 리자드 본사에 딸린 치료실이에요. 근처에 치료시설이 가장 가까운 곳이 여기라… 괜찮아요? 응. 고맙다. 네 덕분에 살았어. 나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겨 정수와 초연 씨가 앉아 있던 테이블의 의자 하나에 앉았다. 으으… 어지… 러워. 그때 정수가 약병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먹으래요. 의사말로는 그게…. 아, 됐어.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자고. 나는 그대로 그 드링크를 들이켰다. 그리 나쁘지는 않군… 통증이 좀 사라지는 게 진통제 종류? 아니면 치료제 종류… 나는 주위를 살폈다. 리자드에서 캡슐을 사용할 일은 별로 없기에 사람은 정수와 초연 씨가 다였다. 괜찮아요? 그 자식들은 뭐였어요?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로 목숨이 위험했을…. 아… 게임에서 만난적이 있는 친군데… 레딕… 아. 나는 레딕이라는 말에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초연 씨를 바라보았다. 높은 사람 아무나 불러와요. 으음… 신 과장님이나… 아버님도 괜찮고 방 전무님도…. 굳이 부르러 갈 필요는 없겠군.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방 전무와 아버님. 그리고 신 과장도 있었다. 내가 말한 사람들은 다 몰려왔군.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8시… 2시간 전에 이벤트 시작했겠군. 몸은 괜찮나? 예. 그보다는… 저를 습격한 놈들, 저번에 강 부장님과 유 부장님을 습격한 놈들과 한 패거리입니다. 내 말에 순간 사람들의 얼굴을 꿈틀거렸다. 말을 하다보니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한 놈은 제가 게임 속에서 처리한 PK범이더군요. 그리고… 이번 이벤트 때문에 저를 막았다는 식으로 말을… 큭…. 나는 복부에서 통증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괜찮나? 예… 그보다는… 저 섀도우 월드에 접속해야겠습니다.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가봐야겠습니다. 뭐? 현진 씨! 내 말에 경악하는 사람들. 특히 초연 씨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그런데 이 꼴로 접속이 가능할까? 혹시 접속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서… 좀 프로그램 조정을…. 세 상급자는 서로를 돌아보더니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타이밍 잘 맞네… 자네야 헌터 리더니… 하겠다면 말리지야 못하지. 지금 3기 헌터들까지 모두 해서 빅 캐슬 주위를 지키고 있기는 하네. 그리고 제르난 길드던가? 자네와 친분이 있는 길드고 도움도 받았고 해서… 그쪽에 의뢰를 해서 거기서도 돕고 있고. 그리고 여기 김정수 군도 돕는다고 하더군. 레지엘이라고 했나? 어쨌든 꼭 자네가 나서지 않아도… 그리고 이 이벤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확실하지도 않지 않나? 솔직히 일을 벌이기도 힘든 상황이야. 이런 축제에서 어떻게 수작을 걸겠나. 헌터들 출동도 만일을 대비한 거고. 어쩌면 이번 습격도 자네가 좀 거슬려서 처리하려 한 걸 수도 있고…. 맞는 말이긴 하군. 그런데 레도르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레지엘도 돕는다라… 나는 정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는 중에 나를 만난 건가? 신의 도우심이었군. 하지만… 좀 불안합니다. 어차피 이런 상처를 입기는 했어도 게임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치료를 하면서 할 수는 없겠습니까? 아무래도 불안해. 레딕 그 자식의 말이 거짓으로 보기에는… 내가 헌터가 된 이유가 섀도우 월드 속을 좀 지키자는 거였는데… 물러설순 없지… 그때 초연 씨가 약간 눈물고인 눈을 크게 뜨고는 소리쳤다. 안돼요! 그 몸으로 뭘 어쩐다고요! 현진 씨가 헌터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잖아요! 으음? 나는 눈을 약간 치켜뜨고는 초연 씨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초연 씨. 치… 지금 이 꼴이 된 것도… 저는 차라리 현진 씨가 헌터를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말할 생각까지…. 이건 제 일입니다. 중간에 말을 끊는 내 목소리에 초연 씨가 입을 다물었다. 초연 씨가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 초연 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을 텐데요? 저는 내 직업에도 충실하고… 섀도우 월드를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그리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불안하거든요. 그, 그런…. 딱딱한 존대를 하는 내 말투에 초연 씨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아버님과 신 과장. 그리고 방 전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신 과장을 바라보았다. 신 과장. 캡슐을 약간 수정해서 연결하게. 치료와 병행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신 과장은 급히 방을 나갔고 방 전무는 나를 바라보았다. 부탁하지. 그래도 몸조심하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아버님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초연 씨. 정수는 약간 눈치를 보다가 방을 나섰다. 접속하러 가나? 지금 이벤트를 시작한지 섀도우 월드의 시간으로는 4시간이지. 지금 헌터들의 위치는 정수 군이 가지고 있을 거네. 접속해서 둘이 만나 말을 나누고. 따라오게. 방 전무는 나를 부축해 주었고 아버님이 거들었다. 이런… 어떻게 혼잘 걸을 수도 있겠는데… 나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초연 씨를 잠시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다. 내가… 잘 한건가? 지금… 뭘 한거야? 그다지… 다른 점은 없군. 나는 모든 장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내 모습을 둘러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현실에서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도… 여기에 와서는 통용되지 않는 건가? 나는 마나르트와 여러 장비들을 확인하고는 주위를 살폈다. 내 조금 옆에 서 있는 레지엘. 레지엘? 왜 저래? 레지엘은 약간 멍한, 놀란 눈으로 자신의 몸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템 창이나 그런 것을 확인하고 있는 건가? 왜 그래? 내 질문에 화들짝 놀라서는 나를 돌아보는 레지엘. "뭐, 문제라도 생겼어? 아, 아뇨. 착각인 모양이에요. 아, 여기 이게 헌터들 위치도인데… 세한은 그냥 축제를 즐기면서 주위를 살피라고 하네요. 다른 헌터들도 그런 식이니까요. 다만 그들은 장소가 좀 지정되어 있을 뿐이지… 세한은 뒤늦게 왔고 하니까 편하게 돌아다니며 탐색하라고 하네요. 나는 레지엘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들였다. 흠… 이게 이번 이벤트에 이용되는 땅인가? 나는 최대의 도시인 빅 캐슬 전체를 포함헤 바로 옆의 평원까지 포함하고 있는 축제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넓기는 넓군. 그런데… 여기서 어떤 일을 벌일 수 있을까? 내가 서류를 바라보고 레지엘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사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뭐지? NPC? 웬 NPC가 우리에게 다가오자 나와 레지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레지엘의 차림을 물끄럼이 바라보던 NPC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혹시 레지엘님이십니까? 레지엘? 나는 레지엘을 향해 말하는 NPC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는 사인가? 예, 그렇습니다만? 아, 여기. 이 편지를 전해드리라고 어떤 숙녀분이… 꼭 혼자서만 보시랍니다. 켁? 레지엘, 러브레터라도 되냐? 내 농담에도 레지엘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바라보았다. NPC는 실실 웃다가 인파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편지를 뜯고 있는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진짜 러브레터라도 되나? 웬 숙녀분? 편지를 읽어내리는 레지엘. 순간 레지엘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음? 왜 그래? 아, 아뇨…. 나는 심각을 넘어서 거의 경직의 수준까지 가고 있는 레지엘이 얼굴.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레지엘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차였나? 편지를 다 읽은 레지엘은 그 편지를 품속에 넣었다. 뭐야? 아뇨… 가죠? 밝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기는 레지엘.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레지엘의 뒤를 따랐다. 흐음? 쾅! 낡은 문이 거칠게 열리며 두 사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중년의 사내와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약간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였다. 민 형님! 뭡니까!? 왜 그냥 보내신 겁니까? 거기다 왜 끼어들지도 않으시고…. 뭐야? 20대 중반의 사내, 레딕의 불만에 찬 목소리에 방 안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안경의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급히 고개를 숙이는 레딕. 그 모습에 안경은 고개를 갸웃 하고는 책을 내려놓았다. 민 형님. 뭡니까? 안경의 질문에 중년의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따라 소파에 앉아 씩씩거리는 레딕. 그 모습에 안경은 더욱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요? 제길. 좀 들어보십쇼 형님. 글쎄 민 형님이 이번 마지막 일을 하면서 끼어들기는커녕 딱딱하게 굳어서 타켓을 관찰하기만 하시는 겁니다. 거기다숨통을 끊을 절호의 기회에는 그냥 보내주라고도 하셨다고요. 레딕의 말에 안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센. 컴퓨터 좀 써야겠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안경. 왜 그래요? 잠깐, 그전에… 이제 우리가 카메론과 계약한 것들은 모두 들어준 거지? 중년사내의 말에 레딕은 고개를 끄덕였고 안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이번일이 끝이었고… 나도 방금 한 캐릭터의 능력치를 조정하고는 끝냈소. 왜요? 중년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희… 그분은 기억하고 있겠지? 순간 둘이 표정이 바뀌었다. 뭔가,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 그런 둘을 바라보던 중년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가? 어쨌든 좀 찾아봐야할 정보가 있다. 안경은 군말 없이 컴퓨터를 켰다. 김현진. 우리 타켓의 이름이다. 그에 대해서 좀 찾아봐줘. 안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센서를 쓰고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역시 모니터를 바라보는 레딕. 중년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노렸던 녀석… 마치… 상대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 같았다. 뒤에서 날아오는 나이프를 피하더군. 순간 안경과 레딕의 몸이 움찔했다. 느꼈…다? 그, 그렇기는 했죠…. 약간 어색한 둘의 반응. 그 모습에 미소를 짓던 중년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돌려차기를 할 때… 무릎을 약간 굽혔다 피면서 격타 순간 파괴력을 높인다. 공격을 받을때 피하는 동시에 공격을 의도한 방향으로 흘려 동시에 반격한다. 그리고 체계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인 격투법.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 미리 공격을 피하기도 했다. 그리고 뒤에서 날아오는 나이프를 느끼는 듯 했다. 그리고 엄청난 인내력과… 그 무엇보다… 머리가 좀 길고… 젊기는 하지만… 닮았다. 중년사내의 말이 이어질수록 안경과 레딕의 얼굴은 점차 굳어갔고 마지막, 닮았다는 말에서는 둘 모두 몸을 경직 시켰다. 순간 모니터에 한 프로필이 떠올랐다. 찾았…습니다. 뭘 확인해야 할지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안경. 그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같이 모니터에 집중하는 레딕. 김현진. 약 8년전 부모가 사망. 부모의 이름… 아버… 어머니는 김소희….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순서를 바꾸는 안경. 하지만 레딕도, 중년의 사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머니의 이름에서도 둘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김… 세한… 비, 빌어먹을…. 그, 그럼… 그 자식이…. 안경과 레딕은 중년의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주는 중년의 사내. 확실하군. 그, 느끼는 능력은… 그의 그분의 특기였지. 마, 맙소사… 그, 그럼 우리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레딕을 보며 중년의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경은 어느새 다시 컴퓨터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카메론과의 계약은 끝났어. 내, 내가… 사, 살아있겠죠? 미, 민 형님! 제, 제가…. 그만! 하얗게 질린 레딕의 얼굴에 중년의 사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고함소리에 몸을 움찔하고는 한숨을 내쉬는 레딕. 살아있겠지. 리자드에는 치료실도 있으니까. 어쨌든… 아까 그 일로 카메론사와의 계약도 끝났다. 안경과 레딕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진… 리자드의 헌터, 범지 처리팀 팀장이라… 후…. 미, 민 형님…. 그런데… 마지막, 도우러 왔던 그 검은머리… 그 친구는… 후, 모르겠군. 혀, 형님? 안경은 여전히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레딕은 아직도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 있는 중년의 사내. 김세한… 김현진… 그럼… 어쨌든… 우리는 상황을 봐야겠군. 섯불리 나섰다간 죽도 밥도 아니게 된다. 예, 예…. 으음…. 그때 마침 생각난 듯 중년사내가 안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 센. 그리고 네가 말했던 해커, 김현진과 연관이 있다. 으으음… 역시… 핏줄이라 이건가…. 세 사람은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 많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빅 캐슬, 외곽 성벽의 위에 앉아 축제지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지엘은 다른 곳을 돌아다니고 있고. 빅 캐슬, 성벽 안은 물론, 성벽 밖 평원 전체가 축제지였다. 대충 서울과 비슷한 규모의 축제지로군. 하긴 2000천만에 NPC들까지 모두 모여 있으니 이럴 만도 하지. 사상 최대의 패치를 위해 현재 대륙 모든 사냥터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고 여러 도시들도 출입 금지가 되어 있어서 이곳으로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았다. 거기다 NPC들까지 하면… 장난이 아니군. 내가 너무 과민했나? 나는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죽놀이와 퍼레이드, 여러 공연, 그리고 수많은, 예쁜 간이 천막과 조립식 건물들, 그리고 축제를 즐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확실히 여기서는 일을 벌이기도 힘들겠군. 이 많은 사람들을 봤을 때 일을 벌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현재 리자드에서도 모든 인력을 돌려 축제를 관리하고 있으니… 레딕의 말이 그렇기는 했지만… 어쩌면 그저 구실이었을 지도 모르겠군. 즐거운 모양이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쪽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레도르와 이시린. 이시린은 여전히 딱딱한 분위기였지만 레도르는 꽤 즐거워 보였다. 이시린도 분위기에 휩싸여서 꽤 부드러워 보이고… 시드 형이 좀 신경을 쓴 모양이군. 흠… 대부분이 둘씩 짝을 지어서 다닌다고 하더니… 할딘은 씨아와 함께 다니고 있겠지? 미토스는… 모르겠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럼 나는 이 꼴이 뭐냐? 쳇. 안 그래도 초연 씨와 좀 어색했었는데… 접속하기 전에 그런 말까지 했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깨진 건가? 솔직히 지금 상황으로… 내가 전처럼 초연 씨를 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대륙 전체에서 모였으니…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흠… 혹시 프렌이 빵 장사라도 하고 있을지도… 한번 찾으러 갈까? 나는 다리를 흔들거리며 아래를 유심히 살폈다. 여기 꽤 시원하군. 아니, 추운건가? 나는 저쪽에서 마법사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불꽃의 드래곤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은 전망이네요. 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 앉는 여자. 연녹색… 약간 반짝이는 머리라… 나프네? 느낌이 익숙하다고는 했지만… 웬일입니까? 나는 턱을 바치고 있던 손을 풀며 팔짱을 꼈다. 시선을 여전히 아래를 살피며. 혹시 기습을 대비해 언제든지 단검을 뽑을 수 있도록 취한 자세.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너무 딱딱하네요. 흠… 저희 길드 전체가 몰려와서… 페넬리에게서 몸을 빼기가 힘들었어요. 눈을 피할 장소를 찾다가 성벽 위를 살피니 당신이 앉아 있더군요. 그래서 한번 와봤죠. 전망 좋네요. 호위를 피하려고 로브까지 써서 구경하기가 힘들었는데…. 나는 시선을 돌려 나프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수수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지금은 후드를 뒤로 넘겨서 연녹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지만. 하긴 저 얼굴로 돌아다니다간… 시선 끌기 십상이지. 나는 피식 웃었다. 웃기도 하긴 하네요?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별로 없었는데… 머리를 뒤로 넘기니 미남이네요. 흠… 그런데 애인은? 미토스로부터 들으니 페페라는 운영자와 애인 사이라고 하던데? 미토스… 정말 입싼 인간이야. 나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확실하지는 않지만 깨진 것 같은데… 요새 분위기가 좋지 않다가 아까 좀… 혼자 구경하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고. 내 말에 뚱한 얼굴을 하는 나프네. 흠… 그럼 지금은 혼자라는 말인가요? 아마도. 흐음…. 어째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그때 나프네가 내게 손을 뻗었다. 으음? 캬앙! 나보다 먼저 반응하는 린. 내 망토자락에 몸을 파뭇고 있던 린이 몸을 일으키며 울음을 흘리자 나프네가 손을 멈췄다. 나프네가 놀란 눈으로 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언제부터…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나프네는 내 허벅지만한 크기의 고양이를 보지 못한 것이 꽤 놀라웠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눈을 살짝 찌푸리고는 성벽 위로 뛰어내렸다. 기지개를 피듯 몸을 쭉 늘였다가 고개를 몇 번 까딱하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은 나와 거의 동화되어 있어서… 나와 함께 있으면 남에게는 하나로 보이게… 음? 나는 나프네가 멈춰 있던 손을 다시 뻗자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내 팔짱을 끼며 나를 일으키는 나프네. 뭐야? 오늘 함께 다닐 사람 없으면 나하고 데이트나 하죠. 일어나요. 나와 린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프네를 바라보았다.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프네. 확실히 페페보다 예쁘기는 하군. 나는 별…. 설마 숙녀 혼자 돌아다니게 하려는 건 아니겠죠?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라고요. 50위 안에 드는 랭커를 건드릴 사람이 있으려나? 거기다 당신이 내게 받은 도움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요? 물론 저번 일로는 우리 길드의 위세가 올라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상당한 모험을 한 거였죠. 거기다 이래 뵈도 최고의 미인으로 불리는 레이디가 이렇게 말하면 좀 따라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사악하군. 그래도 하나의 길드를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피식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약간 얼굴을 찌푸리다가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린. 나는 날 잡아끄는 나프네를 따라 성벽 위를 걸었다. 후드는 안 쓰나? 알아보는 사람이 꽤 될 텐데? 뭐, 나는 우리가 애인으로 굳어도 상관은 없어요. 어차피 당신도 애인과 헤어졌다고 하고… 나야 당신의 위명을 얻을 수 있으니 좋죠. 요새 안 그래도 당신과 내가 애인 사이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확실히 굳히게 되는 거고. 레이디스 길드에 득이 되는 일이니 상관없어요. 내가 상관이 있단 말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걷고 있는 나프네. 제길. 이미 승낙한 것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고… 그런데…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서 정식으로 소개를 받은 적이 없군요. 하… 세한, 한이라고들 부르지. 어쩌다 보니 다크소드라는 이름도 얻었고. 좋아요, 한이라고 부르죠. 그럼 이번에는 말투를 좀 바꿔 봐요. 처음에는 이렇지 않더니. 으윽… 이거 오늘 꽤 피곤한 하루가 될 지도 모르겠군. 장사가 꽤 잘 되네요. 흠… 고맙군. 그런데… 설마 애인인가? 무슨 말씀을…. 잠깐, 한. 왜 프렌에게는 그런 말투면서 나한테는 딱딱하게 구는 거예요? 나는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프렌은 주위에서 열심히 반죽을 하고 있는 제빵사 한명에게 뭐라고 말해주고는 나와 나프네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흠… 둘 덕분에 손님이 부쩍 늘었는데? 보답으로 그건 공짜로 해주지. 그래, 설마 그 소문이 진짜였나? 나프네하고 네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 있던데? 아무래도 프렌과 나프네도 아는 사이인 모양이로군. 나는 도도리 제빵 연합 이라는 플랜카드가 펄럭이는 거대한 빵색 천막을 잠시 바라보다가 프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길. 나는 프렌 뒤로 보이는 많은 인파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와 나프네를 알아보고 따라온 사람들. 나프네는 계속 얼굴을 드러내 놓고 다녔고… 나야 반 음산모드. 그리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검은 고양이. 시선을 끌지 않을레야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저 인간들이 속삭이는 말을 종합해 보자면 나프네와 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니… 젠장, 누가 사귄…. 그렇게 보여요, 프렌? 약간. 대충 어울리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길… 그때 엠페러 길드 사건의 영향이 지대적이었군. 이러다… 페페하고 완전 깨지는 건 아닌… 후… 역시 그게 걱정이냐 현진? 음? 왜 그래요? 저 사람… 나는 방금 지나간 사람을 찾다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나프네와 파먹고 있던 빵에서 고개를 들고는 나를 바라보는 린. 아, 자, 잠시… 린, 나프네하고 같이 있어.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를 급히 부르는 나프네의 목소리. 나는 무시하며 인파를 해치고 나갔다.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쉽게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어, 어디지? 분명히…. 나는 급히 주위를 살폈다. 내가 잘못 봤나? 그럴리가. 내 식스센스가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 그때는 식스센스가 없기는 했지만 대략적인 분위기는 알고 있는데? 음? 순간 사람들 사이로 살짝 내비치는 갈색 곱슬머리. 시력이 좋아진 것이 이렇게 기쁜 적은 처음이군. 나는 급히 인파를 뚫고 나가기 시작했다. 제길. 사람한번 많군. 얼마 달리자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휴… 확실하군. 자, 잠시만! 내 외침에 잠시 멈칫하던 셋이 몸을 돌렸다. 모두 중년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었다. 어, 엄청난 위압감… 처, 천악이나 딜럿… 고타보다 더… 양 옆의 둘은 모르는 사람. 그리고 중앙에 서 있는 중년인. 그는 팔목에는 칭칭 감긴 은사를, 등에는 함정제작용 도구 몇 개가 매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 저, 저기 혹시….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는 양 옆의 사람들. 왼쪽의 사람은… 치료술사인가? 오른쪽의 사람은 마법사 같군. 하지만 중간에 서 있는 트랩퍼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윽… 이, 이 사람도 위압감이… 전에는 왜 몰랐던 거지? 자, 잠시… 실례. 순간 내 오른손에서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갔다. 검은 뱀 같은 형상. 검은 마나를 머금은 은사. 내 와이어는 그 트랩퍼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순간 손을 들어올리는 오른쪽의 마법사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치료술사. 뭐, 뭔가? 그런데… 트랩퍼? 어, 엄청난 은사술…. 네놈! 뭐냐! 광염…. 그때 중앙의 트랩퍼가 마법을 시전하려는 마법사를 제지했다. 눈을 끔벅이는 마법사. 허억… 어, 엄청난 마나의 응집… 그런데… 광염? 특이한 마법명이군. 그 은사… 혹시 자네…. 아, 역시…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때 트레인 숲에서 만나 뵙고 거의 일년, 이년 반 만이군요. 역시…. 나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고 트랩퍼는 내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반가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의문의 트랩퍼. 옛날, 마신의 신전에 들어가기 전, 트레인 숲에서 내게 함정의 기초를 알려주고 이 와이어를 선물했던 그 트랩퍼였다. ‘후, 모르겠습니다. 제가 NPC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죽음에 분노한 것도… 그들을 진짜 사람처럼 대하고 사랑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이… 이 세상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는 제가 멍청한 건지… 이런, 어쩌다 보니 이런 얘기만 늘어놓고 있었군요.’ ‘후후. 상관없네. 흠, 자네 헌터라는 일을 한다지?’ ‘예. 뭐, 그것도 이 세상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만.’ ‘흠, 그런가? NPC들… 그들은 사람과 거의 같네. 육체가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 사람의 뇌와 거의 똑같은 뇌를 배양해 그것으로 생각을 하게 해주니까. 이러니 섀도우 월드 초기에 지탄을 많이 받았던 거고.’ ‘사람의 뇌를… 배양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그러니 자네가 NPC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니네. 다만 내 생각에는… 후, 아니네. 다음에 얘기하지. 아니, 언젠가 스스로 알게 되겠지.’ … 하아. 지금까지 들었던 얘기들을 떠올려 보던 나는 눈을 떴다. 인자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트랩퍼. “내가 자네에게 그 은사를 준 건 자네가 이 세상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였지. 아, 이런. 내 친구들을 너무 기다리게 한 듯 하군. 이제 가세나. 아, 나는 음료수나 좀 사갈 테니 미리 가 있게.” 음료수 가게로 걸어가는 트랩퍼. 30여분 동안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두 사람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사람의 뇌? 배양이라. 훗. 완전 사람이란 소리잖아? 이거… 솔직히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군. 후훗. 약간 비윤리적이라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리자드의 공표가 있으니까. 하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니… 그 해커 같은… NPC를 하찮게 여기던 놈들에게 더욱 화가 난다. “모르겠군. 좀 심각한 얘기를 들어버렸는걸?”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저기에 있군. 나는 나무에 기대서서 서로 얘기를 주고 받고 있는 그 중년의 마법사와 치료술사를 발견하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아, 얘기 끝났나? 그런데 라젠은?” 나를 바라보며 물어오는 마법사. 라젠? 아, 그 트랩퍼의 이름인가?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음료수를 사오신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그분의 이름이 라젠이셨습니까?” 내 질문에 마법사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설마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우리에게 소개도 하시 전에 둘이 얘기하러 가 버리기에 꽤 친한 사인줄 알았는데? 흠… 나는 이반이라고 하네. 보다시피 마법사지.” “아, 나는 나르손일세. 치료술사야.” 두 중년인이 소개를 하자 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런… 내가 먼저 소개를 했어야 하는 건데… “아, 저는 세한, 보통 한이라고 불립니다. 사람들은 다크소드라고들 부르죠. 처음 뵙겠습니다.” 내 소개에 둘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다크소드라는 이름 때문인가? “아, 그럼 자네가 마검의 주인이로군. 호… 왠지 마기가 느껴진다 했지.” “흐음, 손잡이 디자인이 멋지군. 날은 얼마나 드나?” 나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하, 하긴 이 정도 기운을 풍기는 사람들이라면 나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수겠지. 그, 그래도 지금까지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니 좀 어색한데? “흠… 그나저나 마검도 마검이지만… 자네도 상당하군. 그 마검의 능력은 자세히 모르지만 그검을 사용하고, 조금만 성장하면 제퍼슨과 자웅을 겨룰 수도 있겠어. 물론 지금이야 제퍼슨과 싸웠다간 10분 안에 깨지겠지만.” 제퍼슨? 나는 순간 얼굴을 굳혔다. 랭킹 1위. 그 사람을 저리 쉽게 말하다니? 그나저나… 제퍼슨과 싸웠다간 10분안에 깨진다고? 이거 씁쓸한데… 확실히 지금 실력으로는 마나르트를 다룬다고 해도 천악을 이기기 힘들지. “그런데… 두 분의 기운을 보면… 랭커들은 실력은 훨씬 뛰어넘으신 듯한데 랭커에 들지 않으신 것을 보면 숨기고 계시는 겁니까?” “뭐?”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두 분. 음? 뭐야, 말을 잘못했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이반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왜 랭커에 들어?” “맞네. 우리야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랭킹이야 현실에서의 친구들에게 매기는 것이 아닌가.” “예?” 나는 눈을 깜박이며 두 분을 바라보았다. 약간 어색한 침묵. 여기서 살아간다고? NPC는 아닌데? “후훗. 우리는 말 그대로 여기서 살아간다네. 우리는 전신마비 환자거든. 덕분에 뇌를 여기로 옮겨 여기서 살아가지.” “아, 라젠님.” 뒤에서 들려온 라젠이라는 트랩퍼의 목소리에 나는 급히 몸을 돌렸다. 순간 내 얼굴 앞에 자리하는 음료수 병.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두 분의 옆으로 다가가 나를 바라보는 라젠. “그리 어렵게 부르지 말게나. 그냥 라젠이라고 부르게. 이 친구들도. 어쨌든 정식으로 소개하지. 이쪽은 세한. 전에 내가 괜찮은 젊은이라 했던 친구지.” “후후.”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말 안했었는데 우리는 모두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야. 덕분에 여기서 살아가지. 하핫. 덕분에 실력은 최강이네. 이 세상에 우리와 비슷한 친구들도 꽤 많고.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들도 많고. 거기다 우리는 각자 직업의 길드도 가지고 있지. 그 직업에서는 최강의 반열에 드는 길드라네. 언제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우리 이름은 알지?”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라. 하긴 저분들, 특히 라젠이나 이반이면 페이린 정도가 아니면 상대할 존재가 없겠어. 아, 마족들은 아직 잘 모르니 넘어가고. 그때 이반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 눈이 왔다지? 그것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아하. 예, 그렇습니다. 엄청난 시간 동안 기다린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죠. 진짜 눈이 내린 것으로는 4번째고요. 꽤 멋지더군요.” 내 말에 셋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훗. 라젠의 말이 맞긴 했군. 현실에 대해 너무 무감각 한데? 아, 이거 넘어가자고. 아,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좀 아쉽군. 언제 운영자에게 영상이라도 보내달라고 해야겠어.” “그것도 좋겠군.” 나는 약간 서글픈 눈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세분을 바라보았다. 역시 현실에 미련이 남으시긴 한 모양이구나. 흠, 이거 왠지 내가 별종이 되는 기분이군. 그나저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큭. 내게는 그보다는 레드 크리스마스나 블러디 크리스마스가 어울릴 것 같군. 나는 씁쓸히 웃었다. “응?” 순간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 “음?” “뭐지?” 순간 얘기를 나누시던 세분도 급히 고개를 돌리셨다. 크읏. 나, 나하고 맞먹는 저 감각이라니… 여, 역시 대단한 분들이군. 그때 이반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 대단하군. 어째 우리와 비슷한 속도로 반응을 하다니.” “예? 아, 하하.” 마, 맙소사. 이거 오늘 아주 짓밟히는구나. 아무래도 평소, 은연중에 자신감이 쌓였던 모양이야. 아, 그보다는 지금껏 이런 진짜 강자들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가? “흠, 대단하군. 그건 그렇고… 이 기운은 특이한데?” 확실히 특이한 기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건가? “으음…….” 나는 식스센스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점차 확실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기운들. 좀 멀리까지 와서 알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사람들이 오죽 많은가. “음? 설마?” 익숙한 마나와 익숙한 기운. “젠장! 린, 나프네!” “음? 왜 그러나?” 나프네의 마나와 린의 마기다. 나는 라젠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떤 놈들이 축제지에서 이런……. “쳇. 역시 내 예감이 맞은 건가?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군.” 확실히 좋은 기분은 아냐. 나는 인파를 힘겹게 제쳐가며 달렸다. “헤… 재밌다.” 칼은 작은 마법사 노인의 손에서 춤추는 요정들을 보며 좋아하는 니베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평화로운 하루였다. 약간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현실에서는 즐기지 못해본 일이었다. “뭐, 별로… 그 정도야 웬만한 마법사면 다 할 수 있는 거잖아.” 칼의 퉁명스러운 말에 니베는 칼에게 혀를 내밀었다. “메~. 이게 쉬운 건 줄 알아? 이렇게 마나 움직이기도 힘들다고. 오빠는 여기만 오면 너무 딱딱해 진다니까.” 칼은 피식 웃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칼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던 니베가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왜 그래? 누구 찾아?” “아, 레지엘하고 팀을 맺도록 되어 있었는데 좀 늦어서.” “그거… 헌터?” “응.” 칼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고 니베는 약간 불만스러워 하는 얼굴이었다. “그거 너무 위험하잖아. 왜 그런 일을 하고 그래.” 니베의 투덜거림에 칼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세한님을 돕는 일이야. 후후. 그리고 위험에 빠져도 그분이 구해주시겠지.” "헤… 맞다. 그런데 다크소드 오빠는 어딨어?“ 오빠… 칼은 피식 웃었다. 분명 세한은 자신들과 같은 나이였다. 뭐, 세한이 자신들보다 먼저 태어나기는 했지만. 몇 분 일찍 태어난 칼을 오빠라 부르는 니베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세한님 얘기가 나오면 얼굴이 변하는군. 어딘가 계시겠… 윽.” 칼은 니베에게 밟힌 발을 살짝 들어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자신을 외면하며 휘파람을 불고 있는 니베를 보고는 얼굴을 풀었다. 즐거워하고 있다. 자신이 조금 아프더라도 니베가 즐거우면 상관없다는 주의의 칼이었다. “칼.” 그때 들려온 목소리. 레지엘의 목소리에 칼은 몸을 돌렸다.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레지엘. 그의 모습에 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니베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음?” 칼은 레지엘이 니베를 보고 잠시 멈칫하자 어색해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처음 겪는 축제라 같이 있고 싶다고 해서….” “어머? 레지엘 씨.” 그때 들려오는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 레지엘은 저쪽에서 음료수 세 개를 들고 걸어오고 있는 제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상관없겠죠. 오랜만이네요, 제시.” “아, 전에 현진이네 집 앞에서 보고는 처음이죠?” 칼은 레지엘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지금은 공식적인 일을 하는 자리. 이렇게 여자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만한 사황이 아니었다. ‘내가 실수했나?’ 작게 중얼거리던 칼은 고개를 저었다. 칼이 알고 있는 레지엘은 이런 일로 뭐라 할 사람은 아니었다. “흠,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죠. 그럼??축제나 즐기자고요.”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레지엘을 보며 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흠, 저기 칼?” 별별 희한한 색의 토끼들을 태운 수레를 보며 까르륵거리는 제시와 니베를 바라보고 있던 칼은 레지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좀 할 말이 있어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레지엘의 모습에 칼은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지나다니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은 큰 소음을 내고 있었고 때문에 칼은 청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흠… 한 말이에요.” 세한의 얘기가 나오자 칼의 얼굴이 약간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런 칼의 기색을 눈치챈 레지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음, 요새 좀 싸늘해지지 않았어요?” “…….” 레지엘의 물음에 칼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확실히 요새 좀 싸늘해진 모습을 보이는 세한이었다. 특히 저번 악마의 숲에서의 일이 끝난 후, 더욱 심해졌다. “…그래도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철저한 존대. 레지엘은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현실이 아니라지만 동갑끼리 이런 완전한 주종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둘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확실히 요즘 좀 심해지시기는 했지만… 소문이 그럴 뿐이지 않습니까.” “아, 저도 그건 알아요. 그저 요새 좀 싸늘해졌다 그거죠.” “…세한의 주위에 사람이 모이는 것만 봐도 세한이 그렇게 차갑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약간 흥분한 듯 눈을 빛내는 칼을 보며 레지엘은 손을 내저었다. “하아… 제가 말하려는 건 이쪽이 아니라….” “…좀 흥분했군요.” “예… 그런데… 사람이 몰린다라….” 순간 레지엘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그리고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여는 레지엘. “그렇기도 하지만… 솔직히 세한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것 같아요. 미시안과 디렐의 일만 봐도….” 칼은 약간 고개를 돌려 레지엘을 외면했다. 그리고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지엘. “천악… 물론 우리도 그를 너무 쉽게 믿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천악과 처음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도 세한이죠. 그리고 미시안도. 사람을 너무 신뢰하는 게 둘의 공통점이죠. 서로 절친한 친구로 닮았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 때문에 디렐은 죽어가고 있고 미시안은 한 팔을 잃었죠.” “…….” 칼은 입술을 깨물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레지엘의 말은 사실이라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세한과 미시안, 둘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요즘 세한이 점점 차가워져 가는 것도 이런 일들을 겪어서일지 모르죠. 물론 옛날부터 꽤 차가웠지만. 어떻게 보면 세한과 어울리는 사람들 모두가 너무 순진한 것일 수도요.” 레지엘은 약간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서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은 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세한들처럼… 순수했다면 좋았을 수도. 하지만 여건이 그렇지 않군요. 어쨌든… 당신들은 좀 경계심이 적어요. 특히 자신들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무슨….” 순간 검광이 번쩍였다. 푸욱.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군요. 곱게 자라신 도련님.” “큭….” 칼은 자신의 복부를 뚫고나온, 레지엘의 성검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순간 뒤를 돌아본 제시와 니베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아악! 오빠!” 두 여자의 비명소리에 레지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레, 레지엘… 다, 당신….” “웬만하면 당신 동생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훗. 뭐, 어쩔 수 없죠. 편지가 와서 말입니다. 이제 가면을 벗으라는군요. 거부하려고 해도 언젠가는 제가 물려받을 자리랍니다. 슬픈 운명이죠.” 다리가 풀려 쓰러져가는 칼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중얼거리는 레지엘의 얼굴은 평소와 너무나도 달랐다. 조소와 비웃음이 담긴 얼굴. 여전히 좀 순한 느낌이 남아있는 얼굴이었지만, 오히려 위화감을 조성해 그의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제 가면을 벗어야겠습니다.” 레지엘은 칼의 복부에 박아 넣었던 성검을 뽑으며 뒤로 물러났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칼. 레지엘은 그런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당신을 죽일 수는 없군요. 쓸데가 있어서요.” 순간 레지엘의 손이 휘둘러지며 칼의 몸 곳곳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칼의 오른팔. “꺄악! 오, 오빠!” 니베와 제시가 급히 칼에게 달려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조소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레지엘. “역시…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우선 도망가고 봐야 하는 것이 텐데요? 후후후.” “저, 저거 뭐야!” “겨, 경비병! 치안대!” 순식간에 주위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레지엘은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저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병사들. 레지엘은 고개를 젓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레지엘이 자신들에게 걸어오자 니베가 칼의 앞을 막아섰다. “비키십쇼.” 순간??폭발하듯 확산되는 성력. 그 밝은 기운에 니베가 뒤로 튕겨나갔다. 나무에 부딪혀 떨어지는 니베. 제시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레지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제시를 잠시 바라보던 레지엘은 몸을 숙여 칼의 얼굴을 쳐들었다. “아직 죽어선 안 됩니다.” 레지엘은 품속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푸른 액체가 출렁이는 작은 병이었다. “레지엘… 다, 당신 도대체….” “흠… 그냥 나쁜 놈으로 생각하세요. 아, 귓말은 소용없습니다. 지금쯤이면 미토스들이고 뭐고 다 죽어나가고 있을 테니. 그리고… 조금 있으면 당신이 그렇게 따르는 다크소드도 무사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너!” 칼의 눈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레지엘은 한숨을 내쉬며 푸른 액체를 칼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칼의 눈이 스르르 풀리며 감겼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 칼의 몸. 레지엘은 피식 웃고는 빈 병을 던져버렸다. “이놈! 무기를 버려라!” 어느새 다가온 치안대 병사들이 창을 들이밀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일으키는 레지엘. “빠르기도 하시군요. 죽이세요.” 레지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 속에서 무기들이 날아와 병사들의 몸을 꿰뚫었다. 순간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병사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 사람들이 물러난 곳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레지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시작하죠.” “여자들은?” 지휘자로 보이는 검사의 말에 레지엘은 제시와 저쪽에 쓰러져 있는 니베를 바라보았다. “글쎄… 저기 기절한 아가씨는 건들지 마십시오. 명령입니다. 이분은… 고이 모시세요. 중요한 분입니다.” 레지엘의 말에 몇몇의 사람들이 제시를 포위, 호위 하듯 둘러쌌다.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제시. “이, 이게 무슨….” “잠시만 가만 계시지요, 제시 아가씨.” “아가씨? 레지엘, 당신 설마….” “노코멘트입니다.” 레지엘은 빙긋 웃어주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칼을 들어올렸다. 엄청난 상처를 입은 칼을 들어올린 레지엘은 칼을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갑시다.” “예.” 레지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곧 레지엘을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50여명으로 늘어났고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어디로….” 자신의 바로 뒤에 따라오던 지휘자의 물음에 레지엘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프네, 레이디스 길드를 치러 갑니다.” “젠장.” 나는 모여 있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사람한번 엄청 많네. “어쩔 수 없군.” 나는 옆의 나무를 박차고 높게 뛰어올랐다. 아주 사람의 바다로군. 나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레이디스?” 레이디스 길드로군. 나는 정체를 알기 힘든 무리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여자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뭐지? 복수라도 되는 건가?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한쪽에서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나프네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서 싸우고 있는 페넬리. “근처에서 호위를 하고 있었나 보군. 어쩌면 한소리 들을지도. 그나저나… 마기가 다 떨어진 건가?” 나는 옛날과 비슷한 괴수의 모습으로 변해 싸우고 있는 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위험하군. 린은 진화를 하면서 최고 전투모드로 변하면 온몸이 마기로 휩싸여 공중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마스터 정도의 유저를 압도할 정도의 위력. 하지만 그것도 한 일주일이 한번 변할 수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마기가 부족하면 최고 전투모드로 변하기도 힘들다. 다만 저 괴수 모드는 저번과 같이 제약이 없지만. “제길.”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 속에서 튀어나가며 나프네를 공격해 가는 두 사람을 보며 이를 갈았다.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건가? 이래서야 적들의 숫자를 알기도 힘들군.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공격을 해가고 있는 거지? “앗? 잇!”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르며 상대를 압도하고 있던 나프네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둘을 발견하고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라붙은 둘. “젠장. 고수잖아?” 나는 내 앞으로 다가오는 건물을 박차고 나프네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얏!” 나프네를 향해 검을 찔러가는 두 괴한. 나프네는 그 공격을 피해 뛰어올랐다. 중간에 몇 번의 도움닫기를 해 꽤 높은 곳으로 뛰어오른 나프네를 잠시 바라보던 둘은 역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마, 맙소사.” 도, 동지인가? 나는 단 한번의 도약으로 나프네가 뛰어오른 높이까지 뛰어오른 둘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말도 안돼. 나프네가 속도와 날렵함만은 거의 최고 수준인데… 단 한번의 도약으로? 아이템인가? 나는 급히 마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내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나가며 속도가 순간 증가되었다. “꺼져라!” 내 고함소리에 한 녀석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마나르트를 크게 휘둘렀다. 마나르트를 간신히 막고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녀석. 나는 동시에 마기를 응집시켰다. “다크 캐논!” 나는 추락하는 동시에 오른손을 휘둘렀다. 내 손에서 뻗어나가는 검은 빛줄기. 남아있던 녀석은 다크 캐논에 얻어맞고는 멀리 날아갔다. 살기 힘들겠지. 턱. 탁. “젠장. 괜찮아? 이게 무슨 일이지?” 바닥에 내려선 나프네는 내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공격해 와서… 처음에는 몇 명 안됐었는데 순식간에 수가 이렇게….” 나는 전체적으로 밀리는 상황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치안대 병사들이 돕고는 있지만 그다지 실력이 높지 않아 큰 도움이 되지는 않고 있었다. 거기다 몰려든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구하기는 힘들었다. 괴인들 중 몇몇이 가끔씩 도우러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처참히 도륙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몇몇 놈들은 아예 몰려든 사람들을 공격해 가고 있어 오히려 우리가 도와주고 싶을 정도였다. 엄청난 실력이군. “하아앗!” 웃? 나는 급히 몸을 돌리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길게 뻗어나간 검은 검기에 내게 달려들던 녀석이 급히 검을 들어 막았다. 폭발과 함께 뒤로 날아가는 녀석. “제길. 미토스들은 뭐하는 거지?” 나는 숨을 고르며 소리쳤다. 귓말을 보낼 시간도 없는데? 나프네가 내게 등을 기대고 섰다.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는 것이 꽤 지친 모양이었다. 거기다 상처도 꽤 되는군. “그들이라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한.” 음?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레지엘. “레지엘? 죽다니? 무슨 말이지?” 도우러 온 건가? 나는 레지엘에게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음? 뒤에 끌리는 건 뭐야? 레지엘이 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좀 성가시더군요. 나프네 양을 습격하면 당신이 올 줄 알았습니다.” “뭐야?” 나는 당황한 눈으로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무, 무슨 소리야? 그, 그러고 보니…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녀석… 평소와 느낌, 기질이 다르다? 이, 이상한 위화감. “뭐, 이런 말입니다.” 레지엘이 자신이 끌고 오던 물체를 내 앞으로 휙 내던졌다. 공중에 흩뿌려지는 붉은 피. 나는 레지엘이 집어던진 물체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카, 칼…?” 이, 이게 무슨… 나는 한 팔이 잘린 데다 몸 곳곳에 큰 상처를 입고 있는 칼의 모습에 얼굴을 굳혔다. 설마… 나는 레지엘을 노려보았다. “레지엘… 너….” 살기를 흘리며 내뱉어진 내 목소리에 레지엘은 조소어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대로입니다. 가면을 벗을 때가 되어서요.” 나는 눈을 번뜩이며 레지엘을 노려보았다. 나프네 역시 당황한 눈으로 레지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 레지엘은 내 눈빛을 담담하게 넘기며 역수로 쥐고 있던 성검을 빙글 돌려 내게 겨누었다. “지금쯤이면 미토스고 뭐고 다 죽었을 겁니다. 어차피 다시 살아날 사람들이지만 전력 약화는 가능하겠죠. 훗. 당신들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습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현실감이 없어. 레지엘이… 이런… 내 기색을 눈치 챘는지 레지엘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순간 레지엘의 손이 휘둘러졌다. 푸확! 순간 칼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나프네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흐음… “카, 칼… 너… 죽여 버린다!” 나는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검은 마기의 폭풍이 내 몸을 휘돌고 있었다. “이렇게 나오셔야죠. 역시 칼을 살려오길 잘했군요.” 레지엘의 중얼거림. 이 자식! 나는 내 몸을 휘몰아치는 마기를 마나르트에 집중했다. 검은 빛을 뿜어대는 마나르트. “죽어!” 나는 마나르트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순간 레지엘의 눈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얼굴. 가면이라고 했나? 그리고 성검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앙! “크윽….” 뭐, 뭐야. 나는 충격의 여파에 뒤로 튕겨져 나왔다. 제길. 내가 밀린 건가? “쳇.” 나는 마나르트를 옆으로 한번 뿌리고는 주위를 살폈다. 폭발의 여파로 생겨난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럼 식스센스인가? “음? 쳇!” 나는 이를 악물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전투 때문에 모여든 사람들이 폭발로 인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 젠장. “웃!” 순간 옆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왔다. 레지엘? 나는 급히 옆으로 몸을 움직이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성검과 마검이 격돌하며 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동시에 뒤로 물러난 나와 레지엘은 사나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이, 상황… 작전이냐?” “글쎄요. 그렇다고 해두죠. 그나저나 조심하시죠. 전 옛날과는 다르니까요.” 나는 마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마기와 마나가 일렁이며 검은 기운이 생겨났다. 