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재스터 7권 제가 처음 써서.. 오타가 많아도 봐주세요. -by. Lotakon 1. 나와 에리아스 난 한참 민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최첨단 저질 개그냐?" 어이가 없다는 듯 민호에게 물었다. 지가 사실은 백호란다. 푸헤헤 요새 한동안 저질 개그 안 하더니 또다시 작렬한다. 그것도 좀 더 최첨단으로 진화한 저질 개그다. 하지만 이런 내 말에 민호가 진지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구라 같아 보이십니까?" "응!" 난 민호의 말에 아주 자신 있게 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아주 확실할 수 있다. 그런 내 대답에 민호는 한숨을 내쉬더니 한마디 던졌다. "휴우, 어쩔 수 없군요, 보여 드리죠." "......?" 뭘 보여 준다는 거냐? 네가 구라 치는 모습? 한편 그 순간 민호가 갑자기 두 손을 모으더니 두 다리를 쩍 벌렸다. 그리고는 그 상태에서는 마구 몸을 흔들더니, "울트라 백호 변신!" 하고 외치신다. 그리고 잠시 후....... 파아앗!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갑자기 하얀빛이 민호의 몸을 감싸더니 약 수 초간 지속되었다. 아니 과정 따윈 중요한 게 아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이쓴 존재는 한마리의 커다란 백호였다. "......"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진 나 말 그대로 완전 백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한 마디.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꺄울!" 그 말이 내가 기절하기 직전에 남긴 한 마디였다. 난 악몽을 꾸었다. 그것도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악몽을. 그렇게도 찾던 마지막 4대 신 중 한명이 사실은 민호였다는 아주 끔찍한 악몽이었다. 차라리 지나가던 보쌈이 4대 신이었다는 것보다 더욱더 충격을 안겨 주는 꿈. 어떻게 보면 단순한 개꿈일 뿐이다. 하지만 개꿈이라 무시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주는 꿈이다. "하아." 너무나도 잊고 싶은 꿈이다. 하지만 한동안은 잊히지 않겠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으니까. "형니임-." "......." "형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때, 어디선가 무얼 하든 항상 들렸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분의 목소리는 아니다. 좀 더 굵으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목소리. "전 귀여운(?) 백호랍니다아!" "......." 인정해야 했다. 더 이상 부인해 봤자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 인정하자, 인정해! 민호가 백호라는 걸......! 아아악! 하, 하지만 진짜 그건......! "미치겠다." 민호가 백호였다는 걸,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나, 정말 미치겠다, 진짜. 으아악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너를....... 아니, 이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니다. 정말! 백호=민호? 할 말이 없다. "조금(?) 놀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어느새 인간으로 돌아와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민호 사마 넌 지금 네놈이 백호였다는 사링르 '조금' 놀라운 거라고 말하는 거냐? 그게 조금이면 많다는 기준은 도대체 뭐냐? 아악!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다. 그때 민호가 말했다. "하지만 형님, 기쁘지 않습니까? "뭐가?" 도대체 내가 뭘 기뻐해야 하는데? 응? "생각 외로 멋지고 완벽하고 뷰티풀하고 그랑상스에다가 랍스타한(?) 백호를 아주 손쉽게 찾았으니까요." "........" 그건....... 맞는 말이다. 사실 백호 찾는 일, 생각만으로도 암담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찾았다는 건 행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앞에 수식어는?" "저를 표현한 겁니다." "........" 네놈이 멋지고 완벽하고 뷰티풀하고 그랑상스에다가 랍스타(?)하다고? 아니, 완벽 뷰티까지는 이해해 주겠는데 그랑상스에다가 랍스타는 어느 나라 언어냐? 그랑상스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랍스타는 그 엄청 비싸다는 요린데? 그거랑 지금 상황이란 무슨 상관인 걸까. 그것이 알고 싶다. 아니, 그것보다....... "왜 말 안 했냐, 이 자식아!" 그렇다. 지금 문제는 이거다. 자신이 백호라는 걸 지금까지 철처히 숨겨 온 민호 자식. 차라리 처음부터 백호라는 걸 밝혔다면 내가 기절하는 사태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터, 하지만 지금까지 아주 뻔뻔하게 나를 속여 왔다. 하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잘 생각해 보면 날 능욕한 거잖아! 난 민호를 째려보며 물었다. "날 속이니 재밌었니?" "속이다니요?" "네놈이 백호라는 걸 숨긴 게 속인 거지!" "아닙니다" "......." 아닙니다라고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일순간 말이 안나온다. 아, 정말 뻔뻔해. 인간이 무슨 번데기 할아버지도 아니고 저렇게 뻔뻔하다니. 그때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형님이 안 물어봐서 말 안 했을 뿐이죠." "........" "감춘 거랑은 엄연히 다릅니다." "......." 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물어보지 않아서 대답을 안 했다는 민호의 말 전혀 타당성이 없잖아! 보통 그런 중요한 사항은 물어보지 않아도 먼저 말해야지! 내가 굳이 물어야 대답하는 건 정말 아니잖니?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고 있을때 민호가 싱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전 짜릿한 남자거든요." "......." 내가 너한테 뭘 바라니? 민호가 백호가 된 사연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일단 이 이이기는 민호라는 외계 생명체의 입에서 전달된 말이므로 사실성은 보장 못한다. 그러니 그 점 유의해서 들을 것을 권장한다. 때는 바야흐로 내가 게임에 접속하기 전 일이었단다. 자기 말로는 순수하게(?) 걷고 있었단다. 여기서 일단 묻고 싶다. 순수하게 걷는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걷는 거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순수하게 걷는다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걸으면 순수하게 걸을 수 있는 걸까? 어떻게 걸어야 순수한 스텝 바이 스텝이 되는 거지?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해져서 그냥 패스하겠다. 그럼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쨋거나 순수하게 걷던 민호,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단다. 이렇게....... -야, 너 백호 해라! 민호의 증언에 의하면 그 외침은 하늘에서 들려왔단다. 한마디로, 순수하게 걷던 민호를 향해 어느 순간 하늘이 '야, 너 백호 해라'라고 소리쳤다는 얘기. 참으로 어이없다. 보통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는 보통 사람이라면 어의가 없어 무시하거나 도망가거나 어리둥절해 하는게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 민호 군은 달랐다. -그러죠. 라고 간단히 대답하셨단다. 그리고 백호가 되셨다. 이게 바로 민호가 백호가 된 엄청난 사연이다. ........ ".......이게 말이 되냐!" 난 소리쳤다. 설명을 듣고도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내 자신에게 무안해질 정도다. 누군가가 지나가던 민호에게 '백호 해라'해서 백호가 됐다? 완전 개구라잖아! 난 민호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진실을 말해!" "진실인데요" "맞고 말할래?" "정말입니다." "맞아야겠군." "믿어 주십시오" "개뿔." 그런 걸 나보고 믿으라고? 아무한테나 물어봐라. 그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누가 믿겠냐. 그 누구라 해도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게 분명하다. 그 순간 민호가 눈빛을 강렬하게 빛내더니 한마디 했다. "제 야설의 혼을 걸겠습니다." "......." "진실입니다." "......." 난 그 말에 힘없이 민호의 멱살을 놓았다. 다른 건 몰라도 야설의 혼을 걸었다. 그 말인즉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걸 걸었다는 것이고, 간단히 말해 좀 전의 이야기는 100프로 진실이라는 것. 민호 사마가 내게 말해 준 엽기 발랄 끔찍한 백호 탄생기는 진실이었던 것이다. "........" 난 생각에 잠겼다. 민호가 얘기해 준 백호 탄생기. 너무 쇼크다.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백호가 돼라 하다니! 아니, 그것보다 그걸 곧바로 수락하는 놈이 더 신기하다. 하지만 저 녀석은 워낙 신기해서 별로 놀랍지는 않다. "궁금해." 도대체 이 날라리 같은 직업의 정체를 알고 싶다. 디재스터라는 직업에 내려진 퀘스트가 속옷 훔치기. 그래, 이것까지는 좋다. 좀 버라이어티한(?) 퀘스트였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그 다음, 4대 신부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일단 지식의 보고라고 불리는 현무 지식의 보고이기는커녕 바보에다가 변태다. 어딜 봐서 지식의 보고냐? 지식의 쪼가리도 안 보인다. 그리고 에리아스. 너무 귀여워서 미쳐버리겠다. 본래 주작이란 조금 차가운 느낌이 드는 존재인데, 이분은 완전 정반대다. 그리고 청룡. 이놈도 곱게 미치지는 않았다. 용이라 불리는 존재는 보통 그 어마어마한 힘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게 사실. 하지만 녀석이 할 줄 아는 건 제 엉덩이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호. 청룡과 쌍두마차를 이루며, 상당한 무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 실체는 변태에다가 외계 생물체다. 결론은........ "로.......또?" 4대 신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그 하늘에 있는 존재는 문득 귀찮음을 느꼈다. 그래서 로또 당첨하듯 무작위로 찍었다. 상당히 근거 있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대충 막 찍어도 꼭 청룡이나 현무, 심지어 민호 같은 놈이 걸린거지? 그 재주, 가히 섬뜩하다. 고르고 싶어도 고르기 힘든 애들을 이렇게 단체로 고르다니. 어떻게 보면 전설적인 능력이다. 그렇게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4대 신을 선발한 저 하늘에 있는 누군가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저 하늘의 누군가를 향해 따질 수도 없는 일. 이제 모든 걸 받아들이고 수긍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있었으니, "스킬을 내놓아라." 지금 중요한 건 이것이다. 백호의 스킬. 민호라는 외계 생물체가 백호였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놈은 화려한 스킬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하지만 이런 내 말에 민호가 입을 열었다. "그냥은 못 줍니다." "오호?" 그냥은 못 주시겠단다. 그 말에 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웃음과 함께 주먹을 쥐면서 말하였다. "맞고 줄래?" "형님" "왜?" 다음 순간, 민호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전 형님을 그 누구보다 존경합니다." "갑자기 뭔 개소리냐?"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공짜로 가르쳐 드리고 싶습니다." "........." "하지만 이건 이민호가 아닌 백호로서 받은 의무, 공으로 구분해야 할 듯싶습니다." "........." 난 민호의 만점 논리에 그만 굳어 버렸다.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그래, 공과 사다. 지금의 민호는 엄연히 백호. 백호의 임무를 망각하면 안 된다. 난 그것도 생각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 민호 녀석이 왠지 모르게 더럽게 멋져 보인다. 민호 네놈에게 이런 멋진 면이 있었군. 난 마음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래, 미안하다. 내 생각이 짧았어. 그래, 네 말대로 공과 사는 구분해야겠지.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이 뭔데?" 그런 내 물음에 민호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야설을 찾아 주십시오." "......." 백호 스킬을 배우기 위해 거쳐야 할 시험은 야설찾기였다. 궁금하다. 백호의 스킬과 야설의 관계가. 그래서 간단히 분해하고 조립하고 연구하고 고뇌해 봤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다. 백호의 스킬과 야설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아니, 오히려 야설과 관계가 깊은쪽은 민호. 즉, 놈의 개인적인 취미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추리를 해 보겠다. 실질적으로 백호의 스킬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야설 찾기, 그런데 백호라는 직책을 맡은 민호 군이 내린 테스트가 야설책 찾기란다.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스킬을 가르쳐주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네놈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요구라고, "백호의 시험이 아니잖아!" 이거다. 이건 백호로서의 시험이 아니라 백호의 시험을 가장한 민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거다. 백호의 테스트를 지가 좋아하는 야설에 교묘하게 끼워 맞춘 것이다.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냐? 응? 한편 그런 나의 외침에 민호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백호의 시험인데요" "너 죽을래?" "형님, 진짜입니다." "하하하. 어이없어. 백호의 스킬을 가르쳐 주는 조건이 야설을 찾는 거라고?" 그 많은 조건 중 왜 하필 네놈과 연관성이 그리도 많은 야설을 찾으라는 것이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건데?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민호가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며 말했다. "우연입니다." "지랄 염병을 해라." 어디서 저런 구라만 늘어가지고. 이제는 안 믿어. 나의 격렬한(?) 반응에 민호가 말했다. "다시 한 번 야설의 혼을 걸겠습니다." "........" "믿어 주십시오." ".......쿠에엑!" 난 결국 비명을 질렀다. 녀석이 야설의 혼을 건 이상 저 말은 진실이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다. 백호의 스킬을 얻는 조건이 야설을 구하는 거라니. 이게 말이 되니? 그렇게 절망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 나에게 가뭄에 물 한방울 같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물론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정말?" "네" 그 말에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민호를 바라보았다. 그래, 현무로서 시험을 내주면서도 민호로서는 내게 도움을 주려는 거구나! 뭔가 아이러니컬하기는 하지만 뭐......! 그때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핫! 핫! 핫! 아이이잉이라는 소설입니다." 뭔가 심플한 제목이군. 심플해. 야설의 제목이 점점 예사롭지 않아지는군. "그리고 그걸 갖고 계신 분은 민영 양이십니다." "흐으음, 그렇군. 민영이가....... 응?" 그 말에 나는 기절할 듯한 얼굴로 민호를 바라보았다. 민영이? 설마 그 민영이? 아니겠지? 동명이인도 많잖아. 안그래?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람은 저 자식의 말에 의해 아주 풍비박산 나 버렸다. "제 동생입니다." "......." 미소녀들은 하나같이 행복만을 준다고 남자들은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 내 주변에 있는 초미소녀들은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게 완벽해서 행복 그 자체다. 하지만 단 한 존재만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외형적인 모습은 내게 너무나도 커다란 행복을 주지만, 그 내면은 날 무섭게 만든다. 그 이름하면 이민영 민호의 동생이자, 야설계의 떠오르는 샛별. 희망사항은 나에게 덮침을 당하는 것. 물론 이건 민호라는 인간이 지 여동생에게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덮침을 당해야 한다는 개소리가 미리 들어갔다느 건 알아두자. 어찌 됐든 그분은 초미소녀들 중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분이다. 틈만 나면 후르르(?) 하시는데 무섭다. 정말 무섭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해 다니는 것도 힘들 정도다. 숙성이 덜 되었다는 핑계도 한물갔고 가지각색의 핑계도 이제 효과가 다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야설책을 얻어오라니! 물론 남자였다면 두들겨 패서 협박하겠지만 민영이는 엄연히 여자다. 그것도 초미소녀다. 한마디로 무력 사용은 절대 불가. 아아악! "누,누군가가 같이 가 주는 건?" 때마침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굿 아이디어. 그렇다. 혼자라면 무척이나 위험하다(?). 하지만 동행이 있다면, 특히 상대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과 같이 간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민호 남동생!" 이름은 생각이 안 나지만 성격은 민호랑 완전히 다른 형제. 제 형이 변태에다가 범죄에 획기적인 존재라면 그는 너무나도 순수한 마음을 가진 착한 사람이다. 그런 그라면 자신의 여동생이 타락의 길을 걷지 못하게 막아 줄 것이다. 분명해! 하지만........ "아직 구더기 님 제사 안 끝났다고 합니다." "........." 갑자기 나타나서 한마디 툭 던지는 민호 님. 난 그 말에 멍하니 민호를 보면서 물었다. "아직도?" "네" "한 달이 넘은 것 같은데?" "보통 한 다섯달은 가죠" "구더기 님 제사가?" "네" "........." 아악!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착하긴 하지만 뭔가 미친 개성을 역시 민호를 닮았다. 무슨 구더기 제사를 다섯 달이나 지내느냔 말이다! 이런 어이없는.......! 2. 미션 임파서블. 민영이를 사수하라. "하아.........." 난 한숨을 내쉰다. 민영이의 방을 보고 말이다 그 누구보다 두려운 라스트 보스, 이민영 양. 어떻게 청순한 외모와 성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행동을 하는 걸까. 정말 그런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다. 외계인 오빠를 두는 바람에 고귀한 미소녀가 그런지경까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바로잡아 주고 싶다. 가련한 미소녀를 구해 내고 싶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깊어." 이미 그녀의 병세는 고칠 수 없을 정도다. 민호라는 바이러스에 걸린 이상 약도 없다. 치료약 따위는 민호 바이러스라는 님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니 오히려 약 성분마저 바이러스 성분에 동화시킬 게 분명하다. 그만큼 그의 바이러스는 절대적이다. "같이 갈 사람이........." 분명 내가 여자들한테 민영이에게 가자고 하면 이유를 물어볼 것이다. 왜냐고, 무슨일인고 말이다. 그런 경우,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영이가 날 덮치려고 하는데 같이 가 줘, 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바보 거북이나 변태 청룡하고 같이 갈 수도 없다. 그럼 남은 인원은........ "에리아스." "네?" "아, 아니야" "........."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와 주시는 분, 에리아스 이유 따위는 묻지 않는다. 그냥 졸졸졸 따라오신다. 아, 너무 귀염둥이 아니, 이게 아니라....... 어찌 됏든 에리아스와 같이 가게 된 이상 조금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아무리 그녀라도 에리아스가 있으면 함부로 하지는 않겠지. "꺄울!" "주,주인님." "에리아스......." 이렇게 된 원인은 속옷 차림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민영 양, 바로 그녀 때문이다.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요새 백합물도 관심이 갔는데 잘 됐어요. 오라버니랑 언니, 환영해요." ".........." ".........." "헤헤헤" ".........!" 우어억! 배, 백합물? 여자랑 여자의 미묘한 그거? 물론 민영이나 에리아스 같은 초미소녀들이라면 괜찮지만......이 아니라!! 난 다급하게 말했다. "이건 옳지 않아!" "뭐가요?" "지, 지금 이 방에는 에리아스도 있다고!" "그게 왜요?" "......." "방금 전에 말했잖아요. 요새 백합물에도 관심이 가거든요. 그래서 언니의 힘도 필요해요 물론 오빠의 힘도. 후후훗." "........." 저 청순한 미소녀의 웃음에서 섬뜩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마치 나를 잡아먹으려는 듯한 동물의 미소가 말이다. 도망가야 한다. 나 혼자라면 괜찮다. 하지만 우리 귀염둥이 에리아스까지 피해를 당하면 안된다. 여기서 문까지의 거리는 약 20미터, 바람의 힘을 충분히 이용하면 순식간에........ 취이익. ".........." ".........." 그때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민영의 방 풍경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언가로 뒤덮였다. ........ "4중 오리데오콘이에요." "........." "도망갈 수 없어요, 오빠, 언니." "........" 자, 잠깐. 왜 민영이 방에 오리데오콘이......... 그것도 4중이나? 이게 왜 만들어진 건데! 응? 도대체 누가 오리데오콘을 4중으로...... "아, 이......민.........호." 그놈이 문득 떠오른다. 오리데오콘이 4중으로 뒤덮인 이 방. 그 자식이라면 만들고도 남을 것같다. 충분히. 별 괴상한 능력 그놈은 일단 백호다.약간은 수긍이 간다고 할까?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민호랑 뭘 계약한 거야?" "비밀이에요, 오라버니." "........" 비밀이라신다. 하지만 안 봐도 뻔하다. 민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무언가에 협조할 때는 분명 미묘하고 야릇한 무언가가 주어졌을 때다. 그러니 두 분 사이에 뭔가 계약이 있었다고 확실할 수 있을 터다. 결론, 민호가 나를 팔아먹었다. "이........민호!" "오라버니" 스으윽. "꺄울!" 순간 하나 남은 속옷까지 훌훌 벗어 버리는 민영 양. 난 애써 고개를 돌리며 절규했다. "이러지 마!" "어서 덮쳐줘요" "이, 이건 옳지않아!" "아님 언니부터?" "주, 주인님" 글썽글썽. 그때 에리아스가 금바이라도 막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나도 당황스럽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난감한 상황은 처음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결심했다. 에리아스를 위해서. "미안해, 민영아!" 임시 무력 해제. 힘을 써서 억지로 옷을 다 입힌 뒤 그대로 침대에 묶어 놓았다. 마침 옆에 밧줄이 있었기에 왜 여자애 방에 밧줄이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기는 한데, 뭐 대략 알 것 같다. 한편, 침대에 묵여 있던 민영 양이 살포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처음이에요, 살살 덮쳐 주세요." "아니야!: 난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자 곧 눈물을 글썽이는 민영. 그런 민영의 모습에 난 너무나도 당황했다. 정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니 정말 미치겠다. 나는 다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니, 화난 건 아니고 그, 그냥 잠시......" ".........." "음, 그러니까........ 지, 진짜 화낸 거 아냐." "........" "그, 그리고 이런 건 좋아하는 남자랑......." "전 오빠가 좋아요" "아니, 그건 분명 일시적인 감정이야" 그래, 그런거다. 분명 일시적인 감정이다. 이런 미묘한 행위는 진정으로 사랑하고 결혼할 남자랑.......... 그때 민영이의 충격 발언이 들려왔다. "전 2년 전부터 오라버니를 좋아했어요." ".........." "오라버니를 너무 좋아해서 매일매일 오라버니의 사진을 모아달라고 했어요." ".........." "그게 벌써 1만 장이 넘은걸요." 섬뜩. 그 말에, 난 순간적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1만 장? 내 사진을 1만장이나 모았다고? 근데 민호 자식, 언제 내 사진을.......!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슬픈 어조로 내게 말한다. "왜 저를 사랑해 주시지 않는 거죠?" "아, 아니 그러니까 그건......." "오빠 말을 듣고 관심도 없었던 야설에 관심을 가진 것도 재현 오빠 때문인데." "......엥?" 그녀의 한마디에 난 엄청난 불길함을 느껴야 했다 잠시 후, 설마 하는 어조로 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저 2년 전에 오빠한테 물었어요.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어떤 여자냐고요." "......." "그러자 오빠는 야설을 사랑하는 여자라고 했어요." "......." "그리고 전 이제 충분히 야설을 사랑해요! 그러니까 오라버니, 절 받아 줘요." 켁! 난 어마어마한 충격에 빠졌다. 민호..... 이민호........... 이 인간, 순진한 소녀에게 뭔 개소리를 해 댄 거냐! 야설을 사랑하는 소녀가 남자에게 인기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민영이 너라면 별 상관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건 아니잖아! 이 저질 자식! 난 민호와 함께 방 안에 있다. 그리고........ "네 여동생을 저 모양으로 만든게 네놈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2년 전 민영이가 물었다면서, 남자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는 어떤 여자냐고." "네, 그랬죠"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는데?" "야설을 사랑하는 여자요." "......." "전 그런 여자가 좋으니까요" 이 개자식, 그건 네놈 기준이잖아! 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민호에게 웃으면서, "오늘 좀 즐길까?" "사양하고 싶습니다." "닥치거라.......!" 어쨌든 민영이 저렇게 된 건 엄연히 내 잘못도 있다. 나를 짝사랑한 나머지, 남자들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 미친 변태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 잘못된 정보로 인해 저렇게 된 것이다. 물론 저런 미소녀가 날 좋아해 주는건 너무 좋다. 그리고 짝사랑의 아픔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민영아, 나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 "오빠를 좋아해 주는 건 정말 고마워, 너같이 아름다운 소녀가 말이야, 하지만 난 이미 좋아하는 여자가....." "상관없어요." "엥?" 민영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골키퍼가 있으면 골키퍼를 패서라도 골을 넣으라고 오빠가 그랬어요." "........" "뭐 2년 전 우리 오빠가 알려 준 정보가 엉터리였다는 걸 알고, 앞으로 야설에 별 관심 안 두기로 결심했어요, 하지만 오빠만큼은 가질 거예요." "......" "헤헤." 그래 야설을 사랑하지 않는 청순 미소녀가 된 건 좋다만 아직 그 성격은 남아있는 듯싶구나. 골키퍼가 있다고 공 안들어간는 말은 들어 봤어도, 골키퍼를 패서라도 골을 넣으라는 건 무슨 소리? 어쨋든 저런 미소녀에게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으니,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3. 백호의 스킬 "자, 이거. .......됐냐?" 난 민호에게 물건을 내밀었다. 민영이 가지고 있던 '핫! 핫! 핫! 아이이잉' 이라는 야설이다. 물론 이걸 가지고 오기 위해 약간의 대가는 치러야 했다. 볼에 입맞춤....... 예진아, 미안해. 흑흑흑. 기분 좋았다고 해야 할지 안 좋았다고 해야 할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한편, 야설을 받아 든 민호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합격입니다. 그럼 백호의 스킬을 가르쳐 드리죠. 상대방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복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 충격적인 사실 하나. 지난번 에르카니아에서 나는 그 변태 자식에게 능욕(?) 당할 뻔했다. 하지만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 시간의 흐름이 깨졌고 덕분에 난 살아남았다. 그건 바로, 민호가 백호의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주 잠시 베르자니아의 능력을 훔쳐 와 시간을 깨 버린 것이다. 그때 나를 구해 준 게 민호였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랍고 당황스럽지만,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 스킬이다. 어떤 존재에게서든 그 능력을 일시적으로 훔쳐 오는 기능! 이거 어마어마하다. 물론 훔친 힘만으로 원판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일시적으로 빌려 오는 것이니, 그걸 펑펑 써 대는 애들하고 싸움이 안 될 것이다. 민호 말로는 이 스킬을 갖고 있다 해도 베르자니아를 이기는 건 무리라고 한다. 역시나 디재스터의 힘을 모두 마스터해야 한단다. 그나저나.......... "익히는 방법은?" 내가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그러자 민호가 웃으며 답했다. "간단합니다. 키스를 하는 겁니다." ".........." "그러고 나서 제가 주문을 외우면 끝이죠."