그리고 동시에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지?” “알고 계실 텐데요?” “암흑 길드. 카메론이라는 곳인가?” 레지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성검을 들어올렸다. 엄청난 빛을 내뿜는 성검. 빌어먹을. 성검의 힘을 모두 사용하는 건가? 나는 내 마력보다도 강한 성력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레지엘의 실력은 이렇게 높지 않았는데?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천악 이상이다. “그럼 갑니다.” “여전히 예의는 바르시군.”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주 달려드는 레지엘. 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에 바리어를 씌웠다. 내가 밀리는 것을 이렇게라도 커버해야한다. 콰콰쾅! 쾅! 나와 레지엘이 충돌할 때마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바리어로 간신히 버티기는 하고 있지만 내가 전체적으로 밀리는 분위기였다. 크윽. 어째서 갑자기 실력이 이렇게 는 거지? “이브니어스.” 음? 레지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성검이 엄청난 빛을 내뿜었다.?? -위험해, 세한! 순간 환한 빛이 나를 덮쳤다. 푸화악! 그리고 순식간에 온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수십 개의 상처들. 크윽. 이게 뭐지? 그때 내 바로 앞으로 레지엘이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나는 힘겹게 몸을 움직이며 마나르트를 휘둘렀다. 콰콰쾅! “크윽.” 엄청난 기의 폭발. “쿨럭. 제, 젠장….” 꼴이 이게 뭐냐. 나는 피를 토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거친 숨을 토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레지엘. 제길. 자잘한 상처뿐이군. “이 힘으로도 안 되는군요. 죄송하지만 더 보여드려서는 위험하군요. 이만 끝내야겠습니다.” 젠장. 설마 이 자식에게 이렇게 죽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히죽 웃었다.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레지엘이 환한 빛을 내뿜는 성검을 들어올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도박이다.” 그래 도박이야. 나는 남아있는 모든 마나를 마나르트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운용해 마나르트에 휘감았다. -흐으… 이, 이봐. 더 이상은 위험해…. “상관없어.” 화르르륵. 순간 마나르트에서 검은 기운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칡흑의 화염. 페이린과의 싸움에서 이 걸로 공격을 성공시켰고… 이거 원리는 몰라도 가장 자신 있는 공격이야. 나는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으아아아아! 크로스!” 순간 레지엘의 눈이 흔들렸다. 저 눈빛… 마치… 그리고 마나르트와 성검이 격돌했다. 스으으응…. 무슨 소리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역시 놀란 눈으로 나를 마주보고 있는 레지엘. 성검과 마검은 격돌한 모습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 퍼져있던 성력과 마기 모두가 두 검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이게 무슨… 순간 레지엘의 눈이 번뜩였다. -제, 젠장! 마나르트? 순간 나는 내 몸이 뒤로 쏠리는 기분을 느꼈다. 치이잉! 이상한 소리.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은 나는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나갔다. 입가로 가느다란 선혈을 흘리고 있는 레지엘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콰당! “크으윽.” “꺄악!” 뭐, 뭐야? 뭔가에 부딪혀 바닥을 뒹군 나는 힘겹게 눈을 떠 주위를 살폈다. 내 몸에 반쯤 깔려있는 나프네. 맙소사. “크큭… 아, 아무래도… 당신하고도 인연이 좀 있는 모양… 커헉.” 저번 바이커리에서 있던 일과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나는 말을 멈추며 기침을 해 대었다. 목구멍을 타고 콸콸 쏟아져 나오는 붉은 피들. 바닥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이 꼴이 괜찮아 보이나?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전방을 주시했다. 먼지 구름이 점차 가라앉으며 이리로 걸어오고 있는 레지엘의 모습이 들어났다. 헤헷. 저 자식도 피투성이군. 나에 비하면 너무도 양호한 편이지만. 나는 레지엘의 가슴 부분과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젠장. 기쁘냐? 빌어먹을. “후우… 생각보다 훨씬 강하군요. 거기다 성검과 마검이 공명을 일으킬 줄은 몰랐습니다.” “공…명?” 무슨 소리지? 나는 점차 붉게 물드는 시야에 눈을 깜박거리며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투지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 꼴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기 힘들어. “멈춰.” 음? 나프네가 내 앞을 막아섰다. 이 여자는 왜 이래? “나, 나프네님!” 저쪽에서 들려오는 페넬리의 목소리. 나는 검을 레지엘에게 겨누고 있는 나프네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프네도 상대가 안돼. 저 자식… 최소한 천악과 동급이야. 성검의 힘을 완벽히 다루는 것 같고… 이상하게 강해졌어. “하하하. 역시 당신의 주위에는 이런 순진한 분들이 많군요, 한.” 아까부터 전투를 치러 상처가 심한 나프네가 나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나프네를 향해 조소를 보내고 있는 레지엘을 노려보았다. 큭. 지금까지 봐온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데? 나는 이 이외의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머리도 잘 안 굴러가네. 상처가 너무 심했나? “당신과 놀 시간 없습니다.” 레지엘이 가볍게 도약하며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달려 나가는 나프네. 순식간에 둘이 충돌하며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피를 토하며 내게 날아오는 나프네. 젠장. “크윽.” 나는 나프네와 부딪혀 뒤로 굴렀다. 내 품에 안겨있는 나프네. 어떻게 안기는 안았군. 기절했나? 나는 정신을 잃고 있는 나프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제 정말 끝입니다.” 레지엘이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더니 성검을 휘둘렀다. 내게 날아오는 밝은 빛의 검기들. 젠장. 오랜만에 죽는군. “빌어먹을.” “취명.” 음? 순간 회색이 내 눈앞을 가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소멸되는 밝은 검기. 나는 내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보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레지엘. “도우… 빚을 갚으러 왔다, 다크소드.” 그 사내는 나를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 큰 원을 그리며 회전해 어깨에 걸쳐지는 커다란 낫, 검은 싸이드. 나는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는 회색머리의 사내, 천악을 보며 피식 웃었다. “천악….” 나는 레지엘을 바라보며 투기를 뿜어대는 천악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뭐야… 네놈이 왜….” “말했지 않나? 빚을 갚으러 왔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말도 안나오는군. 나는 콜록거리며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레지엘. 레지엘은 한숨을 내쉬고는 성검을 어깨에 걸쳤다. 순간 레지엘의 시선이 우리 뒤로 옮겨졌다. 그리고 레지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군요. 천악은 어떻게 상대할 수도 있겠지만… 저 분들은 좀 무리로 보이는군요.” 뭐? 나는 고개를 좀 젓고는 식스센스를 사용했다. 우웃. 이 엄청난 기운… 고개를 돌리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레지엘을 바라보고 있는 라젠 등을 볼 수 있었다. 으윽. 어, 엄청난 기운인데? “세한.” 나를 부르는 레지엘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피곤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지엘. 레지엘은 내가 자신을 바라보자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경고하죠. 헌터를 그만두십시오.” “뭐야?” 헌터를 그만두라고?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당신 성격으로 봤을 때 리자드에 계속 남을 이유가 없을 텐데요?” “무슨… 말이지?” 내 반문에 레지엘은 눈을 좀 치켜떴다가 피식 웃었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요. 아마 알게 되는 날이면, 알아서 그만 두겠죠. 리자드에서 하는 짓이 어떤 일인지 안다면요. 뭐, 저야 그 일과는 무관한 일로 이런 일을 하는 거지만.” 무, 무슨 말이지? 리자드에서 하는 짓이라니? 사람의 뇌를 배양하는 것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그건 이미 끝난 일이고… 큭. 나는 꺼질락 말락 하는 정신을 추스르려 애쓰며 레지엘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경고하죠. 헌터를 그만두십시오. 계속 남는다면… 죽게 될 겁니다. 이곳과 현실, 둘 증 어디서든.” 레지엘의 얼굴이 약간 서늘해져 있었다. 말을 마친 레지엘은 품속에서 막대기 하나를 꺼내더니 똑 부러뜨렸다. 뭐지? 그때 곳곳에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던 괴인들, 암흑 길드의 녀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신호였나? “흠… 경고를 더 확실히 하는 차원에서.” 뭐? 순간 레지엘이 눈을 빛내더니 성검을 한번을 휘둘렀다. 순간 성검에 엄청난 양의 성력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레지엘이 그것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뭐, 뭐지? 거의 가라앉은 흙먼지들을 가르며 날아가는 성검. “뭐… 응? 린! 피해!” 나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고함을 질렀다. 저쪽에서 내게 달려오고 있던 린이 급히 멈춰 섰다. 제, 제길! 늦었어! 급히 마기의 벽을 만들어내는 린. 안돼. 저 검의 성력은… 푸화확! 성검이 마기의 벽을 순식간에 뚫고 지나며 린의 몸을 꿰뚫었다. 포효를 내지르며 쓰러지는 린. 바닥에 엄청난 양의 피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리, 린… “이게 제 경고입니다, 세한.” “너… 너!” 죽여 버릴 테다! 순간 엄청난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내 몸을 휘몰아치는 마기. 응? 마나르트를 잡지도 않았는데? 레지엘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뭐, 뭐야? 내 몸에 남아있는 마기 치고는 너무 많아. 그때 몸 안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커헉….” 순간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비, 빌어먹을… 나는 다시 한번 피를 토하고는 몸을 떨었다. 으윽… “저는 가보죠.” 어느새 손으로 날아돌아온 성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레지엘이 말했다. 나는 희미해지는 시야에 이마를 짚으며 레지엘을 노려보았다. “그럼… 다음에 뵙죠.” 순간 모여든 괴인들 모두가 스크롤을 찢었다. 환한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레지엘이 나를 바라보며 사라졌다. “아….” 나는 멍한 눈으로 린이 쓰러져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비, 빌어먹을… 조, 좀 움직이란 말이다… 가, 가봐야… 나는 내 품에 안겨 있는 나프네를 내려놓으려 애쓰며 린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린. “괜찮나?” “아….” 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라젠의 얼굴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어느새 내게 다가앉아 치료를 시작하고 있는 나르손. 환하게 빛나고 있는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음…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친구로군.” 라젠이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천악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는 사이인가? 나는 간신히 일으키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크큭. 이 기분… 오랜만이지 않아? “이미 틀렸어.” 나르손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젠과 이반이 떫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욱… 마, 말을… “리, 린… 쿨럭….” 나는 다시 피를 토하며 몸을 떨었다. 으윽. 바지가 내 피에 심하게 젖은 나프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린? 아… 혹시 저 마수? 아, 내가 살펴보겠네.” 다행히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나르손이 린에게로 달려갔다. 으윽… 나는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큭. 이거 정말 오랜… “후… 쉬게나.” 그러죠… 나는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헉!” 나는 낮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다 풀려있는 치료기기들과 캡슐의 기기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캡슐을 빠져나갔다. “괜찮습니까?” 나는 손을 내밀어주는 신 과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주위를 살폈다. 한밤중인가? 확실히 시간상으론 그렇게 되는군. “레지엘, 정수는….” “아, 일을 벌이기 전에 회사를 나갔었습니다. 자신의 집이나 PC방에서 접속했겠죠. 어차피 이 일은 게임 속에서의 일이라 처벌도 힘듭니다. 저희 회사에서 발표한 규약에도 명시되어 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올려 신 과장의 말을 막았다. 이 사람은 나보다 직책도 높으면서 계속 존댓말이군. 역시 좀 경계하는 건가? “이미 빠져 나갔다.” 하긴 여기에 있는 채로 일을 벌일 만큼 멍청한 녀석은 아니니까. 나는 피식 웃고는 밤의 야경을 보여주고 있는 강화유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후후훗. 콰앙! “빌어먹을. 그 자식….” 나는 강화유리를 후려친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굳은 얼굴로 좀 물러나는 신 과장. 후우… 그럼… 처음부터 오늘을 위해 접근한 건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확실히 이번 일이 큰 이벤트 중에 일어난 일이고… 배치도도 손이 넣었으니 활동하기는 쉬웠겠지.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준비할 만한 일은 아닌데? “젠장.” 어쨌든 그 자식이 배신했다 그거지. 큭. 그때 신 과장이 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두 번 접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뭐지? 내가 빤히 바라보자 신 과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가 남긴 편집니다.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하는군요. 예의상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정수가? 나는 그 편지를 노려보다가 거칠게 낚아챘다. 그래… 어디 뭐라고 쓰셨나 볼까? <죄송합니다. 저도… 꼭 이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뭐, 이런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군요. 그저 좀 씁쓸해서 이런 글이나 남기고 갑니다. 그리고 다시 경고하지만, 헌터를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나중에 뵙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짤막한 편지를 노려보았다. 이러고 싶지 않으셨나? 그건 그렇고… 헌터를 그만두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지? 그보단… “나중에 보자고? 웃기는군.” 나는 편지를 확 구겨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신 과장. “과장님. 얼마간 저 찾을 생각은 마십시오.” “예?” “어차피 이번 패치야 제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겠죠? 좀 생각 좀 하다 와야겠습니다.” “어, 어?” 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잠시 당황하던 신 과장이 고함을 질렀다. “하, 하지만 초연 씨가 아까 할 말이 있다고….” “할말 없다고 전해주세요.” 젠장. 입을 다문 신 과장을 뒤로 하고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하… 여기도 사람 많은 건 마찬가지군.” 나는 사람들이 득실대는 거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밤중이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것의 위력, 무서운데? “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좋은 날은 아니로군.” 큭. 웬 웃기는 놈들하고 싸우다 거의 죽을 뻔 했고 초연 씨하고는 거의 깨졌고, 한번 죽었지. 레지엘이 배신…했고. “씁쓸한 인생이로군.” 나는 다 마셔버린 맥주 캔을 쓰레기 처리용 난간위에 올려놓았다. 순식간에 튀어나와 캔을 끌고 들어가는 쓰레기 처리 기계들. 나는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으음. 오늘 도장을 열었을까? 좀 얻어맞고 싶은데.” 어째 좀… 나는 식은땀을 흘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오늘 제정신이 아니군. “얼레?” 뭐, 뭔가를 본 것 같은데? 나는 눈을 비비며 눈에 힘을 주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분들이지 않아? 나는 길 건너편을 사이좋게 걸어가고 계시는 두 분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얼씨구? 서, 설마 저 두 사범님이?” 나는 녹차 캔을 들고 걸어가는 듯한 두 분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한번 훼방이나 나 볼까? 안 그래도 혼자 돌아다니기 씁쓸했건만… 두 사범님하고 돌아다니면 심심하지는 않을 텐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로 그럴 기분은 아니군.” 나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두 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후우… 뭐하지? 이 시간에 문을 여는 가게가 있을… 많겠구나. 크리스마스니까. 아버지나 뵈러갈까? “으음? 그러고 보니 뭔가를 빼먹은 듯한데?” 왠지 좀 허전하군. 그때 주머니에서 뭔가가 짤랑거렸다. “오, 비상 키?” 나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바이크 열쇠고리가 달린 미니 카드를 꺼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으윽! 바이크를 잊고 있었군.” 나는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다지오 옆에 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군. 어제 밤에 좀 오래 돌아다녀서 잊고 있었잖아. “우선 그리고 가야 부모님을 만나던지 하겠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길을 걸었다. “으음… 눈이라.” 나는 눈이 얇게 쌓여 있는 내 바이크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으음. 이거 기분이 묘하군. 후… 그럼 부모님에게나 가 보실까. “생각보다는 빨리 왔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바이크로 가져가던 손을 딱 멈췄다. 어, 얼씨구? 이 목소리는… “레딕!”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몸을 돌렸다. 주차장 난간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딕. 제, 젠장. 저 자식은 또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오늘 정말 재수 없는 하루로군. “다행히 살아있었군.” “뭐?” 다행?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레딕을 바라보았다. 안도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딕. 이거 왠지 전과는 분위기가 다른데? “너… 뭐냐?” 나는 주위에 다른 사람이 더 없나 살피며 물었다. 그런 내 모습에 레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지금은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뭐?” 뭐야? 나는 눈을 깜박이며 레딕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딕. “이 날씨에 널 기다리느냐고 힘들었다고.” 기다렸다고? “어떻게 알고 기다린 거지?” “아, 알겠지만 내 형님 중에 엄청난 해커가 있지. 그 바이크에 내장된 신호기를 탐지해서 찾아왔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고.” 나는 긴장한 얼굴로 레딕을 바라보았다. 위험해. 옛날 그 까만 친구처럼 빔건이라도 꺼내들면… 내가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자 레딕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그러지 마시지. 고명하신 다크소드께서 그러시면 쓰나. 어차피 카메론과의 계약은 끝났다고.” 카메론? 젠장. 역시 그 회사였군. 말을 멈춘 레딕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응? “그보다는… 하나 묻자. 네 아버지가 김세한이시냐?” 이시냐? 그, 그보다는 이 녀석이 아버지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레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었군. 좀 같이 가줘야겠다.” “뭐야? 내가 왜? 누구 맘대로 같이… 큭?” 순간 내 뒤통수에 뭔가가 와 닿았다. 뭐, 뭐냐?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언제 다가왔는지 한 사내가 내 뒤통수에 총 하나를 들이대고 있었다. 빔건이 아니네? 구시대의 유물 아냐? 화약식 총. “같이 가 달라고.” 레딕의 말에 나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 시선에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내게 다가오는 레딕. “걱정 마시지.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 설마 우리의 영웅이던 분의 자식을 죽이기야 할까.” 영웅? 무슨 소리지? 그때 자동차 한대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으음… 확실히 운수가 그리 좋은 날이 아니로군. “내리라고.” 나는 투덜투덜 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차들이 거의 없는 주차장. 우우, 어둡다. 이런 곳도 있나? 나는 주위를 살폈다. 세워져 있는 차들은 대부분이 망가져 가는 폐차들이었다. 그리고 쓸만해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이 바이크들. 하지만 대부분이 구형이군. 레딕을 따라 차에서 내린 나는 또 뒤에서 겨눠지는 총을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저기 형님. 이거 계속 겨누고 있어야 됩니까?” 음? 내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내의 목소리에 레딕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웃음을 흘리며 총을 품속에 집어넣는 사내. 얼굴을 보니 꽤 좋아하는 듯했다. “가자고, 다크소드. 이쪽이야.” “응?” 너무도 태연하게 걸어가는 레딕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눈을 깜박이다 얼떨결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 옆에서 함께 걸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친구. 총을 들이밀던 녀석이로군. “이봐, 왜 이런….” “고개 숙여.” “뭐?” 나는 내 말은 끊은 레딕이 몸을 숙여 자세를 낮추자 의아한 눈으로 레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역시 자세를 낮추는 다른 둘. 나는 얼떨결에 함께 몸을 낮췄다. “천천히 움직여. 이쪽으로.” 레딕은 구부러진 철골을 아래를 지나며 열심히 움직였다. 익숙한 몸놀림. 그리고 그건 나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둘도 마찬가지였다. 으윽, 이거 뭐야? 무지 복잡하군. 나는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쇠파이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대단하세요. 익숙한 우리도 꽤 힘든데 이렇게 쉽게 움직이다니.” “아아?” 나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총을 가지고 있던 녀석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은 왜 존댓말을 쓰는 거지? “좋아. 멈춰.” 음? 나는 레딕이 딱 멈춰 서자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 이상한 철골의 미로는 거의 끝나있었고 레딕은 앞의 폐품 집합소 같은 장소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그때 레딕이 갑자기 손을 들어올렸다. “뛰어!” “에?” 순식간에 달려 나가는 레딕 등.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느끼며 따라 달렸다. 모두 빠른 몸놀림으로 폐품들의 언덕을 뚫고 달리고 있었다. “이, 이봐. 지금 영화 찍어?” 내 황당한 질문은 침묵으로 대답 받았다. 못된 놈들. 나는 이를 갈며 속도를 높여 달렸다. 음?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왜 따라가고 있는 거냐? 내가 눈을 깜박거리며 의문에 잠겨 있는 사이. 레딕이 나를 붙잡았다. “음?” “이봐.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여기야.” 뭐? 나는 생각을 접으며 주위를 살폈다. 높은 콘크리트 벽. 여긴…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56구역, 암흑가로군. 정말로 여기에 사는 건가? 덜컥. 그때 내 옆을 따라다니던 녀석이 바닥을 들어올렸다. 뭐, 뭐야? 나는 흙바닥이 들어올려지는 것을 보며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아, 밑에 철문이 달려있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그 젊은 친구와 30대 정도의 남자는 아래로 내려갔고 레딕이 남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 “아, 그냥….” “어서 내려가라고.” “아, 그러지.” 다시 한번 생각하지만… 내가 왜 이 녀석들을 따라가고 있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철골 사다리를 내려갔다. 위에서 다시 문을 닫고는 내려오는 레딕. 윽, 어두워. 내가 좀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황색 빛이 들어왔다. 오오? 백열등이다. “이런 게 아직 남아있긴 하네?” 나는 사다리 중간에 달려있는 백열등 하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런데 이거… 왠지 익숙한 기분이… “음? 데자뷰?” “뭐?” 다른 둘은 이미 저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위에서 내려오고 있던 레딕이 내 혼잣말에 반응을 보였다. “아, 왠지 여기가 기억에 있는 듯해서….” 내 말에 레딕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전에 온 적이 있었지. 어릴 적이라 확실히 기억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후훗. 어쨌든 그 말을 들이니 네 녀석이 틀림없구나.” “뭐?” 나는 굳은 얼굴로 레딕을 올려다보았다. 전에 온 적이 있다고? 내가 이곳에 왔을 리가 없잖아? 내 시선에 레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지 말라고. 네 아버지인 세한님이 이곳 출신이니 네가 여기에 오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뭐, 뭐야?” “아, 그러고 보니 세한님은 자기 자식은 여기와 연관시키기 싫다고 하셨지? 그래서 모르는 모양이군. 확실히 네가 여기에 왔던 것도 단 한번….” “자, 잠깐! 그게 무슨….” 내 말은 순간 주위를 밝히던 불이 나가버리며 끊기고 말았다. “크윽. 결국 나갔군. 간당간당하더니 하필이면… 이봐. 다 왔으니 그냥 뛰어내려.” 쳇. 나는 짜증을 내며 사다리에서 뛰어내렸다. 곧 발이 바닥에 닿고 나는 몸을 웅크리며 착지했다. 그리고 뭔가 딸칵딸칵 하는 소리가 나더니 불빛 하나가 밝혀졌다. 그 30대 정도의 사내가 들고 있는 작은 랜턴. 오오, 역시 구시대의 유물. 탁. 레딕도 사다리에서 뛰어내리자 그 사내는 길을 밝히며 걷기 시작했다. 통로? 나는 습기가 좀 찬 통로를 두리번거리며 황당한 심정을 느꼈다. 맙소사. 이런 곳도 있나? “헤헷. 암흑가로 가는 길이에요. 우리가 암흑가에 사는 것을 들키면 정부에서 끌고 갈 위험이 있거든요. 암흑가에는 좀 중요한 것들이 있어서요. 거기다 우리는 주민증도 없으니 부랑자 수감소에 가기에 딱 알맞아요. 그래서 이런 곳으로 다니는 거죠. 옛날부터 내려오는 통로에요.” 나는 그 좀 앳되어 보이는 녀석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가에 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런 곳으로 다닌다고? 그건 그렇고… “이봐. 우리 아버지가 이곳 출신이라니? 무슨 말이지?” 내 말에 레딕은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이놈이! 내가 뭐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내 옆에서 걸어가던 그 어린 친구가 나를 툭 쳤다. “음?” “다 왔어요.” 뭐?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약한 불빛들 몇 개가 길을 간신히 밝히고 있는 거리.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거리였다. 이곳이… “암흑가?” “그래. 세한님에 대한 얘기는 형님들을 만난 다음에 하자고.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걸릴 위험이 있어서 불들이 약하니까 조심해서 걸어.” 레딕이 내 어깨를 짚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쳇. 나는 레딕의 손을 쳐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한숨을 내쉬고는 따라 걷는 레딕. 나는 약한 불빛들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잊혀진 구역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여기에 정말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건가? 딸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 장발의 청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테라스 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붉은 와인이 찰랑거리는 와인잔 하나가 들려있었다. “음… 정수냐?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검은 장발의 청년, 김정수는 자신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중년의 사내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아무데나 좀 앉아라.” “예.” 정수는 테라스에서 가까운 곳의 의자에 앉았다. 화려한 야경. 테라스 창을 넘어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던 청년은 중년의 사내가 내미는 와인잔을 받아들었다. “괜찮은 풍경이더구나.” “그렇군요.” “그래. 일은 잘 끝냈느냐?” 순간 정수의 안색이 희미하게 굳어갔다. 잠시 침묵하던 정수는 눈을 좀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벤트에 좀 방해가 되었을 겁니다. 평판도 좀 떨어질 것 같고요.” “그래? 잘 했다.” 정수는 묵묵히 야경을 바라보며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는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으며 입을 열었다. “편지에도 적혀 있었겠지만, 어차피 그 동안 너의 행동은 일종의 가면이었다. 모두 잊어라. 그리고… 이 카메론의 사장 자리는 너의 것이다. 언젠가 물려받을 자리, 좀 다져놓는 것도 나쁠 것 없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정수는 입을 다물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년의 사내도 묵묵히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래, 그 김현진인가 하는 녀석, 어떻게 된 거냐? 그 놈들에게 들으니 네가 구해줬다는 것 같던데?” 정적을 깨고 나온 질문에 정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회장님께선 죽이지는 말라고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래도 암흑가의 녀석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면 끝이다. 그 녀석은 위험해. 흠… 그 녀석을 구해준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겠지?” 정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이제 헌터를 그만두게 될 테니 상관없습니다.” “음?” “그 사람의 성격에 리자드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는 일을 알게 된다면 그곳에 남을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 찾아갈 생각입니다. 분명한 경고도 하고요.” “…….” 둘은 잠시 침묵하며 다시 야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암흑가의 녀석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그냥 방치하기로 했다. 어차피 정보를 흘리기도 힘든 녀석들이니.” “죽이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정수의 말에 사내는 약간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쉽지 않아. 수야 많지 않지만 암흑가의 특성상 놈들을 잡기도 힘들다. 그리고 그 중에는 그 엄청난 해커도 끼어있으니. 그놈이 일이라도 터트리면 곤란하지. 그냥 잠시 계약을 맺었던 관계로 놔두는 것이 좋을 거다. 어차피 그 놈들을 이용할 상대도 없으니.” 사내의 말에 정수는 약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를 금세 사라졌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정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이제… 이 일은 제가 전담하게 되겠죠. 제가 자의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들리죠, 아버지.” “네게 그 말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약간 회한이 담긴 목소리에 정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정수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시 아가씨는 더 정중히 모셔라. 회장님의 비위를 건들 일은 없으니.” “알겠습니다.” 정수는 간단히 대답하며 방을 나섰다. 약간 어두운 분위기의 복도. 정수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후후. 역시 아버지는 아직 현진과 암흑가의 관계를 모르시는군. 뭐,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진을 데려갔으니 굳이 내가 찾아갈 필요도 없겠는 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어가던 레지엘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길을 막고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여자 외국인. 정수는 자신을 노려보는 제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 김 사장님의 아들이었나요?” “뭐, 그런 셈입니다, 아가씨.” 약간의 조롱기가 섞인 정수의 대답에 제시는 입술을 깨물고는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지금까지 모두를 속이고 있었다는 건가요? 현진이도? 칼 씨도?” “그런 셈이 되겠군요.” 역시 간단하게 자신을 말을 넘겨버리는 정수를 보며 제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시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정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가씨가 참견하실 일은 아니지요. 아가씨께서 여전히 그들과 어울리시든 말든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그러실 시에는 오늘 같은 일을 좀 많이 겪으시겠지만요.” 제시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살벌한 제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정수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후후. 지금껏 제 가면에 속은 사람들이 멍청한 것이겠죠. 이 세상은 아가씨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좋은 곳이 아니랍니다. 곱게 자라신 아가씨.” 짝. 정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제시를 바라보았다. 정수의 뺨을 치고는 씩씩거리던 제시는 비웃는 듯한 정수의 표정에 몸을 돌려 걸어갔다. 상당히 화가 난 듯 꽉 움켜쥔 손을 떨며 걸어가는 제시를 바라보던 정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나도 그리 좋은 성격은 못 되는군.” 작게 중얼거린 정수는 제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벽에 등을 기대며 뺨을 쓰다듬었다. 제시 앞에서야 무시하고 있었지만 그리 약한 충격은 아니었다. “꽤 맵군. 후… 순진한 아가씨, 저도 좋아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랍니다. 후후후… 젠장.” 작은 중얼거림을 욕설로 끝낸 정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진은 어떻게 할지 모르겠군. 헌터를 그만두는 것이야 예상되는 행동이지만… 그 후에는 어떨까? 하….” 정수는 작은 창을 향해 내다보이는 야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릴 적부터 조기 교육에… 여러 경영학 공부에… 서울대 수석까지. 정말 따분한 생활이었지… 훗. 처음만난 진짜 친구였는데 말야. 뭐, 내 운명인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정수는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다시 만났으면 좋겠군. 좋은 관계로 만날 것 같지는 않지만. 후후.” 정수는 잠깐 더 창밖을 내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창밖에 비친 그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섞여 있었다. “그럼… 일을 시작해 볼까?” “…….” “음? 넌 안 먹냐?” 나는 입을 우물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레딕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으음.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음식은 무엇이지? 나는 둥그런 양철 캔 속에 들어 있는 하얀 죽 같은 것을 보며 입가를 살짝 일그러뜨렸다. 으음, 뭔가가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한데… 레딕이 저렇게 오물거리는 것을 봐도 확실하군. “이게 뭐지?” “뭐?” 내 질문에 레딕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러고 보니 넌 여기 사람이 아니지. 이건 우리들의 주식이라고.” “젠장.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내 질문에 레딕은 이상한 죽을 한 번 더 퍼먹으며 입을 열었다. “아아, 음식 찌꺼기를 사다가 갈아서 죽으로 만든 거야. 옥수수도 조금… 이, 이봐.” 레딕은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당황 반, 재미반의 얼굴로 나를 불러대었다. 크윽… 으, 음식 찌꺼기? 제, 젠장. 몇 번 퍼 퍼먹었는데? 나는 내 옆에서 맛있게 이 음식을 먹고 있는 레딕을 의식해 차마 토하거나 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괴로워했다. “크윽… 왜 이런 걸 먹는 거야?” 내 질문에 레딕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돈이 없으니까. 음식 찌꺼기는 싸다고. 거기다 뭐, 요새는 찌꺼기에 비닐 같은 것도 없고. 독성이 좀 있어도 소독 제품을 넣었으니 걱정 말라고.”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레딕과 내 손에 들린 하얀 음식을 바라보았다. 돈이 없어서? “우리는 없는 존재라니까. 그런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쩌다 한번씩 나가서 푼돈이나 동냥 받아오기도 하지만… 거의 없는 일이고. 그래서 카메론과의 계약도 맺었던 거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카메론과의 계약이라. 나는 약간 싸늘한 눈으로 레딕을 바라보았다. 아까 차를 타고 오면서 들은 말로는 카메론에서 돈을 주면서 일을 시켰다지? 쳇, 돈이 없어서 이런 걸 먹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날 죽이려고까지… “이봐. 그 계약에 대해서 말인데….” “아, 잠깐.” 나는 손을 들어올려 내 말을 막는 레딕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좀 기다리라고. 다 왔으니까.” “음?” 레딕은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흔들 거리며 벽으로 다가가 문 하나를 열었다. 여긴가? 방 안은 역시나 어두웠다. 약한 불빛이 다인 이 복도보다 훨씬 더. 다만 한쪽에서 약하게 흘러나오는 빛이 간신히 방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줄 뿐이었다. “음?” 컴퓨터? 나는 방의 왼쪽 구석에 놓여져 있는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저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이었군. 꽤 옛날의 것으로 보이는 구형 모니터 앞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군. 그때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현진.” 내 이름을 말하며 역시 구형인 키보드를 탁 두드리는 남자. 순간 모니터에 어떤 사진과 프로필로 보이는 것이 좌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음? 내 사진?” 나는 모니터에 나타난 사진이 꽤 익숙한, 머리를 기르기 전의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깜박였다. 머리를 기른 지 꽤 오래돼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군. “진짜군요.” “뭐?” 나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는 안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그때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웃!” 퍽. 급히 틀어낸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작은 나무 막대 하나. 그 나무 막대는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뭐, 뭐야? 나는 막대가 날아온 장소를 바라보았다. 음? 저 사람은 전에 날 습격했을 때 가만히 있던 그 중년인? 그 중년인은 레딕과 안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맞지?” “확실하군요.” “으음.”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셋을 바라보았다. 피식 웃으며 각자 자리에 앉는 셋. 안경은 의자에 그대로. 중년인은 뒤의 침대에, 레딕은 문 옆의 의자에 앉았다. 으음… 나는 어디에 앉는다? “흠.” 나는 문 옆의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앉았다. 그래. 이제 얘기를 좀 들어보실까. “흠… 이제 얘기를 좀 들어보지. 왜 날 여기로… 아니, 그보다는. 아버지가 여기 출신이라니? 무슨 말이지?” 내 말에 침대에 앉아있던 중년인이 빙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소개부터 하지. 이쪽은 알겠지? 레딕이라고 불리는 녀석이야. 이쪽 안경은 센. 자네도 알겠지만 해커지.” “언제 그 해커나 소개시켜 주면 고맙겠군.”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센이라는 안경잡이를 노려보았다. 저 자식이… 바로 그 망할 놈? “젠장… 언제 꼭 갚아주고 말테다. 네놈이 떠올린 야한 사진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혹을 치렀는지 알아?” 이를 빠드득 갈며 투덜거리는 나를 보며 센은 머리를 긁적였다. 크으… 그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지 않으면 미쳐버린다고 했었지. 언젠가 돌려주마. “그리고… 나는 민이라고 불리네. 세한과는… 어찌 보면 친구사이이기도 했지.” 친구? “그러니까. 아버지가 여기 출신이라는 말?” “그렇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네 아버지가 고아라는 것을. 암흑가 출신이기 때문에 네 외가에서도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이고. 김세한, 그는… 흠, 보스라고 해야 하나? 우리 암흑가 사람들의 지도자였다.” 지도자? 나는 얼빠진 눈으로 민이라는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암흑가의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라.” “그래. 머리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강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야 가끔씩 의뢰를 받아서 누굴 습격하거나 하는 것이기에 싸움에는 모두 자신이 있지. 하지만 세한은… 우리가 모두 덤벼도 이길까 말까한 사람이었다.” “…….” 확실히… 강 사범님과 대등한 실력이면 거의 인간의 수준이 아니지.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민이라는 남자의 말이 집중했다.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보며 레딕이 빈정대듯 말했다. “이봐. 너무 충격이야?” 나는 눈을 부릅뜨고는 레딕을 노려보았다. 30여분에 걸쳐 진행된 아버지에 관한 얘기. 종합해 보자면… 아버지는 암흑가에서 태어난 고아라? 그리고 싸움은 거의 신들린 수준이었고. 더구나 암흑가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암흑가를 벗어난 사람이라고? 핫. 그래서 어머니가 외가에서 쫓겨나셨던 거였군. 결혼 후에도 암흑가에 들러서 많은 도움을 주고… 돈도 쥐어 주었다? 그래서 은인이라.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어려워져서 다시 일을 시작했고. 좋아. 대충 이해됐어. 내가 입만 벙긋거리며 말을 하지 못하자 레딕이 입을 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봐?” “진, 괜찮나?” 민의 말. 왜 또 내가 진이라고 불리는 거야. 나는 미소를 지어주려 애썼다. 하하. 얼굴이 굳은 듯한 느낌인데?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음? 쓰러진 건가? 나는 몸이 축 늘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깜박였다. “왜, 왜 이러는 거지?” 민의 목소리군. “레딕. 설마 이상한 짓이라도 한건 아니겠지?” 이건 센이라는 해커의 목소리다. “무슨! 세한님은 제 영웅이라고요! 그분의 아들에게 내가 왜… 어? 그러고 보니 아까 내 저녁을 좀 나눠줬는데….” “저녁을?” “맙소사….” 레딕의 말에 민과 센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아… 정신이 혼미해져. 그때 민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멍청한 자식아! 그걸 진한테 먹이면 어떻게!” “어, 어? 왜 그래요? 난 멀쩡한데? 그러니까 그 음식 탓은….” “젠장! 너하고 진의 위장이 같냐? 앙!? 우리가 먹는 건 일반인이 먹기에는 좋은 게 아니란 말야!” 센의 고함소리. “음? 그래도 소독 약품을… 거기다 요새 음식 찌꺼기는….” “너 죽고 싶냐? 소독 약품 자체에도 독성이 있다고! 맨날 먹고산 우리야 상관 없지만 얘가 괜찮을 줄 알아? 거기다 음식 찌꺼기도 만만치 않다고!” 이어지는 센의 고함소리에 레딕은 ‘어어’거리더니 나를 마구 흔들었다. 이, 이 망할 자식아… 머리 깨지겠다. “어이. 다크소드. 괜찮아? 아니지? 내가 준 음식 먹어서 아니지? 음? 왜 얼굴이 햐얗게….” 맞는 거 같은데…. 그때 뭔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레딕이 내 몸 위를 날아갔다. 뭔가가 벽에 처박히는 소리와 함께 잠잠해지는 레딕. 누군가가 내 눈을 까뒤집었다. “이런. 상태가 별로로군. 세한의 아들이니 죽지야 않겠지만… 저 멍청한 자식. 외부인에게 줄게 없어서… 센, 좀 봐라.” “음… 그래도 아버지한테서 저항력도 좀 받았겠죠. 약이 어딘가에 있었을 텐데? 한 6년은 지나서 효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냥 토하게 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 아닌데요.” 이, 이 인간들이… 나는 점점 정신이 꺼져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꼭 감았다. 역시 운수가 그리 좋지 않은 날이로군. “이, 이런! 현진!” ‘음? 로카드를 사달라고?’ 아버지? 나는 웬 꼬마녀석을 내려다보고 있느 아버지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오오. 아버지네? ‘예!’ 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로군. 그나저나 너 진짜 잘 생겼다. 크면 여자 꽤나 울리겠는데? ‘으음… 그래도 오늘 여행하는 부모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니?’ ‘에에~!’ 음? 그러고 보니 내 어릴적 모습이군. 역시 잘 생겼다 했더니 내 어릴 적인가? 하긴 저 나이에 저런 미남티를 내기도 쉽지 않지. ‘훗. 좋다. 그럼 강 사범네 도장에 가서 수련을 열심히 해라. 이 아빠가 여행에서 돌아왔을때, 한대라도 때리면 기꺼이 사주마.’ ‘한대?’ ‘한대.’ ‘좋아요!’ 나는 그대로 발차기를 날렸다. 음, 이 나이에 비해서는 발군의 실력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난 천재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약간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높게 뛰어올라 식탁을 박차고는 뒤로 몸을 날렸다. 공중 제비를 돌아 거실에 착지하는 아버지. 음. 확실히 민의 말이 이해가 가는군. 이제 와서 보니 완전 괴물인데? ‘얏!’ 나는 꿋꿋하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싱글싱글 웃으며 내 주먹을 피하는 아버지. 인마! 더 빨리! 거기서 왜 정권이 나오냐! 수도를 휘둘러! ‘이런… 여행에서 돌아오면 이라니까.’ ‘에에~!’ 이건…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지막 여행을 떠나시기 바로 전의 모습인가?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별로 좋은 꿈은 아니로군. 음? 이게 꿈이었나? 내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도장? 강 사범님이군.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꿈이니까. ‘허? 네 애비를 한대 때려야 한다고?’ ‘예!’ ‘이럴 때만 의욕이 넘치는군. 역시 피는 못 속이나? 잠깐 기다려라.’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강 사범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에 어지럽게 널린 여러 프로필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강 사범님. 아, 대회 준비 중 이시군. 꽤 중요한 시합이 있으셨지? ‘흠… 다음 상대는 5단이군. 별로야.’ ‘사범님은 승단 안하세요? 빨리 9단을 따셔서 명인이 되셔야죠.’ 음. 그놈 참 똘망똘망하네. ‘하하. 전에도 말했지만 말이다. 나는 네 아빠가 명인이 되기 전에는 승단하지 않을 거다. 네 아빠와의 굳은 약속이거든.’ ‘에? 제가 전에도 말했지만 아빠는 태권도나 그런 걸 배우시지 않는데요?’ ‘하하. 그래. 그냥 길거리 싸움일지도. 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타격용 ’무술‘이잖니. 언젠가 그 친구가 무술 유파를 하나 세울 거다. 그리고 초대 명인이 되겠지. 나는 그때 승단할 거란다. 하하핫!’ ‘흠… 그게 약속이란 말은 열 번도 넘게 들은 것 같은데….’ ‘하하. 어쨌든. 시작하자. 며칠사이에 세한을 한대 때릴 실력으로 키워달라고? 허, 참. 나하고 호각을 다투는 녀석을 한대 정통으로 때리게라. 그 녀석도 괴짜라니까.’ 그래. 괴짜셨지. 이제 기억나는데? 아버지가 싸움은 잘 하셨군. 무술 유파라? 하나의 무술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잖아. 꽤 허황된 꿈이었지. 그리고 그 약속의 당사자가 죽었는데도 아직 승단을 하지 않으시는 강 사범님도 이해하기 힘들어. 이거 그다지 좋은 꿈은 아니야. 역시 오늘은 운수가 좋지 않은가? “그 오늘은 지난 지 오래에요. 정신이 들어요?” 갑자기 뚜렷하게 들려오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으음….” 흐릿한 시야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으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군. 약간 날카로운 얼굴. 흠, 누구더라? “으으… 레…딕?” 내 말에 그 누군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쨌든 남매니 닮은 건 당연하겠지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나는 눈을 깜박이며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닮긴 했지만 레딕은 아니로군. 나는 흑발을 길게 기른 약간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레딕과 약간 비슷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잠시 착각했군. “아, 미안하군요. 으으, 어지러워. 레딕의 동생?” “그래요. 릴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그렇게 불러요, 진.” 왜 또 진이야? 나는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주위를 살폈다. 작은 방. 내가 누워있는 침대 하나와 릴이라는 레딕의 여동생이 앉아있는 의자 하나가 다인 썰렁한 방이었다. 릴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는 손을 휘둘렀다. 쾅쾅. 릴은 벽을 새게 두드렸다. 으음? “알려주지만 당신이 쓰러지고 이틀 만이에요.” 나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그렇게 오래? “또 참고로 말해주자면 그 이틀 동안 암흑가의 사람들 모두가 한번씩은 다녀갔어요. 저기 그 증거고요.” 나는 릴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 놓인 물건들을 확인한 나는 약한 신음을 흘렸다. 문병 와서 놓고 간 물건이라 그건가? 나는 우리 아파트 수위 아저씨가 두르고 있는 담요와 비슷한 담요들, 그러니까 고시대의 유물이라 불리는 녀석들과 각종 특이한 물건들이었다. 앗!? 저건? 나는 누군지 모를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황금빛 트로피를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또 참고로 말하면 저 빔건은 센이 주는 거예요.” “빔건?”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릴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과연 릴이 가리킨 문 옆의 탁자에 빔건이 놓여 있었다. 미, 미친 거 아냐? “아, 확실하게 말하면 저건 장이 놓고 간 거군요. 전에 당신에게 저걸 겨눠서 사과하고 싶다며 놓고 간 건데… 센이 허락해서 가능해졌던 거거든요.” 그, 그것 보다는… 저, 저걸 어떻게 선물로 알고 받으라는 거야? 나는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느 릴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나와는 뭔가가 다른 사람이로군. 내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아, 드디어 깨어났군. 확실히 면역성은 좀 있는 모양이군. 수고했어, 릴.” 안경을 쓰고 있는 사내. 센이었다. 릴은 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책을 들어 읽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몸을 움직여 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섰다. “후우… 내가 레딕 그 인간을….” 나는 이를 갈며 레딕을 씹어대었다. 센이 피식 웃고는 물병 하나를 건넸다. “마셔.” 마시라고?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센의 손에 들린 물병을 바라보았다. “이건 안전한 겁니까?” “레딕의 저녁보다는 안전해.” 나는 약간 긴장하며 물통을 들이켰다. 오, 시원한데? 나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물병을 센에게 돌려주었다. 텅 비어버린 물병을 바라보며 센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 이거 얼마 남지 않은 생수였는데. 뭐, 네가 쓰러진 것도 우리 잘못이니. 따라와. 좀 둘러보라고.” 센은 물병을 휙 던져버리고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릴도 센의 뒤를 따라 나갔다. 사귀는 사이라도 되나? 호흡을 꽤나 잘 맞추며 걸어가는 둘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여기서 죽을 걱정은 없겠군. 아버지가 이곳 출신이라는 것은 대충 맞는 것 같으니까. 아니, 어쩌면 먹을 걸 잘못 먹어서 죽을 지도…. “아….” 문을 나서다 옆을 바라본 나는 잠시 멈칫했다. 문 옆의 탁자 위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빔건. 으윽. 이거 왠지 가지고 싶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쳇. 방을 나선 나는 약간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에 왔을 때는 잘 몰랐지만 꽤 멋진 곳이었다. 완전 질서, 깨끗 그 자체인 서울의 다른 구역과는 판이하게 다른 곳. 완전히 부숴진 건물의 잔해들과 낡은 콘크리트 건물. 이런 것들이 희한하게도 조화를 이루어 꽤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멋진데?” 내가 걷고 있는 곳은 반쯤 무너진 어느 건물의 복도였다. 벽이 내 허리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내가 나온 방이 무사하다는 것에서 불가사의를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센.” “음? 왜, 릴?” “저번 그 얘기로 좀 할 말이 있는데….” 나는 앞에 멈춰서 말을 꺼내는 릴을 잠시 바라보았다. 센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어어? 무슨 얘기들이지? “저… 여기서는 얘기하기가 그렇고….” “으음? 아, 저기, 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허리쯤 있는 벽을 뛰어넘었다. “돌아다니며 구경이나 하고 있죠.” “아, 고맙다.”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로군. 나는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정말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물건들이 곳곳에 널려있었으니까. 물론 요새도 구경할 수는 있는 물건이지만 그거야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무료 박물관이군. “아?” 그때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모두 20대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꽤나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자 5명의 사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님이시군요. 세한님의 아들. 처음 뵙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순간 당황했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짓을 하고 다녔기에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 거지? 잠시 의문에 파묻히던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렇게 딱딱하게 대할 건… 음? 혹시 어디서 절 본적 없으십니까?” 나는 사람들 중 왠지 낯익은 사람이 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내 질문을 받은 20대 후반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 그게… 저, 저번에 리자드의 사람을 습격 할 때….” 음? 나는 잠시 멍한 눈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아, 그때 그 사람이네? 내게 빔건을 겨눴던 그 사람이었다. 호오. 나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 그땐 설마 당신이….” “아뇨. 지난 일인데요, 뭘. 하하.” “가, 감사합니다.” 어째 태경이들이 마구 몰려다니는 기분이군. 레딕들은 너무도 편하게 대하더니 이 인간들은 왜 이리 딱딱하지? “아, 그런데 몇 가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예? 물론입니다.” “아, 여기 사람들이 몇이나 살아요?” 내 질문에 다섯은 각자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대답한 건 그 빔건의 사내였다. 대장으로 보이더니 역시 가장 계산이 빠르군. “아마 남자는 30여명. 여자는 20여명 정도일 겁니다. 음… 남자들 중 1/3은 40대 이상이고 여자들은 모두가 40을 넘기지 않았죠. 젊은 층으로 보면 여자가 더 많습니다.” 내가 묻지 않은 것도 친절히 설명해 주는 사내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들은?” “없습니다. 아직 결혼한 사람도 없는데다… 또….” 사내는 약간 머뭇거렸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건가 보군. 어쨌든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충 70여명? 나는 손을 젓고는 말을 돌렸다. “아, 이름이나 알았으면 좋겠는데요?” “아, 전 장입니다.” 음? 아, 그러고 보니 내게 문병선물로 빔건을 주고 갔던 사람이었잖아. 나는 피식 웃었다. 다른 넷도 자기소개를 했는데 대부분이 간단한 이름이었다. 그냥 부르기 쉬운 이름들을 골라서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 혹시 민이나 레딕이 어디 있는지 아나요?” “아, 저쪽 어디에 계실 겁니다.” 장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손을 흔들어 주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내가 꺼낸 물건을 알아본 장은 미소를 지었다. “아, 그건….” “고마워요. 마음에 드네요.” “하하.” 나는 내 손에 들린 빔건을 한번 돌리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이쪽이라고 했지? “진에게는 말하지 않을 겁니까?” 음? 민이나 레딕을 찾아 헤매던 나는 레딕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 저기 있네? 한숨을 내쉬며 걸어가던 나는 이어지는 민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뭘? 리자드의 짓거리?” 리자드의 짓거리? 나는 눈을 깜박였다. 무슨 소리지? 그때 레딕이 약간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젠장. 전 진 그 녀석은 마음에 들지만… 진이 리자드와 어울리는 꼴은 절대 못 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래.”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는 레딕와 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주시했다.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듣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전에 레지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헌터를 그만두라고? “하지만… 진이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지. 진 그 녀석의 연인이 리자드에서 일하는 것 같으니까. 거기다 그 여자의 아버지가 리자드의 부장 아닌가.” 민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초연 씨와 아버님의 얘기인가? 민과는 대립될 정도로 거친 목소리로 레딕이 말했다. “빌어먹을!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그 여자는 몰라도… 부장이면 그 자식도 그 일의 주동자중 한명이 아닙니까? 전에 센이 신대관인지 하는 자식 컴을 해킹하니 아주 줄줄이 나오더군요. 그 유 부장인지 하는 자식의 직속이 신대관이라는 자식 아닙니까?” 무슨 말이야? “하핫. 나도 모르게 자네들끼리 해킹을 하고 다닌 건가?” “젠장. 웃어넘기지 마십시오! 그래서 계속 감추겠다, 그겁니까? 빌어먹을.” “내 생각에는… 네 생각은 진에게 사실을 알려서, 우리가 밝히지 못하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자 그거 아닌가?” 순간 레딕이 잠잠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 자식들에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나는 몸을 굳혔다. 어머니를 잃어? “… 대외적으로는 리자드에선… 그저 사람의 뇌와 비슷한 것을 배양할 뿐이야.” “하지만 실상은 아니잖습니까? 그 자식들이 진짜 사람들의 장기를 사들이는 것!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빌어먹을! 거기다 우리는 더 좋았겠죠!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니까! 거기다 돈이 필요하니까! 뭐, 간단한 실험? 그 말을 믿고 가셨던 어머니가 그 프로그램 속에 갇히셨습니다! 어머니의 몸 전체가 그 게임에 이용되었다고요! 뭐? 리얼리티? 강한 몬스터 육성!? 미친 새끼들!”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뭔가를 후려치는 소리. 자, 장기를 사들여? 뇌? 배양? 얼마전에 내가 알게된 사실. 사람의 뇌를 배양한다. 하지만 그건 합법적으로… 레지엘이 말했지. 리자드에서 하는 짓을 알게되면… 레딕이 왜 이렇게 비뚤어진 사람이 된 거야? 현실에서는 멀쩡하잖아. 그런데 섀도우 월드에서는 완전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 “개자식들! 이제는 진짜로 서비스에도 이용 하더군요! 이상하게 똑똑하고, 강한 몬스터들이 나타난 답니다! 예? 그 몬스터 중에 하나가 제 어머니일지 모릅니다! 그까짓 돈 때문에! 리자드에게 뇌고 뭐고, 다 빼앗긴 어머니가!” “증거가 없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아. 법정에 설 수도, 신고할 수도 없는 인간들이지. 그래. 리자드에서 돈이 필요한 사람들의 장기를 구입해서 게임에 이용하는 것,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암흑가의 사람들이 그 주 대상이라는 것. 제길. 하지만 그래서 어쩔 거냐? 진을 이용해? 진 혼자서 뭘 어쩐다고?” “저도… 압니다. 하지만….” “네 어머니가 그렇게 죽으신 것, 나도 안다. 실험 대상으로 죽어 가신 것, 나도 알아. 하지만 네게 어머니인 여자, 내 누나이자 친우였다. 암흑가의, 내 친구들 모두가 그렇게 죽었어. 내가 살아있는 것이 신기하지. 거기다 그런 실험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일도 하짐 못했다. 그저 죽었다는 말과 내던져준 돈뭉치 조금! 그걸로 끝이었단 말이다! 너만 그렇게…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줄 아냐! 우리들 중에 너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은 없어! 언제까지 그렇게 비뚤어져 있을 거냐!” “…….” “네 말 때문에! 네 그 증오심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았던 카메론과의 계약도 맺었다. 하지만 그래서 결과가 뭐였냐? 그래! 돈도 꽤 들어왔고! 너희 같은 젊은 녀석들이 리자드의 사람들을 괴롭히며 즐거워하기도 했지. 그래서 뭐가 남았냔 말이다! 리자드의 사람들 전부가 이 일에 동참하고 있는 줄 아냐?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거기다 리자드의 사업은 국운까지 달린 대형 시장이다! 네 생각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거기다 진을 이용해? 네놈! 그 따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거냐!? 네놈이 진이라고 생각해 봐라! 그런 말을 듣고! 헌터라는 직업 자체가! 리자드의 그 계획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라고? 그 놈들이 이 일을 위해 준비하던, 변종 몬스터? 핫, 그런 것들의 뒤처리를 위해 고용한 것이 진이었다고 말하라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앞을 노려보았다. 흠, 레딕이 그런 짓을 하고 다니던 것도 이해가 되는군. 암흑가의 사람들이 카메론과 어째서 계약을 맺었는지도 이해했어. 그리고 아이들과 나이든 사람들이 왜 없는 지도 이해했다. 나이든 사람들, 아이를 가질 나이의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으니 아이가 있기도 힘들겠지. “이상하게 침착한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처음 리자드에 들어갔을 때, 그래서 그렇게 견제를 받았던 건가? 팀장이라면 낮은 위치는 아니지. 내가 자신들의 일을 알아내고, 동참하지 않았을 때의 문제가 있었겠지. 나는 태경이와 상당한 친분이 있어. 리자드 정도면 그런 정보쯤이야 우습겠지. 나 때문에 태경이고 헌터에 가입했다. 대주주의 아들이 헌터에… 변종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도 헌터의 임무였지. … 이용당한 거였군. “강도훈.” 나는 살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 헌터로 만든 사람이 그 자였던가? 신대관이라는 사람이 실질적… 부장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그럼 초연 씨는? “젠장.” 다크워리어. 그 창민인지 하는 자식. 내가 아는 다크 워리어와 뭔가 맞지 않았다. 그 팀장과 그 자의 이상한 모습. 진짜 사람의 뇌를 이용한다고? 어쩌면 그 다크 워리어도 사람의 뇌를 직접 이용한 건가? 그럴 수도 있겠군. 하하핫. “뭔가… 구분되지 않아.” 나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침착했다. 너무 큰 분노를 느끼면 오히려 침착함을 가지게 된다고 했던가? 그런 건가… 나는 피식 웃었다. 품속에 있는 빔건이 갑자기 중요하게 느껴졌다. “확인해야겠어.” 2125년, 12월 28일. (주) 리자드, 게임 운영과, 범죄 처리팀, 팀장 김현진. 헌터 탈퇴. 후임에 진건이 발탁되었으나 한강 전자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거부했고, 범죄 처리팀 팀장에 손영민 임명되었다. 서울 10구역에 위치한 카페 아다지오. “저, 정말 그만두는 거냐?” “아아, 그렇게 되고 말았네요.” 영민(미토스입니다. 혹 모르실 까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현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을 보니까… 강 부장님께 주먹을 휘둘렀다며? 거기에… 초연 씨하고는 완전 깨진 것 같던데… 어떻게 된 거야?” “…….” 현진은 침묵했다. 영민도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별말 없이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때 현진이 입을 열었다. “형. 형도 그만두지 않겠어요?” 현진의 갑작스러운 말에 영민은 눈을 크게 떴다. “왜?” “이유를 말하라면 그러지는 못하겠네요. 전 죽고 싶지 않거든요.” “뭐?” 현진의 말에 영민은 눈을 크게 떴다. 죽고 싶지 않다고? 영민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현진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지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될까요?” 영민은 약간 당혹한 듯한 얼굴로 현진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때문에 현진이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영민에게는 헌터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입술을 깨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영민을 바라보던 현진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의 의미를 모르는 영민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하하, 아니에요. 팀장도 되었겠다, 열심히 해 보세요.” “이, 이봐. 무슨 말을….” “한 가지 말하죠.” 영민은 현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진의 얼굴은… 뭔가를 잃을 듯한 허망함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왠지 모를 분노도. “언젠가, 형이 내가 알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를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을 증오할 지도 몰라요.” “뭐?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리고….” 영민은 당혹한 얼굴로 현진을 바라보았다. 잠시 말을 멈췄던 현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만약이지만…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서로 죽이게 될지 모릅니다.” 영민은 눈을 크게 떴다. 현진은 그런 영민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민이 현진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현진의 코트가 펄럭이는 순간, 영민은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제 말의 증명이에요. 제가 말한 일이 일어난 장소는… 어디가 될지 몰라요.” 영민은 현진의 코트 속에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빔건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런 영민의 반응을 바라보던 현진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빔건의 모습이 사라지자 영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웃으며 다시 만나기를 기원할게요.” “…….” 영민은 카페를 빠져나가는 현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영민이 사나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후 영민은 오랫동안 현진을, 세한을, 다크소드를 보지 못했다. “하하하… 다 들었어요, 영민 형.” 현진은 아다지오를 올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형이 왜 남아야하는지. 리자드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현진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걸었다. “그만두게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 암흑가의 사람들이 위험해질 거라는군요. 언젠가 알게 되겠죠.” 현진은 한숨을 내쉬고는 싸늘한 거리를 걸었다. “레지엘님.” “아아?” 성벽위에서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는 레지엘. 레지엘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있었지만 그에게 말을 건 여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다크소드가 헌터를 탈퇴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래? 예상대로네. 좀 빠르긴 했지만.” 레지엘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의 부관 정도로 보이는 검은 머리의 여검사도 함께 침묵하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조용히 있던 레지엘이 입을 열었다. “돌아올까? 그 동안 내가 느낀 바로는… 잘 모르겠군.” 그때 저 쪽에서 엄청난 크기의 거인이 달려오는 모습이 드러났다. 레지엘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들어올렸다. 파지직! 순간 강한 스파크가 모여들었다가 순식간에 거인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거인과 그 푸른 스파크가 서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순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 거인은 먼지 하나 남지 않고 소멸되었다. 그 모습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던 레지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이 ‘광휘’의 세상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너무 부각되는 것 같아. 섀도우 월드와 맞붙어서는 이기기 힘들겠군.” 카메론의 가상현실 게임. 광휘의 세상 속에 잠시 머무르고 있던 레지엘은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었다. 평소 세한이 좋아하던 하늘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레지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2126년 1월 1일. 섀도우 월드가 가장 길었던 서비스 중단을 끝내고 다시 문을 열었다. 이번 초대형 패치의 주요 내용들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첫 번째. 전 서버의 통합. 4개의 서버가 하나로 통합되는 최대의 패치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4개의 대륙이 공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대륙으로 넘어가고 싶으면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대륙에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는 것의 거의 불가능하다. 엄청난 자연적 요소들이 대륙과 대륙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단 하나의 드래곤, 레드 드래곤 세르페이린이 사는 적색 산맥이 한국 서버와 유럽서버를 가로막고 있다. 원래의 적색 산맥보다 수배는 높아지고 험해진 적색 산맥. 이 레드 드래곤의 영지가 다른 대륙간의 교류를 막는 것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외에서 무한히 넓고 엄청난 해중 몬스터와 비이상적 기후로 대륙을 가로막는 바다. 엄청난 크기와 더위로 대륙간을 가로막는 사막 등이 있다. 이 패치가 실행되면서 텔레포트에도 엄청난 제약이 붙게 되었다. 텔레포트 최대 거리 10km. 거기다 대륙들의 곳곳에 텔레포트를 하지 못하는 금지 구역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이제 텔레포트는 그저 연결되어 있는, 텔레포트가 가능한 한 지점에서 지점을 이동하는 간단한, 짧은 거리의 이동 시설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때문에 리콜스크롤의 이용이 많아질 것이라는 것이 정론이다. 침낭 없이 로그아웃 시 마을로 돌아가는 기능도 사라졌으니까. 두 번째로 랭킹제가 폐지되었다. 서버가 모두 통합되면서 고수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 이런 순위 매기기는 그저 장난에 불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리얼리티를 최대한 추구한다는 리자드 사의 방침에 맞는 패치. 세 번째로 연합의 기능의 등장. 연합 기능, 원래 존재하던 암흑 길드 연합과 비슷한, 길드간의 연합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여러 길드가 하나의 연합을 만들어 커다란 세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연합 간의 전투 등이 활발해 질 것이 당연시 되어 섀도우 월드 속에서의 리얼리티가 증가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네 번째로 새로운 몬스터들이 등장하였다. 새로운 종의 몬스터는 아니지만 계속 등장해 오던 변종 몬스터, 그것들이 공식적으로 프로그램의 제어에 있음을 발표하면서 평균적인 몬스터들의 능력을 증가시켰다. 그리고 이런 변종 몬스터들 외에도 ‘엄청난 지능과 능력’을 가진 특이한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인간의 말을 유창하게 하고 엄청난 능력을 가진 몬스터들. 이 몬스터들은 자신의 몬스터 종족이나 다른 몬스터들을 모아 지휘해 인간을 사냥한다. 죽이고 죽이는 현상. 사람들이 몬스터들에게 사냥당할 위험이 엄청나게 증가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리얼리티 강화라는 말 아래 이루어진 것. 섀도우 월드에서의 삶이 더욱 위험해 지면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든 것이다. 다섯 번째. 죽음 시, 그 플레이어는 신전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현실 시간으로 하루 뒤 그곳에서 부활한다. 그리고 큰 상처를 입었을 때, 가령 예를 들어 한 팔이 잘렸을 때도 특수 포션, 보통 포션 보다 약간 비싼 포션을 사용하면 그 팔을 재생시킬 수 있던 것도 사라졌다. 팔이 잘리거나 해 신체를 재생시키고자 하면 신전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더불어 머리카락이 잘려도 곧 자라던 현상도 사라졌다. 현실과 똑같은 시간이 지나야 자연적으로 자라는 형식, 현실과 똑같이 맞추어 졌다. 여섯 번째로 게임 속에서의 재산을 현실에서도 통하도록, 전환소를 설치하였다. 게임에서의 아이템과 돈을 현실에서의 돈으로 바꾸어 주거나 서로의 현금 거래를 도와주는 장소. 이 전환소는 리자드의 운영자들이 관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패치들이 시행되었다. 이 패치들은, 타 대륙으로 넘어가는 일을 숙원으로 삼는 이들을 만들었고, 몬스터들의 사냥에 분노하고, 그 분노를 상대적으로 ‘사냥’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푸는 이들을 만들었다. 세력을 만들어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만들었으며, 길드, 연합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타 대륙은 카메론의 영향력이 강했고, 그들은 한국의 대륙으로 들어와 섀도우 월드를 망치려 노력했다. 그리고 세한 때문에 패치 전에 사전 공작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리자드에서도 타 대륙에서 자신들이 만든 세력을 동원해 게임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많은 방안을 시행하려 했다. 하지만 이 일들은 대륙간을 막고 있는 요소들에 의해 저지 되었다. 이 패치들이 시행되면서, 리자드에서는 한 가지 공표를 했다. <더 이상의 패치는 없다. 이제 섀도우 월드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최고의 리얼리티를 갖추었다. 이제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헌터들이 처리하며, 운영자들의 시스템의 오류만을 처리하고 헌터들의 연결고리를 하는 정도의 일만 하게 될 것이다. 이 패치는, 마지막 패치이다. 조금씩 시스템의 오류를 고쳐나가는 조정 작업은 있겠지만, 버전이 올라가는, 패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섀도우 월드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이것이 1월 1일 발표된 마지막 패치의 내용이었다. “더 이상의 패치는 없다? 재미있군. 극도로 리얼리티를 강화 한다. 진짜 사람의 뇌를 이용해, 강력한 몬스터들을 만들어 낸다. 현실의 기억은 지운채로? 그리고 그 몬스터들을 이용해 섀도우 월드의 세상을 더욱… 젠장. 그리고 생길 가능성이 많아진, PK범이나 여러 범죄자, 프로그램 상의 오류로 생긴 잔류물들을 통제하는 것으로 드래곤을, 헌터들을 만든다. 멋지군. 정말 감탄할 지경이야.” 현진은 사납게 중얼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후 4개월이 지났다. 게임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현진, 세한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게임 속의 NPC들이 그를 찾았고 동료들이 그를 찾았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그를 찾았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현실에서의 현진의 친구들, 가까운 이들조차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4개월이 흘렀다. 따뜻한 봄. 섀도우 월드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었다.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말해! 당신들이 정말로 그런 짓을 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지?’ ‘현진 군. 내 말을 좀….’ ‘혀, 현진 씨?’ ‘이제… 끝난 것 같군요.’ ‘우리 어머니? 아아, 내가 병에 걸렸었거든. 약을 구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리자드에 가셨었어.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셨지. 아마 기억도 잃으신 채로 리자드에게 이용당하고 계시겠지. 가상현실 속에서. 후후.’ ‘지금 진담이냐?’ ‘말리지는 않지만… 뭐, 마음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니까.’ “핫!” 나는 신음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아….” 악몽이군. 나는 씁쓸히 웃고는 이마를 짚었다. 좀 거친 침대 시트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어났어?” 음? “릴?” 릴이 내 팔을 꼭 껴안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으음. 담요 아래로 릴의 알몸이 살짝 비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있지 않는 새하얀 몸. 나는 그런 릴의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눈가를 찌푸렸다. “자는 모습도 멋지다니까.” “…….” 우웃! 놔라! 나는 내게 엉겨 붙어 오는 릴을 떨쳐내려 애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새벽인가? 워낙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암흑가지만 몇 개월째 여기서 살다시피 하고 있는 나는 아침이든 새벽이든 대충 분간 할 수 있었다. “진, 좀 놀자아.” 미치겠군. 나는 유혹하듯 담요를 가슴 부근까지 내리며 나를 바라보는 릴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또 인 모양이군. “싸웠지?” “뭐?” 내 말에 릴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확실하군. 나는 릴에게 내 셔츠를 던져주며 투덜거렸다. “센하고 싸웠으면 둘이서 해결하라 이거야. 왜 날 끌어들이려고 하냐고. 거기다 그렇게 옷 다 벗고 내 침대에 끼어 자서 어쩌자고?” “하, 하지만… 센이 확실하게 날 사랑하는 지도 헷갈린다고. 그래서 확인도 할 겸해서….” “젠장! 그렇다고 남의 침대에 알몸으로 기어들어와!?” “흥. 어차피 진이야 숯기가 없어서 덮칠 위험도 없으니까. 하아….” 나는 침대에 드러눕는 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몇 번째야? “그런데 네가 알몸이라도 내가 옷을 다 입고 있으니 오해 사기도 힘들 텐데?” “아니야. 센이 침착해 보여도 이럴 때는….” “진! 릴 못 봤어!?” 나이스 타이밍이군. 나는 문을 거칠게 열고 방으로 뛰어 들어오는 센을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센은 손에 들린 종이 하나를 마구 휘저으며 급히 소리쳤다. “릴이 이제 끝내니 어쩌니 하면서 사라졌다고! 여기에는 아무나 붙잡고 잔다고… 응?” 나는 센의 시선이 내 옆에 누워있는 ‘알몸’의 릴과 같은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오가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이이인! 너 이 자식!” 나는 그대로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하하핫. 역시 액션배우 감이라니까.” 창문을 박살내며 건물에서 탈출한 나를 보며 레딕이 한 말이었다. 제길. 쓰라려라. 나는 유리에 긁힌 상처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저 둘은 왜 날 물고 늘어지는 거야?” 나는 위에서 엄청난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센과 릴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레딕은 피식 웃으며 내 넋두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음? 그건?” 나는 레딕의 뒤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상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 질문에 레딕은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식량하고 여러 가지가 떨어져서… 미안.” “아, 상관없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레딕의 어깨를 두드렸다. 레딕은 머리를 긁적이다 상자를 들어올렸다. “얼마나 남았어?” “아, 1억 정도….” 역시 돈 들어가는 곳이 많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5억 중에 4억을 쓴 건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4개월 전에 처음 왔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진 환경이었다. 거기다 이제는 암흑가의 사람들도 꽤 건강해졌고, 삶도 꽤나 풍족해졌다. 나는 피식 웃고는 레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진.” “음?” “정말 괜찮은 거냐?” 레딕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 리가 있나. 내 피 같은 5억이었는데. 그래도 아직 10억이나 남아있다고.” “하지만 이번 일을 실행하면… 또 5억은 들어갈 거라고 민 형님과 센 형님이 그랬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 회색의 안개가 낀 듯한 하늘이었다. 쳇. “상관없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떠날 수 있으면 좋은 거지.” “…고맙다.” “별로.” 나는 미소를 지으며 레딕과 함께 걸었다. 이번 일. 암흑가의 사람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이었다. 새로 정부에 등록시키고 살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 물론 그게 불가능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 어린, 십대 후반의 녀석들은 가능하기도 했다. 물론 뇌물도 쓰고 하려면 돈이 꽤 많이 들겠지만. 지금까지 암흑가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터전을 가꾸는데 만도 4억이 들었다. 그러니 레딕이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상관없으니 된 거지. 어차피 평생 쓰기도 힘든 돈인걸. “하지만 이러다 알거지가 될 지도.” “뭐?” 내 중얼거림에 레딕이 희한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어주고는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리군.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눈을 약간 가늘게 뜨며 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 없어졌어? “훗. 무심에 꽤 다가섰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하군.” 나는 아버지가 남겼던 무서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사람인만큼 무심 어쩌고 하는 것을 완벽히 얻기는 힘들겠지.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강 사범님의 도장이….” 나는 텅 비어버린 도장이 있던 장소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옛날처럼 짧게 자른 머리라 머리카락이 출렁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어떻게 된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텅 비어있는 건물. 강 사범님이 도장의 문을 닫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건 뭐지? 4개월만에 망했다고 보기도 힘든데? “음?” 나는 벽에 붙어 있는 광고지 같은 것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뭐지? “후… 난 또 뭐라고. 도장 이사? 음? 태권도장과 검도장을 동시에 운영한다라. 어, 어째 불길한데?” 나는 태권도장과 검도장을 동시에 갖춘 도장을 새로 꾸렸다는 글귀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강 사범님과 한 사범님이 어떻게 되신 것은 아니겠지? “아.” 나는 벽보 옆의 거울을 보며 몸을 굳혔다. 내 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울. 내 모습은 나조차 생소할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짧은 검은 머리에 약간 그을린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개의 칼자국과 흉터가 마치 다른 사람 같은 기분을 풍기게 하고 있었다. 그리 보기 흉한 흉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느낌을 다르게 하고 있었다. “훗.” 알아볼까? 4개월…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군. 나는 오른쪽 뺨에 길게 그어져 있는 흉터에 손을 가져갔다. 암흑가에서 얻은 상처다. 암흑가의 사람들은 원한을 산 곳이 많았다. 덕분에 가끔씩 공격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부에서 경찰 등이 오지야 않았지만 고용된 깡패 같은 사람들은… 그때 마다 나는 가장 앞에서 싸웠다. 공격해온 사람들이야 빔건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칼은 당연 소지품이었다. 덕분에 이런 흉터들을 얻게 된 것이고. 머리를 짧게 자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긴 머리는 진짜 목숨을 건 싸움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어쨌든 이 세상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 다는 사실, 처음에는 경악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런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쓴 돈도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요새는 이런 공격은 전혀 없다. 어쨌든 이런 일들은….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로군.” 나는 꽤 변한 내 얼굴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암흑가에서 거울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나와서 보니 기분이 더 색다르군. 특히, 눈이 변했어. 왠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눈 같군. 섀도우 월드 속에서 다크소드라는 이름을 얻었을 때 하고 있던 눈이다. 이상하게 착 가라앉은 듯한 눈. “재밌군.” 그래도 기본적인 얼굴은 똑같은데? 분위기가 너무 변해서 그렇지. 전에는 좀 유쾌한 분위기였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된 거 도장에 찾아가는 건 포기해야할까? 만나서 좋을 일도 없을 것 같은데.” 고민고민해서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이렇게 된 거 그냥 가는 게 좋겠어. 나는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 그때 내 시선을 잡는 글이 있었다. 벽보의 가장 아래에 적힌, 직접 쓴 글씨. ‘김현진 임시사범. 네놈 자리는 여전히 남겨뒀다.’ “하하하. 강 사범님이 쓰신 건가? 이거 안 갈수 없겠는데?” 나는 새 도장이 위치한 장소를 확인하고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도장의 입구에 매달려 있는 작은 간판을 바라보았다. 태권도사범 강진철. 검도사범 한수진이라. 언제 의기투합하셔서 이런 도장까지 차리셨나 몰라. “후우. 가볼까?” 나는 약간 긴장하며 도장 안으로 들어갔다. 와글와글. “사람 많군.” 나는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목검을 휘두르거나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운데?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여자인가? “무슨 일이시죠?” 고개를 돌린 나는 눈을 약간 치켜떴다. 헉!? 예쁘다. 나는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검도복에 목검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검도를 하는 사람인가? 도장에서 배분이 꽤 높은 사람인가 보군. 나는 초연 씨보다 더 예쁜듯한 여자를 보며 순수히 감탄했다. 이 미모에 검도도 꽤 잘한다는 거잖아? 그래도 그 동안의 수련으로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은 나는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여기 강 사범님을….” 여자는 내가 말을 하다 말자 의아한 얼굴이었다. 나는 강 사범님과 한 사범님이 서 있는 곳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 오랜만에 왔으니… “훗.” “예?” “아, 여기 실력이 꽤 되는 사범들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강진철과 한수진이었나? 그 두 사람과 겨뤄보기 위해 왔습니다.” 여자는 평범하지 않은 외모를 가진 내가 그런 소리를 하자 꽤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주위에 서 있던 수련생들도 내 말을 듣고는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대련을… 하러 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를 보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레? 이 여자 심상치가 않군. 나는 여자의 기도가 좀 바뀐 것을 느끼고는 약간 감탄했다.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웃음이 비웃는 듯이 느껴졌는지 사람들의 눈이 사나워졌다. 이거 사범님들이 꽤 신뢰를 받으시는 모양인데? 나는 그대로 여자를 지나쳐 걸어갔다. “죄송하지만 대련은 미리 약속을 잡으셔야 합니다만.” 나는 여자의 말에 몸을 돌렸다. 오호? 나는 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보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싸우겠다는 눈빛인데? 그런데 이거 왠지 낯설지가 않은걸? 나는 어째 익숙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신세진입니다.” 신세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잘못 느낀 건가? 나는 약간 장난기가 생기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애송이에게는 관심 없습니다.” 순간 여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리고 사나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나는 별 표정 변화 없이 세진이라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여자. 역시. 아무리 봐도 언제 본적이 있는 듯한 기분인데? 착각인가? 아니면 한 사범님이 가르치셔서 자세나 기도가 익숙한 것일 수도 있고. “뭐, 준비 운동이로는 좋겠군요. 상대해 드리죠, 아가씨.” 나는 빙긋 웃고는 벽에 기대져 있는 목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나와 세진이라는 여자가 대치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하. 이거 어째 내가 악당이 된 듯한 느낌이군. 나는 빙긋 웃으며 세진이라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세진이라느 여자는 긴장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들이지?” 웃? 나는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두 사범님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쳇. 나는 그대로 목검을 휘둘렀다. 당황하며 마주 목검을 휘두르는 여자. 설마 내가 방어구도 착용하지 않고 검을 날릴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검이 서로 부딪히려는 순간, 나는 몸을 빙글 돌리며 목검을 움직였다. 빙글 돌아 여자의 목에 겨눠지는 목검.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 무슨 짓입니까!” 한 사범님이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피식 웃으며 목검을 거뒀다. 목검을 치우자 여자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싸늘하게 웃어준 나는 사범님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전하러 왔습니다.” “뭐예요?” 나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두 분을 바라보았다. 과연 날 알아보실까? 그때 강 사범님이 앞으로 나서셨다. 그리고는 나를 마주 바라보셨다. 으음. “전에도 이런 일이 한번 있었지. 한 25년 정도 전의 일인가?” 나는 사범님이 살짝 미소 짓고 계시는 것을 보고는 역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얘기를 하시는 거군. 눈을 깜박거리며 나와 강 사범님을 번갈아 바라보시는 한 사범님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미소를 지우며 얼굴을 굳혔다. 순간 나와 강 사범님이 빠르게 움직였다. 사범님의 머리가 있던 곳을 지나가는 내 돌려차기와 내 가슴이 있던 곳을 통과하는 강 사범님의 발차기. “무, 무슨!” “하아앗!” “하압!” 나와 강 사범님이 사나운 기세로 맞부딪히자 사람들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공간 확보. 나는 몸을 숙이며 강 사범님의 발차기를 피했다. 전이었으면 긴 머리에 공격이 스쳤을 텐데. 머리를 자르기를 잘 했군. 순식간에 공격을 주고받는 나와 강 사범님을 보며 사람들이 탄성을 토했다. 제길. 한대만 맞으면 죽을 것 같은 건 여전한데? 퍼억! 강 사범님의 내려찍기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매트에 박혀들었다. 역시 무서우신데? 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을 고수하며 돌려차기를 넣었다. 강 사범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내 공격에 주위의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쳇!” 순간 내 가슴으로 강 사범님의 발이 날아왔다. 치이익! 우욱, 쓰라려. 강 사범님의 공격이 스쳐지나간 가슴이 상당히 쓰라렸다. 그리고 연속으로 날아오는 공격들. 역시 읽히는 것은 여전하군. 나는 침착하게 대응해 나갔다. “누, 누구지 저 사람? 가, 강 사범님과 대등하게….” 대등 좋아하네. 나는 강 사범님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에 공격까지 해 나가는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에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대등? 내가 조금씩 밀리는 거 안 보이시나? 나는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공격에 몸을 숙였다. “하앗!” 순간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동시에 일으키며 올려차기를 넣었다. 강 사범님의 턱을 노리고 날아가는 내 공격에 강 사범님이 피식 웃으시며 뒤로 물러나셨다. “좋아. 어디 마음대로 덤벼 보거라.” 나는 눈을 빛내며 그대로 무릎을 굽히면서 다리를 내려 로우 킥을 날렸다. 순식간에 몸을 띄우시며 내게 발차기를 날리는 강 사범님. 나는 왼손으로 공격을 흘려보내며 몸을 굴렸다. “하앗!” 나는 고개를 들자마자 급히 몸을 날렸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강 사범님의 공격이 박혀들었다. 장난이 아니신데? 나는 싸움에 정신을 집중하며 몸을 움직였다. 파팟! 퍽! 치지직! 별별 희한한 소리들을 내며 사범님의 공격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적중 당했을 공격들을 보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내가 늘기는 했군. “웃!” 왼쪽. 나는 보다 확실하게 강 사범님의 공격을 예측하며 반격을 날렸다. 주로 방어를 하던 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래봤자 적중하는 공격이 없으니 문제지. 부우웅! 엄청난 소리를 내며 강 사범님의 발차기가 날아왔다. 가슴인가? 나는 몸을 살짝 비틀며 사범님에게 역시 발차기를 넣었다. 순간 강 사범님의 공격이 내 왼 가슴에 적중했다. “우와아!”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직 아니야! 나는 충격을 이용해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 내 돌려차기가 날아갔다. 전에도 이런 기술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는 스치는 공격이었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퍼어억! 순간 내 돌려차기가 강 사범님의 어깨를 강타했다. 강 사범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성공이다! 하지만??사범님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으윽??? “이놈!” “흥. 설마 아직도 그런 고함에 놀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강 사범님은 약간 건방진 말과 함께 자신의 공격을 뒤로 덤블링 해 피해내는 나를 보며 피식 웃으셨다. “많이 늘었군.” “아직 멀었습니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아직도 꽤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계신 강 사범님을 보며 혀를 찼다. 역시 괴물이시라니까. 그래도 큰 거 한방 넣었으니 됐지. 확실히 많이 늘었군. “으음? 진철 씨. 아는 사람이에요?” 한 사범님이 어느새 다가와 강 사범께 질문을 던졌다. 헥. 한 사범님은 못 알아보시는군. 나는 피식 웃으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내가 변하긴 했나보군. 4개월 만에 그렇게 많이 변한건가? “두 분 결혼이라도 하셨습니까? 내 질문에 한 사범님이 고개를 갸웃하셨다. “아직은. 약혼까지는 했네만.” “맙소사. 그 포악하신 두 분이 결합하신다니, 제 앞날이 두려워집니다.” “뭐야?” 나는 뒤로 몸을 퉁겨 바로 섰다. 목을 우득거리는 나를 바라보시던 한 사범님의 얼굴이 묘하게 변해갔다. “서, 설마… 혀, 현진 군!?” 쳇. 이제 알아보시는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사범님.” “세, 세상에!” 한 사범님이 입을 가리시며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으아아악! 저, 저 사람이 현진이 형이라고!?” “마, 말도 안돼!” 나는 저쪽에서 비명을 지르며 까불거리는 꼬마 녀석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발광을 하던 꼬마 녀석들은 내가 손을 흔들어 주자 몸을 움찔하고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으음. 전에도 좀 팼었는데 분위기까지 좀 살벌해지니까 알아서 피하는군. 나는 피식 웃고는 검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두 얼굴을 발견한 나는 손을 들어올렸다. “아하. 오랜만에 보네요, 진태 형, 민지 누님.” “아아, 그, 그래. 오, 오랜만이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인사를 받는 둘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그냥 오지 말 것을 그랬나? 왠지 씁쓸한데? “잠시 인사나 드리러 왔습니다. 아, 저기 저건 선물입니다.” 나는 도장 입구 옆에 놔둔 전통주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시는 강 사범님.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벌써 가는 건가?” 당황한 듯한 강 사범님의 목소리에 나는 계속 걸어가며 대답했다. “그저 인사나 드리러 온 겁니다. 더 있어서는 어떤 얘기가 나올지 몰라서요.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강도훈이나 초연의 얘기가 나올지 모른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에 강 사범님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지?” 도장을 빠져나와 길을 걷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암흑가로 돌아갈까? 아무 말도 없이 나와서 좀 불안해 하고 있을 텐데? 뭐, 그렇게 걱정하지도 않겠지만. “이제 여기서도 갈 곳이 없는 걸?” 진성이를 찾아가기도 그렇군. 어디에 있을 지도 모르니까. 재훈이나 보러갈까? 그러고 보니 재훈이하고 센을 한번 만나게 해주려 하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군. “잠시만요.” 음?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아까 그 아가씨네? 세진이라고 했었나? 내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세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으윽. 예쁜데? 밖에서 보니까 더 예쁘다. 나는 검은 생머리를 찰랑거리는 세진이라는 여자를 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따라 온 거야? “무슨 일이신지?” 내 질문에 세진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좀 둔하네요? 1년간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현실에서 만나네요. 반가워요.” 1년? 섀도우 월드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여자의 예쁜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얼레? “나프…네?” “예. 미토스 말로는 섀도우 월드에서와 모습이 똑같다고 했는데… 덕분에 전혀 몰랐어요.”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 여자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별일이군. 당신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 도장에 다니는 건가?” “예. 아시다시피 제 작은 할아버지가 무승이시니까요. 검도를 꽤 했거든요. 작은 할아버지와 강 사범님이 친분이 있으셔서 여기에 오게 됐죠.” 작은 할아버지? 고타가 나프네의 작은 할아버지였나? “섀도우 월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그랬겠지. 4개월 동안 한번도 접속하지 않았으니.” 내 말에 나프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왠지 알고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로군. “미토스로부터 대충 얘기는 들었어요. 헌터도 그만두고 페페하고도 완전히 헤어졌다고 하고… 미토스로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섀도우 월드는 그만하는 건가요?” “아마도.” 내 대답에 세진이 약간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토스가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나프네도 내가 섀도우 월드를 좋아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거 어째 그리 좋지 않은 외출이 될 것 같은데? “돌아오지 않을 건가요?” “…….” “오래 찾았다고요.” 엉뚱한 말에 나는 약간 의외라는 눈으로 나프네를, 세진이랬나? 세진을 바라보았다. 왜? 내 시선에 세진이 약간 어색해 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현진 씨?” “!” “아?” 나는 살기가 끌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저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갈색 머리의 여자. 초연 씨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다음에 얘기하지.” 세진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한 나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혀, 현진 씨! 자, 잠시만….” 급히 달려오던 초연 씨는 내 눈빛에 우뚝 멈춰 섰다. 살기가 섞인 눈빛. 같은 방향에 서 있었기에 함께 내 눈을 보게 된 세진도 몸을 움찔했다. 잠시 그렇게 초연 씨를 주시하던 나는 비웃 듯 입가를 올리고는 몸을 돌렸다. 내가 걸어갔지만 초연 씨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 좋은 외출은 아니군.”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 일 이후로 생겨난 이 살기가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별로.” 나는 민의 말에 씁쓸하게 웃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외출이 별로였나 보죠.” 레딕이 초콜릿 바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훗. 그래. 상당히 별로였다. “집중하시지.” 나는 상당한 저기압에 빠져있는 센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릴하고 또 대판 싸운 모양이군. 나는 센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후, 대충 알아봤는데… 한명 내보네서 독립시키는데 한 1, 2억은 들더군.” "1, 2억이라고?" 내 질문에 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 2억이라. 지금 남아있는 돈, 최대한 끌어모아도 12억 정도. 그럼 많아야 10명 정도라는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왜 그렇게 많이 드는 거야?" 내 질문에 센이 민을 잠시 바라보았다. 뭐지? 민은 센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센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살아갈 수 있는 공간, 간단한 원룸이라도 구해주는데 3000은 들더군. 그리고 일거리에 대충 정착을 시켜주는 데 드는 돈까지 합하면 대충 5000만이면 될 거야." 5천? 그런데 거기서 2억으로 뛰는 이유가 뭐지? 나는 의아한 얼굴로 센을 바라보았다. 센은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뇌물이지 뭐." "뇌물?" 뇌물에 그렇게 많이 든다고? "잠깐, 최대한 뇌물을 쓸 필요가 없는, 그 동안 일에 참가한 적이 없는 사람들을 고르라고 했잖아. 그런데 뇌물이 1억 정도까지 든다고?" 내 질문에 센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1억도 작게 잡은 거야." 큭, 뭐, 뭐야?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센을 바라보았다. 1억이 작다니? 무슨 뇌물이 그렇게 많이 든다는 거야? "아직 정확하게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암흑가에 있는 사람들은 몸이 정상인과 좀 다르다." 음? 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몸이 정상인과 다르다니? "무슨 말이죠?" "너만 해도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을 텐데? 너도 암흑가 출신자의 피를 이었으니까." 나? 나는 눈을 깜박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셋을 바라보았다. 다른 점이라니? 내가 모르겠다는 얼굴이자 셋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이봐, 너 싸움 잘하는 것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아냐." 레딕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싸움 잘하는 거라니? 그거야 태권도하고 검도를 했으니까 그렇지. "그거야 배웠으니 그런거지." 내 말에 셋은 일제히 머리를 짚었다. 왜, 왜 저래? "너, 상대의 기척을 느끼거나 하는 능력은? 그리고 네 싸움 실력이 네 나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을 텐데?" 뭐? 민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느끼는 능력? "음? 그건 내가 섀도우 월드에서 쓰던 기술이야. 그걸 현실에서 쓰려고 하다보니 이렇게 된...." 내 말에 레딕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해? 푸하하핫. 그럼 게임에서 쓰던 마법도 현실에서 구현 되냐? 크큭.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뭐? 나는 당황한 눈으로 레딕을 바라보았다. 하, 하긴. 게임에서 쓰던 기술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게 말이 안돼는 것이긴 하지.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때 민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임에서의 기술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해. 물론 전투 경험 같은 거야 대충 구현이 되겠지만." 민의 말에 경험 어쩌고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경험은 된다 그거로군. "네 그 남의 기척을 느끼는 능력. 그건 세한도 가지고 있던 능력이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도 가지고 있던 능력이라고? "아버지가?" "그래. 하핫.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설마 게임 어쩌고 말을 할 줄은 몰랐군. 그 리고 네 살기가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도 세한과 똑같아." 나는 놀란 얼굴로 민을 바라보았다. 어, 어라? 그건 뇌에 이상이 가서 그런거 아니었어? "우리 암흑가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우리의 부모들이 신체 개조 실험의 대상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놀란 얼굴로 민을 바라보았다. 