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녀석을 바라보았다. 뭐 이제는 스킬을 배우기 위해 키스를 해야 한다고? 너 이자식, 뭔가 야릇한 거 보고 싶어서 그러는 줄 내가 모르는 줄 알아? 하지만 뒤이은 민호의 충격적인 한마디. "남자도 상관없습니다." "......." 민호의 말에 의하면 남자든 여자든, 어쨋든 키스를 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여기서 포인트. '남자든' 이라는 것이다. 남자랑 키스...... 차라리 날 죽여라. 남자랑 키스할 바에는 안 배우고 만다. 그럼 남은 건 여자들인데, 예진이를 놔두고 뻔뻔스럽게 다른 여자랑 그런 짓은 못한다. 아무리 스킬을 위해서라지만, "참고로 이 스킬이 있어야 게임 정복이무지 수월해집니다." "........" "이게 없으면 힘들죠" "........" "무지요. 게임 정복의 필수 스킬입니다." 그때 옆에서 살살 입질하는 민호 군. 아, 안돼. 네놈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할 수 없다. 난 예진이만을..... "누님과의 뜨거운 사랑." "......." .........하지만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정말 눈 딱 감고, 100번 200번 300번 그녀에게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면서, 배우겠다. 일단, 키스를 하려 해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 참고로 고민스럽다. 참고로, 내 주변에는 엄청난 미소녀들이 포진되어 있다. 하지만 그냥 존재할 뿐이다. 특별히 애인 사이인 소녀는 없다. 그런 그녀들한테 가서 '나 스킬 배워야 하는데 키스 좀 해 줘'라고 하면? 따귀 맞는다. 아니, 영영 결별일 거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서 아무 여자나 붙잡고 '저 스킬배워야 하니 키스 좀 해줘요' 라고 하면 당장 치한으로 끌려가거나 미친놈이 될것이다. 아악! "왜 그러세요?" 그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그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곧, 내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이리스!" "네?" 그녀라면 나의 이런 고달픈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는다. 그녀도 디재스터라는 직업을 알고 있으니, 이런 내 고충을 충분히 들어 주고 이해해 줄 것이다. "아........" 나의 설명을 들은 이리스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소리다. 하지만 민호, 아니 백호가 그렇다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그때, 이리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키스를 하면......" "스킬을 배울 수 있다는 거지." "........." "남자든 여자든 아무 상관 없이 키스를....... 하지만 남자랑 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어" 난 장렬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남자랑 키스할 바에는 그냥 장렬하게 뒈져버리겠다. 그만큼, 죽어도 싫다. 그러면 여자는? 이것은 이것대로 참 곤란하다. 예진이를 놔두고 다른 여자랑? 하지만 예진과의 사랑을 위해서는 반드시 게임을 정복해야 했고, 그에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건 백호의 스킬. ........어쨌든 결론적으로 모두 예진이를 위한 거다. 나는 이리스를 향해 곤란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방법 없을까?" "........" "하아. 정말 스킬배우려고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단 말이냐.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충격적인 한마디가 내 귀를 점령한 건. "저, 저도 가능할까요?" ".......!" 아하아앙! 아, 아니 이게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잠깐이지만 몇 분 전, 이리스의 달콤한 입술..... 아악! 뭐 하자는 거냐! 나, 나에겐 예진이가 있어! 이건 옳지 않아!! 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방금 전 민호 앞에서 이리스와 입맞춤을 했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에 더욱 선명히 떠오른다. 아아악! 물론 그 대가로 밳호의 아주 특수한 스킬을 얻긴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난 도대체 뭐하는 놈이냔 말이다!" 지금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다. 민호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서 예진이 아닌 다른 여자와 입맞춤했다. 그리고 지금 무엇보다 혐오스러운 건, "크오옥!" 잊히지가 않는다는 것 그 감촉, 느낌, 이리스의 얼굴까지...... 그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 나는 소리쳤다. 제발! 제발...... 이건 아니야! 이글이글 한편 자학개그(?)를 하고 있는 재현을 누군가가 노려보고 있었다. 구워 먹어도 될 정도로 뜨거운 눈빛이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눈빛은 아주 쉽게 캡쳐해 내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초흥분 상태. 이런 뜨거운 시선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투신 벨리나크, 당신은 무슨 생각을......" "아포라 여신(5권참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굳이 인간들이 즐기는 그 세계를 없애 버리려는 걸까? 단지 신의 힘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그건 억지다. 세상에는 많은 신의 힘이 있다. 인간이 발휘할 수 없는 신기한 힘에는 대부분 신의 힘이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것조차도 없애 버리는 게 이치 하지만 투신 벨리나크는 다른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직 디재스터라는, 신의 힘이 개입된 저 게임만을 없애려고 한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4. 머신맨의 복수혈전 "예진아, 미안해!" "......" "아악! 난 나쁜 놈이야!" "......" 난 예진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난 정말 나쁜 놈이야! 흐아앙!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자신을 보더니 미안하다 외치고 뛰쳐나가는 재현의 행동이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그녀로서는 전혀 이해 할수 없는 일. 그런 예진에게 민호가 다가와 말했다. "비밀입니다." "........" 이상한 개소리나 하고 계셨다.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머신맨은 웃었다. 자신의 라이벌(언제?)인 재현이 녀석을 한 방에 보낼 비장의 무기가 완성되었다. 이 사진들이라면 재현이는 그대로 KO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 소녀들은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크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보내 버릴 수 있다. 재현을....... 그리고 자신은 인기 급상승, 재현은 말 그대로 다이다이. 이제부터는 자신의 전성시대다. "하아." 난 한숨을 내쉬었다. 아악! 예진이한테 미안해서 미칠 것 같다. 사실 전과(?) 있다. 민혜랑 에리아스한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엄연히 강제적(?)이었다. 민혜랑은 민호 녀석이 미는 바람에 하게 됐고 에리아스와는 스킬 후유증으로 미쳐서 한 거다. 하지만 이리스와는 엄연히 자유의지로 해 버렸다. 우어억! 아니, 그것보다........ 왜! 왜! 왜 계속 그게 떠오르냔 말이다! 제발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주세요! 그토록 애걸해 봤건만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각인되어 버린다. 흑흑흑. 정말 이건 아닌데, 정말 이건 아니야! "정말 실망이야." "우와,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저질이잖아." "쳇, 마음에 들었는데" "나 저 선배 좋아했는데, 후엥" "......." 그 순간이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내 귀에 갑자기 여자들이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분명 소곤거리는 것이겠지만 나는 워낙 귀가 좋아서 아주 정확히 다 들려온다. 그, 그런데 갑자기 무슨 소리지? 저질이란? 실망이라니? 서, 설마 이리스와의 일을 저분들이....... "이민호?" 그 자식이 설마? 분명 소곤거리는 말이었지만 내 귀에는 아주 확성기로 말한 듯 들려온다. 저, 정말 저거 나 아닌데? 저 여자들은 모르는 사람들이고! 여자들한테 저런 파렴치한 행동을 한 기억도 없단 말이다. 분명....... 그래, 합성..... "합성은 절대 아닙니다." "......" "네버 네버 네버 아니죠" "........." 합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범죄계의 신게서 절대 아니라고 한 이상 아닐 것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 나 진짜 아니야! 민호 넌 알지!" "전 압니다" "그, 그래. 넌 알잖아! 내가 저런 여자들 만난 적 없다는 거!" "그렇죠" 다행이다. 민호는 알고 계신다. 하지만 민호 님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하지만 제가 안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특히 저기 예진 누님 같은 경우는 더욱더 말이죠" ".......!" 민호의 말과 손짓에 나는 그대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그 파렴치한 사진들을 보고 그대로 석상이 되어 버린 나의 천사가 계셨다. 다음 순간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 "아악! 예진아!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난 소리쳤다. 절대 아니다. 내가 아니라고! 저런 짓을 한 적도, 저런 여자를 본 적도 없다고! "........" 마치...... 모든 게 끝난 듯한 느낌이다. 그 사진들의 합성 여부를 조사했단다. 하지만 역시나 민호님의 말대로 합성은 아니란다. 한마디로 실제로 찍힌 사진 그 말인즉, 저 사진에 찍힌 남자는 바로 나....... "........ 일 리가 없잖아!" 난 저런 짓 한 적 없다. 뭐 내가 이중인격이어서 또 다른 내가 저런 짓을 저질렀다고 가정할 수는 있겠지만 난 이중인격도 아니다. 오직 순백의 별(?) 같은 지금의 내 모습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어억!!" 예진이가 그걸 보았다. 길거리에서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고 가슴을 만지면서 키스까지 하는, 그런 파렴치한 사진 속의 나를.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의 여자한테 "끝났군요." "......" "이걸로 모든 게 끝?" "부, 불길한 소리 하지마, 이자식아!" 소리 없이 등 뒤에 나타나 불길한 소리를 해 대는 민호를 향해 나는 빽 소리쳤다. 민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교생에게 소문이 났습니다." "......" "형님은 상큼하다고요." "........" "상큼하다....... 민호의 표현이 상큼하다는 말은 재해석하자면 인간말종이라는 거겠군. 아아악!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도대체 어떻게......? "저 사진 속 남자는 형님을 닮은 사람을 캐스팅해서 분장을 하고, 절묘한 엇각 조작으로 촬영하여 완성한 것 같습니다. "뭐?" 난 그 말에 민호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누가 나와 닮은 사람을 캐스팅해서 분장시키고 사진을 조작했을까.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형님을 증오하는 한 남자 분의 행동이라고 여겨집니다." "........" "한마디로, 형님을 보내 버리려고 작정한 거죠." "......" "예를 들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던 소녀떼를 돌려받기 위해서?" "......!" 난 민호의 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소녀떼? 이 학교에서 소녀떼 타령하는 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밖에 안 떠오른다. 그리고 만날 내가 저한테서 소녀 떼를 빼앗아 갔다며 증오하시는 그분. 설마..... 그래도 선생인데. "그렇게 하고도 남는 분이죠" "......." "진짜 이럴 거예요!" 난 당장 교무실로 쳐들어갔다. 목적은 머신맨과의 만남 이런 내 방문에 머신맨은 능글능글한 얼굴로 되물었다. "뭔 소리지?" "그 사진들.........!" "아, 나도 봤어, 재현 군. 짐승이더군." "그, 그거 선생님이 조작한 거잖아요!" "조작? 그거 합성 아니라고 판정 나왔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후훗." "........." 그러면서 딴청을 피운다. 아아악! 저, 저 머신맨! 우어억!! 그 순간이었다, 머신맨의 한마디가 나를 다운시킨 건. "증거를 가져오든가." "......." "없으면 무관한 사람 잡지 말고 어서 가서 여자들에게 더욱더 파렴치한 행동을 하렴, 짐승 재현 군. 크크크." 그러면서 웃는다. 우어억! 이 머신맨! 범인은 밝혀졌다. 확실하다. 머신맨이라는 것이. 하지만 머신맨이 저 사진을 찍었다는 증거는 없다. 으아악! 지금 무엇보다 비상인 건. "예진이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날 짐승보다 못한 남자로. 다른 여자들한테는 오해를 사도 괜찮다. 저것보다 더한 오해를 받는다 해도 괜찮다. 하지만 예진이한테만큼은 죽어도 저런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미......... "민호 말대로 끝난 건가?" 진실을 파헤치면 될 거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건 완전범죄다. 머신맨은 나를 완전히 보내기 위해 너무나도 철저한 준비를 하셨다. 합성도 아니고 나랑 닮은 사람들 데려와 교묘하게 분장시킨 뒤 완전범죄를 꾀하셨다. "머신맨!" 난 절규했다. 머신맨의 대한 분노를 담아서 한껏 소리쳤다. 물론 그렇다고 이 분노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지만, 아니, 그것보다............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 주저앉으면 난 저 사진의 인물이 되고 만다. 그리고 예진과의 아름다운 사랑은 그대로 무너지고 만다. 내가 게임 정복을 해 봤자 말이다. 하지만 방법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저......." "....." "괜찮......아?" 그때였다. 누군가가 나를 걱정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난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천사 같은목소리가 나를 부를 확률은 0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믿어" "....." "재현이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걸." "예, 예진아......" 그렇다. 지금 내게 말을 건넨 그분은 나의 사랑 나의 천사 예진님이시다. 그녀가 싱긋 웃으면서 내게 말하고 계신다. 나는 믿는다고....... 누구나 나를 짐승이라 손가락질하지만 그녀는 나를 믿는다고 하신다. 아악! 눈물 나와! 덥석, "재, 재현아." "고마워!" 나는 나도 모르게 예진이를 격하게 끌어안아 버렸다. 사실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너무나도 고마워서 그랬다고 미리 말해 둔다. 좀 믿어 주라. 믿어 주세요. 제발 믿어주세요. ........ 믿기 싫으면 말고요. 쳇 두근두근. 한편, 갑작스러운재현의 포옹에 예진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나자랑 안아 본 건 난생처음,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랑 말이다. ".....미, 미안." "아, 아니......" 난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상당히 미묘하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사과했다.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100프로 순백같은 마음으로, 정말 그런 마음으로, 너무나도 그런 마음으로, 순수 100프로 생과일주스 같은 마음으로(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고 있다) 안아 버린 상황을 인식해 버렸다고나 할까. 그렇게 다시 떨어진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얼굴이 조금 빨개진 채, 예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어떻게 할 거야?" "응?" "재현이가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건 밝혀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예진의 말대로 내가 저런 짐승보다 못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밝혀야 한다. 사실 예진이가 믿어 준다는 말이 그 무엇보다 기분 좋지만 그래도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밝힌다? "........" "........"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둘 다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길, 이럴 때 외계 생물체라도 있었으면........ "모든 건 끝났습니다" ".......!" ".......!" 그때 나타나 뜬금없이 한마디 하는 민호군. 뭐가? 웅성웅성. 학생들은 난리였다. 왜 그런고 하니, 밧줄에 묶인 수십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 때문이다. 지금이 어느 땐데, 저분들이 저렇게 공개적으로 밧줄에 묶여 있는 걸까? 그리고 왜 우리학교 운동장에 있는 거지? "납치했습니다." "........" 민호의 당당한 한마디가 들려온다. 그들이 여기에서 밧줄에 묶여 있는 건 다름아닌 우리 민호사마가 납치를 했기 때문이다. 납치....... 아무런 동의 없이 상대방을 강제로 데려가는 행위. 한마디로 범죄행위다. 그런데도 저렇듯 당당하게 납치라고 말씀하신다. 아니, 그것보다........ "용하다, 용해" 지금 납치된 분들을 보자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어떻게 정말 그 단시간에, 위조된 사진에 나온 여자들을 납치해 온 거냐? 게다가 가장 중요한 인물인, 나를 닮은 남자까지 말이다. 그때,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저, 저 사람들, 사진에 있는?" "저 남자, 재현이가 아니야!" "어라? 재현이가......" "잠깐!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학생들이 마구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런 학생들의 반응에 민호는 어디선가 확성기를 하나 꺼내 들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그건 위조였습니다." "위조?" "무슨 말이야?" "갑자기 위조라니?" "뭔 말이야?" 민호의 한마디에 엄청나게 당황하는 학생들.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형님을 증오해서 형님을 짐승보다 못한 남자로 만들기 위해 조작한 일이라는 거죠." "......." "......." "......." "......." 조용했다. 완전한 침묵이라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는 고요함이었다. 민호가, 나와 거의 흡사하게 생긴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이곳에 오기 전 민호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그가 다가갈수록 공포에 질려 가는 남자. 민호가 남자에게 사진을 내밀면서 확성기를 통해 물었다. "여기 찍힌 건 누구죠?" "저, 접니다!" "......." "......." "......." "......." "......." 너무나도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 말에 학생들은 더욱 혼란해 했다. 하지만 민호 군의 취조(?)는 끝나지 않았다. "당신을 고용한 남자는?" "이 학교에서 머신맨이라고 불리는 선생님입니다!" 대답도 즉시 나온다. 그 말에 학생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머, 머신맨?" "뭐야!" "그럼 머신맨이........?" "재현이한테 악감정을 품고 재현이 보내 버리려고 그런거야?" "그런 것 같은데? 우와, 정말." "완전히......."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뭐, 굳이 그 남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이다. "이, 이건 작당하고 나를 보내려는 악마 재현이와 민호의 합작품이야!" "......." "......." "......." "......." "이, 이 나쁜 놈들. 나같이 순수한 선생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되는 거야!" 본인이 순수하다면서 노발대발하신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 듯하다. 왜냐고? 이미 나를 닮은 그 남자의 증언이 끝났으니까. 머신맨의 다급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난 결백해!" 머신맨은 1개월 징계를 받았다. 한마디로 1개월 쉬러 가셨다고 해야 하나? 이걸로 봐서 역시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물론, 민호라는 외계 생물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지만,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곤란한 건, "오빠, 사랑해요." "오빠!" "재현아!" "꺄아악!!" 그 덕에 유명해져서 수많은 여자 분들이 나를 찾아오신다는 거다. 순식간에 민호만큼이나 초유명인사가 되어 버렸다고 해야 하나? 뭐 그나저나 이번 일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그 누구도 나를 믿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오직 홀로 나를 믿어 준 예진이에 대한 사랑이 더욱더 깊어졌다는 것, 거의 미치도록 그녀가 좋다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게임을 정복해서 그녀의 사랑을 쟁취하고 싶다고, 새삼 다짐했다. 5. 수리 중단 "난 이번 일 관두겠어." "가, 갑자기 왜 그래요?" "왜 그래애? 그건 자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 난 갑자기 공사를 중지한다는 제르탄의 말에 너무나도 당황했다. 잘 수리하시다가 뜬금없이 중지하겠다니! 그에 의문을 표하자 살벌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면서 그렇게 되물었다. 아니, 도대체 내가 뭘 안다는 거지? 응?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답이 충분히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말과 함께 더욱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신다. 아악! 저 눈빛, 너무 뜨거워. 아니, 이게 아니라....... 난 제르틴의 말대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순백의 별?" "......." 뭐, 뭐냐? 나의 이 한마디에 어디선가 마구 몰려드는 살기는. 출처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의미는 알겠다. 개소리 작작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정말 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봤지만 순백의 별이라는 말밖에 안 떠오른단 말이다. 한편 그런 나의 말에 제르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잠시 격한 어조로 말하였다. "어떻게 이리스 님과 키스를 하고도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지!" "......." "정말 어이가 없군!" 그러더니 씩씩 숨을 내쉬면서 당장 어디론가 가 버린다. 난 이제야 깨달았다. 저분이 저렇게 흥분한 이유를 요새 좀 잊을 만하니 다시 친절하게 각인시켜 준다. 너무 고마워서 마구 눈물이 난다. 아니, 그거야 어쨋든........ ".......본 건가?" 이리스와의 그 장면을 본 거란 말인가! 다시 말해,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걸 봤다는 것이다. 제르탄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 만약 예진이가 다른 남자와 키스를 했다면? 난 완전히 미쳐서 해롱해롱했을 게 분명하다. 이건 확실하다. 아,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다. 그때 너무나도 정신이 없어서 크으윽!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어요." "......." "정말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정말 죄송해요." 난 진심을 담아 제르탄에게 사과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제르탄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르탄은 아무 말도 없다. 어, 엄청난 충격이었나 봐. 아니,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아. 크어억! 난 왜 그런 짓을, 예진이한테도 미안하고 제르탄에게도 미안한 짓을 해버린 걸까? 이게 다 민호의 사탕발림이라고 우기고 싶다만, 어쨋든 내가 했다는 게 중요하지. "저, 제르탄" "......." "그건 정말 오해고요" "......." "제, 제가 어떻게 해 드려야 할까요? 네?" "......."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꾸가 없다. 아, 이건 아닌데. 정말 아닌데. 하지만 그 순간, 나는 하늘이 아직 날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고? 갑작스럽게 굿 아이디어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니까. "제가 이리스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봐 줄까요?" 그렇다.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선 상대방이 좋아하는 행동을 하는 게 당연지사. 하지만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ㄹ 알기가 쉽지는 않다. 때문에 내가 친히 나서서 알아봐 준다는 것이다. 내 말에, 제르탄은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연다. "침대에서?" "뭐 침대에서든 어디에서든......이 아니라, 그런 관계 아니에요!" "......." "저, 정말이에요!" 순간 긍정할 뻔했다. 침대에서라니 저분, 얼마나 위험한 상상을 하신건가. 거듭 말하지만 이리스랑 난 그런 미묘한 사이가 아니라고! 난 진심으로 재차 소리쳤다. "전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고요!" "흥.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이리스 님과 키스를 한 건가?" "......." "참, 짐승보다 못하군." "......." 그러고 보니, 오히려 내 무덤을 판 느낌이 든다. 제르탄 말대로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이리스랑 키스를 하다니, 아무리 민호의 입질에 넘어가서라지만 엄연히 한 건 사실이니까 물론 다시는 그런 입질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미 과거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엄청난 불륜을 저지른 느낌이........ "저, 정말 그건 오해예요! 제가 이리스에게 호감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알아 올게요!" "......." "그러니! 오해 푸세요!" "......." 그 말에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제르탄.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 "제가 이리스와의 호감도를 급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 오죠!" 내가 이리스의 정보를 가져다주는 조건으로 다시 공사에 들어간다. 물론 알아 온 이후에야 시작한단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리스가 좋아할 만한 것을 알아야 한다. 한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어떻게 아냐는 거지." 제르탄에게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속직히 말해서 이리스한테 뭘 좋아햐나고, 무엇에 관심이 있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기가 상당히 어색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에휴우. "전 알고있습니다." ".......!" 그 순간 들려오는 한마디. 난 황급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리스가 좋아하는 것 알아?" "좋아하는 건 모르죠" "......." 네가 방금 전에 안다며! 이 자식이! 지금 나 놀리는 거야, 뭐야? 그 순간 민호가 담담하게 마을 이었다. 아주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건 알죠." "허억! 조, 좋아하는 남자?" "네." "서, 설마 제르탄?" "죽어도 아니죠" "......." 거참, 제르탄이 들으면 눈물 흘릴 소리군. 굳이 '죽어도'를 붙여야 겠냐,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본인이 직접 들었으면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냐. 저 녀석은 남 충격 주는 게 취미인 가학적 변태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도대체 어떤남자가 이리스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거냐?" 그 청초 미소녀님의 마음을 뺏다니, 누군지 몰라도 참으로 능력도 좋다. 그리고 왠지 제르탄이 가엽기도 하다. 이런 내 질문에 민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왜, 왜그런 눈빛으로 날 봐?" "그냥요" "......." "그것보다, 정말 궁금한가요?" "뭐가?" "이리스 님이 좋아하는 남자 말이죠." "당연하지." 나도 그런 쪽에는 궁금증이 많아서 말이다. 물론 대충 짐작은 간다. 그 이리스 부대(?) 중 한명이겠지. 이런 내말에 민호는 또다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또 빤히 말이다. "뭐야! 왜 계속 그런 야리꾸리한 눈빛으로 보냐!" "존경스러워서요." "......." 갑자기 존경스럽다니, 제발 약간이라도 이해가 되게 말해달라고! 그 순간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이리스 님이 좋아하는 남자는......." ".......남자는?"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런 청순 미소녀가 사랑을 받는 남자가 왠지 모르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때 민호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비밀입니다." "에라이!" 녀석은 끝내 불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의 대화만으로도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난 제르탄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후보들(이리스 친위대)를 대충 나열해 주었다. 그러자 제르탄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무리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르지." "......." "난 드워프, 이리스 님은 드래곤" "......."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군" 그 말에 왠지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래! 포기는 옳지 않아요! 사랑을 쟁취하세요! 그 좋아하는 남자를 무찌르는 겁니다! "마스터......" "......." 베리킨이 자신의 마스터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하지만 그 말에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한편 그런 자신의 마스터의 모습을 본 베리킨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저희 전력을 30프로 이상을 잃게 됩니다." "......." "조금만 더 신중히......" "결정했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그들을 잘 안다. 마치 핵폭탄 같은 존재들이 그놈들이다. 핵폭탄이 터져버리는 순간, 이미 우리의 패배다. 그러니 그전에 처리해야 한다. 베리킨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상식을 깨는 행동을 자주 했다. 그리고 그 점에서는 자신도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게 사실. 하지만 자신의 마스터는 그들을 핵폭탄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다. 도대체 그들의 존재와 자신의 마스터의 관계가 슬그머니 궁금해지는 베리킨이었다. 그 순간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마스터, 한가지......" "뭐지?" "그들 중 주작이라는 4대 신이 있다고 합니다." "그 주작이라는 4대 신은 그 어떤 존재든 소멸해 버리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아니, 그렇게 쉽게 볼 문제는........." "걱정 마라, 그는 소멸하지 않는다. 그 존재를 얕보지 마라." "......." "그렇죠, 저를 얕보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한마디가 들려온 건. 베리킨은 아무 기척도 없이 자신들의 곁에 나타난 그 남자를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스터가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대충이나마 알고 잇었지만 상세하게는 알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한 남자. 너무나도 놀라웠다. 바로 그 존재였다. 목소리조차도, 그 특유의 톤도 똑같다. 아니 당연한 것일지도. 그의 모습은 민호 그 자체였던 것이다. 6. 이색 댄스 경연대회 "아." 난 탄성을 질렀다. 왜냐고? 심심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 할 게 아무것도 없다.'4대 신은 어이없게도 다 찾아버린 상태고, 그뿐 아니라 공사는 열심히 진행 중이다. 남은 거라면 그저 3대 현자를 찾아 나의 힘을 모두 마스터 하는 것이지만 지난번 야설 사건 이후 아직도 아예 진전이 없다. 말 그대로 스톱이라는 거지. 에휴우. 그 순간이었다. "후아! 후아!" "......." "하아! 하아!" "......." 누군가의 이상한 비음이 들려온다. 그리고 내눈에 들어온 진귀한 장면 민호 사마가 계셧다. 하지만 그냥 계신 건 아니다. 두다리를 쩍 벌린 채 양손도 벌리고 계신다. 그리고 마구 앞뒤로 흔들고 계신다. 마치 저질의 극치를 보는 느낌? 난 황당하다는 듯 민호에게 물었다. "뭐 하냐?" "춤춥니다" "......." "같이 하시죠" "내가 미쳤냐?"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춤을 나보고 추라고?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저런 근원도 알 수 없는 춤을 추겠냐? "이게 2007년 전국을 강타한 노홍철이라는 성자님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저질 댄스라는 겁니다." "......." "모든 남녀(......)가 추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춤을?" "네." "......." 그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 2140년. 2007년이라면 약 133년 전의 이야기라는 거다. 거슬러 올라가도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아득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2007년에 이 춤이 전국을 강타?" "그렇습니다. 남녀 모두 말이죠" 남녀 모두? .......남자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여자가? 보기만 해도 엄청 저질이라는 생각이 드는 저 춤을 췄다고? 정말? 정말? 진짜 여자가? "여자들이 프로포즈하기 위해 남자 앞에서 저 춤을 췄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라지?" "진담이죠" "......." "제가 언제 구라 치는 거 봤습니까?" "많이 봤지" 너무 많이 봐서 나열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민호 군은 웃으면서 말했다. "진실입니다." "......." "저를 믿어 주십시오" 솔직히 말하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100년 전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진짜 만약 저 저질 댄스인가가 여자가 남자에게 프러포즈할 때 사용됐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저런 걸 여자가....... "그거랑, 지금 네가 이 춤을 추는 이유의 관계는?" "이번에 개최한다더군요." ".......?" "이색 춤 대회 말입니다." "......."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려 있다죠" "상.......금?" "네. 상금 말입니다." "......." 난 회의를 느꼈다. 내가 왜 이짓을 이짓을 하고 있는 거냐! "좀 더 정열적으로 자신감 있게." "아니, 이 춤을 어떻게....... 자신감 있게 추라는 거냐?" 그렇다. 도대체 이 저질 댄스인가 뭔가 하는 걸 어떻게 자신감 있게 추라고! 그리고 여자들이 남자들한테 프러포즈할 때 추었다는 말, 진짜인 거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다. "형님." "왜?" "1등 하고 싶지 않습니까?" "......." "상금이 2억입니다." "......." "그만큼 많은 라이벌이 등장할 거고요. 그렇기에 평범한 걸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춤은 필수죠." 그 말은 인정한다. 수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독창적인 게 먹히는 건 사실. 하지만 말이다. 이건 너무 독창적이다. 양발과 양손을 벌리고 앞뒤로 흔드는데. 정말 민망하다.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나....... 이거 해야 해?" "당연하지요" "......." "저 혼자 나가면 승리 확률이 줄어들거든요." "......." "이런 건 단체로 해 줘야 제 맛입니다."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이 춤 이름이 저질 댄스라는 데, 정말 연습하면 할수록 내가 저질이 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인생에 회의까지 들 정도다. "둘이...... 뭐 하는 거야?" "헉!" 그때였다. 난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경악에 휩싸인 민혜가 우리를 보고 있다. 커억! 너무 연습에 몰두하다 보니 기척도...... 아니, 이런 것보다.... ".......봤어?" "......." "봤구나" "......." 저 경악 어린 얼굴만으로도 대충 대답이 된다. 얼마나 놀랐는지 말 그대로 석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난 그런 민혜에게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여기에는 지극히 중대한 이유가 있어." "......." 하지만 이런 나의 차분한 설명에도 그녀는 여전히 굳어 있다. 알고 있다. 방금 전까지 민호 자식과 듀엣으로, 보기만 해도 즈질(?)이라는 말이 막 떠오르는 춤을 추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난 다시 그녀에게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일단 설명해 줄게." "......." "그러니까 이색 댄스 경연대회라는 델 나가기 위해 연습중이었거든" "이색....... 댄스 경연대회?" "응!" 여태까지 굳어 있던 민혜가 한마디 입을 열자 난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민혜는 입을 열었지만 여전히 석상 모드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이 춤을 춘다고? 그, 그 이색 댄스 경연대회인가 뭔가에서?" "무, 물론 좀(?) 이상해 보이기는 한데, 이게 100년 전쯤 엄청 대히트였대" "이런 춤이?" "그, 그래. 그뿐 아니라 여자가 남자한테 프러포즈하기 위해 춘 춤이라던걸." "......." 그 말에 민혜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 그, 그런 귀여운 얼굴로 나를 보면 난........ 아이잉. .......자중할게요 "왜 그래?" "......." "저, 저기......" 계속해서 나를 빤히 쳐다보신다. 농담 안하고 진짜 부담된다. 저런 미소녀의 시선은. 그 순간이었다. 민혜의 입이 다시 열렸다. "누구한테 들었는데?" "그야 민호라는 변종 생물체에게........." 빤히. "......." 그 말에 나를 또 쳐다본다. 아아악! 민혜야, 정말 부담된다니까. 네 얼굴은 남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살상무기야!(너무 예뻐서) 날 죽이지 말아 줘. 그때였다. 민혜가 한심하다는 어조로 내게 말한 건. "그걸 믿어?" "......." "민호 오빠 말을 믿어?" "아니, 그, 글쎄?" "말도 안되잖아. 어떻게 여자가 그런 춤을 춰! 아니, 그것도 여자가 프러포즈할 때 보기만 해도........ 이런 춤을 출 리가 없잖아." "......." "거짓말이라고!" "......." 그 말에 난 당장, 열심히 저질 댄스를 추고 계신 민호를 노려보았다. "너 이 자식! 구라 쳤어?" "진실입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가했지만, 어떻게 이걸 여자가 춰?! 그것도 프러포즈용으로!" "100년 전에는 그랬다고 전해지죠" "민호 오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때 민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 그말에 민호는 싱긋 웃으면서 되물었다. "뭐가 말이 안된다는 거죠?" "거짓말이야. 그 춤을 어떻게 여자가...... 그것도 프러포즈용으로" "추었습니다. "......." "그럼 한가지만 묻죠. 민혜 양은 이 춤을 추지 않았다는 증거를 갖고 있나요?" "......." 민호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민혜 그녀는 잠시 버벅거리다가 약간 줄어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식적으로......." "민혜 양은 100년 전 상식을 이해할 수 있나요?" "......." "100년 전에는 이런 춤도 프러포즈용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고는 생각을 안 하시나요?" "......." "세상에는 비상식적인 일도 충분히 있습니다. 실제로 보지 않은 이상 무조건 단정 지으면 안 되는 겁니다." "......." 민호의 알 수 없는 논리에 여전히 말문이 막힌 민혜 저 자식, 정말 말 잘한다. 늘 생각해던 건데, 저 녀석 사기꾼이나 약장수 했으면 역사에 길이 남을 것 같다. 그것도 영원히. 어찌 됐든 믿어 주기로 했다. 뭐 여전히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민호 말대로 100년 전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무리니까.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10년 전 사람들이좀 많이 힘들었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하아. "텔미 텔미 테테테테텔미!" 그 순간, 갑자기 텔미 타령하시는 민호 사마. 거기에는 민호 님이 이상한 복장을 한 채, 소녀들이나 출 법한 약간 독특한 춤을 추고 계신다. 난 민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뭐냐?" 그런 내 물음에 민호는 여전히 춤을 추면서 답했다. "옛날에 남성(?) 5인조 그룹 변태 걸스라는 분들이 대히트 치신 텔미 댄스입니다." "텔미 댄스? 아니, 그것보다 그 여성틱한 춤을 남성 그룹이 췄다고?" "네, 그렇죠." "......." 저질댄스인가 뭔가 하는 것도 너무 충격적인데, 저런 소녀틱한 춤이 남성 5인조 그룹의 춤이라니 상상하는 것마능로도 오한이 든다. 우어억! "그건 또 왜.....?" "아무래도 이색적인 댄스 경연대회잖습니까." "그렇지." "잘 생각해 보니 노홍철 성자님의 저질댄스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더군요" "......." "그래서 5인조 남성 그룹 텔미 댄스와 저질 댄스를 믹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 소녀틱한 춤과 그 저질댄스를 믹스한다고? 자, 잠깐. 상상이 안간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못 볼 것 같아." 그 텔미 댄스인가 하고 저질 댄스를 조합하면? 진짜 인간이 볼수 잇는 춤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형님도 같이 하시죠." "나도?" "2억" "......." 난 하고 있다. 이 거대한 무대 위에서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물론 이리스의 도움으로 폴리모프 한 상태. 하지만....... 하지만........ "형님, 저질 댄스 타임입니다." "......." 그래, 솔직히 말해 텔미 댄스까지는 좋다. 하지만 이 수많은 관중 앞에서 그 저질 댄스를 춰야 하는 거냐고! 앙? "2억" "......." 난 그 말에 다리와 양손을 쫙 벌렸다. 그리고 흔들었다. 민호의 말에 의하면 성자 노홍철 님이라는 분이 만든 저질댄스였다. 민호의 한마디가 이어졌다. "비음도 내 주십시오" "......." "2억" "아이잉." "신음도요" "......." "2억" "하아, 하아." "......." 우승은 했다. 그리고 2억도 챙겼다. 말 그대로 이색 댄스 경연대회였은까. 이만큼 이색적인 건 없었을 테다. 물론 사람들이 저질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고개를 돌릴만큼 민망해도 우리는 끝까지 췄다. 그 결과물이 이 우승 트로피와 상금 2억 원. 하지만..... ".......나 자신이 혐오스럽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단지 돈 때문에 약 20분간이나 그런 춤을 춘 내가 혐오스럽다. 몇분도 아니고 20분이다. 그뿐 아니라 중간중간에 비음과 신음까지...... "아아악!" 이건 아니야!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더라도 그건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야! 20분이나 그, 그 저질댄스를........! "괜찮아?" "......." 그런 나에게 민혜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그런 민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잊어 줘!" 라고 외치면서 뛰쳐나갔다. 민혜야, 조금 전 내 모습을 잊어 줘, 부탁이야, 흐흐흑. 잊어줘! "......." 민혜는 뛰쳐나가는 재현을 보고 깨달았다. 정말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물론 이해는 간다. 그런 이상한 춤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몇분도 아니고 20분이나 췄으니 말이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민혜 양, 기회입니다." "......." 그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민혜에게 속삭이는 민호 그는 의아해 하는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 "지금이 기회입니다." 그 말에 민혜는 황당하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기, 오빠" "네" "내가 재현 오빠랑 영원히 결별하기를 바라는 거야?" "아뇨." "아닌데, 그 이상한 춤을 재현 오빠 앞에서 추라고?" "효과 만점이죠" "......." "뭐 못 믿으시겠으면 제가 직접 보여 드리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엄청나게 경쾌한 뺨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보통 소리가 아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뺨 때리는 소리다.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공은 고개가 휙 돌아간 채였다. 그 모습을 본 민혜가 당황해 물었다. "괘, 괜찮아?" "흐으음." 민호는 다시 원래대로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 부족하군요" "......." 민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직접 보여준다며 자신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갑자기 지나가던 여자를 붙잡고 양손과 양발을 벌려 저질댄스르르 추셨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이미 예측한 것처럼, 여자는 거의 핵폭탄 급의 싸대기를 날렸다. 그런 민호를 본 민혜는 생각했다. 역시 보통 이상한 인간이 아니었다고. 재현이 민호를 두고 외계에서 온 생물체라고, 조심하라고 말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은 민혜였다. 7. 정령 "이게 뭐야!" "낚인 거죠" "아이 씨!" 난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분명 10억짜리 일이라고 해서 민호 녀석과 열나게 뛰었는데 막상 와 보니 말 그대로 낚인 거다. 누군가가 구라를 쳤다는 것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 봐 열나게 달려온 나로서는 순식간에 허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제길, 기분 잡쳤어, 성에 가서 쉬어야겠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민호가 대꾸했다. "뭘 새삼스럽게." "......." "거의 성에서 놀지 않습니까? "닥쳐, 누군 놀고 싶어서 노는 줄 알아? 할 일이 없잔아!" "만드라고라 장사를 다시 하는 건?" "네가 구해 올 거니?" "한두 개 정도는요." "그런데 어떻게 장사를 하니? 한두 개로?" "물론 한두 개로도 할 수 있습니다. 일명 물에 술타기라고 진품에다가 가짜를 섞는 방법으로........" 나는 귀를 막아버렸다. 어차피 들어 봤자 또 범죄학이다. 안 들어도 뻔하다. "......." 머엉. 난 한동안 그 자리에서 입을 쫙 벌린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민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여기 우리 성 있던 곳 아니니?" "잇었던 곳 맞죠" "근데 왜 없니?" "글쎄요" "......." "분명 저희가 떠나 오기 전만 해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건 나도 확실하게 기억하는데, 갑자기 성이 어디로 간거니?" "증발되었을까요?" "저질 농담은 즐이다." 성이 물도 아니고 뭔 증발이냐. 나랑 민호 둘 다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걸 확실히 기어한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민호까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근데 어디로 갔니? 참고로 리아는 내 말이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하다. 민호가 그렇게 설계했으니까. 그러니 실질적으로 움직이게 했을 리는 없다. 근데 성이 사라졌다. 뭐냐? "헉!" "왜 그래?" 그때 갑자기 민호가 놀란 듯 숨을 들이켜자 나는 황급히 물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죠" "뭐, 뭔 소리냐?" "아닙니다. 아닐 겁니다." "......." 뭐, 뭐야? 저 자식.....! 분명 무언가 알고 있다. 하지만 말을 못하고 있다. 도대체 뭐지? 난 민호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뭔데?" "제 착각입니다." "착각이든 아니든, 말해 봐!" "정말요?" "그, 그래" 꿀꺽. 그 말에 너무나도 긴장돼서 침이 마구 넘어간다. 그 순간 민호가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요." "......." 글.......쎄요? 난 잠시 민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곧 민호 사마의 설명이 이어졌다. 녀석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산뜻한 대사를 쳐 줘야 하거든요." "......." "뭔가 긴박한 느낌........" 퍼억! 민호, 그대로 다운. 제길. 내가 저 자식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니. 나름대로 다급한 이 상황에서도 저런 저질스런 농담을 할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아니, 예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생명체야. 그런데...... "진짜 어디 간겨?" 사라진 성 성이 어디로 갔을까? 민호와 나, 둘 다 장소를 착각한 걸까? 파지짓.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차원의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나는 오한을 느꼈다. 무섭다. 무섭다. 무서워! 막연한 공포와 함께, 듣는 것만으로도 청아한 목소리가 내게 들려온다. ".......결혼해." "......." "결혼해" 한동안 일이 바빠 오지 않앗던 결혼해 귀신....... 이 아니라 사신 레에니 양이 등장하셨다. 너무 공포스럽다. 물론 저런 미녀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주제에 배부른 소리하낟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말이다, 난 분명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저분은 무작정 결혼하잔다. 모든 걸 생략하고 그냥 결혼이다. "결혼해" "하하." 난 레에니의 차가운 한 마디에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정말 무서워.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난 다급한 어조로 레에니를 불렀다. "레에니!" "결혼할 거야?" "아, 아니, 갑자기 얘기가......." 난 뭔가 물어보려고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순식간에 결혼이야기로 넘어가는 그녀, 정말 집념 하나는 엄청나다. 어쨋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게 아니고, 한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 "너 여기 올 때 어떻게 와?" "당연히 좌표를 계산해서 오는데" "그래?" "응." 레에니는 분명 좌표를 계산해서 온다고 했다. 그녀가 지금 좌표를 계산해서 성에 온 거라면, 민호와 내가 성의 위치를 착각했을 리 없다는 것. 우리 둘 다 방향을 잃어서 실수를 했다고 치자. 하지만 좌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곳에는 분명 우리의 성이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그 성이 지금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형님" ".......?" 그때 민호가 정말정말 흔치 않은 표정으로, 즉 굳어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난 저녀석이 저런 얼굴을 할때마다 무섭다. 무슨 얘기가 나올지 정말 불안하다. 그리고 잠시 후, 민호의 경악스러운 한마디가 들려왔다. "리아 양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습니다" "......!" 재현과 민호가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며 나간지 약 10분이 흐른 후였다. "어라? 주인님, 일 다 보셨어요?" 리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분명 10분 전 민호와 함께 대박을 물었다고 신이 나서 나간 자신의 주인 재현이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단시간에 끝날 일은 아닌 듯했는데 너무나도 빨리 돌아왔다고 해야 할까? 한편 그 순간, 재현은 웃었다. 그리곤 곧, 파지짓! "......!" 리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앞에 또 다른 그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든 게 똑같았다. 컴퓨터인 그녀가 분석을 못할 리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재현에서 리아로 변신한 그 존재가 말했다. "지금부터 이 성은 제가 점령하죠" "무슨 소리! 제가 그렇게 놔둘 것 같아요?" "후훗"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파짓! "꺄아악! 무, 무슨짓을......?" "잠들어 있어요. 잠깐 동안 말이에요. 뭐 영원히 잠재워 두는 건 일단 이용할 건 이용한 다음이겠죠." "다, 당신, 정체......" 하지만 리아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사라졌기 대문이다. 리아의 모습으 하고 있는 그 존재가 순식간에 리아 대신 재현의 성을 차지한 거다. "무슨 일이야?" "리아, 왜 그래?" 리아의 비명에, 성에 있는 일행 모두가 몰려왔다. 그 모습을 본 가짜 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혹시 모르니 인질이 되어 줘야 할 것 같아요." "......!" "......!" "......!" 어이가 없다. 갑자기 사라진 성, 그리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리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톱니바퀴가 어긋난 느낌이 든다. 도대체 지금 이 상황을 누구랑 상의해야 되지?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레에니와 민호뿐이다. 그래, 지금 이 상황에서 그나마 손을 빌릴 수 있는 놈은 저 외계 생물체뿐이다(레에니는 잘 모르니까). 솔직히 말해 영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지금 일어난 상황에 대해 함께 고민할 존재는 민호뿐이다.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민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마자 난 굳어야 했다. 잠시 후, 눈을 마구 비빈 뒤 폴짝폴짝 뛰며 도리질까지 했다. 그런 후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민호가 두 마리네?" 민호가 두마리다. 분명 몇 분전까지만 해도 한마리(?) 였던 민호가 두 마리로 증식했다. 설마 민호 자식, 이제는 증식까지 하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민호와 똑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가득 찬다면? 세상에는 종말이 도래할 것이다. ....... 잠시 개소리 해 봤다. 그만큼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워 말이다. "......." "형님, 제가 진짜입니다" "형님, 제가 진짜입니다" "......." 두 마리의 민호가 양옆에 서서, 말투, 행동, 목소리 톤 등 미묘한 그 무언가까지도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내게 말한다. 지가 진짜라고. 다음 순간, 또다시 민호 두마리의 말이 들려왔다. "저를 느끼십시오" "저를 느끼십시오" "......." "제 모든 걸 말입니다!" "제 모든 걸 말입니다!" "......." 아니, 저런 미친 소리까지 똑같다. 진짜 너무 똑같다. 그리고 웬만한 사람이라면 보통 이런 장면에선 마구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스토리 전개상 대위기! 하지만 난 고민하지 않는다. 절대 고민하지 않아! 파앗! 다음 순간, 나는 오른쪽에 있는 민호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윈드 플레어!" 콰앙! 바람의 힘을 이용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엄청난 힘을 담은 만큼 직격당한 이상 무사하기는 글렀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적중했다. "어, 어떻게......?" 오른쪽 민호의 목소리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역시 저놈이 짜가였군. 경악에 가득 찬 짜가 민호의 말에 진짜 민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끈끈한 무언가로 이어져 있거든요." "즐" "......?" "그런 게 어딨냐?" "하지만 형님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구별해 내셨습니다. 그건 제 마음을 느껴서가 아닙니까?" 민호의 물음에 난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닌데." "......." "그냥 해 봤어." "......." "그냥 믿었어. 너의 끈질긴 생명력을." 그렇다. 난 무작정 믿었다. 민호 님의 끈질긴 생명력을 말이다. 만약 내가 선택한 민호가 진짜였다고 해도 살아남을 거라고. 그런 내 말에 민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저거 직격당하면 아무리 저라도 죽을 것 같은데요?" "안 죽어." "보기만 해도 딱 죽을 것 같던데요?" "난 너를 믿어" "저를 믿기에는 저 수십미터나 파인 구덩이가 너무 무섭습니다." "사소한(?) 건 넘어가자" "......." 그래, 사소한 건 넘어가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 앞에 이쓴 가짜 민호의 존재가 중요하다. 저 자식이 지금 일어난 이상한 일의 주범일 것 같은 느낌이 마구 들었으니까. 나는 가짜 민호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제 그 모습은 좀......" "무슨 말인가요?" "민호 한마리으로도 감당하기가 힘들어서리."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민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 민호라는 놈은 한 놈만 존재해도 벅차거늘. "전 좋은데요." "난 싫어." "흐으음, 역시 형님은 희소성의 가치를 아는군요." "......." "저같이 순결한 남자는 한 명만으로도 족한 것 같기는 합니다" "즐. 즐. 즐. 즐. 즐." 이 녀석은 언제나 저 좋은 대로만 풀이하신다. 