신체 개조라니? "너도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나? 암흑기의 생활에 대해서. 인류의 타락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88혁명으로도 완전히 없애지 못한 잔류물이 바로 우리지." "잔류물?" 내 멍한 되물음에 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혁명을 주도했던 이민성도 우리들의 처리에 고심했다고 하더군. 결국 우리는 버려졌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갔지. 정부에서 우리를 쉽게 건드리지 않는 것도 그런 사실이 들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아무말 없이 민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이곳을 떠나기도 힘든 이유지. 정부에서 가지는 걱정을 덜 만큼의 돈이 필요하니까." 민은 말을 마치고는 씁쓸히 웃었다. 하하. 약간 혼란스럽군. "그럼 나도 정상인은 아니라는거군." "그래. 네 아버지 세한이 그 신체 개조의 희생자였으니까. 뇌에 관한 실험과 근력 강화 등에 대한 실험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아기 시절의 일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뇌에 관한 실험을 집중적으로 받았지.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대부분의 실험 대상자들이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나는 약간 사나운 눈으로 민을 바라보았다. 뇌에 관한 실험이라. 그럼 그때 프로그램이 이상을 일으킨 것도 이런 이유에선가 내가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센이 눈을 약간 크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인데? 그걸 영향으로 심해진 모양이지.” 쩝. 나는 혀를 살짝 차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신체 개조라. 쳇. “그래서, 암흑가의 사람들이 신체 개조 실험 대상자들이었기 때문에 뇌물이 많이 드는 거라고?” 내 질문에 민은 센에게 눈짓을 보냈고 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음, 그래. 그리 심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약간씩 몸에 이상이 있으니까. 혁명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씩 들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치명적이야. 그래서 최대한 막을 게 분명하거든. 여러 가지로 돈이 많이 들게 확실하지.” “제길. 그래서 대충 얼만데?” “예산을 10억으로 잡으면… 안전하게 잡아서 4명 정도.” 나는 눈을 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심하군. 4명이라. 나는 어색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고 있는 센을 바라보았다.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자.” “음?” 센은 내가 내미는 카드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나는 내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늘인 거니 되는대로 한번 써봐. 그리고 개조 어쩌고 하는 문제는 그만하자고.” 센이 카드를 집어드는 것을 확인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여기 있었군.” 캔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는 레딕의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초콜릿 바를 입에 물고 있는 레딕을 볼 수 있었다. 쳇. 그거 내 돈으로 사면서 항상 물고 다니냐. 도대체 초콜릿을 얼마나 사온 거야? “아아.” “먹지 그래.” 나는 레딕이 내미는 초콜릿 바를 하나 집어 들고는 빈 캔을 멀리 던져 버렸다. 몇 번 퉁퉁 튕기던 캔은 콘크리트 더미의 사이로 사라졌다. “핫, 쓰라리냐?” 레딕의 말에 나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레딕을 바라보았다. 레딕은 피식 웃더니 초콜릿을 입에서 떼고는 말했다. “애들 독립시킨다고 센에게 준 돈 말야.” “…내가 먹고 살 만큼은 남겨 뒀어.” 내 말에 레딕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센의 말로는 네 재산은 그 집하고 1000만원 정도가 끝이라던데? 그걸로 살 수 있냐? 직업도 없으면서?”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무너지고 붕괴되어 가는 건물들이 죽 늘어선 암흑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직업을 구해야지.” “헤엥…….” 나는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내는 레딕을 살짝 노려보았다. 레딕은 잠시 나를 주시하더니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뭐지? “내가 보기에는 넌 이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 같은데?” “섀도우 월드라…….” 나는 전단지 비슷한 섀도우 월드의 광고지를 보며 레딕을 노려보았다. 레딕은 내 눈빛에 몸을 움찔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 하하… 섀도우 월드에서의 아이템이나 돈을 현금으로도 바꿀 수 있더라고. 물론 간신히 생활이나 가능할 정도지만. 그래도 네 다크소드라면 어느 정도 벌이가 될 거야.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고.” “레딕.” 내 나직한 목소리에 레딕은 내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레딕은 입을 다물었고 나도 침묵하며 암흑가의 적막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다크소드.” 갑작스런 레딕의 부름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 자식이 오늘 왜 이래? “그 이름으로…….” “네놈하고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냐?” 나는 순간 식은땀을 흘리며 레딕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레딕은 킬킬거리고는 다시 말했다. “정말 공포 그 자체였지.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나 할 정도로 말이야.” “쳇. 그러는 너도 완전한 싸이코였다고.” 나와 레딕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곧 시선을 거둔 우리는 피식 웃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곧 레딕이 입을 열었다. “그때는 정말 널 죽이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그렇지 않다.” “네가 날 죽일 수나 있겠어?” 레딕은 내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약간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레딕이 몸을 일으켰다. “네놈이 그 세상을 좋아하는 것, 내 몸으로 체험해 봐서 너무도 자알 알고 있다고. 그런 곳이니… 그곳의 타락을 막는 것도 기쁨 아니겠어? 잘 생각해 보라고.” 레딕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내 옆에 놓여있는 섀도우 월드의 광고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그것을 쳐버렸다. 종이가 펄럭거리며 날아갔다. “좋았던 만큼 실망도 크다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 “글쎄!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레딕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저 녀석이 좀 이상한데? 나는 레딕이 뭔가 이상한 것을 먹은 것은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단 말야. 음식 찌꺼기를 먹고도 멀쩡한 놈이 외부에서 사온 ‘식품’을 먹고 이상해 질 리가 없잖아. 잠시 후, 나는 내가 억지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바람이나 쐬고 와야지.” 나는 콘크리트들을 뛰어 넘으며 태양을 향해 이동했다. “이거 운이 없는 건지 있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거대한 콘크리트의 산 위에 올라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저쪽에서 검은 복장을 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흐음. 요새는 뜸하더니 웬일이야? 나는 짧은 머리를 마구 털고는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여기서 더 이상 가게 할 수는 없지. “진?” “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짧은 갈색 머리에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은 여자였다. 저번에 레딕과 함께 나를 습격했던 사람들 중에 하나였던 암흑가의 사람이었다. 콘크리트 더미를 올라오고 있는 소라를 알아본 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오늘은 솔이 정찰 담당이었나 보지? 안녕.” 솔이라는 호칭에 얼굴을 약간 찡그린 소라는 내 옆으로 올라와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저쪽에서 두리번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검은 복장의 사내들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가서 알리라고.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내 말에 솔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뭐, 어떻게든 되겠지. 더 이상 들여보내서는 위치가 들통날 수도 있잖아. 여기서 막고 있어야지.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어디 사람들 같아?” 내 질문에 소라는 검은 복장의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곧 고개를 든 소라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글쎄요. 얼핏 보기에는 칸 그룹의 사람들 같은데… 의뢰처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래? 가봐.” 소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급히 뛰어갔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몸을 풀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라와는 이 콘트리드 산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기에 괴인들은 여전히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여러 가지로 기분이 별로였는데, 기분이나 풀어볼까.” 나는 주머니에서 강철이 덧대어진 가죽 장갑을 꺼내 손에 꼈다. 그리고 품속에 있는 빔건을 잠시 정비한 나는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검은 옷의 사내들이 몸을 움찔하다가 나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제, 젠장!” “그놈이야!” 나는 나를 보며 경악해 소리를 지르는 녀석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날 아는 놈들인가? 하긴, 그 동안 여기에 살면서 이쪽 인간들에게도 내가 꽤 알려졌다. 나는 품속에서 나이프를 꺼내드는 검은 놈들을 보며 살기를 띄었다. 이게… 쳇. “그래, 그러니까 태산 그룹에서 보냈다고?” “그런 모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곱게 차려서 정중한 편지와 함께 돌려보내.” “핫. 알겠습니다. 야! 반만 죽여서 협박 편지하고 같이 돌려보내!” 훗. 나는 피식 웃다가 상당한 고통을 느끼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릴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쯧. 그러니까 왜 혼자서 객기를 부려요. 뭐, 당연히 이기기야 했지만.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고 릴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시를 내리던 레딕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핫. 칼침 한방 맞았군. 며칠 쉬어야겠다. 칸 그룹, 깡패 놈들에게는 반쯤 죽인 쓰레기하고 정중한 협박 편지를 보내기로 했어. 태산 그룹에는… 어쩌지?” “한 2000만 보내. 센에게도 한번 물어보고.” “쩝. 그러지. 넌 좀 쉬어라.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게. 쯧. 괜히 흥분해서는…….” 나는 뒤통수에서 강한 충격을 느끼고는 의식을 잃었다. “으음…….” 나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으으, 어지러워. “일어났어요?” 릴이로군.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내 몸이 뭔가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밧줄? 릴에게 이런 취미도 있었어?” 나는 내 몸을 꽁꽁 묶고 있는 밧줄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릴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밧줄을 풀어주었다. “상처를 꿰맬 때 움직일까봐 묶어 논 거예요.” “꿰, 꿰매?” 나는 입을 벌리며 릴을 바라보았다. 으윽. 기, 기어코 내 몸에다 바늘을 꽂았다 그거지? “제길. 레딕 자식이 기절시킨 이유가 있었군.” “훗. 맞아요. 당신 흉터를 늘리지 않으려고 의술도 배웠는데 쓸 기회가 없어서 부탁했죠. 괜찮아요?” 나는 내 팔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괜찮게 해놨군. 그 동안 잘 피해 다녔는데 기어코 이렇게 되어버렸군. “쳇. 기절시키려면 차라리 수면제라도 사올 것이지… 망할 자식.” 나는 욱신거리는 뒤통수에 불만을 토했다. 릴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책을 들어올려 읽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릴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센하고 또 싸웠어?” 내 물음에 릴은 고개를 저었다. “센은 나갔어요.” “뭐? 나가다니?” 내가 놀라서 되묻자 릴은 피식 웃고는 설명했다. “어떤 국회의원 나으리를 만나러 간다는 것 같았는데… 아, 참고로 이틀 동안 기절해 있었 어요. 레딕이 혹시 돈을 돌려받으려 할지 모른다고 수면제를 먹였거든요.” “…….” 망할 자식. 수면제? 그래서 이렇게 어지러운 거였군. 나는 레딕에 대한 살의를 불태우며 이를 갈았다. 그런데… 국회의원을 만나러 갔다면… 나는 쓰게 웃었다. 음, 이제 확실히 뭔가 일을 구하기는 해야겠는데? “아까워요?” 나는 릴을 바라보았다. 릴이 약간 애매모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돈도 얼마 없다던데. 레딕 말처럼 섀도우 월드나 다시 하는 게 어때요? 먹고 살 만큼은 벌 수 있다던데.” 나는 릴을 쏘아보았다. 약간 움찔하던 릴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이 인간들이 왜 이런 다냐? 쳇. 섀도우 월드라… 나는 흐릿한 창밖의 하늘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왜 웃는 거야?” 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릴을 노려보았다. 릴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몸을 일으켰다. “아니, 누가 그러더라고요. 섀도우 월드 얘기를 꺼내면 추억에 잠길 사람이 있을 거라고. 후훗.” 으윽! 나는 총총거리며 방을 빠져나가는 릴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나가볼까? 나는 몸을 조금씩 움직여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섰다. 쳇. 약간 어지러워서 균형 잡기가 좀 힘든데? 나는 좀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이, 이게 뭐야?” 나는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마! 거기가 아니라니까! 이쪽이야!” “어어! 야! 넘어진다!” 나는 웬 트럭 한대와 그 트럭에서 내려지는 수많은 기기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것들이 다 뭐야? 그때 센이 내게 다가왔다. 센은 손에 슈퍼북 하나를 들고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우하핫! 진! 보라고! 최신형 슈퍼북이야! 캬~! 이거 꼭 가지고 싶었는데. 온라인도 옆으로 빼 침투해서 연결도 완벽해 질 거라고. 우훗.” 나는 히죽거리는 센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빛냈다. “센! 이게 무슨…….” “아, 이거.” 나는 센이 내미는 카드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라? 이거 내 은행 카드 아냐? 나는 의문섞인 눈으로 센을 바라보았고 센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 3억 정도는 남았을 거야. 6억은 썼고 1억은 우리 생활비.” “세, 센. 그러니까 어떻게 돈이…….” 센은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렸다. “설마 우리가 네놈 돈을 먹고 좋아할 줄 알았냐? 암흑가를 벗어나는 건 포기하기로 했어.” 뭐? 나는 당황하며 센을 바라보았다. 포, 포기하다니? 나는 급히 센을 붙잡았다. 센은 눈을 초롱초롱 뜨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윽, 설명을 좀 필요한데?” “그래? 어이~! 좀 알아서 설치해! 발전기에서 가까운 곳으로. 그러면 내가 알아서 연결할 테니까!” 센은 컴퓨터에서 별별 희한한 기계들을 힘겹게 옮기고 있는 녀석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이 기계들을 옮기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센은 나는 돌아보았다. “뭐부터 설명할까?” “다.” 센은 볼을 긁적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 모두를 모아놓고 얘기를 해봤는데… 네 돈을 꿀꺽 하면서까지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 그래서 방향을 바꿨어.” “방향을 바꾸다니?” “아아. 의원 나으리들과 얘기를 좀 했지. 우리는 여기서 그냥 살 테니까 최소한의 보장을 해달라고 했어.” “보장?” 센은 자신의 슈퍼북을 턱으로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이런 거지. 전기는 우리가 알아서 발전할 테니까 인터넷 정도는 연결해 달라고 했지. 이런 전산망을 이용해서 일을 해서 돈도 벌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고. 그리고 의원 나으리들이 힘을 좀 써서 지금까지처럼 뒷구멍으로 다니는 대신 암흑가 입구로도 당당히 다닐 수 있게 됐다고. 좀 신경을 쓰기는 해야겠지만. 그리고 거의 멀쩡하고 일을 나선 적이 없는 몇몇은 나가서 일도 할 수 있도록 조치했어. 뭐, 사는 거야 여기서 살아야겠지만.” 나는 멍한 얼굴로 센을 바라보았다. 그, 그러니까… 그저 최소한의 삶만 보장받는 대신… 영원히 여기서 살겠다고? 센은 내게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능… 했어?” “물론이지. 그 치들이야 우리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면 된다는 주의니까. 그냥 암흑가 근처에 약간 신경을 써서 사람들의 눈만 돌리면 되잖아. 뭐, 그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이지. 그리고 내가 하겠다고 한 일, 이런 전산을 이용한 일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일이니까. 뭐, 암흑가에서 나가지는 못해도 밖에서 먹을 것도 사오고, 이런 컴퓨터도 있으니 이제 살만 하지. 의원들에게 4억 정도. 컴퓨터하고 여러 기계들 사는데 1억 정도. 여러 가지 돈 좀 들이는데 1억. 나머지 1억은 우리가 일을 확보하기 전까지 쓸 자금이야. 그리고 남은 돈 3억. 알았냐?” 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센을 바라보았다. 센은 그런 내 반응에 쓰게 웃었다. “미안하다. 3억밖에 안 남겨서. 그래도 최대한 적게 사용했어. 괜찮냐?” “그,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하하. 상관없어. 우리야 지금까지 여기서 잘 살아왔고, 이제는 그때보다 몇 배는 살기 좋아질 테니까. 너는 신경 쓸 필요 없다고. 3억이면 평생 쓸 만 하지? 넌 집도 있으니까. 돈 떨어지면 우리가 먹여 살려줄게.” “하하…….” 나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센을 바라보았다. 센은 약간 축축해진 내 눈을 보고는 몸을 움찔하더니 볼을 긁적였다. “어, 어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그런 표정은 내가 짓고 싶으니까. 7억이라고 7억. 오히려 우리가 미안하단 말이야.” “그래…….” 나는 눈을 감고는 고개를 들었다. 뭐, 괜찮군. 센은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하아. 이렇게 눈을 감고도 뭘 하고 있는지 알 정도라니. 아버지. 참 좋은 능력 물려주셨……. “아, 맞다!” 나는 센이 갑자기 제자리로 돌아오자 눈을 뜨고는 센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 나머지 1억 말이야. 사실은 따로 쓸 데도 있어. 우리가 꼭 하고 싶었던 일도 하기로 했거든.” “뭐?” 하고 싶었던 일? 센은 빙긋 웃고는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뭐지? 나는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 잠깐! 저, 저건… 나는 장과 그 일당이 힘겹게 나르고 있는 기기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섀도우 월드… 게임 캡슐? 나는 센을 돌아보았다. 센의 눈이 안경 뒤에서 사납게 웃고 있었다. “복수, 리자드를 박살낼 거야.” 뭐? 나는 눈을 크게 뜨고는 센을 바라보았다. 리자드를… 박살내? 센은 내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 “걱정 되냐?” “음?” “섀도우 월드.” 나는 얼굴을 굳혔다. 센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씨익 웃었다. 이, 이 인간이! “하하핫! 역시! 걱정 되지!? 크히히. 걱정 말라고. 우리 힘으로 리자드를 무너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거든. 거기다 너도 있는걸. 우리의 진이 무지무지 좋아하는 섀도우 월드를 위협해서는 안 돼지. 음, 그렇고 말고.” 나는 싸늘한 눈으로 센을 노려보았다. 센은 잠시 움찔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리자드에서 하려는 일들을 좀 망칠 생각이야. 너야 일부로 소식을 피하고 있었으니 모르겠지만. 요즘 섀도우 월드에서 범죄가 점점 늘어가거든. 리자드의 방침 때문이지. 신기하게 플레이어는 더 늘어가고 있지만. 들어보니 헌터들은 조금만 나쁜 짓을 하기만 해도 한꺼번에 몰살을 시키고… 별별 일이 다 일어나고 있다더군. 뭐, 어쨌든. 섀도우 월드 속에서 착한 일이나 하고 다닐까 해서 말이야. 이게 리자드에게 좋은 일이 될지, 나쁜 일이 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뭐, 솔직히 말하면 우리도 여가 활동을 즐길만한 것이 필요하거든.” 나는 굳은 얼굴로 센을 바라보았다. 왠지… 뭔가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때 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 섀도우 월드로 돌아가라. 네가 좋아하는 그림자의 땅으로 가라고.” “무슨… 말이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센을 바라보았다. 센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리자드 사의 아메리카 지부나 유럽 지부에서 한국 서버를 노리고 있더군. 서버를 통합하면서 모든 수입이 한국으로 몰리고 있어. 덕분에 섀도우 월드로 벌리는 돈이 미국에서, 유럽에서 한국으로 건너오고 있다는 소리지. 그래서 아메리카, 유럽 지부에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켜, 한국 본사만으로는 서버를 관리하기 힘들다는 식의 말을 만들어내려는 것 같아. 자기들 서버야 어느 정도 관리를 해야 하겠지만. 자신들이 많든 녀석들을 한국 서버로 보내서 일들을 벌이려고 하는 것 같더군. 거기에 카메론도 협조하고 있고 말이야. 아직까지는 자연의 장벽을 뚫지 못하고 있지만.” “…….” “돌아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우리가 되는대로 협조하겠어. 그래도 조국이니 우리나라가 잘 살면 좋지.” “…….” “계기는 만들어 줬다. 이제 네 선택에 달렸어.” 나는 약간 설레는 듯한 느낌에 쓴웃음을 지었다. 계기라. 훗. 이런 거였구나. 왠지 레딕도 그렇고 섀도우 월드 얘기를 자꾸 꺼낸다 했더니… 내가 그렇게 티를 냈나? 이렇게까지 날 위해주는 건가? 나는 약간 기대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센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재미있군. “깨끗한 것이 좋겠지.” “뭐?” 내 중얼거림에 센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나는 눈을 뜨고는 미소를 지었다. “섀도우 월드를 완벽하게 청소해 보자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리자드에서 한 일들도 까발려 보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세상이 그런 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마음에 안 들어.” “오오?” “해보자고.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인권 단체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섀도우 월드가 없어질 가능성은 적어. 리자드고 카메론이고, 리자드의 다른 지부건.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은 전부 막아보자고.” “돌아가는 거냐?”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센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센은 슈퍼북을 옆구리에 끼더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 짜느라 고생 했겠군.” 센이 몸을 움찔했다. 나는 손을 놓고는 저쪽에서 장 일당이 열심히 나르고 있는 캡슐들을 바라보았다. 대충 10개 정도인가? “뭐, 여가를 즐긴다는데 내가 막을 이유는 없지. 그런데 너무 적지 않아? 거기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언제 내 힘이 되겠다는 거야?” 내 말에 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아, 돈을 벌면 점점 늘릴 거야. 한 사람당 하나씩. 그리고 실력은… 후후훗.” 뭐, 뭐냐? 나는 왠지 광기가 느껴지는 웃음을 흘리는 센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왜, 왜 이러는거지? 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후후. 곧 알게 될 거야. 리자드 녀석들, 랭킹 제도라는 것을 없앤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역시 센도 위험한 인간 중 하나야. 뭐, 넘어가지. 센이야 무모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럼… 궁극 목표 리자드의 만행 까발리기. 당장 목표, 여가 활동삼아 섀도우 월드의 악 청소하기 인가?” 내 중얼거림에 센이 입을 열었다. “네 허락도 맡았으니 현실에서도 일을 조금씩 벌여가야지. 내 해킹 실력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기대되는군.” 내 중얼거림에 센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왠지 떨리는데? 나는 왠지 미소를 짓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무표정을 고수했다. 어느새 눈을 뜬 센은 내 무표정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내 어깨에 손을 척 올려놓았다. “안 가?” “뭐?” 가다니? 어딜?“ “집에. 이왕 결정한 거, 빨리 가보고 싶지 않아?” 나는 멍한 눈으로 센을 바라보았다. 집? 집에는 캡슐이 없는……. “벌써 한대 설치해 놓고 왔어. 그럼. 정리도 좀 하고 연결들을 하려면 바쁘다고. 얼마간은 혼자 놀아. 우리 모두 바쁘니까. 후훗.” 센은 슈퍼북을 쓰다듬으며 걸어갔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이 꽤나 기분이 좋아보였다. 왜 기분이 좋은지 애매하군 그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계획 짜기 힘들었겠군. 꼼짝없지 당했는데? 나는 빙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오랜만에 집으로 가는 건가? 집은 깨끗했다. 관리 프로그램이 알아서 청소를 하고 지냈겠지. “…….”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일한 재산이 이 집이었지? 나는 냉장고 안에 캔커피가 수북하게 싸여 있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레딕의 짓이로군. “…….” 나는 집에서 가장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최신형 캡슐. 옛날과 꽤 달라진 모습의 캡슐이었다. 지이잉… 철컥. -섀도우 월드에 접속되었습니다. “…….” -섀도우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계정 아이디를 말씀해 주십시오. “…벼락부자.”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비밀번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 -확인되었습니다. 홍채, 뇌파 검사가 있겠습니다. 밝은 빛이 내 눈을 훑고 지나갔다. 하핫. -확인되었습니다. 화아악! 순간 시야가 바뀌면서 나는 깊은 숲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바위 위에 약간 오만한 폼으로 앉 아있는 검은 장발, 검은 망토의 사내. 그 사내는 화려한 검집을 가진 검으로 땅을 짚고 있었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검은 검사에게로 손을 뻗었다. -환영합니다, 세한님. 현실의 그림자, 그림자의 땅에서 즐거움을 얻으시길.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점차 밝은 빛이 내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아… 돌아왔나? 4개월 만의 귀환이었다. “후루룩. 차 맛이 좋네요, 마나르트.” -쳇.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페이린은 심심한 듯 몸을 흔들거리고 있는 마나르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심심한가 보죠?” -쳇. 그 망할 주인 자식이 1년째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심심한 게 당연하지. “흐응… 그보다는 걱정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페이린의 말에 마나르트는 몸을 격렬하게 떨며 고함을 질렀다. -무슨! 내가 왜 그런 자식을 걱정해야한다는 거야! “어머? 걱정해야 한다고 하지는 않았는데요? 후훗.” 마나르트는 투덜투덜 거리며 창문을 통해 통나무집 밖으로 나갔다. 엄청난 높이, 험한 산세. 마나르트는 검신을 옆으로 뱅글뱅글 돌리며 세한의 기운을 쫓았다. 레드드래곤, 세르페이린의 레어 위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존재감.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마나르트는 힘 빠진 몸놀림(?)으로 바닥에 내려섰다. -쳇. 이 망할 주인 씨는 언제나 돌아오려나. “흐음… 역시 걱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느새 따라 나왔는지 페이린이 마나르트의 뒤에 서 있었다. 주인도 아닌 주제에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페이린을 보며 마나르트는 이를 갈았다. -젠장. 남에 말을 엿듣는 취미라도 생긴 건가? 마나르트의 짜증 섞인 말에 페이린은 미소를 지었다. 페이린은 마나르트의 검끝이 향하고 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레어 위에 위치한 봉인석. 그 안에 세한의 몸이 들어있다. 처음에는 돌아오면 심심한 시간을 때울 겸 얘기나 하려고 데리고 온 거였는데… 일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세한이었다. “세한은 잘 있어요?” -흥. 그럼 잘 있는 봉인석이 어디 가겠나, 도마뱀.“ 순간 페이린의 이마가 살짝 꿈틀댔다. 페이린은 살기를 피어 올리며 마나르트를 바라보았다. “감히 어디서 그런 말을… 고작 검에 갇힌 마족 주제에…….” -고작? 감히 이 최상위 마족 마나르트에게 그 따위 말을… 죽고 싶나 도마뱀? 마나르트와 페이린 사이에서 험악한 기류와 더불어 마나의 충돌이 일어났다. 세한이 돌아오지 않은 지 딱 1년. 둘의 짜증과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평소에도 반목을 거듭하던 마나르트와 페이린 이었지만 그 동안은 잘 참아왔다. 하지만 마지막 잔을 채우는 건 물방울 하나. 결국 오늘 둘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겨우 최상위 마족의 힘으로 나에게… 죽고 싶은가요, 마나르트.” -흐흐. 겨우라.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검은 마신이 직접 만든, 사라지지 않는 절대의 검이다. 너 따위 비만 도마뱀에게 소멸될 물건이 아니지. 순간 둘의 사이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둘의 마나와 마기가 충돌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페이린의 눈이 드래곤의 눈으로 바뀌며 가공할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덩달아 마나르트에게서는 엄청난 마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힘이 봉인 되 세한이 없으면 제대로 된 마기도 사용하지 못하면서 큰소리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마족.” -1년 동안 꾸준히 힘을 회복한 나다. 저번처럼 아가리에 검날을 박아줄까? 순간 페이린의 얼굴이 꿈틀거리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에 휩쓸린 마나르트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마나르트의 앞에 검은 마기가 응집되어 마기 덩어리가 생성되어 폭발로 생긴 먼지들 속으로 날아갔다. -어디 죽어봐라! “감히!” 순간 엄청난 기의 폭발이 일어나며 적색 산맥의 가장 큰 산, 세르 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나르트와 페이린의 계속되는 충돌에 산새들이 날아오르고 잠자던 몬스터들이 급히 달아났다. -으아아아앗! “죽고 싶은 모양이로군.” 마나르트가 최대한 마기를 응집시키는 모습을 바라보던 페이린이 눈을 빛냈다. 순간 페이린의 몸이 붉은 빛에 감싸이며 점점 거대한 형상을 갖춰갔다. 카오오오오오! 거대한 몸집에 매끄러운 붉은 비늘을 가진 레드드래곤의 모습이 나타났다. 페이린의 마나에 영향을 받은 구름들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가공할 기운이 페이린의 입가에 모여 갔다. -브레스? 제길! 내가 그 동안 모아온 힘을 다 쏟아 붓는 한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는다. 으아아아앗! 콰아아아아! 순간 페이린의 입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마나르트에게서 엄청난 마기의 덩어리가 뻗어나갔다. 후우우웅. 두 기운이 맞부딪히며 순간 두 기운이 융화되어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순간 두 힘이 튕겨지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순간 엄청난 충격파가 주위로 뻗어져나갔다. 그리고 마나르트의 마기를 완전히 소멸시킨 페이린의 브레스가 마나르트를 덮쳤다. -크으윽! 역시 드래곤에겐 무리인가? 빌어먹을! 마나르트는 상당한 고통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마신이 부여한 권능으로 그 어떤 공격에도 소멸되지는 않지만 마나르트이 영혼에 가해지는 충격은 어쩔 수 없다. 비록 중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하게 전해져오는 브레스의 파워에 마나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페이린이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흥! 드래곤의 위력을 깨달았느냐, 하찮은 마족!” -웃기지 마라! 내가 힘만 완전히 지니고 있었으면… 음?“ 마나르트는 순간 익숙하면서도 강한 기운을 느끼고는 급히 몸을 돌렸다. 눈을 빛내고 있던 페이린도 갑자기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이 기운… 세, 세한!?” -세, 세한! 둘은 기쁨에 찬 함성을 지르며 세한이 있던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둘은 그대로 멈춰 섰다. “왜… 타대륙으로…….” -서, 설마… 봉인석이 충격파에 날아간 것은……. “…….” -……. 마나르트와 페이린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방금 전의 그 폭발의 충격 덕분에 세한이 잠들어 있던 봉인석이 산맥을 넘어 타대륙, 아메리카 서버의 대륙으로 넘어가 버린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요, 마나르트!” -젠장! 누가 할 소리를! 네놈이 브레스를 뿜지만 않았어도 이런 폭발이 일어나지는 않았어! “뭐예욧!” -시끄러! 둘은 서로를 향해 악을 써댔다. 그리고 그 사이, 1년 만에 이 세상으로 돌아온 세한은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쳐 가는 절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추락하고 있는 거냐고!” 즐거운 마음으로 섀도우 월드로 돌아온 것은 좋았는데… 우선 처음 눈을 떴을 때 알 수 있었던 사실은 내가 웬 검은색 수정으로 만들어진 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단하게도 그 수정관은 내가 손을 대자마자 바스라져 사라졌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 내 눈에 들어온 풍경이 문제였다. 까마득히 높은 산봉우리들이 내 밑에 있는 모습. 거기에 내 몸 바로 옆에 있는 엄청나게 높은 절벽. …지옥이었다. “으아아아앗! 마나르트 이 자식은 어디있는 거야!” 마나르트라도 있었으면 마기로 어떻게 해봤을 텐데…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마나르트에게 엄청난 욕설을 퍼부으며 아이템을 살폈다. 마나르트를 제외한 아이템들은 다 있었다. 다만 마나르트가 애용(?)하고 있는 다크 가더 만이 없을 뿐. 쳇. 그 다크 가더를 끼면 자기 스스로 마기를 쓸 수 있다고 좋아하더니… 하긴 지금은 그게 있으나 마나지. “후후훗.” 나는 엄청난 속도로 위로 올라가는 절벽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미, 미쳐버릴지도 몰라.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아래는 내려다보았다. 저 까마득히 먼 곳에 보이는 검은 공간. 아마 저기에 땅이 있겠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비, 빌어먹을. 4개월, 1년 만에 돌아오자마자 죽는 건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 그럴 순 없어! 나는 눈을 빛내며 마나를 끌어모아보았다. 내 몸에서 검은 마나가 살며시 빛났다. 쳇. “으아아아아아앗!” 나는 바리어를 아까의 관처럼 만들고는 마나를 필사적으로 움직여 내 몸을 절벽으로 부딪히게 했다. 콰드드드득! 그리고 나는 절벽의 바위들과 힘겹게 자라나는 나무들을 박살내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나도 살고 싶어서. “으아아아아아아!” 나는 샤프소드를 뽑아들고는 절벽에 박아 넣었다. 으으윽. 나는 손이 상당히 저린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은데? 카드드득! “으아아!” 나는 샤프소드를 더욱 깊게 박아 넣었다. 손이 저릿거리며 어깨가 빠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비, 빌어먹을! 콱. 순간 내 몸이 추락을 멈췄다. 그리고 발이 무엇인가에 닿았다. 어라? 벌써 바닥에 닿았을 리가 없는데? 고개를 주위를 살피니 작은 동굴이었다. 간신히 내 키가 될만한 높이의 동굴. 어떻게 보면 크기도 하군. 나는 한 석순 위에 올라서 있는 상황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 어쨌든 위기는 모면했다. “하아…….” 나는 샤프소드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젠장. 더럽게 안 빠지네.” 나는 뭔가에 붙들린 듯한 샤프소드를 보며 짜증을 부렸다. 샤프소드에 마나를 불어넣어 검기를 생성한 나는 샤프소드를 세게 잡아당겼다. 드드득. 샤프소드가 흙먼지를 뿌리며 뽑혀나왔다. 하아. 다행이군. 나는 샤프소드를 역수로 쥐고는 석순 위에서 뛰어내렸다. 절벽에서 약간 튀어나온 동굴의 입구에 내려선 나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으으. 아직도 바닥이 보이지 않아. 시력이 엄청나게 좋아진 상태에서도 바닥이 보이지 않다니. 도대체 얼마나 높은 거지? “이거 이쪽으로 내려가는 건 포기해야겠군. 그럼…….” 나는 고개를 들어 절벽의 위를 바라보았다. 역시 까마득히 높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었다. 이걸 기어올라가는 것도 미친 짓이겠군. “그럼 이 동굴을 들어 가야하는 건가?” 나는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동굴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암흑가에 살면서 어둠에 꽤 익숙해 졌지만… 이건 심하군. “쳇.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마나르트는 어디로 간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샤프소드를 똑바로 쥐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야지. “후, 그럼… 웃!?” 순간 엄청난 기운을 느낀 나는 숨을 들이켰다. 뭐, 뭐야? 나는 동굴 안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페, 페이린과 비슷할 정도의 기운이다. 물론 그때 페이린이 나를 봐주느라 훨씬 약한 기운을 풍겼었지만… 그, 그래도……. “오, 온다!” 나는 미세하게 떨리던 몸을 다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샤프소드를 앞으로 겨누고 마나를 최대한 집어넣자 검은 검기가 생성되었다. 나는 몸을 떨며 동굴 안을 살폈다. 이상한, 바닥이 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제, 젠장. 도망갈 수도 없잖아.” 나는 머리가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샤프소드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순간, 어떤 물체가 모습을 들어냈다. 뭐, 뭐지? 순간 붉은 두 개의 빛이 번쩍 빛났다. “뱀?” 나는 크고 붉은 두 개의 눈을 빛내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거대한 뱀을 보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머리가 내 몸통만한 거대한 몬스터였다. 그리고 남색으로 빛나는 비늘. 엄청난 위용이었다. 무, 무슨 몬스터지? 어, 어떻게 이런 기운을……. “으윽.” 나는 이상하게 고요하다는 느낌에 침을 삼켰다. 주위의 기운이 내 앞에서 붉은 눈을 빛내는 뱀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 젠장. 순간 엄청난 기운이 뱀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크으윽! 나는 발작적으로 샤프소드를 휘둘렀다. “으아아아아아!” 뱀을 향해 엄청난 검기 다발들이 날아들었다. 내 최대한의 힘을 쏟아 부은 공격. 나는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검은 검기들은 뱀의 앞에 딱 멈춰 섰다. “뭐, 뭐…….” 기이이……. 그리고 뭔가에 쥐여짜진 듯이 검기가 소멸되었다. 마, 말도 안돼! 내 최대한의 힘을 실은 공격이……. 콰콰콰콰! 순간 바닥에서 석순들이 솟구치며 내게 전진해왔다. 우웃! 뱀의 머리 앞에서 시작된 석순의 공격에 나는 급히 땅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콰쾅! 순간 엄청난 폭발과 함께 나는 뒤로 밀려났다. 으윽! 절벽 아래도 떨어질 뻔한 나는 절벽의 끝을 간신히 붙잡고는 급히 뛰어올랐다. “헉, 허억…….” 제, 젠장. 갑작스런 마나의 운용으로 몸에 충격이 온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그 거대한 뱀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뱀의 모습에 나는 치를 떨었다. 그리고 엄청난 기운이 모여들었다. -인간이여. 감히 성스러운 이무기의 땅을 침범하다니. 죽음으로써 그 죄를 갚아라. “뭐?” 순간 뱀의 입이 벌리며 붉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앗!” 비, 빌어먹을! 나는 급히 샤프소드를 들어올리며 바리어를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그 붉은 기운은 바리어를 순식간에 파괴시키고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제, 젠장! “으아아! 크로스!” 나는 이를 악물며 최대한 마나를 불어넣은 샤프소드를 휘둘렀다. 그 붉은 기운과 샤프소드가 격돌했다. 파지지직! 하지만 그 붉은 기운을 막은 샤프소드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너무도 강한 힘에 견디지 못한 듯했다. 샤, 샤프소드가… 마, 말도 안돼! 그리고 그 붉은 기운이 내 몸에 부딪혀 들어왔다. 콰아앙! “커헉!” 그 붉은 기운에 적중당한 나는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붉은 기운이 내 몸 안을 휘젓고 다니며 몸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크으윽. “크아아아악!” 절벽에서 꽤 멀어진 나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절벽에서 멀어져 허공에 멈춰선 나는 몸을 떨며 눈을 움직였다. 까마득한 절벽. 제, 젠장. 떨어지면 죽는… 그리고 그 붉은 기운이 순간 응집 되더니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크으…….”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내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여전히 붉은 눈을 빛내고 있는 남색의 거대한 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 단어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무기……?’ 나는 엄청난 고통에 눈을 감았다. =================필독입니다! 필독 입니다!=================================== 오호? 불개미? ㅋㅋ 나와 비슷한 닉네임을 가진 분도 계시군. 기쁩니다. 음.... 여러분께 한 말씀 드립니다. 저번 회에서 세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만.... 이무기에게 당해서 추락 중이라는 거죠. 이무기와 친구를 먹다뇨.... 당해서 추락하는 중인데.... 기연도 아니고.... 그냥 다른 대륙으로 넘어간 기념으로 한방 먹었다고 할까.... 그 이무기, 다시는 만날 일 없습니다. 어쩌면 다른 이무기는 한번 볼지 모르지만.... 그리고 무공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말했다시피 기술이라는 것이 자신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드는 것. 자신의 레벨로 가능한 움직임을 기억시켜 자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거죠. 무공은 없고 이 동대륙에서도 자신만의 기술을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 대륙, 무협의 세계라기 보다는... 좀 동양틱한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몬스터들 중에 동양의 고대 괴물들도 있고요. 문파라든지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몬스터들과 환경이 좀 다를뿐 세한이 원래 있던 대륙과 똑같습니다. 음... 그리고 이무기가 성스럽냐고 하셨던가요? 이무기, 성스러운 동물입니다. 용이 되어 승천하기 위해 수련을 하는 중인 녀석들이니까요. 고대의 이야기(소설)등을 보면 천년 묵은 구렁이 등은 한 집안의 수호신을, 이무기는 한 마을의 수호신 역활을, 승천한 용은 한 나라의 수호신을 했다고 하죠. 이무기늰 성스럽다고 할 수 있는 녀석입니다. 용이 되기 위해 수련중인 녀석, 그게 이무깁니다. 성스럽죠. 음... 그리고 세한이 동대륙으로 넘어갔다? 세한이 있던 곳과 같은 대륙입니다. 다만 산맥에 의해 가로막혀 있을 뿐. 이 산맥 넘기가 사실상 불가능이라 막혀 있는 거죠. 그리소 세한은 세르페이린의 레어 위에 잠들어 있다가 거기서 굴러 떨어진 겁니다. 세르페이린의 레어가 적색 산맥 최고봉이고... 그 레어 위에 세한이 있었으니... 충격에 뒤로 떨어진 거죠. 그 떨어지는 중에 세한이 접속. 최악의 운. 사악한 작가. ㅋㅋㅋ 세한은 곧 본 대륙으로 넘어가.... 려 노력할 예정입니다. ㅡㅡ;;?? “헉, 헉…….” 20대 정도로 보이는 한 사내가 적어도 10m는 되어 보이는 키의 소나무에 기대 서 헐떡이고 있었다. “제, 젠장…….” 사내는 자신의 흰 상의를 붉게 물들이는 피에 어깨를 움켜쥐었다. 나무에 기대서 있는 사내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구별이 애매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머리가 백발인 데다 바늘처럼 모여 삐죽삐죽 서 있었다. 삐죽 선 굵은 바늘 같은 머리 한 가닥마다 대충 15cm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이상한 백발의 사내는 눈에 테 없는 작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옅은 푸른빛이 도는 안경알 속으로 역시 푸른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입에는 작은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크윽. 어깨가 떨어진 건 아닌지 걱정이잖아. 역시 그놈들은 건드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백발의 사내는 여전히 어깨를 움켜쥔 채로 몸을 일으켰다. 약간 흘러내리는 안경을 바로한 사내는 지친 걸음걸이로 몸을 움직였다. “하아, 어디 약초라도 없는… 응?” 힘겹게 중얼거리던 사내는 뭔가를 느낀 듯 급히 고개를 돌렸다. 소나무의 숲. 소나무들 사이를 굳은 얼굴로 주시하던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젠장! 빨리도 쫓아오는군!” 사내는 신음을 흘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고수의 반열에 드는 사람인지 꽤 빠른 속도였다. 한참을 달리던 사내는 자신이 달려온 곳에 핏방울이 떨어진 자국이 있는 것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이걸 어떻게…….” 쉬이익! 순간 여러 개의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백발의 사내는 급히 몸을 날렸다. 파파팍! 땅을 한번 구르고 급히 몸을 일으킨 사내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박혀 있는 화살들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젠장.” “위리안!” 백발의 사내는 갑자기 들려온 고함소리에 아연실색한 얼굴로 나무에 등을 기댔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소나무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빨리도 오셨군, 제트.” 흰머리 사내의 말에 화살을 날렸던 무리 중 한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얼굴에 대각선의 검상이 나 있는 젊은 검사였다. “그 꼴도 잘도 도망치더군, 위리안.” 그의 말에 위리안이라 불린 백발의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마이너 위리안이라고.” “흥. 이류라는 이름에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우리를 건드렸으니 대가는 내놔야겠지?” 제크라는 이름의 검사의 말에 위리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제크의 손짓에 4명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손에 검들을 들고 있는 것이 확실히 목숨을 끈을 작정으로 보였다. 위리안은 쓰게 웃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무에 기대 주저앉은 위리안을 보며 제크라는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헤헷. 어차피 죽을 거 깨끗하게, 멋지게 죽자는 거지. 쿨한 사나이. 어때?” 헤실거리는 위리안을 보며 제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젓던 제크는 턱을 들어 위리안을 가리켰고 앞으로 나섰던 네 명의 사내가 위리안에게 다가갔다. 위리안은 눈가를 가운데로 모은 희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혀 방비를 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무기도 없는 위리안의 모습에 사내들은 별 걱정 없이 다가갔다. 그때 위리안이 뭐라고 투덜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곰방대에 손을 가져갔다. “어디 오랜만에 죽기 전에 담배나 펴보자.” 네 사내는 별 신경쓰지 않았고 위리안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때 잠시 다른 곳을 살피고 있던 제크가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순간 제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안돼! 그 놈에게 곰방대를 주면…….” 그때 주위에 이상한 안개 같은 것이 깔렸다. 제크는 이를 악물고는 급히 몸을 날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안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죽여!” 제크의 고함소리에 위리안의 옆으로 다가갔던 사내들이 급히 검을 들어올렸고 뒤에 서 있던 궁수들이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위리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파!” 어느새 꺼내들었는지 위리안의 손에 손바닥만한 종이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위리안의 외침에 따라 종이에서 이상한 문자가 떠올랐다. 어느 정도의 지식인들이라면 한번쯤을 봤을 만한 문자. 한글과 한문이었다. 그리고 순간 그 종이가 먼지가 되어 바스라졌다. “안돼!” 제크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순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헉, 헉…….” 나는 숨을 헐떡이며 캡슐을 빠져나왔다. “비, 빌어먹을. 죽는 줄 알았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현재 섀도우 월드에서의 내 상태를 말하자면 정말 운 좋게도 엄청난 키의 소나무 위에 떨어져 소나무 가지 사이에 처박혀 있다. 거기다 온 몸이 박살이 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제길. 그 이무긴지 하는 녀석의 공격, 정말 끔찍했어. “젠장.” 나는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피곤하다. “우헤헤헤! 전화 받아!” “…….” 누가 전화질이야? 나는 짜증을 내며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수신자가… 응?” 처음 보는 번혼데? 한번이라도 전화가 왔었다면 기록이 남았을 텐데… 생전 처음 걸려온 번호였다. 누구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파앗. 순간 화상 모니터에 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얼레? -여어! 게임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아니잖아? 레딕? 나는 화상 모니터에 떠오른 레딕와 릴의 얼굴에 눈을 깜박였다. 전화를? 어떻게? 암흑가에는 전화가 없던 걸로 알고 있다. -하핫! 이제 여기도 사람 사는 곳 같아지고 있다고. 전화도 설치되고 말이야. 아, 이번에 연결했나 보군. 나는 트럭 가득하던 각종 기기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날 열받게 만드는 레딕의 말이 들려왔다. -어때? 섀도우 월드에 돌아가니 좋아 죽겠냐? 즐거워? 아, 혹시 센의 선물은……. 순간 내 이마가 꿈틀거렸다. 이, 이 자식이……. “닥쳐!” 팟. 나는 고함과 함께 전화를 끊어 버리고는 헐떡거렸다. 망할 자식. 타이밍도 잘 맞춘다. 나는 눈을 빛내다가 냉장고로 다가갔다.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하나 꺼낸 나는 거실로 걸어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캔커피를 따서 마시던 나는 문득 지금 레딕과 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을 흘렸다. 아마 황당하다는 얼굴로 화상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데… 기분이 좀 나아진 나는 킬킬거리고는 캔커피를 단숨에 비웠다. 어쨌든 도움이 됐군 그래. “그나저나 간만에 접속해서 죽을 뻔 하다니… 미치겠군.” 재수가 없는 건가? 그건 그렇고……. “내가 왜 공중에 떠 있던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산 꼭대기에서 추락하고 있었던 걸까? “쳇. 운영자에게 항의하거나 하기도 그렇고…….” 운영자라.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몸을 일으켰다. “접속을 해 보실까.” “젠장.” 나는 나무 위에 걸쳐져 있는 내 몸을 느끼고는 짜증을 부렸다. 걸려 있다니. 어쨌거나 살아난 것이 다행이다. “으으윽.” 나는 내 몸을 관통하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부러뜨렸다. 가지 하나를 부러뜨릴 때마다 엄청나 고통이 밀려왔다. 아마 평소에 마나르트와 많은 수련(?)을 했기에 참을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여전히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 내 몸을 꿰뚫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모두 부러뜨렸다. “크윽. 끔찍하게 아프군.” 나는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뽑으며 치를 떨었다. 혀, 현실성이 너무 강하다니까. 이제는 감도 조절도 없어졌더니만. 나는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상처들을 붕대로 급히 감았다. 아아. 어지러워. 붕대 위에 포션을 뿌려둔 나는 나무 위에서 굴러 떨어지듯 뛰어내렸다. 나무는 거의 30m는 될 정도로 컸고 덕분에 바닥에 강하게 충돌한 나는 한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우우욱.” 시, 실수 했나? 나는 몸을 꼼짝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러다 오크 한 마리만 나타나면 저세상 가겠군. 그냥 나무 위에 있어야 했나봐. 데굴. 옆으로 한번 굴러 엎드린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깊은 숲. 기필코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깊은 숲이였다. 지금까지 들러봤던 숲이야 나무들 사이의 간격이 적어도 5m 정도는 되는, 심해봐야 3, 4m 정도의 간격은 있는 그런 숲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한 1m나 되면 다행이겠다 싶을 정도의 숲이었다. 지금 내가 떨어져 있는 공간이 신기할 정도로.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위용의 숲의 모습에 나는 별일이다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숲의 생김새를 보니 몬스터가 있기는 힘들어보였다. 작은 뱀 종류의 몬스터는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놈들이 많지는 않다./ “여기가 어디려나.” 나는 정보 창을 생성해 냈다. 으음. 어디 보자……. “얼레?” 나는 너무도 썰렁한 정보창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곳의 지리 등에 나와 있던 문구는 아예 사라져 있었고 시간을 표시하던 문구는 섀도우 월드의 시간은 사라지고 현실의 시간만 나타나 있었다. 