좋게 말하자면 엄청 긍정적이라 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완전 자뻑 속에서 사는 거지.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분들이군요." 그때, 짜가 민호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역시 소름이 끼친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민호 목소리가 들리니 말이다. 거듭말하지만 민호라는 생물은 단 하나만으로도 지구를 위협하는 생물이다. 그런 존재가 두마리나...... 아아, 머리 아파. "뭐 본론으로 들어가죠.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 나타난 건 제 성에 초대를 하고 싶어서랄까요?" "성?" "네, 제 성말입니다" 내가 왜 네놈 성에 초대를 받아야 하는 건데? 아니, 초대한다고 내가 갈 것 같아? 하지만 곧 이어진 녀석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생각이 변했다. "참고로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디재스터라고 불리는 당신의 성이었지만 이미 제어는 모두 끝났으니 제 성이라고 해도 되겠죠? 후훗." "......!" 그 말에 나는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내 성? 그, 그 몇십억이나 주고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은 내 성? 아니, 그것보다....... "너 리아한테 무슨 짓 했어!" 그렇다. 분명 그 성의 모든 것은 리아가 맡고 있다. 그런데 저 자식이 이미 차지했다는 건....... "글쎄요?" "너, 너 설마!" "뭐 직접 와서 보시죠. 많은 분들이 두 분을 기다리고 있을거거든요." "이 자식!" 나는 그 말에 분노해서 소리쳤다. 저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민혜와 나래 누나, 이리스, 민영, 에리아스, 리아까지 저 자식의 수중에 있다는 거다(왜 남자는 제외.....?) 난 분노에 가득 차 다시 외쳤다. "너 그녀들 건들기만 해 봐!" "그건 제 마음인데요?" "이런 개자식!" 난 그 말과 함께 녀석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민호가 붙잡았다. "형님, 침착하십시오." "......." "저분에게는 인질이 있는 상태, 섣불리 움직이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 말에 나는 민호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달려들려던 기세를 거둬들였다. 민호 말대로다. 지금 놈에게는 인질이 있다. 섣불리 행동하다 자극이라도 하면..... "후훗, 그게 현명한 거죠. 그나저나 제 초대를 받아들이실건가요?" "물론." 그녀들을 위해서라도, 빼앗긴 내 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이 초대를 거부할 수 없다. 이런 내 말에 짜가 민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여기서부터 쭈욱 앞으로 오시면 보일 거예요, 아, 그리고...... 재미있는 걸 만들어 봤습니다." "......?" "성 안에 엄청난 액수와 돈과 다량의 오리데오콘이 있더군요" "허억!" 난 그 말에 기겁했다. 돈은 빚으로 갚으려고 모아 놓은 것이고, 오리데오콘은 성 수리를 위해 놔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놈이 그걸 이야기하고 있다. 서, 설마......? 파앗. 그때, 내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차원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 5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골렘이다. 하지만 그냥 골렘은 아니다. 그 골렘의 표면에는...... "오리데오콘?" "제 작품이죠." "......." "후훗, 그러면 나중에 뵙죠." 그리고 녀석은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할 말이 없다. "어서 전투 준비해, 오리데오콘으로 만들어진 골렘이야!" 레에니가 고개 숙인 나에게 다급한 어조로 말했지만 난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내 눈빛이 급격히 변했다. "저희들은 빠지죠" "무, 무슨 소리야? 오리데오콘으로 만들어진 골렘이라고. 혼자 상대하기에는 벅차!" "글쎄요" "......?" "형님은 지난번보다 확실히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말 그대로....." "말 그대로?" "정말 멋진 분이 됩니다." "......무슨 말이야?" "어머나, 끝났네요?" "......?" 그 말에 레에니는 재현과 오리데오콘 골렘이 대치하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변했다. "오, 오리데오콘으로 만들어진 골렘을 맨주먹으로.....?" "하아. 하아." "......." 재현의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오리데오콘으로 만들어진 골렘을 산산히 부숴 버렸다. 그것도 단지 주먹만으로. 잘 가렴. 흐흐흑. 난 진심으로 그들의 행복을 바랐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리데오콘. 하지만 그들은 비쌌다. 그것도 더럽게 그런 오리데오콘 님이 웬 이상한 떨거지 때문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정확히 형님 주먹이라고 하셨으면 합니다만." "......." 그때 민호의 지적이 들려왔다. 물론 내 주먹에 산산조각 난 건 맞다.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엄연히 그건 저 삐리리 같은 자식이 나와의 추억(?)이 담긴 오리데오콘 님을 이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오리 님!!" 난 외친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고. 한편 그런 내 행동에 민호 군이 말했다. "형님, 이런 이상한 행동할 때가 아닙니다." "......." "어서 작전을 세워야죠" "......." 충격적이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놈에게 이상한 행동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다니! 이건 나에 대한 모욕이야! "정신 차려." 넵. 하지만 레에니의 한 마디에 버로우 해야 했다. 지금 상황을 다시 요약해 보자. 지금 상황을 정리하자면, 나의 울트라 하이테크 성이 웬 이상한 놈에게 정령당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인질." 내 일행이 인질이 되어 있는 상태라는 거다. 이렇게 되면 섣불리 행동할 수 없다. 자칫 함부로 행동했다간 그녀들에게 뭔가 피휴ㅐ가 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작정 돌격형이라 마구 때려 부수던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치다니. 크으윽. "일단 제일 중요한 건 인질의 안전입니다." 끄덕끄덕. 난 민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무엇보다 그녀들의 안전이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인질들의 안전을 확보하느냐는 건데. 몰래 들어가서 빼돌리는.......... "불가합니다" 제발 아무 허락 없이 남의 생각 좀 읽지 말아 줄래? 아니, 그것보다........ "불가하다니?" "어제 업그레이드를 했습니다. 보안을 아주 철저하게 했거든요." "......." "누군가가 침입하면 당장 방어 시스템이 작동될 겁니다....." "좋군." "그렇죠." "......." 정말 좋다. 어떻게 성 점령당하기 하루 전에 업그레이드를 하냐? 그것도 방어 업그레이드를 말이다. 멋지다, 멋져. "그럼 몰래 침투는 불가능하다는 거지?" "절대 불가능하죠." "......." "아주 절대 네버 네버 네버 네버 울트라 빅헤드 하게 불가능합니다" 또 나오셨다, 민호 님의 특기. 사람 나락으로 보내기 말이다. 저분은 저렇게 별별 소리를 해서 완전 희망의 자그마한 불꽃까지 밟다 못해서 비비신다. 그만큼 남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즐긴다는 거지. 하지만 뭐 이제는 저런 모습까지도 내 눈에는 귀엽......... 허억! 내, 내가 무슨 미친 생각을! 귀엽다니! 지금 내게 닥친 엄청난 일로 인해 머리가 약간 이상해졌나보다. "이러지 마시죠" "......." "전 남자는 사절입니다." "나도 사절이야, 임마!" 왜 녀석하고 있으면 이렇게나 긴장감이 사라지는 걸까? 정말 신기한 놈이다. 그렇게 다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하필 어제 설치한 최첨단 방어 시스템 때문에 몰래 침입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수십 번 강조하는 민호 군.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그때 민호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형님의 이름을 이용하죠" "......?" 뭐? 내 이름을 이용해? 이번에는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이러십니까?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간단히 말해, 형님의 현상금을 이용하는 겁니다." "......." "저 성에 형님이 있다고 소문을 내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갈 겁니다." "......." "형님은 10억짜리니까요" 저기...... 굳이 그런 표현을 쓸 것까지야. 울고 싶다. "10억짜리 형님." "......." "형님은 정말 위대합니다." ".......닥쳐." 민호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그걸 보는 나의 마음은 더럽게 착잡하다. "형님은 역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계시군요." "네 눈에는 저게 최고의 인기로 보이냐?" "나름대로요." "......." 난 몰래 지켜보았다. 눈에 달러 마크를 띤 채 성을 향해 돌격하는 몇만 명 유저들의 모습을, 단지 민호가 한 10분 정도 소문을 냈을 뿐이다. 저 성에 10억짜리 대악당이 산다고 말이다. 그러자 5분 안에 몇만 명이 모여들었다. 아니, 이제 머지않아 몇십만 명이 될 것 같다. "형님은 인기인~." "......." "너무 멋지십니다." "......." "베리 베리 굿!" 그래, 난 멋진 놈이다. 이렇게 단시간에 몇만 명의 사람을 끌어 모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범죄자잖아? 응? 난 넘 멋져. 흐흐흑. 민호의 작전, 일단 유명인사(?)인 나를 미끼로 순식간에 방어 시스템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몰래 침투해 들어간다. 아주 단순한 듯 보이는 작전이지만 여기에는 난점이 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저 성을 공격하게 해서 방어 시스템을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이 쉬울리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 단숨에 성공했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만 하도록 하자. 어찌 됐든 붕괴된 방어선을 침투해 들어온 우리 둘.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인질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른사람이라면 이 시점에서 인질들이 어디 있을까 허둥지둥하겠지만 지금 내게는 유용한 생물체가 있다. "냄새가 납니다!" .......무슨 개코도 아니고 여자들의 냄새를 쫓아 나아가는 민호 군. 정말 그 기이한 능력에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여차저차해서 우리는 인질들이 있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무사해 보이는 그녀들을 향해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모두 괜찮아?" "오빠!" "재현아." "주인님...... 흐에엥." "......." "오라버니!" 모두 나의 방문을 반기신다. 나는 그런 그녀들을 최대한 진정시켜 주기 위해, "괜찮아, 괜찮아. 진정해." 라고 따뜻한 한마디를 건넸다. 그때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느새 짜가 민호가 나타나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린다. 그런 녀석의 말에 진짜 민호가 자랑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희 형님이 얼마나 악명 높은 대악당인지 상상도 못할겁니다." "......." 민호야, 민호야. 진짜 쪽팔려. 어떻게 그렇게 대악당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거냐? 현상금 10억 걸린 게 그렇게 자랑할 일은 절대 아니잖니? 한편, 진짜 민호의 말에 짜가 민호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황당한 분들이군요." "칭찬 고맙습니다." "......." 아니,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냐? 자신과 완벽하게 똑같은 존재마저도 말발로 이겨 버리는 외계 생물체. 이쯤 되니,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하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 물어볼 게 있다는 내 말에 짜가 민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건 진짜 궁금하다. 진짜 말이다. "너 완벽한 민호로 변신했으니 상대방의 능력이라든가 생각 같은 걸 읽을 수 있지?" "당연한 말이죠" 그 말에 나는 눈을 번쩍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난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자식, 도대체 뭔 생각하면서 사는지 좀 가르쳐 주셈." "......." 그런 내 말에 완전히 굳어 버린 짜가 민호. 그때, 진짜 민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물어보나 마나죠. 당연히 순수한 생각?" "저리가, 이 자식아! 빨리 말해 주라!" 난 초롱초롱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긴박함이라는 단어는 저 멀리 훨훨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지금은 단지 민호 저녀석이 평소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도대체 저 뇌 구조는 뭐로 이루어졌는지 말이다. 잠시 후, 짜가 민호는 여전히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배려가 깃든 어조로 입을 열었다. "뭐 죽음의 선물로 가르쳐 드리죠, 지금 이 모습의 원래 주인은......." "......." 꿀꺽. 난 침을 삼켰다. 드디어, 드디어 민호의 비밀이.......! "아아악!" "왜, 왜 그래?" 그때 갑자기 짜가 민호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다급히 짜가 민호에게 달려갔다. 짜가 민호가 또다시 비명을 토해 냈다. "도, 도대체 어떤 방식..... 아아악!" "정신 차려! 안 돼! 안 돼!" "크아악......!" 털썩. 난 그대로 허무하게 죽어 버린 짜가 민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민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가르쳐 달라고 물었을 뿐인데 왜? 한편 이 모습에 민호는 웃으면서 말했다. "제 순진함에 힘드셨나 봅니다." "......." "실패했습니다." "......." "그것도 어처구니없게 말입니다." "......." "상대방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도중, 그대로 죽어 버렸습니다." 보고하는 베리킨도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단지 민호라는 존재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도중 기억의 회로가 엄청나게 꼬이면서 죽어 버린 것이다. 도대체 이런 어이없는 상황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다. "......." 마이블라스트의 길드 마스터조차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혹시나 재현과 배틀로 인해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충분히 해 보았다. 아무리 자신들의 비밀병기라지만 재현이라는 존재는 그 정도로 쉽게 해치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단지 민호라는 존재의 기억을 더듬었을 뿐인데 소멸이라니. 너무나도 황당하다. "이......민호." 그는 중얼거린다. 알고 있다. 그 민호라는 자가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한 존재라는 건. 하지만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을 마구 벌이는 그를 보자 이제는 섬뜩함마저 느끼는 그였다. 찌릿. 난 세심하게 관찰했다. 민호라는 생물체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기에, 복사한 특수 생명체가 기억을 더듬다가 뒈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거냐? 이런 경우는 종종 있다. 도플갱어 같은 존재가 같은 존재의 기억을 더듬어 약점을 잡아내는 경우, 하지만 그저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과정에서 뒈져 버리다니,이건 정말........ "왜 그래?" 이글거리는 눈으로 민호를 노려보는 나에게, 나래 누나가 다가와 의아한 듯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여전히 민호를 노려보며 답했다. "저 자식을 알고 싶어." "......." "저 자식의 생각을 알게 된다면 노벨상을 타는 것도 무리는 아닐거야" 그래. 만약 녀석의 머리를 해부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노벨상을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논문 제목 '민호의 고차원적인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내 말에 나래 누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 "아무리 봐도 인류가 상대하기는 힘든 존재 같은걸." 허얼? 누나도 그렇게 생각하신 거에요? 말 그대로 민호 녀석은 인류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존재다. 외계인도 상대 못하고 심지어는 도플갱어, 즉 몬스터마저도 상대 못하는 정신세계를 가지신 분이다. 그러면........ "누가 상대해야 하지?" 저 멋진 분을 상대할 영웅은 그 누구도 없단 말인가?" 8. 민호를 존경하는 법 세상에는 참 다양한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때론 농담으로도 주고받기 두려운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내 앞에 서 있는, 15살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소녀. 16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푸른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기른 소녀였다. 내 주변에 워낙 미소녀들이 깔려 있어서 그렇지, 세상에 나가면 참으로 주목받을 만한 미모를 가진 소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소녀가 갑자기 우리를 찾아왔다. '무엇이든지 들어드립니다'에 말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요청하셨다. 민호 님을 너무 존경한다고, 열흘만 같이 지내고 싶다고. 그래. 아무리 개판 5분 전인 의뢰도 많이 받는 나다. 하지만 이런 기가 막힌 의뢰는.....! 민호가 존경스럽단다. 그래서 녀석의 곁에 있는 조건으로 현금으로 약 400만 원에 달하는 400골드를 내놓으셨다. 도대체 왜, 왜! 저런 귀여운 소녀가 민호 같은 미친놈을 존경한다는 걸까? "알면서." "......." 알기는 개뿔! 난 민호의 당당한 한 마디에 기가 질려 버렸다. 알기는 뭘 아냐! 네놈에게 어디 존경할 만한 점이 있다고 그런 저질스러운 말을 해 대는 게야!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민호가 말했다. "전 즐기는 남자니까요." "......." 그거랑 존경하고 뭔 상관인데? 아무리 갖다 붙이려 해 봐도 저언혀 연관이 없다. 한 마디로 개소리다. 하지만..... "멋져요. 민호 님! 역시 품격이 넘치세요." 소녀는 감탄하신다. 분명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민호를 짝사랑했던 한 소녀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사랑이었지만 지금은 존경심이다. 마치 뭔가 대단한 존재를 보는 듯한 존경심 무슨 이런 말도 안되는! 그때, 민호가 나를 보더니 야리꾸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질투하시나요?" "안 해, 이 자식아!" "후훗." "우, 웃음에도 품격이!" 저 아가씨, 정말 심각하다. 저 능글거리는 웃음에서 품격이 느껴진단다. 미친. 소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민호 님, 민호 님은 평소에 뭘 하고 지내시나요?" "저는 독서를 즐겨 합니다." "우와, 낭만!" 즐즐즐즐. 이 자식아, 그게 독서냐? 아니, 책을 읽는 건 맞으니 독서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야설 읽는 걸 독서라 할 수 있을까? "하루에 10시간 이상 독서를 하죠." 점점 더 가관이다. "정말 멋져요!" "전 짜릿한 남자니까요." 책을 10시간 이상 읽는다고? 저건 엄연한 사기다. 왜 그 책이 야설이라고 말하지 않는 게냐! 진실을 불어, 인마! 왠지 모르게 저 소녀에게 모든 진실을 밝히고 싶다. 물론 민호가 존경받는 게 질투가 나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미리 말해 둔다. 정말이다. 한 소녀를 거짓말에서 구해내기 위한 순수한 마음. 절대, 네버 네버 질투가 아니다. 세상에는 진실이 필요하다. 그렇데 다짐하고 소녀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형님은 질투를 하지 않겠죠." "......." "예를 들어 저에 대한 것을 밝히려는 건 질투에 속할까요?" "......." 민호의 혼잣말이 들려온다. 아니, 절대 혼잣말이 아니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즉, 내가 저 소녀에게 진실을 말할까 봐 미리 차단하는 것이다. 내가 소녀에게 진실을 말하면, 난 질투에 눈이 먼 째째한 남자밖에 안 된다는 뜼. .......당했다. 저기압. 지금 내 기분을 말해 주는 단어다. 아주 뷰티풀하게 저기압이시다. 절대 민호 같은 녀석이 존경을 받아서 이런 건 아니다. 난 마음이 넓은 남자거든. "......." 근데, 민호가 왜 존경받아야 하지? 차라리 내가 존경받는 게 더 말이 되지 않나? 제길. "왜 그러세요?" 심각한 고민에 잠겨 있는 내게 이리스가 말을 걸었다. 난 그 물음에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이리스!" "네?" "진짜 진지하게 묻는데........" "......?" "솔직히 말해 줘." "무, 무슨 일인데요?" "부탁이야. 솔직하게." "......." "제발!" "아, 알았어요." 나의 거듭되는 부탁에 당황하면서 얼른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 자, 이제 질문 들어간다. 그녀라면 믿을 만해! 난 정말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민호와 나 중 누가 더 존경스러워?" "......." 내 질문에 갑자기 온몸이 경직되는 듯 보이는 이리스. 나는 최대한 담담한 척 가장하며 다시 말했다. "진실을 말해 줘. 괜찮으니까." "꼭...... 말해야 돼요?" "응. 꼭." "......." 그 말에 이리스는 망설이는 듯 보였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하려는 거지? 다음 순간, 이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두 분 다 별로 존경할 점은 없는 것 같은......." "......." 결론이 나왔다. 민호와 나 둘 다 존경할 만한 점은 쥐뿔도 없다. 근데 왜! 왜! 왜! 똑같이 없는데 민호 녀석은 저런 미소녀가 쫓아다니면서 존경까지 하지? 응? 누가 진실을 가르쳐 달라! 나는 그 미스터리에 온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눈에 곧 엄청난 장면이 목격되었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조금 힘들긴 했지만 열흘 알바치고는 괜찮았어요, 다음에 또 부르세요." "생각해 보죠." "......." 두 분의 돈 거래 현장. 보통 의뢰인이 돈을 주는 법이다. 하지만 왜 민호 님이 저 소녀에게 돈을 주는 거지? 그때, 몰래 지켜보던 나와 민호의 눈이 마주쳤다. 민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즐거웠습니다." "뭐냐?" 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러자 민호 왈, "그냥 심심해서...... 존경받는 기분이 어떤지 체험해 보려고 저분을 고용했거든요." "......." "뭐 그런대로 새로운 기분이더군요." "......." 난 멍하니 민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인즉....... 단지 심심해서, 존경받는 기분이 어떤지 궁금해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거냐? 잠깐. 그때 갑자기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기억. 저 소녀는 분명 의뢰라면서 400만 원을 줬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를 준 거냐? "총 1,000만 원 드렸습니다." "......." "400만 원은 의뢰비인 척 내고 600은 먹으라고 했죠."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성에 굴러다니는 오리데오콘 좀 팔았으니까요." "......." "칭찬은 사양하죠." 그러니까 단지 심심하다는 이유로 6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사용했다는 거냐? 그것도 존경받는 느낌이 어떤지 체험해 보고 싶다고 그런 큰돈을 썼다는 거냐? 그리고, 뭐? 성에서 오리데오콘을 주워? 지금 장난해? 그거 성 수리하는 데 필요한 오리데오콘이잖아! 줍기는 뭘 줍냐, 이 자식아!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민호 군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칭찬은 정중히 사양하죠." "......." 난 말없이 민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러자 민호도 덩달아 웃는다. 내 다른 쪽 손에는 정체 모를 스크롤이 한 장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 스크롤을 쥔 채 생긋 웃었다. 그리고...... 찌이익. 아주 간단하게 찢었다. 물론 한 가지 말하는 건 잊지 않았다. "텔레포트" 그 순간 나와 민호의 모습은 성안에서 사라졌다. 9. 간호 "형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 "......?" 갑작스럽게 내게 다가와 진지한 어조로 말을 건네는 민호. 이번에는 또 뭐냐? 다음 순간 민호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3대 현자 중 한 명입니다." "꺄울!!" "......." 악몽을 꿨다. 얼마나 지독한 꿈이었으면 침대시트가 땀으로 흠뻒 젖을 정도다. 그만큼 내게는 악몽을 넘어선 초악몽. 솔직히, 민호 녀석이 백호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아직 정신적으로 힘들다. 그런데 방금 전, 민호가 3대 현자 중 하나였다는 꿈을 꿨다.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 할 말이 없다. 만약 민호가 정말 3대 현자 중 하나였다면 난 뭐라고 해야 한단말인가? "전 아닙니다." "......." "순수한 백호일 뿐이죠." "......." 어느새 남의 책상 의자에 앉아 나를 보고 싱글싱글 웃고 있는 백호 군. 난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 어두컴컴하다. 그리고 시간을 보니....... "새벽 3시........"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즉, 지금이 새벽 3시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저 녀석은 새벽 3시에 남의 집에 들어와서 남의 의자에 앉아 나를 보고 있는 거냐. 난 물었다. "지금 새벽 3시인 거 알아?" "압니다." "......근데 왜 기분 나쁘게 음침하게 의자에 앉아 나를 보고 있니?" "형님의 자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서, 설마 너.....! "장난입니다." "......." 거듭 말하는데 장난이라도 그런 소름 끼치는 장난은 사절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네가 3대 현자였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겠지?" "당연하죠." "......." 다행이다. 이 말 만으로도 마음이 안정이 온다고 할까.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건 남아 있다. "진짜 여기에 온 목적이 뭐냐?"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이유 없이 새벽 3시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분명 뭔가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내 물음에 민호 군이 웃으며 되물었다. "알고 싶습니까?" "......별로." 그리 알고 싶지 않다. 녀석의 말 자체가 별로 긴박감이 없으니까. 또 무슨 헛소리겠지. 하지만 다음 순간 녀석이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흐으음. 이거 큰일이군요." "또 뭐야?" "형님이 알고 싶지 않다니까요." "어차피 헛소리할 거잖아." "아닙니다. 나름대로 중요한 이야기였죠." "......." 다음 순간 민호의 충격적인 한마디가 이어졌다. "지금 민혜 양이 많이 아픈 듯싶습니다. 부모님도 마침 외출한 까닭에 지금 혼자서 끙끙거리면서 아파하는 것 같습니다만" "뭐!" 난 당장 뛰어나갔다. 물론, 아무리 친한 동생이라지만 새벽 3시에, 그것도 부모님이 안 계신 여자아이 집에 간다는 건 진짜 미묘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민혜가 아프단다. 그것도 많이. 게다가 아무도 간병해 줄 사람 없이 혼자서 앓고 있단다. 나와 민호는 황급히 민혜네 집으로 이동했다. 내가 다급히 벨을 누르려 하자 민호가 말했다. "지금 무지 아픈 상태입니다.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쩌라고?" "문 따죠." "......." "그게 아픈 분에 대한 배려입니다." ......주인 허락 없이 문 따는 게 아픈 분에 대한 배려라는 말은 참 신빙성이 없다. 하지만 민호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지금 민헤는 많이 아픈 상태. 많이 앓다가 겨우 잠들었다면 깨우는 건 미안한 일이다. 차라리 나중에 사과하더라도 일단 집 안에 들어가서 상태를 살피는 게 나을 것이다. "......." "들어가시죠." "저기........" "네" "여기 최첨단 아닌가?" "그런 것 같습니다." "......." 내가 알기로 민혜네 집은 제법 잘사는 관계로, 지문 인식, 홍채 인식 기타 등등, 정말 철저한 보안 시스템이 설치된 집이다. 그래서 도둑들도 침투 불가. 하지만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호 군은 내가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일을 끝내셨다. 너란 놈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견적(?)이 나오니? 