현실 시간으로 예약 로그아웃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 예약 로그아웃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패치로 바뀐 건가?” 현실성을 최대한 추구한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던 리자드의 공문을 떠올린 나는 혀를 찼다. 너무하는군. 랭킹 창 같은 것도 아예 사라졌잖아. 홈페이지 접속이라도 있어 다행이군. “어디 능력치 창은 살아있겠지.” 게임인 만큼 레벨이나 능력치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캐릭터 창을 불러내었다. “음?” 나는 캐릭터 창에서 사라진, 원래 맨 위에 위치해 있던 숫자들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는 혀를 찼다. HP, MP, 스태미나의 수치가 사라져 있었다. 이것도 현실성 추군지 하는 것 때문인가? 그래도 다른 수치들은 그대로 있군. 어차피 능력치들이야 바뀔 일이 없으니… 그래도 한번 확인할까 하던 나는 몸을 또 욱신거리는 느낌에 짜증을 내며 창을 사라지게 했다. “으윽…….”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는 소나무 하나에 몸을 기댔다. 포션. 품속에서 몇 개 남지 않는 포션 중 하나를 꺼낸 나는 그대로 들이켰다. 그런데 회복 속도가 상당히 느려진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아물어가는 상처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끔찍하다. 어쨌든 이 숲의 이름을 알기느니 물 건너갔군. 지도를 꺼낸 나는 여기가 어딜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나무 숲이라. 섀도우 월드에서는 이렇게 소나무가 많은 숲을 찾기 힘들었는데. 거기다 이렇게 울창한 숲이 있다는 말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결국 지도에서도 여기가 어딘지 찾지 못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지도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미 탐험 지역인가? 지도야 사람들이 돌아다닌 곳의 정보를 모으고 답사를 다녀 만들어낸 것이니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곳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 어딘지도 모를 곳에 내가 떨어진 이유는 뭐야? “젠장.” 마치 가죽 갑옷처럼 등에 찰싹 매어 약간 두꺼운 가죽 갑옷처럼 보이는 다크 엘프 특제 배낭에서 포션을 몇 개 꺼낸 나는 그것을 품속의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크윽.”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꽉 붙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힘들어 포션을 하나 더 들이킨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어쨌든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치료를 받든 말든 하겠군. 나는 몸이 약간씩 나이지는 것을 느끼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용하군.” 한 3시간은 걸은 듯 했다. 어이없게도 걸으면서 상처들은 어느 정도 치료되었다. 움직이면서 상처가 났다니, 웃기는 일이로군. 이게 포션의 위대함인가? 나는 피식 웃고는 몸을 풀었다. 약간 고통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나 사용에는 문제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이 숲에는 왜 몬스터가 없는 거야?” 나는 입맛을 다시고는 주위를 살폈다. 몬스터를 한 마리도 만나지 않으니 오히려 이상하군. 옛날에도 많이는 아니어도 이 정도 걸으면 몬스터가 한 놈 쯤은 나타났는데? 거기다 지금은 그 빽빽한 숲도 아니었고 좀 호전된, 보통 숲들과 비슷한 지형이었다. 그런데 몬스터가 하나도 없다니, 이상하군. “음? 핫, 말이 끝나기가 무서운데?” 나는 뭔가 강한 기운을 풍기는 뭔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저기다. 꽤 강한데? 기운 만으로는 거의 오거 수준이야.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어깨로 손을……. “허억!” 그, 그러고 보니! 마나르트가 없잖아! 샤프소드는 아예 소멸되었고. 나는 급히 배낭을 뒤적 였다. 어, 없어. 예비 검이 없어. 나는 입을 벌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오, 오거 급의 몬스터를 검도 없이? 나는 허리의 단검 몇 개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단검인가? “쳇. 그래도 OPG도 있으니까.” 나는 마나를 조금씩 끌어올리며 앞을 주시했다. 그때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털을 가진 뭔가였다. “어라?”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여우? 나는 나무들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흰 털의 가진 여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늑대와 비슷, 조금 더 큰 상당한 크기의 여우였다. 하지만 설마 여우가… 그냥 지나가던 동물인가. 그 몬스터는 아직인 모양이군. 나는 식스센스에 정신을 집중하려 했다. 그때 여우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어라?” 그 여우의 꼬리는… 아홉 개였다. “미치겠군.” 끔찍하게 강한 말하는 이무기에… 이번엔 꼬리 아홉 개 달린 하얀 여우냐? 꼬리 아홉 개라. 그… 구미호라고 하던가? 나는 나를 바라보며 약간 붉그스름한 눈을 빛내는 하얀 여우를 보며 뭐라고 고함을 꽥꽥 질러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오오옷! 이게 무슨 일이냔 말이다! 카아앙~! 갑자기 하얀 여우가 날카롭게 울었다. 오옷? 나는 왠지 모를 기운에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하얀 여우가 엄청난 속도로 내가 다가왔다. 그저 한번의 도약으로 내 얼굴 바로 앞으로 다가온 하얀 여우의 붉은 눈을 보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우와악!” 탓. 나는 급히 몸을 날려 바닥을 굴렀다. 크윽. 베였다. 나는 하얀 여우, 아마도 구미호로 추정되는 여우의 발톱에 살짝 베인 볼을 쓰다듬었다. 자, 장난이 아닌데? 뭐가 저렇게 빨라? 아마 여우의 다리의 구조상 약간 공격 타이밍이 늦었다는 점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저 날카로운 이빨로 공격했으면 당했겠지. “…….” 나는 낮게 울음을 흘리며 이를 드러내는 구미호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상당히 날카로워 보이는군. 그때 구미호가 다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카앙! 날카로운 울음소리. 나는 침착하게 구미호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대 갑자기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포박!” “음?” 저 구미호 양에게 너무 신경을 썼나? 아니, 어쩌면 너무 오랜만이라 익숙하지 않은 걸 수도. 그런데 양이 맞기는 맞나?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종이들이 엄청나 속도로 날아와 구미호를 둘러쌌다. 그리고 구미호가 허공에 멈춰 섰다. 날아온 부적들에는 익숙한 문자들이 적혀 있었다. 한글이네? 한자도 몇 개 있고. 거기다 빛을 내는 글자에 개량 한지와 비슷한 종이라. 부적? 그때 한 사내가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타의 친군가?” 순가 사내의 복장을 보며 내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고타의 복장과 상당히 비슷한 복장이었다. 중세 시대 동양의 복장과 서양의 복장이 뒤섞인 듯한,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좀 펑퍼짐한 서양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복장. 고타가 입고 다니던 것과 비슷한 복장이었다. 하의는 갈색 바지. 상의는 반은 흰색, 반은 붉은 색인 사양복 재질로 만들어진 한복 스타일의 옷이었다. 사내를 주의 깊게 살피던 나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상대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는 아니었다. 약간 피로한 듯 해 보이는 사내의 모습이 너무도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 삐죽 솟은 흰머리에 눈보다 작은 안경알의 테 없는 작은 안경. 그리고 입에 물고 있는 곰방대. 정말 보기 힘든 모습의 사내였다. “으아… 구미호를 보면 당장 도망을 쳐야지.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어떻게 해.” “…….” 나는 별 말없이 삐죽 흰머리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반격하려고 타이밍을 잡고 있던 거였는데. 그때 사내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손바닥만한 그 부적으로 유추되는 종이를 꺼내들었다. 사내가 종이를 검지와 중지로 집어 빳빳하게 세우자 갑자기 하나의 글자가 나타났다. 한글과 한자. 폭과 爆이라는 글자였다. 폭? 그때 사내가 눈을 빛내며 부적을 날렸다. “폭!” 그 부적은 쏜살같이 구미호에게 날아가더니 구미호의 몸에 철썩 붙고는 빛을 내다가 순간 폭발했다. 허어? 대단한데? 불에 그을려 바닥에 떨어진 구미호는 곧 몸을 일으키고는 급히 도망갔다. 나는 사내를 바라보았지만 사내는 약간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으음? 놔 주는 건가? 뭐, 뭔가 이유가 있겠지. 긴장을 푼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상한데? 뭔가 느껴지는 듯 하면서도 느껴지지 않는 힘. 뭐지? 그때 그 사내가 약간 어눌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 혹시 코스프레라도 하는 건가? 복장 한번 특이하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내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자 사내는 쓴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괘, 괜찮…….” 아마 괜찮냐고 물으려 하려던 것 같은 사내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 얼씨구? 나는 놀란 얼굴로 급히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 이봐! 괜찮아!? 이봐!” 나는 사내를 부축하다가 진한 피 냄새와 내 손에 축축하게 묻어나는 붉은 피를 보고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마, 맙소사. 옷 색이 원래 붉은 색 아니었어? 이봐!” 나는 정신을 잃은 듯한 사내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 이거. 구해야겠지? 오랜만에 접속해서 죽는 것도 싫지만 남 죽는 것도 보고 싶지는 않군. “쳇.” 나는 삐죽 흰머리를 들쳐 업고는 눕힐 만한 곳을 찾아 걸었다. 얼마 동안 주위를 돌아다니던 나는 넓은 바위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위로 올라갔다. 꽤 높았는데 순간 도약을 써야 올라가 만한 높이였다. 물론 나무를 타고 올라오면 순간 도약도 필요없겠지만. “으음… 꽤 심한데?” 나는 어깨가 거의 뜯겨나간 데다 곳곳에 화살까지 맞은 사내의 몸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심하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꼴이 난 거야? 어쨌든 날 도와준걸 보니까 일단은 좋은 사람 같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뭔가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수는 4명. 기운이 상당하군. 나는 오랜만에 발동하는 식스센스에 작게 감동하며 사내의 상처를 치료했다. 치료술 스킬도 올리고 병원에서 일하기를 잘했지. “흐음…….” 나는 바늘과 실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갑자기 릴의 일이 생각나. 큭. 나는 피식 웃고는 붕대를 이용해 사내의 상처를 싸맸다. 우선 피는 거의 멈췄지만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나는 얇게 댄 붕대 위로 포션을 부었다. 이거 최고급 포션인데. 좀 아깝군. 나는 상처에 포션이 스며들어간 것을 확인하고는 붕대를 감으며 붕대를 포션에 적셨다. 이러면 괜찮게 낫겠지. 나는 빙긋 웃고는 사내를 눕혔다. 흐음. 이 옷을 입히기는 힘들 것 같은데? 이렇게 반쪽이 피로 물들어서야, 원. 나는 배낭에서 여벌 셔츠를 하나 꺼내 사내에게 입혀주었다. 백발에 내가 입힌 검은 셔츠가 완벽 대립을 이뤘다. 나는 쓰게 웃다가 급히 몸을 돌렸다. 쉬익! 나는 내게 날아드는 화살을 낚아채고는 싸늘한 눈으로 나뭇가지 위를 노려보았다. 나뭇가지 위에서 활을 내게 겨누고 있던 검은 복면인이 당황하며 급히 아래로 뛰어내렸다. “날 노릴 이유가 없으니… 이 친구인가?” 나는 엄청난 상처를 입고 있는 삐죽 머리 사내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아. 나는 바위 가장자리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4인은 몸을 흠칫하고는 뒤로 좀 물러났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너희는 뭐지?” 나는 싸늘하게 말하면서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상대의 실력에 놀라서는 아니었다. 4명의 복면인 모두가 고타 패션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뭐하는 사람들인데 고타와 비슷한 복장들을 하고 있는 거지? “위리안과 한패냐!” 나는 복면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고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위리안? 나는 바위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위에 있는 녀석?” “그렇다!” 저 친구 이름이 위리안이었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긴 머리가 찰랑이는 느낌이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꼴이 엉망이라 옛날 같진 않군. “한패는 아니지만… 그냥 길가다 만났거든.” 내 질문에 복면인은 검을 뽑아들며 사나운 어조로 외쳤다. 흐음. 검의 모양도 우리와 약간 틀린데? 피 흐르는 홈이 없군. 뭐, 마나르트도 없긴 하지만.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웃음에 검을 뽑아든 사내가 살기를 뿜었다. “감히!” “어? 어?” 순간 그 사내가 내게 달려들었다. 이, 이런. 웃음 한번 흘렸다고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왜 이리 살벌해? 나는 옆으로 몸을 빼 공격을 피하고는 마나를 실어 상대를 후려쳤다. 복면인은 급히 뒤로 물러났고 다른 세 명의 복면인도 긴장하며 각자의 무기를 내게 겨눴다. 검 세 개와 활 하나라. “이봐. 왜 갑자기 공격이야?” 내 물음에 복면인은 신중한 태도로 나를 살피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뭐야? “위리안 내놓고 꺼져라.” 나는 눈을 약간 크게 뜨고는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저 친구를 놓고 꺼지라고? 나는 피식 웃었다. “내놓으면 저 친구를 어쩔 거지?” “몰라서 묻는 거냐?” 복면인의 사나운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저 꼴을 보면… 당연히 죽이겠지. 나는 빙긋 웃으며 OPG에서 손톱을 꺼냈다. 복면인들이 몸을 움찔했다. “안되겠군. 어쨌든 날 구해줬거든. 날 죽이고 데려가라.”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셋은 잠시 서로를 돌아보더니 순식간에 내게 쇄도해 왔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검을 쳐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양 옆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완벽한 합격이로군. 나는 얼굴을 굳히며 높이 뛰어올랐다. 쉬이익! 순간 나머지 한명의 화살이 날아왔다. 크읏! 급히 팔에 바리어를 두른 나는 그대로 화살을 쳐냈다. 복면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긴. 옅은 검은 빛의 바리어니 이 검은 팔에 두르면 보이지 않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한명 한명도 만만히 보기 힘든 사람들이지만… 특히 합격이 무섭군. 그때 그 우두머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풍뢰!” 음? 스킬인가? 나는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순간 사내의 검이 여러 검로로 변하며 나를 찔러 들어왔다. 뭐, 뭐야? 그리고 내게 날아오는 검기 가닥. 몇 곳의 방위를 공격해 오는 검기에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우웃." 급히 몸을 날려 공격을 간신히 피한 나는 놀란 눈으로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망토가 잘렸군. 나는 살기를 피어 올렸다. “대단한데? 어떻게 그런 기술을 만들었는지 신기해.” 내 말에 복면인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뭐야? 어쨌거나 대단한데? 어떻게 방금처럼 화려한 기술을 만들어 낸 거지? 좀 오래 생각하면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언제 나도 저런 기술이나 만들어 봐야겠군. 솔직히 내 기술은 그저 단순한 베기나 찌르기 등이 많으니까. 그저 실전에서 실용적으로 쓰기 위한 기술. 하지만 저건 구경거리로도 좋겠는데? 타탓! 그때 다른 둘이 순식간에 범위를 좁혀왔다. 나는 눈을 빛내며 둘을 살폈다. 그리고 내게 화살 하나가 날려왔다. 마나가 실린 화살이었기에 쉽게 막을 수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검을 휘둘러오는 둘의 공격이 아까 우두머리의 공격과 비슷한, 멋진 기술로 바뀌어갔다. “으읏?” 그리고 어느새 그 우두머리가 내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며 검을 찔러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거… 서로 기술 교환이라도 했나? 비슷한 기술인데? 나는 내게 들어오는 네 가지의 공격에 얼굴을 굳혔다. 빌어먹을! 차라리 검이었으면! 마나르트였으면 쉽게 막았을 텐데! 나는 이를 악물었다. ============== 필독입니다! 필독입니다! 필독입니다!============================= 아하하... 정말로 죄송합니다. ^^;; 어제 올린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어제 갑자기 인터넷 회선이 끊기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는.... 방금 인터넷을 다시 연결하고는 급히 올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음... 중요한 말씀입니다만.... 섀도우 월드, 공식 카페(? 허슬러님 지칭 팬 카페?)가 생겼습니다. ^^ 어제 만든 카페인데.... 아직 미흡한 점도 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링크 때문에 메인 화면에 멋진 그림을 넣지도 못한.... ㅡㅡ;; 제 글의 독자이신 세트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쩝... 전에 제가 만들다가 차버린 것에 비하면...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감사합니다. 세트님. ^^ 카페에도 연재가 됩니다. 다음에는 불펌 태그가 걸리지 않아서 모기의 연재란을 링크해 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인데.... 카페에 연재를 하루 이틀 정도 먼저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런 연재 싸이트 등에 올리기에 써둔 양이 좀 적다 싶으면 카페에 먼저 올리고 나중에 모아서 이곳에 올릴 예정입니다. 음.... 어쨌든 세트님이 힘들게 만들어주셨으니 보답이라고 할까요. ^^;; 어쨌든 카페에 연재가 조금 빠를 것 같습니다. 카페 주소는.. http://cafe.daum.net/shadowworld????입니다. “쳇.” ‘하핫. 내가 이런 걸 쓰려니 참 웃기는군. 음… 어쨌든 가장 친한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할 수 없지. 나는 길거리 싸움으로 시작했다. 모든 것을 그저 육체적 능력과 본능에 맡겨 싸우는… 아, 먼저 한마디 하고 들어가자! 과거를 잊지 못하고 계속 마음에 담아두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완전히 잊고, 옛날의 자신을 잊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야.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잖아. 옛날의 경험을 잊지 말라고. 흠, 그럼… 다시 시작. 어쨌든 육체와…….’ 순간 내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놈이 제일 약하다. 나는 몸을 번개 같이 움직이며 옆에서 공격해 오던 녀석의 품을 파고들어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파파퍽! “이, 이런!” 내게 공격을 가한 녀석들이 각자 신음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나는 내 방패막이로 쓴 복면인 한 놈을 던져버리고는 놈들을 노려보았다. “이, 이 자식! 사, 사람을 방패로 삼다니! 나쁜 놈!” “…….” 나는 싸늘한 조소를 담은 얼굴로 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퍼져나가는 살기에 복면인들이 한걸을 뒤로 물러났다. “그쪽에게 들을 말이 아닌 것 같군. 어쨌든. 고맙게는 생각한다.” 내 말에 녀석들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눈동자가 흔들리는데다 무심을 익히려 하는 중인 내 식스센스는 상대의 감정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게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 우두머리의 고함소리에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내가 뭘 하고 있던 건지 모르겠군. 언제부터 마나르트에 그렇게 의존한 거지. 확실히 지금까지, 중요한 싸움에서는 항상 마나르트를 사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나르트가 없으면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 거기다… 원래 내가 주로 쓰는 것은 검술이 아니라 체술이다. 뚜둑. 나는 손을 움켜쥐어 뼈를 튀겼다. 그리고 그 소리를 신호로 하듯 남은 두 명의 검사가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예의 그 화려한 공격. 나는 빙긋 웃고는 옆으로 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화려하다고 해서 강한 건 아니지. 어차피 실력의 차이까지 나는 이상에는 상관없어.” 처음 보는 화려한 공격에 당황했었다. 하지만 어차피 기술의 실용성은 우리의 기술과 별 차이가 없다. 저 친구들의 복장에 갑옷이 없는 걸 보니 방어력은 우리보다 약해 보이니 평균적으로는 비슷하겠지. 나는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하앗!” 검로를 따라 몸을 움직인 나는 한 놈의 품속으로 다가가 어깨로 놈의 가슴을 올려쳤다. “커헉!” 놈은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성공이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녀석을 살피다가 뛰어 올리며 주먹을 올려쳤다. “승룡.” 푸화악! 복면인의 복부에 박힌 OPG에서 폭사된 마나가 놈의 등을 뚫고 위로 솟았다.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복면인을 멀리 던져버리고는 주위를 살폈다. 뒤! “이놈!” 나는 침착하게 몸을 돌리며 돌려차기를 넣었다. 분노한 얼굴로 검을 찔러오던 그 우두머리가 어깨를 얻어맞고는 나무에 처박혔다. 쉬이익! 파공성. 나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내 마나가 주위를 잠식하며 내게 날아오던 화살을 묶었다. 음? “무의식중에 사용한 건데… 이상하군. 마기도 없는데 어떻게… 꼭 마나가 마기처럼 느껴지는데?” 나는 무의식중에 화살을 궁수 녀석에게 날려버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나르트와 마기와 내 마나가 동화를 일으킨 건가? 그래서 마나르트가 없어도 내 마나가 마기화 된 걸 수도. 마기의 특성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겠군. 나는 마나를 일으키며 기운을 살폈다. 얼핏 마력과 비슷한 힘이 내 몸속을 휘몰아치며 약간의 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이 마기를 풍기다니, 어이가 없군. 콰아앙! 순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뭐, 뭐야? 급히 고개를 돌리니 그 궁수 녀석이 가슴에 엄청난 상처를 입고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궁수의 가슴에 내가 날려보낸 화살이 박혀 있었는데 아마 거기서 폭발이 시작된 것으로 보였다. “마, 맙소사. 난 마나를 실은 기억도 없는데?” 무의식중에?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이미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강해졌군. “핫!” 순간 어떤 기척을 느낀 나는 급히 몸을 날렸다. 마나를 실은 검기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박히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저쪽. 나는 순간 양 손을 허리로 가져가며 곧바로 휘둘렀다. “대거 댄싱.” 검은 마나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단검들은 마지막 남은 복면인의 온몸을 꿰뚫었다.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우두머리가 이를 갈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죽었군. “…….”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었다. “이상하게 능력치가 상승한 것 같더니, 이게 센의 선물인가?”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레지엘이 그렇게 강해진 것도 센이 능력치를 조정해서 그런 거였지? 센이 대단하긴 하군.” 리자드 프로그램에 침투해서 캐릭터의 능력치를 조정할 정도라면… 도대체 실력이 얼마나 되는 거지? 나는 모든 능력치가 150씩 증가해 있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 그래도 너무 강해진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옛날의 천악과는 맞먹겠군. 지금이야 천악도 많이 강해졌겠지만. 그럼 마나르트를 쓰면 천악과 비슷하겠는데?” 좋은 건가? 내 노력으로 강해진 것도 아니라서 그런지 약간 씁쓸하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좀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캐릭터 창을 다시 한번 살폈다. “으음? 보너스 수치는 왜 10이야. 줄었잖아?” 나는 보너스 수치가 10으로 줄어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는 32였나? 그랬었는데? 이상하게 혼자서 오르지 않는 녀석이긴 했지만… 왜 떨어진 걸까? “센이 실수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 완벽 주의자인 센이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전과 별다른 것은 느끼지 못하겠는데.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고 보니 보너스 수치가 뭐하는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리자드에서 밝힌 적이 없던가? “모르겠군.” 나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눈을 감았다. 불어오는 바람. 숲 속의 산새들. 흔들리는 나뭇가지. 너무도 잘 느껴졌다. 현실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로군. 나는 주위에 신경을 끊고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돌아온 것 같군.” 안전지대 설정 기능도 사라졌기에 나는 침낭도 피지 않고 그대로 잠을 청했다. 식스센스가 있으니 몬스터들은 느낄 수 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세상이야. “으으음…….” 누군가의 신음소리에 눈을 뜬 나는 눈을 깜박였다. 아침인가? 상쾌한 기분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천상의 망토가 좋은 감촉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역시 마음에 들어. 주위를 살피니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으로 보였다. 해가 뜨지 않았군. 진짜 하늘색을 띄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백발의 남자가 약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신음조차 흘리지 않더니, 감각이 돌아오나 보군. 몸이 좀 나아진 모양이었다. “어라?” 남자, 위리안을 살피던 나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며 눈을 약간 크게 떴다. 포커페이스 흐트러지네. 나는 그 밤송이 같던 뾰족한 백발 머리가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머리가 내려앉았네? 완전 하얀 성게 같은 머리였는데 말이야.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한 나는 피식 웃고는 몸을 풀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고타와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5명이나 되다니. 별일이군.” 나는 한번도 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숲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걸어온 방향으로 엄청난 높이의 산들이 솟아있었다. 내가 저 절벽에서 떨어졌지. 나는 까마득히 높은 절벽이 위치해 있는 산봉우리를 보며 침을 삼켰다. 엄청나군. 살아난 것이 신기해. “이무기라.” 절벽의 중간에서 만났던 거대한 뱀. 이무기라면 우리 고대 전설에 나오는 뱀이지? 용이 되기 위해 수련하거나 용이 되기를 포기한 녀석들. 한 천년 묶은 구렁이에서 한 단계 높은 녀석 정도 되려나. 어쨌든 엄청나게 강했다. “이렇게 강해지고도 한 방에 당하다니. 아, 두 방이었나?” 쳇. 한 방이든 두 방이든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당한 건데. 덤으로 샤프소드까지 아예 소멸해 버렸군. 나는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내가 왜 추락하고 있었던 거지? “…….” 쳇. 나는 약간 짜증을 부리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내 살기에 반응한 것인지 약한 마기가 끌어올라 주위에 퍼져나갔다. 마나르트를 사용할 때와 비교해서는 너무 약한데? 하긴 아무런 고통도 없이 사용하는 거니 어쩔 수 없지. 살기를 극도로 끌어올리면 좀 강해질 지도 모르겠고. 나는 마기 덕분에 어두워진 주위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럼 운동이나… 음? “마, 마인! 마물이냐!” 뭐야?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그 백발의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기를 뿜다니… 구미호와 같은 녀석인가? 넌 뭐냐!” 구미호? 아아. 어제 그 하얀 여우. 구미호는 둔갑도 하지? 나는 피식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둑해진 곳에서 내가 몸을 일으키자 삐죽…이 아니라 축 쳐진 백발머리의 사내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육체적 능력은 약한 거 같으니까. 그 부적 같은 것만 조심하면……. “비(飛)!”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백발의 청년, 위리안이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날렸다. 붉은 글자가 떠오르는 부적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모습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척. 내 가슴에 그 부적이 달라붙었다. 얼씨구? 위리안,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사내를 보니 득의양양한 얼굴이었다. 저거 기억력이 나쁜가? 어제 날 구해줘 놓고는 이제는 공격이야? “이봐. 무슨…….” “염(炎)!” 염? 순간 부적이 엄청난 기세로 타오르더니 거센 화염이 나를 덮쳤다. 우욱! “서, 성공인가? 제길. 구미호 급의 녀석을 상대해서는 위험해. 어서 도망을…….” 화르르륵! “음?” 자신의 옆에 놓인 하얀 배낭을 들어올린 사내는 바위에서 뛰어내리려다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위리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쳇. 꽤 따뜻하군.” 나는 손으로 화염을 밀어내 소멸시키고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위리안을 노려보았다. 순간 바리어를 사용했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피해가 꽤 컸겠는데? 나는 손에 씌워둔 바리어를 소멸시키고는 살기를 내뿜었다. “여, 역시… 구, 구미호 급이라 이 정도로는 안 되나?” “…….”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며 또 하나의 부적을 꺼내든 사내를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마기를 뿜는 것이 특이하다는 건 인정 하지만… 그래도 너무 하는군. 나보고 그 여우 자식하고 친구라고? “대화가 좀 필요하겠군.” “쳇! 쉽게 당하진 않는다!” 귀찮다는 기색인 나와 전의를 불태우는 백발의 사내, 위리안. 누가 봤다면 꽤나 해학적이라고 했을 광경이었다. 그건 그렇고 왜 마나르트가 떠오르는 거지? 나는 만일을 대비해 마나를 끌어올렸다. “후우…….” 나는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담밴가? 약간 어지럽군. 별로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나는 곰방대를 기절해 바위위에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던졌다. 곰방대가 위리안이라는 친구의 가슴에 안착한 것을 확인한 나는 내 팔을 내려보았다. “쳇.” 불에 심하게 그을린 팔의 모습에 나는 혀를 찼다. 저 친구도 장난이 아닌데. 무작정 덤비기에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키긴 했지만 그 덕분에 웬 부적 하나가 내 팔에 들러붙었고 덕분에 이 꼴이 되어버렸다. “부적이라. 새로 생긴 직업인가?” 나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백발의 사내, 위리안을 뚱한 눈으로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특이한 것은 인정하지만 너무하는군. “에너바이트.” 품속에서 보석 하나를 꺼낸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보석을 위리안에게 던졌다. 곧 환한 빛과 함께 보석이 깨져 나갔고 위리안에게 그 빛이 스며들었다. “으음…….” 확실히 효과는 좋군.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위리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숲과 산이 어우러진 경치를 바라보았다. “멋지군. 정신이 드나?” 내 무심한 목소리에 위리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곧 적의가 느껴지며 위리안이 급히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봐. 난 인간이라고. 좀 특이해서 마기를 뿜기도 하지만. 그쪽을 죽이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말을 맺은 나는 몸을 돌려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위리안은 내 얼굴을 보며 잠시 몸을 흠칫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당신 혹시… 어제 구미호에게 습격을 당하던 그…….” “…… 기억력이 별로로군.”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위리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어쨌든 상처는 다 나은 것 같으니 다행이로군, 위리안 씨.” 내 말에 위리안의 눈이 커졌다. 으윽. 한걸음 더 물러나는 걸 보니 또 날 몬스터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아니면 자신을 쫓아온 추격자로 착각할 수도 있고. “어, 어떻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바위 아래를 가리켰다. 위리안은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히익. 엄청나게 높잖아. 여길 어떻게… 음? 저건…….” 위리안은 아직도 남아있는 복면인들의 시체를 보며 입을 벌렸다.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위리안이 내게 고개를 휙 돌렸다. “당신이?” “그래.” 내 대답에 위리안은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때 위리안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끔찍하게 살해할 수가! 당신! 도대체 뭐야!” “…….”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왠지 좀……. “아, 하하하… 그, 그랬군요. 절 죽이려고 쫓아온 사람들이었다니, 죄, 죄송합니다.” 젠장. 나는 약간 검게 그을린 오른뺨을 쓰다듬고 있는 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위리안에게 눈을 부라렸다. 망할. 힘들게 구해주니 이 꼴이 뭐냐. 위리안을 노려보는 나와 시선을 피하며 주위를 살피는 위리안. 아까와는 좀 다른 양상이었다. 나는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뭣 좀 묻지.” “예?” 내 말에 위리안이 긴장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표정을 고수하며 물었다. “그 복장. 도대체 뭐지? 저 복면의 얼간이들도 그렇고, 몽땅 그 웃기는 옷을 입고 있더군.” 내 질문에 위리안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내가 보기에는 그쪽 복장이 더…….” “…….” “…….” 나와 위리안은 순간 침묵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으음, 확실히 여기 친구들은 죄다 저 복장을 하고 있던데… 그렇게 보면 오히려 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군.나는 간단한 강철 갑옷에 검은 망토까지 두르고 있는 내 복장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위리안도 나와 동시에 자신의 복장을 돌아보았다. “…… 넘어가고. 여기가 어디지?” “…….” 내 질문에 위리안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 하하? 이 유명한 곳을 모르는 겁니까? 거기다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딘지도 모른다니… 아, 적색 산맥이죠. 초입 부근.” 어이없다는 듯 말하던 위리안은 내 싸늘한 눈초리에 급히 말을 맺었다. 적색 산맥?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적색 산맥? 적색 산맥 부근에 이런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는데? 그리고 그런 이상한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유저들이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아하하… 제가 보기에는 적색 산맥에 위치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이상하다는 사람이 더 이상한데…….” “…….” “…….” 시선을 교환하던 나와 위리안은 각자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문득 위리안의 얼굴을 살피던 나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음? 동양인과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눈이나 코를 보면 꼭 서양인 같은데? 내가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자 위리안은 눈을 멀뚱히 뜨다가 내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 “…….” “우와~! 신기하군요!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동양인의 얼굴을 만들어낸 거죠? 아, 혹시 진짜 동양인?” “…….” 으으윽. 나는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그래도 수련의 결과인지 아직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나는 위리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동양인인 것은 맞아.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이상한 것이 되는지 모르겠군.” “에?” 위리안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하죠. 아메리카 대륙에 동양인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미국에는 꽤 많지만 그래도 이런 세상에서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 법이죠. 거기다 아메리카 대륙의 동양인들은 캐릭터를 만들 때 서양인의 느낌을 풍기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 어라?” 열심히 설명하던 위리안은 내가 당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아, 아메리카? “아메리카? 그게 무슨… 자, 잠깐! 그렇다면 설마…….”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거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적색 산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봉우리들과 수많은 절벽. 으음. 전에 적색 산맥에 갔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군. “… 이봐.” “에?” “이곳… 아메리카 서버에 속해있던 대륙인가?” “음? 당연하죠.” “…….”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위리안이 눈을 깜박이며 나를 마주보았다. 마, 말도 안돼. 나는 까마득히 높은 산봉우리들과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산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 말도 안돼.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건가?” “예?” 위리안이 반문했지만 나는 무시하며 적색 산맥을 바라보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 그럼 내가 떨어지고 있던 것이… 적색 산맥, 한국 서버에 속해 있던 곳에서… 여기로 떨어지던 거였나? 그, 그런 말도 안돼는……. “하하? 저기… 왜 그러는…….” “말도 안돼. 그럼… 적색 산맥을 넘어왔다는 얘기잖아. 그런…….” “예? 적색 산맥을 넘어 오다니… 서, 설마! 당신 한국 서버에서!” 나는 약간 질린 얼굴로 위리안을 돌아보았다. 위리안이 크게 놀란, 거의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버가 달라서… 복장이나 몬스터도 좀 달랐던 건가? 동양 사람들에겐 서양세계를… 서양 사람들에겐 동양세계를… 순간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위리안이 몸을 떨며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 휘이잉. 순간 검은 마기가 내 몸을 휘몰아쳤다. 하얗게 질린 위리안이 이번에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으윽. 마, 마기? 이, 이봐. 왜…….” “…….” 다른 대륙으로 넘어왔다고? 내가 여기에 왜 돌아왔는데. 나는 엄청난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살짝 미소지었다. 역시 살기에 반응해서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군. 내 미소에 위리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위리안이 무작정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으아아악!” 그리고 순간, 내 옆에서 사람이 사라지자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크아아아악!” 콰콰콰쾅! “이게 뭐냔 말이다!” 엄청난 마나와 마기의 폭풍에 바위가 박살이 나 깨어져 나갔다. 위리안의 비명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후후후. 아메리카 서버라. 나는 마구 솟아나는 짜증과 분노 등등의 감정에 살기를 마구마구 피어올리며 주위의 바위며 나무들을 후려쳤다. “크아아아아악!” 콰아아앙! 내 몸을 중심으로 검은 마나와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나갔다. “정말로 서대륙에서 넘어왔다는 겁니까?” 나는 절로 존댓말을 쓰고 있는 위리안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움켜쥐어 가루로 만들었다. 그 모습에 위리안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눈을 번뜩이며 다른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대단하군요.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는 것을 소원하는 사람, 길드만 해도 엄청난데 아직 아무도 넘지 못했잖습니까. 그런데 혼자서… 도대체 어떻게…….” “어쩌다 보니.” 나는 주위에 남아있는 돌멩이가 없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끼며 등 뒤로 땅을 짚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하늘은 푸르군. “그럼 엄청난 고수겠군요. 그럼 여기서 이름을 떨치려…….” “다시 돌아가야겠지.” 위리안은 자신의 말을 끊으며 내뱉은 내뱉어진 내 말에 입을 약간 벌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넘어오고 싶어서 넘어온 것이 아니니까.” 내 말에 위리안이 약간 동질감이 섞인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 “아, 그럼! 당신도 그쪽 대륙에서 쫓기다 못해 산맥을 넘은 모양이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알아선 안 될 것을 알아버려서 쫓기는 중이거든요! 산맥을 넘으려고 여기로 온 거죠! 하하핫! 설마 저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거기다 벌써 산맥을 넘은 사람이라니!” “…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군…….” 확실히 도망쳤던 것은 사실이니까. 여기로 온 것은 자의가 아니지만. 나는 눈을 약간 가늘게 뜨다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고민에 빠져있는 네 귀에 흥분한 듯한 위리안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도 데리고 가 주십시오!” 나는 약간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위리안은 여전히 약간 싱글거리는 듯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산맥 탐사 길드에서 거금을 들여 지리도도 샀습니다! 적어도 이쪽의 산맥은 꿰뚫고 있지요! 실력도 자신 있습니다! 전 여기서는 살 수 없단 말입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위리안의 외침을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던 나는 말이 끝나자 위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듯 위리안은 당황하며 자신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후회는 없나?” “에?” 내 질문에 위리안이 얼빠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대충 들어보니 충동적으로 산맥을 넘기로 한 것 같군. 어떤 짓을 해서 쫓기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쉽게 선택할 문제는 아닐 텐데? 그래도 여기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후회는 없는 건가?” 내 말에 위리안은 멍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위리안을 마주보았다. 잠시 그렇게 대치하던 위리안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약간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확실히 충동적으로 선택한 거라… 음… 그러고 보니 떠난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나는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위리안을 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여자로군.” “헉!?” 나는 흠칫하는 위리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떻게…….” 나는 위리안을 질문을 무시하며 일어났다. 그냥 넘겨짚기였다네. 나는 망토를 털고는 주위를 살폈다. “따라오는 것은 상관없어. 하지만 난 지금 보급이 딸리니 이곳의 마을에 한번 들려야겠는데. 안내해 줄 수 있나?” 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위리안이 냉큼 옆으로 다가왔다. “여행 동지도 생기니 좋군요.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가다보면 꽤 큰 마을이 나옵니다. 거기에 제가 찾는 사람이 있으니 거기로 갔으면 하는데… 그 후에도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시지. 동행중에 내가 마음에 안 들게 될 수도 있으니. 다시 말하지만 이곳을 떠나는 것, 그리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위리안이 말한 대로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 이름은 세한. 그냥 한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내가 온 곳에서는 다크소드라는 이름으로 불렸었지.” “다크소드… 하지만 검이 없는데?” “잃어 버렸다.” “하하… 아, 저는 위리안. 마이너 위리안 입니다.” 마이너? 나는 약간 의아함을 느끼고는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마이너라니. 이류? “마이너라면, 이류라는 뜻 아닌가?” 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다. 약간 굳은 그의 얼굴을 한번 바라본 나는 고개를 돌려 계속 걸었다. “흠… 그나저나 역시 과학의 힘은 위대합니다.” 뜬금없는 위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외국 사람을 만났을 때 마이너라고 소개하면 이류라는 뜻으로 들릴까봐 걱정했거든요. 하지만 그렇지 않는 모양이네요. 음? 이게 아닌가?” 뭐? 나는 눈을 깜박이며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 외국인이지? 그러고 보니 저절로 통역되서 들리는 모양이군. 나는 별 신경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위리안은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내 마이너는 영어. 그럼 번역할 때 이류로… 그런데 마이너로 들린 건가? 아, 아니지. 한국의 이류가 마이너니까 저쪽에서 이류라고 한 것을 마이너로 통역했을 수도… 아니, 그 반대일 수도…….” 위리안의 말에 잠시 생각해본 나는 안색을 굳혔다. 크윽.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저 인간이 마이너라고 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그렇게……. “흠… 그러고 보니 내 기술명도 한국말인데… 내가 화염이라고 하면 저쪽에겐 파이어라고 들리나? 우욱. 그거 불공평하잖아. 난 부적에 쓰는 글 연습하느라 죽을 맛이었는데…….” 하아? “그건 아닌 거 같군. 우리 쪽에서는 기술 명을 대부분 영어로 말하니까. 멋있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이 마법을 쓸 때 영어로 말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말을 하던 나는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으윽.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닌데? 나는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알아들었다는 얼굴. 진짜 알아들은 건가? 이거 복잡한데. 내가 한글로 말했지만 그게 영어로 통역되면서 이상해 질 수도 있잖아. 그리고 우리가 영어로 기술명을 말하면 그게 어떻게 들리는 거지? “파이어 볼. 어떻게 들렸지?” “파이어 볼. 한글인데요?” 으윽. 위리안에게 질문을 던졌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영어로 말했어.” “어? 나도 한글로 말한…….” 나는 고개를 세게 저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 그만. 더 이상 생각하다간 머리가 돌아버리겠다. 내가 영어로 말한 게 한글로 들렸다고? 음? 그런데 저 친구, 아까 한글을 익히느라 고생했다고 했지? 그럼 기술 명을 한글로 말해야한다는 건데… 그건 왜 그대로 들리는 거야?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생각을 걷어차 버렸다. “그만하지. 머리만 아파. 뭔가 프로그램이 있겠지.” “그, 그렇겠죠.” “어쨌든 이류라는 이름을 가졌다니, 특이하군. 뭐, 별 상관은 없지만.” “하하. 표정이 상당히 싸늘하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다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군. “나이가 몇?” “아, 29.” 나는 순간 몸을 움찔했지만 무시하며 태연히 걸었다. 스물아홉? 생각보다 많은데? 뭐, 나이야 상관없지. “그럼 그렇게 존대를 하지 말지 그래. 편한 데로 말해도 상관없어. 적어도 동료에게 공격을 하지 않을 테니까.” “하하. 그러지. 아, 이제 편하네. 그냥 한이라고 부를게. 내 성격상 누구에게 존대를 하기가 좀 그래서 말이야. 아, 여기가 지름길이야. 약간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날 쫓는 추격자도 없을 테니까…….” 나는 곧바로 편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위리안을 보며 눈을 약간 치켜떴다. 뭐, 나쁘진 않군. 나는 위리안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위리안을 따라 걸었다. 스르륵. 순간 위리안의 머리카락이 다시 빳빳하게, 뾰족해 지기 시작했다. 음? 내가 약한 탄성 비슷한 소리를 내자 위리안이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헤헷. 멋지지. 내 기가 회복 되서 원상복귀 된 거야. 도사들은 자신의 기를 이용해서 머리카락 쯤은 바꿀 수 있어서. 거기다 난 부적을 이용해서 자동으로 해 놨어.” 나는 위리안이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귀걸이를 살폈다. 두꺼운 종이를 작게 자른 듯한 귀걸이들에는 글자들 몇 개가 적혀 있었다. 한쪽은 한글, 한쪽은 한자였는데 너무 작아서 알아보기가 꽤 힘들었다. “도사라. 우리 쪽의 마법사와 비슷한 계열인가? 이곳에 마법사는 없겠지?” “마법사? 없어. 그쪽엔 있는 모양이네. 서양풍인가 봐. 이쪽은 동양풍이 강해서 서양 신화의 몬스터들이 별로 없거든. 일부 지역에는 서양의 몬스터들로 보이는 녀석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는 거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리안은 싱글거리며 유쾌하게 떠들어대었다. 그리 나쁘지는 않은 여행 동료로군. 위리안을 쫓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길을 안내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산맥을 넘겠다고? 나는 위리안을 잠시 쳐다보았다. 위리안은 곰방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안경을 썼는데 이러고 보니 약간 날카로운, 쿨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위리안에게서 시선을 거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상황을 봐야겠군. 둘이서 넘는 다면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내 본 모습을 보면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을 텐데. 나는 피식 웃고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긴 머리도 오랜만이군. 좀 어색한데? “뭐지?” 순간 상당히 강한 기운을 느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위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뭔가 온다. 아무래도 어제 그 녀석 같은데?” 내 말에 위리안은 눈을 깜박였다. 잠시 뭔가 생각하던 위리안은 몸을 굳히며 주위를 살폈다. “구, 구미호!? 보, 복수하러 온 건가?” 나는 심하게 긴장하며 부적하나를 꺼내드는 위리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몸놀림이 빠르기는 했지만 대비만 잘 하면 그리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제 위리안이 날린 부적 하나에 맞고는 바로 도망가던 구미호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지? 어제 쉽게 물리치지 않았나?” 내 질문에 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구미호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아마 봐주고 있었던 걸 거라고. 진짜 맘먹고 덤비면 장난이 아닌데… 불도 뿜고… 어제 내가 기습을 해서 놀라 도망간 것뿐이야. 복수하러 온 거면 골치 아픈데… 보통 레벨 450은 되는 유저들이나 사냥하는 놈이라고. 그것도 검사 같은 친구들이나. 나는 이제 400을 넘은데다 도사란 말이야!” 구미호가 그렇게 강한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 450 정도라. 시험 케이스로는 좋겠는데? 그때 우리의 앞쪽에서 뭔가 하얀 것이 나풀거렸다. 그리고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음?” “으아악!” 약간 어이없다는 기분인 나와는 대조적으로 위리안은 비명을 지르며 내 뒤로 숨었다. 이, 이 자식이……. “뭐야?” “지, 진짜로 하려나봐! 어떻게 좀 막아봐!” 나는 고개를 돌려 하얀 소복을 입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 눈매가 약간 사나워, 날카로워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완벽한 미인의 얼굴이었다. 나는 별 표정 변화 없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재미있군. 둔갑술인가? 해볼만 하겠는데?” “어? 이봐, 한!” 나는 위리안을 외침을 무시하며 하얀 소복을 입은 둔갑 구미호(?)의 앞에 마주섰다. 450이면… 천악과 비슷한 레벨이겠지. 마나르트도 없는 상태에서의 내 실력을 검증 받을 수 있는 상대다. 나는 살기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구미호의 얼굴이 약간 굳는 것과 동시에 나는 마나와 마기를 내뿜었다. 스아아아악! “우웃!?” 마기에 물들어 갑자기 어두워지는 주위의 모습에 위리안이 낮은 비명을 질렀다. 뭐, 상관없지. 그나저나 마나를 섞으니 마나르트를 쓸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괜찮은데? 나는 구미호를 노려보았다. 구미호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떠올랐다. 훗. 그럼 시작……. “자, 잠깐!” 동시에 앞으로 달려 나갈 준비를 하던 구미호와 나는 동시에 옆을 바라보았다. 살기어린 나와 구미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어둑어둑한 모습의 위리안이 서 있었다. 뭐야? 내가 짜증을 내며 입을 열려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티틱. 화악! 순간 작은 불빛이 번쩍하며 위리안의 얼굴이 나타났다. 곰방대에 불을 붙인 건가? 어둠 속에서 곰방대에 불을 붙임으로서 자신의 얼굴만을 환하게 비춘 위리안, 위리안은 곰방대를 입에 물고는 오른손으로 안경을 살짝 치켜올렸다. 싸늘한 눈빛이 안경 뒤에서 빛났다. 저 녀석이 저런 눈을 가지고 있었나? 내가 작게 감탄하는 순간, 위리안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캬아! 완벽해! 이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한줄기의 빛! 쿨한, 싸늘한 눈빛! 거기에 옥을 깎은 듯한 얼굴까지. 아, 여기에 부적도 하나 들고 순식간에 불태우는 것도… 그래도 대사! 화염의 지옥을 보여주마. 캬아~! 완벽해!” “…….” -미친 인간이었군요. 어이없다는 수준을 넘어 거의 살기까지 느끼며 위리안을 노려보던 나는 구미호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구미호가 짜증 섞인 얼굴로 여전히 뭐라고 떠들고 있는 위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몬스터들은 죄다 말을 하는 모양이군. 그 이무기에겐 당했지만, 너에겐 당하지 않는다.” 내 말에 구미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곳의 사람이 아니군요. 뭐, 상관은 없지만. 잠시 기다리시죠. “뭐?” 내가 반문하는 순간, 구미호의 모습이 흐릿해 지더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빠, 빠르다! 나는 급히 몸을 움직이며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위리안에게 쏜살같이 다가가는 구미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난 모양인데? “웃?” 위리안이 몸을 흠칫했다. 쳇! 나는 급히 달려가려했다. 하지만, 순간 위리안의 얼굴에 떠오르는 싸늘한 미소를 발견한 나는 몸을 멈춰섰다. 내 기억에 의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 놈들은 쉽게 당하진 않아. “속(速)! 결(抉), 화(火)!” 위리안은 순식간에 품속에서 부적들을 꺼내들었다. 첫 번째 부적이 푸른 불길과 함께 타오르는 동시에 위리안의 몸놀림이 빨라지며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구미호의 속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속도였다. 그리고 두 번째 부적이 붉은 불길과 함께 공중에 떠올랐다. 파아아아앗! 순식간에 불의 결계가 생성되었다. 불로 이루어진 바리어? 어쨌든 그런 모습이군. 나는 흥미진진한 광경에 위리안과 구미호를 바라보았다. 위리안도 장난이 아닌데? 말만 깝죽대는 녀석은 아니었군. 화아아악! “휘익~!” 구미호의 날카로운 손톱이 번뜩이는 동시에 구미호의 손에서 화염이 타오르자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불을 다룬다고 했지? 그리고 구미호와 위리안의 결계가 충돌했다. 화아아악! 순간 불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멋지군. 나는 불길 속에 가려진 위리안과 구미호의 모습을 쫓았다. “포박(捕縛)!” 순간 위리안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화염이 잦아들며 구미호와 위리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부적 하나가 구미호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잡았나? 스르륵……. 하지만 구미호의 모습이 흐릿해 지더니 자취를 감췄다. 위리안의 부적은 허공을 지나갔고 위리안은 당혹한 얼굴로 다시 부적 여러 개를 꺼내들었다. “속(速)!” 다시 위리안의 몸이 빨라졌다. 그리고 순간, 위리안의 뒤에서 구미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렙450의 몬스터로군. 아, 여기선 뭐라고 부르지? “화막!” 위리안의 고함소리와 함께 수개의 부적이 동시에 타올랐다. 음? 여러 개가 동시에? 강한 기술인가? 순간 위리안의 주위에 불의 그물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 불의 그물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호…….” 저게 도사의 위력인가? 나는 내가 당면한다고 해도 피하기가 쉬워 보이지 않는 공격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바리어로 막아내거나 검기로 가르는 수밖에 보이지 않는데… 위력이 약해 보이지도 않는데? 순식간에 마나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건데… 어쩌면 내상을 입을 지도. -캥! 구미호의 비명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구미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위리안은 구미호가 사라진 허공에서 흩뿌려지는 붉은 선혈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칫! “하하. 이긴 건가?” 위리안에 왠지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얼굴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순간 그의 뒤에서 구미호가 모습을 나타냈다. 왼 어깨에 꽤 깊은 상처를 입은 듯 하얀 소복이 피에 물들고 그을려 있었다. -용서하지 않는다! 구미호의 표독스러운 외침에 위리안이 대경하며 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어느새 구미호의 날카로운 손톱이 불에 휩싸인 채로 위리안의 목을 노리고 날아가고 있었다. “으아악!” 턱. “어?” 비명을 지르던 위리안은 구미호의 손이 허공에 멈추자 놀란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곧 자시의 뒤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위리안은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 어느새……. 나는 내 마나와 마기에 묶인 구미호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 길동무니… 함부로 헤치게 할 수는 없지. 그쪽이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겠지만… 합!”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쾅! 순간 뭔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구미호가 뒤로 퉁겨져나갔다. 바닥을 구른 구미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나를 노려보았다. 기세가 줄지 않았다. 나는 작게 감탄하며 위리안의 앞으로 나섰다. “역시 강한데?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 이기지 못했겠군.” 나는 입안에 고이는 피를 뱉어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쳇. 마나를 너무 급하게 끌어올렸어. 몸이 별론데? 나는 어느새 커다랗고 하얀 여우로 변한 구미호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타앗! 순간 구미호가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엄청난 속도였다. 나는 급히 몸을 띄어 올리며 몸을 회전시켰다. 휘릭. 카앙! 내 내려찍기와 구미호의 불타는 손톱들이 격돌했다. 순간 구미호의 몸에서 화염이 일며 내 몸을 덮쳐왔다. 제, 젠장! “스트라이크.”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아래로 급히 하강했다. 순식간에 OPG에서 손톱들이 튀어나오며 구미호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푸화악! 나는 가슴에서서 솟아나는 붉은 핏방울들을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옛날보다 상처에서 오는 고통이 더 심해졌군. 이것도 리얼리티냐? “훗. 승룡(乘龍)” 어퍼컷과 함께 검은 마나의 권풍이 솟아올랐다. 구미호가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나가떨어졌다. 몸에서 피를 철철흘리던 구미호는 나를 분노어린 눈으로 노려보다가 급히 몸을 날렸다. 도망인가? “도, 도망간다!” 나는 경악섞인 위리안의 외침을 들으며 무릎을 꿇었다. 제길. 역시 강한데? 위리안을 구하느라 너무 급히 힘을 끌어올렸어. “어, 어라? 한? 어이.” 나는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에 한숨을 내쉬었다. 엉망이군 그래. “앗! 할아범! 마침 있었군요!” “음? 위리안이로군. 무슨 일인가?” 약간 흐릿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위리안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길을 걸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잠시 정신을 잃은 건가? “이건 뭐야. 드디어 살인마의 길로 들어선 건가, 위리안 군.” “크윽.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제 동료라고요!” “흐음… 몸이 꽤 안 좋아 보이는데…….” “구미호하고 싸워서 그래요. 좀 도와달라고요!” “구미호?” 누군지는 모르지만… 위리안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의 기가 약간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식스센스의 능력도 증폭된 건가? 능력치가 올라갔으니… 그것도 이해가 되는군. “이 녀석이 죽으면 할아범을 가만두지…….” “위리안…….” 뭐라고 고함을 지르던 위리안은 내 목소리에 반색을 하며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우왓!? 깨어난 거야? 괜찮아?” 나는 눈을 힘겹게 뜨며 위리안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 미소에 위리안은 씨익 웃으며 거의 발광을 했다. “일어났다! 아자앗!” 순간 위리안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느라 부축해 줄 사람이 사라진 나는 휘청했다. 하지만 곧 누군가가 내 몸을 붙잡아주었다. “괜찮은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하얀 백발과 수염을 길게 기른 한 노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왠지 연륜이 느껴지는, 고승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괜찮습니다.” 내 무심한 대답에도 미소를 지어보인 노인은 나를 부축하며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살피니 한 나무집을 볼 수 있었다. 주위에 많은 채소밭도 있는 것이 이곳에서 홀로 생활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집의 옆에 모루와 같은 대장간 물건들이 널려 있는 작업장을 볼 수 있었다. ‘대장간인가…….’ 속으로 웅얼거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바로 했다. “괜찮겠나?” “내상 때문이었습니다. 대충 가라앉았으니 상관없을 겁니다.” 부축 없이 걸으려는 나를 걱정 깃든 눈으로 바라보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대신 걸려있는 발을 들어올리며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안으로 들어간 나는 훈훈한 공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집의 한 가운데에 군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공기를 데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집 안의 구조는 단순 그 자체였는데, 오른쪽에는 침대 두개, 한쪽에는 서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 하나있었다. 그리고 군불 근처에 있는 방석 몇 개가 앉을 것의 전부였다. “허허. 허전해 보이는 모양이로군. 하지만 이렇게 늙고 보니 별 욕심도 없어져서 말이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이 군불 옆에 놓아준 방석에 주저앉았다. 노인도 방석에 앉자 위리안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런! 나만 놓고 어느새!” “허허. 자네도 앉지 그러나 위리안 군.” 위리안은 별말 없이 군불 앞의 방석에 주저앉았다. 위리안은 품속에서 곰방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입에 물었다. 그때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는 대충 알겠군. 하루쯤은 묶어가도 나야 상관없네.” “아, 괜찮으면 밥도!” 위리안의 외침에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노인이 내 눈을 직시했다. 깊어 보이는 눈이었다. 고타의 눈이 이랬었나? 나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노인의 눈을 마주보았다. “흠, 나는 이공이라는 노인이라네. 그냥 이 노인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네. 이곳에서 대장장이 짓을 하고 있지.” “세한입니다. 이곳에서 서대륙이라 부르는 곳에서 넘어왔습니다.” 노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위리안이 당혹한 얼굴로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잠깐. 이봐요, 할아범. 안 놀랍니까? 여기 한은 적색 산맥을 넘어온 친구라니까요.” “들었네만.” 여전히 평온한 이공이라는 노인의 얼굴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던 위리안은 투덜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던 이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리를 해 오겠네. 간단한 요깃거리 정도는 만들어 오지. 위리안 군이야 도와줄 리도 없고… 자네는 몸이 성치 않으니 가만히 있게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발을 헤치고 나갔다. 곧 곰방대를 손에 든 위리안이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그런 것 같군. 여긴 어디지?” “아, 그 마을로 가는 길목에서 약간 벗어난 곳이야. 너 할아범은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NPC인데, 꽤 좋은 할아범이지. 이름 높은 장인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무기들 중 다수가 저 할아범이 만든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느낌이 당연한 거였군. 잠시 후 시작된 식사는 정말 별거 아닌 음식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작은 공기에 담긴 밥 한 그릇과 나물 몇 가지가 전부였다. 아마도 저 밖에서 기르는 채소들 같았는데 어떤 놈들인지 알기는 힘들었다. “쳇, 농담을 해도 웃는 법이 없단 말이야.”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위리안의 불평에 눈을 약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입을 약간 내밀고 있는 위리안의 얼굴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글쎄. 원래 내가 표정 변화가 없어서 그런 것 같군. 그런데 어르신.” 내 부름에 조용히 나물을 우물거리고 있던 이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이 날씨에 군불이라니… 몸이 좋지 않으신 것 아닙니까?” 내 질문에 이 노인이 약간 미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비해 위리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뭔 소리야? 이 할아범이 왜 아파? NPC라 그런 걱정은 없을걸.” 나는 위리안의 말에 눈을 약간 치켜떴다. 살기가 조금 흘렀는지 위리안이 눈을 끔벅였다. 잠시 위리안을 주시하던 나는 시선을 돌렸다. 위리안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모두가 나와 같으리라는 법은 없지. 그때 이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자네들 같은 젊은이들이야 괜찮겠지만 나는 좀 춥다네. 아직 봄이 아닌가.”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위리안은 관심을 끊고는 나물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도 곧 시선을 거두고는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조용한 저녁 식사가 끝나자 위리안은 일찌감치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는 골아 떨어졌다. 침대에 누웠는데도 하얀 백발 머리들은 여전히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이 노인은 작업장을 좀 둘러본다고 밖으로 나갔기에 혼자 남아있던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군불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앉아있으려니 좀 더웠다. “별자리도 현실과는 다른 건가? 좋군.” 나는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딱 세 번째네.” 고개를 돌려보니 약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작업장에 이 노인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세 번? 내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이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작업장으로 돌아들어갔다. 몸을 돌린 노인의 손짓에 나는 작업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작업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낮게 탄성을 질렀다. 더우면서도 덥지 않은 곳이었다. 약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가? 하지만 느낌상으로는 정말 그랬다. 화롯불이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작업장의 곳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기에 덥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더웠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나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역시 재미있는 젊은이로군. 놀라는 기색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어느새 나무 탁자 옆에 놓인 나무 그루터기 의자에 앉아있는 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앉으라는 손짓에 나무 그루터기 하나를 끌어다 앉은 나는 의문 섞인 눈으로 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세번이라고 하셨습니까?” 내 말에 이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때 위리안 군에게 미소를 지어줬었지. 그리고 아까 저녁 식사 때 한번 미소를 지었고. 방금 문을 나서서 하늘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짓더군.” 그걸 다 세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놀란 얼굴로 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웃었을 때, 정말로 웃고 있었나?” 노인의 질문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정말로 웃고 있었냐고? “글쎄요.” “입으로는 웃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더군. 항상 똑같이 착 가라앉은 눈이었지.” 그런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노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아까 하늘을 보며 웃을 때는 눈도 웃더군. 그 웃음이 약간 회한 섞인 웃음이라 의아했지만.” “…….” “아까는 왜 살기를 퍼트린 건가?” 위리안의 일말인가? “제 생각과 달라서 그랬을 뿐입니다. NPC, 어르신 같은 분들에 대해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내 말에 노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내게 손녀가 하나 있다네.” 나는 묵묵히 이 노인의 말을 들었다. “나는 내가 어릴 적 기억도 가지고 있고, 내가 젊었을 때, 내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아내가 죽었을 때, 아들이 죽고 손녀가 태어나고 며느리가 죽었을 때를 다 기억하네. 내가 분명히 겪은 일이었네.” 나는 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마… 우리가 이곳에 들어서기 전의 이야기를 하는 건가? 모두 기억 한다.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이 사람들의 기억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면?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에 이곳의 시간을 현실보다 엄청나게 빠르게 했다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완전히 조작된 기억이라면? 우리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겠지. 제길. “어느 날 유저, 혹은 플레이어라 불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네. 이곳을 여행하고, 짐승들과 영물들을 사냥하는 존재였지. 죽어도 다시 나타나는 다른 세상에서 온 방문객들. 우리는 별 신경쓰지 않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갔네.” “…….” “그들은 우리를 왠지 모르게 무시하더군. 자신들의 도구로 생각하는 듯 했네. 우리의 창조주가 자네들의 세상의 사람들이라는 말은 들었네. 이해하지. 그들의 횡포도 이해하네. 그들에게 내 아들이 죽었고, 며느리도 죽었네.” 내 눈빛이 흔들린 것 같았다. 죽었다? 플레이어에게 NPC가 죽는 일이 흔한 세상이다. 적어도 옛날에는. 이곳은 더 심하다는 말을 센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이해하네. 그들에게는 우리가 그저 유희의 대상이더군. 우리가 몰아내도 다시 돌아올 자들. 절대로 죽지 않는 자들. 우리는 이상하게 그들을 받아들였고, 함께 살아갔네.” 프로그램인가. 유저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라. 이런 명령이 뒤섞여 있는 지도. 나는 왠지 모를 살기가 끓는 것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손녀, 유저들에게 자신의 부모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내 손녀는… 자네들을 증오하지. 복수를 하겠다며 무가로 찾아가 무술을 배우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뛰쳐나간 아이라네.” “…….” “내가 왜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아나?” 나는 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깊은 눈이었다. 현실에 이런 눈을 가지 자가 있을까? 강 사범님이 죽을 때가 되시면 이런 눈이 되실지도.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자네는 다른 것 같군. 처음 봤을 때부터 위리안 군과 다른 것을 느꼈지. 위리안 군도 좋은 젊은이네만… 역시 우리와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더군. 그게 당연한 거지만 말이네. 하지만 자네는 좀 다른 느낌을 줬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보니 더욱 확신이 들더군.” “어떻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연륜이라고 하세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밝은 달이었다. 달의 주위에 수많은 별들이 떠 있었다. 이곳에도 우주의 법칙이 작용하는가? 만들어진 세상에.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우주의 행성 하나가 실수로, 프로그램의 오류로 사라진다면, 이곳에는 어떤 영향이 오는가. 법칙이 없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곳에서, 산꼭대기의 독수리 한 마리가 작은 돌멩이를 굴린다면, 그 돌멩이가 조금 더 큰 돌멩이를 굴리고, 계속 이어져 산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겠지. 그 산사태는 유저와 NPC들을 덮칠 수 있을 테고. 그럼 그것은 프로그램인가? 예정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프로그램을 뛰어넘은 현상인가. 그렇다면 이곳은 우리가 제어한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곳은 우리가 만든 곳이 아닐 지도. 지독한 모순이다. “이상하게 가라앉은 눈이로군. 전에 그런 눈을 한 사람을 한번 본 적이 있었네만… 지금은 죽고 없는, 이곳에서 검성이라 불리던 자였지. 내가 젊었을 시절에 검에 대해 잠시 배웠던 분이었지.” 무심. 이곳에도 무심을 이룬 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곳에 현실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 다른 것, 몬스터라고 해야 하나?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만들어진다? 숲에서 생성되지. 그리고 숲의 전역으로 뻗어나간다. 그 몬스터를 만들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 세상에 우리가 끼어들어, 마음대로 몬스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존재하던 세상에, 어떻게 우리가 연관되어, 몬스터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 수도. 하지만 그렇다면, 패치로 이루어지는, 만들어지는 던젼들은 무엇이지? 혼란스럽다. “뭔가 혼란스럽다는 눈빛인데… 너무 깊이 알려 할 필요는 없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니까.” “그렇습니까.”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떻게 보면 자네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네.” 무슨 말? 나는 의아해 하는 눈으로 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눈은 깊었다. “삶은 반복되지 않기에 즐거운 것이 아니겠나. 그런 점에서 본다면…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자네들이 불쌍해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나.” “삶은… 반복되지 않기에 즐겁다……?” “뭐, 이 늙은이의 개인적인 생각이네.” 그럴지도. 후훗. 이거 오늘 이상하게 밀리는, 많이 깨우치는 느낌인데? “자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나?”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물론입니다.” 내 대답에 노인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으음? 왜, 왠지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뭐지? 내가 의문스럽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켜 내 망토자락을 붙잡았다. “부탁은 나중에 말하겠네. 대신 선물을 한 가지 주지. 이 망토, 보통 물건이 아니로구만. 순은(純銀)이라 불리는… 미스릴이었나? 그 금속에 재생(再生)의 기운이 부여되었군. 끊임없는 재생성. 그것을 하나의 틀에 묶어 이 모습을 유지시키는 것으로 보이네.” 나는 놀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한번 보고 그런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인가? “내가 이것을 영체(靈體), 념(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겠네.” “예?” 나는 얼떨결에 노인에게 천상을 망토를 빼앗기고는 눈을 깜박였다. 무슨 소리지? 념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영체는 또 뭐야? “념을 담는다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담거나, 그것을 뛰어넘어 어떤 영혼을 담는다는 것이네. 잘 된다면 이 망토에 자네의 념을, 영혼을 담을 수 있을 거네. 아니면 강신도 가능하고.” “영혼을? 제 영혼을 담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래서야 자네가 죽지 않겠나. 그저 자네의 념을 넣는 정도까지는 가능할 거네. 강신하는 방법도 있네만…….” 에고 계통의 아이템을 만든다는 건가? 하지만 그래서야… 마나르트 만으로도 시끄럽다. 넘기고. “그런데 그래서야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인지…….” “이 망토의 재생력을 제어해… 자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네. 끊임없는 재생의 힘을 하나의 틀으로 묶고 있네만 그 틀을 부수고 념을 넣을 공간을 만든다면 가능하지.” 무슨 소린지 이해는 가지 않지만… 좋다는 얘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작은 선반 하나로 다가가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을 들고 왔다. 스르륵. 그 병을 망토에 대고 붇자 이상한 기운이 전해졌다. 마치 그 액체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 그 투명한 액체는 천상의 망토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젖은 듯한 흔적은 없었다. 내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보통 젊은이는 아니구만. 신수(神水)를 느끼는 모양이군. 이 신수가 틀을 깨고 념의 공간을 생성하는데 도움을 줄 거네.” “신수…….” “내 가족들이 살해당한 것도 이 신수 때문이지. 이 신수를 얻기 위해… 우리 가족을 습격했네. 그런 놈들에게는 넘겨서는 안되는 것이라 지금까지 간신히 지키고는 있었네만…….” 뭐, 뭐야?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급히 입을 열었다. “어, 어르신. 그렇다면 왜…….” “쉬어도 좋을 나이가 아닌가.” 내 말을 끊고 흘러나온 이 노인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약한 목소리였지만 왠지 크게 느껴지는. “며칠 기다려야 할 걸세. 이곳에 또 들릴 수 있겠나?” 이 노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의 마을에 들렸다가 돌아올 겁니다. 산맥을 넘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자네가 이곳에서 그 할 일이라는 것을 해 줘도 괜찮을 것 같네만…….” 나는 약간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쳇. 내 표정을 살피던 이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게나. 자네 마음에 달린 거지. 며칠 뒤에 오면 완성시켜 놓겠네.” “예.” “아, 자네 검사로 보이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뛰어난 장인이라며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이 노인은 한쪽을 가리켰다. 작업장의 한쪽 벽에 여러 개의 무기들이 걸려있었다. “하나 골라가게나. 검을 잃어버린 모양인데, 모두 보통은 넘는 놈들이라네. 자네라면 자네에게 맞는 놈을 찾을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나 검집은 모두 수수했다. 하지만 보통 평범한 검에서는 느끼기 힘든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식스센스가 이럴 때도 도움이 되는군. 나는 검들을 유심히 살폈다. 검도 있었고, 도도 있었다. 여러 가지 기문병기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역시 검이겠지. 나는 여러 마디로 나뉘어져 있는 굉장히 긴 검 모양의 무기에서 눈을 돌려 검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한 검에서 내 시선이 멈췄다. “마(魔)?” 이상한 기였다. 마기와 비슷한 느낌의 기운이었는데 또 틀렸다. 어쨌든 나와 맞는 검으로 보이는군. 나는 순수한 느낌이나 성스러운 검들을 제껴두고 그 검을 벽걸이에서 떼었다. 지이이잉. 공명? 나는 검이 내 마나와 공명하는 것을 느끼고는 미소를 지었다. 멋진 녀석인데? “역시 특이한 젊은이로군. 요기를 띄는 녀석을 고르다니. 보통 사람들은 쓰지 못할 검이지만 반응을 보니 자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웬만해선 부러지지 않을 테니 잘 사용하게나. 내가 만든 녀석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녀석이니 실망은 안 할 걸세.” “감사합니다.” 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이니 너무 그러지는 말게.” 그 부탁이 뭔지는 모르지만… 꼭 들어드려야겠는데?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작업장을 빠져나왔다. 이 노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왠지 나가봐야 할 듯한 분위기였기에 나왔을 뿐. 이 노인이 뭔가를 부스럭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천상의 망토가 흔들리는 것도 느껴졌다. “밝아.” 나는 밝게 빛나는 달과 별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알게 된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좋으신 분으로 보이는군. 나는 내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약간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익숙한, 섀도우 월드 속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현실에서 역사서에나 봤던 모양의 검. 나는 그 검을 뽑아들었다. 약간 붉은 빛을 띄면서도 검은 빛을 띄는, 이상한 빛의 검신이 달빛 아래 빛나고 있었다. “아이템을 읽는 기능도 사라졌으니…….” 이제 아이템을 읽는 기능도 사라졌다. 스크롤을 이용해 추정 능력치를 알아보는 방법과 직접 상점에 가서 감정하는 방법 외에는 성능을 알기 힘들다. 고수나, 마법사, 장인들이라면 대충 알아볼 수 있겠지만. 나도 고수에, 식스센스까지 겸비했다고. 내가 보기에 이 검은… 샤프소드보다도 월등히 좋아보였다. “망토가 없으니 왠지 허전하군.” 검은 옷 위에 리턴 체인 메일을 걸치고, 그 위에 간단한 부분 갑옷을 걸친 내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뭐, 이것도 보기 나쁘지 않군. 하지만 긴 머리는 별로 어울리지 않지? 나는 검을 머리로 가져갔다. 사라락. 예리한 검날에 잘린 머리카락들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다크소드도 안녕이로군. 음침한 분위기 만들기는 물 건너 갔으니까. 현실에서처럼 흉터가 생긴다면 모르지만. 이제는 캐릭터를 만들 때, 현실에서 크게 바꿀 수 없다. 내 ‘세한’이야 패치 전에 만들었으니 상관없지만. “후훗.” 나는 천천히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에서도 옛날과 다른 모습이 되어가는 건가.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칠흑 같이 어두운, 그 중에 달이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머리는 왜 잘랐어?” 위리안의 질문에 나는 간신히 목까지나 내려올 만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냥. 기분이나 전환해 볼까 해서. 그래, 얼마나 가면 되는 거지?” “넉넉잡아서 만 하루는 걸린다고. 내일 오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 하루라. 나는 그 이 노인의 집과 작업장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약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라? 그 검은 할아범이 준 거야?” 위리안이 내 허리에 차여져 있는 검을 보며 눈을 빛냈다. “신기한데? 할아범은 남에게 자기가 만든 무기를 주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내가 아무리 졸라도 주지 않았거든. 그것도 그렇지만… 요기가 느껴지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기라. 이곳에서의 마기와 비슷한 계통인가? 하지만 마기라는 것도 있는 것 같으니 좀 다르겠지. “그 마을, 어떤 곳이지?” 내 질문에 위리안은 입에 물려던 곰방대를 도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은 곳이지. 꽤 큰,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가까운 곳이야. 길드도 꽤 많이 있고. 특히 산맥 탐사 길드로 유명한 곳이지. 내가 한 달간 머무른 곳이야.” “후후. 그 마을에서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발견한 모양이지?” 내 말에 위리안은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뾰족한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그렇지. 한눈에 반해버렸거든. 현실에서도 그렇게 예쁠지는 모르지만… 마음씨도 곱고. 내 이상형이랄까… 진도도 꽤 나갔다고.” “그래?” 위리안은 어쨌거나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기분이 좋은지 계속 떠들어댔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 어떤 정보를 알게 되어 쫓기다 흘러들어간 마을에서 만난 어여쁜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다 그거 아냐. 나는 장황한 위리안을 설명에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시군. “그래서…….” 내가 갑자기 입을 열자 위리안이 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쫓기고 있던 이유가 뭐지?” 내 질문에 위리안의 기도가 약간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약한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하며 안경 뒤의 검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괜찮은데? 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눈으로 위리안을 바라보았고 위리안은 싸늘한 얼굴로 나를 마주보았다. “꼭 말해야 되는 거야?” “마음대로. 그저 네가 겪었다는 일의 전모를 알고 싶어 한 말일 뿐이다.” “그럼 나중에. 어차피 나하고 함께 다니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지도 몰라.” 위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왠지 내 주위에는 뭔가 남다른 부분이 있는 사람들만 모이는 것 같군. 나도 상당히 남다른 편이지만. “그럼 되는 한 빠르게 가지. 내일 오전 중에는 도착하도록.” “좋아.” 위리안은 예의 그 약한 미소가 감도는 표정으로 돌아갔고 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사람은 속에 한 가지 정도는 감추고 살아가는 존재지. 나도 그렇고. 나는 쓰게 웃었다. -한번 알아봐 줘? “됐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내 말에 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헤어질지도 모르는 사이니 굳이 알아볼 필요까지는 없다. 센도 알겠다는 듯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 지금 대충 알아봤어. 간단한 프로필인데… 볼래? 빠르군. “들어보지.” -좋아. 게임 아이디. 위리안. 마이너 위리안으로 불리는 녀석이야. 직업은 도사. 화염계의 부적술과 보조계의 부적술이 특기라고 하는데? 레벨은 400 정도로 추정된데. 꽤 유명한 랭커였어. 지금이야 랭킹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평판도 괜찮은 녀석이네. 생긴 게 특이해서 더욱 알려졌다고 하고… 가끔씩 짓는 싸늘한 표정이 공포라는군. “그래?” -요즘 근황은… 흑룡문(黑龍們)이라는 길드에게 쫓기고 있다. 평소 지인들의 도움으로 도망은 다니고 있지만 현재 위험상태로 알려짐. 이라는군. “흑룡문이라. 뭐하는 곳이지?” 내 질문에 센은 예상했다는 듯 뭔가를 딸칵거리며 입을 열었다. -흐음, 적색 산맥을 넘기 위한 일과 가끔씩 근처의 몬스터, 아, 여기서는 괴물이라고 하나? 어쨌든 그런 놈들을 퇴치하러 다닌다고도 하는군. 나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센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외적으로군. 실제로는?” -후후. 별로 좋은 놈들이 아냐. 아무래도 리자드 미국 지부와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깨끗한 짓보다는 더러운 짓을 더 많이 하는 놈들이군. 전에는 NPC 장인가문을 습격하기도 했다나봐. 신수라는 것을 노리고… 왜 그래? 내 눈이 싸늘하게 빛나자 센이 약가 움찔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수… 장인가문이라.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 대해 말해주던 이공이라는 노인을 떠올렸다. 흑룡문이라. 어쩌면 한번 붙게 될 지도 모르겠군. 위리안과 함께 있으니 말이야. “별거 아니야.” -그래? 좀 조심하라고. 쉬운 곳은 아니니까. 아, 적색 산맥을 도로 넘을 거지? “물론이지.” -좋아. 지금까지 알려진 산맥이 지리를 모두 종합해서 지도를 만들어 줄게. 품속에 넣어둘 테니 꺼내보라고. 역시 대단하단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질문이 하나 있었지. “궁금한 게 있는데. 능력치 중에 보너스 수치가 10으로 되어 있더군. 왜지?” -아, 그거? 알아보니 그건 현실에서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수치라는군. 어디 검증소에 가서 현실에서의 신체 능력을 테스트 받으면 올라간데. 너라면 상당히 올라갈 거야. 현실에서의 능력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런 의자도 생긴걸 보니 꽤 괜찮은 모양이지? “그쪽은 어때?” 내 질문에 센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지. 이제 세상사는 맛이 난다니까. 벌써 돈도 꽤 들어왔어. 아, 그리고 레딕하고 몇 명이 섀도우로 들어갔다. 아직은 초보지만 좀 강해지면… 손을 써야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고수들이 탄생하겠군 그래. 이제 별로 할 말은 없는 건가? 내가 전화를 이만 끊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돌아간 세상은 마음에 드시나? “하늘은 맑더군.” 나는 큭큭거리는 센의 얼굴이 흐릿해 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꽤 남는데? 나는 시계를 흘깃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이 없군. 로그아웃도 상당한 신경을 써야했다. 어쨌든 동행을 하고 있는데 한명은 로그아웃을 하고 한명은 계속 로그인 상태라면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아이템도 몇 가지 생겨났다. 그 중 하나가 붉은 보석 목걸이 같은 아이템이다. 로그아웃을 하면 그 붉은 목걸이에 몸이 봉인되고 그 목걸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일행 중 한명이 로그아웃 했을 때 유용한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엄청나게 희귀한, 최고급 레어 아이템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시간을 맞춰 로그아웃을 한 덕분에 그 아이템을 쓸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위리안도 상당히 능력있군. 그런 엄청난 아이템도 가지고 있고. 잠시 로그아웃을 할 당시의 일을 생각해 보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로그인할 시간을 정하느라 상당히 골치 아팠다. 미국과 한국의 시차 때문이었는데, 나야 할일 없는 신세지만 위리안은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애매했다. 그 직업이 뭔지는 모르지만. “심심해.” 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한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는데도 약속 시간까지는 3시간이나 남았다. 뭘 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짧은 검은머리에 약간 이질적인 느낌의 눈. 흉터, 칼에 베인 듯한 흉터들이 있는 얼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뭘 하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말 같은데? 나는 볼을 긁적이며 뭘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음, 잘 부탁하네.” 약한 불빛이 조명의 전부인 주차장. 폐기된 주차장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음침한 분위기였다. 검은 정장에 검은 썬그라스를 낀, 얼굴의 깊게 패인 흉터가 공포감을 조성하는 사내. 그리고 평범한 양복이지만 안경 뒤에서 빛나는 눈이 왠지 좋게 보이지 않는 사내. 누가 지나가다 봤으면 단숨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을 꾸미는 무리라고 생각했을 법한 모습이었지만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나는 가보지. 비밀은 잘 지키는 것이 좋을 거야.” “걱정 마십시오.” 안경의 사내는 사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 디스켓을 내밀었다. 검은 정장의 사내가 디스켓을 품속에 집어넣자 안경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걸어갔다. 잠시 후 차 한대가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검은 정장의 사내가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주차장 안에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타탁. 그때 주차장 입구에 몇몇 사람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 얼굴에 약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깔끔한 복장의 두 사내와 몸에 좀 달라붙는 느낌의 가죽옷을 입고 있는 여자였다. 셋 모두 정장의 험악한 인상의 사내에 비해 가벼운 분위기였지만 검은 정장의 사내는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뭐냐?” 주먹을 살짝 쥐는 정장의 사내를 보며 입구를 막고 있는 셋 중 두 사내가 쿡쿡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정장 사내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때 가죽옷의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여자긴 했지만 그 뒤에 두 명의 남자가 있었고, 앞으로 나서는 것으로 보아 셋 중의 우두머리로 보였기에 정장의 사내는 주먹에 조금 힘을 주며 목을 뚜둑거렸다. 그 모습에 여자는 한심하다는 듯이 웃고는 입을 열었다. “방금 받은 것들. 모조리 내놔.” “뭐야? 이 년이…….” 썬그라스 속에서 빛이 번쩍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가죽옷의 여자는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뒤의 두 사내도 미소를 지우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죽여주마! 어디의 떨거지들인지는 모르지만…….” 철컥. 순간 차가운 금속이 자신의 뒤통수에 닿자 정장의 사내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느새 다가온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두 손을 들어올리고 몸을 살짝 돌린 정장 사내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이렇게 기척도 없이 뒤로 다가와, 총을, 그것도 구시대의 화약식 총기를 들이밀 녀석은 이 바닥에서도 흔하지 않다. “레, 레딕…….” 신음을 흘리는 듯한 목소리를 끝으로 사내는 총을 들이민 사내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레딕은 사내의 뒤통수를 가격한 권총을 빙글빙글 돌리고는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셋이 싱글거리며 레딕에게 다가왔다. “역시 멋져요.” “쳇. 그래봤자 진 그 괴물 같은 자식에겐 안 된다고. 그나저나… 이름 높은 크넥스 그룹의 행동대장께서 여긴 어인 행차셨을까?” “후훗. 글쎄요.” 소라. 현진에게 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암흑가의 여자는 비웃음이 담긴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사내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솔의 뒤에 서 있던 두 사내가 몸을 굽혀 쓰러진 사내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른 쪽은 어떻데?” 레딕의 물음에 솔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잘 되겠죠. 아까 시작한다고 하던데… 어차피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만 갔으니까 걱정은 없어요. 잡힐 일도 없고. 아? 빙고!” 솔의 갑작스런 외침에 레딕이 눈을 약간 치켜뜨며 몸을 일으키는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둘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손에는 각각 서류 봉투 하나와 디스켓 하나를 들고 있었다. 레딕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걸렸군.” “대충 보니 꽤 중요한 거네요. 카메론 녀석들, 꽤 놀랄 겁니다. 그런데 리자드 쪽을 감시하러 간 쪽은 어떻데요?” 레딕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주차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머지 셋이 그 뒤를 따라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곧 버려진 주차장의 어둠 속에는 기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사내만이 남게 되었다. “질렸어.” 나는 투덜거리며 만지작거리고 있던 책을 던져버렸다. 오랜만에 읽으려니 미치겠구만. “크으윽!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나는 짜증을 그대로 표현하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냥 혼자 들어가서 주위나 돌아다니고 있을까? 그래. 그게 좋겠……. -전화 받아! 우헤헤헤헤! 타이밍 멋지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 음? -전화 받아! 전화 받아! “뭐야?” 이건… 나는 전화의 발신인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흠… 아무도 안 뜨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갑자기 누군지 모를 사람들의 전화가 빗발치는군. 나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아, 진? 화상 모니터는 잠잠했지만 목소리를 들려왔다. 여자? 아, 릴이로군. “릴? 무슨 일이야?” -아, 제대로 걸렸네. 보고하려고요. 잡았어요. 릴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 보이지? “그래?” -진의 말이 딱 들어맞더라고요. 어떻게 알았어요? 센에게 물어봐도 알려주지도 않고… 아, 가야겠다. 그냥 보고나 할 겸해서 전화한 거니까… 쳇! 알았다고! 나는 릴의 고함소리에 귀에서 전화기를 좀 땠다. -레딕 오빠 쪽이야 정확하게 끝냈을 것 같고… 어쨌든 리자드 쪽은 확실하게 끝냈어요. “알았어. 수고했어.” -후훗. 충성! 전화는 끊어졌고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뭐, 이제부터는 확실하게 믿어보지. 어쨌거나… 접속하지 못하던 이유 중 하나는 해결됐으니 섀도우 월드로……. -전화 받아! 전화 받아! “… 망할.” 나는 수화기를 드는 대신 연결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여전히 모니터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레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성공했다. 카메론 쪽에서 크넥스에 의뢰를 하고 있더라고. 아마 리자드의… 시끄러 이 자식아! 갑작스런 레딕의 고함소리에 나는 짜증을 내며 몸을 뒤로 뺐다. 남매가 똑같다니까. -어쨌든… 아마 리자드하고 카메론에서 서로를 견제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군. 릴에게도 연락이 왔는데, 성공했다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래? 알았다. 나중에 보자고. 혹시 모르니까 몸을 빼야겠어. 가자. 전화가 끊기자 나는 약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카메론 쪽은 거의 도박이었는데… 역시 센이로군. 암흑가의 힘이기도 하지만. 리자드 쪽은 의외지만, 어쨌든 양쪽 다 잘 끝났다니 섀도우 월드로……. -전화 받아! 전화 받아! 헤헤헤헤! “크윽…….” 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신음을 흘렸다. 왜 갑자기 전화가 불똥을 튀기는 거냐? 나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여전히 그 어떤 프로필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또 암흑가에서 온 건가? 도대체 전화를 몇 대 장만한 거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접니다. 스피커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나는 몸을 굳혔다. 이런… 아무래도 심심하다고 했던 것은 취소해야겠는데? 뭐, 확실히 방금 전까지는 심심했지만. 나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입을 열었다. “간만이군요. 성공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통화 내용 녹음을 시작하며 의자를 가져다가 편하게 앉았다. 이번에도 금방 끝나지는 않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왔어?” 나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리안이 부적을 들고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위에 몬스터…아니, 괴물인가? 잠시 고민하던 나는 편한대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주위에 몬스터는 없어.” “응?” 위리안이 몸을 움찔 하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부적이 약한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 능력이야. 주위에 위험은 없다. 가지.”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위리안은 내가 그대로 걷기 시작하자 급히 배낭을 들쳐 메고는 내 뒤를 따라왔다. 새벽인가? 약간 쌀쌀하군. “한, 진짜 그런 능력이 있어?”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위리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오른 어깨에 배낭을 메고 있군. 왼손으로 곰방대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고.” “허억!” 내 말에 위리안이 숨 막힌 신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자.” “어? 아, 그래.” 나는 좀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시 걸어갔고 위리안이 곧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입에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뾰족하게 솟은 하얀 머리가 새벽빛에 약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푸른 안경알 뒤로 보이는 좀 깊어 보이는 푸른 눈동자. 꼭 학자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입에 걸려있는 옅은 미소가 헤픈 느낌을 주어 학자로 보기에는 힘든, 특이한 느낌. 나는 시선을 거두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푸른 하늘이었다. 시끌 시끌. “생각보단 사람이 많군.” “그래? NPC가 꽤 많거든. 웬만하면 NPC들 수를 좀 줄여주면 좋을 텐데. 이 마을은 특히 NPC들이 많아서 좀 복잡하거든.” 위리안의 대답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NPC들의 수를 줄인다고? 순간 내 기도가 변했는지 위리안이 몸을 흠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 별거 아냐.” 아무래도 저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녀석한테 뭐라 하기는 힘들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곳에서는 NPC들에 대한 대우가 나쁜 편이니까. “어디지?” “아, 이 마을의 중심부에 있어. 중앙 광장에 있는 길드를 관리하고 있거든. 이 시간이면 아마 있을 거야.” “그래?” 여기도 마을 형태는 비슷한가 보군. 건물의 형태는 좀 다르지만. 나는 눈을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위리안은 모르고 있었지만 벌써 몇 명이 우리 뒤에 따라붙어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위장하고는 있지만 가끔씩 흘러나오는 살기와 우리를 주시하는 날카로운 기운은 숨기지 않고 있었다. 하긴 나 같은 능력자가 드문, 거의 없으니 당연할 수도 있었다. 그 라젠, 이반, 나르손이라는 이름의 세 어르신들이나 고타 정도가 아니면 눈치 채기 힘들 테니까. "위리안.“ “응?” 약간 진한 미소를 짓고 있던 위리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길드 이름이 뭐지?” “어? 프로테나.” “프로테나라… 알았어. 먼저 가 있어라. 잠시 만날 사람들이 있어.” “만날 사람? 여기에 아는 사람이 있어?” “어르신이 부탁했어.” 어르신이라는 말에 잠시 생각하던 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할아범? 알았어. 먼저 가 있을게. 아, 아니지. 차라리 같이… 얼레?” 위리안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자 어색하게 말을 끝냈다. 사람들 속으로 뛰어든 나는 주위를 살폈다. “이걸 생각 못했군.” 나는 내게 집중되는 시선들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 사람들과 너무도 다른 복장이라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시선을 너무 끌겠다는 생각에 나는 급히 퀵스텝을 사용해 몸을 움직였다. 젠장. 이런 일에 퀵스텝까지 사용해야한다니. 아무래도 이곳의 옷을 좀 살 필요가있겠는데? “음?” 두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에서 타깃들을 감시하고 있던 주토는 눈을 크게 떴다. 위리안이라는 주 타깃은 여전히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 옆에서 걷고 있던 검은 머리에 특이한 차림의 사내가 어느 샌가 사라져 있었다. 엄청난 실력자이니 주의하라는 명을 들었던 주토는 급히 주위를 살폈다. 짧은 회색머리에 약간 어두운 느낌, 딱딱한 느낌을 주는 얼굴. 180정도의 키에 잘 단련된 몸을 가진 주토는 이 세계의 원주민, NPC라 불리는 이들 중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암살자로서의 수업을 받으며 뒷세계에 서 자라난 주토는 현재, 대륙에서 뛰어난 암살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데리고 있던 살수집단이 플레이어들의 길드, 흑룡문이라는 곳에 흡수된 이후로 역시 흑룡문에서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이 들었던 사람들이 있던 옛 살수문에 비해 NPC들을 깔보고, 물건 다루듯 하는 흑룡문에는 마음을 두지 못하고 있는 주토였다. 주토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든 흑룡문에서는 주토의 실력을 이용해 많은 이들을 죽였다. 