정말 이건 옳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우리는 현관문을 열고 민혜의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거기에는 진짜 언뜻 봐도 정말 아파하는 듯한 민혜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누워 있었다. 난 다급히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민혜야!" "으응........" "괜찮아? 어서 구급차 불러!" 내가 다급히 소리치자 그 말에 민호가 구급차를 부르려고 했다. 그 순간, 민혜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오......빠?" 거의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으응. 나, 나야." "오.....빠구나." "지, 지금 당장 구급차를....." "병원......은 싫어." "하, 하지만......" "정말...... 싫어." "......." 병원이 싫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때 민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아 줘." "......엥?" "나....... 어렸을 때처럼 오빠 품속에서 자고 싶어." "......." "안.....돼?" 여기서 거절하면 난 아주 나쁜 놈이 될 것 같다. 민혜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저렇게 부탁하는데...... 그래, 이건 절대 이상한 행동이 아니다. 그저, 그저 그녀에게 온기를 주려는 나의 순수하고 건전한 마음이다. "......."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막상 침대로 들어가 그녀를 안아 주는 건 정말 미묘한 일이다. 어렸을 때는 분명 그런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엄연한 고등학생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발육된 몸과 아름다운 얼굴..... 아아악!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지금은 오직 건전한 생각만 하자. "안 돼?" 민혜가 다시 한 번 간곡한 어조로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더듬거리면서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그래. 해, 해 줄게. 아프지만 마." "고마워....." 맹세컨대, 나는 정말 순수하고 건전한 마음으로 민혜의 침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너무도 아파하는 민혜를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츄파츄파추파파파파 캬캬캬아아날이나리너미.' 최대한 건전한(?) 생각을 하기 위해 주문도 외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민혜의 몸과 그녀의 향긋한 냄새가 더욱 강렬히 느껴졌다. "이, 이건 아니야!" "그렇죠, 그건 아니죠." "......." 망각했다. 저 자식이 있었다는 걸.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잠시 민호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난 민호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예진이한테는 비밀이다." "흐으음." "말하면 네 인생은 그날로 끝이야." "최선을 다해 비밀을 지키죠." "......." 꼭 한마디 덧붙여야만 얘기가 통한다니까. 에휴우. 다음 날. 죽을 것 같다. 진짜 미칠 것 같다. 내 품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민혜. 난 그녀가 깰까 봐 그녀를 안은 채 단 한번의 미세한 몸 짓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잠이라도 자자고 생각했지만 이런 미소녀를 품에 안고 맘 편히 잠들기에는 내공이 부족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일은 민호 녀석이 갑자기 가 버렸다는 것.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남녀가 한 침대에서 안고 있는 모양이 돼 버린 것이다. "......." "으응....." "괜찮아?" 민혜가 깨어나는 듯한 소리에 다급히 물었다. 잠시 후 그녀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꺄아악!" 라고 하신다. "미, 미안해. 오빠." "아니...... 괜찮아." "진짜 미안해." "괜찮아." 너무나도 큰 비명을 지른 것을 내게 사과하는 그녀. 괜찮다. 이해한다. 잠시 동안 치한이 된 기분이기는 했다만 충분히 이해해. 그때 민혜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말했다. "어, 어제 그거 꿈이 아니었던 거야?" "아마도." "......." "그, 그럼 오빠랑 나는........" "......." 푸시시. 그 말에 완전히 빨간 사과가 되어 버린 민혜의 얼굴. 나, 나도 지금 무척 당황스러워! 우어억! 그렇게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몇 분간 연출했다. 잠시 후 내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이제 괜찮은 거야?" 애써 말을 돌리자 민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금....... 괜찮아." 그러면서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이불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다. 역시, 귀엽다. .....아아악! 이게 아니야! 그 순간이었다. 민혜의 질문을 이어진 건. "그, 그런데 어떻게 들어온 거야?" "아, 그거....... 민호가." "아......." "미안해." "아, 아니야........." "네가 아프다고 하기에........ 벨을 누르는 건 실례인 것 같아서. 미안....." "아, 아니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그럼...... 내가 아프다는 소리 듣고 새벽에 온 거야?" "당연하지" 그 말에 민혜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다. "고마........워." "고맙기는. 당연히 와야지!" "......." 그렇다. 사랑스러운 동생이 아프다는데 오빠 된 도리로 오는 건 당연한 거다. 아 참, 그리고 보니. "아침...... 은 먹어야겠지?" "으응. 그럼 지금 내가 요리를......." "노노, 내가 만들어 줄게. 재현표 슈퍼 울트라 죽을 말이야." "......." 민혜는 너무나도 가슴이 떨렸다. 어제 일이 꿈이 아니라니. 그러면 어제 한 침대에서 재현이의 품에서 잔 게........ "아........"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멈출 것 같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새벽에 찾아와 주다니....... 너무나도 고맙고 기뻤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지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에게 여자가 아니라 여동생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포기하려 해도 저런 모습을 보여 주는 재현에게서 마음을 돌리려고 해도 감정은 더욱더 깊어질 뿐이었다. "......오빠, 미안해." 민혜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 죽을 끓여 준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끓일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크오오! "저, 오빠..... 나 샤워 좀 할게." "아...... 응. 그, 그래" 샤워를 한다고? 나에게 샤워를 하겠다고 보고하는 민혜의 말에 나도 모르게 히죽 웃어 버렸다. 허억! 잠깐! 나란 놈,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냐! 그녀는 그저 샤워를 하려는 것 뿐이다. 그런 데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죽 끓일 생각이나 해라. 그 순간이었다. "훔쳐보는 건 미학입니다." "......." 언제 다시 나타났는지, 민호가 내게 한마디 던지신다. 저 자식은 도대체 뭐 하고 돌아다니다가 지금 나타난 거냐? 아니, 그것보다........ "내가 짐승인 줄 알아?" "그럼 아닌가요?" "......죽고 싶니?" "조크였습니다. 예민하게 반응하시기는." "......." 조크는 개뿔. 진담이었으면서. 하지만 뭐 그냥 넘어가자. 그것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사명은 죽을 끓이는 것이니까. 하지만 죽의 탄생법(?)도 모르는 내게는 정말 어려운 미션이다. 간단히 말해, 흰죽도 못 끓인다. 그런데 재현표 슈퍼 울트라 죽을 만드는 게 가능할 리 만무할 터. 난 슬며시 민호에게 물었다. "죽 끓일 줄 아니?" "제가 끓일 줄 알 것 같아 보입니까?" "아니." "정답입니다." "......." 우와, 정답이다. 잠깐 이상한 짓 해 봤다. 그래, 민호 녀석이 죽 끓일 줄 알리가 만무하지. 커피 하나 제대로 못 끓이는 놈인데 말이다. 난 그런 민호에게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어서 죽 끓이는 법 알아 오렴." "흐으음." "왜?" 갑자기 죽 끓이는 법을 알아 오라고 하자 민호 군은 나에게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저 가면 훔쳐보시려는?" "안 훔쳐본다니까!" "그럼 목욕하는 민혜 양을 덮치려는......." "이 자식! 날 뭘로 보는 거야!" 나도 모르게 민호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민호는 더욱더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과민 반응을 보이시는군요." "......." "설마 그런 야릇한 상상을 하신......" "닥치고, 죽 끓이는 방법이나 알아 오지 않으련?" "......그러죠." 그 말과 함께 민호는 휘적휘적 밖으로 나갔다. 안 그래도 지금 어제 일 때문에 화끈거리는데 이상한 소리는 제발 즐이다. 이후 난 민호를 기다리며 주방을 지켰다. 흐으음....... 그때, 민혜의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오빠......" "어, 어?" "부, 부탁 좀 해도 될까?" "허억!" 부탁! 무슨 부탁을....... 지, 지금 민혜는 목욕 중이다. 목욕 중에 부탁이라는 건........ 혹시........ 등 밀어 주기? 아아악! 무슨 상상을 하는 거냐!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짐승 같은 생각만 하는 저질스런 인간이 된 거냐! 그런 일은 일어날 리도 없다. 아악! 정말 내 자신에게 무언가 자괴감이 느껴진다. 그때 민혜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저, 저기....... 급하게 오느라 속옷하고 옷을 깜빡했는데 내 방에서 좀......" "가, 갖다 달라고?" "으응." "......." "......." 그 말과 함게 미묘한 침묵. 난 잠시 후, "조, 조금만 기다려, 하하하하." 라고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민혜가 떨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침대 오른쪽 서랍에 있어. 첫 번째 서랍이 옷이고 두 번째가........ 소, 속옷이야. 미안해." "아, 아니야. 얼른 갖다 줄게." 두근두근. 지금 나는 민혜의 방에 와 있다. 침대 옆에 있는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겉옷들. 난 가볍게 꺼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지금 제일 난관은....... "허억........" 이 두 번째 서랍이다. 이곳에서 민혜의 속옷을........ "......." 뭔 생각을 하는 거냐, 이 짐승 같은 자식아! 도대체 왜 자꾸 어제부터! 우어억! 나, 나에게는 예진이가 있잖아! 응? "......."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나도 남자라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런 짐승!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옷을 갖다 줘야 하는데. 덜덜덜. "......." 두 번째 서랍 바로 앞에 다가간 손이 중풍 환자의 그것처럼 마구 떨린다. 진정하자, 진정해. 이건 아니다. 그만 떨자. 이러다 속옷 갖다 주는데 10년 걸리겠다. 그래! 이건 아니야! 스으윽. 난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내서 마의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나를 반기시는(?) 속옷 님하들. 이렇게 많은 여자 속옷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다. 아아악!! 갑자기 머릿속이 마구 혼란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최대한 나 자신을 다독거렸다. "빠, 빨리 가자! 그래!" 난 대충 아무 속옷이나 막 챙긴 후 허겁지겁 민혜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다급히 욕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마주쳤다.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욕실에서 몇 발자국 나온 민혜와. 아마도 속옷을 가지러 간 내가 함흥차사라, 상황을 보기 위해 몇발자국 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그 경위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내가 너무나도 갑자기 나타난 바람에 너무 놀란 믾혜가 수건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리고 곧 내 눈에 보인 건.......... 민헤의 누드였다. 털썩. "......." "......." 어느새 상황이 바뀌었다. 침대에 누워 간호를 받고 있는 쪽은 나였고, 얼굴을 붉힌 채 나를 간호하는 쪽은 민혜였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민혜가 여기 누워 있었는데, 내가 그녀의 누드를 보고 그대로 기절하는 바람에........ "괜찮아?"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의 민혜가 걱정스러운 듯 내게 물었다. 난 그런 민혜의 물음에 부끄러운 듯 답했다. "미안해." "아, 아니야." "정말 미안해." "괜찮아." "......." "......." 그리고 또 침묵. 할 말이 없다. 그녀의 모든 걸 본 나는 할 말이 없다. 민혜가 괜찮다고는 하지만, 이건 분명 엄청난 일......... "오빠라면 상관없어." "으응?" "아, 아냐......" 그때 민혜가 뭔가 스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잡생각을 너무 깊게 하다 보니 못 들었다. 무슨 말을 한 거지? "뭐죠, 이 미묘한 공기는?" "......." "......." 그때 갑작스럽게 나타난 민호의 말에 그대로 굳어 버린 나와 민혜. 민호가 나와 민혜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설마 제가 어디 간 사이에 복잡 미묘한........" "닥쳐!" 퍼억! 개소리하기 전에 미리 입을 막아 두는 게 좋다. 10. 벨리나크 투신 벨리나크. 그는 말없이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 자신이 간접적으로 힘을 발휘해 만든 베르자니아라는 존재도 이제는 인간계로 나온다. 자신이 직접 손을 쓸 수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힘을 바쳐 베르자니아라는 인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어떻게 보면 디재스터와 베르자니아는 이미 예견된 존재였을지도. "벨리나크.......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아포라." "정말..... 이건 아니에요. 당신도 억지라는 걸 알잖아요?" "......."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요. 당신이 만든 베르자니아라는 존재를........" "이미 늦었다." "......." "베르자니아라는 존재는 이미 내 통제권을 벗어났다." "그, 그럴 수가.....!" "이제 그는 파괴만이 남아 꿈틀대는 존재일 뿐. 만약 디재스터라 불리는 놈이 베르자니아를 잠재운다면 저 디재스터가 개입된 세계도 살겠지. 이미 나는 모든 걸 넘겼다." "......." 아포라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저 투신이라 불리는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지? 왜? "슬픈가?" "......." "사랑하는 존재의 흔적이 사라진다는 게?" "......." 그 말에 아포라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투신 벨리나크는 물었다. "도대체 야설인가 하는 저급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자의 어디가 왜 좋은 거지?" "......." "심지어는 네 이야기를 썼더군." 불그레. 그 말에 아포라는 얼굴을 살짝 붉혔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장난이 많은 존재예요." "......." "사실 야설이라 해 봤자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어요." "......." "자기만 볼 수 있게 만들어 놨으니까요." "......후훗." "......." "끝까지 그의 편을 드는 군." "......." "뭐 상관없다. 갑자기 사라져서 의아하기는 하지만 놈의 흔적이 사라지면 아포라 너도 내게 올지 모르지." "......." 이것은 엄연한 고백이었다. 물론 이런 건 수도 없이 들어 왔다. 투신 벨리나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는 이미 좋아하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투신 벨리나크가 원하는 것은 그녀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물었다. "저만 원하시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요." "......." "'그분"이 사라지기 전, 당신이 아닌 그에게 디재스터의 힘을......." "더 듣고 싶지 않다. 난 가겠다." "......." "그리고 이 일은 언급하지 말도록 하지. 이미 내 통제권을 벗어났으니까." 거짓말이었다. 베르자니아에게 통제권이 넘어갔다는 것은. 그는 신이었다. 신이 게임 속 한 인물조차도 통제하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아포라는 말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그가 무시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아." 아포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서서히 떠오르는 모습.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모습이다. 항상 존댓말과 미소로 일관하는 그 남자. 도대체 그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11. 3대 현자 프로아 "지, 진짜?" "네." "......!" 민호의 보고를 들은 순간 눈물이 나오려 했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다. 3대 현자 중 한명의 단서를. 지난 번 신이 만든 야설 이후 삽질만 하던 나에게는 엄청난 희소식이다. 나는 다급한 어조로 그의 행방을 물었다. "어디 있는데?" 다 필요 없다. 지금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분이 어디에 서식, 아니 있냐는 거다! 다른 건 필요 없어. 한편, 이런 내 질문에 민호 군은 말하신다. "크라아티아 길드에 묶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크라아티아 길드......?" "네." "거긴 어디?" 크라아티아 길드. 이 게임에서 유명하기로는 톱 3 안에 드는 곳이란다. 사상 최고의 길드로, 거의 모든 길드를 통제할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규모 길드, 심지어는 제국에서도 함부로 건들지 못할 정도다. 그만큼 크라아티아 길드라는 곳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그 규모와 명성에 비해 평판은 좋지 않았다. 그만큼 하는 짓이 악랄하다고 할까? 최강의 자리에 군림하여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 하루 만에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길드 마스터가 좀 나쁜 님하다. 게다가 배달 수금까지 하신단다. 지들이 무슨 동네 깡패도 아니고. 허얼, 정말 어이가 없다. 어쨌든 크라아티아 길드는 악명도 높지만 강하기도 더럽게 강했다. 그런 길드 안에 내가 찾는 3대 현자 중 한 명이 포획되어 있단다.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크라아티아 길드가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건 3대 현자의 도움 덕택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흐으음." "그들은 엄청난 지식을 소유한 존재니까요." "......." 그건 그럴 것이다. 확실히 그들의 지식이라면 엄청난 아이템들이 마구 쏟아질 것 같으니까. 그러니 점점 강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형님 걱정하지 마시죠." "......?"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민호. 뭘 걱정하지 마? 민호 군은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악명으로 따지자면 크라아티아 길드보다 형님이 더 높습니다." "......." "축하드립니다." "......." "이렇게 단체로 들이대도 형님혼자의 악명에 못 당하다니, 역시 형님은 킹왕짱입니다!" "......." 고맙다. 하지만 그런 축하는 별로 받고 싶지 않은데? 흑. 어쨌든 현재 우리의 목적은, 3대 현자 중 한 명을 그 악덕길드에서 빼내 우리같이 착한 길드로 데려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도 뭔가 무안한 이 느낌. 크흐으음.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자를 빼내기 위햇는 한번 부딪혀야 하는 게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몇십만이나 되는 병력에, 그것도 돈 칠 하신 분들을 상대로 혼자서 들이대기는 조금 힘들다. "......하아, 은근히 머리 아프네." 갑자기 내 앞에 엄청난 규모의 적이 짠하고 나타나자 머리가 아파왔다." 물론 지금 내게 기습이라는 카드가 있기는 하지만 이게 얼마나 잘 먹힐까 하는 생각도 문득문득 든다. "......으윽. 잠깐 TV나 보면서 머리 좀 식혀야겠다." 난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끼고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TV를 켰다. 하지만 TV를 켜자마자 난 그대로 벌떡 일어나야 했다. 왜냐고? [특보입니다! 최고의 악당이라 불리는, 10억의 현상금이 붙은 대악당이 최고의 길드라 불리는 크라아티아 길드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고 합니다.] 한 미모의 리포터 씨가 내가 크라아티아 길드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냐? 아직 제대로 된 작전회의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TV에!! [자, 그럼 익명의 제보자를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인의 요청에 따라,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음성을 변조하겠습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 그때, 익명과 함께 모자이크 처리된 남자의 음성 변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저 톤, 저 말투, 저 괴상한 느낌, 그냥 느낌이 온다. 설마......? 그때 다시 리포터의 질문이 작렬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셨죠? 혹시 10억이라는 현상금이 걸린 대악당과 무슨 관계라도.....?] [더 이상의 질문은 안됩니다. 그리고 그건 비밀입니다.] 이.......민.......호! "야야야야야야야! 이 자식! 뭐 하자는 거야! 지금 네놈 때문에 유일한 희망인 기습 작전이 아예 물거품이 되었잖아!" "이거 왜 이러십니까?" "왜 이래? 네가 TV까지 나가서 홍보하고 다녔잖아!" "제가요?" "너 장난해?" "전 그런 적 없습니다." "하하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신은 그런 적 없다고 말하는 민호 군. 난 그런 민호를 향해 말했다. "나 지금 TV 보고 왔거든?" "그렇군요." "그렇군요가 아니! 네놈이 리포터랑 인터뷰하는 것 봤다고, 이 자식아!" "아, 혹시 그 익명의 제보자?" "......." "저도 참 그게 누구인지 궁금하더군요." "......." 허허허. 정말 말이 안 나온다. 아니, 이 자식은 진짜 양심이라는 걸 어디다 팔아먹은 거냐? 끝까지 부인하신다. 자신이 아니라고. 난 그런 민호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국에서 그딴 포스를 풍기는 거, 너밖에 없거든?" "왜 이러십니까, 전 억울합니다." "......." "왜 그 익명의 제보자가 저라고 몰아가시나요?" 끝끝내 잡아떼신다. 그리고 난 상기했다. 이분과는 평범하게, 말로는 타협이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잠시 후. "자, 민호 군. 이렇게 방송을 탄 이유를 알고 싶네만." "......왠지 타고 싶었습니다." "제대로 말 안 할래? 앙?" 내가 불끈 쥔 주먹을 내밀자 그 모습에 민호 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왠지 형님 같은 10억짜리 대악당과 10만에 달하는 대악당 길드가 붙으면 엄청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재밌는 사실을 저만 안다는 게 참으로 슬프더군요. 그래서 제보했습니다. "오호라. 그랬니?" "그런 겁니다." 아하, 그렇구나. 단지 나 같은 10억짜리 대악당과 10만에 달하는 대악당 길드가 붙는다는 사실을 저 혼자 알고 있다는 게 시시하게 느껴져서 방송을 탔다는 거구나. 참으로 깜찍한 놈이군. 난 서서히 민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민호는 당황하지도 않고 물었다. "왜 이러십니까." "네놈 덕분에 기습 작전이 물 건너갔거든?" "아니, 그런 저질스런 방법은 10억짜리 대악당이신 형님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 제발 부탁인데 그 호칭 좀. 대악당에게도 멋진 호칭 많을 텐데, 왜 하필 10억짜리 대악당이라고 부르는 거냐! 뭐 예를 들어 암흑천마라든가, 뭐 이런 포스가 나는 별명 있잖아?? 근데 왜 나는 그냥 10억짜리 대악당이야? 뭔가 서럽다. "행동은 내가 다 하는데 일은 왜 네가 벌이니?" "전 형님의 피앙세니까요." "훗." 난 그 말에 웃었다. 그리고 민호를 향해. "그럼 오늘 피앙세 구이 해 먹을까?" "사절이......" 민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으윽, 머리아프다. 크라아티아 길드에서도 내가 자기네들을 공격한다 하니까. 초비상 났단다. 모든 랭킹 유저들에게 최고 경계령이 내려졌단다. 나란 인간도 참. 도대체 내 이미지가 어떻기에 이런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치는 거냐? 아니, 그것보다....... "이러다 예진이가 알아차리면." "죽어도 못 알아차리게 하겠습니다." "네가 도대체 뭔 수로?" "극비입니다." "......." 진짜 궁금하다. 난 정말 유명인사다. 오버 안하고, 이 게임에서 나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민호의 말대로 난 10억짜리 대악당이다. 물론 얼굴이 완전히 공개된 것은 아니어서 아무나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내 얼굴을 보면 어디서 본 듯하다는 느낌은 들 것이다. 그리고 내 얼굴을 자주 본 사람들의 경우, 그 사진을 보면 금방 눈치를 챌 것이다. 예진이도 그 범위에 속한다(사실 학교에서도 내가 10억짜리 대악당이라는 걸 알고 있을 듯한데, 이건 민호 녀석이 입질을 해 놔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용케도 예진이는 모르고 있다. 도대체 저놈, 뭔 짓을 하는 거지? "저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부담스럽습니다." "......." "전 야설을 사랑하는 순수한 남자일 뿐입니다." 제발 잡소리 작작 하셈. 내가 너에 대해 궁금한 건 네놈의 신기한 능력들뿐이거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지금 우리의 병력을 계산해 보자. 요새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최강의 어쌔신 열 분. 변태 청룡과 바보 현무, 외계인 백호, 드래곤 로드 이리스, 그리고 최고의 전력이 되어 주실 사신 레에니까지. 이게 현재 우리 병력이다. 나까지 포함하면 15명. 저쪽은 수십만인데 그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하다. 물론 이분들이 일당백, 아니 일당 무한대라고 하지만 머릿수는 무시할 게 못 된다. 아무리 소수정예라고 해도 그리 유리하지는 않다. 자연재해를 이용해 인원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마나는 무한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다. 그때까지 자연의 힘을 완벽하게 다 끌어올린다면 한 방에 다 쓸어 버릴 수 있을 텐데, 이 점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걸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지금 이 작전을 실행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다른 방법이라고는...... "몰래 들어가서 그 현자만 빼돌리는 건......" 절대 불가능. 왜냐고? 민호 사마가 다 광고했으니까. 몰래라거나 기습 같은 방법은 이제 완전히 봉쇄되어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장하시다. "칭찬은 쑥스러운데요." 찌릿. "흐으음." 남의 생각 멋대로 읽고 제멋대로 자랑스러워하는 민호 님을 한번 노려봐 준다. 내가 지금 칭찬한 걸로 보이냐? 비꼰 거다. 이 자식아! 하아, 정말 한숨만 나온다. "주인님!" "왜 그래, 리아?" 그때 리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복면 쓴 사람들 천 명 정도가 저희 성의 위치를 파악하고 쳐들어오고 있어요!" "오호라? 선빵?" 아마도 저쪽에서 선빵을 하시려는 것 같은데. 선제공격하면 유리할 거라고 내가 저번에 언급했다. 하지만 저런 숫자로 선빵을 해 봤자 병력 낭비다. 일단 여기는 성 근처이니 성에 피해가 가지 않게 자연 마법을 봉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민호야, 검 있냐?" "물론입니다." 검을 사용할 것이다. 사실 나는 검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아는 검술도 없다. 하지만 나의 이 멋진 능력치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와이어는 요새 칙칙해서 별로 안 끌리니까. 그때 어느새 흑색의 검을 준비한 민호 군. 대략 2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대검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포스가 느껴지는....... 그 검을 본 내가 민호에게 물었다. "이건?" "검입니다." "좋은 거?" "그냥 뭐, 마검이라 불리는 검입니다." "마, 마검?" "네." 검 좀 꺼내라니까 갑자기 마검을 꺼내 드는 민호 님. 도, 도대체 마검이라니! 인간의 말을 한다는 그 마검? 에고 소드라고 불리는 그 마검? 엄청나게 능력을 상승시켜 준다는 그 마검? "......." "참고로 안에 잠들어 있는 분은 좀 시끄러워서 재워 뒀습니다." "그러니?" "네." 이젠 마검 안에 있는 존재까지 재우신다. 오오오. 이건 거의 할렐루야 수준이다. 이 녀석, 정말 뭐하는 놈이야? 인간 판도라의 상자 아니야? 그때 민호가 추가 설명이 들려왔다. "참고로 피를 좀 땡기고 페리아인지라고 외치시면 반경 200미터 안에 피 폭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 "잘 쓰시기를." 