이전의 살수문에 있던 22년보다 흑룡문에서 일한 약 2년간의 기간에 죽인 사람의 수가 많다는 것이 주토가 흑룡문에게 시달린 정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암살자, 살수이기는 하지만 섀도우 월드의 NPC이며 천성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지는 않던 주토였기에 현재 흑룡문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흑룡문을 벗어날 힘이 없기에 여전히 주토는 흑룡문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흑룡문의 일급비밀을 알아냈다는 녀석과 그 일행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가능하다면 죽이라는 명도 있었다. 어느 정도 가벼운 마음으로 둘을 감시하던 주토, 그는 현재 엄청난 긴장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 특이한 검은 머리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토는 불현듯 자신과 같이 둘을 감시하고 있던 동료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음?” 주토는 눈을 부릅떴다. 저쪽의 골목에 서 있던 동료가 목에 단검이 꿰뚫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경지에 오른 암살자인 자신의 동료가 죽어있다는 사실에 주토는 경악했다. 플레이어 이기에 평소 좋은 감정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죽어 자빠져 있는 것을 보니 약간의 감정이 생기는 주토였다. 그리고 그 순간, 주토는 급히 몸을 돌렸다. 주토의 눈에 살기를 머금은 한 사내의 모습이 잡혔다. “이봐. 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건지 들어보실까.” 사내의 질문에 잠시 당황하던 주토는 순식간에 손을 휘둘렀다. 겨드랑이 사이에 숨겨져 있던 단검이 사내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엄청난 속도였지만 사내는 순간적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몸을 틀어 단검을 피해냈다. “젠장. 이 자식들은 왜 말보다 단검이 먼저 나가는 거야!” 사내의 투덜거림에 주토가 황당함을 느끼기도 전에 검광이 번뜩였다. 이상한, 남색의 기를 띄는 남색 검신의 검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날아오자 주토는 이를 악물며 양손을 휘둘렀다. 카가각! 사내의 남색 검과 주토의 두 단검이 격돌하며 둘의 중간에 멈춰 섰다. 사내의 얼굴에 감탄이 떠올랐고 주토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둘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캉! 파카칵! 짧은 순간 둘의 공격이 여러 번 교환되었고 약간 어둡던 골목 안에 순간순간 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어느새 골목의 가장 안쪽의 벽에 몰린 주토에게 사내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이미 오른팔에 검상을 입은 주토는 입술을 깨물며 죽음을 기다렸다. 이 특이한 사내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달은 주토였다. ‘빌어먹을!’ 평소 목석같은 놈이라는 말을 듣던 주토는 그에 걸맞게 마지막 유언조차 간단했다. 그리고 사내의 검이 주토를 찔러갔다. 푹! “…….” 눈을 감고 있던 주토는 이상하게 자신의 몸이 멀쩡 하자 눈을 떴다. 그리고 사내의 검이 자신의 목옆을 통과에 벽에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의문 섞인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얼굴이야 무표정했지만 눈빛에서 주토의 말을 읽은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NPC로군. 난 NPC를 베고 싶은 마음은 없어. NPC가 왜 길드에 고용되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또 우리를 쫓지는 말도록. 당신 같은 실력자는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가 힘드니까.” “무슨 소리지?” 주토는 이를 악물며 마지막 남은 단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사내는 상관하지 않으며 몸을 돌렸다. “다시 만나지 않기를. 아, 이거 받아.” 주토는 사내가 던진 물건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이상한 색의 액체가 들어있는 작은 병이었다. 주토가 생전 처음 보는 물건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지 모를지 모르겠지만 상처에 바르고 좀 마셔. 꽤 빨리 치료가 될 거다.” 주토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주토는 신경도 쓰지 않은채 걸어가고 있었다. 주토는 이를 악물며 단검을 뽑아들었다. “이익!” 주토가 단검을 집어던지려는 순간, 마치 뭔가에 붙잡힌 듯이 그의 동작이 멈췄다. 그것이 자의는 아닌 듯 주토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때 어느새 몸을 돌린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난 NPC를 죽이고 싶지 않아.” 왠지 슬픈 느낌의 말에 주토는 눈을 깜박였다. 사내는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몸의 자유를 되찾은 주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불신 가득한 눈으로 골목의 입구 쪽을 바라보던 주토는 오른팔에서 통증이 느껴지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주토는 자신의 왼손에 들린 작은 병의 존재를 깨닫고는 고개를 돌려 그 작은 병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주토는 병의 마개를 열고는 그 액체를 상처에 들이부었다. 그리고 절반쯤 남은 액체를 자잘한 상처에 조금씩 붙고는 또 잠시 고민하다 남은 것을 들이마셨다. “… 효과는 좋군.” 그냥 죽어보자는 심정으로 병을 비운 주토는 정말로 상처가 나아가자 한숨을 내쉬었다. “별 희한한 플레이어를 다 보겠군. 느낌상으론 분명 플레이어였는데…….” 눈가를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주토는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골목은 여전히 어두웠다. “실례하겠습니다.” “예?” 중앙 광장으로 생각되는 곳에 도착한 나는 나무 하나에 멍하니 기대서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은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시죠?” “프로테나 길드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프로테나 길드 말입니까?” “예.” 약간 놀란 듯한 사내의 표정에 나는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래도… 기질이 좋지 않아. 그리고 내 손이 검에 닿는 순간, 사내의 눈에 살기가 지나가며 검이 휘둘러져 왔다. “죽어랏!” “쳇!” 나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내게 휘둘러져오는 검을 쳐냈다. 큭. 찌릿하군. 채채챙! 그때 주위에서 검 뽑는 소리가 수십 개나 들려왔다. 제길. 주위를 둘러보니 검을 뽑아든 자들만 십수 명에 부적을 들고 있는 자도 몇 명 있었다. “죽여!” “이 길드는 환영 인사가 좀 과하군 그래.” 나는 마나, 기를 끌어올리며 검을 들어올렸다. 검에서 남색 기운이, 몸에선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이 검에선 왜 남색이 나오는 거야? 요기가 어쩌고 하더니… 그 때문인가?” 내가 중얼거리는 사이에 첫 번째 검사가 내 앞으로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상당히 빠른, 신경써서 고른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죽어라.” 순간 내 휘두름과 함께 커다란 검기가 날아갔다. 순식간에 첫 상대를 반으로 가른 검기는 그대로 뒤로 날아가며 폭발을 일으켰다. “역시 여기 친구들은 방어력이 약하군. 하긴 갑옷도 없으니 당연한가.” 방심하고 마나를 사용하지 않을 때 끝내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지. 나는 눈을 빛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폭발로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 몇몇의 검과 밝은 빛을 내뿜는 부적들이 날아왔다. 나는 조소어린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아, 위리안.” 위리안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활짝 미소 짓는 여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길고 부드러운 은발 머리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프로테나 길드를 관리하는 여자이자 위리안이 이 마을에 들른 이유인 여자. 위리안은 프레나(프로테나라는 이름은 길드의 지도자 둘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프레나… 오랜만이야.” “예…….” 프레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리안의 품에 안겨갔다. 위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오는 프레나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던 둘은 조금 떨어지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흑룡문에게 쫓기고 있다고 들었는데…….” 걱정이 깃든 프레나의 목소리에 위리안은 멋쩍게 웃으며 안경을 추슬렀다. “괜찮아. 음…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조금 있으면 올 텐데…….” 위리안의 말에 프레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좋은 사람?” “아, 그런 사람이 있어. 날 구해주고 여기까지 동행한 사람인데… 잠시 볼 일이 있어서 헤어졌거든. 곧 여기로 올 거야.” 위리안의 말에 프레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전 차라도 끓여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위리안.” “아, 고마워.” 위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프레나는 부드럽게 몸을 돌려 걸어갔다. 순간 그녀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쳐지나갔지만 세한과 같은 능력을 지니지 못한 위리안은 눈치채지 못했다. 부스럭. 위리안이 서 있는 방에서 빠져나온 프레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두 장의 종이를 꺼냈다. 뭐라고 깨알같이 적혀 있는 두 장의 종이. 그 종이의 마지막에 간단하게 몇 마디를 적은 프레나는 미소를 지으며 옆의 탁자에 놓여 있는 커다란 새장에서 매 한 마리를 꺼냈다. “이 일만 끝나면…….” 푸드득. 작게 중얼거리던 프레나는 갈색의 매가 눈을 빛내며 날개를 조금 퍼덕거리자 미소를 짓고는 매의 다리에 종이를 묶어 주었다. 그리고 곧 매가 창문을 통해 나가려는 듯 살짝 날아올라 창틀에 내려앉았다. 날개를 가다듬는 갈색의 매를 잠시 바라보던 프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장에서 또 한 마리의 매를 꺼냈다. 전의 갈색 매 보다 좀 작은 황색의 매였다.그 매의 다리에 또다시?? 종이를 묶어준 프레나는 미소를 지으며 매를 창문 쪽으로 날렸다. “흑룡문으로 가거라.” 두 마리의 매가 낮게 울며 날개 짓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프레나는 왠지 슬퍼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뭔가 날카로운 기운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프레나는 급히 몸을 돌리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끼에엑! 갈색의 매가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매의 가슴에 단검 하나가 박혀 있었다. 하지만 작은 매는 작은 크기 덕분인지 단검에 왼 다리만을 스치고는 급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누, 누구… 헉!”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프레나의 눈에 엄청난 살기를 뿜어대고 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검사, 세한이었다. “네, 네놈은……!” “역시 당신이었군!” 프레나는 급히 몸을 날리며 품속에서 손을 꺼내며 강하게 휘둘렀다. 뭔가 유연하고 긴 것이 휘둘러지며 세한에게 날아갔다. “칫! 연검!?” 세한이 짜증에 절은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콰콰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프레나가 벽을 부수며 날아갔다. 제길. 역시 한 길드를 책임질 실력이라 그건가? 나는 내 왼 어깨에 박혀 있는 반으로 잘린 연검의 검신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푸확!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큭. 젠장…….” 내가 신음을 흘리는 순간, 위리안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프, 프레나! 이, 이게 무슨…….” … 귀찮아 지겠군. 나는 혀를 차고는 부서진 벽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선 나는 바닥에 쓰러져 콜록거리고 있는 프레나와 그런 프레나를 부축하고 있는 위리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켜라, 위리안.” “음? 한?” 위리안이 내 모습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피투성이인 내 모습에 놀라는 듯 하더니 곧 프레나와 날 번갈아 바라보더니 살기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푸른 안경알 뒤로 번뜩이는 싸늘한 눈동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프레나 조차 몸을 움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별 위압감은 느끼지 못한 나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위리안의 손이 부적 주머니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 손 치워라, 위리안. 손을 잘라버릴 수도 있어.” 내 낮은 음성에 위리안이 손을 멈칫하다가 나를 노려보았다. “설명해!” “그건 그쪽에게 들어라.” 나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는 프레나를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했다. 위리안은 프레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걸음을 옮겨 창밖을 바라보았다. 꽤 먼 쪽에서 강한 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쳇. 아까 놓친 새 때문인가? 거기다 프레난지 하는 여자에게 너무 시간을 소비했어. “미, 미안… 하지만… 꼭 일부러 접근했던 건…….” “빌어먹을! 위리안!” 약간 멍한 표정으로 프레나의 말을 듣고 있던 위리안이 나를 바라보았다. “가자. 오고 있어.” “아…….” “위, 위리안. 나, 난… 다, 당신이라면 알겠지만… 우리는…….” “그 일인가?” “응…….” 젠장.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 듯한 둘의 모습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 여자가 본의였든 아니었든 지금은 도망쳐야할 때다. 나는 눈을 싸늘히 빛내며 검을 휘둘렀다. 파학! 순식간에 프레나의 목이 잘려나갔다. 그 모습에 위리안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위리안! 가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도망쳐야 돼!” “아, 아아…….” 위리안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순간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큭, 예상대로의 반응이로군. “이, 이 자식!” “어차피 죽을 여자였고 죽어봐야 곧 되살아난다. 그저 좀 끔찍한 광경을 봤다고 생각해! 가자!” 내가 약간의 살기를 내뿜으며 외치자 위리안이 몸을 움찔하고는 나를 뒤따랐다. 하지만 여전히 살기가 느껴졌다. 젠장. 이러다 등에 부적 맞겠군. 그때 이를 가는 듯한 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너무 상황이 빠르게 돌아가서 뭐가 뭔지 모르겠군.” “그래? 그냥 흑룡문이 나쁜 곳이다 생각해라. 아무래도 프레난가 하는 여자가 완전히 나쁜 여자는 아니었나보군. 곱게 죽여줘서 다행이군.” “빌어먹을! 네놈은 감정도 없는 거냐! 어떻게 그렇게…….” “그 여자 덕분에 이 길드를 찾아오다가 수십 명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리고 널 노리던 흑룡문의 자객들을 해치워준 게 누군데 지랄이야. 닥치고 따라와!” “망할 자식!” “젠장! 나도 너무 빠르게 돌아가서 정신이 없다! 그 여자 뭐야!?” “빌어먹을! 흑룡문에게 협박을 당했어! 여기서도 중요하지만 현실에서까지 위험했던 모양이라고! 그리고 나에게 접근하기는 했지만…….” “임무로 접근했지만 서로 간에 꽃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 그거냐? 신파극이 따로 없군.” “젠장 맞을 자식!” “닥치고 뛰… 젠장!” 위리안과 서로를 향한 분노의 고함을 질러대던 나는 앞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느낌에 그대로 멈춰 섰다. 아무래도 쉽게 지나가기는 힘들어 보이는 느낌이었다. “우아악! 뭐야! 벌써 온 거야!?”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온 듯한 위리안의 고함소리였다. 회복이 빠르군. 하긴, 죽어봐야 다시 살아나니까. 배신당한 게 좀 서글프긴 하겠지만 서로 뭔가 말을 주고받은 걸 보니……. “그래도 NPC들이 많아서 다행이야. 빨리 달리지는 못할 테니… 가자!” 위리안의 고함소리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NPC들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확실히 사람이 많아서 달려오는데 방해가 되는 모양이군. 골목을 향해 열심히 뛰어가는 위리안을 쫓던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학살이 장면이었다. NPC들이 길을 막고 있자 흑룡문의 놈들로 보이는 녀석들이 NPC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의 NPC들이 죽어갔고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한!” 내가 달리기를 멈추고 멍하니 서 있자 위리안이 급히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자고! 어차피 NPC라 상관없잖아! NPC들이 많아서 도망치는데… 힉!?” NPC 어쩌고 중얼거리던 위리안은 내 눈빛에 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위리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역시 도사 인지라 육체적 능력이 약한 위리안이 켁켁거렸다. “한번만 더 내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하면 그대로 죽여 버릴 테다. NPC라 상관이 없다고? 이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는, NPC에 대해 전혀 모르는 자식에게 들을 말이 아니다. 내겐 NPC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네놈들에게도.” “크윽. 이, 이봐… 한…….” 떨리는 위리안의 눈을 노려보던 나는 위리안을 팽개쳤다. 위리안이 목을 감싸고는 콜록거리고 있었다. 약간의 분노와 당황이 섞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위리안을 노려보던 나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만 헤어지지. 어차피 너와는 끝까지 같이 행동할 생각도 없었다.” “어? 하, 한!” 위리안의 고함소리를 뒤로한 나는 검을 뽑아들며 달려 나갔다. 그 순간에도 여럿의 NPC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개자식들! 죽여 버린다!” 내 고함소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가장 앞으로 나서서 달려오고 있던 사내의 목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나는 살기를 끌어올리며 당당하게 외쳤다. “내 이름은 세한! 적색 산맥의 저편에서 다크소드라 불리던 자다!” 내 외침에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검을 들고 있던 녀석들의 눈이 흔들렸다. 마치 나를 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다, 다크소드… 드, 드래곤과의…….” “마, 마검귀(摩劍鬼)…….” 드래곤? 마검귀? 아, 페이린과의 싸움이 다른 서버에도 중계되었던가? 어쨌든 NPC들을 상대로 한 살육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를 쫓는데 방해가 되어 ‘치우는’ 거였으니까… 나는 이를 갈며 검을 들어올렸다. 짙은 남색의 기운이 강하게 피어올랐다. “죽어.” 내 휘두름과 함께 검기가 날아가며 수십의 적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도 이 노인이 준 검을 움켜쥐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크윽. 제, 제길… 마나르트…….” 지금만큼 마나르트가 그리운 적이 없었다. 지금의 내 능력이라면 마나르트의 힘을 다 뽑아낼 수 있을 텐데… 이 꼴이라니……. “쿨럭… 지, 진짜 괴물이로군. 하지만 이제 지친 모양이지? 얼마간 쉬어라. 죽여버렷!” 흑룡문의 부문주라고 소개했던 망할 자식의 말이었다. 도대체… 위리안이 무슨 짓을 했기에 부문주라는 녀석까지… 거기다 문제는 저놈의 실력이 내게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상위의 실력자. 이미 수십을 베어 넘기느라 지친 내가 당해내기 힘든 녀석이었다. “킥. 그렇다고 쉽게 당해주면 다크소드라는 이름이 운다.” 나는 내게 달려드는 상대의 창을 강하게 퉁겨내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여러 개의 화살이 박혔다. 별별 직종의 분들이 다 계시는군. 그나저나… 나는 몸을 높이 띄우며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계획대로……. 화아아악! 순간 여러 개의 부적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내 몸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여러 명의 외침소리가 울려 퍼졌다. “멸(滅)!” “크윽!” 그리고 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엄청난 기운에 나는 신음을 흘렸다. 제, 젠장! 이건 또 무슨……. 콰쾅! 순간 엄청난 위력의 폭발이 일어났다. 쉬이익, 쿠당! 간만에 멋지게 공중을 비행한 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제, 젠장. 어, 엄청나군. 도사를 얕본 게 실수였나? 나는 역류하는 피를 입으로 토해내며 이를 갈았다. 그 동안의 싸움으로 주위는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이 마을에는 경비대도 없나. 나는 전혀 낌새도 보이지 않는 마을 경비대를 처절하게 씹어대었다. 뭐, 흑룡문이 벌써 장악하기라도 했나보지. 나는 마나를 끌어올리며 주위를 살폈다. 마나와 함께 마기가 다시 피어오르자 내게 다가오던 녀석들이 움찔하며 몸을 멈췄다. 킥. 겁은 많으시군. “NPC들에게 미안하기도 한데…….” 나는 박살이 난 수많은 건물들을 보며 킬킬거렸다. 구한다고 싸운건데 오히려 피해를 줘버린 것은 아닌지 몰라. 그래도 목숨은 살렸으니… 그리고 NPC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재빨리 대피해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리고 이 주위에는 NPC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이제 끝이다, 마검귀!” 흑룡문 부문주 어쩌고 하는 자식의 고함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며 손을 내밀었다. “엿 먹어라. 그리고 난 다크소드라고. 그럼… 다음에 볼까?” “이, 이 새끼!” 아… 미국의 친구들은 가운데 손가락을 좀 싫어한다고 했던가? 나는 좋은 거 알았다는 듯이 빙긋 웃어주고는 뒤로 몸을 날렸다. “도, 도망친다! 잡아!” “서라!” 누구나 느끼는 거겠지만 서면 병신이지. 나는 그대로 멈춰서고는 서라고 외친 친구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내가 멈춰서자 나를 쫓으려하던 녀석들도 엉겹결에 함께 멈춰 섰다. “작별 선물.” 순간 내 주위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흑룡문의 녀석들에게 연속 폭발을 일으키며 다가갔다. 나는 엄청난 크기와 수의 욕지거리들을 뒤로 하며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쿨럭.” 비, 빌어먹을. 힘을 너무 많이… 너무 급히… 나는 피를 토하고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래서 세상이 핏빛은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쓰게 웃으며 되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이 자식!” 대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드는 순간, 뒤에서 분노에 찬 고함소리와 함께 엄청난 기운이 날아왔다. 뭐, 뭐지?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그 망할 놈의 부문주 자식이었다. 제, 젠장! 저 정도의 실력자에게서 그걸로 도망치려한 게 잘못이었나? 쏴아아악! 나는 엄청난 파공성을 내며 내게 날아오는 검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나가 충만히 실린 검이었다. 이거 맞으면 골로 간다. 나는 급히 몸을 날리려 했지만 이미 충분히 지친 몸은 내 명령을 거부했다. “젠장…….” 능력치 하락인가… 어차피 내 노력으로 얻은 힘도 아니니 어쩔 수 없지. 나는 무표정을 회복하며 조소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이상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이 내 몸을 꿰뚫기 직전, 그 기운이 구체화 되며 막을 이뤘다. 카가가각! 그 막과 마나를 머금은 검이 충돌하며 이상한 소음을 냈다. 큭, 귀를 틀어막고 싶을 지경인데? 나는 막의 중심부에 한 장의 종이가 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파캉! “간 줄 알았는데?” “아하… 그냥 여기 있으면 네가 지나갈 것 같아서…….” 막이 깨져나가는 동시에 나와 빠르게 말을 주고받은 하얀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내 최고 속도에 거의 맞먹는 빠르기였다. 빈손으로 멈춰서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부문주 녀석이 급히 다른 검을 뽑아들려 하며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위, 위리안! 네, 네놈이!” 퍼걱! 순간 검에 베이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나며 부문주 녀석의 상반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부문주 녀석을 스쳐지나간 위리안의 손에 검기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는 기검이 들려있었다. 그 기검, 검기의 매개체는 위리안의 손에 들려있는 좀 길쭉한 부적이었다. 화르륵. 속의 부적으로 보이는 부적이 위리안의 몸에서 떨어져나가며 불타올랐고 손에 들려있던 기검도 사라지며 부적이 타올랐다. 그리고 위리안이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후우… 모, 몸은 괜찮… 쿨럭…….” 나는 피를 토하며 허물어지는 위리안의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씨구… 코피도 나고 눈에서도 피나고… 내 판박이로군. 나는 이미 시체로 변한 부문주 녀석을 지나쳐 급히 위리안에게 다가갔다. “으아아! 사신이닷!” 위리안을 부축하던 나는 경악스럽다는 듯이 외치는 위리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군.” “으응… 삭신이 쑤셔… 세상이 핏빛이야…….” “큭, 그 기분은 내가 잘 알지.” “음… 그래?” “킥, 어쨌든 고맙다.” “응… NPC는 미안…….” 나는 피식 웃고는 산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뜩이나 안 좋은 몸에 위리안까지 겹치니 상당히 힘들었지만 언제 흑룡문 놈들이 쫓아올지 모르니… 나는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는 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 도대체 뭘 알아냈기에 저렇게 죽기로 잡으려 드는 걸까? “쳇.” 나는 생각을 접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봐. 일어나.” “우움…….” 나는 어느새 잠들어 있는 위리안의 뺨을 툭툭 쳤다. 곧 신음을 흘리기 시작한 위리안은 눈을 깜박아며 고개를 들었다. “아… 어디야?” “어르신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몸은?” 내 말에 주위를 살펴보던 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해. 회복 주술도 걸어났었거든. 할아범의 집 근처라고? 하긴… 급히 나오느라 보급도 못했으니 먹을 거라도 얻어가자!” 위리안은 밝게 웃으며 내 부축을 떨쳐내며 걸어갔다. 흠… 확실히 좀 멀쩡해 진 모양이네. 나는 가벼워진 팔을 돌리며 포션을 하나 들이켰다. 아아, 역시 마나는 몰라도 체력 회복이 너무……. “어라?” 내가 잠시 몸상태를 살피고 있는데 위리안이 뭔가에 놀란 듯한 소리를 내었다. 위리안을 쳐다보니 그는 나무들 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연기… 저기는…….” 연기?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연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산불? 그렇게 보기에는 불길이 좀… 그런데… 저 방향은……. “서, 설마… 빌어먹을! 어르신!” 연기가 솟아나고 있는 곳이 이 노인의 나무집이 있는 방향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위리안이 당황한 듯 나를 부르다가 급히 쫓아왔다. 하지만 아까 너무 무리 한 덕분에 속의 부적도 쓰지 못해 달리는 속도가 너무 느렸고 나는 훨씬 빠른 속력으로 위리안과 멀어졌다. “우와악! 한! 같이가앗!” 위리안의 고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나는 깨끗이 무시하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크으… 온몸이 쑤신……. “제, 젠장!”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던 나는 마지막 나무를 지나 내 눈에 들어온 광경에 욕설을 내뱉었다. 화르르……. 이 노인의 나무집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 두 구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익숙한 복장. 흑룡문의 녀석들이 입고 다니던 복장이었다. -어떤 장인 일가를 습격했다고……. “젠장!” 전에 센이 해줬던 말을 기억해낸 나는 살기를 퍼트리며 급히 주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집안은 아닌데…….” 거센 불길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식스센스에 의하면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내게 무너지는 불타는 벽을 걷어찬 나는 급히 나무집의 옆을 돌아갔다. 불타고 있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허물어진 작업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박살이 나 뒹굴고 있는 나무 탁자와 각종 연장들이 애처롭게 바닥을 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난장판의 한 가운데에 긴 백발의 노인이 쓰러져있었다. “어, 어르신!” 가슴이 피에 젖어있는 모습이 한눈에 중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 나는 급히 노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르신! 빌어먹을! 정신 차리십쇼! 어르신!” 내가 정신없이 몸을 흔들자 이 노인이 덜덜 떨며 눈을 떴다. 그 깊어보이던 눈이, 마치 둑이 깨진 호수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도 다른 눈에 나는 이를 악물며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자, 자네인가…….” “마, 말하지 마십시오!” 이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에 내가 고함을 쳤지만 이 노인은 힘겹게 미소를 짓고는 계속 입을 열었다. “쿨럭. 와, 왔군… 자, 자네의 망토는 완성 시켰네만… 흐, 흑룡이… 미, 미안하네… 쿨럭…….” 나는 전혀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어르신의 상태에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에 떨리는 내 눈을 잠시 올려다보던 어르신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이 곳을 알아내… 차, 찾아왔네… 하지만 성수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는… 화를 내며 공격하더군… 망토는…….” “젠장. 그 망토가 대숩니까! 정신 차리십쇼!” 나는 입술을 깨물며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구해주게…….” “예?” 갑자기 구해달라는 말을 하는 어르신의 모습에 나는 작게 반문했다. “자네의 망토… 그 아이가 가지고 갔네. 내 부탁… 지금 말하겠네만… 그 아이를 찾아서… 책임져 주게…….” “아… 이?” 아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지? “쿨럭. 내, 내 하나 남은 혈육이네… 마, 망토를 가지고 도망쳤어…적색 산맥… 쪽으로…흑… 의 놈들이 쫓아… 부탁… 하네…….” 나는 저쪽에서 급히 달려오는 위리안의 기척을 느끼고는 눈을 감았다. 이미 심장이 뛰지 않고 있었다. 내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위리안이 숨을 헐떡거리며 다가왔다. “헉, 헉… 무, 무슨… 어… 어어? 하, 할아범? 하, 할아범!” 이 노인, 어르신의 시체를 발견한 위리안이 경악에 찬 고함을 질러대었다. 멍한 눈으로 어르신을 바라보던 위리안이 급히 부적을 꺼내 어르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회, 회복! 회복! 회복! 이익! 일어나 할아범! 일어나라고! 회복!” 부적이 끊임없이 빛을 내뿜고 있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미 목숨이 끊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하, 한! 주, 죽은 거야! 할아범이… 도대체 왜!” 나는 무표정한 눈으로 위리안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내가 조용히 걸어가자 위리안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너! 마을의 NPC들이 죽을 때는 발광을 하더니! 할아범은 상관없다 그거야! 머, 멈춰! 한! 하안!” 나는 다시 눈을 감으며 걸음을 옮겼다. 또 다시 뭐라고 고함을 질러대던 위리안은 포기한 듯 허탈한 음성으로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 말도 안돼… NPC라는 거… 이, 이렇게 쉽게… 어째서… 제, 젠장… 그, 그냥 프로그램이잖아! 왜… 왜!” 나는 눈을 뜨며 몸을 돌렸다. 위리안과의 거리가 꽤 멀어져 있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알겠나?” “뭐, 뭐?” 작은 목소리였지만 위리안은 알아들은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NPC가 어떤 존잰지… 조금이라도 알겠냐는 말이다.” 내 말에 위리안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고는 떨리는 눈으로 어르신의 시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 “키킥. 꼭… 사람이 죽은 거 같잖아… 내, 내가 왜…….” 작게 들려오는 위리안의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사람일 수도 있겠지. 아니, 그들도 사람, 인간이다.” 내 말이 들렸는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위리안은 말을 멈추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위리안을 느끼던 나는 고개를 젓고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적색 산맥 쪽이라고 했나… 약속은 지킨다. 나는 이를 갈며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주영진 “놔!” “킥, 가만있는 게 좋을걸. 나쁜 경험은 아닐 거라고.” “큭큭. 그래. 아주 황홀한 경험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큭큭큭.” 커다란 소나무 밑에 반나체의 모습으로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세 명의 사내가 둘러서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만한 상황. 거의 허리까지 올 듯한 길이의 은발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은 독기어린 눈으로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킥, 그 눈은 변하지 않는군. 어디 보자…….” 한 사내가 여자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슬금슬금 다가갔다. 여자는 거칠게 반항했지만 마치 약 에 취한 듯 몸이 떨리고 있었다. “이익……!” 사내는 여전히 독기가 어려 있는 여인의 눈초리에 혀를 차고는 여자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당겨 자신의 얼굴로 끌어왔다. 사내가 여인의 입술을 덮쳤지만 여인은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는 살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곧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며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킥, 이제 좀 괜찮아 지는군. NPC 주제에 맛은 일품인데? 킥. 운이 좋았어. 우리가 이년을 먼저 잡게 되다니. 킥킥. 좀 건드려 볼까…….” “빨리 끝내고 넘기라고. 큭큭.” “이익!” 은빛 머리의 여인은 다시 독기어린 눈으로 사내들을 노려보았지만 사내가 자신의 어깨에 입술을 가져가자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여인의 옷이 서서히 벗겨져 갔다. “큭, 이거 기다리기가 힘든데? 그렇지?” “흠… 그래? 그렇군.” “그 노인네의 손녀년이 미인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이건 상상이상이란 말야… 더구나 NPC니… 큭큭.” “흠… 저 여자 왜 저러는 거지? 눈은 독기가 어렸던데…….” “큭. 미약(媚藥)을 먹였잖아. 큭큭. 저년 독기가 강하다더니 역시 약에는 당하지 못하는군.” “흠… 미약이라. 여기는 그런 것도 많군. 그런데 저 여자가 그 노인의 손녀가 확실해?” “물론이지. 넌 소문도 못 들었냐? 왜 그렇게 뻔히 아는 말을 물어보는… 헉!” 친절히 대답하던 사내는 급히 물러서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내 옆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동료의 모습에 고함을 지르며 검을 뽑아들었다. “이, 이놈! 이봐! 적이야!” “음?” 여인의 몸을 탐하고 있던 사내가 나를 바라보더니 급히 몸을 일으켰다. 흠… 으윽? 예쁘긴 예쁘군. 나프네 동급이려나… 나는 잠시 당황하는 내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그나저나 책임져 달라는 말이 이거였나? 곤란하군.” “이, 이놈! 너는 뭐냐!” 나는 검을 내게 겨누는 두 쓰레기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미약인지의 해독약은?” “해, 해독약?” 두 사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하며 표정을 수습하려는 것이 해독약이 없는 모양이었다. “없는 모양이군.” “큭, 당연한 걸 묻는군. 큭큭, 그냥 즐기면 되지 해독약이 왜 필요하단 말이냐!” 나는 아주 당당하게, 자신감에 넘쳐 고함을 지르는 한 놈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마나에 섞인 마기에 반응해 어르신이 주었던 요검(妖劍)이 검집에서 조금 뽑혀 나왔다. “죽어라, 쓰레기들.” 푸화아악! 엄청난 기의 폭풍이 몰아치며 두 녀석이 동시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나는 두 녀석이 엄청난 검상을 입고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는 내 앞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은빛 머리에 청색의 이곳 옷을 입고 있는, 장신구라고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여자였다. 옷이 이 지경인 것을 보면 빼앗겼을 수도 있지만. 아직도 휘몰아치고 있는 마기의 폭풍에 여자의 은빛 머리카락이 기의 폭풍에 휘날렸다. 그리고 반쯤 찢어져 너덜거리는데다가 그 쓰레기에 의해 거의 벗겨졌던 옷이 벗겨지려고 했다. 하지만 여인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살기 섞인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위험한 눈을 가진 레이디를 만난 것 같은데. 그때 검은 천 같은 것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람에 휩쓸려 떠오르는 검은 천. 나는 급히 그것을 붙잡았다. 순간 따뜻한 기운 같은 것이 온몸에 퍼지듯 뻗어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천이 마구 늘어나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늘어지는, 순식간에 주위를 온통 뒤덮을 정도까지 자란 검은 천을 보며 나는 이채를 띄고 검은 천을 바라보았다. 이 감촉, 익숙하군. ‘자네의 염을 담을 수 있지.’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검은 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펄럭. 순식간에 망토의 모습으로 변한 천이 바람에 펄럭였다. 다시 망토로군. 이게 새로운 천상의 망토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은빛 머리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여인은 여전히 독기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후우……. “이름이 뭐지?” “…….” 나는 옷이 거의 다 벗겨져 나가 알몸이라 생각해도 될 정도까지 가자 그때서야 여인이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나는 여인의 몸이 백옥 같이 흰 살결이든 천상의 미모든 상관하지 않으며 무심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이름이 뭐냐고 했다.” “…당신, 플레이어겠지?” 엉뚱한 대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역시… 그래, 이제 어쩔 거지? 날 겁탈할 건가? 그렇게 점잖은 척 유지할 필요 없어. 당신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고 있으니… 아!” 나는 말투 등등의 모든 요소에 냉기가 묻어나지만 않았다면 옥음이라 했을 목소리를 무시하며 살기를 내뿜었고 은발의 여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이름이 뭐냐고 했다.” 내가 엄청난 살기를 뿜으며 묻자 여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알몸의 여자를 살기를 뿜으며 내려다보는 나와 알몸이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을 든 사내를 노려보는 여인의 희한한 대치는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 것으로 끝났다. “이… 설화…….” “이설화… 이공 어르신의 손녀… 젠장.” 내 중얼거림에 설화라는 여자의 눈에서 다시 독기가 서렸다. 그녀는 내 검과 천상의 망토를 한번씩 바라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었군. 할아버지가 신수를 건넨 사람이…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할아버지가! 모두 당신 때문이야! 당신만 아니었으면… 아…….” 마구 고함을 지르던 설화가 갑자기 힘을 일은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팔까지 축 늘어뜨려 알몸이 그래도 들어났지만 나는 그것엔 별 신경 쓰지 않으며 그녀를 살폈다. “젠장! 미약 때문인가?” 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고 있는 설화를 안아들었다. 그녀는 반항을 하려는 듯 몸을 꿈틀거렸지만 그게 다였다. 으윽. 나는 독기가 묻어 있으면서도 왠지 모를 감정이 느껴지는 설화의 눈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름은 세한. 당신의 조부인 이공 어르신이 신수를 주신 사람이다. 그리고… 믿을지 모르지만 당신을 책임져 달라는 부탁을 받은…….” 나는 별 마땅찮다는 듯이 말했지만 내 말에 설화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구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미약 때문인지 그 발버둥이 오히려 내게 안겨오는 결과를 주고 있었다는 거였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이야 받았지만 이런 상황은 나도 달갑잖군. 너를 건들 생각은 없으니 신경 끄시지.” 내 싸늘한 눈빛에 설화도 지지 않고 싸늘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붉어진 얼굴에 떨리는 눈으로 그러니 진짜 안 어울리는데… 나는 가능하다면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며 저기 쓰러져 있는 두 자식을 찢어 발기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려 사력을 다했다. 그때 갑자기 설화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제, 젠장! 이 여자는 갑자기 왜 이러는… 나는 몸을 마구 떨고 있는 설화를 사색이 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젠장. 저 자식들… 진짜 해독약이 없는 건가? 나는 오른손에 든 검으로 시체들을 툭툭치며 해독약이 없나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해독약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제길!” 내 욕지거리에 내 품에 안겨 있는 설화가 몸을 움찔 떨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제어하는 듯 한데… 빌어먹을. 진짜 빌어먹을 상황이잖아. “포션이 들까? 해독 포션도 없고… 젠장. 최악의 상황이군.” 이보다 더한 상황이 있을까… 나는 다시 나를 꼭 끌어안는 설화에게서 신경을 끄려 노력하며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젠장! 끌어안지 좀 말란 말이닷! 내가 그렇게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만 정말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 그리고 강한 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에에에하아아아안! “… 마나르트?” 나는 저 멀리서 날아오는 검은 점 같은 것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마, 마나르트? 나, 나를 찾아온 건가? 내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이 마나르트의 모습이 똑똑히 들어났다. 그 화려한 검집에 내 헤드기어를 융합한 모습. 확실한 마나르트였다. 위험하다! 순간 위기감을 느낀 나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으윽. 저번 바이커리에서의 일. 그때는 겨우 며칠이었지… 이번엔 일년이다. 내가 마나를 끌어올리는 것을 무시하듯 마나르트는 엄청난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흐흐흐흑! 세에하안! “음?” 순간 나는 눈이 튀어나올 듯한 광경에 약간 비틀거렸다. 마나르트의 검집 끝 쪽에서 검은 유령 같은 형상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른… 미남… 아니… 미소년. 나는 상당히 귀여워 보이는 유령(?)을 보며 허탈함의 웃음을 흘렸다. 꼭… 전에 봤던 마나르트를 좀 축소하고 귀엽다는 느낌을 가미시킨다면 나올 듯한 모습… 서, 설마!? 철썩. 내 예상은 그 유령 같은 형상이 내 얼굴에 철썩 달라붙는 것으로 사실로 밝혀졌다. -흐흑, 세하아안! 드디어… 드디어… 꺼이꺼이… 정말로, 정말로 반갑네. 흐흑… 그리고 미안해서… 으흐흐흑……. 나는 내 머리에 찰싹 달라붙은 마나르트로 유추되는 귀여운 미소년을 떼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한손은 요검. 한손으로는 설화를 안고 있었기에 그것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모두… 모두 내 탓이네. 으아아앙. 이, 이게… 이게 정말 얼마만인지… 세에하아안……. 나는 내 얼굴에 붙어서 훌쩍거리는 미소년, 아마도 마나르트로 보이는 녀석에게 외쳤다. “마, 마나르트! 우선 떨어지고 보세나! 떨어지라곳!” -으응? 아, 미, 미안하네. 마나르트가 얼굴에서 떨어지자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마나르트를 바라보았다. 허공에 떠 있는 마기를 뿌리는 검은 검과 그 검 끝에서 솟아난 미소년 모습의 작은 유령이라. 나는 그 동안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마, 마나르트… 그, 그게 도대체…….” -음? 무슨 말인가? 뭐가 말인… 음? 우와악!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미소년 유령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소리가 아니라 머리 속에 울려 상당히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게! 이게 뭐야! 이 몸의 완벽한 팔등신에 다이아몬드를 조각한 것 같던 환상의 모습이! 그 모습이잇! 나는 다시 눈물을 뽑을 듯해 보이는 마나르트의 모습에 허탈감이 깃든 웃음을 흘렸다. 그때 설화가 내 몸을 꽉 끌어안는 것에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마나르트를 바라보았다. “도, 도대체…….” -그, 글쎄? 요새 힘이 강해지긴 했지만 이건… 으음? 어, 어라? 세한 자네… 엄청나게 강해졌군. 이유는 모르지만… 그 때문인가? 그런데 왜 이런 웃기는 모습으로…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아니면 주인 취향? 상당히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마나르트를 바라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 심각한 어조에 비해 중얼거리는 내용은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 머리를 강타하는 마나르트이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말이네… 으음… 주인 씨… 그대에게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군. “뭐?” 나는 상당히 귀여운 마나르트가 내 품에 알몸으로 안겨 있는 설화에게 시선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제, 젠장! 마나르트! 그게 아니라 이건…….” -음… 자네도 남자니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네만… 조금… 예쁘긴 예쁜 레이디로군… 하지만 설마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나는 마나르트가 상당히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약간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며 치를 떨었다. 제, 젠장. 아, 아까보다 훨씬 최악의 상황이다. 나는 일생일대의 위기, 최악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으음… 거, 거기다 설마 약까지…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참……. 마나르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한! 거기 있었군! 정말 한참을 찾아 헤…….”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위리안의 기척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경악한 듯한 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유령이닷!” -누가 유령이얏! 물론 마나르트의 목소리를 나에게 밖에 들리지 않았고 위리안은 경악한 표정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음?” 그때 위리안의 의아해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순간 위리안의 기질이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신이시여……. “세, 세하아안! 푸, 품에 안긴 그 여자는!” “아, 그게…….” “너, 너에게 설마 그런… 이 색마 자식!”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최, 최악… 오늘 여러 번 갱신 되는 최대 위기, 최악의 순간이었다. 망할……. “하아아안! 이, 이런 짓을!” -자 자식이 누구보고 유령이라고 한 거냐! 미천한 인간 주제에 감히 마족 서열 107위를 자랑하던 고귀하신 최상위 마족 마나르트님에게 그따위 말을! “죽여버리겠다, 색마 자식!” -죽여주마 미천한 인간! 이공 어르신… 어르신의 부탁… 정말 힘들군요. 나는 천상의 망토와 요검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타닥, 타닥. 나는 마나르트로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아아, 상당히 피곤한 하루였어. 성격이 좀 가라앉은 줄 알았는데… 마나르트를 만나니 여지없이 깨져버리는군. 망할. -이이익! 그만두게! 감히 이 고귀하신 몸을 불쏘시게 따위로 사용하다니! “시끄러.” -크아아아악! 나는 내 머릿속을 울리는 괴성에 한숨을 내쉬며 마나르트를 모닥불에서 거뒀다. 하아. 불쏘시개로 쓸 만 했는데. 나는 내 옆에 놓아둔 요검을 들어올렸다. 흐음… 이거 검집이 아무래도 위험해 보여. 탈것 같단 말이야. 가죽도 있고. -그나저나 정말로 강해졌군. 며칠 사이에 어떻게 이리 강해진 건가? “어쩌다 보니. 그나저나 별일이군. 날 만나면 죽어라고 공격을 퍼부을 줄 알았는데.” 순간 마나르트가 웅웅거림을 딱 멈췄다. 왠지 썰렁한 분위기가 주위를 감도는 듯한 기분이 드는군. -하, 하하하… 무, 무슨 섭한 말을. 자, 자네가 그 고생을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암. 안되고말고. 하. 하. 하. “…….” 아무래도 이상한데. 아까 여기로 넘어와서 겪었던 얘기를 해줄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좀 이상하더니……. -하하하, 세한. 내가 자네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겠……. “알았으니 찌그러져 있어.” -끄응……. 나는 마나르트가 바위에 기대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옆에 눕혀 있는 설화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위리안이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도사들은 치료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니까. 물론 처음 그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죽어버렷 색마 자식! 광폭(狂暴)!’ ‘-죽어버려라 망할 인간! 다크 캐논!’ ‘마, 마검! 악마의 검이라곳!’ ‘-악마라니! 감히 누구에게! 난 마족이닷!’ ‘젠장! 이 악마자식이 뭐라고 떠드는 거야!?’ ‘-입을 찢어버리겠어!’ “… 망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설화를 내려다보았다. 쳇, 예쁘긴 예쁘군. 마나르트나 위리안이 오지 않았으면 진짜 덮쳐 버렸을지도.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책임이라.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내 중얼거림에 요검이 요기를 살짝 내뿜는 듯 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옆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위리안이 피로에 절은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으아아… 결계 작업은 완전히 끝났어어. 졸립다.” 위리안은 미리 펴둔 모포 위에 쓰러졌다. “불침번은 내가 설 테니 잠이나 자 두라고. 나갈 일이 있나?” “아니… 영양제도 듬뿍 먹어둬서 굶어 죽을 일도 없으니까 걱정 마… 화장실도 다 다녀왔어…….” 대답과 함께 위리안은 모포를 둘둘 말고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섀도우 월드에 접속하면 신체의 활동이 거의 없기 때문에 화장실에 갈 일이 좀 줄어든다. 그런 생리 기능을 좀 억제하는 기능도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군. 나는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하나 던져 넣고는 생각에 잠겼다. 적색 산맥을 넘어야 한다. 이곳은 내가 있을 세상이 아냐. 이곳도 문제가 상당해 보이지만… 우선은 한국 서버의 대륙을 정리하는 게 순서겠지. 아는 사람들도 모두 그곳에 있으니……. “잠들었군.” 나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위리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 누운 지 13초 만에 잠들다니, 피곤하긴 했나보군. “레딕은 잘 하고 있을까?” 현실에선 5시간 정도가 지났을 테니 일이야 다 끝났을 시간이었다. 그쪽 일이야 센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나중에 상황을 보면 되는 거니까. 그 놈도 연락은 3일 뒤라고 했지? 그리고 먼저 부탁한 일…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도 적색 산맥을 넘어야 이야기가 되는군. 빌어먹을. 아마 센의 능력이면 레딕 등 암흑가의 사람들의 능력은 꽤 상승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주위의 시선 등이 있으니 너무 급하게 성장시킬 수는 없겠지만… 아니지. 어쩌면 센이 캐릭터의 정보 자체를 바꿔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센의 해킹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도 상상이 안가니까. “뭐, 그 정도 되니까 일을 꾸미는 거겠지. 나까지 이용해 가면서 말이야.” 나는 키득 웃고는 요검을 마나르트의 옆으로 던졌다. 마나르트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역시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저 녀석도 고생을 하기는 했지. 펄럭. 쉬리릭. 가느다란 소리. 뭔가가 펄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들리는 약한 소리.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사가 내 목에 빠르게 감겨들었다. “일어났군.” 설화였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설화를 바라보았다. 머리에 감겨 있는 은빛 천에서 은사가 뻗어나와 있었다. 단 하나뿐인 장신구인가 했더니 무기였군. 현술사인가? 흠… 전문적인 현술사는 처음 보는군. 내가 있던 서대륙에서는 와이어나 은사는 보조적인 도구였으니까. 아, 라젠님은 거의 주 공격수단으로 사용하고 계시기는 하는군. “내가 검을 놓기를 기다린 모양이군.” 내 말에 설화의 눈이 흔들렸다. 역시 깨어있었군, 그래.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여자라면 모포로 몸이라도 가리지 그래.” 은사를 다루느라 손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설화는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설화에게서 움직임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때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날 건드렸나?” “음? 후훗. 그쪽에서 안겨 오던데?” “이익!” 은사가 순식간에 목을 조여 왔다. 분명 그대로 내 목을 잘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티잉! 약한 금속성과 함께 은사가 끊겨 나갔다.?? “은사는 너만 다루는 것이 아니지.” 나는 설화의 은사를 끊어낸 와이어를 손목으로 도로 감고는 망토를 움켜쥐었다. “마, 말도 안… 꺄악!” 설화는 엄청나게 커진 천상의 망토에 파묻혀 몸을 바둥거렸다. 움직임이 약간 딱딱한 것이 약의 기운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내 앞에 길게 늘어나 있는 천상의 망토의 긴 자락을 살짝 잡았다. 스르르륵. “아…….” 천상의 망토가 순식간에 형상을 갖춰가며 설화의 몸을 감쌌고 설화가 비명 같은 신음을 흘렸다. 순식간에 옷으로 변한 천상의 망토가 설화의 몸을 휘감았다. 검은 코트. 괜찮네. 내 상상력으론 여기 옷은 절대 못 만든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설화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복장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고 있던 설화가 급히 뒤로 물러나며 은사를 손에 휘감았다. 또 독기어린 시선이로군. 정말 증오심이 담긴 눈인데? 나는 왠지 살기가 절로 반응하는 듯한 기분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몇 마디 하지. 첫째. 난 약에 취한 여자를 안는 쓰레기 같은 취미는 없다. 둘째. 이공 어르신, 네 할아버지는 내게 널 책임져 달라고 했다. 셋째. 나는 서대륙에서 왔고 다시 돌아갈 것이기에 널 데리고 가겠다. 넷째. 도망은 용서하지 않는다. 어쨌든 난 약속을 지켜야하니까.” “우, 웃기지 마! 내가 왜 당신을… 플레이어 따위를 따라가야 한다는 거야!” “플레이어 따위라. 그럼 나는 NPC 따위를 데리고 다니기 싫다고 해줄까? 그쪽이나 나나 똑같은 존재니 그런 헛소리를 그만두지.” 내 말에 설화는 약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닥쳐! 어쨌든 난 당신을 따라갈 생각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흑룡문에게 잡혀 죽으시겠다? 그거 신세 좋겠군. 그 정도 미모면 쉽게 죽기도 힘드시겠어. 그쪽이 날 따라가고 싶지 않던 그건 상관없다. 난 데려갈 거니까. 어쨌든 그쪽을 책임지기로 했으니 최소한 살려 놓기라도 해야겠지.” 젠장. 이게 결론이다. 최소한 죽게는 하지 말자. “헛소리 마! 플레이어 따위한테 목숨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 “뭐, 구걸까지야… 플레이어를 싫어하나 보군.” “아니, 증오해.” 나는 눈을 약간 치켜뜨고는 설화를 바라보았다.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훗, 저 정도면 웬만한 몬스터들은 싸우기도 전에 꽁지를 빼겠군. “그래? 그거 잘됐군. 나도 플레이어들을 꽤 싫어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 이 문제는 접어두고… 어쨌든 나는 널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겠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설화는 내 무심한 어조에 꽤 열을 받은 듯 손을 휘둘렀다. 상당한 마나를 머금은 은사들이 내게 날아왔다. 이그… 음?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 까가가각! 어느새 날아온 마나르트가 은사를 막아내고 있었다. 설화는 웬 검이 하늘을 날아다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손을 움직였다. 쏴아아악! 엄청난 기세로 은사들이 날아오자 나는 혀를 차며 몸을 움직였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은사들이 박히는 것과 동시에 나는 마나르트를 쥐었다. 스아아아……. 푸화아아악! “음?” 내가 마나르트를 잡는 순간 엄청난 마기가 휘몰아치며 주의에 마기의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어, 얼라리오? 이, 이거 의도한 것도 아닌데 힘이 너무……. “우와아악!” 나는 마기의 폭풍에 휩쓸려 날아가는 위리안을 느끼며 몸을 약간 비틀거렸다. 물론 순간이었고 나는 어느새 설화의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듯 서서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아…….” 몸을 굳히는 설화. 나는 피식 웃고는 마기를 가라앉혔다. 이거 너무 강해졌잖아. 마나르트의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있게 된 건가? 확실히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군. -흐음, 역시 내 힘이 완전히 개방되는군. 정말 강해졌군 그래, 세한. 마나르트의 목소리를 한귀로 흘려버린 나는 설화의 목에서 마나르트를 거두며 모닥불로 다가갔다. “거의 꺼져가는군.” 설화는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댔던 사내가 갑자기 모닥불 타령을 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그 차갑고 독기어린 표정으로 돌아가 버렸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지. 어차피 여기 남으면 넌 죽는다. 넌 살고 난 약속을 지킨다. 양쪽 모두에게 좋은 조건이니 잠자코 따르지 그래.” “… 날 여행 도중의 노리개로 삼겠다는 거냐.” “뭐?” 나는 눈을 약간 크게 뜨고는 설화를 바라보았다. 노리개? “어르신의 부탁은 널 책임져 달라는 거였다. 내게 그 책임은 널 지켜달라는 것으로 풀이되었으니 그런 짓은 하지 않아. 그나저나 우리에 대한 불신이 대단하시군.” “너희들에게 가족 모두가 죽었어.” “그래? 그렇다면 내 부모님은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으니 난 이 세상 비행기들을 모조리 박살내야겠군.” 설화의 눈이 약간 커졌다. 여전히 차가운 눈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이 세상 사람들은 비행기가 뭔지도 모르지… 실수했군. 나는 한숨을 쉬고는 설화에게 다가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설화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은사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나는 무시하며 앞으로 걸어나갔고 덕분에 몸 곳곳에 은사가 박히는 상황에 놓였다. “아…….” 설화는 내가 방어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은사에 뛰어드는 것과 비슷한 짓을 하자 당황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나는 은사를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핏방울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피 색은 똑같은데?” “뭐?” 나는 오른팔에 박혀 있는 은사들을 마기로 뽑아내고는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화가 나보다 10cm정도 작았기에 그리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최대한 지켜주겠어. 원한다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 주겠다. 하지만… 적어도 잠시라도 날 따라오도록. 너의 할아버지의 선택이었다. 적어도 네 할아버지를 신뢰한다면… 날 믿어주면 좋겠군. 그리고 이건 선물이다.” 나는 설화의 머리카락에 내 은사를 장신구처럼 돌돌 감아주고는 손을 땠다. 쯧, 이 차가운 눈은 변하지 않는군 그래. 그때 저쪽에서 위리안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세에에하아안! 허억! 한! 그, 그 꼴이 뭐얏!” 은사에 이리저리 꿰어있는 내 모습의 간단한 평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뒤로 물러서 은사들을 모두 빼내었다. “걱정 마. 이 정도 고통은 옛날부터 많이 겪었으니까.” 옛날이 더 끔찍했었지… 나는 마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새삼 감회가 새롭구나. 마나르트를 쥐고도 멀쩡하다니. 나는 마나르트를 등에 차고는 위리안을 돌아보았다. “위리안. 새 동료다. 이름은 아까 말했고… 우리와 함께 적색 산맥을 넘을 거니 그리 알도록.” “뭐!? 저 소저(小姐)는 NPC잖아?” 순간 내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이런……. “역시 똑같군요. NPC라고 무시하는…….” “NPC면 우리가 로그아웃 했을 때 어떻게 하지?” “아아. 너한테 봉인석이 있잖아. 그리고 위험은 내 마검이 어느 정도는 막아줄 수 있어. 그리고 우리가 교대로 번갈아 가면서 지킬 수도 있고.” “아, 그렇구나.” 나는 설화에게서 살기가 사라지고 헛웃음 소리가 들려오자 빙긋 웃었다. 그때 위리안이 손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맞다. 설화 소저가 할아범의 손녀지. 그럼 가기 전에 무덤에 들렸다 가자고.” “무덤?” “무, 무덤이라고요?” 위리안의 말에 설화도 당황한 듯 내 옆으로 다가서며 위리안에게 반문했다. 무덤이라. 아, 설마 저 녀석 그때 그렇게 늦었던 게……. “아, 네가 설화 소저를 찾으러 갔을 때 할아범을 묻어주고 왔어. 양지바른 곳에 모시고 왔으니 걱정 마. 결계도 쳐 놔서 쉽게 발견되지도 않을 거야.” “아…….” 설화는 상당히 놀란 듯 위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훗, 위리안 녀석, 점점 마음에 드는데? “그럼 어르신의 무덤에 갔다가 적색 산맥을 넘자고. 그런데 넌 왜 소저라고 부르는 거야?” “멋지잖아.” 나는 이마를 짚고는 신음을 흘렸다. 앞으로 마나르트와 위리안에게 쌍으로 시달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그런데 설화에게는 계속 천상의 망토를 입혀야 하려나. 결국 또 나는 이 꼴로 돌아다녀야 한다는 거로군. 뭐, 상관은 없지만. 나는 잠시 시간을 가늠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당장 갈까? 흑룡문이 언제 올지 모르니 빨리 다녀오는 게 좋겠군. 여기가 적색산맥과 어르신의 집의 중간 부분… 왔다.” 내가 몸을 굳히며 마나르트에 손을 가져가는 동시에 위리안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크으윽! 젠장! 결계가……!” “망할!” 나는 나무들 위로 마구마구 쏟아지는 불화살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늘을 일시적으로 붉게 물들이는 불화살들의 모습에 위리안과 설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젠장!” “꺅!” 나는 설화를 끌어안는 동시에 위리안을 걷어찼다. “끄아아악!” 우아하게 공중을 부유한 위리안은 나무들 사이로 멀어져 갔고 나는 설화를 안은 채로 몸을 띄웠다. 내 마기에 이끌린 요검이 내 왼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잠시 실례하지.” 나무 위로 뛰어오른 나는 순간도약을 이용해 높이 뛰어올랐다. 상당히 높이 뛰어오른 나는 주위를 살폈다. 산맥 쪽으로 우리를 몰 듯 산맥을 벗어날 길을 모조리 막고 있는 불길들. 식스센스에 의하면 술책이 아닌, 불이 있는 곳마다 진짜 적들이 있는 실제 상황이었다. “망할. 이래서는 무덤으로 가는 건 거의 불가능…….” “세한이라고 했나요?” “음?” 나는 갑작스런 설화의 물음에 설화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시 나뭇가지 위로 내려서자 설화가 다시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와 약속을 했다면… 나하고도 약속을 하나 해줘요. 나중에… 반드시 할아버지를 뵈러 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나는 설화의 여전히 차가운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훗, 그래도 말투는 꽤 괜찮아졌군. “그 약속, 반드시 지킨다. 속검(速劍).” 나는 적들이 몰려오는 쪽으로 검기 다발을 뿌리고는 위리안을 걷어찬 곳으로 몸을 날렸다. “일행이 된 것을 환영하지. 내 이름은 세한이다.” “이미 말했지만… 이설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급히 멈춰 섰다. “여기 이 얼간이는 위리안. 마이너 위리안이다. 그냥 위리안으로 부르라고. 위리안! 일어나!” 나는 바닥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위리안을 걷어찼다. 위리안이 몸을 움찔 떨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위리안에게 포션 하나를 건네고는 입을 열었다. “가지. 내가 온 대륙으로.” 내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세한. 아무래도 아까 그곳에 짐을 통째로 놓고 온 것 같은데? 자네 배낭이야 있지만 음식이나 그런 건 위리안인지 하는 망할 녀석의 짐에 몰아 뒀었잖나. “…….” <이무기> “배, 배고파아아…….” -쯧쯧. 한심한 인간 같으니. 겨우 반나절 걸은 것 가지고 저 죽을 꼴을 하다니, 역시 미천한 인간답군. “… 좀 닥쳐주지 않겠나?” “하아아안. 배고파아아…….” “귀찮군.” -후훗. 이거 복수가 되겠군. 한. 그냥 가세나. 저런 녀석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않나. “…….” “흥, NPC들을 그렇게 깔보는 플레어이들이… 겨우 음식 하나 못 만들어 낸다는 건가요? 이래서야 산맥을 넘기도 전에 굶어 죽겠군요.” -한! 뭐하나! 레이디가 원한다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어야지! 레이디들의 말은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 것이 마족들의 숙명이네! 서열 56위의 엘카드의 저서, 마족 사랑론에 따르면……. “난 마족이 아니네만…….” 쉬쉬쉭! 투두둑. “사과닷!” “아…….” 나는 상당히 높은 곳에 열려 있는 붉은 과일들을 검기로 베어낸 요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분명 6개를 떨어뜨렸건만 위리안이 벌써 4개째 사과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자신에게 떨어진 과일을 내려다보고 있는 설화… 은혜를 모르는 것들 같으니. “우물우물. 맛있다, 세한. 좀 더 떨어뜨려. 꿀꺽. 하나밖에 안 남았잖아.” “미안하지만 그게 다다. 있었다면 아직까지 그냥 걸어왔을 이유가 없지. 그 6개가 다였어. 다른 나무에는 있지도 않더군.” “그, 그래?” 위리안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하나 남은 과일을 내게 건넸다. 하아. 확실히 배가 고프긴 고프군. 그 망할 자식들 덕분에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군. 덥썩. “음?” 사과를 베어 물려던 나는 사과를 덥썩 움켜쥐는 작은 손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상당히 작은 손이로군. 그리고 이상하게 흐린 느낌……. -우물… 맛있군. 몸이 이래서 많이 못 먹는다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네. “…….” 어느새 마기로 몸을 구체화 시킨 마나르트가 내 머리에 달라붙어 과일을 베어 먹고 있었다. 제, 젠장… 유령 주제에 과일은 왜 먹는 거야? “마나르트…….” -아아. 마기로 몸을 구성하는 것도 힘들다네. 이런 음식으로 약간이나마 마력을 보충할 수 있으니 먹을 수 있으면 먹어둬야지. 이거 참 맛있군 그래. “하아…….” 분명 우리는 마나르트를 만지지 못했었는데? 저 사과는 어떻게 들고 있는 거야? “으아악! 유령이 사과를 먹잖아!” -꿀꺽. 저 망할 인간잇! 또 시작인가. “이건 사과가 아니라 토아라는 열매에요. 역시 플레이어들이라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으아악! 유령이 나를 가리켰어!” -죽여 버리겠다! 손을 마구 휘저으며 고함을 질러대는 마나르트와 유령이라며 소란을 피우는 위리안. 미치겠다. 마나르트의 모습 자체가 마기의 응집체이기 때문에 기를 잘 느끼는 도사에게는 별로겠지만… 그래도 너무하는군.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우…….” 얼레? 나는 나와 동시에 한숨을 내뱉은 설화를 바라보았다. 약간 당황한 듯한 기색이던 설화는내가 여전히 무표정하자 인상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는 거같은데… 나는 쓴웃음을 지었고 그 웃음을 곁눈으로 바라본 설화가 발끈해 소리쳤다. “뭐가 우습죠? 역시 NPC가…….” “그래그래. 그쪽 말이 다 맞아.” “이봐요!” “으아악! 한! 저 유령 좀 어떻게 해봐!” -죽어랏! 분노의 사과(?)를 받아랏! “커헉!” “내가 당신들을 따라가는 건 언젠가 흑룡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라고요!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당신더러 날 책임지라고 했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에게 굽히고 들어갈 생각이 전혀…….” “아아. 알아 들었어.” “이익!” “하아안! 저 유령이 사과를……!” -크아아악! 진짜 죽여 버리겠어! 뭔가 혼란한 분위기. 설화와 말싸움을 하고 있던 나는 걸음을 멈추며 마기를 내뿜었다. 갑작스레 살기를 동반한 마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자 일행이 행동을 딱 멈췄다. “무, 무슨…….”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린 설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너무 강했나? 나는 마력을 너무 끌어올렸다고 생각하며 요검을 빼들었다. “거기. 나오시지.” 검 끝이 향한 곳으로 일행의 시선이 모아졌고 그 나무들 사이에서 한 인형이 뛰어내렸다. 탁. 어느새 마나르트는 마기를 흐트러뜨리고 사라졌고 위리안은 부적을 손에 들었고 설화는 머리카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요검을 움켜쥐며 앞으로 걸어 나오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우물우물, 쩝… 맛있다…….” “…….” -호오… 괜찮은 실력이로군. “맛있군.” “감사합니다, 주군!” “하아. 주군이라는 말은 빼줬으면…….” 나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주토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 2의 칼 등장이군. 나는 우리 앞의 모닥불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는 멧돼지를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콜럭. 우웁. 하아안! 무, 무울… 쿨럭.” “…….” “콜록. 아… 저기, 저도…….” 나는 목이 막힌 듯 발광을 하는 위리안과 맛있는 저녁에 따뜻한 잠자리 덕에 기분이 좀 좋아진 것으로 보이는 설화의 부탁에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주군.” “아, 아니…….” 사삭. 빠르다… 나는 순식간에 사라진 주토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카, 칼보다 더 심하다. 나는 허망한 표정으로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음? 당신은 그때 그…….’ ‘당신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음? 우리를?’ ‘예. 예전부터 흑룡문에서 나오려고 했지만 감시가… 지금 외엔 기회가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 흠… 그거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동시에 내 이름으로 보호를 받겠다?’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얻는 이익은?’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오옷? 주군? 세한을? 이봐. 너 뭐 잘하는 거 있어?’ ‘위리안! 입 닥치고…….’ ‘암살은 자신 있습니다만…….’ ‘아, 그래……?’ ‘그리고 이런 야외에서라면 식량 조달이나 간단한 요리 정도는…….’ ‘진심으로 환영해!’ ‘망할! 위리안!’ 그걸로 끝이었다. 그 후의 위리안의 발악과 설화의 차가운 눈빛, 마나르트의 종알거림에 결국 주토를 받아들이고 말았으니… 부하 2호의 탄생이랄까. “젠장.” “흠… 너무 그러지 말라고. 많은 도움이 되잖아. 아아, 행복해라.” 위리안의 말에 내 눈이 날카로워졌다. 날카롭게 벼려져 날아가는 내 살기에 위리안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고 나는 그런 위리안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게 생각하자. “하긴, 아무래도 너나 설화는 직접 공격보다는 간접공격형이니까… 설화를 보호할 일행이 있으면 좋지. 그 점에서는 합격이군. 이 요리도 그렇고. 다만…….” 왜 내가 주군이 되는 거냐고. 나는 저기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주토를 살폈다. 머리색이 회색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완전한 동양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보니 실력은 일급. 확실히 후방에서 위리안이나 설화를 보호하기에는 적당하겠군. 뭐, 아직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위리안과 설화는 어릴 적부터 암살자로 자라나 살수로 살아갔다는 주토의 얘기에 완전 넘어가 있었다. 뭐, 사실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 얘기를 할때의 기도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여기서 주토가 내 밑으로 붙은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플레이어를 싫어하다가 특이한 나를 만났다. 그 후에 내가 그 유명한 마검귀, 다크소드라는 것을 알아냈다. 내가 적색 산맥을 넘어 다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흑룡문에서 도망치려면 자신으로는 위험하다. 그렇기에 강한 동료가 필요하고, 아무도 오지 못하는 곳이 필요하다. 완벽하게 내가 일치하는군. 다만 왜 내 부하가 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속이고 들어온 녀석일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이성적으로 생각, 침착하자라는 내 모토를 떠올리며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내 희망이 깨진 것은 위리안과 설화가 잠든 후였다. “이건?” 나는 주토가 내미는 편지 같은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야? 나한테 편지 보낼 사람 없는데? 그리고 주토는 품속에서 소검 하나를 꺼냈다. 한 50cm 정도 되는 길이의 소검. 주토는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내가 여전히 무표정하자 안심하며 그 검과 편지를 내게 건넸다. “이 느낌은…….” 얼떨결에 소검과 편지를 받아든 나는 소검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눈을 깜박였다. 이 느낌… 나는 내 허리에 차여있는 요검을 바라보았다. 비슷해. 어르신이 주신 이 검과……. 우웅. 순간 내 손에 들린 소검과 허리의 요검이 낮게 울렸다. 마치 공명이라도 일으키는 듯한 반응이었다. 어르신이 만드신 건가? “아무래도 아직은 절 신뢰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 “…네가 어르신을 죽이고 빼앗았을 가능성은?” “편지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주토의 말에 나는 내 손에 들린 편지를 펼쳤다. 차분한 느낌을 주는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토, 자네가 그때 약속을 잊지 않았다면 이 편지를 읽고 있겠지. 나는 자네가 나와 설화를 구해줬던 것을 아직 잊지 않았다네. 여기 편지와 함께 있는 것은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네. 약간이지만 신수의 힘도 깃들어 있으니 잘 사용하게나. 그리고 할 말이 있네만… 나는 곧 설화를 떠나보낼 생각이네. 좋은 젊은이를 만났어. 자네와 설화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세계의 방문자들이네만… 적어도 나는 그 친구가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네. 내 마음에 쏙 들더군. 그에게 설화를 맡길 생각이네. 그 때문에 자네에게 권유할 것이 있네. 아마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면 그 젊은이와 설화가 적색 산맥을 넘으러 가고 있을 것이네.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어떤가? 그는 서대륙에서 넘어온 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그를 따른다면 자네도 흑룡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네. 그라면… 설화를 정말 잘 돌봐주고 아껴줄 거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자네도 그를 따른다면 흑룡문을 벗어나는 것 쯤, 아주 쉬울 것으로 보이네. 물론 자네의 선택의 문제지만……. 옛날, 자네가 흑룡문 몰래 우리를 피신 시켜 준 것에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자네가 원하던 자유를 얻기를 바라겠네. 아, 이 소검의 이름은 자네 마음대로 정하게나.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빌겠네. 아, 그리고 혹시 자네가 그 젊은이를 만난다면……. 념의 그릇을 가진 이에게.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줄 것으로 믿네. 그 부탁이 무엇인지는… 이 편지를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라 믿네. 념의 그릇을 잘 사용해 주게나. “…….” “예전, 어르신을 구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은인이시기에 그랬던 것이지만… 어르신께선 그 보답으로 자신이 죽게 된다면 집의 지하에 남겨 둔 자신의 선물 하나를 가져가라고 하셨었습니다. 어르신의 거처가 불탄 것을 보고 그리로 갔다가… 어르신의 말씀도 있으셨기에… 제가 세한님을 주군으로 모시는 겁니다.” 이, 이봐. 여기는 날 주군으로 모시라는 말은 없는데? 따르라는 말이 꼭 주군으로 모시라는 말로 풀이될 이유가 없잖아! 나는 속으로 악을 썼지만 입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바로 편지 군데군데에 보이는 내용과 편지 마지막의 내게 남긴 말 때문이었다. “아, 편지의 마지막 글은 주군에게 가는 말 같습니다. 주군에게 설화 아가씨를… 웁.” “하하하. 주, 주토? 우리 잠시 얘기 좀 나눌까?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아, 아니. 주군의 명이다.” “웁?” 주토는 내가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입을 틀어막자 당황하다 주군과 명이라는 단어에 얌전해졌다. 얌전해진 것을 확인한 내가 손을 때자 주토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하명해 주십시오.” “…저 편지의 내용. 설화, 아니 그 누구에게라도 누설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다.” “예? 알겠습니다, 주군.” “…….” 이걸로 부하 2호로 확정됐군. 나는 절망의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밝구나. 그나저나… 그나저나… 그나저나… 어르신은 하필이면 이런 부탁을… 나는 모닥불 건너편에서 잠들어 있는 설화를 바라보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이고 있었다. 크윽. 아무리 생각해도 그 편지의 내용은… 망할. 내가 어떻게 NPC와……. “젠장.” NPC와 어떻게? 젠장!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NPC도 사람이라고 한 것은 나 아니었나? 도대체 평소 하던 말은 어디다 팔아먹고… 크으윽.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르신의 부탁을……. “주, 주군. 괜찮으십니까?”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자 주토가 기겁을 하며 내 상태를 살폈다. 내가 주토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데 마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나르트의 목소리는… 상당히 재미있다는 느낌이 팍팍 묻어나고 있었다. -호오… 좋겠군 그래 세한. 저런 아름다운 레이디를… 도대체 그 영감을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렇게까지 된 건가?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라네. 내 기억으로는 자네에게 여자가… 몇이더라? “닥쳐.” “예?” “아, 난 이 검에게 말한…….” -축하하네. 잘만 하면 소형 하렘을 건설할 수도 있겠군. 엘카드만 해도 부인을 얻지는 못했건만 자네는… 우와악! 지, 진정하게나, 주인 씨! “이 자식! 부러뜨려 버리겠어!” 어떻게 4명으로 불어난 일행은 침묵 속에 숲을 걷고 있었다. 말이 숲이지 산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산으로 보기에는… 경사는 몰리도 주위 풍경이 어색했다. 언덕 같은 지형이라는 것만 빼면 그저 숲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쨌든 경사 덕분에 우리는 상당히 힘들게 숲을 걷고 있었다. 나나 주토는 별 상관없었지만 위리안과 설화는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설화야 성격상 독기를 품은 채 그대로 걷고 있었지만 위리안은 온몸으로 힘들어 죽겠다는 표현을 해대고 있었다. 하지만 위리안이 계속 헥헥거리며 내는 소리를 제외하면 일행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힘든 것은 둘째 치고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곳을 걷고 있으니 당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바로 일행을 압박하고 있는 나와 마나르트의 살기와 마기가 가장 큰 이유였다. -망할! 너무 하지 않나! 이 고귀하신 몸에 금이 가거나 구부러지기라도 했다면 어쩌려고! 사과하게! “…….” -내가 틀린말 했나! 자네의 행실로 봤을 때 소형 하렘 정도는 간단하게 꾸릴 정도란 말이네! 자네가 잡은 여인의 수만 해도 얼마나 되는지 아나? 그 페페라는 운영자와……. “닥쳐.” -취소하게! 고고고고고……. 어제 밤 일대 소동의 여운으로 남은 나와 마나르트의 신경전. 그야말로 일행을 침묵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최대의 주범이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오후인 지금까지 계속 걸었음에도 몬스터는 물론 동물 한 마리도 만나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런 분위기 덕에 점심도 먹지 못한 위리안을 비롯한 셋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결국 위리안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아… 한?” “한 시간만 더 걸어. 그쯤에 야영지로 삼을 만한 곳이 있으니까.” “아, 그래?” 내 싸늘한 반응에 위리안은 그대로 물러났고 덕분에 한숨을 내쉬는 주토와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설화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일행의 가장 뒤에서 걸어가고 있었기에 설화와 위리안의 시선이 교차되는 것을 지켜본 나는 둘이 속으로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주제에 그것도 못해요!’ ‘서, 설화 소저. 저 녀석, 무섭단 말입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설화를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우리 중 여자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때문에 설화는 지금까지도 내가 천상의 망토로 만들어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검은 코트에 긴 은발… 왠지 언밸런스 하면서도 대충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아마 워낙 미인이라 뭘 입혀놔도 괜찮아 보이는 거겠지만……. -훗. 역시 자기가 책임질 여자라 눈길이 가는 모양이지? 역시 자네는……. 고고고고……. 또 다시 시작된 나와 마나르트의 신경전에 앞에서 걸어가던 셋이 몸을 잠시 움찔했다. 마나르트를 땅속에 묻어 볼까 생각하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주위를 살폈다. 흐음……. -이런, 아무래도 잠시 휴전해야겠네. “그래야겠군. 그나저나 기운이 장난이 아닌데?” -아무래도 하루 종일 걸었으니 산맥 깊숙이 들어왔다고 할 수도 있을 거네. 강한 놈들이 있겠지. 무엇보다 우리의 살기에도 상관없다는 듯이 다가오고 있지 않나. “그렇군.” 앞에서 걸어가던 셋은 내가 갑자기 마나르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일제히 몸을 돌렸다. 나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와 마나르트가 살기까지 뿌려가며 신경전을 벌인 것은 몬스터를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살기를 쫓아오는 녀석이라면……. “음? 그러고 보니 이 기운… 설마?” -음? 아는 녀석인가? 나는 마나르트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급히 일행을 바라보며 외쳤다. “당장 달려! 내가 막을 테니 최대한 멀리 도망가! 주토! 위리안과 설화를 보호해라!” “존명.” 주토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위리안과 설화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나와 주토의 행동에 위리안과 설화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잠자코 끌려가던 위리안과 설화가 사태를 인식했는지 주토의 손을 뿌리쳤다. 설화가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가는 사이 위리안이 부적을 꺼내며 소리쳤다. “우리도 도울게! 혼자서는…….” 나는 눈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위리안을 바라보았다. 내 눈빛에 위리안은 물론 다른 둘까지 몸을 흠칫하며 행동을 멈췄다. “나로서도 시간을 버는 것이 고작인 녀석이다. 너희가 남아도 도움이 되겠지만 설화나 주토는 한번 당하면 끝장이야. 네가 보호해라. 주토!” 나는 지도를 꺼내 주토에게 던졌고 지도를 받아든 주토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위리안과 설화를 재촉했다. 마지못해 하며 위리안과 설화가 주토와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괜찮을까? “후훗. 예전엔 둘이서 드래곤도 상대했잖아. 죽기야 하겠어?” -하핫! 그건 그렇군! 그럼 간만에 멋지게 싸워 보세나! 성심성의껏 보좌하지. “부탁하네.” -아, 그런데 어떤 놈인가? 엄청난 기운이로군, 그래. “흐음… 천년 묵은 구렁이라고 할까… 이무기라는 족속이네.” -… 역시 파충류로군. 나는 피식 웃고는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좀 떨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주토들.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도망치는 일행의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강한 기운. 저번의 그놈보다 강할지 약할지는 모르지만…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마나르트라면 적어도 소멸되지는 않겠지. 나는 마나르트에 손을 가져갔다. 손잡이를 움켜쥐자 마력이 물밀 듯이 흘러들어왔다. “하아, 엄청나군. 마족들은 얼마나 강할지 상상이… 큭! 왔다!” 내 외침과 함께 소나무들 사이에서 한 인형이 걸어 나왔다. 음? 인형? 나는 나무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의 형상을 한 뱀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분명 사람처럼 서 있었지만 온 몸이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다갈색을 띄는 비늘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다. 꼭 두발로 서 있는 도마뱀 같다는 느낌이었다. 잠시 나와 대치하던 이무기로 추정되는 녀석의 눈이 붉은 빛으로 번쩍였다. 구미호가 말을 하기에 혹시 이무기도 말을 걸까 했더니… 이대로 싸움인가? 나는 마나르트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의 형상을 한 이무기가 붉은 빛에 휩싸이더니 점차 거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우욱…….” -호오? 그리고 커지는 크기만큼 이무기의 기 또한 증가했다. 나는 등에 걸어둔 마나르트를 뽑아들까 하다가 검집 그대로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나르트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이무기가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변했다. 거대한 비늘에 덮여 있는 거대한 뱀. 다갈색의 거대한 비늘에 뒤덮인 뱀의 머리 부분에서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고 엄청난 살기가 내게 날아왔다. “훗. 살기라면지지… 응?” 우우우우웅! 이무기의 살기에 낮게 중얼거리던 나는 이무기의 입에서 엄청난 속도로 모아진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다가오자 눈을 부릅떴다. 빠르……. “크로스!” 나는 순식간에 마나르트를 뽑아들며 그 붉은 기운을 가격했다. 극도로 마나를 불어넣은 마나르트에서 생성된 검은 기운이 간신히 붉은 기운을 좀 밀어낸 순간, 땅이 흔들리며 날카로운 바위들이 생성되며 내게 찔러 들어왔다. “망할!” 어쨌든 꼬치구이가 되기는 싫었던 나는 급히 뛰어올랐다. 내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 날카로운 바위들이 서로 격돌하고 있었다. 끄, 끔찍하다. 내가 저 바위들에 찍혔을… 우웃! 후와아앙! 공중에 떠 있던 나는 붉은 기운이 재차 날아오자 신음을 흘렸다. 역시 이 이무기들은… 마나르트를 들어도 이기기는 불가능해 보이는군. 하긴 그때는 한방에 졌었으니까. “흐아아아아앗!” 아까보다는 이무기 브레스(?)의 속도가 느렸지만 위력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공중에 떠있으니 피하지 못한다는 건가? 제길! 똑똑하잖아! 눈깔은 미친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마나와 마력을 있는 데로 끌어 모았다. 마나르트에서 검은 기운이 불타오르며 엄청난 마기가 폭사되었다. 이 검은 불꽃을 만들어 내는 게 훨씬 쉬어졌군. “흐아압!” 나는 마나르트를 힘껏 휘둘럿다 푸확! “어?” 허무하게 갈라지는 붉은 기운. 느껴지던 엄청난 기운에 비해 붉은 기운이 허무하게 파쇄되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마나르트의 경악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하아안! 함정이야아앗! 카아아아아! 마나르트와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아래에서는 엄청난 수의 날카로운 바위들이 솟아올라왔고 사방에서 붉은 기운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 망할. 저런 기운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건가? 확실히 상대를 속이고 일격을 먹이기에는 최고겠지만… 나는 내 다크 캐논을 떠올렸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무기가 나보다 더……. “크아아아아아악!” 콰아아아앙! 엄청난 기의 폭발이 일어나며 붉은 기운이 주위로 폭사되며 날카로운 바위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콰아아아앙! “아…….” “저건…….” 급히 달려가던 주토와 위리안은 저 멀리서 엄청난 폭발소리가 들려오자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꽤 떨어진 곳에서 붉은 기운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의 기는 검은 빛을 띠는데…….” 위리안의 중얼거림에 주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설화는 약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젠장! 가봐야겠어!” 위리안이 부적을 꺼내들며 달려 나가려 하자 주토가 급히 그를 가로막았다. 자신을 가로막는 주토를 보며 위리안이 푸른 눈을 싸늘하게 빛냈다. 하지만 주토는 전혀 물러서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는 저에게 두 분을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군이 당하실 리도 없고, 설사 당하셨다면… 위리안님이 가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주토의 말에 위리안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설화는 별 변화 없이 위리안의 뒤를 따랐다. 그 둘의 뒤를 따르려던 주토는 순간 강한 살기가 느껴지자 품속으로 손을 가져가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걱정을 누르며 걸어가던 위리안은 주토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의아해 하며 몸을 돌렸다. 설화도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고, 순간 둘의 표정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배, 뱀?” “아…….” 만약 동아줄처럼 꼰다면 사람과 맞먹을 크기의 뱀 여러 마리가 나무들을 타고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나무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나무로. 상당히 강한 위압감을 주는 뱀들의 모습에 위리안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설화의 표정은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을 본 듯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너무도 다른 그녀의 반응에 위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십시오! 제가 막겠습니다!” 주토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외쳤다. 위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달려가려는 순간, 두 마리의 뱀이 엄청나 속도로 주토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쩍 벌린 입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빛나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에 위리안이 멈칫하는 사이, 주토는 침착하게 몸을 움직이며 품속에서 꺼낸 소검을 휘둘렀다. 뱀들의 속도를 능가하는 빠른 속도였다. 신수의 기운이 깃든 검에 상처를 입은 거대 뱀이 황급히 몸을 뺐다. “가십시오! 위리안님이나 아가씨가 상대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제가 방어를 해드릴 기회도… 크윽! 가십시오!” 위리안은 다시 뱀의 공격을 받으며 악을 쓰듯 외치는 주토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빠른 속도의 전투에서는 도사인 위리안은 쓸모가 없다. 누군가 공격을 막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주토는 뱀들과 직접 붙어 싸우고 있었고 만약 주토가 위리안을 보호한다 해도 설화가 남는다. 그렇게 도망가는 위리안과 어느새 위리안에게 한 손을 붙잡힌 설화는 나무들 사이를 달려갔다. 그렇게 나무들 사이로 달아나던 위리안은 뭔가 생각난 듯 부적 하나를 꺼내 주토를 향해 던졌다. “비(飛)! 결계(結界)!”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부적은 주토의 오른팔에 달라붙었고 위리안은 그대로 뒤돌아 다시 달려 나갔다. “젠장. 죽지 마라… 한…….” “당신들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요.” 한의 이름을 낮게 중얼거리던 위리안은 설화의 조소어린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캬아악! 깡! 주토의 소검과 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자신의 몸과 비슷한 크기의 뱀이 엄청난 속도로 물러나는 모습에 주토는 신음을 흘리며 역시 뒤로 물러났고 주토가 서 있던 자리에 다른 뱀의 머리가 들이밀어졌다. “크윽!”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한 주토는 이를 갈며 소검을 역수로 쥐며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검신이 뱀들을 향하며 예기를 뿜자 뱀들이 움직임을 멈추며 주토는 노려보았다. 잠시 대치 상태가 유지된 덕분에 숨을 돌린 주토는 슬쩍 뒤를 살폈다. “위리안님과 설화 아가씨는 무사하실지 모르겠군. 거기에 주군 또한…….” 낮게 중얼거리던 주토는 뱀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를 악물며 옆으로 움직여 갔다. 휘이익! 굵은 통나무에 맞먹는 크기의 꼬리들이 날아들자 주토는 급히 뛰어올라 뱀의 꼬리를 박차고 다시 한번 뛰어올랐다. 목표를 잃은 뱀들의 꼬리가 지면을 강타하며 엄청난 진동을 일으켰다. “큭.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군.” 이미 뱀들과 사투를 벌인 시간만 해도 한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정도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는 시간. 때문에 위리안과 설화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기로 한 주토는 한을 떠올렸다. 그 실력에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자신의 상황이 제일 나쁠지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한 주토는 입술을 깨물며 소검을 휘둘렀다. 파카칵! 푸확! 동시에 양쪽에서 공격해 들어온 뱀들의 공격 중 간신히 한 놈의 공격은 막아낸 주토였지만 다른 녀석의 공격은 막지 못하고 허리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벌써 수십 번째의 상처였다. 다만 빠른 몸놀림으로 공격을 비껴내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았기에 쓰러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도 속도가 거의 줄지 않은 정신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왼손으로 허리를 부여잡은 주토는 급히 나무 위로 뛰어오르며 소검을 휘둘렀다. 뒤에서 접근하던 뱀 하나가 머리를 얻어맞고는 괴성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비늘이 너무 단단하다…….” 주토는 피가 거의 묻지 않은 자신의 소검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기를 웬만큼 실지 않으면 비늘에 흠집도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격에 기를 실기에는 전투가 너무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뱀들의 속도도 속도지만 자신보다 더 많은 숫자. 최악의 상황이었다. 콰드드드득! 그때 나무들이 쓰러지는,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에서 다가오는 뱀의 머리를 쳐내고 있던 주토는 아연실색해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싸우고 있는 뱀들보다 한 단계 크고 강해 보이는 붉은 빛의 뱀이 나무들을 마구 쓰러트리며 돌격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로 뒤로 다가온 뱀이 입을 쩍 벌리며 주토를 공격했다. “크으윽!” 뱀의 공격에 제대로 명중당한 주토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나무들 사이에 처박힌 주토의 몸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푹. 뒤늦게 주토의 소검이 주토의 옆에 떨어져 박혔다. 잠시 검을 바라보던 주토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단 한방의 공격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힘을 빼앗아간 일격. 주토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여러 마리의 뱀들을 바라보았다. “후우. 씹혀 먹히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간단하게 유언을 끝마친 주토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뱀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뱀들은 그런 주토의 행동에 가소롭다는 듯이 혀를 낼름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뱀들의 모습에 주토가 쓴웃음을 지으며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주토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순간 몸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된 것을 눈치 챈 주토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주토의 어깨를 짚고 있던 존재는 주토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주, 주군?”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을 떠올린 주토가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주토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존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누구지?” 잠시 흐릿했던 눈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존재가 세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주토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곳은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고, 때문에 이곳에 웬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은 상당히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를 잠시 살피던 주토는 더더욱 비상식적인 사실을 발견하고는 신음을 흘렸다. 주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는 보통 입고 다니는 형태의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 긴 백발머리. 하지만… 피부에 하늘빛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인간의 피부와 비늘이 혼합된 듯한 피부. 하지만 끔찍하다거나 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는, 사내를 신비스럽게까지 보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주토가 신음을 흘린 것도 신기한 모습을 보아서였다. “이런, 이런. 역시 진광(嗔狂)의 아이들이로군. 물러가라. 진광을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 후배가 될지 모르는 너희들을 해치고 싶지는 않구나. 물러가라.” 생긴 것과 분위기에 맞게 목소리도 맑다는 생각을 하던 주토는 뱀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뱀들은 물러나지는 않았고 사내의 표정이 약간 험악해 졌다. “마지막 경고다. 나는 내 말을 거역하는 녀석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지는 않는다. 물러나라!” 엄청난 기운이 담겨있는 사내의 일갈에 주토가 눈을 찡그렸다. 뱀들도 몸을 마구 비틀어대더니 잠시 주춤하다가 사내에게 마구 달려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주토는 사내의 몸 주위에 회오리바람이 생성되자 딱 멈춰 섰다. 그리고 분노에 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진광에게서 약간의 힘을 받은 주제에… 감히 나에게 이빨을 들이민단 말이냐!” 사내의 외침과 함께 강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주토는 엄청난 광풍에 몸을 고정시키며 자신의 소검을 집어 들었다.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이 든 주토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앞에 위치한 사내와 뱀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순간, 휘몰아치던 바람이 여러 지점에 응집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바람의 칼날들이 생성되었다. 주토가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이, 사내가 손을 들어올렸고 그 바람의 칼날들이 뱀들을 순식간에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우욱…….”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뱀들이 손짓 하나에 고깃덩이로 바뀌자 경악하던 주토는 잠시 뭐라고 투덜거리던 사내가 자신을 돌아보자 몸을 흠칫 떨었다. 편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사내는 주토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음, 죽지는 않은 모양이군. 저쪽과 일행이 맞는지?” 사내가 자신의 뒤를 가리키며 물어오자 주토는 얼떨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뒤로 좀 떨어진 곳에 피투성이의 위리안이 쓰러져 있자 눈을 크게 떴다. “위, 위리안님!?” 주토의 놀란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 백발의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주토를 일으켜주었다. “여기로 오는 도중에 만났네. 이 뱀들보다 한 단계 수준 높은 녀석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더군. 뛰어난 실력을 가진 듯 했지만 이런 놈들에게는 약한 듯해서… 아, 이게 아니지. 어쨌든 저쪽도 죽지는 않았으니 걱정 말게.” “아,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당신은…….” 주토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뭐, 상관없겠지. 나는 성풍(成風). 바람을 다루는 이무기. 이무기들의 수장이네.” “이, 이무기?” 주토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성풍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 아니, 이무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네. 뭐, 자네들을 습격한 그 망할 이무기 자식과는 다른 존재이니 걱정 말게. 그나저나 자네들의 대장은 무사할지 모르겠군. 진광과 직접 맞붙은 모양이던데… 아까의 폭발도 위험하고… 그 분에게 부탁을 받았는데 이거 곤란하군. 어서 가세나!” 성풍이 세한의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주토는 잠시 생각했다. 진광과 세한이 맞붙었다는 얘기는… 아무래도 그 진광이라는 자도 이무기로 보였고 그렇다면 세한이 혼자 남아 싸우고 있는 존재가 이무기라는 것. 주토는 질린 얼굴로 성풍을 바라보았다. 아까 뱀들을 순식간에 살육하던 힘. 이런 존재와 세한이……. 주토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성풍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위리안을 들쳐 업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성풍을 쫓아온 주토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순간 주토의 안색이 굳어졌다. “저… 이무기님?” 자신을 칭한 호칭에 작게 미소 짓던 성풍은 주토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나?” “아, 저… 저분 말고 다른 분은 보지 못하셨습니까.” 주토의 질문에 성풍은 눈을 깜박이며 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든 성풍이 말했다. “자네들의 대장 말인가? 지금 구하러 가려고 하네만.” 성풍의 대답에서 뭔가를 알아챈 주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성풍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토를 바라보는 가운데 주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호, 혹시… 그분 근처에 은발머리의 소저가 있지 않았는지…….” 주토의 말에 상황을 알아차린 성풍의 표정이 약간 묘하게 굳어졌다. “으음? 이 친구 말고 다른 일행이 또 있었던 건가?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이 친구만이 뱀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네. 근처에 다른 인간은 없었네.” 성풍의 말에 주토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성풍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주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 그럼 설화 아가씨는… 젠장!”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던 설화는 몸을 일으키며 이마에 고인 땀을 닦았다. “다, 다행히 뱀들은 없지만…….” 설화는 자신의 주위에 널린 늑대들의 시체를 보며 신음을 흘렸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강한 늑대들이었다. 털색이 적갈색을 띈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빠른 몸놀림과 힘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설화는 자신의 손에 들린 은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실들은 늑대들에게 모두 끊어진지 오래였다. 만약 세한이 준 이 은사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설화의 표정이 약간 묘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이 은사는 도대체 뭐로 만든 거지? 끊어져도 다시 생겨나는 데다…….” 잠시 은사를 내려다보던 설화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 흰머리는 괜찮을까?” 자신을 도망치게 하고는 뱀들과 맞서던 위리안의 모습을 떠올린 설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지켜주겠다던 세한도, 그 흰머리도, 그 주토라는 암살자도 모두 스스로 싸움에 뛰어들고 있었다. 결국에는 자신 혼자 남아 싸우고 있었지만 그 셋의 행동을 떠올려보던 설화는 얼굴을 찡그렸다. “플레이어면서… 그리고 그 주토라는 사람은 또 뭐야. 왜 할아버지의 무기를… 그것도 신수까지 들어있는… 그리고 세한이라는 플레이어에게 할아버지가 날 부탁했다고? 무슨…….” 지난밤에 주토와 세한이 나누던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던 설화였다. 그다지 신경을 쓰고 있지는않았지만 이 상황이 되니 자신을 지켜주겠다던 세한이 보고 싶어지는 설화였다. 어쨌든 강하니까. 잠시 세한이 주토를 붙잡고 비밀이라고 말하던 일을 떠올린 설화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역시 플레이어라 우리와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없다는… 아?” 콰콰콰콰쾅! 우수수수수…….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설화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는 은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뭐지?” 그때 또다시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며 불과 5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무들이 줄줄이 쓰러지며 즉석으로 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하늘 높이 폭사되는 붉은 기운에 설화는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났다. 엄청난 공포를 주는 기운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엄청난 크기의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갈색의 거대한 비늘로 덥힌 몸을 가진 뱀이었다. “이, 이무기?” 엄청난 기와 크기, 그리고 말로만 듣던 모습에 저 뱀이 이무기라는 것을 알아차린 설화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리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무기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콰콰쾅! 나무들을 마구 박살내며 붉은 기운을 내뿜는 이무기의 모습에 설화는 몸을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어째서인지 설화가 서 있는 곳으로 이무기가 움직였다. 설화가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엄청난 기운이 이무기에게 날아들었다. 이무기의 옆으로 꽤 떨어진 곳에서 날아온 검은 기운에 이무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