참으로 고맙구나. 검 달라고 했더니 이런 엄청난 걸 주다니 말이다. 푸직. 역시 내 예상대로다. 나에게는 검술도, 사용법도 아무것도 필요 없다. 이 무지막지한 능력치가 그런 것 따위는 다 필요 없게 만들었으니까. 물론 스킬이 없다는 건 아쉽지만 임시 스킬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페리아인지. 민호의 설명에 의하면 상대방의 피를 좀 땡기면 사용 가능한 기술이란다. 반경 200미터 정도가 폭발로 초토화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스킬이라는 거지. "괴, 괴물이야!" "인간이 아니야!!" "검성?" "검의 달인이야!" "으악!" 나의 검에 무참히 베어져 가며 한마디씩 남기신다. 미안하지만 그 외침들 중 정답은 없네요. 검은 오늘 처음 사용해 보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약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천 명이라는 일원 중 남은 건 대략 칠백 명 정도? 그렇다면 이 검이 300명 정도 피를 땡겼다는 것이다. 그럼........ "페리아인지!!" 가차없이 시전했다. 파아앙! 그러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주변이 피의 바다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아앙아아아!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터져 나온 피가 적들을 삼켰다. "......." 뭐냐, 이 무시무시한 스킬은. 어, 어라? 그런데 난 잠시 후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나도 화려하고 강력한 파괴력에 인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마나 올인?" 미치도록 큰 내 마나통이 그대로 올인한 거다. "이, 이 스킬 뭐야?" 난 돌아오자마자 다급히 민호에게 물었다. 그 말에 민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막장 스킬입니다." "......." "남아 있는 마나를 모두 투자해서 추가 데미지를 늘리거든요." "......." "간단히 말해, 한 번 쓰면 마나 올인?" "이런 스킬을 가르쳐 주면 어떡하자는 거냐!" 황당하다. 단 한 번에 마나가 바닥나는 스킬을 가르쳐 주면 어쩌라고! 물론 좀 전엔 한 방에 다 쓸어 버려서 별 문제 없었지만 만약 대규모 전투였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주, 주인님! 10만 명이 더 몰려오고 있어요!" "......." 난 그 말에 민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민호 님은 상큼하게 입을 여셨다. "뒈지라는 운명이군요." "뒈질래? 운명은 개뿔! 네놈 때문이잖아!" 어디서 이상한 마검 하나 주더니 토네이도를 15번 이상 사용할 수 있을만한 마나를 갉아먹게 하고 나서 운명이라니! 그런 내 성화에 민호 군은 또다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번에는 2미터에 달하는 은색의 대검이었다. 녀석이 그 검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엄청난 겁니다." "......또 무슨 이상한 아이템이냐?" "이건 정말 정상적인 겁니다. 그 능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뷰티풀 광티풀 하죠." 뷰티풀은 네놈이 하도 쓰는 말이라 이해가 되는데 광티풀은 웬 신종 언어냐? 이런 세종대왕님이 증오할 놈 같으니. 만날 한글 파괴해. "일단 뭐 주의 사항 불어!" "없습니다." "진짜?" "진짜 없습니다." "능력은?" "상대방의 마나를 흡수하는 겁니다. 상대방을 죽인 후에요." "......!" 허얼....... 또 이런 엄청난 검은 어디서 구한 거지?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은 저 엄청난 대군이 문제. 난 다시 한 번 민호를 향해 물었다. "문제없지?" "네." "정말 없지?" "네." "진짜로 없지?" "그렇습니다." 진짜 왜 이렇게 믿을 수가 없는 지......... 모든 게 불신 그 자체다. 그 순간 민호가 한 가지 생각났다는 듯 얼른 입을 열었다. "아, 여자 분 한 분 데려가셔야 합니다." "......?" "여자 분이 필요합니다." "아무 문제 없다며!" "문제 없습니다. 단지........" "단지 뭐?" "좀 더 좋은 능력치를 보정받으시려면......." "......." 그 말에 난 에리아스를 데리고 나섰다.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남자들한테 무적이니 아무런 걱정 없다(뭐 이분에게 오게 하지도 못할 테니까). 사실 레에니나 이리스가 무력 면에서는 훨씬 좋지만 그분은 만날 출장중이라 만나기가 힘들고, 이리스는 지금 컨디션이 좋지 않아 에리아스를 데려온 것이다. 어찌 됐든 에리아스 양을 데려온 나. 근데 왜 여자를 데리고 가라는 거지? "저, 주인님. 전 뭘 해야 하나요?" 그때 에리아스가 여전히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단지 민호 사마가 여자 데려가면 좋아딘다길레....... 스윽. "......." "......." 그때였다. 나와 에리아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냐고? 그건 바로..... "이, 이건! 내 손이!" "주, 주인님......." "오해야!" 어느새 오른손에 검이 들려 있고, 왼손은 에리아스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건 뭐냐?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고! 우우웅. "......." "......." 그때 갑자기 은색의 대검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억!" "주, 주인님. 흐, 흐엥......" "이, 이건 진짜........ 우어억!" 어느새 내 손이 에리아스의 팔을 과격하게 움켜쥐더니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다. 아악! 도대체 뭐야! 이게 뭐냐고! 스윽. 털썩. 다음 순간, 에리아스는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어느새 내 손이 그녀의 상의를 파고 들어가 가슴을 만지고 있었으니까. 우우우웅!! 은색의 검이 미친 듯이 울어 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폭발적인 힘이 발생했다. "이민호!!" 난 기절한 에리아스를 안고 들어가 민호 자식을 불렀다. 그런데 민호 님은 없다. 그저 쪽지 한 장만이 나를 반기신다. 즐겁게 승리하지 않으셨습니까? 인생을 즐기죠. "......." 또 당했다. 그렇게 우리는 승리했다. 민호의 이상한 아이템 덕분에. 이건 엄연히 변종 아이템의 승리다. 그리고 아주 협정적으로(?) 3대 현자 중 한 명이라는 프로아라는 분도 데려왔다. 물론 후유증도 있었다. "......." "......." "저, 에리아스." "네?" 나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면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버리는 에리아스. "......." "......." 에리아스와의 미묘한 침묵이라는 후유증. 제길! 에리아스는 다짐했다. 재현은 자신의 주인님이라고. 자신은 4대 수호신 중 하나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재현을 볼 때마다 그녀의 심장박동은 빨라지곤 했다. 남자 공포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는 첫사랑이었던 것이다. "회장님, 저희가 염려하던 부분이......" "흐으음." 회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자유도를 너무 강조한 탓이었을까? 그 덕에 괴물 하나가 탄생했는데도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베르자니아가 시공을 여는 순간 게임은 중단됩니다." "......." "그에게 죽임을 당한 유저들은 다시는 접속하지 못하니까요." "......." 알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르자니아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소멸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에게 죽으면 되살아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렇게 점점 시간이 지나다 보면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저는 아무도 없게 될 테고, 말 그대로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하아, 답답하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디재스터라고 불리는 그 존재라면 베르자니아라는 그 괴물과 상대가 가능할지도......" "디재스터?" "네, 게임 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유저입니다. 현상금 10억에다가 자연의 힘을 다루는......." "잠깐, 기다려 보게." "......?" 회장이라 불린 남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그 디재스터라는 직업이 게임에 있는가?" "무, 물론 있다고......." "나에게는 디재스터에 대한 직업 자체의 데이터가 없네. 분명 이 게임을 만들 때 제일 많이 기여한 제진 군도 내게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어." 도대체 이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12. 루팡 vs 민호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3대 현자 중 프로아라는 분이 자연의 힘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대략 1주일 정도? 금방 될 줄 알았던 나로서는 약간 의외였지만 뭐 그정도는 기다려도 상관 없다. 그나저나, "루팡?" "그거 엄청 오래된 이야기 아니야?" "응! 범죄를 예고하고 그 물건을 훔치러 온대!" "지금 그 루팡이 우리 한국에 와 있대?" "그렇대!" "우아!" "왠지 멋지지 않아?" "응!" 여자애들, 난리다. 루팡인지 뭔지 하는 도둑 분 때문이다. 아주 옛날, 루팡이라는 분이 계셨다. 그 분은 심심해서 경고장 카드를 좀 날리셨다. 그런데 계속 해서 카드질을 함에도 불구하고 경찰들이 그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유명해진 인물, 루팡. 아무래도 그런 루팡의 출펺에 이렇게 난리가 난 것이다. 그런데...... 난 무심코 민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민호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왠지 모르게 범죄 이야기만 나오면 네가 생각나서." "너무 순수해서?" "즐." 네가 너무 범죄적인 인간이니까. 도자기를..... 도난당했다! 그냥 도자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미를 살려 만든,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뽐내서 각 나라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하던 도자기이다. 대략 몇천억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세계에서도 인정한 유물이다. 나는 몰랐지만 바로 어제 경고장이 날라오셨단다. 그 덕택에 각국의 엘리트 경찰부터 시작해서 특수부대원들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루팡은 그자들을 농락하고 도자기 획득에 성공! 어찌 보면 정말 굉장한 능력이다. 지금이 무슨 옛날도 아니고 최첨단 시대에, 그것도 각국에서 파견된 엘리트들을 전부 따돌리고 훔쳐 가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별 관심 없다는 것. "형님." "......?" 또 저놈의 헛소리. 이번에는 뭔 일이냐? 민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왜?" "그 루팡 님이 예진 누님에게 한 방에 가셨나 봅니다." "......?" 이건 또 뭔 개소리냐? 루팡인가 뭔가 하는 놈이 내 천사에게 한 방에 가다니? 그렇게 이상하게 꼬아서 말하면 난 못 알아듣는단다. 다음 순간, 민호의 충격적인 한마디가 이어졌다. "경고장을 보내왔습니다. 예진 누님의 입술을 빼았겠다고요." "......." 와글와글. 교실에 도착하자 장난이 아니다. 이미 세계 각국의 경찰들의 배치가 모두 완료되었고 예진이는 철통같은 보안 속에 있다. 그 누구도 접근 불가라고 할까? "우와! 예진이, 부러워." "루팡조차도 예진이한테 반한 거야?" "입술을 뺏겠대. 낭만적이야!" 다들 조용하라고! 낭만적이긴 개뿔! 도대체 그 자식, 뭐 하는 자식이야! 솔직히 루팡이 무슨 짓을 하든 별 관심 없다. 하지만 예진이랑 관련된 일이라면 극도로 예민해지는 게 사실. 그때 당황한 예진이가 나한테 천천히 다가왔다. 그 모습에 경찰들도 그녀를 따라온다. 경찰 하나가 예진의 앞으로 나섰다. "어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그러면서 내 몸을 탐색하신다. 뭐냐? 설마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뭐 변장도 잘한다고 하니 이쯤은 이해해 줘야겠지. 한편, 내 앞에 선 예진은 여전히 당황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재현아........ 어떡해." "으응?" "오늘 밤 9시에......" "아." 저 한쪽에서는 낭만적이라는 등 이상한 소리를 하고 계시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정체 모를 도둑에게 입술을 빼앗기기 싫은 건 당연하다. 아니, 뺏기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그런 예진을 향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지켜줄게." "고, 고마워." 내 말에 예진이는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걱정 마, 예진아. 내가 지켜 줄게! 그리고 무엇보다...... "민호." "네에." "작전을 개시한다." "그러죠." "루팡 포획 작전." 내게도 루팡인가 뭔가 정도는 가볍게 밟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범죄학의 전설이라 불리는 민호 사마가 계신다. 예진이의 집. 역시 천사가 사는 곳답게 냄새가 향기롭다. 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 여기 온 목적을 생각해라. 지금 난 저질스런 루팡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서 예진이의 입술을 지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참고로 말하면 예진이의 집은 제법 잘사는 편이다. 집이 1,2층 합쳐 130평 정도 된다. 그리고 혼자다 보니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그래서인지 내가 나타났을 때 날 보는 부모님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고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어쩄든 평소라면 절대 불가능했겠지만, 예진이 내가 엄청나게 뛰어난 보디가드라고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경찰들도 수없이 집에 깔렸기에, 난 부모님의 눈치를 보면서도 성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것도 예진이의 방에 말이다. 크호호호호. "......." "......." 한편, 아기자기하게 꾸민 예진이의 방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는 우리들. 어색하다, 어색해. 심히 어색하다. 벌컥. 그때 갑자기 예진이의 방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젊었을 때 상당한 미남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 같은 예진이의 아버님이 싱긋 웃으며 서 있었다. "문은 열어 놔야지?" "그래야죠." "후훗." ......이러면서 가신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에 예진이는 그만 당황했다. "미, 미안....." "미안하긴........" "......." "......." 그리고 또다시 침묵. 우어어! 미치겠다, 미치겠어! 분명 지난번 예진이가 날 간호하느라 우리 집에 단둘이 있었던 적은 있지만, 그때는 우리 집이었고 여기는 예진이의 방. 뭔가 느낌이 너무 다르다. "형니임." "......." "......." 그때 창문에 매달려 나를 부르는 민호 군. 난 민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긴 2층인데?" "밧줄 타고 있습니다." "......그러니?" "네." 왜 굳이 밧줄까지 써서 창문에 매달려 있는 거냐? 이렇게 묻고 싶다. 하지만 물어봤자 또 뭔가 이상한 대답이 들려올 터. 그런데 무언가 위화감이 든다. 분명 저런 이상한 행동. 저런 미친 행동은 민호가 평소 하던 짓이 틀림없다. 목소리나 말투도 민호 그 자체다. 하지만 뭔가 고차원적으로, 민호와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 난 얼굴 물었다. "네놈이 제일 좋아하는 책은?" "......." 말문이 막혀 버린 민호. 그리고 잠시 후. "......." 파앗. 그대로 2층에서 떨어졌다. 난 다급히 창밖을 내다보며 외쳤다. "방금 떨어진 놈이에요!" "잡아!" "그 자식이야!" "어서!" 나의 외침에 녀석이 방금 전 뛰어내린 자리로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다. 이런 제길....... "재, 재현아. 무, 무슨 일이야?" 예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난 그런 그녀에게 설명했다. "민호로 변장해 침입하려고 했던 것 같아." "미, 민호 님으로?" "응. 아주 대단해. 그런 고차원적인 미친 행동이 가능하다니." 나도 깜빡 속았다. 흉내 내고 싶어도 흉내 낼 수 없는 민호의 고차원적인 미친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다니. 하마터면 저 자식을 예진이 옆에 둘 뻔했다. 그런데....... "......진짜 민호는?" 난 당장 민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들려오는 황당한 목소리. - 집입니다. 제 집으로 야설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기쁘군요. "이 등신아! 그건 미끼잖아!" -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넘어가면 어떻게 하자고!" - 분명 저로 변장해서 형님에게 접근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밧줄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가는 유치한(?) 방법으로요. 이 자식........ 다 본 거 아냐? 어떻게 방법까지 다 아는 거지?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 하지만 저와 형님의 사이는 끈적 미묘하죠. "......죽고 싶니?" - 아뇨. 어찌 됐든 전 형님이 가짜로 어설프게 변신한 저를, 제가 좋아하는 야설의 제목을 물어봐서라도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 뭐, 지금 가죠. "......." 이런 태평한 자식이 있나! 알아보기는 개뿔! 열나 완벽하게 분장해 놔서 못 알아볼 뻔했다가 단지 이상한 느낌에 물어본 거라고! 근데 이 자식은 분명 집에 있다면서 어떻게 그 자식이 창문에 있었는지, 내가 뭘 질문해서 정체를 알아냈는지를 아는 거지? 왠지 할 말이 없다. "형님이 울면서 애타게 찾은 귀염둥이 여기 왔습니다." 그때 휘적휘적 태평하게 예진이의 방으로 올라오는 민호 군. 분명 밖에는 경찰이 잔뜩 깔렸을 텐데? 지금은 그 누구라도 예진이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경찰들이 곱게 보내 줄 리 만무할 터. 근데 얘는 그냥 제 집 오듯이 왔다. 난 싱긋 웃으면서 민호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민호가 말했다. "저 진짜입니다." "......." "상큼한 미소는 제 전용이니까요." "......." "저의 모든 걸." 진짜 민호다. 제대로 미쳤다. 아까는 약간 덜 미쳐 보여서 내가 눈치를 깠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미쳤다. 확실히 민호다. 참, 사람 판별하는 방법도 이상하다. 문득 민호가 입을 열었다. "저질이군요." "......." 갑자기 저질이라니? 나 말이냐? 이 자식, 오자마자 시비 거는 거냐! 하지만 그 말은 나를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그는 다시 유유자적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창밖을 내다보며 한마디 툭 던지신다. "그렇게 붙어 있으면 힘들지 않으신가요?" "......." "힘들 텐데요." "도대체 무슨 말?"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 대는 민호 옆으로 다가가 묻자, 그 물음에 민호 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까 전 저로 변장해서 창문에 붙어 올라오는 저질스런 작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래.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분명 집 안에서 루팡인지 뭔지 하는 놈이 미끼로 던져 준 야설에 히죽거리고 있었을 놈이 여기 상황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거냐? 이런 내 물음에 민호는 답했다. "그냥 대충 감이죠." "......." 감으로 그렇게 때려 맞히는 게 가능하니? 그때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형님과 저의 끈적끈적한 관계로 인해 정체는 밝혀졌습......." 퍼억! 난 그대로 손을 들어 민호의 뒤통수를 갈기고 말았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한 번만 더 끈적이라는 단어 남발하면 묻어 버린다." "명심하죠." "......." 이 자식이, 가만히 있으니까! 왜 자꾸 기분 나쁘게 네놈과 날 끈적끈적한 사이로 모는 거냐? 남들이 들으면 충분히 오해할 만한 대사다. 진짜 기분 나빠. "어쨌든 형님은 그분이 가짜라는 걸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그분은 2층에서 뛰어내렸고, 형님은 경찰들에게 소리쳤죠." "그렇지." "하지만 그건 페이크였습니다." "......?" "그저 뭔가 다른 것을 떨어뜨렸을 뿐입니다. 진짜는 벽에 붙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원래 사람 심리가 똑같은 곳을 되돌아보지 않는 습성이 있거든요. 안 그래요, 루팡님? 지금 8시 56분이니 4분 남았군요. "......." 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왜냐고.......? 창밖에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허겁지겁 사라지는 한 인기척을 느꼈으니까. 나는 민호를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 정말......." "칭찬은 사양하죠." "어디서 온 외계 생물이냐?" 말도 안 된다. 저, 저 남자는 뭐지? 도대체 어떻게...... 분명 자신은 완벽하게 그림자와 동화되었다. 이건 그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여태까지 수백 건에 달하는 도둑질을 해 왔지만 처음으로 실패했다. 너무나도 맥없이. 분명 저 남자로 변장하기 위해 나름대로 완벽한 조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일단은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다. 느낌이 좋지 않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콰앙! 갑자기 그가 있던 곳의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느새 순식간에 주위를 포위한 경찰들. 그, 루팡이 당황해 외쳤다. "무슨 일입니까?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이건 옳지 않은......." 그때,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앙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 제른, 나이 28세. 공식 FBI. 하지만 이 시간, FBI의 제른이라는 남자는 미국의 한 건물에서 발견되었다. 그럼 여기에 있는 제르는 누구일까?" "......." "아니, 제르라고 부르면 무안한가? 루팡.......?" "......." 잡혔다. 허얼. 뭐지? 뭐지? 그 루팡인가 뭔지 하는 녀석이 이렇게 쉽게 잡히다니, 뭔가 이상하다. 그때 민호가 두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정의는 승리합니다." "......." "정의는 아름다우니까요." 네놈이 정의 타령할 레벨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아까 그 미국 아저씨가 너한테 뭐라뭐라 하던데, 무슨 얘기 한 거냐?" "아, 별거 아닙니다. 그냥 자그마한 정보를 하나 드렸죠." "정보?" "뭐 '우연히' 알아낸 정보입니다." "......." 13. 보조 직업 이 게임에는 보조 직업이라는 게 있다. 당연히 주 직업은 첫 번째로 배운 것이고, 보조 직업은 레벨 400 이상이 배우는 직업이다. 그리고 내 스텟을 살짝 공개하자면....... 【아이디: 크레이스 레벨: 1,858 직업: 자연 타이틀: 혼돈조차도 갈라 버릴 정도로 재수를 가진 당신, 어떤 말이 필요하리, 당신이라는 존재는...... 엄청나다!(모든 능력치 10,000 상승) HP/MP : 48,300/82,120 힘: 2,500 체력: 1,240 지력: 1,550 운: 10(-???????) (현실에서의 능력을 보정 받는 상태입니다. 따로 표시하지는 않습니다.)】 .......이렇다. 그런니 400은 기본이라는 것. 근데 한 가지 거슬리는 건, 저 운 스텟. 마이너스 ????????라니, 심히 기분 나쁘다. 도대체 저 물음표에는 어떤 미스터리가 숨어 있으려나. 에휴. 어찌 됐든. 보조 직업이라는 걸 배우면 그 직업의 스킬들을 적은 마나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이 게임 자체가 자유도를 최대한 살렸기 때문에, 검사가 마법을 쓰거나 심지어느느 정령을 다루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10배 이상의 마나가 든다는 것. 그리고 기술이 고급이 될 수록 최대 20배의 마나가 소모된다. 이러다 보니 검사가 마법을 배웠다 하더라도 7서클 이상 마법을 쓰면 일반 마법사들의 20배 이상의 마나가 소모되는 것이다. 엄청 화려한 장비를 갖추지 않은 이상, 마법을 배워도 소모되는 양때문에 거의 사용을 못하는 게 사실. 그런데 여기서 보조 직업을 갖게 되면, 그 직업을 수행할 때에 한해서는 소모되는 마나의 양이 2배가 된다. 주 직업에 비해서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20배보다는 2배가 훨 낫다. 내가 익힌 마법 중 8서클 마법 헬 파이어가 대략 500 정도 소모된다. 그렇지만 다른 직업이 사용할 때는 약 1만 정도? 그리고 데미지 또한 지능의 영향을 받다 보니...... 뭐 어찌 됐든 뭔가 미묘하다. 나야 워낙 스텟 자체가 다 막장이고 마나의 통도 너무 커서 상관은 없다만. 3대 현자가 자연의 힘을 끌어올리기 위해 뭔가 준비하는 1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보조 직업을 하나 가질 예정이다. 그건 바로....... "프리스트!" 과거를 돌아본다.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 덕분에 10억짜리 대형 범죄자라는 타이틀도 얻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야만인은 되기 싫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마음으로 동료들의 안전을 지켜 주고 축복을 내려 주는 프리스트를 하려는 것이다. "풋." "......." "푸푸풋." "......이 자식이! 왜 웃어!" 그런 나의 각오를 무색하게 만드는 민호 군. 내가 윽박지르자 민호가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꾸했다. "웃겨서요." "뭐가 웃겨!" "파괴 전문이신 형님이 프리스트라니요." "......." "차라리 지나가던 마왕이 프리스트를 하는 게 더 아름답겠군요." "......." 이 자식! 지금 그 말을 풀이하자면, 내가 마왕보다 더 나쁜 놈이라는 거냐? "당연하죠." "......." "솔직히 말해서 마왕들이 아무리 난리 쳐도 형님만큼 잘 파괴하지는 못하니까요." "......." 민호의 염장질이 있긴 했지만 난 할 것이다. 프리스트를! 오직 버프 마법과 축복을 통해 파티원들에게 도움을 주고, 지나가는 유저들에게도...... 후훗. 물론 내 마스크로는 당장 난리 날 게 분명하니, 일단 이리스의 마법으로 마스크를 좀 변형하자. ......착한 일을 하려고 해도 이렇게 변장해야 하다니, 뭔가 슬프군. 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금부터 열심히! 이미 스킬은 다 배워 둔 상태다. 물론 고급 스킬은 없고 기본 스킬뿐이지만, 내 지능지수에 의해 스킬 레벨이 1인데도 불구하고 능력치 상승은 거의 예술이다. 힐 수치 역시 그렇다. "님, 저 버프 마법 좀." "저...... 힐 좀 걸어 주시면 안 돼요?" "님아! 힐 좀 걸어 주세요!" 프리스트 로브를 걸친 나를 보고 마구 달려오는 유저들. 그 모습에 난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죠. 후훗." 그러곤 힐과 버프 마법을 난사해 주었다. 그러자..... "우와! 어, 엄청난 고렙?" "피 차는 거 봐!" "능력치가! 10배 이상 올랐어!" "초고렙인가 봐!" "블레스 스킬 레벨이 얼마예요?" 블레스 스킬. 1이다. 지금 배웠는데 뭘 바라는 걸까? 거듭 말하지만 무지막지한 스텟으로 인해, 상상도 못할 스킬이 발휘되는 것이다. 스킬 레벨은 모두 1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착한 일을 하니 왠지 뿌듯? 흐흐흐. 1시간 후. 난 근처 동굴에 숨었다. 왜냐고? "허억! 웬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실 프리스트라는 직업 자체가 마나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 전의 나처럼 아무한테나 막 버프나 힐을 걸어 주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정말 착한 마음에서, 힐과 버프를 난사해 주는 소리를 듣고 유저들이 우르르 몰려든 것이다. 처음 한 10분 정도는 괜찮았다. 마나도 충분했다. 하지만 20분, 30분이 지나자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40분이 지나자 지쳐서 그대로 날아 버렸다. 한마디로 도망친 것. ......무섭다. 버프에 목말라 하는 유저들. "때려 부수는 게 편하죠?" "......." 그때 내 앞에 나타나 조잘거리는 민호. 그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 봤자 형님의 본성은 파괴입니다." "......." 민호의 말 대로다. 정말 부수는 게 이렇게 편한 일인지(?) 오늘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놈의 말에 끄덕여 주기는 싫다. 난 지금 반성하기 위해 착한 일을 하는 거다. 그래, 착한 일! 프리스트라는 직업을 내가 너무 가볍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제일 안전한 곳에 서서 버프만 걸어 주면 되는 게 프리스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 당신, 프리스트 처음?" "아, 제대로 해요!" "아, 짜증나!" "이게 뭐야!" "아, 제대로 안 걸어요?" "......." 파티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알았다. 이번에는 6인조 파티가 가입했다. 사냥할 몬스터는 오우거. 상당히 강력한 몬스터로 알려져 있지만 파티만 잘 이루면 생각 외로 쉽게 잡을 수 있어, 이런 단체 파티에서 선호하는 몬스터다. 그 중 프리스트라고 하면 그 어떤 직업보다도 선호도로는 1등이다. 그만큼 파티 사냥의 꽃이라고 할까? 뛰어난 능력치로 인해, 허접한 스킬 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능력치 상승효과를 보이자 그걸 본 파티원들은 감동해서 황급히 날 캐스팅 했다. 하지만 난 보조 마법은 처음이다. 그냥 뒤에서 힐 한 방 날려주고 보조 마법 걸어 주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상대방의 움직임도 느리게 만들어야 하고, 순간적으로 검날을 강력하게 만드는 마법도 시전해야 하고, 방어막도 쳐 줘야 하고, 한마디로 열나게 바쁜 직업이다. 그런 직업을, 처음 해 보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퍽! 퍼퍽! "꺄아!" "으악!" "크윽!" 콰앙! 잠깐 잡생각 한 번 해 준 동안, 어느새 몰려든 오우거 2마리에게 한 번에 몰살당한 파티원들. 멋지군. 아니, 이게 아니라. "나 혼자?" 하필 인적도 드문 곳에서 나 혼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쿵! 쿵! 그때, 아주 깜찍발랄한(?) 발소리를 내며 내게 달려오는 오우거 2마리. 나는 고민했다. 지금 나는 연약한 프리스트다. 분명 프리스트 노릇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또다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럼, 도망?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파앗. 내게 달려들어 오던 몽둥이 두 개를 검 한자루로 막아선 존재가 나타난 건. 그리고, "플레임 익스텐딩!" 뒤쪽에서 너무나도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너무 익숙하다? 내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마법 영창으로 생겨난 네 개의 불덩어리가 오우거 두 마리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앙! 곧 한 마리의 오우거를 향해 몰아쳐 갔다. 그러자 한 마리 즉시 다이.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두 개의 몽둥이를 막아 준 그분이 나머지 오우거의 목 또한 순식간에 베어 버린 것이다. 상당한 실력자들이다. 내가 인정해 줄 정도니까. "괜찮으세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난 그 물음에 멍해 있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고? 분명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이건, 이건...... "예진이?" "제, 제 이름을 어떻게......." "......." 나도 모르게 예진이의 이름을 부르자 당황하는 그녀. 나도 당황스럽다. 아, 지금 나는 폴리모프 마법으로 변신한 상태다. 하지만 예진이도 곧 내 정체를 알아차렸다. "폴리모프?" 그때........ 스르륵. 어느새 내 순결한(?) 목에 닿은 검 한 자루. 검의 주인공은 바로 그 분이다. 예진이와 항상 파트너로 다니시는 그분. 예진이와 미모가 비등하고 성격이 너무 차가워 보여서 내가 임시로 이름을 붙여 준 얼음공주님. 뭐, 나영이라고 했던가? 그분이 내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도 예진이를 스토킹하는 남자 중 하나인가요?" "......." 저 한마디에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저렇게 후드를 눌러쓰고 다녀도 예진이를 쫓아다니는 인간말종 같은 놈들이 많다는 것을(너는 아니냐?). 아니, 그런 추악한 영혼들이 있나. "다시 물을게요. 예진이한테 무슨 목적이죠?" "저, 전 그냥 순진한 프리스트......" "전 농담을 좋아하지 않아요. 예진이의 목소리만으로도 정체를 알 정도면......." "저, 저기 나영아. 너무 심한........" 그때 우리 천사가 나서서 말했다. 하지만 나영 님은 여전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예진아, 이런 늑대 같은 남자에게는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어." "......." "나에게 맡겨 줘." "......." 나영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는 예진. 나영의 차가운 눈빛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무슨 목적인가요?" "저, 전 정말 억울한데요......" "말로는 안 될 것 같군요." 저, 정말 왜 이러세요! 전 정말 억울하다고요! 나름대로 착한 일 한번 하려고 변신해서 프리스트 노릇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요! "......크아악!" "......!" "......!" 그때 오우거의 주 서식지인 페란 숲이 통째로 날아갈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나영이 황급히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뿐만 아니라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예진이도 마찬가지였다. 나영이의 친절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 이렇게 친절하게 한마디 해 주시니 무지 감동하겠다. 잠시 후, 두 미소녀를 긴장하게 만든 주범이 짜잔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8미터에 달하는 크기. 오른손에는 4미터에 달하는 몽둥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오오, 무기가 제 몸의 반이야. 저런 엄청난 무기를 봤나! 그 모습을 본 나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트윈네이거 오우거......." 개는 뭐 하는 오우거? 내가 몬스터에 대한 지식은 좀 없는 편이다. 아니, 좀이 아니라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내가 아는 것들이라고 오크, 트롤, 오우거, 이 세 분 정도? 물론 더 있기는 한데 저런 변종 몬스터까지 알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아서 말이다. "나, 나영아......" 몬스터를 본 예진도 당황해서 나영이의 이름을 불렀다. 나영이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이길 수 없어." "......." "오우거 중에서도 레전드 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야, 심지어 오우거 보스보다 훨씬 강해." 아니, 이렇게 친절한 설명을! 그럼 간단히 말하자면, 저 거대한 오우거 님은 레전드 급으로 분리된 오우거! 한마디로 전설의 오우거라는 거다. 그 힘은 오우거 보스를 뭉개 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한마디로 막장을 달리는 몬스터라는 거다. 스으윽. "꺄악!" "......!" 그때였다. 8미터에 달하는 오우거가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순식간에 움직여 예진이 앞으로 온 것이다. 아마도 마법사로 보이는 예진이를 제거하려는 속셈인 듯했다. 다음 순간 녀석의 무지막지한 몽둥이가 예진이를 향해 내리쳐졌다. 난 그대로 엄청난 스피드로 달려들어 예진이를 감싸 안았다. 퍼억! 하지만 한발 늦었던 걸까? 그 어마어마한 몽둥이에 내 어깨가 작살 난 것이다. 아주 산산조각 나 버렸다. "크으윽......." "괘, 괜찮으세요?" 예진이 다급한 어조로, 자신을 구해 준 나에게 물었다. 난 괜찮아. 너만 안 다쳤다면.......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상처. 예진의 발목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예진 님의 발목이. 예진 님의 발목이. 예진 님의 발목이. 예진 님의 발목이........ 예진 님의....... "크오오!" 다음 순간, 나는 으스러진 어깨는 아랑곳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레전드 급 오우거를 향해. 그리고....... "하이킥!!" "......." "......." 나영과 예진은 할 말을 잃었다. 전설이라 불리는 오우거가 쓰러지고 있었다. 한데 쓰러지게 된 과정이 어이가 없다. 단 한 번의 발차기. 다른 것은 없었다. 그저 프리스트로 보이는 남자의 하이킥 한 방에 레전드 급 오우거가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러운 마나의 일그러짐으로 폴리모프 마법이 풀려 버렸다. "......." "......." "......." 나와 예진, 나영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하필 지금 폴리모프 마법이 풀린 거냐? 응? 왜 하필.......! "재.......현이?" "......." 여신님이 물어보셔도 할 말이 없다. 예진이가 황급히 내게로 다가와 물었다. "어깨 괜찮아?" "으응, 뭐......." "괘, 괜찮아 보이지 않아. 어서 치료하자." "......." 치료라면 또 내가 힐 좀 한다. 이래 봬도 프리스트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진이의 말에 나는 힘을 쓸 줄 모르는 프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아니, 그냥 뇌리에서 지워 버릴래. "내가 부축해 줄 테니 어서 마을로......." 그러면서 다치지 않은 쪽 발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나는 천국을 보았다. 아아앙~ 온몸이 나른해지는 예진이의 향기....... "프리스트 아닌가요?" "......." "프리스트 옷을 입은 걸로 봐서 보조 직업은 분명 프리스트인 것 같은데요." "......." 그때 날카롭게 한마디 던지시는 나영 님. 차갑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아. 난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프리스트 옷을 입고 변명해 봤자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프리스트는 맞는데요, 힐은 못 써요." "......."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나영이.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설픈 거짓말이긴 했다. 지나가던 유치원생도 안 믿을 구라다. 프리스트가 힐을 못 쓴다니, 그걸 프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게 말이 되나? 하지만 본인이 안 배웠다는데 어찌하겠는가? 내 스킬을 훑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재, 재현아. 내가 알기로 프리스트는 힐을 배워야 한데, 언제 시간 나면 꼭 배워." "......." 역시 예진 여신님. 제 말을 믿어 주신 겁니까? 이윽고 우리는 근처 마을에 도착했다. 나영 님의 눈길이 워낙 달짝지근해서 편안한 마음의 여행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진의 부축을 받았다는 걸로 만족하자. 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사실. "아차!" "왜 그래?" "아, 아니야." 난 당황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면 분명 나의 현상금 포스터가 붙어 있을 테고, 그 장본인이 바로 옆에 있다면 아무리 눈치 없는 예진이라도 알아챌 것이다. 난 다급히 마을을 나가자고 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아악! 모든 게 끝났어! 나의 순수한(?) 이미지도, 청초한(?) 이미지도......! 분명 오해하겠지. 하지만 상황은 내 걱정은 아랑곳없다는 듯 흘러갔다. "왜 그래?" "......."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아니." .......없다. 후드 속에서 눈을 번쩍이면서 부리나케 주변을 살펴봐도 없다. 분명히 없어. 내 영광의 포스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라면 제법 붙어 있을 터인데, 대체 어디에 붙어 있단 말인가. 문득, 민호가 내게 속삭인 말이 떠올랐다. '절대 눈치 못 채게 해 드리겠습니다.' .......진짜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응? 예진과의 행복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민호와의 만남을 서둘렀다. 그 면상이 보고 싶어서는 절대 아니고, 단지 그놈의 신기한 마법이 어떤 건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저를 애타게, 눈물 나게, 사랑스럽게 찾고 계시나요?" "......." 그때 알아서 나타나 주시는 민호 사마. 덕지덕지 붙은 그 이상한 수식어들은 제외하고, 지금 중요한 건....... "너, 너 무슨 마법을 쓴 거냐?" "......?" "분명 오늘 예진이랑 한 마을에 들어갔는데 내 포스터가 안 보였어!" 내 포스터가 안 보였다. 왠지 평범한 유저가 된 듯한 짜릿한 기분은 일단 접어 두고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 드릴 용의는 있습니다." "......." 그 말에 난 깨달았다. 녀석이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을. 물론 예측은 했다. 녀석이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를 도와줄 놈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나는 약간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들어 보기는 하마." "들어준다 약속하지 않으면 말씀 못 드립니다." "......일단 말해 봐." 분명 평범한 요구는 아닐 터, 헛소리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 궁금하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내 포스터가 모두 사라진 거지? 그때, 민호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저를 안아 주시죠." "......." "그게 조건입니다." "너, 더 미쳤니?" "조크입니다." "......." 제발 그런 소름 끼치는 조크는 하지 말아라. 부탁한다. 저를 안아 주시죠. 이 말을 듣는 순간 1억 마리의 바퀴벌레가 온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단 말이다. 농담 하나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는 정말 사양이다. 민호가 입을 열었다. "아포라 여신이 덮침을 당하는 장면을 끝까지 들어 주시죠." "닥쳐! 안 해!" 저질. "12월 25일" 자신이 저 세계를 없앨 날이다. 인간들은 이날을 크리스마스라 부르면서 즐거워한다. 이런 날에 최악의 불행을 맛본다면 인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정말에 허우적거리겠지. "정말, 벨리나크......!" 한편 그런 벨리나크를 본 아포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수하게 전투만을 좋아했던 그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악한 마음을 품게 했단 말인가! 그래, 신의 힘이 개입되어서 그 세계를 지워야 한다는 억지는 그래도 받아 줄 만하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사람들이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다니! 자신이 알던 벨리나크는 저런 악한 마음을 가진 신이 아니었다. 한편 그런 그녀의 부름에. "왜 그러지?" 그는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아포라가 당황한 듯 물었다. "제가 왜 이러는 지 이유를 모르시나요?" "글쎄, 모르겠군." "다, 당신...... 정말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죠?" "......." "당신이란 존재는 이러지 않았잖아요.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죠.......?" "알고 싶나?" "......." "아니, 알고 있지 않나?" 벨리나크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포라는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다. 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악한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난 그 미소랑 존댓말이 생각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증오를 느낀다. 그 가식적인 모습으로 너에게는 사랑을.......심지어 '그분'에게는 신뢰를....... 난 정말 참을 수 없다." "......." "이게 내가 이렇게 된 이유다. 그럼." "벨리나크......." 쓸쓸히 등을 돌리는 모습을 바라볼 뿐 아포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4. 커플 "오 마이 갓!" 우리 집에서 울려 퍼지는 정체 모를 함성(?) 절대 좋아서 내는 게 아니다. 경악에 가득 찬 함성인 것이다. 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TV를, 아니 정확히는 TV 속의 날짜를. 재차 확인해 봤지만 날짜는 12월 8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 오늘이 12월 1일 아니었던가? 그렇게 철저하게 믿던 나에게 12월 8일이라는 숫자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날짜 좀 착각한 것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날짜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다. 생일 때문이다. 나의 귀염둥이, 예진이의 생일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그녀의 생일은 12월 9일, 그 날이 바로 여신이 탄생한 날이다. 그만큼 값진 날. 당연하지만 멋진 선물은 필수다. 천천히 멋진 선물을 준비하려던 내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니, 어떻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1주일이나 오차가 생기느냔 말이다! 물론 TV나 휴대폰, 기타 등등에 관심을 안 두긴 했지만, 이렇게 크게 오차가 나다니. 나란 인간도 참........ 하지만 좌절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어서 그녀의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 나는 지갑을 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달랑 1,000원짜리 한 장이 나를 반기신다. 요리조리 살펴봐도 단돈 1,000원! 단돈 1,000원 님만이 나를 반긴다. "아아악!" 난 비명을 질렀다. 이럴 수가! 이건 아니야! 1,000원이라니! 물론 예진의 천사 같은 성격상, 농담 안하고 1,000원짜리 선물 하나 해 줘도 너무나도 고맙게 받아 줄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1,000원짜리 선물이라니, 그건 말도 안된다. 그렇지만 돈이 없어! 스으윽. 그때, 누군가 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밑에서. 난 소리가 들려온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무언가가 손을 쭉 내민 채 기어 나오고 있었다. "제발 평범하게 나타나렴." "그럼 신선하지 않잖습니까." "......." 그래, 신선하지는 않지. 하지만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오는 건 너무 과도하게 신선하지 않냐? 나니까 이러지 다른 사람 같으면 너무 놀라 기절할 거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런 짓 좀 하지 마라. "고민이 있습니까?" 민호가 내게 물었다. 난 그런 그의 질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 예진이 생일인데 돈이 없어......." "그렇군요." "......." 아니, 그렇게 수긍하면 고민을 말한 사람 입장에서는 무지 난감하잖아? 뭐, 저 자식한테 뭘 바라겠느냐만은. "제가 돈 많이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해 드릴까요?" "......." 그 말에 나는 잠시 주시했다. 그러고는 곧 녀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즐, 됐어. 네놈이 말하는 일자리라고 해 봐야 분명 이상한 거겠지." "흐으음." 다른 사람이 일을 주선해 준다면 또 몰라. 저 자식이 일을 주선해 준다는 것 자체가 뭔가 구린 냄새가 팍팍 풍긴다. 그만큼 저놈에 대한 나의 신뢰도는 제로에 가깝다. 민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짜릿한 일인데요?" "더 하기 싫다." "순수한 일입니다." "네놈의 순수 기준은 잘 알거든?" 네놈의 순수함의 기준은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 말만 순수지 실체를 드러내면 순수와는 정말 거리가 먼 일이다. 이런 내 말에 민호가 안타까운 듯한 어조로 되물었다.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당연한 걸 왜 묻니?" "슬픕니다." "슬퍼하렴." "......." 이제 나도 점점 민호틱해지나 보다. 이렇게 사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하지만 그건 저 민호에게만 해당된다는 걸 알아 줬으면 한다. 어차피 저놈은 절대 나락으로 떨어질 인간이 아니니까. 민호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야기라도 들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사절, 사절. 내 귀가 썩을 거야." "들어 봐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안 들어." "이거......" 그 순간 민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파란 배춧잎(?)이다. 순식간에 가로채는 나의 손놀림. 그리고 난 인심을 쓴다는 듯 말했다. "말해 봐." "역시 저질이군요." "......닥쳐!" 인간으로서 당연한 거라고! "제가 추천해 드리는 일은 대행 알바라는 겁니다." "대행 알바?" "네. 무언가를 대신 해 주고 돈을 받는 아르바이트죠. 예를 들어. 하루 동안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되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결혼식장 하객을 해 준다거나 숙제를 대신 해 주는 등의 일이죠." "......." 들어는 봤다. 꽤나 수입이 짭짤한 일자리라고 말이다. 뭐 그렇게 건전한 일은 아니지만 불건전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숙제 대행이라니, 머리 쓰는 건 절대 사양이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 그 의미는 뭐지? 그럴 것 같았다니! 듣는 입장에서 뭔가 상당히 거슬리는....... "그래서 미리 준비해 놨습니다." "으응?" 뭘 준비한 거냐? 설마 이 자식, 내가 승낙할 걸 알고 벌써 일을 벌여 놨다는 거냐? 뭐 이런 어이없는 자식이 다 있어! 내가 배춧잎 한 장에 금방 넘어갈 거라고 확신했단 말이냐? 크으윽. 뭔가 씁쓸하다. "들어오시죠." 민호가 문 밖을 향해 누군가를 부르자 갑작스럽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거냐? 이제 와서 거절하기도....... "엥?" 하지만 난 집 안으로 들어온 그분, 아니 그녀를 보고 그만 굳어 버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 그리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얼굴. 그뿐만이 아니다. 몸매부터 시작해서 모든 남성분들의 이상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분의 미모는 끝내 준다.........가 아니라. "누나?" "대행 알바 한다면서?" "그, 그렇기는 한데......." "그럼 내가 오늘 너 고용할게." "......?" "데이트할 남자로!" "......." 당황스럽다. 도대체 누나가 왜 이런 걸........ 솔직히 말해 누나가 데이트하고 싶다 하면 전국의 모든 남자들이 달려올 것이다. 아니, 이건 좀 오버고, 약간 미친 녀석들은 어마어마한 거금을 주고라도 하려는 것이 바로 나래 누나와의 데이트다. 그런데 내가 오히려 돈을 받고 누나와 데이트를 하다니.......! "누, 누나. 이건......" "응? 왜 그래?" "아니, 그러니까...... 누나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무료로 데이트 가능한데 굳이 돈을........" "......?" "데이트만 하는 줄 아는 거야?" "엥? 그럼 뭐.......?" "오늘 재현이는 내 남자친구로 고용된 거야." "......." "남, 자, 친, 구, 말야. 헤헤." 두근두근. 정말 미치겠다. 평소에도 가끔씩, 아주 가끔씩 그냥 아는 누나와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나래 누나와 함께 논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엄연히 나래 누나가 나를 고용(?)해서 남자친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악!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이건 엄연한 일이다. 일! 그리고 나의 공주님을 위해 하는 거야. 이상한 생각은 금지다! "아." "......." 그때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전 사 온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떠서 내게 먹여주려는 나래누님. 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저, 저기, 이건......" "남, 자, 친, 구." "......." "당연히 하는 건데?" "알았어요. 아......." 난 그 말에 그냥 입을 벌렸다. 내 입속으로 차가우면서도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들어왔는데, 그와 동시에 살기도 마구 느껴진다. 하지만 난 이제 익숙하다. 주변의 이 살기. 남자든 여자든 금방이라도 나를 구워 드실 것 같은 저 눈빛들. 아잉, 멋져. 그렇게 나와 나래 누나는 모든 사람이 100프로 연인이라고 생각할 법한 하루를 보냈다. 예를 들어, 팔짱 끼고 다니면서 속삭이거나, 찰싹 붙어 거리를 다니거나, 극장에서 손 꼭 붙잡고 영화를 본다거나, 어쨌든 진짜 연인들이 할 건 다 했다. 물론 그 덕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맛봐야 했지만. 아무리 알바라고 했지만 이런 엄청난 미녀와 연인 같은 데이트를 하는 상황은 진짜 견디기 힘들다. 물론 내게는 예진이가 있으니 딴 맘은 정말 안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사건은 발생하고 말았다. 집이 부산이어서 하룻밤만 자고 가겠다는 나래 누나를 우리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하필 오늘, 이 추운 날 우리집 앞에 서 있는 분이 계셨다. 그리고 난 그분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참고로 지금 상황을 묘사하자면, 나래 누나가 춥다면서 내 팔짱을 낀 채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그뿐 아니라 내 주머니에 손까지, 게다가 둘이 함께 우리집으로 들어가려는 모션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악! "......." 우리 집 앞에 서 있던 그녀, 예진이가 나와 나래 누나를 보더니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 더듬거리며 말했다. "오늘 학교 안 왔기에 호, 혹시 아픈가 해서 와, 와 본 거야 아, 안 아픈 것 같네. 그, 그럼 나 갈게." "자, 잠깐! 여기는 오해가........." "......."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진은 뒤돌아서 뛰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나래 누나에게 외쳤다. "누나! 먼저 들어가 있어요!" "......."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래 누나를 조심스럽게 떼어 내려 했지만 누나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 "누나?" "싫어." "저, 저기 지금 급한 일이......" "......." "누나, 갑자기 왜 그래요?" "......." 누나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싱긋 웃더니 말했다. "장난이야, 파이팅!" "고마워요!" 난 누나의 응원을 뒤로한 채 열심히 달렸다. 예진 님, 오해예요! "......." 나래의 눈가에 자그마한 눈물방울이 맺혔다. 가슴이 아프다. 부서질 것같이 아프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아픈 것일 줄이야. 항상 재현만을 좋아했던 나래에게 지금 재현의 행동은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잠시 후, 나래가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애써 웃음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나답지 않은 걸.......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아. 절대........." 그녀는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저, 저기, 예진아." 난 조심스럽게 예진이의 팔목을 잡아 세웠다. 하지만 이런 내 부름에도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허억! 제길,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게 분명하다. 이런! 왜 하필........ 난 더듬거리며 애써 설명했다. "진짜 만날 이 말만 해서 미안한데, 진짜 오해야, 그러니까......" "......." "......." 으윽, 알 수 없는 침묵. 나는 다시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 나래 누나랑은 오래 알던 사이고, 오해하지 말아 줘. 그리고 방금 전 그건....... 음........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기 좀 그렇긴 한데, 누나가 갑자기 남자친구 역할을 해 달라잖아. 사실 나, 네 생일인데 돈이 없어서........ 그래서 급하게 일을 찾다 보니 그렇게......." 마구 횡설수설하는 나.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으아악!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한 건 모두 진실이다. 100프로 생과일주스 같은 진짜다. 다음 순간. 덥석. "......!!" 누군가 내 몸에 안겼다. 아니, 누군가라고 돌려 말할 필요도 없다. 이곳에 있는 건 예진이뿐이었으니까. 나는 갑작스러운 예진이의 행동에 석고상이 되어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예진이가 내 몸에.......... 다음 순간, 울음기 가득한 예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물은 안 해 줘도 돼, 하지만 재현이가........ 재현이가........" "......." 쿵쾅쿵쾅! 갑자기 미친 듯이 심장이 뛴다. 뭐, 뭐지? 이 꿈같은 상황은.......? 도대체 뭐야! 그때 예진이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여자랑 사이좋게 있는 건....... 싫어." "......." "......." 그녀의 눈물이 내 옷을 적셨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방금 전 예진이의 말. 다른 여자랑 사이좋게 있는 건 싫다. 싫다. 싫다. 싫단다. 이쯤 되면 아무리 둔하다 못해 둔탱이라 불리는 나라도 느낌이 온다. 한마디로 입질 점령. 그리고 그 순간, 예진이의 카운터 펀치가 작열했다. "좋아해." "......." "그........ 누구보다도." "......." 분명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였지만 내 귀에는 아주 잘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좋아........해!" 나는 그 말과 함께 예진이를 힘껏 껴안았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몇 년 전부터 서로를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붉어진 얼굴에 퉁퉁 부은 눈망울조차도 너무나도 귀여운 우리 공주님. 그렇게 한동안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세계 정복에는 관심이 없어?" "으응. 그런 건 별로." "......." "무, 물론 재현이가 하고 싶다면 도와줄게." 천사 예진 양. 도와주신단다. "그리고 저번에 내가 아팠을 때, 민호라는 놈이 와서 더 깊은 사랑을 하려면 튕겨야 한다고 했다고?" "으응." "......." "......." 난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는 이민호라는 괴기 생물체가 있었다는 것을. 나의 심상치 않은 상태를 느꼈는지, 에진이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이제 서로의 마음을 알았잖아. 그냥 넘어가는 게......." "예진아." "으응?" "이것만은 봐주라." "......." "내 이놈을 잡지 않으면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아." "재, 재현이가 정 그렇다면......." "고마워." 내 말은 무조건 들어주는 그녀. 아, 정말 천사다. 그리고 이런 천사와 난....... 우헤헤. 하지만 좋아하기는 아직 이르다. 왜냐고? "이........민........호!" 모든 일의 주범인 그 자식을 잡아야 했다. 15. 여행(?) 난 해외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초절정 미소녀 세 분과 함께. 민혜와 나래 누나, 그리고 나의 천사 예진이까지, 이렇게 총 세 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분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간다. 물론 그녀들만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저분들의 부모님이 그냥 보내 줄 리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최고라 불리는 여자 보디가드 스무 명이 붙었다. 뭐 그 점에 대해서는 그리 불만 없다. 그게 더 안전할 것 같기도 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인 건 예진이와 나래 누나, 민혜가 금방 친해진 것이라고 할까나? 마치 친자매 같다. ........예진이랑 사귀는 건 아직 비밀로 하기로 했다. 물론 가끔씩 나와 관련된 대화를 할 때면 복잡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기는 하지만, 난 잘 모르겠으니 패스.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해외여행을 가게 됐다. 근데 여기서 잠깐, 뜬금없이 웬 세계 여행이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저 세 분에게는 즐거운 해외여행이지만 나에게는.......... "이........민호.........." 포획 작전이다. 모든 게 밝혀졌다는 걸 알아챈 민호 님. 그는 재빨리 날았다. 어디로? 해외로. 어떻게 순식간에 해외로 토낄 수 있는지 심히 궁금하지만 뭐 그분의 괴상한 능력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외국으로 토꼈다고 내가 포기할쏘냐? 이래 봬도 내가 한 악랄 한다. 그래서 지금 이 계획이 진행 중인 것이다. 물론 나 혼자 갈 수도 있지만, 나 혼자서는 너무 칙칙한 여정이 될 테니 저분들을 동원한 것이다. 그나저나......... "민영아, 지금 이집트에 있는 거 맞아?" - 네,오라버니. 지금 오빠 이집트에 있다는 정보가 있어요. "흐으음" 난 화상 전화기를 통해 민영이와 통화 중이다. 사실 나 혼자 힘으로 해외로 토낀 민호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도움을 받기로 한 이가 민호의 동생 민영이다. 이분 역시 민호의 핏줄답게 괴상한 걸 많이 할 줄 아신다. 즉, 민호라는 생물을 추적하는 데는 그와 비슷한 인간의 도움이 필수라는 것이다. 웬만하면 하기 어려운 일도 쉽게 처리하신다. 아무래도 세계 네트워크를 자기 통제하에 두고 민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같은데, 역시 무서운 분이다. "저기, 재현아........." "응?" 그때 내 베이베, 아니 이게 아니라 나의 천사인 예진이가 슬며시 다가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스트레스 받으면 건강에 해롭대." "걱정 마! 난 오래 살 거야! 예진이를 오래오래 보고 싶거든." "......." 불그레. 나의 닭살 멘트에 얼굴을 붉히는 예진이. 아, 귀여워. 귀여워. 하지만 여기 있는 건 우리 둘만이 아니다.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있다는 걸 잠시 망각했다. 그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급 무안........ "그런데..........." "......?" 예진이가 다시 내게 말을 건넸다. "민호 님........ 용서해 주면 안 돼?" "......." "민혜랑 나래 언니 이야기 들어 보면 그래도 재현이를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 흐으음. 그건 맞는 말이다. 항상 이상해서 그렇지. 나름대로 나를 무지 좋아하지. 하지만 그놈이 저지른 일이 너무나도 큰 중죄다. 물론 좋은 결과가 났으니 그것만으로 용서해 줄 수 있는 일이지만. 난 너무나도 귀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예진이를 마주 바라보았다. 크으윽. 처, 천사다. 나 같으면 날 골탕먹인 놈을 죽어도 용서 못한다. 하지만 예진이는 용서해 주라고 한다. 하아....... 나의 천사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용서........ "오빠!" "......?" 민혜가 다급히 다가와 날 불렀다. 그리고는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피라미드에 아주 큰 글씨로 우리말이 적혀 있대!" "엥?" 난 직접 피라미드로 향했다. 이집트의 명물 피라미드. 피라피라피피라여서 붙여졌던 피라미드. .......뭔 말인지 궁금한가? 그냥 넘어가자. 어찌 됐든 피라미드는 이집트 왕들의 미라를 지키기 위해 지어진,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 왕의 무덤이다. 그런 피라미드에 정말 한글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그 커다란 피라미드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글씨가. 그리고 더욱더 기가 막힌 건, '형님, 이러지 마시죠. 순수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저질 형님.' 이라는 민호의 글이 적혀 있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무슨 재주로 저 커다란 피라미드를 가득 채울 정도로 글씨를 써 넣은 거냐? 진짜 외계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행동이다. "이러지 마시죠, 저질 형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착한 예진이의 말 듣고 용서해 주려 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저 글을 본 이상, 용서해 주는 건 무리다. 만약 내가 성자였다 해도 그냥 넘어가지 못할 사태인 것이다. "우어억! 이민호!!" 내 이 자식, 꼭 잡고 만다! - 오라버니, 뉴욕 자유의 여신상 쪽으로....... "으억!" 민영이가 준 정보에 난 기절할 뻔했다. 이 자식, 또 언제 뉴욕까지 날아간 거냐? 피라미드에 낙서를 해서 지금 이집트 정부와 우리 정부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이번엔 뉴욕으로? 이 자식,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뉴욕 도착. 우린 곧바로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경찰과, 심지어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런 분들이 잔뜩 모여 있는 걸까? 그건 바로........ '형님, 제발 이러지 마시죠? 그런 행동, 옳지 않습니다.' "......." "......." "......." "......." 이번에는 자유의 여신상에 커다랗게 낙서를 해 놓으셨다. 아니, 도대체 무슨 재주로 저렇게 커다란 구조물에 글씨를 새길 수 있는 거냐? 도대체 무슨 수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저런 글씨를 써 넣은 거지? 점점 미궁에 빠지다 못해 섬뜩하다. 그 후, 프랑스 에펠탑, 중국 만리장성, 이탈이아의 피사의 사탑, 마지막으로 로마의 콜로세움, 기타 등등 세계 곳곳 유적들에 낙서를 하셨다. 그 내용을 열거하면, '형님, 진정하시죠.' '형님, 그만 오시죠?' '형니임~ 사랑스럽게 용서해 주시죠.' '정말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형님, 아이 러브 유!' 라는 글귀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세계는 이 기이한 현상에 난리가 났고, 그 문자가 한글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정부는 땀을 삐질삐질 흘려야 했다. 그렇게 난 계속해서 녀석을 추적했다. 여자들은 너무 힘들어서 돌아간 상태고, 나 혼자서 묵묵히 민호 사마를 추적하고 있다. 제대로 잔 지도 벌써 근 1주일째. 당연한 말이지만 목욕도 못한다. 그러다 보니 옷도 더러워졌고, 딱 보면 영락없이 거지다. 게다가 양손에 쥐어진 빵과 우유. 진짜 거기 그 자체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아! "흐으음" 그 순간이었나? 드디어, 발견했다. 민호라는 외계 생물체. 내가 이곳에 잠복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유유자적 걸어오고 있다. 드디어 오늘로서 긴 추격전의 종지부를 찍겠다. 이민호! "뭔가 기분이 꿀꿀하군요." "......!" 난 민호의 말에 기겁했다. 분명 나는 완전히 은신한 상태. 그런데 이 자식은 또다시 알 수 없는 식스센스로 위험을 탐지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벌떡! 난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이........민호!!" "......." 그날부로 민호의 도주는 끝났다." "이러지 마시죠, 형님." "닥쳐!" "형님, 전 두 분께서 짜릿한 연애를 하셨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 "닥치라고 했다!" "......." 지금 나와 민호는 아무도 없는 산속에 있는 상태. 민호가 나무에 묶인 채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절대 안 속을 거거든. "형님의 이런 난폭한 모습을 보면 예진 누님이......." "안 보이면 돼." "그거 맞는 말이군요." "그래, 맞는 말이지." "흐으음." 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내게 남은 건 독기뿐이다. 세계 곳곳 돌아다니며 민호를 추적하면서 생긴 독기 말이다. 민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나무에 매달아 놓고 이상한 짓은 사절입니다." "글쎄,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냐." "......." "요즘 나의 궁극기 비기가 약해진 기분이라서........" "아닙니다. 강합니다." "아니, 아니. 약해." "강합니다. 절대 강합니다." "노노, 약하다니까. 그래서 이번 기회에 2탄을 연습해 보려고......." 난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플레이즈으으으으 엔디비아 랄랄랄랄 구구구굿 2탄 말야." 그런 내 말에 민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연습 열심히 하시죠. 전 이만 내려갔으면 합니다만." "아니, 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씨익 웃었다. 그러자 민호도 같이 웃는다. "전 별로 도움 드리고 싶지 않은데요." "거부권 없음."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요?" "지금 여기서는 그딴 거 없거든?" "이거 참 아름답군요." "그래, 아름답지. 크크크." 나는 민호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들어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네가 2탄 탄생을 위해 도움 좀 줬으면 좋겠다." "다시 말하는데, 정말 싫은데요." "노노, 넌 해야 돼." "정말 하기 싫습니다." 그 말에 난 다시 한 번 웃으며 말했다. "해야 돼........ 후훗." 그날부터 며칠동안 깊은 산중에서 유령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16. 비밀 사실 이제 이 게임을 해야 할 의미는 사라졌다. 최종 목표였던 게임 정복은 구라로 판정되었고 이미 예진이와의 사랑도 이루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게임을 하면서 정이 들었기도 하지만 빚을 다 못 갚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 내가 여기서 빠지면 그 이상한 두 곳에서 이 게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게 뻔하니까. 나의 사랑 예진이가 즐기는 게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정체가 들통났다. 10억짜리 현상범이라는 것을 예진이에게 들켜 버렸다. 나는 다급히 내가 10억짜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런 내 말에 예진은 싱긋 웃으면서, '재현이 말이면 다 믿어.' 라고 말해 주셨다. 아아아, 정말 천사다. 이걸로. 내 정체를 예진이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거다. 뭐 그렇다고 막 들이댄다는 것 아니다. 전 국가를 상대로 배틀 붙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아니, 이제는 조용히 살면서 자연의 힘을 마스터하고 마이블라스트인가 뭔가와 베르자니아만 족치면 모든 게 해피 엔딩? "오빠, 준비됐대." "오케바리!" 난 민혜의 말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자, 자연의 힘을 얻으러 가 보실까? 우우우우우웅. 내가 도착하자 나를 반기는 건 마구 울어 대는 결계식. 오, 진동해. 마구 진동해. 흐헤헤헤. 난 드디어 작동되는 결계식을 보고 마구 흥분하기 시작했다. 저 둥그런 모양의 푸른빛의 결계식. 솔직히 겉모습만 보면 별거 없다. 하지만 저 안에 들어가면 자연에 대한 지식이 마구 들어오면서 더욱 강해진단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의 현자들도 같은 과정을 반복. 즉 세 번의 담금질(?)에 의해 나는 다시 태어난다. 슈퍼맨으로 말이다. "으하하하." 난 그런 생각에 들떠 결계식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주춤하지는 않는다. 이미 힘을 얻는다는 것에 무지 흥분한 상태였으니까. 파지짓. 내가 결계식 안으로 들어가자 현자 프로이는 주문을 외워서 결계식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곧 푸른 불꽃이 튀고 붉은색 불꽃, 보라색 불꽃 등 가지각색의 불꽃이 막 튀었다. 하지만 역시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무나도 기대를 했기 때문일까? 어서어서 가자!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몸이 하얀빛에 휩싸였다. 5시간이 지났다. 일행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프로아의 말에 의하면 1시간이면 끝난다고 했다. 하지만 1시간은 커녕 5시간이 넘어가고 있다. 그렇게 되자 제일 당황하는 건 프로아. 분명 이전에 했던 얘기와는 상황이 달랐다. "저, 저기 왜 이러는 거죠?" "무슨 일이라도?" "오빠한테........" "오라버니!" 프로아는 정신이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채 마구 추궁하는 여자들 때문에. 하지만 변명할 말이 없어 더욱 답답할 지경. 한편, 일행 중 가장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민호였다. 그가 조용히 고개를 흔들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닐 겁니다. 시간상 불가능하니까요." 그런 민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으윽." "오빠!" "정신이 들어?" "주, 주인님! 흐에엥!" "괜찮으세요?" "오라버니, 걱정했잖아요!" 재현이 정신을 차리는 듯하자 여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런 그녀들을, 재현은 씨익 웃으며 진정시켜 주었다. 어느새 민호가 다가와 웃으며 물었따. "형님, 괜찮으십니까?" "응. 그런대로........" "흠." 하지만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일행을 바라보는 재현의 눈빛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아닐 거다. 게임 설정일 것이다. 아니, 무슨 소리지? 뭐냐?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냐? 난 하얀빛에 둘러싸였을 때 무언가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거짓말 같은 일.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냥 게임 속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릴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사실이라고. 아무런 물증도 심증도 없지만 그냥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러십니까?" 민호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난 잔뜩 굳은 얼굴로 그런 민호를 바라보았다. "민호야." "네에." 녀석은 여전히 웃으면서 대꾸했다. 하지만 난 저 미소 뒤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난 물었다. "나에게 뭐 할 말 없냐?" "저는 너무 깜찍발랄해서 비밀이 없는데요?" 저런 헛소리를 하는 것 보니 평상시의 민호다. 하지만 그의 기이한 능력. 사실 웃으면서 그냥 넘기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왔다. 결코 웃으며 넘길 수 없다. 나의 본능이 이 망상 같은 상상이 진실이라 말하고 있다. 난 민호를 향해 다시 굳은 어조로 물었다. "무슨 목적이냐?" "......?" "네놈의 목적 말이다." "왜 그러시죠?" 민호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난 그런 민호에게 차가운 얼굴로, 그러나 존댓말로 물었다. "민호, 아니 선대 디재스터라고 불리는 당신이라는 존재의 진정한 목적 말입니다." "......." "......." "......." "......." "......." 내 한마디에 모든 숨소리마저 정지했다. 외전. 아포라 "다, 당신 무슨 짓이에요!" "왜 그러시죠?" "저, 저를 야설에 집......" 아포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디재스터라고 불리는 신이 자신을 모티브 삼은 캐릭터를 야설에 등장시킨 것이다.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저질스런 신이 있나라고 따지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아포라의 역정에도 그는 웃으며, "당신이 매력적이어서요." "......." "뭐, 정 싫다면 지우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저만 볼 수 있습니다." "......." "그럼 지우겠습니다." "자, 잠깐......" "......?" "이미 쓰신 거면 그냥....... 그리고 남들이 볼 수 없다면......" 아포라는 결국 평소 내성적인 성격답지 않게 그것을 허락했다. 저 남자의 기억 속에 조금이라도 남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뭐, 역시 아름다운 분답게 마음도 곱군요." "......." 불그레. 그 말에 아포라의 얼굴은 결국 새빨간 사과가 되었다. 저런 멘트조차도 항상 내뱉던 것이라는 걸 알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 한편, 벨리나크는 아무런 감정 없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모습.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속은 너무나도 커다란 분노로 인해 어둠에 잠식되고 있었다.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그분'. 그리고 그분의 힘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저 존재. 분했다. 왜 자신이 아닌 저렇게 실실 쪼개는 남자가 그분에게 선택받아야 했는지, 싸움 실력은 분명 막상막하다. 그리고 충성심 역시 저 남자보다 높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런데 왜! "......." 그리고 이제는 이길 수조차 없다. 그분의 힘을 이어받은 그는 이미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능력을 됐으니까.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수천 년간 사랑해 온 아포라를, 저 자식은 가식적인 미소로 홀리고 있다. 몇 버닝나 아포라에게 저건 가식이라고 외쳐 봤지만, 그래 봤자 돌아오는 건 그녀의 냉대였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그녀도 왠지 저 존재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면 무척이나 화를 냈다. 이쯤 되면 알고 싶지 않아도 모를 수 없다. "왜! 왜! 왜 저 존재는....... 나의 모든 걸........!" 그렇게 점점 분노는 쌓여갔다. "하아."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걸까? 아님 모르는 척 하는 걸까? 그녀의 마음은 심란했다. 분명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의혹만 증폭된다. 다른 존재들의 경우 은연중 감정이 겉으로 표현되기도 하기에 대충 추측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저 존재는 항상 미소만 짓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거다. "하아."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는 그녀.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자신들은 죽지 않은 존재라고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다. 아니, 그전에 다른 신이 그를 차지하기라도 한다면....... "......."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온다. 그렇다고 직접 고백할 수는 없었다. 자신과 그는 짧은 시간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다. 몇천 년, 아니 몇만 년이나 되는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존재. 그런 존재에게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고민스러워 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꺅!" 그때 갑자기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의 한마디에 깜짝 놀란 그녀는 그만 침대에 벌렁 누워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남자는....... "아직 아침인데요." "짐승!" "흐음." "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아포라는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말을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정말 저 남자는....... 하지만 어쩐지 그런 모습조차도 귀엽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인가? 한편, 그런 아포라의 반응에 그가 다시 말했다. "저는 그저 아침이라고 말했을 뿐인데요." "......." "야릇한 상상을 하신 거군요." "아, 안 했어요!" "한 것 같은데요?" "아, 안 했다니까요!"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 쓸데없는 말다툼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이런 시간조차도 아포라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때였다. 그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왜 그러세요?" 왠일로 진지한 그의 모습에 당황하는 아포라. 그가 천천히 아포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힘없이 침대로 무너졌다. '서, 설마.' 아포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알고 있다. 자신이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그냥 살아온 것도 아니고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실제로 겪게 되다니....... 그것도 좋아하는 존재와........ "얼굴에 머리카락이 붙었네요." "......." "떼었습니다. 감사의 인사는 필요 없습니다. 사절하죠." "......나가요!!" "......?" 웬만해선 목소리를 높이지 않기로 유명한 아포라의 하이톤이었다. "아, 정말......." 아포라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척이나 둔한 그의 행동에도 어이가 없었다. 아니, 야설을 그렇게도 좋아하면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다. 그때였다. 끼이익. 다시 한 번 아포라의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나르크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12대 신 중 그와 벨리나크를 제외하고는 제일 강하다고 알려진 신. 하지만 강한 건 사실이어도 그다지 평판이 좋은 신은 아니다. 탐욕과 음욕에 절어서 수많은 천사를 겁탈했다고 알려진 신이었다. 오직 신이라는 이름 때문에 용서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분이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 하지만 지금 그분은 없다. 물론 그분 대신 일을 처리하는 그가 있기는 했지만 같은 신으로서 율법에 따라 단죄하기는 조금 곤란할 것이다. 어찌 됐든 상당히 만나고 싶지 않은 신인 건 분명하다. 아포라가 경계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나르크?" "아니, 그냥 아포라를 보고 싶어서 왔지. 크크크." "......." "그나저나 미모는 여전히 죽여주네." "......." 그러면서 그녀의 온몸을 훑어본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시선이었다. 그 말에 아포라는 힘없이 대꾸했다. "저는 별로 보고 싶지가 않네요. 좀 나가 주셨으면 해요. 저는 쉬고 싶거든요." 저 남자를 얼른 내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전혀 나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튕기는 것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말야." 아포라가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전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아, 나에 대한 관심?" "착각하지 마세요. 저는 신이에요. 같은 신에게 그런 마음을......." 그 순간 나르크가 아포라를 강제로 침대에 밀어 눕혔다. 아포라가 당황해서 외쳤다. "뭐, 뭐 하는 거죠!" "뭐 하는 거긴? 즐기는 거지!" "다, 당신 미쳤어요? 저는 신이라고요!" "신은 여자 아닌가?" "......." "예전부터 널 원했다고. 크크크." 나르크의 거친 손이 아포라의 옷을 찢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신끼리는 상대를 일시적인 죽음 상태로 만들어 한동안 움직임에 제재를 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같은 신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오직 그분의 판단을 따라야만 한다. 하지만.......... "......." 그는 어겼다. 그분의 허락도 없이 나르크를 단숨에 베어 버린 것.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포라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런 저질스런 신이 있다니 세상도 참 고달프군요." "......." 말은 하지 않았다. 아포라는 그저 그의 품에 안긴 채 눈물을 흘렸다. 신이 같은 신을 죽ㅇ녔다. 아니, 죽인 건 아니지만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그가 아무리 그분의 일을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해도, 아니 그런 까닭에 더욱 신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벨리나크가 더욱 충동질했음은 물론이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아포라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그가 말했다. "아뇨, 그런 놈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죠." 그러면서 그는 웃었다. 변태에 괴짜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이랄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저 변태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인 모습에 놀라셨군요." "......." 아포라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이다. 물론 물어봤자 얼굴에 다 써 있다고 둘러댈 것이 뻔했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제가 야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실제와 야설을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 "야설에 나오는 건 여자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 행동이거든요." "그, 근데 당신은 왜 야설을........" "전 짜릿한 남자니까요." "......." "너무 고리타분하게 살아도 재미없지 않습니까?" 역시 좋은 남자였다. 그래, 용기를 내자,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그러나 그의 말이 먼저 이어졌다. "아, 저 한동안 어디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 청천벽력같은 한마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녀에게는 카운터 펀치 같은 한마디였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드디어 그분을 찾았다고 할까요?" "무, 무슨 말이에요?" "흐으음, 뭐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죠. 일단은 제가 할 일을 해야겠죠." "할 일이라니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포라는 물었다. 어딘가 멀리 떠날 듯한 불길한 예감이 느껴지는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더 이상의 말씀은 드리기 어렵고....... 다만 제가 얻은 힘을 돌려 드리러 가는 겁니다. 그리고 제 마음, 알고 싶은신가요?" 끄덕끄덕.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포라. 그가 그런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하며 입을 열었다. "이게 제 마음입니다." "......." 그를 생각하면 할수록 아포라의 가슴은 뛰었다. 마지막의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묻고 싶다. 하지만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렇게 사라져 버린 걸까.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디재스터』 제8권에서 계속>